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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1004638
20210711004638
指導敎授 金 鐘 旭
제마넥 마렉 (
ZEM ANEK Mar
ek)
指導敎授 金 鐘 旭
委員長 (
인)
委 員 (
인)
委 員 (
인)
1. 연구 목적과 선행연구
1) 연구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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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어떻게 이용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내셔널리즘 또는 민족주
의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한 후, 중국과 일본 두 나라의 대표적인 지식
인들을 통해 화엄의 정치적 역할을 연구하고, 본 논문의 중심인 만해 한
용운의 화엄적 민족주의를 심도 있게 연구함으로써 화엄적 민족주의 사
상이 가지는 현대적 의의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본 논문의 중심개념인 민족주의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의 개념부터 정의해야한다. 이는 두 가지 방법으로 행해질 수
있는데, 첫째는 서양에서 내셔널리즘 개념의 형성과 근대 동서양의 역사
속에서 내셔널리즘의 전개를 살펴봄으로써 정의할 수 있다. 둘째는 현재
인문학에서 정의되는 민족, 서양의 ‘nation’, 그리고 근대 동아시아 지역
의 근대 사상가들에게 있어서의 민족의 개념을 비교, 정리하고자 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동아시아에서 각종의 사상들이 풍부하게 논
의된 기간이다. 동아시아 삼국의 전통사상인 유·불·도의 배경에 서양 철
학과 과학이 결합되어 서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각 세 나라에서 민족
주의적으로 자기 사상을 구성하는 지식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자국의
전통사상과 서양사상을 함께 이용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화엄 사상이 그
들의 민족주의의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어떤 식으로 화엄 사상
을 활용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각 나라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을 택하
고, 그들의 사상을 연구하려고 한다. 중국의 대표적 학자로는 탄스통(譚
嗣同)과 량치차오(梁啓超), 장타이엔(章太炎)의 사상을 살펴보고 일본에
서는 다카쿠스 준지로와 키히라 타다요시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동
아시아의 화엄과 정치의 관계를 살펴보는데 앞서, 화엄사상의 핵심교리
로서 법계연기, 십현문, 육상원융, 성기사상의 개요를 먼저 살펴봄으로써
구체적으로 근대 사상가들에게 화엄사상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었는지 알
아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논의로서 한용운의 화엄사상의 논의로 들어가면, 한국의 민
족주의를 대표하는 만해 한용운은 승려 · 시인 · 소설가 · 철학자 등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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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면에서 두각을 보인 인물인데, 본 논문에서는 화엄사상가로서의 만해
와 독립사상가로서의 만해의 사상에 중점을 두어 그의 화엄적 민족주의
사상을 살펴보려고 한다. 아울러 그가 파악한 민족의 개념과 독립사상의
교학적인 바탕을 알아봄으로써, 만해의 화엄사상이 독립사상의 수립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본 논문에서 연구된 화엄적 민족주의의 현재
적이고 응용적인 의의를 고찰하려고 한다. 먼저 서구적 내셔널리즘과 화
엄적 민족주의를 비교함과 아울러 민족국가들로 구성되어 현재 통합의
단계를 밟고 있는 유럽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유럽연합 내 회원국들의
관계 등의 문제를 화엄 사상을 적용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여기
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행되는 세계화를 화엄적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2) 선행연구
1) Hutchinson, John, Smith, Anthony D., eds. Nationalism. Oxfor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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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만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문화권을 포함하고 있어서 본
논문의 좋은 방법론적인 바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A. Smith가 쓴
Nationalism and Modernism2)을 바탕으로 하여, 본 논문에 특별히 필요
한 민족과 민족주의의 개념을 정의하고, 식민 지배를 받은 국가에서 나
타나는 민족주의를 연구하고자 한다. 또한 화엄적 민족주의의 현대적 의
의에 등장하는 세계화와 민족국가 등의 현재적인 개념들을 앞서 언급한
두 책을 이론적인 바탕으로 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동양사의 전체적인 개관은 East Asia : Tradition and Transformatio
n3)에 잘 구성되어 있으나,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종교, 즉 불교의
정치적인 역할은 자세하게 서술되어있지 않다. 이런 부분을 보완하기 위
하여 학술잡지인 ‘불교평론’의 2006년 12월호에 실린 ‘불교와 민족주의’
특집을 이용할 것이다. 이 특집은 한․중․일 세 나라의 근대 불교와 민족
주의를 각각 연구하고 있는데, 그 중 박노자의 ‘한국 근대 민족주의와
불교’4)는 한국뿐만 아니라 불교권 국가에서의 불교와 민족의 관계를 연
구하고, 근대 한국 불교와 그것의 민족주의적인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한용운이 그 속에서 가지는 위치 등이 논의 되어 있다.
실제 학계에서는 문학사 · 시인 · 불교인 · 대선사 · 독립사상가 등 다
양한 분야에 공헌을 한 인물인 만해 한용운에 대해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여러 방향으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만해 한용운의 다양한 업적에 대
한 전반적인 연구에 관한 저술로서는 박노순의 『만해한용운연구』5)가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 책은 한용운의 생애 · 불교사상 · 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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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사상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만해 개인에 관한 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본 논문에 필요한 그의 독립사상에 관한 내용의 파악도 용
이하리라 본다.
민족주의와 화엄사상 이 두 가지 주제는 논문의 핵심이므로 더 자세하
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와 독립사상에 관한 논설 · 학위논문이
많은데 그 중 한용운의 민족의식의 발달을 연구하는 김광식의 논문6)과
김상현의 논문을7) 주요 텍스트로 이용할 것이다. 한용운의 대표작인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그가 일본 유학 생활 후 귀국하고 난 뒤 민
족의식이 어떻게 성장하였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김광식의 논문의 핵심이
다. 김상현의 논문 등은 여타 논문들과 같이 한용운의 독립사상의 핵심
을 자유와 평등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만해의 화엄사상을 주제로 하는 논문 중 일부분은 『불교대전』을 중
심으로 하고 있다. 『불교대전』은 만해의 개인적인 사상보다는 여러 불
경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그의 화엄사상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논문들 중 서호천8)의 논문은
한용운의 모든 측면의 바탕인 사사무애 법계연기(事事無礙 法界緣起) 사
상을 중심으로 한다. 그리고 전보삼의 박사논문9)은 한용운의 작품에서
나타난 화엄사상을 분석하고 자유, 평등, 평화 등의 핵심적인 개념을 윤
리적인 입장에서 연구하고 있다.
사실 만해에 대한 문학적 혹은 불교적 업적에 대한 연구는 학계에서 방
대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위에서 본 논문의 참고 자료로서 언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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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이나 서적의 경향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해의 독립사상의 근본이
된 민족주의와 화엄철학의 상관적 연결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 만해의 민족주의
사상에 화엄철학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기존의 만해의
잘 알려진 업적에 더하여 그의 사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
다고 본다.
2. 연구범위와 연구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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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이해하고, Wright, David. "Tan Sitong and
the Ether Reconsidered"12)를 통해 탄스통의 인학을 중심으로 중국의
화엄적 민족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화엄적 관점에서 탄
스통의 인학을 그의 전집을 직접 연구함으로써 이해해 보고자 한다. 일
본에 관하여는, 먼저 피터 두으스의『日本近代史』를 참고로 일본에서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경향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 후에 Ishii
Kosei의 논문13)을 통해 키히라 타다요시의 화엄 사상을 알아보고, 다카
쿠스 준지로의 "The New Japanism and the Buddhist View on
Nationality."14) 등을 중심으로 일본 제국주의 사상에 화엄철학이 미친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민족은 민족주의를 설명하는 데에 핵심적이므로, 두 개념 모두 정확하
게 정의될 필요가 있다. 민족과 민족주의의 개념은 동양에서 유래한 것
이 아니다. 그 두 개념은 근대 시기 새로운 서양 사상으로서 동양으로
유입되었다. 유럽에서 nation과 nationalism이라는 개념들이 어떻게 탄생
하여 역사적으로 발전하였고, 동양에서 민족(民族)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유래하였는지를 발생사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만해 한용운의 화엄적 민족주의를 연구하기 위한 중심적 방법론으로는
한용운의 화엄적 민족주의와 동아시아에서 화엄사상의 정치적 역할을 연
구하고 난 뒤, 위에서 정의한 서구적 내셔널리즘과 비교하고자 한다. 구
체적으로 민족주의의 발달사를 살펴봄과 동시에 각 국에서 나타난 민족
주의적 사회, 정치 현상을 분석해보고,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각 국가
11) Fung, Yu-lan. A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Vol.II. London: George Allen & Unwin
Ltd., 1953.
12) Wright, David. "Tan Sitong and the Ether Reconsidered" in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Vol. 57, No 3. (1994).
13) Ishii Kosei. "Kegon Philosophy and Nationalism in Modern Japan" in Hamar, Imre.
Reflecting Mirrors: Perspectives on Huayan Buddhism. Wiesbaden: Harrassowitz Verlag,
2007.
14) Takakusu, Junjiro. "The New Japanism and the Buddhist View on Nationality." in The
Young East. vol.8, No. 1,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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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 발전 경향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서양의 내셔널리즘을 기준으로 하
였을 때 화엄적 민족주의가 어느 정도의 내셔널리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반면 독립사상으로서의 성격은 어떠한지를 알아볼 것이다. 그리
고 중국과 일본의 화엄사상도 서구적 내셔널리즘에 비교될 것이다.
나아가, 현재 유럽은 민족국가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국
가들의 이해와 고유한 민족 문화로 인해 통합을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
고 있다. 각 국가들 간에 존재하는 정치적, 역사적 이해관계로 인한 갈
등, 그리고 각 국가에서 유지되어왔던 독자적인 제도와 유럽연합이 요구
하는 유럽적인 제도 간의 충돌 등이 문제점이다. 이는 전체적인 통일과
다양함 사이에서 오는 괴리로서, 유럽은 一과 多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에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용운이 민족주의를 논하기 위해 사용한 화엄사상을 이러한
문제의 해결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는 유럽연합에 비하여 자
연스럽고 자발적인 현상이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크게 다
르지 않다. 이는 Global과 Local로 표현되는 一과 多의 문제이다. 따라서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한 태도가 세계화 시대에 어느 정도 필요한 것
인지를 만해의 화엄적 민족주의와 비교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만해의 문학적, 종교적 사상에 대해서는 실
로 방대한 양의 연구와 검토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만해의 불교적 관점
에서의 화엄철학이 그의 독립사상의 중심이 된 민족주의 사상과 어떻게
연결되고 활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된 바가 많지 아니하다. 따라서
만해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의 화엄철학을 연구하는 것은 만해의 정치적
사상가로서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만해의 사상이 제국주의 시대의 저
항 논리로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민족과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답
을 제시할 수 있는 현대적 의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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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민족주의의 의미
1. nation 개념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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껴지고, 실제로 여러 국어사전에서도 nation을 민족, 혹은 국가로 다르게
정의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두 단어는 엄격한 구분
이 필요한 것들이다. 즉, 민족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온 세계
사람을 그 생활양식, 문화유산, 언어 등에 따라 나눈 겨레를 말하며, 비교되
는 단어로서 '체질의 유전적 특색에 의하여 분류되는 인종'이라는 말이나, '
국적에 의하여 분류되는 국민'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민족은 후천적으로 배
워 획득하는 문화유산에 따라 사람을 분류한 개념이라고 표현할 수 있
다.16) 반면, 국민이라는 단어는 사전에서 국가의 통치권 아래 있는 인민으
로서 국가를 구성하는 인간의 집합이고, 국적을 가지고 일정한 권리, 의무
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이 국권에 복종하는 지위에서는 국민, 국정
에 참여하는 지위에서는 공민 또는 시민이라 일컬어지는 것이다.17) 사전적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국민이 '국가'라는 존재를 전제로 하는 개념임에 반
해 민족이라는 것은 문화적, 역사적 동일성을 공유하는 집단을 말하는 개념
으로서 구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 논문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핵심
은 '민족주의'에 관한 것이므로 구체적으로 '민족'이라는 개념을 nation의 개
념으로 사용하여 연구를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여러 방법 중에서 '민족성(nationality)'이라
는 개념은 그 의의가 크다. 그런데 '민족성'이라는 정체성 규정 수단이
정체성을 나타내는 다른 분류 수단과 구별되는 특징은 민족(nation)이라
는 개념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민족(nation)'은 자주성을
기본으로 하여 개인들의 충성의 대상이 되는 집단적 총체를 말하며, 공
동 연대(collective solidarity)의 근거가 되는 개념인 것이다. 다시 말해,
민족이란 동일한 인종적 및 지역적 기원을 가지거나 또는 가진다고 여겨지
는 역사적 운명 및 문화적 전통, 특히 언어, 종교, 역사, 생활양식 등을 공통
으로 하는 기초적 사회 집단을 말하는 것이나18) 인종, 국민의 범위와는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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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흔히 생각하기에 사람의 정체성을 계층, 지역, 종
교 등의 기준으로 표면상 분류할 수 있다고 보지만 이는 유동적인 것일
뿐이고, nation이라는 공동체는 항상 단일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민족이라는 개념에 의존한 '내셔널리즘'의 정체는 무
엇인가? 내셔널리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nation19)의 의미를 정확
히 알아야 한다. nation이란 개념 역시 흔히 일반적으로 주지되는 정의
와 달리 역사적으로 그 의미의 변천을 이해함으로써 그 의미를 학문적으
로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nation개념의 현대적 의미를 갖기 이전의 의미의 변천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탈리아 학자 G. Zernatto의 분석20)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틴어인
natio는 natus라는 단어와 어근이 같고, '태어난다'는 의미의 nascor라는 단
어와 그 유래가 동일하다. 따라서 로마인에게 natio라는 단어의 의미는 '태
어난 것'이라는 뜻이었다.21) 결국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natio는 '출생이 서
로 유사함'을 말하게 되고, 이는 곧 '서로 연결된 집단'의 의미로 관념되었
다. 이와 같이 간단한 언어적 분석을 통해 nation이라는 개념을 '원래부터'
출생에 관련된 단어라고 생각하면 간단히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지만 한편
으로, 이러한 간단한 이해로 인해 오히려 큰 오해에 빠질 위험이 있다. 현대
적인 의미의 nation과 로마시대에 있어서의 natio는 개념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스스로를 지칭할 때 natio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단
적인 예로 로마 제국의 국민은 'populus Romanus(로마의 국민)'라고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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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고 'natio Romanorum'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natio는 외국인의 무리를 가
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외국인은 어느 지역에서 왔든지 간에 natio라는
무리에 속하게 되었고, 외국인으로서의 지위는 로마인보다 낮은 위치에 속
했다. 로마인과 다른 외국인의 언어, 의복, 행동들은 급이 낮은 것으로 여겨
졌고 이로 인해 natio에 속하는 사람들은 천시당하는 경향이 있었다.22)
로마 시대 이후로도 natio라는 단어는 위와 같은 의미로 중세 시대의 대학
들에서까지 쓰였다. 당시 대학들이 설립된 도시에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나
라에서 유학하러 오게 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로마에서와 마찬가
지로 대학에서도 그러한 학생들을 외국인으로 무리지어 규정지었고, 식생
활이나 언어 등에 대한 서로 다른 필요에 따라 출신 지역을 기준으로 각기
다른 학생 집단을 만들어 이를 일컬어 nationes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대
학 내에 형성된 natio는 점차 구성원들의 공통 이익을 추구하는 그룹으로
인식되기에 이르고 결국 공통적인 의지와 의견을 가지는 특수한 공동체가
곧 natio라고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로서의 natio는 19~20세기의 nation 개념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중세의 대학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설립된
시설이었고, 당시의 로마 사회에서의 기독교 집단으로서의 corpus(體)
Christianorum (基督敎人의)은 오직 기독교를 추종하는 사람들로만 구성
되어 있었다. 로마의 기독교 사회는 다른 언어를 가진 공동체를 상정하지
않은 것이었고, 따라서 기독교의 부수적 집단으로서의 대학은 기독교로서
의 영적인 동일성의 표현이었다. 즉,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로마 사회에
서 언어는 라틴어만이 존재할 뿐이었고, 문화 역시 기독교 문화 하나 만을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 내의 nation으로 규정된 학생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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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으로서의 역할과 의미는 대학 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고, 학교에
서 벗어나면 이러한 nation은 기독교 문화로 지배되던 일반 로마 사회에서
는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nationes의 개념은 로마 시대에 발생된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유럽전역으로 전파되어 다른 나라들에서도 대학 내에 이러한 nationes로서
의 그룹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구성을 살펴보면 현대에 사용되는
nations의 개념과 그 의미가 전혀 다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당시 파리 대
학에 존재하였던 4 nations가 대표적인 예이다.23) 4 nations는 각각 '프랑
스 네이션', '피카드 네이션', '노르만 네이션', '게르만 네이션'이었는데, 그
각개 명칭에 나타나 있는 것과는 달리 각각 프랑스인, 피카드인, 노르만인,
게르만인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네이션(nation de France)'은
기본적으로 로만(roman) 언어를 이용하는 학생들 이었으므로 프랑스인 뿐
만이 아니라 스페인인과 이탈리아인까지 포함되었고, '피카드 네이션
(nation de Picardie)'은 네덜란드인들을 지칭한 것이었다. 또한 '노르만 네
이션(nation de Normandie)'은 유럽의 북동쪽에서 온 학생들로 구성된 것
이었고, '게르만 네이션(nation de Germanie)'은 독일과 영국에서 온 학생
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당시의 '네이션'은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규정지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근현대의 내셔널리즘의 개념에서 비롯되
는 민족성(ethnicity) 등의 문제는 그 당시에는 존재하지 아니하였다.
nation들 사이에 서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그 논쟁의 원인은 민족적
인 요소들이 아니라 항상 종교와 학문적인 요소들 때문이었다.24)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중세의 유럽은 기독교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였고, 그
기독교 공동체 하에 여러 민족(people)들이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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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들은 언어, 문화, 법률 등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고 이러한
인식들은 각 민족의 기원 신화를 통해 다양하게 표현되기도 하였으나, 근본
적으로는 모두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화와 이스라엘의 구약 성서 등에 기
초를 둔 것이었다.25) 이러한 기원 신화들은 6세기 무렵의 고등교육을 받은
신부들에 의해 자신의 민족을 당시의 역사적 흐름에 맞추기 위하여 그리스
로마의 신화나 구약 성서를 모티브로 구성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 로마 신화나 구약성서에 동일한 근원을 두고 있음에도 서로 다른 기
원 신화를 구성한 것의 시대적 의의는 당시 유럽이 유일한 교황을 전제로
하는 단일한 기독교 문화권이었으면서도 각 나라가 한 국가에 예속되어있
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유럽 대륙 내에
존재하는 왕들은 각각 별개의 특정한 '지역'의 통치자라는 장소적 개념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그 영토에 사는 '민족들(peoples)'의 왕이라는 개념
에 더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원 신화는 각 왕들에게 있어서
민족의 공동 기원을 정당화할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정치 수단이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의 단일성이라는 것도 완벽한 단일성을 말하
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교회의 대분열과 같은 사건으로 인하여 기독교의
단일성은 그 지위에 침습을 당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실례로서 그레고리Ⅺ
세 교황이 사망한 후 선거를 통해 이탈리아인인 교황이 선출되었으나, 프랑
스 신부들은 이러한 선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고 결국 이들에 의한
또 다른 교황이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교회의 분열은 유럽 각지의
교회 조직뿐만이 아니라, 각 개별 교회의 신부들이나 일반 신도들에게 까지
도 혼란을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논의를 하고자 교회의
대표자들은 1414년 Constance 공의회를 열게 되었다. 공의회는 일반적으
로 소도시에서 열리곤 하였는데, 중세의 대학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의회에
모인 대표자들은 외국인의 집합으로 여겨졌고, 나아가 그들은 당시 대학 학
25) Reynolds, Susan. "Medieval origines gentium and the community of the realm" in
Hutchinson John, Smith Anthony D. (eds.) Nationalism: Critical Concepts in Political
Science. Vol. II. London: Routledge, 2000. pp. 558-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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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중심축이었던 신학의 연구자들이었으므로 그들 역시 앞서 설명한 그
때 당시의 대학 내의 nation과 같은 개념으로 인식되었다. 예를 들어 '게르
만 네이션'은 독일인뿐만 아니라 헝가리, 폴란드, 보헤미아, 스칸디나비아
신부들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프랑스 학자들과 영국 학자들도 같은 nation
에 속해 있었는데, 1417년에 프랑스 학자들이 별개의 nation을 설립할 것을
건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경우 역시 프랑스 학자들이 민
족적, 혹은 언어적 이유로 별개의 nation 설립을 주장한 것은 아니고, 단지
프랑스 왕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왔다는 이유에 의한 것일 뿐이었다.
로마 가톨릭의 권력이 강해지고 그 권력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각
지역별 문화는 발전할 수 없었다. 종교와 언어에 있어서 기독교와 라틴어라
는 획일화된 문화 기반에 결속되어 있었으므로 개별화된 문화의 다양성이
발현되기 곤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술, 문학, 과
학은 점차 교회와 분리되고 있었고, 더불어 교회와 왕국 사이의 다툼이 일
어나기도 하는 상황에서 교회의 세속화가 진행되었고 유럽은 바야흐로 개
혁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익히 아는 바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 문화에 의해 억압되었던 각 지역에서의 서로 다
른 특유한 언어와 문화들이 분화되어 나타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위에 말한 공의회를 기점으로 nation의 의미에는 또 다시 변화의 기회가
생겼다. 당시 공의회에 참석한 회원들은 외국인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지역의 대표자이거나 지도자의 대리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즉 각 회원
들은 자신들의 출신 지역의 대표로서 서로 각 지역을 연결 시켜주는 '관계'
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nation이라는 개념에는 '대표자의 공
동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고, 공동체를 대표하는 사람은 곧
엘리트로 여겨지게 되었다.
Montesquieu도 그의 Esprit des lois2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초기
26) 법의 정신, Esp. XXVIII, 9 (Under the first two dynasties the nation was often
assembled, that is the nobility and the bishops; the commons were not taken into
consid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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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두 왕조 하에서 nation이 종종 소집되었다. 그 nation의 구성원은 귀족들
과 주교들이었다. 평민들은 고려되지 아니하였다.” 이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몽테스키외가 살았던 시대(1689~1755)에 사용되었던 이 nation 개념이
이제까지 설명하였던 그 엘리트, 귀족의 집회를 말하는 것이었음을 분명
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재에 쓰이는 nation의 개념
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의미로서 당시의 nation이라는 단어는 people이라
는 단어에 대비되는 의미였던 것이었다. 라틴어의 populus(백성, 국민,
평민)는 영어의 people, 불어의 peuple에 대한 어원이 되는 말인데 이는
그 populus에 속한 사람들의 지위를 낮추어 부르는 의미를 지니기도 하
였다. 또한 Populatio라는 단어는 주민(population)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면서, 더불어 '파괴하다' '황폐하게하다'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populus라는 집단은 적절히 다스리지 못하면
파괴자, 약탈자가 될 수 있는 대상들로서, 지도자의 정치적인 관점에서
는 적절히 통치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그 의미가 규정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nation이라는 단어가 보다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
는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루이14세(1638~1715) 당시에는 국가가 곧
왕이요, 왕이 곧 국가라고 보았으므로 이른바 특정의 엘리트 집단을 가
리키는 nation이라는 용어는 그 쓰임새가 크지 않았으므로 그 당시에는
nation이나 état라는 단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루이 14세가 사망한 후 ‘L'État, c'est moi (짐이 곧 국가니라)’라는 개
념은 사라지게 되었고, 루이 15세 당시에도 왕권이 국가 자체로 여겨지
지는 않았으며 귀족의 최상위층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될 뿐이었다. 이때
에 비로소 nation과 state라는 단어가 대두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이
는 부를 축적한 시민 계급이 자신들의 계급을 평민 계급과 차별지어 표
현하기 위하여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그 예를 들면, 1858년에 쓰인 무명
의 한 홍보용 게시 글27)에서 계급간의 차이를 말했던 예를 찾아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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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데, "법률가들이 평민(peuple) 계급으로부터 칼의 도움 없이 벗어났
고, 문인들이 호라티우스를 따라하면서 평민을 세속이라고 규정짓고, 예
술가도 평민이라고 일컬으면 안 될 것이며, 상인들이 고귀함을 상업을
통하여 이루니 상인들 역시 평민이라고 부르지 않도록 보호하자."라고
하여 시민 계급을 평민 계급과 분명히 구별하려 하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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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적 변천을 거친 nation개념은 근대에 이르러서
는 민족주의자들에게 주로 사용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개
념을 가지는 관념으로 귀결되어 졌다. 즉, 근대적 nation개념의 근본적
의미는 첫째, 공동의 민족적 기원이 되는 신화와 역사를 공유하게 하고,
둘째, 언어 ․ 종교 등의 토착적 공동 문화에 기반을 둔 신문화의 발달을
가능하게 하며, 셋째, 역사적인 영토나 조국의 경계를 설정하는 기준이
되고, 셋째, 지역적 ․ 경제적인 각 집단들을 단일 집단으로 통일화시키
며, 넷째, 각 구성원에게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갖게 하는 법률 시스템
을 구성함을 그 공통 개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
면 nation의 근대성이 분명히 보이게 된다. 공통 문화나 경제, 법률적 권
리라는 개념들이 모두 근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30)
30) Smith, Anthony D. Myths and memories of the nation. Oxfor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pp. 10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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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셔널리즘 개념의 이해
1) 서구 내셔널리즘의 역사
31) Kohn, Hans. Nationalism: Its Meaning and History. New York: Van Nostrand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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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고대 유대와 그리스
근대 유럽의 역사는 기독교와 로마의 전통을 통하여 고대 그리스 및
유대 사회와 연결되어진다. 이 두 문명의 경우에도 근대 민족주의와 유
사한 측면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즉,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경우에는 씨
족적(tribal)인 공동 의식을 제일 중요시하여 그러한 공동 의식은 유대인
과 그리스인들의 종교의 핵심이 되었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각 구성
원들의 존엄성을 높이는 역할을 하였고 이것은 민주주의 사상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 두 문명과는 달리 다른 문화권에서는 이러한 공동체
의식이라는 것도 왕이나 지도계층에만 존재하는 것이어서 나머지 사람들
은 그 상류층의 신하들로만 여겨지게 되었다. 이런 지배자 계층은 그리
스와 이스라엘에서는 존재하지 아니하였다. 성서의 구약을 보면 민주주
의의 유래가 되는 관념을 찾아볼 수 있는데 평등 의식과 이스라엘 민족
만의 공동적 운명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들이 가지는 민주주의 사상에 대한 특별한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유대인과 그리스인에게는 타 민족과 구별되는 두드러진 민족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민족의식과 고유한 문화의식이 융합되어
생성된 공동체 의식이 그 두 나라의 각 씨족연합을 서로 연대시키고 현
재에 이르기 까지 결속을 공고히 할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유대인의 세 가지 내셔널리즘적인 특성을 살펴보면, 첫째, 유일하게
민족으로서 신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믿는 선민사상, 둘째, 사회 결
속의 근원이 되는 민족의 역사의식, 셋째 민족적 메시아 신앙을 통해 '
민족'이라는 특성을 무엇보다도 부각시켰다. 즉, 유대인은 신으로부터 선
택된 민족이 된 순간에 유대인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따라서 유대교의
핵심은 신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약속 곧 신약(神約)인 것이다. 그 신
약이 곧 유대인을 민족으로 엮어주었고, 신약의 의미는 곧 하나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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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법칙,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연결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타나크32)를 활용하게 되는데 이것은 연대기적인 경
전이 아니다. 그러나 이 경전을 통해서 어떠한 특정 시점부터 이스라엘
인들이 스스로를 goy나 'am 즉 민족이라고 인식하였던 것을 알 수 있
다. 이러한 자존적 민족의식은 어떠한 지족(支族)이나 씨족의 의미를 넘
어선 것임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강한 민족의식은 자연히 그 민
족 외의 외부인은 이방인으로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선지
자(prophets) 시대부터는 히브리인은 세계 역사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과정으로 보고 연속되는 역사 속에서 그 중심을 차지하는 히브리인이 특
유의 역할을 지닌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그리스인은 정치공동체인 도시 국가(polis)에 대하여 최고의 충
성을 바쳐야 한다는 사상을 발전시켜나갔다. 각 시민의 생활은 폴리스를
떠나서는 전혀 상상할 수 도 없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생활은 철저하게
정치화 되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인 역시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다른 민족과는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 민족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인식은 600 B.C.E 페르시아 전쟁 무렵에 유
래한 것이다. 이후 헬레네스와 헬라스 즉 전체 그리스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 사용된 것은 700 B.C.E에 이르러서야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외의 민족들은 bárbaros 즉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차별은 이스라
엘과 그리스 두 문화에서 모두 발생하였지만, 그리스인의 경우가 더 심
하였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모든 인간은 “그의 형상을 따라” 신으로
창조되었으나 유대인이 선민(選民)인 것일 뿐이라고 하여 기본적인 인간
상에는 차별을 두지 아니하였으나, 그리스인들은 야만인의 가치관과 윤
리를 개선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리스인과 야만인의 사이의 전
투를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소크라테
스는 야만인들을 자연스럽게 그리스의 적으로 간주하였고 그리스 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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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 간에 전쟁이 일어났을 시에는 적을 전멸을 시킬 수 없는 것이지
만, 그리스와 야만인이 전쟁을 하는 경우에는 적을 노예로 만들거나 전
멸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걸음 더 나아
가서 그리스인을 자유민, 야만인은 노예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특정한
정치적 내셔널리즘(political nationalism)이 그리스 전역에서 통합적으로
발달한 것은 아니다. 각 그리스인의 충성의 대상은 오직 자신이 소속된
도시국가였다. 각각의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통일된 적이 있긴 하였으나, 그 위협이 없어지자마자 도시
국가들 사이에는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스의 차별적인 세계관을 처음으로 비판한 것은 B.C.E 5세기 아테
네의 소피스트들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내셔널리즘적인 입장에 대항해서
인간의 평등은 본성적인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기 때
문에 태어날 때부터 노예로 정해져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인격적 완성도가 각 인간의 조건을 만든다고 하였다. 그러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위와 같이 그리스인과 야만인의 본성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인도주의적인 입장에 반대하였으므로 B.C.E. 4세기말까
지 그리스 내의 주류적인 정치관은 인도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가 본래 지니고 있는 세계관인 도시 국가적 애
국주의와 인종차별적인 내셔널리즘을 결합시켜 표현하였는데 이것이 최
후의 그리스 polis적인 철학이었다. 특히 소피스트의 인도주의적 가르침
으로 인해 개인이 점점 가족, 씨족과 도시 국가적 관념에서 벗어나게 되
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알렉산더 대왕은 몇
년 후에 도시 국가의 독립을 이루었고 인종 배타주의에서 벗어나게 하였
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소아
시아에서 혈족 관계가 아닌 공통적인 문화에 근거한 천하 통일을 시도
하였다. 그 결과 알렉산더 왕국은 전체적으로 통일된 그리스 문화권에
속하게 되었다. 나아가 동양과의 문화 교류가 가능하게 되면서 '야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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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관념도 급격히 변화하게 된다.
살펴본 바와 같이 과정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일지라도 결국 역사적 발
달의 전개가 유사한 그리스와 유대의 전통에는 민족적인 요소가 남아있
었지만, 세계사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민족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
자체 보다는 그들의 보편화적 사상이었다.33)
ii) 로마제국과 중세 유럽
로마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의 보편화된 사상에 기초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에서는 그리스, 즉 헬라스 정신을 계승하며, 그 정신은 이스라엘의
보편적인 정신과 융합되었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 개념으로
부터 시작되었고, 전 세계(orbis terrarum)를 한 도시로 만들었다. 또한
스토아 철학을 통해서, 각 개인의 조국은 사람이 살고 있는 전 세계
(cosmo~)국가(~polis)라고 보는 cosmopolis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이
와 같은 철학은 도시 국가가 당시에 인식할 수 있었던 세계의 모든 지역
을 동일 법체계와 문명을 기초로 통합시켜 하나의 제국으로 발전시켜 나
가려고 하였던 기원전 마지막 2세기 동안의 로마인의 사상에 큰 영향
을 끼쳤다. 결국 로마 제국의 사상은 고대 희랍 문명에 그 기원을 두면
서도 이스라엘과 같은 민족적 배타성을 띠지 않는 보편화적 세계관을 기
본으로 하는 기독교의 전파를 위한 바탕을 마련하였다.34)
기독교인은 스스로를 이스라엘 민족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면서 새로운
민중으로서 인식하였고 그들 자신을 지친함에 있어 백성, 씨족 등의 단
어를 사용하였다. 베드로 전서를 보면
33) Kohn, Hans. The Idea of Nationalism: A Study in Its Origins and Background.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61. pp 27-60.
Grosby, Steven. "Religion and nationality in antiquity: the worship of Yahweh and ancient
Israel" in Hutchinson John, Smith Anthony D. (eds.) Nationalism: Critical Concepts in
Political Science. Vol. II. London: Routledge, 2000. pp. 439-477.
