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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신학캠프2010 자료집 완성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자료집 완성
무소유 vs 긍정의 힘?
미리보기
PROGRAM.
09:00-09:30 등록 및 교제
사회 : 조석민 교수
09:30-10:20 기조 강의 강사 : 오세택 목사 (두레교회)
광고 : 고상환 사무처장
김근주(1층) 전성민(본당)
10:30-12:10 Session 1
조석민(3층) 권연경(3층)
12:10-13:10 점심식사
13:10-13:40 연구원 및 과정 소개 전성민 연구위원
김근주(본당) 조석민(1층)
13:40-15:20 Session 2
김동춘(3층) 배덕만(3층)
전성민(3층) 권연경(1층)
15:40-17:20 Session 3
김동춘(본당) 배덕만(3층)
SECTION
주 제 강 사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김근주 교수
:느헤미야 개혁 찬찬히 보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전성민 교수
구약성경이 말하는 소유권과 사용권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헌금, 축복의 통로인가? 조석민 교수
:고후 8-9장을 중심으로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권연경 교수
바울이 들려주는 십자가의 긍정 이야기
(안양대학교)
배덕만 교수
돈과 교회의 역사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김동춘 교수
‘긍정의 힘’에 대한 신학적 비판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광고하기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에 오신 여러분을 마음을 다해 환영합니다.
두레교회/기독청년아카데미
오세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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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oson 2 5
구약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느 5:15-16)
:느헤미야 개혁 찬찬히 보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김근주 교수
1. 느헤미야의 기도(1:5-11)
예루살렘의 참상을 들은 느헤미야는 곧바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그의 기도의 핵심은 이스
라엘 자손의 지은 죄에 대한 자복이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가리켜 “나와 내 아
버지의 집이 범죄”하였다고 고백한다(1:6). 민족이 겪고 있는 참상을 다른 데에서 그 원인을 찾
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느헤미야 기도의 특징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스라엘 자손이 범한 죄의 근본은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한 것이었다(1:7). 느헤미야의 사역을 시작하는 이 기도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2. 그에게 있어 이스라엘 자손의 죄악의 핵심은 모세를 통해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그로 인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방에 흩으신 것이 오늘의 참상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망하고 흩어져 있는 것은 결코 국력이 약해서나, 불운해서가 아니
라 여호와께서 명하신 계명을 지키지 않은 때문이다. 그렇다면 느헤미야의 개혁은 당연히 이스
라엘이 떠났던 계명과 율법, 규례로 돌아가는 것을 지향할 것이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서에서 이
루어지고 있는 개혁의 양상은 다름아닌 1장에서의 고백한 대로 여호와의 계명과 율법으로 돌아
간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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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건, 그리고 그 옛날 여호와의 명하시는 대로 계명과 규례를 전하던 모세이건 모두 여호와
의 종들이다. 그들 모두 여호와께서 부르신 자들이며, 여호와의 뜻을 세상 가운데서 행하는 이
들이며, 여호와께 순종해야 하는 이들이다. 스스로가 여호와의 종임을 고백할 때에, 어디에 있
건 그 계명대로 그 뜻대로 순종할 수 있다. 이제 예루살렘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호와의 종일뿐이다.
2. 성벽 재건
허물어진 성벽과 불타버린 성문을 돌아본 느헤미야는 최우선의 과제가 성벽의 재건이라 여겼다.
성벽이 없음으로 인해 이방인들이 자유롭게 출입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제대로 준행하지도 않으
며, 그저 무원칙하게 예루살렘 인근의 필요와 처지를 따라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
래서 성벽을 쌓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예루살렘을 외부로부터 지킬 뿐 아니라, 내부
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결속하기 위한 과제였을 것이다. 이 일의 가장 큰 장애가 될 수 있는 것
은 이것이 제국에 대한 반역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이다. 페르시아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지역에서 성벽을 견고하게 쌓는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불순한 의도를 가진 행동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느헤미야의 공동체를 찾아온 산발랏과 도비야 역시 이러한 행동을 “왕을 배반”
하는 것으로 여겼다(2:19). 에스라서의 성전 건축에 관한 본문에 등장하는 성벽 건축 관련 본문
(스 4:11-22)은 아마 느헤미야 시대의 성벽 건축을 둘러싼 논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
르면 성벽 건축은 반역의 상징이었다. 느헤미야서는 그가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기 전에 이미
건축에 대한 왕실의 허가를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2:5-6), 자칫 이 일은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는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느헤미야때에도 그랬듯이, 예수께서 이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 역시 로마 정부에게는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사건으로 비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를 핍박하고 제거하려는 이들은 이러한 정치적 틀을 이용하여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
며, 느헤미야를 제거하려는 이들 역시 동일한 논리로 그의 시도를 무산시키고자 애쓴다. 느헤미
야가 진행하는 성벽은 페르시아에 대한 저항과 무관하되,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결단
과 직결된다. 성벽을 지은 공동체는 곧바로 여호와의 율법에 따라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는 데에
서(8-10장) 그 점을 볼 수 있다. 페르시아의 식민지에 살고 있지만, 이미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
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이 세
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으며, 주님은 무력으로 나라를 회복하지 않으셨으되, 주님의 선포를 따른
제자들의 삶은 더 이상 세상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이었다. 이러한 유
비를 생각할 때,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재건을 상징한다. 실제로 이 성
벽이 재건된 이후, 안식일의 올바른 준수를 위해 성문을 닫는 사건과 연관하여 다시 언급된다
(13:16-22). 즉 이 성벽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이방 풍습과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삶을
가르는 경계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이 성벽은 전쟁을 위한 것이나 유대인 공동체의 세력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따르는 삶, 그 율법을 따라 순종하는 공동체를 상징한다. 성벽은
전쟁과 힘, 군대와 연관된 소재이지만, 느헤미야서에서 이 성벽은 구별된 공동체를 상징한다.
