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기전 - 3황5제 역사는 도둑당한 조선민족의 곰나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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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기전>과 관련, 곰족의 역사, 전설인

삼황오제의 역사는 모두 조선민족의 역사


151. 2. 23. 2021. 전원철

I. 근거

1. 고고학적 및 동물학적 근거

1) 동아시아 곰은 3가지이다. 큰곰, 반달곰, 곰고양이(판다)이다. 이


3가지 중 오직 판다만 현재 중공영토 사천성, 감숙성 내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통적인 “곰”이 아니고, 또 설사 곰이라고
하더라도 그 서식지는 원래 羌族臧族, 위구르, 몽골족의 고향이고
한족의 땅이 아니다.

2) 큰곰, 반달곰은 오직 한반도, 만주, 남-북몽골, 동서시베리아 등


북방지역에서만 산다.

2.문헌사학학적 근거

3) 조선민족의 기원은 환국에 이어 곰족(웅족)으로부터 시작된다.

4) 복희는 ‘웅족’이고, ‘구이’이며, 이는 ‘동이’이며, ‘조선’이다.

5) 황제 헌원과 염제 신농은 복희와 소전씨 사이의 아들이자, 여왜의


조카이다.

6) 이른바 “중국 사서”에는 황제 헌원과 염제 신농의 선조가 아버지-


어머니대 이상 소급 추적이 불가능하다.

7) 그러나 이들이 ‘구이’, ‘동이’, ‘조선’이었음이 드러난다.

8) 이에 반해 조선 사서에는 <신시본기>등은 ‘신농’ 선조가 환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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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곡 ‘고시래의 방계’라고 직설한다.

9) <신시본기>는 복희가 ‘신시’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복희, 여왜,


염제 신농, 황제 헌원은 모두 신시-환국시대 조선민족이다.

10) 중.한 두 나라의 사서 모두가 같은 결과를 보여준다. 특히


<신시본기> 등 조선민족의 기록은 중국 사서의 빈틈을 정확하게
메워주고 일관성 있게 해주는 열쇠이다.

11) 또 <신시본기> 등은 당시에 일부러 왜곡해서 쓸 이유도 없었다.


진정한 고대사서이다.

따라서 결론 적으로 “곰(熊)족”을 토대로 하는 <단군설화> 및 <삼황오제설>은


모두- 한족이 지난세기 1903년도 이래 약취, 절도해간- 동북방 민족인 고대
조선민족의 역사이다.

II. 왜곡의 원인과 한족역사로 바뀐 이유


1. 고대적 동북공정

1) 사마천은 한나라까지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사기>에서 고대적


동북공정을 통해 동이(東夷)족 “곰(熊)족”의 역사를 지우려고 했다.

2) 단, <사기삼가주>에서 3명의 사가는 사마천이 의도적으로 빼거나, 알지


못했던 부분을 보충하여 실었다.

2. 현대의 동북공정

3) 후대의 민국 및 공산당 학자들은 청나라를 몰아내고 독립하기 위해


삼황오제를 자신의 선조라고 추앙하기 시작하였고,

4) 이는 오늘날에도 “중국인문 3시조” 이름 아래 지속하고 있다.

1. 향후 할 일-역사광복 및 대륙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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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기전>과 관련,

곰족의 역사, 전설인 삼황오제의 역사는 모두


조선민족의 역사

I. 근거

1. 고고학적 및 동물학적 근거

동아시아 곰은 3가지이다. 큰곰, 반달곰, 곰고양이(판다)이다. 이 3가지 중 오직


판다만 현재 중공영토 사천성, 감숙성 내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통적인
“곰”이 아니고, 또 설사 곰이라고 하더라도 그 서식지는 원래 羌族臧族, 위구르,
몽골족의 고향이고 한족의 땅이 아니다.

큰곰, 반달곰은 오직 한반도, 만주, 남-북몽골, 동서시베리아 등 북방지역에서만


산다.

다음이 동물학적 지식과 그 분포도는 이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해 준다.


아래에서 보듯이 이른 바 “중국” 본토에는 “곰”이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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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 of Bear species (Ursidae) distribution.png:
00 00 00 00 00 Ailuropoda melanoleuca 00 00 00 00 00 Helarctos
malayanus 00 00 00 00 00 Melursus ursinus 00 00 00 00 00 Tremarctos
ornatus 00 00 00 00 00 Ursus americanus 00 00 00 00 00 Ursus
thibetanus 00 00 00 00 00 Ursus arctos 00 00 00 00 00 Ursus maritimus1

1. 00 00 색갈은 판다곰(Ailuropoda melanoleuca)


2. 00 색갈은 반달곰(티베트곰)(Ursus thibetanus)

1 https://zh.wikipedia.org/wiki/%E7%86%8A%E7%A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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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00 00 큰곰 English: Brown Bear, Grizzly Bear, Mexican Grizzly
Bear Ursus arctos2

따라서 곰부족나라를 모체로 하는 삼황오제의 역사와 전설은 이른 바


중국한족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동북아 곰이 서식하는 지대의 고대 조선-
선비민족의 선조의 역사이다.

그러나, 궤변론자들은 큰곰, 반달곰은 오직 한반도, 만주, 남-북몽골,


동서시베리아 등 북방지역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산동성의 무씨사(武氏祠)에
곰 벽화가 보이므로 옛날에는 중국에도 곰이 살았다고 볼 수 있고 따라서
곰나라 삼황오제의 역사는 이른 바 “한족” 선조의 역사일 수도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무씨사(武氏祠) 벽화는 삼황오제의 역사를 기리는 사당이므로 설사


중국에 곰이 없었더라도 당연히 상상에 의한 곰그림이라도 나올 수 밖에 없다.3

2 中文: 大熊貓 中文(中国大陆): 大熊猫 한국어: 대왕판다 English: Giant pandas


Ailuropoda melanoleuca
中文(繁體): 棕熊한국어: 큰곰 English: Brown Bear, Grizzly Bear, Mexican Grizzly
Bear Ursus arctos 中文(新加坡): 亚洲黑熊한국어: 반달곰, 반달가슴곰 Ursus
thibetanus English: Asiatic black bear, Himalayan black bear, Moon bear, Tibetan
black bear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Ailuropoda_melanoleuca

3 武氏祠众多画像内容中,表现最多的是历史上的人物故事画,并且画像之侧有榜文题铭和赞

语。其中表现的古帝王圣贤有伏羲、女娲、祝融、神农、黄帝、颛顼、尧、舜、禹、帝辛、文王、武王、周
公、老子、孔子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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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벽화가 중국에 고대에 곰이 있었다거나, 또는 삼황오제가
‘곰부족’이면서 또 동시에 한족의 선조라는 것은 -아래-에서처럼 입증하지는
못한다.

2.문헌사학학적 근거

조선민족의 기원은 환국에 이어 곰족(熊族)으로부터 시작된다. <삼국유사>,

弟子等。https://baike.baidu.com/item/%E6%AD%A6%E6%B0%8F%E7%A5%A0%E7
%94%BB%E5%83%8F%E7%9F%B3/6345890?fr=alad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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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기(三聖紀)>4와 <신시본기(神市本紀)>5가 그것들이다.

4 桓國之末,安巴堅下視三危、太白,皆可以弘益人間。誰可使之,五加僉曰:「庶子
有桓雄,勇兼仁智,嘗有意於易世,以弘益人間,可遣太白而理之。」乃授天符印三種,
仍勅曰:「如今人物業已造完矣,君勿惜厥勞,率衆三千而往,開天立敎,在世理化,
爲萬世子孫之洪範也。」
時有盤固者,好奇術,欲分道,而往請,乃許之。遂積財寶,率十干、十二支之神將,
與共工、有巢、有苗、有燧偕至三危山拉林洞窟,而立爲君,謂之諸畎,是謂盤固可
汗也。
於是桓雄率衆三千降于太白山頂,神壇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也。將風伯、
雨師、雲師,而主穀、主命、主刑、主病、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
化,弘益人間。
時有一熊一虎,同隣而居,嘗祈于神壇樹,願化爲神戒之氓。雄聞之曰:「可敎也。」
乃以呪術,換骨移神,先以神遺靜解靈其艾一炷,蒜二十枚,戒之曰:「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便得人形。熊虎二族,皆得而食之,忌三七日。」熊能耐飢寒,遵戒
而得儀容;虎則放慢不能忌,而不得善業,是二性之不相若也。熊女者無與爲歸,故
每於壇樹下呪願有孕。乃假化爲桓而使與之爲婚,懷孕生子,有帳。
桓雄天王,肇自開天,生民施化,演天經、講神誥,大訓于衆。自是以後,蚩尤天王
闢土地,採銅鐵,鍊兵興産,時九桓皆以三神爲一源之祖,主蘇塗,主管境,主責禍。
與衆議,一歸爲和白,竝智生雙修爲居佺。自是九桓悉統于三韓,管境之天帝子乃號
曰檀君王儉。
密記云:桓國之末,有難治之强族,患之。桓雄乃以三神設敎,以佺戒爲業,而聚衆
作誓,有勸懲善惡之法,自是密有剪除之志。時族號不一,俗尙漸岐,原住者爲虎,
新住者爲熊。虎性嗜貪、殘忍,專事掠奪。熊性愚愎自恃,不肯和調。雖居同穴,久
益疎遠,未嘗假貸,不通婚嫁事,每多不服,咸未有一其途也。至是,熊女君聞桓雄
有神德,乃率衆往見,曰:「願賜一穴廛,一爲神戒之盟。」雄乃許之,使之奠接,
生子有産。虎終不能悛,放之四海,桓族之興始此焉。<桓檀古記 三聖紀全>作者:
安含老 元董仲

