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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민간정부에서 쿠데타

가능성과 그 조건: 군 내부의


역동성을 중심으로
장 준 영
한국외국어대학교
Abstract

이 글의 목적은 미얀마 민간정부 하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정치에 개입할 가능성과 조


건을 탐구하는 것이다. 미얀마는 1962년부터 2011년 유사민간정권이 출범하기 전까지
군부가 집권했는데, 각기 다른 두 번의 군부정권 동안 유사한 정치행태가 목격되었다. 최
고 권력자는 정치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하고, 공식 직위에 물러난 이
후에도 막후권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2016년 민간정부가 출범하면서 군부의 정치참여는 축소되었으나 은퇴한 군 지도자가
장악한 막후권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현재 막후권력은 과거와 달리 운명공동체로
서 군부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목적에 따라 작동되고 있다. 그러므로 민간정부에
서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고, 쿠데타가 성공하더라도 군부정권의 생명은 길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군부가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은 유효하다

※ 주제어: 군부, 쿠데타, 막후권력, 미얀마, 권위주의, 민주주의, 정치발전


126 글로벌정치연구 제9권 1호 (2016년 6월)

Ⅰ. 문제제기

미얀마는 21세기 들어 비민주국가 가운데 가장 모범적으로 체제전환을 이룬


국가로 손꼽힌다. 2011년 퇴역한 군부가 중심이 되어 출범한 유사민간정부
(quasi-civilian government)는 2015년 11월 총선을 통해 평화로운 정권교체의 경로
를 확보해 주었고, 마침내 2016년 3월 31일 민간정권이 탄생했다. 1962년 쿠데타
이후 54년 만에 민간정권은 회복되었으나 그럼에도 민주화에 대한 낙관적 기대보
다는 우려가 더 높아 보인다. 민간정권의 회복 기간이 말해주듯이 장기간의 군부
통치는 국가의 정상화를 위한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자유화에서 민주화로 가
는 경로는 긍정적이고 단선적이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2016년 출범한 민간정부에서 군부의 쿠데타 가능성과 조건을 검증함
으로써 미얀마 정치발전의 미래상을 전망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군의
정치개입을 설명하는 요인은 군부 내외적으로 다양하게 분석된다.1) 먼저 군 내부적
으로 조직력, 위계구조, 응집력, 무기의 독점 등 군이 가진 상대적인 강점이 군부의
쿠데타를 유인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성숙되지 못한 국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회현상이 존재하므로 군사적 측면으로만 군의 정치개입은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다. 즉 군부가 사회의 구조적 취약성을 메우기 위해 정치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정
치적으로는 정당의 쇠퇴와 몰락, 엘리트의 분열 등 정치제도화의 미진과 민간정부
의 실패, 사회적으로는 계급과 종족간 갈등을 통한 사회 분열, 무질서와 폭력의 만
연, 광범위한 부정부패, 경제적으로는 경제발전 실패 등이 군 외적 요인이다.
최근 연구로서 국가가 쿠데타의 가능성에 취약한 이유로 체제의 정통성 수준,
시민사회의 강도, 과거 군부쿠데타의 빈도 등을 꼽는다. 민간정부가 정권의 정통성
을 유지하기 위해 군부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거나, 국내외적으로 연대하는 시민사
회가 존재하지 않거나, 과거 군부의 쿠데타 성공 사례가 많으면 많을수록 군부의

1) 군 내적 요인을 주장한 학자로는 Finer(1971), Janowtiz(1964) 등이며, 군 외적 요인을 주장


한 학자로는 Decalo(1976), Perlmutter(1969), Zolberg(1976) 등이다. 그러나 데칼로의 주장
대로 두 요인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다뤄질 필요가 있다(Decalo 1976, 12-13).
장준영 / 미얀마 민간정부에서 쿠데타 가능성과 그 조건 127

응집력과 조직력은 강해 쿠데타는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Croissant 2013, 269).


위 주장들을 종합하면, 군부는 내적으로 쿠데타를 시도할 수 있는 일체감, 조
직력, 직업주의 등을 갖추고 외적으로 정치와 사회의 분열, 경제상황의 악화 등 사
회적 위기 상황에 직면할 때 쿠데타를 통한 정치개입을 감행할 가능성이 크다. 또
한 장기간 군부가 집권한 국가일수록 군부의 퇴진은 반드시 영구적이지 않다. 군부
를 대체할 사회세력이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역량이 미미할 것이고, 군부는
스스로의 과오를 면책하기 위한 “예약된 영역”(reserved domain)을 요구한다. 형식
적으로 만들어진 민간우위의 원칙은 군부의 태도에 따라 얼마든지 역전 가능한 명
제가 된다.
미얀마에서는 1958년, 1962년, 1988년 등 총 세 차례에 걸쳐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고, 모두 성공했다. 그런데 앞의 두 쿠데타와 달리 1988년 쿠데타는 군부를
극복할 사회세력이 없는 가운데 발생한 것으로 1962년부터 만들어진 군부의 직업
주의를 신직업주의로 강화하는 정치행위였다. 1962년부터 26년 간 실시한 사회주
의경제는 실패했고, 이로 인해 시민의식은 성장하지 못했다. 신흥계층은 출현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시민사회의 형성과 성장도 기대할 수준은 아니었다.2) 그래서
1988년 쿠데타는 거부쿠데타(veto)가 아닌 집권세력의 인적 변화를 추구하는 집권
연장 쿠데타였다.
나아가 2016년 출범한 민간정권에서도 군부의 의향(disposition)과 기회가 충족
될 경우 체제 전복의 가능성은 상존한다.3) 2015년 총선 결과에 따른 절차적 민주
주의, 즉 폴리아키(polyarchy) 형태를 수립할 수 있었던 배경은 시민사회의 압력에
대한 반응이나 정부와 시민사회 간 협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군부가 자발적으로 정
치에서 부분적 퇴진을 선언한 결과였다. 또한 2008년 제정된 헌법만 보더라도 군
부는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가진다(Ministry of Information 2008).4)

2) 이런 이유에서 1988년 민주화운동은 지도층의 분열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하여 양


길현(2009), 장준영(2003), Lintner(2007)를 참조하라.
3) 이 시각은 Finer(1975)의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4) 국방은 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고 군대와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해서는 자결권을 가진다(20조
(b))가 대표적이다. 이외 군부의 권한은 다양하다. 군총사령관은 부통령에 준하고, 내무∙국
경∙국방 등 주요 세 개 부처 장관은 군총사령관의 재가를 얻어 현역 장성급 인사(소장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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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간의 경제 개방으로 연 7-8%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한 것은 사실이지


