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essional Documents
Culture Documents
(박훈의 일본사 이야기) 쇼군 권력 균열 틈타…사쓰마·조슈, 막부 개혁에 칼을 대다
(박훈의 일본사 이야기) 쇼군 권력 균열 틈타…사쓰마·조슈, 막부 개혁에 칼을 대다
(박훈의 일본사 이야기) 쇼군 권력 균열 틈타…사쓰마·조슈, 막부 개혁에 칼을 대다
https://www.sedaily.com/News/NewsView/NewsPrint?Nid=1Z058BSK69 1/5
2021. 3. 12. [박훈의 일본사 이야기]쇼군 권력 균열 틈타…사쓰마·조슈, 막부 개혁에 칼을 대다
막부는 여기에 빈틈을 보인 것이다. 이 틈을 사쓰마번(藩), 조슈번, 도사번이 치고 들어왔다. 이들은 모두 일본열
도의 서남쪽에 위치한, 대규모 영지를 보유한 번들이었다. 이들을 서남 웅번(西南雄藩)이라 부른다. 당시 전국
에는 270개 정도의 번이 있었지만, 덩치가 큰 번은 소수였다. 20만석(石) 이상이 20여개, 10만석 이상이 50개
정도였다. 대체로 10만석 이상은 돼야 제대로 된 번 대접을 받았다. 당시 번들은 희한하게도 각자의 생산력, 즉
석고(石高)로 평가됐다. 석고만으로 사회적 위신이 결정되는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였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도쿠가와 시대가 경제적 실력을 중시하는 ‘경제사회’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런 면이 없는 것
은 아니지만, 석고는 기본적으로 군사력을 얼마나 동원할 수 있는가 하는 지표였다. 따라서 석고를 중시했다는
것은 도쿠가와 시대가 ‘군사사회’였음을 보여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점이 조선사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가장
이해하기 힘든 점 중 하나다.
사쓰마는 72만석, 조슈는 36만석, 도사번은 24만석으로 모두 내로라하는 대번(大藩)들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편을 들어 전쟁 후 도쿠가와에게 처벌을 받았던 도자마 다이묘(外樣大
名)들이었다. 이 때문에 도쿠가와 시대 내내 막부 정치에 개입할 수 없었다. 300년 가까이 굳게 닫혔던 문에 드
디어 빈틈이 보였다. 그러나 막부는 여전히 버거운 상대다. 그래서 이들은 미토번이나 존왕양이파 ‘지사’들을 이
용하거나 무엇보다 일왕을 정치무대에 끌어들였다. 막부와 쇼군의 권위를 누를 수 있는 것은 역시 일왕밖에 없
었다. 그러나 이 번들의 가신단 누구나가 막부에 도전한 것은 아니었다. 다이묘나 상급 사무라이들은 이미 300
년 가까이 막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부귀영화를 누려왔다. 새삼 그런 세상을 바꿀 이유가 없었다.
https://www.sedaily.com/News/NewsView/NewsPrint?Nid=1Z058BSK69 2/5
2021. 3. 12. [박훈의 일본사 이야기]쇼군 권력 균열 틈타…사쓰마·조슈, 막부 개혁에 칼을 대다
나리아키라의 후계는 그의 이복동생 시마즈 히사미쓰의 어린 아들로 정해졌다. 자연히 히사미쓰가 대원군처럼
실권을 쥐게 됐다. 이복형만큼은 아니었지만 히사미쓰도 유능한 정치가였다. 1862년, 다이로의 목이 잘린 지 2
년 후 그는 약 1,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교토로 행군했다. 교토로 가 일왕과 조정을 자기편으로 삼고 막부에 개
혁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막부 지배 하에서 다이묘가 대군을 이끌고, 그것도 일왕이 있는 교토에 입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의 눈에도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전국의 사무라이들이 흥분한 것도 무리가 아
니다. 사쓰마 가신들은 더더욱 그랬다. 드디어 주군이 일왕의 선봉이 돼 막부를 친다고 신나했다. 그들 중 수십명
이 교토 인근의 데라다야(寺田屋)라는 곳에 숙박하며 거사를 꾸몄다.
그러나 정작 주군의 뜻은 딴 데 있었다. 교토에 들어간 히사미쓰는 애초에 막부를 전복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
러기에는 가진 게 너무 많았다. 그가 바란 것은 그저 막부의 정치운영에 사쓰마번이 좀 더 간여하는 것이었다. 그
런 그에게 데라다야에 모여 있는 ‘철부지’들은 위험천만한 존재들이었다. 즉각 번의 최고 검객들에게 일망타진
을 명령했다. 안면이 있는 같은 가신들끼리 처참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를 일본사에서는 ‘데라다야 사건’이라
고 한다. 주군에 대한 절대충성이라는 사무라이의 의식에 큰 균열이 발생한 순간이었다. 주군에 대한 충성보다
https://www.sedaily.com/News/NewsView/NewsPrint?Nid=1Z058BSK69 3/5
2021. 3. 12. [박훈의 일본사 이야기]쇼군 권력 균열 틈타…사쓰마·조슈, 막부 개혁에 칼을 대다
과격파 가신들을 도륙한 히사미쓰는 에도로 갔다. 그는 영리하게도 일왕의 칙사를 모시고 갔다. 그리고 일왕의
명령이라는 형식을 빌려 막부의 개혁을 촉구했다. 쇼군이 교토에 가서 일왕에 배알할 것, 막부 정치에 외부 유력
자를 포함시킬 것 등이 그 내용이었다. 칙사의 힘을 빌리는 형식이었다고는 해도 감히 일개 도자마번이 막부를
상대로 개혁을 촉구한 건, 전에 없던 일이었다. 한번 터진 둑에 밀물이 밀어닥쳤다. 사쓰마에 뒤질세라 이번에는
조슈번이 칙사를 대동하고 들어와 막부 정치 개혁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사쓰마·조슈, 즉 삿쵸(薩長)의 경쟁이
시작된다. 흥미로운 것은 칙사가 쇼군에게 일왕의 칙서를 전달하는 장면이다. 이전까지는 쇼군이 상단에 앉고
칙사가 하단에서 칙서를 바치는 형식이었지만 이때 칙사의 강경한 주장으로 그 자리가 바뀌었다. 이제 시각적으
로도 일왕과 쇼군 중 누가 윗사람인지가 명확해졌다.
사쓰마와 조슈에 연타를 맞은 막부는 쇼군을 상경시키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몰렸다. 표면적으로는 일왕의 요
구였지만, 사실은 사쓰마와 조슈의 공작이었다. 이듬해인 1863년 초 쇼군은 결국 교토에 갔는데, 이것은 1634
년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이래 229년 만의 일이다. 당시 이에미쓰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교
토를 위압했지만, 지금은 일왕에게 그간의 비례(非禮)를 사죄하기 위한, 초라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당시 교토
에는 조슈번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열혈 존양파 ‘지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혹시 쇼군이 그들에게
포로가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이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 후로도 쇼군 이에모치는 교토와 오사카에 두 번
더 올라가야 했고,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는 아예 내내 교토에 있어 재임 중 에도 땅을 밟지 못했다. 에도는 이미
정치적으로 공동화 상태로 들어가고 있었고, 교토는 수백 년 만에 다시 일본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https://www.sedaily.com/News/NewsView/NewsPrint?Nid=1Z058BSK69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