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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죽은 원조
가난과 죽은 원조
가난과 죽은 원조
가난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계를 넘어선 곳으로 옮겨 가야만 합니다. … 풍부한 유머, 온화한 성격,
곧잘 터져 나오는 웃음, 품위, 연대감 따위 말입니다. 우리 아이티 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음식을
나눠먹는 전통이 있습니다. 친구나 친척이 아이를 기를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아이들을 대신 기릅니다.
우리는 수확 때가 되면 콘비(두레와 유사한 아이티 전통)를 이루어 함께 일하기도 하고, 이웃의 집을
함께 짓고 그 대가로 하루 일이 끝날 때 곡물로 나눠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들어설 수 없이
꽉 찬 탭-탭(트럭을 개조해 만든 아이티의 대중교통수단)에서 한 자리를 더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미소 짓고 있으며,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결집시킬 수 있는 풍부한 경험과 지식, 기술과 에너지, 그리고 힘이 존재합니다.
바로 이런 창조성에서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아이티를 비롯해 멕시코, 브라질,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점점 늘어나는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가난한 사람들이 파노라마처럼 보여 준 인간적인 인고
(忍苦)에서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예로부터 가난이 항시 비참하고 굴욕적인 것으로 여겨진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청빈’은
서양에서도 동양에서도 오랫동안 지식인의 도덕률 중 하나였습니다. 오히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부자’가 이렇게 존경할만한 인물로서 추구되는 것이야말로 극히 예외적인 이 시대 특유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돈이 신(神)이 된 시대의 결과이지만 또한 그것을 이론적
사상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다방면에서 지속적으로 정당화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난의
감각’을 상실하고 ‘가난의 미학’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아름다운 가난’이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용모순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가난에 대해 게으름, 무능력,
주체화의 실패 등등의 온갖 부정적 언사와 수사를 붙이며 가난을 문명사회가 퇴치해야할 과제로
만들었습니다. 가난은 문명화된 사회의 부끄러운 치부가 되었습니다. 국제기구와 잘사는 나라의
시민들은 원조프로그램을 통해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자 합니다. 그와 같은 빈곤퇴치
프로젝트는 일견 휴머니즘적인 듯 보이지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휴머니즘이 아니라 그들을
대상으로 자선을 베푸는 자신들의 휴머니즘을 돋보이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난으로 가는 길을 찾습니다. 고립된 가난은 무력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과 함께 가난해지고 싶습니다.
가난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
아프리카에 대한 원조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아프리카의 비참한 현실이 외부세계에 알려지고
국제사회의 양심 있는 시민들이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인도주의적 운동을 시작한다. 정부와
국제기구들도 이 도덕적 호소를 외면할 수 없어 빈곤국들에 대한 국제적 연대의 일종으로서 원조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공유하는 이 시나리오는 그러나 일면의 진실만을 담고 있을 뿐입니다. 잘사는
나라들의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 3 세계에 대한 원조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국제정치경제학의 배경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과거의 제국과 식민지는 채권국과 채무국의 관계로 전환됩니다. 원조는 결코 거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서구 제국주의가 과거 식민지들에 대해 저지른 수탈과 착취에 대한 반성도,
배상도, 순수한 인도주의적 지원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원조경제는 서구경제의 활로였던 것입니다.
서구의 ‘자본’이 아프리카에 ‘투자’한 것, 그것이 원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원조경제’는
오늘날 세계경제의 지배적 산업인 금융산업과 부채경제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미·소 냉전기에 미국은 원조를 냉전의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서방세계는 경제적 동맹과 해외영토를
통해 세계 패권을 장악하려고 하였습니다. 원조가 세계를 자본주의 또는 공산주의로 만들기 위한
경쟁에서 또 하나의 무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독재정권과 전쟁광 군부에게도
아낌없이 돈을 퍼부어주었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그리고 그 원조금을 둘러싸고, 아프리카의
각지에서는 내전이 끊이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서구의 총칼이 아프리카를 짓밟았다면 이번에는
서방세계의 돈이 아프리카를 철저히 파괴합니다. 무력에 의한 예속이 돈에 예속된 상태로 변질되었을
뿐, 예속상태는 변함이 없습니다. 서구의 돈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정부, 자립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으니까요.
