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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 1991년

PROGRAMS
제 41회 아니 이 생명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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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1회 아니 이 생명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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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41회 아니 이 생명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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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1회 아니 이 생명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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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41회 아니 이 생명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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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1회 아니 이 생명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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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41회 아니 이 생명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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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FACE PROGRAMS
PROGRAMS 1986년 ~ 1991년

축|시
제 42회 작은 사랑의
제 42회멜로디 1987년
작은 사랑의 3월 20,
멜로디 1987년 3월 21일
20,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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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FACE
PROGRAMS
축|시
제 43회 꽃피는 체리 1987년 9월 18,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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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3회 꽃피는 체리 1987년 9월 18,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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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43회 꽃피는 체리 1987년 9월 18,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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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3회 꽃피는 체리 1987년 9월 18,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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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FACE
PROGRAMS
축|시
제 43회 꽃피는 체리 1987년 9월 18,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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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3회 꽃피는 체리 1987년 9월 18,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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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43회 꽃피는 체리 1987년 9월 18,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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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3회 꽃피는 체리 1987년 9월 18,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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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43회 꽃피는 체리 1987년 9월 18,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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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3회 꽃피는 체리 1987년 9월 18,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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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43회 꽃피는 체리 1987년 9월 18,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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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3회 꽃피는 체리 제1987년 9월체리


43회 꽃피는 18,1987년
19일9월 18,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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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44회
제 44회안티고네
안티고네 1988
1988 3월 3월
25, 26일 25,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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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5회 상상병 환자 1988년 9월 1, 2,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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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45회 상상병 환자 1988년 9월 1, 2,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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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5회 상상병 환자 1988년 9월 1, 2,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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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45회 상상병 환자 1988년 9월 1, 2,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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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5회 상상병 환자 1988년 9월 1, 2,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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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5회 상상병 환자 1988년 9월 1, 2,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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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5회 상상병 환자 1988년 9월 1, 2,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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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46회
제 46회탑 1989년
탑 1989년
3월 17,3월
18일17,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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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7회 정의의 사람들 1989년 9월 8,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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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47회 정의의 사람들 1989년 9월 8,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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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7회 정의의 사람들 1989년 9월 8,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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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47회 정의의 사람들 1989년 9월 8,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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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7회 정의의 사람들 1989년 9월 8,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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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47회 정의의 사람들 1989년 9월 8,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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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7회 정의의 사람들 1989년 9월 8,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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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47회 정의의 사람들 1989년 9월 8,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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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48회 제
만선48회1990년 3월3월
만선 1990년 16,16,17일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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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50회 메피스토 1991년 9월 6,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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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50회 메피스토 1991년 9월 6,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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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50회 메피스토 1991년 9월 6,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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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50회 메피스토 1991년 9월 6,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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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50회 메피스토 1991년 9월 6,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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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86년 ~ 1991년

제 50회 메피스토 1991년 9월 6,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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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부터 시작된 졸업정원제의 여파로 연극부에 지원하는 인원이 급감하였다. 1986년 ‘처녀 비행’에서는 연극부원 모두가 스텝과
캐스트를 담당해야 할 정도로 힘든 상황이 지속되었다. 5공화국 말기인 80년대 후반, 민주화를 향한 학생운동이 절정에 달했고, 그
영향으로 참여극, 목적극을 지향하느냐, 순수 연극을 고수하느냐의 내부 갈등은 위축된 연극부의 인적 자원을 더욱 고갈시키는 결과
를 가져왔다. 창립 30주년을 한 해 앞둔 1989년에는 가용 인원 10명이 채 안되었으나 정기공연 2회, 워크샵 2회 공연을 소화해내면
서 연극부의 저력을 보여주었고, 드디어 1990년, 학교 운동장에서 야유회와 운동회 형식으로 ‘창립 30주년 기념 홈커밍데이’를 갖고,
‘재학생-졸업생 합동 공연’으로 ‘우리 읍내’를 마리아홀 무대에 올리는 감격을 맛보았다. 하지만 이듬해인 1991년에는 정기공연이 가
을 대공연 1회로 축소되었고...

1986년~1991년, 고난과 영광의 연극부 Part 1.

김양수 (의·34회)
* 1986년 가톨릭의대 의학과 입학
* 1986년 5월 26일 work shop 공연 "뜻대로 생각하세요" (루이기 필란델로 작 / 장기육 연출) 객원배우로
참여, ‘아가치 의원’ 역으로 무대 데뷔
* 1986년 가을 정기 대공연 성의 연극회 정식 입단 ‘아니, 이 생명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브라이언 클라크 작/ 기국서 연출) 피터 커셔우 역/ 조명 보조
* 1987년 봄 공연 ‘작은 사랑의 멜로디’ (미겔라모스/삐달아사 작/ 정홍준 연출) 까를로스 역/ 조명
* 1987년 가을 정기 대공연 ‘꽃피는 체리’ (로버트 볼트 작/ 김병훈 연출) 톰 체리역/ 조명
* 1988년 봄 공연 ‘안티고네’ (장 아누이 작/ 이경욱 연출) 병사 2 역/ 무대감독
* 1988년 가을 정기 대공연 ‘상상병 환자’ (몰리에르 작/ 양정현 연출) 끌레앙뜨 역/ 기획
* 1989년 봄 공연 ‘탑’ (피터 바이스 작) 연출
* 1989년 가을 정기 대공연 ‘정의의 사람들’ (알베르 까뮈 작 / 김영환 연출) 이반 까리아예프 역/ 기획
* 1990년 봄 공연 ‘만선’ (천승세 작/ 김태경 연출) 조명
* 1990년 창립30주년 재학생-졸업생 합동 공연 ‘우리 읍네’ (손튼 와일더 작/ 정종화 연출) 피이터 깁스 역
* 1991년 가을 정기 대공연 ‘메피스토’ (클라우스 만 작/ 송미숙 연출) 한스 요스트힝겔 역/ 조명
* 1993년 졸업과 동시에 성의연극회 동문회원으로 신분 상승 됨.
* 2010년 창립50주년 재학생-졸업생 합동 공연 ‘닥터 체홉의 인생 산책’ 이바니치 역

제가 담당한 역사 편찬 구역은 1986-1991년 기간입니다. 다른 분들이 쓰신 내용과 달


리 제가 올리는 내용은 약간 우울 모드입니다. 그리고 개인적 에피소드는 최대한 자제하
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적인 내용을 과감하게 실었습니다. 글의 구성은 '여는 글(당시
현실 상황) →연도별 연극부 활동→닫는 글(1986-1991년 연극부의 개인적 평가)'의 순서
를 취했습니다. 글의 제목은 " 1986년-1991년, 고난과 영광의 연극부"로 정해 보았습니
다. 이번에 올리는 부분은 첫 번째 여는 글에 해당합니다. 주로 '고난'에 해당하는 내용
이라 어두운 분위기로 가는 점 양해 바랍니다. 읽기에 부담되시더라도 '영광'에 해당하
는 부분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경운동 시절 실험극장이 길 건너에 있었는데 우리가 공연하면 교문 밖까지 관객 줄


이 이어졌고 실험극장은 파리를 날렸지.”
“1984년 ‘보이체크’ 공연 때는 객석 사이 복도에까지 관객이 앉아야 했어.”

아이들이 학교에서 대고구려 제국의 위대한 역사를 배우듯, 우리도 신입생 시절 선배로
부터 연극부의 ‘믿기지 않는 전설’을 들으며 무대에 섰다. 하지만 가용 인원 15명을 절
대로 넘지 않았던 1980년대 후반 연극부의 현실은 다음의 키워드들로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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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 1991년

‘all staff all cast & multitasking’

모든 배우가 직접 무대장치, 조명, 의상, 분장, 음향을 스스로 챙겼다. 객원 배우가 아니


라면 공연 때마다 모든 연극부원은 무조건 두 개 이상 역할을 했다. 연출이 staff meeting
을 하면 staff meeting 참가자와 무대 위 배우의 면면은 거의 같은 경우가 매 공연마다
반복되었다. 상황에 따라 배우, 기획 혹은 무대감독, staff 등 세 가지 역할을 동시에 떠
안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배역 죽이기 & 객원 배우’

선정된 작품에 등장하는 배역은 언제나 연극부원 보다 많았다. 작품이 결정되면 제일 먼


저 배역을 자르고, 그래도 사람이 모자라면 친한 친구를 감언이설로 설득하여 무대에 세
워야 했다.

‘순수와 참여의 갈등’

80년대 후반은 5공화국 말기였다. 민주화를 향한 학생운동은 절정에 달했었고, 그 영향으


로 참여극, 혹은 목적극을 지향하느냐, 순수 연극을 고수하느냐의 내부 갈등은 위축된 연
극부의 인적 자원을 더욱 고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수평의 붕괴, 그리고 개인의 고립’

의학과, 간호학과 각기별 연극부원은 1-2명 정도였다.(물론 부원이 없는 기수도 있었다.)


동아리에서 당시 유행했던 흔한 말 중 하나가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었는데 80년대
후반 연극부원들에게는 동기가 거의 없었다. 이는 동아리 문화의 한축인 수평적 관계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통의 연극부, 가대 특유의 서클 문화 정서로 인해 연
극부내 수평적 관계의 붕괴와 무관하게 수직적 관계는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동기 없이
선배와 후배 사이에서 부대끼며 연극작업을 했던 시절, 결국 개인은 고립되어갔다.

1986년 - 1991년 연극부원 명단


(입학년도 기준, 1986-1991년 현재 재학생 중, 동문 주소록에 등재된 사람)

`80 의 학 과 : 유순집, 김창재


`81 의 학 과 : 이천희, 이헌상, 최황, 황동진
`82 의 학 과 : 김용욱
`83 의 학 과 : 구태형, 장기육
`83 간호학과 : 김혜정, 김희정, 오은숙, 정은숙, 조윤선
`84 간호학과 : 한현진
`85 의 학 과 : 이경욱, 정홍준
`85 간호학과 : 유경임, 이숙희, 홍은영
`86 의 학 과 : 김양수, 박정미, 이진석
`86 간호학과 : 박선미
`87 의 학 과 : 김태경
`87 간호학과 : 유미영, 이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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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의 학 과 : 정명선
`89 의 학 과 : 윤주희, 고석진
`89 간호학과 : 홍은경
`90 의 학 과 : 서상원
`90 간호학과 : 고은화
`91 의 학 과 : 곽태호, 길기철, 이상희
`91 간호학과 : 노은숙, 이경주

1986년-1991년의 명배우
(당시 공연평과 개인적 기억을 토대로)

`86 이진석
1989 봄 공연 ‘탑’ 마술사 역
`85 홍은영 1989 가을 공연 ‘정의의 사람들’ 스테빵 역
1987 가을공연 ‘꽃피는 체리’ 이사벨 체리 역 1991 가을 공연 ‘메피스토’ 브루크너 역

`88 정명선
1989 봄 공연 ‘탑’ 곱추 역
1990 30주년 기념 공연 ‘우리 읍네’ 소움즈 부인역 `89 홍은경
1991 가을공연 ‘메피스토’ 미리암 호로비츠 역 1990 30주년 기념 공연 ‘우리 읍네’ 에밀리 역

깨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

1. 1986년 가을 정기 공연 ‘아니 이 생명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 공연 기간 4일,


공연 횟수 4회(최장 공연 기간)
2. 1990년 30주년 기념공연 ‘우리 읍내’ -공연 기간 3일, 공연 횟수 5회(최고 공연
횟수)
3. 이진석(의·33회)의 최다 배우 출연 기록
워크숍 1회 +정기공연 10회 (1986-1991 모든 정기공연에 Cas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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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 1991년

1986년~1991년, 고난과 영광의 연극부 Part 2.

채진호 선배님의 지령을 받자와 제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 연극부 역사를 정리하려니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선 형식적인 문제에서 개인적인 회상 형식으로 글을 써
볼까, 아니면 정사 편찬(?)을 하는 사관의 입장에서 글을 써볼까 하는 고민이 있었고, 내
용적으로 공연 연보 중심의 기술이 좋을까, 아니면 연극부 시절 벌어졌던 잊지 못할 에
피소드 중심의 이야기를 적는 것이 좋을까 하는 선택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결국 저의 고
민과 궁리의 흔적 은 그대로 결과물에 나타납니다. 한마디로 들쭉날쭉 생각나는 대로의
내용이라는 거지요. 이번에 쓰는 내용은 각 연도별 활동 기술에 앞서 제가 현역으로 있
던 시절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활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86년 -1991년 연극부 활동 내역 개괄

80년대 후반 연극부 활동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강남에서 유지된 경운동 시스템’이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부의 공식 활동인 워크샵과 봄, 가을 정기공연은 물론, 공연
외 동아리 활동 모두가 경운동 시절 확립된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 갔었다. 공연 외 동아
리 활동은 다음과 같은데 거의 모두가 경운동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활동들이다.

1. 공연 후 합평회,
2. 신입생 환영회 및 졸업생 환송회
3. 각종 MT :
- 워크샵 합평회를 겸한 봄 MT,
- 가을 공연 연습 직전의 여름 여행
- 총회 직후의 가을 MT
- 봄 공연 연습 직전의 겨울 여행
4. 까메아드 축제 기간 중 주점 운영
5. 외부 연극 관람
6. 국가고시 응시 선배 응원
7. 외부에서 섭외 들어온 연극 공연 지원, 마리아홀 행사 시 조명, 장치 등 지원

1980년대 후반 연극부의 MT는 언제나 같은 장소와 같은 민박집을 찾아가는 경향이


있었다. 역시 경운동 시절부터의 전통이라고 생각된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봄 MT
는 강촌, 여름 여행은 송지호 해수욕장, 가을 MT 는 새터, 겨울 여행은 치악산으로 정해
져 있었다. 이는 핸드폰이나 호출기 등이 없던 시절, 나중에 찾아오는 후발대나 졸업 선
배들이 헤매지 않고 쉽게 합류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점차 MT 장소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양상으로 바뀌는데, 이는 숙박 문화가 다양화된 영향(콘도나 펜션 등), 졸
업 선배들이 공보의나 군의관으로 근무하는 장소로 찾아가는 경우 비용 절감의 문제, 그
리고 졸업 후 MT를 찾아오는 선배들이 줄어든 점이 이유라고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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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91년 사이 연극부 활동 중 특기할만한 사항
1. 1990년 창립 30주년 기념 재학생-졸업생 합동 공연
2. 1990년 동문 홈커밍 데이
- 30주년 기념 공연 준비 행사의 일환으로 기획 되어 1990년 5월 하순 지금 서울성모병원 자리에 있었던 학교 운동장에서 야유회+운동
회 형식으로 개최되었다.
3.1989년 가을 워크샵 공연
- 개인적인 회상으로 1989년은 연극부에 있어서 ‘기적의 한 해’였다. 진행 팀을 제외한 가용 인원 10명이 안되었던 연극부가 정기공연
2회, 워크샵 2회 공연을 소화해낸 것이다. 1989년 가을 워크샵 공연 이야기는 연도별 활동 내역에서 다시 기술할 예정이다.

1986년
1986년 연극부 활동 내역

임원진 : 회장 : 구태형, 부회장 : 한현진, 총무: 이경욱/이숙희


공연 내역 - 워크샵 1회, 정기공연 2회
(1986년 봄 공연 ‘처녀비행’은 내가 연극부 가입 전 공연이라 기술에서 제외했음)

1986년 워크샵 공연

공 연 일 : 1986년 5월 24일
작 품 : 루이기 피란델로 작 “뜻대로 생각하세요”
연 출 : 장기육
무대감독 : 유경임

워크샵 연출은 본과 1학년에서 맡아왔으나 86년 당시 본1 연극부원이 없어 본과 2학


년 장기육 동문이 연출을 맡음. 그리고 워크샵은 두 팀으로 나누어 작업을 하였으나 인
적 자원의 한계로 한 팀으로 편성. 내가 ‘연극부가 낳은 천재’ 중 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장기육 동문의 독특한 작품 해석과 연출이 기억에 남는다. 비교적 많은 인원이 등장함에
도 적절한 대사 안배가 되어 있으며, 러닝 타임이 길지 않고, 작품 내용이 흥미로우며,
등장인물 간 다양한 관계 설정이 여러 가지 장면을 보여주는 작품인 “뜻대로 생각하세
요”는 워크샵 공연 단골 메뉴가 되어 이후 두 차례 더 리메이크 된다.

1986년 봄 MT 및 워크샵 합평회

일 시 : 1986년 5월 24일-25일
장 소 : 강원도 강촌 MT 민박집

워크샵 공연 직후 치른 86년 봄 MT. 밤새도록 막걸리를 마시면서 공연에 대한 이야기


를 나누었고, 관례대로 ‘워크샵 대장’을 선출했다. 대장에는 예과 1학년 박종갑이 선출되
었다. 연극부 MT의 비공식, 한시 직책인 ‘대장’은 첫날 고학년 선배들의 합의나 전체 투
표로 저학년 중에서 지명, 선출되는데 대장에게는 3대 권리와 3대 의무가 있었다.

# 대장의 3대 의무
1. 음주 시 술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치한다.
2. 음주 시 누구라도 대작을 원하면 언제든지 대작해 주어야 한다.
3. 끝까지 술자리에서 살아남아 뒤처리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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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 1991년

# 대장의 권리
누구든지 술을 마시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선후배 불문하고 술을 권할 수 있다.

밤새도록 술 마시며 기타치고 노래 부르다가 새벽 무렵 강가로 나가 한사람씩 찍어서


강물에 빠뜨리는 장난을 쳤고, 그때까지도 강변에 막걸리 통 들고 나가 강가에 핀 들꽃을
꺾어 막걸리에 띄워 마시는 낭만을 보여주던 배우 임효영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뛰어
난 연기력을 보여 주었던 임효영은 이후 연극부 노선 투쟁의 와중에서 탈퇴한다.)
MT 제 2일은 삼학산 등반을 했었는데 나는 개인 사정으로 일찍 집에 돌아와 등반에 참
여하진 못했다.

1986년 여름 여행

(가을 공연 연습 개시 MT)
일 시 : 1986년 7월 30일-8월 2일
장 소 : 대천 해수욕장

별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없다. 예전 기록을 모아둔 박스에서 당시의 메모를 적은 수


첩을 찾을 수 있었는데 서부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려다가 기차시간을 놓쳐 용산 시외버
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것으로 일정이 변경되었고, 피서지 물가가 비싸다며 서
울에서 먹거리 장을 보겠다는 한현진 부회장님께서 함께 장을 보던 동기들인 정봉수, 임
효영 등과 버스를 타지 못하고 낙오되어 후발대로 도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침 해장술과 낮술을 마셔보았으니, 이는 술로 이어지던 이후 연극부
MT의 서곡이라 할 수 있었고, 여행 마지막 날 아침엔가 정봉수가 급성충수염이 의심되
는 복통을 호소하여 본4 이천희 선배께서 배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나서 ‘정말 맹장염
같다.’고 고민하던 모습이 기억난다.(물론 단순한 배탈 혹은 숙취 증상이었지만)

1986년 가을 정기 대공연
[41회] '아니 이 생명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B. 클라크 작 , 기국서 연출, 1986년 가을
공 연 일 : 1986년 9월 20일-23일(4일간 4회 공연)
최초 연습 시작일 : 1986년 8월 4일/연습 기간 42일
작 품 : 브라이언 클라크 작 “아니, 도대체 이 생명은 누구의 것인가?”
연 출 : 기국서
기 획 : 장기육
무대감독 : 정홍준

86년 가을공연 작품 ‘아니 이 생명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당시에 줄여서 ‘아이누’


라고 불렀다.) 의식이 뚜렷한(식물인간이나 뇌사자와는 전혀 다른) 전신마비 환자가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찾는다는 내용의 작품이었다. 의학적 개입의 당위성과 환자의 인권의
충돌을 다룬 작품이라 수년 전부터 공연 작품 후보군에 꾸준히 올라온 것으로 알고 있
지만 내용 전개가 지루한 측면도 없지 않아 번번이 최종 선택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전
체 대사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주인공 사지마비 환자 ‘켄’이 대본상 처음부터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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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에 누워서 연기를 해야 하는(사지마비 환자니까)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
건이었는데 기국서 연출께서 상상과 회상의 장면에서 과감하게 주인공을 일으켜 돌아다
니게 하는 것으로 간단히 그 문제를 해결했다.(당시 본3이던 김용욱 동문께서 연출에게
이 파격적 제안을 해서 채택되었다는 후일담도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워크샵을 거쳐 처음으로 정기 공연에 데뷔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연


출께서 공연 오프닝을 출연배우 모두가 무대에 올라와 배역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자기
소개를 하는 장면으로 만들었는데 극 후반부 단역으로 잠깐 출연했던 나의 자기소개 멘
트가 연극부 배우 공식 데뷔 대사가 되었다.
“보시다시피 저는 잘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른 배우들을 생각해서 이번 작품에 지나친 출
연을 자제하기로 했습니다.”
(무거운 극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바꿔보려는 신입생 특유의 장난기가 발동했던 오프
닝 멘트였다. 문제는 그 이후 부족한 연극부 인력문제로 연기력이 별로였던 내가 계속
지나친 출연을 했다는 서글픈 사실.)

스텝으로는 조명을 맡았었다. 예전 마리아 홀의 고질적 문제 중 하나이던 조명시설의


부족과 잘못된 위치선정은 언제나 ‘어두운 무대’라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조명 치프이던 예2 이경욱동문이 Ceiling 조명기기의 위치를
바꾸려 시도했다가(철야 작업을 통해 천정의 조명기기를 일단 모두 객석으로 내렸다.)
학교 당국에 적발되어 다음날 다시 조명기기를 원위치 시키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어두운 무대’ 극복을 위한 조명팀의 도전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조명 치프 이경욱 동문의 도전과 좌절-사진 커튼 바로 밑에 보이는
조명기기를 천정 위로 올라가 로프를 이용해서 모두 객석바닥으로 내
렸다. 이경욱 선배의 계획은 사진에 보이는 객석 조명 중 적절한 위치
의 몇 개를 떼어내고 그 구멍을 통해 와이어를 내린 후 와이어에 쇠
파이프를 고정하고 그 쇠파이프에 조명기기를 매달아서 완벽한 위치
의 Ceiling 조명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쇠파이프와 와이어는 때마침
강남성모병원에서 엘리베이터를 교체하면서 나온 폐자재를 마리아홀
뒤에 쌓아 놓았는데 그 중에서 재활용할 예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
면 황당하고 무모한, 안전사고 저지르기 딱 알맞은 계획이었다. 학교
측에 사전 발각된 것이 다행이라는.... 다음날 조명기기를 그대로 원위
치 시켰는데 내릴 때는 로프로 쉽게 내렸지만 올릴 때는 무대 뒤편
사다리를 통해 천정으로 하나 하나 조명기기를 다시 옮기는 대역사
(大役事??)로 녹초가 되었다.

300
1986년 ~ 1991년

86년 가을 공연은 첫 정기공연이라 그런지 단편적인 기억들이 많이 남아있다. 기국서


연출의 특이한 언행과 술버릇, 한현진 누님께서 수녀복을 손수 만들고 나서 어린애처럼
기뻐하던 모습, 동기 중 유난히 진지하게 연습에 임했고, 그 결과 1학년 캐스트 중 가장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준 임효영, 주제 음악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심야 라디오 프
로에서 우연히 녹음한 경음악이 연출의 OK 사인을 받아 의기양양하던 이숙희 누님, 첫
날 공연 두 시간 전에 무대장치가 너무 썰렁하다면서 뒤편에 베니어판으로 상징 배경을
만들어 올렸던 장치팀의 기적.(결국 첫 공연은 페인트도 마르지 않은 무대장치에서 치렀
다.) 쫑파티 때 식당을 가득 매운 동문 선배들에게 기가 질렸고, 그분들에게 무조건 술
한 잔씩 따라 올리면서 인사 올리라는 재학생 선배들의 지령을 받아 종이컵 들고 얼굴
도 낯선 선배님들과 술잔 주고받기 대장정(?!)에 녹아났던 기억들....... .

번외편 : 86-91 연극부 생활사- 하나. 밥먹기

공연 연습은 6시 전후로 시작했다. 저녁 10시 넘어 까지 연습을 하자면 끼니 해결은


중요한 문제였다. 워크숍 때는 부원들이 매일 조금씩 돈을 걷어 터미널 맞은편 경남 아
파트 상가 지하 분식집에서 순대와 떡볶이, 튀김들을 사서 저녁을 대신하곤 했다. 간혹
선배들이 찾아와서 한 턱 내는 운 좋은 날엔 중국 음식을 시켜먹기도 했다. 비용 문제도
만만치 않았고, 당시만 해도 학교 주변에서 값싸고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먹거리 찾기
가 힘들어 질리도록 먹으면서도 순대와 떡볶이, 튀김은 워크숍 저녁식사 메뉴로서 끈질
긴 생명력을 유지했다.
정기공연 때는 직접 취사를 했다. 연극부 서클룸에는 언제나 코펠/휴대용 가스레인지, 식
기 등이 준비되어 있었고 부회장이 식사 당번과 메뉴를 짜서 부원들에게 쌀과 부식거리
를 집에서 가져오라고 시키곤 했다. 김치 등 밑반찬까지 식당 주방 냉장고 한 켠에 보관
하면서 밥은 학교 식당 구석에서 만들어 함께 모여서 먹었다. 연습이 6시에 시작되므로
취사 당번은 그보다 훨씬 일찍 밥 짓기를 시작해야 했는데 이는 수업시간과 맞물려 여
의치 않은 일이었다. 밥 짓고 설거지 하는 일이 질색인 나는(지금도 나는 아내의 집안일
을 별로 도와주지 않는 간 큰 가장이다) 연극 연습보다 취사 당번 하는 일이 더 힘들게
느껴지곤 했다. 학교에서 화재 위험을 이유로 가스레인지 피우고 취사하는 일을 금지하
기 시작하면서, 또 거기에 연극부의 인적 자원 부족까지 심화되면서 연극부 저녁 취사는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 이후 끼니 해결은 ‘각자 알아서’로 바뀌었고(1989년 이전
에 저녁 취사는 없어진 것으로 기억한다.), 혹시 저녁을 먹지 못한 부원들을 위해 기획
이 주머니 사정에 따라 때때로 간식거리를 마리아홀 로비에 사놓으면 부원들은 연습 중
쉬는 시간에 고픈 배를 채우곤 했다.

1986년 가을 MT(정기 총회)

일 시 : 1986년 10월 하순의 주말 1박 2일


장 소 : 경기도 새터 유원지 오동나무 집

연극부 가을 MT는 정기 총회에서 차기 회장단을 선출한 후 이,취임식 행사로 치르던


행사였다. 새터 유원지 오동나무 집은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기억으로는 내가 본과 3

301
학년 때까지 연극부 가을 MT 장소로 이용되었던 것 같다. 그밖에 연극부 지정 여행지
였던 치악산, 송지호, 강촌 등은 그보다 훨씬 전에 연극부에서 외면을 받던 것과 대조적
이었다.

86년 새터 MT에서 나는 연극부 앨범에 ‘굴욕씬’을 하나 남겼다. 새터 MT는 둘째


날 아침 보트를 빌려 타고 강 건너편 찻집으로 모여 커피를 마시는 것이 주요 이벤트였
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노 젓는 보트를 탄 나는 보트 모는 요령을 전혀 몰라 배를 타고 10
여 분간 선착장에서 오도 가도 못하면서 헤매야 했다.(나중에 노 젓는 보트는 뱃머리를
등 뒤에 두고 뒤를 보면서 앞으로 나가는 것이 기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극부
원 모두를 유쾌하게 웃긴 나의 ‘보트 굴욕씬’은 동영상은 아니지만 스틸 사진으로 서클
룸에 꽂혀 있는 연극부 앨범에 지금도 남아 있다.
보트 타고 커피 마시러 가는 행사는 곧잘 노로 물을 튀기며 다른 사람에게 물벼락을 안
기는 장난으로 이어졌다. 특히 2인승 보트에 노잡이로 타고서 여자 부원들에게 간택(?)
받지 못하여 남자만 두 명이 타게 되는 보트들이 이런 장난을 즐겨했는데, 해마다 반복
되는 물장난에 대한 대비책으로 아예 배에 오를 때 코펠을 들고 타는 부원들마저 있을
정도였다.(코펠은 머리에 쓰면 방어무기, 바가지 대용으로 물을 뿌리면 공격무기가 된
다.)

1986년 겨울 여행

(봄 공연 연습 개시 MT)
일 시 : 1986년 12월 혹은 1987년 1월 중 3박 4일
장 소 : 치악산

86년 겨울 여행은 졸업반 선배들과 함께 한 마지막 여행이기도 했다. 86년 이전에도 치


악산 겨울여행은 연극부원들에게 많은 추억거리를 남겼던 것 같다. 86년도 치악산 겨울
여행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때 선배들은 치악산을 치 떨리고 악 받치는 산이라고 부르곤
했다.) ‘사건’중심으로 86년 겨울 여행을 정리해 보자면,

1. 예1 이진석의 ‘보리밟기’와 예1 김양수의 ‘계란죽 만들기’


모두 저녁 술자리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당시 본4 선배들의 주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
했다. 그런 선배들을 모시고 1학년들이 대작을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결국 나
와 이진석 자정 무렵 모두 ‘필름이 끊기는 상태’가 되었는데 그 결과 약간 소란스러워진
(?) 이진석은 선배들과 민박집 근처 보리밭으로 옮겨져 눈이 얼어붙은 보리밭을 자근자
근 온몸으로 밟아야 했다. 나는 계속 방안을 지켰지만 구토에 시달렸는데 술안주로 귤을
계속 먹었던 내가 코펠에 쏟아 놓은 토사물을 보고 모 선배가 ‘이거 꼭 계란죽이네.’ 라
고 농담을 하여 ‘계란죽’은 여행 내내 나의 별명이 되었다.