5 <桓檀古記/太白逸史神市本紀 第三>
震域留記神市紀云:桓雄天皇見人居已完,萬物各得其所,乃使高矢禮專掌鳴養之務,
是爲主穀,而時稼穡之道不備,又無火種,爲憂。一日偶入深山,只看喬木荒落,但
遺骨骸,老幹枯枝交織亂叉,立住多時,沈吟無語,忽然大風吹林,萬竅怒號,老幹
相逼,擦起火光,閃閃脇脇,乍起旋消,乃猛然惺悟曰:「是哉,是哉!是乃取火之法
也!」歸,取老槐枝擦而爲火,功猶不完。明日,復至喬林處,徘徊尋思,忽然一個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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紋虎咆哮躍來,高矢氏大叱一聲,飛石猛打,誤中岩角,炳然生火,乃大喜而歸,復
擊石取火。從此民得火食,鑄冶之術始興,而制作之功亦漸進矣。…
三聖密記曰:桓國之末,有難治之强族,患之。桓雄爲邦,乃以三神設敎,而聚衆作
誓,密有剪除之志。時族號不一,俗尙漸謗,原住者爲虎,新移者爲熊,然虎性貪嗜
殘忍,專事掠奪;熊性愚愎自恃,不肯和調。雖居同穴,久益疎遠,未嘗假貸,不通
婚嫁事,每多不服,咸未有一其途也。至是,熊女君聞桓雄有神德,乃率衆往見曰:
「願賜一穴廛,一爲神戒之氓。」雄乃許之,使之奠接,生子有産。虎終不能悛,放之
四海。桓族之興始此。
朝代記曰:時人多産乏,憂其生道之無方也。庶子之部,有大人桓雄者,探聽輿情,
期欲天降,開一光明世界于地上。時安巴堅遍視金岳、三危、太白,而太白可以弘益
人間,乃命雄曰:「如今人物業已造完矣,君勿惜勞苦,率衆人躬自降往下界,開天施
敎,主祭天神,以立父權,扶携平和歸一;以立師道,在世理化,爲子孫萬世之洪範
也。」乃授天符印三個,遣往理之。雄率徒三千,初降于太白山神壇樹下,謂之神市,
將風伯、雨師、雲師而主穀、主命、主刑、主病、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弘益人間,是謂桓雄天王也。
時有一熊一虎,同隣而居,常祈于神壇樹,而又請於桓雄,願化爲天戒之氓。雄乃以
神呪換骨移神,又以神遺得驗靈活,乃其艾一炷、蒜二十枚也,仍戒之曰:「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自由成眞,平等濟物,便得化人踐形之大人者也。熊與虎兩家皆得而
食之,忌三七日,務自修鍊。」而熊耐飢寒痛苦,遵天戒,守雄約,而得健者之女容;
虎則誣慢,不能忌違天戒,而終不得與之贊天業,是二姓之不相若也。熊氏諸女,自
執愚强,而無與之爲歸,故每於壇樹下群聚,以呪願有孕,有帳,雄乃假化爲桓,得
管境,而使與之婚孕生子女,自是群女群男漸得就倫。其後有號曰檀君王儉,立都阿
斯達,今松花江也,始稱國爲朝鮮。三韓、高離、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
夫餘、濊與貊,皆其管境也。
… 密記曰:伏羲出自神市,世襲雨師之職,後經靑邱、樂浪,遂徙于陳,幷與燧人、
有巢立號於西土也。後裔分居于風山,亦姓風,後遂分爲佩、觀、任、己、煊、理、
缸、彭八氏也。今山西濟水羲族舊居尙在,任、宿、須句、須臾等國皆環焉。
大辯經曰:伏羲出於神市,而作雨師,觀神龍之變而造卦圖,改神市癸亥而爲首甲子。
女媧承伏羲制度,朱襄仍舊文字,而始傳六書。伏羲陵,今在山東魚臺縣,鳧山之南。
神農起於列山。列山,列水所出也。神農,少典之子。少典與少卷,皆高矢氏之傍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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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른바 “중국 사서”도 복희, 여왜, 신농 3명의 황은 물론,

2) 황제 등 5제 가문이 ‘구이’, 곧 ‘동이’이자, ‘곰족(熊族)’임이 명백히


보인다.

이 ‘태호 (太昊) 복희씨(伏羲氏)’는 “천황(天皇), 인제(人帝), 황웅씨(皇雄氏)”라는


3개의 칭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는 그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곰(熊,
雄 )부족 사람’이고 이 부족의 임금이었음을 알려준다. 왜 인가? ‘황웅씨( 皇 雄
氏)’는 우선 한문 어법으로는 ‘웅(雄)에서 임금(皇)노릇하는 분(氏)’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웅( 雄 )’의 원래 글자는 ‘웅(熊)’이고, 그 소리도 원래는 ‘공(Kong,
곰)’이었다. 그러므로 ‘황웅씨(皇 雄 氏)’는 ‘황웅씨(皇 熊 氏)’, 곧 ‘곰들한테 왕
노릇하는 분’이다. 특히 <제계보(帝系譜)><제계성(帝系姓)>에는

“포희(包羲)는 자(字)가 복희(伏羲)이고, 호(號)가 누런 곰(黃熊)이고 시호(諡)가


태호(太昊)인데, 소전의 딸과 혼인하여(娶少典)”…6

라고 하여 그가 ‘곰부족’ 사람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른 한편 ‘황웅씨( 皇


雄 氏 )’의 원래 말인 ‘황웅씨( 皇 熊 氏 )’는 우리말 이두로는 ‘큰/한(大)/황( 皇 )
곰(熊/ 雄 ) 씨( 氏 )’이다. 곧 곰부족의 임금이자, ‘다른 곰보다 큰(한) 곰님’, 곧
‘왕곰(王熊, 왕검, 王儉)’이다. 즉 황웅씨(皇雄氏)는 ‘왕곰(王熊) 씨’, ’왕검(王儉)’과
같은 뜻이므로 그는 바로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곰(熊, 雄 )부족’에서 나온

也。<桓檀古記/太白逸史神市本紀 第三>

6 <帝系譜><帝系姓> : 包羲字伏羲黃熊諡太昊娶少典

https://www.docin.com/p-209570629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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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다.

또 황제( 黃 帝)도 곰나라임금( 有 熊 國 君), 곧 “소전국군( 少 典 國 君)의 둘째아들( 次


子)이다.

黃帝者,〈〔【集解】徐廣曰:「號有熊。」【索隱】案:有土德之瑞,土色黃,故稱黃帝,猶
神農火德王而稱炎帝然也。此以黃帝爲五帝之首,蓋依《大戴禮·五帝德》。又譙周、宋均
亦以爲然。而孔安國、皇甫謐《帝王代紀》及孫氏注《系本》並以伏犧、神農、黃帝爲三皇,
少昊、高陽、高辛、唐、虞爲五帝。注「號有熊」者,以其本是有熊國君之子故也。亦號軒轅
氏。皇甫謐云:「居軒轅之丘,因以爲名,又以爲號。」又據《左傳》,亦號帝鴻氏也。【正
義】《輿地志》云:「涿鹿本名彭城,黃帝初都,遷有熊也。」案:黃帝有熊國君,乃少典
國君之次子,號曰有熊氏,又曰縉雲氏,又曰帝鴻氏,亦曰帝軒氏。母曰附寶,之祁
野,見大電繞北斗樞星,感而懷孕,二十四月而生黃帝於壽丘。壽丘在魯東門之北,今
在兗州曲阜縣東北六里。生日角龍顏,有景雲之瑞,以土德王,故曰黃帝。封泰山,禪
亭亭。亭亭在牟陰。〕〉少典之子,〈〔【集解】譙周曰:「有熊國君,少典之子也。」皇甫謐
曰:「有熊,今河南新鄭是也。」【索隱】少典者,諸侯國號,非人名也。又案:《國語》云
「少典娶有蟜氏女,生黃帝、炎帝」。然則炎帝亦少典之子。7

그런데, 이른바 <史記三家註/卷001>[史記卷一五帝本紀第一作者:司馬遷 西漢]등


이른 바 “중국 사서”에는 황제헌원과 염제신농의 선조가 아버지-어머니
“소전”대 이상 소급 추적이 불가능하다.

7
<史記三家註/卷001>[史記卷一五帝本紀第一作者:司馬遷 西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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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설사 “중국사서”에서 가능하더라도 복희( 伏 羲 )에 까지는 올라가지만
복희가 어느 땅에서 나온지 잘 알려주지 않는다.

《帝系谱》《帝系姓》载:包羲字伏羲号黄熊谥太昊娶少典,生炎帝黄帝。《元和姓纂》典
氏载:太昊伏羲氏娶少典氏。… 黄帝是少典的儿子,和炎帝是兄弟。而少典又是伏羲
的夫人,所以,历史上的黄帝,是伏羲的儿子。8

그러나, 또 삼황(三皇)의 첫째인 태호(太昊) 복희씨(伏羲氏)는 “구이(仇夷)” 족, 곧


‘동이(東夷)족’이다.

<노사(路史) 9 >에 따르면 “태호(太昊) 복희씨(伏羲氏)는 방아(方牙),또는(一曰)


창아(蒼牙)이다. 풍성(風姓)이고 춘황(春皇) 포희(包羲)이다. 또한 천황(天皇),
인제( 人 帝 )라고 일컷고, 황웅씨( 皇 雄 氏 ), 창정( 蒼 精 )의 임금( 君 )이다.
어머니(母)는 화서(華胥)이고 화서물가(華胥之渚)에서 살았다. … 복희씨(伏羲
氏)는 구이(仇夷)에서 태어나, 기성(起城)에서 자랐다(生于仇夷,長于起城).”10

8 《帝系谱》《帝系姓》载:包羲字伏羲号黄熊谥太昊娶少典,生炎帝黄帝。
《元和姓纂》典氏载:太昊伏羲氏娶少典氏。
《国语》载:少典生炎帝黄帝。
《史记》载:黄帝,少典之子。黄帝是少典的儿子,和炎帝是兄弟。而少典又是伏羲
的 夫 人 , 所 以 , 历 史 上 的 黄 帝 , 是 伏 羲 的 儿 子 。
https://www.qlchat.com/hot/html/16262611.html

9 송(宋)나라 때 라필(羅泌, 1131~1189년)이 쓴 사적이다.

