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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스파이더맨의 연대기

원작 만화 탄생에서 <스파이더맨 3>까지

2007.05.02 / 김정대(영화 칼럼니스트)

슈퍼히어로 코믹스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스파이더맨>은 샘 레이미 감독에 의해 영화로 탈바꿈해서도 그 인기를 이어
갔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캐릭터, 이야기, 기술력 모든 면에서 이후 만들어질 슈퍼히어로 영화들의 모범을 제시했
다. <수퍼맨> <배트맨> <엑스맨>과 <스파이더맨>은 무엇이 다른가?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관류하는 맥락들과 <스
파이더맨 3>에서 새로 등장한 인물들, 그리고 그 뒤에 감춰진 궁금증까지 영화 칼럼니스트 김정대가 만화 원작과 영화
시리즈를 종횡무진하며 모든 의문을 해결해준다. (만화책 제목은 [ ]로, 영화 제목은 <>로 구분했음을 알립니다)

1960년대 초, 마블 코믹스의 편집장이자 작가였던 스탠 리는 향후 진로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당시 만화업계가 매너리즘에 빠


져 있다고 여긴 그는 기존 관습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만화를 소개할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마블 코믹스 발행인 마틴 굿맨
은 ‘이미 상업성이 검증된 관습을 굳이 파괴할 이유가 있느냐’며 그의 제안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옛 관습을 따라 한심한 만화
를 계속 양산하느니, 차라리 만화작가 커리어를 포기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스탠 리는 회사를 그만두기
로 결심했다.

헌데, 그가 사직서를 내기 직전에 운명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경쟁사인 DC 코믹스의


슈퍼영웅 팀 만화 시리즈인 [저스티스 리그 오브 아메리카]의 성공을 보며 배 아파하
던 굿맨이 리에게 “우리도 슈퍼영웅 팀 시리즈를 하나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다. 굿
맨이 생각한 것은 캡틴 아메리카나 서브-마리너와 같은 과거의 마블 코믹스 캐릭터들
을 한 데 모은 시리즈였다. 하지만 리는 제안을 들으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
존에 볼 수 없었던 스타일로 무장한 완전히 새로운 슈퍼영웅 팀 시리즈’를 떠올린 것
이다.

그러나 당시 그에게는 굿맨의 고집을 꺾을 만한 힘이 없었다. 그날 저녁, 리의 아내는 이 일 때문에 남편이 고민하고 있는 모습
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까짓것, 당신이 원하는 스타일로 만화를 창작하세요! 설사 그 일로 인해 당신이 해고된다 해도 문제될
게 뭐 있나요? 어차피 당신은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이었잖아요?!” 이 말을 듣는 순간, 한동안 잠자고 있는 리의 창작욕이 활활
타올랐다. 다음 날 당장 동료 잭 커비와 ‘파격적인 슈퍼히어로 팀 만화’의 창작 작업에 돌입했고, 그 결과 만화계의 조류를 영원
히 바꿔놓은 걸작이 탄생했다. 바로 [판타스틱 4]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리조차 이 만화가 도입한 컨셉이 훗날 마블 코믹스, 아
니 미국 만화계를 통틀어 최고의 인기 스타인 ‘스파이더맨’을 낳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마블 전성시대의 개막과 거미인간의 탄생

[판타스틱 4]의 가장 큰 공헌은 슈퍼히어로 만화에 ‘리얼리즘’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이 만화는 ‘만일 보통사람이 우연한 사고
로 슈퍼 파워를 얻어 영웅이 된다면? 그리고 슈퍼히어로가 된 후에도 보통사람과 같은 개성을 지닌다면?’이라는 컨셉에서 비롯
됐다. 과거의 슈퍼히어로들과는 달리 [판타스틱 4]의 영웅들은 일상적인 고민들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며, 지극히 인간적인
약점마저 지닌 ‘불완전한’ 인물들이다. 팀의 리더인 리드 리처드는 항상 설교조의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따분한 인물이며 애
인이자 동료 영웅인 수 스톰과의 관계도 순탄치 않다. 또, 자니 스톰의 경우는 사고뭉치에 가까운 틴에이저다. 그리고 벤 그림
의 경우는 오히려 슈퍼 파워를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라 여기고 있다. 세 명의 동료들과는 달리, 그는 괴물에 가까운 인물인 ‘더
씽(The Thing)'으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이 네 명은 또한 기존의 슈퍼히어로들과는 달리 종종 사회에서 냉대를 받기도 한다. 당
장 시리즈 2편에서 이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범죄자로 몰려서 군대에게 쫓기게 된다. 이런 것들은 기존의 슈퍼히어로 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컨셉이었다. 독자들은 ‘자신들과 같은 약점을 지닌’ 이 현실적인 캐릭터들에 즉각 매료됐다. [판타스틱 4]에 쏟
아진 열렬한 호응에 고무된 스탠 리-잭 커비 콤비는 ‘저주받은 슈퍼히어로’ 벤 그림의 설정을 더욱 확장해 또 하나의 걸작을 만
들어낸다. 바로 [헐크]였다.

