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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서론

신 학 서 론
문병호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제 1편 신학서론

제 1장 신학이란 무엇인가?
1. 신학의 세 측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 나를 아는 지식, 계시

신학이라는 말은 중세 신학자 Peter Abelard(1079-1142)가 그의 저서


Theologia Christiana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신학은 Francis Turretin이 말한
바 “존재로서, 하나님; 인식으로서, 그 분의 말씀”(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1.2)을 포함한다.

신학은 qeov§(being, esse)와 lovgo§(knowing, cognitio)의 합성어이다.


어원상 이 단어는 “하나님에 관한(about) 말씀뿐만 아니라 하나님의(of) 말씀”
즉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가진 지식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께서 가지신
지식”을 포함한다 (Kuyper, Principles of Sacred Theology, 230). Augustine은
신학을 “신성에 관한 이치 혹은 말씀(de divinitate ratio sive sermo)”이라고
정의한다(De civitate Dei, 8.1). Thomas Aquinas가 말했듯이, “신학은 하나님에
의해서 가르쳐지며,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이끈다(Theologia a Deo
docetur, Deum docet, et ad Deum ducit)” (Summa Theologia 1.1.7).

신학(qeologiva)이라는 말은 원래 헬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들의


시들(poetry)을 의미하는 단어였으며, 이후 이러한 시들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의미했으며, 궁극적으로 이와 같은 자료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지적이며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가르침을 의미하게 되었다. Aristotle은 철학을
물리학, 수학, 신학으로 삼분하고 신학을 제 일 철학이라고 불렀다. 이 경우
신학은 형이상학에 적용되는 말이었다.

동방 교부들은 신학(qeologiva)이라는 단어를 그리스도의


신성(divinitas)을 다루는 기독교 학문의 한 부분을 칭한다고 좁게 파악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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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 있었다. 특히 갑파도기아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다루는


theologia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다루는 oikonomia를 구분했다. 그러나
대체로 라틴 신학자들은 theologia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와 관련된
계시에 관한 지식으로 이해했다(Kuyper, Principles of Sacred Theology, 235).

대부분 신학자들은 신학을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관한 교리의


총화로 본다: “신학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계시하신 자신과 자신의 사역에 관한 교리의 체계 혹은 그
전체(corpus)이다”(Turretin, 1.2). 신학은 하나님의 존재(existentia)—혹은
인격(persona)—와 사역(opera)에 대한 계시 지식(cognitio sive scientia sive sensus
revelationis)을 종합화, 체계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것이다.

C. Hodge: “만약 자연 과학이 자연의 사실들과 법칙들에 관계된다고


한다면 신학은 성경의 사실들과 원리들에 관계된다. 전자의 목적은 외부적인
사실들을 정리하고 조직화하는 것이며 그것들이 결정되는 법칙들을
확정하는 것이다. 후자의 목적은 성경의 사실들을 조직화하며 그 사실들이
연관된 원리들과 일반적 진리들을 확정하는 것(to systematize the facts of the
Bible, and ascertain the principles or general truths which those facts
involve)이다”(1.18). “조직신학의 직분은 성경적 사실들을 밝히고 그들의
조화와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취하고 그것들
상호간의 관계와 관련 진리들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다(to take those facts,
determine their relation to each other and to other cognate truths, as well as to vindicate
them and show their harmony and consistency”(1.1-2).

B. B. Warfield: “신학은 말 그대로 하나님에 관한 조직화된 지식(the


systematized knowledge of God)이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그
분에 관한 지식이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그 무엇이라면, 그 분에 관한
조직적인 지식(a systematic knowledge of Him)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신학’이라는 단어가 고유하게 품고 있는 함축적인 의미이다.” (Warfield, 9.96,
cf. C. Hodge, 1.2-3).

워필드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다음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한다.


1) “신학이 학문이라는 단언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that
God is)과 그 분께서 그 분의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고 계신다는 사실(that He
has relation to His creatures)에 대한 단언(affirmation)을 전제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계시지 아니하신다면 신학은 존재 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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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께서 존재하신다고 하더라도 그 분께서 그 분의 피조물들과의 관계 밖에


계신다면 신학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적인 변증(philosophical
apologetics)의 전체 실체는 과학적 신학의 구조 안에서 전제되며 그것의
근저(根底)를 형성한다.”

2) “신학이 학문이라는 단언은 사람은 종교적인 본성, 즉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that God is)뿐만 아니라 어느 한도에서 그 분께서
누구신지(what He is)를 이해할 수 있는 본성, 그 분께서 그 분의
피조물들과의 관계들 속에 계신다는 사실(that He stands in relations with His
creatures)뿐만 아니라 그 관계들이 무엇인지를(what those relations are)
이해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단언을 전제한다.”

3) “신학이 학문이라는 단언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이 사람들의


마음 앞에 제시되는 교통의 수단들이(media of communication)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그것들을 인식할 수 있으며, 인식하는 가운데 이해할 수 있다는
단언을 전제한다.” (9.55-56).

“달리 말하면, 우리가 신학을 학문이라고 확정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의 실재뿐만 아니라 그 분을 이해하는 한(限)의 능력을(the reality
of God’s existence and our capacity so far to understand Him) 확정할
뿐만 아니라 그 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지도록 하신다는
사실(that He has made Himself known to us)을 확정한다. 우리는 계시의
객관적 실재(the objective reality of a revelation)를 확정한다” (9.56).

신학의 prolegomena를 다루면서 워필드는 하나님, 사람 그리고 계시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데 이는 칼빈이 기독교 강요(1559) 제 일
권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 그리고 계시(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서 성경)를 다룬 것과 일맥상통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revelatio Dei ipsius)에


의존한다. 신학의 대상은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이며 하나님을 궁구함으로써
이르고자 하는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마 11:27; 고전 2:10 ff.).
신학함은 대상을 대상으로부터 흘러 나온 지식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즉,
신학의 목표는 대상에 관한 지식과 대상으로부터 주어진 지식을 일치시키는
것이며, 그 일치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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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이며, 또한 스스로 신학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신학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한도에서 신학을 한다(doing theology).

다른 모든 학문은 학문의 주체에 의해서 이성적이거나 경험적으로


고찰되고 정리된 대상에 관한 지식을 지향한다. 그러나 신학은 대상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냄—계시(revelatio)—에 의해서
드러난—계시된(revelatus)—지식에 근거하여 신학하며 그것을 목표로 삼는다.
계시(revelatio)는 발견이나 발명과 다르다(라틴어 어원상 inventus는 이 두
가지 의미를 함유한다). 참으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식—계시이다(라틴어 de는 대상과 기원을 동시에 표현한다).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그러므로 신학에 있어서 대상과 지식은 수렴할
뿐만 아니라 일치한다. 왜냐하면 계시의 정점(culmen)이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 Chrisiti), 육신에 나타나신 하나님(Deus manifestatus in carne),
우리 속에 계신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이 그의 영이시기 때문이다(요
14:16-17, 26; 15:26; 16:13-15; 17:17-19; 롬 8:9, 14-16, 갈 2:20; 4:6).

그러므로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식인 계시에 한정된다. 계시를 넘어서서 신학을 할 수 없다. 신학은
계시에 의존하는 학문이다. 계시는 창조주인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지식이기 때문에 계시는 오직 믿음으로만 수납 된다.
계시를 믿음으로 수납(受納)함이 신학함의 요체(要諦)이다. 믿음은 단지
지식의 자료이거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지식을 얻는 행위이다: “믿음이
지식의 자료가 아니라 지식의 기관(not the source but the organ of knowledge)일
진대, 계시는—비록 배타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진리를 알리고,
하나님에 관한 사상들을 나누는데 있다. 그것은 선포일 뿐만 아니라
영감이며 행위-계시일 뿐만 아니라 말씀-계시이다(not only manifestation but also
inspiration, not only deed-revelation but also word revelation)”(Bavinck, Reformed
Dogmatics, 1.41). 그러므로 “신앙의 원리들은(principia fidei) 그 자체로 신앙의
조항들(articuli fidei)이다. 그것들은 인간적인 논증들과 증거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기초해 있다”(RD. 1.109).

부활 후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향해서 주님께서 던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세 번째 질문에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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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다. 이는 신학함이


어떠해야 함의 단면을 보여 준다. 베드로가 근심했다는 것은 그가 이성적 판단에서
신앙적 판단으로 돌이켰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성적 논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개방되어 있으나 하나님께는 폐쇄되어 있다. 그러나 신앙적 논리는 하나님께는
개방되어 있으나 자기 자신에게는 폐쇄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순종이
있으며, 이성에는 방종이 따른다. 신앙의 세계는 지식의 주체가 지식의 객체에
무릎을 꿇고 의지하는 것이다. 나의 지식 자체를 지식의 대상인 하나님께서만이
아신다는 고백이 신앙의 고백이다. 이 때 신학자의 삶은 신앙인의 삶을 구현해서
하나님께 띠 띠고 살게 된다(요 21:17-19). 하나님의 섭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수납된다. “. . .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띠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3‐6). 귀로 들음은 이성적인 것이며, 눈으로 봄은 신앙적인
것이다. 이성은 지각과 판단을 통하여서 그를 아는 것이나, 신앙은 그를 봄으로써
그를 알고 이로써 그에 관한 지각에 이르는 것이다.

타락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인류로부터 그의 형상(imago Dei)을 완전히


지워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들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sensus divinitatis)과
종교의 씨앗(semen religionis)과 양심(conscientia)의 불씨들(scintillae)을 남겨
두셨다. 자연인은 일반은총을 입어서 만물의 영장으로서 고상한 문화활동을
하고 살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두더지”보다도 더 눈이 멀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는 사람에게만 아들이 거하며 아들이 거하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라”(요 17:26).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ajgapa')/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으니라(e[gnwstai')”(고전 8:2-3).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오직 성령으로 영감(inspiratio)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조명(illuminatio)으로 감화(persuasio)된 심령으로 믿음으로써
수납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계시로서
수납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notitia vera Dei)은 모두 성령에
의해서 감화된 지식(notitia persuasa Spiritu Sanctu)이며 은밀한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감화된 심령 가운데 믿음으로만 받는다. 신학은 믿음으로 이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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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는 것이지 이해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faith seeking understanding,


fides quaerens intellectum). 오직 신학은 믿음으로 하며 믿음으로 중생된
이성(ratio conversa)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종합화하고 체계화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그러므로 신학의 대상은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계시이며, 신학의


방법은 믿음으로 신학함이며, 신학의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온전함에
이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신학의 대상이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계시임은 신학의 중심이 로고스이며 그 절정이 로고스의
성육신—Deus manifestatus in carne—임을 말해준다. 신학은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신 지식에 국한된다. 하나님은 마치 유모가 아이에게 옹알이를 하듯이
인류에게 자신을 맞추심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Calvin, Inst. 1.13.1).

하나님께서 인격(a person)이실진대, 그것은 그 분께서는 오직 그


분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표현하시는 한에 있어서 알려지실 수
있다는 엄격한 필연성에(by stringent necessity, that He can be known only
so far as He reveals or expresses Himself) 따른다. 그리고 단지 그것은
만약 계시가 없다면 지식도 없고, 물론, 하나님에 관한 조직화된
지식이나 과학적 지식도 없다는 사실(that if there be no revelation, there
can be no knowledge, and, of course, no systematized knowledge or science
of God)을 역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사상에 있어서와 추론에
있어서 그 분께 가 닿는 것은 오직 그 분께서 낮추셔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질 만하게 하시고, 말씀의 사역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이야기 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기 위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만하게 낮추어 주시기 때문이다(only because He
condescends to make himself intelligible to us, to speak to us through work
of word, to reveal Himself). (Warfield, 9.58).

하나님의 맞추심(accommodatio Dei): 하나님은 아버지, 의사, 교사 등의


은유로 자주 표현되지만 또한 이방의 적(敵)으로도 나타난다. 하나님의 백성의 적은
하나님의 적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대적하신다.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시 35:1).
최고의 맞추심은(accommodation par excellence)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그의 백성의 자리에 까지 내려 오셔서 그들을 은혜로서
높이신다. 그리고 그 높이신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셔서 맞추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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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중보자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의의 전가를


통하여서 자신을 낮추시고 맞추셔서 받아 주신다. 이것이 은혜 중의 은혜이다.

Herman Bavinck는 이성주의(rationalism)로부터 비롯된


관념주의(idealism)와 경험주의(empiricism)로부터 비롯된
물질주의(materialism)를 실재론(realism)의 입장에서 비판하면서 실재의
원인과 기반에 대한 지식 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근본 원리를 의미하는
principium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신학에 적용해서 그 학문적 기초를
1 2
논한다(RD 1.89, 210 ff.). 그는 신학의 tres principia를 다음과 같이 개진한다.

하나님의 자기지식(self-knowledge)과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은 그


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근원이다(the source of our knowledge of him).
하나님의 자기의식이 없다면 그 분의 피조물들 가운데 그 분을 아는
지식이 없다. . . . 하나님의 자기지식과 우리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의 관계는, 전자는 후자에 대하여 원형적(archetypal)이며 후자는
전자에 대해서 모형적(ectypal)이라고 상례적으로 일컬어졌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수준에서


피조물의 방식으로 스스로 지니신 지식의 각인(刻印)이다. 피조물
가운데 현재(顯在)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사람이나 피조물의
의식의 능력에 맞추어 주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기의식에 대한 어느
정도의 유사함 그리고 유한하고 제한된 스케치(only a weak likeness, a
finite, limited sketch, of the absolute self-consciousness of God accommodated
to the capacities of the human or creaturely consciousness)이다

. . . . 따라서 신학의 원리(the principle of theology)는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계시 혹은 자기 교통(the self-revelation or
self-communication of God to his creatures)이다. . . . 결국, 신학의 목적은
이성적인 피조물이 하나님을 아는 것 그리고 그 분을 앎으로 그 분을

1 성경은 단지 fons(source)가 아니라 principium(foundation 혹은 principle)이다.


전자는 성경을 교회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the church)의 자료로 보는 카톨릭 신학자들의
관점이며 후자는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완전 축자 영감과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수납을 sola Scriptura 원리로서 전개하는 관점이다. 카이퍼, 바빙크, 워필드
등은 이를 principia theologiae로 체계화한다.
2 바빙크는 실재론의 입장을 지지함에 있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지주의(intellectualism)를 거론하고(RD 1.232) 종교의 기반을 다룸에 있어서 경건과 예배를
강조하며 이를 슐라이엘마허의 신앙 개념과 연결하는듯한 태도(RD 1.242-243)를 취하는데
이는 깊이 논의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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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롭게 하는 것이다(잠 16:4; 롬 11:36; 고전 8:6; 골 3:17). 사람들에


의해서 알려지시는 것이(마 11:25, 26) 그 분의 선한 기쁨(eujdokia)이다.
. . . 내적인 말씀(verbum internum)은 주요한 말씀(verbum principale)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때문이다. 이 지식이 모든 신학의 목적, 참으로 하나님의 전체
자기계시의 목적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인 외적인 말씀은 이러한
연결을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도구적인 말씀(verbum
instrumentale)으로서 아마도 이러한 경륜에 있어서 역사하게 될 모든
종류들의 이차적인 원인들을 위하여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본성상
여전히 예비적이며, 일시적이며, 사건적(provisional, temporary, and
incidental)이다.

이렇듯, 우리는 세 가지 원리들을(principia)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


존재의 원리(principium essendi)로서 하나님께서는 신학의
근원(source)이 되신다; 둘째, 외적 인식의 원리 (principium
cognoscendi externum)로서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한(限) 도구적이고 일시적인 성격을 띤다; 마지막으로,
내적 인식의 원리 (principium cognoscendi internum)로서 하나님의
영에 의한 사람들의 조명이다.

이 세 가지는 그것들이 모두 하나님을 저자로 두었다는 점에서와


그것들의 내용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동일한 지식을 지닌다는 점에서
하나이다. 하나님에 대한 원형적 지식(the archetypal knowledge of
God)은 하나님 의식에 있다; 하나님에 대한 모형적 지식은 계시에
부여되며 성경에 기록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세 가지 원리들에
있어서 그 주체는—그것이 계시로부터 나와서 사람의 의식으로
들어간다는 측면에서—공히 하나님이시다. 자신의 자기지식을
드러내시고, 그것을 계시를 통하여서 교통하시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리고 질료적 측면에
있어서(materially) 세 가지 원리들은 하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소유하시고, 계시 가운데 교통하시며,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전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하나의 동일하고, 순수하며, 참된
지식이기 때문이다. . . . 구별되나 본질상 하나인(distinct yet essentially
one)이 세 가지 원리들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in the trinitarian
being of God)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말씀으로서 로고스를 통하여서
성령 가운데 자신을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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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시다(It is the Father who, through the Son as Logos, imparts himself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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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creatures in the Spirit)”(RD 1.212-214).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의 이성과 추론과 경험에 가둘 수는 없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중보자의 은혜 가운데 살게 하시며
성령으로 계속적인 교통을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만이 믿음으로서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지식은 이성(데카르트)과
경험(로크)과 경험에 대한 이성적 비판(칸트)과 회의(흄)를 넘어서며,
아래로부터 올라가는 신의존 감정(슐라이엘마허)이나 도덕적 공동 가치에
대한 종교적 해석(리츌)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기 때문에 실존적인 부딪힘이 있기 전에 스스로 계시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인 성경은 곧 하나님의 계시이다(be).
그러므로 실존적인 의미 있는 말씀만이 계시가 된다(becoming)는
주장이나(바르트), 더 나아가서 말씀을 받는 자가 신화(deificatio) 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가 계시답게 된다(becoming)고 보는 견해(라아너)는 극복된다.

[데카르트]

철학을 나무에 비유해서 뿌리는 형이상학이고 둥치는 자연학(수학,


물리학 등)이며 큰 가지 셋은 의학, 기계학, 도덕학으로 보았다. 그는 학문의
유기성을 강조했으며 모든 학문은 “자연의 빛”인 “이성(ratio)”을 통해서
동일한 방법으로 “과학적 지식”에 이른다고 보았다. 학문의 방법으로서 모든
것을 철저히 의심하며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한 것만을 참으로
인정하라는 명증성의 법칙을 강조했다.
데카르트는 내가 지금 있다는 것은 지금 나는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 외에 다른 존재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정신만을 나(ego)의
본질적 요소라고 보았다. 나의 존재를 이성으로 회의하는 주체로 파악해서
부동의 중심성을 확보한 그는 신존재를 cogito ergo sum(我思故我在)이라는
명증적 법칙에 기반해서 증명하려고 했다: “나는 생각하는 존재이므로 나를
가능케 하는 자도 생각하는 존재여야 한다. 내 안의 신의 관념이 있으므로
나의 존재를 가능케 하고 지탱해 주는 것도 신의 관념 안에 있는 모든
완전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신적인 완전성을 소유한 것은 신 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오직

3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빙크는 신학의 방법은 종합적-발생적(synthetic-genetic)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RD 1.9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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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죄인으로서의 나’와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의
인식에는 이를 수 없었다. 그리고 위의 논증에서 보듯이
인식론적으로는(epistemologically) 나로부터 하나님에 이르고,
존재적으로는(ontologically) 하나님으로부터 나에 이르는 두 기반의 모순을
공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데카르트는 Anselm의 존재론적 논증을 따랐으며,
이 논증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존재(existence)와 실체(substance)를
동일시 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논증된 하나님의 존재의 실체가 사유하는
인간의 배후로 들어 간다. 그리하여 인간은 회의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서
회의를 극복한다고 한다.

[헤겔]

이와 같이 주관적 이성주의(subjective rationalism)는 필연적으로


절대적이며 객관적 이성주의(absolute and objective rationalism)에
이른다(Bavinck, RD 1.217-218). 데카르트의 후예들인 피히테, 셀링, 헤겔을
거쳐서 주창된 관념론(idealism)이 이를 말한다: “지식뿐만 아니라 존재,
이념들 뿐만 아니라 사물들 자체가 생각으로부터 발현되었다. 생각과 존재가,
그러므로, 하나이다(metaphysical idealism)”(RD 215).
헤겔은 관념론을 극단화하여 존재를 사유에, 종교를 철학에
복속시킨다. “생각은 존재를 낳는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 사상을 생성의 사상, 진화의 사상(the idea of
becoming, of evolution)과 연합시킨다. 존재하고 있는 사상이 실현되는 것은
점차적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일어난다. 그러한 종류의 생각은 사람들
가운데서 먼저 의식을 이룬다. 그러나 가장 낮은 단계에서, 자연적 단계에서,
유한한 마음으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분리되었음을 느낀다. 종교
가운데, 특히 기독교 종교 가운데, 그 분리는 극복된다: 하나님과 사람은
하나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하나임은 그것이 모든 종교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종교에 타당하게는 표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회화적
표상과 감정이라는 형태들로 가리워졌다. 오직 철학에서 그 사상은 관념적
형태 가운데 적당한 표현을 발견하고 절대 지식, 하나님에 대한 인성의 지식,
4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지식이 된다”(RD 166).

4 헤겔은 논리, 자연, 영의 세 요소로 철학을 수립한다. 논리(logic)는 개념들과


그것들의 관계를 모두 포함하는 전체로서의 절대 이념(Absolute Idea)을 다룬다. 그리고 이
절대 이념이 구현되는 곳으로서 자연(nature)을 다룬다. 자연은 실재가 펼쳐지는 곳이다.
영(Spirit)은 절대 이념과 자연을 모두 포함한다. 영은 우리의 모든 의식을 심층적으로
다루고 의식의 대상인 객관적인 사물들과의 관계를 다룬다. 절대 이념이 점진적으로
◈ 조직신학서론

[로크]

로크도 우리가 감각적 인식(sense perception)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사물을 아는 것이 아니라 개념(idea)이라고 하는 감각의 표상(representation)을
통해서 안다는 데카르트의 입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로크는 감각적 경험에
기반하지 않는 이성의 작용(reasoning)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절대적·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내적 혹은 생래적 개념(internal or innate idea)에 이를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감각적 인식을 통해서
사물의 실체나 원리를 알 수 있는 개연성(probability)마저 박탈했다고 로크는
비난한다.
“내가 보기에 지식이란 관념들의 결합과 일치 또는 불일치와 모순에
대한 지각(praeceptio=prae+capio)이다. 지식은 오직 이것만으로 성립한다. 이
지각이 있는 곳에 지식이 있고 이 지각이 없는 곳에는 상상이나 추측 또는
믿음이 있을지라도 지식은 없다.”
로크는 믿음에는 인식적인 의무가 따른다고 본다. 이성은 믿음의
원천이나 기초가 아니라 안내자이다. 1) 믿음에는 증거가 확실해야 한다. 2)
증거를 통하여서 명제의 참과 거짓을 검토해야 한다. 3) 개연성의 정도에
따라 그 명제를 좀더 굳건하게 또는 덜 굳건하게 믿어야 한다. 로크는
기독교와 같은 계시 종교는 그것의 증거와 개연성이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에 서로 배타적인 믿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랑과 용서, 관용과 평화의 덕목을 실천하는 것으로
보았다.

[흄]

데카르트가 이성 자체의 인식능력에 따른 절대적 방법적 회의를


말했다면, 흄은 이성의 지각으로 인식능력이 작동해서 지식을 획득하는
방식을 관찰해 본 후의 비판적 회의를 말했다. 데카르트가 회의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그 실체를 명증하게 인식하고 이로부터
하나님을 인식하는 이성의 존재와 작용에 대한 확신에 이르렀다면, 흄은

구현됨에 따라서 우리의 영에 내재한 목적(an inner telos)이 펼쳐지고 깨달아지듯이 논리나
자연이나 역사도 그러하다. 비록 무한한 절대 영 혹은 절대 마음이 우리의 영과 같지는
않지만 그것들의 불명확한 일체성(an implicit unity)은 역사 가운데 점점 명확해 진다(explicit).
절대 영은 세 영역으로 우리의 영 가운데 나타난다: “art, religion, philosophy. Artistic expressions
communicate more on the level of feeling; religion expresses the truth in sensible representations;
philosophy expresses the truth conceptually or in the form of reason.” Cf. Diogenes Allen, Philosophy for
Understanding Theology (Atlanta: John Knox, 1985), 221-242.

11
◈ 조직신학서론

철저하게 경험론에 기반한 비판적인 추론을 통하여서 “영혼”이나 “자아”는


주관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흄이 자아를 여전히 “지각”이라는 의식을 통해서 파악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데카르트적이며, 나의 의식, 나의 지각은 나의 신체를 통해서
경험하고 의식한 것들이고, 굳이 이것들을 하나의 총체 혹은 체계로
통합하는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는 반데카르트적이다. 흄은
존재 증명을 통해서 데카르트가 이른 인식론과 실재론의 일치—사실상 서로
상반되는—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로크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회의했다. 그는 이전의 인상(impression)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표상으로서의 개념(idea)에 이르는 감각적 인식은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인상과 개념 사이에 필연성이 없으며 우연(causality)이 지배한다고 보았다.
5
이 우연은 지각될 수 없으며 알 수 없다. 다만 경험될 뿐이다.
흄은 종교를 좀더 역사적으로 파악해서 자연종교는 다신교적이었나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열정(passions)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마지막에는
계몽적인 단일신교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을 증명함에 있어서
인간 이성에 회의적일 뿐 아니라 신적인 이성(a divine reason)도 전제하지
않는다. 다만 가장 우월한 이성(a supreme reason)을 전제로 한
구도(design)만이 있음을 말한다.
인간의 마음은 텅빈 판(tabula rasa)과 같아서 감각을 통해서 표상된
개념이 순수하게 인식되는 곳이라는 경험주의의 전제는 흄에 의해서
부정되었다. 경험주의자들은 ‘인간’이 경험의 주체라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을 알만한 것과 종교의 씨앗이 영혼 속에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식과 의와 거룩함에 이른다. 인간의 지·정·의는 하나님을 알고
느끼며 그의 뜻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제하지 않는
경험주의적 인식론은 결국 그 대상을 물질로만 한정하고, 나아가서 인식의
능력과 인식의 기구인 마음 자체도 물질 세계로부터 온다는 유물론에
6
빠지게 된다.

5
흄의 이성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서 감각적 지식에 대한 회의는 경험주의에
익숙한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보편 상식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했다. 그 한
경향이 Thomas Reid(1710-96)에 의해서 전개된 Scottish common sense realism이다. Allen,
189-193.
6 바빙크 RD 219-222 참조.
◈ 조직신학서론

[칸트]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지식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현실의


세계에 관한 질문] 지식의 가능 조건은 한편으로는 시간과 공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 지성의 능동적 행위에 바탕을 둔 범주이다. 시간(어떤 것이
동시에 혹은 연이어 있다)과 공간(어떤 것이 나란히 있다)은 감성을 통해서
우리가 만나는 대상을 담아 주는 틀이고, 범주는 개념을 통해서 오성이
사고할 수 있는 근본 틀을 제공해 준다. 여기서 범주는 카테고리가 아니라
헬라어 카타고류오(katagoreuo)에서 나온 말로 말하다, 진술하다, 서술하다는
뜻이다. 즉 사물과 사건을 서술하는 사고틀(양, 질, 실체, 속성, 인과, 상호성,
가능성, 실재성 등)이 범주이다. 그런데 지식은 이와 같이 공간과 시간과
범주 가운데에 형식적으로 주어진 재료를 통해서 바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개념을 통해서 사유되어야 한다. 즉 지식은 감각적 경험과
개념적 사고의 종합을 통해서 비로서 생성된다. 그러므로 감성적 직관의
영역인 “현상계”만이 지식의 대상이 된다. 예지계(물자체, ding an sich)는 알
수 없다.
2.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실천을 통해서 실현하는 이념의
세계에관한 질문]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3. 나는 무엇을 소망 할 수 있는가? [현실과 이념의 통합에 대한 소망]
칸트는 덕과 행복의 일치 즉 원하는 것(Wollen)과 해야 할 것(Sollen)의 일치,
달리 말해서 자유와 자연의 일치를 최고의 선(summum bonum)이라고 한다.
그리고 덕의 실현을 위해서 영혼의 불멸이 요청되듯이 행복과 관련해서
신의 존재가 요청된다고 한다. 도덕법칙은 그 자체로 아무런 행복도
약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개념에 따르면 행복은 도덕법칙을
준수하는 일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
윤리는 이성적 존재자가 도덕법칙에 따라서 전심으로 봉사하는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로 그려내고 있다. 하나님 나라로부터 파생된 최고선을
가능케하는 거룩한 창조자를 통해서 자연과 윤리는 그 자체로는 파악될 수
없는 조화에 도달한다. 칸트는 하나님을 우주론적으로 논증함에 있어서
존재론적인 논증을 전제하고 이로써 하나님의 절대적 존재성과 최상의
존재성을 말한다.
데카르트가 오직 유일하게 명증한 cogito ergo sum이라는 법칙에
기반하여 이성적 사유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인식된 하나님의
실체에 인간의 존재를 유비했다면, 칸트는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이해에 이른다. 인간은 현상계 혹은 자연계에

13
◈ 조직신학서론

속한 감성적 존재이자 예지계에 속한 도덕 명령의 입법자이다. 인간은


시간에 종속된 자연의 한 부분이면서 예지적 주체로서 시간을 초월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자유와 도덕의식은 실천 이성의 범주 가운데 논해진다.
종교는 도덕성 위에 세워지고 덕을 목표로 한다. 종교는 인류를 위한
탈출구로서 하나님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성의 자율에 맡겨진 종교가 가장
순수한 종교이다(Bavinck, RD 1.164). 믿는 것과 아는 것은 구분되며, 각각
고유한 영역에서 작용한다. 예지계(the supersensuous world)에 속한 것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단지 믿는 것에 만족한다. 이와 같은 도덕적 동기에 기반한
개인의 인격적인 확신이 믿음이다. 슐라이엘마허는 이를 절대적인 신의존
감정으로 대체했다(RD 1.35-36).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 “여태껏 아무도 마음 자체가, 그것이
관찰을 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서를 부여하고 있다는 사상을 몰랐다.
사실들은 그것들이 조직적인 배열로 구체화(具體化)되는 것으로서 관찰되지
않고서는 관찰되지 않는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비록 자연을 관찰하지만,
자연 위에 실체와 우유성(偶有性)의 범주들을(categories of substance and
casuality) 부과하는 것은 마음 자체이다. 자연은 우연히 관련된 사실들이다.
그리고 우연히 관련된 사실들은 사람의 마음에 의해서 관찰되고 배열된
단순한 사실들(brute facts)이다. 따라서 자연과 관계된 전체 지식 작용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언급이 없이도 완전하다. 나아가서, 하나님은 이 지식
과정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 . . 확실히, 칸트는 하나님에 대한 실천적
지식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이 실천적 지식은 어떠한 믿음-구성체(a
faith-construct)이다. 그것은 제한된 개념이다. 사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서 이론적이지 않은—즉 실제로 관념적인(no theoretical, that is, real
conceptual) 지식을 가진다. 그러한 실제적 지식은 공간-시간 세상에
제한된다(limited to the space-time world)고 칸트는 말한다”(Van Til, In Defense of
Faith, 1.53-54).

[슐라이엘마허]

슐라이엘마허는 교리학(dogmatics)은 신학자의 종교적 주관성의


표현이라고 보며, 교리적 진술의 시금석은 오직 믿음의 의식(faith
consciousness)이며 이것의 표현이 교리라고 한다. 그는 믿음의 성향(性向,
habitus)과 신학적인 지식을 구분하지 않고 비중생자의 신학이라는 개념을
도출하고자 한다. 그는 교의학을 성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지 않고 역사적
발전 과정에 있어서 특정한 시점의 기독교 교회에 의해서 공언된 교리에
관한 학문이라고 본다(The Christian Faith, 3, 88-93, cf. Berkhof, 1.35, It is history,
◈ 조직신학서론

but history of present, Mackintosh, 62). 특히 그가 변증학을 기독교 전체의


변호에 헌신하는 학문이라고 본 것은 계시에 대한 신앙보다 내적 경험을
앞세우는 주관주의의 결과이다(The Christian Faith, 4, cf. 박형룡 1.62).
그는 모라비안 교도의 경건주의와 칸트와 헬라철학에 능숙했다. 그의
신학은 “절대 의존 감정(the feeling of absolute dependence)“을 과학적인 사고의
기반으로 풀어감으로써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잇는 종교의 보편적 고리를
찾아내고자 한다(Mackintosh, 35). 슐라이엘마허는 다음과 같이 종교의 속성과
보편성을 설명한다. “종교의 총화는 그것의 가장 고상한 연합 가운데서
감정상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하나임을 느끼는 것, 어떤 유일하고 특별한
일이든지 오직 이 연합으로 인해서 가능하다고 느끼는 것, 그리고 말하자면
우리의 존재와 삶은 하나님 안에서의, 하나님을 통한 존재와 삶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On Religion, 50).
그는 종교를 설명하면서 piety라는 개념을 부각시키는데, 이는 단순한
정서(emotion)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영향(affectus)”으로 말미암은
무한자, 영원자, 전체에 대한 직접적인(즉각적인) 감정(the immediate feeling of
the Infinite, Eternal, Whole)이라고 본다 (cf. On Religion, 36, 71, 93-94, 101; The
Christian Faith, 5-93). 각자의 본성은 전체의 본성을 나타내고, 각자는 다른
사람의 중보자가 된다 (cf. On Religion, 79. 예수는 중보의 대표자이다, 248).
우리의 영으로부터 전체(the Whole)인 하나님이 인식되고 이로써 우주를
묘사한다: “만약 마음이 종교를 낳고 지탱해야 한다면 그것은 한 세계로서,
한 세계 안에서 우리 위에 작용해야 한다” (On Religion, 71).
슐라이엘마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전체이므로 하나님이다. 이
전체는 부분의 기원이다. 그리고 부분은 전체의 일부이며 전체로 돌아간다.
부분은 전체의 일부이다. 종교는 자리는 부분이 전체를 느끼는 느낌 혹은
의존하는 감정에 있다. “나에게 무한자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모든
것, 우주는 기적이다; 그리고 모든 유한한 것은, 내가 그 안에서 무한자의 표
혹은 조짐을 발견하는 한에 있어서 그러한 관계를 가진다. 계시는 무엇인가?
사람에 대한 우주의 새롭고 본래적인 모든 교통이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모든 기본적인 감정은 영감이다. 내가 당신들을 이끌 종교는 어떤 맹목적인
믿음, 물리학과 심리학에 대한 어떤 부정(否定)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자연적이다. 그러하나, 또다시 말해서, 우주의 직접적인
산출물로서, 그것은 은혜로부터 나온 모든 것들이다” (Mackintosh, 44. 원문은
On Religion, 88-90). 그는 하나님을 “우리의 수용적이며 활동적인 존재의
기원(the Whence of our receptive and active existence)”이라고 부른다.
“슐라이엘마허에 있어서 교리는 하나님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에 관한 진술이다. 단지 이러함으로 말씀들이 중요하다”(Mackintosh, 64,

15
◈ 조직신학서론

66).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 안에서의 그의 존재,


이러한 지식이 그 속에 있게 된 고유한 방식,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통하여
사람들과 교통하고 그들에게 종교를 일으키는 능력에 대한 그만의 고유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사역에 대한
의식과 그의 신성에 대한 의식을 말해주는 것이지,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On Religion, 247). 슐라이엘마허는 그리스도께 “그 분의
고유한 존재와 그 분의 내적 자아로서 최고 존재의 완전한 내주(the perfect
indwelling of the Supreme Being as His peculiar being and His inmost self)”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에게 “절대적으로 능력이 있는 신의식”이 있었다는
사실로 설명한다 (The Christian Faith, 387-388).

[리츨]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 사역은 단지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모든 기독교 교리의 부분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된
7
백성들의 공동체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구원론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학적 깨달음의 직접적인 대상은 죄사함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조건 지어진 관계로 하나님께 서는 공동체의
믿음이다”(Justification and Reconciliation, 3). “우리는, 단지 우리가 의식적이며
의도적으로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형성하신 공동체의 지체들이라고
여기는 한, 기독교적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 죄, 회심, 영생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4).
슐라이엘마허는 하나님에 대한 의존이 종교 경험의 보편적인
양상이라고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구원(redemption)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고유한 형식의 전제가 된다고 보았다. 리츨은 이와 같은
슐라이엘마허의 견해를 심화시켜 하나님의 왕국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기독교는—그것을 구속자며 하나님의 왕국의 설립자로서 지으신 분이신
그리스도의 생애에 기초하여—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에 존재하고, 사랑의
동기로 행하고자 하는 자극을 포함하고, 인류라는 도덕적 기관을 목표로
삼고, 하나님의 왕국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자녀됨의 관계에 기초하는

7 Bavink, RD 1.67. “Revelation contained no metaphysical teaching about the origin, essence,
and end of things but only the gracious disclosure of God’s will to establish his kingdom on earth.
Accordingly, for Ritschl, the content of religion was limited to ‘value judgements’; dogmas implied no
theoretical or philosophical worldviews but only that which corresponds to the religious need of the
church. Thus dogmatics was not a pure but a practical science, limited to a doctrine of faith and salvation.
It is restricted to what can be utilized in preaching and the relations of Christians among themselves. In
order to treat the subject, it is therefore necessary for the dogmatician to position himself within, not
outside of, the church of Christ.”
◈ 조직신학서론

단일신론적이며, 완전히 영적이며, 윤리적인 종교이다” (13).


리츨은 신학을 “신앙의 학문”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교회를 주관적
그러나 공동체적 신앙 체험의 장으로서 보는 그의 주관주의를 반영한다.
신학은 계시에 의존해서 믿음으로 하는 것이지, 엄밀히 말해서 신앙의 학문
즉 신앙으로부터 세워가는 바벨의 학문, 아래로부터의 학문이 아니다.
반틸이 칸트를 비판하면서 말했듯이, 신앙으로 신학을 세워가는 것(a
faith-construct)이 아니다.

[바르트]

그의 교회 교의학에서 명백하게 말하기를 교의학(dogmatics)은


“기독교 신앙”을 요구하며 바로 그 자체가 “믿음의 행동”이라고 한다.
이것은 신학은 신앙에 기초한다는 슐라이엘마허의 입장을 떠올리게 한다.
바르트는 “신앙의 행위를 전제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실제(reality)가
믿음에 선행하며 처음부터 교리를 위해서 확정되었다는 가정을 한다. 말씀은
믿음에 선행한다; 말씀은 믿음의 행위를 전제한다.
바르트의 교의학은 슐라이엘마허의 주관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
“교의학은 하나의 신학적인 훈육이다. 그러나 신학은 교회의 한 기능이다.
교회는 그것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함에 따라서 하나님을 고백한다(Dogmatics
is a theological discipline. But theology is a function of the Church. The Church
confesses God as it talks about God)”(CD 1.3). “교의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교회의 본질이듯이, 그 분께서—자신을 교회에 드리기로
약속하신 가운데—자신 속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그 분을 아는 바대로 우리를 위하여 진리이시다 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 . . 교의학에서 문제가 되는 어떤 신적인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 완고한 믿음이며 이 완고한 목적이다. . . . 믿음 안에, 오직 믿음
안에, 인간의 행위는 교회의 존재와, 계시와 화해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행위와 관계된다. 이러하므로 교의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작용하는 믿음의 행동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복종으로서만 가능하다(In faith, and only in faith, human action is
related to the being of the Church, to the action of God in revelation and reconciliation.
Hence dogmatics is quite impossible except as an act of faith, in the determination of
human action by listening to Jesus Christ and as obedience to Him)”(CD 1.12-13, 17).
이와 같은 바르트의 접근은 “교의학은 하나의 신학적인 훈육으로서,
이렇듯 오직 기독교 교회에 속하므로, 오직 우리가 기독교 교회의 개념에
관하여 명확하게 될 때만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다(Since dogmatics is

17
◈ 조직신학서론

a theological discipline, and thus pertains solely to the Christian Church, we can only
explain what it is when we have become clear as to the conception of the Christian
Church)” 라는 테제로부터 출발해서 종교는 “절대 의존 감정”에 기반한다는
관점에 이르고 이로부터 경건을 설명하는 슐라이엘마허의 입장과
유사하다(The Christian Faith, 3, 88-93).

신학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의존한다. 이성으로나 지각으로나


감정으로는 principia theologiae에 이를 수 없음은 물론 fontes theologiae도
획득하지 못한다. 오직 fontes theologiae는 계시이며 principia theologiae는
계시의존이다. 세상의 학문은 나를 통하여서 나를 아는 지식에 이르고
이로써 대상에 대한 지식에 이른다. 그러나 신학은 대상을 아는 지식을
통하여서 나를 아는 지식에 이르고 이로부터 대상에 대한 지식에 이르게
된다. 신학함은 주체로부터 객체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객체로부터 주체로
이르고 이로써 주체로부터 객체에 이르게 된다.

칼빈은 진실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천명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기 때문에(행 17:28) 우리의 사상을 버리고 즉시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기을 올바르게 관조할 수 없다. 이렇듯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선행하나, 아무도 자신의
모습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진정하게 추구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는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선행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게끔 이끄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손”이다(“unusquisque sui agnitione non
tantum instigatur ad quaerendum Deum, sed etiam ad reperiendum quasi manu ducitur”).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하심(infinitas bonorum)”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가난함(vero ex nostra tenuitate)”이다. “자신의 무지, 무익, 가난, 연약,
타락과 부패를 느끼지 않고는 아무도 참다운 지혜의 빛, 구원의 능력, 모든
일에 부요한 자비, 순결한 의가 주님께만 속한다는 것을 알 수 가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을 진지하게 갈망하지
8
않는다.” Inst. 1.1.1(CO 2.31).

8 “Ita ex ignorantiae, vanitatis, inopiae, infirmitatis, pravitatis denique et corruptionis propriae


sensu recognoscimus, non alibi quam in Domino sitam esse veram sapientiaew lucem, solidam virtutem,
bonorum omnium perfectam affluentiam, iustitiae puritatem, atque adeo malis nostris ad consideranda
Dei bona excitamur; nec ante ad illum serio aspirare possumus, quam coeperiums nobis ipsis displicere.”
◈ 조직신학서론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명백한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faciem”)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모든 판단을
내림에 있어서 기준을 삼아야 하는 유일하신 분(unica regula)이 주님이시다.”
Inst. 1.1.2(CO 2.32). 하나님의 고귀하심과 자신을 비교해 보기 전에는 아무도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깨달을 수 없다(“hominem humilitatis suae agnitione
nunquam satis tangi et affici, nisi postquam se ad Dei maiestatem comparavit”).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서로 연관되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선행시킴이 올바른 가르침의 순서(ordo recte
docendi)이다. Inst. 1.1.3(CO 2.33).

칼빈이 파악하는 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의 존재와 우리가


어떻게 그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며 그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지에 관한 지식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종교 혹은 경건함이 없는
곳에 신학이 없다: “Iam vero Dei notitiam intelligo, qua non modo concipimus
aliquem esse Deum, sed etiam tenemus quod de eo scire nostra refert, quod utile est in
eius gloriam, quod denique expedit. Neque enim Deum, proprie loquendo, cognosci
dicemus ubi nulla est religio nec pietas.” “Pietatem voco coniunctam cum amore Dei
reverentiam quam beneficiorum eius notitia conciliat.” Inst. 1.2.1(CO 2.34).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먼저 두려움과 경배를 가르치고, 우리의 안내자요
선생이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모든 자비를 구하게끔 하고, 그 자비를
9
얻으며 그 공로를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게 한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마음을 품는 믿음에 참으로 순수하고 진정한 종교가 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뜻을 다하여 그를 경배함이며 율법에 기록된 바대로
10
합당한 예배를 드림이다.” Inst. 1.2.2(CO 2.35).

결론적으로 칼빈에게 있어서 참 신학(theologia vera)은 위로부터의


신학이며, (자기)계시의 신학이며, 믿음의 신학이며, 로고스의 신학이다.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어서 날마다 거듭나는 심령을 가진 사람만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 가운데서
믿음으로 신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은 개혁되어가는
신학이다(theolog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

9 “Quin potius huc valere debet eius notitia, primum ut ad timorem ac reverentiam nos instituat;
deinde ut ea duce ac magistra omne bonum ab illo petere, et illi acceptum ferre discamus.”
10 “En quid sit pura germanaque religio, nempe fides cum serio Dei timore coniuncta; ut timor
et voluntariam reverentiam in se contineat, et secum trahat legitimum cultum quails in lege praescribitur.”

19
◈ 조직신학서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이시다(딤전 6:16).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우리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죄의 신발, 내 의로 가득한 교만의 신발, 내 이성대로
살기에 바쁜 아집의 신발을 벗어버리고 두 손 들고 겸손히 나아가야 한다(출
3:5).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길은 그를 경외하는 길 밖에 없다. 경외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심중에 깊이 인정하고 그를 예배하는 것이다(잠 3:6).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그를 아는 지식에 이름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운행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깨닫고 구속주 하나님께 의지한다. 이것이 지혜이며 명철이다. 세상
사람들은 알기 전에는 믿지 않지만 우리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

우리의 경건은 하나님과의 존재의 통보나 신화를 통한


자질(qualitas)의 변화에 주안점을 두기 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전가에 치중한
영성(spiritualitas)이라는 개념보다 경건이라는 말(pietas)이 더욱 합당하고
광의적이다. 경건은 계시를 믿음으로 받음과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의 뜻과 사역을 알자 구원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교제(communio)하며 그의 의를 전가받아서
교통(communicatio)하면서 날마다 거룩함에 이르는 견인의 삶을 살고
구별되어서 드려지는 거룩함으로 위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주의
백성은 이 진리로 세상에 던져져 증인의 삶을 삶으로 거룩함을 얻게 된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7-19).

J. Gresham Machen은 그의 책 Christianity and Liberalism에서


“doctrine”이라는 제목으로 한 장을 할애하며 신학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단순히 변증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깊이 고찰하고 있다. 교리는 성경적
사실과 사실에 대한 해석을 제시한다. 그런데 성경은 사실과 사실에 대한
해석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건뿐만 아니라 사건의 의미를
선포하셨다”(32). “예수의 가르침은 교리에 뿌리박고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그 분의 고유한 인격에 대한 놀라운 제시(提示)에 의존했으므로
그러했다”(33).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즉 “한 분 실재적이며 살아 계신
인격(a real, a living Person)”으로서 그의 삶—에 대한 사실과 그 해석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실제적인 의미가 있다(40 ff.). 기독교는 처음부터 삶의
◈ 조직신학서론

방식이었다(47). 교리는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교리는 바로 믿음의 뿌리에 있다”(44).
성경이 제시하는 삶의 극치는 증인으로서의 삶이다. 진리와 진리에 대한
해석과 수용과 전파가 이 단어에 흘러 들어 간다.
기독교의 성격은 사도행전 1장의 처음 여덟 절의 말씀에 요약된
메시지에 기초하고 있다. “너희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현재의 목적을 위하여 사도행전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 논박하고 예수께서 실제로 지금 인용한 말씀을 하셨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아주 불필요하다. 어쨌든, 이 구절은 초대
교회에 관해서 무엇이 알려졌는지를 합당하게 요약한 것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증인되기 운동(a campaign of witnessing)이었다.
증인되기는 단지 예수께서 개인적인 삶의 구석진 곳들 안에서 무엇을
행하고 계셨는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의 말씀들을 이러한
방식으로 취하는 것은 그 문맥과 모든 증거들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한편,
바울의 편지와 다른 모든 자료들은 그 증언이 주로 내적이며 영적인
사실들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 분의 죽음과 부활로 단번에 영원히 행하신
것에 관하여 되었다는 것이 아주 확실함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따라서,
일어난 어떤 것에 대한 설명에 기초하고 있으며 기독교 일꾼은 일차적으로
증인이다”(52-53).

2. 신학: Initia Scientiarum (학문의 출발)

칼빈이 ordo docendi로서 1559년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론-신론(창조주


하나님)-인[죄]론-율법-기독론(구속주 하나님)-구원론(성령론)-교회론(성례론
포함)-시민국가의 순을 채택한 이후 대체로 Post-Reformation Reformers들은
성경론(doctrina Scripturae)을 prolegomena(praecognita Theologiae)로서
다루었다(예컨데 F. Turretin, Calvin theologian Richard A. Muller는 그의 책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에서 Prolegomena와 the doctrine of the
Scripture를 나누어서 다른 책으로 다루나 이는 인식론적 ordo를 의미하는
것이지 dogmatics의 ordo docendi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칼빈의 가르침의 순서는 종래 Peter Lombard가 그의 책 Sententiraum


libri IV에서 체계화하고 이후의 신학자들이 대체로 따랐던 the Trinity-Creation
and Sin-the Incarnation and the Virtues-the Sacraments 구조를 크게 벗어났다고는
볼 수 없으나, 성경론을 서론 부분으로 삼아서 전개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조직신학 체계에 있어서 prolegomena로서 다루는 부분은 단지 서론에 머무는

21
◈ 조직신학서론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교리(a dogmatics in nuce)를 가르친다—“말해져야 할 첫


번째 것들(the first things to be said)”(Weber, 1.6).

정통주의(正統主義) 개혁신학(改革神學)은 하나님의 영광 및 주권과


그 자신의 계시의 무오한 기록인 성경의 권위를 확인함을 그 사명으로
한다(박형룡 1.21).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가르침과 체계화로서 신학은
설교(preaching)와 교의(dogma)와 교리(doctrine, dogmatics)의 세 가지 국면으로
나타난다. Augustine의 De doctrina christiana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설교는
교회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고백의 형식으로 기술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교의는 교회가 공적으로 정의하고 신적 권위에 의해서 선언한 가르침을
말한다. 그리고 교리는 우리의 신앙에 요구되는 바 성경적 가르침의
근본적인 요소들이다. 교리는 가르침 자체(doctrine)와 가르침
전체(dogmatics)로 엄밀하게는 구분되는데, 우리가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을 하나님의 지식의 체계화와 종합화로 볼 때 이는 dogmatics라는
단어와 상통하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교의는 교의학의 주제거리를 형성하므로(dogma


forms the subject-matter of Dogmatics), 후자는 기독교 교의의 학문(the
science of Christian dogma)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서
교의학은 성경의 교리적 진리를(the doctrinal truth of Scripture) 조직적인
방식으로, 특별히 교회에 고백된 바대로의 진리와 함께 다룬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의학은 교회의 교리(the doctrine of the Church)를
전체적으로 다루며 각각의 믿음의 조항을 그것의 전체와의 관련성
11
가운데 고려한다(Berkhof, 1.35).

신학 백과(Theological Encyclopedia)는 주경신학(the Exegetical),


역사신학(the Historical), 조직신학(the Systematic), 실천신학(the Practical),
그리고 이들 제 분과들에 대한 전제적인 진리 검증으로서의
변증학(Apologetical Theology)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그것은 신학이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물론 단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조직신학이 설명하는 것이다. 변증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길에 우리는 둔다. 주경신학은 그것의 각
영역에(disjecta membra) 걸쳐서 이 지식을 우리에게 준다. 역사 신학은 이

11 서철원 교수님께서 “교리”를 성경에 근거해서 교회가 신앙 고백 형태로 선포한


가르침이라고 정의 하실 때 이는 오히려 “dogma”의 어의(語義)에 가깝다. 사실 dogma,
doctrine, dogmatics는 엄밀히 구별되어 사용되지 않는다.
◈ 조직신학서론

지식이 어떻게 이해되어 왔으며 삶 속에 전해졌는지 깨닫게 한다. 실천


신학은 어떻게 이 지식을 세상 속으로 확산시킬지(propagate) 우리에게
가르친다”(Warfield, 9.92).

“조직신학의 과제는 변증적이고, 주경적이고, 역사적인 신학에 의해서


제공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취하고, 그 지식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맺고 있는 탐구하고, 그 지식을 조직적으로—즉 유기적인
전체로서—설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서 그 지식 전체에 대한 각 지식
상호간의 합당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 전체를
형성하기 위하여 결합된 많은 것들 중에서 마땅히 강조할 것을 강조하는
가운데 그 지식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붙드는 것이다” (Warfield, 9.92).

변증학은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구성적이며 규칙적인 원리들을(the


constitutive and regulative principles of theology) 수립하는 분과이다.”(Warfield,
9.9). 변증학은 다섯 종류로 분류된다. 철학적 변증학(philosophical
apologetics)은 하나님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세우고자 하며, 심리학적
변증학(psychological apologetics)은 사람의 종교적 본성으로부터 신학의
기초를 설명코자 함이며, 초자연적인 요소의 역사상 실체(the reality of the
supernatural factor in history)의 존재를 기반으로 하는 변증학은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통해서 신학의 기초를 놓고자 하며, 역사적 변증학(historical
apologetics)은 계시 종교로서 기독교의 신적인 기원을 기독교 자체의
증거들로부터 세우는 것이며, 성경적인 변증학(bibliological apologetics)은
죄인들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으로서 성경의 진실성을
수립하고자 한다(9.13). 특히 믿음과 변증학의 관계와 관련해서 성경적인
변증학은 중요한데, Warfield의 다음 고찰은 변증학의 기반과 취지를 잘
보여준다: “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을 때마다 그
행동 안에는,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알 수 있는 한 분—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계시 가운데 자신을
알리신—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살아있는 확신이 함축되어 있다”(9.16).

특히 교의학과 윤리학의 관계에 대한 일고(一考)를 요한다.


슐라이엘마허는 윤리학을 “이성의 사색적 제시(提示)로서 전 영역에 걸친
이성의 작용에 있어서 자연 과학과 부합한다” 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교회를
이러한 윤리 개념으로부터 이해함에 있어서, 교회 공동체의 기초로서의
경건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신학을 세워나간다. 그는 “종교철학”을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경건의 완전한 현상으로—그것이 집합적으로

23
◈ 조직신학서론

취해진다면—구성된 종교적 교통의 다양한 존재 양식에 대한 비판적인


제시”로 본다 (The Christian Faith, 7).

슐라이엘마허는 경건을 지식(knowing)과 감정(feeling)과 행위(doing)의


복합으로 본다(11). 삶에 있어서 전 양자는 자아에 머무는
것(Insichbleiben)이며 제 삼자는 자아를 넘어서는 것(Aussichheraustreten)이지만
전 양자와 제 삼자는 단지 대자적(antithetical) 관계에 있지만 않다. 교의의
내용으로서 지식과 이에 대한 의식으로서의 감정이 내부에 머물지 않고
자기를 넘어서는 절대자에 대한 의존감정으로 나아갈 때 즉 신앙의식(faith
consciousness)를 갖게 될 때 이는 행위를 수반한다. 슐라이엘마허에 있어서
종교적 자의식(self-righteousness)은 믿음의식 혹은 경건으로 기술되며 이는
자아의 수용성(receptivity)과 행위성(activity)를 동시에 포함한다(13).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교의학과 윤리학은 분리되지 않으며, 그가 교의학을
교회교의학으로서 보는 것은 교회를 윤리적 개념으로 파악함으로부터
기인한다. 그에게 있어서 윤리는 객관에 대한 주관적 의식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idea와 연결될 때 비로서 종교적 경건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cf.
5-31, 584 ff.).

슐라이엘마허가 윤리를 행위에 대한 이성적 고찰로서 보고 이를


교의학과 연결시킨 것과 일맥상통하게, 중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도 교의학과
윤리를 인식론적으로 동시에 고찰한다(Summa Theologiae, 2.2). 리츨(A.
Ritschl)은 스스로 주장하는 바 정통적 신학 입장에 더 가까이 서서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활동을 구별하고자 했으나 공동체의 도덕 가치를 중시하는
그의 신학이 슐라이엘마허의 기독교 공동체(Christian communion)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Weber, 1.66).

