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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학교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 @글쓰는 기계

대학원생 이한.
다른 세계 마법명가의 막내로 태어나다.
-다시는 학교에 들어가지 않겠다!
'너는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평생 놀고 먹...'
'그래. 너도 스스로 네 재능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마법학교 에인로가드로 가라!'
'가주님!'
마법학교를 졸업하면 평생이 보장된다.
최선을 다해 졸업하라!
001 화
다시는 대학원에 가지 않겠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살겠다!
...힘들었던 대학원을 졸업하며 한국인 이한은 그렇게 다짐했다.
‘학’자 들어가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그러나 세상일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한이 불운한 사고로 죽은 뒤 다시 태어난 곳이 하필이면 다른 세계의 마법사 가문인 워다나즈 가문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15 년.
오늘은 이한이 제국 최고의 마법학교인 에인로가드에 입학하는 날이었다.
*    *    *
워다나즈 가문에 다시 태어난 이한.
처음에는 당황했고, 그 다음에는 신기해했고, 그 다음에는 받아들였다.
다행히 워다나즈 가문은 제국에서도 매우 권세 있는 마법사 가문이었던 것이다.
이한의 아버지인 가문의 가주는 황제와도 친분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고, 가문의 저택은 누가 봐도 부유함 그 자체였다.
이쯤 되면 이한도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전생에 대학원을 다녀서 보상을 받는 건가?
아무런 고생 하지 않아도 평생 편안하게 놀고먹을 수 있는 삶.
...은 물론 착각이었다.
워다나즈 가문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이한 워다나즈.
-예. 가주님.
-너는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
‘평생 놀고먹는 삶이라고 대답해도 되나?’
이한은 살짝 고민했다.
이게 별로 좋은 대답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괜한 질문을 했는가? 하긴, 답은 정해져 있겠지.
-예?
-너도 스스로 네 재능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예?
-워다나즈 가문의 규칙은 너도 알고 있겠지. 첫째가 가문의 모든 것을 이어 받는다.
-예?????
마지막 말은 좀 많이 충격적이었다.
모든 것을 이어 받는다고?
그러면 둘째 이하는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것인가??
-가주님. 저는 그러면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겁니까?
-아니다. 이한 워다나즈.
‘다행이군.’
-가문은 네게 모든 기회를 줄 것이다. 네가 기사가 되고 싶다면 최고의 기사를 구해다 줄 것이고, 네가 관료가 되고 싶다면 제국의 재상에게 배울 기회를 줄 것이다.
상인이 되고 싶다면 제국 최고의 상단주 밑에서 일할 기회를 주겠지. 네가 가문 안에 있는 동안, 원하는 모든 기회를 주겠다!
‘...그냥 그걸 돈으로 주시면 안 됩니까?’
지금 말한 것만 돈으로 환산해도 어마어마한 가치가 나올 텐데...
가문의 규칙은 매우 불합리했다.
‘젠장. 좀 더 먼저 태어났으면 날로 먹고 살 수 있었을 텐데.’
이한은 가문의 셋째로 태어난 자신의 게으름을 후회했다.
가문의 모든 것을 이어 받는 것은 첫째.
그 이하는 알아서 자기 자신이 먹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덕분에 이한은 어린 나이부터 무엇을 해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지 깊게 고민해야 했다.
관료, 상인, 기사, 모험가...
그나마 다행인 건 가문에서 재산만 물려주지 않을 뿐 지원은 다 해준다는 점이었다.
가주의 자식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배우고 얻을 기회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이한이 진로로 고른 건 마법사였다.
-그럴 줄 알았다.
이한의 아버지, 가주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네 재능을 너도 느끼고 있었겠지?
-...??
‘마법사가 가장 안정적이어서 고른 건데...?’
실제로 마법사는 정말 안전한 직업이었다.
제국에서는 모두에게 존경 받고, 귀족이 가져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직업.
거기에 실력만 있으면 정말 어디든 안 불리는 곳이 없는 직업이었다.
기사단에서도 마법사가 필요했고 모험가 길드에서도 마법사를 필요로 했고 황제의 관료들도 마법사를 필요로 했고...
-에인로가드로 가라. 거기서 수많은 마법사의 씨앗과 부딪히며 성장해라. 그 경험이 널 완성시킬 것이다.
에인로가드는 제국 마법 학교 중에서도 최고의 마법 학교.
가장 전통 있고 가장 강력한 마법 학교인 만큼 그 이름이 가지는 힘은 대단했다.
에인로가드에 들어가서 무사히 졸업하기만 해도 최소한의 명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었다.
학교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우거나, 교수의 눈에 들어 추천서를 받거나, 아니면 다른 학생들과 인맥을 쌓거나...
에인로가드는 제국 최고의 마법 학교인 만큼, 제국 최고의 인맥 양성소였다.
다시는 대학원 비스무리한 곳에는 가지 않겠다고 치를 떤 이한도 얌전히 들어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냥 참고 졸업하면...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자.’
*    *    *
늙은 기사, 알라르롱이 깍듯하게 이한에게 경례를 올렸다.
“이한 워다나즈 님.”
“여기까지 날 호위하느라 고생 많았어.”
“별 일 아니었습니다.”
알라르롱은 워다나즈 가문의 기사였다.
원래라면 이한의 호위 같은 일에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됐지만, 그는 수도를 떠나 에인로가드까지 가는 이한을 직접 호위하겠다고 자청했다.
이한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내가 경한테 배웠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와줄 줄은 몰랐는데...”
“이한 님께서 제게 검술을 배워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워다나즈 가문의 이름을 무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제가 나선 겁니다.”
“그래. 이유야 뭐든.”
알라르롱은 엄격하게 말했지만 이한은 웃었다. 알라르롱의 성격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엄격하고 진지했지만 속이 깊은 알라르롱이었다. 직접 자처한 것도 이한을 걱정해서리라.
이한이 웃자 알라르롱은 겸연쩍은 듯이 헛기침을 한 번 했다.
“크흠. 솔직히 말해서, 이한 님께서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하셨을 때 기쁘긴 했습니다.”
워다나즈 가문은 마법사 가문.
굳이 검술을 배우려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한이 배운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뭐든 간에 배워 놓으면 나중에 쓸 일이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특히 검술 같은 건 호신에 꼭 필요하지 않겠는가.
두 번째는...
미친듯이 심심해서였다.
놀랍게도 워다나즈 가문에서는 마법을 조금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이다.
-열다섯 살 전에는 위험하므로 마법을 배울 수 없다!
이 세계는 15 살쯤 되면 대충 성인 취급을 해줬다.
마법은 학문 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가장 위험한 학문.
성인이 되기 전에는 다룰 수 없다는 것도 이해는 갔다.
물론 정신적으로 나이가 많은 이한 입장에서는 꽤나 억울한 일이었지만...
“보십시오. 다른 귀족 자제 분들도 가문에 부끄럽지 않게 호위들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저건... 좀 과한 거 같은데?”
이한은 제국 대로를 채운 마차 행렬들을 보고 어이없어했다.
아무리 그래도 마차 열 대와 기병 수십 명을 데리고 오는 건 좀 과했던 것이다.
귀족의 체면이라는 건 ‘누가 누가 더 사치 잘 하나’여서 그냥 나들이를 갈 때도 어마어마하게 화려하게 간다지만, 학교 입학하는 꼬마 하나 데려다 놓으려고 저렇게 할
줄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호위, 시종, 하인, 노예, 다 못 데리고 들어가지 않나?”
“예.”
에인로가드는 오래된 전통의 마법 학교.
그 전통 중 하나는 ‘평등’이었다.
황족이든 노예든 들어올 수 있지만, 들어올 때는 맨몸 하나만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
당연히 저렇게 많이 데리고 와봤자 들어갈 때는 혼자 들어가야 했다.
“아마 몇 명은 주변의 마을에서 계속 기다리겠지요.”
“...그렇게까지 한다고?”
이한은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서 환생한지 15 년이 됐지만 아직도 귀족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저 거대한 마법학교에 들어가면 한 달에 한 번이나 나올까 말까일 텐데 그걸 대비해서 주변의 마을에서 자리를 잡고 기다린다니.
“아까 물어봤습니다만 벌써 몇몇 건물들을 구매했다더군요. 근처 마을에는 대대로 그렇게 팔리는 건물들이 따로 있을 정도랍니다.”
“난 그 정도까진 됐어. 경.”
“이미 저희도 조촐한 저택 하나를 구매했습니다만...?”
“......”
이한은 속으로 욕했다.
그럴 돈이 있으면 그냥 저금해놨다가 나중에 줄 것이지...!
그렇게 쓸데없이 사치할 돈은 OK 인데 이한에게 따로 돈을 주는 건 안 된다니.
가문의 법도는 불합리했다.
“수도는 멉니다. 이한 님. 귀족이라면 만약을 대비해야 하는 법이지요.”
“그래. 든든하군.”
이한은 말 위에 탔다.
마차를 끌고 들어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한은 그냥 말을 타고 정문으로 들어가는 게 속편할 것 같았다.
‘마차들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해가 지겠군.’
“그러면 경. 다시 한 번 데려다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이한 님.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알라르롱은 진심이었다.
가문의 핏줄들 중에서 알라르롱이 가장 좋아하는 건 이한이었던 것이다.
진지함과 겸손함을 아는 이.
“가주님께서도 이한 님의 재능을 칭찬하셨습니다.”
“없는 말을 지어내서 기분 좋게 해줄 건 없는데. 어쨌든 고맙군.”
“아니, 정말인데...”
*    *    *
마법학교 에인로가드는 황궁이 있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땅에 마력이 충만한 곳을 찾다 보니 이렇게 정해졌다고 했다.
과연 그런 소문에 맞게 주변 풍경은 대자연이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학교 뒤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산맥이 자리 잡고 있었고, 옆으로는 드넓고 긴 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으니...
눈을 감자 무한한 자연의 마나가 공기와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이건 잘못됐어.”
“??”
이한은 옆의 소년이 말을 걸어오자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여기는 옷만 봐도 신분을 알 수 있었다.
비단과 금실로 화려하게 자수가 놓아진 겉옷. 굳은 살 없는 손과 얼굴.
귀족 가문 출신이 분명했다.
‘사람을 불러야 하나?’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서 벌벌 떠는 모습이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마법 관련된 문제가 있는 건가?
“왜 그래. 괜찮나?”
“나... 나는...”
“그래. 뭐가 문제지?”
“하인이 없으면... 잠을 못 잔다고...”
“......”
이한은 한 대 치려다가 말았다.
‘이 새끼가...’
방금까지 걱정한 게 미안할 정도로 하찮은 이유였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매우 진지한 문제 같았다.
“하인을 데리고 오지 말라니 말도 안 돼. 하인은 내 손과 발 같은 거잖아. 내 손과 발을 자르고 들어오라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야?”
“그렇군. 논리적이야.”
이한은 대충 듣고 대충 흘렸다.
그러나 소년은 이한이 대충 한 말에 용기를 얻은 것 같았다.
“그렇지? 가서 항의해야겠어.”
“...뭐라고 항의할 생각이지?”
“하인을 데리고 올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가문의 이름을 걸고 이건 부당한 일이야!”
“그래. 열심히 해봐.”
몇 천 년 넘게 지켜온 전통이 웬 소년 하나 때문에 깨질 것 같지 않았지만, 이한은 응원했다.
첫 번째로 자기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은 이 일에 어떻게 대응할까?
소년은 쪼르르 달려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멍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
“나는, 반성한다, 나는, 반성한다, 나는, 반성한다...”
“...!!!”
이한은 경악했다.
‘정신계 마법!’
소년이 맛이 가서 중얼거리는 걸 보니 매혹이나 지배 같은 마법에 당한 게 분명했다.
마법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이한도 들어본 마법이었으니까.
놀라운 건 귀족 가문의 자제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걸 쓰는 이 학교의 마법사들이었다.
‘...사람 하나 죽어도 뒷산에 묻는다는 게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오기 전에 들었던 소문 때문에 이한은 찜찜해지는 걸 느꼈다.
-모두들 에인로가드에 온 것을 환영한다.
커다란 목소리가 아닌, 모두의 뇌에 직접적으로 쏘아 보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쾅!
그리고 동시에 에인로가드의 정문이 열렸다.
-들어와라. 무쇠대가리들아!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은 모두 다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목소리의 폭언 때문이 아니었다.
다들 마법 재능이 있는 만큼, 에인로가드에 걸린 마법 때문에 어마어마한 마력의 압박을 느낀 것이다.
맨눈으로 태양을 보려고 하면 이런 기분이 들까?
맨손으로 거인을 이기려고 하면 이런 기분이 들까?
히히힝!
말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마차를 끌고 온 이들 중에 마차를 타고 들어가려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맨몸으로 오라고 했는데....
목소리와 함께 그 마차가 갑자기 사라졌다.
마차 안에 앉아 있던 귀족 가문의 소녀는 비명과 함께 낙하했다.
열 대가 넘는 마차들이 사라지고 소년소녀들의 비명이 들렸다.
-괜찮다. 무쇠대가리들아! 어차피 규칙을 안 지키려고 해도 이 학교가 지키게 만들어 줄 테니까.
“......”
이한처럼 눈치 빠른 몇몇 이들은 이 학교가 소문처럼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궁둥짝 움직여라! 입장! 입장!! 입장!!!!
“......”
“......”
*    *    *
이한은 원래 관찰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버릇은 이세계로 오면서 한층 더 심해졌다.
무얼 보든 새롭고 신기했으니 관찰이 재밌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는 백 명이 가볍게 넘어가는 소년소녀들이 모여 있었다.
황족, 귀족, 기사, 사제, 상인, 모험가, 거지 등 그 복색도 다양했다.
그리고 그런 소년소녀들은 벌써부터 삼삼오오 모여 그룹을 만들고 있었다.
앞으로 긴 학교생활을 보냄에 있어 인맥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맞아. 가문의 문장도 없을 텐데 용케 알아봤군.”
평등이란 전통에 걸맞게, 옷에 가문의 문장을 달고 오는 건 금지였다.
물론 그래도 알아볼 방법은 있었다.
당장 이한도 예전에 본 적 있는 황족과 귀족 몇 명을 알아봤으니까.
“나는 요네르. 요네르 메이킨이야.”
살짝 곱슬거리는, 어깨까지 오는 선명한 붉은 머리칼. 거기에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를 가진 소녀가 앞에 서있었다.
메이킨 가문.
메이킨 가문도 제국에서 꽤 유명한 마법사 가문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메이킨 가문은 좀 더 제국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 정도?
그에 비해 워다나즈 가문은 좀 따로 노는 편에 가까웠다.
당장 가문의 가주부터가 황제의 요청에도 나오지 않고 마법 연구를 위해 칩거하는 경우가 잦았으니...
“반가워. 요네르. 무슨 일이지?”
“황자 전하께서 널 보고 싶어해.”
메이킨은 뒤를 가리켰다.
여기 있는 이들 중 가장 화려하게 차려 입은 소년이 이한을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002 화
황족. 황자. 황녀.
보통 ‘황’자 들어가는 것들은 고귀하고 존엄한 힘을 갖고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제국에서는 조금 달랐다.
황족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이다.
‘지금 황제 자식이 100 명 넘어가지 않았나?’
아무리 끗발 날리는 게 황족이라고 해도 황제 직속 자식들만 세 자리 숫자면 문제가 좀 있다고 봐야 했다.
그쯤 되면 이한이 슬쩍 황궁에 들어가도 황제가 자기 자식인 줄 알 것 아닌가.
이한이 형제들보다 늦게 태어난 대가로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황제의 자식들도 똑같았다.
가장 먼저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한보다 더 가혹하다고 할 수 있었다.
워다나즈 가문은 그래도 가주가 자식들 이름은 기억하고 챙겨줬으니까.
하지만 황족들은 그런 관심 없이 자기가 알아서 자기 인생을 꾸려야 했다.
물론 썩어도 준치라고, 평민들 앞에서는 황족의 혈통도 제법 위력이 있었지만...
하필 이 근처에 있는 것들은 제국에서도 쟁쟁한 대가문 출신의 자제들.
이들은 듣도 보도 못한 황자한테 굽신거릴 필요가 없었다.
당장 요네르 메이킨만 해도 대다수 황족들보다 처지가 나을 터.
그런데 요네르가 저렇게 나서서 황자와 같이 다니는 이유는?
‘...애가 좀 멍청한가?’
이한은 요네르가 들었으면 화를 냈을 생각을 했다.
실제로 주변을 보니 요네르를 비웃는 몇몇 소년소녀들이 있었다.
귀족의 체면이 있지, 황자의 시중을 왜 드느냐는 비웃음이었다.
제국 귀족의 자존심은 황족의 자존심 못지않았다.
실제로 대귀족쯤 되면 황제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래. 알겠어.”
그러나 이한은 메이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쁠 거 없지.’
비웃음 받고 있는 건 메이킨이었지, 제안을 받은 이한은 딱히 비웃음을 사지 않았다.
그리고 황자가 끗발 없다고 해서 굳이 처음 만남부터 시비를 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세상사 누구든 친해지면 나중에 도움이 되기 마련이었다.
“...고마워! 다행이야!”
메이킨은 밝은 햇살처럼 웃었다. 그렇게까지 기뻐하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왜?”
“내 제안을 벌써 세 명이나 거절했거든.”
“......”
이한은 메이킨의 제안을 거절했어야 했나 살짝 후회했다.
*    *    *
황자, 가이난도는 97 번째 황자였다.
비슷한 시간대에 태어난 형제자매들이 여럿 있어 사실은 101 번째 아니냐는 말이 있었지만 가이난도는 97 번째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아마 세 자리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던 게 분명했다.
그걸 제외한다면 가이난도는 꽤 철이 없는 황족이었다.
15 살이면 성인 취급이었지만 모두가 똑같이 성숙하지는 않는 법.
이 학교에서 황족의 가치가 그리 크지 않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한 게 분명했다.
“들었어? 이한?? 저 자식이 내 제안을 거절했다니까?”
“그래. 그래. 들었어.”
“어떻게 감히??”
“가이난도 네가 얼마나 존귀한지 모르는 거겠지.”
“존귀가 뭐냐?”
가이난도가 의아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가이난도를 빤히 쳐다보다가 상냥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이한 안에서 가이난도 평가가 한 단계 내려갔지만, 가이난도는 눈치 채지 못했다.
“존귀는 신분이 높고 귀하다는 뜻이지.”
“아. 나한테 어울리는 말이네.”
“그렇지.”
“어쨌든 내 제안은 거절해놓고 아덴아르트와 이야기하고 있잖아! 정말 모욕적이야...!”
아덴아르트.
가이난도가 가리킨 학생, 아덴아르트도 황족이었다. 아마 43 번째였나 44 번째 황녀쯤 됐을 것이다.
‘분위기 자체가 다르군.’
길고 찰랑거리는 은발에 선명한 푸른 눈. 지적이고 단아한 얼굴.
황녀는 가만히 침묵한 채로 서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저런 품위 있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뿜어내는 황녀는 귀족 출신 학생들에게 존중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덴아르트는 아마...
‘가이난도처럼 사람 시켜서 안 불렀겠지.’
귀족 자제들이 자존심 강하다 하더라도, 황족이 직접 말을 걸어주는데 무시할 정도로 무례하진 않았다.
가이난도도 그냥 자기가 직접 가서 말 걸고 친한 척 했으면 사람 여럿 모였을 것이다.
“네가 나중에 손봐주겠어?”
가이난도는 이한을 보며 말했다.
동년배에 비해 이한은 키가 크고 몸이 다부졌다.
계속 검술을 배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사가 되기 위해 모였다지만 마법 하나 제대로 배우지 못한 소년소녀들 사이에서는 주먹이 더 센 법.
물론 이한은 가이난도의 자존심을 위해 남과 싸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가이난도.”
“응?”
“존귀한 존재는 남을 시켜서 괴롭히지 않아.”
“괴롭힌 게 아니라 응징...”
“어쨌든. 존귀한 존재는 그러지 않아. 잘 생각해봐.”
“으음.”
이한의 말에 가이난도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니 좀 품위 없어 보이긴 했던 것이다.
“그러면 이한. 네 생각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 같은데?”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거지.”
“...그거 말고는?”
“직접 결투를 신청하는 것도 방법이긴 해.”
“흥. 너그럽게 용서해줘야겠다.”
직접 결투하기는 싫었는지 가이난도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이한은 그 모습에 가이난도의 장점을 발견했다.
바로 생각보다 단순하다는 점이었다.
“와. 너 대단하다. 가이난도의 고집도 꺾고.”
요네르는 놀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이한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가이난도와 같이 움직이는 거지?”
“친척이야. 사촌.”
“그렇다고 저런 말을 일일이 들어줄 건 없지 않나? 메이킨 가문 정도면...”
더 물어보기도 전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홀에 터지듯이 울려 퍼졌다.
-잘 떠들었나, 무쇠대가리들아! 이제 그만 떠들어도 좋다. 앞으로 몇 년 동안 떠들 수 있을 테니까.
“!”
아까 정문에서 들렸던 것과 같은 목소리가 들리고, 홀 가운데에 거대한 해골이 떠올랐다.
어마어마한 마력을 흩뿌리는, 타오르는 안광을 가진 해골.
‘리치!’
위대한 마법사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언데드가 된 존재.
그게 바로 리치였다.
이한도 소문만 들었지 리치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다른 학생들도 신기한지 웅성거렸다.
-한 가지 문제를 내지. 내가 왜 너희를 무쇠대가리라고 부를까?
아덴아르트가 손을 들었다. 가이난도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노려봤다.
-말해라.
“...저희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의 상징이 강철이기 때문입니다.”
-훌륭하다. 네 기숙사에 10 점을 주마!
“그런 게 있습니까?”
-당연히 없지. 마법사가 되려면 거짓말을 간파하는 법부터 배워라.
속았다는 걸 깨달은 아덴아르트가 좋아하다가 말고 흰 얼굴을 붉혔다.
-그래. 너희 1 학년의 상징은 강철이다. 2 학년의 상징이 청동인 것처럼 말이야. 강철은 단단하고,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그 품질이 달라지며, 쓰임새도 다양한 유용한
물건이지. 실로 너희 1 학년에게 어울리는 금속이다.
“오오...”
“과연.”
자리에 모인 소년소녀들은 해골 교장의 말에 감탄했다.
-또 속는구나! 멍청한 놈들. 너희 상징이 강철인 건 너희가 대가리에 든 게 없는 놈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쇠대가리인 거고! 못 믿겠으면 두드려 봐라. 아주 좋은
소리가 날 거다.
“......”
“......”
좌중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저런 모욕을 받아본 적도 없는 신분의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아무도 따지지 못했다.
그만큼 해골 교장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대단하군.’
이한은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해골 교장이 나타난 다음부터 이 주변의 마력 밀도가 미친듯이 올라가서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마치 깊고 깊은 심해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 어떻게든 움직여지는군.’
이한이 몸을 꿈틀거리자, 해골 교장은 눈빛을 돌려 이한을 쳐다보았다.
-...?
신기한 것을 보는 눈빛.
이한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고 똑바로 섰다.
졸업장과 인맥을 갖고 나오기 위해 들어왔는데 1 학년 때부터 교장에게 찍힐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내가 먼 길을 걸어 온 제국의 미래들에게 너무 가혹한 말만 한 것 같군.
해골 교장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몇몇은 그 말에 살짝 안도했지만, 이한은 속지 않았다.
‘약간 좀 미친 놈이 분명해.’
리치가 되면 잃는 게 있다더니 해골 교장은 좀 여러 가지를 잃은 게 분명했다.
이한은 전생의 대학원 시절, 옆 연구실의 교수가 떠올랐다.
그 교수도 저 해골 교장처럼 눈빛이 광기에 가득찼던 것 같...
‘아니. 그 교수보단 저 리치가 나은 것 같기도.’
그렇게 생각하자 해골 교장도 의외로 상대할 만한 것 같았다.
-자! 너희들을 위해 이 학원에서 가장 뛰어난 요리사들이 하루 전부터 만찬을 준비했다. 부족하지만 이 만찬을 즐기고 여행으로 쌓인 피로를 풀어주길 바란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기숙사에 따뜻한 이불과 침대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 말에 살찐 소년 한둘이 침을 흘렸다.
과연 어떤 만찬일까? 제국 서부 풍으로, 잘 키운 닭에 밀가루를 두르고 기름과 버터, 양파, 소금, 후추 등을 넣고 포도주를 부어 자글자글하게 끓인 닭 요리나 베샤멜
소스를 듬뿍 부은 그라탕도 좋았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두툼한 치즈와 버터만 그냥 내줘도 흰 빵에 발라서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제국 동부 풍으로 싱싱한 생선에 고추장 양념을 발라 숯불에 구워서 내오는 것도 좋았다.
동부 음식 중에 국수는 싸구려 음식이라고 잘 안 먹었지만 오랜 여정 때문에 허기져서 그런지 지금 내오면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딱히 홀에 있는 거대한 테이블에는 아무런 음식도 나오지 않았다.
“???”
-또 또 속는구나! 이 멍청한 놈들! 대체 언제쯤 되어야 정신을 차릴까? 대체 마법사는 어떻게 되려고?
‘미친 놈 아니야 저거?’
몇몇 심약한 신입생은 해골 교장의 폭언에 울먹거렸다.
-자. 이제 규칙을 말해주겠다. 이 학원은 마법사의 요람이다. 그리고 마법사를 키우는 가장 커다란 원동력은 바로 갈망이다!
말과 함께 허공에서 허름한 망토와 허름한 지팡이와 허름한 옷 꾸러미가 나타났다.
-이게 바로 너희가 입고 지낼 교복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허공에서 검고 딱딱한 빵과 다 식은 주먹밥이 나타났다.
-이게 바로 너희가 먹고 지낼 음식이다.
“너, 너무하잖아...!”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외치자 해골 교장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바로 그 반응을 원했다! 저 음식이 너무 맛이 없어 보인다고? 마법을 빨리 익혀서 네 손으로 음식을 구해라! 저 옷과 지팡이가 너무 쓰레기 같아 보인다고?
마법을 익혀서 네 손으로 새 옷과 지팡이를 구해라! 이 학원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
이한은 경악했다.
에인로가드가 혹독하다는 소문만 들었지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한 마디로 억울하면 빨리 마법 실력 키워라가 교칙인 학교!
‘이래도 되나?’
“흥. 밖에 말해서 물건을 들여오면 그만이지.”
건방진 자세를 한 학생 한 명이 울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해골 교장은 더더욱 신이 나서 외쳤다.
-그래! 그 반응도 원했다. 1 학년은 외출 금지다! 상급생들한테 부탁해서 물건을 구할 생각은 하지도 마라! 한동안 상급생들은 만나지도 못할 테니까!
“......”
“......”
-해산! 무쇠대가리들아, 행운을 빈다! 좋은 마법사가 되려무나!
이한은 누군가가 분명 ‘개새끼’라고 중얼거리는 걸 들은 것 같았다.
해골 교장도 그것까지 뭐라고 하진 않았다.
황자, 가이난도는 해골 교장이 사라지자 발을 구르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이게 말이 돼?? 우리 같은 신분을 감히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거야? 이한! 너는 화가 나지 않니? 저 거지나 입을 법한 옷과 돼지나 먹을 음식을 갖고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어? 뭐 괜찮지 않나?”
“......”
003 화
가이난도는 순간 이한이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사람이 어떻게 딱딱한 검은 빵과 식은 주먹밥만 먹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거칠고 허름한 망토를 두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한은 딱히 농담을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워다나즈 가문... 무서운 가문 같으니...!’
가이난도는 경악했다.
제국의 귀족 가문들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각자 고유의 풍습과 가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한의 가문인 워다나즈 가문은 제국 귀족 가문들 중에서도 알려진 정보가 적은 편이었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마법 연구에만 몰두한 탓이었지만...
덕분에 가이난도는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워다나즈 가문은 가문의 핏줄들을 저렇게 키우나봐!
‘너무한 거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노예도 저렇게 대접하지는 않을 텐데... 워다나즈 가주가 그렇게 잔인한 인물일 줄이야...’
가이난도는 이한을 동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언제 한 번 저택에 찾아와. 내가 꼭 제대로 대접해 줄 테니.”
“어... 고맙다?”
가이난도가 왜 이러는지는 몰랐지만,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해골 교장의 폭풍 같은 연설이 끝나고 학생들이 흩어져서 나가는 동안 요네르와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이한은 아까 궁금했던 걸 물었다.
“왜 가이난도와 함께하는 거지? 아무리 사촌이라도 메이킨 가문 정도면 일개 황족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텐데.”
“아. 가이난도의 어머니 때문에.”
요네르는 선선히 말했다.
그 모습에 이한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가이난도의 어머니한테 신세를 진 적이 있는 건가?”
이한은 순간 상상을 했다.
지금보다 훨씬 어린 요네르가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했는데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다들 요네르를 경멸하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요네르는 겁먹어서 울먹이는데, 황비 중 한 명인 가이난도의 어머니가 나타나서 이렇게 따뜻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괜찮아요. 실수할 수도 있죠.
그런 경험이라면 감동 받을 법도 했다.
가이난도가 별 볼일 없는 황족이라지만 그에게 황족 대접을 제대로 해줄 수도...
“응? 아니. 가이난도의 어머니가 어마어마한 부자시거든. 가이난도와 친하게 지내면 돈을 많이 주셨어.”
“...!!”
이한은 경악했다.
그런 비밀이 있었단 말인가?
‘나도 친하게 지내야겠군!’
*    *    *
마법학교 에인로가드에는 황족부터 노예까지, 재능만 있으면 어떤 이들이든 받아들였다.
물론 마법사들도 한창 성질 예민하고 날카로운 소년소녀들을 그냥 한곳에 모아놓으면 사고가 나기 쉽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인로가드의 기숙사는 출신에 따라 4 곳으로 나뉘었다.
오만한 푸른 용의 탑.
황족과 명성 높은 귀족 가문 출신들이 여기에 들어갔다.
이한도 워다나즈 가문인 만큼 자동적으로 여기에 속했다.
“윽. 사제들이잖아. 괜히 설교나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
“쉿. 괜히 시비 걸지 마.”
옆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원히 타오르는 불사조의 탑’ 소속인 신입생들을 보고 불평하는 소리였다.
영원히 타오르는 불사조의 탑.
제국의 여러 교단들에서 온 사제들은 여기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제국의 사제들은 마법을 쓰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들은 마력을 신이 내려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여러 교단에서 제국의 가장 뛰어난 마법 학교인 에인로가드에 사제들을 보내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눈에 띄긴 하는군.’
황족이나 귀족들은 아직 교복으로 갈아입지 않아서 옷차림이 제각각이었지만, 사제들은 전부 다 검소한 사제복 차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문에 찾아온 사제들한테 설교 좀 들으면서 자라 온 귀족 소년소녀들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철커덕, 철커덕-
그러나 그 뒤에 들어오는 이들을 보자 소년소녀들의 인상은 더더욱 찌푸려졌다.
벼락을 물어뜯는 흰 호랑이의 탑.
제국의 기사 가문 출신 소년소녀들은 이 탑에 들어갔다.
기사 가문이 마법학교에 오는 게 얼핏 보면 신기하게 들렸지만, 기사들 중에서도 마법은 필요했다.
당장 텔레파시부터 시작해서 치료까지 마법이 안 쓰이는 곳은 없는 것이다.
이들은 기사로서, 마법사로서 두 개의 길을 같이 걸을 각오를 한 이들이었다.
가이난도는 그게 영 못마땅했는지 투덜거렸다.
“영광스럽고 순수한 마법의 길을 저런 식으로 모욕하는 놈들을 굳이 여기서 받아줘야 해? 그냥 길거리 마법사를 가정교사로 들여도 충분할 텐데.”
옆에서 듣고 있던 이한은 살짝 찔렸다.
다른 이들이야 마법으로 순수한 진리를 탐구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몰라도, 이한은 그냥 마법으로 출세하려고 들어왔던 것이다.
“기왕 배울 거면 최고에서 배우고 싶었겠지.”
“뭐야... 왜 쟤네 편을 들어?”
“가이난도.”
이한은 가이난도에게 한층 더 너그러워진 상태였다.
가이난도의 어머니가 돈이 많다는 걸 들었기 때문이었다.
“존귀한 존재는 자기보다 아랫사람을 경멸하지 않아.”
“...그거 너무 조건이 까다로운 거 같은데...”
그래도 존귀하고는 싶었는지 가이난도는 입을 다물었다.
기사 가문의 소년소녀들이 지나가고 자, 마지막 기숙사 학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다양하고 독특한 복장들을 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과거와 미래를 보는 검은 거북이의 탑.
이 기숙사는 가장 구성이 다양했다.
평민, 하인, 노예, 광대, 거지, 상인, 신흥 하급 귀족 등 다양한 이들이 전부 모여 있는 것이다.
가장 신분이 낮다는 걸 이들도 알고 있었는지 주눅 든 표정이 느껴졌다.
‘기회가 되면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경멸의 시선을 던지는 다른 이들과 달리, 이한은 기회만 되면 친분을 쌓고 싶었다.
돈벌이에 가장 좋은 게 무엇인가.
역시 사업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업을 같이 하기 좋은 건 옆에 있는 가이난도 같은 사람이 아닌, 저렇게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 아니겠는가.
“이쪽을 쳐다보는데?”
“눈 마주치지 마. 마주쳐서 좋을 거 없어.”
“재수 없는 자식들...”
푸른 용의 탑 소속 학생들이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걸 이들이 모를 리 없었다.
여기서 다퉈서 좋을 게 없었으니 그들은 시선을 피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저런 천박한 자들까지 받아줘야 하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소곤거리던 목소리 중 유독 하나가 선명하게 들렸다.
검은 거북이의 탑 학생들도 들었는지 인상이 험악해졌다.
‘오.’
이한은 순간 이게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저쪽 탑 학생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
‘지금 나서야겠군.’
*    *    *
검은 거북이의 탑 학생들은 위축되지 않으려고 해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제법 기가 드센 학생들도 이 낯선 분위기와 수군거림에는 쉽게 나서지 못했다.
그 때 나선 건 푸른 용의 탑 출신의 소년, 이한이었다.
선이 굵은, 위엄 있는 조각 같은 외모를 갖고 있는 소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박한 건 그쪽이겠지. 에인로가드에 들어오기 전에 스스로가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지 않았나? 그런 것도 잊어버리고 하찮은 자존심이나 내세우다니.”
소년에게서는 위압감과 함께 강렬한 존재감이 풍겨 나왔다.
타고난 혈통을 갖고서,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진 대귀족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고귀한 모습.
그 모습에 다른 푸른 용의 탑 학생들도 공감한 모양이었다.
“맞는 말이야.”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지? 역시 워다나즈 가문 출신다워.”
아까 조롱한 사람은 부끄러웠는지 나서지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검은 거북이의 탑 학생들도 반응을 보였다.
“워다나즈 가문??”
“그 마법가문...?!”
“눈 마주치지 마, 멍청아! 위험한 가문이라고!”
“가주가 드래곤인 가문이잖아? 드래곤의 핏줄인가?”
“드래곤이 아니라 고대 정령의 핏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
*    *    *
처음에 이한은 잘 되었다 싶었다.
학생들 모두 이한의 말에 설득된 것이다.
‘괜찮은데?’
이제 검은 거북이의 탑 학생들이 이한에게 감사 인사만 하면...
“워다나즈 가문??”
“그 마법가문...?!”
“눈 마주치지 마, 멍청아! 위험한 가문이라고!”
“가주가 드래곤인 가문이잖아? 드래곤의 핏줄인가?”
“드래곤이 아니라 고대 정령의 핏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
그러나 이한의 예상과는 좀 다른 반응이 나왔다.
친분을 쌓기보다는 두려움에 찬 시선을 던지는 학생들!
학생들의 반응에 이한은 뭔가 일이 잘못 굴러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고맙다고 인사가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옆에서 요네르가 감탄하며 말했다.
“방금 보여준 모습, 정말 훌륭했어. 맞아. 에인로가드에 들어온 귀족이라면 무릇 그래야지.”
“...요네르. 내가 무섭게 생겼나?”
“응? 아니? 귀족답게, 위엄 있는데?”
요네르는 이한이 왜 고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한의 외모는 말 그대로 ‘귀족답게’ 잘 생긴 편이었다.
선이 굵고, 각진 턱에, 꾹 다문 입술. 거기에 날카로운 눈빛까지.
평민들이 접근 못할 정도로 위엄 넘치는 모습은 귀족들 사이에서 장점으로 뽑혔다.
실제로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다들 좋게 봐주고 있었다.
그 반응에 이한은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야 어울리는 건 무리겠군.’
*    *    *
각 기숙사들은 본관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향을 따라 각자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한과 다른 학생들은 길을 따라 저 멀리 보이는 푸른 탑으로 향했다.
‘정말 넓군.’
안에서 보니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말이 학교였지 호수와 숲, 강과 산이 안에 있는 학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걸 보자 갑자기 해골 교장이 한 말이 떠올랐다.
‘알아서 구하라고 했지?’
이 학교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해골 교장은 그렇게 말했었다.
확실히 이런 모습을 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에 가서 짐승을 잡거나 아니면 호수에 가서 낚시를 하거나...
“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보구나.”
“응?”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건 위대한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아니. 숲에 잡을 수 있는 짐승 뭐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워다나즈 가문에서 혹시 그런 훈련도 시켜??”
*    *    *
오만한 푸른 용의 탑은 푸른색 돌로 길쭉하게 솟아 있는 탑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그렇게 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이 확장해 놓은, 무한에 가까운 넓은 공간이 있었다.
“!”
탑의 문을 통과하자 방금까지 같이 있던 여러 명의 학생들이 전부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자 이한은 혼자 어두컴컴한 공간에 남아 있었다.
[어디로 가겠는가?]
“??”
[어디로 가겠는가?]
‘아.’
이한은 지금 자신한테 말을 거는 게 탑 그 자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어디로... 갈 수 있습니까?”
[너는 적응이 빠르구나.]
탑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한은 탑이 빙그레 미소지은 것 같았다.
[지금 네가 갈 수 있는 곳은 네 개인 방과, 일학년 전용 강철 휴게실이다.]
“다른 곳도 갈 수 있습니까?”
[그래. 어떤 곳은 이름만 알면 갈 수 있고, 어떤 곳은 다른 것들을 알아야 갈 수 있지만.]
푸른용의탑기숙사
불사조탑기숙사
호랑이탑기숙사
거북이탑기숙사
“이학년들의 휴게실이나 공용 휴게실에 갈 수 있습니까?”
[그래.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어째서입니까?”
[교장께서 금지했으니까.]
“......”
이한은 교장의 철저함을 욕했다. 이런 부분에서는 철저한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개인 방에 보내주십시오.”
[그래. 입학을 환영한다. 어린 마법사야.]
004 화
각자에게 주어지는 개인 방은 의외로 넓고 쾌적했다.
해골 교장이 다른 건 하나도 주지 않아도 개인 방까지 뺏어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이건 이한 기준의 생각이었고, 지금쯤 다른 귀족들은 아무것도 없는 살풍경한 방의 모습을 보고 경악하고 있었다.
-거... 거지들이 사는 곳인가?
-혹시 누가 방 안을 도둑질한 거 아닌가요?
털썩-
책상, 의자, 침대를 빼면 아무것도 없어서 그런지 더 넓게 느껴지는 방.
이한은 일단 받은 옷을 정리하고 짐을 간단하게 구석에 놓은 다음 책을 꺼냈다.
<에인로가드에 대하여>.
들어오기 전에 각자 받는, 학교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적혀 있는 얇은 책이었다.
‘필수 과목은 무조건 들어야 하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선택. 처음 한 달에는 돌아다니면서 어떤 강의가 좋을지 들어보고 결정할 수 있다...’
이 학교는 엄격한 듯하면서도 이런 부분에서는 자유로웠다.
일단 들어온 이상 학생이 무슨 공부를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마법사란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는 자. 선배와 스승이 도와준다 하더라도 자신의 길은 자신이 정해서 나아가야 한다. 오수 고나달테스.
‘교장 이름이 오수 고나달테스였군.’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얻은 이한은 대충 일을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신입생 휴게실은 갈 수 있다고 하니, 가서 이야기를 좀 나눠 볼 생각이었다.
*    *    *
“나는 연금술을 배워보고 싶어.”
요네르는 먼저 내려와 있었다. 이한이 도착한 걸 발견한 요네르는 반갑게 손을 흔들어줬다.
“연금술?”
“응. 가문에 있었을 때부터 연금술에 관심이 많았거든. 내 공방을 차려서 황실에 납품하는 게 꿈이야.”
“돈 좀 되겠는데.”
“같이 하겠어?”
“으음. 생각 좀 해보고. 연금술 사업이란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잖아.”
이한은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네르가 가문에 있었을 때부터 연금술에 관심이 많았던 것처럼, 이한은 가문에 있었을 때부터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연금술이라고 하면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제국의 연금술 사업도 경쟁이 치열했다.
뛰어난 연금술사들이 만든 길드들이 서로 시장 점유율을 뺏기 위해 살벌하게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모험가 길드에 포션 공짜로 뿌리기, 상대 연금술 길드가 만든 포션 나쁜 소문 퍼뜨리기, 포션 원료로 쓰는 약초 전부 독점해서 견제하기 등등.
소문 하나하나가 흉흉한 만큼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역시 안정적인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이한의 1 차 목표는 황실 관리, 즉 공무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무원 해서 나쁠 건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넌 어디에 관심이 있는데?”
“나?”
이한은 질문을 받자 살짝 당황했다.
왜냐하면...
‘경쟁 적고 학점 받기 좋은 과목 들을 생각이었는데.’
학문이고 뭐고, 여기서 받은 성적도 외부에 나갔을 때는 스펙이 됐다.
당연히 이한이 신경 안 쓸 리 없었다.
“한 달 동안 시간이 있으니 둘러보면서 결정할 생각이었지. 뭐든지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와... 대단한걸.”
“??”
이한은 뭐가 대단한지 이해하지 못해서 요네르를 쳐다보았다.
대단할 게 있나?
“보통 자기가 익히려는 마법은 생각해서 오거든. 자기 취향에 맞는 걸로. 하지만 그게 꼭 좋은 방법인 건 아니니까...”
자기가 어떤 마법에 적성이 맞는지는 직접 해보기 전에는 알기 힘들었다.
그리고 적성에 맞지 않는 마법을 억지로 배우는 건 생각보다 효율이 좋지 않은 일.
진리를 추구하는 마법사라면 고집을 꺾고 더 좋은 길을 선택할 줄 알아야 했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욕심이 있고, 욕심이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 싶은 법.
그런 욕심을 버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역시 워다나즈 가문의 규칙이야?”
‘무슨 말만 하면 다 워다나즈 가문이 나와?’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가문 안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밖으로 나오니 가문의 이름이 가진 힘을 더 실감하게 되었다.
당장 아까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보낸 눈빛도 그렇고...
혹시 워다나즈 가문의 이미지가 이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강한 걸지도 몰랐다.
“큰일났어!”
“??”
뒤늦게 도착한 가이난도가 허겁지겁 외쳤다.
“무슨 일이지?”
“내 방에 도둑이 들었나봐! 아무것도 없어!”
“......”
*    *    *
기초 마법의 이해.
에인로가드에 들어온 일학년이라면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이었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만 듣는 과목인지 다른 탑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표정이 이상한데?”
“배가 고프고, 제대로 잠을 못 자서 졸립고, 옷이 거칠어서 움직일 때 신경이 쓰여.”
요네르의 말에 가이난도가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일찍 일어났을 때, 가이난도는 어제 일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갓 만든 버터를 바른 따끈따끈한 흰 빵과 닭고기와 향신료를 넣어 끓인 후끈한 수프가 당연히 제공되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고, 침대에서 일어난 가이난도를 맞이한 건 딱딱한 검은 빵과 딱딱한 주먹밥, 그리고 찬 물 한 컵이었다.
‘난 먹을 만했는데...’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워다나즈 가문에 태어나고 나서는 호의호식하긴 했지만, 원래 이한은 매우 힘들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어... 내가 잘못 봤나? 선배님. 오전 9 시부터 오후 9 시까지 일을 하면 식사는 언제 하죠?
-자. 여기. 에너지 바. 아침점심저녁이니까 아껴 먹어라.
-...개소리죠?
-나한테 그러지 마. 나도 에너지 바로 때워야 하니까. 그래도 끝나면 진수성찬이 기다리고 있어.
-컵라면이라고 하면 죽여 버릴 겁니다.
-...미안. 컵라면이야.
-......
-그래도 삼각김밥도 있...
‘음. 지금이 좀 더 나은 것 같은데.’
하지만 이한 빼고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모두 다 진이 빠진 표정이었다.
학교에 들어온 하루만에 이렇게 된 것이다.
끼익-
<기초 마법의 이해> 강의실은 에인로가드 본관 1 층에 위치해 있었다.
신입생들을 배려하는 학교의 친절이었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신입생들은 길을 잃을 확률이 높아질 테니까.
“...어...?”
“잘, 잘못 들어왔나?”
“제대로 들어왔어요. 자. 다들 앉아요.”
문 앞에 학생들이 멈춰서 수군대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왜 저러지?
그 답은 곧바로 나왔다.
강의실 안에 트롤이 있었던 것이다.
“......”
“......”
“빨리 들어오라니까요!”
“어... 음...”
학생들은 공포와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주저하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트롤.
평생 가문 안에서 살아온 학생들도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사납고 포악한 몬스터였다.
그런 트롤이 마치 교수처럼 차려입고 기다리고 있었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게 강의실인지 트롤의 뷔페인지 헷갈리는 것이다.
“자. 내 소개부터 해야겠네요. 난 가르시아 킴이에요. 트롤 혼혈이고요. 모두 겁을 먹은 건 알겠지만, 겁을 먹을 필요는 없어요. 나는 아주 배가 고프지 않는 한 사람을
먹지 않거든요.”
“......”
“농담이었는데 괜히 했나보군요.”
분위기가 더 썰렁해지자 가르시아는 매우 미안해했다.
“자! 우리의 교장께서 매번 하는 말이 있어요. 시간은 가장 큰 보물이라고요. 강의를 시작해볼까요?”
가르시아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어중간하게 서있던 학생들이 밀려나듯 제 자리로 가서 앉았다.
“여러분들은 강철의 칭호를 받고 들어온 마법사의 씨앗이지요. 이 중에서 오만하거나 멍청한 몇 명은 몰래 마법을 써봤을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마법을 써보지
않았을 거예요. 이 강의는, 여러분들에게 마법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여러분들에게 잘 맞는 마법을 찾아주는 강의랍니다. 마법의 길은 험난하고 좁은 길이고 그 길은
혼자서 걸어가야 하지만, 나는 그 길을 걷기 전의 나침반이 되어주고 싶어요.”
