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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연극회 연감 최종 2011.1.

12 10:33 AM 페이지1

연극 공연이 끝나는 때마다 관객석은 늘 눈물바다를 이루곤


했습니다.
김 안드레아 신부가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마지막 순간, 참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으로 교우들을 위로하며 천주 •
께 기구하는 장면은 신앙심 깊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려 놓기에
충분하였으니까요.
그런데 그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은 옥졸이 고문하는 장면이었습
니다. 청동화로에 달군 시뻘건 쇠꼬챙이로 김 신부의 등에 무자
비하게 담금질을 해대는 시츄에이션이지요.

1960 ~ 2010
형틀 뒤에 돼지 비게를 몇 근 사다가 안보이게 매달고는 벌겋게
단 쇠꼬챙이로 지져대면, 살이 타는 소리와 냄새와 더불어 조명
발 받은 붉은 연기가 막 올라가는 가운데 마치 노틀담의 꼽추같
은 험악한 인상으로 분장한 옥졸이 대사 한마디 없이 연기해내는
잔인한 장면은 관객들이 숨죽이며 흐느끼다가 마침내 울음을 터
뜨리게 만들곤 했습니다.

- 서학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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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코락스의 내력 - 이헌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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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부산 - 황혜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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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5월, 어머니 날 단상 -이종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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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들어와 미안해요 - 이영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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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박씨를 이길 수 없나니 - 김양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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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 이야기 - 김광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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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올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김창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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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안녕하시죠? - 이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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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 이정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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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 유경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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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신소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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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연극을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 김광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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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를수록 - 이천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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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차 례

동문회원 명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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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생 명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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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연극회 회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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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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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2010년 8월 27일 저녁 8시・・・.


우리의 역사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최 봉 춘
(의・25회, 성의연극회 동문회장)

010년 8월 27일 저녁 8시…. 닥터 체홉의 ‘인생산책’이라는 8개의 단편을 모아 만든 창


2 립 50주년 기념공연의 무대가 올라가고…. 그 무대를 시작하는 배우들의 긴장감, 숨 죽
여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의 눈, 서서히 관객과 하나가 되어 뜨거워지는 무대… 무대 인사를
하자 쏟아졌던 그 갈채와 환호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벅찬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으로 봤을 때 5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우리의 [성의연극


회]가 1960년 의대 1회 졸업생 배출을 축하하기 위해 가졌던 첫 공연을 시작으로 벌써 70여회
넘게 공연을 해온 정통 연극회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렇게 50년이라는 반세기의 세월을 이어
올 수 있었던 힘은 회원들 모두의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번 5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하면서 빛났던 동문과 재학생들의 화합과 조화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남겨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무더운 여름, 더위를 참아가며 연습을
하고, 무대를 만들고, 연극회 주제가를 만들어 부르고, 또 한편으로 동문들은 현업에서, 재학
생들은 학업의 일선에서 두 가지 일을 해오며 모두가 최선을 다해 보여줬던 모습은 지금도
가슴을 훈훈하게 합니다.

이렇게 서로의 시간을 쪼개가며 밤낮으로 이뤄낸 결과, 관객들은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보
답을 해주었고 이 성원이 우리가 연극을 사랑하고 또 무대에 서게 하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
나 싶습니다.

우리 성의연극회의 역사와 이야기를 담는 [성의 연극회 회상(回想) 50년] 발간을 축하하며,


이 책이 우리의 연극회의 발전을 더욱 밝게 해줄 것이고, 또 앞으로 있을 100주년을 기념하는
징검다리가 되길 희망해봅니다.

이번 50주년 기념공연에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신 모든 분들과 기념 책자 발간을 위해 힘써주


신 편찬위원, 그리고 각 분야를 맡아 원고를 정리하여 준 필진 모두에게 고마운 뜻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차례

축|사 축|사

‘성의연극회 회상 50년’의 발간을 축하하며

유 남 진
(의・24회, 성의연극회 지도교수)

제 성의연극회 50주년 기념공연이 막을 내린지 넉달이 지났습니다. 50주년 기념사업으


이 로 추진중인 ‘성의연극회 회상 50년’의 완성된 모습은 예측 컨데 마치 50살이 된 성의
연극회의 오래된 일기장을 보게 되는 느낌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성의연극회를 거쳐간 많은
동문들의 과거의 모습과 그 당시의 느낌들이 모두 담겨져 있는 일기장. 이 일기장에는 지난
순간순간에 우리의 모습과 생각들이 내가 아닌 우리가 공유하였던 느낌들이 스냅사진의 정지
화면처럼 그려져 있겠지요.

성의연극회의 지난 50년을 돌이켜보면 어느 때 부턴가 공연 후 모임에서 재학생보다 찾아온


졸업생의 수가 더 많아지기 시작하였지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재학생들의 활동에 졸업생들
이 상시 같이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의연극회의 모든 활
동들에서 재학생과 졸업생의 경계가 없고, 재학생과 동문, 그리고 동문과 동문 간에도 많은
세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문들이 졸업생이 아니라 재학 시 성의연극회의 활동이 연장되어
있는 듯해서 재학생과 동문의 구분이 없는 대가족 공동체의 모습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
난 50년간의 성의연극회의 모습에는 재학 당시의 모습과 함께 졸업 후에도 연극부 생활을 수
십 년째 계속하고 있는 동문들의 모습도 성의연극회 역사의 일부로 그려져 있을 겁니다.

‘성의연극회 회상 50년’이 기다려 집니다. 50년간의 우리 대가족의 삶의 모습이...


축|시

성의 연극회 오십년

문 일 신
(의・16회, 50주년 예술총감독)

성의 연극회 오십년~!
성의 연극회 오십년~!
그 긴 세월 속에서
그 긴 세월 속에서
숱한 사연들이 층층히 쌓여 가는 동안
숱한 사연들이 층층히 쌓여 가는 동안 성의 연극회 오십년~!
청년이 장년(壯年)되고, 초로(初老), 할배 되도록
청년이 장년(壯年)되고, 초로(初老), 할배 되도록 허술한 무대에
우리 몸과 마음을 서로 연결해주며 성의 연극회 오십년~!
우리 몸과 마음을 서로 연결해주며 서툰 연기지만
우리가 만나고 하나가 된 그 곳. 허술한 무대에
우리가 만나고 하나가 된 그 곳. 그래도‘맨 몸뚱어리의 진실’이라며
서툰 연기지만
우린 맡겨진 역(役)에 정열을 다하여
그래도‘맨 몸뚱어리의 진실’이라며
열연을 했었지요.
우린 맡겨진 역(役)에 정열을 다하여
연극은 절정에서 막이 내리고
열연을 했었지요.
성의 연극회 50년~! 땀에 젖은 몸으로
연극은 절정에서 막이 내리고
이제 장년(壯年)의 큰 나무되어 우뚝 선 관객의 박수와 환호를 뒤로하고 돌아설 때
땀에 젖은 몸으로
저 앞에 한번쯤 멈추어 서서 어김없이 밀려드는 허전한 마음에
관객의 박수와 환호를 뒤로하고 돌아설 때
오랜 내력의 아픈 줄기를 봉은사 코스모스길을 내달렸습니다.
성의 연극회 50년~! 어김없이 밀려드는 허전한 마음에
찬찬히 쓰다듬어 보셨나요?
이제 장년(壯年)의 큰 나무되어 우뚝 선 봉은사 코스모스길을 내달렸습니다.
그 긴 세월 속에서
저 앞에 한번쯤 멈추어 서서
내가 뿌리가 되었는지
오랜 내력의 아픈 줄기를 세월이 서리서리 붙들어놓은
모진 바람의 손자국에 긁힌 줄기인지
찬찬히 쓰다듬어 보셨나요? 그런 것들을.., 더듬으면
어깨가 밟혀 구부러진 가지인지
그 긴 세월 속에서 나름대로 지켜온 허술한 역사에 부끄러울 때도 있고,
그냥 그 아래 딩구는 낙엽인지..,
내가 뿌리가 되었는지 밋밋하게 지나간 세월을 부끄러워하기도 합니다.
찬찬히 내려다 보셨나요~?
모진 바람의 손자국에 긁힌 줄기인지
그러나, 오랜 세월 굽이진 소나무와
어깨가 밟혀 구부러진 가지인지
갈라지고 떨어져나간 밑둥이의 주목(朱木)이
그냥 그 아래 딩구는 낙엽인지.., 세월이 서리서리 붙들어놓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데..,
찬찬히 내려다 보셨나요~? 그런 것들을.., 더듬으면
나름대로 지켜온 허술한 역사에 부끄러울 때도
아~,성의연극회~!
있고,
백년, 천년, 언제까지나
밋밋하게 지나간 세월을 부끄러워하기도
위대한 역사를
합니다.
찬란히 꽃피워 가기를...

-문나무-
역|대|지|도|교|수

안 치 열(영상의학과)
1960 ~
ƒ 44년 평양의전 졸업
ƒ 56년 서울적십자병원 방사선과장
ƒ 57년 가톨릭의대 방사선과 주임교수
ƒ 68년 원자력청장
ƒ 80년 경희대학교 총장
ƒ 88∼95년 음성 꽃동네 인곡자애병원 의무원장

문 재 각(인문사회학과) 이 동 호(생화학과)
1970 ~ 1974 1975 ~ 1985

윤 여 웅(인문사회과학) 심 상 인(임상병리학과)
1985 ~ 1988 1989 ~ 1991

윤 여 웅(인문사회과학) 이 종 건(성형외과)
1992 ~ 1997 1998 ~ 2000

이 정 태(정신과) 유 남 진(병리학과)
2001 ~ 2007 2008 ~
역|대|연|극|부|임|원

1969년 부장 1970년 부장 1971~2년 부장 1973년 부장 1974년 부장


이 응 상(의・13) 이 광 우(의・14) 문 일 신(의・16) 방 진 성(의・17) 이 종 건(의・18)

1975년 부장 1975년 부회장 1976년 부장 1977년 부장 1978년 부장


김 경 수(의・19) 박 순 옥(간・20) 양 승 한(의・21) 유 경 수(의・21) 변 상 태(의・22)

1979년 부장 1980년 부장 1980년 부회장 1981년 부장 1981년 부회장


김 병 욱(의・23) 이 종 승(의・24) 이 희 옥(간・25) 심 성 보(의・25) 송 나 옥(간・26)

1982년 부장 1982년 부회장 1983년 부장 1984년 부장 1985년 부장


손 주 영(의・26) 정 태 원(간・27) 유 순 집(의・26) 이 헌 상(의・28) 김 용 욱(의・29)

1986년 부장 1986년 부회장 1986년 총무 1986년 총무 1987년 부장


구 태 형(의・30) 한 현 진(간・31) 이 경 욱(의・33) 박 선 미(간・33) 정 홍 준(의・32)

1987년 부회장 1988년 부장 1988년 부회장 1989년 부장 1989년 부회장


유 경 임(간・32) 이 경 욱(의・33) 박 선 미(간・33) 이 진 석(의・33) 유 미 영(간・34)
차례

역|대|연|극|부|임|원

1990년 부장 1990년 부회장 1991년 부장 1991년 부회장 1992년 부장


김 태 경(의・34) 이 미 경(간・35) 정 명 선(의・35) 홍 은 경(간・37) 윤 주 희(의・36)

1992년 부회장 1993년 부장 1993년 부회장 1994년 부장 1994년 부회장


고 은 화(간・37) 김 대 욱(중도사퇴) 이 경 주(간・38) 곽 태 호(의・38) 이 상 희

1995년 부장 1995년 부회장 1996년 부장 1996년 부회장 1997년 부장


차 현 민(의・39) 김 귀 란(간・41) 박 상 협(중도사퇴) 김 송 희(중도사퇴) 이 준 현(의・41)

1998년 부장 1999년 부장 2000년 부장 2001년 부장 2002년 부장


손 보 성(의・42) 최 진 현(의・44) 황 현 석(의・45) 조 진 범(의・46) 문 영 규(의・47)

2003년 부장 2004년 부장 2005년 부장 2006년 부장 2007년 부장


민 진 수(의・48) 이 재 민(의・49) 김 경 문(의・50) 이 창 건(의・51) 신 기 원(의・4)

2008년 부장 2009년 부장 2010년 부장


이 준 엽(의・3) 박 병 훈(의・2) 김 은 재(의・1)
역|대|동|문|회|임|원

1대 2대

회 장 부 회 장 회 장 부 회 장
김 정 규(의・5) 김 정 숙(간・13) 김 광 평(의・7) 김 정 숙(간・13)

총무 유남진(의・24)

3대 4대

회 장 회 장 부 회 장 부 회 장
김 영 민(의・12) 문 일 신(의・16) 박 경 웅(의・16) 박 영 숙(간・21)
총무 김영훈(의・25) 총무 이종건(의・18)
부총무 유남진(의・24), 김영훈(의・25), 김혜정(간・29)

5대 6대

회 장 부 회 장 회 장 부 회 장
박 경 웅(의・16) 정 순 희(간・25) 이 종 건(의・18) 유 경 애(간・25)
총무 이종건(의・18) 총무 유남진(의・24)
총무임소 문일신(의・16) 무임소 문일신(의・16) 박경웅(의・16)
차례

역|대|동|문|회|임|원

7대

회 장 부 회 장
김 경 수(의・19) 유 경 애(간・25)
총무 김창재(의・28)

8대

회 장 부 회 장 부 회 장
최 창 순(의・22) 유 남 진(의・24) 이 유 배(간・26)
총무 최봉춘(의・25), 김창재(의・28), 김양수(의・34), 차현민(의・39)
총무 황혜순(간・27), 홍은영(간・32), 고은화(간・37), 김귀란(간・41)
감사 이종건(의・18), 김경수(의・19)

9대

회 장 부 회 장 부 회 장
최 봉 춘(의・25) 이 헌 상(의・28) 황 혜 순(간・27)
총무 차현민(의・39)
무대 위에서 _ On Stage
공 연 연 보
회 차 년 도 작 품 작 연 출
1 1960 장남의 권리 T. S. 머레이 나봉한
2 1960 시작과 끝 존 골즈위디 나봉한
3 1960 서학란 이해남 나봉한
4 1961 어느 인간가족 안재성 김정규
5 1961 프레스 룸 잭하우스 주상현
6 1964 아버지 스트린드베리 최진하
7 1968 실수연발 세익스피어 이승규
8 1969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 함현진
9 1970 안도라 막스 프리쉬 이승규
10 1971 수업료를 돌려주세요 카인츠 프릿취 이재철 외
11 1971 국물있사옵니다 이근삼 이승규
12 1972 곰 안톤 체홉 문일신
13 1972 노부인의 방문 뒤레마트 이승규
14 1973 강제결혼 몰리에르 문일신
15 1973 십이야 세익스피어 이승규
16 1974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들 몰리에르 박창서
17 1974 우리읍내 손톤 와일더 김도훈
18 1975 건강진단 조해일 이종영
19 1975 안티고네 장 아누이 이승규
20 1976 환타스틱스 톰 존슨 이정태
21 1976 해녀 뭍에 오르다 오영진 이정태
22 1977 찰리 브라운 존 고든 신상현
23 1977 4계절의 사나이 로버트 볼트 김재연
24 1978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최창순
25 1978 만리장성 막스 프리쉬 정종화
26 1979 끝없는 아리아 E. St. V. 밀레이 김병욱
27 1979 30일 간의 야유회 이근삼 최창순
28 1980 블랙코미디 피터 쉐퍼 이종승
29 1980 진짜 하운드 경위 톰 스토파드 정상일
30 1981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이강백 김용범
31 1981 시련 아서 밀러 조일도
32 1982 비더만과 방화범 막스 프리쉬 박영학
33 1982 템페스트 세익스피어 정종화
34 1983 토끼와 포수 박조열 유순집
35 1983 아득하면 되리라 오태영 기국서
36 1984 성자의 샘물 존 M. 싱그 최 황

18
공연 연보

공 연 연 보
회 차 년 도 작 품 작 연 출
37 1984 보이체크 G. 뷰흐너 이병훈
38 1985 의사망나니 몰리에르 이천희
39 1985 미시시피씨의 결혼 뒤렌마트 심재찬
40 1986 처녀비행 이만희 구태형
41 1986 아니 이 생명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B. 클라크 기국서
42 1987 작은 사랑의 멜로디 삐달아사, 마켈라모르 정흥준
43 1987 꽃피는 체리 로버트 볼트 김병훈
44 1988 안티고네 장 아누이 이경욱
45 1988 상상병 환자 몰리에르 양정현
46 1989 탑 피터 바이스 김양수
47 1989 정의의 사람들 알베르 까뮈 김영환
48 1990 만선 천승세 김태경
49 1990 우리 읍내 손톤 와일더 정종화
50 1991 메피스토 클라우스 만 송미숙
51 1992 굿닥터 닐 사이먼 윤주희
52 1993 누가 선인장을 삼켰대? 곽태호 곽태호
53 1994 유리 동물원 테네시 윌리엄스 곽태호
54 1995 어떤 인생 휴 레너드 서상원
55 1995 다리위에서 바라본 풍경 아서 밀러 차현민
56 1996 돼지와 오토바이 이만희 박상협
57 1996 Media 에우리피데스 이남희
58 1997 동승 함세덕 김민정
59 1998 마지막 포옹 윌리엄 인지 손보성
60 1998 한여름 밤의 꿈 세익스피어 김중기
61 1999 세일즈맨의 죽음 아서 밀러 문영동
62 2001 오장군의 발톱 복조열 현미자
63 2002 바다가 보고싶다 김봉웅 장우재
64 2003 인어전설 정의신 김낙형
65 2004 김치국 씨 환장하다 장소현 하일호
66 2005 한여름밤의 꿈 세익스피어 차지성
67 2006 사랑을 찾아서 김광림 차지성
68 2007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 위성신 이한얼
69 2007 우리 읍내 손톤 와일더 송형종
70 2008 밑바닥에서 막심 고르끼 이한얼
71 2009 트랜스 십이야 세익스피어/오동식 각색 이성구
72 2010 닥터 체홉의 인생산책 안톤 체홉 김성노

19
1960년 ~ 1964년
PROGRAMS
제 1 회 장남의 권리 1960년 2월 6일

1960년 2월 6일 ‘제1회 졸업제’ 2부 순서로 공연되었다.

22
PROGRAMS 1960년 ~ 1964년

제 2 회 시작과 끝 1960년 4월 17일

1960년 4월 17일 ‘제1회 전국의과대학 합동예술제’에서 공연되었다.

23
PROGRAMS
제 2 회 시작과 끝 1960년 5월 6일

1960년 5월 6일 ‘제6회 개교기념일, 신입생환영, 졸업생 국가고시 전원합격 축하제’에서 다시 한번 무대에 올랐다.

24
PROGRAMS 1960년 ~ 1964년

제 3 회 서학란 1960년 7월 28일

25
PROGRAMS
제 3 회 서학란 1960년 7월 28일

26
PROGRAMSPROGRAMS 1960년 ~ 1964년

제 3 회 서학란 1960년 7월 28일


제 3 회 서학란 1960년 7월 28일

27
PROGRAMS
제 3 회 서학란 1960년 7월 28일

28
PROGRAMS 1960년 ~ 1964년

제 5 회 프레스 룸 1961년 11월 1일

29
PROGRAMS
제 5 회 프레스 룸 1961년 11월 1일

30
PROGRAMSPROGRAMS 1960년 ~ 1964년

제 5 회 프레스 룸 1961년 11월


제 5 회1일
프레스 룸 1961년 11월 1일

31
PROGRAMS
제 5 회 프레스 룸 1961년 11월 1일

32
1960년 ~ 1964년

1960년 2월 6일, 1회 졸업생 배출을 축하하기 위해 김정규, 김광평 동문이 주축이 되어 올린 T.S. 머레이 원작 ‘장남의 권리’가 성의
연극회 최초의 연극이다. 같은 해 4월, ‘제1회 전국의과대학 합동 예술제’에 단막극 ‘시작과 끝’을 공연하고, 1회 졸업생 전원 국시
합격을 축하하고 신입생 환영을 위하여 가톨릭 문화관에서 재공연을 하게 된다. 7월에 올린 ‘서학란’은 캐스트만 20여 명이 등장하
는 대작으로, 연극부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인 1961년 KBS 주최 ‘전국 대학 방송극 경연대회’에 참가하
여 ‘어느 인간 가족’으로 작품상을 받았으며, 그해 11월, 김광평 동문이 번역한 한국 초연의 ‘프레스 룸’을 명동 성모병원 낙성 축하
공연으로 무대에 올렸다. 2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개교 10주년이 되던 1964년, 역시 김광평 동문이 번역한 ‘아버지’를 국내 초연으로
당시 최고의 공연장 ‘드라마센터’에서 올리게 된다.

성의연극회의 탄생

김광평 (의·7회)

제1회 공연부터 6회 공연까지는 당시 참여하였던 7회 졸업생 고핀 김광평이 옛날 이


야기 하는 형식으로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겠습니다.

CMC 최초의 연극
[1회] '장남의 권리' - T.S. 머레이 작 , 나봉한 연출, 1960년
때 : 1960년 2월 6일(토) 하오 2시, 6시
곳 : 본교 강당 ( 명동 가톨릭 문화관 )
주 최 : 가톨릭의대 학도호국단
후 원 : 교수회. 성의월보사
캐스트 : 밧트 모리시 (아버지)-김광평(7회), 모-라 (어머니)-민정원(숙대 약대), 휴 모리시 (큰아들)-박영수(5회), 쎈 모리시
캐스트 : (작은 아들)-김정규(5회), 단 헤가티 (이웃사람)-오인동(8회)

1960년, 당시는 학교명이 성신대학 의학부에서 가톨릭의대로 막 바뀐 뒤였습니다.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되는 해였는데, 그 기념으로 무언가 행사를 가져야 하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생긴 지 몇 년 안 되는 의대가 첫 졸업생을 배출한다는 사실을 선전도 할
겸 우선 사람들 시선을 끌 수 있는 행사로 제1회 졸업제라는 행사를 하기로 하였고 그
프로그램에 1부는 음악, 2부를 연극을 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나 봅니다.

장남의 권리
왼쪽부터 오인동, 김광평, 김정규 동문과,
바닥에 누워있는 박영수 동문, 여역은 숙대
약대 재학생 민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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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학생회를 통해 처음으로 접한 당시 예과 2학년이었던 김정규 선배가 연극부
를새로 만들기 위해 고등학교 시절 연극 활동을 한 적이 있는 사람들을 수소문하다가
예과 1학년인 고핀과 만나 두 사람이 주축이 되어 연극부를 조직했어요.

학교에서는 요즘에 비교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돈을 들여서 뒷받침 해주었기


때문에 공연 자체에 필요한 예산은 넉넉하였지만, 새로 만든 연극부라서, 오로지 KMA
100% 합격 목표를 향하여 일로매진하는 것밖에 모르던 의대생들을 연습무대로 이끌어
내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당시는 간호학과가 생기기 전이라 여역을 할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애로였지요.


그래서 궁리 끝에 어떻게 연줄이 닿은 숙대 약대 여학생을 섭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연출은 우리나라 영화계의 선구자 나운규 선생의 아드님이시고, 당시 원방각 극단에 계
시던 나봉한 선생님을 모셔 오게 되었지요.

나운규(羅雲奎) 씨 아들 나봉한(羅奉漢) 씨
“그 사람은 사극만 하는 감독인가”하는 소리를 듣는 젊은 감독이 있다. 나
봉한 씨(36)
한국 영화계의 귀재 고 나운규 씨의 아들이다. “선친 얘기로 결부시키는 것
은 싫습니다. 저의 영화와는 별개 문제이니까” 철저한 ‘독립’을 주장한다.
그러나 영화계에선 나운규 씨의 아들, ‘이대’ 감독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처음엔 연극에 뜻을 뒀죠” 그래서 서라벌예대에 들어갔다. “너도 아버지
같이 고생하고 싶으냐”는 백부의 맹렬한 반대를 설득하고, 친구인 임원식
감독의 권유로 처음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와 같이 만든 첫 영화가
‘청일 전쟁과 민비’. 그리고는 ‘청산별곡’,‘꽃가마’,‘화촉신방’, ‘문정왕후’,지
금은‘인조반정’을 준비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사극만 만들어서 그런지 사극
전문으로 알려진 것이 좀 불만이라 한다. “사극도 시대의 증언이 되는 방향
으로 하고 싶은데, 제작자의 흥행성 때문에 뜻이 굽혀지는 것이 한스럽다”
고도 말한다. 앞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현대 애정물. 젊은이의 공통된 고민
을 파헤쳐보고 싶은 의욕이 있다.

(경향신문 1967년 2월 25일)

당시 지도교수님은 방사선과 교수님이셨던 안치열 교수님께서 맡아 많은 가르침과 도


움을 주셨습니다.
그 때 공연 작품은 우선 캐스트가 몇 명 나오지 않는 간단한 작품을 고른다는 전제 조
건을 갖고 고르다보니 T.S. Murray 원작인 '장남의 권리'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현대판 '카인과 아벨' 이야기라고나 할까요?
아일랜드의 한 농촌의 평범한 가정을 배경으로 형제간의 시기, 질투, 갈등이 부모들의
편애로 증폭되어 비극으로 치닫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제법 날씬했던 고핀은 다혈질인 아일랜드 농부인 극중 배역에 충실하느라고 의상
안에 방석을 넣고 분장을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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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 1964년

그때만 해도 의과대학 학생들이 연극을 한다는 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한해 하


고 의외의 일로 생각하면서도 학교 당국에서 성의껏 지원하였고, 명동 주교관에서 아주
고풍스러운 식탁이나 의자, 찬장 등을 대도구로 사용할 수 있게 빌려주었으며, 재학생들
뿐 아니라 교직원들과 명동 성모 병원의 많은 식구들이 구경 와 모두가 재미있게 공연
을 보아주어서, CMC 최초의 연극에 참여하였던 우리 연극부원들이 큰 힘을 얻게 되었
습니다.

명동 가톨릭 문화관
1939년 2월 11일 축성식을 거행한 문화관은 한국 교회의
상징인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의연극회 1회 공연인 ‘장남의 권리’를 위시해서 수많은
문화행사가 열렸고, 특히 명동 성모병원으로 실습을 나가
는 의대 본과 3, 4학년들의 교실로도 사용되었다. 현재는
문화관 2층에 문화예술공간인 ‘꼬스트홀’이 문을 열어 476
석 규모의 클래식 음악 전용 연주홀로 사용되고 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2회] '시작과 끝' - 존 골즈위디 작 , 나봉한 연출, 1960년
때 : 4293년 (1960년) 4월 17일 오후 2시
곳 : 숙명여자대학교 대강당
캐스트 : 키스 다란트 (엘리트 고등 변호사)-김정규(5회), 라리 다란트 (술주정꾼 깡패 동생)-김광평(7회), 완 더 (동생 라리의
캐스트 : 애인)-장 미

제2회 공연이 되는 ‘시작과 끝’은 첫 무대를 성공적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던 1960년 그


해 봄에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김정규 선배와 고핀 단 둘이 다시 판을 벌려 또한
번 시도했던 연극이었습니다.

전국 8개 의과대학이 합동으로 가진 제1회 ‘전국의과대학 합동 예술제’에서 1부는 역시


주로 음악 순서로 기악연주 및 독창, 합창과 시낭송(그때 연세의대의 마종기 씨가 자작
시 낭송), 그리고 무용 순서였고, 2부는 연극이었는데 우리 학교와 연세의대가 단막극을
하나씩 공연하였습니다. 당시 의대생들은 학생들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런대로 낭만을
즐길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연세의대는 레디 그레고리의 "구민원 병실"을 했고 우리는 영국의 극작가 존 골즈워디의


단막극을 골라 올렸지요. 등장인원이 단 3명이라 우선 캐스트 때문에 골치 썩일 일은 없
었으니까요. 여역은 역시 기성극단에서 활약하던 여배우를 빌려 왔었지요. 이번에도 학
생회 예산이 꽤 나와서 여역 출연료를 줄 수가 있었거든요.
연출은 처음에 잘 모르고 김 아무개였는지 오 아무개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 연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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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맡겼는데 알고 보니 3류 날라리여서 연극을 망칠 것 같아, 다시 나봉한 선생님에게
맡아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예술제 개최 장소였던 숙명여대 대강당에서 4월에 1차 공연하고 난 얼마 후인 5월에, 학
교 구내 가톨릭 문화관에서도 다시 공연을 하였지요.
그 때는 1회 졸업생이 전원 의사국가고시에 합격된 것을 축하하고 신입생을 환영하는
행사를 제6회 개교기념일에 했는데, 이때도 명동의 성모병원 식구들과 주교관 및 수녀원
에서도 와서 구경을 했습니다.

작품은 19세기 말 영국을 무대로 상류사회 일각의 비리와 부정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형
제간의 갈등을 비판적으로 바라 본 사회극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정규 선배가 엘
리트 고등변호사인 형 역으로 나오고, 고핀이 술주정꾼이며 늘 말썽만 부리며 형을 몰락
의 길로 인도하는 깡패 동생 역을 맡았었지요. 여역은 동생의 애인이구요.
자세한 작품 줄거리는 기억이 안 나지만 캐스트가 적어서 연습기간 내내 단출하면서도
아주 재미있었지요.

① ②

시작과 끝

① 숙대 대강당, ‘라리’의 애인 ‘완더’가 엘리트 변호사 ‘키스’에게


동생의 구명을 위해 힘써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② 명동 가톨릭 문화관 앙콜공연 후, 좌로부터 김광평, 기성 극단


장미, 김정규 동문

③ 좌로부터 무감을 맡았던 안재성 동문, 김광평, 김정규, 장미, 나


봉한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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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 1964년

연극부의 기초를 다진 대작
[3회] '서학란' - 이해남 작 , 나봉한 연출, 1960년
공연 일시 : 1960년 7월 28일
공연 장소 : 원 각 사
원 작 : 이 해 남
연 출 : 나 봉 한
조 연 출 : 최영한, 안재성(5회)
무 대 감 독 : 문원걸(5회)
음 악 효 과 : 유연덕(5회), 이상철(5회)
캐 스 트 :
김안드레아-김정규(5회), 현회장-김광평(7회), 판관-박영수(5회), 김여상-왕규선(1회), 이재학(6회), 김 방지거-진성만, 최베드
로-김왕기(7회), 이 도마-박성호(9회), 영국사관-안재성(5회), 중국 관헌-한상억(5회), 임성룡-박장원(6회), 염수-이학구(5회),
교우 A-최은철(10회), 교우 B-김인정, 포졸 갑-김익명(7회), 포졸 을-박태수(6회, 작고), 왕 요셉-이상철(5회), 야고보-손충성
(7회), 옥졸-최영한 (특별찬조출연)

연극부의 기초가 좀 더 다져진 것은 1960년 7월에 막을 올려 3회 공연으로 기록되는 서학


란이었습니다. 당시 팜플렛에는 4회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건 바로 직전 제2회 공연이었던
‘시작과 끝’의 교내 공연을 3회로 쳐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고, 나중에 정정을 하였습니다.

학교 당국으로부터 의대생들도 학업에 지장이 없이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연극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도 점점 많아져서 이번에는 좀 스케일이 큰 작품으로 가
기로 하였지요. 그러나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여역을 소화할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이었
는데 그때까지도 간호학과의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여역이 전혀 없는 작품이었고, 그 중에서 고른 것이 이해남 작 서학
란(西學亂)이었습니다. 그간 공연 때마다 명동주교관과 수녀원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었고
의대생들의 연극에 대한 반응이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약간 정치적인 제스추어로 보일 수도
있었겠으나 아무튼 한국 가톨릭 역사 상 최초의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천주교 박해 시
순교한 사건을 그린 이 작품으로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캐스트가 무려 20명 가까이 되는 4막6장의 대작이었습니다.
가톨릭을 교명으로 쓰는 대학에서 할 만한 연극이었지요.

연출은 역시 그간 우리 연극부와 인연을 맺은 나봉한 선생이 맡았고 조연출은 당시 한양


대 연극영화과 재학생이던 최불암이 도와주었는데 본명이 최영한이었습니다.
무대장치도 그간은 우리 손으로 망치, 톱을 들고 뚝딱거리며 만들던 조잡한 장치 대신 외부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고, 극중 배경이 1840년대였기 때문에 조선조 의상을 당시 명동
에 있던 국립극장 전신인 시공관에서 대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캐스트가 문제였습니다. 최소한 18명 이상의 연기자가 필요한 연극인데 연극무대에
서 본 경험은 커녕 연극구경조차 한 일이 없는 의대생들이 태반인 가운데 의예과 1학년과 2
학년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다 소화하려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한 학년이 겨우 60명 전후였던 당시 사정에 비추어 본다면 의예과 학생 중 정말 많은 인원
이 캐스트와 스탭으로 동참하였던 거지요.
그해 1회로 졸업을 한 왕규선 선배가 뒤늦게 캐스트로 같이 참여하였고 오원섭 선배도 아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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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당시 학생회 예산이 배정된 것은 물론 주교관과 경향신문사 사장이 재정적으로 후원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으나 수많은 식구들을 컨트롤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방사선과 안치열 교수님이 지도교수님이셨는데 연습장인 문화관에 자주 나오셔서 같이 시간
을 보내며 자상한 배려를 해주셨고 막이 오르는 날까지 학생들을 격려하며 이끌어 주셨지요.

장마철 내내 끈적거리는 더위를 참아가며 연습을 하여 그 해 가장 더운 때인 7월말, 을지


로 입구 소재 원각사라고 하는 극장에서 막을 올렸습니다. 원각사는 그 후 화재로 소실되고
재개발로 건물이 없어졌지만 당시로서는 공연장치고는 A급 공연장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대관신청을 하고 차례가 되려면 한 여름이나 가능했었지요.

1960년 원각사, 해병대 군악대 공연

원각사
6·25 전쟁 이후 영화나 여성국극이 인기를 끌면서 대부분의 사설극장
들이 관중을 끌어 모았기 때문에, 연극은 명맥 유지조차 어려웠다.
1958년 12월 을지로 입구에 소극장 원각사가 개관되었고, 본격적인 소
극장 원각사가 생기면서 침체해 있던 공연예술계가 생기를 찾아 극단
들도 몇 개 더 조직되었다. 원각사는 시설도 비교적 좋았고 내부나 극
장 문이 정취가 풍기도록 꾸며져 있었는데, 불행히도 1960년 12월에
불이 나서 전소되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재학생들과 병원 식구들은 물론 많은 신부님과 수녀님들, 그리


고 신학부 학생들, 구경꺼리가 별로 없던 시절에 의대생들이 하는 연극은 과연 어떨까 하
고 궁금해 하는 외부 학생들과 학부형들로 극장 안은 초만원을 이루었었지요.

원각사에서 2회 공연을 한 후 나중에 또 가톨릭 문화관 강당에서 앙콜 공연을 하였습니다.

연극 공연이 끝나는 때마다 관객석은 늘 눈물바다를 이루곤 했어요.


김정규 선배가 혼신의 힘을 모아 열연했던 김 안드레아 신부가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마지
막 순간, 참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으로 남은 교우들을 위로하며 천주께
기구하는 장면은 신앙심 깊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려 놓기에 충분하였으니까요.
그런데 그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은 김대건 신부 재판에서 옥졸이 고문하는 장면이었습니다.

38
1960년 ~ 1964년

① ② ③

④ ⑤

⑥ ⑦

서 학 란
① 그 더운 여름날 한 겨울 의상을 입고 땀 좀 흘렸다. 김 신부를 만난 두 사람이 눈물
을 흘리며 반가워하고 있다. 좌로부터 김광평, 김정규, 김왕기 동문,
② 국경으로 드나들기가 점점 어려워지자, 중국에서 신부 서품을 받은 김 신부를 모셔오
기 위해 고깃배로 위장하고 출발할 준비를 하는 교우들, 좌로부터 김인정, 최은철, 김
광평 동문
③ 서해를 건너 상해에 도착한 현 회장 일행이 중국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김 신부를
고국으로 모셔가게 된다. 김신부를 기다리고 있는 교우들
④ 상해 항구에 배를 준비하고 김대건 신부를 맞는 교우들, 좌로부터 김 신부 역의 김정
고, 현 회장 역의 김광평, 이 도마 역의 박성호
⑤ 김 신부로부터 중국 교우들이 전하는 선물을 받는 현 회장과 그 일행, 좌로부터 김정
규, 박성호, 김광평, 최은철 동문
⑥ 김대건 신부가 영국 사관의 도움을 청하고 있다. 영국 사관역은 당시 키가 제일 컸던
안재성 동문이 맡았는데, 분장을 하고보니 외국사람 모습 그대로여서 단역이었지만
큰 인기를 모았다.
⑦ 클라이막스가 되는 김대건 신부 재판 장면, 무대 우측 대청마루에 판관이 앉아 천주
를 거부하도록 강요하였으나, 김 신부가 의연하게 대응하자 화가 치밀어 고문을 명하
고 있다. 무대 뒤쪽 중앙에서 형틀을 준비하는 꼽추 옥졸(최불암 분)의 모습이 보인다.
⑧ 참혹한 고문 끝에 사형 언도가 내려지고 형장으로 끌려가기 직전, 남은 교우들을 위
로하며 기도하는 김 신부의 마지막 모습, 김정규 동문 양 옆으로 포졸 갑, 을 역의
박태수, 김익명 동문, 뒤로 손이 묶인 현 회장 역의 김광평 동문과 교우들이 다같이
⑧ 울부짖으며 슬퍼할 때, 관객들도 같이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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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를 부정할 것을 강요하는 판관의 지시에 의하여 불꽃이 이글거리는 청동화로에
달군 시뻘건 쇠꼬챙이로 김 신부의 등에 무자비하게 담금질을 해대는 시츄에이션이지요.
실제로 매 공연 때마다 무대 위에 대형 숯불 화로를 들여다 놓은 후 쇠꼬챙이 몇 개를 꽂
아 놓고 달구곤 했고 연기자들은 땀이 비 오듯 흐르는 가운데 정말 더워서 곤욕을 치르곤
했습니다.
그 장면에서 손을 뒤로 묶인 고핀은 땀 때문에 턱에 단 수염이 떨어지려는 위기를 맞곤
했는데, 그 엄숙한 장면에서 수염이 떨어지는 것은 극 진행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커다란
사건이 될 수 있었기에 늘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진작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의대생 중에 그 옥졸 역을 실감나게 연기할만한 인물
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습 중 여러 번의 역 교체 끝에 결국 막이 오르기 전날 연
출 선생님이 조연출인 최불암씨를 붙들고 "어쩌겠나... 자네가 하게."하면서 사정을 하였
지요.