바르트에 있어서 “실존한다(existieren)”는 것은 “윤리적으로


실존하는(also ethischen existiern)”것을 뜻한다. 따라서 어느 한 사람의 판단과
행동의 연속성과, 그 행동의 가치와 선함은 곧 바로 그 사람의 존재론적
연속성과 가치와, 선함(Güte)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존재를
행동(Handeln 혹은 Akt) 내지 사역(Werk)으로부터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그의 계시 행위로부터 규정하는 것에 상응한다. 왜냐하면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 속에 계신 분이기(Gott ist in seiner Tat)”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의 행동은 곧 자신의 계시행위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은 곧 계시 행위 속에 있고, 그 계시
행위 속에 바로 하나님의 존재가 실존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의 가치 및
◈ 조직신학서론

연속성 그리고 선함은 그 행동의 가치 및 연속성 그리고 선함에 상응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의 연관성은 인간의 존재와 윤리적 행동과
은유적인 유비(analogisch Metapher)의 연관성을 갖는다] (전문인용, 김재진, [칼
바르트 신학 해부]).

신학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의 윤리학을 다룸에 있어서 그들의 율법관에


주로 문의(問議) 한다 (박형룡, 1.63; Berkhof, 1.51; Weber, 1.66). Melanchthon이
율법의 규범적 용법에 착안해서 소위 성도들을 위한 율법의 제 3용법(usus
renatis, usus tertius legis)을 개진했다는 점을 제시하면서 그를 이후
credenda(what should be believed)와 facienda(what should be done)을 나눈 선구적
학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Weber, 1.66). 그러나 실상 멜랑흐톤은 율법의
본질을 정죄적 규범(regula accusans)으로 보는 입장에서 율법의 규범성을
논했을 뿐이며—그래서 율법의 제 3용법을 성도의 계속적인 회개라는
측면에서 부각—율법을 삶의 규범(regula vivendi)로는 파악하지 못했다.

칼빈은 율법을 하나님의 뜻의 계시로서 삶의 규범(regula vivendi)으로


파악하고, 본래 이 율법은 선했으나 인간의 우연한(accidentale) 타락으로
말미암아 신학적 기능(usus theologicus)을 하게 되었다고 본다. 칼빈은
성도들에게 작용하는 율법의 용법(usus in renatis)을 주요하며 고유한 용법으로
보는데 이 경우 중보자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율법은
교훈적(pedagogical)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권고적(exhortative) 기능도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Melanchthon은 율법은 본질적으로 정죄적 규범이라는
Luther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성도를 위한 율법의 용법을 단지 계속적인
회개를 위한 것으로서 소극적으로만 본다. 따라서 칼빈 신학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윤리 혹은 기독교인의 삶의 교리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중보자 그리스도의 의의 계속적 전가로 말미암아 인격과 행위로 의롭다함을
12
받는 성도의 총체적 구원교리와 분리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지식이다. 이


지식은 계시된 하나님의 자기 지식으로서 성경과 교회의 신앙 고백과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혹은 종교 의식)으로 표현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님으로 나오며 서로 분리되거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의 선포가
신학의 기원이 아니듯이 주관적 종교 경험이 신학의 내적 도구가 될 수

12 참고. 졸저. Byung-Ho Moon, Lex Dei Regula Vivendi et Vivificandi:


Calvin’s Christological Understanding of the Law in the Light of His Concept of
Christus Mediator Legis (Milton Keynes, UK: Paternoster, 2006).
25
◈ 조직신학서론

없다. 기독교 윤리가 교리의 가치를 좌우해서도 안되며 성경이 가치중립의


13
의문에 머물러서도 안된다. 기독교 신학은 계시된 하나님의
자기계시(principium essendi)로서 성경(principium externum cognoscendi)을
믿음으로 수납하는 지식(principium internum cognoscendi)을 기초로 하며 이를
지향한다.

신학은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여 이를 적용하는 학문(a heuristic


science)이 아니라 계시를 믿음으로 수납하여 체계화하고 종합화하는
학문이다. 과학적 탐구가 아니라 믿음이 지식 행위이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으로 영감되었으며 조명되어
감화된 심령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말씀이 곧 말씀하심이다. 이 진리에
부착함이 신학함이다.

“교의학의 과제는 항상 동일하다. 그것은 바로 그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세부적인 강해와 해석에 다르지 않으며, 다를 수도
없다. 그것은 성경의 보화들을 펼치는 것, 가르침의 표본을 제시하는
것(paradosi§ eij§ tupon didach§, Rom. 6:17)이다. 그러므로 그것 가운에서
우리는 하늘의 가르침의 양식과 형상(forma ac imago doctrinae coelestis)을
소유한다. 따라서 교의학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교의학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희미한 형상이거나 그것을 조금 닮은 것 이상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것 자체의 독립적인 방식에 따라서 옛날에
선지자들에 의해서 수다(數多)하고 다양한 방식들로 말해졌으며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에 의해서 말씀 된 것을 아버지를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는
14
것이다”(RD 1.55).

3. 방법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지식의 체계화


학문(scientia)으로서 신학은 고유한 방법론에 근거해서 전개되어 왔다
(이하 Hodge, 1.3-103).

3.1 사색적 방법(The Speculative Method)

사고 법칙이나 내재적 사유 원리로부터 존재와 당위에 대한 진리를

13 바빙크는 신학의 방법론을 다루면서 세 가지 객관적 요소로서 Scripture, the


confession of the church, 그리고 the faith of the Christian community(Christian consciousness)을
언급한다. RD 1.84 ff. 111.
14 참조 Amandus Polanus, Syntagma Theologiae Christianae, 5th ed. Hanover, Aubry, 1624, p.
539.
◈ 조직신학서론

추론하고 결정하는 à priori(선험적) 방법론이다. 이는 다시 셋으로 나누어


진다.

[이신론적이며 합리주의적인 방법론(Deistic and Rationalistic Form)]

이는 자연 법칙이나 인간 정신의 구조를 통해서 발견된 자료만을


토대로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관한 지식을 구축하는 것이다.
합리주의(rationalism)는 이신론(deism)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 이신론은
“우주를 벗어나서 계신 인격적인 하나님(an extramundane personal God)”을
상정하는데, 이로부터 이성과 하나님, 자연적인 것(the natural)과 초자연적인
것(the supernatural)을 구별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과 세상을 일치시키는
일원론(monism)에 이른다.

이신론적 합리주의(deistical rationalism)는 초자연계시(특별계시)를


철학적 혹은 도덕적 이유로 거부한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창조하시고
그들의 속성과 특질을 그의 본성에 맞게 정하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활동에 여전히 간섭하신다면 이는 피조물들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로써 하나님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고 한다.

15
[교리적이며 합리주의적인 방법론(Dogmatic and Rationalistic Form)]

초자연적인 신적 계시를 믿고 이것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나,


모든 성경적인 교리들을 철학적인 구조로 축소시키는 방법론이다. 이는 일반
사람들의 믿음(pivsti§)을 현자들의 철학(지식, gnw'si§)으로 고양시키고자 했던
초대 교부들과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특히 실재론자들)에 의해서 추구되었다.
이 입장은 “Nil credi posse, quod a ratione capi et intelligi nequeat (이성적으로
파악되고 이해되지 않는 것으로서 믿어지는 것은 없다)”는 말에 의해서
대변된다. 그리하여 성경적인 교리들은—초자연적인 교리를
포함해서—이성에 의해서 파악된 진리들과 자연 종교의 교리들을 지지하기
위해서 인정된다.

15 Hodge의 분류에 의하면 deistic and rationalistic form, dogmatic form,


transcendentalists로 되어 있으며 dogmatism을 dogmatic form으로 본다. 그런데 이후
상술하면서는 오히려 transcendentalists을 dogmatism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dogmatic
form을 dogmatic and rationalistic form으로 다루고 dogmatism을 transcendentalism과 같은
개념으로 다룬다.

27
◈ 조직신학서론

Anselm: “그리스도에 관한 보편적 믿음이 믿도록 하는 모든 것들을


이성적 필연성 가운데 알아야 한다(rationabili necessitate intelligere, esse oportere
omnia illa, quae nobis fides catholica de Christo credere praecipit)”(Cur Deus Homo,
1.25). “육체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이거나 육신적이다. 이것에
대하여 말하자면,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알 수
없다. . . . 믿지 않는 사람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은 경험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사람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Qui secundum carnem
vivit, carnalis sive animalis est, de quo dicitur: animalis homo non percipit ea, quae sunt
Spiritus Dei. . . . . Qui non crediderit, non intelligent, nam qui non crediderit, non
experietur, et qui expertus non fuerit, non intelligent)”(De Fide Trinitatis, 2).
“그러므로 나는 믿기 위해서 알기를 구하지 않고, 오히려 알기 위해서
믿는다. 왜냐하면 내가 이것을 믿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Neque enim quaero intelligere, ut credam, sed credo, ut intelligam. Nam et
hoc credo, quia, nisi credidero, non intelligam)”(Proslogium, i).

“이성, 혹은 이성적 설명, 혹은 철학적 증명은 어떤 믿음의 기초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성적으로 믿을 수 있을
것이다(We may rationally believe what we cannot understand)”(Hodge, 1.42).

[독단주의(Dogmatism) 혹은 초월론(transcendentalism)]

이성과 역사에 기반하지 않은 어떤 계시도 인정하지 않는 방법론이다.


모든 진리는 이성적 사고 과정의 산물이다. 혹시 성경이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면 그것은 철학적 가르침과 우연히 일치함에 있어서이다. 이 방법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삼위일체, 성육신, 구속, 영혼불멸, 미래의 심판 등에
관한 관념들을 성경과는 독립적으로 추구하고자 한다.

이는 성경적 진리가 이성적 증거에 의해서 지지를 받는 정도를


넘어서서 성경이 철학화되는 것(philosophizing)을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믿음의 근거가 될 뿐이라고 여겨진다. 지식의 대상은 성경에
깔려 있는 사색적이며 철학적인 이념들이다. 이 이념들은 이성의 빛에
의해서 참되다고 알려진다. 그러므로 신앙이 이성에 의해서 고양될 때,
기독교는 철학으로 고양된다. 엄밀하게 말해서, 교리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
철학적 신학을 구한다면 독단론과 초월주의는 신학적 철학을 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Wolf: “Scripture serves as an aid to natural theology.” 이 방법은
플라톤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이 전개한 방법론이었다.
◈ 조직신학서론

3.2 신비적 방법(The Mystic Method)

이 방법은 감정에 의존하는 신학방법론으로서 둘로 나누어진다.


초자연주의적 방법론(a supernatural)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immediately)
영혼과 교통하며 성경의 가르침과는 무관하게 감정(feeling)과
직관(intuition)을 통하여서 진리를 계시하신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성경이 아니라 내적인 빛이다. 한편 자연주의적 방법론(a
natural)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적인 인간의 의식(natural consciousness of
men)이 종교적인 지식의 원천이라고 본다. 초자연적인 방법과는 달리
자연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는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비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와 권위와 계시성과 영감성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교리체계(a system of doctrines)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슐라이엘마허가 말했듯이 신학자의 의무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기독교 의식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영혼의
동일함(identity)과 무한에 대한 직접적인 직관(the immediate intuition of the
infinite)을 주장하는 범신론과 헬라의 신비적 철학 사상 그리고 스피노자의
철학과, 이성을 인간의 영적 능력(faculty)로 보지 아니하고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God in man)으로 보는 신플라톤주의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이
이런 경향을 가진다. 슐라이엘마허는 종교를 절대의존감정으로 보고, 성경이
신앙의 준칙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성경은 다만 저자들의 종교의식의
기록으로서 독자들을 경성시킨다고 말한다. 예수에 대한 기사도 예수의
신의식의 기록이라고 본다.

[스피노자]

“나는 신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모든 것이 각각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substantia)로
이해한다”(Ethica, 1부 정의 6). 그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신 안에서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신 또는 각각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실체라는 단어는 sub+stans의 복합어로서 모든 것을
아래서 떠 받쳐 준다는 의미이다. 실체로서의 신의 본성으로부터 만물이
유출된다고 스피노자는 본다. 그는 자기 중심성을 버리고 타자 즉 신을
체험하고 사랑할 때 진정으로 그를 알게 된다고 한다. 나 이외의 다른 모든
사물과 사람이 신의 표현임을 체험할 때,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할

29
◈ 조직신학서론

수 있다고 본다. 신에 대한 사랑은 사실 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다. 신은 스피노자의 철학의 시작이고 끝이다. 내 속에서 신을
바라볼 때—체험하고 사랑할 때—신이 내 속에 계시며 내가 신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게 된다. 신은 실체이다; 그러나 신은 나를 떠나서
존재하거나 알려지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의 신 이해는 철학적이며
동시에 윤리적이다.

[신플라톤주의]

아무 속성도 없고 알려 지지도 않고 기술되지도 않는 simple


being(혹은 후대의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absolute being)을 신이라고 본다.
신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런 의미에서 primal being)이며 아무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의 힘(duvnami§ tw'n pavntwn)이 된다고 한다. 이 존재로부터 만물이
유출된다(process, emanate). 각기 다른 영적인 존재들에게 개별화된 지식인
정신(mind, nou'§)이 처음으로, 사물과 유기적이고 본질적으로 연관됨으로써
개별화된 영(soul, yukhv)이 다음으로 유출된다. 그러므로 모든 영은 지성을
통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다. 그런데 육체가 없는 영이 없기 때문에
죄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철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직접 보는 것이다(the
immediate vision of God). 이것이 영에 최고의 축복과 쉼을 준다. 하나님과
연합은 우리 자신에게 우리가 침잠하되 수동적으로 침잠하여 하나님을 자신
속에서 발견하고 하나님과 하나됨을 의식하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이성을 통한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통을 추구하는


신지론자들(theosophists, 新知論者)과 감정을 교통의 통로로 보는 좁은 의미의
신비주의자들로 나눌 수 있다. 신비주의자들은 이성이나 감정을 통하여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함을 주장하며 성령의 영감을 믿지 아니한다.

3.3 귀납적 방법(The Inductive Method)

학문으로서 신학을 말할 때, 이는 귀납법적 접근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일반과학이 자연을 대상으로 한다면 신학은 성경을 대상으로 한다.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계시하는 모든 사실이 성경에 있다. 신학함은 성경의
사실들로부터 진리의 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성경 속의 모든 진리는 서로
모순되지 아니하며, 우리 본성의 구조와 경험을 통하여서 인식되고 확증된다.
자명한(self-evident) 진리는 성경 가운데서 그렇게 증거 된다.
◈ 조직신학서론

성령의 내적인 가르침은 우리에게 성경의 진리뿐만 아니라 그


영향까지 조명한다. 믿음으로 신학함의 원리는 계시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적인 가르침이 계시의 객관성을 대치하지는 못한다. 칼빈은 성경의
영감(inspiratio)과 감화(illuminatio)를 성령의 내적인 조명으로 유기적으로
파악하고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여전히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사 진리를 알게
하시고, 그 진리로 살게 하시며, 살 능력을 주심을 강조한다. 우리가
따르고자 하는 성경의 학문적 특성으로서의 귀납적 방법은 경험적으로
계시의 진위를 판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명한 말씀을 성령의 역사로
진리로 믿는 그 자체와 그 영향을 학문적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신학하고 믿음에 이른다(롬 1:17).

3.4 종합적-발생적 방법(The Synthetic-Genetic Method)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은 principia theologiae에 의해서 신학하는 것이다.
이에 기반할 때에만 귀납적 방법론은 합당하다.

31
◈ 조직신학서론

제 2장 신학의 대상
신학의 대상이 되는 지식은 직접적으로 탐구해서 발견된
지식(sapientia inventa)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말미암은 감화로
믿음으로 수납하게 되는 매개된 지식(acquisitio mediata)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계시된 지식(sapientia revelata)이며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우리에게 맞추셔서(accommodare)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revelatio Dei ipsius)를 통해서만 알려진다.

1. 하나님의 존재

칼빈은 하나님을 다룸에 있어서 Deus Infinitus, Deus Spiritus, Deus


Trinitas를 말한다. 특히 그는 기독교 강요에서 삼위일체(1.13)전에 우상을
다루는데(1.10-12) 이는 위의 세 가지를 역설하기 위함이다.

1.1 창조주 하나님(Deus Creator): 하나님은 자기 필연성(내신적


필연성)에 따라서 자기 경륜(consilium)과 작정(decretum)대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조는 영원 물질을 기본으로 하여 자기 위에 있는 이데아를
원형으로 현상을 조성한 것이거나(플라톤) 존재의 근원으로부터의 유출이
아니다(신플라톤주의). 하나님은 창조물과 함께 혹은 안에 계신 것이
아니며(범신론) 창조의 질서대로 섭리하시는 것이 아니다(이신론). 그러므로
존재일반으로부터 하나님의 개념에 이르고자 하는 존재의 유비는 합당하지
않다. 하나님은 창조하셨고, 창조를 계시하셨고, 창조주로 자신의 신분을
성경과 자연에서 확정(identification)하셨다(ex. 창 1:1; 요 1:1; 시 19:1-6; 잠
8:22-31; 욥 38-41).

1.2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구속주로 계시하신 하나님 (Deus


Redemptor in Christo)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deitas)이 피조물을 취하시고(assumptio


creaturae)육신으로 나타나셔서(manifestatus in carne) 인성(humanitas)과
신성(divinitas)을 지닌 중보자(mediator)가 되심으로써 창조주가 구속주이시며
또한 구속주가 창조주이심이 계시된다.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pactum
salutis)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주로서, 그의 동정녀 탄생을 통한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이 구속방법으로서, 그리고 선택된 백성의 구속이
작정되었다. 구속사역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모든 창조(creation)와 인류(genus
◈ 조직신학서론

humanum)를 자신에게로 회복(restitutio)시키셨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속주 되심은 성경에 증거된


바이며(요 5:39), 모세가 기록한 바이다(요 5:46).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주
되심은 원복음(창 3:15, proto-evangelium)으로 이미 계시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회복자로서 예언되었다(사 19:20).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구약시대에도 계시되는데 그의 현재(顯在, praesentia personae, 창
18:1-33; 28:12; 출 3:2; 13:21-22; 14:19-29; 23:20; 32:34,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여호와의 사자의 임재를 나타낸다; 수 5:13-15; 호 12:3-5; etc)와 환상(겔
1:26-28; 단 7:13; etc)에서 현저하다.

셀베투스가 그리스도의 가시적 현존(ocularis praesentia)을 형상적인


아들(Filius figurativus)의 드러남으로 보았다면 칼빈은 반대로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의 예표(praefiguratio)를 제시하면서 그것의 성례적인 의미를
강조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인격(persona)이 그림자(umbra)로서 현재함을
말했으나, 셀베투스는 구약시대 그리스도의 현존은 그의 그림자가
인격적으로(personalis)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3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로 계시하신 하나님(Trinitas Dei in


Christo)

그리스도가 육신 가운데 오신 하나님(Deus in carne, Deus incarnatus,


Ignatius)이시기 때문에 분명히 밝혀진 하나님의 존재(subsistentia Dei)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말씀 가운데 계시하신다. 말씀 가운데 하나님은 자신을
삼위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삼위 하나님의 계시는 정점(culmen)에 이른다. 아들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며(요 14:10-11; 17:21)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기 때문에(요 10:30) 아버지께서 아들을 아는 것과 같이 아들은
아버지를 안다(요 10:15). 그러므로 아들을 통하여서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되고(요 17:26), 아들을 알면 아버지를 알게 된다(요 14:7).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고후 3:17).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가운데


하나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증거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듯이(요 1:18; 17:4, 6)
성령은 아들을 증거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요 15:26; 16:14).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전 12:3). 만물은 아버지께
속하고(of) 아들을 통하여서(through) 지어졌으며 성령 가운데(in)

33
◈ 조직신학서론

존재한다(Bavinck, Our Reasonable Faith, 155-156).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성령만이 아신다. 하나님의 자기


지식(revelatio archetypa)은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에 관한 지식을 말씀(로고스)으로서 우리에게 계시하는데, 오직 성령의
은밀한 역사로만 이를 알 수 있다(고전 2:10-16). 이러한 지식(revelatio
ectypa)은 처음에는 말씀으로, 다음으로는 육신 가운데, 그리고 이제는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계시된다. 삼위 하나님의 지식도 말씀
가운데, 육신 가운데,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서 계시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보좌 우편에 재위(sessio)하시면서 중보자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중보하신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은 중보자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린다.

1.4 무한한 영(spiritus infinitus) 곧 절대적 인격(persona absoluta)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내재 신학자들이 존재 유비에 의해서 철학적으로 관념화한


the Infinite, the Whole, the Whence of all existence, the Eternal로서 정의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한한 영(spiritus infinitus)으로서 스스로 계신 절대적
인격(persona absoluta)이시며 계시주, 창조주, 섭리주, 구속주이시다. 하나님은
자증력(self-authentication)이 있는 말씀으로 말씀하시고 천지를 지으시고
운행하신다. 오직 스스로 기뻐하심으로 자신의 필연성(necessitas)에
따라서—자발적으로(voluntarie)—계시하시고 역사(歷史) 속에서
역사(役事)하신다. 그리고 지으신 것을 지키시고, 선택하신 백성을
구속하신다. 하나님은 절대 생명(vita absoluta)으로서 생명의
창조주(Creator)시며 이를 주시는 분(Largitor, 욥 10:12)이시며 이를 다시 회복
시키시는 구주(Redemptor)가 되신다.

2. 하나님의 사역(opera Dei)

2.1 하나님의 창조(creatio Dei)

헬라 철학이 물질의 영원성을 견지하는 이원론(dualism)의 입장에서


창조를 하나님의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흘러 나오는 외적인 현현인
◈ 조직신학서론

유출(emnatio)로 보았다면, 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유로운—비필연적인—주권적 사역으로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교리로 받는다. 창조 가운데 무한하고 절대적인 영이신 하나님의
지혜(sapientia)와 지식(scientia)이 현시된다.

창조는 영원하신 창조의 작정(decretum)에 따라서 그 뜻(voluntas)대로


경륜(consilium)을 이루심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유래하는 것도 아니며 신적인 진화 과정의 양상도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 명령(iussum)으로 이루어짐이다. 만물은 단번에 성부로부터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다. 시간도 창조되어 피조물의 존재 방식이
되었으며 영의 세계(천사들)도 함께 창조 되었다. 하나님은 시간 내에(in
tempore)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cum tempore)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조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이다. 이에 예속되는


목적으로 피조물들의 행복과 구원, 그리고 감사와 찬미의 마음으로부터 받는
찬양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이다(theatrum gloriae
Dei).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imago Dei)으로 인류를 창조하시고 백성으로
삼으시사 하나님 나라의 왕국(regnum Dei)을 조성하고자 하셨다. 창조는 이
백성의 거소(domicilium poluli)가 된다.

2.2 하나님의 섭리(providential Dei)

섭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를 보존하심(conservatio, sustentatio)과


다스리심(gubernatio)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섭리로 창조를 완성하신다. 곧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신다(계 11:15; 미 4:1-4). 피조물의 근본
특성은 창조주에의 의존성(dependentia)이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단지
가능적으로(per potentiam)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임재한다. 그는
천지에 충만하시고(시 139:7-10; 렘 23:24), 우리가 살고 기동하는 영역을
구성하시며(행 17:28), 또한 그의 영으로 지면을 새롭게 하시며(시 104:30),
상한 심령을 가진 이들과(시 51:11; 사 57:15), 그의 전으로서 교회 안에
거하시는 것(고전 3:16; 엡 2:22)으로 언급된다. 그의 임재는 초월과 내재를
아우른다.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
분이다(엡 4:6).

하나님은 어떤 외부적인 필연성에 매이지 않으신다. 내향적인


사역(opera ad intra)인 성자의 나심(generatio)과 성령의 발출(processio)은

35
◈ 조직신학서론

필연적이나 외향적인 사역(opera ad extra)에 대한 필연성은 신적인 작정과


사물들의 성질에 좌우된 필연성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따르는
것이지 필연성에 매이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 수가
없다(욥 38-41). 다만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신실함을 믿는다. 하나님은 오직
스스로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모든 것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뜻하신 즉
이루시고 이루신 즉 모든 것이 의롭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우주를 다스리는 법을 스스로


취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는 우리에게 유일한 의의 규범이
되며 진실로 모든 만물의 정당한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법을
최상의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법에 맞추도록 하자. 하나님에게는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의지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만물이 정한대로 되고 움직이는 원리이며, 이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비록 그 원인은 알 수가 없으나 모두가 옳은 것이다 (Inst. 1.17.2).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스스로 계시며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스스로의
뜻에 따라서 모든 것을 행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 인생이 모두 알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맞추셔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것만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manus invisibilis)으로 섭리하신다.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보존하시고 운행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감찰(監察)하시고
권고(眷顧)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정해진 법칙에 던져 놓고 그냥
놀고 있는 신(the idle god, 에피큐루스 학파, 이후의 이신론)이 아닐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운명(fortuna, 스토아 학파)에 맡기시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섭리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형상을 한 인류를
보이는 손(manus visibilis)으로 사용하셔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되 사람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빈빈히 사람의 열심으로 자신의
열심을 보이신다. 하나님이 인간의 손을 통하여서 일하시는 것—이차적인
원인(second causality 혹은 second causes) 즉 하나님에 의해서 중개된
원인(intermediate causes)—은 운명의 필연성이나 행운의 우연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의 섭리에 따른 것이다.
◈ 조직신학서론

2.3 하나님의 구원(salus Dei)=창조의 회복(restitutio creationis)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생령으로 지으신 인류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셔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만세 전에 작정하시고 때가
차매 그 경륜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 가운데
보내셔서 최초 언약의 약속인 영생을 성취하는 의를 이루게 하셨다. 이로써
창조주의 사랑이 구속주의 사랑으로 계시되었으며 성취되었다. 그리고 구속
중보자가 창조 중보자심이 확증되었다.

육신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Deus [manifestatus] in carne, Deus incarnatus)


구원 사역을 이루심으로써 성도와의 연합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계속적으로 중보하신다. 구원의 적용(adpropatio)이
구원자의 손에 있다. 구원의 전 과정이 전적 은혜의 선물(donum gratuitum)(엡
2:8-9)이다. 성육신을 통하여서 무한하신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에 놓이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부정(否定)인 죄의 형벌을 받는 생소한 사역(opus
alienum)을 통하여서 만유의 주재로서 본래적 사역(opus proprium)을 이루셨다.
이러한 구원의 길(via salutis)이 창조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consilium)이었다. 구원사(historia salvifica)와 구원서정(ordo salutis)이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보로 말미암아 역동적으로 연관됨으로써 우리의
구원은 과거-현재-미래성을 가지게 되었다.

2.4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consummatio creationis)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자셨다는(erat) 것뿐만 아니라 창조자라는(est)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자시라”(롬 4:17b).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계 21:1).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나의 태초가
되신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시
139:13).

하이델베르그 신앙 교육서에서 언급하듯이 “무로부터 천지를 지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 . .는. . .나의 하나님이며
아버지시다”(문 26).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역사 가운데 완성시키실
것을 믿듯이 나의 처음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금과 앞으로도 나를
계속 지으가실 것을 믿는다(Shirley C. Gutherie, Jr., Christian Doctrine, 156-157).

37
◈ 조직신학서론

다시 때가 차면 주님께서 다시 강림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이


완성되고 창조가 완성된다. 창조의 완성은 구원이 완성된 백성에게 현시되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의 현시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보혜사 성령—의 통치가 완성됨으로 새 인류 곧 구원 받은 백성에게
하나님이 충만히 임하셔서 하나님을 마주 보게 된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은
만유 안에 만유가 되셔서 충만히 임재하심으로 창조를 완성하신다. 따라서
더 이상 자연의 순환의 법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빛(lumen gloriae)으로 살고 자연적 생명(vita naturalis)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곧 영(spiritus)으로 산다. 이로써 자신의 영광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우주(kovsmo§, mundus)와 하나님의 형상을 한 소우주(mikrovkosmo§)로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로부터 더 이상의 것을 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으며 완성할 수도 없는 온전한 찬양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 조직신학서론

제 3장 신학의 근본원리
신학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신학의 대상이다. 그리고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이 지식은 우리 자신의 지각 자체(로크)이거나 지각에 대한
개념화(칸트) 이거나 지각으로부터 나온 감정(슐라이엘마허)이 아니다. 이
지식은 이성이 이성적으로 판단한 합리적 지식(데카르트)이 아니다.

나로부터 나온 내재적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서 완전하나 부분적으로만 계시된다(고전 13:8-13).
이곳에서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theologia stadii)과 본향에서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theologia patriae)의 차이를 인식하며, 계시 위에서(above)가 아니라 계시
아래서(below), 즉 계시에 의존(dependentia)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신학(theologia humana)이다. 즉 신학은 하나님의(of)
지식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about) 지식으로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지식을 추구한다. 즉 원형신학 혹은 계시(theologia seu revelatio
archetypa)가 아니라 모형신학 혹은 계시(theologia seu revelatio ectypa)가 신학의
대상이 된다 (Kuyper, Principles of Sacred Theology, 244, 248).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유추할 수 없다(250). 신학적 고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서 계시하신
지식이다. 그러므로 theologia ectypa이다(252).

이하 theologia ectypa의 특성을 정리해 본다. 1) 모든 계시는 자발적


계시이다. 하나님의 뜻(voluntas)—기뻐하심—에 따라서 계시된 만큼 하나님을
알게 된다. 2) 하나님의 계시의 모형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를
부분적으로 안다. 그러나 theologia ectypa는 theologia archetypa에서 나온
것으로서 진리(veritas)이다. 즉 부분적이나 진리이다. 3) 하나님의 모형
계시(theologia ectypa)는 하나님의 지식의 의인화(anthropomorphism)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맞추심(accommodatio)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self-knowledge, theologia archetypa)을
분여하시는 것이(impart) 아니라,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을 우리에게
맞추어서 계시하신다(accommodare)(253-256).

[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신 뜻에 따라 창조물 가운데 자기를


스스로 계시하시는 것이지, 슐라이엘마허를 필두로 한 내재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우리가 지식(knowing)을 통하여서 절대 존재에 의존하는

39
◈ 조직신학서론

감정(feeling)을 갖게 할 만큼, 그래서 그 신이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에게


완전하게 알려 질 만큼, 나아가서 그 신이 내 속에 갇힌 신이 될 만큼만
피조물에 필연적으로 계시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피조물 안에 모두
계시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계시이다(즉 특별계시가 존재한다. 자연
신학 비판). 하나님은 피조물 가운데서 피조물과 함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다(범신론 비판). 그러므로 계시를 창조에 국한시키거나
창조 후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만 자신의
기뻐하심에 따른 비필연적인 계시 속에 완전하고 충족되게 계시된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영광을 돌려야 한다(258-260).

[2]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통하여서 우리가 그 분 자신을 아는 주관적


지식에 이르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의도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완전함을 의식하는 존재를 지향한다. 하나님이 계시하는 것은 그가
그것을 계시하기 전부터 자신에 대해서 의식하는 계시이다(That which God
reveals is conscious knowledge of Himself, before He reveals it). 그러므로 계시를
[믿음으로] 받는 자는 계시를 주관적으로 의식한다(260-263).

[3]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따라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계시라는 극장(theatrum revelationis)의 관객(spectator)이자 배우(histrio)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가 그 속에서 작용함으로써 최고의 의식을
하는 주체일 뿐만 아니라 가장 완전한 계시이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계시를 받을 뿐만 아니라 계시로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이끌어
낸다 (theologia innata seu concreata).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칼빈은 semen
religionis라고 부른다.

한편 본래 사람에게는 믿음(fides)이 주어졌다. 믿음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단지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여는 것 그리고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보다 뛰어 나신, 그 자체로 우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시는 다른 한
존재(another Being)에 대한 계속적인 인식.”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about)
그리고 우리 자신 안의(within) 하나님의 계시가 믿음으로 수납될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theologia innata seu concreta를
fides로 받는 것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이 두 요소와 더불어서 논리적인 행위(the logical action)를 통해서 revelatio를
theologia로, praeceptio를 sapientia로, impressio를 conceptio로 바꾸는 사상과
언어의 표현이 필요한 것이다. “계시가 없이는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는다.
믿음이 없이는 계시에 대한 어떤 이해나 적용도 없다. 인식된 것에 대한
◈ 조직신학서론

논리적인 행위가 없다면 그것은 주관적인 지식으로 바뀔 수 없다”(263-275).

[4] 위에 언급한 세 가지 요소—revelation, faith, the logical action—는


타락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인간에게
동정적(sympathetic)이었던 계시가 적대적(antipathetic)이 되었다. 여전히
믿음이 존재하나 그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에게 동정적(sympathetic)인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논리적인 행위 역시 여전히 남아 있으나
이제 이로써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이하에서는 이와 같은 세 가지
요소가 타락한 인류에게 작용하는 현상과 가치를 살펴 본다.

(1) revelation.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지 않으면 타락한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진정한 의미의 신학도 없다. 타락한 인류에게도 불씨들(scintillae,
sparks)과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rudera imaginis Dei)이 여전히 있어서 죄에
대한 제동을 건다. 그러나 일반은총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모두 죄와
불법으로 죽었으며 중생에 대해서는 완전히 수동적이며 무능하다. 특별
계시는 이와 같은 일반은총 속에 있는 죄인들을 위한 것이다.

특별 계시는 “formally”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외부로부터 내부로


들어 옴을 의미하며—이는 common consciousness가 individual consciousness로
되는 것이다—“materially” 하나님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죄인들을 적대하는
분으로서 계시하지 않고 오히려 긍휼히 여기며 자비를 베푸시는 분으로
계시하신다.

(2) faith.

한편 타락한 죄인으로서 원래 영혼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바라는 믿음(pivsti§)이 하나님의 외의 것을 믿는 다른 믿음(ajpistiva)으로
전향되었으나, 이제 육체 가운데 하나님의 나타나심(the manifestation of God in
the flesh)를 믿는 믿음을 추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faith in Christ)에
이른다. 하나님 외의 것을 찾는 일시적인 믿음이 아니라 이제는 영원한
믿음을 갖게 된다.

41
◈ 조직신학서론

(3) the logical action.

그리고 the logical action of the ectypal theology는 이제 하나님의 지식은


구원론적인 해석을 통해서 주관적 지식이 된다. 이는 계시의 개인 구원에의
적용을 의미한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그에게 지혜가
된다(고전 1:30).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가운데 계시된다. 이
계시는 머리 되신 예수의 지체들에게만 믿음으로 수납된다. 육신 가운데
몸을 입은 로고스가 타락한 인류를 대신해서 the logical action of the ectypal
theology를 행한다. 이로써 살아계시고 명확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viva et
expressa)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관화된 구원의 지식이 인류 개인의
주관적인 가르침이 된다(indoctrination).

“몸의 머리로서 그리스도께서는 회복된 인성의 주제가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 분 안에서 완전할 뿐만 아니라 그 분으로부터 각
성도들에게 내려 온다. . . . 한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이 그 분의 신비한
전체 몸에 중심적으로 주어져서 그 분으로부터 그것 자체가 그 분의
지체들과 교통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얻어질 수 없을 정도의
윤리적인 완전함이 이제 성취되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의 머리요
중심(centrum)으로서 처음이 되셔서 자신으로부터 각 성도들에게로
내려오신다.”(286).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요 10:30) 말씀에 기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특히 선지자로서—하나님의 지식을 Theologia Unionis라고
부른다.

(1)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지식(theologia archetypa, an adequate divine


self-knowledge)이 아니라 “a human knowledge of God”이다. 즉 인간의 능력으로
측량할 수 있을 만큼의 완전한 지식이다.

(2) 이러한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의


열매인데 변증적 분석(dialectical analysis)으로 진리에 이를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직관적인 지식이다. 이 지식은 지혜 있는 자나 배운 자에게는 거치는
것이나 젖먹이도 받는 말씀이다. 이 지식은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지식(gnw'si§)이나 이해(suvnei§)가 아니라 우리의 지혜(sofiva)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논쟁하지 아니하시고 선포하신다; 그 분께서는 주장하시기
◈ 조직신학서론

보다는 보여주시고 예증하신다. 그 분께서는 분석하시지 않으시고 사람을


사로잡으시는 표로써 진리를 드러내신다”(287).

즉 the logical action은 중생한 사람이 계시(revelation)를 믿음으로


수납하여서 하나님에 관한 인격적인 지식(personal knowledge)을 얻고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 관한 완전한 지식에 비추어서 변증적으로
의식(dialectical consciousness)하는 가운데서 이해(understanding)함에 있다.

(3) 그런데 이와 같은 the logical action에 있어서 믿음으로 수납된


계시는 성령의 조명(illuminatio)을 통하여서 이루어지므로 실제적인 지식이
된다. 성령은 개개인에게 작용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교사”로서 작용한다.
성령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지식에 우리가 믿음으로 수납한
하나님의 계시를 비춤으로써 교회의 교리(doctrine)가 되게 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성령은 이러한 교리를 통해서 계시의 일반적인 이해에 이르게
한다. 여기서 Kuyper는 theologia ectypa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자기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지식과 성령의 역사를 동시에 다룸으로써
계시의 삼위일체적 이해에 이른다(275-299).

칼빈이 갈파했듯이 하나님의 지식은 창조주 하나님 지식과 구속주


하나님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논리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의 지식이
앞서나 시간적으로는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이 앞선다. 구속주를
믿음으로써만 그리하여 구속주의 지식에 비추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함으로써만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Logos, Verbum Dei, Sermo Dei)이므로 모든 지식이 그에게서
출발한다. 그런데 참 하나님의 지식(notitia vera Dei)은 중생한 자들만이
믿음으로 수납하기 때문에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믿는 사람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을 통하여서 창조주 하나님의 지식에
이른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구속주로 나타내신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아는 것이 참 하나님의 지식이다.

로고스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기 객관화이시며 하나님의 자기


계시(revelatio ipsius Dei)이다. 그런데 archetypal theology를 ectypal theology로
계시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지식의 일부를 그냥 나눠 준 것이 아니라
맞추어서 주셨다. 이 맞추심(accommodatio)의 절정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드러내심의 절정이며 구원 작정을

43
◈ 조직신학서론

이루심이었다.

하나님은 자기를 드러내시고 동시에 구원을 이루고자 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시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며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은 하나님이
구속주이심을 계시함에 있었다. 그러므로 성육신을 부인하면 속죄를
부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시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을
부인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수납하여 주관적, 인격적, 구속적
하나님 지식에 이르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인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로고스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그 계시의 절정은


로고스가 육신을 취하심이다. 그 계시의 언약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며 그
권능이 부활로 선포되고 승천하셔서 재위하심으로 통치하심으로써 이 땅에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구원의 완성이 창조의 회복이 된다.
◈ 조직신학서론

제 4장 그리스도의 계시(revelatio Christiana)


하나님은 인류 일반에게 sensus divinitatis, semen religionis, conscientia를
주셨다. 전 양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지식과 더욱 관련된다면 최후자는
하나님의 어떠하심 즉 선악간에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더욱 관련된다.
전 양자는 창조주 하나님(Deus Creator)을 아는 지식에, 최후자는 심판하시는
하나님(Deux Vindex)을 아는 지식에 더욱 관련된다. 하나님의 뜻의
계시(revelatio voluntatis Dei)를 율법의 본질(natura legis)이라고 보는 정통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 양자는 하나님의 창조에, 최후자는 피조물의
운행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더욱 관련된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과 그 씨앗을 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심령을 사악하게 사용하여 우상을 만드는데
바빴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의 의를 좇아 살아감으로써 그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내어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자리에 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영의 지배를 받고 그 사슬에 매임으로써
뒤틀린 분별력으로 선악을 판단함으로써 모든 행사가 악함에 이르게 되었다.
일반계시의 은총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한 인류는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이를 핑계할 수
없다(inexcusabilitas, cf. 롬 1:20). 다만 하나님은 일반은총의 섬광들을 여전히
남겨 두셔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존재를 바라고 그의 말씀을 받는
자리를 두신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Deus Infinitus) 영이시기(Deus Spiritus) 때문에


제한되지 아니하시며 형상으로 표현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Deus Trinitas)이시며, 살아계시며, 창조주이시자 구속주이시다.
말씀(Sermo, Logos)으로 말씀(Verbum)하신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육신으로
보내셨으며 그 육신 가운데서 구원의 협약(pactum salutis)을 이루셨다. 그
육신 가운데서 계시의 정점을 보이셨고, 구원을 다 이루셨다. 로고스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이제 그림자(umbra)로서 계시던 하나님의
인격(persona)이 육신을 입으셨다. 그리고 그 육신 가운데 양성에 따라서
중보자의 직무(officium Mediatoris)를 수행하시고 이루셨다.

이 중보자가 지금도 여전히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 중보하신다. 구약 시대 때 그리스도는 인격으로 계셨다.
다만 아직 몸을 입지 아니하시고 그림자로 계셨다. 그러므로 그림자가

45
◈ 조직신학서론

인격적(personalis)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격이 그림자로 계셨다. 구약


백성들도, 비록 그림자였지만, 제 2위 하나님(hypostasis)이 인격(persona)으로
존재(subsistentia)함을 믿었다. 율법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repraesentatio)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현재(顯在, praesentia)를 계시했다.

이 표상과 현재가 만나는 점이 로고스의 성육신이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그 몸으로 구원을 이루시려고 로고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표상의 실재(subsistentia)와 현재의 실체(substantia)가
육신 가운데 드러났다. 그리스도를 증거한 계시가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
계시였음이 드러났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빛으로 증거 되었으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했으나(요 1:3-5, 9-11), 이제
그 빛이 육신 가운데 오심으로써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마다 독생자의
영광을 보고 그를 믿고 영생에 이르게 되었다(요 1:11-14, 18, 3:16):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러므로 참 신학(theologia vera)은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시에 따라서 모든 부분이 해석되고 조명되는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에 따라서 신학의 정오(正誤)가 판단되어야 한다.
창조계시로부터 시작하는 신학은 하나님을 피조물에 가두는 내재신학이
되며 자연신학(theologia naturalis)에 이른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하고 오염된 인류는 자연계시로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없다. 먼저 자신의 눈을 안경으로 교정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특별계시 즉 구원계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자연인의 이성은 하나님을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자연 신학은 결국 신을
이성에 가두고 신의 무한성과 영적인 특성 그리고 삼위일체의 신비를
부정한다. 신을 인간에게 가둘 뿐만 아니라 신을 죽이는 길에 선다. 신학은
중생자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자연신학은 존재일반에의 동참으로서 신의 존재를 설명하고자 하는


희랍의 근본사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돌(있음) - 풀(있음 + 생명) - 개(있음 +
생명 + 운동 + 지각) - 사람(있음 + 생명 + 운동 + 지각 + 지성) - 천사(있음
+ 생명 + 운동 + 지각 + 거의 대부분의 지성) - 신(있음 + 생명 + 운동 +
지각 + 지성 자체).

중세 스콜라 철학은 이 사상을 수납해서 피조물로부터 존재의 동참을


◈ 조직신학서론

통해서 최고 존재인 신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아퀴나스는 신을 “사고를


사고하는 사고”라고 보았다. 신은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고 한다. 이 경우 신은 최고의 순수유(actus purissimus)로서 창조주나
구속주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섭리하지 않는 한가한 신(Deus otiosus)에
불과하다. 신을 잠재우고 자신들의 공로로 신 존재에 동참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신화(deificatio)를 구원의 목표로 삼는 카톨릭의 신학은 이와
같은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존재의 유비를
설명함에 있어서 피조물의 구조와 본성을 탐구하여 그 존재와 성질을
부정하여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이르는 부정적인 방법(via negative)과 이와
대조적으로 피조물에 나타난 선(bonum), 아름다움(pulchritudo),
거룩(sanctitas)으로부터 유추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이르고자 하는
적극적인 방법(via positive)이 있다. 믿음이 아니면 무한하시고 영이신
살아계신 삼위 하나님을 알 수 없다.

47
◈ 조직신학서론

제 5장 계시(revelatio)에 의존해서 신학함:

계시=신지식의 길(via ad cognitionem Dei)


자연과학의 인식 원리(principium cognoscendi)는 객체(object)로부터
지식을 이끌어 내는 것은 주체의 이성(ratio)이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성에
의해서 객체가 사고의 주체인 자연인에게 종속된다(“[An] object is subjected to
him(natural man) as the thinking subject [by his reason]).” “자연과학에서 지식을
취하는 것은 사고의 주체이다; 그러나 신학에 있어서는 지식을 주는 것이
객체 자체이다”( Kuyper, Principles of Sacred Theology, 341, 342).

하나님은 그의 영광의 극장으로서 피조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구조, 그리고 사회(societas)의 구조와 질서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일반은총과 종교의 씨앗(semen religionis), 하나님을 아는 지식(신의식, sensus
divinitatis), 양심(conscientia)으로 대표되는 일반계시를 타락한 인류에게
베푸심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해서 그들이 자신의 무지를 변명할
수 없게(inexcusabilis) 하셨다. 그러므로 원죄의 유전(遺傳)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멸망에 이르는 것은 마땅한 형벌(poena debita)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사 선택한 백성에게는
값없는 은혜(gratia immerita)를 베푸셔서 구원하셨다. 그리고 구원에 관한
지식을 말씀 가운데 특별 계시로서 주셨다.

이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the self-revelation of God to the


sinner)는 구속주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일반 계시와는 그 내용에
있어서(materialiter) 다르며, 그 계시가 중생된 사람에게만 특별히 계시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믿음으로만 수납된다는 측면에서
일반계시와는 그 형식에 있어서(formaliter) 다르다. 그러므로 구원지식은
창조(creation)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re-creation)로부터 나온다.
구원지식은 종교의 씨앗으로부터 보편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영감되고, 영감된 말씀이 조명되어 개인적으로 획득된다. 죄인들 각자의
마음에 자기 자신의 지식을 영감하시고(inspirare) 조명하시는(illuminare)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은 자기 자식을 계시하신다. 이것이 실유의
원리(principim entis)이다 (Kuyper, Principles of Sacred Theology, 413-420).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구원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말씀이


구속계시가 됨을 보여 주었다. 이로써 말씀이 영원하신 중보자 되심을
◈ 조직신학서론

나타낸다. 실체적인 의(substantialis iustitia)가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만약


타락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그리스도는 여전히 인간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론하는 신학자들(오시안더로 대표)과는 달리 칼빈은 율법의 명령과 인간의
16 17 18
전적이고 인격적인 타락 사이의 큰 간격을 메우는 중보자의 필연성을
직시한다 (Inst. 2.12.6, CO 2.345; 3.11.5, 10. CO 2.536-537, 540-541).

칼빈에게 있어서 율법이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인 것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실체(substantia)이자 진리(veritas)인 한에서 그렇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실체이자 진리이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praeceptum)에는 약속(promissio)이
19
부수(附隨)하며 율법은 그리스도를 표상(repraesentatio)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재(praesentia)를 계시한다. 한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총체적인 계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reality)를 계시한다. 그리스도가
말씀으로서 육신으로서 지금은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계시되는 진리로서
계시의 실체가 된다. 이것이 실유의 원리이다.

실유의 원리와 더불어서 개혁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원리로서 인식의 원리(principium cognoscendi)를 논한다. 이는 내적
원리(principium internum)로서의 계시와 외적 원리(principium externum)로서의
신앙과 이성으로 상론된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칼빈은 cognitio, notitia라는 라틴어 사용, 이 둘은 모두
불어 cognoissance로 번역. 한편 scientia라는 단어는 지식 그 자체를 표현)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파악되지 않는다.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Finitum est non capax infiniti).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영이시며, 절대적인 인격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형상을 한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즉 피조물이 창조주를 아는 것은)
이성에 의함이 아니라 성령의 감화(persuasio)로 말미암는 믿음과 경건에

16 Inst. 2.1.9, CO 2.184: “. . . totum hominem quasi diluvio a capite ad pedes sic fuisse
obrutum, ut nulla pars a peccato sit immunis; ac proinde quidquid ab eo procedit in peccatum imputari.”
17 Inst. 2.2.1, CO 2.185: “. . . peccati dominatum, ex quo primum hominem sibi obligatum
tenuit, non solum in toto genere grassari, sed in solidum etiam occupare singulas animas, . . .”
18 As regards human depravity, Calvin obviously rejects traducianism, which was supported by
Servetus who, according to Calvin, tried to introduce the Manichaean error of the soul’s emanation (Inst.
1.15.5, 2.14.8, CO 2.139-140, CO 2.360-361). Cf. Inst. 2.1.7, McNeill’s footnote 10; Inst. 1.15.5,
McNeill’s footnote 15.
19 율법의 명령과 약속에 관해서, Inst. 2.5.10, 2.7.12, 2.9.3, 3.17.1-15; Comm. Ex. 19:1-2
(1.313-316, CO 24.192-194); Lev. 18:5 (3.201-289, CO 25.1-58).

49
◈ 조직신학서론

의한다. 즉, 무한한 영으로서 절대적 인격이신 하나님은 자기의


존재(existensia)와 경륜(consilium)과 사역(opera), 그리고 자기의
인격(persona)과 직(officium, munus)을 스스로 계시하시는데(se revelare), 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만이 피조물이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이다(위로부터의
신학). 즉 하나님의 자기계시—하나님은 스스로 계시하시기 때문에
계시하신대로 존재하신다—와 성령의 구속(“the bridle of the Holy Spirit”)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Inst. 1.4.4).

1. 계시의 가능성

계시라는 말은 정체를 드러냄(unveiling)을 의미하는 라틴어


revelatio에서 유래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물과의 관계에서
자기에 관한 진리를 사람에게 전달하시는 행동”과 “이 행동으로부터
결과하는 하나님의 지식”을 가르킨다. “신학에서 이 말은 결코 무의식적
생성적(becoming) 현현(범신론적)을 가르키지 않고 하나님께서 신적 진리를
전달하시는 의식적, 자원적, 고의적 행위”를 의미한다.

계시에 해당하는 구약의 말은 hl;G; (벗어지다) 신약의 말은 ajpokaluyi§,


fanevrwsi§(벗어지는 것, 열어 보이는 것)이다. ajpokaluyi§는 주로 특별계시에
fanevrwsi§는 일반계시에 주로 사용되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i) 계시 개념은 실유의 원리를 기초로 성립된다.


하나님은 절대 인격(persona non genita)이시며 절대적으로
자의식적(自意識的, 매개없이 모든 것을 아심)이고 스스로를 계시하신다.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 전에 이미 자의식적이셨으며, 자의식에 이르기 위해서
천지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즉 인격적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주와
구속주로서 계시한 것이지 창조를 통해서 자신의 실체를 유출하거나, 우주
안에서 자의식적으로 되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격은 외계적
이데아로서 단순히 사유의 대상이거나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 실제적, 실체적
산물이다(existentia realis et substantialis). 하나님은 스스로의 기뻐하신 뜻에
따라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절대 인격이신 하나님은 자신을 절대적으로
계시하신다.

ii) 계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만 계시된다.


창세기 1:26-27의 하나님의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어거스틴은 형상은 지적 특성과 모양은 도덕적 특성과 연관된다고
◈ 조직신학서론

본다. 로마 카톨릭은 형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적 은사를 모양은


초자연적으로 받은 은사의 칭호 즉 원시적 의로 보았다. 칼빈은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형상을 영혼의 실체로 모양을 그것의 자질로 보는 견해와 형상을
육체에 모양을 영혼에 관련된 것으로 보는 오시안더를 비판하며 여기에서
형상과 모양은 뜻으로 구별되지 아니하며 히브리어법에 따라 모양은
강조하기 위해 덧붙여진 것으로 본다(Inst. 1.15.3). 하나님의 형상의 좌소는
영혼이며(Inst. 1.15.3), 영혼은 1)불멸적이나 창조된 존재이며 2) 신적인 것이
20
새겨진 곳이며 3) 양심과 지성의 좌소이다(Inst. 1.15.2).

2. 계시의 내용

하나님의 자기 계시(revelatio ipsius Dei):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의


존재와 사역을 계시하심으로써 인간에게 자신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여
이것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의 존재(영광, 권능)와
사역(창조, 섭리, 구원)과 경륜(언약, 하나님 나라)을 포함한다. 이들 모두는
로고스를 통해서 계시되며, 로고스는 또한 계시의 내용이 된다. 그리고
로고스는 삼위일체 가운데 내재적이며 경륜적으로 이해되며, 삼위일체는
또한 계시의 내용이 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계시자이다.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타락 후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로서 인류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이 “계시의 저자”라는
것뿐만 아니라 아버지라는 것도 알지 못한다(Inst. 2.1.1). 그리스도는 말씀
자체일 뿐만 아니라 말씀의 전달자이며 해석자, 그리고 말씀의 완성자이다.

3. 계시=신지식의 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하여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 1)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어떤 분이신가(“what sort he is”) 2) 그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이 우리에게 합당한가—무엇이 그의 본성과 일치하는 가(“what is
consistent with his nature”) 3) 그를 아는 유익이 어디 있는가: “첫째, 우리의
지식은 우리를 가르쳐 두려워하며 경외하게 해야 한다; 둘째, 우리의
안내자요 교사로서 그 지식을 가지고 우리는 그 분으로부터 모든 선한 것을
찾도록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받은 바대로 그 분의 뜻에 맞게 믿어야

20 신학의 좌소에 관해서 Bavinck, CD 1.254-279.

51
◈ 조직신학서론

한다” (Inst. 1.2.1-2).


◈ 조직신학서론

제 6장 성경(Scriptura)에 근거해서 신학함:

성경=신학의 형식적 원리
특별계시는 창조 후에 말씀으로 온 계시로서 타락전의 하나님과
사람과의 언약관계를 다룬 비구속적 특별계시와 타락후의 하나님과
인류와의 관계 회복을 다룬 구속적 특별계시로 나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칼빈은 말씀을 세 가지 비유로 특징적으로 표현한다.


i) 안경(spectacles)
하나님의 지식을 성경의 안경을 통하여 명확히 보게 됨(Inst. 1.6.1).
ii) 실(the thread of the Word)
가까이 갈 수 없는 하나님(딤전 6:16)에 이르게 되는 길을 인도하는
실(Inst. 1.6.3).
iii) 학교(the very school of God’s children) (Inst. 1.6.4) 시편 19:7-8 참조.

1. 성경=신지식의 원천

최종 계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완성이고 절정이다. 오순절


부흥운동자들이 방언 등을 통한 새 계시의 발생과 그 연속성을 말하나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기록된 말씀(로고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완성이고 절정이다. 그리스도가 마지막 계시이다(요
3:16). 더 이상 새 계시나 추가 계시가 있지 않다. 다만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마지막 때에는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다(고전 13:12; 고후 3:18; 요일 3:2).

이상과 같은 특성은 성경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기록이며 그리스도


계시 즉 기록된 로고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의 길로서 중보자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획득함이 참 신지식의 길이다. 성경이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기록된
로고스이기 때문에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아니하면 아무도 참되고 건전한
교리의 한 입 맛조차 볼 수가 없다”(Inst. 1.6.2).

