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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언약에서 조건과 그 순종의 보상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문제점
행위언약에서 조건과 그 순종의 보상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문제점
2003學年度
碩士學位請求論文
安養大學校 神學大學院
牧會學科
崔 天 洙
행위언약에서 조건과 그 순종의 보상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문제점
A Historycal Perspective of the Condition and Reward
in the Covenant of Works and the Problem
指導 漢 聖 基 敎授
2003년 12월
安養大學校 神學大學院
牧會學科
崔 天 洙
감사의 글
2003년 12월19일
최 천 수
<목 차>
I. 서 론 ································································································································· 1
A. 문제제기 ························································································································· 1
B. 목적 및 방법 ··················································································································· 2
II. 본 론 ······························································································································· 4
A. 언약의 의미 ····················································································································· 4
III. 결 론 ························································································································· 58
참고 문헌 ······························································································································· 61
I. 서론
A. 문제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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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완전한 상태가 아닌 완전한 상태를 위한 준비단계(probation, G. Vos의 표현에 따라)인 것
이다. 벌코프가 제시하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창2:17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는 구절이다.
이 표현에 ‘먹지 않으면 영생을 줄 것이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과
연 이러한 해석이 합당한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조건과 그에 대한 보상이 행위언약에서 필수적인
부분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행위언약과 은혜언약과의 관계도 다시 조명해보고자
한다.
B. 목적 및 방법
본고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언약신학의 역사를 바빙크의 평가에 따라 살펴볼 것이다. 바빙
크의 평가에 따라서 언약의 개념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통일성과 나아가서 삼위일체 하나
님의 실체의 통일성과도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나서 ‘언약’이라는 단어의 용례들을 통
해서 그 의미를 먼저 살피고자 한다. 왜냐하면 최근에 성경신학 특히 구약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언
약에 대한 개념을 다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신약과 구약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약에 해당되는 단어들의 사용례들을 살펴봄으로써 그 용어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여기서의 논의의 중심은 언약의 핵심이 언약의 방식에 있는가 아니면 내
용에 있는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 ‘언약’이라는 단어를 살펴본 이후에 그러한 언약의 개념에 기
초한 언약의 내용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과 예정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이러한 과정에서 발견
되고 확인된 언약을 중심으로 은혜언약과 행위언약과의 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몇몇 학자
들이 주장하고 있는 행위언약 교리 가운데에서 그 요소들을 살펴봄으로 행위 언약의 조건이 갖는
위치를 살펴본 후에, 이것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는 예정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에 나타나는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예정론과 관련하여서는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관점
에서,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하여서 살펴볼 것이다. 두 번째로는 행위언약에서 보상과 형
벌로써의 영생과 죽음의 성격을 통해서 나타나는 문제를 살펴볼 것이고, 마지막 세 번째로는 본문
에 대한 이해의 문제에서 살피고자 한다.
이 글을 통해서 의도하는 바는 순종에 대한 보상, 즉 영생에 대한 약속이 행위언약을 형성하는
필수적인 핵심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럼에도 행위언약이 그 의미를 잃지 않음을 보
여주는데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준이 되는 신학은 칼빈과 그의 영향을 받은 17세기 개혁신학자
들의 신학2)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 부분에서 많이 인용될 것이다. 한가
지 아쉬운 점은 본고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다양하고 방대한 주제들이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제들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간략하게 소개하는 정도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II. 본론
A. 언약의 의미
1. 언약 신학의 역사적 발전 과정
2) 김영규, 『17세기 개혁신학』(서울: 개혁주의 성경연구소, 2000), p295 여기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거
론되어 있는데, 여기서 개혁주의란 이러한 인물들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엄
밀한 정통주의 노선을 따르는 것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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념이 내포하고 있는 요소들 곧 시험적 명령, 선택의 자유, 죄와 죽음의 가능성 등은 모두 언급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그의 주저인 「신국론」에서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를 언
약(testamentum, pactum)으로 명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바빙크의 언약론에 대한 역
사적 평가에 따르며 언약에 대한 더욱 근원적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성경에서 언약 관념은 저절로 기독교 신학으로 넘어갔다. 교부들의 경우 특별히 그들의 주석들에서 그
것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언약론이 교의학적인 의미를 얻게 된 것은, 그리스도 종교가 이스라엘
적인 종교와 결합 속에서 그리고 동시에 그것과의 구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사실로 말미암은 것
이다. 이미 사도시대로부터 여기에 두 가지 경향들이 대립해 있었다. 유대주의는 이방인으로부터 온 그
리스도인들에게도 모세법 특별히 할례의 보존을 요구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교리에 있어서 하나
님과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부정하였다. 다른 편에서 영지주의가 있는데, …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
대교와는 전혀 다른 신 즉 은혜와 사랑의 신이 계시되었다. 그 때문에 율법적인 전체 입장은 사라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고, 구약 전체로부터 자유롭다. 이런 두 가지 당파들과 대조
적으로 기독교와 그 신학이 어떤 이중 과업으로 분류됨을 보여준다. 영지주의와 대조하여 그것은 신구
약의 통일성을 주장하고 유대주의와 대조하여 신구약의 차이를 주장한다4).
이것은 바빙크가 유대교와 그리고 영지주의와의 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언약론이 중요한 위치
를 차지하고 있으며, 신구약 성경과 관계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언약의
통일성은 신약과 구약의 통일성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빙크는 다음과 같은 교부들의 글들을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일치하게 교부들을 통해서 율법과 복음은 참으로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다고 종종 표현되고 있
다. 열매가 씨로부터 나온다면, 열매가 씨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복음도 율법과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율법으로부터 속행한다. 그로부터 다른 것이나 외래적이거나 별종이 아니고 모순적이지 않다
(Sicut fructus scparatur a semine, cum sit fructus ex semine, sic et Evagelum separatur a
lege, dum provehitur ex lege: aliud a illa, sed non alienum, diversum, sed non contrarium, 이
레니우스). 두려움은 더 구약에 속해있고 사랑은 더 신약에 속해 있으나, 구약 안에 신약이 감추어져 있
고 신약 안에 구약이 드러나 있다(in Verere Testamento Novum latet et in Novi Vetus patet, 터
툴리안). 구약은 신약의 감추어진 것이요 신약은 구약의 계시이다(Vetus Testamentum Novum
Pracoccupat et Novum interpretatum est Votus. Vetus Testamentum est occultatio Novi, et
Novum est revelatio Verteris, 어거스틴5)). 차이는 본질에 따른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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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h` diafora ou=k e=stin para thn ou=sian a=lla. kata thn twn χronwn e=vnallaghn , 크리소스토무스
)6).
따라서 언약론은 기독교의 근원적인 성격과 관련하고 있으며, 우리는 바빙크를 따를 때, 여기서 언
약론이 단순한 하나의 교리적 성격을 넘어서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언약론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가장 풍부하게 발전되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언약론적 신학에 대해서 유페이(Ypey)는 그것이 코케이우스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하고, 헤페
(Heppe)는 멜랑히톤 안에 그 기원을 갖는 독일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이라고 했지만, 바빙크는 말하
기를 “언약론 자체는 처음 올레비아누스, 칼빈 혹은 불링거에게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이미 재세례파와 대립하여 신구약의 근본적 통일성을 주장하였던 쯔빙글리 안에서 만나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7). 쯔빙글리(Zwimgli)를 언약론적 신학의 기원으로 삼는 바빙크의 주장은 불링거를
주장하고 있는 벌코프8)와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9). 그러나 바빙크는 신구약의 근본적인 통일성
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재세례파에 대한 쯔빙글리의 주장에서 언약론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역사
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쯔빙글리로부터 불링거와 칼빈에게 계승되고 특별히 올레비
아누스, 우르시누스, 손니우스(Sohnius), 애글린(Egling), 보쿠비우스(Boquinus), 휘페리우스
(Hyperius)등 독일 개혁주의자들 안에서 받아들여졌고, 영국신학에서는 롤록(Rollock), 하우(Howo),
카트라이트(Cartwright), 프레스톤(Preston), 토마스 블레이크(Thomas Blake), 퍼킨스(Perkins), 아
메시우스(Amesius), 존 볼(John Ball), 제임스 우서(James Usher),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프란
시스 로버스(Francis Roberts), 토마스 보스톤(Thomas Boston) 등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는 스네카누스(Snecanus), 유니우스(Junius), 고마루스(Gomarus), 아버지와 아들 트렐
카티우스(Trelcatius), 네르데누스(Nerdenus), 라벤스페커(Ravensperger) 등에서 쯔빙글리와 만나게
된다.
언약론의 발전과 관련하여서 바빙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언약론을 약화시키는 경향들을 지적하
고 있는데, 하나는 언약론 자체에 대하여 외부적인 성격이 있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성격이 있지만
결국은 하나의 문제 즉 신구약의 통일성과 관련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외부적인 성
격은, 바빙크에 따르면 신구약의 통일성의 문제는 이미 사도시대 때부터 유대주의자들과 영지주의
자(시몬 마구스, 케틴투스)들로부터 근원을 갖고 있지만, 특별히 2,3세기 경 마르시온주의에 의해서
강력하게 공격을 받았다. 이들은 하나님과 물질 사이의 영원한 이원론에서 출발하여 그 둘 사이의
변이는 모든 세대들을 통하여 중재되었으며 세계의 창조는 조물주 혹은 요덴신(jodengod)이라 하는
낮은 신에 돌렸는데, 이 신은 지극히 높고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낮은 신분의 하나님이요, 율법,
의와 복수의 하나님이다. 따라서 구약의 하나님은 질투적이고, 복수심에 불타며 악의 창조자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전혀 다른 신 즉 은혜와 사랑의 신이 계시되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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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유대주의 혹은 영지주의적인 사상들은 근절되지 않고 중세시대에도 발전되었으며, 지금에도
여전히 그들의 영향이 타당하다10). 재세례파는 급진적이고 종교 윤리적 개혁뿐만 아니라, 사회 정
치적인 개혁을 원하였으며 이들을 성경에 호소하였으나, 점점 성경을 내적인 말씀 안에 종속시켰고
결국 성경은 죽은 문자처럼 되었다. 특별히 구약은 모든 복음적인 내용을 잃었는데, 이스라엘은 돼
지떼와 같이 다만 세속적인 재물에 의해서 길러내진 것이었다. 여기서 율법은 모든 가치와 힘을 잃
어 버렸다. 쏘시니안주의는 자신의 합리주의적 원리에 의해서 같은 결과에 도달했는데, 구약은 신
약보다 훨씬 저위에 있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폐지되었다. 알미니안주의는 그와 같이 대담하지는
않았지만, 구약을 다만 세속적인 재물을 약속하였던 언약으로 파악하였다. 루터조차도 신구약을 종
종 율법과 복음처럼 대조시켰으나, 후에는 더 조심하여 구약 안에도 풍부한 복음적 약속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럼에도 그들은 신구약에 단지 한 메시야, 한 신앙, 한 구원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였을
지라도, 한 언약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를 거부하였다.
두 번째 내부적인 성격은, 언약론을 전 교의학의 출발점과 지배원리로 삼았던 코케이우스의 문제
점과 그가 열어놓은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바빙크의 평가에 의하면 코케이우스에서 논쟁
되고 있는 것은 언약개념이 아니라, 그의 성경신학과 그의 역사적 방법이었다. “코케이우스의 책
「언약에 대한 교리대요」(Summa doctrinae de foedere et testamento, 1648)는 성경역사적인 교의
학이었고 성경을 원리로 뿐만 아니라 교의학의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성경신학을 전통신학과 대조
시켰고, 언약을 작정에, 역사를 이념에, 인간론적인 방법을 신학적인 방법에 대조시켰다. 이 방법의
위험은 그것이 영원하고 변치 아니하는 실체를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것의 흐름 안에 떨어뜨리고,
되어지는 것의 이념을 하나님 자신에게 전가시키는 것에 있다.11)” 즉 코케이우스는 언약을 역사적
으로 그 첫 시작부터 현재까지 추적하였는데, 그 경륜들 안에서 언약의 발전과 진보를 가리켰고,
따라서 경륜 가운데 나타난 은혜언약들의 객관적인 축복들은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구약
과 신약의 차이를 인정하게 되었고, 은혜언약을 행위언약의 폐지로서 받아들임으로써 언약론 전체
를 파괴하고 말았다. 철학에서 데카르트가 스콜라주의와 정통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났다면, 신학에
서는 코케이우스가 이들에 반대하여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코케이우스주의가 데카
르트주의와 결합되어 점점 받아들여지면서 여러 가지 교의들에 대한 반대로 인도하였고 역시 구약
을 붕괴시키는데 공헌하였다. 특별히 스피노자(Spinoza)와 시몬(R. Simon)이래 구약의 역사적 비판
이 태어났고, 칸트, 슐라이어마허, 헤겔과 바우어등을 거쳐, 현금 오늘날에도 구약적 성경비평은 일
찍이 영지주의자들, 재세례파들, 소시니안주의자들, 합리주의자들에 의해서 구약에 대해 제기되었던
모든 관점들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바빙크의 평가이다.
