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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오픈포럼」 15권 2호(2021.9.

근대적 진화 개념의 등장과 기독교의 반응


The Emergence of the Modern Concept of Evolution and the Responses of
Church

양승훈1)
Paul Seung-Hun YANG

에스와티니 기독의과대학교
Eswatini Medical Christian University
Po Box A624 Swazi Plaza Mbabane
Mbabane H101, Kingdom of Eswatini
E-Mail: viewmanse@gmail.com

(Received on August 15, 2021,


Accepted on September 20, 2021)

I.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에 기초한 창조연대


II. 넓어지는 지평과 갈등의 조짐
1. 중세의 우주관
2. 르네상스 이후의 지구의 연대

1) 양승훈은 경북대 물리교육과 교수(1983-1997),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원장 및 교수로(1997-2021), 쥬빌리채


플 담임목사(2010-2021)를 거쳐 현재는 에스와티니 기독의과대학교(EMCU) 총장으로(2021.9.-) 재임하고 있다. 『진화
는 과학적 사실인가?』(공저, 1981) 등 40여 권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근래에는 지난 30여 년 간 집중해 오던 『창조
론 대강좌』 시리즈 탈고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까지 『다중격변 창조론』, 『생명의 기원과 외계생명체』, 『창조와
진화』, 『대폭발과 우주의 창조』, 『창조연대 논쟁』, 『인류의 기원과 역사적 아담』 등 여섯 권을 출간하였고, 현
재 마지막 일곱 번째 책인 『과학사와 과학철학: 한 창조론자의 관점』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 외에도 창세기 1,
6-9장을 강해한 『창조에서 홍수까지』, 창조론오픈 포럼에서 발표한 논문들을 편집한 『기독교와 창조론』, 『그랜
드 캐니언: 정말 노아홍수 때 생겼을까?』를 출간하였다. 2007년 8월, 조덕영 박사와 더불어 “창조론 오픈 포럼”을
창립하여 공동대표 및 「창조론오픈포럼」 논문집 공동 편집장(2007-2021), 1988년에 창간한 기독교 세계관 전문학술
지인 「통합연구」의 창간 발행인/편집장과 2018년에 복간한 「통합연구」의 편집장을 역임했다(20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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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새로운 지구 이론
IV. 모세 지질학과 새로운 지질학
V. 절대연대 측정법의 등장
VI. 인류의 오랜 연대와 선아담 인류(Pre-Adamites) 논쟁
1. 라페이레르의 선아담인류론
2. 19세기의 선아담 인류
3. 미국에서 인류의 다중기원설과 흑인 인종차별
4. 도전 받는 인류의 연대
VII. 19세기 지질학과 창세기 해석
1. 베이컨적 절충안2)
2. 비평적 성경해석학의 등장과 전문가들의 불일치
3. 독일의 성경 비평학
4. 위기에 처한 베이컨적 절충안
VIII. 진화론에 대한 세 가지 반응
IX. 진화론의 등장과 교회의 반응
X. 진화론과 종교를 화해시키려는 시도
XI. 진화론과 유전법칙
1. 멘델의 유전법칙
2. 유전법칙의 재발견
3. 진화론과 유전법칙의 결합?
XII. 요약과 결론

ABSTRACT
This Essay deals with the church's response to the various events that led to the emergence of the modern
concept of evolution from the mid-17th century to the late 19th century, and furthermore, the emergence of
fundamentalism in the 20th century and the background of the emergence of creation science as a part of
it. For examples, the emergence of a long earth age from James Usher's 6000 years of earth age, the
transition from the geocentrism to the heliocentrism, the emergence of modern geology from Moses geology,
the emergence of absolute dating technique, the emergence of archaic anthropology, the debate on the
pre-Adamite theory. With the emergence of those events, new interpretations of Genesis were proposed and
the Baconian Compromise represented by the “two book theory” coexisted and was widely accepted.
However, it was threatened as naturalists who studied only nature, regardless of the Bible, were strongly
influenced. Finally it was dismantled after lasting 200 years since Bacon. As the movement of naturalists to
interpret the Bible within an academic framework has emerged stronger than the previous influence of the
Bible on interpreting science, “scientific hermeneutics” and “critical hermeneutics” appeared. Particularly, the

2) Moore, “Geologists and Interpreters of Genesis in the Nineteenth Century,” <God & Nature>, Ch.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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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ergence of modern geology opened a new horizon for biblical interpretation. Among the people in
modern geology, Charles Lyell thought that catastrophism geology based on Noah's Flood should be
abandoned and a geology based on uniformitarianism should be established. It was also Charles Robert
Darwin who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transition to an era dominated by scientists. Darwin was fascinated
by Lyell’s uniformitarian ideas after reading Lyell's books. As time passed after the publication of <Origin
of Species>, naturalists gradually took the lead in geological studies. In particular, the combination of the
theory of evolution and the Mendel’s laws of heredity brought together a number of experts in the fields of
geology and biblical hermeneutics to downgrade Genesis narrative to a “primitive” account of the beginning.
Eventually, as this situation continued, the church and Christians in general suffered confusion, and they
were expecting a new movement to establish a more clear foundation of Christianity. The conditions for the
revival of fundamentalism that emerged in the early 20th century and creation science, one of its fruits,
were ripe.

영역: 과학사/과학철학
키워드: 창조연대, 모세 지질학, 절대연대 측정법, 선아담 인류론, 베이컨적 절충안, 성경 비평학

근대과학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된 기계론적 세계관은 생명에 대한 견해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종래의 신비적 우주관에서 벗어난 새로운 주장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지구의 역사에 대
해서도 좀 더 체계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18세기를 지나면서 기계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지질학
과 우주론이 시작되었고,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에 기초한 종래의 지구와 우주의 연대에 대해서도
과학적인 연구들이 등장하였다. 본고에서는 중세 이후 지구와 우주의 창조연대에 대한 견해들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개괄하고 이 견해들이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어떤 함의를 가졌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I.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에 기초한 창조연대

지구의 창조연대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긴 했지만 근대에 들어와서도 교회 내에서 별로 큰


갈등을 가져오지 않았다. 창조연대 문제를 두고 대립과 분열의 씨앗을 뿌린 것은 영국의 두 학자
였다. 17세기 중엽, 흠정역(欽定譯, KJV) 성경번역에 참여한 두 명의 영국 학자의 정확한 성경해석
에 대한 열심은 수 세기 후에 경직된 독단으로 변질되어 오랫동안 기독교인들을 분열시키고 신앙
을 사실과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3)
1642년, 흠정역 성경이 출간된 지 31년 정도 지났을 때 케임브리지의 주교이자 케임브리지 대
학의 총장(vice chancellor)이며 유명한 히브리어 학자였던 라잇풑(John Lightfoot, 1602-1675)은
우주가 주전 3928년 9월 17일에 창조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연대는 창세기, 출애굽기, 열왕기

3) Martin J.S. Rudwick, “The Shape and Meaning of Earth History,” <God & Nature>, Ch.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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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하, 역대상, 하에 나타난 사람들의 계보를 근거로, 그리고 1년을 현재와 같은 365일로 계산하
여 나온 것이었다.

그림 1 어셔(좌)와 라잇풑

그로부터 8년 후, 아일랜드 아르마의 대주교(Archbishop of Armagh) 어셔(James Ussher or


Usher, 1581-1656)는 라잇풑의 연대를 약간 수정하여 지구의 역사는 주전 4004년(율리우스曆 710
년) 10월 “스물 셋째 날의 전날 밤이 시작될 때”라고 발표하였다.4) 이것은 율리우스력(proleptic
Julian calendar)에서 BC 4004년 10월 22일 오후 6시경에 해당하였다.5)
어셔는 성경에 나타난 모든 계보와 역사적인 사건의 연대를 고려하여 창조연대를 계산하였다.
처음에는 라잇풑과 어셔의 연대가 약간 달랐지만 한 동안의 논쟁 끝에 라잇풑은 어셔의 연대에
맞추었다. 그는 모든 창조 역사는 주전 4004년 10월 18-24일 사이에 일어났으며 아담의 창조는
10월 23일 오전 9시에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기가 막히게 정확한 창조연대는 당시 성
경학자들과 비평가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졌다.6)
하지만 어셔나 라잇풑은 둘 다 히브리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무시했으며 성경에 생략된 계보가
있음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흠정역(KJV) 성경의 단어에만 근거하여 창조주간은 여섯 번의 연
속적인 24시간 하루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창세기 1장에 나타난 모든 사건들은 오늘날 태양
력으로 1주일 이내에 일어났으며 성경에 나타난 인류의 계보들은 빠짐없이 기록되었다는 가정은
타당한 것인가?
계보에 관한 성경의 몇몇 기록들을 비교해 보면 아담으로부터의 계보에 빠진 세대가 있음을 알
수 있다.7) 성경에 계보를 기록할 때는 기록자에 따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빼고 기
록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이 창조되기 전 창조주간의 길이는 근대과학이 탄
생하기 이전부터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주와 인간의 정확한 창조연대는 아
무도 알 수가 없으며, 우리는 단지 성경의 해석과 과학적 증거들로부터 개략적이고 잠정적인 연

4) “the entrance of the night preceding the 23rd day of October... the year before Christ 4004” from
Rupke, <Great Chain of History>, pp.32-33; Gillispie, <Genesis and Geology>, p.108.
5) http://en.wikipedia.org/wiki/James_Ussher; 예기(豫記) 율리우스력이란 4년마다 돌아오는 윤년을 AD 4년까지 거
슬러 올라가도록 율리우스력을 확장한 달력이다. 율리우스력이 시행된 BC 45년과 AD 4년 사이의 윤년은 불
규칙적이었다.
6) Bernard Ramm, <The Christian View of Science and Scripture> (Grand Rapids, MI: Eerdmans, 1954) p.121.
7) 예를 들면 창4:14,11:12-3; 눅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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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가 시작될 무렵의 흠정역 성경에서부터는 어셔의 연대가 성경의 관주
나 제목으로까지 삽입되었다. 많은 독자들은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의 구절과 주석가들이 추기한
각주의 연대를 잘 구별하지 못했다. 더욱이 흠정역 성경은 재빨리 영어권 나라들의 독보적인 성
경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기독교가 유럽을 벗어나 세계로 퍼질 때 이 영어권 나라들이 바로 개
신교의 주요 지지자들이 되었다. 그 이후 오랫동안 심각한 논의도 없이 어셔의 창조연대와 성경
은 결합하게 되었고 어셔의 계산은 개신교가 퍼지는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권위 있는 창조연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II. 넓어지는 지평과 갈등의 조짐

하지만 성경기록만을 근거로 제시된 창조연대는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
를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먼저 중세의 우주관을 잠시 살펴본 후 이러한 우주관이 근대에 들어와
어떻게 변화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1. 중세의 우주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중세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위로 구형으로 형
성된 우주는 한정된 시스템(bound system)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계급 사회의 안정된 균형이
라는 사회적 질서를 반영한 것이었으며, 발전하지 않고 단순히 주기적 변화(cyclic change)만을 반
복하는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런 개념은 우주가 영원하며 자기 보존적이어서 스스로 자연
과 사회질서의 유지자이며 공간적으로도 무한하다는 이론으로부터도 추론될 수 있었다.8)

그림 2 중세의 우주관9)

