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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회 KPI평화포럼 자료집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일시 : 2016년 6월 3일(금) 오후 2시-5시
장소 : 연세대학교 삼성학술정보관 (ICONS ROOM)

공동주최
인간평화와 치유연구센터 www.koreapeace.or.kr
미래선도연구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포럼일정
등 록   13:30-14:00

개회사 전우택 원장(KPI, 연세대학교 교수) 14:00-14:10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1부 : 주제발표

사회 김선욱 교수(숭실대학교 철학과)

발제① 캄보디아의 역사적 영년(Year Zero / année zéro) 14:10-14:35


- 창세의 절대혼돈과 인간의 절대비극은 치유할 수 있는가?
박명림 교수 연세대학교 지역학협동과정

발제② 영화와 사회치유 14:35-15:05


- 역사적 트라우마의 극복을 향한 멀고도 험한 길
임정택 교수 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발제③ 캄보디아 킬링필드 : 문화를 통해 본 화해의 가능성 15:05-15:25


강효인 연구원 연세대학교 인간평화와 치유연구센터

휴식 15:25-15:30

발제④ 캄보디아와 증언치료요법 (testimony therapy) 15:30-15:55


신보경 연구원 연세대학교 인간평화와 치유연구센터

발제⑤ 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15:55-16:20


전우택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KPI 원장

2부 : 지정 및 종합토론
토론① 부경환 연구원 16:20-16:35
(아시아문화연구소)

16:35-17:00
발제자 및 청중

|제50회 KPI평화포럼| 1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목 차
l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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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발제문

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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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사회치유 : 역사적 트라우마의 극복을 향한 멀고도 험한 길


임정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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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 : 문화를 통해 본 화해의 가능성 강효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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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와 증언치료요법 (testimony therapy) 신보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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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역사적 영년(Year Zero / année zéro) 박명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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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지

l 부록

한반도평화연구원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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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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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방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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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안보 분야 10대 싱크탱크’에 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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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I평화포럼(공개포럼) 개최 현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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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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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회 KPI평화포럼| 3
발 표

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교수(연세대학교 의과대학, KPI 원장)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캄보디아 비극의 원인 : 왜 그런 일이 벌여졌을까?


- 필립 쇼트의 <폴 포트 평전>을 중심으로

I. 서론

캄보디아에서는 1975년 4월부터 1979년 1월까지 3년 8개월의 폴 포트 정권하


에서 700만 인구 중 150-200만의 인구가 죽임을 당한 인류 최대의 비극 중 하나
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보면, 이러한 잔혹한 비극은 캄보디아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규모와 기간만 달랐을 뿐, 인류 역사상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던 현상 중 하나일 뿐 이었고, 어떻게 보면 인
간의 깊은 본성과 연관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비극은 비슷한 양상
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각 비극마다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도 있다. 폴 포트 정권
하의 캄보디아는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특성을 가진 나라였고, 가장
근본적이고 극단적인 인간 개조를 추진하다가 엄청난 비극을 만들어 내며 좌절하
고 붕괴되었던 국가였다. 이에 본 글에서는 캄보디아에서 발생하였던 그 비극의 특
징적 원인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2016년 본 연구팀은 캄보디아 현지를 방문하여
많은 사람들과 문헌, 자료, 현장의 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질문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였다. 이에 대한 대답은 매우 다
양한 측면에서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저자는 그것을 폴 포트와 그 핵심세력들이 가
지고 있는 사고의 행동의 특성에서 찾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관련 자료들을 Philip Short가 쓴 <Pol Pot - Anatomy of
nightmare>(2004)(<폴 포트 평전>(이혜선 역. 실천문학사. 2008))을 통하여 얻
을 수 있었다. 그 책에서 얻은 자료들을 토대로, 저자가 저자의 생각으로 질문에 대
한 대답을 작성해 보았다. 이제부터 캄보디아에서 왜 그런 비극이 벌어졌는지의 이
유를 세 가지로 설명해 본다.

|제50회 KPI평화포럼| 7
<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II. 본론 : 캄보디아 비극의 원인

1. 극단적인 종교적 이상주의와 공산주의의 결합


캄보디아 폴 포트 정권의 비극은 캄보디아의 문화적 전통 중에 존재하는 이성보
다는 감성에 중심을 두는 신비주의 및 극단주의가 공산주의를 만나 결합하면서 만
들어 진 현상이다. 신비주의, 극단적 이상주의, 초월주의, 비현실주의 등의 전통 안
에서는 합리적인 사고에 따른 현실적인 대안 제시 보다는 신비한 지혜에 따른 초월
과 같은 것이 더 강조된다. 공산주의 자체도 매우 낭만주의적, 비현실적 성격을 가
지고 있으나, 나름대로 그것을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한 논리와 철학, 그리고 방법
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공산주의자들은 그런 전통적인 마르크스
레닌의 공산주의 이론과 현실적 대안, 대중의 동의와 참여 같은 것들을 깊이 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산주의가 가지고 있는 물질의 평등한 분배 하나만을 머릿속
에 입력한 후에, 그것을 이루어 가는 방법으로 캄보디아의 전통적인 비이성적 극단
주의를 바로 연결시켰다. 따라서 그들은 소위 순수한 마르크스 이론에 충실할 생각
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폴 포트와 그의 중심 추종자들은 유고의 공산주의 지도자 티토가 스탈린


에 저항하고 자국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레닌, 스탈
린의 방식이 공산주의의 유일한 정답이 아니라면, 자신들도 자신들의 공산주의 정
답을 따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전통적으로 베트
남, 태국과 맞서 싸워왔던 캄보디아인에게 전통적 공산주의를 고수하는 베트남의
공산주의에 대응하는, 캄보디아 고유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다는 것은 더욱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지 않고 자신들
의 직관적 영감에 의한 새로운 공산주의 사상을 만들기 원하였다1).

“우리는 열심히 방향을 찾은 다음 그 방향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면서 출발


했다. 따라야할 본보기도 청사진도 없었다. 그저 여기저기서 영향을 받았
다......... 그렇다고 그 어떤 것도 모방하지 않았다. 내가 직접 캄보디아에서 겪

1) 필립 쇼트 (2008) : 폴 포트 평전. 이혜선 역. 실천문학사앞의 책 p140

8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은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폴 포트)2)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사회를 변혁하기 원하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현실성보다


는, 완전한 해탈, 구원의 경지에 이른 극단적 종교인으로서의 생각, 즉 완전한 평
등, 완전한 자기 절제, 완전한 자기 부정, 완전한 사유재산으로 부터의 해방 상태를
추구하였다. 실제로 폴 포트 정권은 불교라는 종교 자체를 부정하였다. 그래서 모
든 승려들도 승려로서의 신분을 버리도록 하였고, 그들 역시 교화의 대상이 되었
다. 그러나 폴 포트 정권은 원래 전통적으로 캄보디아 불교가 추구하였던 가치와
그 종교성을 자신들의 공산주의와 결합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성’은 캄보디아
공산혁명 목표의 특징을 만들어 낸다. 바로 ‘종교적 인간개조’였다.

폴 포트는 인간과 캄보디아를 개조하는 일에 매료되어 있었다. 자신의 생각으로


캄보디아 국가와 캄보디아의 모든 개개인을 개조하여 과거 캄보디아 왕국의 재현,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3) 그 과정에서 크메르 루
즈는 “깨달음” 이라는 종교적 용어를 가지고 주민들을 세뇌시켜 갔다4). 자기 자신
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자신의 사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개인의 이
기심, 자기중심성을 스스로 버리고 그로 인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도록 하는 것은
종교가 하는 일이다. 불교에서도 이것은 이념의 순결성, 절제와 금욕, 물질에 대한
초연함. 자아에 대한 억압으로 가르친다. 이것은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종교
적이고 이상적인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적 상태를 크메르 루즈는
정치적, 강제적, 폭력적으로 인간에게 강요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
었다.

1) 사적 소유와 애착에 대한 부정을 통한 완전한 평등


폴 포트 정권이 추구한 완전한 평등은 사적 소유의 부정과 더불어 사적 소유에
대한 애착을 완전히 끊는 것이었다. 사유재산을 아예 금지하였고, 사적인 매매도
금지하였으며, 부의 획득과 매매 자체를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하여 화
폐 사용을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아주 제한적인 물물교환만을 인정하였다.

2) ibid 284
3) ibid 839
4) iid 614

|제50회 KPI평화포럼| 9
<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수렵채취가 금지되어 떨어진 과일도 줍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 모든 것이 사적 소


유 욕구와 연관된다고 본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캄보디아의 전통 종
교인 불교의 영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폴 포트 정권이 추구한 내용은 원래 불교의
사원에 들어간 승려들의 삶이 추구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즉 부의
획득과 소비 자체를 멀리하도록 한 것 이었다 5)

그런데 폴 포트 정권이 추구한 사적 소유의 대상은 돈과 물질만이 아니었다. 폴


포트 정권은 한 개인에게 독립적으로 소속되거나 소유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그 모
든 것을 금지하려 하였다. 예를 들어 부부관계나 부모 자식관계 등도 거기에 포함
되었다. 즉 그런 개인적인 관계에 묶여 있으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물질에 대한 사
적 소유 욕구로 이어질 것으로 보아 그런 인간관계의 특별성도 다 금지하려 나선
것이었다. 이에 따라 결혼 상대자를 자기의 것이라 생각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하
여, 결혼 상대자도 당이 결정하였고, 그래서 부부가 같이 사는 것도 금지하였으며,
부부간 성관계를 가지는 것도 여성의 배란일을 맞추어 당이 허락한 날에만 가능하
게 하였다. 즉 너의 부인이나 너의 남편은 너 개인의 것이 아니라 당과 집단의 것이
라는 인식을 가지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부모 지식간의 관계에도 적용되었다. 아
이들은 7세가 되면 부모와 떨어져 집단생활을 하여야만 하였다6). 그리고 일상적인
언어 사용에서도 개인의 특별함을 표현하는 것을 전부 금지하여 ‘나’ 라는 말은 ‘우
리’라는 말로, ‘부모’라는 말은 ‘아저씨(숙부), 아줌마(숙모)’ 라는 말로 바꾸어 사
용하도록 하였고, 타인을 부를 때의 호칭으로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을 사용하도
록 하였다. 즉 모든 관계가 집단적으로 바뀌고 개개인을 구분하는 언어들이 금지되
었던 것이다7).

2) 인간의 개별성, 창의성 부정을 통한 완전한 집단성


유형, 무형의 모든 것에 대한 개인의 사적 소유와 애착을 금지하게 되면서 각자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개별성을 부정당하게 된다. 즉 한 인간으로 자신만의 생각,
취향, 의견, 선호를 가지는 것이 전면적으로 금지된 것이다.

5) ibid 562
6) ibid 609
7) ibid 616

10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사적 소유와 개별성의 부정은 일차적으로 의식주 영역에서의 절대적인 단일한


통일성을 강요하게 되었다. 음식에 있어서는 개인 각자가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권한과 기회를 근본적으로 없앴다. 식사 준비를 자신의 집에서 하는
것은 모두 금지되었다. 따라서 모든 냄비와 접시는 당에 제출하여야 하였고, 집에
는 물을 끓일 주전자와 숟가락만이 허락되었다. 그리고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집단
으로 지정된 식사 장소에 모여 급식을 받아야 했다. 이것을 급식통일제라 불렀다.8)
이것은 마치 불교에서 승려생활 할 때, 모두가 집단적으로 주어지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과 유사한 형식이었다. 옷도 개인이 자신의 옷을 선택하여 입는 것이 금지
되고 색상이 없는 옷으로 모두 통일시켰다.

이렇게 되면서 사람들도 자신이 어떤 개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가치를 가진다는


생각을 점차 하지 못하도록 유도되었다. 자신들은 그냥 캄보디아라는 국가를 구성
하는 하나의 부속품으로서만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한 인간의 가치
는 그 사람이 움직여 다닌 논밭의 넓이에 따라 결정되었다9). 사람들은 이념의 족
쇄가 단단하게 죄어질수록 스스로를 개인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고, 무슨 일을 하는
기계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자신을 그 신비한 기계의 톱니바퀴로 여기게 되었
다10). 그러면서 개인의 감정 상태 역시, 개인이 스스로 선택하거나 스스로 자연스
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여기에 되었다. 크메르 루즈의 강제 노동 장소
에서는 언제나 선전선동의 음악을 틀어놓았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늘 강제적으로
들어야만 하였는데, 그런 경쾌한 음악 덕분에 사람들은 그 노래 속의 가사 내용을
모두 사실로 믿게 하였다.

“그 노래를 들으면 우리가 모두 기쁘지 않은 것이 꼭 우리의 잘못처럼 느껴


졌어요. 이기심 게으름 욕망을 없애기 위해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았
지요”11)

8) ibid 654
9) ibid 612
10) ibid 604
11) ibid 614

|제50회 KPI평화포럼| 11
<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이렇게 되면서 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자극할 수 있는 아름다움, 화려함, 안락함


같은 정서와 그것을 표현하는 말의 사용이 방송에서조차 금지되었다. 그것들이 감
상적 부르주아적 정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엄격하고 극단적인 종교적
금욕주의가 사회를 뒤덮은 것이었다.

2. 추진방법의 문제 : 폭력과 사상 절대주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캄보디아의 공산혁명은 그것이 추구하는 방향과 내용 자체
가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는 비현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큰 비
극의 원인은 그러한 혁명을 이루는 방법으로 폴 포트 정권이 선택한 그 도구, 방법
이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1) 인간개조 방법으로서의 폭력
폴 포트 정권은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이상을 폭력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천부인권 사상이 제도에 도입되기 전, 거의 모든 문명권은 잔혹한
노예제도를 운영하였고, 노예가 아닌 평민이라 할지라도, 집권 세력의 잔혹한 통치
와 학살의 대상에서 예외가 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동남아시아 전 지역과 캄보디아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캄보디아 왕조 시대에는 물론이고, 프랑스 식민시대, 그
리고 시아누크 왕의 통치시대와 론 놀 통치시대에도 잔혹한 인권침해와 살해의 역
사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폴 포트 정권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진
다. 여기서 주목할 사항은 폴 포트 정권 시대의 잔혹함이 그 이전의 정권들과 달리
새삼스레 더 잔혹하였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폴 포트 정권 역시,
폭력을 통한 인간 통치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정권들과 달리, 폴 포트 정권에서는 단기간에


엄청난 규모의 죽음이 있게 된다. 이것은 과거 정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과 권력을
유지하는 것을 그들의 정권 목표로 한 것에 비하여, 폴 포트 정권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과 인간을 만드는 개조’를 자신들의 정권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
었다. 그리고 그러한 개조를 교화와 설득이 아닌, 폭력으로 이루겠다고 생각한 것
이 그러한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12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여기서 주목할 내용 중 하나는, 폴 포트 정권이 가졌던 ‘개조’에 대한 생각이었다.


같은 공산중의 국가였던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전통적인 유교 국가에서는 교육
과 교화에 의한 인간 개조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좀 더 크게 보는 반면, 캄보디아와
같은 전통적인 불교국가에서는 그런 교화와 교육의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적게 보
았다. 그에 따라, 교화에 의한 변화보다는, 그가 ‘원래’ 어느 영역에 속하여 있는가
를 더 중요하게 보는 전통이 있었다. 즉 ‘선 안의 사람과 선 밖의 사람’을 구분하고,
그 선은 여간해서는 넘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폴 포트 정권
은 그런 사상적 전통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악용한다12).

1972년 이후 폴 포트 정권의 최종적인 꿈은 캄보디아 사람 전체를 외부세계에


오염되지 않은 토착농민처럼 개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시와 제국주의적인 프
랑스의 서구 문명에 오염된 ‘선 밖의 사람들’은 그 오염에서부터 건져내지고 순결
하게 만들어져야만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개조, 즉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함양은
사상 교육이 아닌, 열악한 환경 속에서 땀을 흘리는 육체노동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고 생각하였다13). 그래서 폴 포트 정권은 그런 사람들을 열악한 생활환경과 가혹
한 노동으로 내모는 것이 정당한 동시에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에 따라
모든 일들이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야만 하였으나, 그것
은 개조를 위한 불가피한 결과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대량 학살
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2) 사상 절대주의의 한계
이상주의적 공산국가를 이루는 것을 국가 목표로 내세우면서 국가를 이끌어 가
는 것은 ‘사상’이 되었다. 그 사상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절대적 위치를 가지게 되
었고, 그 사상 앞에서는 어떤 것도 그 우위성을 가질 수 없었다. 이것은 전문적 지
식보다도 사상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로 연결되었다. 그러면서 전문적 지식이 필요
로 되고 적용되어야 하는 부분에서도 사상이 더 우위에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그런
전문적 지식이 무시되는 현상이 강하게 나타났다.

12) ibid 445


13) ibid 517

|제50회 KPI평화포럼| 13
<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더구나 캄보디아는 근대화와 그에 따른 지식,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 프랑스 식민


지 기간 동안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식과 전문성은 곧 프랑스 제국주의 추종과 연관
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면서 모든 일을 해 나가는데 있어 전문적 지식과 기
술보다도 순결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동이 더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
여졌다. 이것은 반지성주의, 반전문주의로 이어졌다. 그에 따라 폴 포트 정권 기간
동안 댐 건설 등 수많은 토목공사들이 이루어졌으나, 그 대부분은 전문적 지식과
기술 부족으로 인하여 큰 실패로 귀착되었고 많은 인명 피해도 났다.

합리적이고 전문적인 기술과 지식의 거부, 사상의 확신으로 모든 어려움을 뚫고


나가야 한다는 식의 사고들은 인간의 굳은 의지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 될 수도 있
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큰 비극을 만들어 내는 이유가 되었다. 합리적인 문제제기
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였고,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거짓과 또 다른 불행을 만들어 내었다. 예를 들어 중앙 지도부는 국가의 필
요와 이론적 계산에 의하여 각 시골 지역에 농작물을 3배 증산하라고 목표치를 주
었다. 물론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역 당 간부들은 자신
들이 징계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추수시기에 3배의 소출을 냈다고 거짓 보고들
을 하였다. 그러면 중앙 지도부에서는 그 3배 소출의 결과를 토대로 중앙에 보내야
하는 곡물의 양을 할당하였고, 지역 당 간부들은 그 할당량을 보냈다. 그러면 그 농
촌 지역에는 실제로 인민들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은 거의 남지 않는 일들이 있게 되
어 결국 수많은 아사자들을 만들어 내었다.

결국 이러한 모순과 비극을 현장 속에서 겪으면서, 크메르 루즈 정권도 자신들의


정책을 서서히 포기하고 바꾸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1978년부터는 규제
를 완화하기 시작하여 수렵체취를 허용하고, 가족끼리 식사하는 것도 허용하였고,
다양한 색상의 옷을 입는 것도 허용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금지되었던 농촌 지역의
본토박이와 도시로부터 농촌으로 이주당하여 온 이주민 사이의 결혼도 허용되었
다. 그리고 전문 기술교육도 허용되게 되었다14). 즉 극단적인 사상 위주의 통제가
한계에 부딪침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이것은 크메르 루즈 정권을
취약하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14) ibid 725

14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3. 내부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
극단적인 이상주의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도록 만든다. 즉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선
과 악, 적군과 아군, 충성스러운 사람과 배신하는 사람 등으로 철저히 구분되는 것
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캄보디아의 전통적 사고인 “선 안의 사람과 밖의 사
람” 구분과 연결되었다. 그러한 구분은, 폴 포트 정권이 정권을 잡기 전까지는 ‘선
안의 공산주의자’와 ‘선 밖의 비공산주의자’로의 구분이었다. 그리고 정권을 잡게
되면서 폴 포트와 그 중심인물들은 선 밖의 사람들에 대한 의심을 더욱 증폭시킨
다. 과거 극도로 억압적이고 잔혹하였던 시아누크 정권과 론 놀 정권 하에서 자신
들이 엄격한 비밀유지와 내부적인 투쟁 역량을 키워 정국 상황을 변화시키고 마침
내 정권을 쟁취하게 된 것처럼, “자신들의 밖”의 비공산주의자들도 이제부터 그런
비밀유지와 내부적 역량을 키워 다시 자신들을 뒤집을 수 있다는 의심을 한 것이었
다. 그래서 그럴만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가차 없이 처형하기 시작하였
다. 이런 의심과 두려움이 대량 살육의 초기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일단 폴 포트와 그의 동료들이 정권을 잡게 된 이후에는 그 ‘선의 위치’가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한다. 바로 자신들의 내부 공산주의 집단 안으로 이동이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 집단 내부로 침투해 온 적의 스파이와 동조자들이 있을 수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종교적 강박증”과 같은 현상이었다.
정치적 사고를 한다면 세력의 유지를 위하여 어느 정도 의심이 되는 존재들도 확실
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용납하고 관찰하면 상황을 보는 것이 일반적일 수 있
다. 그러나 폴 포트 정권은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도 “종교적” 이었다. 그들은 종교
적인 완벽한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
처럼 보이는 의심이 들면, 자신들의 정치적 세력이 약화되는 것 등은 고려하지 않
은 가운데, 그대로 다 숙청을 하기 시작하였다. 순결한 사람들만으로 구성된 정권
이, 오염되고 타락한 존재들과 합하여 더 큰 숫자를 이루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숙청은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져 갔다. 프놈펜에 위치한 S21
수용소에서 죽어간 1만2천명의 사람 중 2/3는 크메르 루즈 출신, 바로 “자신들의
선 안”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제50회 KPI평화포럼| 15
<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이들의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태도”는 극단적인 비밀주의로 연결된다. 자기 내


부에게도 모든 것을 감추고 비밀로 하여,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진격
해 오는 동안에도 아군에게 그런 사실을 정확하게 알리지 않는 일들이 벌어져, 그
결과 패망을 하게 된다. 이런 극단적인 의심과 불신의 태도는 폴 포트 정권을 세웠
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그리고는 정권을 무너뜨린다.

III. 결론 : 우리 시대에 대한 적용

결국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비극은 인간이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만든다’라는 공


산주의의 ‘명분적 사고’와 ‘강력한 권력의지’를 가지고 인간을 개조한다는 슬로건
하에 얼마나 잔인한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 중의 하나가 된다. 폴 포트와
핵심 집단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끝까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을 버
리지 않았다. 인간과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 능력이 없을 때, 본말이 전도되는 상황
을 인간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미 30 여 년 전 붕괴된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이 보여주었던 그들의 이상주


의적 목표와 좌절은 한반도에도 몇 가지 점을 시사한다. 북한이 가지고 있는 특성
이 폴 포트 정권이 가지고 있는 특성도 상당 부분 유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첫
째, 근본적인 인간개조를 자신들의 국가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주체사
상이 강조하는 인간의 모습 역시, 이기심이 전혀 없고, 당과 인민, 조국을 위해 열
정적으로 헌신하며, 그러기 위하여 최고지도자에게 절대적인 충성과 복종을 하는
인간상이다. 자신들의 개인적 이익과는 전혀 상관없이 집단을 위하여 숭고한 희생
을 하는 인간을 만드는 인간개조가 국가적 목표가 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극단적
인 자기중심성과 자기도취성이다. 폴 포트 정권은 자신들이 혼란스러운 세계 한 가
운데 떠있는 순결한 섬이자 인류의 귀중한 본보기이고 그래서 자신들의 혁명은 그
어떤 혁명보다 값지다는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세계 최강 미국을 축출한 것이 자신
들만 한 일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바로 옆 국가인 베트남이 실제로 그런 일을 하였
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전 세계가 자신들을 부러워하
고 칭찬하고 자신들을 따라 배우고 있다는 식의 선전을 하였고, 자신들은 전례 없
는 독자적인 혁명을 한다고 주장을 하였다15) 이것은 북한이 보이는 것과 매우 유

16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자신들의 특성을 극단적으로 이분


화 시켜 강조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셋째, 지도자의 신격화이다. 지도자 폴 포트
는 늘 인민들에게 나서는 일들이 없었고, 심지어 당 간부들에게도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극히 제한하였다. 그리고 매우 간단하고 우회적인 수수께끼 같은 말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였다. 스스로를 신비화화고 그것을 통하여 신격화한 것이다. 이것은 북
한이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것과 유사한 측면을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캄보디아 폴
포트 정권에 대한 성찰은 한반도 상황에서도 중요하다.

캄보디아의 사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런 잘못된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큰 비극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집단들
이 일어서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리 사회가 더
균형 잡히고 건강한 모습을 가지고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일단 상황이 벌어지
고 나면, 그 비극은 되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언제나
너무도 늦은 것이 된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
에 예비하고 준비하고 방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캄보디아의 킬링필드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의 목소리이다.

15) ibid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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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 참고문헌
필립 쇼트 (2008) : 폴 포트 평전. 이혜선 역. 실천문학사 (Philip Short(2004):Pol
Pot - Anatomy of nightm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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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ECCC 재판의 사회치유적 측면 고찰

I. 시작하는 말

캄보디아에서는 1979년 크메르 루즈 정권이 무너진 지 30년, 그리고 재판에 대


한 준비 논의가 시작된 지 12년이 되던 2009년, 마침내 캄보디아 정부와 UN의 공
동 재판정인 ECCC 재판이 열리게 되었고, 전국에 그 에 대한 원고 신청 및 증인 신
청이 공고되었다. 그러나 12,000명의 S-21 피해자 가족 중 오직 94명 피해자의
가족만이 001재판 (두크 재판)에 참여 신청을 하였고, 총 150만 명이 죽은 비극에
대한 001, 002 재판에 8,202 명만이 참여 신청을 하였다. 이 거대한 국가적 비극에
대하여 직접 그 재판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숫자는 이리도 적었던 것의 원
인은 (i) ECCC 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면서도 그 피해자들이 여기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충분한 통지를 못 받은 경우들도 많았고, (ii) 이것이 그들의 현재
의 삶과 직접 연관이 없다고 느끼거나, (iii) 이런 재판에 참여하는 것에 의하여 나
중에 보복을 받을까 두려웠던 것 등이 이야기되었다. 72일간의 001 재판(두크 재
판) 기간 중, 법정에서는 24명의 증인, 22명의 원고, 9명의 전문가가 발언하였다.
이러한 ECCC 재판은 단순히 30년 전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처벌 재판이
아니었다. 이것은 재판을 통하여 30년 전 극단적인 상처를 입었던 개인, 가족, 그리
고 사회 전체에 치유적 기능을 하는 행사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재판부는 사회회
복적 효과 (rehabilitative impact)를 고려하였으나, 그것은 개인 단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한 것이었다.1) 실제로 법정 증언과 진실위원회에 참석하여
발언하는 것이 트라우마 희생자들 개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또는 부정
적인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하여는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2)3) 그러나 그와 함께, 이
러한 재판이 가지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치유 기능도 분석될 필요가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캄보디아의 ECCC 재판이 가졌던 사회치유적 기능, 그리고 그런 치유
적 기능을 저해하였던 요소들, 재판 관련자들이 가져야 했던 2차 심리적 문제들,
그리고 재판과 연관되어 이루어졌던 마을대화 (community Dialogue)가 가졌던 사
회치유적 역할을 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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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II. 재판의 사회치유에 대한 긍정적 기능

1. 무기력한 피해자로부터 힘 있는 역사 참여자로의 변화 느낌


원고들이나 증인들은 여러 번의 재판 준비회의에 참여하면서 점차 본인들이 거
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주 작고 무기력하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였던
초라하였던 존재라는 느낌, 그리고 그로 인하여 가지게 되었던 낮은 자존감으로부
터 점차, 그 역사의 사건들에 대하여 자신들이 용감하게 증언을 할 수 있고, 그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과거의 악에 저항하는 힘을 가진 존재로 바뀐다는 것에 대한 큰
자부심과 만족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정부가 과거 크메르 루즈의 행위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인권과 존엄


을 인정해 주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범죄 행위를 하였던 사람들이 처벌되는 것
을 통하여 이 사회에 정의가 다시 세워 진다는 느낌을 가짐으로써 치유적 느낌을
받게 되었다.

또한 원고와 증인들은 법정에서 자신들의 과거 경험들을 증언함으로써 그것이


공식 기록에 남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기억이 개인 기억이 아닌, 공동
체와 국가의 집단기억으로 확정된다는 것에 대하여 만족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역
사에 기록되어, 다음 세대들에게 역사교육의 자료가 되게 함으로써 미래를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데 자신들이 기여를 하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자신들이 의미 있는
일을 하였다는 것에 만족하였다.

2. 같이 고통 받은 사람들과의 연대감 형성과 사회활동 강화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오직 세상에 자신 하나만이 이런 고통을 겪었고, 다른 그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없다는 그런 고립된 생각과 감정을 가
지고 살아왔었다. 그러다가 재판에 참여하게 되면서 자신 주변에 자신과 같은 고통
을 겪었고, 자신과 같은 무기력 속에 있다가, 이제는 서로에게 관심과 위로를 주고,
함께 힘을 합하여 과거 있었던 이런 일들에 대하여 무언가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
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은 강력한 유대감, 연대감으로 이어지면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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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들로 하여금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한 원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이런 소송인이 된 것이 나에게는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과


거 이야기를 하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나 자신에 대하여 명확해 졌다는 느낌이 있다. 그
전에는 나 혼자만 이런 일을 당하였다고 느꼈으며, 다른 소송인들을 몰랐다. 그러나 재판
을 통하여 나는 내가 다른 소송인들에 의하여 지지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경
험을 나에게 나누어 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재판 과정을 통하여 캄보디아에서는 과도기적 정의 (transitional justice)를 만


들어보려는 많은 시민단체들이 활성화 되는데, 이들 원고와 증인들이 그에 큰 기여
를 하게 되었다. 즉 원고 및 증인들과 시민단체들이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가 된
것이다. 이것은 재판을 넘어서서 캄보디아 전체 사회의 발전과 변화에 기여하게 되
었다.

3. 자신의 고통에 대한 의미 발견과 성숙 인정


증인들과 원고들은, 법정 진술을 함으로써 억울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간 자신의
가족, 친척들에게, 생존해 있는 가족으로서의 책임을 이제 다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있었다. 그것은 캄보디아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이었
다.

동시에, 사람들은 법정 진술과 재판 참여를 통하여 본인이 그 동안 심한 고통을


받고도 끝까지 살아남아 있었던 것의 의미를 느끼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신이 이제
더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해 나갔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치유적 경험이었다.

