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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서사 20171220: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2017020179 비교문학비교문화협동과정 석사 김일우

아듀 벤야민 : “불가능한 역사의 비철학적 안티테제에 관한 소고 ”

우리는 역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식의 정원에서 소일하는


무위도식자들이 역사를 필요로 하는 것과는 다르게 역사를 필요로 한다.
______ 니체, 「삶을 위한 역사의 유용성과 단점」

배라는 가설에서 분리되어 끝없는 대양에 내던져진 작은 보트에는 확실히


뭔가 특수한 것이 있고, 그 누구도 그 특수성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______ 무리카미 하루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나는 바로 출구를 찾고 있기 때문에 모방한다.


그 곳에 다른 이유는 없다.
______ 프란츠 카프카, 『성(Das Schloß)』

Das buckliche Männlein 꼽추 난쟁이

Will ich in mein Gärtlein gehn, 내가 내 조그만 정원에 나가,


Will mein Zwiebeln giessen, 내 양파에 물을 주려 하면,
Steht ein bucklicht Männlein da, 거기 한 곱사등이 난쟁이가 서 있어,
Fängt als an zu nießen. 재채기를 하기 시작하네.

Will ich in mein Küchel gehn, 내가 내 조그만 부엌에 가서,


Will mein Süpplein kochen; 내 수프를 끓이려 하면,
Steht ein bucklicht Männlein da, 거기 한 곱사등이 난쟁이가 서 있어,
hat mein Töpfchen brochen. 내 냄비를 깨뜨렸네.

Will ich in mein Stüblein gehn, 내가 내 작은 방으로 가서,


Will mein Müßlein essen; 내 죽(시리얼)을 먹으려 하면,
Steht ein bucklicht Männlein da, 거기 한 곱사등이 난쟁이가 서 있어,
Hats schon halber gessen. 이미 절반을 먹어치웠네.

Will ich auf mein Boden gehn, 내가 내 땅에 나가,


Will mein Hölzlein holen; 내 나무를 가져오려 하면,
Steht ein bucklicht Männlein da, 거기 한 곱사등이 난쟁이가 서 있어,
Hat mirs halber g'stohlen. 절반을 이미 훔쳐갔네.

Will ich in mein Keller gehn, 내가 지하실에 내려가,


Will mein Weinlein zapfen; 내 포도주를 뽑으려 하면,
Steht ein bucklicht Männlein da, 거기 한 곱사등이 난쟁이가 서 있어,
Thut mir'n Krug wegschnappen. 포도주 단지를 빼앗아 가네.

Setz ich mich ans Rädlein hin, 내가 내 작은 자전거에 앉아,


Will mein Fädlein drehen; 내 페달을 밟아 돌리려 하면
Steht ein bucklicht Männlein da, 거기 한 곱사등이 난쟁이가 서 있어,
Läßt mirs Rad nicht gehen. 자전거가 구르지 못하게 하네.

Geh ich in mein Kämmerlein, 내가 내 작은 방에 가서,


Will mein Bettlein machen; 잠자리를 펴려고 하면,
Steht ein bucklicht Männlein da, 거기 한 곱사등이 난쟁이가 서 있어,
Fängt als an zu lachen. 웃기 시작하네.

Wenn ich an mein Bänklein knie, 내가 내 긴 의자에 무릎 꿇고 앉아,


Will ein bislein beten; 조금 기도를 하려 하면,
Steht ein bucklicht Männlein da, 거기 한 곱사등이 난쟁이가 서 있어,
Fängt als an zu reden. 말하기 시작하네.

Liebes Kindlein, ach ich bitt, 귀여운 아이야, 부탁인데,


Bet' für's bucklicht Männlein mit! 곱사등이 난쟁이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렴!1)