온화한 트롤 교수의 말에 안에 있던 학생들의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해골 교장보다 몇 배는 나은 사람 같은데?’
“자. 그러면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해야겠군요. 마법이란 뭘까요?”
황녀 아덴아르트가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법사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맞아요. 마법사의 의지로 세상을 뒤트는 일. 문제는 ‘어떻게’냐죠. 어떻게 세상을 바꿀까요?”
“마나의 힘으로요?”
“아주 좋아요. 마력, 마나... 이 근원적인 힘을 빌려 세상을 바꾸는 것이죠.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마력을 느낄 줄 알고, 자신 안에 있는 마력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일 거예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자질 있는 사람만 받는 곳이다 보니 다들 마력에 대한 각성은 한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죠. 마법을 쓰려면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해요. 자신의 의지로 마력을 불러내서, 그 마력을 섬세하게 엮고, 결과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죠.
흔히들 마법에는 주문이나 동작, 시약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의지에요. 마법사 자신의 의지. 그걸 잊으면 안 된답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주문과 동작이
필요할 거예요. 아직 많이 미숙한 만큼. 자.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졸립죠? 한 번 직접 해보면서 하겠습니다. 각자 지팡이를 꺼내고, 마력을 모아보세요.”
우우우웅-
넓은 강의실 안에 마력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린 마법사들이 제각각 자신 안의 마력을 짜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한 또한 집중하고 마력을 지팡이에 모으기 시작했다. 몸 안에 있던 마력들이 흘러나오며 지팡이에 고였다.
“이제 그 마력을 유지한 채로... 집중력을 잃으면 안 됩니다! 그 상태에서 빛의 이미지를 떠올려보세요. 자기가 생각하는 빛의 이미지. 밝고, 따뜻하고, 번쩍이는. 뭐든
좋아요.”
이번에는 끙끙 앓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마력을 컨트롤하는 건 사납게 날뛰는 말의 고삐를 붙잡고 당기는 일에 가까웠다.
조금만 집중을 놓으면 그냥 훅 하고 흩어지는 것이다.
“점점 더 강하게 떠올린 채... 외치는 겁니다. 뭐든 좋아요. 빛이여! 빛! 밝음! 밝은 빛! 자기 안에서 떠오르는 주문이면 뭐든 좋아요.”
“빛이여!”
“밝은 빛이여!”
“태양보다 눈부시고 내 영광처럼 아름다운 빛이여!”
“너무 긴 주문을 하지 마세요! 여러분 수준에 너무 긴 주문을 외우면 오히려 집중력이 흩어질 거예요.”
집중해서 마력을 모으고, 그 마력을 자신의 의지로 바꾸고, 마지막으로는 주문까지 외쳐서 확실하게 끝맺음한다.
이한은 마법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그런다고 한 번에 되지는 않았지만.
펑! 퍼엉! 펑펑!
“윽!” “크흑!” “아오...!”
곳곳에서 마법에 실패한 어린 마법사들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트롤 교수는 웃으면서 지팡이를 휘둘렀다.
마법 시전에 실패하면 모았던 마력이 주인을 잃고 날뛰면서 마법사를 다치게 할 수 있었다.
그걸 막아주는 게 교수의 역할이었다.
“자. 실패했다고 겁먹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처음에는 다 그런 법이에요. 몸 안에 마력이 남아 있는 한 다시!”
2 차 시도.
다시 펑펑거리는 소리와 함께 학생들이 신음소리를 냈다.
트롤 교수는 속으로 웃었다.
원래 이 가장 간단한 ‘발광’이라는 마법을 익히는 데에만 해도 보통 한 달은 넘게 걸렸다.
마법이란 건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교수는 그걸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건 학생들이 직접 몸으로 겪어야 할 일이었으니.
“자! 다시!”
3 차 시도.
이제 슬슬 학생들 중 마력을 다 써서 기진맥진한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이란 게 생각보다 마력을 엄청나게 소모했던 것이다.
절반 넘는 학생들이 지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다시!”
4 차 시도.
이번에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주저앉았다. 운이 좋거나, 컨트롤이 좋은 두셋만 서있었다.
“다시!”
5 차 시도.
“다시!”
6 차 시도.
“다시!”
7 차 시도.
“어... 교수님. 말씀을 끊어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계속 해야 합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외치고 있던 트롤 교수는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보통 4 차, 아무리 많아도 5 차에서 끝나야 했는데 7 차까지 한 명이 서있었던 것이다.
005 화
마력.
마나, 마력, 동부의 어떤 부족에서는 ‘기(氣)’, 폼 잡기 좋아하는 학자는 에테르, 고집 센 사제들은 신성력이라고 부르는 별명 많은 이 힘은 마법사들의 근원이었다.
세계를 바꾸기 위한 힘!
마법을 쓸 때마다 자기 안의 마력을 끌어내서 소모해야 하는 만큼, 요령 없고 실력 없는 어린 마법사들이 마력 부족에 시달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7 차까지 시도했는데 멀쩡하게 서있다니.
“학생 이름이?”
“이한입니다.”
트롤 교수, 가르시아는 작게 웃었다.
가문의 이름 대신 자신의 이름을 말한 모습에 호감이 갔던 것이다.
귀족. 그것도 대귀족 출신 중에 가문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이는 드물었다.
학교의 이념 중 하나인 ‘평등’과 잘 어울리는 사람인 것이다.
“이리 와보세요.”
“어...”
이한은 불안해하며 다가섰다.
‘그냥 비틀거렸어야 했나?’
남들 다 마력 써서 비틀거리는데, 혼자 멀쩡히 서있는 만큼 좀 의아한 건 사실이었다.
자기가 마법을 제대로 쓰지 않았나 싶었던 것이다.
“흠. 흠. 그렇군요.”
가르시아가 이한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끄덕거리자, 뒤에 있던 가이난도가 요네르에게 속삭였다.
“야. 구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저러다 삼키면 어떡해??”
“...교수님 귀에 다 들릴 테니까 좀 조용히 해 멍청아.”
“!?”
가르시아는 손목을 놓고 말했다.
“끝나고 이한 학생은 잠시 남으세요.”
“아. 예.”
*    *    *
그 뒤로 <기초 마법의 이해>는 별다른 마법 훈련을 하지 않았다.
대신 가르시아 교수는 마법사로서의 마음가짐을 엄하게 설교했다.
“마력을 다 썼을 때는 무조건적으로 쉬어야 해요. 아직 실력이 부족할 때는 더더욱! 마력이 부족하다고 초조해하지 마세요. 훈련을 하면 마력의 양도 늘어날 것이고,
요령이 생기면 마력의 소모도 줄어들 테니까요. 언제나 신입생들 중에는 의욕이 넘쳐서 몰래 마법 연습을 하다가 쓰러져서 오는 경우가 있어요. 운이 나쁘면 크게 다칠
수 있으니 절대 그러면 안 된답니다. 그리고 학생. 난 학생을 삼키지 않아요.”
“죄... 죄송합니다.”
가이난도는 벌벌 떨며 사과했다.
“자.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필수 강의 말고 다른 선택 강의들이 학교 이곳저곳에서 진행되고 있으니, 가서 한 번씩 들어보고 무엇을 배울지 고민해보세요. 잘
모르겠으면 내 방으로 찾아와서 물어봐도 된답니다.”
“......”
“......”
학생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너 트롤 혼혈 교수의 사무실로 가서 1:1 로 상담할 수 있냐?
-미쳤냐?
...같은 시선 교환이었다.
“워다나즈. 조심해.”
“맞아. 트롤의 약점은 불과 산성이야.”
“여긴 둘 다 없잖아?”
“...워다나즈. 조심해.”
다른 학생들의 응원을 들으며,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 앞에 섰다.
“사실 이한 학생에 대해 먼저 듣기는 했어요.”
“??”
의외의 말에 이한은 멈칫했다.
뭐지?
“교장 선생님에게 들었다고 하면 이야기가 빠를까요?”
“...!”
미친 리치 교장한테 들었다고 하자 이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르시아 교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요. 교장 선생님이 좀 정신 나간 개새끼처럼 보일 때가 있긴 하지만 근본은 선한 사람이거든요.”
“...예??”
그게 말이 되나?
그러나 가르시아 교수는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매년 초마다 신입생들을 훑어보시고 간단하게 교수들한테 말을 전해주시죠.”
학생들은 몰랐지만, 리치 교장은 매우 날카로운 안목을 갖고 있었다.
이 학교에 들어오는 신입생들은 제국에서 갓 성인이 된 가지각색의 소년소녀들.
사고가 터지는 것을 막으려면 예리한 안목이 필요한 것이다.
-저 드워프 놈은 조심해라. 보아하니 기숙사 방을 세 번은 태워 먹을 놈이다.
-하! 저건 악마 혼혈이군. 신성 마법을 쓰는 교수들은 주의해라. 괜히 다치는 일이 없도록.
-저건 <흰 까마귀> 길드 소속 소매치기잖아?? 교수들, 조심하도록. 설마 학생한테 소매치기 당해서 하소연하러 오는 사람은 없겠지? 그런 작자는 지하감옥에 처넣을
테니까.
물론 교장의 말을 무시하는 교수들도 여럿 있었다.
리치 교장은 날카로운 안목을 갖고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미치광이 같은 성격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저 오크 녀석... 왠지 창을 잘 쓸 거 같군.
-대대로 검술 명가 출신입니다만?
-닥치도록! 창을 쓰라고 전해라.
-......
그런 교장은 이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 놈은 대우(大愚)의 자질이 있군.
-...??
대우(大愚).
매우 어리석다라는 뜻이었다.
물론 교수들이 저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제국 동부의 격언 중에 유명한 격언이 있었던 것이다.
-대우(大愚)는 곧 대지(大智)다.
매우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은, 매우 지혜로운 모습과 통하는 구석이 있다.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진정한 지혜를 찾아야 한다는 오래된 격언이었다.
그렇다면 교장의 말은 이런 뜻이 됐다.
-지금 봐서는 알기 힘들지만 나중에 대성할 자질이 엿보이는군.
자리에 있던 교수들의 반응은 반으로 나뉘었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무언가 재능이 있나보다’거나 ‘혹시 어제 워다나즈 가문 사람한테 술 한 잔 거하게 얻어 먹으셨나’로.
그리고 가르시아 교수는 교장의 말뜻이 뭐였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런 뜻이었군.’
“어... 교장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한은 살짝 불길해졌다.
교수에게 총애를 받는 건 장점과 단점이 있었다.
총애를 받으면 좋은 성적과 추천서를 받을 수 있었다.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인 것이다.
하지만...
일정 이상의 총애를 받으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녀석. 네 재능은 이렇게 썩히기 아깝구나.
-감사합니다!
-그래. 넌 대학원에 와야 해!
-예? 생각해본 적 없는...
-지금 밖에 나가서 취직해봤자 경쟁률이 얼마나 심한지 아니? 대학원에 가서 학위도 따고 하면 더 좋은 조건에 취직도 되고, 무엇보다 네가 좋아하는 학문을 더 깊게 팔
수 있단다. 얼마나 좋니?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성격 좋은 교수를 만나면 차라리 나았다.
만약 사악한 미치광이 교수를 만나면 지옥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리치 교장은...
‘절대 친해지고 싶지 않은 인물이지.’
이한은 안정적으로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인맥을 쌓아 졸업하고 싶었지 해골 교장과 친해져서 수상쩍은 마법의 길을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 미안해요. 교장 선생님께서 한 말씀을 그대로 이야기해줄 수는 없고... 대신, 학생의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게요. 교장 선생님이 전한 말도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에요.”
“!”
이한은 트롤 교수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이한의 재능이라니.
‘내 재능이... 이렇게 따로 말할 정도였나?’
워다나즈 가문에 있을 때 이한은 딱히 재능에 관한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물론 마법 능력이 있다는 확인을 받았다.
이한의 아버지, 워다나즈 가문의 가주도 이렇게 말했으니까.
-제 재능은 어떻습니까?
-음. 네 마법 재능은 꽤 괜찮은 편이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게 다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재능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다니까 좀 당황스러웠다.
‘나쁜 이야기 아니야 이거?’
이한은 진지하게 요네르와 같이 투자 받아서 연금술 공방 차려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한 학생의 마력량은 매우 많아요.”
“...예? 그게 다입니까?”
이한은 황당해했다.
‘마법을 시전하는데 문제가 있다’ ‘빛 속성 마법이 체질적으로 안 맞아서 빛 속성 마법은 앞으로 못 쓴다’ 같은 것들이 아니라 그냥 마력량이 많다니.
일단 나쁜 게 아니라서 다행이긴 한데...
이렇게 따로 말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사람마다 타고난 마력량은 다르고, 훈련과 요령으로 극복 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따로 말할 정도로 중요한가?’
“물론 그게 다가 아니죠.”
“아... 역시 그렇군요.”
“이한 학생의 마력량은 진짜 엄청나게 매우 많아요.”
“...???”
“정말, 진짜, 미친듯이, 엄청나게, 매우 많은 정도?”
“오.”
그제야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가 이렇게 따로 불러서 진지하게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    *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난 뒤 이한은 생각했다.
‘좋은 거 아닌가?’
마법을 쓰려면 마력이 필요했다.
마력이 부족하면 밖에 퍼져 있는 마력을 끌어오거나, 마법진으로 마력을 따로 모으거나, 마력이 담긴 마석을 쓰거나 하는 식으로 대체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력이 많으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법사로서는 매우 유용한 재능...
“안타깝게 됐어요.”
“???”
그러나 가르시아 교수는 이한을 안쓰러움과 걱정 섞인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이한은 뭔가 잘못 굴러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력량이 많으면 좋은 거 아닙니까?”
“보통 많으면 좋죠. 그런데 이한 학생은 진짜 엄청나게 매우 많다니까요. 유리병 안에 담긴 물은 이렇게 다루기 쉽지만, 거대한 바다의 물을 통제하는 건 매우 힘들지
않겠어요?”
가르시아 교수의 말에 이한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마법 난이도가 미친듯이 올라간다고?’
당장 오늘 ‘발광’이라는 아주 간단한 마법을 배우는 데만 해도 성공한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마법은 어려운 학문이었다.
마력을 끌어내고, 집중하고, 의지로 묶고...
이 모든 게 초인적인 집중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력량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아지면 안 그래도 높은 난이도가 더 올라갔다.
“자. 여기 이 팔찌를 받으세요.”
투박하고 묵직한 쇠 팔찌.
가르시아 교수는 이한의 양 손목에 팔찌를 하나씩 채워줬다.
“마력을 흡수하는 팔찌에요. 도움이 될 겁니다.”
“!”
그래도 마법학교라고 바로 해결책을 주는 모습에 이한은 감동을 받았다.
“이것만 차고 있으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겠군요!”
“네? 아뇨. 이거 차고 있어도 더럽게 힘들 걸요?”
“......”
“너무 어마어마한 마력이라 뭘 해도 어쩔 수가 없어요. 안 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하는 거지.”
가르시아 교수는 비교적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었지만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이런 부분에서는 절대 돌려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혹시 다른 조언이라도?”
“음... 엄청나게 마법을 많이 써서 마력을 소모시키면 그나마 좀 나을 것 같긴 하군요. 이한 학생은 기초적인 마법 훈련은 혼자서 연습해도 돼요. 절대 마력 고갈로 사고
나지 않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면 특혜를 허락 받은 거였지만, 이한은 별로 기쁘지 않았다.
*    *    *
‘아. 이거 마법 안 쓰는 과목들을 들어야 하나?’
마법학교라고 했지만 꼭 마법을 쓰는 과목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당장 연금술만 해도 마법을 쓰는 일이 적은 것이다.
교수의 방을 나온 이한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1 학년 때부터 진로 잘 잡고 학점 관리를 잘 해둬야 나중에 졸업할 때 후회를 안 하는데...’
“살아나왔구나!”
계단 아래에서는 가이난도와 요네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난도는 진심으로 걱정했는지 이한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뭘 보는 거냐?”
“교수가 물어뜯은 흔적이 없나 보고 있는 거야.”
요네르의 말에 이한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가이난도를 쳐다보았다.
‘하긴 해골 교장 보면 교수를 의심 안 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무슨 말 들었어?”
요네르가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 질문에 이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법 연습 많이 하라던데.”
“감히...!”
가이난도는 자기 일처럼 화를 냈다.
감히 대가문의 자제한테 마법 연습을 많이 하라고 하다니.
이 얼마나 무례한 소리란 말인가!
‘저 말 듣고 화낼 정도면 나중에 시험 못 봐서 재시험 보게 하면 교수한테 결투 신청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 이 자식?’
“내 일은 됐고. 다음 필수 과목 전까지 선택 과목들 들어보고 싶은데. 생각해 놓은 과목들 있어?”
“난 당연히 연금술이지.”
요네르의 말에 가이난도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에이. 연금술은 하인이나 노예들이 하는 거지!”
“......”
이한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요네르의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것을!
006 화
가문의 노기사, 알라르롱에게 꾸준히 검술을 가르침 받고 본인도 격투에 조예가 있던 이한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요네르의 자세는 사람을 패기 직전의 자세였다!
“잠깐. 잠깐.”
이한은 둘 사이에 끼어들어서 말렸다.
“연금술을 무시하지 말라고. 가이난도.”
“하지만 연금술은 하찮은데.”
가이난도는 분위기 파악을 조금도 하지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거기 어디에 지혜가 있어?”
마법은 끝없이 무한한 학문이었다. 그 안에서도 학파가 수십 개로 나뉘었다.
환상 마법, 소환 마법, 변환 마법, 원소 마법 등등.
그리고 같은 원소 마법이라도 불, 물, 빛, 어둠 등등.
한 분야를 골라서 그것만 평생 파고들어도 부족할 정도로 마법의 세계는 심오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법의 세계에서, 연금술은 좀 무시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멋모르는 신참 마법사들 눈에 연금술은 좀...
많이 수수한 것이다.
남들은 지팡이 휘두르면서 빛의 천사를 불러내고 땅을 찢어발기는데 연구실에 틀어박혀 약초 넣고 약물 조합하고 있었으니...
“그건...”
“잠깐만. 워다나즈. 조금만 비켜봐.”
요네르는 이한에게 부탁했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알겠어.”
이한이 비켜서자 요네르는 걸어가서 가이난도 앞에 섰다.
가이난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너, 병실 가서 포션 달라고 하지 마. 그것도 연금술로 만든 거니까!”
빡!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가이난도가 뒤로 자빠졌다.
이한이 감탄할 정도로 멋진 펀치였다.
*    *    *
“그런데 패도 되는 거였나?”
“하루 정도 지나고 사과하면 상관없어.”
요네르는 가이난도를 처음 패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사촌끼리 싸우는 경우가 많다지만 이렇게 패도 괜찮을 줄이야.
‘괜히 말렸군.’
이한은 앞으로 둘이 싸움 나면 말리지 않고 옆에서 구경이나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잠깐. 오해하면 곤란한데, 나는 사람을 쉽게 때리지 않아. 무슨 소리인지 알지?”
요네르가 오해했는지 급히 변명했다.
귀족, 그것도 전통 있고 규모 있는 가문일수록 더더욱 예절과 품위가 중요했다.
상대와 말싸움 좀 했다고 주먹질 날리는 게 품위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열 받으면 주먹질도 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
요네르는 이한의 말에 더 당황했다.
‘워다나즈 가문에 저런 규칙도 있나?’
기사 가문이면 모를까 제국에서 손꼽히는 가문이 저런 주먹질을 옹호하다니.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얘가 좀 그릇이 남다른가봐.’
요네르는 그렇게 납득했다.
확실히 이한은 같이 들어 온 귀족들 중에서도 유독 관록이 있어 보이는 편이었다.
다들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하지만 갓 성인이 된 풋내기들.
그런 풋내기들 중에서 이한은 좀 눈에 띄는 편이었다. 행동거지부터 시작해서 말하는 것까지 어딘가 남달랐던 것이다.
과연 그 워다나즈 가문 출신다웠다.
요네르는 화제를 돌렸다. 이한이 넘어가준다는데 굳이 그걸 물고 늘어질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정말 연금술 들어도 괜찮겠어? 나 때문에 같이 가는 가면 진짜 혼자 가도 괜찮은데.”
“아니. 나도 연금술에는 관심이 있어.”
“오... 같이 사업하자는 제안에 솔깃한 거야?”
“그것도 고민 중이긴 해.”
“!”
예상과 다른 반응에 요네르가 오히려 놀랐다.
그 짧은 사이에 생각이 바뀔 줄이야.
“무슨 일이 있었길래?” “으음. 그게...”
이한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했다.
-내가 마법에 의외로 재능이 없는 것 같아서 진지하게 연금술 사업을 고민해봐야 할 것 같은데.
...라고 말하면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너무 쩨쩨한 말이 됐다.
“아냐. 괜찮아. 말 안 해도 알겠어. 연금술의 가치를 고민하고 깨달은 거구나.”
“응?”
“연금술은 정말 재밌는 학문이지?”
“어... 뭐... 그렇지.”
요네르가 왠지 신이 난 것 같아서, 이한은 일단 맞장구를 쳐줬다.
“흔히들 연금술이라고 하면 지하의 연금술 공방에서 틀어박혀 나오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연금술의 세계는 훨씬 더 넓고 심오해.”
“으... 응.”
이한은 당황하지 않았다.
자기가 관심 없는 이야기에 대해 듣는 건 대학원 시절부터 단련된 기술이었던 것이다.
-자네 등산 좋아하나?
-예? 그게...
-그래. 등산은 정말 좋지. 작년에 내가 설악산 갔던 이야기를 했었나? 새벽안개를 뚫고 구름을...
-예. 예.
-...그렇게 재밌어 할 줄이야. 자네도 등산을 즐거워하겠군. 언제 한 번 같이 가도록 하지!
-......
그런 경험과 비교하면 요네르의 이야기는 재밌는 편에 속했다.
“혹시 메이킨 가문에 있을 때 연금술을 미리 공부했나?”
이한의 질문에 요네르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응. 근데 이건 비밀이야. 마법은 미리 못 배우게 했지만 연금술까지 엄격하게 막지는 않으셨거든.”
“미리 예습할 수도 있지 뭐.”
“......”
요네르는 다시 한 번 혼란스럽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주먹질도 OK, 성인되기 전에는 마법 배우지 말라는 규칙을 무시해도 OK...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다.
‘미리 공부했다니 잘 됐군.’
이한은 공부 잘 하는 친구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요네르가 연금술을 잘 안다면 도움을 받아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으리라.
“그러면 혹시 나도 가르쳐 줄 수 있겠어?”
“...물론이지!”
연금술을 배우고 싶다는 이한의 말에, 요네르는 활짝 웃으면서 이한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    *    *
<기초 연금술의 이해>.
기초 마법의 이해에서 트롤 혼혈 교수를 만난 이한이었기에, 이제는 어떤 교수가 나타나도 별로 놀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놀랍지 않았다.
‘되게 평범하게 생겼잖아?’
자리에 있는 건 키 작은 드워프였다. 사냥꾼이나 레인저처럼 날렵하게 차려 입은 드워프는 허리춤에 쇠뇌까지 차고 있었다.
“다 왔나?”
“윽. 검은 거북이의 탑 학생들도 있잖아.”
요네르가 중얼거렸다.
요네르가 평민 출신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껄끄러운 건 사실이었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끼리 듣는다면 서로 이야기가 통해서 불편함이 없었지만...
다른 탑 학생들이 같이 들으면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게다가 보아하니 검은 거북이의 탑 학생들이 더 많아보였다.
‘시선이 신경 쓰이긴 하는군.’
평민 출신들이 귀족 출신을 만났을 때 보이는 반응은 보통 두 가지였다.
하나는 두려워하면서 엮이기 싫어하거나.
다른 하나는 적대심을 드러내거나.
학교 밖이라면 후자는 어지간해서는 보기 힘들겠지만, 여기는 ‘평등’이 이념인 학교 안이었다.
안 그래도 평소에 귀족 놈들 거들먹거리는 것에 원한이 쌓였는데 학교 안에 들어오고 나서도 <푸른 용의 탑>의 귀족 신입생들이 깔보듯 비웃으니 적대심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야. 그만 쳐다봐. 게다가 저기 워다나즈 가문 출신도 있어.”
“어쩌라고? 워다나즈 가문이라도 학교 안은 못 건드려.”
“평생 학교 안에서 살 거 아니잖아. 밖에 나갔을 때 보복당하면 어쩌려고?” “그건 그 때 생각하면 그만이지.”
“......”
이한은 혀를 찼다.
자기 자신이 하지 않은 일로 원한을 사는 건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괜히 친한 척 해봤자 역효과만 나겠군.’
한동안 <푸른 용의 탑>의 학생들하고 어울려야 할 것 같았다.
“모두 조용.”
키 작은 드워프 교수가 입을 열었다. 키는 작았지만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느껴졌다.
“내 이름은 우레걸음 금다르. 편하게 우레걸음 교수님이라고 불러주면 된다. 아마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겠지. 저 뒤에 저렇게 멋진 학교의 건물들이 있는데, 왜
우리는 이런 책상 하나 없는 풀밭에서 모였을까?”
그랬다.
지금 <기초 연금술의 이해>를 듣기 위해 모인 곳은 놀랍게도 학교 건물이 아닌 밖의 언덕이었던 것이다.
황녀, 아덴아르트가 손을 들었다. 우레걸음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딱히 대답 들으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는데. 그래. 말해봐라.”
“자연의 마나를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정해진 대로 시약과 약초를 섞으면 되는 거 아니냐는 편견이 있었지만, 연금술에도 마법은 필요했다.
자연의 마나를 느끼고 어떤 힘들이 있는지 깨닫는 건 연금술사한테도 중요한 일인 것이다.
“아닌데?”
...그러나 드워프 교수는 뭔 황당한 소리를 하냐는 듯이 아덴아르트를 쳐다보았다.
아덴아르트는 창백한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한은 별 생각 없이 요네르에게 물었다.
“재료 모으기 좋아서 여기 모이라고 한 거 아닌가?”
“설마 그런 이유겠어?”
“오. 정답!”
“......”
이한과 요네르는 황당하다는 듯이 드워프 교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우레걸음은 감탄한 표정으로 이한을 보며 말했다.
“바로 맞추는 무쇠대가리들이 드문데.”
“무쇠대가리가 아니라 신입생...”
“그래. 그래. 무쇠대가리신입생. 하여튼 잘 했다. 뛰어난 연금술사의 재능이 있군.”
드워프 교수의 칭찬에 요네르가 부럽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덴아르트도 살짝 이한을 노려보았다.
마치 라이벌이라도 본 것처럼.
‘...아니 이건 노려볼 게 아니지.’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다른 거면 모를까 이런 대답 때문에 칭찬 받은 걸 질투하고 싶나?
“여기 모이라고 한 이유는 바로 연금술에 필요한 능력이 무엇인지 무쇠대가리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다. 아마 여기 있는 무쇠대가리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
연금술에 필요한 능력은 뛰어난 지능과 섬세한 마력 컨트롤이야’라고.”
‘어? 연금술에도 섬세한 마력 컨트롤이 필요한가?’
듣고 있던 이한은 움찔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연금술사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바로 재료를 모으는 능력이다.”
“......”
“......”
드워프 교수의 말에 자리에 모인 마법사들은 황당해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능력이었던 것이다.
아덴아르트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손을 들고 물었다.
“교수님. 재료나 시약 같은 건 직접 재배해서 기를 수 있고, 또 모험가들에게 의뢰해서 구해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금술사가 직접 구해야 한다는 건 어폐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저 저 저 저 실전은 하나도 모르는 무쇠대가리 애송이 같으니!”
이미 살짝 붉어진 아덴아르트의 얼굴이 좀 더 빨개졌다. 드워프 교수 우레걸음은 쯧쯧거리며 말했다.
“연금술사들이 쓰는 재료나 시약들 중에서 길러서 얻을 수 있는 게 어느 정도 되는 줄 아나? 10%도 안 된다! 나머지는 다 돈 주고 사와야 하는 거야. 그리고 그 돈 주고
사온다고 다 쓸만할까? 왜 마법사들이 모험가 고용할 때 파티 껴서 직접 따라가는 줄 아나? 시간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라 모험가 놈들끼리 내버려두면 약초를 더럽게 못
캐서야! 조심스럽고 귀하게 캐야 할 약초를 그냥 뿌리째 대충 뽑는다고!”
우레걸음은 평소에 맺힌 원한이 많았는지 아주 사납게 떠들어댔다.
“그런 의미에서 연금술사는 무조건적으로 재료와 시약을 스스로 구할 방법을 알아야 한다. 남한테 의존하기만 하는 연금술사는 결코 대성할 수 없어. 나중에
연구하는데 재료 없다고 징징대면 누가 찾아주겠나?”
드워프 교수의 말에 자리에 모인 학생들은 어느 정도 공감한 표정으로(그리고 기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 정도면 다 설명이 됐겠지. 그럼 가서 찾아오도록 해라.”
“네?”
“뭘 네야? 흩어져서 재료 찾아오라고.”
우레걸음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허공에서 종이가 생겨나더니 마법사들한테 한 장씩 날아갔다.
종이 위에는 푸르죽죽하게 생긴 약초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007 화
‘영지버섯하고 인삼을 섞은 것처럼 생겼는데.’
찾아와야 할 약초를 봤을 때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독오초(瀆汚草)>라고 불리는 약초로, 해독약을 만들 때 들어간다고 쓰여 있었다.
“다뤄본 적 있어?”
“응.”
“다행이군.”
요네르가 다뤄본 적 있다고 하는 말에, 이한은 안심했다.
언덕과 들판, 숲 근처에 널린 수많은 풀들과 약초 사이에서 뭐가 뭔지 구분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약초 그림이 있다 하더라도 초보자가 헷갈리기 쉬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뤄본 적 있는 경험자는 든든했다.
“그런데... 우리 둘이서 움직이기는 좀 그래.”
“역시 위험한가?”
“그치? 돌아다닐 때에는 최소 셋이 좋지. 가이난도를 괜히 팼나봐.”
“안 팼어도 따라오진 않았을 테니 상관없지.”
이한의 말에 요네르가 씩 웃었다.
“그럼 그냥 둘이서 돌아다닐까?”
“아니. 사망자 명단에 이름 올리고 싶지는 않아.”
에인로가드는 그 명성에 걸맞게 흉악한 소문도 많았다.
마법이란 게 워낙 위험한 학문이다 보니, 배우다가 죽는 경우도 여럿 나오는 것이다.
이한도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교수들이 신경을 써줘도 사고는 일어나는 법이니까.
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냥 전체적으로 다 안전불감증 아닌가?’
에인로가드는 교수부터 시작해서 학생들까지 목숨에 미련이 없는 것 같았다. 현대인인 이한의 기준에서는 다들 좀 미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사망자 명단이라니... 그런 얼굴로 섬뜩한 농담하지 마. 안 어울려.”
“농담한 게 아닌데.”
“농담이 아니라면 더 무섭거든? 응. 역시 같은 탑 애가 좋겠는데.”
요네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 중 한 명을 찾아 같이 다니자고 제안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없었다.
“어... 망했나?”
“황녀님한테 말 걸면 안 되나?”
“너 용케 그 황녀님한테 말 걸고 싶어한다? 성격 엄청 까칠해 보이던데.”
“약초 찾으려는 거지 무도회 열려는 게 아니잖아?”
이한의 말에 요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런데 이미 늦은 거 같군.”
아덴아르트 근처에는 이미 학생들 몇 명이 붙어 있었다.
황녀도 여럿이서 다녀야 하는 필요성을 느꼈는지 벌써 파티를 짠 것이다.
“아니. 검은 거북이 탑 신입생도 저기 있다고?”
이한은 좀 억울해졌다.
워다나즈 가문이라고 무서워하고 피할 거면 황녀도 똑같이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황녀 곁에 모인 학생들 중 몇 명은 검은 거북이 탑 소속이었다.
“그야 저 황녀님은 입학하기 전부터 여러모로 유명했으니까...”
입학하기 전에도 유명한 사람은 유명한 법.
아덴아르트는 황족들 중에서도 뛰어난 지성과 놀라운 재능으로 이름이 높았었다.
입학하자마자 여러 귀족들이나 평민들이 모이는 게 당연했던 것이다.
“그랬나?”
“...아무리 워다나즈 가문이라도 그렇지 신문도 안 보고 살았어?”
“신문에서 보통 <제국의 새로운 사업>만 읽었거든. <황족들의 소식>은 별로 관심이 없어서.”
“아. 그거 재밌었지. 모험가들이 다 쓴 포션 병 던전에 버리지 말고 갖고 돌아오면 동전 돌려주는 그거 봤어? 아이디어 괜찮지 않아?”
“괜찮은 아이디어였지.”
“...아니. 지금 그 이야기 할 때가 아니잖아.”
요네르는 정신을 차렸다. 이야기가 옆으로 새고 있었다.
“어쨌든 <황족들의 소식>만 봐도 알 수 있었겠지만 아덴아르트는 여러모로 유명했어. 그러니 저렇게 사람이 모이는 것도 당연하지.”
“혹시 가이난도는 뭐 없었나?”
“없었어.”
“그렇군. 가이난도는 별 거 없군.”
“정말 별 거 없지.”
병실에서 포션 먹고 있던 가이난도는 억울하게 공격을 받았다.
“그러면 황녀님은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찾자.”
“그게 될까? 이제 남은 건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밖에 없어 보이는데.”
요네르의 말에 이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으음.’
확실히 이제 남은 건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밖에 없어 보였다.
물론 아무나 붙잡고 같이 움직이자고 하면 몇몇은 응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같이 움직이는 일인 만큼, 서로 방해가 되진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능력이 있으면 좋겠군.’
조별로 무언가 할 때 중요한 건 서로의 능력이 아니겠는가.
이한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적당한 한 명을 발견했다.
*    *    *
검은 거북이의 탑 신입생, 닐리아는 제국 북부의 <그림자 순찰대> 출신 다크 엘프였다.
<그림자 순찰대>는 북부 산맥을 자기 집 안마당처럼 오가며 활약하는 뛰어난 사냥꾼과 정찰자들의 집단.
그런 곳에서 태어났으니 닐리아 또한 숲과 산을 돌아다니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뭐야. 별로 어렵지도 않네.’
독오초는 직접 본 적 없었지만 어떻게 생긴 지 알면 찾는 건 금방이었다.
평생 산이나 숲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 책상물림 풋내기들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사실 에인로가드에 들어오고 나서, 닐리아는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탑 신입생들뿐만 아니라 같은 검은 거북이의 탑 안에서도 뛰어난 신입생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신흥 귀족 가문 출신에, 제국에서도 유명한 상인 집안 출신. 혹은 이름 높은 모험가를 부모로 둔 신입생까지.
그런 이들 사이에서 평생 산과 숲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학교에 초대 받은 닐리아는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들어본 마법 수업들은 막막하기 그지없었고...
그러던 찰나 이런 수업을 만나게 되었으니 닐리아의 의욕이 샘솟는 것도 당연했다.
‘흥. 두고 봐. 다른 놈들보다 몇 배는 빨리 찾을 수 있으니까.’
닐리아는 혼자서 발빠르게 움직여 독오초를 찾아 볼 생각이었다.
남들이야 산과 숲에 익숙하지 않아서 여럿이 뭉쳐 다닌다지만 닐리아는 혼자서도 자신이 있었으니까.
“흠흠.”
“?”
닐리아는 누군가 다가오자 살짝 놀랐다. 붉은 머리칼을 가진, 예쁘장한 소녀였다.
“...넌 뭐야?”
“난 메이킨 가문의 요네르야. 여기는...”
“이한. 잘 부탁해.”
둘의 말에 닐리아는 요네르는 귀족이고 이한은 귀족이 아닌가 싶었다.
보통 귀족은 자기 소개할 때 가문 이름부터 말하는 것이다.
‘근데 푸른 용 탑 소속인데?’
“왜 저러지?”
“네가 가문 이름 말 안 해서지...”
요네르는 어이없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름은 말해놓고 왜 가문은 말 안 한단 말인가.
“자기소개 할 때 가문 이름 매번 말하는 것 자체가 너무 귀찮은 일 아닌가? 나중 가면 가주 이름부터 시작해서 어디에 가문 땅 있는지도 말하고 자기소개해야겠군.”
“귀족들끼리 파티할 때는 그렇게 하잖아?”
“......”
요네르의 말에 이한은 진심으로 질색했다.
그걸 보고 있던 닐리아는 경계심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둘이 떠들 거면 다른 곳에 가서 떠들어. 왜 여기 와서 이러는 건데?”
“같이 움직이지 않겠어?”
“!”
이한의 말에 닐리아는 깜짝 놀랐다.
생각치도 못했던 것이다.
“무슨 꿍꿍이야?”
닐리아는 적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귀족 가문 자제들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북부에서 지낼 때도 그랬다.
가끔가다 산맥으로 찾아오는 귀족들은 ‘이딴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지?’하며 오만상을 찌푸리곤 했다.
사냥꾼들이 가장 좋은 음식과 가장 좋은 침상을 대접해줘도 귀족들은 맛이 없다느니, 불편하다느니, 뭐 이렇게 푸대접을 하냐느니 하며 연신 투덜거리기만 했다.
정찰자 중 몇 명은 ‘산맥 안내해주는 척하면서 절벽 밑으로 밀어버리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하고 농담할 정도였다.
그런 곳에서 자란 만큼 닐리아가 푸른 용의 탑 소속 학생들을 좋게 볼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넓은 곳에서 혼자 돌아다니면 불리하지. 몬스터라도 나오면 최소한 셋은 있어야 하고.”
“흥. 필요 없어.”
닐리아는 코웃음을 치며 거절했다. 이한은 놀라지 않고 물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나?”
“이유는 왜?”
“네가 어떤 이유로 거절했냐에 따라, 네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도 파악할 수 있으니까. 흠. 내가 한 번 맞춰볼까?”
이한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우리가 그쪽을 미끼로 삼거나, 위험에 처하면 버리거나 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건 우리 둘의 명예를 아주 개무시하는 거니까.”
“...그건 아니야.”
귀족 가문 출신 둘한테 저런 말을 듣고도 ‘맞는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닐리아가 아무리 둘을 꺼려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혹시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건가?”
“바로 그거...”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산과 숲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인데. 게다가 약초를 찾는 게 끝이 아니라 그걸 조심스럽게 캐기까지 해야
하잖아? 그런 걸 다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멍청한 거지. 네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음. 이유를 정말 모르겠군.”
“...시끄러. 같이 다니면 될 거 아니야!”
닐리아는 씩씩대며 돌아섰다.
그 모습에 이한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네르는 놀란 눈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워다나즈 가문에서는 대체 뭘 가르치는 걸까?’
*    *    *
닐리아는 걸음걸이가 가볍고 빨랐다.
앞장서서 빠르게 길을 만들고 걷는 모습이 정말 숙련된 사냥꾼 같았다.
요네르가 궁금하다는 듯이 이한을 보며 물었다.
“진짜 잘 움직이긴 하는데, 넌 어떻게 알아보고 말을 건 거야?”
“보아하니 다리와 종아리 근육이 발달했고, 손과 손가락에 혹이랑 굳은살이 있었어. 활을 잡을 때 생기는 거지. 경험 많은 사냥꾼만이 가질 수 있는 증거야.”
“!”
“...!”
요네르뿐만 아니라 앞에서 걷고 있던 닐리아도 듣고 오싹해했다.
설마 저런 걸로 그녀의 출신을 알아맞히다니.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우습게 봤었는데, 저 이한이라는 소년은 가볍게 얕볼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남의 속내를 꿰뚫는 것 같은...
“농담이고, 허리에 <그림자 순찰대> 징표가 달려 있었어. 거기 출신이면 산은 잘 탈 거 아니야.”
“......”
닐리아는 홱 고개를 돌리더니 이한을 노려보았다.
요네르가 웃으면서 물었다.
“듣고 있었어?”
“안 듣고 있었거든!”
“같이 좀 가자. 걸음 속도 맞춰줘.”
“너희가 맞춰야지 왜 내가 맞춰야 하는데!”
닐리아의 말에 이한이 대답했다.
“그야 여기서 약초 구분할 능력이 있는 건 여기 요네르니까. 요네르가 지쳐서 쓰러지면 우리 둘이서 찾아야 한다고.”
“......”
닐리아는 또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고 억지를 부리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다.
“알겠어. 늦추면 되잖아.”
“오. 역시 그림자 순찰대답게 현명한...”
“놀리냐?? 응??”
“칭찬인데.”
계속 이한에게 당하기만 해서 분했는지, 닐리아가 화살을 돌렸다.
“쟤는 약초를 알아본다고 하고, 나는 길잡이 역할을 하면. 네 능력은? 네 역할은 뭔데?”
‘무임승차라고 하면 화내겠지?’
이한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괜히 상대 성질 돋울 필요는 없었으니까.
“나는 주변에 들짐승이나 몬스터가 나왔을 때 쫓는 역할이지.”
“......”
닐리아는 또 할 말이 없어졌다. 산을 탈 때 몬스터를 쫓는 역할을 맡는 사람은 중요한 것이다.
보아하니 이한은 기사 가문 출신 같았다. 키가 크고 체격이 단련된 것처럼 잘 잡혀 있었으니까.
‘...어? 기사는 흰 호랑이 탑 아닌가?’
“아까 못 들은 것 같은데. 네 가문이 어디라고 했어?”
“워다나즈. 워다나즈 가문.”
“......”
닐리아는 질색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쳤다. 이한은 살짝 상처받았다.
008 화
원래 가문 안에 있는 사람은 가문의 소문이나 이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워다나즈 가문 정도 되면 가문의 저택은 어지간한 성보다 컸고, 가문의 땅은 어지간한 도시 수준으로 넓었다.
거기서 지내는 사람들이나 일하는 사람들이 워다나즈 가문에 대해 함부로 말할 리 없었으니...
“워다나즈 가문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무것도 없지. 완전 문제 없지.”
닐리아는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다 헛소문이라고.”
이한의 말에도 닐리아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요네르가 위로하듯이 말했다.
“원래 제국의 귀족 가문들에게는 어처구니없는 소문들이 붙기 마련이야. 너무 신경 쓸 거 없어.”
“그런가?”
“물론 워다나즈 가문은 좀 심한 편이긴 한데...”
“......”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둘이 대화하고 있는 동안 닐리아는 마음을 정리했는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워다나즈 가문이라고 해서 내가 겁 먹을 이유는 없지.”
“무슨 소문을 들었지?”
“......”
닐리아는 말해줘도 되나 안 되나 살짝 고민했다.
당사자한테 말하기에는 조금...
-워다나즈 가문의 가주는 사실 드래곤이다. 대륙 서부에서 일어난 언데드 광란 사건 때 날아와서 브레스로 언데드들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워다나즈 가문의 핏줄들은 강력한 고대 정령과 계약한 대가로 막대한 마법 능력을 받았지만 감정을 잃어버렸다.
-워다나즈 가문 출신 마법사들은 피도 눈물도 없다. 제국 분리주의자들의 폭동 때 나타난 워다나즈 가문 마법사들로 인해 도시 하나가 사라졌다.
...등등등.
워다나즈 가문의 이미지는 이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편이었다.
제국의 평민들 눈에는 ‘평소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무슨 일만 터지면 갑자기 나타나서 쓸어버리고 가는 무자비한 마법괴물들’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제국에 사건 크게 터지면 당연히 대마법사들이 올 수밖에 없지 않나?”
“그렇다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이한은 억울해했고 요네르는 다독였다. 닐리아는 그 반응에 속으로 생각했다.
‘감정을 잃어버렸다는 소문은 확실히 헛소문 같은데...?’
*    *    *
“잠깐.”
“?”
“뭔가 이상해. 여길 봐.”
닐리아는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가리켰다.
풀로 뒤덮인 언덕이어서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닐리아는 다크 엘프 특유의 감각과 <그림자 순찰대> 경험으로 흔적을 잡아낸 것이다.
“보이지? 꽤 덩치가 커다란 놈이 여길 밟고 지나간 거야.”
“그런 것치고는 얕지 않나?”
“잘 짚었어. 꽤 똑똑한 놈이 분명해. 힘을 조절해가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움직이다가 여기서 이 열매를 먹느라 실수한 거지.”
요네르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요네르의 관심분야는 연금술.
이런 사냥꾼의 추적술에 대해서는 관심이 가지 않는 게 당연했다. 요네르는 주변을 둘러보며 약초가 없나 확인하고 있었다.
‘칫.’
닐리아는 속으로 살짝 짜증스러워했다.
<그림자 순찰대>에 있을 때는 모두가 마음이 맞았다.
다들 사냥꾼에 레인저였고, 마을 사람들도 대부분 가족 중에 사냥꾼이나 레인저가 있었기에 무슨 말을 꺼내도 이야기고 통했던 것이다.
-정말 혼날 뻔했습니다. 털이 아름다워서 어떻게든 꼭 잡으려고 했는데...
-하하하! 그럴 수 있지. 나도 젊은 시절에는...
사냥하다 본 사냥감만 꺼내도 한 시간은 떠들 수 있는 사람들.
그에 비해 여기는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저, 내가 산에서 있었던 일인데...
-산?
-어. 사냥을 하러...
-사냥까지?? 왜?
-그야 내가 순찰대 소속...
-그냥 돈 주고 사면 안 되는 거야?
-...시■새■야 진짜 뒤질래?
-히익!
...같은 대화를 겪은 닐리아 입장에서는 요네르 같은 반응이 살짝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래. 다들 사냥꾼이 아니니까 내가 적응해야지.’
“오. 재밌군. 다른 건 없나?”
“...!”
그런 와중에 이한이 보이는 반응은 닐리아의 예상 밖이었다.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듣고 있는 이한.
닐리아는 당황해서 물었다.
“재밌다고?”
“재밌으면 안 되는 부분이었나?”
“...아니. 재밌으면 안 되는 부분은 아니고, 그렇지만 내가 꼭 재밌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게 물론...”
“???”
상대가 횡설수설하자 이한이 역으로 당황했다.
‘술 마시고 왔나?’
닐리아 본인도 자기가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급히 본론으로 돌아왔다.
“좋아! 어쨌든, 이렇게 덩치가 큰 사냥감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는 조심하는 게 좋아. 여기 풀이 잘려진 게 보여? 꽤 커다란 발톱을 갖고 있는 거지.”
“그렇군.”
이한은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있고 배우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교수한테 사기를 당했다 하더라도 대학원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꼭 마법뿐만이 아니더라도 이런 사냥꾼의 지혜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상대의 정체도 알 수 있나?”
“이걸론 부족해.”
닐리아가 아쉽다는 듯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노련한 사냥꾼은 발자국만 봐도 정체를 맞힌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건 환상이었다.
사냥꾼이 발자국만 봐도 정체를 맞힐 수 있는 건 그 지역에서 오래 지냈고, 그 지역에 있는 몬스터들이 무엇인지 다 꿰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주변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바로 알아맞힐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듣기로는 마법학교 주변에는 온갖 이상한 몬스터들이 많다고 들었어.”
