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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 (Mercenary) +1 28
용병 (Mercenary)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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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방송국 이석원 PD 입니다. 하나만 대답해 주십시오. 왜 죽였습니까?”
형사가 웃으며 말했을 때였다. 무릎에 앞머리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얇은 뿔테안경을 쓴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AD 가 얼른 얼굴을 찍었다. 몇 시간 전에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남자의 표정은 무척이나 태연해보였다. 저 얼굴에 모자이크 칠을 해야 하는 게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얇은 혀로 입술을 축이는 모습이 뭐든 한 마디는 할 것 같아 석원도 다시 와이어리스를
들이밀었다. 남자는 안경을 고쳐 쓰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도 담배 한 대만 주세요.”
“왜 죽였습니까, 이것만 대답해주세요.”
“…죽이고 싶어서 죽였어요.”
석원이 멈칫했다. 형사는 기가 찬 얼굴로 '이런 사이코 같은 새끼, 씨발, 콩밥도 아까운 새끼', 하고
중얼거렸다. 당장 한 대 패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는 듯 두꺼운 목덜미에 핏줄이 돋아있었다. 남자는
거칠게 일어난 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며 계속 말했다.
“많이 참았거든요. 게임도 여러 개 해보고, 운동도 해보고, 낚시도 해보고, 사냥도 해보고. 그런데
노력해도 못 참겠더라고요, 그 욕구를…피디님은 누군가 죽이고 싶었던 적 없어요?”
“…….”
“내가 미친놈인가보네요.”
손을 흔드는 AD 를 뒤로하고 석원은 한가한 도로를 달렸다. 퇴근시간이 한참 남아서인지 도로는 휑했다.
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은 다 나갔는지 아무도 없고, 요크셔테리어 호섭이만 꼬리를 뱅뱅 돌리며
반겼다. 발목에 침칠을 하며 쫓아다니던 놈은 개밥그릇 가득 사료를 부어주고 나서야 떨어졌다.
석원은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잠그고, 위에 단 잠금쇠를 하나 더 잠갔다. 창문에 바다색 암막커튼을 치자
방 안이 금세 어둑해졌다. 석원은 옷만 갈아입은 채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저녁보다, 샤워보다, 그는
다른 게 더 급했다. 몇 달치 월급을 털어 마련한 고급 매트리스와 가벼운 거위털 이불, 숙면을 도와주는
기능성 베개를 베고 눈을 감자 물을 잔뜩 먹은 수건처럼 몸이 축 늘어졌다. 마치 매트리스 밑에서
무언가가 그를 잡아당기는 듯 한 기분이었다. 석원은 깊게 호흡하며 기다렸다. 그의 정신이 '그곳'으로
끌려들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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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드릴까요?”
“양고기하고, 우유 한 사발 내와. 빵도. 포도주는 어때?”
“좀 밍밍해요, 그 대신 싸요.”
“맥주나 가져와.”
주문을 받은 아이가 돌아가자 계단 구석에 앉아있던 어린애 둘이 다가왔다. 사내놈 하나와 계집애
하나였는데 둘 다 비쩍 곯아 팔다리가 겨울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
“부츠 닦아드릴까요?”
“얼만데?”
“모리울 동화 다섯 냥이에요.”
“아악!”
“손 떼.”
“아, 아, 아악! 자, 잘못했…!”
“빨리 안 떼면 눈알도 꼬챙이에 꿰일 줄 알아.”
철광을 끼고 있는 자작령 펠라도르는 사계절 언제나 땀내와 열기로 후끈거리는 영지였다. 조금이라도
값싸게 철을 사러 온 상인들, 칼이나 갑옷 따위의 무구를 손질하기 위해 들른 용병들. 그리고 곡괭이를
허리춤에 차고 근육질의 웃통을 드러낸 광부들이 거리를 활보하니 넓은 도로도 비좁게 느껴졌다. 한 차례
비가 더 퍼부으려는지 오늘은 날씨까지 습하고 무더워서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턱으로 땀이 줄줄 흘렀다.
“맞아요.”
“이놈, 많이 컸다! 용병 되겠다고 짐 들고 쫓아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열여덟인가, 열아홉인가?
장가가도 되겠어!”
“지부장 있어요?”
“누구쇼?”
“텐 가렌. 편지 받고 왔는데.”
텐이 배낭에서 편지를 꺼냈다. 발신인에 용병길드 펠라도르 지부, 수신인에 텐 가렌의 이름이 딱딱한
글씨체로 적혀있었다. 직원은 잠시 편지를 훑어보더니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전쟁과 분쟁이 빈번히 일어나고 몬스터들이 활개를 치는 험난한 세상, 용병이 되겠다는 이들이 쏟아져
나와 이제 동급 용병은 발에 치일 정도라지만 은급 용병은 그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은급 용병패는 한
몫 하는 용병이라는 길드의 보증서나 다름없었다. 늙어죽도록 동급 용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도
수두룩하니, 스물도 되지 않은 텐은 승급이 매우 빠른 편이었다.
“따라오쇼.”
실험실이나 마법물품 따위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동안 마법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이천년 전의
마법물품 따위 지금은 웃돈을 주고 팔아도 살 사람 찾기 힘들다. 중요한 것은 바로 마법사의 재산이었다.
그들은 매우 부자였고, 폐쇄적인 성향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전 재산을 고스란히 던젼에
남겨놓았다. 산처럼 쌓인 황금과, 은덩이와, 특별한 광석으로 제조한 무구와, 보석 같은 것들을 말이다.
그러니 어느 영지에서 던젼이 발견되었다는 소리가 들리면 영지 전을 벌여서라도 던젼을 차지하려는
아귀다툼이 벌어지곤 했다.
00002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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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에 들러 모리울 은화 삼십 냥짜리 하급 포션을 다섯 병, 은화 팔십 냥짜리 중급포션을 세 병. 도합
여덟 병이나 산 후 텐은 요란스러운 골목으로 들어섰다.
오른쪽, 왼쪽, 앞쪽, 뒤쪽, 깔린 상점들이 모조리 대장간 간판을 매달고 있는 대장장이 골목이었다.
펠라도르에서 가장 붐비는 곳 중 하나였다. 용병들도, 대상인도, 가난한 짐마차 행상인도 어느 대장간이
가장 값싸고 실력 좋은 곳인지 가늠하느라 정신없이 발품을 팔고 있었다. 쇠를 두들기는 소리부터 값을
흥정하는 소리, 도제들의 호객소리에 귀가 얼얼했다. 텐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고렉시어의 활'이라는 철문패가 큼직하게 걸린 대장간이었다.
“영감, 아직 팔 안 부러졌어요?”
“악담은 옆집 가서 해라, 이놈아.”
텐이 웃으며 말했다.
“……안 깎나?”
“흥정해봤자 몇 푼이나 깎아준다고. 내 입만 아프지.”
“아니, 동화 두세 냥 정돈 깎아주려고 그랬지.”
“그럼 세 냥 깎아줘요. 삼일 후 자정 전에 찾으러올게요.”
“여섯 냥만 내십쇼.”
그가 반값만 내었다고 불평하는 선객은 없었다. 용병들은 이동마차를 탈적에 얼마치를 깎고 타지만,
이동하는 도중 굶주린 몬스터나 도적 따위가 나타날 경우에는 그 처리를 해주기 때문이다. 용병들의
몸값을 생각하면 깎아준 값이야 푼돈이었다. 텐이 여용병의 옆자리에 앉자 늙어서 털에 윤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짐말 두 마리가 발을 떼었다. 덜거덕거리는 소음과 함께 마차가 움직였다.
“얼마야?”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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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원아, 좀 나와 봐! 석원아!”
석원은 아득한 어둠속에서 벗어났다. 아직까지도 손아귀엔 보드라운 감촉이, 뇌리엔 어린놈의 피 냄새가
남아있었다. 한 시간 즈음은 꿈을 되씹으며 그 감각에 젖어있고 싶었는데 무슨 일인지 주위가
시끌벅적했다. 어머니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방문을 두들겼고, 창문 너머 바깥에는 뭔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암막커튼을 걷어보자 가로등 불빛 아래 인파가 바글바글했다. 그 중
교복치마를 입은 여고생이 반이었다. 그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멈춰선 그랜드 카니발에 달라붙어 욕을
퍼붓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만 하다. 석원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밖에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긴, 저 소란 일으킬 사람이 우리 집에 네 누나말고 또 있니? 망할 계집애, 뭐, 단백질 제빈지
뭔지 하는 아이돌이랑 스캔들이 났다는데, 그것 때문에 저 난리다. 일단 회사에서 경호원들 보내주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어. 무슨 애들이 저렇게 몰상식한지, 저러다 지원이 다치면
어떡하니, 응?”
“단백질가이즈 멤버 제이비 말하는 거 같은데, 며칠 전에 그 그룹에 다른 멤버랑 스캔들 났었잖아요.”
“나도 모르겠다, 일단 저 계집애 끌고 들어와야 자초지종을 알지, 아아, 또 이사 가게 생겼네. 내가 이
나이에 이게 무슨 고생이니, 응?! 저 계집애 때문에 속이 터져서 정말!”
분통을 터뜨리는 어머니를 아버지가 겨우겨우 진정시켰다. 그 사이 밖에서는 달걀로 난타하는 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었다. 석원은 한숨을 쉬며 현관문을 열었다. 아비규환이었다. 단백질가이즈의 팬들로 보이는
여고생들과, 누나의 몇 안 되는 사생팬들이 달라붙어 멱살잡이를 하고, 머리를 쥐어뜯고, 욕설을
지껄이고 있었다. 한발 한발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그는 정신 나간 여고생들로 가득 찬 던젼을
상상했다. 차라리 몬스터가 나았다. 몬스터는 말을 못 하니까.
총체적 난국이란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다. 석원은 눈앞에 보이는 아가리마다 화살을 박아주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날계란 점액과 부서진 껍질이 덕지덕지 붙은 창문을 두들기자 창문이 십 센티쯤 내려갔다.
그의 누나, 이지원이 창틈으로 석원을 쳐다봤다. 얼마나 울었는지 짙은 눈 화장이 번져서 너구리가 따로
없었다.
“뭘 잘했다고 울고 있어?”
“쟤들 사진 찍는 거 안보여? 이거 내일 트위터에 다 뜰 텐데, 울고 있어야 내가 좀 더 불쌍해 보일 거
아냐.”
지원이 속삭였다. 석원은 기가 차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리라고 손짓을 하자 지원이 매니저와
함께 내렸다. 난전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귀신처럼 그 모습을 본 팬들이 소리를 질렀다. 망할 년, 걸레,
섹스돌, 죽어라, 꺼져라, 다채로운 욕설과 함께 날계란이 날아왔다. 석원은 지원의 어깨를 끌어안고
걸음을 빨리했다. 간혹 날계란이 날아오는 쪽으로 지원의 머리통을 끌어다 주기도 하면서. 시커먼 눈
위로 눈물 섞인 계란 노른자를 뚝뚝 떨어뜨리며 지원이 이를 갈았다.
석원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는 성격에 조금 문제가 있긴 했지만 비틀린 욕구를 해소하는 것은 오로지
꿈 속 뿐, 현실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현실은 그에게 '참아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눈앞에 칼을 들고 덤비는 놈이 있는데도 참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다, 이건
정당방위니 너무 과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이성이 판단했다.
석원은 허리를 숙여 커터를 잡았다. 넘어진 여고생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둘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거울이 없어도, 석원은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여고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석원은 태연히 허리를 폈다.
“방금 그거 찍은 사람 있지?”
날계란을 뚝뚝 흘리며 거실을 도망 다니던 지원이 욕실에 틀어박히고 나서야 집이 잠잠해졌다. 한참이
지난 후 아버지가 분기탱천한 어머니를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자 말끔해진 지원이 살금살금 기어 나왔다.
지원과 석원, 윤동후 세 명은 석원의 방에 놓인 컴퓨터 앞에 둘러 모였다. 뉴스 기사를 볼 것도 없이
이지원 삼각관계, 이지원 문어발, 이지원 제이비 띠 동갑 등이 포털사이트 검색어 상위를 줄줄이
차지하고 있었다. 지원이 쌍심지를 켰다.
참다못한 윤동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원은 어울리지도 않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윤동후의 팔뚝을
콕콕 찔렀다.
“고생하시네요.”
“매니저 일이 다 그렇지, 뭐. 그래도 너희 누난 이 바닥 사람치곤 양반인거야. 멍청…똑똑하게 처신을
못해서 그렇지.”
석원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밴이 계란 노른자를 흩날리며 떠나자 드디어 집에 평화가 찾아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석원은 짜증과 함께 연기를 날려 보냈다. 보통 꿈을 꾸고 나면 그는 한
시간 남짓 꿈의 내용을 곱씹으며 그 시간을 즐겼다. 그건 살인과 폭행, 섹스에 대해 비정상적인 욕구를
품고 있는 그만의 욕구해소법이었다.
어린애처럼 짓궂은 장난 좀 쳤다고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석원은 앞치마를 걸치고 싱크대 앞에 섰다.
물을 담은 냄비에 된장을 풀고 호박과 두부, 청양고추, 쪽파를 한 움큼씩 썰어 넣고 그의 취향대로
소금도 듬뿍 쳤다. 보글보글 익어가는 된장국을 맛보며 석원은 나름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00003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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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 가렌은 퍼뜩 눈을 떴다. 강렬한 빛이 눈알을 괴롭혔다. 덜그럭 덜그럭. 마차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이름 모를 짐승이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 울퉁불퉁한 숲길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왼손에 뭐가
쥐어져있는 거 같길래 힘을 줬더니 신음소리가 들렸다. 아, 그제야 텐은 기억해냈다. 고향집으로 가는
이동마차 안이었고, 그의 손에 잡힌 건 여용병의 따듯한 젖가슴이었다.
“팔아.”
“뭣?! 이 어린놈의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은화를 쥐어주자 여용병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가 은화를 챙기는 동안 텐은 단단한 허벅지를 벌리고
가죽바지와 속옷을 옆으로 밀었다. 통이 넓어 벗길 필요도 없었다. 아래를 보자 그의 것은 이미 식사할
준비를 마치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단번에 찔러 넣자 여용병이 배를 경직시키며 이를 악물었다.
텐은 축축하고 비좁은 곳에 감싸인 채 소리 없이 웃었다.
“씨발, 뭘 쳐다봐!?”
마부가 냉큼 달려와 여용병의 시체를 질질 끌어 마차 뒤쪽의 짐칸에 실었다. 이렇게 죽은 용병의 시체와
소지품은 용병길드로 가져다주는 게 보통이었다. 안도한 승객들의 감사인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텐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느리게 숨을 쉬었다. 좋은 냄새가 났다. 푸르른 숲 냄새 보다, 진하게 퍼져나가는
여용병의 피 냄새가 더 좋았다.
고향인 뷔로엠 마을은 변함없었다. 밭마다 알알이 영근 밀알과 보리알이 흔들렸고, 영주나 유지의 땅에
소작을 짓는 농부들이 이른 아침부터 가을걷이에 한창이었다. 텐의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하얗게 센 어머니, 아버지, 아래 여동생 하나와 남동생 둘 모두 낫을 하나씩 들고 보리를 베었다. 텐은
짐을 내려놓고 흙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한참동안 가족들을 쳐다보다가, 다리가 쥐가 날 것 같을
때 쯤 말했다.
“나 왔어.”
“오빠, 어디 가?”
“빨간 지붕에.”
“뭐? 왜?”
“거길 뭐 하러 갈 것 같아.”
“못 생겼잖아.”
“그, 그래도 불 끄면 그거나 그거난데 은화가 아깝…….”
“시끄러.”
“…이지원? 그게 누구지?”
“누구? 이름이야?”
“……글쎄.”
두 번째에는 동생들을 떼놓고 가 멧돼지 한 쌍을 잡아왔다. 통째로 해체해 소시지를 만드네, 염장을 하네,
육포를 만드네, 하며 다들 손발을 걷고 매달리는 바람에 새벽에야 빨간 지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틀째 밤. 텐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말했다.
“내일 일찍 갈 거야.”
“……안 가면…….”
“돈 받아서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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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를 회사에 내려놓고 퇴근을 할 때쯤엔 저도 모르게 앞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초보운전 딱지가 붙은
뒤꽁무니를 박아버리고 싶었다.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뒤끝 없이 사람을 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애써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머리를 회전시켰다.
“왜.”
「퇴근했어?」
“하는 중이야.”
「잘 됐다. 나 종편 미니시리즈 오디션 보러 가야 되는데, 동후가 급하게 일이 좀 생겼대서. 니가 좀
태워다주라, 응?」
“곧 도착해, 준비해.”
============================ 작품 후기 ============================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00004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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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은 종합편성 방송국에 들어가는 내내 부산스럽게 주위를 탐색하고 있었다. 며칠 전의 일로 겁을
집어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단백질가이즈의 팬들이 아니라 오디션을 보러 온 것으로
짐작되는 라이벌들이었다.
지원이 웃는 석원의 등짝을 사정없이 때렸다. 석원은 얻어맞고서도 한참을 웃었다. 오디션 장소인 A
스튜디오 대기실을 찾아 들어가자 지원의 표정은 더 일그러졌다. 종편 심야 미니시리즈인데도 불구하고
알만한 얼굴들이 몇 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지원보다 나이가 어리고 연기를 잘했다.
이번에도 글렀다며 머리를 쥐어뜯는 지원에게 드라마팀 FD 가 대본을 내밀었다.
대본은 A4 용지 두 장짜리였다. 앞장에는 드라마의 기획의도와 인물설정 등이, 뒷장에는 「S# 34. 창
고」라고 오디션용 대본이 적혀있었다. 슬쩍 보니 손소란이 살해당하는 씬이었다. 지원이 잠시 옷을
갈아입겠다고 사라지고, 석원은 대기실 의자에 앉아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가제는 「술래잡기」였다.
“내용 험악하지?”
문틈에 서 있는 여자는 우승희였다. 전직 모델다운 완벽한 몸매에 우아한 생김새로 우미인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대한민국에서 잘 나가는 20 대 여배우를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엔 반드시 들어가는 여자였다.
지원도 그녀의 멱살을 잡을 용기는 없었는지 표정을 억지로 누그러뜨렸다.
“울면 나 간다.”
“넌 방금 그거 못 봤어? 나보다 두 살은 어린년이……!”
“네 살쯤 어릴걸? 예쁘긴 하더라, 우승희. 우미인, 우미인 할 만 하던데.”
“넌 누구 편이야! 우미인은 개뿔, 우주인이더구만. 주먹만 한 얼굴에 눈 코 입 다 끼어있는 게 징그럽지
않니? 팔다린 또 뭐 저렇게 길어? 그, 영화에 나오는 에일리언 생각나지 않아? 안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면야.”
아까 자세로 의자에 앉은 지원이 재차 감정을 잡았다. 석원은 뚜벅뚜벅 걸어 지원의 앞에 섰다. 대기실
안의 시선들은 여전히 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석원은 입술을 핥았다. 흥분이 돼서인지 가슴도,
아래쪽도 뻐근해졌다. 지금부터 잠시 동안은 그는 이석원이 아니어도 되었다. 박무경. 살인자의 알맹이를
감추고 있는, 안경잽이 사회복지사였다.
박무경은 지원의 머리카락을 꽉 쥐고 더 밀었다. 나무의자의 등판에 허리가 휘도록 걸쳐지고, 머리통은
긴 곱슬머리의 끝이 땅바닥에 닿을 만치 젖혀졌다. 지원이 다리를 버둥거렸다. 길게 늘어진 목덜미에
핏줄이 올랐다. 박무경이 그 목을 한 손으로 쥐자 숨이 막히는지 지원이 툭툭 끊어지는 기침소리를 냈다.
그때마다 손바닥으로 식도의 움직임이 느껴져서 박무경은 침을 꿀꺽 삼켰다.
“네 동생년놈들까지 다 죽여 버릴 줄 알아.”
“야, 그만해!!”
“그럼 간지러우라고 숨통을 틀어막았니? 실제로 카메라 돌아갈 때도 그렇게 심하겐 안 해! 다 적당하게
하는 거지!”
“난 그냥 대본대로 한 건데.”
“너 이놈시키 두 번 하자 그랬음 누나 잡았겠다!? 아야야, 목 삐었나봐. 엑스레이 찍어야 되는 거
아냐?”