2. 간4 백금자 선배의 ‘지갑 사건’


첫날 저녁으로 기억 되는데 저녁을 먹고 모두 방안에서 이런 저런 잡담을 하던 중 화장
실에 간 백금자 선배로부터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사고라도 났을까 화들짝 놀라서

302
1986년 ~ 1991년

화장실로 몰려가보니 비명의 이유는 재래식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던 백금자 선배께서


실수로 지갑을 *통 안으로 떨어뜨린 때문이었다. 현금과 신분증 등 중요한 물건들이 들
어있는 지갑은 수북히 쌓인 배설물 더미 위에서 볼 수 있었는데 당사자인 백금자 선배
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결국 배설물 보기를 돌같이 여기시
던 간4 동기 김희정 선배께서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대형 나무젓가락으로 지갑을 구출
(!)하고 문제의 지갑을 눈 위에 슥슥 문지른 후 내용물만 꺼내서 백금자 선배에게 인계
하여 상황은 종결 되었다. 김희정 선배의 내공은 이어지는 치악산 등정에서 절정을 이룬
다.

3. 본4들의 교란 작전과 살벌 천진했던 치악산 등반.


여행 세째날은 치악산 등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전날 저녁 후 술자리에서 언제나 부
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는(쉽게 말해 자상한 선배지만 화나면 굉장히
무서워지는) 본4 유순집 선배께서 나와 이진석이 저질렀던 ‘계란죽’과 ‘보리밟기’를 언급
했다. 1학년들이 어떻게 하늘같은 선배 앞에서 이따위 추태를 부릴 수 있느냐며 호통을
쳤고, 이어 오늘밤 술자리에서 1학년들은 선배들이 모두 잠들 때까지 한명도 열외 없이
술자리를 지키라는 엄명을 내렸다. 나는 바짝 긴장을 했고, 긴장하고 술을 마신 때문일
까, 마셔도 마셔도 흐트러짐 없던 선배들은 그날따라 일찌감치 ‘힘들어 못 마시겠다’며
술잔을 놓고 잠이 들었다. 아무튼 마지막 선배(기억으로는 본2 구태형, 본3 김용욱 선배
가 끝까지 남았던 것 같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나도 잠이 들었는데 거의 새벽 6시
가 다 된 시간이었다.
8시경 선배들의 재촉으로 숙취 속에서 잠을 깨었다. 치악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와야
하니까 서둘러야 한단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본4 선배들이 일찍 잠이 든 것은 술이
과해서가 아니라 바로 치악산 등정을 위해 체력을 비축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내가 숙취에서 벗어난 때는 치악산 정상까지 3/4정도 올라갔을 무렵이었다. 올라가면서
먹으라고 나누어준 음료수와 간식거리는 초입부터 바닥이 났고, 숙취와 등산에 따른 수
분보충은 눈을 집어먹는 것으로 해결했다. 아무튼 선배들과 동기들과 밀어주고 끌어주면
서 가까스로 정상에 올랐다. 그런데 앞서간 사람들이 정상에 오른 후 문제가 생겼다. 정
상에서 바라보니 멀리서 눈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는데, 15명 전후이던 연극부원 중
상당수가 뒤쳐져서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누군가 내려가서
날씨가 험하니까 그냥 하산하라고 전하던가, 뒤쳐진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함께 하산하든
지 해야 했다. 결국 그냥 내려가기에 너무 많이들 올라온지라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마
지막으로 도착한 사람은 김희정 선배였고 그때는 눈구름이 치악산 정상을 덮을 무렵이
었다.(유순집 선배의 콧수염에 고드름이 맺혔다....) 마지막에 올라온 김희정 선배의 신발
을 보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등산화가 아닌 평범한 여성구두였기 때문이다.
하산은 좋게 말해 ‘천진난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광란의 하산’이었다. 눈보라 속에
조난당할지도 모른다던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얼어붙은 등산로를 미끄럼타면서 내
려왔기 때문이다.(하산로와 등산로가 달랐다.) 이 또한 해마다 반복되는 겨울여행 행사였
는데 선배들은 ‘치악산 돌 엉덩이로 깨기’라고 부르곤 했다. 어쩌면 추락사고가 날 수도

303
있는 국립공원 등산로에서 괴성을 지르며 눈썰매 타듯 하산하던 우리들의 모습. 무모하
고 대책 없을 지라도 그것은 젊음의 특권이었다.

1987년
1987년 연극부 활동 내역

임 원 진 : 회장: 정홍준, 부회장: 유경임, 총무: 이진석/박선미


활동내역 : 워크샵 1회, 정기공연 2회, MT 4회

1987년 봄 정기 공연

[42회] '작은 사랑의 멜로디' - 삐달 아사, 마켈 라모르 작, 정흥준 연출, 1987년 봄


일 시 : 1987년 3월 20일-21일(2일간 3회 공연)
작 품 : 삐달 아사/마켈 라모르 공저 “작은 사랑의 멜로디”
연 출 : 정홍준
기 획 : 이경욱
무대감독 : 임효영

연극부 공연 작품 선정은 학생 연출의 봄 공연의 경우 가벼운 내용의 희극을, 외부 연출


의 가을 공연은 무거운 내용의 비극이나 대작 드라마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87년
봄 공연은 이런 불문율이 지켜지던 마지막 봄 공연이었다. ‘작은 사랑의 멜로디’ (‘아이
누’에 이어 제목이 길어 역시 ‘작사메’란 약칭을 사용했다.)는 전형적인 코미디물이었다.
연출의 정홍준 동문은 디테일한 간섭보다는 반복적으로 런을 뛰어서 작품의 흐름을 배
우들이 이해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그 이후 선배들의 집요한 touch가 특
징이던 연극부의 연습방식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러브씬을 연기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유연하지 못하고 뻣뻣하기만한


나 의 대사와 acting은 선배들의 집중 타겟이 되곤 했다. 상대역이던 1년 선배 이숙희 동
문에게서 ‘남자 녀석이 왜 이렇게 리드를 못하냐?’는 구박을 밥 먹듯 얻어 들었는데 어
느 날 연습에서 이숙희 선배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품에 안겼다. 나는 ‘드디어 내가
연기에 눈을 뜨는 구나’라고 기뻐했지만 알고 보니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연습시작 후
처음으로 배경음악이 깔렸는데(‘캐넌’이었다.) 숙희 선배는 상대역은 나를 보고 감정을
잡는 것을 포기하고 배경음악으로 방향전환을 한 것이었다.

희극을 무대에 올리면서 대본에 없는 수없이 많은 웃음 포인트를 만들어냈다. 배우,


연출뿐 아니라 무대 아래에서 지켜보던 모든 연극부원들이 ‘여기선 이렇게 하면 어떨
까?’하는 아이디어를 내서 관객을 웃기기 위한 고민을 했다. 심오한 메시지 없는 작품이
었지만 고민들이 모이고 모여 관객에게 웃음을 주자는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본
다.

연극부에게 토요일 낮 공연은 징크스가 잔뜩 낀 마의 공연이었다. 하지만 87년 봄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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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 1991년

연 때는 세 번 공연 중 토요일 낮 공연이 가장 잘한 공연으로 기억된다. 배우가 느끼기


에도, 무대 아래 스텝들이 보기에도 연습하며 준비했던 것들의 100% 이상을 보여주었
다. 문제는 그 덕분에 가장 중요한 마지막 공연을 망쳐버렸다는 사실....... .

86년 가을 공연에 이어 조명을 맡았다. ‘밝은 무대’를 위한 이경욱 선배의 도전은 계


속 이어졌는데 공사장에서 사용하는 ‘아시바’를 좌우 객석에 설치하여 조명용 탑으로 사
용하는 방안을 생각해 냈다. 100%는 아니었지만 만족할만한 효과가 있어 아시바 설치는
이후 정기 공연 때마다 조명팀의 중요한 작업이 되었다.

아시바. 당시 설치 사진이 없어 인터넷 검색에서 퍼온 사진이다. 아시바를 좌우 객석에


2층 높이로 쌓고 그위에 작업용 합판을 얹은 후 그 위에 조명 스텐드를 설치했다. 아시
바를 학교에서 빌려서 설치하고, 그 위에 조명기기를 올리는 일은 고되고 위험한 작업
이었다. 조명자체의 효과도 괜찮았지만, 마리아홀 객석 분위기를 전문 연극공연장처럼
보이게 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분명히 있었다고 여겨진다. 학교 공연 서클 중 아시바를
설치하여 조명을 비추는 팀은 연극부 조명팀 뿐이었다.

번외편 : 86-91 연극부 생활사 둘 : 대본 쓰기

지금처럼 컴퓨터와 문서작성 프로그램으로 간단히 제본 출판을 할 수 없던 시절, 공연


용 대본은 갱지에 마스터 인쇄로 만들었다. 마스터 인쇄에 사용되는 원본은 일일이 손을
필사(筆寫)했다. 작품이 결정되면 원본을 복사하여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가진 후 각자
맡은 부분을 손으로 베껴 썼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드는 작업이었으며 악필인 연극부
원들이 적은 부분은 알아보기 힘들어 공연 연습 내내 스트레스를 주곤 했다. 자기가 맡
은 부분은 다 옮겨 적으면 간단한 인사말이나 격려문구등 낙서를 남기는 경우도 있었다.

서클룸에는 공동 낙서장 격인 일지가 있어서 부원들은 일지를 통해 서로의 글씨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공연대본을 보면 어느 부분을 누가 옮겨 적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악필은 고생해서 대본 쓰기에 힘을 보태고도 핀잔을 들어야 했
다.(나처럼)

이번 연극부 역사 정리 작업을 하면서 창고에서 잠자던 예전 대본들을 다시 꺼내 보


았는데 아내도, 나도 20년이 지났음에도 글씨만 봐도 누가 적었는지 금방 알 수 있어 반
갑고도 신기했다. 컴퓨터의 보급으로 궁색한 마스터 인쇄 대본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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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나에겐 부원들의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는 예전의 대본들에 더욱 애틋한 애착이 간다.

1987년 워크샵 공연
공 연 일 : 1987년 6월 4일
제 1 작품: 이반 작, F선상의 아리아
연 출 : 이경욱
무대감독 : 이진석

제 2 작품: 페츄니아를 짓밟은 거인


연 출 : 홍은영
무대감독 : 정봉수

87년 워크숍에서는 두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그 이후에는 한 팀을 꾸리기도 부족한


인원으로 인해, 1990년대 후반부 연극부원 가입이 급증하던 무렵에는 워크숍 공연 자체
가 폐지되어 두 작품을 올릴 수 있었던 워크숍은 87년이 마지막이었다.

87년 워크샵에서 특이한 점은 ‘F선상의 아리아’에서 배역보다 배우가 한 명 넘쳐서


응급으로 여자 배역을 하나 만들어 캐스팅을 했었고, ‘페츄니아를 짓밟은 거인’은 오
히려 남자 배우 한 명이 모자라는 상황이 발생하여 개인적인 물밑 작업으로 86워크숍
대장 출신인 예과 2학년 박종갑을 배우로 섭외했다. 그 결과 박종갑은 2년 연속 워크숍
무대를 밟는 워크숍 공연 전문 배우가 되었다.

1987년 봄 MT 및 워크샵 합평회

일 시 : 1987년 6월 공연날 이후 1박 2일
장 소 : 강원도 강촌

1987년 여름 여행

(가을 공연 연습 개시 MT)
일 시 : 1987년 8월 초순
장 소 : 강원도 송지호 해수욕장

1987년 가을 정기 대공연

[43회] '꽃피는 체리' - 로버트 볼트 작 , 김병훈 연출, 1987년 가을


공 연 일 : 1987년 9월 18일-19일(2일간 3회 공연)
최초 연습 시작일 : 1987년 8월 10일/연습기간 40일
작 품 : 로버트 볼트 작 “꽃피는 체리”
연 출 : 김영훈
기 획 : 이경욱
무대감독 : 정홍준
87년 봄 공연에서 연기에 두각을 나타낸 배우는 예2 임효영, 정봉수였다. 이중 임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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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 1991년

은 학생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공연 직후 연극부를 탈퇴한다. 정봉수 역시 캐스트 참여를


고사하면서 장치 스텝에 전념한다. 주인공 ‘짐 체리’역의 캐스팅이 관건이었는데, 이때
연극부 역사상 최다 출연 배우 경력을 쌓게 되는 예과 2학년 이진석 동문이 짐 체리 역
에 캐스팅 되었다. 대본상 덩치가 매우 큰 짐 체리를 표현하기 위해 마른 체격의 이진석
은 무더운 여름임에도 의상 안에 헌 옷가지 등을 쑤셔 넣어 몸집을 부풀려야 했다. 짐
체리 부부(이진석과 간3 홍은영 선배)의 열연이 기억에 남는 공연이었다.

번외편 : 86-91 연극부 생활사 셋 : 작품과 연출 결정

작품 결정 과정은 공연 연습 시작 전 서클룸에 공고를 내어 후보 작품을 받고, 작품


을 읽어본 후 토의를 거쳐 결정했다. 민주적 다수결이 결정 원칙이었지만 간혹 섭외된
외부 연출, 혹은 연극부장급 선배 학번이 강력하게 추천하는 작품으로 정해지기도 했다.
87년 가을공연 개인 노트에 작품결정 과정이 적혀 있어 내용을 정리하여 소개한다.

1987년 7월 10일 작품 결정 첫모임

참석자 : 정홍준, 이경욱, 유경임, 홍은영, 이진석, 정봉수, 박선미, 박정미, 김양수, 유미영(진
행팀 김용욱, 구태형, 장기육)

후보작 총 21편

1. 정의의 사람들(A.까뮈) 2. 틈입자(모리스 메테를 뱅크) 3. 위선자 따르뛰프(몰리에르)


4. 유리동물원(T.윌리암스) 5. 쥐라기의 사람들(이강백) 6. 봄날(이강백) 7. 까리귤라(A.
까뮈) 8. 오해(A.까뮈) 9. 찰리 브라운 10. 여왕과 반역자(유고 베터) 11. 대머리 여가수
(유진 이오네스꼬) 12. 분신(F.뒤렌마트) 13. 고래(임희재)14.병사와 수녀(찰스 쑈) 15.
지금 부재중(사이먼 그레이) 16. 봄(이창현) 17. 나비야 저 청산에(이하륜) 18.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19. 구토(싸르트르) 20.꽃 피는 체리(로버트 볼트) 21. 세일즈
맨의 죽음(아서 밀러)

1차 선정 결과 남은 작품
1. 정의의 사람들 2. 유리동물원 3. 오해 4. 여왕과 반역자 5. 분신 6. 나비야 저 청
산에 7. 꽃피는 체리

2차 선정 - 연출에게 제시하여 한 작품으로 결정하기로 함.

1. 정의의 사람들 2. 유리동물원 3. 분신 4. 꽃피는 체리


거수투표 결과 위의 작품 중 꽃피는 체리가 4명의 지지를 받아 연극부에서 연출에게 추
천하는 1순위 작품이 되었다.(기록에 의하면 압도적 지지를 받는 작품이 없었던 것 같다.)

외부 연출은 89-91년 당시 지도교수를 역임하셨던 윤여웅 교수께서 극단 맥토를 운영


하시는 등 연극계에 발이 넓으셨기 때문에 지도교수의 추천을 받거나, 이전 외부 연출에
게서 소개를 받아 섭외했었다. 87년 가을 공연의 외부 연출 결정 시기는 7월 28일-8월 2
일 사이로 기록되어 있다. 대게 연극부장과 부원 몇 명이 함께 연출을 찾아가 첫 만남을

307
가졌지만 87년의 경우에는 기말고사 기간이라 정홍준 연극부장 혼자서 연출을 만났다.

1987년 가을 MT(정기 총회)

일 시 : 1987년 11월 14일 -15일


장 소 : 경기도 새터 유원지 오동나무 집

1987년 겨울 여행

(봄 공연 연습 개시 MT)
일 시 : 1988년 1월 26일-27일
장 소 : 남이섬

1988년
1988년 연극부 활동 내역

임 원 진 : 회장: 이경욱, 부회장: 박선미, 총무: 김태경/유미영


활동내역 : 워크샵 1회, 정기공연 2회, MT 4회

1988년 봄 정기 공연

[44회] '안티고네' - 장 아누이 작 , 이경욱 연출, 1988년 봄


일 시 : 1988년 3월 25일-26일(2일간 3회 공연)
최초 연습 시작일 : 1988년 2월 1일/연습기간 52일
작 품 : 장 아누이 작 “안티고네”
연 출 : 이경욱
기 획 : 정홍준
무대감독 : 김양수

연극부 통산 44회 공연인 ‘안티고네’는 처음으로 기존 공연 작품을 재공연한 경우였


다.(첫공연은 1975년 14회) 쉽지 않은 작품인데다가 재공연에 대한 부담감(75년 연출은
역대 외부 연출 중 이름이 높던 이승규 연출이었다.)으로 내부적인 반발이 만만찮았지만
부장과 연출을 맡은 이경욱 선배의 의지로 강행한 공연이다. ‘크레온’ 역의 정봉수의 연
기력이 절정에 달했던 작품이다.

1988년 워크샵 공연

일 시 : 1988년 5월 26일
작 품 : 따라지 극작가
연 출 : 이진석
무대감독 : 김태경

308
1986년 ~ 1991년

1988년 봄 MT 및 합평회

일 시 : 1988년 5월 28일-30일
장 소 : 강원도 강촌

1988년 여름 여행

(가을 공연 연습 개시 MT)
일 시 : 1988년 7월 하순 3박 4일
장 소 : 강원도 송지호 해수욕장

당시 군복무 중이던 이헌상 선배를 만나서 물심양면 많은 도움을 받았던 여행이다. 장


마철이었는데 군복에 군용 우의를 입고 우산 없이 철모만 쓰고 비를 맞으며 민박집을
찾아왔던 이헌상 선배의 모습이 영화 속 주인공 같아 보였던 기억이 난다.

1988년 가을 정기 대공연

네 번째 뮤지컬
[45회] '상상병 환자' - 몰리에르 작, 양정현 연출, 1988년 가을
일 시 : 1988년 9월 1일-3일 (3일간 4회 공연) 연출 : 양정현
최초 연습 시작일 : 1988년 7월 25일/총 연습일 37일 기획 : 김양수
작 품 : 몰리에르 작 상상병 환자 무대감독 : 이진석

88년 가을 공연은 86-91 기간 중 유일무이한 세미뮤지컬 공연이었다. 서울예전 교수로


재직 중이던 양정현 선생님을 연출로 섭외하여 그간 대학로 출신 젊은 연출가들이 주로
맡았던 외부연출 패턴에 변화를 주기도 했다. 기획을 맡았던 나는 중학교-고등학교 동창
으로 음악활동을 하던 인하공전 재학생 신병준, 김동민 두 친구를 섭외하여 반주자겸 음
악감독을 부탁했다. 드럼과 키보드를 이용한 코믹한 음향효과, 극중 주제가와 막간 음악
을 순수 자작곡으로 올리는 등 참신한 시도가 많았던 무대였다.

309
1988년 가을 MT(정기 총회)

일 시 : 미상
장 소 : 미상

1988년 겨울 여행

(봄 공연 연습 개시 MT)
일 시 : 1989년 1월 중 3박 4일
장 소 : 제주도

제주도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던 최황 선배를 찾아간 여행이었다. 적은 비용으로 제


주도 여행을 하는 방법을 생각해낸 사람은 회장 이진석이었다. 이진석은 탁월한 기획력
을 발휘하여 3박 4일 내내 지도와 버스라는 두 가지 도구만으로 제주도 구석구석을 연
극부원에게 구경시키는 데 성공했다. 결국 돌아오는 배를 탈 돈마저 떨어졌는데, 막판
최황 선배의 경제적 파산을 각오한 승선 운임 보조에 힘입어 연극부원 전원은 제주도에
서 고립되는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고 봄 공연 준비에 임할 수 있었다.

1989년

1989년 활동 내역

임 원 진 : 회장: 이진석, 부회장: 유미영, 총무: 정명선


활동내역 : 워크샵 2회, 정기공연 2회, MT 4회

1989년 봄 정기 공연

[46회] '탑' - 피터 바이스 작 , 김양수 연출, 1989년 봄


일 시 : 1989년 3월 17일-18일(2일간 3회 공연)
최초 연습 시작일 : 1989년 2월 8일/총 연습기간 37일
작 품 : 페터 바이스 작“탑”
연 출 : 김양수
기 획 : 이진석
무대감독 : 김태경→유미영

89년 봄 공연은 연극부 최대의 위기가 스쳐지나간 공연이기도 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사회 문화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연극부에서도 연극작업에서 용인되는 연출의 우월적
지위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당시 연기력에 있어서만큼은 상당한
평가를 받던 86학번 정봉수는 연극부 동아리 생활에는 적극적으로 어울리지 못하는 모
습을 보여 왔는데, 그는 연출의 위상 변화라는 움직임을 명분으로 당시 연출을 맡았던
나와 배우 훈련이나 작품 해석 등 공연 연습 진행과정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연극부 안팎에서 참여예술과 순수예술을 둘러싼 이념적 균열은 연극부를 떠나는 사람들
의 이유 중 하나가 되어 왔었다.(84학번 이환, 86학번 임효영이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310
1986년 ~ 1991년

하지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속담과 달리 정봉수의 행동은 자신이 의도한 대로


봄 공연 혹은 연극부 전체를 이끌어 나가겠다는 공격적인 측면이 강했으며, 그러한 정봉
수의 태도가 그간 이어져오던 연극부 고유의 색채와 어우러지기 힘들다는 판단을 했던
나의 반감 또한 매우 컸다.

주축 학번 연극부원 사이 갈등은 당연히 공연연습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상황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후배들은 양비론적 자세를 견지했으며, 이는 공연 중단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사태를 수습한 주역은 회장인 이진석이었다. 그는 누가 옳으냐의 관점이 아니라, 누가


동아리라는 측면에서 더 합리적으로 행동했느냐를 생각했던 것 같다. 이진석의 강경한
태도는 정봉수의 탈퇴로 이어졌고, 이경욱 선배의 측면지원까지 더해져 흔들리던 연극부
원들도 다시 분위기를 쇄신하여 공연 연습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이진석과 이
경욱 선배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최소한 89년 봄 공연은 취소되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연극부는 참여예술파와 순수예술파로 분열되었을지도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89년 봄공연은 무사히 끝났다. 연극부를 탈퇴한 정봉수는 학생회 멤버


들을 주축으로 ‘판’이라는 연극 동아리를 급조하여 자신의 해석으로 ‘탑’을 재구성, 학생
회가 주최한 신입생 환영행사에 공연을 올린다. 급조된 연극 동아리 ‘판’은 89년을 넘기
지 못하고 유명무실해졌다. 그리고 정봉수는 몇몇 공연 동아리에 개인적으로 연극 지원

311
활동을 편 것으로 알고 있다.
내 개인적으로 ‘연극부 기적의 해’로 부르는 1989년은 이렇게 태풍과 홍역을 치르면서
시작 되었다.

1989년 워크샵 공연

일 시 : 1989년 5월
작 품 : 안톤 체홉 작 ‘청혼’
연 출 : 김태경
무대감독 : 정명선

신입 연극부원 윤주희, 홍은경 그리고 객원으로 참여한 송승헌 세 명의 배우로 치른


워크샵 공연이었다. 배우들의 연기가 지지부진하여 자극책으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스피드 런’을 뛰었는데 세 명의 신입생은 결국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대성통곡을 터뜨
렸다. 연습 후 이들을 달래기 위해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너무 과음을 하여 집으로 가지
도 못하고 다시 마리아홀로 돌아와 객석의 커텐을 떼어내어 몸에 둘둘 감고 자던 기억
이 난다. 운이 좋으면 무대 장치하다 남은 스티로폴을 깔고 자는 경우도 있었고....... .

번외편 : 86-91 연극부 생활사 넷 : 스텝, 그 ‘거룩한’ 계보.

70년대-80년대 초반, 학년 당 연극부원이 10명 가까이 되던 시절에는 배우가 아닌 전문


스텝으로만 연극부 시절을 보낸 동문들도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예를 들어 학구파의
상징이던 81학번 황동진 선배는 장치 전문 스텝으로 후배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모
든 연극부원이 스텝과 배우를 동시에 맡아야 했던 80년대 후반부터는 전문 스텝의 개념
이 점차 희미해졌다. 86년-91년은 연극부원들 사이 면면히 이어져 오던 전문 스텝 계보가
종말을 고하던 시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도에서 각 스텝의 계보
를 정리해 본다.

무대장치 : 황동진-장기육-정홍준-이진석-윤주희
조 명 : 김창재-이헌상(?)-구태형-이경욱-김양수-김태경
분 장 : 김혜정-한현진-유경임-유미영-정명선(?)-고은화(?)
의 상 : 김희정-홍은영-박선미-이미경-홍은경
효 과 : 이숙희 -??

공연이 없는 휴식기에는 각 스텝별로 식사를 하거나, 영화를 보러가는 등 단합 대회


형식의 모임을 갖기도 했다. 배역은 공연 때마다 바뀌지만, 한번 맡은 스텝은 바뀌는 일
이 거의 없어 같은 스텝을 맡은 선후배간에 동질감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
다. 가장 일을 요란하게 하는 장치 팀과 조명 팀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서로를 놀리며 견
제하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연극 작업 중 스텝간 조율 미스로 사
소한 충돌이 일어나는 적도 없지 않았는데, 역시 장치와 조명의 마찰이 가장 잦았다.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나는 조명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가져왔다. 지금도 어느 극

312
1986년 ~ 1991년

장이든 처음 들어가면 무대보다 조명시절을 먼저 보는 버릇이 있다. 암흑 속에서 조명이


서서히 들어올 때, 이제 공연이 시작됨을 느끼며 맛보는 야릇한 흥분은 내가 배우일 때
나 관객일 때나 변함없는 공통적인 감정이다.

86년-91년 사이 연극부원의 수가 좀 더 많았더라면, 나는 전문 조명 스텝으로 연극부


생활을 보냈을 것 같다. 조명실에 앉아 Dimmer의 레버를 서서히 올릴 때, 나의 손놀림
에 따라 시나브로 밝아져 오는 무대를 바라보며 나는 천지를 창조하는 조물주의 심정과
맞닿을지도 모를 오만한 쾌감을 맛보곤 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아 나는 진행 팀
학년이 되어 배우에서 물러난 1990년 봄 공연 때까지 워크샵 공연을 제외하고 정기공연
에서 내가 설치하고 Cue sheet를 짠 조명 key를 단 한 번도 잡아볼 수 없었다. 사람이
부족한 연극부에서 나는 공연 때마다 casting 되었기 때문이다. 도리 없이 조명 key는 워
크샵을 거쳐 갔거나 연극부와 친분이 있던 학생들을 섭외해야 했다. 땀 흘리며, 위험 무
릅쓰며(전기와 고공 작업을 포함한 조명은 실제로 위험한 작업이기도 하다.) 설치한 조
명 Key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넘기는 일을 반복했던 일은 연극작업에 얽힌 서글
픈 기억중 하나이다.

1989년 봄 MT 및 워크샵 합평회


일 시 : 미상
장 소 : 미상

1989년 여름 여행
(가을 공연 연습 개시 MT)
일 시: 미상
장 소: 미상

1989년 가을 정기 대공연
[47회] '정의의 사람들' - 알베르 까뮈 작 , 김영환 연출, 1989년 가을
일 시 : 1989년 9월 8일-9일(2일간 3회 공연)
작 품 : 알베르 까뮈 작 ‘정의의 사람들’
연 출 : 김영환
기 획 : 김양수
무대감독 : 김태경

313
50주년 공연 연습 도중, 89년 가을 공연 연출을 맡으셨던 김영환 선생님께서 2010년
초 고인이 되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김영환 연출님을 깊은 눈매와
과묵한 성격으로 기억한다. 차분하고 간결한 어조로 감정과 극 흐름을 잡아주던 연습 때
의 모습이 아직도 아련히 떠오르곤 한다. 짧지만 깊고 강렬할 수밖에 없는 무대를 통한
인연. 늦게나마 이 지면을 빌어 그분의 명복을 빌어본다.

89년 가을 공연은 개인적으로 한계점을 느꼈던 공연이기도 하다. 마지막 무대라고 생


각하며 기획과 주연을 동시에 맡게 되었지만, 두 가지 중 하나도 제대로 소화해 낼 역량
이 없었던 나로서는 엄청나게 저질러 놓은 나의 사고(?) 뒷수습에 정신이 없었다. ‘정의
의 사람들’은 몇년 전부터 꾸준히 공연작 후보군에 올랐던 희곡이며, 개인적으로도 한번
쯤 공연해보고 싶었던 작품이지만 막상 작업을 시작하고 보니 극이 너무 무겁고 극적
긴장과 재미를 표현해 내기 어려워 연습 기간 내내 악전고투가 이어졌다. 달빛 아래에서
만 아름다운 월하미인(月下美人), 나에겐 정의의 사람들은 그런 작품이 아닐까 한다. 많
지도 않은 cast 조차 연극부원으로 감당하지 못해 배우를 외부에서 섭외해 와야 했고...
(펑크가 지속되다가 공연 10여일 전에야 간신히 섭외에 성공했다.)

그때 마지막 공연의 커튼콜 후, 이제 배우로 무대에 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애잔한 감상에 젖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후로도 두 번을 더 배우로 무대에 섰고,
이 글을 적는 지금 세 번째 무대를 준비하는 중이다. 사람 사는 일에 섣부른 예단은 금물
인가 보다.