책에는 ‘가난(빈곤)’이 국제원조의 중심의제가 된 현실적 배경에 대해서도 설명이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이 서구 시민사회에 싹트기 시작했다’는 식의 설명과는
전혀 다릅니다. 70 년대까지의 서구의 원조정책은 ‘돈 빌려 드립니다’와 ‘(그 돈으로) 건설해드립니다’
로 상징됩니다. 그런데 유가상승으로 인해 원자재 가격이 오르자 국제사회(서방세계)는 개발의제를
‘빈곤퇴치’로 전환합니다. 이전까지의 원조가 실질적인 투자, 즉 대규모 공공기반시설 투자(전기, 운송
등)에 집중되었다면, ‘경제적인 이유에서’ 빈곤퇴치(문맹퇴치캠페인이나 예방접종프로그램 식량보급
등)로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경우 1970 년대 중반까지 원조의 거의 2/3 가 도로, 철도,
상하수도, 항만, 공항, 발전소, 통신 같은 공공기반 시설에 쓰였지만, 1980 년대 초반이 되면 빈곤구제
원조가 50%에 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원조의 중심의제가 빈곤의제로 바뀌게 된 것은 아프리카의 경제
상황에서는 더 안 좋은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경제의 자립적 발전을 위한 필수조건인 공공기반시설에
대한 투자가 중단되고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물자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원조의존
경제시스템이 시작된 것이니까요.
“원조의존의 최종적 결과는 제대로 돌아가는 아프리카를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아프리카 사람들이
운영하는 게 아니라 외부인들이 아프리카의 운명을 결정하고 지배하려고 기를 쓰는 결과만 가져온다.
아프리카 문제가 글로벌 의제에서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프리카의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니며 서구의 팝스타와 정치인들이 아프리카 담론을 독식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손에 선발된 아프리카 사람들이 국제무대에서 발언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아프리카를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아프리카 사람들이 운영하도록 하라’는 외침은 ‘가난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해결하도록 하라’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빈곤
담론을 가난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다시 만들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착취를 투자라 생각하고 파괴를 개발이라 수탈을 원조라 여기며 이런 식의 새로운 식민주의를
국제연대라 말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제 이 거꾸로 뒤집힌 말을 원래대로 말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가 아니라 오히려 이 세계의 잘 사는 나라들과 잘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의 어깨 위에 얹혀 살아가고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가 깨닫고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가난의 정치학’을 고민하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가난을 돈으로 돕는 것이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남아 있던 인간애마저
파괴한다는 것은 단지 국제정치적 상황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국내의 지역개발의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들이 사는 동네에서는 절대 들어설 수 없는 위험한 시설물들을 가난한 동네에
지으면서 사람들을 돈으로 유혹하는 방식을 우리는 무수히 보아왔습니다. 핵폐기물 처리장, 쓰레기
매립지, 하수처리장, 고압송전로를 엄청난 돈과 함께 들이 밀면서, 그것이 지역경제개발을 위한
호재라고 말합니다. 그 돈을 놓고서 주민 간에 갈등과 반목이 생기고 가난해도 단란했던 동네
이웃들이 적이 되고 맙니다. 신도시 개발도 마찬가지여서, 개발이 추진되고 토지에 대한 집단 수용이
시작되면 과거의 강제철거 대신 지금은 돈을 풉니다.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찢어놓고 서로 싸우게
만듭니다. 이는 서방세계가 아프리카에 대해 했던 원조개발정책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전쟁을 벌이지는 않는다 해도,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치루고 있는 마음의
내전도 그보다 가혹하지 않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돈으로 도움을 주는 것, 거저 주는
것도 아니고 빌려주면서, 가난하나 순박하게 살아온 사람들을 돈으로 갈갈이 찢어 서로 싸우게
만들고 결국은 가난에 스며있던 인간애까지 파괴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런 현실은 보지 않은 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자기 양심의 알리바이까지 지켜온 어떤 ‘선량한 시민사회(good society)’가
있다면, 우리는 그런 사회를, 그런 시민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가난에 관한 세 번째 이야기
함께 가난하고 싶은 당신에게
이제 세 번째 편지를 씁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가난의 미학, 가난한 아름다움에 대한 것입니다. 가난이
아름답다고 하면 사람들은 벌써 코웃음을 치는군요. 당신이 가난이 얼마나 힘든 것인 줄, 얼마나
비참한 것인 줄 알기나 하느냐고.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이민자들, 혼혈인디오 메스티조, 여성과 아이들,
익명의 노동자들, 이런 사람들이 살가두 사진의 주인공들입니다. 아프리카와 남미, 아시아로부터
전송되어온, 기아와 내전과 가뭄과 흉작과 질병과 재난 속에 던져진 절망의 얼굴들은 그의
사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구상의 비참하고 참혹한 현장을 찍은 사진은 많고 많지만
살가두의 사진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가장 비참한 상태의 인간을 가장 고귀한 모습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들은 자신보다 약하고 낮은 존재에 보내는 동정과 연민이 아니라 존경과 겸손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게 하고 고개를 숙여 용서를
구하게 하는 성자의 모습으로, 숭고하고 아름답게, 그렇게 말입니다. 그들의 존재감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단골로 등장하는 부족사회의 원시인들이나 연합통신(YP)의 희생자들 사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살가도의 렌즈에서 이들은 타자화된 피사체가 아니라 존엄한 존재로 부활합니다.