만, 헌팅턴이 주장한 쿠데타 실패 가능성의 1인당 국민총생산(GDP)은 현재 민간정
권에서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독립할 당시부터 촉발한 분리주의운동은 현재까
지 진행 중이어서 국민통합은 달성되지 않았고, 여전히 미얀마는 부정부패가 광활
한 사회이다.
이에 반해 미얀마 군부는 군 최고지도자 1인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으
며, 내부적으로 파벌을 인정하지 않는 위계서열이 명확하고 응집력이 강한 집단이
다. 일례로 2011년 유사민간정권으로의 전환과 2015년 총선 결과의 인정은 은퇴한
군 최고지도자인 딴쉐(Than Shwe)의 결정이었다.5) 1988년 쿠데타 또한 쏘마웅(Saw
Maung) 군총사령관이 네윈(Ne Win)의 자택을 방문하고 난 다음 날 시도되었다. 딴
쉐는 건재하고, 민아웅흘라잉(Min Aung Hlaing) 군총사령관을 비롯한 군부의 충성
은 여전히 딴쉐를 향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미얀마 민간정부에서의 쿠데타는 사회경제적 위기보다 군
부의 이익적 동기와 조합주의에 근거할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군
부 내 권력 관계와 권력의 작동방식과 같은 위계구조, 군부의 직업주의 등 군 내부
의 내적 역동성에만 주목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두 차례의 군부정권에서 나타난

는 중장)가 장악한다(232조 b(ⅲ)). 정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국방안보평의회(NDSC:


National Defence and Security Council)에는 최소한 6인이 친군부 성향으로 구성된다.
NDSC는 대통령, 부통령 2인, 군총사령관, 군총부사령관, 상하원 의장, 국방장관, 외무장
관, 내무장관, 국경장관 등 총 11명으로 구성된다(342조). 또한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면
대통령은 정권을 군총사령관에게 이양하는데(40조), 비상사태 선포의 조건이 명시되지 않
아 군부의 정치개입은 상존한다(11장). 부통령 한 자리는 군부 출신의 몫으로 고정되어 있
다. 또한 민간출신 국회의원의 내각 겸직을 금하지만, 상하원 의석수의 25%(지방의회는
30%)를 무투표로 장악한 군부는 군 현직을 유지한다.
5) 총선 후인 12월 2일,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는 대통령, 하원의장, 군총사령관 등
주요 인사들과 연석 회동을 통해 평화적인 정권 이양에 합의했고, 12월 초에는 딴쉐 전
군사평의회 의장을 면담하여 장래 지도자라는 인정을 받았다. 1990년 국민민주주의연합(N
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이 총선에 승리하고도 군부가 결과를 승복하지 않음
에 따라 정권 이양이 불발된 사례가 아웅산수찌에게는 교훈이 된 것이다. 또한 2010년 총
선을 앞두고 딴쉐는 자신의 최대 정적이 될 수 있는 권력서열 2위인 마웅에(Maung Aye)
를 비롯하여 군사평의회 위원 10인과 동반 사퇴함으로써 자신의 지도력을 전시했다(http://
www.irrawaddy.org/article.php?art_id=19323; http://www.mizzima.com/news/inside-burma/4298)
장준영 / 미얀마 민간정부에서 쿠데타 가능성과 그 조건 129

권력 작동방식과 후견주의의 행태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군부의 정치적 전통이 현


재까지 계승되고 있는지를 검토한다. 이를 바탕으로 유사민간정권과 민간정권에서
군부의 권한과 기능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이는 과연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
는 의향과 기회를 충족시킬 수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Ⅱ. 미얀마 군부의 정치개입과 내적 역동성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동기는 군부 스스로 독특한 의무를 가지고 있고, 그


것은 국가의 이익을 보호해야한다는 자의식으로 연결된다. 또한 군부에 대한 민간
정부의 의존이 증대되거나 군부에 대한 대중적 인기가 높거나 또는 민간정부를 제
외하고 군부를 대체할 대안세력이 없거나 아예 권력 공백 현상이 발생할 경우 군
부의 정치개입은 농후해 진다(Finer 1975, 35-85). 이를 미얀마 군부에 대입하면 다
음과 같다.

<표 1> 미얀마 군부의 정치개입 배경

군부의 정치개입 변수 1958년 1962년 1988년


의향 국가이익 보호 ○ ○ ×
민간정부의 군부의존 ○ × ×
기회 군부의 대중적 인기 ○ △ ×
대안세력의 존재 × × ×
※출처: 필자 정리.

<표 1>과 같이 세 차례의 쿠데타는 기존의 사회․경제적 혼란을 돌파하기 위해


군부가 정치에 개입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1988년 쿠데타 사례는 다르다. 즉 앞
의 두 쿠데타는 군부가 국가의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임을 자처하며 정
치에 개입했으므로 민간정부의 실패에 대한 자발적 대응이다. 이에 반해 1988년 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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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타는 26년 간 군부집권으로 인한 사회 전분야의 실패가 국민적 소요사태로 발생한


사회적 혼란을 틈타 발생한 것이다. 앞의 두 쿠데타가 국가의 정상화를 통한 국가이
익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국가이익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군부
자체의 이익, 군 수뇌부의 개인적 경력과 집단의 야망 등으로 변질된 것이다.
1958년 군부의 정치개입은 쿠데타라기보다 민간정부의 군부 의존에 의한 결
과라고 할 수 있다. 1958년 10월 28일 군부에 의한 과도정부(caretaker)가 구성되었
는데, 이미 6개월 전부터 집단 연립여당인 반파시스트인민자유연맹(AFPFL: Anti
Fascist Peoples Freedom League)이 청렴파(The Clean)와 안정파(The Stable)으로 분
열되었고, 군부는 후자를 지지했다. 우 누(U Nu) 총리는 청렴파 소속으로 군부의
대립각을 이루었지만 네윈을 비롯한 군 수뇌부와 비밀회담을 실시한 이후 정권을
이양했다.
18개월 간 지속된 통치에서 군부는 군 내부 갈등을 봉합했고, 무장반군을 소
탕하는 성과를 거두면서 국민적 인기를 확보했다. 그들은 1960년 병영으로 복귀하
면서 『진실은 입증되는가?』(Is Trust Vindicated?)라는 단행본을 출판하여 그들의
치적을 자평하면서 민간정부는 무능하다고 평가했다(The Director of Information
1960). 1962년 쿠데타는 연립정당의 내분 재발, 불교국교화와 같은 인기영합주의적
인 정책, 무장반군과 공산세력의 재무장 등 민간정부의 실패에 이은 국론 분열을
돌파하기 위해 발생하여 민간정부에 대한 의존은 전혀 없었다. 또한 쿠데타 당시에
는 국민의 동요가 없었으나 7월 7일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군부통치 반대시위가
발생함으로써 전폭적인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한편, 1988년 쿠데타는 의향과 기회가 전혀 보장되지 않았고, 3월부터 9월까
지 지속된 민주화운동은 군부정권의 종말을 고하기 직전이었다. 사실 군부정권은 6
월에 모든 기능이 마비되었으나 쿠데타는 9월에 발생함으로써 약 3개월 간 군부가
전열을 정비할 시간과 쿠데타의 명분을 마련할 수 있었다. 군부는 사회적 혼란으로
부터 국가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그들의 의향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군부의 조
합주의적 이익, 네윈을 중심으로 한 군 수뇌부의 면책이 그 본질이었다.
쿠데타 기회도 보장되지 않았으나 이전 쿠데타처럼 군부를 극복할만한 대안세
장준영 / 미얀마 민간정부에서 쿠데타 가능성과 그 조건 131

