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rimunhwa 22 08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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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R I MU N H WA

202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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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long Culture: Making a Name for Oneself


Success might sound rather grand but achieving a goal is like a mirror that successful people in the same field
can reflect on. At times, one can feel overburdened with responsibility, but perhaps the goal is to gain social
acknowledgment to raise one’s value and live a more enriching life.
from “Generational Relatability,” p. 22
·

?
각대는 백관이 관복에 두르던 띠를 말한다. 조선 시대에 과거급제 후 벼슬에 오르는 것은 최고의 출세이
자 가문의 영광이었다. 문관과 무관이 궁궐에 출입할 때, 갖춰 입는 단령團領, 둥근 깃의 외투의 장신구로 사용
된 각대는 조선 시대에 더욱 발달해 착용자의 신분과 계급에 따라 장식이 다양해졌다. 조선 말기 각대를

Gakdae
보면 가죽 바탕에 비단으로 싸고 양 끝은 장방형의 띠돈大銙과 걸이쇠鉸具를 붙여 띠의 앞 중심에서 결속
할 수 있도록 했다. 각대는 문무백관의 사회적 신분의 표상으로 그에 맞는 위엄을 나타내는 기능을 했던
것이다. 현대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이지만, 한편으론 지금의 우리 역시 설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
단히 노력하고 경쟁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측면도 있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극대화되어가는 오늘
을 사는 우리에게 현대판 각대보다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찾아가는 용기와 도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심벌’ 같기도 하다.
사진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Gakdae, which literally means “square belt” in Korean, is what government officials wore around their official
uniforms. During the Joseon Dynasty, passing the civil service exam gwageo and getting appointed as an of-
ficial mark the highest personal success and honor for family in society. Gakdae was part of an ornament for
an official robe with the round collar dallyeong, which was worn by civil and military officials when they en-
tered the palace. The design evolved in an even more elaborate fashion in the Joseon period, and the decora-
tions varied according to the social status and rank of the wearer. In the late Joseon period, gakdae was made
of leather and covered with silk, and the rectangular piece ttidon and clasp georisoe were attached at each tip
to open and close in the front center. The belt was an emblem of the wearing official’s social status, which in
turn represented his dignity. Though this custom seems vastly distant from contemporary life, people today
show a similar aspect in making ceaseless efforts and entering competitions to achieve their goals. It may also
serve as a “symbol” of the need for the courage to find one’s own path in a world of diverse values that coexist
and grow rather than a modern-day gakdae.
Image courtesy of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L⁄
4

28
가치를 묻다
쓰여 있지 않은 하나의 수 | 백규석

6 전통의 경향 TRENDS OF TRADITION


I48 명예를 부르는 건물의 향 | 조인철
The Orientation of a Building
Which Brings HonorTogetherness | Zho In-Choul
;
12 명작 이야기 THE STORY BEHIND THE MASTERPIECE
영광의 꽃, 어사화 | 최순권
Eosahwa: Flowers of Honor | Choi Soon Guen

18 문화 속으로
경쟁이 기본값인 사회에서 스스로를 추앙하라, 28 
우리 고미술을 만나다
나의 해방 일지 | 장윤미 MEETING OUR OWN ANCIENT ART

규장각도 | 장진성
22 세대공감
‘개천에서 용 난다’라 쓰고 ‘개성에서 용 난다’로 읽다
Gyujang Pavilion | Chang Chinsung

| 홍효주, 박신영, 김도균


30 
한국문화원연합회 60주년 특별기고
THE FKCC’S 60TH ANNIVERSARY:
SPECIAL CONTRIBUTION

‘새로운 60년, 위대한 출발’을 위한 제언 | 박광무


A New 60-year Period, a Great Start | Park Kwang Moo

34 
로컬의 새로움 THE NEW LOCAL
우리 안의 보물, 아기장수 | 이동준
Agijangsu: Treasure inside Us | Dong-Joun Rhee

6
12

U R I MU N HWA
A KOREAN LOCAL CULTURE MONTHLY MAGAZINE 월간 우리문화 vol. 310 | 202 2 08

ISSN 1599-4236
* 《우리문화》에 대한 의견은 편집부(young@kccf.or.kr)로 보내주세요.
* 게재된 기사 및 이미지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 책자는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아 제작합니다.
* 이 책은 환경을 위해 FSC 인증을 받은 종이와 친환경 펄프로 생산한 종이를
《우리문화》 웹진 사용하였으며 콩기름 잉크로 인쇄하였습니다.
urimunhwa.or.kr * 월간 《우리문화》는 웹진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urimunhwa.or.kr)
44
76
40 그곳에 가면 62 
시와 사진 한 모금
물의 도시, 제천 | 편집팀 구릉의 집 | 심재휘

44 문화원 탐방 64 방방곡곡 유랑기


L 항일 의병의 역사를 따라 제천을 걷다 | 강진우 희미한 유년을 품은 무섬마을 | 박현택

52 곁엣사람 70 
사진으로 역사를 보다
영화와 음악이 만나는 제천의 재발견 | 이필 여성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기록한
주미조선공사관 | 박주석
58 음식 문화 확대경
제천의 한방 약선음식 | 편집팀 74 
해외 연수기
다시 또 가고 싶은 여행 | 권선옥

76 
비전 선포식 현장 스케치
대한민국 문화플랫폼 한국문화원연합회
60주년 기념행사의 첫 출발을 알리다

78

52
문화소식
문화소식 및 편집후기

발행인 김태웅 발행처 한국문화원연합회


발행일 2022년 8월 1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9(도화동, 성우빌딩) 12층
편집고문 권용태 김종 전화 02-704-4611 | 팩스 02-704-2377
편집주간 한춘섭 홈페이지 www.kccf.or.kr
편집위원 곽효환 김두섭 유경숙 장진성 지두환 등록일 1984년 7월 12일 | 등록번호 마포,라00557
편집담당 신민영 기획·디자인·제작 (주)에이지커뮤니케이션즈 02-763-8600
4
일 생 문 화 ︒가 치 를 묻 다

쓰여 있지 않은 하나의 수

자신만의 비행을 한 갈매기 조나단


국내에선 주로 청소년들이 읽게 되는 책 중 하나가 《갈매
기의 꿈》이다. 원제는 단지 《바다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인데
‘청운靑雲의 꿈’을 품기에 적절한 시기인 청소년들에게 어울리는
제목이기 때문일까? 여하튼 한국어판 번역은 그렇다. 하지만 청
소년 권장 도서라는 말이 무색하게 내가 그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서른을 앞둔 첫 배낭 여행지에서였다. 글의 분량이 많지 않고, 갈
매기들의 고혹적인 비행 장면을 찍은 흑백사진이 함께 실려 있


던 손바닥 크기의 페이퍼백이었다. 소설의 첫 장면엔 이렇게 적
혀 있었다.

우리가 스스로 본성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갈매기들은 해변을 떠나 먹을 것을 향해 갔다가


어쩌면 ‘관습’에 의해 정해진 한계일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오는 방법 즉 비행飛行에 관한 가장 단순한 사실, 그
21세기는 인간 지능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상을 배우려 애쓰지 않는다. 그런 갈매기들에게 중요한 것
스스로 학습하는 기계와는 물론 은 비행이 아니라 먹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갈매기만은 그렇지
더 많은 새로움과 공존하고 않았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나는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것을 너무도 사랑했다.”
5

목표로 한 성공을 위해
비행의 완성을 경멸하는
갈매기들은
아무 데도 갈 수 없지만,
비행의 완성을 위해
목표로 한 성공을 무시하는
갈매기들은 당장이라도
어디로든 갈 수 있어.

당시의 나를 끌어들이기에 충분할 만큼 힘 있는 문장이었 21세기는 새로운 공존의 시간


다. 날아오르는 것 자체를 사랑했던 갈매기 조나단은 가족으로 갈매기 무리로부터 추방된 후 만나게 된 스승 갈매기 치앙
부터 따돌림당하고, 갈매기 무리로부터도 추방당한다. 하지만 에게 조나단은 어떻게 하면 자신도 그렇게 날 수 있는지 물었다.
결국 그 어떤 갈매기도 이루지 못했던 눈부신 비행을 이룬다. 스승이 전해준 비결은 다소 진부하다 싶을 만큼 단순하다. 나의
1970년대 초반에 출판된 이 단순하고도 기묘한 이야기에 전 세 진정한 본성이 단 하나의 ‘쓰여 있지 않은 수an unwritten number’처
계의 수많은 젊은이가 매혹되었다. 20세기는 그랬던 시절인 것 럼, 이미 완벽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었다. 치앙은 또
같다. 누가 무엇이라 손가락질하건,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이렇게 답한다. “목표로 한 성공을 위해 비행의 완성을 경멸하
향해 날아오르는 것. 바야흐로 ‘뉴 에이지’의 시대였다. 는 갈매기들은 아무 데도 갈 수 없지만, 비행의 완성을 위해 목
표로 한 성공을 무시하는 갈매기들은 당장이라도 어디로든 갈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78번째 수’ 수 있어.”
2016년 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바둑 대결이 있었
다.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Google DeepMind Challenge Match’라는 우리가 스스로 본성nature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어쩌면 ‘관
긴 명칭을 가진 이 ‘세기의 대결’은 대부분의 바둑 전문가들이 십 습’에 의해 정해진 한계일지도 모른다. 20세기가 그 한계 너머로
년 동안 바둑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인간 기사가 당연 나아갔던 조나단의 이야기에 열광했던 시대라면, 21세기는 인간
히 승리할 것이라 낙관했던 예측을 깼다. 결과는 기계의 압도적 지능의 타고난 한계와 본성의 영역을 뛰어넘어 스스로 학습해
인 승리였다. 가는 기계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대다. 비행 그
전 세계인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5번의 대국 중 유일한 승리 자체를 너무도 사랑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갈매기 조나단
를 가져왔던 4번째의 대국을 마친 후 바둑기사는 다음과 같이 말 과 오로지 그렇게 둘 수밖에 없었던 프로 바둑 기사의 그 절대적
했다. “지금 만일 제가 3대 1로 앞서는 상황에서 이 한 판을 졌다 인 78번째의 한 수.
면 마음이 아팠겠지만, 오히려 3패를 당하고 1승을 하니까 이렇 두 장면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예측하기 힘든 복잡다단한
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이어 그는 그 대국을 승리로 이끌었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내면에 이미 ‘쓰여 있지 않은 하나의 수’
‘78번째 수數’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 수는 많은 전문가 중 가 있다는 것이다. 그건 끊임없이 나를 시험하고 발견하는 과정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신의 한 수’라는 찬사를 받은 터였다. “그 에서 만날 수 있는 그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가능성일 수도 있지
수를 둔 이유는 그 장면에서 오직 그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않을까?
칭찬을 받아서 오히려 어리둥절합니다.” 글 백규석 광주교육대학교 융합예술학 강사
6

명 예 를 부르 는
일 생 문 화 ︒전 통 의 경 향

향 건물의


Orientation

향向은 바라보는 방위다.


건물이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있느냐는 예부터
풍수적으로 중요한 요소였다.
집 앞에 산봉우리가 있는지,
그 산봉우리의 모양은 어떠한지에 따라
부자나 학자, 미인이 난다고 믿은 것도 그런 이유다.
정확한 방위를 맞추기 위해서 사용하는
풍수 용도의 나침반에는 12방위가 표시되어 있다.
12가지 동물이 상징하는 바에 따라
감응하는 의미가 모두 달랐다.
7

The Orientation TRENDS OF TRADITION

of a Building Which Brings Honor


Orientation is the direction which one faces. From long ago, the orientation of a building—the direction which
it faces—has been an important element of feng shui, an ancient Chinese system of geomancy. Depending on
whether or not there is a mountain peak in front of the house, and how the mountain peak is shaped, people
believed that a wealthy person, a renowned scholar, or a beautiful woman would be born in that house. There
are 12 directions marked on a compass specifically designed for use with feng shui. Based on what the 12 animals
symbolize, the significance to which fortune or luck it corresponds to also differs.
8

There are a number of important conditions that must


be taken into consideration when building a house. In
terms of feng shui, orientation is key. In other words,
one’s fortune can be determined depending on which
direction the building faces. When one tries to deter-
mine the orientation of a building in traditional soci-
ety, choosing which mountain peak among a number
of mountain peaks that are visible from the house to set
as a reference point is a serious matter. It was believed
that if the mountain peak was one with a flat top—as
if things had been stacked up—a rich person would be
born in that house. On the other hand, a mountain with
sharp peak in front of the house can bring an eminent-
ly honorable scholar into the world. And if the peak
was relatively low and resembled a beautiful eyebrow, a
beautiful woman would be born in that house.
When deciding the orientation of a structure, a
rough direction would be determined based on the
mountain peak in front of the building, but then a com-
집을 지을 때, 고려해야 할 여러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다. pass would be employed to determine a more accu-
그중에서 풍수적으로 중요시하는 것 중의 하나는 향向, 바라보는 rate direction. The compass that was used in feng shui

방위이다. 즉, 건물이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길흉을 판단


was called a paecheol (a wearable geomantic compass),
on which tiny characters were inscribed onto sever-
한다는 것이다. 전통 시대에 집의 향을 정할 때는 전면으로 보이 al layers of concentric circles. Each layer has a differ-
는 여러 산봉우리 중에서 어떤 산봉우리를 기준으로 할 것인가 ent use, while the layer with 12 directions or main com-

에 대하여 심사숙고하였던 것이다. 집 앞에, 위가 평평하여 마치


pass points are used in determining the orientation of a
house to attain honor. Twelve compass points are allo-
물건을 쌓아놓은 듯한 모양의 산봉우리가 있으면 부자가 나고, cated to the Twelve Earthly Branches. Earthly Branch-
뾰족한 산봉우리가 있으면 명예가 높은 학자가 나고, 예쁜 눈썹 es symbolize 12 animals, which refer to the rat (ja), ox

같이 야트막한 봉우리가 있으면 미인이 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chuk), tiger (in), rabbit (myo), dragon (jin), snake (sa),
horse (o), goat (mi), monkey (sin), rooster (yu), dog (sul),
건물의 향을 정할 때, 앞의 산봉우리를 보고 대략의 방위를 정할 and pig (hae).
수도 있지만, 더욱 정확한 방위로 맞추기 위해서 나침반을 사용
하기도 하였다. 풍수 용도로 사용하는 나침반을 패철佩鐵, 차고 다니
Why most palaces are south-facing
In East Asia, the Twelve Earthly Branches were used as
는 지남철이라고 하는데, 여러 층의 동심원 속에 작은 글씨들이 빽 markers of time and space in lieu of a number. Based
빽하게 새겨져 있다. 나침반의 각 층은 각기 쓸모가 정해져 있는 on a 24-hour time division, the hours of the rat refer to

데, 명예를 얻기 위한 집의 향을 결정할 때는 주로 12방위로 표시


hours between 23 p.m. the previous night and 1 a.m. the
following morning; and based on a 12-hour division, it
된 층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12방위는 지지地支로 이루어져 있다. refers to midnight, while the hour of the horse would re-
여기서 지지란 12가지 동물을 상징하는데, 자子-쥐, 축丑-소, 인 fer to noon. In terms of direction, the direction of the rat
寅-호랑이, 묘卯-토끼, 진辰-용, 사巳-뱀, 오午-말, 미未-양, 신申-
is due north, while that of the horse is due south.
The 12 directions were divided into 3, each of which
원숭이, 유酉-닭, 술戌-개, 해亥-돼지를 말한다.

궁궐이 대체로 남향인 이유


위 풍수 용도로 사용하는
동양에서 12지지는 시간과 공간의 표시로 숫자 대신 사용 나침반을 일컫는 패철
되었다. 24시간을 기준으로 자시子時라고 하면 전날 23시에서 다 ©국립민속박물관

음 날 새벽 1시까지를 말하고, 12시간 단위로 본다면 자정子正, 밤 The paecheol is a portable


geomantic compass that was
12시을 말한다. 반면, 오시午時는 정오正午, 낮 12시가 되는 것이다. used for feng shui purpose.

한편, 자子 방위는 정북, 오午 방위는 정남이 되는 것이다.


Image courtesy of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9

signifies fortune possessing different characteristics 12개의 방위를 삼등분하여 각기 다른 성격의 감응感應, 運, lucky이
있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그것이 손孫, 자식운, 귀貴, 명예운,
such as son (offspring), gwi (honor), and bu (wealth).
Due south is the direction for gwi, through which one
may attain honor if one’s house faces due south. Hence, 부富, 재물운이다. 정남향은 귀貴의 방위로 집을 정남향으로 정하면
the palace in which the king—the most honorable being 명예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명예로운 분
인 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향은 대체로 남향으로 하는 것이다. 12
in the world—resides, mainly faces south. The Twelve
Earthly Branches circulate temporally and spatially, un-
dergoing a process of 12 phases, namely starting feebly, 지지는 시·공간적으로 순환하는데, 미약하게 시작하여 왕성하
growing actively, and vanishing gradually. Among this 게 성장하고 서서히 소멸해가는 12단계와 과정을 반복한다. 이
와 같은 12단계의 과정 중에서 4번째 생生, 기운이 올라옴의 단계와
process of 12 phases, in feng shui an emphasis is placed
on the 4th phase of birth (the rise of energy), the 8th
phase of flourishment (the activation of energy), and the 8번째 왕旺, 기운이 왕성함의 단계, 12번째의 묘墓, 기운이 저장됨의 단계
12th phase of the tomb (the storing of energy). 를 풍수에서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S
E W
N

도성도(都城圖)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있는 조선 시대 18세기 말에 제작된 한양 지도다.