34) Kohn, Hans. Nationalism: Its Meaning and History. New York: Van Nostrand Company,
1965. p.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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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35)
35) 베드로 전서 2:9-10 (공동번역); 라틴어 Vulgata: “vos autem genus electum regale
sacerdotium gens sancta populus [...] qui aliquando non populus nunc autem populus D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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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키게 되었다. 로마 교황의 전 유럽적 영향력이 점사 쇠퇴하여 감에
따라 게르만족의 정치적 중심은 로마에서 독일 지역으로 이전되었다.36)
36) Kohn, Hans. The Idea of Nationalism: A Study in Its Origins and Background.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61. pp 63-115.
37) Kohn, Hans. Nationalism: Its Meaning and History. New York: Van Nostrand Company,
1965. p.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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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세력과 영토는 점차 감소하고 있었던 가운데, 독일의 문학인
이면서 민족주의자였던 자들은 과거와 민족적 기원신화로 돌아가서 독일
의 민족적 유래를 찾고 스스로를 우월한 민족으로 추켜세웠다.
이 당시 내셔널리즘과 관계가 깊은 종교 개혁자들로서는 루터와 칼뱅
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루터와 칼뱅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영향은 서로
다른 면이 있다. 칼뱅의 종교개혁은 구약의 내셔널리즘을 받아들인 것이
었고, 그에게 있어서 백성과 polis는 종교적인 의미가 컸다. 즉, 백성은
성스러운 백성(peuple sainct)을 말하는 것이었고 국가는 기독교적 국가
(christiana politia)를 상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념들은 훗날 스위스의
민주주의와 내셔널리즘의 발전 과정을 통해 명백히 드러나게 된다. 반면
에 루터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의 가르
침과 사상은 독일 사회와 독일 민족의 필요에 충족되는 것들이었던 것으
로 보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루터가 독일의 내셔널리즘에 끼친 영향력
은 매우 미미하였다.38) 영국이 백년전쟁을 끝으로 유럽 땅에서 물러나
가게 되었던 사건은 영국 내에서는 내셔널리즘 발달의 중요한 계기가 되
었다. 그로 인해 다른 나라에 비해
이 당시에 내셔널리즘의 발달은 지방분권화(decentralizaion)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중세의 로마 제국은 여러 주권 국가로의 출발점이 되었
고 라틴어 외에 여러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으므로 각 지역의 방언은 의
미를 상실하고, 이러한 각각의 독립된 언어의 발전적 변화는 네이션 의
식의 변천에 큰 영향을 미쳤다.
iv) 국민국가의 발생
17세기 이전의 모든 정치적, 사회적 의식에는 종교적이고 보편적인 개
념이 전제가 되어 있었으나 17세기 이후 내셔널리즘의 개념 즉 세속적
38) 성경의 독일어 번역은 독일 민족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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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지역적인 개념이 중심이 되는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에 따라 사람
들의 인식이 새롭게 정리되고 통합되었다.
17세기 초에는 서구 민족국가들(national states)이 스스로를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 국가의 정책들은 당시 통일되
어있는 기독교의 보편적인 정책을 따르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 당시 유
럽 전역으로 세력을 넓히고자 하였던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왕국은 그 통
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교회의 진실한 보호자, 혹은
예수의 가장 충실한 후예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보편주의
가 유럽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국
력 균형의 원칙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 기존 국가들을 단일한 기독교
공동체 하에 속하게 하는 교황과 같은 이상적 권력이 더 이상 필요 없어
지게 되었고, 그러한 권력자의 위치에는 독립국가나 지배자가 대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균형의 상태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하여 확인
되었다.
위와 같은 세력 변화에 의해 보편주의에는 금이 갔지만, 정치력을 가진
민족의 개념이 등장한 것은 아직 아니었으므로 역사의 중심은 국가와 통
치자에 의해서 이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민족주의
(nationalism)가 아닌 국가주의(etatism 또는 statism)가 탄생하게 된다.
왕조는 종교의 위치를 명확하게 규정하였고 충의의 대상은 왕이라는 것
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새로운 충의에는 종교나 내셔널리즘의 정신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1650년부터 1750년 사이의 100년 동안의 정치는
매우 이상적이었다. 18세기 말이 되면서 내셔널리즘이 종교에 대한 정치
적 열망을 대체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정치적인 측면과 정서
적인 측면이 다시 합쳐지게 되었고, 내셔널리즘이 새로운 국가를 합법화
하여 세속화를 통한 국가 스스로의 해방을 가능케 하였다. 이러한 국가
행동의 원칙의 바탕에는 '국가이성’(Raison d'etat)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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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국가 자체의 존재 이념을 강조한 새로운 국가는 교회의 영향
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국가의 통치자는 종교 위에 군림하게 되
었다. 16세기부터는 국가의 통치자가 신민들의 종교를 정하였고, 이에
따라 종교가 가지는 정치적 위치와 의미는 변함과 동시에 종교에도 민족
주의적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절대 왕정이 등장하면서 모
든 신민이 왕 앞에 평등해졌고 국가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변화를 맞이한 국가가 민족적인 성향을 띠기 위해서는 일반 평민들의 정
치적인 관심과 참여가 요구되었고, 이에 따라 내셔널리즘과 민주주의가
동시에 발달되었는데, 내셔널리즘이 자연적 연대 의식에 의지한 것인 반
면 민주주의는 각자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16~17세기에 민족의식이 발달되었는데, 민족의 핵심은 곧
국회였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삼부회가 소집되는 일이 드물었으므로 왕
이 민족의 핵심이었다.
2) 내셔널리즘의 종류
i) 국민주의적 내셔널리즘
국가 정치에 있어서 국민의 적극적 참여와 통합을 전제로 하는 국민주
권주의 혹은 국민국가주의(civic nationalism)에 있어서의 민족주의 사상
이 바로 국민주의적 내셔널리즘이다. 세계가 근대화 과정에 접어들면서
민주화의 강력한 요청이 현실화되는 이념적 단계에서 나타나는 내셔널리
즘을 말한다.
18세기 후반 개인들은 확립된 당국(established authorities)이 국사를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 불만을 느꼈다. 그 때에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깊게 생각하였다. 이때 내셔널리즘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국민주의적
내셔널리즘이 일반적으로 서구 내셔널리즘의 전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그 특징은 ‘아래로부터’의 성격을 갖는 국민형성의 시민적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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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라고 할 수 있다. ‘헤이스’39)도 이 시기에 인도주의적 민족주의 원
리가 하나의 실질적인 운동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하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하여 혁명가들은 민족의 통일과 국민권리를 요
구하기에 이르렀다. ‘인간 및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그들은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 또는 개인도 직접 국민으로부터 위탁받지 않
은 어떤 주권도 행사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불합리하며 민
족의 통일에 저해되는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계급의 차와 특권을 폐지하였으며 귀족의 재산과 명예를 인정하
지 않았다. 길드를 타파하였으며 교회의 재산과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았
다. 또 프랑스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를 법률상 무효로 하였다. 프랑스인
은 시민이라야 하고, 이 시민은 국민이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시민은
개인적 자유를 누려야 하고 국민적 의무를 부담해야 했다. 이렇게 정치
적 민주주의와 인도주의적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와 결부되면서 시민에 의
한 국민적 민족주의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뒷받침한 이론가는 영국의 자유로운 의지에 근거한
‘밀’(John Stuart Mill), ‘벤담’(J. Bentham) 등의 사상에 의하여 출발하
였다. 벤담은 민족적 애국심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증진의 요소로 보면
서 모든 민족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인종, 기후, 종교의 감화 등이 모
든 민족의 차이를 나타낸다고 보면서 민족자결의 권리를 지지하였던 것
이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기조’(Guizot), ‘미슈레’(Julus Michelet) 등에
의하여 이러한 사상들이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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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발생된 여분의 재화와 자본을 국외에서 소비시키기 위해 국민적 통
합을 강조하여 국가 권력을 강화해나갔다. 반면 국민국가 사상이 늦게
발달한 국가에서는 신속한 산업화의 추진을 이루고 국외로의 팽창을 도
모하기 위하여 국가 권력에 힘을 실어주는 국민 국가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와 같이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로서의 전체적 권력의 우월성
을 강조하는 것이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이다.
40) Hayes, C.J.H. The Historical Evolution of Modern Nationalism. New York: Macmillan,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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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탈리아에서는 Guiseppe Mazzini가 봉건적 압제 밑에서 인민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국내적 운동을 전개하였고 자유주의적 민족주의를 실
현함에 있어 도덕적 민주주의와 협력해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러한 민족주의는 배타적 요소의 등장과 함께 구주각국간의 전쟁적 방법
에 의한 대립적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41)
영국이나 프랑스 등 국경과 주권이 있는 국가에는 국민주의적 내셔널리
즘이 나타났는데 이 경우에는 국가라는 테두리 내의 주민들에게 국민이
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이와 달리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같이 여러 연방
국가들로 이루어져 뚜렷한 국경을 이루고 있지 않은 경우에는 민족성
(ethnicity)에 근거한 민족주의적 내셔널리즘이 나타났다. 피히테, 헤겔
등은 nation의 개념을 국민에 한정하지 않고 혈연적·문화적 동질성을 지
니는 공동체로 확장했다. 그리하여 독일의 학자들은 국민(Staatsnation)
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문화민족(Kulturnation)을 말하였다.
국민주의적 내셔널리즘에서는 개개인이 국가에 참여함으로서 국민이라
는 지위를 얻게 되므로 국가는 국민에 바탕을 두게 된다. 반면 민족주의
적 내셔널리즘에서 국가는 민족의 모국으로서의 지위 및 역할을 수행한
다.42)
국민국가가 식민국가가 되면서 약소 후진국들은 저항적 민족주의를 주
창하였고, 이에 따라 내부에서의 자유와 민주를 지향하였던 서구형 민족
주의와는 달리 외부로부터의 독립과 자주를 쟁취하고자 하였던 비서구형
민족주의가 구분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비서구형
민족주의는 후진 식민 국가들의 자주와 독립 사상의 근간이 되는 것이었
으므로 침략국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폐쇄적인 방어적 민족주의를 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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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는 것이고, 한편 이에 비해 서구형 민족주의는 산업화 과정에서
이룬 국민 통합의 여력을 국외로 팽창시키고자 하였던 의도에서 발달된
산물이므로 제국주의의 공격적 개방성으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서구에서 발생되어 발전한 내셔널리즘은 시간이 흐르
면서 비서구 국가에서 국가의 독립과 자존을 찾기 위한 사상적 도구로서
유용하게 도입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내셔널리즘의 거점은 서구 국가
에서 비서구 국가로 이전되기에 이르렀다.
3) 동양적 내셔널리즘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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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지는 못하였다. 단지 이러한 집단들은 중국의 상대적 낙후성을 인정하
여 선진문물을 배워 중국을 강화시킨다는 민족주의적 이념을 가지고 있
었다. 중국의 탈전통사회화는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더욱 어려웠다.
주된 이유는 서구 제국주의 압력에 대한 동아시아 종주국으로서의 자존
심과 내부적 구조로 인해 위로부터의 근대화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탈전통사회화는 제국주의 침략위협 하에서 진행되
었기 때문에 이에 저항하거나 혹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부국강병을 내
세웠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서구의 근대
화 세력은 절대왕권의 부정, 자유주의, 계몽주의와 같은 구체제에 도전
하는 사상이었지만, 동아시아에서 나타난 개혁세력은 제국주의에 대항하
여 구체제를 방어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43)
위에서 언급하였던 대로 이 시기 동아시아에서 나타난 민족의식은 역시
서구화, 즉 서구식 근대화에 관련된 것이다. 서구에서 내셔널리즘은 사
회가 일정한 단계를 거침에 따라 함께 발전해왔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이
미 형성되어 있던 내셔널리즘이 유입된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 형
상과는 괴리가 있었다. 이 사상은 저절로 유입된 것이 아니었다. 바로
지식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선진화된 근대 교육을 받았고 서양
선진 사상에 관심을 두었으며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러한 지식인들은 자주 정치에 개입하였는데 그들은 보통 기존의 정치
구조에 속해 있지 않았다. 특히 식민지와 같은 경우에는 기존의 정치 세
력들과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당시 중국 청나라의 경우를 예를
들어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한 것처럼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간
에 큰 이질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적 구조에 대립하여 본능적으
로 다른 충성의 대상을 찾게 되었다. 이런 후진 사회에서는 사회를 구성
하는 요소들이 다양하지 못 했기 때문에 그 충성의 대상은 자연스럽게
43) 신광영「근대성,근대주의, 근대화와 민족주의」『동아시아의 근대성과 민족주의』한림대학교,
제12회 학술연구발표회, 1996. pp. 7-20.
김영작, 『한말내셔널리즘: 사상과현실』, 백산서당, 2006. pp 2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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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nation)이 되었다.
지식인의 민족주의 사상은 대중들 사이에 아직 민족의식이 존재하지 않
았을 때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은 민족의 업적 중 흥하였던 것들에 대해
재발견하고 재조사하였고 이 모든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는 역시 서양
근대 문물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특히 민족주의자의 첫 세대는 매우 서
구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 세대는 그에 반하여 반서구화를 주장
하였고 민족의 전통과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연구를 행하게 되었다.44)
서구의 내셔널리즘에 대비되어 동양의 민족주의는 두 가지 특수성을 지
닌다. 서구 세력에 의한 침략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민족은 하나의 이데
올로기 아래에서 민족화하여 이를 민족의 독립까지 이끌어 낼 필요가 있
었다. 시대의 특성 상 이러한 과정은 서구에서와 같이 대중에 의해 발생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이끄는 지식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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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다. 16, 7세기 영국에서는 내셔널리즘의 형성
에 유리한 조건으로 새로운 민족의식이 생겨났다. 동시에 서유럽에서 새
로운 정치권력, 즉 절대 왕정이 나타났고 이러한 정치 형태는 프랑스 혁
명의 내셔널리즘과 융합되었다. 또한 당시 엘리트의 가치를 지니던 네이
션의 개념과 평민의 개념이 동의어가 되었다. 이 때부터 대중들이 스스
로를 네이션으로 여기게 되었고, 문화라는 것은 바로 네이션적 문화이며
자기의 삶과 생존을 민족의 생존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
서 내셔널리즘이 대중의 삶에 있어서의 중요한 추진력과 태도를 지배하
게 되었다.
여러 민족성이 수 세기 동안 발달하였고 내셔널리즘 시대에 영국·프랑
스·네덜란드·스위스 등에서 나타났다. 민족주의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미
래의 민족국가가 존재하였다. 서유럽 외에 중앙·동유럽과 아시아에서는
내셔널리즘이 더 늦게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국경은 항상 달랐기
때문에 이런 나라에서의 내셔널리즘은 그 상황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
러므로 이러한 나라들의 목적은 이미 존재하는 국가를 민족국가화하기
보다는 민족에 따라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치와 사회의
발달이 더뎠기 때문에 내셔널리즘은 먼저 문화·철학·예술 등의 분야에서
표현되게 되었다. 원래는 학자와 문인들만의 이데아였다. 또한 서구 외
국가의 내셔널리즘은 서구의 영향을 받았다.
서구의 국가들이 몇 백 년 간 기술과 사회 제도의 발전에 따라 자연스
럽게 근대화의 과정을 거쳐 온 것에 비해 동양의 국가들은 외부의 침략
으로 인해 몇 년에 불과한 시간 안에 근대화되게 되었다. 따라서 동양에
서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지식인을 통해 민족주의가 발전하게 되었
고 민족 운동도 그들의 주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내셔널리즘이나 민족
주의는 서양에서 탄생하여 발달하였고 동양에서 이용되었기 때문에 그
개념의 핵심은 동양과 서양이 크게 다르지 않다. 동서양 내셔널리즘이나
민족주의라는 개념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이해되고 또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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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크게 다음의 네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민족과 민족 국가 발달의 과정
민족에 대한 감정과 자랑
민족을 격찬하는 이데올로기
민족적 열망과 목적의 운동
첫 번째 그룹은 여러 과정을 가리키는데 앞으로 설명될 것이다. 두 번
째의 의미는 민족적 감정(national sentiment)이다. 이 개념은 종종 내셔
널리즘과 헷갈리게 되지만 그 둘은 구별되어서 사용되어야 한다. 아프리
카와 아시아에서의 내셔널리즘에 근거한 이데올로기와 운동은 지식인들
로 구성된 작은 그룹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경우 이데올로기와 운동
만 존재하였지 민족적인 감정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예를 들면 영
국의 역사를 보면 때때로 민족 감정이 나타났지만 그와 관련된 이데올로
기와 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데올로기는 운동을 필수적으로 수반하
지 않지만 운동은 이데올로기를 수반하게끔 되어 있다. 운동이 없는 이
데올로기는 있을 수 있지만,45) 이데올로기가 없는 운동은 가능하지 않
다. 보통은 내셔널리즘적인 사고를 가진 지식인이 그것을 운동으로 실천
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한
‘이데올로기적 운동’으로 불 수 있다.
내셔널리즘적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이의 테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세계는 민족들(nations)로 나뉘고 각 민족은 고유한 특성과 공통
된 운명을 지닌다.
민족만이 정치력의 근원이며 민족에 관한 충성심은 다른 모든 대
상에 관한 충성심을 능가한다.
개개인은 한 민족의 일원(一員)일 때야 말로 진실된 자유를 누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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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민족은 스스로 실현하기 위해 자치가 있어야 된다.
각 민족이 자유와 안전을 누릴 때에 세계의 평화와 공정(公正)이
가능하다.
이 테제들은 항상 내셔널리즘의 핵심이 되어 왔다. 또한 Rousseau,
Burke, Herder, Jefferson, Fichte, Mazzini 등의 이 이론의 중심이었다.
다음 내셔널리즘의 특성은 근대화이다. 서구에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운동이 나타난 때가 18세기 후반이었기 때문이다.
내셔널리즘과 애국주의(patriotism)46)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하지만
이 둘이 서로 같은 것은 아니다. 애국주의는 나라나 국가에 대한 집착을
의미하는 반면 내셔널리즘은 민족에게 nation, 즉 독립된 국가가 존재하
는 지의 여부를 떠나서 문화·역사적 공동체를 위한 이데올로기적인 운동
이다. 또한, 애국주의는 주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반면, 내셔널리
즘은 상황과 시기에 따라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 모두를 띠게
된다.
내셔널리즘적인 운동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는 네이션적 정체성, 네이
션적 동일, 네이션적 자치 이렇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내셔널리
즘이라는 것은 어떤 주민 집단(population)의 일원(一員)이 스스로를
nation이라고 여기거나 nation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길 때 네이션적
정체성·동일·자치를 이룩하고 이를 지속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운동이
라고 정의될 수 있다.47)
근대 세계의 내셔널리즘 운동을 통하여 출현한 내셔널리즘의 형상은 여
러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본 논문에서 연구한 국민주의적 내셔널리즘과
민족주의적 내셔널리즘은 각각 민족의 독립을 전후로 하여 분류될 수 있
46) patriotism patria: 라틴어 모국, 조국, fatherland 라틴어 pater: 아버지
47) Smith, Anthony D. Myths and memories of the nation. Oxfor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pp 10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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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음과 같은 내셔널리즘의 모습들은 동서 유럽 · 아시아 · 아프리카
· 남미에서 나타났다.
48) Smith, Anthony D., National Identity. London, New York: Penguin Books, 1991. pp
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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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은 동서양의 내셔널리즘 역사적 발전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았는데,
그 내용에서 내셔널리즘과 역사적 상황의 상호 관계가 서로 어떠한 영향
을 끼치는지 볼 수 있다. nation 개념의 형성은 세계적으로 nationalism
의 발달을 낳고, 그러한 nationalism의 발달에 따른 역사적 상황의 변화
는 다시 또 새로운 nation 개념의 형성과 nationalism의 등장을 맞게 하
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화된 내셔널리즘은 국민주의적
· 국가주의적 · 민족주의적 내셔널리즘 등의 유형적 분류가 가능한 형태
들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분류적 형태들은 서구의 내셔널리즘의 비서구
세계로 넘어오면서 역사적인 전개 과정에서 그 형태를 달리하면서 나타
나게 된 것들이다. 이러한 내셔널리즘의 개념적 이해를 바탕으로 다음에
서는 구체적으로 민족주의의 개념이 불교적으로 화엄 철학과 어떻게 연
결되는지 알기 위하여, 비서구 내셔널리즘 중에서도 동아시아 국가들,
특히 한국, 중국, 일본에서 민족주의가 화엄 철학과 관련지어지는 사상
적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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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동아시아에서 화엄과 정치의 관계
1. 화엄사상의 핵심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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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를 통해 대승불교의 우주관을 제시하고 있다. 통설적 견해는 화엄경
이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되었다고 본다. 특히 십지품(十地品)은 기원 후
1-2세기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53)
화엄경은 일단 성립된 이후에도 여러 차례 수정․증보․개정되어 여러 이
본을 낳았다. 현존하는 화엄경 가운데 60화엄이 가장 옛 형태를 유지하
고 있고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5세기 초 호탄에 존재하였다.54)
화엄경은 중국과 한국의 사상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고 동양사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화엄사상은 노장사상(老莊思想)과 그
외 다른 전통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동양의 관용적인 정서에 잘 부합 되
어 한국 불교에 있어서는 더욱 주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
화엄경의 근본 사상은 법계연기(法界緣起), 십현문(十玄門), 육상원융
(六相圓融), 그리고 성기사상(性起思想)으로 대표된다. 다음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1) 법계연기(
법계연기(法界緣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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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업감연기(業感緣起)라 부르고 유식종(唯識宗)에서는 뢰야연기(賴
耶緣起)라 하고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진여연기(眞如緣起)라고 하며, 화
엄종(華嚴宗)에서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부르는데 법계연기를 법계무
진연기(法界無盡緣起)라 하기도 한다.56)
모든 사물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여 다 다른 존재로
서 서로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이나 본래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떠한
차별이 없이 평등하고 인연관계에 의해 서로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은 실체(實體)나 자성(自性)이 없는 空한 것이다. 즉 모든
사물은 실상 여러 가지 요소들의 통합 및 상호 의존에 의해 생겨난 조작
적 복합체이며 관계적 구조물이므로, 불가분하고 자존하는 실재 혹은 자
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념의 연장선상에서 부처가 곧 중생이
고 생사가 곧 열반(涅槃)이며 번뇌가 곧 보리여서 일체 만유는 원융무애
(圓融無礙)하여 서로 상충함이 없는 것이다.57)
위에서 살펴본 연기(緣起) 원리를 바탕으로 한 화엄철학의 요지는 상즉
(相卽)과 상입(相入)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상즉과 상입의 원리는 법
계의 무애(無礙)를 가능하게 해준다. 상입은 주어진 하나의 대상 내에서
여러 차원의 다양한 사건들이 함께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예를 들면 여러
전등의 다른 불빛이 동시에 서로 중복되고 융통하는 모습으로 관념할 수
있다.
한편 상즉에 대해서는 인간이 개개의 사물로서 존재하는 분별의 세계에
초점을 두어 사고하는 습관 때문에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원리로서 상
즉에 대해 이해하기는 용이하지 않다. 상즉이란 여러 다른 사물들이 '하
나'임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에 대한 접근은 모든 사물들 사이의 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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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이를 제거해 줄 수 있는 각 사물들의 공통된 본질을 이해함으로서
이루어져야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참된 보편적 동일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공통적인 바탕을 불심(佛心), 진여(眞如), 공
(空), 혹은 이(理)로 부르고 있다. 개개의 물질(事)이 미분화의 원리
(理) 속으로 융화되어 포섭됨으로써 상즉의 진리는 드러나게 된다. 현상
이 본체로 환원되는 이것을 화엄의 언어로 사리무애(事理無礙)라 한다.
이와 같이 우주의 만물 각각이 일체로 연결되어있는 중중무진의 관계를
가지는데 이를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라 부르는 것이다. 이는 곧
내가 이 세상의 개개물물과 연결되어있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반대로 내
속에 이 세계가 들어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한 티
끌 속에 온 우주의 형상이 들어있다‘58)고 하며, 하나가 곧 전체(一即一
切, 一切即一)59) 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상호 연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법
계연기의 궁극적 결론이라고 볼 수 있는 사사무애(事事無礙)의 법계의
무애사상이 성립되는 것이다.
두순의 법계관문(法界觀門)에서 설명된 사법계(四法界)로서 첫째는 현
상 혹은 사건의 경계인 사법계(事法界)와 둘째는 본체 혹은 원리의 경계
인 이법계(理法界), 셋째는 사건과 원리가 완전 자재하고 융섭하는 경계
로서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마지막으로 사건과 사건이 완전 자재
하고 융성하는 경계인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가 있다.60)
이(理)와 사(事)의 화엄 사상적 의미는 여러 개념을 종합하고 함축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이는 '원리', '보편적 진리', '
이성', '추상적인 것', '법칙', '본체', '판단근거', '앎' 등등의 포괄적인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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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사용된다. 사(事)는 '사물', '사건', '개별적 사상(事象)' '구체적인
것', '현상', '물질' 등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사법계를
살펴보기로 한다.61)
사법계(事法界)는 이것은 사물이 서로 다른 대상이나 사건으로 드러나
는 현상적인 세계를 말한다. 여기서는 사물과 사건이 분명하고 독립적인
대상들로 간주 된다.62)
이법계(理法界)는 오로지 현상의 기초를 이루는 추상적 원리 및 모든
원리를 지배하는 내재(內在)의 실재가 드러나는 경계이다. 지각으로 느
끼는 범위를 넘어서는 경계이며, 지성 또는 직관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경계이다. 현상 세계에서 각종 사물간의 상관관계를 움직이는 모든
이치나 법칙들을 조합하는 원리가 되는 것을 말한다.63) 화엄사상가들이
생각하는 가장 궁극적인 이(理)는 우주적 일심(一心) 혹은 공으로 해석
되기도 하는 여여(如如) 혹은 진여 (眞如)를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
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理)의 법계는 사(事)의 법계와 분리된 세계로
관념되는 것이 아니며, 이(理)의 여러 종류가 구체적으로 구분이 되거나
그 범주가 나누어져 그 관계가 구체적으로 규명된 바도 없다. 인과연기
는 사(事)이고, 이실법계는 이(理)로서 이와 사가 둘이 아니며, 따라서
사와 사가 걸림 없는 사사무애의 일진법계(一眞法界)이며, 이러한 일진
법계의 본체는 일심(一心)이 되는 것이다.64)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는 理와 事가 불가분의 단일체라는 경계를
말한다. 이것에 나타나는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事)은 추상적 원리(理)
61) Chang, Garma C.C. The Buddhist Teaching of Totality: The Philosophy of Hwa Yen
Buddhism. University Park and London: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86
(1971) pp. 207-210.
62) “法界宗中無孤單法故 若獨觀之 即事情計之境。” 『註華嚴法界觀門』1 (大正藏 45, p. 684c)
63) “原其實體 但是本心 今以簡非虛妄念慮 故云真 簡非形礙色相 故云空也 理事無礙第二 即此名之
法界”『註華嚴法界觀門』1 (大正藏 45, p. 684c)
64) 해주 스님, 『화엄의 세계』, 민족사, p.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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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발현이며, 원리(理)는 발생하는 사건(事)의 증거가 된다. 이 경계에
서는 이(理)와 사(事)가 상호의존적으로 공존하는 것이며 어느 하나의
존재만으로는 의미가 없다.65) 현실세계의 물리적 변화나 정체된 사물의
실존조차 물리학적 혹은 사회과학적 이론의 발현으로 볼 수 있는 한편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사건(事)이란 언제나 어떤 기초가 되는 원리(理)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와 사는 불가분의 것이고 상호융통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동일하거나 비이원적인(advaya)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공(空)사상에서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명
제에 상응하는 이른바 이사무애인 것이다.66)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법계는 결국 네 번째 경계인 사사무애법계를
설명하기위한 과정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들 범부 중생
들의 입장에서 이 세계를 본 것이 아니라 부처가 깨달음의 경계에서 이
세계를 본 것이다. 범부의 눈으로 보면 가지가지 차별상의 이 현상계는
혼돈과 무질서, 부정과 불의가 팽배한 고해(苦海)와 같다. 그러나 깨달
은 부처의 눈으로 보면 질서 정연하게 운행되고 있는 아름다운 조화(調
和)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 현실 세계에는 아름다운 연꽃이 있는가 하면
악취 나는 시궁창의 오물이 있고, 선이 있는가 하면 악이 또한 있다. 중
생들의 관점에서는 오물이나 악이 전연 없어진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세
계가 될 것 같은데 부처님의 깨친 경계에서 보면 그것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아름답다는 것이다.67) 이와 같은 논리에서 보면 선(善)과 악
(惡), 미(美)와 추(醜) 등등 모든 상대적인 것들은 반대적인 개념으로
존재하지만 대자연의 흐름 속에서 보면 그것은 그대로 전혀 걸림이 없이
질서정연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적 세계를 사사무
애법계(事事無礙法界)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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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상이 주는 의미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각자의 그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각자 해야 할 직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자 자기의 직분을 충실하게 이행할 때 전체로서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에는 독립적 실재나 실체가 없고 사실상 존재하는
유일한 법계는 사사무애법계이며, 그 차원에서의 일체의 개별적 사(事)
는 (理)의 도움 없이 다른 모든 사(事) 속으로 자유롭게 들어가고 융섭
한다. 이 사사무애는 법장과 지엄이 말한 십무애(十無礙)내지는 십현문
(十玄門)을 통해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68)
2) 십현문(
십현문(十玄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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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법계에서 일체의 사물은 언제든지 조금의 모자람이나 빠짐이 없이 원
만하게 사(事)와 이(理), 이외의 모든 것을 동시에 포섭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물을 보는 것은 모든 사물을 보는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
이므로, 하나의 우주 안에 있는 조그마한 낱낱의 입자는 사실상 원만구
족하게 과거와 미래를 통하여 무수한 대상과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다. 일체 제법이 10의를 동시에 구족해서 상응하여 원만히 조화되어 있
으므로 일의(一義)는 다른 9의도 동시에 구족해 있는 동시에 다른 모든
법도 다 10의를 동시에 구족하고 있는 것이다.70)
두 번째,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礙門)은 연기 제법에 넓고 좁음이
있으면서도 그 멀고 가까움에 상관없이 모든 존재들이 아무런 장애가 없
이 서로 자유롭게 연결되고 교류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한계가
있는 좁은 것과 제한이 없이 넓은 것이 자재하여 막히는 것이 없이 존재
하면서도 그 각각의 본래 성질을 잃지는 않는다 함이다. 광(廣)은 한계
를 갖고 있지 않아 밖이 없는 넓음, 즉 무외(無外)이다. 또한 협(狹)은
좁아서 그 안에 공간이 없는 무내(無內)이다. 그러한 큰 것과 작은 것에
자성이 없어 양자가 서로를 포섭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71) 좁은 것과
넓은 것은 하나의 전체가 될 수 있어 서로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자유로
이 서로 교환될 수 있다.
이는 고십현에서는 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을 말하는 것으로,
연기되어있는 법에 순수한 것(純)과 그렇지 못한 것들(雜)이 섞여 있으
나 순수한 것은 순수한 것대로, 잡된 것은 잡된 대로 나름의 자리에 있
으며 이것이 주체의 동시 일념으로 구족 자재함을 말한다.72)
세 번째,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을 살펴보면 절대 이(理)는
하나이지만 현상적 사(事)는 전체이다. 그리고 일체의 사는 이의 발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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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므로 하나는 전체이고 전체는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와 전체가
서로 용납하거나 나아가 동일하다고 말하더라도 '하나' 또는 '전체' 가운
데 하나가 소멸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성이 공하기 때문에 하
나이든 전체이든 걸림 없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나와 전체는
같지 않으나 서로 용납됨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는 하나라는 자성을 가진 확정적인 하나가 아니며, 하나 가운데 전
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존재하지만, 하나는 하나로서 전체가 아니
고 전체는 전체로서 하나가 아니다. 하나는 전체가 아니고 전체도 하나
가 아니어서 각각 그 나름대로의 개성을 가지고 본래의 성질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와 전체의 혼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一)과 다
(多)가 서로 연결되는 것을 상용(相容)이라고 하며, 그 개별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므로 부동(不同)이라고 하는 것이다.
네 번째,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은 상즉의 기본 원리를 다시
설명하는 것으로 일체법을 통섭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요소들이 서로
동일시되어 어떠한 차별로부터도 자유로운 상태를 말한다. 자신을 부정
하고 스스로를 타자와 동일시함으로써 종합적인 동일화가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함께 조화를 이루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상입이 이것과 저
것이 서로 걸림없이 융합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라면, 상즉은 서로 자
기 자신을 무너뜨려 다른 것과 같아지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73)
두 가지가 하나로 융화되는 즉(卽)은 한 물건의 체(體) 그대로가 다른
물건이 됨을 의미한다. 바닷물과 파도가 다른 것이 아닌 것처럼 이사무
애가 곧 상즉이며, 이에 따른 사사무애가 또한 상즉이다. 결국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아니하고 처음이 곧 끝인 것이며, 삼세간이 상즉이어서 융
삼세간불을 이루는 것이며 보살이 중생신을 지어 십불(十佛)로 현현하게
된다.