III. 재판이 사회치유에 대한 긍정적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요소

그러나 위와 같은 재판의 사회치유에서의 긍정적 기능이 있었던 반면, 재판 참여


는 치유를 저해하는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과거의 트라우마에 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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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상처를 더 악화시키는 일들도 있게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증언 내용 선택에 의한 상처
법정은 사법적 논리를 가지고 진행되고, 유, 무죄라는 최종 재판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에 모든 관심이 주어지므로 그 과정에서 원고나 증인들이 체험하는 치유에
대하여 직접적인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상처들이 생길 위험성이 늘
있었다.

법정에서는 증인들과 원고들에게 엄격한 행동지침을 제시하여 법정의 필요에 맞


는 증언만을 하게끔 제한하였다. 즉 판사가 조사에 필요하다고 인정한 부분에 대해
서만 증언하도록 하면서 여기가 법정임을 상기 시킨 것이다. 그러면서 증언자들은
법정에서 자신들이 증언하고 싶어 하였던 것과 재판부로부터 증언으로 요구받는
것 사이의 큰 차이를 가지게 되어 증인들에게 좌절감을 가지게 하였다. 증인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증언해야 할 내용들은 증언하지 못하였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에 대해서만 질문을 받아 그에 대한 심각한 갈등이 있었
다4)

또한 증인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길게 설명하려 하였지만, 재판관은 재판의 신속


한 진행을 위하여 그 이야기들을 짧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여, 양 쪽의 필요는 늘 충
돌하게 되었다. 재판은 진실위원회가 아니고, 피고인의 유무죄를 밝히는 것의 공정
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었기에 생기는 현상들이었다5)6)

그래서 원고측 변호사였던 Silke Studzinsky 는 “법정은 매우 사무적이었고, 피


해자들은 고통에 대하여 공감을 받지 못하였으며, 어떤 원고도 그들의 증언을 통
해 감사의 표현을 듣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떤 추가 질문도 받지 않아 법정이 그들
에 대하여 흥미와 관심이 없다는 느낌을 가지도록 하였다”고 이야기하였다.

2. 증인으로서의 적절한 감정 상태를 요구받는 것에 의한 상처


재판에서 증언이 이루어 질 때 그 증인이 재판관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이느냐도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증인이 재판 중에 감정적으로 무디고 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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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것처럼 행동하면 재판관은 그 증인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로 지나치게 감


정적이고 예민하여도 (hysterical) 신뢰하지 않았다. 또한 법정에 나와 증언을 하
는 것이 증인에게 무언가 2차 이득 (secondary gain)을 주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인
상을 받아도 재판관은 그것을 강하게 의식하였다.

그러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증상의 일환으로 증인은 지나치게 감정이


없거나 지나치게 감정적일 수 있다는 문제들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감정적
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에는 깊은 이유가 있었다. 자기 눈앞에서 가족이 학살
되는 것을 보았던 사람들은 그 순간 자신의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것이 자신들의
목숨에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배웠다. 울지도 분노를 표현하지도 않아야 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이 죽어도 일반적인 애도와 장례를 하지 못하고 즉각 일터로 가
야만 하였고, 그러면서 자신의 감정과 단절하여 살아야 하였다. 무감각으로 인하여
일종의 “걸어 다니는 시체”(walking dead) 가 되어야 했다.7) 그리고 수 십 년이 지
나면서, 어떤 사람들은 다시 감정의 표현을 할 수 있게도 되었으나,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를 못하였다. 따라서 막상 증인으로 나가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극도로 조절하는 것이 요구되었고, 그것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증인
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잘 요약하고 앞뒤 조리 있게 이야기 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001 재판 법정에서 원고나 증인들이 피고인 두크를 증오하고, 죽이고 싶고,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식의 발언들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즉 희생자
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재판관은 “이 자리는 복수
하는 자리가 아니라 정의를 찾는 자리이다”라고 이야기 하곤 하였다. 이런 것들이
재판에 나온 증인들과 원고들에게 상처가 되었다8)

3. 원고와 증인에게 정확한 기억을 요구하는 것에 의한 상처


재판의 증언에서는 오래 전에 있었던 과거의 일들에 대한 정확한 기억을 요구하
였다. 그러나 원고와 증인들은 가장 기초적인 자신의 가족들이 학살당한 정확한 날
짜, 그 때 죽은 가족과 친척들의 숫자, 이름 등을 정확히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경우
들도 많이 있었다. 이미 너무 오래된 일들이었고, 증인들의 나이가 고령이 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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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전반적 기억력 저하가 오기도 하였으며, 너무도 고통스러운 과거 기억이었기에 그


런 핵심적 사항에 대한 기억의 해리(dissociation)가 오기도 하였다. 과거에 자신의
눈앞에서 실제로 펼쳐진 사건이었기에 그에 대한 아주 선명한 회상장면
(flashback)을 가지기도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고 느낀 것을 말로 정확히 표현하는
데는 어려움을 가졌다9) 그러나 이런 부정확한 기억의 이야기는 재판에서 이 원고
와 증인이 과연 진실을 이야기 하고 있는지, 더 나아가 이 사람이 과연 진정한 원고
이고 증인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 받았고, 그것이 이들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다.

더구나 법정에서는 원고 측 변호인들에 의한 공격적인 사실 확인 질문들이 있었


기에, 원고와 증인들은 그것에 일일이 대답을 하여야 하였는데, 이것이 그들에게는
매우 혼란스럽고 힘든 일이 되었다. 때로는 피고인이 직접 증인의 말의 진위 여부
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까지 도달하면 증인들의 입장
은 매우 곤혹스러워졌고 큰 상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크메르 루즈 시절 벌어진 일들에 대한 기록을 담은 많은 서류들은 이미


다 사라져 버렸고, 희생자들이 고문당하고 죽어갔던 교도소나 처형장은 이미 다 부
서져 없어져 버렸기에, 원고와 증인들의 증언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러면서 피고 측 변호사들은 “당신의 고통에 대하
여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일들까지 발생하였다10). 그에 의하여 두크에 대
한 최종 판결이 나고 나서 한 원고는 “나는 아프고 지쳤고, 부끄럽다. 수치심을 느
낀다. 이제 판결이 났고, 나는 웃고 있지만, 내 안에는 고통이 있다” 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원고와 증인들은 자신들의 증언이 재판에 큰 기여를 하기를 원하였지만, 자기 차


례가 오면 크게 긴장하였다. 재판정의 수많은 재판관과 변호사들을 보면서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하고 잘못할까봐, 그래서 그것이 재판 기록에 남을까봐 겁이 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재판에 오기 전에 하였던 발언들과, 재판석에 앉아 하였던
발언의 내용들이 달라지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4. 다시 과거 사실과 만나야 하는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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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재판에 참석하게 되면 자기 스스로 증언을 하면서 수 십 년 간 가족들에게 조차


이야기 하지 않고 지냈던 과거의 일들을 다시 회상하고 꺼내야 하는 어려움을 가졌
다. 과거 트라우마 기억이 재활성화 되면서 과거에는 자신을 보호하려고 기억에서
억누르고 살았던 내용들을, 다시 기억해 내야하는 입장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기
억 속에서 해리되었던 것들이 다시 재생되어야 하고 재활성화 되어야 하는 상황에
들어가는 것이 이들에게 큰 심리적 부담과 충격이 되었다11)

그러나 그에 더하여, 재판에 참석하면서, 객관적으로 그 상황 속에서 있었던 일


들의 사실과 전모를 더욱 정확하게 알게 되는 일들이 발생하였다. 즉 자신의 눈앞
에서 직접 가족들이 죽임을 당한 경우에는 자신이 그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것이 아니고 가족들이 어딘가에 끌려가서 고문 받고 죽었을 경우, 그
때의 상황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재판을 통하여 비로소 아주 구체적이고 정확하
게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다시 받게 되는 일들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
일에 다시 노출되게 되고, 그에 따른 큰 감정적 고통이 있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원고들은 더 이상 재판에 나오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들까지 있게 되었다.

또한 001 재판의 경우, 두크의 앞에서 직접 증언을 하여야 하게 되었으므로, 원


고나 증인은 가해자 두크 앞에 가서 서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있었다. 더구나 두크
가 재판에서 직접 발언을 하도록 하였으므로, 원고와 증인들은 그것을 다 들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그것이 원고와 증인들에게는 너무도 힘든 일이 되었다.
그래서 원고 측 변호사가 두크의 증언을 중지 시킬 것을 요구하였으나 재판부는 받
아들이지 않았다. 법정 진행상의 편리를 위하여 피해자의 고통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것이었다 12)

또한 원고들과 증인들은 증언을 하고 나서 자신의 신변안전을 걱정하였다. “나는


두크의 친척과 아들이 나를 공격할까봐 두렵다”라는 의식, 또는 과거 크메르 루즈
정권에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에 의한 보복 공격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13)14)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원고나 증인들은 재판정에서, 그리고 재판정을 떠난 후에


도, 계속 고통스럽게 울었고, 증언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 간 다음에도, 다시 비
극적 장면에 대한 회상(flashback), 악몽 등이 나타나는 경우들이 있었다.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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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그것을 도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5. 용서의 이야기가 남발되는 것에 의한 상처


재판 진행 속에서 피고가 원고와 증인들에게 자신을 용납해 주고 회복할 수 있도
록 해 달라고 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원고와 증인들에게 커다란 추가적인 심리
적 압박이 되었다. 두크는 재판 과정에서 자주 희생자들과 그 친족들에게 용서를
구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원고와 증인들에게는 심리적으로 크게 충격이 되었다. 원
고들과 증인들은 피고가 용서를 구하기 이전에 먼저 진심으로 사과하고, 희생자에
대한 모든 진실을 밝히는 것에 최대한 협조를 하고, 그리고 나서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두크는 그러지 않았다고 원고들과 증인들은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용서라는 단어가 먼저 나오는 것에 그들은 매우 당혹하고 상처를 받아야 했
다.15)16)

6. 재판 편의주의에 의한 상처들
재판은 성(gender) 문제에 대하여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너무도 거대
한 규모의 살육을 다루는 재판이었기에, 강간 등의 문제는 그다지 주목받는 일이
안된 것이다. 기소에서도 001 재판에서 강간의 문제는 누락시켰다17). 002 사례에
서는 강제결혼을 강간으로 처리하도록 하였으나 이것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없었
다. 한 원고는 자신의 법정 진술이 끝난 이후에, 다른 원고가 법정 진술에서 자신이
당한 강간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자신의 변호사에게 자신도 강간을 당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이미 법정 증언에서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와
재판의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고와 증인들은 재판의 최종 판결문에 자신들이 증언하고 문제로 지적한 내용


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에 매우 당혹해 하였다. 재판은 재판의 논리로서
그들의 주장을 선별적으로 선택하였는데, 그것은 원고와 증인들에게 큰 상처가 되
었다. 따라서 그러한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최종 판결이 나기 전, 원고 측 변호사
들은 원고의 주장 중 일부는 받아들여 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고, 선고
가 난 후에 다시 설명하는 것을 하여야 했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원고와 증인들

26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이 과거에 고통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증거 문서들의 부족에 의한 것이


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과정이었다.

재판부는 재판을 진행하면서 원고와 증인들의 심리에 대하여 그다지 신경을 쓰


지 않고 재판을 하였다. UN 에서는 사전에 이런 재판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심리사회적 교육훈련 부분을 만들었지만, ECCC 관련
자들은 법률 훈련에만 참석하고18), 심리사회적 훈련 (psycho-social training)을
받는 것은 거절하였다19). 재판장은 단지 “마음을 가다듬어라, 침착해라” 라고 말하
는 것 이상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격려해 주지 못하였다. 따라서 대형 트라우마와
관련된 이슈와 증언, 민간소송인의 심리-사회적 지지에 대한 판사와 변호사에 대
한 교육과 훈련은 중요하였다, 그리고 이런 심리적 지원을 그들의 모국어로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그를 위한 예산 배
정이 사전에 있어야만 가능한 것들이었고, ECCC는 그에 대한 충분한 예산을 가지
고 있지 못하였다. 재판부는 처음에는 정신, 심리적 도움을 주는 사람이 법정에 들
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런 것에 대한 의식과 고려가 없었던 것이다. 그
러나 재판이 진행되면서 점차 이것이 재판에 있어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는 것을 인
정하게 되었고, 그 후로는 관련 인사들의 재판 참석을 허용하였다.20)

7. 배보상 사안에 의한 상처
재판에 있어 가장 논쟁적 주제 중 하나는 배보상에 대한 것이었다. ECCC 의 내
부 원칙은 집단적이고 도덕적인 보상이었다. 즉 실제적인 경제적 보상을 하지 않기
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피해 당사자와 가족들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002 재
판의 약 4000명 소송자 중 18%가 의료지원, 16%가 주거환경 개선, 16% 학교 설
립, 12% 개별 보상, 13%는 종교 예식을 요구하였다21). 그리나 ECCC는 자신들의
원칙에 따라 경제적 보상은 피고인이 개인적으로 하든가, 또는 외부의 기부에 의한
기금만을 가지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001 재판에서 피고인 두크는 자신은
돈이 없어 어떤 경제적 보상도 할 수 없다고 대답을 하였고, 그것으로 보상 문제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었다. 그래서 요구자들은 그런 결과를 알아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호인들은 심리적 돌봄, 집단 학살에

|제50회 KPI평화포럼| 27
<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대한 교육과 기념사업, 출판, 정보의 확산 등을 계속 요구하였다 (530) 결국 개인


에 대한 경제적 보상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22)

(&172) 배보상에 대한 권리는 국제법상 널리 인정되고 있으나, 그 개념의 폭이


매우 넓어 실제 상황에서 그 범위를 정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일반적으로 보
상은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23)

1)목적 - 보상(compensation) / 명예회복, 사회로의 복귀(rehabilitation)

2)유형 -경제적 / 영적 (또는 도덕적) / 권리회복적 / 사회재건적


(socio-reconstructing)

3)기전 (mechanism) - 개인적 / 집단적24)

경제적으로 가난한 캄보디아에서 보상은 재정적 부담이 없는 도덕적, 사회재건


적 보상만 이야기되었고, 재정적으로 돈이 더 드는 권리회복적 보상은 미루었다.
워낙 피해자와 연관자들이 많은 상황이었기에, 개인적 보상은 그 피해자를 구분해
내기도 어려웠고, 재정적으로도 쉽지 않아, 집단적 보상만이 현실성을 가질 수 있
는 측면도 있었다.25)

국제사법재판소의 로마법령에 의하면 배보상으로는 restitution (원래의 자리로


복귀), rehabilitation (사회복귀와 명예회복), compensation (보상)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ECCC 에서는 이것들이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001 재판(두크 재판)의 경우, 최종 재판 판결에 원고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에 남기
고, 피고인 두크가 하였던 사과의 모든 말들을 기록에 남기는 것으로, 명예보상을
해 주는 것이 전부가 되고 말았다.26)

8. 재판정 밖에서의 상처들


그러나 재판과 연관된 심리적 치유 문제는 재판정 밖에서도 있었다. 그 내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비록 전체적인 피해자들에 비하여 재판에 원고나 증인으로 참여 신청을 한 사람

28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들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할지라도, 그들 중 실제 원고나 증인으로 채택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구하였다. 그리고 그 대다수의 채택되지 못한 사람들은 재판
과정 중에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채택되지 못한 것으로 인
하여 큰 트라우마를 다시 받아야만 하였다. 27) 그들은 채택되지 못한 것이 죽은 자
들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느꼈고 주변의 친척, 지역 주민, 동
료들에게 체면, 신분, 명예를 잃는 것이 되었다. 거절되었다는 것을 법정에서 증언
할만한 신빙성이나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판결 받았다는 식으로 해석되면서 주변
사람들은 그를 나쁘게 보았고, 그것이 그들에게 심한 창피와 수치심을 가지게 한
것이었다28).

그리고 증인으로 채택되었을 때도 10명 중 3명 정도만 프놈펜으로 올 수 있었다.


이들에 대한 재판부의 재정적 지원이 없었으므로, 가난하고 일을 해야만 하였던 사
람들은 결국 프놈펜의 재판정에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또 상처가
되었다.

IV. 재판 관련 스텝들의 2차 심리적 문제들

1. 내용과 증상
그러나 재판에 의하여 심리적 충격을 받는 것은 원고나 증인, 그리고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 뿐 만이 아니었다. 그들에 더하여 ECCC 의 스탭들, 즉 재판관, 검사, 변
호사, 통역관, 번역자, 법의학자, 경찰 등도 모두 심리적 상처를 받고 어려움을 가
질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29).

재판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잔인하였던 과거 일들에 대한 증언, 그림, 기록들


에 노출되면서 이들은 2차 트라우마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그 중에서도, 스
탭 자신이 외부에는 밝히지 않았지만, 자신만의 과거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경우
에 더 큰 어려움들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런 일에 대하여
더 정의감을 가지고 생존자들에 대한 동정심이 있었기에, 이런 재판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던 경우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과거가 이 재판과 복합되면서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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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큰 어려움을 가지게 하였다. 또한 더 나가서는 이러한 피해자들과 2차 피해자들을


돕는 정신치료자들도 어려움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어려움을 가지게 되면 그 비극과 범죄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집착


하게 되고 압도되어 자신의 일을 적절하게 하지 못하고, 직장과 개인의 삶의 구분
이 모호해 지고, 그에 따라 자신이 그런 자료에 노출되는 것을 회피하려는 원치 않
는 생각이 계속 들고, 두려움, 불안, 수면장애, 악몽, 기운 없음, 중요한 사안에 대하
여 기억하지 못함, 우울 등을 보인다. 이런 2차 트라우마는 점차 누적되면서 그들
의 기억, 감정, 인지, 자존심, 안정감 등에 영향을 준다30) 그리고 그들의 직업적 자
아감 (professional sense of self), 그들의 세계와 자신에 대한 생각(assumption)
이 중대하게 변동되고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즉 탈진(burn-out)을 겪는 것이
다. 그리고 이런 트라우마에 자신들이 취약한(vulnerable) 존재로 느끼게 된다. 이
세상이 더 이상 질서 있고, 예측 가능하며, 이해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두려움을 가지고 외부의 힘에 자신들이 무기력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31) 이러한 2차 트라우마에 의한 증상은 트라우마가 계속 누적이 되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

2. 예방
일반적으로 이런 것은 예방과 치료, 그리고 회복이 가능하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전 교육이다. 이러한 현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미리 교육시키고
그런 현상이 나타나면 즉시 알려 달라고 이야기 해 준다. 둘째, 정기적인 자기 평가
와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이런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일에 노출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정기적인 자기 평가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고, 자기 성찰을 하도록 하
여, 어려움을 예방하고, 초기 증상이 나타날 때 미리 선제적으로 조치를 취할 수 있
도록 해 주어야 한다. 셋째, 동료 그룹을 만들어 서로 자신의 느낌과 상황을 솔직하
게 이야기 하고 서로를 격려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여야 한다. 이런 프로그
램을 통하여 타인을 돌보는 경험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 도움이 된다. 넷째, 정기적으로, 그리고 필요에 따라 그 일에서 떠나 휴식을 시
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많은 문제들은 일정 기간 그 일에서 떨어져 있

30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음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일단 증상이 시작되면 즉각 전문치료자에게 치


료를 받아 조기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것들을 위하여 치료 프로그램인 ISPT 32)33)34)가 개발되어 있다. 이것은


강의와 그룹 토의로 구성되어 있고, 자기 관리와 타인을 돌보는 내용으로 되어 있
다. 또한 이들의 상태를 평가하기 위한 도구로서 30개의 항목으로 구성된
professional QOL scale35), second traumatic stress scale (STSS) 36), self care
assessment worksheet37) 등이 있다.

V. 마을 대화 (Community Dialogue)를 통한 치유

001 재판이 시작되면서 여러 가지 여건 상 모든 사람이 다 원고나 증인으로 채택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관련되었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이것에 대하여 하고 싶은 이
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이것을 NGO 인 DC-Cam 은 “살아있는 기록” (Living
Document) 프로젝트를 통하여 다루었다.38) (643) 이러한 마을 대화는 비록
ECCC 와 직접 관련되지는 않았어도 캄보디아 사회에서 가장 높은 개인적 참여들
을 만들어 내었다. 2011년까지 1만 5천명의 마을 대표가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였
다.

DC-Cam 은 각 마을마다 스스로 대표를 선정하게 하고 그들을 초청하여 ECCC


의 재판 과정, 그리고 피고의 범죄 행위와 살아온 일생에 대하여 교육하였다. 그리
고 그들을 ECCC 재판에 참관하도록 하였고, 참관 후 그들의 경험과 생각을 다른
참석자들과 토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자신들의 마을로 돌아가서 마
을 사람들과 그 재판에 대한 이야기와 토론을 하였다. 그 때 DC-Cam 스탭들과 전
문가들이 그런 마을 모임에 참석하여 실제적 질문을 받고 토론을 도우며, 그 장면
들을 영상에 담았다. 이런 마을 대화 모임들은 아직 ECCC에 대표를 보내지 않고
있던 옆의 마을들에게도 소개되어, 그 마을들에서도 마을 대표를 보내게 되었다.
이것은 크메르 루즈 기간 동안의 고통스러운 상실을 이야기하고, 지역 사회 사람들
로 하여금 그들의 경험을 서로 나누고, 지역 사회의 치유 과정의 시작으로서 목적
을 가졌다 39)

|제50회 KPI평화포럼| 31
<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이런 마을 대화 프로그램은 과거 크메르 루즈 일원이었으며 계속 같은 마을에서


살아 왔던 사람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들은 과거에 마을 사람들에게
복수를 당하여 죽기도 하였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늘 불안하게 지내왔는데, 이런
마을 대화를 통하여 마을 안에서의 그들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고, 용서의 기회도
되었기 때문이었다40) 즉 그 당시 비극적인 일들이 가해자들의 개인적 악으로만 의
하여 벌어진 것이 아니라, 크메르 루즈 정권의 특성과 요구로 그들이 불가피하게
그런 악행을 한 측면도 있다는 식의 이해가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ECCC 법정에 대하여 크메르 루즈 출신 사람들이 가졌던 두려움이나 오해가 없어
지는 의미도 가질 수 있었다.41)

이런 마을 대화는 피해자들의 고통을 치유하는데 의미 있는 과정이 되었다. 그리


고 이것은 법정에서는 불가능하였던 화해 과정을 캄보디아 사람들 스스로가 중심
이 되어 이룰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DC-cam 사람들이 떠난 다음에도 마을 사람
들의 대화와 모임이 지속되어 그 지역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001 재판의 보상적 영향(reparative impact)을 가장 크고 지속
적으로 만들었다.

VI. 마치는 말

ECCC 재판은 재판 자체로만 보면 많은 문제와 제한점을 가진 재판이었다. 캄보


디아 정부의 애매모호한 태도로 인하여, 재판부의 구성에서부터 재판 진행 전체가
정말로 과거의 범죄를 명확히 밝히고 가해자들을 처벌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
는지 여부조차도 불명확한 측면이 있었다. 30년 전의 사건을 다루면서 피고측 인
권과 재판권이 먼저 우선시 되는 것처럼 보여, 원고와 증인들, 피해자와 가족들이
분노하여야만 하였던 부분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ECCC
는 캄보디아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기능을 놀랍게 수행하였다.

무엇보다도, 30년 동안, 한 번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크메르 루즈 시대의 비극


들을 사람들이 말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 중요하였다. ECCC 재판이 TV에
생중계 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제는 정말로 자신도, 그리고 우리 마을도, 이

32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대 속에 들어섰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비록 아직 말을


하는 것이 두려운 측면도 남아 있으나, 이제는 강제에 의한 침묵 시대는 갔고, 말을
할지 안 할지를 선택할 수 있는 시대로 바뀌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캄보디
아의 킬링필드 비극을 치유하는 첫 단추가 되었다.

그에 따라 법정에서의 여러 어려움도 불구하고 치유는 일어나게 되었고, 법정에


원고나 증인으로 나가지 못하였어도, 마을 대화와 같은 다양한 기회들을 통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 현재의 삶, 그리고 미래 아이들에게 전달하여야 할 교
육과 지원을 함께 논의할 수 있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사회치유의 현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캄보디아 사회는 ECCC를 단순한 과거에 대한 재판으로 국한하


여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 자체는 작은 재판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토대로 하여,
거대한 캄보디아 사회 재건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제사회도 그런 가능성에 대한 지원을 하여야 할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벌
어졌던 비극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고 언제든지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기에, 그
리고 인류는 그것에 대하여 더욱 힘 있는 대항 노력을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제50회 KPI평화포럼| 33
<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참고문헌

1) Beth Van Schaack, Daryn Reicherter, Youk Chhang (ed). Cambidian's Hidden
Sacrs. 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n. (2011) p123

2) See, e.g., David Mendeloff, Trauma and Vengeance: Assessing the Psychological
and Emotional Effects of Post-Conflict Justicem 31 Hum. Rts. Q. 592,
601-15(2009); Marie-Benedicte Dembour & Emily Haslam, Silencing Heaings?
Victim-Witnesses at War Crimes Trials, 15 Eur. J. Int’l L. 151 (2004); Jamie
O’Connell, Gambling with the Psyche: Does Prosecuting Human Rights Violators
Console Their Victims? 46 Harv. Int’l L. J. 295, 319 (2005) (finding that
“therapists writing about the effects of impunity do not describe actual instances
of prosecutions helping victims psychologically. The large number of ways trials
may positively or negatively affect victims...suggests that predictions of trials’
effects based on victims’ condition in their absence may be highly uncertain.”).

3) See, e.g., Victims’ Rights Working Group, Victim’s Rights in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 4(2000); Yael Danieli, Victims: Essential Voices at the Court,
VRWG Bull., at I (Sept. 2004), available at
http://www.vrwg.org/smartweb/bulletins/past-issues; Women’s Caucus for Gender
Justice, Recommendations and Commentary for August 1997 PrepCom on the
Establishment of an International Criminal Court 33 (1997) (arguing that
participation is important for “advancing the process of helaing from trauma and
degradation“)

4) Beth Van Schaack, Daryn Reicherter, Youk Chhang (ed). Cambidian's Hidden
Sacrs. 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n. (2011) p106

5) ibid 131,

6) See Marie-Benedicte Dembour & Emily Haslam, supra note 3, at 168-69


(arguing that victim testimony in war cirmes trials, which often relates only
indirectly to the defendant, has the effect of shocking the public conscience and
seems to serve “not so much to decide the guilt of the accused but to contribute
to ‘a national saga that would echo through the generations’”) (quoting Tom
Segev, The Seventh Million: The Israelis and the Holocaust 336(1993)). But see
also Mark J. Osiel, Ever Again: Legal Remembrance of Administrative Massacre,
144 Penn. L. Rev. 463, 505-20(1995) (acknowledging tension between liberal
norms of culpability and the interest of conveying a broader historical narrative
but arguing that “the orchestration of criminal trials for pedagogic purposes-such
as the transformation of a society’s collective memory-is not inherently
misguided or morally indefensible”).

7) Beth Van Schaack, Daryn Reicherter, Youk Chhang (ed). Cambidian's Hidden
Sacrs. 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n. (2011) p107

8) Ibid 26-27.

9) Bessel A.van der Kolk, Trauma and Memory, 52 Psychiatry and Clinical

34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Neurosciences S97(1998).

10) Lay Chan transcript, supra note 57, at 48. But see 13 July 2009 transcript,
supra note 20, at 62-63(instructing defense co-laywer Kar Savuth, at the
request of a Civil Patry lawyer, to “use a lower voice projection and make your
speech gentle so that she can respond to your questions fully”)

11) J. Briere, Psychological Assessment, supra note 5; F.W. Putnam, Dissociative


Phenomenon, in Dissociative Disorders: A Clinical Review (D. Spiegel ed., 1993).

12) Beth Van Schaack, Daryn Reicherter, Youk Chhang (ed). Cambidian's Hidden
Sacrs. 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n. (2011) p127, 128

13) ibid 127

14) Interview with Case 001 Civil Party (Nov. 2, 2010)[hereinafter 2 Nov. 2010
Interview] (on file with author)

15) Beth Van Schaack, Daryn Reicherter, Youk Chhang (ed). Cambidian.s Hidden
Sacrs. 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n. (2011) p160

16) See ECCC, Transcript of Trial Proceedings-Kaing Guek Eav "Duch," Case File
No. 001-18-07-2007-ECCC/TC, at 42(Aug.17,2009)[hereinafter 17 Aug.2009
Transcript]. In her testimony, Martine Lefeuvre mentioned that she is not able to
forgive the accused at this point. id Duch nonetheless asked for her forgiveness.

17) ECCC, Transcript of Trial Proceedings-Kaing guek Eav "Duch," Case File No.
001 /I8007-2007-ECCC/TC(Nov.23, 2009)[hereinafter 23 Nov.2009 transcript]

18) Suzannah Linton, Safeguarding the Independence and Impartiality of the


Cambodian Extraordinary Chambers, 4 J. Int’l Crim. Just. 327 (2006).

19) Interview with Judith Strasser, TPO Clinical Psychologist Consultant &
Supervisor (March 9, 2011) (noting that an offer by TPO and team of experts
from the University of Zurich to provide training on psychological issues in the
courtroom was rejected byt the Judges, but accepted by the Civil Party Lawyers
in Case 002).

20) Beth Van Schaack, Daryn Reicherter, Youk Chhang (ed). Cambidian's Hidden
Sacrs. 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n. (2011) p158

21) ECCC Victims Support Section [VSS], Data Presented at a Roundtable


Discussion with Civil Society Organizations, Phnom Penh, (Sep. 2010) (data on
file with authors ) (based on preliminary data analysis).

22) See Prosecutors v. Kaing, Case NO. 001/I8-07-2007-ECCC/TC, CIVIL


PARTIES' Co-Lawyers' Joint Submission on Reparations,¢46(Sep.14,2009)

23) Jaya Ramio, A Collevtive Response to Mass Violence: Reparations and Healing in
Cambodia, in BRINGING THE KHMER ROUGE TO JUSTICE: PROSECUTING
MASS VIOLENCE BEFORE THE CAMBODIAN COURTS 359,360(Jaya Ramji &

|제50회 KPI평화포럼| 35
<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Beth Van Schaack eds., 2005)

24) David Gray, book Reviews, 4 INT'L J. TRANSINT'L JUST. 296(2010)

25) Jaya Ramji, supra note 9, at 366 & 368. See also Heidy Rombouts et al., supra
note 8, at 460.