2008년 4월 2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560호로 지정되었다. 도봉산과 북한산을 배경으로 하면서 한양의 빼어난 자연환경을 산수화처럼 그렸다. 지도는
남쪽을 바라보며 정사(政事)를 살피는 국왕의 시각에 맞추어 남쪽이 상단으로, 북쪽이 지도 하단으로 배치되어 있다. 풍부한 지명을 기록하여 주위의 산세와
대비되도록 했고 여백에는 행정구역, 도성의 크기와 도로 상황 등을 기록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Doseongdo (Map of the Capital) is a map of Hanyang (the old name for Seoul) produced in the late 18th century when Korea was ruled by the Joseon Dynasty. Now housed at the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this relic was designated Treasure No. 1560 on April 22, 2008. Against the backdrop of the mountains Dobongsan
and Bukhansan, the remarkable natural environment of Hanyang is depicted like a landscape painting. The map was designed to reflect the perspective of the king, who oversaw
national affairs facing south. Hence, south is placed at the top of the map and north on the bottom. Place names are inscribed in full detail to form a contrast with the features of the
mountains surrounding them, and the administrative districts, size of the capital, and road conditions are recorded in the margins.
Image courtesy of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10

△ 손(孫, 자식운, ○), 귀(貴, 명예운, △),


貴 □ 부(富, 재물운, □)의 12방위 구분
○ 12 富

11 1 Twelve compass points allocated to
son (offspring, ○), gwi (honor, △),
and bu (wealth, □)


亥 △ □

10

2





9

3




□ △
8 未 巳

4

7 5
6

집의 생향과 왕향,
묘향이 갖는 손귀부
12지지 중에서 생生의 방위에 해당하는 것은 인寅-호랑이,
신申-원숭이, 사巳-뱀, 해亥-돼지의 방위가 되고, 자식운이나 건
강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왕旺의 방위에 해당하는 것은 자子
-쥐, 오午-말, 묘卯-토끼, 유酉-닭의 방위가 되고, 명예운이나 학  ffspring, honor, and wealth
O
업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묘墓의 방위에 해당하는 것은 진辰 determined by the birth orientation,
-용, 술戌-개, 축丑-소, 미未-양의 방위가 되고, 재물운에 해당하
flourishment orientation, and tomb
orientation
는 것으로 본다. Among the Twelve Earthly Branches, ones affiliated
다시 말하면, 집을 생향生向으로 하면 자식운이나 건강운이 좋게 with the direction of birth are the tiger (in), monkey

되고, 왕향旺向으로 하면 명예운이나 학업운이 좋아지며, 묘향墓


(sin), snake (sa), and pig (hae), which fall under for-
tune related to offspring or health. Ones affiliated with
向으로 하면 재물운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즉, 인寅-호랑이 방위 prosperity are the rat (ja), horse (o), rabbit (myo), and
로 집의 향을 정하면, 건강운이 좋아지고 자식을 갖게 된다는 것 rooster (yu), which fall under fortune related to honor

이다. 풍수에서 사용하는 패철이 없으면 인-호랑이 방위가 어


or study. Ones affiliated with the tomb are the dragon
(jin), dog (sul), ox (chuk), and goat (mi), which fall un-
느 방위인지를 쉽게 알 수 없다. 그러나 패철을 가지고 있는 경우 der fortune related to wealth and business.
가 드물기 때문에 시계를 이용하여 방위를 가늠해야 한다. 자- In other words, if a house faces the direction of

쥐의 방위를 북쪽의 기준으로 삼고, ‘인-호랑이’의 방위를 보


birth, fortune related to offspring or health improves;
if it faces that of flourishment, fortune related to honor
면 ‘2시’의 방위가 된다. 2시 방향으로 집의 향을 정하면 건강 or knowledge improves; and if it faces that of the tomb,
운, 자식운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2시-인, 5시-사, fortune related to wealth improves. Therefore, if the ori-

8시-신, 11시-해로 집의 향을 정하면 건강운, 자식운을 위한 것


entation of the house is established in the direction of
the tiger (in), the household’s health will improve and
이 되고, 12시-자, 3시-묘, 6시-오, 9시-유로 집의 향을 정하면 a child will be born there. Unless one possesses a pae-
명예운, 학업운을 위한 것이 되며, 1시-축, 4시-진, 7시-미, 10 cheol, the geomantic compass used in feng shui, it is dif-

시-술로 집의 향을 정하면 재물운을 위한 것이 된다.


ficult to determine which direction is that of the tiger.
However, since it was rare for people to have access to a
어떤 욕심쟁이가 있어서 손귀부의 3가지를 모두 원한다고 할 때 geomantic compass, people usually used clocks to de-
는 어떻게 하면 될까? 이런 경우 집터에 대해서는 자식운을 좋게 termine the direction. Setting the direction of the rat as

하는 생향生向, △을 하고, 묘지에 대해서는 명예운을 좋게 하는 왕


due north, the direction of the tiger would be at 2 o’clock.
If the house faces the direction of 2 o’clock, fortune per-
향旺向, ○을 하고, 창고 건물에 대해서는 재물운을 좋게 하는 묘향 taining to health and offspring would improve. Based
墓向, □을 하면 되는 것이다. on this logic, the direction of either 2, 5, 8, or 11 o’clock
11

would serve to improve fortune related to health and 손귀부방위법 일람표

향 표시 시계상 방향 비고
offspring; that of either 12, 3, 6, or 9 would improve for-
tune related to honor and knowledge; and that of either
자식운, 건강운 인신사해 ○ 2,8,5,11 생/손
1, 4, 7, or 10 would improve fortune related to wealth.
명예운, 학업운 자오묘유 △ 12,6,3,9 왕/귀

재물운, 사업운 진술축미 □ 4,10,1,7 묘/부


What if someone is covetous and wants to have all
three, namely offspring (son), honor (gwi), and wealth
(bu)? In that case, one can have one’s house face the di-
rection of birth (saenghyang), which improves the for-
List of directions determining the fortune for son (offspring), gwi (honor), and bu (wealth)
tune for offspring, have one’s tomb face the direction
of flourishment (wanghyang), which improves the for- Orientation Symbol Clock position Note

tune for honor, and one’s storehouse face the direction Fortune related to offspring, health In, sin, sa, hae ○ 2, 8, 5, 11 Birth/son
of the tomb (myohyang), which would improve the for-
Fortune related to honor, knowledge Ja, o, myo, yu △ 12, 6, 3, 9 Flourishment/gwi
tune for wealth.
Fortune related to wealth, business Jin, sul, chuk, mi □ 4, 10, 1, 7 Tomb/bu
 odern application of feng shui
M
orientation method
If one were to apply this feng shui orientation meth-
od in a contemporary context, one may set the orienta-
tion based on one’s usage, depending on one’s need for
the fortune for offspring, honor, or wealth. For facilities
that require fortune for health, such as exercise or med-
알고 보면 쓸모가 많은
풍수향법의 현대적 적용
ical treatment facilities, they can choose to face the di-
rection of birth. For government offices or education
facilities, which would benefit from fortune pertain- 이러한 풍수향법을 현대적으로 적용한다면, 용도별로 손
귀부가 요구되는 여부를 가려서 향을 정하면 될 것이다. 건강운
ing to honor, knowledge, or advancement, one could
choose the direction of flourishment. As for facilities to
be used for companies, one could choose the direction 이 필요한 운동, 치료 용도의 시설에 대해서는 생향을 하고, 명예
of the tomb. In addition, each department in the com- 운이나 출세운이 필요한 관청 용도, 교육 용도의 시설에 대해서
는 왕향을 하고, 재물운이 필요한 기업 용도의 시설에 대해서는
pany can also apply this orientation method. Take, for
example, the placing of the production, sales, and ac-
counting departments. Since the production depart- 묘향으로 향을 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 외 특정 회사 내에서도 각
ment should produce products that have no defects, it 부서의 업무 성격에 따라 손귀부의 방위법을 적용할 수 있다. 만
일 생산부, 영업부, 경리부가 있다고 한다면, 생산부는 하자 없는
would be beneficial to have it face the direction of birth.
For the sales department to actively conduct sales, it
should face the direction of flourishment. And as for 제품을 만들어내야 하니까 생향, 영업부는 왕성하게 판매를 해
accounting department, its office should face the direc- 야 하니까 왕향, 경리부는 재물을 모을 수 있어야 하니까 사무실
의 향을 묘향으로 정하면 될 것이다.
tion of the tomb, so that wealth could be accumulated.
On the other hand, the orientation method of off-
spring, honor, and wealth may also be applied in de- 한편, 손귀부의 방위법은 침대나 책상의 방위를 정하는 것에도
termining the direction of one’s bed or desk. If a couple 적용할 수 있다. 자식을 갖고 싶다면, 건강운이나 자식운을 좋게
하는 생향生向, △으로 침대를 향하게 하고 부부가 서로를 존중하
wants to have a baby, they can arrange their bed to face
the direction of birth and also make sure to respect each
other. If one wants to do well in any number of exams, 면 될 것이다. 각종 시험에 성과를 내고 싶다면, 학업운을 좋게
one may arrange one’s desk to face the direction of flour- 하는 왕향旺向, ○으로 책상을 향하게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
는 것이다. 명예운이나 출세운을 좋게 하려면 마찬가지로 왕향旺
ishment to improve one’s fortune for knowledge, while
also studying hard. If a household or company wants to
向, ○으로 책상을 놓고 근무하면 될 것이다. 집안이나 회사의 재
accumulate wealth, they should have their safe face the
direction of the tomb, and earn money and while saving 물이 늘어나기를 바란다면 묘향墓向, □으로 금고문을 바라보게
해놓고, 열심히 벌고 근검절약의 생활을 하면 될 것이다.
and being thrifty.

글 조인철 원광디지털대학교 동양학과 교수


Written by Zho In-Choul,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Oriental
Science at Wonkwang Digital University
Illustrated by Kim Jini 일러스트 김진이
12
일 생 문 화 ︒명 작 이 야 기

영 광 의 꽃 、어 사 화

출세는 군자가 세상에 나가


자기의 뜻을 펼치고
이름을 널리 떨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유명하게 된 것을 빗대어
‘출세했다’라고
다소 부정적으로 말하곤 한다.
조선 시대에는 출세의 주 통로가
과거科擧여서, 율곡 이이李珥도
과거가 아니면 출세하여
도道를 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시대 출세의 관문이자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던
과거 급제와 임금이 내려준
어사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임금이 하사한
종이꽃이라 하여 붙여진 ‘어사화’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Eosahwa,” which obtained its name


from the paper flower that was granted
by the king.
Courtesy of National Museum of Korea
13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THE STORY BEHIND THE MASTERPIECE


시험관과 선배, 친척 등을 방문하던
삼일유가(三日遊街)장면.
〈사람의 일생〉 중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Scene of “three-day visit around town”


during which successful candidates of
the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paid visits to examiners, seniors, and
relatives over the course of three days.
From the Painting of Lifetime.
Courtesy of National Museum of Korea

Eosahwa:
Flowers of Honor

In traditional East Asian society, chulse,


which literally translates as “going out into
the world” though is more commonly
translated as “success,” signified the superior
person (junzi) spreading one’s will and
making something of oneself. However,
in a contemporary context it may have
the somewhat negative connotation of 출세의 관문, 과거科擧
one rising to high status or becoming 조선 시대는 엄격한 신분 사회였지만, 법적으로는 과거科擧
famous socially. In the Joseon Dynasty, the 를 통해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사회였다. 음직蔭職이라 하여 조상의
primary channel of success was the gwageo 공功으로 벼슬에 오르기는 했지만, 과거를 통해 벼슬에 오르는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and even 것을 가장 정상적인 출세로 여겼다. 더구나 학문을 숭상하는 유
a renowned Confucian scholar such as
교 사회에서 문관으로서의 출세는 개인의 사회적 성공이자, 가
Yi I (1536–1584), whose pen name was
문의 영광이었다. 이에 조선 시대 사람들의 이상적인 삶과 일생
Yulgok, said that without the government
을 그린 〈평생도〉에도 과거 급제에서부터 정1품 영의정領議政까
service examination, one would not be
지 올라 치사致仕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able to perform the Way. In regard to
과거를 통한 문관으로의 진출은 한편으로는 권력 및 부를 획득
this, let us take a look at the passing of the
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부모에게 효도하
examination, which was the gateway to
success and honor for the family, as well 며 가문을 빛낼 수 있는 최고의 길이었다. 그래서 과거 합격은 당

as eosahwa, which was the flower awarded 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이에 대한 열망이 클 수밖에 없

by the king to those selected in the state 었다. 이런 이유로 음직 출신의 고위직 관리가 늦은 나이에도 불
examination. 구하고 문과 시험에 도전하기도 하였다.
14

Gateway to success, gwageo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The Joseon Dynasty was a strict, class-oriented soci-
ety, but legally, one was able to ascend the social lad-
der by passing the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There were also ways to be appointed to government
office through the merits of one’s ancestors, i.e., the
protected appointment system for hereditary privi-
lege, which was called eumjik. However, taking pub-
lic office by passing the examination was deemed the
most respectable way of achieving success. Moreover,
in Confucian society, which respected knowledge and
learning, going out into the world as a civil official was
both an indication of social success on a personal lev-
el and a great honor for one’s family. Thus, in a pyeong-
saengdo (a painting of a person’s life and career) whose
frequent subject matter is the ideal life of an individu-
al in the Joseon period, it depicted the process of a per-
son passing the examination, rising to the position of
senior first rank official, i.e., chief state councilor (yeo-
ngjujeong), and eventually resigning from the position.
Becoming a civil official through the examina-
tion was, on the one hand, necessary to obtaining
and maintaining power and wealth, and on the oth-
er, the best way of observing filial piety for one’s par-
ents and bringing honor to one’s family. Thus passing
the examination was an object of envy and admira-
tion, an aspiration for people at that time. Officials
who reached a high-ranking position through eumjik,
the aforementioned appointment system for heredi-
tary privilege, would take the state exam for civil offi-
cials out of a sense of inferiority.
However, even for those who passed the high-lev-
el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daegwa) in the
civil division, it required at least 15 to 20 years of
learning. Also, the gwageo was usually held once ev-
ery 3 years, and ultimately only 33 candidates were
selected, which made it an extremely difficult and
challenging process. Since it was the gateway to suc-
cess, it was likened to a Dragon Gate, where a carp
that swam against a rough current and leapt through
the gate could thereby transform into a dragon.
Hence, in places where people were studying to pre-
pare for the exam, a painting of a leaping carp, or that

‘등용문’의 꿈을 꾸고 과거 급제를 준비했던 곳에


걸어두었던 〈약리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Painting of Leaping Carp, which was hung in places where


people were preparing for the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with dreams of passing through the “Dragon Gate.”
Courtesy of National Museum of Korea
15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원소(園所)가 있는


수원으로 행차하는 장면을 그린
〈화성원행의궤도-급제창방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Painting depicting the scene of King Jeongjo going on a


royal procession to Suwon where the grave of his father,
Crown Prince Sado, is located. Uigwe of Royal Procession
to Suwon Hwaseong Fortress: Announcement Ceremony of
Successful Candidates.
Courtesy of National Museum of Korea

of carp and lotus, were hung on the walls for them to


dream of passing the exam.
When the candidates who passed the exam were
announced, the king would award the scarlet certifi-
cate of the state examination (hongpae), a flower (eo-
sahwa), and royal liquor (eoju) to the successful can-
didates in person.

On a clear spring day, candidates of civil exams


are lined up on the East side,
and those of military exams on the West /
Lovely flowers and young willow branches are
mingled in beautiful harmony /
When eosahwa tied around the head of the haechi
guarding Injeongjeon Hall /
and the hongpae inscribed
with brilliant large characters /
are granted to each person,
one accepts them after bowing to the king, / 하지만 문과의 대과 시험을 거쳐 문관이 되기까지 적어도 15년
에서 20년간의 수학이 필요하였다. 더구나 과거는 대개 3년에
through which one is filled with the honor
of the eosahwa on one’s head and the hongpae in
one’s bosom.1 한 번씩 개최하며, 최종 33명을 선발하기 때문에 매우 어렵고 힘
든 과정이었다. 그래서 출세의 관문이 과거 급제였으므로, 이
는 잉어가 물살이 세고 거친 용문龍門에 뛰어올라 용이 되었다는
At this time, the third-place candidate called tam-
hwarang (literally, the person who gets to pluck the
flower) would receive the entire set of flowers from the 등용문登龍門을 뜻하게 되었다. 이에 과거를 준비하는 곳에는 잉
king to then distribute and pin to the hats of the other 어가 뛰어오르는 그림인 〈약리도躍鯉圖〉나 잉어와 연꽃을 그린
〈연리도蓮鯉圖〉를 걸어두고 과거에 급제하기를 바랐다.
candidates.2 Next, the successful candidates would go
on a “three-day visit around town” (samil yuga), during
which period they visited relatives and examiners ac- 과거에 급제하면 임금이 직접 급제자에게 홍패紅牌, 어사화御賜花,
companied by a band and while wearing the flowers 어주御酒 등을 하사하였다.
granted by the king. There was also an initiation rite or
hazing, which was performed on the successful candi-
dates to simultaneously congratulate them and tease 푸른 봄날에 문과는 동쪽, 무과는 서쪽에 도열하니 /
them. It included the candidate dancing while holding 고운 꽃과 어린 버들가지가 아름답게 어우러지네. /
in his mouth the flower which was granted by the king,
인정전 해치 머리에 빽빽이 묶여 있는 어사화와 /
or the seniors tying him up and painting his face with
ink. However, the newly selected candidate would will- 큰 글자로 휘황하게 쓴 붉은 홍패를 /
ingly accept such an initiation rite, while parents, rela- 한 사람씩 내려주면 절하고 받으니 /
tives, and villagers considered it an honor. 1
머리 위에는 어사화, 품속에는 홍패의 영광이 가득 넘치네.
1 Mumyeongjajip (Collection of Writings by Yun Gi
[pen name Mumyeongja])
2 Imhapilgi 1 《무명자집(無名子集)》
16

이때 어사화는 탐화랑探花郞이라 불리는 3등의 급제자가 임금 앞


에서 어사화를 한꺼번에 받아서 여러 다른 급제자에게 나누어
꽂아 주었다고 한다. 이어서 급제자는 삼일유가三日遊街라고 하
2

여 임금이 내린 어사화를 꽂고 악대를 동반해 3일 동안 일가친척


과 시험감독관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이와 더불어 ‘신은新恩 신래
新來 불린다’고 하여, 급제자를 축하하면서도 놀리던 신고식도 하
였는데, 급제자가 어사화 끝을 문 채로 춤을 추거나, 선배들이 결
박당한 급제자의 얼굴에 먹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 급제
자는 이러한 신고식을 달갑게 여겼고, 부모와 일가친척,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이를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어사화는 어떤 꽃인가?
어사화는 임금이 하사한 종이꽃이라 하여 어사화御賜花, 어
화御花, 사화賜花 또는 어사화御史花라고 한다. 그리고 머리 위의 꽃
이라 하여 대화戴花, 비녀처럼 꽂는다고 하여 잠화簪花, 모자에 꽂
는 꽃이라 하여 모화帽花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어사화가 어떤 종류의 꽃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명확하지는
What kind of flowers were eosahwa?
않다. 그래서 어사화를 생김새에 따라 접시꽃蜀葵花, 영춘화迎春花 The eosahwa was the paper flower granted by the king,
라고도 하며, 양반집에서만 볼 수 있는 꽃이라고 하여 능소화凌霄 from which several names were derived, including eo-

花, 金藤花라고도 하고, 상징성으로 인해 무궁화無窮花 또는 복숭아


sahwa (flower granted by the king), eohwa (royal flow-
er), or sahwa (granted flower). It was also referred to as
꽃 등 다양한 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daehwa for putting it on one’s head, jamhwa for placing
한편 문헌에는 어사화를 ‘계화桂花’라고도 하며, 대과 급제자 명 it on the head in the manner of a decorative woman’s

단을 ‘계방桂榜’이라고 한다. 이것은 중국 진晉나라 때 극선郤詵이


stick-like hairpin called a binyeo, whose Chinese char-
acter was jam, and mohwa, for pinning it on one’s hat
라는 사람이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고서도 한갓 계수나무 (moja). However, it is unclear as to what kind of flowers
한 가지에 비유한 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후로 계수나무 가지 it was designed to resemble. Hence, it is interpreted as a

와 꽃은 곧 과거에 급제한 것을 뜻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계수


number of different flowers. These include hollyhocks
or winter jasmine based on its shape, trumpet creepers
나무에 대해 “장원壯元은 붉은 꽃인데, / 노란 꽃은 방안榜眼 / 흰 since these were the ones that were only found in aris-
꽃은 탐화랑探花郎이네.” 라고 노래한 글도 있는데, 여기에서의 장
3
tocrats’ (yangban) homes, or mugunghwa (rose of Sha-

원은 과거 급제에서 1등, 방안은 2등, 탐화랑은 3등을 가리킨다.


ron) or peach blossoms for their symbolism.
According to some documents it is also called
그리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토정비결土亭秘訣》에도 출세에 대 gyehwa, and the announcement notice for the list
한 운수 풀이로 “머리에 계수나무 꽃을 꽂으니 사람 모두 우러러 of successful candidates who passed the high-lev-

보네.” 또는 “머리에 계수나무 꽃을 꽂으니 관청으로 출입하겠


el exam (daegwa) was called gyebang. “Gye” in both
words refers to the cassia plant. Such a name derived
네.”라는 내용도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계화도 실제 이름의 from the story of Xishen from Jin China, who passed
계수나무의 꽃인지, 아니면 상상 속 달나라의 계수나무라고 알려 the examination at a young age, yet compared it to a

진 목서木犀 나무의 꽃인지 이에 대하여 문헌에조차 언급이 없다.


mere cassia branch. Since then, the cassia branch and
flower have come to be equated with passing the ex-
하여튼 현재 남아 있는 어사화 유물을 보면, 대개 종이를 바른 두 amination. Perhaps due to this, there is a poem which
개의 대오리에 청색, 홍색, 황색, 백색 등의 종이꽃이 장식되어 있 was written about cassia, which goes, “The red flow-

다. 후대에 와서 과거에 급제한 지 60주년이 되는 회방回榜이나,


er is for jangwon / yellow for bangan / and white for
tamhwarang.”3 Here jangwon, bangan, and tamhwa-

