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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정책연구 07 - 01

북한의 대남 협상가 연구

2007. 8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제 출 문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 귀하

본 보고서를 2007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


회의 “북한의 대남 협상가 연구"에 관한 연
구용역과제의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2007. 8

책임연구원 : 최대석
연구보고서

북한의 대남 협상가연구

책임연구원 : 최대석(이화여대 북한대학원 교수)


연 구 원 : 정영철(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연구위원)
연 구 원 : 장인숙(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2007. 8.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이 보고서는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정
책연구개발 용역과제 계획에 의해 수행된 것으로 수록된
내용은 연구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국회 통일외교통상
위원회의 공식적인 견해가 아님을 밝혀둡니다.
목 차

Ⅰ. 들어가며 ······································································································1

Ⅱ. 북한의 외교정책과 협상전술 ·································································3


1. 북한의 외교정책 ···················································································3
가) 냉전기: 진영외교와 비동맹외교 ················································5
나) 데탕트기: 대서방 접근 외교 ························································9
다) 1980년대 신냉전: 부분적인 개방외교 ····································12
라) 사회주의권의 붕괴: 대미․일 외교 강화 ······························14
마) 2000년대: 전방위 외교 ······························································17
2. 북한의 대남 통일정책 ·······································································20
가) 총선거안과 과도적 조치로서의 연방제 ·································22
나) 과도적 연방제 시기 ···································································27
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시기 ·········································30
라) 6․15 공동선언과 민족공조 ·····················································34
3. 북한의 협상전술 ·················································································38

Ⅲ. 북한의 협상가들과 협상기구 ·····························································46


1. 북한의 대남 협상기구 ·······································································46
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50
나)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52
다) 민족화해 협의회 ···········································································54
라) 민족경제협력위원회 ·····································································56
2. 남북협상의 전개과정(정상회담 이후) ···············································59
3. 북한의 협상가들 ···················································································66
가) 남북장관급회담 ···············································································66

- i -
나)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70
다) 국방장관회담․군 장성급회담 ·····················································71
라) 6자회담 ·····························································································73

Ⅳ. 북한의 협상가들의 특징과 앞으로의 전망 ······································78

Ⅴ. 나가며 -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91

<표 차례>
표 1 북한 유럽국가들과의 무역현황(1965-1975) ······································10
표 2 1970년대 북한의 대외무역 현황 ························································11
표 3 2000년 이후, 북한의 대유럽 수교현황 ·············································18
표 4 북한의 통일을 위한 2가지 방도와 6가지 전도 ······························24
표 5 협상단계별 북한의 주요 협상전술 ····················································41
표 6 북한의 대남 협상 행태 변화 추세 ····················································43
표 7 남북한 교역액 추이 ··············································································57
표 8 남북회담의 분야와 횟수(1971.01.01 - 2007.08.02) ···························60
표 9 2000년대 이후 남북간 주요 회담 ······················································62
표 10 남북 장관급 회담 대표단 명단 ························································78
표 11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대표단 명단 ··········································81
표 12 남북 국방장관 회담 대표단 명단 ····················································83
표 13 정상회담 이후, 남북 적십사 회담 대표단 명단 ···························84

<그림 차례>
그림 1 북한의 대남기구 조직도 ··································································50
그림 2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기구 구성 ······················································52

- ii -
I. 들어가며

북한을 둘러싼 각각의 협상들이 진행 중이다. 각각의 협상이 진행되


면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북한 인물들이 우리의 시야를
채우고 있다. 북한과의 협상은 지루한 정치 협상이면서도 동시에 철저
히 국익을 우선시하는 생사결단의 혁명가들과의 협상이기도 하다. 북
한의 협상가들은 국가 이익을 최전선에서 수호하는 사람들이며, 혁명
의 최전선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철저히 당과 혁명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했으며, 동시에 실리를 찾아 표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북한 협상가들에 대한 연구는 단지 북한의 협상가 자체의 연구를 의
미하지 않는다. 북한의 외교정책과 목표, 이를 실현하기 위한 협상가
양성의 과정과 이들의 경험적, 역사적 배경에 대한 연구를 의미한다.
특히, 1994년 이후 제네바 합의 이후 남북한 및 북-일, 북-미간 협상 등
성격을 달리하는 협상이 전개되면서 북한 또한 다양한 분야의 협상가
들이 국제무대에 얼굴을 들어내었고, 이들에 대한 충분한 정보 부족의
상태에서 상대방은 처음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북한과의 협상은 항상 어렵다. 지금까지의 남북 협상 및 기타 협상의
과정을 통해 드러났듯이 예측 불가능하며, 협상의 순간순간에도 예측
불허의 제안이 연속되면서 상대방을 무력하게 하거나 협상의 의욕을
상실시키는 등의 과정이 연속된다.1) 이 과정은 북한의 협상 전술에서
주로 기인하는 것이지만, 북한의 협상가들 자체에 대한 이해 부족도
상당한 문제로 제기된다.
이 연구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북한의 협상
전술과 그것을 실천하는 협상가들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북한

1) 북한의 협상전술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연구물은 북한의 협상전술로 예측불가능성, 뜻밖


의 제안, 새로운 제안, 시간 지연, 벼랑끝 전술 등으로 분석하고 있다. 대체로 북한의 협
상은 ‘주고받기’가 아니라 ‘혁명의 연속’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진다고 분석하고 있다.

- 1 -
의 협상전술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연구가 되었으나 아직도 충분한
연구가 부족한 분야이다. 대체로 경험에 근거한 분석이 대부분이다.2)
북한의 협상전술과는 달리 북한의 협상가들에 대한 분석은 거의 전무
한 실정이다. 대체로 북한의 인물연구에서 개인적인 파일을 축적하고,
확인하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 연구는 바로 이 지점에
서 북한의 협상 전술과 협상가들의 연구를 통해 앞으로 보다 더 다양
한 분야에서, 그리고 더 빈번하게 진행될 북한과의 협상에서 기초적인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연구는 북한의 모든
협상가들을 분석대상으로 하지는 않고 있다. 시대와 회담의 성격에 따
라 북한의 협상가들은 수시로 바뀌고 있으며, 또한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도 판이하게 다르다. 이 연구는 주로 2000년 정상회담 이후의 남
북회담을 중심으로 북한의 협상 전술과 협상가들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주요하게는 남북 장관급 회담, 경제협력 추진위원회, 군
사 회담, 적십자 회담 등이 대상이 될 것이다. 또한, 현재 진행되고 있
는 6자회담 등도 언급될 것이다.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협상에서
얼굴을 비친 인물들에 대해서도 분석하게 될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우리는 북한의 협상 전술, 협상의 원칙 그리고 협상
가들의 특징 등에 대해 보다 더 풍부한 정보를 얻게 되고, 이를 토대
로 향후의 남북 협상에서 우리의 대응 능력을 향상하는데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2) 북한의 협상전술, 협상태도 등의 연구는 일정하게 이루어졌다. 199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 등이 있다. 반면, 협상가들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이는 연구
대상의 특수성에도 기인하지만, 인물에 대한 연구가 소홀한 것과 동시에 북한 인물은 인
물사전을 통해 개인 파일로 축적되는 것으로 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 2 -
II. 북한의 외교정책과 협상전술

1. 북한의 외교정책

1980년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북한은 대외정책의 기본이념으


로서 ‘자주, 친선, 평화’의 원칙을 제시했다. 김일성은 ‘당중앙위원회 사
업총화 보고’를 통해 “우리 당은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대외
활동에서 자주성을 확고히 견지하고 세계 여러 나라들과의 친선협조관
계를 발전시키며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저극 노력할
것입니다. 자주, 친선, 평화 이것이 우리 당 대외정책의 기본 리념입니
다”라고 밝히면서, “우리 당은 모든 대외정책을 우리 나라의 실정과
우리 린민의 리익에 맞게 독자적으로 결정하며 자신의 판단과 주견에
따라 외교활동을 벌려나갈 것입니다.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는 완전한
평등과 호상존중의 원칙에서 다른 당,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발전시
켜 나갈 것이며, 국제관계분야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우리 혁명의
리익으로 부터 출발하여 풀어나갈 것입니다”라고 하여3), 자주적인 대
외정책을 근간으로 하는 대외정책 이념을 주장하였다. 북한의 이러한
대외정책의 원칙은 자주성을 핵심으로 하는 주체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는 위의 언급 중간에 “조선로동당은 주체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자주적인 대외정책을 실시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4)
‘자주, 친선, 평화’의 기본 이념은 이후, 1980년대 말 사회주의권의 붕
괴 및 냉전 체제의 해체로 ‘자주, 평화, 친선’으로 그 순위가 바뀌었다.
1988년 9월 공화국 창건 40주년 기념경축보고에서 김일성은 대외 정책
의 기본 이념으로 ‘자주, 평화, 친선’을 주장하면서, ‘제국주의의 반대와

3) 김일성,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총화 보고(1980, 10, 10),’ 『김일


성저작집』35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7), 365-366쪽.
4) 김일성, 위의 글, 365쪽.

- 3 -
전쟁 반대’를 강조하였다.5) 이어 이러한 기본이념은 1990년 최고인민회
의 제9기 1차 회의에서 공식화되었다. 북한이 이처럼 자주, 친선, 평화
의 순위를 바꾸어 평화를 보다 더 강조하게 된 이유는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한 안보 위기, 냉전의 해체에 따른 전세계적인 평화분위기의
고조 등에서 찾을 수 있다.6) 결국 북한의 대외 정책 우선 순위의 변
화는 주체사상에 기초한 대외정책의 이념과 더불어 탈냉전 이후의 세
계 질서의 변화 그리고 한반도 상황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러한 변화는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채택한 당 규약에서 명시한 대
외정책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당규약 전문에 따르
면 ‘조선로동당은 자주성과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원칙에 기초하여 사
회주의 나라들과의 단결과 국제공산주의운동과의 련대성을 강화하고
세계의 모든 신흥세력나라 인민들과의 친선, 협조관계를 발전시키며,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의 반제민족해방운동과 자본주
의 나라들의 로동계급과 그 밖의 인민들의 혁명투쟁을 지지하고 광범
한 련합 전선을 실현하여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와 지배
주의를 반대하며 평화와 민주주의 민족적 독립과 사회주의 공동위업
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한다’고 명시되어 있다.7) 특히, ‘조선로
동당의 당면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
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의 혁명과업을 완수하
는 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사회를 건
설하는 데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사회주의 완성과 전국

5) 김일성, ‘주체의 혁명적 기치를 높이들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자
(1988, 9, 9),’『김일성저작집』41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5), 245-246쪽. 위 연설에
서 김일성은 ‘평화는 동지적 단결과 협조에 기초하여 발전하는 사회주의의 본성적 요구’
라고 주장하며,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것은 절실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
다. 이러한 김일성의 언급은 사회주의권의 변화와 냉전체제의 해체와 더불어 북한이 느
끼는 안보의 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6) 김계동은 북한이 대외정책의 기본이념을 바꾼 주요한 이유를 전 세계적으로 탈냉전화되
고 평화를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움직임이 일어나자 세계 자유화의 요구에 맞춰 국제관계
를 발전시켜 나가는데서 보편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평화를 중시한 것이라고 보고 있
다. 김계동, 『북한의 외교정책』(서울: 백산서당, 2002), 104-105쪽.
7) 당규약 전문.

- 4 -
적 범위에서에의 공산화라는 기본 목적을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
한 당 규약의 규정과 1980년대 후반의 대외정책의 기본이념을 비교하
면 북한이 현실적인 세계 질서의 변화 속에서 자신들의 대외정책도 일
정하게 바뀌지 않을 수 없음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반제국
주의의 대외정책 기조가 바뀌지는 않고 있지만, ‘우호적으로 대하는 모
든 나라들과 .... 정치, 경제, 문화적 관계를 맺기’를 희망하는 북한의
1998년 헌법에 따르면, 탈냉전의 시기에 북한의 대외정책은 1980년대
말을 기점으로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의 대외 정
책 역시 국제적인 역학관계와 한반도 상황에 따라 시기적으로 많은 변
화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가) 냉전기: 진영외교와 비동맹외교

과거 냉전 시기 북한의 대외정책은 진영외교로 정리된다. 즉, 한국전


쟁을 거쳐 전후복구 기간 동안 북한의 최대 국가이익은 안전보장과 체
제보전이었고, 따라서 대외정책의 핵심 역시 사회주의 국가들에 의존
하는 진영외교였던 것이다.8) 1960년대에 들어와 새롭게 부상하는 비동
맹 국가들과의 외교관계에 노력을 집중했던 비동맹 외교, 1970년대의
데땅트 기간에 진행되었던 대서방 접근이 시도되긴 하였으나 냉전 시
기의 북한 외교는 진영외교를 기본으로 하여 진행되었던 것만은 분명
하다. 북한의 이러한 비동맹 외교나 대서방 접근은 ‘사회주의 건설’과
‘조국통일’을 2대 과제로 설정한 연장선에서 진행되었다.9) 즉, 3대혁명
역량 강화를 위한 노선이 1964년 제시된 이래, 북조선 사회주의 혁명
역량의 강화, 남조선 혁명 역량의 강화, 그리고 국제혁명 역량의 강화

8) 김근식, ‘북한의 체제보전과 대외정책 변화: 진영외교에서 전방위외교로,’ 『국제정치논


총』42집 4호(2002), 153쪽.
9) 김일성은 1950년대 중반 사회주의 건설과 ‘조국통일’을 ‘조선혁명’의 2대 과제로 제시하
고, 그 중에서도 ‘조국통일’을 사회발전의 위에 위치시켰다. 김일성, ‘당원들 속에서 계급
교양 사업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1955,4,1),’ 김일성저작집』9권 (평양: 조선로동당출
판사, 1980), 이 글에서 김일성은 사회주의 건설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계급교양을 강화해
야 하면, 그 주되는 대상으로는 개인이익추구, 관료주의, 종파주의 등을 들고 있다.

- 5 -
를 목적으로 한 대외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것이다.10) 특히, 국
제혁명 역량으로서 사회주의권와의 동맹 및 협력관계의 구축과 더불어
제3세계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 시기 진영외교는 소련 및 중국과의 동맹관계의 형성에서 집중적
으로 표현된다. 1961년 소련 및 중국과 연이어 군사동맹을 체결한 북
한은 이들 나라를 중심으로 한 외교관계를 핵심적인 외교정책으로 두
었다.11) 1950년대 후반부터의 중-소간 갈등과 북-소 및 북-중간 갈등에
도 불구하고, 냉전 시기 이들과의 동맹관계는 지속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 쿠바 사태, 중국의 문화대혁명, 브레즈네프의 등장, 베트남전의
발발 등으로 국제정세가 심각한 안보위기로 치달아가면서 북한은 이들
국가와의 군사동맹과는 별도로 ‘국방-경제 병진 노선’을 통하여 자체의
국방력을 강화하는 등의 노력을 가하였다.12) 다른 한편, 1960년대 북한
은 신흥독립국 등이 대거 등장하고, 유엔에서 발언권을 강화해가면서
이들 국가들과의 외교관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55년 반둥회의로
부터 출발한 비동맹은 이후 주은래가 제창한 ‘평화 5원칙’을 포함한 10
개항의 선언문을 채택하고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이 주축이 되어 중
요한 국제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13) 북한은 반둥회의 이후 강화되고
있는 비동맹 세력을 중요한 외교 대상으로 설정하고 이에 대한 적극적

10) 3대혁명역량 강화는 1964년 2월 27일 당중앙위원회 제4기 8차 전원회에서 제시되었다.


김일성, ‘조국 통일 위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혁명력량을 백방으로 강화하자(1964, 2, 27),’
『김일성저작집』18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2).
11) 김일성은 1961년 6월과 7월 소련과 중국은 잇따라 방문하여 이들 국가들과 조-소 우호
협조 및 상호원조조약, ‘조-중우호협조및 호상원조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들 조약은 북한
과 소련, 북한과 중국간의 군사동맹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서 이중 조-소 조약은 소련
의 해체로 폐기되었으나, 중국과의 조약은 아직은 법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남아있다. 다
만, 그 실제적 효과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12) ‘국방-경제 병진노선’은 1962년 쿠바 사태 이후, 북한이 안보에 심각한 위기를 느끼면서
제기되었다. 1962년 국방-경제 병진 노선이 제기되었고, 이어 이를 구체화한 ‘4대 군사노
선’이 정립되어 나갔다. 1966년 제2차 당대표자회에서는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당의 공
식 노선으로 확정하였다. 이에 따라 1967년부터 북한의 국방비는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
작하여 전체 예산의 30% 이상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노선 변화는 결과적으로 북
한 경제에 심각한 장애로 작용하였다.
13) 반둥회의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인도, 파키스칸, 미얀마 5개국의 발기로 1955년 4월
18일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개최되었다. 반둥회의에서는 1954년 6월 중국의 주은래 총
리와 인도의 네루 총리가 발표한 영토주원의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평등과
호혜, 평화공존의 5원칙을 포함하여 ‘반둥10원칙’을 선언하였다.

- 6 -
인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60년대 흐루시쵸프의 평화공존론과 중-소
갈등, 국제적인 안보위기에 당면하여 중-소에 치우친 외교관계를 비동
맹까지 포함하는 다변적인 외교로 전환하였다. 북한은 “우리나라와 좋
은 관계를 맺기를 희망하는 기타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정상적인 관계
를 수립하며 경제, 문화교류를 발전시키기를 원한다”고 하여 반제국주
의, 반식민주의, 민족해방투쟁의 기치를 내세운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활동의 전개를 추진했던 것이다.14) 특히, 이러한 제3세
계, 비동맹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확대는 남북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고립과 국제무대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노
력 그리고 미국의 ‘남조선 강점’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과 북한에 대한
정당성의 확보를 위한 것이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15) 북한의 비동
맹 외교의 결실은 1975년 8월 페루 리마에서 열린 제5차 비동맹회의에
서 정식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고, 그해 유엔총회에
서 북한측 안이 통과됨으로써 비동맹외교의 성과가 나타나게 되었
다.16) 당시 유엔 총회에서의 북한측 안이 통과하자 김일성은 이를 북
한 외교의 승리라고 자축하기도 하였다.
북한이 이처럼 사회주의 진영과 더불어 비동맹 외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유는 결국 남북한의 대립체제에서의 상호 경쟁 때문이었다.
1964년 국제혁명역량 강화를 내건 북한은 ‘조국통일’에 유리한 국제적
환경과 국제혁명역량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국가뿐만 아
니라 신흥독립국들에 눈을 돌렸다. 특히, 1950년대 말의 중-소간 갈등

14) 『조선중앙연감』1962년, 김계동, 앞의 책, 138쪽에서 재인용.


15) 김일성은 1973년 인민군 중대장 및 중대정치위원들 앞에서 연설을 통해, “오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 인민들이 우리 인민을 적극 지지하는 것은 우리 당
이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옳은 노선과 정책을 실시하며 자주적으로 나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제4차 비동맹회의에서 비동맹국가들이 북한의 주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것에
대한 자신감과 만족감을 표시하였다. 김일성, ‘인민군대의 중대를 강화하자(1973, 10, 11),’
『김일성저작집』21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4). 이 4차 비동맹회의에서는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외국군대의 철수,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해체, 통일된 이후의 유엔 가
입 혹은 단일국호에 의한 유엔 가입을 결의하였다.
16) 1975년 제30차 유엔총회에서는 한국측 결의안이 59:51(기권 29), 북한측 결의안이 54:
43(기권 42)로 통과되었다. 비동맹국가들만을 본다면 북한측 안은 44:24, 한국측 안은
36:41의 비율이었다. 즉, 비동맹외교에서의 북한의 성과가 드러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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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북한의 외교에 심각한 위기였고, 위축된 외교관계의 확대를 위해서
도 비동맹외교는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더구나 소련과 중국이 비동맹
국가에 적극적으로 진출함으로써 북한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미 북한은 1956년의 2차 당대회에서 “우리 당은 앞으로 세계의 공고
한 평화와 안전을 위한 투쟁에 계속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이며 쏘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을 비롯한 인민민주주의 여러 나라들과의 형제적 친선
단결을 눈동자와 같이 고수하며 이 나라들과의 정치, 경제, 문화적 협
조를 더욱 강화하여 나갈 것입니다. 이와 함께 서로 다른 사회제도를
가진 나라들 사이의 평화적 공존에 대한 레닌적 원칙을 견지하며 자주
권의 호상존중과 평등권에 립각하여 세계의 모든 평화애호국가들과의
정치적 련계와 실무적 련계를 맺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라
고 하여 반둥회의 이후 조성된 중립국과의 외교관계에 노력할 것을 피
력하였다.17) 또한, 4차 당대회에서는 사회주의 진영과의 협조강화 및
아시아․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확대,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것을 외교정책의 중요 요구로 내세
웠다.18)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냉전시기 북한의 외교는 사회주의 진영과의 관
계 강화를 핵심으로 하여, 비동맹, 신흥 독립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확
대 그리고 우호적인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정상적 관계를 진행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대상은 역시 사회주의 진영이었다. 이것은
위의 김일성의 언급에서도 나타나듯이,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협력관계
의 구축이 북한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북한의
외교는 냉전시기 1950년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소련, 중국에 대한 외
교 의존기를 벗어나 점차 비동맹 외교로 확대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교 정책은 1970년대 데탕트를 맞이하여 새롭게

17) 김일성,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1956, 4,23),’『김일성저


작집』10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0), 183쪽.
18) 김일성, ‘조선로동당 제4차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1961, 9, 11),’『김일성
저작집』15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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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게 된다.

나) 데탕트기: 대서방 접근 외교

1970년대의 세계는 미-중 화해선언으로 대표되는 데땅트의 시대였다.


이미 북한은 1960년대부터 유럽과의 관계개선에 관심을 두고 노력을
경주하였고, 이러한 노력은 1970년대의 국제정치적 환경 변화에 의해
북한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19) 북한이 유럽과의 관계 개선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우선 국제정치적 환경 변화라는 외적 조건과 더불어 1960
년대 사회주의 공업국가로 발돋움하면서 유럽과의 경제적 관계를 확대
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20) 사실, 냉전시기 북한과 유럽은 정치적으
로 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때문에 양자관의
관계개선이 정치적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21)
북한과 유럽과의 관계개선의 특징은 민간수준의 ‘인민외교’방식과 정
권 차원의 외교적 접근을 배합하는 것이다. 즉, 대상국가의 저명인사나
사회단체를 개별적으로 초청하거나 방문하고, 민간무역대표부 등을 설
치해 준정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가 공식적인 외교수립으로 발전시키
는 방식을 도모했다.22) 이러한 북한의 대유럽 관계개선의 노력은 1960
년 후반 영국, 스웨덴, 서독 등과 민간차원의 무역협정을 체결, 영국,
프랑스, 핀란드, 오스트리아 등에는 민간무역대표부를 설치하는 등의
성과를 내었다. 이어 1973년에는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
이, 스웨덴 등과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74년에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75년에는 포르투갈과 수교했다.23) 유럽은 아니지만 호주와도 74년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이러한 북한과 유럽과의 관계개선은 양자 간의
경제적 관계의 확대를 가져왔다. 북한으로서는 유럽의 앞선 기술의 플

19) 고상두, ‘북한의 대유럽외교정책,’『세계지역연구논총』18집(2002), 17쪽.