“오버하긴. 대본연습 한 번 더할래?”
“됐거든!!”
다시 하이힐이 날아왔다. 석원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곤 얼른 자리를 떴다. 그가 지나가자 대기실
문 옆에 서 있던 여자들이 후다닥 비켜섰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석원은 고개를 가볍게
숙이곤 화장실로 향했다.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손바닥 아래로 두근대던 박동의 감각, 잔뜩 일그러진 고통스러워하던 얼굴, 숨소리도 죽인 채 그를
쳐다보던 관객들. 그가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 해주는 듯 한 박무경의 대사까지.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가 생각하던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쾌감이었다. 꿈을 꾸고 난 후보다 더 생생하고,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방금 전의 그 장면을 카메라로 찍어서 집에서 모니터링도 하고 싶었다.
화장실을 발견하자마자 석원은 제일 끝 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바깥으로
꺼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심지를 세운 놈은 아주 뜨끈뜨끈했다. 그는 입술을 핥으며 화장실 벽에다 등을
기댔다. 그의 머릿속에서 지원이 우승희로 바뀌었다.
그 기다란 눈매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사로잡힌 사슴의 것과 같은 목덜미를 움켜쥐고 그녀의 귀에다 ‘
죽여 버릴 줄 알아.’하고 속삭였다. 그와 박무경은 취향이 조금 달랐다. 그였다면 인육 얘긴 하지 않았을
거다. 시체는 나무토막일 뿐이다. 그건 그에게 어떤 흥미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존댓말을 하는 건
마음에 든다. 정중하게 대할수록 사람은 희망을 품게 되니까. 그것을 박살내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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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 어디세요?」
“어, 어, 김작가, 김작가. 내가 지금 대기실에서 죽이는 거 봤어. 그 왜, 걸그룹인데 얼마 전에 스캔들
나고 난리 났던 애 있지?”
「아~이지원이요? 왜, 걔 발연기보고 충격 받으셨어요? 뭘 새삼스럽게.」
“응? 아냐, 아냐, 걔 표정 연기 잘하던데? 누가 보면 진짜 목 졸린 줄 알겠더라고. 그런데 걔가 문제가
아니라, 같이 온 배우가 물건이야.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우리가 누누이 얘기하던 박무경이 거기
있더라니까? 카메라만 있었으면 그거 찍어놓는 건데, 넋 빼고 보느라 그 생각을 못했네.”
「어머, 그래요? 누군지 기대되네. 아참, 얼른 스튜디오로 오세요. 우승희씨 왔어요. 기어이 오디션
구경하겠다고. 까다로워서, 정말.」
“알았어, 알았어! 지금 가!”
00005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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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침묵이 A 스튜디오 안을 휩쓸었다. 무대 앞 객석에 앉은 정 PD 도, 김작가도, 우승희도, 그리고 그
외의 모두가 할 말을 읽고 무대를 쳐다봤다. 무대 위에는 연기를 끝낸 이지원이 서 있었다.
정 PD 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형편없는 연기를 보여줘 놓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지? 얼굴에
하이스 합금을 깔지 않는 이상 사람이 저럴 수는 없다. 옆에서 물 한 병을 다 비운 김작가가 정 PD 의
팔뚝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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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이 소리를 버럭 지르는 바람에 석원은 하마터면 마포대교 한가운데서 브레이크를 밟을 뻔 했다.
본인이 방금 죽을 뻔 했다는 걸 알 리 없는 지원이 황당해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것 같은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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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어린 텐이 먼저 인사했다.
거한, 케간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 옆에는 검고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 내린 여자가 있었다.
나이는 삼십대 초중반쯤으로, 가무잡잡하게 탄 피부와 풍만한 몸매가 매력적이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와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은 모습이 마치 검사 같았지만 손에는 수정구를 박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오린 메이저. 은급 용병 마법사고…이번 기회에 한밑천 벌어서 겨울엔 결혼하는 게 목적이에요. 그러니
누구든 혼자 못 죽겠다고 내 발목 잡아당기는 놈은 두 번 뒈질 줄 알아.”
“옌시스 제란.”
지부장이 속삭였다.
딱딱한 얼굴의 기사가 말했다. 그들은 펠라도르의 기사단 중에서도 충직한 자들일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죽음을 감수한, 죽어도 괜찮을 자들로 꾸려졌을 것이다. 용병지부장도 한 입 거들었다.
“믿겠다.”
“그럼 마차에 오르십시오. 날이 밝으면 불필요한 시선이 모입니다. 그 전에 무너진 갱도로 가야합니다.”
기사의 말에 로에늠이 화려한 마차에 올랐다. 용병들도 볼품없지만 크기는 지지 않는 짐마차에 올라탔다.
텐은 요정족 이오르의 옆에 앉았다. 좀처럼 보기 힘든 귀족이 등장했음에도 그의 최대 관심사는 이오르의
성별이었다. 다른 용병들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든가 말든가 이오르는 흙으로 빚은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있었다. 손을 흔드는 지부장을 뒤로한 채, 다양한 자들이 섞인 열여덟 명의 던젼원정대는
갱도를 향해 출발했다.
“너, 몇 살이냐?”
“열아홉.”
“던젼에 들어가긴 너무 어리잖아? 지부장 이 새끼. 어지간히 급했나보군. 네가 죽으면 내가 지부장
손가락 하나쯤은 같이 보내주마.”
“글쎄, 누가 죽을지는 가봐야 알지….”
텐이 웃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린은 그의 어깨를 때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뿐 아니라 헤르모스도,
케간도, 시세이도 뒤집어졌다. 지옥으로 갈지도 모르는 마차를 타고 있으니 웃음으로라도 긴장을
풀어보려는 것이겠지만, 다들 너무 웃었다. 그들은 여전히 텐을 짐꾼 보듯이 보고 있었다.
얼마쯤 갔을까. 일행은 드디어 목표한 장소에 도착했다. 널찍하게 파 놓은 공간에는 네모 납작한
돌바닥이 깔려있었고, 그 위에 은으로 그린 마법진이 있었다. 요즘 마법진보다 훨씬 거대하고 투박했다.
영지 마법사가 앞으로 나가 지팡이로 마법진을 두들겼다. 그리고 따라했다간 혀가 다섯 번쯤 꼬일 것 같은
마법 주문을 줄줄 외웠다. 던젼 주인이 걸어둔 암호문을 해석한 것이었다.
주문이 끝나자 마법진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액체가 된 은이 돌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새파랗게
빛을 발했다. 눈알이 뜨거울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텐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마법진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돌계단이 아래로, 아래로 뻗어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던젼으로 가는 입구였다. 안에서는 기묘할 정도로 아무런 소리도, 냄새도 나지 않았다.
모두들 로에늠을 쳐다봤다. 그는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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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6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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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둡군. 이래서야 습격을 받으면 속수무책이오. 조금 더 밝게 할 수는 없소?”
“그건….”
“저,”
시세이가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오린이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영지마법사를
쳐다봤다. 그 역시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두 마법사는 속삭이는 듯 한 목소리를 주고받았다.
“달려! 함정이다!!”
“에라이, 빌어먹을! 하여튼 마법사란 족속들은!”
“마법사가 뭐 어떻단 말이냐, 이 잡놈아!”
일 미터 정도의 넉넉한 너비였던 계단이 그 반으로 좁혀졌다. 그리고 또 그 반으로 줄었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발 잘못 놀리면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질 판국이었다. 계단은 이제 반 뼘
정도의 너비로 줄어들어 일행은 게걸음으로 미끄러지듯이 내려가야 했다.
“떨어진다!”
“마법사!”
눈 깜짝 사이에 돌계단은 산산이 부서졌다. 잘못 맞으면 두개골이 까부수어질 강도의 돌덩이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원정대는 맨 몸으로 허공에 내팽개쳐졌다. 수많은 악독한 함정과, 몬스터들과의 일전을
대비했지만 이런 꼴을 당하리라고 예상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대비책도 있을 리 없었다.
「그라시아 ‧ 그라세.」
우윳빛 방어막이 우웅, 하고 울었다. 보호막을 누르던 돌들이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것들이 원정대 위에 먼지처럼 수북하게 쌓인 후에야 보호막이 사라졌다. 보호막이 반딧불풍뎅이까지
지켜주진 못했는지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어둠의 침묵 속에서 안도의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을 때.
화르륵! 화륵!
수십 개의 횃불이 타올랐다. 시야가 대번에 밝아졌다. 그들이 떨어진 곳은 흙바닥 위에 넓고 둥근
돌바닥을 깔고 돌기둥을 올린 광장 같은 곳이었다. 가장자리에는 오 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횃불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치 던젼이 침입자를, 아니 먹잇감을 반기기라도 하듯이.
포션도 일단 뼈를 맞춰놓고 마셔야 효과가 있기에 멀쩡한 자들이 돌아다니며 뼈를 맞추었다. 여기저기서
우득, 우득 뼈다귀 부딪치는 소리와 신음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텐은 시세이의 오른팔을 감상했다.
부러진 모양이 아주 기괴했다.
“……가관.”
“떨어질 때 한 번 부러지고, 구르다가 또 부러져서 그래. 넌 용케 무사하구나. 어려서 뼈가
물렁물렁한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할 말 없죠. 포션 마실 준비나 해요.”
기사가 말했다. 그들이 떨어진 광장 바닥에는 머리통이 깨지거나 사지가 꺾인 시체가 즐비했다. 앞서
던젼에 들어왔던 기사들과 병사들이었다. 무언가가 내장을 파먹었는지 훼손이 심해, 이미 인간이라기
보단 썩은 고깃덩어리였다. 기사들은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동료와 부하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래봤자
한데 모아두는 것뿐이었지만. 기사들을 이끄는 칼라일이 말했다.
오린이 동떨어진 곳으로 기어가 토악질을 했다. 만장일치로 그들은 잠시 치료의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마법사의 던젼은 침입자들에게 휴식을 허락할 만큼 친절한 곳이 아니었다. 고작 오 분쯤 지나자 쿵. 쿵.
불길한 발소리가 던젼 안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군데군데 바스러진 돌기둥 너머에서부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오르가 흡, 숨을 들이켜고 말했다.
재빨리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자들만을 로에늠 주위에 끌어다놓고 싸울 수 있는 자들은 전투를 준비했다.
기사들이나 용병들이나 전투에는 이골이 난 자들, 지휘하는 자가 없어도 알아서 제 자리를 찾아갔다.
기사들과 옌시스, 도끼를 든 케간이 앞으로 나서고 텐과 이오르는 기둥을 하나씩 타고 올라가 위쪽에서
화살을 겨누었다. 케간이 불편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눈이 있어야 할 곳은 구멍이 뻥 뚫린 채 불길한 붉은빛 구체를 감싸고 있었고, 손에는 거대한 바윗돌로
만들어진 망치를 들고 있었다. 덩치가 큰 만큼 손발도 어마어마하게 커서 걷어차이기라도 하면 단번에
내장이 부서질 것 같았다. 죽음을 불사한 던젼원정대의 돌격도 태풍 앞의 잠자리 날갯짓처럼 느껴졌다.
“범위를 줄일 수는 없겠소?!”
“저 돌덩이의 전신을 다 다져야 한다면 내 도끼날이 먼저 닳아빠질 거란 것만 알아두쇼!”
마법사들이 다시 떠들었다.
그때, 텐은 팽팽히 당겨진 마흔 다섯 발 째 시위를 놓았다. 쉭, 바람을 가르고 쏘아진 화살이 정확히
마력석상의 무릎뒤쪽에 박혔다. 그 순간 마력석상이 움찔했다. 찰나였지만 움직임이 멈추었다.
마력석상이 텐을 돌아보았다. 눈구멍 속의 빛이 사납게 타올랐다. 찾았다. 저 곳이다. 틀림없었다. 텐은
입 꼬리를 양 옆으로 길게 올리며 소리쳤다.
“거기 멈춰 있는 놈, 무릎 안쪽!”
“으아아아! 찔러! 무릎을 부숴!”
“뒈져라, 이 우라질 놈! 지독한 놈!”
“지옥으로 꺼져!”
이오르는 케간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바닥에 걸터앉아, 여전히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텐에게 물었다.
“어쩌면 그대에게 요정족의 피가 흐를지도 모르오. 부모의 조부모의 조부모까지 모두 이름을 대 보시오.”
“………모르는데요.”
“…왜 모르오?”
“……내가 귀족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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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7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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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벗어난 후부터는 길이 마치 개미굴처럼 얽혀있었다. 태양이 없으니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던젼에 들어온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거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었다. 다리가 무거웠고, 어깨가 축축 늘어졌다. 원정대는 매 전투마다 포션을 복용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할 만큼의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신의 자애를 담은 포션은 놀라운 효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코 만병통치약은 아니었다. 포션을 사용해
다친 곳을 재생시키고 나면 반드시 일정시간 휴식을 취해야 했는데, 그럴 틈도 없이 계속 전투를 하고
포션을 마시고 또 전투를 하니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던젼은 쉴 틈 없이 원정대를 괴롭혔다.
용병들이 무기를 꺼내며 궁시렁거렸다. 도끼에도, 칼에도 몬스터의 체액이 끈적끈적하게 묻어 악취가
대단했다. 기사들은 말 할 기운도 없어보였다. 눈 밑이 시커멓고 얼굴이 핼쑥하게 야윈 것이, 저대로
밖에 나갔다간 걸어 다니는 시체라고 화형대로 끌려갈 꼴이었다. 그들이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지긋지긋한
대열로 몬스터를 기다릴 때.
“하나.”
“히모스 ‧ 에칸!”
로에늠이 직접 돌아다니며 부상당한 이들에게 포션을 건네주었다.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라는 치하와
함께. 기사들은 감히 사양하지 못했고, 용병들은 사양할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급도 아니고
무려 중급포션이었다. 아직 포션이 남아있는 텐과, 아예 다치지를 않는 이오르를 제외하고는 용병
중에서도 로에늠의 신세를 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
포션을 마신 원정대는 벌레의 골수와 내장이 줄줄 흐르는 바닥에 드러누워 꿀 같은 휴식을 취했다. 전투를
치른 직후, 그 잠시의 순간만이 그들이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래 머물렀다간 내장냄새를 맡고 기어온
벌레들에게 곧바로 뒷덜미를 잡힌다. 마력을 끌어 쓸 대로 끌어 써 몇 번째일 지 모를 피를 토한 오린
역시 포션을 마시고 늘어졌다.
“궁수, 너는?”
케간이 웃으며 물었다. 텐은 돈을 받으면 뭘 할 것인지 생각해 봤다. 일분쯤 후엔 내장이 발라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에서 무슨 쓸모없는 생각인가 싶기도 했지만. 떠오르는 것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케간의 우스갯소리에 한바탕 웃음이 퍼졌다. 이렇게 이야기 하지만, 그들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발바닥이 천근만근처럼 느껴질 만큼 걸었는데도 던젼은 끝이 보일 생각을 안 했고, 만만찮은
몬스터와 가디언들이 치즈에 몰려든 개미떼마냥 바글거리는데 이제 로에늠의 포션도 똑 떨어졌다.
던젼원정대의 머리 위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워졌을 때 쯤.
“……지금까지 헛짓했군.”
“던젼원정대는 개뿔, 국왕이나, 못해도 공작쯤은 나서야 저 문 한번 만져볼 수 있겠어.”
“죽었소.”
침묵이 던젼원정대를 휩쓸었다. 그들은 엉거주춤 몇 걸음씩 다가가서는 두 마리의 고르곤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반쯤 펼친 날개로 몸을 감싸고, 고개는 푹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생명이 없는
석상처럼. 케간이 주먹만 한 돌덩이를 휙 던졌다. 그것은 고르곤 한 마리의 콧잔등을 치곤 백골 위를
데굴데굴 굴러갔다. 놈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텐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놈의 눈꺼풀 위에 꽂혔다.
여전히 조용했다. 텐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몬스터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위험한 놈을
앞에 두었는데도 전혀 흥분이 되질 않더라니.
“……….”
“……….”
“……죽었다!!”
시세이가 석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던젼원정대는 홀린 듯이 석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황금, 은화, 보석,
어쩌면 그보다 더 좋은 것. 이 안에 잠들어있을 것들을 상상하느라 다들 얼굴근육에 힘이 풀려있었다.
기사들 사이에서 로에늠이 걸어 나왔다. 그는 감회가 남다른 표정으로 마법진을 더듬었다.
‘여기까지 왔군.’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기사들은 저마다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이 안의 보물들이야 다 영주의 차지가 될 것이지만, 그들로서는 의뢰를 마치고 받을 잔금으로도
인생을 재설계할 수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로에늠이 한발 물러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 보라.”
동그랗게 커졌던 이오르의 연갈색 동공이 상황을 파악하고 날카롭게 조여들었을 때, 이번엔 영지마법사의
지팡이로부터 쏘아진 빛이 그의 허리를 깊숙이 베고 지나갔다. 찰나 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오르는
내장이 밀려나오는 허리를 붙잡고 허물어졌다.
“……다, 당신 미쳤어?!”
“무슨 짓이오, 마법에라도 걸린 거요?!”
모두가 경악한 목소리로 소리쳤을 때, 텐은 화살부터 빼 들었다. 영지마법사가 지팡이를 쳐들고 주문을
읊는 순간 시위를 당겼다. 로에늠을 향해. 로에늠은 이오르의 피가 묻은 단검을 털고, 벼락같이 휘둘렀다.
제대로 검술을 배운 실력이었다. 활을 잡은 왼쪽 손목이 깊게 베이며 피가 터졌다.
“크읏!”
“……!”
“좋은 곳으로 가거라.”
혈관속이 끓고 있는 것처럼 전신의 피부가 부글부글 부풀어 올랐다. 거미줄처럼 튀어나온 핏줄들은 시커먼
색이었고, 눈, 코, 입, 귀, 아랫도리의 오공으로 피를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로에늠과 마법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왜? 대체 왜? 왜, 이런 짓을……?
“저들의 목숨을 끊어주어라. 포션의 효능이 온 몸으로 퍼졌으니, 독 또한 온 몸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런
고통을 주지는 않겠다.”
----------------------
콰앙!
석원은 눈을 뜨자마자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변기를 붙잡고 토악질을 했다. 마치 질식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그는 황급히 숨을 들이켰다가 묽은 위액을 토해내길 반복했다. 적막한 욕실 안에 그의 거친
숨소리만 떠돌아다녔다.
“이 놈 봐라……?”
============================ 작품 후기 ============================
퀄리티가 일일연재의 속도를 못 따라가는군요.
이런 연비 나쁜 손가락 같으니...!
00008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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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와 삼겹살을 썰어놓고, 마늘, 참기름, 고춧가루, 후춧가루 등을 아낌없이 쳐서 양념을 만들었다.
양념에 고기를 버무려 재우는 동안 대파와 양파도 꺼내 송송 썰었다. 상추와 깻잎은 깨끗하게 씻어서
쟁반에 올려놓았다. 30 분 쯤 후에 재워놓은 고기를 프라이팬에 붓고 센 불에 볶았다. 청양고추도 듬뿍
썰어 씨 한 톨까지 쏟아 넣고, 마늘도 잔뜩 넣었다. 매콤한 냄새가 부엌에 진동을 할 때쯤, 석원은 잘
익은 오삼불고기에 통깨를 뿌리고 식탁에 내 놓았다. 멍하니 바라보던 지원이 물었다.
“너, 악몽 꿨니?”
“왜?”
“너 기분 나쁠 때마다 요리하는 거 온 가족이 다 알거든. 그리고……너 지금 표정 장난 아냐.”
“그래, 얘. 혹시 회사에서 잘렸니?”
“여자 문제냐? 말 좀 해봐라.”
어머니와 아버지도 합세했다. 요크셔테리어 호섭이까지 멀찍이 떨어져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석원은
숟가락을 들어 얼굴을 비춰봤다. 듣고 보니 표정이 좀 안 좋은 것 같기도 했다. 하긴,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석원은 오늘 새벽의 일을 떠올렸다. 꿈속에서 거나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후, 그는 오랜만에
수면제를 먹었다. 늦잠을 좀 자게 되더라도 확인해봐야 했다. 텐 가렌이, 석원이 19 년 동안 함께했던 그
존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해서.