2 《임하필기(林下筆記)》 3 S ongnamjapji (Miscellaneous Writings of Jo Jaenam [pen name


3 《송남잡지(松南雜誌)》 Songnam])
17

rang refer to the first, second, and third-place candi-


dates, respectively. Also, according to Tojeong bigyeol
(The Secret Divinatory Art of Tojeong), which is wide-
ly known to Koreans, there are a few lines of fortune
recounting success, which go, “With the cassia flow-
er fixed on his head, everyone looks up to him,” or
“With the cassia flower fixed on his head, he would go
in and out of the government office.” However, there
is no mention in the document about whether or not
it is the actual cassia blossoms or the flower of sweet
osmanthus, which in traditional East Asian culture is
known as the imaginary tree that grows on the moon.
In any case, based on existing eosahwa artifacts,
they are mostly blue, red, yellow, or white flowers dec-
orated on two slender pieces of split bamboo tied to-
gether at the bottom and spread out in the upper part.
It is said that among the officials who celebrated the
60th anniversary of one’s passing of the exam (referred
to as hoebang), or the members of royal bodyguard
for the crown prince who passed the exam, they were
awarded special flowers made of silk instead of paper, 급제자를 축하하면서도 놀리던 신고식 장면.
but most of the flowers that are still in existence today 〈기산풍속도-신은 신례 짓고〉
are made of paper.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Since eosahwa was a paper flower specially be- Scene of an initiation rite in which people
congratulated and teased the successful candidate.
stowed upon one by the king, as the source of fam-
Gisan’s Genre Paintings: Initiation Rite of the Newly
ily pride it was clearly treated with special care. Selected Candidate.
Courtesy of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Moreover, when a successful candidate during King
Sejong’s reign called Yi Ham-nyeong, whose eosahwa
was damaged and chewed up by his horse, had his fa- 세자익위사桂坊의 관원 가운데 과거에 급제한 자에게는 특별히
비단으로 만든 어사화를 하사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대부분 종
ther pass away only a few days later, and who him-
self met an untimely death, led people to believe that
damaging the eosahwa was an inauspicious sign.4 이꽃으로 남아 있다.
Therefore, when people received their eosahwa, 어사화는 임금이 특별히 하사한 종이꽃이고, 집안의 자랑거리이
기 때문에 더욱더 소중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세종 때
some had two pieces of slender wooden plates cus-
tom-made to preserve them safely.
The eosahwa, which was pretty much a guaran- 이함녕李咸寧의 말이 어사화를 꺾어 씹는 바람에 며칠 있다 아버
tee of success during the Joseon period, was no lon- 지가 죽고 그마저 일찍 죽었다고 하여, 그때부터 사람들이 어사
화御賜花를 꺾으면 상서롭지 않은 징조라고 여겼으니 말이다. 그
ger produced after the examination was abolished in 4

1894 (31st year of King Gojong’s reign). Nevertheless,


since it was regarded as the token of a renowned aris- 래서 어사화를 받으면, 이를 잘 보존하기 위해 2개의 기다란 나
tocratic family of Confucian scholars and the source 무판을 제작하여 그 사이에 어사화를 보관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출세를 보증했던 어사화는 1894년고종 31에 과거제가
of pride for the family, along with hongpae, and the
list of selected candidates in the civil and military di-
visions (munmugwa bangmok) over several dozen 폐지되면서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사화는 수십
certificates of appointment which were issued at the 종의 관직 임명장보다는, 과거 합격 증서인 홍패, 합격자 명단인
문무과방목文武科榜目과 더불어 명문의 양반가임을 입증하는 증
time, it was passed down generation after generation
as a family heirloom. Now they are exhibited in mu-
seums as the flower that represents the honor of pass- 표이자 집안의 자랑이었기 때문에 가보家寶로 집안 대대로 전해
ing the examination during the Joseon period. 졌고, 이제는 박물관에서 조선 시대 과거 급제의 영광을 재현하

4 
Yongjaechonghwa 는 꽃으로 전시되고 있다.
4 《용재총화(慵齋叢話)》
Written by Choi Soon Guen, head manager at the Children’s Museum of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글 최순권 국립민속박물관 어린이박물관 과장
18
일 생 문 화 ︒문 화 속 으로

나의 해방 일지

경쟁이 기본값인 사회에서


스스로를 추앙하라

경쟁의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어느 순간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라는 생각에
주변을 돌아볼 때가 있다. 경쟁해본 적은 있어도 나를 응원해본 기억,
사랑해본 기억은 없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최근 인기리에 막을 내린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를 통해
승자 독식 사회에서 꿋꿋하게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한다.

경쟁의 결과가 곧 나 자신일까?


선의의 경쟁이란 것이 정말 있을까. 단 한 명의 승리자만 인정하는 사회에서 단
지 경쟁이 가진 잔인함을 착하게 포장해 놓은 말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니, ‘잘했져잘했지만 졌다’란 말도 선의의 경쟁이란 말만큼이나 패배의 슬픔을 포장
하기 위한 구차한 말로 들린다. 내가 되고 싶은 건 ‘선의의 경쟁’에서 ‘졌잘싸’한 인간적
이고 괜찮은 루저가 아니라 ‘독한 경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승리한 초인간적인 위너
다. 이유는 하나다. 오로지 승리한 단 한 사람에게만 짜릿한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승자 독식 사회.
19

승리자가 아니면 인정도 보상도 누릴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절박함과 그로 인한 박탈감,


그렇기에 어떻게 해서든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과 불안은 마치 경쟁의 과정이 곧 인생의
과정이고, 경쟁의 결과가 곧 나의 전부인 것처럼 치환된 지 오래다.
경쟁에서 이기고 싶다는 간절함과 욕망, 그리고 타인을 향한 지나친 인정 욕구는 때때
로 나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사람들로부터 나를 고립시키게 만든다. 내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나를 이길 사람 아니면 내가 이겨야 할 사람이라는 극단적인 생각, 이 경쟁에서
지면 모든 사람이 나를 비난할 것이라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나를 외롭게 만든다.
경쟁의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어느 순간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라는
생각에 주변을 돌아보지만, 나를 응원해주고 사랑해주었던 사람들은 이미 떠난 지 오래
다. 그러나 그들을 밀어낸 건 나 자신이기에 그들을 다시 부를 용기는 나지 않는다. 아쉬
운 대로 나 스스로를 응원하고 싶지만 경쟁해본 적은 있어도 나를 응원해본 기억, 사랑해
본 기억도 없어 방법도 잘 모르겠다. 생각할수록 어렵고 힘들고 귀찮다. 겨우 생각한 응
원이 탕진잼 , 유흥, 그것도 아니면 술이라니. 좀 씁쓸해진다.
1

잉여? 쓸모? 그걸 누가 정하지?


〈나의 해방 일지〉는 이른바 ‘경쟁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주인공들이 경쟁
사회에서 치열하게, 하지만 비열하게 살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
마다. 주인공 염미정을 규정하는 단어는 두 가지다. 계약직 그리고 호구. 염미정이 다니

내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는 회사는 남들이 부러워 마지않는 대기업이지만, 동시에 계급과 그에 따른 차별이 분


나를 이길 사람 아니면 명하게 존재하는 공간이다. 회사 동료들은 염미정을 계약직, 비정규직, 그리고 ‘원오브
내가 이겨야 할 사람이라는 뎀one of them’으로 규정하고, 그 차별 프레임에 염미정을 욱여넣고 납작하게 만든다. 이
극단적인 생각, 를 증명이라도 하듯 한 직원이 염미정을 이렇게 평가한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이쁘지
이 경쟁에서 지면 모든 사람이
나를 비난할 것이라는 생각은
만 합치면 평범한 얼굴이잖아.”
1 “탕진하는 재미”에서 나온 대한민국의 신조어로 자신의 경제적 한도 내에서 마음껏 낭비하며 느끼는 즐거움을 뜻한다.
필연적으로 나를 외롭게 만든다. 위키백과 참조.
20

그나마 있던 한 개인은 저마다의 특별함과 유일한 가치를 가진 개별적 존재지만, 집단에 소속되면서
용기조차 사라지기 그리고 그 집단이 제시한 조건에 따라 줄 세워지고 수치화되면서 그 입지는 좁아지고,
직전이고 이대로 있다가는 특별함은 납작해진다. 염미정 역시 개별로 보면 괜찮은 사람일지는 몰라도 경쟁과 실력
잉여 인간, 쓸모없는
디폴트인 회사 안에서는 괜찮은 스펙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필요할 때만 쓰임 당하는
인간으로 규정되는 건
계약직일 뿐이다.
시간문제다. 이것만큼이나
또 다른 주인공 구자경은 한때 좋은 집, 좋은 차, 남부럽지 않은 돈을 가진 이른바 ‘잘나가
슬픈 건 불행을 짊어지고
가는 건 나 혼자밖에 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은 경쟁에서 승리한 보상이자 대가였다. 그러나 구자경
없다는 절대적 고독감, 이 겪어왔던 경쟁이란 공정한 경쟁도 아니었고, 선의의 경쟁은 더더욱 아니었다. 일인자
그리고 이 불행은 가 되기 위해서 타인을 억압하고 짓밟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면 폭력을 쓰는 것도 개의치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않았다. 그가 상대를 강하게 밀어붙일수록 그리고 악하게 행동할수록 얻는 대가 역시 컸
막막함이다. 다. 처음엔 그 대가가 자신의 능력이라 생각했고, 더 많은 대가를 얻기 위해 구자경은 더
잔인하게, 더 비열하게 상대를 다루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밀려왔다.

염미정과 구자경의 닮은 점은 경쟁에서 자신을 어느 위치에 두어야 할 것인가를


파악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느라 정작 중요한 자기 자신은 돌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염미정은 스스로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규정해버리고 깎아내리며 자신을 위축시
켰다면, 구자경은 타인을 해쳐서라도 경쟁에서 이겨 최고의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강
박으로 자신을 학대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이 얻은 거라곤 멸시와 비아냥, 그리고 수
많은 싸움으로 얻은 상처다.
우리는 일상에서 경쟁하면서 수없이 상처받고 괴로워한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큼 짜
릿한 건 없지만 사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조건 좋은 사람, 잘난
사람 천지이고 동료와 친구를 가장한 경쟁자만 가득하다. 남들과 비교할수록 나는 더
작아지고 더 비참해진다. 그나마 있던 용기조차 사라지기 직전이고 이대로 있다가는 잉
여 인간, 쓸모없는 인간으로 규정되는 건 시간문제다. 이것만큼이나 슬픈 건 불행을 짊
어지고 가는 건 나 혼자밖에 없다는 절대적 고독감, 그리고 이 불행은 끝날 것 같지 않다
는 막막함이다.
그렇다고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라고 해서 마냥 편할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해다. 승리
의 즐거움은 찰나에 가깝고 이 승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독한 노력과 긴 시간이 필요
하다. 게다가 경쟁 과정에서 나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의 원망이 곳곳에서 들리기도 한
다. 하지만 그것에 귀를 기울일 시간은 없다. 어딜 가나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은 있
게 마련이란 생각에 애써 무시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을 하는 순간에도 나를 치고 올라
올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주변을 돌아볼 시간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
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알게 된다. 내 옆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외로움조차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을.
21

나의 선택을 두고 맞는지 구자경의 이런 길고 긴 외로움을 눈치라도 챈 듯 염미정은 구자경에게 자신을 추앙하라


틀린지 판단하고 평가하려 고 요구한다. 좋아하라는 것도 아니고 추앙하라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이다. 좋아하
드는 사람이 있다면, 는 남자에게 돈을 빌려주고도 받지 못하고,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동료 앞에서도 아
경쟁 대신 ‘잠시 멈춤’을
무 말 하지 못하는 자발적 루저인 염미정의 요구에 구자경은 일인자 자리에 모든 에너
선택한 나에게 앞으로
지를 쏟느라 그동안 외면했었던 자신의 감정을 비로소 꺼내 보게 된다.
뭐하며 살 거냐며 재촉하는
추앙. ‘높이 받들어 우러러봄’이라는 뜻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애정하는 마음은
사람이 있다면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말하자. 일방적이기보다 상호적이다. 내가 좋아하는 마음만큼 날 좋아해줬으면 하는 기대, 그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오는 실망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 것이
평가나 평판이 아니라 다. 그러나 추앙은 다르다. 추앙은 일방적인 행위인 동시에 조건 없는 행위다. 자신의 마
존중이라고, 타인과 경쟁을 음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돌아오는 대가가 없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런 기대
부추기는 응원이 아니라 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응원한 적이 있는지, 혹 열렬히
오로지 나를 믿어주는
응원한 그 사람이 경쟁에서 패배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생각해보면 추앙이 어떤
응원이라고 말이다.
의미인지 훨씬 쉽게 다가올 것이다. 다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 결과에 실망하지 않길 바
라는 마음, 결과에 상관없이 다독여주고 싶은 마음.
주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응원받는 사람들을 보면 경쟁에서 졌다고 해서, 또는 자신의
실력이 모자람을 확인했다고 해서 자신의 가치와 쓸모를 운운하며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다. 결과에 상관없이 나는 그 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쟁이 아닌 응원이 가진 힘이다.

부드럽고 분명하게 말하자, 이제 우리 서로를 존중하자고


유감스럽지만 살면서 경쟁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살아 있는 한 말이
다. 하지만 그 전에 새겨야 할 것은 그것이 경쟁인지 아닌지 규정하는 주체는 바로 나 자
신이라는 점이다. 내가 경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손에 땀이 나고 심장이 두근거린
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박과 졌을 때 감당해야 하는 비난과 고통을 생각하니 경쟁
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두려움이 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싸우고 이겨야 하는 경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의 최종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여
기에 내가 써야 할 에너지는 정해져 있다.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도, 쓸모없는 곳에 뼈를
갈아 넣을 필요도 없다. 나에게는 가본 길보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 훨씬 많고, 그 길
을 가기 위해서는 충분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의 선택을 두고 맞는지 틀린지 판단하고 평가하려 드는 사람이 있다면, 경쟁 대신 ‘잠
시 멈춤’을 선택한 나에게 앞으로 뭐하며 살 거냐며 재촉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드럽지
만 분명하게 말하자.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평가나 평판이 아니라 존중이라고, 타인과
경쟁을 부추기는 응원이 아니라 오로지 나를 믿어주는 응원이라고 말이다.
글 장윤미 대중문화평론가
22

사회적 자아는

일 생 문 화 ︒세 대 공 감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또 다른 나의 모습

홍효주
영양사, 20대
1D

‘개천에서
첫 직장을 구하려고 했을 때 기억에 남는 일들을

용 난다’라 쓰고
말해주세요.(면접 준비, 스펙 쌓기, 하고 싶었던 일이나 이루고
싶었던 꿈 등)
첫 직장을 구할 때는 왜인지 모르게 조급한 마음이 앞서서

‘개성에서
집에서 회사까지의 거리, 연봉이라는 큰 우선순위만 두고
면접 보러 다니는 것에 애를 썼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용 난다’로 읽다
조급한 마음이 든다고 해서 원하는 곳에 취업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때는 졸업 후의 공백이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은 두 회사의 면접 일정이 겹쳐서
최종 면접이었던 임원 면접을 포기하고, 더 희망했던 회사의
1차 면접을 보러 갔는데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면접 대신에 새로운 회사의 1차 면접 장소로 가는
건 적잖은 도전이었는데 막상 떨어지고 나니 후회도 많이 되고
씁쓸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회적 출세라는 말도 옛말이 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회 조직에서 인정을 받거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했던
각자의 출세와 각자의 유명세가 있을 뿐이다. 자신만의 노력은 무엇이었나요?
나만의 개성과 매력을 많은 사람이 2년 동안 해군부대에서 영양사로 근무했던 때의 일입니다.
알아봐주고 좋아해준다면, 훈련이 있지 않은 주말 아침에는 병사들이 자느라 바빠서 밥을
그것이 사회적 출세로 이어진다. 안 먹는 것이 저에게는 큰 숙제 중 하나였습니다. 취사병이
물론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주말에는 조리를 해도 와서 먹지를 않으니 의미가 있는 일인지
삶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고, 회의가 든다고 하는 말을 듣고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그 결정의 순간마다 우리는 고민하고 질문한다. 억지로 와서 식사를 하게 하는 것이 아닌 그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어떤 가치를 우선순위로 둘 것인지에 대해. 식단을 채우자는 의도 아래 ‘브런치데이’를 기획했습니다. 주말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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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를 식사시간으로 정해 병사들의 아침잠도 어느 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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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하고, 리조또데이, 분식데이, 내 맘대로 샌드위치 같은 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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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를 정해 만족할 수 있는 식사를 위해 나름 노력을 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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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이 조금이라도 잘 먹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기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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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기대 이상으로 좋은 성과를 내었습니다. 이러한 높은 만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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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부대 내에서 고정 식단이 되고 잔반량 또한 현저히 줄어
따로 대대장님께 표창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이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다고
본인이 생각하는 사회적 출세, 사회에 내 이름을 알린다는 것의 생각하나요? 사회나 타인의 시선에 의해 판단되는 자신의
의미와 그렇게 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모습에 만족하는지, 혹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출세’라는 단어가 제법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목표를 위해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궁금합니다.
실현하는 것은 곧 나와 같은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 달려오는 거짓된 모습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은
후배들에게 거울이 되는 일이고, 그만큼 책임을 져야 하는 저의 조절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 인정과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책임져야 할 일이 더 많다고 목표 실현을 위해 그에 맞춤으로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있는
느껴지기도 합니다. 높은 직급일수록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를 그대로의 나라고 보기는 어렵고 ‘사회 구성원으로 이바지하기
내려놓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더더욱 출세는 곧 책임져야 할 위해 애쓰는 나’가 결국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나’에
일이 많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직장, 좋은 복지, 적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쓰는 순간이 나의 진짜 모습보다
높은 연봉이 아무리 전부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때로는 전부일 많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볼 문제이기도 합니다. 애쓰기만
만큼 저도 모르게 열망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열망에서 한다면 진짜 내가 아니므로 지속할 수 없다고 느껴서요. 타인의
오는 자괴감을 제어할 수 있는 것도 곧 사회적 출세가 바탕이 시선으로 보이는 나의 모습에 만족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장 생활을 하며 느낀 것은 본인의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위해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가치를 높이기 위해 목표 실현을 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으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가장 많이 합니다.
현실적으로 좀 더 여유 있고 윤택한 삶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나면 내가 좀 더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고
출세를 향해 노력한다고 느낍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4

사회적 가면을 쓴 나와 기자를 포기하고, 재미있지도 않은 행정학을 공부하는

그것을 벗은 나와의 간극을


자신에게 회의감이 들기도 했어요. 그 후 수험생활을 접고 언론
출판계에 뛰어들었죠.
줄여나가기
사회 조직에서 인정을 받거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했던
박신영 자신만의 노력은 무엇이었나요?
사회 조직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맡은 업무를 잘 해내는
매거진 에디터, 30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전문적으로 글쓰기를


