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wnload as txt, pdf, or txt
Download as txt, pdf, or txt
You are on page 1of 154

00001 용병(Mercenary)

=========================================================================
             
“BBS 방송국 이석원 PD 입니다. 하나만 대답해 주십시오. 왜 죽였습니까?”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30 세. 전과는커녕 과속딱지 한 번 뗀 적 없는 평범한 중소기업의 대리. 그는


회식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편의점에서 구입한 과도를 휘둘러 행인을 살해했다. 피해자는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가던 19 세 여고생이었는데 몸통만 다섯 군데 이상 찔려 목 아래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경찰이
남자를 발견했을 때, 그는 숨이 끊어진 여고생의 치마를 들치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발적인 범행입니까, 아니면 계획적인 범행입니까? 아는 사이였습니까?”


“…….”

남자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아가리에 본드 칠을 했나', 석원은 들이밀었던 와이어리스를 AD 에게


넘기며 중얼거렸다. 한 시간 반 째 찍은 거라곤 고개를 푹 숙여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범인이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만지작거리는 모습뿐이다.

“우영아, 더 이상 개기고 있어봐야 쓸 만한 그림 찍긴 힘들 거 같다. 형사과 과장한테 사건개요 인터뷰


따고 들어가자.”
“네, 선배. 수갑 타이트 샷만 한 컷 더 찍을게요.”

AD 가 6mm 카메라를 돌려 남자의 수갑을 찍고 있을 때, 밖에서 한 대 태우고 왔는지 담배냄새가 풀풀 나는


형사가 다가왔다.

“피디님, 이제 그만 하시죠. 슬슬 검찰로 송치해야 됩니다. 저놈 저거, 인터뷰 안 해요. 다른 방송국


피디, 기자, 수두룩하게 왔다가 아무것도 못 건지고 그냥 갔어요.”
“예, 이제 과장님 인터뷰만 하고 들어가겠습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뭘요, 한두 번도 아니고. 저 잘 찍힌 컷으로 좀 내보내주세요.”

형사가 웃으며 말했을 때였다. 무릎에 앞머리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얇은 뿔테안경을 쓴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AD 가 얼른 얼굴을 찍었다. 몇 시간 전에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남자의 표정은 무척이나 태연해보였다. 저 얼굴에 모자이크 칠을 해야 하는 게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얇은 혀로 입술을 축이는 모습이 뭐든 한 마디는 할 것 같아 석원도 다시 와이어리스를
들이밀었다. 남자는 안경을 고쳐 쓰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도 담배 한 대만 주세요.”
“왜 죽였습니까, 이것만 대답해주세요.”
“…죽이고 싶어서 죽였어요.”

석원이 멈칫했다. 형사는 기가 찬 얼굴로 '이런 사이코 같은 새끼, 씨발, 콩밥도 아까운 새끼', 하고
중얼거렸다. 당장 한 대 패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는 듯 두꺼운 목덜미에 핏줄이 돋아있었다. 남자는
거칠게 일어난 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며 계속 말했다.

“많이 참았거든요. 게임도 여러 개 해보고, 운동도 해보고, 낚시도 해보고, 사냥도 해보고. 그런데
노력해도 못 참겠더라고요, 그 욕구를…피디님은 누군가 죽이고 싶었던 적 없어요?”
“…….”
“내가 미친놈인가보네요.”

대답을 했으니 이제 대가를 달라고,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석원은 뒷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두


개비를 꺼냈다.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알아요? 내가 마약은 해 본 적 없는데, 마리화나나, 코카인이나 뭐 그런 걸 해도 이보단 못할 것


같아요. 저지르고 나니까 기분이 정말……이걸 왜 지금까지 참았을까 싶은 게. 피디님은 모를걸요, 이런
기분.”
'압니다, 그런 기분', 석원은 빙긋 웃으며 남자에게 담배를 쥐어주었다.

AD 가 컴퓨터에 저장해놓은 사건현장 사진을 찍는 동안 석원은 비타민워터 한 병을 다 비웠다. 갈증이


났다. 피가 낭자한 시멘트, 뒤엉킨 긴 머리카락 뭉치, 피 칠갑을 한 과도, 사진이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과장의 인터뷰까지 끝내고 서를 나오자 태양이 꾸벅꾸벅 기울어지고 있었다.

“넌 회사에 카메라랑 테잎 갖다 놔라. 난 여기서 퇴근할 테니까.”


“예? 저녁 안 먹고 퇴근하십니까?”
“졸려, 들어가서 눈 좀 붙여야겠다.”

석원은 길게 하품을 하며 차문을 열었다. AD 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하여튼 선배, 잠 많은 건 알아줘야 된다니까요. 참, 내일 교수 인터뷰는 누구 데리고 가세요? 제가


가도 돼요?”
“넌 왜 내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냐. 나 좋아하냐?”
“아, 그럼요. 다른 선배들하고 나가면 깨져도 여러 번 깨지는데, 선배는 성격도 좋으시고…….”
“그래, 내일 너 데려간다고 할 테니까 여덟시에 인터뷰 갈 준비나 해둬.”
“옛서! 조심히 들어가십쇼.”

손을 흔드는 AD 를 뒤로하고 석원은 한가한 도로를 달렸다. 퇴근시간이 한참 남아서인지 도로는 휑했다.
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은 다 나갔는지 아무도 없고, 요크셔테리어 호섭이만 꼬리를 뱅뱅 돌리며
반겼다. 발목에 침칠을 하며 쫓아다니던 놈은 개밥그릇 가득 사료를 부어주고 나서야 떨어졌다.

석원은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잠그고, 위에 단 잠금쇠를 하나 더 잠갔다. 창문에 바다색 암막커튼을 치자
방 안이 금세 어둑해졌다. 석원은 옷만 갈아입은 채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저녁보다, 샤워보다, 그는
다른 게 더 급했다. 몇 달치 월급을 털어 마련한 고급 매트리스와 가벼운 거위털 이불, 숙면을 도와주는
기능성 베개를 베고 눈을 감자 물을 잔뜩 먹은 수건처럼 몸이 축 늘어졌다. 마치 매트리스 밑에서
무언가가 그를 잡아당기는 듯 한 기분이었다. 석원은 깊게 호흡하며 기다렸다. 그의 정신이 '그곳'으로
끌려들어가기를.

----------------------

텐 가렌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무거웠다. 오늘도 익숙한 꿈을 꾸었다. 몇 년간 계속 꾸어온,


기억날 듯 말듯 하면서도 결국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꿈이다. 그의 아침 기분이 매일 아침 바닥을 치는
것은 그 꿈 탓이 컸다. 텐은 보풀이 잔뜩 일어나 거칠거칠한 담요를 걷고 일어났다. 움직일 때마다
밀짚을 채운 침대가 삐거덕 삐거덕 몸살을 앓았다. 침대 옆에 걸어놓은 물주머니를 열어 입안에
들이부었다. 그래도 갈증은 여전했다. 물로는 해갈할 수 없는 갈증이었다. 텐은 가죽배낭과 활, 화살 통,
물주머니를 챙겨 방을 나섰다. 어젯밤엔 침대 네 개가 들어있는 공동실이 꽉 찼었는데, 지금은 그만
남아있는 걸 보니 늦은 아침인 모양이었다.

어제 비가 왔던 탓에 말라붙은 진흙과 지푸라기로 지저분한 나무계단을 내려가자 일하는 아이가 약빠르게


자리를 안내했다. 축제 기간이 아닌데도 1 층 식당은 북적북적했다. 근처 영지에 자잘한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더니, 반은 칼을 찬 용병이고 반은 행상인이었다.

“뭘 드릴까요?”
“양고기하고, 우유 한 사발 내와. 빵도. 포도주는 어때?”
“좀 밍밍해요, 그 대신 싸요.”
“맥주나 가져와.”

주문을 받은 아이가 돌아가자 계단 구석에 앉아있던 어린애 둘이 다가왔다. 사내놈 하나와 계집애
하나였는데 둘 다 비쩍 곯아 팔다리가 겨울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
“부츠 닦아드릴까요?”
“얼만데?”
“모리울 동화 다섯 냥이에요.”

방금 주문한 아침식사 값이 동화 여섯, 일곱 냥 값인 걸 감안하면 부츠 닦는 값 치곤 꽤 비싸다. 하지만


동화 다섯 냥은 그깟 부츠나 닦으라고 주는 돈은 아니었다. 주머니에서 동화를 꺼내 던져주자 사내놈은
재빨리 허리춤에 끼워 넣은 걸레와 물통을 꺼내 발치에 달라붙었다. 무릎 아래까지 오는 가죽부츠는
진흙범벅이라 어차피 닦기는 닦아야했다.

텐은 딱딱한 의자허리에 등을 기댔다. 계집애가 식탁 밑으로 기어 들어와서 그의 다리사이에 꿇어앉았다.


허리춤의 매듭을 끌러 슬슬 성이 나려는 것을 꺼내고 일을 시작했다. 동화 다섯 냥은 대부분 이 계집애
혓바닥 값이었다. 고양이나 개 같은 짐승의 것처럼 작은 혓바닥이 열심히 핥고 빨았다. 홀쭉한 얼굴에
눈만 덩그러니 커다란 계집애는 혀를 잘 놀리는 편은 아니어서, 아침식사를 시작한지 한참이 되도록
머리를 아랫도리에 처박고 있었다.

따끈따끈한 양고기를 끼워 넣은 보리빵을 거의 먹어치웠을 때, 비로소 텐은 눈을 감았다. 목구멍을


텁텁하게 만들던 갈증이 조금 가셨다. 그가 쏟아낸 것을 계집애가 꿀꺽 삼키는 모습을 보다가, 텐은
의자허리에 걸어놓은 화살 통에서 화살 하나를 뽑아 서슴없이 사내놈의 손등을 찍었다.

“아악!”
“손 떼.”
“아, 아, 아악! 자, 잘못했…!”
“빨리 안 떼면 눈알도 꼬챙이에 꿰일 줄 알아.”

소년이 황급히 텐의 돈주머니에서 손을 뗐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손등을 꿰뚫어 피가 줄줄 흘렀다. 잔뜩


겁에 질린 놈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계집애는 허리춤을 여미지도 않고 쫓아나갔다. 텐은
스스로 기운 빠진 놈을 밀어 넣고 매듭을 묶었다. 손가락에 피가 조금 묻어있었다. 그는 입술을 핥으며
끄트머리만 조금 남은 보리빵에 피를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입에 구겨 넣고 씹었다. 더 이상 갈증이
나지 않았다.

“아침부터 바닥에 피 칠을 해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모리울 동화 두 냥 추갈세.”

거구의 여관주인이 투덜거렸다. 텐은 못들은 척 맥주를 꿀꺽 꿀꺽 마셨다. 그는 지금 매우 상쾌했다.


정신적인 문제인지, 어렸을 때부터 그는 감각이 둔한 편이었다. 마치 제 3 자의 시선으로 '텐 가렌'
이라는 인간을 관조하는 것처럼. 하지만 성욕을 풀 때나 이렇게 피를 볼 때에는 유난히 감각이 선명해졌다.
그건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그만이 느끼는 쾌감이었다. 여관주인이 빈 그릇을 치우며 혀를
차다.

“낯익은 얼굴이다 했더니 산 너머 뷔로엠 마을에 사는 어린놈이었구먼그래. 용병이 되겠다고 집 나갔단


얘긴 들었는데, 하고 다니는 모양을 보니 짐꾼에선 벗어난 것 같고, 동급 용병이냐? 용병 그거, 칼질하는
것도 재능이 있어야지 잘못하면 병신 되기 십상이야. 동급 땄으면 한 냥 두 냥 차곡차곡 모아 장가나 들어.
은급으로 승급하겠다고 나서다 개죽음 당하는 놈들 여럿 봤다.”
“시끄럽네. 가는 길에 먹게 빵하고 고기 같은 거나 좀 싸줘요. 맥주랑.”
“집에 가는 모양이지? 새벽닭 울기 전에 산 넘어갈 거면 서둘러야할 거다, 세 시간 쯤 후엔 이동마차가
출발할거야.”

양고기 소시지와 손바닥만 한 육포 한 장, 보리빵을 배낭에 집어넣고 여관을 나섰다.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은 용병길드의 지부였다. 여관에선 삼사십 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텐은 여관 앞에 우두커니 선
채 좀처럼 걸음을 떼지 않았다.

철광을 끼고 있는 자작령 펠라도르는 사계절 언제나 땀내와 열기로 후끈거리는 영지였다. 조금이라도
값싸게 철을 사러 온 상인들, 칼이나 갑옷 따위의 무구를 손질하기 위해 들른 용병들. 그리고 곡괭이를
허리춤에 차고 근육질의 웃통을 드러낸 광부들이 거리를 활보하니 넓은 도로도 비좁게 느껴졌다. 한 차례
비가 더 퍼부으려는지 오늘은 날씨까지 습하고 무더워서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턱으로 땀이 줄줄 흘렀다.

텐은 몇 푼 아끼자고 다리를 놀릴 만큼 바지런한 성격은 못 되었다. 그는 동전 세냥을 내고 행상인의


짐마차를 얻어 탔다. 무두질이 안 된 가죽을 실었는지 짐승 누린내가 코를 찔렀지만, 그 대신 용병길드의
펠라도르 지부까지 이십분 만에 도착했다. 펠라도르 지부로 들어가거나, 나오는 사람들 중 반수는
곡괭이나 끌, 망치 같은 채광도구를 갖고 있었다. 영지에서 가장 인력이 필요한 곳이 광산이다 보니
동급용병이 받을 만한 의뢰 중 가장 값을 많이 쳐 주는 곳도 광산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이 이곳이
용병길드인지, 광부길드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들어가자마자 강렬한 럼주 냄새가 풍겼다. 1 층은 술집이었는데, 몇 명은 벌써부터 바에서 컵을 쌓고


있었고, 한 테이블에는 정신을 잃은 취객들이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있었다. 바에 앉은 술꾼 중 한
명이 깜짝 놀라 손을 흔들었다.

“너, 혹시 저 아래 가렌 씨네 집 둘째 아니냐? 응? 맞지?”

텐은 잠시 남자를 뜯어보았다. 오물이 묻어 지저분하게 엉킨 머리카락, 덥수룩한 수염, 홀쭉하게 마른


얼굴. 많이 변했지만 아는 얼굴이긴 했다. 이년 전엔 저보다는 살이 많았다. 동급 용병 중에서는 칼질도
제법 한다고 소문난 편이었고, 성격도 좋아 텐이 짐꾼 일을 했을 때엔 옆에 끼고 여러 가지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가 이토록 무너진 이유는 뻔했다. 그의 다리 한쪽이 허벅지에서부터 잘려있었다. 텐은 그의
다리를 힐긋 쳐다보고 말했다.

“맞아요.”
“이놈, 많이 컸다! 용병 되겠다고 짐 들고 쫓아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열여덟인가, 열아홉인가?
장가가도 되겠어!”

말을 하면서도 남자의 눈동자는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가 원하는 것도 뻔했다. 텐은 바 위에 동전 몇


개를 올려놨다. 직원이 남자의 텅텅 빈 잔을 옆으로 밀어놓고 넘칠 만큼 따른 새 럼주 한잔을 내왔다.
남자는 언제 텐에게 아는 척을 했냐는 듯 술잔을 붙잡고 쩝쩝거렸다. 옆에서 다른 취객들이 부러운 눈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텐은 그들에게서 신경을 끄고 접수처 직원에게 물었다.

“지부장 있어요?”
“누구쇼?”
“텐 가렌. 편지 받고 왔는데.”

텐이 배낭에서 편지를 꺼냈다. 발신인에 용병길드 펠라도르 지부, 수신인에 텐 가렌의 이름이 딱딱한
글씨체로 적혀있었다. 직원은 잠시 편지를 훑어보더니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텐 가렌…자네가 텐 가렌이라고? 내 알기론…….”

텐은 가죽조끼의 안주머니에서 길쭉한 사각형의 물건을 꺼냈다. 끝부분에 쇠사슬 고리가 달린


용병철패였다. 납작한 앞면에는 텐 가렌의 이름이, 뒷면에는 용병패를 발급해준 모드라인 용병길드의
인장이 은으로 새겨져 있었다. 은급 용병패였다. 직원은 조금 놀란 눈으로 텐을 쳐다보았다.

전쟁과 분쟁이 빈번히 일어나고 몬스터들이 활개를 치는 험난한 세상, 용병이 되겠다는 이들이 쏟아져
나와 이제 동급 용병은 발에 치일 정도라지만 은급 용병은 그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은급 용병패는 한
몫 하는 용병이라는 길드의 보증서나 다름없었다. 늙어죽도록 동급 용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도
수두룩하니, 스물도 되지 않은 텐은 승급이 매우 빠른 편이었다.

“따라오쇼.”

직원은 텐을 3 층의 지부장 집무실로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졸고 있던 지부장이 눈을


끔뻑거렸다. 이년쯤 전에 텐에게 동급 용병패를 발행해준 코모드 지부장이었다.
“편지 내용은 봤지? 하긴 봤으니 왔겠지. 적힌 내용은 다 사실이네. 물론 의뢰금도 말이야. 자네도 칼밥
좀 먹어봤으니 알 테지만, 그 정도 돈이면 매우, 매우 많은 거라네. 그 반값만 해도 하겠다는 은급
용병들이 줄을 설 거야.”

그 말 그대로였다. 편지 안에 적힌 의뢰금은 이제 막 은급 패를 받은 용병에겐 과할만큼의 몸값이었다.


얼마나 위험한 의뢴지 모르겠지만 팔이나 다리 한 짝을 떼 줘도 거스름돈이 남는 장사였다. 물론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음식에는 독이 있을 게 뻔했지만.

“안 그래도 너무 높게 불러서 다 받아도 뒷맛 찝찝하겠더라고. 혹시 은을 금으로 잘못 썼나 했지. 그래,


이유가 뭐예요?”
“위험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입에 못질을 해야 하는 일이네.”
“무슨 일인데?”
“그건 의뢰를 승낙한 후에야 해 줄 수 있는 부분이고.”
“할 마음이 있으니까 여기까지 왔지. 말해 봐요, 뭐가 문젠지.”

텐이 재촉했다. 코모드 지부장은 굳게 닫힌 문과, 벨벳커튼이 둘러진 창을 두리번거리곤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삼 개월쯤 전에 갱도 중 한 곳이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네. 사상자가 열두 명이나 나오는 바람에 난리도


아니었지. 영주가 사상자들 목숨 값을 잘 챙겨 가족들에게 보내주는 걸로 마무리 지었고 지금은 그런
사건이 있었지, 하고 잊혀져가는 중이라네. 그런데 그 무너진 갱도 아래서, 던젼이 발견됐거든.”

던젼. 귀족에게도, 용병에게도, 농부, 어부들에게까지 호기심과 욕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텐도


마찬가지였다. 은급 용병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던젼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지금에야 마법사들도 웬만큼 흔해졌지만 이천년 전만 해도 마법사란 정말 귀하고 특별한 존재였다. 그때의
마법사들은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존재들이었는데, 던젼이란 바로 그들이 만든 집을 겸하는
실험실이었다.

실험실이나 마법물품 따위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동안 마법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이천년 전의
마법물품 따위 지금은 웃돈을 주고 팔아도 살 사람 찾기 힘들다. 중요한 것은 바로 마법사의 재산이었다.
그들은 매우 부자였고, 폐쇄적인 성향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전 재산을 고스란히 던젼에
남겨놓았다. 산처럼 쌓인 황금과, 은덩이와, 특별한 광석으로 제조한 무구와, 보석 같은 것들을 말이다.
그러니 어느 영지에서 던젼이 발견되었다는 소리가 들리면 영지 전을 벌여서라도 던젼을 차지하려는
아귀다툼이 벌어지곤 했다.

“던젼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펠라도르 밖으로 새어나가는 즉시 전쟁이라네. 주둥이에 못질을 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일세. 영주와 용병지부가 8 대 2 로 나눠서 조용히 먹기로 했거든. 그래서 급히 펠라도르가
고향이고, 가족이 있는 은급 용병을 찾느라 자네에게까지 차례가 돌아간 거지. 혀를 잘못 놀렸다간
가족들 안위가 보장받지 못할 거란 각오쯤은 해 두게.”
“내가 영주였으면 혼자 먹었을 텐데, 굳이 용병지부를 낀 이유는 뭐예요?”
“마법사가 던젼에 남겨놓은 가디언이나, 함정들이 좀 위험한 모양이야. 영주도 처음엔 혼자 먹을
심산으로 기사와 병사들을 보냈는데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더군. 그러길 네 차례나 반복해서 아까운
기사를 몇 명이나 골로 보냈지. 그제야 아이쿠야, 이거 쉽게 볼 던젼이 아니구나, 한 거야. 덕분에
우리가 끼어들 여지가 생긴 거고. 아, 참고로 이번 파티에 신관은 없네. 신관이 끼면 신전이
따라붙으니까 곤란하거든. 영지 소속 마법사와 자유마법사가 있긴 하지만 둘 다 치유마법이 서툴다더구먼.
선금이 두둑하니 포션이나 많이 사 두게.”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의뢰인데 신관도 없다, 비밀을 발설하면 씨몰살을 감수해야 한다. 몸값이 높을 만


했다. 지부장이 서랍을 뒤져 주먹만 한 돈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묵직한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것은
모조리 번쩍이는 금화였다. 열아홉 인생에 이렇게 많은 금을 한꺼번에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운수
나쁘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고. 텐은 돈주머니의 주둥이를 다시 꼼꼼히 묶어 배낭에 넣고 일어났다. 산을
넘어가는 이동마차가 출발하기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언제까지 오면 돼요?”
“삼일 뒤, 자정에 영주성 앞으로 오게. 그동안 가족들이랑 회포도 좀 풀고. 죽을 때 죽더라도 미련은
남기지 않아야 할 거 아닌가.”

집무실을 나가며 텐은 웃었다. 어차피 목숨 내놓고 하는 일이었다.

00002 용병(Mercenary)
=========================================================================
             
신전에 들러 모리울 은화 삼십 냥짜리 하급 포션을 다섯 병, 은화 팔십 냥짜리 중급포션을 세 병. 도합
여덟 병이나 산 후 텐은 요란스러운 골목으로 들어섰다.

오른쪽, 왼쪽, 앞쪽, 뒤쪽, 깔린 상점들이 모조리 대장간 간판을 매달고 있는 대장장이 골목이었다.
펠라도르에서 가장 붐비는 곳 중 하나였다. 용병들도, 대상인도, 가난한 짐마차 행상인도 어느 대장간이
가장 값싸고 실력 좋은 곳인지 가늠하느라 정신없이 발품을 팔고 있었다. 쇠를 두들기는 소리부터 값을
흥정하는 소리, 도제들의 호객소리에 귀가 얼얼했다. 텐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고렉시어의 활'이라는 철문패가 큼직하게 걸린 대장간이었다.

“영감, 아직 팔 안 부러졌어요?”
“악담은 옆집 가서 해라, 이놈아.”

고렉시어 영감이 버럭 화를 냈다. 텐은 앉은뱅이 의자위의 흙가루를 치우고 걸터앉았다.

“화살이 좀 필요해요, 가벼운 거 세 세트, 무거운 거 두 세트. 가벼운 놈은 남들 쓰는 거 삼분의 이


무게로 해줘요. 촉의 크기도.”
“그건 뭐에 쓰려고?”
“화살을 사냥하는 데 쓰지, 그걸로 곡괭이질이라도 할까봐?”

텐이 웃으며 말했다.

“뭘 사냥할 건지 모르지만 그렇게 가볍게 만들면 힘이 없어서 적중해봤자 타격이 적어. 나야 쉽게 돈 벌어


좋지만, 자네는 생돈 날리는 거 같아 하는 말이지.”
“상관없어요, 모가지나 머리통을 꿸 거니까.”
“그거야 사냥감이 목만 쭉 내밀고 기다려줄 때나 가능한 말이지.”

영감이 코웃음을 쳤다. 그가 손짓을 하자 열 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도제가 냉큼 주문서를 내밀었다.


텐은 그것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다 해서 모리울 은화 세냥에, 동화 열다섯 냥이네. 선금으로 은화 한 냥만 내고 가게.”

텐은 망설임 없이 은화를 꺼내 도제에게 던져주었다. 그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나자 고렉시어 영감이


멀뚱히 올려다봤다.

“……안 깎나?”
“흥정해봤자 몇 푼이나 깎아준다고. 내 입만 아프지.”
“아니, 동화 두세 냥 정돈 깎아주려고 그랬지.”
“그럼 세 냥 깎아줘요. 삼일 후 자정 전에 찾으러올게요.”

손을 흔들고 텐은 성큼성큼 골목을 빠져나갔다. 더 이상 머물렀다간 화살촉으로라도 귀를 막고 싶어질 것


같았다. 대장장이 골목에서 몇 걸음 빠져나오자 그제야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 후에도 그는 다양한
상점과 시장 좌판,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가죽 상에 들러 포션을 깨지지 않게 보관할 벨트와 피독장갑을 새로 샀다. 그리고 저마다 짐수레를


끌고나온 농부들에게서 달걀 열 개짜리 세 꾸러미와 밀가루 한 포대, 보리와 귀리, 수수를 섞은 잡곡 반
포대를, 잡화점에서는 소금과 설탕가루 한 자루를 샀다. 선금으로 받은 돈주머니가 반 이상 가벼워졌을
때에야 그는 이동마차를 타는 곳에 도착했다.

“윗마을 글리머까지 갑니다! 일인당 모리울 동화 일곱 냥!”


“시에모라까지 밤새 달리는 이동마차, 여섯 명 차면 바로 출발합니다!”

널찍한 공터에는 짐말들과 마차들이 여러 대 서 있었다. 말이 마차지, 대충 둥그렇게 비막이 지붕을


만들어 엎은 커다란 짐수레다. 하지만 걸어서 가기엔 꽤 먼 거리를 실어다 주니 당장 오늘 먹을 것 없는
사람들만 아니라면 대부분 이동마차를 애용했다.

텐은 마차들 중 산을 넘어 고향으로 향하는 마차를 찾았다. 이미 선객들이 여럿 타고 있었다. 커다란


검을 등에 맨 용병여자, 가족으로 보이는 젊은 부부와 고만고만한 아이 둘,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 하나,
점잖아 보이는 중년 남자가 하나. 총 일곱 명으로, 다행이 한명분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산을 넘어가시렵니까? 지금 출발하면 느긋하게 가도 동 트기 전에는 떨어집니다요. 모리울 동화 열두


냥입니다.”

텐이 용병패를 꺼내 보여주자, 값은 대번에 바뀌었다.

“여섯 냥만 내십쇼.”

그가 반값만 내었다고 불평하는 선객은 없었다. 용병들은 이동마차를 탈적에 얼마치를 깎고 타지만,
이동하는 도중 굶주린 몬스터나 도적 따위가 나타날 경우에는 그 처리를 해주기 때문이다. 용병들의
몸값을 생각하면 깎아준 값이야 푼돈이었다. 텐이 여용병의 옆자리에 앉자 늙어서 털에 윤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짐말 두 마리가 발을 떼었다. 덜거덕거리는 소음과 함께 마차가 움직였다.

텐은 편히 등을 기댔다. 배도 부르고, 햇살은 따스하고, 주변은 시끌시끌했지만 후드를 푹 눌러쓰자 참을


만 했다. 잠에서 깨어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낮잠이 솔솔 왔다. 한숨 더 잘까, 고민하던 텐은
맞은편에 앉은 어린애 둘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둘이 얼굴이 벌게져서는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닿은 곳은 그가 아니라 옆자리의 여용병 쪽이었다. 그녀는 팔다리를 널브러뜨리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통이 넓고 짧은 가죽바지를 입어 허벅지와 그 안쪽까지 어렴풋이 보였다. 어린애들뿐만 아니라
중년 남자까지 그 속을 안타깝고 뜨거운 눈으로 훔쳐보고 있었다. 텐은 날름 입술을 핥고 물었다.

“얼마야?”
“…뭐가?”

여용병은 텐보다 대여섯 살쯤 많아보였지만, 말투를 지적하진 않았다. 동급 용병인 모양이었다.


아니었다면 눈매 사나운 여용병은 '집에 가서 엄마 젖이나 빨아, 우라질 꼬맹아. 돈은 좀 내놓고.'정도는
했을 것이다. 텐은 느슨하게 꼰 다리를 까딱거리며 여용병의 가슴부터 아래까지 쭉 훑었다. 가슴은
가죽조끼의 단추가 잠기지 않을 정도로 컸다. 전투를 하고 제대로 씻지도 않았는지 허벅지엔 흙이 묻어
지저분했지만, 그래도 군살 없이 얇고 탄력 있었다. 여용병은 심드렁하게 한손을 세 번 쥐었다 폈다 했다.
그리고 '위에만'하고 덧붙였다.

텐은 동화 열다섯 냥을 그녀의 주머니에 넣어주고 군데군데 올이 풀린 웃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전투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지탱하는 보호대만 걸친 가슴은 꽤 부드러워서 만질 맛이 났다. 마차안의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여용병의 옷 속으로 들어간 텐의 손에 집중되었다. 텐은 여용병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조금씩 단단해지는 젖꼭지를 문지르고, 긁었다. 그 사이 여용병은 곯아떨어져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텐은 작게 하품을 하며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손에 잡힌 것을 마음껏 희롱하며 오수에
잠겨들었다.

----------------------
“석원아, 좀 나와 봐! 석원아!”

석원은 아득한 어둠속에서 벗어났다. 아직까지도 손아귀엔 보드라운 감촉이, 뇌리엔 어린놈의 피 냄새가
남아있었다. 한 시간 즈음은 꿈을 되씹으며 그 감각에 젖어있고 싶었는데 무슨 일인지 주위가
시끌벅적했다. 어머니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방문을 두들겼고, 창문 너머 바깥에는 뭔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암막커튼을 걷어보자 가로등 불빛 아래 인파가 바글바글했다. 그 중
교복치마를 입은 여고생이 반이었다. 그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멈춰선 그랜드 카니발에 달라붙어 욕을
퍼붓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만 하다. 석원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밖에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긴, 저 소란 일으킬 사람이 우리 집에 네 누나말고 또 있니? 망할 계집애, 뭐, 단백질 제빈지
뭔지 하는 아이돌이랑 스캔들이 났다는데, 그것 때문에 저 난리다. 일단 회사에서 경호원들 보내주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어. 무슨 애들이 저렇게 몰상식한지, 저러다 지원이 다치면
어떡하니, 응?”
“단백질가이즈 멤버 제이비 말하는 거 같은데, 며칠 전에 그 그룹에 다른 멤버랑 스캔들 났었잖아요.”
“나도 모르겠다, 일단 저 계집애 끌고 들어와야 자초지종을 알지, 아아, 또 이사 가게 생겼네. 내가 이
나이에 이게 무슨 고생이니, 응?! 저 계집애 때문에 속이 터져서 정말!”

분통을 터뜨리는 어머니를 아버지가 겨우겨우 진정시켰다. 그 사이 밖에서는 달걀로 난타하는 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었다. 석원은 한숨을 쉬며 현관문을 열었다. 아비규환이었다. 단백질가이즈의 팬들로 보이는
여고생들과, 누나의 몇 안 되는 사생팬들이 달라붙어 멱살잡이를 하고, 머리를 쥐어뜯고, 욕설을
지껄이고 있었다. 한발 한발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그는 정신 나간 여고생들로 가득 찬 던젼을
상상했다. 차라리 몬스터가 나았다. 몬스터는 말을 못 하니까.

“잠깐만요, 잠깐만요, 지나갈게요.”


“넌, 뭐야!”
“이지원 동생이에요, 좀 지나갈게요!”
“좆까, 씨발! 가긴 어딜 가! 야, 니 누나 걸렌거 아냐?!”
“이 미친년이 똥 묻은 휴지를 쳐 물었나! 동생형, 얼른 가요, 가서 누나 좀 데리고 들어가요! 회사는
뭐하는 거야, 위험하게 경호원도 없이! 이러다 지원누나 다치면 어쩔 거야! 경찰은 왜 안와?!”

총체적 난국이란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다. 석원은 눈앞에 보이는 아가리마다 화살을 박아주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날계란 점액과 부서진 껍질이 덕지덕지 붙은 창문을 두들기자 창문이 십 센티쯤 내려갔다.
그의 누나, 이지원이 창틈으로 석원을 쳐다봤다. 얼마나 울었는지 짙은 눈 화장이 번져서 너구리가 따로
없었다.

“뭘 잘했다고 울고 있어?”
“쟤들 사진 찍는 거 안보여? 이거 내일 트위터에 다 뜰 텐데, 울고 있어야 내가 좀 더 불쌍해 보일 거
아냐.”

지원이 속삭였다. 석원은 기가 차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리라고 손짓을 하자 지원이 매니저와
함께 내렸다. 난전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귀신처럼 그 모습을 본 팬들이 소리를 질렀다. 망할 년, 걸레,
섹스돌, 죽어라, 꺼져라, 다채로운 욕설과 함께 날계란이 날아왔다. 석원은 지원의 어깨를 끌어안고
걸음을 빨리했다. 간혹 날계란이 날아오는 쪽으로 지원의 머리통을 끌어다 주기도 하면서. 시커먼 눈
위로 눈물 섞인 계란 노른자를 뚝뚝 떨어뜨리며 지원이 이를 갈았다.

“망할 년들, 무식한 년들! 내가 다 고소할거야!”


“뭐, 고소?! 고소해라, 이년아! 우광오빠 건드렸을 때도 내가 두고 보자 했는데 제이비오빨 또 건드려?
걸레 같은 할망구, 내가 니 면상에 칼집내고 빵에 들어간다!”

머리를 산발한 여고생 한명이 교복주머니에서 커터 칼을 꺼냈다. 너비 일 센티쯤 되는 문구용 커터였다.


여고생이 위협적으로 커터를 휘두르자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애들이 기겁을 하며 도망갔다. 지원도
딸꾹질을 하며 석원 뒤로 숨었다.
“서, 석원아, 어떡해! 쟤 미쳤나봐!”
“이리 안 나와, 이년아?!”
“원아, 쟤 좀 어떻게 해봐!”

석원은 칼날을 보자마자 눈이 반쯤 돌아갔다. 안 그래도 방금 전 꿈에서 벗어나 여운이 가시지 않고


있었는데, 피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잠시, 여고생이 커터로 누군가를 찔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여고생은 지원만 보고 달려들었다.

석원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는 성격에 조금 문제가 있긴 했지만 비틀린 욕구를 해소하는 것은 오로지
꿈 속 뿐, 현실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현실은 그에게 '참아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눈앞에 칼을 들고 덤비는 놈이 있는데도 참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다, 이건
정당방위니 너무 과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이성이 판단했다.

석원은 매니저가 들고 있던 커다란 백팩을 빼앗았다. 안에 뭘 넣었는지 제법 묵직했다. 그는 백팩의


어깨끈을 붙잡고, 서슴없이 여고생의 팔에 휘둘렀다. 백팩의 모서리에 팔뚝이 찍힌 여고생이 뒤로
나동그라지며 커터를 놓쳤다. 비명소리를 듣는 순간 전기처럼 짜릿한 쾌감이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관통했다.

석원은 허리를 숙여 커터를 잡았다. 넘어진 여고생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둘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거울이 없어도, 석원은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여고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석원은 태연히 허리를 폈다.

썰물 빠지듯 단백질가이즈의 팬들이 우르르 도망친 길에는 만신창이가 된 카니발과, 역시 만신창이가 된


지원의 사생팬들만 남아있었다. 매니저 윤동후가 박수를 짝짝 치며 말했다.

“방금 그거 찍은 사람 있지?”

지원의 사생팬 서너 명이 손을 들었다.

“내 핸드폰으로 사진 좀 보내주고, 단백질가이즈 팬들 제대로 돌았다고 인터넷에 싹 뿌려! 내일 ‘도


넘은 극성팬 커터 칼 휘둘러’, 뭐 이런 기사들 좀 뜨게. 그래야 스캔들 좀 잠잠해지지. 이번 일 잘
끝나면 지원 누나가 밥 한번 살거야. 알았지?”
“네!”

우렁차게 대답하며 사생팬들이 핸드폰을 두두두두 두들겼다. 그 사이 석원과 윤동후는 겁에 질린 지원을


끼고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 앞에서 전전긍긍하던 어머니가 지원의 등짝을 사정없이 갈겼다.

“망할 계집애, 내가 너 때문에 수명이 줄어, 수명이! 잠 잘 자다가 이게 웬 일이니, 응?!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아, 아! 엄마, 아파! 엄마 딸 날계란 얻어맞은 거 안 보여?”

날계란을 뚝뚝 흘리며 거실을 도망 다니던 지원이 욕실에 틀어박히고 나서야 집이 잠잠해졌다. 한참이
지난 후 아버지가 분기탱천한 어머니를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자 말끔해진 지원이 살금살금 기어 나왔다.
지원과 석원, 윤동후 세 명은 석원의 방에 놓인 컴퓨터 앞에 둘러 모였다. 뉴스 기사를 볼 것도 없이
이지원 삼각관계, 이지원 문어발, 이지원 제이비 띠 동갑 등이 포털사이트 검색어 상위를 줄줄이
차지하고 있었다. 지원이 쌍심지를 켰다.

“띠 동갑? 띠 동갑은 아니지, 걔랑 나랑 여섯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그게 문제예요? 대표님 뚜껑 열리셨어요. 이미지 좋아질 때까지 개인 활동 하라고 하셔서, 당장
내일부터 드라마 오디션 쫓아다녀야 돼요.”
“뭐? 무슨 드라마야, 나 연기 못하는 거 알잖아!”
“그 소리가 나와요, 지금? 누나 자칫하면 이번 일로 매장당할 뻔 했어요, 단백질가이즈 팬들이 지금
누나보고 대한민국 넘버원 썅년이라고 부른다니까요. 누나뿐만 아니라 '피치걸'을 통째로 싸잡아서
섹스돌이라고 지랄 지랄을, 어른돌에 노인돌도 모자라서 섹스돌이 뭐예요, 쪽팔리게. 누나 때문에 딴
누나들까지 피해보고.”
“기가 막혀서, 나만 그래? 다른 애들도 나만큼은 다 해!”
“딴 누나들은 안 들키잖아요! 그러게 사생팬들 깔린 거 뻔히 알면서 집엘 왜 따라가서 사진을 찍혀요,
찍히길? 차는 괜히 선팅해 놓은 줄 아세요?!”

참다못한 윤동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원은 어울리지도 않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윤동후의 팔뚝을
콕콕 찔렀다.

“야, 차라리 예능 잡아주라, 응?”


“누난 입만 열면 비호감이라 안돼요! 그렇게 해보고도 모르나.”
“피디들이 편집을 그따위로 해놓으니까 그렇지!”

석원은 둘의 다툼을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프리 PD 라는 직업도 쉬운 건 아니지만,


연예인과 매니저보다는 훨씬 낫지 않나 생각하며. 싸우다 지친 지원은 단백질가이즈 팬들로부터
집단폭격을 받은 피치걸의 갤러리를 검색하며 흥흥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몇 시간 사이에 오년쯤은 늙은
것 같은 윤동후가 일어났을 때는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고생하시네요.”
“매니저 일이 다 그렇지, 뭐. 그래도 너희 누난 이 바닥 사람치곤 양반인거야. 멍청…똑똑하게 처신을
못해서 그렇지.”

백팩을 어깨에 걸치던 윤동후가 멈칫하며 말했다.

“그런데 동생은 참, 아까 보니까 한 터프 하던데? 안 그러게 생겨가지고.”


“……칼을 꺼내길래 놀라서요.”

석원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밴이 계란 노른자를 흩날리며 떠나자 드디어 집에 평화가 찾아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석원은 짜증과 함께 연기를 날려 보냈다. 보통 꿈을 꾸고 나면 그는 한
시간 남짓 꿈의 내용을 곱씹으며 그 시간을 즐겼다. 그건 살인과 폭행, 섹스에 대해 비정상적인 욕구를
품고 있는 그만의 욕구해소법이었다.

현실에서의 그는 28 세 프리 PD 이석원이지만, 잠이 들면 카르투옴 대륙의 열아홉 살짜리 용병 텐 가렌이


된다. 텐 가렌은 이석원의 존재를 모른다, 하지만 석원은 꿈에서 벗어나면 자신이 텐 가렌이었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텐 가렌이 되어 살인했고, 그가 텐 가렌이 되어 섹스한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거의 이십여년 전, 텐 가렌이 태어나면서부터였다. 석원은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 달랐다. 매미의 날개를 뜯거나 개미굴을 찾아 개미들을 눌러 죽이는 것은 지루한 일이었다.
그것들은 말도 못하고, 너무 쉽게 끝났다. 그래서 길거리에 배를 터뜨린 개구리나 바퀴벌레 같은 걸
떨어뜨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구경하곤 했다.

친구들이 오락실에 갈 때 그는 직업탐구를 한다며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놀았다. 응급실이


최고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년시절의 그는 공부는 못했어도 머리는 꽤 돌아가는 편이었다. 한 번도
본성을 들킨 적이 없었다. 꿈을 꾸고 난 후부터는 아쉬운 대로 꿈속에서 욕구해소가 되니 참을성이 생겼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난장판을 겪고 나니 꿈속의 감각이 희미해져 버렸다. 갈 곳 잃은 욕구만이


뱃속에서 뱀처럼 꿈틀거렸다. 석원은 반쯤 타다만 담배를 끄곤 지원의 방에 들어갔다. 지원은 이불을
밀어놓은 채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이불을 지원의 머리끝까지 올려 덮어버리고, 지원의 화장대를 슥
둘러보곤 작은 갈색 화장품을 들었다. 껍데기가 비싸 보이더라니 핸드폰으로 검색해보니 18 만 원짜리였다.
내용물을 화장실 변기통에 쏟아 부었다. 몇 방울쯤 남은 병은 다시 화장대에 갖다 놨다. 그리고는
옷장을 뒤져 스케쥴이 있을 때만 입고 나가는 비싼 옷 두벌을 꺼내고, 구두도 한 켤레 종이가방에 넣었다.
출근할 때 회사 주변의 헌옷 수거함에 넣을 생각이었다.

어린애처럼 짓궂은 장난 좀 쳤다고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석원은 앞치마를 걸치고 싱크대 앞에 섰다.
물을 담은 냄비에 된장을 풀고 호박과 두부, 청양고추, 쪽파를 한 움큼씩 썰어 넣고 그의 취향대로
소금도 듬뿍 쳤다. 보글보글 익어가는 된장국을 맛보며 석원은 나름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00003 용병(Mercenary)
=========================================================================
             
텐 가렌은 퍼뜩 눈을 떴다. 강렬한 빛이 눈알을 괴롭혔다. 덜그럭 덜그럭. 마차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이름 모를 짐승이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 울퉁불퉁한 숲길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왼손에 뭐가
쥐어져있는 거 같길래 힘을 줬더니 신음소리가 들렸다. 아, 그제야 텐은 기억해냈다. 고향집으로 가는
이동마차 안이었고, 그의 손에 잡힌 건 여용병의 따듯한 젖가슴이었다.

“젠장, 짜부라뜨릴 생각이야? 이만 치워. 근지러.”

여용병이 텐의 손을 끄집어내며 불평했다. 텐은 엄지손가락을 살짝 핥았다. 갈증이 밀려졌다.


미적지근해진 맥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마셨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전부터,
그는 항상 잠을 자고 나면 갈증과 답답함을 느꼈다. 그 짜증나는 감각은 피를 보거나 섹스를 하면
쾌감으로 변했다. 요즘 들어 갈증이 더욱 심해졌다. 해소하지 않으면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텐은
여용병을 밀어 넘어뜨리고 허벅지 안으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팔아.”
“뭣?! 이 어린놈의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은화를 쥐어주자 여용병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가 은화를 챙기는 동안 텐은 단단한 허벅지를 벌리고
가죽바지와 속옷을 옆으로 밀었다. 통이 넓어 벗길 필요도 없었다. 아래를 보자 그의 것은 이미 식사할
준비를 마치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단번에 찔러 넣자 여용병이 배를 경직시키며 이를 악물었다.
텐은 축축하고 비좁은 곳에 감싸인 채 소리 없이 웃었다.

“씨발, 뭘 쳐다봐!?”

여용병이 으르렁거리자 훔쳐보던 자들이 깜작 놀라 고개를 수그렸다. 더 세게 처넣었다. 여용병은 한


팔로 눈을 가리고 찍어 올릴 때마다 윽윽, 하는 신음소릴 내며 이를 득득 갈았다. 아픈 모양이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이 마치 밥을 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텐은 그녀의 입에 육포를 물려주었다. 그녀는
‘미친놈’, 하고 중얼거렸지만 결국 육포를 씹어 먹었다. 우물거릴 때마다 빡빡한 아래가 더 조였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텐은 근육 잡힌 그녀의 배 위에 쌓여있던 갈증을 터뜨렸다. 매우, 몹시, 개운했다.

그는 여용병의 가슴골에 은화 한 개를 더 넣어주었다. 삼일쯤 뒤엔 죽을지 살지 모르는 상황이고,


선금으로 받은 금화도 조금 남아있었으므로. 예상외의 소득을 얻었기 때문인지 여용병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몬스터가 나타나기 전까진.

“키야악! 케륵! 켁!”


“카아악!”

퀘레스. 일 미터 오십 센티 정도의 키에 여섯 개의 다리를 가진 개머리 몬스터였다. 놈들은 사막의


낙타처럼 음식을 왕창 섭취한 후엔 축 늘어진 뱃속에 저장해두고 꼬박 한두 달을 굶곤 했다. 때문에
출몰이 잦은 놈들은 아니었지만, 한번 나오면 인간 네댓 명 분은 거뜬히 먹어치웠다. 그런 놈이 무리로
세 마리. 운도 참 없었다.

“퀘, 퀘, 퀘레스야! 신이시여!”


“꺄아악! 엄마!”
“이봐, 뭐하는 거야! 어서 달려! 쫓아오잖아!”

이동마차 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하지만 몬스터가 짖어대는 소리에 겁을 집어먹은 짐말들이 따로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마차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 사이 퀘레스 세 마리는 몇 미터 뒤까지 따라붙었다.
텐은 화살 통에서 화살을 꺼내 시위를 메겼다. 조금 전에 섹스를 해서 그런지 감각이 선명했다. 그는
눈을 한번 깜빡 하고는 화살을 쏘았다. 몬스터 심줄을 꼬아 만든 시위가 파르르 떨리는 순간, 화살촉이
퀘레스의 머리통을 뚫었다. 놈은 그대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텐은 씩 웃으며 화살을 하나 더 메겼다. 긴장감에 손끝이 따끔따끔했다. 그 사이 퀘레스 두 마리가 더


가까워지자 여용병이 ‘우라질!’하고 고함치며 칼을 들고 뛰어내렸다. 그녀가 한 놈을 상대하는 동안
텐은 다시 시위를 놓았다. 쏘아진 화살은 근접한 퀘레스의 머리통에 처박혔다. 그가 마지막 화살을
꺼냈을 때, 마차 구석에 처박혀 있던 어린애가 비명을 질렀다. 한 놈 남은 퀘레스가 여용병의 머리를
아가리에 넣고 씹고 있었다. 송곳니가 박힌 목 아래로 피가 콸콸 쏟아졌다. 생각보다 실력이 없는
여자라고 생각하며 텐은 마지막 화살을 쏘았다. 정확히, 머리통이었다.

마지막 놈이 쓰러지는 것까지 보고 텐은 마치에서 뛰어내렸다. 목덜미가 갈가리 뜯긴 여용병은 조금씩


경련하고 있었지만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포션 따위가 아니라 대신관이 신성력을 쏟아 부어도
살릴까 말까다. 조력자가 한명만 더 있었다면 살았겠지만, 마차에 칼을 가진 용병은 그녀뿐이었다.
어차피 그녀 역시 이런 일에 나서겠다는 약속을 하고 마차 값을 깎았을 것이다. 경련이 멈추어가는 것을
보다가 텐은 시선을 돌렸다. ‘ 노잣돈이 꽤 있었으니 악마들도 섭섭하게 대하진 않겠지’, 하고 생각하며.

마부가 냉큼 달려와 여용병의 시체를 질질 끌어 마차 뒤쪽의 짐칸에 실었다. 이렇게 죽은 용병의 시체와
소지품은 용병길드로 가져다주는 게 보통이었다. 안도한 승객들의 감사인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텐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느리게 숨을 쉬었다. 좋은 냄새가 났다. 푸르른 숲 냄새 보다, 진하게 퍼져나가는
여용병의 피 냄새가 더 좋았다.

고향인 뷔로엠 마을은 변함없었다. 밭마다 알알이 영근 밀알과 보리알이 흔들렸고, 영주나 유지의 땅에
소작을 짓는 농부들이 이른 아침부터 가을걷이에 한창이었다. 텐의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하얗게 센 어머니, 아버지, 아래 여동생 하나와 남동생 둘 모두 낫을 하나씩 들고 보리를 베었다. 텐은
짐을 내려놓고 흙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한참동안 가족들을 쳐다보다가, 다리가 쥐가 날 것 같을
때 쯤 말했다.

“나 왔어.”

보릿대 사이에서 바로 아래 동생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어……형! 엄마! 누나! 셋째 형 왔어!”


“뭐? 누구? 누가 왔다고?”
“텐! 여보, 텐이 돌아왔어! 이리 좀 나와 봐! 이 여편네, 어디 박혀있는 거야?”

보리밭에 한 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어머니는 뛰쳐나와 텐을 끌어안고 꺽꺽 울었다. 텐은 어정쩡하게


안겨서는 어머니의 야윈 등을 만졌다. 사실 그는 다시 돌아와도 가족들이 반겨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죽은 자식이니까.

텐의 위로는 형이 둘 있었는데, 둘 다 용병이 되겠다며 뛰쳐나가서 여태껏 소식이 없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신만이 알 따름이다. 셋째인 텐이 용병이 되겠다고 하자 어머니도, 아버지도 말렸다. 그냥
소작을 하다가 양 몇 마리 살 자금이 생기면 장가를 들고 그렇게 살라고 했다. 하지만 텐이 듣질 않자,
셋째도 죽은 걸로 생각하겠다고 울었다. 떠나는 날도 나와 보지 않았다. 손때 묻은 은화 한 냥과
뜨끈하게 삶은 옥수수 한 주머니만 탁자위에 놓여있었다.
그때가 열여섯의 겨울이었으니 거의 삼년이 흘렀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은 그를
반겨주었다. 매우, 몹시 반겨주었다. 그래서 텐은 만일 삼일 후에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앞으로 가끔씩
집에 돈을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가족이었으니까. 아버지는 다른 밭의 사람들에게 아들이
살아 돌아왔으니 오늘은 쉬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낫을 집어던졌다. 사방에서 축하한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마 그들도 다들 아들자식 한 둘쯤은 떠나보냈으리라. 요즘은 그렇지 않은 집이 드물었다.

“형은 그럼 지금 용병이야? 용병이 된 거야?”


“아님 접시 닦다 왔겠냐.”
“어디 다쳤니? 응? 다쳐서 돌아온 거야?”
“안 다쳤어, 근처에 의뢰 받은 게 있어서 삼일 후엔 또 가봐야 돼.”
“의뢰? 무슨 의뢴데……위험한 거냐?”
“비밀이야. 소문나면 다 죽어.”
“그런데 오빠 왜 활을 메고 있어? 나갈 땐 검을 배울 거라고 목검 만들어서 들고 가더니?”
“활이 체질이야.”

언덕 아래에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에 도착할 때까지 질문들이 멈추지를 않았다. 여섯 명이 들어가기엔


비좁은 집에 짐을 풀고, 그래도 집에 가는데 혹시나 싶어 사 온 것들을 거실에 내다 놨다. 밀가루와,
달걀 따위의 별것 아닌 것들이었는데도 어머니와 여동생은 매우 기뻐했다.

텐은 테이블에 앉아 그녀들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좀 편안한 기분이었다. 일곱 살쯤 된 막내가


슬그머니 다가와 그의 활을 만져보았다. 그가 떠날 때까지만 해도 머리만 커다란 곰 새끼 같았는데 그새
팔다리가 좀 길쭉해졌다. 낯을 가리는지 활만 콕콕 찌르던 놈이 텐의 발치에 주저앉았다.

“형……활 쏘는 거 보여주면 안 돼?”


“저녁에. 선선해지면.”
“형, 나도! 여우 잡으러 가자, 여우! 여우가 비싸!”

잔뜩 들뜬 놈들이 노루, 산양, 사슴, 꿩, 늑대 등등 산에 사는 온갖 짐승들을 늘어놓았다. 텐은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고 늘어져 있다가 해가 넘어갈 때쯤이 되어서야 동생들을 매달고 산으로 향했다.
어차피 신경을 예민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사냥은 필요했다. 훈련도 해야 했고 말이다.

깊은 곳은 몬스터가 나올까 싶어 얕은 곳만 헤치고 다니다보니 사냥감은 보잘 것 없었다. 꿩 한 마리와


비둘기 두 마리, 족제비 한 마리, 토끼 한 마리를 건졌다. 두 녀석은 마치 적군 기사의 목을 들고
행진하는 것처럼 온 마을을 싸돌아다니며 전리품을 뽐내더니 별이 뜰 때쯤 되어서야 집에 들어갔다.

“아버지, 굉장해! 화살을 쏘면 바로 한 마리가 죽었다니까? 눈감고 쏴도 백발백중일거야!”


“그래? 정말이냐? 그렇게 실력이 좋아?”
“…저건 거짓말이야.”

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묻기에 텐이 고개를 저었다. 눈 감고 쏘면 빗나간다. 하지만 눈을 뜨고 쏘면


웬만하면 명중했다. 그는 확실히 활 쏘는 데 재능이 있었다. 칼이나 도끼를 든 용병들이 시위를 당길
시간만 벌어준다면 그의 화살은 거의 빗나감 없이 목표물의 급소를 꿰뚫곤 했다. 단시간 내에 은급 용병이
된 것도 그 재능 덕분이었다.

뜨끈뜨끈한 화덕 옆에 둘러앉아 토끼고기 스튜로 저녁을 때우고, 비로소 모두가 잠에 들 시각. 텐은 나갈


채비를 했다. 그냥 자려니 몸이 근질거렸다. 젖은 천으로 얼굴을 닦던 계집애가 냉큼 달려왔다.

“오빠, 어디 가?”
“빨간 지붕에.”
“뭐? 왜?”
“거길 뭐 하러 갈 것 같아.”

빨간 지붕이란 남편이나 가족을 잃은 여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하수상한 세상에 지켜줄 남자도 없이


살다가 험한 꼴 당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밖에서 일하는 사이 아이를 서로 봐주기 위해서기도 했다.
그녀들은 약초나 버섯 따위를 캐거나 날품을 팔아 돈을 벌었지만 애를 굶겨야 할 정도로 먹고살기 팍팍할
때는 몸도 팔았다. 그가 떠날 때까지만 해도 뷔로엠 마을에도 세 명쯤 있었다. 계집애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거기 여자는 비싼데, 돈 있어?”


“있어.”
“으, 은화가 들 걸?”
“있어.”
“차라리, 저기, 모라 있잖아, 기억나지? 빨간 머리 계집애. 걔한테 가봐, 걔가 가끔 그거……팔거든.
걘 훨씬 쌀 거야.”

모라.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보다 다섯 살이 많았는데 어렸을 때 그에게 날계란에 젖 섞은 것 따윌 몇


번 가져다 준 적이 있었다. 부스스한 말꼬리 털 같은 빨간 머리에 앞니가 커다랗고, 입이 툭 튀어나온
여자였다.

“못 생겼잖아.”
“그, 그래도 불 끄면 그거나 그거난데 은화가 아깝…….”
“시끄러.”

계집애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치맛자락을 꼭 쥐고 텐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집 안의 계집애란


이래야지. 이지원 그건 영…’생각하다가 말고 텐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이지원? 그게 누구지?”
“누구? 이름이야?”
“……글쎄.”

이지원. 텐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인지 뭔지도 알 수 없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래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생각하길 집어치운 그가 막 집 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꿩 깃털을 쥐고 잠들었던 바로
아랫놈이 후다닥 쫓아 나왔다.

“형, 형형형형형! 나 따라가서 구경해도 돼?”


“뭐?”
“조용히 있을게!”

이놈은 열한 살이었다. 텐은 잠시 생각하다가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날 밤엔 은화 한 냥으로 금발의


여자와 긴 시간을 즐겼다. 남편을 잃은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여자는 하는 내내 울었지만, 시끄럽게 굴진
않아 만족할 만한 밤이었다. 그 다음 날도 일과는 비슷했다. 해가 쨍쨍할 무렵엔 낮잠을 자거나 집
안에서 체력단련을 하고, 해가 기울어지면 사냥을 나갔다.

두 번째에는 동생들을 떼놓고 가 멧돼지 한 쌍을 잡아왔다. 통째로 해체해 소시지를 만드네, 염장을 하네,
육포를 만드네, 하며 다들 손발을 걷고 매달리는 바람에 새벽에야 빨간 지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틀째 밤. 텐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말했다.

“내일 일찍 갈 거야.”
“……안 가면…….”
“돈 받아서 안 돼.”

그녀가 애써 피하던 화제였다. 텐은 용병지부에서 선금으로 받아온 주머니를 열어 남은 금화 중 반절을


꺼내놓았다. 어머니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 역시 처음 보는 큰돈일 테니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이것이 마치 자식의 살덩이처럼 느껴진다며 울었다. 그녀는 마음이 너무 약했다. 텐은 한숨을 쉬며,
의뢰를 마치면 다시 들르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정말이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텐은 ‘
살아남는다면’하고 덧붙일까 말까 망설이다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랬다간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잘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밤새 울었다. 용병생활을 하느라 예민해진 귀가 울음을 참는 소리까지 다 주워들었다.


어쩐지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불을 정수리까지 푹 뒤집어쓰고, 텐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

「노숙자 살인범 INT 2」


메모한 6mm 테잎을 AD 에게 던져주고 석원은 기지개를 켰다.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몸뿐만이 아니었다,
요즘은 꿈이 싱거워서 머릿속도 갑갑했다. 조용한 마을에 즐길만한 거라곤 사냥과 평범한 섹스뿐이었다.
텐 가렌은 그걸로 어느 정도 갈증이 해소되는 모양이었지만, 자극에 익숙해진 이석원에게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간만에 심한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었다.

AD 를 회사에 내려놓고 퇴근을 할 때쯤엔 저도 모르게 앞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초보운전 딱지가 붙은
뒤꽁무니를 박아버리고 싶었다.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뒤끝 없이 사람을 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애써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머리를 회전시켰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꿈속에서 텐 가렌이 이지원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냈다. 이지원은 그 곳이 아니라,


이곳. 현실의 존재였는데도 말이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석원은 이대로 현실의 그와, 텐 가렌이
완벽하게 합쳐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꿈을 꾼 후에야 그것이 자신이었음을 알아차리는 게 아니라 텐
가렌이 되었을 때 이석원을 자각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현실에서 저질렀다간 바로 철창신세를 질 일들을
다 해볼 텐데.

그가 이것저것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지원이었다. 그녀는 요 며칠 동안


미니시리즈, 대하사극, 시트콤, 영화, 가리지 않고 오디션을 보러 쫓아다녔지만 몽땅 떨어졌다. 덕분에
쓰레기통엔 갈기갈기 찢어진 대본이 탑처럼 쌓여가고 있었다.

“왜.”
「퇴근했어?」
“하는 중이야.”
「잘 됐다. 나 종편 미니시리즈 오디션 보러 가야 되는데, 동후가 급하게 일이 좀 생겼대서. 니가 좀
태워다주라, 응?」

석원이 피식 웃었다. 어젯밤만 해도 몇 컷 나오지도 않는 조연인데 그나마 공중파도 아니고 종편이 웬


말이냐며 요란법석을 떨어놓고, 결국 보러 가긴 가는 모양이었다.

“잘 거야. 혼자 운전해서 가지?”


「밤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무슨 잠을 벌써 자? 아직 단백질가이즈 팬 애들 무서워서 혼자 못
돌아다니겠어. 엄마도 너랑 같이 가라고 그랬단 말이야, 맛있는 거 사줄게. 비싼 거. 응? 별 거 없어,
그냥 나 오디션 볼 동안 기다리면 돼. 상대역 대사나 좀 쳐주면서.」
“난 그런 거…….”
「걱정 마, 걱정 마. 상대역이 연쇄살인마라 대사도 별로 없어. 배를 갈라보고 싶다, 아가리에 망치를
쑤셔 박을 거야, 뭐 이런 거야.」

순간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배를 갈라? 아가리에 망치를 쑤셔 박아? 맹세코 석원은 누가 듣는


곳에서 단 한 번도 저런 말을 내뱉어본 적이 없었다. 간혹 물을 크게 틀어놓고 샤워를 할 때나 한 번씩
말해 본 게 전부다. 그런 말을 불특정 다수의 앞에서, 몇 번이나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꿈속에서
살인하는 것보다 더 좋을까? 어떤 쾌감일까?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 꼭 맞는 열쇠를 끼워 넣은 기분이었다.
상자뚜껑을 열기만 하면 된다. 석원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곧 도착해, 준비해.”
============================ 작품 후기 ============================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00004 용병(Mercenary)
=========================================================================
             
지원은 종합편성 방송국에 들어가는 내내 부산스럽게 주위를 탐색하고 있었다. 며칠 전의 일로 겁을
집어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단백질가이즈의 팬들이 아니라 오디션을 보러 온 것으로
짐작되는 라이벌들이었다.

“젠장, 저 미구 같은 년 또 왔네. 나랑 이미지 비슷해서 안 되는데…아니, 왜 나 가는 곳마다 졸졸


쫓아다니는 거야?”
“누구?”
“서시! 예명도 그지 같아가지고는. 어어, 주혜영도 왔네? 앨범 낸다더니 노래나 할 것이지 왜 드라마
판은 기웃대고 난리야. 쟤도 나랑 이미지 겹치는데……”
“무슨 이미지가 어떻게 겹친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
“섹시한 백치미!”
“……전혀 걱정할 필요 없겠는데.”

지원이 웃는 석원의 등짝을 사정없이 때렸다. 석원은 얻어맞고서도 한참을 웃었다. 오디션 장소인 A
스튜디오 대기실을 찾아 들어가자 지원의 표정은 더 일그러졌다. 종편 심야 미니시리즈인데도 불구하고
알만한 얼굴들이 몇 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지원보다 나이가 어리고 연기를 잘했다.
이번에도 글렀다며 머리를 쥐어뜯는 지원에게 드라마팀 FD 가 대본을 내밀었다.

“이지원씨, 밤무대가수 손소란 역 맞으시죠? 여기 대본이구요, 손소란 역 오디션 곧 시작하니까 여기서


대기해 주세요.”

대본은 A4 용지 두 장짜리였다. 앞장에는 드라마의 기획의도와 인물설정 등이, 뒷장에는 「S# 34. 창
고」라고 오디션용 대본이 적혀있었다. 슬쩍 보니 손소란이 살해당하는 씬이었다. 지원이 잠시 옷을
갈아입겠다고 사라지고, 석원은 대기실 의자에 앉아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가제는 「술래잡기」였다.

저마다 개인적인 이유로 돈이 필요한 열 명의 인간 군상들이 검은 조직 Y 의 초대로 한 자리에 모인다. Y


는 술래잡기 게임을 제안한다. 열 명의 참가자들은 모두 술래 겸 사냥감이 되어야 한다. 처음 사냥감을
해치우면 1 억의 상금이, 해치우지 못하면 상금과 같은 값의 벌금이 매겨진다. 다음 사냥감의 상금은 2 억,
4 억, 8 억, 16 억으로 뛴다. 그 돈에 목숨을 건 참가자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내용으로, 19 세 이상
관람가의 자극적인 드라마였다.

“내용 험악하지?”

지원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녀는 화장을 좀 더 진하게 덧칠하고 등과 다리가 훤히 드러난


미니드레스를 입고 왔다. 지금 당장 나이트클럽에 가면 있던 밤무대가수도 쫓아내고 채용될만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코웃음을 치고 자리에 앉았다. 의상과
메이크업에 힘을 주더니 자신감도 고개를 처든 모양이었다.

“이 드라마가, 작가는 꽤 이름 있는 사람인데 내용이 그래서 공중파에선 다 퇴짜 맞고 종편으로


넘어왔더라고. 뒷장 봐봐, 니가 해줘야 될 게 거기 박무경 역할이야. Y 에서 참가자들 사이에 끼워 넣은
용병 같은 건데, 완전 쾌락살인자에 사이코패스야. 근데 그 역 하고 싶다는 애들 되게 많더라.”
“그래?”
“아무래도 우리나라 배우들은 좀처럼 접하기 힘든 캐릭터니까, 필모그래피에 이런 역할 하나 있으면 좋긴
하겠지.”

그렇게 말하며 지원은 생수 반통을 원샷했다.


“자, 이제 시작하자. 넌 대본보고 박무경 대사 쳐주면서, 내가 대사 잘못 외우면 바로 얘기해줘야 돼.”
“알았어, 해봐.”

지원은 의자 허리에 손을 둘렀다. 마치 뒤에서 손이 묶인 것처럼.

“한 번만, 한 번만 살려줘요, 응? 당신이 내야 되는 벌금, 내가 거기다가 1 억 얹어서 줄게요, 응? 이,


이번 라운드에 죽이고 받은 거랑, 거기에 1 억 얹으면………얼마지?”
“오억.”
“오, 오억이니까…….”

어설픈 연기와 대사실수 때문에 여기저기서 웃음 참는 소리가 들려오던 중. 뒤에서 누군가가 배를 잡고


웃었다. 정말 웃겨 죽겠다는 듯이 가슴까지 두들기며. ‘이런, 씨…!’하고 일어선 지원이 흠칫 놀랐다.
석원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문틈에 서 있는 여자는 우승희였다. 전직 모델다운 완벽한 몸매에 우아한 생김새로 우미인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대한민국에서 잘 나가는 20 대 여배우를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엔 반드시 들어가는 여자였다.
지원도 그녀의 멱살을 잡을 용기는 없었는지 표정을 억지로 누그러뜨렸다.

“승희누나, 그렇게 웃으면 실례잖아요.”

매니저가 말렸지만 우승희는 대기실 문을 붙들고 한참을 더 웃었다.

“와보겠다고 하길 잘했네. 걸작이다, 걸작.”


“거……걸작?”

지원이 주먹을 꽉 쥐었다. 우승희는 꼬리 끝이 날렵하게 올라간 눈매로 지원을 내려다보았다.

“이 드라마, 내가 주인공이에요. 그런데 난 장르가 스릴러라고 들었는데 시트콤이었나 봐요? 나 잘 웃는


성격 아닌데…재능 있네.”
“……장르 스릴러 맞거든요.”
“그런데 연기가 왜 그래요?”

미소 띤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는 냉랭했다. 불붙인 다이너마이트를 던져놓고 우승희는 대기실을 나가버렸다.


적막해진 대기실 어디선가 간간히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수십 쌍의 시선이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원은 라마즈 호흡이라도 하는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뱉기를 반복했다. 주먹을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긴 손톱이 부딪쳐 까득까득 소리가 날 정도였다. 일그러진 눈매가 점점 붉어지는
것을 보며 석원이 말했다.

“울면 나 간다.”
“넌 방금 그거 못 봤어? 나보다 두 살은 어린년이……!”
“네 살쯤 어릴걸? 예쁘긴 하더라, 우승희. 우미인, 우미인 할 만 하던데.”
“넌 누구 편이야! 우미인은 개뿔, 우주인이더구만. 주먹만 한 얼굴에 눈 코 입 다 끼어있는 게 징그럽지
않니? 팔다린 또 뭐 저렇게 길어? 그, 영화에 나오는 에일리언 생각나지 않아? 안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면야.”

지원은 ‘에일리언 같은 년!’하고 쏘아붙이고는 야무지게 대본을 쥐었다.

“내가 이거 꼭 붙는다, 두고 봐. 오억, 오억, 오억, 오억, 다시 시작한다! 준비 됐지?”


“대사나 잘해.”

아까 자세로 의자에 앉은 지원이 재차 감정을 잡았다. 석원은 뚜벅뚜벅 걸어 지원의 앞에 섰다. 대기실
안의 시선들은 여전히 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석원은 입술을 핥았다. 흥분이 돼서인지 가슴도,
아래쪽도 뻐근해졌다. 지금부터 잠시 동안은 그는 이석원이 아니어도 되었다. 박무경. 살인자의 알맹이를
감추고 있는, 안경잽이 사회복지사였다.

“…1 억 얹으면 오억이니까, 당신도 손해는 아니잖아요, 응?”


“아가씨. 난 어차피 사냥감 해치워도 돈 안 받아요.”
“그, 그, 그럼요…?”
“돈 말고, 시체로 받아.”

박무경은 지원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뒤로 꺾었다. 목이 구십 도로 꺾이고 턱이 쳐들리자 지원이 괴로운


소리를 냈다. 수축된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박무경은 지원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입맛을
다셨다.

“아가씨 시체는 삶아 볼 거예요. 그거 알아요? 사람고기가 생각만큼 기름기가 많진 않다는 거. 실제로


인육을 먹은 중국인이 그렇게 진술했다더라고요. 냄새가 역겨워서 그렇지 쫄깃쫄깃해서 먹을 만은 하다고.
아, 물론 내가 먹어볼 건 아니에요. 난 그 정도로 비위가 좋진 않거든. 아가씨 고기는 다음 사냥감한테
먹여볼 거예요.”
“아, 아, 아파….”

박무경은 지원의 머리카락을 꽉 쥐고 더 밀었다. 나무의자의 등판에 허리가 휘도록 걸쳐지고, 머리통은
긴 곱슬머리의 끝이 땅바닥에 닿을 만치 젖혀졌다. 지원이 다리를 버둥거렸다. 길게 늘어진 목덜미에
핏줄이 올랐다. 박무경이 그 목을 한 손으로 쥐자 숨이 막히는지 지원이 툭툭 끊어지는 기침소리를 냈다.
그때마다 손바닥으로 식도의 움직임이 느껴져서 박무경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까지 상하지 않게 보관해두려면 일단 피를 다 빼야 되는데,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아가씨,


헌혈 해 봤죠? 이번 라운드에 내 무기가 주삿바늘하고 헌혈 팩이거든. 특별제작 한 건가 봐요, 5
리터짜리더라고. 보통 성인의 경우 피가 2 리터이상 빠져나가면 죽어요. 죽은 후엔 내가 알아서 뺄 테니까,
그 전엔 아가씨가 좀 도와줘요. 걱정 마요, 어려운 거 아냐. 내가 혈관에 바늘을 끼우면 오초마다 한
번씩 주먹을 꽉 쥐면 돼요. 그래야 피가 빠져나가니까. 그것도 제대로 못하면 …….”