이 점은 성벽 재건의 과정에서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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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는 공동체를 세운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단지 성벽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참되고 새
로운 공동체가 관건이었다는 점은 5장에서의 토지 개혁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며, 재건이 완성된
후 곧바로 수문 앞 광장에서의 율법책 낭독과 갱신 운동이 잇따른다는 점에서도 확실히 볼 수
있다.
개혁과 재건의 와중에서 일어난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느헤미야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 것?
사실 이러한 경제적인 문제는 뿌리가 깊은 것인지라 함부로 다루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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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느 5:15-16)
4. 수문 앞 광장 집회(8장)
느헤미야 8장은 7월에 이루어진 집회를 소개하고 있다. 8장1절은 에스라 3장1절과 거의 동일하
며, 초막절이 지켜졌다는 점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전개를 지니고 있다. 또한 에스라 2장의 내용
과 느헤미야 7장의 내용이 동일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귀환 공동체의 계수와 파악이 이어
지는 집회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지닌 대로의 본문은 에스라서와 느
헤미야서 모두 이 귀환 공동체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가리키는 틀로 7월에
이루어진 집회와 초막절을 소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1. 초막절 준수
레위기 23장은 절기를 다루고 있다. 레위기의 내용은 크게 보아 1-16장과 17-26장의 두 덩어리
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여호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에 지켜야 하는 규례들로 주로 제
사와 정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는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23장은 여호와 앞에서의 거룩한 삶이라는 큰 주제아래 절기를 지키는
삶을 보여준다. 오경에 절기 관련 본문들이 여러 곳에 있다(출 23:12-19; 34:17-26; 민 28-29장;
신 16:1-17). 민수기의 본문은 이 절기들에 드려지는 제사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나머지 절
기 본문들은 모두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으로 나아와야 하는 순례 절기라는 점을 핵심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레위기 23장의 절기 본문은 이들과 강조점이 확연히 다르다. 우선, 레
위기의 절기 본문은 모든 절기를 이해하는 기본 틀로 안식일을 제시하고 있다. 비록 안식일에
관한 내용이 단 한 절로 표현되어 있지만(23:3), 이 한 절에 담긴 세 가지 내용(7일,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은 그 다음부터 소개되는 거의 모든 절기들에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다. 또한 23장은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를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23:9-22). 칠칠
절 혹은 맥추절로 불리는 이 절기는 다른 절기본문들에서도 간략히 언급되지만, 레위기는 이 절
기를 아주 상세하게 표현한다. 그 뿐 아니라 밀수확에서 절정에 이르는 맥추절이, 사실은 그로
부터 오십일 전인 보리의 첫 수확을 거두는 날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유일하게 강조하는 본문
이 레위기이기도 하다(23:9-14). 보리 첫수확을 드리는 날과 밀의 첫열매 드리는 맥추절의 간격
이 일곱 번의 안식일 즉, 49일이라는 점도 의미깊다. 일곱 안식일은 기계적인 숫자 49일을 의미
하기도 하지만, 일곱이라는 상징적인 숫자가 두 번 반복된다는 점에서 신학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지으시고 7일째에 쉬시므로 그 날을 특별하게 하셨고,
맥추절은 보리 첫수확으로부터 일곱 번의 안식이 경과한 후이기에 특별하다. 농사의 결실과 그
결실을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과 연관된 숫자인 7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레위기가 제시하는
맥추절은 농사와 결부된 일상의 삶 속에서 그 열매를 드리는 제사가 여호와 앞에서의 거룩한
삶임을 강조한다. 이 단락에서 두 번이나 쓰인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23:14,21) 표현은 일상에
대한 강조를 더 한층 두드러지게 한다. 레위기에 있어서 거룩은 단지 성소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같이 일상,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각처에서 드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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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보아도 39절 이하의 초막절 규례 부연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39절 첫머리는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초막절 이해 즉, 토지 소산을 모두 저장한 후에 드리는 절
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초막절 기간 동안에 모든 이스라엘이 초막에 거주할 것을 명령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초막(“수코트/숙곳 tKoSu”)”이라는 단어에서 이 절기의 이름이 나왔다. 그렇
지만, 정작 이 단락에서는 “초막절”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이름이 예상되는 자리에 “여호
와의 절기(“하그 아도나이 hw"hy>-gx;”)”라는 명칭을 적고 있다는 점(23:39)에서 인상적이다1).
1) “여호와의 절기”라는 표현이 2절과 4절, 37절, 44절에도 쓰였지만, 이들은 모두 “모아데 아도나이”이며, 39
절의 표현과는 다르다.
1) 여기서 “여호와의 명절”로 번역된 히브리말은 “하그 아도나이”로써, 레위기 23장39절에서 초막절의 또 다른
이름으로 쓰인다.
2) 윌리암슨(H.G.M. Williamson)의 지적처럼, 설령 초막 만들어 거하기가 포로 이전 시기에 지켜졌다 하더라도,
단지 초막절 절차의 한 부분으로 거행되었을 뿐이지, 그 의미를 충분히 살려서 거행된 것은 아니었다고 이
해할 수도 있다. Williamson, Ezra,Nehemiah(WBC;Waco:WordBooks,1985),296.느헤미야서의 단호한 언급은
귀환 공동체야말로 율법에 규정된 대로 초막절을 거행한 첫 집단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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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1).처음 출애굽을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숙곳에 머물게 하셨듯이, 이제 돌아온 이
스라엘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숙곳에 머무른다. 출애굽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
한 미래가 있듯이, 이제 돌아와 초막에 거하는 귀환 공동체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과 미래가
존재하고 있음을 이러한 비교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비록 돌아온 지 수 십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귀환 공동체 사이에 빈부 격차도 다시 생겨나면서 사회적인 갈등도 있었지만,
느헤미야의 지도를 따라 모든 빚을 탕감함으로 이 갈등이 해결되었다. 이제 에스라의 율법 강독
에 따라, 돌아온 이스라엘이 모두 초막에 거하면서 다시 그들의 출발점에 함께 선 것이다. 함께
초막에 거하였던 공동체는 이후 오직 율법의 말씀에만 따라 근본적이고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
한다(느 9-10장).