1989년 가을 MT(정기 총회)

일 시 : 미상
장 소 : 미상

1989년 가을 워크샵 공연

일 시 : 1989년 11월
작 품 : 끝없는 아리아
연 출 : 이진석
무대감독 : 윤주희

전무후무한 가을 워크샵 공연, 예과 1학년 윤주희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연극


에 대한 열정과 동기들이 너무 적어 겪는 어려움을 돌파하기 위한 방법으로 윤주희는
가을 워크샵을 생각했던 것 같다. 연극부 안팎으로 힘겨운 상황임에도 1학년 후배의 열
정어린 제안을 뿌리칠 수 없어 가을 워크샵은 기획되었고, 처음에 연출은 내가 맡기로
했지만 학사일정에 없던 생화학 시험으로 인해 연출은 이진석 동문으로 교체되었다. 그
리하여 연초부터 동아리의 분열 위기를 맞을 만큼 연극부의 역량이 최저점으로 떨어진
1989년은 워크샵 2회, 정기공연 2회라는 최다 공연 기록을 세우며 마무리 되었다. 내가
1989년을 ‘연극부 기적의 한해’라고 평가하는 이유이다.

314
1986년 ~ 1991년

1989년 겨울 여행

(봄 공연 연습 개시 MT)
일 시 : 미상
장 소 : 미상

번외편 : 86-91 연극부 생활사 다섯 : 공연 쫑파티-공연 후유증 예방접종

마지막 공연이 끝나면 바로 쫑파티가 열렸다. 쫑파티는 선배들의 관극 소감과 연출,


배우, 스텝들의 공연 후기를 들으면서 술 마시며 회포를 푸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공연
이 끝나면 다음 공연 동아리에게 마리아 홀을 인계해야 했기 때문에 무대장치와 조명
철거로 스텝들은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고, 배우들은 분장 지우고 의상 갈아입고
소도구 정리하는 등의 마무리로 역시 분주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기다리시는 선배들
과 쫑파티 자리에 빨리 합석해야 하므로 배우나 스텝 모두 막이 내려간 후 밀려오는 감
회를 차분히 음미할 여유를 허락받을 수는 없었다.

90년 30주년 기념 공연까지는 성의회관 2층 식당이나 1층 휴게실을 빌려 쫑파티 1차


를 치렀다. 그 후 학교 측에서 교내 음주를 금지하는 원칙을 예외 없이 적용하게 되면서
학교에서 쫑파티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쫑파티 장소는 학교 근처 술집으로
옮겨졌다. 내 생각에 조용하고 탁 트인 학교 식당에 비해 술집은 집중도면에서 만족스럽
지 못하게 여겨진다.

졸업 선배들은 쫑파티에서 학생시절 트레이드 마크이던 개인기를 선보이곤 했다. 선배


들은 나이 먹어 쑥스러워 못하겠다며 손사래를 치다가도 직속 선배가 무조건 하라고 시
키면 거절하지 못하고 학생시절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경수 선배님의 팬티
송, 이정태 선배님의 성악 버젼 권주가, 김창재 선배님의 작은별 가족 노래 ‘나의 꿈’,
김용욱 선배님의 팝송 ‘Come back', 및 조용필 모창 등이 쫑파티 단골 선배 개인기로 기
억된다,

쫑파티는 거의 대부분 2차로 이어졌다. 80년대와 90년대는 쫑파티 2차에서 차이를 보


인다. 80년대에는 주로 이태원 디스코텍을 자주 갔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택시 타고
해밀턴 호텔 앞, 혹은 이태원 소방서 앞에 모여서 이동하곤 했다. 디스코텍에서 여자부
원들과 부르스 춤 추는 일은 쫑파티 음주로 인한 취기가 아니면 맨 정신에 절대로 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반면 90년대는 술집이나 노래방이 2차 장소로 선택 되었다. 2차
에 이어 3차로 술집을 또 가거나 아예 여관방을 잡고 지친 사람은 재우고 술이 더 필요
한 사람은 가게에서 술을 사가지고 계속 술을 마시곤 했다. 결국 밤을 하얗게 새우는 경
우가 다반사였다.

쫑파티 행사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정기공연은 토요일에 끝나기 때문이다. 대개 어


린이 대공원 같은 놀이동산을 가곤 했다. 하지만 철야 후 일요일까지 이어지던 쫑파티
행사는 90년대 이후에는 거의 사라진다.

315
술과 여흥으로 정신없이 몰아치는 쫑파티는 연극 작업을 경험한 사람만이 아는, 허무함
과 허탈감으로 대변되는 공연 후유증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예방백신
이었다. 하지만 그 백신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대한 만큼의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1990년
1990년 연극부 활동 내역

임 원 진 : 회장: 김태경, 부회장: 정명선, 총무: 윤주희/홍은경


활동내역 : 워크샵 1회, 정기공연 1회, 30주년 기념 공연, MT 3회
Homme coming day 개최(여름 여행은 30주년 공연 관계로 취소)

1990년 봄 정기 공연

[48회]1990년 '만선' - 천승세 작 , 김태경연출, 1990년 봄


일 시 :1990년 3월 16일 ~ 1990년 3월 17일
작가 천승세 연출 김태경 기획 고석진 무대감독 정명선
C a s t :
윤주희(곰치 역), 이미경(구포댁 역), 김송학(슬슬이 역), 이진석(범쇠 역), 김성용(성
삼 역), 김동현(도삼 역), 김형숙(아낙 A 역), 구영미(아낙 B 역), 고석진(어부 역),
김태경(임제순 역)
S t a f f :
장치 : 윤주희
조명 : 김성용
의상 : 이미경
분장 : 김송학
소도구 : 정명선
음향 : 김형숙
진행 : 정홍준 , 이경욱 , 유미영

연출의변

풍요의 세계에서 어쩔 줄 몰라 허둥대기까지 하는 우리들에게는 의욕, 패기, 진실감이


부족함이 확실한 사실일 것이다. 이런 우리들이 보기에 '만선'의 등장인물인 곰치가 무모
한 이상주의자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곰치에게는 뭔가 이루려는 힘이 있다. 자신감
이 있다. 패기가 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에게 벅찬 인생목표를 세웠다면 이를 이룰 수
있는 희망적 요소는 주위의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과감히 실천하는 추진력일 것이다. 어
떤 이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현대에는 절제와 신중의 현대인이 어떻게 머릿속의 개혁의
식을 표현 할 수 있을까? 자신감이 필요하다.

316
1986년 ~ 1991년

줄거리

남해안의 어느 조그만 어촌에 몇십년 만에 부서 떼가 밀린다.


부서-조기의 일종-를 발견해 내는데 공을 세운 곰치는 넉접 반의 부서에 배 한 척 장
만하겠다는 희망에 부푼다.
이때 선주인 임제순이 접세(뱃삯)를 올려 받기 위해 배를 묶는다. 배를 풀기 위해 사
흘 안에 뱃삯 청산한다는 부당한 계약으로 배는 다시 풀리지만 아들 도삼의 불만은
밖으로 드러난다. 한편 곰치의 딸 슬슬이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범쇠는 이번 계약을
이용하여 자신의 뱃삯을 청산해주는 대신 슬슬이를 아내로 삼으려한다. 다음날 아침
폭풍우가 예상되는 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곰치는 도삼과 배를 탄다. 무섭게 변한 풍
랑으로 곰치는 배도 도삼이도 잃고 돌아온다. 도삼의 죽음과 빛독촉으로 구포댁은 서
서히 실성해간다.
곰치는 '만선'의 꿈을 계속 버리지 않고 갖난애기까지도 뱃사람을 만들려 한다. 이
를 알자 구포댁은 몰아치는 풍랑 중에 아기가 탄 배를 띄워 배를 육지로 보낸다.
곰치는 애기를 구하러 가고 성삼은 슬슬이의 죽음을 발견한다. 범쇠의 야욕에 대한
두려움으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90년 봄 공연은 진행 팀 학번이 되어 처음으로 맞이한 공연이다. 준회원과 객원 배우


를 대거 동원하여 89년 공연보다 외적으로 공연 규모는 커졌지만, 그럼에도 배역을 채우
지 못해 무리하게 배우를 잘라내며 공연해야 했던 작품이다. 86-91년 기간 중 가장 화려
한 무대장치가 세워진 공연으로 기억한다. 초가집 한 채를 무대 위에 그대로 지었기 때
문이다. 초가집의 골조는 이미 조명탑에 사용되던 ‘아시바’를 이용했고, 초가지붕은 야밤
에 장치팀 이 차량을 이용, 교외로 진출하여 농가에 쌓여있던 볏단을 싣고 와서 해결했
다. 실재로 헛간과 방 하나를 갖춘 두 칸짜리 초가집을 마리아 홀에 올리는 데 성공했
다. 방에서는 연기를 하지 않았지만 오프닝 장면에 필요하여 가정용 100V 배선을 끌어
와 백열전구 하나를 달아 놓았다. 공연 후 주연을 맡았던 윤주희 동문은 관객으로부터
펜 레터를 받아 공개했는데, ‘푸르스름한 새벽녘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그림자 초가집에
서 노란 빛으로 밝아오던 창호문이 인상 깊었다’는 구절로 시작되는 편지였다. 바로 조
명과 장치의 절묘한 조화의 절정이었다.

나의 동기 이진석 동문은 본과 3학년임에도 배우를 뛰었다. 극의 막바지에서 그는 여


주인공을 겁탈하는 악역을 연기했는데, 문제의 장면은 헛간으로 여주인공을 끌고 들어가
문을 닫은 후 육성연기로 상황을 표현하고, 다시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바지춤을 끌어
올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86-91년 공연 장면 중 ‘19금’에 가장 근접한
수준이었다.

1990년 워크샵 공연

일 시 : 1990년 5월 24일
작 품 : 즐거운 여행
연 출 : 정명선
무대감독 : 윤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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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편 : 86-91 연극부 생활사 여섯 : 연극부의 술 문화.

연극부는 교내에서 술과 인연이 많은 동아리로 회자되곤 했다. 두주불사 주당들이 모


인 동아리는 아니지만 86-91년 기간 중에는 공연 연습이 끝나면 습관적, 무조건적으로
뒤풀이 술자리가 이어졌기 때문에 정기공연, 워크샵 연습기간만 합해도 120일 가까이 함
께 부대끼며 지내야 한다고 볼 때, 공연에 참여하는 자체만으로 술과의 인연은 결코 무
시못할 수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입생 환영회, 졸업생 환송회, 각종 MT, 공연
연습 개시 전 준비 모임등 공연 외 활동과 비공식적인 동아리 모임에서도 술자리가 이
어지므로 평균적인 연극부 정회원의 1년 생활을 결산해 보면 약 90일 가량은 조금이라
도 술을 마시게 되는 날에 해당한다고 추정된다.

통금이 있던 80년대 초반과 그 이후인 86-91년 술자리 양상은 조금 달랐다. 80년대 초반


이 ‘11시 이전 술자리 종료, 개인당 소주 한 병’ 식으로 시간과 할당량을 정해 놓고 술을
마셨다면 통금이 사라진 86년 이후는 ‘분위기만 좋으면 무제한 연장전’ 개념으로 술을 마셨
다.

자주 찾아가는 단골 술집도 학교가 자리 잡은 고속 터미널 주변 개발 과정에 따라 변


화를 보였다. 80년대 후반에는 경남 아파트 상가 지하 식당(워크숍 공연 연습 때 순대와
떡볶이 구입처), 청록회관 건물의 중국집 ‘희래’, 터미널 지하상가 생맥주 집 ‘충무’, 터미
널 경부선 지하 생맥주 집 ‘타임’(이 술집들은 최소한 한번 이상 정기공연에 스폰서 지
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경부선 건너편 아파트 상가 지하의 술집들, 뉴코아 백화점 건너
편과 구반포 주변 포장마차촌등이 연극부 술자리의 주무대였다. 이후 고속터미널 주변의
개발이 진행되면서 예술적 갈등과 갈증에 시달리는(?) 연극부원들을 위로해 줄 술집도
늘어났는데 미도 아파트 주변이 그 중 대표적인 술집 밀집 지역이었다.

연극부 술 문화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구호’이다. 공연 개시 구호인 ‘스가발’은 술집


에서도 술자리 시작과 마무리에 애용 되었으며, 그 밖에도 15개 가량의 ‘구호’가 술자리
의 권주가 대신으로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이들 ‘구호’를 다 외우느냐 못 외우느냐가 연
극부 정회원을 가늠하는 불문율적 기준이기도 했다.

구호의 상당수는 이정태 선배님께서 만드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호에는 유명한 싯
구, 유행어, 연극 대사 등을 권주가 개념으로 패러디 하고 변형하여 만들어진 것들과, 연
극부 생활에서 잊지 못할 에피소드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들
이 있다. 구호는 술자리에서 철저하게 선후배간 구전(口傳)으로 익혔다. 신입생 시절 그
많은 구호를 주저함 없이 유창하게 외우며 즐겁게 술 마시는 선배들을 보며 굉장히 재
미있고 신기하게 여겼었다. 나는 언제 저걸 다 외우나 걱정했지만 1학년 가을공연 무렵
술잔만 들면 구호가 술술 튀어 나오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내가 머리가 좋았던
것이 아니라 그만큼 술자리가 잦았었다.)

‘술 많이 마시는 연극부’는 이제 옛이야기가 되었다. 공연 횟수도 줄어들었고 요즘 젊

318
1986년 ~ 1991년

은 세대의 음주 문화도 나의 청춘 시절과 많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50주년 기념 공


연 연습 중인 요즘, 졸업 선배들 덕분에 술자리가 다시 잦아졌지만, 과거 연극부 술 문
화의 백미였던 구호가 들려오는 일은 거의 없다. 구호는 이제 연극부 일상의 소품이 아
닌 보존, 발굴 대상이 되어 버렸다.

1990년 봄 MT 및 워크샵 합평회

일 시 : 1990년 5월 26일-27일
장 소 : 강촌

1990년 연극부 창립 30주년 기념 Home coming day

일 시 : 1990년 6월 3일
장 소 : 학교 운동장

연극부 30주년 기념 공연의 발대식 의미로 기획된 행사이다. 일요일 하루 학교 운동장


에서 운동회+야유회 형식으로 개최했다. 연극부 생활 내내 주소록에서 이름만 보던 선배
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경험이었고, 졸업 선배들의 연극부에 대한 진한 애정을 확인하
게 되는 뜻 깊은 자리이기도 했다.

1990년 창립 30주년 재학생-동문 합동공연 우리 읍내

[49회] '우리 읍내' - 손톤 와일더 작, 정종화 연출, 1990년 가을


일 시 : 1990년 9월 14일-16일(3일간 5회 공연)
연 출 : 정종화
기 획 : 박경웅, 김태경
무대감독 : 양승한

창립 30주년 기념 공연은 현역에서 은퇴한 나를 다시 무대로 불러들인 첫 번째 공연

319
이었다. 당시 본과 2학년이던 내가 30주년 기념 공연 전체를 서술하는 것은 무리이다.
재학생 측면에서 몇 가지만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1. 50주년 기념 공연과 달리 30주년 기념 공연은 무게 중심이 재학생 쪽에 있었다. 주


요 배역에 졸업 동문들이 대거 캐스팅 되었지만 주연인 ‘에밀리’역은 89학번 간호학과
홍은경이 맡았으며(정종화 연출의 파격적 캐스팅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결과적으로 홍은
경의 ‘에밀리’ 캐스팅은 대성공으로 연극부 역사에 기록된다), 기획 실무 업무나 스텝 파
트는 재학생들이 담당했다. 재학생 수준으로 해결이 곤란한 배역과, 재정적 지원, 그리고
광범위한 섭외, 홍보 등 기획 구성 요소들은 졸업 동문들의 전폭적인 후원이 없으면 불
가능 했지만 연극 공연에 필요한 기본적 하드웨어는 기존 연극부 시스템으로 공연을 치
렀다.

2. 공연 준비 시기에는 내가 기획을 맡기로 했고, 연극부장 김태경이 배우를 서기로


했었다. 그러나 단지 내가 사투리가 없다는 이유로 김태경과 임무 교대를 했다.

3. 작품 결정 과정에서 재학생들은 ‘작은 반란’을 일으켰었다. 재학생 내부에서 30주년


기념 공연작으로 선정한 작품은 아서 밀러 작 ‘시련’이었다. 공연 과정에 동문회 차원의
적극적 참여가 있기 전에 결정하여 대본까지 인쇄했으나 ‘우리 읍내’로 방향 전환이 되
면서 재학생 지도부는 속된 말로 엄청 깨져야 했다.(시련으로 작품을 정할 때 기획은 나
였는데 이후 기획이 김태경으로 바뀌면서 무단으로 저지른 작품 선정의 ‘독박’은 김태경
이 뒤집어 썼다. 이 지면을 빌어 다시금 김태경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4. 당시로서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30주년 기념 공연. 재학생들은 연극 공연이라는


소프 트웨어적 결과물 외에 이후로 두고두고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하드웨어적 결과물을
얻고 싶어 했다. 그 결과물은 크게 두 가지였다. 장치 팀에서 확보한 돌출무대, 조명 팀
에서 확보한 조명기기이다.

5. 86-91년 시기 영원한 배우라고 할 수 있을 이진석 동문에 얽힌 독특한 비화(秘話)가


있다. 그는 3막 무덤 장면 ‘죽은 자 가운데 한 사람’을 연기했는데 대사는 ‘그래요.’라는
대답 딱 하나였다. 그런데 정종화 연출께서는 무덤에 죽은 사람으로 등장하는 연기자들
에게 굉장히 까다로운 요구를 했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의 분위기, 일상의
감정 기복에서 완전히 초탈한 그런 분위기의 대사를 하라는 것이었다. 무덤 주인들 가운
데 연출의 요구에 완벽히 부흥한 사람이 바로 이진석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이진석은 무
려 100가지 다른 버젼의 ‘그래요.’를 준비했다고 한다.

320
1986년 ~ 1991년

의사들이 연극 공연을 갖는다.


- 가톨릭의대 연극부 창립30周(주) 맞아 ‘우
리 읍내’ 마련・의료계 일선에서 개원하고 있
거나 의과대학 교수로 있는 의사들이 주축
이 된 연극공연이 마련돼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공연은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은
가톨릭의과대학 연극부가 14일부터 16일까
지 가톨릭의대 마리아홀에서 선보이는 동문
재학생 합동무대 ‘우리 읍내’다. 손톤 와일더
원작의 이 작품은 1900년대 초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담고 있다. 가톨릭의대 연극부는 이번 공연
을 위해 연극부 선배 김광평 씨가 번역을
맡고 정종화 씨가 연출을 담당해 새로운 작
품 해석을 보여줄 계획이다. 연극에 참여하
는 동문은 인하대 김정규 교수, 인제대 의대
문일신 교수를 비롯, 박창서, 홍지희, 박경희
씨 등 30여 명의 선후배들로 연극을 통한
다정한 만남의 장을 열어가고 있다
(동아일보 1990년 9월 10일)

1990년 가을 MT(정기 총회)

일 시 : 1990년 9월 20-21일
장 소 : 경기도 새터 오동나무 집

1990년 겨울 여행

일 시 : 미상
장 소 : 미상

1991년
1991년 연극부 활동 내역

임 원 진 : 회장: 정명선, 부회장: 홍은경, 총무: 윤주희


활동내역 : 워크샵 1회, 정기공연 1회, MT 4회

30주년 기념공연의 여파로 1991년 봄 공연은 결국 취소되었다.


이후로 전개된 공연 횟수 감소 현상의 서곡이기도 했다.

1991년 워크샵 공연

일 시 : 1991년 5월 24일
작 품 : 엘렉트라
연 출 : 윤주희
무대감독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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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봄 MT 및 워크샵 합평회

일 시 : 1991년 5월 25-26일
장 소 : 강촌

1991년 여름 여행

(가을공연 연습 개시 MT)
일 시 : 1991년 7월 26일-28일
장 소 : 강원도 송지호 해수욕장

1991년 가을 정기 대공연

[50회]1991년 '메피스토' - 클라우스 만작, 송미숙연출


일 시 : 1991년 9월 6일 ~ 1991년 9월 7일
작 가 : 클라우스만 각색 마리안느 무누슈킨 번역 김문환 연출 송미숙
기 획 : 윤주희 무감 정명선
Cast :
이경욱(헨드릭 회프겐 역), 유미영(카롤라 마르틴 역), 이진석(마그누스 고트샬크 코
마스 부뤼크너 역), 김태경(세바스찬 부뤼크너 역), 김양수(한스 요스트힝겔 역), 정
명선(미리암 호로비츠 역), 김정훈(크누르 역), 심동석(오토 울리히 역), 윤주희(알렉
스 역), 고은화(테레사 폰 헤르쯔펠트 역), 홍은경(니콜레타 폰 니이부르 역), 오수
희(에포이 역), 이해정(에리카 부뤼크너 역), 길기철(한스 미클라스 역), 김대욱(테오
필 자르너 역), 이경주(율리에테 역), 노은숙(로렌츠 역)

Staff :
연출 : 송미숙 조명 : 고석진, 김대욱
기획 : 윤주희 의상 : 홍은경, 노은숙
무감 : 정명선 분장 : 고은화, 오수희
진행 : 이경욱, 박정미, 이미경, 김형숙 소도구 : 서상원, 이경주
장치 : 심동석, 윤주희 음향 : 이상희, 이해정

322
1986년 ~ 1991년

연출의 변

본 작품 [메피스토]의 역자인 연극 평론가 김 문환 님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보면, "이상


으로 우리는 아리안느 무누슈킨이 이끄는[태양 극단]의 [메피스토]와 관련된 기초적인 사항
들을 알아보았다.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 속에 보다 인간다운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지성
의 호소가 남달리 강한 독일에서조차 적어도 공공기관의 차원에서는 기피의 대상이 된 바
있는 이 작품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인가는 자못 궁금하다. 그러나 이
미 김 기선 교수에 의해 소설[메피스토]가 번역, 소개된 지 몇 해가 지났고 유럽 영화계의
일환으로 영화[메피스토]가 상영된 만큼, 그리고 뜻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하게나마 반
향이 일었던 것을 보면 연극 [메피스토]에도 어느 정도 반응이 있지 않겠는가 기대 해본다.
단지 [태양극단]만한 정성과 기량을 보여 줄 극단이 우리에게 있는 자가 문제이기는 하다."
본 작품을 만난 지도 3년도 더 되나보다. 소설과 영화 그리고 그 당시의 독일에 대해서 이
제는 보든 것을 자신 있게 표현해도 좋을 만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역사가 30년이나 되는 가톨리그이대 연극반과의 만남이 어느 날 내게 운명처럼 다가
올 줄이야! 작품에 대한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두려움도 행복감도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온통 지배하는가보다. 연극을 시작한지 10년을 넘기고 있다. 이제는 책임감도
통감하고 있으며 더욱이 대학 극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임을 뼈아프게 알고 있으므
로 막올릴 그날만을 정성으로 기다릴 뿐. 가톨릭의대 연극부원들에게 사랑을 보내며...

91년 가을 공연은 지극히 이례적인 공연이었다. 당시 본과 4학년이던 이경욱 선배가


주연을 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예전 연극부 공연과 ‘상당히 다른’ 양상이라고 할
만하다. 배역을 ‘대학살(??)’ 수준으로 줄였음에도 정상적인 진행이 어려울 정도로 무대
아래 사람들 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공연을 했다. 나로서는 은퇴 후 두 번째, 선배의 강
권에 의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배우를 뛴 공연이기도 하다. 나는 역시 조명 스텝을 담당
했는데, 조명 key를 잡을 사람은 섭외할 수 있었지만 ending 장면에서 주인공에게 비추
어야 하는 Pin 조명을 맞춰줄 사람을 도저히 구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내 배역의 마지
막 퇴장 후 무대 뒤편으로 나가 성의회관 쪽으로 우회, 마리아홀 2층 객석으로 뛰어올라
가 Pin을 잡는 것으로 사태를 해결했다. 덕분에 나는 커튼콜에 등장할 수 없었다.

사람이 모자란 이유 하나로 배우를 자주 뛰어야 했지만 나는 내 자신 좋은 배우가 아니


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당연히 나는 공연 후 한 번도 성공한 배역이라는 평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메피스토 공연에서 나는 단역이지만 의미 있는 악역을 맡았는데 그것은
나의 배우 경력 중 처음이자 마지막 악역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럭저럭 괜찮게 했다.’는
공연평을 그 악역을 통해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나에게 맞는 배역을 찾
지 못한 채 방황하던 미운 오리새끼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1991년 가을 MT(정기총회)
일 시 : 1991년 10월 19-20일
장 소 : 경기도 새터 오동나무 집

1991년 겨울 여행
(봄 공연 연습 개시 MT)
일 시 : 미상
장 소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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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20년 후 되새김 해보는
고난과 영광의 연극부 시절
김미경, 김양수, 김춘일, 김필영, 박선미, 박정미, 박종갑, 이선영, 임효영, 장재순, 정봉
수, 정정임, 최윤희, 함영옥. 나와 동기인 86학번 의학과, 간호학과 학생 중 워크샵 공
연과 정기 공연, 그 외 연극 작업등으로 가톨릭 의대의 연극, 그리고 연극부와 직, 간접
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이름이다. 그 중 끝까지 연극부에 남은 사람은 나, 이진
석,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사랑하는 아내인 박선미이다. 다른 사람들은 끝까지 함께
할 만한 무엇인가를 여기서 느끼지 못했거나, 혹은 연극보다 더욱 재미있고 가치 있는
일을 찾아서,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사연과 이유로 성의 연극회의 동문으로 남지 않
았다. 열 네 명 중 세 명이다. 86년-91년. ‘고난의 연극부’라는 말은 결코 허언(虛言)은
아니었다.
꾸준하고 부지런하지 못한 천성 때문에 굉장히 급하게 정리한 내용들이다. 학생 때나
불혹 나이 지금이나 ‘벼락치기 공부’로 승부하는 좋지 못한 습성은 절대로 고쳐지지 않
는다. 좀 더 차분하고 진지하게 작업했다면 하는 후회가 없지 않다. 정리한 내용의 절반
가량은 당시에 작성한 나의 개인기록에서,(특히 날짜에 대해서는) 나머지는 기억에 의존
하여 기술한 내용이다. 당연히 본의 아닌 ‘기억의 왜곡’에 의한 오류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연극부 생활을 나와 함께 했던 선・후배, 동기들에 의한 오류 수정 작업을 간
절히 기대해 본다.

서클룸에는 아직도 당시의 일지, 앨범, 기획, 연출, 무감노트 등이 적잖게 보관중인 것
으로 알고 있다. 여유를 가지고 작업에 임했다면 서클룸 기록을 검토해서 보다 정확하고
내실 있는 결과물을 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있다. 예를 들어 기획 노트를 통해
연극 예산 규모와 내역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정리했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성의
연극회 모두에게 의미 있고 도움 되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신입생 시절, 연극이라는 예술을 처음 경험하면서, 그리고 연극부라는 공동체 구성원


중 하나가 되면서, 나는 그 정도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가슴에 안았고,
등에 짊어졌다는, 벅차면서도 황망한 느낌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 ‘무엇’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연극을 한다는 사실 하나로, 연극을 하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함께 호흡할 수 있
다는 사실 하나로 나를 달뜨게 하고 흥겹게 하는 그 무엇, 성의 연극회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하며 그들로 하여금 서로 교감하며,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유전자의 참모습을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하는지 나는 정말로 알지 못한다. 혹시 그것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
는 언어를 내가 찾아냈다면, 나도 열 네 명 중 떠나간 한사람으로 기록되어졌을지 모른다.

324
1986년 ~ 1991년

설명할 수 없지만 정도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러기에 나로 인해 깨지고 무너져


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소중한 가치, 연극과 연극부는 젊은 시절
나에게 그런 의미로 가슴에 사무쳤었다. 그런 절실함과 절박함이 86년-91년 최악의 상황
에서 연극부를 지켜낸 사람들을 지탱한 마지막 힘이었을 것이다.

연극 공연이 주목적인 동아리라는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86년-91년 사이 가톨릭 의대


연극부는 91년 봄 공연 불발을 제외하고 단 한 걸음의 후퇴도 없이 부여된 소임을 완수
했다. 오히려 89년에는 정말로 ‘빈틈만 보이면’ 공연을 올릴 정도로 연극에 ‘미쳐 살았
다.’ 그리고 91년 가을 공연 때는 본과 3,4학년 전원이 배우로 무대에 올랐다. 비록 그
결과물들이 역량의 한계로 인해 매끄럽고 아름답지 못했을지라도, 꽃집에 가면 언제나
꽃향기를 맡을 수 있듯, 그 시절 마리아 홀엔 언제나 연극이 끊이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1986년-1991년. ‘영광의 연극부’라는 말 역시 결코 허망한 공치사만은 아니리라.

325
과거의 회상에 빠져 [1984~1986]

한현진 (간·31회)

커뮤니티에 연극50년 사진을 올리다가 문득 과거의 회상에 빠져버렸다


그해 간호학과 동기는 나 혼자였었다.
3학년이 되어서 연극반 부회장을 할 사람도 내가 유일했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없이 연극부 부회
장이 되어야 했었다.
위에 선배들이 나누어서 하던 분장, 의상, 부회장이 나서서 후배들 챙기는 일들을 나누어서 할 여력
이 없었던 것 같다.
혜정 언니가 하던 분장, 희정 언니가 하던 의상 ,기타 소품 등 간호학과 선배들이 하던 기타 등등의
일등과 저녁 식사 해결까지...

분장은 최봉춘 선배님의 와이프에게 가서 따로 배워왔었다


연극하면서 분장 도움 주러 오셔서, 연극반에서 만나 커플이 되신 선배님의 사연은 따로 들을 수 있
었으면 한다
거의 출산이 다가 와서 배가 부르고 너무 더운 여름 힘든 와중에, 선배님 아내이신 분장선생님은 분
장에 대해 잘 모르고, 평소에 잘 꾸미고 다니지도 않는 화장의 기초도 모르던 나에게 분장에 대해
열심히 가르쳐 주셨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이야기해서 가게 된 상황까지 알 수는 없고, 아마 선배님들의 걱정 속에 열심히 배우러 다녔
던 것 같다.
집에 가서 남산만큼 부른 배를 하시고, 밥 챙겨주시고 분장 가르쳐주시고 해서 공연에 대비한 분장
을 배워 와서 숙희, 경임이, 은영이를 동기 삼아 연극준비를 하였다.