20) 김근식, 앞의 논문, 155쪽.
21) 김학성, ‘북한과 유럽의 관계개선과 한반도 문제,’『극동문제』7월호(2001), 16쪽.
22) 김계동, 앞의 책, 282쪽.
23) 김계동, 위의 책,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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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트 및 자본을 수입하고, 자국의 1차 원료의 수출을 통해 경제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표 1> 북한 유럽국가들과의 무역현황(1965-1975)


(단위: 천 달러)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영국
수출 4,090 5,024 7,884 7,025 10,560 13,021 14,096 28,686 74,960 106,689 161,793
수입 1,335 2,210 5,264 15,302 32,039 32,799 46,187 73,872 68,932 90,424 123,047
프랑스
수출 567 953 2,118 2,590 1,752 1,568 2,562 8,186 23,141 24,491 40,054
수입 600 10,906 16,721 13,731 36,425 52,243 71,754 47,797 46,903 35,510 137,338
서독
수출 3,586 6,915 5,288 9,637 16,417 27,330 31,363 51,204 120,338 241,770 312,282
수입 16,179 20,311 30,951 73,357 78,990 67,204 73,740 66,954 132,030 140,354 192,724
덴마크
수출 151 869 365 234 526 312 892 4,467 10,803 11,647 21,895
수입 399 389 445 480 784 833 455 5,182 3,011 4,919 5,666
핀란드
수출 112 133 351 166 191 273 382 1,143 816 5,004 4,456
수입 12 2 231 164 2 241 10 20 423 289 391
노르웨이
수출 132 306 236 529 131 175 351 548 1,381 2,030 4,245
수입 256 79 821 4,993 1,429 115 218 2,249 3,031 3,570 3,823
스웨덴
수출 5,444 9,831 8,035 6,137 8,566 7,885 8,703 9,484 17,575 29,892 56,045
수입 806 1,158 2,232 8,827 7,616 2,758 1,759 3,571 15,279 30,294 13,418

아이슬란
드 수출
- - 220 37 102 1114 151 389 743 1806 437
수입
- - - - - 1157 - 33 16 43 145
오스트리
아 수출
- 1 117 76 86 107 397 1,262 1,675 3,938 10,167
수입
60 2 61 498 156 231 1,987 6,257 8,489 3,746 2,668
포르투갈
수출 63 13 1 - 13 6 343 171 233 517 864
수입 15 6 14 31 15 62 95 183 1,045 1,608 1,018

* 출처: 고상두, ‘북한의 대유럽외교정책,’『세계지역연구논총』제18집(200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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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의 <표 1>과 <표 2>를 합친 것임.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북한과 유럽과의 무역은 대체로 영국, 프
랑스, 서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서독으로부터의 상품과 기
술의 수입이 눈에 띈다. 이는 당시 북한이 필요로 했던 기술과 상품의
주요 수입국이 서독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유럽과의 경제관계 확
대의 결과는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중반의 북한의 무역 구조가 공산
권이 아닌 서방권 혹은 비서방권의 무역이 북한 전체 무역의 약 40%
를 상회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24) 1970년대 북한의 무역현황은 다
음과 같다.

<표 2> 1970년대 북한의 대외무역 현황


(단위: %, 백만달러)

연도 소련 중국 기타공산권 비공산권 무역총액

1970 46.4(%) 14.2 12.0 27.4 805.6


1971 52.4 17.2 16.3 13.6 866.0
1972 39.8 24.0 15.2 21.0 1038.7
1973 32.1 22.5 14.6 30.9 1340.4
1974 21.5 18.2 11.7 48.6 1980.3
1975 22.2 22.9 13.9 41.0 2077.9
1976 22.1 23.5 13.9 40.8 1486.9
1977 25.6 21.7 11.8 41.0 1500.0
1978 23.5 19.4 12.8 44.3 1800.0
1979 24.0 20.8 10.3 44.9 2937.3

* 출처: 황의각, 『북한경제론』(서울: 나남, 1992), 222-223쪽

그러나 북한의 1970년대 대서방 접근은 두 번에 걸친 오일쇼크(Oil


Shock)와 북한의 대외 신인도 문제 그리고 북한 외교관들의 불미스러
운 일들로 인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서방 국가들과의

24) 정영철, ‘북한의 대외경제정책에 관한 연구,’(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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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은 북한이 필요로 하는 상품과 기술의 수입 효과도 있었지만, 무
역적자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고 여기에 누적된 채무까지 겹쳐지
면서 북한으로서는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1970
년대 말에는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레이거니즘으로 대표되는 신냉
전이 도래하면서 북한의 대서방 접근은 위축되게 되었고, 신냉전의 분
위기에서 북한 역시 중-소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
었다.

다) 1980년대 신냉전: 부분적인 개방외교

1980년대에 접어들어 북한은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확대가 한계


에 부딪히고, 신냉전이 도래하자 중-소와의 관계를 보다 더 강화하는
한편, 부분적으로 개방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 나라들,
비동맹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를 일차적으로 강조하면서, 자본주의 나
라들과의 친선과 경제교류도 지속할 것임을 표명하였다. 특히, 김일성
은 제6차 당대회에서 “우리는 남조선에서 미군을 철거하고 우리 나라
의 통일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미국과도 좋게 지낼 용의를 가지고 있습
니다”라고 하여,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기도 하였
다.25) 이러한 의지의 표명은 1984년 1월 중앙인민위원회와 최고인민회
의 상설회의 연합회의를 통해 ‘조선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새로운
조치를 취할 데 대하여’라는 의제를 토의하고 ‘서울 당국과 미합중국
정부와 국회에 보내는 편지’를 채택해 남북한, 미국의 3자 회담을 제안
하는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26)
1980년대 북한 외교는 특히, 남남협조와 대외무역의 다각화, 다양화
의 요구를 강조하면서 나타났다. 이는 1970년대 대서방 접근이 소기의

25) 김일성,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1980, 10, 10),’『김일성


저자집』35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7), 366쪽. 제6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총결기
간(1970-1980년) 동안 세계66개국과의 새롭게 외교관계를 맺었다고 밝히고 있다.
26) 김계동, 앞의 책,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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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북한이 다시금 제3세계 국가들과의 협력 강화
와 일부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제관계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김일성은 1984년 2월 이례적으로 대외무역을 강조하면서 대외무역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27) 이 연설에서 김일성은 대외무역의 필요성, 대
외무역 기관, 신용의 중요성, 대외 수송 및 국제 시장에 대한 연구, 무
역 일군들의 자질 등에 대한 대외무역 전반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이
러한 대외무역의 강조는 1984년 ‘합영법’의 제정 등 대외적인 부분적인
개방으로 나타났고, 이는 북한의 외교가 부분적인 개방외교로 전환되
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합영법은 1970년대 대서방 접근의
교훈에 따라 일방적인 대외무역의 방식이 아니라 중국의 개혁․개방의
일부분을 참고하여 기술과 자본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었다. 합영법은
북한이 대외무역 적자 등의 위험을 줄이고, 발전된 기술과 자본을 끌
어들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28) 그러나 북한의 합영법 제정과 그 이
후의 상황 전개는 북한이 의도했던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다. 합영법이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합영․합작은 위한 시행세칙은 1986년에 가
서야 마련되었고, 그나마 합영의 대상이 일본의 조총련을 중심으로 진
행됨으로써 대규모 투자나 기술의 도입은 미미하였다. 약 100여건의
합영․합작이 진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것이 북한의 경제에
미친 영향을 아주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대외 환경 역시 미국과
의 냉전적 적대관계의 지속, 중국의 개혁․개방의 가속화 그리고 소련
의 고르바쵸프 등장 이후의 변화 등과 맞물려 북한으로서는 국제적인
환경의 측면에서도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1980년대 초반 83년
미얀마 아웅산 테러로 인한 국제적 고립과 더불어 1987년의 KAL기
폭파 사건으로 미국으로부터 테러지원국에 지정되는 등 외교적 고립은

27) 김일성, ‘대외무역을 다각화, 다양화할데 대한 당의 방침을 철저히 관철하자(1984, 2,13),’


『김일성저작집』38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28) 북한의 합영법에 대해서는 정영철, ‘북한의 대외경제정책에 관한 연구:1984년 합영법 이
후를 중심으로,’(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6); 조명철․홍익표,『북한의 외국인투자유
치정책과 투자환경』(서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1998); 신희선, ‘북한의 대외개방정책에
관한 연구,’(숙명여대 박사학위 논문) 등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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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80년대부터 소련과 동유럽의
대변혁의 발생으로 북한의 외교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라) 사회주의권의 붕괴: 대미․일 외교의 강화

1980년말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는 북한에게 심각한 외교,


안보의 위기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소련 및 중국 등의 사회주의 시장
의 소멸은 북한 경제에 치명적인 것이었다. 1991년 제3차 7개년 계획
의 실패를 스스로 인정한 북한은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의 설치 등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으나, 핵위기의 발생과 한반도를 둘러싼 제반
여건의 불비, 그리고 북한의 준비 부족 등이 겹치면서 사실상 실패하
고 말았다.29)
1990년대의 북한의 대외환경은 한-소 수교 및 소련의 해체, 한-중 수
교로 인한 국제적 고립, 유엔에의 동시가입에 따른 두 개 한국의 국제
적인 공식화, 핵위기로 인한 미국과의 적대적 냉전체제의 지속 등으로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특히, 경제적으로 사회주의 시장의 소멸은 그
동안 원유, 코크스 등 주요 원료의 수입에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이러
한 조건에서 북한은 미국과의 대외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
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동서독 통합 및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더 이상 진영외교가 가능
하지 않은 조건에서 북한은 대미, 대일관계 개선,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에 역점을 두었다. 그동안 사회주의 - 비동맹 - 우호적인 자
본주의 국가의 순으로 외교관계를 강조하던 데에서 벗어나 아시아 국
가들과의 관계를 보다 더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은 1991년의 신
년사에서 ‘아세아 국가들’과의 친선협조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을 강

29) 이 시기 북한은 나진-선봉 지구를 자유무역지대로 지정하면서 첨단사업의 유치, 관광 및


중개무역 기지 등의 청사진을 마련했으나 투자가 여의치 못하고, 산업 인프라의 부족과
법.제도의 미비 등으로 원하는 만큼의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현재까지 약 2억 달
러 정도의 투자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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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였다.30) 이는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 한 이후, 자신들
과의 친선 및 경제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대상으로서 아시아
국가들을 지목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대미 접촉을 시도하고, 대미관계에 보다 더 많은 노력을 쏟기
시작했다. 북한과 미국의 외교관 접촉은 1988년 12월 북경에서의 참사
관급 접촉으로 시작하였다. 참사관급 접촉을 시작으로 민간 분야에서
의 워싱턴과 평양을 오가는 다양한 접촉이 진행되었다. 1990년 6월의
미국 교수들의 평양방문, 91년 미군 송환을 둘러싸고 북경에서의 정무
참사관급 접촉, 그리고 솔라즈 의원의 평양 방문 등이 이루어졌다. 이
러한 대미접촉은 1992년 김용순 당 국제부장과 아놀드 켄터 미 국무차
관의 고위급 외교관의 접촉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핵위기로 인한 양국
간의 이견이 해소되지 않고, 갈등이 격화되면서 1993년의 NPT 탈퇴로
미국과의 극단적인 대립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4년 카
터 전 미국대통령의 평양 방문으로 극단적 대립의 위기에서 벗어나 그
해 10월 ‘제네바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북-미 관계를 새로운 관계로 접
어들기 시작했다.31) 제네바 합의는 북한으로서는 당면한 핵위기로부터
벗어남은 물론 미국과의 관계정상화까지 규정된 것으로서 북한 외교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은 영변 핵시설 등 5곳
을 동결, 봉인하고 IAEA의 감시하에 두었으며, 미국은 매년 중유 5만
톤 및 일부 경제제재 조치를 철회하였다. 또한, 2003년까지 경수로 2기
를 제공하기로 하고 한국형 경수로를 북한의 신포 금호지구에 건설하
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북-미관계는 핵위기에 따른 대결관계를 일정정
도 청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셋째, 일본과도 적극적인 외교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1990년 가네마

30) 김일성의 91년 신년사는 사회주의, 비동맹국가들과의 대외정책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지


만, 아시아 국가들과의 친선협조관계를 보다 더 강조함으로써 국제정치의 현실에 대처하
는 북한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김일성, ‘신년사(1991, 1, 1),’『김일성저작집』43권(평
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6).
31) 제네바 합의에 대해서는 케네스 퀴노네스, 노순옥 역『2평 빵집에서 결정된 한반도 운
명』(서울: 중앙 M&B, 2000); 샐리그 해리슨, 이홍동 역,『코리안 엔드게임』(서울: 삼인,
2003); 돈 오버도퍼, 이종길 역,『두개의한국』(서울: 길산, 2003) 등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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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신 자민당 부총재의 방문과 ‘조-일 3당 공동선언’ 이후, 북일 수교
협상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수교 협상은 납치자 문제와 전후 보상 등
의 문제로 교착과 재개를 반복하였다.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일본
연립여당 3당 대표단이 방북하여 수교 협상을 재개하였으나 일본인 처
고향방문을 둘러싼 갈등으로 다시금 교착상태에 빠졌다. 2002년 고이
즈미 수상의 방문으로 일본과의 수교협상이 다시금 진척되었으나 납치
자 문제로 인해 오히려 일본 내의 반북여론이 팽배해지고, 제2차 핵위
기가 불거지면서 북-일관계는 오히려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북
한은 일본과의 수교를 통해 배상금 문제와 경제협력을 목적으로 했지
만 결국은 정치적인 문제로 인하여 관계개선은 실패하고 말았다.32)
결국 이 시기의 북한의 외교정책은 미국과의 외교를 우선적인 관심
으로 두고, 일본 및 주변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특히, 핵위기의 제네바합의를 통한 해결과 금창리 위기의 극복으로 미
국과의 관계개선은 속도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발전하는 성과를 거두었
다. 또한, 통미봉남(通美封南)으로 대표되는 미국과의 우선적인 관계강
화와 남한에 대한 일정한 거리두기는 김영삼 정부의 대북 흡수통일에
대한 경계와 당면한 핵위기의 해결이라는 객관적 조건과 더불어 남한
에서의 통일운동진영의 분화 및 약화와 북한 체제의 재정비가 완료되
지 않았던 내부의 조건이 결합된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외교정책은
대미외교의 강화와 주변국들과의 관계 정상화에 중심을 두었다. 그러
나 2000년대에 들어와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외교적 여건이 한
층 유리해지면서 전방위적 외교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32) 북일관계에 대해서는 신정화, ‘북일관계의 역사,’『역사비평』2002년 겨울호; 신정화,『일


본의 대북정책』(서울: 오름, 2005); 진희관, ‘북일관계 연구: 북한의 대일인식 변화를 중
심으로,’『통일문제연구』1997년 상반기호; 진창수, ‘북일국교정상화 교섭의 개시와 좌초,’
한국세계지역학회, 2002년도 춘계정기학술회의 논문집 등을 참조할 것. 최근 북한과 일본
의 관계 악화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일본의 수교시 수교 배상금(혹은 보상금)으로 약 150
억 달러가 지급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300억 달러까지 전망하기
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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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000년대: 전방위 외교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여러 분야에서의 변화를 강제하였다. 남북한


관계는 물론 남한 사회 내부, 북한 사회 내부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
다. 또한, 남북 정상회담은 북한의 외교정책과 외교전략에도 많은 변화
를 주었다. 비록 반제국주의의 강조와 자주, 평화, 친선의 대외 이념에
는 변화가 없지만, 서방 국가들과의 보다 강화된 관계를 추구하였고,
러시아, 중국 등의 오랜 우방과도 정상화를 이룩하고 협력관계를 발전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유럽연합 및 유럽
의 각국들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였고, 호주와의 관계회복 및 필리핀,
캐나다 등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였다. 1997년 8월 김정일의 논문에서는
‘미국을 백년 숙적으로 보려하지 않으며, 조미관계가 정상화되기를 바
라’고 있다고 하여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희망하고 있음을
내비치었다.33)
우선, 정상회담을 전후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이 이어졌
고, 국가 수립 이후 처음으로 미국과 북한 양자가 울브라이트 국무장
관의 평양 방문과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워싱턴 방문이 있
었다. 또한, 러시아의 푸틴의 방북 및 김정일 위원장의 방러 등 상호
교차방문이 전개되어, 북-중, 북-러의 새로운 협력관계가 형성되었다.
둘째로는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하여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과 수교를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이 적극적으로 국
제무대로 진출한 것에도 이유가 있지만, 국제사회가 북한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의 북한과의
수교는 유럽 연합의 국제무대에서의 위상 강화와 향후 북한의 개혁․
개방 혹은 동북아 경제개발에 유럽 연합이 참여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도 한다.

33) 김정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조국통일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1997. 8),’『김정
일선집』14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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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 2000년 이후, 북한의 대유럽 수교현황

국가명 수교일

이탈리아 2000.1

영국 2000.12

네덜란드 2001.1.15

벨기에 2001.1.23

스페인 2001.2.7

독일 2001.3.1

룩셈부르크 2001.3.5

그리스 2001.3.8

유럽연합(EU) 2001.7.25

아일랜드 2003.12.10

프랑스 미수교

셋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의 부시행정부의 등장으로 북-미


관계가 악화되면서 북한으로서는 ‘제2의 핵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부시 행정부의 등장과 대북 강경정책으로 클린턴 행정부 말기
의 수교 직전까지 진행되었던 양국간의 관계는 극단적인 적대관계로
다시금 회귀하고 말았다.34) 이와 더불어 2002-3년의 고이즈미의 방북으
로 수교협상의 진전을 기대했지만, 납치자 문제로 인해 오히려 북-일관
계는 최악의 상태로 빠지고 말았다. 이런 조건에서도 남북관계는 햇볕
정책 - 대북 포용정책을 통해 꾸준히 발전하면서 북한으로서는 하나의
완충장치의 역할을 하였다.
2000년대 북한의 외교 정책이 실리주의적이고, 전방위적 성격으로 변

34) 제2의 북핵위기는 2002년 10월 미국의 대북 특사로 북한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당시 국
무부 차관보의 방북 결과로 인해 불거졌다. 당시 미국은 켈리의 방북을 보고하면서 북한
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북한이 시인했다고 발표했고, 이때부터 북-미간 핵공방이
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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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되었지만, 여전히 반제국주의적 외교이념은 변하지 않고 있다. 2001
년 신년 공동사설은 “제국주의의 강권과 지배주의적 책동이 더는 허용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35) 또한, 1995년부터 2004년까지의 <<로
동신문>> 외교노선에 관련된 사설 중 반제국주의 노선에 대한 비중이
71.4%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36) 이러한 북한의 입장
은 반제국주의적 외교이념과 국제주의적 원칙 그리고 비동맹 및 자본
주의 국가들과의 우호적인 관계의 형성이라는 기존의 외교정책에 실리
주의적 입장에서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이중적 성격’으로 정리할 수 있
다. 이러한 ‘이중 전략’은 한편으로는 체제 보전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실리의 추구라는 현실성을 모두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의 북한 외교정책은 대미 관계 개선과 대일 관계 개선 그리고
남북한 관계로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재의 6자회담 및 2.13
합의의 이행과 이어지는 한반도 평화체제 및 동북아 질서 변화에서 북
한은 최종적으로 북미관계 개선을 목표로 미국과의 외교관계에 집중하
면서 동시에 남한에 대해서는 ‘민족공조’의 차원에서 보다 더 높은 요
구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북한은 남한에 대해서
‘민족공조’와 ‘외세공조’의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과 미
국, 북한과 일본, 그리고 남북한 간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대화와 협상
이 이어질 것이다. 북한의 외교정책이 북한 체제의 국가적 이익의 견
지에서 결정되는 전략이라면, 협상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술이자,
‘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벼랑끝 전술’로 명명되는 북한의
협상술은 단지 ‘비합리적 행위자로서 북한’때문이 아니라, 북한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객관적 환경과 주변 여건에서 비롯된다.37) 또한, 협상

35) <<로동신문>> 2001년 1월 1일자.


36) 백성호, ‘김일성 사후 북한 외교노선의 변화와 대외관계의 특징,’『국제정치논총』45집 4
호(2005), 172쪽.
37) 우리는 흔히 북한을 ‘나쁜(bad)’ 혹은 ‘미친(mad)’행위자로 묘사한다. 그리고 이를 설명
하는 근거로서 북한의 협상 전술이나, 협상 태도 혹은 협상 이후의 행동을 든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에 대한 이미지화는 상호 모순된 북한 인식에서 기인한다. 헤이젤 스미스가
말한대로 미친 행위자와 나쁜 행위자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북한의 행위는
합리성을 지녔으며, 우리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Smith, Hazel, 'Bad, mad,
sad and rational actor? Why the 'secrutization' Paradigm makes for poor 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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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임하는 협상가들간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측면도 적지 않다. 북한
의 외교정책을 전략적 차원에서 분석하고 이해해야 한다면, 북한의 협
상전술은 이러한 전략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분석되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 북한의 대남 통일 정책38)

북한의 외교정책이 진영외교에서 최근의 전방위외교로까지 변화해온


것처럼, 북한의 대남 통일정책 역시 변화되어 왔다. 과거 ‘변혁’과 ‘통
일’을 뗄 수 없는 연관된 혁명전략으로 인식하던 것에서 벗어나 ‘변혁’
과 ‘통일’을 각기 독자성을 갖는 자율적인 영역으로 인식한 북한은 최
근에는 ‘변혁’보다는 ‘통일’을 보다 앞세우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북
한의 대남 통일정책은 초기의 외세의 간섭 없는 ‘총선거’안에서 1960년
대의 ‘과도적 연방제’ 그리고 70년대의 ‘고려연방공화국’안으로 그리고
80년대부터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으로 변화되었다. 1990년
대에 들어서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변화하면서 사실상 남한이 주장
하는 남북연합과 유사한 방식과 내용으로 변화되었다.39)
사실, 북한은 전쟁과 분단 고착화 이후 ‘2개의 과제’를 수행해야만 했
다. 하나는 사회주의 혁명을 지속하여 북한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통일된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40) 그
리고 이는 ‘변혁과 통일’이라는 뗄 수 없이 연관된 혁명전략으로 구체

analysis of north Korea,' International Affairs 76, 1(2002).