26) Prosecutors v. Kaing, Case No.00I/I8-07-2007-ECCC/TC, at240-4I (July


26,20I0);Patrick Falby, Cambodia KRouge court leaves victims disappointed,
AFP(Sept.13,2010)

27) Interview with Case 001 Civil Party Applicant (Dec. 5, 2010) (on file with
author).

28) Civil Party Applicant Remarks, supra note 22

29) Beth Van Schaack, Daryn Reicherter, Youk Chhang (ed). Cambidian's Hidden
Sacrs. 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n. (2011) p119

30) K.W. Saakvitne et al., Transforming the Pain, supra note 86.

31) R. Janoff-Bulman, Shattered Assumptions: Towards a New Psychology of


Trauma(1992).

32) Y. Fischman, Secondary Trauma, supra note 83.

33) Information about the ISPT can be found on the Institute for Redress and
Recovery’s website at http://law.scu.edu/redress/.

34) Y. Fischman, Secondary Trauma, supra note 83

35) B.H. Stamm, The professional Quality of Life Scale, ProQOL, 2009, available at
www.proQOL.org.

36) B.E. Bride et al., Development and Validation of the Secondary Traumatic Stress
Scale, 14(1) Res. Soc. Work Prac. 27(2004).

37) B.E. Bride et al., Development and Validation of the Secondary Traumatic Stress
Scale, 14(1) Res. Soc. Work Prac. 27(2004).

38) Living Documents, DOCUMENTATION CTR. OF CAMBODIA,


www.dccam.org/Projects/Living_DOC/Living_Documents.htm

39) Documentary Center of Cambodia. The DC-Cam Annual Report 2010. p27-28

40) Savina Sirik, Village Meeting: Fear Reduced Among Kbmer Rouge Lower Level
Cadres, DOCUMENTATION CTR. OF CAMBODIA (Mar.23.2010)

41) 648 DC-CAM Annual Report 2010, supra note 67, at 25.

36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킬링필드가 만든 정신건강적 문제와 사회치유 노력

I. 시작하는 말

1. 왜 크메르 루즈는 다른 정권과 달리 정신적 상처를 더 크게 주


었는가?
캄보디아의 과거 시아누크 정권 때나 론 놀 정권 때도 캄보디아인에 대한 잔인한
폭력들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크메르 루즈 정권이 가한 폭력과 그로 인한 충격은
그 전의 것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크메르 루즈 정권은 일반 캄보디아인의 전통적
문화, 즉 종교, 예술, 인간관계, 사회계층 구조, 사회의 전제 조건 등을 완전히 부정
하고, 말살하여,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크메르 루즈
체제 하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던 기본적 안전감을 상실하게 되었
다. 이것이 단순한 물리적 폭력을 쓰는 것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1)

이로 인하여 가족과 사회의 관계망 붕괴, 지역 경제의 붕괴, 노동인력의 강제 이


동, 식량 생산 시스템의 변동 등이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
고, 생존자들과 그 가족들의 건강과 삶에 심대한 영향이 있었다.2) 또한 수많은 사
람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극심한 애도(grief) 반응과 상실감 등이 깊은 고통을 주고
사회적 기능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런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전통적으로 유지되
어 왔던 종교적 믿음을 상실하게 하고, 문화적인 전통가치들도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크메르 루즈 정권을 겪은 캄보디아인들은 그로 인하여 단순히 정신의학적 문
제가 아닌, 그 보다 훨씬 더 깊은 정신적 충격과 트라우마를 받게 되었고, 그것이
큰 정신적 후유증을 남겼다.

2. 정신의학적 진단을 넘어서는 상처에 대한 이해


크메르 루즈 정권의 악행에 대한 재판인 ECCC 는 진실의 전모를 드러내고 처벌
을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재판이 시작되면서 40년 가까지 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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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하에 들어가 있던 캄보디아 사람들의 정신건강 문제가 표면에 드러내게 되었다.


그리고 캄보디아 인구의 1/3 이 PTSD 의 진단기준에 맞는 환자들로 조사되었다.3)

그러나 한 사회가 받은 거대한 트라우마의 충격을 단순히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PTSD), 우울증 등의 빈도로만 측정하여 제시하는 것은 충분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또한 그러한 충격이 만들어 낸 많은 정신적 충격과 후유증은 정신의학적 진
단으로 다 평가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 심대한 것을 표현하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트라우마가 가진 사회심리적 파급효과는 객관적 측정 도구
를 가질 수 없고, 그 깊이를 알 수도 없다. 우리는 그저 트라우마를 받은 사람들의
행동상의 나타나는 문제들을 가지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이 고작이다. 그것은 개인
차원에서, 그리고 그 주변의 가족과 마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원에서의 기능장
애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것은 그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에 까지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폭력이 정신과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개인적이고 집단적이다.4)

과거에는 국제보건의료기구들이 전쟁과 대량학살의 신체적 상처와 그 치유에 집


중하였으나, 최근에는 국가의 사회심리 이슈에 좀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즉 정치
적 폭력에 따른 정신적 기능장애 (dysfunction)와 고통 (suffering)이 주요 공공 정
신보건문제가 되어 WHO 와 UN, UNICEF 등 관심 사항이 되었다. WHO의 경우,
세계적으로 트라우마 경험을 하였던 사람의 10%가 심각한 정신건강적 문제를 가
지고 있고, 또 다른 10%는 효과적으로 기능을 하지를 못하는 상태가 된다고 본다.
이 때 가장 흔한 상태는 우울, 불안, 불면, 허리 통증, 위장 통증 등의 정신신체의학
적 (psychosomatic) 문제들이다.5) 정신건강의 병리는 거대한 고통의 사회적 짐
(burden)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것이 적절히 치료가 되지 않으면 개인과 사회는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캄보디아에서 ECCC 가 활동하게 되면서 과거 숨겨졌던 상처들이 외부로 드러나


게 되었다. 피해자들이 비로소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캄보디아의 NGO 인
DC-Cam 은 크메르 루즈 관련 과거사를 조사하면서 사건 자체와 함께, 사건들과
관련된 트라우마와 연관된 정신적 고통들도 기록하였다. 즉 그 사건이 어떤 심리적
파급효과를 만들어 내었는지도 기록을 한 것이다. 이것은 캄보디아의 비극에 대한

38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의미 있는 기록이 되게 되었다.

II. 역사적 트라우마가 정신건강에 미친 영향들

1. 집단 심리적 문제들
캄보디아에서와 같은 거대한 사회적 트라우마는 생존자 및 그 가족들의 정신건
강, 심리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상 행동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트라우마는 일반적
으로 비적응적 행동패턴을 만들어 내어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 즉 가족을
잃은 것이 그 후 테러, PTSD, 보복, 조절 안 되는 잔인성, 우울, 희망 없는 느낌 등
과 연관되어 나타난다.6) 이것이 사람들을 공격적이고, 참을성 없고, 무책임하게 만
든다. 젊은이들은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겁에 질려
있게 된다. 아이들도 그들의 지능과 능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회피하게 된
다. 특히 고아로 자란 아이들, 청년들은 이런 특징들을 더욱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결국 크메르 루즈의 폭력은 캄보디아 사람들 중 일부를 잔인하고, 정상적 사고력이
없는 상태로 만든 것이다. 크메르 루즈 시대는 전반적인 불신과 공포, 동정심의 부
족, 무기력감을 만들어 내었다. 이런 것을 캄보디아에서는 “baksbat” 상태라 말하
기도 하는데, Dr. Sotheara 는 이것을 캄보디아인의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의 특징
으로 이야기하면서 그 내용을 낮은 자존감, 자기효율성(edlf-efficacy)에 대한 낮
은 확신, 의존성, 쉽게 공포심을 가짐 등으로 정의하였다7) (***).

일반적으로 캄보디아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이 본 것을 쉽게 타인에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그 동안
의 역사 속에서의 경험들을 통하여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자신들을 철저하게 억누르며 산다. 그러나 그 억눌린 것이 한 번 발산될 수 있는 상
황이 벌어지면, 그 때는 아주 통제가 안 되는 극단적인 모습으로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강도 행위를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히게 되
면, 그 현장의 사람들은 강도를 폭행하고 짓밟아 죽이며, 그것이 용인되는 문화가
있다. 그 분노가 정당하고 또 그 분노를 표출하여도 자신에게 개인적 해가 오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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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을 것이라는 보장이 된다면, 그 분노를 행위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크메르


루즈 기간을 지낸 후의 캄보디아에서 보게 되는 집단 심리적 특징 중 하나가 되고
있다.

프놈펜 왕립대학 심리학과의 prof. SEK Sisokhom, Bernhild Pfautsch 교수팀은


국민 정신건강 서베이를 실시하였다8). 이 조사에 따르면 가정폭력, 알콜중독, 자살
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40년 전 크메르 루즈 정권
하에서의 경험 하나와만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그들의 분석이었다. 그것
은 다양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 등과 맞물려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크메르 루즈 정권 하에서의 킬링필m 경험과 같은 거대한 사회적
트라우마는 그 사회 전체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고, 그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
를 하지 못하면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들이 이어져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해 보
인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과거의 트라우마에 의한 상처를 더욱 악화시켜 서로 악
순환을 만드는 결과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

2. 가해자와 피해자의 복합성 문제


역사가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발생하는 문제 중 하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정확
한 구분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독일 나찌의 홀로코스트인 경우는 그 가해자와 피
해자가 명확히 구분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예외적인 일에 속한다. 캄보디아의 경우
에도, 피해자는 얼마 후 자신과 가족들의 복수를 위하여 가해자가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다시 2차 피해자가 되는 일들이 반복되면서 최종적으로는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정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 들어가는 문제를 가지게 되
었다.

즉 이미 크메르 루즈 정권이 시작되기 전에 시아누크 왕정과 론 놀 우파 정권은


잔혹한 통치를 하였고 그에 따라 많은 피해자들이 만들어 졌다. 왕족, 귀족, 지식
인, 부유한 사람들, 프랑스에 협조적이었던 사람들 중심이었던 왕정과 론 놀 정권
에 의하여 농촌의 가난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그 중 상당수는 크메르 루즈에
들어가거나 그 지지자들이 되었었다. 그리고 크메르 루즈가 정권을 잡으면서 자신
들이 생각하는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고, 그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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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에는 과거 자신들에게 해를 끼친 가해자들도 있었다. 또한 크메르 루즈 정권 안에


서도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인하여 내부적 숙청과 처형이 엄청나게 일어나 가해자
가 다시 피해자가 되는 일들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크메르 루즈 정권이 끝
난 후, 살아남은 다양한 피해자들은 그 가해자들을 사적으로 처벌하려는 시도들이
많이 있었고, 그렇게 피해를 본 사람들이 다시 자신들의 가해자를 또 보복하는 일
들이 있었다. 가해와 피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진 것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캄보디아의 정권을 새로 잡은 그룹은 과거 크메르 루즈와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캄보디아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자신들이 매우 적대적으로
보고 있는 베트남 군인들을 끌어들여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 정권을 무너뜨린 새로
운 정권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정권은 위하
여 과거 크메르 루즈 시절의 악행을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노출시키는
과정에서, 과거의 일부 역사는 선택적으로 은폐되고 왜곡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캄
보디아에서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구분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 캄보디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영일 교수는 다음과 같
이 이야기하였다. “캄보디아에서는 55세 이상의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전에 크메
르 루즈 였는지 여부를 묻지 않는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가해자이다. 피해자는 이미 모두 다 죽었다”

이런 가해자와 피해자의 혼합 현상은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제한하


고, 또한 피해자들에 대한 치료 활동을 제한하게 만들었다. 피해자라 언급되어 지
는 사람들도 어떤 면에서는 가해자일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런 피해를
받았을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인데, 왜 그들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가 하는
복잡한 질문과 논리가 작동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이 국가에서 사회적 치
유, 트라우마에 대한 적극적 치유가 이루어지는데 여러 제약을 만들었다.

3. 정신의학적 문제들
캄보디아에서 과거사에 의한 트라우마는 사람들에게 정신건강의 문제를 만들었
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하나의 정신질환을 가지면, 다른 정신질환도 함께 가지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에 따라, 불안과 우울, PTSD 가 한 사람에게 모두 같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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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게 되는 경우들이 있고, 불안과 PTSD 가 있는 사람은 그와 함께 알코올 문제를 가


지게 되는 경우들이 많다. PTSD 가 있는 사람에게 알코올 및 약물남용 문제들이
매우 심하게 있게 되는 경우들이 약 75%에서 나타난다는 보고들이 있었다.9)10)
그리고 전쟁 참가자는 그러한 경험에 의하여, 그 이후에 가정폭력도 증가하고,11)
알콜 소비도 증가하고 아동학대의 위험도 커지고,12) 그에 따라 가족들에게 2차
PTSD가 있게 하는 등 가족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13) 이런
현상들이 캄보디아에서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크메르 루즈 시절에는 정신건강에 영향을 끼칠 조건들의 결합이 강하게


있었다. 전쟁, 대량학살, 기아, 가난이 공존한 것이다. 거기에 강제노동, 성폭력이
전반적으로 있었다14). De Jong 의 연구 결과 PTSD 가 지역민의 28.4%에서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15) 청소년들에게 있어서도 가정 내 스트레스, 가족과의 이별, 사
별, 알콜 남용과 같은 것들이 있고 그것이 PTSD 와 연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정신건강적인 문제들은 결국 그 피해자들로 하여금 제대로 된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그것은 가난으로 이어졌다. 가난은 이들의 정신건강 치료
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그 사이에 악순환이 이루어졌다.

4. 부모의 아이 양육 문제들
크메르 루즈 정권의 트라우마는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나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자, 그들이 자녀를 양육하는데서 문제를 가지
게 되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부모의 심리적 필요
를 돌보아 주어야 하는 소위 역할 반전(role reversal)이 있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부모들은 자신들이 겪은 과거의 고통에 대하여 침묵하였다. 부모의


낮은 학력과 지식수준이 과거 트라우마에 대하여 자녀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어렵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과거의 경험들로 인하여 부모들은 아이들을 지나치게
보호하는 태도를 가졌고, 특히 자녀들이 어떤 정치적인 일에 참여하는 것을 적극적
으로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무능한 부모, 자신이 돌봐주어야 하였던 부모들의 그
런 태도들에 대하여 자녀들은 반항하였고, 그러면서도 스스로 위축되어 사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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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정체성 형성에 어려움을 가졌다.

이미 수 십 년 전 없어진 크메르 루즈 정권이 지금의 캄보디아 아이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아이들은 윗세대로부터 심리적 문제를 유전으로
물려받는다. 어른들의 자기 연민,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neglect), 일하는데 있어
서의 무능 등이 아이들과 젊은이들로 하여금 부모를 존경하지 못하게 하였고, 새로
운 사회적 기회를 가지지 못하게 하였다. 자녀 양육에 자신이 없는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자유를 주어 문제가 되었다. 결국 아이들에게 과보호와 보호
부족이 모두 문제가 되었다.

5. 자살
캄보디아의 국가적 차원의 전수조사 통계 자료는 없다. 그러나 프놈펜 왕립대학
심리학과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자살률이 인구 10만 명 당 42명이라 나온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높은 자살률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띠는 것은 20-25세
연령대의 자살률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프놈펜 왕립대학 심리학과의 prof. SEK Sisokhom, Bernhild Pfautsch 교수팀은 그
것을 다음의 몇 가지로 추측 한다.

1) 젊은이들이 겪는 경제적 압력과 경제적 어려움


이들의 부모 세대는 크메르 루즈 시절을 겪으면서 트라우마 등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여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고 일하기 어려운 세대였다. 그리고 그에
따라 젊은이들은 부모 대신, 가족을 경제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다. 그
러면서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가지기 위하여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였는데, 이들
에게 특별한 기술들이 없기 때문에 도시에서 직업을 가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었다. 그에 따라 이들은 큰 압력과 좌절감을 가지면서 자살을 한다는 것이었다.

2) 감정의 적극적 표현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경향


전통적으로 캄보디아 사람들은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고 안으로 참고 인내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TV 등의 매스 미디어는 사람들
이 감정을 적극적이고 직접 표현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고, 그것이 더 정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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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멋있고 옳은 일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이것에 젊은이들이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


면서 현실 속에서의 좌절감과 우울감을 참지 않고 그대로 행동화하여 자살에 이르
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고 본 것이다.

3) 부모의 권위와의 충돌이 중매결혼에 대한 반발로 나타남


전통적으로 캄보디아에서는 중매에 의한 결혼을 하여왔고, 부모들은 그것을 당
연하고 중요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생각과 문화는 다르게 변하여, 중
매결혼을 거부하면서 부모와 극심한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런 문화적 이행기 속에
서 결혼과 연관된 자살이 많이 있게 되었다. 부모는 트라우마로 인하여 자식을 키
우는데 있어서 재정적, 교육적으로는 무능하였으나, 자식들의 결혼 문제 등에서는
부모로서의 권위를 분명히 가지기 원하는 것이 있었고, 자식들은 부모의 능력과 권
위를 인정하지 못하는 상황이 충돌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6. 가정 폭력
사회적 트라우마는 높은 가정폭력 발생과 연결된다. 이것은 과거 트라우마를 받
은 남성들이 집안에서 부인과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것과
동시에, 과거 트라우마를 받은 여성들이 우울증과 PTSD 증상 등을 가지고 있으면
서 남편이나 자식과의 갈등을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면서 자신이 폭력을 행사하거
나 또는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경향이 더 커지는 것과 다 연결이 되어 있었다. 즉 일
종의 사고 경향성이 더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가정폭력은 다시
사회적인 폭력과 자해, 자살 등으로 이어져 사회적인 폭력 수준을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문제로 이어졌다.

7. 정신건강에 더 취약한 집단
국가가 큰 혼란 상태에 빠지고, 사회적 트라우마가 집단적으로 발생하였을 때,
일반적으로 그 사회의 약자들은 이중, 삼중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더 겪게 된다. 그
리고도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밖으로 전혀 내지 못하는 어려움을 가진다. 일반
적으로 이들은 전쟁에 직접 참가한 군인들, 인종청소, 고문, 대량학살의 대상이 되
었던 피해 민간인들, 여성, 아동, 노인, 소수 집단 등이 될 경우가 많다. 이것은 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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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보디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16).

혼란한 시대에는 대규모 성적 범죄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남성


들과 달리, 사회적 트라우마에 더하여 성적인 범죄 대상까지 이중적으로 되게 된
다. 혼란한 상황 중 성적 폭력과 대량 강간이 전쟁의 도구로 사용되면서 여성들은
더욱 취약하게 되었다.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 정권 시절, 핍박을 받은 여성들 중 다
수가 강간을 당하였다. 그리고 정부의 정책 하에 강제 결혼을 하여야만 하였다. 그
것은 다른 모습의 집단 강간이었다. 그것이 여성들에게 끼친 악영향은 매우 심각하
였다. 이러한 어려움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로 되었으나, 캄보디아 상
황에서 그런 지원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그에 따라 2008년 UN 안전보장이사회
에서는 성폭력을 전쟁범죄, 반인륜범죄, 고문의 일종, 인종대량학살의 부분으로 규
정하였다. 집단 강간은 그 결과, 원치 않는 임신, 질병, 사회적 낙인, 가족의 거부
등이 있게 되어 가족 구조를 무너뜨리게 되고, 그에 의하여 사회를 붕괴시키고 여
성들의 정신건강에 큰 영향을 끼친다.17)18)19)

아동들은 트라우마 사건들에 의하여 부모를 잃음으로써 고아가 되고 일반적으로


이들이 가장 취약한 집단이 된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부모를 죽인 후에, 이 고아 된
아이들을 데리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하수인, 또는 군인으로 사용하는 경우들이 늘
어가고 있어 그것이 또 다른 문제들을 만들어 내었다. 캄보디아에서 크메르 루즈
군인들은 부모들을 죽이고 아이들을 데리고 있으면서 그 아이들을 소년병, 또는 지
뢰 매설하는 인력으로 사용하였었다.

캄보디아 사회에서 소수집단은 이슬람을 종교로 가지고 있는 참족, 캄보디아인


들과 민족적으로 상호 증오의 대상인 베트남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역시, 크메르
루즈 정권 시절에 캄보디아인들과는 또 다른, 그리고 더 많은 핍박과 고통을 당하
여야만 하였다. 그로 인하여 이들 역시 심각한 정신건강적 후유증을 가지게 되었
다.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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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III.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노력들

1. 정부의 활동

1) 분노의 날 제정
캄보디아에서 사회적 치유를 위한 특별 조치 중 하나는 매 년 5월 20일을 “분노
의 날”로 정하여 운영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크메르 루즈 정권이 무너진 이후, 피해
자와 가해자가 서로 직접 보복하는 것을 막고, 그런 분노를 다른 방법으로 승화시
키는 것을 목적으로 정부가 만든 것이었다. 초창기에는 자신들이 당한 고통을 사람
들 앞에서 말로 이야기하여 행동화하는 것을 막는 등의 효과를 가지는 의미도 있었
다. 그러나 그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그냥 이름뿐인 정부 여당의 행사로 바뀌
게 되어, 이제는 공무원들만 동원되어 참석하는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캄보디아
일반 국민들도 이 날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것이 하나의 정치적 활
동으로만 보고 있게 되었다.

어떤 국가적 행사가 진정한 의미의 치유를 목표로 한다면 희생자들의 고통을 인


정해 주고, 그 희생자들이 주인이 되는 행사가 되도록 하여야 하는데, 캄보디아에
서 이 날은 그런 본질적인 것에 다가가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중적
관심을 가질 수 없게된 것이다. 이에 따라 NGO 단체인 CDP는 그것을 추모의 날
(memorial day)로 이름을 바꾸자고 제안한 바 있었다.22)

2) 기념탑과 기념관 운영
캄보디아 정부는 과거 크메르 루즈 정권의 만행을 알리는 기념관과 기념탑 등을
적극적으로 만들고 홍보하고, 그래서 해외여행자들에게는 캄보디아의 주요 관광지
로 있게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람들에게 큰 주목을 받는 것은 당시 처형당
하여 죽은 사람들의 유골들을 그대로 전시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들의 유골을 관광 전시물로 사용하는 것은 양면성을 가진다. 즉 과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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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고통과 비극을 가장 직접적으로 후세와 외부에 증언하며 알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일종의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좀 더 존엄성을 가져야 하는 인간의 유골을 관광 전시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서, 화장을 하여 장례를 치르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불교국가인 캄보디아에서 이것
은 죽은 사람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다. 또한 현 캄보디아 정권의 정당성을 알리
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이런 유골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비난도 있을 수 있다. 결국
비극 속에서 죽은 사람들을 또 비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비난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현지에서 활동하는 NGO 사람들에게 이 문제에 대하여 질
문을 하였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 상황에서 이것은 부정적 의미보다 긍정적
의미가 더 크다는 의견들을 주었다. 즉 진상 조사 및 가해자 처벌 등이 제대로 이루
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이 나마라도 있어야 그 사실을 다음 세대에게 정확히 알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 이런 식으로 전국에 유골들을 다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을 유지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부분이 있다고 할 것이다.

2. NGO 활동

1) KDei Karuna 의 활동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를 위하여 캄보디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NGO로 KDei
Karuna 가 있다. 이 기관은 미국의 international center for conciliation의 지원을
받아 크메르 루즈 정권으로 인한 심리적 상처를 받았음에도 아직 국가나 법으로 지
원받기 어려운 영역의 치유를 위하여 활동하여 왔다. 그들의 활동 프로그램으로 정
의와 역사 탐방(Justice and History Outreach : JHO)가 있는데 여기에 속하는 다
양한 활동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1) 훈련자를 위한 훈련 프로그램(Training of Trainer Project) : 마을의 주요


인사(key person)가 과거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는 프로젝
트였다. 마을 사람들 중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그 마을의 공동체 문제를 가지고 오
면, 그것을 가지고 대화하는 방법을 훈련시킨 것이다. 이러한 대화 내용과 방식은
전통 불교문화와 연계시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피해자가 장례식을 할 때
에도 그것을 개인장이 아닌 마을의 ‘사회장’으로 하도록 한다든지 하여, 그 고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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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받은 사람의 고통을 그 마을 공동체가 공동체의 문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인정하


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 것이다. 또한 피해자들이 법원에 소송을 할 때 그것
을 지원하는 방법 등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2) 지역사회 기억 프로젝트(Community memory initiative project) : 마을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한 개인의 기억이 아닌, 마을의 기억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것
이었다. 즉 고통과 연계된 사람들이 각자 다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과거 사건들을
공동이 함께 모여 이야기하면서 “마을의 공식 기억”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토대로
누가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죽었는지를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는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이런 과정은 관련된 피해자들에게 심리적 보상이 되는 일이 되었다.

(3) 구술역사 프로젝트(Oral history project) : 개개인의 경험을 이야기 듣고 모


으는 일을 하여,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져 왔는지를 기록에 남기는 일을 하였다.

(4) 강제이주 이동 전시회(Mobile exhibition on 'Forced Transfer') : 크메르 루


즈 정권 하에서 있었던 도시민들의 강제 이주와 강제 노동, 그리고 그들의 고통 등
을 찍은 사진 전시회, 영상 영화, 밤에 동네에서 야외 연극 공연 등을 함으로써 과
거 일에 대한 기억과 추모를 하는 일이 이루어졌다. 전국을 순회하며 10 군데 정도
에서 프로그램을 가졌었다.

2) TPO 활동
TPO 는 네덜란드를 기반으로 하는 비정부기구로서 캄보디아에서 다양한 정신건
강 프로그램 지원 활동을 하는 단체이다. 그 활동 중 대표적인 활동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았다.

(1) 재판 지원 프로그램

회치유적 차원의 활동으로 과거 크메르 루즈 정권 시절의 잔혹한 일들에 대한


ECCC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그 동안 과거의 상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매우 금기시 되어왔던 캄보디아 사회에서, 이런 재판에 나가서 증언을 한다
는 것 자체가 증인 당사자에게는 매우 두렵고 힘든 일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을 개
인적으로 지원하고 격려하는 일은 그 당사자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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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사회적인 치유적 의미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런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한 개인


이 해결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런 기관이 있어 거기서 체계적으로 지원해 주면
사람들은 그 문제를 더 쉽고 성공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일을 하는 기관 중 하나가 TPO 이다. 여기서는 증인이 선정되면 1-2달


전부터 그들과의 만남을 시작하여 재판과 관련된 법적인 사항들, 관련된 인권 사항
들, ECCC 재판과정 등에 대한 교육을 한다. 그리고 재판에 증인으로 나가는 날 그
리고 법정에서도 그들 옆에 있으면서 현장 자문을 해 주고, 증언이 끝난 직후, 그리
고 그들이 집으로 돌아 간 이후에도 그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지원해 주는 일들을
하였다. 그리고 재판에 나가서 증언을 하였던 사람들끼리의 모임을 만들어 일종의
자조그룹으로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였다. 실제로 매우 많은 국민들이
피해와 트라우마를 받은 캄보디아 사회에서 모든 피해자들을 다 지원하기는 어려
운 실정이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이들 증언자들을 돕는 일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증인 지원 업무를 하는 사람
들을 모집하고 그들을 교육하는 것, 즉 “돕는 방법을 교육하는 것” 이 중요한 업무
가 되고 있었다.

(2) testimonial therapy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이야기하기 원한다. 그러나 캄보디아 문


화에서는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위험한 일로 간주되어졌고, 그에
따라 자신의 고통을 말로 표현하기 보다는 침묵, 또는 귀를 뚫는 풍습 등으로만 표
현하여 왔다. 특히 크메르 루즈 정권 하에서의 고통에 대하여는 자신들이 겪은 일
을 말하는 것이 더욱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어 침묵을 지켜왔다. 따라서 이런 상황
에서 마치 서구인들에게 자신들의 고통을 이야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캄보디
아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고통을 이야기하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캄보디아인들도 예를 들어 외국에서 의료진이 오거나 하면, 그들에게는 자
신들이 당한 고통과 지금의 어려움을 울면서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나타나
곤 하였다. 즉 이들도 안전하다고 느끼는 상황에서는 자신들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기 원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이들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방식으로 이들
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의 개발이 중요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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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다.

그래서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Inger Agger 의 Testimonial Therapy 였다.23)


ECCC를 통하여 드디어 크메를 루즈 시절에 겪었던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이 사회
적으로 용인되고 안전한 일임이 나타나면서 당시의 비극을 증언하겠다고 나선 사
람들만도 4-5000 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 중 실제로 재판에 나가서 증언할 수 있
는 있는 사람은 100 여명에 불과하였다. 그에 따라 증언을 하지 못하는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증언적 성격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치료적 성격을 가지는 프로그램이
필요로 되었는데, 그것이 증언치유의 시작이 되었다. 피해자들은 4일 간 자신들이
당한 일들을 천천히 다 이야기하도록 하고, 그것은 프로그램 스탭들에 의하여 전부
글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끝나면 마지막 날, 기록된 내용의 요약본
종이를 승려 앞에서 스탭이 읽고 그것을 붉은 끈으로 희생자에게 전달한다. 승려는
그 말을 듣고 다음 생에서는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게 축복하는 일을 하였다. 그리
고 이미 죽은 사람들은 좋은 곳에 가서 살 것이라는 이야기하여 주었다. 이런 식의
그 사회의 종교와 문화에 맞는 치료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시
도되었다.

3.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 시도 프로그램


이것은 NGO 의 활동 중 하나이나, 그 내용이 중요하고 자세히 다룰 필요가 있어,
여기에 별도의 항목으로 나누어 적도록 한다.