이 단락의 결론으로써, 언약론은 바빙크의 평가와 같이 개혁주의 교의학의 경우와 신자들의 삶의
실천의 경우에 커다란 의미를 갖고 발전되어 왔는데, 그것은 성경에 근거하여 신구약의 참된 종교
를 계속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으로서 파악하였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를
로마 카톨릭이나 루터주의 교회보다도 개혁주의가 더욱 분명하게 많이 파악했다는 것이다.
10) 김영규, "Calvin und DAS ALTE TESTAMENT: Sola scriptura und der trinitariche Gott als
alleiniger autor des Alten Testament", 1993 pp. 1-2 에서는 현대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마르시
온의 영향에 대하여 경계하고 기독교와 그 신학의 토대를 성경 위에 세워야할 것을 주장하고 있
다.
11) H. Bavinck, 김영규 역. 『개혁주의 교의학 I』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 §56,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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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12). 이들 중에서 안토니 A. 후크마에 의하면 인간타락 이전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와 세우신
협정을 “행위의 언약”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이유를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첫
째는 “아담의 지배 관리”체계 속으로 들어온 은혜의 요소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
적한다. 즉 인간에게 이러한 보상을 주리라고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이해되어져
야 한다. 둘째는 성경이 이러한 협정을 언약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물론 호세
아 6:7의 내용에 대해서 후크마는 이것을 예외로 인정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구절의 해석적인 의
미에서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또 자신이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 번째로는
창세기의 매우 앞부분에서는 언약의 서약이나 언약의 제기의식을 나타내는 어떤 표시도 없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네 번째로는 성경에 나타난 언약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구속과 관련하여 사용되
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13).
물론 후크마가 제기하는 반대 입장은 H. 바빙크가 평가했던 전통적 개혁주의적 입장에서의 행
위 언약에 대한 개념을 정확하게 의미한다고 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단지 그는 찰스 핫지
(Charles Hodge), 로버트 대브니(Robert L. Dabney), 윌리엄 쉐드(William G.T.Shedd),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메리딕 클라인(Meredith Kline), 팔머 로벗
슨(O.Palmer Robertson) 등을 열거하고 있을 뿐이다14).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반대 이유에 대해서
는 본 고에서 따로 고려하지는 않고 전체적인 면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고려하려고
하는 바는 두 번째 이후의 이유에 대한 부분인데, 특히 세 번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즉 언약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혀 다른 의미에서이지만 언약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이 또한 있음을 살펴보
고자 한다. 이는 구약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언약을 평가한 존 스텍(John H. Stek)을 들 수 있다. 그
는 언약의 성격과 기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15). 첫째, 언약은 왕국통치의 특
별한 형식적 수단이었다. 성경에서 왕국과 언약은 상관적인 것(correlatives)이 아니다. 둘째, 이러한
왕국 통치 수단 즉 언약의 독특한 특징은 자기 저주적 맹세를 통해 행한 헌신의 구체화이다. 셋째,
성경의 언약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상황 속에서 어떤 구체적인 미래의 조치가 이루어질 것을 보
장해 주는 역할을 했다. 넷째, 성경에 나타난 각각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통치하시는
역사 속에서 각자의 독특한 목적을 가졌다. 다섯째, ‘왕의 하사’와 ‘종주-가신’ 형태의 언약 모두는
언약의 주님에 대한 신뢰와 그분에 대한 충성스러운 봉사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감당했다. 여섯째,
따라서 성경의 언약은 하나님-피조물 관계의 원리에 속하지 않는다. 언약은 창조의 기초를 세우지
않았다. 언약은 창조의 목표가 아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그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 사이의 존재론적
거리를 연결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언약은 확신을 제공하고 믿음을 보강해주며 헌신을 강화시켜주
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내용을 열거함으로써 존 스텍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적 틀을 구성하고 있
는 ‘언약’의 개념에 대한 재정립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또 나아가서 그러한 결과를 통해서 성경의
내용을 포괄하는 주제로써 ‘언약’대신에 ‘하나님 나라’ 개념을 도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후크마
가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 사용을 반대했다면 존 스텍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언약 신학의 개념 자
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성경에서 언약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한 예를 통해서 자신들의 입장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언약의 용례들을 살펴서 이들의 주장이 과연 정당한가를 확인하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언약의 개념을 정립하고자하는 것이다.
a. 구약의 ‘언약(’)ברית의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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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구약에서 사용된 ‘언약’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가장 분명하게 확인하기 위해서는 신약이
어떻게 그 용어를 해석하고 그에 따라서 사용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약과 구약의 통일성을 믿고, 신약은 구약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16). 그
럼에도 먼저 구약 속에서의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구약성경 자체도 그 의미를 분명
하게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택(John H. Stek)교수가
정리한 구약의 언약에 대한 개념에 대한 배경이 되는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스텍 교수는 고대
근동의 언약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렇게 정의함으로써 스텍 교수는, 예컨대 조건과 책벌이 수반되어진 약속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언약이 존재한다(L. Berkhof); 혹은 왕권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언약이 존재한다(G. Kline); 혹은
당사자들이 사랑의 헌신을 통해 서로 결속되어진 개인적 관계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언약이 존재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그가 반대한 사실들이 비록 근래의 학자들의 견해에 대한 반대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주장은 결국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지속적인 언약의 관계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스텍교수 자신도 긍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요소들은 사람들 사
이에 행해진 언약의 사례라는 것이다. 그는 이점에 있어서 “성경에서 읽어 볼 수 있는 하나님과 인
간 사이의 언약은 그 양식과 기능에 있어서 고대 근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인간 언약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특별히 두 가지의 고대 근동의 언약 형식은 야훼
언약과 유사한 것으로 확인된다고 한다. 첫째가 종주가신조약(suzerain-vassal treaty)의 형태이고
두 번째가 왕의 하사(royal grant) 형식이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첫 번째 언약으로써 노아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왕의 하사’ 형태로, 그리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마찬가지로 ‘왕의 하사’
형태의 언약으로, 시내산 언약은 ‘종주-가신 조약(언약)’의 형태로, 비느하스에게 주신 ‘영원한 규
례’(출29:9)는 ‘왕의 하사’ 형식으로, 마지막으로 다윗에게 하신 언약 또한 ‘왕의 하사’ 형식으로 규
정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모든 언약(왕의 하사 언약과 종주가신 언약)들은 위대한 왕에 대한 신뢰
와 충성스런 봉사를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했다고 하면서 자신의 결론으로 이끌고 있다.
스텍교수가 고대 근동의 언약의 형태와 하나님과 인간이 맺는 언약의 형태의 유사성을 지적한
것은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형태의 유사성으로부터 인간 사이에 체결하는 언약의
핵심적 내용이 하나님과 인간이 체결하는 언약의 핵심적 내용을 해석하거나 대체할 수 있다고 말
하는 것은 그 자체로부터 정당성을 얻는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17).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
16) Cf,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박윤선 역(서울:영음사,1999) pp. 11-16 1장에는 성경에 대한 고백이
있다.
17) Kittel, Gerhard; Friedrich, Gerhard, “The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0, 그런 의미에서 TDNT가 언약의 개념을
인간적인 제도로써 그리고 신학적으로 접근한 방식은 옳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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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언약을 체결하실 때, 그 방식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 있
는 언약의 방식으로 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과, 그 의미와 내용 자체도 인간의 언약(그것도
이방인들의 언약)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고대 근동에는 창조
와 홍수에 대한 설화가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18).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창조와 홍수에 대한 기
사와 유사한 모양(형태)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대 근동의 설화들이 성경에 영향을 미
쳤으므로 그 핵심적인 내용을 거기로부터 발견해야 하는가? 물론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와 홍수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사실에 대한 참된
해석은 성경에 있으며, 고대 근동에 나타난 내용은 사실로부터 타락하고 부패된 내용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건들의 역사적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전혀 다른 결론에 나올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언약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하는 문제와 언약의 체결 방식은 언제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가하는 문제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언약()ברית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사용하는 경우는 총 286회 정도가 있다19).
이중에는 어근은 같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사용되는 2회의 경우(렘2:22, 말3:2,soap,tyrIb)를 제
외하고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그리고 사람(혹은 피조물20))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
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사용된 경우들에서 특징적인 것은 이 단어가 주로 하나님
과 사람 혹은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사용되고 있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21)에서는 비교적 낮은 비율
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 경우들에서는 스텍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은 고대 근동의
언약의 형태들이 거의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문제는 구약 성경에서 언약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훨씬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에는 몇 번의 경우22)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하나님 편에서 인간과 맺는 언
약의 형식을 하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이 언약을 맺은 경우는 노아23)와 아브라함24) 그리고 시내산
과 모압에서 이스라엘 민족, 그리고 여기에 포함될 수 있는 비느하스(제사장들)25), 다윗26), 마지막
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아담(호6:7)이 있다. 여기에 새언약27)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경우 포함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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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고, 직접적으로 언약 체결하는 내용은 없지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함께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는 구절28)들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포함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창
조언약 혹은 자연법칙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언약 체결 과정에 대한 묘사가 나타
나고 있는 노아, 아브라함, 다윗, 비느하스, 시내산 언약 등은 그 형식에 있어서 스텍 교수가 지적
하고 있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의 하나님이 인간과 체결하는 언약들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언약의 체결
당시의 인간 편에서의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후손에게도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노아와 맺은 언약을 보면, 물론 그 언약의 체결 당사자는 노아와 그 자녀들이었지만, 하
나님께서는 '너희와 너희 후손'(창9:9)과 언약을 세운다고 선언하고 계시며, 그 언약의 징표인 무지
개는 여전히 유효하게 나타나고 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도 마찬가지의 특징이 나타난다. 하나
님께서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의 대대 후손과 영원한 언약을 세운다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창
17:7), 그 이후에도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에 따라서 역사하심을 보여주셨다(출
2:24,레26:42,왕하13:23). 그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언약을 기억하고
신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신7:12,8:18). 시내산 혹은 모압 언약도 마찬가지이다. 출애굽기 이후로
말라기까지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이 언약을 나타내고 있는 언약()ברית이라는 단어는 143여 회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으며29) 이 언약을 지키는가 아닌가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었는
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특징적인 표현으로는 ‘언약궤’와 ‘언약책’
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시내산 언약을 기억하고 또한 신뢰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표현이다. 비느하스와 맺으신 언약도 마찬가지로 말라기 선지자 시대까
지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었음을 말라기서는 보여주고 있다(말2:4,5,8). 마지막으로 다윗과 맺으신 언
약도 다윗 자신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사람들도 그 언약이 지속 될 것임을 심지
어 유다의 멸망에 가까운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까지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대하21:7;시
89:3,28,34,39;132:12;사55:3;렘33:21). 또 이 언약들이 갖고 있는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단어가 있는
데 그것은 영원(םꗚ)עוֹ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가 언약이라는 단어와 함께 언약의 성격을 설명하
는 경우는 약 20회30)가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에는 노아와 맺은 언약,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시내
산 언약31), 비느하스와 맺은 언약, 다윗과 맺은 언약, 새언약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언약들의 지속적인 영원한 성격이 각 언약들의 상호간에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또한
볼 수 있다. 우선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과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 신명기7:12를 확인해
야 한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 이 말씀은 모세가 모압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놓고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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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과정을 회고하며 행한 두 번째 설교 가운데 십계명과 신중한 기초적 율법을 상세히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다32). 따라서 이 모든 법도란 시내산 언약 가운데 세워진 율법을 말하는 것임
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통해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언약을 통해서 세워진 율
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이행하실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기준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은 분명하게 연속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구절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시내산 언약과 새언약 사이의 연관성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것은 예레미야 31:31-33
을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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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약들을 묶어주는 중요한 내용이 또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앞에서도 보인 바와 같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이 약속의 말씀은 각각의 언약
들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인 내용으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창17:7에는 아브라함 언약
에 대하여 이 약속이 적용되고 있고, 출애굽기 19:5이하에는 시내산 언약에 대하여 이 약속이 적용
되고 있으며, 예레미야 31:33에는 새언약에 이 약속이 적용되고 있다. 그리고 왕하11:17에는 왕과
백성으로 여호와와 언약을 세우는 것이 “여호와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런 의미에서, 메시야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름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그리고 새언약과 다윗 언약 등이
서로 밀접한 연관성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을 더욱
풍성하게 보충설명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고, 마찬가지로 새언약은 시내산 언약의 영적인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언약은 새언약이 어떤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인가를 보여주
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언약들이 지향하는 바는 신약의 메시야(그리스도)라
는 사실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새언약을 세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언약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것
을 지켜지도록 하기 위한 것(렘31:31)임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으로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언약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성실하심이 분명하게 나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부족함을 고려하시면서도 그러한 부족함으로까지 낮추시는 하나님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므로 존 스텍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에 나타난 언약의 특징이 자기 저주적 맹세를 통
해 행한 헌신의 구체화적 성격37)이 있을지라도 그리고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상황 속에서 어떤 구
체적인 미래의 조치가 이루어질 것을 보장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을지라도 이것은 단지 인간 편에
서만 언약을 고려한 것임이 드러났다.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을 인간의 편에서만 생각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언약이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쌍방의 언약이면서 그러면서도 동시에 하
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인도하시고 인간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심을 성경은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b. 신약의 ‘언약(διαθηκη)’의 용례
구약성경 히브리어인 언약()ברית에 해당하는 신약의 헬라어는 'διαθηκη'이다. 이 단어는 총 33회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에서 7번은 구약을 인용하면서 쓰이고 있다. 공관복음에서 4번, 사도행전에
서 2번, 바울서신38)에서 9번 그리고 계시록에서 1번 사용되고 있다. 특히 히브리서에서는 가장 많
은 17번이 사용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보았을 때, 신약에서는 구약보다는 ‘언약’이라는 단어가 갖
는 의미의 중요성이 덜 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이 언약의 성취의 내용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라고 보았을 때, 그 중요성은 구약에 비해 절대로 덜하지 않다고 볼 수 있
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약에서 ‘διαθηκη’를 사용할 때는 예레미야 31장에 나타나고 있는 새언약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잘 인정되고 있다39). 특히 롬11:27, 고후3:6f, 히8:6f, 히10:16f 등 4번에 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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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레미야 31장31절 이하를 인용함으로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신약에서 ‘διαθηκη’는
새언약만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언약을 지칭하면서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
고 있는 구절들이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하여 앞부분에서 살펴본 바, 즉
새언약과 그 이전의 언약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누가복음 1장72절은 사가랴가 그의 아들인 세례자 요한을 낳은 후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눅1:67)한 내용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이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1:73) 때문임을 노래하고 있으며, 또 69절에서 ‘구원의 뿔을 그 종 다
윗의 집에 일으키셨다’고 표현함으로써 새언약의 성취가 다윗 언약을 이루심으로 된 것으로 표현하
고 있다. 즉 새언약의 성취, 다시 말해서 구원의 성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에 기
인하며, 더욱 구체적인 형태에 있어서는 다윗 언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이다. 또 같은 저자로 알려져 있는 사도행전에서도 두 번 언약과 관련하여 구약을 인용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는 새언약과 옛 언약과의 관계성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는 베드로가 오순절 이후에 성전
에서 한 설교(3:25)에서 나타나고, 두 번째는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설교(변호,7:8)할 때 나타난다.