38) 이 절은 임현진․정영철,『21세기 통일한국을 위한 모색』(서울: 서울대출판부, 2005) 중
제1부 제2장의 내용을 수정․보완, 추가한 것이다.
39) 북한의 통일정책 변화와 연방제 방안에 대해서는 전득주, 『남북한 통일정책비교』(서
울: 숭실대출판부, 2000); 공용득,『북한 연방제연구』(서울: 청목, 2004)를 참조할 것.
40) 북한은 지금까지도 혁명과 건설 그리고 통일이라는 과제를 천명하고 있다. 노동당 6차
당대회에서 개정된 규약 전문에 의하면, ‘조선노동당의 당면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
을 완수하는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데
있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국토통일원, 『조선노동당대회 자료집』제4집(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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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되어 나갔다. 그리고 북한의 통일방안은 이와 같은 전략 속에서 수
립되고 추진되었다. 이러한 북한 통일방안은 남한 사회의 변화, 국제
환경의 변화, 북한 사회의 변화 등 다양한 복합 요인에 의해 가능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분단체제가 지속됨으로 인해 양 사회의
이질성이 점차 커져나가고, 단일한 제도에 의한 통일이 불가능 혹은
엄청난 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었다. 결국 북한의 통
일방안은 일원론적 통일관에서 연방주의적 통일관으로 변화되었다.
북한은 지금까지 크게 3가지의 통일방안을 내 놓았다. ‘총선거안’, ‘과
도적 연방제안’, ‘완성된 연방제안’이 그것이다. 대체로 1960년 4.19시기
까지가 총선거를 기본으로 한 일원적 통일론에 기초하고 있었다면,
4.19를 계기로 60년대는 총선거안과 과도적 대책으로서 연방제가 공존
하던 시기였다. 과도적 연방제안은 1973년 김일성의 ‘5대강령’에서 제
안된 것으로 ‘고려연방공화국’ 창립과 단일 국호에 의한 UN 가입을 주
장하던 시기이다. 그리고 1980년 6차 당대회를 계기로 ‘고려민주연방공
화국창립방안’을 제안하면서 연방제를 완성된 통일국가의 형태로 제시
하였다. 이로써 북한은 급진적인 체제 통합의 문제에서 두 체제를 기
본으로 해서 하나의 국가로의 통일을 주장하게 되었다. 마치 중국의
대만에 대한 통일정책 즉, 일국양제(一國兩制)와 동일한 형태의 통일방
안을 내세운 것이다. 현재에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단계적
으로 실시하기 위한 단계적 연방제안을 제시하고 있다. 즉, 낮은 단계
의 연방제에서 높은 단계의 연방제로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지난 6.15
공동선언의 제2항에 명시된 느슨한 연방제는 1991년 김일성 주석이 신
년사를 통해 밝힌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의미하고 있다.41) 현재 북
한은 연방제 방안을 유일한 통일방안으로 주장하고 있다. 현재 남북한
의 상이한 체제를 일거에 통일시킬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연방제

41) 1991년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 연방제를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 외교, 국방권을 지


역 정부에 일정기간 위임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수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김일성,
1991년 신년사(<<로동신문>> 1991년 1월 1일). 이러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89년 문익
환-허담 회담을 통해 공동 발표한 선언문에서 연방제는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고, 단번
에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언급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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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여러 가지 합리적인 제안 중의 하나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남
한이 주장하는 연합제와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는 본질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형태상으로는 많은 공통성을 안고 있는 것
이 사실이다. 남한의 경우, 그 동안의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통일정책에
서 현실적이고 점진적인 그리고 마침내는 절충적이며, 단계적인 접근
으로 변화해 온 것처럼, 북한 역시 총선거에서부터 연방제까지 일원론
적 통일론에서 연방적 통일론으로 변화해왔다.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통일방안 그 자체의 전개과정을 보면 양측이 공히 단계
적이고 점진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 총선거안과 과도적 조치로서의 연방제

이 시기는 대체로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까지를 포


괄한다. 이 시기는 북한의 민족통일전선에 입각한 좌우합작의 시도, 무
력을 동원한 전쟁, 평화적 통일 방안의 주장 등이 계속되던 때였으며,
중요하게는 외세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줄기찬 주장이 계속되었다.
또한, 북한의 통일전략이 확정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내외적으로는 모
스크바 3상회담과 미․소공동위원회를 둘러싸고 미․소, 좌․우의 대
립이 격화되면서 북한지역에서 좌익세력이 세력을 넓혀가는 것과 대조
적으로 남한지역에서의 좌익은 고립과 탄압으로 혁명역량이 극도로 축
소되고 있었다. 북한은 이런 조건에서 자신들의 유리한 조건을 기반으
로 전국적 범위의 혁명 수행을 위한 ‘민주기지론’을 내놓았다. 이제 북
한은 북한 지역만을 넘어서서 남한까지 포괄하는 ‘혁명 기지’로서의 역
할까지 떠안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북한은 ‘민주기지론’과 ‘통일전
선’을 양축으로 하여 전국적 범위에서 혁명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그리
고 이러한 방법의 최종적 결과로서 한국전쟁은 필연적인 구조적 산물
이었던 것이다.42) 전쟁 이후, 북한은 제네바 협상에서 ‘전조선 주민의

42) 한국전쟁의 불가피성은 김구 선생이 분단 정권의 수립을 지켜보면서, 전쟁의 불가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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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사 표시에 입각한 통일전선 정부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총
선거를 실시할 것’43) 등의 평화통일방식을 제안한다. 북한의 평화통일
방식의 제안은 전후 북한 사회의 건설과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평
화적인 환경의 조성을 위한 필수적 요구에서 기인한다. 이후, 북한은
평화적 통일 방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민주기지론’에 입각한 남한에
서의 혁명과 통일의 성취를 전략으로 삼고 있었다. 즉, ‘선혁명 후통일’
의 입장이었던 것이다.44) 당시 북한은 ‘혁명=통일’이었던 것이다. 따라
서 ‘선변혁 후통일’은 ‘남조선에서의 혁명’의 성취가 곧바로 통일로 이
어진다는 것에 근거를 두었고, 이를 위한 남조선 혁명 사업이 곧 통일
사업이었던 것이다. 또한, 북한의 민주기지론에는 남한에서의 혁명역량
의 미진함에 대한 평가가 놓여있었다. 즉, 혁명을 위한 기지이자 지도
부로서 북한 혁명이 놓여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북한의 민주기지론
과 총선거안은 남한 체제에 대한 북한 체제의 자신감이 놓여 있었다.
비교적 일찍 경제 개발에 나선 북한은 한국전쟁의 복구와 이어진 천리
마 운동 등을 통해 비교적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당시 남북한의
경제 총량은 북한이 월등히 앞서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제반 개혁 조
치를 통해서 보다 더 안정적인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러
한 배경에서 북한은 총선거를 통해 남한 체제와의 통일을 추진했던 것
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후 북한의 총선거안은 1960년 4.19를 계기로 과도적 조치로서의 연
방제가 나올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70년 과도적인 성격의 고려연방공
화국안이 제출될 때까지 유효하였다. 그러나 통일의 전략으로서는 평
화적 방도와 비평화적 방도를 제시하였으며45), ‘선혁명 후통일’의 입장
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을 탄식했던 데서도 나타난다.


43) 이 한 엮음,『북한의 통일정책 변천사 (상)』(서울: 온누리, 1989).
44) 이 한, 위의 책.
45) 통일전략으로서 2가지 방도와 6가지 전도를 제시하였다. 2가지 방도란 평화적 방도와
비평화적 방도를 뜻하며, 6가지 전도란 평화적 방도로서 남한 혁명의 성공, 남한 정권의
붕괴, 자유의사에 의한 총선거를, 비평화적 방도로서 남한 혁명의 성공과 북한에 의한 전
쟁, 제국주의와의 전쟁을 통한 남한 해방 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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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4> 북한의 통일을 위한 2가지 방도와 6가지 전도

2가지 방도 6가지 전도

평화적 방도 남한혁명의 성공 남한 정권의 붕괴 자유의사에 의한 총선거

제국주의와 전쟁을 통한
비평화적 방도 남한혁명의 성공 북한에 의한 전쟁
남한 해방

먼저, 이 시기 북한은 통일을 전국적 범위에서의 ‘반제민족해방인민


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사업으로 규정했다. 즉, 통일은 외세를
몰아내고 반제반봉건혁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남북의 혁명역
량과 민족주의자들까지 포함하는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혁명을 수행하고자 했다. 1948년 남한에서의 단독선거 실시되고 단독
정부 수립이 구체적인 일정에 오르자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제안을 받
아들여 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를 소집한다. 이 자리에서 김
구, 김규식, 김두봉, 김일성 소위 ‘4김 회담’이 별도로 마련되어 통일전
선을 형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5월 10일의
단독선거와 8월 15일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은 분단 정권의 탄생을 기
정사실화했고, 북한도 9월 9일 공화국 정권을 정식으로 선포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남북 양 지역에 성격을 달리하는 두 개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두 개 정권의 수립은 오랜 세월 중앙집권화된 단일 정치체를
유지해오던 우리 민족의 정서와 해방 이후 통일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대다수 대중의 요구에 반하는 것이었으며, 사회경제 구조 역시 심각한
기형성을 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은 모두 다 정권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북진통일’과 ‘국토완정’을 공공연하게 내비치게 되
었다.46) 특히, 북한의 김일성은 1949년부터 실시된 2개년 계획의 상반

46) 남․북 정권의 정통성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즉, 남한은 유엔 결의에 의한 총선거
를 통해서 합법적으로 수립된 정부라는 것을, 북한은 전 조선주민의 총의에 의해 수립된
정부라는 것을 주장한다. 북한의 김일성은 1948년 5월 6일 홍명희 선생과의 담화에서
“남북련석회의는 우리 민족의 력사에 국토완정과 민족통일의 기치하에 각계각층의 애국
적인사들을 묶어세운 위대한 회합으로 영원히 기록될것입니다”라고 언급하였고(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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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임무의 성과에 고무되어 ‘국토완정’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하기도 하
였다.47) 한국전쟁은 평화적인 방도에 의한 거의 모든 수단들이 고갈된
뒤 양측이 적극적으로 고려하던 방법이었다. 특히, 북한은 한국전쟁 직
전 군사편제를 정리하고 중국과 소련으로부터의 인력과 장비를 보급
받아 착실하게 전쟁을 준비해나갔다. 마침내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
하였고, 그 결과 양측은 승자와 패자도 없는 소모적인 국력만을 낭비
한 채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분단이 기정사실화 되고, 남․북한 주민들의 상대방에 대한 적
개심만을 키워놓은 심리적 분단, 정서적 분단까지도 결과했다는 점이
다.48) 이로써 북한이 의도했던 ‘반제반봉건인민민주주의혁명’에 의한
남조선 혁명과 조국 통일의 완수는 실패하게 되었다.
둘째, 혁명과 통일이 실패한 뒤 북한은 평화적 통일방도로 통일정책
을 전환하게 된다. 즉,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사회주의로의 이행과 건
설을 위한 평화적 조건의 마련과 전 조선 주민의 자유의사에 따른 총
선거안을 들고 나온 것이다. 총선거안의 전제조건으로는 모든 외국군
대의 철수와 남한의 민주화를 들고 있다.49) 1954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9차대회 호소문을 비롯하여 1950년대 내내 북한의 통일정책의
주된 내용은 외국군 철수, 남과 북의 대표자 회의와 한반도 문제를 다
룰 국제회의, 경제․사회․문화의 자유로운 교류와 왕래 그리고 자유
의사에 따른 선거로 집약된다.50) 한국 전쟁 후, 북한이 내놓은 총선거

‘홍명희와 한 담화(1948, 5, 6),’『김일성저작집』4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또한,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에서 발표한 정부 정강에서도 첫째 항에 ‘공화국정부는 전체 조선
인민을 정부의 주위에 튼튼히 단결시켜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동원할 것이며 국토완정
과 민족통일의 선결조건으로 되는 쏘미 량국 군대의 동시철거에 관한 쏘련 정부의 제의
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할것입니다,’라고 하여 국토완정을 정부의 공식 정책
으로 공식화시켰다.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강(1948, 9, 8),’『김일성저작
집』4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47) 김일성, ‘2개년 인민경제계획을 승리적으로 완수하자(1949, 7, 19),’『김일성저작집』5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0).
48) 분단의 과정에 대해서는 강정구,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서울: 역사비평사, 1996)
을 참조할 것.
49) 이 한, 앞의 책.
50) 김혁동, ‘남북한의 통일정책과 그 추진방향,’ 조찬래 외,『북한과 통일문제』(서울: 담론
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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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 “조선에서 모든 외국군대가 철거하고 남북조선 인민들이 한자리
에 모여앉아....자유로운 의사에 기초하여”51) 혹은 “어떠한 외국의 간섭
도 없이 조선인 자신의 민주주의적 의사에 의하여”52) 등의 완전한 외
세 개입을 배제한 상태에서의 총선거안에서 1958년 “중립국 기구의 감
시하에 실시될 수 있다”53)고 변화한다.
셋째로, 북한의 총선거안은 과도적 조치로서의 연방제와 병립하게 된
다. 1960년 남한에서의 4.19 혁명이 발생하고, 자주적인 교류와 통일운
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자 총선거안과 함께 과도적 조치로서 연방제를
실시하고 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새로운 제안을
하게 된다.54) 비록, 과도적 조치이기는 하지만 일원론적 통일관에서 연
방주의적 접근으로 자세를 전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외국군
의 철수를 주장하고 있으며, 나아가 남북군대의 축소와 남북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하였다. 또한, 연방제 제안과 동시에 ‘경제공동위원회’ 개최
를 열자고 주장함으로써 당시의 압도적인 자신들 역량에 대한 자신감
을 내보이고 있다.55)
이렇게 본다면, 북한의 1960년대까지의 통일정책은 전쟁에 의한 무력
통일이 실패한 뒤, 평화적 방도에 의한 총선거안이 기본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총선거안은 외국군의 철수와 평화적 환경의 조성 그리고
조선인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통일방안으로서 북한의 역량이 우세

51) 김일성, ‘8․15해방 10돐 경축대회에서 한 보고(1955, 8, 14),’『김일성저작집』9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0).
52) 김일성, ‘사회주의 건설에서 인민정권의 당면과업에 대하여(1957, 9, 20),’『김일성저작
집』11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1).
5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성명(58년 2월 25일), 이 한 엮음, 앞의 책, 92쪽.
54) 김일성, ‘조선인민의 민족적 명절 8․15 해방 15돐 경축대회에서 한 보고(1960, 8, 14),’
『김일성저작집』14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1). 4.19 혁명에 대해 북한의 지도집단
이 보인 반응에 대해서는 유영구.『남북을 오고간 사람들』(서울: 글, 1993)을 볼 것. 또
한, 4.19 로 인해 ‘남한 혁명의 주체’, ‘남한 혁명의 성격’, ‘변혁과 통일’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북한의 대응에 대해서는 한모니카, ‘4월 민중항쟁 전
후 북한의 통일노선과 통일정책’ 한국역사연구회 4월항쟁연구반,『4.19와 남북관계』(서
울: 민연, 2001)을 참조할 것.
55) 당시 남북한의 정치, 경제, 군사적 역량을 비교하면 북한이 남한을 능가하고 있다. 더욱
이, 남한에서의 4.19의 발발과 혁명적 상황의 전개는 남한 혁명과 통일에 대한 자신감을
더욱 높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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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조건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남북의 체제 이질화의 정도가 그
다지 높지 않은 조건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북한의
기본 입장은 ‘선혁명 후통일’이었다. 즉, 남한에서의 혁명과 통일의 성
취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3대 혁명 역량의 강화가 제기되었다.
결국 1960년대까지의 총선거안은 북한의 주도에 의한 통일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한에서 박정희의 등장과 산업화 및 자본주의의 고도성장
그리고 북한에서의 사회주의 개혁과 제도의 정비로 인해 점차 체제 통
일의 가능성은 낮아져 갔다. 이러한 조건에서 북한은 새로운 통일정책
으로 선회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연방제 방식으로의 변화이다. 연방
제는 1960년에 이미 제기되었으나, 그것은 과도적 대책으로서 성격을
갖는 것이었고, 본격적으로는 과도적 연방제 즉, ‘고려연방공화국’으로
정립된 것은 70년대 들어와서이다.

나) 과도적 연방제 시기

1970년 조선로동당 5차 대회 결정서는 남한 혁명을 그동안의 ‘반제반


봉건민주주의혁명’에서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정식화하고,
전 조선혁명의 일부분으로서 남한 혁명을 위치시켰다.56) 남한 혁명은
이제 조선혁명의 독자적인 구성부분으로 변화되었다. 즉, 남한 혁명은
조선혁명의 완수를 위한 전제가 되는 것과 동시에, 지역 혁명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남한 혁명과 북한 혁명은 하나의 조선 혁
명이라는 공통성과 동시에 두 지역의 상이한 조건에서 벌어지는 지역
혁명으로서 위상이 설정된 것이다. 이와 함께, 통일정책에 있어서 1973
년 김일성의 6월 ‘5대 강령’의 선언을 통해 일정한 변화를 보인다.57)

56) ‘조선로동당 5차 대회 결정서,’ 국토통일원,『조선노동당대회 자료집 3』(서울: 국토통일


원, 1988).
57) 1973년 6월 남한에서는 박정희의 ‘6.23선언’이 발표되었다. 이와 동시에 북한의 김일성은
체코 후사크 대통령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5대 강령’을 발표한다. 이로써 7.4 남북
공동성명은 완전히 파탄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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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북과 남 사이의 군사적 대치상태의 해소와 긴장상태의 완화, 북과
남 사이에 정치, 경제, 군사, 외교, 경제, 문화의 다방면적인 합작과 교
류, 북과 남의 각계각층 인민들과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
는 대민족회의 소집, 단일국호에 의한 남북련방제 실시, 고려연방공화
국의 단일국호로 UN에 가입’ 등이다.58)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북한이 주
장한 고려연방공화국이 1960년에 제안했던 과도적 대책으로서 연방제
와 다르다는 점이다. 1960년대의 연방제가 정부대표로 구성되는 최고
민족회의를 통해 구성되며, 기능과 역할도 경제, 문화적 문제에 국한되
었던 것에 비해, ‘5대강령’에서 제시하고 있는 연방제는 대민족회의라
는 전민족적 범위에서의 통일전선에 기초하여 구성되며, 외교문제까지
도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적 연방제안은 말 그
대로 과도적 단계로서 연방제를 상정하고 있을 뿐이다. 즉, 연방제를
거쳐 하나의 국가체제로 통일을 하겠다는 구상을 담고 있다. 따라서
과도적 단계로서의 연방제는 다른 형태의 통일방안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1980년 당 제6차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으로 구체화되어 나온다.
1970년대는 박정희의 UN 동시가입, 한반도 교차승인 등이 주장되던
시기였다. UN 동시 가입이나 교차 승인 등은 곧 ‘2개의 한국’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또한,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남북한의 통일원칙이 합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과정은 이전보다 더한 적대와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1976년부터는 한․미 합동 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Team
Spirit)가 실시됨으로써 북한으로서는 전쟁의 위협에 대한 부담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59) 이러한 조건에서 북한은 74년 대미 평화협정 체결

58) 김일성, ‘민족의 분렬을 방지하고 조국을 통일하자(1973, 6, 23),’『김일성저작집』28권(평


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4).
59) 팀 스피리트 훈련은 1976년 6월에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1975년 월남 공산화와 1960년
대 말의 일련의 한반도 상황의 군사적 긴장의 고조, 1970년대 초반의 주한미군 철수 등
으로 ‘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1979년 매년 훈련을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팀 스피리
트 훈련은 남북한간에 군사적 쟁점이 되었는데, 남북 회담의 경우 이 훈련으로 인하여
한동안 회담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팀 스피리트 훈련은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있던 해에
완전히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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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비동맹 외교의 강화를 통한 UN사 해체(75년), 남북한 사이의 정
치협상(77년) 주장 등을 내놓는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북한이 남
한과의 통일협상을 진행하는 것에서 나아가 미국을 통일 및 평화협상
의 상대자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이미 앞서 북한의 외교정책에서 살펴
보았듯이, 1970년대 북한의 대서방 접근 외교는 미국과의 인민외교 및
의회 차원의 외교적 노력도 동시에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북․
미 평화협정, 남북 불가침 선언을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한,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남한의 군사
적 실권을 미국이 쥐고 있고, 미국을 통하지 않고서는 의미있는 진전
을 이루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74년 허담 부총리 겸 외교부
장은 최고인민회의 보고에서 72년 김일성이 제시한 남북평화협정을 거
론한 뒤, “현 조건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하여서는
그것을 확실히 담보할만한 실권을 가진 당사자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응당합니다”60)라고 하여 남북한 간의 평화협정 체결이 별 의의가
없음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미국과의 평화협정 문제를 토의할 것을 정
식으로 제의하였다.61) 이로써, 이제 북한은 평화협정과 군사적 긴장완
화의 문제 즉, 정치․군사적 대화를 미국과 벌이겠다는 의지를 천명하
였으며, 남한에는 대민족회의나 정치협상회의 등의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등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입장은 이후 줄곧 기본적인

60) 허 담, ‘최고인민회의 제5기 3차 회의 보고(1974년),’ 국토통일원, 『북한 최고인민회의


자료집 3』(서울: 국토통일원, 1988). 사실,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주장은 이 시기 이전에
는 남북 평화협정이었다. 김일성은 1974년에 “ 늘 우리 나라에서 북과남 사이에 조성된
긴장상태를 가시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서는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화국정부는 지난 기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
하여 꾸준히 노력하여왔으며 남조선당국자들과 대화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조선당국자
들은 우리가 내놓은 정당한 제안들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도리여 미제를 등에
업고 전쟁준비와 분렬책동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제반 사실은 남조선당국자들에게는
평화협정체결문제를 해결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
서 우리는 이 문제를 조선정전협정조인당사자이며 평화협정을 담보할 수 있는 실권자인
미국과 직접 토의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조치로 된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여 이
때부터 대미 평화협정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 ‘수단 정부기관지 <<알 싸하파>>
책임주필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1974, 4, 25),’『김일성저작집』29권(평양: 조선로동
당출판사, 1985), 167쪽.
61) 허 담, 앞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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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정책으로서 자리하게 된다.62)
1970년대는 다른 한편으로 북한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김정
일 후계체제가 성립되어, 내부의 체제 정비가 필요한 때였다. 또한, 남
한의 고도성장으로 경제발전의 측면에서도 대등하거나 남한이 추월하
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는 북한이 이전 시기, 힘의 우위와 경제력의 우
위를 바탕으로 한 대남 정책이 어려워졌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미 돌
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남북한의 체제의 상이함이 커졌음을 의미한다.
이제 새로운 통일방안과 통일정책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는
1980년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나타나게 된다. 완성된 형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이 그것이다.

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시기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은 10년만에 제6차 당대회를 개최하였다. 여


기서는 크게 두 가지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하나는 그 동안 내
부에서만 진행되던 후계체제를 공식화하여 김정일이 공식적인 후계자
로 등장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이라는
완성된 형태의 통일방안을 제안한 것이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은 전제조건으로 “남조선에서 군사․파쇼 통치를 청산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할 것,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전쟁위험을 제거”하기 위
하여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꿀 것, “미국의 ‘두개 조선’ 조작
책동을 저지시키면서 조선의 내정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끝장 낼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63)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안은 김일성이 밝히고 있
듯이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
하고 용납하는 기초 우에서 북과 남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통일정

62) 북한의 이러한 대민족회의 혹은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는 1948년 평양에서 있었던
‘연석회의’를 모델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상층 및 하층 통일전선의 형성의 일환이었
다.
63) 김일성, ‘제6차대회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1980, 10, 10),’ 국토통일원,『조선노동당대
회 자료집 4』(서울: 국토통일원,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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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내오고 그 밑에서 북과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
역자치를 실시하는 련방공화국을 창립하여 조국을 통일할 것”을 주장
하고 있다.64)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의 최고지도기구는 최고민족연합회
의가 되며, 연방상설위원회가 전반적인 사업을 관할한다. 그리고 각각
의 정부는 지역자치정부로서 기능하도록 되어 있다. 고려민주연방공화
국의 성격은 중립국가로서 어떠한 동맹이나 블록에도 소속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며, UN에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의 단일국호로 가입하도록
되어 있다.65) 이와 함께,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의 시정방침으로 10대 시
정방침을 주장하고 있다.66)
1980년대는 새로운 냉전의 시기였다.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레이
거니즘으로 대표되는 신냉전의 도래와 남한에서의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이은 신군부의 집권은 남북한의 대립과 갈등을 부추키는 외부적 조건
을 제공하였다. 또한, 반소 삼각동맹체로서 ‘한․미․일 삼각안보동맹
체제’의 구축과 강화는 한반도에 군사적 대결과 무력증강을 통한 핵전
쟁의 가능성이 한반도에 상존하게 됨을 뜻했다. 즉, 한반도는 전세계적
반공전선의 제1전초기지가 되었음을 뜻한다.67)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
의 정치적 안정과 강력한 반공정권의 수립은 미국에게 절대적으로 필
요한 요구였던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북한이 내놓은 새로운 통일방안
은 별다른 영향을 미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1980년대 후반의 신
데땅트의 분위기와 사회주의권의 변화는 노태우 정부로 하여금 적극적
인 대북정책을 추진하도록 만들었다. 북한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을 통해 위로부터의 대화전술과 아래에서의 통일전선전술을 사용

64) 김일성, 위의 글.
65) 김일성, 위의 글
66) 10대 시정방침으로는 1) 자주성의 견지와 자주적 정책의 실시, 2) 나라의 전지역에서 민
주주의 실시, 3) 남북간의 경제교류와 합작실시, 민족경제의 자립적 발전보장, 4) 과학․
문화․교육분야의 교류․협력, 5) 전국적 범위에서 교통․체신수단의 자유로운 이용 보
장, 6) 근로대중과 전체인민의 생활안정 도모, 복리의 계통적 증진, 7) 군사적 대치해소,
민족연합군 조직, 8) 해외동포의 민족적 권리와 이익 옹호, 9) 통일 이전의 대외관계의
올바른 처리, 지역정부의 제활동의 통일적 조절, 10) 평화애호적인 대외정책 실시 등이
다. 김일성, 위의 글.
67) 이 한, ‘권두논문: 남북한 통일정책의 기본논리,’ 이 한 엮음,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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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남한에서의 대중적 통일운동을 최대한 이용하고자 했다. 즉, 노
태우 정부와 당국자간 대화를 추진함과 동시에, 임수경의 방북과 문익
환의 방북 등 아래에서의 통일전선전술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
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이 발표된 뒤, 11월에는 이의 실현을 위한
북한 지역의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진행하고, 남한과 해외동포
들에게 연석회의 개최를 위한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68) 1982년 김일
성은 시정연설을 통해 통일은 자주적으로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는 미군을 철거하고 미국의 내정간섭을 끝장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전히, 통일의 중심문제는 자주의 원칙인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가장 공명정대한 통일방안으로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을 주장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북한은 통일방안의 모색보다는 새로
운 남북관계의 구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소련과 동
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북한에게 심각한 외교적 고립을 가져다주었으
며, 중국의 개혁․개방, 베트남의 도이모이 정책의 실시는 전통적인 우
방인 사회주의 형제나라들로부터의 지원과 국제적인 지지를 획득하는
데서 커다란 어려움을 노정시켰다. 더구나, 남한의 UN 가입에 대한 중
국의 암묵적 승인은 전통적으로 고수해오던 UN의 단일국호에 의한 가
입의 원칙을 포기하도록 하였다. 결국 1991년 9월 결국 남북한은 별개
의 국가로 UN에 가입하였으며, 이제 국제적으로 한반도에는 두 개의
국가가 정립되었다. 이와 발맞추어 북한은 세계탁구선수권 대회 단일
팀 출전, 세계 청소년 축구 단일팀 출전 등을 통해 국제적으로 하나의
국가임을 나타내고자 했다. 또한, 1991년 합의된 남북합의서를 통해
“쌍방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사이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
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라고 함으로써,
국제적인 분단을 내부적인 합의를 통해 하나의 민족, 국가임을 나타내