의상에 대한 것도 너무 열악한 상황이었다


86년 ‘아니 이 생명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에서 나는 수녀 역할을 맡았었고, 평소 친하던 수녀님
께 수녀복을 빌릴 수 있는지 물어 봤지만 수녀복은 절대로 빌려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연극은 올라가야 했기에, 수녀님께 부탁을 드려서 머리수건(?)을 풀러서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
고, 그날부터 수녀복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재봉틀 사용을 전혀 할 수 없었던 나는 천을 동대문에서 사가지고 와서 끙끙대면서 만들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보다 못한 엄마의 도움을 받아 3일 밤을 거의 새다시피 하면서 잘못되면 다시 만들고 해
서 거의 비슷한 수녀복을 만들어 냈다.

326
1986년 ~ 1991년

엄마 말씀에 ‘주전자 부회장(?)’이라고, 전혀 연극에 가망이 없는 내가 죽어라 열심히 뒤에서 사람을


챙기는 역할만 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뜻이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엄마의 도움까지 얻어서 수녀복을
만들어 냈다
지금도 나는 연기에는 전혀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동기가 없었던 덕에 무대에 서는 행운을 얻기도 했지만, 이전에 내가 섰던 무대가 얼마나 형
편이 없었던지, 하나, 둘, 세 발자국 가라고 하면 딱 고만큼만 가서 섰던 모습에 연출을 맡았던 선배
가 무척 혼나던 모습 등등~~
그나마 수녀 역할을 보셨던 선배님이 오셔서, 많이 나아져서 한 역할을 잘 소화해 냈다고 칭찬을 들
었을 때도 기쁨보다는 연극 무대에 이제는 서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었었던 것 같다.

그해 병원 학교 등의 수녀님들이 대거 오셔서 연극을 관람을 하셨던 기억도 난다.


엠티도 후배를 챙겨줄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한해 위의 회장 태형이 선배와 기욱이 선배 그리고 내가
후배를 챙겨야 할 유일한 인원이어서 일인 몇역을 해야 할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도 헌상이 선배 기수가 사람이 많고 간호학과도 바로 위 기수가 사람이 많아서, 엠티 등을 갈
때 아마 선배들이 돌아가면서 시간이 되는 사람이 서로 의논을 해서 챙겨서 와주지 않았나 싶다.

여름 엠티 때 창재 선배, 천희 선배가 와주어서 든든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도 나고, 여름 회를 잘


못 먹어서 배탈이 났던 기억도 난다.
선배들이 무척 아껴 주셨던 기억들도 많이 난다.
아마 내가 없으면 그 기수에 간호학과가 한명도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겠지?ㅋㅋ
점점 없어지는 회원 수에 그때도 앞날을 걱정 했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50주년이라는 행사를 한다
는 생각에 마음이 무언가가 그득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참, 집에서는 요리며 빨래며 전혀 하지 않았는데, 연극 할 때면 거기에만 매달려 살던 내가 유일하


게 요리하고, 집에 있는 먹을 것 가지고 날랐던, 그리고 못하던 요리도 맛있게 먹어 주었던 사람들...
그때 맛있었다고 했던 것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하던 말이 아니었나 ? ㅎㅎ

50주년은 우리 연극반 연극사에도 의미가 깊지만 나 개인적으로 대학 4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커


다란 한 획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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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30주년 기념
재학생 ・ 졸업생 합동공연-우리 읍내
PROGRAMS
제 49회 우리읍내 1990년 9월 14, 15,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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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차례

제 49회 우리읍내 1990년 9월 14, 15,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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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회] '우리 읍내' - 손톤 와일더 작 , 정종화 연출, 1990년 가을

일 시 : 1990년 9월 14일 ~ 1990년 9월 16일 ( 총 5회 공연 )


작 가 : 손톤 와일더
번 역 : 김광평
연 출 : 정종화
기 획 : 박경웅 , 김태경
Cast :
박창서(무대감독 역) 김광평(닥터 깁스 역) 이천희(죠오, 싸이 크로웰 역)
이헌상(하우이 뉴우썸 역) 홍지희(김스 부인 역) 박경희(웹 부인 역)
김양수(피이터 깁스 역) 서상원(윌리 역) 홍은경(에밀리 웹 역)
김정규(윌라아드 교수 역) 문일신(웹 사진국장 역)
유미영(특별석의 여인 역) 정홍준(호전적인 남자 역) 유남진(사이몬 스팀슨 역)
정명선(소옴즈 부인 역) 박영학(워렌 순경 역)
이진석(야구선수 역) 이경욱(야구선수 역) 김형숙(오르간 반주자 역)
윤주희(샘 크레이그 역) 김용욱(죠오 스터더드 역) 허정호(죽은자 가운데의 한
남자 역) 이미경(죽은자 가운데의 한여인 역)
Staff :
연 출 : 정종화 조 연 출 : 유남진, 정홍준
기 획 : 박경웅, 김태경 무대감독 : 양승한
무대장치 : 윤주희 무대장치 도안 : 최연호
조 명 : 이경욱, 김동현 의 상 : 이미경
분 장 : 김송학, 정명선, 고은화 분장지도 : 맹희진
효 과 : 안정현 사 진 : 이계임
마임지도 : 윤주희
합 창 단 : 김동현, 양인봉, 오수희, 유미정
성가대 특별출연 : 이윤숙, 박은주, 이진수, 이용우, 최양희, 박진성, 강형문, 송상도
진행 : 안승란, 심미옥, 윤경애, 강현미, 이경민, 김혜정, 홍은영, 문향이, 최노아

연출의 글
삶은 하나의 신비(神秘)

어떤 이가 당대(當代)의 훌륭한 선사(禪師)를 찾아가「당신의 명상(瞑想)이란 무엇입


니까?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수행(修行)을 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나는 배고플
때 밥 먹고, 졸리울 때 잠잔다. 이것이 모두야」라고 그는 대답하였다. 질문을 했던
그 사람은 「그러나 그것은 우리도 모두 그렇게 합니다. 거기에 어떤 특별한 의미라
도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선사(禪師)는 다시 「나는 배가 고플 때 밥 먹고 졸리울 때 잠잔다」하고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하였다.
우리는 보통 배고플 때「우리」의 잘 훈련된 습관이 밥을 먹고, 우리가 졸리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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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30주년 기념 재학생-졸업생 합동공연-우리 읍내

「우리」 의 잘 훈련된 습관이 잠을 잔다. 그 선사(禪師)는 「나」라는 점을 강조했


는데 바로 그것이 「우리」와 다른 점일 것이다.
만약 우리의 평범한 생활,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매 순간을 깨어 산다면, 습관적으
로 배를 채우지 않고, 습관적으로 잠을 자지 않고 「우리 자신」이 먹고 잔다면…
우리는 그 선사와 같이 삶을 보고 느끼고 깨달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 3막, 끝날 무렵 여주인공 Emily가 눈물을 흘리며 무대감독에게 묻는다.


"아! 이 세상이여, 너무나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이어서 아무도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
는 걸까.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에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면서 살까요?
살아가는 매순간 순간을 말이에요!"
무대감독은 이 물음에 「성인(聖人)이나 시인(詩人)」이라면 혹 알지도 모른다는 대
답을 하며 Emily를 다시 무덤으로 안내한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Emily는 죽은 후에야 살아생전에 깨닫지 못했던 삶의 진정한 가
치를 처음으로 인식하고 삶의 신비를 깊이 느낀다.
이 작품이 아름답고 또한 흥미로운 점은 작품 속에 담겨져있는 내용물은 물론이고
작품을 있게 하는 형식에도 있다.
「연극적(Theatrical)」이라는 형식의 틀이다.
「연극적」이란, 관객들로 하여금 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 어디까지나 연극
이지 실생활이 아니며, 인생은 해석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사실 그대로 보여지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보통 접할 수 있고 또한 접하고 있는 연극의 대부분은「사실적(Real)」연극
들이다. 이 「사실적」연극의 기본적인 전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실생활의 한 단면
을 제4의 벽을 통해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것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인생을 사진
찍어 보여주듯이 무대 위에 재현한다는 말이다. 전문적인 말을 빌리면 연극이 행위
의 모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전제(前提) 이다.
그렇지만, 「연극적」연극에서는 행동의 대상과 다른 모든 「모방적」요소들이 모방
이 아니라 「창작」이며, 그 점에 있어서 특별한 종류의 창작인 것이다. 「사실적」
연극에서도 물론 창작의 가치에 대해서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연극적」연극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한다. 즉,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 자기와
동일시되는 것을 바라는, 자기가 지금 극장에 와 있지 않다는 착각을 유발시키려는
「사실적」연극이 아니라, 그런 점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며, 극장은 연극예술의 수
단이고 단지 극장은 극장으로써 그 수단을 사용하는데 있지 감추는데 있는 것이 아
니라는 견해이다.

이 작품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무대장치가 없으며, 상징적인 기능을 하는 몇 개


의 대.소 도구만이 놓여있다. 예를 들면, 의자와 테이블은 주방을, 사다리는 이층 침
실을, 격자 문은 뒤뜰 문을, 세 줄로 늘어놓은 의자들은 묘지를, 의자에 앉은 사자
(死者)의 무릎은 묘석을 나타낸다. Mrs. Gibbs 가 주방에서 들어올리는 것은 가상의

345
차양이며, Joe가 문간에 집어던지는 것은 가상의 신문, 우유배달부가 가상의 말을
끌고 가상의 우유를 배달하는 것 등, 이와 같이 대.소 도구와 배우들의 마임과 음향
효과에 의해 만들어지는 가상의 무대, 이런 모든 것들이 「연극적」 특성을 무대 위
에서 최대한 확대시키고, 또한 응집시키려 해보았다.

끝으로 가톨릭 의과대학 연극부 창립 30주년 기념 동문·재학생 합동공연에 참여할


수 있었던 영광을 마음으로 깊이 감사드리며, 무대 위에서와 무대 아래에서 열심히
땀흘린 회장님을 비롯 동문·재학생 여러분들께 신(神)의 가호(加護)가 있기를 빕니
다.

작품소개
"우리읍내"란 어떤 작품인가?

손톤 와일더의 대표적 희곡으로 꼽히는"우리읍내"는 1900년대 초 미국 뉴 햄프셔스


주의 그로버스 코너스라고 부르는 작은 읍을 무대로, 그곳에 사는 지극히 평범한 사
람들의 일상적인 얘기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실적 연극에만 길들여져 있는 일반 관객에게 혹시나 당혹 감을
줄지도 모르는 것은, 이 연극에는 열리고 닫히는 막(幕)도 없고 사실적인 무대장치
도 없다는 것이다. 몇 가지 대도구 밖에 없는 텅 빈 무대 위에서 오직 연기자들의
연기력에만 의존하여 극이 진행될 뿐이다. 이 연극에는 영웅적인 주인공도 없고, 극
적 긴장감을 주는 사건의 전개도 없으며, 충동적이거나 특별히 눈에 띄는 갈등 구조
도 없다. 그저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처럼 그렇게 흘러가면서도 인간이 겪는 경험 중
출생, 사랑, 결혼, 죽음 등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과정에서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언
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허식 없는 일상적 삶을 통하여, 인생은 과연 무엇이라고 생
각하느냐고 관객에게 묻고 있다.
3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가장 특이한 존재는 무대감독이라는 이름의 역(役)이
다. 사실적인 연극에서의 무대감독은 관객에게 자신이 보이지 않게 무대 뒤에 숨어
서 연기자들이나 극 진행에 필요한 스텝들을 지시하고 통제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이 연극에서의 무대감독은 스스로 관객 앞에 나서서 이 연극이 실제상황 같은 착각
을 하지 않도록 하고 오직 연극일 뿐임을 일깨워 주기나 하려는 듯이 무대 위에서
그 장면에 필요한 연기자들을 불러내고 또 그들에게 각 장면의 시작과 끝을 지시하
고 모든 스텝들을 지휘한다. 그는 극의 상황을 알리는 해설자의 역할을 할뿐만 아니
라, 때로는 그 중의 단역을 맡아 연기자들과 함께 연기하기도 한다. 이 무대감독은
작품의 얘기를 진행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유자재로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현재, 과
거, 미래를 넘나들며, 무대장면을 자기가 원하는 어떠한 장소로도 가지고 갈 수 있
는 초능력의 요술사와도 같은 존재이다.

제1막은 1901년 어느 봄 날, 우리 읍내의 "일상적인 하루"를 보여준다.


깁스 의사선생 댁과 웹 편집국장 댁을 중심으로 그들 가족 구성원간에 일어나는 아
주 평범하고 사소한 얘기들, 이웃간에 주고받는 일상적인 인사나 날씨 얘기 등,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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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30주년 기념 재학생-졸업생 합동공연-우리 읍내

러나 단순하면서도 인정이 오고 가는 우리 이웃들의 얘기와도 같은 장면들이 연결


된다.

제2막은 "사랑과 결혼"이다. 3년 후인 1904년 여름. 결혼식날 아침 장면부터 시작


되면,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하게 되는 자식들을 걱정하는 부모들의 불안, 초조를
그리며 곧이어, 피이터와 에밀리가 처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되는
회상장면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교회에서 결혼식이 거행되며 모든 하객들의 축복
속에 그들 둘은 결혼행진곡에 발맞추어 행복을 향하여 걸어나간다.

제3막은 "죽음"이다. 결혼식을 올리던 날로부터 9년 후인 1913년 여름 어느 날,


공동묘지로부터 얘기는 시작된다. 무대 왼편에는 무덤이 줄지어 나란히 있고, 그 중
에는 깁스 부인의 묘도 보인다.
이윽고 장례행렬이 도착한다. 28살의 젊은 나이로 에밀리가 죽은 것이다. 에밀리의
혼백은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먼저 이 세상을 뜬 시어머니 깁스 부인을 만난다. 그
러나 에밀리는 아직껏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하거나 감내할 수가 없다.
그녀는 자기가 살던 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줄 것을 무대감독에게 간절히 원
한다. 죽은 날로부터 15년 전인 겨울, 열 두 번째 생일날 하루를 택하여 이승으로
돌아온 에밀리는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닫는다. 살아 생전에는 보잘것없고 소홀하게
생각했던 순간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었음을, 자신이 죽은 후이기 때문에
그때에야 비로소 인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너무나 감정이 벅차 올라 에밀리는 산마
루 위 자기 무덤으로 다시 돌려보내줄 것을 애원한다. 에밀리를 제자리로 돌려보낸
무대감독은 다음과 같은 대사를 관객에게 던지면서 작별인사를 고한다.

"네-날씨가 활짝 개었군요. 별들이 총총 빛나고 있습니다. 별들은 저 먼 태고적 시


절부터, 저 하늘 위에서 서로 비켜서 가며, 기나긴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
지구라는 행성(行星) 만이 자신의 뭔가를 만들어 보려고 쉬지 않고 열심히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로하면 좋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모두 열 여섯 시간마다 자리에
누워서 휴식을 취합니다."

손톤 와일더는 이 작품을 통하여 이 우주에 펼쳐진 영겁의 시점에서 볼 때 우리


가 사는 한 세상은 참으로 짧은 시간에 불과하지만, 그럴수록 한 순간 순간이 너무
나 아깝고 소중한 것이며, "우리의 삶이란 신(神)이 내려준 축복 받은 선물"임을 우
리들이 깨달아 주기를 조용한 목소리로 강조하고 있다.

347
에필로그
김광평(의・7회)

연극 "우리읍내"는 1974년에 이미 경운동 시절에 한번 올렸던 작품이었습니다.


연극부 창립30주년기념 동문. 재학생 합동공연에서 다시 무대에 올리게 된 것은 우리가 그간
해 온 작품 중 가장 매력 있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하나 골라 앵콜 공연으로 하자고 한 데
그 연유가 있었지요.

그런데 작품을 정하고 번역된 대본을 검토하면서 보니 대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많


았습니다. 그래서 원본을 구하여 정독한 후 고핀이 번역작업을 새로 하게 되었지요.
그 과정에서 ‘닥터 깁스’의 아들 이름도 ‘죠오지’에서 ‘피이터’로 바뀌었습니다.
원작에 표시된 찬송가 제목들을 존중하여 그 악보를 구하여 성가대 연습장면을 연출하였는
데 당시 무대 감독역을 맡아 극중에서 젊은 두 사람의 결혼식 주례 목사 연기를 했던 박창
서 동문이 자신의 교회 성가대원들을 찬조 출연하게 하여 멋진 화음을 이루어 공연효과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몇 년 후 박동문은 신학을 공부하고 진짜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극중 결혼식 장면의 하객들은 매회 연극을 관람하러 오는 우리 졸업생동문들이 타이밍을


맞추어 객석에서 무대로 올라와 혼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채워주는 이벤트로 마련하
여 한결 흥겨운 시간이 되었고, 2막이 끝난 후 잠시 휴식시간에는 관객들과 함께 마리아 홀
로비에서 간단한 결혼축하 파티도 했지요.

며칠 공연만으로 끝나는 것이 너무 아쉬워 비용이 좀 들더라도 비디오 촬영을 하자는 의


견이 대두되었습니다. MBC에서 방송극 촬영전문기사를 초빙하여 공연 중 촬영을 했지만 그
걸로는 공연기록에 지나지 않기에 콘티를 간략하게 다시 만들어 공연 일정이 다 끝난 후 다
시 모여 하루 종일 걸려서 무대 위에서 근접촬영으로 보강한 후 대학로의 전문편집실 기기
를 빌려 편집을 하면서 영화적 감각으로 재구성한 비디오 "우리읍내"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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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30주년 기념 재학생-졸업생 합동공연-우리 읍내

처음으로 시도하는 졸업생과 재학생의 합동공연이어서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사뭇 궁


금하였습니다만 의외로 졸업생 동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었고 재학생들도 열심
히 따라주어 연습과정 자체가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고 선후배간의 우애를 다지는 중요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③ ②

우리읍내
① 하우이 : 안녕합쇼? 사모님. 선생님은 방금 행길 따라
오시던뎁쇼.
깁스 부인 : 그러셔요? 오늘은 아저씨가 좀 늦었나봐요.

② 무대감독 : 그럼-자! 물 한잔부터 마셔라. 에밀리야.


굉장히 놀랜 모양이구나.

③ 피이터 : 휘익! 에밀리!


에밀리 : 어머: 여보세요?
피이터 : 여보세요?
에밀리: 공부가 전혀 안돼. 달이 굉장히 밝지?

④ 닥터 깁스 : 편안히 앉아라. 피이터야. 잠깐이면 될테


니까. 피이터, 너 몇 살 됐지?
④ 피이터 : 저요? 열 일곱 살이요. 만으로는 열 여섯이죠.

349
① ②

③ ④

우리읍내 ⑤
① 깁스 부인 : 정말 멋진 성가 연습이었어요. 안그래요? 에밀리 엄마,
저기 저 달을 좀 봐요. 감자 풍년이 확실하다니까.

② 웹 편집국장 : 잘 있었오? 사이몬... 밤이라 그런지 읍내가 모두 조


용해진 것 같군요

③ 에밀리 : 내가 원하는 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그 뿐이야


피이터 : 그럴께. 에밀리. 에밀리, 그런다니까.
에밀리 : 영원히 말이야. 내말 들려? 영원히, 영원히!

④ 깁스 부인 : 그래, 그 사람들, 곧 갈거다. 얘야, 그리 마음 졸이지 마라


에밀리 : 그동안이 벌써 천년, 수천년이나 지난 것 같아요... 제가 저
찬송가를 좋아하던 걸 아빠는 기억하고 계셨어요.

⑤ 에밀리 : 보세요! 아버님이 꽃을 가지고 오셨어요. 어머님 드리려구요.

⑥ ‘우리읍내’의 배경이 되는 그로버스 코너스 마을이 저 멀리 아스라이


바라보인다. ⑥

350
창립30주년 기념 재학생-졸업생 합동공연-우리 읍내

문일신 (의・16회)
'90년 창립 30주년 기념 재학생 동문 합동공연 소오튼 와일더작 "우리읍내"에서 웹 편집장으로 다시
무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졸업 하자마자 미국에 의사취업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선 군의관으로 입대하였으나, 월남전의 조기


종결로 이민의 길이 막히게 됩니다. 모교로 돌아와 소아과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인제의대 상계백병
원 소아과 교수로 재직 중, 김광평 고핀 샘의 주도로 창립 30주년기념 졸업생공연을 추진하게 됩니다.
이렇게하여 꿈에 그리던 무대를 서게 되었지만, 온갖 세파의 잡념으로 학창 시절만큼의 열정을 집중
할 수가 없었고, 내심(內心) "다시 하지 않은것만 못하다" 라고 자평(自評)하고 있습니다.

박창서 (의・18회)
연극부 창립 30주년과 개교 35주년을 맞아 동문 재학생 합동 공연을 하게 된 것은 우리 모두 잘 아
는 일이지만 나에게도 새로운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너무나 반가운 소식에 흔쾌히 참여하기로 하였다.
모여 의논하기를 주로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엮어가고 동문들은 주로 재정적 후원을 맡고 혹 단역으로
출연할 수 있게 하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장의사 역이나 무덤 속에 있는 죽은 자 역할을 하리
라 마음먹고 있었다. 정종화 연출님과의 대면에서 그가 동문들을 보더니 작품 속 배역과 실제 나이에
걸맞게 캐스팅을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장의사 역할을 하게 되
리라 속으로 기뻐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무대감독 역을 맡게 되었다.
당시 오후 7시에 연습을 시작하였기에 8시까지 진료하던 것을 오후 6시로 줄이며 그 복잡한 서울 시내
교통을 뚫고 매일 연습장 강남 마리아 홀로 가게 되었다. 한편 치주염으로 고생하면서 결국은 피로가
겹쳐 치아를 6개나 발치를 하게 된다. 그러니 발음이 새지 않도록 무진 애를 썼던 기억이 새롭다.
또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일은 극중의 성가대 역이다. 이왕이면 가톨릭의대 합창단을 동원하리라 생각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해서 나에게 극중 합창단 구성의 임무가 맡겨졌는데, 아는 후배에게 부탁하였더
니 모 대학 성악과 학생들 몇을 보내주었다. 한데 이들은 연극 분위기에 맞지 않았고, 터무니없는 출연
료를 요구하기에 난감했었다. 당시 나는 과거에 참여했던 합창단의 동문들이 동문합창단을 만들어 내가
단장을 맡아보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이들을 동원하기에는 단원들의 개인적 사정이, 다들 직장인이고
가정주부들이어서 매우 힘들었던 것이다. 하여 학생들로 구성된 <대학 합창단> 단원들을, 내가 운영이
사임을 내세워 자원하는 사람을 모아 왔다. 그들도 음대 성악과 학생들이고 앞으로 오페라 등에 출연해
야 하기에 연극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는 단원들이 적극 참여해 주어서 수준 높고 아름다운 합창으
로 공연에 동참할 수 있었던 일이 보람 있게 느껴진다.

‘우리읍내’ 공연을 축하해주는 합창단원들이


나를 위해 축가를 불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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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모든 분들의 각고의 노력과 열정으로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음은 우리 모두 함께
경험을 공유하는 일이다. 내 아내와 내 아이들도 내가 하는 연극을 처음 보았고, 당시
내 주변에 연결되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관람을 했던 것이다. 작품이 주는 감동이 관객
들에게 잘 전달되었던 아주 좋은 공연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읍내"에 대해서는 많은
동문들이 언급하였을 것이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다만 그 때 함께한 모든
동문들과 재학생 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플 따름이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 이 아까운 작품을 그대로 사장하기에는 너무 아쉬워 비디오로


기록해 두기로 하고 모두 다시 모여 비디오 작업을 하게 되었다. 고핀 샘께서 콘티를 짜
고 촬영된 비디오를 다시 대학로 어느 건물에서 편집을 하고, 당시 김광평 선생님과 내
가 며칠 밤을 새우며 함께 작업하던 일이 눈에 선하다. 그래서 TV나 영화의 편집 용어
가 낯설기만 하지는 않게 되는 수확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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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 1998년
PROGRAMS
제 52회 누가 선인장을 삼켰대? 1993년 8월 27, 28일

354
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52회 누가 선인장을 삼켰대? 1993년 8월 27, 28일

355
PROGRAMS
제 52회 누가 선인장을 삼켰대? 1993년 8월 27, 28일

356
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52회 누가 선인장을 삼켰대? 1993년 8월 27, 28일

357
PROGRAMS
제 53회 유리 동물원 1994년 3월 4, 5일

358
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53회 유리 동물원 1994년 3월 4, 5일

359
PROGRAMS
제 53회 유리 동물원 1994년 3월 4,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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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54회 어떤 인생 1995년 3월유리17,


제 53회 동물원18일
1994년 3월 4, 5일

361
PROGRAMS
제 53회 유리 동물원 1994년 3월 4, 5일

362
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54회 어떤 인생 1995년 3월 17, 18일

363
PROGRAMS
제 54회 어떤 인생 1995년 3월 17, 18일

364
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54회 어떤 인생 1995년 3월 17, 18일

365
PROGRAMS
제 54회 어떤 인생 1995년 3월 17, 18일

366
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54회 어떤 인생 1995년 3월 17, 18일

367
PROGRAMS
제 55회 다리 위에서 바라본 풍경 1995년 8월 31일, 9월 1일

368
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55회 다리 위에서 바라본 풍경 1995년 8월 31일, 9월 1일

369
PROGRAMS
제 55회 다리 위에서 바라본 풍경 1995년 8월 31일, 9월 1일

370
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55회 다리 위에서 바라본 풍경 1995년 8월 31일, 9월 1일

371
PROGRAMS
제 56회 돼지와 오토바이 1996년 3월 15, 16일

372
PROGRAMS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56회 돼지와 오토바이 1996년


제 56회 돼지와 3월1996년
오토바이 15, 16일
3월 15, 16일

373
PROGRAMS
제 57회 Media 1996년 9월 4, 5일

374
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57회 Media 1996년 9월 4, 5일

375
PROGRAMS
제 57회 Media 1996년 9월 4, 5일

376
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57회 Media 1996년 9월 4, 5일

377
PROGRAMS
제 57회 Media 1996년 9월 4, 5일

378
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57회 Media 1996년 9월 4, 5일

379
PROGRAMS
제 57회 Media 1996년 9월 4, 5일

380
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57회 Media 1996년 9월 4, 5일

381
PROGRAMS
제 58회 동승 1997년 9월 3, 4일

382
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58회 동승 1997년 9월 3, 4일

383
PROGRAMS
제 58회 동승 1997년 9월 3, 4일

384
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58회 동승 1997년 9월 3, 4일

385
PROGRAMS
제 58회 동승 1997년 9월 3, 4일

386
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60회 한 여름밤의 꿈 1998년 9월 4, 5일

387
PROGRAMS
제 60회 한 여름밤의 꿈 1998년 9월 4, 5일

388
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60회 한 여름밤의 꿈 1998년 9월 4,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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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60회 한 여름밤의 꿈 1998년 9월 4,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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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92년 ~ 1998년

제 60회 한 여름밤의 꿈 1998년 9월 4,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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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60회 한 여름밤의 꿈 1998년 9월 4, 5일

392
1992년 ~ 1998년

92년 봄 공연 ‘굿닥터’를 무대에 올린 후 92년 가을 정기공연과 93년 봄 공연이 무산되었으나 93년 가을, 곽태호 동문이 직접 대본을 쓰
고 연출을 맡은 ‘누가 선인장을 삼켰대?’를 무대에 올려 연극부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92~93년 연극반으로서는 참으로 어려웠던
시기를 넘기면서 다시 중흥의 깃발을 올리고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50년사 끼워넣기 1992년~1993년

차현민 (의·39회)

92년은 제가 아직 연극반에 아직 정식으로 가입하지 않아 당시 연극반의 자세한 정황


은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 양수 형이나 다른 분들의 보충이 필요합니다.

[51회] ‘굿닥터’-닐 사이먼 작, 윤주희 연출, 1992년 봄


연출: 윤주희(본2)
캐스트: 서상원(본1), 곽태호(예2), 김대욱(예2), 고은화(간3), 이경주(간2), 노은숙(간2)

50주년 기념공연의 토대가 되는 닐 사이먼 작 '굿닥터'를 당시 신입생으로 관람하였다.


처음 접하는 대학극으로 선배들의 공연이 왠지 멋있어 보였다. 특히 서상원 선배의 중후
한 목소리와 이경주 선배의 오디션 연기가 인상 깊었다. 공연 끝나고 나오는데 터미널 가
는 길 물어보던 교대생이 자기네 학교 연극반 보다 훨씬 잘 하더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워크샵에 참여하게 되었다. 노은숙(간2) 연출로 '뜻대로 생각하세요'를


하게 되었다. 연습 시작하고 보니 연극반 선배들이 너무 단출해서 놀랐다. 지난 공연에
참여하였던 서상원, 곽태호 선배는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고 대신 본4 김양수, 김태경, 본
3 정명선, 간3 홍은경 선배를 알게 되었다. 10명도 채 안 되는 선배들이 10명의 신입생
을 챙기는 것이 당시 연극부의 현실이었다. 연습은 생각보다 힘들고 재미없었다. 신체훈
련 한다고 의과학연구원 뒷산에 데리고 올라가서 산을 뛰어다니게 하지 않나, 당시 잔디
운동장을 10바퀴씩 뛰게 하지 않아 스피드 런 할 때는 선배들이 고래고래 욕하고 소리
치고 한마디로 슬펐다.

정신없이 공연을 마치고 강촌으로 MT를 갔다. 밤새 술 마시고 다음날 삼악산에 오르는
연극반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이 전통도 92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
다. 당시에는 전통을 지속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393
공연이 끝나고 한동안 연극반을 찾지 않았다.

그런데 가을 공연을 취소했다는 말이 들렸다. 워크샵 할 때는 다시는 연극 안하리라 생


각했는데 한달 두달 지나니 연극반 선배들도 보고 싶고 해서 공연하면 도와주러 가려했었
는데, 공연 안하게 되었다는 소식 들으니 왠지 섭섭했다.

