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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스파이더맨의 연대기
불타는 스파이더맨의 연대기
슈퍼히어로 코믹스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스파이더맨>은 샘 레이미 감독에 의해 영화로 탈바꿈해서도 그 인기를 이어
갔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캐릭터, 이야기, 기술력 모든 면에서 이후 만들어질 슈퍼히어로 영화들의 모범을 제시했
다. <수퍼맨> <배트맨> <엑스맨>과 <스파이더맨>은 무엇이 다른가?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관류하는 맥락들과 <스
파이더맨 3>에서 새로 등장한 인물들, 그리고 그 뒤에 감춰진 궁금증까지 영화 칼럼니스트 김정대가 만화 원작과 영화
시리즈를 종횡무진하며 모든 의문을 해결해준다. (만화책 제목은 [ ]로, 영화 제목은 <>로 구분했음을 알립니다)
그러나 당시 그에게는 굿맨의 고집을 꺾을 만한 힘이 없었다. 그날 저녁, 리의 아내는 이 일 때문에 남편이 고민하고 있는 모습
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까짓것, 당신이 원하는 스타일로 만화를 창작하세요! 설사 그 일로 인해 당신이 해고된다 해도 문제될
게 뭐 있나요? 어차피 당신은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이었잖아요?!” 이 말을 듣는 순간, 한동안 잠자고 있는 리의 창작욕이 활활
타올랐다. 다음 날 당장 동료 잭 커비와 ‘파격적인 슈퍼히어로 팀 만화’의 창작 작업에 돌입했고, 그 결과 만화계의 조류를 영원
히 바꿔놓은 걸작이 탄생했다. 바로 [판타스틱 4]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리조차 이 만화가 도입한 컨셉이 훗날 마블 코믹스, 아
니 미국 만화계를 통틀어 최고의 인기 스타인 ‘스파이더맨’을 낳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판타스틱 4]의 가장 큰 공헌은 슈퍼히어로 만화에 ‘리얼리즘’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이 만화는 ‘만일 보통사람이 우연한 사고
로 슈퍼 파워를 얻어 영웅이 된다면? 그리고 슈퍼히어로가 된 후에도 보통사람과 같은 개성을 지닌다면?’이라는 컨셉에서 비롯
됐다. 과거의 슈퍼히어로들과는 달리 [판타스틱 4]의 영웅들은 일상적인 고민들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며, 지극히 인간적인
약점마저 지닌 ‘불완전한’ 인물들이다. 팀의 리더인 리드 리처드는 항상 설교조의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따분한 인물이며 애
인이자 동료 영웅인 수 스톰과의 관계도 순탄치 않다. 또, 자니 스톰의 경우는 사고뭉치에 가까운 틴에이저다. 그리고 벤 그림
의 경우는 오히려 슈퍼 파워를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라 여기고 있다. 세 명의 동료들과는 달리, 그는 괴물에 가까운 인물인 ‘더
씽(The Thing)'으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이 네 명은 또한 기존의 슈퍼히어로들과는 달리 종종 사회에서 냉대를 받기도 한다. 당
장 시리즈 2편에서 이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범죄자로 몰려서 군대에게 쫓기게 된다. 이런 것들은 기존의 슈퍼히어로 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컨셉이었다. 독자들은 ‘자신들과 같은 약점을 지닌’ 이 현실적인 캐릭터들에 즉각 매료됐다. [판타스틱 4]에 쏟
아진 열렬한 호응에 고무된 스탠 리-잭 커비 콤비는 ‘저주받은 슈퍼히어로’ 벤 그림의 설정을 더욱 확장해 또 하나의 걸작을 만
들어낸다. 바로 [헐크]였다.