박무경은 지원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네 동생년놈들까지 다 죽여 버릴 줄 알아.”
“야, 그만해!!”

하이힐이 박무경, 아니 석원의 정강이를 콱 찍었다. 석원이 정강이를 잡고 펄쩍 뛰었다. 그가 인상을


쓰며 정강이를 문지를 때, 지원은 켁켁거리며 기침을 토해냈다. 그리곤 악에 받친 얼굴로 몇 번이나
석원의 다리를 걷어찼다.

“너 무섭게 왜 그래! 목 부러지는 줄 알았잖아!”


“많이 아팠어?”

석원이 묻자 지원이 ‘야!’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럼 간지러우라고 숨통을 틀어막았니? 실제로 카메라 돌아갈 때도 그렇게 심하겐 안 해! 다 적당하게
하는 거지!”
“난 그냥 대본대로 한 건데.”
“너 이놈시키 두 번 하자 그랬음 누나 잡았겠다!? 아야야, 목 삐었나봐. 엑스레이 찍어야 되는 거
아냐?”
“오버하긴. 대본연습 한 번 더할래?”
“됐거든!!”

다시 하이힐이 날아왔다. 석원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곤 얼른 자리를 떴다. 그가 지나가자 대기실
문 옆에 서 있던 여자들이 후다닥 비켜섰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석원은 고개를 가볍게
숙이곤 화장실로 향했다.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손바닥 아래로 두근대던 박동의 감각, 잔뜩 일그러진 고통스러워하던 얼굴, 숨소리도 죽인 채 그를
쳐다보던 관객들. 그가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 해주는 듯 한 박무경의 대사까지.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가 생각하던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쾌감이었다. 꿈을 꾸고 난 후보다 더 생생하고,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방금 전의 그 장면을 카메라로 찍어서 집에서 모니터링도 하고 싶었다.

화장실을 발견하자마자 석원은 제일 끝 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바깥으로
꺼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심지를 세운 놈은 아주 뜨끈뜨끈했다. 그는 입술을 핥으며 화장실 벽에다 등을
기댔다. 그의 머릿속에서 지원이 우승희로 바뀌었다.

그 기다란 눈매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사로잡힌 사슴의 것과 같은 목덜미를 움켜쥐고 그녀의 귀에다 ‘
죽여 버릴 줄 알아.’하고 속삭였다. 그와 박무경은 취향이 조금 달랐다. 그였다면 인육 얘긴 하지 않았을
거다. 시체는 나무토막일 뿐이다. 그건 그에게 어떤 흥미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존댓말을 하는 건
마음에 든다. 정중하게 대할수록 사람은 희망을 품게 되니까. 그것을 박살내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일
것이다.

한참 후, 칸 밖으로 나온 그는 태연히 손을 씻었다. 페이퍼로 젖은 손을 닦으며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서 한 남자가 웃고 있었다. 친절해 보이는 웃음은 아니었다. 석원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뺨을 툭툭
때렸다.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그의 시커먼 욕망도 크기를 키워갔다. 그것은 꿈으로도 다 해소할 수
없을 만큼 커져서, 이젠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처럼 목구멍 바로 밑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인내심도 이젠 아슬아슬했다. 석원은 문득 며칠 전에 봤던 여고생 살인범을 떠올렸다. 그라고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한순간의 쾌락에 무너져 철창 속에 갇히는 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한계는 틀림없이 찾아올 것이다. 그 전에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했다.

----------------------

정형석 PD 는 담배 한 대를 태우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일부러 넓은 길을 두고 지원자들이 바글거리는


대기실을 지나갔다. 좁은 게 문젠가, 꽃밭인데. 꽃에 치이는 건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쟤는 60 점, 쟤는
50 점, 오, 재는 85 점. 한 명 한 명 점수를 매기며 느긋하게 지나가던 그의 시선이 멈춘 것은, 대기실
안에서 대본연습을 하고 있는 한 남녀를 봤을 때였다.

그들을 쳐다보는 것은 정 PD 뿐만이 아니었다. 대기실 안의 모두가 다들 남녀를 주목하고 있었다.


머리카락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고요함속에서 남자의 대사만 뚜렷하게 들렸다.

정 PD 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박무경이란 캐릭터는 제작진 측에서도 고민이 많은 캐릭터였다.


정적인 사회복지사와 쾌락살인마를 넘나드는 박무경은 어설픈 배우들이 연기하기엔 너무 어려웠고, 이미
이런 종류의 연기로 호평을 받았었던 믿음직한 배우들은 몸값이 비쌌다.

여주인공과 함께 극의 긴장감을 살려줘야 하는 역할인데 캐스팅을 잘못 하면 드라마를 똥통에 싸지르는


꼴이 된다. 그래서 그는 작가에게 박무경이라는 캐릭터의 비중을 낮추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었다. 하지만
‘저거’라면? 정 PD 는 진지하게 자문했다. 저 박무경이라면 꽤, 아니 상당히 괜찮은 거 아닌가, 하고.

남자는 신인치고는 연기를 잘했다. 어쩌면 브라운관에서 못 봤을 뿐이지 연극판에서 뼈가 굵은 배우일지도


모른다. 사이코패스 박무경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사이코패스가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정
PD 역시 수십 번도 더 읽어본 씬이었고 곱씹어본 대사였는데 텍스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박력이 느껴졌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대사를 귀담아듣게 만드는 흡입력을. 연기인 것을 뻔히
아는데도 보는 사람을 무섭게 만드는 저 분위기를.

그때, 뒷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꺼내보니 김작가였다. 대본연습을 끝냈는지 서로 발길질을 하며


장난치는 남녀를, 그 중에서도 남자의 얼굴을 기억에 넣어두고 그는 대기실을 벗어났다.

「감독님, 어디세요?」
“어, 어, 김작가, 김작가. 내가 지금 대기실에서 죽이는 거 봤어. 그 왜, 걸그룹인데 얼마 전에 스캔들
나고 난리 났던 애 있지?”
「아~이지원이요? 왜, 걔 발연기보고 충격 받으셨어요? 뭘 새삼스럽게.」
“응? 아냐, 아냐, 걔 표정 연기 잘하던데? 누가 보면 진짜 목 졸린 줄 알겠더라고. 그런데 걔가 문제가
아니라, 같이 온 배우가 물건이야.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우리가 누누이 얘기하던 박무경이 거기
있더라니까? 카메라만 있었으면 그거 찍어놓는 건데, 넋 빼고 보느라 그 생각을 못했네.”
「어머, 그래요? 누군지 기대되네. 아참, 얼른 스튜디오로 오세요. 우승희씨 왔어요. 기어이 오디션
구경하겠다고. 까다로워서, 정말.」
“알았어, 알았어! 지금 가!”

정 PD 는 날듯이 스튜디오로 향했다. 잠시 후에 있을 박무경 역의 오디션을 기대하며.

00005 용병(Mercenary)
=========================================================================
             
무거운 침묵이 A 스튜디오 안을 휩쓸었다. 무대 앞 객석에 앉은 정 PD 도, 김작가도, 우승희도, 그리고 그
외의 모두가 할 말을 읽고 무대를 쳐다봤다. 무대 위에는 연기를 끝낸 이지원이 서 있었다.

정 PD 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형편없는 연기를 보여줘 놓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지? 얼굴에
하이스 합금을 깔지 않는 이상 사람이 저럴 수는 없다. 옆에서 물 한 병을 다 비운 김작가가 정 PD 의
팔뚝을 붙잡았다.

“쟬 캐스팅하신다고 하면 대본 불 싸질러버릴 거예요. 알아서 하세요.”


“김작가……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어.”
“표정연기는 개뿔….”
“그게, 아깐 정말 괜찮았거든……걔, 쟤랑 같이 온 남자는 정말 괜찮아. 내가 장담할게!”

정 PD 가 단언했다. 그러나 박무경 역의 오디션이 다 끝날 때까지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당황한 정 PD 가


대기실을 뒤지고 다녔지만 머리꼭지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중간에 돌아간 건가 싶어 지원자 목록을
뒤져봤더니, 아예 지원한 적도 없는 남자였다. 정 PD 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김작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지원도 안 한 거 보니 배우 아닌가본데. 감독님이 너무 좋게 본 거 아니에요? 없는 사람한테 그만 신경


쓰시고 얘기나 좀 해요. 방금 전에 오디션 본 애들 중에 김승현, 걔 어때요? 제가 보기엔 제일 괜찮던데.
박무경 비중만 좀 줄이면….”
“아냐, 아냐. 아까 그 남자가 김승현보다 훨씬 좋았어. 진짜로.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한참동안 앉아있던 정 PD 가 벌떡 일어나더니 FD 에게 말했다.

“이지원 매니저 번호 좀 줘봐.”

----------------------

검은 한강위로 달이 떠올랐다. 석원은 음악을 틀었다. 얼마 전 AD 가 구해다준 최신가요는 그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지원의 수다보다는 백배 나았다. 지원은 휴지로 눈물을 찔끔찔끔 닦고 있었다. 보통 오디션을
보고 난 다음날이나 그 다음날쯤 합격여부를 전달받는 것과는 달리 그녀는 오늘. 오디션을 보고 나서
곧바로 탈락이 통보되었다. 제작진끼리 의논해볼 가치도 없다는 뜻이었다.

“연기, 그래. 내가 연기는 좀 안 돼, 나도 알아. 그래도 내가, 응? 그래도 신인 애들보다 화제성은 좀


있잖아. 팬도 있고. 카메라 빨도 잘 받고. 안 그래?”
“굳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야 난 할 말이 없지.”
“너 말투가 자꾸 누나 신경 긁는다? 아까 오디션 볼 때 우승희가 날 어떻게 쳐다봤는지 알아? 지가 무슨
귀족이야, 영부인이야, 뭐야. 사람을 왜 깔아봐, 기분 나쁘게? 드라마 그냥 콱 망해버려라. 시청률
0.1% 나와서 조기 종영됐음 딱 좋겠네. 그럼 고 에일리언 콧대도 좀 납작해지겠지?하는 드라마마다 뜨니
지가 무슨 톱 배운 줄 알아. 나이도 어린 게. 우리 치킨하고 맥주 좀 사가자. 분이 안 풀려.”

집에서 술까지 마시며 남은 불평불만을 터뜨리겠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석원에게 보조석 문을 열어서


그녀를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그녀의 수다를 막았다. 냉큼
핸드폰을 꺼내본 지원이 실망했다.

“동후네……나야. 왜 전화했어? 오늘? 석원이 데리고 갔는데? 맞아, 걔가 상대역 대사 쳐줬어. 근데


그게 왜……뭐!?”

지원이 소리를 버럭 지르는 바람에 석원은 하마터면 마포대교 한가운데서 브레이크를 밟을 뻔 했다.
본인이 방금 죽을 뻔 했다는 걸 알 리 없는 지원이 황당해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것 같은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야, 감독이 너 오디션 좀 꼭 보고싶댄다, 박무경 역으로.”


“……나? 날 왜.”
“아까 우리 같이 연습하는 거 봤대. 생각 있으면, 아니 없더라도 꼭 연락 좀 달라 그랬다는데? 오디션은
당장 오늘이건 내일이건 언제든 시간 괜찮다고. 대본도 나온데 까지 바로 보내주겠대. 뭐니, 나랑 대우가
왜 이렇게 달라. 감독 이거 게이 아냐?”

지원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석원은 생각에 잠겼다. 오디션을 따로 보자는 건 그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오디션을 보는 것까진 괜찮았다. 아까 연습해본 것만으로도 상당히 즐거웠고, 연기라고
하기엔 좀 솔직한 대사들을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읊어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다 얼떨결에 오디션에 붙어버리면? 난데없이 배우 이석원이 되어야 할 판이다. 그도


방송계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연출자와 배우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역시 거절할까, 생각하다가 우승희를 떠올렸다. 드라마를 하게 된다면 상상만이 아니라 직접 그녀를 죽여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뿐이 아니라 연쇄살인마 컨셉이니 살인 씬도 몇 번이나 나올 게 틀림없다.
그걸 생각하니 어디 한번 해볼까하는 마음도 고개를 쳐들었다.

석원은 갈등했다. 어차피 종편 심야 드라마니 시청률도 1%미만일 테고, 보는 사람만 보는 마이너


드라마로 막 내릴 가능성이 컸다. 미니시리즈니 촬영기간도 몇 달 안 걸릴 테고…그 동안 오늘만큼, 아니
오늘보다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다시 프리 PD
의 일상으로 돌아가 먹고살면 된다.

석원은 일단 대본부터 받아보고, 그 후에 결정하자고 마음먹었다.

----------------------

이른 아침 이동마차를 타고 출발한 텐은 저녁 늦게야 대장장이 거리에 도착했다. 잔금을 치르고 주문했던


화살세트를 받았다. 그가 가진 화살통에 다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많아서, 고렉시어 영감이 화살통
하나를 덤으로 주었다. 던젼 안에 며칠이나 있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 화살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등이 묵직해지자 기분이 좋아졌다.

여관에 들러 던젼 안에서 먹을 식량도 샀다. 물론 영주 측에서도 준비해 오긴 하겠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소고기로 만든 육포를 스무 장이나 샀다. 맛은 별로라도 이동 중에 먹기로는 이것만한
것도 없었다. 그래도 냄새가 너무 심하니 소금도 작은 걸로 한 주머니, 좀 사치를 부려보자는 생각에
말린 과일도 좀 챙겼다.

어쩌면 던젼 속이 추울 수도 있다. 얇은 담요도 하나, 후드 안에 담비털이 붙어있는 망토도 하나 샀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그가 영주성으로 갔을 때는 어느덧 자정이 코앞이었다. 거대한 두 대의 마차 주변에
벌써 여럿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두 무리로 나눠져 있었다. 갑옷 위로 적갈색 세틴 망토를 늘어뜨리고 말을 탄 아홉 명의 기사,


영지 마법사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한 무리. 그리고 지저분하고 자유분방한 행색이 앞태로 보나 뒤태로
보나 용병인 자들이 한 무리였다.

“텐! 텐 가렌, 이쪽으로 오게. 겨우 다 모였군!”

지부장이 손짓했다. 텐은 우물거리던 육포를 꿀꺽 삼키고 용병무리에 끼었다. 용병들은 그를 포함해 총


일곱 명이었는데 그가 제일 어렸다. 터질 것 같은 근육에, 키가 2m 는 족히 되는 거한이 그를 쳐다봤다.
그는 거대한 양날도끼를 매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도끼 모델 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텐이 ‘모델이 뭐지?’하고 고개를 갸웃했을 때 거한이 말했다.

“이 꼬맹인 뭐요, 짐꾼이오? 던젼에 무슨 짐꾼을 데려가나?”


“짐꾼이라니, 그도 은급 용병일세. 승급한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으잉? 이 몸이 펠라도르에서 몇 년을 일했는데, 저놈은 본적도 없소.”
“그야 펠라도르에선 잠시 머물며 동급패만 따고 다른 영지로 나갔으니까 그렇지. 자, 다 모였으니 이제
서로 인사나 하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네.”

제일 어린 텐이 먼저 인사했다.

“텐 가렌이에요. 보시다시피, 궁사고.”

등에 맨 화살통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나마 그와 나이차이가 가장 덜 나 보이는 이십대 후반의 남자가


나섰다. 그는 매끈한 단궁을 들고 있었는데 활대 중앙에 수정구가 박혀 있었다.

“시세이 세이머. 저도 궁삽니다. 마법도 조금 하는데, 그건 별 볼일 없고요. 그렇다고 또 궁술이 괜찮냐,


하면 그것도 그냥 그렇습니다. 그래서 궁술과 마법을 같이 쓰는데 마궁사라고 하기엔 어감이 좀 이상해서
…….”
“답답하구만. 난 케간 베로머드요. 도끼를 쓰오.”

거한, 케간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 옆에는 검고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 내린 여자가 있었다.
나이는 삼십대 초중반쯤으로, 가무잡잡하게 탄 피부와 풍만한 몸매가 매력적이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와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은 모습이 마치 검사 같았지만 손에는 수정구를 박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오린 메이저. 은급 용병 마법사고…이번 기회에 한밑천 벌어서 겨울엔 결혼하는 게 목적이에요. 그러니
누구든 혼자 못 죽겠다고 내 발목 잡아당기는 놈은 두 번 뒈질 줄 알아.”

웃으며 이름을 밝힌 그녀는 협박으로 마무리했다. 여용병들이야 살아남기 위해 말도 행동도 험해진


여자들이니 특이할 것도 없었다.

“옌시스 제란.”

허리에 얇은 장검을 찬 남자였다. 몸은 매우 탄탄했지만 눈가에 패인 잔주름으로 볼 때 마흔 남짓은


되어보였다. 그는 팔짱을 끼고 기사들 쪽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표정이나 눈이 매우 차갑고 우울했다.

그 다음은 지부장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있는 남자로, 일행 중 가장 잘생긴 얼굴을 갖고 있었다. 웃으니


미모가 더 살아났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엔 그 얼굴에 찬사를 보내줄 여자는 없었다.

“검을 씁니다. 이름은 헤르모스 론.”

그는 똑같이 생긴 검을 두 자루나 차고 있었다. 그까지 소개를 끝내자 이제 남은 것은 한 명 뿐이었다.


그, 또는 그녀는 후드를 푹 뒤집어쓴 채 얼굴도 드러내지 않고 서 있었는데 키가 매우 컸다. 지부장을
비롯해 모두가 그를 쳐다보자, 그는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그 얼굴이 드러났을 때엔 모두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용병들 뿐 아니라 이쪽을 쳐다보던 기사들까지 동요하게 만드는 외모였다.

진주를 갈아 뿌린 듯 한 피부는 창백하게 빛났고, 물결치듯 구불거리는 연녹색 머리카락은 귀족여자라면


백금을 주고도 사려 들 만큼 아름다웠다. 어둠 속에서도 그 얼굴 주변에만 마치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또는 그녀는 얇은 눈매를 내리감으며 말했다.

“이오르요, 요정족에겐 성이 없소.”


“……요정? 요정이라고? 지부장, 펠라도르 출신 용병만 모았다고 하지 않았소? 펠라도르에 요정족이
사오?”
“머리 나쁘긴, 그거야 입단속 때문인데 요정족은 약속과 계약을 목숨같이 지키는 자들이니 상관없지.”
“그런데 여잡니까, 남잡니까? 요정들은 남녀구별 없이 아름다우니 겉으로 봐선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시세이가 물었지만 이오르는 대답 없이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어쨌든 요정족의 등장으로 분위기는 한결


밝아졌다. 요정족은 궁술뿐만 아니라 후각, 시각이 매우 뛰어났고 마법사들보다 안전한 보호막을 칠 수
있었다. 거대 규모의 용병단이나, 상인, 귀족들까지도 금화를 쌓아주고 데려가려고 안달을 하는 게 바로
요정족이다. 그런 자가 끼었으니 이번 던젼행은 시작부터 운이 좋았다.

모두가 이오르의 후드 속을 어떻게 한번쯤 더 볼 수 없을까, 하고 기웃거리고 있을 때. 성문이 열리며


젊은 청년이 시종과 함께 나왔다. 기사들이 황급히 말에서 내렸다. 청년은 값비싼 은사 실크셔츠와 세틴
망토, 여우 털목도리를 하고 있었는데, 복장이 아니었으면 그 역시 성별을 헷갈렸을 만큼 생김새가
고왔다. 그는 기사들과 용병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나는 로에늠 펠라도르 이에렉사다.”


“영주의 네 번째 핏줄이라네.”

지부장이 속삭였다.

“우리는 다섯 번째 던젼원정대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그대들을 이끌고 갈 것이다. 그곳의 흉악한 것들을


모조리 없애고, 보물을 찾아 아버지이자 영주님께 바치는 것이 나의 임무이자 원정대의 목표다.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에는 영광과 충분한 금이 나누어질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도 모두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 다오. 나는 이 임무를 반드시 완수해야만 한다.”
“모두가 기사단의 정예들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딱딱한 얼굴의 기사가 말했다. 그들은 펠라도르의 기사단 중에서도 충직한 자들일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죽음을 감수한, 죽어도 괜찮을 자들로 꾸려졌을 것이다. 용병지부장도 한 입 거들었다.

“용병지부도 마찬가집니다, 도련님. 요정족까지 포함된 매우 깐깐하게 엄선한 자들입니다. 어디


기사님들만 하겠냐마는, 그래도 믿고 한 팔 맡기실 정도는 될 겁니다. 감히 말씀드리길……뭐가 튀어나올
지 모를 위험한 던젼은 용병들이 더 익숙하니까요.”

지부장의 허풍에 로에늠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다.”
“그럼 마차에 오르십시오. 날이 밝으면 불필요한 시선이 모입니다. 그 전에 무너진 갱도로 가야합니다.”

기사의 말에 로에늠이 화려한 마차에 올랐다. 용병들도 볼품없지만 크기는 지지 않는 짐마차에 올라탔다.
텐은 요정족 이오르의 옆에 앉았다. 좀처럼 보기 힘든 귀족이 등장했음에도 그의 최대 관심사는 이오르의
성별이었다. 다른 용병들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든가 말든가 이오르는 흙으로 빚은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있었다. 손을 흔드는 지부장을 뒤로한 채, 다양한 자들이 섞인 열여덟 명의 던젼원정대는
갱도를 향해 출발했다.

밤바람은 사납게 아우성쳤다. 텐은 그 바람 속에서 피냄새를 맡았다. 던젼 안으로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며칠이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나날이 이어질 것이다. 한 발 한 발 나아갈 때마다 전투를 치를 것이고,
그때마다 자욱하게 피냄새가 번질 것이다.

텐은 모처럼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기대감, 이 흥분 앞에선 짐승을 사냥하는


것이나 섹스 따윈 비할 것도 아니었다. 섹스의 대상이 요정족이라면 모를까…텐은 이오르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때 마법사 오린이 텐에게 물었다.

“너, 몇 살이냐?”
“열아홉.”
“던젼에 들어가긴 너무 어리잖아? 지부장 이 새끼. 어지간히 급했나보군. 네가 죽으면 내가 지부장
손가락 하나쯤은 같이 보내주마.”
“글쎄, 누가 죽을지는 가봐야 알지….”

텐이 웃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린은 그의 어깨를 때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뿐 아니라 헤르모스도,
케간도, 시세이도 뒤집어졌다. 지옥으로 갈지도 모르는 마차를 타고 있으니 웃음으로라도 긴장을
풀어보려는 것이겠지만, 다들 너무 웃었다. 그들은 여전히 텐을 짐꾼 보듯이 보고 있었다.

텐은 어깨를 두들기는 오린의 손을 치워버리곤 비뚜름하게 웃었다. 상관없었다. 어떤 파티든 처음엔 다


그랬으니까. 하지만 결국 한번은, 죽음을 코앞에 두고 그의 화살에 목숨을 구걸하게 될 것이다.

갱도 앞에 도착하자 마부들은 다시 마차를 끌고 돌아갔다. 기사들이 타고 온 말도 마찬가지였다. 남겨진


것은 인간들과 한명의 요정족뿐이었다. 밤하늘에 쏟아진 보석처럼 반짝이는 별들만이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았다.

“별이 많군. 죽기엔 아쉬운 밤이야.”


“음유시인 나셨네. 뒈질 거면 혼자 뒈지쇼.”

헤르모스가 중얼거리자 케간이 끼어들었다. 마법사 두 명이 각자의 지팡이에 불을 밝힌 후 원정대는


갱도로 들어섰다. 용병들이 앞서고, 그 뒤를 로에늠을 감싼 기사들이 따라왔다. 무너진 갱도를 다시
파놓은 탓에 길은 매우 비좁았다. 걸어갈 때마다 위에서 흙과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흙벽으로 다리가 마흔 개쯤 달린 지네가 기어갈 때마다 용병들은 뒤를 돌아봤지만, 로에늠은 얼굴이 좀


굳어졌을 뿐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젊은 기사들 쪽이 더 반응이 다채로웠다. 텐의 바로 뒤를
따라오는 시세이가 구경하는 맛이 없다고 속삭였다. 앞에서 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쯤 갔을까. 일행은 드디어 목표한 장소에 도착했다. 널찍하게 파 놓은 공간에는 네모 납작한
돌바닥이 깔려있었고, 그 위에 은으로 그린 마법진이 있었다. 요즘 마법진보다 훨씬 거대하고 투박했다.
영지 마법사가 앞으로 나가 지팡이로 마법진을 두들겼다. 그리고 따라했다간 혀가 다섯 번쯤 꼬일 것 같은
마법 주문을 줄줄 외웠다. 던젼 주인이 걸어둔 암호문을 해석한 것이었다.

“…뤼미엣 ‧ 드 ‧ 리오메이로스 ‧ 로쉐라.”

주문이 끝나자 마법진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액체가 된 은이 돌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새파랗게
빛을 발했다. 눈알이 뜨거울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텐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마법진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돌계단이 아래로, 아래로 뻗어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던젼으로 가는 입구였다. 안에서는 기묘할 정도로 아무런 소리도, 냄새도 나지 않았다.
모두들 로에늠을 쳐다봤다. 그는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들어가자.”

감각이 예민한 이오르가 처음. 옌시스가 두 번째, 빛을 발할 수 있는 오린이 세 번째, 헤르모스가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는 텐의 차례였다. 아래쪽은 정말 어두워서 앞쪽에서 불을 밝혔는데도 선두인
이오르가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보이는 것은 앞사람 정도였다.

텐은 헤르모스의 등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잠시 후 위에서 까드득, 하고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입구가 닫혔소.’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일행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열여덟 명의 발자국소리와 숨소리가 고요한 던젼을 깨웠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봐 주신 분들, 선추코 해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

00006 용병(Mercenary)
=========================================================================
             
“너무 어둡군. 이래서야 습격을 받으면 속수무책이오. 조금 더 밝게 할 수는 없소?”
“그건….”
“저,”

영지마법사와 오린이 동시에 말했다. 잠시의 침묵 뒤로, 영지마법사가 먼저 이야기했다.

“칼라일경. 언제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르는데 벌써부터 마력을 소모할 수는 없습니다.”


“저한테 반딧불풍뎅이가 한 마리 있어요. 깨우면 열두 시간 밖에 못 가지만 일단 상황파악이 필요하니 별
수 없죠.”

일행은 잠시 멈춰 섰다. 앞에서 부스럭 부스럭 짐을 뒤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주문 외는 소리가


이어졌다. 앞쪽이 확 밝아지며 주먹만 한 뭔가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실제 풍뎅이보다 훨씬 거대하긴
했지만 겉모습만은 날개달린 풍뎅이였다. 풍뎅이는 온 몸에서 빛을 뿜어냈다. 여전히 아래는 까마득한
어둠뿐이었지만 주위는 훨씬 밝아졌다. 사오 미터쯤 아래의 계단까지 보일 정도였다. 답답한 거야
여전했지만 아까보단 나았다. 케간이 투덜댔다.

“제길, 계단이 길기도 하군. 옛날 마법사들은 체력이 꽤 좋았나보오.”


“던젼을 만들었을 정도의 실력 있는 마법사라면 공중부양마법쯤 가뿐히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이걸 매일
오르락내리락했겠어?”
“그럼 이 계단은 왜 만든 거요?”
“그거야 손님을 위해서 만든 거 아닐까요?”

시세이가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오린이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영지마법사를
쳐다봤다. 그 역시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두 마법사는 속삭이는 듯 한 목소리를 주고받았다.

“그 시대의 마법사들은 제가 알기로….”


“모두 괴팍하기 이를 데 없었지. 그들은 결코 손님의 편의를 위해 계단을 만들 자들이 아니었소.”
“역시 그렇죠? 그 폐쇄적인 종자들이,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만의 공간인 던젼에 그런 친절한 짓을 했을
했다고 보긴 힘들어요.”

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젊은 기사 한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이 계단은 뭐란 말이오?”


“…….”
“…….”

텐은 허리에 매단 식량주머니를 더 꽉 조이고, 배낭을 고쳐 멨다. 등줄기가 서늘해진 게 그 뿐만은


아니었으리라. 침묵은 잠시였다.

“달려! 함정이다!!”
“에라이, 빌어먹을! 하여튼 마법사란 족속들은!”
“마법사가 뭐 어떻단 말이냐, 이 잡놈아!”

열여덟 명의 던젼원정대는 꽁지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다리도 쉬지 않았고, 입도


쉬지 않았다. 대부분은 마법사를 향한 욕지거리였다. 그들이 나선계단을 세층 정도 더 내려갔을 때,
드디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쿠구궁!

일 미터 정도의 넉넉한 너비였던 계단이 그 반으로 좁혀졌다. 그리고 또 그 반으로 줄었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발 잘못 놀리면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질 판국이었다. 계단은 이제 반 뼘
정도의 너비로 줄어들어 일행은 게걸음으로 미끄러지듯이 내려가야 했다.

몇몇은 이미 얄팍해진 계단을 붙들고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텐은 배낭 아래 둘둘 말아 묶어둔 담요를


꺼냈다. 그것을 온 몸에 칭칭 두르고 마치 번데기처럼 망토를 한 번 더 휘감았다. 그러는 동안 너비 삼
센티 정도로 얇아진 계단이 드디어 쩌저적, 균열을 일으켰다.

“떨어진다!”
“마법사!”

눈 깜짝 사이에 돌계단은 산산이 부서졌다. 잘못 맞으면 두개골이 까부수어질 강도의 돌덩이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원정대는 맨 몸으로 허공에 내팽개쳐졌다. 수많은 악독한 함정과, 몬스터들과의 일전을
대비했지만 이런 꼴을 당하리라고 예상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대비책도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하로 추락했다. 돌 부스러기에 부딪치고 긁혀 만신창이가 되고, 내장이 위로


솟구치는 감각에 헛구역질이 나올 때쯤. 반딧불풍뎅이의 빛이 드디어 바닥을 비추었다. 텐은 망토를 꽉
틀어쥐었다.

“일리아라모르 ‧ 로페므 ‧ 뷔사오!”


“…로페므 ‧ 뷔사오!”

양쪽에서 희뿌연 빛이 터져 나왔다. 마치 위에서 끌어당기는 것처럼 하강속도가 훅 줄어들었다. 하지만


줄어들었을 뿐,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저마다 패대기친 개구리 꼴이 되어 땅바닥에 철썩철썩
달라붙었다. 공중에 뜬 채 용을 쓰고 마법을 유지하던 두 마법사도 마지막 한명까지 내려놓고는
허수아비처럼 나뒹굴었다. 용병 여섯 명을 지탱한 오린은 호흡곤란 때문에 목을 쥐어뜯었고, 총 열 명을
지탱해야 했던 영지마법사는 피를 토했다.

「그라시아 ‧ 그라세.」

날렵하게 착지하자마자 이오르가 양 손을 들어 올리며 주문을 외웠다. 요정족의 마법이었다. 긴


손끝에서부터 뻗어나간 실낱들이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엮이며 보호막을 만들었다. 성기었지만 열여덟
던젼원정대를 다 감쌀 만큼 커다랬다. 그 위를 무겁고 뾰족한 돌조각들이 강타했다. 후드가 흘러내린
이오르의 창백한 얼굴에 핏줄이 섰다.

「그라시아 ‧ 그라세 ‧ 그라외오르!」

우윳빛 방어막이 우웅, 하고 울었다. 보호막을 누르던 돌들이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것들이 원정대 위에 먼지처럼 수북하게 쌓인 후에야 보호막이 사라졌다. 보호막이 반딧불풍뎅이까지
지켜주진 못했는지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어둠의 침묵 속에서 안도의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을 때.

화르륵! 화륵!
수십 개의 횃불이 타올랐다. 시야가 대번에 밝아졌다. 그들이 떨어진 곳은 흙바닥 위에 넓고 둥근
돌바닥을 깔고 돌기둥을 올린 광장 같은 곳이었다. 가장자리에는 오 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횃불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치 던젼이 침입자를, 아니 먹잇감을 반기기라도 하듯이.

일행들 중 제일 먼저 일어선 것은 담요와 망토로 몸을 감쌌던 텐과, 발이 땅에 닿는 순간까지 마법에


보호받은 로에늠. 굵은 뼈다귀 덕을 단단히 본 케간이었다. 뒤이어 옌시스가 정신을 차렸고, 저 아래까지
굴러갔던 시세이가 기어왔다. 기사들도 몇은 무사히 일어났고, 몇은 일어나지 못했다. 옌시스가 피가
뚝뚝 흐르는 이마를 지혈하며 말했다.
“죽은 사람 있습니까?”
“…….”
“다친 사람은?”
“…여기요, 팔이 부러졌습니다.”
“난 오른쪽 발목이 나갔소.”
“나는 손가락이…….”
“전……후우, 후우, 일어나질 못하겠는 게…갈비뼈가 부서졌나봅니다.”

기사들이고, 용병들이고 할 것 없이 사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오린은 마른기침을 토해내며 ‘개 같은


마법사…, 뒈져라….’하고 중얼거렸다. 어느새 허공에는 지긋지긋한 나선계단이 다시 나타나있었다.
누군가가 계단에 돌덩이를 집어던졌다. 그러나 그 돌덩이는 계단에 닿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바닥에
쌓인 돌가루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마치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포션도 일단 뼈를 맞춰놓고 마셔야 효과가 있기에 멀쩡한 자들이 돌아다니며 뼈를 맞추었다. 여기저기서
우득, 우득 뼈다귀 부딪치는 소리와 신음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텐은 시세이의 오른팔을 감상했다.
부러진 모양이 아주 기괴했다.

“……가관.”
“떨어질 때 한 번 부러지고, 구르다가 또 부러져서 그래. 넌 용케 무사하구나. 어려서 뼈가
물렁물렁한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할 말 없죠. 포션 마실 준비나 해요.”

텐은 그의 입에 담요 한 자락을 쑤셔 넣고 대충 뼈를 맞춰주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참던 시세이는 포션을


한 병 동내고 벌러덩 누웠다. 퉁퉁 부어있던 팔이 빠른 속도로 가라앉았다. 포션의 효과였다.

“들어온 지 삼십분도 안 돼서 두 번씩 죽은 셈이군.”


“진짜 죽은 자들도 있소.”

기사가 말했다. 그들이 떨어진 광장 바닥에는 머리통이 깨지거나 사지가 꺾인 시체가 즐비했다. 앞서
던젼에 들어왔던 기사들과 병사들이었다. 무언가가 내장을 파먹었는지 훼손이 심해, 이미 인간이라기
보단 썩은 고깃덩어리였다. 기사들은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동료와 부하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래봤자
한데 모아두는 것뿐이었지만. 기사들을 이끄는 칼라일이 말했다.

“뼈가 제대로 붙을 때까지 잠시 쉬는 게 어떻겠소.”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대부분의 마력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바람에 뱃속이……우욱, 욱! 니미럴!”

오린이 동떨어진 곳으로 기어가 토악질을 했다. 만장일치로 그들은 잠시 치료의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마법사의 던젼은 침입자들에게 휴식을 허락할 만큼 친절한 곳이 아니었다. 고작 오 분쯤 지나자 쿵. 쿵.
불길한 발소리가 던젼 안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군데군데 바스러진 돌기둥 너머에서부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오르가 흡, 숨을 들이켜고 말했다.

“……생명의 냄새가 아니군. 마법사에게 생명을 부여받은 가디언이오. 네 구쯤.”


“산 넘어 산이구만.”

재빨리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자들만을 로에늠 주위에 끌어다놓고 싸울 수 있는 자들은 전투를 준비했다.
기사들이나 용병들이나 전투에는 이골이 난 자들, 지휘하는 자가 없어도 알아서 제 자리를 찾아갔다.
기사들과 옌시스, 도끼를 든 케간이 앞으로 나서고 텐과 이오르는 기둥을 하나씩 타고 올라가 위쪽에서
화살을 겨누었다. 케간이 불편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꼬마…당부하건데, 날 맞추진 마라.”


“하지 말라면 또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라…….”

텐이 웃으며 말했다. 시답잖은 얘기를 하는 와중에도 발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스릉, 여섯 명의


기사가 검을 뽑았다.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마침내 가디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개의
돌덩이들이 뭉쳐져 만들어진 마력석상이었다. 높이가 사 미터를 웃돌았다.

눈이 있어야 할 곳은 구멍이 뻥 뚫린 채 불길한 붉은빛 구체를 감싸고 있었고, 손에는 거대한 바윗돌로
만들어진 망치를 들고 있었다. 덩치가 큰 만큼 손발도 어마어마하게 커서 걷어차이기라도 하면 단번에
내장이 부서질 것 같았다. 죽음을 불사한 던젼원정대의 돌격도 태풍 앞의 잠자리 날갯짓처럼 느껴졌다.

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석상을 훑어봤다. 어느 부윌 명중시키든 고통스러워할 것 같지 않았다. 저것이


고통을 알기나 하는 존재들일까. 텐은 시험 삼아 돌멩이와 돌멩이가 맞닿은 틈으로 화살을 꽃아 넣었지만,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뒤쪽에서 오린과 영지마법사가 외쳤다.

“몸 어딘가에 마력 심장이 박혀있을 거예요! 그걸 찾아요!”


“맞소, 칼라일경! 그것만 터뜨리면 저것은 그냥 바윗덩어리나 다름없소!”

기사 칼라일과 케간이 다급하게 말했다.

“범위를 줄일 수는 없겠소?!”
“저 돌덩이의 전신을 다 다져야 한다면 내 도끼날이 먼저 닳아빠질 거란 것만 알아두쇼!”

마법사들이 다시 떠들었다.

“그건 마법사의 성격에 따라 다 달라요! 일단은…가슴은 아닐 확률이 높아요! 공격받기 가장 쉬우니까!”


“그런 생각을 겨냥해 일부러 가슴에 박았을 수도 있소!”
“니미럴, 그렇게 생각하면 제외할 부분이 없어요!”
“만약 마력 심장이 있는 곳에 타격을 입는다면 그들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반응을 보일 거요! 일단
전신을 공격하시오!”
“결론은 그거요?! 그게 결론이요?!”

바닥을 몇 번이나 굴러간 케간이 버럭 소리쳤다. 텐은 이오르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저 돌덩이들의


약점을 찾을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둘은 마력석상을 한 구씩 맡아서 바늘꽃이로 만들기 시작했다. 입
구멍, 목, 쇄골, 어깨, 다닥다닥 붙은 돌멩이 틈새를 비집고 화살촉이 꽂혀 들어갔다. 텐은 대가 두껍고
촉이 커다란 화살만 뽑아 연사했다. 팔에 부담이 갔지만 얇은 화살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전투가 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몸뚱이가 성한 자가 없었다. 모두가


칼질에는 일가견이 있는 자들이었지만 그것도 상대가 인간이거나 살아 숨 쉬는 몬스터일 때나 먹히는
것이지, 이번엔 상대가 너무나 암담했다. 무거운 주먹에 얻어맞은 젊은 기사가 오 미터쯤 튕겨나가
처박혔다. 입에서 내장조각과 핏덩이가 쏟아졌다.

그때, 텐은 팽팽히 당겨진 마흔 다섯 발 째 시위를 놓았다. 쉭, 바람을 가르고 쏘아진 화살이 정확히
마력석상의 무릎뒤쪽에 박혔다. 그 순간 마력석상이 움찔했다. 찰나였지만 움직임이 멈추었다.
마력석상이 텐을 돌아보았다. 눈구멍 속의 빛이 사납게 타올랐다. 찾았다. 저 곳이다. 틀림없었다. 텐은
입 꼬리를 양 옆으로 길게 올리며 소리쳤다.

“거기 멈춰 있는 놈, 무릎 안쪽!”
“으아아아! 찔러! 무릎을 부숴!”
“뒈져라, 이 우라질 놈! 지독한 놈!”
“지옥으로 꺼져!”

세 명이 다리 한 짝에 달라붙어 난도질을 하자 놈은 거세게 다리를 흔들었다. 기사 두 명이 튕겨나갔지만


곧바로 다시 붙었다. 텐은 같은 자리에 세 발을 더 쏘았다. 케간의 도끼가 그 위를 후려쳤다. 놈이
거대한 몸을 휘청거렸다. 무슨 짓을 해도 쓰러지지 않을 것만 같던 놈은 무릎 안쪽이 반쯤 으스러진 순간
평범한 석상이 되어 쓰러졌다. 안구의 붉은빛도 사그라져버렸다. 곧바로 이오르 역시 약점을 찾아냈다.
기세를 탄 원정대가 우르르 그놈에게 몰려갔다.
세구 째의 약점을 찾았을 때에는 회복한 부상자들이 합세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 여덟명의 던젼원정대는 쓰러진 석상들 위에 걸터앉았다. 승리했으되, 꼴은 만신창이였다. 휴식이
필요한 부상자가 또 반수가 넘어섰다.

텐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근육이 별로 없는 오른팔이 파들파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 발 한


발을 온 힘을 다해 쏘느라 장갑을 끼었는데도 손가락 끝이 너덜너덜했다. 기운은 없었지만 기분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텐은 하급포션을 반병 마시고 드러누워 전투의 후희를 즐겼다. 마력석상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들이었다면 더 즐거웠을 텐데…하고 생각했을 때. 그의 옆에 케간이 다가와
걸터앉았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달려들고, 누구보다 많이 얻어맞아 바닥을 굴러다녔는데도 멀쩡해
보였다.

“덕 봤다, 궁사. 오늘 하루 내가 네 짐꾼이 돼주지.”


“……어디 안 부러졌어요? 징그럽네.”
“내가 튼튼한 뼈다귀 덕을 많이 보는 편이지! 그런데 말이다, 눈이 좋다고 소문난 궁수들도 너만큼
화살을 기똥차게 꽂진 못하던데, 그건 무슨 수를 쓴 거냐?”
“…재능 덕을 많이 보는 편이죠.”
“으하하하! 그래, 당분간 내 등 뒤를 잘 부탁한다, 궁사!”

커다랗게 웃던 케간이 뚝, 웃음을 그쳤다. 격렬한 전투 후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이오르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바라만 봐도 좋은지 케간의 입이 흐뭇하게 벌어졌다. 그가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시오, 부탁이오. 성별만 좀 알려주쇼. 내가 아까 지옥 문턱까지 갔다가 그게 궁금해서 다시


돌아왔소.”
“…….”

이오르는 케간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바닥에 걸터앉아, 여전히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텐에게 물었다.

“어쩌면 그대에게 요정족의 피가 흐를지도 모르오. 부모의 조부모의 조부모까지 모두 이름을 대 보시오.”
“………모르는데요.”

이오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모르오?”
“……내가 귀족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하하하하! 어디선가 터져 나온 것을 시작으로 던젼원정대 사이에 떠들썩한 웃음이 전염되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과 공포의 끈을 이오르가 끊어준 셈이었다.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맥주를 한
모금 마신 케간이 턱수염에 매달린 물기를 훔치며 말했다.

“요정족 양반.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부모 이름도 모르오!”


“부모의 조부모의 조부모라니 시간을 얼마나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건가?”
“호칭조차 모르겠군.”
“……나도 사대 째부터는 헷갈린다.”

마지막엔 로에늠까지 보태었다. 광장을 채운 웃음소리는 한참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 저 멀리 어둡고 축축한 땅 속에서 게걸스럽기 짝이 없는 포식자들이 깨어났다. 놈들은
신선한 내장의 냄새에 군침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 그것을 남김없이 먹어치우기 위해 꾸역꾸역 쏟아져
나왔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해주신 분들, 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
꾸준히 봐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힘이 납니다.

00007 용병(Mercenary)
=========================================================================
             
광장을 벗어난 후부터는 길이 마치 개미굴처럼 얽혀있었다. 태양이 없으니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던젼에 들어온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거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었다. 다리가 무거웠고, 어깨가 축축 늘어졌다. 원정대는 매 전투마다 포션을 복용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할 만큼의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신의 자애를 담은 포션은 놀라운 효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코 만병통치약은 아니었다. 포션을 사용해
다친 곳을 재생시키고 나면 반드시 일정시간 휴식을 취해야 했는데, 그럴 틈도 없이 계속 전투를 하고
포션을 마시고 또 전투를 하니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던젼은 쉴 틈 없이 원정대를 괴롭혔다.

가죽주머니 속에서 말린 열매 같은 걸 주워 먹던 이오르가 벌떡 일어났다. 끝이 약간 뾰족한 귀가


쫑긋거렸다. 그는 킁킁 냄새를 맡더니 망설임 없이 활을 빼들었다. 통로 이곳저곳에 쓰러져 있던
원정대가 욕지거리를 하며 일어났다.

“……벌레들이오. 50 마리, 80 마리……150 마리정도.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소. 1 분 30 초쯤 후면


도착하오..”
“우라질!”
“내 앞으로는 금급 용병이 세 명쯤 포함된 파티가 아니면 절대 던젼은 쳐다도 안 볼 거요.”
“동감입니다…우리 일행에도 금급 용병이 있었으면 이만큼 힘들진 않았을 텐데…….”
“펠라도르 출신 금급 용병이 없는 걸 어쩌겠습니까?”

용병들이 무기를 꺼내며 궁시렁거렸다. 도끼에도, 칼에도 몬스터의 체액이 끈적끈적하게 묻어 악취가
대단했다. 기사들은 말 할 기운도 없어보였다. 눈 밑이 시커멓고 얼굴이 핼쑥하게 야윈 것이, 저대로
밖에 나갔다간 걸어 다니는 시체라고 화형대로 끌려갈 꼴이었다. 그들이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지긋지긋한
대열로 몬스터를 기다릴 때.

텐은 횃불 하나를 꺼뜨리고 횃대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화살통을 뒤적였다. 오기 전에 꽉꽉 채워넣었던


화살은 이제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전투가 끝나면 죄다 회수하긴 했지만 던젼 가디언이나 몬스터들의
껍질이 워낙 단단한 탓에 화살대가 꺾이거나 촉이 뭉개진 것들이 반이었다. 텐은 그나마 성한 놈을 하나
시위에 걸었다.

사삭. 사사삭. 사사삭.


털이 수북하게 난 다리가 바닥을 쓸며 내는 소리였다. 굽이진 통로에 더듬이의 그림자가 어른거린 순간,
놈들이 시커먼 파도처럼 쏟아져왔다. 신물 나게 보았던 놈이다. 거대한 검은 철갑. 네 쌍의 다리와 두
쌍의 더듬이, 손쉽게 사냥감의 내장을 파낼 수 있는 갈퀴를 가진 벌레몬스터 코마였다. 놈들은
지렁이처럼 흙속의 영양분을 먹기도 했지만, 그보단 짐승의 내장을 파먹는 것을 훨씬 좋아했다.

지금까지 원정대가 죽인 놈들만 천여 마리는 족히 될 텐데도 놈들은 끊임없이 기어 나왔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알을 보며 텐은 눈매를 가늘게 조였다. 팽팽하게 당긴 시위를 놓자 쐐액, 바람을 뚫고 나간
화살촉이 눈깔 하나를 뚫고 뒤통수로 튀어나왔다. 헤르모스를 공격하던 놈이 옆으로 벌러덩 쓰러져 다리를
꿈틀거렸다. 마지막 안간힘도 부질없이 생명이 빠져나갔다.

“하나.”

텐은 숫자를 세며 웃었다. 역시 돌덩이 따위보다는 살아있는 놈이 죽이는 맛이 좋았다. 일렬로 늘어서


통로를 꽉 막아버린 기사들과 용병검사들이 벌레와 접전을 벌이고, 궁사와 마법사가 후위에서 지원했다.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전투가 거듭될수록 벌레들을 소탕하는데 드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서른
마리쯤이 남았을 때, 시세이가 커다란 활에 화살 다섯 개를 한꺼번에 매기며 소리쳤다.
“눈먼 화살에 안 맞으려면 뒤로 빠지세요!”
“쏘지 마! 아직 쏘지 마!”

케간의 고함과 함께 던젼원정대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벌레들은 ‘저놈들이 드디어 겁을 먹었군!’하는


표정으로 따라붙었다. 쫓고 쫓기는 두 무리의 간격이 조금 멀어졌을 때.

“히모스 ‧ 에칸!”

마력에 감싸인 화살 다섯 발이 벌레들 사이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이후는 몇 번이나 봤던 그대로였다.


다섯 번의 폭발소리와 함께 벌레들은 거무튀튀하고 역겨운 잔해를 남긴 채 전멸했다. 한번 쏘고 나면
포션을 마셔야 할 정도로 힘이 빠지는 방법이긴 했지만, 효과는 좋았다. 폭발할 때 날아온 잔해를 온
몸으로 받은 기사들이 진저리를 쳤다. 칼라일이 목덜미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골수를 훔쳐냈다.

“마법화살이 대량살상 무기인 것은 틀림없긴 하오만…….”


“위력이 문제요? 조절이 안 돼서 아군까지 싸잡아 뒈져라, 뒈져라 하는구만!”

케간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는 폭발에 다리 한 짝이 휘말려 피를 분수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오린이


얼른 마법으로 지혈했다. 케간은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피를 아깝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포션은 소모한
피까지 채워주지는 못했다. 문제는 뭉개진 살을 재생시켜줄 포션마저 다 떨어졌다는 것이었지만, 다행이
던젼원정대에는 포션을 마법주머니 한 가득 싸 짊어지고 온 사람이 있었다.

“고통을 참지 마라. 아직 내게 여유분의 포션이 있다.”

로에늠이 마법주머니에서 포션을 탈탈 털어 꺼냈다. 영지 마법사가 난색을 띄며 말렸다.

“그것을 다 써버리시면 만일의 경우에…….”


“내가 지금껏 살아남아있는 것은 저들이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 아닌가. 포션은 나보다는 저들이 쓰는 게
옳다.”
“하지만…….”
“죽고 나면 한 푼 가치도 없는 것이다.”

로에늠이 직접 돌아다니며 부상당한 이들에게 포션을 건네주었다.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라는 치하와
함께. 기사들은 감히 사양하지 못했고, 용병들은 사양할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급도 아니고
무려 중급포션이었다. 아직 포션이 남아있는 텐과, 아예 다치지를 않는 이오르를 제외하고는 용병
중에서도 로에늠의 신세를 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

포션을 마신 원정대는 벌레의 골수와 내장이 줄줄 흐르는 바닥에 드러누워 꿀 같은 휴식을 취했다. 전투를
치른 직후, 그 잠시의 순간만이 그들이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래 머물렀다간 내장냄새를 맡고 기어온
벌레들에게 곧바로 뒷덜미를 잡힌다. 마력을 끌어 쓸 대로 끌어 써 몇 번째일 지 모를 피를 토한 오린
역시 포션을 마시고 늘어졌다.

“우라질 놈의 벌레들. 죽여도 죽여도 어디서 또 기어 나오는지, 어떻게 해야 저놈들을 뿌리 뽑을 수


있을까?”
“세스코 불러요.”

텐이 횃대위에서 풀쩍 뛰어내리며 말했다. 오린이 돌아봤다.

“뭐? 세스코? 그게 누군데?”


“벌레 잡는………용병인가?”
“뭐야, 혹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건 아니겠지?”

텐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뭔가가 생각날 듯 말듯 했다. 요즘 들어 이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단어가 떠올랐는데 그게 대체 무엇인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일이.
처음 한두 번이야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지만 자꾸 기억에 혼동이 오니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텐은
던젼에서 살아나가게 되면 꼭 세스코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이 되자 원정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앉아서 식사할 여유도 없어 다들 텁텁한


육포나 빵을 우겨넣었다. 오린은 빵을 먹다 말고 퉤, 핏덩이를 뱉었다. 케간이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한밑천 벌어 결혼하겠다더니, 결혼이고 자시고 여기서 뼈 묻는 거 아니오?”


“이 개잡놈의 종자가, 말이 씨가 된다는데……그러는 네놈은 잔금 받으면 그걸로 뭐 할 생각이냐?”
“도끼부터 좋은 걸로 바꾸고, 나머진…글쎄, 나도 참한 계집 하나 얻어서 살림이나 차려볼까. 둘까지는
벅차고.”

어느새 두 사람의 대화를 귀담아 듣고 있던 던젼원정대가 끼어들었다. 기사들이야 잔금 받을 일이 없으니


얼른 마누라 궁둥이나 두들기거나 나흘쯤 휴가를 내어 늘어지게 잠이나 자겠다고 했고, 헤르모스는 땅값
비싼 수도에 집을 사겠다고 했다. 옌시스는 같은 무게의 금으로 거래되는 값비싼 검을 구하겠다고 했으며,
시세이는 용병을 때려치우고 장사를 시작할 건데 여관과 여행상점 중 고민이라고 털어놨다.

“궁수, 너는?”

케간이 웃으며 물었다. 텐은 돈을 받으면 뭘 할 것인지 생각해 봤다. 일분쯤 후엔 내장이 발라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에서 무슨 쓸모없는 생각인가 싶기도 했지만. 떠오르는 것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반은 집으로 보내고, 반은 글쎄요…….”


“뭣이, 집? 설마 목 빠지게 기다리는 마누라와 토깽이 같은 자식들이 줄줄이 있는 건 아니겠지?”

케간의 우스갯소리에 한바탕 웃음이 퍼졌다. 이렇게 이야기 하지만, 그들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발바닥이 천근만근처럼 느껴질 만큼 걸었는데도 던젼은 끝이 보일 생각을 안 했고, 만만찮은
몬스터와 가디언들이 치즈에 몰려든 개미떼마냥 바글거리는데 이제 로에늠의 포션도 똑 떨어졌다.
던젼원정대의 머리 위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워졌을 때 쯤.

그들의 앞에 다시 거대한 광장이 나타났다. 백 개쯤은 될 법한 계단이 반쯤 으스러진 채 남아있었고, 그


아래에는 은으로 마법진을 새긴 돌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원정대는 우뚝 멈춰 섰다. 이곳이 던젼의
끝임을, 그들이 찾아 헤멘 목적지임을. 저 문 뒤에 그들이 원하는 것이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환호를 지르지 못했다.

돌문은 높이만 십 미터는 족히 되었다. 손으로 백만 년쯤 밀어봐야 열릴 것 같지 않았다. 가까이 가


마법진을 해독해 주문을 외는 수밖에 없는데, 문 앞에는 문지기가 버티고 있었다. 피막에 감싸인
징그러운 날개, 바짝 선 검은 비늘. 소 한 마리는 그대로 삼킬 수 있는 두꺼운 목뼈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전설속의 드래곤과 가장 흡사한 몬스터, 고르곤이었다. 그것도 두 마리나. 그들이 깔고 앉은
바닥에는 백골이 수북하게 깔려있었다.

“……지금까지 헛짓했군.”
“던젼원정대는 개뿔, 국왕이나, 못해도 공작쯤은 나서야 저 문 한번 만져볼 수 있겠어.”
“죽었소.”

이오르가 말했다. 케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이제 다 죽었소. 여기가 우리 무덤인가 보오.”

이오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곤 긴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고르곤 말이오. 죽었소.”

침묵이 던젼원정대를 휩쓸었다. 그들은 엉거주춤 몇 걸음씩 다가가서는 두 마리의 고르곤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반쯤 펼친 날개로 몸을 감싸고, 고개는 푹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생명이 없는
석상처럼. 케간이 주먹만 한 돌덩이를 휙 던졌다. 그것은 고르곤 한 마리의 콧잔등을 치곤 백골 위를
데굴데굴 굴러갔다. 놈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텐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놈의 눈꺼풀 위에 꽂혔다.
여전히 조용했다. 텐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몬스터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위험한 놈을
앞에 두었는데도 전혀 흥분이 되질 않더라니.

“……….”
“……….”
“……죽었다!!”

던젼용병대는 미끄러지듯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미친놈들처럼 고함을 지르며. 날갯죽지를 젖혀보자


고르곤의 배는 갈기갈기 찢어져 내장이 깨끗하게 발라진 상태였다. 코마들에게 당한 것이 분명했다.
오린이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고르곤이, 고작 코마에게 잡아먹히다니……?”


“아마 굶어죽은 것이 먼저였을 거요. 이 던젼은 까마득한 시간동안 잠들어 있지 않았소. 흙에서 영양분을
섭취하는 코마들이나, 마력으로 움직이는 가디언과는 달리 이놈들은 보물을 노리는 인간들이 먹잇감이었을
테니, 굶주림 속에서 천천히 죽어갔겠지.”

영지마법사가 말했다. 용병들은 한 장 한 장이 너비 일 미터쯤은 되는 고르곤의 비늘을 만지며


희희낙락했다.

“비늘 죽이는구먼! 이것만 뜯어 팔아도 집 한 채는 거뜬하겠소!”


“집 한 채가 웬 말이랍니까, 두 채도 살겁니다.”
“거, 다들 통 작기는. 고르곤 시체가지고 행복해할 때에요, 지금?”

시세이가 석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던젼원정대는 홀린 듯이 석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황금, 은화, 보석,
어쩌면 그보다 더 좋은 것. 이 안에 잠들어있을 것들을 상상하느라 다들 얼굴근육에 힘이 풀려있었다.
기사들 사이에서 로에늠이 걸어 나왔다. 그는 감회가 남다른 표정으로 마법진을 더듬었다.

‘여기까지 왔군.’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기사들은 저마다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이 안의 보물들이야 다 영주의 차지가 될 것이지만, 그들로서는 의뢰를 마치고 받을 잔금으로도
인생을 재설계할 수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로에늠이 한발 물러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 보라.”

영지마법사가 나섰다. 그는 한 손에 마법지팡이를 꽉 쥐고, 빠른 속도로 마법진을 해독했다. 그의 입에서


주문이 읊어져 나올 때마다 은으로 그린 마법진이 푸르게 빛나며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마침내
녹아내린 은이 석문으로 흡수되었을 때. 거대한 석문은 안개비처럼 뿌연 돌가루를 흩날리며 움직였다.

틈이 벌어지자 찬란한 금빛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이런 일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텐마저도 입을 벌리게


만드는, 아름답고 장엄한 광채였다. 하얗게 점멸되었던 시야에 황금으로 쌓은 산이 어른거렸을 때.

텐은 익숙한 소리를 들었다. 쇠붙이가, 살을 찢고 들어가는 소리였다. 옆을 쳐다봤다. 이오르가 양


손으로 가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칼끝이 그의 손 한쪽을 뚫고 가슴에까지 틀어박혀있었다. 짧은
검신으로 핏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동그랗게 커졌던 이오르의 연갈색 동공이 상황을 파악하고 날카롭게 조여들었을 때, 이번엔 영지마법사의
지팡이로부터 쏘아진 빛이 그의 허리를 깊숙이 베고 지나갔다. 찰나 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오르는
내장이 밀려나오는 허리를 붙잡고 허물어졌다.

“……다, 당신 미쳤어?!”
“무슨 짓이오, 마법에라도 걸린 거요?!”

모두가 경악한 목소리로 소리쳤을 때, 텐은 화살부터 빼 들었다. 영지마법사가 지팡이를 쳐들고 주문을
읊는 순간 시위를 당겼다. 로에늠을 향해. 로에늠은 이오르의 피가 묻은 단검을 털고, 벼락같이 휘둘렀다.
제대로 검술을 배운 실력이었다. 활을 잡은 왼쪽 손목이 깊게 베이며 피가 터졌다.

“크읏!”

텐은 고통 속에서 활을 놓쳐버렸다. 그 대신 화살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에다 대고


휘둘렀다. 화살촉이 로에늠의 뺨을 깊게 훑고 지나갔을 때. 단검은 텐의 가슴을 쑤시고 폐를 건드렸다.

“……!”
“좋은 곳으로 가거라.”

로에늠이 볼우물이 패도록 깊게 웃었다. 텐은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숨이 턱 막혀왔다. 텐은 옆으로


기울어진 세상을 쳐다보았다. 던젼용병대 모두가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혈관속이 끓고 있는 것처럼 전신의 피부가 부글부글 부풀어 올랐다. 거미줄처럼 튀어나온 핏줄들은 시커먼
색이었고, 눈, 코, 입, 귀, 아랫도리의 오공으로 피를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로에늠과 마법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왜? 대체 왜? 왜, 이런 짓을……?

“저들의 목숨을 끊어주어라. 포션의 효능이 온 몸으로 퍼졌으니, 독 또한 온 몸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런
고통을 주지는 않겠다.”

로에늠의 명령에 마법사가 직접 한명, 한명 목을 잘랐다. 검은 피웅덩이 속에서 기사 한 명이 꿈틀거렸다.

“포……션을, 신…성한 것을, 쿨럭! 훼손하다니……! 신벌이 두렵지도 않소?!”


“두렵지 않다. 죽음도, 벌레에게 내장을 파 먹히는 고통도 두렵지 않다. 내가 정녕 두려운 것은……
아버지가 황금을 끌어안고 기꺼워하는 꼴을 내 두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로에늠은 황금의 산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는 나를 죽어 없어져도 될 말처럼 여기고 사지로 보냈는데, 내가 왜 이것을 그에게 바쳐야 한단


말이냐?”

그가 금화를 한 손 가득 퍼올린 순간, 텐 가렌의 정신이 끊어졌다.

----------------------

콰앙!
석원은 눈을 뜨자마자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변기를 붙잡고 토악질을 했다. 마치 질식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그는 황급히 숨을 들이켰다가 묽은 위액을 토해내길 반복했다. 적막한 욕실 안에 그의 거친
숨소리만 떠돌아다녔다.

휴지를 뜯어 입가를 닦고 변기 물을 내렸다. 그리고 세면대에 물을 받았다. 물이 차오르는 동안,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아직도 두꺼운 칼날이 박혀있는 것처럼 욱신욱신 쑤셨다. 찬물이
넘쳐흐르는 세면대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제야 좀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자 전등을 켜지 않아
검게 물든 수면에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 속에서 로에늠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이 놈 봐라……?”

석원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웃었다.

============================ 작품 후기 ============================
퀄리티가 일일연재의 속도를 못 따라가는군요.
이런 연비 나쁜 손가락 같으니...!

선추코 남겨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

00008 용병(Mercenary)
=========================================================================
             
오징어와 삼겹살을 썰어놓고, 마늘, 참기름, 고춧가루, 후춧가루 등을 아낌없이 쳐서 양념을 만들었다.
양념에 고기를 버무려 재우는 동안 대파와 양파도 꺼내 송송 썰었다. 상추와 깻잎은 깨끗하게 씻어서
쟁반에 올려놓았다. 30 분 쯤 후에 재워놓은 고기를 프라이팬에 붓고 센 불에 볶았다. 청양고추도 듬뿍
썰어 씨 한 톨까지 쏟아 넣고, 마늘도 잔뜩 넣었다. 매콤한 냄새가 부엌에 진동을 할 때쯤, 석원은 잘
익은 오삼불고기에 통깨를 뿌리고 식탁에 내 놓았다. 멍하니 바라보던 지원이 물었다.

“너, 악몽 꿨니?”
“왜?”
“너 기분 나쁠 때마다 요리하는 거 온 가족이 다 알거든. 그리고……너 지금 표정 장난 아냐.”
“그래, 얘. 혹시 회사에서 잘렸니?”
“여자 문제냐? 말 좀 해봐라.”

어머니와 아버지도 합세했다. 요크셔테리어 호섭이까지 멀찍이 떨어져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석원은
숟가락을 들어 얼굴을 비춰봤다. 듣고 보니 표정이 좀 안 좋은 것 같기도 했다. 하긴,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석원은 오늘 새벽의 일을 떠올렸다. 꿈속에서 거나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후, 그는 오랜만에
수면제를 먹었다. 늦잠을 좀 자게 되더라도 확인해봐야 했다. 텐 가렌이, 석원이 19 년 동안 함께했던 그
존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해서.

하지만 그는 아무런 꿈도 꾸지 못하고 깨어났다. 텐 가렌의 존재를 인식하고 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석원은 현기증이 났다.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전신이 차갑게
굳었다. 그는 자신을 잘 알았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텐 가렌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이석원은 결코 평범함을 가장한 채 살아가기 힘들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침부터 그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지만, 물론 가족에게 말 할 수는 없었다.

“별거 아니에요. 짜증이 좀 나서….”


“불쾌지수가 높아져서 그런가? 조깅이라도 하면서 땀 좀 빼는 게 어떠니? 너 달리는 거 좋아하잖아.”

어머니의 말에 입안이 미어터지도록 쌈을 우겨넣던 지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달리기 하니까 그거 생각난다, 엄마. 쟤 초등학교 때 말이야. 이왕 운동을 할 거면 달리기 같은 거 말고


태권도나 가라데 같은 거 배우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쟤가 뭐라 그랬는지 기억 나?”
“뭐라고 그랬더라?”
“……누나, 때리다가 사람 죽이면 어떡해?”

식탁이 웃음소리로 들썩거렸다. 지원이 석원의 등을 찰싹찰싹 때리며 말했다.

“내가 정말, 얼마나 웃었던지 잊어버리지도 않아, 그걸. 고사리 같은 손을 해 가지고, 응? 니가 그럴


때가 있었어, 시키야. 그땐 정말 귀여웠는데 이젠 징글징글해져가지고.”
“얘는, 석원이가 어때서? 훤칠하니 이정도면 미남까진 못 되도, 그거 뭐니. 훈, 훈남은 된다, 얘.”
“무슨 소리야, 엄마. 암만 아들이 좋아도 어디 가서 그런 말 절대 하지 마. 욕먹어!”
“너 오디션 보러 갔던 드라마 감독도 석원이랑 드라마 하고 싶다 그랬다면서!”
“엄마, 그건 캐릭터 자체가 절대 훈남 캐릭터가 아니거든요……아, 맞다.”

지원이 말을 하다 말고 벌떡 일어나더니 방에서 16 절지만한 크기의 노트 세 권을 들고 왔다. 권마다 색이


다른 노트였는데, 표지에는 -(가제)술래잡기-라는 글자가 인쇄돼 있었다. 감독이 보내주겠다고 했던
대본이었다. 밤사이 워낙 큰일이 일어났던지라 잊고 있었다. 지원이 대본을 식탁에 휙 던지며 말했다.
“너 잠들고 나서 동후가 들고 왔어. 직접 감독 만나서 받았다는데, 감독이 너랑 꼭 좀 만나보고 싶다
그랬대. 너만 생각 있음 동후가 같이 가주겠다고 전화하라더라. 혹시, 정말 만약에 계약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어머, 무슨 역할인데?!”
“박무경이라고, 연쇄살인범.”

어머니가 호들갑을 떨며 대본을 들춰봤다. 아버지도 헛기침을 하며 한권 가져갔다. 석원은 1 화라고 적힌


대본을 휘리릭 넘겨보았다. 갱지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글자를 훑어보던 그의 시선이, 한 페이지에서
멈추었다. 박무경이 일반인을 살해하는 씬이었다. 서른 두 살의 어린이집 교사를 매달아놓고, 면도날로
살가죽을 가르며 날이 한번 지나갈 때마다 숫자를 세게 했다. 벌거벗은 전신이 다진 고깃덩어리가 될
때까지. 그리고 그녀의 숨이 끊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센 숫자를 둥근 뺨에다 새겨 넣었다.

“……웬일이야, 미친놈. 너 이거 비위 상해서 하겠니?”

목소리 때문에 석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옆에서 대본을 보던 지원이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몇 장 읽다말고 얼굴이 하얘져선 대본을 덮어버렸다. 셋 모두 밥맛이 뚝 떨어진 표정들이었다.
반대로 석원은 없던 식욕이 돌았다. 그는 깻잎위에 고슬고슬하게 익힌 현미 잡곡밥과 죽은 짐승의 고기를
얹어 한입에 집어삼키며 말했다.

“동후 형한테 전화 좀 해줘. 오늘 점심 이후에 바로 오디션 보러 가겠다고.”


“뭐?! 너 일하러 안가?”
“일찍 길거리 인터뷰만 따면 돼. 전화 해.”

통보하듯이 말하고는 석원은 밥을 두 그릇이나 먹어치웠다. 그리고 대본 세권을 모조리 들고 출근했다.


오디션을 보기 전에 다 읽어볼 생각이었다. 석원은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했다. 만약 두 번 다시 텐
가렌이 될 수 없다면, 그는 서둘러 욕구를 풀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뭐가 되었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이 드라마는 그에게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것이다.

----------------------

“되게 재밌나봐?”

운전대를 잡은 동후가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석원은 마지막 장을 덮으며 웃었다. 재미있었다. 고작


세편이 진행되는 동안 박무경은 술래잡기 게임의 참가자 두 명과 일반인 두 명, 총 네 명을 살해했다.
살해법, 도구도 가지각색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석원이 꼭 실행해보고 싶었던 방법도 있었다. 석원이
말없이 웃고 있자 동후도 씩 웃었다.

“잘 됐으면 좋겠네. 감독 쪽에서 이렇게 안달 내는 경우도 드물거든. 어제 살짝 떠 봤는데, 동생이 잘


되면 지원누나도 어떻게 끼워 보낼 수 있을 거 같아. 비중 좀 적고 대사도 없는 걸로. 대사전달력이 너무
좋으셔가지고, 누나가.”
“……대본 보니까 대사 없는 역 많던데요, 비명만 지르면 되는 거.”
“그래, 그런 거. 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그런 역할을 맡아야 되는데. 그래야 단백질가이즈 팬들이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껴가지고, 욕 좀 덜 할 거 아냐. 걔들이 피치걸 공홈에 테러를 해놔 가지고 무서워서
스케쥴 업데이트도 못하겠다니까.”

둘이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이 차는 방송국 정문으로 들어섰다. 입구에서 플랜카드와 현수막 따위를 들고


우글거리던 학생들이 미친 듯이 차 뒤꽁무니를 쫓아왔다. 바깥에서야 안이 안 보이겠지만, 석원에게는
창문을 두들기며 오빠를 부르짖는 여고생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동후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 오늘 음악방송 하는 날인가보네. 괜찮아, 괜찮아. 내려.”

문을 열었다. 여고생들이 홍조가 오른 얼굴로 소리를 지르다가, 차에서 내리는 석원의 얼굴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팬보다는 연예인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여고생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처음 보는데…아저씨, 누구 매니저예요?”


“매니저 아닌데.”
“에이, 썅. 누가 장수오빠 차랬어!”

욕을 하며 실망하던 그들은 뒤이어 또 다른 차량이 들어오자 노도처럼 그쪽으로 몰려갔다. 동후가 석원의
팔을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놀랐어? 팬이라는 게 저래, 원래. 내가 쫓아다니는 연예인은 신이고 나머지는 다 꼴뚜기지. 그래도
하룻밤 잠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변하는 게 이 바닥인데, 혹시 또 알아? 몇 개월 후에는 쟤들이 동생
쫓아다닐지.”

동후가 낄낄 웃으며 앞장섰다. 석원은 쓰게 웃었다. 오늘 오디션에서 떨어지면 몇 달 후 그의 뒤를


쫓아다니는 게 경찰이 될 수도 있었다. 가스총을 앞세운 경찰보다야 사납긴 해도 귀염성 있는 팬들이 몇
배는 나았다.