“아. 그 이야기 나도 들었는데.”
요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인로가드 자체가 워낙 마력이 풍부한 땅에 위치해 있어서, 그 마력의 영향으로 몬스터들도 많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실험하다가 만들어진 몬스터들이 학교 근처를 돌아다닌대. 버려진 마법약 때문에 희귀한 슬라임도 자주 생긴다고 하더라.”
“......”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여기 마법사들은 실험 안전 수칙 같은 게 없나??’
마법약부터 시작해서 마법으로 만든 인공 생물까지.
이런 것들은 철저하게 관리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냥 그걸 대충 갖다 버리니 저런 문제가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더 조심해야겠군.”
“잘 말했어! 이 흔적을 기본적으로 쫓으면서 움직일 거야. 기습 받을 일은 줄어들 테니까.”
“나도 흔적 읽는 법을 배울 수 있나?”
이한의 말에 닐리아는 눈을 깜박였다.
무례한 소리를 한 건가 싶어서 이한은 다시 말했다.
“가르쳐주기 힘들면 그냥 무시해도 상관없...”
“...절대 쉽지 않을 텐데, 도중에 배우다가 포기할 걸? 이게 얼마나 어려운 기술인지 알아?”
“가르쳐만 준다면 그러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해보지.”
“...흥. 가르쳐 줄 테니까 어디 한 번 해보던가!”
요네르는 닐리아가 못 듣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굳이 저런 걸 배울 필요가 있어?”
“왜. 재밌어 보이잖아.”
“???”
*    *    *
“찾았다. 독오초.”
닐리아와 이한이 경계하는 사이, 요네르는 약초를 발견했다.
짙게 자라난 수풀 사이에 숨어 있는 약초를 보고 이한은 감탄했다.
‘용케 찾았군.’
“두 개밖에 없어.”
“......”
“......”
“하나만 더 찾으면 될... 왜 다들 말이 없어?”
요네르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왜 둘이 말이 없어졌는지 깨달았다.
-■■...
덩치가 어마어마한 돼지 한 마리가 이쪽을 매우 강렬하게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력이 느껴지는 걸 보니 뭔가 잘못 먹었군.”
돼지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에, 이한은 냉정하게 말했다.
주변에 흘러나온 시약을 먹었든 포션을 먹었든 아니면 특수한 실험을 받았든...
“지금 그런 소리 할 때가 아니잖아! 조심해!”
닐리아가 다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돼지는 절대 약한 동물이 아니었다.
묵직한 덩치에, 제법 날렵한 몸놀림. 거기에 송곳니까지 갖고 있는 놈은 더 위험했다.
게다가 지금 상대는 얌전히 길러지는 가축이 아니라 완전히 야성을 되찾은 짐승에 가까웠다.
하물며 이상한 걸 먹어서 마력까지 갖게 되었다면 몬스터라고 보는 게 나았다.
“멧돼지라고 생각해! 절대 자극하지 말고! 다들 뒤로 천천히 물러서!”
닐리아는 둘에게 말했다.
요네르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이한은 요네르를 부축하며 슬쩍 뒤로 물러섰다.
-■■■!
그러나 돼지는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상당히 화가 났는지 김을 뿜어대며 씩씩대고 있었다.
“더 물러나기만 하면 위험하겠군.”
이한은 지팡이를 들고 멈췄다.
마치 창처럼, 두 손으로 지팡이를 강하게 잡고 앞으로 선 모습이 제법 그럴듯했다.
‘맞아...!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었지?’
그제야 닐리아는 이한이 어느 가문 출신인지 떠올렸다.
제국의 대마법사 가문, 워다나즈 가문 출신.
그런 만큼 여기 들어오기 전에도 몇 가지 마법을 배웠을지도 몰랐다.
‘아까 자기가 주변에 들짐승이나 몬스터가 나왔을 때 쫓는 역할이라고 했었지?’
닐리아는 이한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 있어?”
“확실하진 않겠지만 아마?”
“만약 실패하면 무조건 저 빨간머리 업고 뛰어! 내가 유인할 테니까!”
여기 인원 중에서 산과 언덕을 가장 빠르게 누빌 수 있는 건 닐리아 본인이었다.
이한의 마법을 못 믿는 건 아니었지만, 숙련된 사냥꾼은 언제나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야 했다.
상황이 틀어지면 닐리아는 자신이 돼지를 유인해서 따돌릴 생각이었다.
이한은 닐리아의 말에 좀 감동 받은 표정을 지었다. 요네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까지 우리를...”
“그런 거 아니거든!? 나밖에 못 하는 일이니까 그런 거거든?!”
“그래. 어쨌든 고맙다. 만약의 상황에는 잘 부탁하지.”
이한은 더 이상 떠들지 않고 집중했다.
돼지도 점점 더 거리가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셋. 둘. 하나.’
이한은 차분하게 숫자를 세며 상대와의 간격을 쟀다.
뒤에서 보고 있던 닐리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대체 무슨 마법으로 저 돼지를 상대하려는 걸까?
빡!!!
“......”
청명한 소리가 돼지의 머리통에서 울려 퍼졌다.
이한이 선택한 건 지팡이 휘두르기였다.
*    *    *
-검은 무기의 왕이지만, 검만을 다루셔서는 안 됩니다. 검술은 검이 없는 상황에서도 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검, 창, 곤봉, 단검, 맨손 모두 말입니다.
-그렇군.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불평 안 하십니까?
-왜?
-아, 아닙니다.
알라르롱은 가문의 직계라고 해서 쉽게 가르쳐주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배웠던 것처럼 엄하고 혹독하게 이한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한은 정말 잘 배웠다.
다른 귀족이라면 ‘이렇게 힘든 일을 내가 왜 해야 하는데!’라고 했겠지만, 이한은 정반대였다.
‘돈 주고도 운동을 하는데 이 정도면 할 만하지 않나?’
대학원 다닐 때에는 운동을 하고 싶어도 못 했었는데, 알라르롱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세세히 가르쳐주는 지금 상황이 불만스러울 리 없었다.
게다가 몸이 힘들면 바로 하인들이 달려와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마법 물약을 바치는데...
-이한 님. 지금쯤 궁금하실 겁니다. 왜 다른 기사들처럼 무기에 오러를 씌우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는데? 그런 대단한 경지를 나처럼 배우는 사람이 오를 수가 있나?
-...오러 때문이 아니면 대체 왜 검술을 배우겠다고 하신 겁니까??
알라르롱은 가르치다 말고 황당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009 화
마법사만 마나를 다루는 게 아니었다.
평생 검을 휘두르며 수련한 검객은 마나를 응축해 검 위에 덧씌울 수 있게 됐다.
바로 오러의 경지!
이게 워낙 멋지고 화려한 만큼, 귀족 자제들 중에서는 이걸 보고 검술을 배우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법사 가문이라도 그건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한이 처음에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알라르롱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오러를 배우고 싶어하시는군. 진실을 알게 되면 실망하실 텐데.’
알라르롱은 엄격한 기사.
굳이 먼저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이한이 알아서 떨어져나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한은 생각보다 훌륭하게 잘 버텼고, 만족한 알라르롱은 자신이 먼저 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그런데 이한이 오러에 별 관심이 없다니 좀 많이 당황스러웠다.
-스스로를 단련하고 자기 몸 지킬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지.
-...!
이한의 말에 알라르롱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어린아이가 보여줄 수 없는 성숙한 모습이었다.
저런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검술을 배우고 있었다니.
-사실 이한 님. 이한 님도 오러를 쓸 수 있습니다. 언젠가 말입니다.
-아니... 오러는 됐고. 나는 그냥 마법사가...
-오러는 일이년 검을 휘두른다고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가르쳐드린 대로 꾸준히 검을 휘두르고 단련하신다면 언젠가 깨달으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그냥 몸 하나 지키면 된다니까. 경. 사무실 안에서 살고 싶어.
어쨌든 이한은 알라르롱이 하라는 대로 꾸준히 했다.
딱히 오러를 깨닫고 소드마스터가 되려는 건 아니었고, 그냥 단련해둬서 나쁠 거 없었으니까.
*    *    *
...그 성과가 지금 바로 나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손맛이...?’
이한은 스스로에게 놀랐다.
돼지의 움직임을 꿰고 있다가 들어오는 순간 정확하게 지팡이를 갈긴 건 놀랍지 않았다.
몇 번이고 알라르롱에게 얻어맞으면서 배웠던 기술이었으니까.
마법학교에서 지급하는 지팡이는 매우 단단해서 곤봉으로 써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돼지를 때릴 때, 무언가 주변의 마력이 일렁이며 지팡이에 모인 느낌이 들었다.
이제까지 검을 휘두르면서 연습할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
‘마법을 배우기 시작해서인가?’
알라르롱이 말한 ‘언젠가 깨달으실 수 있을 겁니다’라는 게 이것인가 싶었다.
자연스럽게 무기에 마력을 모으는 느낌.
물론 아직은 오러라고 하기에는 우스울 정도의 수준이었다.
마력을 모으고 모아서 응축해야 오러가 되는 거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냥 휘두르는 것보다 마력이 담긴 공격이 훨씬 더 파괴력이 있는 것이다.
-크르르륵...
실제로 그렇게 사납게 꿀꿀대던 돼지도 한 방에 비실거리더니 옆으로 픽 쓰러졌다.
보고 있던 닐리아가 황당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혹시 내가 못 본 건가?? 마법을 쓴 걸까??’
마법의 세계는 넓었고 당연히 근력 강화 마법이나 민첩 강화 마법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제 갓 입학한 신입생이 쓰기에는 너무 어려운 마법이었다.
“해치웠어!?”
“해치운 것... 같군.”
이한은 지팡이를 아래로 내려놓고 돌연변이 돼지의 숨통을 확인했다. 확실히 죽은 게 맞았다.
요네르는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수업 이래도 되는 거 맞아?”
“난 그 생각을 교장 만났을 때부터 했지.”
아무리 연금술의 비결이 자연 깊숙한 곳에 있다지만, 마법 하나 제대로 배우지 못한 신입생들이 돌아다니는 곳에 이런 몬스터가 돌아다니다니.
말이 돼지였지 아까 위력만 보면 두꺼운 나무 하나 부숴먹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연금술은 듣지 말까?’
이한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마법학교의 교수들이 다들 좀 미쳐 있다고 가정했을 때, 사망 확률을 계산해보면...
강의실 밖에서 듣는 수업이 강의실 안에서 듣는 수업보다 높지 않겠는가.
좀 날로 먹는 수업인가 했는데, 지금 몬스터 만나는 거 보면 앞으로 더 빡세질 수 있었다.
“앞으로 더 깊은 숲에 들어가서 트롤의 타액이라도 모아오라고 할 수 있어.”
“으으응...”
요네르도 이한의 말에 살짝 고민이 됐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연금술 공방을 열고 싶긴 했지만 죽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잠... 잠깐. 너희 앞으로 안 들으려는 건 아니지?”
닐리아는 다급히 말했다.
안 그래도 빈약한 친구 관계.
간신히 생긴 두 친구였다. 이 둘이 연금술 수업에 나오지 않으면 닐리아는 또 혼자서 고독하게 들어야 했다.
“그러는 거 아니지!? 둘... 둘 다 푸른 용의 탑 소속이잖아. 자, 자부심 같은 거 있지 않아?”
“난 없는데.”
“나도 명예보다는 실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
두 대귀족의 말에 닐리아는 완전히 삐졌다.
“그래, 마음대로 해!”
“아니. 왜 삐지고 그래?”
“맞아. 꼭 안 듣는다고 결정한 것도 아니고.”
“...진짜?”
닐리아가 고개를 돌려서 묻는 순간, 저쪽에서 익숙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또 나왔나보군.”
“...그냥 안 들을지도...”
“......”
*    *    *
달려간 셋이 발견한 것은 방금 상대했던 돌연변이 돼지였다.
이 주변에 저런 놈이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 이상 나온다는 걸 알게 된 이한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그만 들어야겠군.”
“야...!”
“지금 그거 갖고 싸울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요네르가 아래를 가리켰다.
돼지는 혼자 있지 않았다. 불운한 학생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여섯 명이군.’
황녀, 아덴아르트를 포함한 여섯 명이 있었다.
이한 그룹보다 훨씬 더 나은 상황.
“알아서 잘 잡지 않을까?”
“으응?”
요네르는 이한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아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이한을 쳐다보았다.
“과연 그럴까?”
“저깟 놈들은 알아서 잘 하라고 해.”
닐리아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아덴아르트를 따라다니는 추종자 그룹이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고고하고 거만한 황녀와 거기에 빌붙어서 아부하는 자들로 보였던 것!
“내가 상대하겠다!”
“!”
여섯 명 중 한 명이 나섰다. 이한도 기숙사에서 얼굴을 본 적 있는 귀족이었다.
“누구지?”
물론 얼굴을 봤다고 해서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한은 제국 귀족 가문들은 알아도 자식들 얼굴은 잘 몰랐다.
“아산 달카드.”
“아하. 달카드 가문이로군.”
“...가문은 알면서 왜 얼굴은 모르는...?”
요네르는 의아해했다.
달카드 가문.
워다나즈 가문이 대대로 황제의 조언자를 맡아왔던 가문이었다면, 달카드 가문은 대대로 제국의 재상이나 재무관 자리를 맡아왔던 가문이었다.
뛰어나고 정확한 일처리로 명성이 드높은 가문.
“달카드 가문이면 믿을만 하겠는데.”
“응. 가이난도와 달리 믿을 만한 것 같아.”
“?”
듣고 있던 닐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황자를 말한 건가?
아산은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체형이었지만, 지팡이를 잡고 나선 자세는 그럴듯했다.
이한은 아산이 제법 검술을 익혔다는 걸 알아챘다.
고수는 서로 알아차리는 법.
“저 달카드도 검술을 배웠군.”
“과연... 그런 거라면 괜찮겠네.”
요네르는 안심했다.
아래에 있던 여섯 명이 다치는 건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산은 지팡이를 잡고 돼지를 겨눴다.
“네놈의 움직임은 100% 읽고 있다.”
그리고 한 걸음.
“너는 내 예측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돼지!”
그리고 한 걸음.
정확하게 자로 그린 것처럼 똑같은 보폭이었다. 이한은 살짝 감탄했다.
‘인간 캠퍼스인가?’
제국의 검술은 마법만큼이나 종류가 다양했다.
강하고 무거운 검술, 빠르고 가벼운 검술, 변화가 많고 복잡한 검술...
그리고 알라르롱이 말하길, 지금 아산이 쓰는 것 같은 검술도 있다고 했다.
-복잡한 수학적 계산을 바탕으로, 보법을 밟을 때마다 자신의 위치를 중심으로 도형을 만드는 기하학적 검술이...
-오. 재밌어 보이는데 배울 수 있습니까?
-...예!? 그게 재밌어 보이신다고요!? 정신 나간 검술 같지 않습니까?
알라르롱은 그 검술을 몰라서 자기가 아는 검술만 가르쳐줬지만, 아산이 지팡이를 잡고 움직이는 걸 보니 그 생각이 났다.
철두철미하다!
-■■■!
아산이 보법을 밟으면서 돼지를 도발하자, 돼지도 성질이 난 모양이었다.
사납게 울으며 아산에게 달려들었다.
아산은 마치 투우를 하듯이 옆으로 비켜서면서 돼지의 옆구리를 지팡이로 사납게 찔렀다.
“하!”
-■!
쾅!
그리고 아산이 날아갔다.
성난 돼지가 급브레이크를 밟은 다음 옆으로 몸통을 날린 것이다.
“......”
“......”
정통으로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 아산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큭. 내 계산이 틀렸군...”
“...그냥 검술만 열심히 배운 놈이었군...”
이한은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검술은 열심히 배웠는데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자세는 괜찮은데 덤비는 돼지 상대로 저렇게 예측을 못하고 날아가지!
“도와주자.”
“!”
이한의 말에 닐리아는 놀랐다.
설마 저 상황에서 도와주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게 귀족의 품격...?’
입만 살아 있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직접 자기가 위험 상황에서 솔선수범해서 나서는 모습.
마치 이야기에서나 본 것 같은 귀족 같았다. 닐리아는 아주 조금 감동했다.
“도와주고 나면 앞으로 다른 수업들에서 부탁을 할 수 있겠지. 시험이나 과제도. 황녀의 인맥이라면 더더욱.”
“......”
닐리아는 감동이 사라졌다.
야 이 속물아...!
*    *    *
아덴아르트는 뒤를 향해 손짓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그 뜻은 명백했다.
남아 있던 네 명의 학생들은 허겁지겁 아덴아르트 뒤에 숨었다.
딱히 숨는다고 숨겨지진 않겠지만...
아덴아르트는 갑자기 고독함을 느꼈다.
비키라고 말한 건 그녀였지만 이 상황이 기쁘진 않았다.
하지만 이것 또한 해내야 할 임무일 뿐.
이제까지 완벽하게 해내왔던 다른 일들처럼, 아덴아르트는 이 돼지 또한 완벽하게 처리할 생각이었다.
‘호흡을 읽고. 돌진하면...’
빡!
굉음과 함께 돼지가 옆으로 나뒹굴었다.
“?!??!”
그리고 이한이 놈의 뒤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타났다.
“다행히 안 들켰군.”
“역풍을 타고 접근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게 알겠어?”
“그래. 사냥꾼의 지혜는 대단하군.”
“...연금술 수업을 계속 들으면 그 지혜를 더 깊게 할 수 있을지도?”
“아니. 그건 싫다.”
“......”
이한은 이미 마음을 굳힌 뒤였다.
연금술 싫어!
‘강의실 안에서 살겠다.’
아덴아르트는 잠시 굳어 있다가, 곧 감정을 회복하고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워다나즈.”
“별 것 아닙니다. 황녀님.”
옆에서 듣고 있던 닐리아가 의아하다는 듯이 속삭였다.
-왜 존댓말을 해?
-그러게 말이다. 나도 분위기에 휩쓸렸군.
다들 동년배고 학교의 규칙도 있는 만큼 신분에 상관없이 반말이 평범했지만, 황녀가 저렇게 말하니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쓰게 됐다.
“참.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아덴아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적 받기 좋은 강의가 있으면 추천 좀 해주십시오.”
황녀는 이한보다 인맥이 넓은 만큼 귀에 들어온 지식도 많을 것이다.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
물론 아덴아르트 입장에서는 살짝 정신이 아득해지는 소리였다.
이 워다나즈 가문의 마법사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설마 강의를 날로 먹고 싶어서 물어보는 건 아닐 테고, 다른 뜻이 있는 걸까?
“성적 받기 좋은 강의는 내가 알고 있다!”
뒤에서 어디서 들어본 드워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한은 갑자기 오싹한 불길함을 느꼈다.
마치 예전 대학원 교수님을 만났을 때처럼...
탁-
급히 비켜서려는 이한의 옷깃을 드워프 교수, 우레걸음이 붙잡았다.
그리고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바로 연금술 강의다. 워다나즈.”
“......”
010 화
“그렇습니까. 교수님.”
이한은 감정을 표정에 내보이지 않았다.
미친 교수들을 상대한 게 하루이틀이 아닌데 애송이처럼 그러진 않는 것이다.
“확실히 연금술 강의는 열정과 애정만 있다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강의 끝나면 다시는 듣지 말아야겠군.’
“역시 그렇게 생각했냐?”
우레걸음은 흐뭇한 표정으로 코밑을 쓱 훔쳤다.
“그럼 들어라.”
“...제가 아직 다른 강의를 못 들어봐서...”
“아. 됐고. 들으라고. 다른 강의가 이것보다 더 낫진 않을 거 아니냐.”
“아니 다 들어보고...”
“아니야! 넌 들어야 해!”
이한은 슬슬 잘못 걸렸다는 감정을 느꼈다.
옆에 있는 다른 학생들은 질투심 섞인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워다나즈 가문...
-대단한 재능이야...
‘날 더 빡치게 하는군.’
우레걸음 교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만 해야겠군. 불운하게도 다른 곳으로 간 그룹은 돼지를 못 만났으니.”
“......”
“...교수님. 설마 돼지를 일부러 만나게 하신 겁니까?”
학생 중 한 명이 경악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말이 돼지였지 저건 숫제 몬스터나 마찬가지였다.
재수 없었으면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파열되어서 죽을 수도 있었다.
우레걸음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 설마 약초만 캐오게 시켰겠나? 당연히 약초를 캐오면서 겪을 수 있는 상황도 마주쳐봐야지.”
“그... 그런...”
“과연 그렇군요. 이봐. 교수님께서 설마 아무 대비도 안 하시고 보냈겠어? 아마 우리 뒤를 계속 쫓아오셨을 거야.”
“아아...”
학생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하자 다들 납득했다.
확실히...
“아닌데? 내가 너희를 왜 따라가겠나?”
드워프 교수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여기 온 건 돼지가 쓰러져서 온 거다.”
“그... 그러다 크게 사고가 나면요?!”
“그럼 연금술의 재능이 없는 거겠지.”
“......”
“......”
이한은 여기 모인 학생들이 보내는 마음의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개■끼가...!’
“잡든, 피하든, 도망치든, 숨든, 온갖 돌발 상황을 처리하는 것이 연금술사의 재능이다. 무쇠대가리들아. 알겠나?”
“예!”
“저... 독오초는 그럼 필요 없나요?”
요네르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서 물었다. 우레걸음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독오초를 찾았다고?”
“예.”
“저런. 진짜 찾을 줄은 몰랐는데. 너도 합격이다! 자. 여기로 와라. 너도 무조건 들어야겠군.”
“......”
요네르는 얼떨결에 끌려왔다.
“저, 제가 혼자 찾은 게 아닌데요. 저기 닐리아도 같이 찾았어요.”
“그래? 너도 합격이다! 이리 와라!”
우레걸음은 이번에는 닐리아를 끌어당겼다. 닐리아는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여기 워다나즈도...”
“넌 정말 정말 들어야겠구나!”
“......”
이한은 반쯤 포기했다.
이쯤 되면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조졌군.’
아무리 수업을 안 들어도 교수한테 찍혀서 좋을 게 없는 법.
여기서 안 들었다가는 이 드워프 교수가 다른 강의실까지 찾아올지도 몰랐다.
“...최선을 다해 듣겠습니다. 연금술이 제 꿈이었습니다!”
“녀석...!”
우레걸음은 씩 웃었다. 이한의 감정 변화를 읽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신입생들 중 가장 정신적으로 성숙한 건 이한이었다.
분명 연금술 수업을 별로 듣고 싶어하지 않았는데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빠르게 받아들이고 태도를 바꾸는 저 모습.
귀족 가문 출신들은 자신의 속마음을 잘 숨기질 못했다.
평생 자기 감정 숨길 일이 없었으니, 저런 식으로 참는 연습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이한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너무 아쉬워할 것 없다. 연금술 강의에는 특권이 있거든.”
우레걸음은 이한을 달래기로 마음먹었다.
제자 구하기 힘든 세상이었다.
학생들이 강의를 보고 평가하는 것처럼, 교수들도 학생을 평가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제자가 있으면 지금 우레걸음처럼 꽉 붙들어 놔야 했다.
하지만 억지로 붙들기만 하면 역효과가 나서 탈주할 수도 있었다.
가장 좋은 건 당근이었다.
“무슨 특권 말입니까?”
“숲 근처에 내 오두막이 있다. 원래 평소에는 접근하지 못하게 하지만, 너는 돼지를 잡고 독오초까지 구했으니 특혜로 이번 학기 동안은 마음대로 접근하게 해주마.”
“...??”
이한은 뭔 개소린가 싶었다.
교수 집에 놀러오는 특권이라니.
‘청소를 하는 특권, 분리수거를 하는 특권, 노예짓을 하는 특권을 누리란 소린가?’
“...아. 내가 설명이 너무 적었군.”
이한의 눈빛을 보고 우레걸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 챘다. 드워프 교수는 급히 말을 덧붙였다.
“무쇠대가리들이 가장 원하는 게 뭐인 줄 아나?”
“학점 받기 쉬운 강의 아닙니까?”
“...너 정말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 맞나?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정답은 먹을 거다. 지금이야 안색이 나쁜 정도지만, 일주일만 더 지나면 서로 잡아먹으려고 할 걸.”
“......”
우레걸음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여기 모인 학생들 중 80% 이상이 잘 먹고 잘 살던 이들.
그런 학생들을 받아놓고 딱딱한 검은 빵과 차갑게 식은 주먹밥만 주면 당연히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 오두막에는 숲에서 잡은 고기와 생선, 내가 아는 비밀 장소에서 캐낸 향신료와 채소가 있단 말이지.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
이한은 그제야 깨달았다.
일종의 뷔페 이용권!
“교수님!”
“이놈. 점점 마음에 드는구나.”
두 사제는 서로 손을 붙잡고 뜨거운 우정을 교환했다.
*    *    *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다음 강의를 찾으러 움직이는 사이(몇몇 학생들은 ‘다시는 듣나 봐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한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요네르와 닐리아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안 가?”
“돼지 해체할 건데.”
“......”
“......”
“훌륭하구나!”
우레걸음 혼자 감탄했다.
신입생들 중 이 정도로 빠르게 적응하는 놈은 정말 처음 봤던 것이다.
“교수님. 이거 먹을 수 있는 거 맞습니까?”
“흉폭해지기만 했지 먹는 데에는 아무 문제없다.”
“그렇군요. 혹시 해체하고 훈제할 수 있도록 장비 좀 빌려주실 수 있으신지...?”
“이놈. 연금술이 벌써부터 좋아지고 있지?”
“예. 연금술이 정말 너무 좋습니다.”
현실에 적응한 이한은 연금술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교수 말이 사실이라면 가만히 기다릴 문제가 아니다.’
생각해보니 힌트는 있었다.
입학했을 때부터 교장이 말한 ‘답은 이 학교에 있으니 찾아라’부터 시작해서, 아무것도 주지 않고 외출도 금지하는 규칙까지.
신입생들이 알아서 먹을 것 찾고 버텨야 한다!
‘뭐 이딴 학교가 다 있나 싶지만... 솔직히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다.’
사람 죽어나가도 모를 학교인데 알아서 자기가 먹을 거 챙기는 것 정도는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이한은 돼지를 한 마리씩 짊어지고 개울가로 갔다.
피를 빼고 내장을 해체하려면 물이 있는 곳이 좋았으니까.
“도와줄게.”
요네르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가왔다.
“괜찮겠어?”
“앞으로 이것보다 더한 재료들도 많이 다뤄야 할 텐데 뭘. 대신 고기 좀 나눠 줄 거지?”
“......”
이한은 요네르의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닐리아는 뒤에 있다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진짜 둘이 해체할 거야!?”
“그래.”
“아니... 왜 학교에서...”
“배 안 고파?”
“...좋아! 도와줄게!”
이한도 알라르롱과 함께하며 사냥하는 법과 해체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고, 닐리아는 말 그대로 전문가였다.
거기에 요네르도 재료 다루는 걸 몇 번이고 연습한 만큼 아마추어는 아니었다.
“장비 여기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다.”
우레걸음은 필요한 장비를 가져다줬다. 눈빛에는 ‘어디 어떻게 하나 한 번 보자’는 흥미가 가득했다.
이한은 단검을 뽑아들고 가죽을 벗겼다.
서걱-
‘잘하잖아?’
닐리아는 솔직히 놀랐다.
대귀족 출신인 이한이 닐리아 못지않게 잘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셋은 열심히 힘을 합쳐 가죽을 벗긴 다음 살코기를 분류해서 나뭇가지에 걸어놓았다.
워낙 덩치가 큰 만큼 먹을 만한 부분도 많았지만, 이한은 내장도 버리지 않았다.
‘내장은 소시지로 만들어야겠군.’
이 지옥 같은 1 학년 생활이 얼마나 갈지 모르는 만큼 식료품은 많이 만들수록 좋았다.
“훈제를 하려는 건가?”
“예.”
“제법...!”
우레걸음은 감탄했다.
이 많은 고기를 다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아무리 날씨가 선선하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지나면 상할 것이다.
하지만 고기에 연기를 쏘여서 훈제를 한다면 훨씬 오래갔다. 신입생들한테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교수님. 이 나무토막 좀 쓰겠습니다.”
“잠... 잠깐.”
이한이 오두막 근처에 쌓아 놓은 나무에 손을 대자 우레걸음이 당황했다.
훈제도 아무 나무로 하는 게 아니었다. 연기로 하는 만큼 향이 좋은 나무일수록 좋았다.
‘애써 준비해 놓은 고급 사과나무 장작인데...’
좋은 걸 알아보는 재주가 있는지 이한은 그걸 또 날름 가져갔다. 우레걸음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닐리아. 이 정도면 될까?”
“충분하지. 차고 넘쳐.”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고기 냄새가 자글자글 코를 찔렀다. 열심히 작업하는 셋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꼬르륵-
이한은 시선을 돌렸다. 요네르는 아니었고, 닐리아도 아니었다.
드워프 교수였다.
“...시장하십니까?”
“그래. 출출하긴 하군.”
이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수가 배고프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대학원생.
‘고기도 많으니 좀 구워야겠군.’
“교수님. 빵하고 버터 좀...”
“...적당히 가져가라...”
우레걸음은 투덜거렸지만 자기도 먹는 식사인 만큼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이한은 무쇠 프라이팬 위에 고기를 올렸다. 고기를 올릴 때도 그냥 올리지 않았다. 소금과 후추를 사용해 제대로 간을 했다.
주물럭, 주물럭-
“뭐하고 있는 거냐?”
“밑작업 중입니다.”
“?”
우레걸음은 이한이 참 특이하게도 준비한다 싶었다.
그냥 구우면 될 것을...
그리고도 이한은 멈추지 않았다. 고기에 칼집을 내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 다음 고기를 올렸다.
치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기 익는 냄새가 물씬 퍼졌다. 이한은 오두막 옆에서 갖고 온 야채도 프라이팬 위에 얹었다.
“왜 멈추는 거냐??”
이한이 굽다가 멈추자 드워프 교수는 당황했다. 아직 덜 익은 것이다.
“이렇게 버터를 넣어주면 더 좋습니다.”
“지금 연금술에 재능이 없다고 말하려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우레걸음은 수상쩍다는 듯이 시선을 던졌다. 그런다고 빼줄 생각 없었던 것이다.
“드셔보시고 그런 소리 하시죠.”
고기가 노릇노릇 구워지자 제법 그럴듯한 식사가 완성되었다.
돼지고기 스테이크와 야채구이. 그리고 오두막에서 갖고 나온 두툼한 빵과 버터.
갓 구운 빵은 아니었지만 검은 빵만 먹은 신입생들에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와구와구-
갑자기 조용해졌다.
넷 모두 먹느라 정신이 팔린 것이다.
가장 잘 먹는 건 우레걸음이었다.
드워프 교수는 빵을 한 움큼 뜯어내서 구운 돼지고기 한 덩이를 큼지막하게 사이에 끼우더니 호쾌하게 먹었다.
그리고는 혼자 오두막으로 걸어가더니 잼이 담긴 통을 들고 나왔다.
“......”
“......”
“...조금씩 나눠줄 테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무쇠대가리들아.”
011 화
단 것은 사람의 정신을 회복시켜주고 영혼을 회복시켜줬다.
우레걸음 교수가 갖고 온 잼들이 바로 그랬다.
딸기 잼, 라즈베리 잼, 무화과 잼 등등을 빵에 듬뿍 발라서 먹은 학생들은 술에 취한 표정을 지었다.
‘쯧쯧.’
드워프 교수는 새삼 불쌍하다는 듯이 1 학년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이 마법학교의 교수인 만큼 신입생들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상급생들은 외출이나 가능하지 신입생들은 이 안에서 버텨야 했으니...
“지금 많이 먹어둬라. 한동안 못 먹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교수님!”
지글지글 잘 익은 두꺼운 고기와 달콤한 잼과 버터를 바른 빵들.
거기에 샘물 졸졸 흐르는 풍경과 마음 맞는 친구들까지.
모두 즐겁게 먹고 마셨다.
신입생들이 배부르게 먹고 가쁜 숨을 내쉬는 동안, 우레걸음 교수는 손수 뒷정리에 들어갔다.
“...잠깐. 왜 잼 통이 하나 부족하지?”
“죄송합니다. 교수님.”
“......”
이한이 망토 사이에서 잼 통을 뻔뻔하게 꺼내는 모습에, 우레걸음은 할 말을 잃었다.
‘이번 신입생들은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    *    *
마력으로 커진 돼지의 덩치는 생각보다 대단했다.
배부르게 먹고 최대한 훈제를 했는데도 고기가 많이 남았다.
심지어 우레걸음 교수가 오두막에 걸어놓겠다고 몇 덩이 챙겨갔는데도.
“이걸 어쩌지?”
“교수님. 혹시 이걸 보관할 방법이 있습니까?”
이한은 우레걸음을 보며 물었다. 우레걸음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있지.”
“!”
“냉기 계열 마법을 사용해서 얼리는 거다.”
“......”
“......”
신입생들은 우레걸음을 노려보았다.
지금 <빛 생성>도 제대로 시전 못해서 다음 시간 때 다시 트롤 교수와 연습해야 하는데 고기를 꽁꽁 얼릴 정도의 냉기 마법을 어떻게 쓴단 말인가.
“그거 말고는 없습니까?”
“있지.”
“뭡니까?”
“냉기 정령을 불러내서 도움을 받는 거다. 참고로 난 둘 다 쓸 수 있지.”
“......”
“......”
신입생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는 뜻을 같이했다.
‘그냥 저 교수한테 묻지 말자.’
‘그래.’
우레걸음도 그걸 눈치 챘는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너희들 수준에서 여기 있는 고기들을 다 보존할 수는 없을 거다.”
“교수님께서 마법을 걸어주시면...”
닐리아의 말에 드워프 교수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건 공평하지 않지.”
“으음... 혹시 친구들한테 나눠줘도 돼?”
닐리아는 둘을 보며 물었다. 이한과 요네르도 같이 잡은 만큼 허락이 필요했던 것이다.
“네 몫이니까 네 마음대로 해도 괜찮겠지.”
“맞아.”
“고, 고마워.”
닐리아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둘의 배려에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같은 탑 학생들과 아직 친해지지 못했지만, 지금 굶주리고 허기진 친구들한테 이런 고기 선물은 친해지기 좋은 기회가 되리라.
산맥에서도 그랬듯이 ‘배고플 때 음식을 나눠주는 자가 네 친구다’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닐리아는 멋쩍음을 숨기기 위해 제안했다.
“너희들도 나눠주는 건 어때?”
“오... 돈 받고?”
“그거 정말 괜찮은데?”
이한과 요네르는 닐리아의 제안에 감탄했다. 닐리아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난 돈 이야기는 안 했...”
“확실히. 푸른 용의 탑에 들어온 학생들은 대부분 돈이 많겠지. 이런 친구들한테 음식을 베풀어주고 돈을 조금 받는다고 해서 안 될 건 없을 거야.”
“그래! 우리는 친구들한테 친절을 베풀어주는 거야.”
요네르는 이한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귀족 자제들은 ‘체면 없게 그게 무슨 짓이냐’라고 반응할 수도 있었지만, 하필이면 여기 모여 있는 두 귀족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들이었다.
<개처럼 벌어서 잘 먹고 잘 살자>의 이한.
<연금술 공방을 위해 동전 하나도 저축하자>의 요네르.
둘은 뜻이 통한 표정으로 악수를 했다.
물론 제정신인 사람도 있었다. 닐리아는 믿기 힘들다는 듯이 물었다.
“...지금 진짜 친구들한테 돈을 받고 음식을 팔려는 거야?”
“너도 하게?”
“아니야!”
이한의 질문에 닐리아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게 좀... 좀 그렇지 않아?!”
“닐리아. 잘 생각해봐. 아무 대가 없이 그냥 받기만 하면 친구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하겠어.”
“맞아. 우리는 친구들을 배려해주는 거야.”
“......”
두 귀족이 제법 그럴듯하게 귀족의 자존심을 말하고 있었지만, 닐리아는 이제 속지 않았다.
“...난 그냥 친구들한테 선물할 거야.”
“마음대로 해. 닐리아. 하지만 후회할지도 몰라.”
“맞아. 닐리아. 우정은 사라질지 몰라도 금화는 남는다구.”
“걔네들이 정말 너희를 친구라고 생각할까?”
“물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어. 바로 금화를...”
“안 들을 거니까 둘 다 조용히 해!”
오두막 앞 의자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던 우레걸음 교수는 셋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세 명, 앞으로 몰려다니면 골치 좀 썩이겠군.’
신입생들은 제국의 전역에서 모인 만큼 온갖 종류의 학생들이 다 있었다.
지금 저 셋은 재능도 있고, 열정도 있는 뛰어난 인재들이었지만...
그걸 떠나서 ‘사고뭉치’의 관상이 보였다.
*    *    *
오만한 푸른 용의 탑.
에인로가드 본관에서 널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기숙사는, 정문을 지나쳐 나오면 정령이 깃든 것 같은 싱그러운 숲의 향기가 신입생들을 반겼다.
메마르고 척박한 식사에 찌든 학생들도 이 공기를 들이마시면 일시적으로 표정이 부드러워질 정도로.
“...?”
그런데 오늘의 공기는 좀 달랐다.
치이익, 치익-
마치 고기 굽는 것 같은 식욕을 당기게 하는 냄새가 났던 것이다.
“이야. 다들 식사는 잘 했어?”
“정말 좋은 저녁이야!”
“...???”
“????”
나온 학생들은 키 큰 남학생과 붉은 머리칼의 여학생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모습에 당황했다.
워다나즈와 메이킨 가문의 신입생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건 고기집게였다.
타닥, 타닥-
이한은 철판 밑에 설치된 모닥불에 장작을 넣었다. 위에 넓적하게 자른 고기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그 소리와 냄새에, 누군가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꿀꺽-
“자. 다들 와서 먹어. 너희들을 위해서 잡아온 거니까.”
“정... 정말?! 그게 정말이야??”
신입생들은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각자 내로라하는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아직 소년소녀들에 불과했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기 직전인 상황에서 이런 바베큐 파티는 너무 유혹적이었다.
“그래. 대신 제국 은화 하나씩만 내.”
“제국 은화 하나?”
밖의 마을이라면 이런 고기구이 같은 건 동전 두세개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고립되어 있는 학교 안.
3 배 넘게 값을 받아도 경쟁자가 없었다.
“그거면 돼?! 너무 싼 거 아니야?”
“하하. 우리가 너희들 상대로 돈을 벌려고 이러는 거겠어? 다만 아무것도 내지 않고 그냥 먹으면 너희들의 마음이 불편할까봐 이러는 거지.”
“맞아맞아.”
이한과 요네르는 친절한 미소와 함께 학생들에게 말했다.
학생들은 감동했다.
역시 대가문 출신의 귀족들은 달라도 뭔가 달랐다.
이렇게 관대할 줄이야.
다들 배고프고 힘든 상황이라 먹을 게 생기면 자기 혼자 먹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이 둘은 이렇게 철판에 모닥불까지 준비해서 친구들한테 나눠주려고 한 것이다!
“워다나즈...!”
“메이킨...!”
“자자. 고기가 타겠어. 빨리 내고 먹자고.”
“잠깐, 은화가 없는데.”
“나도.”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멈칫했다. 들어올 때 맨몸에 가깝게 들어왔는데 돈이라고 있을 리 없었다.
이한은 걱정 말라는 표정으로 종이와 깃털 펜을 내밀었다.
“여기에 액수와 이름을 쓰고 사인을 하면 되지. 귀찮게 낼 필요 없이 한 번에 정산하면 되잖아?”
“그런...! 워다나즈, 넌 정말 천재야!”
“이렇게 편리한 방법이!”
슥슥슥-
굶주림에 홀린 학생들은 지능이 조금 내려가 있었다.
그들은 허겁지겁 사인하고서 철판 앞으로 달려갔다.
와구와구쩝쩝!
이한은 종이를 둘둘 말아서 품속에 챙겨 넣은 뒤 흐뭇하게 광경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장사가 될 줄은 몰랐군.’
누군가는 저렇게까지 해서 푼돈을 벌어야 하냐고 묻겠지만, 원래 돈이란 건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했다.
게다가 은화 하나 정도면 푼돈도 아니었다. 땅을 파도 동전 한 푼 나오지 않는데 하물며 은화라면야.
이렇게 신입생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한의 주머니도 두둑해질 것이다.
“팔리엑. 식은 주먹밥을 억지로 먹을 필요 없이 여기 철판 위에 고기 기름을 두르고 밥을 볶으면...”
“넌... 넌 정말 천재야? 워다나즈?”
“생활의 지혜일 뿐이지.”
이한은 학생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렇게 은화를 받았는데 이 정도는 서비스로 해줄 수 있었다.
누가 뺏어라도 갈까봐 익은 고기를 입에 집어넣는 학생들은, 만약 1 학년 대표를 뽑으라고 한다면 만장일치로 이한을 뽑을 정도로 감격한 표정이었다.
“워다나즈! 워다나즈! 워다나즈!”
“메이킨! 메이킨! 메이킨!”
귀족 학생들은 우물거리는 입으로 둘의 가문을 환호했다.
그 환호성에 뒤늦게 내려온 가이난도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뭐, 뭐... 무슨 일이야??”
“아. 가이난도. 왔어? 고기 먹을래?”
“뭐!? 고기가 있어?? 진짜??”
가이난도는 상황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뛰쳐나가려고 했다.
탁-
그러나 가이난도는 그럴 수 없었다. 이한이 어깨를 잡은 것이다.
“왜?!”
“은화 하나.”
“...돈... 돈 받는 거야?”
“공짜로 주면 다들 자존심이 상할 테니까.”
“그건 그렇지. 근데 난 지금 돈이 없는데...”
“뭘. 여기다가 액수와 이름을 쓰고 사인하면 되지.”
“이한...!”
가이난도는 감동 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친절할 줄이야.
역시 진정한 우정은 학교에 있었다.
*    *    *
갑작스러운 바베큐 파티로 인해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혈색이 좀 좋아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루한 강의가 즐거워지진 않았다.
<기초 마법 인성 교육>이란 필수강의 제목을 본 학생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인성 교육이라니. 대체 우리를 뭘로 보고?”
“이런 건 하층민들이나 배워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처럼 명예를 아는 귀족들이 이런 걸 굳이 배워야 해?”
“그러게 말이야.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이 자식들은 불평도 재수없게 하는 재주가 있네.’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만 강의실에 있어서 그렇지, 다른 기숙사 학생들이 있다면 싸움 좀 났을 소리를 태연히 하고 있었다.
놀라운 건 저게 악의가 있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매우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개소리!
모두 좋은 아침이란다.
“......”
“......”
머리에 때려 박는 텔레파시 마법에, 모두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마법 때문이 아니었다. 이 목소리가 매우 낯익었던 것이다.
‘설마...’
안녕! 무쇠대가리들아!
“......”
강의실 문이 아닌, 천장에서 ‘뿅’하고 거대한 해골이 나타났다.
이 학원의 교장, 오수 고나달테스였다.
새로운 학원의 생활은 참 즐겁지? 가문의 울타리 안에서만 지내다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것저것 해보는 생활이 참으로 두근두근 거리지?
물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리치 교장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놀라워했다.
이것 봐라. 뭘 먹었나보군. 생각보다 빠른데? 한 달은 넘게 지나야 움직일 줄 알았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혹시 알아서 찾아 먹어야 했던 거였습니까?”
그래. 내가 알아서 하라고 말했잖나.
“그게 그 소리였습니까? 왜 우리가 이런 걸 해야 하는지 이해가...”
-침묵!
“읍읍!”
손을 든 학생의 목소리가 그대로 사라졌다. 리치 교장은 흐뭇하게 해골을 끄덕였다. 소름끼치는 달그락 소리가 났다.
012 화
어찌되었든 너희 무쇠대가리들이 빨리 깨닫다니 기쁘구나!
“......”
“......”
리치 교장의 칭찬에도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다. 이한은 누군가가 욕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푸른 용의 탑은 원래 가장 느린 편이다.’
그러나 의외로 리치 교장은 진심을 담아서 칭찬한 것이었다.
매해 새로운 기숙사에 새로운 학생들이 들어왔지만, 그 중 푸른 용의 탑이 가장 적응에 느린 편이었다.
가장 적응이 빠른 것은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
상인이나 평민, 혹은 빈민가 출신 학생들까지 들어오는 만큼 적응력이 남다른 것이다.
그 다음으로 빠른 건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었다.
아무래도 기사 가문 출신들이 많다보니 신체 능력이 좋고 험한 일에도 잘 버텼다.
그에 비해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대부분이 고위 귀족 가문 출신들.
험한 일을 해본 적도 없는 만큼 적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며칠도 안 되어서 이렇게 알아서 먹을 걸 구해서 챙겨먹다니.
솔직히 기특했다.
‘저 놈이 범인이렷다?’
리치 교장의 푸른 눈빛이 이한에게 꽂혔다.
언제나 대마법사의 직감은 틀리지 않는 법.
가끔 틀릴 때가 있으면 힘으로라도 맞게 만들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한은 다행이었다.
리치 교장이 처음 느낀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으니까.
‘좋은 마법사의 자질은 단순히 마력량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지...’
리치 교장은 이한의 마력량 때문에 이한을 높게 평가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평가 요소 중 하나였지만, 리치 교장은 다른 점을 더 인상 깊게 여겼다.
그 딱딱한 워다나즈 가문에서 저렇게 자유로운 놈이 나오다니.
‘자유로운 생각. 그게 바로 마법사의 길을 열어주는 동반자다.’
리치 교장이 여기 있는 학생들한테 알려주고 싶은 게 바로 그것이었다.
딱딱한 빵과 식은 밥을 먹이는 것도 그런 자유로운 생각을 키워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걸 보면서 즐기기도 했지만 아무튼 원래 목적은 그랬던 것이다.
‘왜 갑자기 등골이 서늘한지 모르겠군.’
이한은 갑자기 불길함을 느꼈다. 봄 날씨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서늘한 기분이었다.
*    *    *
“교장 선생님. 저희가 마법사로서 성장하기 위해 스스로 끼니를 해먹어야 한다는 건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이 인성 교육을 들어야 하는 건 어째서입니까?”
확실히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겁이 없었다.
고위 귀족 출신이다보니 리치 교장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것이다.
리치 교장은 해골을 달그락거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주 잘 말했다. 왜 인성 교육을 받아야 할 것 같으냐? 네가 말해봐라.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여기 출신 마법사들이 밖에서 사고를 치면 빌어먹을 황제 폐하께서 나한테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쩌렁쩌렁 울리는 리치 교장의 목소리에, 신입생들은 모두 귀를 막았다.
너희 선배들이! 밖에 나가서! 사고를 치지 않았다면 이럴 일도 없었겠지! 이 빌어먹을 무쇠대가리들아!!
