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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연구용역보고서 (북한의 대남협상가연구)
2007년 연구용역보고서 (북한의 대남협상가연구)
정책연구 07 - 01
북한의 대남 협상가 연구
2007. 8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제 출 문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 귀하
2007. 8
책임연구원 : 최대석
연구보고서
북한의 대남 협상가연구
2007. 8.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이 보고서는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정
책연구개발 용역과제 계획에 의해 수행된 것으로 수록된
내용은 연구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국회 통일외교통상
위원회의 공식적인 견해가 아님을 밝혀둡니다.
목 차
Ⅰ. 들어가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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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70
다) 국방장관회담․군 장성급회담 ·····················································71
라) 6자회담 ·····························································································73
<표 차례>
표 1 북한 유럽국가들과의 무역현황(1965-1975) ······································10
표 2 1970년대 북한의 대외무역 현황 ························································11
표 3 2000년 이후, 북한의 대유럽 수교현황 ·············································18
표 4 북한의 통일을 위한 2가지 방도와 6가지 전도 ······························24
표 5 협상단계별 북한의 주요 협상전술 ····················································41
표 6 북한의 대남 협상 행태 변화 추세 ····················································43
표 7 남북한 교역액 추이 ··············································································57
표 8 남북회담의 분야와 횟수(1971.01.01 - 2007.08.02) ···························60
표 9 2000년대 이후 남북간 주요 회담 ······················································62
표 10 남북 장관급 회담 대표단 명단 ························································78
표 11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대표단 명단 ··········································81
표 12 남북 국방장관 회담 대표단 명단 ····················································83
표 13 정상회담 이후, 남북 적십사 회담 대표단 명단 ···························84
<그림 차례>
그림 1 북한의 대남기구 조직도 ··································································50
그림 2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기구 구성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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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며
- 1 -
의 협상전술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연구가 되었으나 아직도 충분한
연구가 부족한 분야이다. 대체로 경험에 근거한 분석이 대부분이다.2)
북한의 협상전술과는 달리 북한의 협상가들에 대한 분석은 거의 전무
한 실정이다. 대체로 북한의 인물연구에서 개인적인 파일을 축적하고,
확인하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 연구는 바로 이 지점에
서 북한의 협상 전술과 협상가들의 연구를 통해 앞으로 보다 더 다양
한 분야에서, 그리고 더 빈번하게 진행될 북한과의 협상에서 기초적인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연구는 북한의 모든
협상가들을 분석대상으로 하지는 않고 있다. 시대와 회담의 성격에 따
라 북한의 협상가들은 수시로 바뀌고 있으며, 또한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도 판이하게 다르다. 이 연구는 주로 2000년 정상회담 이후의 남
북회담을 중심으로 북한의 협상 전술과 협상가들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주요하게는 남북 장관급 회담, 경제협력 추진위원회, 군
사 회담, 적십자 회담 등이 대상이 될 것이다. 또한, 현재 진행되고 있
는 6자회담 등도 언급될 것이다.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협상에서
얼굴을 비친 인물들에 대해서도 분석하게 될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우리는 북한의 협상 전술, 협상의 원칙 그리고 협상
가들의 특징 등에 대해 보다 더 풍부한 정보를 얻게 되고, 이를 토대
로 향후의 남북 협상에서 우리의 대응 능력을 향상하는데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 2 -
II. 북한의 외교정책과 협상전술
1. 북한의 외교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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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반대’를 강조하였다.5) 이어 이러한 기본이념은 1990년 최고인민회
의 제9기 1차 회의에서 공식화되었다. 북한이 이처럼 자주, 친선, 평화
의 순위를 바꾸어 평화를 보다 더 강조하게 된 이유는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한 안보 위기, 냉전의 해체에 따른 전세계적인 평화분위기의
고조 등에서 찾을 수 있다.6) 결국 북한의 대외 정책 우선 순위의 변
화는 주체사상에 기초한 대외정책의 이념과 더불어 탈냉전 이후의 세
계 질서의 변화 그리고 한반도 상황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러한 변화는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채택한 당 규약에서 명시한 대
외정책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당규약 전문에 따르
면 ‘조선로동당은 자주성과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원칙에 기초하여 사
회주의 나라들과의 단결과 국제공산주의운동과의 련대성을 강화하고
세계의 모든 신흥세력나라 인민들과의 친선, 협조관계를 발전시키며,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의 반제민족해방운동과 자본주
의 나라들의 로동계급과 그 밖의 인민들의 혁명투쟁을 지지하고 광범
한 련합 전선을 실현하여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와 지배
주의를 반대하며 평화와 민주주의 민족적 독립과 사회주의 공동위업
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한다’고 명시되어 있다.7) 특히, ‘조선로
동당의 당면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
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의 혁명과업을 완수하
는 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사회를 건
설하는 데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사회주의 완성과 전국
5) 김일성, ‘주체의 혁명적 기치를 높이들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자
(1988, 9, 9),’『김일성저작집』41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5), 245-246쪽. 위 연설에
서 김일성은 ‘평화는 동지적 단결과 협조에 기초하여 발전하는 사회주의의 본성적 요구’
라고 주장하며,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것은 절실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
다. 이러한 김일성의 언급은 사회주의권의 변화와 냉전체제의 해체와 더불어 북한이 느
끼는 안보의 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6) 김계동은 북한이 대외정책의 기본이념을 바꾼 주요한 이유를 전 세계적으로 탈냉전화되
고 평화를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움직임이 일어나자 세계 자유화의 요구에 맞춰 국제관계
를 발전시켜 나가는데서 보편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평화를 중시한 것이라고 보고 있
다. 김계동, 『북한의 외교정책』(서울: 백산서당, 2002), 104-105쪽.
7) 당규약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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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범위에서에의 공산화라는 기본 목적을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
한 당 규약의 규정과 1980년대 후반의 대외정책의 기본이념을 비교하
면 북한이 현실적인 세계 질서의 변화 속에서 자신들의 대외정책도 일
정하게 바뀌지 않을 수 없음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반제국
주의의 대외정책 기조가 바뀌지는 않고 있지만, ‘우호적으로 대하는 모
든 나라들과 .... 정치, 경제, 문화적 관계를 맺기’를 희망하는 북한의
1998년 헌법에 따르면, 탈냉전의 시기에 북한의 대외정책은 1980년대
말을 기점으로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의 대외 정
책 역시 국제적인 역학관계와 한반도 상황에 따라 시기적으로 많은 변
화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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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목적으로 한 대외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것이다.10) 특히, 국
제혁명 역량으로서 사회주의권와의 동맹 및 협력관계의 구축과 더불어
제3세계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 시기 진영외교는 소련 및 중국과의 동맹관계의 형성에서 집중적
으로 표현된다. 1961년 소련 및 중국과 연이어 군사동맹을 체결한 북
한은 이들 나라를 중심으로 한 외교관계를 핵심적인 외교정책으로 두
었다.11) 1950년대 후반부터의 중-소간 갈등과 북-소 및 북-중간 갈등에
도 불구하고, 냉전 시기 이들과의 동맹관계는 지속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 쿠바 사태, 중국의 문화대혁명, 브레즈네프의 등장, 베트남전의
발발 등으로 국제정세가 심각한 안보위기로 치달아가면서 북한은 이들
국가와의 군사동맹과는 별도로 ‘국방-경제 병진 노선’을 통하여 자체의
국방력을 강화하는 등의 노력을 가하였다.12) 다른 한편, 1960년대 북한
은 신흥독립국 등이 대거 등장하고, 유엔에서 발언권을 강화해가면서
이들 국가들과의 외교관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55년 반둥회의로
부터 출발한 비동맹은 이후 주은래가 제창한 ‘평화 5원칙’을 포함한 10
개항의 선언문을 채택하고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이 주축이 되어 중
요한 국제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13) 북한은 반둥회의 이후 강화되고
있는 비동맹 세력을 중요한 외교 대상으로 설정하고 이에 대한 적극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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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60년대 흐루시쵸프의 평화공존론과 중-소
갈등, 국제적인 안보위기에 당면하여 중-소에 치우친 외교관계를 비동
맹까지 포함하는 다변적인 외교로 전환하였다. 북한은 “우리나라와 좋
은 관계를 맺기를 희망하는 기타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정상적인 관계
를 수립하며 경제, 문화교류를 발전시키기를 원한다”고 하여 반제국주
의, 반식민주의, 민족해방투쟁의 기치를 내세운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활동의 전개를 추진했던 것이다.14) 특히, 이러한 제3세
계, 비동맹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확대는 남북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고립과 국제무대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노
력 그리고 미국의 ‘남조선 강점’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과 북한에 대한
정당성의 확보를 위한 것이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15) 북한의 비동
맹 외교의 결실은 1975년 8월 페루 리마에서 열린 제5차 비동맹회의에
서 정식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고, 그해 유엔총회에
서 북한측 안이 통과됨으로써 비동맹외교의 성과가 나타나게 되었
다.16) 당시 유엔 총회에서의 북한측 안이 통과하자 김일성은 이를 북
한 외교의 승리라고 자축하기도 하였다.
북한이 이처럼 사회주의 진영과 더불어 비동맹 외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유는 결국 남북한의 대립체제에서의 상호 경쟁 때문이었다.
1964년 국제혁명역량 강화를 내건 북한은 ‘조국통일’에 유리한 국제적
환경과 국제혁명역량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국가뿐만 아
니라 신흥독립국들에 눈을 돌렸다. 특히, 1950년대 말의 중-소간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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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북한의 외교에 심각한 위기였고, 위축된 외교관계의 확대를 위해서
도 비동맹외교는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더구나 소련과 중국이 비동맹
국가에 적극적으로 진출함으로써 북한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미 북한은 1956년의 2차 당대회에서 “우리 당은 앞으로 세계의 공고
한 평화와 안전을 위한 투쟁에 계속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이며 쏘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을 비롯한 인민민주주의 여러 나라들과의 형제적 친선
단결을 눈동자와 같이 고수하며 이 나라들과의 정치, 경제, 문화적 협
조를 더욱 강화하여 나갈 것입니다. 이와 함께 서로 다른 사회제도를
가진 나라들 사이의 평화적 공존에 대한 레닌적 원칙을 견지하며 자주
권의 호상존중과 평등권에 립각하여 세계의 모든 평화애호국가들과의
정치적 련계와 실무적 련계를 맺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라
고 하여 반둥회의 이후 조성된 중립국과의 외교관계에 노력할 것을 피
력하였다.17) 또한, 4차 당대회에서는 사회주의 진영과의 협조강화 및
아시아․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확대,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것을 외교정책의 중요 요구로 내세
웠다.18)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냉전시기 북한의 외교는 사회주의 진영과의 관
계 강화를 핵심으로 하여, 비동맹, 신흥 독립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확
대 그리고 우호적인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정상적 관계를 진행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대상은 역시 사회주의 진영이었다. 이것은
위의 김일성의 언급에서도 나타나듯이,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협력관계
의 구축이 북한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북한의
외교는 냉전시기 1950년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소련, 중국에 대한 외
교 의존기를 벗어나 점차 비동맹 외교로 확대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교 정책은 1970년대 데탕트를 맞이하여 새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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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게 된다.