력이 존재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최초의 전국적 규모 민주화운동에서 구심점이


될 만한 지도부가 없었다(Lintner 2007, 128). 그래서 군부는 쿠데타에 즈음하여 약
탈과 방화행위를 일삼고, 죄수들이 탈옥하는 등 사회 무질서를 조장했다(Lintner
2007, 131-132). ‘8888’사태 이후 네윈은 온건파 마웅마웅(Maung Maung)을 버마사
회주의계획당(BSPP: Burma Socialist Programme Party) 의장 겸 대통령에 지명하여
국민의 반응을 살핀 뒤였다. 만약 국민들이 마웅마웅체제를 수용했다면, 군부의 쿠
데타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쿠데타를 성공한 뒤 군부는 그들의 선배처럼 어지러운 내정을 수습하여 국가
의 수호자(kedinshin)가 된 1958년의 군부를 표방했다. 그래서 군부는 1958년처럼
시위대와 공산주의자들이 국가전복을 도모했다고 주장했다(Seekins 2002, 204-205).
한편, 1997년 군부는 그들의 1차 목적인 국가의 법과 질서를 회복했다고 판단하고,
국방과 정치를 동시에 담당하는 이중기능(dual function)을 위해 군사평의회의 명칭
을 변경했다. 1988년 이후 2010년 11월 총선을 통해 자발적으로 정치군부의 위상
을 축소하기까지 군부정권은 경제 실패, 국제사회의 압박 등 군 외적 위험 요인에
도 불구하고 지속될 수 있었다.
외부의 위협적인 도전이 없거나 도전을 하더라도 군부가 동요할 수준이 아닌
상황에서 군부정권이 자발적으로 붕괴되지 않았다면 이는 군 내부의 역동성을 관
찰함으로써 군부정권의 지속 요인을 파악할 수 있다. 즉 군부의 조직력과 위계질서
등 응집력은 내부적으로 군부가 분열하지 않는 중요 요인이 되고, 세대교체에 따른
권력지형의 변화에도 응집력의 구도는 변화하지 않아야 한다. 민간정부에서도 군사
정부 당시 군부의 응집력과 권력구도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군부의 정치개입 가능
성은 열려있고, 의향과 기회가 충족될 경우 쿠데타는 발생할 수 있다.
<그림 1>과 같이 미얀마 군부는 정권에 따라 1인 독재체제와 집단지도체제로
양분된다. 집단지도체제의 경우 막후권력, 즉 이전 정권의 은퇴한 최고 지도자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에서 유효하다. 반대로 1인 독재체제는 막후권력을
허락하지 않는데 군부통치가 시작된 1차 군부정권 당시에는 이 막후권력이 존재하
지 않았다. 만약 막후권력이 군부 내 지도자를 강제할 능력이 유효하면 쿠데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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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에서 조종할 수 있다. 1962년 쿠데타는 막후권력이 없는 상황에서 발생했지만,


이후 막후권력체제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배후조종 구도가 유지되지
않으면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이 낮다. 쿠데타가 성공할 경우 군사정권의 수장은
막후권력자의 신변을 결정하겠지만, 쿠데타 이전 막후권력자의 재가가 필요하기 때
문이다.

<그림 1> 미얀마 군부 내 권력구도

막후권력
○ ×

군부

집단지도체제 1인 독재체제

한편, 막후권력은 집단지도체제의 내부적 경쟁과 갈등 구도를 유발함으로써


자신의 신변을 유지하는 지렛대로 활용된다. 그럼으로써 군 내부의 분열을 일시적
으로 유도하지만 막후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인 인물을 발굴하고 그를 군
내부에서 축출함으로써 안정적인 권력체제를 유지하고, 군의 응집력도 강화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집단지도체제는 쿠데타를 일으키기에는 내적 합의를 구하기
힘든 환경과 동일시된다. 결론적으로 현직 군부를 강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막후권
력이 없는 상황에서 쿠데타는 실현 불가능한 명제가 된다.
장준영 / 미얀마 민간정부에서 쿠데타 가능성과 그 조건 133

Ⅲ. 1차 군부정권(1962-88)의 형태와 특징: 개인적 정권의 지속

엄밀히 구별하면 제 1차 군부정권 시기는 1974년부터 민정이양이 이뤄져 군


사평의회 시기와 구별될 필요는 있으나 권력의 실소유자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
한 구별은 무의미하다. 3월 2일, 쿠데타가 성공한 뒤 네윈은 자신을 의장으로 하는
17인의 혁명평의회(RC: Revolutionary Council)를 구성했고, 4개월 뒤인 7월 4일, 버
마사회주의계획당(BSPP: Burma Socialist Programme Party)을 창당했다. BSPP는 당
강령에서도 명시되어 있듯이 소수의 군부가 장악하는 전형적인 간부정당이었다
(BSPP 1963, 57-59). 또한 1974년 민간 이양 이전까지 BSPP의 최상위에 혁명평의
회가 존재하고, 여기에 소속된 위원 모두가 쿠데타 직후 구성된 혁명평의회의 위원
과 동일 인물이었다. 따라서 사실상 군부가 당을 지배하고, 당은 외적으로 조직된
이익집단을 통해 군부정권에 대한 지지를 유인하는 체제였다.
1974년 민정이양과 함께 혁명평의회는 해체되고 국가평의회(Council of State)
가 국가 최고기관으로 창설되었다. 1974년 사회주의 헌법 제 66조에 따르면, 국가
평의회 의장은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최고 권력자에 해당된다. <표 2>와 같이 네윈
은 1974년부터 1981년 제 4차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산유(San
Yu)에게 승계할 때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또한 국가기관을 감독 및 지도하는
BSPP 의장직을 창당부터 1988년 7월 23일까지 장악함으로써 1인 독재체제를 공고
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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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 1차 군부정권 당시 대통령 명단 및 네윈과의 관계

역대 성명 임기 당적 및 신분
네윈(Ne Win,
4대 1974.3.2-1981.11.9 BSPP/ 군→민간
1911–2002)
산유(San Yu,
5대 1981.11.9-1988.7.25 BSPP/ 군→민간
1918–1996)
쎄인르윈(Sein Lwin,
6대 1988.7.25-1988.8.12 BSPP/ 군→민간
1923–2004)
에꼬(Aye Ko),
1988.8.12-1988.8.19 BSPP/ 군→민간
직무대행
마웅마웅(Maung Maung,
7대 1988.8.19-1988.9.18 BSPP/ 군→민간
1925–1994)
※출처: 필자 정리.