4.2. 갱신 운동
10장29-39절에서는 8장의 수문앞 광장 집회를 기점으로 해서 귀환 공동체의 백성들이 회개하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따라 살기로 결단한 내용이 소개된다. 느헤미야 첫머리의 회
개가 그의 개혁으로 구체화되었듯이, 9장에 담긴 긴 회개 기도는 10장29절 이하의 개혁으로 구
체화된다. 여기에는 이방혼인 금지와 안식일 준수를 비롯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드려야 하는
몫에 대한 내용까지 고루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31절
에 있는 대로, 칠 년 안식년을 지키겠다는 부분이다. 이와 더불어 모든 빚의 탕감도 결단의 한
부분으로 선포되었다. 칠 년마다 빚을 면제하는 것은 신명기 15장의 면제년과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신 15:1-11). 그러나 땅을 쉬게 하는 것과 빚의 면제가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
서 신명기 규례와는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신명기 규례의 칠 년 면제년은 각 사람마다 그 기
점이 다르지만, 느헤미야의 칠 년은 모든 공동체에 공통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빚의 면제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은 희년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안식년을 다루고 있는
레위기의 법은 안식년 정신의 확장으로 희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식년 준수 선언은 희
년 준수와도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레위기 23장과 25장에 담긴 절기 규정은 23장3절의 안식
일 규정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안식일의 확장이 25장의 안식년이며, 가장 큰 안식년이 희년
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생각하면 안식년과 희년은 기계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앞에서 살펴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15
보았던 대로, 땅을 원래 맡은 이에게 돌려 주기로 한 조치라든지, 느헤미야가 땅을 사지 아니하
였다는 언급 역시 느헤미야의 개혁의 이면에 희년법이 놓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희년 규정은 실상 안식년 규정의 확장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여호와께 구별
된 백성이므로 거룩하다. 여호와께 구별된 이들은 여호와께서 구별하신 안식일을 지키며 여호와
께서 구별하신 안식년을 지킨다. 그러므로 안식년과 희년은 단지 사회적인 규례가 아니라 여호
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는 거룩을 이루는 규례이다. 그런 점에서 이에 대한 규정들이 레위
기의 “성결 법전”(17-26장)에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고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따라 살기로 언약한 느헤미야 공동체의 개혁에 이러한 안식년의 준수가 포함
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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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구약성경이 말하는 소유권과 사용권1)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전성민 교수
1. 서론
1.1. 참고 자료
월터 부르그만, 성서로 본 땅 (나눔사, 1991);이안 두굿, 에스겔 (성서유니온, 2003); 스탠리 그렌츠,
기독교 윤리학의 토대와 흐름 (IVP, 2001); Daniel Hawk, Joshua (Liturgical Press, 2000); Tod Linafelt
and Timothy Beal, Ruth and Esther (Liturgical Press, 1999); Norbert Lohfink, S.J., “Poverty in the
Laws of the Ancient Near East and of the Bible,” Theological Studies 52 (1991): 34-50; 캐서린 두웁
자켄펠드, 룻기 (현대성서주석;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G. von Rad, “The Promised Land and
Yahweh's Land in Hexateuch,” in The Problem of the Hexateuch and Other Essays (Oliver and
Boyd Ltd., 1966): 79-93; Gordon Wenham, The Book of Leviticus (Eerdmans, 1979); H.G.M.
Williamson, Isaiah 1-5 (ICC; T & T Clark, 2006); 크리스토퍼 라이트, 에스겔 강해 (IVP, 2004); 크리
스토퍼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 개정판 (IVP, 2006);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17
1.2. 핵심 논지
1.2.1. “‘내가(혹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은 결코 경제 윤리의 주장에서 최종적인 대답
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시며, 나(혹은 우리)는 단지 위
탁을 받아서 차지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에 속한 어떤 것을 더욱 필
요로 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게 하신다. 땅과 자원의 소유권이 절대
적인 처분권을 수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영과 분배에 대한 책임을 수반한다. 지구의 자
원들을 사용할 수 있는 만인의 권리는, 오직 독점적으로 그 자원을 누리기 위해 소유하고 있는 어떠한
사람의 권리보다 도덕적으로 선행되는 것 같다.”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 개정판, 203, 저자의
강조)
“The right of all to use the resources of the earth seems to be morally prior to the right of any to
own them for exclusive enjoyment.”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148, 저
자의 강조)
1.2.2. “지구의 자원에 대한 접근권과 사용권이 자원들에 대한 사유 재산권에 도덕적 제약을 설정해 주
는 공동의 권리이듯이, 경제 과정의 최종 생산물을 소비하고 향유할 권리 역시 모든 사람의 필요에 의
해 제약을 받는다. ... 그것은 “내 것은 내 것이며, 거기에서 내가 얻어낼 수 있는 무엇이든지 내가 갖
고 소비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라이트, 205-206)
“Just as the right of access to, the use of, the resources of the earth is a shared right that sets moral
limitations to the right of private ownership of resources, so too the right to consume or enjoy the
end product of the economic process is limited by the needs of all. ... which cuts across the idea
that ‘what’s mine is mine and I am entitled to keep and consume whatever I can get out of it‘.”