[판타스틱 4]와 [헐크]의 대성공으로 마블 코믹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한편, 스탠 리는 두 만화의 컨셉을 총망라한 새로
운 슈퍼히어로 시리즈를 만들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타이핑을 하던 중 벽에 붙은 파리를 보고는
‘벽을 기어 다니는 슈퍼히어로’를 문뜩 떠올렸다. ‘이거 멋진 아이디어인걸!’이라고 생각한 그는 즉각 이 영웅에게 이름을 붙이
기로 했다. 파리인간, 모기인간, 곤충인간 등 갖은 괴상한(?) 이름들을 놓고 고민하던 그는 어린 시절에 즐겨 읽던 펄프 픽션
[스파이더]를 떠올리고는 ‘스파이더맨’이라는 이름을 지어냈다. 리는 앞선 두 인기 만화의 컨셉을 계승해 이 새로운 영웅을 다
음과 같이 설정했다. “왕따 틴에이저가 어느 날 거미에게 물린 뒤 슈퍼히어로 ‘스파이더맨’이 된다. 하지만 그에게 부여된 슈퍼
파워는 오히려 삶을 구속하는 재앙이 돼버린다.”

리는 즉각 굿맨에게 달려가 이 아이디어를 들려줬다. 굿맨의 반응은 이러했다. “지금


농담하나? 틴에이저는 슈퍼히어로 만화의 조연은 될 수 있어도 절대 주인공은 될 수
없다고! 게다가 명색이 슈퍼히어로라는 인물이 왕따인 데다가 사춘기 소년의 고민을
안고 있다는 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악당이랑 싸우는 스토리로 컷을 가득 채워도 부
족할 판에 그런 이야기까지 담으면 만화는 엄청나게 따분해진다고! 그리고 결정적으
로, 이름이 ‘스파이더맨’이 뭔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동물이 거미라는 것 자네
정말 모르나?” 리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멋진 아이디
어를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대중들에게 이 아이디어를 선보이고 싶었던
리는 ‘어메이징 판타지’의 마지막 호에 그것을 싣기로 했다. 이 잡지는 폐간 예정이었
던 관계로 굿맨의 감시망에는 벗어나 있었기에 리는 아무런 제약 없이 머릿속으로 구
상한 이야기를 펼칠 수 있었다.

최초에, 리는 잭 커비에게 이 새로운 만화의 그림을 그려줄 것을 의뢰했다. 하지만 커


비가 그린 스파이더맨은 체격이 우람한 ‘전형적 영웅’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리는 이
와는 정 반대되는, ‘평범하고 볼품없는’ 캐릭터를 원했다. 결국 그는 과감히 파트너를
교체하기로 결심했고, 이에 따라 새로 호흡을 맞추게 된 인물이 바로 스티브 딧코였
다. ‘고뇌하는 보통사람’과 ‘우중충한 도시’의 묘사를 장기로 했던 딧코는 리의 기대에 부응하는 그림을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첫 번째 스파이더맨 이야기는 예정대로 1962년 8월에 발간된 ‘어메이징 판타지’ 15호에 실렸고, 잡지는
곧 폐간됐다. ‘최소한 대중들에게 스파이더맨이 뭔지를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다’라고 여긴 리는 이후 한동안 스파이더맨을 머
릿속에서 지운 채 다른 작품의 창작활동에만 전념했다. 헌데, 얼마 후 ‘어메이징 판타지’ 15호의 판매량 집계결과가 나오자 리
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늘 판매부수가 저조했던 이 잡지의 15호는 놀랍게도 마블 코믹스의 발간지 중 최고의 판매부수를 기록
한 것이다. 물론 그 원인이 뭔지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었다. 쇼킹한 판매부수 발표가 있은 직후, 굿맨이 리에게로 와서 ‘더 쇼
킹한’ 제안을 했다. “이봐, 왜 지난번에 내가 아주 ‘좋아했던’ 스파이더맨 이야기 있잖나? 그거 시리즈로 발간해볼 생각 없나?”
마블 코믹스의 인기 시리즈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스파이더맨, 고뇌하는 보통영웅


‘어메이징 판타지’ 15호에 실린 스파이더맨 만화는 첫 컷부터가 파격적이었다. 이 컷의 좌측에는 핸섬한 틴에이저 무리가 그려
져 있었는데, 그들 중 누구도 만화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바로 그들이 손가락질하고 있는 우측의 청년이었
다. 마르고 볼품없는 이 왕따 청년의 이름은 피터 파커로, 전형적인 ‘공부벌레형’ 인물이다. 파커는 어느 날 과학 학술 발표회를
참관하던 도중 방사능에 노출된 거미에게 물리고, 그 영향으로 초능력을 가지게 된다. 초능력을 이용해 돈을 벌 방법을 궁리하
던 파커는 복장과 거미줄 발사기 등을 만든 뒤 스스로를 ‘스파이더맨’이라 명명하고 TV 쇼에 출연해 큰 인기를 끈다. 그러나 자
만심에 도취된 그는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주하던 도둑을 보고도 막지 않는 우를 범하게 되고, 결국 그 도둑은 파커의 삼촌 벤
을 살해한다. 살해범을 붙잡은 뒤, 자신 때문에 벤이 죽었음을 안 파커는 눈물을 흘리며 황혼 속으로 사라진다. 만화의 마지막
컷에는 파커가 이 사건을 통해 비로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리고 이 문구
는 그대로 시리즈의 캐치프레이즈가 됐다.