산유, 쎄인르윈(Sein Lwin), 마웅마웅(Maung Maung)은 공통적으로 네윈의 심


복으로 알려지지만 민간정권 출범 이후 모두 퇴역한 군인이기도 하다. 또한 산유를
제외한 두 인물은 혁명평의회 구성원이 아닌 네윈이 육성했고, 결정적으로 이들은
네윈에게 도전할 의향이나 역량이 부족한 인물들이었다.
네윈의 일인 독재체제는 쿠데타부터 공고화된 것이 아니라 1970년대까지 자
신에 대한 도전을 극복한 과정의 결과였다. 첫 번째 사건은 1963년 육군총부사령
관 아웅지(Aung Gyi) 준장의 해임이었다. 아웅지는 독립운동 당시 네윈이 조직한
“제 4 버마소총대대”의 일원으로서 과도정부에도 참여했고, 네윈을 대신하여 국민
에게 쿠데타의 배경을 설명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할 정도로 네윈에게 충직한 인물
이었다(Butwell 1963, 240-241; Lintner 1994, 212).
그는 급진적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를 반대했는데, 그의 대척점에는 띤페(Tin
Pe)6)가 있었다. 이 시기만 하더라도 네윈은 국가의 경제정책을 명확히 결정하지 않

6) 아웅지와 대결에서 승리한 뒤 띤페는 1965년 사회주의 경제건설 촉진법을 공포하는 등


사유재산의 국유화를 완성함으로서 사실상 국가가 모든 생산 수단을 독점하는 구조를 완
성했다. 이로 인해 소비재 가격이 급등하고 전국에서 암시장이 형성되는 등 경제 왜곡이
현실화되었다. 네윈은 그 책임을 물어 1970년 띤페를 해임했다(Topich and Leitich 2013,
91).
장준영 / 미얀마 민간정부에서 쿠데타 가능성과 그 조건 135

은 상황에서 경제적 온건주의와 급진주의를 주장하던 아웅지와 띤페의 대결은 이


데올로기나 경제정책이 아니라 파벌경쟁으로 비춰졌다. 아웅지가 사퇴한 뒤 그를
지지한 모든 인사들은 해당 직위에서 해제되었다(Topich & Leitich 2013, 91). 아웅
지의 직위는 칫먀잉(Chin Myaing)이 무역 및 산업부 장관, 산유 준장이 육군총부사
령관을 각각 계승했다(Taylor 2015, 277). 특히 산유 준장이 향후 25년간 대통령을
비롯한 네윈의 측근으로 생존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아웅지의 축출은 그에게 적
지 않은 교훈을 주었을 것이다.
두 번째 사건은 민간이양 이후 본격화된 공개적 반정부 시위 등 사회적 혼란
과 군 내부의 불만이 축적된 상황에서 발생했다.7) 1976년 당시 권력서열 3위인 띤
우(Tin Oo) 국방장관겸 육군총사령관의 석연찮은 해임과 연계하여 쿠데타 음모 계
획의 발각으로 네윈 정권은 위기를 맞았다. 1976년 7월, 옹쪼민(Ohn Kyaw Myint)
당시 육군 대위가 주도하여 총 14명의 영위관급 장교(대위 11명, 소령 3명)가 쿠데
타를 일으켜 네윈과 산유를 암살한 뒤 민간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다(Rogers 2010,
61). 옹쪼민은 띤우 후임에 임명된 쪼틴(Kyaw Htin) 육군총사령관의 부관으로서,
당시 경제발전을 실패한 사회주의정권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당대 소장파 장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Rogers 2010, 61).
군정보국에 의해 쿠데타 음모는 발각되어 수포로 돌아가고 옹쪼민 대위는 처
형되었고, 띤우도 여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7년 형에 처해졌다(Martin 1977, 155;
Silverstein 1977, 144). 띤우가 젊은 장교로부터 인기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나 그가
쿠데타에 가담하거나 배후에서 조종한 사실은 발견되지 않는다.8) 오히려 네윈은
띤우가 탈정치적 직업 군인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신뢰하지 않았다(Win Min 2008,
30). 네윈에게 있어서 띤우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자신과 산유를 위협할 유

7) 1974년 3월 2일, 민간정권이 수립된 직후부터 도처에서 파업과 시위가 발생했고, 이에 대


해 정부는 6월, 집회와 결사 금지령을 발표하고 모든 학교를 무기한 폐쇄했다. 그러나 같
은 해 12월, 정부는 우 땅(U Thant) 전 유엔사무총장의 국장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네윈정권이 수립된 이후 최초로 전국적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발생
했다.
8) 이와 다른 이유도 있다. 띤우의 부인이 일부 서구국가 외교관들의 도움으로 주방용품을
밀수한 사실이 발각되자 네윈으로부터 이혼하라는 압력을 받았는데, 띤우가 항명하자 축
출 당했다는 소문도 있다.
136 글로벌정치연구 제9권 1호 (2016년 6월)

일한 인물이었다(Silverstein 1977, 144). 이 사건 이후 산유는 임시전당대회를 개최


하고 1974년 시행한 정당 정책의 실패를 빌미로 당원 54,193명을 출당시키는 등
정권에 대한 도전형국이 형성되지 않도록 조치했다(Silverstein 1977, 144).
세 번째 사건은 1976년 쿠데타 음모를 발각한 군정보국(MI)의 수장인 띤우
(Tin Oo)9)의 축출이었다. 1983년 5월 17일, 네윈은 부정부패 혐의로 띤우와 그의
심복이었던 보 니(Bo Ni) 내무부 장관을 전격 경질했다. 두 인물은 공식 직책 이외
에 대규모 개인사업을 경영하면서 가족을 중심으로 불법무역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있었다(Steinberg 1984, 198; Taylor 2015, 487). 그러나 경질사유가 띤우의 부정부
패가 아니라 네윈에게 도전할 가장 유력한 인물이 바로 띤우였다는 사실이었다. 띤
우는 종종 “일인자와 절반”(number one and half)으로 불릴 정도로 네윈과 독자적
으로 파벌을 형성했고(Win Min 2008, 30), 띤우가 담당하던 군정보국은 국가 안의
국가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Lintner 1989, 65).
당시 군정보국은 네윈의 일인독재체제에 도전하는 세력을 감시하고 제거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네윈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 군정보국을 맡았다(Maung
Maung Gyi 1983, 203). 1983년 11월 정보국 국장직은 폐지된 대신 고위 관료가 집
단체제를 형성하는 구도로 바뀌었다(Steinberg 1984, 199). 그러나 10월 9일, 북한이
자행한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개인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기존 제도를
무력화시킨 네윈의 결단은 정보국의 붕괴를 조장했다.
이상과 같이 1차 군부정권은 철저히 네윈의 개인독재를 위해 모든 자원이 동
원되었다. 네윈 또한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인사를 발견하면 즉시 축출함으로써 개
인적 정권을 강화했다. 1988년 민주화운동 당시에도 네윈은 모든 직책에서 사퇴했
으나 그의 심복들을 대통령직에 임명하는 등 배후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표
2> 참조).
1988년 9월 쿠데타 이후 네윈은 막후권력을 행사하면서 군부통치를 제도화시
켰다. 그는 사망하기 전까지 남바원지(nambaonegyi, 절대 일인자) 또는 어포지