목소리 때문에 석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옆에서 대본을 보던 지원이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몇 장 읽다말고 얼굴이 하얘져선 대본을 덮어버렸다. 셋 모두 밥맛이 뚝 떨어진 표정들이었다.
반대로 석원은 없던 식욕이 돌았다. 그는 깻잎위에 고슬고슬하게 익힌 현미 잡곡밥과 죽은 짐승의 고기를
얹어 한입에 집어삼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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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게 재밌나봐?”
문을 열었다. 여고생들이 홍조가 오른 얼굴로 소리를 지르다가, 차에서 내리는 석원의 얼굴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팬보다는 연예인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여고생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욕을 하며 실망하던 그들은 뒤이어 또 다른 차량이 들어오자 노도처럼 그쪽으로 몰려갔다. 동후가 석원의
팔을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놀랐어? 팬이라는 게 저래, 원래. 내가 쫓아다니는 연예인은 신이고 나머지는 다 꼴뚜기지. 그래도
하룻밤 잠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변하는 게 이 바닥인데, 혹시 또 알아? 몇 개월 후에는 쟤들이 동생
쫓아다닐지.”
“감독님, 저 저분 본 적 있는데.”
“뭐? 승희씨가 언제?”
“오디션 날 그 여자, 이지원씨랑 같이 온 분이잖아요. …지금 저 놀리시는 거 아니죠?”
“감독님, 들으셨죠?”
“좋아, 어차피 이희란은 그 씬에서 대사 없고…석원씬 대사 외울 시간 필요하죠?”
“괜찮아요, 다 외웠습니다.”
석원도 웃으며 대답했다. ‘특히나 암퇘지가’, 라는 생각은 덧붙이지 않았지만.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던 감독이 정신을 차리고는 그에게 꼬치꼬치 질문을 던졌다.
동후가 얼른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석원은 감독에게 테잎 인제스트를 하고나면 영상을 좀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서둘러 스튜디오를 나왔다. 옆에서 동후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수다를 늘어놓았지만, 그것을
귀담아 들을 상황이 아니었다. 박무경이 되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기분 좋은 정도가 너무
심해 피가 펄펄 끓고 난리가 났다. 마치 수업시간에 야한잡지를 읽고 안절부절못하는 중학생이 된 것처럼.
동후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와 함께 뒤에서 우승희가 걸어오고 있었다.
“촬영장에서 봬요.”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얼떨결에 석원도 인사를 했다. 그녀는 스카프 자락을 펄럭이며
멀어졌다.
목을 쭉 빼고 감탄하는 동후를 내버려두고 석원은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농담이 아니라 이러다 코피라도
날 것 같았다. 일단 집에서 한 차례 몸을 달래고, 낮잠을 잘 생각이었다. 텐 가렌이 어떻게 되었는지
다시 알아봐야 했다. 석원은 진심으로 신에게 빌었다. 텐 가렌이 무사히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만든 이 세상에 미친 놈 하나 풀어놓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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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원은 어둠속에 푹 빠졌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아팠다. 몸은 지독히 무거웠다.
몸살이 왔거나 아니면 가위라도 눌린 것 같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석원은 신음을 흘렸다. 기억났다.
우승희를 상대로 박무경 역의 오디션을 보고, 집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텐 가렌의 기억은 없었다. 석원은 그가 죽었다는 것을, 그리고 꿈속의 유희 역시 끝났음을 인정해야
했다.
“이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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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9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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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는 이석원이었지만 텐 가렌이기도 했다. 스스로를 자각한 채로 깨어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석원은 모든 의문들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일단 살아나는 게 급선무였다. 그는
차가운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그리고 곧,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가슴아래 단검의 손잡이가
박혀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그는 허리춤을 뒤져 럼주를 담아놓은 주머니를 꺼냈다. 이곳에서 그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몽롱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술뿐이었다. 벨트에서 중급포션도 하나 꺼냈다. 포션을 먼저 마시고 럼주를 비웠다.
목이 화끈하게 타들어갔다. 석원은 윗입술을 한번 핥고, 곧바로 칼을 뽑았다.
“크으………!”
석원은 기다가, 걷다가, 쉬기를 반복하며 창고를 한 바퀴 돌았다. 어슴푸레한 창고 가장자리에서 은으로
그린 마법진을 발견했다. 이 던젼에서만 세 번째로 보는 모양이었다. 위치로 보면 이동마법진이
확실해보였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마력을 가진 자들뿐이었다. 석원은
다시 기어서 이오르에게 다가갔다. 지금 이 안에서 그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머리와 몸통이 붙어있는
자였다. 가슴에 뚫린 구멍은 그렇다 치고 쩍 벌어진 옆구리에서 내장이 보이는데도 숨은 쉬니, 인간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핏물을 빨아들여 질퍽질퍽한 린넨 셔츠도 단추를 끌러 젖혔다.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더니, 성별은 여자가
맞았다. 길게 뻗은 쇄골 아래로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는 가슴이 보였다. 석원은 환부에 골고루 포션을
부었다. 그리고 그녀의 상처가 나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즈즈즉, 소리를 내며 환부가 거죽부터
아물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오히려 중급포션을 마신 그보다도 효과가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오르가 눈을 번쩍 떴다.
“정신이 들어요?”
“…….”
이오르는 로브를 걸치고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 멀쩡하게 걸어 다녔다. 대단한
체력에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그녀는 마법진에 달라붙어 은으로 쓰인 문자를 더듬었다. 한참을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 펠라도르 자작은 자식이 보물을 가져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석원은 그에게
‘던젼 안에 황금이 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네 아들이 들고 사라졌다’는 말을 전해야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요정족인 이오르의 증언, 로에늠이 그의 가슴에 꽃아 두고 간 단검, 그리고 이 머리들. 이 정도
증거라면 영주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놈 참…….”
“용병이에요. 텐 가렌이고,”
“이오르요.”
“영주성과 용병지부에 심부름꾼 좀 보내주고, 그리고 신관 좀 불러줘요. 보시다시피 몸이 걸레짝이라.”
용병패를 보여주었지만 꼴이 이렇다 보니 출입허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석원과 이오르가 화살에 겨누어진
채 쉬고 있는 동안 말을 탄 경비대원이 동시에 세 방향으로 달려갔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펠라도르
용병지부장 코모드였다. 석원이 그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있을 때 경비대원이 신관을 모셔왔다.
연약한 신관은 신성력을 사용하기도 전에 용병과 기사들의 머리통을 발견하곤 뒤로 고꾸라졌다. 세 번째로
도착한 영주성의 기사는 상황을 전해 듣고 황급히 영주성으로 되돌아가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난장판이었다.
태양이 서쪽으로 서서히 미끄러질 때 쯤. 비로소 석원과 이오르는 용병지부 건물에 있는 객실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용병지부장, 영지의 가신, 영지의 기사외 다수에게 던젼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하고 난 후였다.
석원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 미뤄두었던 의문들을 되짚어볼 때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텐 가렌의
몸으로 깨어났다. 지난세월 그가 몹시도 바라오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시커먼 영혼이 이곳이 그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즐거워하긴 이르다. 먼저 알아봐야 할 것이 있었다.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지속적인 현상인지. 그것을 시험해보기 위해 석원은 시트를
뒤집어썼다.
“…….”
“텐? 텐 가렌!”
“……!”
석원은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남자는 목발을 짚으며 엉거주춤 방 안으로 들어섰다. 술에 진탕
취했음에도 용병의 습성이 남아있는지, 겉으로는 허술하게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경계를 하는 눈치였다.
석원은 배낭을 뒤적였다. 묵직한 돈주머니가 잡혔다. 그가 등을 보이고 있자 남자는 고개를 쭉 빼고 그의
움직임을 샅샅이 훔쳐보았다. 그에게 석원은 금화가 가득 담긴 주머니를 내밀었다. 고요한 객실 안에
짤깍짤깍 동전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문을 거칠게 닫고, 한 달음에 석원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에 이미 술기운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명백한 탐욕이었다. 방심하고 있는 착한 어린놈을 죽이고, 돈을 모조리 빼앗을
욕심.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석원은 금화주머니를 든 왼손이 아닌, 화살을 든 오른손을 휘둘렀다. 푹.
두꺼운 화살촉이 남자의 폐를 뚫고 들어갔다.
히익, 히익, 크게 벌어진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이는 시커멓게 썩은
이빨, 허옇게 백태가 낀 혓바닥.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석원은 고꾸라지는 남자를 지탱해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화살통에서 촉의 크기가 크고, 작은 새 화살을 꺼냈다. 그는 흥얼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 작품 후기 ============================
조회수, 추천, 쿠폰, 코멘트! 모두 갑자기 늘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재미있게 봐 주시는 독자님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
+쥬논 작가님의 샤피로 이야기가 많이 나오던데, 주인공이 현실과 환상세계 양쪽을 오가는 설정이
같더군요. 혹시 그 외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지, 샤피로 보신 분 계시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럼 책을
구해서 읽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
00010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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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오려는지, 비바람이 심란하게 불었다. 늦은 밤에도 등을 밝히고 있던 장사꾼들이 하나둘 짐을
꾸려 기어들어갔다. 텅 빈 거리를 기마대의 말발굽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들은 우의도 없이 망토만 걸친
채 굵은 빗방울을 온 몸으로 맞고 있었다. 펠라도르 자작의 병사들이었다. 석원, 아니 텐 가렌은 창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영주는 아직도 세간 살림을 깨부수고 있다더군. 하룻밤 가족과 이별을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병사들을
내보내다니……분노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닌 모양이야. 벌써 용병지부에도 로에늠 이에렉사의 추적 의뢰가
접수되었다네. 현상금도 걸었다더군. 후계자 자리를 탐해 아버지인 영주를 시해하려다 실패하고, 가신인
마법사와 기사들을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명목으로 말이네."
지부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텐과,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는 이오르를 번갈아보며 씁쓸히 말했다.
"다행이 증거가 명백하고, 신관이 그것을 검증해주었지만 영주의 심기가 안 좋으니 언제 자네들에게 화가
미칠지 모르네. 한동안은 레오넬을 떠나있는 게 좋겠어.”
"곧 출발할거요."
그녀의 눈빛은 조금 달라보였다. 던젼에서의 그녀가 세렝게티 초원의 굶주린 암사자 같았다면, 지금은
배부른 암사자 같았다. 미세한 차이이긴 했지만 더 험악해지는 것보다야 보기 좋았다. 텐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텐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자, 이오르는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가만히 다물린, 복숭앗빛
입술에 시선이 묶인 순간. 이오르의 얇은 눈매가 살짝 감겼다.
"농담이오."
낮은 속삭임과 함께 입술이 닿았다. 그것은 찰나간의 부드러움만 남기고 떨어졌다. 이오르는 그대로
객실을 나가버렸다. 텐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핥았다. 그가 알기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죽어가는 인간의 눈이고, 가장 즐거운 것은 살인이었다. 하지만 저런 존재를 침대 위에서
먹어치운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그는 불붙은 아랫배를
달랬다.
"가서 저것 좀 들고 있어."
"뭐야?! 이런 미친…,"
"시키는 대로 하면, 이건 네 거야."
수면, 맥주, 섹스. 물론 마지막 것이 가장 즐거웠다. 텐은 금발머리 창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일어났다.
코르셋으로 조인 잘록한 허리는 한 팔에 들어오고도 한참 공간이 남았다. 텐은 그녀를 끌고 계단을
올라갔다. 검은색 곱슬머리를 풀어헤친 창부가 그의 왼쪽 품에 달라붙었다. 여우처럼 가느다란 눈매와
양쪽 끝이 살짝 올라간 입술이 매력적이었다.
셋은 한 몸처럼 엉켜 어둑한 방안으로 들어섰다. 몰아치는 비바람에 나무창이 삐걱삐걱 근육통을 호소했다.
검은머리 창부가 두꺼운 커튼을 치고, 밑동만 남은 양초에 불을 붙였다. 판자바닥을 덮은 싸구려 카펫.
거친 시트를 몇 겹 쌓아놨을 뿐인 나무침대. 쿰쿰한 곰팡이 냄새…하룻밤 색사를 치르기 위해 만든 방은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커다랗고 순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화장이 지워진 콧잔등에는 흐리게 주근깨가 남아있었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아직 어린 여자였다. 텐은 얇은 금발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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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건 없어?"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인생이 이 만큼만 살만하다면야 담배도, 술도, 카페인도 끊고 오래오래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만큼 모든 일이 순탄하게 풀리고 있었다. 마치 샐리의 법칙처럼.
============================ 작품 후기 ============================
선추코해주신 분들, 쿠폰 보내주신 독자님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
00011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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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는 육상부였다. 대회에서 상도 제법 받았다. 그의 부모님은 공부에는 별다른
재능이 없는 아들이 올림픽 메달을 받아올 지도 모른다는 꿈에 부풀었고, 신발장에는 육상선수용
스파이크가 몇 켤레나 쌓였다.
"꽤……날카롭네요, 가위."
"그럼요, 얼마나 예리한데요. 잘못 쓰면 흉기죠. 유혈사태 일으키는 미용사들도 가끔 있어요."
석원은 가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흥미로운 도구를 좋아했다. 사용법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한창 음침한 상상에 빠져있을 때, 입구가 떠들썩해졌다. 어린 소녀 다섯 명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바비인형처럼 늘씬한 다리와 오밀조밀 자리 잡은 이목구비. 일반인이 아닌 건
확실했다. 원장이 그의 앞머리를 자르며 속삭였다.
원장이 덧붙였을 때, 지원이 돌아왔다. 쵸코렐라를 발견한 그녀의 반응은 '이런, 씨발!'이었다. 마침
반대편에서도 지원을 발견한 모양인지, 쵸코렐라가 멋진 각선미를 앞세우며 다가왔다.
"우린 늦어도 올 하반기쯤으로 보고 있어. 대표님이 완벽주의자시라, 앨범에 들어간 곡이 하나만 마음에
안 들어도 다시, 다시, 다시……도무지 끝날 생각을 안 하네. 너흰 벌써 후속곡 준비하나봐?"
"네, 다음 달에요. 다들 걱정이에요. 저희가 데뷔곡으로 음악차트 3 위까지 올라갔잖아요. 대표님이
내친김에 이번에 1 위 한번 해보자는데, 너무 부담되더라고요. 팬들도 기대를 너무 많이 해서……."
새끼 표범들이 송곳니를 번뜩이며 손을 흔들었다. 치타도 발톱이 흉흉한 앞발을 마주 흔들었다. 동후가
주차장에서 차를 빼오는 동안, 석원과 지원은 헤어살롱 입구에서 기다렸다. 지원이 핸드백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며 말했다.
"썅년들."
"누가 듣겠다."
"……어린년들이 사근사근 웃으면서 총질하는 것 좀 봐라, 응? 네 누나 지금 열댓발 맞았다. 씨발, 천하의
이지원이 꼴 우습게 됐지."
"이 바닥이 이래. 누나가 이렇게 더러운 꼴 보면서 돈 번다, 그 돈으로 지금 네 머리 해준 거야,
이시키야. 알아?"
"그러게 내가 계산한다니까."
"그게 돈이 얼만데 니가……됐고, 넌 이번 드라마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하던 일이나 계속 해. 괜한 헛꿈
꾸지 말고. 이 바닥은 인기 없으면 쓰레기야. 아무도 안 알아줘."
얘길 하다 말고 김상일 대표가 표정을 팍 구겼다.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다. 피치걸의 노래였다. 동후가
얼른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윤동후입니다. 네……네?"
"이석원입니다."
「안녕하세요, 우승희에요. 번호는 감독님한테 받았어요. 놀라셨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제가 지금 영화 촬영 중인데, 출연자 한명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현장이 발칵 뒤집어졌거든요. 다들
대타 찾느라고 난린데……이석원씨가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생각 있나 해서요. 단역이라 분량은
적지만 대사는 좀 있어요.」
김성일 대표가 황급히 메모장에 글자를 써내려갔다. '한 번 겪어보는 게 열 번 레슨 받는 것보다 낫다,
그리고 우승희가 출연하는 영화면 대박은 못 치더라도 중박은 따 놓은 당상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석원은 턱을 문지르며 고민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굳이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일단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우승희가 대답했다.
============================ 작품 후기 ============================
저번편에도 선추코 해주신 분들, 쿠폰 보내주신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
소설 내용 중 오류가 있으면 언제든 지적해주세요.
00012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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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발은 올림픽 대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목적지는 영화촬영지인 한국민속촌이었다. 30 분 전,
석원은 우승희에게 긍정의 대답을 전했다. 그 영화의 제작비가 110 억이고, 톱배우 김승후와 스타감독
고종원의 두 번째 합작이며, 추석 황금연휴 개봉으로 800 만 관객돌파를 노리는 대작이어서……는 물론
아니었다.
미하라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꾸준히 성장하는 나날을 보내리라 마음먹었다. 북풍이 불어와 세상이
흑백으로 물들고, 그 속에서 새싹이 움을 틔우고, 그리고 세찬 비보라가 기존의 것들을 휩쓸고 지나간
후에는……지금과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많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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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나가면 귀 한쪽 자르기.”
“……안 해, 미친놈아.”
“그럼 손가락.”
“안 한다고.”
청년이 진흙을 던졌다. 텐은 아쉽게 돌아섰다. 내기에 끼려고 뛰어온 마법사가 입맛을 다셨다. 빗물로
세수를 하며, 텐은 신전 쪽으로 향했다. 여행길에는 필요한 게 산더미였다. 대한민국이야 가는 길목마다
휴게소가 줄줄이 붙어있지만 이곳은 마을 하나를 이동하는데 며칠이 걸리기도 했다.
직원이 금화를 쓸어갔다. 그걸로 손을 털고, 텐은 용병지부를 나섰다. 이번에야말로 에드레몽 쪽으로
발길을 잡았다.
홀가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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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은 개소리 집어치우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어차피 바깥을 경계하겠다는 명목으로 나온 참이다. 마력이
금세 바닥나는 마법사보다야 넉넉히 화살을 준비한 궁수가 차지하는 게 당연했다. 한참동안 눈싸움을 하던
마법사는 ‘이빨도 안 들어갈 놈…….’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기어들어갔다.
여자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쫓기는 듯 한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나온 숲길에서
말을 탄 남자가 뒤쫓아 왔다. 조잡한 갑옷과 담요역할을 하는 두툼한 망토자락, 긴 쇠사슬에 매단 톱날
갈고리까지. 어딜 보나 마적이었다.
말발굽에 밟히거나 갈고리에 찍히거나, 어느 쪽이든 여자의 등뼈는 곧 으스러질 것처럼 보였다. 텐은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선택의 순간이었다. 쫓는 마적을 죽일까, 쫓기는 여자를 죽일까. 마적의 습격을
받았다면 어차피 여자도 죄를 짓고 숨어사는 화전민일 게 뻔했다.
소수로 움직이는 마적단은 영악하고, 잔인했다. 그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화전민들만 노렸다.
마적도, 여자도 카르투옴 대륙에서는 생명의 값어치가 없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텐에게는 달랐다.
그에게는 저런 자들이야말로 값어치 있는 목숨이었다.
그는 싱싱한 놈을 먼저 잡기로 했다. 이쪽을 발견한 마적이 급하게 말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핑, 시위를
떠난 화살이 오른쪽 가슴을 뚫었다. 몸에 맞지도 않는 싸구려 철갑은 농부들의 괭이나 낫 정도나 막아낼까,
강철을 녹여 만든 화살촉에는 어림도 없었다.
화살에 맞고도 놈은 고삐를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말허리를 걷어찼다. 텐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왼쪽
어깨에 한발을 쏘았다. 놈이 또 다시 휘청거렸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오른쪽 어깨에도 한 발, 두툼한
팔뚝에도 한발……마적의 긴 팔과 머리채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여자가 대답했다.
먹구름 투성이 하늘처럼, 그녀의 얼굴도 시커멓게 죽었다. 그러나 망설임은 잠시였다. 여자는 제 손으로
단추를 뜯어냈다. 볕에 그을린 건강한 젖가슴이 드러났다. 그녀는 가족이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두느니
몸을 한 번 더 버리고 마는 것을 택했다. 모드레스가 마차의 문을 활짝 열고 환영했다. 그녀가 디딤대에
발을 올리자, 안에서 두터운 팔 여러 개가 그녀의 몸뚱이를 끌고 들어갔다. 끼익, 문이 닫혔다. 지붕
아래서 울음 섞인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 작품 후기 ============================
저변 편에도 선추코 해주신 분들, 쿠폰 보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조금 늦었습니다.