(Wright, 149)
1.3. 글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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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론
2.1. 땅에 대한 두 가지 접근
토지 신유라는 이상적이고 궁극적인 원리만을 주장할 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경제 윤리적 이상과
우리의 현실의 괴리를 느끼고, 그 괴리가 너무 커질 경우, 이상을 무시하고자 하는 경향을 가질 수 있
다. 이에 구약 성경 또한 실제적 소유를 인정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신유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논함으로 구약 성경의 도전을 좀 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2.1.2. 신적 선물로서의 땅
- 토지의 실제적 소유권은 이스라엘 각 지파들과 그 지파 내에서 대가족 단위에게 있었다. (민수기 26
장, 특히 52-56절; 민수기 34장; 여호수아 13-19장)
- 또한 “지계표를 옮기는 죄악”도 (신명기 27:17 참고) 토지의 신적 소유와 더불어 사적 소유 (개인적
소유는 아니어도)를 동시에 인정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2.1.3. 폰 라트의 “The Promised Land and Yahweh's Land in the Hexateuch”: 땅에 대한 두 가지 개
념(역사적 개념; 제의적 개념)을 구별
2.1.3.1. 역사적 개념
- 족장들에게 약속된 땅과 그 약속의 성취로서 선물 받는 땅
- 이러한 두가지 중심 주제를 처음과 마지막에 두고, 이집트에서의 노예 살이, 출애굽, 광야에서의 방
황에 관한 기록들이 역사적 흐름의 틀을 이룬다.
2.1.3.2. 제의적 개념
- “여호와가 땅을 소유하신다”라는 믿음이 기본
- 레위기 25:23
- 이 개념에는 첫 열매에 관한 규정, 십일조에 관한 규정, 추수와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방법에 관한 규
정, 그리고 앞에 언급한 구절의 맥락인 안식일 규정 등과 같은 토지의 사용과, 토지의 소산물 등에 관
한 모든 제의적 규정들이 포함된다.
2.1.4. 결론: “약속의 땅” (증여자 giver로서의 여호와) 과 “여호와의 땅” (소유자 owner 로서의 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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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라는 두 주제;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의 신학적 근원
2.2.1. 단편적인 예
(레위기 19:9-10)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
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
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2.2.2.1. “기업”(“나할라”; 수 13:6, 7, 8, 14, 15, 23, 24, 28, 29, 32, 33)
- 유산(inheritance)? 소유권의 이전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나할라”의 근원적 의미를 오해하게 할 수 있다.
- “나할라”에 대한 적절한 이해: 여호와의 권위를 통해 주어진 정당한 소유로, 땅에 적용된자면 “정당한
소유지”정도가 될 것이다.
- “정당한 몫이나 받을 권리에 해당하는 것이면 무엇에든지 사용된다. 즉, 법적으로 그리고 고유하게
한 사람이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 것을 의미한다.”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 120)
- 이러한 정당한 소유권이 세대를 이어 주장될 수 있었으며, 이런 경우, “대를 이어서 소유하는 세습되
는 재산”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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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절: 레위를 네 그룹으로 나눔
8-40절: 네 그룹에게 주어진 목초지가 딸린 성읍들의 이름을 지파별로 기록: 8-40절은 4-7절
의 상세 해설
43-45절: 여호수아 13-21장의 전체 결론
(수 21:2-3) 가나안 땅 실로에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우리가 거주
할 성읍들과 우리 가축을 위해 그 목초지들을 우리에게 주라 하셨나이다 하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
와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 이 성읍들과 그 목초지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
(참고) 현대의 제사장: (롬 15:16; 벧전 2:5, 9; 계 1:6; 5:10; 약 5:16 참고; 엡 4:11-12 참고): 벧전 2:9 그
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
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
이라
2.2.2.4: 레위 지파에게 땅이 “기업”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성읍들
과 목초지를 사용했다. 다른 지파들이 땅을 정당하게 소유했었으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물
로서, 레위지파의 사용을 위해 내어 놓아야 했다.
2.2.4.1. 레위기 25장의 구조와 내용 (전반적 명령과 단계별로 주어진 구체적 규례들 신학적 근거 [38, 42, 55절])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1
- 안식년과 희년 (전반적 명령 1-22절)
- 외경 마카베오상 6장 49, 53절은 안식년 실행을 언급한다. (기원전 164-163년 김병하, 93. Grabbe,
VanderKam 재인용)
-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Ant. 12.378)에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음: “But then their
provisions failed them; what fruits of the ground they had laid up were spent, and the land being
not ploughed that year, continued unsowed, because it was the seventh year, on which, by our
laws, we are obliged to let it lie uncultivated.”
2.2.4.3. 희년의 역사적 실행 여부의 중요한 기준: 희년의 급진적인 특이성 - 주기성
- 비정기적인 약자 층에 대한 배려는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일 수 있으며 “정치적 라이벌을 견제하
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김병하, 86); “정치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 부정기적으로 선포되었던 고대
근동 왕들의 각종 칙령들” (김병 하, 92);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선의 개념으로 희년 규례를 정의한다
면 성서를 비롯한 많은 문헌들의 구절들이 희년 규례로 간주되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희년 규례 정
신 중의 하나인 나눔이나 자선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구절들을 희년 규례라고 규정하는 것은 많은 무
리가 따르는 것이다.” (김병하, 87)
22
2.3.1. 핵심 개념: 법적 권리와 도덕적 의무
2.3.3. (룻 4:3-4; 개역개정)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
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
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룻 4:9-10 비교) 4: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3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
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아무개”는 법적인 권리는 누리기를 원했다. 아주 명료하게 “내가 무르겠노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 권리는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나오미는 집안을 이을 자식도 친척
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도덕적 의무”가 부과되자 고엘은 발을 뺀다. 이것이 그를 이름 없는 “아무
개”로 남게 한 것이다.
2.3.7. 보통 사람 “아무개”
2.3.8. 기독인의 윤리 수준
24
(겔 47:14) 내가 옛적에 내 손을 들어 맹세하여 이 땅을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하였나니 너희는 공평하게 나누
어 기업을 삼으라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
- 지파들의 체제에 타국인("게르")들도 포함될 것이다. 즉, 지파간의 평등의 범위가 이스라엘 이라는
민족의 한 계를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22절). 이스라엘 속에서 여러 계층으로 살
아가던 타국인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어느 정도는 유사한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할례를 받으면 유
월절 식사에도 참여할 수 있었으며(출 12:48), 원한다면 제사와 같은 종교 행위에도 온전히 참여 할 수
있었다(레위기 22:18 참고).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권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땅에 관한 것
이었다. 타국인은 땅을 차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한계는 그들을 "이등 시민"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에스겔의 마지막 환상에서 그러한 제한마저 철폐된다. 이러한 보편성의 원칙이 이상적인 기업 분배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점이다.