그리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얼마 뒤 다시 윤주희 선배가 찾아와 이번에 간호협회에서


모유먹이기 캠페인을 하는데 행사를 마리아홀에서 하고 모유먹이기에 도움이 될 수 있
는 연극을 행사의 일환으로 해 달라고 100만원의 개런티를 제시했다고 하며 워크샵 맴
버들이 도와주었으면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다시한번 연극반에 오게 되었다. 윤주
희 선배의 꼬임에 여러 사람들이 걸려들어 곽태호 선배가 대본을 만들고 직접 연출을
하고 이혜승, 김동철, 신소영, 강창진, 김은경 등 1학년 동기들이 참여하여 만들어진 작
품이 '천부인권'이었다. 20분 넘지 않는 분량이었던 것 같고 모유를 먹는 것 자체가 천부
인권이라는 주제의 재판극으로 크게 힘들이지 않고 만들었던 작품으로 기억된다. 간협신
보에도 기사가 났었던 것 같다. 이 작품으로 인해 향후 곽태호 선배는 위기의 연극반에
브레인으로 떠오르게 된다.

정식 공연이 아니었지만 공연이 끝나고 합평회를 겸한 총회를 했던 것 같다. 윤주희


선배의 뒤를 이어 한 학년 건너뛰고, 당시 예과 2학년 이었던 김대욱 선배가 연극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새터로 MT 를 갔다. 가을 새터 MT도 전통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 마지
막이 될 뻔했는데 4년 뒤 한번 더 가게 된다. 4년 후가 마지막이었다.

또 각자 갈 길로 갔다. 나와 곽태호 선배는 아직 정식 연극반이 아니었기에 한동안 발


길을 끊었었다.

그리고 2학기 끝나고 겨울방학이 왔다. 그런데 위태위태하게 존폐의 기로를 걷던 연극


반에 다시 한번 변고가 생겼다. 신임 연극부장 김대욱 선배가 유급하고 그 여파로 연극
부를 나가게 된 것이다. 이경주 선배가 부회장 겸 회장대행을 맞고 윤주희 선배가 계속
후배들을 챙겨주었으나 이미 고갈될 대로 고갈된 연극부 인력으로 봄 공연은 무리였고
또 다시 정기공연은 쉬게 된다. 예과 1학년 남학생도 모두 유급을 당해 제대로 연극반
활동을 못하게 되고 이렇게 저렇게 내가 이 무렵부터 연극반에 자주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시작한 93년은 봄 공연 못하는 대신 연극반은 새로운 시도로 비디오 카메라를


이용하여 연극반을 홍보하는 동영상을 촬영하게 된다. 윤주희, 곽태호 선배가 콘티를 짜
서 나름 재미있게 잘 만들어 신입생환영 오리엔테이션에서 반응이 좋았고 그 결과 대거
10명이 워크샵에 참여하겠다고 나섰다. 또 한동안 연극반에서 연기파 배우로 활약한 박상
협(93년 입학)이 들어왔다. 연극반에 자주 나오면서 여러 이유로 연극반을 쉬고 있던 고
석진 선배와 분장할 때만 나오는 이상희 선배, 장치 만들 때 도와주러 나오는 길기철 선
배를 알게 되었다.

394
1992년 ~ 1998년

워크샵 하겠다는 신입생은 10명 확보되었는데 연출과 무감할 사람이 없어서 어찌어찌
하다가 예2 신소영이 연출을 하고 내가 무대감독을 하게 되었다. 둘다 정식 연극부원 아
니고 전년도 워크샵과 가을에 있었던 모유먹이기 행사공연에 참석했던 인연으로 참여했
다고는 하나 모양새가 좋지는 않았다. '연인과 타인'이라는 꽤 괜찮은 작품을 했었는데
문제는 대학로에서 공연했던 작품을 신입생과 신참내기 연출이 하기에 버거웠다는 것이
었다. 연출은 뻑 하면 안 나오고 선배들이 결국 개입해서 한 장면씩 만들어 주었는데,
선배들도 이러 저래 티격태격하다가 급기야 공연을 1주 미루고 힘들게 마무리했다. 결과
적으로 공연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냈지만 여러 안 좋은 모습을 본 신입생들이 모조리
빠져나가 다시 연극반은 1학년이 박상협만 남게 되었다.

1학기가 끝나고 연극반은 또다시 정기공연을 못할 위기에 빠졌다. 이번에도 못하면 3


회 연속 정기공연 펑크! 여기저기서 연극반 조만간 문 닫을 거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
기 해결을 위해 윤주희 선배가 다시 곽태호 선배를 끌어들였다. 이리하여 올려 진 작품
이 곽태호 선배가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한 '누가 선인장을 삼켰대?' 이다.

[52회] '누가 선인장을 삼켰대?' - 곽태호 작, 곽태호 연출, 1993년 가을


일시 1993년 8월 27일 ~ 1993년 8월 28일
작가 곽태호
Cast :
최승욱(아버지 역), 김은경(어머니 역), 박상협(수일 역), 이경주 (영임 역), 차현민(수남 역) , 이혜승(순임 역) ,
강희숙(순임 역)
Staff :
연출 : 곽태호 무감 : 고은화 기획 : 차현민
장치 : 곽태호 조명 : 이종현 분장 : 이상희, 정은주
의상&음향&소도구 : 신소영 특별출연(목소리) : 이상희
진행 : 정명선, 윤주희, 홍은경

연출의 변

1. 이를테면 당신이 밤나무가 우거진 숲을 걷다가 정수리에 가시투성이인 밤송이가


떨어졌다고 가정해보자. 따끔거리는 아픔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슬러 당신의 몸을
소스라치게 할 것이다. 더욱이 그 밤나무의 키가 클수록 당신은 더 오래 전율할
것임에 틀림없다. 당신은 이제부터는 모자를 쓰게 될지 모르며 혹은 그 밤나무
숲에 다시는 가지 않을 지도 모른다. 또, 당신이 낚시로 , 아니 더 정확히는 작은
갈고랑쇠로 채낸 큼지막한 생선을 먹고 있을 때, 당신이 잡은 그 물고기의 가시
가 식도를 긁으며 식도 어느 한 구석에 콱 박혔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의 소화 조
직이 찢어져 피가 안으로 주르르 흐르면, 밥을 한입 크게 삼켜 그 가시를 뽑든지
또는 더 날카로운 기계를 집어넣어 꼭 쥐게 한 뒤 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당신
은 생채기가 안으로 남게 된다. 당신이 만약 소심한 사람이라면 그 생선을 다시
는 먹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잠깐, 다시 꼼꼼하게 짚어보자.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밤송이 가시는 당신의

395
정수리에 박힌 것이고, 당신이 낚시에 사용한 갈고랑쇠의 뾰족함은 결국 당신의
식도에 박힌 가시로 변한 것이다.
밤송이와 생선가시... 또 무엇이 있을까? 장미의 가시라고? 그건 너무 예쁜 가시
이다. 예수가 쓴 가시 면류관? 희생 치곤 너무 고통스럽다.

2. 이 작품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선인장의 가시이다. 그렇다고 어느 사막에 핀


선인장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또 화분에 곱게 키우는 그런 선인장도 아니다.
몸 안에서 기생충처럼 우리의 웃음을 빨아먹어 결국 상처투성이의 울음만을 남기
는... 몸 속의 선인장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선인장을 가지고 있다.
선인장에 긁힌 생채기를 한 줌씩 가지고 있다.
2. ...... 우린 날 때부터 그런 가시밭을 가지고 왔는지 몰라. 단지 눈에 보이지 않았
던 거지... 우리를 한 번씩 밟을 때마다 우리 몸 안의 선인장은 키가 조금씩 커왔
던게지. 안에서부터 밖으로 삐죽삐죽 솟아나 있는(대사에서)......

3. 이 작품은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를 당한 한 가족이 기지촌이라는 특수한 상황으


로 쫓겨 이사한 후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
의 이야기일 수 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상황은 오히려 더 비극적일 수 있다.
아니,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죽음으로 끝나는 우리의 삶은 희-비극을 논하기
전에 어차피 비극이리라.
3. 작품 속에 나오는 술주정뿐인 무능력한 아버지, 세상에 불만이 많은 절름발이 수
일, 양공주 영임, 그리고 순수함을 잃어 가는 순임,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도 긍
정적이려고 하는 어머니, 이 가족은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르겠다.

4. TV와 Cinema와 넘치는 Video가 연극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연극이라는 행위가
전자와 빛 알갱이에 짓눌려있다. 요즘의 관객은 연극보다는 '자극'을 원하는 듯하
다. 그렇다고 과거의 연극을 고집한다면 스스로 연극의 무덤을 파는 일이리라 생
각한다. 연극은 변해야 한다.
4. ...... 적어도 이번 연극으로 우리는 그것을 시도해 보았다.
4. 끝으로 방학을 투자하며 고생한 배우들과 무감, 기획에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비록 연습 때는 그 말을 못했지만...

기획의 변

폭 삼 미터
너비 오 미터의 공간
무대라고들 말하는 그 조그마한 공간은
무한한 세계입니다.
그 안에는 자유가 숨을 쉽니다.
창조가 나래를 폅니다.

396
1992년 ~ 1998년

그 곳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우리들이 모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팔월은 어느새 흘러가버리고
지나가버린 시간들에 아쉬움을 간직한 채
이제는
여러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군요.

기획은 할 사람이 없어서 내가 했다. 간신히 연출, 무감, 기획은 정해졌는데 배우가 모
자랐다. 이리저리 사람을 끌어 모아 연습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문제가 다른 데에서 발
생했다. 당시 연극부 동문회에서 작품이 정기공연으로 올리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후원을
안 하겠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도 여러 선배님들의 도움과 박상협, 이경주 등의 뛰
어난 연기로 공연은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또다시 총회로 새로운 회장단을 꾸려야 할 시기가 왔다. 당시에 연극부원은 본4 정명


선, 본3 윤주희, 간4 홍은경, 고은화 선배가 전통적인 연극반 양성 시스템으로 키워진 마
지막 세대였고 그 이후 어수선한 시기에 간3 이경주, 간2 이혜승이 있었고 고석진, 서상
원, 김대욱 선배는 나가있고 1학년 박상협이 있고, 나와 곽태호, 이상희, 길기철 선배는
어정쩡하게 연극반 활동은 하고 있는 상태였다. 간3 이경주 회장대행에서 예1 박상협으
로 회장이 넘어갈 상황에서 곽태호 선배가 연극부장, 이상희 선배가 부회장을 맡아주어
연극반은 또 한번 생존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렇게 쓰다 보니 92, 93년은 정말 연극반 존폐의 기로였던 것 같네요. 당시 윤주희


선배가 선후배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이전 전통을 이어나가지 못한다는 선
배들의 질책을 혼자 떠안고 후배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연극을 계속 할 수 있게 해 주었
습니다.)

397
92년에는...

고 은 화(간・37회)

90~93년도까지 활동한 고은화입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옛말이 있죠!!
90년, 30주년 기념공연을 끝내고 연극반은 소강기로 들어갔습니다.
85학번 이경욱 선배와 86학번 김양수 선배, 이진석 선배는 누구보다 연극반을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었고 그래서 한 5년을 버텼던 것 같아요.

제가 입학한 90년부터 93년은 정말 사람이 없었어요.


91년에 서태지가 해성처럼 우리나라 가요계를 흔들면서 우리나라의 문화가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힘들이지 않게 하고자 하는 분
위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죠... 그런데 연극반은 전통을 바꾸는데는 보수적이잖아요?
그 안에서 충돌을 일으키면서 서로 갈등하는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물론 그때는 이런
생각을 안했지만요...
그래도 참 재미있었어요.

현민이가 아주 자세하게 기술해줘서 저도 조금씩 생각이 나네요.


92년도 가을공연 취소는... 정말 할 사람이 없었어요. 본2 윤주희, 간3인 저 고은화, 그
리고 간1 이혜승, 예1 강창진 외 이름이 생각 안나는 1명 그리곤 연극에 참여할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린 과감하게 “공연을 하지말자. 사람도 없는데 더 이상 힘
을 소모하지 말자” 그렇게 가을 공연을 취소했어요.
써클룸 페인트칠 하고 MT 바닷가로 가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놀러 다니고 그렇게
방학을 보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몇명 안다녔는데 시간이 갈수록 좀 더 많은 사람들
이 모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재미있었던 추억을 만들었던것 같아요. 처음으로 방학다
운 방학을 보냈어요.

그러다 2학기가 시작되어 모유수유 협회에서 간단한 콩트를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와
서 마리아홀에서 그 당시론 엄청나게 큰 돈인 100만원을 받고 곽태호가 대본을 써서 일
주일인가 연습하고 아주 조그만 콩트를 막간을 이용해서 올리게 되었죠.

398
1992년 ~ 1998년

제 기억에 가을공연을 쉰 건 그때가 처음인 것 같은데.. 아닌가요? 획기적이었죠. 연극


반이 가을공연을 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그런데 결과적으론 그 당시 무
리해서 공연을 올리려고 했으면 올릴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현민이나 곽태호, 이
경주는 볼 수 없었을 것 같아요. 다들 질려서 다시는 연극반에 발길도 두지 않았을지 모
르죠. 저희들은 이보 전진을 위한 한보 후퇴를 한 것이죠...

이제야 기억이 나네요. 그 때 참... 우울하고 암담했었거든요... 근데 그게 또 저에게 살


아가는 힘을 준 것 같아요.

399
50년사 끼워넣기 1994~1995년
차현민 (의·39회)

곽태호 연극부장 체제로 시작한 94년은 차현민(본1), 이혜승(간3), 박상협(예2) 만으로


봄 공연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의외로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를 시작했던 것 같
다. 어차피 이전에도 몇 번 공연을 쉬었기에 공연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각각의 연극부원
으로서는 할 만큼 했다는 위로를 주었고, 다들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번에도 신입생 유치
에 실패한다면 연극반 문을 닫자고 했기에 어쩌면 연극반 마지막 공연을 준비한다는 자
세로 시작하였다. 곽태호 선배는 이번에는 정통 연극을 제대로 한번 올리겠다고 의욕적
으로 준비했고 그 결과,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으로 작품이 결정되었다.

[53회] '유리동물원' - 테네시 윌리엄스 작 , 곽태호 연출, 1994년 봄


일시 1994년 3월 4일 ~ 1994년 3월 5일
원작 테네시 윌리암스
Cast :
이경주(아만다 역), 이혜승(로라 역), 차현민(짐 역), 박상협(톰 역)
Staff :
연출 : 곽태호
무대감독 : 이경주
기획 : 윤주희 사진 : 김동철
장치 : 윤주희, 최승욱 슬라이드 : 김은경
조명 : 이준현 의상 : 노은숙
음향 : 서재현 진행 : 고석진, 서상원, 모현진, 정세희
분장 : 이상희 무대&표지 디자인 : 전상미
소도구 : 신소영 음악작곡 : 송준석

연출의 변

1. 유리는 투명하다.
1. 유리는 반짝인다.
1. 그러나 유리는 깨지기 쉽다.

2. 환상과 꿈은 현실 앞에서 무참히 깨어져서 쉽게 흩어지고 있다.


2. 현실과 이상은 타협할 수 없는 평행선처럼 우리의 숨을 조이며 그 긴장을 유지하
고 있다. 우리에게 괴리감이라는 포장 안 된 선물만 획 던져 준 채......

2. 이 작품 속에 나오는 네 명의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환상과 현실에 대한 영역이


다르다. 서로의 환상과 현실이 다름으로 해서 갈등이 생긴다. 이것을 조목조목 찾
아보는 것이 이 극의 색다른 재미를 더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400
1992년 ~ 1998년

2. ‘아만다’는 화려했던 과거라는 환상으로 비참한 현실을 위로한다. 그녀는 자신


의 아이들을 동물원에 가둔 동물처럼 조련하려고 한다. 너무 갇혀 있어서 울부짖
음밖에 남지 않은 ‘로라’와 ‘톰’을... 하지만, 극 속의 그들은 연극을 만들고, 보는
우리처럼 훤하게 너른 태초의 대지를 무한히 달리고 싶어 하는 못된 성품을 물려
받은 그런 인물이었다.

2. ‘로라’는 유리동물원이라는 환상의 세계에 푹 빠져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 현실


이란, 자신의 강한 열등의식만을 더 느끼게 해주는 거추장스러운 공간이었다. 그녀
는 유리동물원의 세계에서 무한히 행복해 했다...개인적인 욕심으로는, 흔히 우리가
미쳤다고 표현하는 정신병자들을 유리동물원에 갇혀 있는 ‘로라’를 통해 표현해보
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기괴한 사람들의 집합에 속하기보다는 단지 상처받기
쉬운 영혼이라는 것을 꼭 말하고 싶었다. ‘톰’은 현실과 환상에 각각 한발씩을 올
려놓고 있다. 가족 구성원의 하나로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자기와, 가족을 떠나서
자아를 찾으라는 내재된 자신의 목소리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관점을
새롭게 해본 것은 ‘톰’이 누이인 ‘로라’에게 보이지 않는 미움을 갖고 있었다는 점
과 그가 집을 떠난 뒤 미워했던 ‘로라’에게 죄책감을 강하게 느꼈다는 점이다........
‘짐’은 현실적인 면이 강한 사람이다. 아니 세속적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겠
다. 자본주의를 신봉하고 사회적인 성공을 꿈꾸며 인간의 감정에는 무관심한, 그러
나 그것마저도 관심이 있는 척 가장하는 비정한 인간으로 사랑마저도 기만하다.
하지만 그도 현실에 만족 못하는 처량한 신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연출적 시각에서
간과하지 않으려고 했다.

3.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을 만들면서 대학극의 모습이 어떠해야하는지 자꾸 의문을


갖게 되었다. 점점 줄어드는 연극부원, 힘들어진 예산, 맹목적인 소수의 열정, 그
리고 좌절... 어쩌면 그것은 연극부가 가지고 있는 환상과 현실의 괴리감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유리동물원을 준비하면서 내 자신이 점점 그 유리
동물원에 갇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3. 끝으로 이 연극의 장치를 맡아준 상미와 음악을 직접 작곡해 준 준석에게 고마


움을 전하며, 누구보다도 더 고생을 하며 두 달의 긴 겨울을 함께 했던 네 명의
배우에게 고맙다는 말을 순수하게 해주고 싶다. 특히 간4임에도 불구하고 ‘아만
다’ 역을 해준 경주에겐 내가 빚을 졌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또 기획을 맡아준
윤주희 선배님과, 윤여웅 지도교수님과, 도와주신 동문 선배님들과 그 외 모든 스
텝에게 감사드린다.

4. 유리는 투명했고 반짝였으며 쉽게 깨졌으나, 우리에겐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소


중히 남게 되었다.

401
남 2, 여 2 나오는 작품이고 모든 배역이 각기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있기에 졸업반 이
경주 선배가 어렵게 배우로 나서겠다고 하였고, 역시 졸업반 윤주희 선배도 후배들의 부
담을 덜어주고자 기획을 자청하고 나섰다. 곽태호 선배는 몽환적인 작품 분위기를 최대
한 살리기 위해 무대장치와 음향, 조명에 각별한 신경을 써서 음악작곡과 무대디자인을
외부에서 섭외해 왔다. 무대디자인은 무대 안에 집 구조물을 만들고 마리아홀 뒷벽을 모
두 가리는 장막에 배경이 되는 미국남부 어느 도시의 배경을 채색하였다. 장막이 워낙
크다보니 마땅히 작업할 공간이 없어 당시 성의회관 다목적실에 장막을 깔아놓고 그림
을 그렸는데 다 그리고 걷어보니 바닥이 온통 페인트 자국으로 덮여 있어 지워야 할 필
요가 있었다. 마침 그날 흰 눈이 많이 내려 연습하던 배우들이 눈을 가져다 바닥을 닦던
일은 아직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또 연습 중에 이번 신입생 중 타 학교에서 잠
시 연극반 하다 다시 재수해서 들어온 학생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한번 나
와 달라고 하였더니 용케도 연습장에 나와 주어 연습 후 터미널에서 같이 술 마시고 약
간의 폭력(?)을 사용하여 연극부에 들게 하였다. 이 신입생이 바로 이후 연극부 인맥의
큰 축을 이루는 한영고 인맥의 시작인 이준현이다. 아름답고 몽환적인 무대와 구슬처럼
빛나던 유리 동물들, 적절한 음악이 배우들의 연기를 빛내주었고 곽태호 선배의 뛰어난
연출력과 이경주, 이혜승, 박상협의 개성 있는 연기가 어우러져, 어쩌면 성의연극회 역사
상 두고두고 기억될 공연으로 남을 수 있었는데 내가 맞은 '짐' 이라는 역이 그야말로
연극에 짐이 되어 버렸다. 개인적으로는 역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자책감이 두고두고
남는 공연이었다. 그래도 신입생 환영 공연을 보고 예1에서 윤완수가 추가로 들어오고,
간1에서 김귀란, 오재숙, 정진아가 들어와 연극반에는 간만에 떠들썩한 날들이 찾아왔다.
이에 준비한 워크샵 공연이 2년 전 봄 공연으로도 올렸던 ‘굿닥터’ 였고 관객들의 반응
도 비교적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을 공연을 준비해야 하나 지난 1년 동안 나름 공
연을 지속한 탓에 부원들의 피로도 상승으로 또 한번 쉬어가기로 하였다. 이제는 공연을
쉰다는 것이 별로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최악의 시기를 잘 버텨냈고 연극반이 문
닫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은 점차 잊혀져 갔다.

그해 가을 총회에서 내가 연극부장이 되고 김귀란 부회장, 윤완수 총무로 회장단이


꾸려졌다. 그런데 큰 걱정이 있었다. 윤주희, 이경주 선배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있어 주
었는데 이제 졸업이라 다른 든든한 버팀목이 필요하였다. 이에 이런저런 이유로 연극반
을 나가있던 고석진, 서상원, 김대욱 선배를 찾아 한번 도와주십사 부탁하였고 결국 선
배들의 귀환이 성사되었다. 이렇게 올린 봄 공연이 서상원 연출의 '어떤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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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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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회] '어떤 인생' - 휴 레너드 작 , 서상원 연출, 1995년 봄

작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는 사람인데 과거와 현재가 계속 교차하면서 작품 전편에


후회와 회한이 흐르는 우울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이렇게 시작한 95년은 예1 손보성, 임
지은, 간1 조윤영이 들어왔고 예년처럼 워크샵에 참여하겠다는 신입생들이 더 있어 10여
명으로 '수업료를 돌려주세요'와 '버지니아 그레이의 초상'를 올리게 된다. 워크샵 후 예1
서석민, 간1 김경아가 연극반과의 인연을 이어나간다. 특기할만한 점은 간만에 두 작품
을 동시에 올리려니 먹여야 할 배우가 많았고 아무리 먹여도 항상 배고파하는 배우들
때문에 힘들었던 것과, 대신 참여한 배우가 많다보니 관객이 평소 정기공연 때보다 더
많아 간만에 마리아홀 복도에 까지 관객들이 쪼그려 앉아서 관람하였다는 것이다. 연출을
맡은 이준현, 김송희 및 당시 거의 모든 공연에서 마무리 작업을 총괄하던 곽태호 선배
의 노력으로 웬만한 정기공연 수준의 완성도를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학기가 끝나고 이번에는 MT 를 가는데 강원도 동해에 계신 이준현 할머니 댁으로 간


다. 먹여주고 재워주신 이준현 할머니께 이자리를 빌어 다시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가
을공연 하자고 부원들을 꼬실 목적으로 간 MT였으나 별로 반응들이 신통하지 않아 일
단 회장단으로 공연 팀을 짜고, 작품은 아서 밀러의 '다리위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결정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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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 1998년

[55회] '다리위에서 바라본 풍경' - 아서 밀러 작 , 차현민 연출, 1995년 가을


일 시 : 1995년 8월 31일 ~ 1995년 9월 1일
작 가 : 아서 밀러
Cast :
박상협(에디 역), 김대욱(마르코 역), 손보성(알피에리 역), 김경아(베아트리스 역), 윤완수(로돌포 역), 오재숙(캐더린
역), 이준현(루이 역), 김귀란(캐더린 역), 서종희(토니 역), 조병훈(수사관1 역), 성병윤(마이클), 최시영(수사관2 역)
Staff :
연출 : 차현민 음 향 : 최시영
무대감독 : 박상협 분 장 : 김귀란, 오재숙
기획 : 이준현 디자인 : 이미선
조명 : 김송희 사 진 : 김동철
장치 : 이준현, 길기철, 손보성 진 행 : 고석진, 곽태호, 서상원, 이상희

연출의 변

우리의 삶이란 지극히 평범한 하루하루의 연속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또 대다수의 사람은 교육에 의한 탓인지 갈등의 순간에서도 한발짝 뒤로 물러
나 적당히 타협하고 감정이 어느 극단으로 흐르지 않도록 중용을 지키고자 한
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를 미덕으로 칭송한다.
이작품의 주인공 ‘에디’는 어떠한가? 그도 지극히 평범한 어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우리 이웃임에 틀림없다. 단 한 가지 그의 결점이 있다면 조카딸에 대한
과도한 사랑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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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순수성을 항변하고 주위 사람들의 충고에 분개한
다. 이러한 그가 물론 위선적으로 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숨기
지 않고 다 드러내 보인 그가 오히려 가식적이지 않고 더 진실한 인간의 모습
이 아닐까 한다. 이번 작품을 통해 감정에 솔직했던 한 인간이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그리고자 했음을 밝힌다.
올해는 우리 연극부가 의욕적으로 활동했던 한 해였다. 영하의 마리아홀에서 준
비했던 지난 봄 공연, 두 작품을 올렸던 Work Shop, 그리고 이번 가을 공연까
지 힘들더라도 잘 따라주었던 모든 연극부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이번
공연으로 올 한해를 풍성히 마무리했으면 한다.
끝으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고 틈틈이 조언을 해 주셨던 김영민 동문회장님
과 윤여웅 지도교수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0여명의 등장인물이 필요한 관계로 참여 안 하겠다던 부원들을 이래저래 설득하고


몇몇 등장인물 자르고 외부에서 몇 명 데리고 와서 드디어 연습을 시작하였는데 연출이
처음인 나에게 작품이 너무 크고 버거웠다. 가을공연 외부연출은 이미 명맥이 끊겨 생각
도 못하고 있었다. 캐스팅과 대본분석 및 대본 편집 까지는 비교적 잘 되었는데 블로킹
부터 진도가 나아가질 않았다. 이때 당시 인턴으로 강남성모병원에 있던 이경욱 선배가
때맞춰 등장하였다. 평소 듣던 대로 이경욱 선배는 한번 작품에 손대기 시작하자 무섭게
몰아쳐 본업도 잊고 날마다 나타나 거의 모든 장면을 다 만들고 배우들을 지도하였다.
자연스럽게 나는 뒤로 물러나 공연 막판에는 무대장치 만드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들이
게 된다. 선배들의 헌신적인 지도와 배우들의 열정 및 원작이 가지고 있는 강렬한 힘으
로 공연은 성공적으로 마쳤는데 실제 공연 중 주인공 ‘에디’가 처조카에 연정을 품고 하
는 대사 '넌 아무데도 못가...' 에서 들렸던 객석의 비명소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92-93년 연극반으로서는 참으로 어려웠던 시기를 넘기고 94-95년은 다시 중흥


의 깃발을 올리고 나름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배우로써도 연출로써도
참담한 실패를 겪었기에 우울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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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 1998년

추억의 습작

손보성 (의·39회)

추억을 들추어 보는 것이 이렇게 설레는 일인 줄 몰랐다.


대학 시절 나의 열정과 추억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곳... 마리아홀 그리고 연극부... 이제
는 사라져 버린 곳이지만 나의 기억 속에서 마리아홀은 아직 옛 모습 그대로이다.

1995년 워크샵 " 수업료를 돌려주세요"

극중 역할은 교장선생님이었다.
분장 준비 중 한 컷... 이때를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늘씬한 몸매였었는데...ㅠ.ㅠ
아무도 기억을 못한다....ㅠ.ㅠ
연극부에서 먹은 술 때문에 몸에 부종이 생겼다.;;;;

1995년 가을공연 "다리위에서 바라본 풍경"


극중 배역은 변호사 ‘알피에리’. 극 전체의 나레이터 역할이었다.
극의 마지막 대사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마지막 대사를 하면서 나도 모
르게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에디’와 ‘마르코’의 싸움
상협이 형과 대욱이 형의 갈등과 액션이 돋보였던 연극이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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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회] '돼지와 오토바이' - 이만희 작 , 박상협 연출, 1996년 봄

주~~연 : 손 보 성!!
블로킹이 너무 복잡해서 너무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연습하던 중 한 장면을 훌쩍 뛰어 넘어갔던 적도...
‘돼지와 오토바이’는 90년대 연극부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연극이었다.
바로 이 연극 ‘돼지와 오토바이’를 통해 90년대 후반을 주름잡게 될 대배우 ‘손보성이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1996년 워크샵 "뜻대로 생각하세요" (It Is So, If You Think It Is)

루이기 피란델로(Luigi Pirandello) 작, 연 출 : 손 보 성 !!