우선 베드로의 설교에서는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승천 이후의 일까지 예수 사건에 있어서 예수를
영화롭게 하신 분, 즉 그 주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새언약의
성취이신 예수님과 아브라함 언약과의 연관성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3:25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을 아브라함의 언약 백성으로써 인정하고 그에 따라 복음을 먼저(πρωτον) 들을 수 있는 축복을 받
았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는 옛언약과 새언약의 분명한 관계적 표현들이 나타나고
있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그 관계들을 내포하고 있는 표현들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7장에 있는 스데반의 설교에서는 그 언약들의 관계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아브라
함의 언약을 할례의 언약이라고 하면서 이스라엘 역사의 한 과정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
다. 그러나 7:51에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란 표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꾸짖는
표현은 예레미야 31장의 새언약을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아브라함 언약을 할례의 언약(7:8)으로 표
현한 것과의 연관성을 갖도록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의 구절들은 아브라함 언약과 새언약과의
연속적인 성격의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울서신들과 히브리서에는 연관성보다는 차이점을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차이점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에 대하여 확인해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먼저 바울
서신에 대해서 살펴보기 위해서는 고린도 후서 3장과 갈라디아서 3,4장을 살펴보아야 한다. 고린도
후서 3장은 시내산 언약과 새언약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히브리서와 같이 살펴보기로 하
고, 먼저 갈라디아서 3,4장을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과의 차이를 부
각시키면서 새언약이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두 언약 사이의 연속성이 아닌 단절성을 말하고 있는가? 사실 사도바울이 율법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는 문제는 바울 신학에서 상당히 논쟁이 되어오고 있는 실정이다. 논쟁의 초점에 대
한 더 정확한 표현은 제2성전 유대교에 대한 바울의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전통
적인 견해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는 ‘행위 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이다. 그러나 샌더스(E.P. Sanders) 이후에 많은 학자들, 일명 새 관점 주의자들은 '언약적 신율법
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40). 즉 신약시대 당시의 유대교에서의 율법에 대한 이해는 그것을
행함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으로써 사는 방식으로써 율법이 주어진 것이라고 믿었
다는 주장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새 관점 주의자들 대한 내용들을 모두 살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샌더스41)의 글의 구조를 살펴봄으로써 본고의 논지를 이끌어 가고자 한다.
40) James D. G. Dunn, "Pouline Theology" The New Testament today, ed. Mark Allen Powell,
(Louisville,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9) pp. 100-107
41) E. P. Sanders, 김진영 역. 『바울,율법,유대인』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 갈라디아서 3,4장
에 대한 본고와 관련 하여는 특별히 pp. 34-62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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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더스는 전혀 다른 목적과 그에 따른 결과에 이르기 때문에 그 내용을 수용하기는 거의 어렵다.
그러나 그가 논의하는 방식 혹은 틀에 있어서는 본고가 의도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적인 부분에 이
르는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바울이 유대적 기독교인과 논쟁하면서 ‘getting in’과 ‘staying
in’의 구조 안에서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바울이 ‘의’를 표현하는 ‘δικ-’어간을 사용할 때는 언
제나 ‘언약 백성’ 안에 들어가는(getting in) 것과 관계하고, 의와는 관계없이 율법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언약 백성’ 안에 머무는(staying in) 것과 관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샌더스가 주장하는 초점
은 ‘언약백성’에 들어가는 것(getting in)과 관련하여서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
다’고 함으로 ‘믿음’만이 ‘언약백성 안에 들어가는 조건’이라는 것이고, 그 대적자들은 그 믿음에 ‘할
례, 정결법, 절기’등과 같은 외형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해주는 율법을 지켜야 ‘언약백성’ 안
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샌더스가 말하는 바울의 주장을 요약하면 ‘언약
백성’안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이지만, 그 ‘언약 백성’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앞에서
표현한 몇 가지 율법을 제외하고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Sanders가 ‘믿음’도 하
나의 행위로써 이해하는 듯하다는 면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언약백성과 관련하여 믿음과 율법
의 관계에 대해서 칼빈이 율법의 제3사용에서 설명한 틀을 어느 정도 이용하고 있다고 보인다42).
이러한 원칙에서 보았을 때, 갈라디아서 3:17에서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
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 한다’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의를 얻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의 문제는 그 백성이 된 자로서의 삶의 방식인 율법에 의해서 지배받는 하위 개념이 아니라 오
히려 상위 개념인 것이다. 즉 형식에 의해서 내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의해서 형식이
결정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형식은 내용을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18절에서와
같이 유업(언약백성이 되는 것)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약속(언약의 내용)으로부터 온 것이다.
또 율법은 약속으로부터 떨어져서 독립적으로는 그 본질적 의미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
째로 갈라디아서 4장 24절에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을 거의 극단적 대립으로 표현하고 있
는 듯하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말을 듣는 대상이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21
절)이라는 사실이다. 즉 아브라함 언약의 약속과 그 성취로써의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로 의43)를 얻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율법을 약속 즉 아브라함의 언약과 연
관하여 생각할 때,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역할을 하지만, 단순히 율법만을 놓고 생각할 때
그 역할은 칼빈44)의 지적대로 인간을 정죄하는 기능을 한다45). 이는 본문에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23절에 보면,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
라’. 따라서 여기서의 대조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사이의 대조가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과 아브라함 언약을 배제한 상태에서의 시내산 언약의 내용 사이의 대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
다. 결국 이 구절들에서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사이의 대조보다는 그 연관성과 연속성이
확립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린도 후서 3장과 히브리서 7,8장에서는 시내산 언약과 새 언약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새 언약
42) Cf, John Calvin, 김종흡외 공역. 『기독교 강요』(1559), vol. 1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9),
II.7.1-15, pp. 501-524 여기서 칼빈은 율법의 1,2,3 사용 및 역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신
자의 삶의 원리로써 제 3사용을 강조하고 있다.
43) 물론 Sanders를 비롯하여 새 관점 주의자들은 ‘행위 의’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김세
윤 교수는 이들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지만, 자신의 학위 논문의 주제인 ‘다메섹 계시 사건’
과 관련해서만 반박하고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김세윤, 정옥배 역. 『바울신학과 새 관점』 (서울:
두란노, 2002).
44) J. 칼빈, 기독교 강요 I (1559), 501-524.
45) Herman Ridderbos, 박영희 역. 『바울신학』 (서울: 개혁주의 신행협회, 2001) ,pp. 168-173. 여기서
리더보스는 죄의 보편성과 율법과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의 인간론에 대하여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시오. 조병수, 『사도바울의 인간이해』신약신학 열두 논문 (경기 수원: 합동신학
대학원 출판부, 1999), pp. 161-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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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더 좋은 언약이고 시내산 언약은 상대적으로 더 나쁜 언약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
일 수 있다. 그러나 고린도 후서3장과 히브리서 7,8장에서 공통적인 것은 예레미야 31장의 새언약
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고후 3:3에는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
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렘31:33 ‘내가 나
의 법을 그들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두 언약 사이의 비교는 그 내용에 있어서의 비교가 아니라 동일한 내용에 대한 그 형식에 있어서
의 비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후서 3장에서도 비교되는 것은 ‘의문(letter)’과
‘(성)령’의 대조(3:6)에 있지 그 언약의 내용의 대조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46). 히브리서
에서도 마찬가지의 경우에 해당한다. 8장 6절에 ‘더 좋은 언약’이란 표현과 7절에 ‘첫 언약이 무흠
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라는 표현에 대한 증거 구절로 예레미야 31:31 이하
를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9장에서는 계속해서 시내산 언약에 속한 성소와 새 언약에 속한 하늘의
성소를 비교하면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9:23), ‘참 것의 그림자’(9:24)라는 표현으로 그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모형과 그림자’라는 표상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그들이 지시하고 있는 바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시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는 것(형식)이 세상적이고 임시적이어서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언약의 내용은 변함이 없을지라도 그것을 이루고 있는 형식은 변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단어들을 통하여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를 모세와 비
교하고, 대제사장들과 비교하고, 희생제사와 비교함으로 옛 언약과 관련된 형식의 제한적이고 임식
적인 성격과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성격을 비교하지만 그 내용의 연속성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신약에서 언약이라는 단어(διαθηκη)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언약들(아브라함 언약과 시내
산 언약, 시내산 언약과 새언약) 사이의 부정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듯한 구절들을 살펴보았다. 그러
나 그러한 표현들이 언약의 본질을 구성하는 내용에 있어서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
적 내용을 구성하는 형식에 있어서의 차이를 말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 본질적 내용의 연속성을 전
제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강화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에서 ‘언약’들은 연속적
인 성격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표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
연속적인 성격을 구성하고 있는 언약의 본질적인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c. 언약의 내용
신약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언급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하신 약속의
표면적 의미47)를 넘어서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48). 그렇다면 구약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였으
며(정확히 표현하면 구약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신약의 교회에서 그
내용을 변경시키고 있는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구약성경은 이스
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의 내용을 분명하게 붙잡고 있음을 보여주
고 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여호수아서에서는 땅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어가는 과정을 그려주고 있다.