“......”
“......”
이 인성 교육을 왜 하냐고?! 나중에 황제 폐하의 고관이 찾아와서 사건의 이유를 물을 때, 최소한 이렇게 인성 교육을 하고 있다고 변명을 해야 너희들이 싸잡혀서
처벌받지 않으니까 그렇다! 이 무쇠대가리 놈들아!! 충분한 대답이 되었느냐!?!
“예... 예!!”
질문을 던진 학생은 리치 교장의 기세에 압도되어서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마법사 놈들이란 기본적으로 언제 어떻게 개짓거리를 할지 모르는 놈들이다. 너희들은 아니라고 하지 마라. 그딴 거짓말은 나를 화나게 만들 뿐이니까. 나중에 외출이
허락되면 보게 될 거다. 너희 마법사 놈들이 얼마나 사고를 많이 치는지를! 책 펴라! 1 페이지를 읽는다!!
““나는 민간인들을 마법으로 위협하지 않겠습니다!””
한 번 더!
““나는 민간인들을 마법으로 위협하지 않겠습니다!””
이한은 따라서 외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효과가 정말 있나?’
오히려 이런 교육을 하면 마법사들이 더 사고를 칠 것 같은데...
*    *    *
모든 학생들이 인성 교육 강의가 지루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 예상은 빗나갔다.
인성 교육 강의는 예상보다 훨씬 더 지루했다.
“이게... 이게 필수로 들어야 하는 강의라니...”
“하도 많이 읽어서 목이 쉰 거 같아.”
자. 오늘 강의로 너희들의 텅 빈 무쇠대가리에도 선량한 마음이 자리 잡혔기를 바란다.
“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강의를 돕기 위해 두 명이 필요한데. 자원할 사람 있느냐?
리치 교장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목소리가 더 소름돋았다.
“......”
“......”
학생들은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리치 교장은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도 나오지 않으면 더 괴로울 텐데? 정말 끝까지 나오지 않을 셈이냐?
“제가 하겠습니다.”
손을 든 건 이한이었다. 리치 교장은 더 즐기지 못해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워다나즈의 무쇠대가리로구나. 일하는 걸 좋아하느냐?
“존경하는 교수님을 돕는다면 그것이 영광 아니겠습니까?”
“워다나즈...!”
“너란 녀석은 정말이지...”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진하게 감동 받은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어제는 황혼의 바비큐 파티로 학생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더니, 오늘은 같은 기숙사 학생들을 위해 앞에 나서고 있었다.
워다나즈 가문이 제국의 기둥이라는 괜한 말이 아니었다.
저 책임감을 보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게 상당히 얄밉구나. 하지만 좋다. 언제나 기회는 적극적인 녀석에게 찾아오니까.
이한은 자기 속셈이 리치 교장한테 들켰다는 걸 깨달았다.
우레걸음 교수한테서 배운 사실.
그것은 교수를 돕는 일이 의외로 남는 게 많다는 것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폐쇄된 공간 안에서는 교수에게 뭐라도 받을수록 좋았다.
그 상대가 미치광이 해골 리치라 하더라도 말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학점도 잘 받을 수 있겠지.’
“이... 이한. 미쳤어?”
가이난도는 경악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다른 학생이 가이난도에게 말했다.
“아무도 안 나섰으면 모두가 피해를 입었을 거야. 워다나즈는 미친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나선 거라고.”
“그, 그런... 그러면 나도...”
가이난도가 망설이면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여라 다리야!’
존귀해지기 위해서는 이런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어야 했다.
게다가 이한은 가이난도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내가 도와줘야...’
달카드 가문의 무쇠대가리구나. 하긴, 달카드 가문은 언제나 서류 작업에 능했지.
“칭찬 감사합니다.”
가이난도가 고민하는 사이 두 번째 사람이 나왔다.
아산 달카드.
달카드 가문 출신이자, 저번에 연금술 수업에서 난폭한 변이 돼지한테 맞고 날아간 소년이었다.
“?”
이한은 의아하다는 듯이 아산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아산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와 비슷한 걸 노리나?’
아산은 품위 있게 안경을 살짝 잡아 올리며 말했다.
“물론, 워다나즈 너라면 내가 왜 나섰는지 알고 있겠지.”
“...모르겠는데??”
이한은 황당해하며 말했다.
아산의 속마음을 그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뭐? 어째서?! 당연히 저번에 도와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 아니겠나?!”
아산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더 황당해했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 아아. 그거였군. 아니,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무슨 소리. 달카드 가문은 언제나 빚을 갚지.”
두 무쇠대가리들이 훈훈하게 대화를 나누는 걸 보니 기쁘긴 하지만, 지금 바로 해야 할 일이 있다.
“?”
다음 강의 때 친구들에게 나눠줄 수 있도록 이 안전수칙을 학생 숫자만큼 베껴서 써놓도록.
“......”
“......”
리치 교장의 말에 아산은 정신이 번쩍 든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
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교장 선생님의 마법 한 번이라면 여기 있는 종이에 저 글을 그대로 베끼는 건 손쉽지 않습니까? 저희가 직접 손으로 베끼는 건 비효율적이지
않습니까?”
안다. 그러니까 시키는 거지.
“......”
이한은 확실하게 보았다.
아산의 눈동자에서 살의가 솟구치는 것을!
*    *    *
-미안. 이한.
-도와주고 싶은데...
요네르나 가이난도, 그리고 다른 학생들은 미안해하며 나갔다.
도와주고 싶어도 리치 교장이 막았던 것이다.
두 명이면 됐지 뭘! 꺼져라!
그 결과 이한은 아산 달카드와 함께 빈 강의실에서 베껴 쓰기를 하는 꼴이 되었다.
“용납할 수 없다... 용납할 수 없다... 이런 비효율적인 짓을 시키다니...!”
‘얘 이러다가 망가지는 건 아니겠지?’
아산은 중얼거리며 분노의 펜놀림을 시전했다. 그 모습에 이한은 슬슬 걱정이 되었다.
사실 교장이 왜 이걸 시키는지는 알 것 같았다.
‘꼬우면 마법을 익혀서 하라 이거겠지.’
교장의 광기 어린 행동들은 사실 그 의도만 알면 의외로 파악하기 쉬웠다.
...문제는 실질적으로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아직 <빛 생성> 마법도 제대로 시전하지 못하는데 글자 쓰기 마법 같은 걸 어떻게 시전한단 말인가.
‘힌트 같은 것도 없나?’
이한은 리치 교장에게 남은 일말의 양심을 믿으며 빈 강의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워다나즈? 뭐하고 있나?”
아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워다나즈가 강의실 구석구석을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뭐 챙길 만한 게 없나 보고 있는데.”
“그런 짓을 해도 되나?”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
“그건 도둑질 같은데...”
“여기는 리치 교장의 강의실이야.”
“...가끔은 도둑질도 괜찮을 거 같군.”
아산은 벌떡 일어서서 이한을 도우러 달려왔다.
‘사람 망가지는 건 정말 순식간이군.’
귀족 가문이든 뭐든 간에 이 학교에 들어오면 사람이 좀...
“뭐라도 있나?”
“글쎄. 여기 종이가 좀 있군. 언제 쓸지 모르니까 챙겨놓자. 잠깐. 열쇠가 있는데.”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나타났다.
어디에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한은 일단 챙겨 놨다. 아산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디 열쇠인지 아는 건가?”
“아니. 하지만 일단 챙겨놔야 나중에 쓸 수 있으니까.”
“과연... 합리적이군.”
아산은 감탄했다. 확실히 논리적이었다.
탁-
서랍의 마지막 칸을 열자, 갑자기 마력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서랍을 열었다는 건, 너희들이 멍청하게 팔목이 부러져라 쓰는 것을 멈추고 생각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거겠지. 부디 그게 최대한 이른 시간이길 빈다! 이 멍청한
노동을 오래 했을수록 한심하고 불쌍할 테니까.
“......”
“......”
여기에 1 서클 마법인 <하급 조종>이 있다. 이걸 가지고 가서 배워라. 빠르게 배우는 게 좋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한 학기 내내 손으로 글씨를 쓰게 될 테니.
교장의 숨겨진 의도.
그 의도를 깨달은 학생들은 감동을 받...
...지 않았다. 
“워다나즈.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마법을 왜 이렇게 가르치려는 거지? 이것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방법이 많을 텐데!”
아산은 분통이 터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마법은 뛰어난 스승이 하나하나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것이었지, 이렇게 던져놓고 살아남기 위해 배우는 게 아니었다.
뭐 이런 방법이 있단 말인가!
아산은 열기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워다나즈. 너라면 이해하겠지. 같이 교장 선생님에게 항의하자. 우리 둘이 진지하게 항의한다면 그 교장도 생각을 바꿀지 몰라. ...워다나즈??”
“음?”
이한은 고개를 돌렸다.
이한은 이미 마법을 배우려고 준비 중이었던 것이다.
013 화
“워다나즈...”
“아니, 마법 배우러 학교 왔잖아.”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변명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아산의 눈빛이 배신감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하긴... 마법을 배우러 오긴 했지.”
“그리고 잘 생각해봐. 그 교장이 우리 둘이 설득한다고 설득될 것 같나?”
“그것도 그렇긴 하지.”
아산은 납득했다.
확실히 리치 교장을 설득할 수 있다는 건 아산이 보기에도 좀 많이 힘들어보였다.
“내 생각에도 95% 확률로 실패할 것 같긴 해.”
“성공 확률이 5%나 된다는 게 더 놀라운데...”
어쨌든 아산이 납득한 것 같자, 이한은 <하급 조종> 마법 설명이 쓰여 있는 종이를 집중해서 읽었다.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의지와 주문과 동작.
-<하급 조종>에 쓰기 좋은 주문은 다음과 같다. 움직여라, 움직여, 조종...
“움직여라. 움직여라. 흠. 이렇게인가.”
이한은 입에 착 맞는 주문을 고른 다음 동작을 따라해 보았다.
지팡이를 시계 방향으로 가볍게 휘두르는 동작이었지만, 매번 마력이 다르게 모였다.
‘마법이 정말... 보통 어려운 게 아니야.’
이한은 새삼 마법이 얼마나 어려운 학문인지 느꼈다.
아주 간단한 마법조차도 익히려면 고도의 집중과 연습이 필요했다.
의지를 집중해서 그 마법을 시전하겠다는 일념을 불태우면서, 주문을 외워서 마력을 더욱 증폭시키고, 동시에 모인 마력을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움직여야 했다.
마치 외발자전거를 타면서 양손으로 각각 접시를 돌리는 묘기를 펼쳐야 하는 기분이었다.
“워다나즈. 그런데 킴 교수님께서 강의실 밖에서 마법 연습 하지 말라고 하셨잖아?”
“하지만 교장은 하라고 했지. 교장이 더 위잖아.”
“과연...” 
아산은 다시 한 번 납득했다.
물론 납득한다고 없던 마력량이 갑자기 생겨나는 건 아니었다.
4 번 정도 시도하고 아산은 비틀거리며 옆으로 드러누웠다.
“으윽... 미안하다. 워다나즈. 갑자기 멀미가... 우윽.”
“그럴 수도 있지. 누워 있어라.”
그러거나 말거나 이한은 <하급 조종>에 몰두했다.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지팡이 끝에 모인 마력이 ‘팟’하고 쏘아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목표는 깃털 펜.
마법을 맞은 깃털 펜이 움찔하거나 부르르 떨었다.
‘동작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이한의 무기는 압도적인 마력량.
다른 사람들은 몇 번 주문을 쓰고 지쳐서 쉬는 동안에도 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문을 연습할 수 있었다.
탁-
이한은 아예 거울을 앞에다가 가져다 놓고 주문을 쓰기 시작했다. 동작의 차이를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조금 덜 휘두르는 건가? 조금 덜 휘둘러보자. 좀 괜찮아진 것 같은데. 그 다음은 이쪽인가?’
“워다나즈. 괜찮은 거 맞냐?”
누워 있던 아산이 끙끙대며 물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워다나즈 가문... 끄응. 어지러워서 머리가 안 돌아가는데...”
“움직여라!”
순간 이한은 자신의 정신이 깃털 펜과 연동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제 3 의 손이 쭉 뻗어져 나와 깃털을 붙잡은 느낌.
아까까지 움찔하거나 부르르 떨기만 하던 깃털 펜이 살며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이걸 집중해서 조종하면 됐다.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팡! 작게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깃털 펜이 마치 다트처럼 쏘아져나갔다.
그리고는 열려 있는 창문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
“뭐... 뭐 한 거야?”
“...깃털 펜이 날아갔는데??”
“대... 대단한데 워다나즈!? 마법에 성공한 거야?!”
“아니, 아직 성공한 건 아니지.”
<하급 조종>은 염동력 계열의 1 서클 마법으로, 작고 가벼운 물건을 섬세하게 조종하는 마법이었다.
...이한이 아직 마법에 대해서 잘 모르긴 하지만, 방금 한 것처럼 깃털 펜을 쏘아 날리는 건 확실히 실패였다.
‘이 마법은 넘어야 할 장애물이 두 가지였군.’
<하급 조종>은 동작을 정확하게 맞춰서 주문을 성공시킨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 다음에도 집중해서 물체를 조종해야 했다.
이한은 첫 번째는 성공했지만, 두 번째는 아직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괜찮겠지. 주문을 성공했으니 조종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팡!
팡!
팡팡팡팡팡팡팡팡!
“......”
아산 달카드는 경악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옆의 벽에 깃털 펜이 날아와 박힌 것이다.
“워... 워다나즈...”
“...미안하다.”
이한은 방금 자신이 가진 자신감을 후회했다.
놀랍게도 세세한 조종이 도저히 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라고 생각하면 그 순간 깃털 펜은 쏜살같이 날아가버렸다.
거의 암기 수준!
‘설마... 설마 마력 때문은 아니겠지.’
이한은 가르시아 킴 교수가 말해줬던 게 떠올랐다.
보통 사람들보다 매우매우매우 마력이 많은 탓에 마법 시전에 좀 불편함이 있을 거라고 했는데...
‘한 번만 더 해보자.’
달칵-
자, 오늘치는 열심히 썼느냐? 기뻐해도 좋다! 남은 건 내가 마법으로 써줄 테니까.
문이 열리고 리치 교장이 등장했다.
핑!
그리고 이한이 쏘아낸 깃털 펜이 리치 교장의 이마를 정확히 노리고 날아갔다.
“워다나즈...!”
그 순간, 이한은 아산 달카드에게 영웅이 되었다.
신입생이 교장을 저격하다니.
정말 너무 멋지다!
*    *    *
정말 놀랍게도 리치 교장은 화를 내지 않았다.
생각보다 정말 빨리 찾았군. 아주 조금 괜찮은 무쇠대가리인 걸 인정해주마.
“앗. 그러면 앞으로 이 무의미한 필기는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아니. 네놈들이 마법을 익히지 못한다면 계속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하게 될 거다.
아산 달카드는 교장을 노려보았다. 교장은 매우 기쁘다는 듯이 히죽거렸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존경하옵는 교장 선생님!”
어디서 달콤한 아첨의 소리가 들려오는구나. 뭐냐?
“혹시 조종하는 요령에 대해서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까 하는 걸 보니 주문 자체는 성공한 모양이더구나. 조종이 어렵더냐?
“예.”
많은 새내기 마법사들이 그렇지.
“아. 그렇습니까?”
이한은 안도했다.
자기가 마력이 많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처음 마법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모두 겪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하! 거짓말이다!
“......”
주문이 어렵지 조종은 보통 한두번이면 된다. 너처럼 화살처럼 날려버리는 놈은 더더욱 없고. 어쩌겠느냐. 네가 열심히 알아서 잘 해야지.
‘상대는 교장이다. 상대는 교장이다. 상대는 교장이다...’
이한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썼다. 그 모습에 리치 교장은 매우 아쉬워했다.
아산 달카드는 어린놈답게 쿡쿡 찌르면 발끈하는 게 매우 재밌었는데, 저 워다나즈 가문의 어린놈은 늙은이가 안에 들어선 것마냥 참을성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겁먹을 건 없다. 마법이란 건 쓸수록 늘 테니까. 가서 점심이나 먹어라!
*    *    *
오전 강의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붙잡혀 있던 덕분에, 다른 신입생들은 전부 다 다른 강의를 들으러 가거나 찾으러 간 상태였다.
아산 달카드는 아직도 마력이 덜 회복됐는지 병실에 가서 쉬겠다고 떠나버렸다.
‘나도 점심이나 먹어야겠군.’
점심이라고 해봤자 딱딱하게 굳은 검은 빵과 식은 주먹밥이었지만, 그래도 이한은 한결 나은 편이었다. 저번에 잡아서 훈제시켜놓은 고기가 있었으니까.
‘밖에서 야채나 과일이라도 좀 찾아봐야겠는데...’
처음에는 확신이 없었지만, 진지하게 교장이 그러라고 준비해 놓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눈치 빠른 학생들은 먹을 걸 찾아서 다니지 않을까?
“...워다나즈.” “?”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한은 고개를 돌렸다.
찰랑거리는 긴 은발에, 마주치는 순간 움찔하게 만드는 차가운 인상.
황녀 아덴아르트가 복도 앞에 서있었다.
“뭡니까?”
아덴아르트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들고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아!”
이한은 황녀가 왜 부르는지 깨달았다.
저번에 연금술 수업에서 황녀를 도와준 인연으로, 이한보다 훨씬 더 인맥이 넓은 황녀한테 부탁을 했었던 것이다.
‘쓸만한 강의를 좀 찾아달라고 했었지.’
에인로가드의 신입생들은 필수강의를 제외하면 나머지 과목들은 자기가 알아서 찾아서 들어야 했다.
하지만 신입생들이 그런 걸 알아서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 수준.
2 학년들과도 만나지 못하는 상황인 만큼 알아내기 위해서는 신입생들 사이에서라도 정보 교환이 필수였다.
황녀는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음?”
기쁜 마음으로 종이를 받아서 읽던 이한은 멈칫했다.
-인기 있는 강의 목록- 
<기초 연금술의 이해>
<기초 제국 언어학>
<기초 춤과 사교>
...
일단 ‘연금술의 이해’가 있는 것부터가 수상한데다가 다른 강의들의 이름도 뭔가 좀 이한이 생각했던 것들과 달랐다.
그리고 ‘성적 받기 좋은’이 아니라 ‘인기 있는’이라고?
“저, 황녀님?”
“?”
“인기 있는 강의가 정확히 어떤 뜻입니까?”
“??”
황녀는 순간 당황한 듯, 표정을 살짝 무너뜨리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한은 좀 더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황녀님. 제가 물어본 건 성적 받기 좋은 강의였지 인기 있는 강의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기 없는 강의가 성적 받기는 더 쉬울 텐데요.”
준비된 학생인 이한은 인기나 소문에 휘둘리지 않았다.
인기 있는 강의->뛰어난 인재들이 몰려와서 성적 받기 힘든 강의.
인기 없는 강의->경쟁자가 적어서 성적 받기 좋은 강의.
물론 황녀가 이한의 독특한 이론에 동의하진 않았다.
“......”
아덴아르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날로 먹을 수 있는 강의를 찾고 있는 거였다니.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 왜 저런 강의를 찾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덴아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실망했다.
연금술 수업에서 봤을 때만 해도 워다나즈의 모습은 가장 귀족다운 모습이었는데...
슥-
아덴아르트는 다른 종이를 내밀었다.
정리하는 김에, 피하기 위해서 메모해놨던 인기 없는 강의 목록이었다.
-인기 없는 강의 목록- 
<기초 검술>
<기초 체력 훈련>
<기초 마법전투의 반복적 학습>
...
‘오오.’
이한은 목록에 감탄했다.
벌써부터 인기 없는 강의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일단 검술.
마법학교까지 들어와서 검술을 새로 배우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마법에 전념해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검술을 누가 배우려 한단 말인가.
체력 훈련도 비슷했다. 마법만 해도 시간이 빠듯한데 굳이 쓸데없이 몸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괜히 마법사들이 허약하다고 놀림 받는 게 아니었다.
<마법전투의 반복적 학습>도 인기 없을 수밖에 없었다.
마법을 배우는 건 위대한 진리를 깨닫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법을 알기 위해서였지, 싸움을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럴 거면 기사나 검술 길드 밑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는 게 맞았다.
여기 학생들이 제각각의 꿈과 목적을 갖고 들어왔겠지만, 그 중 마법으로 싸움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를 갖고 들어온 학생은 없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마법을 배우는 것이었지, 그 마법을 전투에 활용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 게 뭐냐.’
물론 이한은 그런 인식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검술과 체력 훈련은 이름부터 이한이 자신 있는 부분이었다.
마법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라르롱 밑에서 꾸준히 훈련 받았으니까.
그리고 마법전투의 반복적 학습도 그랬다.
마법으로 싸우는 방법 배워놔서 나쁠 것 없었다.
자기 목숨 지킬 방법 하나 더 늘어나는 셈 아니겠는가.
겸사겸사 경쟁 적은 강의에서 학점도 쉽게 따내고...
“감사합니다. 황녀님.”
“......”
아덴아르트는 대답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에는 미약한 실망과 경멸이 피어올라 있었지만, 이한은 강의에 집중하느라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이한은 훌쩍 돌아서서 떠났다. 황녀는 뭐라고 하려다가 작게 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014 화
‘아쉽게 됐군.’
이한은 아쉬워했다.
같은 기숙사의 친구들이 이한의 독특한 이론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일... 일부러 인기 없는 강의를 듣겠다고? 왜? 혹시 아무도 듣지 않는 강의를 듣는 게 존귀한 일이야?
-<기초 마법전투의 반복적 학습>? 아앗. 미안. 그 시간에 이미 들으려는 수업이 있어. 진, 진짜야. 거짓말 아니야.
-워다나즈. 대체 왜 시간을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하는 것이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달카드 가문에서 배운 바로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의로운 자가 걷는 길은 외로운 법.
나중에 중간고사가 닥쳐오고 기말고사가 닥쳐오고 과제가 목을 조르기 시작하면 친구들은 이한의 선견지명을 떠올리게 되리라.
원래 어느 학교든 간에 교수는 사람의 마음이 없다.
학생들은 다른 강의도 듣건만, 오로지 자기 강의에만 집중하길 원하는 냉혹한 철혈의 이기심!
그래서 학생들도 정말 좋아하는 강의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좀 날로 먹는 강의들로 받쳐줘야 했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
세상 어느 학교든 간에 굴러가는 방식은 비슷한 것이다.
‘여기인가?’
이한은 본관의 정문으로 들어가 지하 계단을 찾았다.
기초 마법전투의 반복적 학습을 배우는 강의실은 지하 1 층이었던 것이다.
“...으스스하군.”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본관 정문을 통과하면 나오는 거대 계단.
지나치게 호화롭지도, 지나치게 살풍경하지도 않은 고딕풍 계단은 딱히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길함이 느껴지는 건 이한이 알고 있는 지식 때문일지도 몰랐다.
‘마법사의 탑에서는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지.’
제국 사람이라면 마법사도, 마법사 아닌 사람도 알고 있는 유명한 격언.
-마법사의 탑에서는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단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보여도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지 모르니, ‘2 층에는 뭐가 있지?’하고 올라갔다가 영원한 미궁에 갇혀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이한이 가문에서 읽은 몇몇 동화들은 못된 마법사의 탑에 갇힌 어린아이들이 간신히 탈출하는 내용들이 많았다.
아직 이 세계에 덜 적응한 이한은 순진무구하게도 이렇게 물었더랬다.
-이 동화 과장이죠?
-과장이 좀 심하긴 하네요. 도련님.
-그쵸? 아무리 그래도 2 층 갔다가 실종되는 건...
-네. 마법사의 탑에 들어간 비전문가는 절대 탈출할 수 없어요. 여기 어린아이들은 실제라면 갇힌 채로 늙어 죽었겠지요.
-......
멋대로 2 층 갔다가 실종되는 일이 흔히 일어나는 일이란 말은 어린 이한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온갖 신비가 담겨 있는 마법사의 탑은 그 정도의 마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마법학교 에인로가드는 수많은 마법사의 탑들이 합쳐진 곳이나 마찬가지.
그 위험성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실제로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 중에 학교 안을 돌아다니며 탐색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새로 들어와서 호기심이 넘쳐날 때일 텐데도!
다들 가문에서 직접 들었거나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다.
괜히 새로 들어왔다고 건물 이곳저곳을 탐색하다가는 시체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에이. 그래도 지하 1 층 정도는 괜찮겠지...’
이한은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사실 마법사의 탑에 대한 악명이 지나치게 과장된 것도 있었다.
본관 1 층이나 기숙사 같은 곳은 돌아다녀도 딱히 별 일이 없지 않았던가.
그 때 익숙한 뼈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그락, 달그락-
어. 뭐야. 지하 1 층 가냐? 내일 시체로 발견되는 거 아니니?
“......”
지나가는 리치 교장이 던져주는 친절한 말에, 이한은 할 말을 잃었다.
‘아차.’
“존경하는 교장 선생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한은 머리를 딱 숙였다.
마음속으로는 원한과 증오가 솟구쳐도 겉으로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이 대학원생.
절도 넘치는 이한의 인사는 품위 넘치는 귀족의 예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리치 교장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좀 아는구나.
“예. 제가 지하 1 층에 가려고 하는데, 혹시 가르침을 주실 게 있으신지?”
없다. 내일 시체로 발견되면 내가 꽃 하나 올려주마.
‘개새끼.’
*    *    *
그렇게 겁을 준 것치고 지하 1 층은 평범했다.
드넓은 복도 양옆으로 강의실들이 있고, 시체나 언데드나 기타 등등의 위험한 몬스터도 보이지 않았다.
약간 어두컴컴하고 음산하고 싸늘하긴 했지만, 이한은 이 마법학교의 터가 좋지 않아서라고 믿기로 했다.
‘다행이군.’
슥-
그 때 두 명의 학생이 이한의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한은 놀랐다.
이 둘도 <기초 마법전투의 반복적 학습>을 들으러 온 걸까?
‘역시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나.’
하긴 제국 전역에서 똑똑한 인재들이 모였는데 이한처럼 생각한 사람이 없을 리가 없었다.
경쟁자가 생겼지만 이한은 개의치 않았다.
‘두 명 정도는 괜찮지. 혼자서 듣는 것도 부담되고.’
“앗. 여기 강의실이 아니잖아. 잘못 들어갈 뻔했네.”
“여긴 무슨 강의실이지?”
“<기초 마법전투의 반복적 학습>.”
“뭐? 그딴 강의도 있었어? 그런 걸 들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어?”
“흰 호랑이 탑 애들이 들어봤다가 욕을 하고 나왔다더라.”
“걔들도 못 들을 정도면 들을 수 있는 강의가 아닌 것 같은데?”
“......”
두 명의 학생은 떠들면서 다른 강의실로 가버렸다.
이한은 갑자기 살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끼이익-
그래도 강의실 안에는 세 명의 학생이 벌써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한은 저들이 이한처럼 강력한 목적을 갖고 온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세 명의 학생들은 불안, 초조, 혼란, 걱정, 등등의 감정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 강의 잘못 들어왔나?’의 표정!
“시간이 됐군. 착석해라.”
“!”
이한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강의실 구석에 교수가 앉아 있었는데도 눈치를 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늘진 곳에 앉아 있었다지만 이렇게 존재감이 없을 줄이야.
‘뱀파이어인가?’
창백한 피부. 긴 송곳니. 음울한 시선.
트롤 교수가 있었던 만큼 뱀파이어 교수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으아악!”
“헉...!”
“......”
이한은 황당하다는 듯이 다른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이한이야 그렇다 쳐도 먼저 온 셋도 교수가 앉아 있었던 걸 몰랐단 말인가?
“나는 볼라디 배그렉. 기초 마법전투의 반복적 학습을 맡아 가르칠 교수다. 모두들 잘 부탁한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학생들은 입을 모아 인사했다. 이한도 같이 인사했다.
볼라디 교수는 지팡이도 꺼내지 않고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강의실 테이블 위에는 손바닥만한 구슬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그 구슬은 영성석(靈星石)으로 만든 구슬이다.”
영성석.
이한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마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광석 아니었나?’
대충 별자리가 특정 위치에 배치되면 신성한 힘을 내뿜는데 그 때 별자리의 힘을 받고 변화한 광물.
그게 영성석이었다.
마력에 꽤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특징을 갖고 있어서 탐지 장비나 결계에 쓴다고 들었는데...
“다들 구슬을 잡고 집중해서 마력을 불어넣어라.”
학생들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일단 구슬을 붙잡았다.
여기 있는 학생들은 전부 다 신입생.
그것도 들어온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이들이었다.
재능이야 있지만, 마력을 잘 불어넣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 것이다.
파아앗!
“어억!”
“꺄악!”
그러나 그런 불안감과 상관없이, 구슬들은 느리게 진동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볼라디 교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지금 그 구슬은 너희의 의지와 연결이 된 상태다.”
‘아티팩트!’
이한은 이 구슬이 그냥 영성석을 깎아 만든 구슬이 아니라, 교수가 하나하나 직접 만든 아티팩트라는 걸 깨달았다.
‘잘 만든 아티팩트가 그렇게 돈이 된다던데.’
아티팩트는 언제 어디에서나 수요가 많았다.
아티팩트를 잘 만드는 마법사는 돈방석에 앉을 수 있다!
그런 말을 들었던 만큼 이한도 아티팩트에 관심이 있긴 했다.
다만 아티팩트도 이한에게 관심이 있어야 하니 그렇지.
“으아아악!”
“!”
옆에 있던 구슬이 천장 높이 솟구쳤다. 마치 천장을 뚫을 것 같은 기세였다. 다행히 구슬은 강의실 천장 아래에서 뚝 멈췄다.
그런데도 볼라디 교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마치 얼굴의 근육이 마비라도 된 것 같았다.
“의지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은 너희가 조종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물론, 구슬은 이 강의실을 부수지 못하도록 제약이 걸려 있다.”
“다, 다행이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슬이 학생의 복부를 강타했다.
퍽!
“컥...!?”
“강의실을 부수지 못하도록 제약이 걸려 있지만 너희들은 아니다. 구슬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주의해라.”
“......”
보통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라’일 텐데, 사람하고 부딪혀서 구슬이 망가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니.
이한은 이 뱀파이어 교수도 만만찮게 미친 사람이란 걸 느꼈다.
학생들은 그래도 아직 일말의 희망을 놓지 못했는지 교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 뭘 하면 됩니까?”
“구슬을 띄워서, 원을 그려라.”
학생들은 조심스럽게 정신을 집중하고 구슬을 띄웠다.
이한도 구슬을 띄웠다.
모두 구슬을 움직여서 원 비스무리한 걸 그리려고 노력했다. 매우 삐뚤삐뚤하긴 했지만 제법 원 비슷한 걸 그리는 학생도 나왔다.
“그렸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느꼈는지 그 학생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볼라디 교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건 원이 아니다. 다시 그려라.”
“...아, 예.”
학생들은 다시 구슬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도 원을 그리고.
그 그 다음에도 원을 그리고...
그 그 그 다음에도...
학생 중 한 명이 정말,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저, 언제까지 원을 그려야 합니까?”
“?”
볼라디 교수는 처음으로 감정을 살짝 드러냈다.
그 감정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의 의아함이었다.
“당연히, 완벽하게 그릴 때까지다.”
“......”
“...교수님. 잠시 화장실에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묻지 않아도 좋다.”
학생 한 명이 나갔다.
눈치를 보던 다른 학생도 슬쩍 일어서서 나갔다.
이한을 제외하고 남아 있던 한 명도 고민하다가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
“???”
이한은 깜짝 놀랐다.
강의실에서 나가려고 저런 적극적인 연기를 한다고?
‘이 자식. 제법인데?’
이한은 학생을 부축했다.
그러나 학생의 표정은 납덩이처럼 창백했다.
연기가 아니었다.
“괜찮나?”
“마... 마력이...”
“교수님! 마력을 다 소모해서 쓰러진 것 같습니다.”
이한은 교수를 보며 말했다.
가르시아 교수가 가르쳤듯이, 마법을 처음 배우는 초보자들은 자신의 마력 양을 잘 관리하지 못했다.
그래서 멋대로 마력을 낭비하다가 마력이 고갈되어 픽 쓰러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지금 이 학생도 그런 게 분명했다.
“그렇군.”
“어떻게 합니까?”
“마력이 회복되면, 다시 구슬을 잡고 원을 그리도록.”
“......”
이한은 부축하고 있는 학생이 분노로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학생이 다시 강의실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강의 나 혼자 듣겠군.’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됐다.
혼자 남은 이한은 확인을 위해 물었다.
“교수님. 이 강의 성적은 어떻게 매겨집니까?”
“기본적인 규칙대로, 1 등부터 차례대로 점수를 준다.”
“과연...”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구슬을 붙잡았다.
“원을 그리면 됩니까?”
“그렇다.”
이한은 구슬을 움직여 허공에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간 학생들은 ‘이게 무슨 시간을 쓰레기처럼 버리는 짓이야!’라고 투덜댔지만, 이한은 알 바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
학기 끝까지 앉아만 있으면 안정적으로 높은 학점을 받을 수 있다니.
이것이 진정한 강의였다.
015 화
‘그런데 어렵긴 하군.’
구슬을 의지로 조종하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아까 자기가 조종하는 구슬에게 얻어맞은 학생처럼, 구슬은 조금만 집중을 놓아도 멋대로 튀어나갔다.
마치 세 번째 팔이 새로 달린 것 같은 낯선 감각.
그나마 다행인 건 이한은 마력 떨어져서 쓰러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구슬 띄워서 계속 원을 그려도 마력이 떨어지는 느낌은 전혀 받지 않았다.
“......”
볼라디 교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이한을 그저 빤히 쳐다보았다.
‘마력이 안 떨어져서 저러는 건가?’
이한은 교수가 왜 쳐다보나 의아해했다.
이한이 구슬을 너무 빠르게 잘 조종해서일리는 없을 테고(이한이 보기에도 원은 좀 삐뚤삐뚤했다), 이한이 너무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구슬을 조종해서 신기해하는
걸지도 몰랐다.
‘아니. 그냥 아무도 없어서 나 쳐다보는 거군.’
하지만 이한은 뒤늦게 교수가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력량이 많은 게 신기하면 그냥 질문을 던졌겠지!
하긴 강의실에 이한밖에 없으니 눈 둘 곳도 없을 것이다. 이한은 교수가 쳐다보거나 말거나 구슬 열심히 돌리는 것에 집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굴리면 학점이 나온다고 생각하자.’
빙글빙글 굴리면 학점이 나오는 마법의 구슬.
그렇게 생각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이한은 교수 밑에서 불합리한 일을 견뎌내는 것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적응이 되어 있었다.
*    *    *
‘신기하군.’
볼라디 교수는 매우 신기해하고 있었다.
물론 표정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지만, 본인은 오랜만에 신기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눈앞의 신입생이 바로 그 이유였다.
매 해마다 <기초 마법전투의 반복적 학습>에 신입생이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사라졌다.
작년에도 들었던 사람은 0 명.
그러나 볼라디 교수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교장 오수 고나달테스와 했던 계약은 ‘매 해마다 <기초 마법전투의 반복적 학습> 강의를 해달라’였지, ‘학생들을 많이 모아달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볼라디 교수는 학생이 한 명도 없어도 정해진 시간이 되면 강의실에 앉아 구슬을 놓고 기다렸다가 강의 시간이 끝나고 나서야 일어났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지 몰라도, 이건 볼라디 교수의 원칙이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반복적으로 쌓인 시간들.
그 반복을 깨고 특이한 신입생 하나가 오늘 나타났다.
선이 굵은 조각 같은 외모를 가진 잘생긴 소년.
딱 봐도 푸른 용의 탑 학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행동하는 거나 억양을 보면 아마 제국 대가문 출신이리라.
그런데...
아무 불평 없이 계속 구슬 빙글빙글 돌리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가장 신분이 낮은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도 이 강의를 들으면 ‘이걸 왜 해요 시발’하면서 우르르 빠져나가는데, 푸른 용의 탑 학생이 얌전히 집중하고 있는 건 특이한
일이었다.
게다가 저 구슬을 계속 돌리면서 아직 힘든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타고난 마력량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실 볼라디 교수가 다른 교수들과 친분이 있었다면, 그래서 트롤 교수 가르시아 킴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면 이한의 마력량이 어느 정도인지 대략적으로라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볼라디 교수는 다른 교수들과 굳이 어울리지 않았다.
교장과 했던 계약에 그런 내용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볼라디 교수는 이한의 마력량이 꽤 많다는 것만 짐작했지 정확히 얼마나 많은지는 눈치 채지 못했다.
‘계속 남아 있으면 좋겠군.’
볼라디 교수는 강의하면서 처음으로 학생이 자리에 남아 있길 바랐다.
저 학생이 계속 들어준다면, 볼라디 교수 또한 강의 역사상 처음으로 다음 내용을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
*    *    *
“정말 좋은 강의를 찾았다니까?”
이한은 진지하게 말했다.
원래 이한이 이런 친절을 베풀지는 않는데 요네르와 가이난도는 좀 예외였다.
요네르는 나중에 동업자가 될 수도 있었고, 가이난도는 나중에 어머니께서 친구비를 주실 수도 있지 않은가.
원래 집안 좋은 친구들에게 잘 대해줘서 나쁠 게 없었다.
“내 생각에 이거 더 들으러 올 학생은 없다. 들으면 무조건 A+는 예약이라고 봐야 해.”
“...으으응...”
요네르의 얼굴에서는 ‘이한의 제안을 어떻게 거절해야 잘 거절할 수 있을까?’하고 매우 고민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아무도 듣지 않는 강의라니 정말 이름만 들어도 피하고 싶은데, 이한이 저렇게 추천하는데 거절하긴 미안하고, 어떻게 하지?
“...아니. 듣기 싫으면 안 들어도 괜찮아.”
이한은 요네르에게 말했다.
억지로 들으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한 학기에 과목 하나를 무조건 날로 먹을 수 있다는 게 좋아서 추천해준 거였는데...
“으음. 좀 더 자세히 말해봐.”
그에 비해 가이난도는 솔깃한 모양이었다.
“뭘 가르치는데?”
“교수가 만든 구슬 아티팩트가 있는데, 여기다가 마력을 불어넣고 띄워.”
“오. 그런 다음에는?”
“그걸 그려서 원을 만드는 연습을 하지.”
“그렇군. 그 다음에는?”
“없는데.”
“......”
“......”
요네르와 가이난도는 황당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 혹시 가짜 교수 아니냐?”
“가짜든 진짜든 알 게 뭐냐. 나한테 점수를 준다는 게 중요하지.”
요네르는 감탄했다.
그녀가 입학했을 때만 해도, 요네르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나 정도면 여기 학생들 중에서 가장 실용적으로 생각하는 편 아닐까?
아무래도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대가문 출신들이 많다보니 사고방식이 꽉 막혀 있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요네르도 느낀 적이 여러 번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한과 대화하다보니 세상은 넓고 하늘은 높다는 걸 느끼게 됐다.
저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소년은 실용에 미친 수준이었다.
요네르도 못 따라갈 정도!
“뭐, 너희들이 듣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다음은 <기초 검술>이군.”
“...진, 진짜 그것도 듣게??”
“워다나즈. 진짜 좀 아닌 거 같은데...”
친구들이 말려봤자 이한은 듣지 않았다.
필수로 들어야 하는 강의가 아니라면, 그 외에는 오로지 스스로의 기준으로 선택하겠다.
그게 이 마법학교 에인로가드의 규칙이었으니까!
‘진짜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가이난도는 교장한테 달려가서 상담이라도 받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    *    *
기초 검술 강의는 기초 마법전투의 반복적 학습보다 훨씬 학생들이 많았다.
딱 봐도 열 명 넘는 학생들이 본관 남쪽 앞마당에 모여서 교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의외로 많잖아?’
놀랐던 이한은 금세 이유를 깨달았다.
여기 있던 학생들은 <벼락을 물어뜯는 흰 호랑이의 탑>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제국 기사 가문 출신으로서 마법을 배우기 위해 여기까지 온 학생들.
당연히 기사 가문 출신인 만큼 검술에 능통했고, 훨씬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가문 학생들은 검술을 배웠다 하더라도 여기까지 와서 검술을 배울 생각은 없었지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반대였다.
‘하긴 기초 마법전투의 반복적 학습이 너무 날로 먹는 거였지.’
살짝 실망한 이한이었지만, 생각해보니 한 명 중에서 1 등하는 강의가 특이한 거지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한도 검술을 꾸준히 배워오지 않았던가.
“...뭐야?”
“푸른 용의 탑 출신 아니야?”
이한이 놀란 것처럼,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놀라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설마 다른 기숙사 학생들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나, 저 녀석이 누군지 알아.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잖아.”
“워다나즈 가문...! 제국의 마법명가잖아?”
“근데 그런 가문 출신이 왜 이 강의를 들어?”
“가문에서 가정교사한테 검술 조금 배웠다고 온 거 아니야?”
“검술을 얕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대부분의 학생들은 강하게 거부감을 보였다.
각자 차이가 있긴 했지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검술에 자부심을 갖고 진지하게 수련하는 이들이었다.
그에 비해 다른 귀족 가문에서 검술을 배우는 건 그냥 호신용으로, 교양용으로 가볍게 겉핥기만 익히는 수준.
그런 느낌으로 강의를 들으러 오니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한도 그런 반응들을 눈치챘다.
‘알 게 뭐냐.’
그리고 물론 신경 쓰지 않았다.
기껏해야 십대 꼬꼬마들이 유치하게 신경전 벌이는 것에 휘말려서 일일이 반응할 정도로 이한은 멍청하지 않았다.
“어이.”
이한이 반응들을 무시하자 결국 학생 중 한 명이 나섰다.
기사 가문 출신다운 단련된 체격.
게다가 오크 종족 특유의 근육까지 합쳐지자 허름한 누더기 교복 위로도 위압적인 선이 드러났다.
상대는 이한 앞에 서더니 똑바로 올려다봤다.
이한도 어쩌라는 거냐는 듯이 마주 쳐다봐줬다.
제법 험악하게 생긴 오크였지만 이런 걸로 겁먹기에는 이한이 너무 경험이 많았다.
“할 말 있나?”
“그래.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푸른 용 탑 소속. 맞나?”
“맞는데.”
“잘못 알고 온 모양인데 이건 진지한 검술 강의다. 겉모양만 그럴듯하게 휘두르는 걸 가르치는 강의가 아니라.”
“그렇군. 알려줘서 고맙다.”
“......”
좋게 말해줘도 이한이 무시하자, 오크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잘 이해하지 못했나본데, 진짜 검술 강의는 너희 같은 고위 귀족이 하는 그냥 칼 휘두르기가 아니야. 서로 나눠서 대련도 하게 될 텐데, 그 때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어. 여기 있는 다른 학생들은 손대중을 하지 않을 거라고.”
“그래. 만약 널 상대하게 된다면, 널 다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야.”
“......”
오크는 이한의 말을 이해하는 게 한 박자 늦었다. 뒤늦게 이한의 말을 이해한 오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때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강의를 가르칠 교수가 자리에 도착한 것이다.
“자. 모두들. 모여 줬으면 좋겠는데?”
교수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상냥했지만 겉모습은 정반대였다.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을 갖고 태어나는 엘프 종족인데도 불구하고, 교수의 겉모습은 위압감을 만들어냈다.
얼굴부터 시작해서 전신을 뒤덮고 있는 흉터와 상흔이 만들어내는 위압감이었다.
한쪽 팔과 한쪽 다리는 의수와 의족이었고, 한쪽 눈도 흉터 때문에 옆의 눈과 크기가 다르게 보였다.
“나는 잉걸델 교수입니다. 이번 학기 동안 여러분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게 됐습니다.”
엘프 교수는 긴 장검을 지팡이처럼 짚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 이 에인로가드에서 굳이 검술을 또 배우려는 여러분들은 각자 검술을 배운 경험이 있을 겁니다. 실력을 발전시키거나, 혹은 녹슬지 않게 하려고 이 자리에
와있겠지요.”
이한은 살짝 찔렸다. 물론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보다는 학점 때문에 온 게 더 컸던 것이다.
“그래서 저는 검술을 처음부터 가르쳐주지는 않을 겁니다. 각자 배운 검술을 갈고 닦는 게 더 나을 테니까요.”
기사 가문 출신 학생들은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으로 엘프 교수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아무래도 마법이 아직 낯선 학생들이었다.
그런 학생들에게는 마법 이야기보다 검술 이야기가 훨씬 더 그럴듯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톡톡-
“?”
이한은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이한의 팔을 톡톡 건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잉걸델 교수와 같은 엘프 종족이었지만 이미지는 정반대였다.
상대는 목덜미에 닿을 정도로 짧은 금색 머리칼에, 선이 가늘고 중성적인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들한테 인기 있게 생겼군.’
“무슨 일이지?”
“워다나즈 가문 출신. 맞지? 워다나즈 가문 출신인데 검술을 배우려고 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상대는 경쾌하면서도 경박하지 않게 말을 걸어왔다.
아까 시비를 걸던 학생과는 달리 사람을 상대하는 데에 능숙하다는 게 느껴졌다.
“듣는 인원 적어서 점수 따기 좋아 보였다.”
“......”
016 화
어차피 한 학기 동안 강의 들으면서 서로 검 맞대야 하는데, 괜히 ‘나는 사실 마법명가 출신이지만 소드마스터가 꿈이었단다’같은 거짓말을 해서 서로 좋을 게 없었다.
게다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이한을 경계하고 있는 만큼 그 경계심을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냥 적당히 버티다가 점수 받아갈 테니 너희가 신경 쓸 필요 없다!
“......”
그러나 상대의 표정은 매우 미묘하고 복잡해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한의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몰라서 고민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그렇구나. 난 모라디 가문 출신이야. 모라디라고 불러.”
“그래. 반갑군. 모라디.”
이한은 모라디의 손을 잡고 가볍게 악수했다.
체구는 작은 편이었지만 손바닥에 잡힌 물집과 굳은살은 상대가 기사 가문 출신이라는 걸 다시 상기시켰다.
‘잠깐. 모라디 가문이면...’
모라디 가문.
이한도 몇 번 이름을 들어본 적 있던 제국 기사 가문이었다.
분명 추운 북쪽에서 철혈의 규칙으로 인근을 지키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문이라고 들었는데...
‘...가문의 이미지와는 좀 반대인데.’
“?”
모라디는 이한의 눈빛에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하긴 꼭 가문 명성이 일치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서로의 가문도 신경 쓰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시비부터 걸던 아까 상대와 비교하면 오히려 모라디가 더 상식적으로 느껴졌다.
‘잘 구슬려서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경계심을 풀어야겠군.’
*    *    *
벽암검(碧巖劍).