안정된 사회질서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주기적 변화라는 제한된 인식과 우주의 유한함, 그리고
방향이 결정된 세계 역사를 통합하려고 하였다. 이런 견해는 하나님이 창조와 함께 종말을 예정

8) Martin J.S. Rudwick, “The Shape and Meaning of Earth History,” <God & Nature>, Ch.12.
9) http://faculty.knox.edu/fmcandre/cosmolog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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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셨으므로 세계 역사란 임시적이며 유한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에덴동산의 창조, 인간


의 타락, 그리고 미래의 심판과 천년왕국이라는 성경 역사의 구조는 우주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에 인간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무질서한 흐름 속에 질서를 부여했으며
사회적 활동을 정당화하면서 동시에 초월적 의미도 제공하였다. 이런 견해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
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인간의 역사를 지구의 역사, 우주의 역사와 동등하게 간주한 결과였
다.10)

2. 르네상스 이후의 지구의 연대

하지만 이런 단순한 성경해석은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기와 종교개혁


기에는 성경 본문 연구(textual scholarship) 방법이 성경 내부의 모순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었다.
본문 연구의 진보로 인해 성경에 나타난 사건과 연대기를 다른 사건들과 비교하는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원문과 고대 유적에 대한 관심은 풍부한 역사적 정보를 제공했다. 또한 이것은 성
경 얘기들을 전체적으로 통합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정량적으로 명확한 설명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런 작업들이 천문학적 계산들과 비교되면서 지구 역사는 “수천 년”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곧 여러 가지 문제점에 봉착하였다. 당장 15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대항해
기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고대 이집트 왕조의 기록과 중국 문명의 기록과도 잘 맞지 않았다. 또
한 유럽인들의 잇따른 신대륙 발견으로 인해 신대륙에 분포하고 있는 상이한 동식물의 분포도 설
명하기 어려웠다. 즉 노아의 홍수 이후 방주에 탔던 동물들이 어떻게 그처럼 빠른 시간 안에 전
세계에 퍼질 수 있었으며, 어떻게 지역에 따라 동식물의 분포가 그처럼 다른지를 설명할 수 없었
다. 또한 신대륙에 거주하고 있는 원주민들이 노아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노아 홍수 이후 노아와
그 자녀들이 어떻게 그처럼 빨리 퍼질 수 있었는지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이전에는 거의 신화적인 지역이었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Sub-Saharan Africa) 지역에 대한 탐
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무역이 시작되면서 전혀 다른 관습과 방언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있
음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인간이 동일한 조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이처럼 다를
수 있을까, 어떻게 넓은 대양에 의해 분리되어 있는 지역들에까지 인간이 흩어져서 살 수 있었을
까? 라는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11)
이처럼 세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면서 과학은 전통적인 성경 이해와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 잦
아졌다. 한 예로 18세기 과학자들은 지구의 연대를 크게 확장시켰다. 1775년, 프랑스 박물학자,
수학자, 우주론자 뷔퐁(Georges-Louis Leclerc de Buffon, 1707-1788)은 지구의 연대를 75,000년이
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현대 지질학이 말하는 지구연대에 비해서는 매우 짧지만 당시의 6,000년
연대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늘어난 연대였다.12)

10) Martin J.S. Rudwick, “The Shape and Meaning of Earth History,” <God & Nature>, Ch.12.
11) Rudwick, <God & Nature>, p.163.
12) Nelson, <When Science & Christianity Meet>, pp.16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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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뷔퐁(좌)과 퀴비에

또한 프랑스 박물학자이자 동물학자였던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는 지구는 더 이상


시간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격변들이 일어나 지구 표면의 모양을 변화
시켰다는, 소위 다중격변설(multiple catastrophism)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화석에 대한 해석도 달
라졌다. 이전에는 화석을 동식물을 닮은 광물질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과거에 살았던 실제적
인 동식물들의 유해나 흔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19세기가 시작될 때에 서구 지성인들
은 지구와 인간 이외의 동식물들은 아담과 하와가 출현하기 전에 오랜 역사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13)
지구 연대에 대한 확장을 수용한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두 가지 중 한 이론을 선택했다. 하나
는 소위 “간격 이론”(Gap Theory)이라는 것으로서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지질학적 시간을
삽입할 수 있는 간격이 있다는 것이었다.14) 이 이론은 에든버러 대학(University of Edinburgh) 교
수이자 스코틀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 창설자인 차머스(Thomas Chalmers,
1780-1847)가 1814년 오랜 연대와 성경을 조화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제창한 이론이었다.15)

그림 4 좌로부터 차머스, 라이트, 브라이언, 로스

다른 하나는 창조주간의 하루하루를 태양일이 아닌, 긴 기간으로 보는 소위 “날-시대 이


론”(Day-Age Theory)이었다. 사실 날-시대 이론은 5세기 어거스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거스틴

13) Nelson, <When Science & Christianity Meet>, p.163.


14) 간격이론(Gap Theory)은 Gap creationism, ruin-restoration creationism, restoration creationism 등으로도 불
린다.
15) Tom McIver, “Formless and Void: Gap Theory Creationism,” <Creation/Evolution> 8 (3): 1–24 (Fall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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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에 관하여>(De Genesi ad Litteram, On the Literal [Interpretation of]
Genesis)라는 책에서 창세기의 “날”은 문자적 하루로 해석할 수 없다고 말했다.16) 날-시대 이론은
어거스틴 이후 과학과 성경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근대로 와
서는 영국 지질학자 라이엘(Charles Lyell)이 자신의 유명한 저서 <지질학 원리>(Principles of
Geology)를 통해 날-시대 이론을 주장했다. 또한 19세기 중반, 미국 지질학자 구이요트(Arnold
Guyot), 19세기 후반, 캐나다 지질학자이자 주석가였던 도손(John William Dawson),17) 미국 지질
학자이자 오벌린 신학교(Oberlin Theological Seminary) 교수였던 라이트(George Frederick
Wright, 1838-1921),18) 미국 반진화론 정치가이자 스콥스 재판 검사(Scopes Trial prosecutor)였던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1860-1925),19) 미국 침례교 목사이자 반진화론 캠페인을 벌렸
던 릴리(William Bell Riley, 1861-1947),20) <믿는 이유>(Reasons to Believe)의 창설자이자 천문학
자 로스(Hugh Ross, 1945-) 등이 날-시대 이론을 지지했다. 근래에 와서 간격 이론은 지질학적 증
거와 맞지 않음이 점점 드러났기 때문에 퇴조하였고 현재는 복음주의권에서 날-시대 이론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21)

III. 새로운 지구 이론

창조연대와 더불어 사람들의 관심은 역시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구였다. 지구는 우주의 일부라
는 개념이 나온 후에야 지구의 기원이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이런 개념은 코페르니
쿠스의 태양중심설에 의한 것이 아니라 16세기 말 이탈리아 철학자이자 도미니칸 수도사 브루노
(Giordano Bruno, 1548-1600)와 17세기 중반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의 우주론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들의 우주론에 의하면 우주는 중심도, 경계도 없으며, 심지어 창조되지도 않았
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우주론에서는 지구가 우주의 시작과 동시에 시작했다고 보
았지만 이들은 우주는 무한하고 영원하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은 젊은 지구 역사와 맞지 않았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지구 역사를 우주 역사와 분리하였다.
이 새로운 모델에 따르면 성경이 말하는 역사는 우주 전체보다는 인간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지
구상의 사건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영국 신학자 버어넷(Thomas Burnet, 1635-1715)도 데카르트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그는 <지구에 관한 거룩한 이론>(Sacred Theory of the Earth)에서 지구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명백히 거부하며 지구의 유한하고 짧은 역사가
거대한 우주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하였다.

16) Robert T. Pennock, <Tower of Babel, The Evidence against the New Creationism> (MIT Press, 2000), p.19.
17) Ronald Numbers, <The Creationists: From Scientific Creationism to Intelligent Design>, Expanded Editio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pp.21-23.
18) Numbers, <The Creationists: From Scientific Creationism to Intelligent Design>, pp.33-50, 82.
19) Numbers, <The Creationists: From Scientific Creationism to Intelligent Design>, p.58.
20) Numbers, <The Creationists: From Scientific Creationism to Intelligent Design>, p.82.
21) Nelson, <When Science & Christianity Meet>,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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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버어넷과 <지구에 관한 거룩한 이론>

버어넷의 이론을 필두로 지구의 역사에 대한 수많은 이론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 영국의 자
연학자이자 지질학자인 우드워드(John Woodward, 1665-1728)는 화석과 지층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으로 노아 홍수를 설명함으로써 성경의 문자적 해석의 범주를 넘었다. 이런 해석의 배후에는
당시 계몽주의적 지성의 수용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이것은 이전의 성경 외적 자료를 성경
해석에 적당하게 수용함으로써 의미 있는 것이 되게 한 것을 뒤집어서 성경해석을 성경 외적 자
료의 틀 내에 적당하게 수용함으로서 의미 있는 것이 되게 한 것이었다. 즉 과거에는 지구의 역
사에 대한 철학적, 역사적 이론이 성경의 원리에 의해 합당한 것인지가 평가되었으나 이제는 성
경의 원리가 다른 이론들에 의해 그 정당성을 확인받는 형편이 된 것이다.
나아가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노골적으로 반기독교적 우주론을 장려하였다. 그들은 지구
이론을 기독교 교리와 교회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어떤 이론도 검증되거나 명확한 과
학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구는 지금까지도 항상 동일한 자연법칙
의 지배하에 있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주장을 인간 역사에까지 확장, 적용시켰다. 그래
서 그들은 인간은 창조되지 않았고, 따라서 전통적 도덕과 사회적 강압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다
고 하였다.
이러한 반기독교적 우주론이나 인간 역사에 대한 해석은 지구 역사에도 적용되었다. 18세기, 화
석이 발견되는 지층보다 더 오래된 암석이 발견됨에 따라 성경에 기록된 노아 홍수는 상대적으로
최근 사건이 되었다. 홍수 지층 아래의 지층이나 암석은(요즘 용어로 선캄브리아기 지층) 창세기
에 기록되어 있지도 않았고 화석도 없으므로 인간 이전 지구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기록된” 사료가 없는 역사라는 새로운 종류의 역사학이 등장했다. 그리고 18
세기 자연주의자들은 인간의 유물보다 화석과 지층의 증거를 더 믿을만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로
인해 18세기 말, 사람들은 인간 이전의 지구 역사가 1만 년 혹은 10만 년 정도라고 생각하게 되
었다. 물론 이 때도 “영원한 우주론”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지구 역사를 터무니없이 길게 잡기
도 했지만 그런 사람들의 숫자는 소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성경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지구 역사를 길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성경비평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성경비평학 자체가 반기독교적인 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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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이 분야의 사람들은 성경 창조 기사의 문자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자


연의 증거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그들은 지구 역사의 시간은 종교적인 해석과는 무
관하며 오히려 그 속에서 인간의 의미를 찾는 것이 종교의 과제라고 보았다.