미국의 평론가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타인의 고통』이란 책에서 서구의 사진작가나 기자들이
전쟁이나 재난 현장의 사진을 찍을 때 서구와 비서구에 대해 완전히 다른 감성과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서구지역의 전쟁 사진에선 터부시 되는 훼손된 시체들이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경우엔 금기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전쟁이나 재난을 겪는
서구인들이 언제나 고통을 ‘이겨내는’ 모습으로,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내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데 비해 비서구 지역에서는 오직 현실의 비참함만이 부각되며 그 속에 놓인 인간
역시 가련하고 불쌍한, 고통을 ‘당하는’ 희생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것을 혹시 눈치 챈 적이
있으신지요? 일종의 상징조작과도 같은 그러나 하는 사람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로 생산된 사진들을
통해 서구인들의 뇌리에 서구세계 바깥 사람들의 검은 몸은 언제나 ‘인간의 몸’이 아닌, 미개한 ‘
몸뚱이’로 문명사회에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야만적인 일들이 새겨지는 곳으로 각인되어 왔다는
것이 손택의 통찰입니다.
그러나 살가두의 사진에서 이들의 검은 몸, 야위고 더러운 검은 몸은, 오히려 문명이 저지른 죄악을
씻어줄 성소로 등장합니다. 뺏지 않고 속이지 않고 착취하지 않고 억압하지도 않고, 반대로 빼앗기고
쫒기고 짓밟히고 억눌리면서도 인간의 선함을 잃지 않고 살아온 이들은 그러하기에 역설적으로
죄악을 저지른 자들을 용서하고 구원해줄 수 있는 성자들인 것입니다. 풍요롭고 안전한 곳에서
오히려 욕심에 뒤틀리고 타인에게 잔인해져가는 사람들과 달리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사랑과 희생을 보여주는 이 선하면서도 강인한 사람들이야말로 이 땅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인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라 할 것입니다.
“단순히 행색이 초라하고 가진 게 없다고 해서 손가락질 받아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가난과 고통은 따지고 보면 정부를 비롯해서 가진 자와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 하는 문제다.”