벤야민은 암살당하기 몇 달 전 스페인의 한 국경 마을에서 「역사철학테제」(Thesi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를 집필한다.2) 이야기의 시작은 강력한 “꼽추 난장이(Das buckliche
Männlein)”(1)3), “항상 승리하게끔 되어 있는 것은 소위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불리는 인형이다.”(1) 그
는 독일에서 전승되는 노래에 근거하면 어떤 일[역사]이든 훼방을, “반대 수”(1)를 놓는다. 그것은 “거울”
이라는 판타스마고리 뒤어 숨어 있는, 어쩌면 실재하지 않는 형상이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적 유물론>이
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늘 항상 어떤 폐허의 모습으로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그토록 발견하길 원했던 “이제 침묵해 버리고 만 목소리의 한 가락 반향”(2), 반드시
읽어내어 계승해야만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든 변화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이러한 사
소한 변화”(4)들을, 그렇다면 지금 여기의 폐허에서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보다 구체적인 질문은, 지
금 여기에서 발견되는 파국의 징후들을 그렇다면 <꼽추 난장이>가 가시화하려는 중지로 읽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파국>이 <항상 승리>할 때에, 그 승리는 역사를 필연적인 방식으로 구성하는가?

역사의 분열에 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벤야민이 <역사적 유물론자>라고 명명하
는 독자들에게 부디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부탁해 마지 않았던 구분은 <역사주의>와의 구분이다. 역사주
의라는 “적(enemy)은 승리를 거듭하고 있다.”(6) 이미 존재하는 역사, 단일하고 고정되어 있으며 지금의
전통을 구성하고 있는 그 폭력적 서사에 맞서, <역사적 유물론자>는 “찰나에 영원히 되돌아 올 수 없이
사라져버리는”(5), “휙 스쳐 지나가버리는”(5) 과거라는 장소의 진정으로 이야기되어야만 하는 상(像)에

1) Des Knaben Wunderhorn(소년의 마적). Alte deutsche Lieder. hrsg. v. Achim von Arnim u. Clemens
Brentano. 3. Bd., Heidelberg 1808. S. 54. 번역: 최성만
2) 벤야민 암살과 「테제」에서 드러난 마르크스주의 실패에 관한 분석과의 연관성은 슬라보예 지젝이 『시차적 관점』의
서문에서 흥미로운 방식으로 주장한 바 있다.
3)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는 18개로 분열된 테제와 두 개의 덧붙여진 글(A, B)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인용은 괄호
안에 특별한 언급 없이 단락 기호만 표기한다.
주의를 기울인다. 물론 이는 우연한 징후로 나타나고, <꼽추 난장이>처럼 숨어 있다. 그리고 그 징후를 가
시화 한 뒤에는 늘 사라져버린다...... 혹은 사라져야만 한다.

발견되고, 말해지고, 사라지는 그 중지의 연속, 우연한 간극의 진열에서 발견되는 것은 <역사주
의의 중지>이고, <불가능한 역사>의 재구성이다. 그것은 망각해서는 안 되는 죽음을 애도하고, 이야기되
지 않으면 사라져버릴 죽음들을 다시 이야기한다. 그것이 말해져야만 하는 이유는 벤야민이 강조한 바와
같이 “현재에 의해 인식되지 못했던 모든 과거의 상은 언제든지 현재와 함께 영원히 사라져 버릴 위험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5) 하지만 그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요청되어야만 하는 질문은, 벤야민
이 건져 올리려는 폐허는 정확히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발견될 수 있으며, <꼽추 난장이>의 폭정은 어
떻게 지양될 수 있는가? 질문을 바꾸어보면, 모든 현재를 중지시키는 언어는 폐허라고 단정할 수 있으며,
모든 파국의 징후들은 초월성을 지양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연 채 뒤로 물러나는가?

물론 “죽은 사람들까지도 적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특정


한 역사가”(6)들에게 징후의 언어와 잠재성의 언어를 구분하는 작업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적은 죽은 사
람들을 자신의 단일한 서사에 포섭시켜 희생양으로 명명하기를 원하고 있고, 침입한 모든 불안을 끊임없
이 방어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에 글쓰기와 관련한 무엇이 분명히 있다. 유령의 노래는 현재를 중지시키
는 모든 종류의 언어이고, “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떤 기억을 붙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6) 역사가들, 역사를 중지시키는 역사가들은 스스로를 분열하며 계속 말을 한다.