68) 1980년 11월 연석회의에 대해서는 이 한 편, ‘제정당․사회단체 련석회의,’ 위의 책,


627-631쪽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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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고 하였다.69)
또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도 수정할 뜻을 내비쳤다. 1989
년 방북한 문익환 목사와 허담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장 사이의 합의
에서 “통일은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진적으로 할 수 있다”고 선언
했다. 여기서 점진적 방식의 통일이 곧 ‘느슨한 연방’ 혹은 ‘단계적 연
방’이다. 그리고 91년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 외교권과 국방권을 일정
기간 지역정부에 위임하고 점차로 이를 중앙정부에 귀속시키는 단계적
인 연방제를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이를 공식화했다.70) 이
로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은 2단계에 걸친 단계적 연방으로
수정되게 된다.71) 북한으로서는 점차 어려워지는 외부적인 조건하에서
내부적인 합의를 조금 더 쉽게 하기 위한 일종의 양보였던 셈이다. 그
리고 이렇게 변화한 ‘낮은 단계의 연방’은 남한이 제안한 ‘국가연합’과
보다 많은 공통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의 북한의 통일정책은 다른 문제로 인해 주춤거리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북․미간의 핵갈등과 북한 경제의 파탄 그
리고 체제이완 현상에 직면하여 우선적으로 체제안보를 우려해야 했던
것이다. 더구나,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은 북한에게 역사상 최초로
권력의 계승문제를 제기했다. 비록, 김정일로의 권력승계가 30여 년 전
부터 준비되고, 1980년대부터는 사실상 김정일에 의해 북한이 통치되
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지난 사회주의 국가들이 보여주었던 승계시의
문제는 북한으로서도 우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72) 따라서, 북한으
로서는 1990년대의 중․후반기를 체제안보와 계승의 완결성을 보장하
는 것이 시급했던 것이다. 여기에, 독일, 예멘 등의 통일경험은 당시
김영삼 정권의 공공연한 ‘흡수통일’ 천명 등으로 북한으로서는 아예 정

69)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 1991년


70) 김일성, 91년 신년사, <<노동신문>> 1991년 1월 1일자.
71) 지난 6.15 공동선언 2항의 ‘느슨한 연방’은 1991년 김일성이 밝힌 ‘낮은 단계의 연방’을
의미한다.
72) 당시 북한의 관영매체들은 김일성 사망 후 곧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캠페인을
벌였지만, 세도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한 특별한 경고를 강도 높게 내놓음으로써 이러한
일단의 우려를 내비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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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차원의 대화의 창을 닫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남북대화는
닫히고, 미국과의 우선적인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소위, ‘통미봉남(通
美封南)’이 시작된 것이다. 1990년대 중․후반기는 70년대 이래 가장
최악의 남북관계로 기록될 만하다. 그리고 이를 해소하는 데는 김대중
정부가 등장하기까지 5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야 했다.
1980년 이후 북한의 통일정책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중
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전의 과도적 연방제라는 말 그대로의 과도기를
보내고, 완성된 형태의 연방제가 등장한 것이다. 북한에게 연방제는 남
북 사이의 체제의 상이함과 차이의 확대 등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었다. 그러나 연방제의 기본전제인 미군 철수와 내정 간섭의 배제 등
은 당시의 남한 정권의 상황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다른 한
편, 1980년대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남북 간의 대화와 대중적인
접촉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비록 일회성으로 그치기는 했지만, 조금씩
남북 간의 대화와 협상, 합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1991년에는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처음으로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
됨으로써 90년대 통일의 이정표를 마련한 시기였다. 북한으로서는 국
제적으로 두 개의 한국이 공식화되고,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외풍(外
風) 속에서 체제생존과 계승의 문제에 맞닥뜨렸던 시기였다. 이런 조건
에서 내부적인 합의를 통해 하나의 국가임을 어떻게 하든지 확인하려
고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남한의 통일정책과 맞물리면서
2000년에 와서 극적인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다. 지난 50년간 서로를
적대시했던 두 정상이 마주앉아 통일의 대원칙을 확인하고, 화합의 손
을 잡은 것이다. 이제 북한도 어느 정도의 내부체제를 정비한 채로 통
일정책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라) 6.15 공동선언과 민족공조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발표한 ‘6.15 공동선언’은 지금까지도 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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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이끌어가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특히 제2항에서 합의한 ‘연합
과 낮은 단계의 연방’의 공통성을 지향하는 방향에서 통일방안을 마련
하기로 한 것은 획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6.15 공동선언’ 이후, 북
한은 통일의 원칙으로서 ‘자주’를 보다 더 구체화, 적극적으로 주장하
면서 ‘민족공조’을 내세우고 있다. 비록 1992년 김일성이 신년사를 통
해 ‘통일과정에서 유관국들의 협조가 중요함’을 역설했지만73), 자주의
원칙은 ‘6.15 공동선언’ 제1항에서도 합의한 바와 같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인 것이다.
북한의 민족공조론은 민족대단결론에 연원을 두고 있다. 김정일은
1998년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라
는 문헌을 통해 ‘민족대단결’을 주장하면서 발표한 ‘민족대단결 5대방
침’을 강조하였다.74) 이에 따르면, 과거 김일성이 제시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그대로 충실히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족공조론은
2000년 정상회담 당시 제 1항의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에서 사용된
이래, 2001년 신년사에서 ‘민족공조’라는 용어로 제시되었고, 2002년부
터는 ‘우리민족끼리’와 ‘민족공조’가 공식화되어 사용되었다.75) 북한의
이러한 민족공조론은 하나의 이념으로 자리매김 되면서 3대공조(2005
년 신년사설)로 발전하였다.76) 북한이 주장하는 민족공조론은 자주의
원칙에 입각한 민족대단결을 핵심으로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
관계를 민족공조와 외세공조로 구분하고 남한에 대하여 민족공조 우선
과 외세공조 우선의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대남 공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민족공조론은 남북관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순기능의
측면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민족공조를 통해 남북한의 정

73) 김일성, 92년 신년사, <<노동신문>> 1992년 1월 1일자.


74) 김정일,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1998, 4)’『김정일선
집』14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00)
75) 2001년 북한의 신년사설은 ‘민족공조’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그해 1월 10일
‘우리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여는 2001년 대회’에서 ‘우리민족끼리, 민족공조, 조선민족끼
리’ 등의 혼용된 용어로 사용되다가, 2002년 신년사설에서 일반화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김수민, 윤황, ‘김정일의 민족대단결론과 민족공조론에 대한 평가,’『평화연구』13권 21호
(2005년 가을), 100-101쪽.
76) 북한이 주장하는 ‘3대 공조’는 ‘민족자주’, ‘반전평화’, ‘통일애국’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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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 군사, 경제, 사회문화적 협력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적 명분과 실
리를 획득할 수 있으며, 또한, 미국과 북한과의 핵갈등을 남북한의 관
계진전을 통해 일정하게 완화, 완충할 수 있는 여지를 낳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1990년대부터 변화하기 시작한 북한의 민족
주의에 대한 재해석과 긍정적 평가77)와 민족대단결론이 2000년 정상회
담 이후의 남북관계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나타난 것이 민족공조론이
라고 할 수 있다.
한편, ‘6.15 공동선언’ 이후, 북한의 대남 통일정책은 자주의 원칙에
입각한 민족공조와 실리주의적 대남 관계의 이중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민족공조를 통해 외세와의 공조 특히 한미관계의 재조정을 요구
하는 한편, 실리주의적 입장에서는 쌀과 비료의 지원과 민간 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교류․협력 사업을 강화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남북
한의 경제협력이 북미 핵갈등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꾸준히 발전하고
있으며, 금강산관광 및 개성공단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서 북한의
대남 정책도 경제적 실익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적극성을 띠고 있는 것
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공조와 실리의 이중적 전
략에서 우선적인 것은 정치, 군사적인 문제이며, 따라서 민족공조의 지
속적이 주장과 외세와의 공조에 대한 비판은 감소하지 않을 전망이다.
현재 북한은 남북간의 관계를 ‘과도적 공존’으로 규정하고 있다.78) 그
리고 현재의 남북관계를 보다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근본문제’를 해
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79) 2005년 북한 대표단이 국립 현충원의

77) 이에 대해서는 정영철, ‘북한의 민족․민족주의 - 민족개념의 정립과 민족주의의 재평


가’,『문학과 사회』63호(2003년 가을호)를 참조할 것.
78) 지난해 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으로 인해 남북관계가 심하게 흔들렸다. 당국간 대화가
단절되고 민간 교류도 위축되었다. 정례화 될 것처럼 보이던 8.15 공동행사도 북한의 수
해피해로 인해 취소되었다. 이는 지금의 남북관계가 여전히 불안함을 보여주고 있다. 지
난 2006년 광주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행사’에 참가한 북한의 한 인사는 현재의 남북관
계를 ‘과도적 공존’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의 표현처럼, 남북관계는 ‘과도적’ 상황에 있
다.
79) 북한이 주장하는 근본문제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장벽의 제거를 의미한다. 정치적
장벽의 제거는 참관지 제한 및 상호비방 중지 등을, 경제적 장벽은 경제봉쇄 및 법적, 제
도적 장벽의 제거, 군사적 장벽의 제거는 외세와의 연합 훈련 중지 및 NLL 문제 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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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과 참배, 2006년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 참배, 2007년 수유리 국립
묘지 참배 등의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의 이유도 근본문제
의 하나로 제기하고 있는 참관지 제한에 대한 북한의 선(先)행동의 하
나라고 해석된다.
앞으로 북한의 대남정책은 남한에 대한 3대 근본문제의 해결을 위한
압력과 ‘민족 대 외세’의 대립 구도에서 민족공조를 지속적으로 주장할
것이다. 2000년 정상회담이 북한에게 국제사회와의 교류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을 제공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공조를 핵심으로
하는 ‘주체적 민족론’의 강화의 기회도 제공하였다. 이는 남북한의 통
일문제에 대한 접점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며, 동시에 우리가
생각하는 ‘열린 자주’와 충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고민거리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응이 요구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역사적으로 북한의 대남 통일정책을 살펴본 대로, 북한의 대
남․통일 정책은 일원주의적 체제 통일의 논리에서 점차 연방주의적
통일로 진화해왔다. 남북한 사회의 이질성이 커가고, 국제적인 정세의
변화 속에서 북한도 나름대로 대남 통일정책을 변화시켜왔던 것이다.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은 1960년대의 과도적 조치에서 70년대 과도적
연방제로 그리고 80년대의 완성된 연방제로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북
한이 주장하고 있는 연방제 방안은 구체적인 각론에서는 아직까지 많
은 공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북한 연방제 방안의 큰 특징은 서로
다른 체제의 연방이라는 ‘미완의 실험’을 통한 민족 문제 해결에 있다
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북한의 대남 통일정책은 과거 변혁과 통일
의 논리에서 벗어나 민족문제로서 통일문제를 대하고 있는 특징을 보
이고 있다. 따라서 이념과 체제의 대결이 아닌 애국과 매국으로 선을
가르려 하는 것이 북한의 통일정책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민
족과 외세와의 대결구도를 형성하고자 해왔다. 이러한 북한의 대남 통
일정책의 특징은 김정일이 1998년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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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석회의 50돐 기념 중앙연구토론회’에 보낸 서한 ‘온 민족이 대단결하
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남한의 집권자, 여당, 야당, 군장성, 대자본가와도 민족대단
결의 기치 하에 단결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80)
지난 6.15 공동선언 이후 북한의 통일환경과 통일정책 역시 일정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과거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을 통해 남한을 배
제하던 데에서 벗어나 남한과의 합작과 화해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미
이산가족 상봉, 장관급 회담, 경제협력회의, 국방장관 회담을 통해 진
행되고 있다. 한편, 북한은 1997년 신년공동사설에서 언급한 ‘조국통일
3대헌장’을 양보할 수 없는 통일원칙으로 내세우고 있다.81) 그러나 그
동안 항상 언급해오던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서 김정
일이 전향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좀 더 쉬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82) 앞으로 북한은 자주와 실리의 원칙에서 외교 및 대남 통일
정책을 전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남한과의 여러 형태의 회
담과 협상을 진행시킬 것이며, 이를 통해 한편으로는 민족공조를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실리를 취하고자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 역시
그에 대한 준비와 대응 정책을 마련해야 하는 쉽지 않은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북간의 협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3. 북한의 협상전술

일반적으로 협상은 개인이나 혹은 국가가 절충과 타협을 통해 서로


80) 김정일,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룩하자’ 앞의 글.
81) 조국통일 3대헌장이란 ‘7.4 남북공동성명’,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 ‘전민족대단결
10대 방침’ 등을 의미한다.
82) 주한미군 철수나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북한이 공식적으로 미군 주둔 허용과 국보법
의 유지를 밝힌 적은 없다. 지난 정상회담 때와 언론사 방북 때 김정일이 발언했다는 보
도 이상의 새로운 변화는 없는 셈이다. 여전히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은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연방제 방식의 통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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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충하는 이익을 조절, 혹은 공통된 이익의 획득을 위해 추진하는 하
나의 상호작용이라고 정의된다.83) 북한 역시 협상을 “국가들 사이의
분쟁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적용하는 외교적 방법
또는 회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84) 이렇게 본다면, 북한 역시 평화적
방법에 따른 회담이나 외교적 방법으로 협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
서 큰 차별성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대외정책이 반제투쟁과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면, 협상은 이러한 대외이
념을 실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인식된다.85) 김일성의 언급에 따르면,
“대화건 협상이건 우리는 적을 날카롭게 공격해서 적을 궁지에 몰아넣
는 혁명의 적극적인 지류적 공격형태로 생각해야 됩니다”라고 하여 협
상은 또 따른 혁명투쟁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86) 이처럼 북한은 협
상을 ‘당사자들의 공동의 이익을 찾아내는 과정으로 보지 않고 상대방
을 제압하는 공작이나 조작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파악’하
는 경향이 강하다.87)
그러나 최근 들어 북한의 협상태도는 여러 측면에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의 협상을 연구한 스나이더에 따르면 과거
에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선전적인 면이 강했으나, 최근에는 실질적인
관계개선을 추진하고 있다고 바라본다. 또한, 과거의 벼랑끝 전술 등이
최근에는 경제적인 문제를 다루는 협상에서는 줄어들고 있다고 분석하
고 있다.88) 지금까지 남북협상은 상대방의 이익은 나의 손실이며 상대

83) 김도태, ‘북한의 핵협상관련 전략, 전술 연구,’『협상연구』5권 1호(1999), 156쪽; 서구적


개념에서 국가간의 협상은 외교의 핵심수단으로서 합의에 도달하기위해 상충하는 이해를
조정해나가는 교섭과정으로 정의된다. F.C.Iklé, How Nations Negotiate (New York:
Frederick A. PraegerPublishers, 1964), pp. 3-4, 허만호, ‘북한의 협상행위의 특징,’『국제
정치논총』36집 2호(1996), 179쪽에서 재인용.
84) 과학백과사전출판사,『현대조선말사전』(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2342쪽.
85) 허만호, 앞의 글, 189쪽.
86) 허만호, 앞의 글, 190쪽에서 재인용.
87) 김용호, ‘북한의 대외협상 행태 분석,’『국제정치논총』40집 4호(2000), 294쪽.
88) 스콧 스나이더, 안진환 역,『벼랑끝협상』(서울: 청년정신, 2003). 반면, 북한과 미국의 협
상을 연구한 척 다운스는 북한의 협상 태도가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비판적으로 지적하
고 있다. 척 다운스, 송승종 역,『북한의 협상전략』(서울: 한울아카데미, 1999). 이에 대
해 김용호는 북한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부정적 수단과 긍정적 수단을 모두 사
용하는데 척 다운스는 전자에 과도한 강조를 두고 있고, 스나이더는 후자에 과도한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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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손실이 나의 이익이라는 제로섬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89)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최근의 북한 협상행태는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북한은 약소국으로서 미국 등과의 대외협상에서 더 많은 집중
력을 발휘하고 더 많은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90) 이러한 측면
에서 본다면, 북한은 미국 및 남한과의 협상에서 더 많은 성과를 얻어
내기 위한 주의력과 강한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긍정적 수단과 부정적 수단을 적절히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북한의 협상전술이 익숙히
않은 서구인들의 눈에는 과거의 냉전시절과 동일하게 보일 있을 것이
다. 그러나 협상에서 긍․부정의 수단들은 전술적으로 빈번하게 사용
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것을 북한만의 협상전술로 인식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전통적인 북한의 협상태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
여준다. 우선, 전략적 측면에서 경쟁전략과 무행동전략이 주축을 이루
고 있다. 즉, 북한이 일방적인 이익만을 추구하여 남한과의 협력과 타
협을 부정함으로써 선택하게 되는 전략이다. 냉전 시절 남북한의 극단
적인 대립의 과정에서 어느 일방의 이익이 곧 타방의 손실이 되는 것
은 양측이 서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는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기보다는 상대방을 부정하고, 상
대방과의 협상을 아예 봉쇄하는 것이 유효한 전략이 될 것이다. 둘째,
협상목적과 협상 의제 사이에 불일치를 내포한다. 즉, 북한은 협상을
통해 남한이 획득할 수 있는 협상이득을 거부하며, 북한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셋째, 남북한 사이에 불균형 협상을 추구한다. 넷째,
의사(pseudo-)협상과 불균형협상을 운용하기 위해 협상의제의 정치적

를 두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김용호, 위의 글, 295쪽.


89) 이시형, ‘김정일 시대 북한의 대남인식,’『한국동북아논총』30집(2004), 268쪽.
90) 일반적으로 강대국과 약소국의 협상에서 약소국은 주의력와 집중력에서 강대국보다 앞
서는 경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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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성을 제고하는 특별한 전략적 형태를 보였다. 마지막으로 협상의
제와 목적의 차이에 따른 의사협상 수행을 통해 협상과정에서 시기별
로 사용되는 전술의 성격을 달리한다.91)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협상
태도는 최근에 들어와서 일정하게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협상인식에서 남북협상을 더 이상 군사력의 대안으로 이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며, 협상을 문제해결 혹은 실익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사
용하고 있다.92) 이러한 북한의 태도는 과거 의사 협상이 진의 협상으
로 변화고 있음을 말해준다.
다른 한편, 북한은 협상에서 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하여 양
면게임의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즉, 서방이 만들어 놓은 가공된 사실
- 외교부는 대외협상파이며, 군부는 강경파 - 을 교묘히 활용하여, 외교
부와 군부 사이의 노선갈등이 있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역할분담을 하
고, 이를 통해 협상에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는 것이다.93)
김용호는 북한의 협상 전술을 단계별로 분석하여 그 특징을 밝혔는
데, 다음과 같다.

<표 5> 협상단계별 북한의 주요 협상전술

1. 협상 전(前)단계: 유리한 협상환경과 의제 모색


- 상대방이 협상을 더욱 원하는 협상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함
- 결론이 삽입되거나 북한에 유리한 의제 선정을 위해 장기간 노력함

2. 초기단계: 높은 요구와 원칙 제시로 주도권 장악 시도


- 매우 공격적이고 비타협적인 자세로 나오는 경향이 강함
- 상대방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매우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협상의 원칙을 제시
하여 동의를 구한 후 향후 협상과정에서 상대방이 쉽게 타협하지 않는 경우
협상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음
- 처음에 최대한의 요구사항을 제시함(최종 합의사항에 가까운 제안을 처음부터
내놓는 적이 거의 없음)

91) 이상의 특징은 김도태, ‘북한의 국가이익과 협상태도 변화,’『협상연구』6권 2호(2001),


76-79쪽.
92) 김도태, 위의 글, 86-87쪽.
93) 김영재, ‘탈냉전기 북한 외교정책의 변화,’『한국정치외교사논총』24집 2호(2002), 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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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들의 제안을 먼저 논의하기를 요구하는 경향이 강함

3. 중간단계: 조작과 비공식 채널을 통한 타결 내용과 방식 모색


- 북한은 요구사항을 증폭시키거나 새로운 이슈를 제기하거나, 부당한 요구사항
을 내놓거나 기습제안 등을 통해 협상의제를 조작하는 능력이 뛰어남
- 의도적으로 계산된 벼랑끝 전술 사용
- 상대방을 지치게 만들거나 상대방의 양보가능성을 타진하거나 또는 최종안을
알아내기 위해 비공식 접촉을 시도하거나 지연전술 사용
- 중재자를 동원하여 북한의 진의를 전달하거나 협상의 교착상태를 타개하려고
시도
- 중간단계에서 일부 의제에 관해 합의를 하거나 합의의 틀을 만들어내어 협상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함
- 일괄타결 방식을 선호
- 북한은 자국의 언론매체는 물론 외국 언론매체 등을 활용하여 상대방의 기대
수준을 낮추거나 상대방의 의도를 알아내거나 자국의 입장을 비공식적으로 전
달하여 협상의 목적을 추구함

4. 최종단계: 합의나 거부를 위한 조치 구체화


- 북한은 상대방의 의사를 충분히 타진했거나, 최종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국익증
진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흔히 별안간 최종합의에 나서는 경우가 많음
- 북한의 협상대표들은 재량권이 매우 적기 때문에 최종합의 단계에서 평양의 의
사를 타진하기 위해 협상을 중단하고 기다리는 경우가 많음
- 자국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부분이나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사항에 대
해서는 철회하지 않고 나중에 다시 제기함
- 북한은 이행과정에서 융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매우 구체적이고 ‘계약’의 성격을
가진 합의문보다 상대적으로 모호하고 추상적인 내용을 담은 정치적 합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음
- 북한은 합의문 작성을 협상의 종결로 보지 않기 때문에 합의사항의 이행과정에
서 새로운 요구를 내세우는 경우가 있음

* 출처: 김용호, ‘북한의 대외협상 행태 분석,’『국제정치논총』40집 4호(2000), 297쪽.

이러한 협상단계별 전술은 냉전시기와 냉전 종식 이후에도 차별성과


지속성을 보여주는데, 냉전시기의 협상과 냉전 종식 이후의 협상 전술
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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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6> 북한의 대남 협상 행태 변화 추세

구분 냉전시기 냉전 종식 후

협상 적십자회담, 조절위 회담, 체육회담, 총리급회담, 정상회담으로 협상 수준


방식 경제회담, 국회회담 등으로 다양화 의 상향화 추세

협상 협상의제 외의 목적을 추구하는 가짜 타협을 통해 문제 해결을 추구하는


전략 협상의 성격이 강함 진의 협상의 성격이 강함
협상
공세적, 비타협적 경향 수세적, 타협적 경향
태도
협상의
경제, 사회분야 교류협력 등으로 확대
제 정치군사적인 문제 위주
판문점, 평양, 서울 외에 북경, 금강
협상장 판문점과 평양 및 서울에 국한
산, 한라산 등으로 다양화

협상 남한 적십자사와 당국자 외에 통일전 적십자사와 당국자 외에 남한 기업,


상대 선전략에 따라 정당, 사회단체 대표 체육계 인사, 민간단체, 종교단체 등
회의 추진 으로 확대

합의 원칙 및 명분과 함께 구체적인 합의와


원칙과 명분에 집착
방식 실리추구
-여전히 높은 요구를 제시하지만 과거
-강탈적 요구나 높은 요구 제시한 에 비해 빨리 타협하는 경향
후 장기간 반복 제의 - 지연전술 약화
- 지연전술 -여전히 기선제압과 협상 주도권 장악
- 기선제압과 주도권 장악 에 노력
- 결론이 삽입된 의제 제시 -여전히 결론이 삽입된 의제 제시
- 남측의 대미 의존을 비난 -남측의 국제공조에 대한 비판은 여전
협상
- 위기조성 및 벼랑끝 전술 사용 하나 점차 태도 완화 추세
전술
- 선제 또는 기습제의 -위기조성 및 위협 약화
- 사건의 조작 등으로 진실 왜곡 -선제 또는 기습 제의 줄어듦
- 합의사항 무효화 전술 -확대 해석이나 아전인수 여전
- 거부권 확보 -합의사항 불이행 경향이 줄어듦
- 남측의 양보를 역이용하여 새로운 -거부권 확보 노력 약화
요구 제시 -남측의 양보에 타협으로 대응하는 경
향 증가

* 출처: 김용호, ‘북한의 대외협상 행태 분석,’『국제정치논총』40집 4호(2000),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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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에 의하면, 북한의 협상은 냉전 시대와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먼저 협상태도에서 과거의 공세적인 접근에서 벗어
나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데서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
는 곧 탈냉전 이후 북한의 외교적 고립과 남북한을 둘러싼 환경의 변
화, 그리고 1990년대 이후의 북한의 체제 위기에 따른 대응에서 그 이
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북한의 협상행태에서 특징적인 것의 하나는 협상을 둘러
싼 문화적 측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이다. 스티브 린튼에 따르면,
북한은 독특한 고유문화로 인하여 인간관계, 체면 등을 중시하며 오래
동안 주변 강국들의 거만스러운 행동에 모욕을 당해왔기 때문에 상대
방이 보이는 존경스러운 제스처나 예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
다.94) 이러한 특징은 협상에 나서는 북한의 협상가들이 보이는 태도에
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로 인해 북한과의 협상에서 서구의
협상가들이 적잖이 당황해하는 일이 초기에 빈번하게 나타나기도 한
다.
지금까지 남북한은 여러 차례의 협상을 진행시켜 왔다. 이를 현장에
서 지켜본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의 평가에 따르면, 과거와 달리 1990
년대 이후의 협상은 때에 따라서는 부정적 협상전술도 배합 사용하였
으나 주로 공동이익을 추구한 긍정적 협상이었다고 평가된다.95) 북한
이 지난 고위급 회담에서 보여준 협상태도와 전술을 특징적으로 추려
보면 먼저 양보와 절충의 유화전술, 단계적 대안제시 전술, 자존심과
체면의 중시, 공통․유사한 것만 합의하자는 전술, 일괄타결 동시집행
원칙, 회담 형식의 신축적 운용 전술, 비공식 접촉 활용 전술 등이
다.96)

94) 송종환, ‘북한 협상행태 연구의 문화적 접근,’『협상연구』8권 2호(2002), 223쪽.