나의 첫 연출 작품이었던 ‘뜻대로 생각하세요’
10명의 배우를 작은 무대 위에 올리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었다.
수업 시간 내내 사람모형을 만들어서 완성한 블로킹... 이 극의 연출을 하면서 블로킹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하게 된 것 같다.
나의 연극 선생님이었던 태호 형...
‘뜻대로 생각하세요’를 연출하면서 내게 가장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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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 1998년

[57회] '메디아' - 에우리피데스 작 , 이남희 연출, 1996년 가을

극중 배역 ‘야슨’.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장치...
공연장 바닥을 전부 철판으로 깔고, 뒤에 계단을 만들기 위해 밤새워 톱질을 했던 무대장치였다.
공연이 끝나고 장치를 부술 때 정말 마음이 아팠다.
연기를 위해 삭발까지 했던...
강한 카리스마를 위해 당시 연출을 하셨던 이남희 선생님이 삭발을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삭발을 했건만 삭발한 모습을 본 연출님의 한마디에 쓰러지고 말았다.
"귀여워졌네. 실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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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회] '동승' - 함세덕 작 , 김민정 연출, 1997년 가을

기획: 손보성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그 연극 ‘동승’
메디아에 이어 두 번째로 아름다운 무대장치였던 것 같다.
나무는 서울종합예술학교에서 슬쩍 해온 것 이고 옆의 돌담과 바위는 스티로폴과 종이
상자로 만든 실감나는 무대장치였다.
더운 여름에 마리아홀에서 스티로폴을 톱으로 잘라 커다란 바위 모형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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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 1998년

[59회] '마지막 포옹' - 윌리엄 인지 작 , 손보성 연출, 1998년 봄

보성이의 첫 연출작!!! 하지만 사진이 ㅠ.ㅠ


마지막 포옹은 사형수의 죽기 전의 심리와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다.
심오하고 어려운 작품이었지만 탁월한 연출력으로 호평을 받은 작품이었다.(혼자 생각-.-;;)
연습을 할 당시 추운 겨울이었지만 배우들은 죄수복 하나만 걸치고 하느라 블로킹이나
대사, 감정이 아닌 추위와 싸우면서 연습을 했던 가슴 아픈 기억이 있는 작품.
그 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후후 물론 연출을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지요.

[60회] '한여름밤의 꿈' - 셰익스피어 작 , 김중기 연출, 1998년 가을

배역은 요정의 왕 ‘오베론’...쫄바지의 아픈 추억이;;;


의상 담당이 투덜거렸던 기억이 난다.
다른 사람의 쫄바지는 만원인데 내 것만 만천원이라고...-.-;;
연극부에서 먹은 술 때문에 생긴 부종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나보다.
오베론의 카리스마에 관객이 압도되었던 가장 기억에 남는 연기였었다
‘한여름밤의 꿈’은 아쉽게도 사진이 많이 없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기에 사진을 찍기가 무척 어려웠다는 후문이.. 공연을 위해 한
달간 무용을 배웠었던...^^

이상이 저의 추억의 습작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이제는 기억마저 아득해져버린 대학시절 연극부에서의 추억이 다시 살
아나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희망은 잠자고 있지 않는 인간의 꿈이다.


인간의 꿈이 있는 한, 이 세상은 도전해 볼만하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꿈을 잃지 말자, 꿈을 꾸자.
꿈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에겐 선물로 주어진다.

--아리스토 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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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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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1회 세일즈맨의 죽음 1999년 9월 3,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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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5회 김치국씨 환장하다 2004년 9월 3,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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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6회 한 여름밤의 꿈 2005년 9월 2,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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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1회 트랜스 십이야 2009년 8월 25,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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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99년 ~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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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제 71회 트랜스 십이야 2009년 8월 25,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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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S 1999년 ~ 2009년

제 71회 트랜스 십이야 2009년 8월 25,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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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부 창립 40주년을 맞는 2000년, 의약분업 사태의 여파로 준비 중이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공연을 취소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
듬해인 2001년, 예술의 전당에서 ‘창립 40주년 기념 홈커밍데이’를 가졌다. 2005년 ‘한 여름밤의 꿈’은 1982년부터 공연장으로 사용되어왔
던 ‘마리아홀’에서의 마지막 공연이었으며, 2008년 ‘밑바닥에서’가 신축 성의회관 ‘마리아홀’ 개관기념 공연이다.
2006년 ‘홈커밍데이’에서 ‘창립 50주년 기념 재학생, 졸업생 합동공연’을 하기로 결정하였으며, 2010년 3월 ‘50주년 기념공연 발대식’을 갖
고 50주년 공연의 첫 발을 내딛었다.

연극부 최근 10년[1999년부터 2009년까지]

1) 2) 3) 4) 5) 6) 7)
김동진(의·45회) 이두수(의·45회) 김지혜(간·47회) 이유선(간·50회) 심정우(의·51회) 이창건(의·51회) 이한얼(본4)

* 최근 10년의 연극부 역사는 당대의 역사를 스스로 평가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에 ‘연극
부 역사’라고 이름 붙이지 않고 ‘연극부 최근 10년’이라 제목을 정했습니다. 내용도 최근
10년간 연극부 활동을 하며 느낀 소감과 에피소드들을 적었습니다. 선배님들이 저희들의
최근 10년간 연극부 활동을 회상하고 평가하시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들이라 생각합
2)
니다.

1999년 5월 워크샵 <소시민의 결혼> (작: 브레히트 / 연출: 김동진)

한 소시민 가족의 결혼피로연장에서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를 다룬 연극으


로 기억하고 있다. 젊은 남녀의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전혀 신랑 신부는 주목받지 못하고
주위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신혼집 살림에 트집을 잡다가 피로연은 아주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 와중에서도 신랑 이대근 군과 신부 김숙경 양은 찐한 포옹과 키
스씬을 하며 막을 내린다.
98학번 이대근과 99학번 신입생들과 함께한 작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김동진)가 어
떻게 연출을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공연 연습 내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었던 것 같
다. 지금 생각하면 복잡한 생각 안하고 그냥 작품에 나와 있는 모습들을 재밌고 맛깔나
게 보여주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과 관련하여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문혜신양이 그렇게 신부를 많이 하고 싶어 했는데 캐스팅이 어머니로 되어 하염없이 눈
물을 흘렸던 일이다. 생각이 짧은 연출 때문에 맘고생 한 것 같다. 연극 중간 중간 민진
수가 내뱉는 상황파악 안된 할아버지 대사는 답답한 가운데 웃음을 주는 순간이었다. 나
중에 바다가 보고 싶다를 통해 연기가 무엇인가를 보여준 영규가 간간히 보여준 로봇
걸음과 강렬한 인상을 주기위해 상대배우에게 따귀를 사정없이 치던 모습도 추억으로
남아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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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 2009년

[61회] '세일즈맨의 죽음' - 아서 밀러 작 , 문영동 연출, 1999년 가을


아서밀러 원작, 문영동 연출, 황현석 무감, 최진현 기획

정말 대단했다. 우리는 마리아홀 무대를 앞으로 넓히고 2층 집을 지었다. 카리스마와


에너지가 넘치는 문영동 연출님 지도하에 여러 가지 연극의 기본기부터 탄탄히 배워갔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집안과 집밖의 공간으로 나누어진 무대 구분과 그 무대를 이용
한 공간의 변화 또한 복잡했지만 잘 표현되었고 연기하는 사람으로서도 흥미진진했다.
단연 윌리(세일즈맨) 역할을 했던 현석이 형의 연기는 정말 뛰어 났다. 가장으로서 갖는
스트레스와 가족과의 갈등, 잦은 실패들과 이에 대한 부정, 결국은 자살. 이 모든 것들은
사실 현재의 아버지들도 가지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잘 표현되었다. 실제로 현석이
형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다른 배우들도 모두 열심히 하였고 나름대로 성공적인 공
연이 되었던 것 같다.1)

2000년 5월 워크샵 <데모스테스의 재판> (작: 이근삼 / 연출: 문영규)


1)
시종일관 우울한 모습을 보였던 주인공 데모스테스(혁수)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워낙 극
중 말하는 장면보다 조는 장면이 많았던 데모스테스는 런 뛰는 중 실제로 잠들었음에도 불
구하고 대사 전에 일어난 저력까지 보여주었습니다.3) 당시 배우 중 유일한 연극부였던 김
지혜는 변호사로 나와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보여 줘 연극부 보물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
죠.1) 검사로 나온 오민진양은 비록 연극부원은 아니었지만 굉장한 열정을 보여주며 공연
당일에는 변호사를 향해 울부짖는 장면에서 실제 울어 상대역을 깜짝 놀라게 하는 모습도
3)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멘시키 역을 맡고 있던 배우가 공연을 삼일 앞두고 출연을 포기하
는 사태가 발생, 연기지도를 해주던 김숙경 양 이 그 자리를 대신해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
쳤던 기억이 납니다.1)

2000년 가을 정기 대공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의료파업으로 연극 중단.


조진범이 성의회관 앞 계단에 앉아 담배 무지하게 피우면서 ‘우리 연극 못해’라고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다들 의약분업보다 준비하던 연극을 하지 못하는 상실감이 더 커보였
습니다. 하지만 연극부 일원들은 의약분업 관련 교내와 교외 행사에서 구호대와 조명 등
으로 활발히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2)

2001년 5월 워크샵 <아폴로> (작: 장 지로두 / 연출: 김지혜)

발명협회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유쾌하고 명랑한 이야기였습니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그냥 미남이라고 말하세요” 라고 하던 대사가 생각납
니다.
이 말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변화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배우로는 김흥석, 윤소영, 박서라, 황주철, 정철홍, 이두수 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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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석, 윤소영의 풋풋한 연기와 박서라, 황주철의 능숙한 부부 연기, 정철홍과 이두수의
독특한 연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장치장 민진수는 돌도끼부터 온갖 대형 장치들까지 뚝딱뚝딱 혼자 만들어내어 놀라게
2)
했습니다. 당시 남자가 퇴장을 하는 큰 창문이 필요하였는데 단 하루 밤 만에 뚝딱 만
3)
들어내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이대근, 김동진, 문영규가 만들어낸 따뜻한 분위기의 조명도 극과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김지혜는 연출로서 특유의 꼼꼼함과 추진력 그리고 기차화통을 삶아먹은 화통함으로 처
음 연기하는 신입들을 능숙하게 이끌었습니다.
차현민 선배님부터 최진현, 김태우, 황현석, 함수경, 조경아, 김숙경, 문혜신과 같은 연기
선배들의 지도와 끈끈하다 못해 한 가족이 되어버린 조직력에 연극부에 완전히 빠져들
어 버렸습니다. 선배님들은 떠먹여 주기에 바빴고 신입들은 받아먹느라 바빴습니다. 이
공연은 황주철의 데뷔무대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황주철은 한동안 바보 주인공자리를 놓
2)
치지 않았습니다.

[62회] '오장군의 발톱' - 박조열 작 , 현미자 연출, 2001년 가을


박조열 원작, 현미자 연출, 민진수 무감, 조진범 기획
공연일시 : 2001년 9월 7일(금)~ 8일(토) 오후 6시
공연장소 :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 마리아홀
CAST :
오장군 - 황주철(예1)
어머니 - 문혜신(간3)
꽃분이 - 김숙경(간3)
먹 쇠 - 김지혜(간2)
군의관, 관료C, 동 사령관 - 김동진(본2)
집배원A, 동 교관, 관료A, 동 전속부관, 동 상사, 서 사령관 - 이두수(본2)
군의관, 집배원B, 운전병, 서 정보장교 - 조진범(본2)
조교A, 동 정보참모, 서 참모A, 영현 하사관 - 문영규(본1)
조교B, 인사장교, 관료B, 동 작전참모, 동 수색중대장 - 민진수(본1)
STAFF :
장치 : 조진범(본2), 이두수(본2), 민진수(본1), 황주철(예1)
조명 : 김동진(본1), 이대근(예2), 문영규(본1), 김흥석(예1)
분장 : 김숙경(간3),박서라(간1)
의상 : 문혜신(간3),윤소영(간1)
소품 : 김지혜(간2)
진행 : 최진현(본4), 김태우(본4), 황현석(본3), 함수경(간4), 조경아(간4)
음향 : 김동진(본2)
팜플렛 디자인 : 이대근(예2)

무척 더운 여름이었습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해에는 마리아홀을 원하는 만큼


쓸 수 없었던 사정이 있어서 종합학습실이나 강의실에서 연습을 했습니다.
현미자 연출님은 항상 호흡을 강조하셨었는데, 우리는 처음에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한 호흡’에 하지 않았다고 무척이나 많이 혼났습니다.^^
그러다가 숙경이가 우스갯소리처럼 ‘숨 안 쉬고 끝까지 대사하면 안 혼나는 것 같다’고 했
습니다. 크게 웃어넘겼지만 계속 혼나다 못해 한번 해보니까 정말 그렇더군요. 그 당시에는
호흡의 의미는 잘 모르고, 혼나긴 싫어서, 숨 한번 안 쉬고 한번에 대사 치느라 애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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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 2009년

먹었습니다. 그때 주철이는 숙경이와 우물 앞에서 공연 중 무대에서 떨어졌는데 어찌나


빨리 다시 뛰어올라오는지 한 걸음에 껑충 뛰어 올라오더군요. 정말 몸무게를 무색하게
하는 과감한 액션이었습니다. 나중에 관객들에게 물어보니 아무도 그 장면을 어색하게 기
억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숙경이와 혜신이가 보여주었던 정적이 가득한 분위기에서 한마
디씩 오가는 논밭에서의 장면은 호흡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물론 숨 쉴 것
다 쉬면서 말이죠.) 비전문가가 보더라도 ‘아! 이것이 한 호흡에 한다는 것이구나’라고 느
껴질 정도였습니다. 정적이 흐르는 것이 느껴지고 침묵의 힘이 전해졌는데 조용한 가운데
모두가 빠져들었고 관객도 함께 정적을 더해갔습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했습니다. 친
구들에게 물어보았을 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동진이가 동쪽나라 사령관으로 바비인형을
들고 혼자서 전략에 대해 독백하는 장면이었다고 했습니다. 소름끼치는 카리스마가 돋보
였습니다.
사실 제일 좋아했던 장면은 문영규와 민진수가 함께 몸짓을 보이며 상관에게 상황보고 하
는 장면이었습니다. 어찌나 합이 잘 맞던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으면 하는 생각
도 들고 저렇게 함께할 수 있는 우정이 부러웠습니다.
이두수는 그때 오장군을 지휘봉으로 때리는 역할을 하다 지휘봉을 놓쳐 간담이 서늘했
습니다. 그 지휘봉은 마리아홀의 오른쪽 벽 커튼까지 날아갔습니다. 아 정말 누군가 맞
기라도 했으면 이거 어떡하나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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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범은 무대 위에서 담배 피우는 장면이 있었는데 너무 자연스러웠습니다. 어둡고 조
용한 무대 위해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은 일품이었습니다. 정말 진짜 군인 같
2)
았습니다. (지금은 실제로 군인입니다^^)
김지혜는 소로서 열연했는데 대사가 대부분 “뫼에~~뫼에~~”였습니다. 대사 속에 정서를
전달하는 연기가 일품이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오 장군이 죽어 그 유골함을 들고 무대
를 한 바퀴 도는 장면이었는데 그렇게 많은 연습 중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공연날 오장군의 죽음을 보는 장면에서 쏟아져 진짜 눈물을 뫼에~ 함성에 담았더니 가
2)
장 울음이 실감났다는 말씀을 해주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어깨 견장 바꾸기였습니다. 일인 다역을 하다 보니 동
쪽나라 사령관을 하다가 서쪽나라 병사도 했다가 하니 그 순간 어깨에 있는 견장을 뒤
집어 다른 색으로 보여지게 해야 하는데 이게 그렇게 힘들었습니다. 조명이 켜진 순간
오른쪽에는 동쪽나라 왼쪽에는 서쪽나라 견장을 차고 있으니 장군이의 유골함을 들고
1)
무대를 빙빙 도는 장면에서 계속 나라가 바뀌는 것처럼 보이니 참으로 민망했습니다.

2002년 2월 봄 워크샵 <파수꾼> (작: 이강백 / 연출: 김지혜)

이 공연은 암흑기에 접어든 연극부에 신입생 유치를 하기 위해 어렵게 결정한 공연이었


습니다. 다만 신입생 유치를 위한 공연이 너무 어두운 나머지 신입생은 한 명도 들지 않
은 절망적인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배우가 적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지만 신입생 유
3)
치를 위한 것이니만큼 밝고 재밌는 것을 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두수가 장치를 맡았는데 장치가 소홀해서 스스로 부끄러웠습니다.
문영규의 담담한 듯하면서도 깊이 있는 내면연기에 이두수와 김동진은 모두 감동했습니
다.
워크샵 ‘아폴로’ 이후 김지혜가 다시 연출을 맡아 훌륭히 마무리 했습니다. 이두수는 외
부 연출님 말고는 주로 김지혜가 연출하는 것만 보아서 지금도 연출하면 김지혜가 떠오
릅니다. 개인적으로는 시연도 잘하고 표현도 잘하는 연출이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
다.
2)
김동진은 촌장으로서 뛰어난 리얼리티를 보여주었습니다.
객원 배우 김민성은 연극 초짜임에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찬사를 받았고 이대근은 굉장히
참여하고자 하지 않았었으나 역시나 배우 부족으로 결국 공연날에는 철조물 안에 앉아 연
3)
신 ‘늑대가 오고 있다’라고 외쳐댔던 기억이 납니다.
2)
역시 주인공은 황주철이었습니다. 황주철이 맡은 ‘파수꾼 다‘는 어리숙하지만 성장해가
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바보연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한참 고생했습니다. 다만 깜
깜한 밤의 무서움을 표현하기 위해 하루는 밤 11시에 마리아홀 조명 단 한 개만 켜고
실제 깜깜한 곳에서 했던 연습에서는 발군의 연기를 보여주어서 굉장히 기특했는데 바
3)
로 다음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역시 황주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주철이
2)
는 다음 공연에서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멋진 연기를 보여 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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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 2009년

[63회] '바다가 보고싶다' - 스가 고에이 작, 장우재 연출, 2002년 가을


스가 고에이 원작, 장우재 연출, 김지혜 무감, 문영규 기획
공연일시 : 2002년 8월 30일(금) 오후6시~ 31일(토) 오후 3시, 6시(2회공연)
공연장소 :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 마리아홀
CAST :
전수택 - 이대근(본1), 강철수 - 문영규(본2), 권지숙 - 김지혜(간3), 이봉구 - 황주철(예2)
STAFF :
장치 : 문동규(본2) 민진수(본1) 황주철(예2) 이재민(예1)
조명 : 이대근(본1) 문영규(본2)
분장 : 김지혜(간3)
의상 : 이정경(간1)
소품 : 황주철(예2)
진행 : 황현석(본4) 조진범(본3) 김동진(본3) 이두수(본3) 문혜신(간4) 김숙경(간4)
음향 : 이혜영(간2) 안무 : 윤화주 팜플렛 디자인 : 이미로

작품해설-작가소개 (무대감독 김지혜)


김응봉(일본명:스가 고에이)

그는 25세 때인 73년 '기시다 희곡상'을 사상 최연소로 수상했으며, 82년에는


소설 <가마다 행진곡>으로 전후태생 작가로는 최초로 '아꾸다가와상'과 더불어
권위를 자랑하는 '나오끼상'을 획득했다. 그는 소설가, 극작가, 연출가로서 일본
청년문화의 기수요, 신화적 존재이며 이번에 성의연극회에서 공연된 <바다가 보
고싶다>는 일본에서 10년 동안이나 롱런한, 그의 희곡상 수상작품인 <살인 사
건>이다. 또 이작품은 작가 자신이 한국에 건너와 직접 '뜨거운 바다'라는 제목
으로 전무송, 최주봉, 김지숙 등의 기라성 같은 배우와 공연을 감행, 국내 연극
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몇 년 전부터 배우 김지숙이 이
끌고 있는 극단 전설에서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김지은 감독이 연출로
공연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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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부 부원이 없어 문 닫기 전에 해보자고 했던 작품입니다. (알고 보니 선배님들의
시대에도 숱하게 있었던 일이었더군요.) 더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으신 선배님들께는 송
구스럽지만 그렇게 비장한 각오였던 것 같습니다. 캐스트는 이대근, 문영규, 김지혜, 황
주철 네 명 뿐이었습니다. 진행을 제외하고 보면 알 수 있듯이 소수의 인력으로 해낸 연
극이었습니다.
그런데 연극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이대근은 처음부터 끝까지 속사포처럼 대사를 이어갔
고 그간 쌓아왔던 모든 연극적 에너지를 쏟아냈습니다. 전체의 연극을 휘어잡는 힘이 대
단했습니다. 처음부터 끌어오던 힘을 클라이맥스로 내딛는 힘은 정말 굉장했습니다.
대근이가 꽃다발로 황주철을 수차례 내려치고 꽃잎들이 흩어지는 가운데 음악이 최대한
고조되었던 장면은 회상만 하여도 짜릿합니다. 거의 충격에 가까웠습니다. 이대근과 문
영규의 탱고댄스와 문영규가 속옷 바람으로 바바리를 펼치는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합
니다. 파격적인 장면이었지만 연극에 너무 잘 녹아있어 자연스러웠습니다. 이 연극이
좋아 정식 공연도 다 봤지만 그 전에 런 뛰는 것도 계속 봤습니다. 연습하는 것을 지켜
2)
본 김동진이 ‘영규 연극 너무 잘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황주철은 썬글라스를 끼고 ‘마이웨이’를 멋들어지게 불렀고(목소리가 극과 잘 맞아떨어
졌던 것 같습니다)2) 그간 했던 연기 중 가장 뛰어난 몰입도를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마
지막 김지숙을 목 조르는 장면에서는 너무 몰입한 나머지 땀을 뚝뚝 흘리며 손에 너무
3)
힘을 줘 장면 끝나고 켁켁거릴 정도였습니다. 또한 김지혜는 평상시 전혀 여성적이지
않아 연출님의 특명으로 연습때 마다 화장을 하고 여성스럽게 하고 다니는 등의 노력으
로 다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농후한 연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듬 해 후배들에게 여성
2)
스러움에 대해 지도를 하여 선배들이 깜짝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실력도 있었지만 네 명 모두 연극만을 위해서 모든 인생을 투자하고자 했던 열정이 완
연히 드러나는 무대였습니다.(그들은 옆에서 보면 마치 연극에 중독된 사람 같았습니
2)
다.)
배우가 부족하고 연기하기도 벅찼던 때 기획을 맡은 문영규는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선배님들 및 주변 상가 섭외를 혼자서 다 돌아 당시 부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다만 매일 돈 없다며 술집가면 안주 없이 술만 사줘서 당시 술집 사장님께서 불쌍히 여
겨 안주를 주시고, 배우들에게 라면만 먹여 같이 밥을 먹는 연출님께서 김치라도 달라며
3)
울부짖는 등 여러 원성도 샀습니다. 이 작품의 포스터에는 문영규 군(당시 기획)의 심
1)
리 상태가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배우도 적고 모두 고생하며 했던 작품
이지만 특히 당시 부원들을 불쌍히 여겼던 차현민, 김경주 선배 부부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최근 11년 이상 모든 순간 저희와 함께 해주시고 연극반의 무구한
1)2)3)4)5)6)7)
역사가 이어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점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적은 부원들이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매일같이 새벽 3~4시까지 함께
술을 마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서로에 대한 애정을 쌓을 수 있었던 작품이기도 하였습니
3)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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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 2009년

[64회] '인어전설' - 정의신 작 , 김낙형 연출, 2003년 가을


정의신 원작, 김낙형 연출, 황주철 무감, 민진수 기획
공연일시 : 2003년 8월 29일(금) , 30일(토) 오후 6시
공연장소 :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 마리아홀
CAST STAFF
시인 - 이대근(본1) 장치 : 민진수(본2) 이재민(예2) 이민기(예1)
노파 - 김지혜(간4) 이한얼(예1)
영식 - 황주철(예2) 조명 : 이대근(본1) 황주철(예2) 김경문(예1)
영호 - 이재민(예2) 심정우(예1)
아버지 - 김경문(예1) 분장 : 김지혜(간4) 장지연(간1) 양수정(간1)
어머니 - 이보나(간1) 소품 : 이유선(간1)
영수 - 이민기(예1) 의상 : 이보나(간1) 윤지혜(간1)
영규 - 이한얼(예1) 음향 : 김경문(예1)
영길, 숙자 - 이유선(간1) 작곡 : 지상현
영희, 깜치 - 양수정(간1) 진행 : 조진범(본4) 김동진(본4) 이두수(본4)
제니, 남감독부인 - 윤지혜(간1) 문동규(본3) 문영규(본3)
금어 - 장지연(간1) 팜플렛 디자인:민희선(이화여대 비서학과3)
남감독, 남씨, 우씨 - 심정우(예1) 포스터 디자인:배수정(이화여대 시각디자인과3)

작품해설(무대감독 황주철)
<인어전설>은 1990년대 초 일본에서 극단 '신주쿠료산바쿠'에서 공연한 작품으
로 1993년에 내한공연을 펼친 적이 있다. 1987년 재일교포 2세 김수진을 대표로
도쿄에서 결성된 극단 '신주쿠료산바쿠'는 일본에서 가장 다이나믹하게 연극활
동을 펼치고 있는 젊은 극단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인어전설>은 서울 여의도
한강변에 대형 텐트를 설치하고 공연하여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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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부 신입생들이 대거 입성하며 연극부를 살렸습니다.
힘든 연극부를 누가 들랴 하는 생각에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목마른 사슴이 우
물을 찾듯… 한번만 도와주세요’ 라는 내용의 전단지도 만들었었습니다.(이재민 주민등
록증 복사본도 첨부했었습니다^^)
나중에 신입생들의 얘기를 듣고 보니 다들 연극에 대한 열망도 강하고 스스로 하고 싶
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2)
신입부원의 활기찼던 분위기가 생각납니다.
다만 1학년을 제외하고는 배우라고는 황주철 뿐이어서 당시 4학년이었던 김지혜와 더
이상의 연극은 하지 않겠다는 이대근을 기획이었던 민진수가 간신히 무대로 끌어들여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연극의 'o'자도 모르는 신입생들과 함께하는 무대라 이대근과
김지혜가 무대 기본을 담당하여 연습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비주얼을 중요하게 보셨
던 연출님이라 복싱장면, 춤추는 장면 등 한 장면 한 장면 만드는데 하루에 몇 시간씩
3)
연습해서 멋진 장면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인어전설은 노래와 춤이 있는 연극이었습니다. 배우 모두가 부르는 떼창도 있었고, 여자
셋이 부르는 코러스도 있었습니다. 금어의 솔로 노래는 모두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단체
로 부르는 떼창 부분은 목소리가 튀거나 음정이 안 맞는 배우들은 하나씩 제외되어 실
4)
제로 노래를 무르는 배우들은 절반 정도였고 탈락된 배우들은 립싱크를 해야 했습니다.
코러스 역할을 맡았던 여자 셋은 우산을 돌리면서 춤을 추는 장면이 있었는데, 하필 구
해온 우산이 수동 우산 이었습니다. 안무에는 우산을 접었다 피는 장면도 몇 번 있었기
때문에 수동우산을 구해온 기획을 원망하기도 했으나 연습에는 장사가 없다고, 치열한
연습 끝에 본 무대에서는 실수 없이 우산을 폈다 접었다 하며 틀리지 않고 안무를 소화
4)
할 수 있었습니다.
이한얼은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역할을 능숙하게 소화했고 맨 무릎으로 땅바닥에 떨어
지는 역할을 하는 통에 봉와직염이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공연을 강행하는 투혼을 보여
2)
줬고 공연 끝나고 바로 입원하였습니다. 김경문은 아버지 역할이었는데 느긋하고 느릿
한 특유의 말투를 연출님께서 지적하시며 시연을 보여주셨는데 경문이와 똑같이 연기하
3)
셔서 모두들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권투감독 역할로 출연한 심정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연극부에 들기 전까지만 해도 심정
우가 무대에 배우로 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배우 최초로서의 경험을 준 작품입니
다.
심정우의 첫 등장씬에서 부부 싸움 후 부인이 던지는 쟁반 대여섯 개를 한손으로 연속
해서 잡아서 흡사 쇼처럼 보이게 해야 했습니다. 안경을 벗고 무대에 올라야 되어서, 잘
안 보이는 상태에서 해야 했기에 애로사항이 있었습니다. 반복되는 연습을 통해 공연 당
시에는 쟁반을 거의 떨어뜨리지 않고 잡아서 탄성을 이끌어냈던 기억이 납니다.
신입생 모두가 처음으로 하는 공연이라 연습 초반에는 실수도 많았지만, 김낙형 연출님
과 여러 선배님들의 혼신어린 지도 덕에 모두들 능숙하게 공연을 서서, 모두가 스스로도
5)
놀랐던 작품으로 기억됩니다.
2)
이 공연을 통해 당대 연극부는 신구 조화를 이루고 세대교체를 이루어내게 됩니다.

490
1999년 ~ 2009년

인어전설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몽환적인 내용으로 여러 장치가 등장


하였는데, 시인과 노파가 등장하는 공원의 벤치를 모아 나룻배를 만들어 강을 거슬러 오
는 것처럼 표현 한 것은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그 때 만들었던 벤치들은 동아리방으로
옮겨져 오랜 시간동안 연극반 회원들의 휴식을 책임지게 됩니다. 가족들과 금어가 나오
는 나룻터 마을의 고물상은 폐타이어로 꾸며졌고, 슬레이트로 만든 한쪽의 벽은 앞으로
내릴 수 있게 되어있어 그 위로 배우들이 등장하여 대사를 하기도 하고, 코러스들이 노
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특이한 장치 중의 하나는 영희가 등장하는 보조 무대였는데,
샤막을 이용하여 실루엣만 비치게 함으로써 영희가 현실이 아니라 영길의 환상에만 존
재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부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샤막을 설치한 보조무대는 사실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마리아홀에 있던 그랜드피아노였고, 영희는 뚜껑을 덮은 그랜드 피아
4)
노 위에 올라가 대사를 했습니다.
가족 이야기였는데 연극부 신입들이 이미 이때 가족처럼 보였습니다. 현재에도 가장 끈
2)
끈하고 모두가 연극에 열정적인 학번입니다.

2004년 5월 워크샵 <수업료를 돌려주세요>

(작: 프린츠 카린시 / 연출: 이한얼 / 무감: 이유선)


공연장소 : 구 마리아홀

줄거리

어느 학교 교장실에 18년 전에 졸업한 '물짱구'라고 하는 졸업생이 찾아온다.