공부해본 적도, 기획안을 작성해본 적도 없어서 잡지
에디터로서의 첫발을 떼는 게 무척 어려웠어요. 단시간에 작법
기술을 체득한다는 요행은 없으니까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매일 30분씩 신문 헤드라인을 필사했어요. 또한, 일주일에
첫 직장을 구하려고 했을 때 기억에 남는 일들을 말해주세요. 한 번 서점의 베스트셀러 책장을 뒤지고, 여러 SNS에 가입해
‘문송합니다’라는 문구가 유행하던 때, 특출나지 않은 트렌드와 이슈를 찾아 고군분투했습니다. 중간에 몇 번이나
인문대생이 갈 곳은 공무원 학원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건
공무원의 안정적인 급여와 완전한 고용 안정성은 취준생과 이것뿐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6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부모에게 매력적인 조건이니까요. 나름대로 인생 최대의 다행히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전히
노력과 ‘잘 될 거야’라고 자기 위로를 하며 수험생 생활을 좋은 글을 쓰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버텼지만, 수험생활이 길어질수록 몸과 마음은 피폐해졌고, 자신감이 생겼거든요. 어렵고 막막했던 에디터 생활을 꾸준히
합격이라는 결과는 예상할 수 없을 만큼 멀리 있었어요. 할 수 있었던 건, 글 자체에 대한 애정과 타인에게 감동을 주는
지극히도 평범한 어느 날, TV에서 촛불시위를 중계하는 젊은 글을 쓰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언젠가 좋은
기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결의에 찬 눈빛으로 카메라를 작품을 집필하겠다는 새로운 꿈도 원동력이 되어주었고요.
응시하는 그들을 보자 마음이 먹먹해졌는데, 그때 뭔가 제
안에서 변화가 일어났던 것 같아요. 중학생 때부터 꿈이던 본인이 생각하는 사회적 출세, 사회에 내 이름을 알린다는 것의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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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와 그렇게 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d ¢æ7 bH8 ⁄?I _
보통 돈, 명예, 권력을 모두 가져야만 출세했다고들 하는데 7. 8’d¨y,df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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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중 하나도 갖기 어려운 시대 아닌가요? 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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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 할까요? 이름값을 유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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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더 많은 피땀을 흘려야 할지도 모르고요. 유명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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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더라도 가족, 지인들과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게 훨씬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회적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닌 자기만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이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다고
달라지겠죠. 좋아하는 분야를 오랜 시간 깊게 파고들면 어느새 생각하나요? 사회나 타인의 시선에 의해 판단되는 자신의
전문가가 되고 명성은 자동으로 얻게 되니까요. 그게 곧 진정한 모습에 만족하는지, 혹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출세라고 봅니다. 위해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궁금합니다.
친한 지인은 저를 “일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고 사람에 대한
사회생활을 하면서 맺은 인연이나 존경하는 사람, 기억에 남는 애정과 관계를 중시한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가족이나
이를 꼽는다면 누가 있나요? 동료에게 물었을 때도 친한 지인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고요.
한 분야의 독보적인 전문가로 알려진 K교수님에게 어려운 30대에 접어들면서 가족, 친구, 동료 등 사람에 따라 다양한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어요. 일면식도 없던 터라 가면을 쓰는데, 아마도 책임감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자 모습이 가면에 잘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어요. 이제 막 완역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과 타인이 인정하는 모습이
작업을 끝냈다는 그는 1시간이 넘는 전화 통화에도 귀찮은 일치해 다행인 한편,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는 시선이 때로는
내색이 없이 솔직하고 다정했어요. 그는 ‘유명한 사람은 바빠서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진짜 모습도 그런 사람이어야만 할
사소한 일을 귀찮아할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만큼 다른 것 같아 스스로를 가차 없이 채찍질하게 되니까요. 사회적
사람을 무시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주었어요. 며칠 동안 가면을 쓴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마다 ‘미래의 나는
그분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40년 뒤엔 나도 저런 모습이면 어떤 사람일지’ 자문하며 진짜와 가면을 쓴 모습의 차이를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줄여나가려 노력합니다.
26

–&

치열했던 한 시절을 지나 첫 직장을 구하려고 했을 때 기억에 남는 일들을 말해주세요.

인생에 숨은 여러 갈래의
저의 첫 직장은 국내 대기업 소속 광고대행사의
광고기획자Acount Executive였습니다. 하지만 당초 졸업 후,
길을 걷는 것 하고 싶었던 일은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PD였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디스커버리 채널의 다큐멘터리
김도균 프로그램처럼 인간과 자연의 근원적 속성을 다루는 나만의
멋진 다큐멘터리 작품을 만드는 것이 이루고 싶었던
연합뉴스 콘텐츠사업부, 50대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른바 ‘언론고시’라고 불리는 언론사


시험은 엄청난 스펙과 실력을 갖추어야 통과될 만큼 쉽지 않은
도전이었습니다. 이에 목표를 수정해 대학 시절 활동했던
광고대행사로 진로를 수정하였고, 광고대행사에 입사한
선배들의 경험과 충고를 바탕으로 입사 준비를 하였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은 대학 재학 시절 ‘애드 컬리지’라는
광고동아리 활동을 통해 LG애드 대학생 광고대상에 작품을
출품해 입선을 하기도 하였고 광고에 관심 있는 여러 동아리
동료들과 다양한 활동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동아리 활동이
입사 이후에도 동종 업계에 취업한 동료들과 지속적인 정보를
교환하고 교류를 하였기에 저에겐 광고동아리 활동이 매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조직에서 인정을 받거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했던


자신만의 노력은 무엇이었나요?
저마다 본인이 속한 조직에서 인정받고 높은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할 겁니다. 제 주변에도 조직에서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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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받고 높은 업무 성과를 이룬 사람들은 남과는 다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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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화된 능력이나 역량, 어떤 난관도 굴하지 않는 열정, 02b8¤>v†I2˜y

소속된 조직원 누구와도 소통하고 협업하는 능력 등을 갖추고


`3$ßÆE8ffl>I˜,7⁄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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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Yd•>Sv*3(},d
저는 업무적 역량이나 열정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소통과
ÆßS5Ø.
협업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추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느 조직이든 혼자서 일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과 열정만 앞세워 독불장군처럼 일하는 데에는 분명 내가 생각하는 사회적 출세, 사회에 나의 이름을 알린다,
한계가 존재합니다. 내가 속한 조직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목표를 실현한다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렇게 하려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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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서는 개인의 역량은 물론이고 소통 능력을 갖추어 조직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구성원들과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에 나가 출세를 하려면 한정된 자리를
저의 경우, 부서 회의나 다른 부서와의 협업 업무에서 소통이 차지하려는 다른 사람들을 제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각자 자신의 주장만 개인적인 시간도 희생하고, 앞서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내세우고 쌍방향 소통이 되지 않아 의견이 수렴되지 못했던 노력하고 때로는 사내 정치와 술수를 쓰는 게 유리할 때도 있을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삶이 적성에 잘 맞는다면 축하할 만한
원인을 파악한 후에는 모든 커뮤니케이션에서 잘 듣고, 일이지만, 저의 경우는 사회적 출세를 위해 다른 즐거움을
되물으면서 소통의 오류를 줄이면서 업무 효율을 높이려고 포기해 가면서 이른바 출세를 위한 외길만을 걸어가는 삶을
부단히 애를 썼죠. 대화의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저보다는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에 숨은 길은 여러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자 했습니다. 갈래이고 저는 그중 한길만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의 길,
또한, 차장급의 중간 간부가 되고부터는 타 부서와의 협업 낭만의 길, 색다른 길들을 걷고 싶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업무를 맡았을 때에도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과 경험들이 모여 사회적 출세의 의미는 여러 갈래의 다양한 길을 경험하고 그
발생하게 되는 충돌이나 마찰을 최소화하고 갈등을 조정하고 경험을 통해 보람을 느끼고 재미가 있다면 실패를 해도 충분히
의견을 수렴하여 아이디어를 극대화시키는 윤활유로써 만족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야 결과에 상관없이
‘코디네이터’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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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리 고미 술 을 만 나 다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 Kim Hongdo (1745–after 1806),


〈규장각도(奎章閣圖)〉, 1776년, 비단에 채색, 143.2×115.5cm, Gyujang Pavilion, 1776, ink and colors on silk, 143.2 × 115.5 cm,
국립중앙박물관 National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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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도
MEETING OUR OWN ANCIENT ART
규장각奎章閣은 1776년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즉위한 후 바로 설치한 기관으로 내각內閣으로도 불렸다.
정조는 선왕先王들의 어필御筆, 어제御製 시문詩文을 봉안奉安하기 위한 전각을 만들고자 했는데 이것이 규장각이
다. ‘규장奎章’이라는 말은 임금의 어필과 어제, 즉 왕이 쓴 글씨와 글을 가리킨다. 규장각은 창덕궁昌德宮에서 경
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영화당暎花堂 옆의 언덕에 2층 건물로 지어졌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역
대 국왕의 어제, 어필을 보관하는 일뿐 아니라 규장각 소속의 학문적으로 뛰어났던 각신閣臣들을 통해 국가가
당면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었다. 즉, 규장각은 국가 경영을 위한 정책연구소이기도 했

奎章閣圖
다. 〈규장각도奎章閣圖〉는 정조를 위하여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인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가 정성을 들여 규장
각 주변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규장각도〉에 그려진 규장각 건물을 살펴보면 이 그림을 그릴 당시 32세였던
김홍도가 계화界畵에 매우 뛰어난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계화는 정교하게 건축물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건축
물의 묘사에는 자계척(界尺)가 사용되었다. 화면 중앙에 2층 건물인 규장각이 배치되어 있는데 1층이 규장각이고
2층이 주합루宙合樓이다. 김홍도는 부감법俯瞰法을 사용하여 응봉鷹峯 아래에 위치한 창덕궁 후원과 규장각의 모
습을 웅장한 화면 속에 포착해냈다. 조선 후기 건축물 그림의 특징 중 하나는 지붕은 청록색, 건물 기둥은 붉은
색으로 그리는 것인데 이 그림에도 그대로 이 원칙이 지켜져 있다. 김홍도는 매우 가는 선으로 규장각의 문과
문살들을 정교하게 묘사하였다.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로서도 〈규장각도〉는 응봉 아래의 울창한 수림樹林, 규장각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 연못 근처의 평화로운 정경 등이 잘 표현되어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글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Gyujang Pavilion
The Gyujang Pavilion, also referred to as Naegak, is in ruled-line painting rendering buildings in an ex-
an institution which was established immediately af- tremely elaborate manner. A ruler was used in depict-
ter King Jeongjo (r. 1776–1800) ascended the throne ing the buildings. At the center of the screen stands
in 1776. King Jeongjo wanted to build a pavilion to en- the two-story structure of the Gyujang Pavilion where
shrine calligraphic works, poems, and prose by previ- the Gyujang Royal Library housing the calligraphic
ous kings, which eventually became the Gyujang Pa- works and texts is on the first floor and the Juhap Hall,
vilion. The Gyujang refers to the calligraphic works a place for scholarly activities, is on the second floor.
and writings created by kings. The Gyujang Pavil- Kim employed a bird’s-eye-view to capture the spa-
ion was built as a two-story building on a hill next to cious rear garden of the Changdeok Palace located be-
the Yeonghwa Hall, which is a place well-known for neath Mount Eung and the Gyujang Pavilion. One of
its beautiful landscape inside the Changdeok Palace. the characteristics of late Joseon paintings that de-
King Jeongjo had this building built not only to house pict buildings is that the roof tiles are painted in blue
calligraphic works and writings by previous kings, but and green and pillars in red. This principle is evident
also to make state policies with brilliant young offi- in Gyujang Pavilion as well. Kim Hongdo portrayed
cials working at the Gyujang Pavilion to solve the is- the doors and muntin bars of the Gyujang Pavilion in
sues of the day. In other words, the Gyujang Pavil- extremely fine lines. Even as a topographical paint-
ion served as a policy research institute or think tank ing, Gyujang Pavilion is a remarkable painting show-
for state administration. Gyujang Pavilion is a work ing the thick forest beneath Mount Eung, the beauti-
painted for King Jeongjo by Kim Hongdo (1745–af- ful landscape surrounding the Gyujang Pavilion, and
ter 1806), a court painter affiliated with the Bureau of the peaceful scenery near the pond.
Painting, showing in great detail the building itself
Written by Chang Chinsung, Professor of East Asian art
and the landscape surrounding the Gyujang Pavilion. in the Department of Archaeology and Art History at Seoul National
Kim, who was 32 at the time, was remarkably skilled University
30
한국문화원연합회 창립

60
주년 특별기고

‘새로운 60년,
위대한 출발’을 위한 제언
창립 이후 장족의 발전을 해온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현황을 자랑스럽게 지켜보면서
새로운 60년을 향한 위대한 출발을 위해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앞으로 연합회의 비전과 발전 방향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A New 60-year Period,


a Great Start Proud of the current standing of the Federation of
Korean Cultural Center,
which has made remarkable progress since its
establishment, I would like to make a few suggestions
before its great leap toward the next 60 years.
I hope they will help the Federation of Korean
Cultural Center set its future visions and directions.
31

자랑스러운 60년, 문화의 희망 씨앗 뿌리기

THE FKCC’S 60TH ANNIVERSARY: SPECIAL CONTRIBUTION


연합회는 전국 지방문화원의 울타리이면서 거대한 문화공동체의 중
심이다. 대한민국이 근대화의 기치를 내걸 무렵 1962년에 사단법인 한국문
화원연합회를 창립하였다.1 1947년 강화, 1951년 전주와 밀양에 이어 원주
1952년 울진1953년 그리고 인천과 천안1954년 등 20여 곳의 문화원이 순차로 설
립되면서 문화원연합회의 모체가 되었다.2 이후 60년 동안 줄기차게 발전하
여 16개 시도연합회와 231개 지방문화원으로 늘어났다. 모든 기초지방자치
단체마다 하나의 문화원이 설립된 셈이다.

지방문화원, 지역문화의 구심체


해방과 6.25 전후戰後 파괴된 이 땅의 문화 불모지에 처음으로 뿌리를
내리고 지역의 문화를 꽃피우기 위한 선각자들의 노력이 지방문화원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문화원연합회를 결성하면서 그 풀뿌리 문화 살리기를
확산해나갔다.
오늘날 지방문화원은 지역별 문화의 뿌리요 구심체로 확고한 법적 기반을
The federation as a platform 지니며, 향토문화로부터 문화자원의 가치를 찾아내고 가꾸고 또 다른 문화
A platform does not entail the domination
of a cultural policy. Lee O-young likens it
콘텐츠로 발전시키는 원천이요 핵심 주체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to bojagi (wrapping cloth). In the game of 세계의 모든 문화는 그 지역의 특별한 환경과 인재, 그들의 통찰과 창의가
Rock, Paper, Scissors, bojagi (paper) has a 어우러져 형성되었다. 지역문화란 곧 그 자체가 세계문화의 본질이며 다양
gentle power that embraces the other ele-
ments, forming a virtuous symbiotic rela-
성과 독자성과 창의성을 내재한다. 가장 세계적global이면서 가장 지역적local
tionship with them. It pursues principles of 이라는 의미이다. 이를 글로컬glocal하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문화적 독특성
coexistence like the infinitely rotating yin 이 지역문화의 생명이며, 세계문화의 보편적 가치를 얻고 새로운 문화 창조
and yang of the Taegeuk symbol. The na-
ture of an all-inclusive local cultural plat-
의 기반이 된다.
form is found in the bojagi theory. The Fed-
eration of Korean Cultural Center has been 플랫폼으로서의 연합회
working towards this by fostering origi-
nal content, hosting local cultural festi-
플랫폼은 문화정책의 권력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어령은 이를 보자기
vals, and maintaining a cultural resources 로 설명한다.3 보자기는 가위와 바위와 함께 선순환의 공생관계를 이루면서
archive. Now, in the era of hyperconnec- 모두를 포용하는 부드러운 힘이다. 태극의 음양이 무한대로 순환하듯 상생의
tivity and artificial intelligence, it is time
이치를 만들어낸다. 지역문화종합플랫폼의 본질은 보자기론에서 찾아야 한
for the Federation of Korean Cultural Cen-
ter to act as a platform that preserves each 다. 연합회에서는 그동안 원천 콘텐츠의 발굴, 지역문화박람회 개최, 문화자
region’s original content as derived from 원 아카이브 등의 사업을 추진하여왔다. 이제 21세기 초연결시대를 맞아 전국
local cultural resources, and use these
resources to produce new cross-genre cul-
지역별 문화자원의 원천 콘텐츠의 보존과 이를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새로
tural content. 운 문화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플랫폼의 역할로 승화시켜나가야 한다.

1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초대 회장은 한기창 인천문화원장이었다. 한국문화원연합회 연혁(누리집)


2 박광무, 한국문화정책론(증보판2015) p.139, 562; 한국문화원연합회, 2020 연차보고서 p.3 참조
3 이어령, 보자기인문학(2015)
32

문화자원의 원형 보존  e federation as the


Th
한류의 이름으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한국의 문화는 이제 더 이상 pregnant mother of 21st
변방의 이름 없는 존재가 아니다. 21세기의 국가경쟁력과 문화의 품격은 세
century Korean culture
The Federation of Korean Cultural Center
계인에게 그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도 않지만 쉽게 must fulfill its role as the pregnant moth-
문화원천 콘텐츠가 생성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장르에 걸쳐 문화인 er that elevates and fosters Korean culture

의 창의와 문화행동과 샛별들의 활약이 세계인에게 공감을 주는 것은 바로


and Koreans’ pride in that culture. Going
beyond a homogeneous culture, we have
한민족의 문화적 깊이와 넓이와 품격에서 비롯되며, 이를 지속 발굴하고 가 tirelessly challenged ourselves, adapted,
공하는 원천이 바로 이 문화자원에 숨어 있다. 한국문화의 원형과 변용은 문 and created new content with the cultur-

화자원에서 출발한다. 이에 문화원연합회와 전국의 지방문화원이 중심 역


al traditions of a homogeneous race, an en-
terprising spirit, a dynamic attitude, con-
할을 해야 한다. vergence and harmony, and the wisdom of
embracing change. In the hyperconnect-

21세기 한국문화의 태모胎母로서의 문화원연합회 ed era of the 21st century, the Federation of
Korean Cultural Center is required to play
문화원연합회는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자랑스러움을 문화적으로 승화 a pivotal role in driving the power of this
하고 창조해나가는 태모胎母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단일민족문 nation’s culture across the world with a

화에서 나아가 한민족의 문화적 전통과 진취적 기상과 역동성과 융합과 화


more positive energy.
Regional cultural centers around Ko-
합, 변용의 지혜로 끊임없이 도전하고 적응하며 새롭게 창조해왔다. 이 민족 rea should give priority to cultural collab-
문화의 힘을 21세기 초연결시대에 세계인에게 확산하는 중심 역할을 요구 orative projects of local communities that

받고 있다.
have diverse cultural families, thereby en-
hancing the cultural value of each region
전국의 지방문화원에서는 다양한 문화가족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의 문화적 while expanding respect and empathy for
인 연합사업과 지역별 문화가치의 고품격화, 세계문화의 다양성 존중과 공 the diversity of world culture. To this end,

감성을 확대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부여함이 마땅하다. 연합회는 이를 위한


the Federation of Korean Cultural Center
must become a platform for research and
연구 분석과 정책사업의 개발 및 연계와 연대를 위한 플랫폼의 역할을 해야 analysis, policy development, collabora-
할 것이다. tion, and solidarity.

문화원연합회는 전국에 산재된 한국문화 원형과 함께 새롭게 유입된 이민


The federation must fulfill its role as
the pregnant mother of cultural creation,
移民한민족이 형성하는 글로벌문화와 융합해 21세기 한민족문화의 새로운 analyzing and recreating new visions of
비전을 분석하고 재창조하는 문화 창조의 태모 역할을 해야만 한다. 21st century Korean culture produced
through an amalgamation of Korean cul-

문화 거버넌스의 중심
tural archetypes and global cultures that
are brought to Korea by its migrant popu-
오늘날 정책과 정치는 거버넌스로 구현되고 있다.4 거버넌스의 핵심은 lation.