다섯 번째,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은 숨은 것과 드러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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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어우러져 현상과 본체가 상즉상입해서 일체가 된다는 것으로서, 어
떠한 현상이 드러난 부분의 이면에는 숨겨진 부분이 공존하고 드러난 부
분은 감춰진 부분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고십
현에서는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顯俱成門)으로 표현되어 있다.
《화엄현담》에서 반달의 예를 드는 것에서 그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
는데, 반달은 달의 반이 빛을 발하고 다른 반은 어둡다. 반만이 빛을 발
하여 보인다고 해서 어두워 보이지 않는 다른 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밝음과 어둠이 함께 있어 밝음 아래에 어둠이 있고, 어둠 아래에 밝음이
있다. 다양한 것들 속에서 일부는 드러나고 그 이면에는 많은 것들이 동
시에 가리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편은 보이고 다른 한 편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둘 다 갖추어져 있어 하나가 성립되면 다른 쪽도 자
연스레 이루어지는 모습이다.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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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도 중중무진하게 연기상유(緣起相由)하여 무애자재함이다.76) 이것은
제법이 무애한 원리의 반복적 의미로서 존재가 중중무진으로 서로 얽혀
즉입하는 관계로 계가 계를 끝없이 포용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면이 거
울로 된 방에서는 거울을 통해 나타나는 상들이 수 없이 많으니 이러한
모습이 중중무진의 상태이다. 인다라망경계문은 이러한 무진연기의 비유
로 인다라미세경계망 등의 이름으로 쓰이기도 하고 있다.
여덟 번째, 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은 현상 속에 사법에 기탁
하여 다함없는 법문을 드러냄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적인 설명을 통해
진리를 밝히는 것이니, 모든 연기된 존재가 그대로 법계법문임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 그대로 연기 현전한 것이므로 모든 물물이
전부 비로자나 진법신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비유는 곧 법의 상징
이어서, 법이 비유이고 비유가 곧 법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화엄은 직현
(直顯)으로 상징될 수 있다.77)
아홉 번째,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은 시간적 관점에서 무애를
논하는 것으로 상입으로 인해 과거는 현재와 미래로 들어가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상즉으로 인해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영원한
현재'로 포섭되는 것이다. 십세가 시간에 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상즉,
상입하여 하나의 총합을 이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후 장단의 구별이
뚜렷하여 질서가 정연한 것을 말한다. 과거 · 현재 · 미래의 삼세(三世)
에 각각 삼세가 있어 구세(九世)가 되고 그 구세는 일념에 포섭되므로
십세가 된다. 그래서 일념이 십세무량겁이요 무량겁이 일념이지만, 동시
에 십세는 낱낱이 서로 혼잡함이 없이 구별되어 있는 것이다. 78) 오늘
이 현재인 것은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이지만, 어제의 관점에서 보
면 오늘은 미래가 되는 것이며, 미래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은 과거가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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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래서 오늘은 현재로서의 현재, 과거에서의 미래, 미래에서의 과거
라는 세 가지 의미로 존재한다. 이와 같이 과거나 미래의 시점에서도 각
각 세 가지 의미의 시점이 존재하니 곧 아홉 시점이 되는 것이다. 그러
나 결국 이러한 구세는 찰나 일념에 지나지 않아 구세 십세가 상즉하게
된다.
열 번째,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은 스스로 홀로 생겨나는 것
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물들은 연기의 원리에 따라,
각 인자들의 배합으로부터 생겨난다. 중심 주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와 관련된 인자들의 덕택이며, 반대로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한정된
시각을 가진 한 특정경계의 특정 사건 안에 현상적 질서가 어지럽혀지거
나 무가치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하나의 주체가 허락될 뿐이다.
이는 고십현에서는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을 말한다. 여기서
유심이란 여래장(如來藏)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다. 그 유심은 다시
여래의 과덕을 구족한 성기구덕(性起具德)의 진여일심으로 해석되었다.
일체 모든 존재가 여래성이 그대로 나타난 존재이기 때문에 사사무애 법
계연기의 신비를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유심회전 선성문
은 유심을 이(理)로 보고 선성(善成)된 존재를 사(事)로 보아 이사무애
로 오인할 수도 있어 이 유심회전문 대신 주반원명구덕문을 10문의 하
나로 설정한 것이다.79)
모든 것을 포섭하는 총체성이란 어떤 방식으로도 개개 경계의 질서를
손상시키거나 방해하지 않으며, 둘 또는 그 이상의 별도의 세계들이 한
데 묶인 단위체로 다뤄질 때도 더 넓은 질서를 조금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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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육상원융(
육상원융(六相圓融)
81) Cook, Francis H. Hua-yen Buddhism: The Jewel Net of Indra. University Park and
London: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77. pp. 75 - 90.
82) 『華嚴一乘教義分齊章』4 (大正藏 45, p. 507c) 六相緣起三門分別。初列名略釋。二明教興
意。三問答解釋。初列名者。謂總相.別相.同相.異相.成相.壞相
83) 해주 스님, 『화엄의 세계』, 민족사, p. 211
84) 『大方廣佛華嚴經 (80권)』 34 (大正藏 10, pp. 178b-21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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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도법을 설하는 곳에 이 육상이란 말과 유사한 용어들이 나온다. 이것
에서 연유되어 육상의 이론이 전개되었다.
육상원융으로 체계화된 명칭인 총상, 별상, 동상, 이상, 성상, 괴상이라
는 용어가 그대로 보이는 곳은 『팔십화엄』과 『십지경』이다. 팔십화
엄에서는 보살이 총상 내지 괴상의 모든 바라밀행을 다 설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마음이 증장케 하는 원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이 원을 청량징관
은 수행이리원(修行二利願)이라 명하고 이름붙이고 있다. 여기서는 『육
십화엄』과 달리 육상의 명목이 바로 열거되어 있기는 하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다. 이러한 『팔십화엄』에서의 육상명은 세친이 『십
지경론』에서 인용한 『십지경』에서도 나타나 있다.86)
이러한 육상명의 전개는 화엄종의 지엄을 거쳐 의상과 법장에 이르러
육상원융으로 체계화됨으로써 대표적인 화엄교의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현수법장은『오교장(五敎章)』87)에서 육상을 육상연기라 일컬으면서 구
체적으로 육상의 명칭을 총상, 별상, 동상, 이상, 성상, 괴상으로 나열하
고 그 내용을 설명하면서 지엄의 「육상송」을 소개하고 있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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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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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고, 그럼에도 집이 있다고 집착한다면 인이 없이 과로서의 집이 있
다고 하는 것이므로 상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상은 모든 연이
화합하여 집을 이루는 것이고, 총상은 오직 전체로서의 집을 보고 일컫
는 것이라는 점에서 동상과 총상이 다르다.
반면 이상은 서까래 등의 모든 연이 차별하여 각각의 자리가 부동한 것
을 말한다. 이상으로 인해 동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상은 동상과
구별되면서도 다르지 아니하다. 서까래와 기와가 구별되듯이 만약 다르
지 아니하다면 결국 한 가지만으로 집을 이루는 것이니 이는 근본 연에
위배되어 집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이 별상과 구
별되는 것은 별상이 서까래 등 모든 연이 하나의 집과 다름을 말한 것이
라면, 이상은 서까래 등 모든 연이 서로 바라보아 상대적으로 다른 모습
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92)
성상(成相)이라고 하는 것은 집을 구성하고 있는 그 구성물들의 역할
과 모양이 다르게 존재하지만 하나의 집을 이루는 목적을 성취하는 측면
에서 이를 성상(成相)이라고 부르며 이에 대칭되는 것이 괴상(壞相)이라
부른다.
성상이 서까래 등 모든 연이 각각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집을 이루게
됨을 말한다는 의미는 서까래나 어느 하나의 연이 전체의 집을 이룰 수
없고, 오히려 모든 연이 자법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오히려 집이 이루어
지게 된다는 뜻이다. 만약 서까래가 홀로 집을 이룬다면 서까래는 본래
연의 법을 잃기 때문에 결국 집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
므로 성상은 짓지 않으면서 지음을 밝히는 것이다. 성상이 동상과 구별
되는 것은 동상은 연기가 현전함을 보여주고, 성상은 연기가 무성인 것
이다.
한편, 괴상은 서까래 등의 여러 연이 각각 자법에 머물러 본래 움직이
지 아니함을 말하는 것이다. 즉, 괴상이란 짓되 짓지 아니함을 의미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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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이상(異相)의 부동이 각각 움직이지 않으나 서로 상대적인 의미
를 지니는 것인 반면 괴상(壞相)의 부동은 체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법과 법이 각각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93)
요약하면, 총상(總相)이란 말은 총체, 전체의 상이란 뜻이고, 동상(同
相)이란 그 전체가 하나의 동질성을 이룬 것을 의미하고, 성상(成相)이
란 그 전체가 하나로서 완성된 상을 나타낸다. 별상(別相)이란 전체의
부분들 하나하나를 말하고, 이상(異相)이란 그 하나하나가 특이성을 갖
춘 의미이고, 괴상(壞相)이란 그 별개의 특이한 부분들이 전체의 완성을
위해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지 않음을 나타낸다는 설명이다.
신라(新羅) 의상(義湘)은 세친(世親)과 지엄(智儼)의 육상설에 이어
법장(法藏)보다도 앞서 비유를 통해 육상의를 설명하고 있다. 의상은 일
승법계도(一乘法界圖)를 통해 화엄경의 핵심내용을 설명하였는데 여기서
법성게(法性偈)와 법계도인(法界圖印)을 합한 합시일인(合詩一印)의 반
시(槃詩)가 육상원융에 의해 이루어짐을 밝힌 것이다.94) 도인(圖印)의
상(相)이 갖는 의미를 상세히 밝히기 위해 의상은 육상으로 이를 설명하
는데, 총상, 별상, 동상, 이상, 성상, 괴상의 육상 가운데 먼저 근본인(根
本印)은 총상이요, 나머지 굴곡들은 별상이니 별(別)이 인(印)에 의지하
여 인을 원만케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95) 도인(圖印) 중에서 인(印)
이 원만한 것은 총상이며, 원만한 인의 여러 각과 굴곡은 별상이다. 모
든 각과 굴곡이 한가지로 인(印)인 것은 동상이다. 한가지로 인이나 부
동(不動)하여 각각 다른 것은 이상(異相)이다. 부동하여 다르면서도 한
편에 치우치는 바 없이 곧 바른 인(印)인 것은 성상(成相)이다. 곧 바른
인이면서도 각각 제자리에 머물러 짓지 아니하는 것은 괴상(壞相)이
다.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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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의상은 총 · 별 등 육상처럼 일승(一乘) · 삼승(三乘), 主 ·
伴이 서로 도와 不卽不離 不一不異하여 항상 중도(中道)에 있다고 하였
다. 일승이 주(主)이고 삼승은 반(伴)이나 주반상성(主伴相成)이 되는
것은, 일승으로 말미암아 삼승이 있고 삼승으로 말미암아 일승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승은 삼승을 총괄적으로 포함하는 것이므로 주가 되
고, 삼승은 일승에 의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반이 된다. 그러므로 서로
이루어진다.97) 따라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나 오직 중도에 있다는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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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법계도인(法界圖印)이 행포원융(行布圓融)의 원융으로 이해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육상이 각각 차별하여 하나가 아니면서도 총상과 별상이
다르지 아니하고 동상과 이상, 성상과 괴상이 다르지 아니하다. 또 총상
과 동상과 성상이 같은 세계이고, 별상과 이상과 괴상이 일제(一際)이
다.100) 따라서 육상은 모두 무애원융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4) 성기사상(
성기사상(性起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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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다. 결국, 성기는 본유인체가 중생심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출전
의 과불로서 번뇌가 전혀 없으신 부처가 중생심에 현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수행에 의해 비로소 부처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심 중에
현재 현기해 있는 그대로가 바로 여래의 성기라는 것이다.
지엄은『孔目章』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03) 『智儼集, 孔目章 4』(大正藏 45, 580c) 起在 大解大行 離分別 菩提心中 名爲起也 由是緣起
故 說爲起 起卽不起 不起者 是性起 廣如經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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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개는 여래의 체성을 나타내고, 진리는 여래의 법을 시현하는 것이다.
여래는 불개며 이 불개인 여래의 진리가 나타난 것이 성기법인 것이다.
나아가 법장의 「華嚴經問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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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綠生法은 한 법도 일정한 相으로서 性이 있는 것은 아니다. 自性
이 없으므로 自在하지 아니하니 즉 生하나 不生의 生이다. 불생의 생
은 不住의 뜻이며, 부주는 곧 中道이다 …… 중도의 뜻은 無分別이며,
無分別法은 자성을 고수하지 않으므로 綠을 따름이 부진하니 또한 부
주이다.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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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에서 연(緣)으로 출현함이고, 성기는 법성(法性)면에서 자체 출현함이
다. 연기는 가설인 인분이며, 성기는 불가설인 과분이다. 연기는 수생과
수생본유이고, 성기는 본유와 본유수생이다. 연기는 차별인과이고, 성기
는 평등인과이다. 또한, 연기는 해행이며, 성기는 증입이다. 그리고 연기
문은 연기상유이므로 초발심 위에서 일체 위를 다 포섭하여 정각을 이루
는 반면, 성기문은 법성융통이므로 본래성불이다. 나아가 연기문에서는
즉신성불을 설하고 성기문에서는 즉신시불을 설하여 구래성불을 말한다.
궁극적으로 연기문은 사사무애 법계연기에 증입하고, 성기문은 성기 만
과(萬果)에 증입한다.110)
따라서 연기관은 개개의 존재가 십현육상을 구족하여 모든 곳과 모든
시간에 두루하며, 법계의 전체상이 개개 존재 속에 충만하여 원융무애하
고 주반구족 중중무진함을 관하여 법계에 증입하는 것이다. 반면에 성기
관은 일심진여를 관하여 일심진여의 본각이야말로 본래 청정원명해서 만
덕의 근원이라고 보는 것이다. 번뇌에 묶여 있는 범부에게도 여래출현의
과덕이 갖추어져 있어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스스로 그러
한 덕으로서 인과의정의 체용을 그대로 원만히 갖추고 있다는 것을 강조
하는 것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성기의 불변성을 가리켜 '생함도 멸함도 없
으며 더러워지거나 깨끗해짐도 없으며 늘어나는 일도 없다'(不生不滅·不
垢不淨·不增不減)111)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본성은 생겨나거나 없어지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거울에 비친 형상과 같은 것이다. 중국의 현
수 법장(法藏)스님은 性을 변질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불개(不改)라고
했다. 불개라 함은 인간의 본성은 청정하고 진실해서 변질되지 아니하며
절대선 그 자체로서의 참나(眞我)를 말하는 것이다.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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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에서는 중생도 본래적으로 부처님의 지혜(知慧)와 덕상(德相)을
갖추고 있다고 하여 본래적인 나는 부처님의 생명과 같다고 한다. 그리
고 화엄경에 말하기를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이 티끌만큼도 차이가 없
다고 하였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113). 부처나 중생이나 마음이 각기
다르지만 본래적인 면에는 본질적으로 다름이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
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성기 즉 본래 부처 사상인 것이다. 이러한 것이
화엄경의 성기품(性起品)에 나타난 사상으로 중생 속에 부처님이 계시고
부처님 안에 중생들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부처이므
로 중생이라도 부처로서의 참된 나를 찾아 노력하고 정진해야한다는 가
르침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114)
2. 중국 정치사상과 화엄철학
1) 근대 중국의 역사적 배경
112) Chang, Garma C.C. The Buddhist Teaching of Totality: The Philosophy of Hwa Yen
Buddhism. University Park and London: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86
(1971) pp. 121-136.
113) 『大方廣佛華嚴經 60권』10 (大正藏 9, p. 465c)
114) 카마타 시게오. 『화엄의 사상』고려원, 1993 (1987), pp. 55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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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과 그에 따른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로, 젊은 독서인층(讀
書人層)은 망국의 위기감을 절감하였다. 그들은 패전의 경험에서, 유럽
의 무기·기술만을 도입하려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의 한계를 깨닫고, 전
통적인 정치체제·교육제도 개혁으로서 부국강병을 실현해야만 중국이 근
대세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즉, 캉유웨이와 량치차
오는『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바탕으로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베이징에서 정치결사인 강학회(强學會)를 만들고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일간지도 발행하며 개혁파 관료와 지식인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그러
나 결국 이 운동은 서태후(西太后)의 쿠데타로 100일 만에 좌절되고,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담사동을 포함하여 6명의
청년개혁가들은 처형당했으며, 황제도 강제로 격리되었다. 근대적인 학
교설립 등과 같은 몇몇 온건한 개혁정책들이 계속 시행되었지만, 과거제
도는 다시 부활되었고 그때까지 실행되지 않았던 개혁에 관한 대부분의
칙령들은 취소되었다. 20세기에 헌법제정·국회개설을 목표로 한 입헌(立
憲)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청조타도(淸朝打倒)·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한
쑨원[孫文] 등의 혁명운동이 활발해졌다. 변법자강운동에서 시도된 과거
제도의 폐지나 근대적 대학의 설립 등은 후에 신해혁명의 기초가 되었
다. 청나라는 1906년 새로이 헌법을 제정하고 입헌군주국으로 변화를
선언하였고, 1911년 5월 헌법에 의거한 새로운 내각을 발표하였다. 한
편, 당시 청나라의 군대였던 팔기군은 태평천국의 난과 청일전쟁을 거치
면서 급속히 약화되고 대신 이홍장의 신식 군대인 북양군의 영향력이 강
화되었다. 이홍장의 뒤를 이은 위안스카이는 북양군을 더욱 강화하고 각
지방에 군사학교를 세워 장교를 양성하였다.
근대적 대학의 설립과 군사학교 등을 통해 신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
이 늘어나자 이들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화흥회’,‘광복회’ 등의 혁명단체가 통합되어 쑨원을 대표로 하는 중국 동
맹회가 성립되었다. 1911년 우창에서 우연한 충돌이 발단이 되어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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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우창 봉기는 당시 무르익은 혁명의 기운에 도화선이 되었고 이를 발
단으로 이후 당시 남부지방의 대부분의 성(城)들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을 선포하고 혁명군에 가담하였다.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각 성은 통일 혁명중앙정부의 수립을 위해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 ‘각성대표회의’ 등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혁명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 동맹회 등 통일된 혁명세력이 각 성
의 무장 봉기에 가담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체적이
고 일률적인 규율이나 지도 체제가 없었다.115) 일단 청조와 구체제에 반
대하기만 하면 입헌파든 공화파든 가리지 않고 무장봉기에 나섰기 때문
에 봉기가 성공하여도 실제 지배권은 입헌파 등의 반동세력이 가지고 있
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군은 위안스카이와 협상하는 방향으로 국면을 전
환하여, 혁명세력이 강했던 남부지방과 위안스카이 등 청조세력의 북부
지방간의 협상인 ‘남북의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혁명군 자체의 통일성,
단결성 결여와 위안스카이에 대한 호의적 여론과 서구 열강의 지지로 인
해 혁명군은 위안스카이와의 정치적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
의화가 개시되고 양 측 대표의 협상 중에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대총통으
로 하는 임시 공화국 정부를 세우자 담판은 일시 중지되었으나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조건부로 총통직을 양보하겠다는 제안을 한 후 협상이
지속되었다.
협상의 결과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의 종말을 실현시켰다.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는 자신이 황제에서 퇴위하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퇴위칙령을 발표하였다. 이로서 268년에 걸친 만주족의 중
국 통치는 종말을 고했으며 기원전 221년 진 시 황제부터 내려온 2,133
년 동안의 황제의 통치가 막을 내렸다. 이어 쑨원은 임시공화국 정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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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총통직을 사직하고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됨으로써 중국은
왕조에 통치에서 벗어나 비로소 공화국가로서의 정치 체제를 시작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민족 국가로서의 본격적인 인식과 전환의 계기가 된 것은 중
일 전쟁이었다. 문화를 지키고 민족을 지키는 방식은 민족국가(국민국
가) 성립 후에 국가보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고, 중일 전쟁
의 발단은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116) 중일전쟁은 1937년 일본제국
의 중국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
속되었고, 이는 20세기 아시아에서의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117) 1931
년 이후 두 나라 사이에 간헐적으로 교전이 있었으나, 전면전은 1937년
이후로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항복과 함께 1945년에 종료되었다. 전쟁은
수십 년간 계속되어 온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의 결과였으며, 이는 원료
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을 정치 · 군사적으로 지배하려는 것이었
다. 동시에 중국의 민족주의와 민족자결주의의 대두가 전쟁을 불가피하
게 만들었다. 1937년 이전에는 소규모의 지역적인 전투가 있었을 뿐이
었으나 1931년 일본이 만주사면을 일으켰고, 그 연장에서 일어난 1937
년의 루거우차오 사건(盧溝橋事件)으로 두 나라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
다. 1937년부터 1941까지의 기간에는 중국이 단독으로 일본에 맞섰으
나, 진주만 공격 후의 중일 전쟁은 더 큰 규모의 제2차 세계 대전에 포
함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국공내전이 심화되면서 중국 근대 상황
은 점차 불안이 가중되었다. 예상 밖에 공산 홍군의 승리를 거두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이는 봉건 중국과의 단절과 동시
에 신중국이라는 중국 역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시대가 도래하였
116) 김영진, "근대 중국 불교와 민족주의"『불교평론』, Vol.8 No.3/4 (28/29), 2006.12. p.48.
117) Bix, Herbert P. “The Showa Emperor's 'Monologue' and the Problem of War
Responsibility”, in Journal of Japanese Studies, Vol.18, No.2. (1992 Summer), pp.295-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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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을 의미하였다.118)
1960년대 문화혁명을 계기로 중국의 좌경화가 가속화 되었다. 문화혁
명을 통한 개혁개방을 주창하면서, 전통과 과거를 부정하고 혁명의 기치
(旗幟)를 세웠다. 이 때에 불교 역시 배격의 대상이 되어 당시 불교계의
모든 지위가 박탈되고 고승들은 투옥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중
국은 80년대에 이르러서는 개혁개방의 성과를 바탕으로 변화된 세계적
정치 상황 속에서 시장경제의 도입이라는 큰 과제를 실현하면서 오히려
전통 중국으로의 회귀를 꾀하고 있다.
2) 근대 중국에서 불교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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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민족주의 이론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량치차오가 민족과 국가
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였던 것과는 달리 장타이엔은 국가와 민족을 철
저히 분리된 개념으로 보았다.
이러한 결과로 장타이엔에게 있어서 국가는 만주족이 통치하는 청(淸)
을 가리키는 것이 되고, 따라서 그는 청정부를 대체할 한족 중심의 새로
운 국가를 지향하였다. 결국 신해혁명을 통해 청나라가 사라지고 난 후
민족국가의 건설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면서 불교계 역시 전국적인 조직
을 갖추고 스스로의 권익 보전에 매진하면서 적극적인 국가 건설 작업에
참여 하였다. 장타이엔(章太炎)은 중화민국의 건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그 역시 확고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종교를 통해 신심을
일으켜 국민의 도덕을 증진해야 하며, 국수(國粹)를 이용해서 종성(種
姓)을 격발하여 애국의 열정을 증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119) 당시 민
족주의 사상이 주요한 정치적 주제였던 상황에서 장타이엔은 이론적으로
성숙된 민족주의의 실현을 추진할 근원이 될 수 있는 것이 불교라고 보
았다. 종교심과 혁명도덕을 연결하여 이를 지식인들에게 필요한 덕목으
로 세우고, 이를 위해 그가 우선적으로 주장하는 불교 이론은 화엄학과
법상학 이었다.
- 68 -
을 진보된 근대 국가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불교와 민족주
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장타이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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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교육과 계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나, 당시의 중국의 시대 상황을
볼 때 이미 제국주의의 발달과 산업화를 이룬 서구에 맞서기 위해서는
비약적인 발전과 강한 결집이 요구되고 이는 결국 교육이나 계몽 보다는
종교를 통한 단결과 통일된 목표의 지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그는 유교는 교육의 수단이지 종교가 아니고, 서구 열강의 제국주
의의 바탕이 된 기독교가 중국의 바탕이 될 수 없다고 보아 불교만이 중
국 사회를 진보로 이끌어줄 종교라고 보았다. 즉, 량치차오에게는 불교
가 서구 제국주의의 침습에 대항하면서도 중국을 하나로 단결시켜 줄 정
치적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불교이론이 곧바로 민족주의로 연결되는 것
은 아니지만, 장타이엔과 량치차오는 불교를 민족주의 실현의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약해진 청 제국은 쓰러지게 되고, 1912년 4월
당시 불교계의 대표격인 징안(敬安)을 중심으로 ‘중국불교총회’가 설립
됐다. 이것은 중국 최초의 근대적 불교 조직이다. 전국 규모의 조직이
성립하게 된 계기는 지방 정부나 중앙 정부가 진행한 묘산흥학(廟算興
學) 운동에 대한 저항이다. 당시 지방 권력자들은 신식교육과 미신타파
라는 명분으로 불교와 도교를 공격했다. 도관이나 사원의 재산을 빼앗아
학교를 짓거나 그 경비로 충당하는 일이 계속 일어났다. 이런 상황은 상
당히 오래 지속되었고, 이에 대해 불교계는 재산을 지키고 자신의 지위
를 확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학교를 짓고 사회사업을 하는 경우가 발생
했다. 이것은 변화된 사회 내에서 불교계가 자신의 역할과 지위를 찾는
노력이었다. 중국불교총회의 장정(章程)은 당시 중국 불교의 성격을 명
확하게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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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국불교는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국민의
행복”이라고 언급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중생’의 이익이 아닌 국가적
측면에서의 ‘국민’을 말하고 있다. 당시의 당면 과제는 국가건설이었으므
로 근대적 국민국가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위해 중국 불교역시 국가와 국
민에 초점을 맞춘 불교의 발전 방향을 설정하였던 것이다.
중일 전쟁 이후 불교계는 항일 정신을 강조하는 한편, 후방 지원을 위
해 부상병이나 난민을 돌보고 고아를 교육하였다. 서구가 아닌 일본과의
전쟁은 ‘동양의 가치’로 자리 잡았던 불교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하였다.
즉, 세계 종교로서가 아닌 민족 종교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
이다. 극난극복의 정신적 지주로써 불교가 자리하게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그에 따른 국공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산 홍군의
승리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불교계는 개별적인 활동을
마치고 국가관리 체제에 참여하게 되어 중국불교협회가 공산당과 밀접하
게 관련을 맺고 체제를 운영하였다.
1960년대에는 문화혁명의 발발로 중국이 급속히 좌경화 되었는데 개혁
개방이라는 성과를 거두는 가운데 불교는 강력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개방이후 80년대에는 근대불교 연구열풍이 다시 일어나게
되고 신중국 당시의 불교 억압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에서의 전통 지향
적 경향 속에서 불교는 새로운 부흥을 맞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불교적 민족주의 사상가들은 서양의 근대화된 문화와 불
교 교리를 동시에 추구하면서도 그것들을 절대시한 것이 아니라 중국 고
유의 전통과 특유성을 지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전통에의 존중은 당시
청의 지배 윤리로 쓰인 유교적인 도덕과 과거 중국의 사회 문화의 답습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가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형태로서의
중국 전통 문화에의 지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혁명 사상의 발전에 화엄사상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사상가는 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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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譚嗣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에서는 탄스통의 사상 속에
나타난 화엄사상을 위주로 설명해보고자 한다.
탄스통(譚嗣同)은 19세기 말의 젊고 유능한 학자이자 개혁가로서 유교,
불교 그리고 서양의 사상을 절충하여 새로운 체계를 설립하였다. 그는
戊戌六君子 중 한명으로, 1989년 戊戌政變때 처형당한 인물이다. 그는
고위 관료의 아들로, 북경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가족 중 일부
와 그 자신도 디프테리아로 목숨을 잃을 위기를 넘기면서, 그는 본가가
있는 湖南지방의 瀏陽으로 떠났다. 그의 어린 시절이 다분히 불행하였던
영향으로 인해 이후 저술하게 되는 글들을 통해 전통적인 중국 가족의
가치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는 5번이나 과거에 낙제하였으나, 시강(新
疆)으로 가서 지방관을 수행하는 동안 중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지방 관
습을 연구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과 토론을 즐겼다. 그는 많
은 수의 수필과 서찰 그리고 그 시대의 일대기를 작성하였다.
1890년대에 이르러 그의 사상은 유교의 금문경(今文經), 다수의 불서
들, 그리고 서구 사상의 번역본들을 읽음으로 성숙되어 갔다. 그에게 가
장 큰 영향을 끼친 동시대 개혁가는 캉유웨이(康有爲) 일 것이다. 비록
탄스통은 그에 비해 고전적인 학자로서는 부족했지만, 사상가로서는 더
욱 날카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125) 그가 공부했던 서양 도서의 번역본
들은 그에게 서양 과학이 그가 생각했던 불교와 유교의 양상과 잘 들어
맞는다고 생각했다.126) 그의 가장 철학적으로 주요한 저술서인 인학(仁
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25) Fung, Yu-lan. A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Vol.II. London: George Allen & Unwin
Ltd., 1953. p. 692.
126) Wright, David. "Tan Sitong and the Ether Reconsidered" in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Vol. 57, No 3. (1994), pp. 55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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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수학, 과학 그리고 사회학에 대한 저서를 비롯하여, 신약에도 정통
해야 한다. 중국의 서적중에서는 『易』,『春秋公羊傳』『論語』『禮
記』『孟子』『壯者』『墨子』『史記』[...] 등에 마땅히 정통해야 한
다."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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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테르는 원소들의 원소로, 따라서 개인은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
고, 조직은 조직으로서 존재할 수 있으며, 형상과 형상은 서로간에 소통
할 수 있다. 탄스통이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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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 계급이 폐지되면, 상급과 하급사이의 평등이 있을 것이다. 公理
를 따르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평등이 있을 것이다. 千里, 萬
里를 넘어 전 세계가 한 가족, 한 사람이 될 것이다.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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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선념은 마치 어떤 장애물도 없이 만리를 가는 전신을 보내는 것처럼
반드시 응답을 갖는다. 이 인의 힘은 중국의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용되어질 수 있다. 그는 심력이 악용되어 질 수 있고, 힘은 그
자체로 진실한 성공을 이루어 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선한 점 보다
악한 점이 더 많기 때문에 중국이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좋
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우방으로서 점령해오는 이들을 주시해야 한다고 그
는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국이 자강에 집중하기 위해 우리들의 모든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心力의 운용을 통한 定見에
대한 불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상과 모든 중생의 구제는 중생에 의해
모든 것이 어떻게 인지되어 있는지 달려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의 철학
을 다른 철학과 차별되게 한다. 그는 힘이 아닌 사고에 집중했다.
탄스통은 캉유웨이의 大同思想을 발전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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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형태들이 그 본질이 손상되지 않고도 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만물
의 전체성을 강조하면서 탄은 사회의 계층적 사회 조직과 민족국가를 주
장하는 군주제도는 다른 것과 자신 사이에 장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만
물의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다.133)
仁은 인간들을 以太란 매체를 통해 연결하므로 신사회의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왕들은 신하를 통제하기 위해서, 관료들은 백성들을 통제
하기 위해서, 아버지들은 아들을 복종시키기 위해서, 남편들은 아내들을
억압하기 위해서 헛된 범주를 사용해 왔으나134), 그 사회속의 개인들은
그러한 헛된 범주로 나뉘지 않을 것이다. 같은 논리를 이용하여 남녀에
대한 차별, 여성에게 행해진 전족 풍습, 식용을 목적으로 한 살생
등135), 이러한 헛된 행동은 만물이 통일성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인식론적인 오류는 모든 악의 근원이다. 탄스통의 사
상은 근본적인 평등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철학적 사상에 따르
면, 후에 국가들이 없어질 것이라고 예측하였다.136)
본 논문의 입장에서 탄스통의 철학은 미래 大同의 세계에서 민족과 국
가들이 없어지기 때문에 민족주의라는 사상의 화엄 철학을 통한 초월로
볼 수 있다. 탄스통의 철학은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군주 주의적 입장
과는 많이 달랐다. 그의 사상은 실은 공산주의들이 말하는 “국가의 쇠
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탄스통의 사상은 공산주의의 계급
투쟁과 달리 조화로운 세계관이었다.