95) 임동원, ‘남북 고위급회담과 북한의 협상전략,’ 곽태환 외,『북한의 협상전략과 남북한
관계』(서울: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1997), 118쪽.
96) 임동원, 위의 글, 119-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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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협상전술과 태도는 다만 북한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
니다. 우리는 단지 북한의 협상전술은 벼랑끝, 시간끌기, 억지부리기,
합의 불이행 등의 부정적인 언어로만 평가해왔다. 그러나 북한의 협상
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원칙을 끝까지 고집하고 관철시키고자 하는 의
지가 무척 강함을 느낄 수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약소국의 경우 하나
의 중요 협상은 단순한 국가의 이익이 아닌 국가의 최고의 이익을 성
취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된다.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보여준 협상 태도는 약소국이 강대국과 맞서 협상에서 주의력, 집중력
을 얼마나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관철하는가를 보여준 대표적인 협상
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남한과의 협상은 비교적 대등한 입장에서의
협상이지만, 이 역시도 분단과 국제적 고립의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하
지 않으면 안 되는 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북한이 6자회담
에서 보여준 협상 태도를 분석한 이기동은 북한이 오히려 이 기간 동
안 많은 유연성을 보여줬다고 평가하고 있다. 더 이상 벼랑끝 협상이
가능하지 않다는 여러 가지 객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양보와 유연성
은 오히려 북한의 몫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97) 지금까지 남북한 간에
는 1970년대 초부터 시작하여 2000년대 초까지 공식, 비공식 회담이
약 370차례가 있었다고 한다.98) 회담의 형식과 내용도 실무회담에서부
터 시작하여 장관급, 총리급, 정상회담까지 격상되었다. 앞으로도 남북
한은 많은 회담을 앞두고 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북한의 협상 전
술을 운용하는 협상가들과의 접촉과 만남도 그 만큼 더많아질 것이다.
북한의 협상전술과 태도, 그리고 이를 운용하는 협상가들에 대한 연구
가 보다 더 필요해지는 이유이다.

97) 이기동, ‘6자회담시 북한의 태도평가 및 향후 전망,’ 한국북방학회 발표논문(2007년 6월


5일, 한양대, 서울)
98) 송종환, 앞의 글,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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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북한의 협상가들과 협상기구

1. 북한의 대남 협상기구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는 당우위의 정치체제를 갖추고 있다. 일명


당-국가 체제(party-state system)가 전형적인 사회주의 정치체제인 것
이다. 모든 것이 당의 정책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국가정책도 당에
의해 지도, 통제된다. 북한도 이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북한 헌
법 제11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영도 밑에 모
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규정하여 실질적인 권력의 원천이 조선로동당
임을 명문화 해놓고 있다.99) 따라서 북한의 대남협상 정책은 조선노동
당의 해당부서에서 작성되고, 협상에 나서는 대남협상기구와 간부들도
노동당의 지도와 통제를 받는다.
대남협상을 지휘하는 노동당의 최고기관은 비서국의 대남담당비서(북
한에서는 통일전선사업담당이라고도 한다)이다. 비서국은 당내 인사문
제를 비롯해 당면문제를 정기적으로 토의, 결정하고 그 결정을 집행
조직, 지도하며, 당 산하의 전문부서를 일상적으로 지휘, 감독하는 당
의 중추기관이다. 대남담당비서의 산하에는 통일전선사업부, 대외연락
부, 35호실(구 대외정보조사부), 작전부 등의 전문부서가 설치돼 있다.
그동안 대남담당비서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김용순 비서가 맡고
있었으나, 그가 사망한 후 현재까지 담당 비서는 공석으로 알려져 있
다.100) 현재는 각 부장들의 협의를 통해 결정된 사항이 직접 김정일 국
방위원장에게 보고돼 재가를 받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대남 사업은 방대한 기구를 갖추고 있으며, 체계적으로 대남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가 접하게 되는 남

99) 1998년 헌법
100) 1980년대 후반부터 대남 담당 비서를 역임했던 김용순은 2003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까지 그를 대신하는 대남담당 비서는 공석이지만, 남
북 행사때에는 김기남 비서가 참가하여 그의 역할을 일정부분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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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화의 북측 대표들은 대체로 대남 사업 관련 인물이라고 보아도 무
방하다. 북한에서 대남 사업을 관장하는 곳은 일명 ‘3호 청사’라 불리
는 곳이다. 3호 청사란 북한의 대남정책과 사업의 총본산으로 불리는
노동당 별관을 이르는 말이다. 평양 모란봉 구역 전승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사에는 대남 사업만 수행하는 통일전선부, 작전부, 대외연락
부가 소속되어 있다. 이중 통일전선부는 대남 사업 기구 중 가장 방대
하며, 중요한 기구로 김용순 대남 사업 담당 비서가 부장을 맡고 있다
가 사망 후, 2007년 3월부터 노동당 국제부장과 국방위원회 참사를 역
임한 김양건 부장이 새로 임명됐다.101)
통일전선부는 해외교포나 동포들의 포섭공작, 한국내 민간단체들을
대상으로 한 통일전선 구축, 크고 작은 대남 제의, 남북대화, 교류 등
의 업무를 맡고 있는 곳으로 한국내 주요 인사들의 방북도 이 부서가
관장하고 있다. 통일전선부 소속의 인사들은 주로 아세아․태평양 평
화위원회의 직함이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직함을 가지고 남북대화에
나오고 있다. 2000 남북정상회담 이후 장관급 회담 수석대표로 나온
전금진(전금철: 아태 부위원장)이나 남북 정상회담 합의 당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의 파트너였던 송호경(아태 부위원장)을 비롯해 각종
남북대화에 모습을 드러낸 이종혁(아태 부위원장), 박영수(조평통 부국
장), 안병수(본명 안경호: 조평통 부위원장) 등도 통일전선부 부부장급
의 인사들이다.
통일전선부의 조직을 보면 우선 통전부 본부의 모든 기능과 역할을
함축시킨 일명 ‘어머니 연락소’로 불리는 조국평화통일서기국(조평통)
이 있다. 기본적으로 통일외교의 합법성을 주장하며 막후에서 대남전
략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조직이다. 주로 회담과 관련한 연구와 실행,
인물 파악, 정보수집 등을 전담한다. 통전부의 간부는 대부분 조평통
성원들이 추천되며 대우도 매우 좋은 것으로 전해진다. 통전부에는 정

101) 김양건 부장은 1980년대부터 노동당 국제부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1997년 당 국제
부장을 지내다, 2000년 4월 노동당 부장, 2005년 국방위원회 참사로 활동하고 있다. 2007
년 3월에 사망한 김용순의 뒤를 이어 통일전선부 부장을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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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회담과, 교류과, 간부과, 연고자과, 재일총련과 등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 밖에도 통전부 교류1과 소속으로 조평통 산하에는 전교조, 민주노
총, 범민련, 통일연대 등의 남한 단체 담당과들이 존재한다. 교류1과는
1998년부터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라는 대외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단군민족통일협의회’라는 대외명칭을 사용하는 교류2과에는 북한의 종
교단체들이 주로 구성돼 있다. 민족의 시조인 단군이념 아래에는 오직
민족만이 있으며, 종교를 떠나 민족애로 뭉쳐 통일조국을 건설하자는
것이 이 조직 명칭의 의미다. 이들 교류2과 소속 각 종교조직은 남북
경제교류와 인물 포섭을 기본 목적으로 한다. 대외적으로는 불교, 기독
교 등의 이름을 허용하지만 대내적으로는 1국, 2국으로 명명된다.
북한에서 가장 큰 남한자료 도서관을 갖추고 있는 조국통일연구원(구
남조선문제연구소)도 통일전선부 산하 기관이다. 조국통일연구원은 한
국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 군사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남한 정세분석 보고서와 각종 백서를 작성한다. 한국 경제의 시장조사,
주가분석, 인플레 현황 등을 체크해 향후 예측까지 전망하는 경제보고
서의 경우, 매주 한 번씩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고되는 것으로 전
해진다. 한국 각 분야의 대표적인 인물들에 대한 분석보고서도 매주
한 번씩 김 위원장에게 보고된다. 대부분 평생직으로 신분을 보장받는
연구원들의 업무는 매우 세분화돼 있는데, 사회문화부서에는 ‘조선일
보’만 30년 동안 분석한 연구원도 있다고 한다. 이 연구원들은 대부분
남한의 신문·잡지를 참고하거나 별도의 첩보를 토대로 보고서 요지를
작성한다.
대외연락부는 과거 사회문화부를 축소하면서 명칭이 바뀐 것으로 간
첩 및 공작원 남파, 공작원 밀봉교육, 한국내 고정간첩 관리, 한국내
지하당 구축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1992년 대선 당시 남한조선노동당
의 이선실이나 15대 대선 직전의 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 등이 모두
대외연락부 소속이라고 한다. 현재 대외연락부는 통일전선부 제1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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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역임한 강주일(강관주) 부장이 맡고 있다.
작전부는 공작장비, 무기개발 및 대남침투요원의 안내와 호송, 요인
저격, 납치 등의 임무를 맡고 있으며 유사시 한국의 후방교란과 전략
무기 습격 등의 임무도 수행한다. 작전부는 소속 요원의 훈련과 인무
수행을 위해 북한 각지에 6개의 연락소를 두고 있으며 청진, 원산, 남
포, 해주 등 4개 해상연락소와 개성, 사리원에 2개의 육상 연락소를 두
고 있다. 작전부장은 오극렬 전 총참모장이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
고 있다.
옛 대외정보조사부의 후신인 35실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대남 기
구이다. 35호실은 3호 청사와 떨어져서 평양시내 중심지인 창광거리
본청사에 위치하고 있다. 35호실은 테러 및 대남, 해외정보를 수집하고
해외인사를 포섭, 매수해 한국내에 투입시키는 등 대남 우회침투활동
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 해외간첩공작, 국제, 대남 테러공작 등도 이
부서의 주요 임무라고 한다. 1987년의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최은희-신
상옥 부부 납치사건 등이 이 부서의 주요 활동이었으며, 교수간첩 깐
수도 35호실 소속으로 전해진다. 현재 35호실의 실장은 공석이고 허명
욱 부실장이 대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북한의 대남기구는 방대하게 구축되어 있으나, 공식적으로 공
개된 적은 거의 없다. 이러한 대남 기구의 요원이나 인사들은 북한이
공개적으로 드러낸 단체의 소속직함을 가지고 활동을 한다. 이러한 대
표적인 공개단체가 바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조선아세아․태평양 평
화위원회, 민족화해협의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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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북한의 대남기구 조직도

대남담당비서

통일전선사업부 대외연락부 작전부 35호실

조 해 육

평 연 상 상
조 정 회 교 간 일
통 고 연 연
국 책 담 류 부 총
서 자 락 락
통 과 과 과 과 련
기 과 소 소
일 과



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지난 1960년 남한에서 4.19 혁명이 발생하고,


재야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통일논의가 분출되자 이를 당국차원에서 전
략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조직된 조선노동당의 대남 외곽조직이다.
조평통은 1961년 5월 13일 홍명희를 위원장으로 33명의 준비위원회
에서 조직된 노동당 외곽단체로서 북한의 정당, 사회단체와 각계 인사
들을 망라하여 결성되었다. 홍명희를 위원장으로 한 것은 홍명희가 월
북 인사라는 점에서 남한에 대한 통일 공세를 강화할 적합한 인물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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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이다. 조평통의 위원장, 부위원장에는 주요 간부를 임명하고 있
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조선노동당의 통일문제 및 남북대화와 관련한
입장을 대변 또는 옹호하고, 한국 각계각층 인사 및 해외인사들을 대
상으로 연방제 통일 실현투쟁을 고취한다. 또한 한국 내 주요 사건 또
는 새로운 정책 제시 때마다 ‘조평통 서기국 보도’ 등을 발표하여(1977
년 2월부터) 이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대변인 성명 또는 담화 등 문건
을 통해 반정부 선전 및 여론을 조성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노동당의 대남협상기구인 통일전선부가 남북 대화에 직접 참여
하거나 국내 각계각층 인사 및 해외교포들에 대한 통일투쟁 선동 업무
등을 공개적으로 수행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업무를 조평
통의 명의로 수행하는 것이다. 조평통은 주로 통일전선부 회담과의 지
도를 받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조평통은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보다 더 강경한 대남자세
를 보이고 있다. 이는 최고인민회의가 앞장서기 곤란한 부분에 대해서
조평통이 앞장서서 보도나 성명을 통해 대남 정책을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상회담이 개최되기 전 남한의 국정원 해체나 국정원의 남
북대화에 대한 개입을 비난한 것도 조평통이었다(2000년 3월 16일 조
평통 서기국 보도).
조평통의 조직은 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상무위원회와 서기국을 두
고 있으며 중앙위 산하에 조직부, 선전부, 회담부, 조사연구부, 총무부,
자료종합실, 기요부(비밀부) 등의 부서를 두고 있다. 위원장과 부위원장
등의 간부는 대부분이 당 정치국원, 당비서,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겸하고 있는 당, 고위간부들로서 위원장은 허담 위원장 사망 이후 공
석으로 돼 있다.
현재 부위원장으로는 안경호, 양형섭(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
위원장), 오익제(1997.8 월북) 등 10여명으로 구성되어있다. 서기국장은
한시해가 맡고 있다가 1998년 안병수(본명 안경호)로 교체됐다. 조평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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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구 구성은 다음과 같다.

<그림 2>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기구 구성

중 앙 위 원 회

상 무 위 원 회

서 기 국

참 사 실

조 자
조 선 회 사 료 총 기
직 전 담 연 종 무 요
부 부 부 구 합 부 부
부 실

나)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1990년대 사회주의 붕괴 이후 북한은 외교 무대에서 과거 당 중심의


외교를 펼쳤던 것에서 벗어나, 공식적인 국가기구나 민간단체를 앞세
우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아태평화위의 설립도 그 일환으로 보여진다.
특히 1990년대 들어 미․일과의 외교가 중요해지면서 이를 총괄할 필
요성을 느끼면서 창설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민간기구의 성격을 띠고 있는 대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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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기구로 1994년 5월에 설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기구가 처음으
로 외부에 알려진 것은 1994년 7월 김용순(당시 통일전선사업 담당 비
서 겸 아태평화위위원장)이 방북중인 일본의 국제문제연구소 소장 나
카마루 가오루와 만난 사실을 전하면서부터이다. 이때 중앙방송은 김
용순을 아태평화위 위원장으로 호칭했었다. 이를 통해 처음으로 이 기
구의 존재가 외부로 알려졌다.
이 기구는 노동당 대남부서인 통일전선부 산하의 기구로서 미국, 일
본 등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창구역할과 함께, 남북교류를
조정 및 통제하고, 유력 외국인사에 대한 방북 요청 및 해외 학술회의
참가 등을 통해 북한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이후 아태평화위는 1995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평양국제체육문화축
전’을 주관했고, 일본과 1995년 쌀지원문제를 논의했다. 리틀엔젤스 공
연(1998년 5월)과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방북(1998년 6월) 초청 및
금강산 관광사업 등도 주관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도 깊숙이 관
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아태평화위는 2000년대에 들어와 대남 경제협력 사업에도 관여하여
이를 종합․조정하는 등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즉, 북한 각종 대남경
협사업 추진 여부를 일차적으로 판단, 북한의 관련 기구에 분배하는
권한까지 행사하고 있다. 이것은 통전부 정책과가 남북경제교류나 회
담의 유무를 감안해 아태평화위 명의로 사업범위와 내용을 조절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아태평화위의 조직은 대남․대외로 지역을 양분하고 정치, 경제, 사
회, 문화 등의 분야별 부서를 두고 운영되고 있으며 위원장은 현재 공
석이고, 부위원장은 이종혁, 전금철(전금진), 최승철 등이 활동하고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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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민족화해협의회

민족화해협의회는 남한에 가장 잘 알려진 대남기구이다. 최근 대부분


의 방북초청장이 민화협의 이름으로 발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민화협이 어떤 조직이고, 어떤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기관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민화협은 1998년 6월 8일 북한이 8․15대축전 제의에 앞서 북한의
정계, 사회, 문화계, 종교계 등 각계 단체들과 인사들로 구성한 대남단
체의 하나이다. 이 기구는 북한이 민족화해를 내세워 결성한 최초의
협의체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민족대단결 5대방침(1998.4)에서 언급
된 ‘온 민족의 접촉 대화와 련대 련합’을 실현하기 위한 실무기구로 역
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김대중 정부의 정경분리 원칙에 따른 접
촉․교류 활성화 정책에 대응해 국내 종교․문화계 등 각종 민간단체
인사들의 대북 접촉 창구로 활용하려는 측면에서 민화협이 결성됐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민화협은 그 동안 중요한 남북교류 창구로 역할을 해온 아태
평화위원회의 업무까지 상당부분 넘겨받아 명실상부하게 남북 사회․
문화․학술․시민단체(NGO)․종교 교류의 북측파트너로 성장했다. 평
양을 방문했을 때 나오는 대부분의 북한 안내원도 민화협 소속이다.
2005년 평양에서 공연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참관하
기 위해 남쪽에서 8500여 명의 방북단이 올라가자 민화협 소속 안내원
이 총출동하기도 했다.
민화협은 결성 이틀 후인 1998년 6월 10일 김영대 회장이 ‘8․15 통
일대축전’ 북한 준비위원장으로 선임되면서 1998년도 통일대축전을 준
비하는 것으로 첫 활동을 시작했다. 1999년 1월 18일에는 범민련 북측
본부 등과 함께 문익환 사망 (1994.1.18) 5주년 추도식을 개최했다.
1999년 2월 4일에는 ‘제2차 전원회의’를 개최하고 남쪽의 각계 단
체․인사들과의 폭넓은 접촉과 대화 실현문제 등을 토의하기도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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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또한 1999년 10월 13일 열린 ‘제3차 전원회의’에서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남․북․해외 3자연대 공동투쟁 대책을 논의하면서 남한
의 국가보안법 완전 철폐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이후
2000년 8월 28일 열린 ‘제4차 전원회의’에서는 6.15 공동선언을 지지하
는 남한 단체들과 공동보조를 취하여 민족화해와 통일분위기를 조성하
는데 이바지할 것을 결의하였다.
민화협이 남쪽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남북공동행사가 정기적
으로 열리기 시작한 2001년 이후이다. 민화협은 2001년 ‘6․15 민족통
일대토론회’(금강산), ‘8․15 남북 공동 행사’(8.15-16, 평양) 등 대규모
남북 공동행사를 주관하였다. 2002년부터는 서울, 인천과 평양을 오가
며 열린 6․15남북공동행사, 8․15남북공동행사를 남한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와 함께 개최하였다.
2005년의 ‘조용필 평양공연’(8.23)을 비롯한 각종 방북 공연, 남쪽 언
론사의 대북사업, 〈아리랑〉공연 참관사업,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우
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등 여러 대북지원단체와 사업을 진행하고 있
는 것도 역시 민화협이다. .
민화협의 활발한 교류와 활동에도 불구하고 민화협의 세부 조직편제
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다만 남북공동행사나 남북간 접촉에 나온 민
화협 간부들의 직책을 통해 어렴풋이 유추해 볼 수 있다.
현재 드러난 직제는 <회장 - 부회장 - 상무위원 - 중앙위원 - 실장 -
부장 - 부부장 - 과장 - 책임부원 - 부원>으로 조직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외에도 민화협 내에는 사무소장, 부소장, 사무소 부원 직제가 있는
데, 사무소장이 어느 정도 직급에 해당하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
고 있다.
회장은 1998년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김영대 사회민주당 위원장이
맡고 있고, 부회장은 5-7명으로 가변적이다. 현재 조충한, 주진구, 정덕
기, 이충복, 박경철 등이 부회장 직함으로 활동하고 있고, 상무위원으
로는 김경남, 황봉국 등이 활동하고 있다. 중앙위원으로는 민족대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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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한웅희 책임주필, 김지선 등이 최근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초
기 민화협 부회장단에는 김령성, 강연학, 김완수, 최승철 등의 이름이
올라 있지만 주로 다른 직책에서 활동하며 민화협에서 일하고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민화협 부회장들은 대부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국장직을 겸직하고 있다. 민족화해협의회에서 활동하는 간부
들은 대부분 통전부 교류1와 교류 2과 소속으로 전해진다.
민화협의 실장, 부소장급 이상은 대부분 2005년 출범한 6․15남북공
동위원회(6․15민족공동위원회로 개칭) 북측위원회에도 소속돼 있다.
민화협 내에는 담당업무가 다른 몇 개의 부로 나눠져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정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종교, 언론, NGO, 정당․사회단체
등이다. 그래서 대규모 남쪽대표단이 방북하면 대표단 구성원에 따라
각 담당 부장, 과장, 부원들이 나온다. 민화협 성원의 전체 규모는 베
일에 가려 있다.

라) 민족경제협력위원회

2005년 10월 28일 개성공단 안에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가 문을 열


었다.102) 이 사무소에 근무하는 북한 관계자들은 민경협 소속이다.
2004년부터 남북경협과 관련된 모든 협의와 남쪽 기업의 초청은 민경
협 또는 민경협 산하 기관, 회사 이름으로 이뤄지고 있다. 주로 대남
경제협력 협상창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민경협은 2005년 6월 22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조선민
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경제협력위원회를 내온다”라고 발표하면서 공식
발족됐다. 민경협 발족 이유에 대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우리
민족공동의 통일강령인 615 북남 공동선언의 이념에 따라 북남 경제
협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라고 발표했다.

102) 흔히들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가 개성공단의 사업을 총괄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


다. 개성공단 사업을 총괄하는 것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이며,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
소는 남북경협에 대한 남북의 상시적인 협의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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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협의 공식 발족과 함께 북한은 남한의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
률’(1990년 제정)에 해당하는 ‘북남경제협력법’을 제정했다. 총 27조로
구성된 이 법은 △전 민족적 이익 △균형적 민족경제발전 △상호 존중
및 신뢰 △유무상통(有無相通․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융통한다) 등
을 남북경제협력의 원칙으로 제시했다.
특히 이 법은 남북경협에 대한 ‘중앙민족경제협력지도기관’의 임무를
분명히 하고 있는데, 여기서 언급한 ‘중앙민족경제협력지도기관’이 바
로 민경협인 것으로 파악된다.
2004년에 이미 조직돼 활동하고 있는 기구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회가 정식 발족을 발표한 것은 이 기구가 정부의 공식기구로 승격된
것을 의미한다. 남한이 중국에 이어 북한의 두 번째 교역 상대로 발전
했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이 활성화되면서 남쪽과 경협을 전담할
중앙정부 차원의 기구가 필요하게 된 셈이다.