내일 다음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
00013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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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는 지금까지의 두 배는 되는 속도로 달려갔다. 텐은 화살을 꺼내 촉을 더듬었다. 날카로운 날 끝에
스쳐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텐은 그 피를 쪽, 빨아먹었다. 그때 덜컹하고 마차 문이 열리더니 용병
한명이 지붕으로 기어 올라왔다. 등에 단창을 세 자루나 메고, 콧수염을 짧게 기른 중년 남자였다. 그는
엉덩이 내려놓을 틈도 없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으며 말했다.
“누에르 ‧ 마르콘!”
마법사가 지팡이를 창밖으로 내밀고 외쳤다. 수정이 붉게 빛났다. 이쪽을 쳐다본 놈이 뭐라고 소리치려
했으나, 그전에 목이 쩍 갈라졌다. 놈이 고꾸라지자 여자가 곡괭이를 들고 휘둘렀다. 콸콸 쏟아지는 피와,
살점과, 내장조각이 웅덩이를 시뻘겋게 물들였다. 끼이익, 마차 문이 열리고 용병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때, 용병들을 발견한 마적이 황급히 각피리를 불었다. 우우웅, 낮은 진동이 울리자 약탈을 하기 위해
흩어졌던 놈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다. 아랫춤의 물건을 덜렁거리는 놈부터, 말 등에 여자를 묶어놓은
놈, 돼지를 줄줄이 꿰어 끌고 나온 놈까지 다양했다. 용병들은 마치 성난 들개처럼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날붙이가 붙어먹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순식간에 마을을 점령했다.
히히힝! 히힝!
아쉬움을 달래며 텐은 아수라장이 된 마을을 돌아보았다. 접전은 잠시였을 뿐, 승기는 애초부터 기울어져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주민들은 벌써부터 살았다며 서로서로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흑……흐윽…….”
“후읍…! 으으으웅……!”
“니미럴, 매번 저런 놈들이 있지. 요행으로 은급용병패를 받은 놈들. 행운에 감사하며 자잘한 일이나 할
것이지, 꼭 돈에 눈이 멀어서 죽을 자릴 찾아온단 말이야……. 어이, 궁수. 저놈 쏴 죽여 버려. 어차피
미하라에 갔어도 하루 만에 뒈졌을 놈이다.”
텐은 화살을 뽑았다. 시위를 걸고 쭈욱 잡아당겼다. 활대가 둥글게 굽었다. 손가락이 아리도록 잡아당긴
시위를 놓으며, 텐은 문득 골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꼬리치는 인어마냥 쏘아진 화살이 목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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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깼으면 이만 바깥 좀 보지?”
“도착했어요?”
동후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차에서 내리자 후덥지근한 날씨가 먼저 반겼다. 전국적으로 폭염 특보가
내렸다더니 숨구멍이 턱턱 막혔다. 동후는 벌써부터 반팔 티셔츠를 펄럭거렸다.
평소라면 흙먼지만 날아다닐 옛것들이 오늘은 활기를 띄고 있었다. 노리개와 꽃신, 비단댕기가 널린
좌판부터 생선이 종류별로 늘어진 어물전. 불똥이 탁탁 튀는 대장간. 색색깔 곱기도 한 비단가게……마치
수백 년 전의 저잣거리로 시간을 이동한 것 같았다. 그러나 가게 주인들은 저마다 손부채질을 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지금 여기 와있다고?”
“예, 명환아! 이명환! 너 이리 좀 와봐!”
인파 속에서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 얼른 달려왔다. 어깨가 두껍고 단단한 게 운동을 오래 한 몸이었다.
키는 석원보다 머리 반개는 더 컸다. 몸만 보면 연기자보다는 스턴트맨이 어울릴 것 같았지만, 생김새도
꽤 멀끔하게 잘생긴 편이었다. 감독은 이제 석원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옆에 선 동후가 ‘엿됐다’고
속삭였다. 감독이 슬쩍 석원의 눈치를 보았다. 이미 결정을 내린 듯 한 표정이었다.
갑작스런 해프닝에 촬영이 중단되었다. 제작진과 보조출연자들은 색다른 볼거리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죄송하게 됐습니다.’이명환이 석원을 스쳐지나가며 속삭였다. 이미 배역에 낙점 받은 듯 한 태도였다.
양궁을 배웠다니, 활을 쏘는 것으로 테스트를 하겠다는 말이 기꺼울 만도 했다. 석원이 헛웃음을 지었다.
곁으로 다가온 우승희가 말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미안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아까 대충 들었는데, 문자를 못 봤네, 어쩌네 하는 건 다 헛소리예요. 경쟁자가 있건 없건, 우승희가
소개한 게 누구건……배역 딸 자신 있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죠. 같은 초심자라도 저쪽은 연기 오래 배웠을
거예요.”
동후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바로 올라가면 저녁은 서울에서 먹겠네.’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우승희가 계속 말했다.
우승희가 이마를 짚었다. 동후는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냈다. 저 멀리서 타닥타닥, 말이 끌려오고 있었다.
사실 그는 수시로 말을 탔다. 마상에서 활을 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텐
가렌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이석원의 몸으로써는 단 한 번도 말을 타본 적이 없었다. 물론 타는 방법과
요령은 기억 속에 뚜렷이 새겨져있다. 그것만으로 가능할지 어쩔지는……직접 해보지 않고서야 모를
일이다. 석원은 턱을 괸 채로 말을 빤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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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편에 선추코 보내주신 분들, 쿠폰 선물해주신 분들모두 감사드립니다 :-)!
00014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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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하시겠습니까?”
하고 묻는 얼굴에는 저부터 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뒤집힌 갈매기날개처럼 올라간 입매와 빳빳한
고개. 이명환은 상당히 자신만만해보였다. 석원은 여전히 턱을 괸 채로 ‘먼저 하시죠’하고 말했다. ‘
먼저’를 뱉을 때쯤 이명환은 이미 왼쪽 발을 등자에 쑤셔 넣고 있었다. 갈기와 고삐를 단단히 붙들고,
왼발을 세게 굴러 올라탔다. ‘일단 등자부터 밟으시고요…….’하고 중얼거리던 스태프가 엄지를 번쩍
쳐들었다. 이명환은 말이 뒷걸음질 치자 재빨리 갈기를 쓰다듬는 여유까지 보였다. 양궁을 배웠다는 젊은
연기자는, 말도 잘 탔다.
이명환이 겸양을 떨었다. 감독이 그를 핥듯이 쳐다보았다. 특히 말 옆구리로 내려온 탄탄한 허벅지와
고삐를 잡아채고 있는 굴곡진 팔뚝을. 이명환은 조심조심 양 손을 놓고, 잠시 뜸을 들였다. 말은
얌전했다. 그가 석궁을 받아들고 화살에 시위를 메기자 감독은 침이라도 줄줄 흘릴 기세였다. 그는
시위를 끝까지 당겨보라느니, 활을 좀 더 들어보라느니 주문을 하며 ‘그림 좋다, 그림 좋아!’를
연발했다. 그쪽 분위기가 매우 화기애애한 반면, 석원의 곁에는 태풍경보가 내렸다. 동후는 미지근해서
쉰내만 나는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셨다. 우승희는 선글라스를 끼고 팔짱을 끼었다. 비단댕기에 매치한
검은색 보잉 선글라스는 접근금지 표지판처럼 보였다. 침묵 끝에 동후가 코웃음을 쳤다.
“말 타본 적 없다면서요.”
“없습니다.”
“이석원씨도 양궁 배웠어요?”
“아뇨.”
“……이봐요, 이석원씨. 말 타는 게 자전거 타는 거랑은 좀…다르거든요. 이 분위기에 낙마라도 하면
쪽팔려서 얼굴 들겠어요?”
“쪽팔릴 짓을 왜 합니까?”
석원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감독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카메라와 붐대를
내려놓고 앉아있던 스태프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시간도 부족한데 더 볼 필요 있나하는 얼굴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이미 이명환은 빈자리에 쑥 박힌 고급 적벽돌이고, 석원은 언감생심 그 자리를 넘보는 시멘트
부스러기였다. 빈자리에 박혀봐야 미관상 보기도 안 좋고 집값만 떨어뜨리는 그런 것. 그것이 현재 그의
값어치였다. 하지만 석원은 태연했다.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로……자신이 부풀었다.
“말 타 보셨습니까?”
이명환이 말 등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석원은 듣기평가와는 친분이 없었지만, 저 말의 속뜻이 ‘올라타다
미끄러져서 쪽이나 파시지.’임을 못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석원은 ‘그래요?’하고 대꾸하며 말의
갈기를 길게 쓰다듬었다. 매일매일 피 맛을 잔뜩 보는 카르투옴대륙의 말들에 비한다면 이놈은 순해빠진
개꼴이었다. 퉁방울만 한 눈깔이 흐리멍덩했다.
‘저적’, 활대가 신음을 질렀다. 그는 굶주린 얼굴로 표적을 쳐다봤다. 표적위에 누군가가 어른거렸다.
우승희였다. 고상한 입술이 뭐든 처박고 싶게 생겼다. 화살이든, 다른 것이든. 똑같이 기분은 좋을
것이다. 그는 치미는 욕망을 달래며 시위를 놓았다. 그리고…….
‘석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
틀림없이 표적의 정 중앙에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분명히 느낌으로는 우승희가 어른거리던 표적에
화살을 쑤셔 넣어 줬는데. 화살은 비웃듯 흙바닥에서 깃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텐 가렌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실수다. 허탈했고, 당황했고, 조금 쪽팔렸다. 석원은 제 손을 내려다봤다. 흉 하나 없는
손바닥이다. 지저분한 텐 가렌의 것과는 달랐다. ‘텐 가렌’과 ‘이석원’은 같은 정신을 공유하지만,
신체적으로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이다. 석원은 씁쓸한 얼굴로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주위는 조용했다.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이명환의 소속사 선배인 이태혁이었다.
대답을 안 하면 이 자리에서 바지라도 벗길 기세였다. 석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그가 소매를 놓았다.
순식간에 스태프가 옷 한 벌을 가져왔다. 왈패 의상이었다. 고감독은 그 위에 시나리오 대본을 척
얹더니 형광펜으로 쫙쫙 줄을 그었다.
속사포처럼 떠들고, 고감독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홀로 남은 석원이 주위를 돌아봤다. 시선, 시선.
쏟아지는 시선에 살갗이 다 근지러웠다. 구경꾼들. 스태프들. 보조출연자들……저마다 수군거리며 그를
힐끔대고 있었다. 그는 뒷덜미를 문지르며 돌아섰다. 이명환은 가장자리에라도 맞추었지만, 그는
실패했다. 그런데도 고감독이 연기를 한 번 더 보자고 요청한 건 그였다. 의도를 모르니 마음이 심란했다.
그런 그에게 동후가 달려왔다.
“말 타봤죠?
“아뇨.”
“활, 쏴본 적 있죠?”
“…없습니다.”
석원이 잡아뗐다. 양심에(그가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지만)거리낄 일도 아니었다. 이석원으로써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는 엄지로 슥, 입가를 문질렀다. 그에겐 한심스런 활질이었지만 남들 눈엔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승희의 눈에도. 그녀가 흘겨보며 말했다
“좋았어요.”
“괜찮았어요?”
그리고 그는 대표에게 이 낭보를 전해야 한다며 핸드폰을 들고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석원에게 우승희가
고갯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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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등에서 내려온 이석원에게 대본을 떠안긴 건 그 때문이다. 제대로 된 연기를 보고 싶었다. ‘제대로’
된 연기를. 고감독은 대본을 펼쳤다. 그리고 78 번째 씬 지문을 펜으로 직직 그었다. 그리고 그 옆에
새로운 지문을 휘갈기기 시작했다. 웃음이 절로 났다. 안 써질 때는 작업실이 너구리굴이 되도록
줄담배를 태우고, 뱃살을 출렁이며 벨리댄스를 춰도 안 풀리던 시나리오가 쭉쭉 잘도 빠졌다. 채 십분도
되기 전에 씬 하나를 뜯어고친 그가 상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00015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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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워싱을 넣은 바지는 닳아빠진 쥐색이었다. 저고리는 여밈이 느슨해 배까지 훤하게 보였다.
거기다 개도 안 물어갈 너덜너덜한 신까지. 말이 좋아 왈패 부두목이지, 영 상태가 안 좋았다. 우승희는
그의 머리카락마저 죄 헝클어놓았다. ‘야성적’이라며. 동후는 ‘박력 있다’고 지껄였다. 둘 다 눈이 삔
게 확실했다. 석원의 눈에는 그저 바가지 하나 들면 동냥 가는 거지꼴이었다. 그는 화장실 앞에 선 채로
허탈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스타일리쉬한 부류는 못 되었지만, 그렇다고 거지처럼 입고 다니는 취미도
없었다. 미리 대본을 보지 않았다면 당장 이 걸레를 벗어던지고 싶었을 것이다.
동후가 펄쩍 뛰었다. 예예, 했지만 석원의 속내는 심드렁했다. 암행어사가 아니라 나라님일지라도 관심
없었다. 그의 관심은 다른데 쏠려 있었다.
그런 처지 때문인지, 장수현은 어딘가 동정심을 유발하는 구석이 있었다. 강아지처럼 꼬리가 쳐진 눈매가
그랬고, 그 안에 처량하게 반짝이는 눈빛이 그랬다. 하지만 석원에게는 감흥 없는 것이었다. 카르투옴
대륙에선 고개만 돌리면 저보다 수십 배는 절박한 눈빛과 마주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장수현이 아니라
그녀가 맡은 역할, 단인마님이었다. 석원은 대본을 다시 한 번 들춰봤다. 78 번 씬은 좌의정의 사주를
받은 채늠과 왈패들이 정 8 품 문관을 사살한 후의 상황이었다. 패거리들이 하인들의 모가지를 자르고 있을
때, 피 맛보다 계집 맛에 굶주린 흑구가 안채를 찾아간다.
# 78. 안채
허리끈 푸르며 단인마님에게 다가가는 흑구. 반쯤 실성한 단인마님, 장지문 쪽으로 기어간다.
흑구, 단인마님 머릿단 붙들고 침상 위로 밀어 넘어뜨린다. 비명 지르는 단인마님.
흑구 어딜 가, 임자? 서방 찾으러 가?
단인 놔, 놔라, 놔라 이놈! 이런 짓을 하고도 살길 바라느냐?! 나으리께서 아시면…!
흑구 (혀를 차며, 귓가에 대고)그놈은 이미 황천길 건넜어, 이년아.
단인마님, 덜컥 저항을 멈춘다. 단검을 머리맡에 꽂는 흑구. 투박한 손길로 옷고름을 푼다.
단인마님의 파르르 떨리는 손이, 비녀를 꼭 잡는다.
“석원씨! 의상 잘 어울리는데?”
“대본 봤죠?”
“예.”
“그 상황대로만 풀어요. 대사랑 지문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예?”
“쓰리! 투! 원!”
“액션!”
“……?”
방 안에는 여자 대신, 구레나룻부터 턱까지 수염이 덥수룩한 카메라감독만 떡하니 서 있었다.
……흑구는 손잡이까지 진득하게 흐른 피를 툭, 털었다. 당황할 일은 아니었다. 작살로 찔러 죽여야 할
물고기가 싱싱하다는 건 오히려 기뻐할 일이다. 그는 이런 여흥을 반기는 사람이었다. ‘앙큼한 년…….’
소리 없이 달싹이며, 그는 좁은 방안을 훑었다. 불룩하게 솟아오른 비단이불. 다섯 보 떨어진 오른편엔
벽장이, 그 뒤로는 사군자과 시문이 어우러진 병풍이 펼쳐져 있었다. 숨을 곳이라곤 딱 그 세 곳뿐이다.
흑구는 문지방을 넘어 들어갔다.
원앙이 화려하게 양각된 벽장은 사람이 간신히 구겨 들어갈 크기였다. 칼등으로 벽장을 툭툭 두드렸다.
답은 없었다. 그는 벽장의 여닫이문 사이로 난 틈에 단검 끝을 집어넣었다. 천한 칼에 귀한 몸 상하지
않도록 느릿…느릿…칼날이 시커먼 틈을 가르고 내려갔다. 틈새 끝에 손잡이가 걸릴 때까지도 반응은
없었다. 벽장은 아닌 모양이었다. 흑구는 비단이불을 쳐다봤다. 걸음은 여전히 느긋하기만 했다. 애가
타들어가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서방 기다려?”
그가 여상하게 말했다. 그 때.
까강!
병풍 너머에서 날붙이가 튀어나왔다. 비녀나 은장도 따위가 아니라 어린아이 키만 한 장검이. 야무지게
손잡이를 움켜쥔 건 단인마님이다. 시퍼런 눈에선 눈물이 출렁출렁했다.
“아!”
“저리 비—악!”
아차, 싶었다. 석원은 냉큼 그녀의 얼굴을 누르던 손부터 떼고 일어났다. 살기등등하게 꽂혀있는 단검도
휙 집어 내버렸다.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어 조금 더, 조금 더 하다 보니 너무 과했다. 장지문 밖을
돌아보자 고감독이 당황한 얼굴로 ‘커, 컷!’하고 외쳤다. 석원이 손을 내밀었다.
마님, 아니 장수현이 석원의 손을 탁 쳤다.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고 쏘아보는데 원망이 그득했다. 세상에
둘도 없을 불한당, 아동 성 추행범, 뭐 그런 걸 보는 시선이었다. 사실 그리 틀린 건 아니었지만. 석원은
항복하듯 양 손을 올렸다.
“동생 정말 나쁜 놈 같더라.”
“그거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칭찬이죠.”
이명환은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고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번에 흑구 역에 이명환이 낙점됐다.
이명환과 이태혁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서로를 얼싸안기까지 했다. 그리고……석원과 동후는 말없이 그
광경을 쳐다봤다. 잔칫집에 풍악 끊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동후의 턱은 과장 좀 보태 쇄골까지 떨어진
것 같았다. 고감독이 말했다.
“미안한데, 의상 좀 벗어줘.”
“……예?”
“이석원씨가 채늠 역할을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양치기 팔콘입니다^^;
어느새 해가 바뀌어 1 년만에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쪽지 보내주시고, 쿠폰 보내주시며 기다려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00016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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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 컷!”
찬 빗방울이 찔끔찔끔 떨어질 때쯤, 오늘의 마지막 씬이 끝났다. 동후는 얼른 얼음물과 수건을 챙겼다.
물론 ‘그의 배우’를 위해서다. 조금 전, 그는 스타더스트 김대표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그리고
강력히 말했다. 이지원 잘 달래서, 이석원이 반드시 전속 계약서에 도장 찍게 해야 한다고. 연기 한 번
안 해봤다는 놈이 단번에 드라마 최고의 캐릭터를 차지했다. 단역 오디션을 보러 왔다가 조연 자리에
엉덩이를 뭉개기까지 했다. 지금은 이석원이라는 이름 석 자,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지만 동후의 눈엔
이미 그가 금줄 친 돼지로 보였다. 내 배우 목마르랴 부랴부랴 뛰어가는 그에게, 김승후와 우승희의
대화가 꽂혔다.
우승희가 웃었다.
“왜요, 견제해요?”
“견제? 내가 왜 귀찮게 다른 배우를 견제해.”
“이 얼굴을 가지고.”
“어련하실까.”
우승희가 코웃음을 쳤다. 동후도 코웃음을 쳤다. 한달음에 석원에게 달려간 그가 말했다.
“걱정 마, 동생.”
“뭘요?”
“한 일 년 돈 들이부어 관리하고 카메라 마사지 좀 받으면, 친엄마도 30 분쯤 쳐다봐야 아~내 새끼구나,
하게 되는 게 이 바닥이야.”
“……뜬금없이 무슨 소리예요? 그게.”
“아냐, 물 마셔. 물. 차가우니까 꺾어 마셔. 심장 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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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워 죽겠단 표정의 동후를 돌려보내고, 석원은 서둘러 건물로 들어갔다. 그가 일하는 시사교양국은
8 층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뾰족한 고성이 그의 귀를 찔렀다.
“이 PD,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안녕이고 자시고. 아니, 여러분의 작은 손길이 어려운 이웃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이거 한마디가
그렇게 비싸나?”