하지만 “새로운 지배자는 그들 이전에 승리했었던 모든 자들의 상속자이다.”(7) <꼽추 난장이>


가 승리를 거둔다면, <파국> 또는 어떤 혁명이 역사로 기록된다면, 그 장소는 분명히 니체적 의미에서 승
리를 거둔, ‘복수(ressentiment)’에 성공한 역사가들의 장소이다. 그 곳에서 구성되는 서사는 어떻게 역사
주의를 지양할 수 있는가? “[역사주의자와 대비되는] 역사적 유물론자는 가능한 한도 내에서 이러한 전승
으로부터 비켜난다.”(7)라고 말할 때 여기에 전제되는 ‘가능한 한도 내’는 어느 정도의 정상 참작을 요구
하는가? 우리는 전승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비켜날 수 있는가? “결을 거슬러서 역사를 손질하는
사람”(7)이 지쳐 쓰러진다면, 그 자리에 남겨지는 것은 다시 역사주의의 고착이 아닌가?

물론 벤야민은 초월성을 전제하고 있지 않다. 그의 신은 완전한 폐허 안에 또는 아래에 있다. 그


는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8)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바로 아래에서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반대자들이 진보라는 이름을 하나의 역사적 규범으로 삼아 이를 들고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8)이라고 말한다. 비상사태의 도래는 그러므로 미래의 것이지만 결코 보다
‘나은’ 무엇을 전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일보를 위한 것이 아니며, 도래할 과거이다. 그러므로 인류를
위한 것도 아니고, 전체주의를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진보가 규범이 될 때, 즉 지금의 상황보
다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 허구적 도래를 계시하는 ‘영웅’이 대중을 매혹할 때, 오히려 그 대항점에서 파시
즘은 자기를 견고하게 만드는 바깥을 이용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다.
9

그러므로 여기에서 벤야민이 늘 명상하던 그림, “클레(P. Klee)가 그린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9)를 감상할 수 있게 된다. 그 천사는 “마치 그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
어지려고 하는 것처럼”(9) 시선을 회피하고 있다.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열려 있으며, 날개
는 펼쳐져 있다.”(9) 그것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이
보고 말한 것으로부터 당장이라도 도망가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벤야민이 다시 읽은 “역사의 천사”(9)
의 모습에서 그 정지하지 않은 반복의 운동, 역사라는 장소를 다시 구성하는 <구원>의 운동이 읽힌다면,
이 구원에는 늘, 언제나 <파국>이 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강조점은, 그 역(易)이 마찬가지로 항상 참인
것은 아니다. “일련의 사건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바로 그 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그 잔해들을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하나의 파국을 바라보고 있다.”(9) 벤야민이
파리의 도서관에서 발굴하려 시도했던 수많은 텍스트들, 잔해들, 읽히지 않은 기록들을 다시 읽을 때에 텍
스트는 계속해서 쌓이지만, 그것이 읽히지 않고 내팽개쳐진다면 여전히 도래하는 것은 <하나의(singular)
파국>이다. 하지만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읽어야 할 잔해들을 읽고, 또 <입을 열고> 말해야 할 잔해
들을 말하고, 자신이 토해낸 그 공간이 고착되기 전에 <멀어진다>.

10

하지만 그것이 벤야민처럼 예민한 독자들에게만 허락된 일이라면, 그러한 비난이 벤야민에게 흔
히 가해지는 엘리트주의라는 기표의 비난, 난해하다는 비난, 이해할 수 없다는 비난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벤야민이 스스로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벤야민이 기획한 작업은 오히려 엘리트주의로부터 가
장 멀리 떨어져 있는 작업이다. 벤야민은 어떤 초월적 기표도 신뢰하지 않았기에 가장 초월적인 기표인
‘신’을 폐허에 두었다. 그 장소에는 인간 중심주의도, 진일보에 대한 허구적 믿음도, 단일한 공동체의 서사
도, 파시즘을 향한 노예적 갈구도 자리하지 않아야만 한다. 신화와 신은 다르다. 다만 벤야민은 타협하기
를 원치 않았다. 타협의 언어에는 역사주의의 언어를 반복해야만 하는 맹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
고, 그러므로 <가능한 한도 내에서> 그 언어를 반복하지 않는 방식으로 벤야민은 말할 수밖에 없었다.