<표 7> 남북한 교역액 추이


(단위: 백만불)
연도 ‘91 ‘92 ‘93 ‘94 ‘95 ‘96 ‘97 ‘98 ‘99 ‘00 ‘01 ‘02 ‘03 ‘04 ‘05 ‘06

총교역액 111 173 187 195 287 252 308 222 333 425 403 642 724 697 1055 1349
* 출처: 통일부, ‘통계자료’(http://www.unikorea.go.kr)

민경협은 1998년 내각 무역성 산하에 조직된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


경련, 회장 정운업)를 모태로 하고 있다. 민간 차원의 남북경협은 1989
년부터 시작됐다. 북한은 고려민족발전협의회(고민발), 광명성총회사,
삼천리총회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대남 경협창구를 만들었지만 상호간
에 신뢰조성이 되지 않았다. 남한의 기업들은 북한과 교류를 하고 싶
어도 어디에 가서 논의해야 하는지조차 막연하였다. 그 동안의 경험이
간접 경험에 의존해 먼저 북에 들어간 기업들로부터 알음알음 소개를
받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8년 경협창구가 민경

- 57 -
련으로 단일화되면서 혼선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대남 경협사
업은 민경련이 주도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민경련으로 단일화된 창구를 통해 남북 경제협력 사업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였다. 즉,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경제
협력추진위원회가 가동되고, 금강산관광지구에 이어 개성공업지구가
열리면서 남북 당국간 협의가 이전보다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남한과
의 순수 민간급 경제교류협력을 전담하는 기구인 민경련으로는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고, 전체적으로 남북 경협을 재검토하고, 이에 맞
는 새로운 체계를 세울 필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4년 여름 북한은 대남경협라인을 대대적으로 다
시 짜는 작업에 착수했다. 내각 산하에 민간 경제협력 뿐만 아니라 당
국간 협의까지를 포괄적으로 담당하는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방침이 정
해졌고, 1년간의 준비 끝에 민경협이 공식 출범하게 되었다.
2005년 10월 1일 평양 양각도 국제호텔에서 남한 기업인을 대상으로
열린 투자간담회에서 민경협과 민경련의 차이에 대해 민경련 김춘근
부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민경협은 주로 북남 당국간의 전반적인 사업을 담당하는 부서다. 예


를 들어 개성공단, 금강산관광사업, 남북 경제회담 등을 관할한다. 민
경련은 남쪽과의 순수 민간급 경제교류협력을 전담하는 기구다.’

현재 민경협은 산하에 남한과의 경협을 담당하는 민경련, 개성공업


지구 및 금강산 관련 사업 담당 부서,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이하 경
추위) 담당 부서, 철도․도로 건설 등을 담당하는 광복총회사 등 남북
경제회담, 특구, 경협 사업을 망라해 담당하고 있다. 한마디로 민경협
은 남북경제 협력과 대화를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장관급 부서인 셈이
다.
민경협 위원장에는 정운업 민경련 회장이 승진, 겸직하고 있고,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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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하던 김성일 부국장이 부위원장으로 임명됐
다. 또 민경련 김춘근 서기국장이 민경련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민경
협 부위원장직도 겸직하고 있다.
민경련 산하에 있는 4개의 회사는 광명성총회사 여서현 총사장, 개선
총회사 손경철 총사장, 새별총회사 김용학 사장, 삼천리 총회사 김일호
사장 등으로 짜여졌고, 서기국에서 이름이 바뀐 정책국장에는 방강수
가 임명됐다. 방강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남북경제협력추진위에 북
한측 대표로 매번 참여하고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북한의 대남담당 기구는 방대하고, 많은 인원을 포


괄하고 있다. 분야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있다. 자
체로 연구와 정책 기능을 보유하고 있으며 많은 인원들이 중복되어 있
기도 하다. 또한, 그 특성상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기구들도 상
당수 존재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근 년간에 북한의 대남담당 기구의 변화도 눈에 띈다. 즉, 남북한
관계가 변화하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업들과 새로운 정황들이 조성
되었으며, 이에 따라 북한의 대남 기구로 여러 형태의 조직개편을 한
것으로 보인달. 또한, 책임자급의 교체나 새로운 인물도 부상하고 있
다. 앞으로도 북한의 대남 담당 기구들은 현재와 같은 기본 구도 속에
서도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남북한 관계의
변화에 따라 이들 기구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남북협상의 전개과정(정상회담 이후)

남북한은 지금까지 약 550여 차례에 걸친 회담을 진행해왔다. 1970년


대 초에 최초로 의미있는 협상이 전개되기 시작하여, 1980년대에는 적
십자 회담을 비롯한 체육회담, 고위급 회담이 열렸고, 이 결과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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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되었다. 이후 1990년대에도 회담이 진행되었
으나 소련 및 동구권의 대변화와 북-미간 핵갈등 그리고 김영삼 정부
에 의한 흡수통일의 노골화 등으로 회담은 지그재그 형태를 보여왔다.
남북한 협상에서 획기적인 전환이 된 계기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었다. 남북 정상회담은 ‘6.15 공동선언’을 만들어내었고, 후속 협상을
명문화함으로써 남북간의 화해․협력을 위한 제도화된 협상틀을 형성
하였다.103)
정상회담 이후에 진행된 회담의 숫자만 보아도, 그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점을 볼 수 있다. 우선, 회담의 격이 장관급 회담 등으로 격상
되었고, 회담의 횟수도 그 이전과 비교하여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또
한, 회담 분야도 확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북회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70년대부터의 회담의 분야와 횟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표 8> 남북회담의 분야와 횟수(1971.01.01 - 2007.08.02)

사회문화 인도 경제 군사 정치 계

2007 3 5 9 2 4 23

2006 5 4 8 3 3 23

2005 10 3 11 4 6 34

2004 2 7 13 2 1 25

2003 5 8 17 7 1 38

2002 4 10 14 3 2 33

2001 2 2 3 1 8

2000 18 4 3 2 27

1999 8 8

1998 4 1 5

1997 7 4 11

103) 6.15 공동선언은 제5항에서 ‘북과 남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안에 당국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라고 합의하고 있다. 이에
따라 6.15 공동선언의 실현을 위한 남북 장관급 회담이 정례화 되어있다.

- 60 -
1996 0

1995 3 3

1994 10 10

1993 4 4

1992 80 8 88

1991 12 7 19

1990 15 2 7 24

1989 7 8 9 24

1988 8 8

1987 1 1

1986 2 2

1985 2 4 6 1 13

1984 1 2 3 6

1983 0

1982 0

1981 0

1980 10 10

1979 3 4 7

1978 0

1977 5 5

1976 6 6

1975 2 8 10

1974 6 12 18

1973 7 4 11

1972 4 32 36

1971 18 18

계 238 43 83 143 51 558


* 출처: 남북회담사무국(http://dialogue.unikore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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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에서 특징적인 것은 1970년대 초, 그리고 80년대말 - 90년대
초,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의 회담이 상당히 많은 횟수를 기록하고 있
다는 점이다. 이는 1970년대 초의 ‘7.4 남북 공동성명’의 발표를 전후한
시기의 남북 회담과 91년 ‘기본합의서’를 전후한 시기, 그리고 2000년
‘6.15 공동선언’을 전후한 시기에 회담이 집중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또 다른 특징은 사회 문화분야의 회담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주로 문화예술 및 체육 등의 교류가 비교적 일찍
부터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마지막으로 2000년대 이후에 와서는 사
회문화, 인도적 분야, 경제, 군사, 정치 회담이 병행되어 진행되고 있다
는 점이다. 이는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한 관계가 모든 분야에서 활
발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2000년대 이후의 회담이 전체
558차례의 회담 중 211건을 차지함으로써 약 38% 가량을 차지하고 있
다. 이는 정상회담 이후 남북한 관계가 그 이전과 비교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고, 당국자 및 민간 차원의 회담이 수시로 열리고 있
음을 말해준다.
2000년대 들어 남북간의 주요 회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04)

<표 9> 2000년대 이후 남북간 주요 회담


연도 장관급회담 군사관련회담 경제관련회담 적십사회담
<국방장관회담>
제1차:7.29-31
제1차:9.25-26(제주)
(서울) 제1차:
<군사실무회담> <남북경제협력실무접촉>
제2차:8.29-9.1 6.27-30
제1차: 11.28 제1차:9.25-26(서울)
(평양) (금강산)
2000 (판문점 통일각) 제2차:11.8-11.11(평양)
제3차:9.27-9.30 제2차:
제2차: 12.5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제주) 9.20-23
(판문점 평화의 집) 1차:12.27-30(평양)
제4차:12.12-12.16 (금강산)
제3차:12.21
(평양)
(판문점 통일각)
2001 제5차:9.15-18 <군사실무회담> <남북전력실무협의회> 제3차:

104) 1998년 국민의 정부 이후 남북간 접촉이나 회담을 보면 98년 5회, 99년 8회, 2000년 27
회, 2001년 8회, 2002년 33회, 2003년 38회, 2004년 25회, 2005년 34회, 2006년 23회, 그리
고 2007년 6월 30일까지 20회 등으로 정상회담 이후, 매년 수 십 차례의 다양한 회담이
열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북회담사무국.

- 62 -
제4차:1.31
(서울)
(판문점 평화의 집) 1.29-31
제6차:11.9-14 제1차:2.7-10(평양)
제5차:2.8 (금강산)
(금강산)
(판문점 통일각)
제4차:
9.6-8
(금강산)
<군사실무회담> <남북경추위>
제7차:8.12-14 <적십자회담실
제6차:9.14 제2차:8.27-30(서울)
(서울) 무접촉>
2002 (판문점 평화의 집) 제3차:11.6-9(평양)
제8차:10.19-22 제1차:
제7차:9.17 <남북경협제도실무협의회>
(평양) 10.31-11.2
(판문점 통일각) 제1차:12.11-13(서울)
(금강산)
제2차:12.15-17
(금강산)
<남북경추위>
제4차:2.11-14(서울)
제9차:1.21-24
<군사실무회담> 제5차:5.19-23(평양)
(서울)
제8차:9.17 제6차:8.26-28(서울)
제10차:4.27-29 제5차:11.4-6
2003 (통일각) 제7차:11.5-8(평양)
(평양) (금강산)
제9차:12.23 <남북경협제도실무협의회>
제11차:7.9-12
(평화의 집) 제2차:7.29-31(개성)
(서울)
제3차:10.11-12(문산)
제4차:12.17-20(평양)
<장성급군사회담>
제1차:5.26
(금강산)
제2차:6.3-4
(설악산)
<장성급군사회담실무 <남북경추위>
제13차:2.3-6(서울)
2004 대표접촉> 제8차:3.2-5(서울)
제14차:5.4-7(평양)
제1차:6.10-12 제9차:6.2-5(평양)
(개성)
제2차:6.29-30
(파주)
수석대표접촉:7.5
(개성)
제15차:6.21-24
<장성급군사회담실무
(서울)
대표회담>
제16차:9.13-16 <남북경추위> 제6차:
제3차:7.20
2005 (평양) 제10차:7.9-12(서울) 8.23-25
(평화의 집)
제17차:12.13-16 제11차:10.28(개성) (금강산)
제4차:8.12
(서울)
(통일각)
<남북차관급회담>

- 63 -
5.16-19(개성)
<장성급군사회담>
제18차:4.21-24
제3차:3.2-3 제7차:
(평양) <남북경추위>
2006 (통일각) 2.21-23
제19차:7.11-13 제12차:6.3-6(제주)
제4차:5.16-18 (금강산)
(부산)
(자유의 집)
제20차:2.27-3.2
<장성급군사회담>
(평양) <남북경추위>
2007 제5차:5.8-11
제21차:5.29-6.1 제13차:4.18-22(평양)
(통일각)
(서울)
* 위의 표에서는 군사실무회담, 적십자실무접촉, 개성공단, 체육회담 등 여타의 회
담은 제외하였다.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2000년대 들어 장관급회담, 군사관련회담,


경제협력관련회담, 적십자회담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회담이 진행되었
다. 또한, 정상회담 이후에만도 남북 특사회담이 4차례에 걸쳐 진행되
어 회담이 교착국면에 빠지거나, 남북관계가 어려워질 때 돌파구의 역
할을 하였다.
먼저, 2000년대 이후, 남북회담은 정상회담에 의해 정례화된 장관급
회담이 남북간 회담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장관급 회
담은 지금까지 총 21차례에 걸쳐 진행되어 남북간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제반 영역에 대한 화해와 협력의 방도는 논의하는 회담이 되고
있다. 비록 남북의 회담을 바라보는 입장과 구조의 차이로 인해 군사
적 방안에 대해서는 장관급 회담에서 실질적인 토의가 진행되지 않았
지만, 경제협력과 농업 분야의 협력 그리고 사회문화분야에서의 협력
은 장관급 회담을 통해 논의가 발전해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장
관급회담은 남한에서는 통일부장관이 그리고 북한에서는 내각참사의
이름으로 대표가 결정되고 있다.105)
둘째로, 국방관련 회담은 1차례의 국방장관 회담 이후, 장성급 회담

105) 지금까지 장관급회담의 남북한 대표를 살펴보면, 남한은 박재규(1-4차), 홍순영(5-6차),


정세현(7-14차), 정동영(15-17차), 이종석(18-19차), 이재정(20차-현재) 통일부장관이, 북한은
전금진(1-4차). 김령성(5-13차), 권호웅(14차-현재) 내각참사가 수석대표를 맡고 있다. 남북
회담 사무국.

- 64 -
과 군사실무회담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북한은 국방장관 회담을
요구하는 우리의 요구에 대해 장성급 회담이나 실무회담으로 대응하고
있다. 국방관련 회담은 대체로 서해상의 경계선 문제(NLL문제), 군사충
돌 방지 문제, 경의선-동해선 연결에 따른 군사보장 조치의 문제 등으
로 한정되고 있다.
셋째로, 경제협력추진위원회는 장관급 회담에서 합의한 사항이나 혹
은 남북한의 경제협력에 관한 제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양측에서
차관급이 수석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경제협력추진위원회는 장관급 회
담에 부속된 회담이지만, 사실상 남북한의 경제협력을 실무적으로 총
괄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적십자회담은 이산가족 상봉 문제나 인도적 지원 문제
그리고 금강산 면회소 설치 등의 주로 인도적 사안을 중심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
남북 회담의 장소는 장관급 회담의 서울과 평양을 번갈아 가며 열리
고 있으며, 제주도나 부산 등에서 개최되기도 한다. 국방관련 회담은
대체로 판문점에서 통일각과 자유의 집 혹은 평화의 집에서 번갈아 개
최되며, 제1차 국방장관 회담은 제주도에서 개최되었다. 남북회담은 대
체로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린다는 점에서 대등한 입장에서 회담이
라는 성격을 보여주고 있지만, 적십자회담은 금강산에서 회담이 진행
되고 있다. 경제관련 회담 중의 경추위 회담을 제외하면, 개성에서 회
담이 열리는 횟수가 많아지고 있다.
회담에 참여하는 인물들을 보면 장관급 회담은 통일부 장관과 내각
참사가, 국방관련 회담은 국방장관과 인민무력부장 혹은 남북의 장성
급이 참여하고 있으며, 경추위 회담은 남북 모두 차관급 인사들이 협
상에 나서고 있다. 다만, 경추위 회담의 경우 남한에서는 재경부 차관
이 수석대표로 나서고 있으나, 북한에서는 초기에는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수석대표로 참여하다가 이후에는 건설건재공업성 부상
이, 그리고 최근에는 민족경제협력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여하고 있다.

- 65 -
남북 회담이 대체로 대등한 입장에서의 회담이라는 면을 고려하면, 수
석대표의 위상은 대체로 균형적이라고 할 수 있다.106)

3. 북한의 협상가들

가) 남북장관급회담

남북장관급 회담은 남한의 통일부장관과 북한의 내각책임참사가 참


석하는 정부차원의 남북회담이다. 남북한 간에는 2000년 남북 정상이
합의, 서명한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남한은 2000년 7월 19일 이한동
국무총리 명의의 대북서한에서 남북공동선언 이행에 따른 제반문제를
남북 장관급회담을 통해 협의해 나갈 것을 북한에 제의하였고, 북한이
7월 21일 남한의 남북장관급회담 개최 제의를 받아들여 제1차 남북장
관급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이후 2007년 8월 현재까지 모두 21차례
장관급회담이 열렸다.
남북 장관급회담은 남북공동선언 이행과 실천과정에서 제기되는 제
반문제를 협의·해결하는 중심적 협의체로서 남북적십자회담, 남북국방
장관회담, 남북경협실무접촉 등 여러 분야에서 개최된 회담들에서 합
의한 사항들의 이행을 총괄, 조정하고 지원해 나가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동안 북한에서는 전금진 조평통 부위위원장, 김영성 조평통 부국
장, 권호웅 조평통 부국장 등 3명이 내각 책임참사란 이름으로 장관급
회담 수석대표로 나왔다.

* 2000년 7월 제1차 남북장관급회담에 수석대표로 나온 전금진 내각


책임참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남북대화의 북한측 간판으로 전금철이란

106) 다만, 남북의 권력구조의 차이와 북한의 내각과 군의 분리 등으로 그 권한과 역할에서
는 서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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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북한내 직함은 노동당 통일전
선부 부부장이며 대외용 직함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
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내각 책임참사 등이다.
그는 1934년 함경북도 웅기에서 빈동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문대대로
농사를 지어왔고 부모님을 일자무식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 후, 그는
수학 물리를 전공해 장차 교수가 되고 싶었으나 스승의 권고로 김일성
종합대학 법학부에 입학을 했다. 대학에 입학하자 그의 부친은 너무
기쁜 나머지 온 동네방네를 다니며 아들 자랑을 했다고 한다. 대학 졸
업 후, 노동당 중앙당에 들어간 그는 1959년부터 62년까지 적십자 중
앙위원회 간부로 배치돼 재일동포 귀국사업을 담당했고, 1961년 조국
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에 지도원으로 파견돼 사업하기 시작하다고
1969년 정식으로 조평통 위원이 되었다.
그는 1972년 11월 김영주 조직부장(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부
위원장)이 북한측 위원장을 맡았던 남북조절위원회의 북한 대변인 및
간사로 활약하면서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0년에는 통일전
선부 부부장으로 승진하면서 대외적으로 조평통 부위원장 직함을 가졌
으며 지난 1985년 7월에는 남북 국회회담 제1, 2차 예비접촉 북한측
대표단장으로 임명돼 판문점 회담에 참가했다. 그는 대남사업에 기여
한 공로로 1992년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82년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2003년에 8월의 제11기까지 대의원으로 선출
되었다.
그는 1995년 6월 21일 15만t의 대북 쌀무상 지원을 위한 남북협상에
참석했고 한달 후인 6월 30일 대북 쌀수송선 '씨 아펙스'호 인공기 강
제 게양사건 때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어 1995년 7월과 9월에 있
은 제2, 3차 남북 베이징회담 때도 북한측 대표로 활동하는 등 남북간
의 각종 협상에서 수석대표로 활약했다.
특히 그는 1998년 4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남북 당국대표 회
담 때는 정무원(지금의 내각) 책임참사 직함을 갖고 북한측 수석대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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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했다. 이 회담 결렬이후 한동안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자 비료회
담의 결렬에 대한 책임을 졌거나 중병에 걸린 것 아니냐는 등 각종 설
이 나돌았다. 그러나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때 김대
중 대통령을 백화원 영빈관에 안내하고 환영만찬과 순안공항 환송식에
참석해 건재를 과시했다. 현재는 몸이 좋지 않아 요양 중으로 내외활
동을 하지 않고 있다.
그가 각종 남북대화의 간판으로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실
무에 능하고, 협상전략과 관련한 각종 전술기획에 뛰어났기 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단히 논리적이고, 신중한 성격이다.

* 전금진의 후임으로 장관급회담 수석대표가 된 김영성 내각참사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준비  접촉에서  북한 실무대표로 나와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참사란
직책을 사용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대남관계에서 공개활동하기 시작
한 것은 1992년 조평통 참사로 남북 연락사무소 설치 및 운영문
제를 협의하기 위한 대표접촉과 남북교류협력분과위원회 회의 때
다.이후  그는  민족화해협의회  부회장으로  활동해  북한을  방문
한  남한측  단체나  인사들과  만나기  시작했다.1999년 6월 1일
중국 용정에서 있는 ‘늦봄 문익환목사 회고모임’에 북한대표단의 실무
책임자로 모습을 드러냈고, 7월에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북측본부  부의장  직함을  달고나와  ‘99 통일대축전  및  제10차 
범민족대회 공동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9년 11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북한 방문 때에는 아태평
화위  참사  자격으로  나왔다. 그는 정상회담 실무접촉에서 수려한 
풍채와  잘  갖춰진  언변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서글서글한 
눈매에 잘 빗어넘긴 헤어스타일,  감색  더블수트에  넥타이 컬
러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그는 지금까지 보아온 북한 대표들
의 모습과 달라 더욱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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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제시대 때 머슴을 살았던 부모에게서 1945년 ‘해방둥이’로 태
어나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으며 두 아이의 아버지이
다. 그는 마치 잘생긴 북의 공훈배우 같은 외모로 눈길을 끌었다. 훤칠
한 키에 전문 성우 뺨치는 목소리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아주 논
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정성들여 듣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특히 그는 대남문제를 오랜동안 분석해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
측근인 것으로 확인되었고, 남조선문제연구소(현재 조국통일연구원)에
서 남한정세 분석을 오랫동안 담당했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직
접 보고되는 ‘1호문건’ 작성자였다고 한다. 당시 그는 통일전선부 부부
장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제1부국장과 민족화해협의회 부회
장을 맡아 활동했다.
장관급회담 대표로 처음 온 김령성 단장은, 네 차례 회담에서 북한측
대표단장을 맡았던 전금진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었다. 30여년간 남
북대화에 관여해 온 전금진 전 단장이 차가운 인상의 노련한 ‘협상가’
라면, 김 단장은 ‘친근하고 편안한 상대’로 느껴졌다는 것이 당시 회
담에 참가했던 통일부 당국자의 평가였다.

* 김영성의 후임인 권호웅은 북한 대남협상가들의 세대교체를 상징적


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14차 남북 장관급회담부터 수석대표로 나온
그는 비록 나이는 40대 후반에 불과하지만 대남사업의 경력만큼은 누
구 못지않게 화려하다. 그는 2000년 4월 베이징에서 열린 정상회담 비
공개 특사 접촉과 준비 접촉 과정에서 북한측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했
고, 그해 7월에 열린 1차 장관급회담(서울)에서 회담 상황실장을 맡아
회담 전 과정을 조율, 당시부터 보이지 않는 '실세'로 통했다.
이전에는 금강산 솔잎혹파리 방제대책 협의, 남북 노동자축구대회 준
비회담 등에서도 북한측 대표로 나왔고 1998년에는 '옥수수 박사'로 알
려진 김순권 경북대 교수의 북한측 안내 업무를 맡는 등 거의 모든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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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업에 깊숙이 관여해왔다. 김일성대 총학생회장 자격으로 '권민'이
라는 가명을 사용해 1996년 미국 버클리 대에서 열린 '한반도평화통일
심포지엄'에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
현재 그는 통일전선부 회담과 과장으로 북한 내부에서는 김정일 국
방위원장의 의중을 정확히 읽는 몇 안 되는 간부로 평가받고 있는 것
으로 전해진다. 그는 구김살 없는 표정에, 세련된 매너까지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김영성 대표보다는 전금진 대표쪽에 가까운,
조금은 까다로운 인상을 주고 있다.

나)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는 남북경제협력을 전문 분야별로 효율적으


로 협의·추진해 나가기 위한 위원회로 활동하고 있다. 남북한은 2000년
9월 열린 제3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경추위를 설치키로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 그해 12월에 열린 제4차 장관급회담에서 차관급을 위원장
으로 하는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구성,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2000년 12월 제1차 남북경협추진위원회 회의가 실시되었으며,
2007년 현재까지 13차 회의가 열렸다. 초기에는 남한에서 재정경제부
차관이, 북한에서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수석대표로 참여했으
나, 북한 수석대표는 이후 건설건재공업성 부상(차관), 중앙특구개발총
국장 등으로 변화됐다.
경제협력추진위원회는 남북간 회의를 통해 전력협력문제를 비롯하여
철도 및 도로연결 문제, 개성공업단지 건설 문제, 임진강유역 수해방지
사업 추진 문제 등 남북간 당면한 경제협력에서 제기되는 실무적 문제
들을 협의·해결하고 있다.
대체로 경추위 회담은 민경협이 실무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경추위 북한측 협상단은 단장보다는 배후에 있는 민
경협의 주요 인사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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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민경련 회장을 겸직하고 있는 민경협 정운업 위원장은 2000년
9월 25일부터 이틀간 서울에서 경제협력 제도적 장치 마련을 위해 열
리는 남북 실무접촉에 북한측 단장으로 참석하면서부터 남쪽에 얼굴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1992년 7월 남북경협 논의 차 서울을
방문한 김달현 내각 부총리를 수행해 처음 서울을 방문했지만, 1998년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이 판문점을 통해 방북할 때, 송호경 조선아시아
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함께 영접나올 때만해도 다소 생소한 인
물이었다.
그는 1963년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후 노동당 재정경리부 지도원으로
들어간 후 여러 부서에서 주로 재정담당사업을 맡아오다 무역성으로
자리를 옮긴 후, 1992년 정무원 대외경제위원회 산하의 삼천리총회사
총사장, 1995년 개선무역총회사 위원장, 광명성경제연합회 회장을 거쳐
1998년 민경련 회장이 됐다.