오디션 날은 도떼기시장처럼 북적북적하던 스튜디오가 오늘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석원과 동후가


암막이 쳐진 무대 위에 올라갔을 때, 객석에는 제작진들과 긴 생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우승희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석원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꼬리 끝이 올라간 눈매를 살짝 휘며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감독님, 저 저분 본 적 있는데.”
“뭐? 승희씨가 언제?”
“오디션 날 그 여자, 이지원씨랑 같이 온 분이잖아요. …지금 저 놀리시는 거 아니죠?”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싸늘했다. 정형석 PD 가 손사래를 쳤다.

“그럼, 내가 바쁜 사람들 데려다놓고 장난치겠어? 아예 승희씨가 상대역 한번 해보지 그래? 석원씨,


석원씨 맞죠? 석원씨도 혼자 하면 뻘쭘하고, 분위기 잘 안 나올 것 같은데.”
“전 좋아요. 드라마 들어가면 저랑 제일 많이 부딪칠 역인데, 궁합도 중요하죠.”

우승희가 곧바로 일어났다. 그녀는 무대 한 가운데에 직접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단추를 몇 개나 끄른


캐주얼한 남방에 짧은 바지를 입은 탓에 서 있는 석원과 동후에게는 그녀의 깊은 쇄골라인과 허벅지가
훤히 보였다. 동후는 입을 헤벌리고 그것을 쳐다보다가, 우승희의 매니저가 눈치를 주고 나서야 부랴부랴
무대에서 내려갔다. 우승희가 석원을 올려보며 말했다.

“대본 봤어요? 박무경이 처음으로 가정주부 살해하는 씬 어떠세요? 둘이 하기엔 이게 좋지 싶은데요.”


“아…잘 됐네요, 저도 그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들었는데.”

석원이 윗입술을 살짝 핥으며 대답했다. 극중에서, 한 라운드가 시작될 때 술래잡기의 참가자들은 두


장의 제비를 뽑는다. 첫 번째 제비에는 자신이 이틀 안에 죽여야 하는 사냥감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제비에는 반대로 자신을 죽여야 하는 자가 사용할 수 있는 살인도구가 적혀있다. 첫
라운드에 박무경이 뽑은 사냥감은 가정주부 이희란이었고, 그녀가 뽑은 도구는 종이였다. 그녀는 누구든
자신을 종이로 죽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도했다. 그리고 박무경은 고작 다섯 시간 만에 그녀를
잡아 살해한다.

“감독님, 들으셨죠?”
“좋아, 어차피 이희란은 그 씬에서 대사 없고…석원씬 대사 외울 시간 필요하죠?”
“괜찮아요, 다 외웠습니다.”

감독이 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설마 대본을 다 외웠어요?”


“아뇨, 이 장면이 특히나……대사가 좋더라고요.”

석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극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살인이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은 장면이었다.


술래잡기 대본을 쓴 김효승 작가가 깔끔하게 세 번, 박수를 쳤다. 묘한 눈으로 석원을 훑어보던 우승희가
목에서 스카프를 풀었다. 밑에서 그녀의 매니저가 ‘누나, 그거 협찬!’하고 소리쳤지만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재갈대신 스카프를 입에 넣고 뒤통수에 꽉 매듭을 묶었다. FD 가 석원에게 스케치북 한 권을
쥐어주는 사이, 의자에는 이미 이희란이 앉아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카메라 돌릴 테니까 준비되면 시작하세요!”

정면에 한 대, 측면에 두 대 고정된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갔다. 박무경은 우승희를, 아니 이희란을


내려 봤다. 그녀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남편 몰래 도박에 빠졌다가, 사채 돈을 갚기 위해 술래잡기에
참여했다. 서른아홉 살의 가정주부라기엔 지나치게 어리고 예뻐 보였다. 그래서 박무경은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살인은 예술품을 조각하는 것과 같다. 재료가 좋으면 작품을 만드는 즐거움도 두 배다.

“늦어서 미안해요. 사실 더 일찍 데려올 수도 있었는데, 알다시피 난 종이로 당신을 죽여야 하잖아요. 그


방법에 대해서 고민을 하다보니까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고. 종이가 사람 죽이는 데 자주
사용되는 도구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당신도 이렇게 불안해하는 거겠지. 하지만 걱정 마요. 나는 잘 할
자신 없으면 시작도 안 하니까. 전문가거든.”

박무경은 즐거운 얼굴로 수다를 늘어놓았다. 살인을 할 때마다 말이 많아지는 것은 그의 버릇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친절한 설명이 사냥감을 더욱 더 커다란 공포로 몰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만 해도 이희란은 벌써부터 아름다운 눈동자에 자비와 동정을 호소하는 눈물을 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넘쳐 속눈썹에 매달릴 것 같은 물기가 박무경을 매우 기껍게 만들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스케치북에서 한 장을 뜯어냈다. 한 손으로는 이희란의 머리칼을 붙잡아 젖히고,


종이의 얇은 끄트머리로 그녀의 목덜미를 쓸었다. 이희란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덜덜 떨었다. 박무경이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요. 난 실수하는 거, 정말 싫어해요. 그러니까 버릇없이 움직여서 내 즐거운 기분을


방해하기라도 하면,”
“으읍…!”
“암퇘지 같은 네년 몸뚱이를 절단 내서 선거사무소로 보낼 거야. 그럼 재미없겠지, 응?”
“……!”

볼품없이 찌그러진 눈매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겁에 질려 길게 뺀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꿈틀거렸지만 그녀는 참고 있었다. 박무경의 심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착하네요. 그렇게 얌전히 있어요. 그럼 금방 끝날 테니까. 종이, 이거 생각보다 날카로운 거거든. 물론


칼처럼 찌르거나, 베어서 죽일 수는 없어요. 그럼 내가 이걸 어떻게 쓸까, 궁금하죠? 일단 당신 목에
가느다란 상처를 만들고 나서 그 틈에 끼워 톱질을 할 거예요. 한 번, 두 번, 세 번, 슬근슬근……
경동맥이 잘려서 종이가 젖어버리면 그 옆쪽 면으로, 또 옆면으로, 또 옆면으로…흰 종이가 붉은 종이가
될 즈음엔…다 끝나있겠지.”

박무경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 후 선명하게 남은 눈물자국을 닦아주고, 석원은 우승희의


머리카락을 놓았다. 연기를 다 끝냈는데도 그녀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불안한 시선으로 따라붙고 있었다.
그게 묘하게 재미있어서 석원은 그녀 앞에서 두어 번 이쪽으로 갔다, 저 쪽으로 갔다 하며 움직였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끝났는데요. 톱질하는 거까지 할까요?”


“아……끝났어요?”
“끝났어요.”
스카프를 끄집어내고 우승희가 긴장을 풀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립글로즈가
발라진 입술 안으로 붉은 혀가 엿보였다. 석원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불이 얼마나 붙었는지 아주
아궁이 속 장작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가 연기를 잘 한 탓에 더 심했다. 우승희가 묘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 그런 말 못하게 생겨가지고….”


“어떤 말이요, 아……암퇘지?”
“…네, 그런 말이요. 한 번 더 해줄 필욘 없었는데.”

우승희가 벌떡 일어났다. 몇 걸음을 걷기도 전에 높은 힐을 신은 발이 꼬였다. 한달음에 달려온 매니저가


그녀를 부축해 내려갔다. 석원은 입맛을 다시며 객석을 쳐다봤다. 감독과 작가, 제작진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내려가자 김작가가 호들갑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석원씨라고 했죠? 어쩜, 대사를 그렇게 귀에 쫙쫙 달라붙게 쳐요? 대사가 확 사네.”


“입에 쫙쫙 달라붙더라고요, 대사가.”

석원도 웃으며 대답했다. ‘특히나 암퇘지가’, 라는 생각은 덧붙이지 않았지만.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던 감독이 정신을 차리고는 그에게 꼬치꼬치 질문을 던졌다.

“석원씨, 소속사 있어요? 아니지 참, 배우 아니랬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뭐예요? 드라마 하게 되면


시간 뺄 수 있어요?”
“프리피딥니다. BBS 에서 시사물 제작하고 있는데, 몇 개월은 빠질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우리가 오늘 얘기해 보고 최대한 빨리 연락할게요. 연락은 윤동후 실장님한테 드리면 되나?”
“예예, 저한테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동후가 얼른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석원은 감독에게 테잎 인제스트를 하고나면 영상을 좀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서둘러 스튜디오를 나왔다. 옆에서 동후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수다를 늘어놓았지만, 그것을
귀담아 들을 상황이 아니었다. 박무경이 되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기분 좋은 정도가 너무
심해 피가 펄펄 끓고 난리가 났다. 마치 수업시간에 야한잡지를 읽고 안절부절못하는 중학생이 된 것처럼.
동후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와 함께 뒤에서 우승희가 걸어오고 있었다.

“촬영장에서 봬요.”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얼떨결에 석원도 인사를 했다. 그녀는 스카프 자락을 펄럭이며
멀어졌다.

“이야……우승희가 걸으면 거기가 런웨이라더니. 역시 배우들은 아우라가 달라.”

목을 쭉 빼고 감탄하는 동후를 내버려두고 석원은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농담이 아니라 이러다 코피라도
날 것 같았다. 일단 집에서 한 차례 몸을 달래고, 낮잠을 잘 생각이었다. 텐 가렌이 어떻게 되었는지
다시 알아봐야 했다. 석원은 진심으로 신에게 빌었다. 텐 가렌이 무사히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만든 이 세상에 미친 놈 하나 풀어놓게 될 테니까.

----------------------

석원은 어둠속에 푹 빠졌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아팠다. 몸은 지독히 무거웠다.
몸살이 왔거나 아니면 가위라도 눌린 것 같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석원은 신음을 흘렸다. 기억났다.
우승희를 상대로 박무경 역의 오디션을 보고, 집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텐 가렌의 기억은 없었다. 석원은 그가 죽었다는 것을, 그리고 꿈속의 유희 역시 끝났음을 인정해야
했다.

바닥에 가라앉은 기분으로 석원은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넋을 잃은 채 눈앞에 보이는 것을 쳐다봤다.


구불구불하게 펼쳐진 연녹색 머리카락, 그 위에 파묻힌 피에 젖은 창백한 얼굴. 현실속의 존재라고
하기엔, 너무 아름다웠다. 석원은 굳게 다물린 입술과 끝이 뾰족한 귀까지 눈으로 더듬어보다가 눈을
깜박였다. 낯이 익었다. 그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이석원이 아니라 텐 가렌으로써의 그가. 석원은
거칠게 말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었다.

“이오르……?”

몇 번이나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길고 흰 손가락이……꿈틀, 움직였다.

============================ 작품 후기 ============================
지난편 선추코 해주신 분들, 쿠폰 보내주신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

00009 용병(Mercenary)
=========================================================================
             
지금 그는 이석원이었지만 텐 가렌이기도 했다. 스스로를 자각한 채로 깨어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석원은 모든 의문들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일단 살아나는 게 급선무였다. 그는
차가운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그리고 곧,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가슴아래 단검의 손잡이가
박혀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어느 술집에선가 봤었던, 칼날을 쑤셔 넣은 맥주 통이 된 기분이었다. 현기증이 났지만 다행이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얼얼한 발바닥이나, 따끔따끔한 손끝이 더 거슬렸다. 아마도 쇼크 탓일
것이다. 하지만 단검을 뽑는 즉시 내장을 도려내는 고통과 마주할 것을 생각하니 쉽사리 손을 대기가
어려웠다. 마취약이 절실했다.

그는 허리춤을 뒤져 럼주를 담아놓은 주머니를 꺼냈다. 이곳에서 그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몽롱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술뿐이었다. 벨트에서 중급포션도 하나 꺼냈다. 포션을 먼저 마시고 럼주를 비웠다.
목이 화끈하게 타들어갔다. 석원은 윗입술을 한번 핥고, 곧바로 칼을 뽑았다.

“크으………!”

아팠다. 물론 아팠지만 걱정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그 상태로 한참을 누워있자 그럭저럭 기어 다닐 수


있을 만큼은 상태가 호전되었다. 그가 있는 장소는 석벽으로 감싸인 거대한 공간이었다. 원래는 금과
보석 따위를 산처럼 쌓아둔 창고였지만 지금은 시체들과 반시체들을 쌓아놓은 무덤 꼴이었다. 로에늠과
영지마법사가 죄다 긁어간 모양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반짝이는 거라곤 횃불뿐이었다.

석원은 기다가, 걷다가, 쉬기를 반복하며 창고를 한 바퀴 돌았다. 어슴푸레한 창고 가장자리에서 은으로
그린 마법진을 발견했다. 이 던젼에서만 세 번째로 보는 모양이었다. 위치로 보면 이동마법진이
확실해보였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마력을 가진 자들뿐이었다. 석원은
다시 기어서 이오르에게 다가갔다. 지금 이 안에서 그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머리와 몸통이 붙어있는
자였다. 가슴에 뚫린 구멍은 그렇다 치고 쩍 벌어진 옆구리에서 내장이 보이는데도 숨은 쉬니, 인간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석원은 마지막 남은 포션을 꺼냈다. 삼분의 이 정도가 남은 하급포션이었다. 그것을 들고 그는 잠시


고민했다. 반시체가 혼자 포션을 마실 수 있을 리는 없고, 보통 영화에서는 혀를 사용해 넣어주곤 했지만
실제로 잘 될지는 의문이었다. 삼키지 못한다면 목숨 값을 하나 버리는 셈이었으니 신중해야 했다. 결국
그는 이오르의 로브를 벗겼다.

핏물을 빨아들여 질퍽질퍽한 린넨 셔츠도 단추를 끌러 젖혔다.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더니, 성별은 여자가
맞았다. 길게 뻗은 쇄골 아래로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는 가슴이 보였다. 석원은 환부에 골고루 포션을
부었다. 그리고 그녀의 상처가 나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즈즈즉, 소리를 내며 환부가 거죽부터
아물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오히려 중급포션을 마신 그보다도 효과가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오르가 눈을 번쩍 떴다.

“정신이 들어요?”
“…….”

빼곡하게 박힌 연녹색 속눈썹 안으로 맑은 바닷물 색의 눈동자가 그를 쳐다보았다. 이오르는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둘러보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는데 여간 사나운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는 뻔했다.

“…그들은 어디로 갔소?”


“글쎄요. 일단 일어나 봐요, 마법진 같은 게 하나 있는데 당신이 해독하지 못하면 여기서 우리 둘이
말라죽어야 할 판이니까.”

이오르는 로브를 걸치고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 멀쩡하게 걸어 다녔다. 대단한
체력에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그녀는 마법진에 달라붙어 은으로 쓰인 문자를 더듬었다. 한참을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할 것 같소,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그럼 당신은 그걸 맡아요. 나는 좀 챙겨야 할 게 있으니까.”

석원은 이리 휘청, 저리 휘청하며 던젼원정대의 시체가 널린 곳에 도착했다. 하나같이 시커먼 핏줄과


핏자국에 뒤덮여 있어서 구분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는 마트에서 쇼핑을 하듯이 시체들을 뒤적였다.
헤르모스, 시세이, 케간……그 중에서 가장 꼴이 끔찍한 시세이와 머리카락이 길어 들기 편해 보이는
오린의 머리를 골랐다.

물론 기사의 목도 챙겨야했다. 가장 직위가 높은 칼라일의 머리는 반만 베어진 채 덜렁덜렁 붙어있었다.


석원은 돌멩이로 목뼈를 찧어 으스러뜨린 후 뜯어냈다. 내친김에 기사의 것을 하나 더 챙기자 어느새 네
개였다. 안이 꽉 차서 그런지 같은 크기의 수박만큼 무거웠다. 양 손에 두통씩 든 것을 이오르 옆에
내려놓자, 주문을 읊고 있던 그녀가 물었다.

“인간들 욕심이란 알 수가 없군. 그건 왜 가져가는 거요? 황금 대신이오?”


“…황금 대신 챙길 게 없어서 머리통을 챙길까, 하던 일이나 계속 해요.”

지금쯤 펠라도르 자작은 자식이 보물을 가져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석원은 그에게
‘던젼 안에 황금이 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네 아들이 들고 사라졌다’는 말을 전해야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요정족인 이오르의 증언, 로에늠이 그의 가슴에 꽃아 두고 간 단검, 그리고 이 머리들. 이 정도
증거라면 영주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훼르 ‧ 르오세르 ‧ 로웨므….”

이오르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주문을 읊었다. 돌 위에 그려진 은문자가 서서히 녹아들어갔다.


마법진의 원은 장정 한명 들어가면 알맞을 크기였다. 석원은 머리를 들고 이오르와 딱 붙어 섰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의 광채가 사방을 뒤덮었을 때. 그들은 돌먼지가 켜켜이 쌓인 창고 안이 아니라, 졸졸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선명한 숲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쾌청한 새벽공기, 이슬을 흠뻑 마신 바람,
나뭇잎 사이로 떠다니는 안개. 그리고 시체 한 구.

낯익은 얼굴이었다. 한 손에 수정이 깨진 지팡이를 들고 쓰러진 그는 로에늠과 함께 사라진


영지마법사였다. 목 아래부터 사타구니 바로 위까지 길게 칼집이 나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는 뻔했다.
로에늠 펠라도르 이에렉사.

“그놈 참…….”

껍질을 몇 겹이나 두른 양파 같은 놈이라고 생각하며, 석원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젊은 청년. 그리고 잿빛 로브에 피칠갑을 하고, 마법사 로브를 입은 남자를


부축하고 있는 동행자. 그들은 누가 봐도 평범한 일행은 아니었다. 둘, 또는 셋은 펠라도르 자작령에서
가장 번화한 레오넬의 성문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푸짐하게 아침을 먹고 막 야간조와 교대를 한
경비대원들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귀찮게 아침 댓바람부터 웬 여행자야? 수배자는 아니겠지?”


“뜨내기 용병들이겠지.”
“내가 보기엔 사냥꾼들일세. 둘 다 활을 매고 있잖나, 손에 들린 건 사냥감 같은데…….”

그들이 가까워질수록 경비대원들의 목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대신 그들의 눈이 커졌다. 일행 중 젊은


청년은 양손에 양배추처럼 크고 둥근 덩어리를 바리바리 들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사람 머리통이었다.
로브를 입은 동행자는 마법사를 부축하고 있는 게 아니라, 마법사 시체를 짐짝마냥 옆구리에 끼고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시체의 가랑이 아래로 구불구불한 것이 덜렁거렸다. 창자였다. 경비대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일곱여 경비대원이 부랴부랴 활을 찾아 아래로 겨누었을 때. 일행, 석원과 이오르는 성문 바로 아래에


도착했다. 잔뜩 긴장한 경비대원들이 앞 다투어 이름을 대라, 찾아온 목적도 대라, 들고 있는 건 뭐냐,
등의 질문을 쏟아 부었다. 석원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로한 얼굴로 말했다.

“용병이에요. 텐 가렌이고,”
“이오르요.”
“영주성과 용병지부에 심부름꾼 좀 보내주고, 그리고 신관 좀 불러줘요. 보시다시피 몸이 걸레짝이라.”

용병패를 보여주었지만 꼴이 이렇다 보니 출입허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석원과 이오르가 화살에 겨누어진
채 쉬고 있는 동안 말을 탄 경비대원이 동시에 세 방향으로 달려갔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펠라도르
용병지부장 코모드였다. 석원이 그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있을 때 경비대원이 신관을 모셔왔다.
연약한 신관은 신성력을 사용하기도 전에 용병과 기사들의 머리통을 발견하곤 뒤로 고꾸라졌다. 세 번째로
도착한 영주성의 기사는 상황을 전해 듣고 황급히 영주성으로 되돌아가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난장판이었다.

태양이 서쪽으로 서서히 미끄러질 때 쯤. 비로소 석원과 이오르는 용병지부 건물에 있는 객실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용병지부장, 영지의 가신, 영지의 기사외 다수에게 던젼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하고 난 후였다.

신관의 도움을 받아 몸 상태도 회복되었다. 오십대의 여신관이 몸을 한 번 어루만졌을 뿐인데 걸레를


기워놓은 것 같던 흉터들이 사라지고 내부도 편안해졌다. 마치 사우나에서 땀을 쫙 빼고 나서 찬 물로
샤워를 하고, 선풍기 바람이 부는 시원한 황토방에 드러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석원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 미뤄두었던 의문들을 되짚어볼 때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텐 가렌의
몸으로 깨어났다. 지난세월 그가 몹시도 바라오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시커먼 영혼이 이곳이 그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즐거워하긴 이르다. 먼저 알아봐야 할 것이 있었다.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지속적인 현상인지. 그것을 시험해보기 위해 석원은 시트를
뒤집어썼다.

“…….”

그러나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미 ‘이곳에선 괜찮다, 이곳은 드러내도 괜찮은 곳이야’라는


생각이 뇌리에 가득했다. 그가 스스로 채운, 그에게만 보이는 족쇄가 느슨해지고 있었다. 미칠 것 같은
갈증이 느껴졌다. 수분 따위로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이었다. 그의 머리는 황급히 먹잇감을 물색했다. 바로
옆방에는 이오르가 있다. 하지만 그녀는 턱도 없는 상대였다. 터미네이터도 그녀 앞에선 꼬리를 말아야
할 참이다.
다른 객실들도 주인이 있을 테지만, 용병지부의 객실은 은급 용병들이나 사용할 수 있는 곳이다. 누구
하나 쉽사리 목을 물어뜯을 수 있는 자들이 없다. 그렇다면 아래층은? 1 층의 술집에는 꽤 괜찮은
사냥감들이 있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해가 기울어진 후의 술집은 남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북적거린다. 그들 틈에서 죽여도 뒤탈이 없을 만 한 자를 찾아서, 객실로 끌어올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석원은 수많은 방법을 떠올렸다 삭제하기를 반복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텐? 텐 가렌!”
“……!”

석원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중년의 남자였다. 한쪽이 잘려나간 다리에


덥수룩한 수염, 거죽만 붙은 홀쭉한 얼굴. 며칠 전에 1 층에서 만나 술을 사 주었던 남자다. 그는 오늘도
역시 벌겋게 취해있었다.

“네가 이 방에 묵고 있단 얘길 주워들어서, 내가 저기, 부탁할 게 있어서 말이다. 혹시 주머니에 좀


여유가 있으면 술값을 몇 푼 빌릴 수 있을까 하고. 만약 없으면, 내가 네 이름으로 외상을 좀 달아놓으면
안될까?”
“……일단 들어오세요.”

석원은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남자는 목발을 짚으며 엉거주춤 방 안으로 들어섰다. 술에 진탕
취했음에도 용병의 습성이 남아있는지, 겉으로는 허술하게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경계를 하는 눈치였다.
석원은 배낭을 뒤적였다. 묵직한 돈주머니가 잡혔다. 그가 등을 보이고 있자 남자는 고개를 쭉 빼고 그의
움직임을 샅샅이 훔쳐보았다. 그에게 석원은 금화가 가득 담긴 주머니를 내밀었다. 고요한 객실 안에
짤깍짤깍 동전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마침 의뢰를 끝낸 다음이라 돈은 많아요. 하지만 다 금화뿐이라…….”


“……!”

남자는 문을 거칠게 닫고, 한 달음에 석원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에 이미 술기운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명백한 탐욕이었다. 방심하고 있는 착한 어린놈을 죽이고, 돈을 모조리 빼앗을
욕심.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석원은 금화주머니를 든 왼손이 아닌, 화살을 든 오른손을 휘둘렀다. 푹.
두꺼운 화살촉이 남자의 폐를 뚫고 들어갔다.

히익, 히익, 크게 벌어진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이는 시커멓게 썩은
이빨, 허옇게 백태가 낀 혓바닥.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석원은 고꾸라지는 남자를 지탱해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화살통에서 촉의 크기가 크고, 작은 새 화살을 꺼냈다. 그는 흥얼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돈을 노린 침입자에게 화살 세대쯤은 괜찮을 거예요. 두 대를 맞고도 물러서질 않았거든. 아픈 게


문제겠어, 어린놈한테서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만 뺏으면 술로 호수를 만들고 헤엄도 칠 수 있을 텐데.”
“히이…히이……!”

그는 남자가 잘 볼 수 있도록 위쪽에서 아래로 화살을 겨냥했다. 다음은 어디가 좋을까, 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고민이었다. 머리, 목, 가슴, 사타구니, 화살촉이 움직일 때마다 남자가 발작하듯이 떨었다.
눈물, 콧물, 침, 오줌까지. 피 섞인 액체들이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마치 몸 안의 수분이란 수분은
다 쏟아내고 죽을 작정인 것 같았다.

“죽자고 덤벼드니 나라고 별 수 있나. 죽지 않으려면 죽이는 수밖에.”


“사…, 살려…….”

핑, 시위를 떠난 화살이 아랫배를 뚫고 들어갔다. 쿨럭, 남자가 피거품을 물었다. 떨림은 거의 멈춰


있었다. 곧 죽을 것이다. 석원은 곧바로 다음 화살을 겨냥했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작별인사를 던졌다.

“너무 억울해하진 마요. 저승 갈 뱃삯으로 금화를 넣어줄 테니까……당신은 내 첫 경험이거든.”


화살은 깔끔하게, 남자의 목을 꿰뚫었다. 남자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남은 것은 시뻘건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사람을 죽였다.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는 타고나기를 이렇게
타고난 것이다. 갈증은 사그라지고 포만감이 그를 만족스럽게 했다. 석원은 확신했다. 섹스도, 도박도,
마약도, 그 무엇도 지금 이 기분을 대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직, 살인뿐이었다.

그는 찬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지부장에게 작은 사건이 있었음을 설명했다. 남자는


가족도 없고, 돈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빚뿐이었다. 그는 빚을 갚고 술을 마시기 위해 다른 용병을
습격한 것이다. 이 바닥에서, 그건 곧장 목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짓이었다. 석원의 이야기가 곧
진실이 되었다.

곧 객실에서 시체가 치워지고, 아직 용병이 되지 못한 어린애가 피를 닦으러 왔다. 석원은 어린애에게


삼십분쯤 후에 깨워달라고 부탁하곤 침대에 누웠다. 매우 편안하고 안락한 기분이었다. 어머니의 젖을
배불리 먹고 흔들침대에 누운 아기가 된 것처럼.

그리고 삼십 분 후, 그는 다른 세상을 거쳐 이곳에서 다시 눈을 떴다. 어린애가 그를 깨웠다. 어린애를


내보내고, 석원은 미친놈처럼 웃었다. 이젠 확실했다. 한 번의 죽음으로 이석원이자 텐 가렌이었던
존재는 사라졌다. 이제 이 몸은 오롯이 그의 것이었다. 석원은 베개 대신 깍지를 낀 팔을 베고, 즐거운
고민에 몰두했다. 이곳에서 그가 명심해야 할 것은 단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죽어서는 안 된다. 또 한 번 죽음에 노출된다면 그때 사라지는 것은 이석원, 바로 그가 될


것이다.

두 번째, 뒤탈이 없는 사냥감을 고른다. 식사 중에 나이프로 점원의 손목을 베고 싶을 때나, 사인을


하다가 깃펜으로 급사의 목을 찌르고 싶을 때는 인내해야 한다. 인내. 지긋지긋한 단어였지만 이곳
카르투옴 대륙에도 법은 존재한다. 일반인을 살해하면 자경단이나 경비대가 나선다. 자칫하면 수배범
명단에 올라 쫓기는 삶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 합법적으로도 충분히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곳에서 일을
그렇게 망쳐놓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규칙이 흔들린다면 그가 손에 넣은 새로운 인생은 재미없게 꼬일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의 규칙이 잘


지켜진다면, 그는 그토록 바래오던 것……평온을 얻게 될 것이다.

============================ 작품 후기 ============================
조회수, 추천, 쿠폰, 코멘트! 모두 갑자기 늘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재미있게 봐 주시는 독자님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

+쥬논 작가님의 샤피로 이야기가 많이 나오던데, 주인공이 현실과 환상세계 양쪽을 오가는 설정이
같더군요. 혹시 그 외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지, 샤피로 보신 분 계시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럼 책을
구해서 읽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

00010 용병(Mercenary)
=========================================================================
             
태풍이 오려는지, 비바람이 심란하게 불었다. 늦은 밤에도 등을 밝히고 있던 장사꾼들이 하나둘 짐을
꾸려 기어들어갔다. 텅 빈 거리를 기마대의 말발굽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들은 우의도 없이 망토만 걸친
채 굵은 빗방울을 온 몸으로 맞고 있었다. 펠라도르 자작의 병사들이었다. 석원, 아니 텐 가렌은 창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영주는 아직도 세간 살림을 깨부수고 있다더군. 하룻밤 가족과 이별을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병사들을
내보내다니……분노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닌 모양이야. 벌써 용병지부에도 로에늠 이에렉사의 추적 의뢰가
접수되었다네. 현상금도 걸었다더군. 후계자 자리를 탐해 아버지인 영주를 시해하려다 실패하고, 가신인
마법사와 기사들을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명목으로 말이네."

지부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텐과,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는 이오르를 번갈아보며 씁쓸히 말했다.
"다행이 증거가 명백하고, 신관이 그것을 검증해주었지만 영주의 심기가 안 좋으니 언제 자네들에게 화가
미칠지 모르네. 한동안은 레오넬을 떠나있는 게 좋겠어.”
"곧 출발할거요."

이오르가 말했다. 그녀는 이미 깨끗하게 씻은 몸에 새 로브를 걸치고, 배낭과 활을 메고 있었다. 텐 역시


이 심심한 마을에 오래 머물 생각은 아니었다. 지부장은 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객실을 나갔다.
이오르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있었다.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텐은 창가에 기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잿빛 로브 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풍성한 머리카락, 그


틈새로 살짝 보였다 사라지는 창백하고 긴 목덜미. 세상에 뱀파이어가 존재한다면 저 목을 보는 순간
깨물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으리라. 그만큼 아름다웠다. 절로 한숨이 터지도록, 게걸스러운 욕구가 다시
입맛을 다실만큼. 아름다웠다.

어쩌면 바라만 봐야 하기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텐은 탁자 옆에 세워놓은 활시위를 퉁,


당겨보았다. 날고 기어도 지금 당장은 무리다. 그러니 참아보자고, 그는 생각했다. 어차피 참는 거야
익숙한 일이다. 가장 특별한 것을 나중으로 미뤄두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것도 꽤 재미난 길이 될
것이다. 당분간 그녀에게 텐 가렌은 인간족 용병궁사일 뿐이다. 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활을
챙겨들었을 때, 이오르가 일어났다.

"요정족은 은혜를 중히 여기오. 그대가 내 목숨을 한 번 살렸으니, 훗날 그대가 위험할 때는 내가


도와주리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달라보였다. 던젼에서의 그녀가 세렝게티 초원의 굶주린 암사자 같았다면, 지금은
배부른 암사자 같았다. 미세한 차이이긴 했지만 더 험악해지는 것보다야 보기 좋았다. 텐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말로만? 증거로 입 한번 맞춰주지 그래요."


"입을? 무엇으로, 화살로 말이오?"
"……."

텐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자, 이오르는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가만히 다물린, 복숭앗빛
입술에 시선이 묶인 순간. 이오르의 얇은 눈매가 살짝 감겼다.

"농담이오."

낮은 속삭임과 함께 입술이 닿았다. 그것은 찰나간의 부드러움만 남기고 떨어졌다. 이오르는 그대로
객실을 나가버렸다. 텐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핥았다. 그가 알기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죽어가는 인간의 눈이고, 가장 즐거운 것은 살인이었다. 하지만 저런 존재를 침대 위에서
먹어치운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그는 불붙은 아랫배를
달랬다.

광산에서 돌아온 용병들 때문에 1 층은 도무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텐은 한참 걸려서야 의뢰판 앞에


다다랐다. 의뢰주가 따로 지정하는 용병이 있거나, 액수가 매우 큰 건의 의뢰가 아니라면 보통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의뢰판에 올려놓기 마련이었다. 왼쪽 칸에는 의뢰의 내용이, 오른쪽 칸에는 보수가 적혀있었다.
쭉 훑어보며 텐은 다음 목적지를 결정했다. 미하라 백작령. 마법 수정구가 발견되는 산맥을 끼고 있어,
몬스터와 인간을 상대로 한 분쟁이 끊이질 않는 영지였다. 때문에 미하라 백작령은 주기적으로 은급
용병을 모집했다.

"미하라로 가는 용병, 어디서 뽑아요?"

텐이 묻자 접수처 직원이 양피지를 잘라 뭔가를 적어주었다. 검은 벽돌 거리의 '에드레몽', 적당한 값의


창부와 싼값의 술을 함께 파는 술집이었다. 그것을 받자마자 텐은 술 냄새와 연초 냄새, 고린내 나는 땀
냄새로 숨쉬기도 힘든 건물을 빠져나왔다. 차라리 비를 맞는 게 나았다.

촉이 녹슬지 않도록 화살통에 천을 덮어씌우고, 망토자락을 여몄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빗줄기를 뚫고


걸었다. 거센 빗방울이 그의 머리통을 두들겼다. 오늘 내일 쉽사리 그칠 비는 아니었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망토에 기름을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며 텐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막판엔 거의 뛰다시피 했음에도 에드레몽에 도착했을 때 그는 시궁창에서 막 기어 나온 생쥐 꼴이었다.


냉큼 달려온 소년에게 망토와 동전을 건네주자, 소년은 망토를 탁탁 털어 벽난로 근처에 널었다. 텐은
내부를 둘러보았다. 병사, 농사꾼, 사냥꾼, 광부, 다양한 종류의 인간들이 우글거렸다. 돈푼 좀 있는
자는 창부 젖가슴을 주물럭거리며 마셨고, 돈 없는 자는 그녀들의 궁둥이를 안주삼아 마셨다. 돈 많은
자들이야 이미 위층으로 올라가 황홀경에 빠져있을 것이다.

소년의 안내로 텐은 미하라로 가는 용병일행을 찾아갔다. 총 열 두 명이었다. 그 중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한 자가 미하라를 대표해서 온 남자, 모드레스일 것이다. 그는 근육이 우락부락한 중년인이었는데,
양쪽 허벅지에 창부들을 올려놓고 그녀들이 들어주는 술잔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그 역시 용병인 게
틀림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텐이 똑똑, 테이블을 두드렸다.

"용병지부에서 의뢰판보고 왔는데요."


"어린 앤 안 받아!"

모드레스는 맥주를 질질 흘리며 말했다. 텐이 겉옷 속주머니에서 용병패를 꺼내 던졌다. 그는 그것을


힐긋 보더니 그제야 텐을 바라봤다. 탐탐치 않은 표정이었다. 모드레스는 텐의 용병패를 집어, 창부의
화려한 드레스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여긴가? 더 안쪽인가? 네년 자지러지는 데가 어디야?'그가
중얼거릴 때마다 창부가 웃음 섞인 비명을 질렀다. 한참 후에 창부의 치마 속에서 손을 꺼낸 그가
번들번들해진 용병패를 다시 집어던졌다.

"모가지만 꼿꼿한 애송이도 마찬가지야. 내가 아니었으면 피에 젖었을 거, 더 좋은 거에 적셔줬으니


그거나 핥아먹어. "
"실력을 볼 거면 얼른 합시다, 졸리니까."

텐이 웃으며 말했다. 모드레스는 그제야 탐탁잖은 표정을 거두었다.

"활을 쓰는 모양인데, 어이! 누가 저 끝에다 동전이라도 하나 올려놔 봐! 어린친구 실력 좀 보게!"

한순간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곧바로 두 배쯤 더 떠들썩해졌다. 용병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것처럼 우르르 일어나더니, 엄지손톱보다 조금 큰 클리에 공국 동화를 벽난로 위에 올려놓았다.
맞은편 벽과의 거리는 15 미터쯤 되었다. '따분하긴.', 텐은 윗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모드레스의 허벅지에 앉아있는 금발머리 창부를 일으켰다.

"가서 저것 좀 들고 있어."
"뭐야?! 이런 미친…,"
"시키는 대로 하면, 이건 네 거야."

텐은 테이블에 모리울 은화 두 개를 내려놓았다. 거무튀튀한 나무 위에 은빛 광채가 반짝이는 순간,


그녀는 끌어안고 있던 남자의 목을 내팽개치고 일어났다.

"자신 있으니까 그러는 거죠? 응? 내 손가락 잘리면 당신이 책임져야 해!"

창부는 살살 눈웃음을 치고 벽난로 옆에 붙어 섰다. 정면으로 서서 팔을 옆으로 쭉 뻗은 채, 엄지와


검지로 동화만 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텐은 활과 화살을 챙겨 맞은편 벽에 붙었다. 어느새 술집 안의
시선들이 온통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한쪽에선 손님과 창녀들이 내기 돈을 거느라 바빴다.

텐은 화살을 걸고, 시위가 팽팽해질 때까지 당겼다. 사실 동전보다는 다른 게 먼저 눈에 들어왔다.


겁먹은 커다란 눈, 꽉 악문 작은 입술, 숨을 참느라 움푹 들어간 쇄골……그러나 아쉽게도 이 화살의
먹잇감은 동전이었다. 장애물도 없겠다, 바로 감이 왔다. 지금이다. 지금 놓으면 빗나갈 리가 없다.
그렇게 확신한 순간 텐은 시위를 놓았다. 침묵을 뚫고 날아간 화살이 동전을 꿰뚫고, 벽에 붙은
나무액자에 틀어박혔다.

"젠장! 어린년 피보고 술 맛 좀 살려볼까 했더니만, 글렀구먼."


"실력 좋은데, 덕분에 벌었으니 내 맥주 한잔 사겠소!"
"니미럴, 이깟 내기에서도 운이 안 따라주니……죽을 때가 됐구만, 됐어!"

술집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텐은 누군가 떠미는 술잔을 받아들고 다시 용병들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이번엔 의자를 빼고 앉았다. 금발머리 창녀가 그의 허벅지 위에 냉큼 올라탔다. 가늘고 흰 팔이 어깨를
감싸고, 술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입술이 그의 목덜미에 문질러졌다. 모드레스는 코웃음을 치며 창부에게
거위 뼈다귀를 집어던졌다.

"망할 년, 날 걷어차고 바람 불면 날아갈 어린놈한테 붙어?"


"당신도 은화를 내밀어 봐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쫓아갈 테니까!"

왁자지껄한 웃음이 커졌다. 모드레스는 낄낄거리고 웃으며 텐의 맥주잔에 제 잔을 부딪쳤다.

"돈이 있으면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둬. 내일 새벽에 출발한다."

수면, 맥주, 섹스. 물론 마지막 것이 가장 즐거웠다. 텐은 금발머리 창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일어났다.
코르셋으로 조인 잘록한 허리는 한 팔에 들어오고도 한참 공간이 남았다. 텐은 그녀를 끌고 계단을
올라갔다. 검은색 곱슬머리를 풀어헤친 창부가 그의 왼쪽 품에 달라붙었다. 여우처럼 가느다란 눈매와
양쪽 끝이 살짝 올라간 입술이 매력적이었다.

텐은 양쪽 손아귀에 넘치도록 들어오는 가슴을 주물렀다. 가느다란 육체를 욕심껏 다루다보면 목을


조르거나, 꺾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겠지만……일을 치른 지 얼마 안 됐으니 인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셋은 한 몸처럼 엉켜 어둑한 방안으로 들어섰다. 몰아치는 비바람에 나무창이 삐걱삐걱 근육통을 호소했다.
검은머리 창부가 두꺼운 커튼을 치고, 밑동만 남은 양초에 불을 붙였다. 판자바닥을 덮은 싸구려 카펫.
거친 시트를 몇 겹 쌓아놨을 뿐인 나무침대. 쿰쿰한 곰팡이 냄새…하룻밤 색사를 치르기 위해 만든 방은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추적거리는 빗소리에 가쁜 숨소리가 섞여들었다. 드레스와 풍성한 속치마가 꽃 이파리 지듯 떨어졌다.


가혹할 만큼 꽉 졸라놓은 코르셋이 보기 좋았다. 금발머리 창부가 교태를 부리며 누웠다. 납작한 배를 꽉
누르자 불편한 신음이 터졌다. 텐은 매끈하게 살집이 오른 허벅지를 잡아 올렸다. 축축하고, 뜨끈뜨끈한
곳에 쑤셔 넣자 창부가 비명을 질렀다.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시트 위에서 요란하게
흔들렸다. 창부가 배를 누른 손을 떼어내려 바동거렸다. 아프다고 애원하는 목소리가 처량 맞았다. '쉿'
텐은 창부의 귓가에 속삭였다.

금발머리 창부의 장밋빛 뺨이 눈물로 얼룩지자 텐은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좁은 어깨,


날개 뼈가 도드라진 등, 잘록한 허리……엎드린 상체가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흐느적거렸다. 흰 목덜미를
짓눌렀다. 창부가 이마를 베갯잇에 문질렀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애달픈 신음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밤은 길었고, 여자는 연약했다. 침대위에 널브러진 창부들을 내버려두고 텐은 창문을 반쯤 열었다.


후드득 밀려들어온 빗줄기와 젖은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비척비척 일어난 금발머리 창부가 물수건으로
그의 등을 닦았다. 어깨, 가슴, 복부, 다리…카펫위에 무릎을 꿇고 그녀는 그의 손가락을 핥았다. 텐은
그녀의 통통한 뺨과, 얇은 턱을 쥐고 문질렀다. 그녀는 하는 내내 훌쩍거린 탓에 흠뻑 젖은 눈으로
웃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나, 사람 하나만 죽여줘요."


"누구?"
"미하라에 있어요. 크란겐 브라르타. 애꾸눈에, 입술위로 긴 상처가 있는 용병이에요."

그가 대답이 없자 창부는 계속 말했다.

"이 년 전에……클로페아니아를 반란군이 휩쓸고 갔을 때 그 개만도 못한 종자가 내 남편이랑 아들을


죽였어요. 그리고 군이 이동하는 곳마다 나를 질질 끌고 다니다가……귀찮아지니 여기다 팔았어요."

그녀는 커다랗고 순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화장이 지워진 콧잔등에는 흐리게 주근깨가 남아있었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아직 어린 여자였다. 텐은 얇은 금발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그래서, 죽이고 나면 대가는?"


"언제든지, 당신이 원할 때마다……당신 거예요. 죽이든지, 살리든지, 당신 마음대로……."
"몇 명한테나 그런 말을 했어?"
"열한 명이요. 하지만 아직 아무도……당신은 활을 잘 쏘니까, 혹시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텐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창턱에 앉혔다. 우르르르, 천둥이 몰아치며 화살 같은 빗줄기가 그녀의 등과


머리카락을 적셨다. 허벅지를 붙잡아 벌리며 그는 크란겐 브라르타라는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그가
괜찮은 먹잇감이라면 망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창부는 제법 미인이었고, 이런 재료라면 죽이고 나서
머리카락이나, 눈알이나, 살가죽 따위의 전리품을 챙겨놓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텐은 창부의 비명을
즐기며 웃었다. 창 밖에선 차가운 폭풍우가 몰아쳤지만, 그의 밤은 매우 안락했다.

----------------------

머그컵에 막 내린 커피를 반쯤 따랐다. 뜨거운 김이 펄펄 나는 커피를 식히는 동안 토스터기에 식빵 두


개를 꽂았다. 시간을 입력하고 전원버튼을 눌렀을 때, 식탁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다.
윤동후였다.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내며 석원은 메시지 버튼을 눌렀다. '아침 댓바람부터 감독에게 전화가
왔고, 상의결과 박무경 역에 그가 낙점됐으니 일어나면 전화 달라'는 내용이었다. 석원은 핸드폰을 다시
식탁에 던져놓았다. 전화는 아침식사 후에 할 생각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그 일이 매우 절실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는 게걸스러운 본능이 만족할 만한


매력적인 식당을 찾아냈다. 그것에 비하면 살인자를 연기하는 것은 디저트나, 술 한잔정도의
유흥거리였다. 물론 그것도 놓칠 수는 없다. 먹고 마실 것이 넘치면 골라먹는 재미가 있을 것이고, 그는
언제든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했으니까.

토스터기가 띵, 신호음을 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식빵 두 쪽을 꺼내고 노른자가 터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계란 프라이를 식빵 사이에 구겨 넣었다. 소파에 파묻히듯이 앉아 아침뉴스를 틀었다. 식욕을
돋우는 데는 사건 사고 뉴스만 한 게 없었다. 마침 요 근래 부천을 발칵 뒤집어놓은 부녀자 토막살인
사건의 특집 기사가 나오고 있었다. 석원은 한 입 가득 토스트를 베어 물었다. 겉은 바삭하고, 물기를
흡수한 안쪽은 짭짤하고 부드러웠다.

"내건 없어?"

지원이 잠옷 바람으로 다가왔다. 석원은 다섯 입 만에 토스트를 남김없이 해치웠다. 그리고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후후 불며 말했다.

"없어. 아, 그리고 내가 사 놓은 담배. 누나가 다 피워. 담배 끊을 거야."


"뭐? 갑자기 왜?"
"슬슬 몸 챙겨야지. 안 죽고 오래 살려면."
"이 시키야, 넌 건강해지고 난 일찍 죽으라고?"

지원이 하,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너 오늘은…기분 좋은가보다?"
"……최고야."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인생이 이 만큼만 살만하다면야 담배도, 술도, 카페인도 끊고 오래오래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만큼 모든 일이 순탄하게 풀리고 있었다. 마치 샐리의 법칙처럼.

때문에 마음 한편에선 불안이 피어올랐다. 뭔가 예상치도 못했던 것이 근처를 도사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뒷덜미를 물어뜯을 준비를 하며. 지나친 걱정이겠지만 어느 정도의 긴장은 필요했다. 조심, 또 조심.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널 것……실낱같은 평온을 손에 쥐었으니, 이제는 지킬 차례였다.

============================ 작품 후기 ============================
선추코해주신 분들, 쿠폰 보내주신 독자님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

00011 용병(Mercenary)
=========================================================================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는 육상부였다. 대회에서 상도 제법 받았다. 그의 부모님은 공부에는 별다른
재능이 없는 아들이 올림픽 메달을 받아올 지도 모른다는 꿈에 부풀었고, 신발장에는 육상선수용
스파이크가 몇 켤레나 쌓였다.

그러나 16 살의 이석원은, 그의 실력이 1 등을 놓치지 않을 만큼 뛰어나진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달리는 것은 그의 어두운 에너지를 소모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1 등이 아니라면
소용없었다. 부모님과 코치는 몇 번이나 그를 설득하려 애썼다. 그는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둘러댔다.

'내 앞에서 누군가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으면, 그 등을 찌르고 싶어져서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때부터 그가 뛰는 장소는 트랙이 아닌 공원이나, 조깅코스가 되었다.


석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갑자기 중학교 어린 시절을 떠올린 것은……이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루하고, 좀이 쑤시고, 약냄새로 머리까지 지끈거리는 이 상황을.

"깔끔하게 잘라줘요, 원장님. 뭐랄까……냉장고에 시체를 숨겨놨을 것 같은 옆집오빠 스타일로."


"냉장고? 시체 숨기려면 김치냉장고는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토막 내서 칸칸마다 나눠담으면 되잖아요, 사람 그거 몇 근이나 나간다고."

그는 오전 10 시쯤 헤어살롱에 도착했다. 그리고 수의처럼 흰 가운에 새빨간 커트보를 걸치고 의자에


앉혀졌다. 짙은 갈색이던 그의 머리카락을 새까맣게 물들이는 데 한 시간 반, 거기다가 영양을
줘야한다며 또 한 시간 반. 세 시간을 앉아있었던 걸로 모자라 이제는 싹둑싹둑 잘라내기까지 하고 있었다.

당사자인 그는 물론이고 같이 온 동후도 지쳐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지원만이 네 시간째 원장과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대단한 체력이었다. 그녀가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뜨고 나서야 비로소 고요가 찾아왔다.

석원은 조금이라도 그의 흥미를 끌 만 한 것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대로라면 따분함을 참다 못 해


미용가위에 귓바퀴를 들이대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거울탁자에 올려놓은 얼음을 가득채운 오렌지주스,
핸드폰, 이어폰, 마리끌레르 7 월호. 그리고 바퀴달린 서랍에 놓인 빗, 날카로운 미용가위세트…….
은색으로 빛나는 날렵한 가위들은 메스와 비슷했다.

"꽤……날카롭네요, 가위."
"그럼요, 얼마나 예리한데요. 잘못 쓰면 흉기죠. 유혈사태 일으키는 미용사들도 가끔 있어요."

석원은 가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흥미로운 도구를 좋아했다. 사용법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한창 음침한 상상에 빠져있을 때, 입구가 떠들썩해졌다. 어린 소녀 다섯 명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바비인형처럼 늘씬한 다리와 오밀조밀 자리 잡은 이목구비. 일반인이 아닌 건
확실했다. 원장이 그의 앞머리를 자르며 속삭였다.

"쵸코렐라예요, 올봄에 데뷔한. 예쁘죠?"


"……어리네요."
"멤버가 죄다 고등학생이에요, 평균연령 18 세. 올해 쏟아져 나온 걸그룹들 중에 쟤들이 제일 떴어요."

보고 있자니 목이 말라서, 석원은 얼음이 반쯤 녹아 밍밍한 오렌지주스를 들이켰다. 다섯 명 다 머리가


길었다. 문득 어젯밤의 창녀들이 떠올랐다. 긴 머리의 장점은 잡아당기기 수월하다는 것이다. 침대
위에서든, 어디서든. 물론 소녀들의 장점이 머리카락뿐인 건 아니었다. 잘 먹고 자란 어린아이답게 살결
고운 뺨이나, 자신만만한 표정. 가느다란 몸매도 보는 맛이 있었다. 물론 보기만 하는 것보다는 만지는
것이 즐겁고, 만지기만 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도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안 될 말이다. 이곳은
참아야 하는 곳이었으니까.

석원이 아쉽게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다섯 명 중 한명과 눈이 마주쳤다. 차분한 분위기의 소녀였다.


하나같이 화려한 얼굴들 틈에서 홀로 이질적인. 석원이 웃자 그녀는 오른쪽 동료를 한번, 왼쪽 동료를
한번을 돌아보더니 그제야 석원이 보고 있는 것이 자신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순진한 아가씨였다. 석원의 시선을 눈치 챈 원장이 웃으며 말했다.

"송재인 보고 있어요? 취향 특이하시네, 밋밋해서 제일 존재감 없는 멤번데."


"그래요?"
"어머, 모르시는구나? 다른 멤버들한테 따돌림 당한다는 소문도 많았어요. ……물론 헛소문이겠지만."

원장이 덧붙였을 때, 지원이 돌아왔다. 쵸코렐라를 발견한 그녀의 반응은 '이런, 씨발!'이었다. 마침
반대편에서도 지원을 발견한 모양인지, 쵸코렐라가 멋진 각선미를 앞세우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랜만에 봬요, 요즘 방송국에 통 안보이셔서……."


"어머, 안녕. 내가 요즘 드라마 들어갈 준비하느라 바빠서……연기레슨 받고 있거든."

지원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레슨이요? 레슨 안 받아도 선배님 연기 잘 하시잖아요."


"맞아, 저번 작품 때도 호평 대단했잖아요. 저도 이번에 BBS 에서 하는 미니시리즈 들어가는데 연기 막힐
때 연락드려도 돼요? 좀 도와주세요, 선배님. 요즘 네티즌들 아이돌이 연기한다고 하면 쌍심지를 켜고
보잖아요. 연기를 발로 하더라, HD 화면으로 보니까 피부가 어떻더라……게다가 전 처음부터 주인공이라,
좀 겁나더라구요."
"참, 그럼 피치걸은 다음 앨범 언제 나오는 거예요?"

싱글싱글 웃으며, 지원이 대답했다.

"우린 늦어도 올 하반기쯤으로 보고 있어. 대표님이 완벽주의자시라, 앨범에 들어간 곡이 하나만 마음에
안 들어도 다시, 다시, 다시……도무지 끝날 생각을 안 하네. 너흰 벌써 후속곡 준비하나봐?"
"네, 다음 달에요. 다들 걱정이에요. 저희가 데뷔곡으로 음악차트 3 위까지 올라갔잖아요. 대표님이
내친김에 이번에 1 위 한번 해보자는데, 너무 부담되더라고요. 팬들도 기대를 너무 많이 해서……."

새끼 표범 네 마리와, 늙은 치타가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표범들 뒤꽁무니에는 언니들 텃세에


젖도 못 빨아먹은 덜자란 미숙아도 한 마리. 흡사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한 장면 같았다. 동후가 얼른 이
자리를 뜨자고 눈치를 보냈다. 석원은 원장이 가위를 치우기 무섭게 커트보와 가운을 벗고 일어났다.
지원이 이만큼 참은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이대로 십분만 지난다면 내일 포털사이트 검색어 1 위를 「
이지원 쵸코렐라 폭행」이 차지할 지도 모른다. 동후가 얼른 나섰다.

"누나, 죄송한데 이러다 레슨 늦겠어요."


"……그래? 그럼 가야지. 다들 머리 잘 하고, 또 보자."
"드라마 꼭 볼게요, 선배님!"

새끼 표범들이 송곳니를 번뜩이며 손을 흔들었다. 치타도 발톱이 흉흉한 앞발을 마주 흔들었다. 동후가
주차장에서 차를 빼오는 동안, 석원과 지원은 헤어살롱 입구에서 기다렸다. 지원이 핸드백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며 말했다.

"썅년들."
"누가 듣겠다."
"……어린년들이 사근사근 웃으면서 총질하는 것 좀 봐라, 응? 네 누나 지금 열댓발 맞았다. 씨발, 천하의
이지원이 꼴 우습게 됐지."

악문 턱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선글라스에 가린 눈도 잔뜩 구겨져있을 것이다. 참으려고 애를 쓰는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석원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옆 자리에 서 있었다. 차는 금방 도착했다. 지원은
선팅으로 가려진 차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분통을 터뜨렸다. 비싼 선글라스를 집어던지고 흉기 같은
하이힐 굽으로 바닥을 쾅쾅 내리찍고, 목쿠션에 주먹질을 하고, 마지막엔 머리로 창문까지 들이받았다.
한참 후에야 분을 가라앉힌 지원이 말했다.

"이 바닥이 이래. 누나가 이렇게 더러운 꼴 보면서 돈 번다, 그 돈으로 지금 네 머리 해준 거야,
이시키야. 알아?"
"그러게 내가 계산한다니까."
"그게 돈이 얼만데 니가……됐고, 넌 이번 드라마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하던 일이나 계속 해. 괜한 헛꿈
꾸지 말고. 이 바닥은 인기 없으면 쓰레기야. 아무도 안 알아줘."

지원이 조금 풀이 죽은 눈치라, 동후가 얼른 말을 돌렸다.

"동생, 일단 드라마 계약부터 하고……방송 일 하니까 알지? 드라마판도 출연료 빈부격차 심한 거.


동생은 출연 씬은 많아도 신인이라 편당 35~40 만 원쯤 받을 거야."
"그럼……달에 삼백쯤 되겠네요, 지금 제가 받는 월급보다 높은데요?"

석원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가끔 그도 살인사건 재연을 위해 배우를 쓰긴 하지만 드라마보다는


훨씬 페이가 적었다. 신인배우의 페이가 그 정도라면 경력이 쌓일수록 더 올라갔으면 올라갔지 내려가진
않는다는 말인데, 이번에 겪어보고 나쁘지 않으면 계속 해볼까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괜찮은 액수였다.

"만약 이번 드라마로 대한민국에 이름 석 자 알리면 그 다음 작품부턴 출연료도 점점 올라가는 거지.


인지도 좀 생기면 이백, 오백, 천, 쟁쟁한 탑배우급은 오천, 일억……. 요즘 케이블이나 종편에서
너도나도 드라마 바람이 불어서 출연료도 고공행진이야. 우승희도 지금 편당 이, 삼천은 받아갈걸?
게다가 그런 배우들은 드라마 끝나도 CF 가 종류별로 붙으니까 돈을 갈퀴로 쓸어 담는 거지, 뭐."

슬쩍 지원의 눈치를 보며 동후가 말했다.

"그런데 동생도 드라마 들어가기 전에 연기 레슨도 받고 해야 될 텐데……레슨비 그거 만만찮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소속사랑 계약하면 대표님이,"
"야!"

지원이 소리를 꽥 질렀다.

"너 어따 뭘 들이대? 양심은 홍대 프리마켓에다 세일 붙여서 팔아먹었어? 어딜 힘도 없는 소속사를……


대표님한테도 꿈도 꾸지 말라 그래!"
"에이, 씨.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네! 누나, 누나가 우리 대표님한테 그러면 안 되죠. 누나 때문에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하신데. 누나 제이비랑 스캔들 나고 나선 양파즙 드신대요, 하루 다섯 팩씩. 혈압
올라가서."
"그 스캔들은 잘 묻혔잖아!"
"누가 들으면 누나가 묻은 줄 알겠네, 단백질가이즈 소속사에서 손장수 다음 달에 군입대한다고
터뜨려줘서 묻힌 거지! 천만다행인줄 알고 손장수 입대 할 때 선물이나 보내세요. 아니지, 그랬다가
손장수랑 스캔들나면 완전 매장이지, 매장. 대한민국이 아니라 아시아 넘버원 썅년 되는 거지."
"뭐, 이놈의 시키야!?"

둘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 급기야 차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곧 공성전도 시작되었다. 목쿠션과


선글라스, CD 케이스 따위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석원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주저 없이 이어폰을 꺼냈다.
귀마개 대용이었다. 압구정에서 지원의 소속사인 '스타더스트 엔터테인먼트'까지는 이십분 정도의
거리였다. 도착했을 때는 동후도, 지원도, 차도 꼴이 가관이었다.

스타더스트 엔터테인먼트는 고층빌딩의 8 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엔터테인먼트라고 간판은 거창하지만


달랑 사무실 하나에 지하 연습실 두 칸이 전부였다. 사무실은 한산했다. 사무직 직원 두 명만 책상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전화를 받고 있던 여직원이 손을 흔들었다.

"윤실장님! 여수엑스포 특집 팀이라는데, 피치걸 섭외 좀 하고 싶다는데요? 야외무대공연하고, ENG 로


직접 여수 엑스포 방문해서 체험해보는 촬영까지 이틀 빼야 된대요. 페이는 백오십 줄 수 있다고 하고요.
뭐라고 할까요?"
"지원누나 때문에 안 돼, 드라마 말곤 방송출연 금지야. 경사 났지. 안에 대표님 계셔?"

여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후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좁은 대표실 안에는 피치걸을 포함한


기획사 연예인들의 프로필 사진과 콘서트 포스터 등이 어지럽게 붙어있었다. 널찍한 책상 위에는 보란
듯이 양파즙이 상자 째 올라와 있었다. 김상일 대표는 키가 크고 마른 삼십대 후반의 남자였다. 요 며칠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턱수염이 거칠거칠하고 뺨이 홀쭉했다. 그는 조용히 지원을 쳐다보다가, 양파즙을
집어던졌다.

"넌 내려가서 안 되는 연기연습이나 할 것이지 여긴 뭐 하러 기어들어와? 난 지금 네 이름만 봐도 혈압이


오르는 사람이야, 나가! 나가는 김에 벽에 붙은 피치걸 포스터도 다 뜯어서 나가! 꼴도 보기 싫어!"
"에이, 씨……동생 드라마 계약서 보러 왔거든요! 보호자한테 왜 이래요, 여기 대표 못 쓰겠구만!"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하고 있네!"

차 안에서의 광경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이차전은 오 분쯤 후, 여직원이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돌리고 나서야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석원은 소파에 앉아 계약서를 들춰보았다. 그가 이름을 적고
사인을 해야 할 부분만 공란이었다. 김상일 대표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석원씨, 출연료 얘긴 들었어요?"


"네, 차 안에서 들었습니다."
"거기 적힌 거 보면 아시겠지만 세금포함 40 이에요, 편당. 재방 나가면 출연료 20%, 삼방은 10%고.
필모그래피가 전혀 없는 신인치고는 많이 받는 편인 겁니다. 그리고 그쪽 감독이랑 작가가 석원씨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해서, 지원이가 드라마에 얼굴 비추는 거 말고도 OST 한 곡 정도는 맡을 수 있을 거
같아요. 같이 자리 한번 만들어서 확실히 장담을 받아야 하겠지만……어쨌든 출연료는 그래요. 괜찮죠?"

석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상일 대표가 안도한 얼굴로 웃었다.

"다행이네, 드라마 출연한다고 하면 무조건 떼돈 버는 줄 아는 사람들이 꽤 있거든요. 엿 같은


미디어들이 워낙 톱 배우들 출연료만 노출시키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출연자랑 장소섭외 끝나는 대로 다음
달부터는 촬영에 들어갈 텐데……작가가 박무경 역할은 근육이 좀 붙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가 벗었을 때의 갭이 중요하다나, 뭐라나. 어쨌든 운동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피부 관리도 받고, 연기레슨까지 받으려면 시간 굉장히 촉박해요. 동후 말 들어보니까 오디션 볼
때 연기 자연스럽게 잘 했다고 하던데, 혹시 배운 적은 없어요? 학교 다닐 때 연극동아리 활동을
했다거나……."
"제대로 배운 적은 없습니다."

연기를 배운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여자의 목을 조르고 싶을 때면 그녀의 목덜미가 아름답다고 칭찬했고,


친척 동생에게 해코지를 하고 싶을 때는 아이 돌보는 건 영 소질에 안 맞는다며 자리를 옮겼다. 이런
식으로 그의 삶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들이 발생했다. 연기는 그가 평범한
학생으로, 회사원으로, 아들로 남아있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의 연기가 자연스러워보였다면 아마 그
덕분일 것이다.

"그럼 일단 연기 레슨은 지원이 다니는데 같이 다니는 걸로 하고, 그리고 PT 는 내가 따로…."

얘길 하다 말고 김상일 대표가 표정을 팍 구겼다.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다. 피치걸의 노래였다. 동후가
얼른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윤동후입니다. 네……네?"

동후가 화들짝 놀라더니 석원을 쳐다봤다. 눈이 동그랬다. '잠깐만요,'하고 전화기를 내린 그가 석원에게


말했다.

"우승희씬데? 동생이랑 같이 있으면 통화 좀 할 수 있냐고."


"우승희?! 그 에일리언이 왜, 우웁!"

김상일 대표가 지원의 입을 양파즙으로 틀어막았다. 동후가 스피커폰으로 돌린 핸드폰을 석원에게


건네주었다. 석원은 마치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선물상자를 받은 기분이었다. 우승희가
그에게 연락할 일이 뭐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석원입니다."
「안녕하세요, 우승희에요. 번호는 감독님한테 받았어요. 놀라셨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제가 지금 영화 촬영 중인데, 출연자 한명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현장이 발칵 뒤집어졌거든요. 다들
대타 찾느라고 난린데……이석원씨가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생각 있나 해서요. 단역이라 분량은
적지만 대사는 좀 있어요.」

김성일 대표가 황급히 메모장에 글자를 써내려갔다. '한 번 겪어보는 게 열 번 레슨 받는 것보다 낫다,
그리고 우승희가 출연하는 영화면 대박은 못 치더라도 중박은 따 놓은 당상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석원은 턱을 문지르며 고민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굳이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일단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어떤 역할인데요?"


「악역 중 한명인데, 연기력이 좀 필요해요. 등장하는 씬이 대부분 사람 칼로 찔러 죽이고, 화살로 쏴
죽이고, 잡아다 패고 강간하는 씬들이라. 아, 위험한 액션은 대역이 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말안장에
앉아있는 정도만 잠깐 배우면 될 거예요.」

'재밌겠는데….'하고 생각하던 석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칼에다, 화살이요? 말까지 탑니까?"


「사극이거든요.」

우승희가 대답했다.

============================ 작품 후기 ============================
저번편에도 선추코 해주신 분들, 쿠폰 보내주신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
소설 내용 중 오류가 있으면 언제든 지적해주세요.

00012 용병(Mercenary)
=========================================================================
             
카니발은 올림픽 대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목적지는 영화촬영지인 한국민속촌이었다. 30 분 전,
석원은 우승희에게 긍정의 대답을 전했다. 그 영화의 제작비가 110 억이고, 톱배우 김승후와 스타감독
고종원의 두 번째 합작이며, 추석 황금연휴 개봉으로 800 만 관객돌파를 노리는 대작이어서……는 물론
아니었다.

그는 아직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민속촌으로 가고


있는 이유는, 구미가 당기는 배역이었기 때문이다. 덤으로 볼만한 구경거리도 있을 것이다. 우승희의
우아한 댕기머리, 속살 한 점 보이지 않게 여민 저고리와 다듬이 명주치마…그런 것. 석원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동후는 벌써부터 들떠있었다.

“우승희, 김승후 주연에 고종원 감독……연말에 최우수작품상도 노려볼 만 할 거야, 응? 게다가


사극로맨스, 이게 또 요즘 대세지. 동생한테 진짜 복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거라니까, 열심히 한 번 해봐.
영화판도 좁아서 한번 괜찮다 싶으면 또 쓰고, 또 쓰고, 그런다고 하더라고.”

‘알았어요.’석원은 대충 대답했다. 동후가 ‘아, 참.’하고 다시 입을 뗐다.

“그런데 동생, 혹시 태권도나 합기도, 복싱…뭐 그런 거 배운 적 있어?”


“……아뇨, 없어요.”
“그런 거 하나쯤 배워두면 좋아. 액션씬 찍을 때 폼이 다르더라고. 물론 대역이 있긴 하지만, 대역 쓰면
클로즈업도 따로 따야 되고 아무래도 생동감이 부족하잖아. 감독들도 이왕이면 배우가 직접 찍은 씬을
많이 쓰려고 하고. 아마 연기레슨 커리큘럼에 액션 파트가 따로 있을 거야. 동생은 그거부터 배워야겠다.
사극만큼은 아니겠지만 술래잡기 박무경도 몸싸움이 많은 역할이니까…….”

석원은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액션씬을 위해 싸우는 방법을 배우게 되다니, 참 묘했다. 정작 그게


필요한 것은 이쪽이 아니라 다른 쪽인데 말이다. 카르투옴 대륙에서의 그, 즉 텐 가렌은 궁술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천재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체력도, 완력도
그만저만. 그야말로 활이 생명줄이었다. 활을 놓치고 나면 동급용병 두엇 상대하는 것도 만만찮을 것이다.

그래서야 곤란했다. 그에게는 강해지는 것이 곧 즐거움을 얻는 길이었다. 때문에 그는 몇 가지


우선되어야 할 사항을 정리했다. 첫째, 꾸준히 근력을 키울 것. 둘째, 손에서 놓다시피 한 검을 다시
잡을 것. 셋째, 더 좋은 활과 화살을 손에 넣을 것.

미하라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꾸준히 성장하는 나날을 보내리라 마음먹었다. 북풍이 불어와 세상이
흑백으로 물들고, 그 속에서 새싹이 움을 틔우고, 그리고 세찬 비보라가 기존의 것들을 휩쓸고 지나간
후에는……지금과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많은 것이.

----------------------

“어이! 어이, 활잽이, 냉큼 일어나!”

누군가 문짝을 걷어차고 있었다. 그는 뻑뻑한 눈을 깜빡였다. 냄새나는 시트가 뺨에 비벼졌다,


거미줄처럼 쩍쩍 금이 간 천장이 보였다. 카르투옴 대륙이었다. 아마 차 안에서 깜빡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텐 가렌은 하품을 쩍 하며 문을 열었다. 문을 때려 부술 셈이었는지 허공을 날아오던
발바닥이 우뚝 멈추었다. 불청객은 미하라의 용병 모드레스였다. 그는 아랫뺨부터 목까지 길게 이어지는
손톱자국을 달고 있었다. 텐이 피딱지를 쳐다보자 그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뭐 필요한 게 있으면 얼른 구해 둬. 없으면 도로 퍼져 자고. 두 시간 후엔 출발한다.”

텐은 반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챙길 짐도 없었다, 여행복 위에 밤사이 바짝 마른 망토를


걸치고 배낭과 활, 화살통만 달랑 둘러맸다. 창문을 열어보니 하늘은 아직도 먹구름으로 우울했다. 1
층에는 밤새 먹고 마신 용병들이 테이블을 하나씩 차지하고 뻗어있었다.

아랫도리에 계란껍질로 뚜껑을 씌워놓은 놈, 털이 수북한 알궁둥이를 드러낸 놈, 고치처럼 망토에 둘둘


감겨 테이블 아래에 처박혀있는 놈…… 가관도 아니었다. ‘하여튼 용병들이란…짐승인지 사람인지…….’
구석에서 주인장이 토사물을 치우며 중얼거렸다.
그런가하면, 새벽 일찍 훈련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웃통을 벗은 몸뚱이에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들이
줄줄 흘렀다. 대련을 하는 자들 앞에서는 마법사가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어느 한쪽이 긁히기라도 하면 치유마법을 써주기로 하고 몇 푼 받았을 것이다. 텐은 기지개를 켜며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어이, 나뭇잎 맞추기 내기할래? 은 한 냥 한판.”

한쪽 귀가 잘려나간 청년이 말했다. 그는 수북한 장작더미에다 단검을 던지고 있었는데, 나란히 꽂힌


단검이 ‘돈이 없어’라는 글자를 만들고 있었다. 텐은 입술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핥으며 대답했다.

“빗나가면 귀 한쪽 자르기.”
“……안 해, 미친놈아.”
“그럼 손가락.”
“안 한다고.”

청년이 진흙을 던졌다. 텐은 아쉽게 돌아섰다. 내기에 끼려고 뛰어온 마법사가 입맛을 다셨다. 빗물로
세수를 하며, 텐은 신전 쪽으로 향했다. 여행길에는 필요한 게 산더미였다. 대한민국이야 가는 길목마다
휴게소가 줄줄이 붙어있지만 이곳은 마을 하나를 이동하는데 며칠이 걸리기도 했다.

우선 중급포션 두 병과 하급포션 세 병을 사서 허전하던 벨트를 채우고, 잡화점에서 몬스터의 혈액에


약초를 섞어 조제한 연고와 붕대를 샀다. 던젼도 아닌데 매 전투마다 포션을 마셨다간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다음은 무기였다. 그는 촉이 상하고 깃에 흠집이 난 화살들을 고렉시어 영감에게
헐값에 넘기고, 보통 크기의 화살 세 세트를 구입했다. 육십 개 가량의 화살이 채워지자 등이 묵직해졌다.

아침준비를 하느라 부산한 식당에 들러 요깃거리도 구입했다. 말린 소고기와 겉은 딱딱하고 속은


꾸덕꾸덕한 살라미 소시지를 한 주머니, 럼주 한 주머니, 건자두와 약간의 소금. 값을 치르며 텐은 몇
가지가 그리워졌다. 라면이나, 종이냄비나, 아이스박스 같은 것……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욕심을
내자면 침낭, 면도기, 샴푸, 클렌징 폼, 선글라스, 선풍기, 한도 끝도 없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그가 가진 것에 만족하는 수밖에.