자료 사진의 김 신부 역 뒤에 보이는 곱사등의 인물이 바로 그 옥졸이었습니다.


형틀 뒤에 돼지 비게를 몇 근 사다가 안보이게 매달고는 벌겋게 단 쇠꼬챙이로 지져대면,
살이 타는 소리와 냄새와 더불어 조명 발 받은 붉은 연기가 막 올라가는 가운데 마치 노
틀담의 꼽추 같은 험악한 인상으로 분장한 옥졸이 대사 한마디 없이 연기해내는 잔인한
장면은 관객들이 숨죽이며 흐느끼다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게 만들곤 했습니다.

아무튼 서학란은 가톨릭의대 연극부가 창립되어 첫 공연을 시작한 1960년 그해 6개월


동안에 3번째로 올린 작품이라 쉴 새도 없이 계속 달려온 우리 모두 힘들고 고달팠었지
만 그래도 대작(大作)을 하면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연극부라는 존재가 깊이 뿌리내
리게 된 계기가 되어주었습니다.

⌜서학란⌟공연성황 가톨릭의대 연극반서


가톨릭대학 의학부 연극반의 제4회 공연은 이해남 작, 나봉한 연출인 ‘서학
란’(4막 6장)을 가지고 지난 28일 원각사(圓覺寺)에서 베풀어졌다. 온갖 박해 속
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1846년 여름에 돌아간 한국 최초의 신부 ‘김 안드
레아’의 이야기가 순수한 학생극무대를 통해 재현되어 신자 아닌 일반 관객에
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
(경향신문 1960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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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 1964년

가톨릭의대 연극부를 회상(回想)하며...

최 불 암

우선 ‘가톨릭의대 연극부 창립 50주년’과 더불어 ‘성의연극회 회상(回想), 50년’의 편찬을 축하


드립니다. 어느 분야에서건 지나온 긴 세월을 뒤돌아보며, 그 역사를 되새겨 본다는 것은 귀중한
일이고, 무척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요즈음 나이 탓인지 자꾸 옛 추억의 그림자를
찾게 됩니다. 그런 저에게 오늘 뜻밖에 이렇게 가톨릭 연극부와 50년 전의 인연을 회상하게 되었
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설레고 감개무량(感慨無量)한 일입니다.

가톨릭의대 학생들과 함께 가톨릭의 순교 성인 김대건 신부님의 일대기를 그린 ‘서학란’ 연극을


만들게 된 그때 저는 갓 20살의 청년이었습니다. 당시 연극을 만들며 가톨릭의대 연극부원들과
느낀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이야기들은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고, 연극을 통해 알게 된 성인
김대건 신부님 생애의 족적(足跡)은 제 마음에 지금도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몇해 전 마카오에 여행을 갔을 때였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아내가 “아마 여기에 김대건 신부님
유골의 일부 조각이 모셔져 있을 거예요.”라 해서 “내가 김대건 신부님에 대해서 잘 알지”라고 얘
기했더니 아내가 “아니 어떻게 알아요?”하며 깜짝 놀라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성인 김대건 신부
님 순교(殉敎)의 족적(足跡)을 알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연극 ‘서학란’ 때문이니, 가톨릭의대 연극부
와 함께 한 그 인연이 저에게 얼마나 좋은 일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만났던 연극부 친구들 얼굴도 떠오릅니다. 저와 나이도 비슷하고 갸름한 외모에 얌전했던
김정규, 남자다웠던 김광평..., 그네들의 얼굴이 스쳐지나 갑니다. 가끔 성모병원을 가게 되면 ‘혹
시 저 의사가 나를 알아보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하고, 담당 의사에게 “가톨릭의대 연극부 아는
사람 있어요?”라고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골프장에서 가톨릭의대 연극부 출신이라
며 인사를 하는 문일신 선생을 만나게 되어 너무나 반갑고 기뻤었지요. 안부를 묻고 또 묻고, 여
러분들을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저는 1958년 서라벌 예대에 입학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배우가 되려는 생각은 없
었고, 연출 공부를 하려고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연기는 미남, 미녀들이 하는 건데, 저는 잘 생기
지 못해서 배우가 될 조건이 아니었다고 생각했으나 이 일을 좋아했기에 연출을 하려고 했습니다.
노역(老役)은 ‘서학란’을 연출하신 나봉한 선배님 덕에 하게 되었습니다. 나봉한 선배께서 연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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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조연출을 하며 여러 작품을 만들었는데, 할아버지 역할이 나오면 나봉한 선배께서 ‘네가 나
가서 하는 게 낫지 않느냐’하셨고, 그러면 저는 연출 겸 배우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 졸업 때쯤으로 기억합니다. 나봉한 선배께서 “가톨릭의대에서 연극을 한다는데,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하셔서 “이번에도 조연출입니까?” 하며 심부름꾼으로 따라간 곳이 ‘가톨릭의대’
였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공부도 잘하고, 가정도 좋은 학생들에게 연극물을 들여야 한다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시간만 버리는 건 아닌지...연극은 고생길인데, 한번 발을 들이면 빼지도 못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일단 연극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연출 나봉한 선배님은 몸이 약한 편이어서, 선배께서 메소드 연기(演技)을 얘기해 주시면 제가


주로 연습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꽤 오랜 기간 연습을 했는데 배우들이 원하는 수준만큼 잘 따
라오지 못하고, 연기자로서의 감성도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까, 김정규 선생이 저보고 “낮엔 연출 선생님과 연습하고, 최 형(兄)과 우


리는 따로 밤이라도 새워 연습합시다”라고 하여 그 날부터 명동 성당 옆, 빨간 벽돌 건물에 방을
하나 내어, 합숙처럼 밤에도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애쓴 만큼 연습은 진척이 없고, 연극이 잘 안돼서 속상해 하던 어느 날 깊은 밤에, 속이


타니까 홀로 바람을 쏘이러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잊지 못할 체험을 하게 됩니다.
아마 그때 수리(修理)하기 위해서였는지, 성당 저 아래쪽에 있던 성모 마리아 상이 언덕 위에
있는 명동 성당 문 앞, 낮은 위치에 옮겨져 있었습니다. 휘황한 달빛 아래 비추인 성모상에서, 문
득 실제로 성모 마리아님께서 내 곁에 계시다는 느낌이 들면서, 성모께서 금방이라도 내게 다가오
실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뭔가에 이끌리듯 마리아 상 옆에 다가가서 제 마음의 속상함을 마음속
으로 아뢰고, 이 연극이 성공리에 무대에 올라갈 수 있도록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바로 그때, 옆에 계신 성모께서 제게 손을 내미시는 듯해, 성모님 손을 얼떨결에 잡았습니다. “아~
동정녀께서 내 기도에 응답을 해주시는구나!” 하는 전율이 확 밀려왔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수없이 속상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지며 이어 울음이 터져 나와 한참을 그렇
게 있었습니다. 그 이후 요즈음도 여의도를 오가며 어디서나 성모 마리아 상을 뵐 때면 뭔가 가
슴이 뜨끔하고 뭉클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때 마리아님의 손을 잡아서였을까요? 아님 제가
울었던 기억이 나서일까요? 아마도 제 20代 순수했던 그 때 그 날 밤의 마음이 떠오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한참 울고 연습실로 들어갔더니, 연극부 친구들이 저를 의아하게 바라보면서 “어딜 갔


다 왔니?”하는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연습하자.”고 하는데, 마침 통금 해제
사이렌이 울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는 새벽 4시 통금 해제 사이렌이 울릴 때까지 연습을 하
곤 했는데, 끝내야 할 그 시간에도 불구하고 저는 연습을 더 하자고 했더니, 김정규 선생이 다가
와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최 형(兄)~ 더 할 것 없다. 걱정하지 마. 우리가 잘 할게.”하며 살며시
제 어깨에 손을 얹어 준 그 따뜻한 기억...

그리고, 공연 날짜는 다가오는데, 대도구, 소품, 의상을 구할 수 없어 쩔쩔매며 이리 저리 뛰어


다니다가, 다행히 명동 국립극장 전신인 시공관에서 대여를 받았던 기억도 납니다.

42
1960년 ~ 1964년

극중에 망나니가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당시 의대생 중에 그 역을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입


으로 막걸리를 뿜어내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춤을 추어야 하는데, 그런 춤을 본 적도 없다고 하
여 제가 시범을 보였다가, 나 선배님께서 “여기서도 별 수 없다. 네가 해라”고 하여 망나니 역까
지 맡게 되었습니다. 거지처럼 행색을 하고, 상투를 쳐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험한 모습의 분
장을 해야 했는데, 요즘 같은 분장 도구나 가발이 없었음에도 어떻게 그런 분장을 할 수 있었는
지 모르겠습니다.

또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아마도 총연습 때 같습니다. 공연 중에 막이 닫히지 않는 것이었습


니다. 무대 천정에 연결된 도르래와 줄 사이에 무엇이 걸렸던 모양입니다. 저는 그때 망나니 분장
을 하고 있었는데, 천정으로 올라갈 사람이 없어서 제가 그 모습 그대로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
라가, 그것도 사다리 꼭대기에 발을 걸치고 서서 줄을 풀어서 고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망나니 분장을 하고 공연 중에 사다리 위에서 그 일을 하는 광경
이 우스웠는지 밑에서는 사람들이 웃고 한 기억이 납니다.

공연을 마친 후에도 아쉬운 마음에 연극부 친구들을 좀 만났던가 싶습니다. 김정규, 김광평 선
생과도 몇 년 동안은 관계를 가졌던 것 같은데... 그 당시 김정규 선생을 좋아했었습니다. 나이도
비슷했고 얌전하면서도 속이 깊은 분으로 기억합니다.

회고를 하는 동안 가톨릭의대 연극부가 50년 동안 71회의 공연을 하고 이번에 창립 50주년 기


념 재학생, 졸업생 합동 공연을 올린다는 소식이 굉장히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50년 전
연극부가 이렇게 잘 보존돼서 여기까지 왔구나!”하구요. 그 긴 시간들을 통해 감동을 전해 준 가
톨릭의대 연극부에 진심으로 감사와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연극을 올리면서 제가 초청을 못 받았는지 유감도 좀 있습니다. 제 가


슴 속에 담고 있었던 ‘가톨릭의대 연극부~!’ 그곳에 제 마음이 항상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 기억해
주십시오. 유쾌한 회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0년 7월 한 여름.
서재에서... 최불암

43
작품상을 받은 라디오 방송극
[4회] '어느 인간가족' - 안재성 작 , 김정규 연출, 1961년

제4회로 기록된 이 작품은 사실 무대에서의 연극 공연이 아니라 라디오 방송극이었습


니다.
요즘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전국 대학 방송극 경연대회’라는 행사가 있었는
데 그 해에 우리 대학 연극부가 참가했지요.
그때는 아마 라디오방송국이 나라에서 운영하는 KBS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국
의 많은 대학이 대학방송극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경합을 벌이곤 했었습니다.
TV도 없던 때라 방송극에 나오는 성우들은 한참 주가가 높던 시절이었지요.
전 국민이 저녁마다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 연속극을 들으며 하루의 고달픔과 시름을
달래던 시절입니다.
영화에서는 신성일. 엄앵란 콤비가 셀 수도 없는 많은 영화에 겹치기 출연할 때 그 목소
리는 방송국의 성우들이 대신했는데 대부분의 영화에서 성우 이창환 씨와 고은정 씨가
그들의 참 목소리 주인공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은정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엄앵
란의 목소리로 착각하여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이 후일 TV에 나온 엄앵란의 진짜 목소
리를 처음 듣고는 다들 놀랬었지요.
성우들이 주름잡던 그때, "현해탄은 알고 있다."라는 연속극에서 일본군인 리노우에 상
사 역을 맡아 고약한 이미지로 이름을 날리던 유명한 성우 주상현 씨와 우리 대학 연극
부가 연결되어 그 경연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관행 상 방송국에 누가 아는 사람이 있어야 방송극 제작에 유리하였기 때문이었지
요.
참가작품은 학생이 쓴 것이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지만 참가 대학 거의 대부분이 암암
리에 각각 내로다 하는 방송작가에게서 작품을 받는 형편이었습니다. 우리도 그 때 잘
나가는 극작가 작품을 들고 나가 결국 작품상을 받기는 하였지만...
실제 연출은 주상현 씨가 맡아서 했습니다.
방송극도 역시 연극적인 기법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 연습 자체는 별 어려움이 없었습
니다만 소리로만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 무대 연극과는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하였습
니다.
그러나 녹음 방송이 아니라 생방송이라 모두 긴장하였던 것 같습니다.
방송할 때 처음 들어가 본 때문이었는지 아무튼 남산에 있던 KBS방송국 스튜디오가 너
무나 신기하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군요.
특히 효과음을 낼 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발한 방법으로 각종 소리를 창조하여 내
는 것을 보고 감탄하였었지요.
당시 대본이 남아 있는 것도 없고 사진도 한 장 없다보니 순전히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
는 것이라 약간의 오류가 있을지는 몰라도 대충 극본의 줄거리와 각자 맡았던 역할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44
1960년 ~ 1964년

하루벌이 막노동으로 연명해 가는 아주 무식하고 우직하고 지능이 몹시 낮은 한 사나이


가 국민학교 5-6학년 정도 나이의 똘똘한 아들, 그리고 말 못하는 벙어리 아내를 데리고
도시 근교 산기슭에 움막을 치고 삽니다. 아무리 뭐가 찢어지게 가난하였지만 그들 부부
는 행복합니다.
다만 아들 눈에는 너무 바보같이 어리석어 늘 손해만 보고 사는 아버지가 불만입니다.
그러다가 무슨 사건이 생깁니다. 아버지가 파출소에 잡혀가고 아들이 따라가서 아버지를
변호하여 주어 풀려 나오던가 아무튼 한바탕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그 후 잠시 평온
을 되찾았다가 그들이 사는 움막이 그 지역 일대의 재개발로 철거당하게 됩니다. 움막에
홀로 남아 있던 벙어리 아내가 철거반에 대항하다 변을 만나게 되고 아들이 전해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나이가 철거반의 불도저를 향하여 맞서 싸웁니다. 디테일은 잘 생
각이 나지 않지만 결말은 비극으로 끝나는 줄거리였습니다.
다만 지금껏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가운데 철벅거리며 걷는
사나이의 헐떡거리는 숨소리에 맞추어 발자국 효과음을 내느라고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던 효과맨의 모습입니다.
당시 배역은 우직한 사나이 역에 김익명 동문, 똘똘한 아들 역에 김광평 동문, 벙어리
아내 역에 안재성 동문, 파출소 순경 역에 김정규 동문, 해설에는 나중에 "쟈니 브러더
스"라는 중창단의 멤버로 유명해지면서 의과대학을 그만둔 진성만 씨가 맡아 했습니다.
나이든 배역을 몇 번 하면서 아예 노역으로 배역이 굳어질 것 같았던 저, 고핀이 아역을
맡았던 것이 좀 이색적인 일이었고 벙어리 아내 역을 맡았던 안재성 동문이 특정 대사
없이 “아아..”나 “어어” 또는 “어버버버”하면서 배역을 잘 소화하여 박수갈채를 받았던
생각이 납니다.
미국 시민이 된 안재성 선배는 한 10여년 전에 제가 LA 들렀을 때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방사선과 개업을 하고 있었지요.
그때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함께 웃었습니다.
연극과 연관된 추억은 아무리 당시에는 괴롭고 힘들었어도 모두 즐겁고 행복한 기억으
로 남게 되나 봅니다.

45
오길 참 잘했습니다.
- 50주년 기념 홈커밍데이에서

진 성 만

제가 며칠 전 낯선 전화를 한통 받았습니다.
“성의연극회 50주년 기념 모임이 있는데 참석해달라..”
제게는 전혀 생소한 얘기라 전화를 잘 못 걸지 않았나 싶었는데, 전화를 건 채진호 원장
에게 자세한 설명을 듣고 영광스런 초대에 가겠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그 다음에 본과 1학년 재학생 회장이 전화를 해서 다시 한번 초청을 한다는 말씀을 듣고 쾌
히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참 오길 잘했고, 50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제 친한 친구 중에 변호사가 한 명 있는데, 이 친구가 어디 가서 저를 소개할 때는 꼭 두 가
지의 타이틀을 설명합니다.
첫번째는 "'빨간 마후라'를 부른 '쟈니 브라더스'의 '진성만'이다."
두번째는 "그렇지만, 이 친구가 가톨릭의대를 다니다가 가수를 했소"라고 말이지요.
'그렇지만'이란 단어가 조금 거슬리지만, 이 친구는 고대 법대를 나왔고, 저는 가톨릭의
대를 들어왔고 해서, 대학 생활 때부터 교류가 많았던 친구입니다.
이 친구는 제가 의사가 되지 않고 DDR 의 길로 간걸 조금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
DDR이 뭔줄 아세요? 네... '딴따라'란 말이지요?...좀 아쉬워 하더라구요.
저는 짧은 의학도 시절이었지만 이를 소중한 꼬리표로 항상 달고 다닙니다.
무척 영광스럽고, 오늘 또 이렇게 나와 보니까 더욱 더 자긍심을 갖게 됩니다.

50년 전으로 돌아가서,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같은 반 친구가


저를 잠깐 보자 하더군요.
친구 얘기인즉슨 ‘연극을 하는데 네가 좀 참여를 해줘야겠다’는 말이었습니다.
당시는 지방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사투리가 마구 튀어나올 때인데다 차림새 하며
매너 하며 몹시 촌스러웠지요.
그런데 그 친구가 왜 저를 찍었는지 지금도 미스테리랍니다.

46
1960년 ~ 1964년

그 친구가 바로 '광평' 친구예요. 아마 지금 물어보면 기억을 못할 겁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서학란'과 '프레스 룸' 두 작품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그만 두었을 때, 민간 방송인 '동아방송'이 개국되면서 성우 모집을 했어요.


제가 가톨릭의대에서 연극을 했던 경험이 진가를 발휘해서, 1000:1의 경쟁을 뚫고 제1기
성우로 합격을 할 수 있었고, 그때 '광평'씨의 덕분임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그 당시 성우가 누군가 하면 '박정자', '전원주', '사미자', 지금은 돌아가신 '김무생', '박웅
'...아주 대한민국의 쟁쟁한 연기자들이 그 때 저와 동기생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다 '쟈니 브라더스'의 '빨간 마후라'가 갑자기 빅히트를 하면서 정말이지 어느 날 자
고 일어나니까 스타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아방송 성우를 겸업하다가 성우를 그만 두고 노래로 빠지게 되었고, 지금까지
도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초대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고, 오늘 박영수 선배님, 김익명 동문, 김광평 동


문, 한광수 전 의협회장님, 백성길 동창회장님을 비롯한 여러분 모두를 뵐 수 있어서 너
무 기쁘고 오길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성의연극회의 무궁한 발전을 바라면서 제 중언부언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60년대 ‘빨간 마후라’, ‘수평선(부라보 해군)’등으로 전성기


를 구가하던 남성 사중창단 쟈니브라더스. 동아방송 성우 1
기생이기도 한 베이스 진성만 동문은 재학 중 ‘서학란’에서
김 방지거 역, ‘어느 인간 가족’에서 해설을, ‘프레스 룸’에서
‘비트 막실리안’ 기자 역을 맡았으며, 영화배우 김지미 씨의
여동생 김지애 씨와 결혼, 지미필름 대표를 역임했다. 원년
멤버 그대로 재결성한 '쟈니브라더스'가 37년 전 사진 옆에서
포즈를 취했다.

(위로부터 김준, 양영일, 김현진, 진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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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성모병원 낙성 축하, 한국 초연의 연극
[5회] '프레스 룸' - 잭하우스 원작, 주상현 연출, 1961년
공연일시 : 1961년 11월 1일
공연장소 : 시공관
주 최 : 가톨릭의과대학 학생회
원 작 : 잭 하우스 (Jack House ) 번 역 : 김광평
연 출 : 주상현, 박신호
진 행 : 주수동(본3, 4회, 작고) 무대감독 : 박영수(본2, 5회)
장 치 : 안재성(본2, 5회) 의 상 : 유연덕(본2, 5회)
소 도 구 : 문원걸(본2, 5회) 조 명 : 장영대
효 과 : 홍두표
캐 스 트 :
찜 왈린(기자)-김익명(예2, 7회), 엘 시(레스토랑 여급)-홍정자(간2), 얀 블래싱톤(기자)-김광평(예2, 7회), 도날드 바톤(기자)-김정규
(본2, 5회), 미스 모리스(여기자)-오정옥(간1), 비트 막실리안(기자)-진성만(예2), 윌리 화이트(기자)-최은철(예2, 10회), 기절한 부인-
김혜숙( KBS성우)

가톨릭의대가 첫 졸업생을 배출시킨 다음 해인 1961년에 또다시 경사스러운 일이 생


겼습니다.
명동성당 올라가는 길 우측에 교정이 있었고 그 건너편에 일제시대에 지은 고색이 창연
한 성모병원이 있었는데 구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최신의료장비를 갖춘 초현대식 새로
운 성모병원을 짓고 낙성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낙성식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잔
치가 따르게 마련이었지요.
졸업제 행사 때처럼 합창부와 프로그램을 나누었고 이번에는 연극부가 1부를 맡았습니
다.
그런데 연극을 하려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하는 문제인 작품을 고르는 일이 당시에는 대
단히 힘이 들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정보의 홍수시대가 아닌 정보 부재 시절이라 그랬겠
지만 대본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 인터넷으로도 대본을 구
할 수가 있지만 인터넷은커녕 인쇄된 책자로 나와 있는 대본조차 없었기 때문에 대본을
구하는 길이란 오직 기성극단에서 공연한 후 누가 갖고 있는 것을 수소문하여 알아보는
길뿐이었습니다.
딱히 마땅한 작품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외국원서까지 뒤적이게
되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찾아보던 중 영국 극작가들의 단막극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읽은 작품 중 하나가 퍽 마음에 들게 되면서 그걸 번역하여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핀이 감히 겁도 없이 번역작업에 뛰어들어 총대를 메고 한 달을 매달려 단막
극 작품 하나를 건져냈지요. 의대 공부 따라가기도 힘든 세월을 밤을 새워가며 연극대본
번역이랍시고 고생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작품을 어렵게 정한 후에도 그걸 연습용 대본으로 만들자면 또 한참을 고생하여야 했지
요. 복사기나 프린터가 없었던 시절이니까 가리방을 긁어 등사하는 방법 밖에 길이 없었
습니다. 가리방 긁는다는 것은 가늘게 홈이 파진 철강판 위에 원지라고 부르는 왁스 먹
인 종이를 올려놓고 일일이 철필로 긁으면서 글자 한자 한자를 써넣는 작업이었습니다.
그 작업이 끝나면 등사기에 원지를 붙이고 롤러에 등사 잉크를 묻혀 밀어내면서 종이에

48
1960년 ~ 1964년

찍는 일이 뒤따릅니다. 그 모든 작업을 우리가 직접 해야 했지요. 등사가 끝난 후 제본


은 특별한 기술과 장비가 필요한 작업이라 전문 업체에 맡겼습니다.
그때 번역한 작품은 1930년대에 발표된 영국의 무명극작가의 희곡이었는데 국내에서는
고핀이 번역하여 무대에 올린 것이 처음이니까 아마 한국초연이라고 해야겠지요?
서학란 때 같이 막을 올렸던 연극부원 중 일부가 동참하였고 간호학과 학생들도 이때부터
여역을 맡아 무대에 같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캐스트 8명 중 여역이 3명이었는데2명은 당
시 간1, 간2 학생이 맡았고 고도의 연기력을 필요로 했던 여역 하나는 당시 연출을 맡았던
주상현 씨가 방송국 성우 한 분을 어렵게 섭외하여 같이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연출도 실제는 주상현 씨가 주로 했는데 나중에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
지만 프로그램 상에는 박신호라는 군소극단 출신 한 분의 이름으로 실리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반 영국 런던의 한 법정의 기자실(pressroom)을 무대로 벌어지는 사
회풍자극이었습니다. 신문사 기자들이 진실은 외면한 채 독자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킨다
는 미명하에 세속적이거나 관능적인 호기심을 채울 기사 취재에만 경쟁적으로 열을 올
리는 현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지요.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심적 고통이나
인간적인 수치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시체를 물어뜯기 위하여 저돌적으로 달려
드는 하이에나 같은 근성으로 사건취재에 임하는 기자들의 속성을 고발하는 이야기입니다.
공연 장소는 명동 한복판에 자리 잡았던 시공관이었는데, 이곳은 나중에 국립극장으로
되었다가 무슨 증권사인가 투신사인가 하는 건물로 되었다가 2009년 연극전문공연장인
명동예술극장으로 바뀌게 됩니다.
시공관
일제시대인 1934년 다마타 건축사무소의 일본인 건축가 이시바시가
영화관으로 지은 명치좌(明治座) 건물로 1936년 6월부터 영화를 상
영했다. 당시로써는 꽤 크고 화려한 건물이었으며, 해방 후 서울시
의 공관으로 활용되어서 시공관(市公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1957
년 6월부터 국립극장으로 사용되었으며. 1973년에 국립극장이 장충
동으로 옮겨가면서 1975년까지 국립극장 산하 예술 극장으로 쓰이
다가 1975년 대한투자금융에 매각되었다. 2009년 12월 문화관광부
가 다시 이 건물을 매입하여 2009년 6월 5일 명동예술극장으로 재
개관하였다.

① 프레스룸 : 좌로부터 진성만, 오정옥, 최은철, 김광평 동문, 대사


를 하고 있는 분이 ‘기절한 부인’역의 김혜숙 씨이고 제일 우측
에 김익명 동문이 보인다.
② 1960년대 명동국립극장
① ③ 2009년 명동예술극장

② ③

49
개교 10주년 기념, 한국 초연, 드라마센터를 넘쳐나게 하다.
[6회] '아버지' - 스트린드베르히 원작 , 최진하 연출, 1964년
공연일시 : 1964년 10월
공연장소 : 드라마 센터
주 최 : 가톨릭의과대학 학생회
원 작 : A. 스트린드베르히 (August Strindberg)
번 역 : 김광평
연 출 : 최진하
무대장치 : 함현진
그외스탭 : 윤준모, 하영수, 김정상, 전후근, 조재항 등
캐 스 트 :
아돌프 (기병대위) - 김광평 (본3, 7회), 라우라 (아돌프의 처) - 서정자 (간3, 작고), 닥터 외스테르마크 - 김익명 (본3, 7회),
목사 (아돌프의 처남) - 이수웅 (본1, 10회), 마가렛 (아돌프의 유모) - 한상림 (간2), 베르타 (아돌프의 딸) - 송복자 (간4),
네드 (기병대 하사관) - 성태경 (예1, 11회), 당번병 (기병대 사병) - 이 황 (예1, 작고)

6회 공연으로 기록되는 "아버지"는 연극의 규모로 보나 작품의 완성도로 보나 1회부터 그


때까지 해온 모든 공연 중 가장 나은 작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공연입니다.
그래서였겠지만 고핀이 가장 열성적으로 매달렸었고 애착을 느끼던 작품이었다고 기억되는군요.
5회 공연 이후 2년간 공백을 두고 연극부 활동이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내심 언제고 또
무대에 설 수 있는 날만 고대하며 세월을 죽이고 있던 중 1964년은 절호의 챤스였습니다.
그 해는 바로 개교 10주년이 되는 해였고 고핀이 본과 3학년이었는데 같은 학년 급우였던
학생회장이 충분한 예산을 할애하여 연극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작품 선정을 하느라 외국서적 전문점에서 작품을 고르던 중 우연히 포켓북으로


출판된 희곡집에서 스트린드베르히의 "아버지"라는 3막극을 발견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이 발표 시에는 스웨덴어였겠지만 그 희곡집은 영어로 발간된 것이어서 내용을
파악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지요. 첫 번 읽을 때부터 감동을 받았고 무대에 올리고 싶
은 욕망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여기저기 알아보니 그때까지도 이 작품은 국내 어느 단체
에서도 공연한 적이 없었고 따라서 번역된 희곡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작
품을 우리가 공연한 다면 국내 초연이 될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한번 도전해보기로 작
정했습니다. 과거 5회째 공연작품으로 단막극을 번역했던 경험을 발판 삼아 그해 봄부터
여름까지 3달을 꼬박 번역하느라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작업을 했습니다. 영어실력이 딸
려서 진도가 안 나가고 막힐 때에는 영문학을 전공한 고교선배를 찾아가 도움도 청하곤
하였습니다. 방학 중 연습 들어가기 전까지 대본을 마련하여야 했기에 무진 애를 써가며
드디어 번역작업을 끝내고 연습대본도 만들었습니다.

아버지 연습대본

50
1960년 ~ 1964년

당시 연출은 실험극장 창립멤버였었고 여러 대학에서 연출을 맡아 왕성하게 일하시던


고핀의 고교 선배 최진하 씨를 모셔왔고, 장치는 당시 실험극장에 적을 두고 있던 배우
였고 연출가인 동시에 무대장치 제작도 하던 고교 후배 함현진에게 맡겼습니다. 함현진
은 그 후 8회 공연인 "안네의 일기"때 연출을 맡았었지요.
의상 또한 전문가가 제대로 시대고증을 하고 디자인하여 제작한 의상을 맞추기로 하였
고 분장사도 기성극단에서 출장을 나와 주었습니다. 연출과 무대장치 그리고 의상이나
분장이 정통 연극을 하는 전문가들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연기자들만 제몫
을 하여준다면 제법 수준 있는 작품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조건이었지요.
게다가 공연장소가 당시로서는 최신, 최고의 공연장이었던 드라마센터였고 조명이나 음
향시설까지 제대로 갖추어진 무대였기 때문에 연극다운 연극을 올리지 않으면 망신당하
기 딱 좋은 입장이어서 아마도 그때 연기자들이 혼신의 힘을 다 해 더 열심히 연습에
임했던 것 같습니다.

캐스트로는 저 고핀과 당시 연극부장이었던 본3 김익명 동문이 주축이 되어 본1의 이


수웅 동문, 그리고 예과1학년이었던 이황, 성태경 동문이 무대에 같이 섰습니다. 성태경
동문은 몇 년 후에 학생회장이 되었고, 하마터면 맥이 끊길 뻔하던 연극부 재건에 큰 힘
이 되어주었습니다.
캐스트 중 여역도 3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간호학과 여학생들이 잘 소화하였지요. 지원자
가 많아서 오디션을 통해 캐스트를 뽑았던 기억이 납니다.
각종 스탭에는 당시 본과 1학년 학생들이 많이 거들어주었습니다.

"아버지" 공연에 동참하였던 동문 중 윤준모, 이황, 서정자 동문은 이미 고인이 되었


고 송복자 동문은 그후 미국으로 건너가 의과대학을 다시 졸업하고 닥터가 되어 있다는
풍문을 들은 바 있으며 스탭으로 참여했던 김정상 등 동문들도 지금은 미국 시민이 되
었다고 합니다.

남우조연상 / 진지한 연극도 함현진


실험극장‘리어왕’
‘공부하는 연극인으로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향
해 더한층 노력하겠다’고 무척 겸양의 자세로
수상소감을 말하는 함 군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극에 뜻을 둔 연극도였다.
작으마한 키에, 커다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모
든 것을 배우려는 진지한 태도.
‘리어왕’, ‘도적들의 무도회’등에 출연했는가 하
면, 연출 공부도 병행하면서 자신의 의욕을 실
제와 맞추어 갔다. 지금 실험극장 동인인 그는
서울고교를 거쳐 중앙대학 연극영화과 중퇴, 연
기나 연출 외에도 무대미술에 취미가 있다. 한
때 ‘청포도극회’를 조직했던 그는 올해 25세.
장래가 더욱 촉망된다.
(동아일보 1965년 1월 7일)

51

드라마센터
김중업의 설계로 1960년에 착공, 1962년에 완공된 소극장. 창설자
유치진이 록펠러재단의 원조를 받고 건축한 총건평 700여 평, 객석
500석의 소극장으로 100여 평의 주무대와 30평의 원형무대, 뒷 무
대, 옆 무대와 도서관, 연극학교 교실, 작가실, 의상실, 분장실, 욕
실 등을 규모 있게 갖춘 최신식 극장이었다. 그러나 재정문제에 부
닥쳐 휴관과 개관을 거듭하다가 1980년 후반 서울예술대학의 실습
무대로 변용되는 등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 2009년 6월 8일 서울시
에서 이곳을 리모델링하여 현대적인 예술 공간인 남산예술센터를
조성하게 되었다.

아버지

① 라우라 역의 서정자, 아돌프 역의 김광평 동문

② 아돌프 역의 김광평 동문과 닥터 외스테르마크 역의 김익명 동


문, 아돌프와 닥터가 처음 만나 인사하는 장면이다.

③ 아돌프의 처남 목사 역의 이수웅 동문과 닥터 외스테르마크 역


의 김익명 동문

④ 아버지 아돌프 역의 김광평 동문과 딸 베르타 역의 송복자 동문 ②

③ ④

52
1960년 ~ 1964년

연극발표회
가톨릭의대에서는 창립10주년 기념 연극발표회와 음
악회를 다음과 같이 연다.
연극 발표회 = 30일과 10월 1일 하오 3시와 7시, ‘드
라마센터’에서, ‘스트린드베리’ 원작 김광평 역 ‘아버
지’ 전3막 상연, 연출 최진하
음악회 = 10월 2일 하오 3시와 7시 ‘드라마센터’에서
(동아일보 1964년 9월 29일)

TV도 없고 볼거리가 별로 없었던 시절이라 그랬겠지만 드라마센터가 미어터질 만큼 관


객이 몰려와 비명을 지를 정도가 되었던 생각이 어렴풋이 납니다.
이제 4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이 흐른 까마득한 옛 이야기가 되었습니다만 타임머신이 있
다면 한 번쯤 되돌아가 보고 싶은 시간입니다.
당시 만든 팜플렛이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어 그때 참여했던 몇 사람의 기억을 더듬어 기
록하여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작품 해설 "아버지" ( Der Vater )

이 연극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기병대위(騎兵大尉) 아돌프는 군인이면서도 박


식하고 자연과학 분야에 조예가 깊어 광물학이나 천문학에 관한 논문을 저술할
정도로 다양한 삶을 즐기는 사나이지만 20년 가까이 같이 살고 있는 그의 처
라우라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부부이면서도 남남끼리 보다도 더 서로를 이해하
지 못할 뿐더러 각자 가정 내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하여 서로 대립되어 갈등을
키워 가는 불편한 관계이다.

아돌프는 그의 처뿐만 아니라 한집안에 같이 살고 있는 장모와 자신의 유아


시절부터 함께 한 늙은 유모 마가렛, 그리고 여가정교사 등 여러 여인들이 그를
에워싸고 매사에 참견을 하는 것이 지겹기만 하다.
무엇보다도 과년한 딸의 장래 거취문제에 대하여 부부가 각자 상반된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아돌프는 그의 딸이 이 답답한 곳에 갇
히어 여러 여인들에게 휘둘리며 사느니 집을 떠나 도시로 나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계속하여 교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반면에 엄마야말로 자식과
는 더 가깝기 때문에 자식의 문제를 결정할 때 우선권을 가져야 마땅하다고 역
설하는 라우라는 딸이 그림에 재능이 있으므로 당연히 화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고집한다.

53
마침내 각자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적대적인 위치가 되고 서로의
증오심이 자라면서 비극의 씨앗이 잉태된다.

소유욕과 지배욕이 강하고 무식하지만 사악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 라우라


는 남편을 궁지로 몰아넣고 아버지로서의 권리를 박탈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그를 미친 사람으로 몰아간다.
이런 사실을 간파하지 못한 이 가정의 주치의 닥터 외스테르마크는 반신반의하
면서도 라우라의 음모에 휘말리게 되고 사태는 점점 아돌프에게 불리하게 된다.
그간 라우라가 남편에게로 오가는 편지를 가로채어 가면서 아돌프 주위 사람들
에게 그의 정신이 이상하다는 소문을 내왔던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돌프는 점
차 이성을 잃어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원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딸 베르타가 자기 소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일으키도록 교묘하게 유도한 함정에 빠져 그 속에서
고민하게 된 것이다. 주치의와 함께 공모하여 정신병원에 감금시킬 계획을 세운 라
우라는 마침내 아돌프에게 "이제 당신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는 것을 군당
국에 알리는 이 편지 한 장으로 당신은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당신
없이도 우리는 당신의 연금으로 살 수 있으니 걱정 말라."라는 말로 약을 올린다.
이에 격분한 아돌프는 그녀의 면전을 향하여 불이 켜 있는 등잔을 던지고 사태는
극도로 악화된다.