그러나 만일 아브라함의 언약의 내용이 단순히 그 곳에서 머무른다고 하면, 앞에서 제시했던 언약
의 연속성에 대한 근거는 상당히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그러한 의미에서 스
택교수는 언약의 개별적 성격을 강조했던 것 같다. 실제로 시내산 언약에서는 땅과 자손에 대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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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함 언약의 약속에 대해서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고, 단지 앞으로 있을 가나안 땅에서의 삶
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그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약들이 이렇게 느슨한 형태로 연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언약의 의미와 형식으로 주
어지는 약속을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실 때, 약속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과 땅(창15:18,17:2,4,6,8), 그리고 복의 근원(창12:2)에 대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약속의 내용을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
너와 너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
손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인간 편에서의 어떤 행위가 아니라 절
대적으로 하나님 편에서의 행위에 해당한다49). 따라서 영원히 지속되어야할 언약의 성격상(창17:7)
인간 편에서의 어떤 표시가 필요하고50), 그 표시로써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할
례’를 허락하신 것이다(창17:9,10).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언약의 의미 즉 ‘하
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과 언약으로써
주신 약속 즉 ‘자손과 땅’에 대한 것과의 관계이다. 그것은 후자는 전자를 역사 가운데 행하시는 하
나님의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경륜들의 중요성의 순서를 말할 수는 없을지라
도, 언약의 의미와 그 언약을 이루시는 과정에 있는 약속의 내용에는 순서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와 너의 자손은 나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의미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언약에 대한 약속이 있는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손과
땅’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신뢰하지 못하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15:2에서는 아브라함이 약속을 이
미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속자로 다메섹 엘리에셀을 지목했는가 하면, 17:17에서는 할례의
표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했고, 아비멜렉에게 약속을
받은 그의 아내인 사라를 넘겨주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시라
는 사실에 대해서 불신했다는 내용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비록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15:1에서 하신 말씀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
라51)’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할지라도 그는 늘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인
정하고 그 분에게 예배하고 그 분을 섬겼다52)는 사실이다53). 여기서 사도 바울(롬4장)과 히브리서
(11:18f)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으로 생
각된다. 그러므로 언약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언약의 의미 즉 ‘나는 너와 너의 자손의 하나님
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시내산 언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시내산 언약에서는 율법이라는 조건
혹은 의무가 붙어 있기 때문에 스텍 교수는 이를 고대 근동의 언약 형식 중에서 ‘종주-가신’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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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언약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했을 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표인 ‘할례’도 보
기에 따라서는 의무이고 조건일 수가 있다. 물론 그 정도에 있어서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
로 큰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정도의 차이이지 본질적인 차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아브
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할례는 언약의 표로써 주어져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은 언약
백성의 삶의 원리로써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출애굽기 19:5,654)은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전에 선포하신 내용으로써,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강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조건의 순종에 대한 결과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
약의 의미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이 내용은 아브라함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하나의
민족으로 성장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써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더욱 자세
하게 설명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 땅에서의 그들의 삶의
형식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는 말씀은 신명기 8:1-3에55) 잘 나타나 있
다. 즉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모든 것들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
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셨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이
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즉 율법의 말씀대로 살아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56).
이렇게 언약의 의미는 예레미야 31:33에는 더욱 분명하게 명제적으로 표현되고 나타나고 있다.
예레미야는 새언약에 대해서 예언하면서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함으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언약의 의미에 대해서 왕하11:1757)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여호야다가 왕과 백성이
여호와와 언약을 맺도록 하는 장면에 대한 설명인데, 그 언약을 세우는 것의 의미가 ‘여호와의 백
성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볼 때, 언약의 연속성은 이러한 의
미의 연속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오히려 연속성이라기보다는 통일성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
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의 의미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어떤 면에서는 점점 풍성하게
그 언약을 표현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은혜언약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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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를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도 더 살펴보겠지만, 이제까지 살펴온 언약의
의미가 행위언약에도 적용될 때에는 이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성경이 이러한 협정
을 언약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 문제에는 호세아 6:7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 구절에서 후크마는 םꕇאָꗖ에서 םꕇאָ이 사람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NIV(난외주
처리),KJV,ASV), ꗖ(처럼)가 ꔶ(안에)로 번역될 수 있다(RSV,JB)는 사실로부터 번역과 의미가 분명
치 않은 구절에 어떤 교리를 기초로 하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는 것은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영어 번역본들은 ‘아담처럼’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59). 그리고 후크마가
지적한 바와 같은 아담에게 주어진 은혜의 요소를 그 자신보다 더 강화하였을 때 나타나는, 하나님
과 아담에게 있어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언약의 관계를 살
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후크마가 지적한 것은 창세기의 매우 앞부분에서는 언약의 서약
이나 언약의 제기의식을 나타내는 어떤 표시도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도 어떤 의식이 나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이것은 시대마다 언약을 맺
는 형식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아담이 범죄하기 이
전의 시대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 있음을 또한 고려해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그때에는 제사의식도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또한 동물을 죽이는 것에 대한 내용도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아
담에게 모세시대에 해당하는 고대 근동의 언약의식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아담의 역사성을 인정하
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모세시대의 언약의식을 모든 시대의 언약에 적용해야 하는 무리가 뒤따르
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로는 성경에 나타난 언약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구속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두 번째 지적과 함께 은혜언약과
행위언약과의 관계성 속에서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이와같이 후크마의 지적에 대해서 반론을 제시함으로 행위언약이라는 용어 사용의 가능성에 대
해서 살펴보았다. 따라서 본고에서 ‘행위언약’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거기에는 이미 ‘언약의 의
미’가 ‘하나님이 그 택하신 자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된다’는데 있다는 사실을 전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행위언약의 성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 언약을 맺고 있는 당사
자인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아담의 상태에 대해서 확인해야할 필요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59) ASV(American Standard Version, 1901) ,DBY(The Darby Bible, 1949/1964), DRA(The
Douay-Rheims American Edition, 1899), ESV(English Standard Version, 2001), NAS(New
American Standard Bible,1977), NAU(-, 1995), NIB(New International Version, Br), NIV(-, US,
1984), NLT(New Living Translation), YLT(The Webster Bible,1833), VUL(Latin Vulgate)
6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9항.
Cf, 김영규, 『기독교강요 강독 I』 (서울: 개혁주의 성경 연구소, 2000), pp.11-13. 1529년 쯔빙글리와
루터가 Marburg에서 성만찬 교리에 대해서 논쟁할 때, 개혁자들이 'sola Scriptura'라는 용어를 각각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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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개혁주의는 계시 즉 성경의 주체로써 하나님에 대한 강조점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이러한 의
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윌리엄 쉐드(William T. G. Shed)의 표현61)과 같이 모든
교리와 신학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언약의 주체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62).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칼빈은 신구약(언약)의 통일성의 기본적인 원리와 관련하여 크리소스토
무스의 ‘차이는 실체에 따른 것이 아니라, 시대(경륜)에 따라 변한 것이다(h` diafora ou=k e=stin para
thn ou=sian a=lla. kata thn twn χronwn e=nallaghn)'는 말을 하고 있다63). 그리고 그에 따라서 칼빈
이 1539년 기독교 강요 제 7장에서 “모든 언약은 실체에 있어서와 그 자체에 있어서 우리의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고 전적으로 하나요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에 있어서 다를 뿐이다́.”라고 했
다. 또한 칼빈은 ‘하나님은 시대마다 같은 교리를 가르치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일관성이 빛난다
(Ergo in eo elucet Dei constantia, quad eandem omnibus saeculis doctrinam tradidit)’64)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칼빈이 말하는 바가 단순히 성경의 저자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의 통일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교의̀(h́ gnwmh)의 통일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이것은 크리소스토무스의 입장과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주
체 혹은 실체의 통일성의 문제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문제는 언약의 통일성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모든 시대의 교리의 통일성의 문제와도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
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우리는 삼위일체와 그분의 역사(경륜)의 통일성이 어떠한 관계가 있
는지를 알아보아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a. 삼위일체 하나님
이 단락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자세히 다루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
하다. 단지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경륜에 있어서의 관계에 한하여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
된다. 여기서 삼위일체에 대한 표현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는 현실에서 먼저 어떤 의미의 삼위일
체를 전제하고 있는가를 보여야 마땅할 것 같다.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기준으로 하여
이신론과 범신론으로부터 그리고 종속론적 삼위일체와 양태론적 삼위일체적 경향으로부터 삼위일
체의 개념을 잘 보존해온 어거스틴과 칼빈 그리고 헤르만 바빙크 등의 견해들 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의 견해들이 완전히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본 고에서
는 그 미묘한 차이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보다는 일치하게 나타나는 큰 틀에 대해서 관심을 갖
는다는 것을 밝힌다. 여기서 이 삼위일체 구조에 대한 간단하면서도 포괄적인 설명에 대해서는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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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규 교수의 표현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65)
헤르만 바빙크가 그의 책 개혁주의 교의학 II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순서는 먼저 속
성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66), 그 다음으로 삼위일체 자체와 그 구조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그리고
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그 경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
야할 것은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나타난 삼위일체의 구조와 외적인 사역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
이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 부분을 자신의 표현67)과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에 대한 설명을 끝내
고 계속 이어 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외적 사역과 관련한 또 하나의 커
다란 소주제로써 방대한 내용을 다루기 위한 방편일 뿐이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내용과 그 경
륜을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외적 사역
(outgoing works:opera ad extra)은 항상 전체로서의 신적 존재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위
에게는 신적 본질 내에서의 그의 존재 순서에 상응하는 특정한 사역이 돌려진다. 성부는 자신으로
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신 안에서 사역하신다.68)” 이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삼위일체 하
나님의 구조와 그 사역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한 어거스틴이 말
한바와 같이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요 동일한 실체에 속하기 때문에,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삼
위일체 하나님은 분리할 수 없이 역사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그 실체에 있어서 세 분이 하나로
존재하시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시간적인 변화에 상관없이 시간과 공간의 간격 없이 모든 피조
물들 위에 그 자체로 있고 동시에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하나요 동일하게 존재한다.69)”는 삼위일
체의 통일적 경륜에 대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이런 의미를 전제하고 하나님
의 뜻(qhlma), 의논(boul.h.), 작정(proqesij), 예정(proori,zw)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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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qhlma), 의논70)(boulh.), 작정(proqesij), 예정(proorizw)71)은 에베소서 1장 11절72)에
증거된 바의 순서를 나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qelh.ma) 혹은 의지는 칼빈이
기독교 강요73)에서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만물과 모든 것의 궁극적 원인이 되는 의미에서의
“뜻”이므로, 모든 것에 우선하며 따라서 그것에 앞선 원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처음에 위
치하고 있다. 두 번째로 의논(boulh.)은 삼위일체에서 구별되는 각 위(성부, 성자, 성령)74)의 뜻
(qhlma)의 합의로써 하나님의 단일성75)이라는 비공유적 속성과 삼위일체적 특성76)과 관련하여 하
나의 뜻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에베소서 1장11절의 구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의논(boulh.)를 따
라(kata.) 모든 피조물들을 ‘작정(proqesij)’하고 그 작정을 따라(kata.) 그 모든 것들이 먼 원인과 가
까운 원인77)이 되는 방식으로 ‘예정(proorizw)’이 일어난다. 이에 따라서 예정은 구원론과 관련하여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칼빈이 기독교 강요(1559)에서 예정론을 신론(기독교 강요
(1559), I)에서 다루지 않고 구원론을 다루는 과정(기독교 강요(1559), III)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사
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언약의 개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78)는
70) 헬라어 의 번역을 UBSDICT와 LNLEX는 단순하게 purpose, intension, plan, decision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ANLEX와 GRKDIC 그리고 LSDIC는 councel의 개념을 추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7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 1항부터 3항에서는 예정과 작정을 개혁주의 전통에서와 같이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즉 작정에는 존재해야할 모든 것들이 포함되고, 예정에는 천사들과 사람들의 선태과 유
기가 포함된다.
72) 모든 것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
으니, =En w-| kai, e=klhrwqhmen proorisqe,ntej kata. pro,qhsin tou/ ta. pa,nta e=nergou/ntoj
kata. th.n boulh.n tou/ qelh,matoj au=tou/
73) Cf, John Calvin, 기독교 강요(1559), I.17.2 p327 , III.22.11, p534.
