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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의 유산
트로츠키의 유산
제1부: 혁명으로 가는 긴 여정
러시아혁명과 내전
제2부: 러시아혁명의 퇴보
중국 혁명의 비극
제3부: 제4인터내셔널의 건설
재편과 입당전술
인민전선과 스페인 내전
“레닌과 나의 결별은 ‘도덕적’ 또는 개인적 이유로 발생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표면적으
로만 그랬다. 결국 이 결별은 정치적이었고 단순히 조직 방식의 영역에서 표현되었을 뿐이었
다. 나는 스스로를 중앙집중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체제에 대한 전쟁에서 수백만 대
중을 지도하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하고 강압적인 중앙집중주의를 혁명정당이 필요로 할 것인
가를 나는 그 당시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이 점은 매우 명백하다.“—트로츠키, 『나의 생
애』, 1930년
“자유주의 노동 정치꾼, 노동계급 운동의 방해꾼, 다수의 의지를 거부하는 자들과는, 연방적이
든 아니든, 통합은 있을 수 없다. 일관된 맑스주의자들, 맑스주의 사상을 온전히 지지하고, 깎
여나가지 않은 구호들을 지지하는 모든 분자들, 청산주의자들과 단절한 모든 분자들 사이에는
통합이 있을 수 있고 있어야한다.
“통합은 위대한 것이고 위대한 구호이다. 그러나 노동자 운동이 필요한 것은 맑스주의자들의
통합이지 맑스주의를 반대하고 왜곡시키는 자들과 맑스주의자들 사이의 통합이 아니다.”[강조
는 원저자]—「통합Unity」, 1914년 4월
차르 정부는 억압과 더불어 정치적 양보를 통해 혁명적 격동을 견뎌내었다. 헌법이 승인되었
고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외국은행에서 꾼 돈으로 차르 정부는, 결국 해산된, (‘두마’라고
불린) 의회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1905년의 여파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3개 진영으로 나뉘었다. 러시아는 자본주의 단계를
밟아야 한다고 믿는 멘셰비키,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민주주의 독재’를 전망하는 볼셰비키,
농민의 지지를 받는 노동계급 혁명이 당면 과제라는 ‘연속혁명’론을 제기하는 트로츠키가 그
들이었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권력을 잡기에 너무 왜소하므로 그렇게 하려는 모든 시도는 치명적 실수라
고 멘셰비키는 여겼다. 대신에 사회주의로 가는 ‘두 단계’ 중 첫 과정으로서 부르주아 자유주
의 분파와의 전략적 동맹(즉, 정치적 종속)을 구상했다.
레닌의 혁명적 노동계급과 농민의 ‘민주적’ 통치라는 생각은 추상적이고, 그것과 국제 사회주
의 혁명과의 연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나중에 이렇게 지적했다.
“예를 들어 만약 내일, 모로코가 프랑스에 대해, 인도가 영국에 대해, 페르시아나 중국이 러시
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다면, 선제공격을 누가 했는가에 관계없이, 그 전쟁은 ‘정당’하고 ‘방
어적’인 것이다.”―같은 책
러시아혁명과 내전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고 사상자가 쌓이고 경제가 망가지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1917년 즈음,
러시아 군대 1천5백만 병사 중 1천만 명이 포로가 되거나 중상을 입거나 죽거나 했다. 1917
년 2월 23일 국제여성의 날 이후 며칠 동안, 시위대들은 ‘빵!’ ‘독재타도!’ ‘전쟁종식!’을 외쳤
다(『러시아 혁명사』 7장의 ‘5일간’을 볼 것). 페트로그라드(페테르부르크) 경찰이 시위대에 총
격을 가하자, 노동자들은 1905년의 경험을 좇아 소비에트를 수립하였다. 2월 26일 차르가 페
트로그라드 군대에 봉기 진압을 명령했을 때, 병사들은 그 명령을 거부하고 시위대열에 합류
했다. 차르는 퇴위하였고, 정권은 붕괴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중권력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자신이 원치 않았던 혁명으로 권력에 올라
선 새로운 계급이 실제로는 이미 낡은 그래서 역사적으로 시효가 지난 계급이라면, 이 결과
이 계급이 공식적으로 권력을 넘겨받기도 전에 벌써 새로운 과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계
급이라면, 이 계급이 권력으로 밀려 올라간 순간, 충분히 성숙하여 권력을 도모하는 적대계급
과 마주칠 수 있다. 이때는 불안정한 이중권력보다 더 불안한 권력이 정치혁명으로 수립된다.