2.4.3. 땅의 사방 경계(47:15-20)
(겔 48:15; NIV) The remaining area, 5,000 cubits wide and 25,000 cubits long, will be for the common use
of the city, for houses and for pastureland. The city will be in the center of it.
(삼상 21: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
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5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
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
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 일상적인 노동의 터전이 비록 “거룩하게 구별할 땅”(“트루마트 하코데쉬”, 10, 18, 21절)과는 구별되
지만 “예물로 드릴 땅”(“하트루마 아쉐르 트리무”, 8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5
3. 결론: 다시 원점으로 그러나 더욱 강력하게
경제적 자원과 산물의 궁극적 소유주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경제적 자원과
산물의 신적 소유만 강조할 경우, 우리는 성경의 요구를 이상적인 것만으로 치부하며, 성경의
도전을 저버릴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경제적 자원과 산물이 궁극적으로 신적 소유 아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의 정당한 실제적 소유권이 현실의 적절한 경제 단위에 “사적”으로도 주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한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여러
본문들은 그 권리가 어떤 필요에 처한 사람의 “사용권”에 우선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한 구약 본문에서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제도화해 놓은 모습들을 찾을 수 있다. 더불어 기독인
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윤리적 수준”은 법을 잘 지키는 정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은
도덕의 최소 기준을 정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서 법적 권리를 주
장하는 것은 “보통”의 모습일 수는 있겠지만, 룻기는 그러한 “보통”사람의 “이름”을 우리에게 전
해주지 않는다. 성경은 이웃 사랑의 근원적 동기를 가지고 법적 권리와 함께 도덕적 의무를 행
했던 사람의 이름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에 “그것은 내 것이다”라는 소유권과 관련된 선언은
어떤 자원과 산물을 누가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최종적 대답이 결코 될 수 없다. “합법”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더 근원적인 가치인 정의와 공평을 행하며 우리의 소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내어 놓는 것이 기독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요구되어지는 경제 윤리
적 삶이며, 어떤 기독인들은 이러한 원리를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 사회 가운데 제도화시키
는 일에 부름을 받았을 것이다. 이런 작업들을 포함한 일상의 노동은, 에스겔의 환상이 보여주
듯,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께 드려질 예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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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헌금, 축복의 통로인가?
:고린도후서 8-9장을 중심으로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
조석민 교수
들어가며
첫째, 헌금과 관련된 현재의 문제가 무엇인지 개괄적으로 간략하게 살펴 볼 것이다. 둘째, 헌금
의 성경적 의미를 고린도후서 8-9장을 중심으로 고찰할 것이다. 셋째, 성경이 말하는 복의 의미
를 살펴보고, 헌금과의 관계를 확인할 것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올바른 헌금을 드리기 위한 그
리스도인들의 재물 사용에 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고 실제적인 제안을 할 것이다.
1. 한국 교회의 헌금 문제
헌금의 의도나 목적이 성경적이지 않고 토속 종교의 세속적 개념의 복들과 관련되어 있다. 한국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분류하고 있는 헌금의 종류는 교회 마다 다르며, 교회의 형편과 목적에 따
라서 그 숫자가 늘어나거나 줄어든다.
개인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목적 헌금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헌금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특히
복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헌금을 드리는 경우, 그런 행위는 무속 신앙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7
교회 헌금이 늘고 개인의 수입이 오르고 사업이 잘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관련하여 복을 저울질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기복 사상의 영향아래 바알을 섬겼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들은 가나안 종교의 바알 신을 섬기면 풍성한 농산물을 공급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이스라
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신이 참 신이라고 믿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먹
고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
는 신이 참 신이라고 믿는 것이다.
2. 헌금의 성경적 의미
바울이 가르치는 헌금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은 헌금의 의미
를 직접적으로 가르치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그 의미를 알게 한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바
울이 격려한 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모금이었다. 바울은 이 모금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모금 운동(연보)에 대한 근본적인 근거를 제시하는데, 그
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모금 행위에 대하여 “은혜”, “섬기는 일”, “참여함”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모두 헌금과
관계된 말들로 이해할 수 있다.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받아 행하는 인간의 은혜로운 행위
를 의미하며(고후 8:1), “섬기는 일”은 가난한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것이다. “참여함”은 사람들
과의 친교만이 아니라, 교제를 가능하게 하고 원활하게 하는 어떤 구체적인 일을 의미한다.1)
2.1. 고린도후서 8장 해석 요약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를 위한 모금을 호소
하고 있다. 이 모금을 위하여 마케도냐 교회들의 모범을 제시한다. 마케도냐 교회들은 빌립보,
베뢰아, 데살로니가 등이 있다(행 16, 17장). 끝으로 모금한 것을 전달할 사람을 추천하고 있다.
28
은 빌 1:29-20과 살전 1:6, 2:14; 3:3-4에 언급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부유해야 남
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마케도냐 교회는 어려운 가운데 예루살렘의 궁핍한 자들을 위하
여 기쁨으로 모금을 하였다.
3-4절은 2절에 설명한 내용의 부연 설명이다. 바울은 마케도냐 교회의 성도들이 어떻게 헌금했
는지를 증언한다. 즉, 힘대로 할 뿐 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풍성한 헌금을 드렸다.
이 일을 바울은 성도 섬기는 일이라고 한다. 즉, 봉사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으로 표현한다.
5절에 의하면 마케도냐 사람들의 태도는 바울의 기대를 넘어섰다. 즉, 그들은 헌금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렸다. 헌금의 기본자세와 태도를 가르친다. 6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그가 말하고자 하는 본론으로 들어간다. 바울은 디도에게 고린도에 가도록 권고한다. 디
도의 임무는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 운동의 결실이다. 이 모금 운동은 이미 그 이전에 시작된
것 같다(고전 16:1-4). 이제 그것을 마감해 줄 것을 부탁한다.