이와 관련하여 다른 곳(III.14.17 pp. 319-321)에서 칼빈은 구원의 원인들과 관련하여 철학자들이 사용하
는 4가지 원인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데, 구원의 동력인(動力因) 혹은 유효적 원인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그리고 질료인(質料因) 으로써 그리스도를, 형상인(形相因)으로써 믿음을 그리고 마지막
으로 목적인(目的因)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며 인애를 찬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궁극적
원인으로써의 하나님의 뜻과 유효적 원인으로써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차이가 보인다.
74) H. Bavinck, 개혁주의 신론, p327. 하나님의 뜻은 속성에서 다루는 문제인데, 이 뜻은 하나님의 속
성 가운데 공유적 속성에 속해 있다. 따라서 속성에 대한 표현이 이 ‘뜻’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있는데, 즉
성부하나님의 뜻, 성자 하나님의 뜻, 성령 하나님의 뜻 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뜻이 세 개이다는 표현은 불가능함도 역시 마찬가지로 동시에 사용되어야 한다. Cf, H. 바빙크, 하
나님의 큰일, 김영규역(서울:기독교 문서선교회, 1999), pp. 255-258. 에는 선택(예정)과 관련된 하나님의
의논(counsel)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75) H. Bavinck, 개혁주의신론, pp. 242-254. 바빙크는 하나님의 단일성(Oneness)를 숫자적 단일성(통일
성)과 질적 단일성(단순성)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76) H. Bavinck, 개혁주의 신론, p.442. “각 위는 전체 존재와 동일하고, 다른 두 위를 합한 것이나 세 위
전체와도 동일한 것이다.”
77) Cf. John Calvin, "De Aeterna Dei Praedestinatione" Calvin Opera VIII, p.296
칼빈은 당시의 Phigius가 예정론을 비판하면서 유기된 자들이 단죄를 받게 된 것이 그들이 타락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범죄 이전에 멸망하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라고 한 논박에 대해서 그것은 그
가 가까운 원인과 먼 원인들(causae propinquae et remotae)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영원한 예정과 죄의 원인은 그런 먼 원인과 가까운 원인들 사이의 최고의 그리고 가장
최상의 균형적 조화(optima et aptissima symmetria)가 있음(ibid., 297)을 주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먼 원인과 가까운 원인들이란 개념은 기독교 강요에서 다른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더 낮은 원인들(causae inferioes)이란 개념이나 선행한 것이 뒤따른 것의 원인(posterioris causa)이
라고 한다든지, 혹은 일반적 경륜(ordinaria dispensatio)과 경륜의질서(ordo dispensationis)에 있어서 다
음에 오는 은혜에 이르는 단계로서 앞서는 은혜를 원인으로 삼으신다(priorem gratiam, quae gradus est
ad sequentem, causam quodammodo facit). 또는 하나님께서 은혜들을 가지고 은혜를 축적하시기 때문
에, 전의 것으로부터 두 번째 것을 더하심으로 원인을 삼으신다(quia Deus gratias gratiiscumulando, ex
prioribus causam sumit secundas addendi)등과 같은 표현들이다(기독교강요 1559, III, xiv,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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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즉 구원과 관계한다는 사실로부터 당연히 하나님의 ‘예정’
과 관련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78) Cf, H. Bavinck, 개혁주의 신론, pp. 575-583. 바빙크에 의하면 예정의 대상(특히 선택의 작정)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택한 백성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7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6항. “하나님께서 영광의 구원을 받을 자들을
선택하심과 동시에 그 성취방법도 예정하셨으니”
80) 도르트회의, 예정론, 7항.
선택은 하나님의 불변의 결정이다. 그 결정에 의해서 세상의 기초 전에 온 인류로부터 순수한 상태에서
죄로 타락한 … 그의 기뻐하시는 의지에 따라 단지 은혜로 그들 중 다수를 그들의 공로 없이 지위를 고
려하지 않고 일반적인 곤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것이다. 그 그리스도를 그가 영원 전부터 중
보자와 모든 택자들의 머리와 구원의 기초로 삼으셨다.
81) Cf, J. Calvin, 기독교 강요(1559), II.11.13 p. 641. 여기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외면적
인 형식과 방법을 바꾸셨다는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변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여러 가지로
다르며 또 변하는 인간의 능력에 알맞도록 행동하신다.”
82) Cf, J. Calvin, 기독교 강요(1559), II.10.8., p.608.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
다.”
83) Cf, J. Calvin, 기독교 강요(1559), II.11.10 p.637. “성경에 창세이후로 하나님의 특별 선택을 받았다고
하는 성도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동일한 축복 에 참여했다”, II.11.13. p. 641 “하
나님이 같은 교리를 모든 시대에 가르치시고…”
84) 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III, §345-346, pp. 186-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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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언약 즉 참된 종교를 역사적으로 그의 첫 시작에서부터 현재까지 추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어
디서나 다양하고 계속적인 경륜들 안에서 이 언약의 발전과 진보를 가리켰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이
말했던 대로 계시의 명료성, 즉 통찰의 선명과 의식의 판명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은혜언약의 다양
한 경륜들 아래에서 객관적 축복들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행위의 연기안에 있었
고 이스라엘은 아직 참되고 영원한 선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되, 소망의 백성이었고 땅에서의 긴 생을
열망하였으며 여전히 죽음의 공포 안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충만한 죄 용서(a=fhsij)를
갖지 못하고 불완전한 용서(parhsij)만 가지고 있었다. 동물 희생은 전혀 화해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
에 칭의는 불완전 하였다. 신자들의 위로도 약하였고 그들의 양심은 안식하지 못하였다. 마음의 할례는
참으로 없었고 다만 신약에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서 제공된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구약에는 참으로 모든 것이 현존하였으나 다만 모형과 그림자로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자
체의 실재성은 전적으로 부정되지 않았어도 대부분이 부정되었다. 주관적으로만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우연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실체에 있어서도 구약은 신약과 다른 것이다. … 결과적으로 그는 언약에
대해서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었다. 그것은 다만 일시적으로 인간적이며 계속 스스로 변하는 종교의 형
태이었다.85)
c. 행위언약과 은혜언약과의 관계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칼빈은 언약의 통일성을 말할 때, 실체의 통일성뿐만 아니라 교리의
통일성과 함께 구원의 서정과 방식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다. 칼빈이 “하나님이 같은 교리를 모든 시
대에 가르치시고, 자기 이름에 대한 경배는 처음에 명령하신 것과 똑같은 것을 계속 요구하셨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일관성이 빛나는 것이다”고 말했을 때, 그는 신약과 구약이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교리들 가운데 가장 중심적으로 드러나는 것으
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구약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나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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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게 적용되며, 또 그렇게 그와 같은 내용을 하나님께서 가르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여기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사실은 물론 아담에게까지 적용될 것
이다. 그런데 칼빈이 ‘하나님이 같은 교리를 모든 시대에 가르치셨다’고 했을 때, 그것이 아담이 타
락하기 이전에도 해당되는가의 문제는 성경이 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로
보여진다. 단지 성경에는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은혜언약이 나타났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창3
장). 여기에 행위언약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타락하기 이전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주어
진 것은 성경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1:28)’ 그리고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라(창2:15)’는 두 가지의 적극적인 명령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
라(창2:17)’는 소극적인 명령만이 나타나고 있다. 행위언약은 대체로 이 명령들과 관계하고 있으며,
특히 벌코프, 보스 등과 같은 이들은 행위언약을 말할 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소극적 명령에 한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에게서는 행위언약이라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고 단지 언약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서 톤웰(Thonwell)87)과 같은 사람은 “마땅히 나타나야할 계약적인 표현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고, 다만 신비적인 현실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평했고, 실제로 행위언약이라는 표
현은 칼빈 이후에 잘 발전되었다. 그러나 칼빈(J. Calvin) 안에서 행위언약에 대응하는 개념을 발견
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다. 김지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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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지훈의 ‘아담의 행위를 조건으로 한 것이며, 그에 따른 열매는 전제로 주어진 그러한 면
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에 들어갔다’는 설명은 하나님과 아담의 언약관계가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에 의해서 시작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러나 칼빈의 표현을 따라 언약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께
서 주신 명령은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가 언약관계에 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옳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
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시기 전까지의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는 시간89) 동안 하나님과 아담은
언약관계가 아니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90).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을 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에 대하여,
칼빈이 그 율법은 언약백성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율법의 제 3사용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앞에서 지적했다. 즉 언약백성이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진 것이지, 율법을 지키
면 축복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라는 조건에 의해서 언약관계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와같이 이러한 의미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명령들도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상태와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은 사
실이다. 그 때의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지 않았고, 죄책도 없었고 부패하지도 않았으며, 따
라서 “의와 거룩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엡4:24,골3:10)으로 충만해 있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은
전적으로 부패91)하였고 자기 죄책으로 힘들어 하였으며, 좁은 의미92)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
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 의해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 구분이 된다면 그것은 언
약의 통일성과 관련하여 오는 문제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언약의 통일성에는 실체의 통일성 뿐
만 아니라 교리의 통일성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과 구약이 구별될 뿐 구분되
지 않는 것처럼 행위언약과 은혜언약도 구분되지 않고 구별될 수만 있어야 언약의 통일성과 모순
되지 않을 것이다. 칼빈은 언약의 통일성에 대해서 말했을 뿐이지, 은혜언약만의 통일성을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한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교리의
통일성과 관련하여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내용을 하나님께서 가르치셨
다고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은혜언약 관계 즉 그리스도를 통
한 구원을 받을 대상이라는 것과 그것을 하나님께서 타락 이전에 가르치셨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
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되었을지라도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
89) 여기에다 성경의 설명(창2:8,9)은 아담을 창조하셨음을 먼저 설명하고 그 다음에 에덴동산을 만드셨
음을 설명하며, 또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보았을 때, 아담이 먼저 창조
되고, 그 다음으로 에덴동산이 창조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따라서 그 명령의 시간과는 차이가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90) L. Berkhof, 조직신학 상, p424, 426. 이 문제와 관련하여 벌코프는 그 관계는 언약관계가 아닌 자연
적 관계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자연적 관계에서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를 가진다고 그가 설
명했을 때, 이 자연적 관계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는 은혜언약의 관계
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가 시인한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문제를 그가 인식했는지
안했는지는 다른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살펴볼 것이지만 벌코프가 언약을 생각하는 개념은 이와
다르다는 점에서 이문제와 관련하여 벌코프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Cf., H. Bavinck, 하나
님의 큰일, pp. 205-208 여기에서 바빙크는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
신 명령은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된 이전의 모든 명령들에 대한 보증 혹은 제한적 역할을 한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바빙크에게도 행위언약의 시점은 금령에서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있었던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명령들은 한 가지 명령으로 증보되었고, 혹은 차라리 한가지
명령으로 말미암아 제한되었다. 왜냐하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는 금령은 하나님의 형상에
속해 있지도 않고 그 구성요소를 형성하지도 않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그것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91) Cf, J. Calvin, 기독교 강요(1559), II.3.1,2.
92)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형상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구분하고 인간이 타락했을 때, 상실하는 것은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의,거룩,지식)이라고 한다. Cf, L. Berkhof, 조직신학 상, pp. 41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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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어떤 시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 시점 이전에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 칼빈에 따르면 “천사들이든 사람들이든, 사람들 중에 그들이 죽었든 지금까지 살아있든 간에,
살아있는 자들 중에 그들이 어느 땅에서 행하든 민족들 중 어느 곳에 흩어져 있든 택함을 받은 전
체 수인 교회를 믿는다”고93) 하여 교회가 하나님의 예정의 선택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
다94). 그런데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예정의 선택’에는 선택의 대상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까지 포함되기 때문에 언약이란 예정 안에 포함된 개념이고 따라서 교회는 예정 안
에 있는 내용으로써의 언약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이 “세상의 창조 이
후로 주께서 땅위에 그의 교회를 가지지 않으셨던 때가 없다고 선포된 것과 같이 마지막 시기까지
도 그가 그것을 가지지 않은 때가 없다”고95) 했을 때, 그리고 “주님께서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이런 방법을 통해 그가 택하신 모든 사람 가운데 그의 선택을 이루시고 나타내시는 것이다”고96)
했을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행위언약의 시대이든 은혜언약의 시대이든 모두가 이 교회의 시대
에 포함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행위언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든지 혹은 칼빈에게 있어서 행위언약의 의미를 발
견하기 위해서는 즉 거기에 ‘언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은혜언약과의 대립적인 성격에
서 사용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일성 가운데에서 사용해야할 필요성이 충분히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사이의 대립적 성격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로마서 5
장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서 5장12절 이하에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온 죄와
은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벌코프97)는 아담에서 행위언약을 그리스도에서 은혜
언약을 유추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평행적으로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담의
상태를 일종의 언약으로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함으로 이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죄의
전가의 문제를 설명함에 있어서 아담을 자연적 육신의 머리일 뿐만 아니라 언약적 머리라고 함으
로써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여기서 죄의 전가의 문제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
서 5장이 벌코프의 주장과 같이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있는지, 그리고 아담을 행위언약의 대
표자로써 그리고 그리스도를 은혜언약의 대표자로써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확인하고자
한다.