10 太昊伏羲氏,方牙,一曰蒼牙。風姓,是爲春皇包羲。亦號天皇、人帝、皇雄氏、
蒼精之君也。母華胥,居于華胥之渚,嘗暨叔嫟,翔于渚之汾。巨跡出焉,華胥決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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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둘째 황인 여와(女媧)는 태호씨(太昊氏)의 누이(女弟)이다.

“여황씨( 女 皇 氏) 포와( 㚿 媧 )는 운성( 雲 姓 )이다. 달리 부르기를( 一 曰 ) 여희( 女


希 )라 한다. 뱀몸통( 虵 身 ), 소머리( 牛 首 )에 흩어진 머리카락( 宣 髮 )을 하고,
태호씨(太昊氏)의 누이(女弟)이다. 승광(承匡, 河南省 商丘市 睢县城 西15公里
匡城村 西北) 11 에서 났다. … 태호씨(太昊氏)가 쇠퇴하고(衰), 공공씨(共工)가
세상을 어지럽히자(爲始作亂) … 이에 여황씨(女皇氏)가 그 신통한 힘을 부려(役
其神力) 공공씨와 힘겨루기를 하고(以與共工氏較), 공공씨를 없애고 옮기고(滅
共 工 氏 而 遷 之 ) , 然 後 四 極 正 冀 州 寧 , 地 平 天 成 , 萬 民 復 生 。 포와씨( 㚿 媧 氏 )는
그리하여 들어서서(乃立) 이름(號)을 일컷기를(曰) 여황씨(女皇氏)라 했다. …
중산의 들(中皇山之原)에서 다스려, 이른 바(所謂) 여와산(女媧山)이다. 繼興于
麗,爰絕瑞席蘿圖,承庖制,度席水, 하여 동방(東方)에서 뛰어난 님금(勝主)이

以跧之,意有所動,虹且遶之。因孕十有二歲,以十月四日降神。得亥之應,故謂曰
歲。生于仇夷,長于起城,龍身牛首,渠肩達腋,山準日角,奯目珠䚘、駿毫翁巤,
龍脣龜齒。長九尺有一寸,望之廣,親之專,繼天出震,聰明睿智。蓋承歲以王,以
立治紀,而萬事循用之。肇脩文教,爲百王典,以其載德自木,木實麗東道,不可尚
同乎元氣,是稱太昊。得乎中央,別而能全,宿而有成,因號伏羲,自有句而應世,
故又曰有句氏。方是時也,天下多獸,教人以獵,豢育犧牲,服牛乘馬,草鞮皮蒙,
引重致遠,以利天下,而天下服度。天出文章,河出馬圖,于是觀象于天,效法于地,
近參乎身,遠取諸物,兆三書,著八卦,以逆陰陽之微,以順性命之理,成神明之德,
類萬物之情。<路史/卷十禪通紀太昊紀上>

11 承匡,又名匡城,古地名,女娲传说在这里诞生,也是春秋战国城址之一,位于今
河南省商丘市睢县城西15公里匡城村西北。“临危不惧”的典故源于此,古有“匡城八景”。
https://baike.baidu.com/item/%E6%89%BF%E5%8C%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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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12

사적(史籍)의 기록에 따르면 삼황( 三 皇 ), 곧 태호( 太 昊 ) 복희씨( 伏 羲 氏 )와


여황씨( 女 皇氏 ) 여왜( 㚿 媧 )는 오누이지간이다. “황제( 黃 帝)와 염제( 炎 帝)”는 이
오누이의 아들과 조카이다.

이들은 모두 ‘곰(熊, 雄) 족’ 출신으로서, ‘동이(東夷)’를 가리키는 ‘구이(仇夷)’


풍성(風姓)과 운성(雲姓)으로 ‘구이(九夷)’ 풍이(風夷) 족과 시위씨(豕韋氏)의
선조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들은 둘 다 포(包)씨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
곰족은 조선민족의 기록이 ‘웅족’이라는 그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지나 역사상 최초의 황(皇)인 복희씨( 伏 羲 氏 )가 태어난 고향 ‘구이( 仇


夷 )’는 <후한서( 後 漢 書 )> 13 에서 ‘동이( 東 夷 )’를 가리켜 쓴 “구이( 九 夷 )”와 같은
말이다. ‘구(仇)’는 백제(百濟)의 전신인 ‘십제(什濟)’-곧 10명의 신하들과 나라를
지었다는 뜻에서 쓴 초기 백제의 국명-의 예에서 보듯이, 숫자 ‘구(九)’에 사람
‘인(人)’ 변을 더한 것으로 가리키는 대상이 사람일 때 쓰는 수사이다. 곧
사실은 물건을 가리킬 때 쓰는 수사 ‘구(九)’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구이(仇

12 女皇氏㚿媧,雲姓,一曰女希。虵身牛首宣髮,太昊氏之女弟。出于承匡。
生而神靈,亡景亡𩐿,少佐太昊,禱于神祇,而爲女婦正。姓氏職昏,因通行媒,以
重萬民之判,是曰神媒。 太昊氏衰,共工爲始作亂。振滔洪水,以禍天下。隳天綱,
絕地紀,覆中冀,人不堪命,于是女皇氏役其神力以與共工氏較,滅共工氏而遷之,
然後四極正冀州寧,地平天成,萬民復生。㚿媧氏乃立號曰女皇氏。
治于中皇山之原,所謂女媧山也。繼興于麗,爰絕瑞席蘿圖,承庖制,度席水,勝主
于東方。造天立極,惟虛亡醇,一而不𡁕,喋于苛事。上祭九天,下契黃壚,合元履
中,開陰布綱,而下服度。 <路史/卷十一禪通紀 女皇氏>
13 사마표(司馬彪, 西晉, 245~306년)가 쓴 <속한서(續漢書)>를 남조(南朝)의 하나
인 유송(劉宋)의 범엽(范曄, 398~445년)이 보충한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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夷)” 출신 복희씨(伏羲氏)는 그가 곧 “구이(九夷)”인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또 이 <후한서( 後 漢 書 )>가 보여주듯이, “구이( 九 夷 )”는 바로 ‘동이( 東 夷 )’이며,


‘동이(東夷)’는 곧 ‘예(濊), 맥(貊), 왜(倭), 한(韓)’이다. 이와 같은 ‘동이(東夷)’의
개념을 <후한서(後漢書)>는 다음과 같이 밝혀준다:

“구이(九夷)”는 달리 “《王制》가 ‘동방(東方)은 부르기를(曰) 이(夷)라 한다. 이(夷


者)는 뿌리( 柢 ) 14 다. 인( 仁 )하고도 잘 나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言 仁而 好 生 ).
만물( 萬 物 )은 땅에 뿌리내리고 나온다( 柢 地 而 出 ). 이 때문에 태어난 성이
부드럽고 따르며( 故 天 性 柔 順 ) , 도( 道 )로써 이끌기가 쉽고( 易 以 道 御 ), 나아가
군자국과 불사지국(至有君子、不死之國焉)이 있다.
이(夷)에는 9가지(九種)가 있다. 부르기를(曰) 견이(畎夷), 어이(於夷), 방이(方
夷 ), 황이( 黄 夷 ), 백이( 白 夷 ), 적이( 赤 夷 ), 현이( 玄 夷 ), 풍이( 風 夷 ), 양이( 陽
夷)이다. 이 때문에 공자(孔子)는 구이(九夷)에서 살고 싶어했다(故孔子欲居九夷
也).
옛날( 昔 ) 요( 堯 )가 명( 命 )하여 희중( 羲 仲 )을 우이( 嵎 夷 )에 살게 하였고,
부르기를( 曰) 양곡( 旸 谷 )이라 하는데 , 대개( 蓋) 해가 뜨는 곳이다( 日 之 所 出
也)…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조선 땅에 도망가서(避地朝鮮),그로 말미암아
그 나라 왕이 되었다(因王其國). 백여 년이 지나(百有餘歲),무제(武帝)가 이를
없애자( 滅 之) ,이에( 於 是) 동이( 東 夷)가 처음 통하여 서울에 왔다( 始通上京).
왕망(王莽)이 자리를 뺏자(篡位),맥인(貊人)이 변두리에 쳐들어왔다(寇邊). 建
武之初,復來朝貢。時遼東太守祭肜威讋北方,声行海表,이에 예(濊), 맥(貊),
왜(倭), 한(韓)이 만리(萬里)를 건너 조정에 방물을 바쳤다(朝獻).” 15

14 柢 dǐ foundation / root

15 《王制》云:“東方曰夷。”夷者,柢也,言仁而好生,萬物柢地而出。故天性柔順,
易以道御,至有君子、不死之國焉。夷有九種,曰畎夷、於夷、方夷、黄夷、白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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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에서 보듯이 <후한서>가 말하는 ‘구이(九夷)’는 ‘중국(中國)’, ‘중토(中土)’,
또는 <진서 사이전(晉書 四夷傳)>이 말하는 ‘제화(諸華)’16에 대비되는 “남만(南蠻),