바울은 모금에 앞서 고린도 교인들이 풍부함에 관하여 언급한다(고전 1:5). 바울은 고린도 교인
들을 칭찬하면서 모금 운동을 권면하고 있다. 8절은 모금 운동이 강요되어서는 안될 것을 분
명히 보여주며, 자신의 말이 명령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그들의 사랑과 신앙에 호소하고 있
다. 8절에서 ‘다른 사람들’이란 마케도냐 사람들을 의미한다. 바울은 헌금과 관련해서 사랑이라
는 말을 사용한다. 9절은 헌금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근거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을 본받아 헌금해야 함을 가리킨다(참조. 빌 2:6-8). 10절은 8절과 같은 내용이다. 모금
을 위해 명령해서는 안 되고 각 사람이 기꺼이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바울이
이 일에 뜻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10절의 ‘뜻만 보인다’는 ‘조언하다, 의견을 주다’라는 의
미가 있다. ‘일 년전’은 아마도 고전 16:1-4과 연결되는 것 같다.
11-12절에서 헌금의 자발성의 원리를 다시금 언급한다. 즉, 헌금은 얼마를 내든지 자발적으로
내는 것이 환영을 받을 만한 것이고, 아무 것도 없는 자들에게는 강요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표시일 수 있다. 13절은 모금의 목적에 대해 해명을 하는 것으
로 모금 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오해를 내포하고 있다. 즉 바울을 비난하던 자들이 바울의 모금
운동에 대하여 모금을 빙자로 바울이 그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14절에서 바울은 모금의
목적이 평균에 있다고 주장하며, 평균의 구체적인 의미를 가르친다. 즉, 평균케하는 하는 헌금
의 역할을 설명한다. 15절은 헌금의 원리로서 공평성의 원리를 구약성경에서 찾고 있다. 출애굽
기 16:8의 만나 기적을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필요를 아시고 그 필요에
맞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29
바울은 7-15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미 시작한 모금을 완수해 줄 것을 부탁한다. 이 단락에
서는 모금 전달을 위한 사람, 즉, 바울의 동역자인 디도와 두 명의 형제를 언급한다. 디도는 바
울의 요청을 받아들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갔다. 18-19절에서 디도 외에 두 사람의 형제를 함께
보낸 것은 유대교의 증인에 관한 법이 고려되고 있는 것 같다. 18절에서 동반자에 대하여 묘사
한다. 그가 누구인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모든 교
회를 통해 칭찬을 받는 사람이다. 19절은 계속 이 형제를 말한다. 바울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
릴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 같다. 20-21절은 디도 외에 신용할 만한 두 사람을 보내는 의도와
이유를 알게 한다. 즉, 거액의 헌금을 운반할 때 생기는 어려움을 피하고자 한다. 헌금을 운반
할 때 위험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전달할 두 사람을 함께 보낸 것이다. 23절에서 두 사람의 신
용에 대하여 말한다. 23절에서 디도 및 두 사람의 형제들에 관하여 소개한 이유가 24절에 명시
되고 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들에게 친절과 정성을 베풀라고 권면한다.
2.2. 고린도후서 9장 해석 요약
고린도후서 9장에서 바울은 아가야 지역의 교회들을 향한 모금을 호소하고 있다. 아가야 지방이
란 고린도를 포함한 그 주변의 모든 교회를 포함한다. 바울은 이 지역의 교회들에게 모금을 준
비할 것을 권고하면서 헌금하는 자의 자세와 헌금의 효용성을 언급하면서 모금에 너그러울 것
을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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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절은 잠언 11:24과 19:17의 의미를 재현한 것이다(참조. 갈 6:7-9). 바울은 헌금을 하는데
있어서도 자유로운 판단을 소중하게 여긴다. 7절에서 잠언 22:8을 자유롭게 인용하면서 기쁨으
로 그리고 자유롭게 하는 헌금을 칭찬한다. 바울은 8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성도들을 섬기는
일 때문에 가난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도록 능력으로 모든 은사를 풍성하게 내리시
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가르친다. 이것을 위하여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즉 시편 112: 9
을 인용한다. 즉, 가난한 사람들을 볼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 뜻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
님과 의로운 관계를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다. 10절은 8절에서 바울이 언급했던 그리스도인들에
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다시 강조한다. 이 부분은 이사야 55:10을 연상시킨다. 바
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헌금에 참여하는 것이 의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이
일은 헌금을 하는 고린도 성도들과 가난한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모두 유익한 일임을 밝힌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31
4) 구제금 모금 운동은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조심스럽게 실행되었다. 본문에서는 고린도 교회
에서의 모금운동을 마감하도록 디도와 함께 거액의 모금액을 운반하기 위해 두 사람을 동행시
킨다. 이는 오해와 위험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3. 성경이 가르치는 복의 의미
32
한 극히 제한적인 복의 간구나 추구는 지양되어야 한다.
4. 헌금을 위한 재물 사용의 실제
한국 교회의 실정에서 어떻게 헌금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실제적인 제안은 교회의 형편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기본적인 사상과 개념은 다를 수 없다. 교회의 성도라면 물질적인 책임
이 분명히 있다. 이런 관점에서 헌금을 실제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얼마나, 어떻게 헌금하
느냐는 개인의 믿음과 생활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서 획일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
명한 것은 헌금의 의무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나가며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33
신약
바울이 들려주는 십자가의 긍정 이야기
안양대학교 신학과
권연경 교수
대박과 축복
긍정의 힘
긍정적 태도에 힘이 있다는 생각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분명한 확신을 갖고, 흔들리지 않는
태도로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이 그것을 이룰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에서 쉽게 확
인되는 사실이다. 무언가에 대한 의심이나 두려움은 우리의 태도를 어정쩡하게 하고 모호하게
한다. 그러다 보면 무엇이든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우리의 행동이 한 가지 일관된 신념에
이끌릴 때, 우리의 행동은 매우 효과적이 될 것이다. 그만큼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야
기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우리의 격언이 말하는 바도 그와 같다.