그러므로 참 신지식(notitia Dei vera)의 원천(fons)은 성경이다.


i) 이성에 의해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53
◈ 조직신학서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는 신을 사고를 사고하는


사고로서 사유의 영역에 묶어둔다. 또한 플라톤의 이데아는 관념적이어서
신을 현상계와 분리된 이념으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는 창조주와 구속주의 개념에 이르지 못한다. 즉
자연 이성은 신지식의 원천이 될 수 없다. 헤에겔은 그의 관념론에서
하나님이 이성에 자신을 계시함으로써 철학자는 철학함을 통하여서
절대이성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의 그릇으로 절대자를 담을 수는
없다. 즉 하나님은 현상계에 대한 이성의 철학으로 설명될 수 없다.
ii) 종교 경험(혹은 인간의 종교 의식, 종교심)은 하나님의 지식의
원천이 될 수 없다. 슐라이엘마허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근거해서
종교경험을 이성적으로 분석했으며 리츨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근거해서
종교경험을 도덕적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이 인간 존재의
구조가 계시하는 종교시의 분석에서부터 나온다고 주장될 때 이 지식은
우상에 다름 아니다.
iii) 종교 체험은 하나님의 지식의 원천이 될 수 없다.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특수한 종교체험이나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보편적 종교체험이 성경의 표준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지식의
원천이 될 수 없다. 자유주의자들이 보편적 종교체험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을 비신화화하여 내재화, 관념화함으로써 현상계에 가둠에 다름
아니다.
iv) 하나님의 말씀 외에 계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자유주의와 정통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그저 온 성경에 있다는 것보다도 성경의 어떤 부분들로 하여금
주관적 경험에서 ‘나에게 그의 말씀으로’ 되게하는 하나님의 조명에 그것이
발견된다고 한다. 바르트는 말하되 ‘내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경험한 것이
진리라 하였고, 브룬너는 ‘성경의 어느 부분들이 하나님의 참 말씀인지를
나는 어떻게 아는냐? 그것들에게서 그가 내게 말씀하시는 때에다’고 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성육신하신 본체론적인 하나님의


말씀(lovgo§)”과 “성경에 기록된 인식론적인 하나님의 말씀(rJh'ma qeou')”를
구별한다. 그러나 신정통주의자들과는 달리 이 둘이 서로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구약 선지자들은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되,”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 등의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에 의해서 선포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시종일관 공표하였다. 바울은 구약을 “하나님의
◈ 조직신학서론

말씀”으로(롬 3:2) 신약의 복음을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살전 2:13)으로 표현하였다. 예수께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을 기록한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요 10:35)로
보셨다. 신약에서 구약 성구를 인용하면서 하나님이나 성령을 그 저자로
말한 곳이 매우 많이 있다(마 15:4; 히 1:1; 3:7; 4:3; 5:6; 7:21; 8:5, 8, 10;
10:15‐16).

결론적으로 정통적인 견해는 성경의 계시로부터 성령의 persuasio와


illuminatio를 통한 지식, fides와 pietas 가운데의 지식에로 이르며, 이로부터
종교 경험들이 생산된다는 것이다. 참 종교 경험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성경은 삼위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책이기 때문에 성령의 은밀한


증거와 조명에 의해서 우리가 가르칠만하게(teachable, docilis) 되어서
창조주와 구속주 하나님을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믿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나에게 말씀하시는 책이기 전에 스스로 말씀하시는
자기계시의 책이며 교회의 승인이나 해석에 의해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 스스로 계시한다(Inst. 1.7.1-3). 즉
성경이 원규범(norma normans)이며 교리는 이차적 규범 즉 규범된 규범(norma
normata)이다.

2. 성경=신지식의 외적 원리(principium cognoscendi externum)

i) 성경은 하나니의 자기계시의 기록으로서 신적 권위(auctoritas


divina)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 지식의 원천(fons), 표준(norma),
심판관(iudex)이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이 성경의
원저자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성경의 권위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영감에
의해 즉 하나님의 호흡하심으로 무오하게(infallibiliter) 기록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ii)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이 말씀 가운데 인격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에 기반함으로써 자기 가신성을 갖는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내적
증거로 인간 저자들을 통해서 친히 자신의 입술로 하신 말씀으로서 스스로
확정한다(Inst. 1.7.4-5). 이와 같이 성경은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우리에게
스스로 계시됨으로써 자기 해석자여서 성경외에 다른 유전과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서 명료화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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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서론

[참고]

하나님 인간 저자들 독자들


(auctor originalis) (auctor humanus)

inspiratio Spiritus Sanctus illuminatio Spiritus Sanctus


testimonium arcanum Spiritus Sanctus +
persuasio

autopistia self-authentication
◈ 조직신학서론

제 7장 교리의 지도를 따라 신학함


하나님의 존재, 사역, 경륜, 작정을 그의 계시를 믿음으로 받는 것.
하나님의 말씀하심, 하나님의 자기계시(실유의 원리)에 따라서 성경(신지식의
외적 원리)을 믿음(내적 원리)의 내용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조직신학이다. 즉
하나님의 전 경륜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믿음의 체계를 이루는 것이다. 이 때
성경이 원규범으로 교회의 진리에 대한 신앙고백인 교리가 규범된 규범으로
작용한다.

교리(doctrine)는 “종교적 진리에 관한 직접적이고 소박한 어떤 한


개인의 계통적 서술”임에 반하여 교의(dogma)는 “교회의 권위적인 인정을
받은 역사적 신경들에 자리잡은 기독교 교리의 공적 표시”로서 통상
구별하나. 두 용어는 공히 헬라어 dokei'n에서 나온 말로서, dokei'n moi(내게
그렇게 보인다; 그것이 내 확신이다)라는 말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공인된
자명한 진리, 법령, 결의 등을 뜻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리 혹은 교의는
신적 권위(혹은 신적 증언)에 의해서 교회에 자명한 진리로서 알려지고
교회에 의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진리를 뜻한다.

교리는 하나님의 구원진리를 신적 권위에 근거하여 교회가


신앙고백의 형식으로 표현한 명제로서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근본진리를
뜻한다.

i) 교리는 하나님의 구원 진리의 표현이다.

로고스를 통한 구원 진리의 계시를 선포함이 교리이다. 그러므로


각교리는 일정한 견지에서 구속 종교로서 기독교를 전체적으로 표현한다.
기독교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생(生, 生命)의 방식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신비체험이나 도덕적 모범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즉 영생의 지식에서 출발한다(요
17:3). 구원 진리의 진수는 요 3:16에 표현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원리, 기독론(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시자 하나님의 작정의 이루심이시다. 따라서 제 2위 로고스
하나님을 통한 구원 진리의 계시가 교리이다. 교리는 기독교를 구속종교로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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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서론

ii) 교리는 신적 권위에 근거한다.

교리는 성경에서 나왔고, 성경에 근거하여 공식화되었으므로 신적


권위를 갖는다. 교리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에서 찾음에 있어서 교리의
사도적 성격을 확증함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도들의 특별영감에
의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교리는 성경적 진리의 표현으로서 그 권위는
성경을 앞서지 못한다. 오히려 교리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에 기원하고
성경의 권위(authority)는 성경의 원저자(original author)가 하나님이라는데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어떤 가르침도 교리가 될 수 없다.

초대 교회 최고의 이단은 영지주의(Gnosticism, 靈知主義)라고


불리는 그노시스파였다. 이들은 헬라의 이원론적 철학과 동방의 신비
사상들을 비판 없이 받아들여 성경의 계시를 세속화한 일종의 기독교 내의
혼합주의 운동의 선구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영혼과 육신의 분리를 강조해서
영혼은 귀하나 육신은 악하다고 보았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은 구속주
하나님보다 열등하다고 보았으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고 단지
하나님이 예수님의 영과 결합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육신은 저급하기 때문에
육신의 삶은 영혼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보았다. 사도 요한과 바울의
작품에서 보듯이 영지주의자들은 이미 사도시대 때부터 흥왕했다.

교리의 형성은 일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속사도(續使徒) 시대(바나바, 허메, 로마의 클레멘트, 폴리캅, 파피아스,
이그나티우스), 이단 사설에 대해서 기독교 교리를 수호한 신학자들이
활동한 변증가(辨證家) 시대(저스틴, 타티안, 아데나고라스, 안디옥의
데오휠루스), 그리고 교회적으로 교리를 체계화한 교부(敎父)들의
시대(반그노시스파 교부들: 이레네우스, 휩폴리투스,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
교부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를 거쳐서 이루어졌다. 특히
어거스틴은 초대 교회에서 중세 교회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교리를 확립한
신학자였다. 초대 교회의 시대에 있었던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의
삼위일체 논쟁,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포이티엘스의 힐라리의 성령론 논쟁,
성령의 출래(procession)에 관한 휠리오께(Filioque) 논쟁, 그리고
아폴리나리우스의 단성론과 네스토리우스의 왜곡된 양성론을 반박하는
기독론 논쟁 등을 통하여서 형성된 니케아 신조, 아다나시우스 신조, 칼케돈
신조 등은 모두 교리의 성경적 적합성을 추구한 초대 교회의 교리들을
교회의 신앙 고백으로 확정한 것이었다.
◈ 조직신학서론

iii) 교리는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교리를 근본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서게 되는데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며, 교의적 일치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며, 교리를 통하여
진리 수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참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신앙 고백
형식으로 교리를 확정한다.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로서 교회는 교의를
가진다.

iv) 교리는 신앙 고백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교회는 신앙 고백을 통해서 교리를 규범화한다(교리의 규범: regula


doctrinae). 교회의 몸이 그리스도라면, 교회는 그리스도를 주로서 고백함으로
세워진다(마 16:16-18).

성경은 믿는 바가 입술로 고백되기를 원한다(롬 10:9-10). 즉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고백한다(Credo, ergo confiteor).”

초대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원입교인들이 사도적인 교훈을 입술로


고백하기를 요구했었는데, 이 고백을 우리는 “신앙의 규범,” 즉 신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신조(symbolum, creed, rule of faith)는 “공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신앙고백, 또는 신앙의 내용을 언어 형태로 표현하되 그것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여 구원을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여기거나
최소한 건전한 기독교회를 유지하기에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성경적 구원 진리, 즉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는 최초의 신앙 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말씀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성경적 신앙고백은 이후 삼위일체 교리로서 니케아 신조(동방교회)와
사도신경(서방교회)로 발전한다.

루터란 교회는 칼케돈, 아다나시우스 신경, 콘스탄티노플을 받는다고


선포한 반면에 칼빈은 칼케돈 까지만 언급. 특히 칼빈은 사도신경을
중요하게 다룬다. “. . .우리 믿음의 전체 역사가 그것[사도신경]에 간결하고
명확한 순서에 따라서 요약되어 있다. 그것은 성경의 진정한 증거들에
의해서 보증되지 않은 어떤 것도 담고 있지 않다”(Inst. 2.16.18).

59
◈ 조직신학서론

v) 교리는 교회의 신앙을 표현한 명제이다.

교리는 성경적 계시 진리에 대한 믿음의 조항을 교회가 신앙고백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 해석의 역사가 교리사라면 교리사는
성경해석사이며 성경해석의 역사적 원리에 기반하여 성령의 인도와 조명에
의해서 계시 진리의 이해가 깊어짐으로 교리의 수정과 확장이 가능하다.

교리는 성경 계시에 의존한 교회의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교회의


해석이나 유전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앞서 가지 못한다. 교리는 성경의
진술을 단순히 그대로 중언(重言)함이 아니라, 그것에 포함된 진리들을
신중히 인출하여 수납하고 이를 특정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다.

vi) 교리는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근본 진리이다.

교리는 성경의 구원 계시에 의존한 규범된 규범으로서 교회를 세우고


확장해 가는 근본진리이다. 교리는 교회 존립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공교회가 확정한 것이다. 이 교리는 만대교회가 지켜가야 한다. 기독교
신학이 교회의 신학이 되려면 교회의 교리에 부착해야 한다.

믿음의 규범으로서 신조는 어떤 특정한 제정자가 없이 그 특정


시대에 속한 교회들의 일반적인 상황에서 나올 수도 있고(사도신경), 교회의
전체회의에서 나올 수도 있고(니케아 신조, 칼케돈 신조), 특정 교회
회의에서 나올 수도 있고(트렌트 회의 신조, 도르트 신조,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 어떤 신학자들이 교회의 권위를 위촉받아 만든
것일 수도 있고(영국 성공회 39개조 신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일치신조),
한 개인이 자기가 속한 교회와 교파의 대표 자격으로 만든 것일 수도
있다(멜랑흐톤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과 변증서, 스몰칼덴 신조, 루터의
요리문답, 불링거의 제 2 스위스 신앙 고백서, 칼빈의 신앙 교육서 등).
최후자의 경우에는 신조로서의 권위가 그것을 고백한 교회나 교파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부여되거나 묵인되었었다. 이것도 광의의 공교회의 확정이라고
볼 수 있다. 하르낙은 전세계를 대표하는 세계적 회의만이 교리를 확정할
권세가 있다고 보았으나 가시 교회, 비가시 교회의 구분에 신중함으로써
지교회의 역할을 강조했던 종교 개혁주의자들은 각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리를 확정할 성경적 권세가 있음을 강조했다.
◈ 조직신학서론

1. 정통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의 형성

사도신경은(2 세기부터 형성) 교육이나 예배의식에 사용할 목적으로,


특히 세례를 받고자 하는 자나 입교를 원하는 자에게 신앙을 고백케 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사도신경은 구원에 필요한 기독교 신앙에 근본적인
모든 조목들을 성경적 용어를 사용해서, 계시의 순서대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Credo)와 이어지는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사하여 주시는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한 신앙고백(Credo in)을 포함한다.”

니케아 신조가 동방교회의 산물이듯이 서방교회에서 제 4세기 이전에


사도신경이 형성되었다. 사도신경의 기원은 마태복음 16:16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임이 분명하다.

서방교회는 세례 때 사용하기에 가장 적절하고 대중적인 형태의


신조를 제정하고 있었는데, 사도신경의 몇몇 조항들은 니케아회의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초자연적 잉태(마 1:18; 눅 1:35), 지옥강하(눅 23:43; 행 2:31;
벧전 3:19; 4:6), 육체의 부활등도 논란이 있으나 성경계시에 부합한다.

현재 루피누스(390)가 만든 라틴어 본문과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 336-341)가 만든 헬라어 본문이 남아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도신경과 같은 것은 5세기 말까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라틴교회에서
사도 신경의 형태가 전체적으로 확고하게 굳어진 것은 8세기 이후 또는
로마교회의 감독들이 서방교회의 예배의식들을 로마교회화 하려는 강력한
시도를 벌였을 때일 것으로 보인다.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 Symbolum Nicaeno–Constantinopolitanum)]

본래 니케아 신조는 아리안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325년


동방교회의 감독들이 니케아에서 회집했던 제 1차 니케아 회의에서 나왔다.
이 신조는 “그리고 성령”이란 말로 갑자기 끝나고 있으며 아리안주의자들에
대한 저주가 덧붙여져 있다. 이것이 칼케돈 회의(451)까지의 공식
신경이었다. 니케아 회의는 아리우스주의와 오리겐의 사상을 추종하던
가이샤라 사람 유세비우스 (Eusebius of Caesara)의 이단 사상에 대한
아다나시우스 (알렉산드리아의 대집사)의 승리였다.

61
◈ 조직신학서론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던 아리우스는 하나님 안에 내재한 단순히


신적 정력일 따름인 로고스와 성육신 하신 성자로서의 로고스를 구별했다.
특히 후자에게는 시초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세계가 존재하기 전에 무에서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영원하지도 않고 신적 본체도 가지지 아니하였다.
만물 중에서 가장 크고 제일인 로고스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창조된
존재로서, 비록 이를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었지만, 신적본체(ousia)를 갖지
않는다는 단일신론파의 단일신주의원리(The monotheistic principle)를 견지했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비록 유일한 특권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성도들과
같이 그도 다만 하나님에 연합되어 있다고 가르쳤다(참조, Inst. 1.13.5).

한편 아리우스의 아류로서 가이샤라의 유세비우스는 성자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성자의 영원발생(eternal generation)에 있어서 성자는
성부에게 실질적으로 또한 본질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제 2 신(Theos
Deuteros)이라고 주장한 오리겐의 설을 추종해서 homoousios 대신에
homoiousios(유사본질)를 주장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본래의 니케아 신조를 두 곳 수정하고


저주문을 삭제했으며, “그리고 성령” 다음의 조항을 추가했다. 이 신조는
데오도시우스가 마케도니우스를 좇는 사람들, 특히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성령 기계론자들(Pneumatomachians)을 막기 위해 381년 동방 감독들을
소집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했던 회의 때 생겼다고 추정된다. 니케아
신조는 희랍교회에서 큰 권위를 인정받아 사도신경이 라틴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차지하는 버금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 로마교회도
스페인 톨레도에서 열린 제 3차회의(589)에서 Filioque 이론을 공인하면서
전기를 마련해서 6세기 이후 이를 예배의식에 사용하고 있다.

교황의 권위로 로마교회(서방교회)가 희랍교회(동방교회)로부터


분리된 주요한 요인은 Filioque 이론이었다. 희랍교회는 원래의 니케아
신경에 충실해서 오직 성부로부터의 성령의 출래(processio, ejkpovreusi§)를
주장했다. 희랍 교회는 성령의 출래도 아들의 출생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내-삼위일체의 과정(eternal inner-trinitarian process)이며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일시적인(temporal) 사역(pevyi§)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로마교회는 히포의 주교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따라서 성령의
이중출래(processio duplex)를 주장했다.
◈ 조직신학서론

대체로 니케아와 콘스탄틴노플 신경은 성자와 성령의 신위격을


선포함에 주안점이 있는데, 특히 기독론과 관련해서 성자와 성부와의
동일본질(coessential to the Father, oJmoouvvsio§ tw'/ patri), 만세 전에
잉태되심(begotten before all the worlds, pro; pavntw'n ai;wvnwn),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very God of very God, qeo;;§ ajlhqino;§ ejk ajlhqinou'), 나셨으며 창조되지
않으신 분(begotten, not made, gennhqeiv§, ouj poihqeiv§)이라는 사실이 공교회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선포되었다.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이 사도신경을
사용하듯이 희랍 정교는 니케아 신경을 사용한다. 다만 로마 카톨릭은
필리오케 이론과 함께 니케아 신경을 의식에 사용하며 루터란과
앵글리칸(성공회)도 이를 사용한다. 앵글리칸 외에 개혁주의 교단에서 이
신경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칼빈은 사도신경을 매우 높이 평가한 반면에
니케아 신경은 “신앙고백의 공식이라기보다 나지막하게 부르기에 합당한
노래(carmen cantillando magis aptum, quam confessionis formula)”(De Reform.
Eccles.)라고 폄하했다.

63
◈ 조직신학서론

The Apostles’ Creed: The Nicene Creed 325 The Nicene Creed, as
Received Text (brackets enlarged 381 (brackets
are the later additions)
are Western changes)

I believe in God the Father We believe in one God, the We [I] believe in one God the

Almighty, [Maker of heaven Father Almighty, Maker of all Father Almighty,


and earth]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Son, our Lord; the Son of God, begotten of the the only begotten Son of God,
Father [the only-begotten; that Begotten of the Father before
is, of the essence of the Father, all worlds;
God of God], Light of Light, [God of God].

very God of very God, Light of light.


begotten, not made, being of Very God of very God.
one substance(oJmoouvsion) with Begotten, not made,
the Father; by whom all things Being of one substance with

were made [both in heaven and the Father;


on earth];
By whom all things were made;

Who was [conceived] by the who for us men, and for our Who, for us men, and for our
Holy Ghost, salvation, came down and was salvation, came down from

Born of the Virgin Mary; incarnate and was made man; heaven,
And was incarnate by the Holy

Ghost of the Virgin Mary,

And was made man;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He was crucified for us under


was crucified [dead], and Pontius Pilate;

buried; And suffer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into Hades];


***************************

The third day he rose again and the third day he rose again, And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 조직신학서론

According to the Scriptures;

He ascended into heaven, ascended into heaven; And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the Father;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And he shall come again, with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glory,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Whose kingdom shall have no

end.

And [I believe] in the Holy And in the Holy Ghost. And [I believe] in the Holy
Ghost. Ghost,
The Lord, and Giver of life;

Who proceedeth from the


Fatehr
[and the Son];
Who with the Father and the

Son together is worshipped and


glorified;

Who spake by the Prophets.

The holy [catholic] Church; And [I believe]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

The forgiveness of sins; We [I] acknowledge one

baptism for the remission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flesh And we [I] look for the

[body];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everlasting].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65
◈ 조직신학서론

come.

[But those who say: There was

a time when he was not; and


He was not before he was

made; and He was made out of


nothing, or He is of another

substance or essence, or The


Son of God is created, or

changeable, or alterable―they
are condemned by th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아다나시우스 신조]

삼위일체 교리의 수립에 공헌한 아다나시우스(알렉산드리아 주교,


373년 사망)의 신학은 아다나시우스 신조라고 9세기 이후로 알려졌던
“Quicunque vult salvus esse”로 시작하는 Symbolum quicunque에 잘 나타나 있다.
아다나시우스는 위(persona), 본체(essentia)라는 용어를 확립해서 삼위일체를
설명했다.

하나님은 삼위를 가진 한 분이시요, 각 위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을


지닌 완전한 신이시다. 신적 위들은 서로가 하나이며, 신적 본체 안에서
영원한 상호 교통과 침투가 이루어진다. 각 위마다 신적 본체 안에 있는
신적 속성들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 위에 독특한 개별적 특성이나
성질도 가지고 있어서 서로 교환 될 수가 없다.

성부는 비발생이지만 성자는 발생되었고, 성령도 발생되었다. 이 삼위


안에서는 시간적으로 우선하거나 종속하는 일이 없고, 지위에 있어서도
우월하거나 열등한 일이 없으며, 삼위가 동등하고 똑 같이 영원하다고
가르쳤다.

아다나시우스 신경은 처음 네 차례의 공의회(325-451)와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관한 어거스틴의 신학을 명확하고 간결하게 교리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서두와 말미에 공교회의 신앙을 강조하고 불신을
◈ 조직신학서론

저주함으로써(the damnatory clauses) 참다운 구원 지식을 일깨우고 있다.


아다나시우스 신경은 루터란과 많은 개혁주의 교단들의 신조에
채택되었다(Augsburg Confession, Form of Concord, Thirty-nine Articles, Second
Helvetic Confession, Belgic Confession, Bohemian Confession). 루터는 이를
“사도시대 이후 가장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Symbolum Quicunque(The Athanasian Creed)

1. Whoever will be saved: before all things it is necessary that he hold the Catholic
Faith(catholicam fidem);
2. Which Faith except every one do keep whole and undefiled: without doubt he shall
perish everlastingly.
3. And the Catholic Faith is this: That we worship one God in Trinity, and Trinity in
Unity(unum Deum in Trinitate, et Trinitatem in Unitate);
4. Neither confounding the Persons: nor dividing the Substance(substantiam) [Essence].
5. For there is one Person(persona) of the Father: another of the Son: and another of the
Holy Ghost.
6. But the Godhead(divinitas) of the Father, of the Son, and of the Holy Ghost, is all one:
the Glory equal, the Majesty coeternal.
7. Such as the Father is: such is the Son: and such is the Holy Spirit.
8. The Father uncreate [uncreated](increatus): the Son uncreate [uncreated](increatus):
and the Holy Ghost uncreate [uncreated](increatus).
9. The Father incomprehensible [unlimited](immensus): the Son incomprehensible
[unlimited](immensus): and the Holy Ghost incomprehensible [unlimited, or
infinite](immensus).
10. The Father eternal(aeternus): the Son eternal(aeternus): and the Holy Ghost
eternal(aeternus).
11. And yet they are not three eternals: but one eternal(unus aeternus).
12. As also there are not three uncreated: nor three incomprehensibles [infinites], but
one uncreated(unus increatus): and one incomprehensible [infinite](unus immensus).
13. So likewise the Father is Almighty(omnipotens): the Son almighty(omnipotens): and
the Holy Ghost Almighty(omnipotens).
14. And yet they are not three Almighties: but one Almighty(unus omnipotens).
15. So the Father is God(deus): the Son is God(deus): and the Holy Ghost is God(deus).
16. And yet they are not three Gods: but one God(unus est Deus).
17. So likewise the Father is the Lord(dominus): the Son Lord(dominus): and the Holy

67
◈ 조직신학서론

Ghost Lord(dominus).
18. And yet not three Lords: but one Lord(unus [est] Dominus).
19. For like as we are compelled by the Christian verity: to acknowledge every Person
by himself to be God and Lord:
20. So are we forbidden by the Catholic Religion(catholica religione): to say, There be
[are] three Gods, or three Lords.
21. The Father is made of none: neither created, nor begotten(Pater a nullo est factus:
nec creatus, nec genitus).
22. The Son is of the Father alone: not made, nor created: but begotten(Filius a Patre
solo est: non factus, nec creatus: sed genitus).
23. The Holy Ghost is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neither made, nor created, not
begotten: but proceeding(Spiritus Sanctus a Patre et Filio: non factus, nec creatus, nec
genitus: sed prodedens).
24. So there is one Father, not three Fathers: one Son, not three Sons: one Holy Ghost,
not three Holy Ghosts.
25. And in this Trinity none is afore(prius), or after another(posterius): none is
greater(maius), or less(minus) than another [there is nothing before, or after: nothing
greater or less].
26. But the whole three Persons are coeternal(coaeternae), and coequal(coaequales).
27. So that in all things, as afore said: the Unity in Trinity(Unitas in Trinitate), and the
Trinity in Unity(Trinitas in Unitate), is to be worshipped.
28. He therefore that will be saved, must [let him] thus think of the Trinity.
**
29. Furthermore it is necessary to everlasting salvation: that he also believe rightly
[faithfully] the Incarnation(incarnationem) of our Lord Jesus Christ.
30. For the right Faith is, that we believe and confess: that our Lord Jesus Christ, the
Son of God, is God and Man.
31. God, of the Substance [Essence] of the Father(ex substantia Patris): begotten before
the worlds: and Man, of the Substance(substantia) [Essence] of his Mother(ex
substantia matris), born in the world.
32. Perfect God: and perfect Man, of a reasonable soul and human flesh subsisting.
33. Equal to the Father, as touching his Godhead(secundum divinitatem): and inferior to
the Father as touching his Manhood(secundum humanitatem).
34. Who although he be [is] God and Man; yet he is not two, but one Christ(unus est
Christus).
35. One; not by conversion of the Godhead into flesh: but by taking [assumption] of the
◈ 조직신학서론

Manhood into God(non conversione divinitatis in carnem: sed assumptione humanitatis


in Deum).
36. One altogether; not by confusion of Substance [Essence]: but by unity of Person(non
confusione substantiae: sed unitate personae).
37. For as the reasonable soul and flesh is one man: so God and Man is one Christ(Nam
sicut anima rationalis et caro unus est homo: ita Deus et homo unus est Christus).
38. Who suffered for our salvation: descended into hell [Hades, spirit-world](descendit
ad inferos): rose again the third day from the dead.
39. He ascended into heaven, he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God [God the
Father] Almighty.
40. From whence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41. At whose coming all men shall rise again with their bodies;
42. And shall give account for their own works.
43. And they that have done good shall go into life everlasting: and they that have done
evil, into everlasting fire.
44. This is the Catholic Faith: which except a man believe faithfully [truly and firmly],
he can not be saved.

[삼위일체(Trinitas) 교리]
1. 하나님은 실체(oujsiva, essentia, substantia)에 있어서 한 분이시다.
2. 내적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은 삼위격(uJpostasi§, provswpon)으로
계신다.
3.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고 성령은 아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독특한 특성(qualitas,
proprietas)에 의해서 구별된다. Inst. 1.13.5. 각 삼위의 위격은 하나님의
본질에 위격적으로 존재하는 위격적인 존재(subsistentia)를 의미하는데
이는 공유되지 못하는(incommunicabilis) 특성에 의해서 구분된다. Inst.
1.13.16.
4. 각 위격은 하나님의 전 실체를 가지고, 실체에 관한 한 각 위격은
다른 위격들을 완전히 포괄하고 관통한다. “말씀과 성령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이다.” Inst. 1.13.6
5. 그러므로 위격과 실체는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고, 위격들도 상호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 “각 위격 가운데서 전체 신성이 이해된다.”
Inst. 1.13.19
6.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사역에 있어서 언제나 한 하나님으로
역사하신다. “아버지께 일의 시작 그리고 모든 것들의 기초와 원천이,

69
◈ 조직신학서론

아들께 모든 것들의 지혜, 경륜, 그리고 경영이, 성령께 일의 능력과


효능이 돌려진다(patri principium agendi, rerumque omnium fons et scaturigo
attribuitur; filio sapientia, consilium, ipsaque in rebus agendis dispensatio; at
spiritui virtus et efficacia assignatur actionis.” Inst. 1.13.18.
7. 하나님은 내적으로 삼위시나 그 영광과 권능과 의지가 하나이고
동일하다.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으로서 예배의 대상이 되며 홀로
영광을 받으신다. 삼위 하나님 위격에 선후나 대소가 없으며, 각
위격은 자신에게 동등하고 영원하다.
8. 각각의 위마다 관계적인 호칭과 독특한 특성을 나타내는 고유한
호칭이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관해서 하나님이라고,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이라고 불리신다. 또한, 아버지는 자신에 관해서 하나님이라고,
아들에 관해서 아버지라고 불리신다. 그 분께서 아들에 관해서
아버지라고 불리시는 한, 그 분께서는 아들이 아니시다. 그 분께서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이라고 불리시는 한, 아버지가 아니시다. 그
분께서 자신에 관해서 아버지라 불리시고 자신에 관해서 아들이라고
불리시는 한, 그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에 무관하게 단지 아들을 말할 때, 우리는 그 분께서 스스로
계신다고 잘 그리고 바르게 선포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 분을
유일한 시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분께서 아버지와 가지신
관계를 주목할 때, 우리는 아버지를 아들의 시작으로 합당하게
삼는다.” Inst. 1.13.19.

“아들은 오직 아버지로부터 오셨으며; 성령은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오셨다.” Inst. 1.13.18.

아버지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계시고, 아들은 오직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출래하신다(Pater
a nullo est, Filius a Patre solo est genitus, Spiritus sanctus a Patre et Filio
procedens).

삼위일체의 교리적 고백: 본질상 무한하시고 절대적인 영이신


유일하신 삼위 하나님은 세 위격이 세 인격으로 존재한다.
◈ 조직신학서론

[칼케돈 신조]

니케아 회의가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선재 교리를 체계화시킨 반면에


칼케돈 회의는 지상에 임재하셨다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성육신하신
로고스에 대한 교리를 체계화시켰다. 니케아 신경이 삼신론(Tritheism)과
양태론(Sabellianism)의 극단에 대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존재)에 대한
변증이었다면 칼케돈 신경은 양성의 연합을 제 3의 성으로의 혼합으로 본
유티커스주의(Eutychianism)와 양성의 연합을 양 위격의 연합과 동일시한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에 대한 변증(apologetic)이었다. 칼케돈 신경은
기독론에 관한 합당한 성경적 진리인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에 나타난
양성적 중보에 대한 선포였으나 이원론(dualism)이나 가현론(dualism)을
따르는 학자들은 이를 받지 않으며, 주관적이며 심리적인 신학을 주창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과(Schleiermacher, Baur, Dorner, Rothe, etc.) 존재의 통보와
신화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변증법(dialetic)에 기반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신학자들(Barth, Rahner, etc.)의
견해도 이에 배치된다.

Symbolum Chalcedonense
Sequentes igitur sanctos patres, unum eundemque confiteri Filium et
Dominum nostrum Jesum Christum consonanter omnes docemus, eundem
perfectum in deitate et eundem perfectum in humanitate; Deum verum et
hominem verum eundem ex anima rationali et corpore; consubstantialem
Patri secundum deitatem, consubstantialem nobis eundem secundum
humanitatem; ‘per omnia nobis similem, absque peccato’(Heb. iv): ante
secula quidem de Parte genitum secundum deitatem; in novissimis autem
diebus eundem propter nos et propter nostram salutem ex Maria virgine,
Dei genitrice secundum humanitatem; unum eundemque Christum, Filium,
Dominum, unigenitum, in duabus naturis inconfuse, immutabiliter,
indivise, inseperabiliter agnoscendum; nusquam sublata differentia
naturarum propter unitionem, magisque salva proprietate utriusque
naturae, et in unam personam atque susbistentiam concurrente: non in
duas personas partitum aut divisum, sed unum eundemque Filium de
unigenitum, Deum verbum, Dominum Jesum Christum; sicut ante
prophetae de eo et ipse nos Jesus Christus erudivit et patrum nobis
symbolum tradidit.

71
◈ 조직신학서론

우리는 성교부들의 뒤를 따라, 아무 의의 없이 사람들을 가르쳐


다음과 같이 신앙고백케 한다.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에 있어서 안전하시며,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시며, 참 영혼과 참 육체를 소유하셨으며,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일 본질이시고(oJmoouvsion),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동일
본질이시다(oJmoouvsion).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와 같으시되 오히려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며, 신성에 따라 만세전에 성부에게서
나셨고, 후일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을 따라,
신모(th'§ qeotovkon)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 유일하신
그리스도, 성자, 주, 독생자로서 양성을 혼합없이, 변화없이,
분열없이, 분리없이 소유하셨음을(ejk duvo fuvsewn [ejk duvo fuvsesin],
ajsugcuvtw§, ajjtrevptw§, ajdiairevtw§, ajcwrivstw§) 우리는 인정한다.
연합으로 인하여(dia; th;n e{nwsin) 양성의 구별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성의 특성이(th'§ ijdiovthra§ eJkatevra§ fuvsew§)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동시에 한 인격과 위격에서(eij§ e}n provswpon
kai; mivan uJpovstasin) 두 인격으로 나눠지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선지자들이 처음부터 그에 관하여 예언한 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신대로, 또는 성교부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주는바 대로, 그는 유일하신 성자요,
독생자이시요, 말씀이신 하나님이시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기독론]

1. 영원한 아들의 신격(the eternal deity of the Son)


제 2위격인 아들(Deus Filius)은 “영원하고 본질적인 아버지의 말씀(the
eternal and essential Word of the Father)”로써 영원한 신격(deitas aeterna)을
가진다. Inst. 1.13.7.
2. 성육신 하신 하나님(Deus in carne, Deus incarnatus)
하나님 안에서의 제 2 인격의 진정한 성육신(ejnanqrwvphsi§ qeou',
ejnsavrkwsi§ tou' lovgou, incarnatio Verbi). 성육신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변형
혹은 변화되었다거나, 둘이 하나로 혼합되었다거나, 단지 거주한다거나,
단지 연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독생하신 하나님(Filius Dei unigenitus, monogenh')이 사람의 아들로
나심(genitus).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Inst. 2.14.1.
3. 한 인격: 인격의 하나임(unitas personae)=그리스도의 신격(deitas)의
하나임
◈ 조직신학서론

실체(oujsiva, essence)와 성(fuvsi§, natura)은 능력과 질의 총화를 의미하는데


반하여 위격(uJpovstasi§, hypostasis)과 인격(provswpon, persona)은 자아 혹은
자신의 존재를 의미한다. 성육인은 로고스가 인성을 취함(assumptio)을
의미하는 것이지 인격을 취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성은 그 자체로
위격을 가지지 않으며(따라서 자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위격에
참여한다(participare) 즉 위격에 존재한다(subsistere). 전자는
anhypostasis(ajnupovstasi§)를 후자는 enhypostasis(ejnupovstasi§)를 설명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신-인(God-man)이 되심은 이중적
존재(네스토리우스) 혹은 중간 존재(아폴리나리우스) 혹은 제 삼의
존재(tertium quid, 유티커스)가 됨을 뜻하지 않는다.
4. 양성의 연합(hypostatic union): the union of humanity and divinity (unio duae
naturae)
양성은 혼합없이(inconfuse), 변화없이(immutabiliter), 분열없이(indivise),
분리없이(inseparabiliter) 연합되었다. 그러므로 신적 의지와 인간의 의지는
서로 교통하지만 여전하게 남아 있다. 여기에 Gregory of Nyssa(Contra
Apollinarium)가 제기한 기독론적 pericwvrhsi§(permeatio, circummeatio,
circulatio, circumincessio, intercommunio—reciprocal indwelling, interpenetration,
reciprocal pervasion)의 일단을 볼 수 있다. 다만 기독론적 pericwvrhsi§는
개혁주의 관점에서의 속성교통론에 의해서만 지지된다.
5. 위격적 연합(e[nwsi§ kaq! uJpovstasin, e[nwsi§ uJpovstatikhv, unio hypostatica,
unio personalis)
a. 연합 가운데 하나임(unitas in unio)
b. 참 하나님과 참 사람(Deus verus et homo verus)
c. 두 본성이 혼합없이, 변화없이, 분열없이, 분리없이 연합하여 한
인격을 이룸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역(opera, officium)은 양성이 서로
혼합없이 변화없이, 분열없이, 분리없이 교통함으로서 이루어진다.
개혁주의의 속성교통론(communicatio idiomatum, idiwmavtwn koinwniva)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사역의 방식으로 이해된다. Inst.
2.14.1
d.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한 성에 배타적으로 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에 돌려진다. 사역의 주체는 성이 아니라 인격이다.

73
◈ 조직신학서론

2. 이신칭의 교리

이신칭의의 교리를 루터는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이라고 했으며


칼빈은 “믿음이 박혀 도는 주요한 문지도리(cardo)”라고 했다. Inst. 3.2.16. cf.
“종교가 박혀 도는 주요한 문지도리.” Inst. 3.11.1.

루터 이후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질에 따라서 행한


사람에게 은혜를 부인하지 못하신다(facientibus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의 신인합력설(Synergism)을 부인하고 우리의 구속사역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해한다. 특히 루터는 생소한
사역(opus alienum)과 고유한 사역(opus proprium) 개념을 통해서 십자가의
신학에 이른다. 즉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자신에게 가장 낯선 일을 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고유하신 일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mystica cum Christo)에 기반한 중보자


그리스도의 사역을 역동적으로 파악함으로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설명한다.
즉 구속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영인 아들의 영,
즉 보혜사 성령을 받아서 의를 전가(轉嫁, imputatio)받음으로써
죄사함(remissio peccatorum)과 옛 사람이 죽고(mortificatio) 새 사람이 다시
사는(vivificatio) 은혜에 이른 공로 없는 은혜로(gratia immerita)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교제(communio)하며
교통(communicatio)하는 삶을 살아서 영생(vita aeterna)에 이르는 도를
이신칭의로 본다.

개혁주의자들은 칭의를 하나님의 취하심(assumptio Dei)으로


파악함으로써 구원을 거저 주시는 선물(donum gratuitum)로 본다. 이신칭의의
교리가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임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caput)로 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얻은 지체들(membra)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sola fide는 sola gratia를 전제한다. 엄밀히
말해서 sola fide는 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을 의미한다.
◈ 조직신학서론

제 8장 믿음으로 신학함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Finitum est non capax infiniti)’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 자기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존재뿐만


아니라 계시행위, 계시내용도 이성으로 알 수 없다. 피조물은 스스로
창조주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피조물에 나타난 창조주의 경륜과 작정도
파악할 수 없다.

신학은 믿음으로 하고 자연이성(생래적 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계시를 사고할 때 그 계시를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하여 수납하고,
계시의 자기 주장을 순종한다.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드려
신학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믿음으로만 온전히 수납된다.

1. 믿음=신지식 수납의 손=지식의 내적원리

여기서 논의가 되는 믿음은 신적 권위(은혜)에서 유래하는 신적


신앙(fides divina)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경계시의 가신성을 계시 자체에서
찾지 않는 로마 카톨릭교도들은 믿음을 분류하여 인적 신앙(fides humana)에
도달한 사람은 자신의 공로로 말미암은 주입된 은혜(gratia infusa)에 의하여
신적 신앙에 이름으로 종국적으로 초자연적 질서로 승진되고 견신(visio
Dei)한다는 사상을 견지하고 있으나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 은혜에 의한
선물(donum)이지 공로(meritum)가 아니다. Inst. 3.2.9. *로마 카톨릭은 구원
지식이 없는 불명확한 신앙(fides implicita)과 비록 지식은 있으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경건의 의식이 없는 비정형적 신앙(fides informis)을 신앙의
형태로 인정하나 사실 이러한 신앙은 참 신앙(fides vera)이 아니다(참조 Inst.
3.2.5, 8). 카톨릭에 의하면 정형적 신앙(fides formata)은 “덧붙여진 자질로
형성된 믿음(formed faith by a superadded quality)”이라고 본다.

칼빈에 의하면 “올바른 믿음의 정의는 . . . 성령을 통하여서 우리의


마음에 계시되고 우리의 심장에 새겨진 그리스도 안에서 그저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기초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아는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다.” Inst. 3.2.7.

하나님의 계시를 실유의 원리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믿음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진리(계시)를

75
◈ 조직신학서론

수납한다.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구속주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고 구원 경륜을 통한 창조의 회복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됨으로써 원 창조의 지식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계시,
성육신 계시, 삼위일체 계시는 믿음에 의해서 동시에 수납된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터툴리안: 배리인 고로 믿을만 하고, 불가능한 고로 확실하다;
안셈: 나는 내가 믿을 수 있기 위하여 이해하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가 이해할 수 있기 위하여 믿는다(fides quaerens intellectum; per fiedem
ad intellectum)]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아버지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고, 복음을 믿음의 목표(the goal of faith)로 전제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온전히 이를 수 없다(참고, Inst. 3.2.6).
그러므로 구원자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과 약속의 성취로서의 복음을 통하여
얻게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믿음에 근거한 하나님의 신지식의 중심이
된다. (fides divina=fides salvifica.) 즉 예수 그리스도를 화해주(구속주)요 계시의
교사요(Mediator reconciliationis; Mediator doctrinae) 우리와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하는 그러므로 임마누엘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게 하시는
중재자로서(Mediator partrocinii) 받아들일 때(믿음으로 수납할 때) 하나님의 참
지식에 이르게 된다.

2. 믿음의 본성

하나님의 실유의 원리(principium essendi)는 믿음에 의해서만 수납된다.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아무도 자신 속에서 살며 기동하고 계시는(행
17:28) 하나님을 묵상하는데 즉시 자신의 생각을 돌리지 아니하면 자신을 볼
수 없다.” Inst. 1.1.1.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리고 자신을
살피기 위해서 낮아져서 그 분을 관조하지 아니하면 자신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Inst. 1.1.2.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는 우리 자신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오직 믿음으로만 수납되기 때문에 믿음에 의하지
않고는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
사역, 경륜, 작정뿐만 아니라 그의 계시와 계시물에 대한 지식도 믿음에
◈ 조직신학서론

의하지 않고는 가질 수 없다.

또한 사물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 사물을 인식하는 우리 자신의


존재와 인식 기능조차 하나님의 앞에 선 우리 자신을 파악하지 않고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coram Deo)
세우지 않고는 우리 자신을 의뢰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지식을
얻기 위한 영혼의 기능인 믿음은 모든 사물과 우리 자신을 확실하게
인식하는 기능으로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A. Kuyper는 신앙수위의 확실한 입장에 서서(박형룡, 1.168) 믿음을


‘영혼이 자기 확실성을 수립하는 기능’이라고 본다.
a.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믿음으로 획득하고, 믿음으로 내
자신의 지식을 획득함으로서 인식활동의 주체인 ‘나’에 의해 ‘믿음’으로
사고의 확실성에 이름을 확신한다.
b. 이 믿음에 의한 인식작용의 확실성에 근거해서 지각된 표상의
세계와 실재하는 물자체의 세계가 일치함을 확신한다.
c. 믿음이 “실상”이며, “증거”이다(히 11:1). 예컨데 자연의 보편
법칙은 믿음에 의해 확실성을 가진다.
* 이성의 사유과정의 3요소가 사유하는 영혼, 표상을 구성함에
재료로 사용하는 감각들과 기술들, 사유의 기구로서 공간, 시간, 인과관계,
실유 같은 본유 관념들이라면 이러한 사유 과정 전체에 작용하는 인식
작용의 확실성은 믿음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 칼빈의 히 11:1 해석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uJpovstasi§, substantia)이다. “믿음은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에 대한 확실하고 안전한
소유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라는 것은 볼 수 없으나 확신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e[legco§, demonstratio)라고 부언한다. 이
증거는 신앙의 확신(fiducia)을 의미한다고 본다. “믿음은 나타나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것이며, 희미한 것들의
명백함이며, 없는 것들의 현존이며, 숨은 것들의 드러냄이다.” Inst. 3.2.41.

3. 믿음의 발생

중생(regeneratio)은 회개(poenitentia)와 죄용서(remissio peccatorum)로

77
◈ 조직신학서론

이루어 진다(눅 24:47,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 행 5:31,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회개와 죄용서—즉, 생명이 거듭남과 값 없이
주신 화해—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에게 수여되며, 양자 모두 믿음을
통하여서 우리가 얻게 된다.”

“우리가 회개의 기원이 믿음에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믿음으로


회개에 이를 때 [믿음과 회개 사이에] 시간이 걸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로써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이상 회개를 자신에게 적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회개는 계속적으로 믿음을 따를 뿐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나온다(Poenitentiam vero non modo fidem continuo subsequi, sed ex ea nasci).” Inst.
3.3.1.

[믿음과 구원서정]

믿음은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로 논의된다

“율법적 회개(poenitentia legalis)”: “이로써 죄로 말미암아 자만하고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두려움에 빠져 있는 인간이 교란된 상태로
머물며 이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게 된다.”

“복음적 회개(poenitentia evangelica)”: “이로써 참으로 심각하게


손상된죄인이 다시금 일어 나서 그리스도를 자신의 상처를 낫게 하는
치료약으로, 자신의 공포를 치유하는 위로로, 자신의 비참함을 치유하는
천국으로 붙들게 된다.” 율법적 회개로 mortificatio의 은혜에 복음적 회개로
vivificatio의 은혜에 이른다. 사실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는 따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동시에 온다. Inst. 3.3.3-4. 따라서 회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회개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로 진정하게 돌림, 그 분에 대한
순수하고 진지한 두려움으로부터 일어나는 돌림이다. 그것은 육체와
옛사람의 죽음(mortificatio)과 영의 살림(vivificatio)으로 이루어진다.” Inst. 3.3.5.

그러므로 믿음, 회개, 죄 용서, 그리고 중생은 엄밀한 의미에서


분리되지 않으며 시간적 전후차서(前後次序)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차적 회개(second repentance)”나 “이차적 축복(second blessing)”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Inst. 3.3.23.
◈ 조직신학서론

그러므로 구원의 실재로서 구원의 각 과정과 구원의 원리로서


iustificatio sola fide가 구원서정(ordo salutis)에 있어서 명백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소명, 중생, 회심, 믿음, 칭의가 동시적이며 성화 역시 칭의와
동시에 즉각성을 가지며 점진적으로 되어 간다(결정적 성화, decisive
sanctification).

“나는 그 유일한 목적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추악해졌으며 거의


지워진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회복하는 것인 중생으로서 회개를
해석한다.” Inst. 3.3.9.

“하나님의 관대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어지셔서 우리가


믿음으로 그 분을 붙잡고 소유하게 되었다. 그 분께 동참함으로써 우리는
이중적인 은혜를 우린다. 즉 그리스도의 무죄함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 그리하여서 우리는 하늘에서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은혜로운
아버지로서 그 분을 소유하게 된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룩하여
져서 우리는 삶의 무죄함과 순수함을 경작하게 된다.” Inst. 3.11.1.

믿음이 신지식의 내적 원리라고 말할 때 이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그의 의를 전가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고 거듭난 자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확신하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믿음 자체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믿음으로 말미암고 믿음은
중생으로 시작한다. 중생된 자만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시를 확신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지식에 이른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중생된 사람만이 온전한
신학을 한다.

오직 믿음으로만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계시를 성령의 조명(illuminatio)으로
감화(persuasio)된 심령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voluntas Dei), 구원 계시로
수납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적 믿음(fides salvifica)이다. cf. Inst. 3.2.8, 11.

4. 믿음의 요소

믿음의 대상(fides, quae creditur)과 사람의 주관적 결정(fides, qua


creditur).

79
◈ 조직신학서론

1) 믿음의 대상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실유의 원리)의 계시로서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뜻을 계시하는 그의
말씀(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조명으로 감화된 심령이


진리로 받는 것이 믿음이다.

2) 주관적 확신

a) cognitio
믿음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Inst. 3.2.1, 3.
믿음은 무지한 경건(ignorantia pia)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그의 뜻을 아는 지식에 근거한다. Inst. 3.2.2.
막연히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안다(cognitio
explicita). Inst. 3.2.2.
이러한 지식은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서
수납할 만한 상태(docilitas, teachableness)로 됨으로써 가능하다. “이
가르칠만함은 배우고자 하는 갈망과 함께 교황주의자들이 발명한 일종의
“맹목적인 믿음(fides implicita)에 만족하는 저 게으른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단순한 무식함과는 아주 다르다.” Inst. 3.2.5.

b) assensus
이는 성령에 의해서 감화(persuasio)된 대로 신앙의 대상을 전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다. 모든 계시의 지식은 성령에 의해서 감화된 지식이기
때문에 신앙 지식과 신앙의 승인은 구분되지 않는다.
* assensus=ad+sensus
* cognitio는 scientia와는 달리 이미 주관적으로 수납된 지식이기
때문에 cognitio와 assensus는 엄밀히 구분되지 않는다.

c) fiducia
신앙 대상을 승인하게 되면 그 대상은 전적으로 받아 들여 자신을
내어 맡기는 신뢰에 이른다.
믿음은 중생자에게 수여된 성령의 선물(“the unique gift of the
◈ 조직신학서론

Spirit”)이기 때문에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감화되지 않은


신앙이란 없다. 성령이 하나님의 계시로 증거할 때, 성령은 동시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해서 아들과 딸로 삼았다는 것(adoptio)을 의미한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의존한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
없이는 그리스도께서 알려질 수 없으시다. 결론적으로, 믿음은 절대 헌신된
성향 (affectus)과 분리될 수 없다.” Inst. 3.2.8.

5. 믿음의 인식

성경의 자기 가신성은 믿음에 의한 신지식의 수납을 전제한다.


성경의 원저자(auctor primaries, auctor originalis)인 하나님의 권위로써(auctoritas)
지어진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고 성령의 증거와 감화로 믿음에
의해서 수납되는데, 이 믿음은 신앙의 대상에 대한 지식(cognitio explicita)에
기초한다.

이러한 신앙의 대상에 대한 인식(계시 지식)은 중생된 이성에 의해서


얻어진다. 중생된 이성(ratio renata)은 믿음에 의해서 거듭난 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한다.

81
◈ 조직신학서론

제 9장 중생 이성(ratio renata)의 역할
믿음으로 수납된 계시는 중생된 이성으로 말미암아 이해된다.
자연 이성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논증된 자연 계시와 특별 계시의
가능성, 필요성, 실재성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적인 믿음(fides
humana)에 의한 것이다. 이는 자연 이성의 능력에 기반한 자연적 믿음이며
중생한 자의 거듭난 이성에 기반한 신적인 믿음(fides divina), 구원적
믿음(fides salvifica), 참 믿음(fides vera)이 아니다.

그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믿음을 갖게 된 중생한 자들은


하나님의말씀을 깨달아 알고(cognitio), 그 지식을 인정하며(assensus), 확신에
이르게 되는데(fiducia), 이러한 참 믿음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된
자는 그 지식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수납하여, 이해하고, 이해한 바대로 의지하며 산다.

중생한 사람은 생명의 실체인 영(anima)에 있어서 새로움을 받아서


이해(ratio)와 의지(voluntas)에 있어서 non posse peccare 상태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안에 계시된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 곧 보내심을
받은 자를 영접하고(요 1:12) 아는 자이다(요 17:1-3).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되고, 그리스도께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받게 되며(요 1:14),
그 분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인격의 형상이신
아들을 통하여서 아버지를 온전히 알게 된다(마 3:17; 요 1:14; 롬 8:12; 히
1:3).

아버지는 아들 앞에 아무 것도 감추시지 않으시니, 이는 아들이 같은


본성과 속성과 지식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들 외에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고(마 11:27),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이제는 육신 가운데 살지 않고
영에 사는 자,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사람(롬 8:9),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갈 4;6; 롬 8:15),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로서,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는 원만한
이해에 이르고, 새 사람을 입어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고, 후사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받기로 한 자(롬 8:15-17; 골
2:2; 골 3:10), 즉 온전히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자진 중생한 사람(고전
2:16)만이 주의 마음을 알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이르게
된다(롬 11:33-34).
◈ 조직신학서론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가지고 semen


religionis(종교의 씨앗), sensus divinitatis(하나님을 알만한 지식),
conscientia(양심)을 가지고 창조되었으나(Inst. 1.3.1), 타락 후 “자연적
은사들은 부패되었으나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제거되었다.” Inst. 2.2.4, 12.

자연적인 은사(gift, donum)로서 선과 악을 구별하는 이성(reason,


ratio)은 의지(voluntas)와 마찬가지로 “첫째로, 사람의 사악하고 타락한 본성
가운데 어떤 섬광들이 여전히 빛난다. . . . 그러나, 둘째로, 그들이 이 빛을
그들의 짙은 무지로 질식하게 했으므로 더 이상 그것이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없다.” Inst. 2.2.12.

인간에게 남아 있는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영이 작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없다. “성령의 일깨움(impulse)”이 없으면
올바른 이성을 가지고 선을 분별하고, 택하고, 따르는 열망을 가질 수 없다.
Inst. 2.2.26. 이러한 영은 자연인에게 주어지는 일반은총이 아니며 중생에
의해서 온다 (“. . . the Spirit comes, not from nature, but from regeneration.” Inst.
2.2.2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중생한 이성은 본래 이성의 회복이라고 할


수있을 것이나, 그 이성 자체로의 절대 완전한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자에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영의 지속적인 사역에 의해서 이성이 신앙에
근거한 하나님의 지식을 얻게 됨을 말한다. 즉 중생자의 이성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곧 지식이 되는 것이다. 중생 이성으로만 믿음으로 계시를 수납함을
이해하게 된다—fides quaerens intellectum의 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원형적 지식과 모형적 지식은 “즉각적, 직관적,


직접적이어서 절대적으로 포함적이다. 그러나 피조자 인생은 역사의 과정에
있는 피조물 우주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추리와 연구의 범위로 가지되
매우 제한된 정도의 지식을 목표로 삼고 있다”(박형룡, 1.179). 사람의 이성은
순전한 상태에 있을지라도(타락전) “유한한 모형적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박형룡, 1.184).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는 순종, 곧 신앙이 없이


이성만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없으며, 중생자는 신분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아들과 딸의 자리에 서게 되나, 하나님을 알게 됨은
그리스도의 기름 부으심(요일 2:20)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각을

83
◈ 조직신학서론

주실 때에만 가능하다(요일 5:20).

신학은 믿음으로 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eij§ uJpakohvn pivstew§,” 롬 1:5). 중생자만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인격(persona loquentis Dei)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사변에 의해서
말씀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진리로 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음으로써(audito ex verbo) 사고한다. 들음으로써 믿고, 믿음으로써 의에
이른다. 참 이해에 이른 자마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을 계시하고 구속주 하나님을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동시에 계시한다. 말씀을 듣는 자는 먼저 이성의 능력의 한계를
깨닫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구속주 하나님께 의지하여 자신의 이성의
변화를 체험한다. 그리하여 중생된 이성을 지니게 된 자는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말씀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른다. 이 때 이성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종속되며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한다. 이것이 은혜이다.

결론적으로 중생 이성으로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신성—하나님의 말씀의 자기 계시(실유의 원리)와 자기 계시의
주장(adfirmatio sui revelationis)—에 의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의 구원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생 이성은 신앙하는 이성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중생한 이성으로 믿음으로 수납한 계시를 이해한다.
◈ 조직신학서론

제 10장 신학의 분류
1. 신학의 분류

1) 주경신학(theologia exegetica)

이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자체(the ipsissima verba of the divine


revelation)”를 다룬다.
성경 계시의 역사적·문자적 해석에 중점을 두고 텍스트 상호간의
조화를 중요시하고 계시의 구속사적 의미를 강조한다. 문자에 충실한 영적인
해석을 추구함에 있어서 하나님 주권,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에 기반한 성령의 역사(役事),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반한
교회론적 관점 등을 중요시한다.
성경 신학은 주경 신학의 일부분이다.

2) 역사신학

교회의 신앙과 교회의 생활을 중심으로 다룬다.