이중권력의 ‘무정부 상태’를 새로운 단계마다 극복하는 것이 혁명의 또는 반혁명의 과제이다.”
―『러시아 혁명사』, 11장 ‘이중권력’
…
“노동자 대표단의 소비에트가 혁명정부로서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라는 점을 대중에게 설명해
야 한다. …우리는 국가권력 전체가 노동자 대표단의 소비에트로 이전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
해 알려야 한다.”—「4월 테제」
“이 정식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다. 사태는 그것을 정식의 영역에서 현실의 영역으로 옮겨놓
았고 그것에 살과 뼈를 입혔으며 구체화시켰고 그리하여 그것을 수정했다.”
레닌의 강력한 정치적 권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볼셰비키 간부들은 그의 정책을 종파주의적
인 것으로 취급하였다. 오직 몇 주에 걸친 치열한 정치투쟁 이후에야 레닌은, 4월말에 열린
볼셰비키 총회에서 다수의 대의원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 정치적 재무장은 10월의 승리로 가
는 길목에서 결정적인 것이었다. 이후 몇 개월 동안 해결되어야 할 중요 문제들이 여전히 많
았지만, 「4월 테제」의 수용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가는 전략적 항로가 설정되었다.
임시정부는 노동자 농민의 요구뿐만 아니라 대지주와 자본가들의 요구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 얼마 안 가서 확인되었다. 인민들은 점점 더 러시아의 ‘이중권력’ 체제가 지속될 수 없다
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조만간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이동하여 소비에트와 반항적인 노동
운동을 쓸어버리는 군사독재가 수립되든지, 왼쪽으로 결정적으로 움직여 임시정부를 들어내고
그 자리에 노동계급 통치를 수립하든지 해야 했다. 중간 지대가 사라지자, 심화되는 사회양극
화는 한편으로는 볼셰비키 다른 한편으로는 군부의 반혁명분자들을 강화시켰다.
혁명이 유럽을 관통하여 10월 혁명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던 볼셰비키는 (교회, 귀족,
대지주에 대해서는 예외였지만) 유산계급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방대한 자본주의 기업들 대부분을 즉각 국유화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1918년 5월에
서야 방어조치로서 집행했다.
이 양보로 사회혁명당 좌파가 분개하여 정부에서 뛰쳐나가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이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건물을 폭파하여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가비상위원회Checka 수장인 펠릭스
제르진스키를 인질로 붙잡고, 모스크바 전화국을 장악하고, 독일 대사를 살해하고, 레닌에 총
격을 가했다(생존했으나 심각하게 부상당했다.). 볼셰비키는 사회혁명당 좌파를 불법화했다.
1918~1920년 사이 내전 기간 동안,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정권을 방어하기 위해 ‘적색 테러’
에 의존했다(「무정부주의자와의 대화」를 참고할 것). 그러한 조치들은 당장의 긴급한 위험으로
인한 임시방편으로 여겨졌다.
제2부: 러시아혁명의 퇴보
스탈린주의로의 퇴보 : ‘일국사회주의’
전쟁과 혁명의 시기에 러시아 노동계급은 많은 수가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완전히
탈진했다. 최상분자 상당수는 내전으로 죽거나 볼셰비키당과 소비에트 국가 기구로 들어갔다.
볼셰비키당은 ‘전시공산주의’(1918~1921)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행정 명령이 공장
에서 노동자 통제의 확대를 대신했고, 도심과 군으로 보내기 위해 농민으로부터 식량을 강제
로 징발해야 했다. 단기적으로 보면 전시공산주의는 백군과의 내전에서 적군이 이길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고립된 노동자국가 내에 새롭고 거대한 모순을 형성했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지도부는 노동자 국가의 관료주의적 기형화가 증대하고 있음을 고통
스럽게 인식하고 있었다. 1차 대전 후 신생 소비에트 국가에 가해지는 압력을 경감시킬 해외
혁명 봉기들이 실패했다. 이제는 제한된 내부 자원만으로 경제를 되살릴 방법을 찾아야했다.