IV. 모세 지질학과 새로운 지질학

성경에 나타난 창조연대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지질학에서도 새로운 이론들이 등장했다. 먼저


종래의 노아의 홍수를 중심으로 제시된 모세 지질학을 살펴보자. 홍수 지질학이라고도 불리는 모
세 지질학은 16, 17세기 성경 연대기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서 지금도 창조과학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이들은 지구와 인류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기록으로부터 시작하여 화석이
나 암석, 지층 등을 연구하고 해석한다. 특히 지구 역사에 대한 현대 지질학이 점차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난해성을 띠어감에 따라 모세 지질학자들은 일반인들이 알 수 있는 언어로,
특히 기독교 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현대 지질학의 문제점들과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모세 지질학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1882년에 킨즈(Samuel Kinns, 1826-1903)가 출간한 <모세와
지질힉>(Moses and Geology), 캐나다 안식교 신자인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
1870-1963)가 출간한 <새로운 지질학>(The New Geology), 안식교가 시작한 창조과학운동을 개
신교계에 들여온 토목공학자 모리스(Henry M. Morris, 1918-2006)와 근본주의 침례교 신학자 윗
콤(John C. Whitcomb, Jr., 1924-2020)이 1961년에 공저한 <창세기 대홍수>(The Genesis Flood)
등을 들 수 있다.22)

그림 6 모세 지질학 혹은 홍수 지질학을 퍼뜨린 대표적인 책들

22) Samuel Kinns, <Moses and Geology: Or, the Harmony of the Bible with Science Thoroughly Revised, and
the Astronomical Facts Brought Up to Date, with a Special Preface> (Originally published in 1882, revised
and updated in 2015 from Arkose Press); George McCready Price, <The New Geology> (Pacific Press
Publishing Association, 1923); John C Whitcomb, Jr. and Henry M Morris, <The Genesis Flood: The Biblical
Record and Its Scientific Implications> (1961). 오늘날 모세 지질학, 홍수 지질학, 창조과학, 젊은 지구론 등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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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접어들면서 성경에 기초한 지질학이 아니라 야외탐사에
기초한 새로운 지질학이 등장하였다. 지질학자들은 세상의 기원에 대한 종교와 과학의 상반된 견
해에서 자신들을 분리한 채 객관적인 증거들을 연구하는 데만 몰두했다. 지질학자들은 전통적인
성경 연대기 학자들과는 무관하게 지질학을 연구했다. 그 결과 19세기에 들어와 지질학은 지구에
관한 많은 지식을 제공하게 되었다.23)
당시의 지질학은 지질학의 연구 범위를 분명히 했다. 즉 지질학은 비과학적인 것, 지구의 기원
이나 궁극적 운명, 인류의 역사와 기원 등은 아예 연구에서 배제하였다. 이들은 지구 나이와 그들
의 종교적 신념은 무관하다는 성경비평학자들의 견해를 수용하였다. 지질학자들은 화석으로만 출
토되고 지금은 사멸한 많은 생명체들을 연구하면서 성경에만 기초해서 해석하던 지구의 역사를
확장하고 대신 인류의 문명 역사를 축소시켰다.

V. 절대연대 측정법의 등장24)

지질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 되면서 자연스럽게 지구연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지질학자들은 지층에 근거한 상대적 연대를 결정할 수는 있었지만 절대적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20세기에 가까워지면서 물리학계에는 지구의 절대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들이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1896년 프랑스 물리학
자 앙리 베끄렐(Henri Becquerel, 1852-1908)의 방사능 발견이었다.25) 그는 방사능이 발견된 지
오래지 않아 사람들은 방사성 원소의 붕괴가 연대측정에 사용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림 7 베크렐과 방사능 원소의 붕괴

지각을 구성하고 있는 암석들은 많은 개별적인 결정들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결정은 서로


다른 원소들(철, 마그네슘, 실리콘)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원소들의 대부분은 자연 상태에서 안

23) Rudwick, <God & Nature>, Ch.12.


24) Martin J.S. Rudwick, “The Shape and Meaning of Earth History,” <God & Nature>, Ch.12.
25) “Henri Becquerel,” <Nobel Lectures, Physics 1901-1921> (Amsterdam: Elsevier Publishing Company, 1967).
베끄렐은 이 공로로 1903년 Pierre Curie, Marie Curie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cf.
https://www.nobelprize.org/prizes/physics/1903/becquerel/biograph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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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이고 변하지 않지만 몇몇 원소들은 방사능 붕괴라는 과정에 의해서 한 원소에서 다른 원소로
변해갔다. 원래의 모원소(parent element)가 자원소(daughter element)로 붕괴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감소한 모원소와 증가한 자원소의 비율에 의해 계산되었다. 방사성 동위원소는 일정하게
지수함수적으로 붕괴하기 때문에 연대 측정 과정에서 방사성 동위원소의 손실이나 첨가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면(대부분의 연대 측정법들은 방사성 동위원소의 손실이나 첨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들을 가지고 있다) 암석의 절대연대를 비교적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26)
수많은 방사성 동위원소들이 연대측정에 이용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믿을만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사성 동위원소는 몇 가지로 압축되었다. 일반적으로 암석의 연대를 측정하는데 사용되는
방법으로는 반감기가 긴 우라늄-납(Ur-Pb), 토륨-납(Th-Pb), 루비듐-스트론튬(Rb-Sr), 포타슘-아르곤
(K-Ar) 등의 방법 등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는 매년 수천 건 이상의 암석과 광물질들에 대한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이 잘 정립된 표준 과정을 따라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오랜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 영국의 물리학자 켈빈은 이미 1900년대 초반에 지질학적인 연대를 암석의
방사능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한정지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7) 그러나 암석의 방사성 동위
원소법의 폭넓은 사용은 20세기 중엽부터 본격화되었다.
방사능 동위원소를 이용한 지구의 연대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 제시하는 연대를 훨씬 넘었다.
그리고 암석들의 연대측정이 계속되면서 지구 연대는 계속 확장되어 갔다. 지구 연대가 점차 확
장되면서 오래 지구 연대는 중요한 원군을 하나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19세기 중엽에 본격
적으로 시작된 다윈의 진화론이었다. 진화론자들은 진화가 천천히 일어난다고 가정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양한 생명세계가 출현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매우 오랜 연대
가 필요했다. 그런데 바로 그 중요한 근거를 지질학이 제공해 준 셈이었다.
서로 다른 여러 가지 방사능 연대측정 기술들은 지구가 오랜 시간 전에 만들어졌다는 일관된
증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아직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방사능 연대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들은 여전히 창세기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창조주간을 현재의 태양일 하루로
해석하고 성경의 족보에 나온 인물들의 수명을 더해서 지구와 인류의 나이는 10,000년을 넘지 않
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방사능 연대측정법이 제시하는 46억 년의 지구연대는 진화론과 동의어
라고 생각한다.28)

VI. 인류의 오랜 연대와 선아담 인류(Pre-Adamites) 논쟁

지구나 우주의 창조연대에 대한 논쟁이 먼저 시작되었으나 이 논쟁은 불가피하게 인류의 기원


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29) 17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류는 6,000여 년 전에

26) 방사성 원소의 붕괴는 핵의 변환이므로 온도나 압력 등 외적인 요인에 의해서 붕괴속도가 별로 변화하지 않
았다.
27) 양승훈, <창조론 대강좌>, 개정 2쇄 (예영, 2013), 제12장 참고.
28) 방사능 연대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위튼 대학 졸업생으로서 방사능 연대측정을 전공한 Roger C. Wiens가 일반
인들을 위해 알기 쉽게 쓴 “Radiometric Dating: A Christian Perspective”을 참고하라. 이 논문은 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Home Page에 실려 있다. 국내 문헌으로는 양승훈, <창조연대 논쟁: 젊은 지구론, 무엇이
문제인가?> (서울: SFC, 2017)을 보라.
29) Nelson, <When Science & Christianity Meet>, Ch.7. 국내 문헌으로는 양승훈, <인류의 기원과 역사적 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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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된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생각을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1850년대 후반까지만 해


도 지구나 우주는 수백만 년 이상 오래되었다는 증거가 많았지만 인류의 연대가 6,000년 이상 되
었다는 증거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종의 기원>의 발표를 전후하여 인류의 기원과 관련된 성경
의 문자적 해석, 문자적 해석에 기초한 창조연대도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30)

1. 라페이레르의 선아담인류론

먼저 과학혁명이 진행되던 시기에 살았던, 유대인이자 프랑스 개신교도 목사였던 라페이레르


(Isaac de La Peyrere, 1596-1676)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는 1655년에 라틴어로 출간된 <아담 이
전의 사람들>(Prae-Adamitae, 1656년에는 Men before Adam 제목으로 영어판 발행)이라는 저서
를 통해 아담과 하와는 첫 인간이 아니며 다만 유대인들의 조상일 뿐이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제
시했다. 그는 구약은 오직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 이외의 이방 민족들은 아담
과 하와보다 먼저 창조되었다고 했다.

그림 8 라페이레르와 그의 책

아담 이외의 인류가 존재했다는 주장은 가인과 아벨이 아담과 하와의 유일한 자녀들이었다고
할 때 가인이 어디서 아내를 얻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또한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추방당한
후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했던 사람들, 즉 성경에 등장하는 놋 땅에 거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를 설명할 수 있다.
이 주장은 그 후에도 이따금 지지자들을 모았으며, 자연스럽게 인류의 다중기원론(Polygenism)
으로 이어졌다. 스코틀랜드 귀족이자 식자(man of letters)였던 홈(Henry Home)은 1774년에 출간
한 <인류의 역사에 관한 스케치>(Sketches of the History of Man)에서 모든 인종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이 살고 있는 기후와 환경에 적합하게 독립적으로 창조된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던 단일기원설을 반박하는 주장이었다. 단일기원설에 의하면 모든 인류는
한 조상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후에 다른 환경과 기후가 있는 곳으로 이주했을 때 그 기후와 환
경에 맞게 적응했다는 주장이었다.31)

(서울: SFC, 2021)을 참고하라.


30) Nelson, <When Science & Christianity Meet>,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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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세기의 선아담 인류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선아담 인류와 인류의 다중기원설은 좀 더 많은 전문학자들에 의해 제시


되었다. 특히 <종의 기원>이 출판되던 1850년대부터 과학자들에 의해 인류의 기원과 인류의 연
대에 대하여 종래의 성경의 가르침을 반박하는 주장들이 본격적으로 제시되기 시작했다. 아래에
서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첫째, 하버드 대학의 동물학 교수인 애거시즈(Louis Agassiz)였다. 1850년, 애거시즈는 대중 종
교 잡지인 <Christian Examiner>에 쓴 글에서 하나님이 각 지역마다 인종을 따로 창조하였으며,
그러므로 대부분의 민족들은 “아담과 하와에게 연결되지 않는다”(not related to Adam and Eve)
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제시했다.
둘째, 영국의 유명한 지질학자인 라이엘(Charles Lyell)이었다. 1863년, 라이엘은 <인간이 오래되
었다는 지질학적 증거>(Geological Evidences of the Antiquity of Man)라는 책에서 인류는 6,000
여 년 전에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다는 일반적인 상식보다 훨씬 오래 전에 출현했다는 과학적
증거를 제시했다. 이런 책들은 1871년, 다윈의 <인류의 유래>(Descent of Man)가 출판되기 훨씬
이전에 진화론적 인간관이 출현할 수 있는 길을 닦았다.32) 이 책에서 다윈은 본격적으로 인간의
오래됨(antiquity)과 통일성(unity)을 제시하였다. 그는 인류의 단일기원설을 지지하였다.
선아담 인류설은 후에 인류의 진화와 인류의 오래됨을 인정하는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수용
되었다. 예를 들면 프린스턴 대학(Princeton College)의 교수 쉴즈(Charles Woodruff Shields,
1825-1904), 그의 신학교 동료인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1921), 성경무오설
의 열렬한 옹호자였고 단일기원적 선아담 인류론(monogenetic preadamism)을 받아들였던 토레이
(Reuben A. Torrey, 1856-1928) 등은 현대 고고학과 인류학의 발견물들을 엄격한 성경해석과 조
화시킬 수 있는 한 방법으로서 선아담 인류론을 받아들였다.33)

그림 9 선아담 인류설을 받아들인 신학자들. 좌로부터 쉴즈, 워필드, 토레이

31) Nelson, <When Science & Christianity Meet>, p.165.