나) 데탕트기: 대서방 접근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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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트 및 자본을 수입하고, 자국의 1차 원료의 수출을 통해 경제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영국
수출 4,090 5,024 7,884 7,025 10,560 13,021 14,096 28,686 74,960 106,689 161,793
수입 1,335 2,210 5,264 15,302 32,039 32,799 46,187 73,872 68,932 90,424 123,047
프랑스
수출 567 953 2,118 2,590 1,752 1,568 2,562 8,186 23,141 24,491 40,054
수입 600 10,906 16,721 13,731 36,425 52,243 71,754 47,797 46,903 35,510 137,338
서독
수출 3,586 6,915 5,288 9,637 16,417 27,330 31,363 51,204 120,338 241,770 312,282
수입 16,179 20,311 30,951 73,357 78,990 67,204 73,740 66,954 132,030 140,354 192,724
덴마크
수출 151 869 365 234 526 312 892 4,467 10,803 11,647 21,895
수입 399 389 445 480 784 833 455 5,182 3,011 4,919 5,666
핀란드
수출 112 133 351 166 191 273 382 1,143 816 5,004 4,456
수입 12 2 231 164 2 241 10 20 423 289 391
노르웨이
수출 132 306 236 529 131 175 351 548 1,381 2,030 4,245
수입 256 79 821 4,993 1,429 115 218 2,249 3,031 3,570 3,823
스웨덴
수출 5,444 9,831 8,035 6,137 8,566 7,885 8,703 9,484 17,575 29,892 56,045
수입 806 1,158 2,232 8,827 7,616 2,758 1,759 3,571 15,279 30,294 13,418
아이슬란
드 수출
- - 220 37 102 1114 151 389 743 1806 437
수입
- - - - - 1157 - 33 16 43 145
오스트리
아 수출
- 1 117 76 86 107 397 1,262 1,675 3,938 10,167
수입
60 2 61 498 156 231 1,987 6,257 8,489 3,746 2,668
포르투갈
수출 63 13 1 - 13 6 343 171 233 517 864
수입 15 6 14 31 15 62 95 183 1,045 1,608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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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의 <표 1>과 <표 2>를 합친 것임.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북한과 유럽과의 무역은 대체로 영국, 프
랑스, 서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서독으로부터의 상품과 기
술의 수입이 눈에 띈다. 이는 당시 북한이 필요로 했던 기술과 상품의
주요 수입국이 서독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유럽과의 경제관계 확
대의 결과는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중반의 북한의 무역 구조가 공산
권이 아닌 서방권 혹은 비서방권의 무역이 북한 전체 무역의 약 40%
를 상회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24) 1970년대 북한의 무역현황은 다
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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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은 북한이 필요로 하는 상품과 기술의 수입 효과도 있었지만, 무
역적자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고 여기에 누적된 채무까지 겹쳐지
면서 북한으로서는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1970
년대 말에는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레이거니즘으로 대표되는 신냉
전이 도래하면서 북한의 대서방 접근은 위축되게 되었고, 신냉전의 분
위기에서 북한 역시 중-소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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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북한이 다시금 제3세계 국가들과의 협력 강화
와 일부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제관계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김일성은 1984년 2월 이례적으로 대외무역을 강조하면서 대외무역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27) 이 연설에서 김일성은 대외무역의 필요성, 대
외무역 기관, 신용의 중요성, 대외 수송 및 국제 시장에 대한 연구, 무
역 일군들의 자질 등에 대한 대외무역 전반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이
러한 대외무역의 강조는 1984년 ‘합영법’의 제정 등 대외적인 부분적인
개방으로 나타났고, 이는 북한의 외교가 부분적인 개방외교로 전환되
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합영법은 1970년대 대서방 접근의
교훈에 따라 일방적인 대외무역의 방식이 아니라 중국의 개혁․개방의
일부분을 참고하여 기술과 자본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었다. 합영법은
북한이 대외무역 적자 등의 위험을 줄이고, 발전된 기술과 자본을 끌
어들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28) 그러나 북한의 합영법 제정과 그 이
후의 상황 전개는 북한이 의도했던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다. 합영법이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합영․합작은 위한 시행세칙은 1986년에 가
서야 마련되었고, 그나마 합영의 대상이 일본의 조총련을 중심으로 진
행됨으로써 대규모 투자나 기술의 도입은 미미하였다. 약 100여건의
합영․합작이 진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것이 북한의 경제에
미친 영향을 아주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대외 환경 역시 미국과
의 냉전적 적대관계의 지속, 중국의 개혁․개방의 가속화 그리고 소련
의 고르바쵸프 등장 이후의 변화 등과 맞물려 북한으로서는 국제적인
환경의 측면에서도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1980년대 초반 83년
미얀마 아웅산 테러로 인한 국제적 고립과 더불어 1987년의 KAL기
폭파 사건으로 미국으로부터 테러지원국에 지정되는 등 외교적 고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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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80년대부터 소련과 동유럽의
대변혁의 발생으로 북한의 외교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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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였다.30) 이는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 한 이후, 자신들
과의 친선 및 경제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대상으로서 아시아
국가들을 지목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대미 접촉을 시도하고, 대미관계에 보다 더 많은 노력을 쏟기
시작했다. 북한과 미국의 외교관 접촉은 1988년 12월 북경에서의 참사
관급 접촉으로 시작하였다. 참사관급 접촉을 시작으로 민간 분야에서
의 워싱턴과 평양을 오가는 다양한 접촉이 진행되었다. 1990년 6월의
미국 교수들의 평양방문, 91년 미군 송환을 둘러싸고 북경에서의 정무
참사관급 접촉, 그리고 솔라즈 의원의 평양 방문 등이 이루어졌다. 이
러한 대미접촉은 1992년 김용순 당 국제부장과 아놀드 켄터 미 국무차
관의 고위급 외교관의 접촉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핵위기로 인한 양국
간의 이견이 해소되지 않고, 갈등이 격화되면서 1993년의 NPT 탈퇴로
미국과의 극단적인 대립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4년 카
터 전 미국대통령의 평양 방문으로 극단적 대립의 위기에서 벗어나 그
해 10월 ‘제네바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북-미 관계를 새로운 관계로 접
어들기 시작했다.31) 제네바 합의는 북한으로서는 당면한 핵위기로부터
벗어남은 물론 미국과의 관계정상화까지 규정된 것으로서 북한 외교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은 영변 핵시설 등 5곳
을 동결, 봉인하고 IAEA의 감시하에 두었으며, 미국은 매년 중유 5만
톤 및 일부 경제제재 조치를 철회하였다. 또한, 2003년까지 경수로 2기
를 제공하기로 하고 한국형 경수로를 북한의 신포 금호지구에 건설하
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북-미관계는 핵위기에 따른 대결관계를 일정정
도 청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셋째, 일본과도 적극적인 외교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1990년 가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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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신 자민당 부총재의 방문과 ‘조-일 3당 공동선언’ 이후, 북일 수교
협상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수교 협상은 납치자 문제와 전후 보상 등
의 문제로 교착과 재개를 반복하였다.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일본
연립여당 3당 대표단이 방북하여 수교 협상을 재개하였으나 일본인 처
고향방문을 둘러싼 갈등으로 다시금 교착상태에 빠졌다. 2002년 고이
즈미 수상의 방문으로 일본과의 수교협상이 다시금 진척되었으나 납치
자 문제로 인해 오히려 일본 내의 반북여론이 팽배해지고, 제2차 핵위
기가 불거지면서 북-일관계는 오히려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북
한은 일본과의 수교를 통해 배상금 문제와 경제협력을 목적으로 했지
만 결국은 정치적인 문제로 인하여 관계개선은 실패하고 말았다.32)
결국 이 시기의 북한의 외교정책은 미국과의 외교를 우선적인 관심
으로 두고, 일본 및 주변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특히, 핵위기의 제네바합의를 통한 해결과 금창리 위기의 극복으로 미
국과의 관계개선은 속도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발전하는 성과를 거두었
다. 또한, 통미봉남(通美封南)으로 대표되는 미국과의 우선적인 관계강
화와 남한에 대한 일정한 거리두기는 김영삼 정부의 대북 흡수통일에
대한 경계와 당면한 핵위기의 해결이라는 객관적 조건과 더불어 남한
에서의 통일운동진영의 분화 및 약화와 북한 체제의 재정비가 완료되
지 않았던 내부의 조건이 결합된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외교정책은
대미외교의 강화와 주변국들과의 관계 정상화에 중심을 두었다. 그러
나 2000년대에 들어와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외교적 여건이 한
층 유리해지면서 전방위적 외교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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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000년대: 전방위 외교
33) 김정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조국통일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1997. 8),’『김정
일선집』14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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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 2000년 이후, 북한의 대유럽 수교현황
국가명 수교일
이탈리아 2000.1
영국 2000.12
네덜란드 2001.1.15
벨기에 2001.1.23
스페인 2001.2.7
독일 2001.3.1
룩셈부르크 2001.3.5
그리스 2001.3.8
유럽연합(EU) 2001.7.25
아일랜드 2003.12.10
프랑스 미수교
34) 제2의 북핵위기는 2002년 10월 미국의 대북 특사로 북한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당시 국
무부 차관보의 방북 결과로 인해 불거졌다. 당시 미국은 켈리의 방북을 보고하면서 북한
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북한이 시인했다고 발표했고, 이때부터 북-미간 핵공방이
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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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되었지만, 여전히 반제국주의적 외교이념은 변하지 않고 있다. 2001
년 신년 공동사설은 “제국주의의 강권과 지배주의적 책동이 더는 허용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35) 또한, 1995년부터 2004년까지의 <<로
동신문>> 외교노선에 관련된 사설 중 반제국주의 노선에 대한 비중이
71.4%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36) 이러한 북한의 입장
은 반제국주의적 외교이념과 국제주의적 원칙 그리고 비동맹 및 자본
주의 국가들과의 우호적인 관계의 형성이라는 기존의 외교정책에 실리
주의적 입장에서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이중적 성격’으로 정리할 수 있
다. 이러한 ‘이중 전략’은 한편으로는 체제 보전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실리의 추구라는 현실성을 모두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의 북한 외교정책은 대미 관계 개선과 대일 관계 개선 그리고
남북한 관계로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재의 6자회담 및 2.13
합의의 이행과 이어지는 한반도 평화체제 및 동북아 질서 변화에서 북
한은 최종적으로 북미관계 개선을 목표로 미국과의 외교관계에 집중하
면서 동시에 남한에 대해서는 ‘민족공조’의 차원에서 보다 더 높은 요
구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북한은 남한에 대해서
‘민족공조’와 ‘외세공조’의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과 미
국, 북한과 일본, 그리고 남북한 간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대화와 협상
이 이어질 것이다. 북한의 외교정책이 북한 체제의 국가적 이익의 견
지에서 결정되는 전략이라면, 협상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술이자,
‘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벼랑끝 전술’로 명명되는 북한의
협상술은 단지 ‘비합리적 행위자로서 북한’때문이 아니라, 북한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객관적 환경과 주변 여건에서 비롯된다.37) 또한,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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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임하는 협상가들간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측면도 적지 않다. 북한
의 외교정책을 전략적 차원에서 분석하고 이해해야 한다면, 북한의 협
상전술은 이러한 전략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분석되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 북한의 대남 통일 정책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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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되어 나갔다. 그리고 북한의 통일방안은 이와 같은 전략 속에서 수
립되고 추진되었다. 이러한 북한 통일방안은 남한 사회의 변화, 국제
환경의 변화, 북한 사회의 변화 등 다양한 복합 요인에 의해 가능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분단체제가 지속됨으로 인해 양 사회의
이질성이 점차 커져나가고, 단일한 제도에 의한 통일이 불가능 혹은
엄청난 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었다. 결국 북한의 통
일방안은 일원론적 통일관에서 연방주의적 통일관으로 변화되었다.
북한은 지금까지 크게 3가지의 통일방안을 내 놓았다. ‘총선거안’, ‘과
도적 연방제안’, ‘완성된 연방제안’이 그것이다. 대체로 1960년 4.19시기
까지가 총선거를 기본으로 한 일원적 통일론에 기초하고 있었다면,
4.19를 계기로 60년대는 총선거안과 과도적 대책으로서 연방제가 공존
하던 시기였다. 과도적 연방제안은 1973년 김일성의 ‘5대강령’에서 제
안된 것으로 ‘고려연방공화국’ 창립과 단일 국호에 의한 UN 가입을 주
장하던 시기이다. 그리고 1980년 6차 당대회를 계기로 ‘고려민주연방공
화국창립방안’을 제안하면서 연방제를 완성된 통일국가의 형태로 제시
하였다. 이로써 북한은 급진적인 체제 통합의 문제에서 두 체제를 기
본으로 해서 하나의 국가로의 통일을 주장하게 되었다. 마치 중국의
대만에 대한 통일정책 즉, 일국양제(一國兩制)와 동일한 형태의 통일방
안을 내세운 것이다. 현재에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단계적
으로 실시하기 위한 단계적 연방제안을 제시하고 있다. 즉, 낮은 단계
의 연방제에서 높은 단계의 연방제로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지난 6.15
공동선언의 제2항에 명시된 느슨한 연방제는 1991년 김일성 주석이 신
년사를 통해 밝힌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의미하고 있다.41) 현재 북
한은 연방제 방안을 유일한 통일방안으로 주장하고 있다. 현재 남북한
의 상이한 체제를 일거에 통일시킬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연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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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여러 가지 합리적인 제안 중의 하나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남
한이 주장하는 연합제와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는 본질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형태상으로는 많은 공통성을 안고 있는 것
이 사실이다. 남한의 경우, 그 동안의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통일정책에
서 현실적이고 점진적인 그리고 마침내는 절충적이며, 단계적인 접근
으로 변화해 온 것처럼, 북한 역시 총선거에서부터 연방제까지 일원론
적 통일론에서 연방적 통일론으로 변화해왔다.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통일방안 그 자체의 전개과정을 보면 양측이 공히 단계
적이고 점진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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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사 표시에 입각한 통일전선 정부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총
선거를 실시할 것’43) 등의 평화통일방식을 제안한다. 북한의 평화통일
방식의 제안은 전후 북한 사회의 건설과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평
화적인 환경의 조성을 위한 필수적 요구에서 기인한다. 이후, 북한은
평화적 통일 방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민주기지론’에 입각한 남한에
서의 혁명과 통일의 성취를 전략으로 삼고 있었다. 즉, ‘선혁명 후통일’
의 입장이었던 것이다.44) 당시 북한은 ‘혁명=통일’이었던 것이다. 따라
서 ‘선변혁 후통일’은 ‘남조선에서의 혁명’의 성취가 곧바로 통일로 이
어진다는 것에 근거를 두었고, 이를 위한 남조선 혁명 사업이 곧 통일
사업이었던 것이다. 또한, 북한의 민주기지론에는 남한에서의 혁명역량
의 미진함에 대한 평가가 놓여있었다. 즉, 혁명을 위한 기지이자 지도
부로서 북한 혁명이 놓여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북한의 민주기지론
과 총선거안은 남한 체제에 대한 북한 체제의 자신감이 놓여 있었다.
비교적 일찍 경제 개발에 나선 북한은 한국전쟁의 복구와 이어진 천리
마 운동 등을 통해 비교적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당시 남북한의
경제 총량은 북한이 월등히 앞서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제반 개혁 조
치를 통해서 보다 더 안정적인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러
한 배경에서 북한은 총선거를 통해 남한 체제와의 통일을 추진했던 것
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후 북한의 총선거안은 1960년 4.19를 계기로 과도적 조치로서의 연
방제가 나올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70년 과도적인 성격의 고려연방공
화국안이 제출될 때까지 유효하였다. 그러나 통일의 전략으로서는 평
화적 방도와 비평화적 방도를 제시하였으며45), ‘선혁명 후통일’의 입장
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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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4> 북한의 통일을 위한 2가지 방도와 6가지 전도
2가지 방도 6가지 전도
제국주의와 전쟁을 통한
비평화적 방도 남한혁명의 성공 북한에 의한 전쟁
남한 해방
46) 남․북 정권의 정통성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즉, 남한은 유엔 결의에 의한 총선거
를 통해서 합법적으로 수립된 정부라는 것을, 북한은 전 조선주민의 총의에 의해 수립된
정부라는 것을 주장한다. 북한의 김일성은 1948년 5월 6일 홍명희 선생과의 담화에서
“남북련석회의는 우리 민족의 력사에 국토완정과 민족통일의 기치하에 각계각층의 애국
적인사들을 묶어세운 위대한 회합으로 영원히 기록될것입니다”라고 언급하였고(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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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임무의 성과에 고무되어 ‘국토완정’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하기도 하
였다.47) 한국전쟁은 평화적인 방도에 의한 거의 모든 수단들이 고갈된
뒤 양측이 적극적으로 고려하던 방법이었다. 특히, 북한은 한국전쟁 직
전 군사편제를 정리하고 중국과 소련으로부터의 인력과 장비를 보급
받아 착실하게 전쟁을 준비해나갔다. 마침내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
하였고, 그 결과 양측은 승자와 패자도 없는 소모적인 국력만을 낭비
한 채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분단이 기정사실화 되고, 남․북한 주민들의 상대방에 대한 적
개심만을 키워놓은 심리적 분단, 정서적 분단까지도 결과했다는 점이
다.48) 이로써 북한이 의도했던 ‘반제반봉건인민민주주의혁명’에 의한
남조선 혁명과 조국 통일의 완수는 실패하게 되었다.