3) 근대 중국 불교와 화엄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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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의 지식인인 캉유웨이 (康有為), 탄스통(譚嗣同), 장타이엔
(章太炎) 등은 화엄과 유식학을 공부하고 그것을 개혁과 혁명을 위한 정
치적 주장에 적용하여 중국 정치와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본
장에서 살펴볼 량치차오는 당시 중국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
로 만해가 그의 『飮氷室文集』을 통해 칸트의 인식론과 자유론을 수용
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반면 장타이엔은 량치챠오의 국가주의를
비판하고 반만주족 혁명을 주장하였으며137), 서구적 근대를 수용하면서
불교의 구체적 보편화를 희망하여, 과학적 사고에 기반을 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불교를 추구하였다. 장타이엔이 宗敎心과 國粹를 연결하면서
내세운 불교이론은 화엄학과 유식학이었는데, 화엄적 평등의 입장에서
당시 漢族과 滿洲族의 관계를 비판하였다.138) 탄스통의 가장 큰 관심은
봉건주의에 대한 비판과 개인을 사회제약으로부터 자유화시키는 데 있었
다. 탄스통 역시 유식․선․화엄사상을 정치 이념에 흡수하여, 그것을 ‘仁學’
이라 칭하고, 화엄의 사사무애의 평등의 관점139)에서 위와 같은 문제들
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3. 일본 정치사상과 화엄철학
1) 근대 일본의 역사적 배경
137) Hao Chang. Liang Ch'i-ch'ao and Intellectual Transition in China: 1890-1907. Taibei:
Rainbow-Bridge Book Co., 1971 pp. 238-250.
138) Laitinen, Kauko. Chinese Nationalism in the late Qing Dynasty: Zhang Binglin as an
Anti-Manchu Propagandist. London: Curzon Press Ltd., 1990 pp. 48-83.
139) 『仁學』,『譚嗣同全集』 pp. 29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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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는 상당히 번영한 편이었다. 산업화 이전단계의 상업혁명이 이미 달성
되어 근대적 기수로가 공장제도가 들어오자 곧 근대 경제를 이룩할 수
있는 제도 및 관습이 형성되어 있었다. 동시에 이러한 경제적 변화로 인
한 사회 체제의 혼란 때문에 경제 개혁과 산업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할 수 있었다. 즉, 당시의 경세 성장의 기조에서
상대적으로 경제적 지위가 약하였던 사무라이 계층의 불만이 커져가고,
소수의 개혁사상가들은 지도계층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회적
불만은 서양 세력의 침투가 본격화 되면서 과격한 정치 행동으로 바뀌어
갔다.
변혁을 지향하는 내부적 세력의 요구와 개항을 요구하는 서양 세력의
압력 속에서 막부(幕府)는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는데 실패하였고, 오히
려 개혁을 주창한 내부 세력의 막부에 대한 불만이 서양세력의 침습으로
인한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다까시마 슈우한(高島秋
帆 1798~1866), 사꾸마 쇼오잔(佑久間象山 1811~1864), 다까노 죠오
에이(高野長英 1804~1850) 등 蘭學者들이 서양 군대에 비교한 일본 군
사의 낙후성을 지적하고, 일본의 도덕적 우월성과 정치 방법으로 일본의
독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보았으며, 외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서양의 과학 · 기술 · 총포를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고 보았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140)
존왕양이(尊王攘夷)운동을 통해 외세를 배격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지
만, 막부(幕府)는 힘을 얻지 못하였고 오히려 그 권위는 상실되어 가고
있었다. 막부의 부활을 위해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군사적 자
강과 주요 제도의 정비를 내용으로 하는 전반적인 개혁을 시도하여, 서
양식 내각제를 도입하고 서양식 무기를 공급하는 등의 개혁을 통해 중앙
집권화된 근대적 국가로의 변형을 꾀하였다. 그러나 반대파는 오히려 막
부 지배의 종식과 천황(天皇)중심의 새로운 정부 수립을 도모하는 명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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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였다. 이에 도구카와 막부는 막을 내리고 명치
천황(明治天皇)에게 권력이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는 명치유신의 주도세
력이 혁명적이면서도 대부분의 근대혁명과는 달리 왕정복고(王政復古)를
내세웠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명치유신의 보수적 왕정복고 사상 뒤에는 일본 전체를 새로운 방향으로
근본적인 개혁을 이루려는 ‘천황의 정부’의 시도가 계획되고 있었다. 배
외감정이 여전이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오히려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적
극적으로 도입하여 일본을 서양 국가와 같이 부강하게 하려는 부국강병
책(富國强兵策)이 강한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폐번치현(廢藩置縣) 이
후, 중앙 정부는 모든 면에서 지방통제를 강화하여 실질적인 중앙집권화
를 이루었고, 농업과 토지의 정비하는 한편 징병제를 도입함으로 인해
사무라이는 몰락에 이르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상공업을 장려하여 일
종의 국가자본주의 정책을 추진하였고 궁극적으로 서양 선진국에서 유행
하던 민간 기업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당시 정부는 농민들이 낸 세금을
자원으로 하여 기업진흥 정책을 현실화 시킬 수 있었는데, 이는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기반으로 한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을 통해 경제적 근대화
를 이루어 낸 결과라 할 수 있다.141)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 세력의 거센 반대와 저항이 있는 가운데 실험적
인 정책의 시도로 혼란과 불안정이 나타났던 1870년대 초와는 달리,
1880년대에는 보수적인 경향의 증대와 함께 일본은 안정의 시기를 맞이
하였다.
1870년대 초 쇄국과 고립정책에서 벗어난 일본은 점차 대외확장의 욕
구를 가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주변 국가들과의 영토 분쟁 문제가 주요
한 외교적 이슈로 작용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초기의 제국주의적 입장은
원료나 새로운 시장 및 해외 투자기회의 확보를 위한 경제적 목적인 것
이기 보다는,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의 대외적 위기에 자극되어 전략적으
141) 위의 책,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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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한 서양식 제국주의로의 변화를 추구한 것이
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해외팽창의 첫 번째 관심은 한반도에 집중되었다.
1876년 포함(砲艦)의 힘으로 조선을 개항케 하고 나서 조선을 강력한
경제적 군사의 거점으로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던 친청파(親淸派)의 영향으로 조선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강화되고 있던 상황이었고, 자연히 청일(淸日)간에 조선을 두고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1894년~1895년 사이의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일본은
부국강병을 위한 일본 정부의 그동안의 노력에 힘입어 중국군을 항복시
키고 제국주의 국가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미국과 영국은 일본을 새로운 국제적 세력으로 보아 호
의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다른 유럽 국가들은 일본을 동등한 대열에 포함
시키려 하지 않았다.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의 후원아래 일본이
청일전쟁의 결과 획득한 요동(療東)반도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
것이 단초가 되어 러일전쟁(露日戰爭)이 발발하게 된다. 일본과 러시아
의 대결의 주된 무대는 역시 한반도였고 결과적으로 청일 전쟁 이후 중
국으로부터의 독립을 확인받았음에도 조선은 여전히 러시아와 일본의 세
력다툼의 근거지가 되었다. 1905년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는
결국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정치 군사 경제적 우월권을 인정하였고, 미국
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도 이에 따라 일본의 국제적 위치를 인정하게 됨
으로써 공식적으로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명치시대까지 일본의 외교정책은 대만 식민지와 한반도의 방어, 중국에
서 일본의 특수 권익을 보호하는데 있었다. 이러한 기본 목표는 일본 내
에서 광범한 지지를 받았으며 거의 모든 일본인들은 이 점에서 관념적으
로 제국주의자였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전략을 달성하는 방법론에 있어
서는 견해가 나뉘었다. 즉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협조해야 한다는 주
장과 독자적인 길을 걸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갈라졌다. 특히 독자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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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갖는 특수성을 역
설하면서 일본의 정치적, 민족적 우월성을 제국주의의 명분으로 삼았다.
1차 대전 종결 이후 일본 외교는 열강과의 협조라는 온건 방침으로 선
회하게 되는다, 이것은 이전의 ‘독자노선’ 정책이 결론적으로 일본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서양 국가들의 불신과 중국의 반감을 사게 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한 것이었다.
온건적 제국주의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만주사변(滿洲事變)’이후 협
조 외교를 뒤엎고, 군국주의적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 당시 군국주의는
직업적인 군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일반 국민에게 까지 보편화되어
군국주의적 사상이 사회 전반에 팽배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고도로 집권화된 국가 사회주의 형태를 추구하게 되는
데, 대표적인 국가 사회주의 사상가 기따 잇끼(北 一輝, 1883년~1937
년)는 사회 · 정치 · 경제의 모든 면을 전체적으로 지배함으로써 국가의
힘을 동원해야한다고 강조하였다.142) 그의 목표는 전체가 하나로 되는
사회 곧 계급갈등이 없고 천황(天皇)의 직접 지배 아래 아이사의 7억
형제들을 식민지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통일된 사회에 있었다.
이러한 국가 사회주의 사상은 당시 군국주의 사상의 주요한 사상적 근거
가 되어 주었다.
만주사변 이후 정치적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로 들어가게 되면서, 일본
이 내우외환에 위협받고 있다고 믿은 이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소화
유신(昭和維新)’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일찍이 막부의 전제
로부터 명치천황(明治天皇)을 구했듯이, 민간 지배자들로부터 소화천황
(昭和天皇)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일본이 위기에 처할 때 마
다 민족주의적 가치에 호소하여 민족적 결집을 이끌어내는 일본의 민족
주의적 제국주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소화유
신이 성공적인 결과를 낳지는 못하였지만 이후 정당 정치가 쇠퇴하고 다
142) 위의 책,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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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군부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점은 일본의 제국주의가 민족주
의를 수단으로 유지되고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1941년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의 발발(勃發)은 일본 국민들의 감정을
고양되게 만들었다. 1930년대 말부터 일본 정부는 ‘국민정신동원운동’의
일환으로 반서양 선전을 전 국민에게 주입하고 민족주의적인 가치의 강
조를 통해 전쟁을 정당화하여 일본인들 스스로가 전쟁을 통해 위대하고
성스러운 과업을 수행한다고 믿게 하였다. 더 깊은 의미에서는 전쟁 노
력에 집중함으로써 1920년대 사회적 분열과 1930년대 초의 경제적 곤
경으로 상처받은 일본 사회가 다시 결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상대적으로 동남아시아에서는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서양식
민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곳에서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
동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① 신불습합(神佛習合)
일본 근대의 시작점인 명치유신 당시 천황제를 중심으로 한 제정일치의
근대 국가 설립에 불교가 동조함으로써 그 체제의 질서에 편입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신정(神政)국가
를 이루기 위해서는 신사(神社)와 관련된 행정의 최고 기관인 진기칸(神
祇官)의 설치를 통해 통치의 근간으로 삼으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신
불분리 정책이 필요하였는데, 이는 일본불교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의 역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신불습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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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대륙을 통해 국제화를 이루어 일본에 전해진 후 일본에 토착화하
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이념이다. 불교는 신불습합 사상을 바탕으로
자연신에 대한 숭배를 지켜온 신도를 체계화 하는데 공헌한 외래 종교였
다.
유교와 더불어 불교를 통치의 근간으로 삼은 쇼오토쿠 태자(聖德太子
574~622)에 의해 불교가 상류의 사상적 흐름을 지향하게 된 점도 있지
만 종래 전통 신앙과의 공존은 양자를 늘 긴장시켜왔고, 신불 상호간의
내적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통치자들이 불교와의 전통적인 관계를 외면하고 신
도의 독자성만을 강조한 결과 요시다와 이세 신도의 부흥이 일어났고,
이 두 신도는 명치유신 전후의 폐불훼석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지
되었다. 중세와 근세를 통해 신불습합의 과정에서 사원과 신사의 역할이
분리되었지만 양자의 마찰이 없이 현생의 사회를 지배하는 천황제와 사
후의 세계관을 지배한 불교가 별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명치유신 다음해인 1869년 명치천황(明治天皇 1852~1912)은
야스쿠니 신사를 세워 천황을 위해 전사한 자들을 제신(祭神)으로 합사
(合祀)하였는데, 야스쿠니의 근본적 성격은 천황의 현인신(現 人神)으로
서의 신성성(神聖性)의 재확립을 통한 절대적 세계관을 천황제 국가로서
확립하려는 의도가 담겨진 것이었다.143) 1874년 천황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후, 이것이 관례화되면서 천황주의와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이
념적 근거지가 되었다. 야스쿠니 신사가 천황제의 절대화를 위한 수단으
로 부상한 것은 전통적 관점에서 볼 때 불교의 배제라는 결과를 낳기는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천황신도의 본산인 이세신궁(伊勢神宮)의 내외궁
이 밀교의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의 양계 만다라에 의해 규정
되고 이를 기본으로 권위를 강화시켜왔다는 점은 불교의 상대성에 의해
143) 원익선,「천황제 국가의 형성과 근대불교의 파행」, 『불교평론』, Vol.8 No.3/4 (28/29),
2006.12. pp. 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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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발전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신도와 불교는 서로 분리
되면서 변화, 발전을 거듭하였지만, 어느 하나를 부정하고 공격할 때 다
른 하나도 결국 존재의 의의를 상실함과 동시에 부정되는 모순을 드러내
게 된다. 천황제에 의한 근대 국가의 일탈은 신도에 대한 불교의 이러한
견제와 자극의 전통을 무너뜨린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② 왕법불법(王法佛法)과 황국불교화
명치유신 전 에도 말기에는 주로 왕법불법 일치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는 반외세, 반기독교적인 입장에서 호법불교를 통한 양이(攘夷)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토진종(凈土眞宗) 서본원사
파(西本願寺派)에 속하는 게추쇼오(月性 1817~1858)이었다. 불교 호법
사상을 대표하는『불법호국론』에서 그는 왕법과 불법의 불리를 주장했
다. 카시와하라 유우센(栢原祐泉)에 의하면 게초쇼오는 여기에서 호법 ·
호국 · 방사(防邪, 반기독교 사상)사상의 일체관을 보이고 있다. 이는 단
지 불교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었던 것이 아니고 그것을 허락하는 일반적
인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144) 이러한 시대적인 일반론은 명치유신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주장되고 있었다.
이러한 불법왕법의 논리는 이후 황도(皇道)불교화의 논리로 연결된다.
일본에서 천태종의 사이쵸(最澄767-822)에 의해 처음으로 불법을 진제
로, 왕법을 속제로 설정하는 진속제의 이론이 형성되었다. 이에 대해 신
란(親鸞 1173~1263)은 세속에서 지켜야 할 세속적인 법을 인왕, 즉 속
제로 놓고 극락왕생을 진제로 보았다. 근대에 이르러는 이러한 종조의
가르침에 대한 비약을 통해 황권에 대한 복종과 한발 더 나아가 천황에
대한 보은마저 속제의 가르침으로 변질된 것이다. 진종에서 보은의 의미
는 미타명호(彌陀名號)를 그대로 믿고 받드는 것에 의해 왕생정토가 결
정되며 이에 따라 이러한 보은감사의 염불을 통해 절대적 타력에 의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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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믿음을 갖는 일관된 삶을 뜻한다. 이러한 진속2제의 교설은 이후, 청
일전쟁,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의 침략과 제2차 세계대
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신도(信徒)인 일본국민을 전쟁에 휘말리게 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는 제국주의 열강에 합류하는 동시에, 중국과
한국 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던 청일전쟁에 대해 교단 들어 참전자를
독려하는 사상적 수단이 되었고, 군국주의에 의한 침략전쟁 중에는 불법
의 가르침마저 속제, 즉 왕법의 종속으로 완전히 기울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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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別帳)은 1872년 사청제도가 폐지된 후, 호적법이 제정되면서 호적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막부에 의해 본말사의 실태 조사가 실시된 후
전국적 차원의 신도 체계가 확립됨에 따라 단가제도는 사원경제의 방편
과 수탈책으로 전환되기도 하였다.
본말사제도로 시작해 사청제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제도들은 민중을
타율적으로 사원에 속하게 함으로써 국민의 생활전반을 지배하는 의식체
계로 만들고, 더불어 장제화(漿劑化)되가는 불교와 맞물려 전국민화 되
었다. 단가제는 명치유신 이후 종교의 자유가 법제화되었음에도 해체되
지 아니하고, 현재까지도 일본 사원 경제의 근간이 되고 있다.
신불분리를 통한 제정일치의 근대국가 지향은 이러한 단가제도를 기반
으로 한 교단 불교 정착과 상호 관련을 가지고 발전해 나갔으며, 명치
정부의 천황제 절대 권력의 확립은 일본 전통의 가족 관념을 기반으로
조상 숭배를 중요시하는 가(家)의 관념에 의해 지지되었으며 이는 교단
불교의 단가제가 가(家)의 단위로 성립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145) 단가
제를 기본으로 구성된 종교적 관념을 바탕으로 하여 가(家)의 확대된 형
태로서 천황 중심의 제정일치 국가를 이루려 하였던 것에 본질이 있다.
군국주의와 아시아에 대한 패권주의, 제국주의적인 주변국의 식민지화
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념으로 팔굉일우(八紘一宇) 사상이 가(家)의 관념
의 표출이 극대화 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타나카 치가쿠(田中智
學 1861~1939)가『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라의 중심을 하나로 하
여 수도를 열고, 천하를 덮어서 하나로 만들면 좋지 않겠는가(兼六合以
開都, 不亦可乎)”라고 하였던 것에서 나온 개념인데, 세계를 일가(一家)
로 보아 일본 국내 차원을 넘어서서 세계를 향한 천황제의 확장을 정당
화하기 위한 사상적 근거로 삼은 것이다. 이는 군국주의를 지향하는 불
교가들의 주요한 명제가 되었다. 진종 본원사파 22대 종주였던 오오타니
코오즈이(大谷光瑞, 1876~1984)는 일본의 이상이 대동아 공영권과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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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경제권 실현에 있다고 하면서 지구를 취하는 것이야말로 팔굉일우
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46) 즉 전 세계를 정복함으로써 진정
한 천황의 일가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고, 불교 교의의 왜곡을 통하여 군
국주의에 대한 종교적 지지를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와 같이 일본에서의 신도와 불교의 상호작용은 가(家)의 종교라는 개
념을 기초로 군국주의 또는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사상적 배경을 낳았
고, 이를 통해 국내에서의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화를 강력히 하고, 이를
기반으로 국외로의 세력 확장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근대 일본에서 화엄사상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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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질서 건설의 발판이 여기에 있다. 여기에서는 개체와 전체가 하나이
며, 일즉일체(一卽一切)·일체즉일(一切卽一)의 국체만다라야말로 무아
(無我)의 법에 입각한 총체화의 세계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 존재가 아니라 상보적(相補的) 존재이며 거기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무진연기(無盡緣起)의 법계가 있다. [...] 에베
오손(江部鴨村)의 『화엄경강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나라의 조상신은 하나이면서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절대신이고, (중략)
부처도 일다상즉(一多相卽), 주반호융(主伴互融)의 여래이다.
여기에 신과 부처의 일치하는 마음이 있다. (중략) 황국 일본의 팔굉
일우와 화엄의 연화장세계는 일치성, 유사성을 지닌 (중략) 제국주의
가 아닌 일다상즉, 주반호융의 연화장세계적 팔굉일우이다.
황실에 의한 불교의 도입과 17조 헌법의 제정, 동대사 대불전과 국
분사, 국분니사의 건립의 사실은 우익과 군부의 폐불운동에 대한 일본
불교의 자기방위의 주된 근거이며, 동대사 대불전의 비로자나불을
『화엄경』의 본존불로 보는 것에 의해 화엄사상과 황국사상의 융화
혹은 일치를 말하는 것이 일본불교의 기조가 되었다.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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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한 논문집 『국가와 불교』에는 법학자인 오노 세이이치로(小野淸一
郞)와 함께 하야시야 토모지로(林屋次郞), 미야모토 쇼손(宮本正尊), 하
나야마 신쇼(花山信勝), 시바노 쿄토(芝野恭堂), 요쵸 에니치(橫超慧日)
등의 일류 불교학자들이 불교와 국가의 연결을 강조하면서 불교는 충군
애국을 가르치는 것임을 논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모든 학자들이 어떠
한 형태로든 쇼토쿠 태자의 불교를 거론하고” 있었다.150)
이들 학자 중 하야시야가 ‘천황이 곧 국가’라고 하는 구조는 ‘화엄교학
을 배경으로 하면 한 점의 모순도 없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이야
기하고 있는데,151) 이는 역설적으로 불교와 국가의 ‘모순’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화엄교학을 들고 나오지 않으면 천황과 국가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불교측에 자신감을 주었다.
다만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쇼토쿠 태자와 화엄을 이용하는
것은 불교 공격에 대한 변명의 소재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소재의 범
위를 넘어서 성전을 고무하기 위한 열광적인 주장으로 변해갔다. 미국과
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후의 시기에 니시다 키타로와 고야마 이와오, 니
시타니 게이지 등 교토학파라고 불린 니시다 문하의 사람들도 빈번히 화
엄교학을 이용한 이론을 전개하여 불교계와 불교 학계만이 아니라 학생
과 지식인의 눈을 화엄에 향하게 하였다.
국가주의적 불교를 지향하는 풍조는 메이지 시기 이래 늘 이어지고 있
었고,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의 대외적인 위기의 시기에는 다나카 치가
쿠(田中智學)의 국주회(國柱會)등이 이를 계승하고 있었다. 일련종(日蓮
宗)과 선종, 그 밖의 승려와 거사들의 국수주의적인 활동이 얼마나 성행
했는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쇼와 시기에도 불교의 각 종파는 국가주
의화 되었고, 특히 1931년의 만주사변 이래 종파별로 황도불교화가 진
전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와 불교학계에서 화엄교학과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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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의 의의를 강조한 것은 1940년경부터였다.
특히 만주사변 이래, 일본이 아시아를 통일하고 지도하는 형태가 되어
구미의 열강과 맞서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지게 된 것도 주목할 만하
다. 한편 국내에서는 각 계층에서 대립이 심화되어 정부는 그 융화와 통
제를 추진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이 필요하
였기 때문에, 쇼토쿠 태자와 화엄교학, 동대사가 이제까지와 달리 주목
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152)
1937년 문부성이 간행한『국체의 본의』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152) Ishii Kosei. "Kegon Philosophy and Nationalism in Modern Japan" in Hamar, Imre.
Reflecting Mirrors: Perspectives on Huayan Buddhism. Wiesbaden: Harrassowitz Verlag,
2007. pp. 326-327.
153) 石井公,成 「憲法17條が想定している爭亂」,『印佛硏』第41卷 第1號, 1992. 12. [재인용,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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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와 같이 무(武)를 강조하는 것도 헌법 17조와 공통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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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근대 일본의 학계와 불교계에서 민족주의가 어떻게 발전하
게 되었는지 살펴보기 위해, 민족주의적 불교 사상 발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키히라 타다요시의 사상과 다카쿠스 준지로의 사상을 중
심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1910년대 이전까지는 화엄교학은 거대한 교단을 가지고 있는 종파가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주의와의 접근이 두드러진 일련종, 선종, 정토진종
등과 달리 사회적 영향은 미약하였다. 따라서 당시 화엄관계의 개설서,
주석서 등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단 드물게 헤겔 학자로 유명한 키
히라 타다요시의 연구가 있었다. 1923년 키히라는『행(行)의 철학』(岩
波書店) 이라는 저서의「화엄경과 파우스트」라는 장에서 “산천초목과
국토의 일체중생을 조직한 대만다라로서 천지의 신들과 그 밖의 보살의
대조직계를 표현한 것을 『화엄경』이라고 한다.”고 이야기하여 헤겔과
병칭된 『화엄경』을 칭송하였다. 이후에도 키히라는 여러 곳에서 화엄
과 헤겔을 병칭하고 있다. 그는 헤겔의 철학이 칸트의 철학에서 발전된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칸트의 철학을 ‘진여연기(眞如緣起)에 해당하는
스피노자의 철학과 법계연기(法界緣起)의『화엄경』을 논리화한 것에 해
당하는 라이프니츠 철학’의 생각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또
『화엄경』은 논리로서의 진여연기와 법계연기의 양쪽을 융합한 형태로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다. 요컨대 키히라는 기본적으로는 헤겔과 『화엄
경』을 동일한 수준으로 간주하면서 빈번히 화엄교학의 교판(敎判)의 사
상을 이용하였던 것이다.156)
『행의 철학』의 경우 쇼토쿠 태자의 화(和)의 사상에 관한 언급이 보
이지 않으며 화엄교학과 화(和)의 사상은 아직 연결되고 있지 않다. 그
러나 이 책의 마지막 제12장에서 보면, 헤겔에 기초하여 “국가는 […]
구체적인 진리이다.”라고 단언하고 “우리는 일본인이다.”라는 구호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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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마무리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키히라의 헤겔과 『화엄경』 해
석은 실은 그대로 일본국가론, 일본정신론에 이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
다. 다시 말하여 키히라는 법계연기, 진여연기로서 논리화되기 이전의
통합된 존재 양상을 『화엄경』에서 발견하고, 그러한 통합적인 입장의
살아 있는 예를 천황, 국체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1930년에 간행된
『일본정신』(岩波書店)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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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며, (동대사의) 대불은 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주장은 실은 메이지 시기 이래 일본 사상계의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던「교육칙어」에 기초하고 있다. 1932년에 간
행된 키히라의 『일본정신과 변증법』(문부성 사상문제연구회 편)에는
그 점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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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의 부분으로, 신민 가운데에 천황과 같은 최고의 덕을 갖춘 사람
이 포함되면 일즉일체의 법계연기가 되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천황
과 대등하다는 것이 된다. 일즉일체는 민주주의로 갈 위험성이 있다고
하는 지적은 “장소(場所)의 논리 또는 사사무애의 철학은 황도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아나키즘의 근거가 되어
버린다.”고 말하는데, 그러한 입장에서 니시다 철학과 화엄교학을 이용한
전시의 불교학계의 전쟁 책임을 물었던 이치가와의 주장과 평가는 반대
이지만 인식에서는 통하는 면이 있다.
사실, 키히라가 중시한 화엄교학이라는 것은 무력에 의한 공격을 정당
화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키히라는 일본의 무(武)를 정당화하기 위
한 수단으로 화(和)를 끄집어내었다. 1933년 국민정신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우리 신(神)의 개념에 대하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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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 중의『우리 국체에 있어서 화(和)』를 펴냈는데, 여기서 그는 17조
헌법의 ‘사리자통(事理自通)’을 ‘사(事)와 리(理)의 대립을 걸림 없게 하
는 사사무애법계의 실현’이라고 해석하였고, 화엄의 십현문(十玄門)을
‘곧 비로자나의 작용’이라고 이야기하는 등 끊임없이 화엄교학을 이용하
여 국체를 논리화하려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키히라 타다요시에게 있어서 화엄 철학은
일본국가론, 혹은 황국 사상, 나아가 무(武)를 조화(和)의 합리화에 대
한 강력한 논리적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160) Takakusu, Junjiro. "The New Japanism and the Buddhist View on Nationality." in The
Young East. vol.8, No. 1, 1938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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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지배적인 사상이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161) 다카쿠시 준지로는 일본
에서 전체주의가 다른 어느 국가에서 보다 우수한 형태로 실현되었기 때
문에 서구적 형태의 전체주의를 일본사회에 도입할 필요성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카쿠시 준지로는 서양의 전체주의를 분석함에 있어
서, 중세의 서양에서는 백성위에 2가지 권력이 있는데 하나는 종교적 세
력가로서의 교황과 정치적 권력자로서의 왕이 그것이다. 이 두 권력들은
정치적 영향력에 있어서 경쟁관계에 있었고, 이러한 관계는 결과적으로
갈등을 낳곤 하였다. 그리고 권력자에 의한 통치는 백성과 정부의 이익
간에도 마찰을 낳았고 이러한 시스템은 백성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에 실
패하였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권력자와 국민과의 갈등은 권력에 대한 저
항을 가져오게 되고 기존 정치세력을 정치적 정당들로 교체하게끔 하여
민주주의를 발생시켰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한 다카쿠시 준지로는 민주
주의가 민중의 행복을 촉진하는 독재정치(autocracy)보다 나을 것이 없
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는 전체주의의 강화를 통해 천황국
가를 완벽하게 실현하는 것이 국민의 결집을 통한 신일본제국을 건설하
는 목표가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가족’이 가장 자연적인 형태의 ‘완벽한 전체주의적 집
단(perfect totalistic institution)'이라고 하였다. 모든 가족 구성원은 공
통의 이익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공통이익의 실현에 있어서는 가족이라
는 시스템이 인간 본성에 있어서 철저히 자연발생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결집에 대한 정당화의 논리나 철학조차 요구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이것을 이를 국가의 관점에서 천황이 바로 모든 백성의 아버지(common
father)가 되고, 그는 모든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며, 그 가족의 구성원으
로서의 국민은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아버지, 즉 천황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일본에 있어서 전체주의는 자연발생적인 ‘가족’이라는 개
념을 상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므로, 이론이나 철학을 넘어선 당위적 사상
161) 위의 책.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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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었고, 가족이라는 개념만큼 일본 국민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사상인 것이다. 다카쿠시 준지로의 전체주의 사상에서는 일본
의 천황제가 이러한 가족개념에서 파생된 것이어서, 중세 시대 왕정 국
가들에서 왕과 국민들 간의 마찰이 빚어졌던 것과는 역설적으로 오히려
천황이 국민의 공통적 아버지가 되어 국민의 섬김을 받는 것이 자연스러
운 것으로 여겨지게끔 하였던 것이다. 일본에서의 천황은 가족의 가장으
로서 당연히 섬김과 존경을 받는 대상이지, 서양에서와 같이 거부와 저
항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카쿠시 준지로는 다른
어느 국가에서보다 일본의 전체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본보기가 될 수 있
다고 생각하였다.
또, 다카쿠시 준지로는 신일본주의는 불교의 전체주의와 분리될 수 없
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불교의 전체주의는 철저하고 완벽한 원칙이
며, 일본은 전체주의 그 자체임이 명확하기 때문에 변칙적이고 독재적인
서구의 전체주의를 도입할 필요조차 없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는 비
록 서구의 전체주의의 도입에 반대하는 것이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고
있지만, 몇몇은 외부의 전체주의 원칙을 수용하는 것의 장점을 받아들이
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설명하기를, 만약 그러한 원칙이 필요
하다면 불교에서 그 완벽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화엄경
의 ‘법계연기’라고 하였다.162)
다카쿠시 준지로는 ‘연기(緣起)’라는 것은 곧 ‘상호 관계(mutual
relationship)'를 의미하며, 결국 상호관계로서의 연기는 전체주의의 의미
한다고 보았다. 그는 사물이나 사실들 간에 조화를 이루기는 매우 어렵
고 현실적으로 사회의 곳곳에서는 경쟁이나 대립 관계가 빈번하게 일어
나고 결국은 자연적이고 필연적이게 개인주의가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전체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계연기를
162) Takakusu, Junjiro. "The New Japanism and the Buddhist View on Nationality." in The
Young East. vol.8, No. 1, 1938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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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모든 것이 모든
다른 것들과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나아가 모든 사람이 그 자신의
자아를 폐지하고 자기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동일시해야하며,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조화를 이루며 스스럼없이 협력해야 한다고 하였다. 다카쿠
시 준지로는 그것이 ‘일반적 유통(general mobilization)’의 세계라고 정
의하였다. 163) 그는 이러한 이상적인 세계는 불교에서 ‘일심법계’ 혹은
‘연화장 법계’라고 불리며, 때로는 ‘화엄으로 요약되기도 한다고 설명한
다. 이는 곧 모든 사물이 상호 연관되고, 상호 의존하며, 서로 협력하며,
서로를 수용하는 세상인 것이다.
쇼무 천황 시대(724~749 A.D.)이래로 화엄경의 전체주의는 일본의 통
치에 있어서 기본 원칙으로 차용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66개의 지역으
로 나뉘고, 그 각각에 본사(本寺)가 세워지면서, 종교적인 또는 정치적
인 혼란이 뒤따르면서 일본에서는 시기적으로 화엄적 전체주의 사상에
위기가 찾아오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혼돈의 과정에서
오히려 국가 수호나 국가의 충언자 역할을 하는 사원들이 등장하게 되면
서 일본 불교는 국가의 보호자로서의 임무를 깨닫기에 이른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카쿠시 준지로는 화엄적 전체주의 사상은 하나의 원칙으로서
만 세워져야할 뿐이지 일본제국의 전체주의 위에 혹은 그에 반하는 교리
로 세워져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하였다.164) 그는 신일본주의가 실질적으
로 전체주의의 바탕에서 세워져야하고, 그 기초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
(無我, self-lessness)의 개념 위에 존재해야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전체주의는 이타주의(non-egotism)와 무아(self-lessness)의 원리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완벽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화엄의 일심법계는
무아의 원칙에 기반을 두어 세워진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이고, 무
아는 곧 자기부정(self-negation)으로부터 나오며, 이는 다시 윤리적 교
163) 위의 책. p.13
164) 위의 책.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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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로서의 이기주의의 부정과 이타주의의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3) 근대 일본화엄사상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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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히라의 화엄 사상에서는 한편으로는 신민이라 할지라도 천황과 같은
덕을 갖춘다면 일즉일체의 연기에 의해 국민 개개인이 천황과 대등하다
는 결론을 낳게 되므로, 반국가주의적인 면도 있었다.