32) <인류의 유래> 원문 참고: http://www.infidels.org/library/historical/charles_darwin/descent_of_man/index.shtml
33) Nelson, <When Science & Christianity Meet>,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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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국에서 인류의 다중기원설과 흑인 인종차별

영국과 프랑스 학자들을 중심으로 인류의 다중기원설은 시작되었으나 후에 이 이론을 가장 열


렬하게 받아들인 것은 미국인들이었다. 미국에서의 다중기원설은 소위 “아메리칸 인종학
파”(American School of Ethnology)로 알려진 몰톤(Samuel G. Morton, 1799-1851), 글리돈
(George R. Gliddon, 1809-1857), 노트(Josiah C. Nott, 1804-1873), 애거시즈(Louis Agassiz,
1807-1873) 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연구되었다.34)
미국이 다중기원론에 특히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흑인들에 대한 차
별과 관련이 있었다. 남북전쟁(Civil War)으로 인해 노예제도는 사라졌지만 백인들의 인종적 우월
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의 대표적인 한 예가 내쉬빌(Nashville) 출신의 백인 목사이자 인종차별
주의자인 페인(Buckner H. Payne, 1799-1889)이었다.
페인은 1867년, <흑인: 그들의 인종적 지위는 무엇인가?>(The Negro: What is His Ethnological
Status?)라는 소책자를 통해 아프리카 흑인들은 열등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 가까운 유인원
(subhuman)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의 히브리 원문을 자세히 해석한 것을 자신의 어설픈 과학
지식과 결합시켜 아프리카에서 온 미국인들의 지위가 더 높아지게 되면 사회적, 정치적 재난이
닥칠 것이라고 주장했다.35)

그림 10 페인의 인종차별주의 책들

페인은 성경의 창조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흑인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하나인 함(Ham)의 자손


이 아니며, 따라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흑인들은 아담과 하와 이전에

34) Nelson, <When Science & Christianity Meet>, pp.166-181.


35) 이 책은 얇지만 원 제목은 매우 길다: Buckner H. Payne, <The Negro: what is his ethnological status? Is he
the progeny of Ham? Is he a descendant of Adam and Eve? Has he a soul? Or is he a beast in God's
nomenclature? What is his status as fixed by God in creation? What is his relation to the white race?>
(Cincinnati, Published for the Proprietor,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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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흑인들은 노아의 홍수 때 방주에 탔던 동물들로부터 유래했기 때문


에 동물계(animal kingdom)에 속해 있으며, 영혼(soul)이 없다고 믿었다. 그는 흑인이 원숭이와 유
일하게 다른 점은 그들이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그는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했던
“뱀”(serpent)이 바로 흑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에덴동산의 다른 동물들은 말을 할 수 없었기 때
문이라고 했다.
페인은 “진짜 인간”(true humans)이 흑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 것(interbreeding)은 용서받
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혹독하게 처벌하실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노
아의 홍수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함으로 인해 노아의 홍수라는 재앙이 왔
듯이 만일 미국 정부가 자연과 하나님의 명령에 반하여 흑인들에게 정치적 평등권을 부여한다면
미국을 반드시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경고했다. 물론 이러한 페인의 주장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글리돈과 노트의 글과 주장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백인 우월사상에 심취되어 한평생 흑인들을 증오하고 살았던 페인은 1879년 테네시 주 데이비
슨 카운티의 보호 시설(an asylum in Davidson County, Tennessee)에 수용되었다가 1889년 90세
의 나이로 가난하고 맹인이 된 채 죽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테네시 주 내슈빌에 있는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Mount Olivet Cemetery in Nashville, Tennessee)에 나사가 없는 사각 목재 상자
(lumber square box without screws)에 담겨 매장되었다.36)

4. 도전 받는 인류의 연대

선아담 인류와 인류의 다중 기원론에 더하여 그 동안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연대도 도전


받기 시작했다. 1858년, 영국 남부의 브릭스햄 동굴(Brixham Cave)에 대한 발굴 결과는 인류의 연
대가 오래되었다는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했으며, 1860년까지, 지도적인 과학자들은 한 때 인류는
지금은 멸종한 동물들 중에 살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비록 인류의 연대는 정확하게 결정되지 않
았지만 적어도 성경의 6,000년보다는 오래되었으며, 아담과 하와의 창조보다 오래되었을 수 있다
고 생각했다.37) 이와 같은 인류의 기원에 대한 과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반
응은 다양했다.
우선 이미 아담과 하와를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 신화적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던 자유주의자들
(liberals)은 인류의 연대가 오래 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보수적인(conservative) 기독교인들은 인류의 연대를 확장하는 것은 과학이 신학의 영역을 침해하
는 예라고 생각하며, 고고학자들이 발굴물들의 연대측정법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몇몇 정통
(orthodox)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인류의 역사를 6000년으로 한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고고
학적 발굴 결과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선아담
인류론조차 과학과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조화시키는 데 사용하였다. 이들은 창세기 1장 1절과
에덴동산 사이에는 아담과 하와가 아닌 다른 초기 인류들이 살았다고 주장했다.38)
이러한 조화를 시도했던 대표적인 초기의 한 사람은 존경받는 경건한 감리교도이자 지질학자였

36) https://en.wikipedia.org/wiki/Buckner_H._Payne
37) Nelson, <When Science & Christianity Meet>, p.178.
38) Nelson, <When Science & Christianity Meet>, p.306에 있는 각주 40의 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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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윈첼(Alexander Winchell, 1824-91)이었다. 그는 많은 논문들을 통해 현대과학을 기독교적인 관


점에서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다른 경건한 과학자들과 같이 다윈의 철저한 자연주의적 진화
론을 배격하고 대신 하나님이 자연의 법칙을 통해 생물들의 진화를 인도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류의 출현을 설명하는 데도 역사적 아담을 유대인의 가장 오랜 조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진화론
을 받아들였다.39)

그림 11 윈첼과 <선아담 인류>

윈첼은 <선아담 인류; 혹은 아담 이전에 인류가 존재했다는 것의 증명>(Preadamites; or, A


Demonstration of The Existence of Men before Adam)이라는 책을 통해 니그로족은 선인류 아
담에 속하며 흥미롭게도 코카시안족들도 니그로 조상들로부터 발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아담
인류론이 과학적으로 정확하고(correct), 성경적으로도 보증되며(warranted), 신학적으로도 건전하
다고(sound) 생각했다.40)
미국에서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이런 여러 논쟁들이 뜨거웠던 배경에는 19세기 미국의 인종차별
논쟁과 무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위해 여러 과학적 증거들을 제시했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비과학적” 이데올로기들을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예를 들면 17세기 프랑스 출신의 신
학자 페이레르(Isaac de La Peyrere, 1596–1676)는 유대인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프린스턴
대학(전 College of New Jersey)의 7대 총장이었던 스미스(Samuel Stanhope Smith, 1751-1819)는
자신의 정치이론을 지지하기 위해, 미국 외과의사이자 인류학자 노트(Josiah Clark Nott,
1804-1873)는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을 방어하기 위해, 앞에서 언급한 페인(Buckner H. Payne)은
흑인평등권을 반대하기 위해 인류의 다중기원설을 주장했다.41)

39) Nelson, <When Science & Christianity Meet>, pp.179-180. p.306에 있는 각주 41의 내용 참고.
40) Alexander Winchell, <Preadamites; Or, a Demonstration of the Existence of Men Before Adam: Together
with a Study of Their Condition, Antiquity, Racial Affinities, and Progressive Dispersion Over the Earth>
(1880). 근래에 Amazon을 통해 전자책을 구입할 수 있다.
41) Nelson, <When Science & Christianity Meet>,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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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좌로부터 페이레르, 스미스, 노트

VII. 19세기 지질학과 창세기 해석

18-19세기를 지나면서 창세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더불어 지구와 인류의 기원, 창조연대, 인
종의 기원 등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은 결국 근대적 지질학의 등장과 창세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
으로 이어졌다. 아래에서는 먼저 과학혁명기 동안 제시되었던 베이컨의 절충안을 살펴보고 이어
비평적 성경해석학의 등장을 소개한다.42)

1. 베이컨적 절충안43)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이전의 철학자들은 자연과 성경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단일 교재(text)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과학혁명기에 이르러서는
혁명의 여러 주역들은 자연과 성경은 서로 다른 두 권의 교재라고 보았다. 이에 대한 베이컨은
<학문의 진보>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사실 한권이 아니라 두 권의 책을 쓰셨다. 물론 우
리 모두는 첫 번째 책, 즉 성경에 더 익숙하다. 그러나 그 분은 자연이라고 하는 두 번째 책도 쓰
셨다.”44)

42) James R. Moore, “Geologists and Interpreters of Genesis in the Nineteenth Century,” <God & Nature>,
Ch.13.
43) Moore, “Geologists and Interpreters of Genesis in the Nineteenth Century,” <God & Nature>, Ch.13.
44) “God has, in fact, written two books, not just one. Of course, we are all familiar with the first book he
wrote, namely Scripture. But he has written a second book called creation. from ”Francis Bacon,
<Advancement of Learning> (1605) 전체 제목은 “Of Proficience and Advancement of Learning Divine and
Huma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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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3 베이컨과 <학문의 진보>

흔히 “두 책 이론”(the doctrine of two books)으로 알려진 이 입장을 지지한 베이컨은 “자연은


성경에 대한 열쇠이다. 하나님의 솜씨가 나타난 책(자연)을 공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
록된 책(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했다.45) 그는 진정한 지식은 피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전능함을 나타내며 신앙으로 인도한다고 보았다. 자연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고 보았다. 그러나 거꾸로 자연을 성경에 맞추려는 시도는 “이 지
식들을 어리석게 혼합 또는 혼동하는 것이다”고 봤다.
베이컨의 “두 책 이론”은 신학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전능하심, 성경의 참 뜻, 타락에 의한 지적
능력의 훼손이라는 개념들을 정당화 해주고,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을 해석하는 사
람들로부터의 자유를 허락해주는 일종의 정치적인 절충안이었다. 이 베이컨적 절충안(The
Baconian Compromise)은 베이컨 이후 근 200여 년 간 받아들여졌다.
예를 들면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탈피하여 스코틀랜드 지질학자 허튼(James Hutton,
1726-1797)은 오래된 지구를 주장하였다. 이에 비해 스코틀랜드 목사이자 신학자 차머스(Thomas
Chalmers, 1780-1847)는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긴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는 간격이론(Gap
Theory)을 주장하였다. 또한 프랑스 가톨릭 지질학자이자 해부학자인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는 지구역사에서 노아의 홍수 한 차례만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격변이 있었다는 다중
격변설(Multiple Catastrophic Theory)을 주장했다. 이에 비해 스코틀랜드 기독교 광물학자 제임슨
(Robert Jameson, 1774-1854)과 영국 신학자 버클랜드(William Buckland, 1784-1856)는 최근의
격변은 바로 노아의 홍수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어색한 분리는 결국 신학자들로 하여금 지질학
적 결과들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였고, 지질학자들로 하여금 창세기의 과학적 의미의 경계를 정

45) “두 책 신학”의 핵심인 “자연의 책”(librum naturae) 개념은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에서부터 나타난다. “교
부들 중에서도 자연의 책(the Book of Nature)이라는 말을 명시적으로 사용한 사람들로는 성 바실(St.
Basil), 성 그레고리 닛사(St. Gregory of Nyssa),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존 카시안(John Cassian), 성
존 크리소스톰(St. John Chrysostom), 성 에프렘 시리안(St. Ephrem the Syrian), 성 막시무스 컨페서(St.
Maximus the Confessor)가 있다.” - cf. "The two books prior to the scientific revolution," <Perspectives
on Science and Christian Faith> (2005): 4-5. Link: http://inters.org/tanzella-nitti/pdf/9.TwoBooks.pdf ; 근대에
들어와서 “두 책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사용한 사람으로는 베이컨과 더불어 갈릴레오를 들 수 있다: Galileo,
“Letter to the Grand Duchess Christina of Tuscany” (1615), Verses 272-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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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논쟁을 촉발하게 하였다.