9) 그는 덩치가 커서 장신(長身)이라는 의미인 랑바지(lanbargyi) 또는 MI 띤우로 불렸다, 동


명이인이 많은 미얀마의 특성상 소속이나 출신지를 이름 앞에 붙여 구별한다.
장준영 / 미얀마 민간정부에서 쿠데타 가능성과 그 조건 137

(aphogyi, 큰 할아버지)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절대 권력자였고, 그의 부하들도


네윈이라는 큰 정원에서 출생하고, 양육 받은 네윈 창빠욱(chanpauk, 정원)으로 스
스로를 평가했다(Mya Maung 1992, 25). 네윈과 군부 모두가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다수는 네윈이 (사망하기 직전까지) 여전히 군사평의회의 쟁점에 대한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것으로 믿겨진다(Tin Maung Maung Tan 2001, 236). 이러한 단서는 쏘마
웅(Saw Maung) 군총사령관이 네윈의 자택을 방문한 후 쿠데타가 발생하였다는 점
에서도 찾을 수 있다(Steinberg 2001, 2)

Ⅳ. 2차 군부정권(1988-2010)의 형태와 특징:


집단지도체제에서 개인적 정권으로 변화

2차 군부정권은 2002년 네윈이 사망하기 전까지 네윈이 주도하는 권력구도가


유지되었고, 2004년 네윈의 심복인 킨늉 총리가 축출된 후 딴쉐(Than Shwe) 1인
체제로 공고화되었다. 딴쉐도 자신의 독점적인 권력체제를 안전화하기 위해 잠재적
경쟁자로 분류되는 군 인사를 축출함으로써 네윈과 유사한 전략을 채택했다. 2011
년 유사민간정권이 출범한 뒤 딴쉐는 네윈처럼 막후권력을 행사하며 여전히 자신
의 입지를 공고화했다.
정부구조 상 2차 군부정권은 2011년 정권이 이양될 때까지 과도 군사평의회
의 형태로 유지되었고, 따라서 대통령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총리는 1차 군부정권
당시 대통령직과 유사하게 최고 권력자에 의해 선출되거나 교체되었다(<표 3> 참
조).
138 글로벌정치연구 제9권 1호 (2016년 6월)

<표 3> 2차 군부정권 당시 총리 명단

역대 성명 임기 신분
쏘마웅 군부(SLORC의장
7 1988.9.21-1992.4.23
(Saw Maung) 겸직)
딴쉐 군부(SLORC/SPDC의
8 1992.4.23-2003.8.25
(Than Shwe) 장 겸직)
킨늉 군부(SPDC의장 지명,
9 2003.8.25-2004.10.18
(Khin Nyunt) 축출)
군부(승진 임명,
10 쏘윈(Soe Win) 2004.10.19-2007.10.12
백혈병으로 사망)
군부(2007-2010)→US
떼잉쎄잉 DP(2010)
11 2007.10.12-2011.3.30
(Thein Sein) ※승진 임명, 신정부 구성에
따라 총리직 폐지
※출처: 필자 정리.

쏘마웅과 딴쉐는 네윈의 천거에 의해 각각 총리에 취임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네윈은 아웅지, 띤우(1976)를 축출한 뒤 행정력과 정치력을 겸비한 군 인사를 선호
했는데, 쏘마웅은 야전경험만 풍부한 군인으로서 군 내부에 대한 충성심으로 쿠데
타를 감행했다. 즉 네윈은 배후에서 자신의 심복을 활용하여 지속적인 군부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고, 역시 쏘마웅을 통해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건
재함을 군 내부적으로 확인시킨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2002년 네윈이 사망하기 전까지 딴쉐-마웅에(Maung Aye)-킨
늉으로 구성되는 권력의 삼각구도는 지속적인 갈등과 견제 구도를 유지하면서 네
윈에 대한 도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먼저 1983년 네윈은 아웅산 묘소 폭파사
건 당시 군 정보국을 담당한 아웅꼬(Aung Ko) 대령을 해임하고 킨늉 대령을 후임
으로 발탁했는데, 네윈에 대한 충성심이 그 주요한 배경이었다(Selth 2002, 106). 네
윈은 새로 구성한 군사평의회에 킨늉을 제 1서기로 발탁하고, 딴쉐 부의장의 의장
진출에 따라 공석이 된 부의장직은 킨늉의 추천으로 마웅에를 임명했다. 또한 군사
평의회 의장직 승계를 바라지 않았던 딴쉐를 해당 직위에 임명했다(Lintner et al.
장준영 / 미얀마 민간정부에서 쿠데타 가능성과 그 조건 139

2000).
3인 지도체제 가운데 네윈은 서열이 가장 낮은 3위를 적극 지지함으로써 권
력서열 1위가 2-3위와 협력 또는 강압을 통해 네윈에게 도전할 환경을 구축하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2위와 3위의 전략적 협력을 통해 1위를 적극적으로 견제한다.
또한 권력서열 2위는 일종의 권력 완충지대를 형성함으로써 1위와 협력하지 못하
는 구도를 완성했다.
한편, 킨늉은 3인 지도체제 내에서 독자적인 파벌을 형성했다. 1997년 군사평
의회가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SLORC: State Law and Order Restoration Council)에
서 국가평화발전평의회(SPDC: State Peace and Development Council)로 개칭할 때
킨늉은 주도적으로 50대 장교를 발탁했다. 그 가운데 띤우(Tin Oo) SPDC 제 2서
기와 윈밍(Win Myint) 제 3서기는 킨늉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인 도전자로서 각
각 2001년 부패 혐의와 헬기사고로 권력층에서 축출됐다. 일반적으로 군부 내 권
력구도에서 축출되면, 군사평의회는 명령을 통해 “임기 만료”, “부정부패”, “건강상
의 이유” 등을 발표한다. 윈밍 제 2서기의 사례가 여기에 해당되고, 띤우 제 2서기
는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헬기사고로 사망했다.
2002년 3월, 군정보국은 네윈의 사위와 손자를 쿠데타 기도혐의10)로 체포함으
로써 네윈의 막후정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두 번째
군부정권은 첫 번째 군부정권을 계승했다는 차원에서, 즉 첫 번째 군부정권의 막후
권력이 생존하고 있으므로 두 번째 군부정권의 최고 권력자는 절대 권력을 향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딴쉐 의장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하는 차원에서 네윈 족벌을