“연예인들이 다 그렇죠, 뭐.”
방송사가 무조건 갑이었던 때는 까마득한 쥐라기 시절, 요즘은 방송사와 연예 기획사들 기 싸움이 팽팽한
세상이다. 등급별 기준표로 나뉘어 지급되는 출연료 방식은 이미 유물이다. 케이블이니 종합편성채널이니,
대기업과 언론사에서 채널을 늘릴 때마다 연예인 몸값도 뛰었다. 서로 모셔가려고 야단인 톱배우,
톱가수들의 출연료는 아예 상한선이 없다.
그에게 쏟아지는 다섯 쌍의 눈길이 ‘이런 쓸모없는 놈을 봤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석원은 쓸모없는
놈은 이만 꺼져주겠다는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파티션에 겹겹이 둘러싸인 시사국 끄트머리, ‘시사
데일리’ 제작팀이 그의 일터였다. 종이 넘어가고 자판 두들기는 소리만이 침묵을 깨우는 이곳이야말로
진정 교양 있는 공간,
“피해자 인터뷰가 없어?! 지하철에서 무차별 칼부림이 일어났는데, 부상자가 다섯 명이나 되는데 왜
인터뷰가 없어? 어젯밤 방송 3 사 뉴스엔 얼굴 까고 다 나오더만!”
“사건이 너무 커져서 피해자들이 몸 사린다고, 담당 형사들이 죽어도 피해자 연락처는 못 알려준다는데 별
수 있어요. 그 대신,”
“니미! 기자들은 알 거 아냐! 보도국에 물어봤어?”
“…걔들도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못 알려준댑니다.”
성부장이 툴툴거리며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조용한 회의실에 자리를 잡고, 석원은 직구를 던졌다.
석원은 잠시 말을 골랐다.
“아뇨, 제작 말고 배우요.”
“……뭐?”
“누나 따라 오디션에 갔다가 어떻게 캐스팅이 돼서요. 쉽게 못 해볼 경험이고 해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미친놈.”
“부양가족도 없고 나이도 젊으니까 이런 짓도 해보지, 서른 넘으면 하겠습니까?”
“참, 머리 바꾼 거 잘 어울리세요.”
“…고마워요.”
“선배님, 연애하십니까?”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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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팔콘입니다^^
지난편 추천, 코멘트 달아주신 분들, 서평 보내주신 분들,
그리고 쿠폰 보내주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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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어 팩쯤 남은 양파즙이 상자 째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스타더스트 엔터테인먼트 김상일 대표는
홀가분한 얼굴로 손을 털었다. 이제 양파즙은 안녕이었다. 그는 심신의 평화를 찾았다. 요 한달. 회사의
트러블메이커인 이지원이 잠잠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팬이 회사 정문에 빨간 스프레이로 ‘죽어, 썅년’
이라고 팬레터를 써놓긴 했지만, 그 정도야 사건사고 축에도 못 꼈다.
“꼬라지하고는……무스 발랐냐?”
“땀이거든요. 오전 내 민속촌에 있다가 왔는데, 바깥 날씨 완전 찜통이에요. 좀 있음 9 월인데 대체
언제까지 무더위야?”
“…임마, 니가 민속촌에 갈 일이 뭐가 있어?”
“아, 석원이 한 달째 거기서 영화촬영 중이잖아요.”
고개를 숙인 동후가 한숨을 쉬었다. 갑갑하게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풀어 뒷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꾹꾹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김대표의 핸드폰이 울렸다. 동후가 보낸 문자였다. 세
명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있었다. 김대표도 익히 아는 인물들이었다. 동후는 등으로 문을 밀며 말했다.
김대표의 핸드폰을 삿대질한 동후가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꼿꼿이 펴고 전화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곤 휙
나가버렸다.
김대표는 주섬주섬 쓰레기통을 뒤졌다. 그리고 양파즙 한 팩을 원샷했다. 이지원이 잠잠하다 했더니
이번엔 윤동후가 그의 혈압을 올리고 있었다. 그는 복잡한 눈으로 핸드폰을 바라봤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손아민, 뮤지컬배우 박우진, 무술감독 김대경.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이름들이었다.
「네.」
“아이고, 아민씨. 저 스타더스트 김상일입니다.”
「김대표님? 어쩐 일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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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입니다.’
‘피부 나이는 사십대예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아민씨, 손아민씨?」
“아, 이석원씨 어떠냐고 물으셨죠?”
“뭐, 배우 다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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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일 대표는 의심스런 눈길로 수화기를 쳐다봤다. ‘이 썅년이 누굴 칭찬할 여자가 아닌데…….’그는
손가락을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그리고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이번엔 망설임 없이 두 번째 번호를
눌렀다. 은퇴한 뮤지컬배우이자, 연기교습선생인 박우진.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47 세. 167cm 에 102kg.
겉보기엔 딱 온화한 러시아 인형처럼 생겼지만,
“여보세요? 아이고~선생님!”
그의 별명은 사드 후작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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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아, 김대표님.”
그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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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원…….”
「예, 어떻습니까?」
“…꽤 괜찮은 액션배우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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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일 대표를 필두로, 팀장, 실장, 로드매니저까지 스타더스트의 모든 직원이 비좁은 회의실에 집합했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전체회의였다. 다들 엉덩이 깔고 앉자마자 기획안부터 쳐들었다. 이곳은
정글이었다.
고딕체로 커다란 제목과 기획의도, 픽스 된 출연자, CP, PD, 작가 리스트만 줄줄이 적혀있는. 하지만
그 한 장이 내내 심드렁하던 김대표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PBS 추석 특집 예능?”
“네, 파일럿이지만 일단 공중파고. 시청률 괜찮으면 바로 레귤러로 편성될 겁니다. 김주한 PD 랑 홍선미
작가 기획이니까요. 라인업도 괜찮고요. 편성나면 주말 1 시간짜리 완전 날예능입니다.”
“그 쪽에서 섭외 들어온 거야?”
“아뇨, 플랩에서 일하는 후배가 섭외전화 받았다길래, 제가 찾아가서 김주한 PD 만났습니다. 마침
이미지 소비 안 한 신선한 얼굴을 찾는다고 해서 세인이 들이밀어 봤는데,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고요.”
김대표가 기획안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테이블 한 바퀴를 빙 돌아 이제 동후의 차례였다. 동후가 수첩을
펴며 말했다.
“그리고 석원이는….”
“그 사람은 우리 회사 소속 아니잖아요.”
동후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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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숨이 푹 죽어있는 베개에 얼굴을 박은 채로 깨어났다. 속눈썹 밑으로 실거미가 툭 떨어졌다.
달아나려는 거미를 손가락으로 비벼 죽였다. 다시 카르투옴으로 돌아왔다. 그는 텐 가렌이었다. 너저분한
용병무리와 미하라로 떠나는 중이었고, 긴 여정도 이제 끝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달랑 침대 하나 놓인 방이었다. 욋가지에 흙을 발라 만든 벽에는 거미줄처럼 금이 쩍쩍 가 있었는데 그
틈으로 흙부스러기와 햇살이 떨어졌다. 문 옆엔 밤사이 뿌옇게 촛농이 내린 놋쇠촛대가 걸려있고, 그
아래에 깡마르고 털이 지저분하게 엉킨 개가 엎드려있었다. 침대 바로 밑에는 낯익은 가죽배낭과 활,
화살통. 그리고 그가 조급하게 벗어던졌던 옷가지와 허리띠 따위가 보였다. 아, 하고 텐은 생각했다.
이곳은 매음굴의 객실이었다.
그는 시트를 들추었다. 어쩐지 허리 아래가 갑갑하다 했더니, 벌거벗은 금발머리 여자가 그의 허벅지를
베고 잠들어있었다. 숨소리가 아랫도리를 간지럽혔다. 여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옆구리에도 따스한
젖가슴이 닿아있었다. 빠르게 잠이 달아났다. 그 대신 덮쳐온 것은 강렬한 허기다. 머릿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요망한 놈이 ‘나 일어날 차롄가?’하고 대가리를 들었다. 놈은 늘 그렇듯 게걸스럽게 요구했다. ‘
여긴 카르투옴이야. 어서 즐겨보자고’. 물론 텐은 흔쾌히 놈의 손을 잡았다.
그는 두 여자를 번갈아보곤, 허벅지에 달라붙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끌어당겼다.
“야, 야. 일어나.”
“아! 아파요…….”
“내가 뭐랬어?”
“아……고기. 우유랑.”
“그리고?”
“빨리.”
“돈 많이 벌었나 봐요?”
텐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허리를 더듬었다. 가슴은 무방비하게 출렁거렸지만, 그녀의 허리는 검보라색
공단 코르셋으로 조여져 있었다. 양 손으로 여자의 납작한 배를 눌렀다. 신음소리 대신 가쁜 호흡이 터져
나왔다. 손목에 체중을 실었다. 목덜미에 핏대가 서고 발뒤꿈치가 그의 등을 때렸다.
마침내 그녀가 ‘제발 그만’이라고 애원했을 때. 텐은 그녀의 몸속에 죽은 핏덩이 같은 쾌감을 토해냈다.
그는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뭔가가 어깨를 스쳤다. 뒷목에서부터 어깨로 뜨끈한 것이 흘렀다. 텐은
벼락같이 화살을 꺼내 여자의 목을 찍었다. 동시에 그의 옆구리에 또 한 번 불이 붙었다. 이번엔 끔찍한
고통도 함께였다. 악소리가 절로 났다. 텐은 구르듯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배낭을 뒤져 하급포션 한 개를
모조리 마셨다. 겨우 숨구멍이 트였다.
침대 틀과, 양털과 귀리껍질을 넣은 두툼한 깔개 사이가 살짝 벌어져 있었다. 깔개를 들추자 손도끼와,
끝을 뾰족하게 갈아놓은 쇠꼬챙이가 나왔다. 쇠꼬챙이의 끝이 거무튀튀했다. 녹이 슨 것처럼 보이지만,
만져보니 말라붙은 피였다.
“너 수배범이냐?”
“수배범이냐고 묻잖아.”
하급포션이 아니라 중급포션을 쏟아 부어도 여자를 살리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매달릴
것이라곤 이 포션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아주 잘게 끄덕거렸다. 텐은 포션을 다시 배낭이 넣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내려놨던 단검을 집었다. 그녀는 곧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 번 손맛을
느끼고 싶었다.
“이 년 수배범이던데?”
“무슨 말씀인지…….”
“살인수배범이라니까.”
“정말 죄송합니다요. 엊그제 데려온 년인데 시작부터 말썽을 일으키다니……수배범인 줄 알았으면 당장에
쫓아냈을 겁니다. 정말입니다요.”
“그러시겠지.”
“저, 나리. 경비대에는…….”
“난 곧 떠날거니 괜한 걱정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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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원은 좀비처럼 비척거리며 거실로 나갔다.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부모님은 벌써 출근했는지 보이지 않고,
이지원은 소파 팔걸이에 얼굴을 처박고 누워있었다. 그리고 윤동후가 그녀를 달래는 중이었다. 석원이
턱짓으로 물었다.
“왜 이래요?”
“쵸코렐라가 후속곡으로 음원차트 1 위 찍었어.”
“팩하고 노려보지 마요. 주름져. 그리고 술래잡기 OST 이번 주 안에 녹음 들어갈 거예요. 곡조나 가사나
엄청 우울한 컨셉으로 갈 거라니까 누난 감정이입이나 좀 하고 있어요.”
“감정이입이 필요해 뵈니?”
스케쥴 표는 분단위로 촘촘하게 갈라져 있었다. 일산 액션스쿨 들렀다가 술래잡기 포스터 의상 컨셉회의,
의상 피팅, 영종도 세트장 촬영, 민속촌 촬영,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웨이트……더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도 고생해라.”
“…갔다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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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다시 갑시다.”
“액션!”
“나으리….”
“컷!”
“앞으로 말이야, 앞으로. 영화랑 드라마만 잘되면 팬클럽이야 알아서 생기는 거지. 보면 동생은 겸손한
걸 넘어서 욕심이 너무 없어. 목표는 높게 잡아야 되는데.”
“얼마나 높게, 저만큼요?”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팔콘입니다.
오랜만에 들고왔는데 분량이 적어 죄송합니다ㅠ
00019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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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선풍기가 돌아갔다. 해일처럼 일어난 흙먼지가 살갗을 긁고, 겉으로 드러난 구멍이란 구멍을 죄
틀어막았다.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불평할 시간이 있다면 한 컷이라도 더 찍는 편이 나았다.
태양은 서산머리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고, 제 시간에 촬영을 끝내지 못했을 경우 고종원 감독이 부릴
히스테리는 누구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고감독이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도 가만있질 못하고 대가리를 흔들고 있었다. 마치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차 안의 노호혼 인형처럼. 아무도 그의 미친 짓을 방해하지 않았다. 영화만 좋아진다면 감독이
봉산탈춤을 추던 트리플 악셀을 뛰던 무슨 상관이랴.
스크립터 안재영은 자근거리는 모래를 뱉으며 모니터를 쳐다봤다. 흙먼지가 뿌옇게 흩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다섯 필의 말이 달려왔다. 왈패들로 분장한 무술팀. 그리고 이석원이었다. 끝자락이 다 헤진 무명
도포가 까마귀 깃털처럼 펼쳐지고, 투박한 삿갓이 역풍에 젖혀져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섬뜩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그 얼굴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이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쳐다봤다.
조감독이 안재영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녀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가슴께를 만져보자 심장박동이
손바닥을 요란하게 두들겼다. 안재영은 가슴을 누르며 중얼거렸다.
조감독이 다시 한 번 뒤통수를 때렸다. 그러는 그 역시 안색이 좋지는 않았다. 아니, 렉카에 탑승한 모든
스태프가 기가 쭉 빨린 얼굴이었다. 바짝 긴장하고 찍어야 하는 씬이기도 했고, 스태프들을 몰입하게
만들만큼 배우의 연기가 좋은 탓이기도 했다.
이석원의 얼굴이 계속 가까워지고 있었다. 렉카의 속도는 일정했다. 말이 쫒아오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저러다 말과 렉카가 부딪치기라도 하면 대형사고, 아니, 재앙이다. 조감독은 황급히 시나리오를
훑었다.
“커트!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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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문제는,
퇴화한 그의 암기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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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뿔의 표면과 활채의 표면을 미리 거칠게 깎아서 접착제가 잘 붙도록 만든 뒤에……밧줄로 활채와
물소뿔을 단단히 감아서 한참을……풀이 마르고 나면 밀쇠로 문질러서 단단히 접착되도록……’
덧창을 열어보자 푸르스름한 아침이었다. 하늘은 높다랗고, 바람은 찼지만 상쾌했다. 이곳은 이름 모를
농부의 집이었다. 덧창 밑에선 머리통이 커다란 꼬마가 암탉 한 마리를 끼고 지렁이를 먹이고 있었다.
어젯밤 잠자리를 판 농부의 아들이었다. 간밤엔 닭과 동침을 했는지 등짝과 궁둥이가 온통 진흙과
닭털투성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좁아빠진 집 마당에 덩치가 산만한 용병들이 우글거렸다. 반수 이상은 훈련 중이었고,
나머지는 머리를 맞대고 둥그렇게 둘러서 있었다.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가까이 가보니 그새 노루를
한 마리 잡아다 해체하는 중이었다. 텐이 코를 킁킁거리자, 손칼로 갈비뼈 안쪽 살을 발라내던 근육질의
중늙은이가 말했다.
“정말 안 먹냐?”
“날고기 안 먹어요.”
모드레스가 낄낄 웃었다.
“언제 출발한대?”
“여기서 합류하기로 한 놈이 있다는데, 그놈이 아직 안 왔어.”
“일행입니다.”
“일행? 저자도 마법사요?”
“은급 용병이오?”
마법사는 건강이 힘인 자들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마력은 생명력이나 마찬가지였다. 무턱대고 마력을
끌어 쓰면 신체기관이 망가지고, 수명이 쭉쭉 줄어들었다. 그러면 겉보기엔 스무 살 청년이어도 이가
빠지고, 내장이 상하고, 눈이 먼 채로 죽어 자빠지기 십상이다. 마력손실로 망가진 몸은 포션으로도
고치기 힘들었다.
“이는 건강하군.”
“이름이 뭐요?”
“…유리, 아즈엘.”
“짐은 어쩔 거요?”
“짐이 아닙니다.”
“그럼 그 솜씨도 한번 봅시다.”
“그건…….”
“아니면 놓고 가야 하오.”
“괜찮으니까 해.”
“…….”
“마노.”
“하지만,”
“해.”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마법사가 아니라고?”
“그럼 요, 요정족이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요?”
“더 필요합니까?”
“아니, 솜씨는 충분히 봤소. 그런데…….”
모드레스가 말했다.
후드 아래로 산홋가지색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놀란 얼굴도 드러났다. 그녀의 인상은 얼음처럼 싸늘해
보였다. 그리고 후드로 가리지 않으면 안될 만큼, 몹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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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거 또 있어요?”
“있으면?”
“팔라고.”
“싫다, 이놈아. 이게 구하기 쉬운 건 줄 아느냐? 동화 한 냥 없어서 벌거벗은 기집을 쳐다만 봤을 때도
안 판 물건이야, 이게.”
“그리고 젊은 놈이 이런 걸 먹어 뭐하게?”
“열아홉이 젊긴. 하루하루 늙어 가는데.”
“……”
텐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안 판다고?”
“안 판다.”
“그럼 물물교환은 어때요?”
“네놈이 그걸 왜 갖고 있어?”
“여깄다. 그거 얼른 다오.”
“…….”
“말을 섞지 말라니까.”
마법사 영감이 이를 갈았지만, 텐은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른쪽을
바라봤다. 남매가 나란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텐은 물론 마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다시 움직인 그녀의 시선은 텐의 배낭에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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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텐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일어났다. 예상한 바였다. 그는 야영지를 벗어나 전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양초나 횃불은 필요 없었다. 새파란 달무리가 숲을 밝히고 있었다. 그는 일행에게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의 예상이 맞다면, 곧 누군가 그의 뒤를 밟아 올 것이다. 텐은
느긋하게 밤바람을 즐겼다.
“지금 당장은 돈이 없습니다. 하지만 내일 미하라에 도착해서 착수금을 받으면 그것부터…그리고 나머지는
……다른 방법으로 대신 치를 수는 없겠습니까?”
수상한 단어를 머릿속에 넣어두고, 텐은 본래 목적을 떠올렸다. 큼큼, 그가 작게 목기침을 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단단한 나무를 빵 뜯듯이 뜯은 여자였다. 그 손이 인간의
살을 잡으면 어떻게 될지는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텐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혹시 몸도 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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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0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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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부 대본이랑 생수는 다 세팅해놨지?”
말하는 사이 국장실 앞에 도착한 정형석이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에 흐릿하게 얼굴이 비쳤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머리를 다듬었다. 조연출이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했다.
씩 웃으며, 정형석은 국장실 문고리를 돌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단정하게 여민
셔츠에 넥타이까지 졸라맨, 동글동글한 인상의 중년인이 TVY 드라마국장 박양준. 그리고 소파에 앉아
아이패드를 들고 있는 반대머리는 술래잡기 CP 채구형 부장이었다. 정형석은 꾸벅 인사를 하곤 둘에게
대본을 건넸다.
“한 시간 후에 리딩 시작할건데, 혹시 두 분도….”
“아냐, 감독이랑 배우들 상견례에 우리가 끼긴 그렇지. 이따가 리딩 끝나면 우승희 잠깐 보고 인사만
하지 뭐.”
“그럼 전 이만 준비할 게 좀 남아서, 가보겠습니다.”
“어, 그래. 얼른 가 봐.”
“그런데 정 PD, 우리 시청률 2 프로는 기대해 봐도 되겠지? 그래도 우승희 카드가 있는데, 광고도 앞뒤로
좀 붙어줘야….”
“부장님.”
“응?”
“이왕 기대를 하시려거든, 광고 완판을 기대하세요. 저 이거 중반부턴 광고 완판 붙여서 내보낼 거니까.”
그리곤 문이 닫혔다. 흥얼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발소리가 성큼성큼 멀어졌다. 채부장은 문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박국장에게 물었다.
“국장님. 저거 미친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골 아픈데, 너까지 보태지 마라.”