1) 정의
2011년에서 2013년 사이에 NGO인 TPO와 KK 는 화해 프로그램을 4-5 사례
정도 시도하였고, 그 중 3 사례가 끝까지 진행되었었다고 하였다. 화해 프로그램이
란 크메르 루즈 시절의 가해자와 피해자로서 그 이후에도 같은 마을, 또는 옆 마을
에서 30-40년을 같이 살면서도 서로 침묵하고 긴장한 상태로 살아왔을 때, 그들
을 대상으로 화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실행하고 그것을 다큐멘
터리 필름으로 녹화하는 것을 말하였다. 캄보디아는 모계 사회라서, 서로가 혈연으
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크메르 루즈 시절을 겪으면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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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들은 서로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서


로 완전히 관계를 끊고 살았다. 때로는 개인적으로 복수를 하기 원하였으나 법적인
이유, 또는 모계 쪽으로 친족 혈연으로 묶인 이유 등으로 인하여 복수를 하지 못하
고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그런 가운데 가해자들은 지역 사회에서 종교 및 문화생활
의 중심인 불교 사원에 가지도 못하고 살았고, 언젠가 자신의 자녀들이 복수의 대
상이 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2) 배경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 것은 ECCC 재판이 열리게 된 것과 깊은 관련을 가진
다. 그 전까지는 고통에 대하여 침묵의 문화 (Culture of Silence)를 가지고 있는
캄보디아 사회에서, 피해자가 입을 열고, 그것이 가해자에게 전달되는 이러한 일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였다. 그런 가운데 40년 가까이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러다
가 ECCC 가 열리고 나서야 비로소 TPO와 KK 등의 NGO 도 이런 프로그램을 생각
하고 나설 수 있었다. NGO 가 아무리 이런 프로그램을 미리 생각하고 시도하려고
하여도, ECCC 와 같은 큰 사회적, 국가적 변화와 제도적인 보장이 있어야 이런 프
로그램은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ECCC 와 같은 국가와 정부차원의, 거
시적 여건이 마련되어도, 이런 구체적인 일이 발생하도록 하기 위하여는 NGO 의
활동이 필요로 되었다. 이런 만남의 자리는 국가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처음에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피해자들을 알아보러 다니자,


당사자와 그 마을에서는 이것이 ECCC로 가져가 재판하려고 하는 조사 활동이라
의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한 마을 중재자
(local facilitator)가 이 일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것을 당사자들에게 설명하도록 하
면서 일들이 진행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적 측면에서 크메르 루즈 군인 출신들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였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들이 잘못된 언행을 하였을 때 폴 포트 정권에 고발하도
록 교육받았던 사람들이었고 군대에 징집되어 나갔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전쟁
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크메르 루즈 정권에 의하여 자신들의 부모들이 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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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아야 했었다. 이런 것들이 이들을 극도로 혼란스럽게 만


들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더욱 더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었다.

실제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는 어려운 측면이 많이 있었다. 먼저 가해자로서


의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그 이후에 더 큰 위험에 빠질 가능성을 높인다
고 생각이 되면서 과거에 자신이 그런 일을 하였었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기도 하였
다. 그러나 이미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그 때 어떤 일이 어떻게 있었는지를 아는 상
황에서 무조건 부정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것이 이런 프로그램이 진행
될 수 있는 한 가지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언제든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긴장 속에 사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긴장은 특히 가해자에게 자녀가 태어나면서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피해자가 자신의 아이들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피해자가 너를 해칠 수 있다고도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가해자들은 그런 불안 때문에 미국, 영국 등으로 이주하여 갔고, 캄보
디아 내에서는 크메르 루즈 군대로 있다가 한꺼번에 투항한 사람들이 ‘바일런’ 지
역에 모여 살아 피해자들과 함께 있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자녀들에 대한 우
려는 화해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하였다.

또한 과거사의 진실을 언제까지 은폐하고 다음 세대에게 넘길 것인가 와도 연관


이 있었다.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그 사건을 어떻게 이야기해주고 교육시키며 기
억하도록 할 것인가도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3) 고려할 사항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는 억지 분위기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
뿐 더러 그것은 옳지도 않은 것이다. 화해라는 말을 너무 쉽게 꺼내고 그것을 이루
어 보려는 태도는 문제를 많이 가진다. 이 프로그램이 가졌던 장점은 이것이 6개월
이라는 긴 기간 동안, 매우 단계적이고도 조심스럽게 진행되었고, 진심으로 화해할
수 있는 중간 과정을 가지도록 하였으며, 그 지역 문화 및 정서에 맞는 과정과 의식
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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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또한 한 두 개의 사례가 만들어 졌다고 그것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일반화하려 하


여서도 안 되었다. 모든 사례는 그 사례만의 독특한 배경과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일이 화해로 성공하는 사례가 만들어
지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었고, 수 많은 사람들과 마을들에게,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캄보디아의 사회치유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었다.

4) 과정 및 실행
먼저 NGO 스탭들이 그 마을에 가서 상황을 알아보고 그 곳에 머물렀다. 이 때
호텔을 이용하지 않고 마을의 집을 얻어 머물렀는데, 이것은 그 마을 사람들의 신
뢰와 마음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런 문제는 그 마을 전체의 민심들과도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그 지역 어른들의 인정과 신뢰를 받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였
다. 그러면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중재를 담당하여 줄 지역 중재자(local
facilitator)을 만들었다. 이 사람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다.

일단 그렇게 된 다음에 적절한 대상자를 선정하게 되면, 그 양 쪽을 찾아가 이 일


을 하고자 하는 기관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이 때 마을 중재자의 역할이 중요하
였다. 낯선 외부인 스탭이 아닌,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마을 중재자가 그들의 참여를
설득할 수 있는 힘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양 측이 그 동안 어떤 생각을 하
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 들었다.

일정 부분 시간이 지나 동의를 받게 되면, 처음에는 비디오를 가지고 피해자에게


가서 면담하는 내용을 촬영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가져다가 가해자에게 보여주었
다. 일차적 반응은 가해자들의 부정이었다. 피해자가 말하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일 그런 일이 있었다 하였더라도, 그것은 스스로 그런 것이 아
니라 당시 조직의 윗사람이 시켜서 명령에 의하여 한 일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
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에게 할 말이 있느냐고 하였고, 그 가해자가 피해자
에게 하는 말을 촬영하여, 그것을 피해자에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식으로 총 6-7
회 씩 영상을 주고받는 일들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총 50차례의 마을 및
양 측 방문하며 이루어졌고, 이것은 6개월이 걸리는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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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마지막 단계에서 들어서면서 양 측에게 이제 영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나 이야기 할 수 있겠냐고 제안 하였다. 이 때 만나게 될 경우의 주의사항을 먼저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아야 했다. 즉 분노를 직접 표현하지 않아야 하며, 신체적 공
격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중간과정을 거치면서 양 측이 만나기로 최
종 동의가 이루어지면 그 만남에 대한 준비에 들어갔다.

만날 때에는 당사자, 가족, 마을중재자, 심리적 지지자, 사원 승려가 다 같이 사


원에서 만나는 구조를 가졌었다. 이것은 의미 있는 구조였다. 서로의 가족들과 심
리적 지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것이 개인만의 화해가 아닌, 가족 공동체, 마을 공동
체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장하는 측면이 있었다. 또한 물리적으로 양 당사자
를 보호할 수 있는 측면도 가졌을 것이다. 또한 사원에서 만남으로써 이들이 겪은
고통과 화해, 용서를 구하는 일이 종교적으로 승화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게 하였
다. 사실, 용서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 차원의 승화가 없이는 완성되기 어려운 측면
을 가지기 때문이다. 또한 승려 앞에서 만나기로 한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었는
데, 캄보디아의 전통문화에 따르면 승려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
다.

몇 몇 경우, 가해자는 피해자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30


년이 지난 일이기도 하였고, 실제로 기억이 안 나는 것일 수도 있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었기에 그 때 희생자들을 각 개인별로 알지 못하였을 수도 있
고, 또는 그 피해자 개인이 기억이 난다고 차마 이야기를 할 수 없어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과거 크메르 루즈 시절을 다룬 영화를 함께 보
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간을 통하여서, 최종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희생자였고, 그러나 앞으로


는 이런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자” 라는
분위기와 메시지를 나누게 되는 것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였다. 이 마지막 메
시지와 만남에서는 불교 승려가 치유의 전달자(conveyer of healer)가 되었다.

5) 결과
이 프로그램에서는 총 3사례의 마지막 대면 시도가 있었다. 그 결과, 제1 사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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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성공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가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제2 사례는 피해자가


결국은 가해자와 직접 만나는 것을 동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사과한다는
가해자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해자인 자신은 그 가해자를 용
서는 하겠다고 이야기 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고 한다. 제3 사례는 성공적으로 화
해가 이루어졌고, 서로 포옹하였으며, 그 가해자의 자식들도 그 마을 공동체 안에
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화해를 한 가해자는 “새로 태어난 느낌이다”라


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과거 30년 동안 마을 사원에서 하는 종교 행사를 전혀 가
지 못하였고, 이것은 그가 그 지역공동체에서 소외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제는 사원에 가게 되었다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이런 화해 프로그램을
한다고 하였을 때 그것이 성공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말
로 화해가 이루어지자 많이 놀랐으며, 이것은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어떤 새로운 희
망을 보여주는 일이 되었다고 하였다.

IV. 사회치유 활동 기관들의 과제

1. 정부의 과제들
경제 수준이 낮은 캄보디아에서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 그리고 신체적인 질병의
치료 문제가 국가 지원 우선순위의 상위에 있게 된다. 그러면서 정신건강 문제들은
모두 급한 일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면서 관심 밖으로 밀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건강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 또 다른 큰 문제이다. 이
런 문제에 대한 이해도 없고, 또한 정신질환에 대한 큰 편견과 낙인(stigma)들을
가지고 있어, 정신건강적 문제가 있으면 자신들이 마음이 약해서 그런 것이라 부
끄럽게 생각하고, 문제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의사가 아닌, 비의료인, 승려, 민간요
법사에게 가곤 하여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부 보건부 정신건강과장인 Dr. CHHIT Sophal 과 자문관 Dr. Robert Brook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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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의 대화에서 나온 내용들은 다음과 같았다. 캄보디아의 상황이 아직 정신건강에 관


심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보건부에 정신보건과가 만들어 진 것도 1년
밖에 되지 않았고, 예산은 거의 책정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보건성의
활동 우선순위는 1) 모자보건 2) HIV, TB, 말라리아 3) 정신건강 순이라 하였고,
보건부 전체 예산이 100-200만 불에 불과하여, 여기서 정신건강 예산은 매우 적
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트라우마의 치유는 종합적
(comprehensive)인 것이 되어야 하며, 그것은 즉 치유적 노력이 국제적, 국가적,
지역사회적 레벨에서 모두 이루어져야 하는데, 캄보디아에서는 아직 ECCC 를 통
한 국제적 차원의 치료만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DC-Cam 등을 통한 마을 대화 프로그램이 전형적이고 성공적인 지역단위 차원의
치료를 수행하고 있었지만, 보건부는 아직 그 효과를 충분히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향후 정부 및 사회기관 차원에서 정신건강 치유를 위하여 추진할 필요가 있는 사


안들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방송을 통하여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일들
이 필요하다. 둘째, 1, 2차 의료에 포함되는 포괄적인 정신건강 프로그램을 가져야
한다. 셋째, 캄보디아의 문화에 적절한 치료 방법 개발이 필요하다. 넷째, 지역사회
전체가 힘을 가지도록 만드는 전체적 접근 (holistic approach)이 필요하다. 다섯
째, 절대적으로 부족한 정신건강 전문가들을 더 양성하고, TPO를 치유센터로 삼아
증상이 심한 사람들을 치료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여야 한다. 여섯째, 특히
정신건강의 취약 집단에 대한 관심을 더 크게 가지고 집중적 활동을 하여야 한다.

2. 비정부기구들의 과제들
캄보디아는 아직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그러다 보니, 정부
가 국민들의 사회적 트라우마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 개입을 하기에는 아
직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그에 더하여, 캄보디아의 매우 복잡한 현대정치사의 흐
름 속에서, 현 정부가 과거 크메르 루즈 정권 시절의 여러 악행에 대한 적극적 대처
를 하기 어려운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아닌, 비정부 기구
(NGO)가 그런 사회적 치유를 위한 역할을 하여야 하는 상황이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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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그러나 이러한 활동을 하는데 있어 캄보디아는 몇 가지 어려움을 가진다. 첫째,


국가의 경제력이 적다 보니, 민간 사회에서의 재정 자원 역시 부족하여, 이러한 활
동을 하는데 필요로 하는 재정을 충분히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가졌다. 둘째, 크메
르 루즈 시절, 주로 지식인들이 피해를 입으면서 많은 숫자가 죽어, 이러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인적 자원 자체가 부족한 측면을 가졌었다.

그러한 가운데 캄보디아의 문제점을 인식한 외국 기관들이 재정적, 기술적 지원


을 하여, 외국 NGO 의 캄보디아 지부 격으로 NGO들이 만들어져 활동에 들어가게
되었고 나름대로 훌륭한 역할을 하는 NGO들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몇 가
지 문제점이 있게 되었다.

첫째, 그러한 NGO의 역할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정부는 자신들이


하여야 할 일을 NGO가 하여 줄 것을 요구하는 상황이 있게 되었고, 그러면서 NGO
는 자신들의 고유 업무와 정부가 요구한 일을 하는 업무 사이에서 갈등을 가지게
되는 경우들이 생겼다. 즉 자신을 지원하는 외국 기관들은 기관 고유의 업무를 가
지고 캄보디아 지부의 활동을 평가하기를 원하였으나, 정부는 그런 사항들을 별로
고려하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TPO 는 활동 초기 외국 기관의 재
정 지원을 받아 정부 활동 지원을 해 주었다. 즉 정부는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TPO 에 알려줘서 그들이 그 환자를 보도록 하여 정부가
NGO를 이용하는 형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TPO가 외국 기관
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을 때의 활동 목표가 아니었고, 외국 후원금은 기부자들의
목적이 있는 것이라서 그런 식으로 정부가 이용하려 하는 것과 갈등이 있게 되었다
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제는 정부 지원하는 일을 중지하였다고 하였다.

둘째, 그러나 자신들을 지원하는 외국 기관들의 기준과 시각에 맞는 활동을 하려


하면서, 그것이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는 캄보디아의 실정과 정서와는 동떨어진, 외
국인들의 시각에 맞춘, 비본질적이고, NGO를 위한 NGO 비즈니스를 하는 기관들
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셋째, 캄보디아 크메를 루즈 시절의 큰 비극이 국제적 관심을 끌면서 많은 지원


이 캄보디아에 주어졌으나, 2007년 세계 경제 위기 시점부터 지원이 줄어들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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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작하였고, 그 이후에 다시 다른 국제 분쟁지역들, 예를 들면 미얀마, 아프리카 국가


등이 등장하면서, 국제적 관심이 그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캄보디아
에 대한 지원은 점차 줄어들게 되면서 외국 NGO 들을 배경으로 가지고 활동하였
던 많은 NGO 들이 큰 어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캄보디아 정부가 계속하
여 캄보디아의 경제 성장이 빠르게 이루어져 경제 사정은 과거보다 매우 좋아졌다
고 홍보한 것도 한 몫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결국 사회적 치유 활동을
하던 많은 NGO 들이 지속가능한 활동을 하는데 있어 큰 문제를 가지게 되었다.

결국 여기서 고려하여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가장 바람직한 순서는 국내에 먼


저 자생적인 NGO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관에 외국 기관이 프로젝트
베이스로 지원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설사 외국의 지원이 줄어든다 할지라
도, 원래 자생력을 가지고 있는 단체였기 때문에 고유의 활동이 위축은 된다 할지
라도 지속이 될 수 있고, 다시 새로운 활동 단계로 이행도 가능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처음 시작을 외국 NGO에 의하여 캄보디아 지부 형태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가급적 빨리 현지화하고 자생력을 가지도록 하여, 설사 외국의 지원이 줄거나 중단
된다 할지라도 그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
다. 캄보디아와 같은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하지 못한 나라에서라도, 이러한 원칙
이 적용되지 못하면 지속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기관들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활동의 좋은 예로 시엔랩 근방의 지뢰박물관을 들 수 있다. 캄보디아의


지뢰제거 활동을 최초로 시작한 아키 라 (Aki Ra)씨는 한 개인으로서 그 일을 시작
하였다. 정확한 출생연도도 잘 모르나 1970년 생으로 생각되는 이 사람은, 5살 때
부모를 크메르 루즈 군인들에게 잃고도 크메르 루즈 군인들과 함께 살다가 10세부
터 크메르 루즈의 소년병으로 지뢰매설 작업을 시작하여 13세 때에는 지뢰매설 작
업에 있어 완전한 전문가가 되었다. 그 후 종전이 되고 나서 1991년부터 지뢰의 문
제점을 느끼고 스스로 그것을 제거하는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정부의 지원이
나 외국의 지원도 필요 없고, 자신이 자신의 일을 해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며 활동
을 하였다. 그리고 점차 그러한 내용이 국내 및 해외로 알려져, 해외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외부 지원이 없어도 본인들은 이 일을 해 나가겠다는

58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기관이기에, 자신들의 규모와 수준에


맞는 지뢰제거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 왔고,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 활동으로 변하
여, 다른 많은 기관들이 이런 일들에 동참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결과를 만들었던 것
이다.

V. 마치는 말

크메르 루즈 정권 시절, 3년 8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150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


다. 이것은 나찌의 홀로코스트에서처럼, 가스실에 들어가 대량으로 한꺼번에 죽어
나간 숫자가 아니었다. 이 150만 명의 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몽둥이, 칼, 총, 전
기고문, 목을 조르는 줄에 의하여 죽어 간 사람들의 숫자였다. 가장 비참한 형태의
죽음으로 캄보디아 사람들은 죽어간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죽음 뒤에는, 살아남은 사람들과 또 그들의 가족들이 있었


다. 그러나 그들은 40년의 기간 동안, 공포 속에서, 자신들이 겪었던 일들을 밖으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살아갔다. 그 수많은 고통과 한이 캄보디아 사람들의 정신세계,
집단 심리를 크게 변화시켜 놓았다. 정말로“제 정신으로 살 사람”이 없는 시대였다.
아무도 자기 생각을 정직한 큰 목소리로 말하지 못하였다. 늘 불안하였고, 조심하
였다. 알콜 중독의 숫자가 증가하였고, 가정폭력이 심하였으며, 제대로 나가서 일
을 하고 돈을 벌 수가 없었다. 가난이 뒤따랐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들은 태어나
자라났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무능한 부모들을 경멸하였고, 충돌하였고, 그리고는
자살하였다.

한 사회가 겪은 거대한 트라우마의 상처는 단지 PTSD 유병률 몇 %, 우울증 유


병률 몇 % 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많은 단체들의 사람들이 그 상처를 치유해 보려고 다양한 활동들을
하였었고, 넓은 바다의 작은 물방울 같은 노력이라 할지라도, 그 노력으로 인하여
도움을 받고, 새로운 삶의 감동을 경험한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에 의하여 캄보디아 사회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좋아져가고 있었다. 캄보디

|제50회 KPI평화포럼| 59
<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아에서의 정부와 NGO의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무언가를 더 도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캄보디아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 프로그램 이야기는 한반도에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좌와 우로 나뉘어 20세기 최악의 전쟁을 경험하고 수 백 만의 사람들이
죽어갔던 경험을 가진 한반도에서, 아직도 분단에 의한 상호 증오와 불신이 극한
상태에 있는 한반도에서, 그래서 집단적인 심리 상태와 정신건강 상태가 캄보디아
나 큰 차이 없는 한반도에서, 화해라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해 보이는 한반도에
서, 캄보디아의 화해 이야기는 하나의 도전이기 때문이다. 화해는 최후의 한사람까
지 다 치료되고 건강해 져야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들의 세대보다, 자
기 다음 세대의 삶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들을 감싸 보호하려는 ‘상처 깊은 사람
들’에 의하여 먼저 시작되는 것이었다.

60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 참고문헌

1) Beth Van Schaack, Daryn Reicherter, Youk Chhang (ed). Cambidian's Hidden
Sacrs. 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n. (2011) p8

2) Penedersen, Political Violence, Ethnic Conflict, and Contemporary Wars: Broad


Application for Health and Social Wellbeing . 75, Social Science and Medicine.
175(2002)

3) Beth Van Schaack, Daryn Reicherter, Youk Chhang (ed). Cambidian's Hidden
Sacrs. 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n. (2011) p223-224

4) ibid 8, 10, 15, 25

5) ibid 16

6) ibid 192, 194

7) Chhim Sotheara (2013). Baksbat(broken courage): A Trauma-based Cultural


syndrome in Cambodia. Medical Anthropoplgy. 32(2) p160-173.

8) Dr. Tanja Schunert et al. (2012). Cambodian Mental Health Survey 2012.
Department of Psychology, Royal University of Phnom Penh.

9) L.K. Jacobsen, S.M. Southwick, & T.R. Kosten, Substance Use Disorders in
Patients With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A Review of the Literature, 158(8)
Am. J. Psychiatry 1184(2001).

10) R.A. Kulka et al., Trauma and the Vietnam War Generation: Report of Findings
from the National Vietnam Veterans Readjustment Study(1990).

11) D.M. Glenn et al., Violence and Hostility among Families of Vietnam Veterans
with Combat-relate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17 Violence & Victims
473(2002)

12) C. Catani, E. Schauer, & F. Neuner, Beyond Individual

13) T. Galovski& J. Lyons, Psychological Sequelae of Cambat Violence: A Review of


Impact of PTSD on the Veteran's Family and Possible Intervention. 9
AGGRESSION & VIOLENT BEHAVIOR, 477(2004)

14) Beth Van Schaack, Daryn Reicherter, Youk Chhang (ed). Cambidian's Hidden
Sacrs. 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n. (2011) p22

15) J.T. de Jong et al., Household Survey of Psychiatric Morbidity in Cambodia,


50(2) Int’l J. Soc. Psychiatry 174(2004).

16) Beth Van Schaack, Daryn Reicherter, Youk Chhang (ed). Cambidian's Hidden
Sacrs. 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n. (2011) p16

17) Sarath Youn et al.(2015) MY TESTIMONY(pp1-84).Phnom Penh

|제50회 KPI평화포럼| 61
<사회적 트라우마와 치유 : 캄보디아 사례를 중심으로> 전우택

18) Rochelle Braaf. (2014). Sexual violence against ethnic minorities during the
Khmer Rouge regime. Cambodian Defenders Project.

19) Theresa DE LANGIS.(2015) LIKE GHOST CHANGES BODY(pp 1-96)

20) Dr. Kristina CHHIM et al. (2014). Life Before Expulsion: community history
from Vietnamese minorities in Kampong Chhnang. Kedi Karuna.

21) Lyma Nguyen & Christoph Sperfeldt. (2012). A Boat Without Anchors: a report
on the legal status of ethnic vietnamese minority populations in Cambodia under
domestic and international laws governing nationality and statelessness. Cambodia:
Jesuit Refugee Service(JRS).

22) SOK Sam Oeun.(1994-2009) CAMBODIA DEFENDERS PROJECT(pp1-52)

23) Inger Agger. Calming the mind : healing after mass atrocity in Cambodia.
Sage.(2105)

62
발 표②

영화와 사회치유:역사적 트라우마의


극복을 향한 멀고도 험한 길

임정택 교수(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상상력 장애로서의 트라우마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

1920년 독일 체르노비츠에서 유대계 독일인으로 태어나 2차 대전 중에 가족과


함께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가 부모를 잃고 자신도 가스실에서 죽을 뻔한 위기를 넘
기고 살아남은 시인 파울 셀란. 그의 시 <죽음의 푸가>의 시작 부분이다. 셀란의
시는 홀로코스트라는 불가해한 트라우마에서 시작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온전치 않다. 단어를 두서없이 나열하는 듯한 그의 해체적인 시어. 죽음을
비유하는 검은 우유를 마시고 무덤을 파는 행위는 시 전편을 통해 지속적으로 반복
되고 있어 마치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가 매일 밤 악몽으로 나타나 그에게 고통을
가하는 듯하다. 결국 고통의 시인 셀란은 1970년 파리의 세느 강에 투신 자살함으
로써 생을 마감하고 만다.

유대인 600만명을 죽인 독일의 홀로코스트. 전 국민의 20%인 약 200만명이 희


생되었던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의 킬링필드. 1년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100만명
으로 추산되는 인명을 살상한 인도네시아에서의 집단학살. 100일 동안 인구의
10%인 100만명이 학살당한 르완다 대학살. 20세기를 장식한 대학살극들이다. 홀
로코스트 또는 제노사이드로 명명되는 이러한 가공할만한 사건들은 인간 이성의

|제50회 KPI평화포럼| 65
<영화와 사회치유 - 역사적 트라우마의 극복을 향한 멀고도 험한 길> 임정택

힘으로 역사는 발전할 수 있다는 낙관론적 계몽의 기획을 여지없이 파괴시키고 말


았다. 또한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의 영역에서마저도 이탈된 불가해한 사건으로 그
어떤 상상력으로도 그것을 상상해낼 수 없는 가공의 사건들이었다.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인간은 이성의 장애, 상상력의 장애를 앓을 수 밖에 없다. 상상력의 장애는
곧 표현의 장애이며 언어의 장애, 이미지의 장애로 이어진다. 그래서 홀로코스트
연구에서 많은 역사학자들과 예술이론가들은 저마다 ‘재현불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며 ... 불가능하다”1)고 했


다. 원래 야만인(barbarian)이란 그리스어 어원으로 볼 때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2) 홀로코스트는 윤리적 한계를 넘은 “극한 사례”(limit-case)이기
에 그것은 인간의 인식틀 한계 밖에 있으며 “언어 밖의 사태”이기에 재현할 수 도
없고 재현될 수도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을 흔히 ‘비재현의 윤리’라고 부른다. 프랑
스의 리오타르 또한 홀로코스트를 지진계마저 파괴해버리는 측정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하고 재현불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 누구도 글이나 그림, 혹은 그 어떤 것
을 통해서든 숭고라는 정감에 근접했다거나, 그것의 목격자인 척 혹은 그것에 대한
진솔한 보고자인 척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며, 위선이다. 숭고는
만들어질 수 없으며 스스로를 ‘투사’(project)하는 것도 아니다. (...) 예술은 숭고
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중략)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숭고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이러한 아포리아를 그리고 그것의 고통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술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결국 숭고에 대한 어떤 말도 할 수
없음을 말할 뿐이다.”3)

모리스 블랑쇼 역시 그의 저서 『재난의 글쓰기』에서 상상이 불가능한 인종말


살이 결코 문학적 상상력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재난에 대해 글을

1) Teeodor W. Adorno, Cutural Criticism and Society, in: Can we live after Auschwitz?,
ed. Rolf Tiedermann, Stanford,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p. 162.
2) 최종철, ‘재난의 재현’이 ‘재현의 재난’이 될 때. 재현불가능성의 문화정치학, 미슬사학보
42집(2014), p. 65-89.
3) Jean-Francois Lyotard, Heidegger and "the Jews", Minneapolis: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0, p. 48.

66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쓴다는 것은 다시금 과거의 고통을 반복하고 재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4)

우리는 이 지점에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재현불가능성을 고


수할 경우 역사적 트라우마는 영원한 침묵 속에 파묻히지 않겠는가?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은 영원히 억압된 채 악몽으로서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끊임없이 고통스
럽게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치유의 수단은 존
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재현의 포기는 곧 치유의 포기인가? 재현불가능성 때문에
재현을 본질로 삼았던 전통적 예술과 미학은 파산선고를 해야하는가? 인간은 상상
하는 존재이며 끊임없이 치유를 향한 존재라는 것을 고려할 때 이 물음들 대한 답
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이다. 비재현의 윤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비윤리적인 것이
되고 만다. 재현의 거부는 주체가 그 고통과 관계가 없음을 확인함으로써 주체의
안위를 보장받는 위선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5) 사회치유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재현의 불가능성에 저항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인간의 상상마저 초월하는 불가해한
집단학살에 대한 마비된 상상력을 복원할 때 비로소 치유의 길이 열린다. 그것은
아주 어려운 작업이다. 재현불가능성 자체를 재현하든가 아니면 상상을 초월하는
획기적인 표현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우리는 트라우마의 치유에 있어서 재현불가능성과 재현에 대한 당위성 사이에서


항상 딜렘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재현불가능성을 등에 업고 불가해한 홀로코스트
에 대해 언어나 이미지로 표현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현을 통한 기억은 마
음의 상흔을 덧나게 하며 재현의 포기를 통한 기억의 억압은 잠정적인 망각을 가능
케할 뿐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시간이 가면 지혈이 되고 봉합되는 육
체적인 상처와는 달리 트라우마를 통한 마음의 상처는 끊임없는 기억과 망각의 줄
다리기를 통해 장기적으로 서서히 치유되어 가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파울 셀란은 왜 시를 썼는가?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기에 충분했던 '언어 밖 사태‘인 인종말살에 대해서 지워져버린 자신의 존
재를 어떻게든 확인해보기 위한 몸부림이 아닐까? 그리고 잃어버린 언어를 다시

4) Maurice Blanchot, The Writing of the Disaster, Lincoln: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86,p.5-7.
5) 최종철,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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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사회치유 - 역사적 트라우마의 극복을 향한 멀고도 험한 길> 임정택

찾아보기 위한 절규가 아닐까? 트라우마로 인해 마비된 감각과 상상력을 다시 활


성화시키기 위한 꿈틀거림이 아닐까? 그 끔찍한 죽음의 공포를 검은 우유를 매끼
마시는 극히 원초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로 그것도 파편적으로 그리고 업습하는 악
몽처럼 반복적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언어의 장애인, 상상력의 장애인 파울 셀
란은 우리에게 그 무서운 트라우마 기억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그 무거운
기억을 자신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부담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과거의
기억을 남겨주고 자신의 존재는 스스로 지워버릴 수 밖에 없었다.