결국 정신이상으로 몰린 아돌프는 믿었던 늙은 유모까지 합세한 꾀임에 속아


광폭한 정신병자 또는 죄수들에게나 사용하는 구속복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게 되고 때늦게 자신이 꼼짝못하게 묶여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정말 미
친 사람처럼 흥분하여 울부짖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유모의 품속에서 숨을 거
두고 만다.

근대적 희랍비극이라는 평을 듣는 희곡 "아버지"는 3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야기 구조가 단일한 사건에 집중되어 있고 무대도 동일한 장소, 같은 거실에
서 24시간 동안에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다. 그뿐 아니라 주요 인물들의 심
리상태를 극렬하게 묘사한 솜씨를 보면 철저한 자연주의 수법으로 구성한 사실
극이라고 해야할 듯하다.

이 극은 1887년에 발표되자마자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파리의 "자유극장"에서


도 공연되었고 그 후 100여년이 넘도록 여러 나라에서 찬사를 받으며 공연된
작품으로 최근 1990년대 중반까지도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상연된바 있다.

54
1960년 ~ 1964년

스트린드베르히( August Strindberg : 1849-1912 )의 작품 세계

입센과 더불어 유럽 사실주의 연극 시대의 쌍벽을 이루는 스트린드베르히는


노벨 문학상도 받은 바 있는 스웨덴의 극작가며 소설가다.
초기에는 철저한 자연주의 수법과 심리묘사를 위주로 한 사실주의 작품을 주로
썼으나 만년에 들어서서는 차차 신비주의, 표현주의 내지 초현실주의적인 경향
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부유한 상인인 아버지와 그 집 하녀인 어머니 사이에 원치 않는 자식으로 태어
난 그는 일찍이 모친을 여이고 계모에 의해 학대받으며 실의와 좌절과 혼돈 속
에서 불만스런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대학을 중퇴 후 가정교사, 신문기자, 도서관 사서 등의 직업으로 생계를 꾸리면
서 문학에 집착하기 시작한 그는 평생동안 60편 가까운 희곡을 위시하여 시와
소설도 썼고 철학, 종교, 역사, 천문학 분야의 각종 저술도 남겼다.

희곡 중에서는 "아버지" "미스 줄리" "죽음의 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 "유령


소나타"등이 알려져 있으며 자서전적 소설인 "치인(痴人)의 고백"도 유명하다.
그의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남녀간의 냉혹하고 처절한 싸움이나 잔인할 정도의
여성혐오증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그가 여성으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에
기인한 것으로 이해된다.
3번 결혼한 경력은 그가 얼마나 대 여성관계가 불안하였는가를 말해주는 듯하
다.
여권 신장을 주장했던 입센과는 달리 그는 인생이란 남성과 여성, 양성(兩性)의
끊임없는 전투이며 질서와 평정을 위해 어느 한쪽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어야
하겠지만 만약 여성이 그 위치에 선다면 모두 파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역설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편협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후세의 많은 극
작가, 예를 들면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암스, 해롤드 핀터, 사무엘 베케트, 존
오스본 등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55

① ③

④ ⑤

아버지

① 한상림 동문이 노련한 연기를 보였던 늙은 유모 마가렛이


아돌프에게 얘기를 걸고 있다.

② 아돌프가 지친 몸으로 소파에서 쉬고 있다.

③ 공연이 끝난 후 최진하 연출과 김광평 동문

④ 좌로부터 유모 마가렛 역의 한상림 동문, 최진하 연출, 베


르타 역의 송복자, 라우라 역의 서정자 동문

⑤ 좌로부터 네드 역의 성태경, 베르타 역의 송복자, 유모 역


의 한상림, 라우라 역의 서정자, 당번병 역의 이황 동문

⑥ 뒷줄 좌로부터 김익명, 하영수, 전후근, 최태일, 한 사람


건너 성태경, 조재항, 이황 동문, 앞줄 좌로부터 윤준모,
김광평, 서정자, 최진하, 송복자, 한상림, 김정상 동문 ⑥

56
1968년 ~ 1977년
PROGRAMS
제 8 회 안네의 일기 1969년 11월 13일, 14일

58
PROGRAMS 차례

제 8 회 안네의 일기 1969년 11월 13일, 14일

59
PROGRAMS
제 8 회 안네의 일기 1969년 11월 13일, 14일

60
PROGRAMS 차례

제 8 회 안네의 일기 1969년 11월 13일, 14일

61
PREFACE
PROGRAMS
축|시
제 9 회 안도라 1970년 10월 1, 2, 3일

62
PROGRAMS 차례

제 9 회 안도라 1970년 10월 1, 2, 3일

63
PROGRAMS
제 9 회 안도라 1970년 10월 1, 2, 3일

64
PREFACE PROGRAMS 차례

축|시 제 10회 수업료를 돌려주세요 1971년 봄

65
PROGRAMS
제 11회 국물 있사옵니다. 1971년 9월 23, 24, 25일

66
PROGRAMS 차례

제 11회 국물 있사옵니다. 1971년 9월 23, 24, 25일

67
PROGRAMS
제11회
제 11회국물국물 있사옵니다.
있사옵니다. 1981년
1971년 9월 23, 24, 9월
25일 23, 24, 25일

68
PROGRAMS 차례

제 11회 국물 있사옵니다. 1971년 9월 23, 24, 25일

69
PREFACE
PROGRAMS
축|시
제 12회 곰 1972년 봄

70
PROGRAMS 차례

제 13회 노부인의 방문 1972년 9월 28, 29, 30일

71
PROGRAMS
제 13회 노부인의 방문 1972년 9월 28, 29, 30일

72
PROGRAMS 차례

제 13회 노부인의 방문 1972년 9월 28, 29, 30일

73
PROGRAMSPROGRAMS
제 13회
제 13회 노부인의 노부인의
방문 1972년방문 1972년
9월 28, 29, 30일9월 28, 29, 30일

74
PROGRAMS 차례

제 13회 노부인의 방문 1972년 9월 28, 29, 30일

75
PROGRAMS
제 13회 노부인의 방문 1972년 9월 28, 29, 30일

76
PROGRAMS 차례

제 14회 강제결혼 1973년 봄

77
PROGRAMS
제 15회 십이야 1973년 9월 27일, 28일, 29일

78
PROGRAMS 차례

제 15회 십이야 1973년 9월 27일, 28일, 29일

79
PROGRAMS
제 15회 십이야 1973년 9월 27일, 28일, 29일

80
PROGRAMS 차례

제 15회 십이야 1973년 9월 27일, 28일, 29일

81
PROGRAMS
제 15회 십이야 1973년 9월 27일, 28일, 29일

82
PROGRAMS 차례

제 16회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들 1974년 3월 30일

83
PROGRAMS
제 16회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들 1974년 3월 30일

84
PROGRAMS 차례

제 17회 우리읍내 1974년 9월 26, 27, 28일

85
PROGRAMS
제 17회 우리읍내 1974년 9월 26, 27, 28일

86
PROGRAMS 차례

제 17회 우리읍내 1974년 9월 26, 27, 28일

87
PROGRAMS
제 17회 우리읍내 1974년 9월 26, 27, 28일

88
PROGRAMS 차례

제 17회 우리읍내 1974년 9월 26, 27, 28일

89
PROGRAMS
제 17회 우리읍내 1974년 9월 26, 27, 28일

90
PROGRAMS 차례

제 17회 우리읍내 1974년 9월 26, 27, 28일

91
PREFACE
PROGRAMS
축|시
제 18회 건강진단 1975년 봄

92
PROGRAMS 차례

제 19회 안티고네 1975년 9월 25, 26, 27일

93
PROGRAMS
제 19회 안티고네 1975년 9월 25, 26, 27일

94
PROGRAMS 차례

제 19회 안티고네 1975년 9월 25, 26, 27일

95
PREFACE
PROGRAMS
축|시
제 20회 환타스틱스 1976년 3월 27일

96
PROGRAMS 차례

제 20회 환타스틱스 1976년 3월 27일

97
PROGRAMS
제 21회 해녀 뭍에 오르다 1976년 9월 27, 28, 29일

98
PROGRAMS 차례

제 21회 해녀 뭍에 오르다 1976년 9월 27, 28, 29일

99
PROGRAMS
제 21회 해녀 뭍에 오르다 1976년 9월 27, 28, 29일

100
PROGRAMS 차례

제 21회 해녀 뭍에 오르다 1976년 9월 27, 28, 29일

101
PROGRAMS
제 22회 찰리 브라운 1977년 3월 24일, 25일

102
PROGRAMS 차례

제 22회 찰리 브라운 1977년 3월 24일, 25일

103
PROGRAMS
제 23회 사계절의 사나이 1977년 9월 15, 16, 17일

104
PROGRAMS 차례

제 23회 사계절의 사나이 1977년 9월 15, 16, 17일

105
PROGRAMS
제 23회 사계절의 사나이 1977년 9월 15, 16, 17일

106
PROGRAMS 차례

제 23회 사계절의 사나이 1977년 9월 15, 16, 17일

107
1964년 ‘아버지’ 공연 이후 4년 간의 공백기가 있었으나, 경운동으로 캠퍼스를 이전한 1968년, 당시 학생회 회장 성태경 동문이 연극의
부활을 주도하여 ‘실수 연발’을 무대에 올릴 수 있었고 이후 매년 정기공연을 갖게 되었다. 이때 연출을 맡은 이승규 씨는 이후 1975년
‘안티고네’ 공연까지 8년 동안 가을 정기공연의 연출을 맡아서, 계속적으로 본교 연극부를 지도하며 성의연극회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968년 ‘실수연발’과 1969년 ‘안네의 일기’는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였으나, 1970년 'CAMEAD' 축제 기간 중 공연된 ‘안도라’부
터 외부 공연의 대관료 비용으로 조명기구를 구입, 경운동 강당에 설치하여 사용함으로서, 이후부터 교내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1971년부터 ‘신입생 환영 봄공연’과 ‘가을 정기대공연’으로, 년 2회 공연이 정착되었고, 1972년 ‘곰’을 문일신 동문이 연출함으로써 학
생 연출의 시작을 알렸다.
1974년 이종건 동문이 연극부장을 맡으면서 MT 등, 연극 외의 행사를 통해 동아리의 형태를 갖추며 결속을 다지게 되었다. 또한 1973
년부터는 정기 공연 이외에도, 연극에 관심 있는 학생들을 위한 workshop 공연이 시작되었다.
1976년 봄, 첫 뮤지컬 ‘환타스틱스’를 무대에 올리고 이듬해인 1977년에도 뮤지컬 ‘찰리 브라운’을 공연하였다.

성태경 학생회장, 연극부의 맥을 잇게 하다


[7회] '실수연발' - 셰익스피어 작 , 이승규 연출, 1968년

(박창서 ・ 의18회)

입학 후 선배들의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연극부원들이 예1 교실에, 그것도 수업시간을


교수님께 할애 받아 15분간이나 선전(?)하고 있었는데,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예1 교실에
찾아온 선배들의 숫자가 규모가 작은 단과 대학치고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나중에 알
았지만 실수연발의 출연자들과 스탶들이 총동원되었다.)
연극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르고 시작하였던 연극부 생활, 그래서 내 생애 최초로 좋
은 선배님들 덕분에, 연극다운 연극 그리고 드라마센터라는 우리나라 그 당시 국립극장
다음으로 순수 연극을 위한 무대에서 데뷔 작품, 셰익스피어 작, 이승규 연출의 <실수
연발>에 출연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공연은 여러분들이 누차 들어 알듯이, 가톨릭의대 연극부의 맥을 잇게 한 작품이었


다. 앞서 김정규, 김광평 선배님들을 주축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연극이 김광평 선배님
이 졸업하시고 그 맥이 끊어지려던 차에, 당시 본3이던 성태경 학생회장 (당시는 본과 2
년 말에 선출하여 본3 때 회장 활동을 했음)이 예과 때 연극부 활동을 하던 것을 다시
일으킨 노력으로 드디어 막을 올린 작품이다. 무려 6개월을 연습했고 그래도 캐스트가
모자라서 예1에 와서 새로운 후배를 물색 끝에 내가 뽑혔던 것이다.

그것이 나의 대학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커질 줄은 몰랐다.


나는 욕구가 많은 사람인지, 아니면 어느 것에도 만족할 수 없었던 욕구 불만형의 사람
이었는지, 하라는 공부는 제대로 안하면서, 성의학보 기자 생활과 당시 경제 형편상 다
른 집에 입주하여 과외 선생하랴, 또 학교외의 모임에 나가랴 넘 바쁜 생활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충실하지 못하면서 오지랖만 펄럭이고 다녔다.

108
1968년 ~ 1977년

(문일신 ・ 의16회)

1964년 6회 공연 ‘아버지’ 이후 65년~67년 공연의 공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상한 일은 아닌 것이 당시엔 매년 1회 공연이 정착되지도 않았고, 학생회에서도 한 해는
‘합창공연’, 한 해는 ‘연극공연’ 하는 식으로 격년으로 연극공연을 지원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던 중 1964년 입학하여 6회 공연 ‘아버지’ 무대에 선 경험이 있는 본3의 성태경(12


회) 선배가 68년도 학생회 회장이 되면서 연극 공연의 부활을 기획하게 되었고, 그 결과 7
회 공연으로 ‘실수연발’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연출은 당시 중앙대 연극영화과 1~2회 출신들로 구성된 극단 가교의 대표 연출이신


이승규 연출이 섭외가 되었는데, 연극에 대한 순수한 열정에 불타오르는 이승규 연출은
연습 중간에 작품 자체를 바꾸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연구하는 자세로 5~6개월의 긴
연습기간을 거쳐 드라마 센터에서 막을 올렸다 합니다.(이 이야기를 자세히 아는분은 14
회 내과 이광우 교수입니다.)

공연은 크게 성공하여 3일간 4회 공연하는 동안, 드라마 센터는 연일 입장객으로 긴


줄이 생기고, 관객으로 극장이 미어터지고, 늦게 도착하신 정일천 학장님이 객석 사이
계단에 신문지를 깔고 관극하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이후 가톨릭의대 최고의 동
아리는“연극부~!”의 등식이 생기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실수연발

109
‘안네의 일기’에서 ‘강제결혼’까지

문일신(의・16회)

연극과의 첫 만남 ~ 69년 가톨릭의대 입학과 연극부

당시는 ‘성의 연극회’공식 이름이 ‘가톨릭의대 연극부’입니다.

‘69년 3월에 가톨릭의대에 입학하여, 갓 신입생으로 가톨릭신자들 모임에 참석 하였다


가, 연극부 신입회원을 뽑느라 물색중 이던, 당시 본1 정진범(14회, 재미), 이광우(14회,
본교 내분비내과 교수)를 만나 입회를 권유 받고, 예1 박경웅(개업), 간1 최낭희(재미),
간1 조인옥(소재불명)과 함께, 경운동 학교 지하 학생 식당에서 연극부 모임에 처음 참
석하게 되었습니다.
가보니 간단한 자기소개, 연극부 역사와 현황을 듣고, 이제 가을 공연 작품 선정이 되면
연락하겠으니 기다리라는 이야기를 듣고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연극부는 동아리
활동의 모임은 없고, 공연 중심의 모임이었습니다.)

‘69년 당시 연극부원은 본4 성태경(신경외과, 대림성모병원), 김영민(내과개업) / 본2 이


응상(뉴질랜드 이민) / 본1 정진범, 김덕수, 장윤오, 한종석, 김명덕(이상 모두 미국이민),
이광우(본교 내과교수), 윤기헌(비뇨기과 개업) / 예2 박창서(개업)/ 예1 문일신(소아과 개
업), 박경웅(통증의학과 개업)/ 간4 김정숙(소재불명)/ 간1 최낭희(미국이민), 조인옥(소재
불명) 이었습니다.

당시 연극부는 제가 입학하기 전 해인‘68년에 올린 ‘이승규 연출, 실수연발’에 대한 무


용담이 한창이었습니다. ‘실수연발’ 공연으로 자신감과 맨 파워를 갖춘 예2의 이광우, 정
진범, 이재철, 김명덕, 한종석, 장윤오, 윤기헌등의 멤버가 본1로 진급하여, 연극공연의
열정을 불태운 결실로 69년 11월13일 가톨릭의대 연극 공연사에 길이 남을, 대외적으로
도 인정 받게되는, 최고의 연극공연 ‘안네의 일기’를 함현진 연출로‘드라마 센터에서 올
리게 됩니다. 이 공연에 저는 예과 1년에 참여하였고, 그 자세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110
1968년 ~ 1977년

첫 무대 '안네의 일기'에 Casting,


"대학극...클랄라아의 중후한 연기가 돋보인 연극" 이란 극평 기사가~!
[8회] '안네의 일기' - 안네 프랑크 작 , 함현진 연출
1969년 11월 13일~14일 오후 3시, 저녁 7시, 드라마센타
Staff :
연출: 함현진 / 기획: 이응상(본2) / 무감: 김명덕(본1) / 효과: 옥인영(본2) / 소품: 장윤오(본1) / 조명: 김덕수(본1)
/ 의상: 조인옥(간1)
Cast :
옷토 후랑크: 이광우(본1) / 에디트 후랑크: 김정숙(간4) / 마르콧트: 김승혜(간3) / 안네: 채수희(간3) / 환단: 정진범(본1) /
환단부인: 최낭희(간1) / 페에타아: 윤기헌(본1) / 둣셀: 이응상(본2, 연극부장) / 미이프: 한종석(본1) / 크랄라아: 문일신(예1)

봄에 신입생 환영모임 이후 연극 생각은 까맣게 잊고 지내고 있는데, '69년 1학기말


시험도 끝나고, 얼마 후 본1 정진범 선배가 찾아와 가을 공연작품으로 안네 후랑크 작,
오혜린 역의 '안네의 일기'가 선정 되었고, 연출은 당시 최고의 연극배우 중 한명인 함현
진 씨로, 저는 '클랄라아'역으로, 예1 박경웅은 안네 아버지 비서역인 '미이프'로 casting될
것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아시겠지만 '클랄라아'는 안네 가족이 무대인 다락방에 피신해 있는 동안, 안네 아버지


회사를 맡아 운영해주는 자로, 다락방에 가끔 등장해서 필요한 생필품도 공급하고, 긴박
하게 돌아가는 밖의 소식도 전달해주는 messenger 역으로, 아무튼 그때 그때마다 등장하
여 극의 분위기를 반전 시켜주는 '대사량' 은 적으나, 매우 중요한 역이라고 선배는 부연
설명하며, 결코 단역이 아니라며 격려 해주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정국은 박 대통령의 '3선 개헌반대'의 소용돌이 속에, 학생들은 연일 가


두 데모에 나섰고, 당국은 '휴교령'과 '집회금지령'등으로 대응하는 상황이라, 공연의 성
사 여부가 불투명한 채, 불안한 마음으로 연습이 진행되었습니다.

연습은 집회허가가 나지 않아 간호학과 기숙사를 빌려 숨어 연습을 하기도 하고, 다방


이 끝난 이후 다방을 빌려 밤샘하기도 하고, 또 공연 여부가 불투명하자, 자로 잰듯한
블로킹을 긋고, 대사 하나도 완성도가 만족할 때까지 몇날 몇일 반복시키며 엄격한 연습
을 원칙으로 하시던 ‘함현진’ 연출도 드디어 폭발하여 못하겠다 하기도 하고, 공연 1주
를 남기고 부원 간에 구타 사건이 생기기도 하고(이 사건은 당시 본1 윤기헌 선배와 간
3 채수희 사이에 연습 과정에서 생긴 말다툼 끝에, 윤선배가 따귀를 한 대 올렸는데, 채
수희가 가까이 있는 기숙사에 가서 울고불고 하면서 일이 커져, 간4 김정숙 선배가 가세
하게 되고, 공연을 하니마니 하며 일이 커지자 당시 연극부장이신 본2의 이응상 선배가
“공연을 망치려하느냐~!”하며 윤기헌 선배를 불러 야단치신 일입니다.)...
암튼, 얼마나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는지, 공연 팜플렛에 당시 부장이자 기획이었던 본2
이응상(12회, 비뇨기과 뉴질랜드 이민)은 "그래도 막은 오른다!" 는 일성을 토해 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막은 올랐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공연은 드라마 센터
공연 사상 손꼽히는 수작으로 평가될 정도로 성공적 이었습니다. 함현진 연출은 "이제
나는 연출로서는 이 이상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다!"라고 하며 평생 연출은 하지 않겠

111
다고 선언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함현진 연출의 인맥으로, 효과에는 효과의 전설 김벌레 선생님이 지도하셨고, 장치는


‘최연호’ 선생께서 맡으셨는데, 한국 무대장치 1인자로 이번 장치를 맡으신 최연호 선생
께서도 자신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내세울 수 있는 수작 다섯 걸작의 하나로 이 '안네
의 일기' 장치를 꼽는다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급기야는 웬만한 공연은 관극 하지 않으
신다는 연극계의 거목 '유치진' 선생께서도 일부러 오셔서 관극을 하시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저렇게 일간지 문화부 기자들 귀에 까지 들어가, 그들도 관극을 하게 되


고, 그들 역시 감동하여 대학극이 이렇게 공연했다는 것이 기사 거리가 될 만 했는지 문
화면에 Box기사로 처리하였는데, 동아일보의 기사 내용은 대강 이러 했습니다~!
"..... 가톨릭의대 '안네의 일기' 공연은 대학극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감동을 우리에게 선사
하였다.... 흠이라면 아마츄어로 기본 훈련부족에서 오는 '대사의 소화불량증'.... 그러나, 클랄
라아 역(문일신 분)의 중후한 연기가 돋보였다....."

아! 어떤 기자 분이었는지..., 저는 이 한줄의 기사의 힘으로, 연극 속으로... 연극속으


로... 점점 몰입해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안네의 일기

당대 최고의 무대장치가이신 최연호(작고) 선생님의 무대장치입니다. 최


연호 선생님은 돈을 갖고 이야기하자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위치에
계신 분이었지만, 함현진 연출 소개로 ‘안네의 일기’에서 우리 연극회와
인연을 맺으신 후, 계속해서 ‘안도라’, ‘국물 있사옵니다’, ‘노부인의 방
문’ 등의 무대장치를 흔쾌히 만들어주셨습니다. 열악한 경운동 무대를 탓
하지 않으시고 대본 분석과 무대조건 파악을 철저히 하시고 완벽한 작품
을 만들어주시던 선생님께서 곁에 계시지 않음을 너무 애석하게 생각하
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갖고 머리숙여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좌측부터 의사 둣셀(이응상), 안네 어머니 디트(김정숙), 안네 언니 마르콧
트(김승혜), 안네(채수희), 안네 아버지 후랑크(이광우), 그리고 환단씨 가
족들인 아들 페에타(윤기헌), 환단 씨 부인(최낭희), 환단 씨(정진범)

안네의 일기

안네 가족이 은신해 있는 다락방에 클랄라아(문일신, 무대 중앙)가 방문했


을 때, 안네 아버지인 프랑크(이광우)가 맞이하는 장면

112
1968년 ~ 1977년

'69년 겨울 '범연회'(범대학 연극연구회)에서 casting과 '이승규 연출'과의 만남

예 1학년말 시험을 끝으로, 겨울의 긴 방학으로 들어 가려하는데, 어느 날 불쑥, 본1


정진범 선배가 찾아 왔습니다. '범연회'라는 모임이 있고, 거기에서 지금 희랍비극 '에우
리피데스' 작 '박코스의 여신도'라는 작품을 '이승규' 연출(현 재미)로 연습중인데, casting
추천 부탁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승규' 연출! 연극계에 젊은 세대의 리더로 주목을 받고 있던 분! 중앙대 연극영화과


1회 출신으로 중대연극과 동문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던 극단 '가교'의 대표와 연출을
맡고 '68년 셰익스피어 작 '실수연발' 공연으로 우리 연극부와 인연을 맺은 후, '70년대
우리대학 연극부 중흥의 시기에 수년간을 우리 연극부와 함께하셨던 분입니다~ 이승규
선생과 저의 인연은 그렇게 만나게 되어 시작 되었습니다.

‘박코스의 여신도’ 공연 - 범대학연극연극회

전국 9개대학 연극회 회원의 모임인 범대학연극연극회는 오


는 6~8일(하오 3시, 7시) ‘유리피데스’ 작 (김갑순 번역) ‘박크
스의 여신도’를 명동성당 문화관서 공연한다. 연출은 이승규,
서울대, 가톨릭의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외국어대학 등이 참
가한다. 이 범대학연극연구회는 지난 1월, 12개 대학 연극회
회원들의 주동으로 발족되었다.
(경향신문 1970년 3월 5일)

‘70년 연극 공연의 큰 변화와 가을공연 '안도라'의 사연

‘70년, 제가 예과 2년에 진급했고, 69년도 ‘안네일기’ 공연에 매료된 동급생들의 연극부


추가 입회가 있었습니다. 추가 입회하게 된 동기가 16회 김남철(미국이민), 고익준(피부
과 개업), 김은중(본교 산부인과 교수) 등입니다. 그리고 신입생으로는 17회로 입학한 이
종건 등이었습니다. 당시 활약이 컸던 14회 이광우, 장윤오, 김덕수 선배 등이 보성고 출
신이었던 인연으로 공연 시 숱한 보성고 후배들을 불러 모아단역으로 세우는 등으로 후배를
끌여들여 우리 연극부에는 한동안 이종건, 문세호, 김진배, 이춘오, 안인호..., 최창순, 변

113
상태로 이어지는 보성고 출신들이 연극부의 강세를 이루게 됩니다.

또 한편 연극부 출신 본2 정진범 선배가 학생회 회장으로 진출하며, 공연에도 큰 변화


가 옵니다.

정진범 회장은 연극했던 경험을 살려, 분산 개최되던 여러 동아리 행사를 모아, 일주


일 간의 축제행사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름하여 'CAMEAD' 축제입니다. 연극 공연도 이
행사 기간 동안 공연 일자를 잡게 되는 등, 여러 변화가 불가피 했구요. 공연장소도 '드
라마센타' 등 전문 극장을 대관하던 것을, 예산 관계 등으로 경운동 작은 강당에 조명등
을 좀 보강하여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극장이라고 하기에는 만족할 수 없는 빈약한
무대이기에, 몇 년에 한번 씩은 교외 전문 극장을 이용하기로 하였습니다. 허나 그 후
40 년 동안 우린 학교 강당이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70년 당시 학생회장에는 연극부 출신 14회 정진범, 연극부장에는 14회 이광우 선배라는
구도가 짜졌습니다. 이광우 선배는 함현진 연출에게 먼저 연출을 섭외하였으나 고사하
자, 이승규 연출께 섭외하였고, 이승규 연출은 자신이 한번 올리고 싶어하던 희곡, 막스
프리쉬의 '안도라'를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국립극단의 첫 상임연출가 이승규 씨


미국 유학을 마치고 최근 귀국한 연출가 이승규 씨가 국립극단
의 첫 상임 연출가로 발탁됐다. 국립극장은 지난해 행정주도에서
예술인 중심으로 대폭적인 운영개편안을 마련, 오랜 침체를 벗어
나려고 하는 터라 이 씨의 국립극단 영입은 하나의 방향 제시로서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국립극단은 한국적 현실에서 다른 극단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극을 위한 연습이 아니라 연기자를 만
들기 위한 훈련도 해야 하고 우리나라의 정신적 가치나 독특한 미
(美)를 표현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국립극단이라면 적어도 다른 나라에서 그 특유의 연극술을
배우러 와야지 가르침을 받을 입장이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소속 배우들을 중심으로 운영돼온 국립극장이 상임연
출가를 맞아들인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상임연출가라하나 맡은
일이 거의 예술 감독과 통해 국립극단이 작품과 연출가 중심으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 씨는 1965년 극단 가교의 창단 주역으로 15 년 동안 가교를
이끌어오다 80년 도미, 뉴욕대학에서 공연이론을 전공,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특히 연구 분야가 전통연극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국
립극단이 안고 있는 과제와도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셈이다. “우리
연극은 근세에 와서는 너무 서구적인 것을 모방한 경향이 강하고,
전통 연극은 박물관에 박제돼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우리 전통
을 어떻게 재창조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큽니다.”
우리 전통극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국립극단을 깊이
있고 권위있게 운영하면서 끊임없는 실험 작업도 해야 한다고 덧
붙였다.

“연극의 표현 매체는 언어가 아니고 공간입니다. 우리 연극이 언어에만 매달렸기 때문에 큰 발전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소리, 조명, 배우의 몸뚱이,
무대장치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자리할 수 있는 공간 속에서 언어도 하나의 요소일 뿐입니다.”
그동안의 자신의 연극관의 변화를 이렇게 간추렸다.
어쨌거나 그의 무르익은 예술 세계가 국립극단과 어떻게 맞아 떨어지고 국립극단이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에 대한 연극계의 기대는 자못 크다.

(경향신문 1985년 6월 18일)

114
1968년 ~ 1977년

경운동 시대의 개막
[9회] '안도라' - 막스 프리쉬 작 , 이승규 연출,
1970년 10월 1일 ~ 3일 (오후 3시, 7시 4회 공연), 경운동 강당
Staff :
연출: 이승규 / 기획: 이광우(본2) / 지도교수: 문재각 / 효과: 김벌레, 최보문 / 장치: 최연호 / 조명: 김덕수, 김은중
/ 분장: 장윤오 / 소도구: 이희숙, 조옥선 / 의상: 박경임, 성말임 / 편집: 이재철 / 진행: 현유진
Cast :
안드리; 윤기헌 / 바르쁠린; 정경희 / 교사; 문일신 / 어머니; 최낭희 / 부인; 유명순 / 신부; 박창서 / 군인; 김남철 /
주인; 박경웅 / 목수; 김명덕 / 의사; 한종석 / 견습생; 고익준 / 낯선자; 이광우 / 천치; 채세용 / 검은제복 군인들;
권혁준, 유혜승. 김용운, 최희수, 이종건 / 유태인 검열관; 권오경

이승규 연출은 당시 캐스팅에 ‘오디션’ 제도를 시행하셨는데, 저는 '중년 이상 노역'이


쉽게 어울리는지, 아버지 교사 역으로 일찍 casting 이 되었고. 주인공 소년 '안드리'와 그
의 여친 여주인공 '바르쁠린'의 casting이 되지 않아 일정에 큰 차질이 올 상태인지라, 급
기야 한해 유급하여 연극을 쉬고 있던 본1 윤기헌 선배가 불려와 '안드리'를 맡고, 당시
성의학보사에 아리따운 여기자로 있던 '간1 정경희'가 전격 스카웃되어 그의 연인 '바르
쁠린' 역을 맡게 되었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두 사람은 실제로 백년가약을 맺었다는 것
이니, 사람의 인연이란 것은 참으로 오묘하다고 할 밖에...

장치는 다시 최연호 선생님이 맡아 주셨는데, 빈약한 경운동 강당의 무대를 중후한 안


도라의 도시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장치예술에 감탄하였습니다.
Casting에서 기억 나는 것은 유태인을 색출해내는 유태인 검열관에 권오경(예2. 현재 서
울성모 통증의학과 교수)인데, 180cm가 넘는 큰 거구가 뚜걱 뚜걱 등장하자 무대가 꽉
차고, 관객들이 우와! 하며 탄성을 지르고, 연극을 한층 흥분의 도가니로 만든 기억이
납니다.

115
'71년 연극부장을 맡으며 봄, 가을 년 2회 공연을 시도하다~

이끌어 주시던 바로 윗 선배들은 본3으로 진급하여 명동으로 떠나고, 바로 윗 학년(15


회)에 연극부원이 없었고, 그리하여 저는 본1로 진급하며, 임기를 끝낸 이광우 선배 후
임으로, 71년~72년 본2까지 2년간 연속으로 연극부장을 맡게 됩니다. 참~! 연극과 나의
인연은 모질다고 할 수밖에... 물론 2년간의 연극부장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학생
회를 거칠게 다루어 악명 높은(?), ‘연극부 트리오’로 좌충우돌 해준 박경웅(영등포 개
업), 김남철(마취과, 미국이민) 같은 좋은 친구들 덕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가을 대공연이 연출부터 장치, 심지어는 분장까지 전문 연극인의 도움을 받아 치


루어 진다면, 연출, 장치, 분장 모두를 우리 손으로 만드는 연극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
래서 봄공연을 신설하여 봄, 가을 년 2회 공연을 하기로 하고, 봄 공연 날짜는 3월로 하
면, 겨울 방학 동안 연습하기도 좋고 ‘신입생 환영 공연’ 타이틀로 학생회에서 자금을
얻을 수도 있고 하여 ‘신입생 환영’ 봄 공연을 시도하게 됩니다.

본과 진급하면 잘 알겠지만 해부학, 조직학... 등등 엄청난 양으로 쏟아지는 학업의 중


압감, 수시로 보는 시험으로 눈 코뜰 사이 없는데, 1년에 한번 연극공연도 모자라 공연
을 2번씩이나 하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나도 미쳤지 미쳤어 ~@#$%

116
1968년 ~ 1977년

연출 없는 연극, 첫 봄 공연
[10회] '수업료를 돌려주세요' - 카인츠 프릿취 작 , 이재철 외 연출,
1971년 봄 연출: 이재철 외 다수 / 기획; 문일신 / 71년 신입생환영회 / 경운동강당
Cast :
문일신, 박경웅, 김남철, 김은중, 박창서, 박경애 외 다수

처음이라 힘에 부치지 않게 쉬운 작품을 한다고 단막극 카인츠 후릿츠 작 '수업료를


돌려주세요'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학생 연출의 부재로 고생하게 됩니다. '연출 없는
연극!' 을 한 겁니다. 공연 연보를 보면 1971년 ‘수업료를 돌려주오’의 연출은 실은 누구
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작품 선정 후, 연출을, 경기고교 재학생 때부터 연극 활동을 해
온 본3 이재철(작고) 선배에게 부탁하여 시작하였으나 몇 번 하지 않아 여러 가지 이유
로 도중하차 하시게 됩니다.
급하게 되어 같이 연습하던 박창서(개업, 목사)동문이 연세대 재학생인 어떤 후배를
소개하여, 연출을 맡겼으나 casting만 바꿔놓고 무단히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황당하
게 되었습니다. 공연 3일 전 되어서야 이승규 연출님에게 급히 S.O.S.를 보내 도움을 요
청한바, 와 보시고 어처구니 없어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얼마나 한심하셨던지, 이
승규 연출께서 팔소매를 걷어 부치고, 공연 하루 전 인데도 블로킹을 이리저리 바꾸어,
겨우 막을 올리게 되었는데, 작품이 코믹한 덕분에, 속사정을 모르는 관객들은 그저 재
미있다고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공연 당일에는 극단 가교의 배우 김동욱 씨등이 오셔서
분장을 해주시고, 다른 Staff 의 공백을 메꿔 진행되었습니다.
casting에서 기억 남는 일은, 연습을 구경 하러온 신입생 간호학과 1학년 박경애를 ‘사환’
으로 전격 Casting하여 신입생이 신입생 환영 무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팜플렛을 보면 재미있는 것이 우리나라 최고라 할 수 있는 통기타 가수의 전설들


인,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양희은이 출연한 것입니다. 당시 윤형주가 연세의대를 다니
다, 다시 경희의대로 적을 옮긴 '의과대학생'의 신분이었기에, 윤형주를 통하여 이 멤버
들이 섭외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117
캐스트로 서려면 건강 진단서를 떼어 와라!
[11회] '국물 있사옵니다' - 이근삼 작 , 이승규 연출, 1971년 가을
1971년 9월 23일(목), 24일(금), 25일(토) 평일 오후 7시, 토요일 오후 3시, 7시,
경운동강당
Staff :
연출; 이승규 / 기획; 김남철 / 조연출; 박창서 / 무대감독; 박경웅 / 효과; 김벌레, 김강회, 노영숙 / 장치; 김해랑,
이장정 / 조명; 권오경, 방진성, 김헌지 / 분장; 김동욱, 고익준 / 소도구; 이종건, 이용배 / 의상; 이래은, 김경숙 /
프로그램; 김은중 / 진행; 윤기헌
Cast :
김상범; 문일신 / 김상학; 민풍기 / 김상출; 김은중 / 사장; 박창서 / 배영민; 박경웅 / 성아미; 유명순 / 태크; 김남철
/ 현소희; 김영수 / 관리인; 하명진 / 박용자; 김영숙 / 문여사; 박명애

그해 1학기가 끝나자 박경웅 동문과 저는 연출 섭외에 나섰습니다. ‘이승규’ 연출님은


당시 극단사정과 개인적인 사정으로 낙향하시어 두문불출 연락을 끊었다고 하여 어려웠
습니다. 이 기회에 우린 좀 더 다양한 연출을 만나보고 싶은 욕심에 당대 최고 수준의
연출이란 연출은 다 만나고 다녔는데, 허규, 표재순, 오태석, 유덕형 등을 차례로 다 만
나 섭외하였으나, 결국은 은둔해계신, 연극부의 어머니 품같이 따뜻한 이승규 연출님을
물어물어 두메 산골 시골까지 찾아뵙고 가을 공연을 부탁드렸습니다.
당시 이승규 연출은 아버지가 교장으로 계시는 학교가 있는 시골에 계셨는데, 깜짝 반
가워하시면서도 지난해 '안도라' 공연을 잘 소화하지 못했다고 자책하시며, “그래도 부족
한 나를 다시 찾아 왔느냐?” 하셨습니다. 2박 3일 머무르며 여러 가지 연극 이야기를 한
끝에 그럼 이번엔 확실한 성공을 보장하는 작품으로 창작극인 ‘국물 있사옵니다’를 하기
로 했습니다. 문제는 런닝타임 2시간 반 동안에 주인공 '상범'의 역의 대사량이 절반 이
상이고, 막이 오르면 등장하여 막이 내릴 때까지 퇴장이 없는 강행군을 하는 역이었습니
다. 연출께서 저에게 casting을 맡기시며, 연습 전에 '건강진단서'를 받아오라고 하셨습니
다.