赤夷、玄夷、風夷、陽夷。故孔子欲居九夷也。 昔堯命羲仲宅嵎夷,曰旸谷,蓋日
之所出也。夏后氏太康失德,夷人始畔。自少康已後,世服王化,遂賓於王門,獻其
樂舞。桀為暴虐,諸夷内侵,殷湯革命,伐而定之。至於仲丁,蓝夷作寇。自是或服
或畔,三百餘年。武乙衰敝,東夷浸盛,遂分遷淮、岱,漸居中土。
及武王滅紂,肅慎來獻石砮、楛矢。管、蔡畔周,乃招誘夷狄,周公征之,遂定東夷。
康王之時,肅慎復至。後徐夷僭號,乃率九夷以伐宗周,西至河上。穆王畏其方熾,
乃分東方諸侯,命徐偃王主之。偃王處潢池東,地方五百里,行仁義,陆地而朝者三
十有六國。穆王後得骥騄之乘,乃使造父御以告楚,令伐徐,一日而至。於是楚文王
大舉兵而滅之。偃王仁而無权,不忍斗其人,故致於敗。乃北走彭城武原縣東山下,
百姓隨之者以萬數,因名其山為徐山。厲王無道,淮夷入寇,王命虢仲征之,不克,
宣王復命召分伐而平之。及幽王淫亂,四夷交侵,至齊桓修霸,攘而卻焉。及楚靈會
申,亦來豫盟。後越遷琅邪,與共征戰,遂陵暴諸夏,侵滅小邦。
秦并六國,其淮、泗夷皆散為民户。陳涉起兵,天下崩潰,燕人衛滿避地朝鮮,因王
其國。百有餘歲,武帝滅之,於是東夷始通上京。王莽篡位,貊人寇邊。建武之初,
復來朝貢。時遼東太守祭肜威讋北方,声行海表,於是濊、貊、倭、韓,萬里朝獻,
故章、和已後,使聘流通。逮永初多難,始入寇鈔;桓、靈失政,漸滋曼焉。
自中兴之後,四夷來賓,雖時有乖畔,而使驛不絕,故國俗風土,可得略记。東夷率
皆土著,憙飲酒歌舞,或寇弁衣錦,器用俎豆。所謂中國失礼,求之四夷者也。几蠻、
夷、戎、狄总名四夷者,猶公、侯、伯、子、男皆號諸侯云。<後漢書卷八十五·东夷
列传第七十五>

後漢書(南朝劉宋) 范曄 (西晉) 司馬彪 〈(司馬彪《續漢書》作者,有八〈志〉30


卷補入范曄所著《後漢書》)註:(唐) 章懷太子 李賢 (南朝蕭梁)劉昭〈《續漢志》
原注者〉. 《後漢書》是一部記載東漢歷史的紀傳體史書。書中分十紀、八十列傳和八
志(司馬彪續作)。紀和列傳的作者是南朝劉宋時的范曄。北宋真宗時,有人把晉朝
司馬彪的《續漢書》八志三十卷與之合刊,成為今天的《後漢書》。 https://zh.wikisour
ce.org/wiki/%E5%BE%8C%E6%BC%A2%E6%9B%B8
16 夫恢恢乾德,萬類之所資始;蕩蕩坤儀,九區之所均載。考羲軒於往統,肇承天而
理物;訊炎昊於前辟,爰制地而疏疆。襲冠帶以辨諸華,限要荒以殊遐裔,區分中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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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北狄), 서융(西戎), 동이(東夷)” 등 ‘사이( 四 夷 )’ 중 ‘동이(東 夷 )’이다. 또 이
동이(東夷)는 또 바로 ‘조선(朝鮮), 예(濊), 맥(貊), 왜(倭), 한(韓)’이다. 그러므로
“구이(仇夷)” 출신인 복희씨(伏羲氏)는 곧 “구이(九夷)”인이고, 그는 <후한서(後漢
書)>가 보여주듯이, 바로 ‘동이(東夷) 조선(朝鮮)’인이다.

이처럼 “중국사서”에서 “生黃帝, 炎帝”한 인물로 “【集解】譙周曰:「有熊國君,少典


之子也”라고 하고 한 그 소전(少典)이라는 인물의 뿌리에 관해 앞의 그 결론과
일치하게도, 조선 사서 <신시본기> 등은 그의 선조를 환운천왕(桓雄天皇)의 주곡
고시래의 방계 기록하고 있다.

神農,少典之子。少典與少卷,皆高矢氏之傍支也。<桓檀古記/太白逸史神市本紀 第
三>

震域留記神市紀云:桓雄天皇見人居已完,萬物各得其所,乃使高矢禮專掌鳴養之
務,是爲主穀,而時稼穡之道不備,又無火種,爲憂。… 高矢氏大叱一聲,飛石猛
打,誤中岩角,炳然生火,乃大喜而歸,復擊石取火。<桓檀古記/太白逸史神市本紀
第三>

其來尚矣。九夷八狄,被青野而亙玄方;七戎六蠻,綿西宇而橫南極。繁種落,異君
長,遇有道則時遵聲教,鐘無妄則爭肆虔劉,趨扇風塵,蓋其常性也。詳求遐議,曆
選深謨,莫不待以羈縻,防其猾夏。
武帝受終衰魏,廓境全吳,威略既申,招攜斯廣,迷亂華之議,矜來遠之名,撫
舊懷新,歲時無怠,凡四夷入貢者,有二十三國。既而惠皇失德,中宗遷播,凶徒分
據,天邑傾淪,朝化所覃,江外而已,賝貢之禮,於茲殆絕,殊風異俗,所未能詳。
故采其可知者,爲之傳云。北狄竊號中壤,備於載記;在其諸部種類,今略書之。<
晉書卷九十七 列傳第六十七 四夷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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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 震 域 留 記 神 市 紀 >가 말하는 “ 桓 雄 天 皇 ”의 主 穀 高 矢 禮 의 傍 支 가
“곰나라임금(有熊國君) 소전(少典)이고 그의 2 아들이 “黃帝, 炎帝”이다.

《帝系谱》《帝系姓》는 포희(包羲) 字 복희(伏羲) 号 황웅(黄熊) 시谥 태호(太昊)가


소전(少典)씨와 혼인하여 염제(炎帝)와 황제(黄帝)를 낳았다고 했고, 《元和姓纂》
典 氏 는 “태호( 太 昊 ) 복희씨( 伏 羲 氏 )가 소전씨( 少 典 氏 )와 혼인하여( 娶 )…라고
하였으니, 황제( 黄 帝 )는 소전( 少 典 )의 아들( 儿 子 )이고 염제( 炎 帝 )는 형제( 兄
弟)이다. 그런데 소전(少典)은 또 복희(伏羲)의 부인(夫人)이다. 그러므로 历史
上의 황제(黄帝)는 복희(伏羲)의 아들(子)이다.17

그런데, 태호( 太 昊 ) 복희( 伏 羲 ) 황웅( 黄 熊 )이 조선민족이라는 사실을 직설하는


기록이 있다:

<太白逸史 神市本紀 第三>: “복희(伏羲)는 신시(神市)에서 나왔고, 대대로(世襲)


운사(雨師)의 직(職)을 이었다. 나중에 청구(靑邱), 낙랑(樂浪)을 거쳐 마침내
진(陳)으로 갔고, 수인(燧人)씨와 같이 흥했고, 有巢는 西土에서 立號했다. 後裔
는 風山에 나누어 살아 亦시 姓風이라 했다.”18

17 《帝系谱》《帝系姓》载:包羲字伏羲号黄熊谥太昊娶少典,生炎帝黄帝。
《元和姓纂》典氏载:太昊伏羲氏娶少典氏。
《国语》载:少典生炎帝黄帝。
《史记》载:黄帝,少典之子。黄帝是少典的儿子,和炎帝是兄弟。而少典又是伏羲
的 夫 人 , 所 以 , 历 史 上 的 黄 帝 , 是 伏 羲 的 儿 子 。
https://www.qlchat.com/hot/html/16262611.html

18 密記曰:伏羲出自神市,世襲雨師之職,後經靑邱、樂浪,遂徙于陳,幷與燧人、有巢立號於
西土也。後裔分居于風山,亦姓風,後遂分爲佩、觀、任、己、煊、理、缸、彭八氏也。今山西濟水羲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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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다.

중국기록 조선기록
구이(九夷)=동이(東夷)=조선(朝鮮)19 신시(神市) 환족(桓族)

태호(太昊) 복희(伏羲) 누런 곰(黄熊) +


신시(神市) 태호(太昊) 복희(伏羲) ---
소전(少典)20 유웅국군(有熊國君)
소전(少典) 고씨씨방계(高矢氏之傍支)22

아들(子)
염제( 炎 帝 ) →황제( 黄 帝 ) 환웅천왕 + 웅녀(熊女)=熊女君23
유웅씨(有熊氏)

단군왕검
21
요임금(황제고손)

舊居尙在,任、宿、須句、須臾等國皆環焉。
大辯經曰:伏羲出於神市,而作雨師,觀神龍之變而造卦圖,改神市癸亥而爲首甲子。女媧承伏
羲制度,朱襄仍舊文字,而始傳六書。伏羲陵,今在山東魚臺縣,鳧山之南。神農起於列山。列山,
列水所出也。<桓檀古記/太白逸史神市本紀 第三>
19
<후한서 동이전>

20
《帝系谱》《帝系姓》 《元和姓纂》典氏

21
帝嚳高辛者,黃帝之曾孫也。高辛父曰蟜極,蟜極父曰玄囂,玄囂父曰黃帝… 帝嚳娶陳鋒氏女,生
放勳。娶娵訾氏女,生摯。帝嚳崩,而摯代立。帝摯立,不善,崩 [2]
。而弟放勳立,是爲帝堯。< 史
記卷一 五帝本紀第一>

22
<震域留記神市紀>, 密記 <桓檀古記/太白逸史神市本紀>

23
熊女君聞桓雄有神德,乃率衆往見,曰:「願賜一穴廛,一爲神戒之盟。」雄乃許
之,使之奠接,生子有産。虎終不能悛,放之四海,桓族之興始此焉。<桓檀古記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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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로사>가 복희씨(伏羲氏)는 “구이(仇夷)” 출신이라고 하고, 이는 <후한서(後
漢 書 )>의 “구이( 九 夷 )”이며, 이는 곧 ‘동이( 東 夷 )’이고, 이는 또 <후한서( 後 漢
書)>의 정의에 따라 “조선(朝鮮)”인임도 알 수 있는데, <太白逸史 神市本紀 第三
>도 같은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결론

이상을 보면 결국

“구이(仇夷)” 출신 신시(神市)의 복희씨(伏羲氏)와 소전(少典)씨 여인 사이에 난


2 아들 염제( 炎 帝 )와 황제( 黄 帝 )는 환웅천왕(桓雄天王) 때 웅족(熊族)의
일원으로 좀 더 나중에 태어나 조선(朝鮮)을 세울 단군왕검의 선조세대의
종조부들

이다.