한편 다카쿠스 준지로는 화엄이야말로 불교에 있어서의 전체성 이론으
로서, 전체주의와 화엄법계를 연결할 것을 강조하였다.165) 다카쿠스 준
지로는 전체주의 사상을 신일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사상으로 세우면서,
민족을 ‘혈통의 문화(culture of blood)’를 통해 이해하고, 가족 개념을
통해 천황을 국민 공통의 아버지로 정의하면서 그에 대한 충성을 전체주
의의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그는 일본의 전체주의를 가장 자연스럽고
이상적인 것으로 보면서, 서구의 전체주의보다는 오히려 화엄에 근거한
법계연기 사상을 통해 전체주의의 이념적 근거로 삼고자 하였다. 즉, 각
국민들 사이에 또,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법계연기적 관계를 이룸으
로써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고, 이것이 곧 다카쿠스 준지로가 말
하는 이상적이고 완벽한 일본의 전체주의가 되는 것이다. 일본이 근대에
시기적으로 지역적 분권으로 인해 많은 혼란을 겪을 때에도 이와 같은
화엄적 연기 사상에 바탕을 둔 전체주의에 힘입어 다시 전체주의적 통합
을 이루어 냈다는 점에서 일본에서 불교의 지위가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
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카쿠스 준지로는 불교의 화엄적 연기
사상도 하나의 원칙으로서 성립될 수 있을 뿐이지, 일본의 전체주의의
상위 개념이 되거나, 전체주의에 반하는 교리가 될 수 는 없다고 보았
다. 다만, 그는 불교적인 이타주의와 무아(無我) 사상이 기초가 된 전체
주의는 무엇보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통치 이념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165) Takakusu, Junjiro. "The New Japanism and the Buddhist View on Nationality." in The
Young East. vol.8, No. 1,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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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이념적 합리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의 내셔널리즘은 천
황제에 의해 뿌리를 내렸고, 서양 열강으로부터의 위협을 극복하고 국가
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 적극적인 형태의 내셔널리즘을 선택하게 되었
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화엄적 연기 사상을 통해 전체주의로서의 조화
를 강조하고, 천황제를 기반으로 제국주의적 팽창을 시도하는 것을 화엄
적 연기의 실현이라고 합리화하는 것이 일본의 화엄 사상의 가장 큰 특
징이라고 하겠다.
4. 한국 정치사상과 화엄철학
1) 근대 한국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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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는 한편 조선 후기 사회 안의 계급 대립을 더욱 고양시켰다.166)
이후 봉건 체제 하에서의 수탈과 권력적 모순의 심화가 가중되었고 이
에 따라 봉건 체제에 저항하는 농민 항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이러
한 학문적 기반으로서 실학이 크게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홍경래, 우군
칙, 이희저, 김창시 등이 주축이 되어 봉기된 1811년의 평안도 농민 전
쟁을 시작으로 봉건 지배층의 수탈과 억압에 저항하는 농민의 항쟁이 잇
달아 일어났다. 각 농민 항쟁들이 가졌던 내부적 한계나 봉건 정부의 강
경한 대처로 봉건체제의 완전한 붕괴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더라도, 당시
동요하던 조선 봉건 사회의 붕괴를 재촉한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 이후 조선 봉건 사회에 이러한 계급 모순 외에 제국주의의
열강의 침탈이라는 새로운 민족 모순이 첨가되면서, 농민들은 점차 사회
변혁과 저항의 거대한 동인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시도가 본격화 되면서 안으로 조선 사회는 봉건
통치 체제의 청산이라는 ‘반봉건’의 과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에게 경제적으로는 자주적인 근대화의 기틀이 될 민족 자
원의 수탈을 막고 정치적으로 이민족의 침략을 저지해야하는 ‘반침략’의
과제를 새롭게 감당하여야 하였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대외적 위
기의식이 높아지는 가운데 대원군 정권은 안으로 봉건제를 강화함으로ㅆ
흔들리던 조선 왕조를 유지하려고 하는 한편, 밖으로는 나라의 문을 굳
게 닫는 강력한 쇄국 정책으로 대응하였다. 당시의 쇄국양이와 위정척사
사상은 천주교의 침투와 그것을 매개로 하는 서양의 침입을 막는 데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연암 박지원 등은 비록 오랑캐라도 그 법이
좋고 제도가 아름답다면 그것을 스승으로 배워야한다167)고 주장하는 등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다. 1801년
의 천주교 탄압 이래 실학사상의 발전이 단절됨으로써 사상적 경직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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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조선이 자주적 개국, 개화로써 당시의 세계사적 상황에 유
연하게 대응하는데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168)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고, 명성황후의 세력이 등장하면서 대외의존적
인 외교정책이 계속되면서 오히려 열강들의 조선에 대한 침습은 가속화
되었다. 민씨 정권의 제한적인 개화 정책은 초기 개화파가 중앙의 권력
에 참여하여 세력을 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였던 반면, 대외 의존적
성격과 불철저한 개화정책은 문호 개방을 반대하던 척사파와 권력 아래
저항이 커져가던 민중에게서 극심한 저항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169) 이
과정에서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운 일본이 조선 침략의 의도를 본격화
하고 마침내 1875년 운양호 사건을 초래하게 되었고 나아가 1876년 강
화도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조선의 성리학자나 지배층에게는 밖에
서의 충격과 안에서 무너지고 있는 조선 봉건 사회를 유지, 강화하는 것
이 과제였는데 ‘위정척사론’이 바로 이러한 조선 봉건사회의 위기라는
나라 안팎의 상황에 대응하려는 보수적인 봉건 지배층의 사상 체계로서
성립되었다. 1860년대 프랑스의 침략이나, 강화도 조약 등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봉건 유생들에 의해 형성 ․ 확대된 위정척사론은 1876년 개항
을 전후로 이른바 ‘반일 척사 운동’으로 행동화하면서 보다 강화되었다.
앞서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강화도 조약 이래 민씨 정권과 그 추종자들
의 자주성 없는 대일 정책은 국내 인민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유생들
의 위정척사론을 대두시킴으로써 대원군의 재등장을 기대하는 풍조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개국 이래 새로운 세계열강의 동양에 대한 견문
이 넓어짐에 따라 조선의 발전을 촉진하고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세계 대세의 발전에 대응하려고 하는 개화사상 조류가 일어났다. 당시
김기수 일행이나 김홍집 일행 등이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되었던 것은 이
러한 조류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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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개화사상의 확산 가운데 정부기구 및 군제 개편이 이루어졌으
나, 이 과정에서 군제 개편에 따른 불평등한 조직 개편과 대우로 인해
군인들의 불만이 거세어졌다. 이를 발단으로 하여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게 된다.170) 군인과 도시빈민을 주체로 하였던 임오군란은 강화도
조약 이래 본격적인 반일 투쟁으로 변모해 갔다. 그러나 청나라의 무력
개입에 의해 군란이 실패한 뒤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위정척사파는 큰
타격을 받았고, 반면 민씨 일파를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는 청나라의 조
종 아래 점차 자립성을 상실하여 내정개혁에 의해 근대적 발전을 추진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점차 멀어졌다. 임오군란이 청에 의해 좌절되고 난
후 민씨 일파가 다시 정권을 장악하면서 일본과 이후 일본군의 조선 주
둔을 허용하는 제물포 조약을 맺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 사회 일각에서는 개화사상이 더욱 확산되고, 이 사상을 현실 정치
에서 실현하려는 정치 세력으로 개화파가 등장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파
의 거장이었던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1807~1876)가 스스로 체
득한 실학적 항풍에 청에서 습득한 중국 견문을 더해 개화사상을 형성하
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김옥균, 박영효, 박영교, 홍영식, 서광
범, 김윤식 등은 후일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 개화파의 중심 인물들이
되었다.171) 이러한 개화파의 주요 사상은 조선의 정치적 모순을 깨닫고
문호를 개방하여 세계의 추세에 적응하는 정치적 혁신을 꾀하는 부르주
아적 개혁을 뜻하였다. 이와 같이 개화사상은 조선 사회의 봉건적 재편
을 부정하고 그 대안으로서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이전의 실
학보다 진보적이었고, 위정척사 사상과는 질적으로 구별되었다.172)
개화파가 민씨 정권 안에서 점진적, 평화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던 노
력은 벽에 부딪히게 되고, 급진 개화파의 의도는 청의 양무론적 개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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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존하던 민씨 정권과 충돌하게 되었다. 임오군란 당시 민씨 정권의 요
청으로 군란을 강력한 수단으로 진압하였던 청은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
으로 간섭하기 시작하였고 민씨 정권은 나아가 개화파의 주요 인물을 지
방이나 해외로 보내어 개화파의 약화를 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에서
민에서 민씨 정권에 참여하면서 평화적으로 개혁을 꾀하던 급진 개화파
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김옥균 등의 급진 개화파
는 민씨 정권의 친청 수구 정책에 대항하여 민씨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계획을 도모하게 된다. 그리하여 1884년 마침내 급진 개화파들은 우정
국 개설 축하연을 이용하여 민씨 세력을 제거하려는 갑신정변을 일으켰
다. 그러나 민씨 정권의 요청을 받은 청군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정변은 개화파가 조선 사회를 낡은 봉
건 체제에서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 체제로 발전시키려한 최초의 정치적
시도였으며, 또한 근대화의 주체로서 근대적 시민층과 민중이 충분히 성
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앙 권력 안에서 성장한 선진적인 청년 관리가
주체가 된 봉건 권력 안에서 일어난 부르주아적 개혁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173) 부르주아적 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화파가 민중으로부터 친일파
라는 지탄을 받으며 정치적 기반을 잃어가는 한편, 청의 도움으로 다시
정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더욱 친청 보수의 성격을 강화해 나갔다. 이
러한 결과가 1885년 맺어진 ‘천진 조약’으로 나타났으며, 영국의 극동함
대가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는 외에 남하를 꾀하던 러시아의 압박까지 더
하여 나라 안팎의 상황은 한층 복잡한 형세를 이루어 나갔다. 이러한 배
경 속에서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는 여전히 난관에 봉착해 있었고, 1880
년대 후반에는 농민 항쟁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1890년대에는 전
국적으로 항쟁이 거세어졌다.
1860년 경주의 몰락양반 출신인 최제우에 의하여 창시된 동학사상은
기존의 개혁적 기반을 잃은 유교와 불교에 반대하고, 서양의 침입에 반
173) 위의 책, p.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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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는 민중종교로서 지위를 굳혀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학조
직이 점차 강화되고 교조신원과 지방관리의 횡포에 반대하는 항의운동이
곳곳에서 전개되다가 1894년 비로소 갑오농민전쟁의 발발하게 되었다.
전봉준 등이 주축이 되어 시작된 민란은 본격적인 농민전쟁으로 가속화
되어 결국 봉건정부로 하여금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이게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은 외세의존적인 봉건계급에 의해 도입된
청일양군의 무력간섭으로 인해 농민군의 최종적 관철을 어렵게 만들었
고, 결국 갑오농민전쟁은 격렬한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19세기 동아시아에 있어서 중국의 ‘태평천국’ 농민전쟁과
함께 가장 본격적인 농민전쟁이었으며 이후 갑오개혁의 원동력이 되었
다.174)
이후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 미국, 일본 등 열강의 이권 다툼은 더욱
심화되었고 점차 식민지화의 위기가 가속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속에서
개화파의 개혁 노력과 봉건 체제에 대한 개혁을 열망하던 민중의 바람을
바탕으로 갑오개혁이 실시되었다. 화폐 제도의 개혁과 함께 지세의 금납
화를 실시함으로써 조선 후기 이래 발전하던 상업적 농업의 발전을 더욱
촉진시켰다. 그러나 지주 중심의 부르주아적 개혁 성향은 민중에게 호응
을 얻지 못하였고 그들의 개혁정책은 ‘왜국화’를 위한 조치로 받아들여
져 반일 감정을 부추기게 되었을 뿐이었다. 결국 전국적인 반일 의병 항
쟁이 거세게 일어나는 가운데, 1895년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
과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되고 1896년 아관파천 사건을 계기로 갑오정권
은 무너지게 된다. 을미의병 역시 초기에는 당시 팽배하던 반일감정과
갑오정권에 대한 불만을 업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봉건적 사샅의
한계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대한 제국의 성립과 함께 광무개혁
등 여전히 부르주아 개혁운동들이 시도되는 한편 농민 항쟁 역시 전국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열강들의 침략 세력에 대항하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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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부족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제정 러시아의 만주 진출과 함께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하고자 당시 러시아와 대
립하고 있던 일본을 이용하려 하였다. 이는 ‘영 ․ 일 공수동맹’(1902)으
로 구체화되었고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비로소 본격적 국면을 맞이한다.
미국 역시 ‘카스라 ․ 테프트 비밀협약’(1905)을 통해 일본의 조선에 대
한 식민 지배를 인정하였다.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열강
의 승인을 받은 일본은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을 통해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화를 이루었다. 통감 정치 아래 진행된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는
형식적 법제 근대화를 통해 일본의 자본주의를 조선에 이식함과 동시에
조선 경제를 식민지 경제 구조로 재편하여 갔다. 또한 조선 경제에 봉건
적 생산관계를 존속시킴으로써 조선을 일본 자본주의를 위한 식량, 원료
공급지로 전락시켰다.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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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한 연합전선 형성에 의해 학생 중심의 운동이 대중 운동과 결합하고
나아가 지방으로 파급되는 계기를 만들었다.176) 3 ․ 1운동을 기점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두 조류로 나뉜 조선민족해방운동은 일본의 식민
지배에 강한 타격을 주게 되었다. 이후 국내 민족주의운동과 대중운동의
조직화를 통해 독립운동은 보다 더 탄력을 받게 되고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여 조선이 해방을 맞기까지 각계각층의 다양
한 독립운동들이 끊임없이 시도되면서 조선의 민족주의적 독립사상이 강
한 국가적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2) 근대 한국에서 불교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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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교는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서의 지위는 잃었지만 신앙의 대상
으로 왕실과 민간 및 부녀자 층에 유지되어 태조(太祖)의 현비도 불교신
자였으며 그 후의 왕비들도 대개 불교에 귀의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세종(世宗)과 세조(世祖)때 그 폐단이 많이 시정되자 관대한 정책으로
역대의 사상조류가 폭넓게 받아들여짐으로서 불사(佛事)의 중건이나 불
경 간행 등이 실시되고 승려들의 사회 경제 활동이 용인되는 등 불교의
중흥이 시도되기도 하였다.179) 그 까닭은 불교철학이 사물을 독립, 대립
관계로 보지 않고 포용 융화 관계로 보고 있어 국가와 개인의 안녕과 평
화를 기원하는 종교 기능을 가지고 있었고 유교처럼 중국을 존중하는 세
계관이 없으며 민간 신앙의 하나로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180)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에 걸쳐 또 다시 불교는 암흑시대
를 맞게 되었는데 그 예로 연산군의 불교정책은 곧 훼불(毁佛)로 일관하
는 정책을 폈던 것이다.181) 그러다가 조선 중기이후부터는 간혹 왕들에
게 불교숭상의 기풍이 일어나 명종(明宗)때 문정왕후(文定王后)와 그를
돕던 보우(普雨)에 의하여 불교계는 다시 부흥의 계기를 맞아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교양종(禪敎兩宗)이 부활되고 승과제가 시행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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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182) 이때 승과에 의해서 서산(西山)과 사명(四溟)과 같은 고승이 배
출될 수 있었고 그 후 보우(普雨)와 문정왕후가 죽자 불교계는 다시 침
체되었다. 임진왜란과 청(淸)과의 전쟁으로 인해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
게 되자 서산과 사명 등이 이끄는 승병(僧兵)의 활동183)은 도탄에 빠진
민중을 건지려는 불심(佛心)의 발로였고 오랜 역사를 가진 불교로서의
저력을 발휘함과 동시에 불교를 중흥시키는 계기가 되어 그 구국 정신이
3 ․ 1 정신에까지 계승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불교에 대한 탄압을 가중되었고 인조(仁祖)때 승
려들의 입성(入城)을 금하는 방(榜)까지 내린바 있고, 현종(顯宗) 원년
에는 양민으로서 승려가 되는 것을 일체 금하기까지 하였다. 영조(英祖)
30년에는 사찰의 위패(位牌)를 봉안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정조(正祖)
2년에도 다시 승려의 입성을 엄금시킨 바 있었다.
이상의 사실들에서 조선에 있어서는 위정자들이 대부분 불교를 학대하
기는 하였으나 몰살하고자하는 탄압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승려들이 구국정신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왕실을 중심으로 한
군신들이나 지도 계층의 사람들이 불교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기본
적인 사상적 배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말기에서 일제시대에 이르는 근대의 불교계는 대내외적으로 큰 변
화가 있었던 때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국가의 위력과 기능이 상실되어
가고 사회는 점차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계는 그 동안 탄
압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색을 시작하였다. 당시 기독교도 민족운
동을 지도하면서 그 세력이 확장되어 천년 이상이나 뿌리를 박고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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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능가하기에 이르렀고, 동학과 각종 신흥종교가 일어나 조국과 민
족을 구하자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배불정책(排佛政策)에 의해 한국 불
교는 새로운 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방향설정에 무기력하
였다. 이 때 마침 불교계는 유신(維新)의 주창자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백용성, 박한영, 한용운 등의 주도하에 헌신적인 불교 유신과 구국운동
이 펼쳐지게 되었다.184)
시기적으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던 시기였으므로 보호와 협상이란 미
명하에 종교적 침투가 시도되었다. 종교의 침습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호응을 얻어 정치적 탄압과 착취를 합리화 할 수 있는 용이한 수단이 되
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수단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나게 되는데 역사적인 예로서 태종의 억불정책 이후 시시때때로 왕
조에 의해 조선 승려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던 반면, 일본승려는 항
상 도성입성이 가능했고 포교소(布敎所)까지 설치하여 포교를 하는 상황
이었다.185) 이 때 일본의 일연종(日蓮宗)의 한 승려가 조선 승려도 도성
에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총무대신(總務大臣) 김홍집과 흥선
대원군에 까지 진언하여 승려의 입성이 허가 되었던 것이다.186)
그러나 그 후에도 불교는 다시 국가의 관리를 받게 되고 아울러 일제의
관리 하에서 불교통합정책(佛敎統合政策)에 따라 그 정통성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187) 당시에 원종(圓宗)을 이끌어 가던 이회광(李晦
光)이 일본조동종(日本曹洞宗) 승려 무전(武田)과 공모하여 한국 불교와
일본조동종과 합종(合宗)할 것을 약속하고 연합조약 7개조를 조동종(曹
洞宗과) 종무대표자 弘津說三과 체결하고 은밀하게 추진하였다.
184) Park, Pori. "Korean Buddhist Reforms and Problems in the Adoption of Modernity
during the Colonial Period." in Korea Journal. Vol. 45. No. 1. Spring 2005. pp. 88-91.
185) 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 탐구당, 1978, p. 342
186) 李能和, 『朝鮮佛敎通史』下篇, 京仁書林, 1968. p. 927
187)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앞의 책. p.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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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한국 불교인 박한영 (朴漢永), 정진응 (鄭震應), 한용운 등은
불교통합에 반대 궐기하여 조선의 전통적인 임제종(臨濟宗)을 표방하고
반대운동을 벌여 이끌어 나갔다. 이때 白龍城도 조선불교가 임제종이라
는 내용의 건백서(建白書)를 총독부에 제출하고 일본의 불교 통합정책에
반대하였다. 일본의 종교 침략의 일환으로 들어온 원종(圓宗)과 조동종
(曹洞宗)과의 연합맹약은 실패하기에 이른다.
그 후 1911년 6월 총독부에서 사찰령(寺刹令)이 공포된 이후 원종과
임제종은 폐지되었으나 결국 조선불교가 일본불교에 예속되지는 않게 되
었을 뿐 조선불교에 대한 압제는 계속되었다. 사찰령은 불교발전이 목적
이 아닌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였다. 한국 불
교 수호를 위하여 한용운이 제시한 정교 분립에 관한 논설에서 사찰령과
그 시행규칙에 의해 사찰재산의 처분이 모두 행정적 구속을 받게 된 것
에 대하여 정교분립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한국
불교의 종지를 수호하고 정교분립을 지켜나가는 문제는 사찰령의 반포로
인해 종지(宗旨)는 수호되었으나 간섭은 전적으로 배제되지 못한 상태로
끝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침체된 불교를 되살리고 불교계의 모순을
타파하고자 한용운이 불교유신론(佛敎維新論)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
3 ․ 1 운동이 일어나자 한용운, 백용성, 중앙학교의 재학생들이 불교계
의 주동인물로 가담하였다. 이 시기에 불교진흥을 위한 움직임은 교육기
관의 설립, 잡지간행, 개화인물의 활동 등을 대표적인 활동으로 볼 수
있다.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에 의해 명진학교(明進學校), 능인보통학
교(能仁普通學校), 보성학교(普成學校), 동광학교(東光學校) 등이 설립
되고, 조선불교일보(朝鮮佛敎日報), 해동불교(海東佛敎), 불교진흥회일보
(佛敎振興會日報), 조선불교계(朝鮮佛敎界) 등의 잡지가 간행되었다.188)
또한 당시의 개화 인물로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에게 劉大致의 불
교사상이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이동인, 이연식 등은 일본을 왕래하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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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활동과 신문화 수용에 기여하였다.189)
대한제국(大韓帝國) 광무(光武) 원년(元年) 승려들의 도성입성금령(都
城入城禁令)이 해제되고 이후부터 불교는 자유롭게 도성내에서 포교활동
을 할 수 있게 되었다. 500여년간 탄압받던 불교가 자유롭게 신앙활동
을 하게 되었고, 국가에서도 불교에 관심을 보여 관리서(管理署)를 설치
하여 사사(寺社)를 관리하였다. 그러나 국가적 관리는 실효를 거두지 못
하고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승려들에 의한 자체적인 교단의 중흥이 시
도되지 않은 바는 아니나 현실적으로 달성되지 못하고 한일합방(韓日合
邦)이라는 시련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일제의 사찰령(寺刹令)하에서 조
선불교는 많은 시련을 겪었다. 일본총독부(日本總督府)의 지배하에 원종
도 임제종도 말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조선불교는 조선불교
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 또는 조선불교 조계종(朝鮮佛敎曹溪宗)의
이름으로 전통을 유지하여 왔다. 그 후 광복을 맞을 때까지 억압받던 불
교는 광복이후 비로소 민족불교의 중흥사업을 다시금 도모할 수 있게 되
었다.
3) 근대 한국 불교와 화엄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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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보살계를 받았으며, 정관 17년에 귀국할 때 경, 율, 론 삼장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따라서 삼국시대 화엄경의 전래는 자장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화엄학이 신라에 전해진 이후 원효(元曉), 의상(義湘) 같은 승려들이
신라 화엄학을 정립하기 시작하면서 화엄학에 대한 교리 조직과 화엄사
찰이 건립되고 한국 불교사에 주종(主宗)을 이루었다. 인도 대승불교의
거대한 사상적 흐름이었던 중관과 유식의 대립에 대한 문제점을 극복하
고 이론과 실천운동을 펼쳤던 승려가 바로 원효와 의상이다. 『기신론』
의 재발견과 화엄적 실천으로 대립을 극복하고, 아울러 화엄이 널리 유
통되게 하였다.190) 원효의 저술 활동과 의상의 실천적 교단 운동을 통해
화엄사상은 빠르게 퍼져 나갔고, 신라 왕실의 지지를 받으면서 통일기
신라교학을 주도하는 지위에 다다랐다. 고려 시대에도 균여(均如), 의천
(義天) 등에 의해 화엄학의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짐으로써 『華嚴圓通
疏』,『圓宗文類』등의 논저(論著)들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 화엄의
특징은 화엄종의 성립과 성상융회사상, 선엄일치적 화엄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신라 이래 화엄이 교학으로서 계승되었던 것이 고려 시대에 이
르러 종파를 이루게 되었고, 화엄교학의 대중화에 노력을 기울였던 균여
의 영향으로 남악, 북악을 융회하고 법상종의 세력을 흡수하기 위한 성
상융회사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또한 한국불교에서 화엄과 선의 긴밀한
연결성은 고려시대에 형성된 지눌의 돈오점수의 화엄선 사상에 잘 나타
나 있다고 하겠다. 또한 탄문 등에 의해서 화엄과 선의 일치가 주장되면
서 성상융회에 선종사상을 융화하여 교선일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191)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인해 불교종파의
폐합이 시행됨으로써 十二宗이 七宗이 되었다가 다시 선종(禪宗)과 교종
(敎宗) 양종으로 되면서 화엄학도 종래 우리 불교사의 주종(主宗)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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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특성을 잃어버리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15세기 때의 설잠(雪岑)
은『화엄일승법계도주(華嚴一乘法界圖註)』와『화엄석제(華嚴釋題)』
등을 통하여 의상화엄을 선엄일치적 화엄으로 부각시키고 있다.192)
명종(明宗 1546~1567) 때에 보우(普雨)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특별
한 지원 하에 불교의 중흥을 시도하였으나 문정왕후의 서거 후 이마저도
수포로 돌아갔다. 선교 양종을 중심으로 한 승과제도가 부활되면서, 교
종의 시험은 화엄 사상에 중심을 두어 실시 되었다는 점에서 교중에 화
엄이 주요한 위치에 자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뒤 청허(淸虛
1520~1604)에 이르러 선교도총섭(禪敎都總攝)이 되었고 그 법류에 선
과 교를 겸통(兼通)한 고승들이 많았지만 화엄학을 특별히 연구한 승려
는 거의 없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설파상언(雪坡尙彦)과 인악의첨(仁岳義沾), 연담유
일(蓮潭有一) 등의 화엄종사(華嚴宗師)들이 나타났다. 설파상언193)은 호
암체정(虎巖軆凈) 고제(高弟)로서 33세에 용추사(龍湫寺)에서 강석(講
席)을 열었다. 그는 오교삼승(五敎三乘)의 묘체(妙諦)를 모두 잘 이해하
였는데 특히 화엄학에 정명하였다. 그는 강원(講院)의 주교재인 청경저
(淸凉著) ‘화엄경류초(華嚴經疏鈔)’ 가운데 소료(疏料)가 결여된 것을
찾아내어 도표보원(圖表補元)하였고 또는 소초(疏鈔) 가운데 인용문이
잘못된 것을 일일이 교정하는 등 일생을 화엄학의 연구와 발전에 힘썼
다. 그의 연구가 인악의첨와 연담유일에게 이어졌다.
인악의첨194)은 碧峯和尙의 高弟로서 설파의 강맥(講脉)을 계승하여 화
엄 강의에 집중하였고, 『화엄경사기(華嚴經私記)』등의 저술을 남겨 화
엄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 연담유일195)은 虎巖軆淨의 高弟로서 동문
192) 위의 책, p. 353
193) 朝鮮佛敎通史 上中編 pp. 568-570, 雪坡大師碑銘(蔡濟恭 撰)
194) 朝鮮佛敎通史 上中編 pp. 577-579, 仁岳和尙行狀(門人聖岸 撰)
195) 朝鮮佛敎通史 上中編 pp. 580-581, 蓮潭大師碑銘(水觀居士 李忠翊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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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이 설파의 강맥을 이어 보림사(寶林寺)에서 강석(講席)을 연 뒤 수
많은 강의를 행함으로 따르는 제자가 많았고, 『諸經論義 七部共十八
卷』과『文集法語 四卷』을 남겼다.
또 도봉유문(道峰有聞)은 의상의 「법성게(法性偈)」에 과주를 남겨서
의상의 화엄을 전승하였던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후의 한국 불교는 화
엄과 선과 염불을 함께 체득하는 삼문수업(三門修業)의 전통이 이루어졌
다. 그리하여 선사들도 모두 화엄종주(華嚴宗主)로 불려졌다.
『화엄경』의 전래에 관하여는 자장(慈藏) 당시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
됨을 앞에서 설명하였다. 화엄관계의 다른 전적들 역시 경과 함께 들어
왔을 수도 있겠으나, 기록으로는 승전이 692년경에 법장의 저술을 전하
였으며 범수(梵修)는 799년에 『팔십화엄』의 주석서인 『청량소』를
처음 전하였다. 고려 의천은 1000여 권을 송과 일본에서 갖고 와서
1086년에 입각하였으며, 『원종문류』에도 많은 화엄전적을 수록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숙종 7년(1681)에 청량의 『화엄경수초연의초』 80권이
임자도에 표착한 것을 백암성총이 발견하였다.
『화엄경』의 유통 상황으로는 사경본 가운데 신라 경덕왕 13년(754)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화엄사 연기 조사가 사경한 것 중 제47권이
근천에서 발견되었다. 석경으로는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각경한 화
엄사 각황전 석벽이 일부 깨어진 단편 조각으로 남아 있다.
판각으로는 고려 초 부석사에 3본 화엄을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수창 4년(1098) 해인사 성간(成幹)이 국가보위를 위해 진화엄을 새긴
것이 해인사 사간장경 속에 남아 있다. 고려대장경에도 화엄경이 각인되
어있다. 조선시대로 들어와서 효령대군과 정경공주가 화엄경을 새겨 안
양 청계사에 모신 일이 전해진다. 숙종 15년(1689)에는 임자도에서 발
견했던 『청량소초』를 성총이 판각한 징광사(澄光寺)판이 있었으나
1770년 불타버렸다. 영조(1774) 때 설파가 판각한 영각사(靈覺寺)판이
있었으나 역시 6․25때 불타버렸다. 그러나 영각사판본은 남아 있다. 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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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영기(永奇)가 각인한 봉은사판이 있다 이는 영각사판을 복각한 것으
로서 중간에 45장을 보충한 이 봉은사판이 그동안 강원의 교재로 쓰여
왔던 유일한 현존판이다.
이와 같이 화엄경과 화엄전적이 전래되고 배포되어 화엄교학이 발전하
고 화엄종이 성립되었다. 이와 같이 발전을 거듭한 한국화엄은 조선시대
에 이루어진 불교전문강원(현 지방승가대학)의 과정에서도 화엄경을 마
지막 대교과로 수학하고 있는 점에서 화엄학의 역사적 전통을 이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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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만해의 화엄사상과 민족주의
1) 만해의 인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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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었고 그때 백담사의 주지 연곡(蓮谷) 스님의 영향으로 불문에 귀의
하게 된다. 이때가 1904년 그의 나이 26세 되던 해였다. 이에 본격적인
승려의 길에 들어서고 1905년 1월 26일 백담사 연곡 스님을 은사로, 영
제(永濟) 스님에 의해 수계를 하였다. 득도 때의 계명(戒名)은 봉완(奉
玩), 법명이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였다.
수도생활을 시작한 만해 한용운은 팔만대장경의 불경들을 접하게 되고
건봉사(乾鳳寺)의 강원을 거치면서 『기신론(起信論)』, 『능엄경(楞嚴
經)』,『원각경(圓覺經)』,『화엄경(華嚴經)』을 배웠다.198) 이 과정에
서 한용운은 화엄사상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훗날 화엄경의 비로자나
법신의 세계관을 넘나들며 보현행의 실천의지를 다지게 되는 것도 이때
의 수학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199)
한용운이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과 『영환지략(瀛環之略)』을 접
하면서 조선과 중국, 일본 외에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유럽 등 넓은 세
계와 세계인들의 생각과 철학을 만나게 되었고 칸트와 루소, 베이컨, 데
카르트 등 서양철학자들까지 인식하게 된 그는 넓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던 한용운은 친일파로 오해를 받아 구사
일생으로 살아 돌아오게 되고 만해는 훗날 이 경험을 회고하면서 바보스
러움과 지나친 용기라 하였지만 이는 만해의 모험정신과 도전정신을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후 한양에서 만해 한용운은 국내․외의 정세에 대하여 넓은 이해를 갖
게 되고 1908년, 당시 새로운 문화의 전달 통로인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리하여 만해는 京都 ․ 東京 ․ 시모노세키(馬關) ․ 미야지마(宮島)
등지를 시찰하며 신문물을 접하였다. 그 과정에서 만해는 일본인들이 현
대문명의 이기를 수입하여 그것을 활용하여 조선으로의 침략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알게 되고 토지수탈의 바탕이자 당시의 최첨단 기술인 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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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술을 배우게 된다. 6개월여의 일본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한용운은 서
울 청진동에 경성명진측랑걍습소(京城明進測量講習所)200)를 개설하고
축량 기술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며 조국의 토지를 수호하는데 앞장섰
다.
당시 국내 정세는 더 불안해지고 있어 러․일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의 강
압에 의해 굴욕적인 을사늑약(1910)이 강제로 체결 되었고 이에 대한
지식인이나 독립투사들의 반발도 거세었다. 불교계에서는 만해 한용운이
1910년 박한영, 김종래, 장금봉, 진진응 등과 함께 순천 송광사의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한 ․ 일 불교동맹조약 체결을 분쇄
하고 조선불교의 법맥은 임제종(臨濟宗)임을 주장하며 임시 종무원(宗務
院)을 송광사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임제종 운동도 큰 성과를 기
대할 수 없게 되었고 이듬해 만주에 망명하여 만주지방 일대에 흩어져
있는 독립군들에게 민족 독립사상을 북돋아 주고 독립운동을 지원하였
다.