파울 셀란의 시를 읽은 아도르노는 재현불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수정한


다. “독일인이 저지른 것은 어떤 식의 이해도 허용하지 않지만 …… 그럼에도 불구
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태를 견뎌내고 싶어하는 의식은, 객관적으로 지배하는
광기에 자신도 떨어지지 않기 위해 사태를 파악해보려는 시도를 매번 되풀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6) 사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문학과 드라마, 영화들은 꾸준히 만
들어져왔으며 앞으로도 만들어질 것이다. 전후 독일의 문화예술은 거의 모두 나치
의 범죄에 대한 과거극복을 성찰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재현
의 실험들은 재현불가능성이라는 규범적 명제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라는 역사
적 트라우마를 나름대로 기억하고 성찰하고 동일시하고 객관화하면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성과 상상력을 복원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실험들이 진정으
로 피해자들 또는 가해자들의 트라우마적 상흔을 어루만져주고 치유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고통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역사적 트라우마와 사회치유를 논함에 있어서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확


인해야 한다. “전쟁, 대참사, 재난 같은 ‘일반적인 인간 경험의 범주를 넘어서는’ 충
격적인 외상 사건을 경험한 후 그 후유증으로 발생하는 장애”7) 로서의 트라우마에
대한 의학적 정의를 넘어 트라우마에 대한 또 다른 정의 또는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트라우마의 증상으로서 의학에서는 초조, 불안,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
신경질, 공격성, 분노, 악몽이나 플래시백의 형태로 외상 사건을 반복적으로 재경
험하는 것을 들고 있다. 필자는 여기에 더해 상상력의 장애, 표현의 장애, 언어의

6) 아도르노, 김유동 옮김, <미니마 모랄리아> 도서출판 길 2005, 142쪽.


7) 김준기,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시그마북스 2009, 30쪽.

68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장애, 이미지의 장애로서의 트라우마를 첨가하고자 한다.

이 명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기존 연구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캐롤린 요


더는 트라우마로 인한 기억들은 조각조각 편린으로 남게 되어 한편의 그래픽 이미
지로 나타나거나 때론 사건의 순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하면서 말을 관장하는 뇌부분의 기능이 멎기도 하며 ‘공포에 의해 벙어리’
가 되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고 했다.8) 트라우마 환자의 말하는 태도를 연구한
조너던 셰이 Jonathan Shay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게 되면 일관성있는 의식작용
이 방해를 받는 “의식의 파편화”(the fragmentation of consciousness)가 발생하고
이 과정에서 언어화할 수 없는 트라우마적 상황이 악몽 등으로 반복해서 나타난다
고 주장하고 있다. 빅토 프랭클 Victor Frankl 역시 의식의 파편화와 언어적 표현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파편화된 의식을 언어화화는 작업이 곧 트라우마의 치료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화라는 것은 펠만, 카루스, 라카프라와 같은 트라우마 연
구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존 이해의 틀을 넘어서는 충격적인 사건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의 틀에 대한 요구라고 한다.9) 새로운 인식의 틀이란 재현불가능
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형태로든 홀로코스트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서사방식일 수
있다. 그것은 홀로코스트에 의해 마비된 상상력과 언어를 다시 회복해가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체험이 상상력의 마비라는 사실은 프랑스의 디디 위베르만의 저


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가 뒷받침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홀로코스트의
근본 동기는 유대인을 많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을 말살하여 유대인의 이미
지를 아예 지워버리려는 것이었으며 이미지의 종말은 결국 유대인에 대한 상상 자
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10) 결국 홀로코스트는 상상을 초월하는
집단학살을 통해서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가공할 사건인 것이다. 상상력의 마비는
의식의 파편화와 통한다. 의식의 파편화는 언어의 파편화를 가져오고 표현의 장애
를 일으킨다. 파울 셀란의 시는 바로 파편화된 의식의 산물이다. 셀란의 시가 우리
에게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정상인의 언어보다는 비정상적인 장애인의

8) 캐롤린 요더, 김복기 옮김, 트라우마의 이해와 치유, 아나뱁티스트, 2014, p. 45.
9) 한국근대영미소설학회, 상처와 치유의 서사, 신아사, 2013, 5쪽 이하.
10) Georges DiDi-Huberman, Images in Spite of All:Four Photographs from Auschwitz,
Chicago: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8, p. 43.

|제50회 KPI평화포럼| 69
<영화와 사회치유 - 역사적 트라우마의 극복을 향한 멀고도 험한 길> 임정택

언어가 비정상적인 학살사건을 더 잘 재현할 수 있으며 폭력과 문명의 야만성을 더


잘 고발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방식을


실험해왔다. 때로는 허구화를 통해서 상업영화의 문법을 따르며 관객과 인물과의
강한 동일시를 불러일으키는 서사전략으로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을 매개했다.
때로는 시각적 재현과 내러티브를 거부하며 ‘장애적’ 시각으로 홀로코스트를 기억
하고자 했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미국에서 4부작 TV 미니시리즈로 제작되어
1979년 1월에 전 독일에 방영된 <홀로코스트>이다. 독일에 동화된 유대인 의사
바이스 가족의 나치 치하에서의 박해를 다룬 이 드라마는 방영 전부터 독일 사회에
일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방영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논쟁부터 시작하여 방영 후
‘홀로코스트 신드롬’을 불러온 이 드라마는 비록 미학적으로 헐리우드 영화식의 감
성적 멜로드라마의 문법을 따르고 있지만 독일 국민들에게 일대 ‘정신적 충격’을
가하면서 전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억압하고 거부하면서 잠정적인 망각의
지대에 놓아두었던 홀로코스트를 대토론의 장으로 이끌어내었다. 픽션의 이름으로
재현불가능성에 도전하면서 침묵을 깨고 전후 독일사회에서 금기시되었던 홀로코
스트와 스스럼없이 대면할 수 있게함으로써 독일 대중들의 기억장애와 표현의 장
애를 치유하는 효과를 어느 정도 거두었다고 본다. 그것의 기본 원리는 가해자와
피해자와의 동일시를 가능케하는 전통적 미학의 재현방식이었다.11)

반면 1985년 프랑스의 클로드 란츠만 감독이 발표한 다큐멘터리 <쇼아>는 재


현불가능성에 충실하면서 홀로코스트 영화의 새로운 형식을 창안하고 있다. 9시간
30분이라는 긴 시간동안 우리는 스크린에서 유대인의 학살장면은 하나도 볼 수 없
다. 당시의 기록필름이나 영상자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장애요 시각화의 거부요 재현의 거부이다. 그래서 영화는 텅비어있다. 대신 스크린
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생존자와 가해자, 목격자, 관련 당사자들의 증언의 목소
리이다. 그리고 과거 홀로코스트의 현장인 첼모 수용소, 트레블링카 집단처형장,
아우슈비츠, 바르사뱌 유대인 게토의 텅빈 현재의 모습이 보여질 뿐이다. 재현은
영화 속에서 부재하며 포기된다. 재현이 이루어지는 곳은 영화가 아니라 관객의 의

11) 신명훈, 드라마 <홀로코스트>와 독일의 과거청산, 역사와 문화 20(2010), p. 7-32.

70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식이다. 영화를 보면서 또는 들으면서 관객은 이미지의 부재를 홀로코스트에 관련


된 이미지들을 연상하며 채워나간다. 스스로의 재현을 통해 관객은 과거를 기억한
다. 그것은 이미지에 의해 일방적으로 부과되는 기억과는 다르다. 클로드 란츠만은
관객에 의한 재현을 통해 재현불가능성을 피해가고 있다. 이러한 강요되지 않은 기
억이 관객을 치유할 수 있고 그것이 사회적 치유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란츠만은 사실을 허구화함으로써 홀로코스트의 참극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개인의 영웅이야기로 변질시킨 <쉰들러 리스트>를 키치멜
로드라마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12)

<킬링필드>: 트라우마의 끝- 죽음

캄보디아 뉴욕타임즈 특파원 시드니 쉔버그는 1980년 그가 캄보디아에서 취재


하고 경험한 것에 대한 실화 <디스 프란의 생과 사. 한 캄보디아인의 이야기>를
기고한다. 디스 프란은 쉔버그가 캄보디아 현지에서 채용한 조수 기자이자 통역관
역할을 한 자로 쉔버그와는 호형호제하는 각별한 사이이다. 쉔버그는 이 글로 그해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미션>의 감독 롤랑 조페는 이 실화를 바탕으로 1984년 영

12) 이향준, <쇼아>: 익명의 아이히만(I-chimann)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문학연구


42집(2011), p. 69-101.

|제50회 KPI평화포럼| 71
<영화와 사회치유 - 역사적 트라우마의 극복을 향한 멀고도 험한 길> 임정택

화 <킬링필드>를 발표했다. 이 영화는 론 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농경사회를 바탕


으로한 급진 공산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폴 포트의 크메르 루즈가 자행한 200만
명의 대학살극을 다룬다. 그것은 1985년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보고서에서도 언급
된 것처럼 “나치 이래 세계에서 일어난 가장 심각한 범죄”이다. 영화는 과연 이 엄
청난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일까?

영화 <킬링필드>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극영화이기 때문에 고전적인 영화서사


를 통해서 재현불가능성을 비껴가고 있다. 영화 속에서 시드니 쉔버그는 미국의 융
단폭격에 의해 많은 양민이 희생된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1973년 8월 프놈펜에 도
착한다. 방콕에서 자기가 탑승한 프롬펜행 비행기가 수 시간 연착된 것과 미공군의
공습이 연관이 있음을 예감한 시드니는 미국 군 당국의 은폐시도에도 불구하고 조
수 프란과 함께 현지 취재활동을 과감하게 펼친다. 여기에서 진실을 찾아 알리려는
도덕적 저널리스트로서의 시드니와 프란의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그것
과 함께 또한 두 사람의 우정의 스토리가 펼처지고 있다. 따라서 영화는 적어도 시
드니가 주도하고 있는 1부에서는 왜 미국이 오래동안 캄보디아를 공습해왔는가
그리고 결국은 그 결과인 크메르루즈의 학살극이 미국의 잘못된 외교정책의 산물
이 아닌가에 대한 역사적인 성찰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우정의 이야기로 머물고 싶은 것이며 영화 그 이상을 원치 않은 것이다.13)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은 이 영화가 과연 킬링필드를 다루고 있는 영화인지 의
구심을 갖게 된다. 캄보디안 내전에서 정부군이 계속 불리해지는 상황에서도 그들
은 가족들만 미국으로 피난시키고 현장에 계속 남아 기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하기
로 한다. 크메르루즈 군이 프롬펜을 장악하면서 그들은 체포되나 프란의 기지로 살
아남고 가장 안전한 프랑스 대사관으로 피신한다. 영화는 이 와중에 전쟁의 참혹상
을 묘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주된 주제는 되지 못한다. 이 영화는 전쟁 스토리가
아니라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이기 때문이다. 프란은 캄보디아인이라는 이유로 결
국 탈출하지 못하고 쉔버그와 작별하며 크메르 루즈 치하에 내맡겨진다.

뉴욕으로 돌아온 쉔버그는 친구 프란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별 성과


를 거두지 못하고 캄보디아 특종기사 덕분에 퓰리처상을 받게 된다. 그의 수상 연

13) 아마도 제작자 프트넘과 감독 조페는 미국 영화시장을 고려했을 것이다.

72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설에서 그는 친구 프란과의 우정과 진실을 말하는 기자로서의 미션을 다시 강조한


다. “내가 프란과 파트너로서 함께 있었다는 사실때문에 대단히 행복합니다. 더욱
더 행복한 것은 우리가 서로 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캄보디아에서
나와 함께 한 그의 미션은 절대적으로 불필요했던 전쟁에서 그의 국민들이 어떤 고
통을 겪었는지를 세상에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미션은 나의 미션이 되었습니다.
나의 보도는 그가 없었다면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쉔버그는 동료기자
로부터 상을 받기 위해서 프란을 사지에 남겨놓지 않았냐는 추궁을 당하기도 하며
점점 더 캄보디아의 현실로부터 멀어져간다. 1부의 마지막 장면이 그것을 잘 표현
해주고 있다. 쉔버그는 뉴욕의 자기 집 거실에 앉아 캄보디아에서 찍은 현장 사진
들을 음미한다. 그리고 TV를 켜고 닉슨 대통령이 닉슨 독트린을 설명하는 영상을
본다. 닉슨에 이어지는 영상은 미국의 B-52 폭격기가 수많은 포탄들로 캄보디아
를 폭격하는 장면과 함께 희생된 양민들의 처참함 이미지 사진들이다. 풋치니의 오
페라 <투란도트>에서의 유명한 아리아 <누구도 잠자면 안되>가 배경음악으로
들리면서 쉔버그가 보고 있는 영상의 효과는 배가된다고 볼 수 있다. 닉슨 독트린
에 대한 비판과 함께 아름다운 음악과 강력한 대조를 이루는 양민들의 처참한 모습
은 이미 TV모니터 안에 박제된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프란과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영상을 바라보고 있는 쉔버그는 멀어진 존재들이다.
여기에서 영화는 제 2부로 넘어가며 크메르루즈 치하에서 혹독한 강제노동을 당하
고 있는 프란이 등장한다. 제2부는 프란이 직접 경험하는 킬링필드의 참상을 일인
칭 시점으로 쉔버그에게 보고하는 형식이다. 프란이 멀어져가는 쉔버그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되어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동시에 멀리 떨
어져있다. 지식인은 숙청대상이기에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처참한 기아와 폭력과
크메르 루즈가 내세운 어린 소년 소녀들에 의한 양민 학살이 프란의 직접 체험을
통해 재현된다. 우여곡절 끝에 프란은 마침내 강제노동수용소로부터 탈출한다. 도
망가면서 그는 수백개의 유골들이 뒹굴고 있는 논밭을 지나고 바로 킬링필드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예일대 연구팀에 의하면 200개의 킬링필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1979년 10월 마침내 쉔버그와 프란은 태국 국경의 한 난민촌에서 재회를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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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사회치유 - 역사적 트라우마의 극복을 향한 멀고도 험한 길> 임정택

된다. 눈물어린 재회의 포옹을 하고 있는 두 남자를 쳐다보고 있는 난민들. 두 남자


는 감성적으로 자극되어 눈물을 흘리고 있으나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난민
들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표현이 없다. 텅 비어있다. 트라우마의 고통에 억
눌린 그들은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존재없는 존재들이다. 영화
는 다시 한 번 난민들의 고통이 진정 이 영화의 중심이 아니고 두 사람의 우정이 중
심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학살난민들을 보여주면서 들리는 배경음악은
좀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해보자는 존 레논의 <이매진>이다. 존 레논은 세계가 하나
로서 살게되리라는 희망을 상상해보자고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표현의 장애인이
된 난민들도 과연 그러한 상상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비록 영화 <킬링필드>는 극영화로서 치유와 관련하여 많은 한계를 보여주고는


있으나 캄보디아에서의 세기적 집단학살을 서방의 대중들에게 알리는 기폭제가 되
었다는 사실은 치유를 향한 조그만 발걸음으로 평가될 수 있다. 1977년 1월 프랑
소와 퐁쇼우가 <캄보디아 0년> 으로 민주캄푸치아의 학살을 최초로 고발한 출판
물이었다면, 1984년 롤랑 조페의 영화 <킬링필드>는 킬링필드란 말을 전 세계에
대중화시킴으로써 캄보디아의 200만 학살극을 고발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거기에
대해 성찰을 시작하도록 자극했다는 사실 하나로 이 영화의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
다.

실제인물 디스 프란은 뉴욕으로 돌아와 쉔버그와 함께 뉴욕타임즈의 사진 기자


로 활동하면서 캄보디어의 제노사이드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도사로 활동했다.
나중에 그는 췌장암에 걸려 어려운 생을 살았다. 그는 말했다. “나를 치유할 수 있
는 의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폴 트같은 사람이 나보다 더 아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 우리 두 사람은 머리 속에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에서는 살인자와 희생자가 똑같은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해자의 트라우마도 인
정했던 그는 1996년 로스앤젤레스의 아파트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크메
르 루즈의 살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게 디스 프란의 트라우마는 끝을 맺었다.

74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The Act of Killing> - 살인의 재연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인도네시아 인권단체의 요청으로 북수마트라 메단 지


역의 농장노동자들과의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갔다. 거기서 그는
노동자들이 왜 노조에 가입하기를 꺼려하느냐는 질문에 당황하는 것을 보고,
1965-66년 1년도 채 안되는 사이에 농부, 지식인 등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무려
100만명을 학살한 제노사이드가 아직도 이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았다. 당시 농장의 스탭들 모두가 공산주의자로 몰려 제거되었고 그들은 그러한
엄청난 일이 자기들에게 다시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아직 한 번도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이나 재판이 진행되지 않았고 또한 여전히 그들
이 권력의 핵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그들의 태도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반면에 오펜하이머는 가해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의외로 가해자들은 자기들의
과거 학살행위에 대해 조금도 거리낌 없이 오히려 자랑스럽게 아야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펜하이머 감독은 피해자의 시선이 아닌 가해자의 시선에서
인도네시아 학살극에 대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거
기에는 인도네시아 군 당국의 방해도 작용했다.

감독은 메단 지역의 암살단 리더로서 - 이들은 물론 국가의 지원하에 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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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사회치유 - 역사적 트라우마의 극복을 향한 멀고도 험한 길> 임정택

자의 절멸을 수행했다 - 1000여명을 죽인 안와르 콩고에게 당시 자기들이 행한


살인을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영화 속에서 가해자들이
자신들의 영화를 만드는 형식으로 진행되며 감독 오펜하이머는 보이는 않는 연출
자로서 함께 영화에 개입한다. 오펜하이머 감독은

영화적 서사장치를 이용하여 가해자로 하여금 마음껏 살인을 재연하도록 함으로


써 홀로코스트의 재현불가능성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것, 말해서는 안되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실제 살인행위를 그저
재연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자기들이 만드는 영화의 콘텐츠는 실제의 살인행위
이기에 더 이상 어떠한 상상력도 필요없다. 실제와 영화가 동일하며 하나이다. 그
들에게 제노사이드는 표현의 장애가 아닌 오히려 표현의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가
해자들은 모두 함께 공동으로 영화를 만들어가며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자신
들은 스타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젖어 살인의 광기를 마음껏 발산한다. 그들은
철사 줄로 목을 졸라 사람을 죽였던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며 살인을 재연하기도
하며 죽은 시신의 배를 갈라 내장을 파먹는 상황까지 거침없이 연출한다. 그들의
잔인성과 극악무도함은 극에 달한다. 감독은 현실과 영화(환상)의 절묘한 조합을
통하여 제노사이드 다큐멘타리의 새로운 문법을 창안하고 있다. 사실을 탐구하고
추적하는 전통적인 다큐가 아닌 상상의 다큐라고 할까. 시각을 거부하고 재현을 거
부하며 총체적인 서사를 포기하는 <쇼아>적 다큐멘터리와는 극과 극의 대조를 이
룬다.

가해자들의 영화는 철저하게 헐리우드 상업영화 문법을 따르고 있다. 영화 속 영


화의 제작자이자 감독인 안와르 콩고는 사실 영화와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그는
메단에서 영화관을 운영했으며 암표를 팔아 돈을 벌었다. 소위 공산주의자들이 미
국영화 상영을 반대했다는 것이 그가 암살단의 리더가 되어 학살을 주동하게 된 직
접적인 동기이다. 그는 존웨인,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헐리우드 배우를 좋아하며
살인의 기술도 갱스터 느와르 영화나 웨스턴 영화에서 직접 보고 배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과 역사와의 동일시를 통해 완벽한 현실재현을 주도하고 있는 안와


르 콩고에게도 트라우마가 감지된다. 그는 스크린 밖 보이지 않는 오펜하이머 감독

76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에게 말한다. “좋은 음악, 춤, 행복감, 약간의 술, 마리화나, 엑스타지로 이 모든 것


을 잊어버리려고도 해보았지.” 안와르도 우울함을 느낄 때가 있으며 때론 악몽도
꾼다. 본인이 철사줄로 목졸리는 피해자의 역할을 직접 연기해본 후에 그는 일종의
회의감도 갖는다. 자기가 여러 사람을 죽였던 옥상에서는 오래동안 헛구역질을 하
기도 한다. 안와르는 살인의 재연을 통해서 자기가 행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영화를 만드는 동안, 살인의 광기를 마음껏 발산
하는 동안 가해자 안와르 콩고에게 변화가 생긴 것일까? 그렇다면 영화만들기 자
체는 콩고에게 일종의 이야기치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비약적 해
석이다. 오펜하이머 감독도 그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영화가
행한 것은 50년간의 침묵을 깨고 어떻게 과거가 현재에 다시 재연되는지에 대해
관객이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영화가 그 자체로서 국가 전체를 바꿀 수는 없습
니다. ...모두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말하는 것은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이
제는 강력하게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해자들 자신들은 더 이상 어떠한 부인
도 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전체 정치적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은 평범한 인도네시아인들이 자기들의 가장 고통스러운 문제를 처음으로
두려움없이 말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오펜하이머 감독의 결론이
다. 영화 <엑트 오브 킬링>은 118개 도시에서 1100회 상영되었고 일부 지역에서
는 무료 다운로드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친국가적 잡지 Tempo는 집단학살 이야기
에 대한 비공식적 검열을 중지하였다.14) 오펜하이머 감독은 10여년 간의 다큐 작
업을 통해 50년 간의 침묵을 깸으로써 멀고도 험한 사회치유로의 첫 걸음을 내디
뎠다.

14) Rebecca Harkins-Cross, Performing History,Performing Truth:The Act of Killing,


Metro Magazine 180( ), pp. 9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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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표③

캄보디아 킬링필드 : 문화를 통해 본


화해의 가능성

강효인 연구원(연세대학교 인간평화와 치유연구센터)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목차

Ⅰ. 서론

Ⅱ. 캄보디아 문화와 화해

1. 왜곡된 화해의 의미

2. 캄보디아 불교 문화와 화해

Ⅲ. 캄보디아 화해의 경과와 그 가능성

1. ECCC: 카르마적 정의의 실현

2. 캄보디아 NGO: 자비와 용서, 비폭력의 실현

Ⅳ. 결론

I. 서론

“캄보디아 킬링필드”1)는 약 200만명2)이 목숨을 잃은 20세기 최악의 대학살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후 약 30년이 지난 2000년대 중반, 유엔의 지원 하에 관련
전범을 재판하기 위해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ECCC: Extraordinary Chambers in
the Courts of Cambodia)가 설립되었다. 이 시기에는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되어
인권NGO및 학자들 사이에서는 전범 재판소의 사례 중 성공담이 나올 것이라는 기

1) 캄보디아에서 1975∼79년 4년 동안 폴 포트의 급진 공산주의 정권 크메르루주가 양민


200만 명을 학살한 20세기 최악의 사건 중 하나.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무장단체이던
크메르루주(붉은 크메르) 정권이 론 놀 정권을 무너뜨린 후 1979년까지 노동자와 농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최대 200만 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부유층을 학살한
사건이다.
2) 정확한 집계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일반적으로 100~200만 명의 수치가 통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최근 문헌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거의 200만 명에 가까운’ 수치와 표현을
이용하기로 한다(부경환,2010 참고).

|제50회 KPI평화포럼| 81
<캄보디아 킬링필드 : 문화를 통해 본 화해의 가능성> 강효인

대감으로 캄보디아 사회의 치유 및 화해와 관련한 연구가 급증하였고 국제 NGO에


의한 원조의 규모도 증가하였다(Margolis, 2007).

그러나 이 미증유의 대학살 사건은 당시 캄보디아 정권이었던 크메르 루주


(Khmer Rouge)는 물론이고 하위의 마을 단위까지 근거리와 원거리의 모든 인간
관계에서 서로가 피해자이며 가해자가 전방위적으로 존재한다는 특수성을 보이고
있어, 화해의 당사자의 범위나 그 가능성에 대해 쉽사리 논할 수 없다는 어려움이
있다. 당시 쏟아져 나온 화해 연구는 국가 단위의 정치적 화해에 대한 논의나 개인
의 치유 차원에서의 화해를 주로 다루었고, 서구의 시각이 반영되어 캄보디아의 현
실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따라 캄보디아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화해와 갈등해결 방법에 대한 요구가 점차 증대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문화적 접근 방식에 입각하여 캄보디아의 불교 문화의 윤리규범,


그리고 불교 기관과 의식을 살펴보아, 캄보디아 불교 문화에 내재된 화해의 개념과
실제 캄보디아 사회 문화적으로 작동되는 양상을 탐구한다. ECCC의 사례를 통해
서 이러한 화해가 실제 법과 제도 상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또 NGO로 대표
되는 시민사회 주도의 화해 프로그램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그
리하여 캄보디아의 불교문화의 화해 개념이 법과 제도, 그리고 시민사회 모두에 작
용하고 있음을 밝히고, 캄보디아식 화해의 달성과 사회 치유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시도한다.

II. 캄보디아 문화와 화해

1. 왜곡된 화해의 의미
‘화해(Reconciliation)는 라틴어 ‘conciliatus’ 에서 유래된 것으로, ‘함께 오다’ 또
는 ‘같이 모이다’(coming together)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화해는 갈등으
로 인해 서로 멀어지고 헤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모이고, 깨어진 관계가 다시(re)
건설되고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화해란 어제의 갈등과 증오에 더 이상 사로

82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잡히지 않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 혹은 그런 관계를 회복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


다(Hayner, 2008: 284). 화해를 분류하자면 개인적 차원과 정치적 화해로 나뉠 수
있는데, 개인적 화해가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관계 복원을 의미한다면, 정치적 화
해는 공적인 차원에서 집단적인 화합을 의미한다(이 재승, 2011).

제노사이드 이후의 사회는 형사처벌, 피해배상, 제도개혁을 실현해야 하지만 이


러한 요구는 힘의 논리에 의해 외면당하며 오히려 지배세력의 시각에서 조율된 국
민화해론이 활개를 치게 된다(이재승, 2011). 이는 20세기 전대미문의 대량학살
사건으로 기록되는 ‘킬링필드’ 이후의 캄보디아에서도 재현되었다. 1993년 총선
거를 통해 새롭게 ‘캄보디아왕국’(Kingdom of Cambodia)이 수립된 이후, 캄보디
아 정부는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을 포함한 가해자들에게 어떠한 처벌도 취하지 않
았으며, 캄보디아의 시민들을 위한 정신의학적이며 심리학적 필요를 해결하기 위
한 노력 역시 전무하였다(Linton, 2004: 12). 1990년대의 캄보디아에서 ‘화해’라
는 단어는 캄보디아 정치 엘리트 간 권력 투쟁을 은폐하기 위한 일종의 유행어였
다. 1997년 6월 20일 캄보디아의 두 수상은UN 측에 ‘민주 캄푸치아 시대에 자행
된 범죄의 책임에 대해 법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정의가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러나 훈센과 라나리드 왕자 간의 권력 투쟁, 크메르
루즈를 끌어들이기 위한 경쟁, 크메르루주 해체 등 복잡하고 어지러운 국내 정치
상황을 겪으며 ‘정의’는 곧바로 ‘화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 1998년 말에는 화해
가 가장 중요한 정책 고려사항이 되었으며 캄보디아의 모든 갈등과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Linton, 2004: 13). 정부는
크메르 루주와 CPK가 통합되었고 더 이상의 군사 충돌은 없으며, 이것을 화해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과거를 뒤로 하고 이제 그만 용서하고 잊으라고 하였다. 훈센 총
리는 "구멍을 파서 과거를 그 안에 묻으라(dig a hole and bury the past in it)"는
악명 높은 말을 남겼다. 또 정부는 ‘크메르 루주와의 화해는 평화의 대가’라는 말도
서슴없이 하였으며, 크메르 루주와 관련한 과거사를 언급할 때 화해라는 말을 자유
롭게 사용하였다. 캄보디아인들은 수백만의 생명의 손실과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대
한 책임도 없이, 화해라는 문구 하에 크메르루주 지도자들과 그들의 군사력이 다시
받아들여진 것에 혼란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은 1979년 캄보디아 정권이 크메르 루

|제50회 KPI평화포럼| 83
<캄보디아 킬링필드 : 문화를 통해 본 화해의 가능성> 강효인

주와 연관된 사람들을 사면해주고, 심지어 가해자와 방관자들을 묵인했던 역사적


현실에 원인이 있다. 정치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정치적 거래를 통해 서로 화해
했을 뿐, 정작 캄보디아 국민들은 화해 혹은 통합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고, 지
도자들 또한 믿을 수 없었다(Linton, 2004: 12).

2. 캄보디아 불교문화와 화해

1) 캄보디아 불교의 윤리규범과 화해


2008년 캄보디아 당국의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캄보디아 총인구의 96% 가 불
교도 이다.3) 캄보디아는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불교를 국가종교로 명시 적으로 규정(제 43조)하고 있으며 국가는 팔리어 학교와
불교교육기관을 보급하고 발전시킬 것을 명시(제68조)하고 있다(나희량, 2010).
이처럼 캄보디아는 스스로 불교국가로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으며 불교의
진흥을 국가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캄보디아의 불교는 폴폿 정권
(Pol Pot Regime) 당시 심각한 박해와 사원이 파괴되는 것을 경험했다. 1981년 6
월에 실시된 전국인민대회에서 불교의 통일과 복원의 필요성이 강조되었고, 불교
사원의 복구, 파기했던 승려들의 재서품등이 이루어졌다(정미경, 2015). 캄보디아
대중은 크메르 루주의 종교 멸절 정책 이후에 불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재수용하였
으며, 파고다와 절은 마을 공동체의 사회적, 교육적, 정신적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
다(Gellman, 2008). 이처럼 캄보디아의 상좌부 불교는 식민지배기, 사회주의 체
제, 그리고 개혁개방의 역사적 물결을 거쳐 현재는 국민들의 일상생활 속에 가치,
관습, 교리가 스며들어 마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이 국민들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
다(정미경, 2015).

그런데 실제 캄보디아의 불교 문화가 발현되는 양상을 들여다보면, 상좌부 불


교, 브라만교 (Brahmanism), 토속 종교(조상신, 토지신 등 모시기)가 혼합된 불교
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예를 들어 불교 사원에 다니면서도 집안에 토지

3) National Institute of Statistics, Ministry of Planning, General Population Census of


Cambodia 2008: Analysis of the Census Results: Report 11 Family and Households
(Phnom Penh: National Institute of Statistics, 2010)

84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신이나 조상 신상을 건립하여 날마다 제례를 드리고, 개인 혹은 가정에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마을의 무당을 찾아가기도 한다(정미경, 2015).