채부장은 찍소리도 못하고 앉았다. 정형석 앞에서야 시종일관 담담했지만, 사실 박국장은 지금 모가지가
달랑달랑했다. 아니, 이미 잘린 머리를 들고 다니는 형편이었다. 그가 드라마국장이 된 지 9 개월. TVY
드라마 시청률은 나날이 하향곡선을 그렸다. 전국시청률 2 프로를 넘어간 드라마가 없었고, 주인공들
몸값에만 회당 1 억을 쓰고 야심차게 출범시킨 50 부작은 0.2 프로로 거하게 말아먹고 조기 종영될
판국이다.
그런 그에게 김효승작가 대본에 우승희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드라마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이석원인지 뭔지 하는 우량아 나부랭이가 같이 매달리기 전까진. 박국장은 급격히 피로해진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채부장이 말했다.
“나도 걱정이 되서 그러죠. 아니, 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 우승희 팬들도 지금 난리 났어요. 보도자료도
안 뿌렸는데 캐스팅 정보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뭐라는데?”
“뭐래긴요, 연출부 미친 거 아니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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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본인은 얌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와인색 미니드레스에, 장롱에 모셔놓고 감상만 하던
에르메스 버킨 백을 들고 있었다. 한 마리 홍학 같았다. 석원이 빤히 쳐다보자 지원이 코웃음을 쳤다.
지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홍학과 카나리아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리곤 양쪽 다 코웃음을
치며 떨어졌다. 석원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조류편. 그것도 생방송이다.
그 후에도 대회의실의 빈자리는 차곡차곡 채워졌다. 석원의 왼편에는 화려한 꽁지깃을 뽐내느라 정신없는
수컷 공작새 두 마리가 앉았다. 얼굴이 낯선 것을 보니 유명한 배우들은 아니었다. 둘 중, 분홍색
와이셔츠를 입은 공작새가 석원을 힐긋거리다가 물었다.
“몇 살이에요?”
“스물여덟이요.”
“동갑이네.”
또각또각, 백조가 걸어 들어왔다. 우승희는 낙낙한 우윳빛 셔츠에 검은 스키니 진을 입고 있었다. 하나로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가냘픈 목덜미에 스쳤다. 그녀가 인사하자 대회의실에 모인 연기자들이 죄다
일어났다. 심지어 배익선까지 허리를 들었다. 빈자리를 찾아 걸어오던 우승희가 석원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녀의 얄상한 눈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석원이 대답했다.
“저 여자 서른다섯이야.”
“그래서?”
“딱 너 만한 애들 밝힐 나이니까 조심하라고.”
분홍색 숫공작이었다. 파닥파닥 움직이는 꽁지깃이 ‘얼른 받아, 받아줘, 받고 친하게 지내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석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콜드컵을 받았다. 안 그래도 뜨거운 불길이 장기를 태우던
참이었다. 달랠 것이 필요했다. 그가 얼음물을 한 모금 마셨을 때, 정형석 PD 가 조연출에게 물었다.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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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1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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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씬 1. 저택.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창문 안으로 서재가 보인다. 창백한 형광등 불빛에서 틸 다운하면,
탁자 뒤에 앉아있는 관리자. 그 옆에 세워진 트라이포드와 비디오카메라. 녹화버튼에 빨간불이 깜빡인다.
카메라 화면 속엔…….”
빚이 있거나,
부자가 되고 싶으니까.
이곳은 묘지처럼 냉기가 도는 서재였다. 관리자는 주름이 무성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사람이 아니라,
개를 보는 눈빛이었다. 투견장에 내보내기 위해 우리에 가둬놓은 열 번째 개새끼. 그 개가 지난번
관리자를 물어 죽였다는 사실을 언제쯤 알아차릴까? 그는 온순한 얼굴로 생각했다.
관리자가 물었다.
“당신은 왜 배가 고파요?”
“…뭐?”
“그거랑 굉장히 비슷한 질문이라서.”
그는 턱을 괴고 말했다.
박무경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곤 차가운 위스키를 단번에 마셨다. 관리자는 아직 질문이 남은
모양이었다.
관리자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박무경은 팔꿈치까지 접어올린 셔츠를 내리며 창밖을 쳐다봤다.
빗줄기는 더 거세질 모양이었다. 그는 이런 날을 좋아했다. 시체를 가공하기 딱 좋은 날씨다. 비가
피냄새를 덮어줄 테니까.
관리자가 주춤 눈을 피했을 때,
“이석원씨?”
석원의 눈동자가 대본을 훑었다. 씬 마지막엔 대사가 없었다. 지문엔 그저, 무섭게 관리자를 노려보라고
쓰여 있었다. 등줄기로 한기가 쭉 올라왔다. 머리가 생각을 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열렸다.
“죄송합니다.”
“저 이런 애드립은 좋아해요.”
그 말이 석원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앞에서 배익선이 헛기침을 하며, 이만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그는
안도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해프닝이 잠잠해지자 곧 다시 대본이 넘어갔다. 하지만 석원의 눈엔 이미
대본 따윈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주위에 사람이 없었다면 스스로
뺨이라도 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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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감독은 문득 깨달았다. 아까부터 카메라의 프레임이 고정돼 있었다. 박무경만 찍고 있었던 것이다.
힐긋 뒤를 돌아보니 조명감독도 입을 벌리고 카메라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배익선과 이석원의 투샷 때부터였다. 저도 모르게 카메라가 박무경을, 아니 이석원을
쫒아갔다. 그가 애드립을 쳤을 때는 무슨 드라마 찍는 것 마냥 현란한 카메라 워킹을 시도하고 있었다.
정신이 잠깐 마실 나갔다 온 게 틀림없다.
덕분에 메이킹이 쓸데없이 예술이었다. 이건 뭐, 어딜 잘라다 붙여도 그림이었다. ‘누가 편집할지 몰라도,
그 놈 노났구만….’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리딩은 어느새 2 화 대본의 중반부까지 진행돼 있었다.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참 묘했다. 다들 지나치게
열심이었다. 대본리딩을 건성으로 하는 배우도 드물었지만 백퍼센트를 다 보여주는 배우도 드문데,
오늘은 다들 백퍼센트를 넘어 칼 같은 긴장감까지 감돌았다. 이대로 현장에 옮겨놔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석원이 킬킬거렸다. 그리곤 곧바로 이지원에게 아랫배를 얻어맞았다. 촬영감독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한 순간 그를 섬찟하게 만들었던 박무경은 어딜 가고, 평범한 남자만 남아있었다.
조명감독이 입이 근질근질한 표정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니, 비결이 뭐예요? 비결이….”
그리곤 빙긋 웃었다.
“그게 비결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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낄낄거리며 새로 고침을 하던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글이 무섭게 올라오고 있었다. 지금 시간은
12 시 50 분. 갤러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시간은 아니었다. ‘어디서 떡밥이라도 던졌나?’ 아니나 다를까.
두 번째 페이지 아랫줄에 댓글 40 개짜리 글이 올라와 있었다.
“대리님, 뭐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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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는 늘 한 줄 한 줄 아껴가며 읽고 있습니다.
00022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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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면 좀비가 창궐해 세상이 뒤집어졌으면 좋겠다. 자고 일어나면 괴물로 변해있었으면 좋겠다.
자고 일어나면 초능력이 생겼으면 좋겠다. 자고 일어나면, 자고 일어나면……뭐가됐든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어린 시절 이석원은 바라고 또 바랐다.
“보기 거북하겠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 거야. 술래잡기 박무경이 감정이입하기 쉬운 캐릭터는 아니잖아.”
“정말 고마워요, 형.”
이지원이 비꼬았다. 석원은 유쾌한 기분으로 책장의 한 구절을 소리 내어 읽었다. ‘메리 에번스의 시신은
목젖부터 복부까지 절개된 채, 모든 장기가 쏟아져 나와 있었다. 심장은 다섯 토막으로 발견되었는데
가운데 한 조각은 바싹 구워져 있었다.’ 지원의 어깨가 움찔움찔했다. 석원이 내심 웃었을 때,
테이블에서 핸드폰이 울었다.
공휴일엔 늘 호섭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부모님이 오늘은 소파에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앉아있었다. 그들은
돋보기안경까지 끼고 한 시간째 갤럭시 탭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꼭 쥔 주먹에 검지만 곧게 편 어머니가
화면을 눌렀다. 몇 번째인지 모를 술래잡기 메이킹 영상이 다시 재생됐다.
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지원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든 말든, 어머니는 잔뜩 들뜬 기색으로 덧붙였다.
지원이 소리쳤다.
낄낄거리던 동후는 결국 개껌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지원이 그 대단한 성량으로 소리를 질렀고,
호섭이는 제 개껌을 돌려달라고 깽깽거렸다. 시끄러웠다. 그 속에서 석원만이 동떨어져 있었다. 석원은
느릿느릿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평소였다면 치솟는 짜증을 감추며 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어나는 대신 다시 책을 펴들었다. 이 정도야 버틸만했다. 손에 들린 책은 꽤 흥미로웠고, 밤엔 이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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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원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텐 가렌의 시간도 멈춰있지만은 않았다. 텐은 조악한 나무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눈에 달라붙어 있던 졸음이 후드득 떨어졌다. 미하라의 새벽은 몹시 쾌청했고, 허공엔
까마귀 수십 마리가 빙빙 돌며 바닥에 뿌려진 내장을 노리고 있었다.
텐은 콧노래를 부르며 시위에 화살을 재었다. 힘껏 깃대를 잡아당기고, 놓았다. 둥글게 쏘아져나간
화살이 목표물을 꿰뚫었다. 도제의 머리통 위에서 날아다니던 까마귀였다. 화살이 까마귀의 발목을 뚫고
나뭇가지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텐의 두 번째 화살이 까마귀의 목을 땄다. 도제의 얼굴 위로 피벼락이
쏟아졌다.
“뭘 봐.”
“창문 닫어, 미친놈아. 냄새 들어와…….”
텐은 배낭을 둘러매며 일어났다. 더 뭉그적거리고 있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카르투옴의 시간은 현실보다
두 배, 세배는 더 빨리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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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아즈엘은 누이를 바라보았다. 꿈속의 그녀는 모처럼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소맷부리에 주름을 넣어
부풀린 공단 드레스는 그가 선물한 것이었다. 수선화 문양을 수놓은 숄도, 머리를 반쯤 묶고 있는 저
리본도 그가 사다 준 것이다. 이때의 누이는 정말 아름다웠다.
유리는 그녀가 저울에 동화와 은화, 금화를 달아보고 양피지에 무게를 기록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깃펜 끝에 잉크를 적시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작은 돌멩이 하나가 훤하게 열린 창 안으로
굴러들어왔다. 그녀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일어나, 창밖을 쳐다보았다. 아래에서 누군가가 ‘마노!
마노!’하고 소리쳤다.
“어디 다녀오니?”
“후원자 따라서 귀족들 사냥터에 갔다왔어.”
“예쁜 아가씨들 많이 봤겠구나?”
어린 그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어머니가 벌써 혼처를 알아보는 거야? 그 남자는 문장만 그럴듯하지, 사람 돼지나 마찬가지야. 기사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첩이 둘이나 있어. 그 중 한명은 아주 유명한 매춘부인데, 이미 사생아까지…
….”
뒷말이 흐려졌다. 누이의 얼굴이 어두웠다. 어린 그는 조그맣게 주문을 읊조리곤, 훌쩍 날아올라 창틀에
앉았다. 그리곤 말했다.
00023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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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 가렌은 막 신전에 들어서려다 말고 뒷걸음질쳤다. 신상이 우뚝 선 입구에는 몇 장의 현상수배지가
붙어있었는데, 그 가운데 낯익은 얼굴 하나가 끼어있었다. 로에늠 펠라도르 이에렉사. 그에겐 의미가
깊은 청년이었다. 그림으로 봐도 아주 신수가 훤했다. 텐은 복숭아 과육을 깨물며 비뚜름하게 웃었다.
“하급 포션 세 병.”
“각각 모리울 은화로 서른 냥입니다.”
“얼마면 됩니까?”
“……뭐가. 오즈엣?”
텐이 코웃음을 쳤다. 저들이 ‘꽤 괜찮은 파티’라면 펠라도르의 던젼원정대는 왕국 제일의 파티쯤 되었을
것이고 그들의 전멸은 국가적 손실이다. 하지만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라에 익숙한 자들과
동행해서 나쁠 건 없고, 저 정도 머릿수라면 마노 아즈엘과 서로서로 견제도 될 테니까.
'아는 사인가?' 비렁뱅이들 사이에서 누군가 물었다. 턱부터 우람한 가슴, 손등까지 털로 뒤덮인데다,
그 위에 털조끼까지 두른 남자는 인간이라기보단 짐승에 가까웠다. 타단이 텐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그래도 미하라의 떠도는 숲은 초심자가 올라타기엔 콧대가 높지. 당분간은 우리 파티에 끼어서 밥값이나
벌라고, 꼬마. 참고로 우리 중엔 미하라 토박이가 있어서 따로 숙소를 잡을 필요도 없어. 집 꼬락서니야
돼지우리가 따로 없지만, 그래도 제법 좋은 여자가 딸려 있단 말씀이야. 어이, 외팔이. 남는 자리
있지?”
또 한 번 왁자지껄하게 웃음이 터졌다. 단번에 그들의 관계를 알아차린 텐이 흥미가 가신 얼굴로 무리에
합류했다. 용병 넷과 타단, 텐 가렌. 둘이 실력을 보증한 마노 아즈엘까지. 순식간에 일곱 명의 파티가
꾸려졌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그들은 대장간과 가죽 세공장, 잡화점 등을 돌며 필요한 물품을 사들인 다음, 용병지부에서 짐수레와
짐꾼을 구했다. 목적지는 물론 <떠도는 숲>이었다. ‘기사는 성도로 가고, 전사는 미하라의 떠돌이
숲으로 가라’는 말이 있을 만큼 유명한 몬스터 서식처. 미하라에 몬스터 토벌대가 항시 운영되는 것도
떠도는 숲의 몬스터 때문이었다.
마노 아즈엘이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타단이 눈빛으로 후드를 녹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털북숭이가 턱짓했다. 무덤처럼 완만한 언덕에 창대가 줄줄이 박혀 있었다. 꼭대기에는 찌그러진 투구
같은 것이 걸려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쇳물을 부어 굳힌 사람 머리통이었다. 썩 괜찮은 취향이었다.
“제한시간 내로 나오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행동이 적발되면 무조건 감옥행이오. 그리고 만약
사냥 중 수정구를 발견하면,”
“몬스터가 따먹기 전에 얼른 갖고 나오겠소. 것 참, 한두 번 들락거린 것도 아닌….”
“벗지그래?”
텐이 말하자, 마노 아즈엘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용병들은 묘한 분위기 속에 눈치만 살폈다. 생각이야 빤했다. 이곳은 때마침 사람이 예사로 죽어 나가는
숲이다. 여차하면……. 서서히 공기가 사나워졌다. 한 걸음 물러서 있는 건 텐과 타단, 어린
짐꾼뿐이었다. 텐은 누가 됐건 어서 한 명쯤 죽어 나가길 바랐다. 물론 시체는 용병이 될 게 분명했다.
설마 그럴 리 없겠지만 마노 아즈엘이 궁지에 몰린다면 그도 끼어들 셈이었다. 눈독 들인 물건에 누군가
먼저 칼집을 낸다면 기분이 몹시 더러울 테니까.
“다 끝났습니다. 이제 괜찮아요.”
“…포션인가요?”
“우리 거래 하나 할까?”
“……거래?”
“내 조건을 들어주면 포션으로 상처를 없애주고, 덤으로 오즈엣도 주는 거래.”
몹시 친절하고 상냥한,
00024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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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는 성립됐다. 마노 아즈엘은 오즈엣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텐은 가시나무 군락 너머의 여울목을
작업장으로 정했다.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었으나, 이곳에선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녀를
데리고 수풀 속으로 들어가자 등 뒤에서 타단이 사체 틈바구니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거 없다며 투덜댔다.
물론 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등이 모두 드러났다. 오목하게 패인 등골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허리에 닿았다. 상처가 좀
있긴 했지만, 상아처럼 희고 매끄러운 피부였다. 이런 걸레짝이 아니라 드레스를 입히고 싶었다.
코르셋으로 안 그래도 잘록한 허리를 더 바짝 졸라매고, 촉촉한 산홋가지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목을
드러내고, 그 위에 큼직한 보석을 걸면 훨씬 보기 좋을 것이다.
칼을 쥐지 않은 손으로 상처를 만졌다. 손끝으로 근육의 움직임과 피부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
아파?’ 텐이 속삭였다. 마노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비명이나, 애원이나, 눈물 따위는 다 삼킨 채
오히려 되물었다. ‘……당신은 이게 즐거운가요?’라고.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신나게 즐기고 있었다.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어쩌면 이 순간이야말로 ‘사랑스럽다’는 말을 사용해야 할 순간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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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는 힐긋, 노인의 가슴을 바라봤다. 가시나무와 장미가 새겨진 백랍 브로치가 달려있었다. 왕실
마법사단의 인장이었다. 노인은 왕실마법사거나, 왕실마법사였던 게 분명했다. 유리의 세상이 뒤집히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그도 저 브로치를 달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비참한 속내를 숨긴 채 창문으로 시선을
피했다. 커튼이 흔들리는 나무격차 창 너머엔 하녀들이 부산을 떨고 있었다. 가만 보니 금색 술이 잔뜩
달린 양탄자를 터는 중이었다. 볕이 따사롭던 어느 날의 오후, 그의 누이가 그랬듯이. 옛날 생각에
울적해지기까지 한 그가 결국 눈을 내리깔았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흰머리가 성성한 기사가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던 유리가 신음했다. 망해가는 영지도 일으킨다는 던젼의 보물을 독차지하다니,
그 기분이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함께 던젼에 들어간 원정대 중 두 명이 살아남았네. 뒤처리를 그리 허술하게 할 놈들이 아닌데, 희한한
일이란 말이야……둘 중 하나는 요정이고 하나는 아직 스물도 안 된 은급 용병이라는군. 요정이야 바람
같은 존재니 찾기 어렵겠지만, 용병은 살아만 있다면 쉽게 찾을 수 있을걸세. 자네가 직접 찾아오게.”
깜짝 놀란 기사가 인사마저 얼버무리며 뛰쳐나갔다. 그리고서야, 마침내 노인이 유리를 보았다. ‘일찍
죽긴 아깝게 생겼군.’ 그의 첫마디였다.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유리는 비틀린 눈으로 웃었다. 그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
때문에 인생을 망친 누이만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죽어줄 수 있었다.
“작년에 상처한 기사가 한 명 있네. 마흔이 조금 넘었던가? 봉토도 있고, 가문도 그만하면 썩 괜찮은
편이지. 자식이 셋 있긴 하지만 다 여식이니 후일 문제가 될 일은 없을걸세.”
“…직접 봐야겠습니다.”
“기사를 상대로 품평이라고 하겠다는 겐가? 가당찮네. 목숨을 거는 마법사가 드물긴 하지만, 돈을 들여
찾으면 또 못 찾을 것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게. 자네를 찾아낸 것처럼 말이야.”
결국, 유리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때. 마치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그의 허리가 홱 굽어졌다.
입에선 핏덩이가 쏟아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지팡이를 쳐다봤다. 신경 다발이 갈가리 뜯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수정구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희미하게 점멸하던 유백색 빛도 꺼졌다.
노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러나 유리에게는 이미 수치를 느낄 정신마저 무너지고 없었다.
아득한 공포뿐이었다. 그는 즉시 저택을 뛰쳐나갔다. 백작가의 말을 빼앗듯이 빌려 한달음에 여인숙까지
달렸다. 나무층계를 뛰어 올라간 유리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거칠어진 그의 숨소리만이 방안을 떠돌았다. 아침에 마노가 누워있던 침대는 이미 싸늘히 식어있었다.
유리는 문에 기댄 채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그의 마력이 강제로 뽑혀나갈 때는 누이가 힘을 쓸
때뿐이었다.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나 유리의 몸이 망가진다는 것을 눈치챈 후로, 누이는 웬만해선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목숨이 경각에 놓이는 경우가 아니고선 말이다.
유리는 매섭게 제 뺨을 내리쳤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어디선가 누이가 위험에 처해있다. 그는 애써
최악의 상황을 회피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나무층계가 부서질 듯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곧 문이 벌컥 열렸다. ‘신이시여.’ 유리는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그의
누이였다. 유리는 마노를 와락 끌어안았다.