이한이 가문의 노기사 알라르롱에게 배운 검술의 이름이었다.
푸른 바위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알라르롱의 검술은 단단하고 우직했다.
-세상의 검술은 셀 수 없이 다양합니다. 빠르고, 느리고, 날카롭고, 둔탁하고, 무겁고, 가볍고, 단순하고, 복잡한 검술들을 모두를 배울 필요도 없을 뿐더러... 저는
가르칠 능력도 없습니다. 제가 가르칠 검술은, 제가 배워왔고 믿어 온 제 검의 길입니다. 언젠가 이한 님께서도 꾸준히 검의 길을 걷다 보면 자신만의 길을 깨닫게 되실
겁니다.
수십 년 동안 검술을 익혀 온 알라르롱과, 검술을 익힌 지 고작해야 십 년도 안 된 이한은 그 경험치 자체가 달랐다.
그래서 알라르롱이 말하는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한에게는 다른 귀족들에게 없는 장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까라면 깐다는 점이었다.
알라르롱이 당황할 정도로 이한은 시키는 대로 했고, 덕분에 이한의 검술은 군더더기하나 없이 기본이 꽉 잡혀 있었다.
“벽암검? 기초가 잘 잡혀 있습니다.”
잉걸델 교수도 이한의 자세를 보고 칭찬했다.
“어디 가문 출신입니까? 벽암검이라면 분명...”
“워다나즈 가문 출신입니다.”
“...?”
잉걸델 교수는 순간 반응이 늦었다.
워다나즈 가문의 검술이 벽암검이었나?
뒤늦게 워다나즈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떠올린 잉걸델 교수는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검술을 배우려고 하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제국 귀족이라면 검술은 기본적인 교양 아니겠습니까.”
잉걸델은 그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틀린 대답은 아니었지만 잉걸델이 좋아하는 대답은 아니었던 것이다.
잉걸델 같은 천생 검객에게 검술은 생사를 가르는 기술이었지 귀족을 위한 교양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검술이 마법 못지않게 깊이 있는 학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배우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만점!!”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잉걸델은 손을 내저었다.
생각치도 못한 훌륭한 대답에 무심코 속마음이 나와 버린 것이다.
워다나즈 가문이라는 마법명가 출신이면서 저렇게 검술을 진지하게 대할 줄이야.
겉멋만 든 몇몇 흰 호랑이 탑 학생들보다 훨씬 더 보기 좋은 태도였다.
‘통했나?’
이한은 잉걸델의 표정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미친 리치 교장에 비하면 잉걸델 교수는 인상만 험악하지 매우 알기 쉽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미친 교수들 밑에서 닳고 닳은 이한에게 잉걸델 교수 같은 순진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쉬운 일이었다.
아무리 점수 날로 먹으려고 들어왔다지만 교수 앞에서는 본심을 숨겨야 하는 법.
“훌륭한 마음가짐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나 또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진지하게 상대하겠습니다. 자. 목검을 들어 올리세요.”
“......”
이한은 너무 대답을 잘 했나 살짝 후회했다.
*    *    *
잉걸델 교수는 쉴 틈 없이 학생들을 두들겨 팼다.
처음에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태도에 방심했던 학생들도 몇 대 두들겨 맞자 악에 받쳐 덤벼들게 되었다.
잉걸델 교수는 그런 학생들을 다시 한 번 두들겨 패서 꼬리 내린 쥐새끼처럼 만들었다.
‘와. 장난 아니군.’
이한의 검술 실력은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그래도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볼 정도는 됐다.
이한을 가르친 알라르롱도 대단한 검사였지만 잉걸델 교수도 그에 못지않았던 것이다.
알라르롱이 움직이지 않는 바위 같은 검사였다면 잉걸델은 빠르게 흐르는 물과 같은 검사였다.
놀라운 건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의수와 의족인데도 저런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나름 자기 가문의 검술을 오랫동안 수련해 온 학생들은 잉걸델 교수의 움직임을 조금도 따라잡지 못하고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자운검(紫雲劍)의 움직임치고는 변화가 너무 적습니다. 쌍검의 핵심은 그 난해함과 복잡함! 무작정 검을 휘두르지 말고 더욱 고민하고 휘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고산월검(高山月劍)은 더 빠르고 날카롭게! 찌를 때 눈치를 보지 말고 전력을 향해 몸을 던지십시오.”
게다가 교수라는 직위에 걸맞게 잉걸델은 학생들이 펼치는 검술들을 다 알아보았다.
제국의 검술은 유명한 것만 따져도 수백 개가 넘었고, 가문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는 것까지 따지면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잉걸델은 그 검술들의 이름까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쉬도록 하겠습니다.”
“......”
“커억...”
“개ㅆ...”
학생들은 앓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드러누웠다. 욕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없을 정도였다.
이한도 근육이 뻐근하고 몸이 얼얼했다.
-벽암검은 바위와 같은 검술.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어, 교수님의 실력이 저보다 위인데 안 흔들릴 수가 있습니까?
-자, 계속 공격하겠습니다. 막아내 보십시오! 자! 자! 자!
잉걸델은 이한도 모르는 약점을 잘도 찾아내서 때려댔다.
이한은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막아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실수한 것 같은데...’
휴식 시간이 되자 이한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학생들보다 좀 더 많이, 집요하게 맞은 것 같았다.
물론 이한의 검술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었지만 이한의 직감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미 <기초 연금술의 이해>에서 교수에게 잘못 걸렸다가 어떻게 되는지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냥 가만히 있었어야 했나?
‘점수 땄다고 더 두들겨 맞을 줄은 몰랐다.’
“워다나즈?”
“예. 교수님.”
“잠깐 대련을 하게 나오십시오.”
“......”
이한은 정말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남들 쉬는데 교수한테 단독으로 매를 맞아야 한다니.
그러나 잉걸델은 자기가 이한을 패려고 불러낸 게 아니었다.
“이쪽은 초이 가문의 더르규. 두 학생이 간단하게 대련을 해보도록 하십시오.”
“!”
이한뿐만 아니라 쉬고 있던 학생들도 놀랐다.
왜 저 둘을?
‘아까 시비걸었던 놈이잖아?’
이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더르규를 쳐다보았다.
‘다른 기숙사 놈이 왜 강의 듣냐?’하고 시비 걸었던 놈인 만큼 좋게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한이 워다나즈 가문인 걸 알고도 앞뒤 가리지 않고 시비 걸 정도로 머리가 꽉 막힌 놈 아닌가.
대련이라고 적당히 봐주는 대신 무작정 덤벼들 게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교수님!”
그렇게 말하고 오크는 이한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주 속마음이 보인다.’
이번 기회를 빌려서 재수 없는 다른 기숙사 학생을 밟아놓겠다는 속마음이 얼굴에서 읽힐 정도였다.
많고 많은 학생 중에서 교수가 왜 굳이 이한을 고른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설마 다른 기숙사 학생이라고 교수한테 찍힌 건 아니겠지. 분명 아까 대답은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이한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가문의 저택에서 편하게 놀고먹으면서 지내도 됐는데 굳이 알라르롱에게 두들겨 맞으며 검술을 배웠던 건, 이럴 때 두들겨 맞지 않기 위해서였으니까!
*    *    *
잉걸델 교수가 더르규와 이한을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 학생들 중 둘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검술은 그냥 배운다고 바로 펼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검술의 핵심 기술들, 검식(劍式)은 기본적으로 몇 천 번 정도 연습하고 자신이 직접 실전에서 해봐야 간신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상대의 가슴을 찌르려고 하다가 궤도를 틀어 목을 찌르는 기술이 있다고 쳐보자.
그걸 그냥 다짜고짜 쓰면 어지간히 멍청한 적이 아니고서야 맞아주지 않았다.
그 전에 휘두르려고 살짝 위협을 하거나, 하단을 노리는 것처럼 속임수를 걸거나, 이런 세세한 동작들을 연속해서 넣어줘야 그 기술의 파괴력이 나오는 것이다.
즉 검식을 이해한다는 건 이런 응용으로 온전하게 펼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자기가 배운 검식을 이해할 줄만 알아도 바깥의 어지간한 용병들은 찜쪄먹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용병들은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본능과 힘에 맡겨 마구잡이로 휘둘러댔으니...
그런 점에서 둘은 자기가 배운 검식을 이해하고 써먹을 줄 아는 경지였다.
심지어 둘은 미약하지만 무기에 마력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아무리 기사 가문 출신이라 하더라도 이 나이에 이 정도면 기사로 가도 충분히 성공할 재능이었다.
‘워다나즈 가문 같은 마법명가에서 저 정도로 검술을 연습하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초이 가문의 더르규는 그렇다 치더라도, 워다나즈 같은 마법명가 출신의 학생이 검술의 성취가 높은 건 정말 의외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게 더 잉걸델에게 기특했다.
‘검술도 마법만큼 깊고 의미 있는 학문이다. 저 학생도 그렇게 느꼈기에 각오를 하고 배우려고 온 거겠지.’
잉걸델은 이한을 오해하고 있었다.
이한이 가문의 눈치를 보며 몰래 검술을 익힐 정도로 검술에 목숨을 걸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워다나즈 가문 사람들은 이한이 알라르롱에게 검술을 배우는 것에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워다나즈 가문은 원래 각자 자기 할 일 알아서 하고 서로 뭘 하든 간섭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걸 모르는 잉걸델에게 이한은 기특하고 안타까운 학생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된 이상, 잉걸델에게는 이한이 걷는 검의 길을 지도해 줄 책임이 있었다.
‘초이 가문의 고산월검(高山月劍)은 빠르고 날카로운 쾌검. 그에 비해 워다나즈의 벽암검(碧巖劍)은 무겁고 강한 중검. 서로 정반대되는 스타일이다. 서로 겨루게 하면
배우는 게 많겠지. 검의 길에서 자신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라이벌의 존재는 무엇보다 귀하니까.’
물론 잉걸델 교수도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유일하게 다른 기숙사 출신인 이한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었다.
잉걸델 교수 밑에서 개처럼 두들겨 맞다 보면 서로 사이가 나빠질 시간도 없을 것이다. 오직 잉걸델 교수만을 미워하게 될 테니까!
잉걸델 교수는 현재 가장 뛰어난 두 학생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를, 그래서 그 긍정적인 영향이 다른 학생들에게도 전파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촤아아악!
그런 생각을 하던 잉걸델 교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한이 발로 흙을 차서 더르규의 얼굴에 흩뿌리는 모습이었다.
017 화
‘대단하구나!’
이한이 발로 흙을 차서 더르규의 얼굴에 흩뿌리는 걸 봤을 때, 잉걸델 교수가 처음으로 든 생각은 감탄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오직 생(生)과 사(死)만이 있을 뿐.
품위와 교양을 위해 검술을 배우는 귀족들은 품위 없는 수단을 하찮게 여겼지만, 실전에서 목숨을 걸고 검을 휘두르는 검객들은 오로지 승리만을 중요시했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이한이 발로 흙을 차서 날린 건 전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게다가 더 높게 평가받아야 할 점은 지금 동년배의 학생들이 다 쳐다보고 있다는 상황 자체였다.
기껏해야 십대 중반 정도 된 나이. 한창 혈기 넘치고 자존심 셀 나이였다.
귀족들뿐만 아니라 기사들도 비겁한 수단은 쓰기 싫어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알고 있어도 쓰지 못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그런데 이한은 1 초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흙을 차서 날렸다.
가문으로만 따지면 여기서 가장 고귀한 대가문 출신인데도!
검술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고, 그 검술을 위해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검객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크아악!”
더르규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욕설을 내뱉었다.
눈과 코, 입에 흙이 온통 들어가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제기랄! 이런 얕은 수작에!?’
더르규는 비겁한 방법을 쓴 상대보다 방심한 스스로한테 화가 났다.
가문에서 검술을 배울 때 이런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고 몇 번을 들었는데!
상대가 고귀한 대가문 출신 귀족이라 자로 잰 듯한 반듯한 검술을 쓸 거라고 멋대로 짐작해버린 것이다.
‘빠르게 끝낸다!’
자세가 무너진 더르규를 향해 이한은 걸음을 밟으며 달려들었다.
이한도 검술을 꽤 오랫동안 수련했지만 더르규도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수련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한보다 더 열심히, 더 혹독하게 수련했을지도 몰랐다.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제대로 맞붙으면 이한이 이길지 더르규가 이길지 이한 본인도 알지 못하는 상황.
그렇다면?
이길 수 있게 상황을 만들어야했다.
...물론 이 흙 걷어차는 걸 알라르롱이 가르쳐 준 건 아니었다.
덕분에 알라르롱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잉걸델 교수에게 감탄을 받고 있었다.
‘저런 것까지 가르치다니 스승도 참 지독한 사람이 분명하구나!’
“크윽... 젠장!”
“!”
더르규는 발로 세게 땅을 걷어차더니 공중에서 제비를 돌며 뒤로 날아갔다.
자세고 뭐고 없었다. 급하게 거리를 벌린 탓에 더르규는 균형을 잃고 넘어져서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
“......”
이한도 상대가 뒤로 몸 날려서 데굴데굴 구를 줄은 몰랐다.
‘아니 이 자식 뭐 이렇게 죽기 살기로...? 하긴 내가 흙을 뿌렸지.’
나름 기사 가문 출신이라 흙바닥 위에서 데굴데굴 굴러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다들 충격을 받았는지 응원하던 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했다.
잉걸델 교수만 혼자 박수를 쳤다.
“훌륭하다, 젊은 학생들!”
“......”
“......”
더르규는 소매로 얼굴에 묻은 흙을 훔쳐냈다. 얼굴은 좀 말끔해졌어도 흙 위에서 구른 탓에 온몸이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눈빛은 더더욱 사나워져있었다.
이한은 혀를 찼다.
‘그래도 소득이 없진 않군.’
상대는 얼굴에 흙도 맞고 바닥도 구른 만큼 열이 좀 받았을 것이다.
원래 싸움은 열이 받은 사람이 실수하기 마련.
서로 팽팽할 때는 이런 식으로 심리전을 걸어줘야 했다.
“크아아!”
더르규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    *    *
‘정말 잘 싸운다!’
잉걸델 교수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아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두 학생의 자세에 감탄했다면, 지금 감탄은 순수한 검술에 대한 감탄이었다.
지금 신입생들 중 가장 뛰어난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먼저 초이 가문의 더르규는 고산월검을 멋들어지게 선보이고 있었다.
쾌검답게 빠르고 경쾌한 리듬에 맞춰 목검이 쉭쉭 소리를 내며 이한을 찌르고 들어갔다.
원래라면 찌르고 뺄 때마다 동작이 느려져야 했지만 더르규는 느려지지 않고 그 속도를 유지했다.
검에 마력을 조금이나마 불어넣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냥 찌르고 들어와도 막기 힘들 텐데 검식 하나하나에 마력까지 불어넣어져 있다니.
신입생한테는 지나치게 가혹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도 만만치 않았다.
툭.
“!”
툭.
“!!”
툭-
“!!!!”
공격을 하면 할수록 더르규의 표정이 초조함과 안타까움으로 물들어나갔다.
더르규는 상대한테 역습당하지 않기 위해 빠르게, 멈추지 않고 걸음을 밟고 있었다.
그러면서 공격할 때는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키면서 던지듯이 확 찌르고 들어갔다.
그러지 않으면 검의 속도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화려하고 빠른 공격은 가능했지만 그만큼 체력 소모가 심했다. 더르규는 벌써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마치 바위처럼 적은 움직임으로 가만히 있다가 찌르기가 들어오면 툭, 툭 옆으로 궤도를 쳐내고만 있었다.
마치 공격이 다 보이는 것처럼.
‘제기랄!’
더르규는 바위를 바늘로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공격을 예측했다 하더라도 상대가 저렇게 쉽게 쳐낼 줄이야.
‘찌르기에 담긴 힘이 부족한 건가? 상대는 왜 지치지 않는 거지!’
더르규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때 이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자식 숨 넘어갈 것 같은데 왜 안 멈춰?’
이한이 배운 벽암검은 무겁고 강한 중검 계열의 검술.
더르규 상대로 한 방 맞추려고 해도, 더르규가 정말 미친듯이 왔다갔다 움직여서 그게 쉽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상대보다 이한이 체력적으로 유리하다는 점.
상대는 흥분한데다가, 바닥을 굴렀고, 동작이 훨씬 더 격렬하며, 무엇보다...
이한은 검을 휘두를 때 마력 좀 불어넣는다고 지치지 않았다.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자각한 스스로의 마력은 이한 본인도 놀라울 정도였다.
...이 정도면 검에 마력을 꽤 오랫동안 많이 불어넣은 거 같은데 왜 지치질 않지?
하지만 이한이 유리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여유롭지는 않았다.
솔직히 더르규의 공격이 상당히 매서웠던 것이다.
한 번 한 번 튕겨낼 때마다 묵직한 힘이 실려 있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목검이라서 그렇지 이게 진검이었다면 스치는 것만으로도 옷깃이 잘려나갔으리라.
겉에서 보면 이한이 여유 있는 동작으로 짧게 짧게 튕겨내며 막아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막아내는 이한은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허어억...!”
그리고 결국 먼저 무너진 건 더르규였다.
호흡을 참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도 참았지만, 더르규는 정신적으로 먼저 흔들렸다.
상대가 너무 흔들림이 없어 보였던 탓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공격을 막아내는 워다나즈 가문의 놈!
그 눈빛을 마주하자 더르규는 자신이 이미 상대방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됐다.
‘안타깝군.’
잉걸델 교수는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더르규가 먼저 무너지긴 했지만 이한도 제법 몰려 있었다.
그만큼 더르규의 공격이 매서웠던 것이다.
그걸 알았다면 더르규도 좀 더 힘을 짜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더르규는 상대를 과대평가하고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어린 만큼 어쩔 수 없는 실수였다.
하물며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은 대귀족 특유의 냉정하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벌써부터 뿌리고 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미남은 검술에서도 여러모로 유리한 법.
팍!
더르규가 무너지자 워다나즈는 바로 목검을 휘둘러 상대의 검을 날려버리고 목 끝 앞에서 검을 멈췄다.
“그만! 워다나즈가 이겼습니다.”
잉걸델 교수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의 싸움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들 중 가장 뛰어난 더르규가 지다니!
“말도 안 돼!”
“역시 흙을 뿌려서...”
“더르규도 땅바닥에서 굴렀잖아.”
“뭐 어쩌라고 새끼야. 더르규 잘못이라 이거야?”
“아... 아니. 미안.”
잉걸델 교수는 수군거리는 학생들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 두 학생은 참으로 훌륭한 검술을 보여줬습니다. 오늘 이겼다고 앞으로도 이기란 법은 없고, 오늘 졌다고 해서 앞으로도 지란 법은 없습니다. 승자는 겸손하고,
패자는 정진해서 서로 나아가도록 하십시오. 서로에게 인사.”
이한은 손을 내밀면서 상대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이한은 상대가 노려보거나, 침을 뱉거나, 손에 힘을 주거나, 그 외의 지랄을 할 거라고 예상을 했다.
이한이 강의 들으러 왔을 때 시비를 건 걸 보면 성질이 보통이 아닌데 가장 자부심 강한 검술에서 꺾인 것이다.
‘주먹으로 덤비면 로우킥으로 하단 무너뜨리고 바로 카운터 넣어야지.’
이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쳐다보며 혹시 모를 기습을 대비했다.
잉걸델 교수가 옆에 있다지만, 교수는 기본적으로 믿을 게 안 된다는 걸 예전에도 배웠고 이 학교에서도 새로 배우지 않았던가.
“...좋은 싸움이었다. 내가 잘못보고 그쪽을 무시한 걸 사과하지. 넌 이 강의를 들을 자격이 충분하다.”
“!”
그러나 오크는 솔직하게 사과를 해왔다.
이한은 ‘이 자식이 방심시켜놓고 기습하려는 건 아니겠지’하고 확인해봤지만 그런 의도는 없어보였다.
그렇다면...
“너도 걱정해서 한 소리겠지. 신경 쓰지 않는다.”
“......”
탁-
더르규는 이한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에는 존중의 뜻이 담겨 있었다.
짝짝짝-
자신이 생각한 아름다운 모습에 잉걸델 교수는 감격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물론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매우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다들 뭐합니까? 박수 안 치고?”
“......”
스릉-
잉걸델 교수가 정색하고 검을 뽑아들자, 학생들은 다급하게 손을 놀렸다.
짝짝짝짝짝짝!
*    *    *
“저런 망신을 당하고서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은 아니겠지? 밟아버려.”
차가운 목소리에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더르규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부족해서 진 거다.”
“아니야! 그 자식이 흙을 차서 진 거지!”
“아니. 흙을 뿌리지 않았어도 내가 졌을 거다. 그리고 그런 수작 때문에 진 거라면 그 또한 내가 부족해서 진 거지.”
더르규의 말에 학생들은 술렁거렸다.
가장 검술 솜씨가 좋은 만큼, 기숙사 학생들에게 더르규의 말은 무게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금색 머리칼의 학생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건 안 궁금해. 중요한 건 우리 탑의 명예와 자존심이 너 때문에 깨졌다는 거야. 책임을 져. 초이 가문.”
“......”
모라디 가문의 혈통을 이은 지젤은 차갑게 내뱉었다.
그 말에 더르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북부의 기사 가문들 사이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라디 가문인 만큼 더르규도 쉽게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내 실력이 부족해서 졌는데, 어떻게 책임을 지란 거지?”
“간단해. 혼자서 가서 졌으면 여럿이서 가면 그만이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명의 학생이 나와서 더르규 옆에 섰다.
“걱정 마. 더르규. 내가 도와줄 테니.”
“세 명이면 충분하지.”
“...셋이서 한 명을 상대하는 게 기사로서 부끄럽진 않나?”
더르규는 어떻게든 상황을 막아내기 위해 힘겹게 말했다.
그러자 지젤은 피식 웃었다.
“그런 소리를 할 거면 이겼어야지. 져놓고 그런 소리를 해?”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반응은 반으로 나뉘었다.
평소부터 모라디 가문의 편에 서던 학생들 절반.
그리고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 절반.
그러나 그 절반의 학생들도 나서지는 않았다.
더르규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했다.
“거절하겠다.”
“너. 후회할 걸.”
지젤은 더 이상 권하지 않겠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겁쟁이는 빠진댄다. 너까지 해서 셋. 가서 워다나즈를 좀 밟아주고 와.”
“알겠어. 모라디.”
“걱정하지 말라고.”
“......”
아무리 이한이 잘 싸운다 하더라도 3 대 1. 너무 불리했다.
심지어 검술을 꾸준히 배운 셋이었다.
더르규는 결심을 했다.
명예를 위해 이한의 편에 서기로.
*    *    *
빡!
“워다나즈 이 새끼!! 감히!!”
“...다음 놈도 뒤지고 싶으면 다가와 봐라.”
이한은 차갑게 말했다. 그 모습에 위압된 두 학생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뒤늦게 도와주러 달려온 더르규는 경악한 표정으로 쓰러져 있는 학생을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018 화
이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속이 좁았다.
수업이 끝나서 돌아가려고 하자마자 갑자기 세 명이 이한의 앞길을 막아선 것이다.
“워다나즈. 그렇게 비열하게 이기고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았냐?”
“다시는 뻔뻔하게 강의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교훈을 내려주마.”
이한이 이름을 모르는 드워프 학생과 오크 학생이 내뱉듯 말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이한은 캐보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내 가문이 워다나즈 가문인 걸 알고도 이러는 건가?”
“비겁하게 가문 갖고 협박을 하다니...!”
“3 대 1 로 덤비는 건 비겁하지 않고?”
“시끄러워!”
아닌 척 했지만 상대의 표정에는 얼핏 두려움이 스쳐지나갔다.
워다나즈 가문의 소문은 들어본 적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기숙사 자존심 좀 세워보겠다고 이렇게 3 대 1 로 덤벼서 주먹질을 하겠다?
‘일단 기본적으로 머리통이 좀 비어 있는 거랑 별개로... 믿는 구석이 있나?’
자기가 대가문 출신이거나 아니면 대가문 출신의 뒷배가 있거나.
‘전자는 아닌 거 같으니 후자일 텐데.’
그게 맞다면 머리통이 좀 심하게 비어 있는 게 맞았다.
워다나즈 가문 같은 대가문과 마찰이 생기면 상대 대가문이 챙겨줄 리가 없지 않은가.
어지간하면 이용당하고 버려질 가능성이 높았다.
괜히 대가문들 싸움에 끼지 말란 말이 있는 게 아닌데...
‘말해서 이해할 놈이라면 애초에 이렇게 덤비지도 않았겠지.’
상대가 앞뒤 생각 안 하고 무작정 덤비는 놈이라면 아무리 이한이 논리적으로 설득해도 별 의미가 없었다.
주먹은 가깝고 가문은 멀리 있지 않은가.
“누가 시킨 거지? 아마 너희들의 가문이 거절하기 힘든 힘을 가진 가문이겠지.”
“!!!”
“!!!!!”
세 학생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어떻게 다른 기숙사 학생 놈이 흰 호랑이 탑 내부에서 굴러가는 일을 이렇게 맞춘단 말인가?
“닥... 닥쳐!”
“공격하자고!”
“둘러싸!”
셋은 더 이상 대화해봤자 자기들만 손해라는 걸 깨달았는지 공격을 진행하려고 슬금슬금 움직였다.
‘3 대 1 은 무리다.’
그 틈을 타 이한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알라르롱은 단호하게 말했었다.
-1 대 1 은 하셔도 됩니다. 2 대 1 은 어쩔 수 없다면 하십시오. 3 대 1 은 그냥 도망치십시오.
세 명과 싸울 일이 생기면 그냥 튀어라!
이한도 거기에는 동의했다.
셋 모두 기사 가문 출신으로 검술 꽤 배워본 놈들일 텐데, 3 대 1 로 붙으면 무조건 이한이 불리했다.
문제는 셋이 길을 막고 있다는 것.
어떻게든 흔들어서 뚫어야 했다.
‘그래!’
그 순간 이한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상대는 이한이 마법명가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걸 이용해야 했다.
“움직여라!”
이한이 힘 있는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자 세 명의 학생은 깜짝 놀랐다.
마법이라니.
그들은 아직 제일 간단한 발광 마법도 헤매고 있는데!
‘하급 조종으로 위협한다.’
이한도 <하급 조종> 마법을 완벽하게 익힌 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조종은 아직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상대방은 이한이 완벽하게 익히지 못했다는 사실을 모를 테니까.
서로 마법 실력이 하찮은 지금, 이한의 마법은 상대를 겁먹고 움츠러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빡!
“......”
이한은 경악으로 눈을 크게 떴다.
이한이 하려고 한 건 그냥 돌멩이를 공중에 띄우려고 한 것뿐이었다.
일단 돌멩이를 공중에 띄우면 그걸 이용해서 얼마든지 상대방을 위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한은 자신의 마법 실력을 과대평가했다.
공중에 띄운 채로 정지시키는 것도 생각보다 어려웠던 것이다.
주문을 거는 순간 돌멩이는 쏜살같이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그리고 염소 수인족 학생의 이마를 정확하게 후려갈겼다.
“워다나즈 이 새끼!! 감히!!”
남은 두 학생은 처음으로 맞이하는 전투마법에 경악했다.
반응할 틈도 없이 날아오는 바위 화살 주문이라니.
아무리 워다나즈 가문이라지만 벌써 이런 강력한 마법을...!
“...다음 놈도 뒤지고 싶으면 다가와 봐라.”
이한은 차갑게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방금 마법은 의도했던 것처럼 허세를 부려야했다.
“으윽...”
“비키는 게 좋을 거다. 너희에게 검이 있다면 내게는 마법이 있으니까.”
둘은 두려움과 자존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이한은 다시 한 번 마법을 사용했다.
“움직여라!”
“으악!”
드워프 학생은 몸을 옆으로 날렸다. 그러나 바위 화살은 몸을 날린 드워프 학생을 정확히 추적해 배를 후려갈겼다.
빡!
“컥... 억.”
드워프 학생은 숨도 쉬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혼자 남은 오크 학생은 그대로 겁에 질렸다.
피했는데도 맞히다니.
정말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내가 마법 잘못 익힌 건 아니겠지?’
그리고 쓰러진 학생을 보고 이한도 속으로 당황스러워했다.
어떻게 그냥 띄우는 건 안 되는데 상대 맞히는 건 노리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잘 되냐?
“그... 그만해. 내가 졌다! 비킬게! 비키겠어! 그만 쏴! 죽이지 마!”
‘안 죽여 미친놈아.’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끝까지 표정을 유지했다.
“앞으로 조심해라. 워다나즈 가문의 이름을.”
“크윽...”
오크 학생은 이를 갈았지만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뒤늦게 달려온 더르규는 황당한 표정 그대로 이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쪽도 싸우려고 온 건가?”
“아. 아니.”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더르규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    *    *
“모라디 가문의 가젤이란 녀석이 그런 협박을?”
“아니. 지젤...”
“아. 그래. 지젤. 이름이 어렵군. 어쨌든 그 모라디 가문의 지젤이란 녀석이?”
더르규가 털어놓는 고백에 이한은 살짝 놀랐다.
푸른 용의 탑과 흰 호랑이의 탑 분위기가 꽤 달랐던 것이다.
푸른 용의 탑은 각자 다 대가문 출신이거나 황족 출신이라 그런지 어느 누가 휘어잡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실제로는 각자의 가문들끼리 가진 관계를 따라 삼삼오오 모여 활동하는 분위기에 가까웠다.
황녀 아덴아르트가 가장 유명한 편이라 따르는 학생들이 몇 명 있긴 했지만, 그것도 명령 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흰 호랑이 탑은 모라디 가문 출신 지젤이 좌지우지하고 있다니.
“어떻게 생긴 녀석이지?”
“이렇게.”
더르규는 나뭇가지로 바닥에 그림을 솜씨 좋게 그려가며 외모를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이한은 경악했다.
‘아니...?!’
검술 수업 들을 때 이한에게 친절한 척을 하며 말을 걸던 학생 아닌가.
“어쩐지 반반하게 생긴 주제에 지나치게 친절하더니... 역시나 사악한 속마음을 숨기고 있었군.”
“워다나즈. 지젤 모라디가 사악하다는 건 동의하지만 그게 외모하고 상관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게다가 반반하게 생겼다니. 혹시 지젤을 남자로...”
이한은 더르규의 지적을 한 귀로 흘렸다.
반반하게 생긴 사내놈 변호해주는 걸 뭐하러 듣는단 말인가.
‘그나저나 아이러니하군.’
처음에 이한은 그나마 친절하게 굴었던 지젤의 힘을 빌려 다른 학생들도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처음에 충돌이 일어났던 더르규와 친해지고, 지젤은 사악한 꿍꿍이를 숨기고 있었다니.
‘날 떠보려고 말을 걸었던 건가?’
이한은 지젤에게 했던 말들을 되새겨보았다.
딱히 중요하거나 약점이 될 말을 하지는 않았었다.
‘나는 학점 날로 먹으려고 검술 강의를 들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학생들을 시켜서 기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 말을 들었으면 보통 만만하게 생각하지, 위협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해가 안 가는군. 왜 나를 공격하려고 한 거지?”
“내가 생각하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넌 워다나즈 가문이다.”
“두 가문 사이에 내가 모르는 악연이 있나?”
이한은 의아해했다.
혹시 마법가문인 워다나즈 가문과 기사가문인 모라디 가문에 피의 악연이?
“아니. 내가 알기로 그런 건 없다. 다만 명성 높은 워다나즈 가문 출신인 너를 가차 없이 밟으면 우리 1 학년들 사이에서 지젤의 권력은 그만큼 강해진다.”
“......”
이한은 바로 뜻을 알아차리고 정색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한이...
워다나즈 가문 꼬리표가 붙은 비싼 트로피로 보였단 말인가?
‘은근히 기분 나쁘군 이거.’
아무리 십대들의 유치한 시비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기분 나쁜 건 기분 나쁜 거였다.
“지금 우리 1 학년들 중에 모두가 지젤을 따르지는 않지만, 지젤이 그런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지젤을 따르는 학생들이 더 많아지겠지.”
“동급생들 시켜서 주먹질 날리는 걸 카리스마라고 하나? 기사 가문 놈들이란.”
이한의 말에 더르규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또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너한테 한 말은 아니야. 뭘 풀이 죽고 그래.”
“고맙다. 워다나즈. 말을 계속하도록 하지. 지젤은 언제 어디서나 우두머리 역할을 하려고 하는 성격이다. 자기 권력, 자기 지배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는
녀석이지. 그러니... 검술 강의를 계속 들을 거라면 주의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검술 강의를 계속 듣는다면, 그리고 이한이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질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감정을 교묘하게 선동해서 학생들이 자신을 따르게 만들 것이다.
더르규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꼭 검술 강의를 듣지 않더라도 쉬는 시간에 검술을 따로 배우는 방법도 있다.”
“흠. 더르규.”
“?”
“지금 떠올랐는데, 나 <기초 체력 훈련>도 들으려고 하는데... 이것도 흰 호랑이 탑 학생들만 듣나?”
“...워다나즈. 무례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워다나즈 가문은 마법명가 아니었나...? 대체 왜...?”
더르규는 참다가 결국 의문을 내뱉었다.
*    *    *
더르규와 갈라지고 나서 돌아오면서 이한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더르규의 조언은 가장 쉬운 조언이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만 듣는 강의를 피해라.
강의만 피한다면 지젤이 아무리 시비를 걸려고 해도 걸 수가 없었다.
다른 강의에서는 이한도 푸른 용의 탑 학생들과 같이 다닐 텐데 어떻게 시비를 걸겠는가.
그리고 지젤도 이한이 강의에서 사라지면 굳이 쫓아와서 시비 걸지는 않을 것이다. 남는 게 없으니까.
하지만 이한은 그 조언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첫 번째로, 더르규는 몰랐지만 이한은 학점을 쉽게 받기 위해 그 강의들을 고른 것이었고...
‘감히 나한테 정치질을 시도한다 이거지?’
두 번째는 자존심이었다.
저런 같잖은 이유로 같잖은 수작을 부려오는데 그걸 내버려둔다?
이한은 손해 보면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쾅-
이한은 탑으로 돌아가 1 학년 휴게실의 문을 열었다.
먼저 와있던 학생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한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친구들아!”
“...?”
“??”
“오늘 난 흰 호랑이 탑 학생들한테 공격받았다. 그저 내가 푸른 용의 탑 소속이란 이유만으로!”
순간 침묵.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말에 학생들은 한 박자 늦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 누군가 탁자를 뒤집었다.
“...이 깡통덩어리 자식들이 돌아버렸나!?”
“감히 보이는 게 없다 이거지!!”
‘음?’
동급생들의 반응은 이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격렬했다.
“다들 연락 돌려! 흰 호랑이 탑 놈들이 감히 워다나즈를 건드렸어!”
“가이난도면 모를까 워다나즈를 건드렸다고? 네놈들은 선을 넘은 거야!”
“무기 구할 방법 없나? 어디서 갖고 올 방법을 찾아봐! 죽여버리겠어!”
좀 지나치게 과열되는 거 같자 이한은 말리기 위해 나섰다.
“잠깐. 잠깐. 다들 날 위해서 너무 친절한데. 그 정도까지는 해줄 필요 없다. 나는...”
“아니야! 워다나즈. 너한테 받은 은혜가 있다.”
“맞아! 여기서 워다나즈가 구해 온 고기를 먹지 않은 자가 없는데!”
자기들이 얼마나 바가지 쓴 건지도 모르고 고마워하는 친구들을 보자 이한은 아주 조금 미안해졌다.
“그리고 이건 자존심 문제야!”
“흰 호랑이 탑 놈들을 무찌르자!”
“흰 호랑이 탑 놈들을 무찌르자!!”
019 화
‘내가 얘네들을 너무 과소평가했군.’
물론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이한을 좋아하고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 뜨겁게 날뛰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기사 가문 출신에, 푸른 용의 탑 학생들과는 정반대되는 거칠고 사나운 몸가짐.
안 그래도 내심 경멸하고 있었는데 그쪽에서 먼저 건드리자 바로 폭발해버린 것이다.
평소에 이한과 이야기를 거의 나누지 않은 다른 그룹의 학생들도 단단히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무기로 쓸 수 있는 걸 들고 따라 나와! 흰 호랑이 탑으로 가자!”
“잠깐!”
달카드 가문의 아산이 흥분한 학생들 앞에 섰다.
아산은 휴게실 테이블 위로 올라간 다음 동급생들을 말렸다.
“모두 진정해!”
‘오. 제정신인 놈이 있었군.’
이한은 아산의 말에 살짝 기뻐졌다.
그래도 모두 다 상황 파악을 못하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뭐냐, 달카드! 겁이라도 먹은 거야?”
“지금 명예가 모독당했는데!”
물론 학생들은 말리는 아산의 모습에 더 화를 냈다.
아산은 침착하게 말했다.
“흰 호랑이 탑 놈들은 기사 가문 출신.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 95% 확률로 우리가 당할 수 있다.”
“그럼 이대로 물러나자고?!”
“아니. 우리는 인원을 나눠서 조를 짠 다음 체계적으로 매복해 있다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발견해서 공격해야 한다!”
“오...!”
“......”
이한은 한숨을 쉬었다.
기대한 내가 멍청이지!
“잠깐, 잠깐!”
이한은 아산을 대신해서 크게 외쳤다.
이 문제의 당사자인 이한의 목소리는 아산보다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이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먼저 이것부터 확실히 하자. 나는 너희들한테 내 복수를 부탁할 생각이 없다! 이건 내 명예와 관련된 일이다. 내 복수를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 정도로 내가 약하지는
않아!”
이한의 말에 학생들은 웅성거렸다.
여기 있는 학생들 중 명예를 신경쓰지 않는 학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각자 가문의 이름과 함께 명예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이한이 스스로의 명예를 이유로 나서자 다들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워다나즈. 흰 호랑이 탑 놈들은 간교하고 비열하고 치사하며 더러운 놈들이라 네가 정정당당하게 복수를 하려고 해도 그게 여의치 않을 텐데.”
“......”
학생 중 한 명이 숨도 쉬지 않고 욕을 하는 모습에 이한은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노련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처럼 명예로운 가문 출신들이 저들과 똑같이 구는 건 진흙탕에 들어가 같이 뒹구는 꼴이다. 그렇게 굴지는 말자!”
이한의 목소리에는 확실한 설득력이 담겨 있었다.
당당한 겉모습과 태도에서 나오는 분위기는 물론이고 평소 보여줬던 행동까지.
분노하고 일어섰던 학생들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워다나즈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비열한 놈들 같으니. 명예가 뭔지도 모르는 놈들.”
친구들이 진정하자 이한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애초에 이 이야기를 하려고 화제를 꺼냈던 것이다.
“대신 놈들이 시비를 걸어오면 서로 협력해서 대응하자. 흰 호랑이 탑 놈들은 비겁하게 여럿이서 덤빌 가능성이 높으니까.”
“과연!”
“그래! 그 정도는 해줘야지!”
이한의 말에 학생들은 그제야 만족했는지 발을 구르고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잘 됐군.’
이한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제 학교 지나가다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시비 걸어오면 동료들을 불러서 맞받아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정도만 되어도 충분...
“그러고 보니 다음 <기초 마법의 이해>는 흰 호랑이 탑 놈들하고 같이 듣잖아?”
“잘 됐네. 그 무식하고 천박한 놈들한테 본때를 보여줄 수 있겠어.”
“애초에 흙먼지 위에서 뒹굴면서 쇳조각이나 휘두를 자식들이 무슨 마법을 배우겠다고...”
“난 <빛 생성> 마법을 마스터했어.”
“너도? 나도. 그 놈들 앞에서 마법을 보여주자고. 그 놈들 낯짝이 궁금한데? 그 놈들 중 어느 누구도 마법을 다 익히지 못했을 걸?”
“이게 바로 귀족다운 품위 있는 방식이지!”
‘...잠깐.’
다시 자리에 앉아서 떠드는 학생들의 대화에, 이한은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지금 설마 발광 마법 못 익힌 거 나밖에 없나?
*    *    *
다음 날.
기지개를 펴며 휴게실로 나온 요네르는 깜짝 놀랐다.
이한의 눈 밑에 짙은 그림자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래!?”
요네르는 처음에는 식사 때문인 줄 알았다.
기숙사에서 매 끼 나오는 식사는 한창 배고플 학생들을 굶주리게 만들었으니까.
처음 기숙사로 들어간 다음 날, 학생들의 얼굴은 실제로 푸석푸석하고 퀭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한은 처음 날부터 적응을 완벽하게 했던 특이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굶주릴 때, 혼자 우레걸음의 오두막에 가서 훈제한 고깃덩이와 갓 캐낸 채소들을 갖고 와서 친구들에게 나눠 줄 정도로(돈은 좀 받았지만)
여유가 넘치던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 식사 때문에 저럴 이유가 없었다.
가이난도라면 모를까...
“마법 연습하느라.”
“마법? 따로 연습하면 안... 아. 저번에 킴 교수님한테 허락 받았다고 했었지?”
“응. 다른 사람들은 다들 <빛 생성>을 성공했다고 해서 밤새 연습했지.”
“?”
요네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게 무슨...?”
“으하아아암.”
가이난도가 늘어지는 하품을 하며 휴게실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허름한 옷에 달린 주머니에서 소시지를(어제 이한에게 돈 주고 산 소시지였다) 꺼냈다.
가이난도는 그 소시지를 마치 보물처럼 소중하게 다뤘다.
누가 훔쳐가기라도 할까봐 주변을 두리번거린 다음 꼬챙이 끝에 꽂아 벽난로 안에서 타닥거리는 불꽃에 집어넣었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시지가 익기 시작했다. 질 좋은 돼지를 잡아서 만든 만큼 소시지의 냄새는 굶주린 창자를 자극했다.
“헤헤헷...”
“......”
“......”
이한과 요네르가 딱하게 보고 있다는 건 눈치 채지 못하고, 가이난도는 다른 주머니에서 감자(이것도 돈 주고 산 거였다)를 꺼냈다.
그리고는 벽난로의 모닥불 밑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헤헤헤헷...”
“...가이난도. 안 뺏어먹으니까 그냥 멀쩡히 먹어라.”
“?!??”
가이난도는 펄쩍 뛰며 놀랐다. 이한과 요네르가 뒤에 있는 줄 몰랐던 것이다.
“언, 언제부터 있었냐?!”
“네가 소시지 소중하게 꽂아 넣을 때부터.”
“아, 안 그랬어!”
“소시지 타겠다. 꺼내기나 해.”
“헉!”
가이난도는 그 말을 듣고 허겁지겁 꼬챙이를 꺼냈다. 그리고는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가이난도. 진짜 나하고 요네르가 네 소시지와 감자를 뺏을 거 같냐?”
“물... 물론 아니지.”
그렇게 말했지만 가이난도는 여전히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이한은 굳이 말하는 대신 요네르를 보며 말했다.
“상태가 심각한데.”
“다들 배고파하고 있어.”
가이난도가 특별히 미친놈이라기보다는 지금 다들 배가 고픈 상태였다.
그나마 이한이 우레걸음의 오두막에서 식재료를 갖고 와서 나눠주니까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학생들의 상태는 더더욱 안 좋아졌을 것이다.
“고기도 이번 주말이면 다 먹을 것 같은데... 주말에 새로 사냥을 해야겠는데.”
“괜찮을까?”
“닐리아하고 같이 가자고 해야지.”
이한의 말에 요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능력 있는 다크 엘프 사냥인 닐리아가 같이 가준다면 든든할 것이다.
물론 닐리아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았고, 들었다면 ‘왜 갑자기 나를!?’하며 황당해했겠지만...
“우레걸음 교수가 은근히 치사하단 말이지.”
이한은 투덜거렸다.
우레걸음 교수는 은근히 쪼잔한 드워프였다.
오두막을 마음껏 쓰게 허락해줬지만, 이한이 그 안에 있는 걸 가져가는 것에는 매우 깐깐했다.
그 자리에서 캐서 먹거나 요리해서 먹는 거면 몰라도 가져가려고 하면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다.
-잠깐, 그 빵은 내가 저녁에 먹으려고 구워 놓은 빵이잖아! 아니! 잼은 또 언제 주머니에 넣은 거냐! 그걸 왜 가져가려는 거냐?
-아니. 교수님이 시키는 대로 텃밭을 가꿨는데 이것도 못 가져갑니까?
-방금 배부르게 잘 먹었잖아! 왜 추가로 가져가!? 올 때마다 그렇게 다 가져가면 오두막 거덜나겠다!
“빈틈이 없어서 빼돌릴 방법도 없어 보이고.”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 수는 없을까...”
그렇게 말한 요네르는 스스로가 한 말을 깨닫고 ‘헉’하고 놀랐다.
어느새 이 학교에 물들고 있었던 것이다.
*    *    *
트롤 교수, 가르시아 킴은 들어오는 학생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은 만큼 가르시아는 미묘한 변화들을 금세 눈치 챌 수 있었다.
첫 번째.
마법학교에 들어온 첫 주가 끝나가고 있는 만큼 학생들은 매우 굶주리고 배고파하고 있었다.
가르시아가 교장의 이론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학생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데에 굶기는 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기는 했다.
굶주린 학생들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온몸의 힘을 다하는 것이다.
‘다들 힘내세요.’
두 번째.
벌써 탑 사이에 긴장감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출신들이 모인 만큼 학생들끼리 경쟁하고 적대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오만한 푸른 용의 탑>과 <벼락을 물어뜯는 흰 호랑이의 탑>은 언제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전통 깊은 대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란 귀족 자제들 vs 거칠고 황량한 제국의 변방에서 태어나고 자란 기사 자제들.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교장의 이론에 따르면 학생들을 빠릿빠릿하게 만들어주는 것 중 하나였다.
서로 경쟁할수록 강해진다!
“자. 다들 앉으세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충격적이지는 않았지만, 가르시아 교수는 여전히 위압감이 넘쳤다.
트롤의 피가 섞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도 흰 호랑이의 탑 학생들도 얌전히 앉았다.
“저번에 <빛 생성> 마법을 배워봤었죠. 다들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망할 건 없어요. 마법의 길은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처음에는 헤매겠지만,
한 번 요령을 익히고 감을 잡는 순간 실력이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할 거예요. 자. 그래도 혹시 그 사이에 <빛 생성> 마법을 성공한 사람이 있나요?”
이한은 하품이 나오는 걸 참으면서 손을 들었다.
‘밤새 연습했네.’
다른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전부 다 <빛 생성> 마법을 성공했다고 하자, 이한은 급격히 초조해졌다.
숙련된 한국인답게 남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지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게 이한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한은 밤새 잠을 자는 대신 <빛 생성> 마법을 연습했다.
어마어마한 마력량이 아니었다면 진작 쓰러졌을 테지만 이한은 아무리 써도 멀쩡했다. 조금 졸리기만 했을 뿐.