이미 『음빙실문집』과『영환지략』을 통해 세계사의 빠른 변화를 느낀
한용운은 조선의 뒤쳐진 세계적 흐름을 인식하고 인간정신의 유신을 통
하여 한국 불교가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시대정신과 역사의
식의 자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201)을 내놓게 되었다. 이 유신론에서 유신운동의 기본적인 목표와 방
향이 정신문화의 혁명에 있다고 주창한 그는 불교인이건 아니건 인간에
게는 누구나 정신의 유신을 하여야 하며 그 길만이 조선이 살아갈 수 있
는 길임을 강조 하였다.
이러한 유신론을 통해 당시 조선불교의 낙후성과 은둔성을 통렬하게 비
판하고 중생구제를 위한 승려교육, 포교, 경전의 해석 등 불교 개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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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를 천명하고 비종교적, 비사회적, 비합리적, 토속적, 미신적인 요소
와 인습을 타파하고 혁신해서 불교계도 시대적 변화에 부응한 새로운 진
로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순수한 신앙에 바탕을 둔 윤리관을 확립하여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다시
구현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역사적, 사회적 요청에 부응할 대중불교 실현
의 사명감을 고취하고 촉구하였다.
불경 대중화를 위한 작업으로 양산 통도사에서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모
두 열람하여 1914년 4월 30일『불교대전(佛敎大典)』을 편찬하기에 이
른다. 재래식 장경 위주의 편찬방법에서 벗어나 주제별로 엮어진 최초의
책으로 불교 근대화 작업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용운
은 이와 같은 저술활동을 통해 포교 면에서는 실천론을 강조하고, 교리
면에서는 禪 ․ 敎 일치를 제창했다.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한 이래 1917년에는 『정선강의채근담(精選講
義菜根譚)』을 발행하여 국민 계몽 운동에 앞장섰으며 1918년 4월에는
유심사(惟心社)라는 잡지사를 개설하고 그해 9월에 『惟心』誌 창간호
(創刊號)를 발행했다.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된 한용운은 이 잡지를 통해
애국 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3 ․ 1 독립운동 당시에는 주도자로서 행동강령으로 공약삼장을
첨가202)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내 나라에서 죽으니 한이 없다
는 한용운의 한마디는 생사를 초월한 정신으로 화엄철학의 무진연기 사
상이요, 보현행원의 실천운동이었다. 최후의 일인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
사를 발표하라는 공약삼장은 광명, 정대, 화합이라는 바로 불, 법, 승 삼
보의 정신을 말한 것이었다.
옥중의 고초를 치르면서도 한용운은 꿋꿋하고 강인한 독립의지를 굽히
지 아니하였고 『조선독립(朝鮮獨立)에 대한 감상(感想)의 개요(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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要)』203)를 발표하기까지 하였다. 이 문헌에는 한용운의 민족주의를 바
탕으로 한 독립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서 한용운은 자유와 평화는 인간생
활의 본질이요, 전 인류의 요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제국주의 ․
침략주의는 인간의 참다운 생명을 희생시키는 불행을 초래하였으며 폭력
적인 일본의 침략행위가 조선 민중에 있어 얼마나 비참한 일이며, 승자
또한 군국주의의 갈등을 느낄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민족이 독립을 하려
고 함은 자기가 스스로 살려는 본능이며 누가 이것을 억제하거나 방해할
것이냐고도 반문하였다. 만해 한용운은 여기서 인간의 자유와 평화, 인
간의 독립성, 군국주의의 배격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독립의 이유를 4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①민족 자존성, ②조
국사상, ③자유주의, ④대세계의 의무를 그 이유로 들고 있다. 즉, 첫째
로, 민족자존성이란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아니하려는
것은 인류 공통의 본질로서 이러한 민족의 자립의지는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독립의 원리라는 것이다. 둘째, 인류는 만물의 영장으로 그 근
본을 잊지 못하며 그 근본으로서의 조국에 대한 사랑을 부정할 수 없는
조국사상으로 보았다. 셋째, 자유정신은 인생의 목적이어서 자유를 얻
고 지키기 위해 생명까지 바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넷째, 나아가 민
족자결은 세계 평화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민족자결주의가 성립되지 못
하면 아무리 국제연맹을 체결해서 평화를 보강할지라도 수포로 돌아갈
뿐이고, 따라서 조선 민족의 독립자결은 세계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하였
다.204)
만해 한용운의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 내포한 독립정신의
원천은 자유, 평등, 평화로 이어지는 대강령이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
인간 생활의 참다운 목적으로 인식하고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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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한계로 삼는 만해 한용운의 독립정신은 일제 식민지 시대를 극
복한 3 ․ 1 독립정신의 요체다. 그러므로 이 자유주의 정신은 조국 독립
뿐 아니라 나아가 세계 평화로 까지 이어지는 만해사상에서의 민족정신
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만해 한용운의 사상은 화엄적 관점에서 살펴 볼 때 사사무애 법
계의 정신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불교의 조선 침탈
은 민족적 자존심은 물론 민족 역사의 단절을 가져오는 치욕의 오점으로
인식하고 민족적 역량을 모아 임제종을 세우고 한국불교의 법통을 잇는
종지수호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한국 불교의 법맥을 확고히 하고자 한국불
교의 일대 종풍운동을 통한 의식개혁에 앞장섰던 것이다. 세계사의 빠른
변화를 직시한 만해 한용운은 인간정신의 유신을 통하여 한국불교가 새
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의 자각이 『조선
불교유신론』을 세상에 내놓게 하였고 여기에서 불교개혁정신의 원형의
틀을 잡았다. 더불어 각종 논설에서 대중불교의 실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출옥 후에도 불교청년회 등에서 강연을 하는 중에 불교의 진아에서
향유되는 자유권을 제시하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 민족의 자존성에 연결
되어 조선의 독립이 곧 자유의 실현이라고 하였다.
1925년 김시습의 『십현담요해(十玄談了解)』를 발견하고 만해 자신의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남겼는데 여기에서 만해 한용운의 십현연
기관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이때에 사랑의 증도가 『님의 침묵(沈
黙)』을 탈고한다. '님'이란 생명의 근원이고, 영혼이며, 종교적 신념의
결정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말로 설명되어지고 해석되어지기 이전에 이
미 그것 자체이며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法身)의 침묵(沈黙)으로 상
징되는 것이다.
1927년 49세가 된 만해 한용운은 민족운동에 가담한다. 민족항일전선
인 신간회 창립위원으로 활약하는 등 좌 ․ 우파로 나누어져 있던 그들의
사상을 하나로 모으려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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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겨울에는 조병옥 박사와 함께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하고 여론화에 앞장서고자 민족 운동가들과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총독
부의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9년 10월에는 다시 『조선물산장려회보』『장산』『실생활』등으로
개칭되면서 1932년까지 회지를 간행하였다. 특히 본회의 회지인 『실생
활』제3권 11호에 「고난의 칼날에 서라」205)는 글을 발표하였다. 회지
간행은 1930년 초에 중단되었다. 일제가 만주침략을 감행한 뒤 한국의
민족독립운동 탄압을 강화하였기 때문이다.
1931년 6월 『불교(佛敎)』지(誌)를 인수하여 불교관계의 많은 논설을
발표하여 대중불교의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전주 안
심사에 보관되어 있던 한글 경판(금강경(金剛經), 원각경(圓角經), 사중
경(思重經), 및 유합(類合), 천자문(千字文))을 발굴 조사하여 영인206)
하였다.
1932년에는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주도 하면서 법보회(法寶會)를
조직하여 불교대중화 운동에 앞장을 섰고, 불교청년회를 조직하고 이를
불교청년 총동맹으로 확대 개편하기도 하였다. 불타정신의 체험, 합리종
정의 확립, 대중 불교의 실현이라는 3대 강령을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일제의 조선사찰령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불교의 자주적 역량을 위
하여 민족종교로서의 역할과 불교의 시대정신을 일깨워 갔다 보현보살의
행원의 이상을 실천에 옮겨간 것이다. 그 후에도 조선일보에 「심우장산
시(尋牛莊山詩)」207)를 발표하면서 민족문학의 지표를 제시하였다.
만해 한용운이 마지막 여생을 보낸 곳이 이 심우장(尋牛莊)인데 손수
지은 이 택호(宅號)는 牛를 찾는다는 뜻이다. 소는 마음에 비유한 것으
로 마음자리 바로 찾아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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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뜻이다. 여기에서 만해 한용운은 당시 금서로 묶여있던 단재 신채
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부도 속에 넣어 단재 탑을 만들려다가 사전
에 발각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며 『혹풍』『박명』『후회』등의 신
문 연재소설을 남겼다.
한용운은 일제 말기 혹독한 무단정치아래서 일제의 황민화운동을 전 조
선이 전개하며 강요할 때 끝까지 굴하지 않고 버티면서 타협하지 않고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벌이고 조선인 학병출정을 반대하는 등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속하였다. 한편으로 『유마경』을 번역하여 중생이 아프기
에 내가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민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아파했다.
조국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한용운은 66세의
생애(生涯)로 입적(入寂)하였다. 한용운은 민족의 갈망을 절실하게 노래
한 시인이었고 또 구국 일념으로 살아온 독립지사였으며, 가혹한 고난과
탄압속 에서도 의연함을 보여 지조를 꺾지 않은 대사상가였다.
만해 한용운은 독립운동가, 시인, 불교의 대강백(大講白), 대선사(大禪
師)로서의 업적은 크고 뚜렷하였다. 그의 한 생애는 민족에 대한 관음보
살(觀音菩薩)의 대비(大悲) 원력(願力)이요,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대행
(大行) 원력(願力)의 실천자였다. 민족운동가, 불교사상가, 근대 시인으
로 집약되는 만해는 청정심으로 극락정토를 지상에 꾸미려는 깊은 뜻을
심어놓았다. 때문에 문학, 예술 분야 뿐 아니라 역사, 종교, 사회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만해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노력이 방대하게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2) 만해의 불교관
i) 만해의 선사상(禪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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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의 불교사상은 분석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하나
는 『불교대전(佛敎大典)』208)을 중심으로 한 화엄사상(華嚴思想)이고,
또 하나는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209)를 중심으로 한 선사상(禪思
想)이다. 화엄사상과 선사상은 만해의 중심사상으로서 그의 저술의 곳곳
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나 있다. 불교사학적으로도 선종(禪宗)의 발전과
정에서 좌선을 통해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화엄사상 이었음을 고려하면 양 사상은 전혀 별개의 사상으로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이 상호 공존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
다. 따라서 만해가 화엄사상과 선사상을 함께 주요 사상으로 삼은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다.
a) 선 ․ 교 일치 사상 논리
한용운의 불교사상은 한 종파에 국한시킬 수 없고, 그는 선(禪)과 교
(敎) 모두를 수행하였으며 저술도 선과 교 모두에 걸쳐있다. 그는 선과
교를 모두 중시하고 편협하게 하나에만 빠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만해 한용운 선사상의 특징은 선 ․ 교일치, 또는 선 ․ 교 원
융적인 선종을 말한다. 선종의 경우에는 일반으로 경학을 배척하거나 지
나치게 과소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것은 선 ․ 교 양자 사이에
반목을 불러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은 규봉 종밀 선사의
논리와 같이 선 ․ 교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한 것으로 이러한 선과 교의
원융의 합일정신은 보조국사 지눌의 정신을 계승하는 정신이기도 하며,
한국 선종의 맥을 잇는 정신이기도 하다.
부처의 참 뜻을 전하는 길은 여러 형태로 설명하여 왔는데 불타의 마음
이 선이요, 불타의 문자가 교라고 하여 마음과 문자가 몇 개의 대립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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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설명하거나 종속관계로 파악하려했던 기존의 해석과 달리, 한용
운은 선 ․ 교상의 대립을 해소하고 선지가 불타의 말과 일치함을 『불교
대전』의 편찬을 통해 설명하였다. 만해 한용운의 선종 사상을 대표하는
저술이 『십현담주해』라면, 만해의 교학사상을 대표하는 저술은 『불교
대전』이다. 이 두 권의 저술은 만해의 선 ․ 교 일치사상을 나타내 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그리고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선 ․ 교의 진
흥을 동시에 꾀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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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 생활 그대로가 불교였다. 만해의 이와 같은 선 ․ 교 일치의 정신은
그대로 불타정신의 행동 철학이자 그의 선사상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b) 적적성성(寂寂惺惺)의 논리
만해 선사상의 요체는 적적성성하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한국
전통 선사상 정혜쌍수의 맥과도 같은 논리다. 정혜쌍수는 지(止)와 관
(觀)이라는 선의 본질을 표현하는 용어로서 선과 동일어이기도 하나 성
성(惺惺)과 적적(寂寂), 교와 선의 의미를 포함하기도 한다. 만해 한용
운은 선의 요점을『조선불교유신론』에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보조국사
의 『근수정혜결사문(勤修定慧結社文)』과 『수심결(修心訣)』이 많이
강조되고 있으며 사실상 한국 선(禪)의 전통 속에 흐르고 있는 사상인
정혜쌍수(定慧雙修)는 적적(寂寂)에만 편중하는 것이나 성성(惺惺)에만
편중하는 것은 다 경계하고 병행하여 수행케 하는 것이고 만해 한용운은
어느 하나에 떨어지는 것은 정당한 수행의 길이 아니라고 보았다.
만해 한용운은 움직이지 않으면 흐트러짐이 없고 어둡지 않으면 혼수함
이 없으니 흐트러짐이 없고, 혼수함이 없으면 마음의 본래가 밝혀진다고
보았다. 동(動)과 정(定)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파악하였다.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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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고요함이 하나가 아닌 것은 생사를 자재(自在)한 것이다.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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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性定慧)의 성성적적(惺惺寂寂)이나 적적성성(寂寂惺惺)의 원리로 선
(禪)의 세계를 설명하였다.
c) 활선(活禪)의 논리
만해 한용운의 생애는 활선의 경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3 ․ 1 독
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일, 신간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일, 만당의 실질
적 지도자로서의 활약 등을 본다면 불득하고 얻은 진리를 민족 중생에게
회향시키고자 하였던 활선의 실천의 모습이다. 만해 한용운은 그의 논설
「선(禪)과 인생(人生)」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ii) 불교 개혁 사상
만해 한용운이 동경에서 수학한 후 돌아왔을 당시 한국 불교계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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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와 이른바 '연합맹약(聯合盟約)'을 맺고 1500여 년 전통의 불교마
저 일본의 지배를 받게끔 되어 있어서 불교계 내부의 갈등과 대립이 비
등하고 있었다. 이 때 만해는 일본 유학 당시 갖게 된 불교 유신의 소양
을 바탕으로 종래의 불교를 새롭게 하기 위한 방안으로 '승려교육안', '
사찰운영계획' '승려가취론(僧侶嫁娶論)'을 주장했다.
'승려가취론'에서 스님은 모든 승려를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으로
나누고 사판승(事判僧)에 한해서는 외전(外典)과 내전(內典)을 충실히
겸전한 자로서 대중포교(大衆布敎)를 목적으로 가취(嫁娶)시키자고 주장
하였다. 한용운은 『불교유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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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때는 유신도 적어지고 파괴가 클 때는 유신도 더욱 크다고 보고 있
는 것이다.
217) 『朝鮮佛敎維新論』,『全集』2. p.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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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불교는 과거나 현재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미래의 문명에 적응할
수 있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만해의 주창에 의해서 위축되었던 한국 불교의 자긍심을 회
복하고 한국 불교가 포괄적인 분야에 걸쳐 비종교적이고, 비사회적인 낡
은 요인과 인습을 지양하고 혁신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iii) 대중불교(大衆佛敎) 사상
만해 한용운은 불교가 인간 사회와 격리된 성직자로서의 승려들이나 소
수의 불자들에 의해 향유될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대중에 근접한 민중화
된 모습을 가져야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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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는 실로 방대한 교리의 서적이
있으나 극소수의 전문가 이외에는 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딴 까닭이 아니라 읽기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고 또 인쇄 반포가
되지 못하여 심산벽지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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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의 상호 관계는 서로 화친하는 데에 그 본질이 있지만 이것에
반하여 이기주의적 탐욕의 발로로 다른 나라를 침범하여 그 민족을 구속
할 때에는 부득이하게 그 억압을 받는 나라의 민족은 평화와 자유를 되
찾기 위해 불교는 악한 적을 항복시키는 법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보살(菩薩)은 인생을 행복하게 하고 사회를 안전하게 하며 국가를 위하
는 일에 있어서는 살생을 할지라도 결코 파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
히려 완전하게 계율을 지키는 것이 될 수 있다. 불교의 계율 실천에 대
해 피상적인 것만을 보고 그 본질을 알지 못한다면 계율만 고집하는 것
이 오히려 파괴가 된다. 모든 불교의 계법에는 이와 같이 개차방편법(開
遮方便法)이 있으므로 불교의 계율에 대한 근본정신을 꿰뚫어 보지 않으
면 불교의 계법이 오도될 수 있으므로 극히 주의하여야한다.
만해가 행한 실천한 일제의 탄압에 대한 목숨을 아끼지 않는 항거는 이
러한 불교 정신적 자유와 평등의 회복을 위한 실체적 노력으로써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항거 정신은 구체적으로 교단의 침체, 망국의
비통 속에 열정과 지조를 지켜 학병징집반대, 신사 참배반대, 창씨개명
반대 운동 등으로 실천되었다. 특히 1919년 만해 한용운은 3 ․ 1 운동에
있어서 불교계의 대표자로서 혹은 조국 상실의 비통함을 안고 있는 민중
의 대변자로서 그 중심축의 역할을 하였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
심의 구현으로서 중생을 구제함뿐만 아니라 나라를 지키겠다는 서원을
세워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완수한 증거이다. 이러한 만해의
불교중흥고 호국사상의 보살정신은 한국 불교의 근대사 속에 살아남아
지금까지 민족 불교로서의 전통이 되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3) 만해의 화엄사상
i) 한국 화엄사상의 도입과 전개
이지관 (李智冠)의 『한국불교사상사개관(韓國佛敎思想史槪觀)』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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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조선 후기까지의 한국으로의 화엄사상의 도입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 보면 불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래, 화엄에 관한 내용이 나타나는
최초의 문헌은 고구려(高句麗)의 승려 승랑(僧朗)의 전기이다. 승랑은
삼론종(三論宗)의 승려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 화엄학(華嚴學)에도 능통
하였고 한국 화엄학을 최초로 도입시킨 승려였음이 『고승전(高僧傳)』
권8「법도전(法度傳)」223)에 전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자장부터 화엄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으며
불국사의 석굴암 등은 화엄사상을 지상에 구현하려고 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를 보면 창사(創寺)
이후로 주지는 거의가 화엄학계 특히 의상계(義相系)의 제자들이 역임했
던 것도 주목된다.
특히 신라인들은 불교를 받아들임에 있어 과거부터 불교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사유하고 이를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라국은 과거불(過去佛)의 주처(住處)였다고 하며, 가엽(迦葉)의 연좌
석(宴坐石)이었다고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있다.
또한 원효는 화엄에 관해서 『화엄경소』 8권, 『화엄경강목』 1권,
『화엄입법계품초』 2권, 『일도장(一道章)』 1권, 『보법기(普法記)』
등의 저술을 남겼다고 전하나, 현존하는 것은 『화엄경소』의 서문과 권
3 『광명각품』만이 남아 있다.
두순, 지엄, 의상, 법장 등에 의해 전개된 화엄사상은 일심법계(一心法
界)를 바탕으로 하는 중중무진한 연기를 설명하는데 의의를 가지는 점에
서 원효의 기신론관과 매우 가까운 면을 보인다. 원효의 화엄학에 관한
견해를 신라 表員의 『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要決問答)』권2
「보법의(普法義)」에 전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원효는 화엄경을 일체법
이 아무런 걸림 없이 서로 들어가고 서로 즉하고 있다는 보법이 설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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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대표적인 경전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일심법계에서 연기하는 모든 법
을 십문(十門)으로 표현하는 십현연기설(十玄緣起設)도 원효의 보법사문
(普法四門)과 본질적으로 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효의 중심사상인 기
신론 사상에 모두 연결 지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224)
224) 全寶三, 『華嚴의 觀點으로 본 萬海思想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민윤리학과, 2007,
pp. 18-19
225) 위의 책, pp.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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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지엄과 법장, 의상 등의 저서에 대한 주석
과 강의에 노력하였고 나아가 화엄경의 보현신앙에 의거 향가 11수를
지어 유포하여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화엄 신앙을 일반서민층에게까지 보
편화하여 고려시대 불교와 사회문화의 사상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신라 말기부터 선종이 대두되면서 화엄종에 대해 회의적인 비판이 가해
지자 화엄종에서도 이에 대응하여 자체적인 교리의 강화가 요구되었고
그러한 시대적 요구를 기반으로 균여가 화엄학의 저서들에 대한 본격적
인 재정립 활동이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균여
의 연구는 실천수행을 강조하던 신라 화엄학의 단점을 보완하여 화엄학
의 이론적 측면을 강화한 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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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알 수 있다.226)
살펴본 바와 같이 균여 화엄학의 주안점은 성상융회였는데 반하여 의천
의 화엄학 단계에서는 교선일치와 화엄과 천태의 조화 등의 문제가 새로
운 과제로 제기되고 화엄종의 입장에서 법상종과 선종을 포섭하여 화엄
종단의 우위를 역설하였다.
이후 고려 말에는 균여의 화엄학이 의천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다시 부
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균여의 방대한 저술과 이를 이은 후학들의 노력
으로 균여의 저술 가운데 5부 18권이 대장경 보유편에 수록됨으로써 다
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화엄종의 이러한 움직임은 『법계도총수록』
의 편찬과 발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균여의 부흥은 곧 신라 화엄학의 계승을 뜻하는데, 이것은 당시 불교계
가 처한 현실에서 의천의 대송(對宋) 편향적 화엄관에 대한 반성이며 민
족주체성에 대한 각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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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지눌은 선에서 출발하여 의상의 화엄을 근원으로 이해하였으며 이통현
의 실천적인 화엄교학을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선교를 일치시키는데 성공
하였다. 의상에서에서 비롯된 해동화엄의 원류가 지눌을 거쳐 설잠에게
전수되었다.
설잠은 화엄세계는 본래 아무런 개념적 규정도 포함하지 아니하며 그와
같은 세계의 인격화로서 비로자나불 또한 침묵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
다. 개념현상을 떠난 본래성의 차원에서는 일체 침묵하더라도 실은 침묵
이 아니며 실증적 차원에서 석가가 화엄세계에 관하여 설하였다 하더라
도 그 본래성에 관한 것은 설하여진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존재 세
계의 본래상은 바로 현현(顯現)하며, 현현이 바로 본래성으로서 스스로
현현하는 것이고 이것을 화엄에서 성기자연(性起自然) 즉 '저절로 그러
한 것'이라고 하였다. 설잠에게 있어서 존재세계는 인간존재의 문제에
귀착되는 것이었으며 존재세계를 분해한 망상의 일념은 동시에 성기의
장으로서 구성의 일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설잠에게 있어 화엄의 성기
법계(性起法界)와 돈오(頓悟)의 선(禪)체험은 근원적으로 상의(相依)의
관계로서 화엄의 법계가 성기(性起)인 것이나 선(禪)을 통한 체험의 장
을 찾는 것은 철저히 자기일신에 귀착하는 문제였던 것으로 보았다.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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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왕조의 배불정책에 따라 억압되던 불교가 일제에
의해 조선 침탈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일본 승려들을 활용하여 포교영
역 확대라는 명분으로 조선의 전국에 걸쳐 그들의 기지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만해 한용운은 일본의 불교 침탈이 민족적 자존
심은 물론 민족 역사의 단절을 가져오는 치욕의 오점 이라는 인식으로
민족적 역량을 모아 이러한 침략적 종교 활동의 배격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게 된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1911년 영호남 승려들이
순천 송광사에 모여 총회를 열고 임제종을 세우는 등 한국불교의 법통을
잇는 임제종 수호 운동의 전개였다. 이것을 통해 만해 한용운은 한국불
교의 법맥을 확고히 함으로써 한국불교의 일대 종풍운동을 통한 의식개
혁을 주장하였다. 이에 1600년 한국 불교 법통의 계승과 사수라는 절대
절명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 총독부의 한국불교 탄압에 박차
를 가하였고 이러한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불교의 친일화 과정과 왜색화
의 선봉에 선 한국불교계의 현실은 개혁의 대상이 되었고 이러한 개혁의
주체로서 핵심 인물이 바로 만해 한용운이었던 것이다.
만해 한용운과 더불어 불교개혁을 도모하는데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인
물이 영호 박한영(朴漢永)이다. 일제 강점기 화엄학의 실천자로서 한국
불교 전통의 법맥을 지킨 인물로 한용운 등과 함께 일제가 한국불교와
일본불교를 합종하려했던 연합맹약 7조약에 반대하여 한국 불교전통은
임제종(臨濟宗)임을 다시 밝히고 일제의 한국불교 말살정책에 정면으로
맞서 투쟁하였다. 특히 만해 한용운과의 두터운 관계는 남다른 데가 있
어 만해 한용운이 영호 박한영에게 보낸 한시 16편을 살펴보면 대부분
화엄세계를 읊은 시구로서 역사의 암흑기에도 시정을 초월한 사사무애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화엄사상은 한국 역사와 함께하면서 일제 시대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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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기까지 한국 정치 문화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때론 배척당하기도
하였으나 민족적 주체성을 찾고 그것을 보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
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일제의 억압과 조선불교의 형해화 속에서도
만해 한용운 등의 불교사상적 민족주체성을 가진 문인 등의 지식인에게
로 이어져 내려온 화엄사상을 통해 민족주의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한국 불교 역사에 있어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ii) 만해 화엄사상의 형성
다양한 저술과 논설 중에서 한용운의 화엄사상을 살필 수 있는 문헌은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1913년 5월 25일 불교서관 발행),
『불교대전(佛敎大典)』(1914년 4월 30일 범어서 찬술 발행), 『유심
(惟心)』 잡지 창간호, 제2호, 제3호(1918년 9월 1일, 10월 20일, 12월
1일 발행), 『님의 침묵』(1926년 5월 20일 회동서관 발행), 『십현담
주해(十玄談註解)』(1926년 5월 15일 법보회 발행), 『유마힐소설경강
의(維摩詰所說經講義)』기타 각종 논설 등이다.
a) 만해의 사사무애관(事事無礙觀)
만해의 화엄적(華嚴的) 세계관(世界觀)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저술은
『朝鮮佛敎維新論』이다. 만해 한용운은 여기서 불교 개혁을 통하여 인
간정신을 유신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유신론에서 불교 교리의 사상적인
체계를 먼저 제시하여 불교 개혁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현
실적인 덕목(德目) 12개항230)을 제시하여 개선점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서 한용운은 화엄사상(華嚴思想)의 법계관(法界觀)인 사사무애(事事無
礙)의 대승적 진리를 담은 세계관을 제시하여 과감히 유신할 것을 주장
230) 승려(僧侶)의 교육(敎育), 참선(參禪), 염불당(念佛堂), 포교(布敎), 사원(寺院)의 위치(位
置), 각종 소회(所懷), 의식(儀式), 노동(勞動), 결혼(結婚), 주직(住職)의 선거(選擧), 승려(僧
侶)의 단결(團結), 사원(寺院)의 통할(統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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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여기에서도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보현행(普賢行)을 다짐하고 있는 만
해 한용운의 화엄사상을 접하게 된다.
231)『朝鮮佛敎維新論』, 『全集』2. p. 45
232) 金芿石, 『華嚴學槪論』, 法輪社, 1974. p.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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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蓮華藏世界)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비
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중앙에 안좌(安坐)하여 있는 연화장세계해(蓮
華藏世界海)를 중심으로 주위 십방(十方)에 각각 무수의 불세계해(佛世
界海)가 있고, 그 하나하나의 불세계해에 또한 각각 주불(主佛)이 안좌
하여 있어 무수의 보살중(菩薩衆)을 거느리고 있다 한다. 이처럼 연화장
세계를 중심으로 천문학적인 무량세계(無量世界)가 불광명(佛光明)에 의
해 비춰지고 있으며, 이어서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등장하여 설법을 하
는 연화장세계는 바로 십현연기(十玄緣起)의 주반구족(主伴具足)의 세계
요 인다라망(因陀羅網) 중중(重重)의 불국토(佛國土)로서, 일절제불(一
切諸佛)의 국토가 모두 이 가운데 섭진(攝盡)되지 않음이 없음을 나타낸
다.233)
이러한 화엄적 세계관은 만해에게 있어서는 불신(佛身)이 멀리 십만억
국토를 지나 존재하는 극락(極樂)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 속에서 찾는
것이며 따라서 만해는 "불신은 법계에 충만하니, 원근(遠近) ․ 내외(內
外) 불신(佛身) 아닌 것이 없다."234)라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조선불교유신론』에서 만해는 화엄적 사사무애(事事無礙)의 중
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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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강조하여 중생구제를 말하면서 화엄사상(華嚴思想)의 세계관인
대비 원력을 나타내고 있다. 한용운은『조선불교유신론』의 목차의 내용
마다 화엄의 세계관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결론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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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을 살펴보면 입세간(入世間)의 논리를 통하여 역사의 현장 속에
서 개척자적으로 살아간 점을 알 수 있다. 국가와 개인 즉 개아(個我)와
보편아(普遍我)의 조화를 통한 나라사랑의 정신과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실상에서 창조의 논리로 파악하여 생성과 소멸의 근원을 파악함과 동시
에 존재의 이법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대자유의 논리를 통하
여 일체 무애인의 경지에서 생사 초탈의 인간의 참모습을 보였으며 끝없
는 구도를 통하여 영원한 구도자인 보살의 이상을 제시하였다.
만해가 앞서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강조한 비로자나법신관(毘盧遮那
法身觀)은 만해 사상의 핵심으로 그의 사상 형성에 지속적인 중심축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불교대전』의 집필에 있어서도 총설
(總說)의 도입을 "온갖 법(法)이 다 불법(佛法)이다"237)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그 자체로 불법(佛
法)이 된다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비로자나법신관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다.238)
이러한 만해의 사사무애관은 1924년 발행된 『개관(開關)』이란 잡지
에 기고한 「내가 믿는 불교」라는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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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나타난 만해의 설명은 곧 '사사무애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국 십
현문(十玄門)에서의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즉, 만유제법(萬有諸法)은 일체라는 면에서 서로 원융무애(圓融
無礙) 자재(自在)함을 말한다. 전체 속의 하나하나가 하나 속의 전체가
대(大)와 소(小)가 고(高)와 저(底)가 함께 조화하여 움직이므로 우리
는 일을 함에 있어서 혼자서 독립되거나 떨어져 있떠라도 그것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다른 것과의 조화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이
다. 즉, 만유제법은 완전한 조화(調和)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문(門)이다.
『불교(佛敎)』지에 실린 만해의 글에서도 비로자나법신관이 잘 나타나
있다.
山山 ․ 水水 ․ 花花 ․ 草草 어느 것 하나도 불성(佛性) 아닌 것이 없
는 까닭이다[...]. 그러나 미(迷)한 자는 ㅡ스스로 견성(見性)한 줄을
모르고 가령 관념적으로 안다 하더라도 어찌하여서 山山 ․ 水水 ․ 花
花 ․ 草草가 다 불성(佛性)인 줄을 모르는 까닭이다.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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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橫說竪說)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241)이라고 하였는데 '일
념 간에 삼세를 은현'한다는 것은 십현문의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
成門)을 의미하는 것이며 '무설설을 횡설수설한 팔만대장경'은 비로자나
불의 침묵을 의미한다. 만해는 비로자나법신관과 사사무애관을 팔만대장
경의 맥을 이루는 관념으로 파악하여 자신의 불교사상의 핵심은 화엄의
세계관인 '비로자나법신관'에 근거한 '사사무애관'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
다.
이러한 사사무애관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만해의 입장에 있어서는
그때 당시 불교인으로서 출세간(出世間)을 강조하던 풍토에서 벗어나 사
회 속에서 공존하며 세간과 사사무애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만해의 생각이 드러난 글이 『역경(譯經)의
급무(急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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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어 화엄과 선을 융합하는데 힘썼다. 이처럼 중국에서의 선종에는
화엄사상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신라 하대의 선사(禪師)들에게
계승되고 있었다.