스토리를 구상하며 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일 보통사람에게 초능력이 생긴다면 그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정말
로 과거의 슈퍼히어로들처럼 이타적인 목적에 그것을 쓸까? 아니다.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나 돈과 명예를 위해 그것을 활용하
려 할 것이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생생한 리얼리티는 이렇게 해서 부여됐다. 만화사가들은 스파이더맨이 초유의 인기를 끈
이유를 ‘캐릭터 묘사의 리얼함’에서 찾고 있다. 소외감과 고독감, 돈문제, 학업문제, 그리고 연애문제까지 파커가 겪는 모든 고
뇌들은 ‘실제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의 그것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파커가 갑작스럽게 생긴 초능력 때문에 오히려 곤경에 처
한다는 설정은 청소년들이 사춘기에 겪는 ‘성장의 고통’(육체적인 능력의 향상에 수반되는 정신적 방황)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
곤 한다. 실제로, 파커가 시리즈를 거듭하며 습득하는 교훈의 내용은 청소년들이 성장과정에서 체득하게 되는 ‘인생의 교훈’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또, 시리즈 2편 이후 스파이더맨이 엉뚱하게도 사회의 적으로 내몰린다는 설정은 1960년대의 ‘반항적인’
젊은이 문화에 대한 기성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주인공의 설정, 테마,
시대정신 등 모든 면에서 주된 독자층이었던 청소년들의 관심사를 120% 반영한 작품인 셈이다.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맨의 특질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수퍼맨]의 클라크 켄트는 일부러 ‘얼간이’인 척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는 진짜 얼간이다!” 만화학자 윌리엄 라담 역시 비슷한 맥락의 의견을 제시했다. “[수퍼맨]에
서 진짜 주인공은 수퍼맨이며, 클라크 켄트는 그의 가면에 불과하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설정은 이와는 정반대다.” 이들의
의견은 독자들이 피터 파커에게 일체감을 느끼고, 그에게 감정몰입을 할 수 있었던 요인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만화의 연
재가 시작된 직후, 리의 사무실에는 팬레터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리조차도 스파이더맨이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 줄은
예상치 못했다. 1960년대 중반에 리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판타스틱 4]를 제치고 마블 코믹
스, 아니 미국 만화업계 최고의 인기 시리즈로 등극한 상태였다.

▶아이러니와 파격의 연대기

스파이더맨의 설정은 ‘아이러니와 파격’이라는 말로 대변된다. 우선 스파이더맨을 공


공의 적으로 매도하는 J 조나 제임슨(‘데일리 뷰글’의 편집장)을 보자. 제임슨은 [수퍼
맨]의 페리 화이트(‘데일리 플래닛’의 편집장)의 악당 버전이라 할 정도로 심술궂은
인물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피터 파커의 돈 문제를 해결해주는 유일한 인물이기
도 하다. 파커는 제임슨에게 스파이더맨의 사진을 팔아서 번 돈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에서 늘 파커를 놀려대는 플래쉬는 우습게도 스파이더
맨의 열렬한 찬미자다.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악당의 설정이다. 예컨대 시리즈 3호
에 처음 등장한 이후 큰 인기를 끈 ‘닥 옥’(닥터 옥토퍼스)을 보자. 스파이더맨의 생명
마저 위협하는 강력한 악당인 그는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파커의 숙모 메이와 사
랑에 빠진다. 결국 파커는 메이의 가슴에 상처를 줄까봐 닥 옥에게 손을 못 대는 난처
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시리즈 최고의 인기 악당 중 하나인 그린 고블린의 설정은 이
보다 더 기괴하다. 리는 시리즈 14호에서 그린 고블린을 처음 소개한 후, 오랫동안 이
악당의 정체를 밝히지 않아 독자들을 애타게 했는데, 시리즈 39호에서야 밝혀진 그의 정체는 쇼킹했다. 바로 파커의 친구 해리
오스본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훗날 해리 오스본 자신도 스파이더맨의 적(그린 고블린 2세)이 된다는 점이
다. 친구와 적의 경계가 없는 스파이더맨의 ‘뒤죽박죽’ 세계, 그것은 바로 현실세계 축소판이기도 했다.

시리즈가 거듭되면서 만화 속 설정은 계속 업데이트된다. 예컨대, 고등학생이었던 파커는 일정 시간이 흐른 후 대학생이 되고,
첫사랑인 그웬 스테이시를 만나게 된다. 한편, 작화가 스티브 딧코는 38호를 끝으로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하차하고, 그 자리
는 존 로미타가 대신하게 된다. 이전까지 로맨틱 만화 장르에서 주로 활동했던 로미타는 특히 ‘미모의 여성’을 잘 그리는 것으
로 유명했다. 로미타가 탄생시킨 최고의 인물은 바로 엠제이(메리 제인 왓슨)였다. 붉은 머리의 엠제이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
웬 스테이시와는 달리 보다 쾌활하고 활동적인 인물로, 엄밀히 말해 ‘주인공급’으로 설정된 캐릭터는 아니었다. 본래 스탠 리는
파커와 스테이시를 어느 시점에서 결혼시킬 예정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파커에게 더 잘 어울리는 인물은 오히려 엠제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 시점부터 엠제이는 파커의 진짜 파트너로 급부상하는데, 1972년부터 리의 뒤를 이어 시리즈의 작가를 맡게 된
게리 콘웨이는 이런 분위기를 이어받아 시리즈 121호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소개한다. 이 작품에서 그린 고블린에게 납치된 스
테이시는 브룩클린 다리 위에서 떨어지게 되는데, 스파이더맨은 간신히 거미줄로 그녀를 붙잡는 데 성공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녀는 숨을 거두게 된다. 더 쇼킹한 것은 그녀가 죽은 이유가 바로 스파이더맨의 거미줄로 인한 갑작스러운 충격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스파이더맨은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분노와
자괴감에 휩싸인 스파이더맨은 다음 호에서 그린 고블린을 글라이더에 찔려서 죽게 한다. 이 내용이 담긴 시리즈 121~122호는
현대 슈퍼히어로 만화의 관행을 송두리째 바꾼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들 이후 슈퍼히어로 만화의 내용은 그야
말로 예측이 불가능하게 됐다. 여주인공은 ‘죽을 수도’ 있으며, 우리의 영웅은 악당과의 대결에서 패할 수도 있다. 또한 사회의
정의는 반드시 회복되는 것이 아니며, 때로 악이 승리할 수도 있다. 이것은 1980년대 이후 유행하게 되는 누아르 스타일의 만화
들을 예고하는 징후이기도 했다.