둘째, 혁명과 통일이 실패한 뒤 북한은 평화적 통일방도로 통일정책
을 전환하게 된다. 즉,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사회주의로의 이행과 건
설을 위한 평화적 조건의 마련과 전 조선 주민의 자유의사에 따른 총
선거안을 들고 나온 것이다. 총선거안의 전제조건으로는 모든 외국군
대의 철수와 남한의 민주화를 들고 있다.49) 1954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9차대회 호소문을 비롯하여 1950년대 내내 북한의 통일정책의
주된 내용은 외국군 철수, 남과 북의 대표자 회의와 한반도 문제를 다
룰 국제회의, 경제․사회․문화의 자유로운 교류와 왕래 그리고 자유
의사에 따른 선거로 집약된다.50) 한국 전쟁 후, 북한이 내놓은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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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 “조선에서 모든 외국군대가 철거하고 남북조선 인민들이 한자리
에 모여앉아....자유로운 의사에 기초하여”51) 혹은 “어떠한 외국의 간섭
도 없이 조선인 자신의 민주주의적 의사에 의하여”52) 등의 완전한 외
세 개입을 배제한 상태에서의 총선거안에서 1958년 “중립국 기구의 감
시하에 실시될 수 있다”53)고 변화한다.
셋째로, 북한의 총선거안은 과도적 조치로서의 연방제와 병립하게 된
다. 1960년 남한에서의 4.19 혁명이 발생하고, 자주적인 교류와 통일운
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자 총선거안과 함께 과도적 조치로서 연방제를
실시하고 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새로운 제안을
하게 된다.54) 비록, 과도적 조치이기는 하지만 일원론적 통일관에서 연
방주의적 접근으로 자세를 전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외국군
의 철수를 주장하고 있으며, 나아가 남북군대의 축소와 남북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하였다. 또한, 연방제 제안과 동시에 ‘경제공동위원회’ 개최
를 열자고 주장함으로써 당시의 압도적인 자신들 역량에 대한 자신감
을 내보이고 있다.55)
이렇게 본다면, 북한의 1960년대까지의 통일정책은 전쟁에 의한 무력
통일이 실패한 뒤, 평화적 방도에 의한 총선거안이 기본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총선거안은 외국군의 철수와 평화적 환경의 조성 그리고
조선인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통일방안으로서 북한의 역량이 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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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조건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남북의 체제 이질화의 정도가 그
다지 높지 않은 조건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북한의
기본 입장은 ‘선혁명 후통일’이었다. 즉, 남한에서의 혁명과 통일의 성
취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3대 혁명 역량의 강화가 제기되었다.
결국 1960년대까지의 총선거안은 북한의 주도에 의한 통일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한에서 박정희의 등장과 산업화 및 자본주의의 고도성장
그리고 북한에서의 사회주의 개혁과 제도의 정비로 인해 점차 체제 통
일의 가능성은 낮아져 갔다. 이러한 조건에서 북한은 새로운 통일정책
으로 선회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연방제 방식으로의 변화이다. 연방
제는 1960년에 이미 제기되었으나, 그것은 과도적 대책으로서 성격을
갖는 것이었고, 본격적으로는 과도적 연방제 즉, ‘고려연방공화국’으로
정립된 것은 70년대 들어와서이다.
나) 과도적 연방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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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북과 남 사이의 군사적 대치상태의 해소와 긴장상태의 완화, 북과
남 사이에 정치, 경제, 군사, 외교, 경제, 문화의 다방면적인 합작과 교
류, 북과 남의 각계각층 인민들과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
는 대민족회의 소집, 단일국호에 의한 남북련방제 실시, 고려연방공화
국의 단일국호로 UN에 가입’ 등이다.58)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북한이 주
장한 고려연방공화국이 1960년에 제안했던 과도적 대책으로서 연방제
와 다르다는 점이다. 1960년대의 연방제가 정부대표로 구성되는 최고
민족회의를 통해 구성되며, 기능과 역할도 경제, 문화적 문제에 국한되
었던 것에 비해, ‘5대강령’에서 제시하고 있는 연방제는 대민족회의라
는 전민족적 범위에서의 통일전선에 기초하여 구성되며, 외교문제까지
도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적 연방제안은 말 그
대로 과도적 단계로서 연방제를 상정하고 있을 뿐이다. 즉, 연방제를
거쳐 하나의 국가체제로 통일을 하겠다는 구상을 담고 있다. 따라서
과도적 단계로서의 연방제는 다른 형태의 통일방안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1980년 당 제6차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으로 구체화되어 나온다.
1970년대는 박정희의 UN 동시가입, 한반도 교차승인 등이 주장되던
시기였다. UN 동시 가입이나 교차 승인 등은 곧 ‘2개의 한국’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또한,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남북한의 통일원칙이 합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과정은 이전보다 더한 적대와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1976년부터는 한․미 합동 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Team
Spirit)가 실시됨으로써 북한으로서는 전쟁의 위협에 대한 부담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59) 이러한 조건에서 북한은 74년 대미 평화협정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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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비동맹 외교의 강화를 통한 UN사 해체(75년), 남북한 사이의 정
치협상(77년) 주장 등을 내놓는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북한이 남
한과의 통일협상을 진행하는 것에서 나아가 미국을 통일 및 평화협상
의 상대자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이미 앞서 북한의 외교정책에서 살펴
보았듯이, 1970년대 북한의 대서방 접근 외교는 미국과의 인민외교 및
의회 차원의 외교적 노력도 동시에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북․
미 평화협정, 남북 불가침 선언을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한,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남한의 군사
적 실권을 미국이 쥐고 있고, 미국을 통하지 않고서는 의미있는 진전
을 이루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74년 허담 부총리 겸 외교부
장은 최고인민회의 보고에서 72년 김일성이 제시한 남북평화협정을 거
론한 뒤, “현 조건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하여서는
그것을 확실히 담보할만한 실권을 가진 당사자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응당합니다”60)라고 하여 남북한 간의 평화협정 체결이 별 의의가
없음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미국과의 평화협정 문제를 토의할 것을 정
식으로 제의하였다.61) 이로써, 이제 북한은 평화협정과 군사적 긴장완
화의 문제 즉, 정치․군사적 대화를 미국과 벌이겠다는 의지를 천명하
였으며, 남한에는 대민족회의나 정치협상회의 등의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등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입장은 이후 줄곧 기본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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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정책으로서 자리하게 된다.62)
1970년대는 다른 한편으로 북한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김정
일 후계체제가 성립되어, 내부의 체제 정비가 필요한 때였다. 또한, 남
한의 고도성장으로 경제발전의 측면에서도 대등하거나 남한이 추월하
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는 북한이 이전 시기, 힘의 우위와 경제력의 우
위를 바탕으로 한 대남 정책이 어려워졌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미 돌
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남북한의 체제의 상이함이 커졌음을 의미한다.
이제 새로운 통일방안과 통일정책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는
1980년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나타나게 된다. 완성된 형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이 그것이다.
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시기
62) 북한의 이러한 대민족회의 혹은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는 1948년 평양에서 있었던
‘연석회의’를 모델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상층 및 하층 통일전선의 형성의 일환이었
다.
63) 김일성, ‘제6차대회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1980, 10, 10),’ 국토통일원,『조선노동당대
회 자료집 4』(서울: 국토통일원,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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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내오고 그 밑에서 북과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
역자치를 실시하는 련방공화국을 창립하여 조국을 통일할 것”을 주장
하고 있다.64)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의 최고지도기구는 최고민족연합회
의가 되며, 연방상설위원회가 전반적인 사업을 관할한다. 그리고 각각
의 정부는 지역자치정부로서 기능하도록 되어 있다. 고려민주연방공화
국의 성격은 중립국가로서 어떠한 동맹이나 블록에도 소속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며, UN에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의 단일국호로 가입하도록
되어 있다.65) 이와 함께,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의 시정방침으로 10대 시
정방침을 주장하고 있다.66)
1980년대는 새로운 냉전의 시기였다.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레이
거니즘으로 대표되는 신냉전의 도래와 남한에서의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이은 신군부의 집권은 남북한의 대립과 갈등을 부추키는 외부적 조건
을 제공하였다. 또한, 반소 삼각동맹체로서 ‘한․미․일 삼각안보동맹
체제’의 구축과 강화는 한반도에 군사적 대결과 무력증강을 통한 핵전
쟁의 가능성이 한반도에 상존하게 됨을 뜻했다. 즉, 한반도는 전세계적
반공전선의 제1전초기지가 되었음을 뜻한다.67)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
의 정치적 안정과 강력한 반공정권의 수립은 미국에게 절대적으로 필
요한 요구였던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북한이 내놓은 새로운 통일방안
은 별다른 영향을 미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1980년대 후반의 신
데땅트의 분위기와 사회주의권의 변화는 노태우 정부로 하여금 적극적
인 대북정책을 추진하도록 만들었다. 북한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을 통해 위로부터의 대화전술과 아래에서의 통일전선전술을 사용
64) 김일성, 위의 글.
65) 김일성, 위의 글
66) 10대 시정방침으로는 1) 자주성의 견지와 자주적 정책의 실시, 2) 나라의 전지역에서 민
주주의 실시, 3) 남북간의 경제교류와 합작실시, 민족경제의 자립적 발전보장, 4) 과학․
문화․교육분야의 교류․협력, 5) 전국적 범위에서 교통․체신수단의 자유로운 이용 보
장, 6) 근로대중과 전체인민의 생활안정 도모, 복리의 계통적 증진, 7) 군사적 대치해소,
민족연합군 조직, 8) 해외동포의 민족적 권리와 이익 옹호, 9) 통일 이전의 대외관계의
올바른 처리, 지역정부의 제활동의 통일적 조절, 10) 평화애호적인 대외정책 실시 등이
다. 김일성, 위의 글.
67) 이 한, ‘권두논문: 남북한 통일정책의 기본논리,’ 이 한 엮음,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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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남한에서의 대중적 통일운동을 최대한 이용하고자 했다. 즉, 노
태우 정부와 당국자간 대화를 추진함과 동시에, 임수경의 방북과 문익
환의 방북 등 아래에서의 통일전선전술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
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이 발표된 뒤, 11월에는 이의 실현을 위한
북한 지역의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진행하고, 남한과 해외동포
들에게 연석회의 개최를 위한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68) 1982년 김일
성은 시정연설을 통해 통일은 자주적으로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는 미군을 철거하고 미국의 내정간섭을 끝장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전히, 통일의 중심문제는 자주의 원칙인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가장 공명정대한 통일방안으로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을 주장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북한은 통일방안의 모색보다는 새로
운 남북관계의 구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소련과 동
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북한에게 심각한 외교적 고립을 가져다주었으
며, 중국의 개혁․개방, 베트남의 도이모이 정책의 실시는 전통적인 우
방인 사회주의 형제나라들로부터의 지원과 국제적인 지지를 획득하는
데서 커다란 어려움을 노정시켰다. 더구나, 남한의 UN 가입에 대한 중
국의 암묵적 승인은 전통적으로 고수해오던 UN의 단일국호에 의한 가
입의 원칙을 포기하도록 하였다. 결국 1991년 9월 결국 남북한은 별개
의 국가로 UN에 가입하였으며, 이제 국제적으로 한반도에는 두 개의
국가가 정립되었다. 이와 발맞추어 북한은 세계탁구선수권 대회 단일
팀 출전, 세계 청소년 축구 단일팀 출전 등을 통해 국제적으로 하나의
국가임을 나타내고자 했다. 또한, 1991년 합의된 남북합의서를 통해
“쌍방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사이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
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라고 함으로써,
국제적인 분단을 내부적인 합의를 통해 하나의 민족, 국가임을 나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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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고 하였다.69)
또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도 수정할 뜻을 내비쳤다. 1989
년 방북한 문익환 목사와 허담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장 사이의 합의
에서 “통일은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진적으로 할 수 있다”고 선언
했다. 여기서 점진적 방식의 통일이 곧 ‘느슨한 연방’ 혹은 ‘단계적 연
방’이다. 그리고 91년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 외교권과 국방권을 일정
기간 지역정부에 위임하고 점차로 이를 중앙정부에 귀속시키는 단계적
인 연방제를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이를 공식화했다.70) 이
로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은 2단계에 걸친 단계적 연방으로
수정되게 된다.71) 북한으로서는 점차 어려워지는 외부적인 조건하에서
내부적인 합의를 조금 더 쉽게 하기 위한 일종의 양보였던 셈이다. 그
리고 이렇게 변화한 ‘낮은 단계의 연방’은 남한이 제안한 ‘국가연합’과
보다 많은 공통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의 북한의 통일정책은 다른 문제로 인해 주춤거리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북․미간의 핵갈등과 북한 경제의 파탄 그
리고 체제이완 현상에 직면하여 우선적으로 체제안보를 우려해야 했던
것이다. 더구나,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은 북한에게 역사상 최초로
권력의 계승문제를 제기했다. 비록, 김정일로의 권력승계가 30여 년 전
부터 준비되고, 1980년대부터는 사실상 김정일에 의해 북한이 통치되
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지난 사회주의 국가들이 보여주었던 승계시의
문제는 북한으로서도 우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72) 따라서, 북한으
로서는 1990년대의 중․후반기를 체제안보와 계승의 완결성을 보장하
는 것이 시급했던 것이다. 여기에, 독일, 예멘 등의 통일경험은 당시
김영삼 정권의 공공연한 ‘흡수통일’ 천명 등으로 북한으로서는 아예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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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차원의 대화의 창을 닫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남북대화는
닫히고, 미국과의 우선적인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소위, ‘통미봉남(通
美封南)’이 시작된 것이다. 1990년대 중․후반기는 70년대 이래 가장
최악의 남북관계로 기록될 만하다. 그리고 이를 해소하는 데는 김대중
정부가 등장하기까지 5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야 했다.