10) 2002년 3월 7일, 군정보국은 네윈의 장녀 산다윈(Sandar Win)의 남편인 에쪼윈(Aye Zaw
Win)과 슬하 세 아들 에네윈(Aye Ne Win), 궤네윈(Kway Ne Win), 즈웨네윈(Zwe Ne
Win)을 쿠데타 기도혐의로 긴급 체포했다. 같은 해 9월 26일 법원은 이들이 2006년 3월
27일 딴쉐, 마웅에, 킨늉 등 최고 권력자 3인을 납치한 후 쿠데타로 정권전복을 시도하
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판결했다. 공판에서 산다윈은 가택연금, 나머지 4명은 모두 사형
판결을 선고했으나 항고심에서 모두 무기징역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정부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네윈 일가는 자신들의 사업이 정부 정책으로 인해 손실을 입었고, 이에 대한 반
감으로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다른 해석을 내 놓았다. 쿠데타에 사용할 군수품의 출처가
불분명하고 군사작전을 수행하기에는 그 수가 부족했으며, 쿠데타 공모자도 밝혀지지 않
아 쿠데타 모의는 의문이었다.
140 글로벌정치연구 제9권 1호 (2016년 6월)

축출한 것이다. 또한 네윈 족벌이 직접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상황에서 딴쉐는


2004년 킨늉을 전격 경질함으로써 집단지도체제의 와해에 이은 완전한 1인 독재체
제를 구축했다.11)
딴쉐 의장의 킨늉 총리 축출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네윈이 띤우 정보
국장을 해임한 사례와 동일하게 독재자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국가기능과
제도의 일시적 마비도 감수하는 독단을 감행한다. 잠재적 경쟁자를 축출함으로써
당장에는 권력의 공고화를 가져올 수 있어도 중장기적으로 정권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환경으로 이어졌다.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처럼 2007년 승려주도의
샤프론 혁명(Saffron Revolution)은 헐거워진 국가 통제체제의 빈틈을 상징하는 사
건이었다. 또한 1983년 군정보국이 다수의 각료들이 책임지는 형태로 변화했듯이
2004년 킨늉 경질이후 군정보국은 해체되고, 이를 대신하여 군무안보실(OMAS:
Office of Military Affairs Security)이 신설되었으며 구 군정보국의 모든 권한을 정
규군으로 예속시켰다.
둘째,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전격 경질한 뒤 최고 권력자는 전문성을 배제하
고 자신의 최측근을 해당 직위에 임명함으로써 불필요한 정치적 비용을 치렀다. 네
윈이 킨늉을 전격 발탁했다면, 딴쉐는 자신의 심복으로 알려진 민스웨(Myint Swe)
당시 양공지역사령관을 킨늉의 후임으로 지명했다. 민스웨를 중심으로 정보국 재건
을 시도했으나 정보업무를 관할할 인적자원이 대부분 영어(囹圄)상태에 들어감으로
써 인물 발굴의 한계와 업무의 지속성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11) 쉐망(Shwe Mann) 당시 합동참모장은 킨늉 총리의 경질 사유를 정부군과 군정보국의 대


립으로 압축했다. 중국 국경지역 무세(Muse) 주재 정보국 장교들이 보석과 티크를 밀수
하는 등 부패 혐의가 만연하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딴쉐 의장은 지역 사령관들이 이들을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킨늉이 이를 무시했고, 문제를 일으킨 정보국 장교들도
해고하지도 않아 딴쉐로부터 명령불복종 혐의로 직위 해임되었다(Kyaw Yin Hlaing
2005, 176). 2004년 9월부터 무세 지역 군정보국 요원 200명이 체포되기 시작했고, 10월
18일에는 정부군이 군정보국 청사를 접수한 뒤 쪼윈(Kyaw Win) 군정보국 부국장을 비
롯하여 킨늉의 최측근들을 긴급 체포했다. 한편, 2005년 7월 킨늉은 권력형 비리 및 부
정축재 등 총 8개의 죄명으로 44년간의 실형을 선고 받고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이외 킨
늉 휘하에 있던 정보국 소속 장교 38명을 포함하여 1천 여 명 이상이 즉결 심판을 받아
평균 20년 형, 일부는 100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았다. 킨늉은 2011년 떼잉쎄인(Thein
Sein) 전 대통령의 대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장준영 / 미얀마 민간정부에서 쿠데타 가능성과 그 조건 141

Ⅴ. 유사민간정권과 민간정권에서의 군부:


막후권력의 단계적 해체

네윈과 딴쉐는 각각 군부정권의 최고 지도자로 자신의 권력에 도전을 받을


경우 가차 없이 해당 인사를 축출하는 전략을 선택했고, 은퇴 후에도 막후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상이하다. 네윈은 군부정권의 창시자로서 개인이 장기
집권할 수 있는 권력구도를 설계하고 시행함에 있어서 권력을 공유하는 행태를 보
이지 않았다. 이에 반해 딴쉐는 2차 군부정권의 계승자로서 네윈의 정치적 막후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다가 네윈과 동일하게 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집단지도체제
를 와해시킨 정치적 전략을 채택했다. 또한 네윈은 자신에 대한 도전 가능성이 감
지될 경우 이에 강경하게 대응했고, 딴쉐는 잠재적 도전자의 권력이 최고조에 달했
을 때 축출 작전을 시행했다.
두 인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정치적 결사체로서 군부의 지속적인 정치 관여
유무였다. 네윈은 쏘마웅을 종용하여 쿠데타를 통해 성공적인 군부의 정권 계승을
완성함으로써 정치군인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고, 군부의 정치 및 경제적 책임소지
를 무기한 연기시켰다. 이에 반해 딴쉐는 자신을 포함한 족벌의 안정적인 출구전략
을 위해 군사평의회 해체와 유사민간정권으로의 이양을 유도함으로써 군부의 정치
적 역할을 축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딴쉐의 전략은 군부가 병영으로
복귀하는 직업주의적 의식에 근거한 결정이라기보다 철저히 개인적인 목적에 근거
한다. 그는 동시대 아랍세계의 독재자가 시민에 의해 사살되는 현장을 목격했고,
자신도 언젠가는 자신이 네윈과 네윈 족벌에 행한 것처럼 하급자로부터 정치적 보
복을 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장준영 2012, 6-7).
비록 유사민간정권이라는 정치체제의 변화가 목도되고, 은퇴한 군 최고 지도자
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일한 구도가 지속되지만, 유사민간정권에 들어서
도 군부의 쿠데타 가능성은 매우 낮게 제기되었다. 2015년 총선을 앞둔 8월부터 쿠
데타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실제 발생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다. 대신 딴쉐는 1988
142 글로벌정치연구 제9권 1호 (2016년 6월)