이를 볼 때 <太白逸史 神 市 本 紀 > 등 조선민족의 기록은 이른 바 중국 사서의


빈틈을 정확하게 메워주고 일관성 있게 해주는 열쇠이다.

또 <신시본기> 등 조선민족의 사서는 당시에 일부러 왜곡해서 쓸 이유도 없었다.


진정한 고대사서이다. 따라서 결론 적으로 “곰(熊)족”을 토대로 하는 <단군설화>

聖紀全>作者:安含老 元董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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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삼황오제설>은 모두 동북방 민족인 고대 조선민족의 역사이다.

III. 삼황오제사 왜곡의 원인과 한족(漢族) 역사로


바뀐 이유

1. 사마천 <사기>의 고대적 동북공정

사마천은 한(漢)나라까지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사기>에서 고대적 동북공정을


통해 동이(東夷)족 “곰(熊)족”의 역사를 지우려고 했다.

단, <사기삼가주>에서 3명의 사가는 사마천이 의도적으로 빼거나, 알지 못했던


부분을 보충하여 <삼가주>를 실었다.

2. 현대사가와 동북공정 사가의 왜곡

후대의 민국(民國) 및 공산당(共産黨) 정치가들과 사상가들은 만주족(滿洲族)의


청(淸)나라를 몰아내고 독립하기 위해 삼황오제를 자신의 선조라고 추앙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오늘날에도 “중국인문3시조” 이름 아래 지속하고 있다.

지나대륙에서 오늘날 “한족(漢族, 汉族)”이라는 말을 가장 처음으로 쓴 자는


청(淸)나라 말 “멸만흥한(滅滿興漢)”을 외친 양계초(梁启超)이다. 그는 우선
1901년 《中国史叙论》에서 “中国民族”개념과 민족주의(民族主义)개념을 처음
대담하게 내세우고, 中国民族의 历史划分을 다음과 같이 3개 시대로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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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上世史,自黄帝以迄秦之一统,是为中国之中国,即中国民族自发达、自竞
争、自团结之时代也;第二,中世史,自秦统一后至清代乾隆之末年,是为亚洲之中
国,即中国民族与亚洲各民族交涉、繁赜、竞争最烈之时代也;第三,近世史,自乾
隆末年以至于今日,是为世界之中国,即中国民族合同全亚洲民族与西人交涉、竞争
之时代也。24

이어서 1902 년 “中华民族”을 처음 정식으로 제출했다.


《论中国学术思想变迁之大势》에서 “中华”의 뜻을 설명하면서

立于五洲中之最大洲而为其洲中之最大国者,谁乎?我中华也;人口居全地球三
分之一者,谁乎?我中华也;四千余年之历史未尝一中断者,谁乎?我中华也。25

라고 했다.

1905 년 梁启超는 《历史上中国民族之观察》에서 “中华民族”은


“中国境内的所有民族,是多元混合的”이라는 뜻을 발표했다.

24

25 “保种”、“民族”到“中国民族”,再到“中华”和“中华民族”,梁启超基本

完成了“中华民族”一词的创造。这是目前所见到的关于“中华民族”的最早词汇,
一直沿用到了今天。 <“中华民族”是谁首提的?> 李喜所 (南开大学史学教授)

http://www.confuchina.com/08%20xiandaihua/zhonghuaminzu.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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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梁启超는 “중화민족(中华民族)”을 때로는 “한족(汉族)” 때로는
“中国的所有民族”을 가리키는 말로 써, 1903 년에
《政治学大家伯伦知理之学说》에서:

吾中国言民族者,当于小民族主义之外,更提倡大民族主义。小民族主义者何?
汉族对于国内他族是也。大民族主义者何?合国内本部属部之诸族以对于国外之诸
26
族是也。……合汉合满合蒙合回合苗合藏,组成一大民族。

라고 하여 처음으로 그 “汉族”이란 말의 개념을 다듬었다.

한편 황제(黃帝)를 그 “한족(汉族)”의 선조로 제창한 것은 양계초와 같은 모임의


동지이기도 한 청(清) 말 유광한(劉光漢, (1884~1919년)이다. 그도

26 不过,梁启超在具体使用“中华民族”一词时却比较混乱,有时指汉族,有时又指

中国的所有民族,直到 1903 年其发表的《政治学大家伯伦知理之学说》一文中,才清


晰地赋予了较为科学的内涵。其称:

吾中国言民族者,当于小民族主义之外,更提倡大民族主义。小民族主义者何?汉族
对于国内他族是也。大民族主义者何?合国内本部属部之诸族以对于国外之诸族是也
。……合汉合满合蒙合回合苗合藏,组成一大民族。 <“中华民族”是谁首提的?>
李喜所 (南开大学史学教授)

http://www.confuchina.com/08%20xiandaihua/zhonghuaminzu.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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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政原論>27에서 “한족(漢族)”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28

27 劉師培為劉文淇之曾孫,劉毓崧之孫,劉壽曾之侄,父亲为劉毓崧次子刘贵曾(良
甫)。其家儀徵劉氏,又稱青豀舊屋劉氏,於清季前後五世相繼注《左傳》,為近代經
學世家,「揚州學派」之中堅。刘师培的祖父刘毓崧参与编辑《船山遗书》,对王夫之
至为钦敬。…

光緒 29 年(1903),刘师培在《国民日日报》发表“黄帝纪年论”,反对年号制,同
时也反对康有为等变法派主张的孔子纪年。[1]还撰写了《攘书》、《中国民族志》、
《中国民约精义》、《两汉种族学发微论》等著作集中宣传其汉民族主义思想。撰寫
民族史志,達成復漢排滿革命目標國粹學派進行歷史教育的方式之一,是透過民族史
志的論述,以建構漢民族的國族認同意識,並藉以宣傳興漢排滿的革命思想。刘师培
指出,《春秋》“公、谷二传之旨,皆辨别内外,区析华戎。吾思邱明亲炙宣尼,备闻
孔门之绪论。故《左传》一书,亦首严华夷之界,僖二十三年传云:杞成公卒。书曰
子,杞,夷也。二十七年传云:杞桓公来朝,用夷礼,故曰子。此左氏传之大义也,
亦孔门之微言也。”[2]
光緒三十年(1904)經蔡元培介紹加入光復會,與蔡氏合辦《俄事警聞》,鼓吹「拒
俄運動」,後改《警鐘日報》,為主筆。當年《警鐘日報》遭清政府查封,至浙江平
湖避難。三十一年(1905)正月,鄧實等在上海創辦《國粹學報》。….
排满革命论[编辑]
光緒三十三年(1907),因积极参与反清活动遭通缉,劉師培攜妻何殷震亡命日本,
加入中國同盟會。以「韋裔」之筆名在《民報》撰文,與《新民叢報》就國體問題展
開論爭;又切論滿洲在明代於中國為異族、為化外,梁啟超所謂「中華民族」實為諂
媚清廷;繼而與何震創辦《天義報》、《衡報》,鼓吹女權主義、共產主義、無政府
主義,撰有《共產黨宣言序》。应章太炎之邀,刘师培参与了《民报》的编辑与撰述,
他的民族主义思想发展到了一个高峰,发表了《普告汉人》、《论满洲非中国之臣
民》、《利害平等论》、《清儒得失论》等文章。

28 古代階級制度論
漢種人民由西方入中國乃黃種之人民也,苗族人民久居中國乃黑種之人民也。昔女媧
分黃土人及引絙人爲二種,富貴賢知者爲黃土人,貧賤凡庸者爲引絙人。黃土人爲中
國之民,引絙人爲北狄之民,此中國人民貴同種,賤異種之始,然其時猶未征服苗民
也。及黃帝去蚩尤之凶,遷其民善者於鄒屠之地,遷其惡者於有北之鄉,械之以木,
故古文民字作𠘽。漢族之民則自稱百姓。上古之時,聖人吹律定姓以記其族人。百姓
者,王公之子弟也,羣臣之父兄子弟也。上古之時以同族之民咸爲貴族,列爲高官,
官有世功則受氏姓。… 且古代尊親己族,不僅尊爲百姓也。排斥異族,不使與漢族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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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황제기년론( 黃 帝 紀 年論)>에서 “황제( 黃 帝 )”를 “한족(漢族)의 선조”라고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나아가 清 光绪29년 (西元1903年)劉師培가 《国民日日
报》에 “黄帝纪年论”을 발표하고 연호제(年号制)를 반대하였다.29

等。以羗爲羊種,以蠻閩爲蛇種,以貉爲豺種,以狄爲犬種則貴同種賤異族之思想固
古代神王所遺也,豈不偉哉!<古政原論>

29 最早於清光绪29年(西元1903年)由劉師培在《国民日日报》发表“黄帝纪年论”時提
出,其反对年号制, https://zh.wikipedia.org/wiki/%E9%BB%84%E5%B8%9D%E7%
BA%AA%E5%8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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湖北軍政府創辦的《中華民國公報》,日期標註為黃帝紀元4609年10月15日30

이들이 각각 “한족(漢族)”이라는 말과 <黃帝紀年論>을 통해 황제(黃帝) 한족(漢族)


선조설을 제창한 이래 중공학자들은 모두 이를 받아들여 현재까지 쓴다. 한
예로 1921년 中華民國 도당인 蔡東藩 許廑父는 <民國演義上下卷> “第三回
奉密令馮國璋逞威 舉總統孫中山就職”에서

孫文辭無可辭,勉允就職,當准於辛亥年十一月十三日,即陽曆新正月一日,為臨時
總統蒞任,中華民國紀元的吉期。先是鄂軍起義,用黃帝紀元,因黃帝為漢族遠祖,
興漢排滿,不得不溯源黃帝,所以檄文起首,稱為黃帝紀元四千六百零九年;至造成
民國,擬聯合漢、滿、蒙、回、藏五族,成一大中華,不應再存種族的形跡,乃改用民國
紀元。31

30

https://zh.wikipedia.org/wiki/%E9%BB%84%E5%B8%9D%E7%BA%AA%E5%85%83

31

孫文字逸仙,號中山,廣東香山縣人 … 各代表忍氣吞聲,面面相覷,忽聞孫中山航海到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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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했다. 여기에서 보듯이 “만주족을 없애고, 한족을 일으키기 위해(興漢排滿)”
“어쩔 수 없이 황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不 得 不 溯 源 黃 帝 )”, “황제를 한족의 먼
조상으로 한다(黃帝為漢族遠祖)”는 개념이 날조된 것이다.