참여 협력 역할 분담 그리고 책무성으로 특징짓는다. 문화 분야의 거버넌스


에서 전국의 지방문화원은 지역문화의 핵심 법정기관이다. 지방문화원진흥
법 제12조는 연합회를 법정법인으로 규정한다. 전국의 지방문화원을 네트
워크 거버넌스로 연결하는 중심이다.
4 박광무, 대한민국거버넌스솔루션(2021) “거버넌스의 이해” pp.49-86.
33

“A new 60-year period, 여기서 지역문화재단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각급 지
a great start” from 방자치단체에서는 자치단체의 조례로 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재정적 지원과
convergent partnership 일정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지방문화원과 지역문화재단과의 역
The adages “the most traditional is the
most modern” and “the most local is the 할 분담을 명확히 해야 한다. 지방문화의 독자성·고유성을 살려나가고 지역
most global” are unchanging truths. Even 의 문화 원형의 발굴 보존 및 세대간 시대별 전승傳承을 감당하는 것은 오롯
이 지방문화원 본연의 책무이다. 이를 지속 발전하도록 지역문화재단은 그
without referring to BTS leader RM’s inter-
est in Korea’s traditional and cultural phe-
nomena, we are surrounded by countless 재정적·행정적인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한편 지역문화재단은 지역별 문화
gems, such as daechwita (a genre of tra- 재정의 조달과 역내 모든 문화기관 시설에 효과적이고 공정하게 재원이 배
분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ditional music), gat (traditional hat), the
Bangasayusang (Pensive Bodhisattva), Go-
ryeo celadon, saekdong (colorful stripes), 지역문화 거버넌스에서 수평적 네트워크 거버넌스의 중심에 지방문화원이
and the Smile of Silla (a handmade roof- 있고 지역문화재단이 참여·협력·역할 분담이라는 거버넌스 본연의 기능이
end tile artifact). These treasures are final-
원활하게 작동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이들의 공존이 곧 지역문화의 발
ly becoming known to the world thanks to
ultraprecise tracking and AI-based obser- 전을 이끄는 견인차로 작용할 것이다. 문화원연합회는 이러한 부분이 전국
vation and analysis in the 21st century’s 의 모든 지역에서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문화체육관광부는 물론 전국 지
방자치단체와도 긴밀히 소통해야 한다.
hyperconnected, ultrafast environment.
Reinterpreting traditions is the radiant re-
birth of cultural archetypes and new forms
of re-creation. As the Federation of Kore- 「새로운 60년, 위대한 출발」은 융합적 협력으로부터
“가장 전통적인 것이 가장 현대적이다.”라는 명제는 “가장 지역적인
an Cultural Center prepares for the next
60 years, I hope that the golden generation
and the next generation of rising stars will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명제와 함께 불변의 진리이다. 대취타, 갓, 반가
join hands and make great achievements 사유상, 고려청자, 색동, 천년의 미소 등 우리 곁에 널린 무수한 흙 속의 진주
들이 바야흐로 21세기 초연결·초고속 환경에서 초정밀 탐사와 인공지능의
together. This will be possible through con-
vergent cooperation.
The Federation of Korean Cultur- 관찰과 분석에 의하여 세계 속에 찬란하게 드러나고 있다. 전통의 재해석,
al Center and all regional cultural centers 그것은 문화 원형의 빛나는 부활이요 새로운 차원의 재창조이다. 새로운 60
년을 맞이하면서 황금세대와 샛별세대의 결합으로 연합회가 위대한 새 일
have the task of maintaining the local cul-
ture while finding a way to reinterpret and
recreate an extensive and rich collection 을 주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융합적 협력으로 가능하다.
of cultural resources. The convergence of 연합회와 모든 지방문화원은 전국 각 지역의 기층문화와 함께하며 방대하
고 심오한 문화자원의 보고寶庫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재창조할 것인가의 과
the older generation’s wisdom and know-
how with the younger generation’s passion
and creativity will produce a brilliant light 제를 안고 있다. 황금세대의 지혜와 경륜과 자원이 샛별세대의 패기 및 창의
which is sure to illuminate the challeng- 와 멋지게 융합될 때 찬란한 빛을 발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60년, 위대한
출발선에서 도전과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es and opportunities to come over the next
60 years.
글 박광무 행정학박사, 전 한국문화관광연구원장, 경북 울진 태생, 성균관대 초빙교수,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역량지도교수, 전국지방자치단체 문화가치평가위원장, 행정고등고시, 성균관대 서울대행정대학원,
성대국정전문대학원 졸업, 미국미주리대고위급연수, 행정사법인 CST 대표 겸 문화행정연구소 소장
Written by Park Kwang Moo, PhD in public administra- [역임] 윤석열대통령선대위정책특보, 2018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 문화부문화예술국장
tion and former president of Korea Culture & Tourism
Institute [주요 저서] 《한국문화정책론》, 《대한민국거버넌스솔루션》, 《기생충BTSnKculture》, 《혁명의유혹》 외 다수.
34

우 리 안 의 보 물 、아 기 장 수
광복절이 있는 8월이다. 우리는 진정한 문화적 독립을 이루고 있는가?
로컬 의 새 로움

국가권력이 아닌, 지역과 시민이 주체가 되어


형성해가는 지역문화의 독립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 안에 있는 자기다움의 문화를
열어젖힐 때 거기서 지역문화는 새롭게 싹틀 수 있다.
그 지역문화를 지켜내는 것은 이제, 우리 지역민의 몫이다.
지역문화의 참된 독립을 위하여
35

Agijangsu: Treasure inside Us

THE NEW LOCAL


For True Independence of Local Culture
August is the month of Korean Liberation Day.
But have we truly achieved cultural independence?
How can local culture led not by the national authorities,
but by its regions and citizens, achieve independence?
Local culture can only blossom when we take the initiative to open up
and reveal the unique culture which is inside us.
Now, it is the role of the local people to preserve their own culture.
36

아기장수는 어느 산골  ighty Baby enters the lives


M
가난한 농사꾼 부부의 품에서 of the people
이 세상을 구할 영웅으로 태어났다.
Born in a remote village to poor farming

소리 소문 없이 백성의 삶 속으로
parents, Agijangsu (Mighty Baby) is predes-
tined to become a hero and save the world.
들어온 것인데, 아기장수의 탄생은 His otherwise ordinary birth and intro-
세상의 불의를 더 이상 두고 duction into the lives of the common peo-
볼 수 없어서 하늘이 ple suggests that the heavens, unable to

개입할 필요를 느꼈음을 말해준다. tolerate the injustices of the world any lon-
ger, deemed it necessary to intervene. The
wings under the baby’s arms are a sign of
his divine identity chosen by the heavens
for those suffering in the world.
Upon discovering their son’s wings, the
parents run to the kitchen and with fire from
the fireplace, burn the baby’s wings. The
백성의 삶 속으로 들어온 아기장수 baby dies when his wings catch fire. We be-

아기장수는 어느 산골 가난한 농사꾼 부부의 품에서 이 세상


lieved that the parents would protect their
son with their lives, but the unexpected has
을 구할 영웅으로 태어났다. 소리 소문 없이 백성의 삶 속으로 들 happened. The parents betray their baby,
어온 것인데, 아기장수의 탄생은 세상의 불의를 더 이상 두고 볼 someone who would have saved them. Why

수 없어서 하늘이 개입할 필요를 느꼈음을 말해준다. 아기의 겨드


does Mighty Baby have to die in his parents’
hands? Is his destiny to meet an untimely
랑이에 날개가 있다는 것은 그가 하늘이 낸 신령한 존재임을 암시 death? Through this story, people look back
한다. 세상에는 신음하고 있는 백성이 있기 때문이다. on their history of relinquishing and deny-

하지만 부모는 아기의 날개를 확인하고는, 더럭 겁이 나서 부엌


ing their own long-held hopes.

으로 달려가 아궁이 불로 날개를 태워버리고 만다. 날개에 불이


붙자 아기는 그만 죽고 말았다. 우리는 부모가 목숨을 걸고 아기  illing the Mighty Baby
K
를 지켜주리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아기
among us
The tale of Agijangsu has been told in various
는 그가 구할 백성이자 혈육인 부모에게 배신을 당했다. 아기장 forms in some 400 region in Korea. The story
수는 왜 부모의 손에 죽어야 했나? 그의 죽음은 과연 필연적인 shows how impoverished, powerless people,

것이었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those who are oppressed by the authorities,
dreamed of a new world. One of the versions
희망을 스스로 부숴버리고 부정했던 역사를 되돌아볼 것이다. of this story is known as “Agijangsu in Maok-
san Mountain” and originates in Icheon. Why

우리 안에 들어온 아기장수 죽이기 has this story spread so far and wide? Sim-
ply put, when life is ravaged by war and tyr-
아기장수는 400여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는 설화 anny, people long for a savior. This is why a
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 땅의 백성들이 권세자들에게 억눌리면서 belief in Jeonggamnok (Prophecies of Jeong)

얼마나 간절하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어왔는지 보여주는 이야기


spread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is a testa-
ment to the extent of the people’s sufferings.
다. 이천에 내려오는 마옥산 아기장수도 그중 한 편이다. 왜 이 이 Although their resistance to the tyranny of
야기가 이렇게 널리 유포되었을까? 전란과 폭정에 시달려 삶이 the authorities runs through the narrative of

피폐해지면 민중은 구원자를 대망한다. 조선 후기에 정감신앙이


tale of Agijangsu, what the people want is for
the heavens to send them a savior to remove
퍼진 이유이기도 하다. 민중의 아픔이 그만큼 크고 절실했다는 증 the authorities and create a new world. The
거일 것이다. 물론 지배자의 폭정에 대한 저항감으로 형성된 것이 moment they realize this will never happen,

아기장수 서사지만, 우선 그들이 바라는 건 하늘이 구원자를 내려


their hopes are crushed and they give in to
fear and despair. In this way, the Mighty Ba-
보내 단번에 저들을 쓸어내고 새 세상을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by’s failure actually stems from his parents’
이런 바람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 소망은 이내 anxiety and fear.
37

The people desperately dream of a new 하지만 이런 바람이


world, but when the baby who will realize the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 소망은 이내
dream enters their lives, they take a step back.

좌절되고 두려움과 절망의


Their fear comes from their history of count-
less failures and despair. The Mighty Ba-
by’s wings look like dandelion leaves, show- 상황으로 떨어진다.
ing that his birth is the answer to the people’s 아기장수의 실패는
heartfelt hope. But the moment his parents 알고 보면 부모의 이런 불안과
are overwhelmed by fear, their hope turns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다.
into rebellious thoughts and a mark of trea-
son. By letting their savior die, the people
close the door to salvation on themselves.

 ocal society’s charge for the


L 좌절되고 두려움과 절망의 상황으로 떨어진다. 아기장수의 실패
Mighty Baby’s death 는 알고 보면 부모의 이런 불안과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다.
The parents’ burning of their son’s wings
clearly illustrates the people’s sense of de- 민중은 간절히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만, 막상 그 꿈을 이룰 아기
spair and helplessness. The tale of Agijang- 가 그들 앞에 나타나자 뒷걸음친다. 그런 두려움은 수많은 실패
와 좌절을 겪었던 그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기
su is an insightful parable about heading
toward a new world, but it is also a trage-
dy in which repeated attempts end in fail- 장수의 날개는 민들레 이파리처럼 생겼다. 이것은 민초들의 간
ure. The Mighty Baby constantly shows 절한 바람에 부응해 아기가 태어났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부모
가 두려움에 휩싸이는 순간, 그들이 품어온 희망은 불온한 생각
growth, but he is stuck in a time loop and
fails to become a complete being. The only
way to overcome this situation is by exam- 과 모반의 흔적이 되어버렸다. 민중 스스로 구원자인 아기를 죽
ining where he failed and at which point he 게 함으로써 구원의 길을 닫아버렸다.
38

아기장수는 새로운 세상으로


가기 위한 거대한 서사지만
그 시도가 거듭되는 실패로 인해
좌절되는 비극이기도 하다.

아기장수의 죽음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혐의 should have acted differently. For a start,

부모가 아기의 날개를 태워버리는 장면은 억눌린 백성의


the Mighty Baby should have accepted
the reality of his “dirt spoon” background.
자포자기와 무력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기장수는 Even if his parents would be of no help to
새로운 세상으로 가기 위한 거대한 서사지만 그 시도가 거듭되 him in the future, he should have fully un-

는 실패로 인해 좌절되는 비극이기도 하다. 아기장수는 늘 성장


derstood his parents’ situation and reality.
However, such understanding and trust do
과정에 있지만 반복되는 타임루프에 갇혀서 완성에 이르지 못 not exist between the son and his parents.
한다. 이 상황을 돌파하려면 그가 어디에서 실패했는지 어떤 지 The Mighty Baby should have first

점에서 그의 행동을 수정해야 했는지 면밀하게 돌아봐야 한다.


earned the trust of his parents and the peo-
ple. But he tries to omit this step and quick-
아기장수는 먼저 그가 ‘흙수저’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했어 ly become an adult, a complete being. No
야 했다. 비록 부모가 그의 앞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존 matter what path he chooses, he fails. The

재라 하더라도 그는 부모의 입장과 처한 현실을 충분히 이해했


timing is not right and the people is not en-
lightened, but another reason for his fail-
어야 했다. 하지만 아기와 부모 사이에 그런 공감과 신뢰는 보이 ure is that he skips the process of patiently
지 않는다. searching for the world the people dream

아기장수는 먼저 부모의 신뢰를 얻고 더 나아가 백성들의 지지를


of. The Mighty Baby and Yongma (Dragon
Horse) should have become partners, but
얻어야 했다. 하지만 아기장수는 이 단계를 뛰어넘어 성급하게 they fail to achieve that dream. Even if the
아기에서 어른으로, 완전체가 되려 했다. 아기장수는 어떤 길을 Mighty Baby had become a complete per-
39

아기장수 설화의 정점은 바로


‘속 빈 바위’ 이야기다. 마옥산에 있는
수많은 바위는 아기장수와 용마를 키우고 있다.
한 아기장수가 나와 실패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son, riding the Dragon Horse, the dream 선택하든지 계속해서 실패를 경험한다. 이렇게 실패하는 이유는
아직 때를 만나지 못했거나 민중이 아직 각성하지 못한 탓이기
would have still eluded him. But the sto-
ry does not end here. The tale of Agijangsu
leaves us with two clues that hint at anoth- 도 하지만, 그들이 꿈꾸는 세상을 인내심을 갖고 함께 모색해가
er form of hope and longing. 는 과정을 밟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기장수와 용마는 짝이 되어
야 함에도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한다. 용마를 타고 완전체가 되
 ocal people’s responsibility
L
to protect local culture 었다 해도 아마 꿈을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
The first clue is the rock. The grief-stricken 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기장수 이야기는 우리에게 또 다른
희망과 기다림을 예고하는 두 가지 실마리를 던져준다.
parents bury their son under a large rock at
Maoksan Mountain. But the rock is like an
incubator that not only protects the baby
but also fosters the Dragon Horse and army 지역문화를 지켜내는 것은
for the baby to fight with. Some boulders
지역민의 몫이다
conceal the Mighty Baby’s armor and hel-
met. When all is ready, the rock will open by 첫 번째 실마리인 바위를 보자. 부모는 탄식하면서 아기를
itself. But even this rock cracks when sol- 마옥산 큰 바위 밑에 묻는다. 바위는 아기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인큐베이팅 공간이다. 바위는 아기뿐만 아니라 용마와 거병할
diers sent by the king hit it with silver grass.
The silver grass represents grassroots peo-
ple. Just as the parents snipped the baby’s 군사들까지 키운다. 어떤 바위에는 아기장수가 입을 갑옷과 투
wings, so too did they reveal the secret of 구가 들어 있다. 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면 바위는 저절로 열리
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바위도 왕이 보낸 군졸들이 억새풀로 내
the rock. The Mighty Baby who fails to ma-
ture into a complete being meets a tragic
death once again. 려치자 갈라지고 만다. 억새풀은 민초인 백성을 상징한다. 아기
The second clue is the river. Water is 의 날개를 자른 것도 부모이듯 바위를 여는 비밀을 누설한 것도
부모다. 그래서 완전체로 성장하지 못한 아기장수는 또다시 비
another source of life. After the Dragon
Horse jumps into the river, word spreads
that the Mighty Baby is living in the riv- 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er. When even the parents and the rock fail 또 다른 실마리인 강물을 보자. 물은 또 다른 생명력의 공간이다.
용마가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간 후부터 이 강물에 아기장수가
to protect the baby, the river takes him in
and fosters hope for his survival. The high-
light of Agijangsu’s story is the part about 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 부모도, 바위도 지켜주지 못한 아기
the “empty rock.” The innumerable rocks 장수를 이번에는 강물이 받아서 길러내리란 새로운 희망을 예고
한다. 아기장수 설화의 정점은 바로 ‘속 빈 바위’ 이야기다. 마옥
at Maoksan Mountain are looking after the
Mighty Baby and the Dragon Horse. Even
when one Mighty Baby fails, the story does 산에 있는 수많은 바위는 아기장수와 용마를 키우고 있다. 한 아
not end there. Other Might Babies will rise 기장수가 나와 실패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또 다른 아기장
수가 바위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위 속에서 자라
from the rocks. As long as they are matur-
ing inside the rocks, a yearning for a new
world will continue. Hope for local culture, 고 있는 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백성의 바람과 온전히
completely independent and with a bud- 독립적이면서 저마다의 가능성을 꽃피울 지역문화에 대한 희망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ding potential, will also continue.

Written byDong-Joun Rhee,


글 이동준 이천문화원 사무국장
secretary general, Icheon Cultural Center
Illustrated by
Yang Lim 일러스트 임양(책배여강)
D
40
지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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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의 도시, 한방의 도시, 물의 도시. 제천을 수식하는 말은 많지만,
한여름의 더위를 피해 이곳을 찾는다면 단연 물의 도시, 제천의 진면목을 살펴야 한다.
충주호와 옥순봉, 의림지와 용추폭포는 잘 알려진 관광지를 여행하는 단순한 즐거움보다
인위적이거나 과장되지 않은 자연의 정성스러운 손바람을 맞을 수 있는 곳이다.
눈을 감으면 금세 달콤한 오수午睡에 들 것 같은 제천으로 향했다.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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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에 개통한 제천 8경 옥순봉
출렁다리는 충주호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제천의 명소다. ©제천시청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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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청이 지정한 우리나라
100대 명산에 드는
제천의 금수산은 단풍이
들면 비단에 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수산
기암절벽에 기대 있는
정방사는 충주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을
자랑한다.
©제천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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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부터 존재했으며
지금까지 실제 관개시설로
활용되는 유일한 저수지인
의림지 전경. 제천 10경 중
제1경으로 꼽힌다.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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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지 못하고 터져 죽어
만들어진 곳이라는 전설을
지닌 용추폭포. 이곳에
설치된 유리 전망대는
발아래 쏟아지는 폭포를
내려다보며 걸을 수 있어
색다른 스릴감을
느낄 수 있다.
44
지역문화︒

항일 의병의 역사를 따라
제천을 걷다
제천 시내를 가로지르는 도로에는 의병대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곳이 구한말 항일 의병의 근거지였음을 은유하는 듯하다.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싸운 의병들의 애국심은 제천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45

왼쪽 화서학파의 명맥을
잇는 선비들과 전국에서
들고 일어난 항일 의병을
모신 자양영당과
숭의사의 전경

오른쪽 의암 유인석이
제천의병을 지휘할 때
사용했던 당시의 지도

제천의병의 의미를 곱씹는 여행의 시작


제천을 중심으로 일어난 구한말 항일 의병, 즉 제천의병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화서 이항로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조선 유교문화의
정수를 지키고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위정척사론을 주창했으며, 이러한
사상에 공감하는 이들이 한데 모여 화서학파가 만들어졌다. 그중 한 명으로
춘천에서 활동하던 성재 유중교는 번잡한 정세를 피해 1889년 제천의 장담
마을로 터를 옮겼다. 이름 높은 화서학파 선비 중 한 사람이었던 만큼 장담마
을에는 그를 흠모하는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제천의병의 정신적 뿌리는 이
렇게 형성됐고, 4년 후 유중교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제자들에 의해 위정척
사사상이 굳게 자리 잡았다.
1895년 일제가 조선의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상투를 자르게 한 단발령
을 강행하자, 전국 각지에서 일제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위정척사
사상으로 무장한 제천의 선비들도 의병을 조직했으며, 유중로의 제자인 의
암 유인석이 제천의병의 대장 격인 호좌의진湖左義陣 자리에 올라 의병 봉기
의 명분을 팔도에 천명했으니, 1896년 2월 7일의 일이었다.
제천, 청풍, 단양, 영춘 등 사군四郡 지역을 장악한 제천의병은 곧장 충주로
진격, 2월 17일 점령에 성공했다. 이후 서울로 진출하려 했지만 최신식 무기
로 중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공세에 시달려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점차 세
력이 줄어들어 의병이 해산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인석은 후일을 도모하
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독립군의 밑바탕을 마련했다. 한편 제천의병은 1907
년 고종의 강제 퇴위 및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다시금 들고 일어섰으며, 산악
지형 전투에 약한 일본군을 괴롭혔으나 의병대장인 운강 이강년이 체포됨에
따라 세력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제천의병의 굳센 항일 정신은 독립군
에게로 계승되어 민족 해방과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했다.
46

위 항일 의병을 모신
성스러운 사당을 지키기
위해 자양영당 입구에
우뚝 선 홍살문

아래 자양영당에는
주자학의 창시자인 주희,
우암 송시열, 화서 이항로,
성재 유중교 등 화서학파의
맥을 잇는 대표적 선비들이

장담마을의 제천의병관과 모셔져 있다.