먼저 로마서 5장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
다. 여기서 실제적으로 대조가 되는 것은 죄와 죄의 결과로써의 사망이 은혜와 그 결과로써의 생
명과 대조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오고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해
서 은혜가 들어온다는 면에서 어느 정도 대조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은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러나 이것은 대조라기보다는 오히려 유비적인 측면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
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
에 이르렀느니라”는 18절의 표현은 아담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원리는 그리스도의 사역
의 결과가 많은 사람에게 미치는 원리를 설명해주고 증명하는 도구적인 의미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아담의 범죄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그리스도의 사역은 죄인들을
의롭게한다는 면에서 더욱 그 의미의 은혜됨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담과 그
리스도를 비교한다고 표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대조적인 비교가 아닌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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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하기위한 혹은 강조하기 위한 비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비교가 벌코프의 표현과 같이 수평적 비교가 아닌 설명적 혹은 강조하기 위한 비교라는 사실
은 더 나아가서 아담을 행위언약에 그리고 그리스도를 은혜언약에 대입하여 이해하기를 어렵게
한다. 이런 이해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이것은 아담과 그리스도가 각각의 언약에서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담이 행위언약에 있어서 벌코프의 표현과 같이 인간편에서 인류의 대표자라고
할수 있을지라도, 그리스도는 은혜언약에 있어서 인간을 대표하는 대표자가 아니라 오히려 언약의
중보자98)이며, 질료적 원인으로써 이해되어지고 있다. 그리스도가 언약의 대표자라는 표현은 벌코
프가 구속 언약에 대하여 설명할 때 나오는 개념으로써99) 이에 대한 문제점은 코케이우스와 관련
된 것으로 앞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가 있다. 따라서 이 문제점이 인정된다면 아담은 행위언약의
인간편의 대표자이고 그리스도는 은혜언약의 중보자이기 때문에 똑같은 입장에서의 비교가 이루어
질 수 없고, 따라서 이 본문은 은혜언약과 행위언약을 비교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타락
적 아담과 타락후 아담이든지 혹은 아담과 아브라함의 비교가 언약의 대표자로써 은혜언약과 행위
언약의 비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이 본문을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대조적
비교로 보고자 하는 시도는 본문을 통해서 교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행위언약이라는 교리로
본문을 해석하고자하는 시도로 보여진다.
d. 단락 요점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은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통일성과 관련하여 본질적으로 하나의 언약이지만 경륜에 따라 구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약을 말할 때는 언제나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98) Cf, J. Calvin, 기독교 강요(1559), II.12.1-3; H. 바빙크, 하나님의 큰일, pp. 269-296.
99) L. Berkhof, 조직신학 상, pp. 489-495.
100) L. Berkhof, 조직신학 상, pp. 424-429.
101) 벌코프가 이러한 언약의 요소들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도 적용하여 구속의 언약이라
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순전히 인간적인 개념을 삼위일체 하나님에도 적용할 수 있
는가하는 문제점을 지적한 바가 있다. 마찬가지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이러한 개념을 적용
하고 있는데, 이를 예정의 측면에서 살펴볼 때, 엄격히 적용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
제와 관련하여는 이후에 살펴볼 것이다.
102) 그러나 추측해보건대, 이것은 고대 근동의 언약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렇다면 그는
여기에서 존 스택이 주장하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언약의식을 언약의 구성요소로써 생각하고 있지 않
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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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관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언약적 관계이다. 자연적 관계란 인간에게 순종할 의무만 있을 뿐,
자신의 순종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수 없는, 그리고 교제의 가능성 정도만 있을 뿐 실제적인 교제
가 없는 절대자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을 통하여 아담이 언약관계에
들어감으로 그는 인류의 언약적 머리가 되었으며, 조건(시험)과 이에 따른 보상과 처벌에 대한 약
속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특히 자연적 관계에 대한 설명은 성경의 증거를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는데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이 전혀 성경적이지 않고, 단지 자신이 제시한 언약의
요소들을 통해 설정한 언약관계를 설명하고 이에 따라 나온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째로 벌코프는 언약의 보상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 다음에 조건에 대해서 설명하지만 먼저
조건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그는 아담의 행위언약 이전 상태가 죄의 가능성을 인식하지 않은 십계
명과 같은 도덕법이 긍정적인 형태로 심비에 새겨져 있는 상태(자연적 관계)라고 하면서 여기에 부
정적인 형태의 명령이 추가됨으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시험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절대적으로 인간에 의해서 결정103)된다고 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는데, 어떻게 도덕법에는 죄의 가능성이 전혀 없고 오로지 순종만 있는 것인지,
그리고 왜 그러한 도덕법만 있을 때의 관계는 언약관계라고 할 수 없는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벌
코프는 후자에 대하여는 언약의 요소들을 적용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통하여 설명할 것이고, 전자
에 대하여는 보상과 처벌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로 유추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렇게 했을
때에, 영생에 대한 약속 즉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전제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도덕법의 관
계보다 금지법의 관계가 더 특별한 이유는 전혀 없어 보인다. 따라서 처벌에 대한 약속을 포함하여
영생에 대한 약속은 벌코프가 주장하는 행위언약의 요소 중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세 번째로 영생에 대한 약속을 벌코프는 처벌에 대한 경고 즉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2:17)”는 말씀에서 찾고 있다. 불순종했을 때 죽을 것이라는 경고에는 순종했을 때에는 살것이라
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단순히 최초의 삶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삶이란 이전의 삶과는 다른 영생으로 표
현될 수 있는 그러한 최고의 상태라는 논리이다. 그런데 이 논리의 문제는 자신이 언약의 요소로써
조건과 보상이라는 것을 정해놓고 그 전제에 의하여 본문을 설명하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불순종하면 죽을 것’이라는 본문의 정확한 논리적 역의 표현은 ‘순종하면 죽지 않은 것’이라는 사
실이다104). 따라서 이 주장에는 순환론적인 면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또 벌코프가 로마서 7:10
의 ‘계명은 생명을 이르게 한다’는 표현을 인용하면서 이 생명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생명이라고 했
다. 그런데 그는 이 원리가 왜 금지명령에만 적용되고 도덕법에는 적용되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침
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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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로 나누는데, 전자는 아담의 타락 이전의 계시를 말하고 후자는 아담의 타락 이후의 계시를 가
리킨다. 그리고 전자에 대해서는 행위언약으로 후자에 대해서는 은혜언약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주
의해야할 것은 보스가 말하는 계시는 성경의 내용 전체를 말하고 있지 않고, 성경 안에서 계시되어
지고 있는 내용만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스는 전구속적 특별계시의 필연성에 대하여 벌코프와 같이 인격적 교제의 필요성에 의해서 정
당화 시키고 있다. 그는 이러한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이끄신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
님께서 처음 초자연주의의 형태를 생각할 때 염두에 두신 구체적인 목적으로부터 생각할 수 있다
고 한다. 그것은 선과 축복 등을 더 이상 잃을 가능성이 없는 확정된 상태이고, 더 이상 범죄할 가
능성이 없는 따라서 죄의 결과에 종속될 필요성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사람의 처음 상태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시험의 상태이고 이 시험을 통과하여 더 낳은 확정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런 시험의 성격은 인간이 이 시험의 사실과 그 기간을 알아야 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위해 타락 전에도 특별계시가 필요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서 인간이 처음의 상
태보다 한층 높은 종교와 선의 상태로 이끌어질 수 있는 시험(probation)과정의 원칙들에 대한 계
시의 내용을 네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생명나무로 상징된 최고 가능성에 있어서의 ‘생명
의 원칙’, 둘째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상징된 ‘시험의 원칙’, 셋째로 사단으로 상징된 ‘유혹
과 죄의 원칙’, 넷째로 몸의 소멸에 반영된 ‘죽음의 원칙’이라고 한다.
이러한 보스의 논리의 문제는 자신의 논리의 기초적인 요소가 되는 부분에 대한 설명없이 전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사람이 나아가야할 더 낳은 확정된 상태에 대해서 성경 계시에서 찾지
않고107), ‘특별계시를 통하여 교제관계를 수립하심으로 영광으로 이끄신다’고 하고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 초자연주의의 형태를 생각하실 때 염두에 두신 구체적인 목적으로부터도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람의 처음 상태가 영생을 향한 시험의 상태라고 했다. 이는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언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108). 즉 명령에 대한 순종에 대한 보상과 불순종에 대한 형벌이
라는 행위언약의 틀을 이미 전제하고 성경 본문을 네 가지 원칙으로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는 것이
다. 따라서 보스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담의 처음 상태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시험의 상태라는
것과, 이 시험을 통해서 확정적인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간다는 사실임은 분명해졌다.
적)의 전체 역사 과정에 의해서 계시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면에서 일반계시는 특별히 전능과 지
혜, 진노와 선의 속성들 안에서 알리시는 것이고, 특별계시는 특별히 의와 은혜의 속성들 안에서 알리
시는 것이다. 그리고 알리시는 대상과 관련해서는 일반계시는 타락한 인간에게 알리시는 것이요 특별
계시는 특별계시의 빛 아래 사는 인간에게 알리시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를 통해서 볼 때, 계시사를
기록하면서도 그는 계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07) 보스가 주장하는 계시의 유기적 점진성이라는 성격으로부터 그가 여기서 계시록의 내용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108) 이 문제에 대하여 보스의 조직신학 책(Dogmatiek, I. 2(Grand Rapids, 1910;mimeographed), pp.
34-39, 95-96)을 확인을 못했음을 밝힌다.
109) H. Bavinck, 하나님의 큰일, pp. 20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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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한 생각은 그의 낙원에서의 아담의 상태에 대한 견해110)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아담
의 상태가 생각만큼 지나치게 영화로운 상태가 아니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증거는 안식일의 제정에서 확증되고 강화된다고 한다. 왜냐
하면 안식일은 인간의 사역을 고귀하게 하고 혼이 없는 자연적인 단조로운 운동에서 보다 높은 차
원으로 높이고 거기에 신적 소명의 날인을 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안식일을 통해서 육신의 휴식
을 취할 뿐만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에 대하여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 6일 동안 노동을 해야 하는 것처럼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
러한 사실들은 바빙크가 영생을 추론하는 것이 단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금령에 의해서만 추론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금지 명령은 앞의 내용들에 대한 보충이
며 확증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그럼에도 이 금지 명령은 영생의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핵심적이면
서 가장 최고봉에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111)에서는 유일하게 인간이 하나님을 따를 것인지 자신의
길을 갈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빙크의 논리는 앞서 벌코프나 보스에게 제기
한 이 글의 질문에 대하여 모두 대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바빙크가 포괄적이면서 논리적인 사고를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논리의
구조는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영생의 문제를 이끌면서 안식일의 개념으로 그 내용을 보강하고 그
리고 나서 금지명령으로 확증하는 형식이다. 앞의 두 가지 형식은 논리적으로 약간의 문제들이 있
는데 이러한 문제를 금지명령과 연결함으로써 보완하고 있다. 여기서 이 세 가지를 연결하고 있는
끈은 당연히 행위(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궁극의
목적을 예시하고 있다는 사실과,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충만해야 하는 일과 관계가 있음을 인
정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궁극적 목적과 일을 연결하는데 있어서 각주에서 살펴본 바빙크
자신의 아담의 상태에 대한 견해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약간의 비약이 있음을 볼 수 있
다. 다음으로 안식일에서는, 세 가지가 비교(유비)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일과 안식, 둘째는
사람의 노동과 안식일, 셋째는 사람의 행위와 그에 따른 영원한 안식이다. 여기서 첫째와 둘째의
유비를 통해 셋째로 이르는 데는 약간의 비약이 있는데, 첫째와 둘째의 비교가 하나님과 인간의 비
교이기 때문에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고 할찌라도 전혀 다른 차원의 뜻이 있다고 해야 하며, 따라
서 이것은 유비적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둘째와 셋째의 비교에서도 어느정도 인정되어야 할 것 같
다. 7일 안식일이 영원한 안식을 나타내는 것이고 동일한 수준이 아닌 다른 차원을 의미한다면, 그
행위의 비교에 있어서도 적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결함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금지명령에 연결됨
으로 상쇄되고 있다. 따라서 바빙크에 있어서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견해의 최종적인 혹은 가장 핵
심적인 근거는 마찬가지로 시험으로써의 금지명령에 있음을 볼 수 있다.