스테이시가 죽은 후, 파커는 자연히 엠제이와 결합하게 되는데, 이후 시리즈 인물들


간의 얽히고설키는 관계는 이전의 만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묘사된
다.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단순한 액션만화가 아닌 ‘소프 오페라’라고도 불리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시리즈의 묘사 양태는 더욱 기발해
지는데, 1984년에 발표된 [마블 슈퍼히어로들의 비밀전쟁](먼별에서 전개되는 마블
의 영웅들과 악당들의 대결을 다룸)에서 마블의 새 편집장이자 작가인 존 슈터는 ‘검
은 복장’을 입은 스파이더맨을 소개했다. 만화에서 스파이더맨은 전투 중 복장이 손
상돼 검은색의 외계복장을 하는 것으로 설정됐는데, 슈터는 ‘스파이더맨은 앞으로 계
속 검은 복장을 입게 될 것이다’라고 공언해 화제가 됐다. 그의 공언대로 한동안 만화
에서는 스파이더맨이 계속 검은 복장을 입게 되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독자가 들어나게 된다. 결국
1988년에 이르러 마블은 스파이더맨의 복장을 예전의 붉은-파란색 복장으로 환원시키기로 결정했는데, 문제는 ‘갑작스런 복장
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하는가’였다. 바로 그때, 당시 시리즈의 작가였던 데이비드 미셸리니가 기막힌 반전을 생각해냈다. 파커
의 검은 의상은 사실 ‘인간을 숙주로 삼는 외계 생명체’라는 것이다! 이 컨셉을 바탕으로, 미셸리니는 당시 마블 사가 새로 고용
한 만화가 토드 맥팔레인과 함께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서 1988년 4월에 간행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300호에 게재했다. 스
파이더맨에게 ‘버림받은’ 검은 외계 생명체 ‘심비오트’는 이후 에디 브록이라는 리포터를 숙주로 삼게 된다. 에디 브록과 심비
오트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스파이더맨을 죽도록 증오한다는 것이다. 에디 브록과 정신적, 육체적으로 결합
한 심비오트는 괴물 ‘베놈’으로 재탄생한다. 이 작품의 발표 후, 베놈은 그린 고블린과 닥 옥 이후 최고의 인기 악당이 됐고, 토
드 맥팔레인의 주가 역시 하늘을 찌르게 된다. 베놈의 인기가 예상외로 오래 지속되자, 마블은 몇몇 만화에서 아예 베놈을 주연
급으로도 등장시켰다. 당초 악당으로 구상된 베놈이 본의 아니게 ‘선인에 가까운 주인공’으로 둔갑하자, 미셸리니는 심비오트
와 결합한 새로운 악당 ‘카니지’를 등장시켜 베놈 및 스파이더맨과 맞서게 하기도 했다.

토드 맥팔레인이라는 걸출한 만화가를 배출한 이 시기는 바로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중흥기였다. 그러나 이후 시리즈는 혼란기
로 접어든다. 시리즈 내용이 최초의 컨셉과 너무 동떨어졌다고 판단(이 시기에 파커는 더 이상 틴에이저가 아닌, 엠제이와 결혼
한 유부남이었으며 자식까지 낳기 직전이었다)한 마블은 시리즈의 개혁을 단행했는데, 그 개혁 내용은 모든 독자들을 경악케
했다. 바로 1975년에 나온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149호(스파이더맨의 클론이 등장하는 작품) 이후 전개된 모든 이야기에서 스
파이더맨은 사실 진짜가 아닌 클론이었다는 것이다. 이 설정에 따라, 마블은 기존의 피터 파커와 메리 제인을 ‘퇴장’시키고 새
로운 스파이더맨의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러나 독자들은 자신들이 20년이 넘도록 봐온 캐릭터가 ‘가짜’라는 사실에 크게 분노
했고, 당황한 마블은 ‘알고 보니 클론으로 여겨졌던 예전 스파이더맨이 진짜였더라!’라고 설정을 급히 바꿨다. 이 모든 혼란을
야기한 주범이 (죽은 줄 알았던) 그린 고블린이라는 구차한(?) 추가 설정까지 도입하면서 말이다. 이 웃지 못할 해프닝 이후 스
파이더맨 시리즈의 내용은 더욱 복잡해져갔다. ‘클론 사가’로 대표되는 혼란기를 경험하며 독자들은 자연히 예전 스파이더맨
이야기의 정제된 내용을 그리워하게 된다. 스파이더맨 영화 버전이 수면 위로 급부상한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스크린으로의 험난한 여정

1960년대 이후 최고의 인기를 누린 마블의 슈퍼히어로들은 이상하게도 만화책만 일단 벗어나면 전혀 맥을 못 췄다. 수퍼맨, 배
트맨 등 DC 코믹스의 슈퍼히어로들이 수십 년간 브라운관과 라디오, 은막을 고루 지배했던 현상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오
죽했으면 리가 “무슨 저주에라도 걸린 것 같다”라고 푸념까지 늘어놓았겠는가. [판타스틱 4]로 마블의 전성시대가 열린 이후,
TV나 영화 등 다른 매체에서 성공한 마블의 슈퍼히어로는 [헐크](CBS의 TV 시리즈)가 유일했다. 스파이더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60년대 이후 스파이더맨은 만화영화, TV 드라마 등으로도 종종 제작됐으나 랄프 박시의 작품이나 [스파이더맨: 애니
메이션 시리즈](1994~1998) 등을 제외하고는 만족스러운 작품이 거의 없었다. 기대를 모았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TV 시리
즈(1977, 니콜라스 해몬드 주연)의 경우는 리가 “방영을 중단해달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 형편없는 각본으로라도 시리즈를
계속 만들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스러웠다”라고 털어놓았을 정도로 완성도가 형편없었다.