년 군사평의회체제가 출범할 당시처럼 퇴역한 고위 군 인사들의 경쟁구도를 형성함


으로써 이들이 연대하여 자신에게 도전할 수 없도록 했다.12) 나아가 정치경험이 없
는 군인을 군총사령관에 발탁함으로써 더 이상 정치군인을 양성하지 않았다.
군부의 정치적 역할과 군부 본연의 임무를 분리한 딴쉐의 전략은 성공적으로
평가된다. 유사민간정권 5년 간 군부 내 파벌 형성은 목도되지 않았고, 퇴역한 군
수뇌부를 중심으로 한 고위 인사들의 갈등은 경쟁관계로 발전했지만 궁극적으로 딴
쉐의 신변을 위협할 수준은 아니었다. 2013년 민아웅흘라잉(Min Aung Hlaing) 군총
사령관은 군 회의에서 “땃마도(Tatmadaw, 미얀마 군부)는 딴쉐 장군이 형성한 정책
을 언제나 고수할 것이다”(Su Mon Thazin Aung 2014/01/14)라고 언급함으로써 군
권은 여전히 딴쉐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론화했다. 1988년 군부는 무장반군의
완전 소탕을 위해 군의 근대화를 새로운 교리로 채택했고(Maung Aung Myoe 2009,
33), 헌법에 명시되어 있듯이 군부는 국가의 수호를 그들의 핵심 목표로 삼는다(제
338, 339조). 그러면서 군부는 2011년 신정부 출범 이후 군부의 탈정치화를 유인하
는 그린투블루(Green to Blue)13) 전략을 채택했다. 군부는 군부통제 정치구도를 포
기하지만, 대신 군부 지도(tutelage) 또는 조건부 종속 등을 통해 민간과 분리관할
형태를 채택했다. 그러므로 민아웅흘라잉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정치적 역할을 축
소하면서 군의 직업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그 역할을 재조정하고 있다.
한편, 2012년 대통령 취임 1주년 기념사에서 떼잉쎄인 대통령은 강경파와 온
건파로 양분된 정치지형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는데, 실제로는 아웅따웅(Aung
Thaung) 전 산업부장관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온건개혁파
를 적극적으로 견제했다. 딴쉐는 공식적으로 막후권력을 행사한 사례는 드러나지
않고, 아웅따웅 또한 딴쉐에게 충직한 인물로 정의되지만 정작 정부의 개혁정책에
반기를 들게끔 아웅따웅을 조정한 정황도 포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테우(Htay

12) 대통령의 경우 군 서열 3위인 쉐망이 유력했으나 4위인 떼잉쎄인 총리를 선택했고, 서열


5위인 띤아웅민우(Tin Aung Myint Oo)를 부통령에 취임함에 따라 대통령은 군 서열 3위
와 5위의 견제를 받고, 5위는 3위와 4위를 동시에 견제하는 구도를 완성했다.
13) 녹색은 군부, 블루는 경찰을 상징한다. 신정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군부와 경찰의 업무
는 경계선이 모호했으나 신정부 출범 이후 공공질서는 경찰에게 위임한다는 전략이다.
장준영 / 미얀마 민간정부에서 쿠데타 가능성과 그 조건 143

Oo) 전 USDP 부대표는 딴쉐에 대한 존경심을 표출하듯이 최소한 딴쉐는 강경파의


지지를 얻고 있다(The Irrawaddy 2011/05/23).
2015년 8월 발생한 쉐망 하원의장의 당 대표 축출은 여전히 고위 인사간 갈
등이 작동하고 있음을 객관화한다. 쉐망 하원의장은 공공연히 대권도전 의사를 표
출했고, 떼잉쎄인 대통령과 별도로 개혁노선을 견지했다. 특히 그는 개헌안을 두고
군부의 정치적 역할을 축소해야 한다는 급진적 개혁안을 주장했고, 아웅산수찌와
연대를 모색하는 등 군부와 여당 내 반대 여론에 부딪혔다. 실제로 그는 2015년
총선에서 USDP 당적으로 입후보를 희망하는 군부 출신 159명 가운데, 59명만 공
천을 부여했을 정도로 군부 출신 인사에게 강경한 입장이었다. 군부의 역할 축소에
대해 딴쉐 전 의장이 진노하여 대표직 경질을 직접 지시했다(장준영 2015a). 비록
군부가 정치사회의 주역이 될 수 없는 환경에 처해졌지만 최소한 헌법 상 군부에
게 보장된 “예약된 영역”은 침해될 수 없다.
한편, 2015년 총선 이후 두 가지 주목할 사건이 발생했다. 첫 번째는 딴쉐 전
의장이 아웅산수찌와 회동하여 손자의 입을 통해 그녀가 장래 국가의 지도자가 된
것을 확인시켰다.14) 아웅산수찌는 대통령, 하원의장, 군총사령관 등 주요 인사를
차례로 만나면서 평화적인 정권이양에 합의했는데, 딴쉐와의 회동은 전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아웅산수찌는 군부를 포함한 구정권 인사들의 완전한 지지
를 받는 토대를 마련했다. 딴쉐와 아웅산수찌는 1996년과 2003년 두 차례 회동을
했을 뿐 어떤 교류도 없고, 딴쉐도 아웅산수찌를 가장 혐오하는 인물로 간주한다.
이번 회담을 통해 딴쉐는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적응을 통한 개인적 신변을 보장
받으려는 의도가 컸고, 아웅산수찌는 군부를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협력 또는 포용
의 동반자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사건으로는 대권 도전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던 민아웅흘라잉 군총

14) 딴쉐의 손자인 네쉐뛔아웅(Nay Shwe Thway Aung)은 자신의 SNS 계정에 딴쉐와 아웅산
수찌가 만났고, 그 증거로 아웅산수찌, 딴쉐, 떼잉쎄인 대통령이 서명한 5,000짯을 자신
의 계정에 게재했다. 각 인사의 서명은 친필이 맞지만, 각 서명 날짜가 상이하여 진위여
부에 논란이 일었다. 결국 12월 10일, 예툿(U Ye Htut) 정보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떼
잉쎄인 대통령은 지폐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했다(장준영 2015b).
144 글로벌정치연구 제9권 1호 (2016년 6월)

사령관이 5년 간 한 차례 더 임기를 연장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정권 교체기에


군 수뇌부 교체 가능성이 제기되고 지난 5년 간 민아웅흘라잉을 중심으로 군부의
지도체제가 공고화되었기 때문에 내부 단속을 위해 현 총사령관의 유임이 있었다
(Reuters 2016/02/13). 대신 군부 몫으로 할당된 부통령 후보로 딴쉐의 인물로 알려
진 민스웨(Myint Swe) 양공주지사가 지명, 결선투표에서 제 1부통령에 당선됐다.15)
그는 킨늉 총리의 축출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 정보국을 담당하는 등
딴쉐와 가깝고, 전 정부의 고위인사가 대부분 은퇴한 상황에서 행정부에서 민간 일
색의 정치인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거론된다.

Ⅵ. 결론 및 전망

1962년부터 1988년까지, 그리고 1988년부터 2010년까지 각각 20년 이상 유지


된 군부정권은 내부적으로 최고 통치자 1인 체제를 근간으로 하고, 경우에 따라 집
단지도체제를 유지하면서 권력의 독식 또는 배분을 통한 균형 체제를 유지했다. 또
한 쿠데타 초기부터 군사정부 중반까지 집단지도체제가 유지되다가 개인적 정권의
형태로 변화했다. 새로운 군부정권이 출범하면 은퇴한 개인 지도자는 막후권력을
형성하고 행사함으로써 구체제와 신체제 군부의 결속과 상호 조화를 유도함과 동
시에 하극상의 가능성을 견제하는 구도를 유지했다.