1921년 3월 당 대회에서 볼셰비키는 (중앙 계획과 산업화 강화 또한 주장했던) 트로츠키의 제
안에 따라 전시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신경제정책(NEP)’으로 대체했다. NEP는 재산 소유 농업
생산자에게 세금을 매기는 것으로 강제 곡물징발을 대체했다. 불만에 찬 농민에 대한 이 양보
조치는 전쟁과 기근으로 몇 년간 거의 붕괴된 산업과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관료적 퇴보를 되돌리고 소련을 세계 혁명의 중심으로 복원하려는 운동으로
1923년 10월 ‘트로츠키주의’가 등장했다. 이는 ‘46인 선언’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주요 간부들
이 서명한 문서로, 몇 주 전 트로츠키가 주장한 것과 비슷하게, 관료화와 경제 실책 그리고
소련 공산당 내 민주주의 부재에 대한 구체적 비판을 담았다.
스탈린의 동맹이자 당내 좌파에서 우파로 이동한 니콜라이 부하린과 함께, 스탈린,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의 중앙지도부는 트로츠키를 비관주의자, 농민에게 적대적이고 외국의 혁명 모험을
위해 러시아 노동자국가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스탈린은 세계 혁명을 밀
쳐두고 ‘일국사회주의’의 건설을 내세운 보수적 전망을 제기했다.
일국에서 무계급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적 기획은 볼셰비키 전통으
로부터의 근본적 이탈이다. 새로운 교리가 발표되기 불과 6개월 전, 맥스 색트먼이 말한 바와
같이 스탈린은 『레닌주의의 기초(Foundations of Leninism)』 초판에서 정반대의 견해를 주
장했다.
중국 혁명의 비극
볼셰비키당은 1917년 레닌의 「4월 테제」 채택으로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포기하고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과 동일한 관점을 지지했다. 그러나 아직 트로츠키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없었던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에도 이 경험이 적용될 수
있다고 결론 내리지는 않았다.
이 대수적 공식은 인도나 중국과 같은 식민지 국가에서 부르주아 세력과의 다양한 형태의 협
력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1922년 제4차 대회에서 채택된 「동방문제에 관한 테제」는 식민지
세계에서 ‘모든 혁명적 인자들’과 더불어 ‘반제국주의 공동전선’ 수립 전략을 옹호했다. 이는
토착 자본가 계급의 ‘반제국주의’ 분파와 연합할 가능성을 암시한다.
“군벌과 제국주의에 맞선 과감한 투쟁을 통해, 무한의 혁명적 국민당은 실질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기관으로 될 것이다. 남경(南京)에 있는 장개석의 반혁명 조직은
노동자와 농민으로부터 스스로 떨어져나가 제국주의와 밀착하면서, 군벌들의 운명과 같은 길
을 걸을 것이다.
“‘민주주의 독재’는 혁명적 시기 부르주아의 은폐된 통치일 뿐이다. 1917년의 ‘이중 권력’ 경
험과 중국 국민당의 경험은 모두 이 점을 가르쳐 준다.
이후의 역사적 실천은 트로츠키의 분석이 옳음을 입증했고, ‘부르주아적 발전이 뒤처진(즉, 신
식민지)’ 나라들에서 제국주의로부터의 민족적 독립과 농업혁명(경작자에게 토지 분배)은 노동
권력을 위한 투쟁과 반드시 연결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여줬다.
1930년 초, 독일은 국제 정치무대의 중심에 있었다. 히틀러 나치당의 불길한 성장은 유럽에
새로운 암흑시대 도래를 알리고 있었다. 스탈린주의 이론가들의 혼란과 달리 파시즘에 대한
트로츠키의 명징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시작된다.