1980년 이후 북한의 통일정책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중
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전의 과도적 연방제라는 말 그대로의 과도기를
보내고, 완성된 형태의 연방제가 등장한 것이다. 북한에게 연방제는 남
북 사이의 체제의 상이함과 차이의 확대 등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었다. 그러나 연방제의 기본전제인 미군 철수와 내정 간섭의 배제 등
은 당시의 남한 정권의 상황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다른 한
편, 1980년대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남북 간의 대화와 대중적인
접촉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비록 일회성으로 그치기는 했지만, 조금씩
남북 간의 대화와 협상, 합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1991년에는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처음으로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
됨으로써 90년대 통일의 이정표를 마련한 시기였다. 북한으로서는 국
제적으로 두 개의 한국이 공식화되고,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외풍(外
風) 속에서 체제생존과 계승의 문제에 맞닥뜨렸던 시기였다. 이런 조건
에서 내부적인 합의를 통해 하나의 국가임을 어떻게 하든지 확인하려
고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남한의 통일정책과 맞물리면서
2000년에 와서 극적인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다. 지난 50년간 서로를
적대시했던 두 정상이 마주앉아 통일의 대원칙을 확인하고, 화합의 손
을 잡은 것이다. 이제 북한도 어느 정도의 내부체제를 정비한 채로 통
일정책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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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이끌어가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특히 제2항에서 합의한 ‘연합
과 낮은 단계의 연방’의 공통성을 지향하는 방향에서 통일방안을 마련
하기로 한 것은 획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6.15 공동선언’ 이후, 북
한은 통일의 원칙으로서 ‘자주’를 보다 더 구체화, 적극적으로 주장하
면서 ‘민족공조’을 내세우고 있다. 비록 1992년 김일성이 신년사를 통
해 ‘통일과정에서 유관국들의 협조가 중요함’을 역설했지만73), 자주의
원칙은 ‘6.15 공동선언’ 제1항에서도 합의한 바와 같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인 것이다.
북한의 민족공조론은 민족대단결론에 연원을 두고 있다. 김정일은
1998년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라
는 문헌을 통해 ‘민족대단결’을 주장하면서 발표한 ‘민족대단결 5대방
침’을 강조하였다.74) 이에 따르면, 과거 김일성이 제시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그대로 충실히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족공조론은
2000년 정상회담 당시 제 1항의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에서 사용된
이래, 2001년 신년사에서 ‘민족공조’라는 용어로 제시되었고, 2002년부
터는 ‘우리민족끼리’와 ‘민족공조’가 공식화되어 사용되었다.75) 북한의
이러한 민족공조론은 하나의 이념으로 자리매김 되면서 3대공조(2005
년 신년사설)로 발전하였다.76) 북한이 주장하는 민족공조론은 자주의
원칙에 입각한 민족대단결을 핵심으로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
관계를 민족공조와 외세공조로 구분하고 남한에 대하여 민족공조 우선
과 외세공조 우선의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대남 공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민족공조론은 남북관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순기능의
측면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민족공조를 통해 남북한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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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 군사, 경제, 사회문화적 협력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적 명분과 실
리를 획득할 수 있으며, 또한, 미국과 북한과의 핵갈등을 남북한의 관
계진전을 통해 일정하게 완화, 완충할 수 있는 여지를 낳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1990년대부터 변화하기 시작한 북한의 민족
주의에 대한 재해석과 긍정적 평가77)와 민족대단결론이 2000년 정상회
담 이후의 남북관계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나타난 것이 민족공조론이
라고 할 수 있다.
한편, ‘6.15 공동선언’ 이후, 북한의 대남 통일정책은 자주의 원칙에
입각한 민족공조와 실리주의적 대남 관계의 이중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민족공조를 통해 외세와의 공조 특히 한미관계의 재조정을 요구
하는 한편, 실리주의적 입장에서는 쌀과 비료의 지원과 민간 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교류․협력 사업을 강화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남북
한의 경제협력이 북미 핵갈등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꾸준히 발전하고
있으며, 금강산관광 및 개성공단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서 북한의
대남 정책도 경제적 실익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적극성을 띠고 있는 것
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공조와 실리의 이중적 전
략에서 우선적인 것은 정치, 군사적인 문제이며, 따라서 민족공조의 지
속적이 주장과 외세와의 공조에 대한 비판은 감소하지 않을 전망이다.
현재 북한은 남북간의 관계를 ‘과도적 공존’으로 규정하고 있다.78) 그
리고 현재의 남북관계를 보다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근본문제’를 해
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79) 2005년 북한 대표단이 국립 현충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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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과 참배, 2006년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 참배, 2007년 수유리 국립
묘지 참배 등의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의 이유도 근본문제
의 하나로 제기하고 있는 참관지 제한에 대한 북한의 선(先)행동의 하
나라고 해석된다.
앞으로 북한의 대남정책은 남한에 대한 3대 근본문제의 해결을 위한
압력과 ‘민족 대 외세’의 대립 구도에서 민족공조를 지속적으로 주장할
것이다. 2000년 정상회담이 북한에게 국제사회와의 교류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을 제공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공조를 핵심으로
하는 ‘주체적 민족론’의 강화의 기회도 제공하였다. 이는 남북한의 통
일문제에 대한 접점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며, 동시에 우리가
생각하는 ‘열린 자주’와 충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고민거리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응이 요구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역사적으로 북한의 대남 통일정책을 살펴본 대로, 북한의 대
남․통일 정책은 일원주의적 체제 통일의 논리에서 점차 연방주의적
통일로 진화해왔다. 남북한 사회의 이질성이 커가고, 국제적인 정세의
변화 속에서 북한도 나름대로 대남 통일정책을 변화시켜왔던 것이다.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은 1960년대의 과도적 조치에서 70년대 과도적
연방제로 그리고 80년대의 완성된 연방제로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북
한이 주장하고 있는 연방제 방안은 구체적인 각론에서는 아직까지 많
은 공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북한 연방제 방안의 큰 특징은 서로
다른 체제의 연방이라는 ‘미완의 실험’을 통한 민족 문제 해결에 있다
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북한의 대남 통일정책은 과거 변혁과 통일
의 논리에서 벗어나 민족문제로서 통일문제를 대하고 있는 특징을 보
이고 있다. 따라서 이념과 체제의 대결이 아닌 애국과 매국으로 선을
가르려 하는 것이 북한의 통일정책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민
족과 외세와의 대결구도를 형성하고자 해왔다. 이러한 북한의 대남 통
일정책의 특징은 김정일이 1998년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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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석회의 50돐 기념 중앙연구토론회’에 보낸 서한 ‘온 민족이 대단결하
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남한의 집권자, 여당, 야당, 군장성, 대자본가와도 민족대단
결의 기치 하에 단결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80)
지난 6.15 공동선언 이후 북한의 통일환경과 통일정책 역시 일정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과거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을 통해 남한을 배
제하던 데에서 벗어나 남한과의 합작과 화해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미
이산가족 상봉, 장관급 회담, 경제협력회의, 국방장관 회담을 통해 진
행되고 있다. 한편, 북한은 1997년 신년공동사설에서 언급한 ‘조국통일
3대헌장’을 양보할 수 없는 통일원칙으로 내세우고 있다.81) 그러나 그
동안 항상 언급해오던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서 김정
일이 전향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좀 더 쉬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82) 앞으로 북한은 자주와 실리의 원칙에서 외교 및 대남 통일
정책을 전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남한과의 여러 형태의 회
담과 협상을 진행시킬 것이며, 이를 통해 한편으로는 민족공조를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실리를 취하고자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 역시
그에 대한 준비와 대응 정책을 마련해야 하는 쉽지 않은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북간의 협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3. 북한의 협상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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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충하는 이익을 조절, 혹은 공통된 이익의 획득을 위해 추진하는 하
나의 상호작용이라고 정의된다.83) 북한 역시 협상을 “국가들 사이의
분쟁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적용하는 외교적 방법
또는 회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84) 이렇게 본다면, 북한 역시 평화적
방법에 따른 회담이나 외교적 방법으로 협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
서 큰 차별성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대외정책이 반제투쟁과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면, 협상은 이러한 대외이
념을 실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인식된다.85) 김일성의 언급에 따르면,
“대화건 협상이건 우리는 적을 날카롭게 공격해서 적을 궁지에 몰아넣
는 혁명의 적극적인 지류적 공격형태로 생각해야 됩니다”라고 하여 협
상은 또 따른 혁명투쟁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86) 이처럼 북한은 협
상을 ‘당사자들의 공동의 이익을 찾아내는 과정으로 보지 않고 상대방
을 제압하는 공작이나 조작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파악’하
는 경향이 강하다.87)
그러나 최근 들어 북한의 협상태도는 여러 측면에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의 협상을 연구한 스나이더에 따르면 과거
에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선전적인 면이 강했으나, 최근에는 실질적인
관계개선을 추진하고 있다고 바라본다. 또한, 과거의 벼랑끝 전술 등이
최근에는 경제적인 문제를 다루는 협상에서는 줄어들고 있다고 분석하
고 있다.88) 지금까지 남북협상은 상대방의 이익은 나의 손실이며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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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손실이 나의 이익이라는 제로섬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89)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최근의 북한 협상행태는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북한은 약소국으로서 미국 등과의 대외협상에서 더 많은 집중
력을 발휘하고 더 많은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90) 이러한 측면
에서 본다면, 북한은 미국 및 남한과의 협상에서 더 많은 성과를 얻어
내기 위한 주의력과 강한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긍정적 수단과 부정적 수단을 적절히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북한의 협상전술이 익숙히
않은 서구인들의 눈에는 과거의 냉전시절과 동일하게 보일 있을 것이
다. 그러나 협상에서 긍․부정의 수단들은 전술적으로 빈번하게 사용
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것을 북한만의 협상전술로 인식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전통적인 북한의 협상태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
여준다. 우선, 전략적 측면에서 경쟁전략과 무행동전략이 주축을 이루
고 있다. 즉, 북한이 일방적인 이익만을 추구하여 남한과의 협력과 타
협을 부정함으로써 선택하게 되는 전략이다. 냉전 시절 남북한의 극단
적인 대립의 과정에서 어느 일방의 이익이 곧 타방의 손실이 되는 것
은 양측이 서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는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기보다는 상대방을 부정하고, 상
대방과의 협상을 아예 봉쇄하는 것이 유효한 전략이 될 것이다. 둘째,
협상목적과 협상 의제 사이에 불일치를 내포한다. 즉, 북한은 협상을
통해 남한이 획득할 수 있는 협상이득을 거부하며, 북한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셋째, 남북한 사이에 불균형 협상을 추구한다. 넷째,
의사(pseudo-)협상과 불균형협상을 운용하기 위해 협상의제의 정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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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성을 제고하는 특별한 전략적 형태를 보였다. 마지막으로 협상의
제와 목적의 차이에 따른 의사협상 수행을 통해 협상과정에서 시기별
로 사용되는 전술의 성격을 달리한다.91)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협상
태도는 최근에 들어와서 일정하게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협상인식에서 남북협상을 더 이상 군사력의 대안으로 이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며, 협상을 문제해결 혹은 실익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사
용하고 있다.92) 이러한 북한의 태도는 과거 의사 협상이 진의 협상으
로 변화고 있음을 말해준다.
다른 한편, 북한은 협상에서 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하여 양
면게임의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즉, 서방이 만들어 놓은 가공된 사실
- 외교부는 대외협상파이며, 군부는 강경파 - 을 교묘히 활용하여, 외교
부와 군부 사이의 노선갈등이 있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역할분담을 하
고, 이를 통해 협상에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는 것이다.93)
김용호는 북한의 협상 전술을 단계별로 분석하여 그 특징을 밝혔는
데,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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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들의 제안을 먼저 논의하기를 요구하는 경향이 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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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6> 북한의 대남 협상 행태 변화 추세
구분 냉전시기 냉전 종식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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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에 의하면, 북한의 협상은 냉전 시대와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먼저 협상태도에서 과거의 공세적인 접근에서 벗어
나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데서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
는 곧 탈냉전 이후 북한의 외교적 고립과 남북한을 둘러싼 환경의 변
화, 그리고 1990년대 이후의 북한의 체제 위기에 따른 대응에서 그 이
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북한의 협상행태에서 특징적인 것의 하나는 협상을 둘러
싼 문화적 측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이다. 스티브 린튼에 따르면,
북한은 독특한 고유문화로 인하여 인간관계, 체면 등을 중시하며 오래
동안 주변 강국들의 거만스러운 행동에 모욕을 당해왔기 때문에 상대
방이 보이는 존경스러운 제스처나 예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
다.94) 이러한 특징은 협상에 나서는 북한의 협상가들이 보이는 태도에
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로 인해 북한과의 협상에서 서구의
협상가들이 적잖이 당황해하는 일이 초기에 빈번하게 나타나기도 한
다.