“...?”
이한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주변 학생들 중 아무도 손을 든 놈이 없었던 것이다.
‘뭐야?!’
“오오...”
“역시 워다나즈.”
“대단해.”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부러움과 뿌듯함이 섞인 표정으로 작게 박수를 쳤다.
흰 호랑이 탑 놈들아 봐라!
이게 워다나즈다!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어이.”
이한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옆에 있는 학생한테 물었다.
분명히 발광 마법을 마스터했다고 한 놈이었다.
“발광 마법 익혔다면서?”
“아. 혹시 들었어? 그게... 거의 성공했지만 완전히 성공은 아니었거든. 근데 그 정도면 사실 성공 직전이나 마찬가지라서 마스터했다고 한 거지.”
“......”
속았다!
‘이 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귀족 새끼들...!’
020 화
계속 워다나즈 가문에 있다 보니 제국 귀족들이 얼마나 허세부리기 좋아하는 족속들인지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제국 귀족들은 목숨보다 명예를 중요시하고, 당장 파산하기 직전이어도 호화로운 식사를 하는 걸 자존심으로 여기는 이들!
‘아오. 쓸데없이 고생했네.’
“훌륭해요! 푸른 용의 탑에서 두 명이나 나왔군요.”
“?”
이한은 옆을 쳐다보았다.
황녀도 손을 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한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별로 호의적인 눈빛이 아니었다. 푸른 눈동자에 차가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
‘뭐지?’
이한은 생각에 잠겼다.
푸른 용의 탑에서 손꼽히는 인재인 황녀에게 미움을 받는 건 별로 유익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한은 딱히 황녀에게 잘못을 한 기억이 없었다.
오히려 친절을 베풀기만 했던 것이다.
멧돼지도 같이 잡았고 학생에게 도움 되는 유익한 강의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고...
‘나중에 과제나 시험 관련해서 어떻게 도움을 받을지 계획도 세워놨는데. 왜 저러지? 가이난도와 같이 돌아다녀서 그런가?’
툭툭-
“워다나즈.”
아산 달카드가 작게 말했다.
“워다나즈 너에 관해 도는 이상한 소문을 황녀께서 믿는 모양이다.”
“이상한 소문이라니?”
“네가 마법에 몰두하지 않고 게으르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소문.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지.”
아산은 자기 일처럼 화난 표정을 지었다.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이한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한은 놀랐다.
‘아니. 정확한데? 어떻게 알았지?’
너무 정확하게 알아차려서 소름이 돋을 정도!
그리고 이한은 이게 딱히 불명예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산은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에 매우 매우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난 이번 일로 황녀께 실망했다. 물론 이런 소문을 퍼뜨린 놈이 가장 나쁜 놈이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믿다니.”
“아니 뭐... 믿을 수도 있지?”
“...?!”
아산은 경악했다.
워다나즈...
대체 얼마나 관대할 생각이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대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하지만, 지금 아산 눈앞의 워다나즈처럼 귀족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학생은 없었다.
아산은 가문에서 왜 이 학교로 아산을 보냈는지 새삼 깨달았다.
이런 친구를 만나라고 보낸 게 분명했다. 
“넌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워다나즈.”
“??”
이한은 아산의 반응에 의아해했다.
‘뭐 잘못 먹었나?’
*    *    *
“빛이여!”
“빛나라.”
이한과 황녀는 <빛 생성> 마법을 성공시켰다.
지팡이 끝에 구(球) 형태의 발광하는 빛 덩어리가 생기고 마치 랜턴처럼 머물렀다.
황녀의 <빛 생성> 마법은 어딘지 서늘하고 뚜렷한 느낌이 들었고, 이한의 <빛 생성> 마법은 태양처럼 강렬하게 타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가르시아 교수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아주 잘 했어요! 첫 주에 발광 마법을 성공시키는 학생들은 드문 편이죠. 뛰어난 인재들을 만나게 되어서 기쁘네요. 물론 그렇다고 초조해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어요. 발광 마법은 1 서클 마법 중에 가장 기초적인 마법이자, 마법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마법이니까요. 조금 빠르거나 조금 늦는 걸로 마법의 길이 달리지지는
않을 거랍니다.”
‘별로 설득력 없게 들리는데.’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가르시아 교수가 말한 것처럼, 이 <빛 생성> 마법으로 학생들의 재능을 평가할 수 없긴 했다.
수학으로 비교하면 덧셈 좀 빨리 익숙해진다고 나중에 미적분 같은 복잡한 수학 문제를 잘 풀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경쟁심 가득한 학생들한테 저런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실제로 다들 ‘반드시 다른 탑 놈들보다 먼저 익혀주겠어!’라고 생각하고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가르시아 교수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빛 생성> 마법을 가장 먼저 배우게 한 이유는... 이번 학기에 우리가 배우게 될 마법이 원소 마법이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은 <빛 생성> 마법을 배우면서 원소 마법을
쓰는 요령을 무의식적으로 익혔을 겁니다.”
“!”
학생들은 가르시아 교수의 말에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원소 마법이라니!
원소 마법은 기본적으로는 불, 물, 흙, 바람 같이 쉬운 속성들부터 어둠이나 식물 같은 어려운 속성들까지 포함하고 있는 마법이었다.
그리고 이 원소 마법은 다른 복잡하고 어려운 마법을 익히기에 앞서 탄탄한 기초가 되어주는 역할을 했다.
정령 소환을 하고 싶다?
화염 정령을 소환하고 싶다면 화염 원소 마법을 어느 정도 익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염 정령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아티팩트를 만들고 싶다?
화염 속성을 가진 보석을 다루거나 화염 관련 마법을 넣으려면 당연히 화염 원소 마법을 어느 정도 익혀야 했다.
먼 곳으로 여행을 가거나 제국의 외딴 땅에서 근무하게 됐다?
간단한 원소 마법만으로도 마법사들은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야영지의 불을 피우거나 마실 물을 준비한다거나 같은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고급 인력인 것이다.
이렇듯 원소 마법은 그나마 배우기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다른 마법들로 응용이 쉽다는 점까지, 모든 새내기 마법사들이 배우고 넘어가야 할 기초교육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굳이 비교한다면 다른 고등학문을 배우기 위해 덧셈뺄셈을 배우는 것과 비슷했다.
“오늘도 <빛 생성> 마법 연습을 하겠지만, 동시에 여러분들에게 각종 기초 원소 마법들을 테스트하게 할 겁니다. 사람마다 적성에 맞는 원소가 있고, 그 원소를 찾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학생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소곤거렸다.
사실 마법사들은 모든 마법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자기가 관심이 있고 배우고 싶은 분야만 배우면 됐다.
그런 만큼 모든 원소 마법을 다 익히는 것보다, 자신에게 맞는 원소를 찾아서 열심히 배우는 게 더 좋은 방법이었다.
가르시아 교수가 <빛 생성> 마법에 굳이 집착하지 않는 건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러면...”
가르시아 교수가 거대한 지팡이로 교실 바닥을 두드리자, 각 학생들 앞에 촛불이 생겨나고 불이 붙었다.
“요령은 저번 <빛 생성>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빛이 아닌, 불을 타오르게 만드는 게 다르죠. 좀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빛과 달리 불은 사람을 태울 수
있으니까요.”
꿀꺽-
몇몇 학생들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주문과 함께... 타올라라!”
가르시아 교수 앞에 이글거리는 불덩어리가 나타났다. 아무런 땔감도 없는데 혼자서 타오르는 신비한 마법의 불이었다.
“자. 다들 해보세요. 너무 두려워할 건 없습니다. 제가 곁에 있으니까요.”
“불타올라라!”
“이글이글...”
“지글지글...”
“화르륵...”
학생들은 집중해서 ‘불’의 이미지를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몇몇 눈치 빠른 학생은 가르시아 교수의 의도를 깨닫고 촛불에 손을 가까이 가져다대거나, 혹은 일렁거리는 촛불을 노려보았다.
정신을 집중할 때 실제로 그 대상이 가까이 있으면 훨씬 더 심상(心想)을 만들기 쉬운 것이다.
마법사 특유의 정신력으로 불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마력을 끌어내서 그 불을 만들어내겠다는 강렬한 의지로 주문을 외운다!
이한도 집중해서 불을 익혀보려고 했다. <빛 생성>과 달리 남들한테 속지 않고 평범하게 익힐 생각이었다.
“잠깐. 잠깐.”
“?”
그러나 가르시아 교수가 이한을 막았다.
“이한 학생. 학생은 발화 마법을 연습하지 마세요.”
“???”
이한은 의아해했다.
그러고 보니 이한 앞에만 촛불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 구리 그릇 안에 담긴 찰랑거리는 물이 있었다.
“어째서입니까?”
“위험하니까요.”
“......”
이한은 깨달았다.
<빛 생성> 마법을 연습할 때도 몇 번이고 통제에 실패해서 빛이 폭발하곤 했었다.
그나마 눈이 좀 부실 뿐이지 빛은 폭발해도 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화염이 폭발하면?
‘음. 여럿 죽겠군.’
이한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였다.
“마력에 대한 통제력이 올라가고, 원소에 대한 감각이 더 정교해졌을 때, 그때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이해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물 생성> 마법을 연습해보세요. <물 생성> 마법은 실패하더라도 그렇게 위험하지 않으니까요.”
물.
화염과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원소 중 하나였다.
금속이나 번개의 이미지를 뚜렷하게 떠올리긴 힘들어도, 물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만큼 쉽고 친숙한 원소.
게다가 화염과 달리 실패했을 때 위험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물은 좀 미묘한데.’
물 원소 마법의 단점.
그것은 멋이 없다는 점...
...이 아니라.
‘그것도 있긴 하지만, 쓸모가 좀 미묘한데.’
쓸모가 좀 미묘하다는 점이었다.
공격?
화염이나 번개가 더 나았다.
방어?
흙이나 금속이 더 나았다.
굳이 장점을 뽑자면 여행 다닐 때 마실 물을 자기가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있긴 했지만...
‘정말 미묘한 장점이군.’
제국 마법사로서 날로 먹을 수 있는 달달한 꿀 직장에 앉는 게 목표인 이한에게, 그런 생존적인 쓸모는 좀 많이 미묘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화염을 연습하다가 주변을 태울 수는 없었다.
“샘솟아라!”
“워다나즈. 부럽다. 교수님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받다니.”
옆에서 연습하던 아산이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이한에게는 헛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이게 특별 가르침으로 보이나?’
이한도 그냥 남들 하는 것처럼 화염 마법을 배우고 싶었다.
굳이 쓸모가 미묘한 원소 마법을...
“샘솟아라!”
“샘솟아라!”
촤아아악!
불과 세 번째 시도에서, 허공에 물덩어리가 생겨났다.
“!?”
물방울이 아닌 주먹만한 물덩어리!
이한도 놀랐고 가르시아 교수도 깜짝 놀랐다.
아무리 발광 마법을 성공시켜서 조금 익숙해졌다지만, 세번만에 물 생성 마법을 성공하다니.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게다가 물방울이 아니라 주먹만한 물덩어리라니.
원소와의 적성이 정말 잘 맞아야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대단해!’
“다들 여기 보세요! 이한 학생이 물 원소 마법을 성공시켰어요!”
“우와아...!”
“대단하다!”
“역시 워다나즈!”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기쁜 표정으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찌푸리고 질투 섞인 표정으로 이한의 마법을 쳐다보았다.
짝짝짝-
가르시아 교수는 박수를 치며 말했다.
“이한 학생은 훌륭해요. 다들 본받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여러분. 초조해할 필요는 없어요. 각자 적성에 맞는 원소라는 게 있거든요. 적성에 맞는 원소를 찾으면 금세
요령을 익힐 수 있을 거예요. 화산지대나 대장간에서 자란 학생은 화염에, 강가나 바닷가에서 자란 학생은 물에, 바람 거세게 부는 황량한 땅에서 자란 학생은 바람에...
자기가 익숙한 원소들일수록 심상을 만들기 쉬워서 다루기 쉽지요.”
듣고 있던 이한은 의아해했다.
‘난 딱히 강가나 바닷가 출신도 아닌데?’
인생에서 물과 관련된 기억은 교수한테 물먹은 기억밖에 없었다.
그냥 타고난 성격이 물과 잘 맞는 건가?
그게 나쁜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역시...
‘번개나 얼음 같은 희귀한 속성하고 잘 맞으면 더 좋았을 텐데.’
뭔가 장점은 장점인데, 좀 미묘한 장점이라 기분이 묘했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옆을 보니 황녀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빤히 쳐다본 것 같았다.
‘?’
다른 생각을 하자 허공에 생겨났던 물덩어리가 형태를 잃고 바닥에 촥 쏟아졌다.
가르시아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한 학생의 다음 과제는 물을 생성한 다음 형태를 유지시키고 고정시키는 거겠네요.”
“알겠습니다. 교수님.”
물 생성의 요령을 안 이상, 그 상태로 정신을 집중해서 버티는 건 좀 더 쉬운 일이었다.
이한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런 다음 문득 의문이 들어서 물었다.
“교수님. 얼마나 유지하고 고정시켜야 합니까?”
“아. 그렇게 물을 필요 없이 먼저 마력이 다 소진될 거... 아니. 잠시만요.”
보통 새내기 마법사는 집중력보다 마력이 먼저 다 닳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신입생은 정반대.
어마어마한 마력량을 갖고 있어서 그럴 리가 없었다.
가르시아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대답했다.
“수업 끝날 때까지 유지하고 고정하면 될 것 같네요!”
“...???”
이한은 귀를 의심했다.
어...
그건 체벌 아닌가요?
021 화
-어떤 사람 주변에 미친 사람들만 보이면 그 사람도 미친놈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이런 말이 있었다.
마법학교도 비슷했다.
교수들이 다 미친놈처럼 보이면,  그 교수들과 어울리는 멀쩡한 교수도 의심을 해봐야 한다!
‘음. 그래. 가르시아 교수님은 그 미친 교장하고 친한 사이였지. 역시 교수들은 한 명도 믿어선 안 돼.’
가르시아 교수가 들었다면 억울함에 가슴을 쳤을 속마음이었다.
물론 수업 끝까지 마법을 유지하고 있는 게 정신적으로 가혹하게 느껴질 수는 있었다.
비유하자면 손톱 위에 돌아가는 팽이를 올려놓고 계속해서 균형을 잡은 채 버티는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가르시아 교수도 이한에게 이런 과제를 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먼저 세 번 만에 물 생성을 성공했다는 건 이한이 물과 궁합이 맞는 걸 감안하더라도 매우 재능이 뛰어나다는 걸 의미했다.
게다가 마력량은 그 재능을 압도할 정도로 막대한 상황.
이 정도의 원석이라면 그 빛을 더 발휘할 수 있도록 갈고 닦아야 했다.
이한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연습이라고 생각했기에 가르시아 교수는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물론 이한에게 그런 진심은 전해지지 않았다.
‘앞으로 이 학교의 교수들은 전부 다 나사 하나씩 빠져 있다고 생각해야지.’
집중력을 짜내서 물덩이를 유지하며,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기초 마법의 이해> 수업의 남은 시간은 훈훈하게 흘러갔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 중 몇 명이 추가적으로 <빛 생성>을 성공했고, 황녀는 <화염 생성>도 성공했다.
요네르는 바람 원소와 적성이 잘 맞는다는 걸 깨닫고 기뻐했고, 가이난도는 지팡이 하나를 태워먹을 뻔했다.
그리고 이한은 남은 시간 내내 입 꾹 다물고 물덩어리 유지에 집중해야 했다.
“정말 너무한 거 아닙니까?”
“???”
우레걸음 교수는 이한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이한이 설명한 것 중에 너무한 게 있었는지 딱히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가르시아 킴 교수가 네가 마음에 든 거 아니냐? 그래서 그런 일을 시킨 것 같은데?”
“지금 제가 텃밭을 관리하는 것처럼 말입니까?”
‘아. 녀석 되게 투덜거리네.’
이한의 뼈 있는 말에 우레걸음 교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누구나 주말을 기다리는 금요일 오후.
이한은 우레걸음 교수의 오두막에서 텃밭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보면 ‘저 교수는 정말 지독하다 어떻게 워다나즈 가문 출신한테 저런 잡일을’하며 수군거렸을 터.
하지만 우레걸음 교수도 변명할 건 있었다.
...이건 이한이 와서 하겠다고 한 거였으니까.
-교수님. 오두막 관리를 도우러 왔습니다.
-오오. 고맙다.
-일하는 대신 오두막에 있는 걸 조금 먹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라. 그 정도는...
-그러면 조금 먹는 김에 조금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안 돼. 이 녀석아.
“물어본 내가 잘못했다. 그래.”
우레걸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양 손을 들어올렸다.
‘첫 주는 어땠냐’는 가벼운 질문에 저런 대답이 돌아올 줄이야.
하지만 투덜거리는 말버릇만 빼면 이한은 지금 신입생들 중 가장 기대되는 학생이 맞긴 했다.
가르시아 킴 교수도 그래서 이한을 특별대우 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레걸음 교수가 보기에도 이한의 능력은 뛰어났다.
마법적인 능력이 아니었다.
‘저렇게 끈기 있게 잡일을 해내다니. 보면 볼수록 타고난 놈이야.’
...바로 잡일에 관한 능력이었다.
이한이 들었다면 대번에 정색했을 생각이었지만 우레걸음은 진지했다.
우레걸음이 생각하는 연금술에 가장 필요한 능력은, 바로 저런 잡일을 지치지 않고 해내는 능력이었다.
어떤 시약도 구분할 수 있는 타고난 마력 감지력?
어떤 정령과도 빠르게 친해질 수 있는 정령 친화력?
어떤 섬세한 공정도 해낼 수 있는 미세한 마력 조정력?
다 필요 없었다.
뛰어난 연금술사에게 필요한 건 산더미 같은 플라스크를 묵묵히 닦으면서 도망치지 않는 강철 같은 인내력이었다.
그리고 이한은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능력을 갖고 있었다.
다른 귀족 놈이었다면 아무리 먹을 걸 챙겨줘도 텃밭을 관리하고 오두막을 관리하는 잡일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이한은 오히려 꼬박꼬박 찾아와서 잡일을
하고 먹을 걸 받아갔다.
바로 연금술사의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이상하게 소름이 돋지?’
감자를 캐면서 이한은 의아해했다.
선선한 날씨인데 이상하게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안 힘드냐?”
“괜찮습니다.”
우레걸음의 질문에 이한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실제로 별로 힘들지 않았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원래 교수 밑에서 이런 잡일을 하는 건 매우 익숙했던 것이다.
텃밭에서 싱싱한 야채를 뽑고 강가에 설치된 통발을 꺼내 물고기를 꺼내는 일 정도면 솔직히 쉬운 일에 속했다.
“후후.”
“??”
우레걸음 교수가 만족스럽게 웃자 이한은 더 어리둥절해졌다.
뭐지?
‘남이 열심히 일해서 기분이 좋은가? 역시 교수들이란...’
“넌 재능이 있다. 워다나즈.”
“아. 예.”
“너 지금 귓등으로 흘려들었지?”
“아닙니다. 교수님.”
우레걸음은 쯧쯧 혀를 찼다.
어차피 지금 말해준다고 해도 저 투덜거리는 성격에 귀담아듣진 않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저런 놈이 화강암 조각상 같은 워다나즈 가문에서 나온 걸까?
우레걸음은 안락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드워프 종족 특유의 긴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 넣더니 불을 댕겼다.
그리고는 기분 좋게 연기를 뻐금뻐금 내뿜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다른 일은 없었냐?”
‘이 사람 얼마나 심심한 거야?’
당근에 묻은 흙을 털어내면서 이한은 어이없어했다.
하긴 우레걸음도 교수인 만큼 저러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학생들은 일 시켜놓고 옆에서 자기는 심심해 할 줄 알아야 진정한 교수인 것이다.
“다른 기숙사 학생들하고 마찰은 없었고?”
“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네가 여기 들어온 첫 신입생도 아니고, 마지막 신입생도 아닐 텐데. 당연히 짐작할 수 있다.”
우레걸음은 흡연으로 한껏 기분 좋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맞춰보지. 상대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겠군.”
“예. 맞습니다.”
우레걸음의 말에서, 이한은 푸른 용의 탑이 전통적으로 흰 호랑이 탑과 사이가 안 좋다는 걸 알아차렸다.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지. 한쪽은 제국 대귀족 가문들이고, 한쪽은 기사 가문들이니까. 젊은 나이에 싸움이 안 나겠나?”
“참 어이없는 이유 아닙니까? 그런 이유로 쓸데없이 싸워야 한다니. 마법을 배우기에도 바쁜데.”
이한의 말에 우레걸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한의 말이 맞았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원래 젊을 때는 모두 다 어리석은 법 아니겠는가.
“그래도 워다나즈 너는 조금 보는 눈이 있구나. 그래. 그런 어이없는 이유로 서로 다툴 필요는 없지. 쓸데없이 싸울 시간에 마법 연습을 하는 게 더 좋지 않겠냐?”
“맞습니다.”
“이번 해에는 너 같은 녀석이 있어서 싸움이 좀 덜할지도 모르겠구나. 흰 호랑이 탑 놈들이 시비를 걸어와도 무시해버려라.”
“어. 이미 싸웠습니다만.”
“......”
우레걸음은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를 내려놓고 황당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어이없는 이유로 쓸데없이 싸워야 한다는 게 싫다면서??
“아니. 먼저 시비 거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한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우레걸음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먼저 시비를 걸어오면 피할 수 없을 때가 있었으니까.
“이번 흰 호랑이 탑 놈들은 다 거친 놈들인가 보구나. 보통 첫 번째 주에 싸움을 만들 정도로 덤비진 않는데. 어쩌다 싸우게 된 거냐?”
“검술 수업 듣는다고 시비를 걸더군요.”
“......”
툭-
우레걸음은 다시 물었던 파이프를 떨어뜨렸다. 그만큼 황당했던 것이다.
“아주 못된 놈들 아닙니까?”
“네 녀석이 이상한 거지...!”
우레걸음은 어이가 없었다.
왜 많고 많은 강의 중에 검술을 듣는단 말인가.
흰 호랑이 탑 놈들이 왜 시비를 걸었는지 알 것 같았다.
“용케 도망쳤군 그래. 흰 호랑이 탑 놈들이 대체로 마법은 늦게 배워도 싸움질은 잘하는 놈들이거든.”
“예. 세 명이 덤벼서 쓰러뜨리느라 힘들었습니다.”
“......”
우레걸음은 파이프를 얌전히 옆으로 치웠다.
오늘은 더 이상 피우면 안 될 것 같았다.
“쓰러뜨렸다고?”
“힘들었죠. 운이 좋았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일해도 된다. 내가 먹을 걸 차려주마.”
“엇. 그래도 됩니까?”
“그럼. 물론이지.”
우레걸음은 이한에게 좀 더 잘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나중에 제국 최고의 검객이 되어서 암살하러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    *    *
우레걸음의 오두막에서 자라는 채소들은 자연의 정기를 듬뿍 받아서인지 다들 알이 굵고 싱싱했다.
교수는 감자와 양파, 당근을 물로 씻고 껍질을 벗긴 다음 큼직하게 썰어냈다.
그리고는 냄비에 버터를 던지고 양파와 마늘을 넣어 볶았다.
“매달려 있는 고기 좀 갖고 와라.”
“아니. 이 고기는 저하고 요네르의 고기인데.”
“...나만 먹냐?”
“알겠습니다.”
이한은 나중에 요네르한테 사과하기로 마음먹고 매달려 있는 훈제돼지고기를 갖고 왔다.
우레걸음은 고기를 넣고 볶은 다음 포도주를 넉넉하게 부었다. 짙은 포도주 향이 코를 찔렀다.
곧이어 감자, 당근, 양파 등이 차례대로 들어갔다. 우레걸음은 소금을 쳐서 적당히 간을 하며 말했다.
“가문에서 내려오는 스튜다. 이거 하나면 별다른 반찬이 필요 없지. 갓 구운 따끈따끈한 흰 빵 하나면 충분해.”
우레걸음 교수가 저렇게 자신감 있게 말한 이유가 있었다.
스튜는 정말 맛있었다.
며칠 동안 따뜻한 국물을 마시지 못한 이한에게 드워프 스튜는 뱃속을 뜨끈뜨끈하게 덥혀주었다.
숟가락이 나무그릇을 박박 긁는 소리와 함께 서로 스튜 먹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아. 정말 좋군.’
“맛있지?”
“훌륭합니다.”
숙련된 대학원생답게 이한은 즉시 대답했다.
우레걸음은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표정을 보니 뿌듯한 모양이었다. 매우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러고 보니 제가 오기 전에는 교수님께서 이걸 다 관리하신 겁니까?”
“그래.”
“다른 사람들은요?”
“흠흠. 다들 게으르고 요령이 없어서 그런지 도망치더군.”
“......”
이한은 순간 ‘내가 당했나?’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꽤... 번거로웠나보군요.”
“번거롭기는! 연금술사가 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오두막에 쌓인 먼지 청소하고 화덕 치우고 재료 확인하고 텃밭 관리하고 강가에 내놓은 통발하고 길목에 설치한 소형 함정 확인하는 게 사실 기본은 아니었다.
‘나열하고 보니까 이상하긴 하군. 내가 왜 별로 안 어렵다고 생각했을까?’
이한은 스스로의 노동실태의식에 한탄했다.
너무 오랫동안 교수 밑에서 일한 탓에 감각이 마비된 것이다.
“텃밭이 많이 남던데, 저도 뭘 좀 길러 봐도 됩니까?”
“오...”
우레걸음은 감탄했다.
이한은 몰랐지만 우레걸음은 속으로 ‘역시 이 타고난 연금술사 녀석’하고 감탄하고 있었다.
수많은 잡일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일을 만드는 저 모습.
보통 재능이 아니었다.
“물론 된다. 뭘 기르려고?”
“배추와 대파 정도 심지 않을까요?”
“둘 다 괜찮겠지.”
고개를 끄덕이던 우레걸음은 멈칫했다.
“...설마 그것도 장사하려는 건 아니겠지?”
“앗. 어떻게 아셨습니까? 혹시 이것도 다른 학생들이 먼저 했었습니까?”
“......”
니가 처음이다 이 녀석아!
022 화
우레걸음은 헛웃음만 나왔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길러서 파는 것까지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먼저 한 학생은 내가 알기로 없다. 아주 창의적인 아이디어다. 무척이나 창의적이야.”
“오. 감사합니다. 장사가 잘 되겠군요.”
“칭찬 아니다!”
우레걸음은 투덜거렸지만 사실 돈 관리도 연금술사에게는 중요한 덕목이었다.
비싸디 비싼 시약과 재료를 누가 구해주겠는가.
다 자기가 알아서 돈 벌어서 구해야 했다.
‘저렇게 돈 알뜰하게 모으는 거 보면 나중에 돈 부족할 일은 없겠구나.’
“배추와 대파... 음. 찌개 끓이기 좋아 보이는군.”
“!”
우레걸음의 말에 이한은 고개를 들었다.
제국에는 서양풍 음식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만큼 위치에 따라 온갖 음식들이 있었다.
워다나즈 가문이 위치한 제국 서부 쪽은 빵과 치즈를 주로 먹는 서양풍 식습관을 갖고 있다면 제국 동부 쪽은 쌀과 국수, 고추장과 된장 등 이한에게도 친숙한 식습관을
갖고 있었다.
“찌개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지만 먹는 걸 피하는 편이지.”
“?”
“동부 음식이잖나. 난 동부 드워프들을 싫어한다.”
우레걸음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먼 친척 어르신들이 동부에 사시는데, 만나기만 하면 어찌나 쓸데없는 잔소리를 늘어놓으시는지... 요즘 재생 포션이 비싼데 그거 장사를 해봐라, 그러니까 돈을 못
버는 거다, 근데 넌 왜 이렇게 자주 안 찾아오냐, 어린놈이 건방지게 긴 담배 파이프를 쓰냐...”
“......”
생각보다 구체적인 푸념에 이한은 당황했다.
제국 동부가 서부보다 좀 더 전통을 중시하고 규칙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 그렇군요.”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그래도 음식에는 잘못이 없지. 싫어하진 않는다. 나중에 찌개 끓이면 같이 먹도록 하지.”
이한은 주겠다고 말한 적이 없었지만, 심기가 불편해진 교수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별로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
“교수님께 대접해드리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우레걸음은 이한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워다나즈 가문이면 서쪽일 텐데. 그런 놈의 동부 요리를 믿고 먹어도 되나?’
우레걸음은 살짝 불안해졌다.
물론 이한이 잡일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원래 귀족 출신치고 요리 잘하는 놈은 드물지 않은가.
저번에 스테이크 굽는 걸 보면 요리 못하는 놈은 아니었지만 동부 요리가 꽤 까다로운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 잘 생각해보니 그걸 얻어먹는 것도 좀 아닌 것 같군. 네가 기른 거니 난 괜찮다.”
“예? 그런데 아까 드신 돼지고기는 저하고 친구들이 잡은...”
“그건 따지고 보면 내가 준비했던 돼지잖아!”
우레걸음은 결국 화를 냈다.
*    *    *
식사가 끝나고 뒷정리까지 마치자, 이한은 슬슬 돌아갈 준비를 했다.
“참. 주말에는 뭘 할 거냐?”
“와서 일해야 합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주말에도 학생을 부를 것처럼 보이냐?”
우레걸음은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더 황당한 건 이한이었다.
‘어라? 주말에는 원래 안 부르는 건가?’
왜지?
주말에 학생을 부르는 게 교수들의 기본 스킬 아니었나?
“일을 잘 해놨으니 굳이 주말에 올 필요는 없다. 네 텃밭을 가꾸고 싶으면 모를까... 그리고 주말에는 너도 매우 바쁠 거다.”
우레걸음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한은 그걸 듣자 살짝 불안해졌다.
‘불안하게 왜 또 저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일은 무슨. 잘 생각해봐라. 평일 동안 계속 굶주리고 고통 받은 학생들이 주말이 되면 뭘 하겠나?”
“학교에 불을 지릅니까?”
“...그건 좀 너무 과격하군. 먹고 지낼 방법을 찾는다는 거였다.”
학생들을 궁지에 몰아라.
그러면 알아서 구할 것이다.
...로 대표되는 리치 교장의 뜻대로, 보통 신입생들은 주말이 되면 여유가 생겨서 고민을 시작하곤 했다.
-대체 이 학교는 왜 이렇게 우리를 못살게 구는 것인가? 교장이 언데드라서 그런가?
-이대로 계속 굶주릴 수는 없다! 최소한 먹을 걸 구해봐야 한다!
-오, 친구들이여! 우리 같이 손을 잡고 나서자!
“하긴, <검은 거북이의 탑> 학생들이 본관 뒤쪽 숲을 뒤지면서 먹을 수 있는 과일 열매를 찾는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답군.”
우레걸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신입생들이 하는 행동들은 보통 탑에 따라 나뉘었던 것이다.
평민이나 상인, 노예까지 들어오는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체면을 신경 쓰지 않고 가장 빨리 움직이는 편에 속했다.
그런 만큼 학교 뒤편의 숲과 산을 뒤져가면서 먹을 수 있는 걸 찾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네가 사냥한 덕분에 적극적으로 사냥을 시도하는 녀석들도 나올 거다. 원래 첫 주부터 사냥하는 놈들은 드문데.”
“다 교수님의 가르침 덕분 아니겠습니까.”
이한의 아부에 우레걸음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가 뭔가 찜찜함을 느꼈다.
이상하게 욕 같은 기분이 드는데?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보통 어땠습니까?”
“푸른 용의 탑은 가장 느린 편이지. 엉덩이가 무거운 녀석들이잖나.”
이한은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같은 탑 친구들을 보면 주말이 온다고 숲에 먹을 거 찾으러 갈 사람은 몇 명 안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언제나 능력 있는 녀석들이 몇 명 있어서, 몇 주 굶주리고 나면 정신 차리고 좋은 방법을 찾곤 하더군.”
우레걸음은 그렇게 말하며 이한을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니 올해 푸른 용의 탑은 평소와는 매우 다를 것 같았다.
일단 저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사고방식부터가 달랐으니...
‘정말 희한한 놈이야.’
“존경하는 교수님. 다른 탑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 정도는 말해줄 수 있지. 불사조의 탑 학생들은... 아예 별개로 놓아야겠지? 그 녀석들은 굶주리고 힘들다고 해서 흔들릴 놈들이 아니니까.”
제국의 교단에서 보낸, 견습 사제 출신들로 구성된 불사조의 탑.
언제나 신전에서 절약과 검소를 실천해오던 이들인 만큼 이 마법학교에서 가장 적응이 빠른 건 당연했다.
그래서 다른 탑 학생들이 먹을 걸 찾아서 돌아다니는 동안 불사조의 탑 학생들은 그냥 기도하면서 버티는 경우가 많았다.
신앙심의 힘이었다.
‘놀랍군. 어떻게 그런 것만 먹고 계속 버틸 수 있지?’
생각하던 이한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이한도 대학원 때 몇 년 넘게 잘 버텼던 것이다.
‘음. 생각해보니 사람은 의외로 버틸 수 있는 거 같군.’
“참. 워다나즈. 혹시 주말에 사냥할 생각이냐?”
“예.”
숨길 필요가 없었기에 이한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흰 호랑이 탑 놈들을 주의해라. 놈들도 사냥을 자주 나가는 편이니까. 보통 첫 번째 주에는 조심하는 편이지만 어느 누가 잘 사냥한 걸 들었을 테니, 그 성격에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다 교수님의 가르침 덕분 아니겠습니까.”
“...뭐, 알면 됐다. 흰 호랑이 탑 놈들이 전통적으로 사고 많이 치는 놈들이니까 조심하고. 원래 기사 가문 출신들이라 혈기가 왕성하니까.”
“예. 싸우게 되면 다수로 소수를 상대할 수 있도록 전략을 잘 짜겠습니다.”
“......”
그 소리가 아니야...!
우레걸음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솔직히 저 워다나즈 가문 놈은 정말 알아서 잘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안 만날 수도 있다. 숲과 산이 넓기도 하고, 흰 호랑이 탑 놈들이 사냥 대신 다른 걸 선택할 수도 있으니... 아니, 아니다. 첫 번째 주에 무슨.”
“사냥 대신 다른 게 뭡니까?”
“......”
우레걸음은 이걸 괜히 꺼냈나 후회했다.
왠지 모르게 이한에게 말해주면 이한이 직접 해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탈주다.”
“...?!”
탈주.
이 마법학원의 드넓은 부지는 드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성벽 또한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걸 뚫고 나가려는 사람은 나오기 마련.
마법학원 밖에 위치한 마을들과, 그 마을들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을 생각해보면 탈주 시도가 나오는 건 당연했다.
‘새 외투, 새 셔츠, 새 벨트, 새 바지, 새 부츠, 빵과 버터, 치즈와 잼, 각종 건조식량, 만약을 대비한 바늘과 실, 종이와 깃털 펜, 비누와 향수... 젠장. 너무 많아서 다
정리할 수가 없을 정도군!’
‘탈주’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이한의 눈이 번쩍이고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저 물건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이한은 기숙사에서 왕처럼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 봐라! 내가 이러니까 말을 해주기 싫었던 거다!”
우레걸음은 이한의 표정을 보고 속마음을 알아차렸다.
“제가 뭘 말입니까?”
“네 녀석이 지금 밖에 나가서 뭘 구해올 수 있을지 계산하고 있는 걸 모를 줄 아냐!”
“아니? 마법입니까?”
“마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멍청한 짓 하지 마라. 흰 호랑이 탑 놈들이 매년 가장 먼저 탈주를 시도하는 건, 그 놈들이 가장 멍청해서니까.”
“성공자가 없었습니까?”
“......”
“없었습니까?”
“...없진 않았지만!”
“오...”
“후회할 거라니까!”
우레걸음은 외치다가 문득 멈췄다.
생각해보니까 자기가 이걸 이렇게 말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원래 젊을 때는 다 멍청한 짓을 하기 마련이었다.
“됐다. 하고 싶으면 해봐라.”
“아닙니다. 교수님. 저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라!”
*    *    *
어두운 방.
촛불 하나만이 일렁거리는 방 안에서, 험악한 표정을 지은 세 명의 사람이 한 명의 오크를 협박하고 있었다.
“이봐. 초이. 지금 상황을 알고 있어? 어? 네가 빠져나갈 방법은 협조하는 것밖에 없어!”
“...이한. 저 황자가 저렇게 안 해도 나는 그냥 물으면 대답할 거다.”
더르규는 황당하다는 듯이 가이난도를 쳐다보았다.
한 주먹도 안 되어 보이는 놈이 인상을 팍 쓰고 협박하는 게 무섭기보다는 황당했다.
갑자기 셋이 나타나서 ‘따라와!’해서 따라왔더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연극이란 말인가?
“음. 별로 효과가 없었나?”
이한은 커튼을 치웠다. 빈 강의실에 햇빛이 들어왔다. 요네르는 촛불의 불을 훅 불어서 껐다.
상황 파악을 못한 가이난도는 당황해서 이한과 더르규를 쳐다보았다.
“초이를 협박해야 한다면서?! 아는 사이였어?!”
“그래.”
“그러면 이건 왜 준비한 건데!?”
“친한 척 하면서 데리고 오면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볼까봐.”
“!”
더르규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이한의 말이 맞았다. 괜히 오해 받아서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고맙다. 이한. 확실히 친하게 이야기하면서 들어왔다면 오해를 받았을 수도 있겠다.”
“뭘 이런 걸 가지고. 앞으로 첩자 역할을 해줄 널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잠깐. 내가 첩자라니?”
더르규는 그 불명예스러운 칭호에 항의했다.
이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 모라디 가문 녀석이 수상한 짓을 꾸미면 알려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다.”
“그러면 첩자잖아?”
“...첩자가 아니라 좀 더 고상하고 명예로운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더르규는 기사 가문 출신답게 항의했다.
명예와 정의를 위해 알려주는데 이게 왜 첩자란 말인가.
“난 첩자 맞는 것 같은데.”
옆에서 듣고 있던 가이난도가 그렇게 거들었다.
더르규는 가이난도를 노려보았다. 가이난도는 뜨끔해서 시선을 피하며 어물거렸다.
“생각해보니까 첩자 아닌 거 같다.”
023 화
이한은 더르규를 좀 배려해주기로 했다.
“하긴 이건 명예와 정의를 위한 일이니 첩자라는 말은 안 어울리겠군. 더르규. 넌 내부고발자다.”
“어... 어?”
더르규는 낯선 단어에 당황했다.
하지만 뭔가 좀 고상한 거 같으면서도 첩자보다 품격이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괜찮은 것 같은데...?”
“그래. 앞으로 내부고발자로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음모를 알려주면 좋겠군.”
“그, 그러도록 하지.”
옆에 앉아서 양 손바닥 위에 얼굴을 올린 채로 듣고 있던 요네르는 신기해했다.
저 흰 호랑이 탑 출신 오크를 어떻게 설득했길래 저렇게 협조하는 걸까?
“더르규. 주말 아침에 이렇게 널 데리고 온 이유는... 학교를 빠져나갈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서다.”
“...뭐?!”
더르규는 깜짝 놀랐다.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이한은 침착했다.
그러나 그 뒤의 말은 이한의 예상을 벗어났다.
“이한, 너도 빠져나갈 생각이었나?”
“...?!!”
*    *    *
다른 모든 탑 학생들이 그런 것처럼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굶주림에 힘들어했다.
기사 가문 출신이면 굶주림에 강하지 않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기사 가문도 제국의 어엿한 귀족 가문이었다.
어지간해서는 굶을 일이 없었다.
오히려 잘 먹고 잘 움직이는 게 일이었던 만큼 굶주림을 견디기 더 힘든 부분도 있었다.
-사냥이라도 해야 해! 푸른 용의 탑에 워다나즈가 멧돼지를 잡았다는데, 우리도 잡을 수 있어!
-주말이 되면 조를 짜서 잡으러 가보자고. 여기 있는 녀석들 중에서 사냥 안 해본 녀석이 없을 거야. 우리가 가장 유리해!
-마법 하나 가지고 거들먹거리는 다른 탑 놈들의 콧대를 꺾어주자!
-자. 자. 다들 조용.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휘어잡은 건 역시 지젤이었다.
그녀는 타고난 지배력으로 배고픈 학생들을 금세 휘어잡았다.
-사냥? 좋지. 하지만 다들 잘 생각해봐. 사냥이 그리 쉬울까?
-워다나즈 가문도 잡았는데...
-그건 연금술 교수가 준비해 놨던 멧돼지였어. 잘 생각해봐. 그런 멧돼지를 잡으려면 얼마나 깊숙이 들어가야 하겠어? 이 주변 지형도 익숙하지 않은데?
-......
-......
지젤의 말에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납득했다.
확실히 사냥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모르는 곳에서는 더더욱.
지금 학교 뒤편의 야트막한 산이나 숲이면 모를까, 더 깊숙이 들어가는 건 솔직히 무서웠다.
어떤 몬스터가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영역 아닌가.
-그러면 모라디. 네게는 다른 방법이 있어?
-그래.
-무슨 방법인데?
-학교를 빠져나가서 밖의 마을로 향하는 방법.
-...!!!
-성공만 하면 짐승 하나 잡나 못 잡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걸? 우리가 한 학기를 보내는 동안 필요한 모든 걸 다 갖고 올 수 있을 테니.
-그, 그게 정말이야?!
-하... 하지만 너무 터무니없는데.
-필요한 방법은 내 머릿속에 이미 다 정리되어 있어. 따라오고 싶으면 따라와도 좋아. 나 혼자 독점할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따라온다면 내 명령을 따라야 해.
같잖은 반항으로 분위기를 망가뜨리거나 계획을 틀어버리는 건 용서치 않겠어.
-물론이지. 모라디!
-어느 누가 네 말을 거역하겠어!
*    *    *
“아니? 혹시 나도 명령만 잘 들으면 참가할 수 있나?”
“...이봐. 이한.”
“역시 안 되겠지?”
더르규는 어이없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이한을 받아줄지, 안 받아 줄지는 더르규가 알 수 없었지만...
워다나즈 가문으로서 자존심이 있지 저길 어떻게 참가한단 말인가.
당장 지젤이 이한에게 하려고 했던 일들을 떠올리면 더르규 본인이 더 화날 정도였다.
“지젤이 했던 일들을 떠올려봐라.”
“하긴 참가 안 시켜주겠지.”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나.”
더르규가 황당해하는 사이 이한은 생각에 잠겼다.
지젤의 말 때문에 생각이 복잡해진 것이다.
원래 이한은 더르규나 닐리아 같은 친구들을 모아서 조금씩 탈출로를 찾아 볼 생각이었다.
한 번에 찾아내야겠다는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우레걸음 교수가 한 말도 그렇고, 탈출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흰 호랑이 탑의 지젤은 방법이 준비되어 있다고 단언하고 있었다.
허세인가?
‘아니. 허세 부릴 성격은 아니었지. 가이난도도 아니고.’
모라디 가문의 지젤과 많은 대화를 나눠 본 건 아니었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냉철하고 지배욕 강한 성격.
그런 사람이 저렇게 선언했을 때에는 믿는 구석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군. 참가를 안 시켜준다라...”
“아니...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그래. 이해해줘서 다행이다.”
“뒤를 쫓아서 캐낼 수밖에.”
“......”
더르규는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진심인가?”
“뒤를 쫓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나?”
“조금... 불명예스러운 것 같지 않나?”
더르규는 머뭇거렸다.
무릇 기사라면 한낱 싸움에도 명예를 추구해야 했다.
게다가 워다나즈 가문이라면 제국의 대가문 아닌가.
더르규 못지않게 명예를 중요시하게 여길 텐데.
“더르규. 잘 생각해봐라. 이건 전략이다.”
“으응?”
“적을 알고 나를 아는 것. 전략이잖나.”
“...그런가?”
“전략이다.”
이한은 더르규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개소리일수록 더 당당하게 우겨야 한다.’
세상 일이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이상한 소리라고 하더라도 진지하게 영혼을 담아서 말하면 묘한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이 조각 같은 차가운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자 더르규는 자신도 모르게 ‘어? 그런가?’하고 헷갈리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까 전략 같기도 하고...
“전... 략일 수도 있겠군.”
“그래. 전략이다. 적이 무슨 계획을 꾸미는지 알아야 하잖나. 그래야 대비를 하지.”
딱히 지젤이 학교 탈주 계획으로 이한을 뭘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이한은 은근슬쩍 앞으로 벌어질 지젤의 사악한 음모를 막기 위해서는 탈주 계획을 파악해야 한다고 갖다 붙였다.
“더르규. 네 역할이 중요하다. 그 모라디 가문 녀석의 탈출 계획을 나한테 알려줘야 해.”
“알겠다. 노력해보겠다.”
“그래! 훌륭하다. 넌 명예로운 내부고발자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난 네가 얼마나 명예로운지 알아!”
“고맙다. 이한.”
“그래그래.”
이한은 더르규의 어깨를 두드리며 연신 응원을 해주고 돌려보냈다.
“후. 원래 탈출 계획을 고민해보려고 했는데, 계획이 달라졌군. ...다들 왜 날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거지?”
요네르와 가이난도는 묘한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이난도는 진지하게 물었다.
“너 혹시 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세뇌 마법 배운 적 있냐?”
“......”
*    *    *
토요일 저녁, 해 질 무렵.
모라디 가문의 지젤이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이끌고 탈주를 시도하기로 결정된 시간이었다.
더르규한테 시간을 전해들은 이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능한 이번에 탈출 경로를 확인해둬야 해.’
지젤이 탈출 방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줄 리 없었다.
게다가 일단 한 번 성공하고 나면 다음부터는 누가 쫓아오는지 확인을 철저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한도 그랬을 테니까!
안 들키고 탈출 경로를 확인하기 가장 좋은 기회는 첫 번째 시도인 오늘밖에 없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첫 번째 시도인 오늘은 긴장해서 누가 뒤를 쫓아오는지 확인할 여유가 없을 터.
“더르규. 가이난도. 요네르. 닐리아.”
이한은 자리에 모인 친구들을 보며 말했다.
여기 모인 이 친구들이 오늘 추적의 동료가 되어줄 것이다.
“오늘, 학교를 빠져나가는 길을 찾기 위한 모임에 참석해줘서 다들 고맙다.”
“...????”
다크 엘프 닐리아는 깜짝 놀라서 귀를 쫑긋 세웠다.
처음 듣는 소리였던 것이다.
부르길래 ‘앗, 혹시 사냥하러 가나?’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쫄래쫄래 왔는데...
“뭐, 뭐야!? 학교 밖으로 나가!?”
“그래.”
“...미쳤어?!?”
닐리아의 외침에 가이난도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했다.