실제로 캄보디아의 상좌부 불교는 캄보디아에서 화해의 개념을 전파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궁극적으로 화해를 달성하는 데에 가
장 필요한 개념인 자비와 용서의 정신이다. 이는 오늘날의 회복적 정의4)의 차원과
도 맞닿아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모든 사람들, 친구와 적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캄보디아의 승려 Yos Hut Khemacaro는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
다면 그 사람은 자비로 용서받음으로써 사회는 그 사람이 올바른 생각을 하도록,
또 옳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불교에서는 선한 행위로 악한 행위
를 이기고, 사랑과 용서, 자비를 받아들여 불평을 이기며, 친절함으로써 탐욕을 이
기고, 항상 진실을 말함으로써 잘못을 이기라고 가르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
캄보디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승이자 ‘불교 다마이엣트라 평화와 비폭력 센터
(Buddist Dhamayietra Centre for Peace and Non-violence)’의 창립자인 Maha
Gosananda는 화해에 관해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나는 적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인 것을 알고 있다. 캄보디아인들이 크


메르루주를 사랑하게 되는 일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주의 법칙 상 보복과
증오, 복수는 (일단 시작5)되면) 계속 순환되며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화해는 (어
쩔 수 없이) 환경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타협 과정 중 사랑을 드러내는 것을 의
미한다. 캄보디아인들은 오랜 기간 전쟁과 무기로 인해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이
제는 평화와 비폭력적 해결을 지향해야 할 때다. 승가(Sangha)를다시 세우고, 인
간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 아무리 서로 간 차이의 폭이 크다고 할지라도 말
이다.” (Linton, 2004: 76)

4) 회복적 정의에서는 범죄를 관계적이며 윤리적, 사회적, 정치적 등 전체 맥락에서 이해하여


정의는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지역사회가 범죄로 인한 상처를 고치고 화해를 가져올 수
있는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에 참여케 한다.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심이며
미래에 초점을 둔다(배임호 1995)
5) 승가 혹은 상가(sangha)는 본래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된 단체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불교에서는 출가수행자(出家修行者)의 교단(敎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제50회 KPI평화포럼| 85
<캄보디아 킬링필드 : 문화를 통해 본 화해의 가능성> 강효인

캄보디아식의 화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불교 사상은, 타협 및 비당파


성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 개념인 중용사상이다. 크메르 불교 재단(Khmer
Buddhist Foundation)의 지도자 Yos Hut Khemacaro에 따르면 중용은 ‘모두의 관
심사와 이익을 고려하여 진보와 자유, 구제를 달성하기 위해 통합, 합의, 조화를 보
전하는 방법’이다. 또한 비폭력과 자비의 중용 정신은 당파성으로 인한 상호 대립
을 넘어서 정치문제 해결을 위한 모델을 보여준다(Linton, 2004: 77).

그러나 캄보디아의 불교가 형사적 사법 절차나 가해자의 처벌에 반대하는 것만


은 아니다. 크메르어로 정의는 "Yuttethor"라고 한다. 이는 크메르 단어인 다르마
(Dharma, 계율)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공정함, 정직, 불편부당성(impartiality)’이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르마는 상좌불교에서 중시하는 윤리규범이며 승가
(Sangha) 의 생활을 규범하는 위치에 있다. 계라는 것은 불교도가 항상 지켜야 할
마음가짐이고, 율이란 상가 내부의 규칙이다(배상환, 2011). 이는 법 보다는 전통
적이고 도덕적인 상호 이해에 기반하고 있다(Dicklitch, 2010). 상좌불교의 전통적
윤리체계에서 카르마(Karma, 업설)는 계율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
다. 계율이 승가에 귀속된 윤리적 개념이라면, 카르마는 윤회설과 함께 승가와 재
가 일반을 아우르는 윤리규범이다. 카르마는 인과응보의 근본적인 교리로서 자업
자득을 그 핵심내용으로 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며 그에 따른 도덕적 책임
과 윤리적 노력을 강조한다. 또, 부처와 승가에 대해 보시하고 공양함으로써 현세
와 내세의 공덕을 쌓으려는 공덕 지향적 측면이 있다(배상환, 2011).

캄보디아 불교 윤리체계에서의 정의와 처벌은 다르마는 카르마를 함께 고려하


여 설명해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다르마로부터 벗어난다면 카르마에 따라
그가 윤회(Samsara)를 개선할 수 있는 능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어
떤 인간 혹은 동물이 날 때부터 주어지는 그의 성격(어리석거나 명석함) 혹은 상황
(가난하거나 부유함)은 전생에 했던 일의 카르마적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
은 현재의 환경에 반응함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 따라서 현세에 가
난하지만 구제를 잘 한다면, 이로써 공덕을 쌓아 현재나 환생한 삶에서의 어느 순
간에 보답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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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그러나 불교 문화에서 정의는 정치∙사회적 관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아니


다. 불교에서는 자비의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난 잘못된 인식은 곧 잘못된 행동, 즉
보복의 연쇄를 낳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크메르루주 지도자들이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고치려 한다면,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캄
보디아인들은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Gellman, 2008). 응보적 정의는 본래
가해자들이 자발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기 보다는 옳은 행위(자백, 후
회, 사과)를 가해자들에게 강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에서의 옳은 행
위는 한 개인이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동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Gellman, 2008).

1) 캄보디아 불교와 사회문화적 특징


캄보디아 불교가 기존의 왕족 중심의 토마이욧파의 근본주의에서 벗어나 대중
적인 마하니까이파가 불교계의 중추적 역할을 하면서 각 지역에서 승려들의 사회
적 권한이 점차 상승하였다(정미경, 2015). 이에 따라 농촌과 산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했던 마하니까이 승려들은 마을 단위에서 지도적 위치를 점했으며, 파고다
와 절은 마을 공동체의 사회적, 교육적, 정신적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정미경 은
직업선택의 경우를 예로 들며 개인의 중대사를 상담할 시에도 승려와 같이 종교지
도자나 마을 지도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경향이 있음을 실증연구를 통해 밝혔다.
주지할 것은 마을지도자들 역시도 대부분은 승려를 지낸 사람으로, 마을 사람들을
통제 및 관리할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불교사원과 평신도 간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거나, 사원에 기부되는 모든 것을 관장하는 일도 병행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Harris, 2005:74).

캄보디아는 후원자와 피보호자(patron-client) 관계가 지속되는 사회로, 캄보디


아 상좌부불교의 승가는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는 준정치적, 친정부적 성향을 띠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는 불교의 교리에 따라 불법적인 직업이라고 해도 각 지역
에서 사원을 대표하는 승려 혹은 마을지도자가 승인할 경우 불법적 직업이 일정부
분 합법화되는 등의 부작용을 낳는다(정미경, 2015).

이처럼 캄보디아의 불교는 단순히 국가 종교를 넘어서, 마을 단위에서부터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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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 : 문화를 통해 본 화해의 가능성> 강효인

들에게 밀착되어 있는 국민 종교이다. 그런데 실제로 불교가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모습은 불교의 윤리 규범을 최우선순위로 두기 보다는 후견인-피후견인의 전통
하에서 승려의 권위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II. 캄보디아 화해의 경과와 그 가능성

1. ECCC: 카르마적 정의의 실현


캄보디아 법원 내 특별재판부(ECCC: Extraordinary Chambers in the Courts of
Cambodia)는 국제연합 크메르 루주 재판 지원단(UNAKRT: United Nations
Assistance to the Khmer Rouge Trials)을 통해 국제적인 지원을 받는 캄보디아
의 특별 재판부이다. 비공식적으로는 크메르 루주 전범 재판소(Khmer Rouge
Tribunal)나 캄보디아 전범재판소(Cambodia Tribunal)로 불리기도 한다.

캄보디아 내전이 종식될 무렵인 1997년 6월, 당시 캄보디아 제1총리인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 왕자와 훈센(Hun Sen) 총리는 캄보디아 사법부의
역량 및 내부적 청산 동력 부족 등의 이유로 유엔사무총장에게 크메르 루주 정권
치하에 일어난 과거불법청산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후 수년에 걸친 협의 끝
에 캄보디아 정부와 유엔은 2003년 6월 캄보디아인 판사와 유엔이 임명하는 외국
인 판사가 공동으로 재판부를 구성하는 혼합재판소(Hybrid courts)의 형식으로 캄
보디아 프놈펜에 크메르 루주 특별재판소(the Extraordinary Chambers in the
Courts of Cambodia)를 설립하기로 합의하였다.

ECCC는 국제 사법 기준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이 이루어지도록 설계되었으며,


국내법과 국제법 모두의 적용을 받는다. 재판부는 민주 캄푸치아 기간, 즉 1975년
4월 17일 부터 1979년 1월 6일 까지의 사건을 관할하며, 구체적인 관할 범죄는 1)
캄보디아 형법(1956) 하의 고문, 살인, 종교 박해 2) 학살(genocide) 3) 반(反)인
도적 범죄 4) 제네바 협약(1949)의 중대한 위반 5) 외교 상 비엔나 협약(1961)
하 국제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에 대한 범죄로 나눌 수 있다.

88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재판의 대상은 민주 캄푸치아의 고위 지도자들과 민주 캄푸치아의 지배 기간 동


안 자행된 범죄에 가장 책임이 있는 자들이다. 재판부는 수사에 착수하여 현재까지
총 5명의 책임자를 차례로 기소하였다. 첫번째는 전 프놈펜 안보 감옥 S-21(뚜얼
슬렝, Tuol Sleng)의 소장이었던 Duch이라고도 불리는 Kaing Guek Eav에 관한 사
건이었다. 그는 반(反)인도적 범죄와 제네바 협약의 중대한 위반에 해당하는 범죄
를 자행하였다. 그는 2012년 2월 3일 반 인도적 범죄와 비인간적 행위에 대해 각
각 유죄판결을 받았고, 종신형으로 그 기간이 연장되었다. 2번 사건에서는 2명의
전(前)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 전 공산당 부서기 인민의회의장 Nuon Chea와 전 국
가 원수 Khieu Samphan이 재판을 받았다. 또, Ieng Sary와 그의 아내 Ieng Thirith
역시 기소되었으나 관련한 법적 절차가 2013년 3월 14일 에 종료되었는데, 이는
같은 날 Ieng Sary가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Ieng Thirith 역시 치매 증세로 인해
재판에 참여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되어 2011년 11월 사건에서 분리되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재판 및 형사처벌은 캄보디아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앞서 언급한 불교의 윤리규범 중 하나인 카르마는 응보적 정의의 형태다.
불교를 수용한 자들에게는 카르마는 실제 현실에서의 법보다 상위에 놓인 자연법
과도 같기 때문에 그 누구도 자연법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여긴다. 캄보디아의
정신보건과 관련한 NGO의 일원인 Dr. Sophar Ear는 ‘크메르 루주 생존자들은 단
지 몇 책임자 만을 두고 처벌을 논하는 ECCC의 재판, 즉 이생에서의 처벌 시스템
보다는 악한 행위를 한 사람은 바퀴벌레로 환생한다는 것을 굳게 믿음으로써 현실
을 감내해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Gray, 2012). 또, 카르마는 인간의 사법시스템
이 아닌 자연법이기 때문에 그와는 독립적으로 기능한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ECCC의 법정에 서지 않는 낮은 지위의 크메르 루주들 역시 어느 순간이 되면 자신
의 악행에 따른 응보를 받게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Gray, 2012). 따라서 카르마
를 믿는 피해자들은 보복하거나 복수하기 보다는 불교의 명상이나 수행을 통해 스
스로 내면의 평화를 찾고 화해의 길로 접어들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크메르 루주 생존자들이 카르마적 정의만을 믿고 복수를 포


기하지는 않는다. 또 종교적 이상과 사회 현실에는 괴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80
년대 초반에는 희생자 가족들이 크메르 루주 군인들을 찾아내 폭력을 행사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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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 : 문화를 통해 본 화해의 가능성> 강효인

죽여서 복수를 하고 또 상대편의 가족이 가해자를 찾아 복수를 하는 복수의 악순환


이 지속된 시기가 있었다(부경환, 2010). Lars Olsen은 “상당수의 캄보디아인들은
(가해자들에게) 되갚아주고 싶어하며, 가해자들이 자신의 악행에 대해 책임을 지
기를 원한다. 크메르 루주가 감옥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 직접 만나서 때려 눕히
고 싶어하는 사람들 역시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서구적인 것’이라고 볼 수는 없
다”고 말했다(Gray, 2012). 이렇게 현세에서의 가해자 처벌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ECCC가 바로 정의를 실현하는 제도적 방편이 된다. 이는 ‘일반 카르마’라는 개념
을 도입하여 불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자연법이 아닌 헌법이나 국가법을
따르는 것으로, 이생에서 규범이나 법을 어긴다면 사회나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부
터의 처벌, 벌금, 매질, 혹은 더 심각한 범죄에서는 생존자의 가족에게 배상하는 것
과 사형을 언도 받을 수도 있다.

2. NGO: 자비와 용서, 비폭력의 실현


실제 당사자들 간의 화해는 정치적 차원의 화해 보다 훨씬 복잡하므로 다양한 요
소를 고려해야만 한다. 따라서 기존의 서구식 프로세스를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자
칫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따라서 캄보디아의 정신 보건 및 사회 치유 활동
에 주력하는 NGO들은 불교의 윤리와 문화적 요소를 그들의 프로그램에 도입하여
지역 공동체 및 개인 간의 화해를 중재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캄보디아 문화에서
작동되는 불교 규범을 이해하고 그에 기반한 화해 이행 프로세스를 구축함으로써
보다 성공적으로 화해를 도모할 수 있었던 사례들을 살펴본다. 특히 불교의 자비와
용서의 정신을 반영한 갈등 중재 및 화해 프로세스는 개인과 공동체 전체에 미치는
힘이 매우 강력하여 성공적으로 화해를 이끌어 낼 수 있다(Gellman, 2008).

1) TPO 캄보디아의 증언기법을 통한 화해 프로그램


The Transcultural Psychosocial Organization (TPO) Cambodia는 캄보디아의
정신 보건과 사회심리학적 지원 분야에서 선도적인 NGO이다. TPO 캄보디아는
1995년 2월 캄보디아인들의 정신적 문제 및 정신 보건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목적
으로 네덜란드 기반의 NGO인 TPO International의 한 부서로서 설립되었다. 2000
년에는 독립적인 지역 NGO로 등록되었으며, 현재는 캄보디아인들에 의해 운영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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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고 있다. 1995년 설립 이래로 TPO 캄보디아는 200,000이 넘는 캄보디아인들에게


정신보건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TPO는 문화적 맥락에 따라 변용된 치료법인 증언 치료법(Testimonial


Therapy) 을 시행하고 있다. 이는 국제적으로 인정된, 실용적인 트라우마 치료법
이며, 특히 조직적으로 자행된 폭력에 의한 트라우마 사후의 치료법이다. TPO는
캄보디아의 정신적 문화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 문제해결법이 중요하다는 점을 고
려하여, 지역의 사찰 및 불교 수도승들과 협력하여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방법과 결
합한 증언기법을 활용해왔다. TPO는 피해 당사자들 및 크메르 루주의 트라우마 생
존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트라우마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한다. 상담자와 함
께 기록 증언을 작성하여, 다른 생존자, 친지, 공동체 구성원, 지역 권위자, 정부 관
료자, NGO 대표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역 사찰의 승려(혹은 의뢰자의 종교를 반
영해 지역 모스크, 교회 또는 사원 내의 종교인) 앞에서 그들의 증언을 소리내어
읽고 전달한다. 이로써 고통의 인정과 생존자의 낙인을 제거(de-stigmatization)
하고 그들의 존엄성을 회복시킨다. 이는 또한 생존자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영혼의
고통을 완화하고 고인이 된 친척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방법의 하나로도 볼 수 있
다.6)

2) Kdei Karuna의 피해자와 전 크메르 루주 간 대화 프로젝트 (VFKR:


Victim-Former Khmer Rouge Dialogue Project)
Kdei Karuna는 2005년 캄보디아에서 보스턴 기반의 국제 화해 센터(ICfC:
International Center for Conciliation)의 지사로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뿌리 깊
은 갈등과 관련하여 캄보디아인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제공하기 위해, 기관은 역사
적 상흔을 치유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마을 주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2007년 ICfC
의 역사적 화해 기법을 사용한 프로젝트에 착수하였다. 또, 지역민들 스스로가 치
유와 화해를 달성하기 위한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구상할 수 있도록 참여 기법을 사
용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14 곳의 마을에서 시행된 정의와 역사 아웃리치 프로그
램(Justice & History Outreach program)을 포함해 기관의 모든 사업에서 사용되
고 있다.

6) http://tpocambodia.org/justice-and-relief-for-survivors-of-the-khmer-rou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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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 : 문화를 통해 본 화해의 가능성> 강효인

Kdei Karuna의 화해 프로그램 중 피해자와 전 크메르 루주 (VFKR) 간의 대화


프로젝트는 Kdei Karuna와 전 국제 화해 센터(ICfC), 그리고 Transcultural
Psychosocial Organization (TPO) 간의 협력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피해자
와 그들의 직접적 가해자 간 단절된 관계를 이해하고 관계를 구축하는 것에 목표를
둔다. 피해자들은 그들의 직접적 가해자로부터 인정과 사과를 받고 싶어 하는 경우
가 종종 있다. 그러나 문화적 장애물 때문에 가해자들이 범죄를 인정하는 것조차
어려우며, 사과를 받아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피해자와 가해자 간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이므로, 이 프로젝트는 캄보디아 사회
내에서 화해가 가능한지를 조사하기 위한 시범 사업으로 고안되었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전 크메르 루주와 피해자 간의 대화를 시작하게 하여 향후에도 상호 간 이
해 및 공감을 늘려가도록 하는 것이다.

대화 프로그램의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Kdei Karuna의 직원이 마을을 방문하여


직원과 마을 사람들 간의 신뢰가 쌓일 수 있도록 얼마간의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
다. 이 시간 동안 가해자와 가까운 거리에 거주하거나 가해자를 잘 알고 있는 지역
조력자(local facilitator)를 파악 및 선발하여 피해자와 가해자 간 중재의 역할을
맡도록 한다. 지역 조력자는 만일에 갈등 혹은 폭력의 상황이 발생할 시 가해자 혹
은 피해자와 가까운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중재를 하도록 하거나 경찰에 신고하는
등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렇게 수개월간 직원과 지역촉진자의 도움으로 양
자 간 중재를 시도한 결과, 마침내 피해자와 가해자가 상호 동의하게 되면 마을의
승려가 참여하는 가운데 파고다에서 만남을 약속하게 된다. 파고다에서는 피해자
와 가해자 뿐 아니라, 가해자의 가족과 피해자의 가족, 지역 조력자, 심리상담사,
승려 등이 함께 모여 증언을 하고 불교적 의식을 진행한다. 이후 그들 간의 화해가
이루어짐을 상징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공양탑을 세움으로써 마무리 된다.

프로젝트 참가자들 간 면대면 대화와 프로젝트의 완료 이후, 피해자들은 분노와


고통에서 해방되었음을 보였다. 전 크메르 루주 간부는 프로젝트를 통해 그동안 피
해왔던 여러 공동체 불교 행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등 공동체에서 더 나은 관계
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모니터링 요원으로 활약한 지역 조력자 또한 프로젝트
가 성공했다고 여기며, 프로젝트를 통해 갈등 해결 기법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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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게 되었다고 말했다. 가족, 마을 및 공동체 권위자,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 그리고


연장자들 등의 공동체 구성원들은 프로젝트의 성공에 대한 믿음과 동시에 공동체
에 대한 헌신을 표했다.

관련자는 “사람들은 한 기관이 프로젝트 참가자들을 화해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프로젝트 이후, 많은 이들은 그들이 불가능하다고 점쳤던 프로젝트의 성과에 감사
해하며, 피해자와 전 크메르 루주 간부가 관계를 개선한 것이 매우 놀랍다고 말했
다”고 말했다.7)

이처럼 이 프로젝트는 공동체 내에서의 연대, 한 개인의 과거, 피해자와 가해자


관계에서 지역적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보여주면서, 이 프로젝트는
화해가 지닌 문화적 특수성을 드러내는 모범적 사례가 되었다.

2) 승려 Ghosananda의 Peace Walk8)


Maha Ghosananda는 캄보디아의 승려로, 비폭력과 평화의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현재까지도 캄보디아인들에게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
도 여러 차례 지명되었던 세계적인 평화의 대사이기도 했다. 그는 1979년 베트남
이 캄보디아를 침략할 당시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피난민들이 태국
국경에 설치된 난민 캠프로 밀려 들어오자, Ghosananda는 캠프에 간단한 형태의
절을 설치하고 난민들에게 명상법과 내적 평화의 유지법에 대해 가르쳤다. 당시 그
는 전투의 양 진영에서 모두 환영 받지 못했지만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비당파
성을 꿋꿋이 견지하였으며, 사원 내에서는 누구도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도록 하여
사원을 중립의 공간으로 유지시키는 등 비폭력 정신을 몸소 실천하였다. 1988년에
는 시하누크(Sihanouk) 왕에 의해 종정(Supreme Partriarch)으로 지목되었으며
일군의 승려를 이끌고 UN이 주도하는 캄보디아 4개의 파벌 간 평화 대담에 참가하
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 승려들과 평화운동가들을 제 5의 군대, 즉 화해라는 전장

7)http://www.kdei-karuna.org/index.php/what-we-do/justice-history-out-reach/victim-vf
kr-project
8) Matthew Weiner (2007), Peace Wins: Maha Ghosananda, the "Gandhi of Cambodia",
Volume 73. Issue 4-6 (Spring 2007): 36-39을 요약 발췌함

|제50회 KPI평화포럼| 93
<캄보디아 킬링필드 : 문화를 통해 본 화해의 가능성> 강효인

에서 ‘용기’와 ‘자비’의 총탄을 사용하는 ‘평화의 군대(an army of peace)’라고 불


렀다.

UN이 캄보디아-태국 양 진영 간 평화 협정을 중재하면서, Ghosanada와 국제


구호단체의 Elizabeth ernstein과 Bob Maat는 치유를 위한 비당파적이며 정신적
성격의 화해 프로세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간디의 비
폭력 운동에 대해 배웠고, 퀘이커 교도들을 만나 합의를 구축하기 위한 전략과 비
폭력 운동과 전략을 전수받았다. 이렇게 평화와 비폭력의 정신으로 무장한 이들
Dhammayietra라고 불리는 평화 행진을 개시하였다. 행진의 여정은 태국 국경의
난민 캠프로부터 크메르 루주의 영토와 극도로 갈등이 첨예한 지역을 지나 프놈펜
에서 마무리하는 코스였다. 처음에는 100명의 캄보디아 난민들로 시작했지만 점차
행진이 계속되면서 수백명의 사람들이 참가하게 되었다. 이는 캄보디아인들이 평
화를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행진 도중 가난한 마을 주민들과 군인들도
합류하였고, 또는 행진 중이던 승려의 축복을 받기도 했다. 군인들은 ‘더 이상 그
누구도 살인하고 싶지 않다’며 무기를 내려놓았다. 행진으로 지나가던 마을의 주민
들은 이른 아침마다 정신적 정화를 위해 승려들에게 세례를 받겠다며 모여들었다.
이 때 참가자들은 수십년 간 만나지 못했던 친척들을 만나게 되기도 했다. 이 행진
은 “Dharma Contact”라고 불렸으며, 정서적 치유와 공포의 제거, 그리고 지인들과
의 재결합이 이루어지는 화해의 장이 되었다.

행진의 첫 성공 이후, Dhammayietra는 일년간의 준비와 훈련이 포함된 연례 행


사가 되었다. 참가자들은 매년 극도의 더위와 불충분한 음식물, 지뢰의 위험, 공격
받을 위험 등을 견뎌내야 했다. 무장한 지원군이 동행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지원군
때문에 공격을 당해 두 명의 참가자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해를
거듭하면서 Dhmmayietras는 산림파괴, 민주적 선거, 민주 헌법, 여성 문제, 지뢰
제거 캠페인 등으로 참여 영역을 넓혀 갔다. 그러나 ‘Maha Ghosananda가 이끄는
일군의 사람들이 비폭력의 정신을 갖추고 불교 명상 훈련을 받은 후 평화적으로 행
진한다’는 기본틀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Ghosanada는 “가슴에 평화를 품은 사람들
이 거리를 행진할 때, 평화는 전쟁을 이긴다.”는 말을 남겼다

94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IV. 결론

캄보디아의 불교 문화는 카르마의 인정, 용서와 비폭력 등 화해를 성공적으로 진


행시킬 수 있는 다양한 규범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캄보디아 사회는 후견-피후견
의 전통이 남아있고 승려의 사회적 권위가 강하여, 마을 공동체가 승려나 지도자의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는 형태를 보인다. 이 때문에 앞서 살펴 본 TPO, Kdei
Karuna, 그리고 Maha Ghosananda에 이르기까지 모든 화해와 치유 프로그램에는
승려 주도의 불교 의식이 포함된다. 또, 평화 행진을 제외하면 프로그램의 모든 불
교 의식은 사원이라는 공간 내에서 진행된다. 그만큼 캄보디아 마을 공동체에서는
사원의 지위와 승려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PO 캄보디아의 한 직원은 ECCC가 시작되지 않았더라면 현재와 같은 문화에


기반한 치유 및 화해 프로세스의 도입 역시 불가능했을 거라고 언급한 바 있다
(Gray, 2012). ECCC로 인해 “킬링필드” 이후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침묵이 깨지
고 캄보디아 전역에서의 과거사와 관련한 다양한 사회 참여 및 NGO 활동이 촉진
되었다는 것이다.9) 그러나 사실상 이는 ECCC가 시작되기 이전 재판의 시기, 가해
자에 대한 처벌의 강도, 제노사이드에서의 기억이 어떻게 형성되고 고통이 인지되
는지에 대해 UN, 캄보디아 정부, 캄보디아 주민 간 인식의 차이가 크다는 현실에서
비롯된 오해였다(Guillou, 2012). 이렇게 본다면 캄보디아의 화해는 ECCC에 의해
촉발되고, 뒤를 이어TPO나 Kdei Karuna와 같은 NGO의 활동이 개인 간 화해, 사
회적 화해를 이루도록 도움으로써 시민사회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공유되는 가치 및 규범으로서의 문화’의 한 형태로써,
ECCC라는 법과 제도의 영역과NGO에 의한 시민사회의 영역 모두에 작동하고 있
다. ECCC를 통해서는 카르마가 실현되어 위로부터의 국제적 인정, 책임, 처벌이
가능해지고, NGO 중심의 시민사회의 활동은 자비와 용서, 비폭력의 정신에 입각하
여 아래로부터의 개인 및 공동체에서의 화해와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프로세스인

9)이제까지 외부관측자들은 캄보디아 사회가 이처럼 조용한 이유는 갈등을 피하려는 불교적
태도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Hayner, 2008: 337).

|제50회 KPI평화포럼| 95
<캄보디아 킬링필드 : 문화를 통해 본 화해의 가능성> 강효인

것이다.

ECCC는 훈센 정부의 정치적 의도를 달성하기 위한 “보여주기식 재판”이라는 국


내외적 비난에 직면해 있고, 캄보디아의 시민사회는 NGO 중심의 기초적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관련 화해 프로그램도 소규모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
캄보디아는 그 오래된 불교 문화에 내재된, 화해가 가능한 사회 자본을 품고 있고,
살펴본 사례들의 성공담에서 본 것처럼 화해의 가능성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ECCC와 NGO의 활동이 이를 충실히 반영하며 화해를 달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
를 넓혀가고, 국제사회의 관심과 국내의 정치적 개혁이 이에 더해진다면, 캄보디아
의 세계사적 비극의 사회치유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

96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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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발 표④

캄보디아와 증언치료요법 (testimony therapy)

신보경 연구원(연세대학교 인간평화와 치유연구센터)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목 차

1. 캄보디아의 역사와 ‘킬링필드’(Killing Field)

1) 캄보디아 역사 개요

2) 킬링필드(Killing Field)의 역사

2. 증언치료요법 (Testimony Therapy)

1) 초기 증언치료요법의 발전

2) 증언치료법요법의 방법과 효과

3) 증언치료요법의 발전 및 최근 동향

4) 증언의식 (Testimonial Ceremony)

5) 캄보디아의 증언치료요법

3. 증언치료요법과 증언의식의 역할과 향후 방향 모색

|제50회 KPI평화포럼| 101


<캄보디아와 증언치료요법 (testimony therapy)> 신보경

1. 캄보디아의 역사와 ‘킬링필드’

1) 캄보디아 역사 개요
인류 역사 상 가장 찬란한 문명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앙코르(Angkor) 문명을
꽃피웠던 캄보디아에는 지금도 세계 전역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위대한 문화유
산을 보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하지만 한때 동남아시아 최강국의 면모를 보이며
동서양을 통틀어 세계 최대의 도시가 있었던 나라이기도 했던 캄보디아의 현재는
아쉽게도 개발도상국으로서 사회·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뿐만 아니라, ‘킬링
필드(Killing Field)로 잘 알려진 민주캄푸치아 시대(1975~1979)의 대학살의 역
사는 앙코르 와트와 더불어 캄보디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로 자리하고 있는
다소 모순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캄보디아는 거대 앙코르 와트 시기를 지나고 1863년 프랑스 식민지가 되어


1887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French Indochina)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프랑
스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캄보디아의 왕위는 노로돔 1세 (Norodom I, 재위
1860~1904), 시소와트(Sisowath, 재위 1904~1927), 모니봉(Sisowat
Monivong, 재위 1927~1941)등으로 이어졌으며, 1907년 프랑스와 타이 왕국 사
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앙코르 일대의 영토를 타이에게서 돌려받아 오늘날 캄보디
아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세계2차 대전의 여파로 캄보디아는 프랑스
와 일본의 지배를 반복적으로 받게 되었지만 1941년에는 새롭게 왕위에 오른 시아
누크(Norodom Sihanouk)에 의해 1953년 프랑스의 지배에서 완전히 독립할 수 있
었다. 1970년 론 놀(Lon Nol)장군의 쿠데타가 발생하기 이전까지는 캄보디아는
상대적으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쿠데타 이후 친미정권이 들어서면서 오랜
내전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론 놀은 크메르공화국
(Khmer Republic)을 수립하였고, 중국으로 망명한 시아누크는 공산 반군인 크메
르 루즈(Khmer Rouge)와 연합하여 캄푸치아민족통일전선 (National United
Front of Kampuchea)을 구성하였다. 한편 미국에 의지한 론 놀 정부는 1975년 미
국이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면서 붕괴되었고, 크메르 루즈를 중심으로 한 캄푸치
아민족통일전선이 1975년 프놈펜을 장악하게 되었다.