34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집착”
바울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믿음으로 그와
하나가 된 우리들의 죽음과 부활로 이어진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과는 달리, 우리의 부활은
아직 “신음하며” 기다려야 할 미래의 소망으로 남아 있다(롬 6:5, 8; 8:11; 고후 4:14; 고전 15).
따라서 미래의 부활을 바라보는 오늘 우리의 삶은 많은 경우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조명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부활로 이어졌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의 죽음을 통해 부활에 이르는 과정, 혹은 부활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사유화하는 과정
으로 이해된다. 바울의 복음에서 십자가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십자가, 새 창조, 새 인식
바울의 복음이 십자가에서 시작한다면, 우리는 바울이 왜 십자가에 그토록 집착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물론 예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죽음이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인 물음이 필요하다.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위한 것이 되는가? 그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유익 중 한 가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곧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적 죽음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십
자가는 우리들 편에서도 중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35
고, 자기보다 못 가진 사람들에 대한 경멸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가치관 속에서 우
리의 삶은 많은 부분 이런 “외적” 가치들을 확보하고 축적하려는 노력,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증명하고 인정받으려는 땀흘림으로 드러난다. 바울은 이런 삶의 방식을 “외모를 자
랑하는” 삶이라 부른다. 십자가는 이런 삶의 죽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런 헛된 가치들로부터
자유한 새로운 삶을 불러들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생명과 무관한 헛된 인간적 가치들에 대
한 단호한 부정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과 닿아있는 새로운 가치들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
다.
고린도교회와 십자가의 복음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선포했고 또 고린도인들이 수용했던 복음을 “십자가의 말씀”으로 요약함
으로써, 지혜 혹은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적인” 혹은 “육신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던 고린
도 신자들의 이율배반적 영성을 비판한다(3:1-3). 인간이 의지하고 자랑할 만한 일체의 가치를
폐기처분하고(3:1-3; 4:18-23), 오직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
룩함과 구원함이 되도록” 함으로써,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인 것들을 두고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셨던 것이다(1:29-31).
36
서 복음은 분명 역설이다. 여기에는 유대인이 추구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표적”도, 헬라인들이
추구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지혜”도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표적과 지혜의 부재 자체가 십자가
를 구원의 말씀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효력을 갖는 것은 이런 표면적 미약
함과 어리석음 배후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하는 십자가의 말씀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부르
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1:23-24).
제가 이렇게 했던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조성되도
록 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이 진술은 바울이 오로지 십자가의 메시지에만 관심을 기울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십자가가 “헛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십자가 속에 담긴 목적이 좌절되는 일이 없어
야 한다는 의미다(1:17). 바울은 이 십자가의 목적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푼다. 바울은 고린도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37
성도들의 믿음이 선포하는 사람의 수사적 설득력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에 의해 생겨나고 유지되는 것이기를 바랐다. 이것이 십자가에 집중한 바울의 실질적 의도다.
그러니까 그가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메시지를 수사적 꾸밈없이 선포한 것은 어리석음 자체에
무슨 내재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 수사적 지혜에 대한
세속적 집착을 버리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나타나는 실질적 구원의 능력을 매개하기 위함이
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능력을 통해서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4:20. 필자
의 해석을 더한 번역).
십자가와 가치의 역전
이처럼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전폭적 긍정은 십자가의 메시지가 매개하는 하나님의 초월적 능
력 때문이었다. 얼핏 “어리석음”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는 믿는 자들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복음이었다(15:45). 바로 그런 이유로 십자가는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치 있지는 것으로 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수여라는 측
면에서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온갖 인간적 가치들에 대한 부정으로 작용한다. 십자가라는 어
리석음이 참된 생명의 열쇠로 드러나고, 세상에서 인정받던 온갖 가치들이 무가치한 것으로 드
러나면서, 십자가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뒤집는 가치관의 역전을 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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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배경이 좋은 자들이 거의 없었다(1:26). 이 세상이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당연
한 결과였다. 물론 이 배후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깔려 있다.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 복음으로
사람들을 구원함으로써, 그리하여 세상에서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당하는 것들을 택함
으로써, 세상에서 “잘 나가는” 자들, 사람들 보기에 지혜롭고, 강하고, 존재감 있는 자들을 가치
를 폐기처분하셨다(1:27-28). 바울은 이런 불가해한 구원의 방식, 곧 일체의 인간적 조건을 무시
하는 이런 부르심을 은혜라는 말로 요약한다.
따라서 십자가로 부르심을 받은 십자가 공동체는 은혜의 원리에 의해 세상의 가치관이 뒤집히
는, 그러기에 세상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이 작용하는 은혜의 공간이 된다. 아니, 그런 은혜의
공간이 되었어야 했다. 여기에 바울의 답답함이 있다.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초대받은
사람들, 이를 통해 은혜의 선택을 경험한 자들은 새 생명의 원천이 십자가의 복음임을 알기에
생명과 무관한 세상의 가치들로부터는 자유로워야 했다. 돈이건, 세속적 지혜건, 권력이건, 혹은
사회경제적 영향력이건, 그 어떤 것들도 우리를 살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세력들에
아첨하는 삶을 그만두어야 했다. 하지만 고린도의 신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교회
바깥에서 먹히는 그런 인간적 가치들에 집착했고, 그런 가치들을 의존하며 서로 구별하며 서로
분열하였다. 바울은 세속적 가치들을 빌미로 서로 “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고린도의 신자들을
향해 “육적인” 존재들이라 부른다(3:1, 3).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39
복음을 전했고, 모욕을 당하면 도리어 축복하고, 박해를 받으면 인내하고, 비방을 받으면 그 사
람을 권면하였다(4;12-13). 이런 새 생명의 흔적들은 인간적인 가치들을 자랑하며, 이미 다 된
것처럼 우쭐해 하던 고린도인들의 삶에서는 찾을 수 없는 자태였다. 말하자면 고린도인들은 주
장은 화려했지만, 그들의 삶 속에 생명의 흔적은 없는 상황이었다. 말을 잘 했지만, 그 속에 십
자가의 능력을 확인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성도들에게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호소
한다(4:16). 무익하기 짝이 없는 인간적 가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런 것들로 서로를 구별하
며 “시기와 분쟁”을 일삼지 말고, 새로운 삶으로 드러나는 십자가의 능력을 보이라는 권고다
(4:19).