이렇듯 사사무애적 선사상이 신라의 선사들에게 계승되었던 것이 고려
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에게까지 이어져 왔고 이에 지눌은 '
오직 자기 마음만 관하고 사사무애를 관하지 않으면 불과원덕(佛果圓德)
을 잃을 것'243)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화엄과 선을 연결 짓는 사사무애
적 사상은 鏡虛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와 경허로부터 영향을 받은 만해도
화엄과 선의 융합적인 사상적 틀을 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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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두루 응용됨을 말한 것이다."247)라고 주(註)를 달았다. 이처럼 만
해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존재로 바라보는 비로자나 법신은 방소나 방
법에 관계없이 내외 중간에 어느 곳이라도 존재하는 것이며 결국 이러한
비로자나 법신의 세계에서는 일절(一切) 제법(諸法)이 사사무애의 관계
에서 연기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사무애관의 궁극적 표현은「전위(轉位)」편에서 찾아볼 수 있
따. "푸른 못에는 물이 있고 공중에는 달이 있으니 상하(上下)가 같지는
아니하나 각각 그 묘(妙)함을 다하였으니 불법(佛法) 중에 무엇을 취하
고 무엇을 버리리요, 만법(萬法)이 한결같아서 서로 융합하기도 하고 떨
어지기도 한다."248)라고 하여 제법(諸法)의 원융적인 사사무애법계연기
의 상즉상난을 직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만해는 "도(道)를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소요자재(逍遙自在)해
서 외부의 사물에 사역(使役)됨이 없어야한다."249)라고 하여 사사무애
법계에서 연기하는 개체들이 자유로워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진이
(塵異)」편에는 "진세(塵世)를 초월하되 중생을 버리지 않고 세속(世俗)
에 파묻히되 그에 혼염(混染)되지 않는 것"250)이라고 하여 승속(僧俗)
의 무애(無礙)를 강조하였고, 「현기(玄機)」편에서는 "화중우(火中牛)
는 앉아서 모든 있고 없는 성명(性命)을 타파해 끊어버렸으니 생사에 얽
매이지 않는다(火中牛 坐斷性命 不滯生死也)."라고 하여 생사 무애(生死
無礙)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십현문』의 비밀현료구성문(秘密顯
了俱成門)을 사사무애 법계연기로써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에 나타난 만해 사상의 두 요체는 '현상(現
想)의 법신관(法身觀)'과 '활로(活路)의 선풍(禪風)'이라고 볼 수 있
- 152 -
다.251) '현상의 법신관'이란 현상 그대로가 바로 묘유(妙有)의 진리임을
밝힌 비로자나법신관이며, '활로의 선풍'이란 생사 속에서 열반(涅槃)을
구현하며 중생계(衆生界)에서 보살도(菩薩道)를 행하라는 것으로써 바로
생사의 승속(僧俗)의 사사무애관을 말하는 것이었다.
- 153 -
여 연기가 생기는데, 법계연기에서 단지 법계 내에 있는 사사물물 개체
들이 스스로 상즉 상입하여 중중무진의 연기를 이루며 이 연기사상이 불
교에서 구경으로 삼는 최상의 연기론이다. 이 일심법계의 문제는 만해
한용운의 화엄철학의 중심개념인데 이 일심법계관 속에는 모순, 대립이
전혀 없다. 그대로 조화이고 질서이며 화합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유심철학의 실천이 잘 나타난 것이 『유심(惟心)』지의 창간이
다. 한용운은『유심(惟心)』잡지(雜誌)를 통해 청년의 교육, 진로문제를
언급하여 보현보살의 이상을 심었다.252) 특히 창간호의 「심(心)」은 일
심법계관에 의한 유심론적 세계관이 잘 나타난 핵심적 근거이다. 특히
『유심』지의 창간은 유심론적 세계관 속에 일심법계관적인 화엄사상의
특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만해는 『유심(惟心)』지에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다.
- 154 -
무심소요(無心逍遙)의 세계에 은둔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혼탁한 세계
가운데서 비로자나법신을 감득(感得)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심』지
의 출현은 우선 민족의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 운동이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아울러 만해는 『유심』지를 3 ․ 1 독립운동의 전위 수단으로 삼
아 이 잡지의 언론 활동을 통하여 세계정세의 흐름을 파악하였으며 나아
갈 지표를 확인하였던 것이다. 『유심』을 통한 일심법계관의 유심론적
세계관은 만해 한용운의 화엄철학의 골격을 이루는 근간이다.
c) 만해사상과 십현문(十玄門)
십현문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진연기를 설명하는 방법으로서, 존
재하는 개개물물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에 의하여 성
립되어 있으므로 자성, 즉 실체가 없고 자성이 없으므로 공(空)한 것이
며 따라서 일체 만유는 상즉 상입(相卽 相入)의 관계에 있어 무애자재
(无涯自在)한 관계를 열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십현담은 상찰선
사의 게송으로 화엄종의 제4조 청량국사가 주석을 시도하였고, 우리나라
에는 매월당 김시습이 원문과 청량 주에다 다시 주를 보태어 『십현담요
해(十玄談了解)』란 이름으로 간행했다. 이를 만해 한용운이 새로운 감
흥을 일으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내게 된 것이다. 이는 한용
운의 선에 대한 이해와 화엄철학과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한용운은 1931년 『불교(佛敎)』 지(誌)(제87호. 1931. 9. 1)에 「일
념(一念)」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우주의 체와 생명과 가치는 일념에서
건립되는 것이요, 기하의 점, 회화의 소254)라고 하여 무한 법계에서 일
체의 사물은 언제든지 조금의 모자람이나 빠짐이 없이 원만하게 사(事)
와 이(理) 외의 모든 것을 동시에 포섭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한 티끌의 소우주 안에 있는 조그만 낱낱의 입자는 사실상 원만 구족하
- 155 -
게 미래와 과거의 끝없는 우주 속에서 무수한 대상과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시간과 공간에 무애할 뿐만 아니라 모든 원인과 결
과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음도 내포한다는 지적이다.
또 만해 한용운은「정중동(靜中動)」255)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역
설하고 있다.
- 156 -
d) 만해사상과 육상원융(六相圓融)
『화엄경』에서 말하는 중중무진(重重無盡)한 법계연기를 설명하는 한
방법으로 이 육상원융설을 이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화엄사상의 배경에
는 실천적인 수행과 화엄의 교리가 결부되어야한다는 요청이 담겨져 있
다. 이와 같이 종교적 실천의 논리를 담고 있는 까닭에 『화엄경』의 교
리가 가장 높고 깊은 불교 교리로 꼽히게 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연기의 원리에 의해 성립되어
있는데 이에 화엄에서는 법계연기(法界緣起) 또는 무진연기(無盡緣起)라
하여 이를 설명한 것이 바로 육상원융의 이론인 것이다. 육상(六相)은
곧 『화엄경』의 사상이며 『화엄경』이 말하는 우주는 그대로 부처요,
궁극적인 실재(實在)이다. 그것은 고정불변의 실체라는 의미가 아니고
항상 변화하면서 이동하고 순환하는 수많은 것들의 상관관계의 지속이
다. 이런 우주자연을 법계(法界)라 했고, 그 구성요소가 되는 것들을 일
절법(一切法)이라고 했다. 그 법과 법 사이의 관계를 인연소기(因緣所
起) 줄여서 연기(緣起)라 하는 것이다.
또 이 우주자연은 세계, 또는 세계해(世界海)라고도 불렀다. 바다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망망하고 방대함을 나타내고자 한 이유이다. 이 세계
는 세간(世間)이라고 불려지며 『화엄경』은 이 세간에 세 가지가 있다
고 말한다. 주어진 물질로서의 세간인 기세간(器世間), 그 속에 들어와
의식 활동을 잘못된 삶을 사는 중생들이 만들어가는 중생세간(衆生世
間), 그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어 올바로 살면서 이룩하는 정각세간(正覺
世間)의 세 가지다.
육상은 이 세계가 그것을 구성하는 수많은 법들 사이에서 원융 무애한
연기를 이루기 위해서 꼭 필요한 진리를 말한다. 만해 한용운은 여기서
나와 너의 관계 즉 일본의 직분과 조선의 직분의 차이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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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네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아니하려는 것은 인류 공통
의 본질인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람이라도 감히 막지 못
할 뿐만 아니라, 자기 민족이 자기네 민족의 자존심을 억제코자 하여
도 불가능 한 것이다.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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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어떠한 길인가를 현대의 우리들에게 알렸다. 더 나아가 나룻배가
될 수 있는 조국 역사를 사랑하고 가꾸는 만해 한용운의 정신은 화엄철
학에서 말하는 이사무애 법계관(理事無礙 法界觀)의 실천으로 나타났다.
4) 만해의 화엄사상의 의의
i) 자유사상으로서의 화엄사상
우선 첫째로 꼽을 수 있는 만해 한용운의 화엄사상의 의의는 자유사상
에 있다. 그의 자유사상은 그가 독립투쟁에 전면적으로 나서기 이전 오
랫동안 정진해 온 불교사상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 159 -
개인과 사회, 국가와 세계를 파악하는 그의 입장이 상대주의적 존재론인
연기론적 관점에 서 있기 때문인 것이다. 만해가 '나가 없으면 다른 것
이 없다. 마찬가지로 다른 것이 없으면 나도 없다. [...] 나는 다른 것의
모임이요 다른 것은 나의 흩어짐이다.'260)라고 말한 것이나 '하나가 만
(萬)이며 만(萬)이 하나인 것'이라고 한 것도 그러한 연기적 사상을 나
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사무애 법계연기에서는 연기의 주체가 없는 것이므로 사사무애 법계
에서 연기하는 개체들은 자유에 의하여 이루어진 '자유(自由)의 총화(總
和)'라고 볼 수 있다. 어떠한 주체자(主體者)의 명령에 의하여 연기를
생한다면 개체들의 자유는 있을 수 없으므로 사사무애 법계연기에서의
개체들은 어느 것이나 침탈될 수 없는 절대 자유를 자체적으로 보전하면
서 자유로운 연기를 통하여 법계를 장엄(莊嚴)하는 것이다. 만해는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160 -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 고로 자유가 없는
사름은 죽은 사람과 같으며 평화가 없는 자는 최고통의 사람이라 압
박을 당하는 자의 주위는 공기는 분묘로 화하고 쟁탈을 일삼는 사람
의 주위는 지옥이 되느니 우주의 이상적 최행복의 실재는 자유와 평
화라. 고로 자유를 득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혹 무시하고 평화를 지키
기 위해서는 희생을 감수 당하느니 이것은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또
한 의무일지로다.
그러나 자유의 공례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치 아니 함으로 한계를
삼느니 침략적 자유는 몰 평화의 야만자의 자유가 되며 평화의 정신
은 평등에 있으니 평등은자유의 상적을 조함이라. 고로 억압적 평화는
굴욕이 됨 뿐이니 진정한 자유는 반드시 평화를 보하고 진정한 평화
는 반드시 자유를 반할지라. 자유여 평화여 전 인류의 요구일지로다.
262)『全集』4. p. 223
1917년도에 출간된 《정선강의채근담(精選講義菜根譚)》에서, 한용운은 《채근담》의 “化居盆
內 終乏生機 鳥入籠中 便滅天趣 不若山間花鳥 錯集成文 ╃翔自若 自是悠然會心(꽃이 화분 속
에 있으면 마침내 생생한 기운을 잃고 새가 조롱 속에 들면 곧 본래의 취미를 잃느니, 산속의
꽃과 새가 서로 어울려 찬란한 문채(文彩)를 이루고 자유로이 날아다녀 이로부터 유연히 마음
에 느낀 것만 같지 못하다.)”라는 고전적 문구를 자유의 개념에 입각해서 현대적으로 풀이한다.
263) 『朝鮮佛敎維新論』,『全集』 2. p. 58
- 161 -
이처럼 만해는 자유를 인간 생명의 본질적인 것으로 강조하면서 특히
자유 중에서도 '사상의 자유야 말로 사람의 생명이며 학문의 핵심'이라고
했다. 그는 '사람은 외계(外界)의 사물에 포로될 자가 아니오, 마땅히 만
유(萬有)의 절정에 서서 종모자재(縱模自在)함을 얻을 지니'264)라 하면
서 본질적인 '자아의 해탈'을 통해 궁극적인 불교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고 보았다. 그리고 그 자아의 해탈은 용력(勇力)으로도 하지 못하고 위
권(威權)으로도 하지 못하고, 지식으로도 하지 못하고, 재능으로도 하지
못하느니, 그 길은 다만 수양의 한 길이었을 뿐이라'265)고 했다.
동시에 민족정신을 그 시대의 문제의식으로 대두된 중요 개념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인식도 자유의 개념을 바탕으로 파악할 때 좀 더 쉽게
이해되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자유관의 특성은 근대 서구
자유사상에서 그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것이 아니고, 그가 지금까지
체험하고 쌓았던 경험의 축적에 의해서 그 나름의 현실 인식을 통하여
그가 새로이 만들어낸 종교적 성격이 강한 것이라는 데에 있다.
그의 사유적 특성이기도 한 자유정신은 인간본질의 발견에서 비롯하고
있으며 불교적 측면에서는 불성의 자각이 뿌리하고 있다. 불성(佛性)의
자각(自覺)은 자기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구현하는 길이다. 의타적 사상
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본래(自性本來)의 진면목이 명명백백하
게 발로되는 불성구현(佛性具顯)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해 한용
운의 자유사상은 서구 근대사상의 자유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점을 발견
할 수가 있기도 하다. "―에 대한 자유", "―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스스
로 자유 자재하다는 정신적인 자유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자유관은 동시대의 지식인들과는 크게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불교적 인식론에 입각한 그의 자유관은 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
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며(一切唯心造), 결국 현상계(現象界)란 우리
- 162 -
마음의 투영(投影)으로 인식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그 마음의 본체
(本體)는 일체(一體)의 것에 무차별하고 청정하여 변치 않고 나지도, 멸
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不生不滅 不垢不淨) 감각기
관과 그 대상을 초월하여 고요하면서도 항상 작용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
다. 이것을 "진여(眞如)"라고 말하며 이 "진여"는 불교에서 영구히 변하
지 않는 불변의 뜻으로 일절(一切) 만유(萬有)의 진성을 뜻하며 "진
(眞)"은 허망하지 않음을 "여(如)"는 여여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여는
인간의 본체로서 현상계에 구속 받지 않고 자유 자재한 것이라는 주
장266)이다. 이러한 만해 한용운의 자유의 정신은 만유의 생명가치의 대
명제로 삼은 화엄법계의 사사무애 연기법(事事無礙 緣起法)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만해의 자유와 평등 사상에는 서양 근대 사상의 영향이 있다고 하는 점
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1900년대 이후부터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많
은 영향을 끼쳤던 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으로부터 만해
또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편 만해 한용운은 근대 서구사상 특히 칸트의 인식론과 베이컨의 자
유론을 수용하여 불교사상과 비교 고찰하고 있다. 즉, "나의 진정한 자아
를 나의 육안으로 볼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도덕의 이치로 미루어 생
각하면 엄연히 멀리 현상 위에 벗어나 그 밖에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
다면 이 진정한 자아는 반드시 항상 활발 자유로워서 육체가 언제나 필
연의 법칙에 매어 있는 것과는 같지 않음이 명백하다"267)라고 『조선불
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에서 밝히면서 다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
치고 있다.
- 163 -
사람의 자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 이것으로 생각하면 우리 몸에 소
위 자유성과 부자유성의 두 가지가 동시에 병존하고 있음이 이론상
명백한 터이다.268)
- 164 -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가 부과한 도덕적 의무를 따름으로써 참된 자유의
주체가 된다는 실천적인 자유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은 자유의
지야 말로 사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기본적인 역량이라고 생각
하였다. 더 나아가 그의 자유사상은 만물이 본질적으로 평등하게 존재하
는 불교의 평등사상에 기인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 165 -
아(現象我)는 평등하지 못하다고 보았다. 현상의 아(我)는 필연성에 종
속하기 때문에 자유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평등할 수 없다는 것
이다. 현상계인 현실사회에 있어서 불평등, 부자유한 여러 문제들이 결
국 깨달음의 입장에서 평등한 것이라고 본다면 문명이 진화함에 따라 자
유 평등이 부자유하고 불평등한 현상계에서 점차 사회적으로 구현됨으로
써 사회개혁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즉 "자유란 남의 자유를
침범치 않는 것으로써 한계를 삼는다."고 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만해가 생각하는 평등의 근원은 각 개인들의 자
유가 서로 존중되고 보전될 때에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사람들이 각자 자유를 보전하여 남의 자유를 침범치 않는다면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동일하고 저 사람의 자유가 이 사람의 자유
와 동일해서 각자의 자유가 모두 수평선처럼 가지런하게 될 것이라고 보
았다. 만해는 이러한 논지에서 "각자의 자유에 사소한 차이도 없고 보면
평등의 이상이 이보다 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만해 한용운은 인간의 본질로 파악되는 내면적 자유가 사회적
으로 표현될 때에는 각 개인이 서로의 자유권을 존중하여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며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자유를 침해할 때에는
자기의 자유를 보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의 성질이란 그 자유가 침해받을 때에는 투쟁적 성질
을 갖는다. 그의 3 ․ 1 독립정신의 근거이기도 한 이 점이 그의 투쟁적
삶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상으로 자유와 평등의 개념이 서로 혼융되
어 이상적인 이념으로서 추구되었는데 실제적으로 자유와 평등은 서로
상호관계에 있기도 한 정신이다.
또 만해 한용운은 칸트와 양계초의 자유에 대한 개념을 불교적 입장에
서 비판하고 있다. 칸트는 개인적 자유의 개별성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만인 공유의 자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하였으며 양계초는 만인 공유
의 자유만이 있고 개인적 자유가 없다고 한 관점을 옳지 못하다고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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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개인적 자유와 만인공유의 자유를 모두 밝혔
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조선불교유신론』의 불교의 성질을 설명
한 부분에서 잘 지적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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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자유와 평화를 조화시켜 나가려 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처럼 상
즉상리의 관계로 본다면 사회 구성원의 일부가 아무리 자유스러워도 다
른 일부가 부자유하면 완전히 자유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
이 앓고 있기에 나도 앓는다는 유마거사의 표현272)과도 상통하는 사상
이다. 이러한 정신이 바로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이기도 하다. 보살정신에
입각한 사회관은 직접 사회로 들어와 구세의 뜻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도 개인과 사회, 국가 또는 민족과의 관계를 상즉상리의 관
계 속에 있는 유기적 공동체로 파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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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자유주의가 표방하였던 자연법사상(自然法思想)에 기초한 자유사상
과는 구별되는 측면이 있다. 서구 자유주의가 기존의 봉건적 계급질서를
타파하고 종교적 자유를 획득하며, 봉건귀족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하는
데 그 자유사상의 계기를 찾고 있다고 본다면, 반면 만해 사상적 자유
개념은 당시 조선 사회가 직면하였던 민족의 자주 독립 실현이라는 민족
적 과제를 바탕으로 사회적 자유에 주목한 민족 해방의 자유를 역설한
것이며 그가 말하는 사회적 평등은 국가 간의 주권 평등을 강조한 것이
라는 데 그 진정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 169 -
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만해의 역사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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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지식은 점근진적(漸近進的)이므로, 초매(草昧)로부터 문명에,
쟁탈(爭奪)로부터 평화에 지(至)함은 역사적 사실에 증명하기 족하도
다. 인류 진화의 범위는 개인적으로부터 가족, 가족적으로부터 부락
(部落), 부락적으로부터 국가, 국가적으로부터 세계, 세계적으로부터
우주주의에 지(至)하도록 순차로 진보함이니 [...]
- 171 -
첫째로서 만해는 조선민족(朝鮮民族)의 실력을 조선독립의 동기로 삼고
있다. 일제가 당시 조선의 물질문명이 낙후되었다는 주장으로 우민학정
(愚民虐政)과 열등교육을 통해 식민지화를 이루려고 하였으나 만해는 '
조선인은 당당한 독립 국민의 역사와 전통계승의 힘이 있을 뿐 아니라
현대 문명에 맞추어 나아갈 충분한 실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세계 대세(世界大勢)의 변천(變遷)을 들고 있다. 20세기 초부터
전 인류의 사상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군비제한, 국제재
판소 설립, 세계연방의 구상 등 세계정세는 세계평화를 추구하며 촉진하
는 방향성을 띠고 있었다. 당시의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은 세계적인
사상변화의 본보기가 되고 있었다. 만해는 이러한 역사인식의 바탕에서
'현재로부터 미래 세계의 대세는 침략주의의 멸망, 자존적 평화주의의
승리가 될 것' 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와 같
이 인식하게 된 것은 약육강식의 자연적 법칙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야만
적 사회로부터, 인도주의적, 세계평화적인 정의가 구현되는 문명사회로
역사가 진보해 나간다고 보는 역사 인식에 기초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민족자결조건(民族自決條件)을 들고 있다. 만해는 '윌슨이 주장
한 민족 자결주의가 메마른 땅에 봄비를 전해주는 격이 되어 침략자의
압박에서 신음하던 각 민족은 독립 자결을 위해 분토하게 되었는데, 폴
란드, 체코, 아일랜드 그리고 조선의 독립의 선언이 그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윌슨의 민족 자결 주의가 독일을 비롯한 패전국 식민지를 고
려한 원칙이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민족 자결 주의 사상을 조선
독립에도 적용이 될 수 있는 공공의 원칙으로 보았던 것이다. 특히 『조
선독립(朝鮮獨立) 서(書)』에서 말하기를 연합국이 화란의 독립을 찬성
하고 체코의 독립을 위해서는 시베리아까지 출병하였는데 특히 미(美) ․
일(日)의 행동이 현저하였음을 들어 민족자결의 조건으로 강대국들이 약
소국의 민족적 자립을 위하여 힘을 써야겠다는 실례를 비꼬아 말하고 있
다.
- 172 -
만해의 역사 인식에서 특히 강조되는 점은 조선 민족의 장구한 역사적
전통을 이어 계승해 나가야 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사명의
실천의지에 있다. 그가 말하는 '조국사상(祖國思想)'도 자기의 민족에 대
한 오랜 역사와 전통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이를 근본으로 생
각하면 5천년 역사의 단절은 용인될 수 없고 독립을 향한 민족의 역사
적 사명은 보다 더 우선시되는 가치가 되는 것이다.
- 173 -
은 번연 자각하여, 그 신경은 더욱 과민하였으며 그의 기회를 엿보는 인
구는 더욱 광대하였으니 이것이 금회 운동에 주인아(主因兒)'279)라고 주
장하기에 이르렀다. 만해가 어려운 시대적 상황과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과감히 일본의 침략의 부당함을 적극적, 지속적으로 지적하여 알리고,
윌슨의 민족 자결 주의를 희망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사상적인 바탕은
그가 기본적으로 취하고 있던 진보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독립의
쟁취를 통한 역사의 단절 없는 계승을 시대적 사명으로 강조할 수 있었
던 정신적인 기반은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어 타는' 꺼질 줄 모
르는 조국에 대한 사랑에 있었다. 조국의 장구한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발전하는 역사에 희망을 거는 그의 미래 지향적 의지가 끊임없는
조선 독립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2) 자유 · 평등 · 평화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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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있고, 그 전체로서의 자유가 실현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각 개
인의 자유도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특히 만해의 자유사상은 불교적 기본 사상에서 더 나아가 세계적인 철
학 사상들을 비교, 분석하여 도입 ․ 비판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만
해는 '칸트'의 사상 중에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우리 일생의 행위
가 다 내 도덕적 성질이 겉으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 인간성이 자유에 합치 하는가 아닌가를 알고자 하면 공연히 겉으로
나타난 현상만으로 논해서는 안 되며 응당 본성의 도덕적 성질에 입각하
여 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도덕적 성질에 있어서야 누가 조금이
라도 자유롭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겠는가.
도덕적 성질은 생기는 일도, 없어지는 일도 없어서 공간과 시간에 제한
받거나 구속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도 미래도 없고 상상 현재
뿐인 것인바 사람이 각자 이 공간 ․ 시간을 초월한 자유권(-본성)에 의
지하여 스스로 도덕적 성질을 만들어 내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나의 진
정한 자아(自我)를 나의 육안(肉眼)으로 볼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그
러나 도덕의 이치로 미루어 생각하면 엄연히 멀리 현상 위에 벗어나 그
밖에 서 있음을 보게 된다. 자유의지가 선택하고 나면 육체가 그 명령을
따라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의 자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 이것으로 생각
하면 우리 몸에 소위 자유성과 부자유성 두 가지가 동시에 병존하고 있
음이 이론상 명백한 터이다.'라고 칸트의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한 양계초(梁啓超)의 해설에 대해 한용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
였다. 부처님 말씀에 소위 진여(眞如)라는 것이 있는데, 진여란 곧 '칸트
'의 진정한 자아(自我)여서 자유성을 지닌 것이며, 또 소위 무명(無明)
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명이란 '칸트'의 현상적인 자아에 해당하는 개념
이어서 필연의 법칙에 구속되어 자유성이 없는 것을 뜻한다고 하였다.
또 부처님 말씀을 들어 설명하면서 '생각건대 우리가 무시(無始)이래로
진여 ․ 무명(眞如 ․ 無明)의 두 종자를 지니고 있어서 그것이 성해(性海)
- 175 -
와 식장(識藏) 속에 포함되어 서로 훈습(薰習)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범부(凡夫)는 무명으로 진여를 훈습하는 까닭에 반야지(般若智)를 그르
쳐 식(識)을 삼고 도를 배우는 자는 또 진여로 무명을 훈습하는 까닭에
식을 전화시켜 반야지를 이룬다'고 하였음을 들고, 나아가 송대(宋代)의
유학자는 이 범례(凡例)를 따라 중국의 철학을 조직한 터이었으므로 주
자(朱子)는 의리(義理)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을 나누어서 대학
(大學)을 주(注)하였음을 말하고있다. 즉, 그는 말하기를 명덕(明德)은
사람이 하늘에서 받는 것인 바, 허령불매(虛靈不昧)해서 모든 이치를 구
비하여 온갖 사물에 응해 작용하는 당체(當體)이다. 다만 기품(氣禀)의
구애와 인욕(人慾)의 가림으로 인해 때로 어두워지는 수가 있다'고 했
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진여(眞如)가 일체 중생이 보편적으로 지닌 본
체(本體)요, 각자가 한 진여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 했고, '칸트'는 사람
이 다 한 진정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이러한 점에 차이가 있다
고 보았다. 또 나아가 부처님 말씀에 '한 중생이라도 성불(成佛)하지 않
는 자가 있으면, 나도 성불하지 못한다'하셨으니, 모든 사람의 본체가 동
일하다고 보기 때문이며, 이런 태도는 중생을 널리 구제하자는 정신에
있어서 좀 더 넓고 깊으며 더 없이 밝다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만해는 칸트와 주자의 사상을 비교하면서 그 한계를 지적
하였는데 '칸트'는 (만약 선인이 되고자 하는 의욕만 있으면 누구나 선인
이 된다)고 했으니, 그 본체가 자유롭다고 믿었기 때문이어서, 수양이라
는 면에서 볼 때 좀 더 절실하고 행하기 쉬운 특징이 있었다고 하였다.
반면 이에 비해 주자(朱子)의 명덕설(明德說) 같은 것은 만인의 동일한
본체를 지니고 있는 상황을 지적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부처님에게 못 미
치는 점이라고 하겠고, 또 말하기를 이 명덕(明德)이 기품의 구애와 인
욕의 가림을 받는다 하여 자유로운 진정한 자아와 부자유스러운 현상적
자아의 구분에 있어서 한계가 명료치 않았으니, 이것이 '칸트'에 비해 미
흡한 점이다 라고 하고 있다.
- 176 -
결론적으로 만해는 칸트의 개별적 자유의 개념과 양계초의 만인 공유의
자유의 개념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어느 한쪽의 관점이 아닌 불교적 자
유의 관점에서 그 의미를 지적하여 밝히고 있다.
- 177 -
리고 각 개인의 자유와 만인공유의 자유 양자를 모두 강조하고 두 자유
는 별개의 것이지만 다른 하나가 결여된 상태에서는 개인의 자유이든 공
유의 자유이든 완전한 자유로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진보는 양 자
유의 완전한 실현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나아가 궁극적인 평
등 사회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하며 이러한 자유의 수호는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고 지
적하였다.283)
따라서 절대적 평등은 절대적 자유의 보전으로 실현될 수 있고 진정한
자아(自我)는 절대적 자유를 표상하므로 평등으로 나아가지만, 현상적
자아는 필연성에 종속하므로 자유스러울 수 없다. 이러한 내면적 평등은
사회적 자유의 실현을 통해 사회적 평등의 실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결국 만해 한용운에게 있어 자유 ․ 평등은 국가나 권력에 의해서 부여
되거나 보호되는 것이 아닌 자연법적 본질을 갖는 것으로 다른 사람이나
국가에 의해 침해될 수 없는 것으로서, 단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사상
적 개념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적인 사회로 까지 나아간 단계에서 서로의
상호관계 속에서 공유되는 개념인 것이다.
3) 자강론(
자강론(自强論)과 비폭력주의
- 178 -
명에 뒤떨어진 결과 자멸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독립을 획득하기 위해
서는 침략자의 침략에 대한 항거와 동시에 스스로 강화된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 179 -
진실로 땅이 낮아서 물이 흐르지 않음을 보장할 수 없다면, 스스로
땅을 높이 하여 물이 이로부터 떠나게 함이 상책일 것이다 [...] 세상
에서는 흔히 땅의 낮음에 죄 있다 하지 않고 물의 세력이 침범한 것
을 나쁘다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판단으로 물이라는 세력에는 책임
이 없고, 땅이 낮음에 의해 수난을 받게 된 것이다.286)
286)『朝鮮佛敎維新論』,『全集』2. p. 61
287) 金相鉉,『萬海의 獨立事象』, 韓國佛敎學硏究叢書, 近現代 佛敎人物(2). p. 14
- 180 -
그에게 있어 망국의 한은 빗소리도 조국의 통곡으로 들리고 고요한 새
벽에 천지신명의 질책을 듣게 할 정도로 뼈에 사무치는 것이었지만, 그
는 조선 민족이 피해자로서 복수심에 근거한 독립 사상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 181 -
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182 -
정신을 고무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나, 역사를 아
(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파악한 단재의 사관(史觀)은 제국주의적
사상에 기반을 둔 군국주의 ․ 침략주의를 인정할 위험성까지 있는 것으
로서, 자유와 평등의 자연법적 우위성을 인정하는 전제하에 만해가 주장
하는 비폭력 정신이 '침략' 그 자체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던 것과는 비교
되는 것이라 하겠다.
- 183 -
민족자결을 존중하고 돕는 것이 곧 평화주의적인 이상적 국가 관계라고
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강대국인 사(事)와 약소국인 사(事)가 서로 대
립하는 장애가 없는 상태, 즉 사사무애의 화엄적인 민족주의의 실현의
정수인 것이다.
- 184 -
을 잃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본연의 성질을 유지한 채로
서로 무애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 화엄적 사사무애인 것이다. 따라서 일
본이 조선을 침략해 그들의 민족정신을 몰아내고 일본의 민족정신을 이
식하려는 것은 만해의 사사무애적 관점에서 자유, 평화에 완전히 반하는
것이며, 합리화 될 수 없는 것이다. 설사 조선이 약소국이라 하여도 민
족자결을 통한 조선 스스로의 본체를 보유하면서 세계적인 평화와 평등
을 이루는 것이 만해의 민족주의이다. 따라서 침략적이고, 강압적 융화
를 추구하는 일본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는 만해의 화엄적 민족주의와는
철저히 구별되는 것이다.