102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1975년 4월 17일, 5년간의 내전을 끝으로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을 점령한 크


메르 루즈, 공식 명칭은 캄푸치아공산당(CPK : Communist Party of Kampuchea),
는 ‘붉은 크메르군’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크메르 루즈의 중심세력인 폴 포
트(Pol Pot)파는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를 세운 뒤에 모택동주의
에 기초한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혁명 정책을 실시하였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모두
부정하고 캄보디아를 철저히 고립시켜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창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크메르 루즈는 가장 먼저 프놈펜의 인구를 소개(疏開)하였고, 이어 지식인
계층과 유산계급의 척결, 경제 군사화, 종교행위와 전통적 관습 철폐, 시장 폐지 등
을 통해 그들의 혁명 과업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행된 대규모의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 - 고문, 기아, 강제노역, 불법 살인 등-로 인해 크메르 루즈
정권 4년 동안(1975.04~1979.01)에 당시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1/3인 약 2백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사망하였다.1) 이처럼 잔혹했던 크메르 루즈 정권은 폴 포트
의 극단적인 정책에 반대하는 크메르 루즈의 일부세력이 베트남으로 건너가 결성
한 캄푸치아구국민족통일전선(Kampuchean United Front for National Salvation,
KUFNS)에 의해 결국 몰락하였고, 헹 삼린 (Heng Samrin)을 수반으로 하는 ‘캄부
치아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ampuchea, PRK)이라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면서 캄보디아의 2천여 년 역사 중 가장 참혹하고 괴로웠던 시간이 끝이 났
다.

이처럼 캄보디아는 오랜 기간 내전에 시달렸으며 크메르 루즈 정권이 몰락한 이


후에도 캄보디아의 국내 정세는 갈등과 혼란으로 가득하였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냉전 체제가 완화,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캄보디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사
회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991년 10월 파리 평화협정 체결 이후 1993년 5월
국제연합의 주관 아래 총선거가 실시되면서 입헌군주제를 기초한 캄보디아 왕국
(Kingdom of Cambodia)가 재건되고 시아누크가 왕으로 복위하였다. 현재 캄보디
아의 국가원수는 노로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국왕이며, 정부수반인 총리
에는 훈 센 (Hunsen)이 실질적인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2)

1) Suzannah Linton, Reconciliation in Cambodia, The 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


2004
2) 캄보디아의 역사. 네이버 두산백과.

|제50회 KPI평화포럼| 103


<캄보디아와 증언치료요법 (testimony therapy)> 신보경

표 1. 캄보디아의 주요 역사3)

년도 대표적인 역사 내용
- 1963년 노르돔 왕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다
는 조약에 서명하고 단계적으로 식민 지배를 받
1863-1953 게 된다.
(프랑스 식민 지배기)
- 1941년 프랑스 식민정부에 의해 노로돔 시하
누크(Norodom Sihanouk)가 왕으로 즉위한다.

- 1954년 프랑스의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한 이


후, 보수, 우익, 급진 세력이 각각 나누어져 첨예
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보인다.
1970-1975 - 1966년 우익성향의 론 놀 (Lon Nol)이 총선
크메르 공화국 에서 승리한다. 론 놀 수상은 왕정에 대향하여
(Khmer Republic) 1970년 쿠데타를 일으켜 우익정부를 수립하고,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으로 국명을 개
칭하였다. 집권 이후에도 끊임없이 세 개의 세력
이 내전을 벌이다 미군의 베트남 철수 후 론 놀
은 지지 세력을 잃게 된다.

- 폴 포츠의 지휘 하 공산주의 세력인 크메르


1975-1979 루즈는 프놈펜에 입성해 1976년 민주 캄푸치아
로 국명을 개칭하고 극단적인 공산체제로의 회
민주 캄푸치아 귀를 시행한다. 자본주의나 베트남을 포함한 외
(Democratic Kampuchea) 세와 연관된 사람은 모두 숙청의 대상으로 삼아
2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무고하게 죽였다.
- 1979년 베트남 군대와 연합하여 캄푸치아 민
족구국통일전선(KUFNS)는 캄보디아를 정복하
고 폴 포츠의 크메르 루즈를 태국 국경 근처로
쫓아냈다.
1979-1991 - 인민당의 삼린은 친베트남의 캄푸치아 인민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공화국을 건립하게 된다. 그러자 크메르 루즈가
포함된 반베트남 3개 계파가 연합정부를 구성하
여 민주캄푸치아연합정부(CGDK)를 구성하여
내전에 들어간다. 1989년 캄보디아에 주둔하던
베트남군대가 철수하자 내전은 더욱 격화되었
다.
- 1991년 4개의 계좌를 중심으로 하는 최고민
1991- 족평의회(Supreme National Council)가 구성되
현재 캄보디아 었고 의장에는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부의장에서는 훈 센 (Hun Sen)이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77965&cid=40942&categoryId=33371.
3) 2013 KOTRA 국가정보 캄보디아. http://openknowledge.kotra.or.kr/handle/2014.oak/5098.

104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지명되었다.

- 1991년 10월 4개 정파와 19개국의 대표가 참


가한 가운데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장기
간에 걸친 내전은 종지부를 찍었다.

- 1993년 노로돔 시하누크는 왕으로 재즉위하


며 입헌군주제가 시행된다.

- 1997년 7월 선거로 훈 센은 제2수상에서 제1


수상으로 취임하게 된다. 그 이후 2016년 현재
까지 집권하고 있는 중이다.

2) 킬링필드 (Killing Field)의 역사


잔혹했던 대량학살이 자행된 ‘킬링필드(Killing Field)’는 불과 4년 동안 폴 포트
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 정권 때 발생한 일이다. ‘킬링필드’는 프놈펜의 대표적인 쯩
아엑 학살센터(Choeung Ek Genocidal Center) 현장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사실
상 캄보디아 전 국토를 뜻할 정도로 엄청난 수가 분포되어 있다. DC-Cam의
Ten-year Mapping Project (1995-2004)에 따르면, 캄보디아 전역에서 388개
지역에 총 19,733개의 집단매장지가 발견되었다고 하며,4) 아직 발견되지 못한 다
수의 대량학살의 장소가 존재할 것으로 예상된다. 쯩아엑(Choeung Ek) 킬링필드
는 크메르 루즈 정권으로부터 해방된 1979년에 발견되었으며, 발견 당시 129개의
공동 매장지가 있었다. 그 중 86개를 발굴하여 총 8,985구의 유해를 수거하였다.
가장 큰 공동 매장지에서는 무려 450구의 유해가 한꺼번에 발굴되기도 하였다.5)
1988년에는 캄보디아 정부의 주도 하의 지금의 킬링필드 기념탑을 건립하는 프로
젝트가 시작되었고, 1989년에는 발굴된 유해들의 화학처리를 거쳐 영구보관 하기
위해 새로 건립된 기념탑 내로 이전하여 현재까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4) http://www.d.dccam.org/Projects/Maps/List_of_Burial_Site_Most_Updated.pdf
5) Official Website : Choeung Ek Genocidal Center.
http://www.cekillingfield.org/index.php/en/about-us.html.

|제50회 KPI평화포럼| 105


<캄보디아와 증언치료요법 (testimony therapy)> 신보경

크메르 루주 정권 당시 프놈펜을 소개(疏開)하면서 굶주림, 탈진, 강제노역, 처


형 등의 무차별한 형태로 캄보디아 국민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군 장교와
관료, 교사, 의사, 기술자 등과 같은 전문직 종사자와 지식인들에 대한 무차별한 집
단적 학살도 있었다. 사실상 고등 교육 이상을 받은 캄보디아 국민은 말살 당했으
며 그저 안경을 쓰고 있다는, 손이 곱다는 등의 황당무계한 이유로 무참히 살해당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지식인들을 수용하고 고문하며 끝내 킬링필드로 이송하
여 처형하기 위해 과거 Toul Svay Prey라는 이름의 여자 고등학교였던 곳을 폐쇄
하고 만든 크메르 루주의 수용소가 뚜얼슬랭 (Tuol Sleng)이다. 공식적으로는
‘S-21'(Security Prision 21) 이라는 이름으로 폴 포츠 정권이 무너질 때 까지 당
시 캄보디아 전역에서 가장 큰 수용소로 약 1만 명 이상을 수용하여 잔악한 고문과
처형을 자행했다. 1979년 베트남 군대가 프놈펜에 진주한 후 S-21은 해방되었으
며 그 당시 6명의 생존자와 14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6명의 생존자들은 사진이
나 이발 등 특정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그 중 두 명의
생존자(Mr. Chum Mey & Mr. Bou Meng)  는 박물관이 된 S-21에 남아 관광객
들에게 자신들의 증언 자료집을 판매하고 그 때의 이야기를 나누며 생활하고 있다.
S-21은 발견 이듬해인 1980년 7월 13일 베트남 군대에 의해 일반인에게 킬링필
드 대학살 기념관으로 공개되기 시작하였다.

2. 증언치료요법 (Testimony Therapy)

1) 초기 증언치료요법의 발전
증언치료요법(Testimony Therapy)은 1983년 칠레 심리학자인 Lira와
Weinstein이 인권침해의 생존자들을 위한 개별적 정신치료방법으로 처음 개발하
였다. 이들이 증언치료법(TT)을 처음 개발하고 논문에 실었을 당시에는 신변의
보호를 위해 Cienfuegos와 Monelli (1983) 또는 Dominguez와 Weinstein (1987)
라는 가명으로 활동하였다.6) 증언치료요법은 칠레 피노체트 군사 독재정권동안
정치범으로 감옥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의 경험을 탄압과 인권유린의 증거로 수집하

6) Samuel & Okpaku. Clinical methods in transcultural psychiatry. American Psychiatric


Press. 2005

106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는 과정에서 이행되었던‘증언’행위가 피해자들의 치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


하게 되면서 정치상의 박해와 고문 등과 같은 정부주도(state-sponsored)의 폭력
을 경험한 피해자들을 위한 치료의 한 방법으로 발전하였다.7) 이 치료법은 임상적
관점에서는 본래 환자에 있어 두려운 상황에 노출하여 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 개
발된 인지 행동 요법 (Cognitive behavioural therapy)의 정신심리요법 요소와 통
합하여 발전된 것이다.8)

증언치료요법은 개발 이후 여러 방법적 수정을 통하여 정치적 폭력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폭력과 관련된 트라우마를 경험한 세계 여러 지역의 생존자들을 돕
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어 왔다.9) 증언치료요법은 피해자들이 경험한 트라우마
적 사건에 대한 감정적 처리에 용이한 한 방법으로써 정신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
며, 뿐만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 직접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증거자료로써의 역
할을 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증언치료요법은 지지적 상담 (supportive
counseling)을 기반으로 하는 일반적인 임상 또는 회복 상담의 방법과는 다르게 정
신적-법적(psycho-legal) 접근의 치료법으로 정의(justice) 또는 인권(human
right)의 맥락에서 개인의 고통을 공공과 정치적 영역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보는 기법이다.10) 즉, 일반적인 심리사회적 기관에서는 이 방법을 주류의
상담기법으로 사용하거나 발달하지는 못하였다.11)

7)Dijk, Schoutrop & Spinhoven. Testimony Therapy: Treatment Method for Traumatized
Victims of Organized Violence. American Journal of Psychotherapy. Vol.57, No.3, 2003.
8) Mundt, Wunshe, Heinz & Pross. Evaluating interventions for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in low and middle income countries : Narratives Exposure Therapy,
Intervention 2014, Volume 12, Number 2, Page 250-266.
9) Agger, 1994; Agger & Jensen, 1990, 1996; Akinyela, 2005; Curling, 2005; De la Rey
& Owens, 1998; Igreja, Kleijn, Schreuder, van Dijk, & Verschuur, 2004; Luebben,
2003; Lustig, Weine, Saxe, & Beardslee, 2004; Neuner, Schauer, Klaschik, Karunakara,
& Elbert, 2004; Neuner, Schauer, Roth, & Elbert, 2002; van der Veer, 1992; van Dijk,
Schotrop, & Spinhoven, 2003; Weine, Kulenovic, Pavkovic, & Gibbons, 1998
10) Inger Agger. Testimony Therapy of Torture Survivors in Asia. Seminar presentation
at Yonsei Unviersity. 6 May 2016
11) Schauer, Neuner & Elbert. Narrative Exposure Theory : A short-term treatment for
Traumatic Stress Disorders. Hogrefe Publishing. 2011.

|제50회 KPI평화포럼| 107


<캄보디아와 증언치료요법 (testimony therapy)> 신보경

2) 증언치료요법의 방법과 효과
증언치료요법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환자(생존자)는 자신이 경험한 트라우마적
사건을 포함한 인생 전반의 이야기를 심리상담자에게 공개적으로 공유한다. 이 때,
환자는 어떠한 에피소드를 공유할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자세하게 자신의 일생사
를 이야기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상담자는 환자가 풀어놓는 모든 이
야기를 녹음하고 이를 문서화시킨다. 상담자에 의해 타이핑이 완성된 문서는 환자
와 상담자가 함께 내용을 검토한 후 각자 사인을 나눈다. 완성된 증언문서는 환자
혼자 간직하거나 복사본을 가족, 친구들 혹은 인권단체에 기증하는 등의 방법을 환
자 스스로가 선택하도록 한다.

Lira & Winstein에 따르면, 이야기하기”(telling)는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기억들


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12)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경험했던 트라
우마적 사건에 대한“기억하기”(remembering)의 과정에서 환자들은 두려움과 불안
을 느끼며 또다시 트라우마(re-traumatization)에 노출될 수 있는 문제가 있다. 다
수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첫째로는, 환자가
증언치료요법의 진행을 위해 트라우마적 경험을 재상기(re-exposure) 하기 이전
에 그들의 개인적 안전과 상담환경의 안정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환자들 중에는 여
전히 위험에 노출되어 있거나 폭력을 경험하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을 수 있기 때
문이다.13) 둘째로는, 증언치료에서 환자가 증언을 하기 이전과 과정 중에 증언치
료법에 대한 정보 제공 및 추후 활용법 등에 대한 정보와 그들의 증언 내용을 환자
스스로가 검토해 나갈 수 있는 여러 세션을 제공함으로써 단계적으로 치료적 관계
의 신뢰를 쌓고 환자들의 정서 안정을 도와야 한다.<표 2>

12) Cienfuegos and Monelli. The testimony of political repression as a therapeutic


instrument. American Orthopsychiatric Association. 53(1). January 1983.
13) Herman, J, L. Trauma and recovery. New Yrok: Basic Books. International
Rehabilitation Council for Torture Victims. 1997

108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 표 2 > 증언치료법 개요14)

# 세션 주제
1 소개, PTSD 심리교육, 치료법 정보 제공
2 일대기 개요 서술 및 문서 사용에 대한 논의
period 1
3 &4
트라우마적 경험 이전의 삶에 대한 이야기
period 2
5 &6
트라우마적 경험에 대한 이야기
7 현재까지의 문서를 읽고 수정하기
period 3
8 &9
트라우마적 경험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
period 4
10 & 11 현재 상황과 기대에 대한 이야기
현재까지의 문서를 읽고 수정하기
문서 확인 후 사인하기
12
종료

증언치료 과정을 통해 피해자들의 억눌려 있던 복합적인 감정들이 자신들의 과


거 경험을 직접 이야기함으로써 표출된다. 또한, 이것이 제3자에 의해 글로 쓰여
지고 또한 역사적 자료(historical document)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환자들은
해소의 기분, 즉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끼게 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사건으
로 인해 느꼈던 수치심과 죄책감 등이 감소되기도 하며, 자신이 경험한 사건을 재
평가해볼 수 있는 기회로 자신들의 정치적 헌신 또는 수난의 의미를 이해하고 용기
를 얻을 수 있게 된다.15) 16)실제로, 다수의 사례분석 연구를 통해 증언치료요법이
재경험(re-experiencing), 회피(avoidance), 각성과민(hyperarousal), 우울증
(depression) 등과 같은 PTSD 증상을 감소시키는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17)

14) 6)과 동일. 표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함


15) Morkved, Hartmann, Aarsheim, Holen, Milde, Bomyea, & Thorp. A comparison of
narrative exposure therapy and prolonged exposure therapy for PTSD. Clinical
Psychology Review. 34 (2014) 453-467.
16) 8)과 동일
17) Weine SM, et al.(1998); Igreja, et al.(2004); Elbert(2004); Van Dijk, et al.(2003);
Agger et al.(2012); McPherson (2012)

|제50회 KPI평화포럼| 109


<캄보디아와 증언치료요법 (testimony therapy)> 신보경

증언치료요법은 정신·심리적 치료요법으로써의 의의뿐만 아니라 과거 반인권적


사건들로 고통 받은 시간과 경험을 역사의 산증인인 생존자의 말과 글을 통해 공개
적으로 공유됨으로써 다음 세대들을 위한 역사적 교육 자료로서의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3) 증언치료요법의 발전 및 최근동향
최근 들어, 증언치료요법은 지속노출치료법(Prolonged Exposure Therapy)과의
통합을 기반으로 한 내러티브 노출치료법 (Narrative Exposure Treatment, 이하
NET)으로 발전하였으며 이 기법은 외상성 스트레스 증후군을 위한 단기 심리치료
의 한 방법으로 현재 세계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주로 저·중소득 국가에서 발생하
는 갈등(전쟁, 고문 등)과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트라우마 대응에 사용되며, 최근
에는 고소득 국가 내에서의 정치적 망명 또는 난민들을 대상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
다.18)

내러티브 노출 치료법(NET)은 국가 간 문화적 차이의 영향을 받지 않고 실행할


수 있는 치료법으로 이는 모든 문화에는 경험을 공유하는 구술 문화(oral culture)
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9) 또한, 다수의 논문을 통해 내러티브 노출치
료법(NET) 또한 환자들의 PTSD 증상을 완화시켜준다는 효과성을 입증함으로써,
트라우마적 기억에 환자 스스로가 재노출 되는 것이 트라우마로 인한 PTSD 증상
을 완화시키기 위한 치료적 방법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가설에 학문적 힘을 실어주
고 있다.20)

내러티브 노출치료법(NET)은 증언치료요법과 마찬가지로 상담 이전에 심리교


육을 진행함으로써 환자들이 치료법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후, 환자들로부터 치료 동의서(informed consent) 받은 뒤 치료를 시작하게 되
며 대게 한 세션은 60~120분으로 한 주에 한 번 이상 최대 보름동안 세션을 진행
하게 된다. 첫 세션에서는 환자들에게 ‘인생선’(lifeline)을 줄을 활용하여 표현하게

18) Robjant & Fazel. The emerging evidence for Narrative Exposure Therapy: A review.
Clinical Psychology Review. Vol. 30. 1030-1039. 2010.
19) 8)와 동일
20) 12)와 동일

110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한 후, 자신의 출생부터 현재까지의 즐거웠던 일과 슬펐던 일 등을 시간순서대로


표시하게 하고 이후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치료법을
통해 환자를 자신이 경험한 과거 트라우마적 사건에 충분한 시간 동안 감정적 노출
을 하게 함으로써 트라우마적 기억에 대한 힘들었던 습관적 떠오름과 감정적 반응
을 감소하게 한다.21)

4) 증언 의식 (Testimony Ceremonies)
증언치료요법이 아시아 지역에 소개되면서 육체와 정신을 하나의 단위로 여기는
(embodied spirituality) 아시아의 문화적 맥락과 각 지역의 전통적, 종교적 관례와
연결되어 그 형태가 변형되어 발전되었다. 일반적인 증언치료요법의 방법을 넘어
서서, 환자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이 믿고 의지하는 절대적 존재인 신과
그 종교의 의식을 통해 상처를 치유(healing)받는 새로운 접근방식이다.

증언 의식의 발달의 필요성은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과거 집단적 폭력을 경험한


피해자들이 현실적으로 배·보상을 받거나 가해자가 처벌될 수 있는 법적 재판이 열
리는 등의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그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과거의 기억
을 승화할 수 있도록 돕는 지역집단과 사회의 노력 중 하나로 해석될 수 있다. 그
예로, 캄보디아의 경우 현재 UN이 참여하는 ‘민주캄푸치아 시대 동안 자행된 범죄
의 소추를 위한 캄보디아 법원 내 특별재판’(ECCC : Extraordinary Chambers in
the Courts of Cambodia)이 진행되고는 있지만 재판이 처벌할 수 있는 가해자의
수도 크메르 루즈 정권 때의 피해자가 법정에 증인으로 설 수 있는 기회도 매우 제
한적이다. 또한, 캄부디아 정부가 과거사 청산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재판에
간섭해 전범 단죄가 더디게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 등 피해자들의 트라우마
에 대한 치유가 현실적으로는 바르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
다.

Inger Agger 박사는 이와 같이 사회적 역할의 부재 혹은 약화로 인해 여전히 과


거 트라우마적 사건으로부터 치유 받지 못하는 피해자들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21) Robjant & Fazel. The emerging evidence for narratie exposure therapy : A review.
Clinical Psychology Review 30 (2010) 1030-1039.

|제50회 KPI평화포럼| 111


<캄보디아와 증언치료요법 (testimony therapy)> 신보경

가장 좋은 방안으로 증언의식이 포함된 형태로 변형된 증언치료요법을 꼽았으며


처음으로 동남아시아 지역 4개 국가 - 인도, 스리랑카, 캄보디아, 필리핀 -의 고
문생존자들이 각 국가의 특색에 따른 문화적, 종교적 의식(ceremony)을 증언치료
요법과 함께 이행할 때의 효과에 대한 행동연구를 다년간 (2008-2010) 진행하였
다.22)연구에서는 증언의식을 포함한 증언치료요법이 4개의 세션으로 재구성 되었
고, 아래와 같이 그 방법이 재개념화되고 수정되었다.<표 3>

<표 3> 증언의식의 포함으로 재구성된 증언치료요법23)

# Session 방식

1&2 생존자들이 경험한 과거의 트라우마적 사건에 대한 서술


및 기술을 지역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진행
생존자들은 작성된 자신들의 증언문서가 발표될 의식에
3 참여

4 지역 활동가들은 추후 생존자들과 만남을 통해 그들의


삶과 복지를 재평가

첫 두 세션에서는 일반적인 증언치료요법과 동일하게 상담사와 환자 사이에서


과거 트라우마적 경험에 대한 진술과 기술을 진행하며, 세 번째 세션에서는 진술된
내용을 상담사와 함께 문서화시킨다. 이 세션에서는 기존의 증언치료요법에서 진
화된 종교적, 문화적, 또는 영적 의식을 증언자와 상담사가 참여하여 진행한다. 의
식은 상징적 장소에서 진행되는데 주로 종교적으로 신성한 곳이나 추모의 공간 또
는 과거 탄압의 장소 등이 된다. 또한 의식은 종교, 지역사회 지도자 혹은 집단에서
존경받는 인물에 의해 진행되며 방청객은 주로 환자에게 중요한 사람들로써 가족,
친구, 동료, 이웃 등이 된다.

국가별로 다른 사회·문화적, 종교적 특징에 따라 거행되는 의식의 형식 또한 각


기 다르다. 연구에서는, 인도의 경우 다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사회적 특수성을 고

22) Agger et al., Testimony ceremonies in Asia: Integrating spirituality in testimonial


therapy for torture survivors in India, Sri Lanka, Cmabodia, and the Philippines.
Transcultural Psychiatry 49(3-4) 568-589. 2012.
23) 22) 논문의 내용을 정리

112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려하여 인권적 관점에서의 의식이 진행되고 스리랑카, 캄보디아, 필리핀은 각국의


대표적인 종교적 관점에서의 의식이 진행된다. 공통적으로, 모든 증언 의식에서 집
단적·종교적 정화의식, 노래부르기, 춤추기 등의 다양한 형태의 영성 구현을 위한
의식이 진행된다. 환자의 과거 트라우마적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문서(document)
는 의식을 진행하는 주요인사에 의해 방청객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읽혀지고 지난
시간의 고통을 인정받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덕담을 받음으로써 지난날의 상처가
상징적으로 정화되고 치유된다. 세션의 마지막에는 지역 활동가(local facilitator)
들이 증언 의식을 경험한 생존자들을 방문하여 의식 이후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변
화가 있는지에 대한 평가와 지속적인 관리를 이어나간다.

연구에 따르면, 증언의식을 경험한 환자들은 증언의식을 통해 끔찍했던 지난날


의 기억이 종결되는 것을 느끼게 되고 자아인식의 회복과 지역사회의 지지를 이끌
어 내는 등의 긍정적인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5) 캄보디아의 증언치료요법
우리 연구팀이 방문한 캄보디아는 집단적 트라우마의 기억도 그 상처도 매우 깊
은 나라였다. 훈센 총리의 “과거를 묻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 (dig a hole and
bury the past and look to the future)”라는 말처럼 캄보디아인들에게 과거 크메르
루즈 정권 때의 참혹했던 경험에 대해 묻거나 그 때에 대한 이야기 나누는 것은 캄
보디아 사회에서는 금기시 되어있는 일이다. 이는 과거 지식인층에 대한 무차별한
살육의 공포에서 자신의 신분 또는 이야기를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두려움이 여전
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는 마을단위의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그 속에서 대다수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공존한다. 그들은 마을 안에서 과거에
누가 가해자이며 누가 피해자인지를 알지만 묻어둔 채 살아가고 있는 일반적으로
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노출되어 있다. 이처럼, 캄보디아인들은 사실상 과거
의 상처를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어쩌면 그들의 상처가 너무 깊어 방치할
수밖에 없는 채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는 밖으로 드러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캄보디아 사회는 여전히 안전(security)에 취약하며 또한 전
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는 응보를 가리키는 업(karma)이라는 강한 불
교적 신념이 90% 이상의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존재하기에 사실상 우리에게 익숙

|제50회 KPI평화포럼| 113


<캄보디아와 증언치료요법 (testimony therapy)> 신보경

한 서구적 관점에서의 정신심리학적 치료가 진행되기에는 어려운 면이 많다.24)

캄보디아에서는 1990년대부터 다수의 국제기구 및 민간단체들의 지원을 통해


캄보디아인들의 정신건강 치료 및 개선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국소적으로 운영되어
왔으며 여러 단체 중 트라우마 관련 정신건강에 초점을 맞추어 활동하는 대표적인
단체로는 TPO (Transcultural Psychosocial Organization) Cambodia가 있다.
TPO는 1995년 네덜란드 기반의 TPO International의 지부로 캄보디아인의 심리
적, 정신적 문제를 완화시킴을 목표로 운영을 시작하였으며, 2000년에는 자립적인
캄보디아 지역 NGO로 등록되어 활동하고 있는 단체이다. TPO는 ECCC에 증인으
로 참석하는 피해자들에 대한 심리적, 정신적 지원뿐만 아니라 Kadei Karuna 라는
지역NGO 단체와의 협업을 통하여 캄보디아 전역의 마을 단위로 증언 의식이 필요
한 피해자를 지역사회 협력자 (local facilitator)를 통해 조사하고 마을을 방문하여
증언 의식을 진행할 수 있도록 피해자와의 관계(rapport)를 형성하는 일을 한다.

TPO 캄보디아에 증언의식을 의뢰한 피해자는 상담자와 기록자 앞에서 4일 동안


증언을 하며 5일 째에는 승려 앞에서 기록된 증언 내용을 상담사가 직접 읽는다.
이후, 피해자에게 불교 의식의 일환으로 빨간색 끈 표식을 증언집에 묶어 전달하면
서 증언의식은 마무리가 된다. 캄보디아에서는 불교가 국가적 종교인 이유도 있지
만 과거의 사건이 종결된 현재에도 여전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존하는 상황 속에
서 살면서 자신의 가족조차 믿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승려 앞에서 의
식을 진행하게 된다고 한다.25) 또한, ECCC에서 증언한 피해자들 중 상당수의 사
람들도 증언 의식을 받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을 포함하여 현재까지는 300~400여
명의 피해자가 증언의식을 진행하였다고 한다.

3. 증언치료요법과 증언의식의 역할과 향후 방향 모색


이처럼 증언 의식이 포함된 새로운 형태의 증언치료요법은 환자들이 자신들의
경험에 스스로 재노출되어 억눌려있던 복합적 감정을 발산하게 함과 동시에 자신
의 절대적인 믿음이 있는 종교의 의식 혹은 인권적 접근의 정의실현 의식을 통해

24) Royal University of Siem Reap 김경일 교수 면담 내용 요약


25) Dr. Chhim Sotheara 인터뷰 내용

114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자신의 상처가 공개적으로 어루만져지는 초월적 경험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증언의식을 포함한 새로운 형태의 증언치료요법은 환자들로 하여


금 오랜 시간동안의 ‘피해자의 역할’(role of victim)에서 타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
는 '생존자의 역할(role of survivor)'로 전이되는 통과의례(rites of passage) 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26) 즉, 외상 이후 개인의 긍정적인 심리변화가 일어나는 주관
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 외상 후 성장 (posttraumatic growth, PTG)을 증언의식이
이끌어 내줌으로써 단순히 외상 이전으로의 회복뿐만 아니라, 개인의 이전 적응 수
준, 심리적 기능 수준, 또는 삶의 자각 수준을 넘어서는 진정한 변화를 경험한다.
또한, 자신의 변화 이외에도 비슷한 혹은 같은 경험으로 고통 받고 있는 타인에게
자신이 극복한 과정을 공유하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는 힘의 발생을
예상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증언의식은 아시아 국가들의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 맞추어 발전


한 형태로써 서구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활용하고 받아들여지는 트라우마 상담기법
이라 설명할 수는 없으며, 이와 같은 사회적 요소들이 트라우마 치료에 어떠한 영
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많은 연구가 필요로 하다. 또한 단일 종교이지 않은 국가에
서의 증언의식의 역할과 방안을 보다 심도 깊게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종교적
의식이 아닌 인권적 접근의 정의실현 의식으로 진행한다 하더라도 해당 국가 국민
들의 인권에 대한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또한 관련 교육을 이행할 수 있는 사
회적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는지와 같은 요소들이 증언의식의 효과성에 많은 영향
을 끼칠 것이라 예상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여전히 과거의 집단적 트라우마 사건에 의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털어놓을 수 있
는 자리를 그가 속한 사회가 마련해주고 많은 사람들은 피해자의 경험에 대한 이야
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하고도 기본적인 ‘말하고 들어주기’
행위가 사람간의 관계에서 충분히 이루어질 때 비로써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다. 증
언치료요법과 증언의식은 아직 더 많은 연구와 고찰이 필요로 한 상담기법이다. 하

26) 20)과 동일

|제50회 KPI평화포럼| 115


<캄보디아와 증언치료요법 (testimony therapy)> 신보경

지만 여전히 어둠속에 자신의 상처를 숨겨 놓고 살아가고 있는 피해자들을 보다 밝


은 세상으로 이끄는 중요한 방법임은 분명하며 이러한 상담기법의 효과성 증대를
위한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116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참 고 문 헌

<논문>

Agger et al., Testimony ceremonies in Asia: Integrating spirituality in


testimonial therapy for torture survivors in India, Sri Lanka,
Cmabodia, and the Philippines. Transcultural Psychiatry 49(3-4)
568-589. 2012.