그는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이 하나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고, 결국 일자리를 잃게 되었으므로 18년 전에 낸 수업료를 돌려달라고
한다. '물짱구'는 자기가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음을 시험으로 증명하겠다고 한
다. 긴급 교사 회의가 열리고 영악한 교사들은 아주 쉬운 문제를 내어 합격시키
려 한다. 즉시 구두시험이 치러지는데 , 엉터리로 대답하는 물짱구를 교사들은
온갖 이유를 대며 '최우수' 점수를 준다. 결국 마지막 수학 시험. 수학 교사는
앞서의 교사들과 달리 아주 어려운 문제를 낸다. '물짱구'는 정말 모르겠다고 하
며, 수학은 낙제이니 만큼 18년 전 수업료 33만 3천 12원을 돌려달라고 한다.
이때 수학 선생은 최우수 학생이라며 합격을 선언한다.

다시 신입생 흉년이 일었다. 신입생은 의과 이창건과 조준형 뿐.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는 생각에 성의연극회는 워크샵을 단행합니다. 이 과정에서 김정유(본과 2학년)가
참여하고 결국 연극반에 들어오게 됩니다.
매일 수업이 끝나고 301 강의실에서 연습했습니다. 배우는 신입생 또는 연기 경험 1번
의 연기 초짜들, 연출 역시 예과2학년 이한얼군. 다행히도 많은 졸업 선배들의 연기 지
도 덕에 그래도 막은 올랐습니다.
학생 연출 이한얼 군은 이때부터 엄하고 무서운 프로 이미지를 쌓아나갑니다. 1학년 당
시에는 걷는 게 어색하여 휠체어로 앉혀졌다는데 전혀 그런 이미지는 완전히 지워졌습

491
니다. 아마 이때를 계기로 연극에 더 심취하여 결국은 학생 연출 3번과 명연기로 호평
받는 연극인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짱구의 조준형, 교장 선생님의 이민기, 물리 선생님의 이창건, 수학 선생님의 김정유,
지리 선생님의 윤지혜, 역사 선생님의 이유선... 연기 초짜들의 무한도전이 떠오릅니다.
술자리에서도 워크샵 얘기는 잘 나오지 않아서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는데 가끔 술안주
로 꺼내야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땐 이랬지 싶고 그립기도 하고.. 감회가
6)
새롭습니다.

[65회] '김치국씨 환장하다' - 장소현 작, 하일호 연출, 2004년 가을


장소현 원작 하일호 연출 김경문 무감 이재민 기획
공연일시 : 2004년 9월 3일(금) , 4일(토) 오후 6시
공연장소 :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 마리아홀
CAST : STAFF :
김양 - 김정유(본2) 장치 : 이민기(예2) 이재민(본1) 이한얼(예2) 조준형(예1)
김치국 - 김경문(예2) 조명 : 심정우(예2) 김경문(예2) 이창건(예1) 양수정(간2)
카메라맨 - 심정우(예2) 분장 : 윤지혜(간2) 장지연(간2)
수사관, 우측남 - 이한얼(예2) 의상 : 이보나(간2) 김정유(본2)
마누라, 오마니 - 이유선(간2) 소품 : 조준형(예1)
리포터, 진행자, 치어리더 - 장지연(간2) 음향 : 이창건(예1)
옆집여자, 마님 - 양수정(간2) 진행 : 문동규(본4) 문영규(본4) 민진수(본3)
김평천 - 이창건(예1) 포스터제작 : 이소희(서울대 미대 서양학과 2)
진행자, CF 감독, 고위당국자, 홍보팀 : 이재민(본1) 이민기(예2) 이보나(간2) 윤지혜(간2)
정치인, 수사관2 - 조준형(예1)

작품해설 (무대감독 김경문)

'김치국씨 환장하다'는 현재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시는 장소현 씨의 원


작이다. 김치국씨는 6.25 전쟁 직후 삼팔선을 넘어와 온갖 고생을 하며 김밥집
사장으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어느 날 신문을 읽다가 자신이 18억원이라는 큰
돈을 북한 동포 돕기 기금으로 적십자사에 기증을 했다는 기사를 보게 된다. 이
에 방송국 기자들이 들이 닥치고 그는 자기 뜻과는 상관이 없이 시민의 표상으
로 떠오른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텔레비전 토크쇼에 나와 자기 노릇을
한다는 사실에 황당해하는 그를 수사기관은 남파공작원으로 몰아세운다. 김치국
씨의 쌍둥이 형 김평천 씨가 체포되고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해 바지를 내려 거시
기를 확인하게 된다. 김치국 씨는 누명을 쓰게 되지만 이것은 꿈이었다는 것이
결말이다. 이 작품은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분단과 이산가족의 아픔과
상처라는 주제를 풍자 패러디와 희화화로 가볍게 표현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분단을 뛰어넘어 화해로 나아가자는 결론을 보여준다. 또한 통일의 진정한 의미
와 언론에 대한 비판 역시 담고 있다.

하일호 연출님이 섭외되었고 추천 작품을 몇 개 갖고 오셨습니다. 리딩을 하면서 다수결에


남겨진 두 작품은 ‘청춘예찬’과 ‘김치국씨 환장하다’. ‘청춘예찬’은 작품성이 강점이었지만
욕설이 많고 내용이 너무 음침하다는 판단 하에 ‘김치국씨 환장하다’가 낙점되었습니다.6)

492
1999년 ~ 2009년

한 쌍둥이 형제의 일화를 통해 남북 분단의 현실과 이산가족의 아픔이라는 주제를 담고


5)
있는 작품입니다. 김경문과 이창건의 이미지가 비슷하다는 ‘착각’은 이 작품에 더욱 힘
을 실어줬습니다. 결국 김치국에 김경문, 그의 쌍둥이 형 김평천에 이창건이 캐스팅 되
었고 그들은 착각을 진실로 만드는 작업으로 한달 반을 보냅니다.

연출님의 작품 컨셉은 “더욱 더 재밌게!!”로 맞춰졌습니다. 일단 김치국의 김경문식 북한


사투리는 그 자체로도 웃겼습니다. 수사관 한얼이와 김양 정유누나가 어느 쪽이 진짜 김
치국인지 가려내기 위해 바지를 내리고 곧휴를 비교하는 장면은 지금도 화끈거립니다. 김
치국과 김평천이 ‘Holliday' 노래에 맞춰 슬로우 모션으로 서로의 얼굴을 강타하는 장면,
김평천이 티비에 나와 노래와 춤을 추는 장면, 조준형이 도올 김용옥 흉내를 내어 티비에
출연하는 장면, 김평천 아내 유선이가 가느다란 김평천에게 있는 힘껏 달려와 full 점프로
안기는 장면......... 솔직히 감동기 쫙 빼버린 웃음만을 위한 장면이 많아 아쉬운 면이 있지
만, 연극을 준비하는 내내 배우들은 참 신이 났었습니다. 서로 아이디어 짜고 맞춰보고
하며 마리아홀(구)에서 밤샌 날이 많았고 야식은 필수인지라 이때 다들 배가 많이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6)
‘김치국씨 환장하다‘의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바로 그림자 인형극으로 김치국이
독백하는 내용에 맞추어 A4용지에 그림그린 후 붙여서 자른 하드보드지 인형을 가지고
흰 막에 조명을 비추어 그림자 인형극을 연출하였습니다.4)

배우들이 무대 뒤에서 조종하는 인형극을 중간마다 삽입하여,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던

493
작품으로 기억됩니다. 아울러 처음 등장씬은 객석에서 관객들에게 인터뷰를 하는 모습으
로 시작했었는데 신선한 발상의 전환이었던 것 같습니다. 연극 무대에서 배우들의 연기
5)
이외에 다양한 소품과 장치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인형극의 처음 1/3은 연출님의 지도하여 무난하게 진행되었지만 그 뒤는 시간에 쫒기면
서 연출님의 지도를 받지 못하게 되어 배우들이 자력으로 인형극을 꾸며야 했습니다. 그
래도 새로운 경험에 모두들 열심히 하였고, 관객들이 많이 웃어주시고 즐거워 해주셔서
4)
더욱 더 힘내서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첫 정기공연 날, 워크샵과는 비교도 안되는 긴장감에 무대에 제대로 서기도 힘들었지만
관객들의 웃음소리에 점점 목소리와 동작에 힘이 들어갔었습니다. “이 맛에 연극한다”는
닭살돋는 말이 제 입에서도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우리 성의 연극회의 극관에는
많이 어긋난 연극이었지만 첫날 공연 후 선배님들의 응원과 격려는 지금도 정말 감사합
니다. 이번 50주년 기념 공연팀의 엠티에서도 느꼈지만 우리 연극회의 최고 강점은 선배
6)
님의 배려 하에 뭉쳐진 신구의 조화인 것 같습니다.

[66회] '한여름밤의 꿈' - 셰익스피어 작, 차지성 연출, 2005년 가을


세익스피어 원작
차지성 연출 이유선 무감 김경문 기획
공연일시 : 2005년 9월 2일(금) , 3일(토) 오후 6시
공연장소 :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 마리아홀
CAST STAFF :
오우버런 - 이재민(본2) 장치 : 이민기(본1), 이재민(본2), 이한얼(예2), 조준형(예2),
보틈 - 이한얼(예2) 장치 : 신기원(예1), 심은희(간1), 김경민(간1)
헬리너 - 양수정(간3) 조명 : 심정우(본1), 황주철(예2), 김경문(본1), 심정우(본1).
글로리아 - 윤지혜(간3) 조명 : 김병희(예1)
요정1, 시종1 - 이보나(간3) 분장 : 이유선(간3), 김민리(간1), 이혜진(간1), 지정화(간1)
요정2, 시종2 - 이유선(간3)
의상 : 양수정(간3), 양경윤(간1), 양희정(간1), 황초롱(간1)
라이샌더 - 조준형(예2)
소품 : 윤지혜(간3)
디미트리어스 - 이창건(예2)
음향 : 이보나(간3)
플루트 - 신기원(예1)
진행 : 민진수(본4), 김정유(본3), 김경문(본1), 이민기(본1).
테세우스 - 김병희(예1)
짐행 : 장지연(간3)
힙폴리타 - 양경윤(예1)
퀸스 - 양희정(예1) 포스터제작 : 조현수
허미어 - 이혜진(간1) 홍보 : 심정우(본1), 김경문(본1)
티타니아 - 김경민(간1)
퍼크 - 황초롱(간1)
에게우스 - 김은희(간1)
수잔나 - 김민리(간1)
스너그 - 지정화(간1)

형이상학적인 무대 도형을 통한 공간배치 속에서 많은 러브스토리라고 해야할지 사랑의


유형이라고 해야할지 각각의 커플들이 보여주는 연기가 깜찍하면서도 깊었습니다. 이재
민, 양수정, 윤지혜, 이보나, 이유선의 완숙한 연기와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신입들의
2)
패기와 열정으로 이루어냈습니다.
유명한 만큼, 벌써 여러 번 공연되었던 작품입니다. 연출님께서도 작품 고유의 완성도를
높이면서도 이 전의 다른 공연들과는 차별화를 위해, 약간의 각색을 하셨던 걸로 기억됩
니다. 마리아 홀에서의 마지막 공연인 만큼, 배우들도 열심히 준비하였고, 조명 스탭으로

494
1999년 ~ 2009년

참가한 저도 그러하였습니다. 조명 시설이 많이 낙후되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


한 보조 기구를 활용했었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사랑의 유형을 통해, 진정한 사랑이
5)
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기존의 ‘한여름 밤의 꿈’과는 다른 캐릭터들이 인상 깊은 연극이었습니다. 내숭을 떠는
‘허미어’와 힘이 넘치는 ‘헬리너’, 오버하는 ‘라이샌더’와 소심한 ‘디미트리어스’ 등이 등
장하여 웃음을 선사하였습니다.
한여름 밤의 꿈은 의상을 모두 제작하였는데, 등장인물이 20명에 이르러 의상을 만드느
라, 모두 고생이 많았습니다. 배우들은 스탭 일도 병행했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
동대문에 들러 천이랑 자재를 사고, 학교로 이동하여 연극연습을 하고 틈틈이 쉬는 시간
마다 미싱을 돌리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 바느질을 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의상은
공연 전 날에서야 겨우 마무리 되었는데, 가까이서 보면 구멍이 나고 바늘땀이 엉망이
고, 옷핀과 똑딱이 단추로 얼기설기 엮은 옷들이었지만, 조명을 받고 머리를 장식한 조
화들과 어우러지자 녹색, 분홍색, 보라색, 갈색, 황토색등 무대를 총 천연색으로 물들여
배우들을 더욱 빛나도록 해주었습니다.
4)
구 마리아홀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공연이라 더욱 뜻깊은 공연이었습니다.

[67회] ‘사랑을 찾아서’ 김광림 작, 차지성 연출, 2006년 가을


김광림 원작, 차지성 연출, 이한얼 무감, 이창건 기획
공연일시 : 2006년 9월 1일(금) , 2일(토) 오후 7시
공연장소 : 나루아트센터 소공연장
CAST
최부장 - 박창균(예1), 김대리 - 이준엽(예1), 미스터 하 - 남 욱(예1), 미스 리 - 황초롱(간2), 김막동 처 - 계수현
(간1), 김억만 - 김유철(간1), 이순례 - 양희정(예2), 박영문 - 김병희(예2), 이웃남자, 국군장교 - 이한얼(본1), 이웃
여자 - 김은희(간1), 수사관, 사랑을 찾는 한쌍의 남자 - 이재령(간1), 사랑을 찾는 한쌍의 여자 - 김은희(간2)
STAFF
장치 : 이민기(본2), 조준형(본1), 신기원(예2)
조명 : 황주철(본1), 심정우(본2), 김경문(본2)
분장 : 신선애(외부), 이혜진(간2), 강민경(간1)
의상 : 양수정(간4), 이유선(간4)
소품 : 양경윤(예2), 지정화(간2)
음향 : 신기원(예2)
진행 : 김정유(본4), 황주철(본1), 이재민(본3), 이창건(본1), 양수정(간4), 이유선(간4), 이보나(간4), 윤지혜(간4),
장지연(간3)
포스터 제작 : 양경윤(예2), 정영권(미술반)
홍보 : 김민리(간2), 김경민(간2), 임은지(간1), 요시키(간1), 박유미(예1)

495
06년 성의연극회는 새로운 도전을 시도해야만 했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마음의 고향이었던
마리아 홀이 병원 확장으로 인해서 문을 닫아야만 했고, 따라서 새로운 공연장에서 공연을
해야만 했습니다. 강남으로 이전한 이후 몇십 년 만에 처음부터 공연장소를 섭외해야 했고,
연습장소도 마땅치 않았으며, 첫 대관 공연으로 인한 예산의 설정 등등 많은 일들을 예전과
는 다르게 알아보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서초 시민 회관, 한전 아트센터 등등
수많은 공연장에서 이미 예약이 다 잡혀있다는 매몰찬 이야기만 듣고 발을 구르고 있을 때
였을 즈음 삼성역 아트센터에서 공연장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연장이 마련되었
음에도 수많은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땅한 연습 장소를 구하기 힘들어 에어컨도,
환풍도 되지 않는 탁한 학교 지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연습을 진행하였고, 공연장의 대
관도 3일 정도로 리허설도 겨우겨우 마친 채 공연을 진행하였습니다. 정들었던 마리아홀을
떠나서 하는 첫 공연이었던 만큼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올린 극 ‘사랑을 찾아서’는이렇게
올라갔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아가기 위해, 과거의 ‘김억만’이 ‘이순례’와의 만남을
현재까지 잊지 않고 그리워하며 항상 기억하기를 원했던 이 작품은 첫 대관 공연이라는 이
름을 갖게 되었고 1, 2학년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졌기에 젊음의 열정과 패기로 멋진 마무리
7)
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현직 메이크업아티스트인 신선애가 외부 스탭으로 분장팀에 참여하여, 분장을 도와주고,
분장팀에게 분장의 기본 및 노하우를 차근차근 알려주어 그동안의 분장을 재정립하는 기회
4)
가 되기도 했습니다.

[68회]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 위성신 작, 이한얼 연출, 2007년 봄


위성신 작 이한얼 연출

496
1999년 ~ 2009년

07년 봄 공연 ‘사랑에 대한 다섯 개의 소묘’는 2000년 초반 이후 끊겼던 봄 정기 공연을


재학생들의 열정에 의해서 몇 년 만에 올린 봄 공연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
다. 가을 정기 공연 “사랑을 찾아서”가 신입생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졌기에 공연에 참여하
지 못하였던 많은 재학생 선배들과 신입생들에게 연극의 불길을 일으켰고 여름 공연이 끝
나자마자 겨울 공연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11월달에
이미 공연이 결정되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다섯 개의 소묘”는 사랑에 대한 다양한 연령들
의 다섯가지 에피소드를 통해서 사랑의 의미와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
아가는 옴니버스 식 극입니다. 마리아 홀이 없어졌기에 조명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의
과학연구원 대강당에서 공연을 올려야만 했었고, 무대도 열악했지만 연극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의미 있는 봄 공연을 올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몇 년 만의 재학생 연출 공연
이었기에 시행착오도 많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뛰어든 작품이었기에 중간 중간
후회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선배님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무대는 모든 후회를
잊고 땀방울을 흘릴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그렇게 몇 년 만의 재학생 공연은 신입생들에
게 커다란 호응을 얻어 11명의 신입생들이 연극부에 새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7)

[69회] ‘우리 읍내’ 손톤 와일더 작, 송형종 연출, 2007년 가을


손톤 와일더 원작, 송형종 연출, 남욱 무대감독, 신기원 기획
공연일시: 2007년 8월 31일 (금), 9월 1일 (토) 7시
공연장소 : 로빈아트홀
CAST :
무대감독 - 성주희(간1), 의사 깁스 - 남 욱(예2), 조오지 깁스 - 나도현(예1), 레베카 깁스 - 계수현(간3), 깁스 부
인 - 최문경(예1), 윌라드 교수 - 고운정(간1), 하우이 뉴우썸 - 박상민(예1), 편집장 웹 - 김유철(간2), 에밀리 웹 -
신소영(간1), 웹 부인 - 이양현(예1), 위리 웹 싸이먼 스팀스 - 이동원(예1), 쏘옴즈 부인 - 양경윤(본1), 워린 보안
관 쌤크레이그 - 박병훈(예1)
STAFF :
조 연 출 : 김병희(본1)
장 치 : 박창균(예2), 조준형(본2)
소 품 : 양희정(본1), 계수현(간2)
음 향 : 이하늘(간1), 고운정(간1)
조 명 : 이준엽(예2), 김은희(간3)
의 상 : 이재령(간2), 김다솜(간1), 임은지(간2)
분 장 : 강민경(간2), 이혜진(간3), 김은희(간2), 임예지(간1)
진 행 : 이재민(본4), 심정우(본3), 이창건(본2),
김동욱(본2), 장지연(간4), 김경민(간3)
연기지도 : 황주철(본1),이민기(본3), 이한얼(본2), 김경문(본)
포스터 제작 : 신기원 (본1)
포스터 그림 : 유초롱 (외부)
홍 보 : 지정화(간3), 황초롱(간3), 박유미(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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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작품 선정 과정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우리읍내’는 30주년기념공연을 포
함해 정기공연에만 두 번이나 올렸던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대를 뛰어넘는 감동을
목표로 선배님들이 예전에 올렸던 공연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일상적인 삶, 결혼, 그리
고 죽음이라는 우리들의 삶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다루는 작품이라 막이 가까워
질수록 아직도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는 것이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소극장에서의 무대라 연습이동의 불편함과 대관비가 들고, 관객 수용
의 한계가 있었지만 관객과 가까운 거리에서 배우의 표정과 호흡이 관객과 소통된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극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캐스트들이 모두 신입생들이라 연극막판까
지 걱정을 많이 했으나 연출님의 연출능력과 기본적으로 작품이 가지고 있는 무게와 의
미가 배우들의 연기를 빛나게 해주었던 연극이었습니다. 예전 선배님들의 작품과 다른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그것이 이루어졌는지 궁금합니다.7)

[70회] ‘밑바닥에서’ 막심 고르끼 작, 이한얼 연출, 2008년 가을


막심 고르끼 원작, 이한얼 연출, 계수현 무대감독, 이준엽 기획
공연일시 : 2008년 8월 26일 (화), 27일 (수) 오후 7시30분
공연장소 : 가톨릭대학교 성의회관 1층 마리아홀
CAST :
부브노프-박상민(예1), 남작/메드베제프-김준성(예1), 쏘냐-정규선(간1), 루까-황주철(본2), 미하일/꼬스띌료프-이준엽(본1), 끌료쉬-이
동원(예2), 나타샤-유연지(예1), 안나/알료슈까-유연지(간1), 싸씬-박병훈(예2), 영문과 교수-나도현(예2), 베뺄-김은재(예1), 배우-계
수현(간3), 바실리사-신수정(간1)
STAFF :
장치: 남욱(본1),박창균(본1),신기원(본2)
조명: 최문경(예2),나동현(예2),김병희(본2)
음향: 아하늘(간2)
의상: 고운정(간2),임은지(간3),김다솜(간2)
분장: 강민경(간3),박유미(본1),임예지(간2),이양현(예2)
소품: 성주희(간2),신소영(간2),김은희(간3)
진행: 이민기(본4),김동욱(본3),이창건(본3),조준형(본3),이혜진(간4),황초롱(간4)
연기지도: 김경문(본3),김경민(간4),지정화(간4),양경윤(본3),양희정(본2)
포스터 제작: 유초롱(외부)
홍보: 김은희(간3),김정우(본3)

2008년은 새롭게 개관한 성의회관 마리아 홀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


마리아홀의 자취를 기억에 품고 있는 마리아 홀 세대에게 이곳은 아쉽고도 설레는 장소
가 되었습니다. 마리아홀=연극부 라는 공식이 성립했던 과거. 그리고 그 전통을 이어가
기 위해서 우리는 뜨거운 여름을 그곳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새로운 마리아 홀에서의 50
여일... 새로운 사랑과의 만남을 뜨겁게 보내기 위해 우리는 무대 위에서 구르고 또 굴렀
습니다. 이번 공연 작품인 ‘밑바닥에서’는 연극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으로서 사
람들의 삶의 이야기, 연극이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성’에 주목하고 싶었습니다. 남들
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그들의 삶의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었고 최대한 노력했습니다.7)

498
1999년 ~ 2009년

[71회] ‘트랜스 십이야‘ 셰익스피어 원작, 오동식 각색, 이성구 연출


윌리엄 세익스피어 원작, 오동식 각색, 이성구 연출, 박상민 무대감독, 박병훈 기획
공연일시 : 2009년 8월 25일 (화), 8월 26일 (수), 7시 30분
공연장소 : 가톨릭대학교 성의회관 1층 마리아홀

CAST STAFF
오시아 - 이루리(간1) 분 장: 임예지(간3),유연지(예2),강민경(간4),
봐이크 - 박창균(본2) 박유미(본2)
올리 - 남 욱(본2) 소 품: 이하늘(간3),신소영(간3),김은희(간4)
세바스 - 김고운(간1) 음 향: 이양현(본1),정규선(간2),임은지(간4)
쏘냐 - 최문경(본1) 의 상: 유지연(간2),정규선(간2),고운정(간3),
앤시아 - 정효선(간1) 계수현(간4)
바니걸 - 박세원(간1) 장 치: 김은재(예2),이동원(본1),김준성(예2)
아크 - 나도현(본1) 조 명: 성주희(간3),이준엽(본2)
마리스 - 도유진(간1) 진 행: 심정우(본4),조준형(본4),김병희(본3),
앤 - 김신영(본1) 양경윤(본3)
선 - 박상민(예2) 홍 보: 김동욱(본4),이창건(본4),양희정(본3)
경찰1 - 김준성(예2) 연기지도: 김경문(본4),황주철(본3),이한얼(본3),
경찰2 - 이동원(본1) 신기원(본3)
신부 - 김은재(예2) 포스터 제작 : 박병훈(본1)

마리아홀에서의 두 번째 공연입니다. 작년에 올렸던 ‘밑바닥에서’의 비극적 분위기와


는 정반대의 희극적 분위기, 그리고 관객들의 웃음이 그리웠습니다.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의 학제변화로 의과대학 신입생이 없어 걱정했으나 본과생들의 참여와 의학전문대학원1
기가 연극회에 들어오고 무대에 오름으로써 걱정을 무색하게 했습니다. 외부연출, 장치,
조명팀과 호흡을 맞추었는데 새로운 마리아홀의 큰 무대를 감당하기 힘들었고, 비싼 조
명기기들에 비해 실제 실용도가 떨어져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이 때 기억에 남았던 것은
마리아홀에서 2박3일 합숙을 하면서 연출님 아래의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디테일을
잡았던 기억입니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배우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그들의 연기, 센스,
열정을 옆에서 직접 배울 수 있었습니다.7)

499
인사드립니다. 47회 졸업생 민진수입니다.

민진수
(의・47 회, 내과 전공의 4 년차)
1999 년 2 월 한영고 졸업.
1999 년 3 월 가톨릭의과대학교 입학

1999년 5월 워크샵
소시민의 결혼(작: 브레히트 / 연출: 김동진)
맡은 역은 천방지축의 "아버지".
의예과 1학년 문영규 군과 문동규 군은, 4월의 어느 화창한 오후, 모 실습실에서 실험은 안하
고 그 당시 워크샵 숙제인 "털 뽑기" 등을 하면서 몹시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과 같은 실습조였던 저는 그들의 열정적인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은 이번 실험
을 무사히 혼자 마쳐 그들이 편히 워크샵을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살신성인의 마음을 가졌
습니다.
그러나 한 구석에서는 연극에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참여하고픈 마음이 조금씩 싹트고 있었고,
마침 배우를 하겠다는 한 친구가 빠지는 바람에 제가 그 자리에 대신 설 수가 있었습니다.

1999년 9월 가을정기대공연
세일즈맨의 죽음(작: 아서밀러 / 연출: 문영동)
음향 키잡이.
그 해 여름은 친구와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지만 취소가 되고, 집에서 은
둔 생활을 하고 있던 중 음향 키를 잡게 되었습니다. 동기들의 멋진 연기를 무대 밖에서
바라봐야 할 뿐...

2000년 5월 워크샵
데몬스테스의 재판(연출: 문영규)
맡은 역은 여왕의 "경호원"
의예과 2학년. 신입생 유치가 아주 어려웠던 그 해. 다시 한번 워크샵을 하게 되었습니
다. 이로서 연극은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공연 며칠 전 갑자기 또 명의 여배우가 빠지게
된 상황이 되어 간호학과 2학년 김 모양이 또 한번 워크샵 무대를 서게 되었습니다.

2000년 9월 가을정기대공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윗집 아저씨 역을 맡았으나, 의료파업으로 연극 중단.

500
1999년 ~ 2009년

두 번의 워크샵 배우를 끝내고, 드디어 정기공연의 배우로써 다시 한번 무대 위에 서봤


지만.... 막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2001년 5월 워크샵
'....' 제목이 기억이 안 나요 --;;;;
장치짱
의학과 1학년. 워크샵 최고의 장치의 총책임을 맡은 장치짱. 그해 봄은 무지 더웠습니다.

2001년 9월 가을정기대공연
오장군의 발톱(작: 박조열 / 연출: 현미자)
무대감독 & 조교B, 인사장교, 관료B, 동 작전참모, 동 수색중대장
다시 한번 정기공연의 배우로서 무대 위에 섰습니다. 그해 여름 역시 무지 더웠습니다.

2002년 2월 워크샵
파수꾼(작: 이강백/연출: 김지혜)
진행

2002년 9월 가을정기대공연
바다가 보고싶다(작: 스가고에이 / 연출: 장우재)
진행

2003년 9월 가을정기대공연
인어전설(작: 정의신 / 연출: 김낙형)
기획

2004년 5월 워크샵
수업료를 돌려주세요(작: 프린츠 카린시 / 연출: ?)

2004년 9월 가을정기대공연
김치국씨 환장하다(작: 장소현 / 연출: 하일호)
진행

2005년 9월 가을정기대공연
한여름밤의 꿈(작: 세익스피어 / 연출: 차지성)
진행

2006년 2월 가톨릭의과대학교 졸업
2006년 3월 의정부성모병원 / 강남성모병원 인턴
2010년 가톨릭중앙의료원 내과 전공의 4년차

재학생 동안 5번의 워크샵과 5번의 정기공연의 막이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는 것...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졸업생으로서 55의 정기공연을 볼 수 있을 것을
기대합니다.

501
나의 성의연극회 활동 [1999~]

문영규 (의·46회)

1999년 연극부를 가입한 뒤 벌써 11년이 지났네요.


연극부를 가입한 것은 연극에 관심이 있거나 소질이 있어서 가입한 것이 아니라 선배를
따라가다가 저도 모르게 어쩌다 가입한 형태라서, 연극을 한다는 것에 대한 자신은 항상
없었습니다.

예과 1학년 워크샵 공연으로 브레히트의 '소시민의 결혼' 이라는 작품을 하였는데, 20


여개의 대사를 가진 이름도 없는 손님 역할을 하면서 동상처럼 굳은 채 벌벌 떨며 대사
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해 정기공연으로 하였던 대작 '세일즈맨의 죽음'에선 선배들의 수준높은 연기를 볼 수
있었죠.
저는 마찬가지로 벌벌 떨면서 세일즈맨의 아들의 친구 역할을 하였고, 마찬가지로 연출
님이 시키신대로 로보트처럼 움직였던 기억만 조금...