그림 14 상좌로부터 시계방향으로 허튼, 차머스, 퀴비에, 제임슨, 버클랜드

2. 비평적 성경해석학의 등장과 전문가들의 불일치

19세기에 들어오자 베이컨의 절충안에서 과학의 입김이 점차 강해졌다. 이는 종래 성경이 과학


을 해석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데서 나아가 점차 학문적인 틀 속에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자연주
의자들의 움직임이 강하게 대두하였음을 의미한다.46) 이와 관련하여 신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두 가지 조류가 있었다.
첫째는 “과학적 해석학”(scientific hermeneutics)이었다. “과학적 해석학”에서는 객관적이고도 보
편적인 해석을 중시했다. HOW가 중요하지 WHO는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과학적 해석학”의
대표자로서는 독일 개신교 신학자이자 성경학자인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를 들 수 있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해석을 위해 그는 텍스트를 해석할 때 “문법적
해석”(grammatical interpretation)과 “심리적(혹은 기술적) 해석(psychological (or technical)
interpretation)”을 분리했다. 그는 문법적 해석은 텍스트의 언어를 다루는 것이고 심리적 해석은
저자의 사상과 목표를 다루는 것이라고 보았다.47)
둘째, “비평적 해석학”(critical hermeneutics)이었다. 이는 창세기 해석은 누가 해석하느냐에 따

46) Moore, <God & Nature>, Ch.13.


47) Friedrich D.E. Schleiermacher, <Hermeneutics and Criticism> edited by Andrew Bowie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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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그 방법까지 전적으로 결정된다는 견해이다. 이 이론에서는 창세기 해석의 궁극적인 논점은


이야기의 사실성, 성경의 영감 교리, 창조, 타락, 홍수 등에 근거한 신학 체계가 아니라 창조되고
타락한 인간 본성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신학계에서 일어난 운동과는 별개로 근대적 지질학의 등장은 성경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지질학과 신학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이 불일치하게 된 것이었다.48) 흥미롭게도 19
세기에 들어와서 창세기 해석권을 처음 주장했던 그룹은 지질학자들이었다. 19세기 초, 런던왕립
학회 회원이었던 영국 라이엘(Charles Lyell)은 자신의 저서 <지질학 원리>(Principles of Geology)
를 통해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만이 전문가적인 지질이론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노아 홍수
에 근거한 격변설(catastrophism) 지질학을 버리고 다시 지질학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하였
다. 그는 자연을 통해 지구 역사를 연구했던 지질학자이자 자유주의적 기독교인으로서 “지질학의
물리적인 부분은 마치 성경이 세상에 없는 것처럼 간주하고 연구되어져야 한다”고 했다.49)

그림 15 라이엘과 <지질학 원리>

라이엘의 견해는 성경을 통해 지구 역사를 해석했던 영국의 신학자이자 지질학자였던 버클랜드


(William Buckland), 지질학자이자 성직자였던 코니베어(William Conybeare, 1787-1857), 지질학자
이자 성직자였던 세지윅(Adam Sedgwick, 1785-1873) 등 성직자들의 전문가적 의견과 전적으로
달랐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 미국 등에서는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성직자들에 대
한 성경해석학 분야의 “전문적 교육”을 위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50)

3. 독일의 성경 비평학

영국 상황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전임 성직자들이 목회에 대한 부담 없이 학문에만 열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정부에 고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나 영국과는 달리

48) Moore, <God & Nature>, Ch.13.


49) Charles Lyell, <Principles of Geology: Being an Attempt to Explain the Former Changes of the Earth's
Surface, by Reference to Causes Now in Operation> (London: John Murray, 1830-1833). It was a 3-volume
book: Vol 1 in Jan. 1830, Vol 2 in Jan. 1832, Vol 3 in May 1833.
50) Moore, <God & Nature>, Ch.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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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에 묶이지 않는 학문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할레(Halle), 괴팅겐(Göttingen), 베를


린(Berlin) 대학 등에서는 구약성경이 목회와는 무관하게 비판적이면서 전문가적으로 연구되기 시
작하였다. 한 예로 아이크혼(Johann Gottfried Eichhorn, 1752-1827)은 창세기 앞부분을 분석하면
서 현대 비평 운동과 고등 비평을 시작하였다.51)
19C 초반 독일에서는 영국과 미국에서 지질학을 연구하는 것 같이 창세기를 비평적, 전문적으
로 연구하였다. 이제는 창세기 연구는 지질학 연구와 유사하게 되었다. 독일로부터 이런 구약 해
석학적 방법과 지식, 정신은 영국과 미국의 창세기 해석에도 영향을 끼쳤다.
영국에서는 전문적인 과학자들과 광교회신자들(A. Sedwick, W. Whewell, Peacock, Stanley, B.
Jowett...)이 연합하여 독일화에 앞장서며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육과정 개혁에 참여하
기도 했다.52) 옥스퍼드 대학의 조윗(Benjamin Jowett, 1817-1893)과 같은 사람은 “성경을 여느 다
른 책들처럼 해석하라”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식 학문 전통과 슐라이에르마허를 따라서 성경은 반
드시 경험적, 현실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라이엘이 자연이라는 책에 대해서 경험
주의적, 현실주의적, 전문가적 해석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듯이 조윗은 성경을 같은 방법으로 해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라이엘은 자연의 책에게, 조윗은 성경에게, 경험적이고 현실적이며 전문
가적 해석을 제시하였다.
이런 영국의 분위기는 미국에도 일어났다. 그래서 1870년대 후반 미국 동부의 주요 신학교들과
대학들에서는 독일식 구약 연구가 도입되면서 비평신학이 들어오게 되었다. 비평신학이 들어오면
서 지질학과 창세기 해석학은 “분업화” 되기 시작했다. 이제 성경과 자연은 전문적으로, 분리하여,
공통의 방법론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질학자들과 창세기 해석자들은 더 이상의 베이컨
적 절충안이 불필요하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자유롭게 협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4. 위기에 처한 베이컨적 절충안

베이컨적 절충안은 양자가 같은 목적을 추구하던 19세기 초까지는 공존하며 널리 받아들여졌


다. 하지만 성경과 무관하게 자연만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자연주의자들(naturalists)이 등장하면서
베이컨적 절충안은 위협을 받게 되었다. 결국 베이컨 이래 200여년 간(1630-1830) 지속되던 “두
책 이론”은 해체되었고 지질학과 창세기 해석학은 “분업”을 하게 되었다.53)
지질학은 창세기 해석학보다 20, 30년 빨리 전문화가 이루어졌다. 이 기간 동안 “성경적” 지질
학자이자 창세기 해석자였던 스튜어트(Moses Stuart, 1780-1852), 코크번(W. Cockburn,
1773-1858) 등과 창세기와 지질학의 조화론자이자 구세대 지질학자였던 버클랜드(William
Buckland, 1784-1856), 코니베어(William D. Conybeare, 1787-1857), 맨텔(Gideon Mantell,

51) Moore, <God & Nature>, Ch.13.


52) 영국 성공회에는 크게 세 가지 흐름이 있다: (1) 교회의 권위와 질서, 가시적 일치, 전례와 성사를 중시하는 고
교회파(High Church); (2) 이와는 달리 종교개혁 전통에 따라 성령에 의한 개인의 회심, 성경의 최우위성, 복음
적 설교, 이신칭의 등을 강조하면서 청교도적, 복음주의적 전통을 강조하는 저교회파(Low Church); (3) 통합적
인 국민 교회의 성격을 강조하면서 성서비평학과 신학적 자유주의를 적극 수용하고, 신앙의 본질과 권위를 협
소하게 이해하는 태도들을 비판하며, 사회와 문화에 대한 복음의 적응성을 강조하는 광교회파(Broad Church).
cf. <교회사대사전> I권 (서울: 기독지혜사, 1994), 137면. <교회사대사전> II권, 635면.
53) Moore, <God & Nature>, Ch.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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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1852) 등이 등장하여 베이컨의 절충안을 무시하였다. 목사나 언어학자, 골동품 수집가들이


많았던 성경적 지질학자들은 주로 라이엘의 주장과 같은 과격한 주장 때문에 자극을 받아 성경을
근거로 지구 역사를 연구했다. 그들은 지구 역사를 주로 창세기만으로 해석했으며 가끔 지질학적
사실들을 예로 드는 정도였다.

그림 16 좌로부터 버클랜드, 코니베어, 맨텔

반면 전문 지질학자들이자 성직자들이 대부분이었던 조화론자들은 자신들의 연구 결과와 조화


를 이루도록 창세기를 얼마든지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조화론자들은 비록
성경이 과학적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진술들은 언제나 지질학 이론들과 조화된
다고 해석했다. 이들에게는 지질학이나 성경해석학은 둘 다 각기 거룩한 하나님의 책을 연구하는
것이므로 진정한 과학과 진정한 종교는 쌍둥이 자매였다. 하지만 조화론자들이 활동하던 이 시기
(1830-1860)는 베이컨적 절충안이 위기를 맞고 있던 시기였다.
조화론자들의 시기에서 전문가들이 지배하는 시기로 넘어가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다
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이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작은 변화가 꾸준히 쌓여 지질학
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은 다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지질학
이론을 담은 <지질학 원리> 1권이 출간되자 라이엘은 이 책을 비글호(HMS Beagle) 선장 피츠로
이(Robert FitzRoy, 1805-1865)에게 주었고, 피츠로이는 이 책을 1831년 12월 비이글호 항해를 시
작하기 직전에 박물학자의 자격으로 비이글호에 승선하게 된 22세의 다윈에게 주었다. 또한 다윈
은 1832년에 출간된 <지질학 원리> 2권을 비이글로 항해를 하는 도중에 들렀던 남아메리카에서
받았다. 다윈은 비이글호 항해 도중에 이 책들을 탐독하면서 더불어 지질 탐사를 했고, 라이엘의
동일과정설 아이디어에 매료되었다. 다윈의 생각은 비이글로 항해를 마치고 출간한 몇 권의 책으
로 출간되었지만 역시 그의 역작은 1859년에 출간된 <종의 기원>이었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후 시간이 지나면서 지질학 연구에서는 자연주의자들이 점차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54) 성경의 도움 없이도 지질학 연구에 큰 어려움이 없게 되면서 조화론자들의
주장은 힘을 잃게 되었다. 또한 초창기 조화론자들이었던 맨텔, 제임슨(Robert Jameson), 버클랜
드 등이 세상을 떠나자 조화론은 점차 아마추어 이론으로 전락했다. 전문가들은 비전문가들의 반
대에 대처하기 위해 <Essays and Reviews>라는 책과 더불어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에 자극을 받아 1865년에는 성경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빅토리아 연구소”(Victoria

54) Moore, <God & Nature>, Ch.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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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itute)가 설립되었다.55) 쿠퍼(Anthony Ashley Cooper, 1801-1885)를 초대 총재로 선출한 빅토


리아 연구소는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을 취했으나 진화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다
수의 지질학이나 성경해석학 분야의 전문학자들은 이미 “사이좋은”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들은 연합하여 창세기를 태초에 대한 “원시적인” 설명으로 간주했다.