* 김성일 민경협 부위원장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민족화해협의회에


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2003년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2004년 민화협
부회장으로 활동했던 것이 확인된다.

* 김춘근 민경협 부회장은 남한 기업인들에게는 가장 주목받는 인물


이다. 그는 남북 장관급 회담 북쪽 대표를 지내기도 했으며, 민간 차원
의 대남경협사업을 사실상 총괄하고 있다.

* 방강수 민경협 정책국장은 2005년 10월 투자간담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인물로 당국간 경제회담, 민간 경제협력의 방향 등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배후실력자로 전해진다.

다) 국방장관회담․군 장성급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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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국방장관회담은 2000년 9월 25일에 조성태 국방부장관과 김일
철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인민무력부장을 수석대표로 제주도에
서 분단 후 최초로 개최됐다.
남한은 이 회담의 기조연설을 통해 한반도의 실질적 긴장완화와 평
화구축을 위해 군사직통전화 개설과 대규모 부대이동 및 군사훈련 상
호참관, 경의선 비무장지대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군사실무위원회 구
성 등을 논의하기 위해 남북국방장관회담을 정례화하자고 제안하였다.
북한은 6·15 남북수뇌부의 공동선언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남북 사이
에 제기된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을 비롯한 군사적 제반문제를 논의하
자고 하였다.
제1차 회담의 합의문은 공동보도문으로 대신하였는데, 양측 수석대표
의 이름과 사인이 들어 있지 않은 형태이다. 공동보도문의 합의 사항
은 기조연설과는 달리 한반도에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긴
요한 문제라는 것과, 2차 회담을 2000년 11월 중순에 북한에서 열기로
합의하였다지만 무산됐다.
남북장성급회담은 남북의 군사당국자 회담으로, 남북간에 실질적인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을 위한 회담이다. 2004년 2월 제13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남북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한 쌍방
군사당국자회담 조속 개최”에 합의하였으며, 5월에 열린 제14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제1차 남북장성급군사회담 개최에 재합의했다. 이후
남측의 장성급군사회담 개최 요청에 북측이 동의하고, 남북 연락장교
접촉을 실시하여 2004년 5월26일 북측 금강산초대소에서 제1차 남북장
성급군사회담이 개최되었다. 남측에서 수석대표인 박정화 합동참모본
부 작전차장(해군 준장) 등 군 관계자 4명과 통일부 배광복 회담1과장
이, 북측에서는 수석대표인 안익산 인민무력부 정책국장(해군 소장·남
측 준장에 해당) 등 군 관계자 5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2004년 6월3~4일 설악산 켄싱턴스타 호텔에서 제2차 남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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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군사회담이 개최되었으며, 남북은 이 회담에서 향후 서해상의 우
발 충돌을 방지하고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선전 활동을 중지하는 내용
의 합의서를 채택했다.
남북국방장관회담이나 장성급회담에 나오는 북측대표들은 인민무력
부 정책국이나 판문점대표부에 소속돼 있다. 이들의 자세한 경력은 알
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남북대화에 나오는 북한 군대표단은 독자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통전부가 그리는 대남협상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다.

라) 6자회담

6자회담은 직접적인 남북 회담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진


행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회담의 하나이며, 남북이 동시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6자회담은 그 과정과 결과가 한반도의 정세변화 및 남북관
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6자회담에 참여하는 북한의 협상대
표단은 현재 북한이 진행하고 있는 회담에서 가장 높은 급의 대표단이
라고도 할 수 있다. 북한의 외무성 부상이 직접 참여하고 있고, 북한의
최고 권력기구인 국방위원회 등 관련 부서의 ‘상무조’가 결성되어 회담
전략을 짜고, 실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6자회담에 참여한 북한의 수석
대표는 김영일 외무성 부상과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지만, 사실상 김계
관 외무성 부상이 6자회담 전 과정에 참여하고, 실무를 주관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1차 6자회담의 북한측 수석대표로 김영일 외무성
부상이 나왔지만, 곧바로 2차부터 김계관 외무성 부상으로 교체되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김계관 부상은 ‘6자회담 상무조’의 책임자로
알려져 있다.
‘상무조’는 국가적 차원의 중대한 성격을 띠거나 장기성을 띤 사안의
경우, 관련 부서들과 관련 기관들에서 담당자와 전문가들을 차출해 구
성하는 태스크포스(taskforce)다. 북한에서 구성됐던 상무조 중 대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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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널리 알져진 것은 1990년대 초 1차 북핵위기를 계기로 구성된
‘핵상무조’다. 당시 강석주 외무부 제1부부장(현재 외무성 제1부상)을
책임자로 하고, 외교부 국제기구국과 조약법규국, 미국담당국(16국) 등
의 부서들과 인민무력부 등 관련기관 전문가들로 구성됐다.

* 김계관 부상은 북한 외교가의 손꼽히는 대미전문가이며 자타가 공


인하는 협상의 달인으로 통한다. 1943년 1월 평안북도 운산에서 출생
한 그는 1960년대 중반 평양 국제관계대학 불어과에서 공부했다. 졸업
직후인 1969년 알제리주재 북한대사관에 적을 두고 1년간 어학연수과
정을 거쳤으며 1973년에는 알제리주재 북한대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돼
해외공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1975년 귀국한 그는 외무성 비동
맹국과 국제기구국 등을 오가며 과장, 연구원, 전문위원으로 15년 동안
일해 왔다.
그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91년 외무성의 담화, 성명 등을
작성하는 전문필진 부서인 참사실 실장(책임참사)에 발탁되면서부터다.
이즈음부터 북미간 각종 회담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92년에
는 김용순 당중앙위 비서와 캔터 미 국무차관간의 고위급 회담에 배석
한데 이어 이듬해 3월부터 북미고위급회담 북측대표로, 1995년 콸라룸
푸르 북미 경수로협상 대표로 활약했다. 1995년 외교부 부부장으로 발
탁된 그는 1997년 9월 콜롬비아대학에서 개최된 4자회담 예비회담에
참석한 뒤 같은 해 12월부터는 4자회담 북한측 수석대표를 맡았다.
1990년대 들어 굵직한 현안을 다루며 찰스 카트먼 미 한반도 평화회
담 담당특사와의 끈질긴 협상 파트너 인연으로 외교무대에서 두 사람
의 이름을 딴 K-K라인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특히 김 부상은 2004년부터 시작된 2차 6자회담 때부터 수석대표로
활약하면서 힐과 협상을 통해 북핵문제에 대한 9․19공동성명을
이끌어내 새롭게 K-H라인을 구축했다.
2006년 11월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와의 베를린회동,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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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 5차 6자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지난 3월(2007년)에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힐과 역사적인 북미 직접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
다. 힐 차관보는 2006년 12월 2단계 6자회담을 마친 후 김계관 부상에
대해 ‘그는 베테랑 협상가’이며 ‘핵문제에 대해 많은 경험을 갖고 있
다’라고 말했다.
그는 ‘매사에 침착하고 세심한 성품’, ‘온순하고 차분하며 좀처럼 화
를 내지 않는 성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와 협상경험이 있는 미국 외교관들은 ‘김 부상이 상당히 논리적이
고 설득력이 있는 데다 감정이 상한 모습을 쉽게 보이지 않는 등 외교
관으로서의 자질도 훌륭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로 있으면서 6자회담 재개와 북미대


화의 물밑 창구역할을 했던 한성렬 북한 군축평화연구소 대리소장도
주목되는 인물이다. 그는 유엔주대 북한대표부 차석대사를 역임하면서
북한의 미국 내 협상창구 및 대변인 역할을 맡아 왔었다. 2003년 1월
미국의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를 만나 ‘북핵위기’ 해소방안을 놓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눠 화제가 됐던 그는 2003년 10월 10-12일에는
비공개로 열린 ‘북핵 위기에 관한 미국-조선포럼(일명 워싱턴-평양 트
랙 II 포럼)’에 참석해 커트 웰던 미 하원 군사위 부위원장, 코리아 소
사이어티 회장인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대사 등과 만나 폭넓은 대화를
나눠 주목을 받았다.
2002년 8월 유엔대표부에 부임한 한성렬 차석대사는 합리적인 성품
과 차분한 매너로 미국은 물론 한국 외교관계자들과의 모임과 행사 참
석도 마다하지 않아 미국 내 지인도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54
년 6월 평안북도 대관군에서 출생해 이곳에서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
를 졸업한 후 군에 입대했다. 국내 언론들은 그를 1948년 생으로 보도
했지만, 1990년대 중반 본인이 1954년생이라고 밝힌 바 있다.
4년 반 동안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한 후 제대한 그는 1975년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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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고, 졸업 뒤 바로 외교부에 들어갔다.
그는 1993년 9월 유엔주재 북한대표부에 공사로 부임하면서 미국과의
대화에 나섰고, 이후 3년 8개월 동안 재임하면서 북한의 대미접촉 창
구 구실을 했다. 특히 1994년 북핵위기 때는 유엔대표부 공사로서 토
머스 허바드 당시 미국 국무부 차관보와 북미협상 일정을 조정하는 창
구 역할을 했다.
특히 이 시기는 제네바 핵협상, 미군 헬리콥터 입북 사건, 4자회담
등 긴박한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했던 때이다. 1997년 5월 평양으로 돌
아갔던 그가 다시 뉴욕에 부임한 것도 최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북미관계를 풀어보려는 북한 당국의 의중이 담긴 인사로 풀이된다.
특히 그는 2003년 10월 24일 북한 유엔대표부를 방문한 스트로브
미 국무부 한국과장과 만나 조지 부시 대통령이 표명한 `안전보장 문
서화' 방안에 대해 실무협의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차석대
사는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문서를 상정하고 있는지, 북한이
핵포기에 응할 경우 어느 단계에서 문서화에 응할 것인가, 문서는 6자
회담 틀 안에서 어떻게 교환되는가 등에 대해 미국의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북미간 열린 채널인 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활동
이 아닐 수 없다.
이외에도 지난 2000년 2-3월 북한 경제사절단을 인솔하고 미국을 방
문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관계자들을 만나 세계은행 가입의
사를 밝히는 등 북한 외무성에서 몇 안 되는 미국통으로 활동하고 있
다.

지금까지 남북 협상 그리고 6자회담 및 북미간 협상의 주요 인물들


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들의 면면을 정확히 안다는 것은 대
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력을 밝히고, 그의
특징을 분석하는 것은 향후의 협상에 대단히 유용한 정보가 될 것이
다. 이 글에서는 북한의 군부 인사들의 이력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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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 못하였다. 북한의 군부 관련 인물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데에 원
인이 있다.
북한과의 협상은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북한의 협상가들과의 끈질긴
‘말싸움’ 혹은 ‘말대 말’의 경쟁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냉전 이후,
그리고 정상회담 이후, 과거와 같은 제로섬 적인 협상 인식이 상당부
분 사라지고 공존과 공영의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지만, 아직도 이
러한 경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국가간 협상은 국가 이익과 직접 관련된 문제이다. 북한의 협상가들
은 북한의 국가 이익의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전문성을 갖추고 있으며,
자본주의 세계의 협상가들과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앞
서 살펴본 것처럼, 장관급 회담이나 경제관련 회담, 6자회담 등에서도
관련 분야에서 오랫동안 경력을 쌓거나, 연구를 해온 수석대표, 대표단
이 구성되고 운영이 되고 있다. 이들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을
경우, 북한의 협상 전략과 이를 운영하는 협상가들의 관계 및 총체적
인 틀을 인식하지 못하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북한이 보여주는 협
상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자신들의 원칙을 중도에 쉽게 변화시키거
나,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정한 유연성을 발휘하기는 하지
만 원칙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협상가들의 입을 통해 다
양하게 표출한다. 우리가 북한의 협상가들을 제대로 연구하고 대비해
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북한의 외교, 대남 정책 및 협상 전략, 전술
의 분석과 더불어 협상가들까지도 알아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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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북한의 협상가들의 특징과 앞으로의 전망

앞서 북한과 진행중인 협상 및 이들 협상에 나서는 협상가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현재 진행중인 협상과 이들 협상가들을 정리해보면 다음
과 같다. 아울러 남한의 대표단들도 살펴보자.

<표 10> 남북 장관급 회담 대표단 명단

남한 북한
수석대표 박재규(통일부 장관) 수석대표 전금진(내각 책임참사)
1차 장관급 회담 대표 엄낙용(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김영신(문화성 부상)
(2000.7.29 - 31 김순규(문화관광부 차관) 유영선(교육성 국장)
서울) 김종환(국방부 정책보좌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서영교(통일부 국장) 량태현(내각사무국 성원)
수석대표 박재규(통일부 장관) 수석대표 전금진(내각 책임참사)
2차 장관급 회담
대표 이정재(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김영신(문화성 부상)
(2000.8.29 -
김순규(문화관광부 차관) 유영선(교육성 국장)
9.1
김종환(국방부 정책보좌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평양)
서영교(통일부 국장) 량태현(내각사무국 성원)
수석대표 박재규(통일부 장관) 수석대표 전금진(내각 책임참사)
3차 장관급 회담 대표 이정재(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김영신(문화성 부상)
(2000.9.27 - 30 김순규(문화관광부 차관) 유영선(교육성 국장)
제주도) 김형기(통일부 제1정책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서영교(통일부 국장) 량태현(내각사무국 성원)
수석대표 박재규(통일부 장관) 수석대표 전금진(내각 책임참사)
4차 장관급 회담
대표 이정재(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김영신(문화성 부상)
(2000.12.12 -
김순규(문화관광부 차관) 유영선(교육성 국장)
16
김형기(통일부 제1정책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평양)
서영교(통일부 국장) 량태현(내각사무국 성원)
수석대표 홍순영(통일부 장관) 수석대표 김령성(내각 책임참사)
5차 장관급 회담 대표 김진표(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조성발(내각 사무국 참사)
(2001.9.15 - 18 윤형규(문화관광부 차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장)
허수림(민족경제협력련합회 총
서울) 이봉조(통일부 실장) 사장 겸 무역성 처장)
서영교(통일부 국장) 김만길(문화성 국장)
6차 장관급 회담 수석대표 홍순영(통일부 장관) 수석대표 김령성(내각 책임참사)
(2001.11.09 - 대표 김진표(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조성발(내각 사무국 참사)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장)
14 윤형규(문화관광부 차관)
허수림 (민족 경제협 력련합 회
금강산) 이봉조(통일부 실장) 총사장 겸 무역성 처장)

- 78 -
서영교(통일부 국장) 김만길(문화성 국장)
수석대표 정세현(통일부 장관) 수석대표 김령성(내각책임참사)
7차 장관급 회담 대표 윤진식(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조성발(내각사무국 참사)
(2002.8.12 - 14 박문석(문화관광부 차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장)
서울) 이봉조(통일부 통일정책실장) 김춘근(민경련 서기장)
서영교(통일부 국장) 김만길(문화성 국장)
수석대표 정세현(통일부 장관) 수석대표 김령성(내각책임참사)
8차 장관급 회담
대표 윤진식(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조성발(내각사무국 참사)
(2002.10.19 -
박문석(문화관광부 차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장)
22
이봉조(통일부 통일정책실장) 김춘근(민경련 서기장)
평양)
서영교(통일부 국장) 김만길(문화성 국장)
수석대표 김령성(내각책임참사)
수석대표 정세현(통일부 장관)
대표 조성발(내각사무국 참사)
9차 장관급 회담 대표 윤진식(재정경제부 차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장)
(2003.1.21 - 24 박문석(문화관광부 차관)
허수림(민경련 총사장 겸
서울) 이봉조(통일부 통일정책실장)
무역성 차장)
서영교(통일부 국장)
김만길(문화성 국장)
수석대표 김령성(내각책임참사)
수석대표 정세현(통일부장관)
10차 장관급 대표 조성발(내각사무국 참사)
대표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회담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장)
  오지철(문화관광부 차관)
(2003.4.27 - 29 허수림(민경련 총사장 겸
  신언상(통일부 통일정책실장)
평양) 무역성 차장)
  서영교(통일부 국장)
김만길(문화성 국장)
수석대표 김령성(내각책임참사)
11차 장관급 수석대표 정세현(통일부장관)
대표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조성발(내각사무국 참사)
회담
  오지철(문화관광부 차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장)
(2003.7.9 -
  신언상(통일부 통일정책실장) 허수림(민경련 총사장 겸
7.12
무역성 차장)
서울)   서영교(통일부 국장)
김만길(문화성 국장)
수석대표 김령성(내각책임참사)
12차 장관급 수석대표 정세현(통일부장관)
대표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장)
회담
허수림(민경련 총사장 겸
(2003.10.14 -   오지철(문화관광부 차관)
무역성 차장)
17   신언상(통일부 통일정책실장)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평양)   서영교(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수석대표 정세현(통일부장관) 수석대표 김령성(내각책임참사)
13차 장관급
대표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신병철(내각참사)
회담
  오지철(문화관광부 차관) 김춘근(민경련 서기장)
(2004.2.3 - 6
  신언상(통일부 통일정책실장)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서울)
  서영교(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14차 장관급 수석대표 정세현(통일부장관) 수석대표 권호웅(내각책임참사)
회담 대표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2004.5.4 - 7   오지철(문화관광부 차관) 신병철(내각참사)

- 79 -
  신언상(통일부 통일정책실장) 김춘근(민경련 서기장)
평양)
  서영교(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수석대표 정동영(통일부장관) 수석대표 권호웅(내각책임참사)
15차 장관급
대표 박병원(재경부 차관) 대표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회담
배종신(문화부 차관) 김만길(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2005.6.21-24
김천식(통일부 국장) 신병철(내각참사)
서울)
한기범(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수석대표 정동영(통일부장관) 수석대표 권호웅(내각책임참사)
16차 장관급
대표 박병원(재경부 차관) 대표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회담
배종신(문화부 차관) 맹경일(조평통 서기국 부장)
(2005.9.13 - 16
김천식(통일부 국장) 신병철(내각참사)
평양)
한기범(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17차 장관급 수석대표 정동영(통일부장관) 수석대표 권호웅(내각책임참사)
회담 대표 박병원(재경부 차관) 대표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2005.12.13 - 배종신(문화부 차관) 맹경일(조평통 서기국 부장)
16 김천식(통일부 국장) 신병철(내각참사)
제주도) 한기범(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수석대표 이종석(통일부장관) 수석대표 권호웅(내각책임참사)
18차 장관급
대표 박병원(재경부 차관) 대표 주동찬(민경협 부위원장)
회담
유진룡(문광부 차관) 맹경일(아태위 참사)
(2006.4.21 - 24
이관세(통일부 실장) 박진식(내각참사)
평양)
한기범(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수석대표 이종석(통일부장관) 수석대표 권호웅(내각책임참사)
19차 장관급
대표 박병원(재경부 차관) 대표 주동찬(민경협 부위원장)
회담
유진룡(문광부 차관) 박진식(내각참사)
(2006.7.11 - 13
이관세(통일부 실장) 맹경일(조평통서기국 부국장)
부산)
유형호(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수석대표 이재정(통일부장관)
20차 장관급 수석대표 권호웅(내각책임참사)
대표 진동수(재경부 차관)
회담 대표 주동찬(민경협 부위원장)
박양우(문광부 차관)
(2007.2.27 - 박진식(내각참사)
이관세(통일부 실장)
3.2 맹경일(조평통서기국부국장)
유형호(통일부 국장)
평양)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21차 장관급 수석대표 이재정(통일부장관) 수석대표 권호웅(내각책임참사)


회담 대표 진동수(재경부 차관) 대표 주동찬(민경협 부위원장)
(2007.5.29 - 박양우(문광부 차관) 박진식(내각참사)
6.1 고경빈(통일부 본부장) 맹경일(조평통서기국부국장)
서울) 유형호(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 80 -
<표 11>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대표단 명단

남한 북한
위원장 박창련(국가계획위원회 제1부
위원장 이정재(재정경제부 차관)
위원장)
1차 경추위회담 위원 조명균(통일부 국장)
위원 오광홍(철기석탄공업소 부상)
(2000.12.28-30 김창세(건설교통부 국장)
박효영(국토환경보호성 국장)
평양) 양성호(건설교통부 국장)
함기석(철도성 국장)
김해종(국무총리실 심의관)
최현구(삼천리총회사 총사장)
위원장 박창련(국가계획위원회 제1부
위원장 윤진식(재정경제부 차관) 위원장)
2차 경추위회담 위원 조명균(통일부 국장) 위원 박정성(철도성 대외철도협조
(2000.8.27 김창세(건설교통부 국장) 국장)
-30 서울) 양성호(건설교통부 국장) 박성희(석탄공업성 부국장 )
김해종(국무총리실 심의관) 최현구(삼천리총회사 총사장)
조현주(민경련 참사)
위원장 박창련(국가계획위원회 제1부
위원장 윤진식(재정경제부 차관) 위원장)
3차 경추위회담
위원 조명균(통일부 국장) 위원 박정성
(2002.11.6
강교식(건설교통부 국장) (철도성 대외철도협조국장)
-11.9
김창세(건설교통부 국장) 최현구(광명성지도국 처장)
평양)
김해종(국무총리실 심의관) 박성희(석탄공업성 부국장 )
조현주(민화협 부장)
위원장 박창련
위원장 윤진식(재정경제부 차관)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위원장)
4차 경추위회담 위원 조명균(통일부 국장) 위원 박정성
(2003.2.11 김창세(건설교통부 국장) (철도성 대외철도협조국장)
-2.14 서울) 강교식(건설교통부 국장) 박성희(석탄공업성 부국장 )
김해종(국무총리실심의관) 최현구(삼천리총회사 사장)
조현주(민경련 참사)
위원장 박창련
위원장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위원장)
5차 경추위회담 위원 조명균(통일부 국장)
위원 박정성(철도성 대외협력국장)
(2003.5.19 김창세(건설교통부 국장)
최현구(삼천리총회사 사장)
-5.23 평양) 강교식(건설교통부 국장)
김병칠(국토환경보호성 국장)
김해종(국무총리실심의관)
조현주(민경련 참사)
위원장 박창련
위원장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위원장)
6차 경추위회담 위원 조명균(통일부 국장)
위원 박정성(철도성 대외협력국장)
(2003.8.26-8.2 권도엽(건설교통부 국장)
박성희(석탄공업성 부국장 )
8 서울) 최영철(건설교통부 국장)
최현구(삼천리총회사 사장)
김호홍(국무총리실심의관)
김병칠(국토환경보호성 국장)

- 81 -
조현주(민경련 참사)