대본이 나오자 관례대로 정일천 학장님, 문재각 지도교수님, 최현 학생처장 교수님에


게 대본을 드렸습니다. 며칠 후, 최현 교수님의 호출이 있어 가보니, “내용이 깡패 호스
티스가 나오는 저질이다. 당장 작품을 바꿔라.”라고 호통을 치시는 겁니다. 문재각 지도
교수님께 보고 드리니, “문학의 문자도 모르는 무식한 친구 같으니라구”하시며 팔소매
걷어부치고 바로 최현 교수님을 만나 “그런 이야기는 예술 문학을 모독하는것!”이라 호
통 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국물 있사옵니다.’의 막은
올랐습니다.

그 당시 공연 팜플렛을 찬찬히 읽어보시면 문재각 지도교수님의 격려사 행간에서 이


사건으로 교수님 간에 얼마나 격론이 극심했나를 읽어 볼 수 있습니다.

<격려사 / 지도교수 문재각>


.......(전략) 우리 연극부의 공연은 학내행사이니 만큼 일종의 과외활동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여러가지 점을 생각해야
했다는 것은 물론입니다. 학생들의 생리에 맞으면서 교육적인 작품을 선정해야겠다는 점, 부원들의 시간적 희생이 너
무 커서는 안되겠다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할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해서 택한 것이 이

118
1968년 ~ 1977년

근삼작 ‘국물있사옵니다’입니다.
물론 교육적 가치만을 고려하고 예술적인 면을 무시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고도의 예술적가치의 뒷받침이 있어야
교육적 가치를 충분히 발휘 할수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중략) 이번 공연이 이런 여러 가지 요구조건을 얼마
나 충족시킬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각자의 예민한 예술적 감각과 예리한 판단력으로 “gap”을 메꾸어 주시기 바랍니다......

‘국물있사옵니다’는 이승규 연출의 예언대로 흥행(?)에 크게 성공하여 1971년 9월23


일부터 25일까지 4회 공연 내내 경운동교정은 입장객으로 줄을 섰고, 강당의 객석은 차
고 넘쳐 강단이 미어터졌습니다.

119
학생 연출의 시작
[12회] 1972년 '곰' - 안톤 체홉 작 , 문일신 연출, 1972년 봄
Staff:
연출; 문일신 / 기획; 박경웅 / 장치; 김은중 / 분장; 유명순, 조인옥 / 효과; 김강회, 문세호 / 조명; 방진성/ 소도
구; 김영택, 김영수 / 진행; 정진범, 한종석
Cast:
포포브(여지주); 이문영 / 스미르노프(지주); 하명진 / 루카(포포브 하인); 이종건

'수업료를 돌려주오'에서 연출 없는 이상한 공연을 치루느라 혼쭐이 난후, 평소에 연출


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준비 해놓아야겠다는 절박감에, 희곡론, 연출론, 근, 현대 희곡 등
연극에 관한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고, 머리 속에서 공연을 했다 지웠다 하고 있는데,
‘기회는 준비된 자의 것’이라고 했던가! 학년말 시험이 끝나가고 있는 어느 날, 예1 하명
진(현 재미)이 와서 “미국문화원 주최로 하는 영어 연극의 연출을 맡을 의향이 없는지”
를 물어오는 것이 아닙니까? 오! 얼마나 기다려온 기회인가! 내심 쾌재를 부르며 응하게
됩니다. ‘71년 겨울, 미국문화원 주최, 영어연극 유진오닐 작 ‘Whale(고래)’을 처음 연출
하게 됩니다.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72년 교내 행사인 신입생환영 행사의 하나로 2번째
‘봄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전년도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희극이고 단막극
인 안톤체홉의 ‘곰’을 안정적으로 연출하게 되어, 성의연극회 학생 연출의 첫 장을 열게
됩니다.
이를 시작으로 매년 봄 공연은 학생 연출로 하고, 가을공연은 외부 초청 연출로 년 2회
공연의 전통을 세우게 됩니다.

당시에는 서점에 가도 지금처럼 '희곡집'들이 간행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방학을 이용하


여, 박경웅 동문과 저, 둘이서 국립도서관 등에 가서 몇날 며칠을 하루 종일 처박혀 희
곡집을 찾으며 지냈습니다.

작품 선정의 기준으로 '단막극'이며 '희극'인 작품을 찾다가 '안톤 체홉'의 단막극 선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창립 50주년 기념공연에 ‘안톤 체홉’의 작품이 선정되어 공연을 하
니 더욱 감회가 깊습니다.

cast중 젊은 과부역의 간호학과 이문영은 음색이 좋고, 연기력도 있어 좋은 배우였습니


다. 아쉽게도 현재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지주역의 하명진(의과 18회)는 미국에 이민가
있고, 하인 역 이종건(18회)의 이름을 여기서 보니 새삼 반갑군요.
staff는 관례상 본과 3, 4학년은 진행이나 무대감독에 올라 있고, 장치의 김은중(16회 본
교 산부인과 교수)와 민풍기(18회 이비인후과)는 당시 참 열심이었느데, 요즘은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분장과 의상의 최낭희, 조인옥은 저와 연극부 입회 동기로 최낭희는 ‘안네의 일기’에서
수다스런 '부인' 역으로 신입생 답지 않은 명연기가 기억나며, 김명덕 선배와 연극부 커
플로 미국에 이민 가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며, 조인옥은 Staff만 보아왔는데, 현재 연
락이 안됩니다.

120
1968년 ~ 1977년

연극부 3인방

1971년은 우리 연극부가 참 어려웠다. 왜냐하면 ‘의대 15회’에는 연


극부원이 없다. 소위 대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14회가 본1 때에는 이
광우 연극부장 외에 정진범, 김명덕, 윤기헌, 한종석, 장윤오 등이 있
었으나 후배를 양성하지 못했다. 결국 16회인 문일신, 박경웅, 김남철
이 본과 1학년 위치에서 연극부를 끌어나갈 책임을 맡게 되었다. 학
생회는 본2에서 구성되기에 윗학년과 사사건건 힘겨루기가 발생하였
고...우리는 역할을 분담하여, 학생회를 상대할 때 김남철(사대부고 재
학 시 레스링 선수)은 거칠게, 박경웅은 좋은 언변으로, 연극부장 문
일신은 끝에 등장하여 갈등을 수습하고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나갔
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이들을 ‘연극부 3인방’이라 불렀다.
사진은 1972년 본2 당시 김남철, 박경웅, 문일신 (좌로부터)

봉 은 사
1971, 72년도는 가을 공연이 끝나면 뭔가 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서로 헤어지지 못하고 한동안 이렇게 뭉쳐 다녔다.
주 단골코스는 뚝섬 지나서 있는 ‘봉은사’였다. 이 주변이 지금이야 화려한 도심지로 변모했지만, 다들 강북에 살고 있었기에 뚝섬
에 모여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배에서 내려 봉은사까지 가는 길엔 밭과 과수원이 있었고, 배밭 사이
사이 오솔길을 어깨를 부딪치며 걸어갔다. 눈이 시리도록 높고 푸른 가을 하늘과 길가와 절 안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코스모스
꽃밭은 내 평생에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공연’이라는 격전을 치루어낸 용사들처럼, 가을의 따사로운 태양 아래서 모처럼의 한가함과 여유로움을 즐지며
‘어떤 성취감을 만끽하곤 했다.

좌측사진: 좌측 뒤줄부터 문일신, 박명애, 하명진, 박경웅, 김영수, 박창서, 김은중, 김남철, 앞줄에 민풍기, 김영숙
우측사진: 다정한 포즈의 고익준(항상 돋보이는 의상을 입는 멋쟁이였다)과 이종건

121
분장의 유명순은 그해 가을 공연 '노부인의 방문'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인상 깊은 연기
를 보여준 명배우입니다. 현재 미국 이민을 갔으며 저와 2~3차례 전화 통화로 안부를 전
해준 고마운 후배입니다.
효과의 김강회(17회)는 공부와 문학, 다방면에 천재성을 발휘한 능력 있는 동문입니다.
서울대에서 산부인과 전문의 과정을 거쳐, 강릉 의료원장으로 오래 재직 중으로 온화한
성품으로 연극부의 친화력을 키워준 사람입니다.
문세호(18회, 본교 통증의학과 교수)는 보성고등학교 인맥으로 연극부에 들어와 cast와
staff을 섭렵하였고, 현재는 연극부와 좀 소원해졌지만, 연락하면 언제든지 달려 올 겁니다.
조명의 방진성(17회, 비뇨기과 제주도)은 저의 바로 다음으로 연극부장을 역임하였고 이
종건 동문에게 연극부를 바톤 터치하여 연극부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제주도로 개업하여 좀 소원해졌습니다.

봉 은 사
좌로부터 : 문일신, 박경웅, 김남철, 넘어지려는 자 김은중, 가운데 이
종건, 고익준, 김강회, 김창규, 박창서, 뒷줄에 미국에 있는 김진배가
보인다.

소백산 희방사

72년 MT로 기억되는데, 문재각 지도교수님이 보인다. 평양고등학교 출


신으로 ‘평고’ 개교 이래 가장 뛰어난 수재이셨다는 교수님은 6·25동란
으로 월남하셔서, 동기 동창이며 가톨릭의대 설립 공신이신 윤덕선 의
무원장의 권유로 가톨릭의대에 오셨다고 한다. 영문학을 담당하신 인
연으로 연극부 지도교수를 맡으셨고, 예과 소속이셨지만 학교의 기여
도 등으로 학교에서의 힘도 상당하셔서 연극부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
어주셨다. 오래전 당뇨 합병증으로 작고하셨지만, 1971년도 ‘국물 있사옵
니다‘ 공연 때 연극부를 압박하셨던 학생처장 최현 교수님을 불러 준엄
하게 꾸짖으시던 음성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앞줄 좌로부터
장윤오, 최낭희, 조인옥, 문재각 지도교수님, 이종영, 문일신

가운데줄 좌로부터
김영숙, 김은중, 이종건, 유영출,

뒷줄 좌로부터
하명진, 윤기헌, 조용찬, 박영하, 이한식, 김순신

122
1968년 ~ 1977년

bare stage... 맨몸의 진실


[13회] '노부인의 방문' - 뒤렌마트 작 , 이승규 연출,
1972년 9월 28일~29일 오후 3시, 7시 4회 공연 경운동 강당
Staff:
연출; 이승규 / 기획: 문일신 / 무감; 김남철, 방진성 / 효과; 김강회, 홍지희, 곽인숙 / 조명; 권오경, 김창규, 나덕진,
김헌지 / 의상; 이명희, 위성신, 한경희 / 프로그램; 김은중, 이종영, 김경미 / 소도구; 이종건, 문세호, 장윤오/ 분장;
김동욱, 최낭희, 최보문 / 장치; 최연호, 한종석, 김명덕 / 진행; 정진범, 윤기헌
Cast:
알프렛 일; 문일신 / 일의 아내; 김순신 / 일의 아들; 박영하 / 일의 딸; 유영출 / 클랄라아; 유명순 / 경찰서장; 김남
철 / 교사; 민풍기 / 시장; 박경웅 / 의사; 이종건 / 신부: 김진배 / 집사; 박창서 / 코비; 문세호 / 노비; 김경수 로
비; 안승현 / 사진기자; 조용찬 / 아나운서; 이계실 / 신문기자1; 방진성 / 신문기자2; 김혜옥 / 화가; 김은중 / 시민
1, 2, 3; 하명진, 이한식, 이춘오 / 여인1, 2; 이종영, 김선희 / 여객주임; 김기태

‘72년 가을 대공연 연출은 이승규로 무난히 결정이 되었고, 이승규 연출은 독일 전후 쌍벽을 이룬 희곡작
가로 '막스 프리쉬' 와 '뒤렌마트'를 꼽는데, 이미 '안도라'를 통하여 ‘막스 프리쉬’는 접하였기에, 여러모로 대
조적인 작품세계를 갖은 뒤렌마트'의 작품을 택하자고 하셨습니다. 노부인 역의 간2 유명순(현 재미)의 카리
스마 넘치는 연기가 눈에 선하고, 한국 최고의 무대 장치가이신 ‘마이더스의 손’ 최연호 선생님(작고)이 해주
신 멋진 아이디어의 장치는 초라한 경운동 강당 무대에서 독일의 도시 ‘귈렌’의 역, 시청, 경찰서, 마을 등
다양한 장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빠른 무대 전환에도 잘 적응해 공연의 성공에 대단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1972년 가톨릭의대 연극부 제 11회 공연, "노부인의 방문" 사진입니다.


연극부 역사 중, 경운동 캠퍼스의 강당의 무대 조건이 왜 'bare stage' 라
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시민들 개개인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정의를 버리고, 옛 애인인 '
알프렛 일'을 죽여 달라는 '노부인의 살인 청탁'을 받아들여 공동 살인
을 하기 직전, 가운데 횐 와이셔츠 바람의 '알프렛 일'을 에워싸기 시작
하는 장면입니다.

좌측 끝부터
문세호(18회, 성모병원 마취과 교수), 박창서(18회, 개업, 목사), 이종
건(18회, 성형외과 개업), 민풍기(18회, ENT개업), 김순신(간호대 20
회, 미국이민), 문일신(16회, 소아과 개업), 유명순(간호대 18회, 미국
이민), 박경웅(16회, 통증의학과 개업), 김남철(16회, 미국 이민), 김기
태(19회 본교 방사선과 교수)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해도, 물질의 강한 힘에 끝내 굴복 당하고 마는, 약한 인간의 어두운 면을 파헤친 작
품 이었습니다.
그 때 '이승규' 연출께서 <bare stage의 맨몸의 진실>이란 '성의연극회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말씀을 남기
셨고.., 그런 bare stage에 한국 무대장치의 거장이신 고 '최연호' 선생님께서 멋진 '장치'를 만들어 주셨지요.
2005년 극단 김금지 4회 정기공연 "노부인의 방문"을 김광평 선배님 외에 동문들 7~8명이 사이버 번개팅으
로 가서 관람하며 추억하기도 했었습니다.

123
노병은 죽지 않고...
[14회] '강제결혼' - 물리에르 작 , 문일신 연출, 1973년 봄
연출 : 문일신
Cast :
스가나렐; 이종건 / 알깡또오르; 문세호 / 제로니모; 김진배 / 리까스르; 방진성 / 도리메에느; 홍지희 / 말휘리우스;
김경미 / 알시닷; 이한식 / 사동; 이문영 / 빵끄라스;김경수 / 집시여자; 김혜옥, 유영출, 이종영

여름, 가을, 겨울, 다시 봄, 여름 가을... 쉬지 않고 연극 속에 파묻혀 지낸 학창시절입


니다. 어느덧 의과대학의 꽃이라는 '본2'도 학년 말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공부도 하긴
해야 되는데....", 이때가 제가 연극과 의사의 길을 놓고 심하게 고민할 때였습니다. 연극
의 스승이신 "이승규 연출님'을 찾아 상담도 해봅니다. "이대로 '전문 연극인'의 길로 갈
까 합니다." "자네가 의과 대학이란 확실한 길만 가고 있지 않다면 한번쯤... 그러나, 한
국의 연극 현실은 너무 가시밭길일세. 학업에 정진하게."

'73년 봄 공연을 앞두고, 이제 연극의 현실 참여에도 작별의 시간이 온 것을 느끼며,


현장 참여의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언젠가 한번 접해보고 싶었던, 중세기의 연극, 몰리에
르의 풍자와 유머가 가득한 '강제결혼'의 연출을 맡게 됩니다.

이때는 cast도 11명에 이르고, 집시들의 춤도 등장하는 등 좀 버거운 작업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예2 홍지희(현 내과개업)가 여주인공으로 열연한 기억이고, 본1 이종건
(성형외과)이 상대역으로 casting되었습니다.
아! 연극이란 작품은 막이 내리면, 관객의 맘에 남아 있을지언정, 동시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 젊은 날, 학창시절에 전력투구 했던 그 연극들은 사라져 버리고 이젠
훌륭한 관객으로 남겠다고 다짐하며 본3, 본4 동안 연극을 했던 만큼 학업에 전념하게
됩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을 되새기며 말입니다.

스가나렐(이종건)이 “도리메에느, 오늘은


어디를 가는 길이신가?”하고 묻는 장면

124
1968년 ~ 1977년

연극은 인생 그 자체

박창서(의・18 회)

어릴 때, 교회에서 동화대회도 해보고 어린이 성극도 해 보았지만 , 무대다운 무대는 고등


학교 시절 당시 명동에 있던 국립극장에서 셰익스피어 작 ‘오셀로’를 본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당시 장민호, 전운, 오현경 등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했던 것으로 기억하
는데 그때는 멋모르고 무대 뒤의 분장실에 가서 출연자들에게 사인도 받아왔었다. 아마도 막
연하지만 무대를 향한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예과 1학년인 1968년, 얼떨결에 ‘실수연발’에서 데뷔 신고를 하고, 69년에 ‘안네의 일기’에


서는 배역을 맡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당시 이응상 부장 또한 배역을 맡기려 했으나, 한 가
지에 집중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마음을 접고 아주 적은 일만을 맡아서 하기로 했다.
즉 이름만 걸어둔 연극부원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 후 우리 연극반의 대어로 낚여진 문일신과 함께 "범연" (앞 글에서 문일신 동문이 소개


함) 활동을 하면서, 대본을 내가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당시는 철판에다 기름 먹인 종이에
써서 등사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범연 팀과 함께 당시 만리포에서 해변 공연을 하고 있는 "극단 가교"와 함께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지내기도 했다.
이 때 문일신 동문의 연기력이 눈부시게 꽃을 피우게 되었고, 나는 나름대로 범연을 통해, 극
단 가교를 통해 연극인들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연출가 이승규에서 인간 이
승규의 매력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 그의 주변에 있던 박인환, 김소야, 최주봉, 그리고 훨씬 후
의 김진태, 마당놀이의 임문식... 등등 많은 연극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안도라, 국물, 노부인, 및 재치를... ,우리읍내 등 무렵


당시 나는 폭풍노도의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십대를 일컬어 그렇게 말한다지만, 나는
20대에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폭풍노도가 안팎으로 몰아치고 있었기에, 내면의 갈등
과 외적인 고통 속에 있었다. 심지어 당시는 유신시대여서 정해진 나이에 졸업을 못하는 사
람은 군대에 먼저 가야하는 시절이어서 논산에 끌려가기도 했다. 다행인 것은 그곳에서 군의
관이신 윤희로 선배님을 만났고 이 만남 또한 극적이었다. 원산 폭격을 하면서 거꾸로 보고
있는데 마침 훈련병들을 보러 나온 윤 선배님이 훈련병들 뒤쪽에 계셨는데, 원산 폭격 (이는
군대에서 벌칙으로 행하는 힘든 자세입니다.)을 받지 않았더라면 뒤에 계시던 선배님을 볼

125
수 없었을 것이다. 벌떡 일어나 나가서 경례를 하고 "안녕하십니까? 여기 계시네요?" 아마 이
랬을거다. "어!? 너 여기 웬일이니?" "나이가 많다고 여차저차 군에 징집됐습니다."하여 정밀
신체검사를 다시 받았는데, 때맞춰 'Osgood- Schlatter's Disease'가 심해서 무릎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하여 귀향 조치를 받고 되돌아왔는데, 학교에는 복학이 안 되고, 그 때 가발 쓰고 다
니던 기억이 난다.

요즘 학생들은 일부러 해외 어학연수나 알바 등을 위해 휴학한다지만, 당시 가톨릭의대는


등록금을 내지 않으면 교실에 출석해도 결석으로 간주하였고, 결석이 어느 한 과목이라도 한
학기에 1/3 이상 이면 무조건 유급이 되었다. 이를 자동 유급이라 한다. 나중에 연세의대 친
구는 졸업 직전에 6년 치 학비를 인턴 레지던트 월급에서 분할 납부하기로 하고 인턴을 시작
하는 것을 보고 참 많이 속상해 했었다. 그래서 자동 유급을 면하려 휴학하기도 했고 해서
예과 2학년을 두 번, 본과 1학년을 3 번 다니는 기록을 세웠다. 그래서 나와 입학 동기이며
졸업 동기는 단 3명인데, 그 중 한명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지금은 금융기관에서 등록금뿐만 아니라 학자금까지 장기 저리로 융자해 준다니, 참 좋은 세
월이다. 우리 때는 세월조차도 이런 면에서는 참 불리한 시절이었나 보다.

이런 저런 사연과 맞물린 연극부 생활에 대해 쓸 말이 참 많지만 생략하고 넘어가기로 하


자. 다만, 우리의 대 선배이신 고핀 샘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성의 연극회가 늘 그렇듯이 매 공연 연습 때마다 선배들이 늘 돌아가며 연습장을 찾아
와서 격려하고 조언하고 때로는 질책도 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는데, 당시 외부에 오래 계시
다가 본원에 오신 김광평 선배님이 누구의 소개도 없이 경운동 강당에 오셨다. 땀 뻘뻘 흘리
면서 <[16회]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들, 1974년> 연출을 하고 있을 때, 조용히 오셔서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으시던 모습, 그리고 연습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앉아 계시면서, 때로는 웃
으시고 때로는 한숨(?) (아마도 한심스러워서)쉬시며 지켜보시던 일.
그 일이 크게 교훈이 되었던 것을 이제야 고백합니다.
아마 고핀 샘은 기억이 안 나실지 모르지만, 의과대, 간호대 학생들의 학예회가 아닌 진짜 연
극을 하라고 하시던 말씀, 당시 나는 연출자로서 두 사람을 겪어 보았으니 당연히 두 사람의
연출 스타일을 본떠서 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안네의 일기를 연출했던 함현진 스타
일로 할 것인가? 또는 오랫동안 우리 가톨릭 의대 연출을 맡아주신 이승규 스타일로 할 것인
가? 둘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경운동 교사 옥상에서 박경웅 동문과 작품에 대해, 또 연극과 연극부에


대해 진지한 토의를 하는 중인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서울시내 공기가
훨씬 맑았던 것을 알 수 있다.

126
1968년 ~ 1977년

쉽게 말하면, (편의 상 내가 임의로 이렇게 정의하는 것이지, 이 분들이 꼭 이렇기만 하다는


말은 아니다.) 함현진 스타일이란 ‘연출자가 연기자를 로봇처럼 활용하는 방법’이고, 이승규
스타일이라 함은 ‘큰 밑그림을 그려주고 연기자의 자유의지로 연기자의 창의력을 한껏 발휘
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빨리 어떤 성과를 내고 어느 정도 수준에 올리고 일
관된 그림을 그리며 메시지를 분명하게 하는 데에는 연기자를 연출자가 그려준 대로 한 치도
틀림없게 반복훈련과 스파르타식 연습을 통해 연기를 하여야 하겠으나, 그리되면 연기자의
개성이 다 묻혀버리고 다양성이 훼손될 것이다.
그렇다고 기본 연기 수업도 받은 일이 없는 아마추어 학생 연기자에게 창의력을 발휘하게 하
는 방법은 참으로 실패할 위험성이 컸다. 성과가 더디고 통일성이 없고 어색하고 서투른 몸
짓이 너무나 드러나겠고... 잘못하면 선배님 말씀대로 학예회 수준에 머무를 위험성이 커질
것이었다.
이는 주입식 교육이 좋으냐, 창의적 자율적 학습이 좋으냐 하는 문제처럼 정답은 없는 것이
다. 다만 각각의 방법의 장점만 따온다면 더욱 좋은 일일 것이다. 주입식과 자율적 훈련을 어
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연극은 영화와 달리 무대에서 관객 앞에서 실시간으로 진행되며 다시 편집하여 보여줄 수 없
는 생생한 실연(현실)이기에, 여러 가지 변수가 생길 때 임기응변할 수 있어야 하고 관객과
호흡을 같이 하여야 할 뿐 아니라 연기자들 상호간에 일치된 조화와 개성이 살아나야겠기에
나는 후자를 더 비중있게 취하고 정 급하면 주입식 방법도 택하리라 맘 먹었던 것이다. 그리
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즉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꺾지 않으시는데, 연출
자도 연기자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극중 인물과 출연자가 하나가 되도록 도와주고 극의 앙상
블을 조화롭게 이끌면서 큰 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최고참 선배님의 격려가 더욱 연극에 대한 이론과 역사와 연기론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였


고 공부하게 된 계기였다. 이 시절의 가장 인상 깊은 보람 있는 기억이다.

눈 덮인 치악산에서의 엠티, 아마 십이야 <[15회] 1973년>를 마친 겨울


인 듯하다. 눈 덮인 치악산에서의 2박3일의 엠티는 잊을 수 없는 추억
이다. 지금 재학생 후배들에게도 강추!!!

김진배, 김경수, 이춘오, 박순옥, 박연옥, 하명진, 허영경, 박창서(모자


쓴 사람), 이한식 등이 보이고 있다. 이 사진 속에 보이지는 않아도 많
은 동문들이 함께 갔었고, 하산 길에 모든 부원들이 맨몸으로 눈썰매
가 되어 계곡으로 줄기차게 미끄러지며 내려오던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127
그리고 십이야...
[15회] '십이야' - 셰익스피어 작 , 이승규 연출, 1973년 가을

아마 재학생으로는 마지막 연극부 활동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었던 것으


로 기억난다.

그 당시로는 가을 정기공연 참가 작품 수가 재학생 중에 내가 제일 많은 것으로 생각


되고, 학년을 떠나 연극부에서 제일 노인이 되어 있으면서, 주역을 맡는 것도 좀 미안스
럽기도 했기에 나름대로 작품 속 주인공을 내 캐릭터로 녹여낼 수 있기 위해 애를 썼
지만 역시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통해 몽환적인 분위기이면서도 해피엔딩으로 결말짓는 이야기에


서 사람들의 피곤한 일상을 웃음 지으며 마감하게 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으며, 다시 한
번 연극부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던 작품이었다.

128
1968년 ~ 1977년

[16회]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들' - 몰리에르 작, 박창서 연출, 1974년 봄

저 시절에는 저렇게 초를 먹인 원지에다 철필


로 써서 먹을 묻힌 밀대를 밀어서 한장 한장
찍어냈지요. 글씨체를 보니 바로 저의 글씨로
군요. (이정태 의·20회)

[17회] '우리읍내' - 손톤 와일더 작, 김도훈 연출 1974년 가을

‘우리 읍내’에는 몇 가지 노래가 나오는데, 장


례식 장면의 "샬롬 샤베림"과 찬송가 연습장
면입니다. 당시 무대 밖의 찬송가 연습에는
간호과 3학년 여성 4중창이 도와 주었지요.
찬송가는 ‘21세기 새찬송가’로 221장 "주 믿
는 형제들"입니다. 극속의 성가대 지휘자는
우측 사진 앞줄 제일 오른쪽 신상현 동문이
지만 무대 밖에서는 제가 지휘했던 기억이
있네요. (이정태 의·20회)

묘지장면인데, 레베카가 죽어서 이 묘지로 오


지요. 왼쪽부터 의학과 20회 김희곤, 간호대
21회 신영희, 미국에 있는 고순혜, 안명옥, 그
리고 고와 안 사이는 의학과 19회로, 백혈병
으로 작고한 안승현 동문이로군요. 그가 저렇
게 앉아 있네요. (이정태 의·20회)

129
[18회] '건강진단' - 조해일 작, 이종영 연출, 1975년 봄

첫 만남
최창순 (의·22회)

1975년 입학...
순전히 자의적으로(본능적으로?) 방과 후 들러본 경운동 강당에는 신입생 환영공연인
‘건강진단’의 막바지 연습이 한창이었는데, 의아했던 것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 제일 자
그마하고 목소리 작은 여자(본2. 이종영 선배/재미)가 연출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남여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캐스트들의 연기도 연기려니와 모두
개성이 넘쳐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출연진은 홍영선(의사 역/현 서울성모병원 원장), 신영희(간호사역),이정태(간이 콩알만


해진 사나이), 양승한(쓸개 빠진 사나이), 유경수(재미/위가 늘어난 사나이), 박연옥(허파
에 바람 든 여자), 신상현(가슴에 털 난 사나이)로 기억되며, 강당 책상위에 1인용 소파
를 올려놓고 앉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격려하시던 고 나덕진 선배님이 기억나고, 사다
리 들고 조명 손보고 다니시던 박영하 선배님... 그 분주한 가운데 무엇인가를 하려는 모습
이 좋아보였습니다.
성의 연극에 첫 기억을 남겨주신 분들 늘 그립습니다.
무대에 모든 조명이 밝혀지는 순간의 느낌. 그렇게 저의 연극부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
다.

130
1968년 ~ 1977년

의대 졸업 못 하면 가교에서 받아주세요!
[19회] '안티고네' - 장 아누이 작, 이승규 연출, 1975년 가을

당시 경운동을 떠나 명동에서 지내는 본3 때 갑자기 이승규 연출님이 보자고 한다고


해서, 인사를 미리 못해 송구한 마음으로 후배들에게 이끌리어 경운동 강당에 가서 인사
를 드렸더니 이승규 선생님이 "선배!, 출연 좀 해줘" 라는 것이었다.
그러잖아도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가는 학생생활 (당시 학외 클럽의 후배들을 때로 명
동에서 만날라치면 "형! 무슨 과 하세요?" "아직도 학생이예?'소리를 듣는 판인데...)
강의실에서 소아과 김정규 선배님이나 내과 변지선 교수님, 신경외과 송진언 교수님 등
많은 교수님들이 내가 학보사와 의맥 편집 기자를 하며 하도 여기저기 얼굴 내밀고 다
녔기도 하고, 무대에서 여러 번 얼굴을 보여드렸기도 하지만 무심결에 강의실에서 나를
보고 놀라서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이 "아니! 자네 왜 여기 있나?" 라고 하던 시절인데,
만약 또 연극을 하다가 공부에 지장이 있으면 이제는 퇴학 밖에 선택할 길이 없는데...
고민하다가 "선생님! 나 의대 졸업 못하면 극단 가교에서 받아주실 거예요?" 농담 반 진
담 반이었을 거다.
"설마 졸업 못하겠어? 만일 졸업 못하면 나하고 연극 같이해!?"
그래... 암튼 출연을 결심하고, 그때는 다른 대외 활동 다 접고 있었으니까 연극과 공부만 했다.
물론 레포트 같은 것은 주위에서 많이 도와주었고...

극단 ‘가교’의 이승규 선생님께서 연출을 맡으셨는데, 본과 2학년까지


의 경운동 부원들로 연습을 진행하다가, 지지부진(연출께서 보시기에
수준 미달?)하자 본과 3, 4학년 박창서, 김진배 선배님께서 어느 날 돌
연 등장하여 주연을 맡으셨고, 분위기는 일순간에 변했고...저는 찌는
더위에 무겁고 두터운 옷을 입고 병사3역을 양승한, 이정기와 같이 했
답니다. (최창순 ·의22회)

131
제가 75년도에 입학했을 때, 선배님들로부터 들
었던 기분 좋은 얘기는, 그 당시 3대 대학 연극
부로 희극에는 서강대, 실험극에는 숭실대, 그리
고 고전극으로는 우리 가톨릭의대 연극부라는 얘
기를 들었고, 나름대로 자부심이 대단했었습니다.
연극부에 이제 첫발을 디뎠는데, 가을 정기 대공
연에 경비병 2역을 하게 되었으니! 그 당시 경운
동 강당에서 대공연에는 관람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진행 팀에서 자리가 없어 돌려보내려고 해
도 무작정 들어와서 객석 사이의 복도까지 인산인
해를 이루었습니다. (이정기·의24회)

사진을 보니 옛 추억이 떠오르네요, 그 당시에는 통행금


지가 있어서 연습이 늦어지면 집에 가지를 못하고, 그냥
경운동 강당에서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잠을 해결할 수
밖에 ㅉㅉ... 제 경우에는 무대 뒤에 걸어다닐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쌀가마니를 깔았는데, 그냥 그 위에서 누
워 자다가 무대감독이 깨워주면 뛰어나가 연기를 하곤
했었지요. 지금은 이런 것도 추억거리로 남아서 생각이
나곤합니다.
제가 나름대로 팜플렛 사진을 보니 기억이 떠올라 아는
대로 적어보면, 좌측부터 위에서 아래로 시계방향으로
신영희, 허영경(안티고네역), 박혜남, 신상현, 김경실, 문
세호, ?, 박창서(크레온역), 홍영선(현 서울성모병원장),
박순옥, 박연옥, 고성희(이상 존칭생략)입니다.
혹시 누가 기억하나요. 제가 당시 무감을 맡았었는데, 조
명을 맡았던 팀들 중 양승한, 전해명, 양기화 등이 소금
통과 납봉을 이용해서 디머를 만들어 화재의 위험이 상
존하였던 기억이 있는데... (이정태·의20회)
예산이 너무 부족한 상태이다 보니, 조명에서 디머가 필
요했는데, 디머를 빌릴 수는 없고 해서 경운동 강당의
옆 조명실에 파란색 플라스틱 큰통을 들여놓고, 소금물
을 가득 채운 후, 납판을 전선에 연결해서, 면장갑을 두
껍게 끼고 전선을 잡고, 소금물에 구리판을 담그는 정도
에 따라 조명을 밝게, 또는 어둡게 조절해서 극 진행에
필요한 디머 효과를 너무도 만족스럽게 연출해 낸 걸로
기억합니다! (이정기·의24회)

132
1968년 ~ 1977년

연극부와의 만남을 회상하며

이제 내 인생에서 연극부와의 만남을 회상하며 학창 시절에 참여했던 성의연극회가


이제 어느덧 50주년을 맞이하게 되고, 또한 우리 모든 동문과 재학생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사하기만 하다.
돌이켜 보면 학창 시절에 연극에 참여한 덕에 무대에서 진행되는 극의 흐름을 따라가기
가 쉬웠고, 극 뒤의 숨은 노력이나 사연들이 보이는 것 같았으며, 무엇보다도 연기자들
이 표현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끌어올려보는 안목이 생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
다.
다시 말하면 어느덧 모든 표현물들을 보게 되면, 실제로 표현하고 있는 수준(현상)보다
내 스스로 그것을 소재삼아 한층 업그레이드해서 스스로 감동을 끌어낼 줄 아는 능력
(본질을 보는 힘)이 생겼다고나 할까?
이것 하나 만이라도 연극 활동을 한 것이 얼마나 유익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서 수시로 어느 곳에서나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살고 있는
데, 이 연극 활동을 했던 일이 인간 이해에 참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이 내게 실감 있게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어찌해야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가를 조금은 알게 해 주었다
고 생각하며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누군가 예술은 고등사기라고 했다지만, 예술 특히 연극은 인생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허위로 사는 사람에게는 예술도 허위이고 사기이겠지만, (구약성경 전도서 1장을
참조하라) 인생을 진실하게, 성실하게, 진지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예술(연극)은 진실이고
진지한 것이리라.

경운동 교정에서 어느 날
연극부원들과 함께
우리 마누라 왈
“당신이 지도교수 같애 ㅎㅎ”하던 사진이다.
“아니!! 내가 이 사진에서 그렇게 보이오?”
답 “당신만 양복 입었잖아! ㅋㅋ”

133
가슴에 연극반을 담고...

방진성(의・17회)
1971 국물 있사옵니다 조명
1972 곰, 조명
1972 노부인의 방문 신문기자
1973 연극부장, 강제결혼 리까스르, 십이야 기획

1971년 어느 날 친구인 김강회와 둘이서 경운동 1층 간호대 강의실 옆을 지나고 있었습니


다.
늦은 시간이라 다 학교에서 나가고 조용한 가운데, 대본 연습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지나가다 그냥 호기심에 누가 떠드나 하고 교실 문을 열어 보니, 연극반원들이 열심히 그 해
정기 공연인 ‘국물 있사옵니다’ 대본 읽기를 하고 있다가 우리 둘을 쳐다보더니 무조건 들어오
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한회 위인 16회 선배들은 연극에 매우 열심이셨고 반원들도 많았으나 17회인 저의 반은
연극반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문일신, 김남철, 박경웅, 김은중, 권오경, 고익준 선배님들은 마치 직업이 연극하시는 분들처럼
너무 열심히 연극에 몰두하셨습니다. 때마침 연극반원이 모자라 조명, 음향에 사람이 없던 차
에 선배들은 반 강제적으로 우리 둘을 그날 부로 연극반원이라 하였으며 그래서 제가 조명,
김강회가 음향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연습 중 손이 더 모자라 김창규, 나덕진(작고)도 저
와 같이 연극 반원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해 정규공연인 ‘노부인의 방문’부터는
우리도 점점 연극에 빠져들어 몹시 열심히 참가하였습니다. 16회 선배님들, 특히 문일신 선배
는 너무 열심히 연극에 몰두하시었고, ‘노부인의 방문’은 아주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17회 4명의 연극반원은 무대에 연기자로 서지는 않았고, 그나마 나만 잠간 무대에 서 본 적이
있어서 다음 해 연극 반장은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16회와 18회, 19회, 간호학과에는 아주 뛰
어난 연기자들이 많이 있어, 정기 공연을 좀 특별나게 잘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연출로 저희 연극반과 인연이 깊던 이승규 선생님을 문일신 선배와 함께 찾아뵙고 다
시 연출을 부탁드리면서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1973년 가을 정기공연에 올렸으며 성황리에
연극을 마쳤습니다.
아직도 그때의 감동은 가슴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그 당시 만들기 힘들었던 의상, 무
대 장치 때문에 고생이 많았습니다.
저보다 더 열심히 연극반을 사랑하던 김강회는 강릉에, 김창규는 포항에 있고, 저는 이곳 제주
에 있어 연극반 모임에 잘 나가지는 못하지만 가슴에 항상 연극반을 담고 있습니다.
40여 년 전 함께 모여 연습하고 동거 동락했던 선배, 후배의 얼굴이 하나하나 다 떠오릅니다.