VIII. 진화론에 대한 세 가지 반응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자연에 대한 설명에서 성경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된 배경에는 여러 요소


가 있었지만 그 중심에는 역시 다윈이 1859년에 출간한 <종의 기원>이 있었다. 이 책은 발간되
자마자 동물학자, 식물학자, 지질학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과학자들도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었
다.56) 그리고 철학, 종교, 인간의 본성, 우주의 형성 등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발표되기 시작하
였다. 그러나 이들은 학문적인 엄밀함을 갖춘 업적들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입장을 가
졌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들의 전통 “사상”이었다.57)
사상이란 모두 “그 시대의 자식”이듯이 다윈의 사상 역시 1859년 전후 서구의 종교적 사상 속
에서 나온 것이다. 1859년을 전후한 시기에 다윈과 과학자들의 종교적 입장의 관계는 크게 다음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그룹은 다윈의 반대자들이다.58) 이 입장의 대표적인 인물은 캐나다 노바 스코시아 출신의
장로교인이며 19세기 캐나다를 빛낸 두 명의 지질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도손(Sir J. William
Dawson, 1820-1899)이었다. 그는 1840년에 에든버러 대학(University of Edinburgh)에서 지질학을
공부하였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그만 두었다. 그 후 광산 등에서 일을 하면서 그는 끊임
없이 지질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1854년, 그는 맥길 대학(McGill College)의 교장이 되었으며, 여
기서 지질학, 고생물학 등을 가르쳤다. 1859년 이전부터 종교와 과학을 종합하려고 노력했던 도손
은 종교적으로는 물론 과학적으로도 다윈의 사상에 반대하였다.

그림 17 도손(좌)과 애거시즈

55) 1865년에 설립된 “The Victoria Institute”의 목적은 “성경이 계시한 위대한 진리”(the great truths revealed in
Holy Scripture)를 거짓된 과학으로부터 지키기 위함이었다.
56) A. Hunter Dupree, “Christianity and the Scientific Community in the Age of Darwin,” <God & Nature>,
Ch.14.
57) Dupree, <God & Nature>, Ch.14.
58) Dupree, <God & Nature>, Ch.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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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다른 중요한 반대자로는 스위스 프랑스어권에 살다가 1846년에 미국으로 이민 온 애거


시즈(Louis Agassiz, 1806-1873)를 들 수 있다. 그는 이민 오기 전부터 이미 유럽에서 잘 알려진
학자였기 때문에 이민 온 후에는 유럽과 미국 등 양 대륙 모두에서 영향력이 컸다. 그는 창조자
는 물질을 가지고 실제로 어떤 것을 창조하기보다는 다만 계획만을 생각하므로 자신의 창조사역
을 했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관념론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다윈의 사상을 반대하는 운동
을 폭넓게 전개하였다. 노예제도와 관련하여 그는 “흑인과 말레이 사람들은 노아의 후손이 아니
다”라고 주장하여 당시의 기독교 진화론자였던 그레이(Asa Grey, 1810-1888)와 대립했다.
둘째 그룹은 기독교인이면서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였던 기독교인 다윈주의자들이었다.59) 대
표적인 예로 하버드 대학의 식물학 교수 그레이를 들 수 있다. 그는 <생리학과 동물학, 인간의 자
연사 강좌>(Lectures of Physiology, Zoology, and the Natural History of Man)의 저자 로렌스
(William Lawrence, 1783-1867)의 영향을 받았다. 다윈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로렌스
의 책은 과학으로부터 기적을, 생리학으로부터 영혼을 제외시켰다. 그레이는 18세기 합리주의, 정
통종교에 대한 불신, 로렌스에 대한 영국 법정의 압력 등에 불만을 품고 유물론자로, 그리고 교권
반대주의자로 살았다. 그는 다윈과 더불어 경험주의, 자유주의 등의 사상적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그림 18 좌로부터 로렌스와 <생리학과 동물학, 인간의 자연사 강좌>, 그레이

구체적인 연구에 있어 그레이는 식물분류학에 힘썼다. 그는 종의 불변을 믿었으며 이러한 고정


된 종들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자연선택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연의 과학적,
종교적 원인을 계속 추구하면 언젠가 일관된 진화, 자연선택, 형이상학적, 신학적 입장이 합쳐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과학과 종교를 연결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다윈주의에 관련된 그의 글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자연선택과 연결시키려고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진화과정은 그 자
체가 생물계를 향한 창조주의 계획이었고 방법이었다. 다윈 이후에 과학과 종교가 단절되어 그
영역의 독자성을 주장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과학과 종교를 연결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하였
다.
세 번째 그룹은 불가지론과 기독교 상징주의를 받아들였던 사람들이었다.60) 앞에서의 노력과는

59) Dupree, <God & Nature>, Ch.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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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적으로 과학에서 종교의 역할을 제거하고 계시에 근거하여 종교가 진리의 중재자가 되는 것
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헉슬리(Thomas H. Huxley, 1825-1895)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
는 과학이 종교적인 계시를 완전히 대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실증주의 과학의 영향으로
급속히 확산되었고 결국 창조자가 활동할 수 있는 초월적 영역을 제거하였다. 1860년 옥스퍼드
논쟁에서는 다윈의 대변자로 나서서 진화론을 옹호하였으며, 이로 인해 그는 “다윈의 불독”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의 손자였던 줄리안 헉슬리(Julian Sorell Huxley, 1887-1975) 역시 유명한 진화
론자로 활동하였다.

그림 19 좌로부터 다윈, 토마스 헉슬리, 줄리안 헉슬리

하지만 흥미롭게도 헉슬리와 동시대 사람이며 진화론자였던 다윈은 몇 가지 점에서 헉슬리와


달랐다. 다윈은 신약을 믿지 않았지만 전통적 자연신학의 신적 디자인에 대한 개념은 갖고 있었
다. 그는 진화의 메커니즘으로서 라마르크의 자연선택을 도입하였으나 과학과 종교의 통합에 대
해서는 부정적이 아니었다. 그가 죽기 3년 전인 1879년 5월 9일에 그레이, 헉슬리, 그리고 자신의
입장을 동시에 밝힌 편지를 썼다: “한 사람이 열렬한 유신론자이면서도 진화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나의 판단은 자주 흔들린다...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
는 의미에서의 무신론자는 결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나의 마음의 상태를 가장 정확히 표현하자
면 나는 불가지론자이다.”
다윈의 이론에 대한 이런 다양한 반응 가운데서도 진화론은 교회 내로 점차 스며들었다.61) 도
손은 1859년 이전에 영향력이 있었고 애거시즈의 관념론적 영향은 잠시였지만 그레이는 미국 교
회나 대학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기독교 지성계에 다윈의 진화론 개념을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900년까지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과학에서 계시의 영역을 제
거하는데 일생을 보낸 헉슬리였다. 2차 대전 후 과학과 종교를 조화시키려는 노력도, 신학적 문제
와 성경적 설명에 대한 숙고도 거부한 채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전쟁”으로 몰고 갔던 것은 바로
헉슬리의 유산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국 과학 그 자체를 종교화하는 데로 인도하였다.
진화의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진화론은 우주의 시작과 끝, 인생의 의미에 대한 얘기를 해
주지 못한다. 또한 과학은 명료한 설명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사상적 풍성함과 인생

60) Dupree, <God & Nature>, Ch.14.


61) Dupree, <God & Nature>, Ch.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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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궁극적 진리는 이끌어내지 못한다. 헉슬리가 비판한 종교에서의 절대적인 권위주의를 상기한
다면 다윈 이후 세계는 과학에서 새로운 절대적인 권위주의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곳곳에서 과학의 이름으로 우리의 삶에 파고드는 과학주의라는 새로운 권
위주의의 횡포를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진화론 논쟁에서 볼 수 있
다.

IX. 진화론의 등장과 교회의 반응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되었을 때 몇몇 학자들은 다윈의 영향을 과대평가하여 종교적 위협


으로 보기도 하였지만 일부 영국 국교도들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진화론을 거부할 수 있는 것
으로 생각했다. 다윈의 종교적 위협의 심각성은 생각보다 늦게 인식되었다. 이는 1859년 전에도
이미 자연과학은 초자연적, 성경적 관점에 반대하여 신앙을 재평가하게 하였고, 독일에서도 소위
과학적 유물론자들의 업적이 이미 기원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에 다윈의 진화론에
대하여 크게 놀란 신학자는 없었다.62)
또한 그 이전 2세기에 걸친 자연신학의 전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주의 지위만을 남겨둔 채
섭리자로서의 지위를 박탈하였다. 이러한 이신론적 운동은 곧 무신론으로, 자율적인 세계에 대한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모세의 격변론적 홍수 지질학은 새로운 동일과정설 지질학의 등장으로 대
체되었으며,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근거한 연대는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고 노아의 홍
수의 의미는 축소되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 영국교회는 복음주의 운동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인구 증가, 급격한 도
시화와 산업화 등의 여러 가지 사회적인 변화들이 일어났다. 또한 기성 제도 교회와 같은 대우를
받으려 하는 수많은 교회 분파들은 교회 권위를 더욱 약화시키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바로 이러
한 때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였고 교회와 신학의 미래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전통적 신학자들이 보기에 다윈의 진화론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제시
한 자연선택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무관하게 자연계에서의 디자인을 설명할 수 있는 듯
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연선택에 의해 모든 생물의 탄생과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는 다윈
의 가설이 사실이라면 성경은 허구(fiction)에 불과하며 기독교인들은 2천년 동안 잘못된 것을 믿
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미국 교회에서도 <종의 기원>이 출판된 직후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으며, 첫 반응은 1874년
뉴욕에서 열린 복음주의연합회(Evangelical Alliance)에서 나왔다. 그 모임에서는 진화론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과 독립적으로 다루어졌으며 반응도 사람마다 다양했다. 당시
프린스턴 대학(Princeton College)의 총장이었던 맥코쉬(James McCosh, 1811-1894)는 생물진화는
기독교 신앙과 양립하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과학과 성경은 평행한 계시로 화해되어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을 수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장로교

62) Frederick Gregory, "The Impact of Darwinian Evolution on Protestant Theology in the Nineteenth Century,"
<God & Nature> (Berkeley &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6) Ch.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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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였던 핫지(Charles Hodge, 1797-1878)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든지,


우연에 의하여 지배되는 물질적인 과정을 믿든지, 이는 서로 타협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다윈
의 주장은 결국 모든 동식물과 그들의 본성, 그리고 지적 능력까지도 하나님의 목적이나 인도하
심 없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윈의 이론은 라마르크의 이론보다 훨씬 더
무신론적이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에게 진화론에서 말하는 우연
(chance)이란 스스로 모순적이며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림 20 핫지와 <다윈주의는 무엇인가?>

핫지는 <다윈주의는 무엇인가?>(What is Darwinism?)에서 단호하게 “자연계의 디자인을 부인하


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진화론 비평은 개신교 진영은 물론 가톨릭
교도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졌다. 핫지는 성경의 권위를 지키려고 했고, 성경적 생명의 기원, 지옥,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하나님의 전능하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영생, 하나님의 섭리 등
을 주장했다.