주관적 체험을 신학의 기초로 삼았던 슐라이엘마허는 교의신학을
역사신학으로 보았다.
A. A. Hodge는 “성경적 역사신학”과 “교회적 역사신학”을 나누어서
후자를 특히 교회사라고 부른다(교회사상사+교회생활사).
역사신학은 성경 진리 자체 보다 성경에 관한 교회의 진리를
공시적·통시적으로 다루는 학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구속사 관점으로 일반
역사를 통일적으로 설명함도 또한 중요한 과제이다. 이런 측면에서 역사
신학은 주경 신학과 조직신학과 분리되지 않는다. 일반 역사로 역사신학을
대체 내지 통일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슐라이엘마허적인
주관주의·윤리주의의 잔재라 할 것이다(헤겔, 하르낙, 판넨베르그 등).

3) 교의신학(조직신학)

성경계시를 종합화·체계화함에 있어서 전포괄적이며(all-embracing),


스스로 조리가 있으며(self-consistent), 독립된(self-contained) 진리 체계를
믿음의 항목으로 확정한다. 전체 계시 혹은 계시의 시대 연관성 전체을
믿음의 내용으로서 확정하며 체계화하는 학문이다.
조직신학은 교회의 성경의 진리에 대한 신앙 고백에 대한 체계화이기

85
◈ 조직신학서론

때문에 주경신학을 자료로 하며 역사신학의 통찰력을 기반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성경적으로 해석하는 학문이다. 즉, 광의로, 그리고 참되게, 성경을
성경적으로 해석하는 성경해석학이 조직신학이다.
그러므로 역사신학은 조직신학의 역사이며 주경신학은 조직신학의
텍스트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실천신학은 조직신학의 교회와 개인의 삶에의
적용이라고 할 것이다.

4) 실천신학

말씀의 적용을 다루는 신학의 분과이다.


말씀이 이를 선포 받은 사람들의 내부에서 어떻게 작용함을
다룬다(verbum internum). 따라서 슐라이엘마허는 이는 신학의 왕관이라고
했다. 주로 실천신학은 말씀의 규범적 측면과 축복과 저주의 측면을 동시에
가진다.
실천 신학은 말씀의 가치 규범성을 수립하는 학문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실천신학은 온전하게 수립된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적용하는 일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경과 해석이 없는 실천신학은 없으며,
실천을 지향하지 않는 주경과 해석도 있을 수 없다. 실천 신학은 시대
사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나, 주경신학에 기반한 조직신학적 진리를
역사적으로 통찰하지 않은 진리가 실천신학에 바로 적용됨은 합당하지 않다.

2. 조직신학의 분류

1) 변증학

변증학은 “여러 가지 다양한 비기독교 체계의 철학에 대항하여


기독교 철학을 변호하는 이론이다”(van Til, Apologetics, 13). 프린스턴 전통은
변증학은 계시의 타당성과 신 존재 증명을 하는 것이므로 조직신학에
앞서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화란 신학 전통은 조직신학이 변증학에 앞서는
것으로 본다.
슐라이엘마허는 신의식를 분별함이 모든 신학에 우선해야 함으로
변증학이 수위를 차지한다고 주장했다. 워필드는 변증학을 “학으로서의
신학의 본질적·규율적 원리들을 확정하는 신학의 부분”으로 보고 “하나님의
존재, 사람의 종교성,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하나님의 계시의 진실성”등은
변증학에 의해서 확립되어야 한다고 본다.
화란의 카이퍼와 바빙크는 신앙의 수위를 단언한다. 이들은 교의학의
◈ 조직신학서론

유일한 외적 원리로서 성경과 유일한 내적 원리로서 신앙을 강조한다.


카이퍼는 변증학은 교의학에 의해서 주어진 교리에 대한 변호만을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A. A. Hodge와 van Til 등은 중간 입장에서 자연 이성의 역할은
인정하지 않으나 중생한 이성이 신앙에 근거하여 계시된 진리를 한층
명료하게 인식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슐라이엘마허를 필두로 하는 매개 신학자들에게서 우리가
다루는 진정한 의미의 변증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변증학은 신학함에
있어서의 성경적 전제를 논하는 것이지 주관적 혹은 실존적 종교 체험의
적합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변증학 무용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계시의 신앙적 수납과 신존재 증명을 부인하며 이성수위의 신학을
추구하나, 이성적 신 존재 증명이 불가하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의 신앙적 수납이 오히려 인정되는 것이다. 신학은
이성적 전제 위에 세워질 수 없다. 그러나 성경 진리에 기반한 인식적 전제
없는 신학은 없다.

2) 교의신학

성경 진리를 믿음의 내용으로 종합화·체계화하는 학문이다.


교의신학은 성경 진리의 교회적 선포인 교리를 교훈적(pedagogical),
변증적(apologetic), 고백적(credal) 관점에서 다루는 학문이다.

3) 신조학(symbolics)

교회에 의해서 채택되고 고백된 교리체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경이 없는 교회는 없다(Ecclesia sine symbolis nulla). 신조 혹은 신경(creed)은
신앙 고백(suvmbolon, symbolum)과 신앙의 규범(kanwvn th'§ pivstew§ 혹은 th'§
ajlhqeiva§, regula fidei 혹은 regula veritatis)과 신앙의 조항들로 발전해 왔다.
저명한 신조학자 Philip Schaff가 말했듯이, “성경은 규범하는 규범(norma
Normans)이나 신앙고백은 규범된 규범(norma normata)이다. 성경은 신앙의
규범(regula fidei)이나 신앙고백은 교리의 규범(regula doctrinae)이다”(1.7).
신조는 교회의 지표와 규율을 규정하고 당대의 교리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신조학의 과제는 교리해석적 측면과 역사적 측면을 아우른다.

4) 교리사

87
◈ 조직신학서론

교리사는 교리의 형성과 성경적 당위성을 논구하는 학문이다.


교리사는 교리 공식화 과정을 기술하며 교리의 성경적 적합성을 사도적
성격을 확증함으로써 논하고 교리를 종교적 생과 연관시키며 교리적 검증을
통하여서 한 시대를 넘어서서 다음 시대에 까지 교리의 성경적 적합성을
변증한다. 뿐만 아니라 교리사는 근본 교리를 통하여서 교회의 표지를
궁구함으로써 참 교회의 상을 제시하고, 제 교회 교리들의 상호 연관성을
밝힌다.

5) 윤리학

교리의 적용을 다루는 학문으로 본래 구원론의 일부로 여겨졌다.


교의학이 신앙의 항목을 다룬다면 윤리학은 계명의 교훈을 다룬다. 개혁
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윤리라는 이름에 율법에 대한 해석과 적용을
할애했다. 기독교 윤리학은 사안의 [객관적] 교리적 적합성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주관적 종교 체험이나 일반 윤리에서 주장하는 도덕성에 맞추어서는
안된다.
◈ 조직신학서론

제 11장 교의신학
교리는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신적 권위에 근거하여 교회가 신앙
고백의 형식으로 표현한 명제로서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근본 진리를
뜻한다.

1. 교의신학의 자리

Qeologiva(qevo§+lovgo§)는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뜻하는 말로서, 기독론 논쟁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신격(deitas)을 나타내는
말로서 사용되었으며 후에 삼위일체 논쟁을 거치면서 삼위일체를 뜻하는
말(trinitas)로 사용되었다.

Qeologiva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그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과


삼위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신학은 “교회의 믿음과 진리의 학”이다.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계시를
체계·종합화하는 교의신학은 그 자리를 교회에 터잡는다.

a) ecclesia catholica fidei: 믿음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교리를 신앙


고백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b) ecclesia docens: 교회는 가르치는 교회이기 때문에 통일된 진리
체계가 필요하고 그 진리를 변증할 뿐만 아니라 교훈하는(aedificatio) 교리의
체계가 필요하다.
c) ecclesia praedicens: 교회는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서 교회를 확장해
간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 가운데 최종적이며 궁극적으로 안전하게 주워
졌지만 말씀의 선포 과정에서 교리는 수정을 받기도 하고 확장해 가기도
한다.

2. 학으로서의 교의신학(dogmatica qua scientia)

칸트가 형이상학에 대한 불가지론을 주장하고, 이후 콩트의


신학적-형이상학적-실증적 시대의 도식의 주장으로 신학은 위기를 맞았다.

학문으로서의 [교의]신학은 불가지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애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스스로 계시된 원형적
계시, 즉 모형적 계시(revelatio ectypa)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실 때

89
◈ 조직신학서론

계시의 수납자인 인간이 감당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시어(condescensio)


인간의 능력에 맞추어 주신다(accommodatio).

모든 자연 과학은 이성의 한계 내에서 추구되고 이성의 법칙에


따르게 되나 신학은 이성을 계시에 종속시킨다. 자연 이성(ratio naturalis)의
법에 타당한 것만이 합리적인(rationalis) 것은 아니다. 모든 학문(scientia)이
자연 이성의 한계 내에서만 그 대상을 삼고, 자연 이성의 이해의
범주(paradigm)에서만 그 방법론(실증적 방법론)을 추구할 때, 학문은 근원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성에 의해서 규정된 무엇인가만을
추구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예컨대 현대 양자 물리학은 실증적
논리를 초월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합리성(rationalitas)은 하나님의 신적인 규범과


질서(ratio로 표현, 즉 ratio divina)에 인간의 이성을 종속시키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믿고 순종하는데서 찾아지는 것이다. 신학은 필수적인 학이며
완전한 학이다. 물리학의 대통합 이론도 우주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을
알지 못한다. 신학은 신학적 paradigm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3. 교의의 정의

로마 카톨릭는 교회의 일치를 강조한다. 널리 회자되는 Vincent of


Lerins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전체 교회의 교의는 모든 곳에서, 언제든지,
모든 사람에 의해서 믿어져야 할 것으로서 준수되어야 한다(curandum est, ut
21
id teneamus quod ubique, quod semper, quod ab omnibus creditus est).”

종교 개혁 시대에는 성경적인 근본 진리로서 복음과 율법, 이신칭의


등을 강조했다.

Post-Reformatio Reformer Polanus는 규범성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반드시 믿고 순종해야 할 문장들(sententiae
quibus credi aut obtemperari necesse est proper mandatum Dei).”

이상의 다양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교의(dogma)라는 단어가 말하듯이


전체적으로 교의는 성경 진리에 대한 교회의 consensus를 보여주고자 했다.

21 Commonitorium pro catholicae fidei, antiquitate et universitate (AD 434),


2.5.
◈ 조직신학서론

판넨베르그는 정의는 이러한 점을 반영한다. “교의의 내용과 진리는 교회의


일치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성경 주제에 대한 지식은 교의의 일치를
낳는다.”

4. 교의의 발생

교의의 기원은 세례 선포문(baptismal formula, 마 28:19)과 성찬식 제정


문안(words of institution of the Lord’s Supper)으로 사용하던 신조에 있다. 이러한
신조와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 16:16)은 심지어 오순절 교회의 태동보다
앞선다.

*성경에 나타난 신앙 고백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하는 근거가 된다(신 6:5; 막 4:29 인용). 하나님의 유일하심에 대한 고백:
신 4:35, 39; 삼하 7:22; 22:32; 왕상 8:60; 대상 17:20; 시 18:31; 86:10; 사 43:10-12;
44:6, 8; 45:22; 욜 2:27; 슥 14:9. 신약도 이 고백을 확증한다: 막 12:29; 요 17:3; 고전
8:4; 갈 3:20; 딤전 2:5.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49).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은 모두
메시아를 지칭한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메시아의 신성을 표현한다:
시 2:5, 12 [사 9:6]; 마 16:6; 14:33; 요 11:27; 마 26:63.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8-69).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이
고백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의 중요성을 일깨운다(요 20:29; 벧전 1:8; 고후 5:7; 히
11:27). 곧 fides precedit intellectum의 원리를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하나님]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여기서 o{§는 하나님을 뜻하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91
◈ 조직신학서론

그리하여 본 구절은 신·인이신 그리스도를 노래하는 것으로 강조적으로 읽힌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찌니라”(히 6:1-2). 사도시대 교회의
근본 가르침을 본 구절은 보여 주고 있다.
성경은 신앙 고백을 가르치고 있다(마 10:32-33; 롬 10:9-10). 다음
구절들은 초대 교회 신앙의 조목에 대한 가르침을 암시하고 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믿음의 분수대로(신앙의 유비로, kata; th;n ajnalogivan th'§ pivstew§”(롬 12:6).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a sketch or outline of the healing words, uJpoquvpwsin tw'n uJgiainovn twn lovgon)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3-14).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ta; §toikei'a th'§ ajrch'§ tw'n logivon tou'
qeou')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히 5:1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 4:2).
“누구든지 이 교훈(tauvthn th'n didachn)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요이 1:10).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th'/ a{pax paradofeivsh/ toi'§ aJgivoi§)를
위하여 힘써 싸우리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라”(유 1:3).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나는 주 예수를


믿는다”(행 16:31)는 고백으로 족한 것으로 여겼다. 처음 하나님의 말씀은
구전되었으나 사도들에 의해서 기록된 말씀이 정경으로 수납됨으로써
성경—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읽히고 가르쳐졌다. 신앙고백도
처음에는 구전되었으나 점차 문자화되기 시작했다. 교회 핍박기에는 “은밀한
훈육(Disciplina arcacani)”이 널리 퍼졌는데 사도들의 교리의 요약집인 “신앙의
규율(regula fidei)”은 성도들에게만 비밀리에 전수되었으며 심지어 세례를
위해서 신앙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the catechumens)에게도 고백을 위한
마지막 단계에 가서야 이를 가르쳤다. 따라서 신앙의 규율은 니케아 회의
전의 교부들에게도 단편적으로만 알려졌다가 이후 성경 교리에 대한 논쟁이
본격화 되면서 공적인 가르침으로서 정형화되었다. 신앙 고백들도 대체로
이와 같은 과정으로 수립되었다.
◈ 조직신학서론

그리스도가 신앙의 주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마 16:16의 베드로의


고백은 세례 고백의 근간이 되었다. 이 고백은 이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발전했다.

* 신앙의 규율은 성경 기록의 시대로부터 공교회의 신경으로


넘어가던 2-3세기에 교회 신학자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여기서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해서 공교회의 정통 신학을 지키고 성경 진리를
전통(vetus consuetudo)보다 우위에 두고 신학을 했던 터툴리안의 신앙의
규율을 살펴본다. 특히 터툴리안은 신학 전반에 대한 체계를 세우는
과정에서 삼위일체의 용어 정립에 기여했다.

93
◈ 조직신학서론

Tertullian(AD 200)

First Form
De Virginibus Velandis, cap. 1.

Regula quidem fidei una omnino est, sola, immobilis, et


irreformabilis, credendi scilicet
In unicum Deum Omnipotentem, mundi conditorem;
et Filium ejus, Jesum Christum,
natum ex Virgine Maria, crucifixum sub Pontio Pilato,
tertia die resuscitatum a mortuis, receptum in caelis,
sedentem nunc ad dexteram Patris,
venturum judicare vivos et mortuos,
per carnis etiam resurrectionem.

Second Form
Adv. Praxeam (a Patripassian Unitarian), cap. 2.

Nos vero et semper, et nunc magis, ut instructiores per


Paracletum, Deductorem scilicet omnis veritatis,
Unicum quidem Deum credimus:
sub hac tamen dispensatione, quam oeconomiam dicimus,
ut unici Dei sit et Filius,
Sermo ipsius, qui ex ipso processerit,
per quem omnia facta sunt, et sine quo factum est nihil.
(John i.3)
Hunc missum a Patre in Virginem, et ex ea natum,
hominem et Deum, Filium hominis et Filium Dei,
et cognominatum Jesum Christum:
Hunc passum, hunc mortuum et sepultum,
secundum Scripturas;
et resuscitatum a Patre, et in caelos resumptum,
sedere ad dexteram Patris,
venturum judicare vivos et mortuos:
qui exinde miserit, secundum promissionem suam, a Patre,
◈ 조직신학서론

Spiritum Sanctum, Paracletum,


Sanctificatorem fidei eorum qui credunt in Patrem
et Filium et Spiritum Sanctum.

Third Form
De praescript. Haeret. cap. 13.

Regula est autem fidei, . . . illa scilicet qua creditur,


Unum omnino Deum esse,
nec alium praeter munci conditorem,
qui universa de nihilo produxerit,
per Verbum suum primo omnium demissum;
id Verbum, Filium ejus appellatum,
in nomine Dei varie visum a patriarchis,
in prophetis semper auditum,
postremo delatum, ex Spiritu Patris Dei et virtute,
in Virginem Mariam,
carnem factum in utero ejus, et ex ea natum,
egisse Jesum Christum;
exinde praedicasse novam legem
et novam promissionem regni caelorum;
virtutes fecisse;
fixum cruci;
tertia die resurrexisse;
in caelos ereptum;
sedisse ad dexteram Patris;
misisse vicariam vim Spiritus Sancti,
qui credentes agat;
venturum cum claritate
ad sumendos sanctos in vitae aeternae
et promissorum caelestium fructum,
et ad profanos adjudicandos igni perpetuo,
facta utriusque partis resuscitatione,
cum carnis restitutione.

95
◈ 조직신학서론

a) 교리는 신앙고백에서 기원한다.


b)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바른 조항을 확정하고 이단에
대항해서 교회의 신앙을 변증하기 위해서 신학자들은 성경 계시에
근거한 신앙 고백과 신앙의 규범 등을 공교회의 승인을 거쳐서
교리로서 형성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c) 교리는 교회의 위기 상황에서 교회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발생했다.

교리는 정통신앙의 조항(articuli fidei orthodoxae), 참


신학(theologia vera),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ecclesiae
stantis et cadentis)이다.

5. 교의 신학의 역할

1)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중생된 자들이 믿음의


내용으로 받아 들이는 성경 계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 통일적으로
이해한다. 성경계시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전쳬 계시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해한다.
2) 전체적인 계시 이해에 있어서 교리들의 근거(fundamentum)와
유래(origo)를 밝힌다.
3) 교리들을 설명하고 변호하는 과정에서 성경 계시의 권위에
근거하여 교리를 정립한다.
4) 계시를 깊이 이해하고 그 폭을 확장함으로써 교의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한다.
5) 원 규범(norma normans)에 의해서 규범된 규범(norma
normata)으로서교회의 근본 교리에 들지 못하는 구원 진리들을 믿음의
내용으로 확정하는 일을 한다.

*아디아포라(ajdiavfora, res medias, things indifferent to salvation)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고전 8:1b-3).
+구원에 이르는 근본 진리에 대해서 타협하거나 굴종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자체로 구원과 관계없는 일들(things indifferent to salvation)에 대해서는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남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거나 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 조직신학서론

우리의 자유함이 약한 자들을 거치게 해서는 안된다(고전 8:9). 우리의 자유가


연약한 형제에게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롬 14:13).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4-5).
+ 기독교인의 삶이 세상의 삶보다 더욱 고상한 것은 다만 법의 논리를 좇아 사는
것이 아니라 덕의 논리를 좇아서 사는 것에 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참고 롬
14:19). 이 말씀이 자유의 지침이 된다. 우리의 자유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이다.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음으로써 자기의 옳다하는 바로
자신을 책하지 말아야 한다(롬 14:22). 기독교인의 자유의 정수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전 10:31)는 말씀에 들어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의 영혼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한다. 바울의 고백은 자유의
어떠함을 보여준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자유는 다만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다(고전 9:23).
+ 자유가 없는 지식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다. 거듭난 자의 자유로만 지식으로
사랑에 이른다. 사랑 없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만이(요 8:32) 우리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참 지식이 된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멸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9-11).

6. 교의 신학의 방법론

계시에 의존해서 믿음으로 신학함이다. 계시자, 계시물, 계시하심이


교의 신학의 대상이 된다. 곧 하나님의 존재와 어떠하심과 사역이 신학의
대상이다. 계시에 의존함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revelatio ipsius Dei)에 의한
신학을 의미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신학함은 이성적 사색이나 신비적 체험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구속주가 창조주이심을 믿음으로써 성경에
말씀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중생된 이성으로 종합화하고 체계화하는
것이다.

성경 계시를 믿음의 내용으로 신학적으로 수립하는 방법론을 종합적


방법 혹은 종합적 구성주의라고 한다.

97
◈ 조직신학서론

C. Hodge는 신학적 방법론은 귀납적 방법론(the inductive method)에


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색적 방법(the speculative method)은 사고의
과정으로서 a priori한 방법을 추구하고 신비적 방법(mystical method)은 감정에
속한 것(matter of feeling)을 다룬다고 비판한다. 그는 “자연과 과학자와의
관계와 성경과 신학자와의 관계는 유비된다”고 말하면서, 성경이 모든
신학적 사실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먼저 성경을 통하여서 사실 수집이
이루어지고 이 사실들로부터 원리가 도출된다는 측면에서 “신학자들도
과학자들과 같은 규칙들에 의해서 학문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교의 신학의 방법은 사실 수집으로부터 진리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기록인 성경을 믿음의 내용으로서 체계적이며
종합적으로 수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순종해서
신학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적 사실들을 귀납적으로 살펴서 진리에 이름도
경험 철학적인 귀납이 아니라 믿음으로 계시를 수납하는 계시 체험적
귀납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만 C. Hodge의 견해는 수용된다.

종합적 방법은 하나님 자신을 신학의 대상으로 하되,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근거한 계시의 자기 주장에 의존한 신학을 추구하기 때문에
성경론[계시론]-신론-인론-기독론-구원론-교회론-종말론의 편별이 합당하게
제시된다.

7. 개혁신학(theologia reformata)

개혁 교회(ecclesia reformata)의 신학이 개혁 신학이다. 개혁 교회는


칼빈과 그의 후계자들의 신학을 기초로 삼는 교회를 말한다. 고대 교회의
교리를 기본 진리로 받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와 주석과 설교 그리고 기타 신학 작품들 가운데 전개된
문자적-역사적 성경 해석에 근거한 교리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신학을
말한다.

칼빈 신학의 요체(소위 central dogma)는 이중 예정론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혹은 섭리)을 칭하는 Calvin’s Calvinism에 의해서 대변되어 왔다. 물론
일리는 있으나 이로써 칼빈 신학의 부요함이 다 표현되지는 않는다. 칼빈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 관점에서 신약과 구약의 일치성과 연속성을 논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계속적 의의 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중보자
◈ 조직신학서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보혜사 성령의 개인 구원 서정 과정에


있어서의 총체적인 역사, 그리스도의 삶의 교리(미래를 묵상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로서
스스로 의의 종이 되는 삶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교리, 율법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개념을 통한 율법 안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의 율법에 대한 동시적 이해,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그리고 수직성과 수평성의 역동적 고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시작과 계속으로서 성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고 성취되는 장으로서
시민국가의 삶 등을 망라한다.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함에 있어서 약속-성취의 유비(promissio-perfectio
analogia)와 그림자-실체의 유비(umbra-substantia analogia)를 동시에 아우른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sola Scriptura를 신학 가운데 적용시켰다.

“개혁(Reformed)”이라는 말이 루터란들과 개혁주의자들을 구별하는


지표로서 사용된 것은 베자(Theodore Beza)에 의해서 칼빈의 신학이 일단
체계화된 1590년대를 지나서였다. 사실 “Reformed”라는 말은 “Protestant”와
“Evangelical”이라는 말과 상응하여 사용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미
1518년부터 쯔빙글리(Ulrich Zwingli)에 의해서 복음적이며 개신교적인 설교가
시작되었다. 한편 “Reformed”라는 말이 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개혁된
신앙과 교회를 의미하는 반면에 “Presbyterian”이라는 단어가 주로 교회법
혹은 교회 구조의 양태를 설명하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가 Reformed 신학을
승화시켜서 장로교(Presbyterianism)를 창시한 녹스(John Knox)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양자는 역사적 궤를 긴밀히 같이 한다.

이하 개혁 신학의 특징을 일별한다.

1) 성경을 신지식의 원천으로 신학함의 근거와 원리로 삼는다(성경을


신학의 형식적 원리로 고수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고유한 권위와 유일한
충족성을 강조하는 것이 개혁주의 전통의 기초이다”(I. John Hesselink, On
Being Reformed, 10).

2) Finitum est non capax infiniti.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모든


지식은 중보자 그리스도에 의해서 중보된 지식이다. 이는 하나님의
맞추심(accommodatio)를 의미하는 것이며 불가지론이 아니다.

99
◈ 조직신학서론

3) 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분을 강조하고 그 한계를 분명히 한다.


범신론적인 신화(deificatio) 개념을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신인합력설(synergism)을 반대한다. 하나님은
자주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 인간 편의
필연성은 하나님 편의 자기 필연성(內神的 必然性)에 매인다(이를 second
casuality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해서 주장되나 자주 사람의 보이는 손(visible hand)을 통하여서 작용한다.
개혁주의의 속성 교통론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양성 가운데서의
사역을 정통 기독론 입장(칼케돈)에서 설명한다. 따라서 속성간의 변형과
혼합을 말하는 루터란의 속성 교통론은 받지 않는다.

4)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목표(finis, scopus)는 하나님의 자기


영화(glorificatio Dei sui)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gloria sua)을 목표로
스스로 기뻐하신 뜻에 따라서 인간을 구원하신다.

5) 개혁신학은 인간의 전인격적이며 전체적인 타락으로 말미암는


죄책(poena, 사망)과 오염(corruptio,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을 부각하며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강조한다. 만세전의 구원의 작정(구원협약), 예정,
경륜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하나님의 의(iustitia Dei)이다.

6) 그리스도의 연합을 개인 구정 과정 전체의 기초로 보고 이를


교회론의 근본 진리로 삼는다. 그리스도와 교제(cummunio)하며 공로 없는
전가를 통해서 그의 의와 교통함으로써 의롭게 될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된다.

7)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하여 칭의와 성화를 강조하고, 이를


전체적으로 중생의 은혜로 파악함으로써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거룩한
생활을 강조한다. 개혁 신학에 있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원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서 이해되며 의의 전가는 우리의 인격 뿐만 아니라
행위에 까지 미치는 것으로 파악된다(imputatio duplex).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자유가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다루어 진다.

8) 이러한 역동적 구원 이해에 의해서 율법은 단순히 죄를 깨닫게


하며 그리스도를 찾게할 뿐만 아니라 생활의 규범으로 작용한다. 성도에게
◈ 조직신학서론

있어서 율법은 저주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축복의


도구가 된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하도록
권고(exhortatio)한다. 개혁 신학은 율법과 율법의 성취로서의 복음의
일치성과 연속성을 중보자 기독론적으로 파악한다.

9) 교회는 말씀의 창조물(creatura verbi)이라고 할 것이다. 교회는


말씀에 근거한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다. 고백은 성경 교리의 공적인
가르침의 표헌이다. 개혁 교회는 말씀에 의해서 개혁된 교회(ecclesia reformata
secundum Verbum Dei)이다. 그러므로 선포된 말씀인 설교를 강조한다.

10) 개혁 신학은 모든 생활 영역에서의 그리스도의 왕국(regnum


Christi)의 실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가 그의
다스림(regimentum)이다. 두 왕국—영적인 왕국과 정치적인 왕국—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와 문화 명령의 수행을 보좌 우편에 재위하셔서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에 기반하여 설명한다. Eccles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

101
◈ 조직신학서론

제 12장 신학의 완성

우리의 신지식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에서 유래하였으므로 참 지식이다.


이 지식은 우리가 중보자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의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중생한 이성을 가질 때 그의 중보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수납하는
지식이다(신앙의 유비).

그러므로 우리의 신학은 완성으로 가고 있는 도상의


신학이다(theologia viatorum). 신지식의 완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볼 때(visio
Dei) 이루어진다(고전 13:12; 고후 3:18). 계시자인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됨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완전해진다. 하나님을 바로 앎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고, 그와 교통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은 “우리가 어떤 것을 측량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것과 유사할 때에만이다(We can know things only in the measure in
which we are similar to them)”라는 가설에 놓여 있다. 계시를 존재의
통보(communicatio) 혹은 분여(participatio)로 보고 계시를 중보자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지식에 의해 알려지는 것으로 보기 보다는, 계시가 속으로 들어와
신화된 우리에게 인식될 때에만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게 된다. 곧
하나님과의 연합(unio cum Deo)을 마무리하는 것이 신지식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의 가장 내적인 존재는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하여 떨고
박동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성공적으로 의식할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지속적인 의의 전가보다는 공로을 쌓음으로


말미암아형성된 habitus를 강조해서 이미 현재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신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며(이런 관점에서 imago Dei 설명), 궁극적으로 종말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영광의 빛(lumen gloriae)을 받아서 합리적 영혼이
신화되어서 신 본질을 직관하게 된다고 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생이 계시에로 완전히 함몰되어 계시와 일치하게


되는데 이러한 계시를 완전히 안다는 것은 인간이 피조 수준의 한계를
벗어나 신의 존재와 합일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의 존재까지 피조물을 끌어 올리신다.

19세기의 매개신학도 인류의 신화를 인류 역사의 목표로 본다.


◈ 조직신학서론

슐라이엘마허는 주관적 종교성을 강조함으로써 구도자로서의 인간상을


제시하고헤겔은 역사 계시의 점진적 발전을 통한 극단의 자유인을
생각했으며 도르너(Dorner)는 양자의 중도적 입장으로 로고스와 이상적으로
결합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주장한다.

신학의 완성은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하거나 하나님과 연합하여서


신화되어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피조물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와 연합(unio cum Christo)하여 어린 양 예수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직접 뵙는 것이다. 즉 이제는 온전한 믿음으로 아는 것이다.

103
◈ 조직신학서론

제 13장 신학의 목적
하나님을 앎으로써 변화되어서 그를 믿고, 섬기고, 영화롭게 하며,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령의 특별한 내적 조명으로
역사한다. 하나님을 앎은 곧 변화됨을 의미한다. 하나님 지식은 받는 자의
존재가 함께 결정되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과 창조주
하나님의 지식이 믿음으로 함께 수납된다. 따라서 창조주의 영광과 엄위를
알고,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그의 뜻을 아는 것이 바로 사람의 생명이 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 조직신학서론

제 2편 계시론

제 1장 계시
1. 정의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自己啓示), 곧 자기를 알리심이다.


계시는하나님의 자기현시(patefacio)로서 믿음으로만 수납된다. 계시는 계시
행위, 계시 자체(계시물: 하나님의 존재, 권능, 지혜, 경륜, 창조사역과,
구원계획, 구원의 완성), 그리고 계시 지식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계시는 어떤 감추어진 것을 드러냄이 아니라, 인격적 하나님이
창조주와 창조를 회복하는 구속주로서 자기를 알리심이다. 하나님은
절대인격이시며 절대적으로 자의식적이어서(실유의 원리) 스스로의
기뻐하신 뜻에 의해서 자기를 계시하신다.
계시는 창조를 통한 자신의 실체의 유출(emanatio,
신플라톤주의)이거나, 우주 안에서 자의식적으로 되어 가는 것(헤겔)이
아니다.

2. 계시의 유래, 그 과정과 내용

1) 계시는 성부 하나님(Deus Pater)에게서 유래(origo)한다. 계시는


계시자이신 하나님이 계시의 주체자이시고, 계시하는 작용(revelare)을 통하여
계시의 내용(revelatum)을 전달한다. 계시는 계시자의 자기계시여서 계시자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계시한다. 그러므로 계시자는 계시된 대로 존재하신다.

2) 계시는 성자 하나님(Deus Filius) 곧 하나님의 로고스(Logos, Verbum


Dei)를 통해서 온다. 아들은 “아버지의 영원하고 본질적인 말씀(Verbum Patris
aeternum et essentiale)”(Inst. 1.3.7)이기 때문에 아들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어서
중보함이 없으면 “가까이 가지 못할 빛”(딤전 6:16)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다. “세상의 빛”(요 8:12)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생명의 원천”(시 36:9)이신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눅 10:22).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이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Inst. 3.2.1). 그러므로

105
◈ 조직신학서론

우리 내면의 교사(“inner schoolmaster”)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이끌림을 받은


자(요 6:44; 12:32; 17:6)만이 아버지를 알게 되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Inst. 3.1.4).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계시만이 아버지에게서 유래한


계시이고, 로고스를 매개해서 온 지식만이 참 신지식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계시함에 있어서 언제든지 아들을 통하여 계시하신다. 아들은 하나님의 자기
객관화여서 하나님 지식이 곧 아들이므로 아들을 통하여서만 하나님 지식과
계시가 온다.

Hilary가 갈파했듯이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 자신에게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스스로에게만 유일하게 합당하신 증인이시기 때문에
자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스스로를 나타내시지 않으신다(“. . . God is the one
fit witness to Himself, and is not known except through Himself.”).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되며, 마음 빼앗겨서도 안되고,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것을 말하여서도 안된다(Inst. 1.13.21).

성부 하나님이 계시의 시작(유래)라면 성자는 그 지혜와 경륜 그리고


만물에 대한 경영이며 성령은 계시의 능력과 효능이다(Inst. 1.13.18).

3) 계시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officium speciale) 혹은


조명(illuminatio)에 의해 그 내용이 이해되고 수납된다. 계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Spiritus internum)와 감화(persuasio)에 의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진리로서 수납된다.

3. 계시는 진리 형태

아들을 본 자마다 아버지를 본다(요 14:9). 아들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아버지의 형상”(골 1:15)이신데,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계시는 말씀을 통하여,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살아 있고 명확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viva et
expressa)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치는 중보를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Verbum Dei)이 인간의
언어(lingua humana)에 의해서 이해되고 수납된다.
◈ 조직신학서론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이 인간의 영혼 가운데 진리로서


수납된다.

즉 계시는 하나님의 인격(persona)과 경륜(consilium), 뜻(voluntas)이


아들을 통하여 the eternal and essential Word of God으로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다. 성경으로 기록되어 현현된(manifestata) 계시는 성경 저자들에
의해서 매개된 계시(revelatio mediata)이다. 이는 그들이 처음 계시의
수납자들로서 성령의 영감(inspiratio Spiritus)으로 받은 직접적 신계시(revelatio
Dei immediata)와 동일한 계시이다.

4. 계시는 존재의 통보가 아님

바빙크가 그의 책 Magnalia Dei(Our Reasonable Faith, 하나님의 큰 일,


27-30)에서 계시에 관해서 설파했듯이,
1)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다. 하나님 안에 자의식(自意識)과 자기지식(自己知識)이 없으면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기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계시에 관해서도
주권적이시고,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계시하신다.
2)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계시는 자기계시이다. 하나님은 계시의
근원이시고 그 내용이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계시에 있어서 진리이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자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선포하셨기 때문이다(요 1:18).
하나님의 계시는 그 내용이 아무리 풍부하여도 하나님의 자기지식과
동일하지 않다. 하나님의 자기지식이나 자의식은 그 존재만큼 무한하고 그
본질에서 나오기 때문에 어떤 피조물의 이해에 매이지 않는다.
3) 계시는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로 돌아감이요 하나님은
온갖 것을 자신을 위해서 지으셨다(롬 11:36; 잠 16:4). 전체 계시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있고 동시에 그 안에서 절정(culmen)에 이른다.
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독생자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인격의 형체시다, 그러므로 그를 보는 자마다 아버지를 본다(요
14:9). 그리스도인은 이 신앙에 서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 우리도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후 4:6).

107
◈ 조직신학서론

로마 교회는 계시를 존재의 통보(communicatio) 혹은


분여(participatio)로 본다. 카톨릭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셋으로
분류한다. 1) 첫째 “후험적 지식(a posteriori knowledge)”으로서 자연 이성에
의해서 파악되는 자연적인 지식이 있다. 2) 둘째 말씀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 그리스도의 계시가 있다. 하나님은 이 지식을 자신을
통보하심으로써 주시는데 이를 위해서 성육신을 이루셨다. 3) 셋째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기계시적 구원 행위로부터 나타난
지식이 있다. 이 지식은 인간 개개인의 혹은 단체의 실존적이며 인격적인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경험 가운데 나타나는 지식이 있다.

Karl Rahner에 의하면 제 2 바티칸 공의회에서 카톨릭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역사적인 행위와 인간의 언어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통보의 계시를 연결시켜서 “은혜 가운데 언어적 계시를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지식(the knowledge of God by means of his own verbal
revelation in grace)”에 이르고자 했다고 지적한다.
라너는 은혜를 초월적 경험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께 알려지는
것으로 본다. 즉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향한 자기 실현의 끝(the
finalization of man’s self-realization towards the immediacy of God)”이 은혜라고
본다. 하나님의 인간과의 자기통보가 인간의 초월적인 부분이다. 즉
하나님의 인간과의 통보로서의 계시는 존재의 통보가 됨으로써 은혜이다. 즉
견신(見神, visio Dei)이 신화(神化, deificatio)이다.

Karl Barth는 하나님의 자기현시를 강조하여 그 현시가 하나님의 존재


혹은 본질의 통보라고 본다. 위기신학자들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단절을
강조하여 계시는 성경에 있어서조차 구체적인 역사적 존재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본다. 바르트는 “성경 그 자체는 계시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선지자들 및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경우 그리고 그 경우에만 계시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계시의
특징을 하나님의 객관적 자기현시(patefacio)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 행동의 사건성에서 찾고자 한다. 계시를
진리(veritas)가 아니라 사건(res)으로 파악함에 있어서 바르트는 계시행위를
하나님의 본질의 통보, 분여로 보고, 이로써 인류는 신화되며, 하나님께서
자기의 생을 계시 내에서 사신다고 본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자기의
생을 사신다고 본다.
계시를 사건으로 이해함에 있어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준비(God’s
readiness)”와 “사람의 준비(man’s readiness)”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하나님의
◈ 조직신학서론

준비는 하나님을 알 수 있음(knowability)인데 이는 하나님은 진리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서 자신을 계시함에 있어서
진리이다. 진리는 계시라기 보다는 계시의 준비이다. 한편 사람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연합함으로써 계시 사건을
준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맞을 준비를 한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이 거듭남이 되는 것은 믿음 가운데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계시를 객관적
가능성(혹은 실제)으로, 성령을 주관적 가능성(혹은 실제)으로 본다.
바르트에 의하면 가능성으로서의 계시와 가능성으로서의 믿음은 따로
존재한다. 그가 슐라이엘마허적 주관성을 이와 같은 단절로 극복하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믿음은 여전히 지식을 전제하지 않는
슐라이엘마허적 주관적 믿음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오직 믿음(sola fide)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와 통보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춤과 관계된다. 즉 바르트는 슐라이엘마허적인 sola fide를
벗어나지 못하고, sola fide를 sola scriptura 가운데서 이해하지 못한다.
바르트에세 있어서 하나님은 그 자체라기 보다는 관계로서만 이해된다. 그의
삼위일체 이해는 삼위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이해이다. 이 관계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로 유비된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사람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만 말한다.” 계시의 사건성을
다룸에 있어서 바르트는 특히 성례 신학에 집착한다. 성례적 실제는
우리에게 “나”이신 하나님인 “너 혹은 그”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주관적 부딪힘을 통한 객관화, 이를 통하여서 바르트는 주관주의를
벗어 나고자 했다. 그러나 객관적 계시가 없는 주관적 부딪힘이 있는가?
객관적 계시가 전제되지 않는 믿음(바르트적 믿음)으로 준비된 사람은
누구인가—과연 신자인가? 주관적 부딪힘의 총화가 객관적 계시가 될 수
있는가? 혹 주관적 부딪힘의 총화가 객관적 계시가 된다고 친다면 그
계시는 처음부터 객관적인 계시가 아닌가? 그것은 ‘계시로 말미암은
작용’이라기 보다 ‘계시의 작용’이 아닌가? 즉 계시로 말미암은
믿음(바르트적 믿음)의 작용이 아니라, 믿음으로 수납되는 계시의 능력이
아닌가? 즉 객관적 계시의 객관화 아닌가? 계시와의 주관적인 부딪힘이
있다면 그것은 객관적 계시의 객관화가 경험 가운데 나타남 아닌가?

5. 계시의 목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하나님의 현시(patefacio) 자체이고


그 절정(culmen)이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골

109
◈ 조직신학서론

2:9). 바빙크가 말하듯이 “하나님의 최고의 계시는 찬란한 궁창도 아니요,


권위의 자연도 아니요, 땅 위의 군주나 천재도 아니요, 어떤 철학자나
예술가도 아닌 인자이시다” (Ibid., 30).
◈ 조직신학서론

제 2장 계시의 가능성과 필요성, 그 유래처

1. 계시의 필요성

신지식에 있어서 계시는 필수적이다. 절대적으로 자의식적인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심으로써 계시되기 때문이다.

2. 비필연적 계시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가 통보나 분여의 방식으로 유출되는


것이거나(Plotinus) 19세기 초기 관념론 철학에서 새로운 계시 개념으로
주장한 하나님의 존재가 세계에 내재함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후자에 의하면
초자연적인 것이 자연적인 일반법칙과 일상적인 사건의 과정으로 표현되고,
초자연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에 내재함으로써 모든 계시는 초자연적이거나
또한 자연적이다.

슐라이엘마허와 그를 잇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인간의 내적


신체험(神體驗)이나 도덕의식을 기준으로 이와 같이 내재화된 계시를 풀어
갔다면, 바르트와 브룬너로 대표되는 위기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를 강조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단절을 강조하면서도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과 더불어서 하나님이 자기 존재를 피조물과 나눠 가진다는
범신론적 관점을 공유한다. 다만 이들은 사람의 신의식이나 신비체험에
강조점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행동, 계시 사건에 의해서 “나에게 그의
말씀”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조명을 강조한다.

1) 계시는 인격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다. 2) 하나님은 자기


존재 뿐만 아니라 뜻과 경륜을 알리시고 사역과 영광을 나타내신다. 3)
계시자는 계시물(내용)을 스스로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즉 그의 의지에
의하여 계시하신다. 계시는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일이 아니고—즉 절대적
필연성에 얽매이지 아니하시며—의지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가시적 모습을 보시기를 더욱 기뻐하셨을 때 그의 말씀이 기록되기를
원하셨다”(Inst. 4.8.6). 4) 그러므로 계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영화를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창조주와 재창조를 이루는 구속주로
계시하는 것이다.

111
◈ 조직신학서론

3. 내신적(內神的) 계시의 필요성

하나님은 오직 스스로의 필연성(necessitas)에 의해서 스스로


종속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가 내신적 사건일 때, 즉
내삼위일체적 자기 계시는 필연적이다. 이 때 하나님의 자기 통보, 자기
현시를 로고스(Logos)곧 하나님의 말씀(Verbum Dei)이라고 한다. 이 자기
통보가 하나님의 자기 객관화이며, 아버지의 객관화, 아버지의 계시는
아들이다. 이 아들이 나타나셨으며, 성령의 영감에 의해서 우리 마음에
들어 오셨다.

그러므로 계시는 the knower, the knowledge, the one known과의 관계적
유비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이 자기계시는 영원하고
필연적이다. 내신적 계시는 삼위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보여준다.
이레나이우스는 아버지의 나타나심 혹은 지식을 아들이라고 불렀다.

4. 계시의 유래처

로고스 없이는 자기계시가 없다. 하나님의 자기 인식(지식0이


로고스이다. 로고스를 통한 지식만이 참 신지식이다. 하나님의 자기
객관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로고스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존재의
분여나 통보가 아니라 존재를 알리시며 그 인격과 사역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계시는 진리자체(being)를 드러냄이지 진리를 이루어
감(becoming)이 아니다.
◈ 조직신학서론

제 3장 계시의 분류와 일반계시


1. 계시의 분류

로마 카톨릭 교회는 계시를 자연계시(revelatio naturalis)와


초자연계시(revelatio supernaturalis)로 나눈다. 이하에서 이를 비판한다.

1) 자연을 통한 계시도 그 근원에 있어서 일차적인 원인인 하나님의


존재, 뜻, 섭리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모든 계시는
초자연계시이다. 그러므로 이 구분은 계시의 이중성을 말하기보다 두 양태를
보여준다.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의 기원은 모두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자연계시는 자연현상의 중계를 통해서 전달되는 반면 초자연계시는
하나님이 사건들의 자연적인 과정에 개입함을 의미한다.
2) 이런 구분은 자연신학을 전제한다. 아퀴나스(Aquinas)는 철학의
진리는 철학자로서 신학의 진리는 신학자로서 다루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철학은 과학적 지식에 이르고, 신학적 진리는 지적인 통찰력에 근거하지
않은 신앙의 토대 위에서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이성의 토대 위에
학문을 세우는 것은 가능하나, 신앙의 토대 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계시는 이성으로 얻은 지식에 특별한 신비한 지식(삼위일체, 성육신)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보았다.
3) 구원은 자연과 은혜의 대립 가운데 온 것이 아니라 자연 곧
창조의 회복이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연 계시가 오염되고, 희미하게
되었고, 또 인간의 이해력이 어두워져, 자연에 적힌 하나님의 글씨를
정확하게 일고 해석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초자연계시는 원래
자연계시로부터 알 수 있었던 진리들을 재공포, 교정, 해석해 주며,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온전케 하심이다. 그러므로, 전적 타락을
전제함으로써 자연신학은 그 자리가 없어진다. 그리고 계시는 모두 신앙으로
수납됨이 주창된다. 18세기 영국의 이신론과 독일의 합리주의(볼프 등)는
자연신학을 너무 부각시켜 계시신학을 전적으로 불필요한 것으로 본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구분은 계시의 기원이나 양상보다 계시의


범위와 목적에 따른다.

일반계시(revelatio generalis)는 창조(creatio)에 논거를 두며 모든 지적인


피조물 자체에 전달되는 것으로서 모든 인간이 받을 수 있다. 반면에
특별계시(revelatio specialis)는 재창조(re-creatio)에 토대를 두며 창조 후에

113
◈ 조직신학서론

말씀으로 온 계시이다. 크게 보아서 특별계시는 모두 구원을 목적으로


왔다(타락 전 예정설을 취할 때 이 입장은 명료해진다). Cf. “하나님은 우리의
선과 구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Inst. 1.14.22). 그러나 타락 이전에
온 말씀계시를 비구속적 특별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빙크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다음과 같이 나눈다(Magnalia Dei,


31-37).
일반계시 특별계시
현상과 사건의 평상적인 과정을 다룸 비상한 수단과 현상, 예언이나
기적을 사용
하나님의 능력, 지혜, 선의 속성을 하나님의 의, 거룩, 긍휼과 은혜의
계시 속성을 계시
모든 사람을 향하고, 일반은총에 복음아래 생활하는 사람에게만
의해서 죄를 억제함 미치고 특별은총에 의해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중생으로 영화롭게
하심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 양자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과 기뻐하심에 근원을 둔다. 두
계시의 내용은 모두 은총이다. 다만 일반계시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을 지으시고 어두움에 빛을 비추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 비추시는 그 말씀에 은혜를 입고 있지만(요 1:1-9), 특별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어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 말씀에 은혜를
입고 있다(요 1:14).
2) 두 계시의 결국은 인류의 보존에 있으며 자연계시로 인류를
존속시키고 특별계시로 구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영광을 돌리는 목적에 이바지한다.
3)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내용은 공히 성경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일반계시는 그것이 자연으로부터 나올지라도 성경 안으로 흡수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어두운 이성 때문에 우리는 일반계시를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와 보존과 다스림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한다. i) 만물은 최종적인 원인인 영원하고 본질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를
요구한다(우주론적 증명). ii) 법과 질서에 있어서나 그 통일과 조화에
있어서나 모든 피조물이 갖는 유기적 관계에 있어서 세계는 우연으로써는
◈ 조직신학서론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어떤 목적이 있으며 이 목적이 지혜롭고 전능한


존재에 의해서 성취되었음을 가르친다(목적론적 증명). iii) 모든 인간 의식
속에 그 이상 더 높은 자로 인식될 수 없고, 누구나 자존하는 초월자에 대한
의식이 있다(본체론적 논증). iv) 인간은 이성적이고 도덕적 존재이다. 인간은
그의 양심 속에서 스스로 그를 초월하고 그에게 무조건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법에 제한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 법을 통하여 거룩하고 의로운
입법자로서 하나님을 인정한다(도덕적 혹은 인론적 논증). v) 종교 없는
사람은 없다. 모든 종교는, 심지어 우리가 자연종교라고 부르는 종교조차
비록 미련한 미신에 잡혀 있거나 왜곡된 형태로 하나님을 숭배하는
경우에도 하나님의 실존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vi) 성령의 빛으로 인간
역사를 볼 때 어떤 절대자가 만물의 다스림을 가르쳐 주는 계획과 진행을
보게 된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서 창조되었으며(창


1:26), 하나님이 창조물에 그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가 창조주이심을
나타내셨으며(시 19:1; 롬 1:20), 하나님의 존재와 뜻을 알만한 것을
주셨음(롬 1:19)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되 하나도 없다(시 14:1, 3).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 3:11). 이와 같이 일반계시가 특별계시에
의해서 포함되고 복원되기도 하며, 특별계시는 일반계시에 의해서
설명되기도 한다.

2. 일반계시

일반계시는 말씀(verba)으로 된 것이 아니라 사물(혹은 사건, res)로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속(종교의 씨앗,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 양심,
소우주, 하나님의 작품들을 비추는 맑은 거울)과 그의 창조물(우주라는 전체
작품, 보이는 그의 옷의 광채, 눈부신 극장)에 자신을 계시하셨다(Inst. 1.3-5).

칼빈의 신앙교육서(Calvin’s First Catechism) 1538 in Latin

제 3조.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알아야 할 것(Quid de Deo nobis
cognoscendum)”

이제 하나님의 존귀함은 그 자체로 인간적인 이해력을 훨씬 넘어서며

115
◈ 조직신학서론

심지어 그것에 의해서는 전혀 받아들여질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의 그토록 찬란한 광채에 완전히 전복되지 않도록 그 분의
높으심을 탐구하기보다는 경배하는 것이 합당하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영상이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에서 그 분을 찾고 좇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주님을 볼 수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공허하고 쓸데 없는 사색들로
의심에 빠져 있게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안에서
완전한 경건을 낳고, 자라게 하고, 강화시키는데 유익한 것 즉
두려움과 결합된 믿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물들의 우주에서 우리는 모든 것의 시작이며


기원이 흘러 나오는 하나님의 불멸성을 묵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거대한 무리를 조성하시고 지키시는 그 분의 능력을 묵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크고 혼란스러운 다양성을 명확한 질서로
구성하시고 영원히 그것을 다스리시는 그 분의 지혜를 묵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물들이 지어졌으며 이제 계속 존재하게 되는
원인 자체인 그 분의 선하심을 묵상하기 때문이다; 불경건한
사람들에게 보복하기 보다는 경건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놀랍도록 의 자체를 더욱 좋아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묵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돌이켜 회개에 이르게 하고 크신
자상하심으로 우리의 불의들을 참으시는 그 분의 자비를 묵상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부요하게—우리에게


충분하도록—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의 나태함으로 말미암아
그토록 찬란한 빛에 우리의 눈이 멀어버렸다. 우리는 눈이 멀어서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악함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하찮게
여기고, 무모하게 해석하며, 그것들 가운데서 빛나는 전체 하늘의
지식을 완전히 전도(顚倒)시켜 버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이 마땅하게 기술된 그 분의 말씀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일들
자체는 타락한 우리의 판단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규범으로 헤아려
진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모든 삶,
의, 지혜, 능력, 선, 그리고 자비의 유일하고 영원한 근원이시라는
것을 배운다. 모든 선함이 예외 없이 그 분으로부터 흘러나오므로
모든 찬미가 그 분께 올려짐이 합당하다. 그리고 비록 이 모든
◈ 조직신학서론

것들이 하늘과 땅의 각 영역에 가장 분명하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직 스스로 낮아져서 어떤 방식으로 주님께서 그 분의 삶,
지혜, 그리고 능력을 우리 가운데 계시하시고 우리를 향하여 그 분의
의, 선, 자비를 행하시는지 깊이 생각할 때, 마침내 그것들의
실제적인 목적, 가치, 그리고 우리를 위한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이신론자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모두 일반계시를 강조했는데


이신론자들이 자연계시만을 강조해서 조자연적인 계시의 필연성, 가능성,
실재성 등을 부인한 반면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자연계시를 주로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있다고 보았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모든 인간에게 있는
신적인 요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로 표현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성경, 특히 신약성경은 자기들이 가진 깊은 신의식의 원천인 그리스도와
가까이 접할 특권을 누렸던 사람들의 종교적 경험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이로써 신약 성경은 그 초자연적인 성격이
삭탈되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와 단지 정도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편 위기신학자들은 특별계시만을 강조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이 죄로 인해서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에 자연계시를 볼 눈을
잃어 버렸다고 본다. 브룬너는 하나님의 형상이 형식적으로 남아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파괴되었다고 본다.

1) 창조 자체

창조 행위 자체가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보여 준다(cf. Inst. 1.13).


하나님의 말씀과 영으로 하늘과 땅을 무로부터(ex nihilo) 창조하셨다(cf. Inst.
1.14.20).

Charles Hodge(1.556-558)는 immediate creation ex nihilo와 mediate


creation을 구별한다. Immediate creation(창 1:1)은 순간적이며(instantaneous)
다른 것의 중재 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의미하며, mediate
creation(창 1:2 이하)은 중재에 의해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창조를 말한다.
그러나 인간 창조의 예에서 보듯이 mediate creation의 경우에도 하나님을
창조주(Creator)로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시 139:15).

117
◈ 조직신학서론

6일간 계속된 mediate creation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을 잘


보여준다(Inst. 1.14.2).

창조가 최초의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다. 창조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삼위일체), 그의 권능과 지혜, 그리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의 계시
작업이다. 창조는 비필연적인 자기계시로서 합리적인 존재들이 계시를
수납하기 전에 미리 주셨다.

2) 창조계시(revelatio creaturalis)

이는 창조 작업을 통하여 나타낸 계시라기 보다는 창조 세계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sempiterna eius virtus et divinitas,
롬 1:20)을 의미한다(aeterna 역시 영원을 뜻하지만 sempiterna는 항상
계속되는 영원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창조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창조주로 계시하신다(시 19:1).

신성의 계시로 창조주가 섭리주이시며 심판주이심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신적인 지혜에 대한 가장 고상한
증거”(창 1:27; 9:6)이다(Inst. 1.5.3). “하나님의 형상의 고유한 좌소”로서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나 창조된 실체(an immortal yet created essence)”를 보여준다.
모든 창조물 가운데 인간은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선함을 보여주는 가장
고상하고 놀라운 모범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우리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듯이 우리 자신에 관한 온전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볼 수 없다는 면도 인간의 창조를 다룸에 있어서 특별히
고려되어야 한다(Inst. 1.15). 최고의 창조계시(물)인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회복은 곧 중생의 목표가 된다(“The end of regeneration is that Christ
should reform us to God’s image.” Inst. 1.15.4).

3) 도덕계시

인간에게 양심(conscientia)을 주사 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지식(sensus divini iudicii)”을 깨닫게 하는 “내적인
법정(inner forum)”을 갖게 하신다. 이런 측면에서 칼빈은 양심을 semen
iustitiae(의의 씨앗)이라고 부른다(Inst. 3.19.15; Comm. Rom. 2:15). 양심과
더불어서 하나님은 인류 각 종족에게 윤리와 법을 주셨다.
◈ 조직신학서론

제 4장 일반계시의 직임
1. 일반계시의 가치와 의의

1) 모든 종교의 기초
모든 종교는 창조주의 존재 혹은 위대한 신의 존재를 전제한다. 신이
창조하고 보존하며 질서를 준다고 본다. 성경에도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 영, 로고스의 빛이 비춤 등이 있다고 말한다(창 6:3; 욥 32:8; 요 1:9;
롬 1:18 이하; 2:14-15; 행 14:16-17, 22-30). 그러나 이들 종교는 구원종교가
되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a shadow deity”를 섬긴다(Inst. 1.5.5).