위원장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위원장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7차 경추위회담 위원 박정성(철도성 대외협력국장)
위원 조명균(통일부 국장)
(2003.11.5-11. 박성희(석탄공업성 부국장 )
권도엽(건설교통부 국장)
8 최현구(삼천리총회사 사장)
최영철(건설교통부 국장)
평양) 김병칠(국토환경보호성 국장)
김호홍(국무총리실심의관)
조현주(민경련 참사)
위원장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위원장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8차 경추위회담 위원 박흥렬(통일부 국장) 위원 박정성(철도성 대외협력국장)
(2004.3.2 전병성(건설교통부 국장) 박성희(석탄공업성 부국장 )
- 3.5 서울) 김호홍(국무총리실심의관) 최현구(삼천리총회사 사장)
김병중(건설교통부 과장) 조현주(민경련 참사)
위원장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위원장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9차 경추위회담 위원 박흥렬(통일부 국장) 위원 박정성(철도성 대외협력국장)
(2004.6.2 전병성(건설교통부 국장) 최현구(삼천리총회사 사장)
- 6.5 평양) 김호홍(국무총리실심의관) 윤선호(무역성 국장)
김병중(건설교통부 과장) 조현주(민경련 실장)
위원장 박병원(재정경제부 차관)
위원장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위원 박흥렬(통일부 국장)
10차 경추위회담 위원 박정성(철도성 대외협력국장)
전병성(건설교통부 국장)
(2005.7.9 조현주(민경련 실장)
심호진(해양수산부 국장)
-7.12 서울) 방강수(민경련 책임참사)
배국환(재경부정책기획관)
진 철(국가계획위원회 국장)
오광세(국무총리실심의관)
위원장 박병원(재정경제부 차관)
위원장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위원 박흥렬(통일부 국장)
위원 박정성(철도성 대외협력국장)
신동식(산자부무역정책
11차 경추위회담 조현주(민경련 실장)
심의관)
(2005.10.28 방강수(민경련 책임참사)
전병성
-28 개성) 김춘근(민경협 서기장)
(건설교통부수자원기획관)
주동찬
배국환(재경부정책기획관)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장)
오광세(국무총리실심의관)
위원장 주동찬
위원장 박병원(재정경제부 차관)
(민족경제협력위원회 부위원장)
위원 김천식(통일부 국장)
12차 경추위회담 위원 조현주
강계두(기획예산처행정
(2006.6.3 (민족경제협력위원회 실장)
재정기획단장)
- 6.6 제주도) 방강수
나도성(산업자원부 심의관)
(민족경제협력위원회 책임참사)
원인희(건설교통부수자원기획관)
리영석(국가계획위원회 채취국장)
위원장 진동수(재정경제부 차관) 위원장 주동찬
13차 경추위회담
위원 홍재형(통일부상근회담대표) (민족경제협력위원회 부위원장)
(2007.4.18
김중태(통일부 위원 조현주
-4.22 평양)
남북경제협력본부장) (민족경제협력위원회 실장)

- 82 -
방강수
오정규(산업자원부 (민족경제협력위원회 국장)
무역투자진흥관) 리 영 호 (민 족 경 제협 력 위 원회
김경중(건설교통부 참사)
남북교통팀장) 리영석(국가계획위원회 국장)
성길영(통일부 국장) 박정성(철도성 대외철도협조
국장)

<표 12> 남북 국방장관 회담 대표단 명단

남한 북한
수석대표 김일철(인민무력부장)
수석대표 조성태(국방장관)
차석대표 박승원
제1차 국방장관회담 차석대표 김희상(국방부 중장)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2000.9.25 - 9.26 대표 김국헌(국방부 준장)
대표 김현준(인민무력부 소장)
제주도) 송민순(외교통상부 국장)
로승일(인민무력부 대좌)
이민영(합동참모본부 대령)
유영철(판문점 대표부 대좌)

<표 12> 남북 장성급 회담 대표단 명단

남한 북한
수석대표 박정화(국방부 준장) 수석대표 안익산(인민무력부 소장)
제1차 장성급 대표 임인수(국방부 대령) 대표 유영철(인민무력부 대좌)
군사회담   배광복(통일부 과장)   김상남(인민무력부 대좌)
(2004.5.26 금강산)   문성묵(국방부 대령)   배경삼(인민무력부 상좌)
  정영도(국방부 대령)   박기용(인민무력부 상좌)
수석대표 박정화(국방부 준장) 수석대표 안익산(인민무력부 소장)
제2차 장성급 대표 임인수(국방부 대령) 대표 유영철(인민무력부 대좌)
군사회담   배광복(통일부 과장)   김상남(인민무력부 대좌)
(2004.6.3 설악산)   문성묵(국방부 대령)   배경삼(인민무력부 상좌)
  정영도(국방부 대령)   박기용(인민무력부 상좌)
수석대표 한민구(국방부 정책기획관) 수석대표 김영철(인민무력부 중장)
제3차 장성급
대표 문성묵(국방부 대령) 대표 리현성(인민무력부 대좌)
군사회담
심용창(통일부 과장) 오명철(인민무력부 대좌)
(2006.3.2 - 3.3
엄현성(국방부 대령) 배경삼(인민무력부 상좌)
판문점 통일각)
김형수(국방부 대령) 박기용(인민무력부 상좌)
제4차 장성급 수석대표 한민구(국방부 정책기획관) 수석대표 김영철(인민무력부 중장)

- 83 -
군사회담 대표 문성묵(국방부 대령) 대표 리현성(인민무력부 대좌)
(2006. 5.16 - 심용창(통일부 서기관) 오명철(인민무력부 대좌)
5.18 엄현성(국방부 대령) 배경삼(인민무력부 상좌)
판문점) 김형수(국방부 대령) 박기용(인민무력부 상좌)
수석대표 정승조(국방부 정책기획관)
수석대표 김영철(인민무력부 중장)
제5차 장성급 대표 문성묵(국방부북한정책팀장)
대표 박림수(인민무력부 대좌)
군사회담 길강섭(국방부 대령)
김응철(인민무력부 대좌)
(2007.5.8 - 5. 11 김왕경(국방부 대령)
리선권(인민무력부 상좌)
판문점) 심용창(통일부
박기용(인민무력부 상좌)
정치군사회담팀장)
수석대표 정승조(국방부 정책기획관)
대표 문성묵(국방부 수석대표 김영철(인민무력부 중장)
제6차 장성급
북한정책팀장) 대표 박림수(인민무력부 대좌)
군사회담
길강섭(국방부 대령) 오명철(인민무력부 대좌)
(2007.7.24 - 7.26
정진섭(국방부 대령) 리선권(인민무력부 상좌)
판문점)
심용창(통일부 박기용(인민무력부 상좌)
정치군사회담팀장)

<표 13> 정상회담 이후, 남북 적십사 회담 대표단 명단

남한 북한

수석대표 최승철(북적 중앙위원회


수석대표 박기륜(한적 사무총장)
제1차 적십자 상무위원)
대표 고경빈(한적 남북이산가족
회담 대표 리금철(북적 중앙위원회
대책본부 실행위원)
(2000.6.27 상무위원)
김장균(한적 남북이산가족
-6.30 금강산) 최창훈(북적 중앙위원회
대책본부 실행위원)
부서기장)

수석대표 최승철(북적 중앙위원회


수석대표 박기륜(한적 사무총장)
제2차 적십자 상무위원)
대표 고경빈(한적 남북이산가족
회담 대표 리금철(북적 중앙위원회
대책본부 실행위원)
(2000.9.20 - 상무위원)
김장균(한적 남북이산가족
9.23 금강산) 최창훈(북적 중앙위원회
대책본부 실행위원)
부서기장)

제3차 적십자 수석대표 이병웅(한적 총재 특보) 수석대표 김경락(북적 중앙위원회


회담 대표 고경빈(한적 남북이산가족 상무위원)
(2001.1.29 대책본부 실행위원) 대표 리금철(북적 중앙위원회
- 1.31 금강산) 김장균(한적 남북이산가족 상무위원)

- 84 -
리호림(북적 중앙위원회
대책본부 실행위원)
부서기장)
수석대표 서영훈(한적 총재) 수석대표 장재언(북적 중앙위원장)
제4차 적십자
대표 이병웅(한적 총재 특보) 대표 리금철(북적 중앙위원회위원)
회담
김경웅(한적 남북교류전문위원) 김일훈(북적 중앙위원회위원)
(2002.9.6
송우섭(한적 남북교류전문위원) 김학철(북적 중앙위원회위원)
- 9.8 금강산)
민병대(한적 남북교류국장) 리호림(북적중앙위원회부서기장)

제5차 적십자 수석대표 최성익(북적 중앙위원회


수석대표 이병웅(한적 총재 특보)
회담 상무위원)
대표 최기성(한적남북교류전문위원)
(2003.11.4 대표 최창훈(북적 중앙위원회위원)
유종렬(한적남북교류전문위원)
- 11.6 금강산) 황 철(북적 중앙위원회위원)

수석대표 최성익(북적 중앙위원회


제6차 적십자 수석대표 장석준(한적 사무총장)
부위원장)
회담 대표 이종렬(한적남북교류협력위원장)
대표 황 철(북적 중앙위원회위원)
(2005.8.23 유종렬(한적 남북교류협력위원)
리호림(북적 중앙위원회위원)
- 8.25 금강산) 이교식(한적 남북교류협력위원)

제7차 적십자 수석대표 최성익(북적 중앙위원회


수석대표 장석준(한적 사무총장)
회담 부위원장)
대표 유종렬(한적 실행위원)
(2006.2.21 대표 박용일(북적 중앙위원회위원)
우영관(한적 실행위원)
- 2.23 금강산) 리호림(북적 중앙위원회위원)
수석대표 최성익(북적 중앙위원회
제8차 적십자 수석대표 장석준(한적 사무총장) 부위원장)
회담 대표 홍양호(한적남북교류전문위원) 대표 박용일(북적 중앙위원회
(2007.4.10 김남중(한적 실행위원) 위원)
-4.13 금강산) 최상규(한적 실행위원) 김은철(북적 중앙위원회
부서기장)

<표 14> 6자회담 각국 수석대표 명단


남한 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1차 6자회담 이수혁 김영일 제임스 켈리 왕이 알렉산드르 야부나카
(2003.8.27 (외통부 (외무성 (국무부 (외교부 로슈코프 미토리
-29) 차관보) 부상) 차관보) 부부장) (외무부 차관) (외무성 국장)

2차 6자회담 이수혁 김계관 제임스 켈리 왕이 알렉산드르 야부나카


(2004.2.25 (외통부 (외무성 (국무부 (외교부 로슈코프 미토리
-28) 차관보) 부상) 차관보) 부부장) (외무부 차관) (외무성 국장)

3차 6자회담 이수혁 김계관 제임스 켈리 왕이 알렉산드르 야부나카

- 85 -
(2004.6.21 (외통부 (외무성 (국무부 (외교부 알렉세예프 미토리
-26) 차관보) 부상) 차관보) 부부장) (외무부 차관) (외무성 국장)
크리스토퍼
1단계 송민순 김계관 우다웨이 알렉산드르 사사에
4 힐
(2005.7. (외통부 (외무성 (외교부 알렉세예프 겐이치로
차 (국무부
26-8.7) 차관보) 부상) 부부장) (외무부 차관) (외무성 국장)
6 차관보)
자 2단계 크리스토퍼
송민순 김계관 우다웨이 알렉산드르 사사에
회 (2005.9. 힐
(외통부 (외무성 (외교부 알렉세예프 겐이치로
담 13 (국무부
차관보) 부상) 부부장) (외무부 차관) (외무성 국장)
- 19) 차관보)

1단계 크리스토퍼
송민순 김계관 우다웨이 알렉산드르 사사에
(2005.1 힐
(외통부 (외무성 (외교부 알렉세예프 겐이치로
1.9 (국무부
차관보) 부상) 부부장) (외무부 차관) (외무성 국장)
- 11) 차관보)
5
차 2단계 천영우 크리스토퍼
김계관 우다웨이 알렉산드르 사사에
6 (2006.1 (한반도 힐
(외무성 (외교부 알렉세예프 겐이치로
자 2.18 평화교섭 (국무부
부상) 부부장) (외무부 차관) (외무성 국장)
회 - 22) 본부장) 차관보)

3단계 천영우 크리스토퍼
김계관 우다웨이 알렉산드르 사사에
(2007.2. (한반도 힐
(외무성 (외교부 로슈코프 겐이치로
8 평화교섭 (국무부
부상) 부부장) (외무부 차관) (외무성 국장)
- 13) 본부장) 차관보)

1단계 천영우 크리스토퍼


김계관 우다웨이 알렉산드르 사사에
6 (2007.3. (한반도 힐
(외무성 (외교부 로슈코프 겐이치로
차 15 평화교섭 (국무부
부상) 부부장) (외무부 차관) (외무성 국장)
6 - 23) 본부장) 차관보)

천영우 크리스토퍼
회 2단계 김계관 우다웨이 알렉산드르 사사에
(한반도 힐
담 (2007.1 (외무성 (외교부 로슈코프 겐이치로
평화교섭 (국무부
8-20) 부상) 부부장) (외무부 차관) (외무성 국장)
본부장) 차관보)

이상의 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주요한 남북 회담과 6자회담의 대


표단(수석대표) 명단이다. 이들 대표단 명단을 비교해보면, 북한의 협상
가들은 하나의 회담에서 비교적 오랫동안 회담에 임하고 있는 점을 발

- 86 -
견할 수 있다. 이는 북한 대표단이 하나의 회담에 집중할 수 있는 유
리한 조건이자, 회담장에서 보다 익숙한 환경을 조성하고 회담에 임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약소국이 강대국과의 회
담에서 반드시 양보와 패배만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약소국일수
록 하나의 회담에 전력 집중하는 집중력이 보다 강할 수 있기 때문이
다. 위의 대표단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은 북한이 이러
한 집중력을 보다 더 강하게 가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앞서 보았던 남북 대화의 표면에 등장했
던 협상가들의 특징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북한 대남, 대외협상가들의 가장 큰 특징은 전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의 관료들이 정권교체나 조직 내
인사에 따라 변화되는 것에 비해 북한의 협상가들은 큰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경우 계속 협상에 나오게 된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조평통 간부로 활동하며 무려 30년 가까이 각종 대남협상에 나왔던 전
금진 조평통 부위원장이 대표적 사례이다.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대
외협상을 전담하고 있는 김계관 외무성 부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처럼 오랫동안 하나의 분야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그에 따른 전문성을
갖추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당 분야의 역사적 변동을 잘 알고 그
추세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됨을 의미한다. 북한의
대남․대외 협상가들의 경우 전문성과 경험을 갖춘 협상가들로 성장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이들은 체계적인 연구과 경험을 쌓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
고 있다. 통일전선부 회담과, 조평통의 서기국에서 활동하는 대남간부
들은 노동당에 부원으로 들어온 이후부터 현장체험과 과거 회담 분석
및 문헌 학습을 체계적으로 받는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남북장관급회
담을 이끌고 있는 권호웅 내각참사의 경우 1990년대 중반부터 남한과
의 각종 회담과 교류현장에 나와 현장경험을 쌓았다. 또 대부분의 조
평통 간부들은 1972년 남북공동성명 당시의 남북회담부터 시작해 최근

- 87 -
회담까지 모든 회담록과 동영상을 통해 회담기법을 학습한다. 또한 북
한의 체제 속성상 현안을 다루는 태스크포스의 구성과 해체가 쉽게 이
뤄지고, 일단 태스크포스가 구성되면 이 조직에 모든 실무적 권한이
주어진다.
다른 한편, 북한 외무성 안에도 참사실이 설치돼 협상가들의 전문성
을 높인다. 유사시 북한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각종 성명․담화 작
성이 모두 참사실의 몫이기 때문이다. 성명․담화 등은 사안에 따라
발표주체가 각기 다르게 나오고 있지만 작성기관은 예외없이 외무성
참사실이다. 종종 외무성 대변인이 조선중앙통신 기자의 질문에 대답
하는 형식으로 입장을 표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외무성에 대변인이 실
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기자와 회견을 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외무성 참사실이 작성한 자료를 조선중앙통신사에 보내 회견 형식으로
발표하는 것일 뿐이다.
외무성 참사실에는 책임참사 아래 외무성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
는 10여 명의 참사와 연구원들이 포진해 있어 그때그때 발생하는 현안
에 나름대로 발빠르게 대응한다. 김계관, 박길연 부상 등이 모두 참사
실을 거치면서 인정을 받은 간부들이다. 이들은 이렇게 연구, 학습, 훈
련, 경험을 거치면서 협상가로서의 자신들의 자질을 검증, 발휘하게 되
는 것이다.
다음으로, 부서별 경쟁과 협의구조가 체계적으로 조직돼 있음을 들
수 있다.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총괄적 지도 아래 조평통, 아태평화위원
회, 민화협, 민경협 등 다양한 대외명칭을 사용하며 부서별로 경쟁하면
서도 현안이 생기면 치열한 토론을 통해 합의된 안을 도출해 내는 것
이다. 특히 중대사안의 경우 각 부서별 주요 간부들이 단일한 안을 만
들 때까지 토론을 지속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중대한 사안일 경
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실무 부서들 간의 충분한 토론을 통해
합의된 안을 제출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정세인식, 의제,
협상방식, 협상대표 등이 결정되고, 일단 결정되면 이견이 없이 일사불

- 88 -
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북한 대남협상방식이고, 대표로 나온 협상가들
은 이 결정의 위임 범위 안에서 자율적으로 회담에 임한다. 따라서 우
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북한 대표단의 자율권은 이 범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자율적인 결정권한에 있어서는 제한을 받지만, 결정
된 사안의 범위안에서는 자율성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현안
에 대한 치열한 토론을 통해 단일한 안이 도출되기 때문에 현안에 대
한 대응이 늦게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대체로 이러한 협의과정
에서 합의 도출이 지연된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최근에
최근 북한의 신진협상가들은 과거 오랜 협상경험을 가진 고위급협상가
들보다는 융통성이 떨어지고 상황대처 능력도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으로, 북한의 협상가들이 2000년대 들어와 빠르게 세대교체가 이
뤄지고 있다. 사회 전반적인 세대교체와 더불어 협상가들의 경우도 세
대교체가 거의 다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대남 협상에서 세대교체의
출발점은 바로 2005년 남북 장관급회담의 북한측 수석대표로 40대 후
반의 권호웅 조평통 부국장이 발탁된 것이었다. 이후 장관급 대표단의
북한측 대표들은 전원 40대의 실무형으로 교체됐다.107) 이들은 이전세
대가 논리적이고 공세적이었던 반면에, 불필요한 논쟁 대신 협상전략
에 따라 움직이는 실무형 인사들이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북한
은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분야별 전문가를 협상 대표로 참여시켜
실리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최근 북한의 실리주의의 강
화현상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과거의 이데올
로기를 중시하고, 투사형의 협상가들보다는 실리주의의 강화속에서 실
리에 밝고, 이에 따라 대처할 수 있는 실리형 협상 태도를 보이고 있
는 것이다.
외무성의 대외협상가들도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 김계관 부상 등 부

107) 최근 북한을 방문하는 경우 안내로 나온 민화협 참사들 역시 대부분 30-40대의 젊은


세대로 교체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89 -
상급 인사들은 대부분 60대로 구성돼 있지만 그 아래 실무국장, 부국
장들은 30-40대들로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활발한
세대교체가 이뤄진 만큼 과거의 선례로 볼 때 한동안 현재 등장한 협
상가들이 상당 기간 활동할 것으로 예상된다.
위와 같은 북한 협상가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전문성과 경험 그리고
경쟁과 협조의 구조 속에서 협상가들의 길러지고 실제 운영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 최근에는 세대교체와 함께 과거의 투사형의
협상가보다는 실리추구형의 협상가들이 보다 더 전면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즉, 북한이 현재 처한 조건에서 과거의 투사형의 협상가들보다는 실무
형, 실리형의 협상가들이 요구되고, 젊은 세대로 교체되고 있는 상황에
서 실무, 실리형의 협상가들이 앞으로의 북한 협상가의 특징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 90 -
V. 나가며 -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북한의 외교정책, 대남통일정책, 협상전술, 그리고


주요 남북협상과 북한 협상가들의 특징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북한의 협상가들이 단순한 협상기술자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북한의 국가이익을 최전선에서 실현하기 위한
혁명가의 특성과 동시에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전문가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북한은 대남, 대외 협상에서 혁명가와 전문가의
능력을 갖춘 협상가들을 계속 내보낼 것이며, 그를 통해 자신들의 국
가이익을 최대화하려고 할 것이다.
현재의 남북관계를 예측하면, 앞으로 남북의 협상은 보다 더 다양한
분야에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만나게 될 것이며, 그에 따라 회담의
형식과 내용도 다양화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북한의 협상가들을
분석한다면, 앞으로의 남북 회담에서 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둘 수 있
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남북 회담을 역사적으로 회고해보면, 북한의 협
상가들은 공식적인 석상과 비공식적인 석상에서의 태도와 발언, 내용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북한 협상 전술의 하나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비공식적 석상에서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발
언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비공식적 석상에서의
자유로움이 반드시 ‘비공식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협상가들과의
면대면 접촉이 보다 더 자유로워지고, 익숙해진다면 공식적인 자리에
서도 훨씬 더 나은 협상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의 남북 협상에서 우리 협상가들의 능력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앞으로 보다 더 많은, 그리고 다양한 남북 회담이 진행된다고 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과거 그리고 현재의 북한을 대
하는 우리의 협상의 경험과 지금까지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몇 가지를
유추해보면 다음과 같다.

- 91 -
첫째, 우리 협상가들 역시 전문적인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러한 전
문적인 역량은 단지 지식의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
하게는 북한에 대한 다양한 지식의 습득과 동시에 전문적인 분야에서
의 능력의 고양을 의미한다. 우리의 경우 장관급 회담 등에서 수석대
표는 대체로 대북 사업을 오랫동안 해왔던 인사라기보다는 정치권 인
사가 대부분이다. 이들의 경우 협상가라기보다는 정치가라고 할 수 있
으며, 이들의 대북 통일 정책에 대한 능력과 대북 협상력을 일거에 끌
어올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이러한 우리의 현실이
어쩔수 없는 것이라면, 대북 협상에 대한 오랜 경험과 북한에 대한 제
대로 된 정보와 능력을 갖춘 협상팀을 운영하는 것도 좋은 방안일 것
이다. 남북회담 사무국, 통일부, 국정원 등의 유관 기관 등의 지금까지
의 방식을 보다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이 요구된다.
둘째, 북한의 협상가들의 경우 오랫동안의 경험이 이들의 전문적인
분야에서의 능력을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경우 정
권 교체 등으로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협상가들이 자주 바뀌는 편
이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으로 전문분야에서 협
상에 임할 수 있는 구조적인 대책이 요구된다. 특히, 앞으로 여러 각
분야에서 남북 회담이 진행된다고 했을 때, 각 분야의 전문가 역량과
현재 대북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단체 및 인사들과의 상시적인 의사소
통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간접적인 경험과
이를 통한 협상력의 제고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학문적으로 협상학 등 협상에 관련한 여러 가지 기초적인 이론
과 실지 경험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정 - 관
- 학의 결합이 요구된다. 협상학은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중요한 학문적
요구이며, 남북관계에서도 갈수록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가능성이 큰
조건에서 매우 중요한 학문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학술적 대
응이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북한에 대한 협상가들의 면면을 올바로 파악하고, 그들

- 92 -
의 정보를 축적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어야 한다. 현재 북
한의 인물에 대한 분석은 대체로 각 개인들에 대한 프로파일 정도로
한정되어 있다. 즉, 개인들에 대한 이력서 수준이며, 그들의 직위 변동
과 관련한 사항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수준의 인물 데이터베이스는 사
실상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구체적이고 생생한 정보가 데이터베이스
화되어 축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대책은 가장 기본적인 사안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도 협상가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키워낼 수 있는 체계를 갖추
는 것이다. 이는 비단 남북 회담뿐만 아니라 여타의 국가들과의 협상
에서도 요구되는 것이다. 현재 남북 회담을 비롯한 협상은 통일부, 국
정원 등에서 그리고 여타의 국가들과의 협상은 외교통상부에서 전담하
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물론, 이러한 구조가 잘못된 것은 아니며 각
분야에 대해서도 해당 부서에서 대표가 파견되어 협력하는 체계가 갖
추어져 있다. 그러나 협상은 그때그때의 임기웅변의 대책도 요구되고,
제대로 된 협상가를 내세워 심도있는 협상을 해야 할 때도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6자회담에서 북한의 김계관 수석대표와 미국의 크리스
터퍼 힐 수석대표는 오랫동안의 협상 경험을 가지고 있고, 상당한 협
상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인사들이다. 이들의 이러한 경험과 능력은
상황을 관리하고, 이를 조정․통제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 역시 이러
한 협상가가 요구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협상가들을 목적의식적으로
길러내고, 관리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 남북회담은 북한의 젊은 세대의 협상가들과의 대면이 될 것
이다. 중요한 정치적 결정은 다른 협상틀에서 진행이 되겠지만, 일상적
인 협상은 젊은 세대와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의
젊은 세대의 특징도 파악해야 하고, 그들의 성장 과정과 객관적 환경,
북한의 대내외 정책 및 대남 정책 등에 대한 종합적 판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협상은 단순히 토론을 잘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의제

- 93 -
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국가 이익에 대한 신념, 그리고 타협과 투쟁을
병행할 수 있는 종합적 능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 역시 그에 맞는 협상가들을 키워내고, 관리하는 일을 조금도 소
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 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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