X. 진화론과 종교를 화해시키려는 시도

영국 복음주의 교회나 저교회(Low Church)에서도 미국의 정통파 신학에 호응하였지만 이에 대


한 적극적인 신학을 개발하지 못했다.63) 그 결과 진화론에 대한 신학적 반응은 보수적 단체에서
진화론을 보다 관용적으로 다루려는 연구자들에게로 옮겨졌다.64)
진화론과 종교를 화해시키려는 좀 더 자유로운 생각들은 일부 영국, 독일 등의 신학자들 사이

63) 저교회(Low Church)란 영국국교회(Church of England)의 분파로서 주교직(episcopate), 성직(priesthood), 성례


전(sacrament), 예배 순서나 의식 등을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low” place에 두었으며 신조는
Protestant Nonconformists와 거의 같았다. 저교회란 용어는 18세기 초부터 고교회(High Church) 혹은 광교회
파(Latitudinarian (liberal) group)에 대비하여 사용된 말이다. 일반적으로 앵글리칸, 루터교, 감리교, 가톨릭 등
은 고교회 전통에 속한다고 볼 수 있고, 퀘이커, 청교도, 미국에서 생겨난 여러 전통들은 저교회 전통에 속한
다고 할 수 있다. cf.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Revised edi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83) p.839.
64) Gregory, "The Impact of Darwinian Evolution on Protestant Theology in the Nineteenth Century," <God &
Nature>,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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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자연선택이 하나님의 의도(intent)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핫지에게


동의했지만 진화론의 핵심이 자연선택이라는 그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종의 기원>의 출
판 이래로 많은 과학자들은 자연선택을 비판했지만 진화는 받아들였으며 때로는 라마르크 계열의
다양한 진화론을 수용하기도 했다. 그러면 진화론과 신학은 어떻게 화해를 시도하였는가? 이것은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부류는 정통교리를 변화시키지 않고 진화론을 신학에 도입하는 사람들로서 미국 프린스턴
대학(Princeton College)의 제 11대 총장이었던(1868년부터) 신학자 맥코쉬(James McCosh,
1811-1894)), <조직신학>9Systematic Theology, 1907)의 저자 스트롱(Augustus Hopkins Strong,
1836-1921) 등이 여기에 속하였다. 로체스터 신학교(Rochester Theological Seminary)의 총장이었
던 스트롱은 “우리는 진화의 원리를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단지 하나님의 지혜의 한 방
법이라고 여긴다”고 했다. 그는 자연선택은 비합리적 가정으로서 무신론적이고 무목적적이지만 인
류의 조상을 짐승으로 인정하였다. 한편 맥코쉬는 자연선택은 진화가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이며 초자연적인 설계와 모순이 없다고 했다. 다윈은 두 개념을 반대되는 것으로 말했
지만 그는 “초자연적 디자인이 자연선택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65): 그는 스트롱과 같이 진화론
을 하나님의 창조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지구의 연대를 단순히 6천 년으로 보지 않았고, 또
한 새로운 종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적 선언으로 만들어졌다고도 생각지 않았다;

그림 21 좌로부터 맥코쉬, 스트롱, 템플, 비춰

둘째 부류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들을 보존하는 데 별 관심이 없고 그 시대의 사상과 기독


교 교리를 재구성하는 사람들로서 영국 국교회 성직자인 템플(Frederick Temple, 1821-1902) 등을
들 수 있다. 템플은 진화론의 토대가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의 현재 조건들의 결정에 의한 것이라
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은 창조 이후로 더 이상 자연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인 견해
를 피력했다. 그리고 그는 진화의 기초는 하나님이 아니라 결정론이라고 했다;
세 번째 부류는 진화론을 자신들의 신학적 조망의 모퉁이돌로 삼는 사람들로서 미국의 설교가
비춰(Henry Ward Beecher, 1818-1887) 등을 들 수 있다. 비춰는 당시 미국의 번영과 낙관론적 기
류와 일치하여 자연선택, 생존경쟁에 근거한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하였다.
결국 기독교와 진화론을 화해시키려는 시도의 핵심은 진화의 메커니즘으로서 자연선택의 수용

65) “supernatural design produces natural se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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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부였다. 그레이나 라이트 등은 자연선택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양립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보았지만 핫지 이후의 대부분의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자연선택과 하나님의 설계를 조화시
키려는 시도를 포기했다.66) 이는 결국 많은 신학자들로 하여금 전통적 기독교와 진화론이 화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진화론과 기독교, 그 중에서도 복음주의 기독교와의 화해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다윈 이후 독일
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과학적 설명이 종교적 설명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종교의 영역과
특권을 재정의 하기 시작하였다. 종교는 더 이상 과학적 설명에 제한받지도, 결정되지도, 조건 지
워지지도 않으며, 물질계에 대한 지식도 또한 종교적 영역에 속해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독일 루터교 신학자 오토(Rudolf Otto, 1869-1937)는 “분명히 자연과학을 통한 하나님과 그
의 목적을 발견하는 수단은 없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부터 그것들을 알 수 있다면 자연과학으로
드러난 우리 세계의 기원에 관한 엄격한 인과적 설명은 그들에게 보조적일 것이다.”라고 했다.67)

XI. 진화론과 유전법칙

기독교가 진화론을 수용하는 것과 무관하게, 그리고 진화론의 진위에 무관하게 다윈의 <종의
기원>은 19세기 생물학 분야는 물론 그 이후의 모든 학문, 나아가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쳤
다. 실제로 오늘날 진화론(대진화)은 단순한 생물 이론의 하나로 머물지 않고 학문 전체를 재단하
고 평가하는 세계관이 되고 있다. 진화론에 반대하는 책이나 이론은 무차별 비난에 노출되기 십
상이다. 이전에 종교가 가졌던 절대주의의 폐해를 우리는 오늘날 진화론에서 목도하고 있다. 그
한 예로 진화론과 더불어 19세기 생물학 혁명의 하나로 평가되는 유전법칙을 살펴보자.

1. 멘델의 유전법칙

다윈의 이론에서 진화가 일어나려면 꼭 필요한 요소가 바로 유전이다. 즉, 대물림되는 어떤 형


질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물론 19세기에도 유전이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모를 절반씩 담는
다는 융합유전론이라는 것도 있었고, 생물체의 각 세포마다 소분체(gemmule)가 있고 이 소분체가
생식세포로 모여 자손에게 전해진다는 판제네시스 이론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이론은 유전현
상을 부분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었지만 다 설명하지는 못했다.
올바른 유전이론은 주류 학계와는 거리가 멀었던 오스트리아 브린(Brünn)(오늘날에는 체코 공화
국의 브르노(Brno)의 한 수도원에서 싹트고 있었다. 브르노에 위치한 성 토마스 수도원의 수도사
였던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은 1856년 수도원 정원에 작은 가든을 만들고 그곳
에 34그루의 완두로 잡종교배 실험을 시작했다. 1863년까지 200회가 넘는 교배를 통해 1만 종이
넘는 잡종을 수확한 멘델은 1865년에 자신의 실험결과를 정리하여 그 지역 자연사 학회에서 발
표했고, 그 다음 해에는 “식물 잡종에 관한 연구”이라는 논문으로도 발표했다.

66) Gregory, "The Impact of Darwinian Evolution on Protestant Theology in the Nineteenth Century," <God &
Nature>, p.383.
67) 이런 생각을 한 자유주의자들로는 슐라이에르마흐(F. Schleiermacher), 프리이스(J. Fries), 오토(R. Otto), 스테펜
(L. Stephen)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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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2 멘델과 “식물 잡종에 관한 연구,” 성 토마스 수도원

멘델의 결과는 ‘멘델의 유전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제1법칙은 우열의 법칙이다. 모양이 둥근 순종의 콩과 모양이 주름진 순종 콩(이런 형질을 대립
형질이라 함)을 교배하면 그 결과는 융합유전론의 예상과는 달리 잡종1대의 콩들은 모두 둥글었
다. 또한 노란색 콩 순종과 녹색 콩 순종을 교배했더니 그 결과는 모두 노란색 콩이었다. 멘델은
부모의 형질 중 잡종1대에서 표현되는 형질(둥근 모양, 노란색 등)을 우성형질, 표현되지 않고 숨
어 있는 형질(주름진 모양, 녹색 등)을 열성형질이라 불렀다. 이처럼 잡종1대에서 우성형질만 나타
나는 현상을 ‘우열의 법칙’이라 한다.
제2법칙은 분리의 법칙이다. 멘델은 잡종1대에서 얻은 완두콩끼리 교배해서 잡종2대에 어떤 결
과들이 나오는지 살펴본 결과 우성과 열성이 3:1의 비율로 나타남을 발견하였다. 이처럼 잡종1대
에서 숨어 있던 열성형질이 잡종2대에서 25%의 비율로 나타나는 것을 ‘분리의 법칙’이라 한다. 흔
히 멘델의 법칙을 확인했다는 것은 잡종2대에서 우성과 열성형질이 3:1로 분리돼 나왔음을 확인
했다는 의미이다. 멘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각 개체의 세포 속에 쌍으로 들어 있는 유전인자(훗
날 유전자라 부름)를 가정했다.
제3법칙은 독립의 법칙이다. 이는 서로 다른 두 개의 형질이 각각 독립적으로 유전된다는 내용
이다. 예컨대 둥글고 노란 순종과 주름지고 녹색인 순종을 교배하면 콩의 모양과 색깔은 서로 독
립적인 형질로 발현돼 각각이 잡종2대에서 3:1의 비율로 우열 형질이 드러난다. 멘델은 두 쌍의
대립형질뿐만 아니라 세 쌍의 대립형질에 대해서도 비슷한 실험을 했고 이 경우에도 각각의 대립
형질이 서로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후대에 전해짐을 확인했다.