d. 단락 요점
위의 견해들을 통해서 볼 때, 행위언약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는 아담의 시험으로써의 조건에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 조건과 형벌을 통해서 영생을 추론해 내고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뒷받침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조건(시험)을 강조함으로써 아담과 인류의 운명을 타락전과 타
락 후의 두 가지 가능성에 놓이게 한 것에는 그들의 신학적 배경에 원인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
스는 그의 책 ‘성경신학’을 통해서 코케이우스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었으며112), 벌코
110) 이것은 바빙크가 아담이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의 기쁨을 누리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도록 한다. 왜냐하면 참된 안식이란 노동을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라기 보다는 하나님
과의 완전한 교제가 이루어지는가 아닌가의 문제에 더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111) 바빙크는 이 금지명령의 독특성을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명령임에도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며, 둘째로는 행할 것이 아니라 금할 것이라는 특징은 다른 명
령들 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부터 ‘유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112) Cf, 조성재, "엄밀한 개혁주의에서 본 G. Vos의 성경신학의 역사적 방법에 대한 유용성과 한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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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는 바빙크의 신학을 잘 이어받고 있다는 평가가 있지만, 언약론과 관련하여 코케이우스적 영향하
에 있으며, 구원의 서정 가운데 성화에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강조 등을 통해 차이점도 나타내고
있다. 이들 중에서 바빙크는 가장 정통 개혁주의에 일치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할 것
이다113). 그럼에도 바빙크가 17세기 화란의 레이든 신학교의 승리의 신학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114)로부터 그가 타락후 선택설을 어느정도(장점으로 생각되는 부분) 수용하고 있음직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바빙크는 그의 책 ‘개혁주의 교의학’에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모두의
장단점을 소개하면서 그 둘 사이의 종합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화란 개혁주의 신조
(도르트신조)는 분명하게 후택설을 지지하고 있으며 동시에 어떤 신조도 ‘전택설’을 정죄하지 않는
다115)는 표현이나, ‘전택설이 후택설만큼이나 불만족스럽고 어쩌면 더할지도 모른다116)’고 함으로써
후택설에 대한 어느정도의 선호도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117). 그러므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을 살펴봄으로써 행위언약의 조건이 갖는 문제점을 살펴보아야할 필요성이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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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타락후 선택설에 의하면 타락한 이후의 아담이 예정 즉
선택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는 다른 작정의 내용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
문이다. 즉 타락이전에 아담은 행위언약에 의해서 영생으로 이를 수 있도록 하는 작정이 있었고,
타락한 이후에는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언약의 작정이 즉 예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다.
그러나 타락전 선택설의 큰 특징은 하나님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오직 성경에 따라
모든 것을 지혜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두고 있으며121), 따라서 하나의 작정만이 있다
는 사실이다. 따라서 타락전 선택설에 의하면 아담은 타락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작정에 따라 예
정되고 그에 따라서 선택되었다. 물론 경륜(역사)가운데 예정은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날 수 있을지
라도 그것에 의해 예정의 선택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즉 아담은 처음부터 은혜언약 아래 있었으
며,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에 이르도록 예정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은
행위언약의 요소중 ‘조건’과 ‘그 조건의 순종에 따른 영생에 대한 약속’이라는 또 다른, 예정과 비교
될 수 있는, 작정이 설자리는 없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앞에서 살펴본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행위언약의 개념은 개혁주의 입장에 제한했을 때에 타락후 선택설에 그 기초를 두고 있
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벌코프나 더 심한 경우인 보스는 이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는데, 이는 언약론과 관련하여 코케이우스의 영향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할 때,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써의 영생을 내용으로 하는 행위언약의 개념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타락후 선택설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제시함으로 그 토대를 세우든가 아니면
바빙크와 같이 두 가지 모두의 장점들을 선택하고 종합하며, 그 단점들을 버림으로써 제3의 길을
걷든가 해야한다122). 그러면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먼저 바빙크가 기초하고 있는 화란 개혁주의 신조인 도르트 신조가 타락후 선택설을 채택한 것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바빙크의 평가에 의하면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에서는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동등하게 인정해 왔다고 했으며, 람베뜨 신조(the Lambeth articles of Confession)는 이 문제
에 고의로 대답하지 않았다고 했다.123) 그러나 칼빈의 경우에는 성경에 나타난 죄에 대한 문제를
통해서 전택설의 진리를 확신했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바빙크의 평가가 정확한가의 문제를 제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규 교수에 의하면 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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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평가는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한다.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124).
제3장 6항에서 표현된, “선택되어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들은(Wherefore they who are elected,
being fallen in Adam)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고 유효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되매 역사하
시는 그의 영에 의해서 믿음으로 부름을 받으며 의롭게 되고…”란 표현은 인간과 천사들의 수가 가감
함이 없이 영생을 위해 예정된 이후 영광을 위한 그 선택에 따라서 그것을 위한 모든 수단들도 예정하
였다는 의미에서 진술된 것들이다. 따라서 창조 전에 이미 택자들과 유기자들은 예정되었고 그 수단들
도 예정되었으며 이 제6항에 와서 그 수단으로 타락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기술되어 있다면 분명히
타락전 선택설12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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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가 행위언약의 조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자유의지는 명령에 순종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선택하는 인간의 자유이다.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에 대하여는 많은 글들이 있고 또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그런데 이 글들과 논쟁은
거의 대부분이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이후의 문제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29). 어거스틴과 루터 그리고 칼빈을 따르는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전적 타락과 전적 부패를
주장하고 있는 반면에, 펠라기우스와 그의 영향 하에 있는 반펠라기우스주의, 알미니안주의, 소시니
안 등은 각자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인간 의지의 전적인 부패를 믿지 않고 있다. 즉 개혁주의 전
통에서는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에 인간은 하나님 편에서의 어떠한 ‘선’
도 행할 수 없다고 보는 반면에, 펠라기안 전통에서는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를
통해서 보았을 때,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는 자기 스스로가 선(명령에 순종
한다는 의미)을 행할 수도 있고 악(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의 의미)을 행할 수도 있는 정도에서는 모
두 일치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문제는 행위언약의 조건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죄가 없는 그러한 상태의 아담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의 선택에 하나님의 작정이 의존할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서 먼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기 전의 아담과 그 이후의 아담 혹은 우리들 자신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먼저 우리의 상황을 살펴보면, 신앙을 고백한 우리는 은혜언약 안
에 포함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 간주된다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그 최종적 판단의 근거는 하나님
의 선택에 있지 우리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단지 우리들은 나타나는 열매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 처해있는 ‘나’는 선(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 있고, 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신앙을 고백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이
현재의 상황에 처해있는 내가 나를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내가 신앙을 고백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성화의 과정 가운데에서 우리의 실수까지도 하나님
께서는 그의 작정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롬8:28)130)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면 타락 이
전의 아담의 상황은 어떠한가?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의 상황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가변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유사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담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것인지 범할 것인지 결
정해야 했다. 이것이 아담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불확실한 가변성에서 아담
은 결국 우리와 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의 경우와는 다르게 아담이 처한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전혀
개입하지 않으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전적인 아담의 자유의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의 작정이 아담의 선택에 의존하도록 해야한다. 즉 하나님은 두 가지의 작정을 준비하시고 아담의
선택에 따라 그들 중 하나를 집행하셔야 한다. 하나는 위의 행위 언약이 말하고 있는 순종을 조건
으로 한 영생이라는 작정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영생의 작정 즉 예정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작정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작정들이 사람의 의지에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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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야 한다. 과연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뜻을 너무 수평적인 차원에서 살피고 있음이 분명해 보
인다. 즉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와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성향은 바빙크가 그의 책에서 확인하고 있는 인간의 작정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과도 전혀 무관
치 않을 것이다131).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섭리하시는 방식은 인간의 의지 자체도 하나의 인과를
이루도록 하는 방식의 더 높은 차원에 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132). 그 가장 좋은 예
는 요셉의 고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
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라고 고백하고
있다. 즉 요셉의 형들이 가지고 있었던 요셉에 대한 적의와 그 행동들은 하나님께서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목적에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증명한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당연히 타
락하기 이전의 아담에게도 적용되어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아담은 피조물로써 하나님과
같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피조물로써 아담은 하나님의 작정에 전적
으로 종속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벌코프나 보스, 그리고 바빙크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라는 조건에 대하여 아
담의 행위에 대한 보상과 처벌을 강조한 것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예정론의 관점에서는
아담의 자유의지의 가치를 부당하게 높여 놓은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131) H. Bavinck, 개혁주의 신론, p540. '하나님의 작정이 도덕적 영역에 적용되자마자, 여러 곳에서 반
론이 제기 된다.‘ 여기서 바빙크가 인간에 대한 작정 즉 절대적 의미의 예정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다
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32) 이 문제는 앞에서 예정과 작정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한 바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예정은 작정의
모든 것들이 원인과 결과가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133) H. Bavinck, 하나님의 큰일, pp.208-210.
134) L. Berkhof, 조직신학 상, p479.
135) H. Bavinck, 하나님의 큰일, p245 영역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The punishment which
God appointed for sin is death(Gen. 2:7), but this temporal bodily death by no means stands
alone. It is preceded and followed by many other penalties." 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바빙크가 그
렇게 생각했다고 볼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바빙크가 그러한 견
해를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생각을 갖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고 했을 때, 그러한
생각이 갖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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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고 있는 듯하다.
벌코프가 주장하는대로 아담에게 말씀하신 죽음의 형벌이 종합적인 의미의 죽음이라고 했을 때
의 문제는 그 형벌이 당사자인 아담에게도 적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136). 아담이 육체적인 죽음
을 맞이했을지라도 아담은 둘째 사망(계20:14)에 이르지 않고 오히려 은혜언약 안에서 영생을 얻었
다. 마찬가지로 은혜언약 안에 포함된 모든 사람들은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해야 하지만 분명히 둘
째 사망을 맞이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종합적인 의미의 죽음이라는 형벌은 선별적으로 적용된다
고 해야된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락후 선택설을 지지하는 사람들
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아담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종합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에 이르게 되
었지만 바로 은혜언약을 맺음으로 그러한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논리
에 따르면 아담은 시간적인 의미에서 보다는 논리적인 의미에서 다른 세 가지의 운명137)이 있었다
고 해야 한다. 즉 순종의 행위를 통해서 영생에 이를 운명, 죄로 인하여 죽음에 처할 운명, 그리고
은혜언약에 따라 영생에 이를 운명이 그것이다. 이점에 대한 문제는 앞에서 지적했다. 어찌됐든 하
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자신이 계시
하신 자신의 말씀을 번복(변경)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 결론이 가능하
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불변성이라는 속성과 관련하여 어떤 문제의 소지가 있고, 또한 이 부분의 말
씀은 변경되었다는 이유로 인하여 변하지 않는 진리의 성격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138).
두 번째로 형벌로써의 죽음이 바빙크의 표현대로 일시적이고 육체적인 죽음이라고 했을 때에는
다른 의미에서의 문제가 있다. 물론 이 경우에서 그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따라서 하나님
의 말씀이 변경되거나 번복되었다는 문제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형
벌로써의 죽음이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사망(계20:14)에 이르는 사람들은 즉
유기된 사람들은, 아담의 불순종에 의해서 그들의 육체적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그들 자신들의 자
범죄에 의해서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들의 자범죄는 아담의 범죄에
대하여 전적부패와 전적타락이라는 형벌에 그 원인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둘째 사망에 이르는 직접
적인 원인이 아니라 단지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 사망에 이르는 직접적인
원인이 그들의 자범죄라고 한다면, 타락후 선택설이라는 것은 아담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고 그
이후의 자손들의 자범죄에 대해서는 타락전 선택설이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바빙크가 타락후
선택설의 문제를 지적하는 곳139)에서 그것이 갖는 원래의 문제로 이미 언급되어 있지만, 아담의 최
초의 죄(죄책)가 포함되지 않고 그 죄에 대한 오염만이 포함된다고 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는 원죄가 죄책은 포함되지 않고 오염만이 포함된다고 하는 결론에 부딪힐 것이다140).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행위언약에서 불순종에 대한 형벌로써의 죽음의 성격은 단순히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이후의 모든 타락의 내용을 말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러한 죽음이
말하는 포괄적인 섭리의 성격은 또한 영생의 의미도 마찬가지로 포괄적인 성격으로 인도한다. 사실
아담만을 생각한다면 이 내용은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영생의 의미의 포괄적인 성격상
행위언약을 예정과 관련하여 생각한다면, 예정에서도 최소한도로 타락후 선택설을 기준으로 한다고
136) J. Calvin, 기독교 강요(1559), I.6.1. 칼빈은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그 밖의 족장들이 자신들을
불신자와 구별되게 한, 하나님에 관한 그 깊은 지식(특별계시)에 도달한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이
러한 도움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었다’고 말함으로 아담이 특별계시 즉 구원의 지식에 이르렀다고 함
으로써 아담이 은혜언약에 포함됨을 말한다. 여기서 이러한 칼빈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지라도 은
혜언약에 포함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형벌로써의 종합적인 죽음의 성격에서 오는 문제를 여전히 지
적한다.