[판타스틱 4]와 [헐크]의 대성공으로 마블 코믹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한편, 스탠 리는 두 만화의 컨셉을 총망라한 새로
운 슈퍼히어로 시리즈를 만들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타이핑을 하던 중 벽에 붙은 파리를 보고는
‘벽을 기어 다니는 슈퍼히어로’를 문뜩 떠올렸다. ‘이거 멋진 아이디어인걸!’이라고 생각한 그는 즉각 이 영웅에게 이름을 붙이
기로 했다. 파리인간, 모기인간, 곤충인간 등 갖은 괴상한(?) 이름들을 놓고 고민하던 그는 어린 시절에 즐겨 읽던 펄프 픽션
[스파이더]를 떠올리고는 ‘스파이더맨’이라는 이름을 지어냈다. 리는 앞선 두 인기 만화의 컨셉을 계승해 이 새로운 영웅을 다
음과 같이 설정했다. “왕따 틴에이저가 어느 날 거미에게 물린 뒤 슈퍼히어로 ‘스파이더맨’이 된다. 하지만 그에게 부여된 슈퍼
파워는 오히려 삶을 구속하는 재앙이 돼버린다.”
스토리를 구상하며 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일 보통사람에게 초능력이 생긴다면 그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정말
로 과거의 슈퍼히어로들처럼 이타적인 목적에 그것을 쓸까? 아니다.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나 돈과 명예를 위해 그것을 활용하
려 할 것이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생생한 리얼리티는 이렇게 해서 부여됐다. 만화사가들은 스파이더맨이 초유의 인기를 끈
이유를 ‘캐릭터 묘사의 리얼함’에서 찾고 있다. 소외감과 고독감, 돈문제, 학업문제, 그리고 연애문제까지 파커가 겪는 모든 고
뇌들은 ‘실제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의 그것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파커가 갑작스럽게 생긴 초능력 때문에 오히려 곤경에 처
한다는 설정은 청소년들이 사춘기에 겪는 ‘성장의 고통’(육체적인 능력의 향상에 수반되는 정신적 방황)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
곤 한다. 실제로, 파커가 시리즈를 거듭하며 습득하는 교훈의 내용은 청소년들이 성장과정에서 체득하게 되는 ‘인생의 교훈’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또, 시리즈 2편 이후 스파이더맨이 엉뚱하게도 사회의 적으로 내몰린다는 설정은 1960년대의 ‘반항적인’
젊은이 문화에 대한 기성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주인공의 설정, 테마,
시대정신 등 모든 면에서 주된 독자층이었던 청소년들의 관심사를 120% 반영한 작품인 셈이다.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맨의 특질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수퍼맨]의 클라크 켄트는 일부러 ‘얼간이’인 척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는 진짜 얼간이다!” 만화학자 윌리엄 라담 역시 비슷한 맥락의 의견을 제시했다. “[수퍼맨]에
서 진짜 주인공은 수퍼맨이며, 클라크 켄트는 그의 가면에 불과하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설정은 이와는 정반대다.” 이들의
의견은 독자들이 피터 파커에게 일체감을 느끼고, 그에게 감정몰입을 할 수 있었던 요인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만화의 연
재가 시작된 직후, 리의 사무실에는 팬레터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리조차도 스파이더맨이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 줄은
예상치 못했다. 1960년대 중반에 리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판타스틱 4]를 제치고 마블 코믹
스, 아니 미국 만화업계 최고의 인기 시리즈로 등극한 상태였다.