2. 유전법칙의 재발견

멘델의 법칙은 유전을 설명하는 간단하고도 놀라운 법칙이지만 멘델이 이를 세상에 발표한 이
래 35년 동안이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멘델이 학계의
주류에서 벗어난 아웃 사이더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게다가 멘델이 유전법칙을 발표한 1865년
은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불과 6년 뒤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진화론에 쏠려
있었다. 게다가 당시 생물학 분야에서는 숫자를 세고 통계적으로 데이터를 처리하는 것은 전에
없던 연구방법이었다. 멘델의 생소한 연구방법은 당시 생물학자들에게는 매우 생소하고 어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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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위대한 발견이 영원히 묻혀있을 수는 없었다. 1900년 세 명의 유럽 생물학자들이 멘


델의 법칙을 독립적으로 재발견한 것이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었던 네덜란드의 더프리스(Hugo
DeVries, 1848-1935), 독일의 코렌스(Carl Correns, 1864-1933), 오스트리아의 체르막(Erich von
Tschermak, 1871-1962)이 서로 다른 종류의 식물 잡종 연구를 하다가 멘델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
었다. 그들은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과거 문헌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미 35년 전에
멘델에 의해 자신들의 결과가 발표된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림 23 좌로부터 더프리스, 코렌스, 체르막, 베이트슨

이들 중 패랭이꽃과 양귀비 등을 이용한 실험에서 멘델의 법칙을 확인한 더프리스는 멘델의 공


로를 자신이 가로채려 한 게 아닌가, 또는 표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고 있다. 1900년 3
월에 발표한 그의 논문에는 멘델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게다가 그는 지금 ‘멘델의 법칙’이라 불리
는 것들이 ‘더프리스의 법칙’이라 불리기를 원했기 때문이다.68)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독립적으로 멘델의 법칙을 재발견한 코렌스는 보다 양심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멘델을 모른 채로 멘델과 같은 실험결과를 얻었던 코렌스는 논문을 준비하며 문헌을 찾
아보던 중 멘델의 연구결과를 발견했다. 이미 멘델이 한 일을 알고 있던 그는 1900년 더프리스의
논문을 받아보고 더프리스가 멘델의 공을 가로채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프리스가 멘델을 전
혀 언급하지 않았으면서 멘델이 쓴 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음을 지적했다. 코렌스는 자신과 더프
리스의 연구결과뿐만 아니라 멘델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했다.
세 명 중 가장 젊었던 체르막은 멘델과 마찬가지로 완두콩으로 실험하여 멘델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그 역시 자신의 연구결과를 정리하던 중 멘델의 논문을 알게 되었고, 1900년에는 더프리
스의 논문도 받아보았다. 시간적으로 체르막이 가장 늦게 논문을 발표했지만 시차는 불과 석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경우 누군가의 연구결과가 다른 사람의 연구에 영향을 줄 만큼 충분
한 시간이 없었으리라 판단되기 때문에 과학사에서는 이들 셋을 모두 멘델의 법칙의 재발견자로
인정한다.
이 세 사람 외에도 멘델의 업적을 널리 알린 사람으로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생물학자 윌리엄
베이트슨(William Bateson, 1861-1926)을 들 수 있다. 그는 1900년 5월 왕립원예협회(Royal
Horticulture Society)에 강연하러 가기 위해 케임브리지에서 런던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멘델의

68) cf. H.F. Roberts, <Plant Hybridization before Mendel>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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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칙과 관련된 논문을 읽고 원고를 수정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열렬한 멘델주의자가 된 그는


멘델의 법칙의 중요성을 널리 알렸다. 그는 새로운 용어와 개념을 도입해 멘델의 이론을 보다 쉽
고 정확하게 정리해서 보급했다. 베이트슨은 유전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사람이기도 한데 그
해가 1905년이었다. 이때 이미 그는 인간이 인간의 유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을 예상하고
있었다.

3. 진화론과 유전법칙의 결합?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멘델의 유전법칙은 멘델 자신의 연구는 물론, 멘델의 사후 세 사람의
재발견자들의 연구를 통해 확인되었다. 법칙이라는 이름이 붙는데 요구되는 모든 필요충분조건을
갖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화론은 어떤가? 다윈은 <종의 기원>을 출간할 때는 물론 그 이후에도 자연선택의
결과로 형성된 종들이 유전적 다양성을 갖는 메커니즘을 설명하지 못했다. 즉 다윈은 유전형질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물려주는 메커니즘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멘델의
유전법칙이 발견, 혹은 재발견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진화론과 유전법칙을 결합시키기 위해 노력
했다.69)
1890년대에 이르러 유전학과 생물통계학은 멘델의 유전법칙을 진화론에 접목시켜서 자연선택
을 거친 유전형질이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였다. 유전법칙이 진화론에 접목되
면서 "다양한 개체차를 일으키는 유전형질이 자연선택에 의해 선별되고 그 가운데 적응에 성공한
유전형질만이 자손에게 전달되어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현대 진화 이론의 기본적 토대가 확립되
었다.70) 하지만 이론적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것이 증명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진화론자들은 진화론과 유전법칙이 결합함으로 가장 강력한 이론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진
화가 증명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최적자의 유전자가 자연에 의해 계속 선택되어 새로
운 개체, 나아가 지구상의 다양한 생명세계를 형성한다고 설명, 혹은 주장하는 것이다. 유전자의
변이가 무한하고 자연이 최적자를 선택하는 과정이 무한하다고 하는 주장은 자연이나 실험실에서
관찰되는 매우 제한된 변이와 매우 제한된 자연선택으로부터 유추한 것일 뿐이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 진화론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대답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증
명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멘델의 발견은 일찌감치 법칙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진화론은 지금도
여전히 이론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주변에는 침을 튀기면서 진화는 증명이 되었다고 주장
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구가 둥근 것이 사실이듯이 진화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
지만 일정한 변이의 한계, 때로는 종 내에서, 때로는 종 간에서의 변화는 자연에서나 실험실에서
관찰되지만 그것이 과거에 존재했던(화석이 보여주는), 지금도 존재하는 수 백만 종의 생명세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진화론은 생명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자연주의적 이론으로서는 문제

69) 다윈의 자연선택설과 멘델의 유전학을 연결시키려고 노력한 대표적 인물로는 <진화-현대적 총합>(1942)을 저
술한 쥴리언 헉슬리(Julian S. Huxley 1887-1975), <유전학과 종의 기원>(1937)을 저술한 도브쟌스키
(Theodosius Dobzansky 1900-1975) 등을 들 수 있다. 도브쟌스키는 유전자돌연변이가 유전자풀에서 일어나면
좋은 종이 자연에 의해 신종으로 선택되어 진화한다고 했다.
70) D. Quammen, <The reluctant Mr. Darwin: An intimate portrait of Charles Darwin and the making of his
theory of evolution> (New York, NY: W.W. Norton & Company,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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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없지만 생명세계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론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XII. 요약과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근대과학의 탄생 이후 지구와 생명의 기원과 관련하여 과학과 기독교의 상호


작용을 살펴보았다. 이 긴 상호작용을 통해 자연을 연구하는 과학도,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도 많
이 다듬어졌다.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진화론과 기독교를 화해시키려는 노력은 다양하게
표출되었다.71) 그리고 각각의 시도들은 나름대로의 지지자들이 있었다. 진화론과 기독교를 완전히
분리하려는 급진적인 시도는 지지자들이 가장 적었다. 반면에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어
떤 형태로든 이들을 화해시키려는 노력들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대중들의 필요
를 충족시키기 위해 아담과 하와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그 이래로 신학적인 전통들은 몇 가지 도
전들에 직면했다.
첫째, 기독교의 정통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도전이었다. 그들은 진화론이 성공할수록 성경
의 전통적 이해와 부딪칠 때는 항상 실증주의적 과학의 가정들이 거부되어야 한다는 자신들의 요
구가 점점 설 자리가 줄어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둘째, 기독교와 진화론의 조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의 도전이었다. 그들은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재해석함으로 진화론과 기독교의 조화를 시도하면서 동시에 기독교가 자연을 목적론적으로 해석
하는 권리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자연에 나타난 목적(telos)의 증거가 희미해
지거나 자연이 임의적이라는 증거가 나타날수록 끊임없는 위험 속에 있게 되었다. 이것은 특히
생물학 분야에서 뚜렷했다.
셋째, 하나님은 자연에 대한 참조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도전이었다. 이들은 비신
화화된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신자들을 위해 신학이라고 인정
되지 않는 신학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20세기 장로교 신학은 <종의 기원>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다윈의 책이 발표된 후에는 이전과 같이 하나님, 인간, 자연의 관계가 분명치 않았다.
결국 이러한 어정쩡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교회와 일반 기독교 신자들은 혼란을 겪게 되었고,
좀 더 분명한 기독교의 근본을 세우는 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20세기 초에 등장한
근본주의와 이의 열매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창조과학의 부흥을 위한 조건들이 무르익어갔다.

71) Gregory, "The Impact of Darwinian Evolution on Protestant Theology in the Nineteenth Century," <God &
Nature>,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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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오픈포럼」 15권 2호(2021.9.)

서평1: 양승훈, 『인류의 기원과 역사적 아담』72)

이윤석 Yoonseok LEE


독수리기독학교 Eagle Christian School

양승훈 교수님의 최신작 <인류의 기원과 역사적 아담: 고인류학과 창세기의 대화>는 인류의 기
원 문제를 고인류학의 지식을 활용하면서도 성경 창세기 기록의 의미도 보존할 수 있도록 조화를
시도한 탁월한 결과물입니다.
인류의 기원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최초의 인류에 대해서 이처럼 방대
한 자료들을 엄밀하게 분석하면서 치밀하게 자료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어떤 결론을 내리는데
까지 나아간 연구물은 여지껏 없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책의 장르는 단순히 성경 주석이나 인류의 기원에 대한 기독교 교리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창세기의 얼개에 고인류학 분야의 지식을 잘 맞추어 아담의 역사성을 부각시킨 고인류학 전문 서
적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저자는 치밀한 검토를 거쳐 도출된 결론을 타협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정답', '무오한 교

72) 양승훈, 『인류의 기원과 역사적 아담』 (SFC,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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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Open Forum for Creationists」 Vol.15(2)

리'로 주장하지 않고 일정의 '잠정적 결론', '작업 가설' 정도의 권위만 부여합니다. 이런 면에서 저
자는 아주 겸손하며, 성실한 학술적 노력의 결과로 도출될 수 있는 여러 다른 설명에도 열려 있
습니다.
제가 아는 한 우리나라의 젊은지구론 진영이나 유신진화론 진영의 어느 누구도 양승훈 교수님
처럼 인류의 기원 문제에 대해 이런 정도의 방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연구를 한 이가
없습니다.
기독교계의 많은 분들이 이 책을 통해 우연히 자연 합성된 아미노산으로부터 우연히 단세포 생
물이 나타나고 그게 다세포 생물로 진화하고, 그런 식으로 계속 진화해서 인간도 지구상에 나타
났다는 유신진화론의 허구적 주장, 과학주의에 함몰되어 가정을 결론으로 뒤바꿔 버리는 유신진
화론자들의 선전선동에 휘둘리지 않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 책은 SFC에서 출간된 <양승훈의 창조론 대강좌 시리즈> 일곱권 중에서 제4권, 네 번째 책
입니다.

제1권 다중격변 창조론


제2권 생명의 기원과 외계생명체
제3권 창조와 진화
제4권 인류의 기원과 역사적 아담
제5권 대폭발과 우주의 창조
제6권 창조연대 논쟁
제7권 과학사와 과학철학 (출간 예정)

저는 창조론에 많은 관심이 있었기에 위 시리즈 책들을 대부분 다 읽어보았습니다. 사실 <인류


의 기원과 역사적 아담> 뿐 아니라 다른 책들도 적극 추천할 수 있습니다. 이 책들을 통해 우리
는 좋은 학자의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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