11

“파국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처음부터 사회민주주의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바로 이 타협


주의이다.”(11) 잔해를 잔해로 놓아두어도 괜찮다는 수많은 약속들 앞에 현혹된다면, 인간은 노예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마르크스는 <자신의 노동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인간은 소유주가 된 다른 인간들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노동이 하나
의 정치적 과업을 수행하리라는 환상을] 반박하였다.”(11) 지금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역사적 유물론자들은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과업을, 미래를 약속하는 달콤한 서사들을 반박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효과적이려면 그것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것을 형성한 기원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자본이 이미 자본이 아니고, 미래가 이미 미래가 아니라면, 잠재력들은 역사가 된다.

12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가 약속하는 “미래 세대의 구원자들”(12)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보일수록, 지금 여기 다시 읽어야 할 텍스트들은 많아진다. 여기에는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도 예견했던 문제들이 분명하게 겹쳐져 있다. 작은 약속들로 인하여 “증오와 희생정신을
망각하게”(12) 만드는 수많은 서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반복-재생산 되고 있고,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는
약속들과 징후들은 파국의 도래를 보다 가까운 시점에서 예견하고 있다. 예술이 전체주의에 동원되었던
것처럼, 무한 복제되는 대중문화의 서사는 모든 포스트-모던의 양식들을 자본의 파시즘 논리 안에 녹여버
린다. “[사회민주주의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짓밟히고 억눌린 선조들의 이미지”(12)가 자본의 홍수 아
래 묻혀버린다면, 그것의 발굴은 더 이상 불가능해 질지 모른다. 그러므로 미래는 과거의 폐허에 있다. 여
기에서 카이로스적 시간이 발생시키는 교란, 간극은 일정한 서사를 재구성하지만, 그것은 진보의 방식이
아니라 <파국의 방식>으로 가능해 질 수밖에 없다. 파국을 예비하는 이야기들, 현재를 중지시키는 이야기
들에서 확장되는 시차적 징후들은, 그것이 초월적 신화-되기를 지양하는 한에서, 완전하게 현재에 내재한,
하지만 아직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벤야민의 신학은, 없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유물론이다.
“지금이란 지나간 것의 가장 내밀한 이미지다.”4) 프로이트의 용어로 그것은 어쩌면 <무의식>이고, 라캉의
언어로는 <부분 대상>이며, 들뢰즈의 용어로는 <신체 없는 기관>, 카프카의 언어로는 <죽지 않는>, 결코
끝나지 않는 소송, 베케트의 언어로는 <말 없는 말>, 분명히 있지만, 없는, 기이한 형상들이다.

13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전개되는 “역사적 발전과정이라는 개념에 대한 비판”(13)을 연관시키는 것


은 어렵지 않다. 발전은 기존의 있음을 전제로 그 위에 덧붙여진다. 하지만 벤야민의 과거들은 현재의 장
소에서 도래할 공간을 재구성한다. 미래를 향한 수행들은 없는 과거의 유령들을 실재화한다. 여기에서 물
론 억압된 과거는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없으며, 오직 그것이 발화되는 수행을 통해서만 구성된다.

14

그러므로 “근원은 목표이다”(14)라는 칼 크라우스의 말을 벤야민이 인용할 때, 여기에는 근원을


구성하는 역사철학테제, 원본 없는 근원을 폐허에서 길어올려 구축하는 반복적 기억의 방식이 있다. “원인
으로서의 사실은, 수천년이라는 시간에 의해 그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을 수도 있는 사건들을 통해서 추후
에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A, 강조는 필자) 그 원본 없는 대리보충의 방식, 기억을 구성하는 기억
의 방식은 “마르크스가 혁명으로 파악한 [부정] 변증법적 도약”(14)으로, 폐허와 치욕스러운 증오의 흔적
들을 발견하려는 “예민한 감각”(14)으로 그것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 애도한다.

15

하지만 아직 충분히 말해지지 않은 것은 그 “폭파”(15)를 야기하는 물질성의 정체, “돌발적 사


건”(15)으로 도래하는 과거의 정체이다. <역사적 유물론(Materialismus)>이 <모든 것은 물질이다
(everything is matter)>라고 말할 때, 여기에는 이미 층분히 살펴 본 바와 같이 분명한 가능성 혹은 윤
리적 요청이 함께 읽힌다. 이미 ‘모든 것’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있어야만 하지만 아직 없는 것에서 배제된 <재료(material)들>을 발굴하는 바로 그 작업은, 그러므로
지금 흐르고 있는 ‘모든 것’의 시간, 현재가 전부라고 단언하는 시간에 “시계판에 총을 쏘아 시간을 정지
시키는 순간”(15)을 새겨 넣을 수 있다. 그 순간은 알란 무어의 그래픽 노블 『왓치맨(WATCHMEN)』의
스마일에 묻은 핏자국이고, 처음 보는 좀비의 형상이 도래하는 순간이며, 과거의 이름이 바뀌는 시간이다.