134
1968년 ~ 1977년

소리로 만든 연극

김강회(의・17회)
1971 국물 있사옵니다 효과
1972 곰, 노부인의 방문 효과
강릉동인병원장

재학 기간 6년 내내 고등학교 선후배가 단 한명도 없이 졸업을 하였고, 졸업하고 나서


는 타교인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마치다 보니 대학 동문이라고는 재학 시
절 아래 위, 몇 학년으로 제한된 사람들만 알고 지냈었고, 그 후론 멀리 떨어진 동해안
에서 살다 보니 많은 동문 선후배 간의 따뜻한 교감도 갖지 못하고 살아 왔습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선후배의 情을 나눌 수 있는 곳이 연극반이었는데 수년전 서초동 어디
에서인가 연극반 모임이 있어 모처럼 나가보니 얼굴 아는 사람이 겨우 몇 명 정도이다
보니 다소 서먹했던 느낌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軍에 있을 때만 해도 휴가를 연극 공
연에 맞추어 참석하곤 했는데 이후 이런저런 일로 부지런히 참석하지 못했던 점이 새삼
아쉬워집니다.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는데...

예과 1학년 때 처음 생긴 것으로 기억되는 학교 축제 CAMEAD가 지금도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때 웅변대회에 나가 입상을 했던 일이나 예과 2학년 때 처음으로 써 봤던
단편소설이 聖醫文化賞 대상을 받게 되어 그 상금으로 친구들과 낙원동에 있던 일억조
인가 하는 한식당에서 함께 식사하고 중앙극장에서 영화 ‘라이안의 처녀’를 보았던 것이
어렴풋이 생각납니다. 이렇게 무엇이든 시작해 보고 관심을 갖는 것이 젊은 나이에서 내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연극반 입회도 이런 맥락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내가 연극반에 들어 간 것은 아마도 첫 CAMEAD 때 연극 공연이 인상적이었는지 예


과 2학년 때에야 김창규, 방진성, 故人이 된 나덕진 등과 함께 쭈뼛거리며 참여하게 되
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기생 모두는 cast에는 소질이나 관심이 없었던 탓으로
스탭 역할에 만족하고 열심인, 정말로 특이한 학년으로 생각되었는데 아마 지금도 그러
하겠지만 함께 작품을 만들어 가는 열정적인 과정, 활기차고 독특한 분위기가 좋았던 것
이 오랜 시간 즐겁게 함께한 이유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는 연극부에서 2년 동안 음향 전문가인 김벌래 씨의 도움으로 강당 뒤편 영사실에


서 효과음을 맡아 공연에 일조하였는데 한번은 중앙청내의 ‘국립 영화---’라고 하는 곳에
직접 音을 따러 갔다가 그곳에 보관된 소리의 다양성과 量에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참
여하였던 작품 ‘국물 있사옵니다’의 다방 장면에서 사용했던 당시 유행한 팝송 ‘슈가 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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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 들려오면 요즈음도 객석에서 매회 어김없이 터지던 환성을 기억하고 절로 웃음이
나는, 집사람도 아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 시절 연극부는 봄·가을 연극 공연 뿐만 아니라 겨울에는 치악산, 가을에는 설악산


에서 하루 이틀씩 자면서 山行 하며 가졌던 즐거웠던 시간들의 기억도 새롭고, 서강대,
중앙대, 이대 등 다른 대학의 연극 관람도 함께 하였던 일도 생각납니다. 어느 해인가
공연 후 뒷풀이를 위해 뚝섬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갈대 숲 속과 실개천을 따
라 가, 지금은 서울의 핵심이 된 강남의 봉은사와 인근 배(梨) 밭에서 보냈던 한가로운
시간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입학 원서를 내기 위해 경운동 골목길에서 학교를 찾는데도 무지 고생하였던 기억이


새로운 지금, 그로부터 벌써 40년이 지났다는 점에 새삼 세월이 빠른 느낌으로 다가 옵
니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하였던 친구들이 지금은 다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중후한 모습이 되었을지 문뜩 문뜩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벌써 누렇게 변해 버린
의사면허증을 얼마나 더 우려먹을지는 몰라도 가끔은 만날 수 있는 날을 만들어야 할텐
데 아직도 먼 거리와 바쁜 나날을 핑계로 아쉬움만 키워 갑니다. 이제 연극부 창립 50주
년이 되었다니 함께 축하하며 더 많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시간에 함께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돌아보면 후배들에게 나는 연습 시간에는 매우 엄격하여 연습에 늦는 후배들이 무서


워하는 선배였으며 연극에 열심히 참여하면서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준 선배
이기도 합니다. 학교를 떠난 후 학창시절에 열심이었던 것만큼 현실에 열심히 사느라(?)
소식이 있기 전에는 연극부를 잊고 사는 선배이기도 합니다. 첫 공연의 설레임, 마지막
공연 후 텅 빈 객석을 보면서 가졌던 아쉬움이 지금도 느껴지는 듯한데 시간은 너무 빨
리 지난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세월은 빨리 가는데 행동은 느려지나 봅니다. 그동안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만나지도 못했던 일, 저를 기억하는 많은 선후배님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
며, 회장님을 비롯한 선후배 모두 모두 건강하시고 다시 만나 웃음으로 옛 이야기를 나
눌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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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 1977년

나와 연극반... 1972,1973

홍지희 (의·19회)

나와 연극반...
이렇게 제목을 쓰고 보니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정리가 잘 안 된다. 그리고 연극반
에 무조건 고마운 마음만 앞선다. 그러면 고마운 마음을 정리하기 위하여 나에게 이렇
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한 연극반과의 첫 만남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1972년

나와 '성의연극회'(그때는 '가톨릭의대 연극부')와의 처음 만남은 1972년 우리 학년이 신


입생일 때 신입생환영 연극 공연에서 '신입생 관객'으로서였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8 년 전, 아득~한 옛날인 1972년에. 신입생을 위한 봄 행사로 연
극 안톤 체홉 작 '곰' 공연이 있었고 우리들은 연극을 정말 재밌게 감탄하면서 보았다. 그
리고 그해 봄에 '신입생 관객'이었던 우리 1학년이 아주 많이 연극부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해 가을 정기 공연이었던 '노부인의 방문' 팜플렛을 보면서 기억을 해보니까, 캐스트


로 예과 1학년의 김경수, 이한식, 이춘오, 양승현, 김기태, 이종영, 조용찬, 박영하 간호학
과 1학년의 유영출, 김순신, 김혜옥, 김선희 이렇게 모두 12명이 참가했고, 스태프로 예
과1학년에서 의상 이명희, 위성신, 한경희, 프로그램에 이종영(캐스토도 같이), 김경미,
효과에 홍지희, 이렇게 6명. 가을공연 팜플렛에 이름이 있는 1학년만 18명 정도였다.
그리고 팜플렛에 보면 스태프로 효과에 본과1학년 김강회 선배님 옆에 홍지희라고 이름
이 쓰여 있기는 하지만 나는 연극 공연에는 전혀(?) 공헌한 바가 없고 그저 연습하는 모
습과 공연 진행되는 과정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지금도 기억나는 기차의 도착을 알리
는 기적소리... 그리고 공연 중에 보았던 어떤 대사들... 장면 장면들...)
그리고 프로그램에 광고해준다고 했던 영등포(?)에 있었던 어느 회사의 홍보부에 연극반
친구 종영이와 함께 버스에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하며 찾아갔던 기억도 난다. 1학년이
기 때문에 모든 일이 더 즐거웠으리라 생각이 든다.
연극 '노부인의 방문'에서는 그 당시 본과 2학년이었던 문일신, 박경웅, 김남철 선배님께서
중요한 역할을 해주셨는데 그 중에서 시장 역할을 맡았던 박경웅 선배님은 우리 1학년을
모아놓고 '너희들 말이야... 연극에서는 옆 사람에게 속삭이는 소리도 강당 맨, 뒤까지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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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하는 거야.. 그리고 피곤한 연기를 생생하게! 조는 연기를 힘있게! 해야하는 거야. 조는
연기를 한다고 만약에 정말 졸려서 연기한다면 그게 연기냐? 그건 연기가 아닌거야. 그냥
조는거지..." 이렇게 말씀하셨고 그 말씀에 우리는 “어머나 어쩌면!! 그래 맞아 맞아...” 하면
서 감탄하곤 했다.

1973년

그리고 2학년이 되었던 다음해인 1973년 봄에 몰리에르 작품 '강제결혼'을 본3 문일신


선배님 연출로 신입생환영 공연으로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우리 학년이었던 김경미, 김경
수, 이종영, 유영출 그리고 본1 이종건 선배님, 본2 방진성 선배님과 함께 나도 캐스트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 때 연출을 맡으셨던 문일신 선배님 지도가 너무 예리하고 정확하셔
서 우리반 친구들 모두 선배님 말씀 한마디에 정말 어려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같은 해 1973년 가을공연에 셰익스피어극 '십이야'를 하게 되었는데, 이번 50주


년 공연에 함께 했던 그 당시 예과 1학년이었던 박경희, 이정태, 본과 1학년이었던 이종
건 선배님도 함께 참여했다. 박경희 선생은 예의 그 또랑또랑한 목소리의 마리아역을,
이정태 교수는 무대에서 노래도 부르는 광대 역을, 이종건 선배님은 말보리오 역을 맡았
는데 선배님은 물론이고 1학년이었던 박경희 선생, 이정태교수가 정말 열심히 잘했던 기
억이 난다.
연출은 극단 ‘가교’ 대표이셨던 이승규 선생님께서 해주셨는데 그 당시 ‘가교’에서 연
극배우로 활동하던 윤문식 씨를 포함한 몇 분의 배우들이 가끔 함께 오셔서 우리들 연
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대사를 지도해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확실하게 주는 대사를
할 때는 시선을 고정하고 목소리의 톤을 너무 높이지 말고 침착하게 해라. 먼저 그 상황
을 내가 느껴야한다...” 이런 얘기들을 해주셨다. 그리고 공연 연습 때면 연습하는 모습
을 보러 윗 학년 선배들이 와주셨고 여러 가지로 격려하며 가르쳐주시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 학년이 신입생이던 1학년과 그 다음해 2학년까지 야유회도 따라다니고


연극반 공연 있으면 부지런히 강당으로 모이기도 하면서 나는 친구들과 다른 대학 연극
이나 극단에서 하는 연극을 열심히 보러 다녔다.
무대가 주는 아름다움, 대사가 주는 감동, 팜플렛의 글을 읽는 즐거움 등을 보고 느끼면
서 연극에서 '관객'이 되는 행복을 알았던 시기라 생각한다.

가을 공연 준비 때면 우리의 대사 연습이 한창이었던 1층 강당 근처 어디에선가 카메


아드 축제 공연을 위한 보컬 팀의 연습 소리가 들려왔고, 우리들의 대사 연습하는 소리
와 간간히 들려오는 노래연습 소리에 우리는 수업 이외의 일로 학교에 있는 시간에 평
화로움을 가졌던 것 같다. 이 평화로운 느낌은 1990년 30주년 기념공연 ‘우리읍내’ 연습
으로 강의실과 예전의 마리아홀을 오며가며 또 한 번 가질 수 있었고 그러한 기억을 또
가질 수 있었음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와 연극반’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보긴 했는데


연극 연습이 좋고 연극반에 가는 것이 좋아서 열심히 나가기는 했으나 연극반의 여러

138
1968년 ~ 1977년

가지 일에 열심이었던 김경수, 이종영(재미), 이한식(재미), 이춘오, 김경미(재미) 그 외


다수 우리학년의 친구들에 비하여 나는 연극반에 공헌(?)한 바가 없어서 내가 잘한 이야
기에 대해서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연극반에 고마움을 이야기하자면 정말 많다.
그 중에서도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을 몇 가지만 이야기하면..
첫째, 연극에서 ‘관객’이 되는 즐거움과 행복을 연극반에서 배운 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감동할 수 있는 순간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러한 감동의 순간을 우리는 연극을 통하여 더 자주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연극을 보면서 공연 자체에 감동하기도 하고 그 작품을 만든 과정의 이야기를
보고 감동하기도 하며 연극을 만든 사람들의 글을 보고 감동하기도 한다.

둘째, 연극을 통하여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 일.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 어떤 순간을 만날 때 어떤 연극에서 보았던 어떤 장면 어떤 대사
가 떠오르며 이해되기도하고 또는 반대로 연극 공연을 보다가 어떤 상황, 어떤 사람 혹
은 지난날의 내가 ‘아하!’ 하면서 이해되기도 한다.
첫째와 둘째는 주로 ‘관객이 되는 행복’에 대한 이야기다.
보고 싶은 연극이 있고 시간내기가 가능하다면 언제든지 혼자서라도 ‘관객’이 될 수 있
으므로 ‘좋은 연극에서 관객이 되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 중의 행복한 일이다.

셋째, (가장 중요한 셋째! 언제나 셋째가 가장 중요하지요)


성의연극회를 통하여 정말 좋은 선후배를 알고 만날 수 있었던 일이 가장 고맙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혹은 그냥 가끔 모임에서 얼굴만 보며 지내도
우리 모두 우리가 가장 좋은 시절('기쁜 우리 젊은 날')에 '가톨릭의대 연극부'(성의 연극
회)에 속했었다는 이유로,
혹은 그냥 연극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지금 동문회의 한사람이라는 이유로
서로가 가지게 되는 친근감과 편안함...
이러한 만남이 정말 귀하고 또 귀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어느 소극장에서 보았던
미국의 시인 프로스트가 예술에 대하여 했다는 말을 다시 옮기면서 글을 마치고 싶다.
프로스트는 ‘예술’이라고 말하고 있는 단어를 그 중의 하나인 ‘연극’이라고 말하면서.

예술(연극)은 우정입니다.
예술(연극)은 살아있는 사람과의 우정일 뿐 아니라
죽은 사람과도 나누는 우정입니다
지난 세기의 커다란 사람과의 만남은
우리의 삶을 추악하게 할지도 모르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우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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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뮤지컬
[20회] '환타스틱스' - 톰 존슨 작, 이정태 연출, 1976년 봄

(최창순) 우리 연극부 최초의 뮤지컬 공연이 아니었나 생각되며, 연출을 맡으신 이정태
선배님의 다재다능함에 감복. 춤 배우고 노래 배우고 신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인디언2(머티머)로 혼신의 죽는 연기를 펼쳤었지요

(이정기) 좌측부터 최동수, 유경수(재미), 이정기, 이문영,김경실. 내가 주인공인 마트 역


을 하고 싶었으나, 아버지인 허클비 역을 맡게 되었고, 이후로는 무대에 많이 서지는 못
했지만, 주로 나이 많은 역을 주로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첫 단추를 잘끼워야 하는데...
ㅉㅉ 안무 연습을 하다가 지루하면 잠시 틈을 내어 안무 담당이신 이영란 님 (현 연극
배우,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도 장동건, 원빈의 엄마 역으로 나옴)에게 졸라서 당시
유행하던 고고와 소울 춤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캐스트 중의 한명과 안무 선생님과 모종
의 로맨스도 있었고... 신입생 환영공연으로서는 성공적인 공연이었습니다. 아직 기억나
는 대사 한마디... ‘헨리’가 ‘머티머’에게 "머티머, 엑스트라 배우란 없는거야. 다만 맡은
역할이 시시할 뿐이야~"

(이정태) 이 작품은 1974년인가 극단 ‘가교’에서 공연했던 작품인데. 양승한과 함께 보


고, 개인적으로 대본과 악보를 훔치다시피 해서 공연을 올리게 되었지요. 그런데 실은
악보의 일부를 유실하여 음악 전체를 넣지는 못했음을 고백해요... 피아노를 맡았던 김향
미 님은 제가 홍영선, 이원철(예방의학과 교수), 이성(외과 교수, 성바오로병원)과 함께
하던 남성중창단의 반주자였는데. 함께 하게 되었지요. 나중에 플룻과 바이올린이 추가
되었답니다. 주제곡이 여러분이 잘 아시는 Try to Remember"... 창순아! 너 그때 참 잘
죽더라. 아, 상태는 죽었다가 다시 한번 움찔하다가 다시 죽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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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 1977년

쓰기 연습

이정태 (의·18회)

쓰기 연습 1. 연극부 입단과 동기들...

1973년 봄, 3월이 시작되고, 연극부의 문을 두드렸지요.


철부지, 더벅머리 소년은 누가 오라기 전에 연극무대에 이미 발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2010년 다시 무대에 서니, 실로 40년 가까운 세월을 무대 혹은 무대 언저리에서
그리움 하나로 버티고 있습니다.

당시 신입생으로 연극부에 들어온 사람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저와 양승한(본교 대학 교수 재임, 원주에서 개원, 재활의학과) 정도이고, 그 외에도 외과
를 하다가 전공의 시절 타계한 김은배가 있었고, 그 외에 홍영선(현 서울성모병원장)은 2
학년 말에 들어와서 2년 정도 하다가 그만 두고, 양기화(대한의사협회)와 전해명(여의도성
모병원, 외과)은 본과 3학년인가 4학년 때 성의회(진료단) 만들면서 흐지부지...

그 외에도 서이석인가... 키가 무지하게 컸던 친구가 있었고, 박철순이던가.. 바로 그만


둔 친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간호대에는 일명 쓰리박으로 박순옥, 박연옥, 박인숙이 있었고.. 거기에 산악반을 하던
이혜봉도 있었지요..
박순옥은 여주대 간호학과 교수인데, 나머지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 외에도 그때의 팜플렛들을 보니, 수원에서 내과 개업을 한 이진창, 지금은 어디 있는
지 모르지만 경상도 사투리를 멋들어지게 구사하고 "농구는 광주리에 사과 담기"라는 말
이나, 노래를 코믹하게 개사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던 김희곤, 그리고 기타를 잘 치고
낚시광이었던, 지금은 포항에서 안과를 하는 김원권도 우리 연극부를 거쳐간 멋진 사람
들이었습니다. 지금 막 기억 난 것은 간호대의 박인숙과 함께 음향효과에서 일가를 이루
었던 신호균 동문도 있었는데. 현재는 종로에서 내과를 개원하였지요.

몇가지 기억나는 일들은,


물론 매번 공연이 아닌 모임이면 술에 만취하여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결국 모르는 채로
젊은 시절이 끝나고 말았지만...
여름이면 강릉에서, 만리포에서, 그리고 희방산의 계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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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겨울이면 폭설이 내린 치악산에서, 시루봉에서,
그리고 계곡의 찬물에 손을 담그며 코펠을 씻던 기억이 있습니다.
치악산 시루봉에서부터 숙소까지 눈썰매를 타고 내려오면서, 꽁꽁 얼어버린 후배를 사
랑의 정신으로 돌보던 강회형님, 희방산에서 취한 밤하늘에 헤아릴 수 없이 날아다니던
반딧불이들, 강릉 경포 앞바다에서 실속없이 굽던 정어리 구이, 모든 것이 이제는 흘러
간 추억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나도 늙고 초라합니다....

쓰기 연습 2. 연극 배우기.

저는 연극부에 입단한 이후
1973년 ‘십이야’에서 광대 ‘패스테’로 노래도 불렀고,
다음해인 1974년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들’에 ‘마스카리유’ 역으로 출연하고,
그해 가을 ‘우리 읍내’에 ‘신문 돌리는 조오 크로웰’ 역할을 맡았고,
1975년 봄 조해일의 ‘건강진단’에서는 ‘간이 콩알만해진 사람’,
1975년 가을공연인 ‘안티고네’에서는 무대감독,
1976년 봄에는 뮤지컬 ‘환타스틱스’의 연출,
그해 가을엔 ‘해녀 뭍에 오르다’에서는 연출 및 ‘나연호’ 역,
본과 3학년이던 1977년 가을 ‘4계절의 사나이’에서는 ‘토마스 크롬웰’로 출연해 ‘토마스
모어’를 죽였고,
당시 무대 뒤에서 징과 드럼을 치며 효과를 맡았었고,
1978년 본과 4학년에는 ‘만리장성’에서 ‘쥴리엣’역을 맡은 황혜연(간호학과 23회, 필라델
피아 거주)과 함께 ‘십이야’에 나왔던 "오너라 오려무나"를 다시 불렀습니다.

공연 당일 사라지신 고봉인 연출
[21회] '해녀 뭍에 오르다' - 오영진 작 , 이정태 연출, 1976년 가을

‘해녀 뭍에 오르다’는 고 오영진 선생의 회갑을 기념하여 무대에 올려진 작품입니다. 당시


연극부의 주역이었던 이정태, 전해명, 양기화, 양승한 등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가
톨릭의대 연극부의 무게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그 이름에 걸맞은 연출과 작품을 선정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하지만 비중 있는 작품들을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허용되지 않았습니
다. 말하자면 시대적으로 공연이 금지된 작품이 많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작품 선정은 너무
도 제한적이었습니다. 역사와 전통, 그리고 시대적 제한... 어렵게 찾아간 이승규 선생님께서
주신 작품들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것 뿐 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이지만, 그리
고 우리끼리의 비밀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선생님의 한마디가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하였
습니다. "대학극이면 대학극 다워야지. 이런 정도면 충분하지. 겸손하게 접근해야지..." 뭐 이
런 의미이었던 것 같습니다. 말씀으로는 좀 더 심하셨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래도 선생님

142
1968년 ~ 1977년

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는 김에 연출도 맡아 달라고 떼를 쓰다시피 하였지만, 대학


극은 더 이상 맡지 않겠다는 의도의 말씀이 계셨고, 지금은 일이 없으신 원로 한분을 소개해
줄 테니 만나려면 만나 보라고 해서, 우리는 지금은 개발이 진행된, 당시 마포구 신수동 산
꼭대기로 ‘고봉인’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당시 칠십이 다 되
셨고, 이미 은퇴하신 분 같았습니다. 자료를 보면, 아마도 1970년대에 "연극의 탄생"이라는
책의 한 장을 쓰셨던 그 분이 아닌지 싶습니다.
고봉인 선생께서는 자신은 학생극의 연출은 할 수 없고, 누가 연출을 하면 자신은 연출지도
를 하겠다고 하셔서 그리 하기로 하고 모셨는데, 연극의 대부분을 그분이 만드시고 저는 재
판 장면만을 만들었지만 팜플렛에는 제가 연출을 맡은 것으로 기록이 되었지요.
이분은 공연이 임박하여 어디론가 사라져서 공연 때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한 가지 에피소드는 당시 첫 공연을 마치고 어느 분이 메모를 제게 전해 주었는데...


"무섭도록 잘 보았습니다. 일취월장하소서. 김의경 배"
이렇게 쓰여 있던 종이는 덕성여대 원고지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아마도 현대극단 대표이시던 김의경 선생님이 아니셨을지....

개인적으로는 1974년 여름방학 중 당시 방태수 선생이 대표로 있던 극단 ‘에저또’에서 공


부하고 극단 수습단원들과 함께 현재의 ‘창고극장’(유석진 선생님이 당시 건물을 인수하여
극장으로 개수함)으로 이사하였고, 1975년에는 당 극단에서 화법을 공부했습니다.
1978년과 1979년에 걸친 약 1년간 국립서울정신병원에서 김유광 선생님(현재 마포구에서 개
원, 소극장 경영)을 도와 임하룡 선생과 함께 보조자아로 싸이코드라마를 공부했습니다.
이상이 저의 연극 편력인데, 누가 프로필을 달라고 하기도 했고 또 그냥 기록 삼아서 적어
봅니다.
하지만 정확한 기억인지 몰라서 언제라도 누구라도 교정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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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의 고향 연극부를 그리워 하며

신상현 (의·21회)

저는 1974년 가톨릭의대에 입학을 하고, 선배들로부터 20 여개의 동아리가 있다는 소개를


받고 어떤 서클에 들까 생각하다가 서슴없이 연극부를 선택하였습니다. 고등학교까지 시와 수
필, 소설과 철학에 빠져 내면으로만 가라앉은 지극히 내성적이었던 제 성격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연극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고, 6년 뒤 저는 기대하였던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
습니다.

신입생으로 처음 연극에 참여한 것이 1974년 가을 쏜튼 와일더의 ‘우리 읍내’였습니다. 수줍


고 소극적인 제가 술주정뱅이 성가대 지휘자 역을 맡았데, 역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해 고
전하자, 하루는 이한식 선배님이 저를 낙원동 튀김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막걸리 반 되를 둘
이서 한잔씩 마신 뒤, 저에게 지나가는 여자들을 희롱하는 연기를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
는 조금도 취하지 않았지만 객기를 부리며 늦은 밤길 여학생에게 취객처럼 추태를 부렸고 피
해여성은 너무나 놀라서 황급히 도망을 갔습니다. 다음날 연습시간에 주정뱅이 역을 다시 연
기하였을 때 선배님들이 놀라며 하루 만에 어찌 이렇게 달라졌는가 하며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연극을 통해서 갇혀있던 자신으로부터 탈출하고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당
시에 놀라 도망간 피해 여성에게는 지금까지도 미안한 마음이 크지만....
목가적인 연극 ‘우리 읍네’를 통해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는지
감탄하였고, 그리고 죽은 뒤의 세상에서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는 순수했던 대학 1학년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습니다. <흥! 그렇다니까... 이제야 아셨군? 우리가 살았다는게, 마
치 아무것도 모르고 구름장이나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거지...> 술주정뱅이 성가대 지휘자의 죽
은 자로서의 고백...

두 번째 뮤지컬
[22회] '찰리 브라운' - 존 고든 작 , 신상현 연출, 1977년 봄

본 1때는 ‘찰리 브라운’이라는 연극의 연출을 맡게 되었는데, 음악과 율동, 안무에 전혀 소질


이 없던 제가 겁도 없이 뮤지컬을 맡아서 다시 한 번 자신의 한계로부터 벗어나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전 세계에 찰리 브라운이라는 고전적인 만화의 주인공은 많은 사람
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여러 곳에 그 캐릭터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항상 부족하고 사교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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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 1977년

없고 약삭빠르지도 못한 바보틱한 주인공은 어쩌면 저 자신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챨리 브라운이 노래로 “나는 미남도 아닐세 / 머리도 안 좋고 / 언제나
바보야, 철자와 수에도 / 나는 아무것도 못하네, 공차기와 구슬치기도..... 나는 어쩌면 좋아요?...
나는 철저한 얼간이, 바보, 나는 정신병자.....”하면서 자신을 한탄하자, 여주인공 루시가 “아냐,
그렇지 않다네.... 너는 착한 아이, 챨리 브라운”하면서 격려를 해주는 장면이 지금도 흐뭇한 미
소 속에 떠오릅니다. 같이 어린아이가 되어 연기하던 우리 선후배들 지금은 50대를 넘긴 중년
의 신사, 숙녀들이 되어 있지요. 못 본지가 20년이 넘은 얼굴들.....많이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성인의 길
[23회] '사계절의 사나이' - 로버트 볼트 작 , 김재연 연출, 1977년 가을

본 2 때, 사극 사뮤엘 베케트의 ‘사계절의 사나이’ 기획을 맡았습니다. 비극적 냄새가 물씬 나


는 중후한 대작을 다 소화해내는 우리 연극부원들과 함께 하면서 제가 그 일원이라는 것이 참
으로 자랑스러웠습니다. 수도생활을 하는 지금, 당시에는 토마스 모어가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연극에 몰입하였지만, 돌이켜 보면 목숨을 바쳐서 의를 지켰던 그의 지조 있는 신앙이 제가
수도자로서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닌지 묵상하게 됩니다.
연극부에서의 6년간의 삶이 제 일생에 참으로 소중하고 귀한 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후배들
의 모범이셨던 대 선배님들, 김광평 선배님, 문일신 선배님, 든든한 보스처럼 늘 우리를 지켜
주셨던 영원한 형님 종건이 형, 위트와 해학, 웃음이 뭔지 가르쳐 주셨던 마귀 형, 정태 형,
친동생처럼 여겨졌던 창순이, 변상태... 다 이름할 수 없는 정다웠던 선배님, 동료, 후배들 덕
분에 오늘 저는 꽃동네에서 봉사하며 수도자의 삶을 풍요롭게 살아갑니다. 연극부에서 고통과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유머와 위트를 배웠고, 선후배들과 끈끈한 사랑을 맺으면서 차가
운 이성만을 요구하는 의학도의 가슴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었습니다. 연극의 문학적 감성과
발산하는 끼와 정열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저는 꽃동네에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분들을 돌보면
서 지금처럼 풍요로운 수도 삶을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많이 보고 싶습니다. 그리움은 만날 수 없을 때 그 가치가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영원한 그
리움, 연극부는 제 마음의 고향입니다. 하느님이 의학도였던 저에게 주신 가장 큰 은총의 선물
입니다. 사랑합니다.

21회 연극부 동문 신 상 현 (야고보)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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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사람들

신영희 (간·21회)

성의연극회 50주년 기념 책자를 내게 되었다며 그 당시를 회상하며 글을 부탁한다는


후배의 전화를 받고 먼 생각의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벌써 36년 전인 74년도에 대학1
학년 봄쯤이었던 듯싶은 어느 날, 연극반 소개하신다며 그때 이종건 선배님이 우리 교
실을 들어오셨고 지금도 멋있지만 그때 철없는 1학년 여학생 눈에 보인 멋있는 선배님
의 모습에 반해 연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연극에 대한 열의도 없었지만 사람이 좋아
서 잊지 않고 지내온 시간들이 벌써 36년이 지났다. 20살 그 당시에 내가 60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연극반하고 인연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는데~ 아니 그때는 나에게 이 나
이가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철없던 시절이었다 (아직도 철없음은 진행 중이지만 ...)
사람들이 좋아서 같이한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당시의 사람들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너무나 대선배시지만 정말로 연극을 사랑하셔서 때마다 얼굴을 보이셨던 김광평선배


님!!!
지금도 열정만은 20대 보다 앞서신 멋지신 분이시죠.
안티고네에서 ‘크레온’ 역할로 기성배우보다 더 잘해내신 목소리만 들어도 연극냄새가 나
는 멋진 박창서 선배님!!!
그 당시의 안티고네는 지금도 대사가 기억날 정도로 환상적이었어요. - 꽉 찬 객석, 함
께 하는 호흡... 연극이 이런 것이구나 했던 연극반이었던 것이 자랑스러워 우쭐거렸던
작품으로 기억됩니다.
그때는 그렇게 감성적이고 낭만적인지 모르고 어렵기만 했던 문일신 선배님!!!
연극반 일이라면 항상 열심이셨던 조각 같은 얼굴과 마음의 이종건 선배님!!!
연극반과는 안 어울리는 모범적인 얼굴과 모습으로 신선했던 김강회 선배님!!!
치악산 MT에서 처음으로 제가 술이란 걸 먹고 주정이란 걸 했다지요? 선배님한테...
‘베사메무쵸’를 멋들어지게 부르셨던 고독한 시인 같았던 김진배 선배님!!!
지금도 그 음성이 느껴지는 우리읍내의 무대감독 역할을 누구보다 분위기 있게 해주신

늘 독립군처럼 따로 또 같이 하셨던 김경수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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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 1977년

늘 어깨에 메고 다니시던 초록색 가죽가방은 박물관에 있남요?


경포대 MT에서 물에 빠진 나를 살리셨다고 생명의 은인이라나 뭐라나~~
뒤풀이에서 따라올 자가 없을 우스개 소리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셨던 비실이 이춘오선배
님!!!
늘 따듯했던 허스키한 목소리의 웃음이 기억나는 이종영 선배님!!!
보기만 해도 흐뭇하고 행복했던 돼지 이한식 선배님!!!
지금도 여왕같 지만 그 당시도 작은 여왕 같았던 이름도 예쁜 홍지희 선배님!!!
공주님 같았던 예쁜 ‘안티고네’ 허영경 선배님!!!
잊을 수 없는 쓰리박 박순옥, 박연옥, 박인숙 선배님들!!!
‘건강 진단’ 공연 시 ‘미친 환자’ 역할을 기가 막히게 소화시키신 보고 싶은 연옥언니.
“오려나 오려무나 죽음이여~~”가 생각나는 재기가 번득였던 이정태 선배님!!!
‘십이야’ 때의 주제곡이라는데 지금도 읖조리게 되는 건 순전히 선배님 덕분
그때도 무언가 남달랐던 생각이 깊고 웃는 것이 순박했던, 지금은 수사님이 되신 신상
현!!!
74학번 동기인데도 늘 오라버니 같았죠.
정말 사람 좋았던 보고 싶지만 다시는 볼 수 없는 고영실!!!
미국에서도 ‘우리 읍내’의 조오지 엄마처럼 푸근하게 살고 있는 고순혜!!!
건조한 분위기, 그러나 촉촉한 마음을 가진 박영숙!!!
나와는 쌍둥이 같다고, 늘 붙어 다닌다고 했던 마음이 고운 고성희!!!
늘 성실하게 사람 좋은 웃음을 웃고 다닌, 선배에게 깍듯했던 최창순!!!
매력 있는 목소리, 매력 있는 피부색을 가진 한종숙!!!
재기가 번득이던 소년 같은 김경실!!!

이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다시는 올 수 없는 그러나 확실히 존재했던 나의 대학시절은 연극반 사람들과의 추억
으로 생생해지고~~ 띠엄띠엄이지만 지금의 만남은 마음은 20대라는 말이 실감나게 해주
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어질 연극반과의 만남은 내가 더 이상 세월에 지지 않을 보험 같
은 건 아닐까?~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147
휴... 숙제 완료

김홍진 (의·23회)

50주년 기념 공연이라고 아무 글이나 올리라고 해서 쓰려 하는데 뭘 써야할지 모르겠


네요.

난 처음부터 연극이 좋아서 연극부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고, 워낙 성격이 내성적이라


성격을 좀 고쳐볼까 해서 들어 왔는데 그 인연이 어느새 35년이 되었네요.

처음 들어가서 한 것은 분장 팀 연습 도화지 역할... 덕분에 여드름이 잘 날이 없었죠.


그 후로 생애 단 한번 무대에 섰는데, 워크샵으로 유진 오닐의 “고래”에서 소년 역이었
죠. 단 한마디 “추 추 추워서”였는데 어찌나 떨렸던지... 그 후로 다신 무대 안서겠다고
결심했죠...ㅎ

가을 정기 공연인 ‘안티고네’에서 처음으로 장치, 소도구와 인연을 맺었고 결국은 그


걸로 끝났죠. 그때는 관객이 참 많았는데... 경운동 강당이 미어터져서 유리창 깨진 기
억이 나네요. 지하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반찬이 없어서 물 말아서 간장 쳐서 쑤셔 넣
던 것 하며 기합 빠졌다고 빠따 맞던 거, 그 후의 위로주.. 여자애들이 말 안 듣는다고
대신 맞아야 한다고 옷 두껍게 입고 오라해서 교련복 껴입고 가서, 소리만 크게 나게 일
부러 넙적한 걸로 때린 선배님들... 그걸 보며 훌쩍 훌쩍 울고 말 잘.듣던 여학생들...

데이트 있었는데 선배들이 못 가게 해서 연거푸 두 번 바람 맞췄던 기억...(요즘 같이


핸드폰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때는 연락 할 길이 없어서 무단으로 바람 맞추고...
결국 같이 찍었던 사진, 기념품 우편배달 되고 채임)

본과 1학년 때던가? 무대감독을 맡았고 토요일 오후에 공연이었던 거 같고... 그 날 생


리학 시험이 있었는데... 그 전 날 연출인 최창순과 함께 시험공부 한다고 우리 집에 와
서 시험공부는 안하고 토요일 오전 수업시간에 시험공부하자 한 후, 무대 조명 큐 체크
끝내고 취침... 아뿔싸! 아침에 등교 후 보니깐 큐 체크한 대본을 안 가져 와서 시험공부
포기하고 도서관 가서 다시 체크.. . 무사히 공연 끝낸 생각...(시험은 무사히 못 끝내고
재시)

148
1968년 ~ 1977년

문일신 선배님 소개로 KBS방송국 가서 故 최연호선생님께 무대장치도 받아오던 생


각...(경운동 강당 칫수를 잘 알고계서서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경운동 수위아저씨인 오씨 아저씨... 통금에 걸려 집에 못가서 여관비 빌려서 자던 게


생각납니다.

영원한 꼬붕인 진호, 노아, 유배...

치악산 갔다가 낙오된 여학생 데리고 기어코 정상에 갔는데, 중간에 내려갔을 거라 생
각하고 먼저 내려간 넘들 때매 점심도 못 먹고 당황했던 기억...(겨울 산은 금방 껌껌해
지니깐 쉴 시간 없다고 너무 겁을 줘서 쉬지도 못하고 내려오다가 다 내려와서 기절한
여학생...28회 이현림...)

쓰다보면 한이 없을 것 같네요... 딴 사람들한테 넘길께요.