그 외에도 몇 군데를 더 들르고 나서, 텐은 다시 에드레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몇 걸음 만에


멈춰서야했다. 찜찜했다. 분명 모든 준비는 끝났을 터인데, 뭔가가 그의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텐은
구입한 물건들을 훑어보았다. 잊은 것은 없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찜찜함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리고
그것은 그를 매우……복잡한 기분으로 만들었다.

‘의뢰를 마치면 다시 들를 거야.’

그가 이곳의 어머니에게 했던 말이었다. 시끄럽던 울음소리가 생생했다. 텐은 의아해졌다. 그는 고장 난


인간이었다. 가족에 연연하는 것은 정상인 자들이나 할 짓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은
뒤끝이 영 개운하지가 않았다. 그와 동화되기 전의 ‘텐 가렌’역시 고장 난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이석원’보다는 정상에 가까웠던 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의 파편이 그를
꺼림칙하게 만들고 있었다.

텐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떻게 하면 이 기분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한참의 고민 끝에


그는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에드레몽이 아니라 펠라도르 용병지부였다. 텐은 돈주머니를 들춰봤다.
은화를 제외하고, 남은 금화는 총 일곱 냥이었다. 그는 거기서 두 개를 꺼내 접수처에 올렸다.

“은화로 바꿔서……집에 보내줘요.”


“뷔로엠 마을의 텐 가렌……모리울 금화 두 냥 받았소, 내일 인편으로 전달될 거요.”

직원이 금화를 쓸어갔다. 그걸로 손을 털고, 텐은 용병지부를 나섰다. 이번에야말로 에드레몽 쪽으로
발길을 잡았다.
홀가분했다.

----------------------

아직까지는 잘 닦인 관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왼쪽에는 황금빛 보리들판이 흔들리고, 오른쪽으로는


밤사이 폭풍우에 시달려 구정물이 된 개울이 넘실거렸다. 그 사이를 이두마차가 달그락 달그락 진통을
호소하며 달렸다. 이두마차라고는 해도 귀족들의 것처럼 값비싸게 치장한 물건은 아니었다. 거대한
수레바퀴 위에 가축우리를 얹어놓은 것처럼 볼품없었다.

텐은 그 우리의 지붕에 앉아 있었다. 바퀴가 울퉁불퉁한 부분을 지날 때마다 엉덩이가 배겼지만 참을 만


했다. 이래봬도 이 자리는 경쟁자를 여럿 제치고 차지한 명당이었다. 창문을 다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차 안에서 고약한 토사물 냄새와 쉰내가 진동을 했기 때문이다.

“이보게, 젊은이. 밤사이 계집 둘을 녹이느라 허리가 부실할 텐데 편히 앉아서 가지 그러나.”

사색이 된 마법사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마차 지붕은 넓었지만, 짐을 잔뜩 올리고 밧줄로


감아놓은 터라 두 사람 분의 여유는 없었다. 생각하는 척 하는 말투였으나 요는 자기도 살아야겠으니 냉큼
교대하고 저 똥통 속으로 들어가란 말이었다.

텐은 개소리 집어치우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어차피 바깥을 경계하겠다는 명목으로 나온 참이다. 마력이
금세 바닥나는 마법사보다야 넉넉히 화살을 준비한 궁수가 차지하는 게 당연했다. 한참동안 눈싸움을 하던
마법사는 ‘이빨도 안 들어갈 놈…….’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기어들어갔다.

텐은 건자두를 질겅질겅 씹으며 하늘을 올려봤다. 비는 소강상태였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조금 전에 점심끼니를 때웠건만 하늘을 보면 벌써 저녁이었다. 먹구름 너머에서는 천둥이 그릉그릉 울고
있었다. 따분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텐의 눈이 번쩍 뜨였다.

관도 옆에 난 숲길에서 무언가가 뛰쳐나왔다. 허겁지겁 네발로 기어 나오기에 처음에는 짐승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땅을 짚고 일어서더니 이두마차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여자였다. 텐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쫓기는 듯 한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나온 숲길에서
말을 탄 남자가 뒤쫓아 왔다. 조잡한 갑옷과 담요역할을 하는 두툼한 망토자락, 긴 쇠사슬에 매단 톱날
갈고리까지. 어딜 보나 마적이었다.

말발굽에 밟히거나 갈고리에 찍히거나, 어느 쪽이든 여자의 등뼈는 곧 으스러질 것처럼 보였다. 텐은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선택의 순간이었다. 쫓는 마적을 죽일까, 쫓기는 여자를 죽일까. 마적의 습격을
받았다면 어차피 여자도 죄를 짓고 숨어사는 화전민일 게 뻔했다.

소수로 움직이는 마적단은 영악하고, 잔인했다. 그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화전민들만 노렸다.
마적도, 여자도 카르투옴 대륙에서는 생명의 값어치가 없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텐에게는 달랐다.
그에게는 저런 자들이야말로 값어치 있는 목숨이었다.

‘둘 다 죽이자.’그 중얼거림이 붉은 혈관에 독 한 방울을 만들어냈다. 시커먼 독은 붉은 피를 게걸스럽게


흡입하며 몸속을 온통 제 색으로 물들였다. 시위가 손가락을 파고들수록 고조되는 그 감각이 텐을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했다.

그는 싱싱한 놈을 먼저 잡기로 했다. 이쪽을 발견한 마적이 급하게 말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핑, 시위를
떠난 화살이 오른쪽 가슴을 뚫었다. 몸에 맞지도 않는 싸구려 철갑은 농부들의 괭이나 낫 정도나 막아낼까,
강철을 녹여 만든 화살촉에는 어림도 없었다.

화살에 맞고도 놈은 고삐를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말허리를 걷어찼다. 텐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왼쪽
어깨에 한발을 쏘았다. 놈이 또 다시 휘청거렸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오른쪽 어깨에도 한 발, 두툼한
팔뚝에도 한발……마적의 긴 팔과 머리채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것이 마치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처럼 보여 텐은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생명이 새어나가는 얼굴을


코앞에서 보지 못하는 게 아까웠다. 마적이 말 등에서 굴러 떨어지자, 놀란 말이 투레질을 하며 날뛰다가
제 주인의 머리통을 깨부쉈다. 텐은 못 견디겠다는 듯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안에서 바깥의 소란을 눈치채버린 것이다.

“귓구멍 간지러워 죽겠네. 폐에 바람구멍이 났나, 왜 자꾸 웃고 지랄……저거 여잔가?”


“뭐? 여자?!”
“여자라고?”

작지도 않은 머리통들이 창문 밖으로 뚫고 나오기 위해 아우성이었다. 지금 여자를 쏴 죽이면 대여섯쯤


되는 용병들이 한 몸이 되어 달려들 태세였다. 텐은 애석한 표정으로 활을 내렸다. 능력이 부족하면
서러운 법이라고 생각하며. 그 사이 계속 달린 이두마차가 쓰러져있는 여자 가까이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핏자국을 질질 남기며 기어왔다.

“도, 도와, 도와주세요. 히이……흐으으, 흐으……! 마적이…제발, 살려 주세요……마을에 아직,


가족들이……!”

여자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한 갈래로 땋아 내린 갈색머리카락은 반쯤 풀려서 구불거렸고,


억센 손에 의해 찢어진 옷은 걸레짝이나 다름없었다. 피와 정액이 섞인 것이 다리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닦을 생각도 않고, 마차의 수레바퀴를 잡고 매달렸다. 바퀴가 몸뚱이를 으깨고 지나가야
손을 뗄 기세였다. 일행의 책임자인 모드레스가 말했다.

“마적단의 습격을 받았소?”

여자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드레스는 머리가 깨진 마적의 시체와, 지붕에 앉은 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텐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모드레스는 잠시 미묘한 눈빛으로 텐을 쳐다보았다.
마치 요란하게 홰를 치다가 계란을 깨먹은 수탉이나, 식탁 밑에 똥을 싸질러놓은 개를 쳐다보는 듯 한
눈빛이었다. 그는 곧, 어울리지 않게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마적이 총 몇 명쯤 되오?”


“여, 열……열다섯 명 쯤 됐어요, ……다 말을 타고…….”

여자가 대답했다.

“말을 탄 마적 열다섯이라…숫자는 많지 않군.”

모드레스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여자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도와, 도와주세요, 제발…이럴, 이럴 시간이 없는데, 서두르지 않으면…….”


“우린 용병이오.”
“도, 돈은 있어요. 의뢰, 의뢰금을 드릴게요!”

그녀가 간절히 소리쳤다.

“그럼……갈 길도 먼데 용돈이나 벌어볼까?”

모드레스가 마차안의 용병들에게 물었다. 마적단을 소탕하는 의뢰야 은급용병 서너 명에 동급용병 열 명


정도로만 파티를 꾸려도 충분한 일이었다. 마적단이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동을 하는 탓에 꼬리를 잡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실력은 대체적으로 조잡했다. 반면 지금 마차에 타고 있는 용병들은 열 셋
모두가 은급용병들이었다. 게다가 위치도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 말 그대로 용돈벌이나 다름없었다.
용병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여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에게, 모드레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선금은 뭐로 내겠소?”
“……네……?”
“칼밥 먹는 놈들이 선금 없이 나서는 것 봤소?”
“…….”

먹구름 투성이 하늘처럼, 그녀의 얼굴도 시커멓게 죽었다. 그러나 망설임은 잠시였다. 여자는 제 손으로
단추를 뜯어냈다. 볕에 그을린 건강한 젖가슴이 드러났다. 그녀는 가족이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두느니
몸을 한 번 더 버리고 마는 것을 택했다. 모드레스가 마차의 문을 활짝 열고 환영했다. 그녀가 디딤대에
발을 올리자, 안에서 두터운 팔 여러 개가 그녀의 몸뚱이를 끌고 들어갔다. 끼익, 문이 닫혔다. 지붕
아래서 울음 섞인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텐은 끼지 않았다. 그가 기대하는 것은 좁은 우리 안에서 짐승 흘레붙듯이 해치우는 섹스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아랫도리를 달래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숲속에서 달큰한 피냄새가 풍겨왔다.

============================ 작품 후기 ============================
저변 편에도 선추코 해주신 분들, 쿠폰 보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조금 늦었습니다.
내일 다음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

00013 용병(Mercenary)
=========================================================================
             
마차는 지금까지의 두 배는 되는 속도로 달려갔다. 텐은 화살을 꺼내 촉을 더듬었다. 날카로운 날 끝에
스쳐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텐은 그 피를 쪽, 빨아먹었다. 그때 덜컹하고 마차 문이 열리더니 용병
한명이 지붕으로 기어 올라왔다. 등에 단창을 세 자루나 메고, 콧수염을 짧게 기른 중년 남자였다. 그는
엉덩이 내려놓을 틈도 없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으며 말했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 제 놈들도 집에 마누라가 있으면…….”


“…….”
“말해 뭣하나. 에이, 개 같은 세상. 돈만 아니면 이놈의 용병 짓, 때려치우는 건데….”

중년 남자는 욕지거리를 하며 창끝으로 지붕을 쿵쿵 찍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래에서는 쉴틈없이


비명소리와 더운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흙투성이 길 위에 남은 말발굽을 따라간 지 한참.
마차는 드디어 화전민들의 마을에 도착했다. 부실한 목책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아이를 등에 업은 여자가
엉금엉금 도망치고 있었다. 마적이 갈고리를 휘휘 돌리며 여자의 뒤를 쫓았다. 죽어가는 늙은이가 발목을
붙들자 굽은 허리에 갈고리가 떨어졌다. 여자가 정신 나간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누에르 ‧ 마르콘!”

마법사가 지팡이를 창밖으로 내밀고 외쳤다. 수정이 붉게 빛났다. 이쪽을 쳐다본 놈이 뭐라고 소리치려
했으나, 그전에 목이 쩍 갈라졌다. 놈이 고꾸라지자 여자가 곡괭이를 들고 휘둘렀다. 콸콸 쏟아지는 피와,
살점과, 내장조각이 웅덩이를 시뻘겋게 물들였다. 끼이익, 마차 문이 열리고 용병들이 우르르 내렸다.

“……저놈 마지막에 뭐라고 하려고 했을까?”


“좆됐다?”
“살려줘.”
“씨발.”

낄낄 웃으며 그들은 저마다 무기를 꺼내들었다. 마을은 손바닥만 했다. 마적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죽어 널브러진 자들은 거의 젊은이들이었다. 마을을 지키려 했는지 농기구
따위나 닭이나 잡던 칼을 들고 있었다. 그것으로는 철갑을 두른 마적들에게 상처하나 입히지 못했으리라.
반항하기를 포기한 자들은 마적들의 감시 하에 둥글게 모여앉아 있었다. 대부분 노인들과 여자,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곧 죽을 목숨들이었다. 마적들은 인간거래는 하지 않는다. 그들이 쓸어가는 것들은
돈과 금붙이, 가축, 그리고 몇몇의 좋은 여자뿐이다. 살아남는 여자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죽는 것보다 한
점 나을 것 없는 삶이었다.

“저놈들 모가지 개수로 값쳐주는 건가?”


“니미, 마을 꼬락서닐 보니 은 부스러기나 나올까 모르겠군. 선금을 너무 덥석 받았나.”
“말이 있잖나, 말이. 저거면 미하라까지 여비는 넉넉하게 벌걸세.”
“그리고 어차피 저놈들 다 수배범 아뇨? 의뢰금 몇 푼, 현상금 몇 푼 더하면 목값으로도 은 대여섯
냥씩은 떨어지겠지?”

그때, 용병들을 발견한 마적이 황급히 각피리를 불었다. 우우웅, 낮은 진동이 울리자 약탈을 하기 위해
흩어졌던 놈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다. 아랫춤의 물건을 덜렁거리는 놈부터, 말 등에 여자를 묶어놓은
놈, 돼지를 줄줄이 꿰어 끌고 나온 놈까지 다양했다. 용병들은 마치 성난 들개처럼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날붙이가 붙어먹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순식간에 마을을 점령했다.

이제 마차에 남은 것은 마부와 텐뿐이었다. 마부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수레바퀴 사이로 기어들어갔고,


텐은 태연히 활시위를 당겼다. 기이익……활이 둥글게 구부러졌다가 튕겨나갔다. 화살이 정면으로
달려오던 마적의 눈알을 꿰뚫었다. 갈고리를 빙빙 돌리던 놈이 비명을 지르며 굴러 떨어졌다.

텐은 놈의 가슴을 밟고 화살을 뽑았다. 주먹만 한 안구가 대롱대롱 딸려왔다. 그 끝에 화살촉이 툭


튀어나와있었다. 텐은 다시 화살을 휘둘렀다. 화살 하나에 양쪽 눈알이 사이좋게 꿰어졌다. 끄어어억,
끄어억, 놈이 피 끓는 비명을 질러댔다. 텅 빈 눈구멍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졌고, 바짓가랑이 사이로
오줌이 줄줄 샜다. 놈이 바닥을 더듬으며 기어갔다. 쫓아가서 갈고리로 등을 쑤셔놓으려다가, 텐은 입을
길게 찢으며 웃었다.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히히힝! 히힝!

그는 겁을 잔뜩 먹은 말을 달래 안장에 올라탔다. 옆구리를 세게 치자 말이 콧김을 뿜으며 달려 나갔다.


말발굽이 필사적으로 기어가던 마적을 짓밟았다. 우지끈,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생생했다. 등뼈와 척추가
살을 뚫고 튀어나와있었다. 텐은 한참을 놈만 쳐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홀로 감상하기에는
아까웠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늘 상상만 해 오던 것을 직접 경험하고 난 후부터 그는 자신의‘취향’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본질을 대중에게 드러내거나, 직접 만든 작품을 자랑하고 싶은 과시욕이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관객이 없었다. 다들 너무 바빴다.

아쉬움을 달래며 텐은 아수라장이 된 마을을 돌아보았다. 접전은 잠시였을 뿐, 승기는 애초부터 기울어져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주민들은 벌써부터 살았다며 서로서로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텐은 말을 몰아 허물어져가는 흙집 앞으로 다가갔다. 그 앞에서 말 한 마리가 서성이고 있었다. 마치 볼


일 보는 주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텐은 말에서 내려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문 안은 고요했다.
훌쩍거리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끼이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나무발이 쳐진 집 안은
사람 사는 곳이라기보다는 마구간과 비슷했다. 한쪽에는 손 떼 묻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반대쪽에는
밀짚을 잔뜩 깔아놓고 그 위에 담요를 덮은 잠자리가 있었다. 그 아래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내장을 쏟아낸
채 죽어있었다.

“흑……흐윽…….”

울음소리의 주인공은 아직 젖가슴도 부풀지 않은 어린애였다. 얻어맞은 얼굴은 피 투성이였다. 벌거벗은


몸도 잇자국과 상처로 지저분했다. 아이는 치부를 가릴 생각은 않고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텐이 물었다.
“누가 있어?”
“……없어요.”

아이가 대답했다. 텐은 아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커다란 흰자 속에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오른쪽 아래로 기울어졌다. 담요에 뒤덮인 지푸라기더미 속으로. 목숨을 건 신호였다. 그 속에 마적이
몸을 숨긴 게 분명했다. 담요 아래서 이쪽의 동태를 살피며, 아이의 등허리에 칼날을 들이대고 있을
것이다. 텐은 실쭉 웃으며 화살을 뽑았다.

그가 마적의 몸을 표본에 걸린 나비처럼 만드는 데는 고작 십분도 걸리지 않았다. 손바닥과 발목에 각각


하나씩 꽂힌 화살은 살을 관통해 판자바닥까지 뚫고 들어갔다. 놈이 핏대를 세우며 꽥꽥대는 바람에 텐은
놈의 혓바닥에도 화살을 꽂아주었다. 또 하나의 명확한 취향, 비명은, 역시 여자의 것이 듣기 좋았다.

“후읍…! 으으으웅……!”

놈은 아이처럼 오만상을 찡그리며 울었다. 그때, 내내 구석에 처박힌 채 벌벌 떨던 아이가 뒤로 다가왔다.


얼굴이 살기로 흉흉했다. 손에는 화덕을 들추는 데 쓰는 쇠꼬챙이를 들고 있었다. 마적의 아랫춤이
누렇게 젖었다. 그 옆을 짚고 있던 텐의 손바닥까지 축축해졌다. 텐은 마적의 뱃살에 오물을 닦으며
말했다.

“남의 걸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지.”


“하지만……하지만…….”

아이가 서러운 표정으로 훌쩍거렸다. 텐은 화살촉으로 놈의 배를 문지르며, 아이에게 손짓했다.

“와서 구경이나 해.”

공포에 질린 한 쌍의 눈동자. 그리고 서로 다른 기묘한 열기에 젖은 두 쌍의 눈동자가 쳐다보는 가운데,


부욱…가죽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마적의 배가 갈라졌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모든 작업이 끝났을
즈음에는 둘 모두 빨간 가면을 쓴 것처럼 지저분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에 대롱대롱 매달렸던
핏방울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마적의 숨이 끊어지자, 마치 그것을 보려고 버텼다는 듯 아이가 축
늘어졌다.

텐은 입술에 묻은 피를 핥으며 바지춤을 풀었다. 살인을 저지르면서 느끼는 감각은 마치 오르가즘과도


비슷했다. 체액을 쏟아내는 것이 아닌 정신으로 느끼는 오르가즘. 그 때문인지 몸도 뭉근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묵직하게 크기를 키운 놈을 붙들었다. 여자아이가 깨어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손으로도
충분했다. 그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즐거운 놀이에 빠져 있을 때. 벌컥 문이 열렸다.

“어이! 왜 이렇게 오래…….”


“…….”
“……씨발, 미친놈.”

귀 한쪽이 없는 청년이었다. 그가 가로막고 선 문 뒤로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뭐하고 있는데 그래, 여자랑 붙어먹고 있지?”


“니미, 어젯밤에 설탕가루처럼 살살 녹는 년들이랑 놀아난 놈인데 흙투성이 촌것이랑 할 맛이 나겠소?
틀림없이 돈 될 거 있나 뒤지고 있는 중이라니까.”
“흙이 묻거나 똥이 묻거나, 여자는 여자지. 판돈 한번 올려볼까?”
“올릴 테면 올리시구려! 어린놈들은 그렇지가 않아, 게다가 그놈은 척 봐도 눈이 높게 생겼더구만, 뭘!!
아까도 선금에 손도 안대는 꼴 못 봤소?! 야, 가리지 말고 비켜봐, 안보이잖아!”

‘안 보는 게 좋을 텐데, 그래도 굳이 보겠다면야…….’중얼거리며 청년이 옆으로 비켜섰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대검을 든 남자와 마법사가 들이닥쳤다. 그들이 낱낱이 해체된 고깃덩어리를 쳐다본 순간. 텐은
정신에 이은 육체적 황홀경을 맛보았다. 뿌연 정액이 마적의 뱃속으로 뚝뚝 떨어졌다. 용병들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텐은 빙긋 웃는 얼굴로 아랫춤을 여몄다. 그리고 한결 가벼운 움직임으로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남은 자들 사이로 기나긴 정적이 흘렀다.

싸움은 끝나있었다. 아니, 거의 끝나있었다. 마을 주민들과 용병들의 시선이 집중 된 가운데 마적 한명과


용병이 칼을 부딪치고 있었다. 낯이 익은 얼굴. 오는 도중에 마차 지붕위로 올라왔던 중년인이었다. 둘의
실력은 엇비슷했다. 하지만 동료가 잔뜩 남은 중년인보다, 동료들이 다 죽어 자빠진 마적이 더 치열했다.
그렇다고 그의 실력이 뛰어난 것은 또 아니었다. 오히려 중년인의 실력이 은급 용병패에 맞지 않게
형편없었다. 그는 겨우겨우 상대의 검을 막고 소리쳤다.

“어, 어이, 이봐! 안 도와줄 거야?!”


“…….”

용병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모두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들은 실력을 속인 자에게는 가차 없었다. ‘


동료도 내팽개치는, 짐승새끼들!’중년인이 소리쳤다. 그는 한 발, 한 발 뒷걸음질을 치더니 결국 등을
돌려 도망쳤다. 홀로 남겨진 마적 역시 반대쪽으로 뛰었다. 모드레스가 짜증을 내며 손도끼를 집어던졌다.
뱅글뱅글 돌며 날아간 도끼가 마적의 옆구리를 갈랐다. 마적이 나자빠졌을 때, 중년의 용병은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모드레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니미럴, 매번 저런 놈들이 있지. 요행으로 은급용병패를 받은 놈들. 행운에 감사하며 자잘한 일이나 할
것이지, 꼭 돈에 눈이 멀어서 죽을 자릴 찾아온단 말이야……. 어이, 궁수. 저놈 쏴 죽여 버려. 어차피
미하라에 갔어도 하루 만에 뒈졌을 놈이다.”

텐은 화살을 뽑았다. 시위를 걸고 쭈욱 잡아당겼다. 활대가 둥글게 굽었다. 손가락이 아리도록 잡아당긴
시위를 놓으며, 텐은 문득 골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꼬리치는 인어마냥 쏘아진 화살이 목을
꿰뚫었다.

----------------------

석원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으으으…….’신음을 내며 몸을 뒤틀었다. 돌투성이


바닥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건 텐 가렌의 몸뚱인데, 어째 이 몸도 등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석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등 뒤를 어루만졌다. 푹신푹신한 커버와 목쿠션이 만져졌다. 저쪽의 세계에 있는 동안
매우 그리웠던 감촉이다. 쿠션에 목을 파묻은 채 석원은 여운을 만끽했다. 흉포한 것이 가라앉고 나니
심신이 물 흐르는 것처럼 고요하고 나른했다. 저절로 입술이 길게 올라갔다.

“아주 세상모르고 자더니, 좋은 꿈 꿨나보다?”

시동을 끄고, 동후가 돌아보며 말했다. 석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깼으면 이만 바깥 좀 보지?”
“도착했어요?”

석원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눈을 껌뻑였다. 그의 앞에 펼쳐진 것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커다란


엿판을 둘러맨 엿장수가 짚신을 끌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옆에는 화사하게 꽃무늬를 수놓은 저고리에
전모를 쓴 기생들이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았다. 창의를 걸친 선비는 쭈그리고 앉아 아이패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모두 영화촬영을 위해 동원된 인력이었다. 사극답게 보조출연자들의 숫자도 어마어마했다.

“영화가 대작이라 그런가. 촬영장 분위기 좋다, 그지?”


“그래요?”
“자세히 좀 봐봐, 분장이나 의상 디테일도 좋잖아. 돈 많이 썼네. 특히 저런 거, 저런 거, 기생 옷.
엄청 비싸다더라. 게다가 기생이 예뻐.”

동후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차에서 내리자 후덥지근한 날씨가 먼저 반겼다. 전국적으로 폭염 특보가
내렸다더니 숨구멍이 턱턱 막혔다. 동후는 벌써부터 반팔 티셔츠를 펄럭거렸다.
평소라면 흙먼지만 날아다닐 옛것들이 오늘은 활기를 띄고 있었다. 노리개와 꽃신, 비단댕기가 널린
좌판부터 생선이 종류별로 늘어진 어물전. 불똥이 탁탁 튀는 대장간. 색색깔 곱기도 한 비단가게……마치
수백 년 전의 저잣거리로 시간을 이동한 것 같았다. 그러나 가게 주인들은 저마다 손부채질을 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 오늘은 왜 이렇게 촬영이 많아요? 며칠 치 찍을 걸 한 번에 다 찍는 거 같네.”


“내일부터 비 온다고 난리잖아, 갑자기 비오면 화면 튀니까 이어지는 장면은 오늘 다 찍을라나보지.”

어물전 주인과 방물장수가 삼각 김밥을 먹으며 투덜거렸다. 그 옆에는 젊은 여자 둘이 한복치마를


걷어붙인 채 흙바닥에 퍼질러앉아있었다.

“아……더워 죽겠네. 일당 몇 만원 받겠다고 이게 웬 고생이야. 차라리 방청객 알바할걸…….”


“그래도 넌 댕기머리라 편하겠다. 가채 졸라 무거워. 냄새는 또……아, 씨발. 썩는다, 썩어.”

시대가 섞인 것 같은 기묘한 광경이었다. 두 사람은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지미집(크레인 구조를 가진


무인카메라)이 보이는 곳으로 걸어갔다. 촬영진이 몰려있는 곳은 주막이었다. 나무로 만든 마루에는 술상
서너 개가 올라가 있고, 보조출연자들이 끼리끼리 둘러앉아 국밥을 퍼먹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국밥을 먹으려니, 얼굴이 온통 땀투성이였다. 그들은 카메라가 돌아갈 땐 열심히
수저질을 하다가 카메라가 꺼지면 바지춤 속에서 얼린 생수를 꺼내 얼굴부터 들이밀었다.

“저기 봐, 저기. 김승후다.”

동후가 한쪽을 가리켰다. 일반 시민들은 물론이고, 촬영이 없는 보조출연자들까지 바글바글하게 몰려와


인파를 이룬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다. 김승후는 옥색 비단 도포를 입고, 대나무가 수놓인 담호를 걸치고
있었다. 잔머리 한 올 없이 갈무리한 머리에는 흑립을 썼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구슬을 꿴 주영(갓
장식)이 촤르륵 부딪쳤다.

쌍꺼풀 없이 가느다란 눈이 접힐 때면 인파 속에서 ‘김상, 각고이!’라거나, ‘워아이니…!’같은 다국적


감탄사들이 흘러나왔다. 동후 역시 부러워죽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빈 막걸리 사발을 들고 원샷한 김승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단출한 검은 도포에 얼굴 반을 가리는


투박한 삿갓을 쓴 남자가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척 보아도 악역이었다. 그가 옆에 앉은 남루한 차림의
남자에게 말했다.

“오늘 밤이야. 저놈이 이곳을 뜨면……그년을 끌고 와.”


“컷!”

앉은뱅이 의자에 앉은 감독이 소리쳤다. 그는 얼마 남아있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저기……승후씨, 웃을 때 좀 천진해보였으면 좋겠어. 목하 열애중인 양반이니까, 우리 상큼하게 가자고.


그리고 이태혁씨. 분위기가 좀 약해. 다른 왈패들이 나쁜 놈이라면, 채늠은 미친놈이야, 미친놈.”
“예! 죄송합니다.”

그 뒤로 같은 장면을 세 번 더 찍고서야 촬영이 끝났다. 동후가 미리 사 놓은 비타민워터를 들고 감독에게


다가갔다. 잠시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 감독이 석원을 쭉 훑어봤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연기경험 없다면서요, 우승희씨 소개라 믿고 가는 겁니다. 급한 마당에 다른 대안도 없고……석원씨가


해줄 게 부두목 역할인데,”
“저……감독님. 부두목 배역 확정된 거죠?”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조금 전까지 촬영을 하고 있던 이태혁이었다. 그는 삿갓을 목 뒤로 넘기며


난처한 얼굴을 드러냈다.

“저도 소속사 후배한테 한번 와보라고 했는데……우승희씨가 소개한 연기자가 온다고 해서 제가


취소문자를 보냈거든요. 오지 말라고. 그런데 그 녀석이 문자를 못보고 여기까지 와버렸어요. 이대로
돌아가긴 너무 아쉽다고 테스트만이라도 좀 받아보면 안되겠냐고 졸라서……운동 많이 한 놈이라 액션씬이
괜찮긴 할 텐데…어릴 때 양궁도 좀 배웠고…….”

감독의 귀가 쫑긋거리는 게 석원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지금 여기 와있다고?”
“예, 명환아! 이명환! 너 이리 좀 와봐!”

인파 속에서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 얼른 달려왔다. 어깨가 두껍고 단단한 게 운동을 오래 한 몸이었다.
키는 석원보다 머리 반개는 더 컸다. 몸만 보면 연기자보다는 스턴트맨이 어울릴 것 같았지만, 생김새도
꽤 멀끔하게 잘생긴 편이었다. 감독은 이제 석원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옆에 선 동후가 ‘엿됐다’고
속삭였다. 감독이 슬쩍 석원의 눈치를 보았다. 이미 결정을 내린 듯 한 표정이었다.

“이거 어쩌나, 석원씨…….”


“어쩌긴요, 배역은 하나고 배우는 둘인데.”

익숙한 목소리가 감독의 말을 잘랐다. 뒤돌아본 동후가 입을 떡 벌렸다. 우승희가 스란을 넣은


명주치마를 양손으로 들어 올린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옅은 도화색 저고리에 붉은 옷고름을 단정히
묶고, 등 뒤로는 여러 갈래로 땋아 장식한 댕기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동그마한 이마와 날렵한
콧대가 고운 선을 그렸다. 어디로 보나 아리따운 낭자였으나……목소리는 매우 싸늘했다.

“박 터지게 싸우는 거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려보내서야 되겠어요?”


“그……렇지, 그럼. 여기까지 고생해서 왔는데……그럼 일단 둘 다 테스트 한번 보자고.”

벌떡 일어선 감독이 소리쳤다.

“종수야! 가서 말 좀 끌고 와라, 활하고 화살도 좀 가져오고!”

갑작스런 해프닝에 촬영이 중단되었다. 제작진과 보조출연자들은 색다른 볼거리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죄송하게 됐습니다.’이명환이 석원을 스쳐지나가며 속삭였다. 이미 배역에 낙점 받은 듯 한 태도였다.
양궁을 배웠다니, 활을 쏘는 것으로 테스트를 하겠다는 말이 기꺼울 만도 했다. 석원이 헛웃음을 지었다.
곁으로 다가온 우승희가 말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미안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아까 대충 들었는데, 문자를 못 봤네, 어쩌네 하는 건 다 헛소리예요. 경쟁자가 있건 없건, 우승희가
소개한 게 누구건……배역 딸 자신 있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죠. 같은 초심자라도 저쪽은 연기 오래 배웠을
거예요.”

동후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바로 올라가면 저녁은 서울에서 먹겠네.’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우승희가 계속 말했다.

“게다가 양궁까지 배웠다니 활 쏘는 걸로 이기긴 글렀네요. 승마로라도 점수를 따야 할 텐데……말 타본


적 있어요, 혹시?”
“……타본 적은 없습니다.”

우승희가 이마를 짚었다. 동후는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냈다. 저 멀리서 타닥타닥, 말이 끌려오고 있었다.
사실 그는 수시로 말을 탔다. 마상에서 활을 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텐
가렌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이석원의 몸으로써는 단 한 번도 말을 타본 적이 없었다. 물론 타는 방법과
요령은 기억 속에 뚜렷이 새겨져있다. 그것만으로 가능할지 어쩔지는……직접 해보지 않고서야 모를
일이다. 석원은 턱을 괸 채로 말을 빤히 쳐다보았다.

============================ 작품 후기 ============================
저번 편에 선추코 보내주신 분들, 쿠폰 선물해주신 분들모두 감사드립니다 :-)!

00014 용병(Mercenary)
=========================================================================
             
“먼저…하시겠습니까?”

하고 묻는 얼굴에는 저부터 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뒤집힌 갈매기날개처럼 올라간 입매와 빳빳한
고개. 이명환은 상당히 자신만만해보였다. 석원은 여전히 턱을 괸 채로 ‘먼저 하시죠’하고 말했다. ‘
먼저’를 뱉을 때쯤 이명환은 이미 왼쪽 발을 등자에 쑤셔 넣고 있었다. 갈기와 고삐를 단단히 붙들고,
왼발을 세게 굴러 올라탔다. ‘일단 등자부터 밟으시고요…….’하고 중얼거리던 스태프가 엄지를 번쩍
쳐들었다. 이명환은 말이 뒷걸음질 치자 재빨리 갈기를 쓰다듬는 여유까지 보였다. 양궁을 배웠다는 젊은
연기자는, 말도 잘 탔다.

“니미, 승마도 배웠나……있는 집 자식인가 보다.”

동후가 촬영소품인 막걸리를 콸콸 따랐다. 한 잔 더 따르라는 듯 우승희가 사발을 턱 내려놨다. 고종원


감독은 이명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명환씨, 말 타는 것도 익숙해 뵈는데? 암만 봐도 처음 타보는 솜씨가 아냐.”


“아뇨, 올라타 있는 게 한곕니다. 제주도 놀러갔을 때 패키지체험으로 한 번 타본 게 전부라……그것도
한참 전 일이라서 다리가 후들후들합니다.”

이명환이 겸양을 떨었다. 감독이 그를 핥듯이 쳐다보았다. 특히 말 옆구리로 내려온 탄탄한 허벅지와
고삐를 잡아채고 있는 굴곡진 팔뚝을. 이명환은 조심조심 양 손을 놓고, 잠시 뜸을 들였다. 말은
얌전했다. 그가 석궁을 받아들고 화살에 시위를 메기자 감독은 침이라도 줄줄 흘릴 기세였다. 그는
시위를 끝까지 당겨보라느니, 활을 좀 더 들어보라느니 주문을 하며 ‘그림 좋다, 그림 좋아!’를
연발했다. 그쪽 분위기가 매우 화기애애한 반면, 석원의 곁에는 태풍경보가 내렸다. 동후는 미지근해서
쉰내만 나는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셨다. 우승희는 선글라스를 끼고 팔짱을 끼었다. 비단댕기에 매치한
검은색 보잉 선글라스는 접근금지 표지판처럼 보였다. 침묵 끝에 동후가 코웃음을 쳤다.

“…제주도 패키지에서 한번 타 본 게 전부예요? 천재 나셨네, 불여시같은 놈.”


“요즘 제주도에선 이성계가 승마를 가르쳐주나보죠.”
“그러게 말입니다. 저 재능으로 왜 배우를 하려 그래, 두세 번 더 타보고 올림픽 나가서
국위선양하시지.”

비꼬는 호흡이 착착 잘도 맞았다. 하지만 둘이 그러거나 말거나, 이명환과 감독은 신이 나 있었다.


감독의 주문대로 이명환이 과녁을 향해 시위를 겨냥했다. 수십 쌍의 시선 한가운데 화살이 쏘아졌다.
퍼억, 과녁 오른편에 틀어박힌 화살 깃이 파르르 떨렸다. 김승후를 보기 위해 모인 구경꾼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가 사진을 찍어대며 그의 이름을 물어봤다. 이명환은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감독이 ‘이 친구 몇 년 후엔 카메오 부탁하기도 어려울 만큼 크는 거 아냐?’하고 그의 등을
철썩철썩 내리쳤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우승희가 혀를 찼다.

“운이 없네요, 이석원씨.”


“……그런 겁니까?”
“봤잖아요, 싹싹하니 구김살 없고 순진한 척도 할 줄 알고. 애티튜드도 괜찮은데 그림까지 좋아. 액션이
되니 대역도 필요 없어……저러면 감독이든 스태프든 껌뻑 죽거든요. 부딪치면 한쪽 박만 터지겠네, 그냥
서울 올라가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그거야 해봐야 알죠.”

석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우승희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그를 쳐다봤다.

“말 타본 적 없다면서요.”
“없습니다.”
“이석원씨도 양궁 배웠어요?”
“아뇨.”
“……이봐요, 이석원씨. 말 타는 게 자전거 타는 거랑은 좀…다르거든요. 이 분위기에 낙마라도 하면
쪽팔려서 얼굴 들겠어요?”
“쪽팔릴 짓을 왜 합니까?”

석원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감독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카메라와 붐대를
내려놓고 앉아있던 스태프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시간도 부족한데 더 볼 필요 있나하는 얼굴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이미 이명환은 빈자리에 쑥 박힌 고급 적벽돌이고, 석원은 언감생심 그 자리를 넘보는 시멘트
부스러기였다. 빈자리에 박혀봐야 미관상 보기도 안 좋고 집값만 떨어뜨리는 그런 것. 그것이 현재 그의
값어치였다. 하지만 석원은 태연했다.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로……자신이 부풀었다.

이 몸으로는 승마도, 활을 쏘는 것도 처음이었음에도 막연히 ‘될 것 같은’기분이 들었다. 가뿐히 말


등에 올라 눈 한번 깜빡하기도 전에 표적을 꿰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텐 가렌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가, 몸이, 지금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부추기고 있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할 수 있어야 했다. 군중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니까.

“말 타 보셨습니까?”

이명환이 물었다. 석원은 얇은 재킷을 벗어두며 대답했다.

“글쎄요, 놀이동산 회전목마는 몇 번…….”

감독과 스태프들이 바람 빠진 소리로 웃었다.

“조심하세요, 생각보다 높아요.”

이명환이 말 등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석원은 듣기평가와는 친분이 없었지만, 저 말의 속뜻이 ‘올라타다
미끄러져서 쪽이나 파시지.’임을 못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석원은 ‘그래요?’하고 대꾸하며 말의
갈기를 길게 쓰다듬었다. 매일매일 피 맛을 잔뜩 보는 카르투옴대륙의 말들에 비한다면 이놈은 순해빠진
개꼴이었다. 퉁방울만 한 눈깔이 흐리멍덩했다.

“좀 전에 이명환씨 하는 거 보셨죠? 뭐,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등자에 발 끼워 넣으시고….”

스태프가 뭐라고 지껄였지만 석원의 귓가엔 닿지 않았다. 그는 흔들리는 등자에 한쪽 발을 넣고 다른 쪽을


세게 굴렀다. 잠시, 허공에 뜬 몸이 안장 위에 안착했다. 다른 쪽 등자를 밟아 중심을 잡자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치 데자뷰 같았다. 양쪽 허벅지 안으로 뜨거운 짐승의 체온이 느껴지자 그 어떤 안락한
탈것들보다도 이것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스태프가 활과 화살을 건넸다. 가볍게 시위를 튕겨보았다. 카르투옴 대륙에서의


그는 2 미터 길이의 장궁을 사용했는데, 이건 그 반절 크기였다. 마상에서 사용하기 수월한데다 사거리도
뛰어난 조선 각궁이었다. 마음에 쏙 들었다. 그는 시위를 메기고 표적을 쳐다봤다. 앞서 이명환이 쏘아낸
화살은 표적 가장자리에 꽂혀 있었다. 사람 머리통 세 배는 될 거대한 표적이 코앞에 있는데 그조차 빗
맞추다니……‘눈이 없나?’석원이 비웃었다. 아니, 이미 그는 석원이 아니었다. 살인, 폭력, 섹스,
이석원으로써는 누리지 못했던 방종을 허락받은 텐 가렌이었다.

‘저적’, 활대가 신음을 질렀다. 그는 굶주린 얼굴로 표적을 쳐다봤다. 표적위에 누군가가 어른거렸다.
우승희였다. 고상한 입술이 뭐든 처박고 싶게 생겼다. 화살이든, 다른 것이든. 똑같이 기분은 좋을
것이다. 그는 치미는 욕망을 달래며 시위를 놓았다. 그리고…….
‘석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
틀림없이 표적의 정 중앙에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분명히 느낌으로는 우승희가 어른거리던 표적에
화살을 쑤셔 넣어 줬는데. 화살은 비웃듯 흙바닥에서 깃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텐 가렌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실수다. 허탈했고, 당황했고, 조금 쪽팔렸다. 석원은 제 손을 내려다봤다. 흉 하나 없는
손바닥이다. 지저분한 텐 가렌의 것과는 달랐다. ‘텐 가렌’과 ‘이석원’은 같은 정신을 공유하지만,
신체적으로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이다. 석원은 씁쓸한 얼굴로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주위는 조용했다.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이명환의 소속사 선배인 이태혁이었다.

“다 좋았는데, 화살이 엄한 데 떨어진 게 좀 아깝네.”


“…생각처럼은 안 되네요.”
“사실 나도 자신 없어요. 명환이야 워낙 기본이 되니까 말 위에서도 저게 가능한 거고. 초심자치곤
이석원씨도 잘 한 거지, 뭘.”

말속에 뭐가 있는 건 후배나 선배나 똑같았다. 그런데 한껏 기세가 높은 이태혁과는 달리 이명환은 멀찍이


선 채 석원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오히려 의기양양해야 할 사람은 그였음에도. 이상한 사람은 또 있었다.
고감독이었다. 그는 뭐라고 말은 하고 싶은데 혓바닥이 묶이기라도 한 것 마냥 입술만 들썩거렸다.
얼굴이 불그스름하고 눈을 계속 껌뻑이는 게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놀란 것 같기도 했다. 한참
기다려도 그가 별 말이 없자 석원은 그냥 벗어뒀던 재킷을 껴입었다. 그때, 한달음에 달려온 고감독이
그의 소맷부리를 잡았다.

“자, 잠깐! 잠깐만!”


“…예?”
“석원씨. 내가 한 씬만 더 보고 싶은데, 옷 좀 갈아입을 수 있을까?”

대답을 안 하면 이 자리에서 바지라도 벗길 기세였다. 석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그가 소매를 놓았다.
순식간에 스태프가 옷 한 벌을 가져왔다. 왈패 의상이었다. 고감독은 그 위에 시나리오 대본을 척
얹더니 형광펜으로 쫙쫙 줄을 그었다.

“여기 78 번 씬. 형광펜 친 부분…왈패 부두목 흑구 대사예요. 몇 줄 안 되는 거니까 이 정도는 바로 칠


수 있죠? 옷 갈아입고, 대본 보고, 십분……아니 이십 분 있다 봅시다. 종수야! 상대역 단인마님도
준비 좀 하라고 해! 카메라 돌릴 거야!”

속사포처럼 떠들고, 고감독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홀로 남은 석원이 주위를 돌아봤다. 시선, 시선.
쏟아지는 시선에 살갗이 다 근지러웠다. 구경꾼들. 스태프들. 보조출연자들……저마다 수군거리며 그를
힐끔대고 있었다. 그는 뒷덜미를 문지르며 돌아섰다. 이명환은 가장자리에라도 맞추었지만, 그는
실패했다. 그런데도 고감독이 연기를 한 번 더 보자고 요청한 건 그였다. 의도를 모르니 마음이 심란했다.
그런 그에게 동후가 달려왔다.

“이야, 동생! 죽이던데?”

‘뭐가요?’라고, 석원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되물었다. 그러자 동후가 의뭉스런 얼굴로 그의 엉덩이를 툭


쳤다.

“뭐긴 뭐야, 조금 전에 그거! 못하는 척 똥줄 타게 만들더니, 말도 훌쩍 잘 타고 활도 잘만 쏘던데?”


“…화살이 어디 박혔는진 못 보셨어요?”
“맞추는 게 중요한가, 쏘는 게 중요하지. 국가대표 할 거 아니잖아요?”

우승희가 말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그를 올려봤다. 눈이 가늘었다.

“말 타봤죠?
“아뇨.”
“활, 쏴본 적 있죠?”
“…없습니다.”
석원이 잡아뗐다. 양심에(그가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지만)거리낄 일도 아니었다. 이석원으로써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는 엄지로 슥, 입가를 문질렀다. 그에겐 한심스런 활질이었지만 남들 눈엔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승희의 눈에도. 그녀가 흘겨보며 말했다

“좋았어요.”
“괜찮았어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묻자 우승희가 설핏 웃었다. 동후가 끼어들었다.

“한 번 더 보자는 거 보면 모르겠어? 게다가 카메라 돌린다잖아, 필름 값이 초당 몇 백 원인데. 확실하게


말만 안 했다 뿐이지, 이 역은 이미 동생거야.”

그리고 그는 대표에게 이 낭보를 전해야 한다며 핸드폰을 들고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석원에게 우승희가
고갯짓했다.

“따라와요, 옷은 화장실에서 갈아입으면 돼요.”

석원이 얼른 따라붙었다. 매화꽃이 흐드러진 붉은 치맛단을 밟지 않으려다보니 저절로 걸음이 처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석원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날름거렸다. 곤란했다. 마상에서의 흥분이 아직
가시질 않았다. 그는 요즘 들어 성질이 급해졌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검은 욕망이 뱀처럼 혓바닥 위를
기어 다녔다. 눈동자 속에도, 손가락 끝에도, 아랫도리에도 놈들이 그득 새끼를 까놨다. 텐 가렌
때문이다. 살맛나는 또 다른 인생. 텐 가렌에게는 질긴 인내 따위 필요 없다. 하룻밤 그런 인생을 살다
오면 가끔 ‘이석원’처럼 사는 법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는 우승희의 가냘픈 턱을 한 손에 우겨 쥐고
싶은 충동을 참다, 결국 대본을 뒤적였다.

----------------------

고종원 감독은 불도 안 붙인 담배필터를 잘근잘근 씹었다.


조금 전, 석원이 말위에 올라탔을 때. 고감독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눈앞의 그림을 풀샷으로 보고
싶다는 욕구가 저도 모르게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가끔 그런 배우들이 있다. 외모, 딕션, 액션의
호불호를 떠나서 분위기가 남다른 배우가 있다. 높은 개런티를 받는 톱 배우들의 반은 그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 반은 그런 분위기를 흉내 낸다. 그것을 사람들은 보통, ‘카리스마’라고 표현한다.

그는 충실한 관객이 되어 활을 매만지는 청년을 쳐다봤다. 이번 영화의 소품들은 모양새만 보기 좋게 만든


조잡한 물건이 아니라 소품 팀이 발로 뛰며 인간문화제 장인의 솜씨와 역사학과 교수의 고증을 더해
제작한 작품이었다. 그것이 그의 손에 들린 순간, 고감독은 수백 년을 타임슬립해 그 시대로
끌려들어갔다. 궁궐…연무장…아니,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그가 있는 곳은 땅거미가 지는 들녘이다.

그는 사냥을 준비했다. 활시위가 당져졌다. 굵직한 근육은 없었지만 길게 뻗은 팔과 화살 깃을 붙든


손가락이 그리는 선은 몹시도 매력적이었다. 노리는 것은 토끼나 노루 따위의 싱거운 것이 아니다,
인간이다. 그에게선 역겨운 피비린내가 났다. 분명히 선량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사납고, 가차 없는
사람이다. 얼핏 교활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꾸 시선이 간다. 목소리는 어떨까. 화가 났을 때는,
고통스러울 때는, 약해질 때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어났다.

말 등에서 내려온 이석원에게 대본을 떠안긴 건 그 때문이다. 제대로 된 연기를 보고 싶었다. ‘제대로’
된 연기를. 고감독은 대본을 펼쳤다. 그리고 78 번째 씬 지문을 펜으로 직직 그었다. 그리고 그 옆에
새로운 지문을 휘갈기기 시작했다. 웃음이 절로 났다. 안 써질 때는 작업실이 너구리굴이 되도록
줄담배를 태우고, 뱃살을 출렁이며 벨리댄스를 춰도 안 풀리던 시나리오가 쭉쭉 잘도 빠졌다. 채 십분도
되기 전에 씬 하나를 뜯어고친 그가 상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종수야, 이거 단인마님 갖다 줘라. 좀 이따 이대로 하라고 해.”

00015 용병(Mercenary)
=========================================================================
             
몇 번이나 워싱을 넣은 바지는 닳아빠진 쥐색이었다. 저고리는 여밈이 느슨해 배까지 훤하게 보였다.
거기다 개도 안 물어갈 너덜너덜한 신까지. 말이 좋아 왈패 부두목이지, 영 상태가 안 좋았다. 우승희는
그의 머리카락마저 죄 헝클어놓았다. ‘야성적’이라며. 동후는 ‘박력 있다’고 지껄였다. 둘 다 눈이 삔
게 확실했다. 석원의 눈에는 그저 바가지 하나 들면 동냥 가는 거지꼴이었다. 그는 화장실 앞에 선 채로
허탈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스타일리쉬한 부류는 못 되었지만, 그렇다고 거지처럼 입고 다니는 취미도
없었다. 미리 대본을 보지 않았다면 당장 이 걸레를 벗어던지고 싶었을 것이다.

78 번 씬 촬영장소는 대갓집이었다. 붐대를 등대삼아 찾아가자 이미 오디오, 조명, 카메라들이 스탠바이


되어 있었다. 구경꾼은 어째 아까보다 더 몰려든 듯 했다. 우승희는 한쪽 구석에서 감독과 얘길 하는
중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석원이 우뚝 멈췄다. 우승희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옆으로 알만
한 배우들이 줄줄이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우승희 옆에 앉아 긴 다리를 주체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 김승후였다. 왜 아까보다 구경꾼이 많이 몰렸는지 알 만 했다. 동후가 옆에서 속삭였다.

“계속 쳐다보면 코피 나겠다. 김승후에 이예진에 서상경에…거의 다 고종원사단이야. 고감독이 욕심이


많아서 한번 마음에 드는 배우를 낚으면 잘 안 놓는다더라고.”

그래서 신인 배우들은 물론이거니와 반편이 가수에 개그맨들까지 고감독 눈에 들려고 그렇게 애를


쓴다느니, 고감독이 맘만 먹으면 작품 흥행으로 버는 돈보다 뒷구멍으로 받는 돈이 더 많을 거라느니.
동후의 입에서 풍문이 줄줄 쏟아졌다. 어쨌든 요지는 이번 기회에 고종원 감독 눈에 들어서 실크로드 한
번 깔아보자, 아자아자 파이팅이다.

“무슨 사또 수청 드는 기생도 아니고….”


“사또라니! 사또라니! 고감독은 어사야, 암행어사!”

동후가 펄쩍 뛰었다. 예예, 했지만 석원의 속내는 심드렁했다. 암행어사가 아니라 나라님일지라도 관심
없었다. 그의 관심은 다른데 쏠려 있었다.

“그런데, 단인마님은 누구예요?”

동후가 얕게 턱짓을 했다.

“저기 끝에서 두 번째.”

뽀얀 비단 속적삼 위에 볼레로를 걸친 여자가 대본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78 번 씬을 석원과 함께


연기할 배우였다.

“이름이……장수현인가 그래. 김승후 소속산데, 쟤도 운 참 없어.”


“왜요?”
“얼굴 이뻐, 몸매 좋아, 연기도 곧잘 하거든. 그런데 안 떠. 일일연속극도 했는데, 동생만 해도 봐.
얼굴도 모르잖아. 지금이야 그래도 대형소속사니까 여기저기 단역으로 끼워 팔기라도 하는데, 계약기간
끝나면 재계약 못할걸?”

그런 처지 때문인지, 장수현은 어딘가 동정심을 유발하는 구석이 있었다. 강아지처럼 꼬리가 쳐진 눈매가
그랬고, 그 안에 처량하게 반짝이는 눈빛이 그랬다. 하지만 석원에게는 감흥 없는 것이었다. 카르투옴
대륙에선 고개만 돌리면 저보다 수십 배는 절박한 눈빛과 마주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장수현이 아니라
그녀가 맡은 역할, 단인마님이었다. 석원은 대본을 다시 한 번 들춰봤다. 78 번 씬은 좌의정의 사주를
받은 채늠과 왈패들이 정 8 품 문관을 사살한 후의 상황이었다. 패거리들이 하인들의 모가지를 자르고 있을
때, 피 맛보다 계집 맛에 굶주린 흑구가 안채를 찾아간다.

# 78. 안채

단인마님, 비녀를 목에 대고 덜덜 떨고 있다. 밖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들이 요란하다.


‘나으리, 나으리’, 끊임없이 정인을 부른다.
삐걱, 문이 열린다. 찬바람에 방안을 밝히던 촛불이 휙 꺾어진다.
단인마님, 고개를 들어 쳐다보곤 눈물을 뚝 떨어뜨린다. 흑구가 피칠갑을 한 단검을 들고 있다.

흑구 (웃으며)양반네들 모가지엔 기름기가 끼어서, 그런 걸론 거죽도 안 상해.

허리끈 푸르며 단인마님에게 다가가는 흑구. 반쯤 실성한 단인마님, 장지문 쪽으로 기어간다.
흑구, 단인마님 머릿단 붙들고 침상 위로 밀어 넘어뜨린다. 비명 지르는 단인마님.

흑구 어딜 가, 임자? 서방 찾으러 가?
단인 놔, 놔라, 놔라 이놈! 이런 짓을 하고도 살길 바라느냐?! 나으리께서 아시면…!
흑구 (혀를 차며, 귓가에 대고)그놈은 이미 황천길 건넜어, 이년아.

단인마님, 덜컥 저항을 멈춘다. 단검을 머리맡에 꽂는 흑구. 투박한 손길로 옷고름을 푼다.
단인마님의 파르르 떨리는 손이, 비녀를 꼭 잡는다.

비중 없는 악역의 최후답게 흑구는 고작 두 씬 후에 죽는다. 단인마님 비녀를 눈알에 꽂고서. 상관없었다.


마님 머리채 잡고 옷고름 한 번 풀어보는 것. 그것이 석원이 누더기를 걸치고 여기 서 있는 가장 큰
이유였으니까. ‘그놈은 이미 황천길 건넜어, 이년아…….’그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대사를 곱씹었다.

“석원씨! 의상 잘 어울리는데?”

고감독이 다가오며 말했다. ‘이놈도 눈이 삐었군.’하고 생각했지만, 표정만은 ‘그거 다행이네요.’다.


석원은 빙긋 웃었다. 이태혁과 이명환이 속 다르고 겉 다르다고 나무랄 게 아니었다. 속이 시커먼 걸론
그가 독보적이다.

“대본 봤죠?”
“예.”
“그 상황대로만 풀어요. 대사랑 지문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예?”

석원이 되묻자 고감독은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짓궂은 표정이었다. 그가 통통통 뛰어 감독 자리로


돌아가 버리자 석원은 동후를 쳐다봤다. 그 역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연예인 매니저로 뼈가 굵은 그도
영화감독의 속내까지 줄줄이 꿰고 있진 못했다. 결국 그가 해 줄 수 있는 충고는 ‘카메라 렌즈를
쳐다보지 마라.’, ‘장지문 오른쪽에 레일이 깔렸으니 움직이다가 오퍼레이터랑 안 부딪치게 조심해라‘
정도였다. 슬쩍 우승희를 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관객이었다.

“쓰리! 투! 원!”

감독이 외쳤다. 동후가 뒤로 빠지고, 누군가가 빨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단검을 쥐어줬다. 날을 퉁겨보니


단단했다. 소품이라 진짜 날은 아니었지만 머리맡에 꽃을 정도는 되었다.

“액션!”

탁! 슬레이트가 부딪쳤다. 구경꾼들이 숨을 죽이는 게 느껴졌다. 석원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장지문 쪽으로 걸어갔다. 개처럼 목매여 있던 시커먼 것이, 마치 잉크가 번지듯 그의 혈관으로
흘러들었다. 앞으로 잠시 동안, 그는 마음 놓고 ‘이석원’을 버려도 되었다. 흑구.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거나 약탈하는 게 업인 한양 뒷골목의 왈패. 어쩌면 이렇게 텐 가렌과 비슷한 구석이 많으신지.
대본의 내용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야 눈 깜빡이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드르륵’……그가, 흑구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멈칫했다.

“……?”
방 안에는 여자 대신, 구레나룻부터 턱까지 수염이 덥수룩한 카메라감독만 떡하니 서 있었다.
……흑구는 손잡이까지 진득하게 흐른 피를 툭, 털었다. 당황할 일은 아니었다. 작살로 찔러 죽여야 할
물고기가 싱싱하다는 건 오히려 기뻐할 일이다. 그는 이런 여흥을 반기는 사람이었다. ‘앙큼한 년…….’
소리 없이 달싹이며, 그는 좁은 방안을 훑었다. 불룩하게 솟아오른 비단이불. 다섯 보 떨어진 오른편엔
벽장이, 그 뒤로는 사군자과 시문이 어우러진 병풍이 펼쳐져 있었다. 숨을 곳이라곤 딱 그 세 곳뿐이다.
흑구는 문지방을 넘어 들어갔다.

원앙이 화려하게 양각된 벽장은 사람이 간신히 구겨 들어갈 크기였다. 칼등으로 벽장을 툭툭 두드렸다.
답은 없었다. 그는 벽장의 여닫이문 사이로 난 틈에 단검 끝을 집어넣었다. 천한 칼에 귀한 몸 상하지
않도록 느릿…느릿…칼날이 시커먼 틈을 가르고 내려갔다. 틈새 끝에 손잡이가 걸릴 때까지도 반응은
없었다. 벽장은 아닌 모양이었다. 흑구는 비단이불을 쳐다봤다. 걸음은 여전히 느긋하기만 했다. 애가
타들어가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어디 있어, 임자?”

대답도, 미동도 없었다. 그는 칼끝으로 이불을 들췄다. 안에 있는 건 커다란 목침 두 개였다. 이제 남은


곳은 병풍 너머뿐이다. 흑구는 손대신, 횡으로 비껴든 칼날로 병풍을 천천히 걷었다. 병풍이 반쯤 접혔을
즈음,

“…서방 기다려?”

그가 여상하게 말했다. 그 때.

까강!
병풍 너머에서 날붙이가 튀어나왔다. 비녀나 은장도 따위가 아니라 어린아이 키만 한 장검이. 야무지게
손잡이를 움켜쥔 건 단인마님이다. 시퍼런 눈에선 눈물이 출렁출렁했다.

“이, 이러고도 살길 바라느냐? 나으리께서 아시면…!”


“그놈은 이미 황천길 건넜어, 이년아.”
“……!”

뱀처럼 웃으며, 그는 그녀의 검 끝을 툭 건드렸다. 이를 아득 문 단인마님이 검을 내리쳤다. 위에서


아래로, 종으로, 횡으로, 찔렀다가 베었다가…아낙네의 손에서 펼쳐지는 검술이란 마치 발정 난 암고양이
꼬리 짓 같았다. ‘얼씨구’, ‘아이쿠’, ‘어허!’ 검을 피하는 몸보다 추임새 넣는 주둥이가 더 바빴다.
조롱당한 마님이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흑구는 아랫입술을 날름 핥았다 슬금슬금 아랫도리가
뻐근해져왔다. 그는 어깻죽지를 휘둘러 도끼질하듯 장검을 내리쳤다. 깡! 깡! 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커질수록, 분에 겨운 울음도 커졌다.

“아!”

결국 검이 떨어졌다. 황급히 이불위로 물러난 그녀가 목침을 주워들었다. 흑구가 멈칫 하자, 다른 손엔


큼직한 문갑(文匣)에, 머릿장까지 끌어안았다. 그녀가 너 어디 뒈져보라는 표정으로 목침을 내던졌다.
흑구가 간신히 피하자 이번엔 문갑을 번쩍 들었다. 그도 성질이 올라서, ‘니미럴, 얻어맞아봤자 좀
깨지고 말겠지’하고 달려들었다. 그 뒤론 한바탕 개싸움이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 잡겠다고 방 안이
온통 난장판이 되었을 때, 흑구가 그녀의 머리채를 와락 끌어당겼다. 비명을 울리며 마님이 나뒹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흑구가 냉큼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허벅지 안으로 잘록한 허리가 펄떡거렸다.
흑구는 숨을 몰아쉬며 킬킬거렸다. 귀한 계집을 타고 앉아보니, 말캉말캉하고 뜨끈한 게 진땀 뺀 값은
했다.

“저리 비—악!”

마님 낯 반쪽을 이불에 처박았다. 턱과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손가락에 힘이 꾹 들어갔다. 그녀가 손톱을


세워 그의 팔뚝을 할퀴었다. 흑구는 그녀의 얼굴 옆에다 단검을 콱 꽂았다. 날붙이를 코앞에서 본 마님이
우뚝 멈췄다. 즈즈즉, 흑구가 검 손잡이를 당겼다. 비단보를 쩍 가르고 내려온 칼날이 그녀의 콧등
위에서 멈췄다. 부릅뜬 뜬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흑구가 그녀의 옷고름을 풀며 속삭였다.

“어디 계속 해봐, 혹시 알아? 양반네들 목엔 기름기가 끼어서 이거 갖곤 거죽도 안상할지.”


“………이, 이제 못 하겠어요.”
“뭐?”

마님이 끅끅 서럽게도 울었다.

“이, 이, 이, 이제 못 하겠어요 …못 하겠어요…!”


“…아…….”

아차, 싶었다. 석원은 냉큼 그녀의 얼굴을 누르던 손부터 떼고 일어났다. 살기등등하게 꽂혀있는 단검도
휙 집어 내버렸다.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어 조금 더, 조금 더 하다 보니 너무 과했다. 장지문 밖을
돌아보자 고감독이 당황한 얼굴로 ‘커, 컷!’하고 외쳤다. 석원이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아팠어요? 어디 좀…….”

마님, 아니 장수현이 석원의 손을 탁 쳤다.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고 쏘아보는데 원망이 그득했다. 세상에
둘도 없을 불한당, 아동 성 추행범, 뭐 그런 걸 보는 시선이었다. 사실 그리 틀린 건 아니었지만. 석원은
항복하듯 양 손을 올렸다.

“정말 미안해요. 이런 게 처음이라 좀 지나쳤나봅니다. 대본이랑 상황도 다르고 해서…….”


“…….”
“좀 봐요, 어디 다쳤어요?”

그녀는 오히려 더 웅크렸다. 그때, 허겁지겁 달려온 고감독이 말했다.

“수현씨, 이번 거 아주 괜찮은데? 박진감 넘치고 좋았어.”


“아……감사합니다, 감독님!”

석원의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던 장수현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웃었다. 눈 화장 다 번진 꼬락서니를


가리랴, 풀어진 옷고름 다시 매랴, 감독 눈치 살피랴, 아주 바빴다. 석원은 그 사이 슬쩍 방에서
벗어났다. 즐거운 시간은 끝났다. 남은 건 뱃속에 뭉근하게 남아있는 불길을 식히는 것뿐이다. 제대로
한번 태워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져야 하는 안타까운 불길을. 주춧돌을 밟고 내려서자, 동후가 흐뭇하게
웃으면서 물티슈를 내밀었다.

“동생 정말 나쁜 놈 같더라.”
“그거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칭찬이죠.”

대답은 우승희가 했다.

“앞으로 여기서도 보겠네요.”


“그거야 아직 모르죠.”
“모르는 척은, 저기 표정 안 보여요?”

그녀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이명환이었다. 양궁을 배운데다, 말도 잘 타는 젊은 연기자는 우울해보였다.


옆에서 이태혁이 그의 축 처진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었다. 동후가 ‘지금 빨리 올라가야 서울에서 저녁
먹을 텐데.’, 하고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멘트를 쳤다. 어찌됐든, 애초 상황과는 달리 지금
잔칫집과 초상집의 차이는 누가 봐도 명확해 보였다. 그 때, 안채에서 나온 고감독이 이명환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이명환씨, 지금 석원씨가 한 왈패 흑구 역. 할 수 있겠어요?”


“……예?”
“느긋하게 연습 할 스케쥴 안돼요, 당장 오늘 촬영이라.”
“…시, 시켜만 주시면 정말 열심히 할 자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이명환은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고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번에 흑구 역에 이명환이 낙점됐다.
이명환과 이태혁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서로를 얼싸안기까지 했다. 그리고……석원과 동후는 말없이 그
광경을 쳐다봤다. 잔칫집에 풍악 끊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동후의 턱은 과장 좀 보태 쇄골까지 떨어진
것 같았다. 고감독이 말했다.

“이석원씨는 지금 의상 명환씨 주고….”

동후가 이유라도 물어봐야겠다고 벌떡 일어났을 때.

“그리고, 이태혁씨! 잠깐만.”


“…저요?”

갑자기 호명된 이태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가왔다.

“미안한데, 의상 좀 벗어줘.”
“……예?”
“이석원씨가 채늠 역할을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

석원은 눈동자를 굴려 이태혁을 쳐다봤다.


‘고감독, 이 병신새끼가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야?!’ 그는 정확히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양치기 팔콘입니다^^;
어느새 해가 바뀌어 1 년만에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쪽지 보내주시고, 쿠폰 보내주시며 기다려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한줄, 두줄 짬 날때마다 쓰면서 비축분을 만들어놓고 일에 여유가 좀 생기면 연재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연재를 멈추니 글이 더 진도가 안 나가고 계속 수정만 반복 되더군요. 속도가 느리더라도 독자님들과 함께
호흡하며 쓰는게 좋을 것 같아 다시 돌아왔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00016 용병(Mercenary)
=========================================================================
             
“오케이, 컷!”

찬 빗방울이 찔끔찔끔 떨어질 때쯤, 오늘의 마지막 씬이 끝났다. 동후는 얼른 얼음물과 수건을 챙겼다.
물론 ‘그의 배우’를 위해서다. 조금 전, 그는 스타더스트 김대표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그리고
강력히 말했다. 이지원 잘 달래서, 이석원이 반드시 전속 계약서에 도장 찍게 해야 한다고. 연기 한 번
안 해봤다는 놈이 단번에 드라마 최고의 캐릭터를 차지했다. 단역 오디션을 보러 왔다가 조연 자리에
엉덩이를 뭉개기까지 했다. 지금은 이석원이라는 이름 석 자,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지만 동후의 눈엔
이미 그가 금줄 친 돼지로 보였다. 내 배우 목마르랴 부랴부랴 뛰어가는 그에게, 김승후와 우승희의
대화가 꽂혔다.

“승희씨, 저 친구 이름이 뭐라고?”


“이석원씨요?”
“연극한댔나?”
“연기경험 없다고 들었어요.”
“……괜찮네.”

우승희가 웃었다.

“왜요, 견제해요?”
“견제? 내가 왜 귀찮게 다른 배우를 견제해.”

김승후가 검지로 제 뺨을 톡톡 두들겼다.

“이 얼굴을 가지고.”
“어련하실까.”

우승희가 코웃음을 쳤다. 동후도 코웃음을 쳤다. 한달음에 석원에게 달려간 그가 말했다.

“걱정 마, 동생.”
“뭘요?”
“한 일 년 돈 들이부어 관리하고 카메라 마사지 좀 받으면, 친엄마도 30 분쯤 쳐다봐야 아~내 새끼구나,
하게 되는 게 이 바닥이야.”
“……뜬금없이 무슨 소리예요? 그게.”
“아냐, 물 마셔. 물. 차가우니까 꺾어 마셔. 심장 놀래.”

석원의 땀을 닦아주며, 동후가 씩 웃었다.

----------------------

차가 BBC 방송국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차가운 빗발이 들이쳤다. 먼저 내린 동후가 얼른


우산을 들려줬다.

“피곤해서 어떡하냐. 저녁이라도 먹고 하지.”


“저녁은 무슨, 내일 아침 생방 전에 편집 끝내려면 바빠요.”

하루 종일 시간을 뺀 탓에 밀린 일이 많았다. 당장 편집실에 틀어박혀 AD 가 넣어주는 김밥이나 씹어야 할


판이다. 사식 받아먹는 죄수처럼.

“참, 장마 끝나면 바로 스케쥴 빡빡하게 잡힐 텐데…영화도 그렇고, 드라마도 대본 리딩 전에 준비할 게


산더미야. 그 전에 일 그만둘 수 있겠어?”
“프리랜서 좋은 게 뭔데요. 들어가세요, 형.”

안타까워 죽겠단 표정의 동후를 돌려보내고, 석원은 서둘러 건물로 들어갔다. 그가 일하는 시사교양국은
8 층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뾰족한 고성이 그의 귀를 찔렀다.

“언니! 정준희, 송미연, 임지현 다 까였어요!”


“뭐래니?”
“연기에 집중해야 되서 인터뷰시간 못 낸대요. 십분 아니라 십초도 안 된대요.”
“아주 꼴값을 떨고 계셔. 지들이 김시영이야? 우승희야? 아나, 됐다 그래라. 야, 김시영이랑 우승희
지금 영화 촬영하지? 걔들 전화해봐.”
“언니, 걔들은 예능도 안 하는데 우리 걸 해주겠어요?”
“야, 전화나 해봐, 전화 하는데 돈 드니?!”

같은 층에서 일하는 교양팀 작가들이었다. 명함에 교양국 작가라고 찍혀 나온다고 그들이 교양 있는


사람들이냐,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그녀들은 주기적으로 고함을 지르고, 이어폰을 내던지며, 테라스에서
줄담배를 뻑뻑 피워댄다. 교양은 섭외전화 할 때만 붙는 옵션이나 마찬가지다. 시사국 PD 인 석원이 전혀
시사적이지 않은 것처럼. 재빨리 교양국 자리를 벗어나려던 그가 덥석 뒷덜미를 붙들렸다.

“이 PD,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안녕이고 자시고. 아니, 여러분의 작은 손길이 어려운 이웃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이거 한마디가
그렇게 비싸나?”
“연예인들이 다 그렇죠, 뭐.”

방송사가 무조건 갑이었던 때는 까마득한 쥐라기 시절, 요즘은 방송사와 연예 기획사들 기 싸움이 팽팽한
세상이다. 등급별 기준표로 나뉘어 지급되는 출연료 방식은 이미 유물이다. 케이블이니 종합편성채널이니,
대기업과 언론사에서 채널을 늘릴 때마다 연예인 몸값도 뛰었다. 서로 모셔가려고 야단인 톱배우,
톱가수들의 출연료는 아예 상한선이 없다.