자양영당 그리고 숭의사


화서학파 선비들이 수학했던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장담마을에 가면
제천의병의 발자취를 상세히 살펴볼 수 있는 제천의병전시관이 마련돼 있
다. 입구에 들어서면 영국 〈데일리 메일〉 신문의 맥켄지 기자가 촬영한 의병
사진을 동판 부조로 만들어놨는데, 국사 교과서에서 익히 봐온 장면인데도
가슴 한편이 뭉클해진다. 좌측 입구에서 시계 방향으로 돌면 을미사변 전후
의 국내 정세와 제천의병이 조직된 과정, 대표적 전투인 남산전투 디오라마,
일제의 보복으로 폐허가 된 제천의 사진, 1907년 이후 운강 이강년을 중심으
로 한 후기 의병 활동 등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의암 유인석이 직접 사용
했던 지도 등의 유물도 다수 전시돼 있어, 당시의 의병활동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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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숭의사에서 바라본
자양영당

오른쪽 숭의사(왼쪽)와
자양영당(오른쪽)은 항일 의병을
기리기 위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왼쪽 위 제천의병전시관
입구에는 영국 〈데일리
메일〉 신문의 멕켄지
기자가 촬영한 의병 사진을
동판 부조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왼쪽 아래
제천의병전시관에는
항일 의병 당시에 만들어진
유물들이 다수 전시돼 있다.

오른쪽 제천의병의 숭고한


구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천의병전시관 앞에
세워진 제천의병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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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에서는 제천의병과
순국선열의 숭고한
구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천의병제를 봉행합니다.
작년에 제천의병제는
의병에 대한 청소년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제천 청소년들이 대거
참석하는 청소년의병제로
행사를 치렀으며,
올해도 청소년의병제로
진행할 계획입니다.”

왼쪽 위 숭의사에 모셔진 의암 유인석 위패와


전국 항일 의병을 기리기 위해
그 뒤에 세워진 10폭의 백지 병풍

왼쪽 아래 제천 화서학파의 원류인 성재
유중교가 머물렀던 장담마을의 고택

아래 자양영당에는 구한말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다.

제천의병전시관 왼편에는 자양영당과 숭의사가 나란히 들어서 있다. 1907년


에 지어진 자양영당은 주자학의 창시자인 주희, 우암 송시열, 화서 이항로, 성
재 유중교 등 화서학파의 맥을 잇는 대표적 인물들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이
며, 숭의사는 제천의병전시관, 제천의병기념탑과 함께 세워진 사당으로 구한
말 들고 일어났던 모든 항일 의병을 모신다는 의미를 담아 의암 유인석의 위
패 뒤에 10폭의 백지 병풍을 둘러쳤다. 제천문화원 황금자 사무국장이 매년
이곳에서 거행되는 제천의병제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매년 10월 초 제천에서는 제천의병과 순국선열의 숭고한 구국 정신을 기리
기 위해 제천의병제를 봉행합니다. 자양영당과 숭의사 앞에서 진행되는 제
례, 취타대 행진, 학술 행사, 의병 유물 전시회 등이 두루 열리는 명실상부 제
천시 대표 행사인데요. 작년에 제천의병제는 의병에 대한 청소년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제천 청소년들이 대거 참석하는 청소년의병제로 행사를 치
렀으며, 올해도 청소년의병제로 진행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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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아래
제천의병사에서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제천시 화산동에 위치한 남산은
일제의 대대적인 공격에 밀려난 의병이
최후의 방어전을 벌였던 곳이다.
전기 제천의병 최후의 격전지, 남산
제천시 화산동에 있는 해발 276m의 작은 동산인 남산은 제천의병사에
서 매우 중요한 장소다. 일본군 및 관군과의 최대 격전지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치열한 공세에 밀려 충주성에서 제천으로 밀려난 의병은
남산에 주둔하며 항일 투쟁을 이어 나갔다. 1865년 5월 25일에는 대대적인
공격에 맞서 최후의 방어전을 벌였다.
제천의병은 고장숲 전투에서 세 차례나 적을 물리쳤지만, 오후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서 주요 무기인 화승총에 불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무기를
잃은 제천의병은 하릴없이 밀렸는데, 이때 의병을 이끌던 중군장 안승우와 종
사 홍사구는 의병들을 피하게 한 뒤 끝까지 항전하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순국
했다. 남산 정상에 가면 이 같은 역사를 담은 남산 격전지 표지가 우뚝 서 있다.
제천시는 2019년부터 진행 중인 화산동 도시재생 뉴딜사업의 일환으로 남산
에 의병공원을 조성한다고 밝혔다. 제천의병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 나가려는
©국가문화유산포털
지자체와 지역 주민들의 꾸준한 노력이 사뭇 감동적이다.
50

위 제천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인


의림지는 항일 의병과도
관련이 깊지만, 의림지 일대에서
열리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천의 대표 명소, 의림지의 울창한 그늘 상영 장소와도 가까워 제천을 찾는
이들에게 새로운 명소로
제천은 ‘둑 제堤’ 자와 ‘내 천川’ 자로 이뤄져 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이 거듭나고 있다.

름이 붙은 이유를 의림지에서 찾는다. 의림지는 삼한시대 때 축조된 저수지 아래 포전리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
보호수 아래 세운
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까지 실제 관개시
‘운강 이강년 의병장 피체 유적비’
설로 활용되는 유일한 저수지다. 앞서 설명한 전기 제천의병의 대장을 일컫
는 명칭인 호좌의진도 의림지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의림지라는 호수의 좌측
에 있는 제천에서 일어난 의병 부대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1907년 후기 제천의병 창의 당시 제천을 중심으로 활약한 의병대
장 운강 이강년과 부하 장수들이 전략과 정치를 논했다는 정자가 있다. 바로
1807년에 지어진 영호정이다. 화강암 주춧돌 위에 나무로 지어진 단층의 정
자로, 팔작지붕에 정면과 측면이 각각 2칸인 작은 규모지만 제천의병의 주
요 인물들이 전황과 정사를 논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영호정에서 의림지를 바라보고 왼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또 다른 정자 경호
루와 만난다. 1948년 이 정자를 지을 당시 주변의 소나무를 베었는데, 소나
무에 박혀 있는 화승총 탄환 때문에 톱 여러 자루가 부러졌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점으로 미뤄볼 때 의림지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전투가 벌어
졌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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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제천의병의 주요 인물들이
전황과 정사를 논했다는 영호정

아래 제천 항일 의병의 역사를 한편 운강 이강년은 1908년 7월 2일 의병 70여 명과 포전리에서 까치산으로


둘러보면서 함께 가기 좋은
곳으로는 배론성지가 있다. 이동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왼쪽 발목에 총상을 입고 붙잡힌 뒤 이
1800년대 천주교 박해를 피해
듬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을 거뒀다. 제천의병유족회, 제천의병정신계승지
숨어든 신자들이 모여 형성된
배론성지는 마을 계곡이 도사협의회 등 제천의 시민단체는 2021년 10월 제천시 금성면 포전리 마을
‘배 밑창을 닮았다’해서
입구의 느티나무 보호수 아래 ‘운강 이강년 의병장 피체 유적비’를 세워 그의
붙여진 이름이다.
애국심을 되새겼다.

글 강진우 사진 김현민
52
지역문화︒

˘¨

영화와 음악이 만나는


제천의 재발견
영화음악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제천영화음악아카데미

이건호
영화음악감독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을 한 달여 앞둔 영화음악으로 일상의 템포를 회복하다


7월 어느 날, 제천영화음악아카데미JIMFA 프로그램 제천국제음악영화제JIMFF는 매년 여름 제천에서 열리는 영
준비에 한창인 이건호 영화음악감독을 만났다. 화와 음악의 감동이 함께하는 국제영화제다. 지난 2005년 1회를
그는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OST에 참여해 시작으로, 올해 18회째를 맞았다. JIMFF는 그동안 〈원스〉, 〈서칭
주목받고 있는 작곡가이자, 제천영화음악아카데미 포 슈가맨〉, 〈치코와 리타〉, 〈프랭크〉 등 다양한 음악영화를 대중
담당자로 영화음악을 꿈꾸는 이들과의 에게 소개하고, 제천을 방문하는 젊은이들이 이곳의 숨은 매력을
즐거운 소통을 계획 중이라고 했다. 새롭게 발굴하고 견인하는 역할을 해왔다. JIMMF가 제천의 대표
적인 페스티벌로 자리매김한 데에는 2006년부터 영화제의 역사
와 나란히 해온 제천영화음악아카데미가 내실을 받쳐주고 있었
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53
54

JIMFA는 국내외 최고의 영화음악감독들의 수준 높은 강의


와 멘토링을 받을 수 있는 캠프 형식의 영화음악아카데미다. 영
화음악 전문가를 꿈꾸는 수강생들에게 직접 단편영화 음악을 제
작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만의
색깔과 독창적인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을 한 달여 앞둔 7월 어느 날, JIMFF와
JIMFA를 잇는 영화음악 작업에 한창인 이건호 영화음악감독을
만났다. 그는 JIMFA 프로그램 참여 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3년간 영화제 준비를 같이 했으며,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OST
에 참여해 주목받고 있는 작곡가이다. 현재는 JIMFA에서 교육총
괄을 맡고 있기도 하다.

“영화음악은 온전히 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음악입니다. 물론


하나의 독립된 음악으로서도 가치가 있고 훌륭하지만, 영화
음악은 영화를 위한 음악으로 만들어집니다. 영화의 연출
방식은 다양합니다. 영화의 장면이 눈빛으로 암시하거나 영
화 〈마더〉에서처럼 몸동작으로 표현된다면 영화음악은 음
악으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영화음악은 종종 배경음악의 역할을 넘어 정서적 텍스트


로 쓰이기도 한다. 보통 장면의 전환 직전에 쓰이는 음악은 긴
장을 유발하면서 어떤 극적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건호
감독이 영화음악의 매력에 빠지게 된 계기는 영화 〈글래디에이
터〉였다고 한다. 작곡가 한스 짐머Hans Zimmer가 음악을 맡았다.
전쟁이 시작되는 첫 신에서 웅장하게 퍼져나가던 음악이 긴박
감을 더하며 정서적인 음악으로 변해갔고, 그러면서 자연스럽
게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는 어린 병사들의 마음을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영화음악만이 지닌 정서의 힘을 느꼈다
고 한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영화와 음악,


젊음과 낭만이 어우러진 한여름 밤의
멋진 페스티벌로 자리 잡았다.
사진은 2021년 영화제 모습
55

“좋아하는 작곡가는 영화를 보고 나면 늘 바뀌는 것 같아요. 〈글


래디에이터〉의 한스 짐머, 그리고 최근에는 드라마 〈파친코〉의
OST 전곡을 작업한, 현대 클래식 음악의 주목받는 작곡가 니
코 멀리Nico Muhly입니다. 요즘엔 니코 멀리에 빠져 있어요.”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영화 ‘베스트 3’을 꼽아 달라고 하자,


그는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을 작업할 때 〈다크 나이트〉의 한스
짐머를 많이 참조했다고 한다. 현재 그는 김준성 음악감독의 스
태프로 일하고 있다. 〈집으로 가는 길〉의 작업 과정을 보고 음악
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즉흥연주는 실로 놀라워서 녹음된 원본과 실제 음원
으로 발매된 음반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최근에 가장 영
향을 받은 작곡가는 〈크루엘라〉, 〈돈 룩 업〉 등을 작곡한 니콜라스
브리텔Nicholas Britell이다. 현대음악을 베이스로 하는 그의 영화음
악은 새로운 시선을 보여준다.

새로운 장르에 대한 도전이 즐겁다


최근 이건호 감독의 관심은 웹드라마나 게임, 숏폼 콘텐츠
등으로 장르가 확장되고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에서 동영상을
보는 것은 이제 익숙한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10~30대 사이에선
웹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다. 20분 이내의 짧은 에피소드로 구성
된 웹드라마는 소셜 미디어로 쉽게 전파된다. 유튜브와 OTT 서비
스, 넷플릭스의 등장으로 스트리밍 서비스가 확산되었기 때문이
다. 특히 각광받는 콘텐츠는 ‘숏폼short form’이다. 숏폼은 1분 이내
의 극초 단위에서 10분 이내의 짧은 영상까지 다양하다.

“최근에 웹드라마, 숏폼 콘텐츠가 많이 제작되고 있어요. <플레이


리스트>, <와이낫 미디어> 등 다양한 웹드라마 제작사, <짧은 대
본>, <너덜트>, <숏박스> 등 짧은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한 숏폼이
©안갑주

©안갑주

크게 각광받고 있어요.”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포스터.


‘본래의 빠르기’로 라는 뜻을 가진
음악용어 ‘a tempo’를
콘셉트로 했다.
56

기존의 고전적인
장르만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장하고, 동시대적인
콘텐츠와 감각에 부합하는
작업에 도전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이건호 감독은 단편영화 〈트레이드〉2021에서 편의점에서 사


용하는 바코드 소리를 음악에 음성화하는 독특한 작업을 시도하
기도 했다. 그 외 뮤지컬, 웹드라마, 게임 음악 등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있다. 게임 음악은 유저에게 일어날 수 있는 돌발성, 예
측불허에 대해 철저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완성된
음악으로 출시되는 영화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고 설명한다. 그
러나 이건호 영화음악감독은 기존의 고전적인 장르만을 고집하
지 않고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장하고, 동시대적인 콘텐츠와 감
각에 부합하는 작업에 도전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그의 이러
한 행보는 JIMFA에서 영화음악 지망생들과 만나는 시간에도 반
영돼 수강생들 역시 열린 사고와 마인드로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
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준다.

“JIMFA에서는 종강하는 날 설문조사를 하는데, 수강생들의 의


견을 최대한 프로그램에 반영해 더 나은 교육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카데미를 수료한 수강생들에게서 종종 연락이
옵니다. 이번에 어떤 감독님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올 때 뿌듯함이랄까, 보람을 느끼게 되지요.”

지난 17년 동안 600여 명의 수료생을 배출하며 꾸준히 성장


해온 JIMFA는, 그러나 본인 이름으로 음악감독 타이틀을 가진 사
람은 드물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짐프 OST 마켓’은 재능 있
는 영화음악 작곡가를 발굴하고 실제 데뷔를 위해 기획된 세계 최
초의 영화음악 작곡가 마켓이다. 영화산업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직접 열어주는 한편, 영화 분야에만 한정 짓지 않고 OTT, 웹
드라마, 애니메이션, 게임 등으로 영역을 넓혀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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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에서 펼쳐지는 ‘필름 콘서트’


팬데믹에 지친 일상을 회복하고 본래의 템포로 돌아가기 위
해 역대 최다인 39개국에서 출품한 140여 편의 음악영화가 상영
된다. 다큐멘터리 중심이었던 예전과 다르게 극영화 비중이 크게
늘었다. 작년에 새로 신설된 한국 영화음악이 70%나 증가했을
정도로 한국 음악영화 작곡가들이 많이 참여한다. 〈라스베이거
스를 떠나며〉의 감독 마이크 피기스가 이번에 어드바이저로 온
다. 개막작은 폴란드 바르토즈 블라쉬케 감독의 데뷔작 〈소나타〉
이다. 음악을 통해 청각 장애를 극복한 14세 자폐성 장애 소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올해 신설한 ‘영화와 음악’ 세션에서는 〈헤어질 결심〉의 조영


욱 음악감독, 영화제 프로그램 어드바이저인 마이클 피기스 감
독이 선정한 작품을 비롯해 고故 방준석 음악감독의 추모전도
만나볼 수 있어요. 제천영화음악상 수상자는 영화 〈위플래시〉,
〈라라랜드〉의 저스틴 허위츠예요. 영화제 동안 ‘스페셜 콘서트’
에서 세 편의 영화음악을 선보일 계획입니다. “한국 영화사는
음악 영화사다”라는 주제로 예전 영화 작품을 복원하고 이에
관한 포럼을 열 예정입니다.”

이날 인터뷰에 동석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홍보미디어팀


최승원 팀장은 올해 JIMFF의 야심작으로 ‘필름 콘서트’를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필름 콘서트’는 기존의 영화
를 편곡해, 화면에선 영화가 나오고 무대에선 OST 음악을 오케
스트라 라이브로 감상할 수 있다. 작년에 하지 못했던 ‘원 썸머 나
잇’을 재개할 예정이다. 세계적 수준의 오케스트라 음악으로 구
성된 〈마당을 나온 암탉〉음악 이지수과 영화 〈봄날은 간다〉음악 조성우
가 그것이다. 처음 제작되는 만큼 의림지 무대에서 펼쳐질 두 편
의 필름 콘서트를 통해 한국 영화음악의 수준 높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건호 감독은
제천영화음악아카데미에서
재능 있는 영화음악감독 지망생을
발굴하고 그들이 꿈을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을 함께 한다. 글 이필 사진 김현민
58
지역문화︒

:’

‘미식 관광도시’의
면모를 보여주는
제천의 ‘약채락’
브랜드.
건강 음식점을
발굴하고 다양한
양념장을 개발했다.
59

몸에 좋은 음식이
먹기에도 좋다
제천의 한방 약선음식

제천의 음식은 담백하고 깊은 맛이 특징이다. 또한 약초의 고장답게


산채와 약초를 활용한 향토 음식이 발달했다.
한약재 생산에 있어 오랜 역사를 간직한 제천이 현대인의 건강은 물론
코로나19로 먹거리에 위기감을 느끼는 우리에게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한층 높아지는 이유다.