헌데, 만화영화나 TV 시리즈는 그렇다 치더라도 최고의 인기 만화인 스파이더맨이 장편영화로 오랫동안 만들어지지 못한 이유
는 뭘까? 1970년대 초에 마블로부터 판권을 구입해 영화 버전 <스파이더맨>을 만들려고 했던 스티브 렘버그의 고백을 들어보
자. “어느 스튜디오도 영화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일단 스파이더맨의 갖은 공중곡예를 영상화할 기술력 자체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설사 기술력이 있다고 해도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퍼맨: 더 무비>(1978)의 대히트
로 슈퍼히어로물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을 때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퍼맨이 하늘을 나는 신보다 스파이더맨이
빌딩 사이로 곡예를 부리는 신이 훨씬 찍기 어렵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했기 때문이다. ‘제2의 월트디즈니’를 꿈꾸던 리에게
자신의 최고 걸작이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큼 속상한 일은 없었다. 메이저 스튜디오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
자, 마블은 소형 영화사에 스파이더맨의 판권을 팔 것을 고려하게 된다. 1982년에는 B급 영화의 대부 로저 코먼이 판권을 구입
해 영화판 <스파이더맨>을 만들려고 했으나, 그는 리가 쓴 트리트먼트(영화의 줄거리, 주요 장면 등을 압축해서 적은 글)를 본
뒤 혼비백산해 제작을 포기했다. 코먼이 책정한 예산으로는 리가 구상한 클라이맥스 신(UN 빌딩을 배경으로 한 스파이더맨과
닥 옥의 대결 신)을 도저히 찍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85년에는 중소 영화사 캐논의 대표 메나헴 골란이 스파이더맨의 영화화 판권을 사


들였다. 그런데, 향후 펼쳐질 불행한 사태들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비롯됐다. 리의 원
작 만화에 대한 이해도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골란은 오로지 ‘싸게 제작해서 한몫
잡아보자’라는 생각으로 스파이더맨의 판권을 구입했는데, 최초에 그는 (역시 리의
원작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던) 각본가 레슬리 스티븐슨에게 스파이더맨의 각본 작
업을 맡겼다. 황당하게도 그의 각본에서는 피터 파커가 거미에게 물린 뒤 다리가 여
덟 개인 ‘진짜 거미인간’으로 변신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리는 물론 노발대발하며 이
각본에 퇴짜를 놨다. 다음으로 고용된 각본가는 테드 뉴섬과 존 브랑카토였다. 두 사
람은 영화의 악당을 닥 옥으로 정한 뒤, 스파이더맨과 닥 옥의 기원을 한 데 묶는다는
(닥 옥의 실험으로 방사능에 노출된 거미가 파커를 문다는 설정) 과감한 시도를 했는
데, 각본 작업을 하면서 그들은 스파이더맨의 각색이 다른 슈퍼히어로물보다 몇 배로
까다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플롯만으로 봤을 때, 스파이더맨 만화 시리즈는 사실 ‘비
극’에 가깝다. 이것은 “피터 파커는 늘 불행해야 한다. 만일 전편에서 그가 행복했다
면 다음 편에서는 그를 꼭 불행하게 만들라”는 리의 집필 모토가 40년이 넘도록 후배
작가들에게 계승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의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발랄하며 유머가 넘친다. 이런 묘한
현상은 리가 말풍선을 효과적으로 활용(스파이더맨은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재치 넘치는 독백을 하고 있다)했다는 데서 주로
기인하는 것인데, 문제는 영화에서는 이런 방법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비극적 플롯’과 ‘희극적 분위기’를 어떻게 조화시키
는가는 이후 스파이더맨의 각본을 맡은 모든 이들의 숙제가 됐다.

초창기에 골란은 <스파이더맨>의 감독을 토브 후퍼에게 맡기려 했다. 그러나 캐논영화사 최대 히트작이었던 <대특명>(1984)
의 감독 조셉 지토가 <스파이더맨>을 연출하고 싶다고 밝히자, 골란은 즉각 후퍼에게서 메가폰을 빼앗아 그에게 던져주었다.
헌데 문제는 각본가 뉴섬-브랑카토 콤비와 지토와의 호흡이 전혀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각본가들은 지토가 스파이더맨과 같은
‘복잡한’ 작품을 맡을 정도의 창의력과 연출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지토는 과거 <13일의 금요일 4>(1984)에서 자신과 작
업한 적이 있는 바니 코헨에게 각본을 맡겼다. 코헨은 뉴섬-브랑카토 콤비가 구상한 플롯에 몇 가지 요소를 첨가하는 형식으로
각본을 완성시켰다. 예컨대 닥 옥에게는 조수가 한 명 새로 생겼는데, 파커의 삼촌 벤을 살해하는 것은 바로 이 조수였다. 내용
상 원작 만화에서 다소 벗어난 점이 흠이긴 하지만, 코헨과 지토는 적어도 만화의 정수는 이 각본이 훌륭하게 포착했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지토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영화를 찍을 준비를 할 때, 황당한 일이 생겼다. 캐논 영화사는 당시 무분별한 투자로
인해 극심한 재정난에 처한 상태였는데, 이 때문에 골란이 영화의 제작비를 당초 계획했던 1천5백만 불에서 1천만 불로 삭감해
버린 것이다. 애당초 캐논은 <스파이더맨>을 저예산 영화로 기획한 바 있지만, 제작 규모가 이 정도로 쪼그라들자 지토는 “그
돈으로는 도저히 <스파이더맨>을 만들 수 없습니다. 차라리 안 만드는 게 낫습니다!”라면서 메가폰을 놔버렸다. 스톱모션 애니
메이션 기법과 싸구려 합성 기법 등 온갖 값싼 특수효과 기법으로 만들어질 계획이었던 캐논의 <스파이더맨>은 (다행스럽게
도) 이렇게 해서 빛을 보지 못하게 됐다.