별 볼일 없는 중견배우나 신인, 중고신인들이야 여전히 싼 값이지만 방송국에서 원하는 건 기본적으로


시청자들이 ‘아는’얼굴이었다. 그러니 제작진들 사이에선 섭외지옥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고, 연예인
섭외능력이 되는 PD 작가가 대우받는 것이다. 석원은 시사 PD 였지만 연예인을 가족으로 둔 탓에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 편이었다.

“자기 섭외되는 친한 연예인 좀 없어?”


“…피치걸,”
“말고.”
“있었으면 제가 예능을 했죠.”

그에게 쏟아지는 다섯 쌍의 눈길이 ‘이런 쓸모없는 놈을 봤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석원은 쓸모없는
놈은 이만 꺼져주겠다는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파티션에 겹겹이 둘러싸인 시사국 끄트머리, ‘시사
데일리’ 제작팀이 그의 일터였다. 종이 넘어가고 자판 두들기는 소리만이 침묵을 깨우는 이곳이야말로
진정 교양 있는 공간,

“야, 임마! 너 제정신이야?!”

이지만, 이곳도 일주일에 한 번 샤우팅 데이가 있다. 매주 생방송 전 날. 바로 오늘이다.

“피해자 인터뷰가 없어?! 지하철에서 무차별 칼부림이 일어났는데, 부상자가 다섯 명이나 되는데 왜
인터뷰가 없어? 어젯밤 방송 3 사 뉴스엔 얼굴 까고 다 나오더만!”
“사건이 너무 커져서 피해자들이 몸 사린다고, 담당 형사들이 죽어도 피해자 연락처는 못 알려준다는데 별
수 있어요. 그 대신,”
“니미! 기자들은 알 거 아냐! 보도국에 물어봤어?”
“…걔들도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못 알려준댑니다.”

팀의 책임 PD 인 성부장(이라 부르고 성지랄로 통하는)이 큐시트를 냅다 집어던졌다. 담당피디의 얼굴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그 피 튀는 현장으로 석원이 발을 들였다. 성부장의 사나운 눈초리가 단번에
그에게 향했다.

“이 PD, 설마 지금 출근하는 거 아니지?”

‘맞다면 오늘밤 네 고막과 작별인사를 해야 할 거야’를 포함한 질문이었다. 석원이 입을 떼려 했을 때,


파티션 뒤쪽에서 팔이 불쑥 올라왔다.

“부장님, 이 PD 님 오전부터 계속 OK 컷 붙였는데요. 테잎 프리뷰가 좀 늦게 끝나서, 제가 잠깐 쉬다


오라고 했어요.”

잔머리까지 차분한 밤색 단발머리에 조근 조근한 목소리. PD 들 술자리에서 3 회 연속 ‘앞치마가 잘


어울릴 것 같은 작가’ 1 위를 차지한 김태란이었다. 그녀는 유일하게 성부장이 화를 안 내는 작가였고,
이번 주 석원의 담당 작가기도 했다. 그녀가 석원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석원은 튼튼한 구명줄을 냉큼
붙잡았다.

“정말이야? 오전에 편집방 열어보니까 빈 방이던데?”


“화장실 갔을 때 오셨나보죠.”
“세 번이나 열어봤는데?”
“……앞머리가 눈을 찔러서 잠깐 미용실에 좀…죄송합니다.”
“미용실……이 PD 여유 있어서 좋아. 실력에서 나오는 여유 아냐, 안 그래? 아침에 시사 할 때 기깔난
작품 하나 보여줄 거지?”

‘너나 잘 하세요’가 턱까지 찼지만, 씹어 삼켰다. 연예인들의 세상이야 어떻든 간에 프리랜서 PD 에겐


항상 방송국이, 본사 PD 가 갑이다. 그의 위치는 을 밑에, 병 아래, 정 쯤 된다. 방송 일 아예 때려치울
거 아니면 듣고 흘리는 게 답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해야 할 말도 있었다.

“부장님,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뭐야, 여기서 못 할 말이야?”

성부장이 툴툴거리며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조용한 회의실에 자리를 잡고, 석원은 직구를 던졌다.

“저 한 4 개월만 쉬다 왔으면 합니다.”


“……뭐, 임마?”
“죄송합니다. 저보다 연차 높은 땜빵피디 꽂아 놓고 가겠습니다.”

덧붙이자, 성부장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무슨 일이길래 4 개월을 빠져? 건강 문제야?”

석원은 잠시 말을 골랐다.

“마 뜨잖아, 새꺄. 뭔데?”


“종편 TVY 에서 잠깐 드라마를….”
“드라마? 드라마로 전향하게? 얌마, 드라마 판 그거 완전 노가다야, 노가다!”
“그게 아니라,”
“종편, 케이블, 암만 채널 늘어나도 그 바닥은 편성 못 받아서 기획만 하다 엎어지는 게 수두룩 빽빽이야.
개처럼 일하고 돈 못 받는 놈은 또 한 둘인 줄 알아?”

비아냥이 둑 터진 댐처럼 콸콸 쏟아졌다. 석원은 차 떼고 포 떼고 알맹이만 말했다.

“아뇨, 제작 말고 배우요.”
“……뭐?”
“누나 따라 오디션에 갔다가 어떻게 캐스팅이 돼서요. 쉽게 못 해볼 경험이고 해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성부장의 반응은 심플했다.

“미친놈.”
“부양가족도 없고 나이도 젊으니까 이런 짓도 해보지, 서른 넘으면 하겠습니까?”

석원은 속없는 놈처럼 웃었다. 성부장은 한참 더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


배우는 뭐 아무나 하나?’등등 쉰 소리를 늘어놓으며 석원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볼펜으로 성부장의
귓구멍을 꿰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 끝에, 땜빵 피디 꽃아 놓고 4 개월만 빠졌다 오는 것으로 합의를
끝냈다. 4 개월 후에 돌아올 자리 없어져도 서운해 하지 말란 말은 덤이었다. 석원은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회의실을 나섰다. 모두가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한번 웃고 말았다.
어차피 입 싼 성부장이 곧 ‘이석원이 이 정신 나간 놈이 연기를 하겠댄다.’라는 가사로 랩을 할 것이다.
책상 위에 놓인 프리뷰노트를 들고, 그는 고갯짓으로 김태란 작가를 불러냈다.

“내일 밥 살게요, 작가님. 아깐 고마웠어요.”


“뭘요, 프리뷰가 늦게 끝난 건 정말이에요.”

김태란이 손사래를 쳤다.

“내가 알아서 편집할 테니까 사무실에서 밤새 벌서지 말고 숙직실에서 잠 좀 자요. 아니면 집에


들어갔다가 새벽에 나오던가.”
“그래도 괜찮아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뭐는 나오겠지, 뭐. 욕은 내가 먹을게요.”

김태란이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서던 그녀가 멈칫하더니 말했다.

“참, 머리 바꾼 거 잘 어울리세요.”
“…고마워요.”

그녀가 잰걸음으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로 AD 김우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선배님, 연애하십니까?”
“놀고 있다.”

석원은 심드렁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김우영이 그의 옆구리를 살살 찔렀다.

“에이, 김태란 작가님이 선배님한테 관심 있는 거 모르세요?”


“알지.”

우우~김우영이 야유했다. 석원이 도끼병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피디에겐 팔백 원짜리 에너지 드링크


사주면서 그에게는 오천 원짜리 라떼를 주고, 다른 피디완 맞담배 잘도 피우면서 그와 일할 때만 페브리즈
냄새 풍기는 일이 몇 번씩 반복되다보면 오히려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하다. 요 며칠 태도가 더 노골적이라
석원도 고민하던 참이었다. 만나볼까, 말까. 원체 숨길 게 많다 보니 그는 사람과의 관계에 신중한
편이었다. 연애는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많은 관계다. 섹스는 잠깐이고 피곤함은 길게 간다. 그는 욕망
앞에 늘 궁핍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예전만큼 절실하진 않았다. 한참 생각하다가, 석원은 찰싹 뺨을 한
대 쳤다. 이런 고민에 빠져있기엔 오늘은 좀 많이 바쁜 날이었다.

----------------------

그는 날갯죽지를 쭉 뻗었다. 어깨와 등짝에서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새벽 4 시였다. 저녁 7 시부터 거의


10 시간 가까이 컴퓨터 화면만 쳐다봤다.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창밖엔 여전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석원은 샌드위치와 자일리톨 껍질, 대용량 에너지드링크를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전화기를 들었다.
몇 번 신호가 가고, 김태란이 전화를 받았다.

“작가님, 파인 합시다. 10 분 후에 내려와요.”


「알았어요.」

자다 깼는지 목소리가 낮았다. 석원은 적막한 로비 자판기에서 비타민 워터 두 병을 뽑았다. 한 병은


김태란 몫이었다. 돌아가다가, 그는 흡연 테라스 앞에서 멈췄다. 빗소리나 들으면서 잠을 쫓을
생각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빗방울이 그의 뺨에 부딪쳤다. 오늘밤은 열대야도 한풀 꺾여, 물을 잔뜩 마신
바람이 시원했다. 그때, 커다란 화분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옘병, 배우를 하시겠댄다.”

둘이었다. 담배연기를 흘리는 쪽은 김태란이었고, 같이 있는 건 새벽 뉴스 팀의 작가였다.


“배우?! 웬일이니, 웬일이니. 지랄도 풍년이다, 야. 사람 FM 인 것 같더니 의외성 한 번 대박이네.”
“내 말이.”
“너 혹시 고백 했어?”
“할 뻔 했지. 큰일 날 뻔 했지.”

김태란이 피다만 담배를 집어던졌다.

“잘 됐다, 야. 애초에 프리랜서 PD 뭐 볼 거 있냐? 곤조 부려, 수입 불안정해, 밥 먹듯이 외박해.


방송일 하면서 절대 연애로 엮이면 안 될 족속이 첫째가 프리피디, 둘째도 프리피디, 셋째는 매니저 아냐,
정신 나간 년아.”
“그래도 사람은 괜찮았는데……하필 걸려도 연예인병에 걸리고 지랄이야.”
“야, 아깝다 생각하지 말고 툭툭 털어. 너 어차피 하반기엔 예능프로로 옮길 거라며. 거기서 다시
찾아봐.”
“옘병, 올해 연애해서 내년에 시집가려고 했더니만……텄네, 텄어.”

석원은 자리를 떴다. 결론은, 앞으로 신경 쓸 일이 하나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비타민워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팔콘입니다^^
지난편 추천, 코멘트 달아주신 분들, 서평 보내주신 분들,
그리고 쿠폰 보내주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타나, 내용상 오류가 있으면 언제든 지적 부탁드립니다.


즐거운 설 연휴 되세요^^

00017 용병(Mercenary)
=========================================================================
             
열 두어 팩쯤 남은 양파즙이 상자 째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스타더스트 엔터테인먼트 김상일 대표는
홀가분한 얼굴로 손을 털었다. 이제 양파즙은 안녕이었다. 그는 심신의 평화를 찾았다. 요 한달. 회사의
트러블메이커인 이지원이 잠잠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팬이 회사 정문에 빨간 스프레이로 ‘죽어, 썅년’
이라고 팬레터를 써놓긴 했지만, 그 정도야 사건사고 축에도 못 꼈다.

홀가분한 얼굴로 앉아있던 김대표가 눈을 번쩍 떴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워커 굽이 내는


요란한 발소리. 윤동후가 분명했다. 김대표는 양파즙을 찾아 헤매는 손을 애써 진정시켰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아니나 다를까 건달처럼 앞머리를 쓸어 넘긴 윤동후가 들어왔다.

“꼬라지하고는……무스 발랐냐?”
“땀이거든요. 오전 내 민속촌에 있다가 왔는데, 바깥 날씨 완전 찜통이에요. 좀 있음 9 월인데 대체
언제까지 무더위야?”
“…임마, 니가 민속촌에 갈 일이 뭐가 있어?”
“아, 석원이 한 달째 거기서 영화촬영 중이잖아요.”

김대표가 이마를 짚었다.

“야, 이 호구새끼야. 네가 걔 로드야? 뭘 그렇게 쫓아다녀? 너 안 그래도 내가 들은 게 많아, 임마.


회사 돈으로 이거저거 다 해다 바치고 있다며?”
“그래서 말인데, 석원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동후가 은근하게 물었다.

“어쩌긴 뭘 어째, 계속 배우 하겠다고 하면 좋은 기획사 소개시켜줘야지. UJ 엔터나, 드림하우스 어때?”


“어떻긴 뭐가 어때요, 아깝게 왜 다른데 보내요. 드라마나 영화도 우리가 계약 도와줬고…….”
“그거야 걔가 홀몸이니까 그런 거지, 미우나 고우나 이지원이 우리 새낀데 걔가 이지원이 동생이니까.
어차피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 쪽 인프라도 없잖아, 임마. 생짜 신인 배우를 어떻게 키워.”

고개를 숙인 동후가 한숨을 쉬었다. 갑갑하게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풀어 뒷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꾹꾹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김대표의 핸드폰이 울렸다. 동후가 보낸 문자였다. 세
명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있었다. 김대표도 익히 아는 인물들이었다. 동후는 등으로 문을 밀며 말했다.

“전 그놈 아까워서 못 보내겠습니다. 지난 한달 동안 석원이 도와준 사람들이니까 대표님이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세요. 이석원이, 어떠냐고.”

김대표의 핸드폰을 삿대질한 동후가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꼿꼿이 펴고 전화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곤 휙
나가버렸다.

“윤동후, 저 시러베 잡놈의 새끼, 저거…….”

김대표는 주섬주섬 쓰레기통을 뒤졌다. 그리고 양파즙 한 팩을 원샷했다. 이지원이 잠잠하다 했더니
이번엔 윤동후가 그의 혈압을 올리고 있었다. 그는 복잡한 눈으로 핸드폰을 바라봤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손아민, 뮤지컬배우 박우진, 무술감독 김대경.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이름들이었다.

김대표는 슬그머니 문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조용했다.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곧 깍쟁이 같은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네.」
“아이고, 아민씨. 저 스타더스트 김상일입니다.”
「김대표님? 어쩐 일이세요?」

큼큼 헛기침을 하며, 김상일 대표가 물었다.

“그, 이석원씨 말입니다…요즘 어떤가 싶어서…….”

----------------------

손아민은 연예인 전문의 출장 아티스트였다. 금발에 자주색을 섞은 투톤염색에, 검은 시스루. 12 센티 킬


힐을 사랑하는 그녀를 사람들은 썅년이라고 욕했다. 그래도 그녀의 샵은 늘 예약이 쏟아졌다. 어차피 이
바닥 남자들은 다 썅놈이고 여자들은 다 썅년인데, 그녀는 능력 있는 썅년이었으니까.

그녀가 이석원을 처음 만난 것은 한 달 전, 오랜 단골인 이지원 때문이었다. 당장 촬영이 잡힌 민간인이


있으니 어떻게 좀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이석원을 면전에 뒀을 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연기 엄청 잘
하나 보네.’

그는 훤칠하고, 웃으면 상냥해 보이는 남자였지만 연예인을 할 만한 페이스는 아니었다. 요즘처럼 CD 에


가려지는 작은 얼굴과 8 등신의 스키니한 몸매가 유행인 때에는 더더욱. 그들에 비하면 이석원은
얼굴이라고 달고 다닐 수도 없었다. 물건 출하하라고 난린데, 눈앞의 물건은 반품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대뜸 물었더랬다. ‘이석원씨,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라고.

‘스물여덟입니다.’
‘피부 나이는 사십대예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가 거울을 쳐다봤다. 그녀는 너 같은 놈은 거울 볼 자격도 없다는 투로 말했다. ‘스크럽이나 필링은


주기적으로 하세요?’, ‘영양팩은요?’, ‘스팀 타월로 보습은 하시겠죠.’, ‘설마 세안할 때 비누 쓰시는
건 아니죠?’, ‘자차는 SPF 가 몇이에요?’
그는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차가 뭔데요.’라고 되묻기까지 했다. ‘
자차가 뭐냐고? 자외선 차단제를 몰라? 혈관 속에 정자가 흐르는 마초도 그건 알걸. 요즘 세상에 아직도
이런 덜떨어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있어?’…라고, 아민은 속으로 경악했다.

‘이석원씨, HD 시대예요. 화장품 CF 단골로 찍는 여배우들도 메이크업할 때 둘이 달라붙어서 비비를 1mm


씩 펴 발라요. 잡티, 모공. 이젠 컨실러로도 커버 안 됩니다. 영화는 이미 촬영 중이고 드라마는
리딩까지 한 달 남았다면서요? 지원씨 부탁이라 맡긴 했지만, 솔직히 갈 길이 험난하네요.’

그 순간 이석원이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의 얼굴이 아까완 달리 딱딱했다. 상냥해보이던 인상에서


웃음기가 빠지니 어딘가 비틀려보였다. ‘설마 때리려는 건 아니겠지?’, 라는 황당한 걱정을 했을 만큼.
이석원은 그저 뒷목을 꾹꾹 주물렀다. 매우 피곤하다는 듯이. 그 날 이석원은 웃는 얼굴로 돌아갔지만
그녀는 이상하게 꿈자리가 사나웠다.

어쨌든 그것은 한 달 전의 일이다. 그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요즘은 그와도 꽤 친해져서, 수다를


떨다보면 메이크업 시간이 훌쩍…….

「…아민씨, 손아민씨?」
“아, 이석원씨 어떠냐고 물으셨죠?”

옛날생각에 푹 빠져있던 아민이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배우 다 됐죠.”

----------------------

김상일 대표는 의심스런 눈길로 수화기를 쳐다봤다. ‘이 썅년이 누굴 칭찬할 여자가 아닌데…….’그는
손가락을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그리고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이번엔 망설임 없이 두 번째 번호를
눌렀다. 은퇴한 뮤지컬배우이자, 연기교습선생인 박우진.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47 세. 167cm 에 102kg.
겉보기엔 딱 온화한 러시아 인형처럼 생겼지만,

“여보세요? 아이고~선생님!”

그의 별명은 사드 후작님이었다.

----------------------

박우진은 김상일 대표의 전화를 받고 한 달 전 일을 떠올렸다. 윤동후가 이석원을 옆구리에 끼고 와서 꼭


좀 부탁드린다고 말했을 때, 박우진은 생각했다. ‘연기에 목숨을 건 총각인가보군.’

스물여덟 살은 연예계에 발을 들이기엔 늦은 나이었다. 그리고 평범하게 직장에 다니던 사회인이 일을


그만두고 연기를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재능이 없다면 한시라도 빨리 생업으로 돌아가는 편이 나으니까. 그래서
그는 첫날부터 이석원에게 대본을 내밀었다. 술래잡기의 대본이었다.

‘제일 마음에 드는 씬으로 한번 연기해 보세요.’


‘여기서요?’

그는 조금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입에 모나미 볼펜이나, 알사탕을 넣고 발음연습을 하던


연습생들이 미어캣처럼 이석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입으로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박우진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왜, 사람들 앞에선 못하겠어요? 그럼 화장실에서 할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는 선선히 대본을 들었다. 그리고 박무경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했다.
박우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와 생각해봐도 사실, 그건 연기라기엔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특히 연습실 안을 둘러보며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머리카락 보이면, 가죽이 벗겨질 거야.’
라고 흥얼거렸을 때는 진심이 아닌가 싶었다.

구경하던 연습생이 ‘혹시 누구한테 그런 말 해봤어요?’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이석원은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질문을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이런 말을 어디 가서 해요?’라며.

어쨌든 그 이후로 그가 이석원에게 가르친 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이미 자연스러운 연기자를 잘못


건드렸다간 나쁜 습관만 붙는다. 그가 가르친 것은 명확한 발음과 발성이었다. 어려서 육상을 했다더니
폐활량이 좋아서, 복식호흡도 금방 따라왔다. 그는…….

「……선생님?」
“아, 김대표님.”

박우진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통화중인 것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이석원씨가 배우로써 재능은 좀 있습니까?」


“많습니다.”

그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

김상일 대표는 수화기를 든 채로 침묵했다. 손아민도 그렇지만, 이 깐깐한 양반은 정말 쉽게 칭찬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찍 손자를 봤다더니 마음이 넓어졌나?’ 김상일 대표는 헛기침을 하곤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 지원이는 요즘 어떻습니까?”


「…….」
“……선생님?”
「김대표님. 왜 자꾸 안 되는 애한테 억지로 연기를 시킵니까. 지원이 노래시키세요. 구미호한테 싱싱한
간을 먹여야지, 풀을 캐 먹이니 어디 용을 쓰나.」

전화가 뚝 끊어졌다. 박우진은 지극히 제정신이었다.


이제 남은 번호는 하나였다. 일산 JB 액션스쿨의 무술감독 김대경. 지금 이석원이 찍는 영화의
무술감독이기도 했고, 김상일 대표와도 예전 뮤직비디오 촬영으로 안면을 튼 적이 있었다. 김대표는
마른침을 삼키며 번호를 눌렀다. 이제는 그가 궁금해서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

김대경 감독은 스턴트로 시작해 감독입봉한지 십년이 넘은 베테랑이었다. 그리고 고종원감독과 내리 세


작품을 같이 한 끈끈한 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종원감독이 이석원을 ‘신인에, 액션연습도 처음이고,
당장 촬영들어가야 해서 연습할 시간이 거의 없는 친구지만 잘 좀 부탁한다.’며 소개했을 때. 그는
고감독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미 촬영 중인 배우를 까고 들어와? 이 새끼, 이거. 집에 돈
꽤나 있나보네.’

상식적으로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액션씬이 많은 배우들은 크랭크인 전에 한 달 이상 연습을 하고


시작한다. 욕심 많은 배우들은 세 달, 네 달도 했다. 그렇지 못하면 씬당 많게는 수십 개가 되는
동작들을 소화하기가 버겁기 때문이다.

배우가 버벅대면 고생하는 건 함께 합을 맞춰야하는 무술팀이었다. 최악의 경우 사고가 나기도 했다.


그러니 이석원이 무술팀으로부터 고문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얻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이석원에게 가르친 것은 매우 기초적인 동작이었다. 칼을 들고 바로 서고, 베고, 찌르는. 그리곤


조금 더 리얼해 보이는 법. 그의 신체비율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자세를 찾는 법. 와이어와 트랜블린을
응용하는 법 같은 스턴트 무술 정도.

그 후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봐줘야 하는 배우는 한두 명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보름쯤


지나서, 갑자기 그가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애들에게서 ‘그놈 그거, 아주 웃긴 놈.’이라는
평가를 들었을 때부터였다.

이석원은 자주 이상한 짓을 했다. 그와 무술팀이 합을 맞추는 모습을 보면 ‘저 새끼, 왜 저래?’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분명 그가 가르치고 알려준 동작인데, 이상한 동작이 섞여있었다. 그럴 때는 대부분
아주 얄궂은 결과물이 나왔다. 무술팀 전원이 웃느라 뒤집어질 만큼.

하지만 가끔은, 그도 놀랄 만큼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 그런 것은 바로 촬영에 써먹었다. 그림이 아주


죽여줬다.

며칠 전, 그는 직접 이석원에게 물었다. 검도나, 비슷한 무술을 배운 적이 있느냐고. 액션 욕심이 많은


배우들은 따로 배우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석원은 미묘한 표정으로, ‘글쎄요, 어릴 때 파리채는 좀
휘둘러봤죠.’ 라고 대답했다.

어쨌든 이석원이 계속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명확했다. 고문관이라는 별명도 옛날 일이었다. 그는 곱게


큰 것 같은 외양과는 달리 넉살이 좋은 편이었고, 열심이었다. 그런 배우를 싫어하는 무술팀은 없다.
물론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석원…….”
「예, 어떻습니까?」
“…꽤 괜찮은 액션배우가 될 겁니다.”

확신하듯, 김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

김상일 대표를 필두로, 팀장, 실장, 로드매니저까지 스타더스트의 모든 직원이 비좁은 회의실에 집합했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전체회의였다. 다들 엉덩이 깔고 앉자마자 기획안부터 쳐들었다. 이곳은
정글이었다.

“BBC 랑 여성가족부가 같이 청소년 자원봉사자들 시상을 한다는데, 서림이한테 엔딩공연하고 시상을 좀


해달랍니다. 한 시간 반 생방송, 페이는 130 이고요. 방송 취지도 좋고, 서림이 이미지에도 나쁠 거 없을
거 같은데요.”
“파트너가 누군데?”
“BBC 부사장이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중에 한 명이요.”
“BBC 부사장으로 해달라고 해.”

그 다음으로 잘 안 팔리는 락 밴드 도요의 ‘재즈 콜라보레이션 콘서트’제의, 지상파 아침방송의 인터뷰,


종편 토크쇼 게스트 등의 기획안이 차례대로 테이블에 올라왔다. 그리고 그 다음은 완성되지도 않은 한
장짜리 가안이었다.

고딕체로 커다란 제목과 기획의도, 픽스 된 출연자, CP, PD, 작가 리스트만 줄줄이 적혀있는. 하지만
그 한 장이 내내 심드렁하던 김대표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PBS 추석 특집 예능?”
“네, 파일럿이지만 일단 공중파고. 시청률 괜찮으면 바로 레귤러로 편성될 겁니다. 김주한 PD 랑 홍선미
작가 기획이니까요. 라인업도 괜찮고요. 편성나면 주말 1 시간짜리 완전 날예능입니다.”
“그 쪽에서 섭외 들어온 거야?”
“아뇨, 플랩에서 일하는 후배가 섭외전화 받았다길래, 제가 찾아가서 김주한 PD 만났습니다. 마침
이미지 소비 안 한 신선한 얼굴을 찾는다고 해서 세인이 들이밀어 봤는데,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고요.”

동후와 동갑인 최지호 실장이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수십 명의 배우와 가수가 소속된 대형기획사 플랩


엔터테인먼트 소속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 비좁은 회의실 한 편에 눌러앉았다. 플랩에서 튕겨 나온
이유는 저 거만한 콧대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인맥, 실력, 수단까지 더럽게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김대표는 이미 그를 창립멤버 대하듯 하고 있었다.

“고생 많았어. 내일 나랑 같이 PBS 한번 들어가서 얘기해보자고.”

김대표가 기획안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테이블 한 바퀴를 빙 돌아 이제 동후의 차례였다. 동후가 수첩을
펴며 말했다.

“피치걸 수지누나랑 이리누나는 이번에 뮤지컬….”


“그건 알아, 임마. 또 없어?”
“……지원누나가 종편 TVY 거, 술래잡기 OST 한 곡 하기로 했습니다. 음악감독이 지금 데모 들어온 것
중에서 고르는 중이라니까, 다음 주 중에 녹음 들어갈 겁니다.”
“그래, 이번에 그 곡으로 제발 안티 좀 줄이라고 해.”

김대표가 혀를 끌끌 찼다. 동후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석원이는….”
“그 사람은 우리 회사 소속 아니잖아요.”

최지호가 딴죽을 걸었다. 그는 얄미운 은테안경 너머로 동후를 쳐다보며 말했다.

“배우는 준비 없인 손 안대는 게 좋아요. 제가 플랩에 있을 때 몇 번 맡아봤는데, 99% 쪽박이더라고.


막말로 가수나 개그맨은 일 없으면 행사라도 뛰지, 배우는 일 없으면 굶어죽어요. 걔들이 왜 그렇게
스폰서, 스폰서, 하는지 모르시나.”
“…그런 얘기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사람들이랑 하시고.”

동후가 대꾸했다. 최지호가 피식 웃었다.

“윤동후씨. 꿈꾸지 맙시다.”


“혼자 숙면 하세요. 난 꿈 꿀라니까.”

김대표가 테이블을 쾅쾅 두들겼다. 동후와 최지호의 입이 다물렸다. 김대표가 한숨을 푹 쉬었다.

“윤동후, 너 이 새끼. 책임지고 10 년짜리 계약서 받아와. 9 년도 안되고, 9 년 6 개월도 안 돼. 10


년이야.”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10 년은 개뿔….’하고 생각하면서도 동후는 넙죽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걔가 연기를 계속 하긴 한대? 너 혼자 김칫국 마시는 거 아냐?”


“그건 두고 보세요.”

동후가 말했다.

00018 용병(Mercenary)
=========================================================================
             
그는 숨이 푹 죽어있는 베개에 얼굴을 박은 채로 깨어났다. 속눈썹 밑으로 실거미가 툭 떨어졌다.
달아나려는 거미를 손가락으로 비벼 죽였다. 다시 카르투옴으로 돌아왔다. 그는 텐 가렌이었다. 너저분한
용병무리와 미하라로 떠나는 중이었고, 긴 여정도 이제 끝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달랑 침대 하나 놓인 방이었다. 욋가지에 흙을 발라 만든 벽에는 거미줄처럼 금이 쩍쩍 가 있었는데 그
틈으로 흙부스러기와 햇살이 떨어졌다. 문 옆엔 밤사이 뿌옇게 촛농이 내린 놋쇠촛대가 걸려있고, 그
아래에 깡마르고 털이 지저분하게 엉킨 개가 엎드려있었다. 침대 바로 밑에는 낯익은 가죽배낭과 활,
화살통. 그리고 그가 조급하게 벗어던졌던 옷가지와 허리띠 따위가 보였다. 아, 하고 텐은 생각했다.
이곳은 매음굴의 객실이었다.

그는 시트를 들추었다. 어쩐지 허리 아래가 갑갑하다 했더니, 벌거벗은 금발머리 여자가 그의 허벅지를
베고 잠들어있었다. 숨소리가 아랫도리를 간지럽혔다. 여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옆구리에도 따스한
젖가슴이 닿아있었다. 빠르게 잠이 달아났다. 그 대신 덮쳐온 것은 강렬한 허기다. 머릿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요망한 놈이 ‘나 일어날 차롄가?’하고 대가리를 들었다. 놈은 늘 그렇듯 게걸스럽게 요구했다. ‘
여긴 카르투옴이야. 어서 즐겨보자고’. 물론 텐은 흔쾌히 놈의 손을 잡았다.
그는 두 여자를 번갈아보곤, 허벅지에 달라붙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끌어당겼다.

“야, 야. 일어나.”
“아! 아파요…….”

새벽닭이 울 즈음에나 간신히 잠이 든 여자가 눈을 떴다. 그녀는 피로한 얼굴로 텐을 노려보더니, 곧


그의 아랫도리를 날름 핥았다. 텐은 다시 그녀의 머리카락을 당기며 말했다.

“우유하고, 먹을 것 좀 싸놓으라고 해.”


“네?”
“풀이나 감자 같은 것 말고 고기. 없으면 계란이라도 삶든가. 한번 하고 나갈 거니까 빨리.”

텐은 멍한 금발머리를 발로 밀쳐버렸다. 그리곤 그녀가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지든 말든, 다른 여자의


다리를 벌리고 들어갔다. 굽실거리는 살구색 머리카락에 치즈처럼 촉촉한 입술을 가진 여자였다.
비등비등 했지만 이쪽이 약간 더 미인이었고, 장사 수완이 좋았다. 그녀의 눈초리에선 졸음대신 꿀물이
뚝뚝 떨어졌다. 텐은 매끈하게 뻗은 종아리를 팔뚝에 걸쳤다. 밤사이 녹아나게 놀아난 덕분에 준비도
필요 없었다. 곧바로 침대가 덜컹덜컹 흔들렸다.

그제야 금발머리가 우물쭈물 일어섰다. 텐은 돈주머니에서 모리울 은화 한 냥을 꺼내 내밀었다. 돈을 물


쓰듯 썼지만 아직 주머니엔 은화가 제법 있었다. 금발머리가 넋 빠진 얼굴로 돈주머니를 쳐다봤다. 텐이
그녀의 뺨을 때리며 말했다.

“내가 뭐랬어?”
“아……고기. 우유랑.”
“그리고?”
“빨리.”

텐이 손짓을 하자, 금발머리가 냉큼 은화를 받아 뛰어나갔다.

“돈 많이 벌었나 봐요?”

아래에 깔린 여자가 눈이 또릿해져선 물었다. 텐은 돈주머니를 흔들었다.

“왜, 보기만 해도 좋아?”


“그럼요.”
“그럼 너도 재미 봐.”

그는 돈주머니의 가죽 끈을 반쯤 풀어서 늘어뜨리곤, 목에 걸었다. 그러자 허리짓을 할 때마다 무거운


주머니가 여자 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그녀는 뚫어져라 주머니를 쳐다봤다. 절그럭, 절그럭, 돈 부딪치는
소리가 날 때마다 아래가 잘근잘근 씹혔다. 여자는 욕심 사나운 눈을 한 주제에 시종일관 순한 암소처럼
굴었다.
“응, 응! 빨리 가야 돼요?”

여자가 텐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텐은 젖냄새가 나는 가슴을 깨물며 속삭였다.

“자유시간이 다 됐어, 늦으면 일행을 놓치거든.”


“노예를 보내서 좀 기다려달라고 전하면 되잖아요.”
“용병한테 그런 게 어디 있어. 아직 선금을 받은 것도 아닌데, 그냥 버리고 가는 거지.”
“그래요?”
“그래.”

여자가 텐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만졌다. 텐은 흠칫 놀랐다. 누군가 떠오른 탓이다. 이지원도 자주 그의


머리카락을 이렇게 헝클여놓곤 했다. 그는 여자의 손을 떼어내고 그녀를 내려 봤다. 그녀는 창녀였다.

텐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허리를 더듬었다. 가슴은 무방비하게 출렁거렸지만, 그녀의 허리는 검보라색
공단 코르셋으로 조여져 있었다. 양 손으로 여자의 납작한 배를 눌렀다. 신음소리 대신 가쁜 호흡이 터져
나왔다. 손목에 체중을 실었다. 목덜미에 핏대가 서고 발뒤꿈치가 그의 등을 때렸다.

마침내 그녀가 ‘제발 그만’이라고 애원했을 때. 텐은 그녀의 몸속에 죽은 핏덩이 같은 쾌감을 토해냈다.
그는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뭔가가 어깨를 스쳤다. 뒷목에서부터 어깨로 뜨끈한 것이 흘렀다. 텐은
벼락같이 화살을 꺼내 여자의 목을 찍었다. 동시에 그의 옆구리에 또 한 번 불이 붙었다. 이번엔 끔찍한
고통도 함께였다. 악소리가 절로 났다. 텐은 구르듯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배낭을 뒤져 하급포션 한 개를
모조리 마셨다. 겨우 숨구멍이 트였다.

고통이 좀 가시자 머릿속이 냉정해졌다. ‘뭐가 날 찌른 거지?’ 텐은 침대를 쳐다봤다. 여자는 목에


화살을 꽂은 채로 피거품을 게워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피 묻은 단검이 들려있었다. 그의 피였다.
텐은 단검을 빼앗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대를 샅샅이 살폈다.

침대 틀과, 양털과 귀리껍질을 넣은 두툼한 깔개 사이가 살짝 벌어져 있었다. 깔개를 들추자 손도끼와,
끝을 뾰족하게 갈아놓은 쇠꼬챙이가 나왔다. 쇠꼬챙이의 끝이 거무튀튀했다. 녹이 슨 것처럼 보이지만,
만져보니 말라붙은 피였다.

아랫도리로 남자를 물어 죽이는 게 그녀의 부업이었던 모양이다. 만약 텐이 그녀의 배를 압박해 힘을 빼


놓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당했을 지도 모른다. 텐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용케 아직도 죽지
않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애원하는 눈빛이었다. 텐은 배낭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하급 포션을 꺼냈다.
그리고 그녀의 목 위로 살짝 기울였다. 톡, 톡, 포션이 한 방울씩 떨어지자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너 수배범이냐?”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텐은 포션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사납게 말했다.

“수배범이냐고 묻잖아.”

하급포션이 아니라 중급포션을 쏟아 부어도 여자를 살리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매달릴
것이라곤 이 포션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아주 잘게 끄덕거렸다. 텐은 포션을 다시 배낭이 넣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내려놨던 단검을 집었다. 그녀는 곧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 번 손맛을
느끼고 싶었다.

텐은 여자의 머리를 끌어안고 목을 뒤로 젖혔다. 눈물과 핏물이 뒤섞여 그의 손목을 적셨다. 텐은


단검으로 여자의 뺨을 찔렀다. 뺨은 이미 시체처럼 창백했다.

“네 몸값 얘기하기 전에 그 얘길 먼저 하지 그랬어. 그럼 더 오래, 재밌게 놀았을 거 아냐.”


그는 몹시 아쉬운 표정으로 화살을 뽑았다. 목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몸부림치는 나신을 단단히
안은 채, 단검으로 그녀의 목젖을 그었다. 살가죽이 쩍 벌어지고 핏물이 철철 쏟아졌다. 끈질기게
이어지던 숨은 단번에 끝이 났다. 텐은 피투성이 손으로 아랫도리를 잡았다. 놈은 일찌감치 일어서있었다.
몇 번 문지르기도 전에 흘러나온 찌꺼기가 여자의 빛바랜 눈동자를 덮었다.

텐은 쾌감으로 어깨를 떨었다. 기분이 아주 끝내줬다. 섹스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쾌감이었다.

침대에 달라붙어 피를 핥아먹고 있는 개를 밀어내고, 그는 축축한 옷을 껴입었다. 혹시 몰라 용병패는


허리춤에 걸었다. 그 후엔 침대깔개 밑에 있는 손도끼로 여자의 목을 잘라냈다. 한 손엔 활과 화살을
들고, 다른 손엔 모가지를 든 채로 객실을 나섰다.

문 앞에는 두 명의 창녀와 덩치가 좋은 남자 넷이 서 있었다. 얼어붙은 표정들이 봐줄 만 했다. 그


중에는 아까 쫒아낸 금발머리 여자도 끼어 있었는데, 텐이 주문한 음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이
기다린 것은 텐이 아니라 그의 돈주머니였을 것이다.

텐은 피 묻은 입술을 핥았다. 창녀들이야 그렇다 쳐도 넷이나 되는 남자들은 좀 부담스러웠다. 그들은


모두 칼을 차고 있었고, 마음껏 활질을 하기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가 뜸을 들이는 사이 창녀들은
눈치를 보다 뿔뿔이 도망쳤다. 잠시 후. 텐은 뱃살이 두꺼운 중년 남자에게 여자의 머리통을 내밀었다.

“이 년 수배범이던데?”
“무슨 말씀인지…….”
“살인수배범이라니까.”

중년 남자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텐은 휙, 머리통을 던졌다. 중년 남자 옆에 선 젊은 놈이 엉겁결에


머리통을 받고는 딱딱하게 굳었다. 그를 쳐다보는 눈빛이 겁에 질려 있었다. 텐은 머리통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년 몸값은 그년 목값으로 퉁 칩시다. 돈이 얼마나 될 진 모르지만 난 옷까지 버렸으니까 이쪽이


손해일걸?”

천연덕스럽게 피에 젖은 망토를 들추자 허리춤에서 은급 용병패가 흔들렸다. 텐은 마음껏 보라고 아예


망토를 뒤로 젖히고 허리를 짚었다. 칼을 뽑을까, 말까, 뽑을까, 말까, 고민하던 남자들이 순식간에
저자세로 바뀌었다.

“아니면 내가 직접 경비대에 갖다 주고….”


“아이고, 아닙니다, 나리. 저희 집에서 일어난 일이니 물론 제가 뒤처리를 해야 마땅하지요. 암요.
그럼요.”

중년 남자가 다급하게 지껄였다.

“정말 죄송합니다요. 엊그제 데려온 년인데 시작부터 말썽을 일으키다니……수배범인 줄 알았으면 당장에
쫓아냈을 겁니다. 정말입니다요.”
“그러시겠지.”
“저, 나리. 경비대에는…….”
“난 곧 떠날거니 괜한 걱정 마요.”

텐이 빙긋 웃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매를 털고, 그는 성큼성큼 걸었다. 객실 문틈으로 훔쳐보던


금발머리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텐은 입을 열고 가볍게 물어뜯는 시늉을 했다. 여자가 질겁을 하고 문을
쾅 닫았다. 그는 킬킬거리며 매음굴 밖으로 나갔다.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

이석원은 몹시 우울했다. 지구가, 땅이, 바람이, 공기가, 하여튼 이곳의 모든 것이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입을 떡 벌렸다. 온 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허벅지엔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어제 촬영한 와이어 씬 때문이었다. 무술감독과 고종원 감독은 그를 네 시간이나 대형
크레인에 매달아 놨다. 척추가 안 휜 게 다행이었다.

석원은 좀비처럼 비척거리며 거실로 나갔다.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부모님은 벌써 출근했는지 보이지 않고,
이지원은 소파 팔걸이에 얼굴을 처박고 누워있었다. 그리고 윤동후가 그녀를 달래는 중이었다. 석원이
턱짓으로 물었다.

“왜 이래요?”
“쵸코렐라가 후속곡으로 음원차트 1 위 찍었어.”

동후가 속삭였다. 이지원이 번쩍 고개를 쳐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복장이 뒤집어지는 와중에도 피부


관리는 해야겠든지, 얼굴에는 까만 숯 팩을 붙이고 있었다. 동후가 혀를 차며 말했다.

“팩하고 노려보지 마요. 주름져. 그리고 술래잡기 OST 이번 주 안에 녹음 들어갈 거예요. 곡조나 가사나
엄청 우울한 컨셉으로 갈 거라니까 누난 감정이입이나 좀 하고 있어요.”
“감정이입이 필요해 뵈니?”

지원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요즘 사는 게 우울한 년이야.”


“잘 됐네, 컨디션 유지 잘 하시고요.”
“썅노무시키. 너 내 혈압 올리려고 왔어? 좀 꺼져!”
“누나 보러 온 거 아니거든요.”

코웃음을 돌려주며 동후가 홱 돌아섰다. 그리고 석원에게 스케쥴 표를 내밀었다.

“동생, 오늘 스케쥴 좀 거지같다.”


“어젠 안 그랬어요?”

스케쥴 표는 분단위로 촘촘하게 갈라져 있었다. 일산 액션스쿨 들렀다가 술래잡기 포스터 의상 컨셉회의,
의상 피팅, 영종도 세트장 촬영, 민속촌 촬영,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웨이트……더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세상사 공짜가 없다지만 이 일은 반대급부가 너무 심했다. 몇 개의 씬이 그에게 즐거움을 주었다면,


대부분의 씬을 촬영할 때마다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지?’하는 생각이 1 초 간격으로 들었다.
돈이라도 됐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후회가 더 컸을 것이다.

석원이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동후는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예상보다 장마가 길어진 탓에 톱스타 김승후도 촬영장에서
밤새 대기하는 판국이다. 신인배우의 매니저가 스케줄을 조절할 능력은 없었다. 동후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날이 야위어가는 석원에게 비타민과 칼슘제를 챙겨주는 것과, 걱정하는 것뿐이었다.

“어깨에 멍든 것 좀 봐라, 이건 어쩌다 그런 거야?”


“와이어 때문일걸요.”
“니미럴, 등은?”
“그건 액션스쿨에서 트랜블린 넘다가 맨바닥에 박았어요. 심해요?”
“완전 시커멓게 죽었어. 개새끼들, 살살 좀 다루지. 금쪽같은 배우 몸에…….”

동후가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표정만 보면 석원의 어깨가 멍든 게 아니라 살이 썩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지원이 동후의 뒤통수에 쿠션을 던졌다.

“누가 보면 니가 걔 엄만 줄 알겠다, 새꺄. 아주 쪽쪽 물고 빨아라.”


“말투하고는, 교양 없이. 아, 그리고 팩할 때는 말도 하지 마요. 주름져!”
“니미, 니 말투는 아주 교양이 넘치세요.”

비아냥거리며, 지원이 다가왔다. 그리곤 신발 끈을 묶고 있던 석원의 정수리를 슥슥 문질렀다. 아주 잠깐


석원의 움직임이 멈췄다. 어디선가 피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지원은 달라붙는 캡나시를 입고 있었고,
그것은 얼핏 코르셋처럼 보였다. 석원은 운동화 매듭을 팽팽하게 당기고 일어났다. 지원이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오늘도 고생해라.”
“…갔다 올게.”

살인마는 지친 얼굴로 출근했다.

----------------------

“컷! 다시 갑시다.”

김승후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상대역인 단인마님 장수현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수십 명의 스태프가


그녀만 쳐다보고 있었다. 더위는 살인적이었고, 분위기도 살인적이었다. 해지기 전에 찍어야하는 씬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의 20 번째 NG 를 낸 그녀를 위로해줄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고종원감독이 시뻘건 얼굴로 말했다.

“장, 후……장수현씨,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제대로 해 봅시다.”


“네, 감독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장수현이 사방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다시 슬레이트가 부딪쳤다.

“액션!”
“나으리….”
“컷!”

장수현이 어깨를 움츠렸다. 고감독이 콧김을 씩씩거리며 물었다.

“방금 오디오 안 물렸어?”


“물렸습니다.”

조감독이 대답했다. 결국 고감독이 고함을 질렀다.

“좆도, 씨발……큐사인 떨어지면 한 호흡 쉬고 들어가야 할 거 아냐! 장수현씨, 정말 이럴 거야? 렉카랑


크레인 장수현씨 하나 때문에 계속 대기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저거 오늘 못 찍으면 손해가 얼만 줄
알아?!”
“죄송합니다, 마음이 급해서……죄송합니다, 감독님!”

‘울어라, 울어.’석원은 얼음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장수현이 엉엉 우는 꼴을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도 같았다.

그는 간이 천막 아래 앉아있었다. 이건 뭐 노숙자가 따로 없다. 냄새나는 흑포를 걸치고 대기했다가, 말


탔다가, 다시 대기하기를 여섯 시간째. 속눈썹으로 땀이 줄줄 흘러 눈알이 아주 영롱했다. 옆에 달라붙은
동후가 부채질을 했지만 턱도 없었다.

“쟤 혹시 우리 엿 먹으라고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닐까?”

뒤에서 우승희가 말했다. 그녀는 선글라스와 챙이 넓은 플로피 모자로 얼굴 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드러난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언짢아 보였다. 그녀의 어린 로드가 울상을 지었다.
“누가 들어요, 누나!”
“넌 내 걱정이나 해. 나 일사병으로 쓰러지면 내 걱정 할래?”
“이따가 서상경씨 팬클럽에서 얼음조끼 가져오기로 했대요.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로드의 말에, 동후가 끼어들었다.

“서상경씨 팬클럽 어제도 오지 않았어요?”


“어제 조공한 애들은 네이버 팬클럽 애들이고, 오늘은 디씨갤 팬클럽이래요.”
“올 거면 같이 오지, 왜?”
“서상경 데뷔 초반에 팬클럽 운영자 하나랑 잤다고 찌라시 돌았잖아요. 그거 때문에 그런가, 팬클럽들
사이가 졸라 나쁘대요. 이건 뭐, 팬이 안티지.”

동후와 어린 로드가 머리를 딱 붙이고 속닥거렸다. 한 달 전만 해도 소 닭 보듯 하더니, 요즘은 쌍둥이


저리가라였다. 매일 몇 시간씩 붙어서 수다를 떨어대니 그럴만도 했다. 동후가 혀를 차며 석원의
옆구리를 찔렀다.

“동생, 들었지? 절대 팬이랑은 자면 안 돼. 옷 벗는 순간부터 그냥 헬 게이트 열리는 거야.”


“…저한테 팬이 어딨어요.”

석원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후가 부채질을 더 세게 했다.

“앞으로 말이야, 앞으로. 영화랑 드라마만 잘되면 팬클럽이야 알아서 생기는 거지. 보면 동생은 겸손한
걸 넘어서 욕심이 너무 없어. 목표는 높게 잡아야 되는데.”
“얼마나 높게, 저만큼요?”

석원이 턱짓으로 김승후를 가리켰다. 동후가 콧방귀를 뀌었다.

“오웬 테일러 알지?”


“……누구, 란슬롯이요?”

오웬 테일러는 할리우드 스타였다. 프랜차이즈 영화를 몇 편이나 찍었고, 그 중에서도 숀 베런 감독이


연출한 ‘원탁의 기사’는 대박에 대박을 거듭하며 올해 3 번째 시리즈가 개봉했다. 그리고 개봉 나흘
만에 100 만 관객을 돌파해 전작의 기록을 갈아엎고 있었다. 석원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동후가 어깨를
으쓱했다.

“걔 이번에 원탁의 기사 3 출연료가 4 천 500 만 달러라더라. 영화 한 편 찍고 오백 억이라고. 그놈이나


동생이나 사지육신 똑같은 사람인데, 욕심 안 생겨?”

500 억. 석원은 그 현실감 없는 숫자를 혓바닥 위에서 굴려봤다. 로또 1 등 확률이 마른하늘에 벼락 맞을


확률이라는데, 500 억이면 벼락이 별똥별처럼 쏟아져야 할 판이다. 카르투옴 대륙에서야 흥청망청 은화를
쓰고 살고 있지만 이곳은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평생 일해도 억 단위 통장 만져보기 쉽잖은
소시민이었다. 영화 한 편으로 500 억을 버는 미래를 꿈꾸느니 차라리 완전범죄를 꿈꾸는 편이
현실적이었다.
석원은 숫자 세 개를 한 귀로 흘리며 일어섰다. 감독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석원과 우승희, 그리고 왈패
역을 맡은 무술팀이 둥글게 모이자 고감독이 말했다.

“마상 추격 씬이야. 승희씨는 렉카 탈거고, 석원씨랑 왈패들이 뒤에서 말 타고 바짝 쫒아 오는 거야.


왼쪽에 깔아놓은 레일로 이동차가 따라갈 거니까 안 부딪치게 조심하고. 이거 해 완전히 지기 전에 꼭
찍어야 되니까 다들 집중하자고.”

석원은 훌쩍 말 등에 올라탔다. 채늠이 말을 몰아 자경아씨를 쫒는 씬이었다. 대본에서야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가 쫒는 것은 감독, 조감독, 스크립터, 촬영팀,
음향팀, 모니터 등으로 포화상태인 1.5 톤짜리 렉카였다. 우승희, 아니 이자경은 렉카 위에 설치된
흑갈색 모조 말 등에 앉아있었다. 심지어 말은 다리도 없었다. 동후가 ‘저걸 보고 어떻게 집중해?’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석원의 머릿속은 이미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년을 잡으면 어떻게 해
줄까?’

좌의정 이순원이 저 규수를 끌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준 돈이 금으로 다섯 짝. 하지만 채늠에게


그것은 그저 쌀로 바꿀 수 있는 누런 돌덩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쌀은 훔치면 그만이다.

그는 저 가련한 사슴을 죽이고 싶었다. 걸레짝보다 더 엉망인 꼴로 만들어서 죽고 못 사는 정인 앞에다


던져 놓고 싶었다. 정인이라는 놈이 복수라도 하겠다고 나서면 더 즐거울 것이다. 둘을 나란히 시체로
만들어서 한 놈은 저 남쪽 바닷물에, 한 년은 북쪽에 던져놓을 것이다. 죽어서도 서로를 찾아 구천을
헤매도록.

채늠은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는 늘 마음가는대로 행동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았으니, 할


것이다. 그는 말허리를 힘껏 걷어찼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팔콘입니다.
오랜만에 들고왔는데 분량이 적어 죄송합니다ㅠ

제가 글을 쓰는 속도가 살인적으로 느립니다.


하지만 연재중단은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이해 부탁드립니다ㅠㅠ

다음편은 수정중이라 이번 주 안으로 업로드 하겠습니다.


여름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 장수현 이름이 잘못 들어가있는 부분들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드립니다^^

00019 용병(Mercenary)
=========================================================================
             
대형 선풍기가 돌아갔다. 해일처럼 일어난 흙먼지가 살갗을 긁고, 겉으로 드러난 구멍이란 구멍을 죄
틀어막았다.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불평할 시간이 있다면 한 컷이라도 더 찍는 편이 나았다.
태양은 서산머리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고, 제 시간에 촬영을 끝내지 못했을 경우 고종원 감독이 부릴
히스테리는 누구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좋아, 좋아……왈패들 달린다, 달린다, 자경이 뒤 돌아본다…….”

고감독이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도 가만있질 못하고 대가리를 흔들고 있었다. 마치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차 안의 노호혼 인형처럼. 아무도 그의 미친 짓을 방해하지 않았다. 영화만 좋아진다면 감독이
봉산탈춤을 추던 트리플 악셀을 뛰던 무슨 상관이랴.

스크립터 안재영은 자근거리는 모래를 뱉으며 모니터를 쳐다봤다. 흙먼지가 뿌옇게 흩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다섯 필의 말이 달려왔다. 왈패들로 분장한 무술팀. 그리고 이석원이었다. 끝자락이 다 헤진 무명
도포가 까마귀 깃털처럼 펼쳐지고, 투박한 삿갓이 역풍에 젖혀져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섬뜩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그 얼굴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이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쳐다봤다.

“…숨 쉬어, 임마!”

조감독이 안재영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녀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가슴께를 만져보자 심장박동이
손바닥을 요란하게 두들겼다. 안재영은 가슴을 누르며 중얼거렸다.

“아, 씨발……왜 자꾸 날 쫒아오는 거 같지?”


“니가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렇지, 병신아.”

조감독이 다시 한 번 뒤통수를 때렸다. 그러는 그 역시 안색이 좋지는 않았다. 아니, 렉카에 탑승한 모든
스태프가 기가 쭉 빨린 얼굴이었다. 바짝 긴장하고 찍어야 하는 씬이기도 했고, 스태프들을 몰입하게
만들만큼 배우의 연기가 좋은 탓이기도 했다.

촬영을 하는 게 아니라 마치 영화 한 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시카고 살인저택’이나 ‘뒤


돌아 보지 마’같은 슬래셔무비를. 저런 놈에게 쫓기느니 차라리 ‘나 먼저 고통 없이 죽여줍쇼.’ 하고
목을 내미는 게 마음 편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조감독이, 문득 말했다.

“…근데, 씨발. 저 새끼 저거 어디까지 오는 거야?”

이석원의 얼굴이 계속 가까워지고 있었다. 렉카의 속도는 일정했다. 말이 쫒아오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저러다 말과 렉카가 부딪치기라도 하면 대형사고, 아니, 재앙이다. 조감독은 황급히 시나리오를
훑었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커진다. 어느새 지척까지 쫒아온 채늠과 왈패들.


말고삐 한 손으로 움켜쥐고 검 뽑아드는 채늠.
뒤 돌아보는 자경, 절박하게 말을 재촉하는데,
그 순간 채늠, 검 휘두르고!
흔들리던 자경 댕기머리 끝자락 싹둑 잘려나가는.
모래바람과 함께 공중으로 펄럭이며 날아가는 비단댕기…」

조감독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안재영이 그의 귀에 대고 물었다.

“설마 한 캇트로 쭉 가는 건 아니겠지? 끊어가겠지?”


“당연히 끊어가지.”

안 그래도 위험한 마상 추격 씬이다. 몇 컷으로 나눠 찍고 편집으로 합치는 게 일반적이었고, 스토리보드


역시 그렇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감독의 입에선 좀처럼 사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상모를
돌리느라 컷사인을 내릴 정신도 없어보였다.

그러는 사이 이석원은 한층 더 가까워졌다. 시나리오에 적힌 대로 말발굽 소리가 점점 커졌다. 모니터를


보지 않더라도 그의 입 꼬리가 길게 찢어지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고삐를 한 손으로 말아 쥐었다.
등자에 체중을 싣고 허리를 띄우더니, 결국 검을 빼 들었다. 안재영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엉덩이를 뺐다.

“온다, 온다, 온다, 오잖아, 씨발! 저 미친 새끼!”

그리고 검 날이 코앞을 베었다고 착각한 순간,

“커트! 오케이!”

고감독이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

석원은 늦은 새벽에 귀가했다. 그를 내려준 카니발이 사라지자, 마치 빈집에 있는 것처럼 정적이


밀려왔다. 온 몸이 흙먼지 투성이였지만 샤워를 할 기력도 없어 대강 얼굴만 닦아냈다. 영양제와 포도당
캔디 한 줄, 흑마늘 진액 한 팩, 거기다 토마토케첩 냄새가 진동하는 유기농 야채즙까지 마셨건만 몸
상태가 아주 저질이었다. 그나마 내일이 술래잡기 대본리딩 날이라 영화 스케쥴이 없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잠들 수 있는 밤이었다.

하지만 석원은 침대에 눕기에 앞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요즘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가 꺼낸


파일철에는 이십여 개의 인덱스가 붙어 있었고, 깨알 같은 글자들이 인쇄된 종이로 가득했다. 없는
시간을 쪼개 직접 국회도서관에서 복사해온 도서와 학술자료들이었다. 지금 당장은 여유도, 능력도
없었지만 언젠가는 카르투옴에서 만들어보고 싶은 것들. 그것들을 조금씩 정리해 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요즘 집중하고 있는 것은, 텐 가렌에게 가장 중요한 것. 활과 화살이었다. 텐이 사용하는


활은 길이가 2 미터에 조금 덜 미치는 장궁이었는데 말 위에서 사용하기엔 영 거추장스러웠다. 그래서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 조선 각궁이었다. 장궁과 비교하면 길이가 1 미터 가까이 짧고 사거리는 백 미터
이상 길었다. 그리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도 충분히 연사가 가능했다. 그는 그것이 무척 탐이 났다.
미하라에 자리만 잡으면, 이곳의 지식과 카르투옴의 재료를 섞어 직접 만들어 볼 참이었다.

다만 문제는,

‘…물소뿔의 표면과 활채의 표면을 미리 거칠게 깎아서……물소뿔의 표면과….’

퇴화한 그의 암기력이었다.

----------------------

텐 가렌은 축축한 짚더미 위에서 눈을 껌뻑였다. 비쩍 곯아 젖도 못짤 것 같은 염소가 그의 머리카락을


씹고 있었다. 염소를 밀쳐내던 텐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머리맡에 놓인 가죽배낭을 털었다. 부싯돌
주머니와 기름, 헝겊, 대추절임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 사이로 양피지 두루마리가 툭 떨어졌다.
두루마리에는 어지럽게 글자가 적혀있었다.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글자였다. 텐은 재빨리 깃펜에 잉크를
묻히고 끊어진 곳부터 잇기 시작했다.

‘…물소뿔의 표면과 활채의 표면을 미리 거칠게 깎아서 접착제가 잘 붙도록 만든 뒤에……밧줄로 활채와
물소뿔을 단단히 감아서 한참을……풀이 마르고 나면 밀쇠로 문질러서 단단히 접착되도록……’

서른 줄 쯤 썼을까. 서서히 느려지던 손가락이 결국 멈추었다. 양피지 위로 잉크가 둥글게 번져나갔다.


텐은 벽에다 이마를 박았다. 가물가물했다. 한 번 더 박았다. 그래봐야 더 기억나는 건 없었다. 그는
새삼 충격을 받은 얼굴로 양피지 두루마리를 말았다. 정말이지, 대본을 외우는 게 용했다.

덧창을 열어보자 푸르스름한 아침이었다. 하늘은 높다랗고, 바람은 찼지만 상쾌했다. 이곳은 이름 모를
농부의 집이었다. 덧창 밑에선 머리통이 커다란 꼬마가 암탉 한 마리를 끼고 지렁이를 먹이고 있었다.
어젯밤 잠자리를 판 농부의 아들이었다. 간밤엔 닭과 동침을 했는지 등짝과 궁둥이가 온통 진흙과
닭털투성이었다.

안주인과 낡은 옷 사이로 가슴이 뽀얗던 딸은 보이지 않았다. 옆집과 그 옆집까지 용병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멀찍이 떨어진 다른 집에서 신세를 졌을 것이다. 용병들과 한집에서 밤을 보냈다간 이런저런
소문이 처녀 얼굴에 똥칠을 할 테니까.

밖으로 나가자 좁아빠진 집 마당에 덩치가 산만한 용병들이 우글거렸다. 반수 이상은 훈련 중이었고,
나머지는 머리를 맞대고 둥그렇게 둘러서 있었다.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가까이 가보니 그새 노루를
한 마리 잡아다 해체하는 중이었다. 텐이 코를 킁킁거리자, 손칼로 갈비뼈 안쪽 살을 발라내던 근육질의
중늙은이가 말했다.

“저놈은 왜 젖 뺏긴 개새끼처럼 낑낑거려?”


“어이 꼬마, 한 점 얻어먹으려면 빨리 붙어.”

모드레스가 염통을 잘라먹으며 손짓했다. 텐은 코웃음을 쳤다.

“신경 끄고 많이들 잡숴요. 맛있겠네, 기생충도 많고.”


“저 놈이 또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낸들 알겠소.”

용병들이 혀를 찼다. 예전에 마적 배를 갈라놓고 그 위에 정액을 쏟은 후론 그를 쳐다보는 시선들이 영


께적지근했다. 텐은 대부분 무시로 대응했지만, 모드레스의 눈빛만은 좀 신경이 쓰였다.

그는 자주 텐을 쳐다봤다. 마치 찬바람 분다고 집에 들여놨더니 식탁 밑에서 오줌을 찍찍 싸갈기는


개새끼를 보는 듯 한 시선이었다. 처음에는 그 눈빛을 성욕으로 의심하기도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모드레스의 취향은 콧대 높은 귀족 처녀였으니까.

“정말 안 먹냐?”
“날고기 안 먹어요.”

모드레스가 낄낄 웃었다.

“저거저거, 계집년보다 더 한 놈일세. 내가 저런 놈 나올까봐 애를 안 낳는다니까.”

사방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텐은 마차 위로 풀쩍 올라갔다. 그리고 배낭에서 날고기보다


훨씬 나은 것들을 꺼냈다. 밀가루빵, 삶은 오리 알, 행상인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 산 풍미 있는 소시지…
…그는 음식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다.

밀빵을 반으로 갈라 이것저것 끼워 넣자 순식간에 괜찮은 먹을거리가 됐다. 전자레인지에 1 분쯤 돌리면


더욱 좋겠지만, 이곳에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텐은 애 머리통만한 샌드위치를 몇 입 만에
해치우곤 입맛을 다셨다.

위는 가득 찼지만, 허기는 여전했다. 하지만 오늘은 별 수 없었다. 이 쥐벼룩 만 한 마을엔 젖내 나는


미망인이나 활질을 해도 괜찮을 소매치기 따위는 없었다. 허락된 구멍이라곤 딱 세 가지였다. 배를 곯는
집염소와, 암탉과, 짐말의 뒷구멍. 아주 거지같은 곳이었다.

텐은 따분한 얼굴로 마부석을 쳐다봤다. 한 쪽 귀가 없는 청년, 타단이 웃통을 벗은 채 옷을


조몰락거리고 있었다. 뭘 하나 했더니 터진 솔기를 꿰매는 중이었다. 텐이 짐 보따리 위에 턱을 괴고
물었다.

“언제 출발한대?”
“여기서 합류하기로 한 놈이 있다는데, 그놈이 아직 안 왔어.”

텐은 간절히 새로운 일행이 여자기를 바랐다.


산머리에 안개가 걷히고, 햇볕이 흙바닥을 달굴 즈음. 드디어 저 멀리서 걸어오는 일행이 보였다.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잘생긴 마법사와, 긴 망토를 걸치고 후드까지 푹 눌러쓴
인물이었다. 등 뒤에는 폭이 한뼘은 족히 될 대검을 짊어지고 있었다.

“나는 마법사 한 명이라고 들었는데. 왜 둘이오?”

모드레스가 물었다. 마법사는 지쳐 보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일행입니다.”
“일행? 저자도 마법사요?”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은급 용병이오?”

모드레스가 다시 물었지만, 대답은 똑같았다. 모드레스는 질겅질겅 씹던 염통을 삼키곤 피를 뱉었다.

“우리가 어디 나들이 가는 줄 아는 모양인데, 짐은 필요 없소. 그리고 사실 댁도 그리 믿음직스럽진 않군.


스물여섯이라고 들었는데, 그보다 훨씬 어려보이기도 하고.”
“스물넷입니다. 그리고……저자는 나보다 더 어려 보이는군요.”
마법사가 텐을 가리키며 말했다. 텐은 어깨를 으쓱했다. 모드레스가 한숨을 쉬었다.

“저놈은……저래 뵈도 활솜씨가 좋소.”


“내 솜씨도 나쁘진 않습니다.”
“말은 잘 하는군. 비쩍 말라서 한 끼만 굶겨도 객사할 꼴이구먼. 수정구도 값싼 무엣(마력이 탁한 하급
수정구)이고……어디 입 좀 벌려 보시오.”

마법사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입을 벌렸다. 모드레스는 그의 입 안에 손가락을 넣고


치아 상태를 확인했다.

마법사는 건강이 힘인 자들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마력은 생명력이나 마찬가지였다. 무턱대고 마력을
끌어 쓰면 신체기관이 망가지고, 수명이 쭉쭉 줄어들었다. 그러면 겉보기엔 스무 살 청년이어도 이가
빠지고, 내장이 상하고, 눈이 먼 채로 죽어 자빠지기 십상이다. 마력손실로 망가진 몸은 포션으로도
고치기 힘들었다.

그걸 막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마력 소모를 줄여주는 수정구였다. 상급 수정구인 갈루엣은 웬만한


재력으론 엄두도 안 날 만큼 비쌌다. 그래서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것은 중급 수정구인
오즈엣이었다. 물론 그도 가격이 만만치는 않았다. 게다가 수정구는 소모품이라 마법을 자주 사용하는
자들은 시기적절하게 교체해주는 것도 중요했다. 힘과 생명을 저울에 달고 균형을 잘 유지하는 마법사만이
오래 살아남는다.

“이는 건강하군.”

모드레스가 손가락을 빼며 말했다.

“이름이 뭐요?”
“…유리, 아즈엘.”

마법사, 유리가 대답했다. 그는 마치 벌레라도 삼킨 표정이었다. 새파란 얼굴로 욱욱거리자 후드를 쓴


자가 안절부절 못하고 등을 두들겼다. 용병들은 기도 안 찬 얼굴로 그들의 꼬락서니를 지켜봤다. 텐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망토 밖으로 나온 손이 가늘고 매끄러웠다. 저건 여자의 손이었다. 모드레스도
눈치를 챈 모양인지 목소리가 싸늘했다.

“짐은 어쩔 거요?”

마법사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짐이 아닙니다.”
“그럼 그 솜씨도 한번 봅시다.”
“그건…….”
“아니면 놓고 가야 하오.”

유리가 모드레스를 노려보았다. 모드레스는 간지럽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잠시 후, 유리가 ‘마노’,


하고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후드를 쓴 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슬쩍 날렵한 콧대가 보였다. 유리가
다그치듯이 말했다.

“괜찮으니까 해.”
“…….”
“마노.”
“하지만,”
“해.”

대체 뭘 보여주려고 저러나, 하고 쳐다보던 용병들이 눈을 반짝 떴다.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녀가 여자란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음흉한 눈길이 쏟아졌다. 여자, 마노는 입술을 깨물며 고뎀나무 앞에 섰다.
밑동이 한 아름도 넘는 나무였다. 희고 가느다란 손이 나무를 짚었다. 다섯 개의 손가락 끝마디가
나무껍질을 꾹 눌렀다. 찰나, 손목에서 뿌연 빛이 튀었다.

그 순간 용병들 모두 눈을 양동이만 하게 떴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나무를 파고들고 있었다. 그녀는


치즈 빵의 귀퉁이라도 떼어내는 것처럼 간단하게 나무를 뜯어냈다. 용병들은 말을 잃고 옹이처럼 뻥 뚫린
구멍을 쳐다봤다. 그녀가 고요한 호흡으로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그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마법사가 아니라고?”
“그럼 요, 요정족이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요?”

나무를 자르는 것은 쉽다. 검으로 베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녀가 한 것은 몬스터쯤 돼야 가능할까 싶은


일이었다. 용병들이 앞 다투어 물었지만, 정작 마노는 유리를 부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 그래도 안
좋던 그의 안색이 납처럼 창백했다. 당장이라도 피를 토하고 고꾸라질 것 같았다. 그는 그 상태로
모드레스를 노려봤다.

“더 필요합니까?”
“아니, 솜씨는 충분히 봤소. 그런데…….”

모드레스가 말했다.

“얼굴도 봐야겠소. 수배범이면 곤란하거든.”


“젠장!”

유리가 험악하게 마노의 후드를 벗겼다.

“수배범이 아니라 내 누이입니다. 왜 후드를 쓰고 있는지는, 눈이 있다면 알겠지.”

후드 아래로 산홋가지색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놀란 얼굴도 드러났다. 그녀의 인상은 얼음처럼 싸늘해
보였다. 그리고 후드로 가리지 않으면 안될 만큼, 몹시 아름다웠다.

----------------------

목초지가 초록색 바다처럼 펼쳐졌다. 언덕 위에는 한 떼의 양이 풀을 뜯고 있었다. 마차는 요란한 소음을


내며 한적한 관도를 달렸다. 미하라가 가까워졌기 때문인지, 쉴 틈도 주지 않았다. 텐은 절임대추를
씹으며 오른쪽을 바라봤다. 새로운 일행이 모드레스가 준비해둔 말을 타고 따라오고 있었다.

마부석에 앉은 타단과 마법사 영감의 고개 역시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다만 타단이 넋을 놓고


마노를 쳐다보는 데 반해, 마법사 영감은 유리를 보고 있었다. 그는 언짢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

“누가?”

텐이 불쑥 물었다. 마법사 영감이 귀를 후볐다. 텐이 계속 쳐다보자 그는 허리주머니에서 통통한 뿌리를


꺼내 핥기 시작했다. 새틴에 감싸여 있는 그것은 손가락만한 자주색 약초였다. 누가 늙은 마법사
아니랄까봐 그는 좋은 약초라면 환장을 했다. 저것은 딱 봐도 귀한 것이었다. 약향이 진동을 했다. 텐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그거 또 있어요?”
“있으면?”
“팔라고.”
“싫다, 이놈아. 이게 구하기 쉬운 건 줄 아느냐? 동화 한 냥 없어서 벌거벗은 기집을 쳐다만 봤을 때도
안 판 물건이야, 이게.”

마법사 영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리고 젊은 놈이 이런 걸 먹어 뭐하게?”
“열아홉이 젊긴. 하루하루 늙어 가는데.”
“……”

마법사 영감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타단이 그에게 충고했다.

“저놈이랑 길게 말 섞지 마요. 피곤해.”

텐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안 판다고?”
“안 판다.”
“그럼 물물교환은 어때요?”

배낭을 열며, 텐이 다시 제안했다. 마법사 영감은 이번에도 코웃음을 쳤다.

“이만큼 귀한 게 있기나 하고? 뭐, 어인족의 꼬리비늘이라도 있느냐?”


“그렇게 귀한 건 없고, 좀 덜 귀한 건 있지. 이런 거.”

텐이 꺼낸 것은 주먹 반만 한 크기의 돌이었다. 거친 표면에는 힘줄 같은 것이 거미줄처럼 퍼져있고,


반투명한 알맹이는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유백색으로 진해졌다가 옅어지길 반복했다. 중급 수정구
오즈엣이었다.

“네놈이 그걸 왜 갖고 있어?”