부정 속의 긍정
일견 바울의 삶은 통상적 의미에서 “삶의 긍정”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세속적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이 그려내는 신자들의 삶은 “세상에 가장 불쌍한 자들”의 삶에 가깝다(고전 15:**). 하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이런 행보는 무작정 삶을 부정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결코 염세주의자도,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삶을 긍정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무엇이 긍정할 만한 “삶”인지를 보다 선명한 시선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 보기에
그의 삶은 분명 삶보다 죽음에 가까웠지만, 그의 이런 죽음의 행보는 실상 참된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드러내려는 가장 지혜로운 선택의 결과였다. 바울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그가 언제
나 “예수의 죽음을 지고 다니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후 3:10).
그가 하루하루의 삶에서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겨지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는” 의도의 표현이었다(3:11). 삶을 부정하는 죽음의 행보가 아니라, 궁극적 삶을
긍정하기 위한 잠정적 부정, 혹은 참된 삶을 긍정하기 위한 거짓된 삶의 부정이었던 것이다.
Cf. 빌립보서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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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돈과 교회의 역사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교회사
배덕만 교수
강의를 시작하며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41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잠19:17). 십일조, 안식일, 그리고 희년이라는 구약의 제도들은 부
분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의 부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며,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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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의 도래에 대한 자신의 종말론적 기대감 때문에 말이다. 점차로, 초대교회는 부에 대한 불신
과 가난에 대한 찬미를 발전시켰다.
고리대업을 금지할 때, 교부들은 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특별히 가난한 자들은 돈
을 빌리는 경향이 있고, 탐욕스런 채권자들은 빈번히 그들을 노예로 삼거나 자살로 유도했다. 하지
만 교부들은 채무자들이 대출을 통해 이익을 얻은 경우, 이자의 도덕성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43
중세에, 우리는 빈곤문제를 완화하려는 교회의 합법적 시도들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중세교회위
원회는 자선행위를 일종의 수입세로 확대했다. 교회회원들은 자신들의 수입의 1/10을, 특별히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를 베풀기 위해, 주교에게 지불해야 했다.
4. 재세례파의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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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돈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개혁자들의 일반적 합의가 있었지만, 재세례파들은 중요한 반대
목소리였다. 다른 문제에서처럼 경제에서도, 재세례파들은 개혁자들이 충분한 개혁을 이루지 못
했다고 느꼈다. 메노 시몬스는 개혁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
결과, 그들의 복음을 안이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성례전을 “허무한 떡 떼기”(barren
breadbreaking)으로 만들었다.
시몬스에게,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돌봐야 한다는 급진적 의무를 담고 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3:17).
5. 청교도 윤리
베버의 논제는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칼빈 자신이 부를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자동적 징표로
간주하는 것을 경고했다. 우리는 하나님 섭리의 신비들을 파헤치려 해선 안된다. 결국, 그의 일
반은총에 의해, 하나님은 이교도들에게도 부를 허락한다. 청교도들은 부 안에 어떤 유전적 가치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45
를 발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대단히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리차드 박스터
(Richard Boxter)는 “세상이 가슴 속에 재산을 소유하는 곳에선,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을
저지르게 하고,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하고, 우리의 소명에 불충실하게 하고, 신앙 자체게 잘못을
범하게 한다.” 청교도들은 재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
게 인식하고 있었다. 당대의 물질주의에 대해 논평하면서, 코튼 매더(Cotton Mather)는 이렇게
썼다. “신앙은 부를 낳았고, 딸이 어머니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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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세상의 억압자요, 출애급과 성육신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들은 혁명적 행동을 위한 모델
을 제공한다. 즉, 권세자들을 쫓아내고, 가난한 자들을 해방시킬 때 하나님은 결정적으로 행동
한다. 많은 해방신학자들은 사유재산을 정죄한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적 비전 면에서 대체로 유
토피아적다.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가 인간적 이기주의를 극복한다.
7. 한국교회와 돈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47
과정에서 목회자와 돈의 직접적 접촉이 시작되었고, 이처럼 물질적 절대결핍 시대에 역설적으로
오순절적 부흥운동과 기도원운동이 현세적 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한국교회가 기
복신앙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강의를 마치며
하지만 시대와 문화의 변화와 함께, 교회에서 경제, 즉 돈에 대한 태도와 입장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교회는 돈의 현실적 필요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돈과 관련된 위험도 날카롭
게 인식하였기 때문에, 돈에 대해 매우 모호하고 이중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다. 이론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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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적 태도를 권장하고, 물질보다 영적 삶에 집중하도록 요구했으나, 정작 삶 자체는 돈, 부,
탐욕의 영향을 벗어난 적이 없다. 이런 경향은 자본주의 출현 이후, 더욱 가열되어, 자본이 신
의 자리를 차지한 현재, 교회는 자본주의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부를 거룩한 축복의 증거로
제시하며, 교회 스스로 부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따라서 자본과 부의 위험에 대한 예
언적 경고 대신, 자본주의의 혜택을 정당화하는 타락한 제사장적 태도가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
이다.
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49
기독교윤리
‘긍정의 힘’에 대한 신학적 비판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김동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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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신학캠프2010 Season 2 51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0 Season 2
펴낸날 2010년 7월 3일
펴낸곳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엮은이 기독연구원 느헤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