“오랫동안 군소리 않고 묵묵히 일하는 가난한 서민들, 그들을 대변할 사진작가가 있는가. 이런 고귀한
일들을 사진작가는 해내야 한다. ... 사진이란 다른 사람이 짊어진 아픔의 감각을 기술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들의 슬픔을 미적 존재로 승화시킴으로써 미를 다시 희망으로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한 생명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용기 있는 작가가 요구되는 시대도 없다. 사람들은 역사적 진실에 목말라 하고 있다. 모든
제약과 고통을 넘어서서 민중들의 갈구에 답하는 용기 있는 작품이 나올 때, 참다운 감동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가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예술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괴로움을 이기며 도전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문화의 생산과 소비 시스템을 지배함으로서
문화자본을 독점하고 문화권력자가 되어 저급한 취향을 가진 ‘무식한 대중들’과 ‘가난한 노동계급’에
대해 상징폭력을 행사하는 오늘의 문화귀족들을 향해 돌려주고 싶은 말입니다.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사회적 장에서만이 아니라 문화투쟁으로서의 미학적 대결에서도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자립과 연대의 조건을 박탈당하였고, 존엄과 존경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탓이 아닙니다.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이 세계의 부자들이 저지른 죄악을 고발하는데 작가적 사명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민중미학’이란 것이 사라진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민중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작품들이 그들이 사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민중들과 그 삶을 미적 윤리적
투쟁에서 승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최명희의 『혼불』에서, 조정래의 『
태백산맥』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에서, 곤경 속에서도 인간답게 살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의 형상은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성’을 늘 ‘민중성’에서
찾아온 민중문학의 양식이 언제부터인가 촌스럽게 여겨지거나 또는 ‘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가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나타나고, ‘신경숙’이 작가로 태어났던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주로 작가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방식으로, 나르시스적 지식인들이나 고립된
개인들을 인간적 고뇌를 대표하는 인간으로 둔갑시키면서 말입니다. 노동의 세계가 문학의 세계에서
멀어져 가고 동시에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지식인들의 부채의식도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
탈정치화’가 이념의 시대를 벗어나 예술의 자유를 얻을 수단인 것 마냥 호도되고 그것이 또한 문학의
사명이 되었을 때, 가난한 삶과 가난한 행복과 가난한 사랑에 대한 미적감수성을 잃어버린 문학의
타락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을까요?
가난의 미학은 한편으로는 소비의 미학과 한편으로는 순수예술의 형식주의 미학의 정반대편에
있습니다. 오늘날 소비의 미학이 대중예술과 대중문화를 지배한다면 형식주의 미학은 엘리트 예술과
지배계급의 귀족적 취향을 대변합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삶의 진실성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가난의 미학을 회복하는 것은 일종의 문화투쟁이자 대중소비문화에 대한 문화적
저항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미적취향을 대부분 ‘상품소비’의 형식으로서 만족시키고 있는 현대인들이
그와 같은 ‘소비’를 그만둔다면, 낡은 것을 사랑하고 이미 가진 물건들 가운데서 새로운 쓸모를
끊임없이 찾아내는, ‘밥상조각보’에 깃들어 있는 안목과 기술을 갖게 된다면, 시장이 아니라 각자의
공동체 안에서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는 힘을 다시 갖게 된다면, 그것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이
강요하는 소비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거부와 저항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덜 사고, 덜 쓰고, 덜
버리는 것은 자본주의가 발전시켜온 소비와 착취의 경제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지만 지구와
생명에 대해서는 가장 큰 기여가 될 것입니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가난을 동경하고 가난에
동참함으로써 사는 것을 그만 두고도 필요한 물자를 얻게 될 때, 화폐가 아니라 우리의 손에서
아름다운 물건들이 만들어져 나올 때, 그것이 곧 새로운 경제의 출현이 될 것입니다.
가난에 관한 네 번째 이야기
이시무레 미치코『신(神)들의 마을』(서은혜 옮김, 녹색평론사, 2015)
“여기서는 실패해버린 듯한 20 세기의 성립이 잘 보인다. 왜냐하면 이곳은 물고기의 태(胎), 어머니의
자궁에 해당하는 곳이므로, 그 피와 살을 가지고 일본의 근대를 낳고 길러 배웅하고 지켜보면서,
돌아오지 않는 이들의 부모의 묘역을 지키고 돌봐온 곳이므로, 여기서는 그것이 잘 보인다.”
“일본의 진실.... 그렇지, 진실이쥬 일본의, 이 미나마타의 모습이. 미노루코는 몸에 이것을 짊어지고
태어난 것이것지유. 진실하여 거짓되지 않다는 것은 미노루코의 모습이자 거짓이라곤 한 조각도 없는
진실이라구. 말세, 거꾸로 된 세상이니까유.” 미나마타병 환자의 모습은 모두들 그렇게 “거꾸로 된
세상의 진실을 몸에 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가는 세상, 역세(逆世)와 말법(末法)의 세상이 온
것을 미나마타가 앞장서서 알린 것이라고 ‘열매맺는 아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처녀
미노루코가 뒤틀린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벚꽃 잎을 주우며 우리에게 몸으로 증언해주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작가의 말처럼 “죽은 자들은 언제나 산 자들의 수치를, 목덜미에 늘어뜨린 쇠사슬처럼
얽어매고 돌아온다.”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를 살리고 있는 것은 “죽은 자들이 견디고 있는 수치의 추
(錘)”인 것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