- 185 -
개인과 개인은 서로 한계를 짓고, 배척 되는 관계가 아닌 서로 연결되는
일체가 된다는 점에서 상즉상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 186 -
한다고 할 때, 도덕적 견지에서 말한다면 죄는 갑에 있고 을에 있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공례(公例)에 서서 볼 때에는 도리어 죄가 을
에 있고 갑에는 없는 것이 된다. … 우열(優劣)·승패(勝敗)와 약육강
식(弱肉强食)이 또한 자연의 법칙임을 부정할 길이 없다. … 비유하자
면 갑의 세력은 물 같고, 을의 세력은 땅과도 같다. 이제 한물이 여기
에 있고 땅의 고하(高下)가 같지 않다고 할 때 물이 낮은 데로 흐를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터이다. … 땅이 낮아서 물이 흐르지 않음
을 보장할 수 없다면, 스스로 땅을 높이 하여 물이 이로부터 떠나게
함이 상책일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갑의 세력은 처음부터 죄가 있느
니 없느니 하는 책임이 없고, 을의 세력이 스스로 높고 낮음이 있어서
수난을 겪음을 알게 된다.297)
- 187 -
그의 민족주의적 독립사상은 일본에 대한 배척에 중점이 있는 것이 아
닌 외부로부터의 조선 민족에 대한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
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 188 -
와 철학이 점차 높은 차원(次元)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며, 그 때에야
그릇된 철학적 견해나 그릇된 신앙 같은 것이야 어찌 다시 눈에 띌
줄이 있겠는가. 종교요 철학인 불교는 미래의 도덕 · 문명의 원료품
(原料品) 구실을 착실히 하게 될 것이다.300)
300)『朝鮮佛敎維新論』,『全集』2. p.43
- 189 -
V. 화엄사상과 민족주의의 결합
- 190 -
으로서 지식인들이 민족주의를 내세워 지배계층을 몰락시키는 혁명의 이
념으로 삼았다. 2000년 이상 이어져 내려온 황국 통치가 이미 양적 발
전을 이룬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한계가 있음을 자각한
중국의 지식인들은 황제가 아닌 민족을 중심으로 혁명을 이루어 당시의
청 조정을 퇴진시키고 근대 국가로 거듭나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결
론적으로, 중국 민족주의의 궁극적 목적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본질적으로는 중국 내의 지배계층과 국가적 목표 이념의 교
체로 근대화에 성공하려고 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본 고 제 3장 2절 중국 정치사상과 화엄 철학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 민족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화엄적 연기관을 기본 개념
으로 하여 사상을 발전시킨 대표적인 인물은 탄스통이었다. 탄스통은 그
의 인학(仁學)을 설명하면서 만물이 완전한 상호연관 관계를 이루는 무
애로서의 통(通)은 모든 상호적인 인(仁)이 이태(以太, 에테르)의 전파
를 통해 전달되어짐을 말하면서 화엄경에서의 사사무애를 그 철학의 근
본 개념으로 삼았다. 탄스통은 이러한 통(通)은 평등으로 나타나며 그
상호관계가 인(仁)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인을 통해 중국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그는 캉유
웨이의 대동사상(大同思想)을 발전시켜 국가들의 존재가 사라지고 자민
족과 타민족의 구별이 없어지게 되는 이상향적 세계관을 제시함으로서
만물의 전체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탄스통의 사상에 있어서 화엄적 사사
무애를 기반으로 그 연기의 궁극적인 실현 상태를 그만의 특유한 방법으
로 발전시킨 것이다. 결국 탄스통의 철학은 미래 대동(大同)적 관점에서
민족과 국가 개념이 사라지는 것이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화엄적인 사사
무애의 민족주의 사상에서는 벗어나 있다. 개별적 각 개체의 고유성이
사라진 전체의 개념만이 존재하는 것으로서 민족자결이나 민족주의적 관
점 보다는 ‘조화’에 초점을 둔 사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 191 -
일본에서는 민족주의가 더욱 적극적인 정치 이념으로 사용되었다. 민족
주의의 수용과 발전이 단지 서구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서 자국을 지
키기 위한 방어적 수단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일본 외부로의 적극적
인 침략과 팽창을 위한 제국주의 국가로 진입하는 바탕이 되었다. 일본
에서 민족주의의 수용은 역시 외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
작 되었다. 즉, 일본 민족 스스로의 고유한 우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국수적인 민족주의적 자부심만으로는 외세의 침략에 대처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서양의 과학 · 기술을 도입하는 것뿐만 아니
라 서양식 내각제를 도입하고 서양식 무기를 공급하는 등으로써 서구에
맞설 수 있도록 스스로 개혁 · 개방을 이루었다.
일본에서의 민족주의 사상의 도입과 발전의 특이한 점은 중국에서 민족
주의가 지배 계층을 몰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던 것과 달리, 오히려
천황(天皇)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여 왕정복고
(王政復古)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큰 차이점이 있다. 세계적으로도 대부
분의 근대 혁명이 우월적인 지배계층을 부인하고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민족’을 우위의 개념으로 보아, 부패하고 타성에 젖어있는 기존의 정치
세력을 타파하고자 하였던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러한 보수적 왕정복고 사상에는 일본 스스로가 ‘천황(天皇)’아래 통일된
하나의 집합체로서의 민족이 존재하는 일본 고유의 민족주의적 사상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일본은 강한 중앙집권화를 이
루었고, 아울러 아시아에서는 가장 효율적으로 경제적 근대화를 빠른 시
간 안에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집권화와 경제적 근대화는 일본에서 민족주의를 변
형된 모습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일본은 자신들이 배격하
고자 하였던 서구 열강들과 같이 제국주의 국가로서 해외팽창의 야심을
품게 되었는데 이 때 다시 민족주의가 그 이념적인 표어가 되었다. 민족
주의는 더 이상 일본 내부의 개혁 · 개방을 위한 수단적 이념에 머물지
- 192 -
아니하고, 고도로 집권화된 국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강력한 군국주의
의 근거가 되었다. 이와 같은 민족주의의 제국주의로의 발전은 일본 일
반 국민 내에서도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으며,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노
일전쟁(露日戰爭)을 거치면서 일본은 세계적으로도 본격적인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민족주의를 발판으로 하여 피침략자의
지위에서 침략자의 지위로 전환을 이끌어낸 것이 일본의 민족주의의 흐
름이었다.
일본에서 화엄사상의 발단이 된 핵심적 사상은 ‘천황이 곧 국가’라고
하는 황국 정치사상에 있다. 화엄 사상을 통해 천황과 국가를 동일시하
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냄으로써, 적극적으로 정치에 화엄 사상을
도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만주사변 이래 일본이 아시아를 통합
하고 이끌어나가는 지배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화엄 사상은 강한 뒷
받침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내에서의 각 세력의 대립과 충돌
의 통제와 융화를 하기 위한 정치적 이론으로서 화엄교학이 각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근본은 ‘조화’에 있음을 강조하고 국민은 개개인
이 개별적인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 속의 부분으
로 간주되어 각 개인이 자신의 지위에서 맡은 바 임무를 다 하고, 국가
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통해 전체로서의 국가로 융합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키히라 타다요시는 화엄경을 헤겔과 연결시키면서 진여연기와 법계연기
를 유합한 형태를 헤겔의 사상에서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키히라 타다
요시의 화엄경 해석은 일본국가론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화엄경에서 나
타나는 통합적인 존재의 실현이 곧 천황, 즉 국체라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의 국체는 법계연기와 여래장연기의 중간적인 것으로 모두가
평등한 가운데 천황이 절대적인 존재로 위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키히
라 타다요시의 화엄교학에서도 무력적 침략을 정당화하기에는 곤란한 점
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화(和)의 개념이
- 193 -
등장하였던 것이고, 이 역시 화엄 사상을 이론적으로 바탕에 깔고 있었
음은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천황의 절대성을 강조한 일본 황국 사상은
천황과 백성이 사사무애에 따른 평등 관계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원칙
적으로 화엄 사상과는 차별성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러한 키히라 타
다요시의 화엄철학과 민족주의의 연결은 사사무애의 개념을 본질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는 없다. 그의 화엄철학은 천황 아래 모두가 평
등하다는 논지로 여래장 성기 사상을 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일본에서는 다카쿠스 준지로는 전체주의와 화엄법계의 연결을
강조하고, 니시다 키타로는 사사무애와 이사무애를 말하면서도 황족과
일본의 우월성을 말하였다. 또 쓰치다 교손은 사사무애에 기반을 둔 사
회개혁을 사상화 하여, 자유주의적 사회체제를 인정함과 아울러 국가사
회주의로까지 사상을 발전시켰다. 한편, 스즈키 선사는 화엄사상을 통해
일본을 민족주의적 국가로 재건국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평등적 관점에
서의 각 민족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융화적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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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결을 통한 모든 국가의 평등한 관계의 평화적 공존을 민족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보았다. 이러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만해는 민족주
의가 자칫 흐르기 쉬운 국수주의적 국가관이나 제국주의적 국가관을 지
양하고, 민족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 각국의 자유와 평등을 통한
평화에 있음을 주창했던 것이다. 이는 다른 민족주의 사상과 매우 구별
되는 점으로 민족주의가 ‘민족’의 우월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자기 민족
만을 강조하고 다른 민족을 공격이나 방어의 대상으로 삼는 변질된 민족
주의로 나아가지 않고, 상호적 공존을 중요시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큰 것이다.
기존 서구에서 발생되어 비서구, 즉 동아시아에 이른 민족주의가 다양
한 형태로 발전되다가 대체로 근대 사회에 이르러 변질된 형태를 띠면서
그 의의를 상실해가고 오히려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현대의 국제 사회에
걸맞지 않은 사상으로 전락하고 마는 경향을 보이지만, 만해의 민족주의
는 그 자체로서 현대 사회에 현실화 할 수 있는 사상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 만해의 민족주의적 독립 사상은 자유, 평등, 평화 세 가지
로 대표되는 것으로서, 자유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본질인 까닭에 자
기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을 권리를 누구나 가지는 한편, 동시에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하는 것까지 내포하는 것이다. 이는 개개인의
인간으로서의 자유 존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 국가들의 자유인 자
주독립, 나아가 세계 평화를 이루기 위한 공존의 규칙으로서의 자유까지
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다.
민족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어느 한 민족의 우월함을 말하기보다 각 민
족의 개개의 특성을 존중하는 채로 서로 동등한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만해의 민족주의의 핵심이다. 일본이 제국주의 당시 일본
민족의 도덕적, 정치적 우월성을 내세워 주변 국가로의 침략을 합리화하
면서 민족주의를 통한 국가들 간의 우열을 설정하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만해의 민족주의는 각 개별 개체로서의 인간 개인이나 국
- 195 -
가들의 개성과 자유를 존중하였다는 점에서 중국 사상가 탄스통이 개인,
가족, 사회 공동체, 나아가 국가에 이르기까지 서로 경계가 없이 하나로
통합되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말한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탄
스통의 궁극적 세계관이 현대 사회에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면이
있는 것과는 달리, 만해의 민족주의적 세계관은 현대 사회에서도 유연하
게 받아들여지고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만해의 민족주의는 조선 독립의 사상 형성에 있어서 ‘자강론(自
强論)’이나 ‘비폭력주의(非暴力主義)’로 나타나는데, 이는 만해가 말하는
자유, 평등사상이 민족 간에 서로 자유를 존중할 것뿐만 아니라 민족 스
스로가 자유를 수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이루어지는데, 그러한
능력을 갖춤에는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수단에 의하여야 한다고 말한
다. 이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해가 말하는 독립은 민족 스스로의 능력
을 키우기 위해 철저히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자주(自主) 발전을 이루
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조선 민족만의 민족주의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주의에 입각한 민족 스스로의 평화 수호를 강조하고 있다. 그의
민족주의적 독립 사상은 타인이다 다른 국가, 세력을 원망하고 탓하기보
다 스스로의 자강(自强)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고 그 원인을 제거
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국가나 내부의 다른 계층과의 대립과 갈등
을 통해 자강을 이루려하였던 중국, 일본의 민족주의적 사상과 다르다.
- 196 -
기독교라는 통일화된 종교에 예속되어 규율되던 이전의 서구 정치와 달
리 국가주의 사상이 형성되면서부터 서구 국가들의 왕조는 종교의 위치
를 새로이 규정하고 정치권력의 정점에는 종교적 지도자가 아닌 왕이 위
치하게 하였다. 정치에서 종교의 영향이 배제됨으로 인해 비로소 내셔널
리즘이 나타날 수 있는 시대적 환경이 마련되었다. 이어서 절대 왕정의
등장과 국가권력의 중앙집권화를 이루는 가운데 국민의 계층적 차별을
폐지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중요해지면서 민족주의는 서구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함께 정치 이념의 핵심이 되었다.
세계가 근대화 과정에 접어들고 민주화에 초점이 맞추어 지면서, 서구
의 내셔널리즘은 국민주권주의를 이루기 위한 국민주의적 내셔널리즘을
시작으로 후에 국가 권력의 강화에 따른 신속한 산업화의 추진의 과정에
서 국외 팽창의 이념이 된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으로 나타났고, 궁극적
으로는 국민주권 국가에서 국민의 단결과 통합을 이루기 위해 주권이념
에서 유래한 정치적 연대를 강조한 민족주의적 내셔널리즘으로 연결되었
다. 이러한 서구의 내셔널리즘의 변천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서구에서
는 내셔널리즘이 민주화의 달성과 산업화 과정에서 얻어진 권력의 집중,
그리고 그 집중된 권력과 재화의 잉여를 국외로 팽창시켜나가는 방법으
로 소비하고 다시 그것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다는 데에 그 중심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제국주의로의 전환이라는 결과를 낳았
고, 그러한 서구의 제국주의는 서구 이외의 국가나 사회로의 공격적인
성장 · 침략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서구의 내셔널리즘은 만해의 화엄적 민족주의와 비교할 때 현격
한 차이를 보인다. 서구의 내셔널리즘은 민족적 결집과 우월성을 명분으
로 자국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타국에 대한 공격적 개방성을 합리화하는
제국주의로 빠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만해의 민족주의 역시 민
족주의라는 틀은 서구에서 시작된 민족주의 개념을 차용한 것이며, 만해
가 실제적으로 칸트의 사상 등을 바탕으로 민족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 197 -
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해의 민족주의는 침략적 제국주의
를 결론으로 낳았던 서구의 민족주의와는 달리, 침략국이던 피침략국이
던 가리지 않고 서로가 공존할 수 있는 평화적 화엄 사상에 입각한 민족
주의로 거듭나게 하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만해의 화엄적 민족주의가 존
재의 이유를 갖는 것이다.
만해 한용운이 금후(今後)의 세계는 불교의 세계이며 불교적 자유와 평
등이 실현되는 사회를 미래의 사회로 예측하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 속에서 불교의 화엄적 연기(緣起)관은 불교라는 개별적 · 전통적
종교에 국한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세계 각국의 민
족과 국가 사이에서도 화엄적인 연기를 이루는 관계적 조화가 중요한 가
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만해의 민족주의가 한 시대에 국한된
패러다임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며 항구적인 이념이 될 수 있다.
만해의 자유사상의 중심에는 사사무애의 법계연기관이 자리 잡고 있는
데 개인 사이의 자유사상이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민족주의적인 자주독
립사상으로 나타난다. 즉, 만해가 설명한 바와 같이 ‘나’와 ‘다른 것’은
서로 연기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므로 ‘나’의 존재가 ‘다른 것’의 존재
근거가 되고 ‘다른 것’이 다시 ‘나’의 존재 근거가 되는 것이므로, ‘나’와
‘다른 것’ 사이에는 존재의 우열(優劣)이 없고, 따라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되거나,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어느 한 민족이나
국가가 다른 민족이나 국가와 별개의 존재이면서도, 서로의 존재에 자신
의 존재를 의존하며, 어느 한 민족이나 국가가 다른 민족이나 국가에 종
속되거나 지배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이러한 만해의 화엄적 자유관은
근대 서구의 민족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자유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
라 만해 자신의 사상적 연구와 경험에서 비롯된 불교적 성격이 강한 것
이다. 서구의 자유사상이 자유를 침해하는 대상으로부터의 자유를 일컫
는 관념이었던 것에 비해 만해의 자유사상은 화엄적 사상에 바탕을 둔
- 198 -
것이었으므로 다른 대상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스스로 자신으로부터 나
오는 정신적 자유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해의 화엄적 민족주의는 그의 평등·평화사상에서 그 의의가 최대화된
다. 불교적 관점에서 모든 만물의 평등이 기본적 사상의 근거가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만해가 살았던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의 불평등하고 비평
화적인 상황은 평등하고 평화스러운 사회로 변화되어 가면서 화엄적 연
기로서의 자유가 실현되는 불교적 이상(理想)이 현실화된 사회가 되는
것이다. 각 민족이나 국가의 자유가 각각 존중되고 보전됨으로써 각각의
자유가 평등하게 상호 공존하는 것이 바로 만해의 화엄적 세계관이며 민
족주의인 것이다.
부처와 중생(衆生)의 관계가 상즉상리(相卽相離)로서 상호 의존적인 것
처럼 전체로서의 세계와 개체로서의 각 민족이 서로에게 존재의 근거가
되면서 육상원융(六相圓融)을 이루어 조화를 낳는 것이 만해의 화엄적
민족주의의 핵심이다. 이러한 만해의 관점에서 상즉(相卽)과 상리(相離)
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자칫 민족주의는 전체주의나 자유방임주의로
나아갈 수 있으므로 양자의 조화 속에서 모든 민족과 국가가 균형을 이
루는 것이 곧 사사무애(事事無礙)의 결정체가 되는 것이다. 국가나 민족
간의 관계에서 화엄적 사사무애의 정신이 각 주권의 평등과 자유사상을
민족주의의 어느 한 극단으로 몰아가지 않는 균형점으로서의 역할을 하
는 것이다.
만해의 화엄적 민족주의는 서구 철학 사상을 기초로 시작된 것이기는
하나 단지 서구사상의 적극적이고 무비판적인 도입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만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자유사상을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
다. 서구의 민족주의가 기존의 봉건적 사회를 몰아내고 민주화와 산업화
를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는데 의의가 있다면, 만해의 민족주의는 일제시
대의 조선 사회가 직면했던 민족의 자주 독립의 실현이라는 목표에서 더
나아가 화엄이라는 전통적인 불교 사상으로부터 미래지향적인 세계관으
- 199 -
로서의 자유, 평등적 민족주의를 도출해냈다는 점에서 가장 남다른 의의
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사회는 바야흐로 세계화, 보편화의 시대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대륙과 국가 간의 시간적, 공간적 경계의 의미를 점점 약화시키
고 있다. 근대 사회에 존재하였던 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이나 냉전주의
적인 이슈는 이제 정치적으로 도태되었고, 국제 사회가 정치 · 경제 · 사
회 · 문화적으로 직접적으로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유기적으로 협력하
고 연결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각종 국가들의 연합이나 국제기구들의
역할은 나날이 커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국가
간 교류뿐 아니라, 각 개인들도 적극적인 세계화적 교육과 활동을 통해
어느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목표와 개별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인류 공동체’로서 공통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노력들을 공동의 협조를 통해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만해가 강조하였던 화엄적 민족주의는 더 이상 그 존
재 의의를 상실한 것일까? 현대 사회의 국제적 세계화, 보편화 현상은
과거에 제국주의 국가들이 추구하였던 강자에 의한 약자의 지배, 흡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강대국들의 영토와 권력의 확장을 목표로 하는
세계화가 아니라 인류 공영의 목적을 지닌 자유 · 평등적, 인도주의적
세계화에 중점이 두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EU같은 국가연
합이나 여러 국제기구들의 구성 형태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 개별 국가
들의 민족적 특성이나 주권을 유지한 채로 서로 필요한 영역에 있어서의
통합을 이루는 점이 두드러진다. 즉, 세계화의 공통 목표 속에서 각 민
족이나 국가가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민족과 국
가의 정체성을 찾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 200 -
과 타국, 이 주(洲)와 저 주, 이 인종과 저 인종을 논하지 않고 똑같
이한 집안으로 보고 형제로 여겨, 서로 경쟁함이 없고 침탈(侵奪)함이
없어서 세계 다스리기를 한 집을 다스리는 것 같이 함을 이름이니, 이
같다면 평등이라 해야 할 것인가, 아니라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논의(論議)가 오늘에 있어서는 비록 실현성 없는 공론(空論)
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이후 문명의 정도가 점차 향상하여 그 극에
이르는 날이 오면 장차 천하에 시행될 것임은 새삼 논할 여지가 없는
줄 안다.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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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적 관계가 더 중요시 되거나, 때로는 개별 민족으로서의 본질적 정
체성이 더 중요하게 보일 뿐이다. 세계 역사 속에서 개인과 국가, 국가
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 한 가지 형태에 고착된 것이 아니라 시대
적 상황이나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상대적으로 달리 보여 질 뿐이다. 궁
극적으로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국가 혹은 민족, 국가와 국가는 각 사
(事)와 사(事)가 그 각 본질체로서의 무애(無礙)를 이루는 것이 그 본질
적 관계이다. 따라서 개인과 민족의 관계든, 민족과 다른 민족의 관계에
서든 어느 것도 관념적으로 부정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상대적 관계에
서의 법계연기가 바로 만해가 말하는 화엄이며 민족주의인 것이다.
- 202 -
VI. 결론
- 203 -
주의 사상 발전 과정에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형태는 일본 근대 제국주의에 맞춘 사사무애와 이사무애관에서
나온 전체주의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이다. 즉, 전체와 개체의 조화를
이루는 원융무애 관계에서 '전체'에 초점을 두어 해석하여,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을 바탕으로 하는 전체주의로 나아간 것을 말한다. 화엄사상
은 동아시아의 전통 사상으로 서구 민족주의에 새로운 논리들을 추가했
다. 서구의 정치사상과 민족주의 사상은 인권과 민족권에 기초한 것이지
만, 민족주의가 화엄사상과 결합된 정치 이론에서는 화엄의 총체적 존재
론이 그 사상의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근대 제국주의적 화엄사상의 발전에는 대표적으로 키히
라 타다요시와 다카쿠스 준지로의 사상적 연구가 그 바탕이 되었으며,
키히라는 법계연기, 진여연기가 분리된 개념으로 존재하기 이전에 통합
체로서의 존재를 화엄경에서 찾고, 그 통합체가 곧 천황이라고 규정하였
다. 이에 의해 키히라 타다요시는 천황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모든 백성
들이 연기적으로 연결되는 황국 사상으로서의 사사무애관을 보여준다.
일본의 역사적 상황에서는 천황과 백성이 사사무애의 관념에 따라 평등
한 존재일 수 없었으므로, 천황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는 논지로 화엄 성
기 사상을 응용한 화엄철학을 펼치게 된다. 한편, 다카쿠스 준지로는 전
체주의 사상을 신일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사상으로 세우면서, 민족을
‘혈통의 문화(culture of blood)’를 통해 이해하고, 가족 개념을 통해 천
황을 국민 공통의 아버지로 정의하면서 그에 대한 충성을 전체주의의 기
본 이념으로 삼았다. 국민들 사이에 그리고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법계연기적 관계를 이룸으로써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고, 이것이
곧 다카쿠스 준지로가 말하는 이상적이고 완벽한 일본의 전체주의가 되
는 것이다. 한편으로 다카쿠스 준지로는 불교의 화엄적 연기 사상도 하
나의 원칙으로서 성립될 수 있을 뿐이지, 일본의 전체주의의 상위 개념
이 되거나 전체주의에 반하는 교리가 될 수 는 없다고 보았다. 다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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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불교적인 이타주의와 무아(無我) 사상이 기초가 된 전체주의는 무엇
보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통치 이념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키히라 타
다요시와 다카쿠스 준지로의 화엄적 사상 전개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바
와 같이 일본에서 화엄 사상의 특성은 제국주의 · 군국주의 국가로 나아
가기 위한 전제로서의 전체주의 사상과 천황제에 대한 이념적 합리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의 내셔널리즘은 천황제에 그 핵심이 있고,
서양 열강으로부터의 위협을 극복하고 국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 적
극적인 형태의 내셔널리즘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화
엄적 연기 사상을 통해 전체주의로서의 조화를 강조하고, 천황제를 기반
으로 제국주의적 팽창을 시도하는 것을 화엄적 연기의 실현이라고 합리
화하는 것을 통해 내부적, 외부적 국력의 결집을 이루었다.
화엄 철학이 민족주의 사상 발달에 수용된 두 번째 대립적 형태는 만해
한용운이나 탄스통 등의 사상에서 나타나는 형태로서, 화엄사상에서 나
온 평등과 자유사상에 의지한 세계관이다. 이는 원융무애의 관계에서 전
체와 개체의 조화, 또는 개체와 개체간의 조화에 있어서 '개체'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한 것으로, 이것은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민족주의적 내셔
널리즘으로 연결된다.
탄스통의 사상적 근본 관념인 이태 (以太, 에테르)는 그의 정치적 개혁
의 철학적 토대였다. 탄스통은 이태라는 것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
지만, 그 본질은 변함이 없으므로, 표면적인 정치적 형태들이 그 본질이
손상되지 않고도 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만물의 전체성
을 강조하면서 사회의 계층적 사회 조직과 민족국가를 주장하는 군주제
도는 다른 것과 자신 사이에 장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만물의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불평등과 차별 내지 대
립과 부조화는 만물이 통일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러한 인식의 오류는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까지 하였다. 탄스통의 사
상은 근본적 평등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철학적 세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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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궁극적으로 국가의 경계마저 없어질 것이라고 관념하였다. 탄스통의
철학은 미래 大同의 세계에서 민족과 국가들이 없어지기 때문에 민족주
의라는 사상의 화엄 철학을 통한 초월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캉
유웨이와 량치차오의 군주주의적 입장과는 많이 달랐다. 또한 국가의 쇠
퇴를 말하였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적 사상과 유사한 점이 있긴 하지만,
철저히 조화로운 세계관을 추구하였던 점에서 계급 투쟁적 공산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 하겠다.
만해의 화엄적 민족주의에 있어서는 인류의 진정한 평화란 만인이 저마
다 누려야 할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모든 인류
의 각 개인 자유가 모두 존중되어야 하므로 어느 한사람의 개별적 자유
도 소홀히 될 수 없으며, 한 개인의 자유의 상실은 전체의 공통적 자유
에 대한 침해로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자유를 보유하
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와 평화를 지킬 의무까지 있
다. 그러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은 정의와 인도주의에 기반을 둔 비
폭력적 방법으로서 자강(自强)을 통한 방어적 투쟁을 말하는 것이지 남
의 자유에 대한 침해의 방법이나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침략적 투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강(自强)이라는 것은 소위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
우위에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인식되기 쉬운 면이 있어서, 비폭력주의적
수단과는 조화되기 어렵다는 발상을 갖게 한다. 그러나 만해에게 있어서
진정한 자강이라는 것은 외부로 향하는 자강을 말함이 아니라 내부적 자
강을 통해 외부적으로도 평화적 공존을 이룰 수 있는 이상적 균형 상태
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의 세력을 외부에 대한 침략으로 발산
하여 자기 외의 존재를 억압하고, 힘을 과시하여 강한 존재로 위치를 획
득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의 계몽과 근대화를 통해 국가와 민
족적 정체성을 확고히 함으로써 외부적으로도 힘의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자 함이다. 화엄적 관점에서 볼 때, 만해의 민족주의적 목표는 힘과 비
자연적 세력 재편을 통해 연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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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음과 정진을 통해 그 존재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갖춤으로써, 물
이 흐르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평화적으로 연기적 관계를 이루
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사무애적 법계연기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각 나라의 민족주의적 화엄 철학을 펼친 사상가들의 철학은 일
치한다. 그러나 그 방법적 접근에 있어서는 조금씩 상이함을 보이는데
이는 일본과 중국, 한국의 민족성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그 시대의 역
사적 상황에 따라 화엄사상을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자유주의, 평화주의, 철저한 비폭력주의를 추구하는 만
해의 민족주의 정신은 가장 화엄적인 것이라고 평가할만하다. 만해의 평
화주의에 입각한 화엄적 민족주의는 역사 속에서 퇴화되었던 서구의 제
국주의나 일본의 전체주의 사상과 달리 현재에 이르기까지 활용될 수 있
는 평화주의적 세계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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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Marek ZEMANEK
Dept. of Buddhist Studies
Graduate School of Dongguk University
Hwaeom (Ch. Huayan, Jap. Kegon) School was probably the most
influential indigenous school of Chinese Buddhism. It was
established during the Sui dynasty and flourished during the reign
of Tang. It absorbed non‐Buddhist Chinese philosophical notions
such as essence‐function (體用) logic as well as soteriology of the
Yogâcāra and Tathāgatagarbha schools, original enlightenment
theory of the Awakening of Faith (大乘起信論) altogether with the
notions of emptiness and middle way of Nāgârjuna.
The core of the teaching of the Hwaeom School is theory of
mutual interconnectedness and interpenetration of all phenomena.
This philosophy of non‐obstruction (無礙) among phenomena and
inquiry into the relationship between a part and whole using
expressions like “one is many, many is one (一卽多多卽一)” and “in
one there is all, in many there is one (一中一切多中一)” proved to
have political potential. Already during the Tang Dynasty, when
Empress Wu attempted to establish the Zhou Dynasty, she used
Fazang’s Huayan philosophy as a means to support the unity of
the country.
- 215 -
Despite the fact that the school was almost extinguished during
the purge of 845 – 849 in China, it survived in teaching of other
schools, especially Chan and lived its own life in Korea and Japan
where it was transmitted by Uisang and Simsang respectively. It
became a common part of the philosophical heritage of the three
countries to be rediscovered later in modern period in context of
nationalism.
Nationalism is an ideology and social movement that developed in
Europe in close relationship with emergence of modern states and
popular sovereignty after the French Revolution. Since that,
nationalism has become one of the most important political forces
in the modern history. As such, nationalism was transmitted to the
East Asia along with various Western philosophical and political
thoughts. For the purpose of the thesis, we have analyzed the
notions of nation and nationalism from historical and semantic
perspectives. We could see that the meaning of the term nation
underwent significant changes during the history and was defined
and shaped by given historical circumstances. Upon the notion of
nation, the concept and movement of nationalism had been
evolving over centuries in Europe. We have defined three types of
nationalism: (1) etatism, (2) civic and (3) ethnic nationalism.
Since each of the East Asian countries developed its own unique
Hwaeom School with its masters and writings and since each
country met different historical conditions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he ways how the philosophy was used in relation to
nationalism differed significantly.
The most significant representatives of the modern Chinese
nationalist thought were Kang Youwei (康有為), Zhang Taiyan (章太
炎), Tan Sitong (譚嗣同) and Liang Qichao (梁啟超). Their nationalist
philosophy was influenced by (1) Chinese Confucian and Daoist
- 216 -
thought, (2) Western political philosophy and also by (3) Buddhist
philosophy significantly. Among them, Tan Sitong (1865 – 1898)
introduced an eclectic philosophical system with central notion of
ether. In this concept, the interconnectedness and mutual
relationship of Huayan are utilized. The ether of Tan Sitong works
as a medium connecting all beings and allowing their harmony.
Based on this worldview, he proposes a new society without
classes and also without nations. Thus, the Hwaeom notions of his
philosophy led to the concept of utopian world of equality and
harmony.
In China, nationalism was growing from the bottom especially from
intellectuals, and took the shape of self‐strengthening facing the
presence of western powers and anti‐Manchu movement; and in
philosophy resulted in several utopist theories like those of Kan
Youwei and Tan Sitong. In Japan, on the other hand, nationalism
penetrated all society and was conducted rather from the top. Thus,
all circles were to participate on it in a way. With increasing
aggressivity of Japanese nationalism and altogether with increasing
militarization in the early 20 century, also intellectual circles were
th
- 217 -
on Kegon philosophy. Since all things have mutual relationship and
nothing is allowed to exist independently, the engi (緣起) of Kegon
stands for totalitarianism. The New Japanism based on the “culture
of blood” should have the Kegon totalism as its principle.
Kihira Tadayoshi a philosopher influenced by Hegel’s philosophy,
was concerned about the doctrine of “non‐obstruction among
phenomena.” If this was to be applied to the situation in Japan the
people and the emperor would become equal. This logic also has
similarities with Western democracy. Therefore he utilized the
doctrine of “dependent arising from the tathāgatagarbha.”
Accordingly, he argued that Japan stood between the two theories.
Each individual is different according to his or her occupation and
status, but everyone is equal under the absolute Emperor.
The core of this paper is philosophy and nationalist thought of
Korean Buddhist monk, poet and patriot Han Yongun (1879 ‐ 1944)
who was the most representative Buddhist thinker and reformer of
the modern period who was influenced by Hwaeom. Avataṃsaka‐
sūtra (華嚴經) was one of the most important sources of his
thought. He quotes it throughout his works and his writings have
definitely Hwaeom spirit. In his Great Canon of Buddhism (佛敎大
典), a compilation of quotations of Buddhist texts the Avataṃsaka‐
sūtra is used most frequently. However, his writings are mostly of
the practical kind, rather than purely philosophical works or even
merely Hwaeom texts. Therefore, his Hwaeom thought had to be
extracted out of them. In the thesis, we focused mostly on the
philosophical texts and works and naturally on works related to
nationalism, independence and politics in general; namely On
Revitalization of Korean Buddhism (朝鮮佛敎維新論), Writing on
Korean Independence (朝鮮 獨立의 書) Commentary on Ten
Profound Sayings (十玄談註解) and various articles and ess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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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in newspapers that are gathered and published in
Collected works of Han Yongun (韓龍雲全集). We have analyzed
Manhae’s writings and pointed out the key Hwaeom concepts such
as “non‐obstruction between phenomena”, “six characteristics of
conditioned phenomena” and “ten profound gates” spread all over
his works.
Then, we looked at his works from the perspective of nationalism.
His works responded to the actual situation of the Korean nation
oppressed by the Japanese Empire. Therefore he concerned
himself with the independence theory. There are three key concepts
of his thought: freedom, equality and peace. These three concepts
apply to all his philosophy. He emphasized them in relation to
individuals as well as to countries and nations. We believe that his
notions of freedom and equality are rooted in interconnectedness of
all phenomena and mutuality of the Hwaeom School.
His ideal world consists of countries that maintain their identity and
independence yet are in harmony with each other. Countries should
involve themselves in self‐strengthening but stay in peace with their
neighbors.
In the thesis, we have seen that under the different circumstances
the application of Hwaeom/Huayan/Kegon philosophy differed
significantly. The same notions of harmony among parts of a whole
had various outputs. In Chinese Tan Sitong’s thought it resulted in
idea of a utopian world, in Japan it was used to justify
totalitarianism and expansive politics of imperial Japan. In Manhae’s
philosophy it resulted in the concept of peaceful world of
independent and strong n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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