문화활동의 기초
2)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류는 일반계시의 빛에 의해 진리(veritas)를
알고 선(bonitas)을 행하며 아름다움(pulchritude)을 발현한다. 뿐만 아니라
일반계시를 통하여서 윤리와 법의식을 알게 된다. 즉 양심으로 말미암아
의(iustitia)라는 관념을 가져서 하나님 앞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고 판단한다.
특히 자연법을 주셔서 무지를 핑계치 못하게 함(inexcusabilitas, Inst. 2.2.22).
그러나 이러한 일반계시에 근거한 문화활동은 기독교 문화를 형성하지
못한다.

3) 복음의 예비
일반계시는 언어, 사상, 종교, 도덕생활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복음
전파의 길을 예비하셨다. 일반계시도 특별계시처럼 하나님의 로고스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일반계시로 이방세계에서 자기의 오심을
준비하셨다. 일반계시로 이방인이 스스로 하나님의 소생으로 느끼고(행
17:28), 하나님을 혹 찾아 발견하고(행 17:27),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고(롬 1:19-20),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고(롬 2:14),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일반 생활의 지식(ex. 사 28:23-29, 파종법과 수확법)을 갖는다.
이런 계시와 은총이 모두 복음의 예비가 된다.

2. 일반계시의 불충분성

1) 일반계시의 명료성(perspicuitas revelationis generalis)

만약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었다면(“si integer stetisset Adam,” Inst. 1.2.1)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한 자신의 구조 속에 있는 semen religionis와 sensus

119
◈ 조직신학서론

divinitatis로 일반계시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 신성, 지혜, 영광을


분명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롬 1:21-23; 시 19). 그러나 타락 후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전 1:21). 사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는 달리 일반계시는 창조와 인간의 전 조직, 사회 구조, 도덕 가운데
명료하게 나타난다.

2) 칼빈과 A. 카이퍼가 고찰한 바와 같이 만약 타락이 없었다면


인간은 바른 이성, 양심, 감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에 맞추어
살아가는 능력을 일반계시를 통하여서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영원한 생명과 인간의 궁극적 운명에 관한 것은 일반계시로
결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계발의 명령을 말씀계시(특별계시)로
주셨는데(창 1:28), 이로써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사람의 위치를 확정하셨다. 즉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사람은 피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번성하게 하는 피조물임을 확정하셨다. 그리고 에덴
동산에서의 원시(原始)언약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인류의 영생을
약속하셨다(창 2:9, 16-17, 22). 은혜를 은혜로 알고 인정하면 은혜를
더하시겠다는 약속이 이 언약의 본질이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의 조건성(conditionality)은 세상 계약에서 볼 수


있는 쌍무적(雙務的) 혹은 쌍방적(雙方的) 채무 이행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의 상호성(mutuality)에 기반한다. 이는 이후 체결되는
은혜언약의 본질의 일단(一端)을 보여준다.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은 시종일관
은혜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 이 계시는 오직 특별한 임재(임재) 가운데서
특별한 말씀으로만 주신다. *언약(foedus, pactum, testamentum)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약속인데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기반한 그리스도의
공로(meritum Christi)에 그 실체가 있다.

3) 죄는 일반계시와 이 계시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을 어둡게 하였다.


죄는 일반계시를 흐리게 하고(전체적, 전인격적 타락) 우리의 지각 능력을
흐리게 하고 억압한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연계시로는 창조주이며 언약주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에 이를 수 없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죄 때문에 창조계시와 인간의 구조,
양심, 도덕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안경(specillis, Inst. 1.6.1; 1.14.1)을
써야만 한다.
◈ 조직신학서론

4) 일반계시는 일반 종교의 기초로서도 불충분하다.

모든 종교에는 다 진리에 대한 이론 체계가 있다. 그러나 한 주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신을 헛되게 섬기는 사람들은 일반계시조차도 그들의
종교에 대한 합당한 기초로 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종교는
일반계시조차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5) 일반계시는 기독교의 기초로서 전혀 불충분하다.

일반계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구속 과정의 일부가


아니라 그 예비 과정에 속한다. 펠라기우스의 자력구원주의(autosoterism)는
일반계시의 충분성 및 그 위에 기초한 자연 종교의 충분성을 가르쳤다.

결론적으로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능력, 선하심, 지혜에 관한 기초


지식을 주지만, 하나님의 최고 계시인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구속 사역 및
변화시키는 능력을 배워 알지는 못한다. 즉 일반계시는 구원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일반계시는 인생사의 기초와 안내가 되는 지식은 주나 영생에 관한
영적인 지식을 영원히 채우기에는 불확실하고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이신론자들의 자연종교, 칸트의 이성 종교, 슐라이엘마허와 리츨의 이후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내재 종교는 참된 기독교의 기초가 되지 못한다.

3. 일반계시와 자연신학

계시를 자연 이성에 기반한 지식의 토대 위에 신비한 지식이 덧붙여


진 것으로 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타락한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지
못한 철학적 신학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어거스틴이* 말한 더 고급스러운 이성과 더 저급한 이성은 결코


구별되는 능력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전자로써 사람이 영원한
것들에 의향을 갖고, 스스로 그것들을 관조하며, 자신의 행위이
법칙을 위하여 그것들에 문의하며, 후자로써 일시적인 것들을
의향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둘은, 즉 영원과 시간,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하나는 다른 하나가 알려지는 중간자가 된다.
왜냐하면 발견의 순서에 있어서 우리는 일시적인 것들을 통하여서
영원한 것들에 대한 지식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바울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일들이 명확하게 보여졌으니, 그것들은 만들어진

121
◈ 조직신학서론

것들에 의해서 이해되고 있다.”** 한편 해석의 순서에 있어서 우리는


영원의 관점에서 일시적인 것들을 판단하고 영원한 법률들에 따라서
일시적인 문제들을 처리한다. 따라서 더 고급스러운 이성과 더
저급한 이성은 하나이며 동일한 능력에 속한다. 그것들은 오직
상이한 습관들과 상이한 기능들에 의해서 구별된다. 지혜는 더
고급스러운 이성에, 과학적 지식은 더 저급한 이성에 돌려진다.
Summa Theologia, Ia. lxxix. 9
* de Trinitate, xii. 4 ** Rom. 1:20

우리는 우주적이며 인식할 수 있는 원인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우리의 감각들에 기록된 특별한 사건들로부터 끌어낸다.
Opusc. x, de Causis, lect. I.

기독교 철학은 믿음의 눈으로부터, 철학은 이성의 자연적인


빛으로부터 나온다. 철학적인 진리들은 믿음의 진리들과 배치되지
않는다. 참으로 그것들은 부족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반적인
유비들을 또한 인정한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예표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은 은혜의 서론이기 때문이다.
Opusc. xvi, Exposition, de Trinitate, ii. 3.

칼빈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을 강조해서 하나님을 억제하고 있으며


인간 영혼의 기능을 단지 육체에 봉사하는 것으로만 강조했다고 비난한다.

4. 일반계시의 효능

비록 우리가 “순수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지식”에 이를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이를 핑계할 수
없다(inexcusabilis).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알게 하는
일반계시를 명백하게(perspicue)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무딤(hebetudo)”으로 말미암아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Inst. 1.5.1, 15;
2.2.12-17).

5. 일반계시와 일반은총(gratia communis)

일반은총은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주신 은사들이 인류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어 역사하는 은혜이다. 칼빈이 본 바와 같이 타락
◈ 조직신학서론

후에도 인류에게는 종교의 씨앗과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남아 있으며(Inst.


1.4), 하나님은 피조물에 여전히 자신을 창조주로 계시하시고 피조물을
운행하신다(Inst. 1.5). 일반은총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죄 있는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시는 호의(favor, gratia)라고 함이 타당하다.

A. 카이퍼는 세 권으로 이루어진 책 De Gemeene Gratie 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이하는 Van Til의 Common Grace에서 인용).
1) 카이퍼는 일반은총을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인류의 시체로부터의
분리 과정(a process of disintegration of the corpse)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제한될 수 있었으며 제한되었던 시체로부터의 영적인
분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적이지 아니하며 부분적이다. 죄에 대한
두려운 결과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은
전체적이지 않다.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풍요함과 그 분의
창조 능력이 우리 사악한 족속 가운데서 영광을 받도록, 그것은 부분적이다.
2) 일반은총은 죄를 억제하지만 말살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누르나 해소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길들인다. 그러나 본성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죽끈으로 뒤에서 묶는다. 그러나 그
제압으로부터 풀려나면 다시 악한 족속들이 새롭게 일어난다. 그것은 야생의
가지들을 자르나, 뿌리를 고치지는 못한다. 그것은 사람의 자아의 내적인
충동을 그것의 사악함에 맡긴다. 다만 그것이 완전히 열매 맺는 것은
예방한다. 그것은 제한하고, 금하고, 방해하는 능력으로서 제지해서 멈추게
한다.”
3) 일반은총의 항구적 측면과 점진적 측면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역사하심에 있어서 사람과 독립적으로
활동하신다. 진취적인 사역에 있어서 사람 자신은 ‘하나님과 함께 도구와
협력자’로서 일한다.”

이와 같은 이해에 근거해서 카이퍼는 일반은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일반은총은 주로 하나님의 억제하시는 능력이다. 그것은 사람을
두구로 삼거나, 삼지 않고 작용한다. 그것에 의해서 본래의 우주적 창조
권능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한 기회로 주어진다.”

1924년 CRC(Christian Reformed Church) Synod는 일반은총의 세 가지


측면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i) 인류 일반을 향한 하나님의 자상하신 태도;
ii) 개인적인 관점과 사회적 관점에서의 죄의 억제; iii)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한 소위 시민적 선(civic good)을 다룬다.

123
◈ 조직신학서론

Bavinck와 Van Til도 카이퍼의 견해에 근본적으로 동의한다. Van Til의


견해를 보자. “우리가 만약 칼빈에 의해서 제안된 견해를 따른다면, 우리는
구원에 대한 우주적인 제안을 일반은총의 증거로서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저급한 은총이라기 보다 선행하는 은총이다. 모든 일반은총은 선행하는
은총이다. 그것의 일반성은 선행성에 있다.”

6. 일반계시의 부정

계시는 절대 인격자로서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다. 일반계시는 계시자인 창조주에 관한 지식과 창조 자체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다 포함한다.
◈ 조직신학서론

제 5장 특별계시(revelatio specialis, 말씀 계시, 구원 계시)


1. 특별계시

일반계시의 불충분성이 특별계시의 필요성을 명시한다. 그러나


이것이 계시의 필연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빙크에 의하면: “우리는 특별계시가 하나님 자신께서 그 분의


창조를 위하여 지시하셨던 목적과 떨어질 수 없을 만큼 밀착되었다는
측면에서만 그것의 필연성과 불가피성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 만약 죄로
파괴된 창조를 회복하고 그 분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재창조하시고 그가
하늘의 영원한 복으로 다시 한번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특별계시는 필연적이다.” “창조는 계시이다. 그것은 매우 특별한, 절대적으로
초자연적인, 놀라운 계시이다. 누구든지 창조의 사상을 원리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든 그 이상의 계시의 가능성, 심지어 성육신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아무리 일반계시가 특별계시의 필연성과
가능성을 위한 일에 기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실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그저 주시는 선물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특별계시의 실재는 오직 그것 자체의 존재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다. 그것이 보여지고 인정되는 것은 오직 그것 자체의 빛으로
말미암는다. ”

특별계시는 창조 후에 말씀으로 온 계시이다. 일반계시로는 자기의


작정과 구원 경륜과 역사의 종말을 알리실 수 없으므로 말씀의 형태로
계시하셨다.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i) 말씀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과 오늘날 아들을 통한 말씀(히 1:1)을
모두 포함한다. 이는 창조와 섭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을 계시한다.
ii) 말씀은 인격적이며, 지각하시며, 사유하시는 존재이신 하나님이
그의 형상과 모양을 한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써 인간에게
말씀함을 의미한다.
iii) 특별계시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시다. “길과 진리요
생명”이신 말씀(로고스)으로서 그리스도의 중보직을 역동적으로 이해할
때(mediator reconciliationis, patrocinii, doctrinae) 특별계시로서의 말씀의 내신적
필연성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시고(창 1:3; 시 29:3-9; 33:6,

125
◈ 조직신학서론

9; 104:7; 사 30:31; 66:6),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고(시 94:9), 육신이 되신


말씀을 통하여서 구속 사역(재창조 사역)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Inst. 1.9.3; 2.6.4; 4.8.5).
iv) 특별계시로서 말씀은 하나님의 구속 은총을 계시한다.
일반계시가주의 손으로부터 나온 사역을 스스로 발견하게끔 인간에게 남겨
두셨다면, 특별계시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사상들을 표현하시고, 방황하며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는 인류를 직접 찾아 가신다. 그러므로 특별계시는
특별은총에 다름 아니다.

1) 비구속적 특별계시

타락 전에 말씀으로 주신, 구원을 목표로 하지 않으나, 인류와 언약을


체결하신 특별계시. 인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사 언약의 당사자가 되게
하셨으며 문화명령을 주시고(창 1:28) 경건과 삶의 규범을 언약의 말씀으로
계시하셨다(창 2:16-17). 칼빈은 에덴 동산의 하나님의 명령을 “올바르고
이성적인 유일한 삶의 규범(unica bene et cum ratione vivendi regula)”이라고
부르며 “이로써 사람들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훈련을 하게
된다”고 주석한다(창 2:16 주석).

특별계시로서 말씀은 항상 그 자체가 계시의 내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사건들과 사실들이 말씀으로 해석됨으로써 특별계시가
된다. 예컨대 창 1:28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말씀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고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도 사건이 특별한 계시가 됨이다.

타락 전 하나님은 인류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셨는데, 이를


말씀으로써, 즉 특별계시로써 나타내셨다. 특히 문화명령과 이름을 짓게
하심(창 2:19-20), 그리고 규범을 받는 자가 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이러한 은총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있음을 나타내셨다. 이로써, 하나님의 나라, 남은 자, 선택의
개념이 말씀으로서 이미 예표되었다

2) 구원계시=구속적 특별계시

특별계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기 불능한 죄인들에게 신적은사로서


구원을 약속하고(구약) 약속을 성취하셨다는(신약) 말씀을 포함한다.
◈ 조직신학서론

특별계시는 치유하는 계시로 왔으며 의약적 계시이다(medicina). 창 3:15에서


구원을 약속하고(proto-evangelium) 이를 역사 가운데 준비하셨다. 이런
계시를 구약 백성 가운데 나타내셨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사 삶의 규범을
삼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예표를 미리 보게 하셨다. 특히 제사 제도를
통하여서 대속의 원리를 나타내셨고 오직 피 제사를 통하여서만 구원이
있음을 나타내셨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예표(repraesentatio)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재(顯在, praesentio)를 계시한다. 율법은 규범(praeceptum)과
약속(promissio)을 포함하며 율법의 약속의 성취로서의 복음 역시 복음적
규범과 약속이 있다. 율법의 약속의 성취가 초림으로 성취되었다면 복음적
약속은 재림으로 성취된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사 구원을 이루시고 Christ in the


law가 성육신 하셔서 the law in Christ로 계시되었다. 구약 시대 때부터 계시된
여호와의 백성이라는 개념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는 승천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이는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는 진리의 영이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잔에 채우는 후사로서의 아들의 영(롬 8:17)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그를 머리로 한 몸으로 모인 신령한 공동체가 교회이다.
이는 구약 시대에도 그리스도가 caput ecclesiae et angelorum였다는 측면에서
구약적 교회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백성의 회복이 완성되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구원을 완성하고 심판하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도입하여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실 것이다. 이 모든 계시가 그리스도의 계시이고
구원계시이다.

2. 특별계시의 필요성

1) 타락한 인류의 회복
하나님은 명료하게 자신의 능력과 신성, 영광을 계시하셨지만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시력을 잃어버려 이를 온전히 받지 못한다.
말씀계시(성경)는 이와 같은 눈에 안경이 되어 시력을 회복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하나님은 일반은총을 주셔서 완전히 시력이 없어지도록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계시로는 다만 무지를 핑계치 못할 뿐이다. 먼저
사람이 회복되어야만 하나님과 원래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
회복하게 하는 계시가 특별계시이다.
2) 특별계시는 치료하는 의약으로 왔다.
특별계시은 인류를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키는 일을 한다.

127
◈ 조직신학서론

이러한 구원 경륜과 구원의 과정을 알리시는 일은 말씀 계시로만 된다.


3) 하나님께서 인류와 관계를 맺으시고(원시언약) 인류의 본문과
궁극적인 목표점(영생)을 알리시는 일은 말씀 계시로만 된다. 이를 특히
비구속적 특별계시라고 부른다.
4)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과 경륜을 알리는 것은 창조에서의
현시만으로는 안되며 말씀하셔야 한다. 말씀으로 구속주를 계시할 뿐만
아니라 창조주와 창조 사역을 분명히 알리신다.

3. 특별계시의 내용

1) 특별계시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이다.


성부 하나님의 뜻이 성자 하나님에 의해서 드러나고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수납된다. 특별계시는 삼위 하나님 자신이 말씀으로 계시되고 수납
됨이다. 특별계시는 계시의 내용으로(실유의 원리) 계시자의 영광과 권능을
현시한다(인식의 원리). 특히 특별 계시는 의와 긍휼, 사랑으로 드러난다.
2) 창조가 계시되고 설명되었다.
특별계시는 창조 후의 하나님의 말씀 계시이다. 세계의
창조(물질적+영적)와 인류의 창조가 제시되었다. 그리고 언약주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에 나타난 일반계시가 복원되고 재해석되어 있다.
3) 인류의 타락과 심판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현시되고 설명되어
있다.
4) 범죄 이후의 타락상, 노아 홍수 심판, 언어의 혼란으로 인한
인류의 분파 과정이 잘 개진되어 있다.
5) 아브라함의 소명과 민족 형성의 목적과 그 과정이 개진되어 있다.
6) 이스라엘 민족의 구출과 나라의 진행이 구원의 준비 과정으로
개진되고 설명되어 있다. 남은 자 가운데서 메시아가 나타날 것을 계시.
7) 구원의 길로서 율법과 제사 제도의 수립과 진행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율법 가운데 언약 백성이 살 방도를 보이심. 제사 제도를 통해서
구원의 길을 예표함.
8)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그 준비의
역사로 자세히 기술되고 제시되었다.
스스로 성전이 되어서 오시는 주님의 때까지 보이는 성전 가운데,
스스로 제사장이며 제물이 되어서 오시는 주님의 때까지 피 제사 가운데,
스스로 율법의 마침이요 완성이 되신 주님의 때까지 율법을 통한 통치로써,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계보를 잇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기 위해서
◈ 조직신학서론

택한 백성을 지키심을 계시.


9)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해석이 모든 계시의 핵심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과 사역이 기록됨.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실체가 드러나고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
10) 구원의 적용으로 교회가 이루어져 성령으로 사는 법이 제시되어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좇아 사는 법을 가르치신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성령의 띠로 매인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다.
11) 구원의 완성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약속되어 있다.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최후 심판으로 악을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구원의 완성은 부활과 창조의 변환으로 이루어진다. 처음
창조가 완성되고 죄가 완전히 제거됨으로써 하나님이 창조 가운데 완전히
거하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은 직접 뵙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지식의 완전에 이른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나라를 최종적으로 현시한다.

4. 특별계시의 방법

1) 직접적 말씀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의 존재(여호와, 출 3:4)와 뜻(율법)을
계시하신다. 그리고 말씀으로 인류와 약속을 맺으신다(언약). 그리고 구원의
큰 때에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신 아들 그리스도로 직접 말씀하셨다.
2) 예언의 방식
선지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예언했다. 하나님은 인생언어로나
우림과 둠밈, 꿈, 이상을 통해서 미래에 되어질 일을 알려 주셨다.
말씀(로고스)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며, 예언의 원천이시고,
중보자로서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신다. 그리스도가 승천 후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은 중생과 성화의 영일뿐만 아니라 계시의 영이다. 보혜사
성령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다양한 그리스도의 중보를 증거한다.
3) 하나님의 현현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은 친히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 오셨다. 그리고
족장들에게 “하나님의 사자(Angelus)”로서 오셨다. “주의 사자”(출 3:2)를
주석하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syllogism)에 이른다.

a)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중보자의 인격의 형상(figura personae


Christi)을 지녔다.
b) 그리스도는 심지어 성육신 전에 중보자의 역할을 완수하셨다.

129
◈ 조직신학서론

c)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인격에 관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라고 불렸다.

칼빈은 주의 사자의 현재와 사역을 중보자의 현재와 사역이라고


보면서 이를 신비라고 불렀다. 여호와와 엘로힘이라는 이름도 중보자
그리스도의 현현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세 인격의 전체
본질을 표상한다. 동시에 그것은 중보자로서의 하나님의 인격을 지시한다.”
“엘로힘은 천사들과 신들을 집합 명사로 표상한다; 그것은 삼위 하나님께서
한 본질이시라는 것보다 그 분의 경륜을 지시한다. 동시에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유한 특성을 정의한다. 그것은 그 분이 위엄 뿐만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성격을 계시한다.”
칼빈이 주의 사자, 여호와, 엘로힘으로 선재하신 그리스도(the
pre-existent Christ)응 나타내는 것으로 말할 때, 자주 이와 같은 명칭들은
중보자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의 머리라는 것을 표현한다고
해석한다.
구약 시대의 율법은 예수를 예표할 뿐만 아니라 그의 현재를
계시한다. 하나님의 현현의 절정은 하나님의 성육신이다(Deus manifestatus in
carne).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는 하나님은 영으로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
계신다. 이 영을 특히 그리스도의 영, 보혜사 성령이라고 부른다. 성령으로
백성들 가운데 내주(indwelling)가 완전해지면 하나님께서는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신다. 이로써 창조 안에 충만히 거하신다. 이것이 최후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이다.
4) 꿈과 환상
이는 말씀의 보조 방편이다.
5) 이적
창조와 그 보존은 부절한 이적이다. 특별한 구원 섭리가 진행될 때
특별한 이적이 많이 생긴다. 이적은 구원 계시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구원
집행의 방식이다. 최대 이적은 성육신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의 최대 이적은
만물을 회복함이다. 이적은 권능(duvnami§)라는 뜻이다.
6) 사건과 그 해석
창조시나 구원 집행시 말씀에 의해서 그 사건들이 계시의 방편으로
확립된다.

*Bavinck는 특별계시 수단을 둘로 나눈다.


1) 현현(manifestatio): 객관적 외부적 성격을 띤 특별계시. 하나님이
밖으로부터 진리로 온다. 하나님의 나타나심. 기적, 제비, 우림, 둠밈 등.
◈ 조직신학서론

2) 영감(inspiratio): 주관적 성격을 띠고 하나님이 안으로부터 인간


안에서 말씀. 꿈, 환상, 선견 등. 이 영감은 모든 신자들의 분깃인 내적
조명과는 다르다.

5. 특별계시의 특성

1) 구속계시이다.
타락 이후의 특별계시는 구속 계시이다. 전체적으로 구속 계시는 i)
타락 전의 인간의 상태와 ii) 타락과 iii) 구원의 약속, 성취, 완성을 포함한다.
구원의 완성, 즉 창조의 회복(재창조)에 있어서 특별 은혜가 그침으로
특별계시는 자연 질서에 통합된다. 이때 인간은 신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주보게 된다.
2) 역사적 계시이다.
특별계시는 원시 복음의 선포와 그 약속이 역사 가운데 성취됨을
드러낸다. 구약 계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었고, 새로운 시대에는
성취된 구원에 의한 은혜의 약속(의의 전가)을 받았으며, 이를 성령의
보증으로 확신한다(고후 1:22; 5:5; 엡 4:30).
특히 성경 신학에 있어서 계시는 역사적 제약성을 갖게 되는데,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는 새로운 약속과 성취의 도식으로 역사 가운데
진행된다. 율법의 약속이 성취되고 새로이 복음의 약속이 들어 왔다. 즉
이제 율법 가운데의 약속은 그리스도 가운데의 약속으로 대체된다.
계시를 관념으로만 보려고 하는 이성주의자들과 계시에서 역사적
사실을 제거해서 주관적 체험만을 강조하려는 슐라이엘마허 이후의
관념론자들에게 있어서는 계시의 역사성은 자리를 잃는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word)을 하나님의 말씀하심(speech)으로
이해한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심 곧 그와 같은 하나님의
행위이다(Pannenberg, 1.236).
판넨베르그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계시를 역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다루는데, 그는 부활의 종말론적 의미가 예기적으로
현존한다는(proleptically present) 관점에서 계시의 역사성을 말한다. 부활
사건이 계시로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은 미래에 있을 성도의 부활을 현재
예기함에 있다고 본다. “만약 종말에 일어날 이와 같은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예기적으로 현존한다면(proleptically present)
종말론적 가시성(eschatological visibility)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으로 돌려질
것이다”(1.249). “계시 사건의 정황 가운데 일어나는 신적으로 권위 있는
말씀의 기능은 계시와 역사 가운데 삼중적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131
◈ 조직신학서론

foretelling(미래에 될 것을 현재에 미리 말함), forthtelling(미래에 되어질 일을


중심으로 해서 현재를 논함), 그리고 report(사건을 듣는 사람에게
드러냄)으로 이루어진다(1.250).
판넨베르그는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기반해서 임박한 미래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the present impact of the
immanent future)을 계시의 역사성을 설명하는 중심관점으로 보았다. 즉
미래성(futurity)이 역사성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The future creates past and
present.”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부인되고 성경의
독자들의 미래로 나아가는 체험을 통한 계시에 대한 지식만이 강조된다.
그래서 계시는 미래 사건에 대한 예기적 판단의 현재적 의미의 리포트에
자리를 내준다. 철저한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지금 명확히 계시하신다. 그리고 종말에
완전히 계시하신다. 이것이 역사성이다.
◈ 조직신학서론

제 6장 율법과 복음

1. 율법
율법은 하나님의 뜻의 표현(the expression of the will of God)이다. 율법은
동시에 명령적(imperative)이며 직설적(indicative)이다. 율법은 “완전한 의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 지를 가르친다(what perfect
righteousness is and how it is to be kept)”(Inst. 1536. 1.4). 율법의 본질(natura)은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regula vivendi pie et iuste)이다.
율법의 계시는 삶의 규범을 좇은 경건한 삶과 전체 생명의 갱생에
관계된다. 율법은 본래 선한 것이었으나 인류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저주의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율법에는 항상 명령(praeceptum)과 약속(promissio)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timor
Dei)은 즉시 그리스도에게로 도망가게 된다(fugere). 이와 같은 율법의 신학적
작용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사람은 이제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서 살고자 한다. 이와 같은 율법의 규범적 용법은 그 본질에 부합한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교제(communio)하고
교통(communicatio)하는 사람마다 칭의와 성화의 단계를 거쳐 영화에 이른다.
이때 그리스도는 율법의 중보자(Mediator legis)로서 일하신다. 이런 관점에서
율법은 삶의 규범이자 살리는 규범이다(regula vivendi et vivificandi).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iustitia Dei)는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신 4:1; 5:29-33; 6:1-3; 8:1)는 선포에 잘 나타난다. 율법은 할
수 있는 것(quid possint homines)이 아니라 해야 할 것(quid debeant)을
계시한다. 아무도 율법의 의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중보자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다. 율법은 명령하신 분이 이루시는 분이심을
계시한다. 즉 율법은 언약을 전제한다; 언약의 율법(lex foederis)이다.

[칼빈의 기독론적 율법 이해]

1. Lex Dei Regula Vivendi: 율법의 규범적 본질(natura)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법은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규범과 모세법이


기반하고 있는 종교의 형식(forma religionis), 즉 아브라함의 씨앗들과 맺은
은혜 언약(foedus gratuitum)을 포함한다 (Inst 2.7.1, CO 2.252).22 십계명은

22 칼빈의 율법에 대한 정의(regula vivendi pie et recte)에 대해서, Confession of Faith


(1536), CO 9.694, 22.86; The Catechism of the Church of Geneva, CO 6.51-52; The Commentaries of
John Calvin, 46 vols., Calvin Translation Society Edition (Grand Rapids: Eerdmans, 1948-1950, 이후

133
◈ 조직신학서론

“경건과 의의 완전한 가르침”을 세상에 공포한 것이다.23


본래(originaliter) 율법은 선하고 완전한 것이었으나 범죄로 인하여
“우연히(accidentale) 죽음의 사자(ministram mortis)가 되었다.”24 죄가 세상에
들어 옴으로써 비록 lex vivendi로서 율법의 본질(natura)은 변한 것이 없으나
율법의 사역(officium)은 변형되어서 이제 규범적인 역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신학적인 역할까지 감당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칼빈은 율법의 규범적이고 신학적인
사역과용법에 대해서 균형 잡힌 입장을 견지한다. 그는 전체 율법을 “삶의
규범”으로서만 파악해서 신학적인 용법을 무시하는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반박한다 (Inst 2.5.7, CO 2.235). 칼빈은 그들이 사람들의 악한
욕망과 정욕을 억제하는 굴레로서 작용하는 “율법의 자연적인 용법(l’usage
naturel)”에만 집착해 있다고 비난한다.25
칼빈에 의하면 죄인들을 변화시켜 중생에 이르게 하는 율법의
신학적인 용법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목적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Inst. 1.15.1-8, CO 2.134-143). 비록 율법의
조건성(conditionality)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극복되었다고
하더라도, 율법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으로서 고유한 기능(lex vivendi)을
계속해서 감당한다.

CTS), Ex. 19:1-2 (1.313-316, CO 24.192). 이하 칼빈의 구약 주석은 이 판을 사용(vols.1-15).


그러나 신약 주석은 John Calvin, New Testament Commentaries, ed., D. W. Torrance and T. F.
Torrance (Grand Rapids: Eerdmans, 1960-1972)을 사용. 주석 표기는 전체적으로 Comm. 성경
장.절로 표기; “The Preface,” CTS 2/1.xvi, xvii (CO 24.5-6); Matt. 5:19 (1.181, CO 45.172-173); Rom.
7:11 (145, CO 49.126).
23 Comm. Ex. 19:1-2 (1.313, CO 24.192). 칼빈은 도덕법을 의식법이나 정치법과
구분한다. 그러나 그는 첫째 돌판에 특징적으로 규정된 “영적인 예배”에 대한 명령은
의식법으로서 경건한 삶의 규범을 보충하고, 둘째 돌판의 계명들과 관련된 정치법은 우리가
“선하고 흠결없는 삶의 규범”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칼빈은
도덕법을 의식법이나 정치법과 구분한다. 그러나 그는 첫째 돌판에 특징적으로 규정된
“영적인 예배”에 대한 명령은 의식법으로서 경건한 삶의 규범을 보충하고, 둘째 돌판의
계명들과 관련된 정치법은 우리가 “선하고 흠결없는 삶의 규범”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칼빈은 도덕법을 의식법이나 정치법과 구분한다. 그러나 그는
첫째 돌판에 특징적으로 규정된 “영적인 예배”에 대한 명령은 의식법으로서 경건한 삶의
규범을 보충하고, 둘째 돌판의 계명들과 관련된 정치법은 우리가 “선하고 흠결없는 삶의
규범”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The Preface,” CTS 2/1.xvi-xvii.
칼빈이 그의 에베소서 설교에서 말하듯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믿음(첫째 돌판)과
사랑(둘째 돌판)으로 살아 가는 기독교인의 삶의 요약이자 완성으로서 십계명은 삶의 길이
될 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형상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생명의 길이
된다. John Calvin, Sermons on the Epistle to the Ephesians, tr. Arthur Golding (London, 1577), rev. tr.
Leslie Rawlinson and S. M. Houghton (Edinburgh: Banner of Truth, 1973), Eph. 1:15 (84-87, CO
51.312-315). 이하 설교는 Serm. 성경 장.절로 표기.
24 Comm. Gen. 2:16 (126, CO 23.45); Gen. 3:8 (161, CO 23.65).
25 Sermons of M. John Calvin on the Epistles of S. Paule to Timothie and Titus, tr. L(aurence).
T(omson) (London: George Bishop, 1579), facsimile repr. (Edinburgh: Banner of Truth, 1983), I Tim. 1:7
(44b-45a, CO 53.47-48).
◈ 조직신학서론

비록 율법이 값없이 죄인들을 자녀 삼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만 온다고 가르치며 사람들이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게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일정한 조건하에서만 이루어
26
가는(sub conditione paciscitur) 고유한 기능을 계속한다.

이 인용문에서 칼빈은 “conditio”라는 단어를 선행의 공로(meritum)와


연관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약 가운데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율법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conditio”라는 단어는 삶의 규범(lex
vivendi)인 율법이 lex accusans로서 사람들에게 “경외감과 두려워 하는
마음(reverentia et timor)”을 일으켜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게 하는 신학적인
작용을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27
율법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quid possint hominess)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것(quid debeant)을 계시한다.28 1536년 기독교 강요에서 언급하듯이,
“율법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이다(in lege Dei non opus respiciendum, sed mandatum)”
(1.28, CO 1.46).29 율법은 “우리의 힘과 능력과 역량이 아니라 우리의 의무”를
규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맞추신 의가 아니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맞추어 주신 의(iustitia
accommodata)이다.30
율법은 사람들이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더불어 율법의 수여자의 “영원성, 능력, 지혜, 선, 진리, 의,
자비”를 계시한다 (1536 Inst. 1.1, CO 1.27). 율법의 두 측면—명령과 약속—은
율법이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계시한다는 사실에서
가장 현저하게 드러난다. 칼빈은 그의 첫 번째 <신앙교육서>
(Catechismus)에서 “하나님의 법에 주님의 영원한 의지라고 부르기에 지극히
합당한 모든 의를 드러내는 가장 완전한 법칙(perfectissima totius iustitiae
regula)이 주어진다”고 가르친다.31 그러므로 율법은 “진정한 의에 이르는

26 Comm. Ex. 19:1-2 (1.313, CO 24.192-193).


27 Comm. Ex. 19:1-2 (1.313-315, CO 24.192-194). 율법의 규범과 약속에 대해서, Comm.
Rom. 3:22 (73, CO 49.60); Inst. 2.5.10 (CO 2.237-238), 3.17.6 (CO 2.594-595).
28 참고. Comm. Matt. 5:31 (1.190, CO 45.180).
29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totam fere pietatis summam, et quidquid est in doctrina
salutis cognitu necessarium, complectens; omnibus pietatis studiosis lectu dignissimum opus, ac recens
editum, 1536, 1.28 (CO 1.46). 이는 다음 번역본을 참고한다.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36), tr. and annot. Ford Lewis Battles, rev. ed. (Grand Rapids: Eerdmans, 1986).
30 참고. Sermons of M. Iohn Calvin upon the Fifth Booke of Moses called Deuteronomeie, tr.
Arthur Golding (London: Henry Middleton, 1583), facsimile repr. (Edinburgh: Banner of Truth, 1993),
Deut. 28:1 (88-89, CO 28.353); Sermons of Maister Iohn Calvin upon the Booke of Job, tr. Arthur
Golding (London: George Bishop, 1574), facsimile repr. (Edinburgh: Banner of Truth, 1993), 10:16-17
(186a-187, CO 33.496-499); 23:1-7 (412a-416b, CO 34.331-344).

135
◈ 조직신학서론

예비 과정(tirocinium)”이 아니라 “의의 시작(initium)”이다.32 율법의 의는


하나님의 “고도한 의(iustice plus haute)”와는 구별된다. 율법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비밀스런 섭리를 계시하지는 않지만, 칭의와 성화를 통한 하나님의
이중적인 의를 지시한다.33 칭의와 관련해서, 율법의 의는 중보자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된 하나님의 영원한 의를 계시함으로써 믿음의 의에 사람들이
이르게끔 한다.34 성화와 관련해서, 율법의 의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와 계속적으로 교통함으로써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서
살아가야 하고 살아갈 수 있음을 계시한다.35

2. 율법의 사역과 용법

칼빈은 그의 작품들을 통하여서 종종 lex accusans와 lex vivendi로


표현되는 율법의 이중적인 사역에 대해서 언급한다.36 그러나 lex accusans를
lex vivendi의 결과물로 본다. 이러한 입장이 1559년 기독교 강요에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서 진정한 경건의 도(vera
pietatis ratio)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에 자신들이 무능함을 알게 됨으로써 극심한 심판의 공포 속에서
자신들이 비자발적으로(subactos), 그러나 불가피하게(invite), 중보자에게로
이끌려 감을 깨닫게 되었다” (Inst. 2:8:1, CO 2.266). Sermon de la justification라
불리는 창세기 설교의 한 부분에서 칼빈은 율법의 정죄적인(punitive) 용법을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경건한 삶의 규범을 가르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공표하시는 것으로 파악한다.
37

율법은 항상 lex vivendi로서 작용한다. 심지어 lex accusans로서 작용할


때에도 lex vivendi의 기능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율법은 항상
교육적인(pedagogical) 역할을 감당한다.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의 길”을 가르친다 (Inst. 1.6.2, CO 2.54). 율법을 통하여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고 (Inst. 1.9.3, CO 2.71),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으려고 노력한다 (Inst. 2.12.4, CO 2.342).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니는

31 Catechism or Institution of the Christian Religion, tr. Ford Lewis Battles (from Latin), in I.
John Hesselink, Calvin’s First Catechism: A Commentary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97,
이후 First Catechism), 11 (CO 5.327). 1537년 불어판의 영역은 Instruction in Faith, tr. and ed. Paul
T. Fuhrmann (Philadelphia: Westminster, 1949).
32 Comm. Matt. 5:20 (1.183, CO 45.174).
33 Serm. Job 10:16-17 (186a-187, CO 33.496-499).
34 Comm. Rom. 10:4-5 (222-224, CO 49.196-198).
35 Serm. Deut. 26:25 (300b-302b, CO 26.491-495).
36 John Calvin: Treatises against the Anabaptists and against the Libertines, tr. and ed.
Benjamin W. Farley (Grand Rapids: Baker, 1982), 271-272 (CO 7.206-207); 1539 Inst. 2.83, CO 1.362,
Inst. 2.5.8, CO 2.235-236; Serm. I Tim. 1:5 (44a, CO 53.47); I Tim. 1:8 (51a, CO 53.53-54); The
Catechism of the Church of Geneva in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tr., intro., notes by J. K. S. Reid,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 22 (Philadelphia: Westminster, 1954), 118 (CO 6.79-82).
37 Serm Gen. 15:6 (SC 11/2.756-758): “Vray est que la Loy nous monstre bien que c’est de
justement vivre, et d’acquerir justice si nous en estions capables, comme nous traitterons plus au long ici
apres” (757).
◈ 조직신학서론

고유한 학교(peculiarem scholam)” (Inst. 1.6.4, CO 2.55)이며 “그리스도는 영혼의


교장(interior magister)” (Inst. 3.1.4, CO 2.397)이시다.38
그러므로 칼빈이 신명기 5장 2절 주석에서 말하듯이, 율법의
가르침(paedagogia)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으로 받아야 하며, 가장 높은
영광을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언약에 올려 드려야 한다.”39 한편 동일한
구절에 대한 루터의 견해는 칼빈의 견해와 판이하게 다르다. 그는 호렙산
언약을 율법의 언약으로 보고, “새 언약(은혜 언약)은 우리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자비롭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고 있으나, 옛
언약(율법언약)은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우리의 행위에도 동시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세는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율례와 감당할 수 있는
심판의 범위를 넘어서는 약속을 하지는 않는다.”40 칼빈이 은혜 언약적인
관점에서 율법의 규범적인 본질을 이해하고 이로부터 율법의 은혜를
강조한다면, 루터는 율법의 의를 행위의 의와 동일시 하면서 율법의 본질(the
nature of the law)을 기본적으로 죄에 대한 비난과 저주로서 작용하는
자연법의 본질(the nature of natural law)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루터와 칼빈이 모두 바울의 신학에 충실했지만 그들의 차이는
“암시적(暗示的, connotative)”이라기 보다 “지시적(指示的, denotive)”이며,
“의미론적(semantic)”이라기 보다 “신학적(theological)”이다.41
율법에는 인간의 죄성과 사악함을 폭로하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율법은 율법의 본래의 본질을 회복하는 적극적인 목적으로
사용된다. 마치 복음이 우연히(per accidens) 죽음의 사건(occasio)이 되기도
하나 그것이 죽음의 이유(causa)나 실체(materia)가 아니듯이, 율법도 그렇다.42
비록 죽음이 “율법을 틈 타서(occasione) 죄에 의해서 들어 오지만” 율법은
“죽음의 실체(mortis materiam)”가 아니다.43 “올바르게 살아 가는 삶의 길(via
recte vivendi)”로서 율법의 원래의 본질은 거룩하고 선하며 정직한 것이기
때문에 lex accusans로서의 사역은 우연하고(accidental) 우발적인(occasional)
것이다.44

38 칼빈의 율법의 제 일 용법을 “의의 교사”의 성격으로 파악함에 대해서, Mary


Lane Potter, “The ‘Whole Office of the Law’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Journal of Law and
Religion 3/1 (1985), 118-123.
39 Comm. Deut. 5:1-3 (1.340-341, CO 24.210).
40 LW 9.63. 루터란 신학자 월터 부만(Walter R. Bouman)에 의하면, 루터는 십계명을
좁은 의미로 이해해서 “부족법”과 같은 것으로 본다; 십계명은 “유대인의
작센법(Sachsenspiegel)”과 같아서 그곳에는 “보편적인 자연법”에 대한 형식적인 계시는
있으나 언약의 약속은 없으며, 율법의 약속은 그가 율법에 계시된 복음이라고 이해하는
“토라”에만 있다고 본다. “The Concept of the ‘Law’ in the Lutheran Tradition,” Word & World 3/4
(1983), 416-417, 420-422.
41 이곳에서 개진된 나의 견해는 Dowey와 Hesselink와는 상이하다. Dowey, “Law in
Luther and Calvin,” 148, 153; Hesselink, Calvin’s Concept of the Law, 218, and “Luther and Calvin on
Law and Gospel in Their Galatians Commentaries,” Reformed Review 37(1984), 69-82.
42 Comm. II Cor. 3:6 (42, CO 50.40); II Cor. 3:7 (44, CO 50.41).

43 Comm. Rom. 7:13 (146, CO 49.127). 참고. Comm. II Cor. 3:7 ff. (43-45, CO 50.41-43).
44 Comm. Rom. 7:9-12, (143-145, CO 49.125-127).

137
◈ 조직신학서론

따라서 율법은 중생한 사람들을 위한 용법(usus in renatis)으로 더욱


본질적으로 신학적 작용을 한다.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율법은 가르치는
사역(doctrina)과 권고(勸告)하는 사역(exhortatio)을 감당한다. 가르치는
사역으로서 율법은 거듭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규율을 알려서 그들이
“주님의 의지(Domini voluntas)를 좀 더 순수하게 알아 가는 날마다의 진보가
있도록 하는” 역할을 계속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의지를
알아 가고 “그 의지에 순응하고 적응해 가는(componat et accommodet)” 과정을
말한다. 이것은 로마서 7장 21-23절 주석에서 칼빈이 “하나님의 법”과
“마음의 법”이라고 정의한 것에 부합한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삶을
바르게 형성(形成)시켜 가는 의의 규범”이며, “마음의 법”은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려고 준비하는 것” 곧 “하나님의 법에
순응하는 것”이다.45
권고의 사역은 지식적(noetic) 교훈을 주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것의
작용은 오히려 의지적(volitional)이다. 율법은 “성도들이 그것을 수시로
묵상함으로써 순종에 이르게끔 경성하게 하고(excitetur) 그 안에 더욱
굳건하게 서게 하며(roboretur) 배도(背道)한 반역의 길로부터 돌이키게
한다(retrahatur).” 율법의 명령(praeceptum)은 은혜의 약속(promissio)과 함께
주신 것이라는 것을 성령의 감화에 의해서 깨닫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의지에 맞추어서 자신들도 살아가고자 결단한다.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율법이 계시하는 약속은 성도들이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중보자 그리스도가 여전히 활동하신다는 것이다(Inst. 2.7.12, CO 2.261-262).46
아래에 언급하는 바와 같이 칼빈에게 있어서 율법의 권고는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보에 의해서 우리에게 작용한다.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거듭난 사람들은 율법을 완성한다고 이해하는


해석자들은 바울이 의미하는 바와는 전혀 동 떨어진 잘못된 견해를
퍼뜨리는 사람들이다. 세상에 머물고 있는 한, 성도들은 율법의 의(iustificatio
legis)가 그들 속에 가득해서 완성될 만큼의 진보를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죄사함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의 공로가 우리에게 나누어 질 때 율법의 의가 충족되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우리가 의롭다 칭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함(perfectio)이 우리의 육체에 나타났는데, 이는 이런 엄격한
요구가 더 이상 우리를 저주하는 힘을 가지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의 띠로(spiritus sui vinculo) 자신에게 묶인 사람에게만
자신의 의(iustitiam)를 나누어 주신다. 이와 같이 바울이 중생에 대해서 다시

45 Comm. Rom. 7:21 (152, CO 49. 133): “Legem Dei, quae sola proprie sic nuncupatur, quia
est iustitiae regula, qua vita nostra recte formatur. Huic coniungit legem mentis, sic appellans
propensionem fidelis animae ad obedientiam divinae legis: quia est quaedam nostri cum lege Dei
conformatio.”
46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칼빈은 신자를 위한 율법의 용법을 “eos officii sui
admonendo ad sanctitatis et innocentiae studium excitet . . . docere et exhortari et stimulare ad bonum”
라고 표현한다. 1536 Inst. 6.2 (CO 1.196); Inst. 3.19.2 (CO 2.614).
◈ 조직신학서론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죄의 사자(使者, peccati minister)로 여겨져서는


47
안되기 때문이다.

3. Lex Vivendi로부터 Lex Vivificandi에로

고린도후서 3장 17절 주석에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영감을


받는(inspiretur) 한에 있어서 율법은 살아 있으며 살리는(vivam and vivificam)
법이 될 것이다”라고 칼빈은 말한다. 특히 그리스도를 “율법의 영(spiritum
eius [legis])”이며 “율법의 생명(legis vita)”이라고 지적한다.

영이 모든 인간의 주요한 기능이 발생하는 근원이듯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율법에 생명을 주시고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의 본질이 아니라 그의 은혜와 관련해서
이른바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영이 된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 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어서(vivifica spiritus sui
48
virtute) 우리에게 생기를 주기 때문이다.
본 주석에서 그리스도를 율법의 생명이며 영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칼빈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영의 감화로 말미암아 율법은 생의 규범(regula
vitae)이자 생명을 살리는 규범(regula vivificandi)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인상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생명을 살리는 율법의 기능은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혹은 완성, finem)”으로서 율법의 굴레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켰으며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의 “유일한
목표(scopum)”가 된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설명된다. 본질상 삶의 규범(regula
49

vivendi)인 율법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사람을 살리는 규범


(regula vivificandi)으로서 작용한다. 생명을 살리는 규범적인 본질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왜 그가 제 삼 용법을 “중요하며(praecipuus)” “율법의 고유한
목적에 더욱 가까운(in proprium legis finem propius)” 용법이라고 불렀는지(Inst.
2.7.12, CO 2.261), 그리고 어떻게 그가 동시대 종교개혁자들보다 더욱
본질적·신학적 율법 이해에 이르렀으며 이로써 역동적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개혁주의 율법관]

칼빈은 그리스도는 율법의 중보자(Christus Mediator legis)라는 관점에서 율법의


역동성을 논한다. 거룩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은 신학적 기능과 규범적
기능을 감당하는데 이는 율법의 본질과 합한다고 본다. 율법은 먼저 죄를
깨달음으로 그리스도를 찾게 한다. 율법은 또한 형벌의 엄위로움으로 사회를

Comm. Rom. 8:4 (160, CO 49.140). 여기서 칼빈은 iustitia와 iustificatio를 구별하지
47

않고 사용하고 있다.
48 Comm. II Cor. 3:17 (48-49, CO 50.45-46).
49 Comm. II Cor. 3:16 (48, CO 50.45).

139
◈ 조직신학서론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율법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삶의 규범이


되어서 삶의 길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지적)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한다(의지적).
그러므로 율법은 그리스도의 중보로 인한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규범이자(regula vivendi)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는 규범으로(regula vivificandi)
작용한다. 칼빈의 율법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는 정통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기본적으로 계승되어 왔다. 차알스 홧지(Charles Hodge)는 그의 조직신학 책에서
율법을 상세하게 다룸으로써 프린스턴 구학파와 이를 계승한 웨스터민스터 학파의
50
율법관의 기초를 놓았다. 칼빈과는 달리 홧지는 율법을 기독론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고 구원론의 한 부분으로서 성화를 다룬 후 은혜의 방편인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다루기 전에 논의한다(259-456). 홧지는 신·구약을 통해서 율법은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the manifestation of the will of God)”으로서 나타나며 성경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요구하는 “의무에 대한 전체적인 규율(the whole rule of duty)”을
계시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262, 265-266). 홧지는 종교(religion)와 도덕(morality)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은 종교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연합(the personal union with
God)”이며 도덕성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의 목표인 “하나님의 형상에
순응함(conformity to the divine image)”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260-261). 홧지는 모든
인간의 도덕적인 규율은 그 자신 가운데서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모두
수립되어 있기 때문에 율법은 율법의 수여자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홧지는 하나님의 본성에 고유한
법인 사랑과 모든 실제들의 본질을 제정한 하나님의 법은 영원하며 이를 규정한
것이 십계명이라고 본다(259, 267-268). “인간의 의무에 대한 완전한 규율(a perfect rule
of duty)”인 율법은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사랑의 계시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
가운데 그 영적인 진리가 내포되어서 흐르고 있으므로 율법의 가르침과 율법을
좇는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비밀의 계시인 복음 가운데서 여전히 유효하며
완성된다고 홧지는 주장한다(271).
51
홧지의 입장은 존 머리(John Murray)의 신학에 깊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머리는 도덕법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본성의 반영이며 표현(the reflection and
expression of the moral nature of God)”이라고 정의한다. 도덕법에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함이 삶과 행위의 규율로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196). “우리는 율법에
복종함으로써(by obedience to the law)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라 복종에 이르도록(unto
it)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머리는 성령의 중생케하는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이 삶의 규범으로서 성도들에게도 계속적으로 적용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198-199). 총체적으로 파악된 기독교인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50 Systematic Theology, vol. 3, Soteriology, repr. (Grand Rapids: Eerdmans, 1995).


51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vol. 1, The Claims of Truth (Edinburgh: Banner of
Truth, 1976).
◈ 조직신학서론

삶의 의무가 완전하고 충족하며 무오하게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음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머리는 복음이 가르치는 “믿음의 법칙(the rule of
faith)”은 율법의 가르침을 좇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the new life in
Christ)”에 가장 핵심적으로 나타남을 강조한다(1.201-204).
루이스 뻘콥(Louis Berkhof)는 율법의 세 가지 용법을 전통적인 구분법에
따라서 usus politicus, usus elenchticus, usus normativus로 나누고 율법의 규범적 용법을
강조한다. 그는 성도들을 위한 율법의 제 삼 용법을 말하지만 거듭난 사람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측면에서 죄에 대한 인식을 증가시키는 작용만을 한다고 보는
52
루터란들의 입장을 비판한다.
율법의 규범성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반해서 설명하는 칼빈의 입장은
남부 장로교 신학의 거두 Robert L. Dabney에게서도 발견된다. 답니는 율법이
하나님의 뜻의 계시라면 이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라고 지적하면서 창조자에
복종하는 것이 피조물의 본성이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부정은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부정이 된다고 본다 (351-352). 그는 율법의 규범성을 강조하면서 그 작용을
더욱 폭 넓게 다섯 가지로 고찰한다. 1) 율법은 하나님의 성격의 권위 있는
표현이다. 2) 율법은 몽학선생으로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 3) 율법은
믿는 신자들의 성화에 있어서 삶의 규범이 된다. 4) 율법은 교회에서 죄가 관영하는
것을 억제한다. 5)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 날 악인들을 정죄하는
준비를 하신다. Lectures in Systematic Theology, repr. (Grand Rapids: Zondervan, 1980),
353-354.
이와 같은 개혁주의적 율법 이해는 율법의 본질을 lex accusans로 보아서 그
용법을 소극적으로 다루는 루터란의 이해와 구별됨은 물론 gospel- law-gospel 구조로
구원과정을 이해해서 율법을 복음에 함몰시키는 바르트(Karl Barth)의 입장과도
현격히 다르다. 오늘날 널리 읽히는 루터란의 조직신학 책에서 Hans Schwarz는
자유케하는 말씀으로서의 복음과 심판과 저주의 도구로서의 율법을 엄격하게
나누고 칭의 과정에서 율법이 어떻게 신학적인 작용을 감당하는지에 주된 관심을
쏟는다. 비록 저자는 성도를 위한 율법의 제 삼 용법을 인정은 하지만 이를 성도의
계속적인 회개의 범주에서만 이해한다. 그리하여 율법은 성도들의 삶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님은 사실이지만 다만 잘못된 것을 고쳐 주는 데 머문다는(not perish,
53
but amend) 소극적 고찰을 한다.
독일 개혁주의 신학자 Otto Weber는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아서 율법의
가르침은 그것이 나의 인격과 배치됨을 계시함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나와 배치됨을
가르치는데 이는 말씀이 나 자신에게 실존적으로 부딪힘으로써 그러하다고

52 Systematic Theology, New Edition containing the full text of Systematic Theology and the
original Introductory Volume to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6), 615.
53 “The Word” in Christian Dogmatics, ed. Carl E. Braaten and W. Jenson, vol. 2
(Philadelphia: Fortress, 1984), 269-279.

141
◈ 조직신학서론

주장한다. 율법 가운데서 하나님은 전체적으로 사람과 만나게 되는데 이 때


하나님의 “예”는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는 “아니오”가 된다. 이것이 율법을 통한
죄의 인식이며 이로써 회개에 이르게 된다. 율법을 통한 회개는 죽음(mortificatio)과
살아남(vivificatio)을 동시에 인식하게 함으로써 죽음의 죽음으로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의 계시가 된다. 이와 같은 이해는 근본적으로
멜랑흐톤을 좇은 것으로서 율법의 본질을 lex accusans로 보는 루터란 관점을
반영한다. 베버는 그리스도를 통한 내 속에서(through Christ in me) 율법의 역사를
이와 같이 소극적인 측면에서 파악하고 율법을 인간의 타락의 부분에서 다루고
54
있다.

2. 복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은혜의 엄숙한 선포이다.”


복음의 실체는 “그리스도가 중보자의 직을 수행하는 것,” 즉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에 나타난 구원의 총화”이다. 복음은 오직 그리고 전적
은혜(gratia sola et tota)로 말미암는 죄 용서와 의의 전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 중생, 이신칭의의 원리, 이중 전가의 교리 등을
포괄한다.