시리즈가 거듭되면서 만화 속 설정은 계속 업데이트된다. 예컨대, 고등학생이었던 파커는 일정 시간이 흐른 후 대학생이 되고,
첫사랑인 그웬 스테이시를 만나게 된다. 한편, 작화가 스티브 딧코는 38호를 끝으로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하차하고, 그 자리
는 존 로미타가 대신하게 된다. 이전까지 로맨틱 만화 장르에서 주로 활동했던 로미타는 특히 ‘미모의 여성’을 잘 그리는 것으
로 유명했다. 로미타가 탄생시킨 최고의 인물은 바로 엠제이(메리 제인 왓슨)였다. 붉은 머리의 엠제이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
웬 스테이시와는 달리 보다 쾌활하고 활동적인 인물로, 엄밀히 말해 ‘주인공급’으로 설정된 캐릭터는 아니었다. 본래 스탠 리는
파커와 스테이시를 어느 시점에서 결혼시킬 예정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파커에게 더 잘 어울리는 인물은 오히려 엠제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 시점부터 엠제이는 파커의 진짜 파트너로 급부상하는데, 1972년부터 리의 뒤를 이어 시리즈의 작가를 맡게 된
게리 콘웨이는 이런 분위기를 이어받아 시리즈 121호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소개한다. 이 작품에서 그린 고블린에게 납치된 스
테이시는 브룩클린 다리 위에서 떨어지게 되는데, 스파이더맨은 간신히 거미줄로 그녀를 붙잡는 데 성공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녀는 숨을 거두게 된다. 더 쇼킹한 것은 그녀가 죽은 이유가 바로 스파이더맨의 거미줄로 인한 갑작스러운 충격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스파이더맨은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분노와
자괴감에 휩싸인 스파이더맨은 다음 호에서 그린 고블린을 글라이더에 찔려서 죽게 한다. 이 내용이 담긴 시리즈 121~122호는
현대 슈퍼히어로 만화의 관행을 송두리째 바꾼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들 이후 슈퍼히어로 만화의 내용은 그야
말로 예측이 불가능하게 됐다. 여주인공은 ‘죽을 수도’ 있으며, 우리의 영웅은 악당과의 대결에서 패할 수도 있다. 또한 사회의
정의는 반드시 회복되는 것이 아니며, 때로 악이 승리할 수도 있다. 이것은 1980년대 이후 유행하게 되는 누아르 스타일의 만화
들을 예고하는 징후이기도 했다.
토드 맥팔레인이라는 걸출한 만화가를 배출한 이 시기는 바로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중흥기였다. 그러나 이후 시리즈는 혼란기
로 접어든다. 시리즈 내용이 최초의 컨셉과 너무 동떨어졌다고 판단(이 시기에 파커는 더 이상 틴에이저가 아닌, 엠제이와 결혼
한 유부남이었으며 자식까지 낳기 직전이었다)한 마블은 시리즈의 개혁을 단행했는데, 그 개혁 내용은 모든 독자들을 경악케
했다. 바로 1975년에 나온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149호(스파이더맨의 클론이 등장하는 작품) 이후 전개된 모든 이야기에서 스
파이더맨은 사실 진짜가 아닌 클론이었다는 것이다. 이 설정에 따라, 마블은 기존의 피터 파커와 메리 제인을 ‘퇴장’시키고 새
로운 스파이더맨의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러나 독자들은 자신들이 20년이 넘도록 봐온 캐릭터가 ‘가짜’라는 사실에 크게 분노
했고, 당황한 마블은 ‘알고 보니 클론으로 여겨졌던 예전 스파이더맨이 진짜였더라!’라고 설정을 급히 바꿨다. 이 모든 혼란을
야기한 주범이 (죽은 줄 알았던) 그린 고블린이라는 구차한(?) 추가 설정까지 도입하면서 말이다. 이 웃지 못할 해프닝 이후 스
파이더맨 시리즈의 내용은 더욱 복잡해져갔다. ‘클론 사가’로 대표되는 혼란기를 경험하며 독자들은 자연히 예전 스파이더맨
이야기의 정제된 내용을 그리워하게 된다. 스파이더맨 영화 버전이 수면 위로 급부상한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스크린으로의 험난한 여정
1960년대 이후 최고의 인기를 누린 마블의 슈퍼히어로들은 이상하게도 만화책만 일단 벗어나면 전혀 맥을 못 췄다. 수퍼맨, 배
트맨 등 DC 코믹스의 슈퍼히어로들이 수십 년간 브라운관과 라디오, 은막을 고루 지배했던 현상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오
죽했으면 리가 “무슨 저주에라도 걸린 것 같다”라고 푸념까지 늘어놓았겠는가. [판타스틱 4]로 마블의 전성시대가 열린 이후,
TV나 영화 등 다른 매체에서 성공한 마블의 슈퍼히어로는 [헐크](CBS의 TV 시리즈)가 유일했다. 스파이더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60년대 이후 스파이더맨은 만화영화, TV 드라마 등으로도 종종 제작됐으나 랄프 박시의 작품이나 [스파이더맨: 애니
메이션 시리즈](1994~1998) 등을 제외하고는 만족스러운 작품이 거의 없었다. 기대를 모았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TV 시리
즈(1977, 니콜라스 해몬드 주연)의 경우는 리가 “방영을 중단해달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 형편없는 각본으로라도 시리즈를
계속 만들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스러웠다”라고 털어놓았을 정도로 완성도가 형편없었다.