137) 이 용어는 무신론적 운명론의 의미가 아닌 하나님의 작정의 의미로 사용했다.
138) 사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139) H. Bavinck, 개혁주의 신론, p555.
140) 원죄는 죄책과 오염 두가지 요소로 이루어지고 있다. Cf, L. Berkhof, 조직신학 상, p464; H.
Bavinck, 하나님의 큰일, p233; J. Calvin, 기독교강요(1559), II.1.8,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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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라도 대단히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타락한 선택설에 의할지라도 사람의 창조는 타
락하기 이전에 결정되어져 있다. 즉 이제까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은 모든 사람들과 앞으로 태어
날 모든 사람들이 결정되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것인데, 그중에 한 가지만 보이고자 한다. 행위언약을 통해서 얻는 궁극적인 영생이 그리스도를 통
해 얻는 영생과 동일하다고 했을때14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 문제이
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22:30)” 이
는 영화의 상태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궁극적으로 행위언약을 통해서도 같은 결과
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이 시험의 기간이 얼마나 지속되었는가가 문제이다. 아주 길든
가 그렇지 않든가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험을 통과하자마자 바로 영생을 얻는다
고 했을 때, 이 시험은 이 세상의 마지막 사람이 태어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영생 즉 영화된
몸은 장가가고 시집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험이 아주 긴 경우가 아니라면, 영생의 단계 이전의
단계를 가정해야 한다. 죽지도 않고 시험에 빠지지도 않지만 영생은 아닌 그러한 단계를 거쳐 영생
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은 성경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할
필요도 없고 생각해서도 안되며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언약의 조건을 강조했을 때,
그에 따라 죽음과 영생의 의미를 생각했을 때, 이러한 길로 인도하게 된다. 이것은 행위언약의 조
건이 갖는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행위언약에 있어서 불순종에 대한 형벌로써의 죽음의 성격과 그 문제들과 관련하여 순종의 보상
으로써 영생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여기서 문제는 죽음의 성격을 분명하게 규정하기에도 문제가 있
고 넓은 의미로 받아들이기에도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살펴본 바와 같이, 죽음의 성
격을 분명하게 정의하고자 할 때에는 양쪽 모두에 난제들이 있고, 넓은 의미로 받아들일 때에는 영
생과 관련하여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이 침묵하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써의 영생과 불순종에 대한 형벌로써의 죽음을 주장
하는 행위언약의 구조적인 문제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선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 명령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써
제시된 죽음의 성격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창세기와 로마서를 주석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을 먼저 확인하고자 한다.
141) 여기서 동일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더욱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전혀 그러한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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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낳게 된다. 여기에 대한 문제들은 이미 앞에서 제시하였다.
여기서 이러한 ‘영생’의 이해에 대한 문제점과 관련하여 한 가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은 창세
기 3장22절과 관계해서 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
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의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기서 영생을 표현하는 히브리어는 ml'[ol. yx;w' 이다. 이 히
브리어는 영생이라는 명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동사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영원히 산다는 의미가 무엇인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이 표현이 행위언약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은 더 나은 상태라는 의미의 영생이라고 했을
경우에는, 더 나은 상태의 영생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에 있지 않고
오히려 생명나무 실과에 있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죽음에
이를찌라도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었을 경우에는 다시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위
언약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도 이 표현은 더 나은 상태로서의 영생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
다. 그렇기 때문에 보스는 이것을 성례전적 상징이라고 함으로 이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142). 그렇다
고 해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이라는 표현이 표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지는 않을지라도 어떤 변화를 야기했다는 사실로부터 이와 동등한 입장
에서 비교되고 있는 생명나무의 ‘생명’이라는 표현이 영생에 대한 상징에 불과하다고 하기에는 부
족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또 성례전적 상징에 불과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을 자격이 없는 인간
(아담)이 따먹을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막았
다는 것과 인간이 영생할 것이라고 염려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지도 않고 성경적인 근거도 없어
보인다. 따라서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때, 이 영생에 대한 표현은 아담이 처음에 받았던
생명을 나타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이 가능성이 인정된다면 ‘죽지 않으리라’는 표현은 아담
의 처음 생명의 상태를 나타낼 것을 보여준다.
142) G. Vos, 성경신학, pp. 49-50. Cf, J. Calvin, 기독교강요(1536), p.190. 물론 다른 편에서의 의미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칼빈도 이것을 성례로써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143) L. Berkhof, 조직신학 상, p.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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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두 번째로 예정론과 관련하여서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율법은 구원받은 자들의 삶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는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그것은 율법을 표현하는 관점 즉 율법
을 바라보는 입장들로부터 다른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정론의 관점에서 율법은 택자들의 삶
의 원리로 주어졌을 뿐, 생명을 얻도록 고려된 수단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의 대상
을 명백하게 확인할 수 없는 인간의 편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그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내가 하나님의 선택의 대상인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
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 그 열매들을 맺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
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사는 자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을 지
키는 것은 생명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율법을 전혀 지키지도 않고 소중하게 생각
지도 않으며 나아가서 배척한다면 어떻게 그를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따라
서 위의 구절들은 인간을 배려한 그리고 인간편에서의 진술인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
다144).
d. 단락 요점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행위언약은 형벌로써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는 ‘정녕 죽으리라’는 의미를
설명하기에 어려움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타락전 선택에 의하면 행위언약에 대한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조건처럼 보이는 행위언약도 조건의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에 이르는 과정에서 하나의 도구로써 이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
행위언약은 은혜언약과 대비되는 성격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계 속에 있게 된다. 이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이라는 표현을 같이 사용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그것이 금령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내적
인 모든 명령들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언약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으며 또한 성경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도록 예정되었으며, 그러한 의미에
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서 살아야 했다. 여기서 그 명령을 어겼을 때에 ‘죽으리라’는 의미는 영
생에 대한 반대 의미로서가 아니라 타락 이후의 총체적인 결과를 예시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것
을 통해서 영생의 의미를 유추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언약과 은혜언
약은 언약적 관계를 통해서, 아담의 상태의 변화에 따라 그에 합당한 방식으로 경륜가운데 나타난
언약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구분’이란 단어 보다는 ‘구별’이라는 성격이 더욱 거기에
있음을 볼 수 있다.
III. 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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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이유는 ‘언약’이라는 표현 때문에 나온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이것을 언약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는 이 글을 통해서 분명하게 밝혀졌다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글은 그것에 대하여 행위언약이라는 명칭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 때문에 먼저
‘언약’이라는 단어 속에 과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성이 있었다. 이 작업
은 상당히 길게 논의된 면이 없지 않게 되었다. 먼저 과거의 교회 역사 가운데 이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를 살펴보았는데, 우리의 선배들은 이 용어의 의미 속에 성경론과 관련되어 인식하고
있었으며, 또한 더 나아가서 그 주체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내용까지도 포괄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주의적인 사고에 대하여 최근의 성경신학자들을 중심으로 반대하
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전제와 문제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성이 있었고, 그 근거로 성경
속에서 사용된 ‘언약’이라는 단어의 용례들을 확인할 필요성도 있었다. 이 용어가 성경 속에서 상당
히 많은 빈도수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의 내용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서 ‘언약’이라는 단어가 형식에는 다양성이 있을지라도 그 근본적인 내용은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에 있었음을 살펴보았고, 우리
의 개혁주의자들은 이런 의미에서 언약의 통일성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
한 ‘언약’이라는 용어가 갖는 내용은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일방적인 역사라는 특징으로 나
타나고, 또한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은혜언약의 주체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보는 과
정을 거쳤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조가 갖는 특성은 그 하나님의 역사와 경륜 가운데 그대로 반영
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에 따른 언약의 통일성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음을 또
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언약의 성격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하나님과 ‘택자’와의 관계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따라서 이러한 언약의 통일성은 신약과 구약의 통일성뿐만 아니라 행위언
약과 은혜언약의 통일성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과 함께 본고는 행위언약개념 안에 있는 시험과 순종에 대한 보상이 영생이라고 하
는 내용이 갖는 문제들을 드러내고자 했다. 먼저 예정론과 관련하여 그 문제가 드러나고 있는데,
예정론에서도 첫 번째로는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본서는 칼빈을
따르면서 분명한 형식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을지라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타
락전 선택설을 기준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였다. 즉 행위언약이란 작정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는
타락후 선택설에 의해서만 인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 행위언약이 갖는 순종에 대한 보상으
로써의 영생이라는 의미의 근거가 굳게 정초되어있지 않음을 제시하였다. 두 번째로는 타락하기 이
전 인간의 자유 의지의 문제와 관련하여서, 타락후 선택설을 인정할지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작
정이 인간의 의지에 종속되는 면이 있다는 부당함을 제시함으로 행위언약 안에서 순종의 보상으로
써 영생이라는 내용의 근거가 더욱 흔들리게 되었음을 제시하였다.
행위언약은 그 자체 안에도 문제를 갖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써 영생의 의
미를 확정함으로 불순종에 대한 형벌로써의 죽음의 의미도 확정해야할 필요성이 발생했다는 것이
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를 한정하여 확정하는 데는 영생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보던지 불멸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보든지 양자 모두가 어떤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보였다.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다시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에도 여전히 문제는 발생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 죽음의 의미를 확
인하기 위해서는 본서의 결론으로 인도한다. 즉 행위언약은 언약이 다양한 형식으로 역사 가운데
세워졌던 것과 같이, 언약의 한 형식정도로써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명령은 영생과 죽음의 기로에선 시험으로써 주어진 것
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살아야하는 것을 보여주
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하나의 경고이며, 또한 그러한 삶을 살지 못했을 때에 나타날
것에 대한 총체적인 예시로써 생각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행위언약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명령들은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영생에 대한
보상의 개념에 근거한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에게, 특별히 타락하지 않은 상태의 아담
에게 그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신 명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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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죽음의 형벌이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을 경우에 나타날 일 즉 형벌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이미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출애
굽 직후에 율법을 주셨던 원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을 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죄의 전이’문제 즉 ‘원죄’를 어떻게 설명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벌코프는 이 문제를 ‘언약적 대표145)’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바빙크도 마
찬가지로 언약적 대표개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유기적 성격146)을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바빙크가 유기적 성격이 주된 개념인지 법적인 성격이 주된 개념인지 분명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
만, 어쨌든 ‘언약적 대표’의 개념은 하나의 큰 특징처럼 되어있다. 여기에 대한 어떤 대안을 제시하
는 것은 이미 한계를 넘어가는 일일 것이다. 단지 칼빈의 견해를 제시함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마무리하고 싶다.
전염은 주로 영혼에 있는 것이므로, 자식의 영혼은 부친의 영혼에서 유전된 것이냐고 하는 문제는 무척
이나 교부들을 괴롭혔는데, 이 문제를 이해하려고 애써 논의할 필요는 없다. 주께서 인간성에 부여하시
고자 하신 천품들을 아담에게 위탁하셨다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 따라서 아담이 그 받은 천품
들을 잃었을 때에, 자신이 잃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잃게 한 것이다. 아담이 잃어버린 천품은 자
신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받은 것이며, 그 천품은 한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 주셨다는 말을 들을 때에 누가 영혼의 전이에 대해서 걱정할 것인가? 그러므로 아담이 빼앗겼을
때에 인간성이 벌거숭이가 되고 빈궁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나, 아담이 죄에 전염되었을 때에 감염이
인간성에 잠입했다고 상정하는 것은 조금도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다. 썩은 뿌리에서 썩은 가지가 나왔
으며 여기서 나온 작은 가지에 부패가 전달되었다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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