“복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eujvaggevlion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은혜의 즐겁고 기쁜 소식으로서 우리를 가르쳐서 세상과
그것에 속한 헛된 부와 기쁨을 멸시하고, 마음을 다하여서 바라고,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비교할 수 없는 복이 되는 은총을 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이라는 말로 심지어 율법과 선지자서들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그저
주시는 모든 약속들까지 아우른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께서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푸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선포하실 때마다, 동시에
그리스도를 드러내신다.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은 그 분께서 빛날 때마다
기쁨의 광선을 비추심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값없이 구원 받음에 대한
믿음에 관계되는 한, 교부들은 우리와 같은 복음을 공유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복음이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처음 선포되었다고 말하고는
한다. 우리가 이러한 표현에 붙들리도록 하자. 내가 제시한 복음의 정의를
우리가 견지하도록 하자.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은혜의 엄숙한
선포이다(solenne de patefacta in Christo gratia praeconium). 이런 이유로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능력(Dei potentia in salutem omni

54 Foundations of Dogmatics, translated and annotated by Darrell L. Guder, vol. 1 (Grand


Rapids: Eerdmans, 1981), 587-592.
◈ 조직신학서론

credenti)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절(使節)의 직분(legatio)으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 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자신과 화목케 하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부성적인
사랑의 보증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주제이심이 마땅하다.
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나타나셨고, 죽으셨고,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심을 받으셨고, 마침내 하늘로 취해지셨다고 전하는 역사들이
55
복음이라는 이름을 특별히 받게 되었다.”
a) “계속되는 세대들을 잇는 가운데 구약의 선조들에게도 약속되었던
계시된 구원에 대한 증언.”
b) “타락한 세상을 새롭게 하고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육체 가운데 계시된 아들의 현재에 대한 엄숙한
선포(solennis promulgation de filio Dei in carne exhibito).”
c)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직분의 수행(mediatoris officio).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나심, 죽으심, 그리고 부활은 그것들 자체 우리 구원의 전체
개요(totam salutis nostrae summan)를 포함하고 그 만큼 그것의 실체가 되기
56
때문이다.”

3. 율법과 복음

구약시대에 율법은 그리스도를 예표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재를 동시에 나타낸다. 특히 의식법에 이런 특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구약시대에는 Christ in the law가 계시된다.

율법은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율법의 의(the righteousness of the law) 뿐만 아니라, 중보자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러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는 약속을 계시한다. 즉 율법은
명령과 약속을 동시에 내포한다. 율법은 언약의 율법이다.

인식론적 차원에서 구약 시대의 율법은 오실 그리스도를 그림자로서


계시한다. 그리스도의 인격의 실체는 존재하나 아직 그림자로 계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칼빈은 특히 현재(顯在, praesentia)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성육신(Deus manifestatus in carne)에 의해서 이 실체가 드러난다. 이를

55Comm. John. “The Theme of the Gospel of John,” 5 (CO 47. “Argementum,” VI-VII).
56 Comm. The Harmony of the Gospels, “The Theme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xi (CO 45.
“Argumentum,” 1.2).

143
◈ 조직신학서론

umbra-substantia analogia라고 부른다. 한편 구속사적 측면에서 구약의 약속은


신약시대에 성취된다. 이를 promissio-perfectio analogia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율법의 실체(혹은 진리, substantia, veritas)의 드러남이며,
율법의 요구를 이룸으로 하나님의 의(iustitia Dei)를 완성함이다. 이로써, 이제
the law in Christ가 계시된다.

율법은 복음에 이르는 몽학선생(paedagogus)의 역할을 한다(갈 4:4-6).


율법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은혜(Christ in the law)로 구원에 이른 자는 이제
율법에 매이지 않고 기독교인의 자유(Christian freedom)를 누린다. 이제
의롭다 된 자는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율법(the law in Christ)으로 생활규범을
삼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간다.

4. 율법과 복음: 이신칭의의 원리


1) 로마 카톨릭의 신인합력설(synergism)

로마 교회는 율법의 준수 곧 선행으로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믿음(fides salvifica)에 이른다(formed faith). Facientibus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에 입각해서 두 가지의 공로를 논한다. i) meritum de
congruo(congruent merit): 칭의를 받기 위해서 회개하고 믿는 공로에 따라서
하나님이 자유로운 의지로 은혜를 주심. ii) meritum de condigno(condign merit):
이미 칭의를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정한 의지(ordained will)에 따라 은혜를
주는 것.

2) ordo salutis

루터는 율법의 의와 그리스도의 의를 엄밀히 구별하고 율법을


정죄하는 법(lex accusans)으로서 부정적으로 파악한다. 그는 하나님의 고유한
일(opus proprium)은 본래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는 것이었는데 인류
구속을 위해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육신 가운데 오셔서 시간에
구속(拘束)되며 궁극적으로는 죄의 결과인 죽음에 복종하는 생소한 사역(opus
alienum)을 이루셨다고 설파한다. 이를 신학자들은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이라고 부른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있어서 율법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깨달아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루터는 오직
율법의 정죄적 기능에 입각한 신학적 용법과 사회보호적 용법만을 말했다.
한편 루터를 계승한 멜랑흐톤은 율법이 성도들에게도 작용한다는
소위 율법의 제 3용법을 말했으나 그 역시 율법은 항상 정죄한다(lex semper
◈ 조직신학서론

accusat, Augsburg Confession)는 원칙에 입각해서 이를 주장했다. 멜랑흐톤은


회개를 법적 회개(poenitentia legalis)와 복음적 회개(poenitentia evangelica)로
나누고 율법의 정죄적 작용으로 인한 회개를 믿음에 의한 회개에 선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성도들의 계속적 회개를 위해서 율법이
작용한다는 측면에서만 성도들을 위한 율법의 용법을 주장한다. 율법-복음의
엄밀한 구원서정은 이와 같은 루터란의 이해에 기반한다.

3) 율법의 세 가지 용법(triplex usus legis)

i) 신학적 용법(usus theologicus, paedagogicus)


ii) 정치적 용법(usus politicus)
iii) 교훈적 용법(usus didacticus, usus in renatis): 주요하고 본래적인 용법

4) 구속사(Historia Salutis)

율법의 실체와 기능은 기독론적 관점에서(율법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구속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그림자(umbra)를 바라봄으로써 구원에 이르렀다.
신약시대에는 율법의 실체이신 육신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Deus
manifestatus in carne)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른다. 구원서정적
율법-복음에 고착되지 아니하고 중보자 그리스도와 율법의 역동적인 관계에
기반해서 Christ in the law와 the law in Christ를 구속사적으로 파악해서 율법과
복음(혹은 구약과 신약)의 실체적 일치성(unitas)와 연속성(continuitas)을
umbra-substantia analogia와 promissio-perfectio analogia로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구약시대에 율법은 구원의 과정에 작용하나, 신약시대에


율법은 구원 받은 자의 생활 규범으로서 즉 그리스도의 법으로서
작용한다(cf. 갈 6:2). 이때 기독교인은 자유를 누리는 가운데 율법을 지킨다.
i) 율법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he bondage of the law)
ii)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자유(free obedience to the will
of God revealed in the law—freedom to serve God)
iii) 아디아포라의 사용에 있어서의 자유(freedom in the use of adiaphora)
(cf. 고전 8:1-13; 10:23-33; 롬 14:1-15:2)

145
◈ 조직신학서론

제 7장 자연과 은혜
은혜는 죄에서 구원하고 치료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지 자연의
앙양(elevatio)과 완성(perfectio)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다(롬 5:20b: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1) 로마 카톨릭

토마스 아퀴나스가 계시를 이성으로 얻은 지식에 특별한 신비한


지식이 덧붙여진 것으로 이해한 것과 같이, 그리하여 자연을 계시의
서론이라고 본 것과 같이, 은혜는 고유한 존재로 있는 자연을 보충하고,
완성하고, 앙양(昻揚)하며, 더 높은 상태로 인양(引揚)한다. 그리하여 은혜는
자연을 피조 상태를 넘어 신적 존재에 까지 동참하게 한다. “은혜는 자연을
찢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고
아퀴나스는 말한다.
로마 카톨릭에 있어서 은혜는 자연을 보충하고 완성하기 위해서
덧붙여진 추가적 은사(donum superadditum)이다. 처음 창조된 인간의 본성이
완전해지는 것은 아직 불완전하고 저급하게 남아 있는 본래적 자연적
존재에 하나님의 은혜—초자연적인 은혜(gratia supernaturalis)—가 덧붙여 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원시의(iustitia originalis)라고 부른다.
로마 카톨릭은 루터와 칼빈 등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칭의를 “죄를
외부적으로 전가하지 않는 것”으로만 보고 “영혼이 신성한 것이 되는
내부적인 변화”는 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은혜는 영혼에 덧붙여진
적극적인 실제”—“피조계의 인과관계로는 산출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자질”이라고 본다. 은혜는 “하나님에게 속한 고유한 것을 나누어 갖는
것”으로 이해되며 “신적인 본성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은혜받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따라서 은혜는 “신적인 삶 자체의 교통” “하나님 자신과
같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무엇”이라고 설명한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신의 신성에
동참시키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셨고 사람이 되심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들과 같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카톨릭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원시의를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타락 전 인류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타락 이후
베푸시는 은혜를 모두 자연적 존재에 초자연적인 은혜를 덧붙인 것으로서
이해한다. 그들이 말하는 거룩하게 하는 은혜(sanctifying grace)는 이와 같은
은혜를 말한다.
◈ 조직신학서론

i) 초자연적인 은혜는 자연적인 은혜에 덧붙여진 것이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신적인 속성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지식과 의지에 관한 우리의
영적인 능력들은 우리의 영혼 가운데서 하나님과 닮은 것을 세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유사함을 넘고, 초월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이 되도록 하는
전체적으로 초자연적인 자질을 부여한다.”
ii) 그러므로 계시의 통보 혹은 분여가 있을 뿐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존재의 통보, 분여가 일어난다. 은혜의 역사는 자연의
회복이 아니라 보충과 앙양이며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나누게끔
하는 영혼에 주입된(infused) 적극적인 실제(reality)”이기 때문에 “이미 영광의
시작이다.”
iii) 이미 존재의 통보를 통하여 시작된 “영광”의 상태가 최후로
완성된 실제인 “지복직관(至福直觀, the Beatific Vision)”의 상태로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서 신화(deificatio)될 때이다. “하늘에서 복을 받아서 지복직관의
상태로 오르면 그들은 신적인 삶 자체를 받는다. 그때 신적인 삶을
소유함으로써 지복직관의 충만함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은 심지어 현세적인
삶 가운데서도 자라고 증가한다. 초자연적인 지식과 하나님의 사랑이 강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이때 “특별한 빛(lumen speciale), 영광의 빛(lumen
gloriae)”을 받아 피조물의 지성적 부분이 신화되어 하나님을 직관하게 될 때
하나님의 본질을 본다(visio Dei essentialis).

2) 칼 바르트
이미 보았듯이, 바르트에 있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됨은
객관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준비된 진리를 성령을 통하여서 믿음을 갖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예한 자가 주관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이런
만남은 마치 카톨릭에 있어서 존재가 앙양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계시와 성육신을 통한 신인 연합(unio Dei et hominis)을
통한 신의 존재의 동참을 은혜로 봄은 계시를 그 자체(in se)로 보지 않고
우리를 위한 것(ad nobis 혹은 pro nobis)으로 보는 데서 오는 실존적 철학의
잔재를 보여 준다.

3) 개혁신학
원시의는 창조와 함께 주어지는 것으로 추가적 은사가 아니라 자연적
은사(donum naturale)이다. 은혜는 자연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지 새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새 창조(creatio nova)가 아니라 재
창조(re-creatio)가 구속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어 영화(glorificatio)되어도

147
◈ 조직신학서론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영화는 피조물의 상태로 하나님을


마주봄이다.
◈ 조직신학서론

제 8장 계시의 수납과 성령
은혜의 선물로 믿음을 갖게 된 중생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cognitio), 그 지식을 인정하며(assensus), 확신(fiducia)에 이르게
된다. 중생한 사람만이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서(testimonium Spiritus Sanctus
internum)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성령의 감화와 조명으로 진리로 받게
된다.
기록된 특별계시를 통상 매개된 계시(revelatio specialis mediata)라고
하는데 이는 성령의 역사로만 수납된다. 이성(ratio)이 신화되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수납한 계시를 통해서 얻게 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이성을 바른 자리에 세운다.

149
◈ 조직신학서론

제 9장 계시의 부정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이기 때문에 계시자의 존재, 계시물,
계시행위를 계시자 스스로 드러낸다.
1) 계시주로서의 하나님 부인
계시자로서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은 계시를 부정한다. 만물의 존재(파르메니데스)와
운동(헤라클레이토스)이 영원 전부터 창조됨이 없이 스스로 있었다고
주장하는 철학적 사변들이나, 인격적 존재로서의 신을 부인하고 세계와 신을
일치시킴으로써 유출은 있으나 창조가 없고 드러남은 있으나 계시가 없다고
보는 범신론자들은 계시를 부인한다.
2) 계시물 부인
계시의 명료성을 부인하거나(플라톤), 자연계시와(이신론),
내적으로(혹은 자연적으로) 이해된 계시만을(슐라이엘마허 등의 내재론자들)
주장하는 자들은 특별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편 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의 모든 계시를 부인한다.
3) 계시 행위 부인
한편 계시주로서 하나님, 계시물로서 그의 사역, 속성의 드러남을
인정하기는 하나 아예 이런 부분을 불가지한 영역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하심을 믿지 않는다. 영국의 로크와 흄으로 대변되는
경험론자들은 모든 지식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고 이
감각지각(perception)을 모아서 지식을 얻는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하심을 부인함으로써 계시를 믿지 않게 된다. 특히 특별계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한편 칸트는 현상세계와 예지계를 나누어서 현상세계는
감각기관에 의해서 들어온 표상들이 오성의 범주의 분류에 의해서 지식이
된다고 보았지만, 시공을 초월한 예지계는 알 수 없고 신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다만 종교를 실천이성, 즉 도덕적 영역에서 다룬다.
비트겐슈타인은 계시는 언어의 한계 밖에 있다고 본다. “형이상학적 주제에
관하여 배우는 모든 학생들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시도한다.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주제는 ‘나의 세계’의 한계로서,
그 대상과 관계된 것으로서 자체를 보여 준다.”
◈ 조직신학서론

제 3편 성경론

제 1장 성경(Scriptura Sacra)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12신조 제 1조, 웨스터민스터 신도게요서(the Confession of Faith), 1.2).

1) 성경은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the Word of God written)


* 하나님은 자기의 계시가 보존되고 전파되어 인류를 구원하고
교회를 견고하게 설립하기 위하여 기뻐하심으로(비필연적 계시로) 문자로
기록되게 하셨다.
* 성경의 권위는 성경의 자자이신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에 오직
의거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수납되어야 한다.
*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감동(inspiration)”으로 된 것이다.
*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과 계시와는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 즉 성경이 계시 자체이다.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이고 완결된
계시이다.

2)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 교회의 증거는 성경의 완전성을 변론한다.
* 그러나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감화와 확신(our full persuasion and assurance)”은 우리의 마음에서 말씀으로써
또는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로 말미암는다.
* 성경 해석의 정확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 그러므로 정확 무오한 진리에 대한 최고의 심판주는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다.
* 하나님의 말씀 속에 계시된 구원에 관한 진리를 받는 데에는
“성령의 내적 조명(the inner illumination)”이 필요하다.
3)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다.
* 성경은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과 그의 뜻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궁극적으로, 완전하게 드러내 준다.
* 유식자든 무식자든 “통상한 방법(a due use of the ordinary means)”을
사용하면 구원의 진리에 충만하게 이를 수 있다.

151
◈ 조직신학서론

* 모든 종교상의 논쟁점에 있어서 교회는 궁극적으로 신약과 구약에


호소하게 된다.
*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inspiration)으로 된 것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정확하고 유일한 신앙과 생활의 규범(fidei et vitae norma ad salutem)이다.
◈ 조직신학서론

제 2장 특별계시와 기록의 필요성


1. 특별계시

1) 직접적 특별계시(revelatio specialis immediata): 이는 언어로 기록되지


않은 특별계시라는 뜻이다. 계시가 기록되기 전에 계시 수납자들이 전달받고
해석해서 선포한 특별계시와 재해석되어 복원된 일반계시를 의미한다.
“성경은 계시 자체가 아니라 계시가 알려질 수 있는 묘사, 기록이다.”
“성경은 선행하는 계시와는 구별되나 그 계시와 분리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적이며, 우연적이며, 자의적이며, 모순된 계시의 부가물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계시의 구성물이다. 그것은 계시의 결론과 완성이요, 계시의 모퉁
돌(cornerstone)과 머릿돌(capstone)이다” (바빙크).
특별계시는 모두 기록된 것은 아니다. 모세의 기록 전에도
특별계시는 있었다. 아모스는 묵시 받은 말씀을 간추려 기록했다(암 1:1).
예수님의 행적도 모두 기록에 남겨진 것이 아니다(요 20:30-31; 21:35).
계시록의 어떤 부분은 기록되는 순간 그 계시가 알려진다(예컨데 1:11. “. . .
너 보는 것을 택에 써서. . . .”).

2) 경(scriptura)으로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은 구약시대


rb;D,; 신약시대에는 lovgo§, rJh'ma로 번역된다.
*동적 말씀(the active word): 말씀된 능력의 말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창 1:3; 히 11:3; 시 33:6). 말씀으로 예수의 이적적 탄생이 가능케 됨(눅
1:37).
* 계시로서의 말씀: 말씀하심으로 선지자들을 부르심(삼상 3:7; 렘 1:2,
4). 역사에 성취될 일들을 계시하심(암 4:1; 5:1). 말씀을 통하여(특히 율법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심(마 15:6).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요 1:1).
* 복음으로서 말씀: 거듭나게 하는 말씀(벧전 1:23-25; 약 1:8).
* 성경으로서 말씀: 기록된 말씀. 경(scriptura)으로서 말씀. 특히 시
119에 나타난 율례, 규례, 법도 등이 지시하는 말씀.
3) 특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대한 해석의 기록으로
완결된다. 계시가 기록된 후에는 기록된 계시가 계시로 역사한다. 그러므로
계시의 기록도 계시의 과정이다.

153
◈ 조직신학서론

2. 기록의 필요성

i) 변조와 파괴의 방지를 위하여


ii) 인간의 기억의 한계 때문에
iii)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 조직신학서론

제 3장 계시의 기록: 영감(inspiratio)


1. 하나님의 호흡

* 성경 무오의 주장은 성경이 원저자(auctor primarius)인 하나님의


영(성령)에 의해서 감동 받은 인간 저자들에 의해서 그 내용과 문자까지
영감되었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함이며 이는
구속적 혹은 비구속적이다. 특별계시는 직접적 말씀과 사실의 해석인 말씀의
기록으로서 역사적이다.
* 성육신한 말씀(the Word of God incarnate)인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the Word of God written)인 성경이 있다. 후자를 사람들에게 계시하는
것은 전자이다.
*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받은 계시를
기록하든(계 1:1-3; 암 1:1), “모든 일을 자세히 미루어 살핀” 것을
기록하든(눅 1:3), 혹은 그들이 많은 자료들, 기록들, 구전들을 사용하여
기록하든 성령의 영감으로 했다.
* 영감(inspiriatio)은 하나님이 그가 원하는 것을 기록하여 남기게
하기 위해서 택하신 성경 저자들의 마음 속에 작용하는 성령의 내적
역사(the inward work of the Holy Spirit)이다. 이 영감은 성령의
조명(illuminatio)과는 구분된다. 조명은 개개인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게끔
개개인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하에서 영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본다.

i)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 .


유익하니(pasa grafh qeopneustoj kai wvfelimoj).”
이 본문의 해석과 관련해서 먼저 pasa를 “모든 성경”으로 번역할
것인지 “매 성경”으로 번역할 것인지의 논란과 전체를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매 성경은 . . . 유익하니”로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B. B.
Warfield는 여기서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것은 인생적 기원의 작품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것을 말한다고 봄으로써 성경 저자의 영감뿐만
아니라 성경 자체의 영감까지 주장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그는 본문이
“하나님은 성경을 내 쉬셨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주장한다.
본문은 성경의 전체 영감을 가르치는 구절로 보아야 한다. 특히
qeopneustoj는 수동태로서 하나님이 불어 넣어 주신(God-inspired) 혹은

155
◈ 조직신학서론

하나님이 호흡하신(God-breathed-out)의 뜻으로서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시는 모습과 상통한다.

ii)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니라.” Warfield는
여기서 예언은 전체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본다. 특히 그는 본문이 딤후
3:16과 같이 성경의 신적 기원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계시의 기관으로 사용하셔서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일을 하게
하셨음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이 성령의 공작 아래 그들이 말한 것은
그의 것들이요, 그들의 것들이 아니다.”

iii) 살전 2:13
iv) 고전 14:37
v) 갈 1:11-12

** 칼빈의 딤후 3:16 해석(CO 52.382-383)


“pasa grafh qeopneustoj kai wvfelimoj. . . .”
pasa grafh를 전체 성경(omnis scriptura 혹은 scriptura tota)로 해석.
qeopneustoj를 하나님에 의해서 영감된(inspired by God)으로 보고 이를
“성령의 기관들(organa Spiritus Sancti)”로서 성경저자들이 성령의 구술에
따라(“dictatam a Spiritu sancto”) 하나님을 성경의 저자(“autorem”)로 믿고, 즉
주님의 입(“os Domini”)으로 친히 말씀하심을 믿고, 그들의 마음이 성령이
증거하는대로(“testatur cordibus nostris”)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wvfelimoj는 “선하고 행복한 삶의 완전한 법칙”이라고 주석한다.
워필드는 이를 평가하기를 “칼빈이 결코 구술(dictation)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단지 영감의 결과가 마치 구술된 것과 같다”고 한다.

[성경 영감의 증명]

[1] 추론적 증명: 계시의 정확한 전달, 계시의 초자연적인 전달(ex.


신현, 예언, 이적 등)은 성경이 성령의 영감에 의해서 기록된 책임을
보여준다.
[2] 성경적 증명

i) 계시 구술의 영감
계시기관인 성경기록자들이 성령의 영감으로 자신들의 소명과 과업을
◈ 조직신학서론

의식하고 자신들에게 구술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사,”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되”와 같은 말을 반복해서 사용한다(구약에서만 3천 8백회 이상).
경건의 비밀을 더욱 깊이 내적으로 받은 사도들도 성령이 충만하여
교훈했으며(행 4:8; 13:9) 자기들의 가르침이 진정한 복음임을 확신하고(갈
1:8), 자기들의 전하는 바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했다(고전 2:4, 13; 살전
2:13).

ii) 계시 기록의 영감
선지자와 사도들에 의해서 구술된 계시가 영감된 것 같이 그 계시의
기록도 영감되었다. 기록 자체를 성령의 영감으로 명령 받고 기록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확신하며 이전 말씀에 수시로 호소하며 특히 많은
곳에서 기록된 말씀의 영감을 선포한다(ex. 딤후 3:16). 특히 유기적 영감의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왔으나 계시의 기관인 성경
저자들을 유기적으로 영감하여 사용했다고 함으로써 계시 기록의 영감을
드러낸다.
성경 기록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 자체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삼인칭 하나님의 말씀을 일인칭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특히 예언서에 많다. 성경은 자증하는 것이며(self-authenticated) “사람들을
기관으로 해서 하나님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 기록한 것이다(Inst. 1.7.5).

iii) 성경 전부의 영감
딤후 3;16에서 보았듯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C. 홧지가 고찰한 바, 영감이 모든 책 가운데 동등하게 확장되었고 그 모든
책의 모든 내용에 확장되었다.

iv) 문자들의 영감(축자영감설)


성경 속의 단어들이 영감되었다는 축자 영감(verbal inspiration)의
교리는 성경의 전체적 영감으로부터 추론되고 여호와께서 친히 모세와
대화한 부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말씀의 기록이 말씀 그 자체와 다르지
않음이 분명하고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입술에 넣어주시고(렘 1:9)
에스겔에게 부탁하시기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 말로” 고하라고 한 부분(겔
3:4) 등에서 알다시피 문자까지 영감되었음이 드러난다. 특히 마 5:18, 요
10:35의 주님의 말씀은 축자 영감을 뒷받침한다. 예수와 바울이 구약에
사용된 구체적 단어들을 두고 변론한 것도 축자영감을 증거한다(요 10:35
“신들”; 마 22:43-45 “주”; 갈 3:16 “자손”).

157
◈ 조직신학서론

2. 저자

이와 같이 영감은 구술과 기록에 모두 미치고 계시의 내용과 그


내용을 기록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개념들과 단어들에 미친다. 그러므로
성경의 원저자(auctor primarius)는 하나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Spiritus Sanctus)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의 모세와 선지자들, 신약
시대의 복음서 기록자들과 사도들을 계시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이들은
이차적 저자들(auctores secundarii)이라고 부를 수 있다.

3. 영감의 성질

1)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


유기적 영감은 성경 자체가 증거하고 있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단지
기계와 같이 성령에 의해서 진술된 대로 개성 없이 대서자(amanuensis)와
같이 받아 쓴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영감 가운데 자신들의 성격과 기질,
은사와 재능, 교육과 문화, 어휘, 문체, 스타일 등을 사용하여 계시를
기록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 경험(특히 시편 기자), 목도한 것(누가),
역사적 상황(특히 선지서들) 등을 반영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성령의 영감은 계시 구술과 계시 기록, 계시의 내용과 그
문자들에게도 미치는데, 영감된 문장과 어휘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성경저자들에게 공급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유기적 영감이 있으며,
영감으로 인해 표현된 성경 저자들의 독특한 인격성을 반영하는 기록은
오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쓴 경우(특히 하나님과의 대화의 기록,
언약의 기록)도 많이 있지만 성경 기록에 대한 성령의 영감은
기계적이지(mechanical) 않다. 또한 성령의 영감을 일반인에 대한 성령의
조명 정도로 생각하고 주관적인 영적 직관 혹은 영적 통찰을 영감으로 보는
슐라이엘마허의 동력적(dynamical) 영감설도 용납되지 않는다. 한편 초자연
계시와 특별계시를 부정하는 자연 신학자들은 이성의 고등한 직관력 혹은
통찰력을 영감으로 보고 있다.
성령의 조명은 영감과는 달리 시 119:18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고전 2:12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진리의 전달이 아니라 진리의
이해와 관계되는 것이다.
◈ 조직신학서론

2) 전체적 영감
성경의 전체 부분에 영감이 이루어졌다. 부분적 영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교리적인 부분들은 전체적으로 영감되었으나 비본질적인 진리들을
담고 있는 역사적인 부분들은 부분적으로 영감되었고 부정확성과 잘못들로
손상되었다고 보았다. 그들에 따르면 온갖 종류의 역사적, 시대적, 고고학적,
과학적 오류와 관련해서 성령의 영감은 아무런 방지책이 되지 못한다.

3) 축자 영감(inspiratio verbalis)
언어는 사상의 담지자이므로 사상의 내용 뿐만 아니라 문장과 단어에
이르기까지 영감되어 무오하다. 사상적 영감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상은
분명히 신적으로 영감되었으나 그 사상이 옷 입는 언어는 인간 저자들이
하나님의 인도 없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으로 본다.

4. 성경의 무오

계시의 목적은 사람들을 더 지혜롭게 하는 것이지만 영감은 저자로


하여금 오류를 범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무오성을 보장하는데 있다. 성경
무오는 C. 홧지, 워필드, 매첸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성경 무오를 설명함에 있어서 워필드는 영감의 증거를 세 가지
비순환적 단계로 설명한다. 1)성경이 그 자체의 영감을 가르친다. 2)
하나님께서 영감된 성경과 무관하게 별도로 그의 메신저들로서 그 저자들을
인정하셨다. 3) 하나님은 결코 그들이 오류를 범하거나 거짓말하면서
가르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C. 홧지는 성경의 무오를 설명하면서 성령의 초자연적, 영적 조명을
절대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성경계시의 내적 증거로서 성령의 영감을
강조했으나 영감 자체보다는 증거 자체에 더욱 치중했다. 위필드는 성경
기록자의 내적 확신으로서의 영감보다 성경 자체의 영감을 강조한다. 그는
딤 3:16의 feovpneumato§를 하나님의 숨결이 불어짐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서 “숨결 자체”를 뜻한다고 본다. 그래서 이를 “성경을 내쉬셨다”로
해석한다. (주관적) 성경의 영감은 (객관적) 성경의 무오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성경은 영감에 의해서 주관적으로 무오하게 수납된다기 보다 그
자체가 무오하다. 성경 자체의 무오성이 영감의 결과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
근거해서 위필드는 성경 기록자들에게 내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으로서의 영감, 성경 자체의 구술과 기록에 작용하는 영감, 그리고 성경
자체의 영감의 상호관계를 설명한다. 매첸의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그의 작품에서 보듯이 성경의 무오를 통해서 교리적 진실과

159
◈ 조직신학서론

이에 대한 변증에 이른다.
i) 성경의 내용에 있어서 오류가 없다.
성경은 계시된 내용을 그 의도대로 다 담고 있다.
인용 및 해석에 오류가 없다. 보도의 통일성에 오류가 없다.
ii) 성경의 계시를 담지하는 문장에 오류가 없다.
영감된 문장이므로 내용을 곡해할 문장의 오류가 없다. 중복된 구절,
논리적 오류, 예언의 오류 등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저자의 특수한 성격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고 예언의 오류의 경우에는 아직 그 결론을 말하기가
시기상조인 경우가 많다.
iii) 역사적, 과학적 사실에 있어서 무오하다. 그리고 도덕적인 오류도
없다.
요세푸스와 토인비 등의 역사서들은 오히려 성경의 무오를 입증한다.
작금 세계는 진화론에 빠져 있으나 과학이 발달할수록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드러낼 것이다. 성경에는 도덕적인 오류가 없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백성을 아버지로서 징계하심과 그의 백성의 적(敵)을 적(敵)으로서
징계하심을 나타내심이다. 특히 하나님은 구약시대 백성들의 마음이
강팍함을 보시고 이에 맞추셔서(accommodatio) 명령하시고 역사하신다.
iv) 성경의 첫 원본(autographa)이 무오하다. 많은 사본들이 있지만
근본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는 것은 첫 원본의 무오함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번역본도 영감성을 지니므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되었으면 원리적인
무오성을 지닌다.

5. 성경 무오의 이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오류가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 칼빈이 말했듯이 성경의 권위(authority)와 신빙성(credibility)은 하나님이
그것의 저자(“God is the Author.”)이며 하나님이 인격으로 성경 가운데
말씀하신다(“God in person speaks in it.”)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은
기록된 특별계시이며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기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특별계시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예언과 약속의 책인 구약성경이 역사적이거나 과학적 사실에 있어서
오류를 가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원이 신약에 계시된 대로 인정될
수가 없다. 성경 계시는 역사적인 계시이므로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있으면
구약 성경 계시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원 사역이 진리가 될
수 없다. 구원사는 일반사와 모순되지 않는다.
◈ 조직신학서론

제 4장 정경(Canon)과 외경(apocrypha)
1. 정경

선지자적 유래와 사도성이 확실하여 교회가 완성된 단위로서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유일하고 권위있는 계시로서 인정한 것. 이 책들(libri
canonici)만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관해서(de Deo rebusque divinis)
궁극적인 규범이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앙과 생활의 유일 규범이다(sitque
fidei et vitae norma unica ad salutem).

헬라어 kanwvn이라는 단어는 원래 측량하는 막대자, 직선자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표준, 규범, 기준, 그리고 목록, 표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규범적인 의미로서 갈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와 고후 10:13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된다. 특히 후자의 용례에서는 하나님깨서 바울의 사역에 대해서 세우신
규범이라는 함축적인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이 의미로 사용된 kanwvn 이라는 단어는 교회 안에서의 진리의


규칙(kanwvn th'§ ajlhqevia§: regula veritatis)과 신앙의 규칙(kanwvn th'§ pistevw§:
regula fidei)으로서 참 교회와 이단을 구별 짓는 표준으로서 사용된다.
아다나시우스는 kanwvn이 표준, 규범, 기준으로서 권위성과 성경의 목록을
동시에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는 부활절 서신(Paschal Letter)에서 성경의
책들은 정경화 되었다고 세 번 이상 서술했으며 니케아 공의회(신조
18:3)에서 “허마스의 목자(Shepherd of Hermas)”를 정경에 속하지 않는
작품이라고 공표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2. 외경(ajpovkripa)

정경은 신적 유대(선지성, 사도성)가 분명하고 영감된 책으로서


교회가 채택한 책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위경은 저작성 자체가
허위인 저술이며 외경은 정경적 권위의 주장이 허위임이 드러난 저술들을
의미한다. 즉 선지자적 유래와 사도적 유래가 없는 영감되지 않은 책을
의미한다.

161
◈ 조직신학서론

외경이라는 단어는 통상적으로 어원상 “감추어진 것, 숨겨진 것,


신비한 것”을 의미하는데, 영지주의적 기독교 저자들이 숨겨진 혹은
신비로운 질서들을 가리켜 이 단어들을 사용했으나 이레네우스와
터툴리안은 이 단어를 “거짓의”라는 의미와 동일시했다. 오리겐은 이 단어를
유대인의 정경으로부터는 제외되었으나 기독교인들이 자주 참조하는
저술들에 대해서 사용하였다. 어거스틴과 제롬(불게이트의 외경 부분의
서문에서 히브리 정경(the Hebrew canon)을 따랐다)은 단호히 부정적인
용례로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웨스터민스터 신도게요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는 외경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보인다.
3. 일반적으로 외경이라도 불리는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서 성경 정경의 일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에 어떤 권위도 없으며, 달리 승인되어서도 안되며, 인간의 작품들
이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한편 벨직 신앙 고백서는 외경의 교훈성을 인정한다.


6. 정경과 외경의 차이
교회는 확실히 이런 책들을 읽고 그것들이 정경들에 일치하면
그것들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증언과 주안점으로
믿음과 기독교 종교를 확정할 정도의 능력과 힘은 가지고 있지 않다. 더욱이
그것들은 다른 거룩한 책들의 권위를 흩뜨릴 수 없다.

구약 외경들은 칠십인역본과 벌게이트 역본이 유대 정경에 첨가하여


포함시키고 있는 책들로 구성된다. 이 책들은 대다수가 17세기 트렌트
공의회에서 로마 카톨릭 성서의 일부로 선포되었다.

카톨릭 신앙 교육서
IV. 성경의 정경
120. 교회는 사도적 전통에 의하여 어떤 글들이 거룩한 책들에
포함되는지 분별해 왔다. 그 완전한 목록은 성경의 정경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구약 46권(예레미야와 예레미야 애가를 한 권으로 보면 45권)과 신약
27권을 포함한다.

로마 카톨릭이 받는 구약 외경은 Tobit, Judith, 1 and 2 Maccabees, the


Wisdom of Solomon, Sirach(Ecclesiasticus), Baruch을 포함한다. 이들은
◈ 조직신학서론

외경이라기 보다는 이차적 정경(deuterocanonical)이라고 불림으로써 일차적


정경(protocanonical)과 구별된다.

신약의 외경들은 교리적 견해를 조장하거나 예수의 생애와 사도들의


행적의 기록에서 빠진 부분을 보충하기 위함이었다. 신약의 외경들은 대체로
위경적이다.
a) 외경적 복음서들: 히브리 복음서, 베드로 복음서, 도마 복음서,
니고데모 복음서
b) 외경적 행전들: 바울 행전, 요한 행전
c) 외경적 서신들: 라오디게아 서신, 바울과 세네카의 교신 등
d) 외경적 묵시록들: 베드로 묵시록, 바울 묵시록 등

3. 정경 속의 정경

말씨온(2세기)은 구약은 물론이고 모든 구전과 다른 사도들의 저술을


배격하였다. 그는 “복음”과 “사도”의 두 부분으로 성경을 삼고 “복음”에는
비유대적인 누가복음만 존속시키고 사도에는 바울의 10개 서신을
포함시킨다: 롬, 고전, 고후, 갈, 라오디게아(엡), 빌, 골, 살전, 살후, 빌.
(말씨온이 계시를 축소한 반면 몬타누스(2세기 말)는 경험된 성령의 새로운
사역에 의해서 “새로운 계시”가 주어짐을 인정했다.

루터는 로마서 1:17를 정경 중의 정경이라고 보았으며 “(성경의) 모든


순수하고 거룩한 책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그리스도에 집중한다는
점에서(Christum predigen und treiben) 일치한다. 모든 책들을 (받아들이거나)
배격할 수 있는 시금석은, 그것들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에 집중하느냐
안하느냐에 달려 있다.” Christum treiben의 원리에 의해서 루터는 신약성경의
“심장과 골수”로서 요한복음, 요한일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베드로전서를
들고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은 신약의 주요한 책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특히 그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다.

칼빈은 신약 27권을 온전히 수납했다. 그는 성경의 내적 자기 증거,


즉 가신성(autopistia)을 강조한다. 그는 히브리서의 저자를 바울이 아닌
사도의 제자로(히 2:3에 근거) 주장하고, 베드로 후서는 베드로의 제자가 그
저자임을 지적했으나 이들 작품들과 유다서, 야고보서 등에 대한 정경성에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163
◈ 조직신학서론

4. 정경의 완성

i) 구약: 전도서와 아가서의 정경성이 잠니아 회의(주후 90)까지


확정되지 못했으나 유대인 학자 킴히(David Kimchi, 1160-1232)가 주장하듯이
이미 학사 에스라 시대에 현재와 같은 39권(비록 권을 헤아리는 방법은
틀리나)을 정경으로 확정했다. 구약 외경은 70인역본과 벌게이트역본에
합본된 책들을 의미한다.
ii) 신약: 신약정경을 결정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들은 사도성,
보편적 수납성, 영감성, 그리고 내용의 영적인 특성이 중요하다.
삼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제 1기는 70-170년에 복음서들과 사도
바울의 서신들이 즉각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제 2기는 소위 논쟁된 책들(antilegomena, 히브리, 요한 2. 3서, 베드로
후서, 유다, 야고보, 계시록)을 제외한 신약 모든 책들이 사도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제 3기는 현재 정경 27권이 확정된 시기였다. 367년에 아다나시우스
정경에서 비로소 신약 전부를 인정했다. 382년 로마에서 개최된 다마시네
회의에는 제롬이 주요 인물로서 참여했는데 여기서 아다나시우스의 정경
목록을 채택했다. 그리고 397년 칼타게 회의에서 어거스틴이 신약 성경
27권을 포함한 정경을 발표했다.
◈ 조직신학서론

제 5장 성경의 독특성, 곧 신성성(divinitas Scripturae)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들을 영감시켜 자기계시를 기록하게 하심으로써
성경은 하나님 말씀으로서 권위와 특성을 지닌다. 이것이 성경의 신성성이다.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이 원저자이시다: 권위성
* 하나님은 인간들을 계시 전달 도구로서 영감시켜 사용하신다:
충족성 혹은 완전성
* 하나님은 비구속적 특별 계시와 구속적 특별 계시를 그의 기뻐하신
뜻에 따라 성경에 기록하여 보존하게 하신다: 필요성
* 성경은 성령의 내적 조명에 의한 감화(persuasio)와 성경의 진리에
대한 내적 증거(testimonium)을 통하여 믿음으로 수납된다: 명료성

1. 성경의 권위(auctoritas Scripturae Sacrae)

남부 장로교 신학자 James H. Thornwell의 말과 같이 개신교 원리는


“성경의 진리들은 그 자체의 빛으로 신적임을 자증한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칼빈은 “성경이 완전한 권위를 얻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하늘로부터 솟아 난 하나님 자신의 육성(vivae ipsae Dei voces)으로 믿을
때이다”고 한다(Inst. 1.7.1). 성경의 권위는 이와 같이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autorem eius esse Deum”)라는 사실, 즉 하나님이 그의 인격 가운데서
말씀하신다는 사실(“a Dei loquentis persona”)을 성령의 은밀한 내적 증거(“ab
arcano testimonio Spiritus,” “interiore Spiritus testimonio”)로 말미암아
감화(persuasio)받아 알게 된다(Inst. 1.7.4). 즉 성경의 권위는 성경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하시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한 스스로 자증하기
때문에 온전한 믿음으로 이를 수납하고 이로써 모든 하나님의 지식을 얻게
됨은 순종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참다운 종교(혹은 경건 religio)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려면 우리는 그것이 하늘의 교리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과
성경의 제자(Scripturae discipulus)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도 올바르고 건전한
교리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에 착념해야 한다. 그리고 참다운 이해의 출발은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껴안는
것이다. 완전하고 모든 방면으로 부족함이 없는 믿음뿐만 아니라 모든
참다운 하나님의 지식은 순종으로부터 나온다(omnis recta Dei cognition ab
obedientia nascitur).”

165
◈ 조직신학서론

i) 이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자기 가신성(autopistia)에


근거한다.
성경 진리는 논리적, 이성적 증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내적
조명(가르침)에 의해서 스스로 확증된다(self-authenticated, aujtovpiston, Inst.
1.7.5).
이 성경의 권위는 교회의 인정에 근거하지 않는다. 로마 교회의
주장에 의하면 교회는 시간적, 논리적으로 성경보다 앞서며 성경으로부터
인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의 내주를 통하여서 스스로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성경이 그 존재를 교회로부터 인출하였고 지금은
그것에 의하여 승인, 보존, 해석, 변호되니 교회 없이는 성경 없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교회의 승인에 의해서(“ecclesiae suffragiis”) 그 권위성을 인정
받는 것이 아니다(Inst. 2.7.1). 교회가 성경에 대해서 “승인의 인장을 찍는
것(suffragio obsignat)”이 아니라(Inst. 2.7.2),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에
인장을 찍어 주셨다(Spiritus Dei cordibus nostrius obsignat)” (Inst. 1.7.5).

ii) 성경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oracula)이므로 하나님의 권위와


일치한다. 성경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이다(“hominum ministerio ab ipsissimo Dei ore ad nos fluxisse”) (Inst. 1.7.5).

iii) 성경은 역사적 권위(auctoritas historica)와 규범적 권위(auctoritas


normativa)를 가진다. 성경은 교리적인 부분과 비교리적인 역사적인 부분까지
전체적으로 영감되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신약과 구약 성경을 약속-성취의
유비로 이해하되 그 실체(substantia)인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역사성을
파악하고 이로써 역사적으로 확실한 진리로서 성경을 받는다. 한편 신앙과
삶의 법칙으로서 성경은 규범적 권위을 갖는다. 특히 규범성은 구약시대
율법 가운데 계시된 그리스도(Christus in lege)와 신약 시대 그리스도 가운데
계시된 율법(lex in Christo)이라는 관점의 연속성에서 파악된다.

2. 성경의 충족성(perfectio seu sufficientia)

성경의 완전성 혹은 충족성은 구원 얻음과 믿음 생활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다 성경이 담고 있어서 추후적인 계시나 유전에 의해서 새롭게
보충될 필요가 전혀 없음을 말한다.
재세례파는 성경의 정경성을 가치 없는 것으로 보고 내적인 빛과
말씀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특별 계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 조직신학서론

주장하였다. 이는 몬타누스와 카타리파의 주장과 흡사하다. 재세례파의


모토는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다”라는 말씀(고후 3:6)에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문 말씀의 보충으로서 구술적 유전(traditio


orata)의 절대적 필요성을 단언하였다. 로마교회는 살후 2:15; 3:6에 근거해서
유전을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 두 절에서 말하는 유전은 말씀을
물려 받았다는 뜻이지 계시의 보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유전이란
교회를 통하여 전승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구술적 교훈이라고 한다. 유전은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추가적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또는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한다. 교회는 성경과 유전에 대해서 신적인
권위를 인정 받은 보관자와 재판관이라고 한다. 로마 교회는 사도적 전승의
진실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Vincentius Lerinensis의 주장을 따르는데 그는
“모든 곳에서, 항상, 모든 사람이 믿는 것(ubique, semper, et ab omnibus,
creditum est)”을 사도적인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런데 이런 보편성을 누가
인정할 것인가? 카톨릭은 이를 공교회의 주교들이(그들은 주교회의를
ecclesia docens라고 부른다) 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여전히 그들의
공적인 입장으로 받으나 주교들조차 무오성이 문제될 수 있으므로
궁극적으로 교황의 보좌로부터(ex cathedra) 나온 말씀만이 권위가 있으며
무오하다는 생각에 이른다.

i) 성경의 완전성은 곧 충족성으로서 성경에 하나님의 존재와 뜻,


자기 자신을 알리기에 필요한 모든 것과 창조와 구원 사역에 관한 필수적인
모든 사항들을 다 담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신적 계시의 절정으로
최고의 최종적 계시로 제시되고 있다(마 11:27; 요 1:18; 17:4, 6; 히 1:1).
구원의 길을 알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말씀인 성경만을
찾아 보아야 한다(요 17:20; 요일 1:3).
ii) 성경의 완전성은 본질적 완전성(perfectio essentialis)과 보존의
완전성(perfectio integralis)으로 나눈다. 본질적 완전성은 창조주와 구속주에
관한 모든 하나님 지식이 성경에 다 담겨 있음을 뜻하고, 보존의 완전성은
이와 같이 본질적 완전성을 드러내는 성경에 기록된 계시들이 파괴나 허위
없이 보존되었으므로 어느 한 책, 어느 한 부분도 새로운 계시나 유전으로
보충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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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서론

3. 성경의 필요성(necessitas Scripturae)

로마 카톨릭에 의하면 교회는 성령으로부터 그 생명을 이끌어내므로


자기 충족적이며 따라서 자증적이고 따라서 교회가 성경보다 우위를 갖기
때문에 교회가 성경을 필요로 한다기 보다는 성경이 교회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초대 교회의 몬타누스주의자들과 카타리파 등 신비주의적
계시주의자들은 성경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았으며, 재세례파도 성경을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증거로, 묘사로, 행동으로, 철저하게
무기력한 글자로 보았다. 슐라이엘마허 역시 성경은 교회가 만든 것이고
교회의 종교적 삶의 최고 표현이며 따라서 권위 있는 표현이라고 하였다.
타락한 인류에게 하나님의 지식과 구원진리를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한 안경(specillum)으로서 성경이 절대 필요함은 개혁주의자들의 변함없는
주장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구원 얻음과 하나님
섬김의 길을 세상에 알리셔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시기 위해서 특별계시를
성경에 기록하여 보존케 하셨다.

4. 성경의 명료성(perspicuitas Scripturae)

로마교회에 의하면 성경은 애매한 것이며 신앙과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조차 해석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들은 유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교회의 공적 권위에 의한 성경해석을 강조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유비, 성경의 유비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성적 접근으로
말미암아 카톨릭은 formed faith와 unformed faith, implicit faith와 explicit faith,
consilia, peccatum mortale와 peccatum veniale라는 개념을 발전시킨다).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에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석의(釋義)에 몰두하여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해석에 집중하였다.
구원에 필요한 지식은 성경 각 부분에 똑 같이 명료한 것은 아니지만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인간에게 단순하고 포괄적인 형태로 전달되어서 진지하게
구원을 찾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 아래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필요한
지식을 자기 힘으로 얻을 수 있으며 교회나 성직자 개인의 도움이나 인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등이요 빛이라고 역설한 부분과 예수님께서 자신의 메시지를 군중에게
전파하여 알게 하셨고 사도들도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분변하라고 강조한 것을 부각시켰다(고전 2:15; 10:15; 요일 2:20).
◈ 조직신학서론

i) 성경의 명료성은 성경은 구원 얻음과 믿음 생활에 필수적인


진리를 성령의 조명으로 스스로 계시하기 때문에 신실함으로 이를 읽고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진리를 교회나 다른 권위있는 지도자들의
도움 없이 드러낸다는 것이다. 즉 성경에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이 명료하고
쉽게(perspicue et clare)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신실하게 열심을
다하여(devote et attente) 이를 읽으면 그 진리를 명백하게 알 수 있다.
ii) 그러므로 성경의 구원 진리를 깨닫기 위해 교회의 해석과 지도가
결코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Polanus가 지적하듯이 성경해석은 말씀의
의미와 용도를 파악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교회를 세우는 기초가
된다(“Interpretatio S. Scripturae est explicatio verbi sensus et usus ilius, verbis
perspicuis instituta ad gloriam Dei et aedificationem ecclesiae”).
iii) 성경은 성령의 영감에 의존해서 신앙의 유비와 성경의 유비에
따라서 해석된다.
analogia fiedi: 성령의 내적 조명에 의해서 진리를 인식하고 깨달아서
확신에 이르는 바, 이러한 믿음에 의해서 명료하게 계시된 구원진리로부터
성경의 다른 부분을 해석하는 것이다. a) 근본 교리들을 따라서 다른
부분들을 해석하고 논한다. b) 명료한 부분에 의해서 어두운 부분을 조명하고
해석한다. c) 전체로 부분을 조명하고 해석한다.
analogia Scripturae: 성경은 성경에 의해서 해석한다. 성경은 자기
해석자이다(Scriptura interpres sui ipsius). 해석은 성경의 참 의미를
풀고(enarratio veri sensus Scripturae) 그 용도에로 맞춤으로(accommodatio ad
usum) 이루어진다. 참 의미를 풀어내는 것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sensus
literalis)를 문맥 가운데서 읽어 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문자적 의미가
신앙의 조항들(articuli fidei)과 충돌되거나 사랑의 교훈(praecepta caritatis)과
상치되면 성경의 중심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비유적 의미(sensus
figuratus)가 허용되고 우화적 해석도 허용될 수 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있어서 Bucer, Bullinger, Melanchthon, Calvin은
서지학적이며(philological) 수사학적인(rhetorical)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했다.
특히 칼빈은 이를 자신의 말씀과 성령(Word and Spirit) 이해에 기반해서
문자적, 역사적 해석과 성공적으로 조화시켰다.]

169
◈ 조직신학서론

제 6장 성경의 해석(interpretatio Scripturae)


1. 성경 해석의 원리

i)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자증하기 때문에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ii) 성경해석에 의해서 성경의 뜻이 분명하게(distincte), 명료하게(clare),
확실하게(certe) 드러나게 되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을 때이다. 성경
문자는 항상 영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그 참 의미는 성령의 내적
감화(persuasio)와 증거(testimonium)에 의해서만 밝혀진다.
iii) 성경은 자기 해석자이기 때문에 성경이 성경 해석의 최종 권위를
가진다. 따라서 성경은 성경 본문의 문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즉 성경
본문이 명백하게 주장하는 바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문법적으로
단어와 문장과 문맥의 의미를 밝혀감에 있어서 역사 속에 계시된 구체적인
진리를 파악하고, 그 규범성을 규명해가야 한다. 성경을 문자적, 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가운데 성경의 역사적, 규범적 권위를 확립하게 된다.
iv) 문자적, 문법적 해석에 의해서 성경의 역사적, 규범적 권위를
드러냄에 있어서, 성경 영감(inspiration)에 기반한 성경문자의 영적인 의미를
추구하게 되는데, 이런 과정에서 성경해석은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에
도달한다. 성경의 역사적, 규범적 권위에 대한 구속사적 의의는 기독론적
관점에서만 파악된다. 그리스도는 신약만의 중심이 아니고 구약의
목표(scopus)이며 생명(vita)이며 성취(perfectio)이다. 신약과 구약 전체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된다. 즉 그리스도의 문맥에서 읽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에 있어서 신약과 구약의 통일성과 차이성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해진다: 기독론에 있어서 the promise-fulfillment analogy와 the
umbra-substantia analogy가 동시에 파악되어야 한다. 이를 통하여 구약과
신약이 그 형태(forma)에 있어서는 다르나 그 실체(substantia)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예표론과 구속사적 약속과 성취가 그리스도
안에서 동시에 설명된다.

2. 성경해석에 나타난 오류들

성경을 당내 문화와 철학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오리게네스는


우화적 해석에 빠지고(필로의 영향) 자유주의자들은 당대의 계몽철학과
역사의식으로 성경을 해석했으며 20세기의 불트만의 비신화화 신학과
바르트의 변증신학은 가다머의 해석학이 보여 주듯이 현재 문화적 지평에서
◈ 조직신학서론

성경을 이해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들에게 성경의 자기 해석의 원리를 설


자리가 없으며 성경 진리 자체보다 계시 수납자의 주관적 현재적 이해가 더
중요시 되었다. 다.
한편 문자적(literal), 풍유적(allegorical), 비유적(tropological),
신비적(anagogical) 의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사중적 해석법(quadriga)을
통하여서 중세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문자적, 역사적으로 해석하면서 동시에
영적으로 해석함에 따르는 난점들을 신학적으로 극복하려고 했으나
기독론적으로 본문의 참 의미를 파악함에는 실패했다.

3. 바름직한 성경해석

성경의 문자적 해석은 단지 본문의 문자적 의미만을(merely literally)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Richard A. Muller 교수가 간파했듯이, “칼빈에게 있어서
텍스트의 ‘문자적’ 의미는 기독교인들이 믿어야 할 것들, 해야 할 것들,
그리고 바래야 할 것들(credenda, agenda, et speranda)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은
이해에 있어서 구약시대의 그리스도의 예표와 신약시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사역에 나타난 umbra-substantia analogia와 구속사에 나타난
promisso-perfectio analogia가 기독론적 관점에서 해석되는 것이다.

1) 신약과 구약은 함께 읽어야 한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은 그 실체(substantia)와 실제(re-ipsa,
veritas)에 있어서는 신약과 구약에 있어서 전혀 다르지 않고 다만 그
경륜(administratio, dispensatio)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언약은 공히
“같은 중보자의 은혜”에 기반하고 있다(Inst. 2.10.1-2; 2.11.1). 구약 시대
백성들도 율법에 약속된 복음을 바라보았으며(롬 1:2; 3:21), 그리스도의
중보의 은혜에 의해서 확증된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하여 언약을 맺고
있었다. “구약은 항상 그 목적을 그리스도와 영생에 두고 있었다”(Inst. 2.10.4).
신약과 구약은 함께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구약은 그리스도를 전체적으로
증거하며 신약은 이러한 구약의 빛 가운데서만 온전히 이해되기 때문이다.

2) 구약은 신약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구약의 문맥은 신약이다. 구약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가
구약의 성취이다.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의 계시라면 신약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남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약속의
실체는 신약에 의해서 드러난다. 구약의 약속은 신약의 빛으로 드러나며,
구약의 궁극적 존재 목적은 신약에서 발견된다.

171
◈ 조직신학서론

신약의 빛 속에서 우리는 구약 백성들에게 내린 반석의 물과 만나가


단순히 육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홍해를 가르시고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영적인 세례의 표임을 알게
된다(요 6:48-58; 고전 10:1-6, Inst. 2.10.5-6).
구약 백성들도 믿음으로써 의에 이르게 됨을 믿고 있었다. 그들이
미래를 향하여 묵상한 것은 영생이었으며 이는 중보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창 3:15의 원복음과 말
4:2의 “의로운 해가 떠 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서 구원을 묵상했다(Inst. 2.10.7-22, 특히 2.10.20). 요약하면, “구약의
조상들은 언약의 보증(pignus)으로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미래의 모든 축복이
그에게만 있다고 신뢰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구약 혹은 옛
언약은 지상의 것들에 제한되지 아니하였고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포함하고 있었다” (Inst. 2.10.23).

3) 신:구약은 기독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구약의 목표(scopus)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구약 역사는 메시아를
대망하고 그의 오심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중보자 그리스도는
성육신전에도 중보자로서 구약 백성들에게 계시하셨고 구약 백성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은 구약의 역사에 맞추어서 그리고 그 백성들에게 맞추어서
계시하셨다(accommodatio). 구약 시대의 율법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repraesentatio)할 뿐만 아니라 그의 현재(praesentia)을 계시하였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씀의 역사적인 현존이 구약 백성들에게도 믿음으로
수납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아직 육신 가운데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그림자(umba)만을 보았다. 신약 백성들이 몸을 통하여서 그리스도를 본
반면에 구약 백성들은 그림자를 통하여서 실체를 보았다(cf. 골 2:17).