3.향후 할 일-역사광복

차이나 정치가, 학자가 “黃帝紀元”을 내걸고, “黃帝為漢族遠祖”로 한 것은 “興漢


排 滿 ”을 위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날조한 것일 뿐 어떠한 역사사실적 근거도
없다.

그러나, 우리 학자들은 이른 바 그들이 존경하는 “중국학자”를 받들고 그들이


“ 黃 帝 為 漢 族 遠 祖 ”라고 하니, 그렇게 받아들이고 우리역사로 보지 말자는
10 전짜리 엽전 같은 사고를 버려야 한다.

已抵吳淞口,虧得他來解圍。大眾方轉憂為喜,即開了一個歡迎會,去迓中山--中山於十一
月初六日到滬;… 開箱檢視,總數隻有十七票,倒有十六票中,端端正正的,寫著孫文二字,
大眾歡呼中華共和萬歲三聲,自是中華民國臨時總統,產生大陸,成為開闢以來第一次創局。
大書特書。

孫文辭無可辭,勉允就職,當准於辛亥年十一月十三日,即陽曆新正月一日,為臨時總統蒞任,
中華民國紀元的吉期。先是鄂軍起義,用黃帝紀元,因黃帝為漢族遠祖,興漢排滿,不得
不溯源黃帝,所以檄文起首,稱為黃帝紀元四千六百零九年;至造成民國,擬聯合漢、
滿、蒙、回、藏五族,成一大中華,不應再存種族的形跡,乃改用民國紀元。1921,
中華民國 蔡東藩 許廑父 <民國演義上下卷> “第三回 奉密令馮國璋逞威 舉總統孫中山就
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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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우선 첫째로 빼앗긴 우리 고대 곰족의 역사-웅녀와 삼황오제의 역사를
다시 올바로 되돌려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둘째로 지나대륙은 태초부터 우리 동이 조선민족이 다스린 역사이자, 이른 바


중국문명은 사실은 우리 동이 조선문명에 기반한 것임을 중공과 전세계에
알려야 한다. -끝-

참고자료
<桓檀古記/太白逸史神市本紀 第三>
震域留記神市紀云:桓雄天皇見人居已完,萬物各得其所,乃使高矢禮專掌鳴養之務,
是爲主穀,而時稼穡之道不備,又無火種,爲憂。一日偶入深山,只看喬木荒落,但遺骨
骸,老幹枯枝交織亂叉,立住多時,沈吟無語,忽然大風吹林,萬竅怒號,老幹相逼,
擦起火光,閃閃脇脇,乍起旋消,乃猛然惺悟曰:「是哉,是哉!是乃取火之法也!」歸,
取老槐枝擦而爲火,功猶不完。明日,復至喬林處,徘徊尋思,忽然一個條紋虎咆哮躍來,
高矢氏大叱一聲,飛石猛打,誤中岩角,炳然生火,乃大喜而歸,復擊石取火。從此民得
火食,鑄冶之術始興,而制作之功亦漸進矣。

桓雄天皇又復命神誌赫德作書契。蓋神誌氏,世掌主命之職,專掌出納獻替之務,而只憑
喉舌,曾無文字記存之法。一日出,衆狩獵,忽見驚起一隻牝鹿,彎弓欲射,旋失其懿,
乃四處搜探,遍過山野,至平沙處,始見足印亂鎖,向方自明,乃俯首沈吟,旋復猛惺
曰:「記存之法,惟如斯而已!夫惟如斯而已夫!」是日,罷獵而歸,反復審思,廣察萬
象,不多日,悟得創成文字,是爲太古文字之始矣。但後世年代邈遠,而太古文字沒泯不
存,抑亦其組成也猶有不便而然歟?亦嘗聞南海島郞河里之溪谷,及鏡珀湖先春嶺,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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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烏蘇里以外,岩石之間,時或有發見彫刻,非梵非篆,人莫能曉,此非神誌氏之所作
古字歟?於是而更恨吾國之未振,吾族之不强也!
桓雄天皇使風伯釋提羅,雖除鳥獸蟲魚之害,而人民猶在洞窟土穴之中,下濕外風之氣,
逼人成疾。且禽獸蟲魚之屬,一經窘逐,漸自退避藏匿,不便於屠殺供饋,於是使雨師王
錦營造人居,主致牛、馬、狗豚、雕虎之獸而牧畜利用。使雲師陸若飛定男女婚娶之法焉。而
治尤則世掌兵馬盜賊之職焉。
自此治尤、高矢、神誌之苗裔繁衍最盛。及至治尤天王登極,造九治以採銅鐵,鍊鐵以作刀
戟、大弩以狩獵、征戰,賴以爲神。遠外諸族甚畏大弓之威,聞風膽寒者久矣,故彼謂我族
爲夸,說文所謂「夸,从大从弓,爲東方人」者是也。乃至孔丘氏春秋之作,而夸之名遂
與戎狄幷爲腥宥之稱,惜哉!

三聖密記曰:桓國之末,有難治之强族,患之。桓雄爲邦,乃以三神設敎,而聚衆作誓,
密有剪除之志。時族號不一,俗尙漸謗,原住者爲虎,新移者爲熊,然虎性貪嗜殘忍,專
事掠奪;熊性愚愎自恃,不肯和調。雖居同穴,久益疎遠,未嘗假貸,不通婚嫁事,每多
不服,咸未有一其途也。至是,熊女君聞桓雄有神德,乃率衆往見曰:「願賜一穴廛,一
爲神戒之氓。」雄乃許之,使之奠接,生子有産。虎終不能悛,放之四海。桓族之興始此。

朝代記曰:時人多産乏,憂其生道之無方也。庶子之部,有大人桓雄者,探聽輿情,期欲
天降,開一光明世界于地上。時安巴堅遍視金岳、三危、太白,而太白可以弘益人間,乃命
雄曰:「如今人物業已造完矣,君勿惜勞苦,率衆人躬自降往下界,開天施敎,主祭天神,
以立父權,扶携平和歸一;以立師道,在世理化,爲子孫萬世之洪範也。」乃授天符印三
個,遣往理之。雄率徒三千,初降于太白山神壇樹下,謂之神市,將風伯、雨師、雲師而主
穀、主命、主刑、主病、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弘益人間,是謂桓雄
天王也。
時有一熊一虎,同隣而居,常祈于神壇樹,而又請於桓雄,願化爲天戒之氓。雄乃以神呪
換骨移神,又以神遺得驗靈活,乃其艾一炷、蒜二十枚也,仍戒之曰:「爾輩食之,不見
日光百日,自由成眞,平等濟物,便得化人踐形之大人者也。熊與虎兩家皆得而食之,忌
三七日,務自修鍊。」而熊耐飢寒痛苦,遵天戒,守雄約,而得健者之女容;虎則誣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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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能忌違天戒,而終不得與之贊天業,是二姓之不相若也。熊氏諸女,自執愚强,而無與
之爲歸,故每於壇樹下群聚,以呪願有孕,有帳,雄乃假化爲桓,得管境,而使與之婚
孕生子女,自是群女群男漸得就倫。其後有號曰檀君王儉,立都阿斯達,今松花江也,始
稱國爲朝鮮。三韓、高離、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夫餘、濊與貊,皆其管境也。

神市之世,有七回祭神之曆,一回日祭天神,二回日祭月神,三回日祭水神,四回日祭
火神,五回日祭木神,六回日祭金神,七回日祭土神,盖造曆始於此。然舊用癸亥而檀君
邱乙始用甲子,以十月爲上月,是謂歲首。六癸,自神市氏命神誌所製,而以癸爲首,癸,
啓也,亥,核也,日出之根。故癸爲蘇羅,甲爲淸且伊,乙爲赤剛,丙爲仲林,丁爲海囚,
戊爲中黃,己爲烈好遂,庚爲林樹,辛爲强振,壬爲流不地;亥爲支于離,子爲曉陽,
丑爲加多,寅爲萬良,卯爲新特白,辰爲密多,巳爲飛頓,午爲隆飛,未爲順方,申爲
鳴條,酉爲雲頭,戌爲皆福。
神市肇降之世,山無蹊逕,澤無舟梁,禽獸成群,草木遂長。處與禽獸群,族與萬物幷。
禽獸之隊,可依羈而遊;烏鵲之巢,可攀援而戊。飢食渴飮,時用其血肉,織衣耕食,隨
便自在,是謂至德之世。民居不知所爲,行不知所之其行,鎭鎭其視,顚顚含哺而熙,鼓
腹而遊,日出而起,日入而息。盖天澤洽化,而不知窘乏者也。降及後世,民物益繁,素
樸漸離,捷陟稶罰,勞勞孜孜,始以生計爲慮。於是耕者爭畝,漁者爭區,非爭而得之,
則將不免窘乏矣。如是以後,弓弩作而鳥獸遁,網駱設而魚鰕藏,乃至刀戟甲兵,爾我相
攻,磨牙流血,肝腦塗地,此亦天意固然,於是乎知戰爭之不可免也。今夫究其源,則盖
一源之祖也。然地旣分東西,各據一方,土境逈殊,人煙不通,民知有我而不識有他,故
狩獵採伐之外,曾無險陂。降至數千載之後,而世局已變,仲國者,西土之寶庫也,沃野
千里,風氣恢暢,我桓族之分遷該域者,垂涎而轉進,土着之民,亦湊集而萃會,於是
焉黨同讐異,而干戈胥動,此實萬古爭戰之始也。
自桓雄天皇五傳,而有太虞儀桓雄,敎人必使黙念淸心,調息保精,是乃長生久視之術
也。有子十二人,長曰多儀發桓雄,季曰太卷,復號伏羲,日夢三神降靈于身,萬理洞徹,
仍往三神山祭天,得卦圖於天河,其劃三絶三連,換位推理,妙合三極,變化無窮。
密記曰:伏羲出自神市,世襲雨師之職,後經靑邱、樂浪,遂徙于陳,幷與燧人、有巢立
號於西土也。後裔分居于風山,亦姓風,後遂分爲佩、觀、任、己、煊、理、缸、彭八氏也。今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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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濟水羲族舊居尙在,任、宿、須句、須臾等國皆環焉。
大辯經曰:伏羲出於神市,而作雨師,觀神龍之變而造卦圖,改神市癸亥而爲首甲子。女
媧承伏羲制度,朱襄仍舊文字,而始傳六書。伏羲陵,今在山東魚臺縣,鳧山之南。神農
起於列山。列山,列水所出也。神農,少典之子。少典與少卷,皆高矢氏之傍支也。<桓檀古
記/太白逸史神市本紀 第三>