예과1학년 때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그냥 그렇게 흐른 뒤, 마침내 예과 2학년이


되었을 때인 2000년, 의약분업 사태가 터지고...학생들의 수업거부 투쟁으로 인해 그만
정기공연을 올리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연극부 창립 40주년이었고, 40주년 기념공연에 맞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라는
대작을 올려보기로 기획 후 연습까지 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연극부로서 열심히 투쟁에 참여했던 기억이 나네요...
목소리가 큰 우리 연극부가 주축이 되어 가톨릭의과대학 구호대를 결성하여 학생들 앞
에 나가 구호를 이끌었던 기억이 납니다.
'보복부는 자폭하라 교과서적 진료보장!!! 투쟁 투쟁 투쟁!!!' ㅋ

2001년이 되면서 그동안 힘든 써클이었던 연극부가 더 힘들고 하기 싫어하는 써클이 되


어 가고 있었습니다.
연극부의 분위기가 항상 강압적이었고, 매사에 유연성 없게 연극부 일들이 이루어지면서

502
1999년 ~ 2009년

2001년 '오장군의 발톱' 이라는 공연을 올린 후부터는 부원들의 마음이 연극부를 점차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신입생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 지경까지 되어 2001년 가을 제가 연극부 회장을
맡았을때, 간호학과 2학년 김지혜(부회장), 예과 1학년 황주철(총무)이 활동 가능한 회원
의 전부였습니다.
실제 연극부를 활동하는 회원이 3 명이 되어버린 아주 힘든 시기에 무언가 돌파구를 찾
고자 김지혜가 연출을 맡고 저와 황주철이 출연한 신입생환영공연 ('파수꾼')을 하여 신
입생 유치를 하려 하였으나, 신입생 모집에 실패... 결국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2002년도 역시 회장, 부회장, 총무가 전부인 연극반을 운영하면서 정말 암울하고 힘들


었습니다.
이제 연극부가 문을 닫아야 하나? 라는 위기 속에서 2002년 가을 공연 '바다가 보고싶다'
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98학번이지만 학교를 오래 다니고 있었던 이대근 선배가 선뜻 배우로 서주겠다고
해 총 4명이 출연하는 연극을 기획하였고, 기획 과정에서 차현민 선배님의 헌신적인 도
움으로 연극부를 나갔던 사람들까지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 점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연극공연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과정 속에서 연극부 회원들이 더욱 단결할 수 있었고 즐거운 분위기가 형성되
었습니다.

2002년 정기공연을 무사히 마친 뒤 2003년 신입생이 무려 8명이나 들어오는 대박이 터


집니다.
그 후 연극부에 활기가 더해져 현재까지 많은 부원이 있는 튼튼한 동아리가 된 것 같습
니다.
그 당시 연극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보통 기억에 남는 무대는 가슴
에 남아있다던데...
너무나 힘든 시절이어서 내 머릿속에서 그때 기억을 빨리 빨리 지워버렸나 봅니다.
그래서 연기를 어떻게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503
인사드립니다. 48회 졸업생 김정유입니다.

김정유 (의・48회)
정신과 전공의 3년차

정신과 전공의로 서울성모병원에 근무 중인, 전공의 3년차 김정유입니다.


송파구 석촌동에 거주중이며 90년대 후반부터 다수의 재학생 회장을 배출한 한영고등학
교를 거쳐 2001년 가톨릭 의과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예과1학년 처음 입학하던 시절부터 연극을 하고 싶었으나 부모님의 반대와, 당시는 무
시무시하게 느껴졌던 진범오빠 등의 압박으로 연극하고 싶다는 말 한마디 절대 꺼내지
못하고 3년의 세월을 보낸 뒤, 본과 2학년 봄 뒤늦게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연극반에 들
게 되었습니다.

2004년 워크숍 "수업료를 돌려주세요"의‘수학 선생’

공연을 관람하면서 동경만 해왔던 연극 무대에 처음으로 서보는 경험이었습니다.


한 편의 연극 공연 뒤에는 오랜 기간에 걸친 대본의 탐구와 인물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공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얼마나 속 좁고 내 위주로만 세상과 사람들을 보고 판단해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느끼는 실망감과 자괴감이
어찌나 컸던지요.
공연 날, 점심 김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울었더랍니다... -_-;;
문영규 선배와 주철이가 잘 설득하고 달래주어서 겨우 공연을 마쳤던것 같습니다.

후배들에게 배워가면서 했던 공연이지만 어색하지 않게 적응하도록 도와준 후배들이 너


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용기를 북돋워주신 차현민 선배님과 이경주 선배

504
1999년 ~ 2009년

님, 김귀란 선배님, 조경아 선배님 등 졸업생 선배님들의 도움이 연극반에 발담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나 이준현 선배님의 "조진범! 정유가 연극반 안 든다고 하면 너 이 피쳐 다마셔라"
라는 애프터에서의 한마디로 쐐기를 박게 되었지요.

2004년 가을 정기공연 "김치국씨 환장하다"의‘김 양’

전체 1시간 반 분량의 극에서 약 1분 정도 등장하는 짧은 배역이었습니다.


파격노출을 감행하며 짧고 굵게 가겠다는 컨셉 하에 도전했던 김 양 역을 제대로 소화하지는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아 있습니다. 초반 연습기간에 많이 참여하지 못해 작품에 제대로 몰입
하지 못했던 점도 있겠고 사실 김양이라는 배역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해했으나 정체성을 파악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공연에 출연함으로써 연극반 정식회원 자격을 얻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습니다~~ ^^;;
제가 많이 부족했지마는 공연을 보신 선배님들이 많이 기억해 주시는 배역이라 행복합니다.
출연작이 두 편밖에 되지 않아 미흡한 소개입니다.
잠시나마 연극을 경험했던 기간 동안 쓰라린 자괴감을 맛본 것이 더 많이 기억에 남습니다.
"연극의 매력은 연극을 제한하는 그 모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친구와 한 적이 있습니다.
연극을 제한하는 요소에 저 같은 배우도 있겠지요. ^^;;
그렇지만 그 매력 때문에 연극을 한 편 볼 때마다 또 한편 한편의 작품들을 보고 싶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나에게 또 무슨 이야기를 던져줄까?’ 하는 기대로 말이지요.

연극도 연극이지만 연극반은 저에게 또 다른 의미로 감동이 되었습니다.


가끔씩 모임에 나갈 때면 오랜만에 만나도 항상 친근하고 정감 넘치시는 선배님들, 그리고 선
배님들이 살아가시는 모습들이 너무 아름답고 행복해보여 제가 그 일원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찹니다.

저도 앞으로 열심히 나오고 후배들 잘 챙기는 선배가 되겠습니다. ^^

505
연극부를 추억하며

이민기 (의・50회)
도화면 보건지소 공중보건의사

제 짧은 인생 속에서 가장 큰 감동 중에 하나였던 성의연극회에서의 생활에서 가장


저의 심장을 흔들었던 두 가지를 떠올린다면 첫 공연에서의 커튼콜, 그리고 두 번째 공
연에서의 오프닝 순간 입니다.
물론 그 외 기억하고 추억할 것들은 너무나 많지만요 ^^;;

첫 번째의 감동은 머리 속의 기억과 온몸에 흘렀던 당시의 전율로만 기억에 남아 있


습니다. 가끔씩 ‘그 때의 감동을 재현해낼 수만 있다면 꽤나 큰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텐데’라고 혼자 생각하곤 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된 두 번째 공연인데요.
그때의 오프닝은 커튼으로 가려진 어두운 무대 위에 저 홀로 앉아 라이트가 서서히 켜
지고 커튼이 올라가는 것을 무대 뒤의 작은 의자에 앉아 바라보면서 시작했는데, 당시
흘러나왔던 음악과 객석에서 저만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 극한으로 긴장된 희열로
저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더군요.
그 후 몇 개월이 지났을까요. 그때 귀를 세차게 울렸던 음악이 다시 한번 너무나 듣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으나 작곡가와 곡의 제목도 모르는 상태에서 곡의 일부만을 잠시
들었던 저로서는 찾는 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당시 음향을 담당했던 친구한테 물어봤더라면 어땠을까 하며 무척이나 후회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 6 년간을 찾아다녔을까요.


크리스마스 가족모임에 가려고 형수님 차를 얻어탔는데, 형수님이 틀고 계셨던 CD 에서
그때의 음악이 흘러나오더군요.
6년 만에 처음 듣는 이 음악이 저를 얼마나 눈물짓게 하던지……. ‘Steve Barakatt’의
‘Flying’이라는 곡입니다.

또 하나의 이야깃 거리. 마리아 홀을 쓰던 예과 2학년 워크샵 때의 일입니다.


당시 35분 공연의 처음과 끝을 담당할 만큼 꽤나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506
1999년 ~ 2009년

그만큼 선배님들의 요구치도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계속적인 연습으로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이래저래 싸움도 많이 했습니다.
토요일로 기억되는 어느 날 김양수 선배님과 차현민 선배님이 오셔서 연기 지도를 해주
시고 계셨습니다. 제가 홀로 무대 위에서 대사를 하는 장면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와중
잠깐의 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여자 친구와 전화를 하면서 말다툼이 있었고 만나서 해
결해야겠다는 생각에 두 졸업선배가 무대 밑에서 배우들 무대 위로 나오라는 말이 들리
는 와중에 경문이에게 뒷일을 맡기고 마리아홀 뒷문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ㅎㅎ;; 가방이
객석에 있는 이유로 교통비 몇 천원을 애들한테 빌리고 그냥 튀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졸업선배 두 분의 직접적인 연기지도를 받고 있던 와중에 도주를 한, 참
정신없는 후배였던 것 같습니다. 사랑의 힘이란~ㅎㅎ;;

507
첫 공연의 추억 [2003년]

심정우 (의・51회)
망운 보건지소 공중보건의사

안녕하세요. 전 성의연극회 졸업생인 의과 03학번 심정우입니다.


이번 50주년 기념 연극 공연에 앞서 재학 시절 남아있는 연극에 대한 추억을 회상해보
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에 가장 남는 연극은 2003년 신입생 때 배우로서 참가한 ‘인어 전설’입니다.
그때까지 연극이란 걸 해본적도 없고, 무대에 서본 적도 없기에 제가 배우로서 무대에
올라 연극을 하게 되리란 걸 생각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 따라 들어온 연극반에서 연극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학기 중부터
시작한 연극반 집회 시간을 통해 선배님들의 도움으로 연극에 대해 조금씩이나마 배워
가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여름 방학이 되어서 정기 가을 대공연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맡은 배역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주된 역할은 권투 감독이었습니다. 비록 제가 가장 원하던
배역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마음에 드는 배역이었습니다.
당시 저희 공연에 연출을 맡으신 분은 대학로에서 활동하고 계시던 김낙형 연출님이었
습니다. 연출님께서는 하루에 한명씩 집중적으로 지도를 해주셨는데, 제 차례가 오지 않
아 저는 나름대로 잘 하는가보다 생각하였지만, 이게 웬걸 어느 날 저는 연출님께 집중
적인 훈련을 받았고, 연극인이 되는 것의 어려움에 저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 나는 성격도 조용한 편인데 아무래도 연극을 하는 건 좀 무리인가보다.” 이런 생
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의 어려움 속에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안 가졌던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마는, 예민한 편이라 그런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선배님들의 개인 지도를 통한 반복연습을 통해, 행동의 과장됨, 억양의 변
화 그리고 감정 표현 등의 여러 요소들을 집중 훈련할 수 있었고, 변화되는 저의 모습에
재미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제가 맡은 배역을 연기하기 위해서, 그 인물이 어떤 생애를 살아와서 이러한 성격
과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었는가도 탐구하였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연극의 심오함을 느
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대본으로만 되어있던 연극이 배우들의 연기 외에도 연출을 통한

508
1999년 ~ 2009년

여러 가지 장치와 조명 등으로 삼차원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보며 연극의 색다른 매력


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연을 며칠 앞둔 때에는 어느 때보다도 제 배역에 몰입하여, 연습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도 배역에 대해 생각해보고, 제가 조금이라도 더 배역에 가까워지기를 소망하였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50일간의 기나긴 연습 기간이 끝나가고, 공연 날짜가 다가왔습니다. 공연 전날 리허설을
하였는데, 긴장해서 그런지 왠지 전보다 연기도 잘 안되고, 남의 소품을 들고 나갔다 들
어오는 등 혼란이 많았고, 이 상태로 공연을 잘 올릴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같이 연극을 준비했던 형, 누나, 그리고 신입생 동기들의 도움과 격려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대망의 공연 날, 금요일 수업이 끝나고 찾아온 많은 학생들, 병원에서 오신 선생
님들, 그리고 배우들을 보러온 여러 가족 친지들 앞에서 공연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저의 첫 등장 씬을.... 부인과 다투다가 무대로 뛰쳐나가서, 부
인이 던진 쟁반 여러 개를 잡아서 휙 한 바퀴 돌고 마무리 하는 동작이었습니다. 연습
막판 때는 거의 성공하였으나, 그 때는 한 개를 실수 했던 걸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애
드립을 발휘하여 자연스럽게 수습하고, 대사를 치고 퇴장하였고, 공연 전 느꼈던 긴장감
이 해소되는 것과 함께 가슴의 벅차오름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권투 감독 외에도 여러 배역을 맡은 특성 상 의상도 자주 갈아입고, 소품도 바뀌고, 등
장과 퇴장도 많았지만, 연습했던 대로 큰 무리 없이 잘 해낼 수 있었습니다.
어느 덧 공연은 대단원을 향해 달려갔고, 여러 배우들의 열연 속에 성황리에 막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다들 리허설이나 연습 때보다 본 공연 때 몰입을 더 잘 해서인지, 여러
분들께서 열광을 해주셨고, 배우로 참여한 저도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시 공연을 관람한 저의 부모님께서도 내가 저렇게 연극을 잘 할 줄 몰랐다며 감동과
놀라움을 표현하셨습니다.
이튿날 공연도 성공리에 막을 내렸고, 이윽고 달려간 애프터에서 동기 배우들과 선배님
들, 그리고 연출님과 함께 뒤풀이를 하였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연극에 배우 또는 스탭으로서 참가 하였으나, 역시 가장 기억에 남
는 것은 신입생 때 참가한 “인어 전설”입니다. 가장 열심히 준비했던 연극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저의 첫 연극 경험이라는 것이 저를 더욱 설레게 하는 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추억하는 동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 대학교 시절 이런 소중한 추억을 가지게
해준 연극부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509
2004년과 2005년을 기억하며

이창건 (의・51회)
처인구 보건지소 공중보건의사

2004년
충남, 대전 향우회 신입생 환영식에서 술을 진탕 마신 다음날이었습니다. 추위에 덜덜
떨며 일어난 곳은 으슥한 지하방이었고 전 어제 술자리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주위
를 둘러보니 저 말고도 다른 두 분이 널부러져 자고 있었습니다. 방구석에 서 있는 화이
트보드에는 1호 조준형, 2호 이창건???.....!!.... 막 잠에서 깨신 영규 형과 민기 형이 미소
지으시며 물으셨습니다. “창건아 잘 잤어?” 제 연극반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신입생은 저와 조준형 뿐이었습니다. 의대 2명, 간호대 0명.... 연극반은 빡세고 술 많


이 먹는 동아리라는 편견에 막혀 신입생 유치에 실패한 것을 반성하며 "우리는 진짜 연
극하는 동아리"라는 홍보를 위하여 워크샵의 부활이 논의되었습니다. 이한얼 선배의 강
력한 주장에 워크샵은 시작되었고 바로 인원 모집을 하였는데 이 때 본과 2학년 정유
누나가 연극반에 가입하셨습니다.

첫 공연, 워크샵 ‘수업료를 돌려주세요’

510
1999년 ~ 2009년

배우가 대부분 1,2학년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오랜만의 학생 연출(이한얼)이라 선배들의


근심은 매우 커 보였습니다. 거의 매일같이 현민이 형, 경주 누나, 그리고 지혜누나가 오
셔서 연기지도를 해 주셨고 가끔씩 양수형도 오셔서 조준형을 우리의 주인공 물짱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거기에 반해 연출 한얼 선배는 외로워 보였습니다. 열정만으로 할
작업은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언제나 근심 섞인 한숨을 푹푹 쉬며 펜을 굴렸고 그래서
폭삭 늙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기회를 통해 연극반은 믿음직한 연출가 한명을 보유하
게 되었습니다. 이한얼 선배는 정기공연 ‘밑바닥에서’(2008)와 봄 공연 ‘사랑에 관한 다
섯가지 소묘’(2007)를 연출하게 됩니다.

첫 정기 공연, ‘김치국씨 환장하다’

이제는 삼, 사십 분짜리 연극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일, 이백만 원짜리 연극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관객은 마리아홀에 들어오고 싶어 창을
깨부수고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와 조준형은 바짝 긴장했습니다. 대학로
에서 하일호 연출님이 섭외되어 작품을 하나 갖고 오셨습니다. ‘김치국씨 환장하다’. 김
경문 선배와 제가 비슷하게 생겼다며 김치국과 김평천으로 바로 캐스팅 되었습니다. 거
의 모든 재학생이 배우로 캐스팅되어 장치팀을 따로 꾸릴 인력이 없어 현민이형과 진수
형이 오셔서 모든 장치를 다 만들어주셨습니다. 정말 두분은 요술공이셨습니다. 아~ 이
때 느낀 사실인데 마리아홀과 그 앞마당은 완전한 연극반 소굴이었습니다.
공연 당일 날 하일호 연출님이 나오시지 않는 당혹스러운 일이 있었고 연극이 코믹극으
로 흘러가버린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의 호응이 좋았고 이에 힘입어 학
교에서의 연극반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는데서 그 의미를 찾고 싶고, 그 다음해부터 10
명 이상의 많은 회원을 매년 뽑게 한데 일조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연극반 동문선배님들과의 뒷풀이 자리에서는 연극반의 힘을 느낄 수 있어 뜻
깊었습니다. 한 술집을 다 채워버린 동문회,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선배님들이 예전 추
억의 담소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며 저도 이 집단의 일원이란 자체에 뭉클거렸습니다.

511
2005년
우리끼리도 충분히 즐거웠지만... 그래도 저와 조준형에게는 새로운 얼굴들이 필요했습
니다.
연극반 신입생 유치를 위해 본과 1학년, 예과 2학년, 간호학과 3학년, 거기에 학교로 돌
아오신 주철이형까지 전격적으로 새터에 투입되었습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의예과 4명, 간호학과 5명. 연극반은 생기가 넘쳤습니다. 연기 지도를 위한 정기 집회가
열렸고 ‘굿닥터’를 대본으로 연습하였습니다. 또 틈만 나면 석민이형이 공보의로 계셨던
영월로 무일푼 여행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석민이형께는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한여름밤의 꿈’

그렇게 신나는 학기를 보내고 드디어 여름 공연의 시기가 도래하였습니다. 이번 공연은


마리아홀을 헐기 전 마지막 작품이라는 의미가 있어 선배님들의 관심은 예년보다 훨씬
지대하셨습니다. 신입생도 많아 분업이 가능하였고 연기파 기대주 신입생 황초롱과 양희
정이 있어 극에 대한 기대도 더해졌습니다. 작품도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여름밤의 꿈’
이라는 명작이 선정되어 재학생들은 들떴습니다.
하지만 연습은 꽤 힘들게 하였던 기억입니다. ‘한여름밤의 꿈’은 선배님들이 이미 1998
년에 성공리에 마친 작품이라 그 부담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차지성 연출님과 선배
님들간의 의견차가 있어 연기 경험이 짧은 1, 2학년들은 갈팡질팡 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런 난점을 연습량으로 극복했다고 자부할 정도로 마지막 마리아홀은 열정으로 가득했
습니다. 지금도 연극반 술자리 때 ‘한여름밤의 꿈’ 배우 멤버들끼리 구석 테이블 잡고
그때가 참 좋았다 자찬하곤 합니다. 연극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남들에게 대표작이라
고 자랑할 만한 작품 하나는 갖고 산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는 고마운
작품이었습니다.

512
1999년 ~ 2009년

가장 반짝이는 순간

이유선 (간・20회)

2003년 3월 성의연극회에 가입했을 무렵의 나는 연극의 연자도 몰랐었고, 연극에 관심


이 있지도 않았었다. 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발을 디딘 동아리방이 연극반이었고, 어색해
하면서도 반겨주던 선배님들과 동아리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그 자리에서 가입 하게 되
었는데, 그 이후 연극과 성의연극회는 나에게 있어 아주 의미 있는 한 부분이 되었다.
동아리방의 추억, 같이 관람했던 연극들, 봄, 여름, 가을 계절마다 갔던 MT, 등반대회,
졸업식... 성의연극회와 함께 했던 추억들은 모두 소중하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은 역시 공연의 추억인 것 같다.
첫 연극은 2003년 가을 정기공연인 ‘인어 전설’로 첫 무대의 설렘과 환희를 동시에 안겨
준 공연이었다. ‘인어전설’은 배우가 총 13명이었는데, 그 중 9명이 신입생이었기 때문
에 모두들 걱정이 많았다. “그래도 막은 오른다”지만 정말 막이 오를 수 있을까? 수십
번을 고민하게 했던 연극이었다. 연출을 맡으신 김낙형 연출님은 좋은 분이셨지만 연기
에 관해서는 한없이 무서운 분이셨다. 한 번은 매우 화가 나셔서 무대에 배우들은 일렬
로 세워 놓고 이 순서대로 “연극의 암적인 존재다"라고 하셨는데, 나는 연극의 암적인
존재 2번이었다. 발성도, 몸동작 하나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처음 하는 연기가 어색
하기만 했다. 그 해 여름은 많이 울고, 고민하고, 힘겨운 여름이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여름, 그리고 공연이었다.
이야기를 이끄는 시인 대근 오빠, 카리스마 넘치는 노파 지혜 언니, “체중조절 중이예
요”란 대사로 모두를 웃게 만들었던 영식 주철 오빠, 투지 넘치는 복서 영호 재민 오빠,
담배 피는 연기가 너무 잘 어울렸던 아버지 경문이, 아들들 때문에 언제나 걱정이 많았
던 어머니 보나, 정말로 게이 같았던 영수 민기 오빠, 접시도 던지고 노래도 했던 남 감
독 정우, 신비로운 여인 금어 지연이, 휠체어의 달인이 되어버린 영수 한얼이,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제니 지혜, 내가 목 놓아 불렀던 영희 누나 수정이, 그리고 시인의 과거 역
인 영길 역의 나...
스텝으로 고생했던 진범 오빠, 동진 오빠, 두수 오빠, 동규 오빠, 영규 오빠, 진수 오빠,
거의 매일 오셔서 연기지도를 해주신 현민 오빠와 경주 언니 및 동문 선배님들, 모두들의

513
땀방울이 모여 드디어 정말 오를 수 있을까 싶었던 막이 올랐다. 치열했던 여름의 끝에
있었던 공연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인어전설에서 했던 대사 몇
구절이 뇌리를 맴돌고, 그 때 불렀던 노래들을 흥얼거릴 때가 있다.
두 번째 연극은 2004년 봄 워크샵 ‘수업료를 돌려주세요’였다. 나의 배역은 역사 선생
이었는데, 사투리가 입에 붙지 않아서 고생을 했다. 수업을 듣는 기간에 연극 연습을 한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학기 초 가열차게 끊은 새벽 영어학원은 연극연습 하
느라 피곤하다는 핑계로 결국 거의 가지 못했다. 의상으로 사용하기 위해 몰래 가져갔던
엄마의 구식 정장을 잃어버려서 엄마에게 엄청 혼나기도 하고, 연극 외적으로 가장 파란
만장했던 공연이었다.

① ②

① 인어전설

② 수업료를 돌려주세요

③ 김치국씨 환장하다 ③

세 번째 공연인 2004년 가을정기공연 ‘김치국씨 환장하다’는 매우 재미있게 연극연습을


한 공연이었다.
하지만 연습은 매우 재미있게 하였으나 그만큼의 연기는 나오지 못해 공연 올리기 전
1~2주 동안 마음고생을 매우 한 공연이기도 했다. 특히 공연 당일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공연 당일까지 연기는 잘 되지 않았고 공연 두 시간 전까지 말 그대로 펑펑 울
었다. 분장이 눈물 때문에 지워져서 몇 번이고 분을 두드리고 지워진 분장을 다시 그렸
다. 그러나 공연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공연 전 몸을 푸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아지
기 시작했다. 그것은 될대로 되라는 체념이 아니라 무대에 오른다는 설렘이었다. 막이
오르고, 연극은 "play"라는 말 그대로 공연을 그리고 연기를 즐길 수 있었다.

514
1999년 ~ 2009년

2005년 가을정기공연 ‘한 여름밤의 꿈’은 가장 많은 것을 한 공연이었다. 무대감독,


분장짱에 의상팀, 그리고 배우까지... 배우로 설수 있는 마지막 무대라고 생각해서, 그리
고 마리아홀 폐관공연이었기 때문에 더욱 욕심을 부렸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중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 공연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감독이 되
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고, 의상은 시간에 쫓기다 못해 공연당일까지 바느질을 해야
했으며 분장은 공연 며칠 전까지도 컨셉을 잡지 못했었다. 특히 나의 연기는 언니들이
보러 와서 “니가 제일 못하더라”라고 할 정도였으니... 매우 바쁜 여름이었고, 배우로
서의 마지막 여름이었기에 더욱 아쉬운 여름이었다.
2006년 가을정기공연 ‘사랑을 찾아서’에서는 스텝으로만 참여를 했었다.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 하나가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어서 분장으로 초빙해 와서 같
이 공연을 준비했다. 학교 다닐 때보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더욱 친해졌고, 지금도 가끔
그 때 공연이야기를 하곤 한다.
길지 않은 내 인생에서 연극이 있어서, 그리고 성의연극회가 있어서 더욱 다채로울 수
있었고, 무대에 올랐던 그 순간은 단연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나는 소망한다. 다시 한 번 무대에 설 그 날을...

515
연극 맛보기, 연극 느끼기

김은희 (간・52회)

2005년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다.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가! 뭔가 특별하고 의미 있는


대학생활을 보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선택한 동아리가 바로 성의연극회였다.
‘연극’
중고등학교 때 교내 연극공연이 있으면 꼭꼭 챙겨볼 정도로 문학소녀였던 내가 그 빛나
는 무대에 서게 될 줄이야!
그 첫 번째 공연이 2005년 가을정기공연 ‘한여름 밤의 꿈’ 이었다.
늦잠이 허락되는 여름방학임에도 자명종 소리에 부시시 일어나 마리아홀로 뛰어가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었지.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해가지고 이런 고생이냐’
‘연극이 내게 기쁨을 주는가’
그렇게 수많은 고민과 땀으로 그해 여름이 지나갔다.
그리고 공연 날 무대 뒤,
“꿍쾅, 꿍쾅, 꿍쾅”
심장이 터져버릴 듯한 설레임과 흥분 속에서 연극이 시작되었다.
“전하~~ 전하~ 에게우스 인사드리옵니다~.”
그날도 그렇게 한여름 밤의 꿈처럼 내 가슴속에 어떠한 자욱을 남기고 사라졌다.

2006년 가을정기공연은 ‘사랑을 찾아서’ 였다.


마리아홀이 허물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외부공연장에서 하는 공연이었다.
제목부터가 마음에 들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한번쯤 생각하게 하는 연극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푹 파인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사랑을 찾는 가상속의 여인을 연기하면서
사람들이 왜 연극을 하는지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고, 삶이 풍요롭다는 것을 정말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던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도 그 풍요로움에 내내 행복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516
1999년 ~ 2009년

이렇게 대학생활 동안 내 삶의 ‘연극맛보기’는 끝이 났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더 열정적으로 재밌게 할 수도 있었었는데... 하는 아쉬움
도 남지만 그것마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음속에 간직하며 그리고 또 다른 내 삶의
‘연극 느끼기’가 시작되기를 고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517
소중한 경험

계수현 (간・53회)

성의 연극회 동아리의 방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가 재잘재잘 떠들었었습니다.


수업 후 쉬는 시간과 공강 시간 및 점심시간까지도 말입니다.
동기들과 선후배 모두가 둘러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던 그 모습은, 동방을 가득 채우던 웃
음소리만큼이나 통쾌했었습니다.
4년 동안 활동하면서 저는 주로 배우로 무대에 많이 섰습니다.
2006년도 정기공연 "사랑을 찾아서"라는 작품에서는 ‘김막동의 아내’ 역할로 나왔습니다.
원래의 대본에는 없는 캐릭터를 차지성 연출님께서 새롭게 만들어주셨었죠.
그리고 그 해의 겨울공연, ‘사랑에 관한 다섯가지 소묘’에서는 조명키를 잡았었습니다.
다음으로 2007년도 정기공연인 ‘우리읍내’ 작품에서는 조지의 여동생인 ‘레베카’ 역할로
나왔었습니다. 마지막으로 2008년도 정기공연에는 ‘밑바닥에서’라는 작품에서 배우 역할
과 무대감독을 했었습니다.
저는 정말 행복하게도, 3번을 무대에 서면서 너무도 다양한 캐릭터들을 표현할 수 있었
습니다. ‘김막동의 아내’는 남편의 회사직원과 바람을 피는 30대 여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고, ‘레베카’에서는 학교에 다니는 활발하고 호기심도 많은 발랄한 여자아이를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밑바닥에서’의 배우에서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어찌 보
면 헛된 꿈일지도 모르는 자신만의 이상을 가지고 좌절과 진전을 반복하는 슬픈 인생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4년은 결코 짧지도, 또한 한없이 길지만도 않은 시간입니다.


하지만 뜨거운 여름날에 연출님과 선배님들의 조언에 맞춰서 해봤었던 리액션들과, 무대
감독으로서 배우들과 스텝들을 다독이고 또한 엄하게 분위기를 잡았었던 기억, 그리고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속에서 성숙해가던 나의 캐릭터들...
공연을 준비하고 극을 올리던 이 모든 순간의 기억과 추억들은 지금까지도 저를 뿌듯하
고 기쁘게 합니다. 저는 이제 졸업을 했지만, 제 뒤에 있는 우리 후배님들 모두가 성의
연극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안 소중한 경험들을 많이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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