지금까지 남북한은 여러 차례의 협상을 진행시켜 왔다. 이를 현장에
서 지켜본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의 평가에 따르면, 과거와 달리 1990
년대 이후의 협상은 때에 따라서는 부정적 협상전술도 배합 사용하였
으나 주로 공동이익을 추구한 긍정적 협상이었다고 평가된다.95) 북한
이 지난 고위급 회담에서 보여준 협상태도와 전술을 특징적으로 추려
보면 먼저 양보와 절충의 유화전술, 단계적 대안제시 전술, 자존심과
체면의 중시, 공통․유사한 것만 합의하자는 전술, 일괄타결 동시집행
원칙, 회담 형식의 신축적 운용 전술, 비공식 접촉 활용 전술 등이
다.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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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협상전술과 태도는 다만 북한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
니다. 우리는 단지 북한의 협상전술은 벼랑끝, 시간끌기, 억지부리기,
합의 불이행 등의 부정적인 언어로만 평가해왔다. 그러나 북한의 협상
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원칙을 끝까지 고집하고 관철시키고자 하는 의
지가 무척 강함을 느낄 수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약소국의 경우 하나
의 중요 협상은 단순한 국가의 이익이 아닌 국가의 최고의 이익을 성
취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된다.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보여준 협상 태도는 약소국이 강대국과 맞서 협상에서 주의력, 집중력
을 얼마나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관철하는가를 보여준 대표적인 협상
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남한과의 협상은 비교적 대등한 입장에서의
협상이지만, 이 역시도 분단과 국제적 고립의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하
지 않으면 안 되는 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북한이 6자회담
에서 보여준 협상 태도를 분석한 이기동은 북한이 오히려 이 기간 동
안 많은 유연성을 보여줬다고 평가하고 있다. 더 이상 벼랑끝 협상이
가능하지 않다는 여러 가지 객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양보와 유연성
은 오히려 북한의 몫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97) 지금까지 남북한 간에
는 1970년대 초부터 시작하여 2000년대 초까지 공식, 비공식 회담이
약 370차례가 있었다고 한다.98) 회담의 형식과 내용도 실무회담에서부
터 시작하여 장관급, 총리급, 정상회담까지 격상되었다. 앞으로도 남북
한은 많은 회담을 앞두고 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북한의 협상 전
술을 운용하는 협상가들과의 접촉과 만남도 그 만큼 더많아질 것이다.
북한의 협상전술과 태도, 그리고 이를 운용하는 협상가들에 대한 연구
가 보다 더 필요해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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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북한의 협상가들과 협상기구
1. 북한의 대남 협상기구
99) 1998년 헌법
100) 1980년대 후반부터 대남 담당 비서를 역임했던 김용순은 2003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까지 그를 대신하는 대남담당 비서는 공석이지만, 남
북 행사때에는 김기남 비서가 참가하여 그의 역할을 일정부분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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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화의 북측 대표들은 대체로 대남 사업 관련 인물이라고 보아도 무
방하다. 북한에서 대남 사업을 관장하는 곳은 일명 ‘3호 청사’라 불리
는 곳이다. 3호 청사란 북한의 대남정책과 사업의 총본산으로 불리는
노동당 별관을 이르는 말이다. 평양 모란봉 구역 전승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사에는 대남 사업만 수행하는 통일전선부, 작전부, 대외연락
부가 소속되어 있다. 이중 통일전선부는 대남 사업 기구 중 가장 방대
하며, 중요한 기구로 김용순 대남 사업 담당 비서가 부장을 맡고 있다
가 사망 후, 2007년 3월부터 노동당 국제부장과 국방위원회 참사를 역
임한 김양건 부장이 새로 임명됐다.101)
통일전선부는 해외교포나 동포들의 포섭공작, 한국내 민간단체들을
대상으로 한 통일전선 구축, 크고 작은 대남 제의, 남북대화, 교류 등
의 업무를 맡고 있는 곳으로 한국내 주요 인사들의 방북도 이 부서가
관장하고 있다. 통일전선부 소속의 인사들은 주로 아세아․태평양 평
화위원회의 직함이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직함을 가지고 남북대화에
나오고 있다. 2000 남북정상회담 이후 장관급 회담 수석대표로 나온
전금진(전금철: 아태 부위원장)이나 남북 정상회담 합의 당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의 파트너였던 송호경(아태 부위원장)을 비롯해 각종
남북대화에 모습을 드러낸 이종혁(아태 부위원장), 박영수(조평통 부국
장), 안병수(본명 안경호: 조평통 부위원장) 등도 통일전선부 부부장급
의 인사들이다.
통일전선부의 조직을 보면 우선 통전부 본부의 모든 기능과 역할을
함축시킨 일명 ‘어머니 연락소’로 불리는 조국평화통일서기국(조평통)
이 있다. 기본적으로 통일외교의 합법성을 주장하며 막후에서 대남전
략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조직이다. 주로 회담과 관련한 연구와 실행,
인물 파악, 정보수집 등을 전담한다. 통전부의 간부는 대부분 조평통
성원들이 추천되며 대우도 매우 좋은 것으로 전해진다. 통전부에는 정
101) 김양건 부장은 1980년대부터 노동당 국제부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1997년 당 국제
부장을 지내다, 2000년 4월 노동당 부장, 2005년 국방위원회 참사로 활동하고 있다. 2007
년 3월에 사망한 김용순의 뒤를 이어 통일전선부 부장을 역임하고 있다.
- 47 -
책과, 회담과, 교류과, 간부과, 연고자과, 재일총련과 등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 밖에도 통전부 교류1과 소속으로 조평통 산하에는 전교조, 민주노
총, 범민련, 통일연대 등의 남한 단체 담당과들이 존재한다. 교류1과는
1998년부터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라는 대외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단군민족통일협의회’라는 대외명칭을 사용하는 교류2과에는 북한의 종
교단체들이 주로 구성돼 있다. 민족의 시조인 단군이념 아래에는 오직
민족만이 있으며, 종교를 떠나 민족애로 뭉쳐 통일조국을 건설하자는
것이 이 조직 명칭의 의미다. 이들 교류2과 소속 각 종교조직은 남북
경제교류와 인물 포섭을 기본 목적으로 한다. 대외적으로는 불교, 기독
교 등의 이름을 허용하지만 대내적으로는 1국, 2국으로 명명된다.
북한에서 가장 큰 남한자료 도서관을 갖추고 있는 조국통일연구원(구
남조선문제연구소)도 통일전선부 산하 기관이다. 조국통일연구원은 한
국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 군사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남한 정세분석 보고서와 각종 백서를 작성한다. 한국 경제의 시장조사,
주가분석, 인플레 현황 등을 체크해 향후 예측까지 전망하는 경제보고
서의 경우, 매주 한 번씩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고되는 것으로 전
해진다. 한국 각 분야의 대표적인 인물들에 대한 분석보고서도 매주
한 번씩 김 위원장에게 보고된다. 대부분 평생직으로 신분을 보장받는
연구원들의 업무는 매우 세분화돼 있는데, 사회문화부서에는 ‘조선일
보’만 30년 동안 분석한 연구원도 있다고 한다. 이 연구원들은 대부분
남한의 신문·잡지를 참고하거나 별도의 첩보를 토대로 보고서 요지를
작성한다.
대외연락부는 과거 사회문화부를 축소하면서 명칭이 바뀐 것으로 간
첩 및 공작원 남파, 공작원 밀봉교육, 한국내 고정간첩 관리, 한국내
지하당 구축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1992년 대선 당시 남한조선노동당
의 이선실이나 15대 대선 직전의 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 등이 모두
대외연락부 소속이라고 한다. 현재 대외연락부는 통일전선부 제1부부
- 48 -
장을 역임한 강주일(강관주) 부장이 맡고 있다.
작전부는 공작장비, 무기개발 및 대남침투요원의 안내와 호송, 요인
저격, 납치 등의 임무를 맡고 있으며 유사시 한국의 후방교란과 전략
무기 습격 등의 임무도 수행한다. 작전부는 소속 요원의 훈련과 인무
수행을 위해 북한 각지에 6개의 연락소를 두고 있으며 청진, 원산, 남
포, 해주 등 4개 해상연락소와 개성, 사리원에 2개의 육상 연락소를 두
고 있다. 작전부장은 오극렬 전 총참모장이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
고 있다.
옛 대외정보조사부의 후신인 35실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대남 기
구이다. 35호실은 3호 청사와 떨어져서 평양시내 중심지인 창광거리
본청사에 위치하고 있다. 35호실은 테러 및 대남, 해외정보를 수집하고
해외인사를 포섭, 매수해 한국내에 투입시키는 등 대남 우회침투활동
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 해외간첩공작, 국제, 대남 테러공작 등도 이
부서의 주요 임무라고 한다. 1987년의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최은희-신
상옥 부부 납치사건 등이 이 부서의 주요 활동이었으며, 교수간첩 깐
수도 35호실 소속으로 전해진다. 현재 35호실의 실장은 공석이고 허명
욱 부실장이 대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북한의 대남기구는 방대하게 구축되어 있으나, 공식적으로 공
개된 적은 거의 없다. 이러한 대남 기구의 요원이나 인사들은 북한이
공개적으로 드러낸 단체의 소속직함을 가지고 활동을 한다. 이러한 대
표적인 공개단체가 바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조선아세아․태평양 평
화위원회, 민족화해협의회 등이다.
- 49 -
<그림 2> 북한의 대남기구 조직도
대남담당비서
조 해 육
재
평 연 상 상
조 정 회 교 간 일
통 고 연 연
국 책 담 류 부 총
서 자 락 락
통 과 과 과 과 련
기 과 소 소
일 과
국
연
구
원
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 50 -
기 때문이다. 조평통의 위원장, 부위원장에는 주요 간부를 임명하고 있
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조선노동당의 통일문제 및 남북대화와 관련한
입장을 대변 또는 옹호하고, 한국 각계각층 인사 및 해외인사들을 대
상으로 연방제 통일 실현투쟁을 고취한다. 또한 한국 내 주요 사건 또
는 새로운 정책 제시 때마다 ‘조평통 서기국 보도’ 등을 발표하여(1977
년 2월부터) 이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대변인 성명 또는 담화 등 문건
을 통해 반정부 선전 및 여론을 조성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노동당의 대남협상기구인 통일전선부가 남북 대화에 직접 참여
하거나 국내 각계각층 인사 및 해외교포들에 대한 통일투쟁 선동 업무
등을 공개적으로 수행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업무를 조평
통의 명의로 수행하는 것이다. 조평통은 주로 통일전선부 회담과의 지
도를 받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조평통은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보다 더 강경한 대남자세
를 보이고 있다. 이는 최고인민회의가 앞장서기 곤란한 부분에 대해서
조평통이 앞장서서 보도나 성명을 통해 대남 정책을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상회담이 개최되기 전 남한의 국정원 해체나 국정원의 남
북대화에 대한 개입을 비난한 것도 조평통이었다(2000년 3월 16일 조
평통 서기국 보도).
조평통의 조직은 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상무위원회와 서기국을 두
고 있으며 중앙위 산하에 조직부, 선전부, 회담부, 조사연구부, 총무부,
자료종합실, 기요부(비밀부) 등의 부서를 두고 있다. 위원장과 부위원장
등의 간부는 대부분이 당 정치국원, 당비서,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겸하고 있는 당, 고위간부들로서 위원장은 허담 위원장 사망 이후 공
석으로 돼 있다.
현재 부위원장으로는 안경호, 양형섭(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
위원장), 오익제(1997.8 월북) 등 10여명으로 구성되어있다. 서기국장은
한시해가 맡고 있다가 1998년 안병수(본명 안경호)로 교체됐다. 조평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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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구 구성은 다음과 같다.
중 앙 위 원 회
상 무 위 원 회
서 기 국
참 사 실
조 자
조 선 회 사 료 총 기
직 전 담 연 종 무 요
부 부 부 구 합 부 부
부 실
나)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 52 -
정책 기구로 1994년 5월에 설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기구가 처음으
로 외부에 알려진 것은 1994년 7월 김용순(당시 통일전선사업 담당 비
서 겸 아태평화위위원장)이 방북중인 일본의 국제문제연구소 소장 나
카마루 가오루와 만난 사실을 전하면서부터이다. 이때 중앙방송은 김
용순을 아태평화위 위원장으로 호칭했었다. 이를 통해 처음으로 이 기
구의 존재가 외부로 알려졌다.
이 기구는 노동당 대남부서인 통일전선부 산하의 기구로서 미국, 일
본 등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창구역할과 함께, 남북교류를
조정 및 통제하고, 유력 외국인사에 대한 방북 요청 및 해외 학술회의
참가 등을 통해 북한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이후 아태평화위는 1995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평양국제체육문화축
전’을 주관했고, 일본과 1995년 쌀지원문제를 논의했다. 리틀엔젤스 공
연(1998년 5월)과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방북(1998년 6월) 초청 및
금강산 관광사업 등도 주관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도 깊숙이 관
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아태평화위는 2000년대에 들어와 대남 경제협력 사업에도 관여하여
이를 종합․조정하는 등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즉, 북한 각종 대남경
협사업 추진 여부를 일차적으로 판단, 북한의 관련 기구에 분배하는
권한까지 행사하고 있다. 이것은 통전부 정책과가 남북경제교류나 회
담의 유무를 감안해 아태평화위 명의로 사업범위와 내용을 조절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아태평화위의 조직은 대남․대외로 지역을 양분하고 정치, 경제, 사
회, 문화 등의 분야별 부서를 두고 운영되고 있으며 위원장은 현재 공
석이고, 부위원장은 이종혁, 전금철(전금진), 최승철 등이 활동하고 있
다.