15) 2012년 띤아웅민우(Tin Aung Myint Oo) 부통령이 와병상의 이유로 사퇴할 당시 부통령
으로 지명되었으나 아들이 호주시민권자로 헌법에 저촉이 되어 냥뚠(Nyan Tun) 해군제
독으로 교체되었다.
장준영 / 미얀마 민간정부에서 쿠데타 가능성과 그 조건 145

<표 4> 각 정권의 내부 권력형태 비교

2차 유사민간 및
1차 군부(1962-88)
군부(1988-2010) 민간정권(2011-현재)
정권
네윈(1962-2002) 딴쉐(1992-2010) 떼잉쎄인→틴쪼
최고지도자
군부 지도체제 3인(네윈, 아웅지, 3인(딴쉐, 마웅에,
없음.
구성원 띤우) 킨늉)
최초
군사평의회 17인 18인 없음.
위원
네윈→딴쉐
막후권력 네윈 딴쉐
(2002-현재)
※출처: 필자 정리.

그런데, 2011년부터 유사민간정권이 출범하면서 군부의 정치적 역할은 크게


위축되었다. 사실 유사민간정권은 군부가 정치질서의 주역이 되는 ‘규율민주주
의’(disciplined democracy)를 이데올로기를 채택함으로써 군부 통치에서 군부 통제
를 지향했다. 그러나 행정부 중심으로 개혁이 단행됨에 따라 군부의 정치참여는 헌
법에 보장된 영역 이외에 원천 봉쇄되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정치집단으로서 군부
는 철저히 최고 지도자의 사유물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 왔으니, 2011년 이후 딴쉐
전 의장도 막후에서 군부를 통제하는 구도를 유지해 오고 있다.
146 글로벌정치연구 제9권 1호 (2016년 6월)

<그림 2> 2011년 이후 군부의 권력구도

막후권력


군부
×

집단지도체제 1인 독재체제

<그림 2>와 같이 군부정권 당시 군 지도부는 은퇴한 막후권력에 따라 작동되


었다. 딴쉐는 2002년 네윈을 포함한 네윈 족벌을 축출하여 1인 독재체제를 완성
했으나, 2011년 자신이 은퇴함으로써 네윈과 다른 막후권력의 노정을 가게 되었다.
네윈과 딴쉐 모두 현직에서 경쟁자를 축출함으로써 절대 권력체제를 유지했으나
네윈이 군부의 조합적 이익을 추구했다면, 딴쉐는 개인의 이익에 집중하는 특성을
보였다. 그런 이유로 2011년 이후 군부는 정치집단으로서 역할이 퇴색되었고, 군부
내에서도 파벌 갈등과 경쟁이 발생하지 않았다. 즉 딴쉐의 막후권력은 군부의 지속
적인 정치개입을 위한 지렛대가 아니라 자신과 족벌의 안전한 퇴로 마련을 위해
군부의 정치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2011년 이후 군부가 정치권력
을 장악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딴쉐는 불필요하게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정치에
개입할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다.
현재로서 더 이상 군부가 정치에 개입할 의향과 기회는 없다. 그렇다면 쿠데
타와 같은 군부의 정치개입 명분과 배경은 종식된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명확
히 ‘그렇다’고 하기 어렵다. 첫째, 미얀마 군부는 근본적으로 다종족으로 구성된 연
방의 분열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여 왔고, 정부의 노력에
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정전협정을 통한 국민통합은 달성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군
부는 그들의 교리에도 나타났듯이 무장반군의 소탕을 국가의 이익의 보호와 동일
장준영 / 미얀마 민간정부에서 쿠데타 가능성과 그 조건 147

시하고, 정부의 정전협상이 퇴행하여 사회적 혼란이 가중될 경우 군부의 정치적 결


단은 가능하다.
둘째, 헌법에 보장된 군부의 과도한 역할에 따라 군부는 언제든지 정치에 개
입할 수 있다. 특히 첫 번째 배경과 연계하여 국가의 법과 질서가 무너졌다고 군부
가 자의적으로 판단할 경우 군부의 정치개입은 개방된다. 민간정부에서 헌법 개정
또는 전면 작성이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셋째, 민간정권의 군부에 대한 의존이 발생할 가능성이다. 현행 헌법에 따라
국민민주주의연합(NLD) 대표인 아웅산수찌가 대통령이 되지 못함에 따라 일종의
‘대리통치’ 국면을 완성했지만, 대통령 5년 임기 내에 현재와 같은 구도가 유지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아웅산수찌가 대통령의 각 고문을 총괄하는 국가고문
(state counselor)에 취임함에 따라 군부와 유사하지만 공개적 막후권력체제를 완성
했으나 대통령과 아웅산수찌간 갈등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두 인물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하는 차원에서 군부와 협력하거나 군부가 어지러운 정국을 명분으로
민간정부에 협박(blackmail)을 할 경우 1958년과 같은 과도정부의 구성은 불가능한
미래가 아닐 것이다.
넷째, 지금까지 세 차례의 쿠데타에서 공통적인 사회적 기회는 대안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엄격히 말해 시간이 흐를수록 반군부 정서가 확산되었
고, 1988년 경우에는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세력은 군부를 극
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분파적이었고, 2007년 발생한 샤프론 혁명에서도 그러했다.
따라서 군부는 쿠데타를 계획할 경우 그들에게 저항할 세력에 대한 고심을 할 필
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사실은 현재 막후권력을 형성하고 있는 딴쉐의 거취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그는 장기간 독재를 통해 개인적 야욕이나 권력을 향유한 것보다
안정적인 말로와 가족의 안위를 보장받는 것을 최대 목표로 설정했다. 현재로서 그
는 안정적인 신변보장을 받고 있으나 그가 사망한 뒤 군부 내 권력구도는 요동칠
가능성이 크고, 현재 군총사령관이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달려있다.
148 글로벌정치연구 제9권 1호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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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글로벌정치연구 제9권 1호 (2016년 6월)

[Abstract]

Possibilities and Preconditions of the Military Coup


under the Myanmar’s Civilian Government:
Focusing on the Internal Dynamics of the Military

Jang, Jun Young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This paper explores the possibilities and the preconditions of the military coup
under the new civilian government in Myanmar. The military had ruled from 1962
to 2011 when the quasi civilian government was launched with centering on the
retired military members, however the political behaviors in the different two
military regimes are shown to be similar to each other. The military ruler purged
his potential competitors to consolidate his political power, and even after the
retirement from the official position, the power behind in curtain of the retired
military supremo has still been operating. But the character of the power behind in
curtain in the incumbent is different from the past in such a way that it is only
operating for the personal purposes not to reinforce the military's unity. The retired
supremo would like to be guaranteed his safe final days, and exit strategy.
Therefore, the possibilities of the military coup might be low and even if the coup
is successful, the life of military regime is not too long. Nevertheless, the social
conditions for the military coup are still valid.

Keywords: Military, Coup, Power Behind in Curtain, Myanmar, Authoritarianism,


Democracy, Political Development

투고일 2016.4.30. 심사일 2016.5.20. 게재확정일 2016.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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