마법사 영감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당장 마차 위로 뛰어올라올 기세였다. 그의 지팡이에는 이미


오즈엣이 박혀 있었지만, 수정구를 향한 마법사들의 집착은 어마어마했다. 텐이 말했다.

“혹시라도 내가 마법에 재능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샀는데….”


“샀는데?”
“없더라고.”

마법사 영감이 킬킬 웃었다. 그는 재빨리 주머니를 뒤져 조금 전 자신이 먹은 것보다 더 커다란 약초를


꺼냈다.

“여깄다. 그거 얼른 다오.”
“…….”

텐은 잠시 침묵했다. 마법사 영감의 표정이 점점 급해졌다. 텐은 수정구를 다시 배낭에 집어넣으며


웃었다.

“이것만큼 좋은 약초는 아닌가본데. 거래는 없었던 걸로 합시다.”


“…….”

지팡이를 잡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타단이 혀를 쯧쯧 찼다.

“말을 섞지 말라니까.”
마법사 영감이 이를 갈았지만, 텐은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른쪽을
바라봤다. 남매가 나란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텐은 물론 마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다시 움직인 그녀의 시선은 텐의 배낭에 꽂혀 있었다.

----------------------

오늘 밤도 노숙이었다. 그래도 내일이면 미하라에 도착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얼굴은 보지 못해도


일행에 미인이 끼었기 때문인지, 모두 밝은 얼굴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 사이에서 텐 홀로 겉돌았다.

텐은 담요를 덮은 채 멍하니 모닥불을 쳐다봤다. 잠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꾸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도 없다. 몸은 두 개지만 정신은 하나라, 균형이 무너지면 그 후유증이 만만찮았다. 텐은
머릿속으로 양을 찔러 죽이기 시작했다.

양 한 마리. 사실 대한민국도 그리 나쁘진 않다. 양 두 마리. 먹을 것의 다양함에 있어선 카르투옴


대륙보다 훨씬 나았다. 양 세 마리. 하지만 요즘은 지방을 없애고 근육을 만들기 위해 삼시세끼를 두부와
토마토, 닭 가슴살 따위로 버티고 있었다. 양 네 마리. 소스도 없는 닭 가슴살 샐러드는 맛이 엿 같았다.

결국 텐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일어났다. 예상한 바였다. 그는 야영지를 벗어나 전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양초나 횃불은 필요 없었다. 새파란 달무리가 숲을 밝히고 있었다. 그는 일행에게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의 예상이 맞다면, 곧 누군가 그의 뒤를 밟아 올 것이다. 텐은
느긋하게 밤바람을 즐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망토자락이 풀잎에


스치는 소리. 마노 아즈엘이었다. 후드 밑으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보이는 거라곤 입술뿐이었다. 그
입술이 몇 번이나 붙었다 떨어졌다. 곧 낮은 목소리가 말했다.

“당신에게 필요가 없다면, 그 오즈엣……제가 사고 싶습니다.”


“값만 제대로 쳐 준다면 못 팔 것도 없지.”

텐이 대답하자, 마노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지금 당장은 돈이 없습니다. 하지만 내일 미하라에 도착해서 착수금을 받으면 그것부터…그리고 나머지는
……다른 방법으로 대신 치를 수는 없겠습니까?”

텐의 입술에 의뭉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고생은 제법 한 것 같지만, 분명 귀한 취급을 받아 본


아가씨였다. 적어도 아쉬운 거래는 할 필요가 없었을 만큼은. 그리고 또 한 가지가 텐의 흥미를 자극했다.
용병들은 보통 ‘선금’이나 ‘계약금’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착수금’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수상한 단어를 머릿속에 넣어두고, 텐은 본래 목적을 떠올렸다. 큼큼, 그가 작게 목기침을 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단단한 나무를 빵 뜯듯이 뜯은 여자였다. 그 손이 인간의
살을 잡으면 어떻게 될지는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텐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혹시 몸도 파나?”

그 순간 그가 앉은 나무 등걸에 불똥이 튀었다. 수풀 속에서 유리 아즈엘이 악마 같은 얼굴을 하고 나왔다.


텐이 활과 화살을 빼들었지만, 유리는 마노의 손목을 거칠게 쥐고 으르렁댔다.

“용병들하곤 상대 말라고 했잖아.”


“하지만 유리, 저 사람이 갖고 있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마노의 뺨이 붉어졌다. 그녀의 일그러진 입매가 꾹 다물렸다.

“내 말 들어. 내가 네 몸뚱이 팔아서 살 거 같았으면, 저런 놈한테 헐값에 팔겠어?”


“…….”
“쓸데없는 짓 말고 가만히 좀 있어.”

명령하듯이 말하며, 유리는 텐을 쏘아보았다. 텐은 양손을 들고 물러났다. 가정사에 간섭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 땅엔 사연 없는 사람이 없고, 그 사연은 대체로 재미도 없었다. 기대하던 것이
날아가자 머릿속에서 김이 탁 빠진 기분이었다. 그는 패잔병 꼴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등 뒤로 마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가만히 있어, 나 때문에 네가 하루하루 죽어 가는데…….”


“……마노,”
“오즈엣이 눈앞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목소리에 물기가 섞였다. 텐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그새 표정이 좀 누그러진 유리가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누이 탓이 아니래도. 울지 마. 이건 당연한 일이야. 우린 가족이잖아.”


“…….”
“걱정 마. 오즈엣 없다고 안 죽어.”

유리가 마노를 꽉 끌어안았다. 텐은 그 심란한 광경에서 눈을 돌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팔콘입니다.
지난 편에 추천, 선작, 코멘트 남겨주신 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쿠폰 보내주신 분들께도 감사 드립니다.

내용 중 오타나 비문, 오류가 있는 내용이 있다면 언제든지 지적 부탁드립니다.


그럼 저는 이만 출근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00020 용병(Mercenary)
=========================================================================
             
“1, 2 부 대본이랑 생수는 다 세팅해놨지?”

술래잡기 PD, 정형석이 휘적휘적 걸어가며 물었다. 조연출이 냉큼 대답했다.

“그럼요. 쿠키 두 종류에 커피도 챙겨놨습니다.”


“메이킹 찍을 팀은?”
“촬영감독님, 조명감독님, 다 도착했습니다.”
“매니저들한텐 전화 돌렸고?”
“다 오는 중이랩니다. 설마 상견례 날인데 늦기야 하겠습니까?”

정형석이 코웃음을 쳤다.

“오는 중이다, 이제들 출발한단 소리네. 얼굴에 분칠한 것들 믿지 말고 한 번씩 더 확인해. 배익선


선생님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슬쩍 흘리고. 그래야 꽥하고 뛰어오지.”

말하는 사이 국장실 앞에 도착한 정형석이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에 흐릿하게 얼굴이 비쳤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머리를 다듬었다. 조연출이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했다.

“선배님은 긴장도 안 되십니까?”


“얘가 웃기고 있네. 내가 너냐? 대본리딩 한두 번 해?”
“그래도 종편 오시고 첫작 아닙니까. 공중파하곤 분위기도 다르고, 제작비랑 시청률 차이도
어마어마할거고…….”

정형석이 조연출의 이마를 꾹 찔렀다.

“너 수정고 올라온 거 봤냐?”


“아, 아뇨, 아직 못 봤습니다.”
“봐, 임마, 봐. 봐. 봐. 조연출이 대본도 재깍재깍 안 보고…….”

꾹, 꾹, 꾹, 이마를 찍힌 조연출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거 보면, 긴장이고 걱정이고 될래야 될 수가 없다.”

씩 웃으며, 정형석은 국장실 문고리를 돌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단정하게 여민
셔츠에 넥타이까지 졸라맨, 동글동글한 인상의 중년인이 TVY 드라마국장 박양준. 그리고 소파에 앉아
아이패드를 들고 있는 반대머리는 술래잡기 CP 채구형 부장이었다. 정형석은 꾸벅 인사를 하곤 둘에게
대본을 건넸다.

“이거 술래잡기 1, 2 부 수정대본입니다. 박무경 대사가 조금 늘었어요.”


“박무경?”

잠깐 생각하던 박국장이 ‘아, 그 신인….’하고 중얼거렸다. 정형석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신인이라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연기 잘 하는 친구예요.”


“걱정은 무슨, 배우 보는 눈이야 책상머리에만 앉아있는 나보다 정 PD 가 더 좋을 텐데.”

박국장이 특유의 부처 같은 미소로 말했다. 그 옆에서, 채부장의 얼굴은 점점 떨떠름해지고 있었다. 그는


어항 밖으로 끌려나온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정형석이 힐긋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한 시간 후에 리딩 시작할건데, 혹시 두 분도….”
“아냐, 감독이랑 배우들 상견례에 우리가 끼긴 그렇지. 이따가 리딩 끝나면 우승희 잠깐 보고 인사만
하지 뭐.”
“그럼 전 이만 준비할 게 좀 남아서, 가보겠습니다.”
“어, 그래. 얼른 가 봐.”

박국장이 손을 저었다. 다시금 꾸벅 고개를 숙인 정형석이 문을 열었다. 그 때, 채부장이 지나가듯


덧붙였다.

“그런데 정 PD, 우리 시청률 2 프로는 기대해 봐도 되겠지? 그래도 우승희 카드가 있는데, 광고도 앞뒤로
좀 붙어줘야….”

말꼬리가 흐려졌다. 정형석이 채부장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오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장님.”
“응?”
“이왕 기대를 하시려거든, 광고 완판을 기대하세요. 저 이거 중반부턴 광고 완판 붙여서 내보낼 거니까.”

그리곤 문이 닫혔다. 흥얼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발소리가 성큼성큼 멀어졌다. 채부장은 문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박국장에게 물었다.

“국장님. 저거 미친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골 아픈데, 너까지 보태지 마라.”

박국장이 말했다. 채부장이 벌떡 일어섰다.


“아니, 웃기잖아요. 미니로 시청률 30 프로 뽑았던 놈이니까 자신감 넘치는 건 알겠는데, 지가 아직도
공중파에서 일하는 줄 아는 거 아니냐고요. 광고 완판이 뉘 집 개새끼 이름도 아니고.”
“그만 하라니까.”
“우린 뭐 지금까지 하기 싫어서 안 했나? 완판 되면 회당 광고수익이 4 억이 넘는데. 그게 쉬웠으면
제작비 팍팍 줬지, 뭐 하러 1, 2 억씩 찔끔찔끔….”
“야.”

박국장이 푹 썩은 얼굴로 말했다.

“정 PD 가 신인 비중 늘어난다고 통보하고 나간 이 시점에, 너까지 내 염장을 지르면 되겠냐. 안 되겠냐.”

채부장은 찍소리도 못하고 앉았다. 정형석 앞에서야 시종일관 담담했지만, 사실 박국장은 지금 모가지가
달랑달랑했다. 아니, 이미 잘린 머리를 들고 다니는 형편이었다. 그가 드라마국장이 된 지 9 개월. TVY
드라마 시청률은 나날이 하향곡선을 그렸다. 전국시청률 2 프로를 넘어간 드라마가 없었고, 주인공들
몸값에만 회당 1 억을 쓰고 야심차게 출범시킨 50 부작은 0.2 프로로 거하게 말아먹고 조기 종영될
판국이다.

방송국 내에서 제일 제작비를 많이 받아가는 곳이 예능국. 두 번째가 드라마국인데, 시청률도 광고수주도


예능국 발뒤꿈치에도 못 미쳤다. 그러니 주변 눈총이 살벌할 수밖에. CP 인 채부장도 대책회의실에
끌려가면 저절로 자라목이 되니, 모든 책임을 짊어진 박국장이야 말 할 것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김효승작가 대본에 우승희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드라마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이석원인지 뭔지 하는 우량아 나부랭이가 같이 매달리기 전까진. 박국장은 급격히 피로해진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채부장이 말했다.

“아니, 그러게……정 PD 가 처음 얘기 꺼냈을 때 딱 자르셨어야지. 아니, 우승희 옆에 듣도 보도 못한


신인을 갖다 붙이는 게 말이나 돼요?”
“김효승 작가랑 우승희, 내가 데려왔냐? 네가 데려왔어? 정 PD 가 직접 데려왔어. 김작가야 어차피
공중파에서 퇴짜 맞은 대본이니 그렇다 쳐도, 우승희가 어디 종편 심야 작품 할 급이야?”
“그거야 그렇지만, 우리가 뭐 출연료 후려쳐서 데려온 것도 아니고.”
“요즘 탑배우들 20 프로, 30 프로 더 얹어줘도 급 낮아진다고 종편 안 하는 거 몰라? 그런 애를
잡아왔는데, 괜히 캐스팅 하나 마음에 안 든다고 PD 발목 잡아 봐. 그놈이 우승희 급으로 꽂아 달라고
나오면 어쩔 거야. 너 그럴 능력 있어?”

채부장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정형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다. CP 가 4 회 남은 드라마 멋대로


연장시켰다고 공중파 사원증을 내던지고 나온 놈이다. 노상 실실 웃고 다니는 가벼운 놈 같아도,
자존심은 바벨탑 꼭대기에 있었다.
채부장이 슬그머니 박국장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나도 걱정이 되서 그러죠. 아니, 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 우승희 팬들도 지금 난리 났어요. 보도자료도
안 뿌렸는데 캐스팅 정보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뭐라는데?”
“뭐래긴요, 연출부 미친 거 아니냬지.”

채부장이 아이패드 화면을 툭툭 두드리곤 박국장에게 내밀었다. 술래잡기 캐스팅 관련 글에 댓글이


굴비두름처럼 매달려있었다.

「정형석, 이 개객기가 우미인 필모에 빨간 줄 그을라고 작정한 거 아님?」


「이석원인지 뭔지만 빼면 라인업은 빵빵하더라. 시작 전부터 설레발치지 말고 일단 기다려보자……그래도
정형석 ㅅㅂ놈」
「정형석 감독에 김효승 작가잖아. 생각 없이 모험하겠냐. 일단 작가감독 믿고 가자. 칼 갈고 있다가 이
믿음이 깨지는 날 정형석 뒤통수 까러 갈란다」
「누구 이석원 정보 없냐? 유치원 학예회 비디오라도 감사하다」
「피치걸 이지원 동생이라는 썰이 있던데……」
「어그로 끌지 마라, 지금 형들 심각하다」
「그거 썰 아님. 사실임. 출처는 우리 오빠(피빠임). 근데 이지원이랑 동생이랑 별로 안 닮았다 함」
「……………정말?」
「……설마 진짠 아니지? 아니라고 해줘. TVY 테러하러 가기 전에」
「외근중인데 윗윗윗글 보자마자 더위가 싹 가셨다. 고마운데 이젠 춥다」
「……맞고 아니고를 논하기 전에, 이지원 동생인데 얼굴마저 안 닮았으면 진정 충격과 공포 아니냐?」

박국장이 결국 얼굴을 감쌌다. 며칠 전에 방송한 납량특집보다 이 페이지가 더 무서웠다. 한 줄 한 줄이


그의 위를 푹푹 쑤시는 것 같았다.

그는 문득 액자를 쳐다봤다. 그와 와이프, 그리고 올해 열두 살이 된 딸의 가족사진이었다. 와이프와


딸을 미국으로 보내고 ATM 기계가 된지도 4 년. 한 달 월급 받아 부쳐준 후에야 마음 편하게 딸과 카톡을
주고받는 게 그의 신세였다. 짐 싸서 미국으로 가면 와이프가 받아줄까? 이혼장이나 안 내밀면 다행일
거다.
박국장은 울적한 얼굴로 웃었다.

----------------------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이석원의 덜미를 붙들었다. 지원이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석원의


옷차림을 훑어 내렸다. 헐렁한 라운드 티셔츠에 일자로 뚝 떨어지는 검은색 청바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첫 리딩인데 이 정도로 얌전한 게 좋지.”

그러는 본인은 얌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와인색 미니드레스에, 장롱에 모셔놓고 감상만 하던
에르메스 버킨 백을 들고 있었다. 한 마리 홍학 같았다. 석원이 빤히 쳐다보자 지원이 코웃음을 쳤다.

“너랑 나랑 같니? 넌 신인이니까 겸손하게 가는 거고, 내가 그럼 돈 없는 줄 알아.”


“누나 돈 없잖아요.”

지원이 동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동후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넌 내 쓸개나 맡아두고 있어.”

중얼거리며, 그녀는 대회의실 문을 노려봤다. 결전을 준비하는 홍학. 석원이 물었다.

“그렇게 긴장할 일이야? 저 안에 악어떼라도 있어?”


“악어떼, 상어떼, 피라냐떼……아무것도 상상하지 마.”

지원이 문고리를 돌렸다.

“뭘 상상하든 그보다 안 좋으니까.”

낮은 한숨과도 같던 목소리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확 높아졌다. 지원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일찍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어머, 안녕, 오랜만이네.”

석원은 고장 난 오디오처럼 ‘안녕하세요.’만 따라했다. 회의실에는 이미 여섯 명이 앉아있었다. 그 중


셋은 벌떡 일어나 마주 인사했고, 둘은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었다. 나머지 한 명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원로배우 배익선이었다. 그는 마치 벼슬이 축 늘어진 늙은 칠면조 같았다. 지원이
석원의 어깨를 붙들며 말했다.
“선생님, 시크릿룸 촬영 때 뵙고 1 년 만이네요. 얘가 제 동생이에요, 박무경 역할. 잘 좀 봐주세요.”

배익선이 고개를 들더니 까닥, 하곤 다시 숙였다. 지원의 눈이 잠깐 사나워졌다. 곧 그녀는 라마즈


호흡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석원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을 때, 다시 회의실 문이 열렸다.

지적이고 섬세한 이미지의 아나운서 출신 여배우. 손소연이었다. 물탄 개나리색 블라우스가 꼭 카나리아


같았다. 쭉 인사를 하며 들어오던 손소연이 지원에게도 살짝 고갯짓을 했다. 그리곤 스쳐가며 중얼거렸다.

“아, 놀래라. 녹음실로 잘못 들어왔는 줄 알았네.”


“보도국은 아래층에 있던데?”

지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홍학과 카나리아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리곤 양쪽 다 코웃음을
치며 떨어졌다. 석원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조류편. 그것도 생방송이다.

그 후에도 대회의실의 빈자리는 차곡차곡 채워졌다. 석원의 왼편에는 화려한 꽁지깃을 뽐내느라 정신없는
수컷 공작새 두 마리가 앉았다. 얼굴이 낯선 것을 보니 유명한 배우들은 아니었다. 둘 중, 분홍색
와이셔츠를 입은 공작새가 석원을 힐긋거리다가 물었다.

“몇 살이에요?”
“스물여덟이요.”
“동갑이네.”

공작새가 홱 고개를 돌렸다. ‘누구야?’, ‘박무경.’, ‘아아……쟤가 걔야?’, ‘김승현 물 먹였다더니 별


거 없네.’, ‘왜, 소문엔…….’ 석원은 속닥거리는 소리들을 한 귀로 흘리며 수정대본을 폈다. 그에겐
반반한 숫공작들의 관심보단 수정된 대사를 음미하는 게 더 중요했다.

이 회의실 안에 반이 여배우였지만, 그를 가장 흥분시키는 건 대본이었다. 수정대본은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아침에만 네 번을 읽었다. 지루하기는커녕 이 활자들을 욕심껏 토해낼 수 있다는 기대감만 더욱
높아졌다.
그가 대본을 넘기는 사이, 공작새들의 화제는 다른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 나 주차장에서 우승희 봤다. 벤틀리 몰고 왔던데.”


“인사했어?”
“말도 못 붙였다. 실제로 보니까 말도 못하게 섹시하더라.”
“벤틀리 끌고 다니는 여자면 팔다리만 있어도 섹시할 걸. ……야, 왔다.”

또각또각, 백조가 걸어 들어왔다. 우승희는 낙낙한 우윳빛 셔츠에 검은 스키니 진을 입고 있었다. 하나로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가냘픈 목덜미에 스쳤다. 그녀가 인사하자 대회의실에 모인 연기자들이 죄다
일어났다. 심지어 배익선까지 허리를 들었다. 빈자리를 찾아 걸어오던 우승희가 석원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녀의 얄상한 눈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석원씬 한복보다 이쪽이 더 잘 어울리네요.”


“우승희씨도,”
“난 양쪽 다 어울리죠.”
“…그 말 하려고 했습니다.”

석원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옆에서 지원이 사레라도 걸린 것처럼 기침했다. 그 때 입구가


요란스러워졌다. 오랜만에 보는 정형석 PD 와 김효승 작가였다. 그들은 연기자 한 명, 한 명에게
고개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정형석이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는 표정으로 팔을 벌렸다.

“이야, 우승희씨. 이석원씨. 오랜만입니다. ……이지원씨도. 장마 때문에 영화 스케쥴 딜레이 됐단 얘긴


들었는데, 어때요. 마무린 잘 돼 가고 있어요?”
“주말 안으로 크랭크업 할 거예요. 고종원 감독님 웬만하면 추가촬영 안 하시니까, 후시녹음 잡히면 그날
스케쥴만 조정해주세요.”

우승희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형석이 다시 말했다.

“다행이네요, 걱정했는데. 영화는 추석 시즌 개봉인가? 우리가 추석 다음 주 첫방이니까 영화 덕 좀


보겠네요. 아, 석원씨는 몇 씬이나 남았어요?”
“내일 죽어요.”

석원이 대답했다.

“얼른 죽고 이리 넘어와요. 우리 내일모레 고사지내고 바로 촬영들어갈 거니까.”

정형석이 그의 등을 두들기곤 상석에 가 앉았다. 우승희의 자리는 그 왼편이었다. 석원이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데, 팔꿈치가 그의 허리를 쿡 찔렀다. 김효승 작가였다. 그녀가 장난스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자기 때문에 대본 고친 거 알아요? 티 나죠?”


“…티 납니다.”
“대본 따라오려면 가랑이 찢어질걸요. 내가 봐도 예술이거든.”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곤 멀어졌다. 석원은 왠지 모르게 간질거리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가 자리에


앉자, 지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 서른다섯이야.”
“그래서?”
“딱 너 만한 애들 밝힐 나이니까 조심하라고.”

아주 잠시, 무슨 반응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석원이 피식 웃고 말았다.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일곱 살 차이. 그게 아슬아슬, 귀여운 거거든. 여덟 살은 너무 갔고.”

지원이 맞은편의 배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말간 얼굴에, 꼬리를 쥘부채처럼 접고 있는 얌전한


숫공작이었다. 지원의 눈에서 욕정의 불길이 타올랐다. 석원이 찬물을 끼얹으며 말했다.

“일곱 살은 무슨. 쟤랑은 딱 봐도 내일모래 띠동갑인데.”


“쟤가 저래 뵈도 군필자랜다. 92 년생. 나랑 붙는 배역이라 다 알아보고 왔지.”
“92 년? 그때도 사람이 태어났어?”

재미없는 농담은 곧 멈췄다. 조연출이 문을 닫자, 회의실에 긴장 섞인 침묵이 감돌았다. 정형석 PD 의


소개로 배우 한 명, 한 명이 인사를 마쳤다. 그리고 대본의 첫 페이지가 일제히 넘어갔다.

석원은 슬쩍 웃었다.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그와 닮은 훌륭한 살인자가, 박무경이, 그의 속마음을 대신


읊어줄 시간. 그는 들뜬 얼굴로 대본의 활자를 더듬었다. 그때 그의 눈앞으로 뭔가가 슥 밀려왔다.
얼음물이 담긴 콜드컵이었다. 석원이 왼편을 돌아봤다.

“…시원하게 마시면서 하세요.”

분홍색 숫공작이었다. 파닥파닥 움직이는 꽁지깃이 ‘얼른 받아, 받아줘, 받고 친하게 지내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석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콜드컵을 받았다. 안 그래도 뜨거운 불길이 장기를 태우던
참이었다. 달랠 것이 필요했다. 그가 얼음물을 한 모금 마셨을 때, 정형석 PD 가 조연출에게 물었다.

“TVY 드라마, 시청률이 제일 높았던 게 뭐야?”


“작년 여름에 방영한 장녹숩니다. 26 화가 순간 최고 시청률 4.3 프로였습니다.”
“4.3 프로…….”

정형석이 회의실을 쭉 돌아봤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자, 우리가…TVY 개국 이래 드라마 최고 시청률 한번 찍어봅시다.”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팔콘입니다^^
지난 편에 추천해주신 분, 선작해주신 분, 코멘트 달아주신 분!
그리고 쿠폰 보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내용상의 오류나, 비문, 오타 언제든지 지적 부탁드립니다.


다음주에 다음편으로 뵙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00021 용병(Mercenary)
=========================================================================
             
“씬 1. 저택.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창문 안으로 서재가 보인다. 창백한 형광등 불빛에서 틸 다운하면,
탁자 뒤에 앉아있는 관리자. 그 옆에 세워진 트라이포드와 비디오카메라. 녹화버튼에 빨간불이 깜빡인다.
카메라 화면 속엔…….”

대본리딩이 시작됐다. 지문은 정형석이 직접 읽었다. 배우가 대사를 치면 그가 간간히 감정이나 말투


등을 지적하고 넘어가는 식이었다. 모두가 귀를 기울인 가운데, 한 장 한 장 대본이 넘어갔다.

이야기는 게임을 이끌어가는 참가자들의 인터뷰로부터 시작된다. 화면이 검게 페이드아웃 되었다가


밝아지면, 인터뷰의 대상은 바뀌어있다. 여대생, 가정주부, 실직자, 룸살롱 직원……. 인간도, 악마도
되지 못한 어정쩡한 물건들. 그들이 게임에 참여하게 된 목적은 대체로 두 종류였다.

“그년이 마이캉을 5 천이나 땡겨 놓고 잠수를 탔는데, 염병. 그걸 나더러 갚으라잖아.”

빚이 있거나,

“한 명 죽이고 1 억이면 안 하죠. 그런데 두 명 죽이면 2 억이고, 세 명 죽이면 4 억, 네 명 죽이면 8 억.


다섯 명 죽이면, 좆도, 16 억이라면서요.”

부자가 되고 싶으니까.

물론 박무경에게도 목적이 있었다. 그는 곧 그 목적을 이야기 할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경청할 준비를


끝낸 관객들에게. 박무경은 할 수 있고, 텐 가렌도 할 수 있지만, 이석원은 평생 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은 총을 들고 백화점에 들어가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마침내 다섯 번째 페이지가 넘어갔다. 그는 눈꺼풀을 깜빡였다. 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창밖엔 여전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고,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엔 빛이 꺼질락 말락 했다.

이곳은 묘지처럼 냉기가 도는 서재였다. 관리자는 주름이 무성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사람이 아니라,
개를 보는 눈빛이었다. 투견장에 내보내기 위해 우리에 가둬놓은 열 번째 개새끼. 그 개가 지난번
관리자를 물어 죽였다는 사실을 언제쯤 알아차릴까? 그는 온순한 얼굴로 생각했다.
관리자가 물었다.

“게임에 참가하려는 목적이 뭔가?”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요.”

박무경이 대답했다. 썩어가는 고목 같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이번 관리자 역시 호기심이 많았다. 하기야,


그러니 관짝에 들어갈 나이에 관음증 환자들 심부름이나 하는 걸 테지.

“……왜? 대체 왜, 사람을 죽이고 싶은가?”


“글쎄…….”

박무경은 손끝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그는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도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들이 있다. 이를테면, ‘왜 날 죽이려는 거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같은.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질문들 말이다. 잠깐 고민하던 박무경이 되물었다.

“당신은 왜 배가 고파요?”
“…뭐?”
“그거랑 굉장히 비슷한 질문이라서.”

그는 턱을 괴고 말했다.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요?”


“그야 당연히 ‘먹고 싶다’, 는 생각이….”
“난 길거리를 걸을 때, 회사에 있을 때, 버스나 지하철 안에 있을 때, 늘 ‘죽이고 싶다’, ‘죽이고
싶다’, ‘죽이고 싶다’, 는 생각이 들어요.”
“…….”

꿀꺽, 관리자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나한텐 이게 당연한 일인데.”

박무경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곤 차가운 위스키를 단번에 마셨다. 관리자는 아직 질문이 남은
모양이었다.

“자네 혹시, 어렸을 때 학대를 당했나?”


“아뇨.”

그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슬슬 노인네의 목소리가 지겨워졌다.

“성기능은 어떤가. 문제가 있나?”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관심이 많네, 그게 궁금한가?’하고, 박무경이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다. 속내를 다 드러낸 마당에 얌전한 척 하기도 귀찮았다. 그는 유리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곤 말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요. 어차피 못할 테니까. 그냥 당신이랑 나는, 종류가 다른 거야. 초식동물과


육식동물, 일반식물과 식충식물, 뭐 그렇게. 걔들이 고기 먹고 벌레 먹는 것도 이유가 궁금해요?”

관리자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박무경은 팔꿈치까지 접어올린 셔츠를 내리며 창밖을 쳐다봤다.
빗줄기는 더 거세질 모양이었다. 그는 이런 날을 좋아했다. 시체를 가공하기 딱 좋은 날씨다. 비가
피냄새를 덮어줄 테니까.

그는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멈칫했다. 관리자가 그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이 아주 좆같았다. ‘어떻게 보면 제일 불쌍하군.’하고, 늙은이가 중얼거렸다. 그 말은 박무경을
몹시 언짢게 만들었다.

혓바닥 위로 독이 고였다. 어느 샌가, 그는 상체를 들고 있었다. 양 손으로 탁자를 짚고 허리를 숙이자


늙은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림자로 얼룩진 얼굴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박무경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관리자를 내려 보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내가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거 같아?”

관리자가 주춤 눈을 피했을 때,

“이석원씨?”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이 부셔서 저절로 눈꺼풀이 깜빡였다. 아래서 배익선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거리가 이상하게 가까웠다. 석원은 꿀꺽, 침을 삼키곤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제야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테이블을 짚고 상체를 앞으로 구부리고 있었다. 배익선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은 꼴이었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쳐다봤다. 뒤에서 조연출이 속삭였다.

“저기, 그거, 없는 대산데요?”

석원의 눈동자가 대본을 훑었다. 씬 마지막엔 대사가 없었다. 지문엔 그저, 무섭게 관리자를 노려보라고
쓰여 있었다. 등줄기로 한기가 쭉 올라왔다. 머리가 생각을 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열렸다.

“죄송합니다.”

배익선에게 가장 먼저 사과를 하고, 정형석과 김효승 작가에게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


머릿속엔 수십 가지 변명거리가 떠올랐다. 그가 막 그 중 하나를 골랐을 때.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던
정형석이 손을 들었다.

“아…아니, 아니에요. 잠깐만, 김작가, 방금 마지막 대사 어때?”


“뭘 물어요. 살릴 거예요.”

김효승 작가가 대본에 글자를 휘갈기며 말했다. 정형석이 속삭였다.

“김작가, 애드립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야, 하도 개떡 같은 헛소리들을 해대니까 그런 거고….”

마주 속삭이곤, 그녀가 석원을 쳐다봤다. 그리곤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저 이런 애드립은 좋아해요.”

그 말이 석원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앞에서 배익선이 헛기침을 하며, 이만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그는
안도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해프닝이 잠잠해지자 곧 다시 대본이 넘어갔다. 하지만 석원의 눈엔 이미
대본 따윈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주위에 사람이 없었다면 스스로
뺨이라도 쳤을 것이다.

들뜬 나머지 잠깐 돌았던 게 틀림없다. 이곳은 카르투옴 대륙이 아니었고, 그는 텐 가렌이 아니었다.


이곳은 현실이다. 멋대로 흥분해서 할 말 못할 말 구분 못하고 지껄이면 안 되는 곳이었다. 지금은
말실수를 했을 뿐이지만, 나중엔 큰 사고가 될 수도 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석원은 창백한
얼굴로 되뇌었다.

----------------------

촬영감독은 문득 깨달았다. 아까부터 카메라의 프레임이 고정돼 있었다. 박무경만 찍고 있었던 것이다.
힐긋 뒤를 돌아보니 조명감독도 입을 벌리고 카메라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배익선과 이석원의 투샷 때부터였다. 저도 모르게 카메라가 박무경을, 아니 이석원을
쫒아갔다. 그가 애드립을 쳤을 때는 무슨 드라마 찍는 것 마냥 현란한 카메라 워킹을 시도하고 있었다.
정신이 잠깐 마실 나갔다 온 게 틀림없다.

덕분에 메이킹이 쓸데없이 예술이었다. 이건 뭐, 어딜 잘라다 붙여도 그림이었다. ‘누가 편집할지 몰라도,
그 놈 노났구만….’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리딩은 어느새 2 화 대본의 중반부까지 진행돼 있었다.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참 묘했다. 다들 지나치게
열심이었다. 대본리딩을 건성으로 하는 배우도 드물었지만 백퍼센트를 다 보여주는 배우도 드문데,
오늘은 다들 백퍼센트를 넘어 칼 같은 긴장감까지 감돌았다. 이대로 현장에 옮겨놔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다보니 쫓아가느라 등골이 휘는 배우들도 있었다. 얼굴이 낯선 남자배우 둘이 머리를 딱 붙이고


속닥였다.

“아, 씨발. 왜 리딩부터 힘 빼고 지랄이야? 살 떨려 죽겠네.”


“조용해, 임마. 이석원은 그렇다 치고, 배익선 선생님까지 진지하게 받아친 판에 누가 대충 읽겠냐?
까딱하면 대놓고 발연기 인증하게 생겼구만.”

그나마 그들은 쫓아가기라도 하니 다행이었다. 이지원은 아주 볼만했다. 딱 영재 반에 낀 열등생


꼴이었다. 일찍 죽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눈치 살피다 눈알이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촬영감독은 낄낄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찍었다.

대본리딩이 끝나자마자 조연출이 우승희에게 와이어리스를 내밀었다. 메이킹에 넣을 주연배우 인사


때문이었다. 둘이 인터뷰 내용을 이야기하는 동안, 이석원은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촬영감독이 얼른
그를 붙들었다.

“어딜 가? 인터뷰 하고 가야지?”


“…아, 저도 해요?”

이석원이 눈을 껌뻑였다. 그리곤 이지원에게 말했다.

“나 인터뷰해야 된대. 이건 또 신선하네.”


“시체한테 말 걸지 마. 나 지금 관 뚜껑 덮고 있는 거 안보여?”
“왜 또 성질이야. 내가 죽였어?……아, 내가 죽였지.”

이석원이 킬킬거렸다. 그리곤 곧바로 이지원에게 아랫배를 얻어맞았다. 촬영감독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한 순간 그를 섬찟하게 만들었던 박무경은 어딜 가고, 평범한 남자만 남아있었다.
조명감독이 입이 근질근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이석원씨? 이야…연기하는 거 보고 있으니까 장난 아니던데? 정말 살인자 같더라고.”

이석원이 배를 문지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아니, 비결이 뭐예요? 비결이….”

호들갑을 떠는 와중에, 조명감독이 들고 있던 스탠드가 기울어졌다. 빛이 앞으로 확 쏟아졌다. 이석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조명 탓일까. 파리한 낯빛이 조금 전과는 또 달라보였다.
잠깐의 침묵 뒤에, 이석원이 말했다.

“연기를 할 때는……제가 박무경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곤 빙긋 웃었다.
“그게 비결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네요.”

멍하니 쳐다보던 조명감독이 ‘어, 그게 비결일거야. 그게 비결인가 봐.’ 하고 헛소리를 지껄였다. 슬금


물러난 그가 촬영감독에게 속삭였다.

“…저거, 혹시 정신과 상담 받아봐야 되는 거 아냐?”


“무슨 쉰소리야. 듣겠다.”
“배우들은 감정이입이 너무 심하면, 왜. 어떻게 될지 모른다잖아.”

촬영감독은 힐긋 이석원을 쳐다봤다. 그는 엉거주춤 서서, 테이블에 엎어진 이지원을 보고 있었다. 이걸


달랠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또 영판 다른 모습이다. 촬영감독이 귀밑머리를 긁적였다. 어쩐지 그도
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30 세. 중소기업 4 년차 대리, 우선우. 그는 성씨가 ‘우’라는 것만으로도 조상께 감사하는 우승희의


골수팬이었다. 집에는 우승희의 화보잡지와 드라마, 영화 DVD 가 가득했지만, 회사에서는 아무도 그의
비밀을 알지 못했다. 그의 일반인 코스프레는 훌륭했다.

오늘도 그는 남들보다 일찍 점심을 먹고 들어왔다. 그리고 텅 빈 자리에서 재빨리 마우스를 움직였다. 곧


화면에 흰 페이지가 떴다. 디씨인사이드의 우승희 갤러리였다. 우승희가 요즘 영화와 드라마, 양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덕에 갤러리도 아주 호황이었다. 오늘 아침 그가 올린 글, 「내 생각에 드라마는
시망, 영화만 믿어야 될 듯」이 벌써 일곱 페이지나 뒤로 밀려있었다. 그는 댓글을 샅샅이 핥았다.

「드라마는 그닥 기대하면 안 될 듯. 영화 개봉하기 전에 개같이 일해서 돈 벌어놔야지」


「천만관객 넘기려면 우미인 머리카락 개수 셀 기세로 가야겠네.」
「우미인 관객수 올려주려고 VIP 됐다. 내가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열 번 볼게」
「윗횽, 내 사랑 먹어. 두 번 먹어. 열 번 먹어」
「다들 우미인 볼 생각에 넋 나간 건 알겠는데, 오징어 되기 싫으면 절대 여자사람이랑 가지 마라.
주인공 김승후다」
「상영관에 어시장이 열리겠군. 꼴뚝꼴뚝」

낄낄거리며 새로 고침을 하던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글이 무섭게 올라오고 있었다. 지금 시간은
12 시 50 분. 갤러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시간은 아니었다. ‘어디서 떡밥이라도 던졌나?’ 아니나 다를까.
두 번째 페이지 아랫줄에 댓글 40 개짜리 글이 올라와 있었다.

「니들 지금 술래잡기 메이킹 뜬 건 알고 갤질하냐?」

‘메이킹!’ 그는 한 마리 날랜 생선이 되어 술래잡기의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과연 영상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이틀 전에 했다던 대본리딩 영상이었다. 재생버튼을 클릭하자, 살아 숨 쉬는 우승희의
얼굴이 보였다. 우선우는 가슴을 눌렀다. 너무 두근거려서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모니터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우미인의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종도 불분명한


해산물 한마리가 낯짝을 들이밀었다. 젊은 남자였다. ‘이 놈이 그 놈이구만?’ 우승희 팬들 사이에선
벌써부터 오체분시가 진행 중인 이석원이 틀림없었다. 화면 속에서, 그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박무경 역할의 이석원입니다]

‘니가 박무경이든 말든.’ 우선우가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30 초, 1 분, 1 분 30 초……. 영상이


흐를수록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2 분짜리 짧은 영상이 끝났을 때. 우선우는 멍하니 검은 화면을
쳐다봤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회사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었을 리가 없는데, 이상하게 한기가 들었다.

“대리님, 뭐하세요?”
“……!”

심장이 뚝 떨어졌다. 돌아보니, 여사원들이었다.

“대리님. 대리님? 어머, 우 대리님 더위 먹으셨나 봐요.”


“귀신 본 표정인데?”

우선우가 한숨을 쉬었다. 괜찮다고 손을 젓자, 그녀들은 칫솔을 들고 사라졌다. 사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우선우는 새까만 모니터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가입한 모든 팬 카페에
메이킹 영상을 퍼 나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팔콘입니다^^
지난 편에 선작, 추천, 코멘트 써주신 분들, 쿠폰 보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코멘트는 늘 한 줄 한 줄 아껴가며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내용상의 오류나, 비문, 오타는 언제든지 지적 부탁드립니다.

참, 질문을 주실 때에는 쪽지로 보내 주시거나


코멘트에 답변을 해달라는 내용을 같이 적어주시면 다시 쪽지 드리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00022 용병(Mercenary)
=========================================================================
             
자고 일어나면 좀비가 창궐해 세상이 뒤집어졌으면 좋겠다. 자고 일어나면 괴물로 변해있었으면 좋겠다.
자고 일어나면 초능력이 생겼으면 좋겠다. 자고 일어나면, 자고 일어나면……뭐가됐든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어린 시절 이석원은 바라고 또 바랐다.

다행이도 그 바람은 이루어졌다. 그의 세상은 바뀌었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이십여 년 전 텐


가렌이 탄생하면서 한 번. 얼마 전 그가 텐 가렌의 몸을 차지하며 또 한 번. 그리고 지금, 갑작스럽게
연예인 행세를 하게 되면서 그의 세상은 또 다시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석원은 얼음을 가득 띄운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생각했다. 아직까진 그 변화가 꽤 마음에 든다고.

그는 크리스마스 아침 선물상자를 까보는 어린아이가 된 심정으로, 동후가 챙겨 온 선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동안 율피, 미강, 녹두 등을 비롯한 곡물팩. 물파스. 비타민제와 철분제 등 다양한 선물을
받았지만 이번이 단연 최고였다.

가장 위에 있는 건 런던의 연쇄살인마, A.J.존스의 팩션 소설이었다. 한 페이지엔 눈알이 뽑힌 젊은


급사의 삽화가 곁들여져 있었는데 마음에 쏙 들었다. 그 밑으로 프로파일러와 10 명의 연쇄살인범의
인터뷰. 요시다 지로의 살인저택을 비롯한, 사이코패스를 소재로 한 드라마시리즈 DVD. 인물이 등장하는
족족 머리통을 까부수는 슬래셔무비 같은 것들이 종이가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동후가 그의 반응을
살피면서 말했다.

“보기 거북하겠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 거야. 술래잡기 박무경이 감정이입하기 쉬운 캐릭터는 아니잖아.”
“정말 고마워요, 형.”

고맙다마다. 개새끼가 공만 물어 와도 칭찬을 하는데, 이건 그보다 몇 배는 마음에 드는 일이었다.


등골이 휘도록 일하고 받은 첫 월급도 이만큼 반갑진 않았다. 동후는 그에게 최고의 포르노를 선물한 거나
다름없었다.

컴퓨터 속에 BDSM, 게이섹스, 갱뱅 같은 남다른 콘텐츠를 숨기고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석원에게는


이것이 그를 흥분시키는 매개체였다. 엄격한 그의 이성은 그것들을 컴퓨터 하드 한 구석에 숨겨두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온 가족이 모여 있는 거실에서 시체의 삽화를 핥듯이
쳐다봐도 그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저 캐릭터 분석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

“고맙긴 뭘. 다 보면 말해, 또 찾아다 줄 테니까.”

동후가 마치 시체라도 구해다줄 것처럼 말했고,

“아주 지극정성이구만. 왜, 젖도 물리지 그러냐?”

이지원이 비꼬았다. 석원은 유쾌한 기분으로 책장의 한 구절을 소리 내어 읽었다. ‘메리 에번스의 시신은
목젖부터 복부까지 절개된 채, 모든 장기가 쏟아져 나와 있었다. 심장은 다섯 토막으로 발견되었는데
가운데 한 조각은 바싹 구워져 있었다.’ 지원의 어깨가 움찔움찔했다. 석원이 내심 웃었을 때,
테이블에서 핸드폰이 울었다.

오늘 하루만 벌써 열다섯 번째였다. 평소엔 좀처럼 우는 법이 없던 그의 핸드폰이 오늘은 아주 통곡을


했다. 다 술래잡기의 메이킹 영상 때문이었다. 며칠 전에 촬영한 대본리딩 메이킹이 다음, 네이버,
유튜브 등 여러 포털사이트에 올라오더니, 오늘 아침엔 네이버 메인에 기사가 떴다. 우승희 소속사에서
돌린 보도자료라 그와 관련된 내용은 프로필 한 줄(이석원/28 세. 박무경 역)이 전부였지만.
그가 책장을 덮고 미리 복사해놓은 답 문자를 보내자, 지원이 희한하다는 듯이 말했다.

“걔들은 다 귀신이니? 메이킹이야 관심 있는 사람들만 찾아보는 거고, 기사엔 사진은커녕 이름한줄 띡


올라왔는데 대체 어떻게들 알고 연락하는 거야?”
“다 방송하는 사람들이라 그래.”

실제로 학창시절 동창생이나 친척들에게선 전혀 반응이 없었다. 연락 오는 건 다 사회생활에서 만난


방송쟁이들뿐이었다. 워낙 이직이 잦은 직업인 탓에 인맥도 거미줄 같아서, 누군가 카카오톡 채팅방에
연예계 X 파일을 하나 던지면 방송 삼사는 물론이고 케이블, 종편, 심지어 종교채널에서 일하는
작가피디들에게까지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곳이 이 바닥이었다. 술래잡기의 메이킹 영상도 그렇게 퍼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야단도, 야단도. 누가 보면 너 남우주연상 탄 줄 알겠다, 야.”

지원이 비웃더니, 곧 소리쳤다.

“저 양반들은 아주 갤탭 부수겠어. 엄마, 그거 막 누르면 안 돼!”

공휴일엔 늘 호섭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부모님이 오늘은 소파에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앉아있었다. 그들은
돋보기안경까지 끼고 한 시간째 갤럭시 탭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꼭 쥔 주먹에 검지만 곧게 편 어머니가
화면을 눌렀다. 몇 번째인지 모를 술래잡기 메이킹 영상이 다시 재생됐다.

“봐도 봐도 신기하네. ……여보, 아무래도 이게 석원이 천직인가 봐. 얘, 말하는 것 좀 봐요. 얼굴에도


생기가 돌고.”
“허, 참. 맨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러던 놈이…….”

석원은 뒷덜미를 긁적였다. 부모님의 표정이 낯이 익었다. 오래 전, 체육선생으로부터 ‘우리 석원이가


육상에 재능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딱 저런 표정들이었다. 그 뒤로 지원이 연예계에 데뷔하고
첫 앨범을 내놨을 때도 저 표정. 두 번째 앨범, 세 번째 앨범, 네 번째, 다섯 번째, 처음으로 드라마에
조연으로 캐스팅됐을 때, 처음 예능에 나왔을 때도 저 표정……끝이 좋았던 적이 없는데도 참 한결같았다.
석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사이 구글에다 그의 이름을 검색한 어머니가 호들갑을 떨었다.

“지원아, 이것 좀 봐봐. 여기 석원이 얘기하는 애 또 찾았다. 호갱이라는 앤데….”


“아, 부끄러워. 부끄러워서 손발 없어지겠어.”

지원이 오들오들 떠는 시늉을 하며 말했지만, 어머니는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고 더듬거렸다.


“어디 보자, 박무경 배우랑 우승희랑 케미 쩔어요. 배익선하고도 잘 붙고. 연기를 잘 해서 그런지 이
배우 캐미신인듯. 메이킹만 봐도 쫀득쫀득하네요. ……이게 한국말이니? 난 왜 읽어도 이해가 안 가니?”
“케미가 뭐냐?”

아버지가 묻자, 동후가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선 말했다.

“둘이 연기가 잘 맞는다, 화학 반응이 좋다는 얘기예요.”


“그래? 지원아, 이따가 이것도 프린트 좀 해 놔라.”

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지원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든 말든, 어머니는 잔뜩 들뜬 기색으로 덧붙였다.

“영화는 추석 연휴에 개봉한댔지? 추석에 큰집 가면 할머니랑 다 모시고 한 번 보러 가야겠다. 근데


석원이도 그 때 같이 갈 수 있을까? 유명해지면 함부로 못 돌아다니는 거 아니니?”
“아, 엄마! 호들갑 좀 그만 떨지?”

지원이 소리쳤다.

“저거저거, 엄마한테 말본새 하곤…….”


“또 김칫국 나발 불다가 실망할까봐 그러지! 한두 번도 아니고 징글징글하다, 정말. 평정심을 좀 가져봐,
평정심을!”

불퉁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동후가 갤럭시 탭을 내밀었다.

“여기 누나 얘기도 있네요.”


“뭐?”

지원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베스티즈 사이트의 연예 카테고리에 그녀에 대한 글이 올라와 있었다.


머리통 네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작은 화면을 쳐다봤다.

‘…근데 다들 우승희만 빠는데, 솔직히 제 취향으론 미모는 이지원이 갑인 듯……저 같은 사람 없나요?’,


‘메이킹 편집자도 이지원 좋아하는 듯. 메이킹 보니까 대사 많은 배우들 다 떼샷으로 나올 때, 대사하나
없는 이지원은 원샷 두 번이나 잡힘.’, ‘헐. 이지원 찬양 글에 옹호덧글이 달리다니…이 드라마 흥할
건가 봄.’, ‘이지원 원래 여자들한텐 역적인데 남자들은 좋아하는 사람 꽤 있음.’…….

한 줄 한 줄 읽어내려 갈수록 지원의 콧대는 에펠탑처럼 솟구쳤다. 아버지가 이 페이지도


프린트해놓으라고 말하자, 코끝이 구름을 뚫었다. 벌써 백만 팬덤이라도 생긴 얼굴이었다. 동후가
스크롤을 내리며 말했다.

“마지막 댓글이 최고예요.”

세 쌍의 눈길이 다시 화면에 박혔다.

「메이킹 편집자가 이지원 대사 다 잘라낸 게 신의 한수인 듯」

낄낄거리던 동후는 결국 개껌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지원이 그 대단한 성량으로 소리를 질렀고,
호섭이는 제 개껌을 돌려달라고 깽깽거렸다. 시끄러웠다. 그 속에서 석원만이 동떨어져 있었다. 석원은
느릿느릿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평소였다면 치솟는 짜증을 감추며 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어나는 대신 다시 책을 펴들었다. 이 정도야 버틸만했다. 손에 들린 책은 꽤 흥미로웠고, 밤엔 이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이석원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텐 가렌의 시간도 멈춰있지만은 않았다. 텐은 조악한 나무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눈에 달라붙어 있던 졸음이 후드득 떨어졌다. 미하라의 새벽은 몹시 쾌청했고, 허공엔
까마귀 수십 마리가 빙빙 돌며 바닥에 뿌려진 내장을 노리고 있었다.

용병지부 앞엔 아직 처리하기 못한 시체가 가득했다. 용병의 시체들이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반쯤 뜯어


먹혔거나, 마차 바퀴에 깔린 개구리처럼 으깨져있었다. 텐은 느른하게 웃었다. 이곳에선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어나간다니, 앞으로 물리도록 볼 광경이었다.

그는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쭉 훑어봤다. 태반이 용병이었고, 나머지는 그들이 늘어놓은 몬스터의


부산물들을 값싸게 구입하기 위해 줄 선 행상인들이었다. 곧 텐의 눈이 짓궂게 휘어졌다. 잎사귀 한 장
없는 고목 아래로 작은 머리통이 하나 보였다.

열 두어 살 쯤 됐을까. 왜소한 몸집에 양쪽 뺨만 토실토실한 도제였다. 혼자 짐마차를 지키는 중인지


마부석에 쭈그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앞으로 휘청, 뒤로 휘청 하던 머리통이 결국 뒤로 축 젖혀졌다.
자세히 보니 어디서 얻어맞았는지 눈가엔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너구리같아서 아주 귀여웠다.

텐은 콧노래를 부르며 시위에 화살을 재었다. 힘껏 깃대를 잡아당기고, 놓았다. 둥글게 쏘아져나간
화살이 목표물을 꿰뚫었다. 도제의 머리통 위에서 날아다니던 까마귀였다. 화살이 까마귀의 발목을 뚫고
나뭇가지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텐의 두 번째 화살이 까마귀의 목을 땄다. 도제의 얼굴 위로 피벼락이
쏟아졌다.

화들짝 놀라 깨어난 도제가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곤, 비명을 빽 지르며 엉엉 울었다. 텐은 활을


내려놓고 웃다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 타단이 한심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뭘 봐.”
“창문 닫어, 미친놈아. 냄새 들어와…….”

타단이 웅얼거렸다. 텐이 코웃음을 치며 창을 닫자, 그가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너 그렇게 살다가 언젠가 뒤통수 맞고 죽는다.”


“……말 한 번 예쁘게 하네.”

텐은 배낭을 둘러매며 일어났다. 더 뭉그적거리고 있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카르투옴의 시간은 현실보다
두 배, 세배는 더 빨리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객실 문을 열고 나가기까지 그는 근육질의 팔과 다리를 일곱 개쯤 밟았다. 좁은 객실에 열 명이나 되는


거구가 뒤엉켜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은급 용병들이 워낙에 많아서인지 미하라 용병지부는 모든 객실이
공용실이었다. 오늘밤엔 괜찮은 여관이나 여자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텐은 쩍 하품을 했다.

1 층은 제법 규모가 컸다. 활짝 열린 문은 마차도 드나들 수 있을 것처럼 넓었고, 사방의 벽에는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백랍 촛대들이 걸려 있었다. 마주보는 양쪽 벽에 접수처가 늘어서 있었고 직원도 열 명
가까이는 돼 보였다. 펠라도르 용병지부와 같은 거라곤 테이블에 엎어진 술꾼들뿐이었다. 텐은
둘러보다가 몸뚱이는 곰 같고 얼굴은 여우같은 직원에게 다가갔다. 그는 팔뚝 높이만큼 포갠 양피지를
아마줄로 묶고 있었다. 텐이 말했다.

“어젯밤 모드레스랑 같이 왔는데.”


“모드레스? ……은급용병이오? 토벌대 계약하러 온 거 맞소?”

직원이 미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그럼 내가 여기까지 몸 팔러 왔을까?”


“그가 설명은 잘 한 거요? 최소 육 개월 계약이고, 계약하게 되면 십오일에 한 번은 반드시 토벌대에
참가해야 하오. 죽으면 성에서 위로금이 나오는데, 이 년 안에 죽으면 모리울 은화로 서른 냥. 일 년
안에 죽으면 열다섯 냥. 반년 안에 죽으면 다섯 냥이오. 한 달 안에 죽으면 없고.”
대답할 틈도 없이 퍼부은 직원이, 다시 덧붙였다.

“계약한 용병들이 처음 한 달에 얼마나 죽어나가는지는, 아마 모르는 게 마음 편할 거요.”

텐은 손을 휘휘 젓곤 계약서를 작성했다. 미하라에 대한 이야기야, 오는 동안 모드레스에게 지겹게


들었다. 서명을 끝내자 직원이 양피지를 둘둘 말아 묶었다. 이젠 육 개월은 이곳에 묶인 몸이었다.

선금은 은화 열 두 냥이었다. 안 그래도 포션이 달랑달랑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는 돈주머니를 집어들고


용병지부를 나섰다. 바람은 시원했고, 하늘엔 갈가리 찢어진 구름이 흘러갔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그는 며칠을 섹스만으로 견뎌왔다. 하지만 따분한 여정을 끝내고 새로운 땅에 정착하게 됐으니, 오늘은
피를 좀 볼 생각이었다.

----------------------

유리 아즈엘은 누이를 바라보았다. 꿈속의 그녀는 모처럼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소맷부리에 주름을 넣어
부풀린 공단 드레스는 그가 선물한 것이었다. 수선화 문양을 수놓은 숄도, 머리를 반쯤 묶고 있는 저
리본도 그가 사다 준 것이다. 이때의 누이는 정말 아름다웠다.

유리는 그녀가 저울에 동화와 은화, 금화를 달아보고 양피지에 무게를 기록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깃펜 끝에 잉크를 적시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작은 돌멩이 하나가 훤하게 열린 창 안으로
굴러들어왔다. 그녀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일어나, 창밖을 쳐다보았다. 아래에서 누군가가 ‘마노!
마노!’하고 소리쳤다.

유리는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누이와 똑같은 산호색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잘난 듯이 갈루엣을 박은


지팡이를 들고 있는 소년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열여섯 살. 아직 어린 그가 싱긋 웃고 있었다.
기억이 선명했다. 그가 저렇게 웃고 있으면, 누이는 눈이 부시다며 눈꺼풀을 깜빡거리곤 했다.

“어디 다녀오니?”
“후원자 따라서 귀족들 사냥터에 갔다왔어.”
“예쁜 아가씨들 많이 봤겠구나?”

어린 그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글쎄, 내 보기에 거기도 누이만큼 예쁜 여잔 없더라. 누이만큼 가슴 큰 여자도 없고.”

그녀의 뺨이 확 붉어졌다. 곧,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로엔 웨이든경도 봤니?”


“왜?”
“…….”

뺨이 조금 더 붉어졌다. 어린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머니가 벌써 혼처를 알아보는 거야? 그 남자는 문장만 그럴듯하지, 사람 돼지나 마찬가지야. 기사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첩이 둘이나 있어. 그 중 한명은 아주 유명한 매춘부인데, 이미 사생아까지…
….”

뒷말이 흐려졌다. 누이의 얼굴이 어두웠다. 어린 그는 조그맣게 주문을 읊조리곤, 훌쩍 날아올라 창틀에
앉았다. 그리곤 말했다.

“걱정 말어. 거기다 시집 안 보낼 거니까. 내가 왕실마법사가 되면 그깟 놈보다 훨씬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유리는 양 손으로 힘껏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마치 그의 귓가에다 대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이내, 소년의 목소리가 벌레의 숨소리로 바뀌었다. 그것은 그의 귀를 뚫고 들어와 머릿속이 텅 빌 때까지
갉아댔다.

탕탕.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등이 흠뻑 젖은 채로 깨어났다. 빛 한 점 안 들어오는 여인숙이었다. 그의 옆자리엔 마노가
잠들어있었다. 그는 누이의 몸 위로 시트를 덮어놓고 문을 열었다. 모드레스였다.

“준비해서 나오시오. 그분과 일 얘길 하려면 가서 기다려야 되니까.”


“……얼마나 걸립니까?”

유리가 마노를 힐금 보며 물었다.

“글쎄, 워낙 바쁘신 분이라……어쨌든 해지기 전엔 돌아올 거요.”

어쩌면 하루 종일 기다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모드레스가 마차에 가 있는 동안, 유리는 최대한


깔끔하게 옷차림을 단장했다. 그리고 마노의 머리맡에 해질녘까진 돌아올 테니 얌전히 있으라는 메모를
남겼다. 기나긴 여정 때문인지, 잠든 누이의 얼굴이 곤해보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넘겨주던
유리가 멈칫했다. 마노가 고통스럽게 얼굴을 찡그렸다. 잇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시트를 치우고 누이의 몸을 샅샅이 살폈다. 다친 것을 또 숨긴 게 틀림없었다.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염려한대로 그녀의 허벅지에는 흉하게 상처가 남아 있었다. 아직 새 살이
돋지도 않은, 최근의 상처였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꿈속에서 봤던 누이와는 너무 달랐다.
남자의 것처럼 칙칙한 린넨 셔츠는 끄트머리가 헤져있고, 수년간 대검을 휘두르며 고생한 몸은 영락없는
용병의 것이었다. 유리는 입술을 질끈 깨문 채로 지팡이를 들었다.

“필리아라모르 ‧ 레아모 ‧ 휘리아.”

부드러운 녹색 빛이 뻗어 나왔다. 세 갈래의 빛무리가 허벅지를 휘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처는


말끔히 사라졌다. 유리는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누이의 처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은, 흔들리던 그의
마음을 굳건히 세웠다. 이번 일은 반드시 해내야 했다. 반드시. 그가 거듭 되뇌었을 때였다. 아래서
쩌저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온 몸에 바늘이 박힌 것처럼 굳었다.

무엣 수정구에 금이 갔다. 갈라진 틈으로 그의 생명이 흘러나가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었는데도 턱이


달달 떨렸다.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유리는 창백한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00023 용병(Mercenary)
=========================================================================
             
텐 가렌은 막 신전에 들어서려다 말고 뒷걸음질쳤다. 신상이 우뚝 선 입구에는 몇 장의 현상수배지가
붙어있었는데, 그 가운데 낯익은 얼굴 하나가 끼어있었다. 로에늠 펠라도르 이에렉사. 그에겐 의미가
깊은 청년이었다. 그림으로 봐도 아주 신수가 훤했다. 텐은 복숭아 과육을 깨물며 비뚜름하게 웃었다.

로에늠이 보물을 들고 잠적한 지도 벌써 한 달째. 아직 잡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여러모로 난


놈은 난 놈이었다. 그래 봤자 포션을 훼손시켰으니 곱게 살아있지는 못하겠지만…텐은 과즙이 질질 흐르는
손을 수배지에 문질러 닦곤 신전으로 들어갔다.

홀은 넓고 찬란했다. 굵은 돌기둥들이 천장을 떠받치고 열두 개의 거대한 화로가 홀 구석구석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석벽은 모조리 섬세한 조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틈과 골마다 은으로 채워져
있었다.

홀을 지키고 있는 것은 수염도 안 난 젊은 기르왐(신전기사) 들과 어린 수습 신관들이었다. 일반적인


광경이었다. 제 몫을 하는 신관들은 약 팔러 나올 시간도 없었다. 그들은 하루 열다섯 시간 이상을
기도했다. 매일매일을,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독방에 처박혀서. 정신 나간 작자들이었다. 분명 사망하는
신관의 삼 할 정도는 우울증 탓이리라 생각하며, 텐은 접수대에 팔을 올렸다.

“하급 포션 세 병.”
“각각 모리울 은화로 서른 냥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주머니를 꺼낸 텐이 멈칫했다.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입맛을 다시곤 ‘두 병만.’


하고 말했다. 포션 세 병을 꺼내던 신관이 한 병을 냉큼 집어넣었다. 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최상급 포션을 살 만큼의 돈이 있었는데, 이젠 하급 포션도 사치인 처지가 됐다. 그나마도
아끼기 위해 한 병은 물 주머니에 조심조심 쏟아 희석해야 했다. 이게 다 그동안 흥청망청 써댄 결과였다.
미하라 땅도 밟았겠다, 이젠 미뤄뒀던 돈벌이 궁리를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돈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낯익은 목소리였다. 돌아보자 화롯불의 그림자 너머로 두 명이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마법사의 경우, 직접 살펴보지 않고선 치료비용을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럼……대신관님의 치료를 받으려면 금이 얼마나 있어야 합니까?”
“대신관님은 일 년째 금식 기도 중이십니다. 만나실 수 없습니다.”
“그럼 귀족이라면 만날 수 있습니까?”
“왕명이 아니라면 귀족이라도 만나실 수 없습니다.”

하나는 작달막한 수습 신관이었고, 하나는 전사였다. 낡은 망토, 푹 눌러쓴 후드에 등에 업은 대검까지.


수상쩍은 몰골이 마노 아즈엘이 분명했다. 동생은 떼놓고 온 모양이었다. 텐은 흥미로운 기색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몇 번인가 더 수습 신관에게 말을 붙였으나 돌아오는 건 ‘없습니다, 없습니다,
없습니다 ’뿐이었다.

결국, 그녀가 맥없이 돌아섰다. 어깨 끝이 둥글게 처져 있었다. 텐은 우는 애 뺨 한 대 더 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랫도리가 홧홧했다. 정말 어쩔 도리없는 물건이었다. 그가 신체 부위를 단속하는
틈에, 마노 아즈엘 역시 그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그녀가 한달음에 다가왔다. 그리고
대뜸 물었다.

“얼마면 됩니까?”

주로 그가 창녀나 포주에게나 하던 말이었다.

“……뭐가. 오즈엣?”

되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텐이 손가락 두 개를 폈다.

“모리울 금화로 두 냥.”


“두 냥, 금화로 두 냥…….”

그녀가 말꼬리를 흐렸다. 얼굴이 안 보이니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비싸? 원래 가격보다 낮춰 부른 거야.”


“알아요, 압니다. 하지만…….”
“돈이 모자라? 그 착수금이란 건 얼마나 받기로 했는데?”
“…그건 유리가 돌아와야 확실히…….”

어쨌든 돈이 부족하단 소리였다. 텐은 입맛을 다셨다. 은밀한 상상이 꼬리를 물었다. 값을 깎는 대신 한


번 빨아보라고 할까. 아니면 동생이 했던 것처럼 뺨을 좀 쳐보겠다고 할까. 목을 조르는 건 당연히
허락하지 않겠지. 어느 부위든 칼질을 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텐데……. 유달리 아름다운 것인 만큼
일단 손에 떨어지기만 하면 하고 싶은 것이야 수도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떨어뜨리느냐다. 맨손으로
아름드리나무를 뜯어내는 여자였다. 무작정 칼을 겨누거나 성기를 쥐여주기엔 배짱이 모자랐다. 궁리
끝에, 그는 일단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내놓았다.

“나한테 시간을 좀 파는 건 어때?”


“시간?”
“사냥하러 갈 생각인데…미하라 땅은 처음이기도 하고, 보다시피 내 무기가 활이라 든든한 동료가
필요하던 참이라서. 당신 실력이야 저번에 익히 봤으니 거들어주면 좀 깎아주지. 어때, 생각 있어?”
“있습니다. 하겠습니다.”

그녀가 덥석 물었다. 텐은 신전 입구를 턱짓하며 냉큼 앞장섰다. 그녀가 바짝 따라오자 그는 여상한 투로,


‘그런데 내가 당신을 믿어도 될까?’하고 물었다. 마노가 후드가 젖혀질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갑자기 당신이 강도로 돌변한다든가….’하고 중얼거리자 이번엔 거세게 가로저었다. 맑고 올곧은
눈동자가 그를 바라봤다. 배를 곯아가며 양 떼를 지키는 미련한 개 같은 표정이었다. 텐은 비뚜름한
표정으로 웃었다. 마노 아즈엘의 눈동자가 올곧거나 말거나, 애초에 그는 신뢰 같은 단어는 쓰지도
믿지도 않는 인간이었다.

신전 앞의 돌층계를 반쯤 내려갔을 때, 그는 또 다른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타단이었다. 그는


용병인지 비렁뱅인지 헷갈리는 무리 틈에 끼어서는 신전에서 나오는 자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의도야
빤했다. 신관이나 마법사를 끌어들일 능력은 안 되니, 포션을 가졌을 법한 자를 꼬드겨 동료로 삼기
위해서였다. 텐을 발견하자마자 그가 번쩍 손들었다.

“어이, 활잡이! 내가 꽤 괜찮은 파티를 찾았는데, 낄래?”

텐이 코웃음을 쳤다. 저들이 ‘꽤 괜찮은 파티’라면 펠라도르의 던젼원정대는 왕국 제일의 파티쯤 되었을
것이고 그들의 전멸은 국가적 손실이다. 하지만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라에 익숙한 자들과
동행해서 나쁠 건 없고, 저 정도 머릿수라면 마노 아즈엘과 서로서로 견제도 될 테니까.

'아는 사인가?' 비렁뱅이들 사이에서 누군가 물었다. 턱부터 우람한 가슴, 손등까지 털로 뒤덮인데다,
그 위에 털조끼까지 두른 남자는 인간이라기보단 짐승에 가까웠다. 타단이 텐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텐 가렌이라고, 어제 함께 들어온 놈이에요.”


“오, 모드레스가 데려왔으면 은급이겠구먼. 아직 불알도 안 여문 놈처럼 뵈는데, 솜씨는 좋은
모양이야?”
“불알이고 지랄이고 돈주머니만 꽉 찼으면 됐지 뭘!”

누군가 끼어들었다. 무리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졌다. 털북숭이가 텐의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덧붙였다.

“그래도 미하라의 떠도는 숲은 초심자가 올라타기엔 콧대가 높지. 당분간은 우리 파티에 끼어서 밥값이나
벌라고, 꼬마. 참고로 우리 중엔 미하라 토박이가 있어서 따로 숙소를 잡을 필요도 없어. 집 꼬락서니야
돼지우리가 따로 없지만, 그래도 제법 좋은 여자가 딸려 있단 말씀이야. 어이, 외팔이. 남는 자리
있지?”

외팔이라 불린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몇 달을 굶주린 들개처럼 왜소했고, 정말 팔이


한쪽뿐이었다. 게다가 대여섯의 은급 용병들 사이에서 오직 그만이 동급 용병 패를 차고 있었다. 파티에
끼기는커녕 값싼 럼주나 구걸하고 있어야 할 몰골이었다. 텐이 그의 휑한 팔을 쳐다보자, 그가 탐탁잖은
투로 말했다.

“맨바닥이라도 괜찮다면 내 주지.”


“염병할, 잠자리 말고 네 마누라 가랑이 사이에 들어갈 자리가 남아 있느냔 말이야!”

또 한 번 왁자지껄하게 웃음이 터졌다. 단번에 그들의 관계를 알아차린 텐이 흥미가 가신 얼굴로 무리에
합류했다. 용병 넷과 타단, 텐 가렌. 둘이 실력을 보증한 마노 아즈엘까지. 순식간에 일곱 명의 파티가
꾸려졌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그들은 대장간과 가죽 세공장, 잡화점 등을 돌며 필요한 물품을 사들인 다음, 용병지부에서 짐수레와
짐꾼을 구했다. 목적지는 물론 <떠도는 숲>이었다. ‘기사는 성도로 가고, 전사는 미하라의 떠돌이
숲으로 가라’는 말이 있을 만큼 유명한 몬스터 서식처. 미하라에 몬스터 토벌대가 항시 운영되는 것도
떠도는 숲의 몬스터 때문이었다.

숲과 가까워질수록 흙길은 깊게 팬 말발굽과 수레바퀴 자국으로 어지러웠고, 숲의 입구 주변엔 뾰족한


막사와 인파가 바글거렸다. 대부분 토벌대 계약을 한 뜨내기 용병이나 돈이 궁한 사냥꾼들이었다. 그리고
창과 방패를 든 병사들도 백여 명. 그 중엔 적포도주색 비로드 로브를 걸친 왕실 마법사들도 보였다.
그들 뒤로 병사 셋이 커다란 궤짝을 나눠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돌덩이 같은 것들이 그득 쌓여있었다.
수정구였다.

“수정구가 저렇게 많이…….”

마노 아즈엘이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타단이 눈빛으로 후드를 녹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건 많은 것도 아냐. 한 달에 한 번, 떠도는 숲에서 거둬들인 수정구를 성도로 올려보내는데 그때는


저런 궤짝이 족히 수십 짝은 나온다던데. 하긴, 왕국 제일의 수정구 생성지역인데 그만한 양이 안 나오면
마법사들이 말라죽겠지.”

‘수십 짝…!’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흥분한 기색이 훤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떠도는 숲이 수정구


밭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저 숲에서 수정구가 열리나요?”


“숲 중심부로 한참 들어가야 열리지. 우리 파티는 입구에 발만 담그다 빠질 테니 수정구 딸 생각일랑
버리라고. 그리고 이건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어떻게 하나 빼돌려볼까 하는 생각이라면 더더욱 버려야
할 거야. 반역죄니까. 저 꼴 난다고.”

털북숭이가 턱짓했다. 무덤처럼 완만한 언덕에 창대가 줄줄이 박혀 있었다. 꼭대기에는 찌그러진 투구
같은 것이 걸려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쇳물을 부어 굳힌 사람 머리통이었다. 썩 괜찮은 취향이었다.

숲의 길목엔 진짜 투구를 쓴 병사들이 석상처럼 서 있었다. 일행이 그들에게 용병패, 또는 신분첩을


등록하는 동안 젊은 마법사가 모래시계를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얼추 세 시간쯤 돼 보였다.