그래도 이 모임에 제정신인 사람이 가이난도 본인 말고 한 명은 더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미친 짓 맞지!’
가이난도도 물론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마을을 갔다 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울 리 없지 않은가.
워다나즈가 저렇게까지 말하니까 뭔가 생각이 있겠다 싶어서 따라왔지만 두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 닐리아. 무작정 빠져나가려는 게 아니야. 계획이 있어.”
“!”
이한의 진지한 말에 닐리아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계획이 있다니.
학교에 들어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벌써?
표정을 보니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워다나즈 가문은 정말... 대단하구나...!’
닐리아는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워다나즈 가문에 대해서 소문만 많이 들어봤는데, 지금 이한이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그 소문이 왜 퍼진지 알 것 같았다.
다른 신입생들과는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닐리아는 살짝 기대감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계획인데?”
“흰 호랑이 탑 학생 중에 탈출 방법을 알고 있는 학생이 있는데, 걔 뒤를 쫓아서 방법을 베낄 거야.”
“......”
이한이 말한 방법은 확실히 닐리아의 예상을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너무 많이 벗어나서 문제였지.
*    *    *
다른 기숙사 학생을 쫓아가서 방법을 베끼는 건 닐리아가 생각한 낭만적인 학교생활이 아니었다.
짧지만 깊은 고민. 그리고 한숨.
그러나 닐리아는 결국 참가를 결정했다.
-이한. 닐리아는 참가하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하지만 요네르. 우리는 닐리아의 도움이 필요해. 여기서 가장 추적에 능숙한 건 닐리아야.
-그렇지만 억지로 참가시키는 건...
-그런가? 그렇게 참가하기 싫어하면 어쩔 수 없긴 한데...
-...어쩔 수 없지! 나밖에 안 된다면 도와줄 수밖에!
-닐리아!!
이한과 요네르의 대화를 듣자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겁이 난다고 친구를 버리는 건 <그림자 순찰대>의 규칙이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닐리아가 가진 사냥꾼으로서의 능력을 높게 평가해준 게 기뻤다.
닐리아가 가진 사냥꾼으로서의 능력을 가장 높게 평가해주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탑 학생들이 아니라 다른 탑의 워다나즈였던 것이다.
더르규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다크 엘프. 거절할 줄 알았는데 왜 참가한 거지?”
“난 알 것 같아.”
가이난도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말에 더르규도 ‘아’하고 작게 내뱉었다.
“그렇군.”
사람은 누구나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이유는 여럿이었다.
두려움.
불안함.
이기심.
그런 이유들을 이겨내고 행동에 나설 수 있게 만드는 덕목들을 사람들은 명예라고 부르고, 또 우정이라고 불렀다.
저 다크 엘프가 하기 싫어하면서도 참가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친구들 사이의 우정 때문일 것이다.
‘좋은 걸 보았군.’
더르규는 남몰래 싱긋 웃었다.
더르규 본인도 명예를 위해 참가한 만큼, 가문과 상관없이 우정을 쌓은 친구들을 보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뭐야. 초이. 너도 알아차렸냐?”
“그래.”
“쟤도 그만큼 마을에 가고 싶은 거겠지. 나도 정말 마을에 가고 싶거든. 마을에 도착만 하면 푹신푹신한 침대에서 자거나... 아니, 아니다. 일단 먹을 것부터. 마을에
있는 단 음식이란 단 음식은 다 먹을 거야. 사탕, 초콜릿, 핫케이크, 시럽...”
“......”
더르규는 황당한 눈빛으로 가이난도를 쳐다보았다.
‘이 놈은 왜 여기 있는 거지?’
024 화
더르규가 가이난도에 대한 평가를 낮추고 있는 동안, 닐리아는 밤에 오랫동안 돌아다닐 때 필요한 준비물을 하나씩 손꼽기 시작했다.
“일단 얼마나 오래 움직일지 모르니까 최대한 잘 준비해야 해. 튼튼한 부츠에 질 좋은 양말 몇 켤레가 있으면 좋겠지만...”
“우린 그런 게 없지.”
이한의 말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일부러 교장이 거칠고 낡은 옷을 줬는데 그런 게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닐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짐을 꺼냈다.
“저번에 잡은 짐승 가죽을 이용해서 예비 부츠를 만들어왔어. 휴게실에 있는 커튼 천을 뜯어서 발싸개를 만들었고. 자. 발 줘봐.”
“......”
“......”
이한과 요네르가 말이 없자 닐리아는 아차 싶었다.
‘내가 또 궁상맞게 굴었나?’
고기를 가져다 준 다음부터 닐리아는 <검은 거북이의 탑> 학생들과 꽤 친해질 수 있었지만 그래도 대화하면서 어느 정도 거리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추운 북부 산맥에서 그림자 순찰대 소속으로 태어나고 자란 닐리아와, 제국 중앙의 거대 상단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란 학생은 거리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와! 저기 붉은 꽃 보여?
-응. 저 꽃 맛있지. 달달하고.
-...아, 아니. 예쁘지 않아?
-예쁘고 맛있으니까 더 좋은 거 아니야?
물론 닐리아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한 번 어색해진 다음부터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켜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말하게 되다니.
실수였다.
“이게, 그러니까... 내가 직접 꿰매긴 했는데... 어쩔 수 없어서 그런...”
“정말 대단해!”
“맞아! 대단해!”
“!?”
그러나 이한과 요네르의 반응은 닐리아의 예상과 정반대였다.
“이게, 대단하다고?”
“당연하지. 이걸 직접 만들다니.”
“아무나 할 수 없는 솜씨야. 이거 직접 바늘로 꿰맨 거지?”
이한과 요네르의 반응에 닐리아의 입가와 눈꼬리가 기분 좋은 듯 파르르 떨렸다.
“...별 거 아닌데?”
“별 거 아니라니. 무슨 소리를.”
“맞아. 이걸 여기서 누가 할 수 있겠어.”
“닐리아. 넌 장사를 해야 해.”
“맞아. 같은 탑 학생들한테 돈 받고 팔자.”
기분 좋게 칭찬 듣다가 화제가 이상한 방식으로 흘러가자 닐리아는 손을 내저었다.
“장사는 싫어.”
“아니 왜?”
“어째서? 닐리아. 돈을 왜 싫어하는 거야?”
이한과 요네르가 진심 어린 표정으로 물어보자 닐리아는 어이가 없었다.
‘친구들한테 장사하기 싫어하는 게 보통이지 않아!?’
누가 보면 닐리아가 푸른 용의 탑 소속인 줄 알 것이다.
“뭘 이런 걸로 돈을 받아! 싫어!”
그 말에 이한과 요네르는 정색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돈을 받을 수 있냐 없냐는 네가 정하는 게 아니라 시장이 정하는 거야.”
“정말 좋은 말이야. 닐리아. 이해했지?”
“...나 그냥 설명 마저 하면 안 될까? 응??”
“아. 미안. 계속해.”
간신히 벗어난 닐리아는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더 밝아졌고, 길쭉한 귀도 기분 좋은듯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아닌 척을 해도 인정받는 것은 기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근데 이게 뭐가 대단한 건데?”
가이난도가 이해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퍽!
요네르가 가이난도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이한은 가이난도의 정강이를 깠다.
“닐리아. 쟤는 주지 마라. 안 써봐야지 뭐가 대단한 건지 알지.”
“맞아. 쟤는 고생을 좀 해봐야 해.”
“너...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그래도 황자인데...!”
‘황자였어?!’
닐리아는 기겁했다.
대가문 출신인 이한이나 요네르는 세 자리 숫자가 넘어가는 황족들에게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닐리아에게는 어마어마하게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직계라니.
그 이름만으로도 위엄이...
‘...있지는 않네.’
요네르한테 등짝을 맞고 이한한테는 발로 정강이를 까이는 모습을 보니, 아무리 봐도 황자보다는 환자에 가까웠다.
“야. 네가 지금 몇시간을 꼬박 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저 부츠랑 발싸개가 얼마나 귀한 건지 몰라? 넌 한 시간만 걸어도 발이고 뭐고 다 까질 거라고.”
“우리 그냥 두고 가자.”
“아... 아니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두고 가지 마!”
상황이 마무리되자 이한은 닐리아에게 대신 사과했다.
“미안. 닐리아. 열심히 준비했는데 여기 가이난도가 무례한 말을 했군.”
“아, 아니야. 정말 신경 안 써.”
“신경 쓰는 거 같은데 한 대 더 때릴까?”
“진짜 괜찮거든?!!”
닐리아는 다시 기겁해서 말렸다.
정말 불쾌한 감정은 하나도 없었다. 딱 보니 가이난도는 평생 오래 걸어 본 적이 없어 보였는데(하물며 황자라니), 모르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자. 여기 내가 만들어 온 외투. 봄이지만 밤에는 쌀쌀할 거야. 이 주변에는 바람도 꽤 불 거고.”
“닐리아...”
“정말이지...”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그만 반응할래?”
기분 좋긴 한데 너무 호들갑을 떨어대니 슬슬 닐리아도 귀찮아졌다.
“가죽 배낭. 마을 들어가면 필요할 테니까. 가죽 물주머니. 이것도 만들어왔어.”
‘진짜 대단하군.’
이한은 솔직히 감탄했다.
가죽, 바늘, 실만 가지고서 저걸 혼자서 다 만들다니.
‘저 재주로 왜 장사를 하지 않는 거지?’
만약 이한이었다면 쏠쏠하게 벌어먹었을 텐데.
옆을 보니 요네르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움직이려면 발을 잘 감싸고, 혹시 모를 추위를 대비해서 외투를 준비하고, 그리고 마실 것과 먹을 게 충분해야 하는데...”
말하던 닐리아는 머뭇거렸다.
먹을 게 걱정되었던 것이다.
닐리아야 하루 동안 굶으면서 산맥을 탈 수 있다지만 다른 애들도 과연 괜찮을까?
“먹을 건 내가 갖고 왔어. 소시지하고 빵 잘라낸 거, 염소 치즈. 그리고 드워프식 벌꿀 사탕. 이 정도면 될까?”
“!”
닐리아는 깜짝 놀랐다.
이한이 갖고 온 음식들이면 비상식량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어디서 구해왔어?”
“우레걸음 교수의 오두막에서 슬쩍했어.”
“......”
너 진짜 푸른 용 탑 소속 맞아?
*    *    *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명예로운 친구들. 내 명령에 따르겠다고 맹세한 기사들.”
지젤의 말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젤을 믿고 같이 탈출을 시도하기로 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었다.
어떤 계획도 듣지 못했지만 이렇게 모인 모습에서 지젤이 가진 영향력을 알 수 있었다.
지젤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학생들도 여럿이었고 훨씬 더 험상궂게 생긴 학생들도 여럿.
선이 가늘고 여리여리한 외모를 가진 엘프인 만큼 주눅이 들 법도 했지만, 지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에 섰다.
그리고 오만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안 모인 멍청이들, 배신자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 곧 그 자식들도 알게 되겠지.”
“물론!”
“네 말이 맞아. 모라디.”
“십 분 후 출발한다.”
지젤이 이렇게 자신감에 가득 차있는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지도를 따라서 움직이면, 네 시간 정도면 충분해.’
놀랍게도 지젤은 탈출지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 들어오기 전, 모라디 가문에 있었을 때 찾았던 탈출지도!
-초심자를 위한 마법 개론서, 마법이란 무엇인가, 에인로가드의 전설... 이런 것밖에 없다고?
-죄송합니다. 모라디 님.
-가능한 다 갖고 와. 다른 마법사들한테 무시당할 생각은 없으니까.
기사 가문 출신들은 마법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다들 비슷한 고민을 했다.
내가 과연 따라갈 수 있을까?
다른 가문 출신들과 달리 평생 검만 잡고 휘둘러 온 만큼 그런 걱정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자존심 강한 지젤은 무시당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마법학교에 들어가기 전 각종 책들을 읽으며 최대한 공부했다.
그리고 그 책 사이에 끼어있던 게 탈출지도였다.
-에인로가드 탈출지도...? 뭐 이런 게 있어?
학교를 빠져나가는 상세한 방법이 쓰여 있는 지도라니.
그걸 처음 봤을 때 지젤은 어이가 없었다.
에인로가드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제국에서 재능 있는 자들만 뽑혀서 들어가는 최고의 마법학교.
어떤 한심한 놈이 기껏 그런 기회를 잡고서 탈출하는 방법을 고민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 학교에 들어온 지 하루 만에 지젤은 그 지도가 왜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아, 만들어질 만 하구나!
-에인로가드 탈출에 대하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지도에 나와 있는 길은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로다. 너희 후배들은 나와 내 친구들이 갈고 닦은 이 길을 통해 학교를
빠져나갈지어다...
지도는 먼저 들어온 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해 자세하고 세심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이 지도만 있다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    *    *
“산으로 움직인다.”
“과연...”
수풀 속에 엎드려 있던 이한 일행은 멀리서 횃불들이 일렁거리며 움직이는 걸 목격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산이었나?’
이한이 보기에, 마법학교를 빠져나갈 수 있는 루트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마법학교 정면의 거대한 성벽이나 성문 쪽.
들어온 곳인 만큼 가깝고, 나가기만 하면 제국 가도(街道)를 따라 마을로 금세 갈 수 있었지만, 성벽이나 성문을 돌파하는 게 쉽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마법학교 뒤쪽에 펼쳐진 거대하고 웅장한 산맥.
길게 이어진 성벽도 산맥 깊숙한 곳에서 끊겨 있을 테니, 잘 들어가기만 하면 우회해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이한은 지젤이 방법을 안다면 후자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마법학교 뒤쪽에 펼쳐진 광활한 산맥은 밖에서 보기에도 삼림이 우거져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지도를 갖고 충분히 돌파할 수 있을 터.
그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움직인다. 따라가자!”
“어? 왜 산으로 가??”
가이난도는 당황하면서 뒤를 쫓았다.
당연히 성문으로 나갈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산 위로 올라가서 돌파한다.”
“어? 왜?!”
“거기에 길이 있으니까. 더르규. 가이난도를 부탁한다.”
“알겠다.”
더르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닐리아는 이 중에서 가장 산을 잘 타는 사람이었고, 이한과 더르규는 기사로서 꽤 훈련을 받았다. 요네르도 어렸을 때부터 연금술 재료 모으겠다고 이곳저곳을 쏘다닌
덕분에 걷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가장 걱정되는 건 가이난도!
“어? 뭘 부탁해??”
“내가 네 뒤에 있다. 황자. 코로 숨을 쉬고 발걸음을 멈추지 마라. 자!”
“어? 아니, 잠...”
의문을 풀려던 가이난도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헉헉헉헉헉.”
“자!”
“뭔... 자... 헉헉헉.”
“자!”
‘그만해...!’
달빛도 희미한 밤.
어둠 속에서 낯선 산길을 따라 걷는 건 많은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닐리아가 앞장서서 길을 확인하고, 장애물을 잘라내고 치워줬는데도 일행은 전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이한은 그 와중에도 길을 기록하려고 애썼다.
미친 교수 밑에서 혹독하게 단련된 덕분에 이한은 보이지 않아도 종이 위에 슥슥 지도를 그려나갔다.
“???”
옆에서 같이 걷던 요네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혹시 <야간 시야> 같은 마법을 혼자 쓴 걸까?’
워다나즈 가문이라서 미리 배운 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 묘기였다.
“앗. 이거 봐.”
“이게 뭐지?”
“수면초야. 가루를 내서 물에 타 마시면 잠이 잘 와.”
“챙기자.”
“응?”
“챙기자. 언제 쓰게 될지 모르니까.”
“이걸 쓸 일이 있어?”
요네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수면초를 챙겼다.
‘최소한 한 시간은 넘은 것 같군.’
“닐리아. 얼마나 온 거 같아? 한 시간은 걸은 것 같은데.”
“한 시간하고 10 분.”
닐리아는 그렇게 대답하고 새삼스럽게 이한을 쳐다보았다.
사냥꾼도 아니면서 이 산 속에서 시간감각을 잊지 않다니.
그 순간, 이한은 온몸의 등골이 곤두서는 듯한 오싹한 감각을 느꼈다.
‘몬스터인가!? 아니, 닐리아가 확인했을 텐데? 설마 놓쳤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
그건 익숙한 해골의 웃음소리였다.
025 화
‘설마. 아니겠지.’
이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걸렸구나! 첫 번째 주부터! 하하! 하하하!
“...대, 대체??”
상황 파악이 덜 된 닐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한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교장의 함정에 빠진 것 같군.”
지젤이 어떤 방법으로 탈출 경로를 찾았는지 몰라도, 교장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게 분명했다.
문제는 지젤 혼자 들킨 거면 모를까 이한 일행도 그 뒤를 쫓았다는 것!
첫 번째 주부터 여기로 올라왔다는 건 내가 만들어서 뿌린 가짜 지도를 본 게 분명하구나! 오늘 너희들은 교훈 하나를 얻게 되었다! 출처가 불분명한 지도를 믿지 말라는
것! 그 보물지도가 정말 보물지도인지, 아니면 사악한 리치가 만들어 놓은 함정인지 알 수 없으니까!
“......”
“......”
뭐 저런 새끼가 있냐 진짜? 
이한은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지금 해골 교장 본인이 가짜 탈출 지도를 만들어서 이곳저곳에 뿌렸다는 것 아닌가.
그걸 본 신입생들이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고, 애초에 볼지 안 볼지도 모르는데 그런 짓을 하다니...
‘저건 아무리 생각해도 즐기는 거다.’
입으로는 학생들을 위해서 가르침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한은 저런 교수들에 대해 잘 알았다.
저건 그냥 즐기는 게 분명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아. 잘 들어라! 탈출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복귀 시간이다. 규칙은 간단하다. 나는 나서지 않고, 추적자들을 보낼 테니, 피해서 탑으로 복귀해라!
잡히면 유죄. 피하면 무죄다! 어떤 방법을 써도 좋다. 내 추적자들을 쓰러뜨려도 상관없다!
말과 함께 어두움 밤하늘에 녹색 불빛과 함께 거대한 해골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해골은 아가리에서 언데드 소환수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뼈로 만들어진 사냥개들과 추적자들이 하나둘씩 산 위로 떨어져 내렸다.
팟!
곳곳에서 불빛이 밝혀졌다. 뼈다귀들이 횃불을 밝힌 것이다.
추적의 시작이었다.
*    *    *
“튀자!!!”
닐리아는 다급하게 속삭였다.
닐리아의 눈동자는 공포로 물들어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닐리아. 진정해.”
“어떻게 진정해!! 잡히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죽지는 않겠지.”
워낙 미친 교수들에게 익숙한데다가 교장과 몇 번 따로 대화도 한 적 있는 이한과 달리 닐리아에게 해골 교장은 어마어마하게 두려운 존재였다.
이한이 보기에 해골 교장은 지금 신나서 놀고 있는 거였지만, 닐리아가 보기에는 신입생들의 건방지고 끔찍한 범죄에 분노한 것처럼 보였다.
“그... 그런가?”
“잡히면 뭐 체벌방이나 그런 곳에 들어가는 정도겠지.”
“체... 체벌방!? 안에 고문 기구 같은 게 있고...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그런...”
“그럴 것 같진 않은데.”
닐리아는 안 좋은 방향으로 상상력이 풍부했다. 이한은 일단 닐리아의 입을 손으로 막고 주변 상황을 확인했다.
‘스켈레톤들인가?’
사삭거리며 수풀 헤치며 부딪히는 소리. 뼈로 만들어진 추적자들이 주변을 헤치며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컹! 컹!
뼈 사냥개들이 짖는 소리도 들려왔다.
“달려!! 놈들이 쫓아오면 쓰러뜨려!”
“명예를 위하여! 기사도를 위하여!”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고함을 지르며 목검을 뽑아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한 번 싸워보겠다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근데 딱히 지금 상황이 명예나 기사도와는 상관이 없을 텐데.’
학교 몰래 빠져나가려다가 걸린 상황이 명예나 기사도와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있는지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 해야 하는 건 한 가지밖에 없는 것 같은데?”
더르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서로 다른 탑 출신이라는 게 의미가 없었다.
같이 힘을 합쳐서 적들을 물러 뜨려야 한다!
“좋은 점을 지적했군. 더르규.”
“그래. 내가 나서서...”
“저 놈들이 나서서 시선을 끄는 동안 우리는 빠져나가자.”
“......”
더르규는 황당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닐리아, 요네르, 가이난도는 바로 찬성했다.
““좋은 생각이야!””
“......”
더르규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지금 일행의 우두머리는 더르규가 아니라 이한이었으니까.
‘포위망이 얕은 쪽을 뚫고 나가야 해.’
관찰.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이한은 참았다.
언제 어느 상황이든 간에 당황해서 서두르는 것보다, 참고 기다리는 게 옳을 때가 많았다.
이한은 포위망이 얕은 쪽을 확인하기 위해 기다렸다.
다행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소리를 지르고 달려 나가면서 시간을 끌어주고 있었다.
이 기회를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아니. 근데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숨죽이고 수풀 속에서 관찰하던 이한은 당황했다.
검은 밤하늘에 둥둥 떠있는 해골이 쏟아내는 언데드 소환수들이 멈추지 않고 계속 나오는 것이다.
마치 숫자로 밀어붙여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내가 교장의 광기를 얕봤구나!’
이한은 속으로 탄식했다.
교장은 이한 생각보다 좀 더 미친놈이었다.
붙잡히면 유죄, 탈출하면 무죄라고 선언한 만큼 학생들에게 어느 정도 기회는 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진심으로 꽉꽉 막아버릴 줄이야.
아니, 어쩌면 저게 자기 나름대로 기회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몰랐다.
‘교수들의 머릿속 사고회로는 어딘가 좀 비틀려 있지.’
아마 해골 교장은 진심으로 ‘이 정도는 해줘야지 학생들이 이 포위망을 뚫고 가면서 성장하겠지?’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걸 뚫어야 하는 게 이한이라는 점이었다.
‘이건 뭐... 흰 호랑이 탑 애들이 아무리 시선을 끌어도 의미가 없을 정도인데. 그냥 항복해야 하나?’
아래로 내려가는 길목이란 길목은 다 뼈 추적자들이 지키고 횃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또 뼈 추적자들이.
그 뒤로는 또 또 뼈 추적자들이...
숫자가 얼마나 늘었는지 산 아래쪽이 대낮처럼 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잠깐.’
고민하던 이한은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뼈 사냥개를 이끌고 다니는 뼈 추적자들이 이한 일행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상한데?’
물론 지금 이한 일행이 수풀 속에 숨어 있고,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정신없이 아래로 달려 내려가면서 잔뜩 시선을 끌고 있긴 했다.
하지만 이 주변에 이한 일행이 숨어 있다는 걸 안다면 뼈 사냥개가 주변을 뒤지거나 다가오기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뼈 사냥개나 뼈 추적자들은 이한 일행은 찾는 대신 흰 호랑이 탑 학생들만 쫓아서 아래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설마... 교장이 우리가 있는 걸 모르나?’
이한은 당연히 교장이 이한 일행이 숨어있는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교장은 이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마법사였으니까.
하지만 교장이 여기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나서지 않고, 추적자들을 보낼 테니, 피해서 탑으로 복귀해라!’
생각해보니 저 하늘에 떠오른 거대한 해골이 진짜 교장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멀리서 분신을 보내거나 환영만 보냈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추적자들의 눈만 피하면 된다!’
들키고 도망치는 것보다는 숨어서 도망치는 게 훨씬 나았다.
“...위로 가자.”
“뭐??”
“아래는 지금 안 들킬 수가 없어. 숫자를 봐. 부딪히는 순간 추적자들이 몰려올 거야.”
이한의 말에 닐리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지만 위는 추적자가 없어. 위로 올라가서 우회하거나 버티자. 그게 훨씬 더 가능성이 높아.”
“알겠어!”
“?”
말을 꺼낸 이한도 당황할 정도로 닐리아는 쉽게 수락했다.
“내가 말을 꺼냈지만... 그렇게 고민 안 하고 수락해도 되나? 이 위쪽 길은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잡혀서 체벌방의 고문기구 안에 갇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
*    *    *
30 분 정도 조심스럽게 위로 올라갔을까.
닐리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굴이야. 안에 들어가자.”
“몬스터는?”
“없어. 작은 동굴인데다가 인기척이 전혀 없거든. 돌멩이를 던져봤지.”
닐리아는 긴 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우린 지금 너무 많이 움직였어. 나는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은 좀 쉬어야 할 거야.”
“그래야 할 것 같군.”
닐리아나 이한, 더르규는 멀쩡했지만 요네르는 피곤한 기색이었고 가이난도는 죽기 직전이었다.
어둠 속에서 계속 걸은 데다가 도중에 추적을 피해 긴장한 채로 또 도망쳤으니, 지금 쓰러져도 이상할 것 없었다.
“빛이여!”
동굴 안으로 들어간 이한은 마법을 사용했다. 태양처럼 타오르는 빛이 동굴 안을 채웠다.
요네르는 외투를 동굴 입구에 걸어서 빛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설마... 여기까지 쫓아오진 않겠지?”
“걱정하지 마. 오면서 쫓는 소리는 못 들었으니까. 다 산 아래쪽에 모여 있나봐.”
닐리아가 요네르를 안심시켰다.
다행히 이한이 말한 게 사실이었다.
교장이 불러낸 소환수들은 이한 일행을 눈치 채지도 못했고, 산 위쪽으로 더 올라오지도 않았다.
“문제는 저 소환수들이 언제까지 있느냐지.”
“차라리 내가 뚫고 나갔어야 했을지도 모르겠군.”
더르규가 후회된다는 듯이 말하자 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힘으로 뚫고 나가는 건 불가능했을 거야.”
“어째서지?”
“교장 성격에 절대 그런 허점을 대놓고 보여주지 않았을 테니까.”
“......”
“......”
다른 학생들은 ‘그걸 어떻게 아는데?’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이한의 의견을 존중해서 입을 열지 않았다.
“놈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든, 아니면 우회하든, 지금은 쉬어야 할 때지. 일단 뭘 좀 먹자.”
“찬성!”
이한은 갖고 온 소시지와 빵, 치즈를 각자에게 나눠줬다.
가이난도는 드워프식 벌꿀 사탕을 입에 던져 넣더니 눈을 감고 음미했다. 며칠 동안 단 걸 못 먹었다고 뼈에 사무치는 모양이었다.
“이런. 물을 다 마셨는데...”
닐리아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가죽 물주머니를 꺼냈다. 계속 걷느라 물이 바닥난 것이다.
“걱정할 거 없다. 마법이 있으니까.”
“!”
“샘솟아라!”
이한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외치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물 덩어리가 생겨났다.
닐리아는 허겁지겁 가죽 물주머니를 가져다댔다.
“진짜 대단하군. 이한!”
더르규는 감탄했다.
기사 가문 출신이라 다른 탑 학생들보다 마법 배우는 게 더딘 더르규에게, 이한의 마법은 놀라운 기적에 가까웠다.
가이난도도 요네르도 박수를 치며 아이처럼 기뻐했다.
“마침 목이 말랐는데!”
“덕분에 잘 마실게.”
닐리아는 가죽 물주머니를 꽉 채운 다음 조심스럽게 닫았다. 그리고는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물 마법을 익힐 수 있으면 좋겠는데...”
“요령만 익히면 금세 익힐 거야.”
이한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실제로 이게 그렇게 어려운 마법도 아니고, 감각만 한 번 터득하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인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네.”
닐리아는 그렇게 말하더니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웠다.
“타올라라!”
화륵!
허공에서 작은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닐리아가 모아 놓은 불쏘시개 위에 옮겨 붙었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늑한 모닥불이 만들어졌다.
다들 추운 밤길을 돌아다닌 탓에 손발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는지 탄성이 곳곳에서 새어나왔다.
“휴. 한 번에 성공해서 다행이야. 저번에 성공했지만 불안했거든.”
닐리아는 화염에 적성이 맞았는지, 한 번에 화염 생성 마법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나서 이한을 보며 말했다.
“부럽다. 난 화염보다는 물 마법이 갖고 싶은데.”
“......”
“...왜, 왜?!”
닐리아는 이한이 노려보자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026 화
마법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은 대부분 마법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생각했다.
대부분 ‘야 나는 불 생성 마법 배워서 야영 때 불 붙이고 물 생성 마법 배워서 목마를 때 공짜로 물 마셔야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다.
보통은 ‘기초를 갈고 닦은 다음 내가 원하는 마법을 배워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깨달음을 얻겠다’는 야심을 품지!
그런 만큼 닐리아는 화염 생성 마법에 별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불 붙이는 건 지팡이와 주문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돌멩이와 나뭇가지만 줘도 닐리아는 불을 붙일 자신이 있었으니까.
차라리 자신이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물 마법에 적성이 맞았으면 더 좋았을 것...
“닐리아. 네가 가진 마법에 감사해라.”
“어... 어? 그, 그래.”
이한이 뿜어내는 분위기에 압도된 닐리아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마법을 칭찬해 준 건가??’
마법의 명가, 워다나즈 가문 출신으로서 닐리아 본인이 가진 마법을 하찮게 여기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닐리아는 살짝 멋쩍어하며 고개를 돌렸다.
물론 이한은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마력만 제어할 줄 알았으면 화염 마법부터 배우는 건데. 부럽군.’
*    *    *
언 손발을 녹이고, 타는 갈증을 물로 축이고, 빵과 치즈를 덥혀서 입에 넣자 일행의 피로는 어느 정도 풀렸다.
‘슬슬 밖에 나가서 언데드 놈들을 확인해야겠군.’
이한은 밖에 나가서 언데드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친 교장 성격이라면 아직 남아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닐리아.”
“좋아. 가보자고.”
닐리아도 이한의 생각을 눈치 챘는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굴에서 나오자 캄캄한 어둠이 둘을 반겼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알 수 있었다.
“......”
“젠장.”
아득한 산 아래 쪽이 아직도 환했다. 마치 불로 만든 띠가 산 아래에 둘러진 것 같았다. 언데드 소환수들이 만든 포위망이었다.
“진짜 미친 놈 아닌가?”
“맞... 맞긴 한데 그렇게 말해도 돼?”
닐리아는 해골 교장을 욕하는 게 겁이 났는지 살짝 떨었다.
“괜찮아. 듣는 사람 없어. 욕해도 돼.”
“그, 그런가?”
“닐리아. 마법이란 자유로운 발상에서 나오는 거야. 교장도 우리가 교장을 욕하고 자유로운 발상을 하길 원할 걸.”
이한은 진지한 얼굴로 개소리를 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조각 같은 얼굴로 진지하게 개소리를 하자,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닐리아는 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그런가?
“교, 교장 나쁜 놈! 불곰 같은 놈! 밤에 늑대가 잡아갈...”
파사삭-
“으아앙!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앞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닐리아는 울먹이며 이한에게 달라붙었다.
이한은 가슴팍에 달라붙은 닐리아를 거머리 떼듯이 천천히 떼어내며 경계의 시선을 던졌다.
“닐리아. 조심해. 누군가 있다.”
상대방도 이한 쪽을 알아챘는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지?”
“그쪽부터 말해라.”
“흰 호랑이 탑.”
“젠장. 다 잡힌 게 아니었군.”
이한은 혀를 찼다.
어쩐지 저기 언데드들이 안 사라진다 했더니 그 소란 와중에도 안 잡히고 도망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완전히 엉망인 꼴로 나타났다. 거의 거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거, 거지?”
“아니. 흰 호랑이 탑이라니까.”
*    *    *
-위대한 교장 선생님의 명령을 어기고 탈주한 학생들에게 처벌을.
-위대한 교장 선생님의 명령을 어기고 탈주한 학생들에게 처벌을.
이한 일행과 달리, 포위망을 뚫겠다고 달려 나간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스켈레톤들이었다.
뼈 추적자들은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름끼치는 말을 하며 덤벼들었다.
게다가 들고 있는 뼈로 만든 몽둥이는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한 대 맞으면 움직임이 느려지고 두 대 맞으면 발이 멎는데다가 세 대 맞으면 쓰러졌다.
“악!”
“이 자식들이 비겁하게 숫자로... 크악!”
갈고 닦은 검술을 선보이며 목검으로 뼈 추적자들을 쓰러뜨리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결국 하나둘씩 나뒹굴었다.
-제압 완료.
-제압 완료.
“...위로! 위로 빠져나가!”
그리고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중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건 지젤이었다.
‘이건 뚫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게 아니었다!’
이한은 교장을 조금도 믿지 않았지만, 지젤은 무심코 교장이 하는 말을 믿은 탓에 포위망을 뚫을 수 있다고 착각해버린 것이다.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가려면 잡히는 결말밖에 없었다.
지젤은 남은 학생들을 데리고 산 위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뼈 추적자들은 산 위까지 쫓아오지는 않았다.
“헉... 헉헉...”
“모라디. 위쪽으로... 헉. 도망쳐도 돼? 길이 없잖아.”
“마법사들이 불러낸 소환수들은 오래 있지 못해.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야.”
옆에 이한이 있었다면 ‘그건 허접한 마법사의 경우고 교장이 불러낸 소환수가 그 정도겠냐?’라고 지적했겠지만, 불행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마법 지식은 매우
부족했다.
그들은 지젤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어떻게 하지?”
“기다리자. 쉬면서 체력도 회복하고. 불을 붙... 아니. 쉴 곳부터 먼저 찾아야겠군.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자.”
지젤의 말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닐리아처럼 어둠에 능숙하거나 산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에 능숙하진 않았지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에게는 체력이 있었다.
온몸의 근육에 피로가 쌓이고 갈증으로 인해 목이 바짝 타는데도 불구하고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파사삭-
“저기 소리가 들렸어.”
“산짐승 아닌가?”
“산짐승이면 차라리 잡아버리자. 뱃가죽이 등에 붙은 기분이야.”
그러나 들려오는 소리는 짐승의 소리가 아닌, 사람의 말소리였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 한밤중에 다른 사람이 있을 줄이야.
“...거기 누구지?”
“그쪽부터 말해라.”
“흰 호랑이 탑.”
“젠장. 다 잡힌 게 아니었군.”
놀랍게도 그건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었다.
*    *    *
“들어와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쭈뼛거리며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표정은 어색함으로 가득했다.
서로 싸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도움을 받는 게 편할 리 없었다.
“앉아서 먹고 마시도록.”
이한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옆에 있던 가이난도는 작게 말했다.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왜...”
“쉿.”
더르규는 가이난도의 옆구리를 쳤다.
갑자기 나타난 흰 호랑이 탑 학생들.
거지꼴이 된 걸 보니 이 한밤중에 얼마나 고생을 한지 짐작이 갔다.
원래라면 이한은 이들을 내쫓아도 됐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한테 그런 대접을 받았는데, 내쫓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한은 그들의 형편없는 꼴을 보더니 동굴 안으로 들어오라고 불렀다.
그리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눠줬다.
솔직히 감동적이었다.
‘이한은 진정 명예롭다!’
아군에게 친절을 베푸는 건 쉬운 일이었다. 진정으로 어려운 일은 적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었다.
더르규는 이한의 이번 친절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반성하고 화해하는 계기가 되길 빌었다.
“......”
동굴 안에는 우물거리는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지젤은 조심스럽게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푸른 용의 탑 놈들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지젤은 설마 이한이 지젤의 뒤를 쫓아왔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검은 거북이 탑도 아닌, 푸른 용의 탑 출신 학생들이 그런 비열한 짓을 할 거라고 어느 누가 예상을 했겠는가.
대신 지젤은 다른 식으로 생각했다.
‘...이것들도 지도를 봤구나.’
그렇지 않다면 이 밤에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보다 먼저 올라왔다가 밑에서 일어난 소란에 동굴에 숨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지젤은 입을 오물거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이한이 친절을 베풀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모라디 가문에 있을 때부터 지젤은 이렇게 교육받아 왔었다.
-지젤. 너도 알다시피, 모라디 가문은 원한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말이 있지. 그건 바로 은혜는 생각날 때 갚는다는 거란다.
고마움 같은 감정에 휘둘리는 자는 모라디 가문에서 가장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모라디 가문의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눈앞에서 절박하게 부탁을 하더라도 냉정하게 거절할 줄 알아야 했다.
‘어떻게 이용해야 하지? 일단은 호의를 사야 해.’
그러는 사이 흰 호랑이 탑 학생 중 한 명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나마 친한 더르규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초이. 어ㄸ...”
쿵!
“?!”
말을 꺼내려던 흰 호랑이 탑 학생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더르규는 그 모습에 깜짝 놀랐다.
‘뭐야?!’
처음에는 그냥 피곤에 지쳐서 쓰러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쿵! 쿵!
다른 학생들도 뭐라도 잘못 먹은 것처럼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다.
“...빌어먹을!”
뒤늦게 깨달은 지젤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치며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을 뱉었다.
그러나 이미 물을 적잖게 마신 탓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물에 약을...?!’
“늦었어. 너무 늦게 깨달았군.”
이한은 냉정하게 말했다.
지젤은 정신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이한을 살기 넘치게 노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봤던 부드럽고 호리호리한 표정 대신,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날처럼 날카롭고 살벌한 표정이 나타났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본 적 없는 지젤의 진짜 표정이었다.
“두고... 보자고. 워다나즈...!”
지젤이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조각 같은 싸늘한 얼굴로 무표정하게 그녀를 내려다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지젤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괜히 원한을 샀나?’
지젤의 오해와 달리 이한은 속으로 약간 후회하고 있긴 했다.
이렇게 당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원한을 잊을 리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먼저 친 건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었다.
누군가 너를 이유 없이 싫어한다면, 그 놈에게 이유를 꼭 하나 만들어 줘라!
“뭐, 뭐, 뭐, 뭐냐 이한?!”
“물에 독이 있어!? 나도 마셨는데!?”
더르규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가이난도도 마찬가지였다.
이한은 일부러 둘을 빼고 음모를 꾸민 것이다.
더르규나 가이난도나 모두 표정관리와는 거리가 먼 친구들. 알려줬다가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가이난도. 걱정하지 마라. 독이 아니니까. 그리고 네가 마신 물에는 들어 있지도 않았고. 놈들을 붙잡아서 뼈 추적자들이 있는 곳에 두고 올 거다.”
이한이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마시는 물에 수면제를 탄 건 사사로운 원한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저 밑에 있는 스켈레톤들이 누굴 찾고 있겠는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 놈들을 빨리 잡아서 바쳐야 한다!
“그...! 그렇다고 굳이 이런 수단을...?”
“더르규. 잘 생각해봐라. 정면으로 대결했다면 시끄러워서 들켰을 거다. 게다가 이 모라디가 가만히 있었을까? 발목을 잡고 같이 잡히려고 했겠지.”
더르규는 말로는 이한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말을 듣자 더르규는 또 설득이 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그보다 약을 어디서 구한 건가?”
요네르가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아까 올라오는 길에 수면초를 찾았어.”
어지간한 꽃과 풀은 다 구분할 줄 아는 요네르였기에 올라오면서 흰 줄기를 가진 수면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앗. 이거 봐.
-이게 뭐지?
-수면초야. 가루를 내서 물에 타 마시면 잠이 잘 와.
-챙기자.
-응?
-챙기자. 언제 쓰게 될지 모르니까.
-이걸 쓸 일이 있어?
요네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수면초를 챙겼다. 쓸 일이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쓸 일이 있었다.
...이렇게 쓸 줄은 정말 몰랐지만.
027 화
“이런 나쁜 자식들은 독이 아니라 수면초를 먹인 걸로 고마워해야 해!”
닐리아는 씩씩대며 말했다.
이한과 요네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은 만큼, 흰 호랑이 탑 학생들한테 단단히 화가 나있었던 것이다.
“아무 잘못도 없는 워다나즈한테 그렇게 시비를 걸다니!”
“사실 아무 잘못이 없는 건 아니고, 내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듣는 검술 수업에 들어가긴 했어.”
“어?? 아니 그게 왜 잘못...”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닐리아가 황당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이한을 쳐다보았지만, 이한은 무시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어쨌든 더르규. 네가 놀란 건 알겠지만 이게 비겁하거나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이건 전략이지.”
“마, 맞아. 당한 놈이 바보지.”
닐리아가 이한의 말을 거들었다.
사냥꾼 출신인 닐리아에게 이 정도 보복은 보복도 아니었다.
“난 그래도 좀 명예롭게...”
“어허. 더르규. 네가 명예를 좁게 보고 있군. 결과를 보자고. 여기서 싸웠다가 소란이 일어나서 다 같이 잡혔다면 명예고 뭐고 서로 얼굴 붉혔을 거 아냐. 하지만 물에
수면초를 탄 덕분에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이 잘 끝날 수 있었지. 우리는 들키지 않고, 저 친구들도 괜히 다치지 않고 학교로 돌아갈 거고. 이게 명예 아니겠어?”
“그런... 그런가?”
“명예네. 명예야.”
닐리아가 이한을 거들었다. 요네르와 가이난도도 맞장구쳤다.
“명예로운 행동 같은데.”
“이 정도면 황궁에서도 명예로 쳐줄듯?”
“그... 그렇군.”
먹물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서서히 검어지듯이, 더르규는 본인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서서히 이한의 사고방식에 물들고 있었다.
*    *    *
타타타타탁-
멀리서 언데드들이 달려오는 소리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압 완료.
-제압 완료.
뼈 추적자들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잠에 빠져 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능이 낮은 언데드 소환수인 만큼 그런 걸 구분하지 못했다.
‘이제 기다려봐야겠군.’
이한은 저 뼈 추적자들이 곧 흩어지기 시작할 거라고 확신했다.
목표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전부 붙잡았으니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디 가?”
“기다리는 동안 이 주변 좀 확인해보려고.”
이한은 조심스럽게 성벽이 있는 쪽을 향해 나아갔다.
생각치도 못한 소란이 일어나서 원래 목표였던 학교 탈출은 물거품이 됐지만, 그냥 맨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뭐라도 확인해야 한다.’
학교 부지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성벽이 과연 산맥 어디까지 나와 있을지.
그리고 정말 탈출할 방법은 없는지.
다른 학생들은 이한의 뒤를 쫓아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뼈 추적자들은 사라졌어도 캄캄한 어둠이 그들 앞에 자리 잡고 있는데다가, 산 위는 올라갈수록 가팔라지고 나무와 수풀로 빽빽해졌다.
“너무... 어두운데.”
“이거, 위험해. 넘어지겠어.”
게다가 횃불을 켜고 다니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까지 사라진 탓에 주변은 더욱 어두웠다.
“워다나즈. 불을 켜야겠어.”
“위험하지 않을까?”
“이 주변에 워낙 방해물이 많아서 괜찮을 거야.”
“알겠어. 빛이여!”
이한의 주문과 함께 강렬한 빛이 주변을 감쌌다. 마치 대낮 같은 빛이었다.
그걸 본 닐리아가 갑자기 불안해졌다.
이론적으로 이렇게 거리가 떨어져있는데다가 나무와 수풀이 빽빽하고 무성하게 자라있으면 아래쪽에서 빛이 안 보이는 게 보통이지만...
이한의 주문은 너무 강렬해보였다.
‘설마 들키진 않겠지.’
-불을 꺼다오. 어린 학생들. 잠을 잘 수 없게 되니.
“!!!”
사람이 낸 것 같지 않은, 마력이 담겨 있는 낮고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숲 안에서 들려왔다.
안 그래도 미친 교장한테 시달린 학생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여기에도 함정이 있었단 말인가?
“누구십니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연 건 이한이었다.
‘교장의 소환수라면 먼저 공격했을 거다.’
-질문은 내가 먼저 하겠다. 너희 학생들이 찾아왔으니까. 질문을 맞히면 손님으로 대접해주겠지만, 틀린다면 불청객으로 대우받을 거다. 자... 긴장할 건 없다. 정말
쉬운 문제니까. 한 드워프가 저녁 늦게 방에 촛불 다섯 개를 켜놓았다. 그런데 창문 밖에서 심한 바람이 불어서 촛불 하나가 꺼져버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옆방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손님 드워프가 문을 세게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촛불 하나가 더 꺼져버렸고. 그래서 드워프는 촛불이 꺼지는 걸 막기 위해 창문과 문을 닫아버렸다.
다음 날 아침에 남은 촛불은 몇 개일까?
‘이건 함정이다.’
이한은 수수께끼에 숨은 함정을 깨달았다.
얼핏 보면 다섯 개에서 두 개가 꺼졌으니 세 개가 남았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촛불은 시간이 지나면 다 타서 꺼지게 되어 있었다.
즉 아침이 되었을 때 남은 촛불은 0 개인 것이다.
“세 개요!”
가이난도는 뇌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대답했다. 이한은 경악했다.
“!”
-정답이다.
“...잠, 잠깐. 촛불이 다 타서 꺼지는 게 아니었습니까?”
이한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목소리는 의아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런 수수께끼를 낼 때는 당연히 타지 않는 마법 촛불을 쓰겠지? 당연한 거지 않나?
“......”
이한은 속으로 욕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마법 사회 같으니.’
정말 말한 대로 쉬운 문제였던 것이다.
-질문을 맞혔으니 손님으로 대접해주겠다. 하지만... 오랜만에 손님을 만났는데 그냥 끝내려니 좀 아쉽구나. 한 가지 문제를 더 맞혀보는 건 어떠냐? 틀려도 손님으로
대접해줄 것이고, 맞힌다면 한 가지 선물을 주겠다.
“준비됐습니다.”
이한은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멍청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여기 오전에는 덩치 큰 자가 있다. 이 자는 정오가 되면 덩치가 작아지고, 오후가 되면 다시 덩치가 커진다. 밤이 되면 이 자는 사라진다. 이 자는 누구일까?
학생들은 머뭇거렸다.
생각치도 못한 수수께끼에 당황한 것이다.
‘뭐지?’
‘잘 모르겠어.’
아까 정답으로 자신감을 얻은 가이난도가 다시 외쳤다.
“그것은 오전과 오후에는 덩치가 컸다가 정오에는 덩치가 작아지는 괴물입니다!”
-...틀렸다.
“어째서?! 아. 밤에 사라지는 걸 빼먹어서...”
-틀렸다니까.
“정답은 그림자입니까?”
-정답이다!
“!!!”
친구들은 놀란 눈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맞췄지?
이건 너무나도 유명한 수수께끼였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중 하나 아닌가.
전생의 지식이 있다고 설명하기 귀찮은 만큼 이한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정신을 집중하고 지혜에 몸을 맡기자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모호한 대답은 언제 어디에서나 좋게 해석되기 마련.
상대는 이한의 대답에 매우 감명 받은 모양이었다.
아까보다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훌륭하다. 너희를 환영한다. 영리한 어린 학생들아.
빽빽하게 자리 잡았던 나무들이 일제히 옆으로 비켜서고 주변의 지형이 안개가 낀 것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짙은 녹음의 마력과 함께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정령의 공터가 눈앞에 드러났다.
*    *    *
이한과 친구들을 맞이한 것은 말하는 떡갈나무였다.