헌데, 만화영화나 TV 시리즈는 그렇다 치더라도 최고의 인기 만화인 스파이더맨이 장편영화로 오랫동안 만들어지지 못한 이유
는 뭘까? 1970년대 초에 마블로부터 판권을 구입해 영화 버전 <스파이더맨>을 만들려고 했던 스티브 렘버그의 고백을 들어보
자. “어느 스튜디오도 영화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일단 스파이더맨의 갖은 공중곡예를 영상화할 기술력 자체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설사 기술력이 있다고 해도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퍼맨: 더 무비>(1978)의 대히트
로 슈퍼히어로물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을 때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퍼맨이 하늘을 나는 신보다 스파이더맨이
빌딩 사이로 곡예를 부리는 신이 훨씬 찍기 어렵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했기 때문이다. ‘제2의 월트디즈니’를 꿈꾸던 리에게
자신의 최고 걸작이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큼 속상한 일은 없었다. 메이저 스튜디오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
자, 마블은 소형 영화사에 스파이더맨의 판권을 팔 것을 고려하게 된다. 1982년에는 B급 영화의 대부 로저 코먼이 판권을 구입
해 영화판 <스파이더맨>을 만들려고 했으나, 그는 리가 쓴 트리트먼트(영화의 줄거리, 주요 장면 등을 압축해서 적은 글)를 본
뒤 혼비백산해 제작을 포기했다. 코먼이 책정한 예산으로는 리가 구상한 클라이맥스 신(UN 빌딩을 배경으로 한 스파이더맨과
닥 옥의 대결 신)을 도저히 찍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창기에 골란은 <스파이더맨>의 감독을 토브 후퍼에게 맡기려 했다. 그러나 캐논영화사 최대 히트작이었던 <대특명>(1984)
의 감독 조셉 지토가 <스파이더맨>을 연출하고 싶다고 밝히자, 골란은 즉각 후퍼에게서 메가폰을 빼앗아 그에게 던져주었다.
헌데 문제는 각본가 뉴섬-브랑카토 콤비와 지토와의 호흡이 전혀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각본가들은 지토가 스파이더맨과 같은
‘복잡한’ 작품을 맡을 정도의 창의력과 연출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지토는 과거 <13일의 금요일 4>(1984)에서 자신과 작
업한 적이 있는 바니 코헨에게 각본을 맡겼다. 코헨은 뉴섬-브랑카토 콤비가 구상한 플롯에 몇 가지 요소를 첨가하는 형식으로
각본을 완성시켰다. 예컨대 닥 옥에게는 조수가 한 명 새로 생겼는데, 파커의 삼촌 벤을 살해하는 것은 바로 이 조수였다. 내용
상 원작 만화에서 다소 벗어난 점이 흠이긴 하지만, 코헨과 지토는 적어도 만화의 정수는 이 각본이 훌륭하게 포착했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지토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영화를 찍을 준비를 할 때, 황당한 일이 생겼다. 캐논 영화사는 당시 무분별한 투자로
인해 극심한 재정난에 처한 상태였는데, 이 때문에 골란이 영화의 제작비를 당초 계획했던 1천5백만 불에서 1천만 불로 삭감해
버린 것이다. 애당초 캐논은 <스파이더맨>을 저예산 영화로 기획한 바 있지만, 제작 규모가 이 정도로 쪼그라들자 지토는 “그
돈으로는 도저히 <스파이더맨>을 만들 수 없습니다. 차라리 안 만드는 게 낫습니다!”라면서 메가폰을 놔버렸다. 스톱모션 애니
메이션 기법과 싸구려 합성 기법 등 온갖 값싼 특수효과 기법으로 만들어질 계획이었던 캐논의 <스파이더맨>은 (다행스럽게
도) 이렇게 해서 빛을 보지 못하게 됐다.