글재주가 없어서 죄송... 그래도 많이 무리한거예요...ㅎㅎ

149
우리 학교가 오씨 아저씨 것이 아니라며?
이거 저만 반갑고 호들갑인가요?
경운동 시절 연극부 이야기를 하면, 술자리 이야기와 함께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분이 수위실 "오씨
아저씨" 이지요.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12시 통행금지 시간이 있었던 당시는 막차 끊어지면 갈 곳
이 여관이나 학교 밖에 없었던 시절이었고, 요즘도 그렇지만 연습 끝나고 술 한잔 하고 나면 막차 시
간을 놓치기가 다반사였지요.
오씨 아저씨께서 근무하실 때면 통금에 쫒겨도 걱정 없이 소주와 안주를 사들고 아저씨를 졸라서 강
당에 진입, 무대 위에서 한바탕 판을 벌이다 커텐을 몸에 감고 잠들었던 추억을 만들어 주셨던 분이
시고, 술값 모자라면 술값 빌렸던 사람도 적잖았다하고... 저희들에게 형처럼 삼촌처럼 대해주셨던 고마
운 분이셨지요. 우리 동문 모두가 아저씨를 그리워하기에, 이번 50주년 행사에 모시려고 학교에 수소문
하여 알아낸 주소로 편지를 보냈답니다. 공연 안내 브로셔와 초대권을 제 전화 번호와 함께... 편지를
받자마자 너무 감격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더군요. 그런데, 우리 연극부 동문들의 이름과 역사, 개인사
를 어찌나 정확하게 줄줄이 꿰고 계시던지요! 김강회, 문일신, 이종건, 신상현, 변상태, 이정기, 안인호...
끝없이... 무대 뒤에서 공연을 위해 애쓰는 스탭이 있듯이 우리 연극부 뒤에서 안보이는 힘이 되었던
분이셨고, 지금도 무한 추억거리를 주시는 분이시지요... 어휴! 저만 호들갑인가요? 전 무척 반갑고 설레
는데...연극은 만남의 예술 맞는 것 같아요. 어! 연습해야겠네요. 비 옵니다... 아저씨 성함은 ‘오영안’
이랍니다. (최창순·의22회)

„ 정년퇴직하셨나요? 하긴 제가 나이 먹은 생각을 하면... 학교에 있을 때 우연히 만나면 제 이름을 부르며


“종건아! 연극에 미쳐 공부도 안하던 놈이 교수가 되었으니 무척 자랑스럽다”라고 하시며 등을 두드려주셨
는데....(이종건·의18회)
„ 십이야 끝나고 얼마 후, 교문을 들어서는 외부인에게 "당신, 광대 알아?"하고 물어서 모른다니까 우리 학생
아니라고 했다는 얘기가 전해오는 그 오씨 아씨!!! 정말 반가운 만남입니다...(이정태·의20회)
„ 경운동 무대에서 제2의 시련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미소로서 눈감아 주시던분 ! 정말 보고 싶습니
다.(이천희·의28회)
„ 순식간에 30년을 건너뛰게 하는 이름 '오씨 아저씨' 아량과 웃음이 넉넉하신 분, 정말 뵙고 싶습니다 (안인
호·의23회)
„ 저만 보시면 항상 “혜정이는?” 하고 물으셨었습니다. 정말 보고 싶네요.... 요즘은 남진이형이 오씨아저씨를
닮아 가는 것 같네요. (김창재·의28회)
„ 너무 반갑습니다. 감격스럽네요~(황혜순·간27회)
„ 정말 오씨 아저씨야 말로 70, 80년대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그리고 성의연극부(그 당시 호칭은 연극반) 개
개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산 증인, 그 자체가 아닐까요? 아직도 귀에 생생하게 들리
는 듯 합니다. "증기야(정기야), 너 지금 뭐드냐(뭐하냐)? 연애 고만하고 공부 좀 해야지~" (이정기·의24회)
„ 어제는 진수를 25년 만에 만났는데... 오늘은 오씨 아저씨를 한 20년 만에 뵙게 되겠군요. 이건 이산가족 상
봉도 아니고.. 50주년 공연이 공연 자체의 의미도 있지만 우리 삶에서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일깨워 주네요.
(구태형·의30회)

150
1968년 ~ 1977년

오 영 안

저는 연극반에서 보내주신 50주년 초청장을 받고, 또 오늘 글을 써달라는 연락을 받고


서 두 번째로 가슴이 설레고 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쓴다는 게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그
래서 제가 92년도 근속 20년을 기해서 ‘성의학보’에 게재했던 몇 구절을 간추려봅니다.
이건 재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때의 학교 모양새야 비좁은 터에 건물만 겨우 지어, 강의실 몇 개와 실습실 몇 개가
고작이었으며, 앞마당과 뒷마당이 운동장을 대신했고, 뒷마당이 농구와 테니스를 번갈아
하는 유일한 장소였지요.
길 건너에는 대원군의 ‘운현궁’이 있었는데, 그 속엔 덕성여대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운
현궁 뜨락엔 봄이 되면 예쁘게 핀 꽃과 여대생들이 어우러져 조화를 잘 이루었으며, 그
풍성한 교정이 마냥 부럽기만 하였지요. 하지만 그때의 최소한의 시설과 공간들은 생활
엔 다소 불편이 있었지만 밀착해 부대끼다보니 서로가 정겨웠지요. 지난 20년을 돌이켜
보면 순간순간 모두가 여러분들의 분에 넘치는 사랑과 성원 속에서 물이 흐르듯 오늘에
이르렀지요. 운동장에선 같이 뛰었고 축제 땐 함께 노래도 부르고 심지어 시험 땐 위문
공연 한답시고 각 강의실을 돌며 노래를 불러주는 주책도 부렸지요. 제 자신의 위치, 나
이 이 모두를 초월하고 망각하면서 여러분들 속에 묻혀 살았지요. 이렇게 일심동체가 되
어 살다보니 숨은 이야기들도 있지요. 수업이 끝난 빈 강의실을 순찰하다가 사랑에 푹
빠져있는 커플들과 맞닥쳐 서로가 당황했던 일부터 시작하여, 연극반 어느 여학생을 짝
사랑 한다는 남학생의 청에 못이겨 여학생을 만나본즉 이미 딴 남자 친구가 있다고 하
던 안타까운 일도 있었으며, 장학금을 받고서 아저씨 생각이 나서 맥주 몇 병을 사왔다
고 해서 즐겁게 마셨던 술이 있었는가 하면, 눈보라 치던 어느 겨울밤 술이 얼큰히 취해
소주 한 병을 들고 와서 어느 교수까지 찾아가 통사정을 해봤으나 단 1점차로 낙제하게
되었다며 눈물로 하소연할 때 무슨 말로 위로와 용기를 줄까 하고 난감해하며 마시던
쓴 술도 있었지요. 한번은 써클제 때 방송반에서 불쑥 찾아와 아저씨의 목소리를 방송제
때 내보내고 싶으니 즉흥적으로 몇 마디 해 달래서, 평소 땐 강의실 도서관이 파리를 날
리다가도 시험 땐 돛대기 시장 같다고 꼬집어주고 덧붙여 때마침 어느 학년에서 커플들
이 무더기로 깨어졌다는 말을 듣고서 부디 유종의 미를 거두어줬으면 좋겠다고 하였더
니 그 이튿날 평소 나와 대화를 자주하던 고학년 어느 여학생이 찾아와 방송제에 참석
을 하였는데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나와서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나왔다고 하
며 눈시울을 적시는 그 여학생을 보며 뭉클한 마음으로 몸 둘 바를 모르고 당황해하며
마음속으로만 행복하길 빌며 또 우물우물 넘겼지요. 전 정말 여러분들의 큰 사랑 속에서
나날을 보냈습니다. 신입생 환영회 땐 무대 자막에 내 얼굴이 심심찮게 소개되었고 심지

151
어 “우리 학교가 오씨 아저씨의 것이 아니라며?“하는 어느 단막극 대사도 있었다고요.

지금부터는 연극반 이야길 좀 해야겠는데, 연극반 하면 우선 시골 밥상에 구수한 된장


뚝배기가 생각이 나지요.
어떻게 보면 좀 궁상스럽게 뭉쳐 다니며 밤늦게 찾아와 재워달라고 떼를 쓰고 어떤 땐
아침 일찍 순찰을 돌다 보면 어떻게 들어왔는지 강당 무대 뒤에서, 아니면 무대 바닥에
서 칸막이 천을 뒤집어쓰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깊은 잠에 빠져있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그들 행동 하나 하나가 밉상은 아니었지요.
개개인의 재미있었던 일들은 그만 여기서 접고 50주년 기념공연 관람에 대하여 몇 마디
적겠습니다.
최창순 동문의 초대장을 받고서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약간 흥분까지 했지요. 지금까지
날 잊지 않고 챙기다니 하고서요.
하지만 대답은 했지만 참석할까 말까 하고 많이 망설이기도 했답니다.
마리아홀 현관에 들어서니 김광회 선배가 제일 먼저 눈에 띠어 인사를 했는데 반갑게
맞아주며 사진까지 찍자고 하여 김 선배도 이런 면이 있었던가 했으며, 실은 저는 평소
에도 김 선배의 몸가짐과 생활 신조에서 연륜을 떠나서 존경을 했으며 본받을 점이 많
다고 생각을 했었지요. 그날 몇 마디의 인사말도 간결하고 품위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은 채진호 동문을 만났는데, 반가워하며 접수대로 가서 귓속말로 소근대더니 표
두 장을 전해줬는데, 자리를 잡고서야 소곤거리던 의미를 알겠더군요. 제 자리가 제일
좋은 위치였습니다. 그 섬세한 배려에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바로 옆자리에 이종승, 구태형 동문이 자리 잡고 있었지요. 나름대로 다 좋은 자리를 잡
았더군요. 이종승 동문은 여전히 어깨에 힘을 좀 준 듯 하고 의젓하게 앉아있었으나, 구
태형 동문은 예쁜 사모님과 정장을 하고 동석을 했는데 어쩜 그렇게 옛날 그대로입니
까? 친근하고 약간 모자란 듯 한 미소에 후줄근한 옷맵시, 또 친근하면서도 구수하고 자
기 것을 모두 줄 듯 한 포근함도 변함이 없더군요. 옆 사람을 개의치 않고서 반겨주면서
주머니 속에서 명함을 주며 꼭 찾아오시라고 하는 것이 과장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관람을 하고 나오다 이정기 동문을 만났는데, 옛날부터 부담 없이 좋아해서였던지 나도
모르게 “정기야! 난 네가 졸업하면 날 먹여 살릴 줄 알았다.”라고 소리를 쳤지요. 하지만
전 바로 ‘아차! 내가 너무 말을 하부로 했나?’하고 잠깐 후회도 했습니다만 여러분들을
보는 순간 옛날을 오씨 아저씨로 돌변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녁식사를 하면서 문일신, 이종건 선배를 만났는데, 두 선배가 너무 지치고 피
곤하여 보였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날 그렇게 보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그리고 이종건
선배는 좀 친한 편이었지요. 한 20년 전인가? 아침 출근길에 이종건 선배의 승용차를 보
고 버스 속에서 승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서 “이종건 선생!”하고 소리를 쳤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어주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바오로 병원에서 진료비가 모자라 김창재 동문이 제일 만만하여 찾아
갔던 일이 생각나는데, 50주년 공연 중엔 그 답지 않게 어쩜 그리 능청스럽게 연기를 잘
하던 지요. 그런데 좀 걱정이 되는 것은 집에서 마누라 단속을 잘하고 있을지 하는 것입

152
1968년 ~ 1977년

니다.
그리고 연극반 하면 이정태 동문인데, 연기도 잘하고 재능도 있지요. 아마 배우가 되었
다면 명성을 날렸을 것 같아요. 속마음으로 ‘난 기성 배우보다 연기를 잘한다’고 좀 건
방진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또 유남진 동문, 정말 놀랐습니다! 평소엔 수줍어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았는데 어쩌
면 그렇게 얼굴 두껍게 잘 합니까? 그런데 멋진 의상과 역할에 걸맞은 외모 덕 좀 본 것
같아요.
그리고 손주영, 박경희, 홍지희 동문들하고는 연극반하고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
도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잘 어울리는 별종들 같아요.
럭비공처럼 어디로 튕길 줄 모르는 정의의 사나이 변상태 동문, 또 약방의 감초 같은 최
창순 동문. 그는 진정 가대 연극반을 위하여 태어났으리라.
그리고 선배이면서도 막내 같은 이천희 동문, 말없이 묵묵히 뒷받침 해주는 강주원, 황
동진, 김기수 동문들, 그리고 항상 정이 많고 다정한 간호과 못난이 동문들...
끝으로 최봉춘 동문, 그의 말 없고 많은 것을 내포한 미소와 의젓함은 여전했으며, 맡은
배역 역시 격에 맞는 것 같았고, 연극반을 위해서 많은 애를 쓰고 있으리라 믿지요.

새삼 말씀 드리지만 망설이다가 참석을 했는데, 막상 여러분들과 어울리다 보니 물 만


난 고기처럼 나도 모르게 옛날 오씨 아저씨로 돌아와 신이 나 있더군요.
여러분들이 오씨 아저씨의 긍정 부정을 떠나서 고유한 저의 맛을 변질되지 않게 느끼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우려를 했는데, 더러 옛날에 “사랑해요!” 했던 그 눈빛을 감지할 수
가 있었답니다.
우리가 50주년을 만끽하였으니 지금부터는 100주년을 준비해야지요. 100주년에 오씨 아
저씨가 빠지면 안 되겠지요? 그때 난 120살 밖에 안 될 것이니 초청장을 보내주시면 꼭
참석하겠습니다. 하늘나라에 가 있다면 천상 휴가라도 받아서 무지개 타고 와서 보고 싶
은 여러분들을 얼싸안고 춤을 추고 가겠습니다.

저를 잘 모르실 재학생 여러분들께도 인사를 전합니다. 안녕!

153
1978년 ~ 1985년
PREFACE
PROGRAMS
발|간|사
제 24회 고도를 기다리며 1978년 3월 23, 24일

156
PROGRAMS 차례

제 24회 고도를 기다리며 1978년 3월 23, 24일

157
PROGRAMS
제 24회 고도를 기다리며 1978년 3월 23, 24일

158
PROGRAMS 차례

제 24회 고도를 기다리며 1978년 3월 23, 24일

159
PROGRAMS
제 24회 고도를 기다리며 1978년 3월 23, 24일

160
PROGRAMS 차례

제 24회 고도를 기다리며 1978년 3월 23, 24일

161
PREFACE
PROGRAMS
발|간|사
제 25회 만리장성 1978년 9월 14, 15일

162
PROGRAMS 차례

제 25회 만리장성 1978년 9월 14, 15일

163
PROGRAMS
제 25회 만리장성 1978년 9월 14, 15일

164
PREFACE PROGRAMS 차례

발|간|사 제 25회 만리장성 1978년 9월 14, 15일

165
PROGRAMS
제 25회 만리장성 1978년 9월 14, 15일

166
PROGRAMS 차례

제 25회 만리장성 1978년 9월 14, 15일

167
PROGRAM
PROGRAMS
발|간|사
제 27회 삼십일 간의 야유회 1979년 9월 13, 14, 15일

168
PROGRAMS 차례

제 27회 삼십일 간의 야유회 1979년 9월 13, 14, 15일

169
PROGRAMS
제 27회 삼십일 간의 야유회 1979년 9월 13, 14, 15일

170
PREFACE PROGRAMS 차례

발|간|사 제 27회 삼십일 간의 야유회 1979년 9월 13, 14, 15일

171
PROGRAMS
제 27회 삼십일 간의 야유회 1979년 9월 13, 14, 15일

172
PROGRAMS 차례

제 27회 삼십일 간의 야유회 1979년 9월 13, 14, 15일

173
PREFACE
PROGRAMS
발|간|사
제 29회 진짜 하운드 경위 1980년 12월 18, 19, 20일

174
PROGRAMS 차례

제 29회 진짜 하운드 경위 1980년 12월 18, 19, 20일

175
PROGRAMS
제 29회 진짜 하운드 경위 1980년 12월 18, 19, 20일

176
PREFACE PROGRAMS 차례

발|간|사 제 29회 진짜 하운드 경위 1980년 12월 18, 19, 20일

177
PROGRAMS
제 29회 진짜 하운드 경위 1980년 12월 18, 19, 20일

178
PROGRAMS 차례

제 29회 진짜 하운드 경위 1980년 12월 18, 19, 20일

179
PREFACE
PROGRAMS
발|간|사

제 30회
30회 내가 내가
날씨에 날씨에
따라 변할 따라 변할1981년
사람 같소? 사람3월같소?
26, 27일

180
PROGRAMS 차례

제 30회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1981년 3월 26, 27일

181
PROGRAMS
제 31회 시련 1981년 9월 17, 18, 19일

182
PROGRAMS 차례

제 31회 시련 1981년 9월 17, 18, 19일

183
PROGRAMS
제 31회 시련 1981년 9월 17, 18, 19일

184
PROGRAMS 차례

제 31회 시련 1981년 9월 17, 18, 19일

185
PROGRAMS
제 31회 시련 1981년 9월 17, 18, 19일

186
PROGRAMS 차례

제 31회 시련 1981년 9월 17, 18, 19일

187
PROGRAMS
제 32회 비더만과 방화범 1982년 3월 24, 25일

188
PREFACE PROGRAMS 차례

발|간|사 제 32회 비더만과 방화범 1982년 3월 24, 25일

189
PREFACE
PROGRAMS
발|간|사
제 33회 템페스트 1982년 9월 16, 17, 18일

190
PREFACE PROGRAMS 차례

발|간|사 제 33회 템페스트 1982년 9월 16, 17, 18일

191
PROGRAMS
제 33회 템페스트 1982년 9월 16, 17, 18일

192
PROGRAMS 차례

제 33회 템페스트 1982년 9월 16, 17, 18일

193
PROGRAMS
제 33회 템페스트 1982년 9월 16, 17, 18일

194
PROGRAMS 차례

제 34회 토끼와 포수 1983년 3월 23, 24일

195
PROGRAMS
제 34회 토끼와 포수 1983년 3월 23, 24일

196
PROGRAMS 차례

제 35회 아득하면 되리라 1983년 9월 16일, 17일

197
PROGRAMS
제 35회 아득하면 되리라 1983년 9월 16일, 17일

198
PROGRAMS 차례

제 35회 아득하면 되리라 1983년 9월 16일, 17일

199
PROGRAMS
제 35회 아득하면 되리라 1983년 9월 16일, 17일

200
PROGRAMS 차례

제 37회 보이체크 1984년 9월 14, 15일

201
PROGRAMS
제37회
제 36회보이체크
보이체크
1984년1984년 9월
9월 14, 15일 14, 15일

202
PROGRAMS 차례

제 37회 보이체크 1984년 9월 14, 15일

203
PROGRAMS
제 37회 보이체크 1984년 9월 14, 15일

204
PROGRAMS 차례

제 37회 보이체크 1984년 9월 14, 15일

205
PROGRAMS
제 39회 미시시피씨의 결혼 1985년 9월 20, 21일

206
PROGRAMS 차례

제 39회 미시시피씨의 결혼 1985년 9월 20, 21일

207
1978년 의학과 신입생 11명, 간호학과 신입생 5명이 대거 연극부에 들어오면서, 큰 규모의 연극을 무대에 올릴 수 있게 된다. 1979년 의학과
3명, 간호학과 14명의 신입생을 비롯해 매년 많은 수의 신입생들이 연극부에 들어오면서 연극부의 중흥을 이루게 되었다. 그 결과 21명의
캐스트가 등장하는 ‘만리장성’, 가을대공연 최초의 학생 연출로, 15명이 출연하는 ‘30일간의 야유회’ 등이 공연되었다. 1980년, 연극부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첫 홈커밍데이를 개최하고 성의연극회 동문회를 발족하였으며, 초대 동문회장으로 김정규 동문을 선출하였다. 1981년 창
립 20주년 기념공연으로 ‘시련’을 무대에 올린다. 1982년 봄, ‘비더만과 방화범’을 마지막으로 경운동 시대를 마감하고, 강남으로 학교가 이
전하면서, 그해 가을 정기 대공연은 ‘강남 교사 신축 기념공연’으로 ‘템페스트’를 신축 교사 마리아홀에서 올리게 된다.

경운동의 추억

신경철 (의·25회)

1978년 가톨릭 의대, 경운동


78학번으로 가톨릭 의대에 입학했는데, 신입생 환영 연극을 한다고 해서, 강당을 찾았
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었는데, 고 3으로 공부만 하다가 신입생이 된 대학생
에게 문화적 충격으로, 아직도 머릿속에 그림으로 남아있다. 이종승(예2), 유남진(예2),
김병욱(본1), 이호선(예2)은 마음속에 아직도 배우로 남아있다.

이종승과 유남진...명배우의 탄생을 알리다.


[24회] '고도를 기다리며' - 사무엘 베케트 작, 최창순 연출, 1978년 봄

208
1978년 ~ 1985년

심성보라는 친구가 연극반에서 워크샵을 하니까, 강당에 같이 가자고 해서 전철수(의


사 협회 부회장을 거쳐, 파주에서 가정의학과 개원), 김주현(안산에서 성모이비인후과 개
원), 안혜경(강남 성심 병원 병리과 교수), 박영학(성모병원 이비인후과 교수), 채진호(안
양에서 채진호통증의학과 개원), 최봉춘(강남 신사동에서 세연통증의학과 개원), 김영훈
(소아과 교수, 의정부성모병원 원장), 김용범(송파구에서 시온정형외과 개원), 김형국(부
산에서 김형국소아과 개원), 그리고 나(신경철, 일산에서 고양정형외과 개원), 이렇게 많
은 인원이 참석했다. 그리고 간호학과에서는 이희옥, 정순희, 유경애, 신미옥, 그리고 임
승임이 연극반이었다.
‘환타스틱스’와 ㅇㅇㅇ, 두 작품을 하였다.
최창순(본2), 변상태(본2, 연극부장), 최동수(본2), 김홍진(본2), 권영택(본2), 안인호(본2)
선배님과 김병욱(본1), 박휘규(예2), 이정기(예2), 이호선(예2), 이종승(예2), 유남진(예2) 선
배님과 허관순(간2, 부회장), 김미옥(간2), 허영(간2) 선배님이 경운동에 같이 있으면서,
연기 지도, 무대 장치, 분장, 의상과 조명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낙원 상가에
있는 중국집에서 짬뽕과 고량주를 사 주거나, 덕성여대 옆 골목에 있는 오나시스에서 막
걸리와 김치찌개도 사 주었다. 대학생들이 돈이 많지 않으므로, 김치찌개가 줄어들면
김치 넣고 물 넣고 다시 만들어서 먹었었다. 그 당시에는 김치가 비싸지 않았으리라 생
각된다. 통행금지가 있었기에, 술을 마시다 취하면, 오나시스 방에서 자는 경우도 있었
고, 여관에서 잔적도 있었지만, 학교 강당에서 자는 경우가 많았다. 이종승 선배님은 우
스개소리로 생물학 책값을 받고, BIOLOGY 책값을 받아서, 후배들에게 술을 산다고 하
였다.
명동파인 이정태(본4), 양기화(본4), 양승한(본4), 신상현(본3), 유경수(본3) 선배님과 한종
숙(간4), 김경실(간4), 이은화(간4), 황혜연(간3), 김군자(간3) 선배님도 가끔 오셔서, 낙원
상가에 있는 개미집에서, 족발과 약주를 사 주었다.
옥상과, 옥상 올라가는 계단에서 연습을 했는데, 큰 강당에서 공연을 한다고 발성 연습
과 큰 소리 내기를 하였고, 볼펜을 물고 정확한 발음 구사하기를 하였고, 표준말을 배웠
다.
‘환타스틱스’에서 인디언인 ‘헨리’역을 했었는데, 이종승 선배가 연출이었던 것 같고, 누
가 무대감독이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겠고, 다른 워크샵 작품은 작품명까지도 기억에 없
다. 32년 전 일이 이나마 기억에 있다는 것이 다행일까?
워크샵이 끝나고 어디론가 1박 2일로 놀러 갔었다. 새터로 기억하는데, 대성리나 팔당일
가능성도 있다. 성북역에서 기차를 타고 갔던 것 같기도 하고, 마장동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갔던 것 같기도 하다. 막걸리를 엄청 많이 마시고 취했었던 기억과, 밤에 갑자기
나타난 김홍진, 최동수 선배님이 반갑고 우러러 보였고, 막걸리도 많이 마셔 부러웠었다.
김병욱 선배님의 통기타 반주로 밤을 새워 노래를 불렀고, 캠프 파이어도 하고, 새벽에
는 남학생들이 둘러서서 불을 끄던 기억이 난다.

209
21명의 캐스트로 만리장성을 쌓다.
[25회] '만리장성' - 막스 프리쉬 작 , 정종화 연출-1978년 가을

여름방학 때부터 가을 정기 공연을 준비하였는데, 정종화 연출님을 초빙해서 “만리장


성”을 까메아드(CAMEAD) 축제 기간에 무대에 올렸다. 지도교수로 유기화학 이동호 교수
님이 계셨고, 기획은 변상태, 조연출은 신상현, 그리고 무대감독은 안인호 선배님이었다.
CAST를 보면, '현대인'에 최창순, '황제'에 변상태, '미란'에 박군자, '우창'에 박휘규, '유란'
에 김미옥, '벙어리'에 유남진, '씨우'에 이희옥, '따힝엔 1'에 김용범, '따힝엔 2'에 김병욱,
'망나니'에 이호선, '로미오 1'에 이정태, '로미오 2'에 전철수, '줄리엣'에 황혜연, '나폴레옹'
에 이종승, '콜럼부스'에 김영훈, '쎄느강의 소녀'에 허관순, '빌라도'에 심성보, '돈 쥬앙'에
채진호, '부르투스'에 박영학, '클레오파트라'에 유경애, '병사'에 최봉춘으로, 많은 수의 배
우가 출연했다.
STAFF를 보면 장치 및 소도구에 김홍진, 유남진, 조명에 권영택, 신경철, 김형국, 김주현,
효과에 이은화, 임승임, 분장에 한종숙, 신미옥, 의상에 황혜연, 정순희, program에 허영,
진행에 전해명, 양승한, 유경수, 김경실, 한종숙, 이은화로 역시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
당시에는 빠따라는 것이 있었는데, 선배님들이 양복을 입고 오시면, 바로 그날 이었다. '
사랑의 빠따'라고, 맞고 나면 술을 사주면서 위로해 주었었다. 여학생들은 옆에서 울면서
분위기를 맞추어 주었고, 남자들은 늠름하게 빠따를 맞아야 했었다. 요즈음의 학생회가
당시에는 학도 호국단이었던 것을 보면, 군부 정권이었던 대한민국의 상황이었다고 생각
된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에도 있었던 일이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는 것이 편했었다.
연극에 필요한 무용, 음악, 프로그램이 있으면, 이화 여대나 홍익대에서 대학생들이 와서
도와주었다. 보통은 선배 여학생들이 와서 무용도 가르쳐 주고, 피아노도 쳐 주고, 작곡
도 해 주어서, 또 다른 신선함이 있었다. 흰색 도랑을 구하기 위해 선배님을 따라 동양
방송 운현궁 스튜디오에 갔었는데, 분장실에 있던 탤런트들이 대학생이라서 좋겠다고 관
심을 주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명예보다는 젊음이 훨씬 좋다는 뜻이리라 생각된다.

여름과 겨울 방학 때는 연극 연습 전에 캠핑을 갔었는데, 집이 부산에 있어서 고등학


교 친구들이랑 따로 캠핑을 간다고, 연극반 모임에는 참석을 못하였다.
1학기에 예과 체육 대회를 한다고 야구를 연습했고, 1주일간 성남 군사학교에 갖다오자
마자 중간고사를 보았고, 아마 중간고사 이후에 연극 워크샵을 했던 것 같은데, 공부는
언제 했을까? TV 연속극을 보면, 의사가 환자 보는 장면은 별로 없고, 연애만 하는 것
으로 나오는데, 매일 하는 공부는 아마 기억에 추억으로 남지는 않나 보다. 선배님들이
예과 때 놀아야지, 본과 가면 놀지 못한다고 하였고, 본과 때 놀아야지 인턴 가면 놀지
못한다고 하였고, 인턴 때 놀아야지 레지던트 가면 놀지 못한다고 하였고, 군대에서 놀
아야지 취직하면 놀지 못한다고 하였고, 취직했을 때 놀아야지 개업하면 놀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때 연극반을 하면서 좋은 추억과 좋은 친구가 생겼다.

210
1978년 ~ 1985년

1979년 가톨릭 의대, 경운동

[26회] '끝없는 아리아' - E. St. V. 밀레이 작 , 김병욱 연출, 1979년 봄

1979년 3월 17일, 신입생 환영 봄 공연으로 밀레이 작 ‘끝없는 아리아’를 무대에 올렸


다. 김병욱 연출이었고, 채진호, 이희옥, 정순희, 유남진, 최봉춘 등이 출연하였다.

신입생으로 예과에서 김은성, 김기수, 손주영이 들어왔고, 간호학과에서 백성숙, 임경


인, 이정미, 심계영, 최노아, 이유배, 황신자, 임연미, 송나옥, 정은희, 정춘화, 나경, 이현
숙, 이현림이 들어왔다.

워크샵을 준비했는데, 여학생이 많아서 예과 2학년 남학생도 일부 cast로 참여하였는


데, 대학가에서 민주화 운동이 있어서, 집회는 신고를 해야 했었고, 결국 워크샵 공연 허
가가 나지 않아서, 공연을 포기하였다. 그 당시에 연습했던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
야지...”라는 대사만 생각난다.

가을대공연 학생 최초 연출
[27회] '30일간의 야유회' - 이근삼 작, 최창순 연출, 1979년 가을

1979년 9월 13, 14, 15일 가을 정기 공연이 4회에 걸쳐 경운동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


근삼 작품으로 김병욱 연극부장 기획, 최창순 연출, 김영훈 무대감독 이었다.

CAST로는 ‘죄인 100번’에 박영학, ‘죄인 99번’에 심성보, ‘죄인 5번’에 김기수, ‘죄인 33번’
에 이종승, ‘죄인 18번(1)’에 유경애, ‘죄인 18번(2)’에 임경인, ‘죄인 20번’에 안인호, ‘소장’에
유남진, ‘안종팔’에 최봉춘, ‘고 여사’에 백성숙, ‘신신옥’에 허관순, ‘오 박사’에 이호선, ‘김화
자(1)’에 심계영, ‘김화자(2)’에 이정미, ‘이운수’에 김용범이 출연했다.

STAFF로는 장치 및 소도구에 채진호, 최노아, 이유배, 조명에 김형국, 신경철, 김은성, 효과


에 김미옥, 황신자, 임연미, 손주영, 분장에 이희옥, 임승임, 송나옥, 정은희, 의상에 신미옥, 정
순희, 정춘화, 나경, program에 허영, 이현숙, 진행에 유경수, 신상현, 변상태, 황혜연이 참여했다.

211
예과 2학년 2학기에는 해부학 시간에 시체 해부를 하는데, 연극 연습을 위해 강당에 내
려 왔다가, 지하 식당에서 라면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평생 먹었던 라면 중에서 제일
맛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수업 시간도 빼 먹고 대리 출석을 하였던 기억이 나고, 김광옥
(여, 천호동에 김광옥 이비인후과) 친구의 노트 복사로 독학을 했던 기억도 난다. 2009년
에 졸업 25주년으로 동해안으로 놀러 갔는데, 김광옥 친구를 모셔가기 위해 관광버스를
잠실로 경유하게 할 정도로, 노트 복사지는 우리 반의 중요한 TEXT 역할을 했다.

경운동 학교 앞에는 ‘구름재’ 라는 다방이 있었는데, 백성숙 등이 DJ를 보았다. 구름재


옆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200원에 사 먹고, 구름재에서 커피를 100원에 사 마시며 팝송을
들으며 낭만을 느꼈다. 당시에는 등록금이 삼십만 원, 하숙비가 삼만 원 정도였다. 바로
옆에 실험 극장이 있었는데, 가끔 술집에서 강태기, 김영철, 송승환 등의 배우도 볼 수
있었는데도, 왜 그 당시에 연극을 보러 가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그 옆에는 운현궁이 있
었는데, 지금 쌍문동으로 이사를 간 덕성여대가 있어서, 가끔 잔디밭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학교 옆에는 오비 베어스 생맥주 집이 처음 생겨서, 시체 해부 실습 후 다음날 퀴즈 시
험에도 불구하고, 모두 생맥주를 마셨다. 오나시스 막걸리에서 오비 베어스 생맥주로
넘어 가는 시기로, 연극 연습이 끝나면 생맥주로 목을 축였었다.

연극 공연과 메딕스 공연 후 가을 축제 마지막인 쌍쌍 파티를 테니스 코트에서 했었


는데, 맥주 대리점에서 맥주를 사 와서 팔고, 남는 것은 연극반이 다 마셨던 기억이 난
다. 장기 자랑을 경운동 대강당에서 했었는데, 조명을 잡았던 기억도 있고, 연극 공연 때
디머가 없어서 프라스틱 드럼통에 소금물을 넣고 고무장갑 낀 손으로 구리판 두 개를
넣었다 뺐다 했던 기억도 있다. 조명을 사러 권영택 선배님을 따라 을지로에 갔던 추억
도 남아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로 대학가의 민주화 운동은 더 뜨거워졌지만,
12월 12일 전두환의 쿠테타로, 학년말 고사를 보는 중간에 휴교가 되어 겨울 방학으로 넘
어갔다.

212
1978년 ~ 1985년

삼십일간의 야유회

경운동 시절 가톨릭
대학 의학부와 현재
의 모습

213
경운동의 연극반...

유경애 (간·25회)

뒤 돌아보면 저의 신입생 시절은 질풍노도였던 것 같습니다.


넓은 캠퍼스를 꿈꾼 대학시절에 대한 일종의 반란이었다고나 할까요?

이런 저런 써클을 기웃거리다, 진정 저를 품어주시는 많은 선배님들이 계신 연극반에


끈끈하게 몸담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골목에서 남자 아이들과 말까기, 구슬치기, 다방구를 하며 노느라 해 지


는 줄 몰랐고, 교회에서도 중고등부 때에는 남자 친구들과 더 잘 어울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여자들한테 왕따였으나 심한 내공으로 견뎌왔던 거 같아요.
이런 왈가닥 기질과, 이에 부응하는 넘치는 에너지를 다 품어주고 사랑해 주신 곳이 바
로 연극반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면 이런 성격을 지배하려는 내 이성(?)이 또한 강하여 항상, 여기까지만...이라


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내 행동거지는 어느 선에서 늘 브레이크가 걸렸었습니다.
학창시절에 더욱 더 열심히 연극반 활동을 못했던 이유이자 변명입니다.
좀 심오했나요?

학창시절 연극반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오나시스...이 술집에 대한 에피소드는 모든


연극부원들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근데 맨날 술값은 누가 냈어요?)

강촌의 엠티... 밤하늘의 무수한별을 바라보며 은근 짝사랑하던 선배와 별을 세던(?) 일...


“에그머니나!” 라는 나의 첫 워크샾 공연 대사...
“폐하! 혼자 계시는군요” 외에는 별 대사 없었던 만리장성의 클레오파트라 역...
그리고, 너무도 댄디하시고 젠틀하신, 그 아우라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문일신 선배님...
마치 냉철하고 차가운 아그리빠를 보는듯한 섬세한 조각 미남의 포스를 가져서 늘 무
서웠던 이종건 선배님...
늘 웃음 뒤에 마귀의 날카로움을 보여 주셨던 경수 형...

214
1978년 ~ 1985년

가까울 것 같지만 늘 거리감이 있는 묘한 매력의 정태 형(선배님 이번 연습 때 그 거리


감 날려 보냈어요!)

진정으로 사랑해주고 귀여워 해주던 종숙이 언니의 그 웃음...


사실, 지금도 미안한 것은 많은 후배들을 제가 받은 사랑만큼 품어주질 못한 점입니다.
아마 지금도 그건 그렇구요.
경운동시절을 같이 보냈던 많은 선, 후배, 동기들이 눈앞을 스치네요.

무려 28여년이 흐른 지금 선, 후배들의 학창시절을 떠올리니, 모든 게 그립습니다


지금까지도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게 정말 복입니다.
가장 즐거웠던 시절을 같이 한 분들이기에 더욱 좋습니다.

나에게 연극반은, 소중함과 축복입니다.

215
1980년... 그리고 템페스트

황혜순 (간·27회)

내가 입학했던 1980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당시 연극부장이었던 이종승 선배의 채 몇 분도 되지 않는 모노드라
마에 이끌려 옆자리에 앉아있던 정태원과 함께 봄 공연 연습(‘블랙 코메디’)을 하던 강당을 찾
았던 이래로 나는 30년간 연극부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때 의예과 신입생으로는 박용한, 장미숙, 이보경이 있었고, 간호학과에서는 나를 비


롯하여 지금 종승선배의 부인인 이영애와 정태원, 그 뒤에 추가로 의예과 강재걸, 김창
재, 유순집,간호학과 이영란, 조정란 등이 들어왔지만 졸업 때까지 남은 사람은 창재와
순집이, 나, 태원, 영애 이렇게 다섯 사람 뿐 이었다.

1980년 5월17일, 최규하 과도정부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신군부세력을 규탄하는


대규모 대학 연합의 학생데모로 휴교사태를 맞는다.
암울한 시기였지만 우리는 9월 2학기가 시작되기까지 3달 반 동안 정말 잊지 못할 추억
을 갖게 된다.
집에서 심심하게 지낼 때 우리 연극부는 정기적으로 모여 이종승. 유남진 두 선배가 주
축이되어 연극이론을 공부해서 발표하곤 했다.
휴교 때라 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어 이종승, 유남진, 임경인 선배 집에서 모이고 나중에
는 지금의 대학로 근처에 있던 가톨릭학생회관을 빌려서 하기도 했다.
아마 역대 연극부 역사 중 그때만큼 연극사나 연극이론을 열심히 공부한 적은 없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학생 몇 사람만 모여도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고 허락을 받아야했는데, 매번
종승 선배가 신고하랴, 연극이론 공부해서 강의도 하랴 학생회장의 책임이 무거웠을 것
이다.