Cienfuegos and Monelli. The testimony of political repression as a therapeutic


instrument. American Orthopsychiatric Association. 53(1). January
1983.

Dijk, Schoutrop & Spinhoven. Testimony Therapy: Treatment Method for


Traumatized Victims of Organized Violence. American Journal of
Psychotherapy. Vol.57, No.3, 2003.

Herman, J, L. Trauma and recovery. New Yrok: Basic Books. International


Rehabilitation Council for Torture Victims. 1997

Mundt, Wunshe, Heinz & Pross. Evaluating interventions for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in low and middle income countries : Narratives
Exposure Therapy, Intervention, Volume 12, Number 2, Page
250-266. 2014

Morkved, Hartmann, Aarsheim, Holen, Milde, Bomyea, & Thorp. A comparison


of narrative exposure therapy and prolonged exposure therapy for
PTSD. Clinical Psychology Review. 34.453-467. 2014

Robjant & Fazel. The emerging evidence for Narrative Exposure Therapy: A
review. Clinical Psychology Review. Vol. 30. 1030-1039. 2010.

|제50회 KPI평화포럼| 117


<캄보디아와 증언치료요법 (testimony therapy)> 신보경

Schauer, Neuner & Elbert. Narrative Exposure Theory : A short-term


treatment for Traumatic Stress Disorders. Hogrefe Publishing. 2011.

<책>

Samuel & Okpaku. Clinical methods in transcultural psychiatry. American


Psychiatric Press. 2005

Suzannah Linton, Reconciliation in Cambodia, The 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 2004

<발표자료>

Inger Agger. Testimony Therapy of Torture Survivors in Asia. Seminar


presentation at Yonsei University. 6 May 2016

<인터넷>

캄보디아의 역사. 네이버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77965&cid=40942&categ
oryId=33371

2013 KOTRA 국가정보 캄보디아.


http://openknowledge.kotra.or.kr/handle/2014.oak/5098.

http://www.d.dccam.org/Projects/Maps/List_of_Burial_Site_Most_Updated.pdf

Official Website : Choeung Ek Genocidal Center.


http://www.cekillingfield.org/index.php/en/about-us.html.

118
발 표

캄보디아의 역사적 영년(Year Zero / année zéro)


- 창세의 절대혼돈과 인간의 절대비극은 치유할 수 있는가?

박명림 교수 (연세대학교 지역학협동과정)


부록

한반도평화연구원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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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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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방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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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안보 분야 10대 싱크탱크’에 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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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I평화포럼(공개포럼) 개최 현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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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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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소개

한반도평화연구원 소개
비전
평화와 공동체적 나눔이 충만하며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하나된 한반도를 열어
가는 기독교 싱크탱크

미션
한반도평화연구원은 기독교 정신에 기초하여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비전과 전략, 그
리고 정책대안을 연구, 교육, 전파함으로써 교회와 한국 사회 및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
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가 비전 및 전략 제시 : 한반도평화연구원은 한
반도 평화와 통일의 비전과 전략을 연구하고 이를 교회와 사회에 전파하며 국가가 나아
갈 방향을 제시한다.
② 정책 대안의 연구 개발 서비스 제공 : 한반도평화연구원은 정부, 교회, 사회단체
에서 필요로 하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정책연구 서비스
를 제공한다.
③ 교육 프로그램 개발 및 교육 : 한반도평화연구원은 교회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통일 관련 교육과정 및 교재의 개발을 지원하고, 지성과 영성을 겸비하고 평화와 통일을
준비하는 기독교 인재를 양성한다.

원칙
선택과 집중 : 교회와 사회에 복음주의 통일 담론을 제시하기 위해 새터민 정책, 대북정책,
북한경제재건, 북한인권 등 통일과정과 통일 이후 중요하게 제기될 이슈들을 중점적으로
연구한다.
책임 있는 연구 : 책임 있는 연구를 위하여 공개적 출판이 필요하고, 엄격한 심사를 통해
연구의 질을 높인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한 한반도 평화의 비전제시 : 현안 이슈에 대한 연구원
의 연구와 주장은 검증된 사실에 입각한 냉철하고 객관적인 분석에 기초함으로서 자의적
인 정치적 편향성을 지양한다.
실천적인 정책대안 및 프로그램의 제시 :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평화와 통일준비 프로
그램을 개발한다. 새터민교육기관, 새터민정착지원기관, 대북지원단체 등 현장의 문제를
포착하고 심도 있게 분석하여 대안을 제시하는 순환구조를 형성한다.

122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연구원 조직
고문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사회
이사장 김지철 소망교회
이사(가나다순) 강경민 일산은혜교회 김동호 높은뜻연합선교회 손달익 서문교회 오정현 사랑의교회 우창록 법무
법인 율촌 이문식 광교산울교회 이재훈 온누리교회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윤영관 초대원장/서울대 이장로 2대원장/
한국리더십학교 김창수 한국국방연구원 전우택 원장/연세대 임성빈 부원장/장신대 이해완 부원장/성균관대 윤덕룡 부
원장/KIEP
[2015 신임] 송재식 서림교회
감사 민경윤 동우약품 이천화 가립회계법인
연구위원
고재길 장신대/신학 김근식 경남대/북한정치 김두식 경북대/법학 김병로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북한사회 김병연 서
울대/북한경제 김선욱 숭실대/철학 김성건 서원대/사회학 김연희 대구대/사회복지 김영윤 남북물류포럼 김중호 수출
입은행/정치외교 김창수 국방연구원/군사안보 김창환 한국교육개발원 김회권 숭실대/신학 김흥규 아주대/중국정치 나
희승 철도기술연구원/남북․대륙철도 남성욱 고려대/북한학 박명규 서울대/사회학 박명림 연세대/한국정치 박상진 장
신대/기독교교육학 박영철 성결대/도시개발 박정란 북한학 박정수 성결대/신학 박종운 변호사/법학 박형동 서울대/지
질 배종석 고려대/경영 백종국 경상대/비교정치 신범식 서울대/러시아 신성호 서울대/국제정치 신효숙 북한이탈주민
지원재단 심상달 KDI(전)/한국경제 심혜영 성결대/중국 안창남 강남대/세무학 양운철 세종연구소/북한정치경제 오준
근 경희대/법학 원재천 한동대/인권 유시은 고려대/북한학 윤덕룡 KIEP/북한경제 윤영관 서울대/국제정치경제 윤환
철 미래나눔재단 이국운 한동대/법학 이기홍 한림대/사회학 이만열 고문/역사학 이용욱 고려대/정치외교 이장로 고려
대/국제경영 이종철 빛과생명교회/통일신학 이춘근 과학기술정책연구원/북한과학기술 이해완 성균관대학교/중국 및 법
제 이흥용 건국대/법학 임성빈 장신대/신학 장혜경 한국여성정책연구원/사회학 전길자 이화여대/과학 전우택 연세대/
사회정신의학 전재중 변호사/법학 정경영 서경대/군사학 정병오 좋은교사운동 정성철 명지대/정외과 정우진 연세대/
보건경제학 조동준 서울대/국제정치 조봉현 기은경제연구소/경제 조영아 상지대학교/상담심리학 최도성 가천대/경영학
편주현 고려대/경영학 허문영 통일연구원/북한정치
[2015 신임] 양호승 월드비전 박원곤 한동대학교 이창호 장로회신학대학교이상 66명
[협동연구위원] 석조은 연구원(서울대학교)
섬기는 사람들
전우택 원장 임성빈 부원장 이해완 부원장 윤덕룡 부원장 손인배 행정팀장
연혁
1993 남북나눔운동의 창립과 함께 '남북나눔운동 연구위원회' 조직(위원장 : 이만열)
1993-2006 월례세미나 134회, 북한방문, 분단국 방문연구
2006 남북나눔운동에서 독립된 연구원을 설립하기로 결정
2007. 2. 12 2월 12일 창립총회 및 개원식(원장 윤영관)
2007. 3. 29 제1회 한반도평화포럼 개최,
2007. 12. 27 사단법인 설립허가(통일부)
2010. 10. 1 지정기부금단체
2011. 3. 4 제2대 이장로 원장 선출
2013. 2. 28 제3대 전우택 원장 선출
2016. 4. 7 특별 KPI평화포럼 개최

|제50회 KPI평화포럼| 123


참여방법, 회원가입 안내

참여방법
각 회원은 아래 한반도평화연구원의 회원가입요령에 따라 가입신청을 하시면 심사를 거쳐
한반도평화연구원의 여러 활동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 일반회원(개인, 단체)
◦ 한반도평화연구원에서 발행하는 각종 자료집 및 간행물 등을 받으실 수 있으며, 학술
세미나, 강연, 기타 본원의 각종 행사에 초대합니다.
◦ 한반도평화연구원의 운영과 발전에 관한 제안 또는 건의를 하실 수 있습니다.

●후원회원(개인, 단체, 교회)


◦ 한반도평화연구원이 정한 방법에 따라 후원약정을 하시면 후원회원이 되실 수 있습
니다.
◦ 일반회원의 모든 사항이 적용됩니다.
◦ 단체와 교회에서는 한반도평화연구원의 연구위원 혹은 연구원을 강사로 요청하실 수
있습니다.

●정회원
◦ 한반도평화연구원의 임원과 연구위원으로 구성됩니다.
◦ 총회 및 이사회에 참석하며, 한반도평화연구원의 재정과 운영에 전반적인 책임을 갖습
니다.
◦ 연구위원은 박사학위 이상 혹은 이에 준하는 자격을 갖추신 분으로 소정의 심사절차
를 거쳐 선임됩니다.

회원가입신청 방법

한반도평화연구원(koreapeace@paran.com, 070-8611-7109)에 인적사항을


알려주시거나 홈페이지에서 가입절차를 마치시면 됩니다. 본서 뒷면의 가입신청서를
작성하셔서 직원에게 전해주셔도 됩니다. 월 1만원부터 자유롭게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 소득공제 가능한 기부금영수증을 발행합니다.

www.koreapeac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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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연구원,

‘외교안보 분야 10대 싱크탱크’에 선정


한경비즈니스,'대한민국 100대 싱크탱크'특집

한반도평화연구원이 2008년 12월 시사주간지 '한경Business'가 창


립 13주년을 맞아 기획한 '대한민국 100대 싱크탱크'에 선정되었습
니다.
선정 과정은 2008년 11월중 120명의 분야별 전문가들에게 이메일
설문 및 방문조사로 이뤄졌고, 분석은 M&C리서치에 의해 진행되었
습니다.
100대 싱크탱크에 선정되기 위해서는 외교․안보분야에서 10위 이내
에 들어야 하는데, KPI는 유수의 국책연구원, 대학부설연구소 등에
앞서는 점수를 얻
어 10위에 선정되
었습니다.
기사를 발췌하여
첨부합니다. 같은
내용을 한경
B u s i n e s s
(www.kbizweek.
com, 제680호,
2008.12.15일자)
에서 보실 수 있
습니다.

|제50회 KPI평화포럼| 125


KPI평화포럼 개최현황

KPI평화포럼(공개포럼) 개최 현황
회차 주제 장소 날짜 보도(주요)
프레스센터 20층
제1회 1만 새터민, 우리의 '짐'인가, '힘'인가 국제회의장
2007.3.29 KBS,연합 외

백범기념관
제2회 북핵 문제와 한반도 평화정착 대회의실
2007.6.15 KBS,연합 외

제3회 새터민 청소년 교육, 우리의 미래다 〃 2007.7.14 KBS,동아,중앙,한겨레

제2차 남북정상회담: 은행회관


제4회 국제회의장
2007.8.14 연합,동아,한겨레
의미, 쟁점, 성공을 위한 조건들
백범기념관
제5회 사회주의 체제전환과 기독교 대회의실
2007.10.4 동아,중앙,뉴조

제6회 북한경제의 변화와 사회적 영향 한국기독교회관 2007.11.12 연합,뉴조,한겨레

한국경제신문
제7회 신정부 남북경협의 방향과 정책추진 과제 다산홀 2007.12.27 오마이,중앙,한겨레,뉴조

백범기념관
제8회 이명박 정부의 새터민 정책 방향 모색 대회의실
2008.4.18 연합,한겨레

백범기념관
제9회 동북아 민족주의 갈등과 한반도 평화 대회의실
2008.5.23 동아,문화,한겨레

프레스센터19층
제10회 대북 인권정책과 인권문제의 세계적 추세 기자회견장 2008.8.29 경제투데이,뉴시스,동아,중앙

제11회 남북한 경제통합전략 다사랑(가나의 집) 2008.9.19 비공개 회의

탈북자,그 7년간의 삶들 - 새터민


제12회 함춘회관 2008.11.7 조선
적응사례연구 발표
배재대학교
제13회 갈등의 남북관계- 해법은 무엇인가 학술지원센터
2009.3.18 중앙,연합

오바마 행정부의 출범과 한미전략동맹의 백범기념관


제14회 대회의실
2009.4.17 연합,동아,중앙
대비방향
대한상공회의소
제15회 한반도 안보위기 해법은 무엇인가 중회의실A
2009.6.22 연합, 동아, 뉴시스, FN

이 땅에서의 첫해, 500명 북한이주민의


제16회 함춘회관 2009.9.18 연합 외
삶과 생각

126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회차 주제 장소 날짜 보도(주요)
서독의 동독이탈주민 정착지원을 백범기념관 연합, KBS 한민족방송,
제17회 대회의실
2009.10.8
CBS
통해서 본 북한이탈주민 지원 방안
프레스센터19층 연합, KBS 한민족방송,
제18회 통일과 의료 - 그 가장 따뜻한 만남 기자회견장
2009.10.22
CBS
화폐개혁을 통해서 본 북한경제 현실과 대한상공회의소
제19회 의원회의실
2009.12.7 연합, MBC인터넷
사회 정치적 영향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한 경제통합
제20회 함춘회관 2010.2.25 연합, YTN, MBC인터넷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백범기념관
제21회 북·중 관계와 북한의 미래 대회의실
2010.4.1 중앙, MBC인터넷

사회주의 체제전환기 교회의 역할 - 독일,


제22회 청어람 소강당 2010.6.4 뉴스엔조이, 베리타스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사례
한·러관계 20년의 평가와 미래협력 백범기념관
제23회 대회의실
2010.9.29 중앙, MBC인터넷
강화방안
난민의 심리적 트라우마와 지원방안 : 연세대학교
제24회 의과대학 종합관 2010.10.16 기독신문
아동·청소년을 중심으로 331호

제25회 2011년 미·중관계 전망과 한반도평화 함춘회관 2011.2.11 연합,코리아헤럴드,YTN외

수쿠크 법의 쟁점: 평화를 위한 정부, 국민, 중앙, CGN, C3, 연합,


제26회 청어람 2011.4.13 뉴시스
미디어, 교회의 역할
코리아헤럴드,동아일보,기독
제27회 체제전환국의 경험과 북한교육 개혁방안 청어람 2011.5.20
신문
MBC뉴스,베리타스,연합뉴스
제28회 북한에 대한 인권개입과 식량지원 함춘회관 2011.7.15

남북한 통일담론에 대한 진단과
제29회 은행회관 2011.9.28 국민일보, 중앙일보
통일논의의 수렴방안
제30회 평화인문학의 반(反)평화 연구Ⅰ 청어람 2011.11.24 조선일보

제31회 평화인문학의 반(反)평화 연구Ⅱ 청어람 2011.12.12 Daily NK


동아, 뉴시스, CGN,
제32회 김정일 이후 북한 체제와 한반도 평화의 길 함춘회관 2011.12.27
노컷뉴스
4.11 총선으로 드러난 한국정치의 조선, 동아
제33회 함춘회관 2012.4.19 코나스 외
갈등구조와 해소책 모색
제34회 우리가 꿈꾸는 나라 청어람 2012.8.21 CGN, CBS, CTS, 뉴조 외
한국교회 100주년
특별 통일시대를 준비하라 기념관
2012.9.15 CGN, 유코리아 외

|제50회 KPI평화포럼| 127


KPI평화포럼 개최현황

회차 주제 장소 날짜 보도(주요)
프란치스코
제35회 미․중의 리더십 교체와 향후 대북정책 교육회관
2012.11.16 연합 외

프레스센터 20층 조선, 기독공보,


제36회 대한민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국제회의장
2012.12.6 코나스 외

제37회 남북간 신뢰구축,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청어람 2013.2.19 연합뉴스, 기독공보 외

특별 제1회 새터민 대학생 멘토링 컨퍼런스 청어람 2013.5.4

제38회 통일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청어람 2013.6.17 국민일보 외

제39회 통일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Ⅱ 한국기독교회관 2013.10.7 기독공보 외

제40회 통일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Ⅲ 한국기독교회관 2013.12.3 C 채널 외

제41회 통일과 기독교의 역할 한국기독교회관 2014.4.3 기독공보 외


통일과 세월호 사건 앞에서 바라보는
제42회 한국기독교회관 2014.5.23 복음과 상황 외
대한민국의 미래 방향
제43회 평화를 향한 길 - 북아일랜드의 경험 열매나눔재단빌딩 2014.12.18
연세대학교
제44회 평화를 향한 길 - 북아일랜드의 경험 2 2015.3.4
삼성학술정보관
연세대학교
제45회 동아시아의 평화 - 과거,현재 그리고 미래 2015.6.18
새천년관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Ⅰ - 개인의
제46회 열매나눔재단빌딩 2015.9.17 국민일보, CTS 외
삶과 평화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Ⅱ - 교회
제47회 한국기독교회관 2015.10.19 국민일보, 한국기독공보 외
안의 평화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Ⅲ - 한국
제48회 열매나눔재단빌딩 2015.11.6
사회와 평화
특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 숭실대학교 진리관 2015.12.5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Ⅳ - 국제
제49회 한국기독교회관 2015.12.17
사회와 평화
숭실대학교
특별 한국교회 목회자 통일인식 조사 2016.2.25 조선일보,국민일보 외 다수
한경직기념관
북한이탈주민 지원 인력의 소진 대처 및
특별 열매나눔재단빌딩 2016.4.7 미래나눔재단 협력 포럼
극복 방안

128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북핵문제와 한반도 평화정착


한울아카데미 / 2008.12.15 발행
윤영관·신성호 엮음
김준석·김흥규·백종국·신성호·이근욱·전재성·조동
준·황지환 지음

차례
제1부 핵문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제1장 국제체제의 불안정 요인으로서의 핵확산
제2장 기독교와 핵
제2부 핵무기 제거를 위한 노력: 국제적 사례
제3장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핵화 사례 연구
제4장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무장
제3부 북핵위기와 국제적 해결노력: 평가와 교훈
제5장 1·2차 북핵위기와 미국의 대북정책
제6장 중국의 북핵외교
제7장 북한의 핵개발과 국제협상
2009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제8장 북한 핵문제의 국내정치

7·1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북한경제와 사회: 계획에서 시장으로?
한울아카데미 / 2009.5.7 발행
윤영관·양운철 엮음
김병로·김병연·남성욱·양운철·윤덕룡·이석기 지음

차례
제1장 북한경제 몰락의 정치경제적 함의
제2장 북한경제의 시장화: 비공식화 가설 평가를
중심으로
제3장 북한 기업관리체계의 변화
제4장 북한의 농산물 가격변화에 따른 식량수급 및
협동농장 체제의 변화
제5장 북한의 대외경제관계 변화와 그 영향
제6장 경제조치 이후 북한의 사회적 변화

※ 소개도서는 서점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제49회 KPI평화포럼| 129


KPI발간도서 안내

남북경제협력 정책과 실천과제


한울아카데미 / 2009.5.7 발행
윤영관·이장로 엮음
김근식·김영윤·나희승·안창남·이상준·조동호·
조봉현 지음

차례
제1부 기존 대북정책의 평가와 새로운 대북정책 추진의
필요성
제1장 역대 대북정책 평가와 향후 "포용정책" 발전 방향
제2장 남북경협 측면에서 본 새로운 대북정책 추진의
필요성
제2부 이명박 정부 남북경협의 목표와 추진 전략
제3장 이명박 정부 남북경협의 목표와 추진 전략
제3부 대북경협의 세부 실천과제
제4장 대북경협의 세부 실천과제 Ⅰ: 남북한 상생을
2010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위한 신경협 6대 분야
제5장 대북경협의 세부 실천과제 Ⅱ: 개성공업지구에
역외금융센터를 설치 운영하는 방안 연구
제6장 대북경협의 세부 실천과제 Ⅲ: 남북·대륙
철도개발구상과 단계별 발전방안

오바마 행정부와 한미전략동맹


한울아카데미 / 2009.11.30 발행
정경영·신성호·김창수·조동준 지음

차례
제1장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안보정책과 한미전략동맹 /
신성호
제2장 한미전략동맹의 비전과 구체화 방안 / 김창수
제3장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유엔사의 미래 / 정경영
제4장 지구적 쟁점에서 한국과 미국의 협업 / 조동준

130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통일 실험, 그 7년
:북한이탈주민의 남한살이 패널연구
한울아카데미 / 2010.6. 28 발행
전우택· 유시은·조영아·김연희·민성길·엄진섭·
김현경·김희진 지음
차례
제1부 통일 실험, 7년간의 삶과 생각
제1장 북한이탈주민의 사회적응 7년 추적연구
제2장 북한이탈주민의 종교생활에 대한 7년 종단 연구
제3장 북한이탈주민의 소득수준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제4장 남한 내 북한이탈주민들의 의식 및 생활만족도
제2부 남한살이, 상처를 넘어서
제5장 장기 거주 북한이탈주민의 빈곤특성 연구
제6장 장기 거주 북한이탈주민의 정신건강 예측요인
제7장 북한이탈주민의 남한에서의 삶과 질
제8장 북한이탈주민의 외상 경험 이후 심리적 성장
제9장 북한이탈주민의 삶의 질이 외상 경험 이후
심리적 성장에 미치는 영향
제10장 남한 내 북한이탈주민들의 의식 및 생활 만족도

북한인권 개선, 어떻게 할 것인가


: 평화적 개입 전략과 국제 사례
한울아카데미 / 2010.6. 29 발행
윤영관·김수암 엮음
김수암·김학성·마웅저·박명림·서창록·원재천·이남주 지음
차례
제1부 북한인권 접근 시각과 국제사회의 인권논의
제1장 한국의 북한 인권문제 접근에 대한 성찰과 대안
모색/박명림
제2장 인권논의의 세계적 흐름과 북한인권/김수암
제2부 인권개선정책의 국제 사례
제3장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김학성
제4장 중국에서 인권규범의 확산과 한계/이남주
제3부 북한인권 개선과 개입 전략
제5장 북한인권과 다자적 접근/서창록
제6장 북한인권의 국제법적 접근/원재천
나가며 평화적 개입 수준의 설정과 전략의 모색/김수암
부록 미얀마 인권개선의 사례/마웅저

|제49회 KPI평화포럼| 131


KPI발간도서 안내

사회주의 체제전환과 기독교


한울아카데미 / 2012.2.28 발행
임성빈 엮음
김회권·고재길·설충수·신범식·이규영·고재성·이기홍·임성빈 지음

차례
제1장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대화의 역사와 전망/김회권
제2장 독일의 내적 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고재길
제3장 중국 사회주의 체제 전환기 기독교의 역할과 과제/설충수
제4장 탈사회주의 체제전환기 러시아의 교회-국가-사회 관계/
신범식
제5장 폴란드 가톨릭교회와 현실사회주의 체제 전환/이규영
제6장 헝가리에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고재성
제7장 탈사회주의 전환 과정 중 교회의 역할/이기홍
제8장 남북한 문화의 만남 이후를 준비하는 교회의 역할/임성빈

체제전환국의 경험과
북한 교육개혁 방안
한울아카데미 / 2012.9.28 발행
이장로·김병로 엮음
김병로·신효숙·김신규·김면·박영진·이성준 지음

차례
제1장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국가의 교육개혁 경험
제2장 동유럽의 교육개혁 경험과 그 의미
제3장 독일의 교육 통합 경험과 그 시사점
제4장 중국의 교육개혁 경험과 북한에 주는 시사점
제5장 베트남의 교육개혁 경험과 변화
제6장 북한 교육 실태와 남북 교육협력의 경험
제7장 체제 전환 시 북한 교육개혁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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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평화와 반평화 : 평화인문학적 고찰


프리칭아카데미 / 2013.2.16 발행
김선욱·심혜영·서경석·이해완·전우택·이국운·박정수·김회권 지음

차례
제1부 철학과 문학에서 본 평화와 반평화
제1장 평화와 반평화 : 평화의 윤리학적 조건/김선욱
제2장 반평화적인 삶의 문화와 그 근저/심혜영
제3장 한국문학을 통해 본 이웃 사랑의 철학/서경석
제2부 제도의 관점에서 본 평화와 반평화
제4장 폭력의 내면적 원인과 평화의 내면적 토양/이해완
제5장 인간의 공격성과 한반도의 평화/전우택
제6장 민주적 연방주의와 평화/이국운
제3부 성서의 관점에서 본 평화와 반평화
제7장 초기기독교의 '반-유대주의' 담론과 평화의 문제/박정수
제8장 역대기의 민족화해 사상/김회권

통일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새물결플러스 / 2014.11 발행
전우택 대표저자
윤덕룡·이해완·이문식·조동준·고재길·심혜영
·임성빈·오준근 공동저자

차례
서문 김지철 소망교회 담임목사
제1장 통일과 통일비용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 윤덕룡
제2장 통일의 목적과 방법 및 그 준비에 대한 기독신앙적
성찰 / 이해완
제3장 하나님 나라와 한반도 평화 / 이문식
제4장 평화협정 논의에 대한 기독신앙적 성찰 / 조동준
제5장 반공이데올로기의 문제와 화해의 신학 / 고재길
제6장 북한을 이해하는 여섯 가지 키워드와 기독교적
성찰 / 전우택
제7장 하나됨에 대한 기독신앙적 성찰 / 심혜영
제8장 세대 갈등과 통일에 대한 성찰 / 임성빈
제9장 지방분권과 통일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 오준근
※ 소개도서는 서점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제49회 KPI평화포럼| 133


KPI발간도서 안내

통일한국의 교육비전
한울아카데미 / 2014.11 발행
이장로 엮음
김창환·정병오·신효숙·박상진 지음

차례
제1장 선진국의 교육 가치 및 제도와 정책 / 김창환
제2장 남한 교육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 정병오
제3장 북한 교육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 신효숙
제4장 통일한국의 교육 비전, 철학, 제도 및 정책 / 박상진

남북한 경제통합 : 전략과 정책


한울아카데미 / 2015.11 발행
이장로·김병연·양운철 엮음
김병연·박영철·박진·양운철·이상준 지음

차례
제1장 남북 경제통합전략의 기본 방향 / 박진
제2장 체제전환과 경제통합 / 김병연
제3장 남북한 경제통합과 북한 기업소 사유화 방안 /
양운철
제4장 토지 부분의 통합정책과 과제 / 박영철
제5장 인프라부문 - 남북 경제통합과 북한 인프라 개발의
과제 / 이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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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회
연세대학교 인간평화와 치유연구센터 및 미래선도연구팀,
KPI 공동개최 포럼 자료집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통하여 보는 인간 치유의 길
낸 날 | 2016년 6월 3일
낸 곳 | 사단법인 한반도평화연구원
주 소 |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층 502호
전 화 | 070-8611-7109
팩 스 | 03030-644-7109
이 메 일 | koreapeace@paran.com
홈페이지 | www.koreapeace.or.kr
[질의 응답] 본 면을 활용하셔서 질의와 의견을 제출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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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희망(발표․토론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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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희망(발표․토론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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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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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메일 : @
원하시면 ⏏ 휴대폰 : 01 - -
⏏ 주 소: 시 구 동
본 신청서를
작성하셔서 저희 20 0년9 월 일
신청자 (인)
직원에게
주십시오. ※선택사항 후원 신청서 (제출용)
20 년 월 부터 20009년 월 까지
∙ 매월 ⏏ 1만원 ⏏ 3만원
⏏ 5만원 ⏏ 10만원
⏏ 기타 원
∙ 입금일 매월 일
위와 같이 후원을 약정합니다.
‘후원신청’은
20 년9 월 일
선택사항입니다. 신청자 (인)
F34

2010년부터 KPI의 ……✂……………………………………………………………………

후원 신청서 (후원자 보관용)


후원자에게는 20 년 월 부터 20009년 월 까지

소득공제 가능한 ∙ 매월 원 ∙ 입금일 : 매월 일


[후원계좌] 신한은행 100-023-836269
기부금영수증을 예금주 : 사단법인한반도평화연구원

F34 20 년9 월 일
발급합니다.
070-8611-7109, www.koreapeace.or.kr, koreapeace@paran.com
www.koreapeace.or.kr

03129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5층 502호


전화 070-8611-7109(대) 팩스 03030-644-7109 E-mail: koreapeace@paran.com
후원계좌: 신한은행 100-023-836269 사단법인한반도평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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