“유……!”
“얌전히……얌전히 좀 있으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그거……어디서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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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FD 가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아, 네. 10 분 후에 고사식 시작이라 의상 다 갈아입으셨으면 슬슬 세트장으로 모여주셔야 해서….”
“5 분 내로 가겠습니다.”
얼빠진 FD 를 돌려보내고, 동후와 지원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석원은 그때까지도 미동도 없이 굳어있었다.
‘동생, 괜찮아?’ 동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지원이 거울을 보며 빈정거렸다. 석원은 그 거울 너머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새까만 머리카락, 눈
아래 깊게 그늘을 만들고 있는 캡모자에 재색 티셔츠. 박무경의 껍질을 걸친 이석원이었다. 그는 생수를
마시며 동요를 가라앉혔다. 다행히 병을 다 비웠을 즈음엔, 얼굴에 익숙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술래잡기의 세트장엔 대본 속 별장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고풍스러운 가구와 샹들리에. 엔틱 식기가
가득한 주방. 내부층계에 깔린 검붉은 융단까지 모든 게 으리으리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인형의
집이었다. 고개를 들면 지붕 대신 레일을 타고 쭉 박힌 조명기기들이 보였고, 소도구 팀 스태프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고가의 미술품을 정해진 자리에 세팅하고 있었다.
우승희가 인파에 둘러싸여 있었다. 정형석 PD 와 김효승 작가, 술래잡기의 CP 인 채구형 부장. 그리고
커다란 덩치에 머리털을 지저분하게 기른 남자까지. 어딘가 낯익다 했더니 TV 에 자주 얼굴을 내비치는
예능 피디 신태균이었다. 얼마 전 여배우를 MC 로 한 토크쇼를 새로 런칭한 그가 남의 밥상을 기웃거리는
이유야 뻔했다. 우승희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채구형 부장과 신태균 피디는 우승희를 사이에 놓고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지원이 아니꼬운 얼굴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부장님. 감독님. 작가님은 오늘 메이크업 받고 오셨나 봐요? 세트장 밖에서부터 작가님만
보이던데요?”
그리곤 우승희를 슬쩍 돌아본 지원이 ‘안녕하세요, 우승희씨’하고 인사했다. 우승희가 고개를 까딱했다.
‘저런 썅년…….’ 지원이 입술을 달싹였다. 석원은 눈앞의 인형 1, 2, 3 에게 빠짐없이 인사를 건네곤
마지막으로 우승희를 쳐다봤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열심히 떠드는 채부장을 보고 있었다. 영화
촬영장에서 잔뜩 혹사를 당한 모양인지 오늘따라 더 피로해 보였다. 나쁘지 않았다. 팔딱거리는 날것도
좋지만, 지느러미와 꼬리가 다 잘려나간 채 얌전히 도마 위에 놓인 것도 좋았다. 석원이 저도 모르게
즐거운 상상에 젖으려던 찰나, 어깨 위로 손이 턱 올라왔다. 정형석 피디였다.
정형석 피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신태균 피디는 캡모자를 벗고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더니, 이번엔
우승희의 로드 매니저를 살살 꼬드겼다.
로드 매니저의 표정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말은 단호했다. 신태균 피디가 슬쩍 우승희 쪽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정형석 피디와 김효승 작가까지 합세해 몇 번의 공방이 더 오가는 동안, 석원과 지원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한편에 물러서 있었다. 총성 없는 섭외전쟁. 안 팔리는 연예인인 지원도, 방송국 피디였던
석원도 신물 나게 겪고 봐온 광경이었다. 덩치 큰 보릿자루 동후가 부러워 죽겠다는 듯이 속삭였다.
동후와 지원의 2 차전이 시작되는 듯했지만, 석원은 다른데 신경이 팔려 있었다. 그는 우승희의 옆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묘하게 그녀 위로 누군가가 겹쳐 보였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와 기운
없이 늘어진 어깨, 그리고 낙낙한 셔츠 속으로 우아하게 흐르는 등선……깨달음은 한순간이었다. 마노
아즈엘. 그녀였다.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데도, 여울목 바위에 웅크리고 앉아 피 흘리던 그녀의 모습이
우승희 위로 겹쳐지고 있었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석원은 침을 삼켰다. 화려한 인형들의 연회장처럼 보이던 세트장이 먹잇감이 널린
밀폐된 사육장으로 돌변했다. 당장 누구라도, 아니, 우승희의 목을 자르고 싶었다. 혀가 바짝바짝 마르고
안달이 났다. 갈 곳 잃은 욕망이 그를 부추겼다. 이성이 경종을 울렸지만, 이 어둡고 아늑한 충동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우승희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때였다.
“박무경씨. 잠깐만요.”
멈칫하자마자 플래시가 터졌다. 돌아보자 김효승 작가가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석원은 대답 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핸드폰 화면을 꾹꾹 누르더니 정형석 피디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뭐야, 이거?”
“좋죠? 이거 컬러로 뽑아서 책상 앞에 붙여놓고 쓸까봐. 대사가 그냥 가래떡처럼 쭉쭉 뽑히겠어.”
“석원씨, 석원씨, 잠깐 이것 좀 볼래요?”
그리곤 그가 핸드폰을 앞으로 내밀었다. 석원은 눈동자를 돌려 화면을 쳐다봤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분위기가 몹시 아슬아슬했다. 팔짱을 끼고 있는 억센 팔이 금방이라도 누군가의 목을 조를 것처럼 보였다.
모자의 그림자 때문에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입술은 흐릿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사진을 눈앞에 두고, 그는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굳어버렸다. 저건 이석원의 얼굴이 아니었다.
쾌락과 방종의 대명사 텐 가렌의 얼굴도, 음침한 그림자 속에서 먹잇감을 감상하는 박무경의 얼굴도
아니었다. 누구의 ‘얼굴’도 아니었다. 저건 가식과 내숭의 껍질을 모조리 벗어던진 벌거숭이였다.
00025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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뻣뻣한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옆에서 사진을 본 지원과 동후가 그의 등을 두들기며 뭐라고 지껄였지만
대답할 정신 따윈 없었다. 때마침 고사식이 시작돼 사람들의 관심이 그를 비껴가지 않았더라면 미친놈처럼
이 자리를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
석원은 생각을 떨치고 소파에 누웠다.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어서, 어서, 어서, 검은 욕망이
사납게 재촉하고 있었다. 일 초라도 빨리 넘어가고 싶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얼굴 위에 모자를
얹곤 길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카르투옴 대륙에 와 있었다.
세상은 휘황한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대충 옷만 걸치곤 조급히 미하라의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짙은 푸른색의 빛과 안개가 뒤섞인 골목은 죽은 들쥐나 고양이, 오물 따위로 너저분했다. 부패한 송장
같은 곳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가 머물렀던 화려한 세트장과는 딴판이었다. 그러나 이곳이야말로 그의
세상이었다.
“뭘 찾으시오?”
“이년, 모리울 은화로 계산하면 세 냥에 드리지. 살가죽에 칼집이 많아서 그렇지 한창 젊은 년인데 세
냥이면 거저나 마찬가지요. 오른손이 잘린 것만 빼면 뼈마디도 튼실하고. 한 번 만져보쇼.”
“여기서 할 거요?”
“아니, 이건 옷에 피가 튈까 봐.”
그리곤 노예의 가슴을 푹 찔렀다. 노예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치자 화살이 뽑혀 나왔다. 화살대를 꽉
붙들고 한 번 더 쑤셨다. 분수처럼 핏줄기가 쭉쭉 뿜어졌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진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허우적거리던 노예는 일곱 번째 구멍이 뚫렸을 때 죽어버렸다. 텐은 화살을 버리고 끈적끈적한
손바닥을 쇠창살에 문질렀다. 머릿속이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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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물기를 털며 뒤돌았다. 몬스터에게 옆구리를 뜯어먹힌 타단이 피 거품을 토하고 있었다. 핏줄이
불거진 눈이 그를 간절하게 응시했다. 물론 죽기 전에 작별 키스나 해 달라고 부르는 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건 텐이 늘 가지고 다니는 포션일 테지만, 텐이 원하는 건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즐기며 배를
채우는 것이다.
분노, 고통,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이 치솟았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죽음 뒤에 올 것들. 한번 가졌던 것을, 안락을, 희망을, 자유를 잃었을 때 닥쳐올
것들이야말로 그를 두렵게 했다. 그는 이를 갈며 식인 물고기를 뜯어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때였다.
“처음에 말했었지.”
곧, 이석원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깨어났다. 목구멍으로 신물이 넘어오고 몸에는 경련이 일어났다.
지난번 로에늠에게 심장을 찔렸을 때보다 몇 배는 심한 환통이었다. 피는 용암처럼 들끓었지만, 머리는
차가웠다. 차갑다 못해 으슬으슬했다. 서랍을 뒤져 자질구레한 물건들 사이에서 수면제를 찾아냈다. 물도
없이 두 알을 삼켰다. 책상을 짚고 고개를 숙이자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무너져내렸다.
“뭐야? 안에 무슨 소리야?”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그동안 물 밑에 잠겨있다가 이제야 기어 올라온 김승주입니다.
오랜 시간 기다려주신 분들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
글로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근시일 내로 다음 편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ㅠㅠ!
00026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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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곳이 얼마나 깊은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땅속 어디쯤인 건 분명했다. 토굴의 천장엔 나무
잔뿌리가 거미줄처럼 얽혀있고, 흙벽을 타고 정체 모를 점액질이 꾸역꾸역 흘러내렸다. 보이는 거라곤
오로지 역겨운 것들뿐이었다.
세 번째. 판단력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저 모든 게 엿 같았다. 식은땀을 닦으려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수갑에 달린 녹슨 쇠사슬이 소음을 질렀다. 쇠사슬은 위로는 목줄로, 아래론 발목의 족쇄로 연결되어
있었다. 꼴이 아주 환상적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나가면 일단 포션부터 마신 후, 유리 아즈엘을 찢어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구체적인 방법도 구상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쇠창살을 열고 늙은 간수가 들어왔다. 간수는 떠도는 숲의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나가시오.”
아득하게 멀어지던 정신이 돌아왔다. 이 순간만큼은 ‘날 죽이시오’만큼이나 반가운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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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사가 검붉은 빛깔의 공단과 장식용 레이스를 내밀었다. 공단은 귀족들이나 만져볼 수 있을 법한 고급
옷감이었고, 한 올 한 올 은사로 짠 레이스는 성도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었다. 보통 여자라면 흥분으로
가슴이 터질만한 광경이었으나 마노 아즈엘의 신경은 다른데 쏠려 있었다. 유리가 지팡이에 박힌 오즈엣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마노가 언젠가처럼 엄격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리는 고집스럽게
‘그놈은 이미 죽었어.’라고 말하려다가, 애써 참았다. 그의 누이는 겉으로 보기엔 단단해도 속은 여렸다.
죄책감이라도 갖게 되면 저 작은 머리통으로 얼마나 그 생각에 몰두하게 될지 안 봐도 뻔했다.
그가 아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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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수 둘이 그의 옆에서 지껄였다.
악취의 근원지는 널찍한 수로였다. 그러나 그 안에 흐르는 것은 물이 아니었다. 사람과 가축의 오물부터
시작해서 썩은 쥐나 고양이의 사체, 몬스터의 내장, 온갖 비위상하는 것들은 다 섞어놓은 검은 하수였다.
쇠사슬을 단 죄수들이 그 속에서 부피가 큰 덩어리들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 늙은 간수가 그에게 낡은
장갑과 천 주머니를 쥐여주었다.
“짐승 사체처럼 덩치 큰 것들이 떠내려가 하수로가 막히기라도 하면 지상이 난리가 나거든. 그래서
이곳에서 먼저 깨끗하게 걸러내는 거요. 앞으로 넉 달간 당신이 할 일 중에 가장 편한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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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막 커튼 틈으로 희미한 빛줄기가 쏟아졌다. 먼지가 유유히 떠다녔다. 바닥엔 그가 쓸어버린 노트북과
바인더 뭉치가 그대로 굴러다녔다. 축축하고 역겨운 땅굴이 아니었다. 그의 방이었다. 더듬듯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방문에 닿았을 때. 또다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원의 목소리였다. 석원은 꺼지듯이 한숨을 쉬었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자 속이 확 뒤집어졌다.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문을 열자, 지원이 깜짝 놀라 비켜섰다. 그는 팔뚝을 잡아오는 손을 뿌리치고
황급히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변기에 묽은 위액을 쏟아냈다. 잔뜩 당황한 손이 그의 등을 두들겼다.
“좀 나가 봐, 씻게. 땀범벅이야.”
“…정말 괜찮아?”
“괜찮아.”
그가 티셔츠를 벗으며 말했다. 그제야 지원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욕실 문을 잠그고, 찬물을 틀었다.
순식간에 세면대를 가득 채운 물이 욕실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물줄기를 빨아들이는 배수구를 보자 또다시
욕지기가 치밀었다. 그는 변기에 고개를 처박고 몇 번 더 토해냈다. 간신히 진정하고 레버를 내리자,
변기 구멍 속으로 물이 빨려 들어갔다. 그걸 보니 또 신물이 올라왔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한쪽이 궁지에 몰렸다고 다른 쪽까지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티를 내서도,
긴장을 놓아서도, 집중을 잃어서도 안 된다. 한쪽 발밑이 휘청거리는 만큼 다른 쪽은 더욱 단단하게
중심을 잡아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간신히 손끝에 닿았던 평온은 물론, 모든 게 다 끝장이었다.
텐 가렌의 몸을 차지한 이래로 이만큼 절박한 심정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만큼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던 적도 없었다.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목을 꽉 조르며, 그는 태연히 웃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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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 깜짝이야…뭐야?”
“배우들 스탠바이 다 시켰고요, 대기실에 새 대본이랑 물, 커피, 간식 세팅했습니다. 촬영팀, 조명팀,
음향팀, 소품팀 OK 고요. 펌프랑 가짜 피는 양이 좀 부족할 거 같아서, 분장팀이 슛 들어가기 전까지
추가로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다 됐네. 뭐가 문제야.”
“세트장에 물개랑 펭귄 떴어요.”
눈이 축 처진 물개가 콧잔등을 씰룩이며 말했다. 불똥이 난데없이 배우 쪽으로 튀자, 정형석이 정색했다.
당황한 물개와 펭귄이 동시에 지껄였다. 정형석은 코웃음을 쳤다. 돈이 없어 세트장 실내촬영만 하는
한이 있어도 안 되는 건 안되는 거다. 그리고 그는 일단 방송만 시작되면 협찬금이건 광고비건 얼마든지
끌어올 자신이 있었다.
기세가 수그러든 둘을 뒤로하고 모니터 앞에 앉자, 옆에서 카메라 감독이 낄낄 웃었다.
“아니, 드라마를 피디가 만드는 거지. 마케팅팀이니 홍보팀이니 개떼처럼 몰려들어서 이래라저래라.
언제부터 이 바닥이 이렇게 됐대?”
“옛날, 옛날 한 옛날부터 이랬을걸요.”
본격적으로 헤어와 메이크업, 의상을 갖춘 배우들은 텍스트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완벽했다. 그들은
이미 돈에 팔려온 가정주부, 호스트, 술집 여자, 여대생이었다. 정형석은 카메라 모니터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서 빨리 카메라에 불이 들어가고 배우가 움직이는 씬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런 그의 옆구리를 툭 치며, 카메라 감독이 말했다.
“저 이석원이라는 배우, 살인마 역할치곤 좀 묻히지 않나? 워낙 화려한 사람들을 모아놔서 그런가……
눈에 영 안 들어오네.”
“장 감독님, 긴장 좀 넣고 가시죠?”
“뭐?”
“이석원씨, 잠깐만요.”
정형석은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곤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 감독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카메라를
돌렸다. 저쪽에서 우승희와 이야기하고 있던 김효승 작가가 냉큼 다가왔다. 내심 무명의 주연배우를
궁금해하던 스태프 몇몇, 심지어 물개와 펭귄까지 기웃거렸다. 꼬투리만 잡히면 득달같이 물어뜯겠다는
태도였으나 정형석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정형석이 ‘집중하고 봐요, 좀.’하고 차갑게 말했다. 잠시 카메라 감독을 쳐다보던 박무경이 눈동자를 슥
돌렸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변함없는 시선이었다. 빛 한점 없는 검은 눈동자를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어느 순간부턴가 스피커의 선을 뽑은 것처럼 주위가 몹시 고요하게 느껴졌다. 숨소리마저 불길하게 들렸다.
문득, 정형석은 대본을 떠올렸다. 김효승 작가는 저것을 피식 동물을 앞에 둔 포식 동물의 시선으로
묘사했다. 정확했다.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김승주입니다 :)
지난 편에 추천, 선작, 코멘트 남겨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몇 번씩 읽으며 기운도 얻고, 문제점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폰 보내주신 분들께도 정말 감사 드리구요:)
00027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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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23. 저택 거실, 밤.
거실에 모여있는 참가자들. 홀로 사이드 테이블에 앉아있는 주재영, 벽에 걸린 고가의 오브제를
만지작대다가 장식장 서랍을 열고 안을 뒤지는 손소란, 나머지는 소파에 띄엄띄엄 떨어져 앉아있다.
테이블에 놓인 트레이에서 디저트를 고르는 박무경 뒤로 계단을 내려오는 두 쌍의 발이 보인다. 틸업하면,
관리자와 안내자다.
허리조차 꼿꼿이 세우지 못하는, 그러나 눈빛만은 욕망으로 생생한 관리자와 그를 부축하는 미모의 안내자.
그들이 나타나자 거실의 분위기는 더욱 기묘해졌다. 참가자들은 마치 지뢰가 깔린 바닥에 서 있는 것처럼
옴짝달싹 않고 눈치만 살폈다. 안내자는 그 긴장감을 맛보기라도 하듯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이정환 님께 온 의뢰입니다.”
이정환의 주위에 있던 여자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모두의 신경이 그를 향해 곤두섰다. 마치 심장을
쥐어 짜이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이정환은 엉거주춤 엉덩이만 든 채 망설이고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폭탄의 심지가 빠르게 타들어 가고 있음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폭발은 전혀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나도 2 억 3 천 줍니까?”
“컷! 다시 갑시다.”
정형석 PD 였다.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진행팀 몇 명이 날듯이 세트장으로 뛰어들어가 지폐를
주웠다. 그나마 삼 분의 일은 끈적이는 모조 혈액에 젖어 돈인지 휴짓조각인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
건질 수 있는 것만 최대한 건져봐.’, ‘뭘 건져, 성한 게 없는데.’, ‘어어, 시체 움직이지 마세요. 자세
바뀌면 화면에 티 다 나요.’, ‘난 어쩐지 여기서 엔지 날 거 같더라.’ 이지원은 구시렁대는 진행팀과 FD
틈바구니에서 치이다가, 슬그머니 다시 소파에 앉았다. 정형석이 정확히 세 번의 심호흡 뒤에 말했다.
“지원씨, 왜 그래. 왜 자꾸 카메라를 쳐다봐. 이게 드라마지, 뮤직비디오야?”
“죄송해요, 카메라만 보이면 쳐다보는 게 버릇이 돼서…….”
“음…그럼 어떡할까? 드라마를 몰카로 찍을까?”
“그래도 돼요?”
S# 27. 저택 거실, 밤.
불쾌한 침묵이 감도는 거실. 미동도, 말도 없는 참가자들 틈에서 태연히 디저트를 고르는 박무경. 반대편
소파에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은 손소란이 힐긋 고개를 든다. 눈이 마주치자 빵을 내미는 박무경.
손소란, ‘시체 옆에서 비위도 좋네.’하는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파묻으면, 박무경 계속해서 디저트를
고른다. 그리고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는 황민주.
박무경이 커피잔을 들며 웃었다. 황민주는 긴장을 늦추진 않되, 그러나 조금은 기대하는 얼굴로 그의
옆으로 더 다가갔다. 이제 겨우 밤 10 시. 아침이 밝기까진 적어도 7 시간 이상 남았다. 바로 조금 전에도
어디선가 비명이 들렸다. 그녀는 섣불리 이 자리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신경을 곤두세운 채 계속
경계해야만 하는 상황에 지쳐갔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 밤을 의지할 대상을 물색했다.