파산 직전까지 몰렸던 캐논영화사는 결국 파테커뮤니케이션에 인수됐고, 골란은 판권만료시점(1990년 4월)이 도래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스파이더맨>을 영화화해야겠다는 일념으로 프로젝트를 다시 부활시켰다. 하지만 제작 규모는 지난번보다 오
히려 더 축소됐다. 어이없게도 골란은 5백만 불의 제작비로 <스파이더맨>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 고용된 각본
가 돈 마이클 폴은 특수효과에 돈이 많이 들어가는 닥 옥 대신 ‘나이트 굴’이라는 뱀파이어 악당을 만들어 등장시키는 꼼수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골란은 폴의 각본 역시 제작비가 많이 들어갈 것이라 판단하고는 저예산 영화 전문 각본가인 에단 와일리
를 고용해 ‘초저예산 영화버전’ <스파이더맨>의 각본을 새로 쓰도록 했다. 골란의 등쌀에 못 이겨, 와일리는 각본에서 돈이 들
어가는 요소는 모조리 빼버렸으며, 심지어 파커도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스파이더맨이 되는 것으로 설정했다. 물론 영화
가 이런 식으로 제작되면 영화팬들의 살인적인 비난이 쏟아질 것은 너무나 뻔했지만, 골란은 이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의 머
릿속에는 오로지 인기 캐릭터의 이름값을 이용해 조금이라도 돈을 벌어보자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이
번에도 골란은 제작비를 충당할 수 없어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1989년에 골란은 21세기픽처스라는 회사를 설립한 뒤 마블 측
에 판권만료기간을 연장해줄 것을 요청하고 다시 <스파이더맨>의 제작에 도전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람보 2> <토탈리콜>
등을 제작했던 거대 독립영화사인 캐롤코픽처스가 골란의 프로젝트에 관심을 나타냈다. 골란은 즉각 캐롤코와 판권계약을 체
결했는데, 캐롤코가 당시 <스파이더맨>의 감독으로 내정한 이는 다름 아닌 제임스 카메론이었다. <스파이더맨>은 바로 이 순
간부터 초대형 영화로 돌변했다.
원작 만화의 열혈 팬이었던 카메론은 80페이지에 이르는 <스파이더맨>의 트리트먼
트를 작성했는데, 여기서는 스트랜드(만화의 악당인 ‘일렉트로’에서 영감을 받아 만
들어진 캐릭터)와 샌드맨 등 두 명의 악당이 등장해 스파이더맨과 맞선다. 분위기가
원작 만화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 파커가 방사능 거미가 아닌 ‘유전자 돌연변이’ 거
미에게 물린다는 것, 그리고 만화와는 달리 스파이더맨의 거미줄이 체내에서 직접 생
산된다는 것 등이 이 트리트먼트의 특징이었다. 약간의 컨셉상 변화가 있긴 했지만,
파커의 고독감과 소외감, 성장기 소년의 심리상태에 대한 탁월한 묘사 등 원작 만화
의 지배정서는 이 트리트먼트에 훌륭하게 담겨 있었다. 리는 카메론이 <스파이더맨>
의 감독을 맡았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고(그는 카메론 영화의 팬이었다), 트리트먼
트를 본 후에는 “지구상에서 <스파이더맨>을 가장 완벽하게 영화화할 수 있는 사람
은 바로 카메론이다!”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특히 <터미네이터 2>를 본 뒤(자유자재
로 변신하는 T-1000의 컨셉은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악당 샌드맨의 영향을 받은 것이
다) 그의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하지만 리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카메론은 ‘무능한 제작자’ 골란을 <스파이더맨> 크레딧에 올리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후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카메론의 결정에 발끈한 골란은 캐롤코를 고
소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스파이더맨> 전쟁’의 서막이었다. 캐롤코는 이후 비아콤과 소니의 TV-비디오 판권이 무효
라면서(골란은 자금난을 겪을 때 두 회사에 TV와 비디오 판권을 각각 판 바 있다) 두 회사를 고소했고, 두 회사는 이에 반발하며
캐롤코, 21세기픽처스, 마블을 모두 고소했다. 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파테커뮤니케이션에 속하던 MGM 역시 자신들이 캐논영
화사의 <스파이더맨> 판권을 물려받았다면서 법정 공방 중이던 회사들을 모조리 고소했다. 소송이 거미줄처럼 얽히던 와중에
캐롤코와 21세기픽처스, 마블이 모두 파산 신청을 하면서 상황은 더욱 우습게 됐다. 마블을 공중 분해될 위기에서 가까스로 구
한 CEO 아비 아라드는 이 난감한 사태를 수습하려고 분주히 뛰어다녔으며, 결국 1999년에 가서야 “MGM의 판권은 이미 만료
됐다”는 LA 대법원의 판결을 이끌어내 몇 년간 질질 끌던 복잡한 소송들을 매듭지었다. 마블은 곧 소니와 <스파이더맨>의 판
권계약을 체결했고, 비로소 스파이더맨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게 됐다. 다른 메이저 스튜디오와 맞설 수 있는 대박 프랜차이
즈 시리즈 아이템을 애타게 찾던 소니에게 이보다 더한 희소식은 있을 수 없었다. 계약이 체결된 직후, 소니의 회장 존 캘리는
“오늘은 스튜디오 역사상 가장 경사스러운 날이다!”라고 소감을 밝혔고, 스탠 리 역시 “그간 <스파이더맨>의 영화 버전을 너무
나 보고 싶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쁘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동시에 안타까운 비보도 전해졌다. 수년에 걸친 법정싸움에
지친 카메론이 “나는 이제 더 이상 <스파이더맨>을 연출할 생각이 없다”고 밝힌 것이다. 소니는 ‘블록버스터물의 대가’가 빠진
자리를 메우기 위해 론 하워드, 팀 버튼, 크리스 콜롬버스, 데이비드 핀처 등 많은 감독들을 놓고 고민을 거듭했고, 결국 샘 레
이미에게 <스파이더맨>의 메가폰을 맡기기로 최종 결정했다.