1
<帝系譜><帝系姓> : 包羲字伏羲黃熊諡太昊娶 “中华民族”是谁首提的?32

李喜所 (南开大学史学教授)

32

习惯上所说的“华夏”、“汉人”、“唐人”、“炎黄子孙”,乃至外国人将中国称
之为“大秦”、“震旦”、“支那”等,都不是现代意义上的民族国家的称谓。所谓
“华夷之辨”、“夷夏之防”,集中反映的也是一种相对狭隘的朴素的种族意识。

1840 年鸦片战争之后,尤其是 1894 年中日甲午战争之后,救亡图存的热潮迫使


先进的思想家去重新思考许多问题。在“保国、保种”的呼声中,严复的《天演论》
传递出一种世界民族之间相互竞争的族群理念,从而使国人意识到“合群”的重要性
。遗憾的是,严复没有进一步介绍西方的民族主义理论。梁启超则沿着严复“保种”
、“合群”的思路,渐渐以现代民族主义理论来思考问题。

1898 年秋他流亡日本之后,比较系统的研究了欧洲的民族主义论著,并结合中国
的实际,提出了许多发人深省的新见解。

1899年,梁启超在《东籍月旦》一文中,破天荒地使用了现代意义上的“民族”一词
。他在评介当时有影响的世界史著作时称这些论著“于民族之变迁,社会之情状,政
治之异同得失,……乃能言之详尽焉”。又云:“著最近世史者,往往专叙其民族争竞
变迁 , 政策之烦扰错杂 ” 。
http://www.confuchina.com/08%20xiandaihua/zhonghuaminzu.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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习惯上所说的“华夏”、“汉人”、“唐人”、“炎黄子孙”,乃至外国人将中国称之为“大秦
”、“震旦”、“支那”等,都不是现代意义上的民族国家的称谓。所谓“华夷之辨”、“夷夏之防
”,集中反映的也是一种相对狭隘的朴素的种族意识。

1840 年鸦片战争之后,尤其是 1894 年中日甲午战争之后,救亡图存的热潮迫


使先进的思想家去重新思考许多问题。在“保国、保种”的呼声中,严复的《天演论》传递
出一种世界民族之间相互竞争的族群理念,从而使国人意识到“合群”的重要性。遗憾的
是,严复没有进一步介绍西方的民族主义理论。梁启超则沿着严复“保种”、“合群”的思
路,渐渐以现代民族主义理论来思考问题。

1898 年秋他流亡日本之后,比较系统的研究了欧洲的民族主义论著,并结合中
国的实际,提出了许多发人深省的新见解。

1899 年,梁启超在《东籍月旦》一文中,破天荒地使用了现代意义上的“民族”一词
。他在评介当时有影响的世界史著作时称这些论著“于民族之变迁,社会之情状,政治
之异同得失,……乃能言之详尽焉”。又云:“著最近世史者,往往专叙其民族争竞变迁
,政策之烦扰错杂”。

梁启超从这种民族竞争的理念出发,又大胆地提出了民族主义是近代史学的灵魂
。1901 年,梁启超发表《中国史叙论》一文,首次提出了“中国民族”的概念,并将中国
民族的历史划分为三个时代:

第一,上世史,自黄帝以迄秦之一统,是为中国之中国,即中国民族自发达、自
竞争、自团结之时代也;第二,中世史,自秦统一后至清代乾隆之末年,是为亚洲之中
国,即中国民族与亚洲各民族交涉、繁赜、竞争最烈之时代也;第三,近世史,自乾隆
末年以至于今日,是为世界之中国,即中国民族合同全亚洲民族与西人交涉、竞争之时
代也。

梁启超在这里反复用了三个“中国民族”,而且从宏观上勾勒出三个时期的不同特
点,显然是经过了较长时间的思考之后得出的结论。在“中国民族”的基础上,1902 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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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启超正式提出了“中华民族”。他在《论中国学术思想变迁之大势》一文中,先对“中华”
一词的内涵做了说明。其云:

立于五洲中之最大洲而为其洲中之最大国者,谁乎?我中华也;人口居全地球三分
之一者,谁乎?我中华也;四千余年之历史未尝一中断者,谁乎?我中华也。

随后梁启超在论述战国时期齐国的学术思想地位时,正式使用了“中华民族”,其
云:

齐,海国也。上古时代,我中华民族之有海权思想者,厥惟齐。故于其间产出两种
观念焉,一曰国家观;二曰世界观。

由“保种”、“民族”到“中国民族”,再到“中华”和“中华民族”,梁启超基本完成了“中
华民族”一词的创造。这是目前所见到的关于“中华民族”的最早词汇,一直沿用到了今
天。

1905 年,梁启超又写了《历史上中国民族之观察》一文,从历史演变的角度指出
中华民族是中国境内的所有民族,是多元混合的。

不过,梁启超在具体使用“中华民族”一词时却比较混乱,有时指汉族,有时又指
中国的所有民族,直到 1903 年其发表的《政治学大家伯伦知理之学说》一文中,才清
晰地赋予了较为科学的内涵。其称:

吾中国言民族者,当于小民族主义之外,更提倡大民族主义。小民族主义者何?汉
族对于国内他族是也。大民族主义者何?合国内本部属部之诸族以对于国外之诸族是
也。……合汉合满合蒙合回合苗合藏,组成一大民族。

1905 年,梁启超又写了《历史上中国民族之观察》一文,从历史演变的角度重点
分析了中国民族的多元性和混合性,并断然下结论说:“中华民族自始本非一族,实由
多民族混合而成”。由此,梁启超真正完成了“中华民族”一词从形式到内容的革命性创
造。这就是,中华民族指中国境内的所有民族,汉满蒙回藏等为一家,是多元混合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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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启超钟情于民族主义的根本原因,是他认定民族主义是不可抗拒的时代潮流,
是推进中国现代化进程的原动力。

耐人寻味的是,梁启超为什么会超越孙中山、章太炎这些革命大家,在推进中华民
族大家庭的建设中走在了前列呢?回到当时的历史场景,不难发现,这是客观政治演
变的产物。

众所周知,满族入关后建立了森严的满族贵族集权的专制统治,虽然也对汉族采
取过一些拉拢和团结的政策,但民族歧视和民族压迫十分严重。所以,历来的反清运
动,包括太平天国那样全国性的农民起义,都打出“反满”的旗号,号召和争取民众参
加反清斗争。孙中山等革命派也将“反满”作为发动群众、号召人民投入“反清革命”的一
面旗帜。20 世纪初,革命派喊得最响、影响最大的一个口号就是“革命排满”。这中间不
可避免的夹杂着一种大汉族主义倾向。即使像章太炎、邹容这样的思想理论家和宣传家
也在所难免。聪明的梁启超清醒地看出了其中的问题。特别是受其反对孙中山武装革命
的政治立场所制约,在与革命派的论战当中,自然就打出了民族主义的大旗,宣传满
汉一家、民族平等,并批评革命派的大汉族主义,责难孙中山“驱除鞑虏、恢复中华”的
民族主义。

不难发现,梁启超的民族主义和反对孙中山的反清革命有这样那样的内在联系。
在 1905 年到 1907 年《新民丛报》与《民报》的论战当中,梁启超打出的民族主义大旗
让孙中山等革命派很难应付。不过,经过这场论战,孙中山等革命派也逐步认识到过
分强调反满的负面影响,孙中山在许多场合多次宣称反满并非反对整个满族,而是反
对满族贵族专制统治,反对压迫汉族人民的满族人。一些革命党人也纷纷撰文批评大
汉族主义,明确界定了“革命排满”并不是指所有满族,“实满族中爱新觉罗之一姓”。
历史就是这样让人难以琢磨,梁启超出于某种狭隘的党派偏见鼓吹的民族主义,在客
观上倒纠正了革命党人的大汉族主义。

但是,这种歪打正着,在梁启超构筑现代民族主义理论过程中并不占主导地位。
梁启超钟情于民族主义的根本原因,是他认定民族主义是不可抗拒的时代潮流,是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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进中国现代化进程的原动力。梁启超明确指出:“近四百年来,民族主义日渐发生,日
渐发达,遂至磅礴郁积,为近世史之中心点,顺兹者兴,逆兹者亡。”梁启超毫不动摇
的坚信,要使中国不亡,必须推行民族主义。