여름여행으로 심성보 선배의 집이 있던 충무(지금의 통영)로 10여 명이 넘는 인원이


여행을 갔다. 심 선배의 형님이 새로 지은 집에 묵었는데(심성보 선배의 형님네가 이사
오기도 전에 신세를 졌다는...성보 형 왈 여기서는 새로 지은 집에 신혼부부가 먼저 자고
가면 복이 든다 해서 일부러 재우기도 한다며... 우리들은 신혼부부들은 전혀 아니었으
나...) 밤에는 동동주가 한 동이, 술안주로 삶은 홍합이 큰 다라로 나왔다. 밤새 기타 치
며 노래하고, 그 여행은 남해에 있는 섬 비진도로 이어졌다.

216
1978년 ~ 1985년

12월에 올린 가을 대공연
[29회] '진짜 하운드 경위' - 톰 스토파드 작 , 정상일 연출, 1980년 겨울

이렇게 심심치 않은 방학을 보내고 9월 개학을 해서, 정성일 연출의 ‘진짜 하운드 경
위’를 연습을 시작해서 겨울인 12월 중순에야 공연을 올렸다.

휴교로 워크샆을 거치지 않은 1학년인 우리가 더구나 그 당시로서는 흔치않게(선배들


의 캐스팅 참여가 저조했었던 게 이유였던 것 같다) 영애(신디)와 내가 (드러지부인-심계
영선배와 더블캐스트) 캐스팅되었는데, 한번은 무대에서 연습하다가 웃어서 선배들에게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나 울기도 했었다.

그 때 정성일 연출님이 처음 무대에 서는 나를 위해 "드러지야, 관객들은 네가 실수하


는 것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단다."라며 실수해도 걱정하지 말라고 해주신 말인데, 그 이
후에도 가끔씩 그 말이 떠오르곤 한다. 우리 인생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런지...

그 해에는 휴교로 수업일수가 모자라 겨울 방학을 아주 늦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격동의 정점에 있었던 1980년이 저물어 가고 그 이후 뮤지컬 ‘내가 날씨에 따


라 변할 사람 같소?’ ‘시련’(등장인물도 많았고 꽤 큰 성공적인 작품이었다), ‘비더만과
방화범’을 거쳐 경운동 시절을 마감하고 반포동으로 이사를 와서 교정 이전 기념공연으
로 정종화 연출의 ‘템페스트’를 올리게 된다.

템페스트는 기념공연에 걸맞게 등장인물도 많고 스케일이 아주 큰 공연이었다.


연출님이 걷는 동작에서는 마이클잭슨의 문 워크와 같은 마임을 연습하게 했고, 음악. 춤. 분
장 선생님(그것이 인연이 되어 최봉춘 선배와 결혼하게 됨)들을 모셔와서 노래를 작곡하고 안
무를 해서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축제분위기의 무대였다.

5-6명의 요정들이 있었는데 그때 부회장이던 정태원의 주도 하에 요정들은 따로 무용연


습을 했고 태원이는 무용 연습 중에 미끄러져 넘어져서 턱이 찢어지고 이빨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 만큼 연습이 매우 힘들었었다.
요정 의상은 살색 타이즈에 흰색 깔깔이천으로 속이 훤히 비치는 의상을 만들어서 입혔
는데, 요정대장격인 나 ‘에어리얼’ 역의 치마는 무릎 정도까지 오는 다른 요정의 것과는
달리 무릎 위로 짧게 잘라놔서 높은 계단을 뛰어 다녀야 하는 나로서는 무척 곤혹스러
웠었다.
의상 팀에게 다른 요정들처럼 치마 길게 해서 다시 만들어 달라고 조르기도 했었다.(요
정으로서는 그때 난 심히 통통해서 보는 사람들이 좀 괴롭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뛰어다녀야하는 계단은 높이가 균일하지 않고 점층적으로 높아지게 설계되어 어려
움이 많았는데, 심지어 그중 어느 계단은 이어붙인 자리에 목재가 모자랐는지 패어있는
곳도 있었다. 연습 때마다 그 부분에 발이 걸려서, 장치담당이었던 동진이에게 부탁했
지만, 예산부족이었는지 해결하지 못한 채로 공연에 올라, 결국은 두 번째 공연에서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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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분에 ‘프로스페로’에게 자유를 얻어 계단에서 뛰어내려와 가는 장면에서 발이
그 틈새에 빠져 넘어질 뻔 휘청하였다. 그때 나도 모르게 멈칫 정신이 나간채로 잠시 서
있었는데, 나중에 연출님은 오히려 그 장면이 에어리얼이 자유를 얻고 기쁘게 내려오다
‘프로스페로’에게 여운을 두는 것 같아 좋다며, 마지막 공연 때는 잠시 멈춰서 포즈를
두고 가라 해서 그렇게 했던 에피소드도 있다.

캐스트들은 무대에서 드러나지만, 무대 뒤에서 드러나지 않게 써포트해주는 스탭들


의 힘이 없었다면 - 김홍진, 김형국 선배, 황동진, 그 외 연극무대에 바쳐진 수많은 소
도구, 분장, 조명, 의상, 효과 팀 등의 선후배 연극부원들의 땀과 노력이 없었다면, 50
년을 이어온 우리의 역사도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 동문들이 지난 연극부의 역사를 써주셔서 읽고 있는데, 모두들 그 당시엔 힘들었


지만 지금에 와선 소중한 추억이 되는 작은 조각들이 모여, 모든 공연 써클들이 공연을
중단하는 이 어려운 상황에서 오직 우리 연극부 만이 남아 50주년의 역사를 쓰기위해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리고 같은 연극부 동기이자 오랜 세월 친구로 남아준 창재, 태원, 영애에게 감사한다.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정종화 연출님이 가사를 쓰시고 그때 음악 담당 선생님


(연세대 대학원생이셨던 것으로 기억되는데...좋으신 분이어서 인기가 많았는데 지금은
무엇을 하시는지 모르겠다)이 작곡했던 오프닝이자 클로징송이었던 노래로 이 글을 마
칠까한다.

아름다운 작은새여
새장에서 나~~와,
님 만나러 날~아가라 날아~ 가거라.
끝~날거야 곧 끝~나 아마 곧 끝날거야
끝이나면 나는 갈래~~ 자러갈래 대낮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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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 1985년

50년사 끼워넣기 1981년

이천희 (의·28회)

우리의 동기들은 1981년 입학하였고 졸업정원제 1기생들이다.

경쟁률이 높으리라 예상했지만 모두 하향 지원하는 바람에 미달인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중에 경운동 강당에서 신입생을 모집하기 위하여 각 서클의 소


개가 있었다. 각각 독특한 방법으로 소개가 계속되다가 갑자기 조명이 어두워 졌다. 서
서히 어둠을 헤치고 나타난 사람이 바로 연극부 부장인 심성보 선배였다. 무슨 말을 하
였는지는 지금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연극이란 무엇이고 연극부의 매력에 대
해서 심성보 선배님이 특유의 강렬한 목소리로 토로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잠시 후 갑
자기 내 옆에 그 심성보 선배가 나타났다. 몇 마디 달콤한 말로 나를 추켜세우더니 다짜
고짜로 오후에 강당에서 연극연습이 있으니 와보란다. 아마 안 오면 어떻게 된다는 협박
비슷한 것도 했던 것 같다. 오후에 별 생각 없이 구경이나 가보자고 강당에 들어선 순간
나의 대학 생활의 방향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해졌다. 강당에 들어선 순간 예쁜
누나들의 환대에 정신을 잃고 있다가 흐늘흐늘 지하식당에까지 따라가서 밥을 얻어먹고
나니,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방과 후에 연극연습을 하기 전에 힘을 축
적하기 위하여 학교 지하 식당에서 밥을 하고 연극부원 여럿이 돌아가며 반찬을 가지고
와서 저녁 끼니를 때웠다. 이러한 전통은 경운동에서 강남시대까지 이어졌다.

그때의 봄 공연이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것 같소’였다 김창재 선배가 주연이었고 김


용범 선배님이 연출이었다는 기억이 난다. 주인공은 순수함으로 똘똘 뭉친 경험이 조금
모자란 청년 역이었고 연출 김용범 선배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위엄과 근접할 수
없는 엄숙함과 진지함으로 연극부에서 최고로 높은 선배인줄 알았다.

219
세 번째 뮤지컬
[30회]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 이강백 작 , 김용범 연출, 1981년 봄

나의 뒤를 이어 연극반에 들어온 동기가 최황과 황동진이다. 이 두 사람은 아마도 자


발적으로 연극부를 방문했던 것 같다. 간호학과 동기들로는 문향이, 최현주, 이현림, 강
현미 등이 있고 지금 연극부 동문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이헌상은 워크샵
공연이 끝나고 연극부에 들어 왔다. 뒤늦게 간호학과의 김영희는 연극부에 들어오는 소
감을 ‘자신의 내성적인 성격을 좀 고쳐보겠다’고 밝히면서 들어 왔다.

봄 공연이 끝나고 워크샵 공연으로 첫무대에 섰다. 우리 팀을 담당한 연출이 손주영 선


배님이신데 그 당시 워크샵은 연극의 저변 확대와 연극부원의 확보라는 목적으로 모든 신
입생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우리 팀은 ‘환타스틱스’라는 작품을 가지고 작업을 하였다.
내가 맡은 역은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주인공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나레이터역을 지금
은 연극부가 아닌 내 동기가 맡았었는데, 손주영 선배가 서로 바꾸어서 나에게 연극적으
로 더 중요한 나레이터 역을 맡겼다. 신입생 중에 최초로 연극부에 들어온 나를 예쁘게
보아주셔서 그랬나보다. 아무것도 모르고 하라는 대로 말하고 움직이면서 공연을 끝낸다.
대개 워크샵 공연이 끝나면 그날 저녁으로 짐을 싸들고 강촌 유원지로 쫑파티를 하러 떠난
다. 밤은 이미 깊어 강촌역에 도착하고 이곳에서부터 약 1시간을 걸어가야만 매년 묵는 숙
소에 도착한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숙소로 향하는 길가의 어둠속으로부터 내내 웃고 떠
드는 우리들의 코 속으로 아카시아 향기가 들락거린다. 말하는 것이 지칠 무렵 숙소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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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 1985년

하게 된다. 여기서 기다리는 것은 휴식이 아니다. 저녁이라기보다는 야식 준비와 파티이다. 이


곳에서 연극부의 참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동반해 주신 최고 선배님의 영도 아래 연극부
특유의 주도를 배우기 시작한다. 연극 공연을 마치고 난 뒤의 소감을 한마디씩 하고 술자리에
서 끝까지 정신을 차려 버티기를 배우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버티다가 못 견디어 숙소에 몰래
숨어 들어가 잠을 청하다가 들켜서 다시 불려 나와서 술을 먹게 되는 혹독한 연극부 주도를
배우게 된다. 서서히 동녘하늘이 밝아져 어둠이 가실 때가 되면 강가에 내려가서 모래사장에
장작을 쌓아놓고 모닥불을 피워놓는다. 모닥불이 꺼질 때까지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운다.
아침을 지어 먹고는 한 잠도 못 잤지만 그야말로 악과 깡으로 (공수 부대 장교인 변상태 선배
님의 등산구호;악이다! - 깡이다!) 삼악산 등산을 마치면 워크샵 쫑파티가 끝이 난다.

우리가 입학할 당시에 우리 바로 위의 선배님들은 김창재, 강재걸, 박용한 선배님이 계셨


고 유순집 선배님은 후배인 나보다 늦게 연극부에 합류하셨다. 그중 끝까지 남아서 활동을
하셨던 분은 김창재와 유순집 선배님이셨다. 그 당시 연극부의 학년별로 인원 구성을 보면
본과 2학년과 간호학과 4학년 선배의 수가 많아 모든 행사에 주도권을 가지고 왕성하게 활
동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점차 쇠락해지는 듯하였다. 그런 와중에 신입생 8명(의학과 4명,
간호학과 4명)이 들어오니 연극부에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기를 모두가 기대하였다. 김창재
선배님은 이러한 사정을 간파하고 후배들을 격려하였다. 우리 동기 들은 워크샵이 끝난 후
에 이왕 연극부에 들어 왔으니 연극에 대한 공부를 해보자고 서로 의기투합하였다. 방과
후에 또는 수업을 빼먹고 연극이론과 희곡이론 연출론 등을 가지고 근처 다방이나 레스터
랑에서 자주 모여 토론하였다. 이에 김창채 선배님께서는 밥도 사주고 커피도 사주면서 후
배들의 뜻을 북돋아 주었다.

20주년 기념공연
[31회] '시련' - 아서 밀러 작, 조일도 연출, 1981년 가을

1981년 가을 아서 밀러의 ‘시련’ 을 가지고 조일도 연출 선생님을 모시고 더운 여름


방학 동안 연극부 20주년 기념공연을 준비한다. 이때의 상황은 그때의 본과 선배님들이
더욱 상세히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강력한 맨파워를 가진 본과 2학년 선배님 그리고 간
호학과 3학년 선배님들의 주도와 후배들의 열성으로 준비하고 다듬은 결과 매 공연 경
운동 학교 건물 밖의 인도에까지 장사진을 이루는 성공적인 공연이 되었다.

문화단신
◇가톨릭의대 연극 ‘시련’ 공연 = 가톨릭의
대 연극부는 20회 정기공연으로 ‘아더 밀러’
원작의 ‘시련’을 17일부터 19일까지 가톨릭
의대 강당에서 공연한다. 최봉춘 기획 조일
도 연출
(동아일보 1981년 9월 14일)

221
마녀사냥을 주제로 한 이 극에서 나는 ‘자일즈 코리’라는 할아버지 역을 맡아서 열심히
참여하였다. 하지만 처음이어서 그런지 잘 소화해 내지 못하고 그저 열심히만 하였나 보
다. 타 대학 연극부에서 공연을 관람하고 난 뒤에 나의 역에 대해서 ‘자일즈 코리가 목소
리만 크고 성격이 잘 표현 되지 않은 것 같다’ 라는 평가가 들렸으니 말이다. 연극이 끝
나면 당연히 하게 되는 쫑파티! 공연 준비에 온힘을 다 바쳤던 것과 같이 쫑파티에 도
온 정열을 다 바치고 나서 생을 마감하려는 듯이 미친 듯이 날 뛰었다. 어디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식사와 한 잔술을 걸치고 남은 사람은 집에 못가고 강당에 모였다.
그때에는 통금이 있어 늦으면 어딘가에 숨어 들어가서 다음날 아침 통금해제 시까지 기
다려야 만 했다. 중대한 전투를 승리로 마치고 귀환하는 용사들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수
위아저씨에게 거수경례를 하였다. 수위 오씨 아저씨는 그런 우리를 이해한다는 듯이 미
소로써 우리들을 통과 시켜주었다. 그 당시 연극부의 위상은 교내 서클 중에 최고였다.
오씨 아저씨는 강당과 식당, 그리고 강의실 옥상 등을 휘졌고 다니며 약간의 기물 파손
과 비어 있는 매점 무단침입까지 하는 우리만의 행사를 눈감아 주셨다. 강당에 들어가서
구석구석 자리를 잡아 쉬려고 하는데 갑자기 선배님의 고함 소리가 들리더니 ‘내림 빠
따’가 합법적으로 시작되었다. (김홍진 선배님이 시작하신 걸로 기억된다) 왜 시작 되었
는지는 그 당시에도 몰랐고 지금도 잘 모르겠다. 신입생인 우리(아마 나와 헌상이로 기
억된다)는 우리 차례가 되면 어쩌지 하고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난장판이 되었
다. 아마도 누군가(유순집 선배님으로 기억된다) 항명하며 빠따를 거부하면서 규칙이 사
라진 폭력이 난무하기 시작하였다. 잡으려고 뛰어다니고 잡히면 사망이라는 긴박감에 객
석의자와 탁자를 뛰어넘어 도망다니고 또 이를 쫒아다니며 탁자위에서 구둣발을 휘두르다
가 넘어지기도 하고(신경철 선배님으로 기억된다) 지하식당에까지 도망다니다가 그 옆의
매점의 창문을 억지로 열고 과자 몇 가지를 집어오기도 하고(이헌상으로 기억된다.) 강
의실로 도망가다가 길이 막혀 옥상으로 도망하고(유순집 선배님으로 기억된다) 지칠 때
까지 쫒고 쫒기다가 각자 무대의상을 찾아내 덮거나 강당 창문의 커튼을 뜯어내어 덮고
구석구석에서 잠이 들었다.

부스스 잠에서 깨어난 아침, 찾아온 여자 연극부원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고 경


악을 한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충 정리를 하고 가차를 타고 야외로 나간
다. 아무 계획 없이 떠난 여행인지라(이종승 선배님의 제안이라고 기억된다) 다시 한번
어이없는 사태를 맞는다. 어느 기차역에서(교외선 기차역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내려 기
찻길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손을 잡고 당기고 밀며 걷기도 하
고 기찻길을 따라 달리기도 하면서 뒤에서 기차가 오나 안오나 조심하면서 한참을 걸었
다. 목도 마르고 햇빛도 따가웠지만 선배님들을 따라서 즐겁게 걸었다. 한참을 가도 끝
이 보이지 않다가 결국에는 다음 역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 역에서 음료수를 조금씩 나
누어 먹으면서 목을 축였다. 그리고 차표를 사가지고 다시 돌아 왔다. 이로서 20주년 기념
공연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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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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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동 시대의 마지막 공연
[32회] '비더만과 방화범' - 막스 프리쉬 작, 박영학 연출, 1982년 봄

1982년 봄에 ‘비더만과 방화범들’을 가지고 박영학 선배님의 연출 아래 신입생환영 봄


공연을 준비한다. 연극부는 이때부터 인력 부족으로 인한 애로사항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
한다. 본과 2학년 4명(박영학, 손주영, 김기수, 김은성), 간과 3학년 3명(이영애, 정태원, 황
혜순), 본과 1학년 2명(김창재, 유순집), 간과 2학년(문향이, 강현미. 최현주, 이현림, 김영
희), 예과 2학년(이천희, 최황, 황동진, 이헌상)의 인원으로 강력한 맨파워를 자랑했던 본과
3학년 7명(심성보, 최봉춘, 김용범, 채진호, 신경철, 김영훈, 김형국), 간과 4학년 5명(송나옥,
이유배, 정춘화, 최노아) 선배님들의 빈자리를 채워야만 했다. 한사람이라도 역할을 게을리
하면 안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모두 배우로서 또는 조명, 음향, 장치, 의상, 소품, 분장
등의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되었다. 연극부에 들어온 지 1년 뿐이 안 된 우리 동
기들도 모두 각 분야에 흩어져서 선배님에게 배우면서 역할을 다했다. 조명과 음향에 이헌
상, 장치에 황동진, 배우에 최황과 나(당시 방화범의 조수 역할을 하기로 했던 김기수 선배
님이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포기하는 바람에 운 좋게 내가 그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의상에 문향이, 김영희, 분장에 강현미, 이현림, 소품에 최현주 등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될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 당시 이헌상의 말을 빌면 조명실에서 음향을 동시에 담당하기에
인간의 몸에 달린 손이 두 개 뿐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란다. 그뿐만이 아니라 디머
가 없어서 소금물에 쇠막대기를 담궈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면서 불 밝기를 조
정하였다니 미쳐 버릴 지경이었단다. 장치를 맡은 황동진은 톱과 망치를 들고 밤이면 밤마
다 뚝딱거리느라고 낮에는 졸림에서 거의 벗어나지를 못했다. 의상, 소품 등도 예산이 모자
라 시장바닥을 뒤지기도 하고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발가락이 터지도록 돌아
다녔다. 분장 화장품을 아끼느라고 자주는 못해보았지만 분장연습시간은 힘든 와중에도 즐
거웠다. 서로 얼굴을 만져주면서 부원끼리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연출을 맡은 박영학
선배님의 학구적인 열정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연습을 이끌어서 성공리에 공연을 마치었다.
이후 신입생을 상대로 한 워크샵 공연을 하고 경운동시대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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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 1985년

이 해에 연극부에 예과에서 김용욱, 박수근 후배, 간호학과에서 윤경애, 이경민(큰 경


민), 이경민(작은 경민), 신권화 후배 등 7명이 들어 왔다. 이 중 박수근 후배는 얼마 안
있다가 사라지고 남자 후배가 김용욱 후배만 남게 되었다. 이마저도 잃게 되면 연극부의
앞날이 더욱 깜깜 하겠기에 선배들이 합심하여 김용욱 후배를 챙겨 주었다. 선배들의 배
려(?)덕분인지 김용욱 후배는 끝까지 연극부를 지켜주었다. 그의 별명도 만들어 주었다.
‘시코락스’라고.(이 별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헌상이 잘 알고 있다.)
1982년 후반은 경운동시대에서 강남 시대로 옳겨지며 많은 변화를 맞이한다. 공연 공간이
경운동의 구식 강당에서 ‘마리아홀’이라는 최신식 강당으로 바뀐다. 그리고 강당의 연극부
소유권(?)이 약해지기 시작한다. 서클룸이 생겨 평소에도 부원들의 얼굴을 마주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이는 강당에 대한 소유권이 약해진 것과도 연관이 있다. 경운동시절에는 강
당이 연극부 서클룸으로서 역할을 하여 아무 때나 강당에 들어가서 작업을 할 수 있고 타
공연 서클이 연극부의 도움 없이는 강당을 사용하지 못했었다. 특히 조명에 대한 배타적권
리가 연극부에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어 새로 생기는 서클도 있었고 공평하게 서클룸
을 가졌기고 마리아홀의 시설에 연극부의 소유가 하나도 없어 모든 공연 서클이 동등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무조건 무시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기
득권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최대한 버티어나갔다. 경운동 강당과 마찬가지로 조
명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연극부에만 있다는 빌미로 최대한 오랬동안 지켰으나 타 서클에
서도 조명을 배우겠다고 나서면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리아홀은 공연 목적으로 설계되지 않았기에 무대가 깊이가 너무 없고 조명시설


또한 겉보기에는 그럴싸하나 천장에만 몇 렬로 배치된 조명등으로는 연극적인 효과를
내기에 어렵게 되어 있다. 양측의 객석에서는 무대가 보이지 않아 관객을 앉힐 수 없었
다. 무대 바닥도 그 당시에 최고 품질의 목재로 마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대장치를 만
들면서 손상시킬까 보아 부담스러웠다. 이곳에 옮겨서 처음 막을 올린 작품이 세익스피
어의 ‘템페스트’이다.

강남 교사 신축 기념 공연
[33회] ‘템페스트’ -셰익스피어 작, 정종화 연출, 1982년 가을

우리 연극부와 인연이 있었던 정종화 연출님을 모시고 연습을 시작하였다. 그 어느 때 보


다 험난한 길에 들어선 것이다. 경운동에서 무대의 장치로 썼던 자재를 가지고 와서 객석쪽으
로 단을 만들어 무대를 깊게 하고 경운동에서 떼어온 조명등도 몇 개 추가로 달기 위하여
그 높은 천장을 생명의 위험을 느끼면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사각지대인 양측의 객석은 폐
쇄하는 등 공연에 맞추어 무대를 꾸미는 일이 결코 쉽지가 않았다. 조명을 담당한 김창재
선배님은 천장에 올라가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면서 후배 이헌상을 떼밀어 올라가게 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경운동과는 다른 환경에서 새롭게 해야 되는 일도 있고 기존에 해왔던 일
도 겹치면서 일은 많고 인원은 적으니 모두가 힘에 겨워서 짜증을 내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여자연극부원들은 눈물을 흘리는 일도 잦았다. 이런 와중에 대사도 많고 극 중 비중이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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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사 역의 박영학 선배님과 요정 역을 맡은 황혜순 선배님의 열정은 타의 모범이 되었다.
강의 도중에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등 틈만 나면 마리아홀에 와서 배역 연습을 하였다.
황혜순 선배님은 자기 키보다 높게 쌓아 올린 무대에 올라가 연습을 하는데 발레와 같은
몸동작을 만들어 내느라고 높은데서 점프를 하면서 반복해서 대사를 내뱉는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 연출님의 지도아래 연극부원 하나하나의 열정과 노력을 바탕으로 마리아
홀에서의 첫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

경운동시대와 달라진 것이 또 하나 있다. 이곳에는 술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고 힘겨


워하는 후배들을 위로해 줄만한 장소가 여의치 않았다. 경운동에서는 당시 유행하기 시
작하던 서서 술 마시는 생맥주집 오비베어가 있어 연습 끝나고 시원하게 한잔씩 하고
귀가 하든지 아니면 덕성여대 옆 골목 깊숙이 있는 선술집 같은 ‘오나시스’에 들려서
소주를 한잔 씩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남에는 아직 상권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인지라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마리아홀 로비에서 술을 사다가 마시든지 아니
면 처음 가져본 잔디운동장 한복판에서 모기에 뜯기면서 마시든지 때때로 옛 추억이 생
각나면 경운동으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이사온 지 1년 쯤되니 터미널 지하상가에 생맥
주 집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경운동 시절의 ** 집에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소박한 추억이 있다. 그 ** 주인 아


주머니는 가톨릭의대생들에게 유난히 살갑게 대해주고 안주도 잘해주고 외상도 잘해주
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아주머니에게는 의과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우
리들을 보면 아들 생각이 나서 잘 대해 준다는 소문이 있었다. 연습을 마치고 저녁에
선배님들이 후배들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세 테이블에 나누어서 학년 순서대로 앉
았다. 모든 테이블에 소주 1병씩 과 김치깍두기 한 종지씩 놓여졌다. 모두 구호를 외치
며 호기 있게 한잔 씩 하였다. 선배님들이 한참동안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후배들은 그냥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소주 몇 순배가 돌고 안주
를 시키는 듯했다. 파전이 한 접시가 나와서 선배님들의 테이블에 놓였다. 아무리 기다
려도 더 이상의 파전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 제일 윗 선배님(이종승 선배님
으로 기억된다)의 젓가락만 바라보며 자기의 순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 젓가락이라
도 뜯어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다시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고 기다리다 지쳐서 다시

226
1978년 ~ 1985년

김치깍두기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김치깍두기 안주로 마신 소주로 상당히 취했다.


모임이 끝났는데도 한 몸에 시선을 받았던 파전은 온전하게 접시 위에서 보존되어 식은
채로 떠나는 우리를 배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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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신축교사

손주영 (의·26회)

1982년 마리아 홀 축성기념 학교이전 기념공연 -템페스트-

1982년도, 학교가 경운동에서 반포동 현재 위치로 이전 되었다. 마리아 홀에서 처음


공연이 셰익스피어 원작 정종화 연출의 ‘템페스트’였다. 새로 배정 받은 지하의 연극반
서클룸을 가끔은 숙소처럼 이용하기도 하고, 술집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소아
과를 개원 하시던 김정규 선배님께 대본을 갖다 드리고 보조금을 받아 연극 기획비로
쓰기도 하였다. 후배들이 찾아갈 때 마다 다정하게 맞이하여 주셨던 선배님이 고마웠다.

한번은 마리아홀 천장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면서 조명 작업을 하던 이헌상 후배(예2)


가 떨어질 뻔해서 놀랐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다행 이었다. 어느 날 아
주 늘씬하고 세련된 매너를 가진 멋쟁이 분장사님이 방송국에서 오셨는데 연극이 인연
이 되어 현재 최봉춘 회장님(당시 본3)의 사모님이 되셨다. 연극반 부반장이었던 정태원
(간3)은 요정들 춤 연습을 하다가 넘어져 예쁜 얼굴에 상처가 날 지경이었다. 후배 요정
들을 격려 하며 무대가 땀방울로 얼룩지도록 열심히 뛰어다녔는데 지금도 역시 서울성
모에서 날아다닐 정도로 날씬한 모습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 당시 군계일학의 연기력으
로 춤 노래 미모의 삼박자가 어울려야 캐스팅될 수 있는 대장요정에는 황혜순(간3) 후배
가 캐스팅 되었다. 십대일의 치열한 경쟁을 치르며 당첨 되었다. 쇠밧줄을 타고 흰 무용
복을 입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약간 섹시한 모습이었는데 공연이 끝난 후 팬클럽이 생길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또 한편 무감을 맡은 김은성 동기(본2)는 행여 우리의 몸짱 얼짱
무용선생님(이대무용4)이 무료 무용지도에서 달아날까봐 열심히 출퇴근을 같이 해 주었
다. 그때 은제비란 별명을 얻게 되었고 지금은 제비의 추억을 되새기며 서울성모병원 수
술실장으로서 차기 마취과 주임교수를 기다리며 열심히 심장마취를 하고 있다. 특히 김
기수 동기(본2)는 소싯적 태권도를 하여서 몸이 유연하고 점프력이 좋아 남자 무용수로
도 손색이 없겠다고 무용선생님께서 입이 닳도록 칭찬하면서 조교로서 무용시범을 보이
게 하였었다. 주인공인 ‘프로스페로’는 목소리 큰 박영학 선배(본2)가 맡았는데 약간의
사투리가 섞인 우렁찬 목소리가 착한 도사 역할에 잘 어울렸었다. 영학이 형은 현재도
목소리로 먹고 사는지 ‘세계 소리학회’ 회장님이 되셨다.

228
1978년 ~ 1985년

지금과 마찬가지로 연극반의 재미는 역시 여름 겨울 여행이었는데 그 당시 여행의 기


회가 흔하지 않아서 연극반여행은 더욱 재미있었고 추억에 많이 남아있다. 여행 중에는
언제나 자잘한 사건 등이 생겼고 그 예기를 오래 오래 술안주 삼아 되새기곤 했다. 그러
면 여행에 참여 하지 못 한 후배들이 못간 것을 더욱 아쉬워하곤 했다. 특히 겨울 치악
산 여행은 많은 얘깃거리를 만들었고 그이야기가 눈 덩어리 부풀듯이 불어나 우리들의
연극반 생활에 아기자기 활력을 넣어 주었다.
“형~ 나도 살고 싶어요!”
“에잇! 난 바위가 좋아!”
진료실에 앉아 그시절을 생각하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지며 우리들의 연극반 시절
이 그리워진다.

(당시 본2 연극부장 손주영)

229
나와 연극반

정태원 (간·27회)

대학교 1학년 입학식 날, 우연히 혜순이 옆에 앉으면서 나의 연극반 생활은 시작되었


다. 지금도 그렇지만(?) 1학년 당시의 나와 연극반은 너무도 안 어울리지 않았나 싶다.
혜순이가 연극반 신입생 환영회 하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그냥 한번 구경한다는 생각으
로 쫓아갔었는데...그렇게 해서 생각지도 않던 연극반 생활이 엮이게 되었다. 이왕 시작
했으니깐 열심히 선배들을 쫓아 다녔었고... 5월에 휴교령이 내리면서 우리 학년은 work
shop도 제대로 못했었던 유일한 학년이 되었다.(맞나?)

얘기하면서 수줍어하고 꼬면서 얘기한다고 상태 형이 ‘미쓰 꽈’라고 별명을 불러주셨


고... 창순이 형과는 집이 같은 동네라서 집에도 같이 많이 가고... 많은 선배님들이 연극
반에 어울리지 않는 후배에게 참 잘해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씩씩하게 연극반 생활을
할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연극연습하다 늦게 끝나서 집에 혼자 가는 길에 요즘 애들 말로‘삥’도 뜯기고... (그


당시 돈도 없었는데... 그 다음부터 나는 중고등학교 남자애들이 있으면 빙 돌아가서 가
는 버릇도 생겼다) 그 당시에는 엄청 무서웠었다.
선후배들과 같이 연습하면서 만나고 생활하면서 정도 많이 들고 하면서 학교생활이 빨
리 지나갔었고 학교 생활 중 연극반 생활이 거의 반을 차지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경운동 생활을 끝내고 지금 학교로 이사와서 한, 대망의 마리아홀 첫 공연이 "템
페스트"였다.
그 당시 난 부회장을 했었고, 주영이 형이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 공연에 에어리얼
(황혜순)을 비롯한 요정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 요정들은 나무도 되고, 또 다른 무엇도
되고... 아무튼 난 나무토막 같은 뻣뻣한 몸(지금이나 예전이나 똑같다)으로 요정 대장(잘
해서 가 아니라 학년 상 ㅎㅎ)을 맡게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공연 바로 전날 리허설
을 하면서 “꽝" 넘어졌다. 얼굴을 바닥에(정확하게 말하면 턱을) 박은 채로... 입안에 무
언가가 걸리적거렸고, 턱은 허옇게 보였었는데... 남진이 형이었던 것 같다. 나를 데리고
강남성모병원에 계셨던 성형외과 선배한테 가서 턱을 꿰매게 해주셨던 선배가... 위 어금
니 하나는 반이 나가버리고... 그리고 이빨들이 여러 개가 부서졌었다. 다음날 학교 오는
내내 입을 벌리면 턱이 아프고... 그런데도 우린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

230
1978년 ~ 1985년

그리고 또 하나 생각나는 공연이 2학년 봄 공연이었던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이다. 아마도 나한테는 평생 한번 밖에 없을 일이 있었으니깐...
내 노래 솜씨를 가지고 솔로로 노래를 한 것이다. 어찌 그런 일이! 지금 생각해보면 들
으셨던 관객들이 좀 괴롭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내게는 내 생애 유일한 경험이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연극반 생활은 혜순이 옆자리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좋은 선후배들
을 만나면서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이어질 것 같다.
50주년 기념 공연을 지켜보면서 "성의 연극회"의 발전을 기원하며~~

“선배님들, 후배님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31
나의 사랑, 나의 연극반

이영애 (간·27회)

성의연극반!!!

나의 20대 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신입생 때 고등학교 친구가 가대는 연극반이 좋다


며 내게 가입을 권유했다. 나 역시 연극부가 왠지 재미있을 거 같아 가입했다.

입학한 해인 1980년, 서울의 봄인 광주사태가 나고, 비상계엄선포로 이어지면서 학교는


휴교령이 내렸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거 자체가 힘든 시절이었지만 즐겁게 MT도 다녀
오고 (지난 야유회 때 어떤 선배 말씀... 지난날 엠티 때 술 먹은 담날, 우리가 카레 줘
서 곤욕스러웠다고-글쎄 우리 기억엔 해장국 끓여준 거 같은데 ㅋㅋ), 연극 무대도 캐스
팅으로 몇 번 서 보았다.
가장 잊혀 지지 않는 역은 아더 밀러의 ‘시련’에서 주인공 ‘존 프록터’의 아내 ‘엘리자베
스’역이었는데,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진실을 지키려는 남편과 그의 신념을 피맺힌
절규로 지켜주는 여인의 강인함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연극을 하지 않았다면 학창시절 그 신선했던 풋풋함 속에서 싱그런 향내를 맡을 수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도 내 가슴 한구석은 늘 허전함으로 메말라
있었을 거 같다.

시간이 없어 미팅이나 연애는 제대로 못해봤지만 그곳에서 지금의 반려자이면서 사랑


하는 나의 남편(24회 이종승)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약간의 외압(?)도 있었지만 남편
의 성실함과 자상함에 매료되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보면 인생의 황금기를 연극반에서 연극반 사람들과 지낸 거 같다. 연습할 때


비록 넉넉하진 않았지만, 가끔씩 밑반찬도 싸가고 연습 후 경운동 ‘오나시스’ 술집에서
막걸리, 소주와 주인아줌마께서 맛있게 부쳐주신 부추 전을 먹으며 연극과 인생을 논했
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 문일신 선배님이나 이종건 선배님은 감히 접근하기도 어렵던 대 선배님이셨다.


지금은 같이 세월을 먹는 친근한 선배님으로 느껴지니 세월이 좋은 건 지 아쉬운 건
지...

232
1978년 ~ 1985년

아름다운 50주년 기념 공연을 보며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진한


감동이 밀려오면서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몇 십 년 만에 만난 김기수 형과 진수, 상태 형, 귀여운 아이들과 제주도에서 함께 온


천희, 늘 다정한 헌상이, 연극반 꽃남 주영이 형, 늘 열심히 챙기는 혜순이와 태원이, 애
쓰는 창재, 회장 맡아 어려운 가운데도 최선을 다한 봉춘이 형, 진호 형, 안젤리나 졸리
경애언니, 유배언니, 세월이 비껴가는 문일신 선배님과 이종건 선배님, 이외에도 많은 선
배와 친구들과 후배들... 이분들과 앞으로의 세월도 함께 할 거라는 즐거운 상상은 나를
즐겁게 한다.

233
50년사 끼워넣기 1983년
이천희 (의·28회)

수천만 원짜리 무대 바닥을 훼손하고...