▶거미인간, 할리우드를 평정하다


<스파이더맨>의 각본을 맡게 된 데이비드 코엡은 원작만화에 가장 가깝게 각색된 카메론의 트리트먼트를 바탕으로 각본 작업
을 진행했다. 코엡의 각본 초고는 카메론의 것과 내용상 매우 유사했는데, 다른 것이라면 스트랜드가 ‘일렉트로’로 바뀐 것 정
도였다. 이듬해에 작성한 수정본에서 코엡은 내용을 상당부분 바꿨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렉트로와 샌드맨 대신 그린 고
블린과 닥 옥을 악당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튜디오는 이 각본을 본 뒤 우려를 표시했다. ‘두 명 이상의 악당을 한 영
화에 등장시킨다’는 것은 잘 나가던 워너의 <배트맨> 시리즈가 좌초한 결정적 원인으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예컨대, <배트맨
2>는 호평과 혹평이 엇갈린 영화였는데, 영화를 비판한 이들은 한 목소리로 악당이 두 명(펭귄, 캣우먼)이나 출연하는 바람에
플롯의 초점이 분산됐다는 지적을 한 바 있다. 역시 두 명의 악당(투 페이스, 리들러)이 등장한 <배트맨 포에버>도 같은 맥락의
비판을 받았으며, 무려 세 명의 악당(미스터 프리즈, 포이즌 아이비, 베인)이 출연한 <배트맨과 로빈>은 시리즈 중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닥 옥과 같은 ‘슈퍼스타 악당’이 그린 고블린과 함께 출연할 경우 극중 비중이 현저히 줄어들 수 있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결국 제작진은 근 15년 동안 각본에서 존재해온 악당 닥 옥을 과감히 포기하고 그린 고블린을 <스
파이더맨>의 유일한 악당으로 설정하게 된다.

<스파이더맨> 각본의 최종 수정본은 결과적으로 카메론의 트리트먼트와는 매우 다른 내용이 됐다. 하지만 카메론의 설정 중
두 가지는 끝까지 살아남게 된다. 첫째는 파커를 무는 거미가 원작 만화와는 달리 ‘유전자 돌연변이’ 거미라는 것이며, 둘째는
스파이더맨이 체내에서 생성된 거미줄을 발사한다는 것이다. 특히 두 번째 설정을 놓고 일부 팬들은 ‘원작을 무시했다’면서 크
게 반발했는데, 레이미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카메론의 판단은 옳았다. 만일 만화 내용대로 파커가 거미줄 발사기를
발명하는 것으로 설정한다면, 그가 ‘보통 인간’이라는 설정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런 황당한 기계를 발명할 정도의 인물이면
‘불세출의 천재’가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는 발명품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가난하게 산다는 것
은 애당초 말이 안 되며, ‘천재’라는 이유 때문에 관객들은 그에게서 괴리감마저 느낄 것이다. 또, 파커가 벽을 기어 다니는 능
력이나 초감각 등 다른 거미의 능력은 모두 전수받았으면서 유독 거미줄 만드는 능력만 보유하지 못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
다.” 레이미의 이 발언은 그가 <스파이더맨>을 만들며 리얼리티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에 대한 방증이 된다. 그는 무엇보다 이
영화가 ‘크립톤에서 온 슈퍼영웅’이 아닌, 우연히 ‘스파이더 복권’에 당첨된 보통 인간의 이야기며, 액션물을 가장한 ‘성장 이야
기’라는 데 연출의 초점을 맞췄다.
싸구려 B급 영화로 만들어졌다가 사장될 뻔한 <스파이더맨>은 실로 기막힌 시기에 빛을 보게 됐다. 이 영화가 제작될 무렵에
는 <엑스맨>(2000)의 성공으로 한동안 주춤했던 슈퍼히어로물 인기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엑스맨>은 (역시 스탠 리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답게) 슈퍼히어로의 ‘인간적 측면’의 묘사가 매우 돋보인 작품이었는데, 이런 설정에 익숙해진 관객들
은 <스파이더맨>의 설정을 더욱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작품이 ‘디지털 특수효과
시대’에 제작됐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이 영화에서는 10년 전만 해도 꿈도 꿀 수 없었던 특수효과 신의 구현이 가능해졌다. 허
나 이런 천혜의 제작 배경에도 불구하고 레이미는 영화를 찍는 내내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그의 첫 번째 대형 블록
버스터 작품인 데다가 제작 초기부터 캐스팅 및 영화의 설정 등을 놓고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
다 그는 특수효과로 범벅이 된 이 영화에서 어떻게 연출 감각을 유지할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강력한 위안
거리가 하나 있었다. 바로 자신은 리의 열렬한 팬이며, 스파이더맨의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는 점이었다.(레이미는 80년
대에 리의 다른 걸작인 [마이티 토르]의 영화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미 리와 인연을 맺은 바 있다. [마이티 토르]의 제작이
무산되자 레이미는 대신 <다크맨>을 연출하게 된다) 레이미는 팬들의 야유가 쏟아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팬들을 기쁘게 해주
는 유일한 길은 그들의 다양한 요구를 억지로 수용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누구 못지않은 스파이더맨 팬인 나의 내면의 목소
리를 따르는 것이다”라고 되뇌었다. 그의 접근법은 옳았다.