<스파이더맨> 각본의 최종 수정본은 결과적으로 카메론의 트리트먼트와는 매우 다른 내용이 됐다. 하지만 카메론의 설정 중
두 가지는 끝까지 살아남게 된다. 첫째는 파커를 무는 거미가 원작 만화와는 달리 ‘유전자 돌연변이’ 거미라는 것이며, 둘째는
스파이더맨이 체내에서 생성된 거미줄을 발사한다는 것이다. 특히 두 번째 설정을 놓고 일부 팬들은 ‘원작을 무시했다’면서 크
게 반발했는데, 레이미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카메론의 판단은 옳았다. 만일 만화 내용대로 파커가 거미줄 발사기를
발명하는 것으로 설정한다면, 그가 ‘보통 인간’이라는 설정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런 황당한 기계를 발명할 정도의 인물이면
‘불세출의 천재’가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는 발명품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가난하게 산다는 것
은 애당초 말이 안 되며, ‘천재’라는 이유 때문에 관객들은 그에게서 괴리감마저 느낄 것이다. 또, 파커가 벽을 기어 다니는 능
력이나 초감각 등 다른 거미의 능력은 모두 전수받았으면서 유독 거미줄 만드는 능력만 보유하지 못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
다.” 레이미의 이 발언은 그가 <스파이더맨>을 만들며 리얼리티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에 대한 방증이 된다. 그는 무엇보다 이
영화가 ‘크립톤에서 온 슈퍼영웅’이 아닌, 우연히 ‘스파이더 복권’에 당첨된 보통 인간의 이야기며, 액션물을 가장한 ‘성장 이야
기’라는 데 연출의 초점을 맞췄다.
싸구려 B급 영화로 만들어졌다가 사장될 뻔한 <스파이더맨>은 실로 기막힌 시기에 빛을 보게 됐다. 이 영화가 제작될 무렵에
는 <엑스맨>(2000)의 성공으로 한동안 주춤했던 슈퍼히어로물 인기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엑스맨>은 (역시 스탠 리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답게) 슈퍼히어로의 ‘인간적 측면’의 묘사가 매우 돋보인 작품이었는데, 이런 설정에 익숙해진 관객들
은 <스파이더맨>의 설정을 더욱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작품이 ‘디지털 특수효과
시대’에 제작됐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이 영화에서는 10년 전만 해도 꿈도 꿀 수 없었던 특수효과 신의 구현이 가능해졌다. 허
나 이런 천혜의 제작 배경에도 불구하고 레이미는 영화를 찍는 내내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그의 첫 번째 대형 블록
버스터 작품인 데다가 제작 초기부터 캐스팅 및 영화의 설정 등을 놓고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
다 그는 특수효과로 범벅이 된 이 영화에서 어떻게 연출 감각을 유지할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강력한 위안
거리가 하나 있었다. 바로 자신은 리의 열렬한 팬이며, 스파이더맨의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는 점이었다.(레이미는 80년
대에 리의 다른 걸작인 [마이티 토르]의 영화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미 리와 인연을 맺은 바 있다. [마이티 토르]의 제작이
무산되자 레이미는 대신 <다크맨>을 연출하게 된다) 레이미는 팬들의 야유가 쏟아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팬들을 기쁘게 해주
는 유일한 길은 그들의 다양한 요구를 억지로 수용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누구 못지않은 스파이더맨 팬인 나의 내면의 목소
리를 따르는 것이다”라고 되뇌었다. 그의 접근법은 옳았다.