“中华民族”概念的提出是中国传统民族观念走向现代的重要标志之一,意义深远。

综而观之,敏锐的时代洞察力、救亡图存的使命感以及与革命党斗争的某种政治
需要,使梁启超成为 20 世纪初年研究和宣传民族主义的“弄潮儿”。由他创造的“中华
民族”一词开创了中华民族大家庭构建的新起点。它超越了传统的种族和地域的束缚,
体现了中国各民族是一家的新的民族理念;它告别了“夷夏之变”的陈腐观念,反映了
中国各民族平等相处、团结一致的新的追求。它是中国传统民族观念走向现代的重要标
志之一,意义深远。

首先,增强了民族认同感。以孙中山为代表的革命党和以梁启超为精神领袖的立宪
派在民族主义问题上的趋同,不仅让理论界和全体国人成功地渡过了辛亥革命时期的
民族认同危机,而且为中华民国创建多民族的新的民族国家奠定了理论基础。孙中山在
1912 年元旦的临时大总统宣言书中郑重宣布:“国家之本,在于人民,合汉满蒙回藏
诸地为一国,即合汉满蒙回藏诸族为一人——
是曰民族统一”。在民族统一的旗号下,生活于中国大地上的所有族群都公认自己属于
中华民族,都是中华民族的子孙。经过辛亥革命后近百年的积淀,“中华民族”一词既是
中国各族人民的一个统一的称谓,又是一种不断强化的民族认同和民族心理。

其次,凝练了民族精神。辛亥革命后的思想理论界乃至学术文化界已经很少去讨论
中国的民族构架或民族国家问题了,而是研究如何浇铸新的中华民族精神,包括民族
自信、民族创造力和如何自立于世界民族之林等。五四时期东西文化论战的展开,为从
文化的角度凝练中华民族精神打开了一个新的窗口。李大钊、陈独秀,包括青年毛泽东
、周恩来等,都对中华民族精神的塑造提出了真知灼见。五四前后的 30 年间是凝练新的
中华民族精神的黄金时期。但追根溯源,其原动力和 20 世纪初年中华民族概念的确立
有割不断的联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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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提升了民族力量。当“中华民族”一词变成我国各民族的一种共同认知并为之献身
的时候,就绽放出无法估量的能量。五四运动之后“中华民族”一词逐渐普及,几乎家喻
户晓,专门论述“中华民族”历史的著作不断出现,反对外来侵略、争取民族独立的爱
国运动日益高涨。无论是自发的民众运动,还是共产党领导的反帝斗争,都提升了民
族自觉,增强了民族团结,壮大了民族力量。尤其在反抗日本侵略的抗日战争中,“中
华民族”在焕发出无穷的智慧和力量的过程中融化到了每个中国人的血液中,与生命同
在。如今,中华民族整体观念已经深植于人们的内心深处,成为牢固不可动摇的信念
,必将为实现祖国的统一和中华民族的伟大复兴注入无穷的动力。

主题延伸:“中华民族”一词在近代的涵义演变

梁启超的“多元混合”说

1905 年,梁启超写了《历史上中国民族之观察》一文,从历史演变的角度指出中
华民族是中国境内的所有民族,汉满蒙回藏等为一家,是多元混合的。

杨度的“文化族名”说

杨度在 1907 年发表了《金铁主义说》一文,将中国解释为地域观念,将中华阐释成


文化一统,把中华民族归之为文化族名,所有生长于中国这块土地上的民族经过交流
融合,已经不可分割地形成了一个中华民族。这里,杨度将中华民族的含义赋予了现
代文化人类学的意蕴,颇具文化色彩和理论意义。

章太炎的“汉族中心”说

章太炎并不反对杨度乃至梁启超用中华民族来概括中国各民族的论断。他与杨度所不
同的是:一是坚持要以汉族为中心;二是要由汉人组织政权;三是以汉族来逐步同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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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他少数民族。众所周知,章太炎是一个汉族中心主义者。但他在这里表述的观点较其
1903 年前后宣传的民族复仇主义已经有很大的转变。

孙中山的“五族共和”说

一向倡导“革命排满”的孙中山也接过了“中华民族”的旗号,在 1912 年进一步提出了“


五族共和”,号召以民族平等、民族团结来达到民族融合和民族和谐。

转自:思雨新闻网http://smilefish2005.blogchina.com/4899222.html

Map of Bear species (Ursidae) distribution.png: 00 00 00 00 00 Ailuropoda


melanoleuca 00 00 00 00 00 Helarctos malayanus 00 00 00 00 00 Melursus
ursinus 00 00 00 00 00 Tremarctos ornatus 00 00 00 00 00 Ursus
americanus 00 00 00 00 00 Ursus thibetanus 00 00 00 00 00 Ursus arctos
00 00 00 00 00 Ursus mariti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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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7%86%8A%E7%A7%91

四川大熊猫栖息地

• 夹金山脉

• 天台山 (四川)

• 卧龙国家级自然保护区

• 四姑娘山
• 四川大熊猫栖息地
• Template:四川大熊猫栖息地

• 西岭雪山

• 青城山

https://zh.wikipedia.org/wiki/Category:%E5%9B%9B%E5%B7%9D%E5%A
4%A7%E7%86%8A%E7%8C%AB%E6%A0%96%E6%81%AF%E5%9C%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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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川卧龙国家级自然保护区,是中华人民共和国始建于 1963 年的一处国家级自然保
护区,位於四川省阿坝藏族羌族自治州汶川縣縣域西南,邛崃山脉东南坡,覆盖面積
约 20 万公顷,是大熊貓的主要棲息地之一。同时也是珍贵濒危植物、其它国家级重点
保护濒危动物的栖息地。
https://zh.wikipedia.org/wiki/Category:%E5%9B%9B%E5%B7%9D%E5%A4
%A7%E7%86%8A%E7%8C%AB%E6%A0%96%E6%81%AF%E5%9C%B0

武氏祠在今山东省嘉祥县南武宅山,旧称武梁祠或武氏“前石室”和“左石室”,为武氏家族
墓葬的双阙3个石祠的石刻装饰画,现保存刻石40余块。据武氏石阙和武梁碑记载,它
的创建年代在东汉桓帝建和元年(147)前后,由石工孟孚、李第卯、孙宗
等人刻造,并由“良匠卫改雕文刻画”而成

基本简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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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东汉石祠画像石。武氏祠在今山东省嘉祥县南武宅山,旧称武梁祠或武氏“前石
室”和“左石室”,为武氏家族墓葬的双阙 3 个石祠的石刻装饰画,现保存刻石 40 余块。

据武氏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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阙和武梁碑记载,它的创建年代在东汉桓帝建和元年(147)前后,由石工孟孚、李第
卯、孙宗 等人刻造,并由“良匠卫改雕文刻画”而成。

东西石阙画像内容为神仙灵异、车马人物与历史故事。

现存武梁、武班、武荣三石祠中,武梁祠形体较小,为开间结构。

武班、武荣等祠形体稍大,为中间有立柱的双开间后壁有龛的结构。

各石祠画像内容分布大体相同,刻神仙、灵异、祥瑞等图像于顶部,暗含天降祥瑞
之意。围绕东王公、西王母为主的神话传说都刻在两山墙的山尖部位。表现儒家门人的
高贵形象都刻在后壁高处和两山墙的上层。

反映墓主人显赫地位的出行图布置在后壁和小龛的横额长石上,并通连山墙。按五
行思想中西方属金呈杀的观念,西壁下刻攻战图。

而表现墓主人养尊处优的宴饮、楼阁都刻在祠堂中心后壁的明显之处。

武氏祠众多画像内容中,表现最多的是历史上的人物故事画,并且画像之侧有榜
文题铭和赞语。其中表现的古帝王圣贤有伏羲、女娲、祝融、神农、黄帝、颛顼、尧、舜、禹、
帝辛、文王、武王、周公、老子、孔子及 弟子等。

历史故事中表现古代忠勇义士的内容有:荆轲刺秦王、聂政刺韩王、蔺相如、范雎
与须贾、豫让刺襄子、要离刺庆忌、曹沫刺桓公、侯赢朱亥劫魏师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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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现节妇烈女的故事有京师节女、梁节姑姊、无盐丑女、齐义继母、秋胡妻、朱明妻、
王陵母等。

表现孝子的故事有闵子骞、老莱子斑衣娱亲、丁兰刻木奉亲、董永卖身葬父、伯榆悲
亲、邢渠哺父等。

另外还有义浆羊公、泗水捞鼎、柳惠、颜叔等故事画。

武氏祠画像石构图方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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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氏祠画像采用分层分格构图方法,在一层中包括多个不同的画面和人物,构图
复杂而又均衡匀称,具有浓郁的装饰效果。

每个故事又善于把握情节发展的高潮,表现故事冲突和事态发展转折点的瞬间,
因而人物多具有夸张的戏剧性动作,在均衡平稳中又表现出动感和力度。

武氏祠画像石艺术价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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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氏祠画像石的雕刻方法为凸面线刻。先将石面磨平再勾出物像,然后把物像周围
部分凿去,使画面浮起造成阳文轮廓,最后在阳文上用阴线精雕细刻而成。

画面工整朴实,其严谨、朴素、古拙的写实特色,在山东画像石中具有高度的艺术
价值和典型意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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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aike.baidu.com/item/%E6%AD%A6%E6%B0%8F%E7%A5%A0%E7
%94%BB%E5%83%8F%E7%9F%B3/6345890?fr=aladdin

武氏祠堂,位于河北省邯郸市广平县东胡堡村,是该村武氏世代辈分家谱。

https://baike.sogou.com/v168293149.htm?fromTitle=%E6%AD%A6%E6%
B0%8F%E7%A5%A0%E5%A0%82

图片说明:拍摄于2016年。济南市博物馆展品——
孝堂山石祠北壁汉代壁画拓片(济南长清孝里镇孝里铺村)。图为汉代建筑房顶攀爬
的猴子和飞禽。
图片关键字:拓片,猴子,飞禽,建筑,孝堂山石祠,汉代壁画,济南博物馆,博物馆,场馆,展
馆,展厅,文化场馆,馆藏文物,文化,历史文化,文物,历史文物,展品,馆藏品

http://www.sdphoto.com.cn/pic/37517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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