조선의 3대 약령시장, 제천 은 양념을 쓰지 않는 담백하고 깊은 맛이 특징이다. 국물을 내는 데


‘약초의 고장’인 제천은 조선 시대 3대 약령시장 중 하나로 한 는 고기보다 닭 또는 굴, 조개 같은 것을 쓰며 주로 된장을 풀어 맛
약재 생산과 유통의 중심 도시였다. 전국 약초 생산의 30%, 전국 을 낸다. 또한 약초를 발효한 진액이나 가루를 내어 맛을 내기도 한
황기 유통의 80%를 점유할 정도니 말이다. 제천이 약초의 고장으 다. 제천 향토 음식의 가장 주목되는 특징은 산채 및 약초를 이용한
로 이름을 날린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는데, 우선 지리적 주식이나 부식, 음료 등이 발달했다는 점이다.
특징으로는 동쪽으로 태백산맥, 북서쪽에는 차령산맥, 남동쪽에는
소백산맥이 길게 뻗어 있는 해발 247m의 전형적인 고산 분지다. 제천의 특색은 약재의 생활화
때문에 과거에는 육로 교통이 불편했고, 그나마 철도 교통만 이용 제천 지방은 산악 지역이라는 지역적 특색으로 인하여 예전
할 수 있었다. 특히 4면이 바다에 접하지 않는 국토 내륙 깊숙한 곳 부터 많은 종류의 한약 재료와 희귀한 약재들이 산출되었다. 이
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발효 음식과 저장 러한 이유 때문인지 각 가정에서도 약재를 흔히 접할 수 있었고,
음식이 발달했다. 겨울에는 몹시 추운 날씨를 극복하기 위해 뜨겁 일반식에 독하지 않으면서도 약이 되는 약재를 두루 활용해왔다.
고 매운 음식이 발달하기도 했다. 제천 음식은 사치스럽지 않고 많 약재의 생활화가 역사가 되어 지방화 시대에 제천 지방의 특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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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을 접목한
건강 음식점으로
지정된
‘열두달 밥상’과
‘산아래’ 대표 메뉴

되면서 점차 제천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한방 약선음식이 자 의 대표적인 한방 음식으로는 약채락음식, 약초밥상, 약초떡, 약
리 잡게 되었다. 초순대, 한방갈비, 약초한정식, 한방오리탕, 한방백숙 등을 들 수
앞서 말한 것처럼 제천은 일찍이 조선 시대 전국 3대 약령시로 자 있다. 이는 제천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제
리매김해 생산과 제조, 가공, 유통 및 서비스 연구, 의료, 한의학 천을 찾는 관광객과 제천 시민에게 건강과 힐링을 제공하는 음식
등 한방 지원과 한방 인프라, 산학연 한방 클러스터가 체계적으 문화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 최근 코로나19 상황으로 전 지구적
로 잘 갖추어져 있다. 2010년, ‘제천 국제 한방 바이오 엑스포’라 인 생태, 환경, 건강에 대한 움직임이 기존과 달리 더욱 다양화되
는 대규모 국제 행사 유치에 힘입어 한방산업은 제천의 경제를 고, 음식에 대한 개념이 단지 입맛을 돋우거나 혀끝의 감각만을
견인하는 새로운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한방산업의 전반적인 발 채우는 방식에서 나아가 현대인의 지친 심신을 보해주는 웰빙 음
전과 함께 음식산업 또한 한방 음식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제천 식이 선호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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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건강 보양식으로 제격인


약채락의 다양한 메뉴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황기삼계탕,
황기구절, 해신탕, 흑임자감자채

제천 미식을 경험하는
첫 번째 키워드, ‘약채락’
어느 한 지역을 여행할 때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요 17개의 약채락 지정 음식업소가 등록되어 약초비빔밥, 약채락정
즘 젊은 세대들의 여행 포인트는 ‘맛집’이다. 그냥 맛집이 아니라 식, 약채통밥, 약초밥상, 울금떡갈비, 황기구절탕 등 귀하고 건강
내용과 형식에 충실한 맛집. 제천시는 2019년부터 특별히 관광미 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약채락 R&D 상품으로 약채락 4대 약념藥
식과 미식마케팅팀을 신설하여 ‘미식 관광도시’로 도약하고자 총 念·건강도시락까지 만날 수 있다. 약채락 식당들은 대부분 식재
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한방을 접목한 제천만의 건강 음식점 료를 직접 생산하거나 지역 내에서 생산한 것들을 사용하는 ‘팜투
을 발굴해, 이를 보존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약채락’이라는 브랜 테이블Farm to Table’, 즉 건강 밥상을 실천하는 곳이니 믿고 먹을 수
드를 만들었다. 약채락은 ‘약이 되는 채소를 먹으면 즐겁다’는 뜻 있다. 약채락은 여행자가 제천 미식을 경험하는 첫 번째 키워드이
으로 제천에서 생산되는 11대 GAP 우수 약초를 주재료로 만들어 며, 식당을 선택할 때 사용하는 패스워드 같은 기능을 한다.
건강·맛·멋의 기능성을 더한 제천시 건강 음식 브랜드다. 현재는 정리 편집실 사진제공 제천시청 관광미식과 미식마케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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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와 사 진 한 모금

구릉의 집
너른 들판 가운데 구릉의 집은
먼 곳 대신에 하늘을 가졌다
굴뚝은 뜻 없는 편지를 자주 썼다

먼 곳이 아프면
하늘의 배를 둥글게 쓸어주었다
고개는 들고 또 천천히 고개를 내리는 날은
바람은 너울 같아서 창문이 조금 더 닳았다

한 방향으로 우는 유리창으로는
눈에 바른 모든 풍경이 따라 울었다

구릉의 집은 먼 곳 때문에
처음부터 평평하지 않도록 태어난 집이다

심재휘 시인. 1997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외 다수가 있다.
현대시 동인상, 발견문학상, 김종철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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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하선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사진집 《삶의 중간보고서》《天葬》《발해의 恨》《太王의 증언》 등


희미한 유년을 품은 무섬
현 대 문 화 。방 방 곡 곡 유 랑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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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앉아 있는 물섬.
‘물’에 붙어 있던 ㄹ은
언젠가 물결 따라 흘러가버리고
무섬만 남았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그리움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겠지.

강변 연가
금빛 모래가 펼쳐진 들판 위로 느릿한 강물이 곡
선을 그린다. 해거름 무렵이면 동무들과 어울려 종종
멱을 감았다. 물은 깊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강바닥
의 큼직한 돌덩이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저 멀리 햇
빛에 반짝이는 모래톱을 바라봤다. 희미한 유년의 기
억이다. 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들을 때
면 덩달아 연상되는 풍경이다. 외가가 있던 경북 봉
화의 내성천이다. 이 강물이 흘러 영주의 무섬마을을
지나 예천의 삼강주막 앞에서 낙동강으로 합류된다.
경상도를 세로로 가르는 낙동강의 지류에는 강물이
산에 막혀 물도리동을 만들어낸 곳이 여럿 있다. 안
동의 하회, 예천의 회룡포, 그리고 영주의 무섬이다.
하회나 회룡포는 모두 물이 ‘돈다’는 뜻의 ‘회回’ 자가
들어 있다. 무섬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는 뜻으로
행정지명은 수도리水島里로 쓴다. 섬이라고 했지만 한
강의 여의도나 노들섬처럼 사방이 온통 강물로 둘러
싸인 것은 아니다. 굽이치는 강물 사이에서 ㄷ자 형
으로 불거져 있는 지형이다. 앞은 물로 가로막혀 있
고 뒤는 산으로 둘러싸여 섬처럼 고립된 곳이다.
봉화의 내성천과 소백산맥에서 발원하여 영주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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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에 와서 보니 알겠네 그리움에 젖은 외나무다리


메마른 눈짓이었을 뿐이었노라. 이른 아침, 강가로 나가니 아직 잠을 떨쳐내지
떠나보낸 시간들이 여기 켜켜이 모래로 쌓이고 못한 강물이 새벽 공기에 교교하다. 홀로 엎드려 있
물길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는 외나무다리는 외로운 나무다리라서 어쩔 수 없이
외롭다. 백로 몇 마리가 강물에 발을 담근 채 부지런
둘 데도 놓을 데도 없이 정처 없는 마음자리일 때 히 머리를 놀리고 있다. 아침 식사 중인 모양이다.
하도 외로운 발길이 하릴없이 물가로 향할 때 무섬마을에는 살림집은 있지만 이렇다 할 논밭이 없
여기 그리움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다. 우물과 사당도 없다. 마을이 가라앉을까 봐 우물을
무섬에 와서 보니 알겠네.” 파지 않았고 홍수에 떠내려갈까 봐 조상을 모시는 사당
도 만들지 않아서다. 다만 이 외나무다리로 강을 건너

최대봉 <무섬에 와서 보니> 중
가 농사를 지었다. 마을 이름을 딴 콘크리트 다리수도교
가 생기기 전까지 이 외나무다리만이 외부와 연결되는
통로였다. 외나무다리를 탯줄처럼 붙들고 산 것이다.
예전부터 비가 많이 내리면 다리가 강물에 잠겼고,
훑고 온 서천이 맞닥뜨려 물위에 연꽃을 피웠다. 풍 홍수가 지면 휩쓸려 떠내려갔다. 그럴 때마다 마을
수지리상 ‘물위에 핀 연꽃蓮花浮水形’ 또는 ‘매화 떨어 사람들은 다리를 새로 놓았다. 몇 년 전에도 홍수로
진 자리梅花落地形’로 풀이되는 길지다. 그래서인지 조 다리가 떠내려가 외나무다리 축제가 취소되기도 했
선 시대의 여러 환란과 천재지변에도 크게 그 원형을 다. 최근부터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가 드라마나 영
잃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화, 광고에 아름다운 촬영지로 소개되면서 많은 이들
무섬은 아늑함과 광활함이 함께하는 곳이다. 강변을 이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무섬마을은 중요민속문화
경계로 뭍 쪽으로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안온 재로 지정됐으며, 외나무다리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하며, 둑방 너머로는 금빛 모래로 뒤덮인 너른 백사 100선에 선정되었다.
장이 이어진다. 수십 년 전엔 대청마루에 앉아서도 이 다리는 반원형으로 자른 나무를 대충 다듬은 뒤 얕
저만치 흘러가는 강물이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여 은 물길을 따라 나무 발을 세우고 상판을 얹은 것이
차하면 홍수에 강이 범람하여 지금은 마을 앞에 둑을 다. 높이는 약 60cm, 상판의 폭은 20~30cm, 총길이는
쌓아놓았다. 150m 정도다. 넋 놓고 다리를 걷다 보면 어지러울 때
청정수역인 내성천 상류에서 여름날 은어를 잡았듯 가 있다. 발끝만 쳐다보다가 문득 저만치 흘러가는 강
이 무섬에서도 반두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고, 오후 물을 바라보면 다리가 후들거린다. 물을 투과한 맑은
나절엔 순한 강물에서 멱을 감았을 것이다. 어렴풋한 햇살이 강바닥에서 일렁인다. 찌릿한 물멀미다.
그 옛날의 내성천을 무섬에 와서 추억한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지금의 다리는 ‘대로’라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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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나무다리를 예전에는 쪼맨하게 똑바로 맨들었니더.


나무가 있어야 크게 만들지 않았겠니껴?
시가 맨들면서 이마이(이만큼)
태극모양으로 휘돌게 맨든 기라.”

하얀 백사장과
맑은 강물 위에
20~30cm 폭으로 다. 과거엔 손바닥보다 조금 넓은 정도의 폭으로 반 마을에서 평생을 보낸 할매의 말씀이다.
놓여 있는
외나무다리
듯하게 만들었다. 새끼줄로 묶어놓아 물살이 센 곳에 “외나무다리를 예전에는 쪼맨하게 똑바로 맨들었니
서는 나무의 이음매가 삐걱거렸다고 한다. 게다가 외 더. 나무가 있어야 크게 만들지 않았겠니껴? 시가 맨
나무다리를 건너다 맞은편에서 누가 오기라도 하면 들면서 이마이(이만큼) 태극모양으로 휘돌게 맨든
어쩌나? 하필 이곳에서 원수라도 만난다면 이런 낭 기라.”
패가 없겠다. 원수가 아니더라도 이 좁은 다리 위에 마을에 현대식 콘크리트 다리가 들어선 뒤에야 이 외
서는 비켜설 수도, 강물로 뛰어들 수도 없다. 그럴 땐 나무다리도 신작로로 바뀌었다. 넓어졌다 해도 외나
한쪽 사람이 쪼그리고 앉는다. 그러면 맞은편 사람이 무다리를 건널 때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발끝을 주시
앉은 사람을 타넘어갔다고 한다. 2005년부터 시에서 하며 걸어야 한다. 한눈팔거나 자칫 균형을 잃으면
이 다리를 복원해 관리하면서 지금처럼 S자형의 휘어 물속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빠진다고 해도 그다지 깊
진 다리가 되었다. 다리 폭이 예전의 두 배나 되고 군 지 않으니 크게 위험할 일은 없지만, 옷과 몸을 적시
데군데 ‘비껴다리’도 잇대어 놓았다. 반대편에서 누 면 찝찝하고 번거로울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콘
가 오면 잠깐 비껴다리로 몸을 피하는 것이다. 무섬 크리트 다리를 이용하면 될 것을, 왜 다들 이 다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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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의 집들은 음전하다.


겉치레도 없지만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다.
대개의 집들이 지붕의 용마루 양쪽에
구멍이 뚫려 있는 까치구멍집이다.

와서 건너보려고 난리들일까? 조마조마한 긴장감, 은 독립운동가 김성규 선생의 집을 복원한 것이란다.


불편함을 체득하고 싶은 거다. 다리 위를 걸어봐야 경북 영양 출신의 조동탁이 이 집안으로 장가를 들었
비로소 발밑으로 흐르는 강의 흐름도 여실히 느낄 수 다. 청록파의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활동했던 〈승무〉
있다. 강물과 더욱 가까이 하고 싶다면 비껴다리에 의 시인 조지훈이다. 그러니까 무섬식당은 조지훈의
걸터앉아 발을 담가도 좋다. 발가락 사이로 미끄러지 처갓집 터다. 지훈은 아내에게 난희籣姬라는 예명을
는 물의 질감, 교각에 부딪치며 재잘거리는 물방울들 지어줬다. 그는 신혼 초 자주 처가에 머물렀다고 하는
의 수다를 들을 수 있다. 데 혼자 서울로 떠날 때 시를 지었다. 이별離別이 다소
서정이 담긴 어드벤처 테마파크. 이 외나무다리를 건 상투적이었는지 별리別離라고 했다. 아내의 입장에서
너며 물처럼 떠내려가는 시간의 앙금들을 기억의 모 헤어지는 슬픔을 표현한 것이지만, 무섬의 풍광이 언
래로 쌓는다. 급되어 있다. 〈별리〉 시비가 이곳에 세워져 있다.
훗날 김난희는 무섬을 방문하는 이들이 식사할 곳이
시가 익는 마을 없다는 것을 알고 친정집이자 지훈의 처가인 김성규
무섬의 집들은 음전하다. 겉치레도 없지만 그렇 가옥을 지자체에 기증하며 식당으로 활용토록 했다.
다고 초라하지도 않다. 대개의 집들이 지붕의 용마루 일제강점기 때 집에 들렀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어머
양쪽에 구멍이 뚫려 있는 까치구멍집이다. 까치둥지 니가 밥을 지어 대접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비록 손수
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대문만 닫으면 외 대접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마을을 찾아온 이들이
부와 단절된 채, 집 안에서 생활하는 폐쇄적인 ㅁ자 편히 앉아 밥 한 그릇 먹고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형 가옥이다. 용마루 양쪽의 구멍은 난방이나 조리 뭇 시인들이 무섬을 언급했는데, 조지훈은 〈별리〉
시 발생하는 연기를 외부로 배출하고 낮에는 빛을 받 에서 ‘끊길 듯 끊길 듯 고운 메아리’라고 했고, 다른
아들여 집 안을 밝혀주며 통풍과 습도를 조절하는 숨 시인 황정희는 〈무섬, 결의 깊이〉에서 ‘휘돌아 흐르는
구멍 역할을 한다. 강물이 은빛으로 일어선다’고 했다. 영주 출신 작가
이제 보니 까치구멍이나 외나무다리는 모두 외부와 최대봉은 〈무섬에 와서 보니〉에서 ‘떠나보낸 시간들
교통하는 숨구멍이었다. 무섬은 은둔의 방식으로 자 이 켜켜이 모래로 쌓인다’고 했다. 강물처럼 세월이
신들의 삶의 모습을 지켜왔지만, 외부의 변화도 감지 흘러도 또 어떤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무섬이 그리움
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많은 여행객이 찾아오지 으로 남겠지.
만 단체관광객을 반기지 않으며, 마을에 이들을 수용
할 큰 음식점이나 편의시설도 없다. 대규모 관광객을 무심한 듯 느슨한 무섬
유치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무섬마을은 대중교통으로 방문하기는 수월치
식당이라는 곳이 딱 한 군데 있다. 당초엔 상호가 무섬 않다. 영주시에서 출발하는 노선버스가 없는 것은 아
골동반이었는데 지금은 무섬식당으로 바뀌었다. 이곳 니지만, 외지에서 올 경우에는 어느 정도 불편을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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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구멍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무섬마을
‘그리움이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중 일부를 발췌하고 편집했습니다.
* 이 기사는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 한국판〉에 실린

수해야 한다. 그렇게 찾는다 한들 소문난 맛집이나 다. 사실 기억이 또렷하다 해서 무에 그리 좋을까? 기


운치 있는 카페, 볼거리가 많은 것은 아니다. 단지 강 억은 불편한 것을 덜어내고 의미 있는 것을 강조하려
물 위에 떠 있는 고고한 외나무다리, 고즈넉한 강마 는 본성이 있다. 때문에 기억이 침전되고 발효되면 아
을이 기다릴 뿐이다. 름다움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아
무섬! 무심으로도 읽힌다. 강물도 백사장도 무심하 름다운 기억 한두 조각쯤은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간다.
다. 무심해서인지 느슨해진 기억을 환기해준다. 기억
글과 사진 박현택 연필뮤지엄 관장. 지은 책으로 《오래된 디자인》, 《보이지
도 원근법에 따르니 지금에서 멀어질수록 흐릿해진 않는 디자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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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대 문 화 。사 진 으로 역 사 를 보다

여성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기록한


주미조선공사관
駐美朝鮮公使館

캐서린 카바나가 쓴 글에는 워싱턴에서 활동하고 있던 여성 다큐멘터리 사진가


프랜시스 존스턴이 찍은 워싱턴 주미조선공사관 사진이 실려 있다.
공사관의 응접실과 이범진의 가족사진 등은 당시 조선의 외교활동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Benjamin Johnston, 주미대한제국공사관,


Glass Plate, 1893, The Huntington Library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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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의 나라, 조선이 서양 언론에 등장하다 “그곳 사람들이 조선이라고


1897년 11월 미국 워싱턴 D. C.에서 발행한 여성 잡지 〈The 부르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Puritan〉 2호의 37~38쪽에는 「THE COREAN LEGATION」이라 코리아Corea는 지난 수 세기
는 소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캐서린 카바나Catherine F. Cavanagh 기 동안 다른 나라 사람들의
자가 쓴 글로 조선의 정치적, 문화적 상황과 미국과의 관계 그리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고 공사관의 활동과 가족들의 생활상과 인물평을 담은 내용이 곳이다. 항구는 닫혀 있었고,
다. 이 기사에는 워싱턴에서 활동하고 있던 여성 다큐멘터리 사 사람들은 해외로 나가는
진가 프랜시스 존스턴Frances Johnston이 찍은 워싱턴 주미조선공사 일이 거의 없었다. 스스로의
관의 전경을 담은 사진과 공사관 응접실 사진 두 장과 당시 워싱 힘으로 스스로를 위해
턴의 사진관 〈Smith & Buck Studio〉에서 찍은 주미조선공사駐美朝 살았기에 은둔자의 나라로
〈The Puritan〉 1897년 11월호 표지
鮮公使 이범진李範晉, 1852~1911의 가족사진 한 장 등 상당히 수준 높 불렸다.”
은 사진이 같이 실려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기사의 첫 단락
은 이렇게 시작한다. 미국인들의 시각에서 은둔의 나라였던 조선이 서양의 언론
에 상세히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의
“Corea – or, as the inhabitants call it, Cho-Sen, 국왕 고종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규를 체결한 지 5년이 지난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 had for centuries provoked
1887년 8월 18일양력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견제하고 자주 외교
the curiosity of other nations. Her ports were closed against
foreign commerce ; her people seldom went abroad. 를 실현하기 위해 박정양朴定陽, 1842~1905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
Living for themselves and by themselves, they earned the name 公使로 임명해 미국에 파견했다. “미국 등 서구에 주재공사를 파
of the Hermit Nation.” 견한다”는 내용의 교지를 통해서였다.