[34회] '토끼와 포수' - 박조열 작 , 유순집 연출, 1983년 봄

1983년 봄 유순집 선배님의 연출로 ‘토끼와 포수’를 신입생 환영 봄 공연이자 마리아홀


두 번째 공연으로 올리게 된다. 이때부터 연극부원은 체력뿐만이 아니라 다재다능하여야만
했다. 남자들은 모두 장치, 조명, 음향 등의 스탭을 하면서 공연에 꼭 필요한 인원을 제외하고
는 모두 배우가 되어야만 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분장. 의상, 소품 등의 스탭을 하면서 무
대에 서야만 했다. 인력부족으로 인한 애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명의 연극부
원이라도 빠지면 연습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해 모든 연극부원이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에
참여 해야만 하는 강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낮에는 맡은 대사 연습과 브로킹을 익히고 틈틈이
조명을 매달고 밤에는 망치와 톱을 들고 작업하다가 피곤하면 무대 위에 스치로플을 깔고 덮
고 잠깐 눈을 붙였다. 이 작품의 무대장치가 좀 거대했다. 거실 벽을 만들어 무대 뒷 배경으
로 빙 둘러 세워야 하는데 쉽지가 않았다. 황동진을 주축으로 나와 이헌상, 최황 넷이서 며칠
밤을 새면서 한 면씩 만들었다. 세면을 만들어 서로 붙여 벽을 완성했는데 바닥에 고정하여
바로 세우기가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바닥에 최소한의 못질을 하기로 했다. 바닥을 마감한
목재가 얼마나 딱딱한지 못을 박는 일도 쉽지가 않았지만 벽의 뒷면에 받침대를 만들고 그
받침대를 바닥에 못질하여 고정하였다. 학교에서 애지중지하는 바닥에 못질한 일이 알려지면
서 발칵 뒤집어 졌다. 우리들은 마리아홀의 비싼(그 당시 수 천 만원을 들여 마감했다고 들었
다) 바닥을 훼손한 죄로 교수님(학생처장님) 앞으로 불려 갔다. 교수님 앞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용서만 해달라는 심정으로 30여분을 설교를 들었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다행히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풀려났다. 공연이 끝난 뒤에 학교
당국에서 보수 공사를 하였다. 그리고 무대 앞의 단을 학교에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이후
로 바닥은 어쩔 수 없이 몰래 조금씩 훼손되어갔다.

나의 역할은 아들을 장가보내는 아버지의 역할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름이 ‘김춘추’였


다. 그당시 길게 기르고 있던 장발을 기름을 반짝반짝하게 바르고 올백으로 넘기고 꼬장
꼬장한 성격을 가진 신랑(최황)의 아버지 역을 하였다. 무대에 등장하면서 ‘김 춘 추 올시
다!’ 라고 신부 아버지(이헌상)께 내뱉으면서 신부 집에 들어오는데 객석에서 갑자기 까르
르 웃음이 터졌다. 영문을 모르는 채로 웃음이 가라앉은 후에 극을 진행하였다. 나중에 알

234
1978년 ~ 1985년

고 보니 그 당시 우리나라 최초로 골수이식을 성공시키신 혈액암의 대가이신 김춘추 교수


님의 이미지와 연극에서 김춘추의 이미지가 교차 되면서 웃음을 자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회장님(김창재)이 따뜻한 카리스마로 힘든 후배들을 이끌고, 부회장님(문향이)의 여유


있고 부드러운 사랑으로 후배들을 감싸고, 연출님의 성공적인 공연을 만들어야겠다는 강
력한 의지를 앞세워 성공리에 공연을 마쳤다.

봄 공연을 마치고 신입생을 상대로 워크샵을 끝내고 나니 신입부원이 들어 왔다. 의과


에 구태형과 장기육, 간과에서 김혜정, 김희정, 백금자, 오은숙(일명 뽀숙), 정은숙(일명
정숙) 등이다. 의과 남자 후배들이 너무 없다. 그 즈음 후배들은 진지하고 무거운 것을
피하고 재미있고 가벼운 서클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대표적인 공연 서클인 연극부와
메딕스에 들어오는 후배가 드물었다. 하지만 인원이 적다고 포기하고 좌절하지 않고 또
다시 가을 공연을 향하여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35회] '아득하면 되리라' - 오태영 작 , 기국서 연출, 1983년 가을

이해 가을 공연은 봄에 연이어서 한국희곡을 선택하여 ‘아득하면 되리라’를 올렸


다. 연출로는 그 당시 ‘관객모독’이라는 작품을 무대에 올려 유명세를 탔던 기국서 연출
님으로 이름처럼 기이한 면이 조금 있다. 내 키(160cm) 보다 작은 키에 얼굴이 자그마
하고 눈도 동그랗게 작으며 약간 가운데로 모여 있고 이마는 약간 튀어나왔으며 입술은
볼멘 듯이 항상 튀어 나와 있고 술에서 금방 깨어난 듯하거나, 아니면 잠자리에서 일어
나자마자 일터에 오신 것처럼 부스스한 모습으로 연극부 강당에 들어섰다. 지각도 자주
하시고 결석을 하시는 일도 종종 있었다. 연극을 지도 할 때는 별말을 안 하고 그저 객
석 제일 끝에 서서 무대를 바라보기만 하고 때때로 생각이 잘 안 풀리는 듯하면 빨대로
소주병를 빨아들이기도 하셨다. 무언가 가르쳐 주어야 하거나 주장을 할 때는 주먹을
쥐고 오른쪽 팔 전체로 허공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면서 말씀 하시는 데 쇳소리가 많
이 섞여서 나왔다. 어느 때는 연습을 끝내고 밤이슬을 맞으면서 운동장에 빙 둘러 앉아
서 술을 마시는 자리에 자신이 이전에 지도 하였던 숙대 연극부 여학생을 동반 한 적도
있었다. 연극부원과 자주 부딪혀서 화도 잘 내고 잘 삐지기도 하지만 무대를 꾸미는 감
각은 특출 났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구박받는 꼽추(유순집 선배님 배역)를 동네사람들이
동구 밖으로 내치는 장면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무대 주위로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아래 가운데에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꼽추의 잔뜩 웅크린 등을 흐릿하게 스폿 라이트로
강조하였다. 축대 위 군데군데에서 몇몇의 동네사람들이 어둠속에서 멸시와 비웃음을
꺼림칙한 태세와 음침한 웅성거림으로 꼽추의 등을 향해 내뱉는 장면은 인간 내면에 숨
겨져 있는 비굴한 이중성을 역설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연출님의 독특한 개성과 연극부원 모두 열정과 노력으로 공연을 마쳤으며 적은 인원


으로도 공연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235
가을 대학가에 ‘과(科) 연극’붐
2학기를 맞은 대학가의 게시판은
갖가지 행사 안내 포스터로 활기를
나타내는 가운데, 연극공연 포스터
가 특히 눈길을 끌며 가을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여름방학 동안 흘
린 땀의 결실인 이들 대학가의 연
극 공연 중 특이한 현상은 각 학과
별 공연이 부쩍 늘어났다는 점.......
가톨릭 의대에서도 ‘아득하면 되리
라’(오태영 작)를 오는 16일과 17일
공연할 예정으로 준비에 열을 올리
고 있다.
(경향신문 1983년 9월 8일)

236
1978년 ~ 1985년

50년사 끼워넣기 1984년


이천희 (의・28회)

[36회] '성자의 샘물' - 존 M. 싱그 작 , 최황 연출, 1984년 봄

1984년 봄 ‘성자의 샘물’이란 작품을 나의 동기인 최황의 연출로 무대에 올리게 된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작품이 바로 전 가을공연의 작품과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의 장님거지 부부와 ‘아득하면 되리라’의 꼽추의 이미지가 서로 겹친다. 이 공연부터
마리아 홀로 이사온 후의 연극부의 연습과정이 어느 정도 정형화되고 안정되어 가고 있
었다. 이 공연에서 나의 역할은 항상 붙어 다니는 장님부부 역할을 맡아 장님의 행동거
지를 연구하여 몸에 익히기 위하여 길거리에 장님만 보이면 면밀히 관찰 했던 기억이
난다. 매번 광대 아니면 엑스트라만 하다가 처음으로 극 중 주인공을 하여서인지 연기에
몰두한 기억 만 남아 있다.

워크샵을 마치고 후배(간과에서 한현진 오로지 한명! 만 들어왔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누군가 기억을 되살려 주었으면 고맙겠습니다)가 들어 왔다.

신체 훈련을 시작하다.
[37회] '보이체크' - G. 뷰흐너 작 , 이병훈 연출, 1984년 가을

이 해 가을에 연극부는 획기적인 변화를 겪는다. 연기훈련 과정에 힘든 과정이 추가 되었


다.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배우들의 신체 훈련이 생겨났다. ‘보이체크’라는 작품
으로 이병훈 연출님을 모시고 공연을 준비하였다. 이 연출님의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고자

237
하는 의지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고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하고 계획된 대로 진행되고 이
루어져야만 했다. 연출님이 먼저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였고 무엇이든지 적극적이고 열성
적이었다. 배우가 연기연습을 하기 전에 몸과 마음이 모두 비워져야 한다며 우리들을 달리
기로 시작하여 유격훈련 같기도 하고 요가 같기도 한 동작을 반복시켰다. 그 당시 성의 회관
지하에 있는 여유 공간에서 처음에는 웃고 장난으로 시작한 훈련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숨만 헉헉대며 입에 단내가 날 정도가 되었다. 남자 부원뿐만 아니라 여자
들도 한 명도 빠짐없이 훈련에 참여하고 모두가 잘 견디어 냈다. 연극부에서 처음으로 정신
력 훈련 과정을 도입함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끝나면 어딘가로 모두 흩어져서 땀으
로 뒤범벅이 된 몸을 시원하게 샤워로 닦아내고 나면 정말로 몸과 마음이 개운해진 상태가
된다. 대사 연습과 블로킹은 가볍다. 훈련이 호되어서 배도 자주 고파 선배님들이 사다주는
빵과 우유 등의 간식은 불티나게 팔렸다. 연출님이 강력한 추천으로 ‘보이체크’를 선정하였
다. 이 작품은 영화와 같이 수십 개의 장면의 나열에 의하여 전개되는 작품으로 연출은 이
작품을 통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연극적인 새로운 시도를 기성극단이 아닌 아마추어 극
단에서 실험해보고자 했던 의도가 깔려있었다. 그리고 연출님도, 그리고 우리 연극반도 성
공하였다. 회를 거듭할수록 관객이 늘어 통로에 앉아서 보기까지 하였다. 대부분이 군인역
할을 해야 되기에 공연직전에 우리 동기들은 모두 머리를 박박으로 밀었다. 따라서 후배들
도 머리를 밀었다. 이를 본 교내 다른 서클의 반응은 ‘역시 연극부는 뭐가 달라도 달라!’ 였
다. 머리카락이 자라는 동안 내내 연극부원들은 교내에서 주목을 받았다.

삶의 무게를 힘겨워하며 사는 쫄병 보이체크(최황 배역)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동


료들 또는 상관들에 의하여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사회적인 계급과 제도에 억눌려서 목적
도 갖지 못하고 가난에 찌들어 사는 보이체크를 견디지 못하는 아내(큰경민의 배역? 아니면
신권화의 배역?)는 급기야 보이체크의 상관과 바람을 피게 되고 이를 알게 된 보이체크는
단지 고뇌하고 괴로워할 뿐이었다. 요염하고 바람기 많은 아내의 역을 어린 학생이 표현하
기에는 좀 무리가 따랐지만 열심히 소화해주었다.

연출님의 열정, 회장 이헌상의 결단력, 부회장 신권화의 성실함, 부원들의 땀과 노력이 밑


거름이 되어 새로운 시도로 가득 찬 가을 공연은 성공리에 마쳤다.

238
1978년 ~ 1985년

1981년부터 1986년까지 기억의 단편을 모아

황동진 (의·28회)

벌써 졸업한 지 23년이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내 딸의 나이가 23살이니 믿어야


만 할 사실인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진호 형이 전화를 해서 글을 올리라고 했는데, 사실 연극반 site가 어딘지도
모르고 있어서 우여곡절 끝에 글을 올립니다. 천희가 기억력이 좋아 자세히 글을 썻네요.

저는 지방 (경남 진주)에서 초, 중, 고를 나와 서울은 처음이었고, 그 당시서울과 지방


의 문화적 격차가 큰 관계로 연극은 한 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가톨릭의대라는 학교도 사실은 졸업하기 전까지는 몰랐던 곳이었고, 어찌하다가 의과대
학을 가려고 고르다가 선택한 곳이었습니다. 때문에 대학에 대한 애착도 별로 없었고,
다만 캠프스 라이프를 느끼고 싶은데 학교가 너무 초라해 실망한 터인데, 신입생 서클소
개 시간에 연극반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본과 2학년이었던 심성보 선배님이 연극반을 소개했는데 아주 인상이 깊었고, 나의 소


심한 성격도 고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지체하지 않고 연극반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나서 전두환 군사정권이 집권하고 있어서 암울한 시대였고,
고등학교 동기들 중 많은 친구들이 대학 와서는 목숨을 걸고 데모를 했고, 사회문제에
고뇌가 많았던 때였습니다.
연극반 선배님들의 카리스마에 끌려 나도 덩달아 멋진 남자가 될 것 같은 착각을 하였
고, 여자 선배님들도 많았고, 미인도 많아서 가톨릭의대의 삭막함을 벗어나게 하는 오아
시스 같은 곳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소격동(삼청동 관할)에서 자취를 하였는데, 점심과 저녁은 거의 선배님들이


사줘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선배님들, 다시금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소심하고, 경상도 사투리가 심하고 열정이 부족한 저는 무대장치를 맡았습니다. 당시


연극반에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활발한 시기였고, 간혹 엑스트라가 부족할 때 자리를 채
워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그마저도 너무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경운동에서 반포로 캠퍼스를 옮기고 나서 당시의 생활을 회상해보면, 봄 공연이 있기 전

239
에 한 달간은 거의 강의실로 못가고, 강당으로 출근하여 경동시장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
입하거나, 학교와 병원 기계실 등을 전전하며 필요한 것을 찾으러 다녔고, 가을 공연 때
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예산이 적어 몸으로 때워야 했었지요. 공연에 임박해서는
무대장치 작업을 한다고 밤샘을 하다가 강당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여름에는 신문지
를 덮고 자고, 가을에는 커튼을 떼서 덮고 잤는데 역시 모기 때문에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물론 천희, 헌상이, 황이 등 동기들이 같이 동참했죠. 수업을 너무 빼먹어 출석
일수가 간당간당 할 때 쯤이면 연극은 끝나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죠. 그나마 졸업할
수 있게 도와준 해부학교실 조교들, 연극반 지도교수님 등의 도움으로 손쉽게 학점도 따
고 졸업도 할 수 있었네요. (감사)

지금도 마음에 걸리는 일은 우리 한해 아래에 진수가 두 번 유급하여 퇴학하게 되었


는데 선배로서 도움을 주지 못했던 점과 하나 뿐은 직속후배 용욱이를 너무 부려먹은
일(?)입니다. 모든 게 제 팔자겠지요.

좋았던 기억은 동기들과 같이 서클룸에서 같이 공부하고, 카드치고, 같이 작업하고, 연


극반부원들이 같이 식당에서 저녁을 해 먹으며 우의를 다졌던 일이 있었네요. 같이 있으
면 무슨 일이든 할 것 같은 기분...

연극반에 든 지 5년이 되었을 때 저는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성격은 바뀌는 것이


아니고,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을. 이후에 저의 내성적인 성격이 크게 불편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졸업을 하고 미생물학교실에 조교로 남아 2년간 일하다가 다시 정신과를 하였고, 10년


전부터는 세례를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된 모든 일이 당시는 몰랐지만 내가 가야할 길을
따라 걸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 생활을 생각하면 연극반을 떼 놓고는 말할 수 없고, 그 당시는 몰랐지만 너무나


많은 선배, 동기, 후배, 수위아저씨를 위시한 직원들, 교수님들, 그리고 가톨릭 재단의 따
뜻한 도움이 없었으면 지금의 내 모습은 휠씬 더 삭막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가 '내일의 희망은 오늘에 있다.'라고 했더군요. 오늘 무언가를 할 때 내일은 희


망으로 다가오고, 그렇지 않으면 오늘 같은 내일만 기다린다는 말이겠죠. 연극반에 들어
온 것은 내일을 위한 위대한 선택이고, 그리고 오늘 무언가를 시도한다면 내일은 설레임
속에서 다가올 것입니다. 다들 힘들겠지만 다시 힘을 내어 무언가를 해냅시다. 멀리서
나마 건투를 빕니다.

From. 경남 창원에서 정신과를 하고 있는 연극부원이었던 동문이.

240
1978년 ~ 1985년

아름다웠던... 그리고 행복했던 기억들

구태형 (의·30회)

차현민 군의 원고 부탁을 받고 옛날 기억들을 되새겨 봅니다. 아름다웠던, 그리고 행


복했던 기억들입니다. 힘들고 외롭고 안타까운 기억도 있습니다. 그 기억을 정리해 봅니
다. 사실적인 내용을 토대로 하지만 주로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아 다소 지루할 수 있습
니다.

1. 1983년 가을_ 연극반 입문

올해(2010년)는 우리 대학이 50번째 생일을 맞는 뜻 깊은 해이기도 하지만, 우리 연극반


또한 50번째 생일을 맞아 우리 대학의 역사가 곧 우리 연극반의 역사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는 우리 대학을 졸업한 동문이라면 거의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다. 얼마 전 우리
대학 동창회 50년사(1960~2010)가 발간되기도 했는데 올해는 우리 연극반에도 뜻 깊은 해
가 될 듯하다. 공자는 나이 50을 지천명(知天名)라 하였는데, 쉰이 되면 하늘의 명을 깨닫
게 되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경지에 들어서는 단계라 하셨다. 이제부터 우리는 50년의
역사를 통해 하늘의 명령이나 원리, 또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1983년, 우리대학 강남시대를 연 첫 해라 볼 수 있다. 그 당시 ‘대학졸업정원제’로 인


해 입학정원이 졸업정원보다 30%가량 많아 대학 문은 넓어졌지만 졸업은 어렵게 만들
어 놓았던 시대다. 나도 무사히(?) 졸업은 했지만 학장시절 때 보이지 않던 경쟁은 대단
했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계시던 아버지도 “우째던 열심히 공부만해서 번듯한 의사
가 되어라”고 신신당부를 하시곤 했었다. 그리곤 빠트리지 않고 하시던 말씀, “대학가면
공부는 안하고 쓸데없이(?) 딴 거하자고 꼬드기는 선배들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시골에서 자란 나는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실제로 연극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처


음으로 연극이라는 것을 보게 된 건 1983년 가을공연 '아득하면 되리라'였다. 그것도 객
석이 아닌 마리아홀 조명실에서. 당시 연극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의과대학에서 연극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당시
301강의실(당시 예과 1학년 전용 강의실)을 가득 매운 경쟁자들을 보며 한눈팔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가슴에 되새기곤 했다. 그렇게 무사히 1학년의 한 학기를 잘 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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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 한진수가 강의실로 찾아왔다. 당시 우리 반에는 재수 이상의 사회경력을
가진 분들(?)이 많아 서로간의 호칭에도 혼란이 많았다. 아무래도 그분들은 나와 같은
풋내기를 상대하려 않았던 걸로 생각된다.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진수와도 거리감이 있었
지만 새 학기를 맞아 다정하게 대해주는 진수가 싫지는 않았다. 본론으로 들어가는데 그
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본인이 연극반에 들어가 보니 선배들도 잘해주고 간호
학과 1학년 신입생들이 꽤 괜찮다고 귀뜸을 해주는 것이 아닌가! 당시 83학번 간호학과
동기생은 김혜정, 김희정, 백금자, 오은숙, 정은숙, 000인데 그 중 몇몇은 의학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자주 회자되던 인물들로 혹하는 마음이 들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원인을 제
공했다.

구경삼아 마리아홀을 찾은 그 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가톨릭의대 연극반원이 되었다.


그 날, 막바지 가을공연을 준비 중인 선배님(당시 무대에서 연극에 푹 빠져있던 유순집,
최황, 신권화, 이경민 선배의 모습이 기억난다)과 기국서 연출의 칼칼한 목소리가 객석
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연극이라는게 이런 거구나. 대학생들도 부업으로 이런 걸 할 수
있구나. 무대에서 보여지는 열정들은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자 자극이었다. 당시 조명
시다의 직책이 주워졌고(다들 아시겠지만 대부분 잡일로서 마리아홀의 객석이나 무대
천정을 타거나 객석에서 2층 조명실로의 연락이나 배달임무 등이다) 장기육(그는 장치
시다였다)과 함께 가을 공연을 도왔다.

2. 힘들고 외로웠던 기억들

당시 졸업정원제의 위력은 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듯했다. 무사히 1년을 넘기고 2학년,


302강의실로 들어서자 빈 좌석 없이 꽉 채운 모습이 참으로 삭막하게 느껴졌다. 150명을
수용하는 곳에 145명쯤 차니 조교들은 빈자리 숫자를 보고 결원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대출이 어려워진 것이다. 연극부 활동에는 상당한 핸디캡이였고 그해 봄 공연(성자의 샘
물) 연습 기간 중 쌓여가는 결석일수로 인해 공연이 끝난 후에도 꽤 영향을 줬다. 각박
해지는 학교생활로 인해 워크샵을 했던 신입생들도 연극부 입회에 주저하게 되었고 날
이 갈수록 인원은 줄어 86년 봄 공연에는 연출자를 제외한 8명의 연극부원들이 “올스탭,
올캐스트”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주축이었던 81학번 선배들이 빠지면서 그 공백은 컸고 나를 연극반으로 인도했던


한진수 군도 졸정제의 희생양이 되어 학교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어 오로지 사명감 하
나로 버틴 것 같다. 외롭고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힘들게 연습하고 공연까
지 올리다보니 (실제로 86년 가을 ‘아니 이 생명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는 나흘에 걸
쳐 4회 공연을 했다. 한 두번으로 끝내기가 아쉬웠던 것이다) 공연 후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공허감, 집중력결여, 의욕상실 등등이다. 공연 후에도 써클룸을 배회하거나 타 공
연을 관람하거나 학교를 나오지 않거나 중간에 어디론가 사라지는 현상들로 나타났다. 당
시 이런 사실을 알고 선배들 사이에서는 공연 횟수을 줄이거나 공연 자체의 존폐까지도
심각히 고려해보자는 의견까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또 때가 되면 서로 모여 다음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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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 1985년

을 준비하고 공연을 올렸다. 힘들고 외로웠던 시절이지만 나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기


억들이다. 졸업하셨지만 오셔서 좋은 말씀과 위로, 술자리를 같이 했던 대선배님들, 창재,
순집 선배, 특히 81학번 선배님, 정신적인 지주였던 용욱 선배(외로워 보였지만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셨다), 경욱, 홍준 후배 (특히 양수와 진석 후배는 힘든 시기에 많은 힘과
자극을 주었다)에게 너무 고맙다.

진수 얘기를 잠깐 하자면 3수로 입학하여 연극부원이 된 후 그 자부심과 열정은 대단


했고 무대체질이라며 연기하는 걸 아주 좋아했었다.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맡아 회식이나
MT, 여행에서 같이 보냈던 행복한 기억의 원인을 제공했지만 학교를 떠나고 모두의 기
억에서 지워지게 되었다. 수소문 해보니 그 후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연기 실기
쪽의 전공을 살려 외국에서 수료를 하고 현재 부산에 있는 경성대학교 연극과 교수로
재임 중이다. 연극에 대한 열정은 그 이후에도 식지 않고 오히려 그의 인생에 목표를 제
공한 것이다. 멋진 인생이지 않은가. 요즘 50주년공연 준비를 하시는 몇몇 선배님들의
열정적인 모습과 그의 인생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아 묘한 기분마저 든다. 연극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연극이란? 술잔을 앞에 두고 밤새우고 얘기했던 주제다. 그에게 연극
은 그의 인생이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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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의대 연극부를 회상하며

한진수(경성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몇 달 전에 창재 형이 메일을 보내왔다. 그동안 내가 연락을 못했는데, 먼저 내 메일주


소를 찾아내서 연락해온 터라 반가움과 고마움이 교차된다. 예전의 말투가 그대로 메일
속에 녹아있다. 25년 만인가!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르고 항상 가슴 한 켠에 자리하고 있
던 아스라한 추억들이 선명해 진다.

사실, 나는 무척이나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고 3때 어머니와 친구 분 댁을 방문하였는


데, 그 집에도 고 3인 딸이 있었다. 노란 에이프런을 두르고 과일을 깎고 커피를 타는
그 애의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 분의 배려(?)로 그 애의 방에서 1
시간 반 가량 단 둘이 있었는데, 나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그 애가 묻는 말에 겨우 대답
하곤 했다. 결국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그 애도 내심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집에 돌아와
서도 영화 보러 가자고 전화를 수십 번 들었지만 결국 다이얼을 돌리지 못했다. 그렇게
몇 달을 속앓이를 했으니 학력고사도 망치고 재수의 길로 접어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소망했던 가톨릭 의대에 입학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끝나


고 동아리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다른 동아리들은 몇몇 선배들이 들어와 평범하게
진행하는데, 연극부 차례가 되자 갑자기 30여명 정도 되는 선배들이 가운을 입고 우르르
들어와서는 우리를 에워싸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불을 끄더니 연극부의 활동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 당시 영화를 찍어 홍보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
을 터인데...확실히 다른 동아리들과 구별되고 선배들의 힘이 느껴졌다. 영화가 끝나자 선
배들이 단상에 올라와서는 연극부의 장점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말들은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렸지만, 내성적인 성격을 개조하는 데에도 연극이 도움이 된다
는 취지의 말을 할 때는 두 귀가 번쩍 뜨였다. 저거다! 저것이야 말로 내게 꼭 필요한 것
이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을까? 난 연극을 해보기는커녕 한 번 본 적조차 없지 않은가!
며칠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연극부의 문을 두드리고 신입생 워크숍에 참여하였다. 이것은
나로서는 최대의 용기를 낸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신입생 워크숍은 “F선상의 아리아”라는 작품을 올리게 되었다. 완고한 교수와 학생들
간의 해프닝을 그린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교수 역을 맡았는데 연습과정이 그렇게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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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 1985년

있을 수가 없었다. 현실에서는 내 자신을 잘 표현할 수가 없었지만, 극중의 가상현실 속


에서 극중 역할로 존재하니까 오히려 마음껏 표현할 수 있었고, 내 자신이 자유로워짐을
느꼈다. 첫 워크숍에서의 이러한 경험은 연극예술에 대한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내가 입학할 당시에는 졸업정원제가 적용되고 있었다. 130명을 입학시키고 100명만 졸


업시키는 무시무시한 제도다. 입학동기들 간에 치열한 경쟁이 예고되어 있었고, 그로인
해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연극부에 관심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몇몇 있었지만, 워크숍이후 연극부에 정식으로 입단한 인원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여자
동기들은 꽤 있었지만, 남자는 나만 홀로 남았다. 내 바로 윗 기수도 용욱 선배 혼자뿐
이어서, 연극부의 위기였다. 선배들도 걱정하며 동기들을 확보하라는 압력을 가해왔다.
많은 동기들을 찾아 다녔고,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연극에 관심이 있었던 구태형과
장기육이 고민하면서도 마침내 결단을 내려주었다.

그해 가을 대공연인 “아득하면 되리라”는 나에게는 첫 번째 정기공연이었다. 여름방학


부터 참 열심히 했다. 아침에 모여서 연습하다가 우, 짜, 짬으로 점심을 때우고, 저녁에
연습이 끝나면 술 마시러 가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바야흐로 연극부의 문화를 본격적으
로 습득하는 시기였다. 지금은 많이 단련되었지만, 원래 나는 술을 못 마시는 체질이다.
아버지, 동생들 모두 술을 못한다. 그 당시 나에게는 술 마시러 간다는 것이 고역이었다.
술 냄새만 맡아도 얼굴이 빨개지고 맥주 500cc만 마셔도 토하곤 했다. 특히 강촌에 MT
가서는 대, 여섯 차례 토하고 뻗어버린 기억이 난다. 권화 선배를 위시하여 여성동지들
이 정성껏 마련한 안주들을 어쩔 수 없이 토해내려니 아깝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침에 눈뜨자마자 삼악산을 등반했으니 모두들 대단했다. 이러한 연극부 생활이 육체적
으로는 힘들어도 재미있었고, 매사 소극적이었던 생활태도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연극부 생활을 하면서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스스로 의식적으로 남 앞에 자꾸


나서려고 했다. 한편으로는 두려웠지만, 나 자신도 성격을 바꿔보려고 노력했고, 어떤 때는
마치 연극부원으로서 의무처럼 느껴졌다. 급우들도 연극부원인 나를 의식해서 무슨 모임이
있으면 사회를 보라고 지목하곤 했고 학년 말에는 차기 과대표로 선출해 주기도 했다. 그
리고 마침내는 축제 장기자랑 대회에서 두 선배가 노래 부를 때 여장을 하고 백댄서로 나
서 연극부가 일등상을 받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니, 참으로 상상하기도 어려운 변화였다.

그 다음해 봄 공연은 “성자의 샘물”이었다. ‘티미’ 역할이었는데 처음으로 main cast를


맡아 신나게 연습한 기억이 있다. 그해 가을공연은 이병훈 선생을 초빙하여 “보이체크”
를 무대에 올렸다. 이병훈 선생은 신체훈련과 함께 연극을 대하는 연극철학에 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칼’역을 맡았던 기육이의 음산하고
웃기는 연기가 기억에 남아있다.

나에게 1984년은 인생에서 가장 힘든 해였다. 집안이 더욱 어려워져 아버지가 취업차


미국으로 가셨지만 기약이 없었다. 수학 과외교사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던 나는 한 팀을
더 맡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학업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예과는 그럭저럭 올라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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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과에서는 어렵게 느껴지는 과목들이 있었다. 특히 조직학, 생화학은 공포로 다가왔다.
해부학처럼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은 재미있는데, 조직학처럼 현미경을 들여다보면서
그림 그리는 것은 뱃속이 간질간질한 게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그해 유급을 하게 되고,
의사라는 직업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유급의 충격과 함께 여러모로 심신이 지쳐있어 선배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1985년 봄


공연은 빠졌다. 그러나 곧 후회하게 된다. 매번 참여하던 공연을 건너뛰니 무언가 허전
하고 오히려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공연은 몰리에르의 “의사 망나니”를 뮤
지컬로 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안무를 지도한 무용과 여학생의 걸걸한 목소리와 용욱
선배와 태형이가 코믹하게 춤추고 노래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공연을 건너 뛰어 한 학기 내내 후회스러웠지만, 덕분에 가을공연은 더욱 열심히 참여


할 수 있었다. 작품은 뒤렌마트의 “미시시피씨의 결혼”으로 결정되었고, 열심히 한 탓인
지, 이미지가 맞아서인지 주인공 미시시피 역을 맡게 되었다. 처음으로 주인공을 맡아
열심히 준비했다. 길에서 대사를 중얼거리며 걷기도 하고, 혼자 있을 때면 장소를 가리
지 않고 연습했다. 결국 대본이 너덜너덜해져 한권 더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너덜너덜
해진 그 대본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내 마지막 작품이라 기억에 많이
남아 있다. 아나스타샤 역을 맡은 금자, 생크로드 역의 용욱 선배, 위벨로에 백작 역의
태형이, 위버후버 교수 역의 현진이, 그리고 하녀 역을 깜찍하게 해낸 숙희...

호사다마라고 할까? 공연을 열심히 준비한 것은 좋았는데, 또 한 번의 시련이 나를 기


다리고 있었다. 또 다시 유급을 한 것이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천성이
게으르고, 더구나 싫어하는 것은 억지로 하지 못하고 코앞에 닥쳐야 마지못해 한다. 어
떤 친구는 교수를 찾아가 사정을 해서 구제를 받았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설혹 이번에 올라간다 하더라도 졸업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학교를 나오자마자 군에 지원했다. 군복무를 하면서 고민스러웠다. 수학 강사를 할 것인


가? 연극을 본격적으로 공부해 볼 것인가? 고민 끝에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왕
이면 아예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학력고사를 다시 준비했다. 다행히 부대 부설 야간
고등공민학교(어려운 처지의 학생들이 검정고시를 준비하도록 도와 줌)에서 교사로 재직
하게 되어 도움이 되었다. 실기시험도 준비했는데, 졸병을 데리고 몇 번 연습했는데 아무
래도 망신당할 것 같았다. 마침 그 때 중앙대 연극영화과가 연극학과와 영화학과로 분리
되어 국내 최초로 연극학과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연출전공은 구술시험이어서 연출전공으
로 바꿔 준비하기로 했다.

부대장의 배려로 전역이 한 달 남았지만 학교를 다닐 수가 있었다. 그러나 큰 기대를 갖


고 입학한 중앙대의 커리큘럼은 실망스러웠다. 우선 연기과목이 졸업할 때까지 2개에 불과
했다. 수업내용도 전주의 수업을 토대로 진행되는 내용이 거의 없고 매주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여 연속성과 체계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연기교육을 전공한 선생이 전혀 없던
시기라 대부분 연출자나 이론전공자들이 수업을 맡고 있었다. 그 때부터 연기교육에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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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 1985년

씩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졸업할 무렵, 은사 한 분께 그간의 소회를 말씀드렸고, 그 분의 추천으로 ‘메소드 연기’


로 유명한 The Lee Strasberg Theatre Institute에서 1년간 수학했다. 그런 다음 귀국하여 1
년여 연기강사와 배우로 활동하다가 정식 유학을 결심하고 다시 도미하여 New School
university에서 연기실기석사(MFA in Acting)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에는 여러 대학에서 강
의하다가 2003년 경성대 연극영화학부에 재직하게 되었다. 중앙대에 입학할 때는 잘생긴
(?) 얼굴을 바탕으로 배우가 되는 것이 목표였지만, 아무래도 선생 노릇이 천직인가 보다.

가톨릭 의대에서 인생의 중요한 3년을 보냈지만, 그 기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카대에
서 연극을 처음 접했고, 열심히 했고, 또 무대를 신성시하는 연극철학을 제대로 배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시절, 연극을 버리지 않고 버텼던 원동력
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가대에서 이러한 전통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리라 믿는다.

내가 기억하는 진수 형
한현진 (간·31회)
파란만장 일대기를 뒤로하고 연극을 업으로 하는 교수가 된 진수 형...
저를 기억하시려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진수 형의 파란만장 일대기를 다른 사람이 이해하는 데 조금 도움이 되려나? 진수 형
은 헌상이 형과 같은 나이입니다.(별걸 다 기억하는 한현진입니다. ㅋㅋ)
그해 대입시험을 치르는데 제가 그 기수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가대 의대와 중앙대 의대를 함께 원서를 넣었답니다. 고민을 하다가 면
접을 아마 중앙대로 가서 보고 중대는 떨어지고 그해 아마 가대의대는 미달이었다고 하네요(중앙대 의대 커트라인이 서울대보다 높았
다고 했구요.) 다음해에 제수를 하면서 점수가 나와서 서울대 원서를 넣었고 서울대 의대는 안되고 공대에 2지망으로 붙었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의대가 가고 싶어서 3수를 해서 가대를 들어오게 되었다고 기억합니다. 태형이 형이랑 같은 동기로 들어온 것 같은데... (오래 전에 한
번 들었던 내용이라 정확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진수 형이 말하기를 첫 번째에 가대의대 면접을 봤어야 했다고 ~~~~~~
그러면 시간을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을텐데...하면서 이야기 했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항상 주위는 소란스럽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연극에 대한 열정이 많았고 열심이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항상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
고 연극적인 모습이 일상의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평상시에도 연극처럼 표현을 했던 것 같구요.
연극 교수님으로써의 멋진 모습 기대합니다.

한진수 선배님의 그림자


김양수 (의·34회)
제가 입학했던 1986년이 '전설의 한진수' 선배께서 학교에서 물러나신 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는 한진수 선배님을 한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30주년 공연 때 관람하러 오신 기억이 납니다. 10초간 인사하고 악수 나누었지요.)
그런데 예과 1학년인 저를 보고 선배님들이 한진수 선배랑 닮거나 비슷하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누군지 도통 모르는 사람과 비교된다는 것은 기분이 조금 '거시기' 하더군요. 헤헤..
그런데 비교의 핵심은 바로 '너도 그러다가 학교에서 짤리는 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철부지 예과 1학년에게 그 말은 정말 '살 떨리는 대사'였지요.
아무튼 그분과 유전자가 약간은 비슷했는지 저도 학교를 좀 오래 다니긴 했습니다.
그래도 무사히 졸업해서 오늘날 환자 보면서 먹고 살기는 합니다.
연극부하면서 졸업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
아프고 서글픈 기억이긴 하지만 우리들의 50주년에 그 사람들에 대한 공간도 마련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언뜻 떠오르네요
물론 우리가 공간을 마련한다고 해도 한진수 선배처럼 쿨하게 함께 할 수 있을지 여부는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요.
함께 고생하면서 연극했는데 학교에 들어온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는 점은 언제나 제 가슴에 멍울로 남습니다.
제 후배 중에서는 강창진, 김대욱 이대근의 이름이 기억 납니다. 이 친구들 지금 뭐하면서 지내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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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지 않는 값진 경험

강현미 (간·28회)

81학번 우리 간호학과 연극반 동기는 이현림, 문향이, 최현주, 그리고 나 강현미였다.


우리 중 연극반 생활을 가장 열심히 한 친구는 향이(예뻐서 별명이 인도 미인)로 기억
남는다.
연극반 생활은 나의 인생에서 잊히지 않는 값진 경험이다.
워크샵(환타스틱스)공연과 1981년 가을‘시련’에서 시녀 역을 해보았다.
그 후엔 스탭으로 분장을 주로 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수염을 만들기 위해 KBS 전예출
님을 만나 수염 만드는 법을 배운 일. 연습할 때 식사 준비했던 일. 경운동 강당에서의
추억(아마도 객석 위를 뛰어다니는 것 같은데...) 눈오는 날 경복궁으로 시험공부 하다말
고 연극반 선배들과 놀러갔던 일 등... ‘잿밥에 관심이 있다... 라고 해야하나...
분위기가 좋았고, 사람이 좋았다. 그래서 아직도 모임에 나오려 한다.

[39회] '미시시피씨의 결혼' - 뒤렌마트작 , 심재찬 연출, 1985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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