2002년 5월, 북미에서 개봉한 <스파이더맨>은 역대 개봉일 흥행수입 신기록을 작성하며(개봉 3일 만에 수익 1억불을 돌파한
영화는 <스파이더맨>이 처음이었다) 박스오피스를 초토화시켰다. 마블의 대표 아비 아라드는 1996년 마블이 재정적 위기에 처
했을 때 채권자들에게 “<스파이더맨> 하나만 해도 10억불의 잠재적 상업성이 있소!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오!”라고 설득한 바
있는데, 이 말은 8년 만에 사실로 입증됐다. 하지만 이런 상업적 성공보다 영화 마니아들을 더 기쁘게 한 것은 오랫동안 음지에
서 활동해온 레이미 감독의 연출력이 비로소 대다수의 대중들에게 인정받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스파이더맨>은 평단으로부
터도 대단한 갈채를 이끌어냈으며, 만화의 팬들 역시 ‘레이미가 원작만화의 주제의식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면서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스파이더맨>의 대성공 후 마블 슈퍼히어로물의 행보는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다. <스파이더맨> 이후 마블 캐릭터를 내세
운 영화들이 벌어들인 흥행수입의 합계는 자그마치 40억불이 넘는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스파이더맨> 이후에 제작된 슈퍼
히어로물의 전반적 퀄리티가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향상됐다는 사실이다. 레이미는 <스파이더맨2>(2004)에서 1
편을 뛰어넘는 호평을 이끌어내며 이런 ‘고품질 슈퍼히어로물 시대’를 연 일등공신이 됐다. <스파이더맨 2>에는 무려 15년이
넘게 영화의 악당으로 논의돼온 닥 옥이 비로소 등장하는데, 존 다이크스트라가 이끄는 소니의 특수효과 스탭들이 만든 닥 옥
의 기막힌 액션 신들은 ‘<스타워즈>와 <터미네이터 2> 이래 최고의 시각효과 혁명’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레이미는 이미 1편
을 통해 기본적인 설정의 소개를 마쳤기 때문에 2편에서는 비교적 수월하게 ‘고독한 영웅’에 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었는데, 영화는 마치 스탠 리가 1967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50호에서 소개한 ‘Spider-Man No More'(<스파이더맨 2>의
플롯에 영감을 준 작품)의 셰익스피어 버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완성도를 자랑했다.

두 편의 <스파이더맨>을 통해 ‘대자본과 특수효과의 압박 속에서 재능을 펼치는 법’을 완전히 터득한 레이미는 <스파이더맨
3>에서 과거 스튜디오가 금기시 했던 것들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스튜디오의 ‘금칙’을 깨고 <스파이더맨 3>에는 무
려 세 명의 악당이 등장한다. 특히 현대 코믹스가 낳은 최고의 캐릭터 중 하나인 베놈이 출연한다는 사실은 열혈 팬들의 아드레
날린 게이지를 일찌감치 최대치로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악당들 외에 이번 편에 새로 등장하는 캐릭터 중 특히 흥미를 끄는 인
물은 바로 그웬 스테이시다. 스테이시는 스파이더맨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지만, ‘비운의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단 한 번도 영화의 등장인물로 고려된 적이 없다. 심지어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보다 훨씬 심각한 영화를 꿈꾸었던 카
메론조차 스테이시는 처음부터 등장인물 목록에서 제외시킨 바 있다.(흥미롭게도 한때 <스파이더맨>의 감독 후보였던 데이비
드 핀처는 이와는 반대로 ‘그웬 스테이시 일화에 가장 관심이 많다’고 밝히기도 했다) 물론 스테이시가 <스파이더맨3>에서 맡
은 역할은 만화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녀가 출연한다는 사실은 레이미가 만화의 오랜 모토인 ‘피터 파커가 행복하게 된다면 다
음 편에서 그를 불행하게 만들어라’를 이번 작품에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그렇다. <스파이더맨 3>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2편보다 무겁고 암울한 영화다. 바로 그렇기에 이 영화는 팬들이 절대 놓칠 수 없는 작품이 돼버렸다.
인기 만화작가 브라이언 마이클 밴디스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수퍼맨은 당신이 ‘되기를 희망하는’ 영웅이다. 하지만 스파이
더맨은 고뇌하는 당신 그 자체다.” <스파이더맨 3>는 밴디스의 이런 해석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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