Benjamin Johnston,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정당, Smith & Buck Studio, 〈The Puritan〉에 실린
Glass Plate, 1893, The Huntington Library 소장 주미공사 이진범 가족사진, 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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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는 제일 먼저 통상해서 서로 교빙交騁한 지 대 지역 일대가 재개발되어 현재는 고급 빌라가 들어서 있다. 서


여러 해가 되었는데 아직 상주 공사를 파견하지 못했다. 기관 이상재는 피서옥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이는 결점이 되는 일이다. 내무부협판 박정양을
전권대신으로 특파해서 미국의 수도에 주재하면서….” “응접실과 집무실, 침실, 식당, 욕간, 변소, 화장실, 창고까지
구비했다. 맨 꼭대기 층의 전면에 깃대를 세우고
근대적 의미의 첫 외교관, 박정양 파견 태극기를 높이 게양했다.” 《별건곤》 1926년판
박정양은 서양 국가에 상주시키기 위해 파견한 조선의 첫
외교관이었다. 물론 전에 이미 보빙사절단이 다녀왔지만, 현지 16년간 한국의 혼을 지킨 주미조선국공사관
에 상주하는 근대적 의미의 외교관은 박정양 일행이 처음이었 주미조선공사관은 ‘피서옥’을 공사관으로 사용한 지 1년이
다. 참찬관參贊官 이완용李完用, 1858~1926, 서기관書記官 이하영李夏 조금 넘었을 때 비좁은 공간의 한계를 느껴 새로운 장소로 이전을
榮, 1858~1929 , 이상재李商在, 1850~1927, 번역관繙繹官 이채연李采淵, 추진했다. 1889년 2월 워싱턴 북서쪽에 위치한 13번가 1500번지
1861~1900 등 10명으로 구성했고, 여기에 안내자로 미국인 의사 에1500, 13th Street NW에 위치한 건물을 임대해서 옮겼다. 현재의 주
인 참찬관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이 동행했다. 소는 ‘로건 서클Logan Circle 15번지’이다. 공사관을 이곳으로 옮기
고 처음 2년간은 임대해 사용했지만, 1891년 12월에는 본국의 국
고종의 교지를 받은 지 3개월이 지난 11월 일행은 미국군 왕 고종이 2만 5000달러라는 당시로는 거금의 내탕금內帑金을 보
함 오마하호를 타고 인천을 출발했고, 일본과 하와이를 거쳐 태 내와 완전히 매입해 사용했다. 당시 워싱턴에 주재하는 재외 공관
평양을 건너 12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전에 보 으로서는 유일하게 단독 건물이었다. 워싱턴에서 유명했던 ‘주미
빙사절단이 묵었던 〈팔레스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고, 다시 기 조선국공사관’은 1897년 본국의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주미대
차 편을 통해 수도인 워싱턴에 도착한 것은 다음 해인 1888년 한제국공사관’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05년 ‘을사乙巳늑약’으로
1월 9일이었다. 전권공사 박정양은 자신의 미국 활동 경험을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면서 이곳 공사관도 폐쇄되는 운
기록한 《미속습유美俗拾遺》에 “한양을 떠나 육로로, 해로로 3만 명을 맞았다. 그래도 16년 동안 한국의 혼을 지킨 장소였다.
9215리를 여행한 끝에 드디어 워싱턴에 도착했다”고 감개무
량한 소회를 밝혔다. 그리고 1월 17일 미국 글로버 클리블랜드 비록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잃으면서 공사관은 역사 속으
Stephen Grover Cleveland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본격적으로 로 사라졌지만, 건물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 하지만 건물 자체
공식 외교관으로 활동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만큼이나 기구했다. 원래 이 건물은 미국
의 유명한 해군제독 출신으로 워싱턴의 정치가이고 외교관도 지
워싱턴에 도착한 박정양을 위시한 조선 외교관 일행이 처 냈던 세스 펠프스Seth L. Phelps, 1824~1885가 자신의 노후를 보낼 주
음 한 일은 업무를 수행할 공사관을 얻는 일이었다. 마침 외교관 택으로 빅토리아 양식을 채용해 1877년 건립했고, 그의 사후 조
중 미국인 알렌이 있었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알렌의 지인 중 피 선공사관이 임대해서 사용하다가 1891년 펠프스의 사위인 브라
서Fisher라는 사람이 ‘워싱턴 D.C. 오 스트리트O Street 1513번지’ 운Sevellon A. Brown이 고종에게 매각했다.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에 집을 갖고 있었고, 여기를 임대해서 1월 17일부터 공사관 업 찬탈한 일제는 공사관의 기능을 상실한 이 건물을 한일병합 직
무를 시작했다. 한국 근대사에서 소위 ‘피서옥皮瑞屋’으로 불리는 후인 1910년 우치다 주미일본대사의 이름으로 고종으로부터 단
‘Fisher House’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연간 임대료는 은화 780 5달러에 강제로 매입했고, 다시 1만 달러에 미국인에게 매도하
원월 65원이었다. 3층의 남향 벽돌 건물이었고, 1층에는 현관과 회 고 말았다. 이후 한동안 개인 주택으로 사용되다가 “제2차 세계
랑 그리고 벽난로가 설치된 응접실과 중앙 홀이 있고, 계단을 따 대전 동안에는 흑인을 위한 레크리에이션 센터로 이용되었으며,
라 올라가면 2층에는 식당과 주방 및 배선실이 있으며, 3층에는 미국 트럭노조인 팀스터스 유니온Teamsters Union의 사무실” 로도
1

침실 여러 개가 있었다. 이곳에 10명의 공사관 직원들과 현지에 쓰였다. 1972년 미국 정부가 공사관이 있는 지역을 ‘역사보존지
서 고용한 흑인 하인 2명이 기거했다고 한다. ‘피서옥’은 1970년 1 김종헌, 〈한국민족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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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jamin Johnston,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응접실,


Glass Plate, 1893, The Huntington Library 소장

구’로 지정하면서 보존의 길이 열렸으며, 1977년부터 개인의 집 Johnston, 1864~1952 의 사진 기록 덕분이다. 1880년대 파리에 유
으로 사용되었다. 2012년에 한국 문화재청이 350만 달러를 들여 학해서 미술을 전공한 존스턴은 1889년 고향인 워싱턴에 돌아
다시 구입했고, 2018년 복원 작업을 마치고 현재 기념관으로 대 와 코닥KODAK의 창업주인 조지 이스트만George Eastman으로부터
중에게 공개하고 있다. 카메라와 필름Eastman Kodak cameras and film process을 선물 받고 매
료되어 사진을 배워 프리랜서 기자 겸 사진가로 활동하기 시작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1890년대 당시 워싱턴 D.C.에 주 했다. 〈Demorest’s Family Magazine〉 〈Cosmopolitan〉 〈Harper’s
재한 30여 곳의 외국 공사관 중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건 Weekly〉 〈Ladies’ Home Journal〉 등과 같은 유명 잡지에 사진을
물이다. 건축학자들에 따르면 “우선 1층은 메인홀Main Hall, 응접 기고하면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명성을 쌓았고, 1894년에는
실Parlor, 응접실 후면Back Parlor, 온실Conservatory, 식당Dining Room으 워싱턴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오픈해 상업적인 성공도 거두었다.
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공사방, 서재Library, 사무실Office, 3층은
공사公使 외 나머지 공관원들이 사용하는 3개의 방, 지하층은 보 1893년 열린 시카고박람회를 계기로, 외국인과 그들의 삶
일러실Furnace Room, 당구실Billiard Room, 부엌Kitchen, 식료품저장고 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이 커졌다. 시대의 흐름을 잘 포착한 존
Pantry , 세탁실Laundry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한다. 특별히 스턴은 마침 자신의 동네인 워싱턴에 진출한 많은 외국 공사관
1층에는 정당正堂이라는 공간이 있는데, 고종황제의 어진御眞과 황 들과 외교관들을 취재해 잡지나 신문에 기고했다. 그런 과정에
태자 예진睿眞을 모셨고, 옆에는 태극기도 모셔놓고 있었다고 한 서 조선공사관의 건물 외양과 실내의 모습을 8×10인치 카메라
다. 고종황제와 황태자에 대한 망궐례를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에 담았고, 당시의 모습을 더할 나위 없이 정밀하게 기록해서 우
리에게 남겼다. 그녀는 1945년 자신이 만든 모든 유리원판들과
공사관을 다시 찾아와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해서 역사의 삽화 및 기록들을 ‘미의회도서관’에 기증했고, 현재 LA 근교에
현장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있는 헌팅턴도서관The Huntington Library이 소장하고 있다.
미국의 한 여성 다큐멘터리 사진가 벤자민 존스턴Frances Benjamin 글과 사진 박주석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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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대 문 화 。해 외 연 수 기

다시
또 가고 싶은
여행

이집트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였다.
코로나19로 인해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터여서
이번 여행은 뜻밖에 찾아온 행운이었다.
머나먼 신비의 나라에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나일강, 알렉산드리아 등을 보러 떠나는 길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신비의 나라, 이집트 와 마리아를 데리고 피하라는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이곳에 피


나이가 들 만큼 들었는데도 호기심은 어릴 적과 크게 다르 난한다. 그들이 숨어 살던 동굴 위에 교회를 지은 것이다. 교회
지 않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여행’은 늘 가슴을 설레 내부에는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하얀 대리석 기둥이 있는데, 유
게 한다. 누군가는 ‘여행은 피로와 빨래를 남긴다’고 했지만, 여 다의 기둥은 검붉은색으로 다듬지 않고 거친 모습이어서 유다는
행에서 돌아와 가방을 풀면서 다시 가방 싸는 날을 기다리게 된 지금까지 벌을 서고 있었다. 예수의 피난길을 상세하게 나타낸
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터여서 외국 여 지도를 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세상 부모들 모두가 자식을 위해
행이란 뜻밖에 찾아온 행운이었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나일 서는 지극한 정성을 아끼지 않는다는 생각에, 오래전에 돌아가
강, 알렉산드리아 등을 둘러보러 떠나는 길은 뿌리칠 수 없는 유 신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혹이었다. 인천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열두 시간가량의 비행 끝 주 이집트 한국문화원 방문도 인상적이었다. 이집트는 금·토요
에 아부다비에 도착했다. 다음 날 일찍 비행기에 다시 탑승, 두 일이 휴일이어서 휴무인데도, 오성호 원장님은 문밖까지 나와
시간쯤 뒤에 드디어 카이로에 도착했다. 내가 그 머나먼 신비의 우리 일행을 맞아주셨다. 문화원 부설 세종학당을 통해 한국어
나라 이집트의 카이로에 왔다니, 실로 감개무량했다. 를 배운 사람이 1000여 명이라고 하는데, 이집트 곳곳에서 한국
카이로에서의 첫 일정으로 예수피난교회를 찾았다. 새로운 왕이 을 응원할 것이다. 또 이집트의 대학 두 곳에 한국어학과가 있고,
될 아기가 탄생했다는 말을 들은 유대 왕 헤롯은 두 살 이하의 아 석·박사 과정까지 개설되었다고 한다.
기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요셉의 꿈을 통하여 예수 전시물이 25만 점이 넘는다는 이집트 고고학박물관에서, 실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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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던 미라도 직접 보았다. 여러 파라오의 조각상이 있었는데


핫셉수트 여왕의 조각상에 마음이 끌렸다. 유달리 살아 있는 듯한
느낌, 오뚝한 코에 가볍게 다문 입술이 매력적이었다. 투트모세 1
세의 외동딸로 태어난 공주는 투트모세 2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 남편이 죽자 투트모세 3세의 섭정을 하다가 왕위를 빼앗
아 이집트 최초의 여왕이 된 야심가였다. 행적으로만 보아서는 꽤
나 탐욕스러운 삶을 산 것 같은데 표정이 맑은 미인이었다.

이집트 곳곳에 흐르는 역사와 세월


이집트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피라미드와 스핑크
스였다. 왕들의 무덤이라고 추정하는 피라미드 가운데 가장 큰 것
은 쿠프 왕의 피라미드이다. 기원전 2560년에 2.5톤 사각돌 300
만 개를 사용하여 146m의 높이로 지어져 1311년에 영국의 링컨
대성당이 지어지기까지 최고의 건축물이었다 한다. 사진으로 접
했던 피라미드는 매끄러워 보였는데 직접 올라가 보니 세월에 풍
화되어 표면이 우둘투둘했다. 흙먼지가 날리는 피라미드 사이에
울긋불긋한 안장을 얹은 낙타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거
친 사막의 일꾼들이 장난감이 되어버린 것 같아 안타까웠다.
핫셉수트 여왕이 건축한 신전을 찾아가는 길에 이용한 마차의
마부는 함만이라는 소년이었다. 애티가 뚜렷한 함만은 관록의
늙은 마부들 사이에서 더 어려 보였다. 몇 살이냐고 물었더니 다
섯 손가락을 세 번 펴 보이고, 손가락 세 개를 더했다. 학교에 다
녀야 할 나이에 헝겊으로 눈을 가린 늙은 말을 몰고 있었다. 무턱
대고 앞으로만 달리는 말을 보면서, 나도 한때 저렇게 눈을 뜨지
못하고 앞으로만 질주하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예수피난교회와 파라오의 조각상, 붉어졌다.
피라미드를 만나는 여정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책이나 사진으로만 보던 것을
직접 보았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할 여행을 함께한 일행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여름과 겨울만 있다는 이집트의 날씨는 마침 여름이어서
지독히도 더웠다. 하도 더워서 가이드에게 몇 도냐고 물었더니
44°C라고 한다. 그런데도 평균 나이 70세인 일행은 한 사람의 낙
오는커녕 피곤한 기색도 없이 일정을 잘 소화해냈다. 지중해의
진주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지중해의 푸른 바다를 보며 즐겼던
오찬, 이집트 출국 전날 밤의 만찬 역시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지만, 여행 역시 무엇보다 누구와 함께하느
냐가 중요하다. 전국 각 지역의 훌륭한 원장님들과 동행했기에
여행이 더욱 윤택하였다. ‘나일강 물을 마셔본 사람은 다시 마신
다’라고 했다던가. 이번 팀 그대로 다시 이집트를 여행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따라나서겠다.
글 권선옥 시인, 논산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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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대 문 화 。비 전 선 포식 현 장 스케 치

대한민국 문화플랫폼 한국문화원연합회


60주년 기념행사의
첫 출발을 알리다
창립 60주년을 맞은 한국문화원연합회는 지나온 60년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지역문화의 새로운 비전을 마련하고자 비전 선포식을 개최했다.
이날 ‘대한민국 문화플랫폼 한국문화원연합회’라는 슬로건을 발표하고,
지방문화원과 함께 지역문화 발전의 주도적인 역할을 해나갈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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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 상생을 위한 문화원연합회’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발표하였다. 또


새로운 비전을 선포하다 한 〈지역문화박람회〉의 정례화 개최, 〈지방문화원 지
한국문화원연합회는 6월 29일, 오후 3시 중구 원육성 기본 계획2022~2026〉에 따른 지역 가치의 창조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창립 60주년 비전 선포식을 개 적 공유 추진, 연합회와 지방문화원의 유기적 관계망
최했다. 비전 선포식에는 이채익 국회의원, 전병극 문 을 통한 지역문화의 적극적 활동 주체로 발전시키는
화체육관광부 제1차관, 지방문화원 임직원 등 100여 등의 비전 선포의 주요 내용을 전했다.
명이 참석했다. 김태웅 연합회 회장은 “문화 분권 시대의 지역문화 발
비전 선포식은 한국문화원연합회 창립 60주년 기념행 전의 주체로서 연합회와 지방문화원이 지역 소멸, 세
사의 첫 출발을 알리는 기념식으로, 지나온 60년의 발 대 분열, 인구 고령화 등 급변하는 사회에서 지역문화
자취를 기억하고 연합회와 지방문화원이 지역문화 발 발전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전의 주역으로서 힘차게 나아가고자 새로운 비전을 선 연합회는 현재 231개 문화원과 함께 지역사회 내 문
포하는 의미가 있다. 이날 행사는 이근배 시인의 낭독 화·사회적 소임을 충실히 하고 있다. 연합회 창립 60
및 라클라쎄의 축하 공연을 시작으로 내빈 축사와 기 주년 기념식과 함께 〈제1회 지역문화박람회〉를 오는
념사 및 비전 선포 세레모니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9월 30일부터 10월 1일까지 이틀간 킨텍스 그랜드
연합회는 이날 행사에서 ‘대한민국 문화플랫폼 한국 볼룸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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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으로 보는 제주도 생활문화4》


문 화 소식

발행처 제주문화원

제주문화원은 《기억으로 보는 제주도 생활문화4》를 펴내고 도민에게 무료 배포하고 있다. 김순이 원


장은 발간사에서 “우리 문화원 향토문화연구회 회원들이 자기가 통과해 온 인생의 한 단면을 심층적
으로 조명하여 내놓은 이 글에는 제주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있다”고 밝혔다. 제주문화원
문화대학을 수료하고 제주문화원향토문화연구회에서 활동하는 12명의 회원이 참여하여 1950년부
터 1980년까지 한 시대를 설정하여 본인이 직접 겪은 생활문화를 기록한 책자이다. 제주문화원은 이
작품을 통해 제주의 지층에 묻힌 기억들을 발굴하여, 제주생활문화를 보존하고 미래에 전달하는 작
업을 계속해서 해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밝혔다. 한편, 제주문화원은  《기억으로 보는 제주도생활문
화》Ⅰ~Ⅳ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제작하고 있다.

《양구의 시간》
발행처 양구문화원

양구문화원에서 발행한 구술채록집 《양구의 시간》은 1년여간 양구의 보통사람들 열세 분을 인터뷰


했고, 더불어 명소를 취재하거나 1940년대 양구 동쪽의 풍경을 복원하는 등 ‘글’과 ‘일러스트’와 ‘사
진’을 전략적이면서도 복합적으로 설계하여 ‘기록’으로 엮은 단행본이다.
특히 일러스트 ‘이미지’는 역사적 한 페이지를 감정적 서사로 잔잔한 울림이 되어 들려주기에 누구
에게나 쉽게 공감을 끌어내고 또 그 시대와 그 현장으로 스스럼없이 빠져들게 한다. 더불어 일러스
트의 예술성에 대한 재인식도 깨닫게 해주니, 《양구의 시간》은 앞으로 발간될 구술채록집에 있어
글과 함께 다양한 이미지들의 무궁무진한 많은 역할의 한 지표가 될 것이다.
“양구의 어르신들이 대개는 1950년 한국전쟁의 상흔을 말씀하지만 그 이 야기들 속에서 누군가에
게는 감동과 향수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록적 가치를 선사해줄 것입니다.” 손병진 양구문화
원장은 이번 《양구의 시간》 출간을 기점으로 앞으로도 양구의 다양한 시대적 역사, 문화, 예술, 삶 등
을 증언할 수 있는 구술채록 작업이 확산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2022 〈우리문화〉 3차 편집위원회 회의

연합회는 지난 7월 5일(화) 오후 4시 한국문화원연합회 7층 회의실에서 제2차 편집위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6·7월호 발간물 평가 및 9월호 편집기획을 논의하였다.

편집후기

그날이 오면,
8.15 광복으로 그날은 드디어 와주었는데, 김구는 눈여겨 읽게 될 이달 특집, 의병義兵 발생지 제천의 역사적 숨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라 했다. 그리고, 매월 연재 중인 장진성 교수의 ‘고미술을 만나다’와
준비 없는 광복은 백범 白凡의 우려대로 최악의 동족상잔을 겪으며, 박주석 교수의 ‘사진으로 역사를 보다’에 담긴 스토리는
남북은 긴 이별인 채, 일흔 해를 더 살아왔다. 우리 한국 문화인의 자존심의 원형原型이 되고도 남을 기사다.
국가 설립을 기념하는 동시에 광복이 우리에게 주는 의무와
의미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너무 울어 속이 텅 빈다’는 매미의 짧은 여름처럼,
견디기 힘든 더위의 여름 한 철도 그리 길지는 않을 것 같다.
주목받고 칭찬받는 우리 문화광장에도 전문적인 필자들의
참여가 많으면 많을수록 반갑고 든든하다. 한춘섭 편집주간
한국문화원연합회 창립 주년

일자 2022.9.30. 금 ~ 10.1. 토
장소 그랜드볼룸
9Q
,
흉배胸背는 조선 시대 왕족과 백관이 입던 관복의 장식품으로
문양에 따라 품계를 나타내었다.
©국립민속박물관

Rank badge featuring two cranes


During the Joseon Dynasty, a rank badge (hyungbae) was
a small embroidered panel sewn on the official uniform of the royal family and government officials.
The badge indicated social rank based on the embroidered pattern.
©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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