그녀를 제외하면 거실에 남은 참가자는 여자가 둘, 남자가 둘. 여자들은 애초에 제쳐놓았다. 그녀보다
젊고, 예쁘고, 약아빠지기만 한 것들은 필요가 없다. 그녀 인생에 도움이 되는 건 대체로 남자였다. 두
명의 남자 중 하나는 쭈그리고 앉아 눈알만 희번덕거리는 게 영 꺼림칙했다. 아까부터 자꾸 젊은 여자들을
힐끔거리는 것도 마음이 안 들었다. 남은 것은 박무경뿐이다. 그녀는 그를 꽤 오래 훔쳐봤다.
박무경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하던 일에 열중했다. 나이프가 접시에 놓인 버터를 잘랐다. 두 조각,
네 조각…곧 여덟 개의 버터 조각이 질서정연하게 줄 섰다. 그는 나이프 끝으로 버터 한 조각을 들어 올려
스콘에 얹고 다시 먹기 시작했다. 황민주는 애써 초조함을 숨기고, 가능한 푸근한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박무경이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황민주의 긴장을 조금 더 무너뜨렸다.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몹시 익숙하게 느껴졌다. 장애아를 키우다 보며 공무원과
사회복지사를 물리게 만난다. 그 세월이 벌써 십여 년, 그녀는 어떻게 해야 원하는 것을 쉽게, 더 많이
얻어낼 수 있는지를 잘 알았다. 거실 곳곳에 자리 잡은 참가자들이 주시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오히려 보란 듯이 박무경에게 더 다가갔다.
황민주는 마치 이곳이 복지관의 상담실인 것처럼 굴었다. 사람 죽이고 돈을 벌려는 괴물은 사라지고,
아픈 자식을 돌보는 고단한 어머니만 남았다. 박무경은 확실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가끔
고개도 끄덕였다. 그가 볼펜 대신 나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박무경님께 온 의뢰입니다.”
시체? 그 의미를 헤아리느라 그녀는 박무경의 태도가 이상할 정도로 태연하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박무경은 입안에 집어넣은 타르트를 몇 번 더 씹어 꿀꺽 삼키곤, 커피잔에 새로운 커피를 따르며
물었다.
“여기서?”
“당신은 전적이 있으니까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작년처럼 카메라가 없는 곳으로 끌고 가시면 안 됩니다. 클레임 들어와요.”
현실감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박무경이 웃는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거실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가
끽끽 돌아갔다. 거실 뿐만이 아니었다. 이 저택은 카메라 없는 사각지대 찾기가 사람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곳이었다.
박무경은 여전히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 표정과 말하는 내용이 전혀 들어맞질 않아서, 황민주는 멍청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자, 다른 참가자들은 어느새 벌떡 일어나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주 기분 더러운 시선이었다. 곧 손소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남은 두 명 역시
거실의 끝과 끝으로 물러나서 경계했다. 그제야 황민주는 한차례 몸을 떨었다. 피 한 방울까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안 도망가요?”
박무경이 다시 나이프를 치켜들며 말했다. 황민주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뚝을 잡아챘다. 그리곤
‘이, 있어요……내 아들!’하고 소리쳤다. 포크 하나를 뒤로 감춘 채 접근하던 주재영이 우뚝 멈췄다.
박무경은 덫 앞에서 가까스로 멈춰선 짐승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주재영을 쳐다보다가, 아쉽게 물었다.
“아들이 몇 살인데요?”
“초, 초, 초등학교 3 학년이에요.”
“아…난 애들은 안 죽여요. 짐승이랑 다를 게 없잖아. 뭐 아는 게 있어야지.”
나이프가 가슴에 박혔다.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흔들리던 양팔이 박무경의 목으로 휙 뻗어왔다. 그러나
경직된 손가락 끝은 그의 살갗에 닿아보지도 못한 채 축 늘어졌다. 곧 블라우스가 벌겋게 물들었다.
박무경은 경쾌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간신히 두 발로 버티고 선 주재영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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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형석은 멍하니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카메라 감독이 그를 쳐다봤다. 조명 감독이, 소품팀,
분장팀 스태프들이 그를 쳐다봤다. 심지어 죽은 지 한참 된 시체조차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시체는
엎어진 자세 그대로 정형석을 바라보더니, 좀 떨어진 곳에서 죽어있는 황민주, 아니 김혜영에게 ‘선배님,
씬 끝난 거 아니에요?’ 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컷! 오케이!”
“감독님. 물개랑 펭귄이 잠깐만 회의 좀 하자는데요. 좀 꺼지라고, 꺼지라고 눈칫밥을 퍼 멕여도 어디서
의자 하나씩 들고와서 저러고 앉아있네요.”
그가 고갯짓으로 가리킨 곳엔 마케팅팀 물개와 홍보팀 펭귄이 똑같이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정형석이
고달픈 한숨을 쉬었다. 옆에서 김효승과 AD 가 걱정과 동정의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어깨
무거운 가장의 심정으로 대본을 말아쥐었다. 그리곤 물개와 펭귄 앞에 앉아 똑같이 다리를 꼬았다. ‘
뭐요?’하는 얼굴로 쳐다보자, 펭귄이 대뜸 말했다.
“잘라주세요.”
“……뭘요?”
“박무경 원샷 잡힌 컷이랑, 마지막에 우승희씨 보고 웃는 것까지 스틸컷 다 잘라줘요. 홍보용으로 쓰게.
아예 저걸로 티저도 하나 만드는 게 어때요?”
“무슨 헛소리예요, 셀링포인트는 당연히 우승희지. 그래, 저 배우 연기는 잘하네. 연기파 배우로
이미지만 잘 구축하면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투자자들한텐 인지도가 먼저죠. 걔들은
이석원씨보다 차라리 이지원씨를 더 좋아할걸요? 노이즈 마케팅이라도 되니까.”
“본방 나간 다음부터 말이에요. 우승희야 이미 깐 카드고, 저쪽은 새로운 카드라 의외성이 있잖아요.
지금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무리수라고 생각하는 상황인데. 그걸 뒤집으면,”
“빈대떡 뒤집어요? 안 뒤집히면 어쩔 건데요?”
끝까지 대꾸하긴 했지만, 물개의 기세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펭귄은 ‘두고 봐요, 내가 비싸게 팔아볼
테니까. 그전에 이석원씨 스타일리스트랑 얘기부터 해야겠네.’ 하고 의욕을 불태웠다. 정형석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거만한 자세로 꼬아 올린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거 봐요. 이석원씨 문제는 일단 본방 나가고 한꺼번에 얘기하자고 했죠? 내 안목이 나쁘진 않다니까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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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김승주입니다 :D
지난편에 추천, 선작, 코멘트 남겨주신 분들.
그리고 쿠폰 보내주신 분들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근시일내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수요일 되시기 바랍니다^^
00028 용병(Merce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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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28. 몽타주. 지하감옥
-축축한 흙벽에 등을 기댄 채 웅크린 텐 가렌. 고열로 흐리멍덩해진 눈이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 끝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진다.
-철창을 열고 횃불을 들이미는 간수. 죄수들 틈으로 텐 가렌, 죽은 듯 쓰러져있는. '죽었나?', '안
죽었소.' 죄수 대답하면 다시 철창 닫히고 페이드아웃.
-줄 맞춰 하수도 속의 몬스터 사체를 끌어내는 죄수 네 명. 가운데 낀 텐 가렌, 힘이 빠져 휘청대다가
앞선 죄수에게 뺨 얻어맞는. 잡고 있던 창자를 내팽개치고 달려드는 텐 가렌.
-벌거벗고 쇠창살에 바싹 붙은 죄수, 창살을 사이에 두고 죄수의 하체에 머리를 파묻은 창녀. 카메라 팬
하면, 맞은 편 굴에서 쇠창살에 달라붙어 소리 지르는 죄수들. 그들 너머로, 구석에서 묽은 위액과 피를
토하는 텐 가렌. 찢어진 입술을 닦고 털썩 앉으면, 지치고 고통스러운 얼굴에 눈빛만 형형하다.
그 끔찍한 우울의 늪에서 기어 나오는 데 거의 일주일이 걸렸다. 그의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지금은 시궁쥐 신세지만 기한이 끝나면 바깥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그날을 대비해
땅굴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목록을 작성했다. 꼴이 꼴이다 보니 많진 않았다. 체력을 회복하는 것.
착실히 근력을 키우는 것. 그리고 더 큰 힘과 더 많은 금을 가지기 위해 궁리하는 것.
땅굴에 갇혀 온종일 하는 일이라곤 개같이 일하는 것뿐이니, 다른 생각에 몰두하는 건 정신을 환기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집중력이 좋아지니 암기력도 부쩍 늘었다. 이미 각궁 제작법은 줄줄 욀 정도다.
카르투옴의 재료로 단점을 보완한 더욱 완벽한 제작법도 구상했다. 나가는 즉시 그를 위한 무기부터 만들
요량이었다.
그래도 뼈아프게 학습한 덕분인지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석원은 밤마다 「역사를 바꾼 1,000
가지 발명품」 따위의 책을 한 시간씩 읽었고, 텐 가렌은 눈을 뜬 순간부터 감을 때까지 생각의 고리를
끊지 않았다. 그는 나름 건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배식이 끝나자 간수가 양피지 두루마리를 펼쳤다. 입에 숯 칠을 한 죄수들이 긴장한 얼굴로 쇠창살이
달라붙었다. 그러나 호명 당하는 건 늘 그렇듯 세 명뿐이었다. ‘자몰, 크란겐, 스사르.’ 호명된
죄수들이 황급히 아랫도리를 벗고 쇠창살에 허리를 붙였다. 나흘에 한 번, 가장 개처럼 일한 죄수들에게
주어지는 포상이었다.
선택지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가 여자. 두 번째는 막 구워낸 쫄깃한 빵 한 덩이. 세 번째는 반나절의
휴식이었다. 물론 아랫도리가 시들다 못해 뿌리까지 썩은 늙은이가 아니고선 전부 여자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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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장갑을 벗고 찬물에 넣어뒀던 오징어를 꺼냈다. 미끄덩한 지느러미를 단단히 붙들고 껍질을 벗겨
내는데, 싱크대가 드르륵 진동했다. 알람이었다. 핸드폰 화면을 켜자 아래엔 아직 시간이 되지 않은
알람들이 두 시간 간격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온종일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알람이 울릴
때마다 의식적으로 현재 상태를 짚어볼 수도 있다.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에나 썼던 방법을 다시 사용할
정도로, 그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뭐?”
“네 등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아침부터 시끄럽게 덜그럭덜그럭….”
그녀가 싱크대를 보곤 잔소리를 멈췄다. 온갖 양념통과 사용한 그릇, 사용할 그릇들로 가득했다. 그녀가
질린 얼굴로 ‘우리 가족 생일은 겨울에 다 몰렸는데, 오늘 호섭이 생일이야?’하고 물었다. 석원은
태연히 대답했다.
어젯밤. 그는 막 내린 커피와 지원이 냉장고 깊숙이 모셔놓은 누텔라 초콜릿을 끌어안고 웹하드에
접속했다. BBS 보도국의 사회부 기자들이 사건자료를 공유하는 웹하드였다. 그도 사건취재를 하면서 몇
번 접속한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 아직 비밀번호는 그대로였다. 그 안에 올라온 사건자료들을 하나하나
열람하며 모처럼 좋은 시간을 보냈다. 물론 지원에게 얘기하긴 곤란한 내용이었다. 그는 뒷목을 긁적이며
둘러댔다.
지원이 그의 등을 찰싹 쳤다.
“너 요즘….”
“요즘 뭐?”
“너 요즘 좀,”
“…오늘 무슨 날이냐?”
“너 드라마 잘렸니?”
“잠을 설쳐서 잔칫상 좀 차리셨대요, 엄마 아들이.”
지원이 비아냥대곤, 석원의 옆구리를 툭 치며 ‘이따 얘기하자.’하고 말했다. 석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지원의 얼굴이 썩어가든 말든, 어머니는 신신당부했다. 지원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아빠, 딸 신세 좀
봐. 아들한테 치이고 개한테 밀리고, 이래서 집안의 권위가 제대로 서겠어?’하고 헛소리를 했다. 그도
부분적으론 동감했다. 개 팔자가, 저쪽 세상 텐 가렌 팔자보다 좋았다. 지원이 뭐라고 지껄이건,
아버지는 헛기침하며 등갈비를 마저 뜯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킬 즈음, 석원과 지원은 나란히 카니발에 올랐다.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동후가 오늘 스케쥴을 줄줄 읊었다. 환상적이었다. 전쟁터의 창녀도 이만큼 바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텐 가렌의 하루보다야 훨씬 나았다. 그는 시름을 달래며 차창에 이마를 기댔다. 그러나 곧 후회했다.
인도에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보자 갈증만 심해졌다.
“초코렐라 음원 순위 내려갔어?”
동후는 대답 없이 운전에 몰두했다. ‘쟤네 노래 들어봤어?’ 하고, 그녀가 석원에게 물었다. 석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득달같이 ‘어떻든?’하고 다시 물었다. 석원은 태연히 ‘좋던데?’하고 대답했다.
지원이 앞좌석의 머리받이에 이마를 쿵쿵 박았다. 그리곤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언제 음원 순위 1 위 찍어봐?”
“이번 드라마 OST 잘 뽑아서 음원 1 위 해요, 누나.”
동후가 얼른 말했다.
지원이 고개를 홱 돌렸다.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보며 석원은 혀를 찼다. 이어질 일들이야
안 봐도 뻔했다. 그는 얼른 이어폰을 꽂았다. 어린애 달래듯 어르는 동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자존심이 밥 먹여줘요? 톱스타랑 사진 한 장 찍으면 몇 시간은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권에 올라갈 거고,
지금 부탁할 만한 인맥 중에 우승희만 한 카드도 없어요. 우리 회사에 그만큼 파급력 있는 사람 누가
있다고.”
“보도자료 돌려서 홍보하면 되잖아!”
“…보도자료. 아, 보도자료 돌려서 홍보하면 기사가 미친 듯이 올라오겠구나. 아뿔싸, 내가 그걸
몰랐네.”
“누나 때문에 홍보 대행사한테도 욕 처먹었던 놈이에요, 내가. 걔들이 누날 파느니 차라리 보험을 파는
게 낫겠대요. 누나 보도자료를 불행의 편지라고 부르더라니까. 하긴, 수십, 수백 장 돌려봐야
취재전화는커녕 스팸신고 안 당하면 다행인,”
“야! 넌 매니저라는 게 그 욕을 다 듣고 있니, 병신아?”
“아니, 그 심정이 이해가 되더….”
다음 순간, 석원은 머리로 창문을 들이받았다. 카니발이 급발진한 탓이었다. 소리가 얼마나 크게 났는지
동후가 말까지 더듬으며 괜찮으냐고 물어왔다. ‘괜찮을 리가 있나.’ 석원은 욱신거리는 옆통수를
문지르며 욕지거리를 삼켰다.
“…형.”
“어, 어, 많이 아프지? 차 잠깐 세울,”
“제 앞으로 보험 들어놨어요?”
하고, 그는 적당히 농담을 던졌다. 백미러를 쳐다보던 동후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 순간 주머니가 드르륵
진동했다. 석원은 핸드폰을 꺼내 알람을 껐다. 두 시간을 또 무사히 버텨냈다. 머리를 박살 낼 뻔하긴
했지만.
예기치 않은 사고에 놀랐는지 지원도 더 이상은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그건 환영할 일이었지만, 몇
번이나 괜찮다고 했음에도 두 쌍의 시선이 자꾸만 그를 힐긋거리는 건 문제였다. 열심히 웃느라 입꼬리에
경련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는 사이 차는 방송국에 도착했다. 외곽부터 플래카드나 돗자리 따위를 바리바리 짊어진 어린애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팬클럽별로 줄을 서 있었다. 오늘 공개홀에 아이돌이 단체로
출연하는 모양이었다. 어린애 몇 명이 카니발만 보고 쫓아오다가 인솔자에게 가로막혔다. 게 중 한 명은
낯이 익었다. 이곳에 오디션을 보러 왔을 때 그를 손장수로 착각하고 쫓아왔던 여고생이었다. 노선을
갈아탔는지 오늘은 다른 그룹의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여고생은 인솔자가 한눈을 파는 사이 탈출을
감행했다가 다시 질질 끌려갔다. 어린애들이란 참 기운이 넘쳤다.
“…….”
침묵을 깬 건 진동소리였다. 석원은 퍼뜩 정신을 차리곤 알람을 껐다. 그녀는 여전히 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헛것은 아니었다.
목소리가 어쩐지 먹먹했다. 자세히 보니 기다란 속눈썹 끝에 물기가 매달려 있었다. 미간에 힘을 잔뜩
주고 참고 있었지만, 툭 치기만 해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꼴이었다. 석원은 곤란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타이밍 한 번 끝내줬다. 그는 애써 생각을 전환했다.
석원은 뒷목을 주무르며 대본을 다시 폈다. 글자 하나하나를 명화 보듯이 뜯어봤다. 효과가 괜찮았다.
스물여덟 번째 글자를 감상하고 있을 무렵, 조막만 한 머리통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이제 속눈썹엔
물기가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시원섭섭했다. 석원은 그녀 쪽으로 대본을 슥 밀어주었다. 물론 박무경의
살인 씬이 있는 페이지였다. 그녀는 동그란 눈동자를 굴리다가,
하고 물어왔다.
“한번 찔러 봐요.”
석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란히 얼굴을 붙인 채 사진을 찍고, 문을 나서기까지 그녀는 네 번이나
깍듯이 인사했다. 어지간히도 예의 바른 아가씨였다. 그녀가 나가고 나자 대기실이 다시 고요해졌다.
석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소파에 기댔다.
어쨌건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그는 통제력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석원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제아무리 상황이 엿 같아도, 그는 늘 마지막에 웃는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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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해?”
“앉아 봐, 내가 이따 얘기하자고 했잖아, 아침에.”
“너 요즘 이상한 거 알지?”
“…어디가?”
“모르면 더 문제고. 너 그거 병이야.”
그건 최대한 잠자는 시간을 늦추려는 발버둥이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양쪽 세상의 균형이 어긋날
즈음 기절하듯 저쪽 세상으로 끌려가는 게 일상이었다. 물론 설명한 방법은 없었다. 궁색한 변명거리라도
찾고 있는데 그녀가 계속 말했다.
“내가 언제?”
“아침에도, 너 동후한테 보험 들어놨냐고 물었지? 좀 미친놈 같았어.”
“그건 농담이잖아.”
“농담처럼 안 들리니까 문제지.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냐. 우울해 보였다가,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다가,
또 금방 헤프게 웃고 다니다가. 꼭 조울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동후나 스태프는 너 배역에 너무
몰입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걱정하더라. 그런데 내가 볼 땐, 너 그거 금단증상이야.”
그녀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곤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사라졌다. 석원은 그 이후로도 한참을
소파에 앉아있었다. 핸드폰 알람이 한 번 더 울리고 나서야, 그는 옷과 가방, 그리고 담배 한 갑을
주섬주섬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담배를 꺼내 물곤 라이터를 찾아 불을 붙였다. 거의 두어 달 만이었다.
연기와 한숨을 함께 토해냈다.
우습게도 담배를 피우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금단 증상이었다. 담배 따위가 아니라,
지금껏 그가 마주한 것 중 가장 심각한 금단증상. 그는 텐 가렌이 되어 경험한 쾌락과 자유에 중독됐다.
그것을 마음껏 즐긴 만큼, 놓친 후의 반동도 거세게 돌아왔다. 최고급 마약을 맛본 몸이 다른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도 잘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지원 앞에서 껍질이 홀랑
벗겨진 채 오들오들 떨다니.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었다. 아니, 지원에게 들킬 정도면 호섭이도 눈치챘을
만큼 티를 줄줄 내고 다녔다는 뜻이다. 그걸 그만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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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보름쯤 더 지나자, 그의 몸과 마음엔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는 누군가 감옥에서 꺼내주기만
한다면 멍멍 짖는 시늉까지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다. 의욕으로 충만했다.
“텐 가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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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김승주입니다.
먼저, 세월호 참사 희생자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안타까운 사건 때문에 글을 올리는 게 맞는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올립니다.
글은 어디까지나 소설로, 픽션으로 생각하고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