- 53 -
다) 민족화해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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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또한 1999년 10월 13일 열린 ‘제3차 전원회의’에서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남․북․해외 3자연대 공동투쟁 대책을 논의하면서 남한
의 국가보안법 완전 철폐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이후
2000년 8월 28일 열린 ‘제4차 전원회의’에서는 6.15 공동선언을 지지하
는 남한 단체들과 공동보조를 취하여 민족화해와 통일분위기를 조성하
는데 이바지할 것을 결의하였다.
민화협이 남쪽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남북공동행사가 정기적
으로 열리기 시작한 2001년 이후이다. 민화협은 2001년 ‘6․15 민족통
일대토론회’(금강산), ‘8․15 남북 공동 행사’(8.15-16, 평양) 등 대규모
남북 공동행사를 주관하였다. 2002년부터는 서울, 인천과 평양을 오가
며 열린 6․15남북공동행사, 8․15남북공동행사를 남한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와 함께 개최하였다.
2005년의 ‘조용필 평양공연’(8.23)을 비롯한 각종 방북 공연, 남쪽 언
론사의 대북사업, 〈아리랑〉공연 참관사업,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우
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등 여러 대북지원단체와 사업을 진행하고 있
는 것도 역시 민화협이다. .
민화협의 활발한 교류와 활동에도 불구하고 민화협의 세부 조직편제
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다만 남북공동행사나 남북간 접촉에 나온 민
화협 간부들의 직책을 통해 어렴풋이 유추해 볼 수 있다.
현재 드러난 직제는 <회장 - 부회장 - 상무위원 - 중앙위원 - 실장 -
부장 - 부부장 - 과장 - 책임부원 - 부원>으로 조직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외에도 민화협 내에는 사무소장, 부소장, 사무소 부원 직제가 있는
데, 사무소장이 어느 정도 직급에 해당하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
고 있다.
회장은 1998년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김영대 사회민주당 위원장이
맡고 있고, 부회장은 5-7명으로 가변적이다. 현재 조충한, 주진구, 정덕
기, 이충복, 박경철 등이 부회장 직함으로 활동하고 있고, 상무위원으
로는 김경남, 황봉국 등이 활동하고 있다. 중앙위원으로는 민족대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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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한웅희 책임주필, 김지선 등이 최근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초
기 민화협 부회장단에는 김령성, 강연학, 김완수, 최승철 등의 이름이
올라 있지만 주로 다른 직책에서 활동하며 민화협에서 일하고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민화협 부회장들은 대부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국장직을 겸직하고 있다. 민족화해협의회에서 활동하는 간부
들은 대부분 통전부 교류1와 교류 2과 소속으로 전해진다.
민화협의 실장, 부소장급 이상은 대부분 2005년 출범한 6․15남북공
동위원회(6․15민족공동위원회로 개칭) 북측위원회에도 소속돼 있다.
민화협 내에는 담당업무가 다른 몇 개의 부로 나눠져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정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종교, 언론, NGO, 정당․사회단체
등이다. 그래서 대규모 남쪽대표단이 방북하면 대표단 구성원에 따라
각 담당 부장, 과장, 부원들이 나온다. 민화협 성원의 전체 규모는 베
일에 가려 있다.
라) 민족경제협력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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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협의 공식 발족과 함께 북한은 남한의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
률’(1990년 제정)에 해당하는 ‘북남경제협력법’을 제정했다. 총 27조로
구성된 이 법은 △전 민족적 이익 △균형적 민족경제발전 △상호 존중
및 신뢰 △유무상통(有無相通․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융통한다) 등
을 남북경제협력의 원칙으로 제시했다.
특히 이 법은 남북경협에 대한 ‘중앙민족경제협력지도기관’의 임무를
분명히 하고 있는데, 여기서 언급한 ‘중앙민족경제협력지도기관’이 바
로 민경협인 것으로 파악된다.
2004년에 이미 조직돼 활동하고 있는 기구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회가 정식 발족을 발표한 것은 이 기구가 정부의 공식기구로 승격된
것을 의미한다. 남한이 중국에 이어 북한의 두 번째 교역 상대로 발전
했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이 활성화되면서 남쪽과 경협을 전담할
중앙정부 차원의 기구가 필요하게 된 셈이다.
총교역액 111 173 187 195 287 252 308 222 333 425 403 642 724 697 1055 1349
* 출처: 통일부, ‘통계자료’(http://www.unikorea.go.kr)
- 57 -
련으로 단일화되면서 혼선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대남 경협사
업은 민경련이 주도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민경련으로 단일화된 창구를 통해 남북 경제협력 사업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였다. 즉,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경제
협력추진위원회가 가동되고, 금강산관광지구에 이어 개성공업지구가
열리면서 남북 당국간 협의가 이전보다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남한과
의 순수 민간급 경제교류협력을 전담하는 기구인 민경련으로는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고, 전체적으로 남북 경협을 재검토하고, 이에 맞
는 새로운 체계를 세울 필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4년 여름 북한은 대남경협라인을 대대적으로 다
시 짜는 작업에 착수했다. 내각 산하에 민간 경제협력 뿐만 아니라 당
국간 협의까지를 포괄적으로 담당하는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방침이 정
해졌고, 1년간의 준비 끝에 민경협이 공식 출범하게 되었다.
2005년 10월 1일 평양 양각도 국제호텔에서 남한 기업인을 대상으로
열린 투자간담회에서 민경협과 민경련의 차이에 대해 민경련 김춘근
부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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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하던 김성일 부국장이 부위원장으로 임명됐
다. 또 민경련 김춘근 서기국장이 민경련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민경
협 부위원장직도 겸직하고 있다.
민경련 산하에 있는 4개의 회사는 광명성총회사 여서현 총사장, 개선
총회사 손경철 총사장, 새별총회사 김용학 사장, 삼천리 총회사 김일호
사장 등으로 짜여졌고, 서기국에서 이름이 바뀐 정책국장에는 방강수
가 임명됐다. 방강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남북경제협력추진위에 북
한측 대표로 매번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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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되었다. 이후 1990년대에도 회담이 진행되었
으나 소련 및 동구권의 대변화와 북-미간 핵갈등 그리고 김영삼 정부
에 의한 흡수통일의 노골화 등으로 회담은 지그재그 형태를 보여왔다.
남북한 협상에서 획기적인 전환이 된 계기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었다. 남북 정상회담은 ‘6.15 공동선언’을 만들어내었고, 후속 협상을
명문화함으로써 남북간의 화해․협력을 위한 제도화된 협상틀을 형성
하였다.103)
정상회담 이후에 진행된 회담의 숫자만 보아도, 그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점을 볼 수 있다. 우선, 회담의 격이 장관급 회담 등으로 격상
되었고, 회담의 횟수도 그 이전과 비교하여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또
한, 회담 분야도 확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북회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70년대부터의 회담의 분야와 횟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문화 인도 경제 군사 정치 계
2007 3 5 9 2 4 23
2006 5 4 8 3 3 23
2005 10 3 11 4 6 34
2004 2 7 13 2 1 25
2003 5 8 17 7 1 38
2002 4 10 14 3 2 33
2001 2 2 3 1 8
2000 18 4 3 2 27
1999 8 8
1998 4 1 5
1997 7 4 11
103) 6.15 공동선언은 제5항에서 ‘북과 남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안에 당국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라고 합의하고 있다. 이에
따라 6.15 공동선언의 실현을 위한 남북 장관급 회담이 정례화 되어있다.
- 60 -
1996 0
1995 3 3
1994 10 10
1993 4 4
1992 80 8 88
1991 12 7 19
1990 15 2 7 24
1989 7 8 9 24
1988 8 8
1987 1 1
1986 2 2
1985 2 4 6 1 13
1984 1 2 3 6
1983 0
1982 0
1981 0
1980 10 10
1979 3 4 7
1978 0
1977 5 5
1976 6 6
1975 2 8 10
1974 6 12 18
1973 7 4 11
1972 4 32 36
1971 1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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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에서 특징적인 것은 1970년대 초, 그리고 80년대말 - 90년대
초,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의 회담이 상당히 많은 횟수를 기록하고 있
다는 점이다. 이는 1970년대 초의 ‘7.4 남북 공동성명’의 발표를 전후한
시기의 남북 회담과 91년 ‘기본합의서’를 전후한 시기, 그리고 2000년
‘6.15 공동선언’을 전후한 시기에 회담이 집중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또 다른 특징은 사회 문화분야의 회담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주로 문화예술 및 체육 등의 교류가 비교적 일찍
부터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마지막으로 2000년대 이후에 와서는 사
회문화, 인도적 분야, 경제, 군사, 정치 회담이 병행되어 진행되고 있다
는 점이다. 이는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한 관계가 모든 분야에서 활
발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2000년대 이후의 회담이 전체
558차례의 회담 중 211건을 차지함으로써 약 38% 가량을 차지하고 있
다. 이는 정상회담 이후 남북한 관계가 그 이전과 비교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고, 당국자 및 민간 차원의 회담이 수시로 열리고 있
음을 말해준다.
2000년대 들어 남북간의 주요 회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04)
104) 1998년 국민의 정부 이후 남북간 접촉이나 회담을 보면 98년 5회, 99년 8회, 2000년 27
회, 2001년 8회, 2002년 33회, 2003년 38회, 2004년 25회, 2005년 34회, 2006년 23회, 그리
고 2007년 6월 30일까지 20회 등으로 정상회담 이후, 매년 수 십 차례의 다양한 회담이
열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북회담사무국.
- 62 -
제4차:1.31
(서울)
(판문점 평화의 집) 1.29-31
제6차:11.9-14 제1차:2.7-10(평양)
제5차:2.8 (금강산)
(금강산)
(판문점 통일각)
제4차:
9.6-8
(금강산)
<군사실무회담> <남북경추위>
제7차:8.12-14 <적십자회담실
제6차:9.14 제2차:8.27-30(서울)
(서울) 무접촉>
2002 (판문점 평화의 집) 제3차:11.6-9(평양)
제8차:10.19-22 제1차:
제7차:9.17 <남북경협제도실무협의회>
(평양) 10.31-11.2
(판문점 통일각) 제1차:12.11-13(서울)
(금강산)
제2차:12.15-17
(금강산)
<남북경추위>
제4차:2.11-14(서울)
제9차:1.21-24
<군사실무회담> 제5차:5.19-23(평양)
(서울)
제8차:9.17 제6차:8.26-28(서울)
제10차:4.27-29 제5차:11.4-6
2003 (통일각) 제7차:11.5-8(평양)
(평양) (금강산)
제9차:12.23 <남북경협제도실무협의회>
제11차:7.9-12
(평화의 집) 제2차:7.29-31(개성)
(서울)
제3차:10.11-12(문산)
제4차:12.17-20(평양)
<장성급군사회담>
제1차:5.26
(금강산)
제2차:6.3-4
(설악산)
<장성급군사회담실무 <남북경추위>
제13차:2.3-6(서울)
2004 대표접촉> 제8차:3.2-5(서울)
제14차:5.4-7(평양)
제1차:6.10-12 제9차:6.2-5(평양)
(개성)
제2차:6.29-30
(파주)
수석대표접촉:7.5
(개성)
제15차:6.21-24
<장성급군사회담실무
(서울)
대표회담>
제16차:9.13-16 <남북경추위> 제6차:
제3차:7.20
2005 (평양) 제10차:7.9-12(서울) 8.23-25
(평화의 집)
제17차:12.13-16 제11차:10.28(개성) (금강산)
제4차:8.12
(서울)
(통일각)
<남북차관급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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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19(개성)
<장성급군사회담>
제18차:4.21-24
제3차:3.2-3 제7차:
(평양) <남북경추위>
2006 (통일각) 2.21-23
제19차:7.11-13 제12차:6.3-6(제주)
제4차:5.16-18 (금강산)
(부산)
(자유의 집)
제20차:2.27-3.2
<장성급군사회담>
(평양) <남북경추위>
2007 제5차:5.8-11
제21차:5.29-6.1 제13차:4.18-22(평양)
(통일각)
(서울)
* 위의 표에서는 군사실무회담, 적십자실무접촉, 개성공단, 체육회담 등 여타의 회
담은 제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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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군사실무회담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북한은 국방장관 회담을
요구하는 우리의 요구에 대해 장성급 회담이나 실무회담으로 대응하고
있다. 국방관련 회담은 대체로 서해상의 경계선 문제(NLL문제), 군사충
돌 방지 문제, 경의선-동해선 연결에 따른 군사보장 조치의 문제 등으
로 한정되고 있다.
셋째로, 경제협력추진위원회는 장관급 회담에서 합의한 사항이나 혹
은 남북한의 경제협력에 관한 제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양측에서
차관급이 수석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경제협력추진위원회는 장관급 회
담에 부속된 회담이지만, 사실상 남북한의 경제협력을 실무적으로 총
괄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적십자회담은 이산가족 상봉 문제나 인도적 지원 문제
그리고 금강산 면회소 설치 등의 주로 인도적 사안을 중심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
남북 회담의 장소는 장관급 회담의 서울과 평양을 번갈아 가며 열리
고 있으며, 제주도나 부산 등에서 개최되기도 한다. 국방관련 회담은
대체로 판문점에서 통일각과 자유의 집 혹은 평화의 집에서 번갈아 개
최되며, 제1차 국방장관 회담은 제주도에서 개최되었다. 남북회담은 대
체로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린다는 점에서 대등한 입장에서 회담이
라는 성격을 보여주고 있지만, 적십자회담은 금강산에서 회담이 진행
되고 있다. 경제관련 회담 중의 경추위 회담을 제외하면, 개성에서 회
담이 열리는 횟수가 많아지고 있다.