“파시즘은 단순히 보복, 노골적 폭력, 경찰 테러의 체제가 아니다. 부르주아 사회 내에서 노동
자 민주주의 요소들을 근절시킨 기초 위에 수립되는 특수한 지배체제이다. 파시즘의 임무는
공산주의 전위뿐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의 단결을 강제로 파괴하는 것이다. 이 임무를 위해서
는 노동계급의 가장 혁명적 부위를 전멸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독립적이고 자발적인 모
든 조직을 분쇄하고 노동계급의 방어적 진지를 모두 제거하고 사민당과 노동조합이 지난 75
년 동안 이룩한 모든 성과를 제거할 필요가 있다.”—「다음에는 무엇이?What Next?」, 1932년
1월 27일
1928년 독일 선거에서, 히틀러 나치당 지지는 3%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1929년 주식시장
붕괴 이후 경제가 곤두박질치자 1930년엔 18%, 1932년엔 37%를 득표했다. 이로써 국가사회
주의당[독일나치당]은 의회의 다수당이 되었으나, 부르주아지는 이 파시스트 폭도에게 국가기
구를 넘겨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32년 히틀러가 수상이 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국가수장이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 장군은 “그 자가 수상을? 나는 그 자를 우체국장에 임명해
내 얼굴이 있는 우표를 핥게 하지(The Second World War, Vol. 1, 1964, Winston S.
Churchill).”라고 비웃었다. 1932년 7월과 11월 사이 선거에서 나치당 지지는 2백 만 표가
떨어졌다. 절망한 베를린의 나치당 지도자 괴벨스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우리의 미래는
어둡고 음울하다. 기대와 희망은 거의 사라져버렸다(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William L. Shirer and Ron Rosenbaum).”
중국에서 패배하고 국내에선 쿨락이 폭동을 일으키자, 스탈린은 급격한 좌선회를 선언했다.
세계 자본주의가 종말을 향한 해체의 ‘제3기’에 진입했으며 그것이 코민테른 지부들에 혁명적
돌파구를 열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크렘린의 신호를 받아, 독일공산당은 독일 자본주의가 곧
붕괴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들이 권력을 잡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새 정책의 핵심 요소는 (여
전히 독일 노동계급 다수가 지지하는) 사회민주주의 개량주의와 파시스트가 ‘쌍둥이’라는 인식
에 있었다. 사회민주당이 사실상 ‘사회파시스트’(“말로는 사회주의이지만, 실상은 파시스트”)라
는 것이다. 나치당에 대항하여 사회민주당과 공동전선을 맺는 대신에, 독일공산당은 사회민주
당 평당원들에게 그들의 조직을 버리고 독일공산당이 이끄는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에 참여
하라고 호소했다(<1917> 3호에 실린 「‘제3기’라는 신화The Myth of the ‘Third Period’」,
<1917> 4호에 실린 「쌍둥이가 아니라 그 반대Not Twins, but Antipodes」를 참조할 것)
…
“사민당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반파시즘 동맹을 수립하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일 필요가
있다. 사민당 소속 노동자들에게, “사민당 지도부를 걷어차고 우리의 ‘무소속’ 공동전선에 참
여하자”고 단순히 권유해서는 결코 안 된다. 사민당 지도자들로부터 노동자들을 실제로 떼어
낼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현실은 반파시즘 투쟁을 요구하고 있다. 사민당 노동자
들의 일부는 사민당 조직의 요구와 관계없이 또는 요구에 반대하여 공산당 노동자들과 손을
잡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선진적인 노동자들과 가능한 한 가장 밀접하게 접
촉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현재 이런 노동자의 수는 많지 않다.
독일 노동자는 조직과 규율의 기풍 속에 성장해 왔는데 이 경향은 약점뿐 아니라 장점도 가지
고 있다. 사민당 노동자 절대 다수는 반파시즘 투쟁에 동참하고자 한다. 그러나 최소한 지금
이들은 사민당 조직을 통해 투쟁하려고 할 것이다. 이 단계는 생략될 수 없다. 노동자들의 생
사가 걸린 이 새롭고 특별한 상황에서 사민당 노동자들이 행동을 통해 자기 조직과 지도자들
을 시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
“공산당 노동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수십만 수백만 명이나 된다. 어디로도 도망갈 곳이 없다.
여권의 수는 턱없이 모자라 여러분에게 차례가 돌아올 수 없다.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장악하
면 무시무시한 탱크처럼 여러분의 두개골과 척추를 짓이길 것이다. 오직 가차 없는 투쟁을 통
해서만 여러분은 구원받을 수 있다. 그리고 사민당 노동자들과 공동으로 투쟁할 때만 승리는
여러분의 것이 될 것이다.” —트로츠키, 「반파시즘 노동자공동전선을 위하여」, 1931년 12월
1932년 9월, 독일공산당 지도자 에른스트 텔만은 노동자 공동전선이라는 생각에 이와 같이
답했다.