“제한시간 내로 나오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행동이 적발되면 무조건 감옥행이오. 그리고 만약
사냥 중 수정구를 발견하면,”
“몬스터가 따먹기 전에 얼른 갖고 나오겠소. 것 참, 한두 번 들락거린 것도 아닌….”

털북숭이가 슬그머니 말을 주워담았다. 병사들의 눈총이 따갑다 못해 살을 쑤셨다. 곧 그들은 울창한


숲으로 떠밀렸다. 열 걸음을 걷기도 전에 잡음이 사라졌고, 열다섯 걸음째엔 바람이, 스무 걸음쯤 걷자
빛마저 희미해졌다. 햇살은 구불구불하게 얽힌 나뭇가지와 잎사귀에 가로막혀 찔끔찔끔 흘러내리고 있었다.

텐은 가볍게 비탈길을 올라갔다. 과연 수백 년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을 잡아먹은 숲다웠다. 키


작은 떨기나무 위엔 내장과 살점이 썩어가고 있었고, 피에 적셔진 땅은 서로 다른 살가죽을 기워놓은
것처럼 얼룩덜룩했다. 흡사 그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 같은 숲이었다. 숲을 떠도는 기묘한 악취마저
반가웠다.

텐은 상기된 얼굴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욕망 덩어리가 목구멍을 기어 내려가 폐부를 그득 채웠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노 아즈엘이 여전히 곰팡이 같은 꼬락서니로 후미에 붙어있었다.

“벗지그래?”
텐이 말하자, 마노 아즈엘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두워서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있으면 불편할 텐데…뭐가 보여야 사냥을 하지?”

그리곤 ‘어차피 여긴 동생도 없잖아.’ 하고 덧붙였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곧 후드를


걷었다. 그 순간 숲이 고요해졌다. 큰 소리로 지껄여대던 용병들이 일제히 말을 잃은 탓이었다.
그럴만했다. 요정을 비롯한 반인족까지 통틀어도 이만큼 아름다운 것은 흔치 않을 것이다.
제일 빨리 움직인 건 털북숭이였다.

“저, 이, 어, 어이, 아니, 아가씨. 혹시 몸은 안 파나?”

형편없는 수작질에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그가 얼마 전 그녀에게 했던 똑같은 말이 생각나 웃을 수도


없었다. 마노 아즈엘이 털북숭이를 힐긋 쳐다봤다. 털북숭이뿐 아니라 모두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맥없이, ‘돈이 많은가요?’하고 물었다. 마치 값이 적절하다면 팔겠다는 말로 들렸다. 삽시간에
숲이 들썩였다. 여기저기서 내가 먼저 사겠다고 난리였다. 털북숭이는 헛손질까지 해가며 돈주머니를
끌렀다. 그의 앞섶은 벌써 불룩했지만, 돈주머니의 내용물은 보잘것없었다.

“제기랄! 어쩐지 간밤에 꿈이 좋더라니 이게 웬 횡재야? 얼마나 필요한데? 응? 불러보라고, 얼마나…,”


“…대신관의 신성력을 살 만큼.”

텐이 헛웃음이 터뜨렸다. 털북숭이는 이해를 못 한 표정이었다. ‘대신관이 뭐?’ 그가 되묻자 마노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내 동생에게 대신관의 치료를 받게 해줄 만큼 필요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말해요. 뭐든 줄 테니까.”


“……이…미친년!”

털북숭이가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아닌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미친년이 맞았다.


포션은 우스갯소리로 약이 아니라 은을 마신다고 할 만큼 귀한 물건이고, 직접 신관에게 치료받는 것은
그보다 더 비쌌다. 왕족을 위해 늘 일정량의 신성력을 유지해야 하는 대신관의 몸값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한 거상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 호수를 메울 만큼의 금화를 쏟아부었지만, 대신관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일화가 떠돌 정도였다. 마노 아즈엘의 말은 제 몸값을 그보다 더 쳐달라는 소리였다. 미쳐도
보통 미친년이 아니었다.

용병들은 묘한 분위기 속에 눈치만 살폈다. 생각이야 빤했다. 이곳은 때마침 사람이 예사로 죽어 나가는
숲이다. 여차하면……. 서서히 공기가 사나워졌다. 한 걸음 물러서 있는 건 텐과 타단, 어린
짐꾼뿐이었다. 텐은 누가 됐건 어서 한 명쯤 죽어 나가길 바랐다. 물론 시체는 용병이 될 게 분명했다.
설마 그럴 리 없겠지만 마노 아즈엘이 궁지에 몰린다면 그도 끼어들 셈이었다. 눈독 들인 물건에 누군가
먼저 칼집을 낸다면 기분이 몹시 더러울 테니까.

예상외로, 먼저 움직인 것은 마노 아즈엘이었다. 그녀는 옆구리에 맨 배낭과 로브, 돌돌 만 모포를 함께


벗어 나무 등걸에 던지고 대검을 뽑았다. 그리곤 갑자기 텐의 곁으로 와 말했다.

“지금부터 제 앞으로 나서지 마세요.”

그 뜻을 알아들은 건 텐뿐이었다. 그는 흥미진진해하던 표정을 갈아치우곤 재빨리 귀를 기울였다. 뭔가


돛 같은 것이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습격이었다.

텐은 아쉽게 혀를 차며 근처의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모처럼의 구경거릴 놓쳤으니 몬스터의 피라도 봐야


아쉬움이 덜할 터였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용병들이 허둥지둥 전투준비를 하는 사이, 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뭇가지 지붕 너머를 쳐다봤다. 벌떼 같은 것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니,
벌떼처럼 귀여운 게 아니었다. 저건 박쥐에 가까웠다. 피막 날개 위로 날카로운 발톱이 튀어나왔고,
구불구불하게 얽은 얼굴이 웃고 있었다.
“나카, 암컷 나카야! 제기랄, 무슨 먹구름처럼 몰려들잖아!”
“송곳니를 조심하게! 배란기엔 살도 뜯어 먹는 놈들이야!”

텐은 얇은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화살촉이 머리와 목, 날개, 배를 빙 돌다가 머리통을 겨냥했다.


벼락같이 쏘아진 화살이 박쥐의 귓구멍을 관통했다. 한 마리, 한 마리 없앨 때마다 기갈난 혓바닥 위로
쾌감이 뿌려졌다. 감로수가 따로 없었다.

멀리 있는 놈은 화살로 쏘아 죽이고, 근접한 놈은 단검으로 해치웠다. 화살로 쏘아죽이는 것보다 몇 배나


손맛이 좋았다. 쾌감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대가로 어깨 살점을 뜯겨야 했다. 그는 고통을 삭이기 위해
고개를 푹 수그리고 온갖 욕설을 지껄였다. 그때, 뭔가가 그의 뺨을 스치고 날아갔다.

굵은 나뭇가지에 철썩 들러붙은 것은 나카의 시체처럼 보였다. 전신이 으깨져 빨간 내장과 눈알이 질질


쏟아졌다. 마노 아즈엘의 작품이었다. 그녀는 숫제 물 만난 물고기였다. 검술이고 전술이고 없었다.
무식한 칼질이었다. 그럼에도 대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단단한 갑피를 입은 박쥐가 피떡이 돼서 날아갔다.

텐은 어쩐지 초조해져서 마른 침을 삼켰다. 저것을 보고 있자니, 몬스터 따윈 지루했다. 수십, 수백


마리를 죽여봐야 한번 목을 축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가 진짜 사냥하고 싶은 것은 저런 것이었다. 마노
아즈엘. 그녀를 잡아 죽인다면 아주 오랫동안 쾌감의 호수에서 헤엄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끝났습니다. 이제 괜찮아요.”

그녀가 텐을 올려보며 말했다. 이제 안전하니 내려오라고 팔까지 내밀었다. 텐이 내려가자, 그의 상처를


한번 훑고는 시선을 돌렸다. 용병들 쪽이었다. 그녀가 그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조금 전의 참사를
목도한 용병들이 솜털까지 바싹 선 얼굴로 경계했다. 처음 수작을 걸었던 털북숭이는 공 벌레처럼
움츠러들어 걷어차면 데굴데굴 굴러갈 것 같았다. 그의 코앞까지 다가간 마노 아즈엘이 주머니칼을 꺼냈다.
시퍼런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그녀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분배는 어떻게 합니까?”


“뭐, 뭐, 뭐요?”

그녀가 어린 짐꾼을 가리켰다. 짐꾼은 벌써 박쥐 사체를 뒤지며 팔아먹을 수 있을 만한 것들을 거두는


중이었다. 그녀가 조급한 목소리로 '전리품의 분배는 어떻게 합니까?'하고 물었다. 물론 이곳에 그녀에게
제 몫을 요구할 배포가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지레 찔린 용병들이 제 몫을 사양하자,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 박쥐 사체를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텐은 낄낄 웃었다. 아주 기가 찼다. 그녀는 열 개쯤 모아야 동화 한 냥 떨어질까 말까 한 눈알(주로 알


낳는 암탉의 먹이로 팔렸다.)까지 모조리 주워담고 있었다. 하루 푼돈을 벌어 그날 배를 채우는 짐꾼들도
저 정도로 궁상을 떨진 않았다. 일일이 해체를 하니 작업시간이 더뎠으나 누구 하나 불평하는 자도 없었다.

텐은 나무 등치에 기대앉은 채 그녀를 쳐다보다가, 문득 간지러운 느낌에 어깨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까 박쥐에게 뜯긴 상처에서 피가 질질 흐르고 있었다. 잊고 있던 고통이 둑 터진
것처럼 밀려왔다. 그는 상처에 손도 대지 못한 채 얼른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에
희석한 포션이었다. 미지근하고 쌉싸름한 액체를 넘기자, 상처가 서서히 아물었다. 안도하던 텐이
멈칫했다. 마노 아즈엘이 빤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그게, 혹시…….”

눈치는 있는지 그녀가 다른 용병들을 의식하며 바싹 다가왔다.

“…포션인가요?”

그녀에게서 체향과 섞인 피 냄새가 훅 끼쳐왔다. 자극적이기가 말도 못했다. 텐은 잠시 숨을 멈추곤


말했다.
“…봐 놓고 뭘 물어?”
“조금 긁힌 상처에 포션을…….”
“무슨 헛소리야,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는데.”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옛날의 텐 가렌과는 달리 이석원은 고통에 대한 면역력이 부족했다.


게다가 지구는 고개만 돌려도 병원을 찾을 수 있는 동네지만, 이곳엔 포션 말곤 제대로 된 의약품이 거의
없을뿐더러 진통제라고 불리는 것도 질이 아주 저질이었다. 일단 다치면 낫기까지 지속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건 물론, 아는 게 병이라고 감염 걱정까지 해야 했다. 그가 포션에 의존하는 것도
당연했다. 돈이 바닥나기 전엔 물에 희석하지도 않고 병째로 부어댔으니, 이것도 크게 발전한 셈이었다.

물론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마노 아즈엘은 아연한 눈으로 텐을 보다가, 이내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그리곤 화들짝 놀랐다. 어깻죽지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그녀가 겁에 질려 ‘유리가….’, ‘상처가….’
하고 중얼거렸다. 아픈 것보다는 동생이 화낼 것이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깨에 물을 붓고 피를
닦아내며 텐을, 정확히는 텐의 물 주머니를 힐금힐금 쳐다봤다.

텐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물에 젖자 그녀의 체향이 더욱 진해졌다. 어정쩡하게 식어버린 흥분에


부채질을, 아니, 아랫도리를 화덕에 넣고 굽는 짝이었다. 그는 결국 참지 못했다.

“우리 거래 하나 할까?”
“……거래?”
“내 조건을 들어주면 포션으로 상처를 없애주고, 덤으로 오즈엣도 주는 거래.”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다급한 목소리가 ‘무슨 거래인가요.’하고 물었다. 텐이 손짓하자 그녀가 바짝


다가왔다. 목이 바짝바짝 탔지만,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속삭였다.

“어차피 포션 조금이면 다 사라질 상처들인데….”

몹시 친절하고 상냥한,

“좀 더 늘어나도 상관없잖아? 안 그래?”

그러나 교활한 사기꾼의 목소리였다.

00024 용병(Mercenary)
=========================================================================
             
거래는 성립됐다. 마노 아즈엘은 오즈엣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텐은 가시나무 군락 너머의 여울목을
작업장으로 정했다.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었으나, 이곳에선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녀를
데리고 수풀 속으로 들어가자 등 뒤에서 타단이 사체 틈바구니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거 없다며 투덜댔다.
물론 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마노 아즈엘이 반쯤 여울에 잠긴 바위에 앉았다. 텐은 들뜬 얼굴로 그녀의 옷을 벗겼다. 가죽조끼를


벗기고, 거친 리넨 셔츠의 매듭을 풀어헤쳤다. 그녀는 조용했다. 그저 손에 쥔 오즈엣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이 순간을 감내하는 것은 오로지 동생 때문일 것이다. 가족을 버리는 자들이 많은 만큼
가족을 위해 죽는 자도 많은 세상이었으니까.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마침내 등이 모두 드러났다. 오목하게 패인 등골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허리에 닿았다. 상처가 좀
있긴 했지만, 상아처럼 희고 매끄러운 피부였다. 이런 걸레짝이 아니라 드레스를 입히고 싶었다.
코르셋으로 안 그래도 잘록한 허리를 더 바짝 졸라매고, 촉촉한 산홋가지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목을
드러내고, 그 위에 큼직한 보석을 걸면 훨씬 보기 좋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며 서슴없이 단검을 꽂았다. 얇은 어깨가 벼락 맞은 것처럼 경직된 순간, 그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엄청난 쾌감이었다. 사정한 것도 아닌데 골이 다 흔들렸다. 피가 용암처럼 들끓어서
장기들이 죄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쩍 벌어진 상처에서 흐른 피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또다시 살을 갈랐다. 두 번, 세 번, 경쾌한 칼질에


등이 흠뻑 젖어갔다. 앙다문 턱이 덜덜 떨렸다. 목과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혔다. 고통을 참는 모습이
못 견디게 자극적이었다. 당장에라도 숨통을 끊어놓고 싶으면서도, 아까웠다.

칼을 쥐지 않은 손으로 상처를 만졌다. 손끝으로 근육의 움직임과 피부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
아파?’ 텐이 속삭였다. 마노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비명이나, 애원이나, 눈물 따위는 다 삼킨 채
오히려 되물었다. ‘……당신은 이게 즐거운가요?’라고.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신나게 즐기고 있었다.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어쩌면 이 순간이야말로 ‘사랑스럽다’는 말을 사용해야 할 순간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그는 찰나 간에 칼을 빼앗겼다. 깨달았을 땐 이미 마노 아즈엘이 칼을 쥐고 있었다. 칼끝에서 뿌연 빛이


뿜어졌고, 텐의 얼굴에 흙더미와 함께 뜨끈한 것이 끼얹어졌다. 단말마를 듣고서야 상황이 이해가 됐다.
몬스터였다. 땅을 뚫고 나온, 신전에서 봤던 석상처럼 거대한 몬스터가 아가리부터 생식기 아래까지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지금……뭘 어쩐 거야?” 텐이 물었다.


마노 아즈엘은 얼어붙어 있었다. 단검으로 거대 몬스터를 두 동강 낸 주제에, 뒤늦게 끔찍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다. 아예 정신을 못 차렸다. 그녀는 어린애처럼 달달 떨더니, 오즈엣을 들고 뛰어
나갔다. 그 모든 것이 삽시간에 벌어졌다. 텐은 황망한 얼굴로 흔들리는 가시덤불을 쳐다봤다.

차가운 바람이 땀을 훑고 갔다. 그제야 소름이 돋았다. 그는 하마터면 죽을 뻔한 것이다. 활도 내려놓은


채 넋을 빼고 있었으니, 그녀가 아니었다면 한입에 삼켜졌을 것이다. 포션이고 뭐고 소용없이 몬스터의
위장 속에서 생을 마감할 뻔했다.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텐은 온갖 욕설을 지껄이며 떨리는 손목을
주물렀다.

떨림이 좀 가시고 나자 찾아온 것은 지긋지긋한 감각이었다. 고지를 목전에 두고 추락한 것만 같은 상실감,


그리고 억울함. 당장 그녀를 끌고 오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차례 마노 아즈엘의
솜씨에 감탄했지만, 이번 것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것은 어린애 칼질 수준이었다. 그녀의 능력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마법의 힘을 빌렸거나, 아니면 반인족의 피가 흐르는 게 분명했다. 어느 쪽이건 지금
그의 힘으론 어림없었다. 참아야 했다. 또, 참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살인충동보다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참는 것은 현실로 충분했다. 그에게 이곳은 참아야 할 곳이
아니었다.

----------------------

탁, 탁, 탁, 섬세한 손가락 끝이 의자 팔걸이를 두들겼다. 유리 아즈엘은 찻잔을 집어 던지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는 중이었다. 접객실에서 세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다 서재로 불려 온 것이 삼십 분 전.
노인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저 눈을 가늘게 뜨고 편지를 쓰고 있을 따름이었다.

유리는 힐긋, 노인의 가슴을 바라봤다. 가시나무와 장미가 새겨진 백랍 브로치가 달려있었다. 왕실
마법사단의 인장이었다. 노인은 왕실마법사거나, 왕실마법사였던 게 분명했다. 유리의 세상이 뒤집히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그도 저 브로치를 달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비참한 속내를 숨긴 채 창문으로 시선을
피했다. 커튼이 흔들리는 나무격차 창 너머엔 하녀들이 부산을 떨고 있었다. 가만 보니 금색 술이 잔뜩
달린 양탄자를 터는 중이었다. 볕이 따사롭던 어느 날의 오후, 그의 누이가 그랬듯이. 옛날 생각에
울적해지기까지 한 그가 결국 눈을 내리깔았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흰머리가 성성한 기사가
들어왔다.

“질리안 경, 놈들의 꼬리를 잡았다는 게 사실입니까?”


“사실이네.”

노인이 돌돌 만 편지를 밀랍으로 봉하며 말했다.


“정확히는 로에늠 펠라도르 이에렉사의 꼬리를 잡은 게지. 하지만 그가 ‘놈들’의 자금줄이 되었으니
그를 찾으면 놈들도 잡을 수 있지 않겠나?”
“로에늠 펠라도르 이에렉사……놈은 아비를 시해하려다 실패하고 도주한 신세가 아닙니까?
자금줄이라니요?”
“펠라도르에서 던젼이 발견됐네.”
“……!”
“산처럼 쌓여있던 황금과 보석을, 로에늠 그자가 다 털어갔다는구먼.”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던 유리가 신음했다. 망해가는 영지도 일으킨다는 던젼의 보물을 독차지하다니,
그 기분이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함께 던젼에 들어간 원정대 중 두 명이 살아남았네. 뒤처리를 그리 허술하게 할 놈들이 아닌데, 희한한
일이란 말이야……둘 중 하나는 요정이고 하나는 아직 스물도 안 된 은급 용병이라는군. 요정이야 바람
같은 존재니 찾기 어렵겠지만, 용병은 살아만 있다면 쉽게 찾을 수 있을걸세. 자네가 직접 찾아오게.”

기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직접 말입니까? 은급 용병 하날 찾는 일에….”


“놈들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생존자를 죽일 수도 있으니,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하네. 백작께서 직접
내린 명령일세.”

깜짝 놀란 기사가 인사마저 얼버무리며 뛰쳐나갔다. 그리고서야, 마침내 노인이 유리를 보았다. ‘일찍
죽긴 아깝게 생겼군.’ 그의 첫마디였다.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구먼. 이해해주게, 이래 봬도 나라를 지키느라 바쁜 몸이라네.”

나라고 자시고 그가 알 바 아니었다. 노인이 멋쩍은 얼굴로 본론을 말했다.

“계약은 자네가 죽을 때까지일세. 길면 일 년, 짧으면 당장 내일일 수도 있지. 어떤가, 각오는 되었나?”


“오래전에 끝났습니다.”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네. 명령이라면 죽는시늉도 하던 충성스러운 마법사들이 모두 포기했지. 자네도
알다시피 마법사들이란 천성적으로 목숨을 너무 아끼잖나. 나도 마법사니 그들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네만, 어쨌거나 그들은 반역죄로 다 죽어야 했다네. 그래서 외부인인 자네를 불러온 걸세.
죽는시늉이 아니라, 죽을 마법사가 필요해서 말이야.”

유리는 비틀린 눈으로 웃었다. 그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
때문에 인생을 망친 누이만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죽어줄 수 있었다.

“제 누이에 대한 약속만 지켜준다면, 당신이 원하는 날 죽을 겁니다.”


“그렇지. 누이……자네를 닮았으면 아주 미인이겠군.”

노인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민에 잠기더니, 곧 말했다.

“작년에 상처한 기사가 한 명 있네. 마흔이 조금 넘었던가? 봉토도 있고, 가문도 그만하면 썩 괜찮은
편이지. 자식이 셋 있긴 하지만 다 여식이니 후일 문제가 될 일은 없을걸세.”

유리의 얼굴이 분노로 창백해졌다. 그는 잠시 해야 할 말조차 찾지 못하다가, 겨우 소리쳤다.

“지금 저와 제 누이를 모욕하는 겁니까?! 제 누이는…!”


“몇 년이나 칼을 들고 길바닥을 떠돌던 여자지.”
“……!”
“그런 여자와 기사라니. 자네 목숨과 맞바꾸기엔 넘치는 자릴세.”
이가 아득 갈렸다. 당장에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노인의 목 안에 지팡이를 쑤셔 넣고
그가 아는 가장 강력한 주문을 읊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얌전히 모욕을 견디는
것뿐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바닥을 노려보며 말했다.

“…직접 봐야겠습니다.”
“기사를 상대로 품평이라고 하겠다는 겐가? 가당찮네. 목숨을 거는 마법사가 드물긴 하지만, 돈을 들여
찾으면 또 못 찾을 것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게. 자네를 찾아낸 것처럼 말이야.”

결국, 유리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때. 마치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그의 허리가 홱 굽어졌다.
입에선 핏덩이가 쏟아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지팡이를 쳐다봤다. 신경 다발이 갈가리 뜯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수정구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희미하게 점멸하던 유백색 빛도 꺼졌다.

노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러나 유리에게는 이미 수치를 느낄 정신마저 무너지고 없었다.
아득한 공포뿐이었다. 그는 즉시 저택을 뛰쳐나갔다. 백작가의 말을 빼앗듯이 빌려 한달음에 여인숙까지
달렸다. 나무층계를 뛰어 올라간 유리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거칠어진 그의 숨소리만이 방안을 떠돌았다. 아침에 마노가 누워있던 침대는 이미 싸늘히 식어있었다.
유리는 문에 기댄 채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그의 마력이 강제로 뽑혀나갈 때는 누이가 힘을 쓸
때뿐이었다.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나 유리의 몸이 망가진다는 것을 눈치챈 후로, 누이는 웬만해선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목숨이 경각에 놓이는 경우가 아니고선 말이다.

유리는 매섭게 제 뺨을 내리쳤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어디선가 누이가 위험에 처해있다. 그는 애써
최악의 상황을 회피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나무층계가 부서질 듯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곧 문이 벌컥 열렸다. ‘신이시여.’ 유리는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그의
누이였다. 유리는 마노를 와락 끌어안았다.

“유……!”
“얌전히……얌전히 좀 있으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그가 두려움과 노여움이 범벅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노가 그의 뺨을 감쌌다.

“미안해, 미안해……괜찮아? 내가 …….”


“난 괜찮아. 누이야말로 무슨 일이야? 어딜 갔었….”

유리는 금세 이상을 눈치챘다. 끌어안은 그녀의 옷이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손을 들어보니 물기가


묻어났다. 피였다. 유리는 그녀를 밀치고 쳐다봤다. 얼굴을 빼곤 온통 피투성이였다. 핏구덩이에서 막
기어 나온 꼴이었다. 온몸을 구석구석 노려보던 시선이 마침내 그녀의 손에 꽂혔다. 그녀는 오즈엣을
들고 있었다.

“그거……어디서 났어?”

유리가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

그는 거친 노크 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조명이 너무 희어서 눈이 시렸다. 이곳이 어디든 그의 방은


아니었다. 그의 몸은 검고 긴 소파에 엉거주춤 구겨져 있는 상태였다. 눈을 깜빡이곤 침착하게 주위부터
파악했다. 정면에는 키가 큰 캐비닛이, 측면으론 화장대와 조명 거울이 보였다. 뒤늦게 현실감이
돌아왔다. 이곳은 TVY 드라마세트장의 출연자 대기실이었다.

그는 피로한 눈을 문지르며 생수병을 땄다. 기분이 몹시 저조했다. 이게 다 마노 아즈엘 탓이었다.


황급히 사라지던 그녀의 뒷모습, 흥건하게 젖은 린넨 셔츠가 달라붙어 있던 등을 떠올리자 목이
근질거렸다. 매캐한 그을음이 목구멍을 꽉 틀어막은 느낌이었다. 막 물을 마시려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투박한 인터컴을 찬 여자였다. 그녀는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밀곤 대기실 안을 휘휘 둘러봤다. 그는 ‘
저건 뭐하는 년이야?’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술래잡기 FD 인데요. 슬슬 준비하셔야 할 시간이라….”

여자, FD 가 말했다.

“근데 이지원 씨는 어디 계세요? 아직 분장실에 계세요?”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조금 전, 그는 이석원답지 않은 말을 했다. FD 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으나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간 건 분명했다. 가슴이 선뜩한 실수였다. 그는 분명 평소처럼 주위상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그 순간의 그가 ‘누구’였는지는 확신이 안 섰다. 이석원이었는지, 텐 가렌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박무경이었는지. 굳어있는 그를 태평이 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았는지, FD 가 얼굴을 구기며
재촉했다.

“저기요, 이석원 씨. 곧 나오셔야 하는데, 이지원 씨는 어디 계시는,”


“왜요, 왜. 이지원 씨 여기 계세요.”

뒤돌아본 FD 가 주춤 물러났다. 레더팬츠를 입은 지원이 비딱하게 서 있었다. 동후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그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아, 네. 10 분 후에 고사식 시작이라 의상 다 갈아입으셨으면 슬슬 세트장으로 모여주셔야 해서….”
“5 분 내로 가겠습니다.”

얼빠진 FD 를 돌려보내고, 동후와 지원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석원은 그때까지도 미동도 없이 굳어있었다.
‘동생, 괜찮아?’ 동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나쁜 꿈 꿨어?”


“왜, 꿈에 우승희라도 나오든?”

지원이 거울을 보며 빈정거렸다. 석원은 그 거울 너머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새까만 머리카락, 눈
아래 깊게 그늘을 만들고 있는 캡모자에 재색 티셔츠. 박무경의 껍질을 걸친 이석원이었다. 그는 생수를
마시며 동요를 가라앉혔다. 다행히 병을 다 비웠을 즈음엔, 얼굴에 익숙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동생, 이거. 이따 필요할 거야.”

동후가 봉투를 내밀었다. ‘시청률 5% 대박 기원’이라고 큼직하게 적힌 봉투 안에는 빳빳한 만 원권 지폐


열 장이 들어있었다.

“절하고 나서 돼지 입에다 끼우면 돼.”


“십만 원이나 내요?”
“처녀작이잖아. 잘 돼야지.”
“야, 내건? 내 것도 줘봐.”

지원이 손을 까딱거렸다. 동후가 봉투를 하나 더 꺼냈다.

“하여간 자기 건 엄청나게 챙겨요.”


“내 거 내가 챙겨야지. 보자, 한 장, 두 장….”

날름 봉투를 확인하던 지원이 표정을 구겼다.

“…내건 세 장이네? 쟨 십만 원이고, 왜 난 삼만 원이야?”


“뭘 물어요. 주연과 조연의 차이지. 그래도 이번엔 많이 넣은 거예요. OST 뜨라고.”
“많이……삼만 원이 많아? 너, 이…그럼 저번엔 얼마 넣었는데?!”
동후가 슬그머니 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 그리곤 ‘액수가 중요한가요, 뭐. 마음이 중요하지.’하고
중얼거렸다. 지원이 뒷목을 잡았다.

“이 만원?! 이 썅노무시키야, 내가 쪽팔려서…!”


“어차피 이름도 안 적는데 뭐. 가끔 빈 봉투 넣는 사람도 있대요.”
“그게 그렇게 아깝니?! 차라리 나한테 돈을 달라 그래!”
“돈 줘요, 그럼.”

곧 욕설과 쿠션이 날아다녔다. 그 꼴을 보니 현실감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둘은 세트장으로 향하면서도


끊임없이 투닥거렸지만, 석원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말려봐야 헛수고일뿐더러 어차피 칼로 물 베기였다.

술래잡기의 세트장엔 대본 속 별장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고풍스러운 가구와 샹들리에. 엔틱 식기가
가득한 주방. 내부층계에 깔린 검붉은 융단까지 모든 게 으리으리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인형의
집이었다. 고개를 들면 지붕 대신 레일을 타고 쭉 박힌 조명기기들이 보였고, 소도구 팀 스태프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고가의 미술품을 정해진 자리에 세팅하고 있었다.

“세트장 짓는데 돈깨나 깨졌겠는데?”


“요즘은 인테리어 시공만 기본이 억댄데요, 뭘. 소품이야 다 협찬일 거고.”

언제 목청을 높였느냐는 듯, 지원과 동후가 찰싹 붙어서 수군거렸다. 석원은 거실 중앙에 놓인 병풍과


고사상을 흘깃 보곤 시선을 돌렸다. 세트장 너머에 인형들의 사교장이 펼쳐져 있었다. 드라마 제작
스태프, 매니저, 배우. 그 밖에도 사업팀이니, 홍보팀이니, 마케팅팀이니 하는 작자들이 명함을
돌리느라 정신없었다. 한쪽에서 메이킹 스태프와 사진기사가 그 광경을 낱낱이 찍어대는 중이었다.
지원이 석원의 등을 때리며 ‘웃어, 웃어.’하고 속삭였다.

“언제 찍힐지 모르니까 계속 웃고 있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석원은 웃는 낯으로 카메라 프레임 속으로 들어섰다. 한 명, 한 명, 지나칠


때마다 지원이 사근사근한 인사를 건넸고, 그는 그 뒤에서 노호혼 인형처럼 꾸벅꾸벅 고개만 숙였다.
가끔은 지원과 복화술로, ‘저 여자랑은 상종하지 마. 대기실에까지 주사 아줌마를 불러들인다니까. 팔에
문신 보이지? 저게 주삿바늘 자국 가리려고 새긴 거야.’, ‘주사? 무슨 주사. 프로포폴?’, ‘그럼 포도당
주사겠니, 병신아?’하고 속닥거리기도 했다. 한참 증권가 찌라시에도 없는 이야기를 줄줄 읊던 지원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저년은……우승희네. 재수 없는 년.”

우승희가 인파에 둘러싸여 있었다. 정형석 PD 와 김효승 작가, 술래잡기의 CP 인 채구형 부장. 그리고
커다란 덩치에 머리털을 지저분하게 기른 남자까지. 어딘가 낯익다 했더니 TV 에 자주 얼굴을 내비치는
예능 피디 신태균이었다. 얼마 전 여배우를 MC 로 한 토크쇼를 새로 런칭한 그가 남의 밥상을 기웃거리는
이유야 뻔했다. 우승희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채구형 부장과 신태균 피디는 우승희를 사이에 놓고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지원이 아니꼬운 얼굴로 말했다.

“넌 가서 인사해, 난 저년이랑 얘기하느니 돼지머리랑 얘기하는 게 낫겠다.”


“헛소리 말고 앞장서세요.”

동후가 야멸차게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지원이 하이힐 굽을 질질 끌며 ‘염병, 먹고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니.’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 도착한 그녀는 생글생글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부장님. 감독님. 작가님은 오늘 메이크업 받고 오셨나 봐요? 세트장 밖에서부터 작가님만
보이던데요?”

그리곤 우승희를 슬쩍 돌아본 지원이 ‘안녕하세요, 우승희씨’하고 인사했다. 우승희가 고개를 까딱했다.
‘저런 썅년…….’ 지원이 입술을 달싹였다. 석원은 눈앞의 인형 1, 2, 3 에게 빠짐없이 인사를 건네곤
마지막으로 우승희를 쳐다봤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열심히 떠드는 채부장을 보고 있었다. 영화
촬영장에서 잔뜩 혹사를 당한 모양인지 오늘따라 더 피로해 보였다. 나쁘지 않았다. 팔딱거리는 날것도
좋지만, 지느러미와 꼬리가 다 잘려나간 채 얌전히 도마 위에 놓인 것도 좋았다. 석원이 저도 모르게
즐거운 상상에 젖으려던 찰나, 어깨 위로 손이 턱 올라왔다. 정형석 피디였다.

“게스트로 이석원씨는 어때요? 석원씨도 우리 주연인데.”


“무슨 헛소…….”

신태균 피디가 쏘아붙이다 말고 거칠게 턱수염을 문질렀다.

“아니, 내가 신인배우 섭외하자고 바빠죽겠는데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어차피 같은 채널인데 우승희씨가


특별 게스트로 얼굴 한 번 비춰주면 내 쇼도 살고, 술래잡기 홍보도 되고. 꿩 먹고 알 먹고 아니에요.”
“전 꿩이고 알이고 생각 없고요, 당사자인 우승희씨가 싫다는데 제가 어쩝니까.”

정형석 피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신태균 피디는 캡모자를 벗고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더니, 이번엔
우승희의 로드 매니저를 살살 꼬드겼다.

“실장님, 우리가 생판 남도 아니고 우리 보조 MC 이홍경씨가 우승희씨랑 한솥밥 먹는 사이 아닙니까.


나와만 주면 내가 이번에 영화 나오는 거랑 드라마랑 다 빨아주고, 펌프질 사정없이 해준다니까.”
“저희도 승희 누나가 예능 나가면 좋죠. 좋기만 해요, 승희 누나 나갈 때 소속사 신인들 끼워 보내면
홍보 효과가 얼마나 쏠쏠한데. 저희도 싫어서 이러는게 아니라, 승희 누나가 예능을 안 하세요. 인터뷰도
제 선에서 다 자르는데요.”

로드 매니저의 표정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말은 단호했다. 신태균 피디가 슬쩍 우승희 쪽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내가 PPT 만들어서 대표님 앞에 가서 프레젠테이션이라도 해보면 어때요? 대표님을 설득하면,”


“승희 누나쯤 되면 대표님도 마음대로 컨트롤 못하는 거 아시잖아요.”

정형석 피디와 김효승 작가까지 합세해 몇 번의 공방이 더 오가는 동안, 석원과 지원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한편에 물러서 있었다. 총성 없는 섭외전쟁. 안 팔리는 연예인인 지원도, 방송국 피디였던
석원도 신물 나게 겪고 봐온 광경이었다. 덩치 큰 보릿자루 동후가 부러워 죽겠다는 듯이 속삭였다.

“호가호위도 저 정도면 할 만하지. 누나, 저 봐요. 저 집 로드 매니저는 웃으면서 피디를 까네요. 나도


죽기 전에 한번 저래 볼 수 있을까….”
“인생 모르는 거다, 너. 또 알아? 내가 이 드라마로 빵 떠서 올겨울엔 CF 를 갈퀴로 끌어 담을지?”
“…석원 동생 믿고 힘내야지, 내가.”

동후와 지원의 2 차전이 시작되는 듯했지만, 석원은 다른데 신경이 팔려 있었다. 그는 우승희의 옆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묘하게 그녀 위로 누군가가 겹쳐 보였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와 기운
없이 늘어진 어깨, 그리고 낙낙한 셔츠 속으로 우아하게 흐르는 등선……깨달음은 한순간이었다. 마노
아즈엘. 그녀였다.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데도, 여울목 바위에 웅크리고 앉아 피 흘리던 그녀의 모습이
우승희 위로 겹쳐지고 있었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석원은 침을 삼켰다. 화려한 인형들의 연회장처럼 보이던 세트장이 먹잇감이 널린
밀폐된 사육장으로 돌변했다. 당장 누구라도, 아니, 우승희의 목을 자르고 싶었다. 혀가 바짝바짝 마르고
안달이 났다. 갈 곳 잃은 욕망이 그를 부추겼다. 이성이 경종을 울렸지만, 이 어둡고 아늑한 충동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우승희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때였다.

“박무경씨. 잠깐만요.”
멈칫하자마자 플래시가 터졌다. 돌아보자 김효승 작가가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무슨 생각 했어요? 혹시 대본 생각 했어요?”


“…….”

석원은 대답 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핸드폰 화면을 꾹꾹 누르더니 정형석 피디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이거거든요. 이게 내가 생각하는 박무경이거든.”


“봐봐, 어디.”

힐긋 화면을 들여다본 정형석 피디가 곧바로 핸드폰을 가로챘다.

“뭐야, 이거?”
“좋죠? 이거 컬러로 뽑아서 책상 앞에 붙여놓고 쓸까봐. 대사가 그냥 가래떡처럼 쭉쭉 뽑히겠어.”
“석원씨, 석원씨, 잠깐 이것 좀 볼래요?”

정형석 피디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따 포스터 촬영할 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런 분위기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곤 그가 핸드폰을 앞으로 내밀었다. 석원은 눈동자를 돌려 화면을 쳐다봤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분위기가 몹시 아슬아슬했다. 팔짱을 끼고 있는 억센 팔이 금방이라도 누군가의 목을 조를 것처럼 보였다.
모자의 그림자 때문에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입술은 흐릿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사진을 눈앞에 두고, 그는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굳어버렸다. 저건 이석원의 얼굴이 아니었다.
쾌락과 방종의 대명사 텐 가렌의 얼굴도, 음침한 그림자 속에서 먹잇감을 감상하는 박무경의 얼굴도
아니었다. 누구의 ‘얼굴’도 아니었다. 저건 가식과 내숭의 껍질을 모조리 벗어던진 벌거숭이였다.

00025 용병(Mercenary)
=========================================================================
             
뻣뻣한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옆에서 사진을 본 지원과 동후가 그의 등을 두들기며 뭐라고 지껄였지만
대답할 정신 따윈 없었다. 때마침 고사식이 시작돼 사람들의 관심이 그를 비껴가지 않았더라면 미친놈처럼
이 자리를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는 식이 진행되는 내내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봤다. 상 앞에서 절을 하고 돼지머리에 봉투를 끼워


넣기까지 몇 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정신이 다 아득했다. 마침내 식이 끝나자, 그는 한달음에 대기실로
달려갔다. 뒤쫓아온 동후가 그의 하얗게 질린 꼬락서닐 보곤 더 놀라서 말했다.

“동생, 괜찮아?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거야?”


“…조금만 쉴게요. 포스터 촬영은 언제부터 스탠바이예요?”
“장비 세팅하고 바로 들어간다니까…30 분 후에. 촬영할 수 있겠어?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30 분만 누워 있을게요.”

안절부절못하는 동후를 대기실에서 쫓아내고, 그는 적막한 공간에 홀로 남았다. 곤죽이 된 머릿속을


추스르려 노력했으나 말짱 허사였다.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욕망을 어르고 달래는
데는 선수였다. 근래 들어 인내심이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통제력은 쓸만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석원은 생각을 떨치고 소파에 누웠다.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어서, 어서, 어서, 검은 욕망이
사납게 재촉하고 있었다. 일 초라도 빨리 넘어가고 싶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얼굴 위에 모자를
얹곤 길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카르투옴 대륙에 와 있었다.

세상은 휘황한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대충 옷만 걸치곤 조급히 미하라의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짙은 푸른색의 빛과 안개가 뒤섞인 골목은 죽은 들쥐나 고양이, 오물 따위로 너저분했다. 부패한 송장
같은 곳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가 머물렀던 화려한 세트장과는 딴판이었다. 그러나 이곳이야말로 그의
세상이었다.

다섯 갈래의 갈림길 중 가장 오른쪽으로 들어서자, 분뇨냄새가 확 끼쳐왔다. 시장이었다. 짐승을 팔기


위해 수레를 끌고 온 사람들과 한 푼이라도 싼 걸 찾아보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개구리와
거위, 돼지, 똥오줌을 찍찍 갈기는 당나귀를 지나자 드디어 그가 원하던 것이 나왔다. 그는 입술을
핥으며 다가갔다.

튼실한 수소가 끄는 수레 위에 쇠창살을 단 거대한 우리가 줄줄이 실려 있었다.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그들은 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손길과 시선에 고스란히 노출된 채 낯선 언어로
지껄여댔다.

“뭘 찾으시오?”

콧수염을 기른 늙은이가 말했다.

“이건 바다 건너 모네라에서 넘어온 놈들이오. 밥만 제때 먹이면 양처럼 고분고분하지. 늙은이와 젖먹이


빼곤 없는 게 없으니 어디 골라보쇼. 여자, 남자, 젊은 놈, 어린애….”
“가장 헐값으로 파는 건?”

상인이 김 샜다는 표정으로 다른 수레로 안내했다.

“이년, 모리울 은화로 계산하면 세 냥에 드리지. 살가죽에 칼집이 많아서 그렇지 한창 젊은 년인데 세
냥이면 거저나 마찬가지요. 오른손이 잘린 것만 빼면 뼈마디도 튼실하고. 한 번 만져보쇼.”

한창 젊은 년이라는 노예는 얼핏 봐도 노예상보다 열 살은 많아 보였다. 푹 꺼진 눈매가 몹시 사나웠다.


게다가 요즘 세상에 오른손이 잘린 인간이란 용병 아니면 좀도둑이었다. 텐이 고개를 들이밀자 노예가
기다렸다는 듯이 침을 퉷 뱉었다. 텐은 뺨을 닦아내며 상인을 올려봤다. 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니미럴, 나중에 무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두 냥에 드리리다.”

은화 두 냥이면 양 세 마리 값이었다. 텐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화 몇 냥 더 깎자고 시간을 낭비할


여유는 없었다. 그는 돈주머니를 끌러 남은 돈을 모조리 쏟아냈다. 그래도 은화 두 냥엔 못 미쳤다.
노예상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텐은 욕지거리하며 배낭을 내려놓았다.

“혹시 물건 매입도 하나?”


“좋은 물건이라면.”
“여기선 뭐가 좋은 물건인데?”
“그야 발품 팔 만한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 좋은 물건 아니겠소?”

배낭을 뒤집자 몬스터의 부산물들이 잔뜩 쏟아졌다. 미하라로 오는 한 달간의 여로에서 건진 것들이었다.


자질구레한 것들은 생기는 족족 내버렸으므로, 남은 것은 썩 괜찮은 것들뿐이었다. 수레 위에다 쭉
늘어놓자 파는 자와 사는 자의 처지가 바뀌었다. 장사를 끝내자 노예 대금을 마저 치르고도 은화 한 냥이
남았다. 셈이 끝나자 상인이 수레를 열었다. 그리곤 노예의 머리카락을 잡고 끌어내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쇼, 내가 금방 목줄을 달아서…….”

텐은 상인을 밀쳐놓고 겉옷을 벗었다. 참고, 참고, 또 참다가 이젠 침이 질질 흐를 지경이었다. 이제


기다림은 끝이었다. 무거운 망토를 우리 위에 올려놓고 안에 입은 조끼 매듭까지 끄르자 노예가 해쓱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노예상 역시 낯빛이 떨떠름했다. 그가 족갑에 연결된 쇠사슬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여기서 할 거요?”

상의를 다 벗은 텐이 화살을 뽑았다.

“아니, 이건 옷에 피가 튈까 봐.”

그리곤 노예의 가슴을 푹 찔렀다. 노예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치자 화살이 뽑혀 나왔다. 화살대를 꽉
붙들고 한 번 더 쑤셨다. 분수처럼 핏줄기가 쭉쭉 뿜어졌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진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허우적거리던 노예는 일곱 번째 구멍이 뚫렸을 때 죽어버렸다. 텐은 화살을 버리고 끈적끈적한
손바닥을 쇠창살에 문질렀다. 머릿속이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혹시 시체도 필요하면 헐값에 가져가.”

텐이 웃으며 말하자, 노예상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

난폭하게 몰아치던 욕망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분고분해졌고, 모든 것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석원은


순조롭게 드라마 포스터촬영과 영화의 후반 녹음작업을 소화했다. 별다른 일 없이 하루가 지나자
긴장태세에 들어갔던 신경도 서서히 풀어졌다.

물론 문제는 있었다. 그는 카르투옴과 텐 가렌이 주는 달콤한 자유에 흠뻑 젖었다. 허우적댔다. 그 결과


카르투옴에서조차 '참아야 한다'고 욕망을 통제한 순간, 초조함과 불만이 현실에서 터지고 말았다.
되새길수록 아찔한 순간이었다. 두 번 다신 그런 일이 없어야 했다. 중요한 건 현실과 카르투옴에서의
균형이었다. 카르투옴에서 충분히 욕구를 채우면 그 포만감이 현실에서도 그럭저럭 이어졌다. 그렇다면
사람이 됐건 몬스터가 됐건 욕망이 배를 곯기 전에 재깍재깍 해치워버리면 그만이다. 이곳에선,
카르투옴에선 능력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텐 가렌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위에 걸터앉았다. 마노 아즈엘이 앉았던 바로 그 바위였다. 소매를


걷고, 맑은 여울에 손을 씻었다. 붉은 피와 살점이 떠내려가자 한가롭게 노닐던 물고기 몇 마리가
달아났다. 뒤에선 아까부터 계속 ‘끄륵, 끄륵’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물기를 털며 뒤돌았다. 몬스터에게 옆구리를 뜯어먹힌 타단이 피 거품을 토하고 있었다. 핏줄이
불거진 눈이 그를 간절하게 응시했다. 물론 죽기 전에 작별 키스나 해 달라고 부르는 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건 텐이 늘 가지고 다니는 포션일 테지만, 텐이 원하는 건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즐기며 배를
채우는 것이다.

가죽 배낭에서 살라미 소시지를 듬뿍 끼운 호밀빵을 꺼냈다.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고개를 들자 타단이


울고 있었다. 빵을 다 해치울 때까지도 타단은 숨이 붙어있었다. 찬찬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사실은
호밀빵 따위보다 이쪽이 더 그를 배부르게 했다. 기대감으로 몸이 뜨거워졌다. 입술을 핥으며 웃자,
타단의 눈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텐의 살가죽을 발라내고야 말겠다는 눈빛이었다. 물론 불가능한
희망이었다. 텐이 화살을 뽑기 위해 손을 올렸을 때였다. 그를 빗겨간 타단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그 순간 텐은 바닥을 굴렀다.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숨이 턱 막혔다. 온몸의 피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며 화살 통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화살 깃이 닿은 순간,
뚜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 몇 개가 꺾여 나갔다. 이번에야말로 비명이 터졌다. 텐은 흙바닥에
얼굴을 뭉개며 신음했다. 흐릿한 시야로 누군가의 다리가 보인 순간, 그는 머리카락을 붙들려 질질
끌려갔다. 스치듯 마주친 타단의 눈동자가 통쾌히 웃고 있었다.

“안됐군. 도와줄 친구가 죽어버려서……하지만 멀쩡했어도 별 도움은 안 됐을 거야.”

목소리. 분명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가까스로 고개를 틀자, 놈의 뒤통수가 보였다. 목덜미에서


흔들리는 산홋가지색 머리카락. 유리 아즈엘이었다. 그제야 텐은 무엇에 당했는지 알아챘다. 마법이었다.
유리의 한쪽 손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여울 쪽으로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다가, 텐은 가까스로 바위를 붙들었다. 그제야 유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차갑게 웃으며 주문을 외웠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텐의 허리를 걷어찼다. 한 번, 두 번, 세 번,
텐은 차가운 여울물에 빠진 채 토악질을 했다. 이렇게 얻어맞긴 처음이었다. 내장이 목구멍으로 쏟아질
것 같았다. 놈이 또 뭐라고 지껄이자, 십여 마리의 물고기가 몰려들었다. 눈알이 허옇게 변한 놈들이
입을 쩍 벌렸다. 날카로운 이빨이 그의 살점을 물어뜯었다. 여울이 순식간에 뻘겋게 번져나갔다.

분노, 고통,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이 치솟았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죽음 뒤에 올 것들. 한번 가졌던 것을, 안락을, 희망을, 자유를 잃었을 때 닥쳐올
것들이야말로 그를 두렵게 했다. 그는 이를 갈며 식인 물고기를 뜯어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때였다.

“처음에 말했었지.”

유리 아즈엘이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 솜씨도 나쁘진 않다니까.”

지팡이 끄트머리에 박힌 오즈엣이 검붉게 빛났다. 그것이 텐 가렌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곧, 이석원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깨어났다. 목구멍으로 신물이 넘어오고 몸에는 경련이 일어났다.
지난번 로에늠에게 심장을 찔렸을 때보다 몇 배는 심한 환통이었다. 피는 용암처럼 들끓었지만, 머리는
차가웠다. 차갑다 못해 으슬으슬했다. 서랍을 뒤져 자질구레한 물건들 사이에서 수면제를 찾아냈다. 물도
없이 두 알을 삼켰다. 책상을 짚고 고개를 숙이자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무너져내렸다.

잠시 후. 그는 길게 숨을 토해냈다. 그리곤 한쪽 팔로 책상 위를 쓸어버렸다. 자명종과 노트북이 바닥에


처박히고, 그 위로 책꽂이와 바인더가 쏟아졌다.

“뭐야? 안에 무슨 소리야?”

지원이 문을 두들겼다. 석원은 머리를 쓸어넘기곤 말했다.

“별거 아냐. 책장이 넘어갔어.”


“깜짝이야. 안 다쳤어?”

석원은 흘깃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아홉 시였다. 그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몸이 좀 안 좋아. 10 분, 아니 30 분만 더 잘게. 이따 깨워줘.”


“많이 아파? 오늘 첫 촬영인데 하필….”
“30 분이면 돼, 꼭 깨워.”

그는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텐 가렌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그는 아득한 통로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렸다. 눈도 뜨지 않은 채 주위부터 살폈다.


손바닥 아래 닿은 것은 축축한 흙바닥이었다. 손가락을 꿈틀거리자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는 외려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텐 가렌은 살아있었다.

숨도 쉬지 못할 긴장감이 탁 풀리면서 탈력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아직 마음을 놓을 때는 아니었다. 그는


날 선 신경으로 주변을 더듬었다. 숨소리. 거칠고, 역겹고, 기분 나쁜 숨소리들이 들렸다. 적어도 서넛
이상의 사람이 모여있는 것이 확실했다. 대체 어디에 널브러져 있는 건지, 정신을 잃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든 게 불확실했다.
텐이 기억하는 마지막은 검붉게 발광하는 오즈엣이었다. 오즈엣, 빌어먹을 오즈엣. 그가 마노 아즈엘에게
주었던 것이 틀림없다. 갈가리 찢어놓은 등을 보고 살쾡이 같은 동생이 찾아올 것을 예상했어야 했는데…
…. 실책이었다. 뼈저리다 못해 마디마디 부서졌다.

“데굴데굴……눈알 굴러가는 소리까지 싱싱하구먼.”

심장이 펄떡 뛰었다. 쇳소리가 가득 섞인 노인의 목소리였다.

“그만 일어나게, 젊은이. 오래 볼 사인데 인사는 해야지.”

텐은 마른 침을 삼키며 눈을 떴다. 어둑어둑했다. 탁한 주홍빛의 화롯불만이 근처를 밝혀주었다. 몸을


일으키자 짓밟힌 몸뚱이가 아우성을 쳤다.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천천히
눈을 껌뻑였다.

이곳은 비좁은 토굴이었다. 입구는 굵은 쇠창살로 가로막혔고, 그 너머로는 몇 개인지 알 수 없는


화롯불의 형체만이 희미하게 보였다. 텐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단
한 가지만이 확실해졌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그동안 물 밑에 잠겨있다가 이제야 기어 올라온 김승주입니다.
오랜 시간 기다려주신 분들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
글로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근시일 내로 다음 편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ㅠㅠ!

(내용상의 오류나 비문, 오타는 언제든지 지적 부탁드립니다)

00026 용병(Mercenary)
=========================================================================
             
첫 번째. 이곳이 얼마나 깊은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땅속 어디쯤인 건 분명했다. 토굴의 천장엔 나무
잔뿌리가 거미줄처럼 얽혀있고, 흙벽을 타고 정체 모를 점액질이 꾸역꾸역 흘러내렸다. 보이는 거라곤
오로지 역겨운 것들뿐이었다.

두 번째. 그는 인생을 통틀어 지금처럼 아팠던 적이 없다. 뜯어먹힌 살점 사이로 피가 끝없이 배어


나왔고, 머리는 뜨겁다 못해 절절 끓었다. 못 수백 개를 거꾸로 세워놓고 그 위를 굴러다녀도 이보단 덜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세 번째. 판단력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저 모든 게 엿 같았다. 식은땀을 닦으려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수갑에 달린 녹슨 쇠사슬이 소음을 질렀다. 쇠사슬은 위로는 목줄로, 아래론 발목의 족쇄로 연결되어
있었다. 꼴이 아주 환상적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나가면 일단 포션부터 마신 후, 유리 아즈엘을 찢어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구체적인 방법도 구상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쇠창살을 열고 늙은 간수가 들어왔다. 간수는 떠도는 숲의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름이……텐 가렌, 맞소? 용병?”

텐 가렌이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이자, 간수가 반쯤 열린 쇠창살 틈을 가리켰다.

“나가시오.”
아득하게 멀어지던 정신이 돌아왔다. 이 순간만큼은 ‘날 죽이시오’만큼이나 반가운 소리였다.

----------------------

재단사가 검붉은 빛깔의 공단과 장식용 레이스를 내밀었다. 공단은 귀족들이나 만져볼 수 있을 법한 고급
옷감이었고, 한 올 한 올 은사로 짠 레이스는 성도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었다. 보통 여자라면 흥분으로
가슴이 터질만한 광경이었으나 마노 아즈엘의 신경은 다른데 쏠려 있었다. 유리가 지팡이에 박힌 오즈엣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옷감이나 골라.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제일 비싸고 좋은 걸로. 후처로


들어가는 거라 결혼식은 못 치르지만, 그래도 네가 그 집안에서 비렁뱅이 취급받게 두진 않을 거야.
절대로.”

마노 아즈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리가 지친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사람인지 안 물어봐?”


“…….”
“좋은 사람이래. 기사야.”
“그 사람이 널 치료해 줄 수 있대?”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 남편감 얘길 하고 있잖아. 궁금한 게 그것뿐이야? 나이는 마흔이 조금 넘었어. 사별한 전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이 있긴 한데, 다 딸들이라니까 네가 아들만 낳으면 그쪽 집안에서도 널 홀대하진 않을 거야.
그리고,”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어. 널 치료해 줄 수 있대?”

그는 잠시 할 말을 찾다가, 아무렇지 않게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럼 난 누구든 상관없어.’ 마노가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둥근 어깨 위로 공단 옷감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마치 아름다운 꽃
같았다. 곧 떨어지고 말 만개한 꽃. 유리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을 때였다. 그녀가 물었다.

“…그 애한테 다녀왔지? 무슨 짓을 했어?”


“무슨 짓? 무슨 짓은 그놈이 너한테 했지.”

유리가 빈정거렸다. 마노가 나무라듯 고개를 저었다.

“그 애가 날 해친 게 아니야. 정당한 거래를 했어. 그 상처는 금 두 냥에, 오즈엣에 내가 판 거야.”


“거래? 정당해? 그깟 용병 나부랭이가 네 등을 갈가리 찢어놨는데 정당하게 팔았다고?! 그놈을 토막 내도
분이 안 풀려! 하긴…지금쯤이면 이미 몬스터가 뼈까지 다 발라먹었겠지만,”
“유리!”

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마노가 언젠가처럼 엄격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리는 고집스럽게
‘그놈은 이미 죽었어.’라고 말하려다가, 애써 참았다. 그의 누이는 겉으로 보기엔 단단해도 속은 여렸다.
죄책감이라도 갖게 되면 저 작은 머리통으로 얼마나 그 생각에 몰두하게 될지 안 봐도 뻔했다.

“화풀이로 숲의 여울에다가 처박아놓은 게 다야. 멀쩡하게 숨 잘 쉬고 있을걸. 출입 제한시간을 어겼으니


감옥에 들어가 있기야 하겠지만, 그거야 뭐. 신원만 확인되면 며칠 만에 풀려날 거야.”

그가 아쉽게 말했다.

----------------------

“아마 넉 달 정도는 걸릴 거요.”


남자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텐은 그의 이름을 떠올려보려 했으나 곧 포기했다. 미하라
용병지부의 직원, 곰 같은 몸뚱이에 여우를 닮았다고 생각했던 얼굴. 기억나는 건 그 정도뿐이었다. 텐은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주먹으로 머리를 두어 번 쳤다. 눈앞의 화로가 네 개로 보이다가, 두 개쯤
줄어들었다. 남자는 ‘이놈의 땅굴은 올 때마다 기분이 더럽다니까.’하고 중얼거리곤 계속 말했다.

“미하라 용병지부에서 당신의 신원 보증을 거절했기 때문이오. 그래서 당신 신원을 확인하려면 은급


용병패를 발급한 모드라인 용병 길드까지 편지를 보내야 하는데, 인편으로 가는데 두 달. 오는데 두 달.
뭐, 그 정도 걸리지 않겠소?”
“왜,”

텐은 끔찍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신원확인을…못 해주겠다는 이유가 뭐야?”


“미친놈, 수상쩍은 놈, 그놈은 그럴 줄 알았지, 대체 누굴 죽였나?”

남자가 기막히다는 듯이 웃었다.

“당신 평이 아주 안 좋던데. 이건 어쨌거나 반역죄가 왔다 갔다 하는 문제라서 지부도 조사를 좀 한단


말이오. 당신이 계약서를 쓴 게 고작 엊그젠데, 뭘 믿고 냉큼 신원 보증을 해주겠소? 그런데 여로에
동행했던 다른 용병들은 물론이고, 책임자였던 모드레스까지 당신 신원 문제라면 고갤 젓더구만. 그나마
당신이 타단 이레그와 가까이 지낸 편이라고 해서 그를 찾아봤더니 이미 죽었고. 그쪽도 계약금만 날린
꼴이지.”

주절주절 말이 많았지만, 결론은 이곳에서 넉 달이나 처박혀 있으란 소리였다.

“인편이 아니라, 마법을 쓰면 열 배는 빨리…,”


“돈은 백 배쯤 더 들 거요.”
“내 짐에,”
“안됐지만 당신 몸뚱이에 걸친 옷 말고는 짐이라곤 없었소. 쓰러져있는 동안 강도라도 당했겠지.”

텐은 뭔가 다른 방법을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구멍이 숭숭 난 머리통에선 생각이고 뭐고 줄줄 흘러나갔다.


남자는 ‘당신을 그 꼴로 만들었다는 유리 아즈엘은, 백작가의 의뢰를 받아 일하는 중이오. 무슨 심기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몰라도 안 죽은 게 다행인 줄 아시고…뭐 어쨌든, 넉 달 동안 잘 버텨보시오.
계약금을 받아썼으면 일은 하고 죽어야 할 거 아니오?’하곤 사라졌다. 텐은 이곳에서 나가면 저놈도
죽여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다시 간수에게 질질 끌려나갔다. 활활 타오르는 화로를 두 개, 세 개, 네 개…삼십 개쯤 지났을


무렵, 그는 두 갈래로 갈라진 굴 앞에 멈춰 섰다. 왼쪽에 있는 굴은 입구부터 몹시 컸고, 그 안으로
죄수들이 굴비 두릅처럼 엮인 채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의 굴에서는 음식물 쓰레기가
부패하는 듯한 악취가 흘러나왔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용병 나리? 이거 곧 죽는 거 아닌지 모르겠소.”


“서 있을 힘 있으면 됐지, 뭘.”

간수 둘이 그의 옆에서 지껄였다.

“열이 끓어 제정신이 아닌데, 일은 며칠 쉬게 뒀다가 시키는 게 어떻소?”


“죄수 놈들은 온종일 일을 시켜야지,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돼. 생각이 많아지면 꼭 사고를 치거든.”

건장한 젊은 간수가 텐의 머리를 잡아끌었다. 그리곤 ‘이봐, 힘은 좀 쓰나? 이것 좀 들어 봐.’ 하고


턱짓했다. 머리통 같은 돌이 수북하게 담긴 궤짝이었다. 텐은 멍한 와중에도 기가 막혀서, ‘내 팔뚝을 봐,
그걸 들겠나.’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팔뚝은 젊은 간수의 손목만큼이나 가늘었다.
“입은 살아있는 거 보니 당장은 안 죽겠구만, 뭘. 이놈은 들쥐로밖에 못 쓰겠어. 데려가.”

텐은 오른쪽 굴로 끌려갔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악취는 더욱 심해졌다. 눈이 따끔거리다 못해


고통스러울 즈음, 물소리가 들렸다. 잊고 있던 갈증이 밀려왔다. 시원한 물 한 모금이면 정신이 좀 들 것
같았다. 텐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다리에 힘을 실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박수받아 마땅한
정신력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말 그대로, 정말 시궁창이었다.

악취의 근원지는 널찍한 수로였다. 그러나 그 안에 흐르는 것은 물이 아니었다. 사람과 가축의 오물부터
시작해서 썩은 쥐나 고양이의 사체, 몬스터의 내장, 온갖 비위상하는 것들은 다 섞어놓은 검은 하수였다.
쇠사슬을 단 죄수들이 그 속에서 부피가 큰 덩어리들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 늙은 간수가 그에게 낡은
장갑과 천 주머니를 쥐여주었다.

“짐승 사체처럼 덩치 큰 것들이 떠내려가 하수로가 막히기라도 하면 지상이 난리가 나거든. 그래서
이곳에서 먼저 깨끗하게 걸러내는 거요. 앞으로 넉 달간 당신이 할 일 중에 가장 편한 일이지.”

간신히 버티던 정신이 뚝 끊어졌다.

“쓰러지지 않는 게 좋을걸. 여긴 일 하지 않으면 먹을 것도 안 준다고.”

누군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그냥 쓰러지는 쪽을 선택했다.

----------------------

달콤했다. 잠자리는 안락했고, 적당히 따끈따끈했다. 그러나 쿵쿵거리는 소리가 자꾸 잠을 방해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라텍스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가, 벌떡 일어났다.

암막 커튼 틈으로 희미한 빛줄기가 쏟아졌다. 먼지가 유유히 떠다녔다. 바닥엔 그가 쓸어버린 노트북과
바인더 뭉치가 그대로 굴러다녔다. 축축하고 역겨운 땅굴이 아니었다. 그의 방이었다. 더듬듯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방문에 닿았을 때. 또다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괜찮아? 좀 나와 봐,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거야?”

지원의 목소리였다. 석원은 꺼지듯이 한숨을 쉬었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자 속이 확 뒤집어졌다.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문을 열자, 지원이 깜짝 놀라 비켜섰다. 그는 팔뚝을 잡아오는 손을 뿌리치고
황급히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변기에 묽은 위액을 쏟아냈다. 잔뜩 당황한 손이 그의 등을 두들겼다.

“야, 너, 이거 안 되겠다. 오늘 스케쥴 접자. 감독님한텐 내가 전화할게. 욕 좀 처먹으면 되지.”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너 지금 토하잖아!”
“괜찮다니까. 스트레스 때문에 그래.”

석원은 등에 닿은 지원의 손을 끌어내렸다.

“좀 나가 봐, 씻게. 땀범벅이야.”
“…정말 괜찮아?”
“괜찮아.”

그가 티셔츠를 벗으며 말했다. 그제야 지원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욕실 문을 잠그고, 찬물을 틀었다.
순식간에 세면대를 가득 채운 물이 욕실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물줄기를 빨아들이는 배수구를 보자 또다시
욕지기가 치밀었다. 그는 변기에 고개를 처박고 몇 번 더 토해냈다. 간신히 진정하고 레버를 내리자,
변기 구멍 속으로 물이 빨려 들어갔다. 그걸 보니 또 신물이 올라왔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고개를 들자 볼썽사나운 남자와 마주쳤다. 초조한 얼굴이었다. 그는 긴 시간 우두커니 거울만 쳐다보다가,


어느 순간 길게 심호흡했다. 그리곤 뺨을 내리쳤다. 생각할 것도, 해결해야 할 것도 넘쳤지만, 그 전에
정신부터 바짝 차려야 했다.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한쪽이 궁지에 몰렸다고 다른 쪽까지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티를 내서도,
긴장을 놓아서도, 집중을 잃어서도 안 된다. 한쪽 발밑이 휘청거리는 만큼 다른 쪽은 더욱 단단하게
중심을 잡아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간신히 손끝에 닿았던 평온은 물론, 모든 게 다 끝장이었다.

텐 가렌의 몸을 차지한 이래로 이만큼 절박한 심정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만큼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던 적도 없었다.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목을 꽉 조르며, 그는 태연히 웃어보았다.

----------------------

화장실 스피커에서 상큼한 걸그룹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정형석 PD 는 손을 씻다 말고 잠시 어깨를


들썩거렸다. '달짝지근~달짝지근~'가사를 흥얼거리며 화장실을 나서던 그가 흠칫 놀랐다. 문 앞에
조연출이 썩은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아씨, 깜짝이야…뭐야?”
“배우들 스탠바이 다 시켰고요, 대기실에 새 대본이랑 물, 커피, 간식 세팅했습니다. 촬영팀, 조명팀,
음향팀, 소품팀 OK 고요. 펌프랑 가짜 피는 양이 좀 부족할 거 같아서, 분장팀이 슛 들어가기 전까지
추가로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다 됐네. 뭐가 문제야.”
“세트장에 물개랑 펭귄 떴어요.”

정형석이 우뚝 멈췄다. 생기 넘치던 얼굴이 급속도로 노화했다.

“걔들은 또 왜, 또 뭐! 뭐! 이젠 더 물어뜯길 데도 없다, 정말.”


“슛 들어가기 전에 회의 좀 하자고….”
“바빠 죽겠는데 무슨 회의를 또 해?”
“협찬사 쪽이랑 아직도 박 터지게 싸우나 보던데요.”

터덜터덜 세트장으로 들어가자, 남녀 한 쌍이 우울한 낯짝으로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물개와 펭귄이란


바로 저들, 마케팅팀과 홍보팀 직원을 지칭하는 별명이었다. 정형석에게는 드라마국 국장보다 저들을
상대하는 게 더 까다로운 일이었다. 그는 둥글게 접은 대본으로 뒷목을 탁탁 두들기곤, 다가가 말했다.

“짧게 합시다. 금방 리허설 들어가요.”


“23 번 씬에서 우승희씨가 드는 에나멜 캐리어 있잖아요, 적어도 세 컷은 넣어야 할 거 같아요. 그 중 한
컷은 클로즈업으로. 그리고 립스틱도 협찬사에서 지랄인데, 우승희씨가 바르는 컷은 못 찍더라도 들고
있는 컷이라도 어떻게 끼워 넣을 수 없을까요?”

펭귄이 수첩을 뒤적이며 말했다. 그녀는 양쪽 귀에 볼드한 링 귀걸이를 달고 있었는데, 정형석은 그


귀걸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잡아당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가 정형석의 표정을 힐금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아니, 우리도 우승희는 핸들링 안된다고 계속 엄살떨고 있는데, 협찬사들이 뭐 그런 거 신경 써요? 돈


받아먹었으니 까라면 까라, 못하겠으면 협찬금 도로 토해내라는 식이지. 원래 이 정돈 아니었는데 유난히
진상이네.”
“캐스팅 때문이지, 뭐. 아직도 주연 안 바꾸면 투자금 빼겠다는데도 있어요.”

눈이 축 처진 물개가 콧잔등을 씰룩이며 말했다. 불똥이 난데없이 배우 쪽으로 튀자, 정형석이 정색했다.

“이석원씬 안 바꿉니다. 계속 내 배우 갖고 헛소리할 거면 차라리 돈 빼라고 해요.”


“투자금 빼면, 쥐꼬리만 한 제작비 갖고 드라마 어떻게 만들어요?”
“감독님, 어떻게든 잘 달랠 생각을 해야죠.”

당황한 물개와 펭귄이 동시에 지껄였다. 정형석은 코웃음을 쳤다. 돈이 없어 세트장 실내촬영만 하는
한이 있어도 안 되는 건 안되는 거다. 그리고 그는 일단 방송만 시작되면 협찬금이건 광고비건 얼마든지
끌어올 자신이 있었다.
기세가 수그러든 둘을 뒤로하고 모니터 앞에 앉자, 옆에서 카메라 감독이 낄낄 웃었다.

“아니, 드라마를 피디가 만드는 거지. 마케팅팀이니 홍보팀이니 개떼처럼 몰려들어서 이래라저래라.
언제부터 이 바닥이 이렇게 됐대?”
“옛날, 옛날 한 옛날부터 이랬을걸요.”

정형석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는 귀찮은 일들은 머리 한구석에 처넣어버리고, 진지하게 세트장을


둘러봤다. 첫 촬영을 앞둔 세트장은 긴장된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소품들은 예정대로 세팅되었는지,
카메라와 조명은 모두 제 자리를 찾았는지. 수백 번 머릿속으로 그리고 수정했던 동선이 세트장 위에서 잘
살아날 수 있을지 꼼꼼히 점검하고 있을 즈음 드디어 배우들이 들어왔다.

본격적으로 헤어와 메이크업, 의상을 갖춘 배우들은 텍스트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완벽했다. 그들은
이미 돈에 팔려온 가정주부, 호스트, 술집 여자, 여대생이었다. 정형석은 카메라 모니터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서 빨리 카메라에 불이 들어가고 배우가 움직이는 씬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런 그의 옆구리를 툭 치며, 카메라 감독이 말했다.

“저 이석원이라는 배우, 살인마 역할치곤 좀 묻히지 않나? 워낙 화려한 사람들을 모아놔서 그런가……
눈에 영 안 들어오네.”

정형석이 코웃음을 쳤다. 이십 년 넘게 드라마를 찍었다는 사람이 보는 눈이 없어도 저렇게 없을 수가


있나. 이석원은 다른 배우들과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얌전히 소파에 앉아 리허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모자의 챙이 만들어낸 그림자 탓에 표정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니터를 쳐다보면 오로지,
그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저 안에서 가장 평범했고, 동시에 가장 이질적이었다. 그가 만들어내는 박무경을 만날 때마다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단연코 오늘이 최고였다. 보고만 있어도 긴장감으로 목이 탔다. 그러나
영상을 만드는 카메라 감독이 직접 느끼지 못한다면 백 컷, 천 컷을 찍어봐야 죽은 그림일 뿐이다.
정형석이 꿍꿍이를 감춘 얼굴로 말했다.

“장 감독님, 긴장 좀 넣고 가시죠?”
“뭐?”
“이석원씨, 잠깐만요.”

그가 손짓하자, 소파에 앉아있던 이석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왔다.