4) 벤야민, 『아케이드 저작』, GS V/2


16

벤야민은 그 중지의 중지하지 않음을 거듭 강조한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과도기로서의 현재의


개념이 아니라, 시간이 그 속에 머물러 중지 상태에 도래시키고 있는 현재의 개념을 포기할 수 없다.”(16,
강조는 필자) 물론 그 단수적 과거, “일회적인 과거와의 유일무이한 경험”(16)은 카이로스적 시간으로 상
속되어야만 하는 유산을 재정비하지만, “역사의 지속성을 폭파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16) 여자 아닌
여자들은 늘 구성적인 예외적 위치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비-존재들, 좀비 아닌 좀비들, 포스트-휴먼
들, 거세된 남자들, 수동적으로 저항하는 말 아닌 말을 중얼거리는 바틀비들.

17

“메시아적 정지의 표식”(17)이 기입된 <묵시록>의 순간들, 실재들은 상징계를 죽음의 가능성으
로 몰아넣는다. 그 장소에서 더 이상 사용되던 말들을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명멸하
는 기표들은 다른 방식으로, 혹은 새로운 말들로 같은 자리를 반복하며, 또는 기존의 말들로 다른 자리를
반복하며 상실된 잉여, <꼽추 난장이들>을 구원한다. 벤야민의 반복은 “억압된 과거를 위한 투쟁”(17)이
지만, 여기에는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이 늘 남아 있고, 남아 있어야만 한다. 현재가 사라지는 만큼 과거
는 늘 다시 억압되기 때문이다. 억압이 미래를 산출하고, 미래는 현재의 폐허를 구성하며, 현재는 다시 다
른 과거를 억압한다. 그렇다면 이 무한한 루프의 반복은 다시, <파국>인가?

18

그렇다면 달리는 열차의 선로 바깥은 없는가? 포스트-휴먼들이 타고 있는 난파선에 주어진 특


수한 조건, 유한성의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메시아적 현재시간(Jetztzeit)......은 우주 속에서
인류의 역사가 만든 바로 그 형상(Figur)과 정확하게 일치한다.”(18) 벤야민의 <형상>에서 저항의 방식이
끊임없이 다시 망각된다면 그것을 계속 반복해서 읽고 쓰는 것 말고는 인간에게 남겨진 일은 없는가?

“특정한 시대와 관련을 맺게 되는 상황의 배치”(A)에서 늘 주어진 유산들이 있고, 다시 발견되


어야 하는 재료들이 있다. 벤야민의 기획은 그러므로 말할 수 있는 언어의 조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들
의 조건을 발굴하려는 기획의 일부를 선취하고 있다. “메시아적 시간의 단편들로 점철된 <현재시간>으로
서의 현재라는 개념”(A)에는 이미 포스트 휴먼의 명멸하는 언어들, 결코 단일성을 담보하지 않는 분열된
단편들이 단수적 장소를 구성하고 있고, 그것의 잠재력에 의존하는 한 적어도 홀로코스트는 없다.

“시간으로부터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B)을 발견하는 작업은 물론 피곤한 일이고 쉬운 일이


아니다. 벤야민은 그래서 카프카의 작품에 그토록 매료되었는지 모른다. “카프카...... 그가 서술하는 모든
것은 자기자신과는 다른 것을 진술한다.”5) 탈출구 없는 미로, 부재하는 성을 향한 여정,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법문 앞에서의 기다림. 하지만 그 결코 도래하지 않는 문이, 바로, “매초 매초가 언제라도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었던 조그만 문”(B)이었으면 하는 유물론적 바람이 벤야민의 신학에 있는 것이 아닐까.

5) Walter Benjamin, “Franz Kafka: Beim Bau der chinesischen Mauer”, GS. II/2, S/ 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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