4) 신약은 그 중심인 그리스도로부터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완성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중보는 부활, 승천 후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i) 성령의 파송과 성령의 사역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해졌고 정립되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얼굴로 일하고 그리스도를
현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 안에서 자기의 구원을 적용하신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의를 전가하심으로써 우리의 신분(인격)뿐만 아니라 행위마저
의롭다고 받아 주신다(duplex imputatio, Inst. 3.17.3, 5, 9, 10). 성령은 인격적으로
독자적이지만 그의 사역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제 2 자아(alter ego)이다.
◈ 조직신학서론

성령의 사역이 기독론적으로 이해됨은 성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영적인


그러나 실제적인 임재를 설명하는 이론인 the so-called extra Calvinisticum에
의해서 절정에 이른다.
ii) 종말론은 기독론의 연장이다.
종말은 그리스도의 중보의 완결을 의미한다. 성경 해석이 성취되고
해석이 실재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가르침이 없다(mediator doctrinae).
하나님과 마주 보게 됨으로써 더 이상 중재가 없다(mediator patrocinii).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구원의 적용을 완료하고 역사를 주재하게 되면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재림하신다. 그후에는 더 이상 화해가 없다(mediator
reconciliationis).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한 중보자의 옷을 벗은 후에도 여전히
거룩한 백성을 위해서 성자로서 일하신다. 종말론은 이와 같이 기독론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iii) 기독교인의 삶도 그리스도 중심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이요(마 16:24), 하나님의 후사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받아야 하는 삶이다(롬 8:17).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칭의의
단계뿐만 아니라 성화의 단계에도 미치고 이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자유이다(Inst. 3.19). * triplex libertas Christiana: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 적극적인 율법(하나님의 뜻)에의 순종,
아디아포라(모든 자유를 덕을 세우기 위해서—aedificatio—사용).

5) 성경의 해석은 문자적 의미를 참 해석으로 삼아야 한다.


성경 본문에 나타난 단어와 문장을 문맥에 맞추어서 문법적,
역사적으로 문자적 의미에 충실하게 해석해야 한다. 해석학적 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성경을 해석할 때 교리의 명백한 가르침에 부착해야 한다.

6) 성경해석은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뜻을 도와야 하고 당대


사상으로 번역하면 안된다.
성경의 자증성과 성경이 성경의 해석자임을 믿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믿음으로 수납하는 성령의 조명하에 성경해석을 해야 한다. 당대의
문화와 철학을 잣대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은 성경 해석은
지성을 희생함(sacrificium intellectus)이 아니라 중생 이성을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해석하는 것이다.

173
◈ 조직신학서론

제 7장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영감된 저자에 의해서 인간의 말로써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를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써 전체적으로
증거한다. 성경은 인격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입술을 통하여서
흘러나온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을 영감된 저자들에 의한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이라고 보는 견해를 부정하는 자연신학자들과 내재신학자들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하고 성경 속의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를 계속 축소해 왔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반대한 바르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Die Bibel ist Gottes Wort)라는 주장을 폈다. 그
진실을 보자.

i)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근원적이고 합법적인 증언으로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성경은 증언이다. 성경은 증거 된 것 자체는 아니다.
성경은 계시와 구별된다. 계시의 증언으로서 하나님이 성경 속의 사람들의
말에서 말씀하심이다. 이 말씀하심은 기록된 언어를 통하여서 하나님이
신적인 처분과 행위와 결정을 내리는 사건이다. 이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神言)이 된다(werden).
ii) 영감은 이러한 神言 사건(계시사건)을 통해서 성경이 계시가 되는
“계시 행위”를 의미한다. 즉 영감은 성경이 “무엇이었고” “일 것이고” 다시
말하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그러므로 “사실영감”에 한정되고
“축자영감”이 인정되지 않는다. 바르트에 있어서 영감은 성경기록자에
관계되기보다는 말씀을 성령으로 감동시키는 것에 관계된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영감이다. 즉 예언자의 말씀과 사도들의 말씀을 감동시킨
것이다.”
iii) 성경의 자증성에 근거해서 성령으로 영감된 말씀을 성령의
조명으로 알게 된다는 이해는 바르트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가 들었던 성경이
발생한 계시를 증거한다. 성령의 감동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고 고백하는 것을 성경의 계시성으로 보는 바르트에 의하면
말씀의 자증성보다 말씀에 대한 주관적, 실존적 확신을 강조한다.
iv) 바르트는 말씀의 삼중 형태를 구분한다: 처음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성경 기록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선포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신언이 되는 사건에 의해서 선포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신 계시를 증거한다. 이렇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과
◈ 조직신학서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관계를 파악하는 가운데 성경이 계시의


기록임을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실존적으로 이해될 때에만
그 계시성을 드러낸다고 한다.
v) 바르트는 기록된 말씀과 선포된 말씀의 관계를 계시 사건으로
파악하는 가운데, 먼저 계시의 현실성(혹은 실존적 성격)을 논구하고 이를
토대로 계시의 가능성을 묻는다. 계시 사건에 의해서 드러난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Gott mit uns) 곧 임마누엘이다.
교회 교의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선포
속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다”라는 제목을 부쳤는데, 이는 계시 사건에 의해서
드러난 계시는 다름아닌 성육신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성경이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는 한 성경과 하나님 말씀은 다르지 않다.
성육신한 하나님은 그 자체로 게시사건이며 계시이다. 구원계시인
특별계시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미 본 바와 같이 객관적
가능성으로서의 성경의 진리와 주관적 가능성으로서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고 그 만나는 사건이 특별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의 존재에의
동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 났기 때문에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구원은 “진리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과 절대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한다.
vi) 성경을 계시의 증언으로 보고 계시 사건을 통해서 기록된
말씀인성경의 계시성을 주관적, 실존적으로 파악하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정경을 결정하는 것은 듣는 사람의 결정에 맡겨진다. 소위 정경성은
상대적으로만 표현된다.

175
◈ 조직신학서론

제 8장 성경과 교회
사도 신경에서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는 가시적 교회뿐만
아니라 선택된 백성 전체로 이루어진 비가시적 교회도 포함된다(Inst. 4.1.2, 7).
하나님을 믿는 자마다 교회는 그 어머니가 된다(키프리안, Inst. 4.1.1, 4). 참
교회의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예수님의 제정에 따라서
성례를 거행하는 것이다(Inst. 4.1.9; 4.2.1, cf. 4.3.6에 의하면 권징도 포함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지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왕국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감독이다(ab unico Christi episcopatu, 키프리안, Inst.
4.2.4, 6).
반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주교의 계승이 교회 존립의 최고
조건이라고 보았다(the church exists where bishops succeed one another, Inst. 4.2.3).
그들은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유전들—왜곡된 기도들, 성례들, 그리고
의식들—을 우상과 같이 숭배하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영예, 권능,
통치권을 교회로 앗아갔다(Inst. 4.2.9). 로마 교회는 교황청에 수위권을
주고(the primacy of the Roman See), 그리스도의 대리로서(the vicar of Christ)
로마 교황이 전체 교회를 다스린다고 한다(Inst. 4.6.1). 교황은 “지상 교회의
최고 머리이며 전 세계를 다스리는 주교”라고 불린다(Inst. 4.7.19). 그러나
구약 시대 대제사장의 이름은 교황에게 넘어간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여전히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에게 남아있다(Inst. 4.6.2).
그리스도는 유일한 교회의 머리이다(Inst. 4.6.9).
로마 교회는 교회가 어머니로서 정경을 확정하였으므로 교회가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한다. 성경의 자증성을 인정하지 않고 교회의
권위 있는 해석과 가르침이 있어야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교회의
승인(the assent of the church; the power to approve Scripture)과 교회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the church)에 의해서 성경은 권위를 갖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구약 외경을 인정하고 유전(traditio)을 성경과 더불어서 동등한
권위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두 가지 종류의 계시). 제롬의
불가타 성경을 권위본으로 확정하고 1545년 트렌트 회의에서 유전을
공식화했다: “나는 동일한 교회에 속한 사도적이며 교회적인 유전들과 다른
모든 의무조항들과 규범들을 확고하게 인정하고 수용한다. 나는 성경의
진실한 의미와 해석을 판단하는 직무를 감당하는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가 붙들어 왔으며 붙들고 있는 바대로 성경을 받아들인다. 나는
교부들의 만장일치된 동의에 따르지 않고는 결코 성경을 받아들이거나
해석하지 않는다”(Pelikan, The Riddle of Roman Catholicism, 82).
로마교회는 공의회의 무오를 주장하나(Inst. 4.8.10), 제 2 에베소
◈ 조직신학서론

공의회는 유티커스의 단성론을 채택했으며(Inst. 4.9.8, 13), 제 2 니케아


공의회는 성상숭배를 인정하고(Inst. 1.11.14), 제 2 바티칸 공의회는 종교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러나 교회 공의회의 주재자는
그리스도시며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다(Inst. 4.9.1).
로마교회는 교회가 하나님의 성령이 의해서 다스려지는 한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하며,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초월하고 하나님의 말씀과는
분리된 다른 것을 권위 있게 제정한다면(ordain), 이는 곧 확실한 하나님의
음성(말씀)(a sure oracle of God)에 다름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완전하고 충족하며 교회는 이 말씀의 권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Inst.
4.8.13).
교회는 완벽하지 않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신자들의 의에 의해서
세워져 가는 엘리트 교회를 지향하고 카타리파와 도나투스주의자들은
결함이 없는 완전한 교회를 말하나, 하나님은 교회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며 이를 겸손하고 경건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부족한 모습 가운데서도
지켜 가신다(Inst. 4.8.12).
사도들과 그들을 이은 후계자들은 구별되어야 한다. 사도들은 성경의
참 기록자들이었으나 그들의 후계자들은 다만 이 성경을 받고 가르치는
일을 한 사람들이다(Inst. 4.8.9). 제사장들이나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들의
권위나 품위는 개인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역과 그 사역을
규정하고 맡기는 성경 말씀에 주어진 것이다. 모든 권위는 성경에서 나온
도출된 권위이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입술의 말씀을 기록한 책으로
권위가 있다.

177
◈ 조직신학서론

계시의 정점(Culmen Revelationis): 칼빈의 기독론적 이해

문병호

1. 계시의 기독론적 이해의 실제와 범위

대체로 성경의 무오는 그것이 성령의 영감(inspiratio)으로 기록된


57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논거로 주장되어 왔다. 칼빈이 성경무오를
58
지지했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거의 반분(半分)되어 있다. 부정적인
입장에 서 있는 학자들은 칼빈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부터
구별해서 그것의 기록이 기계적이지 않음은 물론 문자적이거나
59
축자적이지도 않다고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학자들도 칼빈이
성경을 그 저자들이 진리로서 수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다는 사실은
60
인정했다. 어떤 학자라도 칼빈이 성경의 성령 영감론을 완전히 부정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신약과 구약 그리고 복음과 율법은 모두 그
실체(substantia)로서 그리스도를 계시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명확하게
61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성경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57 즉 성경의 무오는 성경의 영감성과 권위성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관한 가장


시효적 작품으로서, W. Sanday, Inspiration, Eight Lectures on the Early History and Origin of the
Doctrine of Biblical Inspiration (London: Longmans, Green, 1893), 3; H. D. McDonald, Theories of
Revelation: An Historical Study 1860-1960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63), 196-373. 성경의
성령 영감성은 기록자와 기록물에도 미친다. 영감은 존재하는 진리에 관한 것이지 진리의
형성에 곤한 것이 아니다. James Orr, Revelation and Inspiration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16), 162-169, 197-218. 초대 교회 교부들은 구약의 말씀이 이미 존재하는 진리라는
측면에서 성경의 성령 영감을 견지했다. Cf. J. N. 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4th ed.
(London: Adam & Charles Black, 1968), 60-64.
58 Roger Nicole, “John Calvin and Inerrancy,”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25(1982), 427-431; W. Krusche,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57), 161-162; John Murray, Calvin
on Scripture and Divine Sovereignty (Grand Rapids: Baker, 1959), 11-15.
59A. D. R. Polman, “Calvin on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in John Calvin:
Contemporary Prophet, ed. Jacob T. Hoogstra (Grand Rapids: Baker, 1959), 97-98.
이러한 부정적인 입장은 Heinrich Heppe, Emil Doumerge, Wilhelm Niesel 등에 의해서
지지된다.
60 예컨대, Roger Nicole, “John Calvin and Inerrancy,” 425-426; L. F. Schulze,
“Calvin and Biblical Inspiration- A Case Study,” in Calvin’s Books: Festschrift for Peter
de Klerk, ed. Wilhelm H. Neuser, Herman J. Selderhuis, Willem van’t Spijker
(Heerenveen: Groen, 1997), 193-195.
61 Edmond Grin, “L’unité des deux Testaments selon Calvin,” Theologische

Zeitschrift 17 (1961), 175-186; John H. Leith, “Creation and Redemption: Law and
Gospel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in Marburg Revisited: A Re-examination of
Lutheran and Reformed Traditions, ed. Paul C. Empie and James I. McCord (Minneapolis:
◈ 조직신학서론

그리스도이신 말씀(Verbum, Sermo)의 기록이라는 사실로부터 성경의


62
질료적(material) 영감이 이미 확정되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이 성경의 성령 영감성을 성령의 작용(efficacia)
자체로부터 접근함으로써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이라는 사실에
더욱 집중하였다면, 일부 학자들은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집중하여 그것을 실체적으로 파악하고자 시도했다. 그들 가운데
월레스(Ronald S. Wallace)는 기독론적 접근의 효시를 보여 주었다. 그는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의 계시이며, 그리스도를 계시한다고 단정적으로
63
말한다.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64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신약과 구약은 실체에 있어서는 하나이나 그
표현 양식이 다양할 뿐이니, 그 일체성이 전형적으로 드러난 것이
65
그리스도의 육체라는 것이다. 월레스는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육체를
이중적으로 파악해서 그것이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성례의 몸으로서
하나님을 계시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러하므로 하나님의 신성을 숨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빌 2:7의 그리스도의 비하를 “말씀의 자기 숨김(the
66
self-concealment of the Word)”이라고 표현한다. 육체는 하나님께서
67
자신을 숨기시며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의 길이며 성령의 역사로
68
그 계시가 베일을 벗고 드러난다고 한다. 이렇듯 월레스는 말씀을 엄격하게
성례와 동일시한 나머지 계시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중보를 성례전적
의미작용(significare)에 제한해서 본 측면이 있다.

Augsburg Publication, 1966), 141-152.


62 한편 성경의 전체적이고 축자적인 영감에 기초해서 그곳에는 “하나님의 말씀(the
oracles of God)” 외에 어떤 인간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그
무오의 정도가 “현학적인 세밀함(pedantic precision)”에 까지 미치는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Murray, Calvin on Scripture and Divine Sovereignty, 29-31.
63 Ronald S.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57), 27, 97.
64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32.
65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8-10, 41.
66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12-17, 인용 16.
23.8-10, 41.
67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23: “Word and
Sacrament, therefore, do not merely take for us the place that visions and oracles and
the elaborate temple ceremonies took in the Old Testament; more particularly, they are
to us what Jesus and His Word and works were to those who received His grace during
the days of His flesh. They are for us the ‘flesh’ of Jesus Christ, the lowly humble form
He takes in revealing Himself and apart from which we cannot come to know His glory
or experience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The Word and Sacraments are thus the
chief treasure of the Church.”
68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129.

179
◈ 조직신학서론

월레스가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육체의 성례론적 의미에 더욱


치중했다면 머리는 성육신한 말씀과 기록된 말씀이 계시로서 동일함을
논증하려고 애썼다. 머리는 그리스도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진리”와 “성육신한 진리로서의
69
그리스도” 사이에는 어떤 불일치도 없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격적 말씀(the hypostatic Word)”으로서 성경 외에서는 우리를 만나지
70
않으니, 이것이 성경 무오의 명확한 증거라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은 오직
성령의 내적 역사로써 작용한다. 이와 같이 성경으로, 성경 가운데 하나님의
71
말씀이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아 계시되므로 성경에는 권위가 있다고 본다.
머리는 성경의 권위와 무오를 기독론적이며 성령론적으로 파악한 공이 있다.
이러한 입장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객관성(objectivity)”과 성령의
역사로서의 “인격성(personalism)”을 함께 주장하여 중세의 실재론과
유명론의 맹점을 칼빈이 극복했다고 본 토랜스와도 근본적으로 맥이 닿아
72
있다. 비록 말씀 자체를 위격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았지만 성령의 내적
증거를 단순히 구원론적 적용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고 말씀 자체와의
73
관계라는 측면에서 파악하고자 한 레인의 입장도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다.
성경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과 그 말씀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며 성령의 조명과 감화로 수납된다는 사실이 칼빈의
계시 이해의 핵심적 가르침이다. 성경의 무오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계시의
기독론적 측면과 성령론적 측면에 주목한 것은 합당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
두 가지 측면을 마땅하게 연결시키는데 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본고에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심과 그 말씀이 성령의 작용으로 역사함을
그리스도의 중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칼빈은 말씀의 확실성과 그
74
말씀의 내적 확신의 고리가 그리스도라고 보았다. 필자는 이 고리가

69 Murray, Calvin on Scripture and Divine Sovereignty, 35-39.


70 Murray, Calvin on Scripture and Divine Sovereignty, 39-43.
71 Murray, Calvin on Scripture and Divine Sovereignty, 43-51.
72 T. F. Torrance, “Knowledge of God and Speech about Him According to John
Calvin,” Revue d’Histoire et de Philosophie Religieuses 44(1964-1965), 409-422, 인용
422.
73Anthony N. S. Lane, “John Calvin: The Witness of the Holy Spirit,” in Faith
and Ferment (London: The Westminster Conference, 1982), 1-17.
74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 . . , 1559를 인용함에 있어서 다음 번역본을
참고한다.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l, tr. Ford Lewis Battles,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s. 20-21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1.9.3.
이하 Inst. 권.장.절 순으로 표기.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2.71. 이하
CO로 표기: “Mutuo enim quodam nexu Dominus verbi spiritusque sui certitudinem inter
se copulavit; . . .” Cf. Polman, “Calvin on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109.
◈ 조직신학서론

말씀으로서 자신의 영—진리의 보혜사 성령—을 주심으로써 그 영을 받은


사람과 연합하여 계속적으로 중보하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전체와 연관됨을 본고에서 논증하고자 한다.
이러한 인식 가운데 본고는 먼저 성경의 성령 영감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고찰하고 이어서 그의 기독론적 계시 이해의 인식론적 기초로서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의 필연성을 다룬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심이 논의된다. 이와 같은 실체적 이해 가운데, 마지막으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수납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중보가 어떻게
역사하는지 파악한다. 요약하면 본고는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과 그 말씀이 살아서 역사한다는 사실을 칼빈이 중보자 그리스도의
75
중보로 어떻게 역동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논구함이 목적이다.

2. 성경의 성령 영감

칼빈은 딤후 3:16을 주석하면서 본문의 “qeopneustoj”를 한정적이


아니라 서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전체 성경(pasa grafh, omnis scriptura 혹은
scriptura tota)이 성령으로 영감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제시했다. 그
논거로서 성경의 저자들이 “성령의 기관들(organa)”로서 성령의 “구술에
76
따라(dictatam)”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는 그가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기록자들은 “확실하고 진정한 성령의 필사자들(certi et authentici
77
spiritus sancti amanuenses)”로서 주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입으로 그들 속에서
78
친히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기록하였다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칼빈은
여기서 기계적이 아니라 유기적인 영감 교리와 함께 축자적 영감 교리까지
79
가르친다. 이러한 칼빈의 입장은 워필드(B. B. Warfield)에게 있어서 더욱

75 Cf. Willem van’t Spijker, “The Sealing with the Holy Spirit in Bucer and
Calvin,” in Calvin, Beza and Later Calvinism, Calvin Studies Society Papers 2005; John
Calvin and the Interpretation of Scripture, Calvin Studies X and XI 2000, 2002, ed. David
Foxgrover (Grand Rapids: CRC Product Services, 2006), 262-266.
76 The Commentaries of John Calvin, 46 vols., Calvin Translation Society

Edition (Grand Rapids: Eerdmans, 1948-1950), II Tim. 3:16 (CO 52.382-383). 이하


칼빈의 구약 주석은 이 판을 사용(vols.1-15). 그러나 신약 주석은 John Calvin, New
Testament Commentaries, ed., D. W. Torrance and T. F. Torrance (Grand Rapids:
Eerdmans, 1960-1972)을 사용. 주석 표기는 전체적으로 Comm. 성경 장.절로 표기.
77 Inst. 4.8.9 (CO 2.851).
78 Inst. 4.8.6 (CO 2.849). Cf. Inst. 1.6.1 (CO 2.53). 성경에서 자신의 거룩한 입술로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표징들은(signa loquentis Dei) 오직 성령의 은밀하고 내적인
증거(arcanum et interius testimonium)에 의해서만 그 실체가 드러난다.
79 칼빈의 성경의 영감 교리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들에 관해서, J. K. S. Reid, The
Authority of Scripture of the Reformation and Post-Reformation Understanding of the

181
◈ 조직신학서론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워필드는 “qeopneustoj”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작품에


친히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성경 저자의 영감뿐만 아니라
성경 자체의 영감까지 주장한다. 그리하여서 그는 이 단어를 “하나님께서
80
성경을 내 쉬셨다” 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워필드가 간파한 바와 같이,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의 영감 교리는 그
것이 성령의 특별한 감동을 받은 인간 저자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인격
적 영감의 수준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마치 처음 인류를 지으실
때 호흡을 불어 넣으신 것과 같이 말씀을 불어 넣으셨다는 축자 영감의 수
준으로까지 나아간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경은 “신성한 어떤 것을 숨
81
쉰다.” 즉 성경의 영감성은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계시(revelation Dei ipsius)
로서 스스로 존재한다는—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신학함에 있어서 전개한—존
재의 원리(principium essendi)를 전제로 한다. 성경은 기록된 영원하신 하
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요 14:6).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진리는 영원히 스스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말씀의 진리는 절대적이고 객관적
82
이다. 성경의 진리는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으로서 계시되기 때문에
오직 성령의 내적 조명과 감화를 통한 믿음으로써 수납된다(principium
83
cognoscendi). 칼빈에게 있어서 이러한 계시의 존재와 인식의 원리는 총체
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이심과 말씀으로 계시하심으로 전개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즉 진리로서, 영원히 계시며
역사하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 말씀이 오셔서 진리를
계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루셨다. 성육신이 계시의
정점(culmen)으로 여겨지는 것은 성경의 기록물(物)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즉
만세 전의 구원협약에 따라서 작정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으로서 육신을

Bible (London: Methuen, 1957), 30-55. 인격적 영감은 Werner Krusche에 의해서
대표적으로 주장되었다.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57). 이 견해는 Wilhelem H. Neuser에 의해서 지지되었다.
“Calvins Verstandnis der Heiligen Schrift,” in Calvinus Sacrae Scripturae Professor, ed.
Wilhelm H. Neuser (Grand Rapids: Eerdmans, 1994), 58-59.
80 Benjamin B. Warfield, Calvin and Augustine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1956), 9. 이러한 워필드의 입장을 지지하는 딤후 3:15-17의 해석에 관하여, Orr,
Revelation and Inspiration, 100-162.
81 Inst. 1.8.1 (CO 2.62).
82Cornelius Van Til, The Defense of Faith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1955), 39-41.
83 이는 principia theologiae로서 논해진다. Cf.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ume 1: Prolegomena, ed. John Bolt, tr. John Vriend (Grand Rapids: Baker,
2003), 89, 207 ff.; Abraham Kuyper, Principles of Sacred Theology, tr. J. Hendrik De
Vries (Grand Rapids: Eerdmans, 1980), 341 ff.
◈ 조직신학서론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써 창조와 구원의 지식을 드러내시며 이루셨기


때문이다. 이를 칼빈의 관점에 따라서 인식론적으로 환언하면,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속주로서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타락 전 하나님 형상과 타락
후 하나님 형상 그리고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아는 지식이
84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비로서 밝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3. 계시론의 기독론적 지평: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

계시론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존재와 작용을 다룬다. 일반계시는


모든 사람이 가지는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서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온 사역을 인간이 스스로 발견하게끔 하시는 일반은총으로 역사한다.
특별계시는 선택된 사람만이 가지는 구속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서
하나님께서 인류를 찾아 가셔서 자신의 사상을 직접 표현하시는
특별은총으로 역사한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나 전자는 후자가 없이 본질적으로, 포괄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85
타락 후 자연적 은사들은 부패되었으며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제거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일반계시를 누리되, 구원의 지식이 없이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돌리지 못한다. 타락으로 말미암은 원죄의 죄책과 오염이
86
일반계시를 은총으로 여기지 못하도록 자연인을 질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계시는 불신자들이 그들의 멸망을 단지 핑계치 못하게 할
87
뿐이다. 이러한 핑계치 못함(inexcusabilitas)으로 말미암아 선택받지 않은
88
백성은 마땅한 형벌(poena debita)을 받게 된다. 반면에 특별계시의 은총으로
거듭난 사람은 일반계시의 은총을 전체적으로 누린다. 거듭난 사람은
일반계시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알고 영화롭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계시의

84 Cf. Warfield, Calvin and Augustine, 29-130; P. Lobstein, “La Connaissance


religieuse d’après Calvin,” Revue de théologie et de philosophie religieuses 42(1909),
53-110; Edward Dowey Jr.,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rev. ed.(Grand
Rapids: Eerdmans, 1993); T. H. L. Parker, The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 rev.
ed.(Grand Rapids: Eerdmans, 1959); Richard A. Muller, “Establishing the Ordo docendi:
The Organization of Calvin’s Institutes, 1536-1559,” in The Unaccommodated Calvin:
Studies in the Foundation of a Theological Tradi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118-139.
85 Inst. 2.2.4 (CO 2.189): “naturalia dona in homine corrupta esse,
supernaturalia vero ablata.” Inst. 2.2.12 (CO 2.195): “naturalia dona fuisse corrupta in
homine per peccatum, supernaturalibus autem exinanitum fuisse.”
86 Inst. 2.2.12 (CO 2.196).
87 Inst. 2.2.22 (CO 2.204): “Finis ergo legis naturalis est, ut reddatur homo
inexcusabilis.”
88 Inst. 3.23.11 (CO 2.707).

183
◈ 조직신학서론

본래적 목적은—일반계시든 특별계시든—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를 통해서


89
인식론적으로 성취된다.
칼빈에게 있어서 신앙의 유비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믿는 믿음으로
확신 가운데 지식을 수납함에 다르지 않다. 계시와 은총이 분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기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그가 양자를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라는 관점에서 역동적으로 파악함에 기인한다.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은혜는 빛과 생명으로 나타나신 구원을, 진리는
90
말씀으로 나타나신 계시를 뜻한다. 구원은 이루심이며 계시는 드러내심이다.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심이 이루심이 된다. 복음은 계시의
이루심이자 이루심의 계시이다. 복음이 이루심이자 계시가 됨은 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자신의 의를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조성하고 그들 가운데 계속적으로 역사함을 뜻한다. 이로써 구원론의
기독론적 지평이 인식론적으로 확보된다.
칼빈의 계시 이해는 단순히 인식론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계시자로서 계시 자체이며 계시에 이르는 은혜의 길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제 2위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 영원하신
독생자이시다. 그가 자신을 구속중보자로서 구원을 계시하며 계시와 동시에
계시를 이루신다. 이러한 이해는 창조중보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창조를
계시하시며 이루신다는 지식에 이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반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라기 보다는 창조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한 지식이라고
정의됨이 합당한다. 이는 특별계시를 구속주 중보자에 관한 지식이라기
보다는 구속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한 지식이라고 부름이 합당함과 같다.
왜냐하면 실체에 있어서(ad substantiam) 중보자는 한 분이시나 경륜에
있어서(ad administrationem) 계시와 그 이룸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경륜상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말씀의 계시와 함께 말씀의 조명과 감화에 이른다.
대체로 ‘칼빈의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의 신학’을 전개해 왔던
주요한 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말씀 자체시며 그 말씀의 전체 인식 과정을
주장하시는 중보자시라는 측면을 동시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단지
인식론적 전제를 각자 수립하고 그 가운데 칼빈의 신학을 ‘꺼꾸로’ 세우고자
하는 우를 범해 왔다.
저명한 칼빈 신학자 도웨(Edward A. Dowey Jr.)와 팔커(T. H. L. Parker)의
칼빈의 인식론에 대한 논쟁은 그 일단(一端)을 잘 제시한다. 도웨(Edward A.

89 칼빈은 로마서 12:6의 “믿음의 분수대로(kata thn avnalogian thj pistewj)”를 “ad
fidei analogiam”으로 번역한다. “Prefatory Address to King Francis I of France,” Inst. 12
(CO 2.12).
90 Cf. Comm. Jn. 1:14 (CO 47:13-16).
◈ 조직신학서론

Dowey Jr.)는 숨겨진 하나님(hidden God)과 사람에게 맞추어 주신


하나님(accommodated God)이라는 개념을 도출해서 마치 칼빈이 전자를
하나님의 하나님으로의 계시로서, 후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의 계시로서
91
구별해서 이해하듯이 다룬다. 도웨는 칼빈이 성육신을 성례전적으로
이해하여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에 적용하였다고 본다—일반계시로서
작용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식 자체를 얻었음을 의미하고 특별계시로서
92
작용함은 지식 자체와 더불어서 구속적 감화까지 얻었음을 의미한다.
특별계시 즉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의
93
은혜에 동참하는 것을 아우른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칼빈은 믿음의 시작은
지식이며 그 지식은 “그리스도의 지식(cognitio Christi)”으로서 “일정
94
그리스도의 맛(gustus aliquis Christi)”을 보는 것으로 여긴다고 지적한다. 성례
관점에서 칼빈은 그리스도는 단지 은유가 아니며 창조의 로고스는 인간의
95
삶을, 구속의 로고스는 초자연적인 삶을 지시한다고 강조한다. 구속주
96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질료로서 그리스도는 또한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질료가 된다는 것이다.
도웨는 이러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질료로서의 로고스에 대한
지식이 율법과 복음으로 계시됨을 칼빈의 인식론의 특징으로 주목한다.
율법에는 지식적 측면 뿐만 아니라 규범성이 있는데, 후자는 계시에
97
대한—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인간의 반응을 제시한다고 본다.
규범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절망과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을 내포한다.
우주적 질서를 포괄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의 계시로서의 율법의 규범성은
원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을 정죄하며 동시에 그리스도로 도망치게 한다.
이러한 구원과정을 통하여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율법과 구속주
하나님의 뜻의 계시로서의 복음은 그 실체가 하나임과 더불어서 창조주와
98
구속주가 한 분이심이 계시된다고 본다. 이러한 도웨의 입장은 단지
인식론에 편향되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로고스 말씀은 그 자체로

91 Dowey,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7-8, 17.


92 이런 취지에서 그리스도가 하늘을 떠나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는 소위
초칼빈주의(the so-called extra Calvinisticum)의 일단을 여실히 보여 주는 칼빈의
말이(Inst. 2.13.4, CO 2.352) 여기서 인용된다. Dowey,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9-10, 14-16, 65, 135, 164-166.
93 Dowey,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164-166.
94 Dowey,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172, 181.
95 Dowey,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7, 203.
96 Dowey,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220.
97 Dowey,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222-225.
98 Dowey,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238.

185
◈ 조직신학서론

계시로서 제시되지 않으며 단지 계시의 질료로서 나타날 뿐이다. 오히려


계시는 아들을 통한 아버지의 뜻의 드러남으로만 이해된다. 계시는 아버지의
뜻의 드러남으로서 아들 자체시며 그러함으로 아들을 통하여서 계시되는
것이다: 아들은 단지 계시의 자료이거나 반영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에 관한 칼빈의 이해가 “변증법적인 것(a dialectic one)”이라고
99
도웨가 말했을 때, 그는 단지 로고스를 인식론적으로만 파악했다. 도웨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말씀으로서의 존재와 그 말씀의 계시를 칼빈이
변증법적으로 파악했다고 보는데, 우리는 도웨 자신의 접근법이
변증법적이지 않았는가 묻는다. 하나님의 지식(혹은 진리 혹은 계시)은
성육신에 의해서 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말씀이 로고스로부터
나온다고 하지 않고 로고스가 말씀 자체라고 가르친다. 로고스는 모든 진리
자체심으로 진리로서 역사한다. 진리는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서 계시되는
것이지 성육신에 의해서 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성육신은 중보자가
신인양성의 중보자로서 오셔서 자신을 드러내셨음을 의미한다. 성육신은
위격의 창조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위격적 연합이다.
도웨와는 달리 팔커(T. H. L. Parker)는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로고스가
말씀이자 계시 자체임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다만 팔커는 일반적인 생래적
지식(innata notitia)을 모두 구원지식에 이르는 과정으로서만 파악하여 칼빈의
100
신학에 있어서 일반계시의 자리를 박탈한다. 팔커는 일반계시로 말미암은
핑계할 수 없음(inexcusabilitas)을 타락한 인류의 죄책에 돌리지 아니하고
101
스스로 계시할 수 없는 창조 자체에 연관시킨다. 칼빈은 인류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그것들 안에는 하나님을
102
아는 지식이 만물에 분명히 새겨 져 있다고 보았다. 아담이 여전히
순수했다면(“si Adam stetisset integer”) 지금의 피조물들로도 충분히 하나님을
103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의 중보자가 역사하여 알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웨는 모든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단지 창조의
104
회복으로서의 구원 지식에 한정함으로써 이러한 이해를 곡해하였다. 결국
도웨가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리스도와 동일시 했을 때 그는
말씀에 계시된 진리 자체가—일반계시든 특별계시든—그리스도라고 보지
않고 다만 계시의 작용을 계시라고 본 측면이 강하다. 말씀은 그리스도의

99 Dowey,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239, 241.


100 Parker, Calvin’s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 36-37, 55.
101 Parker, Calvin’s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 55-56.
102 Inst. 1.5.1, 15 (CO 2.41-42, 52); 2.2.12-17 (CO 2.195-200).
103 Inst. 1.2.1 (CO 2.34).
104 Parker, Calvin’s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 85.
◈ 조직신학서론

105
구속행위와 다르지 않으며, 곧 계시 자체가 구원이라는 것이다.
도웨가 말씀 자체가 아니라 말씀의 드러남을 계시라고 보았다면
팔커는 말씀 자체가 아니라 말씀 자체의 작용 혹은 역사를 계시로 보았다.
비록 견해의 차이는 있으나 양자는 모두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말씀이
진리로서가 아니라 계시된 진리의 물(物)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으로서
파악한다. 중보는 중보자의 존재를 전제한다. 말씀이 계시 자체이다. 이
말씀이 계시된다.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격으로서 위격적으로
존재하신다(subsistere). 말씀은 내삼위일체적(intra-Trinitarian)으로 영원하신
아들의 나심을 의미하지만, 외적 경륜에 있어서는 중보자 되심을 의미한다.
그 분은 말씀으로서 존재하심으로 말씀으로 작용하신다. 즉 중보자로서
중보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계시 자체로서의 말씀의 계시됨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의 계시 작용을 이해해야 한다. 비교적
최근의 작품에서 부틴(Philip Walker Butin)은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모든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국한되며 이것이 우리에게 계시된
106
계시와 다르지 않음을 지적함으로써 말씀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부틴의 견해가 단지 인식론적 측면에 몰두했던 도웨와 팔커의 이해에
새로운 빛을 비춰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관점에서 칼빈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속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보았다고 말했을 때 어디에서도 말씀의 중보자 되심과 중보사역에
107
대한 인식은 나타나지 않는다. 과연 칼빈은 말씀의 내삼위일체적 위격적
존재와 외적 경륜을 그 분의 중보자 되심과 계속적 중보로서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4. 로고스, 하나님의 자기 계시(revelatio ipsius Dei)

개혁 신학의 sola Scriptura의 원리는 오직 말씀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수납된다는 측면에서는 인식론적으로(epistemologically)
그리고 오직 성경이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진리의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는
존재론적으로(ontologically) 다루어 진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시작하면서
진실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졌음은 선포한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이 양자의

105 Parker, Calvin’s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 99.


106 Philip Walker Butin, Revelation, Redemption, and Response: Calvin’s
Trinitarian Understanding of the Divine-Human Relationship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56-58.
107 Butin, Revelation, Redemption, and Response, 24.

187
◈ 조직신학서론

선후(先後)를 논하는데, 그것을 획일적으로 정할 수는 없으나 다만 이 두


가지 지식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공히 하나님 자신의 “손”이라는 사실, 즉
108
모든 지식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우리에게 수여된다는 사실이 천명된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저자(auctor)시며 진리의 수여자(largitor)시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이 스스로 진리의 저자이심으로 진리
109
자체시다. 이 진리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씀이시다. 그 말씀이
성령의 역사로 우리에게 수납된다. 이러한 수납은 우리 속에 “살며 기동하고”
110
계신(행 17:28) 하나님께 “순종함”에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계시는
삼위일체의 경륜으로 역사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심은 그 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심이다.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 그 분은 스스로 “진리”시다. 이
111
진리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조명과 감화로 우리에게 믿음으로 수납된다.
스스로 존재하는 진리를 믿음으로 수납함에 있어서 작용하는 성령, 구약 시
대 선지자들을 감화시켜 계시의 도구로서 사용했던 성령—이 성령이 영원하
112
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특정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
의 말씀이 “성령에게 돌려지고(ad spiritum sanctum)” 성령이 “예언의 저자
(prophetiarum autor)”로서 제시된다. 제 2위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말씀”으로서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심판하심이 곧 성령의
113
위격을 계시한다(시 33:6; 사 11:4). 성령이 호흡하는 “신적인 무엇(divinum
114
quiddam)”이 곧 말씀이다. 성령은 말씀의 작용(efficacia)에 다르지 않다. 성
령이 우리에게 가르침으로써 수여하는 진리가 곧 말씀이다. 성령과 말씀은
115
함께 역사한다.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 스스로 계시하신다. 이러한

108 Inst. 1.1.1 (CO 2.31-32), 1.5.8 (CO 2.46-47), 1.8.1 (CO 2.61-62).
109 Cf. Comm. Jn. 1:14 (CO 47:324): “Veritas quibusdam hic salvificam
coelestis sapientiae lucem significat, aliis vero substantiam vitae bonorumque omnium
spiritualium, quae opponatur umbris et figuris: sicuti capite primo: Gratia et veritas per
Iesum Christum facta est. Mihi veritas pro fidei perfectione accipi videtur, sicuti via pro
initio et rudimentis. .
110 Inst. 1.1.1 (CO 2.31-32), 1.6.2 (CO 2.54-55), 1.7.5 (CO 2.60-61).
Cf. Inst. 1.7.4-5 (CO 2.58-61), 3.2.14-37 (CO 2.409-428). 칼빈은 여기서
111

성령의 내적 증거로 말미암는 자증성과 믿음의 삼 요소로서 지식(notitia), 감화(persuasio),


그리고 확신(fiducia)을 논한다.
112 Cf. Comm. 1 Pet. 1:11 (CO 55.217-218).
113 Inst. 1.13.15 (CO 2.102-103).
114 Inst. 1.8.1 (CO 2.62).
115 대체로 성령의 다양한 사역에 관해서 논하는 학자들조차도 존재적-경륜적

삼위일체론 관점에서 말씀(그리스도)과 성령의 관계를 이상과 같이 역동적으로(존재적,


사역적, 그리고 인식적) 파악하지는 않는다. Cf. Butin, Revelation, Redemption, and
Response, 48-49, 52-53, 76-94; Ferguson, The Holy Spirit, 26-56.
◈ 조직신학서론

말씀과 성령의 이해 가운데, 우리는 칼빈이 성령을 “성경의 저자”라고 말한


116
바를 이해할 수 있다.
계시는 모두 로고스를 통해서 계시되며, 로고스는 또한 계시의 내용
이 된다. 그리고 로고스는 삼위일체 가운데 내재적이며 경륜적으로 이해되며,
117
삼위일체는 또한 우리에게 맞추어 주신 계시의 내용이 된다. 계시는 성자
하나님 곧 하나님의 로고스를 통해서 온다. 아들은 “아버지의 영원하고 실체
118
적인 말씀(Verbum Patris aeternum et essentiale)”이기 때문에 아들이 우리의 중
보자가 되어서 중보함이 없으면 “가까이 가지 못할 빛”(딤전 6:16)에 거하시
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을 아는 빛”(고후 4:6)이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119
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 “내면의 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이끌
림을 받은 자(요 6:44; 12:32; 17:6)만이 아버지를 알게 되고, 유일하신 참 하나
120
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 그리스
도는 말씀 자체일 뿐만 아니라 말씀의 전달자이며 해석자, 그리고 말씀의 완
성자이다. 이상과 같은 특성은 성경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기록이며 그리
스도 계시 즉 기록된 로고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의 길로서 중보자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획득함이 참 신지식의 길이다. 성경이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기록된
로고스이기 때문에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아니하면 아무도 참되고 건전한 교
121
리의 한 입 맛조차 볼 수가 없다.”

5. 지식의 중보자 그리스도

말씀이 육신이 되사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의를 다 이루신 주님께서


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서 자신의 영을 내려 주심으로써 자
신과 함께 한 백성을 친히 다스리신다. 자신의 영을 내려 주심은 곧 다 이루
신 자신의 의를 전가하심이다. 그리스도는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동시에 우
리 속에 계신다. 그 분은 진리 자체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서 계시의 영

116 Inst. 1.9.2 (CO 2.71): “Scripturarum autor est; varius dissimilisque esse non
potest. Qualem igitur se illic semel prodidit, talis perpetuo maneat oportet.”
117하나님의 말씀은 유모가 아기에게 옹알이 하듯이 맞추어 주신 것이라는
accommodatio원리가 삼위일체의 도입부에 주목할만하게 제시되어 있음. 강조됨을 주목할
것이다. 서론으로서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하게 제시되었음. Inst. 1.13.1 (CO 2.396-397).
118 Inst. 1.13.7 (CO 2.95).
119 Inst. 3.2.1 (CO 2.398).
120 Inst. 3.1.4 (CO 2.396-397).
121 Inst. 1.6.2 (CO 2.54).

189
◈ 조직신학서론

으로 작용하신다.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로 우리를 초월한(extra nos) 말씀이


122
우리 속에서(in nobis) 말씀된다.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성도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서 수납한다.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말씀
123 124
의 사역자(minister), 내적 교사(interior magister)로서 아버지께 받은 것을 계
125
시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다면(extra Christum) 참 지식이 없다.
그리스도의 중보는 계시의 전체 과정에 미친다. 영원하신 말씀이신 그
리스도께서 중보자시다. 그 분께서 중보자의 사역을 다 이루신다. 그 분께서
계속적으로 중보하심으로써 다 이루신 의를 성도에게 전가하신다. 그리스도
의 중보로 말미암아 말씀이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인쳐진다. 성령의 인침
126
(obsignatio)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경의 학교(schola)에서 겸손하고 가르칠
127
만한 독자(modestus ac docilis lector)가 된다. 이렇듯 감화된 지식(notitia
persuasa)은 오직 말씀의 말씀의 확실성(certitudo)을 확신(fiducia)하는 사람에게
만 수납된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와 함께 신비한 연합의 띠로 묶인
128
사람을 한 성도만이 이를 경험한다.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그와 교
제하며 교통하는 성도는 그의 영의 역사로 말미암아 말씀을 받고 그 진리에
129
따라서 존재가 변화한다. 말씀이 이미 존재하는 진리의 계시임을 확신함은

122 Cf. Willem van’t Spijker, “ ‘Extra Nos’ and ‘In Nobis’ by Calvin in a
Pneumatological Light,” in Peter De Klerk, ed. Calvin and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Calvin Studies Society, 1989), 44-46.
123 Comm. Jn. 17:8 (CO 47:379).
124 Inst. 3.1.2, 4 (CO 2.394-395, 396-397); Comm. Eph. 1:17 (CO 51.156).

125Cf. Byung-Ho Moon, Christ the Mediator of the Law: Calvin’s Christological
Understanding of the Law as the Rule of Living and Life-Giving (Milton Keynes, UK:
Paternoster, 2006), 102-104.
126Inst. 1.6.4 (CO 2.55).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또한 성령의 학교(schola spiritus
sancti)라고도 불린다. Inst. 3.21.3 (CO 2.681). Cf. Kenneth S. Kantzer, “Calvin and the
Holy Scriptures,” in Inspiration and Interpretation, ed. John F. Walvoord (Grand Rapids:
Eerdmans, 1957), 154-155.
127 Inst. 1.7.5 (CO 2.60-61). 칼빈은 가르칠만함(docilitas)를 중생의 표로서
인식한다(Inst. 1.7.3, CO 2.58). 칼빈은 시편 주석 서문에서 자신의 갑작스런 회심(subito
conversio)을 말하면서 자신의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에 가르쳐 질 만하게 되었다고
말한다(CO 31.21-22). 특히 기독교 강요 1권의 계시론을 마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지혜는 겸손히 가르침만한 심령이 되어서 성경에서 가르쳐진 무엇이든지 예외 없이
껴안는 것이다(Nam sapere nostrum nihil aliud esse debet quam mansueta docilitate
amplecti, et quidam sine exceptione, quidquid in scripturis traditum est”(Inst. 1.18.4, CO
2.174).
128 Inst. 1.9.3 (CO 2.71): “Mutuo enim quodam nexu Dominus verbi spiritusque
sui certitudinem inter se copulavit; . . .”
Comm. Jn. 15:27 (CO 47.355). 이러한 말씀과 성령의 sacer nexus로부터
129

기독교인의 자유가 논해 진다. 성령의 자유는 말씀으로부터가 아니라 말씀을 위해서이다. W.


◈ 조직신학서론

130
그 진리에 따라서 구원 받음과 다르지 않다. 개인 구원 서정의 전체 과정
에 있어서 구원 진리의 계시와 작용(efficacia)은 동시에 역사한다. 곧 드러내
심이 이루심이라는 계시의 정점이 성도의 구원 과정에 역사한다. 이 역사가
“그리스도의 영”의 조명과 감화로 말미암는다. 오직 “그리스도 자신의 입에
서 나오는(ex ore ipsius Christi)” “그리스도의 말씀”을 수납할 때 이러한 역사가
131
일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만 수납
된다. 칼빈은 믿음을 성령의 내적 감화로 우리 가운데 인쳐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약속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고 흔들림 없이 아는 지식
132
이라고 정의한다. 믿음의 지식은 율법과 복음 즉 뜻과 이루심을 포함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u`postasij, substantia)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
거(evlegcoj, demonstratio)이다(히 11:1). 믿음은 말씀을 대상으로 하나 말씀의
133
감화의 도구인(efficient cause)이 된다. 믿음은 지식에 대한 확신(fiducia)이다.
믿음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다(요 17:3). 믿음은 맹목적이지 않다. 믿음은 확실한 지식(cognitio explicita)이
134
다. 칼빈이 믿음의 경험(experimentum fidei) 혹은 확실한 경건의 경험
(certa experientia pietatis)으로 부르는 것은 성도가 이러한 확실한 지식을
135
수납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과 우리가 경험하는 행위로써
136
우리를 가르치신다. 경험이라는 교사(experientia magistra)를 통해서 우리
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선포하신대로 계시
137
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경험은 말씀에 선행하지 못하며 말씀이 없는 경험
138
은 공허하다. 이러한 말씀과 경험, 혹은 진리와 감화, 혹은 역사(役事)와

Balke, “Calvin’s Concept of Freedom,” in Freedom, eds. A. van Egmond and D. van
Keulen (Verspreiding in Belgium: Uitgeverij Callenbach, 1996), 36.
130 Inst. 1.8.13 (CO 2.69): “Quare tum vere demum ad salvificam Dei
cognitionem scriptura satisfaciet, ubi interiori spiritus sancti persuasione fundata fuerit
eius certitudo.”
131 Comm. Jn. 16:25 (CO 47.370).
132 Inst. 3.2.7 (CO 2.403).
133 Inst. 3.2.41 (CO 2.431-432).
134 Inst. 3.2.2 (CO 2.398-399).
135 Cf. Inst. 1.13.14 (CO 2.102); Comm. Jn. 14:20 (CO 47.331), 16:16 (CO
47.365).
136 Comm. Ps. 71:17 (CO 31.660).
137 Inst. 1.10.2 (CO 2.73).
138 W. Balke, “The Word of God and Experientia According to Calvin,” in
Calvinus Ecclesiae Doctor, Die Referate des Congrès International de Recherches
Calviniennes 1978, ed. W. H. Neuser (Kampen, Netherlands: Kok, 1978), 25-26.

191
◈ 조직신학서론

이룸(affectus)에 대한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이해는 말씀이 말씀하신다는 사


실, 혹은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신다는 사실 가운데서만 합당하게 수용
된다.
시편 19편에 대한 칼빈의 주석은 믿음으로 계시를 수납함이 경험이
고, 이 계시가 율법과 복음으로서 약속과 성취를 드러냄이라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잘 나타낸다. 오직 참된 경건은(pietas vera) 삶의 규범으로서 언약의
139
말씀인 율법의 총화로서 십계명을 듣고 지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완전하고 의로운 율법을 사람들은 지킬 수 없으므로, 만약 그리스도의 영이
율법을 살리지 않으면 율법은 단지 무용하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치
140
명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율법 아래에서 그리스도를 배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지도(directio)와 보호(custodia)를 받음으로
써만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게 된다. 성령은 또한 주의 백성이 죄에 빠
141
졌을 때 먼저 신음함으로써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를 조명한다. 곧 경
142
험은 하나님의 중생의 영으로 말미암아(Dei spiritu regenitus) 하나님의 말씀
143
을 확신하는 것이다.
칼빈의 율법관은 그의 기독론적 계시관의 범위가 규범적인 차원에 까
지 확장됨을 잘 제시한다. 칼빈은 율법을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regula
144
vivendi pie et iuste)으로서 이해한다. 이렇듯 율법의 본질이 삶의 규범으로서
파악되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조차 규범의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서 진정한 경건의 도(vera pietatis ratio)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
었을 뿐만 아니라,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에 자신들이 무능함을 알게 됨
으로써 극심한 심판의 공포 속에서 자신들이 비자발적으로(subactos), 그러나
145
불가피하게(invite), 중보자에게로 이끌려 감을 깨닫게 되었다.” 율법은 중생

139 Comm. Ps. 19:7 (CO 31.199).


Comm. Ps. 19:8 (CO 31.201): “Porro certum est, ubi legem non vivificat
140

spiritus Christi, non inutilem modo, sed mortiferam quoque esse suis discipulis. Nam
extra Christum, non nisi inexorabilis rigor in lege viget, qui totum humanum genus irae
Dei et maledictioni suiicit. . . . ideoque Christum sub ea[lege] includit.”
141 Comm. Ps. 19:12-13 (CO 31.205-206).
142 Comm. Ps. 19:13 (CO 31.206).
143 Cf. Balke, “The Word of God and Experientia According to Calvin,” 21-22.
Inst 2.7.1 (CO 2.252). 칼빈의 율법에 대한 정의(regula vivendi pie et
144
recte)에 대해서, Confession of Faith (1536), CO 9.694, 22.86; The Catechism of the
Church of Geneva in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tr., intro., notes by J. K. S. Reid,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 22 (Philadelphia: Westminster, 1954), 118 (CO
6.51-52); Comm. Ex. 19:1-2 (CO 24.192); Matt. 5:19 (CO 45.172-173); Rom. 7:11 (CO
49.126).
145 Inst. 2:8:1 (CO 2.266).
◈ 조직신학서론

한 사람들을 위하여 더욱 본질적으로 신학적인 작용을 한다.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율법은 가르치는 사역(doctrina)과 권고(勸告)하는 사역(exhortatio)을 감
당한다(usus in renatis). 가르치는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146
맞추어 가는 과정으로서 이성(ratio)과 더욱 연관된다. 한편 권고의 사역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아는 바대로 행하고자 하는 의지(voluntas)와 더욱 관
련된다.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율법의 규범과 함께 역사하는 은혜의 약속에
147
따른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성도는 날마다 거룩해진다.
말씀이신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그의 영의 역사로 심령
이 감화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수납한다. 말씀을 받음이 그
진리에 따른 존재의 변화를 수반함은 그리스도께서 계속적으로 중보하시기
때문이다. 중보자 그리스도가 지식을 새롭게 하며, 기도로 우리를 위해서 중
보하시며, 우리의 구원을 그의 의의 계속적 전가로써 완성하신다. 이하의 주
석에서 칼빈은 율법과 복음의 역사가 성도의 존재의 변화에 작용하는 모습
을 표현한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공로의 전가가 계시의 측면에서 언급된
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공로가 우리에게 나누어 질 때 율법의 의가 충족되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우리가 의롭다 칭해진다. 이런 이유로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함(perfectio)이 우리의 육체에 나타났는데, 이는 이런 엄격한 요구가 더
이상 우리를 저주하는 힘을 가지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의 띠로(spiritus sui vinculo) 자신에게 묶인 사람에게만 자신의
148
의(iustitiam)를 나누어 주신다.

6. 결론: 그리스도의 고리

이상에서 칼빈의 계시 이해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의 전 과정


을 중보자로서 중보하신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중보자의
중보는 단순히 인식론적 차원에서 변증법적으로나 수사학적으로 논구될 것
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차원에서 신학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것임

146 Comm. Rom. 7:21 (CO 49. 133): “Legem Dei, quae sola proprie sic
nuncupatur, quia est iustitiae regula, qua vita nostra recte formatur. Huic coniungit
legem mentis, sic appellans propensionem fidelis animae ad obedientiam divinae legis:
quia est quaedam nostri cum lege Dei conformatio.”
147 Inst. 2.7.12 (CO 2.261-262).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칼빈은 신자를 위한
율법의 용법을 “eos officii sui admonendo ad sanctitatis et innocentiae studium excitet . .
. docere et exhortari et stimulare ad bonum” 라고 표현한다. 1536 Inst. 6.2 (CO 1.196);
Inst. 3.19.2 (CO 2.614).
Comm. Rom. 8:4 (160, CO 49.140). 여기서 칼빈은 iustitia와 iustificatio를
148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193
◈ 조직신학서론

149
이 진술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 스스로 존재하며 성령의 영
감으로 그 자체로서(축자적 영감) 영감된 저자들(인격적 영감)에 의해서 기
록된 말씀이다. 말씀을 믿음은 그 말씀의 영감성을 믿으며 동시에 그 말씀의
감화에 순종하는 것이다. 결국 계시의 전체 과정은 계시물(物) 자체, 곧 하나
150
님의 영원하신 말씀의 존재와 사역—중보자의 중보—에 귀결된다. 질료적
으로는 그리스도가 계시의 대상이나 그 추구는 일반 역사에서와 마찬 가지
로 사람들의 주장과 가설로 이루어지므로 기독교의 진리는 단지 최종 진리
151
를 향하여 나아갈 뿐인 것이 아니다.
칼빈의 계시론은 은총론과 함께 추구된다. 일반계시는 일반은총적 계시
이며 특별계시는 특별은총적 계시이다. 일반계시는 일반은총 가운데 모든 사
람에게 계시된다. 특별계시는 특별은총 가운데 선택된 사람에게만 계시된다.
일반계시는 그리스도의 창조 중보를 통해서 그리고 특별계시는 그리스도의
구속 중보를 통해서 계시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을 통하여서 지식을 중
보하신다. 일반계시는 아들의 창조 중보의 계시이다. 특별계시는 아들의 구
속 중보의 계시이다. 따라서 모든 계시는 공히 아들의 중보를 통해서 은총으
로서 계시되며 그렇게 역사한다. 다만 타락으로 말미암아 창조 중보자를 통
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조차도 특별계시로 말미암아 오게 되었다. 따라서 십
자가 위에서 다 이루신 중보자 그리스도의 대속적 은총이 계시의 중심이 된
다. 믿음으로 계시를 수납함은 곧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는 것이
다. 칼빈의 인식론—그리고 그를 충실히 계승한 개혁주의자들의 인식론—의
특징은 성령의 내적 감화로 자증하는(aujtopiston, self-authenticating) 하나님의
말씀이 곧 중보자 그리스도시며 그 분의 중보로 수납된다는 사실에 기인한
다. 믿음이 곧 지식이며 믿음에는 지식의 요소가 있음이 사실이지만 단지 믿
는 행위로 믿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믿음에 이름은 그리
152
스도의 중보를 믿음으로 말씀을 믿음에 이름을 의미한다.