회담에 참여하는 인물들을 보면 장관급 회담은 통일부 장관과 내각
참사가, 국방관련 회담은 국방장관과 인민무력부장 혹은 남북의 장성
급이 참여하고 있으며, 경추위 회담은 남북 모두 차관급 인사들이 협
상에 나서고 있다. 다만, 경추위 회담의 경우 남한에서는 재경부 차관
이 수석대표로 나서고 있으나, 북한에서는 초기에는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수석대표로 참여하다가 이후에는 건설건재공업성 부상
이, 그리고 최근에는 민족경제협력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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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회담이 대체로 대등한 입장에서의 회담이라는 면을 고려하면, 수
석대표의 위상은 대체로 균형적이라고 할 수 있다.106)
3. 북한의 협상가들
가) 남북장관급회담
106) 다만, 남북의 권력구조의 차이와 북한의 내각과 군의 분리 등으로 그 권한과 역할에서
는 서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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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북한내 직함은 노동당 통일전
선부 부부장이며 대외용 직함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
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내각 책임참사 등이다.
그는 1934년 함경북도 웅기에서 빈동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문대대로
농사를 지어왔고 부모님을 일자무식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 후, 그는
수학 물리를 전공해 장차 교수가 되고 싶었으나 스승의 권고로 김일성
종합대학 법학부에 입학을 했다. 대학에 입학하자 그의 부친은 너무
기쁜 나머지 온 동네방네를 다니며 아들 자랑을 했다고 한다. 대학 졸
업 후, 노동당 중앙당에 들어간 그는 1959년부터 62년까지 적십자 중
앙위원회 간부로 배치돼 재일동포 귀국사업을 담당했고, 1961년 조국
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에 지도원으로 파견돼 사업하기 시작하다고
1969년 정식으로 조평통 위원이 되었다.
그는 1972년 11월 김영주 조직부장(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부
위원장)이 북한측 위원장을 맡았던 남북조절위원회의 북한 대변인 및
간사로 활약하면서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0년에는 통일전
선부 부부장으로 승진하면서 대외적으로 조평통 부위원장 직함을 가졌
으며 지난 1985년 7월에는 남북 국회회담 제1, 2차 예비접촉 북한측
대표단장으로 임명돼 판문점 회담에 참가했다. 그는 대남사업에 기여
한 공로로 1992년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82년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2003년에 8월의 제11기까지 대의원으로 선출
되었다.
그는 1995년 6월 21일 15만t의 대북 쌀무상 지원을 위한 남북협상에
참석했고 한달 후인 6월 30일 대북 쌀수송선 '씨 아펙스'호 인공기 강
제 게양사건 때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어 1995년 7월과 9월에 있
은 제2, 3차 남북 베이징회담 때도 북한측 대표로 활동하는 등 남북간
의 각종 협상에서 수석대표로 활약했다.
특히 그는 1998년 4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남북 당국대표 회
담 때는 정무원(지금의 내각) 책임참사 직함을 갖고 북한측 수석대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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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했다. 이 회담 결렬이후 한동안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자 비료회
담의 결렬에 대한 책임을 졌거나 중병에 걸린 것 아니냐는 등 각종 설
이 나돌았다. 그러나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때 김대
중 대통령을 백화원 영빈관에 안내하고 환영만찬과 순안공항 환송식에
참석해 건재를 과시했다. 현재는 몸이 좋지 않아 요양 중으로 내외활
동을 하지 않고 있다.
그가 각종 남북대화의 간판으로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실
무에 능하고, 협상전략과 관련한 각종 전술기획에 뛰어났기 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단히 논리적이고, 신중한 성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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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제시대 때 머슴을 살았던 부모에게서 1945년 ‘해방둥이’로 태
어나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으며 두 아이의 아버지이
다. 그는 마치 잘생긴 북의 공훈배우 같은 외모로 눈길을 끌었다. 훤칠
한 키에 전문 성우 뺨치는 목소리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아주 논
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정성들여 듣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특히 그는 대남문제를 오랜동안 분석해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
측근인 것으로 확인되었고, 남조선문제연구소(현재 조국통일연구원)에
서 남한정세 분석을 오랫동안 담당했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직
접 보고되는 ‘1호문건’ 작성자였다고 한다. 당시 그는 통일전선부 부부
장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제1부국장과 민족화해협의회 부회
장을 맡아 활동했다.
장관급회담 대표로 처음 온 김령성 단장은, 네 차례 회담에서 북한측
대표단장을 맡았던 전금진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었다. 30여년간 남
북대화에 관여해 온 전금진 전 단장이 차가운 인상의 노련한 ‘협상가’
라면, 김 단장은 ‘친근하고 편안한 상대’로 느껴졌다는 것이 당시 회
담에 참가했던 통일부 당국자의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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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업에 깊숙이 관여해왔다. 김일성대 총학생회장 자격으로 '권민'이
라는 가명을 사용해 1996년 미국 버클리 대에서 열린 '한반도평화통일
심포지엄'에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
현재 그는 통일전선부 회담과 과장으로 북한 내부에서는 김정일 국
방위원장의 의중을 정확히 읽는 몇 안 되는 간부로 평가받고 있는 것
으로 전해진다. 그는 구김살 없는 표정에, 세련된 매너까지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김영성 대표보다는 전금진 대표쪽에 가까운,
조금은 까다로운 인상을 주고 있다.
나)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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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민경련 회장을 겸직하고 있는 민경협 정운업 위원장은 2000년
9월 25일부터 이틀간 서울에서 경제협력 제도적 장치 마련을 위해 열
리는 남북 실무접촉에 북한측 단장으로 참석하면서부터 남쪽에 얼굴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1992년 7월 남북경협 논의 차 서울을
방문한 김달현 내각 부총리를 수행해 처음 서울을 방문했지만, 1998년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이 판문점을 통해 방북할 때, 송호경 조선아시아
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함께 영접나올 때만해도 다소 생소한 인
물이었다.
그는 1963년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후 노동당 재정경리부 지도원으로
들어간 후 여러 부서에서 주로 재정담당사업을 맡아오다 무역성으로
자리를 옮긴 후, 1992년 정무원 대외경제위원회 산하의 삼천리총회사
총사장, 1995년 개선무역총회사 위원장, 광명성경제연합회 회장을 거쳐
1998년 민경련 회장이 됐다.
다) 국방장관회담․군 장성급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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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국방장관회담은 2000년 9월 25일에 조성태 국방부장관과 김일
철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인민무력부장을 수석대표로 제주도에
서 분단 후 최초로 개최됐다.
남한은 이 회담의 기조연설을 통해 한반도의 실질적 긴장완화와 평
화구축을 위해 군사직통전화 개설과 대규모 부대이동 및 군사훈련 상
호참관, 경의선 비무장지대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군사실무위원회 구
성 등을 논의하기 위해 남북국방장관회담을 정례화하자고 제안하였다.
북한은 6·15 남북수뇌부의 공동선언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남북 사이
에 제기된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을 비롯한 군사적 제반문제를 논의하
자고 하였다.
제1차 회담의 합의문은 공동보도문으로 대신하였는데, 양측 수석대표
의 이름과 사인이 들어 있지 않은 형태이다. 공동보도문의 합의 사항
은 기조연설과는 달리 한반도에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긴
요한 문제라는 것과, 2차 회담을 2000년 11월 중순에 북한에서 열기로
합의하였다지만 무산됐다.
남북장성급회담은 남북의 군사당국자 회담으로, 남북간에 실질적인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을 위한 회담이다. 2004년 2월 제13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남북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한 쌍방
군사당국자회담 조속 개최”에 합의하였으며, 5월에 열린 제14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제1차 남북장성급군사회담 개최에 재합의했다. 이후
남측의 장성급군사회담 개최 요청에 북측이 동의하고, 남북 연락장교
접촉을 실시하여 2004년 5월26일 북측 금강산초대소에서 제1차 남북장
성급군사회담이 개최되었다. 남측에서 수석대표인 박정화 합동참모본
부 작전차장(해군 준장) 등 군 관계자 4명과 통일부 배광복 회담1과장
이, 북측에서는 수석대표인 안익산 인민무력부 정책국장(해군 소장·남
측 준장에 해당) 등 군 관계자 5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2004년 6월3~4일 설악산 켄싱턴스타 호텔에서 제2차 남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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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군사회담이 개최되었으며, 남북은 이 회담에서 향후 서해상의 우
발 충돌을 방지하고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선전 활동을 중지하는 내용
의 합의서를 채택했다.
남북국방장관회담이나 장성급회담에 나오는 북측대표들은 인민무력
부 정책국이나 판문점대표부에 소속돼 있다. 이들의 자세한 경력은 알
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남북대화에 나오는 북한 군대표단은 독자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통전부가 그리는 대남협상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다.
라) 6자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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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널리 알져진 것은 1990년대 초 1차 북핵위기를 계기로 구성된
‘핵상무조’다. 당시 강석주 외무부 제1부부장(현재 외무성 제1부상)을
책임자로 하고, 외교부 국제기구국과 조약법규국, 미국담당국(16국) 등
의 부서들과 인민무력부 등 관련기관 전문가들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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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 5차 6자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지난 3월(2007년)에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힐과 역사적인 북미 직접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
다. 힐 차관보는 2006년 12월 2단계 6자회담을 마친 후 김계관 부상에
대해 ‘그는 베테랑 협상가’이며 ‘핵문제에 대해 많은 경험을 갖고 있
다’라고 말했다.
그는 ‘매사에 침착하고 세심한 성품’, ‘온순하고 차분하며 좀처럼 화
를 내지 않는 성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와 협상경험이 있는 미국 외교관들은 ‘김 부상이 상당히 논리적이
고 설득력이 있는 데다 감정이 상한 모습을 쉽게 보이지 않는 등 외교
관으로서의 자질도 훌륭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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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고, 졸업 뒤 바로 외교부에 들어갔다.
그는 1993년 9월 유엔주재 북한대표부에 공사로 부임하면서 미국과의
대화에 나섰고, 이후 3년 8개월 동안 재임하면서 북한의 대미접촉 창
구 구실을 했다. 특히 1994년 북핵위기 때는 유엔대표부 공사로서 토
머스 허바드 당시 미국 국무부 차관보와 북미협상 일정을 조정하는 창
구 역할을 했다.
특히 이 시기는 제네바 핵협상, 미군 헬리콥터 입북 사건, 4자회담
등 긴박한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했던 때이다. 1997년 5월 평양으로 돌
아갔던 그가 다시 뉴욕에 부임한 것도 최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북미관계를 풀어보려는 북한 당국의 의중이 담긴 인사로 풀이된다.
특히 그는 2003년 10월 24일 북한 유엔대표부를 방문한 스트로브
미 국무부 한국과장과 만나 조지 부시 대통령이 표명한 `안전보장 문
서화' 방안에 대해 실무협의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차석대
사는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문서를 상정하고 있는지, 북한이
핵포기에 응할 경우 어느 단계에서 문서화에 응할 것인가, 문서는 6자
회담 틀 안에서 어떻게 교환되는가 등에 대해 미국의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북미간 열린 채널인 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활동
이 아닐 수 없다.
이외에도 지난 2000년 2-3월 북한 경제사절단을 인솔하고 미국을 방
문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관계자들을 만나 세계은행 가입의
사를 밝히는 등 북한 외무성에서 몇 안 되는 미국통으로 활동하고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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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 못하였다. 북한의 군부 관련 인물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데에 원
인이 있다.