깊은 숲에는 온갖 몬스터들과 정령들, 그리고 그 외의 신비한 존재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 앞에 나타난 떡갈나무도 그 중 하나였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구나. 이걸 마셔봐라.
말하는 떡갈나무가 가지를 움직여서 나무잔을 건넸다. 거기에는 차가운 녹색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냄새가 별로 좋지 않군.’
녹즙 같은 색에 녹즙 같은 냄새.
하지만 느껴지는 마력은 풍부했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마셨다.
“!”
마치 근육에 쌓인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여름날 땀을 흘리면서 달린 다음 마시는 차가운 얼음물이 온몸에 사무치는 것처럼, 지금 마신 녹색 음료도 그랬다.
차갑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시원함!
매우 쓴 것과 별개로 효과는 확실했다.
-숲의 나무들이 만든 수액을 사용한 음료란다. 입에 맞느냐?
“예. 맛있습니다. 혹시 좀 더 주실 수 있습니까?”
-마음대로 해라.
이한은 가죽 물주머니에 수액을 담아서 챙겼다. 학교 환경이 척박한 만큼 이런 걸 챙길 수 있을 때 챙겨야 했다.
이한이 챙기고 있는 동안 다른 학생들은 떡갈나무들한테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숲의 정령들만이 아는 신비한 공터에 온 만큼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뭐하는 곳이죠?”
“혹시 다른 나무는 없습니까?”
“어, 먹을 거 없어요? 이건 너무 쓴데. 단 과일 같은 거라도 좀.”
친구들이 떠드는 동안 이한도 말하는 떡갈나무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몇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네가 누군지부터 밝혀야겠지. 자기소개를 해봐라.
“저는 이한입니다.”
가문 대신 이름을 먼저 말하는 이한의 모습에 떡갈나무는 신기해했다.
보통 귀족 소년이 가문 대신 이름을 먼저 말하는 건 흔치 않았던 것이다.
-가문은?
“워다나즈 가문입니다.”
쿵-
떡갈나무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한은 살짝 억울해졌다.
-미안하군. 네 잘못은 없는데 소문 때문에. 워다나즈 가문은 참 대단한 마법사들이 많이 나왔지.
“그렇습니까?”
-미치광이 같은 마법사들도 많이 나왔고.
“......”
-가문 대신 스스로의 이름을 말하다니. 훌륭하군. 좋은 마법사가 될 거다. 그런데 이 한밤중에 학생들이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이한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대답했다.
“밤산책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
옆에서 대답을 들은 요네르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말하는 떡갈나무는 저런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
-아. 학교 밖으로 나갈 길을 찾으러 왔나? 그런데 오늘 달의 모양을 보니 신입생들이 들어온 첫 번째 주일 텐데. 설마 첫 번째 주에 벌써 나가려고 시도를 하고 있는
건가?
“...사실 거기에는 이런저런 사정이 있습니다.”
이한은 변명하려고 했지만 말하는 떡갈나무는 이미 감탄하고 있었다.
-첫 번째 주에 나가려고 하다니...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은 대단하군그래.
‘젠장.’
이한은 변명을 포기했다.
“말하는 떡갈나무님. 저 이전에도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나가려고 했다면, 혹시 나가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는 수백 년이 넘게 이 숲에서 살아왔다. 많은 학생들이 이 학교를 나가려고 하는 걸 지켜봤지. 방법이 없지는 않다. 너희 신입생 수준으로는 불가능해서 그렇지.
말하는 떡갈나무는 말해줄 기색이 없어보였다.
애초에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던 이한은 다른 질문을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이 방향대로 쭉 가면 산을 타고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까?”
-무리일 거다. 성벽이 있으니까.
“...여기에도 성벽이 있다고요??”
-그래. 그리고 그 성벽에는 마법이 걸려 있지. 함부로 기어오르다가는 쓴 맛을 보게 될 거다.
이한은 기가 막혔다.
몇 시간은 올라온 이 가파른 산맥 깊숙한 곳에도 성벽이 이어져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
‘이러면 성벽이 끊어진 곳을 찾아서 탈출하는 건 실질적으로 무리다.’
성벽을 기어오르거나 우회하는 것도 안 된다니.
말하는 떡갈나무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신입생 때는 무리해서 나가려고 시도하지 말거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니까. 지금은 산이 잠잠하지만 몇 주가 더 지나면 잠들어있던 몬스터들도 깨어날 거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말하는 떡갈나무는 이한의 눈빛을 보았다.
저런 말을 들었는데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더 달려들려고 하는 눈동자.
그 기개가 말하는 떡갈나무의 마음에 들었다.
-한 가지 수수께끼를 주마. 검은 도끼 부족 오크들과 붉은 깃털 부족 오크들. 흰 독수리 부족 오크들과 초록 개구리 부족 오크들이 모여서 잔치를 열었다. 못된 고블린도
거기에 끼어들어가서 진탕 먹고 마셨지. 고블린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
“???”
자리에 모인 학생들은 말하는 떡갈나무의 수수께끼에 당황스러워했다.
가이난도가 입을 열었다.
“인기 많은 고블린이었습니까?”
떡갈나무는 못 들은 척 무시했다.
028 화
-참. 선물을 주기로 했었지.
말하는 떡갈나무는 이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한의 발 앞쪽의 흙이 꿈틀거리더니 나뭇가지가 솟아나 엮이고 꼬이며 위로 자라났다.
어느새 나뭇가지는 기다란 마법지팡이의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
마법사들의 마도구, 아티팩트는 마법사의 손발과 같은 존재였다.
그 중에서 마법지팡이는 가장 중요한 아티팩트라고 할 수 있었다.
때로는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키고.
때로는 마법의 시전시간을 단축시켜주고.
때로는 쓸 수 없는 마법도 쓰게 만들어주는...
마법사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지금 마법학교의 1 학년들은 모두 학교에서 만들어 준 기다란 스태프 형태의 마법지팡이를 쓰고 있었다.
별다른 특징도 개성도 없지만 이 마법지팡이의 장점은 매우 단단하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사람 키를 가볍게 넘길 정도로 길어서 이한은 이걸 나무 봉처럼 사용했다.
이 지팡이가 없었다면 우레걸음이 풀어놓은 돌연변이 돼지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 혹시 지금 쓰고 있는 지팡이에 정이 들어서 바꿀 생각이 없는가?
“아니요?”
이한은 1 초도 고민하지 않고 새 지팡이를 뽑아들었다.
도구는 도구.
그런 것에 감상적인 마음을 갖는 게 이상한 것이었다.
‘실험 장비 새로 바꿀 때 정 들어서 망설이는 사람도 있나?’
옆에서 더르규가 황당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탁-
새 지팡이를 땅에서 뽑아들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싱그러움이었다.
땅에서 떨어진 나무지팡이에서 싱그러움을 느끼는 게 이상할 수도 있었지만 이한은 분명히 느꼈다.
-느낌이 어떻지?
“싱그러운... 느낌이 듭니다만.”
-!
말하는 떡갈나무는 깜짝 놀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지팡이에 적응한 것이다.
‘붙잡자마자 지팡이의 기운을 느낄 줄이야.’
원래라면 훨씬 더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이한이 느낀 건 지팡이 안에 깃든 나무 정령의 기운이었다.
저 나무지팡이는 정령이 웅크리고 있는 지팡이였던 것이다.
새내기 마법사가 정령을 소환해내기 위해서는 온갖 수련과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하는 것처럼, 지팡이 안에 깃든 정령과 교감하고 힘을 꺼내는 것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원래라면 몇 달은 지팡이를 잡고 휘둘러야 느낄 수 있었고, 그것도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좀 있어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탁월하군. 아무리 워다나즈 가문이라지만 저 정도 재능이라니.’
-훌륭하다. 그걸 느끼다니.
“그렇습니까?”
이한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떡갈나무를 쳐다보았다.
이 싱그러운 느낌을 받은 게 뭐가 대단한 건지 잘 감이 안 온 것이다.
안에 깃든 게 뭔지 모르니 당연했다.
-지팡이를 쓰다보면 그 지팡이 안에 깃든 힘을 알게 될 거다.
“혹시 지금 말해주시면 안 됩니까?”
-안 된다. 재촉하지 않아도 네 재능이라면 충분할 테니까.
말하는 떡갈나무는 슬슬 이한이 매우 독특한 신입생이라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가끔 신입생들 중에서 저런 또라이가 나오곤 했던 것이다.
겁 없고, 능력 있는 또라이들.
지금 이한의 모습은 마치 백 년쯤 전에 만난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미치광이를 연상시켰다.
그보다는 훨씬 더 예의 바르고 침착하긴 했지만...
-자. 나는 다시 잠들어야겠다. 그리고 이제 이 숲 근처에서는 마법을 쓰지 마라. 네 마법은 너무 마력이 강해서 주변의 나무들을 전부 잠에서 깨우니 말이다.
“......”
‘설마 졸려서 내보내려고 대충 말한 건 아니겠지?’
이한은 갑자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지팡이에서 싱그러운 기운이 느껴졌다는 말 한 마디 했다고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는 게 뭔가 좀 이상했던 것이다.
지팡이에 깃든 힘을 바로 말해주지 않는 것도 살짝 수상했다.
졸려서 빨리 자려고 대충 말한 거 아니야?
그냥 내보내면 또 이 숲 근처에 와서 귀찮게 굴 수 있으니 적당한 지팡이를 하나 만들어줘서...
그러나 이한의 의심과는 별개로 공터는 닫히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움직이고 주변이 흐려지더니 점점 더 공터에서 멀어져나갔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말하는 떡갈나무의 목소리가 이한의 귓가에 들려왔다.
-내가 말한 수수께끼를 기억해라. 그걸 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    *    *
밖으로 돌아오자 다행히 언데드들은 모두 사라진 뒤였다.
이한 일행은 새벽의 여명이 어둠을 조금씩 몰아내는 사이 조심스럽게 산을 내려왔다.
다들 지칠 만큼 지쳐서 뭘 더 하기보다는 빨리 침대 위에 누워서 쉬고 싶어했다.
털썩!
이한은 푸른 용의 탑 안에 들어가자 침대에 몸을 던졌다. 탈출이고 뭐고 일단 자고 일어난 다음 고민해 볼 생각이었다.
“...나즈! 워다나즈!”
몇 시간을 푹 잤을까, 누가 개인 침실 문을 두드리면서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뭐냐?”
이한은 하품을 하며 문을 열었다.
안경을 쓴 달카드 가문의 인간 소년, 아산이 앞에 서있었다.
“밖에서 교장 새, 아니, 선생님께서 행사를 진행하신대!”
‘나쁜 의미로 잠이 확 깨는군.’
이한은 그 말을 듣자 잠이 확 깼다.
교장이 행사를 진행한다니.
‘...설마 탈주 시도한 학생들을 색출하는 작업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솔직히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더 찜찜했다.
이한 일행이야 안 걸리고 돌아왔다지만 그 교장 성격에 뭔가 괴팍한 짓을 해도 이상할 것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참석을 안 하는 건 더 위험하다.’
이한은 잘 알았다.
원래 사고를 쳤을 때에는 더욱 더 평소 하던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괜히 수상한 티를 내면 바로 들키는 것이다.
“알겠어. 요네르와 가이난도를 깨워서 나가야겠군.”
“다들 너무 늦게까지 자는 거 아니야?”
이한이 둘을 깨워서 탑 밖으로 걸어 나오자 벌써 태양이 머리 위까지 떠있었다.
셋은 하품을 하며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의 뒤를 쫓아 걸어 나갔다.
“!”
학교 본관 건물 앞에 떠있는 거대한 해골은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왔다.
자,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다! 어서 와라! 어린 무쇠대ㄱ... 그릇들아! 환영한다!
“...??”
분위기를 보니 주동자 색출 작업 같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화기애애한 모임이나 행사에 가까웠다.
앞뜰에는 여러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고, 사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선량한 미소를 띠며 착한 신입생들한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선물했다.
이한도 얼떨결에 사제가 준 쿠키를 받았다. 방금 막 구웠는지 쿠키는 따뜻하고 근사한 향을 풍겼다.
한 입 물자 바삭하고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잼이 새어나왔다.
‘뭐지? 학교가 망하나??’
이한의 당황을 눈치 챘는지 교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기쁜 주말을 맞아 제국의 여러 교단의 사제분들께서 학교를 방문해주셨다. 다들 기쁘겠지? 자. 박수!
짝짝짝짝짝-
신입생들은 웅성거리면서도 일단 박수를 쳤다. 사제들은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오수 고나달테스 님. 언제나 제국의 어린 마법사들을 가르치느라 고생이 많으실 텐데 이런 행사까지 허락하고 도와주실 줄이야.”
하하. 무얼요. 다 제 기쁨입니다. 황제 폐하께 말씀 잘 전해주십시오. 새로운 고대 마법을 발굴하고 연구하기 위해서 예산이 필요한데...
“저, 저희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사제들은 해골 교장의 노골적인 말에 당황했다.
그러나 이한은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친숙함을 느꼈다.
‘어느 세상이든 간에 교수는 예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세상에 무서운 게 하나 없어 보이는 오만한 교수도 연구예산을 주는 사람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 마련이었다.
해골 교장이 아무리 두려움이 없다 하더라도 예산을 지원해주는 제국의 황제 앞에서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제들은 모인 학생들에게 말했다.
“미래에 뛰어난 마법사가 될 학생분들. 오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는 제국의 여러 교단을 대표해서 나온 미천한 종들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저희
교단들을 소개해 줄 수 있다면 진실로 기쁘겠습니다.”
‘마력이 어마어마한데.’
이한은 사제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에 놀랐다.
신입생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마력량이 전신에서 일렁이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사제들의 마력은 특이했다.
신성한 기운을 품고 있는 마력이라니.
신기하지?
“!”
이한은 소름이 돋았다.
어느새 해골 교장이 인기척을 숨긴 채 이한의 옆까지 와있었던 것이다.
이해가 간다. 사제들의 마력은 신성력이라고 불릴 정도로 특이한 구석이 있으니까.
“예. 많이 들어봤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역시 사제들의 마력을 감지하고 있었구나.
‘젠장.’
이한은 실수를 깨달았다.
교장의 떠보는 말에 넘어간 것이다.
왜 그걸 숨기려고 하느냐? 뛰어난 재능이 있으면 자랑해야지. 여기 있는 무쇠대... 무쇠그릇들 중에서 그렇게 정확하게 마력을 탐지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으냐?
해골 교장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마법사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드러낼 줄 알아야 했다.
그래야 돈 많은 귀족들에게서 돈을 갈취, 아니, 투자를 받아서 더 강하고 고등한 마법을 연구하고...
‘음. 당신이랑 엮이기 싫어서라고 말하면 뒤지겠지?’
이한은 생각을 삼켰다.
이한은 어디까지나 좋은 성적 좋은 인맥 쌓아서 졸업하는 게 목표였지 해골 교장과 함께 마법의 진리를 탐구하는 게 목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상황.
“저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이 학교에 많을 테니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라니까? 앞으로는 만나는 학생마다 네 재능을 자랑하고 다니도록 해라. 마땅히 그래야 한다.
‘이거 미친 놈 아니야?’
교장이 말한 대로 하면 이한의 교우관계는 하루만에 가이난도 한 명만 남을 것이다.
다행히 해골 교장은 이한의 친구 관계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는지 다시 화제를 돌렸다.
아마 워다나즈 가문은 신앙에 관심이 없었던 만큼 사제들을 만날 일이 없었겠지.
“예. 그랬습니다.”
제국에는 수많은 신들과 그들을 섬기는 교단이 있었지만, 마법사들은 원래 신앙과 친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마법사들은...
나 또한 신앙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나는 신을 믿기에는 너무 똑똑하기 때문이지.
‘...이러니까 그렇겠지.’
해골 교장처럼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마법사들 중에서는 불신자들이 많았다.
실제로 이한의 아버지인 워다나즈 가문의 가주는 식사시간에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신성력은 마력의 일종이다. 다만 수많은 저능아들의 집단적인 믿음이 성질 변화를 일으켰을 뿐. 신성 마법이라는 것도 결국 마법의 일종이다. 왜 신성 ‘마법’이겠느냐?
-그렇다면 가주님. 신성 마법을 연구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생각이다. 네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고 싶다면 말이다. 수식과 이론을 배경으로 정교화된 진짜 마법에 비하면 신성 마법은 그냥 믿음과 감성에 취해 울부짖는
야만인들의 개짓거리지.
‘사제들 앞에서는 절대 워다나즈 가문 출신인 거 밝히지 말아야겠군.’
회상을 끝낸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선량한 사제들이라도 저 말을 들으면 없던 분노가 생길 것이다.
아마 워다나즈도 나와 생각이 비슷하겠지. 교단들도 참 한심하구나. 먹을 것 좀 챙겨준다고 들어갈 정도의 놈들이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놈들일 텐데. 이런
행사를 열다니.
해골 교장은 투덜거릴 상대가 필요했는지 이한 옆에서 연신 투덜거렸다.
묵묵히 듣던 이한은 입을 열었다.
“교장 선생님.”
왜?
“혹시 추천해주실 만한 교단들 있습니까?”
......
방금 말한 사람 무안해지게 만드는 반응에 해골 교장은 이한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잠깐, 교단들?’
교단이 아니라 교단 ‘들’ 이라고?
029 화
왜... 교단이 아니라 교단‘들’이냐?
해골 교장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물론 여러 교단들의 장단점을 들어보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하려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금 저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한 말은, 물론 아니겠지만, 이렇게 들렸던 것이다.
‘여러 교단들에 들어가고 싶은데 가장 좋은 교단들로 골라주십시오.’
해골 교장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어... 여러 신을 믿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미친 놈!’
해골 교장은 오랜만에 신입생을 보고 감탄했다.
물론 제국에는 진심으로 여러 신을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랑의 신과 지혜의 신을 같이 믿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런데 지금 저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절대로 신을 믿으려는 게 아니었다.
그냥 여러 교단에서 뜯어낼 만큼 뜯어내겠다는 속셈이 너무 당당하게 보이지 않는가!
너무 당당해서 오히려 호감이었다.
물론 여러 교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맞는 말이다. 그리고 아주 잘 물어봤다. 여러 신을 믿는 게 잘못은 아니지. 그런데 가끔 이런 것 가지고 쪼잔하게 구는 교단들도 있단 말이다.
“맞습니다.”
이한은 재빨리 동조했다.
교장이 생각한 것처럼 이한의 목적은 간단명료했다.
‘가입 가능한 교단에는 모조리 가입하자.’
생각해보니 가서 가입 좀 하는 걸로 각종 아이템을 받을 수 있다면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중복 가입이 안 되는 교단을 제외한 교단에는 모조리 가입하는 게 이득이었다.
일단 프리싱가 교단을 추천한다. 스스로를 희생해서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신이지. 교단 사람들도 친절한 편이라 환영해줄 거다.
“프리싱가... 교단.”
이한은 메모했다.
그 다음은 칼라소 교단일까. 혼돈과 변화를 사랑하는 장난꾸러기 신이다. 다른 신을 믿던 말던 신경 쓰지 않고 잘 대해줄 거다.
“칼라소... 교단.”
마지막으로 카포레오 교단도 추천하지. 검술과 검객의 신이라, 너처럼 별난 놈도 환영해 줄 거다.
“카포레오 교단...”
메모하던 이한은 멈칫했다.
이한이 검술 수업 듣는 것도 알고 있었나?
‘아니. 이건 좀 무섭군.’
사소한 일이긴 한데 너무 관심이 많은 거 아닌가 싶었다.
교수, 특히 미친 교수한테 관심 많이 받아서 좋았던 적이 없었는데...
검술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마법을 잊지 마라. 결국 진정으로 위대한 학문은 마법밖에 없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해골 교장의 말에 이한은 매우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물론 속으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이한에게 마법은 출세의 수단이었지 목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음. 그래. 그래.
해골 교장은 그 대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 교단 가입을 이야기하길래 황당했었지만 이렇게 보니 새삼스럽게 기대가 되었다.
‘참으로 보통 놈이 아니다.’
어마어마한 마력의 양이나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은 부수적인 일이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인내심.
워다나즈 가문이라는 대가문 출신의 신입생인데도 저런 인내심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매우 흥미로웠다.
‘미래가 기대되는군.’
그러면 나는 체벌방에 가둔 녀석들을 보러 잠시 가봐야겠군. 잘 해봐라. 워다나즈.
“감사합니다. ...음?”
이한은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어디에 누굴 가뒀다고?
그러나 이미 해골 교장은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    *    *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중 몇 명이 체벌방에 갇힌 건지 궁금했지만 이한은 일단 교단들부터 먼저 방문하기로 했다.
“어디 가려고?”
손에 바구니를 들고 돌아온 요네르는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프리싱가 교단...”
“아. 프리싱가 교단. 평소에 관심이 있었...”
“...하고 칼라소 교단.”
“??”
“하고 카포레오 교단 정도? 음. 오늘 다 도는 건 안 될지도 모르겠군. 너무 노골적이면 좀 그럴 테니 일주일마다 하나씩 바꿔서 가볼까.”
“......”
요네르는 어떻게 된 건지 묻기보다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 이한은 그냥 신을 세 개쯤 믿어보고싶어 하는구나!
“자. 이거 받아.”
요네르는 바구니에서 샌드위치를 꺼내서 내밀었다.
흰 빵 사이에 햄, 토마토, 양상추, 달걀 삶아서 다진 것 등 내용물이 든든히 차있는 샌드위치였다.
굶주린 신입생들한테 하나 던져주면 서로 죽여서라도 뺏을 음식이었다.
“고마운데. 음. 얼마지?”
“...그냥 주는 거야...”
“뭐? 정말로? 어째서? 무슨 목적이지?”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너 진짜 특이한 거 알아? 어제 고생한 것 때문에 고마워서 그런 거야. 자. 빨리 먹어.”
요네르의 말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던 것이다.
열심히 샌드위치를 씹어 먹는 동안 요네르는 차가운 사과 주스를 따라서 이한에게 건네줬다.
꿀꺽-
“그런데 이거 어디서 난 거지?”
“그걸 보통 먼저 묻지 않아? 플레맹 교단에서 받았어. 우리 가문은 예전부터 플레맹 교단하고 친했거든.”
연금술의 신, 플레맹.
이 교단의 사제들은 모두 다 뛰어난 연금술사들이었다.
요네르의 가문인 메이킨 가문에서는 예전부터 플레맹 교단에 넉넉한 지원을 해왔었다.
덕분에 플레맹 교단의 사제들은 요네르를 알아보고 이것저것 먹을 것들을 바구니에 담아 챙겨주었다.
‘아니. 워다나즈 가문은 다른 교단 후원도 안 하고 뭐한 거야?’
이한은 메이킨 가문의 혜안에 감탄했다.
이런 식으로 지원을 해주니 보답이 돌아오지 않는가.
“...역시 좀 그런가?”
“뭐가?”
요네르가 머뭇거리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샌드위치와 사과 주스의 조합을 말하는 걸까?
“그, 플레맹 교단 후원하는 거. 나도 플레맹을 믿긴 하거든...”
가이난도가 ‘연금술이 마법이야?’라고 지껄였다가 한 대 맞은 것처럼, 거만한 마법사들 중에서는 연금술사를 무시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플레맹 교단을 후원하거나 믿고 있다고 하면 ‘제국의 대가문씩이나 되어서 품위 없게 무슨 그런 교단을 후원하나’하는 소리를 지껄이는 자가 가끔 나왔던 것이다.
물론 이한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후원할 수도 있지 왜?”
“...그렇지?”
요네르의 얼굴이 밝아졌다. 요네르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사과 주스를 더 따라줬다.
“더 마셔.”
“응? 아직 남았는...”
요네르는 생각했다.
특이한 성격 탓에 푸른 용의 탑에서 적응하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눈앞의 소년이 있는 이상 생각했던 것처럼 힘들지는 않을 것 같다고.
*    *    *
“저. 프리싱가 님에 대해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만.”
“!”
이한이 다가오자 사제들은 고개를 들며 반색했다.
“어서 오십시오! 형제님! 프리싱가 님에 대해 듣고 싶어서 오셨다니. 환영합니다!”
“네. 전부터 프리싱가 님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왔었고,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 있을까 존경해왔었습니다.”
이한은 속마음을 숨긴 채 말했다.
속으로는 엄청나게 불평을 하더라도 겉으로는 존경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하는 것이 바로 대학원생.
이한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표정유지능력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사제들은 그런 이한의 태도에 흠뻑 반했다.
딱 봐도 대가문 출신의 귀공자 같은 소년이 이렇게 찾아올 줄이야.
“자! 들어오십시오! 티질링. 도와주겠니?”
“지... 지금 가고 있습니다.”
“!”
이한은 놀랐다. 사제들한테 불린 학생의 모습이 상당히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검붉은 기운이 감도는 피부에 이마에 솟아 있는 두 갈래 뿔. 소심한 듯 피하는 눈동자에서는 불꽃이 튀었다가 사라지는 듯했다.
‘악마 혼혈!’
혼혈 계열 종족 중에서 가장 희귀한 종족이었다. 이한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선조나 조상 중에 악마와 계약한 사람이 있으면 그 후손 중에 가끔 세대를 뛰어넘어 이렇게 영향을 받는 존재가 나오는 것이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종족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 때문인지 악마 혼혈 소녀는 동작 하나하나가 소심하고 눈치를 보는 것 같이 느껴졌다.
“저기 티질링도 같은 신입생입니다. <영원히 타오르는 불사조의 탑> 소속이죠.”
사제들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다른 탑 학생들과 거의 교류할 일이 없는 불사조의 탑 학생들이었지만, 이렇게 교단 사제들이 찾아오자 돕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다.
“정말 감동적입니다. 프리싱가 님을 믿는 친구가 여기에도 있을 줄이야. 역시 프리싱가 님입니다.”
“형제님!”
이한이 대충 말한 칭찬에도 사제들은 매우 기쁜 모양이었다.
‘그런데...’
천막 안으로 들어온 이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교단에 가입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두 가지.
교단에 가입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
그리고 교단에 가입하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였다.
이상한 교단에 가입했다가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채찍질이라도 해야 하면 오히려 더 불편하지 않겠는가.
‘교단 천막이라서 그런지 검소하군.’
천막 안은 살풍경했다. 긴 의자들이 몇 개 있었고 앞의 제단에는 프리싱가의 상징처럼 보이는 표식이 놓여 있었다.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한에게는 한 가지 위화감이 있었다.
‘여기, 아티팩트가 너무 많지 않나?’
천막 안에 이상할 정도로 마력이 느껴지는 아이템들이 많았던 것이다.
마법이 걸린 아이템, 아티팩트는 사소한 것이라 해도 꽤 비싸고 희귀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티팩트들이 천막 안에 우글거리다니.
사제들이 딱히 사치스러워 보이는 것도 아닌데...
‘분명 프리싱가는 스스로를 희생해서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신이라고 했지? 아티팩트 제작과 상관이 있는 신인가?’
저벅, 저벅, 저벅.
키가 작고 마른 사제 한 명이 이한에게 설명을 해주기 위해서 다가왔다.
“...?”
놀랍게도 그 사제가 발을 디딜 때마다 매우 깊숙한 발자국이 땅바닥 위에 새겨졌다. 이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 놀라셨습니까? 형제님?”
사제는 이한이 놀란 걸 깨달았는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제가 착용하고 있는 아티팩트 때문이니까요. 이건 저주받은 아티팩트입니다. 형제님. 무게를 몇 배로 늘리는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신성력을
늘려주는 효과가 있는.”
“아. 혹시 던전 탐사를 하거나 모험을 하실 때 실수로 착용하신 겁니까?”
“그건 아니고, 프리싱가 님을 기리기 위해서 착용한 겁니다.”
“??”
“프리싱가 님은 스스로를 희생해서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 만큼 우리도 희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제님. 우리가 세상의 저주 받은 아티팩트들을
하나씩 찰 때마다, 세상의 저주가 줄어드는 겁니다.”
프리싱가 교단.
영원히 세계를 짊어져야 하는 저주를 받은 신을 기리기 위해, 사제들은 스스로 저주 받은 아티팩트들을 착용했다.
이들의 신성 마법은 다른 신성 마법처럼 아티팩트에 담긴 저주를 풀지 않았다.
대신 성능과 저주를 모두 강화시키는 극단적인 효과를 갖고 있었다.
슬슬 진실을 깨달은 이한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이한은 후회했다.
‘내가 정신이 나갔군. 교장의 말을 듣다니.’
교장과의 훈훈한 대화 분위기 때문에 순간 믿어버렸는데, 교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일부러 저주 걸린 아티팩트를 차고 생활하는 교단이라니.
“...형제님께서도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사제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이한이 표정을 관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꺼림칙하게 느끼는 걸 예리하게 눈치챘다.
“아닙니다. 너무 기뻐서...”
“아닙니다. 형제님. 프리싱가 님을 위한 헌신의 길은 사실 힘들고 고된 길입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이 바뀌셨다면, 걷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이해합니다.”
사제는 쓸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한은 미안했지만 출구의 위치를 곁눈질로 확인했다. 상대가 언제라도 돌변해서 붙잡을 수 있었으니까.
“이 저주 받은 허리띠는 새 형제님이 오면 환영의 의미로 드리려고 한 건데... 자세한 설명을 들으면 다들 떠나시더군요. 하긴 당연한 일입니다. 마력을 흡수하는 저주가
붙은 허리띠라니. 어느 형제님이 좋아하겠습니까.”
“...잠깐. 그거 효과가 어떻게 됩니까?”
030 화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
사실, 저주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버프 마법과 비슷했다.
살을 빼고 싶은 사람에게 몸무게가 줄어드는 저주라면? 잘만 이용하면 오히려 좋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마력을 흡수하는 저주가 붙은 허리띠는 보통 마법사라면 ‘히익! 저리 치워!’하며 싫어할 아이템이었지만, 이한에게는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이한은...
마력이 지나칠 정도로 너무 넘쳐났던 것이다.
‘저건 진지하게 차고 다닐 만한데?’
안 그래도 지금 마력 흡수하는 쇠 팔찌 차고 있는데 허리띠 하나 더 찬다고 달라질 것 없었다.
“효과라니요?”
“그, 저주 걸린 아이템인 만큼 원래 효과가 있지 않습니까.”
마법에도 작용과 반작용이 있었다.
저주 걸린 아이템은 그 대가로 평범한 아이템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그러기라도 하지 않으면 어느 누가 저주 걸린 아이템을 굳이 착용하겠는가.
“아하. 형제님. 그걸 말하신 거였군요. 보자...”
‘아니. 저주 말고 원래 성능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이템에 걸린 저주는 기억해도 효과는 기억 못 하는 사제의 모습에 이한은 황당해했다.
본말전도 아닌가.
“투명화 마법이 걸려 있는 허리띠였군요.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지요. 중요한 건 걸려 있는 저주이니... 어쨌든 형제님. 솔직하게 말하셔도 괜찮습니다. 어떤
대답이라도 저는 받아들일 수 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얼마든지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한은 강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그 모습에 사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럴 수가!
당연히 포기하고 떠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착각한 건 사제 본인이었던 것이다.
‘부끄럽구나! 내가 진정한 신앙의 형제를 알아보지 못하고 섣부른 말이나 늘어놓다니.’
사제는 더 이상 이한이 곱게 자란 명문가의 소년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제 앞에 서있는 건 신앙의 길을 진지하게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한 명의 형제였다.
“형제님. 저는 메흐리드라고 합니다. 형제님의 이름을 말해주십시오.”
“이한. 이한 워다나즈입니다.”
‘워다나즈!’
메흐리드는 더욱 더 놀랐다.
워다나즈 가문이라니. 제국에서도 유명한 불신자(不信者) 가문 아닌가.
어쩐지 유난히 기품 있고 위엄 있게 생겼다 했더니...
“형제님의 입단을 교단에서도 기뻐할 겁니다. 자. 여기 이 프리싱가 님을 기리는 허리띠를 받으십시오.”
저주 받은 허리띠를 부르는 이름치고는 지나치게 거창하긴 했지만, 이한은 엄숙한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탁-
허리띠를 차자, 메흐리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교단에 새로 입문한 형제들은 언제나 프리싱가의 짐을 새로 짊어지는 것에 대해 힘들어했다.
아무래도 저주라는 게 처음 겪는 사람은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마력을 흡수하는 허리띠는 이제 막 입학한 학생한테는 너무 가혹할 수 있...
“이거 투명화 마법 어떻게 발동시킵니까?”
“...?!?!”
“??”
“아, 그게... ‘나는 밤에 숨노니’라고 외우면 됩니다. 풀고 싶으실 때는 ‘나는 아침에 드러난다’라고 외우십시오.”
“나는 밤에 숨노니.”
이한이 주문을 외우자, 이한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투명해졌다.
‘오...’
이한은 신기해했다.
투명화 마법이라고 해도 다 같은 투명화 마법이 아니었다.
낮은 서클의 투명화 마법은 말이 투명화 마법이지 그저 빛이 조금 투과되거나, 자세히 보면 뭔가 이상한 점이 보이는 단점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허리띠의 투명화 마법은 거의 완벽해보였다.
‘저주 걸린 아이템을 착용한 보람이 있군.’
“저, 형제님. 그... 몸은 괜찮으십니까?”
“물론 괜찮습니다. 나는 아침에 드러난다.”
이한은 주문을 풀었다.
사실 허리띠를 차기 전에는 마력이 좀 줄어들어서 다룰 수 있는 양만 적절하게 남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는데...
놀랍게도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걱정하는 거 보면 마력을 꽤 흡수하는 아이템 같긴 한데. 이렇게 영향이 없을 수가 있나?’
이 정도면 쇠 팔찌나 허리띠가 흡수하는 마력보다 회복되는 마력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욕심이 생긴 이한은 입을 열었다.
“사제님. 저는 프리싱가 님의 짐을 조금 더 짊어지고 싶습니다.”
“허어...!”
메흐리드는 이 기특한 형제의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그걸 수락할 수는 없었다.
지금 찬 허리띠만 해도 상당히 몸에 부담이 될 텐데...
“안 됩니다. 형제님. 프리싱가 님의 짐은 한 번에 짊어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조금 더 기다리십시오.”
“아닙니다! 저는 더 짊어져야겠습니다!”
“그 마음은 알지만! 형제님. 기다리셔야 합니다!”
*    *    *
결국 아티팩트를 하나 더 받아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소득이 없진 않았다.
일단 투명화 허리띠만으로도 이미 어마어마한 소득인 것이다.
이한이 이걸로 할 일은 당연히...
‘탈주 방법이 늘어났다.’
저번 탈주로 이한은 스스로의 안일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 학교는 생각보다 미친 곳이었고, 교장은 생각보다 훨씬 더 미친 놈이었다.
앞으로 이한이 하려는 시도에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몰랐다.
그 때 이 투명화 허리띠는 이한을 지켜줄 것이다.
“...그렇게 프리싱가 님의 뜻을 기리는 첫 모임이 열렸고, 이는 교단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형제님.”
메흐리드 사제는 이한에게 교단의 역사와 교단의 규칙 등을 설명해주었다.
사실 교단의 역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이한은 관심 없는 이야기를 듣는 데에는 프로였다.
-내가 저번에 골프장 다녀온 이야기를 했었나?
-정말 궁금합니다. 교수님! 빨리 이야기해주십시오!
‘사실 그렇게까지 지루하지도 않았지.’
교단의 역사와 별개로 규칙이나 신성 마법은 흥미로웠다.
그리고 놀랍게도 프리싱가 교단은 교장이 말한 대로 정말 자유로운 기풍을 갖고 있었다.
다른 교단을 같이 믿어도 OK.
금지하는 것도 없고,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살면 됐다.
...저주받은 아이템을 착용하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단점 하나만 제외하면 정말 괜찮은 교단이 맞는데, 그 단점 하나가 너무 크긴 하군.’
이한도 양심상 남한테 ‘프리싱가 교단 좋던데?’란 말을 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단점 하나가 너무 컸으니까!
게다가 교단 사제들이 사용하는 신성 마법들도 다 저런 극단적인 경향이 있으니...
메흐리드 사제는 교단의 이야기를 들은 이한이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까봐 두려워졌는지 푸짐한 선물을 건넸다.
“자. 형제님. 이걸 받으십시오. 에인로가드의 신입생들은 배를 곯는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소문이 좀 과장되었겠지만...”
‘과장 아닌데.’
이한은 사제가 선물한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플레맹 교단이 요네르한테 선물한 바구니처럼, 프리싱가 교단도 꽤 넉넉하게 바구니를 채워놓았다.
한 번 붙잡은 신도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절실함이 느껴졌다.
라즈베리 잼과 마멀레이드 잼, 땅콩 잼 같은 잼들을 담은 병들과 교단에서 구운 둥그렇고 납작한 빵들.
마법으로 뚜껑이 봉인되어 있는 제국에서도 유명한 소고기와 돼지고기 통조림.
소금과 설탕, 커피 가루와 찻잎 같은 기호식품도 있었다.
메흐리드 사제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부를 할 때 음료가 필요할 것 같아서 넣어봤습니다.”
“공부가 아니라 생존에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이한은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메흐리드 사제는 이한이 공부하다가 쉴 때 이걸 먹으라고 준비한 것 같았지만, 학교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건 쉴 때 다과로 먹는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해 방에
비축해둬야 했다.
‘교단이 꾸준히 찾아와야 여기 학생들 인권이 올라갈 텐데.’
“다음 행사는 언제입니까?”
“글쎄요. 최대한 빨리 오고 싶지만, 교장 선생님께서 허락해주셔야 하는지라...”
‘젠장.’
뒷말은 듣지 않아도 한동안 사제들이 못 올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교장 성격에 자주 초대할 리가 없을 테니...
“이것도 같이 받아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
<영원히 타오르는 불사조의 탑>의 신입생인 악마 혼혈 사제, 티질링이 이한에게 자기가 받은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한은 깜짝 놀랐다.
뭐지?
이걸 그냥 주다니?
혹시 받으면 악마와 계약이라도 하게 되는 건가?
“이걸 왜 나에게 주는 거지?”
“저는 프리싱가 님을 모시는 몸. 이런 사치는 제가 과분합니다.”
“그럴 필요 없단다. 티질링. 널 위해 준비한 거니 가져가렴.”
메흐리드 사제는 티질링도 바구니를 받아갔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티질링은 한사코 거절했다.
‘저런. <영원히 타오르는 불사조의 탑>은 정말 분위기가 다르군.’
당장 이한이 소속된 푸른 용의 탑 학생들만 해도 벌써 대가문의 품위는 잊어버리고 ‘야 먹을 거 없냐? 없어? 진짜 없냐?’하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는데...
세 탑의 학생들이 그러는 동안 불사조의 탑 학생들은 고고하게 스스로를 다스리며 인내하고 있었다.
대단하다!
하지만 대단한 건 대단한 거고, 이한은 그렇게 살 생각이 없었다.
“고맙게 받...”
“저. 형제님.”
“?”
메흐리드 사제가 이한을 데리고 구석으로 이동했다.
“혹시 티질링을 좀 챙겨주실 수 없으십니까? 형제님의 가문이 가진 명성을 생각해봤을 때, 형제님께서 챙겨주신다면 티질링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티질링은 스스로에게 너무 엄정한 면이 있어서요.”
“예? 저는 기숙사도 다른...”
“부탁드립니다.”
메흐리드 사제는 말과 함께 바구니 하나를 더 꺼내서 이한에게 찔러 넣어줬다. 확실히 뭘 좀 아는 사제였다.
“자. 하나 더 드릴 테니, 티질링에게 준 바구니는 티질링이 챙겨먹을 수 있도록 같이 먹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바구니 세 개를 든 이한은 그 유혹을 거절할 수 없었다.
밥 같이 먹어주는 것 정도야...
*    *    *
“티질링 사제라고 부르면 되나?”
“네. 원하시는 대로,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영원히 타오르는 불사조의 탑>은 분위기가 어떻지?”
이한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흰 호랑이 탑이나 검은 거북이 탑과 달리, 불사조 탑은 전혀 분위기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악마 혼혈 소녀는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말하시는 겁니까?”
“아. 그러니까 쉬는 시간에 휴게실에서 뭘 하는지...”
“각자 자기 방에서 기도를 합니다.”
티질링은 살짝 뿌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한은 질색했다.
‘음. 생각보다 훨씬 더 삭막한 곳이었군.’
만약 이한이 불사조의 탑에 들어갔다면 숨이 막혔을 것 같았다.
“저녁에도 기도하나?”
“네. 몇몇 사제들은 숲이나 산으로 가서 기도를 해야 하기에 밖으로 나가고, 실내에서 기도해도 되는 사제들은 안에서 기도합니다.”
“그렇군. ...잠깐. 저녁에 나가도 되나?”
“네. 허락을 받았습니다.”
“!”
이한은 의외의 사실에 크게 놀랐다.
‘사제들은 저녁 이후에도 돌아다닐 수 있었나?’
당연히 평일 저녁 이후에는 탑 밖으로 외출이 금지였다. 괜히 이한과 친구들이 주말을 노려서 탈출을 시도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불사조의 탑 학생들은 허가 받았었다니.
하긴 생각해보니 이한이 교장이었어도 불사조의 탑 학생들은 풀어줬을 것 같았다.
저렇게 내버려둬도 아무런 수작을 부리지 않으니...
‘그렇다면 나도 사제복만 입으면 저녁 이후에도 돌아다닐 수 있는 것 아닌가?’
이한은 눈앞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사제복만 있으면...!
“혹시 사제복 한 벌 구할 수 있나?”
“......”
티질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한을 쳐다보았다.
031 화
‘내 사악한 속마음이 들킨 것인가?’
이한은 순간 걱정했지만, 다행히 들킨 건 아니었다.
“사제복을 입는다고 하더라도 신앙이 깊어지거나 저주가 약해지지는 않습니다만...”
티질링은 이한이 다른 오해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염려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사제복을 입으면 평소 편하고 부드러운 옷을 입고 게으르게 지내던 나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 그 옷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티질링은 이한의 옷을 가리켰다.
해골 교장은 학생들에게 거칠고 투박한 교복(사실 이걸 교복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만을 줬기에, 이미 편하고 부드러운 옷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이한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야. 사제복이 필요해. 프리싱가 님의 뜻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
티질링은 고민하더니 뜻을 굽혔다. 신실한 티질링에게 신앙을 위해서라는 이유는 안 들어줄 수가 없는 이유였다.
“다음에 만날 때 구해다드리겠습니다.”
“그래. 참. 사제님한테 부탁을 받았는데, 식사를 좀 챙겨달라고.”
“괜찮습니다.”
티질링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는 지금 식사로도 만족하고 있거든요.”
상대가 거절한다고 바로 ‘알겠습니다’하고 물러난다면 그건 대학원생의 자질이 없었다.
교수가 까라고 하면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는 법.
물론 메흐리드 사제가 교수는 아니었지만...
“하지만 사제님께서 걱정하고 있다고. 뭐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 걱정하실 걸. 이렇게 하면 어때? 같이 식사를 하는 거야. 꼭 억지로 먹지 않아도 돼. 같이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사제님의 걱정은 좀 덜어지지 않겠어?”
이한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지, 고민하던 티질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 메흐리드 사제가 걱정해준 게 미안했던 것이다.
“좋은 생각 같습니다.”
“그렇지?”
이한은 씩 웃었다.
‘같이 식사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많이 먹게 만들어줄 수 있지.’
교단에서 기도만 하면서 자라 온 소녀 한 명 마음대로 다루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그 웃음에 뭔가 수상함을 느꼈는지 티질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주말이 끝나고 새로운 한 주가 찾아왔다.
입학하고 나서 살벌했던 첫 주를 견뎌낸 학생들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성숙해져 있었다.
-훗. 너희는 에인로가드가 힘드냐? 나는 이제 내 집 같다.
-일주일 정도 지나보니까 할 만한데? 마법 수업 이 정도면 충분히 따라갈듯.
주말에 잠깐 휴식을 취한 학생들에게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샘솟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인로가드는 그런 학생들에게 가차 없는 본색을 드러냈다.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
-여기 정육면체의 한 꼭짓점에 젊은 마법사가 있다. 젊은 마법사는 자신이 있는 꼭짓점에서 가장 멀리 있는 꼭짓점까지 마법진을 연결하려고 한다. 이 때 젊은 마법사가
연결할 수 있는 최단거리를 계산하라.
-...교, 교수님? 이, 이건 마법이 아니지 않습니...
-멍청하고 어리석은 질문 하지 마라. 감각에 의존하고 지팡이만 휘두를 줄 아는 마법사는 절대로 대성할 수 없다. 높은 서클의 마법으로 가면 갈수록 복잡한 연산과
법칙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기하학은 마법의 핵심 중 하나다. 기하학을 알지 못하는 자는 마법진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산술도 마법의 핵심이다.
마력을 어떻게 배분해야 할지도 모르는 자가 어떻게 마법진을 그리겠는가?
-......
-...이... 이거...
<기초 제국 언어와 논리>.
-젊은 마법사들에게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는, 자기보다 더 지적으로 고등한 존재에게 사기 계약을 당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계약의 위험성과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중의적인 의미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자. 오늘은 이 문제를 풀어볼 것이다. 여기 술에 취한 멍청한 마법사가 있다. 이 마법사는 술에 취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짓을 하는데, 어느 날 이 마법사는 술에 취한 채로 악마를 소환해서 불리한 계약을 맺어버렸다. 과연 이 마법사는 술이 깨어났을 때 계약을 무효화할 수 있는가... 지금
자는 놈들은 자신의 영혼이 아깝지도 않다는 것인가? 일어나라!
-크아악! 저 안 잤습니다!
첫 번째 주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사나운 필수 과목들을 들은 학생들은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얼굴이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나는... 마법이 적성에 맞지 않는 걸지도...”
“지팡이 좀 휘두른다고 마법을 알았다고 착각하다니... 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쓰레기야...”
학생들은 완전히 자신감이 부서진 채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몇몇 뛰어난 이들은 있었다.
“기하학과 산술은 제국 통치와 운영에 있어서 기본일 뿐.”
제국 재상과 제국 재무관 자리를 대대로 맡아 온 달카드 가문의 아산.
“......”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황족들 중에서 특출난 재능으로 이름이 높은 황녀 아덴아르트.
“어떻게 풀었냐고? 야. 지금 그게 중요하냐? 나갈 방법부터 찾아야지.”
제국 최고의 명문가 자제들이 모인 푸른 용의 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이 셋은 숨 막히는 필수 과목의 습격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해치운 수재들이었다.
‘살면서 대학원 간 게 쓸모 있다고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공부를 그렇게 해서 뭐할 거냐’라고 말했었지만, 놀랍게도 공부는 쓸모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큭큭큭. 이한. 저기 흰 호랑이 탑 놈들을 봐. 꼴이 엉망이야.”
‘너도 못 풀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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