149
Cf. Stephen Edmondson. Calvin’s Christolog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본서는 기존의 수사학적이거나 변증법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언약에 기초한 중보자
그리스도의 삼중적 중보직을 중심으로 칼빈의 기독론을 파악하고 있다.
150 계시와 영감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워필드에게도 계승된다. 다만 워필드에게
있어서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에 대한 인식은 결여되어 있다. Benjamin B. Warfield,
“Calvin’s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 and Calvinism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1956), 79, 82-90.
151 이러한 입장은 판넨베르그에 의해서 주장된다. Wolfhart Pannenberg,
Systematic Theology, tr.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1991), 54-61.
152근래 플란팅가는 칼빈에 있어서 “믿음이 지식(faith is knowledge)”이라는
명제를 말씀의 자증성(self-authentication), 성령의 내적 감화(internal testimony or
witness of the Holy Spirit), 그리고 “믿음을 산출하는 과정(a belief-producing
process)으로서의 믿음(faith)”의 요소들을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칼빈은 토마스
아퀴나스와도 거의 이해의 궤를 같이한다고 본다. 다만 플란팅가의 개혁주의
◈ 조직신학서론

말씀의 완전 축자 영감(the verbal and plenary inspiration of the Word)에 대


한 칼빈의 이해는 지체된 성도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에
기초하고 있다. 이 연합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은 영감된 하
나님의 말씀을 그 영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감화된 심령으로 믿음으로 온전
하게 수납한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중보하심으로 말씀의 확실성
(certitudo)을 믿음 가운데 확신(fiducia)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의 조명과 감
화로 성도들은 말씀을 수납하고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리고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 분을(extra nos) 속에 모시고(in nobis) 날마다 지식을 새롭게
공급받는다. 이는 오직 말씀으로서 말씀하시는 그 분의 계속적 중보로 말미
153
암는다. 스스로 이미 존재하는 말씀의 확실성과 그것에 대한 믿음의 확신
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고리(vinculum)로 연결됨이, 그 은혜의 고리에 우리가
154
매임이 칼빈이 전개한 sola Scriptura 진정한 해석학적 지평이다.

인식론(Reformed epistemology)”은 말씀이 곧 중보자로서 중보함으로써 계시의 전 과정에


역사함을 간과했다. Alvin Plantinga, Warranted Christian Belief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249-258.
153 Cf. Moon, Christ the Mediator of the Law, 102-104.
154 Cf. Cornelius Van Til, The Protestant Doctrine of Scripture, In Defense of
the Faith, vol. 1 (Ripon, CA: Den Dulk Christian Foundation, 1967), 29-30; Kuyper,
Principles of Sacred Theology, 280-289. 성경과 교회의 전통에 관한 종교개혁자들과
카톨릭의 이해에 관해서, Heiko A. Oberman, “Quo Vadis, Petre? Tradition from Irenaeus
to Humani Generis,” in The Dawn of the Reformation (Grand Rapids: Eerdmans, 1986),
269-296.

195
◈ 조직신학서론

자유주의 신학의 기원:


슐라이어마허의 기독교의 본질 이해 비판

문병호
1. 들어가는 말

슐라이어마허만큼 신학함에 있어서 어느 특정한 한 관점을


주도면밀하게 전체 신학체계에 적용한 신학자는 드물다. 이전 신학자들이
신지식(神知識)을 논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계시의 존재와
작용에 논의의 주안점을 둔 것과는 대조적으로, 슐라이어마허는 사람의
종교적 감정에 시종 부착했다. 그는 신지식을 신의식(神意識)으로 대체했다.
기독교 역사상 많은 신학적 조류들이 각 시대의 고유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변증적 동기에 기인하여 명멸하였다. 그러나 신학자들이
나름대로 추구하던 변증적인 취지가 항상 진리의 편에서 수행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어거스틴과 논쟁한 펠라기우스는 세속화되고 몰락해가는
교회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고자 하였지만 자유의지를 가진 자연인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공로주의, 자질주의 신학을
개진하였다. 슐라이어마허도 이러한 한 예를 보여준다. 그는 시대를
비판하고 기독교를 종교의 본질에 충실한 그 무엇으로 세우고자 하는
동기를 가졌으나 자신의 신학을 올바른 성경적 진리에 정초시키지 못하였다.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개진함에 있어서
155
동시대를 살았던 문화적 냉소주의자들을 일차적으로 겨냥하였다. 그는
종교의 근본인 내적 경건을 무시하고 외양만 그럴듯하게 추구하는 종교
교양인들이 기독교를 일종의 제도와 같이 여기고 단지 이성적 지식
체계로서만 관념화한다고 반박하였으며, 종교는 문화적이고 사회적이어야
하나 어떠한 권위에도 매여서는 안 된다는 초기 낭만주의 사상의 경향을
156
여실히 드러내었다. 슐라이어마허 신학에는 독일 이성주의로 말미암아
화석과 같이 경화(硬化)된 동시대 기독교 신학에 대해서 경종을 울리고

155 Cf. George Cross, The Theology of Schleiermacher: A Condensed


Presentation of His Chief Work, "The Christian Faith"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11), 3-113; Keith Clements, ed., Friedrich Schleiermacher: Pioneer of Modern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1), 7-34.
156 Friedrich Schleiermacher, On 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
tr. John Oman, Rep.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94), 역자(Jack Forstman)
서문, ix-x. 이하 본서는 On Religion 으로 표기([종교론]). 본고에서 인용되는 원어는 다음
원서로부터임. Friedrich Schleiermacher, Reden über die Reiligion an die Gebildeten
unter ihren Verächten, mit einer Einleitung von D. Sigfried Lommatzsch, Zweite Auslage
(Gotha: Friedrich Andreas Perthes, 1888).
◈ 조직신학서론

종교의 본원적 개념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도가 뚜렷이 나타난다. “살아있는


경건과 자유로운 용기가 목회자의 직제에서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위로부터는 죽은 문자가 아래로부터의 불안하고 무미건조한 분파주의가
나타날 것이다” 라고 그는 시대를 진단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내적인
157
경건을 우주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심지어 복음주의자들조차도, 심미주의, 과학주의, 사회주의에
젖어서 세상을 초월하는 영원하고 거룩한 존재를 마음에 담고 있지 않다고
158
그는 비판하였다. 이렇듯 슐라이어마허는 신학자로서뿐만 아니라 목회자와
159
설교자로서 이러한 시대적 냉소주의에 나름대로 맞섰던 것이다.
슐라이어마허가 이러한 변증적 동기를 가지고 자신의 신학을
개진했음은 사실이다. 그는 종교의 본질을 규명하여 기독교인이 문화인이
아니라 진정한 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펠라기우스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리고 이후 칼 바르트의 경우에서
보듯이,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동기는 오히려 신학적 편견을 낳아서 성경적
진리를 왜곡하는데 이르고 말았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진리에 대한
변증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논변을 변증하는 진리를 개진하는데 그치고
160
말았다.
161
슐라이어마허의 주저 [기독교 신앙] 을 수미일관하게 지탱하는
기반요소이자 맥이 되는 개념인 신의식 혹은 종교 감정은 사실 그
책에서보다 그의 첫 번째 신학 작품인 [종교론]에 있어서 종교의
본질이라는 주제로 포괄적으로 다루어졌다. [기독교 신앙]은 슐라이어마허가
쓴 가장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조직신학 책이라고 할 만하나, 그것은
[종교론]에서 개진된 그의 입장을 교리적으로 적용한 서책이라고 볼 수

157 On Religion, 207. n. 25.


158 On Religion, 1.
159 슐라이어마허의 신학과 설교와 해석학에 대해서, Cf. Catherine L. Kelsey,
Schleiermacher's Preaching, Dogmatics, and Biblical Criticism (Eugene, OR: Pickwick
Publications, 2007), 1-8. 슐라이어마허는 설교를 진리의 선포라는 측면에서보다 내적
감정의 교통으로 본다. Cf. Dawn DeVries, Jesus Christ in the Preaching of Calvin and
Schleiermacher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6), 48-52.
160 슐라이어마허 신학은 철학적 사변에 기초한 신관에 정초한다는 입장에 관해서,

Cf. Robert R. Williams, Schleiermacher the Theologian: The Construction of the


Doctrine of Go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8), 1-19.
161 Friedrich Schleiermacher, Der christliche Glaube nach den Grundsätzen der
evangelischen Kirche in Zusamenhange dargestellt, Band 1 und Band 2 (Berlin: Georg
Reimer, 1821, 1822). 본서는 동명으로 1830 년에 제 2 판이 출판. 본서는 제 2 판을
번역한 다음을 인용. Friedrich Schleiermacher, The Christian Faith, ed., H. R.
MacKintosh and J. S. Stewart (Edinburgh: T. & T. Clark, 1976). 이하 본서의 인용은
예컨대 Christian Faith 1.2(3)과 같이 표기. 이는 제 1 항목, 둘째 절, 제 3 페이지를 의미함.

197
◈ 조직신학서론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 신앙]을 쓴 이후에도 [종교론]을 해석을


더하여서 출판하였는데 이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본고에서는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을 중심으로 그의 종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고찰하고 비판한다. 먼저 종교의 본질로서 감정에 대해서
다룬다. 그리고 “세계-영”이라는 개념을 논의한다. 이는 우주와 일자를 신
개념으로 보는 슐라이어마허 신학의 핵심 관점을 제공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비판한다.

2. 종교적 감정

2.1. 경건((Frömmigkeit)

[종교론]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의 본질로서 경건을 다루기 전에


먼저 인성(Menschheit)에 대해서 논의한다. 여기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영혼이 그 형상의 주요한 자리라는 사실은
도외시되고 단지 영혼이 두 가지 상반되는 충동(Trieb)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이 강조된다. 첫 번째 충동은 각자가 자신을 개인으로서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을 고유한 존재로 여기고 주변의 것들을 자신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충동이 있다. 두 번째 충동은 전체(Ganze)에 대하여
맞서있는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을 더 큰 무엇에
흡수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러한 두 가지 충동을 동시에 의식한다.
이와 더불어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존재의 독자성과 더불어서 모든 다른
사람이 동일하게 그러한 인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식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를 “의식의 일반적인 띠(ein allgemeines Band des Bewuβtseins)”라고
162
부른다. 사람들의 영혼을 분석함에 있어서 취하는 슐라이어마허의 이러한
163
입장은 철학자 헤겔이 주창한 즉자의식과 대자의식를 연상시킨다.
슐라이어마허는 진정한 인성이 충만한 상태를 “경건”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내부적 충동과 외부적 충동에 대하여 작용하는 인간 본성의 양태를
의미한다. 사람은 이러한 양자의 충동 가운데서 경건한 의식을 갖는데,
그것이 표현된 것이 종교이다. 종교는 한 존재로서 영원한 존재에 대하여

162 On Religion, 4-6


163 헤겔은 슐라이어마허의 내재적 입장을 반대하고 종교의 중심을 이성으로
파악한다. 다만 양자는 종교의 본질을 우주적인 상호 작용에서 파악하여 일종의 범신론적
경향을 보였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Cf. Richard Crouter, "Hegel and
Schleiermacher at Berlin: A Many-Sided Debate,"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48/1(1980): 19-43.
◈ 조직신학서론

갖는 두려움으로 표현된다. 슐라이어마허는 신의 불멸성과 섭리를 종교의 두


축이라고 부른다. 신의 불멸성은 자신을 포함하는 전체를 항상 의식하는
164
것이며 신의 섭리는 그런 섭리 가운데서 받는 신적인 영향을 의미한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신은 의식의 대상으로서 영원히 작용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은 영원하고 불멸하며 신의 섭리는 고유하다. 종교는 그러한
신의 작용의 양식 혹은 현상을 의미할 뿐이다.
종교적인 삶이란 사람의 마음을 경건하게 고양시켜서 전체 영혼이
“무한자와 영원자에 대한 즉각적인 감정(ein unmittelbares Gefühl des
Unendlichen und Ewigen)”에 녹아들어서 그와 “교제함(Gemeinschaft)”에
165
있다. 진정한 종교는 이신론자들과 같이 외계적인 신을 가정하는데 있지
않다. 그것은 또한 죽은 문자에 있지 아니하며 사변적인 지식에 따라서
166
변하는 정신작용도 아니다. 진정한 종교는 우주에 복종하는 영혼의 빛과
열을 산출해 낸다. 그것은 내적인 경건을 “영감(Begeisterung)”으로
고양시키는 것이다. 즉 “천상의 감정”으로 모든 짐을 풀고, “거룩한 불”로
일체의 죽은 문자와 사변을 태우는 것이다. 종교는 신을 향한 내적 정서와
167
성향에 자리 잡고 있다. “더 나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 경건은
필히 스스로 용솟음친다. 마음속에 있는 경건의 영역은 경건 자체에 속하여
168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경건의 자질이 모든 사람에게 있으나 좀 더
고급스러운 영혼을 가진 사람에게만 그것이 고유한 내적 작용을 한다고
보고 있다. 경건은 사람의 자연적이며 본능적인 자질이다. 다만 자신을
넘어서서 전체 가운데서, 영원 가운데서 자신을 의식하는 자만이 더욱
고급스러운 의식을 소유한다. 기독교의 고유성은 이러한 의식에서만
발견된다고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의 본질을 삶과 예술을 모두 포괄하는
“활동(Handeln)”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한다. 진정한 종교는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덕을 추구해야 하며 가장 고상한 인성의 심미적인 상상력을
영적으로 감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종교는 단지 변증법적으로나
수사학적으로만 파악되지 않으며, 단지 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만
169
추구되지도 않는다. 종교의 본질은 오직 내적 경건으로만 논의된다.

164 On Religion, 8-13.


165 On Religion, 16. 영어 번역에는 “교제함”에 관한 부분이 빠져있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설에서 우주에 복종함이 신에 복종함이며 이것이 경건의
166

본질이라고 분명히 개진한다. On Religion, 23-24.


167 On Religion, 17-18.
168 On Religion, 21.
169 On Religion, 27-34.

199
◈ 조직신학서론

경건을 지식으로 측량할 수는 없다. 지식은 추론으로 주어지나 경건은


그렇지 않다. 경건은 “무한자에 대한 지각과 맛(Sinn und Geschamact für
das Unendliche)”이다. 경건은 전체에 복종하고 매일 때 즉각적으로,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그 무엇이다. 경건은 유한 가운데 무한을 드러내는
170
모든 활동을 이끌어 낸다. 경건으로 말미암은 이러한 활동이 종교이다.
슐라이어마허는 경건을 지식과 구별하면서, 경건에는 영감으로
나아가는 감정의 요소가 있음을 강조한다. 슐라이어마허가 경건을 지식 자체
171
혹은 과학적 지식과 구별한 것은 옳다. 그러나 그는 경건의 요소로서 계시,
경건의 본질로서 계시를 믿음으로 수납(受納)함을 말하지는 않았다.
슐라이어마허는 경건이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객관적인 계시를 그 요소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그에게 있어서 경건은 단지 내적 충동에 대한
종교적 의식에 불과할 뿐이다.

경건한 사람의 관조는 무한자 안에서 그리고 무한자를 통하여 모든


유한한 것들의 우주적인 존재에 대해서 갖게 되며, 영원자 안에서
그리고 영원자를 통하여 모든 일시적인 것들의 우주적 존재에 대하여
갖게 되는 즉각적인 의식(das unmittelbare Bewuβtsein)이다. 종교는
이것을 찾고 그것을 살고 움직이는 모든 것들 가운데서, 모든 성장과
변화 가운데서, 모든 행위와 고난 가운데서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즉각적인 감정 가운데서(im unmittelbaren Gefühl), 오직 무한자와
영원자 가운데 있는 존재로서 생명을 갖는 것이며 생명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발견되는 곳에서는 종교가 만족스러우나, 그것이
자신을 숨기고 있는 곳에서는 단지 불안과 고뇌, 극단과 종말이
종교에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전체의 무한한 본성 가운데
있는, 일자와 모두에 있는,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으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들과 모두 안에 있는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세상 혹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아니며 과학도 아니다. 앎이
없이도, 종교는 지식과 과학을 인식한다. 종교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정서(情緖, Regung) 즉 유한자 안에 있는 무한자에 대한
계시(Offenbarung)이므로, 하나님께서 그것 안에서, 그것이 하나님
172
안에서 보인다.

170 On Religion, 37-39.


171 헤겔은 지식 자체를 하나님으로 보는 관념론적 입장을 취한다. 이런 측면에서
슐라이어마허는 헤겔과 구별된다. Cf. Richard R. Niebuhr, Schleiermacher on Christ and
Religion: A New Introduction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64), 147.
슐라이어마허는 지식보다는 감정을 신학의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경건의 요소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계시를 중요시한 칼빈의 입장과도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 조직신학서론

슐라이어마허는 여기에서 계시가 자신이 전체 곧 하나님의 일부라는


내적의식과 다르지 않음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기독교 신앙]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개진된다. [기독교 신앙]에서 슐라이어마허는 “교회 교제의
기초를 형성하는 경건은 순전히 그 자체로는 지식도 아니고 행위도 아니며,
173
감정과 즉각적 자의식의 변화로 간주된다” 라고 정의하였다. 교회는 종교
174
혹은 경건과 관계된 교제이다. 경건은 관계에 대한 의식이다. 경건은
“자기 안에 머묾(Insichbleiben)”과 “자기 밖으로
넘어섬(Aussichheraustreten)”을 중재하는 즉각적인 자기의식이다. “경건은
자기의식에 대한 결정”이다. 지식은 자신에 머물고자 하는 요소이며, 행위는
자신을 넘어서고자 하는 요소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경건의 배아는 되나
경건의 본질 자체는 아니다. 경건의 본질은 이러한 요소들을 묶는 즉각적
175
의식 즉 감정에 있다. 이러한 슐라이어마허의 입장은 그가 경건을 행위를
지향하는 정서적 초극(超克)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기독교 신앙]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영혼의 기능으로서 이성(지식)과
의지(행위)와 더불어서 감정을 논하고 있다. 감정은 즉각적
자의식(unmittelbare Selbstbewuβtsein)의 양태로서 제시된다. 자의식에는
“자기 원인 요소(ein Sichselbstsetzen)”와 “비(非)자기 원인 요소(ein
Sichselbstnichtsogesetzthaben)”가 있다. 전자는 “존재(ein Sein),” 후자는
“취해져 실현된 소유(ein Irgendwiegewordensein)”로 볼 수 있다. 전자는
자유 감정에, 후자는 의존 감정에 부합한다. 사람 사이에서 이러한 두
감정은 상호 교호적이나 절대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경우 서로는
부분으로서 부분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자이며 전체이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갖게 되는 의존 감정과 자유 감정은 교호적일 뿐만
아니라 절대적이다. 전체는 부분을 가지나 부분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合)일 뿐만 아니라 부분의 기원(Whence)이 되기 때문이다.
절대자유 감정이 없는 절대의존 감정이 없다. 왜냐하면 부분으로서 일자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순간, 부분은 일자의 일부로서 일자의 자유에
176
절대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종교에 관해서]에서
슐라이어마허가 종교의 본질로서 대체로 인식론적으로 다루었던 신의식
혹은 감정을 자신의 신관과 교회관에 직접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경건은 일자, 전부, 영원자, 즉 하나님

172 On Religion, 36.


173 Christian Faith, 3, 제목 (5).
174 Christian Faith 3.1(5).
175 Christian Faith 3.3-5(7-12).
176 Christian Faith 4.1-4(12-18).

201
◈ 조직신학서론

안에서(in) 그리고 통하여서(durch) 자기 자신을 유일하고 고유한 존재로


바라보는 동시에 전체의 일부로서 여기는 즉자적, 타자적 인식으로서
즉각적인 감정과 직관 가운데 하나가 되어 그분과 영원히 함께 있음이다.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을 스스로 계신 절대적이며 무한하신 영으로서 보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우주이며 우주의 영일 따름이다.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자기 지식으로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계시는 우리가 우리 안에서 부분으로서
177
전체를 느끼는 즉각적 감정에 불과하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됨은 그분을 그렇게 의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의식을 불러내는 것이
178
중요하며, 그것이 경건한 종교의 본질이라고 본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신은 단지 피조물의 합으로서 전체이며, 순간의 합으로서 영원에
불과하다.

2.2. 감정(Gefühl)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신은 일자, 전부, 영원자이므로 우리는


일부로서 그에게로 들어가야 하며 그로부터 각자로서 나와야 한다. 이러한
들어감과 나아옴이 신과 하나됨의 두 양상으로서, 감정 혹은 의식 가운데서
즉각적으로 일어난다고 본다.

그것은 단순히 움직임으로서 하나의 행동에 불과한가? 그것은 스스로


어떠한 것의 존재 안으로 들어옴 그리고 동시에 전체에 들어옴
아닌가? 그것은 전체로 돌아오며 동시에 스스로 존재하는 노력이다.
이러한 것들이 전체 사슬이 형성되는 고리이다. 당신의 전체 삶은
그러한 존재로서 스스로 전체 가운데(im Ganzen) 있다. 지금 어떻게
전체 가운데 있는가? 당신의 감각들로써(Durch eure Sinne). 그리고
어떻게 당신은 스스로 있는가? 주로 다양한 수준의 지각을 비교할 수
있는 가능성 가운데 주어지는 당신의 자의식이 하나됨으로써(Durch
die Einheit eures Selfstbewuβtseins). 만약 감각과 의식 양자가
모든 삶의 작용 가운데서 함께 형성된다면, 어떻게 그것들이
일어나는지 보는 것은 쉽다. 당신은 감각(Sinn)이 되고 전체는

177 Cf. Gregory A. Thornbury, "A Revelation of the Inward: Schleiermacher's

Theology and the Hermeneutics of Interiority," Southern Baptist Journal of Theology


3/1(1999): 4-26.
178 이러한 관점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스피노자와 노발리스를 극구 칭찬한다. On
Religion, 40-42.
◈ 조직신학서론

대상(Gegenstand)이 된다. 감각과 대상은 섞이어 하나가 되고,


그리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감각으로부터 분리된 대상이 하나의
직관(Anschauung)이 되며, 대상으로부터 분리된 당신은 자체로
감정(Gefühl)이 된다. . . . 당신의 삶의 현상은 그 경험으로부터의
179
영원한 떠남과 돌아옴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신과의 연합 혹은 하나됨은 우주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서 자주 표현된다. 그것은 꽃이 피고 지는 것, 안개가 왔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것은 신랑이 맛보는 신부의 수줍은 입맞춤으로도
표현된다. 우리 자신이 “이러한 즉각적인 연합을 통하여서 실체적으로
들어옴(das Durchbringen des Daseins in diesem unmittelbaren Verein)”을
통하여서 우주로 던져지기도 하고 우주로부터 우리 자신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러한 상태를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포옹을 위해서 성육신한 이성과
우주와의 결혼(heilige Vermählung des Universum mit der
180
fleischgewordenen Vernunst)”이라고 표현한다.
이와 같이 슐라이어마허는 직관을 감각으로부터 분리된 대상으로,
감정을 대상으로부터 단절된 자아의식으로 본다. 직관은 순수하게
객관적이며, 감정은 순수하게 주관적이다. 양자는 고유한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서로 분리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양자는 이미 동일하다. 순수한
주관적 감정은 순수한 객관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객관은 순수한
주관 즉 감정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감정 이전에 진리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계시가 감정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은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에 있어서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를 연상하게 한다. 다만 칸트가
이성적 추론이라고 본 것을 감정 작용으로 대체시켰을 뿐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경건은 지식이 아니라 감정에 기초한다.

“당신의 감정은 그것이 당신과 모든 것에 공통된 존재와 삶을


표현하는 한, 그러한 양식에 있어서 경건이 된다. 당신의 감정은
그것이 당신에게 미치는 세상의 작용에 의해서 당신 안에 계신
181
하나님의 작용의 결과가 되는 한 경건이 된다.”

이러한 감정 즉 전체의 일부로서 전체를 느끼는 의식이 종교의


본질로서 제시된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주어진 소여자의

179 On Religion, 42-43.


180 On Religion, 43-44.
181 On Religion, 45.

203
◈ 조직신학서론

“작용(Tätigkeit)”라고 보는데, 이는 감정에 다름 아니다. 슐라이어마허는


“느끼는 사람으로서(als Fühlende)” 사람의 본질을 파악한다. “느끼는
사람”은 자기 자신조차도 직관의 대상으로 여기고 전체의 일부로서
외계적으로 파악한다. 진정한 종교적 정서는 이러한 경우에 작용하게 된다고
한다. 종교의 대상은 대상 혹은 대상에 대한 직관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정서”이다. 즉 전체의 부분으로서 나에게 작용하는 대상의 의미가 종교적
관조에 의해서 추구된다는 것이다. “느끼는 사람”은 이러한 감흥을 추구하는
182
사람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런 사람을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본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종교의 대상은 일자, 전체, 영원자라고 불리는 신
자신도 아니며, 신의 일부로서의 개별자도 아니며, 오직 전체의 일부로서
나를 느끼는 감흥에 있다. 이러한 감흥을 총체적으로 신의존 감정이라고
183
부른다.
[기독교 신앙]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절대의존
감정(Abhänggigkeitsgefühl)”은 그 자체로 신의식을 드러내는 최고 단계의
184
즉각적 자기의식으로서 인성의 본질적 요소라고 하였다. “절대의존의
즉각적 감정은 모든 종교와 기독교 자기의식에 우리 자신의 존재와
하나님의 무한한 존재가 자기의식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로서
185
전제되고 사실상 포함되어 있다.” 절대의존 감정은 우리가 살아있는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상호 의존하고 작용하는 존재라는 자기의식에서
배태되는 바, 그것이 일자와 기원과 전체 즉 신을 향하므로 절대자유 감정과
186
공존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절대의존 감정이 사람이 자신의 유한함을
의식하는 절대적인 본성으로서 모든 종교, 특히 단일신론적 종교(유대교,
187
기독교, 모하멧교)에 공통되는 본질이라고 보았다. 기독교는 다만 신을
188
전체이며 일자로서 여기는 정도에서 가장 뛰어난 종교라고 하였다.
슐라이어마허는 절대의존 감정은 모든 사람에게 본성적으로 주어진
189
것으로서 필히 신의식과 연합된다고 보았다.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을

182 On Religion, 46-48.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이러한 감정은 내향적이며


외향적이다. 양자는 서로 충돌하지는 않는다. 다만 초월자가 우리를 향하는 것이 우리가
초월자에게로 밀어 올리는 것을 압도할 뿐이다. 이는 초월자가 근원(Urgrund)가 되기
때문이다. Cf. Williams, Schleiermacher the Theologian, 44-46.
183 신의존 감정에 대한 논의는 [기독교 신앙]에 가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신의존 감정은 신앙과 지식을 포괄하는 다의적 개념이다. Cf.
Williams, Schleiermacher the Theologian, 47-48.
184 Christian Faith, 6.1(26).
185 Christian Faith, 32, 제목.
186 Christian Faith, 32.2(132-133).
187 Christian Faith, 33.1-3(133-137).
188 Christian Faith, 8.2-4(35-38).
◈ 조직신학서론

아는 지식이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지해야 하는 연약한


본성으로부터 필히 생성되는 그 무엇이라고 본다. 이러한 본성이 절대자를
향할 때 절대의존 감정으로 나타나고 이로부터 하나님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슐라이엘마허에게 있어서는 신의식은 본성에 따르는 것일
뿐이다. 사람이 자기의식으로부터 신의식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사상이
종교다원주의, 상승신학, 내재신학, 자유주의신학의 본질을 제시해 준다.

2.3. 종교(Religion)

종교는 우리가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als einen Teil des Ganzen)”


190
삶 가운데 “무한자를 제시하는 것”이다.

종교의 총화는 우리를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최고의 일치 가운데


감정에 있어서 하나라는 것을 느끼는 것(im Gefühl Uns-Bewegende
in seiner höchsten Einheit als eins)이다. 어떤 고유하고 특별한 것은
이러한 일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존재와 삶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통하여서 있는 존재이며
191
삶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신을 직관의 대상으로 보고 외계의 한 존재로 여기는 것을


금하라고 경고한다. 창조와 섭리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영향을 주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보지 않고 단지 지식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헛된
192
신화(神話)”에 다름없다고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신과의 합일을 말하지만, 범신론적 의미에서
그러하다. 각자는 무한자, 전체, 소진되지 않는 능력자(Unerschöpflichen)
안에서 다른 외부적인 대상을 “규범(Gebot)”과 “영감(Eingebung)”과
193
“계시(Offenbarung)”로서 본능적으로 받아들인다. 부분으로서 전체를
느끼고, 전체와의 교통을 의식하는 것이 곧 기적이다. 기적은 유한자가
무한자와 전체에 이르는 “현상(Erscheinung)”이다. “모든 유한한 것은
무한자의 표징(Zeichen)이다.”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모든 관계가 기적이
된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기적은 “무한자와 신에 대한 즉각적인

189 Christian Faith, 34.1-3(137-140).


190 On Religion, 48-49.
191 On Religion, 49-50.
192 On Religion, 50.
193 On Religion, 86-87.

205
◈ 조직신학서론

관계(die unmittelbare Beziehung)”를 의미한다. 교리는 이러한 관계를


194
개념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기적은 유한자가 하나님을 전체, 영원자,
무한자로서 경험하는 것이다. 다만 그 전체, 영원, 무한의 일부로서
실체적으로 동참하여 경험한다고 본다. 즉 범신론적 신교(神交) 혹은
신화(神化)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하나님을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원한 분으로 여기지 않고 단지 종교적 감화력의 기원으로만 보는데서
기인한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절대의존 감정을 공유하는 것에 대한 확신
195
곧 믿음이 기적이라고 하였다.
슐라이어마허는 계시를 “우주만상이(Weltalls) 인간의 내적 삶에
대해서 전하는 독창적이고 새로운 모든 고지(告知, Mitteilung)”라고
정의한다. 우리 안에서 비로소 독창적인 그 무엇이 생길 때, 그것이 곧
계시라는 것이다. 모든 “직관”과 “독창적인 감정”이 이러한 계시로부터
196
흘러나온다고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계시를 하나님의 자기지식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계시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라기보다는
사람에게 본원적인 새로운 의식 정도로 치부된다.
슐라이어마허는 영감을 “진정한 도덕성과 자유에 대한 감정을
197
일반적으로 표현한 것(Ausdruck)”으로 정의한다. 사람이 고유한 본성
가운데서 자유롭게 전체의 부분으로서 어떤 대상과 사안에 대해서 느끼는
것을 표현할 때, 이러한 상태를 영감이라고 보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영감은 사람에게 고유한 본질적 정서에 불과하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과는 무관하게 다루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사람
각자의 심중에 있는 "모든 종교적 예기(Jedes religiöse Vorausbilden)”를
198
예언이라고 부른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영감이 그리스도의 전체 존재와
199
하나가 되는 즉각적인 자기의식이라는 측면이 강조된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는 성경 말씀 자체의 영감은 부인되고, 단지 성경 저자의 영적
감동만이 문제될 뿐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계시는 이러한 영감의
교통을 객관적으로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단지 실정적(實定的)일
200
뿐이다.

194 On Religion, 87-89.


195 Christian Faith, 14.3(71-73).
196 On Religion, 89.
197 On Religion, 89.
198 On Religion, 89-90.
199 On Religion, 14.3(75-76).
On Religion, 10.3(47-52).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실정적(positive)”이라는
200

말은 실제적인 목적을 위하여, 주어진 사회의 관계 내에서, 역사적인 경험을 하는 것을


◈ 조직신학서론

슐라이어마허는 즉자와 대자의 의식을 종교 관계로 파악한다. 주체는


대상에 대한 대상이 된다. 사람은 신을 대상으로 하지만 신의 일부로서,
신의 대상이 된다. 신은 전체이며 일자이나, 이미 나를 포함하고 있음으로써
그러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은 곧 관계이다. 전체적인 한 관계가 곧
신이다. 이러한 신관에 따라서 신적 은혜에 대한 고유한 관점이 형성된다.
슐라이어마허는 “은혜의 작용(Gnadenwirkung)”을 세상이 사람의 직관과
감정을 통하여서 그 속으로 들어오고 사람이 행동과 문화를 통하여서
세상에 나가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상호교통의 표현이 계시와
영감이며, 그 가운데서 경건한 사람은 자신의 신적인 본성을 독창적으로
들어내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삶 전체가 곧 은혜의 작용이라는
201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경건한 사람의 삶을 신의 생애의 일부라고 보는
것이다. 은혜는 피조물의 조물주와의 합일의 경지를 말할 뿐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을 개발하고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202
성경은 이러한 믿음에 도움을 주는 자료에 불과하다. 다음 인용문에서
슐라이어마허는 믿음을 정의하면서 그가 종교의 본질과 경건한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다.

자신이 세계를 관조하는 관점에 따라서 자기 자신의 기적들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 자신의 영혼이 세계의 아름다움에 이끌리고
세계의 영에 잠기기를 바랄 때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기 자신의
계시를 깨우지 않는 사람, 극단적인 순간에 가장 살아있는
확신으로써 신적인 영이 자신을 몰아가서 거룩한 영감으로 말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종교가 없다. 적어도 종교적인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우주만상의 즉각적인 산물로서(als
unmittelbarer Einwirkungen des Weltanns) 의식해야 한다.
이것조차 없다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개인적인 무엇, 모방할 수 없는 무엇,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자신의
순수한 기원을 보장할 수 있는 무엇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에
203
대해서 확신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지칭한다. Friedrich Schleiermacher, Brief Outline on the Study of Theology, tr.,


Terrence N. Tice (Philadelphia: John Knox Press, 1966), “Editor's General
Introduction," 14. 본서는 “신학은 실정적인 과학”이라고 정의로부터 시작된다(19).
201 On Religion, 90.
202 On Religion, 90-91.
203 On Religion, 90.

207
◈ 조직신학서론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의 이러한 입장이 하나님과 그분의


불멸성(Unsterblichkeit)을 전제하고 있음을 항변한다. 다만 자신은 신과
불멸성을 하나의 개념(Idee) 정도로 여기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개념은
그것이 즉각적인 감정이나 의식으로써 종교적인 의미를 갖게 되지 않는
이상, 그것 자체로서 계시가 될 수는 없다고 한다. 계시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향하여,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나와 세상이 맺는 관계 가운데서 어느
한 개념을 의식하게 될 때에만 생기게 된다고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즉각적이고 독창적인 존재”와 우리의 존재 나아가서 우리의
인식을 유비시킨다. 우리의 존재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인식도 즉각적이라는
것이다. “개인과 전체의 하나임(Einheit)은 감정 가운데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러한 하나임이 곧 “최고의 존재의 인격(der Persönlichkeit des
höchsten Wesens)”이며, 그 가운데 우리의 인격적인 사고와 사변과 의식이
우주적이며, 생산적이며, 독창적인 우주의 일부로서 작용한다. 그러하므로
종교는 이미 그러다함보다 지금 우리 가운데 그렇게 됨을 말한다. 참다운
204
종교는 “종교적 감각을 배양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종교는 자신의 것을 개발해서 극에 이르는, 곧 자신을 전체의
일부로서 인식함으로써 자신을 전체로 보게 되는, 결국 자신이 신이 되는
길이다.
슐라이어마허는 감정을 종교적 경건의 본질로서 사람이 신의 일부며
곧 그로써 전체라는 의식이라고 여긴다. 감정 가운데 “신의
현존(Gegenwart)”이 있다. 감정은 “신이 사람 앞에 현존하는 방식”이다.
205
감정이 곧 “하나님에 대한 감각적 지식(Sinn für die Gottheit)”이다.
종교적 감정은 일자에 속한 다양한 표징들을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게 하며,
일자의 법을 좇는 도덕의식을 내적으로 발생시킨다. 종교적 감정은 자신을
바로 알고, 자신을 바로 알고, 신의 일부로서 신에 동참하는 경건한 길에
206
우리를 세운다. 슐라이어마허의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신은 우리의
감정을 위하여 우리에 의해서 던져진 한 소여에 불과하다. 신은 규정되는
만큼, 즉 느껴지는 만큼 존재하게 된다. 결국 신은 그 자체로 죽은 무엇에
불과하다. 내재주의가 이성주의와 합하여 사신신학(死神神學)에 이르는 길이
되는 까닭이다. 다음은 슐라이어마허의 이러한 왜곡된 입장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종교의 진정한 본성은 이러하고 저러한 개념이 아니라 우리


안과 세계 안에서 발견되는 대로 하나님을 즉각적으로 의식하는

204 On Religion, 92-95.


205 On Religion, 97.
206 On Religion, 97-98.
◈ 조직신학서론

것이다. 마찬가지고 종교적인 삶의 목표와 성격은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고 믿고, 많은 현자들에 의해서 지나칠 정도로 추구되며
그렇게 믿고 있는 듯이 보이는 불멸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 밖에,
시간 다음에, 나아가서 시간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시간
가운데 있다. 그것은 이러한 일시적인 삶 가운데 가질 수 있는
불멸이다. 그것은 우리가 몰두하는 한 풀어야 하는 문제이다. 유한
가운데서 무한과 하나가 되는 것 그리고 매순간 영원한 것, 그것이
207
종교의 불멸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종교는 모든 인류가 각자 자신의 존재와 어떠함을


내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이다. 기독교가
유일한 것은 그것이 고유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전체 가운데
자신을 봄으로 자신이 전체임을 의식하게 함으로, 유일한 진리를 개진한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종교는 사람의 일이다. 그것은 사람이 본성상 신을
느끼는 것이다. 그 느낌에 대한 신적기원은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종교는
208
느낌 외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3. “세계-영(Weltgeist)”

슐라이어마허는 전체의 일부로서 자신을 느낄 때 감정이 경건이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느낌은 “계속 움직이고, 살아있는 고요한 세상과
209
세계-영의 활동”을 느끼는 것이다. 종교는 “내적이며 필연적인 연결”에
따라서 한 사람의 감정이 다른 사람의 감정과 서로 교통하면서 서로
주체이면서 대상이 되는 구조이다. 이는 경건은 전체의 부분으로서 내가
남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다양한 성부가 한 음악을
이루듯이 모든 것들은 서로 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며, 상호 하나를
이루는 구성요소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고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런
210
뜻에서 모든 개물(個物)은 서로 간에 “표징(Merkzeichen)”이 된다고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속성으로부터 자신의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도출해 낸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진리이심과 무오하심은 그 분께서

207 On Religion, 101.


208 Cf. John P Crossley Jr., "Religion, Science, and Ethics: Schleiermacher's
Study of the Structure of Mind." Annual of the Society of Christian Ethics 11(1991):
151-172.
209 On Religion, 49.
210 On Religion, 50-54.

209
◈ 조직신학서론

무한하심과 배치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의식하는 종교의 감정은


곧 그분께서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포용하신다는 것을 아는 지식과 함께
한다. 종교는 하나의 신념과 하나의 감정만을 추구하지 않으며, “모든
견자(見者, jeder Sehende)”는 새로운 제사장, 새로운 중보자, 새로운
기구로서 새로운 연합체를 추구한다. 무한자를 보는 견자들은 감정에 있어서
직관적으로 신적 속성에 부합하는 일종의 형상을 드러낸다. 즉 감정에
211
있어서 무한히 개방된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무한자로서의 하나님은
무한한 신의식에 유비될 뿐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무한자를 하나님으로서 의식하는 것은 곧
212
자아를 우주의 일부로 의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자신의 삶과 존재가
우주와 내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느낌이 종교의 본질 즉 경건으로서 작용하는 것은 “영의 전체적인
내적인 일치”가 우주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은 함께 느끼고, 함께
반응하는 삶 가운데서 작용한다. 그리하여서 우주와 사람을 존재와 삶에서
213
하나로 묶는다.
슐라이어마허는 전체와 우주 그리고 자아를 묶는 작용이
“세계-영”으로 말미암는다고 본다. 즉각적인 감정이 발생하고 감정을
실행하는 행위가 따르는 것이나, 감정은 우리가 우주의 일부로서 가지는
의식이므로 결국 우주의 영의 작용으로 말미암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214
감정은 우주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신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나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 결국 만물 자체로부터
말미암게 된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성령의 일반은총적이며
특별은총적인 역사가 우주의 영의 작용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범신론적 이해
가운데서 인간의 감정은 결국 영적 세계의 본질적 부분을 드러내는
현상으로 여겨질 뿐이다.
인간은 전체의 일부로서 자신의 연약함과 비참함을 의식하면서
우주에 대한 경외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 이러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그것이
영적인 세계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유한 존재이나 우주의
일부라고 느끼는 경건의 의식은 곧 사람을 통한 우주의 영의 작용 즉
감정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세상 안에서 자기를 의식하는 것은 곧 자기가

211 On Religion, 54-56.


212 Cf. Richard R. Niebuhr, "Schleiermacher: Theology as Human Reflection,"
Harvard Theological Review 55/1(1962): 20-49. 본고는 이후 그의 책에서 정정되어
게재되었다. Niebuhr, Schleiermacher on Christ and Religion: A New Introduction,
137-173.
213 On Religion, 58-59.
214 On Religion, 60-61.
◈ 조직신학서론

외계의 세상을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일어난다. 경건한 감정은 양자를


215
포함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세계-영이 작용하는 네 가지 양상을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첫째로, 인간은 외부를 향한 감정을 갖는다. 무한자에 대한 처음
감정은 “두려움(Furcht)”이다. 두려움을 외계를 향한 법정이다. 그것은
종교의 내적 성소라고 할 수 있다. 두려움은 경외와 함께 하면 경건의
본질적 요소가 된다. 두려움을 통하여서 갖게 되는 “거룩한 경외(heiligen
Ehrfurcht)”는 종교의 제일 요소가 된다. 이러한 경외심은 사람을 묶는 띠가
된다. 경건은 두려움으로부터 생긴다. 여기에서 슐라이어마허는 두려움
자체가 경건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경건의 대상은 두려움이 아니라 두려움을
216
통하여서 깨닫게 되는 세계-영이라고 강조한다.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아니다. 이러한 경외는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가 아니라 단지 우주적 경외에 불과하다.
둘째로, 인간은 세계-영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주의 위대함과
장엄함에 대한 감정을 갖게 된다. 특히 우주의 영이 작용하는 자연법을
영원한 법으로서 인식하게 된다.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우주는 영원한
일체성이 있는데, 그것은 “우주적인 부성적(父性的) 돌봄”을 드러낸다.
“세계-영의 작용 즉 이러한 법에 대한 제시와 적용이 없는 어떤 것도”
즉각적인 감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렇듯 슐라이어마허는 우주법의
질서를 영의 길로 여긴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러한 영의 작용으로 말미암은
감정이 우리를 하나님께 스며들게 하는 길이 된다고 한다. 즉 “자연과 함께
하나가 되는 감정(ein Ganz-Sich-Einesfühlen mit der Natur)”이 곧
217
신의식이 된다.

전체에 대한 감각이 주로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서 먼저 발견되고


육체적인 본성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영은
종교의 좌소(Sitz)일 뿐만 아니라 종교에 가장 가까운 세계이다.
우주는 내적인 삶 가운데 자체를 묘사한다. 그리하여 육체적인 것은
영적인 것에 의해서 이해할만하게 된다. 만약 마음이 종교를
산출하고 유지한다면 그것은 우리 위에 세계로서 그리고 세계
218
안으로서(als Welt und in einer Welt) 작용해야 한다.

215 On Religion, 62-63.


216 On Religion, 63-66.
217 On Religion, 66-71.
218 On Religion, 71.

211
◈ 조직신학서론

마치 자연법에 성령의 질서가 체화되어 있듯이 여기는 것은 범신론에


기초한 물활론의 잔재를 보여줄 뿐이다. 성령은 하나님으로서 위격적으로
존재하시지 단지 우주의 영 혹은 영적 질서와 동일시 될 수 없다.
셋째로, 세계-영은 사랑 안에서, 사랑을 통하여서 참 인성이 작용할
때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아담은 하와 안에서 자기의 살과 피를 봄으로써
인성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슐라이어마허는 인성을 이렇듯 아담과 하와의
관계로부터 유추한다. 아담은 타자인 하와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다.
이는 하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 가운데서 진정한
우주적 일치를 맛보았다. 인성는 독자적인 존재의식이 아니라 상호간에
사랑으로 교통하는 의식과 함께 한다. “인성은 그 자체로 당신을 위한
진정한 우주가 된다(Die Menschheit selfst ist euch eigentlich das
219
Universum).” 우리가 이하에서 보듯이 모든 사람은 서로 간에 중보자가
된다는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은 만인 안에 함께 역사하는 세계-영의 역사를
전제하여 도출된 것이다. 인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단지
사람 사이의 관계로부터 인성의 기원을 찾고 그것을 우주의 영의 작용으로
220
여기는 것은 창조와 구원 섭리에 대한 성경적 진리에 전적으로 배치된다.
221
상호 간에 관계 가운데서 “인성의 전체”를 의식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참
경건이 될 수는 없다. 타락한 인류는 서로 간에 비참함을 볼 뿐이다.
넷째, 세계-영의 작용으로 인한 “종교적 성향을 느끼는 감정(Gefühl
von einem religiösen Gemüt)”은 역사 가운데서 가장 잘 그리고 가장
부드럽게 나타난다.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의 역사와 종교를 별개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를 “가장 깊고 가장 거룩한 것에 대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일반적인 계시”라고 명명하였다. 종교는 역사와 함께
시작하고 끝난다. 이러한 입장은 세계-영이 “전체의 영”으로서 모든 것을
시간과 공간과 아울러 다스린다는 전제 가운데 제시되었다. “구속적 사랑”은
각자의 인성이 역사상 서로 간에 영적인 일치를 이룰 때 성취된다. 즉각적인
경건의 감정이 없다면 도덕성은 근원적인 순수함을 잃어버린다. 모든 인간적
사랑은 구속적 의미가 있으므로, 종교와 윤리는 궤를 같이하게 된다.
222
그리하여 슐라이어마허는 “도덕적 세계는 종교의 우주”라고 말한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언약의 성취로서의 구속사는 부인된다. 구속은 없고

219 On Religion, 71-72.


220 슐라이어마허는 타락을 부인하고 구원을 창조의 자연적인 완성으로서 여긴다.
Cf. Brian A. Gerrish, "Nature and the Theater of Redemption: Schleiermacher on
Christian Dogmatics and the Creation Story," Ex Auditu 3(1987): 120-136.
221 On Religion, 72.
222 On Religion, 79-86.
◈ 조직신학서론

우주의 진화적(혹은 과정적) 완성만이 고려될 뿐이다. 세계-영이 성령을


대체하고, 인간의 감정적 정화(淨化)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자리를 차지한다.
또한 하나님의 규범이 인간의 정황적 덕으로서 대체된다.
슐라이어마허는 본서에 대한 설명에서 그가 세계-영(World-Spirit)을
세계-혼(World-Soul)과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세계-영은
최고 존재가 세상과 맺고 있는 상호 작용을 지칭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최고
존재와 독립된 독자적인 영적 양태를 의미하지도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즉 세계-영은 이방 종교에서 말하는 세상의 영과는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그 자신이 말했듯이, 세계-영이라는
개념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경외하는 영적인 대상 즉 우주적 영을
223
제시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기독교 신앙]에서 슐라이어마허는 믿음을
“절대의존 감정에 대한 확신”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으로써 모든
사람들은 “공통된 영”의 작용으로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아서 구원에
224
이른다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세계-영은 모든 종교의 보편적 경배
대상으로서 영적 제 현상을 포괄하는 의미에 불과하다.

4. 결론: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 비판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 혹은 신이라는 단어보다 일자, 무한자,


전체라는 단어를 대체어로 사용한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신은 여전히
완성되어 가고 있는 과정의 신이다. 신은 전체로서 부분에 의해서 되어가고,
무한자로서 유한한 공간과 시간 가운데서 되어간다. 신은 소진되지 않는
능력으로서 유한한 능력 가운데 이루어져 가고 있다. 신은 다만 관계 가운데
하나의 관념으로 있을 뿐, 인격으로서 스스로 존재하거나, 계시하거나,
역사하지 않는다. 신은 단지 해석과 적용을 기다리는 관념 혹은 관념이
제시하는 현상일 뿐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은 현상일 뿐이다. 결국 신은 관계 자체이고, 실재를 좇는 현상으로서
단지 죽은 신에 불과하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기독교 정황(Christliche
225
Sitte)”에 관계될 뿐, 그것은 철학적, 변증적, 윤리적 해석에 불과하다.
슐라이어마허에 있어서 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는 거론되지
않는다. 종교의 “복수성(複數性, Pluralität)”이 교회의 하나됨을 의미한다고
그는 보고 있다. 그의 교회론은 종교다원주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 “종교는

223 On Religion, 141. n. 12.


224 On Religion, 14.1(68-69).
225 [종교론]에서 이러한 경향은 확연하다. Cf. Karl Barth, The Theology of
Schleiermacher, tr.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1982), 259.

213
◈ 조직신학서론

정확히 그것의 복수성에 의해서 교회의 극적인 일치를 이룬다”고 그는


226
말하였다. 슐라이어마허는 교회의 본질을 “교제(Gemeinschaft)”으로 본다.
그가 말하는 교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지체들로서의 교제가
아니라, “모든 실정 종교들(jeder positiven Religion)”에 속한 교회들의
교제를 의미한다. 교회는 다양한 종교성을 고유하게 드러내는 곳으로서,
227
일자의 부분으로서 일자를 드러내는 공동체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오직 내적인 의식이나 감정에 치중해서
파악한다. 그는 계시를 부인하고 경건을 지식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한다.
진리는 절대적이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즉각적으로 인식되는 그 무엇이라고 본다. 진리는 관계에 대한 의식이며, 그
정점에 일자와 무한자의 일부로서 자신을 그러한 존재와 동일시하는
깨달음이 놓여 있다. 기독교가 유일한 것은 이러한 진리를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공동체로서 고유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질서를 본성상 수용하는 사람들의
228
모임으로서 유일하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구원은 내적인 깨달음에 불과하다.
그에게서는 대리적 속죄의 개념을 찾기는 어렵다. 그는 다 이루신 주님의
의의 전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단지 우리와 동일하나 다만 신의식에
229
있어서 뛰어난 한 사람으로서 주를 모범으로 삼을 뿐이다. 메시아는
최고의 존재를 의식하고, 일자와 부분의 괴리를 그 의식 가운데서 인식하고,
230
그 가운데서 중보하는 중보자로서 우리의 모범이 된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스스로 자신을 위하여 중보가 필요치 않으신 것은 그분께서는
231
자신의 영적인 필요를 스스로 채우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은 전체의 부분으로서, 신의
부분으로서 영적인 삶을 산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만큼,
232 233
하나님이 된다. 그리스도는 한 모범적인 중보자에 불과하다. [기독교
신앙]에서 슐라이어마허는 “구속은 기독교 공동체를 시작한 분이

226 On Religion, 212-213.


227 On Religion, 214-215, 250.
228 On Religion, 217-240.
229 On Religion, 240.
230 On Religion, 240-243.
231 On Religion, 247.
232 On Religion, 248-252.
233 이러한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양성적 중보는 거부된다. Cf. Lori Pearson,
"Schleiermacher and the Christologies behind Chalcedon," Harvard Theological Review
96/3(2003): 349-367.
◈ 조직신학서론

구속자라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모든 기독교인의 의식과 관계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는 교회의 지체들이 그분을 통하여서 구속을 의식한다는 단순한
234
의미에 있어서 하나의 종교적 공동체의 창시자가 된다” 라고 하였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종교의식의 기원으로서 교회의 머리가
될 뿐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 일반에 대한 고찰로부터 기독교의 본질을
논하고자 하였다. [종교론]에 전개된 그의 신학은 이후 그의 주저 [기독교
신앙]의 사상적 기저가 된다. 우리는 [종교론]에 기술된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서 이후 자유주의 신학의 특질을 미리 볼 수가
있다. [기독교 신앙]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235
원형(Urbildlichkeit)으로서 또한 모형(Vorbildlichkeit)이 됨을 강조한다.
236
그리스도는 자기의식에 있어서 우리와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237
이상이 되는 것은 간단이 없이 계속되는 신의식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첫째,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 하나님은 과정에
있는, 단지 의식의 대상으로서의 일자, 전체, 무한자, 영원자일 뿐이다.
둘째, 슐라이어마허는 계시의 존재를 부인한다. 스스로 말씀이신
하나님의 진리가 전제되지 않는다. 지식은 없고 사물에 대한 의식만이 있을
238
뿐이다. 하나님은 “근원적인 감정(Grundgefühl)”일 뿐이다.
셋째,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성을 부인한다. 사람은
전체의 일부로서 전체를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한 요소일 뿐이다. 사람은
계시의 수납자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식을 경험하는 존재로서만 논의된다.
239
이러한 입장 가운데 타락도 부인된다.
넷째,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부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속죄의 값을 치른 분이 아니라 다만 신의식의 소유자로서
모범이 될 뿐이다. 그리스도의 왕직과 제사장직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
다섯째, 슐라이어마허는 구원을 선물로 보지 않고, 각자의 자질에
따른 신화(神化)로 여긴다. 구원은 스스로 깨달아서 신에 온전히 동참하는
것이다.
여섯째,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의 중보의 유일성을 부인하고

234 Christian Faith, 11.3(56).


235 Christian Faith, 93.2(377-380). Cf. Clements, ed., Friedrich Schleiermacher:
Pioneer of Modern Theology, 53-58.
236 Christian Faith, 92.1-3(374-376).
237 Christian Faith, 94.1-3(385-389).
238 Cf. On Religion, 249.
239 Cf. David N. Duke, "Schleiermacher: Theology without a Fall," Perspectives
in Religious Studies 9/1(1982): 21-37.

215
◈ 조직신학서론

만인이 만인에 대하여 중보자가 된다고 한다. 교회는 이러한 상호 중보의


장으로서 제시된다. 슐라이어마허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의를 전가 받아서 서로 하나가 된 지체들의 몸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자연적인 관계가 영적으로 고양된 관계로 나아갈 때 그곳에서
교회의 본질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일곱째,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다원주의의 관점에서 모든 종교의
본질을 신의존 감정에서 찾는다. 이러한 감정은 자연적인 것으로서 기독교적
특별 은총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고유성이 부인된다.
슐라이어마허는 가장 자연적인 것이 성경에 부합한 것, 즉 정경적인
240
것이라고 본다. “보편성(Allgemeinheit)”이 다원성과 혼동되고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주저 [기독교 신앙]에서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신학적인 고찰이 더욱 세부적으로 고찰된다. 이 책에서, 많은 경우
슐라이어마허는 정통 신학의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고, 성경적 진리에 대한 정통적인 논의들을 자주 언급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신학적 의미는 [종교론]에서
이미 변할 수 없는 근간이 놓였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은
241
이러한 [종교론]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칼 바르트는
242
슐라이어마허의 주관주의를 극단적으로 비판했지만, 그 역시 “새로운
243
슐라이어마허주의자(a neo-Schleiermacherian)”였다.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의 감정을 실존적 체험으로 바꾸어 놓았을 뿐이었다.

영원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립니다


(Soli Deo Gloria in Aeternum)!

240 On Religion, 53.


241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 있어서 [종교론]이 갖는 의미와 가치에 관해서, William
C. Martin, "Religion for Its Cultured Despisers: A Study in the Theological Method of
Schleiermacher." Restoration Quarterly 13/2(1970): 91-105.
242Cf. Daniel B. Clendenin, "A Conscious Perplexity: Barth's Interpretation of
Schleiermacher,"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52/2(1990): 281-301.
243 Richard A. Muller, "Jesus Christ in the Preaching of Calvin and
Schleiermacher," Calvin Theological Journal 31/2(1996), 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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