2002년 5월, 북미에서 개봉한 <스파이더맨>은 역대 개봉일 흥행수입 신기록을 작성하며(개봉 3일 만에 수익 1억불을 돌파한
영화는 <스파이더맨>이 처음이었다) 박스오피스를 초토화시켰다. 마블의 대표 아비 아라드는 1996년 마블이 재정적 위기에 처
했을 때 채권자들에게 “<스파이더맨> 하나만 해도 10억불의 잠재적 상업성이 있소!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오!”라고 설득한 바
있는데, 이 말은 8년 만에 사실로 입증됐다. 하지만 이런 상업적 성공보다 영화 마니아들을 더 기쁘게 한 것은 오랫동안 음지에
서 활동해온 레이미 감독의 연출력이 비로소 대다수의 대중들에게 인정받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스파이더맨>은 평단으로부
터도 대단한 갈채를 이끌어냈으며, 만화의 팬들 역시 ‘레이미가 원작만화의 주제의식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면서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스파이더맨>의 대성공 후 마블 슈퍼히어로물의 행보는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다. <스파이더맨> 이후 마블 캐릭터를 내세
운 영화들이 벌어들인 흥행수입의 합계는 자그마치 40억불이 넘는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스파이더맨> 이후에 제작된 슈퍼
히어로물의 전반적 퀄리티가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향상됐다는 사실이다. 레이미는 <스파이더맨2>(2004)에서 1
편을 뛰어넘는 호평을 이끌어내며 이런 ‘고품질 슈퍼히어로물 시대’를 연 일등공신이 됐다. <스파이더맨 2>에는 무려 15년이
넘게 영화의 악당으로 논의돼온 닥 옥이 비로소 등장하는데, 존 다이크스트라가 이끄는 소니의 특수효과 스탭들이 만든 닥 옥
의 기막힌 액션 신들은 ‘<스타워즈>와 <터미네이터 2> 이래 최고의 시각효과 혁명’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레이미는 이미 1편
을 통해 기본적인 설정의 소개를 마쳤기 때문에 2편에서는 비교적 수월하게 ‘고독한 영웅’에 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었는데, 영화는 마치 스탠 리가 1967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50호에서 소개한 ‘Spider-Man No More'(<스파이더맨 2>의
플롯에 영감을 준 작품)의 셰익스피어 버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완성도를 자랑했다.
두 편의 <스파이더맨>을 통해 ‘대자본과 특수효과의 압박 속에서 재능을 펼치는 법’을 완전히 터득한 레이미는 <스파이더맨
3>에서 과거 스튜디오가 금기시 했던 것들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스튜디오의 ‘금칙’을 깨고 <스파이더맨 3>에는 무
려 세 명의 악당이 등장한다. 특히 현대 코믹스가 낳은 최고의 캐릭터 중 하나인 베놈이 출연한다는 사실은 열혈 팬들의 아드레
날린 게이지를 일찌감치 최대치로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악당들 외에 이번 편에 새로 등장하는 캐릭터 중 특히 흥미를 끄는 인
물은 바로 그웬 스테이시다. 스테이시는 스파이더맨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지만, ‘비운의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단 한 번도 영화의 등장인물로 고려된 적이 없다. 심지어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보다 훨씬 심각한 영화를 꿈꾸었던 카
메론조차 스테이시는 처음부터 등장인물 목록에서 제외시킨 바 있다.(흥미롭게도 한때 <스파이더맨>의 감독 후보였던 데이비
드 핀처는 이와는 반대로 ‘그웬 스테이시 일화에 가장 관심이 많다’고 밝히기도 했다) 물론 스테이시가 <스파이더맨3>에서 맡
은 역할은 만화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녀가 출연한다는 사실은 레이미가 만화의 오랜 모토인 ‘피터 파커가 행복하게 된다면 다
음 편에서 그를 불행하게 만들어라’를 이번 작품에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그렇다. <스파이더맨 3>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2편보다 무겁고 암울한 영화다. 바로 그렇기에 이 영화는 팬들이 절대 놓칠 수 없는 작품이 돼버렸다.
인기 만화작가 브라이언 마이클 밴디스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수퍼맨은 당신이 ‘되기를 희망하는’ 영웅이다. 하지만 스파이
더맨은 고뇌하는 당신 그 자체다.” <스파이더맨 3>는 밴디스의 이런 해석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으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