10년 전 코민테른 4차 대회에서 채택한 (트로츠키가 초안을 잡은) 공동전선 문서는 나치당의
위험에 직면하여 국제 좌익반대파가 제기한 바로 그 접근법의 개요를 담고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깃발 주변에 모여든 노동대중이나 우리의 지금의 구호에 호응하는 노동대
중만 단결시키고, 당이건 노동조합이건 개량주의 조직을 무시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세
계에서 가장 훌륭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공동전선이라는 문제는 그런 조건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문제는 이렇게 제기된다. 노동계급의 상당히 중요한 부위가 개량주의 조직에 속해 있거나 그
를 지지한다. 그들의 현재 경험은 개량주의 조직과 단절하여 우리에 가입하기에 아직 충분하
지 않다. 일정에 오른 대중 행동에 개입한 이후에야 의미 있는 변화가 이 관계 속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애써 얻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가 되지 않았다.
…
“이론적으로, 독일공산당의 붕괴는 스탈린주의 관료에 두 경로를 제기한다. 그 정치에 대한
완전한 재평가 또는 그 반대로 코민테른 지부들에서 모든 생명력을 말살하는 것이 그것이다.
독일의 새 정당 건설 구호를 제기한 이후[1933년 3월]에도, 좌익반대파는 이러한 전망으로 사
태를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코민테른의 운명에 대한 문제를 열어놓고 있다.
재편과 입당전술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ICL의 일관된 혁명적 정치노선은 때때로 중요한 기회들을 제공했으
며, 그 기회를 적극 이용하였다.
혁명가는 노동당 대중들과 결합되어 있어야하며, 모범적 활동을 통해서 보다 좌익적 인자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 통합 찬성의 근거였다. 입당은 비혁명적 조직 내에서 대대적 좌경화가
일어나는 상황에서만 효과적인 전술이다. 입당은 장기 전략이 될 수 없다. 장기 입당은 카우
츠키주의적 ‘계급 전체의 당’ 개념으로 회귀와 레닌주의 포기를 의미한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량주의 중도주의 정당으로의 입당은 그 자체로는 장기적 전망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 단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 어떤 조건 하에서의 한 단계일 뿐이다.”(「프랑스사회당
입당의 교훈」, 1935년 12월 30일
노동계급이 약진하던 1934년 8월, 프랑스 ICL 회원들은 사회당에 입당했다. 당의 우익은 바
로 직전 탈당했으며, 지도부는 사회당에 들어와 사회주의를 위해 싸울 것을 모든 혁명가들에
게 촉구하며 급격하게 왼쪽으로 움직였다. 사회당 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볼셰비키-레닌주의
그룹」이라는 분파를 형성했고 <진실>이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입당 기간 동안 내부 불화가 있
었음에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1936년 초 사회당을 탈퇴할 때, 상당한 수의 청년 사회주의자
들이 함께 했고, 프랑스 지부는 3배 이상 불어났다.
…
사회당은 변두리로 밀려났는데, 우리가 사회당 안에서 활동하고 내부 투쟁을 벌인 것이 그 원
인 가운데 하나였다. 혁명정당 건설 과정에서 사회당은 장애물이기 때문에, 그것은 커다란 성
취였다. 문제는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것만이 아니다. 혁명정당 건설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장
애물을 제거하는 것도 과제이다. 다른 모든 당은 경쟁자이고 장애물이다.”―『미국트로츠키주의
의 역사』, 제임스 P. 캐넌, 1972년
인민전선과 스페인 내전
이 혁명적 분출은 모스크바를 놀라게 했다. 1935년 8월 코민테른 7차 대회가 채택한 착취자
들과의 ‘연합unity’이라는 국제전략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코민테른 서기장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그 전략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전략과 명백하게 대치되는
것이었다.
1936년 9월, 사회당 지도자 라르고 카바예로가 수상에 취임했을 때, 공산당의 주요 대표자 두
명이 그의 내각에 입각했다. 빈센트 우리베가 농업부 장관이 되고, 헤수스 에르난데스가 교육
부 장관이 된 것이다. 한 달 전에 에르난데스는 당 기관지 <노동자 세상>에서 공산당이 사회
혁명에 관한 어떠한 것에도 반대함을 분명하게 설명한 바 있었다.