“리허설 전에 박무경 분위기 좀 잡고 갔으면 해서. 리액션 컷 딴다고 생각하고, 나 좀 쳐다봐요. 날


죽이고 싶은 것처럼.”
“…죽이고 싶은 것처럼요?”

정형석은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곤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 감독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카메라를
돌렸다. 저쪽에서 우승희와 이야기하고 있던 김효승 작가가 냉큼 다가왔다. 내심 무명의 주연배우를
궁금해하던 스태프 몇몇, 심지어 물개와 펭귄까지 기웃거렸다. 꼬투리만 잡히면 득달같이 물어뜯겠다는
태도였으나 정형석은 신경 쓰지 않았다.

큐 사인을 내리자 박무경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말없이,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저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형석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을 때, 카메라 감독이 속삭였다.

“지금 하고 있는 거 맞아? 인상도 좀 쓰고, 미간에 주름도 좀 잡고 그래야….”


“장 감독님.”

정형석이 ‘집중하고 봐요, 좀.’하고 차갑게 말했다. 잠시 카메라 감독을 쳐다보던 박무경이 눈동자를 슥
돌렸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변함없는 시선이었다. 빛 한점 없는 검은 눈동자를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어느 순간부턴가 스피커의 선을 뽑은 것처럼 주위가 몹시 고요하게 느껴졌다. 숨소리마저 불길하게 들렸다.
문득, 정형석은 대본을 떠올렸다. 김효승 작가는 저것을 피식 동물을 앞에 둔 포식 동물의 시선으로
묘사했다. 정확했다.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그가 묻자 박무경의 눈이 희미하게 휘어졌다.

“감독님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요.”

그 순간 오싹함을 느낀 것은, 분명 그 혼자만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김승주입니다 :)
지난 편에 추천, 선작, 코멘트 남겨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몇 번씩 읽으며 기운도 얻고, 문제점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폰 보내주신 분들께도 정말 감사 드리구요:)

봄이 왔다 갔다 하는지 오전, 오후 일교차가 어마무시합니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구요. 근시일 내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즐거운 수요일 되세요!

내용 중 오타나 비문, 오류가 있는 내용이 있다면 언제든지 지적 부탁드립니다.

00027 용병(Mercenary)
=========================================================================
             
S# 23. 저택 거실, 밤.
거실에 모여있는 참가자들. 홀로 사이드 테이블에 앉아있는 주재영, 벽에 걸린 고가의 오브제를
만지작대다가 장식장 서랍을 열고 안을 뒤지는 손소란, 나머지는 소파에 띄엄띄엄 떨어져 앉아있다.
테이블에 놓인 트레이에서 디저트를 고르는 박무경 뒤로 계단을 내려오는 두 쌍의 발이 보인다. 틸업하면,
관리자와 안내자다.

허리조차 꼿꼿이 세우지 못하는, 그러나 눈빛만은 욕망으로 생생한 관리자와 그를 부축하는 미모의 안내자.
그들이 나타나자 거실의 분위기는 더욱 기묘해졌다. 참가자들은 마치 지뢰가 깔린 바닥에 서 있는 것처럼
옴짝달싹 않고 눈치만 살폈다. 안내자는 그 긴장감을 맛보기라도 하듯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오늘 술래잡기는 이 저택 안에서 진행됩니다. 저택 곳곳에 여러분을 위해 다양한 작업실을 마련해


뒀습니다. 마음껏 이용하십시오.”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사냥에 실패했을 경우 벌금은 5 천만 원. 하지만 성공 시 상금은 2 억입니다.’


참가자들의 생각이 바쁘게 굴러다녔다. 숨을 곳도, 도망칠 곳도 마땅찮은 밀폐된 공간. 문이라고 달린
것엔 잠금장치가 없고, 벽장식, 촛대, 도자기, 장식품은 언제라도 흉기로 변할 수 있는 것들뿐이다.
게다가 자신의 행동을 벌건 눈으로 쳐다볼 다른 참가자들까지. 누구도 방심할 리가 없는 이런 상황에서 5
천만 원의 벌금은 감수할 만한 금액이었다. 다만, 2 억의 상금이 그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흔들었다.

곧, 안내자가 테이블에 제비가 든 상자를 내려놓았다. 참가자들이 그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뺄 때마다


의심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들은 남이 훔쳐볼 수 없도록 은밀히 제비를 펴 보곤 품속에 집어넣었다.
누군가는 촛불에 태웠다. 이제 잡아야 할 사냥감은 정해졌다. 그러나 섣불리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숨소리조차 온전히 내지 못하는 시간이 길게, 그러나 찰나같이 이어졌다. 어느 순간 드르륵, 안내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관리자와 함께 차를 마시던 그녀가 문자를 확인하곤 말했다.

“이정환 님께 온 의뢰입니다.”

소파 팔걸이 쪽에 앉아있던 남자가 흠칫 놀다.

“지금부터 10 분 이내에, 누구보다 빨리 사냥감을 처리하면 3 천만 원이 추가 지급됩니다. 총상금, 2 억 3


천만 원입니다.”

이정환의 주위에 있던 여자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모두의 신경이 그를 향해 곤두섰다. 마치 심장을
쥐어 짜이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이정환은 엉거주춤 엉덩이만 든 채 망설이고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폭탄의 심지가 빠르게 타들어 가고 있음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폭발은 전혀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중년 남자가 카펫 위로 쓰러졌다. 뒷목에 문신을 새긴 젊은 남자가 그 위로


달려들어 손에 쥔 것을 힘껏 내리쳤다. 청동 촛대였다. 두 번, 세 번, 망설임 없는 매질에 곧 한쪽
머리가 깨져 피가 쭉쭉 뿜어졌다. 중년 남자는 푸들푸들 경련하더니 곧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늘어뜨렸다.
신선하고 뜨거운 피가 카펫을 질퍽하게 적셨다. 남자는 피 묻은 손으로 이마를 닦고는, 안내자를
쳐다봤다.

“나도 2 억 3 천 줍니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진동했다. 안내자는 화면을 잠깐 쳐다보다가, ‘네, 내일 아침


지급됩니다. 즐거운 밤 되십시오’하고 대답했다. 관리자가 탁한 소리로 웃었다. 남자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더니, 피투성이 얼굴로 참가자들을 쭉 쏘아봤다. 그리곤 계단 위로 올라갔다. 탁, 탁,
발걸음소리가 잦아졌을 때 서너 명이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그들은 거실을 벗어나 뿔뿔이 도망쳤다.
이제 거실에 남은 것은 다섯 명의 참가자들, 그리고 머리가 뭉개진 한 구의 시체뿐이었다.

카펫을 적신 피가 소파 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 주재영이 일어났다. 그녀의 가녀린 등으로


시선이 쏘아졌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캐리어를 올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오만 원권 지폐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것은 이런 와중에도 몇몇 참가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재영이 돈뭉치 위로 제비조각을
집어 던지며 말했다.

“가져가요, 5 천만 원이에요. 내가 여기서 죽여야 하는 사람은 하나뿐이야. 그 사람 말곤 아무도 안


죽여요. 하지만 날 뽑은 사람이 누구든,”

그녀가 창백한 입술을 깨물고 참가자들을 노려보았다. ‘날 죽이려고 하는 사람 앞에서까지 참을 생각은


없어요.’ 그 말에 관리자가 의외롭다는 듯 웃었다. ‘그럼, 자넨 벌써 벌금만 1 억 5 천을 낸 셈이군?’
벌건 눈으로 노려보고 있던 손소란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성큼성큼 캐리어 앞으로 다가가더니 지폐를
한 움큼 쥐었다.

“뭐야, 너 사이코야? 돈도 많은 년이 왜 여기서 지랄이야!”

그녀가 캐리어를 확 밀쳤다. 지폐 더미가 카펫 위로 산산이 흩어졌다. 그것들은 곧 피에 젖어 붉게


물들어갔다. 문득 주위가 고요해졌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의 긴장감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컷! 다시 갑시다.”

정형석 PD 였다.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진행팀 몇 명이 날듯이 세트장으로 뛰어들어가 지폐를
주웠다. 그나마 삼 분의 일은 끈적이는 모조 혈액에 젖어 돈인지 휴짓조각인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
건질 수 있는 것만 최대한 건져봐.’, ‘뭘 건져, 성한 게 없는데.’, ‘어어, 시체 움직이지 마세요. 자세
바뀌면 화면에 티 다 나요.’, ‘난 어쩐지 여기서 엔지 날 거 같더라.’ 이지원은 구시렁대는 진행팀과 FD
틈바구니에서 치이다가, 슬그머니 다시 소파에 앉았다. 정형석이 정확히 세 번의 심호흡 뒤에 말했다.
“지원씨, 왜 그래. 왜 자꾸 카메라를 쳐다봐. 이게 드라마지, 뮤직비디오야?”
“죄송해요, 카메라만 보이면 쳐다보는 게 버릇이 돼서…….”
“음…그럼 어떡할까? 드라마를 몰카로 찍을까?”
“그래도 돼요?”

지원이 우리나라 촬영기술이 그렇게나 발전했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고, 정형석은 눈을 감고 생수병을


우그러뜨렸다. 카메라 감독이 ‘멍청한 것도 저 정도면 귀엽다, 귀여워.’하며 실실 웃었다. 그녀는 그
뒤로 두 번의 NG 를 더 내고서야 겨우 OK 컷을 뽑아냈다. 정형석과 김효승의 얼굴이 썩어 문드러진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몇 개의 자잘한 씬, 몇 명의 길고 짧은 대사가 오가고, 마침내 카메라가 박무경을 잡았다. 정형석은


셔츠의 단추를 가슴까지 풀어헤쳤다. 대본을 받은 그 순간부터 최고 시청률을 뽑아내겠다고 마음먹은
씬이었다. 이 씬의 동선을 머릿속에서 그리고, 엎고, 새로 그리길 반복하느라 어젯밤을 허옇게 불태웠다.
이제 이 씬을 명장면으로 남기느냐, 손발이 오그라드는 흑역사로 남기느냐는 배우의 역량에 달렸다. 그가
경건한 자세로 말했다.

“자, 27 번 씬. 3 단 트레이 걸고 갈게요. 큐!”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오고, 이야기는 다시 흘러갔다.

S# 27. 저택 거실, 밤.
불쾌한 침묵이 감도는 거실. 미동도, 말도 없는 참가자들 틈에서 태연히 디저트를 고르는 박무경. 반대편
소파에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은 손소란이 힐긋 고개를 든다. 눈이 마주치자 빵을 내미는 박무경.
손소란, ‘시체 옆에서 비위도 좋네.’하는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파묻으면, 박무경 계속해서 디저트를
고른다. 그리고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는 황민주.

손가락이 위에서부터 쭉 훑고 내려왔다. 트레이에는 패스추리와 초콜릿 타르트, 피낭시에. 스콘 따위가


푸짐하게 쌓여 있다. 휘감기는 공기마저 달짝지근했다. 박무경은 스콘을 크게 한 입 깨물었다. 금세
하나를 다 먹어치우고 다음 것을 고르고 있을 때. 삼십 대 중반의 여자, 황민주가 눈치를 살피며 그의
옆에 앉았다.

“총각도 이번 게임은 그냥 넘기기로 한 거예요?”

박무경이 커피잔을 들며 웃었다. 황민주는 긴장을 늦추진 않되, 그러나 조금은 기대하는 얼굴로 그의
옆으로 더 다가갔다. 이제 겨우 밤 10 시. 아침이 밝기까진 적어도 7 시간 이상 남았다. 바로 조금 전에도
어디선가 비명이 들렸다. 그녀는 섣불리 이 자리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신경을 곤두세운 채 계속
경계해야만 하는 상황에 지쳐갔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 밤을 의지할 대상을 물색했다.

그녀를 제외하면 거실에 남은 참가자는 여자가 둘, 남자가 둘. 여자들은 애초에 제쳐놓았다. 그녀보다
젊고, 예쁘고, 약아빠지기만 한 것들은 필요가 없다. 그녀 인생에 도움이 되는 건 대체로 남자였다. 두
명의 남자 중 하나는 쭈그리고 앉아 눈알만 희번덕거리는 게 영 꺼림칙했다. 아까부터 자꾸 젊은 여자들을
힐끔거리는 것도 마음이 안 들었다. 남은 것은 박무경뿐이다. 그녀는 그를 꽤 오래 훔쳐봤다.

그는 아까부터 엄청나게 먹어댔다. 먹는 행위로 긴장을 털어내려는 속셈이겠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멍청한 방법이었다. 저러다 단단히 체해서 몇 시간 뒤엔 변기통이나 붙들고 있겠지. 게다가 키만 컸지
체격도 건장한 편은 아니었다. 셔츠 밖으로 나온 팔목은 생각보다 가늘었고 안경을 쓴 탓인지 좀 소심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닌 상황에선, 그녀보다 힘이 센 것만으로도 꾀어낼
가치는 충분했다. 그래도 이곳에서 만난 작자 중에선 가장 인상이 좋았다. 그녀는 자신의 눈썰미를
믿었다.

“나도 여기서 날 밝는 것만 기다렸다가 갈 생각인데……총각 옆에 있으면 마음이 한결 든든할 것 같아서.


내가 가까이에 좀 앉아도 될까요?”
“그러세요.”

박무경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하던 일에 열중했다. 나이프가 접시에 놓인 버터를 잘랐다. 두 조각,
네 조각…곧 여덟 개의 버터 조각이 질서정연하게 줄 섰다. 그는 나이프 끝으로 버터 한 조각을 들어 올려
스콘에 얹고 다시 먹기 시작했다. 황민주는 애써 초조함을 숨기고, 가능한 푸근한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총각은 직업이 뭐예요?”


“사회복지사예요.”

그럼 그렇지. 그녀의 눈은 정확했다.

“어머, 그래요? 나도 우리 아들 때문에 복지관 신세 많이 지는데…어느 지역?”


“노원구요. 아드님이 어디가 안 좋으세요?”
“장애가 좀……다리를 못 움직이거든.”

박무경이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황민주의 긴장을 조금 더 무너뜨렸다.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몹시 익숙하게 느껴졌다. 장애아를 키우다 보며 공무원과
사회복지사를 물리게 만난다. 그 세월이 벌써 십여 년, 그녀는 어떻게 해야 원하는 것을 쉽게, 더 많이
얻어낼 수 있는지를 잘 알았다. 거실 곳곳에 자리 잡은 참가자들이 주시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오히려 보란 듯이 박무경에게 더 다가갔다.

“내가 여기 있는 것도 다 아들 때문이야. 일주일에 몇 번씩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나라에서 주는


수급비랑 장애수당 가지곤 턱도 없지. 남편이라고 하나 있는 물건은 어디서 뭘 하고 쏘다니는지 제 아들이
다리가 곱든 말든 돈 한 푼 안 대주고. 애 반찬값이라도 벌어보려고 드러운 거 참아가면서 노래방 도우미
일 좀 했더니, 옆집 여편네가 배알이 뒤틀렸는지 신고를 하는 바람에 그나마 쥐꼬리만 한 수급비까지
깎였어. 애랑 둘이 끌어안고 악착같이 살아보려고 해도 살 수가 있어야지.”

황민주는 마치 이곳이 복지관의 상담실인 것처럼 굴었다. 사람 죽이고 돈을 벌려는 괴물은 사라지고,
아픈 자식을 돌보는 고단한 어머니만 남았다. 박무경은 확실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가끔
고개도 끄덕였다. 그가 볼펜 대신 나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희 쪽 복지관에서 하는 사업들이야, 지역민들을 우선 대상으로 하니까 도움이 안 될 테고……기업에서


장애아동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어요. 혹시 애가 성적이 나쁘지 않으면….”
“우리 애가 몸은 그래도 공부 머린 똑소리나. 성적표 받아오는 거 보면 반에서 3 등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 그러니 내 속이 더 터지지.”
“그럼 다니는 복지관에 얘기해서 신청서 써달라고 하세요. 이번엔 규모가 커서, 심사만 통과하면
장학금으로 500 만 원 정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아…5 백만 원?”

그녀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저번 게임에서 1 억을 손에 쥔 그녀에겐 500 만 원도 푼돈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게임의 상금은 2 억이었다. 저쪽에 굴러다니는 시체의 값은 무려 2 억 3 천만
원이다. 구멍 난 둑에서 욕심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눈동자를 굴려 박무경을 쳐다봤다. 그는 그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준 것에 만족했는지,


다시금 빵에 버터를 발라 먹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남자를 좀 더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좀 더 오래……그녀의 은밀한 상상이 머릿속에서 구체화 되었을 때.
드르륵, 안내자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박무경님께 온 의뢰입니다.”

황민주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손에 든 나이프로 이 자리에서 사냥감을 죽이면, 내일 아침 저택에 남을 시체를 모두 지급하겠습니다.”

시체? 그 의미를 헤아리느라 그녀는 박무경의 태도가 이상할 정도로 태연하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박무경은 입안에 집어넣은 타르트를 몇 번 더 씹어 꿀꺽 삼키곤, 커피잔에 새로운 커피를 따르며
물었다.

“여기서?”
“당신은 전적이 있으니까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작년처럼 카메라가 없는 곳으로 끌고 가시면 안 됩니다. 클레임 들어와요.”

현실감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박무경이 웃는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거실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가
끽끽 돌아갔다. 거실 뿐만이 아니었다. 이 저택은 카메라 없는 사각지대 찾기가 사람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곳이었다.

“하여튼, 관음증 환자들…….”

고개를 돌려 황민주를 쳐다본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세상에 미친놈들 참 많아요?”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물었다.

“초, 총각도 오늘은 그냥 넘어가려는 거 맞지? 아무도 안 죽이고….”


“아뇨, 아침부터 한 끼도 못 먹어서 배부터 채우고 시작하려고요. 전 작업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라서.”

박무경은 여전히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 표정과 말하는 내용이 전혀 들어맞질 않아서, 황민주는 멍청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자, 다른 참가자들은 어느새 벌떡 일어나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주 기분 더러운 시선이었다. 곧 손소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남은 두 명 역시
거실의 끝과 끝으로 물러나서 경계했다. 그제야 황민주는 한차례 몸을 떨었다. 피 한 방울까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누구 이름을 뽑았는데?”


“당신이요.”

박무경이 대답했다. 그는 텅 빈 커피잔을 내려놓고 입가에 남은 빵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그리곤 ‘아,


느끼해…….’하고 중얼거렸다. 버터기름이 가득 묻은 나이프를 손등에 문질러 닦던 그가, 문득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안 도망가요?”

그녀가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 그러나 몇 걸음 뛰지도 못한 채 뭔가에 걸려 넘어졌다.


시체였다. 그녀는 또 다른 남자 참가자가 있는 방향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러나 남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시선이 높았다. 그녀는 기다 말고
돌아보았다. 박무경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전신을 타고 오른 소름이 관자놀이로 쏠렸다. 뇌가 뒤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끔찍했다. 한 편으론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현실과 맞닥뜨렸다. 가느다랗고 부실하다고 생각했던 팔이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붙들었다. 머릿가죽이 뜯겨나갈 것 같은 힘이었다. 그녀는 비명도 못 지르고
꺽꺽댔다. 박무경은 안경을 벗어 카펫 위에 던지곤, 나이프로 그녀의 어깻죽지를 푹 찔렀다.

“소리 질러요. 이 방, 저 방 숨어있는 쥐새끼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나와서 훔쳐볼 정도로, 크게. 난


내가 사람 죽일 때 누가 쳐다보는 게 그렇게 좋더라.”

끓는 듯한 비명이 저택을 울렸다. 그녀가 간절히 쳐다보던 남자는, 나이프를 타고 흐르는 피를 보곤


황급히 도망쳤다. 이제 거실에 남은 것은 그녀와 박무경, 그리고 주재영뿐이었다. 박무경은 황민주의
등을 몇 번 더 쑤시곤 나이프를 털었다.

그녀가 피를 철철 흘리며 주재영이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붉은 발자국이 따라왔다. 황민주는 몸통이 반


잘린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손을 내밀었다. 주재영이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그 손끝을 붙잡았다. 다음
순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쥐었다. 박무경이었다. 피로 흥건한 손바닥이 미끈거렸다. 그는
이어져 있는 둘의 손을 끊어내더니 주재영의 어깨를 옆으로 밀쳤다.

“저리 가서 봐요. 피 튀어요.”

그가 말하곤, 황민주의 몸뚱이를 뒤집었다. 그녀는 공포에 먹힌 얼굴로 울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사, 사, 살려줘요. 돈, 돈 줄게요. 돈 줄게요.”


“돈 있어요?”
“있어요, 있어요.”
“그런데 난 돈보다 사람 죽이는 걸 더 좋아해요. 차라리 돈 말고 사람을 갖다 주면 더 좋겠는데. 아,
다른 참가자들은 빼고. 내키는 대로 죽였다간 바로 탈락이니까요.”

박무경이 다시 나이프를 치켜들며 말했다. 황민주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뚝을 잡아챘다. 그리곤
‘이, 있어요……내 아들!’하고 소리쳤다. 포크 하나를 뒤로 감춘 채 접근하던 주재영이 우뚝 멈췄다.
박무경은 덫 앞에서 가까스로 멈춰선 짐승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주재영을 쳐다보다가, 아쉽게 물었다.

“아들이 몇 살인데요?”
“초, 초, 초등학교 3 학년이에요.”
“아…난 애들은 안 죽여요. 짐승이랑 다를 게 없잖아. 뭐 아는 게 있어야지.”

박무경이 그녀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녀가 악착같이 팔을 휘저어 다시 그의 팔뚝에 매달렸다.


그리곤 ‘아니에요, 아니에요, 내 아들은 달라요, 애가 고, 고생을 많이 하고 커서 어른스러워요.’ 하고
애원했다. 박무경은 볼썽사납게 구겨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곤 말했다.

“이거 아주 웃기는 년이네.”


“……!”
“싫다잖아.”

나이프가 가슴에 박혔다.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흔들리던 양팔이 박무경의 목으로 휙 뻗어왔다. 그러나
경직된 손가락 끝은 그의 살갗에 닿아보지도 못한 채 축 늘어졌다. 곧 블라우스가 벌겋게 물들었다.
박무경은 경쾌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간신히 두 발로 버티고 선 주재영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것은 가련한 암고양이였다. 안락한 보금자리를 잃고, 독이 잔뜩 오른 암고양이. 바로 가죽을 벗기긴


아까웠다. 그렇다고 데려다 키울 자신은 없고……박제를 하면 누구나 탐낼 작품이 나올 것 같았다.
박무경은 나이프를 뽑아 던지고 피 묻은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입가에 뜨뜻한 피가 잔뜩 묻었다. 그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쭉 찢으며 웃었다.

----------------------

“엄마야, 저 미친 새끼 하는 짓 좀 봐라.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그러게……하고 생각했던 FD 가 곧 동료의 옆구리를 툭 쳤다.


“연기잖아, 병신아.”

잠시 눈을 껌뻑인 진행팀이 ‘아, 연기지.’하고 멍청한 소릴 했다. 그는 고개를 쭉 빼고 있느라 뻐근해진


뒷목을 주무르곤 주위를 둘러봤다. 한쪽에 주인 없는 대본이 굴러다녔다. ‘저 다음은 어떻게 되지?’ 그가
중얼거리며 대본을 뒤적였다.

한편, 정형석은 멍하니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카메라 감독이 그를 쳐다봤다. 조명 감독이, 소품팀,
분장팀 스태프들이 그를 쳐다봤다. 심지어 죽은 지 한참 된 시체조차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시체는
엎어진 자세 그대로 정형석을 바라보더니, 좀 떨어진 곳에서 죽어있는 황민주, 아니 김혜영에게 ‘선배님,
씬 끝난 거 아니에요?’ 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그녀에게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아직도 박무경의 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턱 끝에 맺힌 핏방울이 그녀의 쇄골 위로 뚝뚝 떨어졌다. 힐금, 그의 눈동자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입술을 떼었다가, 위쪽의 붐 마이크를 의식하곤 다물었다.
귓속말이라도 하려는지 그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왔을 때, 김혜영은 견디지 못하고 그의 가슴을 밀쳤다.
박무경, 아니 이석원이 주춤 상체를 들었다.
때마침 정신을 차린 정형석이 소리쳤다.

“컷! 오케이!”

촬영장을 감싸고 있던 묘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걷혔다. 정형석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모조 혈액


위를 철퍽철퍽 걸어간 그가 말없이 이석원의 어깨를 때렸다. 좋아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석원과 김혜영을 번갈아 보며 흥분의 피드백을 던지려던 순간. 김혜영이 도망치듯 세트장을 나가버렸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혜영 누나가 비위가 좀 약하셔서…’ 당황한 매니저가 그 뒤를 쫓아갔다.

“제 얼굴이 많이 흉한가 봐요.”

덩그러니 남겨진 석원의 말에, 정형석이 손사래를 쳤다.

“응? 아니, 아니에요. 딱 좋아,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데 무슨 소리예요. 일단 잠깐 쉬고 있어요,


석원씨. 세트장 정리하고 바로 다음 씬 갈 테니까. 이런 날은 그냥……오늘 어디 뽑을 수 있는 데까지
쭉쭉 뽑아 봅시다.”

그가 다시금 석원의 어깨를 철썩철썩 때렸다. 곧 진행팀과 FD 들이 세트장에 몰려 들어와 핏자국을


정리했다. 그 사이 정형석은 세트장을 뛰어 내려가 김효승 작가의 어깨를 붙들었다.

“내가 오늘 찍은 걸로 작품을 못 만들면 사표를 낸다.”


“또요?”
“완전히 씌었어, 씌었어. 김 작가 이런 거 어디서 봤어? 내가 그 날 이석원씨 못 잡았으면 어쩔 뻔했어?
김 작가, 누구? 김성현? 박무경 역에 누굴 캐스팅하자고 했지? 응?”

정형석이 코웃음을 치며 떠들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다 감독님 덕분이에요. 공치사도 한두 번이지 천년만년 우려먹겠네, 아주.”


“내가 뭐랬어, 물건이라고 했지? 빨리 칭찬해 줘, 빨리.”
“…하여간 이 양반도 제정신은 아냐.”

그녀가 헛웃음을 터뜨렸을 때, AD 가 여전히 썩은 얼굴로 불쑥 나타났다.

“감독님. 물개랑 펭귄이 잠깐만 회의 좀 하자는데요. 좀 꺼지라고, 꺼지라고 눈칫밥을 퍼 멕여도 어디서
의자 하나씩 들고와서 저러고 앉아있네요.”

그가 고갯짓으로 가리킨 곳엔 마케팅팀 물개와 홍보팀 펭귄이 똑같이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정형석이
고달픈 한숨을 쉬었다. 옆에서 김효승과 AD 가 걱정과 동정의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어깨
무거운 가장의 심정으로 대본을 말아쥐었다. 그리곤 물개와 펭귄 앞에 앉아 똑같이 다리를 꼬았다. ‘
뭐요?’하는 얼굴로 쳐다보자, 펭귄이 대뜸 말했다.

“잘라주세요.”
“……뭘요?”
“박무경 원샷 잡힌 컷이랑, 마지막에 우승희씨 보고 웃는 것까지 스틸컷 다 잘라줘요. 홍보용으로 쓰게.
아예 저걸로 티저도 하나 만드는 게 어때요?”

예상외의 제안에, 정형석이 눈을 껌뻑였다.

“티저는 우승희씨 위주로 하자면서요?”


“아예 캐릭터 티저를 따로 만들자고요. 주재영이랑, 박무경 둘 다. 이 드라마 셀링포인트가……우승희가
아니네요.”

그녀가 쉬고 있는 이석원을 힐금 쳐다보며 말했다. 물개가 어림없다는 듯 웃었다.

“무슨 헛소리예요, 셀링포인트는 당연히 우승희지. 그래, 저 배우 연기는 잘하네. 연기파 배우로
이미지만 잘 구축하면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투자자들한텐 인지도가 먼저죠. 걔들은
이석원씨보다 차라리 이지원씨를 더 좋아할걸요? 노이즈 마케팅이라도 되니까.”
“본방 나간 다음부터 말이에요. 우승희야 이미 깐 카드고, 저쪽은 새로운 카드라 의외성이 있잖아요.
지금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무리수라고 생각하는 상황인데. 그걸 뒤집으면,”
“빈대떡 뒤집어요? 안 뒤집히면 어쩔 건데요?”

정형석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돌아가는 상황이, 어째 그가 지겨운 말싸움을 반복해야 할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관전자의 시선으로 둘의 언쟁을 구경했다. 팬들의 보호와 안티들의 욕설이 난무하는
시청자 게시판을 미리 보는 것 같아 몹시 흥미로웠다. 펭귄이 어디 제대로 한판 해 보자는 듯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리곤 정형석을 미치게 하곤 했던 말투로 쏘아붙였다.

“이 바닥 모르는 거예요. 정지완도 뮤지컬 하다 처음 드라마 찍었을 때 사람들이 무리수라고 했죠.


강희영도 CF 퀸 소리 듣다가 처음 영화 찍었을 때, 사람들 뭐랬어요? 백 퍼센트 망할 거다, 좋은 이미지
다 망쳤다, 몸 로비로 배역 딴 거 아니냐, 찌라시 돌고 난리 났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둘 다
지금 한류스타예요.”
“너무 긍정적인 사례만 보는 거 아닌가? 연기 잘하고 잘생겨도 못 뜨는 배우들 널리고 깔렸어요. 그리고
일단 시작점부터가 다르잖아요, 이석원씨는 배역이 살인만데.”
“오히려 배역빨 받아서 더 대박 날 수도 있죠.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이에요? 범죄자들 패션이 화제가
되는 세상이에요. 그걸 또 블레임룩이라고 이름까지 붙여놓고 따라 입는 세상이고. 하물며 진짜 살인마도
아니고 진짜 같은 가짠데. 한번 불붙으면 얼마나 뜨겁겠어요?”
“……대박은 무슨, 내가 보기엔 도박 아니면 쪽박이구만.”

끝까지 대꾸하긴 했지만, 물개의 기세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펭귄은 ‘두고 봐요, 내가 비싸게 팔아볼
테니까. 그전에 이석원씨 스타일리스트랑 얘기부터 해야겠네.’ 하고 의욕을 불태웠다. 정형석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거만한 자세로 꼬아 올린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거 봐요. 이석원씨 문제는 일단 본방 나가고 한꺼번에 얘기하자고 했죠? 내 안목이 나쁘진 않다니까
그러네.”

그 말에, 일어나려던 펭귄이 다시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럼 이제 이지원씨 얘기도 좀 할까요?”


“아, 예. 말씀하세요.”

정형석이 냉큼 꼰 다리를 풀었다.


----------------------

석원은 차가운 물수건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옆에서 동후가 한참 동안 지껄이고 있었지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는 박무경의 탈을 뒤집어썼던 순간을 곱씹으며 음미하는 중이었다. 행동 하나, 말
한마디를 지켜보던 수십 쌍의 시선이 우울하던 마음을 달래주었다. 텐 가렌이 진창 속에서 허덕이는 지금,
박무경은 유일하게 숨 쉴 구멍이었다.
손가락 끝이 어깨를 건드렸다. 휙 돌아보자 지원이었다.

“야, 너 연기할 때 좀 소름 끼치는 거 알아? 정말 너 아닌 거 같더라.”

석원은 눈을 껌뻑이며 잠시 대꾸할 말을 찾았다. 다행히 동후가 끼어들었다.

“누나 연기는 볼 때마다 소름 끼쳐요, 볼 때마다. 석원이 오늘 제대로 감정 잡았는데 산통 깨지 말고


저쪽, 저기 멀찍이 가서 구경해요. 아니지, 누난 어차피 오늘 촬영 끝났잖아요. 집에 가요.”
“태워다 줘야 가지!”
“애도 아니고 진짜……콱 상자에 넣어서 퀵으로 부쳤으면 좋겠네.”

구시렁거리던 동후가 문득 석원을 돌아봤다. 그리곤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이대로 가면 스케쥴 많이 지연되겠는데. 오늘 새벽에 들어갈 수도 있겠다. 괜찮겠어, 동생?”

석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어차피 그는 오늘 밤 잠들지 않을 셈이었다.

----------------------

틸업(tilt up) : 카메라를 수직으로 아래에서 위를 향해 움직이면서 촬영하는 기법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김승주입니다 :D
지난편에 추천, 선작, 코멘트 남겨주신 분들.
그리고 쿠폰 보내주신 분들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근시일내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수요일 되시기 바랍니다^^

내용 중 오타나 비문, 오류가 있는 내용이 있다면 언제든지 지적 부탁드립니다.

00028 용병(Mercenary)
=========================================================================
             
S# 28. 몽타주. 지하감옥
-축축한 흙벽에 등을 기댄 채 웅크린 텐 가렌. 고열로 흐리멍덩해진 눈이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 끝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진다.
-철창을 열고 횃불을 들이미는 간수. 죄수들 틈으로 텐 가렌, 죽은 듯 쓰러져있는. '죽었나?', '안
죽었소.' 죄수 대답하면 다시 철창 닫히고 페이드아웃.
-줄 맞춰 하수도 속의 몬스터 사체를 끌어내는 죄수 네 명. 가운데 낀 텐 가렌, 힘이 빠져 휘청대다가
앞선 죄수에게 뺨 얻어맞는. 잡고 있던 창자를 내팽개치고 달려드는 텐 가렌.
-벌거벗고 쇠창살에 바싹 붙은 죄수, 창살을 사이에 두고 죄수의 하체에 머리를 파묻은 창녀. 카메라 팬
하면, 맞은 편 굴에서 쇠창살에 달라붙어 소리 지르는 죄수들. 그들 너머로, 구석에서 묽은 위액과 피를
토하는 텐 가렌. 찢어진 입술을 닦고 털썩 앉으면, 지치고 고통스러운 얼굴에 눈빛만 형형하다.

드라마처럼 모든 게 지문 몇 줄로 지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였다. 테이프 제목은 ‘텐 가렌, 땅굴 속에서 보낸 100 일간의 엿 같은 기록’쯤 되겠지. 텐은
목구멍에 걸린 피 찌꺼기를 마저 뱉어내곤 흙벽을 쳐다봤다. 손톱으로 그어놓은 가느다란 홈이 스물다섯
개. 그가 이곳에 처박힌 지도 벌써 스무날이 넘었다.

첫 열흘은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뇌를 펄펄 끓는 솥 안에 처넣은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간수가 하루에 두 번씩 그가 살아있나 확인했을 정도다. 그가 죽지 않고 연명할 수 있었던 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세상, 이석원의 세상 덕분이었다. 그곳에서 연쇄살인마를
연기하며 스트레스를 긁어내지 않았다면 그는 목을 맬 것이냐 손목을 딸 것이냐를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지루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석원의 일상에서 위안을 찾게 되다니. 텐 가렌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이 꼴을 초래한 것은 그였다. 그가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음에도


쾌락 속을 헤매며 시간을 허비한 것도, 살쾡이 같은 형제가 있는 줄 뻔히 알면서 마노 아즈엘에게 칼을 댄
것도 그였다. 그에게 힘이 있었다면 유리 아즈엘에게 쥐새끼처럼 얻어맞진 않았을 것이다. 금이 있었다면
벌써 이 땅굴을 벗어났을 것이다.

그는 후회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후회할 만한 일을 만들지 않았다. 교도소나 정신병원에 갇힌 후엔,


후회해봐야 소용없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후회가 뼈에 사무쳤다. 그는 칼자루를 손에 쥔 어린애처럼
굴었다. 그 칼이 장난감 칼인 줄도 모르고 활개를 치고 다니다가, 겨우 손끝에 닿는가 싶었던 평온을
시궁창에 갖다 처박았다. 그가 다 망친 것이다. 스스로 목이라도 조르고 싶었다.

그 끔찍한 우울의 늪에서 기어 나오는 데 거의 일주일이 걸렸다. 그의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지금은 시궁쥐 신세지만 기한이 끝나면 바깥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그날을 대비해
땅굴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목록을 작성했다. 꼴이 꼴이다 보니 많진 않았다. 체력을 회복하는 것.
착실히 근력을 키우는 것. 그리고 더 큰 힘과 더 많은 금을 가지기 위해 궁리하는 것.

땅굴에 갇혀 온종일 하는 일이라곤 개같이 일하는 것뿐이니, 다른 생각에 몰두하는 건 정신을 환기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집중력이 좋아지니 암기력도 부쩍 늘었다. 이미 각궁 제작법은 줄줄 욀 정도다.
카르투옴의 재료로 단점을 보완한 더욱 완벽한 제작법도 구상했다. 나가는 즉시 그를 위한 무기부터 만들
요량이었다.

돈을 벌 궁리도 시작했다. 몇 단계 발달한 지식을 이용하면 꽤 그럴싸한 돈벌이용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번째 시도는 엊그제. 지상에 폭우가 쏟아졌는지 온종일 습기가 가득하고 꿉꿉한
날이었다. 휘청휘청하던 화롯불이 꺼지는 바람에 겨우겨우 부싯돌로 불길을 살리는데, 문득 ‘성냥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주 기막힌 아이디어였다. 비 오는 날 불을 피우는 건 정말 엿 같은
일이었고, 마법사들이 만든 젖지 않는 부싯돌은 열흘 치 밥값이었으니까.

그는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여전히 바쁜 일정에 허덕였지만, 그 와중에도 국회도서관과 인터넷을


이용해 성냥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라이터 대용으로 써보기만 했지 자세히 관찰한 적도 관심 가진 적도
없던 물건이었다. 성냥은 나뭇가지 끝에 유황과 인을 발라서 만드는 것이었다. 유황과 인. 둘 다 십여 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론 들어본 적도 없었다. 유황은 어떻게 수소문을 하면 카르투옴에서도 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문제는 인이었다.

독성이 있는데다 발화점이 낮아서 주머니에 넣고만 있어도 불이 붙는다는데 그런 걸 들고 다니다간 어느


날 밤 백골로 발견되기에 십상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현대의 성냥은 과학자들이 수십 년에 걸쳐 연구하고
보완한 것이었다. 그는 며칠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속만 쓰릴 뿐이었다. 문명과 지식의 벽은
바벨탑 뺨치게 높았다.

그래도 뼈아프게 학습한 덕분인지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석원은 밤마다 「역사를 바꾼 1,000
가지 발명품」 따위의 책을 한 시간씩 읽었고, 텐 가렌은 눈을 뜬 순간부터 감을 때까지 생각의 고리를
끊지 않았다. 그는 나름 건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의 굶주린 욕망이었다. 상황 파악 못 하는 그의 오랜 친구. 대본 속의 살인마를 연기하는


것만으론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이것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사고를 칠 뻔한 게
고작 얼마 전 일이다. 그 날 하마터면 이석원의 인생을 말아먹을 뻔했다. 그리고 이러다간, 조만간
식칼을 들고 옆집 문을 두드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반쯤 빼앗긴 통제력부터 되찾아야 했다. 이성을 견고하게 다지고, 또 한 번


벌거숭이가 되지 않도록 그의 남다른 실체를 겹겹이 감싼 채 버텨야 했다. 욕망과의 줄다리기야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었다. 쉽진 않겠지만, 그의 싸움은 언제건 쉬웠던 적이 없다. 그래도 승리하는 건 늘
그였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그래야 했다.

텐은 생각을 끊어내고 현실로 돌아왔다. 배식시간이었다. 간수 두 명이 검집으로 쇠창살을 두들겼다.


소리를 꽥꽥 질러대던 죄수들이 조용해지자, 한 명이 궤짝에 담긴 것을 나눠주었다. 먹을거리는 늘
똑같았다. 바닥에 던져두면 돌인지 빵인지 구분도 못 할 덩어리 하나와, 미끄덩한 몸통에 아가미가 붙은
도롱뇽 두 마리. 심지어 발가락과 꼬리는 꺼멓게 타서 잿가루와 함께 후두두 떨어졌다.

텐은 마른 침을 삼켰다. 다른 때라면 쳐다도 안 봤겠지만, 체력을 위해선 이거라도 집어넣어야 했다.


비위가 강하고 약하고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애써 먼 곳을 노려보며 비린내 나는 것을 씹었다.
산란기에 접어들었는지, 한 놈의 뱃속엔 까만 알이 버글버글했다. 옆에서 늙은 죄수가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운이 좋았다, 는 생각이 들자 기가 막혔다. 처량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배식이 끝나자 간수가 양피지 두루마리를 펼쳤다. 입에 숯 칠을 한 죄수들이 긴장한 얼굴로 쇠창살이
달라붙었다. 그러나 호명 당하는 건 늘 그렇듯 세 명뿐이었다. ‘자몰, 크란겐, 스사르.’ 호명된
죄수들이 황급히 아랫도리를 벗고 쇠창살에 허리를 붙였다. 나흘에 한 번, 가장 개처럼 일한 죄수들에게
주어지는 포상이었다.

선택지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가 여자. 두 번째는 막 구워낸 쫄깃한 빵 한 덩이. 세 번째는 반나절의
휴식이었다. 물론 아랫도리가 시들다 못해 뿌리까지 썩은 늙은이가 아니고선 전부 여자를 골랐다.

벌거벗은 몸에 목줄만 찬 창녀들이 죄수의 아랫도리에 얼굴을 처박았다. 지상에서도 창녀였고,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 후에도 창녀인 여자들이었다. 좀 더 험한 일을 하는 죄수들 굴엔 아예 여자를 넣어주기도
한다는데, 여기선 창살 너머에서 한 번 빨아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텐에겐 주어지지 않았지만.

호명되지 못한 죄수들이 벌건 눈을 하고 구경했다. 그래 봤자 보이는 거라곤 땟국물로 얼룩덜룩한 죄수의


엉덩이와 그 너머로 출렁이는 머리카락뿐이었지만. 그거라도 가장 가까이에서 보겠다고 싸워댔다. 벌써
대부분이 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고 흔들어대고 있었다. 세 명의 허릿짓이 격렬해질수록 구경꾼들의
손놀림도 바빠졌다.

텐은 입안에서 꼬리뼈인지 머리통인지 모르는 것을 한참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턱수염이


덥수룩한 죄수 하나가 헐떡거리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텐이 ‘저리 안 꺼져?’ 하고 으르자, 놈은 잠시
갈등하는 표정을 하더니 곧 다른 놈들처럼 창녀나 구경했다. 텐은 짜증스럽게 뼛조각을 뱉었다. 바로
며칠 전에도 빵을 줄 테니 한 번 빨아달라고 헛소리를 하는 놈과 한바탕 개싸움을 벌였다. 그가 승기를
잡긴 했지만, 싸우다 얻어맞고, 싸웠다고 얻어맞고. 하마터면 시체로 실려 나갈 뻔했다.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여러 번 못할 짓이었다.

텐은 창녀를 쳐다봤다. 문득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미하라로 오던 길에 만났던, 살구색 머리를 한


창녀. 코르셋으로 힘껏 졸라놓았던 허리. 살짝 데운 치즈처럼 하얗고 말랑말랑하던 피부. 그리고 그 위로
철철 쏟아졌던 피까지…온몸의 혈관을 타고 불길이 확 일어났다. 뜨거운 불은 내장을 바싹 태우고,
그을음이 목구멍을 메웠다. 목이 탔다. 배가 고팠다. 성욕관 비교할 수도 없는 끔찍한 허기. 그러나 먹을
거라곤 손바닥에 드문드문 묻은 도롱뇽 알 뿐이었다. 텐은 손바닥을 핥으며 눈을 감았다.
앞으로 석 달. 그만큼만 버티면 된다.

----------------------

개수대로 핏물이 줄줄 흘러들었다. 석원은 피를 뺀 등갈비를 도마 위에 올리고, 식칼로 토막 냈다. 입맛


돋우는 빨간 살덩이가 차곡차곡 쌓였다. 양념을 바르고 시큼하게 익은 김치와 함께 달궈진 냄비 속에
넣었다. 마늘도 몇 개 씻어 식칼 손잡이로 찧었다. 납작하게 으깨진 것들을 파와 함께 냄비에 털어 넣고
뚜껑을 닫았다. 완벽했다.

비닐장갑을 벗고 찬물에 넣어뒀던 오징어를 꺼냈다. 미끄덩한 지느러미를 단단히 붙들고 껍질을 벗겨
내는데, 싱크대가 드르륵 진동했다. 알람이었다. 핸드폰 화면을 켜자 아래엔 아직 시간이 되지 않은
알람들이 두 시간 간격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온종일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알람이 울릴
때마다 의식적으로 현재 상태를 짚어볼 수도 있다.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에나 썼던 방법을 다시 사용할
정도로, 그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다행히 아직까진 괜찮았다. 그는 잘 통제하고 있었다. 속은 난장판이지만 겉으론 더할 나위 없이


정상적이었다. 석원은 알람을 끄고 다시 식칼을 들었다. 오징어의 눈알을 뜯어내고 지느러미와 몸통,
다리를 따로따로 잘랐다. 몸통은 짭조름한 국물이 밸 수 있도록 서른다섯 번 정도 칼집을 냈다.
새끼손가락 크기로 썬 오징어를 막 펄펄 끓는 냄비에 쏟아넣었을 때였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돌아보자, 지원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뭐?”
“네 등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아침부터 시끄럽게 덜그럭덜그럭….”

그녀가 싱크대를 보곤 잔소리를 멈췄다. 온갖 양념통과 사용한 그릇, 사용할 그릇들로 가득했다. 그녀가
질린 얼굴로 ‘우리 가족 생일은 겨울에 다 몰렸는데, 오늘 호섭이 생일이야?’하고 물었다. 석원은
태연히 대답했다.

“어젯밤에 잠을 좀 설쳐서 그런가, 식욕이 당기네.”


“너 트레이너가 이런 거 먹어도 된다던?”

‘먹고 운동 더 하면 돼.’ 석원이 딱 잘라 말했다. 카르투옴에서 날마다 도롱뇽 따위나 먹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세끼를 양배추와 닭고기만 먹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먹는 만큼 운동량을 늘리는 게 나았다.
지원이 발꿈치로 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어제 늦게 잤지? 새벽 3 시에도 불 켜져 있더라?”


“…봤어?”
“화장실 가다가. 뭐 하느라 그 시간까지 잠을 못 자?”

그는 대답하기 전에 싱크대 너머에 있는 덧창을 열었다. 집이 너무 조용했다. 열린 창으로 차 바퀴에


깔린 돌조각들이 으스러지는 소리, 등굣길의 어린애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리자 한결 나았다. ‘뭐
하느라 못 잤느냐니까?’ 지원이 재차 물었다.

어젯밤. 그는 막 내린 커피와 지원이 냉장고 깊숙이 모셔놓은 누텔라 초콜릿을 끌어안고 웹하드에
접속했다. BBS 보도국의 사회부 기자들이 사건자료를 공유하는 웹하드였다. 그도 사건취재를 하면서 몇
번 접속한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 아직 비밀번호는 그대로였다. 그 안에 올라온 사건자료들을 하나하나
열람하며 모처럼 좋은 시간을 보냈다. 물론 지원에게 얘기하긴 곤란한 내용이었다. 그는 뒷목을 긁적이며
둘러댔다.

“인생계획을 어떻게 다시 세울까, 고민 좀 하느라고. 몇 달 사이 변한 게 많잖아.”


“인생계획?”

지원이 그의 등을 찰싹 쳤다.

“얘가 교육방송 대본 읽는 소리 하고 있네. 인생이 계획대로 됐으면 내 연관검색어에 빌보드 1 위가


뜨겠지, 국민 썅년이라고 뜨겠니?”

‘그건 그러네.’ 석원이 설거지를 하다 말고 웃었다. 그녀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 뚜껑을 차례차례


열어보며, 몇 번인가 그를 흘깃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석원이 식칼을 홀더에 꽂으며
‘왜?’ 하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지원이 바싹 다가왔다.

“너 요즘….”
“요즘 뭐?”
“너 요즘 좀,”

그녀가 막 말문을 트려는데 요크셔테리어 호섭이가 꼬리를 뱅뱅 흔들며 달려왔다. 놈은 둘 앞에서 우뚝


멈추더니, 2 초 만에 지원에게 달려들었다. 그 뒤로 하품하며 들어온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우뚝 멈췄다.
그들은 매콤 새콤한 김치 냄새를 킁킁거리더니 동시에 말했다.

“…오늘 무슨 날이냐?”
“너 드라마 잘렸니?”
“잠을 설쳐서 잔칫상 좀 차리셨대요, 엄마 아들이.”

지원이 비아냥대곤, 석원의 옆구리를 툭 치며 ‘이따 얘기하자.’하고 말했다. 석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김치찜이 푹 익어 냄새를 흘릴 즈음, 그들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요즘 그가 바빠진 탓에 모두가 같이


모이는 시간은 아침이 유일했다. 이마저도 새벽 촬영이 있는 날엔 빠지기 일쑤였다. 같은 집 살아도 자식
얼굴 보기 힘들다느니, 이제 우린 독거노인이나 마찬가지라니, 호섭이를 셋째라고 생각하며 키운다느니
하며 한참 울적해하던 어머니가 문득 말했다.

“아들은 오늘도 바쁠 거고, 지원이 넌 오늘도 촬영 안 가지?”

지원이 불퉁하게 말했다.

“나도 가거든? 오늘 한 씬 있거든?”


“넌 금방 죽는다면서 왜 그렇게 안 죽니? 한 씬이면 얼마 안 걸리지?”

지원이 ‘왜! 왜! 나도 할 일 많아, 촬영 끝나면 대본 분석할 거야!’하고 소리쳤다. 매회 대본이 나올


때마다 빠짐없이 챙겨보고 있는 어머니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분석할 만한 대사도 없었다.

“오후에 일찍 들어오면 호섭이 고기 좀 챙겨 줘. 쟤 더위 먹어서 살 내린 것 좀 봐라. 닭고기 사다 놓은


거 있으니까 그거 주면 돼. 저번처럼 돼지비계 먹여서 피부병 올라오게 하지 말고. 알았지?”

지원의 얼굴이 썩어가든 말든, 어머니는 신신당부했다. 지원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아빠, 딸 신세 좀
봐. 아들한테 치이고 개한테 밀리고, 이래서 집안의 권위가 제대로 서겠어?’하고 헛소리를 했다. 그도
부분적으론 동감했다. 개 팔자가, 저쪽 세상 텐 가렌 팔자보다 좋았다. 지원이 뭐라고 지껄이건,
아버지는 헛기침하며 등갈비를 마저 뜯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킬 즈음, 석원과 지원은 나란히 카니발에 올랐다.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동후가 오늘 스케쥴을 줄줄 읊었다. 환상적이었다. 전쟁터의 창녀도 이만큼 바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텐 가렌의 하루보다야 훨씬 나았다. 그는 시름을 달래며 차창에 이마를 기댔다. 그러나 곧 후회했다.
인도에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보자 갈증만 심해졌다.

그렇다고 눈을 감고 있을 수도 없었다. 요즘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터라, 눈만 감아도 잠들 게 분명했다.


잠들고 싶지 않았다. 차 안 이곳저곳을 노려보다 결국 이지원을 쳐다보는 쪽을 택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현실이 피부에 닿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쓴 채로 창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이맛살을
찌푸렸다. 살짝 열린 창밖에서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인기 상한가를 치고 있는 초코렐라의
신곡이었다. 그녀가 심드렁히 물었다.

“초코렐라 음원 순위 내려갔어?”
동후는 대답 없이 운전에 몰두했다. ‘쟤네 노래 들어봤어?’ 하고, 그녀가 석원에게 물었다. 석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득달같이 ‘어떻든?’하고 다시 물었다. 석원은 태연히 ‘좋던데?’하고 대답했다.
지원이 앞좌석의 머리받이에 이마를 쿵쿵 박았다. 그리곤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언제 음원 순위 1 위 찍어봐?”
“이번 드라마 OST 잘 뽑아서 음원 1 위 해요, 누나.”

동후가 얼른 말했다.

“아, 음원 깔리기 전에 우승희랑 셀카 한 번 찍어야겠다. 제가 우승희 매니저한테 부탁해 놓을 테니까.


다행히 석원이 영화 촬영 따라다니면서 좀 친해져서……아!”

동후가 뒤통수에 쿠션을 얻어맞았다.

“내가 그 외계인이랑 사진을 왜 찍어?”


“곡 나오면 홍보해야 할 거 아니에요. 우승희랑 셀카 사진 찍어서 트위터에 올려놓으면 기사가 줄줄이,”
“싫어, 그년이랑은 안 찍어. 회사 다른 애들이랑 찍으면 되잖아.”

지원이 고개를 홱 돌렸다.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보며 석원은 혀를 찼다. 이어질 일들이야
안 봐도 뻔했다. 그는 얼른 이어폰을 꽂았다. 어린애 달래듯 어르는 동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자존심이 밥 먹여줘요? 톱스타랑 사진 한 장 찍으면 몇 시간은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권에 올라갈 거고,
지금 부탁할 만한 인맥 중에 우승희만 한 카드도 없어요. 우리 회사에 그만큼 파급력 있는 사람 누가
있다고.”
“보도자료 돌려서 홍보하면 되잖아!”
“…보도자료. 아, 보도자료 돌려서 홍보하면 기사가 미친 듯이 올라오겠구나. 아뿔싸, 내가 그걸
몰랐네.”

동후가 온몸으로 빈정거렸다.

“누나 때문에 홍보 대행사한테도 욕 처먹었던 놈이에요, 내가. 걔들이 누날 파느니 차라리 보험을 파는
게 낫겠대요. 누나 보도자료를 불행의 편지라고 부르더라니까. 하긴, 수십, 수백 장 돌려봐야
취재전화는커녕 스팸신고 안 당하면 다행인,”
“야! 넌 매니저라는 게 그 욕을 다 듣고 있니, 병신아?”
“아니, 그 심정이 이해가 되더….”

동후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지원이 씹어먹을 듯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러나 눈물 대신 뚝뚝 떨어지는 건 독기였다. 동후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 뒤에서 클랙슨이 울렸다.

다음 순간, 석원은 머리로 창문을 들이받았다. 카니발이 급발진한 탓이었다. 소리가 얼마나 크게 났는지
동후가 말까지 더듬으며 괜찮으냐고 물어왔다. ‘괜찮을 리가 있나.’ 석원은 욱신거리는 옆통수를
문지르며 욕지거리를 삼켰다.

“…형.”
“어, 어, 많이 아프지? 차 잠깐 세울,”
“제 앞으로 보험 들어놨어요?”

하고, 그는 적당히 농담을 던졌다. 백미러를 쳐다보던 동후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 순간 주머니가 드르륵
진동했다. 석원은 핸드폰을 꺼내 알람을 껐다. 두 시간을 또 무사히 버텨냈다. 머리를 박살 낼 뻔하긴
했지만.

예기치 않은 사고에 놀랐는지 지원도 더 이상은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그건 환영할 일이었지만, 몇
번이나 괜찮다고 했음에도 두 쌍의 시선이 자꾸만 그를 힐긋거리는 건 문제였다. 열심히 웃느라 입꼬리에
경련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는 사이 차는 방송국에 도착했다. 외곽부터 플래카드나 돗자리 따위를 바리바리 짊어진 어린애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팬클럽별로 줄을 서 있었다. 오늘 공개홀에 아이돌이 단체로
출연하는 모양이었다. 어린애 몇 명이 카니발만 보고 쫓아오다가 인솔자에게 가로막혔다. 게 중 한 명은
낯이 익었다. 이곳에 오디션을 보러 왔을 때 그를 손장수로 착각하고 쫓아왔던 여고생이었다. 노선을
갈아탔는지 오늘은 다른 그룹의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여고생은 인솔자가 한눈을 파는 사이 탈출을
감행했다가 다시 질질 끌려갔다. 어린애들이란 참 기운이 넘쳤다.

두 세상을 통틀어, 세트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의 하루에서 가장 버틸만한 시간이었다. 이곳에서만은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었다. 지나치게 몰입하는 날이면, 물론 대부분이 그렇지만, 가끔 스태프들이 그를
보고 흠칫흠칫 놀랄 때도 있었다. 조명감독은 석원에게 살해당하는 꿈을 꿨다며 진저리를 쳤다. 그 꿈에
초대됐다면 참 즐거웠을 텐데. 그는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웃어줬다.

연기하는 그 순간만큼은 현실을 잊을 수 있었지만, 아쉬운 건 열악한 환경이었다. 한두 씬 찍고 나면 몇


시간씩 대기하는 게 예사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벌써 세 시간이 넘도록 대기실에 처박혀
있었다. 촬영이 끝난 지원을 데려다 주느라 동후까지 자리를 비운 탓에 대기실엔 혼자뿐이었다. 그는
대본을 뒤적이다가 덮어버렸다. 대사는 물론이고 문장부호까지 달달 욀 지경이었다. 이젠 따분해서
하품만 나왔다.

대기실 안엔 뭐 하나 흥미로운 게 없었다. 조명 거울, 캔 음료수 몇 개와 생수, 커피, 샐러드 샌드위치,


옷걸이……그리고 연습용으로 받은 칼 정도. 물론 찌르면 손잡이 속으로 날이 쑥 들어가는 장난감이었다.

결국, 할만한 거라곤 생각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작고 은밀한 작업공간이었다. 몇 명이 죽어 나가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때마침 TV 모니터엔 한창 촬영 중인 우승희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작업공간으로 초대했다. 그리곤 격정적인 시간을 보냈다. 굶주림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결과물은 제법 근사했다. 메마른 황무지 같던 혈관에 피 몇 방울이 뿌려졌다.

그는 한숨 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랫도리가 혼자 재미 보지 말고 나도 좀 어떻게 해달라고 야단이었다.


애석하게도 그건 무리였다. 당장 저 문을 열고 상상이 현실이 되어 들어온다면 모를까. 그는 입술을
핥으며 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더니 문이 열렸다.

“…….”

석원은 오래간만에 정말 놀라서, 들어온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차분한 얼굴에 교복 같은 무대의상을


입은 여자애였다. 한 손엔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석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젠 헛것까지
보이는 건가 싶었다. 저쪽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당황을 넘어 시체처럼 굳었다.

침묵을 깬 건 진동소리였다. 석원은 퍼뜩 정신을 차리곤 알람을 껐다. 그녀는 여전히 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헛것은 아니었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빈 대기실인 줄 알고…….”

목소리가 어쩐지 먹먹했다. 자세히 보니 기다란 속눈썹 끝에 물기가 매달려 있었다. 미간에 힘을 잔뜩
주고 참고 있었지만, 툭 치기만 해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꼴이었다. 석원은 곤란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타이밍 한 번 끝내줬다. 그는 애써 생각을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송재인. 전에 헤어살롱에서 마주쳤던 초코렐라의 막내였다. 그때도


암표범들 뒤꽁무니에 붙은 미숙아처럼 보이더니, 오늘은 더했다. 무리에서 쫓겨나 아사 직전에 놓인 걸로
모자라 비까지 쫄딱 맞은 듯한 몰골이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었다면 시청자들 눈물깨나 뽑을
스토리였다. 그가 시답잖은 생각으로 흥분을 가라앉히는 동안, 그녀는 문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봤다가,
얼른 닫았다가, 턱을 위로 쳐들고 울음을 삼켰다.
“죄송해요, 밖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잠깐 앉았다 가요.”

석원이 소파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아이돌이 울면서 돌아다녔다간 바로 연예 토픽감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앉더니 티슈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팀 내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느니, 하루에 세 번씩
화장실에 처박혀서 운다느니 하는 소문들이 다 유언비어인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석원은 뒷목을 주무르며 대본을 다시 폈다. 글자 하나하나를 명화 보듯이 뜯어봤다. 효과가 괜찮았다.
스물여덟 번째 글자를 감상하고 있을 무렵, 조막만 한 머리통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이제 속눈썹엔
물기가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시원섭섭했다. 석원은 그녀 쪽으로 대본을 슥 밀어주었다. 물론 박무경의
살인 씬이 있는 페이지였다. 그녀는 동그란 눈동자를 굴리다가,

“얼마나 아플까요? 칼에 찔리면….”

하고 물어왔다.

“이번 뮤직비디오에서 칼에 찔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연기를 못해서 혼났거든요. 전 별로 다쳐본 적이


없어서……칼에 찔리면 얼마나 아플까요?”
“글쎄, 아무래도 겪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죠.”

그는 그런 경험이라면 차고 넘쳤다. 칼, 창, 촉수, 발톱, 심지어 물고기에게 물어뜯기기도 했다. 아픔에


대해서라면 책도 쓸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설명해주지 못하는 게 몹시 안타까웠다. 대신, 그는 촬영용
칼을 들고 손잡이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한번 찔러 봐요.”

그녀가 놀란 다람쥐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석원은 작은 손에 칼잡이를 쥐여주곤, 그녀의 배를


장난스럽게 쳐다봤다. 송재인이 곧 웃음을 터뜨렸다.

“이 드라마 찍으실 때는 그런 농담 하시면 안 될 것 같아요.”


“왜요?”
“농담이 농담처럼 안 들리고, 꼭…….”

그 순간 또다시 진동이 울렸다. 석원은 힐긋 핸드폰을 내려봤지만, 이번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송재인이


진동하는 핸드폰을 꼭 쥐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었다. 결국, 진동이 멈출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은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저, 혹시…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뭔데요?”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주시면…….”

예상외의 부탁이라, 석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하다 왔냐고 물어보면, 사진 찍었다고 하려고요. 대표님이 방송국에 가면 다른 분들께 부탁해서 사진


많이 찍어 놓으라고 했거든요.”
“홍보용으로 쓰려는 거면, 저랑 찍어봐야 도움이 안 될 텐데.”

석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란히 얼굴을 붙인 채 사진을 찍고, 문을 나서기까지 그녀는 네 번이나
깍듯이 인사했다. 어지간히도 예의 바른 아가씨였다. 그녀가 나가고 나자 대기실이 다시 고요해졌다.
석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소파에 기댔다.

버틸만했다. 수십 명이 모여있는 세트장에서 뛰쳐나와야 했던 지난번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발전이었다.


내심 뿌듯해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또 송재인인가 싶었지만, 이번엔 FD 였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대기시간도 끝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FD 가 더듬더듬 지껄였다.

“어……죄송합니다, 연습하시는 줄 몰랐어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네?”
“촬영이 조금 더 딜레이 될 것 같아서, 지금 얼른 식사하고 오셔도 될 것 같아요. 그거 말씀드리려고…
죄송합니다!”

그리곤 도로 문이 닫혔다. 석원은 황당한 얼굴로 닫힌 문을 쳐다봤다. 몇 날 며칠 퇴근도 못 하고


촬영장을 좀비처럼 돌아다니더니 돌았나 싶었다. 아니면 테이블에 놓인 칼을 보고 연습 중인 걸로
착각했던지. 석원은 찜찜한 얼굴로 캔커피의 풀톱을 땄다. 촬영이 늦어진다는 건, 퇴근도 늦어진단
얘기였다. 졸음과 다투려면 미리미리 카페인을 보충해둬야 했다.

어쨌건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그는 통제력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석원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제아무리 상황이 엿 같아도, 그는 늘 마지막에 웃는 쪽이었다.

----------------------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가로등의 빛이 희미하게 점멸했다. 바람만 불어도 꺼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마치 그의 신세 같았다. 곧 자야 한다고 생각하니 말도 못하게 초조해졌다. 그는 긴장으로
저린 손목을 주무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우뚝 멈췄다.

거실에 녹색 스탠드 하나가 켜져 있었다. 그리고 지원이 다리를 꼰 채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기가


막혀 웃었다.

“뭐해?”
“앉아 봐, 내가 이따 얘기하자고 했잖아, 아침에.”

그는 겉옷과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으며 기억을 되짚었다. 그런 말을 듣긴 했다. 한 귀로 듣고 흘려서


그렇지. 뭔가 할 말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소파에 앉으며 ‘해봐, 어디.’하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너 요즘 이상한 거 알지?”
“…어디가?”
“모르면 더 문제고. 너 그거 병이야.”

석원이 눈을 깜빡였다. 사위가 어둑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지금 표정을 들켰다면 곤란했을 테니까. 그는


고개를 숙여 얼굴에 그림자가 깊어지게 만들었다. 그녀가 뭘 알아챘다 해도, 그가 가진 거대한 비밀의
끄트머리 정도일 것이다. 더 큰 비밀을 봤다면 거실이 아니라 정신병원에서 만나자고 했겠지.
그녀가 계속 말했다.

“너 어제만 잠 설친 게 아니라, 요즘 통 못 자지?”


“……아니?”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었다. 그는 ‘못’ 자는 게 아니라 ‘안’ 자는 쪽이었으니까.

“거짓말하지 마. 너 밤에 안 자고 돌아다니는 거 몇 번이나 봤어. 잠 못 자잖아.”

그건 최대한 잠자는 시간을 늦추려는 발버둥이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양쪽 세상의 균형이 어긋날
즈음 기절하듯 저쪽 세상으로 끌려가는 게 일상이었다. 물론 설명한 방법은 없었다. 궁색한 변명거리라도
찾고 있는데 그녀가 계속 말했다.

“또 있어. 너 요즘 폭식하는 거, 그것도 정상아냐. 오늘 아침에 잔칫상 차린 건 그렇다 치고, 엊그제는


도넛, 그 전날엔 마카롱도 한 세트나 먹고. 냉장고에 넣어둔 내 누텔라 반 통이나 먹었지? 너 원래 단 거
잘 안 먹잖아.”
“그건,”
“그리고 성격도. 너 꼭……온종일 박무경 연기하는 거 같아.”

말문이 턱 막혔다. 부지불식간에 얼음물로 떠밀린 기분이었다. 불면, 폭식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저건


들켜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그는 애써 태연히 대꾸했다.

“내가 언제?”
“아침에도, 너 동후한테 보험 들어놨냐고 물었지? 좀 미친놈 같았어.”
“그건 농담이잖아.”
“농담처럼 안 들리니까 문제지.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냐. 우울해 보였다가,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다가,
또 금방 헤프게 웃고 다니다가. 꼭 조울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동후나 스태프는 너 배역에 너무
몰입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걱정하더라. 그런데 내가 볼 땐, 너 그거 금단증상이야.”

그는 이제 변명거리도 찾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숨이 막혔다. 심장이 갈비뼈를


쳤다. 남과 다르다는 걸 들킬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그것은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아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비밀을 들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아직 그를 ‘사람’을 보는
눈으로 보고 있으니까.
지원이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너 좀 완벽주의 같은 거 있는 건 아는데, 그래도 요 몇 달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았잖아. 갑자기 하는


일도 바뀌었고, 몸 만들어야 한다고 식단 조절까지 시작했고, 종일 바쁘고. 그러니까, 금연은 천천히
하자.”

석원은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비로소 그녀의 말을 이해했을 때의 기분이란, 얼음물 속을


허우적거리다가 멱살이 잡혀 끌려 나온 것 같았다. 그녀가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더니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곤 손등을 찰싹 두들겼다.

“일단 피워. 내가 좀 알아봤는데, 안 그래도 스트레스 쌓이는데 갑자기 확 끊으려고 하니까 몸이 더


거부하는 거래. 금연 한번 실패한다고 해서 네가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건 아냐. 일단 피우고, 일이 좀
안정궤도에 들어가면 다시 시도하면 돼.”
“……고마워.”
“고맙긴, 이 누님이 언제나 매의 눈으로 살피고 있다. 응? 맘껏 피우고, 얼른 정신 차려. 사실 너
지금도 표정 되게……이상해.”

그녀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곤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사라졌다. 석원은 그 이후로도 한참을
소파에 앉아있었다. 핸드폰 알람이 한 번 더 울리고 나서야, 그는 옷과 가방, 그리고 담배 한 갑을
주섬주섬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담배를 꺼내 물곤 라이터를 찾아 불을 붙였다. 거의 두어 달 만이었다.
연기와 한숨을 함께 토해냈다.

우습게도 담배를 피우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금단 증상이었다. 담배 따위가 아니라,
지금껏 그가 마주한 것 중 가장 심각한 금단증상. 그는 텐 가렌이 되어 경험한 쾌락과 자유에 중독됐다.
그것을 마음껏 즐긴 만큼, 놓친 후의 반동도 거세게 돌아왔다. 최고급 마약을 맛본 몸이 다른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도 잘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지원 앞에서 껍질이 홀랑
벗겨진 채 오들오들 떨다니.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었다. 아니, 지원에게 들킬 정도면 호섭이도 눈치챘을
만큼 티를 줄줄 내고 다녔다는 뜻이다. 그걸 그만 몰랐다.

28 년간 삐걱거리긴 했어도 잘 돌아갔던 기계가 기어코 고장이 나버렸다. 어서 수리해야 하는데,


막막하기만 했다. 마치 눈을 가리고 살얼음판 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멈추는 순간 물속으로 끌려들어
갈 것만 같아 계속 달리고 있을 뿐이다. 어디가 뭍인지도 모르는 채로.

----------------------
그로부터 보름쯤 더 지나자, 그의 몸과 마음엔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는 누군가 감옥에서 꺼내주기만
한다면 멍멍 짖는 시늉까지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다. 의욕으로 충만했다.

“텐 가렌?”

그날도 역시, 손가락에 묻은 도롱뇽 알을 일일이 핥아 먹던 텐이 흠칫 놀랐다. 간수가 쇠창살 문을


열더니 손짓했다. ‘다 먹었으면 잠깐 나오시오, 누가 찾아왔소.’ 천천히 일어서자, 간수가 그를
재촉했다. 평소라면 목줄을 잡아 질질 끌고 갔을 텐데 반응이 묘했다. 그는 시간을 벌고자 일부러
느릿느릿 걸었다.

뇌를 씻고 생각해봐도 그를 찾아올만한 사람이 없었다. 뭐, 누가 왔든 여기서 더 안 좋아질 일도


없었지만…만약 찾아온 게 용병지부의 직원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구슬리고 말겠다고 다짐했을 때, 그는
이끼가 가득 낀 굴에 도착했다. 간수와 병사의 행색을 한 남자가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텐은 병사를
유심히 살피곤 굴속으로 들어갔다.

초가 타고 있었지만, 불빛은 없으니만 못한 정도였다. 테이블에 앉은 방문자는 윤곽만 어렴풋했다.


그러나 텐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후드를 푹 눌러쓴 꼬락서니가 몰라볼 수가 없었다.
마노 아즈엘이었다.

----------------------

페이드아웃(fade out) : 화면이 점차 어두워지면서 장면이 바뀌는 연출기법


팬(pan) :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좌우로 움직여가면서 촬영하는 기법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김승주입니다.
먼저, 세월호 참사 희생자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안타까운 사건 때문에 글을 올리는 게 맞는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올립니다.
글은 어디까지나 소설로, 픽션으로 생각하고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내용 중 오타나 비문, 오류가 있는 내용이 있다면 언제든지 지적 부탁드립니다.


저번 편을 읽어주심 분들, 추천과 선작, 코멘트 남겨 주신 분들.
그리고 쿠폰 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다음 편은 수정중이라 며칠 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월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모두 즐겁게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