1936년의 자생적 봉기는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형성된 ‘이중권력’과 유사한, 극도로 불안정
한 정세를 조성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자생적으로 떨쳐 일어난 대
중을 승리로 이끌 수준의 혁명정당이 없었다는 점이다.
프랑코 격퇴와 내전 승리라는 시급한 임무를 위해서, 스페인 자본가들 중 민주적 일부와의 동
맹이 필수적이었다고 스탈린주의자들은 주장한다.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즘
중 분명히 선택”해야 한다는 디미트로프 테제를 거부하며, 트로츠키는 볼셰비키의 경험을 다
시 상기시켰다.
“‘우리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독재에도 반대했기 때문
에 [1936년 7월 또는 1937년 5월에] 권력을 잡지 않았다’는 따위의 자기 합리화는 그 자체로
무정부주의가 완전히 반(反)혁명적 교의라는 최종적인 선고와 같다. 권력 장악을 포기하는 것
은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착취자들에게 권력을 자진해서 맡기는 것이다. 모든 혁명의 핵심은
새로운 계급을 권력에 올려놓음으로써, 이 계급이 자신의 강령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는 데에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전쟁을 수행하고 나서 승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권력
장악을 준비하지 않고 대중을 봉기로 이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대신에 새로운 혁명가 세대가 지금 패배의 교훈을 배우고 있다. 이 세대는 투쟁 속에서
제2인터내셔널의 수치스러운 명성을 확인했다. 이들은 제3인터내셔널의 몰락의 깊이를 재봤
다. 이들은 무정부주의자를 그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판단하는 법을 배웠다. 이것은 무수
한 투사들의 희생을 대가로 치른 더할 나위 없이 귀한 위대한 수업이다! 혁명 중핵들은 지금,
오직 제4인터내셔널의 기치 하에서만 결집하고 있다. 패배의 굉음 속에서 태어난 제4인터내셔
널은 노동자들을 승리로 이끌 것이다.”―같은 글
제4인터내셔널: 레닌주의 전위의 재무장
“소비에트는 대중운동이 공공연히 혁명적 단계에 들어선 시점에서만 등장할 수 있다. 처음부
터 소비에트는 착취자에 대항하는 수백만 근로인민의 투쟁 구심이 되어 지방정부와 중앙정부
에 도전하고 이들과 경쟁한다. 공장위원회가 공장 내에서 이중권력을 조성한다면 소비에트는
전국적 이중권력 시기를 개막한다.
“소련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중간에 위치한 모순적 사회체제이다. 특징을 살펴보면, (1) 국가
소유에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여하기에는 생산력이 아직 너무 낮다; (2) 궁핍으로 인하여 자본
주의적 본원적 축적 경향이 계획경제의 수많은 숨구멍을 통해 솟아나고 있다; (3)부르주아적
성격의 분배 규범이 새로운 사회분화의 기초가 되고 있다; (4) 경제성장은 근로인민의 상황을
호전시키고 있지만 특권층의 급속한 형성을 촉진하고 있다; (5) 사회적 적대관계를 활용하면서
관료집단은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독립적 계층으로 전환했다; (6) 사회혁명은 지배정당에 의해
배신당했지만 소유관계와 근로대중의 의식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7) 모순이 더 축적될 경우
소련은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도 있고 자본주의로 다시 후퇴할 수도 있다; (8) 자본주의 복귀를
위한 반혁명은 노동자의 저항으로 분쇄되어야 한다; (9) 사회주의로 나아갈 경우 노동자들은
관료집단을 타도해야한다. 결국 소련의 사회성격은 국내외의 살아 움직이는 사회세력 사이 투
쟁에 의해 최종 결정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도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간주할 수 없다. 소련의 전쟁 참여는 전쟁의 제국주의
적 성격에 전적으로 종속될 것이다. 따라서 (이 전쟁은) 소련에 그나마 남아있는 사회주의 경
제체제를 방어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할 것이다.”—「전쟁의 성격」, 1939년 9월 5일, 『맑스주의
를 옹호하며』에 인용됨
한 달 뒤 개최된 총회에서 색트먼은 소련의 폴란드 침공은 “제국주의 정책”에 기초한 행위로
서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 방어노선 수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같은 책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