북한과의 협상은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북한의 협상가들과의 끈질긴
‘말싸움’ 혹은 ‘말대 말’의 경쟁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냉전 이후,
그리고 정상회담 이후, 과거와 같은 제로섬 적인 협상 인식이 상당부
분 사라지고 공존과 공영의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지만, 아직도 이
러한 경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국가간 협상은 국가 이익과 직접 관련된 문제이다. 북한의 협상가들
은 북한의 국가 이익의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전문성을 갖추고 있으며,
자본주의 세계의 협상가들과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앞
서 살펴본 것처럼, 장관급 회담이나 경제관련 회담, 6자회담 등에서도
관련 분야에서 오랫동안 경력을 쌓거나, 연구를 해온 수석대표, 대표단
이 구성되고 운영이 되고 있다. 이들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을
경우, 북한의 협상 전략과 이를 운영하는 협상가들의 관계 및 총체적
인 틀을 인식하지 못하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북한이 보여주는 협
상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자신들의 원칙을 중도에 쉽게 변화시키거
나,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정한 유연성을 발휘하기는 하지
만 원칙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협상가들의 입을 통해 다
양하게 표출한다. 우리가 북한의 협상가들을 제대로 연구하고 대비해
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북한의 외교, 대남 정책 및 협상 전략, 전술
의 분석과 더불어 협상가들까지도 알아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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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북한의 협상가들의 특징과 앞으로의 전망
남한 북한
수석대표 박재규(통일부 장관) 수석대표 전금진(내각 책임참사)
1차 장관급 회담 대표 엄낙용(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김영신(문화성 부상)
(2000.7.29 - 31 김순규(문화관광부 차관) 유영선(교육성 국장)
서울) 김종환(국방부 정책보좌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서영교(통일부 국장) 량태현(내각사무국 성원)
수석대표 박재규(통일부 장관) 수석대표 전금진(내각 책임참사)
2차 장관급 회담
대표 이정재(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김영신(문화성 부상)
(2000.8.29 -
김순규(문화관광부 차관) 유영선(교육성 국장)
9.1
김종환(국방부 정책보좌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평양)
서영교(통일부 국장) 량태현(내각사무국 성원)
수석대표 박재규(통일부 장관) 수석대표 전금진(내각 책임참사)
3차 장관급 회담 대표 이정재(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김영신(문화성 부상)
(2000.9.27 - 30 김순규(문화관광부 차관) 유영선(교육성 국장)
제주도) 김형기(통일부 제1정책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서영교(통일부 국장) 량태현(내각사무국 성원)
수석대표 박재규(통일부 장관) 수석대표 전금진(내각 책임참사)
4차 장관급 회담
대표 이정재(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김영신(문화성 부상)
(2000.12.12 -
김순규(문화관광부 차관) 유영선(교육성 국장)
16
김형기(통일부 제1정책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평양)
서영교(통일부 국장) 량태현(내각사무국 성원)
수석대표 홍순영(통일부 장관) 수석대표 김령성(내각 책임참사)
5차 장관급 회담 대표 김진표(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조성발(내각 사무국 참사)
(2001.9.15 - 18 윤형규(문화관광부 차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장)
허수림(민족경제협력련합회 총
서울) 이봉조(통일부 실장) 사장 겸 무역성 처장)
서영교(통일부 국장) 김만길(문화성 국장)
6차 장관급 회담 수석대표 홍순영(통일부 장관) 수석대표 김령성(내각 책임참사)
(2001.11.09 - 대표 김진표(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조성발(내각 사무국 참사)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장)
14 윤형규(문화관광부 차관)
허수림 (민족 경제협 력련합 회
금강산) 이봉조(통일부 실장) 총사장 겸 무역성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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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교(통일부 국장) 김만길(문화성 국장)
수석대표 정세현(통일부 장관) 수석대표 김령성(내각책임참사)
7차 장관급 회담 대표 윤진식(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조성발(내각사무국 참사)
(2002.8.12 - 14 박문석(문화관광부 차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장)
서울) 이봉조(통일부 통일정책실장) 김춘근(민경련 서기장)
서영교(통일부 국장) 김만길(문화성 국장)
수석대표 정세현(통일부 장관) 수석대표 김령성(내각책임참사)
8차 장관급 회담
대표 윤진식(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조성발(내각사무국 참사)
(2002.10.19 -
박문석(문화관광부 차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장)
22
이봉조(통일부 통일정책실장) 김춘근(민경련 서기장)
평양)
서영교(통일부 국장) 김만길(문화성 국장)
수석대표 김령성(내각책임참사)
수석대표 정세현(통일부 장관)
대표 조성발(내각사무국 참사)
9차 장관급 회담 대표 윤진식(재정경제부 차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장)
(2003.1.21 - 24 박문석(문화관광부 차관)
허수림(민경련 총사장 겸
서울) 이봉조(통일부 통일정책실장)
무역성 차장)
서영교(통일부 국장)
김만길(문화성 국장)
수석대표 김령성(내각책임참사)
수석대표 정세현(통일부장관)
10차 장관급 대표 조성발(내각사무국 참사)
대표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회담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장)
오지철(문화관광부 차관)
(2003.4.27 - 29 허수림(민경련 총사장 겸
신언상(통일부 통일정책실장)
평양) 무역성 차장)
서영교(통일부 국장)
김만길(문화성 국장)
수석대표 김령성(내각책임참사)
11차 장관급 수석대표 정세현(통일부장관)
대표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조성발(내각사무국 참사)
회담
오지철(문화관광부 차관)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장)
(2003.7.9 -
신언상(통일부 통일정책실장) 허수림(민경련 총사장 겸
7.12
무역성 차장)
서울) 서영교(통일부 국장)
김만길(문화성 국장)
수석대표 김령성(내각책임참사)
12차 장관급 수석대표 정세현(통일부장관)
대표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최성익(조평통 서기국 부장)
회담
허수림(민경련 총사장 겸
(2003.10.14 - 오지철(문화관광부 차관)
무역성 차장)
17 신언상(통일부 통일정책실장)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평양) 서영교(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수석대표 정세현(통일부장관) 수석대표 김령성(내각책임참사)
13차 장관급
대표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신병철(내각참사)
회담
오지철(문화관광부 차관) 김춘근(민경련 서기장)
(2004.2.3 - 6
신언상(통일부 통일정책실장)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서울)
서영교(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14차 장관급 수석대표 정세현(통일부장관) 수석대표 권호웅(내각책임참사)
회담 대표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대표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2004.5.4 - 7 오지철(문화관광부 차관) 신병철(내각참사)
- 79 -
신언상(통일부 통일정책실장) 김춘근(민경련 서기장)
평양)
서영교(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수석대표 정동영(통일부장관) 수석대표 권호웅(내각책임참사)
15차 장관급
대표 박병원(재경부 차관) 대표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회담
배종신(문화부 차관) 김만길(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2005.6.21-24
김천식(통일부 국장) 신병철(내각참사)
서울)
한기범(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수석대표 정동영(통일부장관) 수석대표 권호웅(내각책임참사)
16차 장관급
대표 박병원(재경부 차관) 대표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회담
배종신(문화부 차관) 맹경일(조평통 서기국 부장)
(2005.9.13 - 16
김천식(통일부 국장) 신병철(내각참사)
평양)
한기범(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17차 장관급 수석대표 정동영(통일부장관) 수석대표 권호웅(내각책임참사)
회담 대표 박병원(재경부 차관) 대표 최영건(건설건재공업성 부상)
(2005.12.13 - 배종신(문화부 차관) 맹경일(조평통 서기국 부장)
16 김천식(통일부 국장) 신병철(내각참사)
제주도) 한기범(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수석대표 이종석(통일부장관) 수석대표 권호웅(내각책임참사)
18차 장관급
대표 박병원(재경부 차관) 대표 주동찬(민경협 부위원장)
회담
유진룡(문광부 차관) 맹경일(아태위 참사)
(2006.4.21 - 24
이관세(통일부 실장) 박진식(내각참사)
평양)
한기범(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수석대표 이종석(통일부장관) 수석대표 권호웅(내각책임참사)
19차 장관급
대표 박병원(재경부 차관) 대표 주동찬(민경협 부위원장)
회담
유진룡(문광부 차관) 박진식(내각참사)
(2006.7.11 - 13
이관세(통일부 실장) 맹경일(조평통서기국 부국장)
부산)
유형호(통일부 국장)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수석대표 이재정(통일부장관)
20차 장관급 수석대표 권호웅(내각책임참사)
대표 진동수(재경부 차관)
회담 대표 주동찬(민경협 부위원장)
박양우(문광부 차관)
(2007.2.27 - 박진식(내각참사)
이관세(통일부 실장)
3.2 맹경일(조평통서기국부국장)
유형호(통일부 국장)
평양) 전종수(조평통 서기국 부장)
- 80 -
<표 11>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대표단 명단
남한 북한
위원장 박창련(국가계획위원회 제1부
위원장 이정재(재정경제부 차관)
위원장)
1차 경추위회담 위원 조명균(통일부 국장)
위원 오광홍(철기석탄공업소 부상)
(2000.12.28-30 김창세(건설교통부 국장)
박효영(국토환경보호성 국장)
평양) 양성호(건설교통부 국장)
함기석(철도성 국장)
김해종(국무총리실 심의관)
최현구(삼천리총회사 총사장)
위원장 박창련(국가계획위원회 제1부
위원장 윤진식(재정경제부 차관) 위원장)
2차 경추위회담 위원 조명균(통일부 국장) 위원 박정성(철도성 대외철도협조
(2000.8.27 김창세(건설교통부 국장) 국장)
-30 서울) 양성호(건설교통부 국장) 박성희(석탄공업성 부국장 )
김해종(국무총리실 심의관) 최현구(삼천리총회사 총사장)
조현주(민경련 참사)
위원장 박창련(국가계획위원회 제1부
위원장 윤진식(재정경제부 차관) 위원장)
3차 경추위회담
위원 조명균(통일부 국장) 위원 박정성
(2002.11.6
강교식(건설교통부 국장) (철도성 대외철도협조국장)
-11.9
김창세(건설교통부 국장) 최현구(광명성지도국 처장)
평양)
김해종(국무총리실 심의관) 박성희(석탄공업성 부국장 )
조현주(민화협 부장)
위원장 박창련
위원장 윤진식(재정경제부 차관)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위원장)
4차 경추위회담 위원 조명균(통일부 국장) 위원 박정성
(2003.2.11 김창세(건설교통부 국장) (철도성 대외철도협조국장)
-2.14 서울) 강교식(건설교통부 국장) 박성희(석탄공업성 부국장 )
김해종(국무총리실심의관) 최현구(삼천리총회사 사장)
조현주(민경련 참사)
위원장 박창련
위원장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위원장)
5차 경추위회담 위원 조명균(통일부 국장)
위원 박정성(철도성 대외협력국장)
(2003.5.19 김창세(건설교통부 국장)
최현구(삼천리총회사 사장)
-5.23 평양) 강교식(건설교통부 국장)
김병칠(국토환경보호성 국장)
김해종(국무총리실심의관)
조현주(민경련 참사)
위원장 박창련
위원장 김광림(재정경제부 차관)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위원장)
6차 경추위회담 위원 조명균(통일부 국장)
위원 박정성(철도성 대외협력국장)
(2003.8.26-8.2 권도엽(건설교통부 국장)
박성희(석탄공업성 부국장 )
8 서울) 최영철(건설교통부 국장)
최현구(삼천리총회사 사장)
김호홍(국무총리실심의관)
김병칠(국토환경보호성 국장)
- 81 -
조현주(민경련 참사)
- 82 -
방강수
오정규(산업자원부 (민족경제협력위원회 국장)
무역투자진흥관) 리 영 호 (민 족 경 제협 력 위 원회
김경중(건설교통부 참사)
남북교통팀장) 리영석(국가계획위원회 국장)
성길영(통일부 국장) 박정성(철도성 대외철도협조
국장)
남한 북한
수석대표 김일철(인민무력부장)
수석대표 조성태(국방장관)
차석대표 박승원
제1차 국방장관회담 차석대표 김희상(국방부 중장)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2000.9.25 - 9.26 대표 김국헌(국방부 준장)
대표 김현준(인민무력부 소장)
제주도) 송민순(외교통상부 국장)
로승일(인민무력부 대좌)
이민영(합동참모본부 대령)
유영철(판문점 대표부 대좌)
남한 북한
수석대표 박정화(국방부 준장) 수석대표 안익산(인민무력부 소장)
제1차 장성급 대표 임인수(국방부 대령) 대표 유영철(인민무력부 대좌)
군사회담 배광복(통일부 과장) 김상남(인민무력부 대좌)
(2004.5.26 금강산) 문성묵(국방부 대령) 배경삼(인민무력부 상좌)
정영도(국방부 대령) 박기용(인민무력부 상좌)
수석대표 박정화(국방부 준장) 수석대표 안익산(인민무력부 소장)
제2차 장성급 대표 임인수(국방부 대령) 대표 유영철(인민무력부 대좌)
군사회담 배광복(통일부 과장) 김상남(인민무력부 대좌)
(2004.6.3 설악산) 문성묵(국방부 대령) 배경삼(인민무력부 상좌)
정영도(국방부 대령) 박기용(인민무력부 상좌)
수석대표 한민구(국방부 정책기획관) 수석대표 김영철(인민무력부 중장)
제3차 장성급
대표 문성묵(국방부 대령) 대표 리현성(인민무력부 대좌)
군사회담
심용창(통일부 과장) 오명철(인민무력부 대좌)
(2006.3.2 - 3.3
엄현성(국방부 대령) 배경삼(인민무력부 상좌)
판문점 통일각)
김형수(국방부 대령) 박기용(인민무력부 상좌)
제4차 장성급 수석대표 한민구(국방부 정책기획관) 수석대표 김영철(인민무력부 중장)
- 83 -
군사회담 대표 문성묵(국방부 대령) 대표 리현성(인민무력부 대좌)
(2006. 5.16 - 심용창(통일부 서기관) 오명철(인민무력부 대좌)
5.18 엄현성(국방부 대령) 배경삼(인민무력부 상좌)
판문점) 김형수(국방부 대령) 박기용(인민무력부 상좌)
수석대표 정승조(국방부 정책기획관)
수석대표 김영철(인민무력부 중장)
제5차 장성급 대표 문성묵(국방부북한정책팀장)
대표 박림수(인민무력부 대좌)
군사회담 길강섭(국방부 대령)
김응철(인민무력부 대좌)
(2007.5.8 - 5. 11 김왕경(국방부 대령)
리선권(인민무력부 상좌)
판문점) 심용창(통일부
박기용(인민무력부 상좌)
정치군사회담팀장)
수석대표 정승조(국방부 정책기획관)
대표 문성묵(국방부 수석대표 김영철(인민무력부 중장)
제6차 장성급
북한정책팀장) 대표 박림수(인민무력부 대좌)
군사회담
길강섭(국방부 대령) 오명철(인민무력부 대좌)
(2007.7.24 - 7.26
정진섭(국방부 대령) 리선권(인민무력부 상좌)
판문점)
심용창(통일부 박기용(인민무력부 상좌)
정치군사회담팀장)
남한 북한
- 84 -
리호림(북적 중앙위원회
대책본부 실행위원)
부서기장)
수석대표 서영훈(한적 총재) 수석대표 장재언(북적 중앙위원장)
제4차 적십자
대표 이병웅(한적 총재 특보) 대표 리금철(북적 중앙위원회위원)
회담
김경웅(한적 남북교류전문위원) 김일훈(북적 중앙위원회위원)
(2002.9.6
송우섭(한적 남북교류전문위원) 김학철(북적 중앙위원회위원)
- 9.8 금강산)
민병대(한적 남북교류국장) 리호림(북적중앙위원회부서기장)
- 85 -
(2004.6.21 (외통부 (외무성 (국무부 (외교부 알렉세예프 미토리
-26) 차관보) 부상) 차관보) 부부장) (외무부 차관) (외무성 국장)
크리스토퍼
1단계 송민순 김계관 우다웨이 알렉산드르 사사에
4 힐
(2005.7. (외통부 (외무성 (외교부 알렉세예프 겐이치로
차 (국무부
26-8.7) 차관보) 부상) 부부장) (외무부 차관) (외무성 국장)
6 차관보)
자 2단계 크리스토퍼
송민순 김계관 우다웨이 알렉산드르 사사에
회 (2005.9. 힐
(외통부 (외무성 (외교부 알렉세예프 겐이치로
담 13 (국무부
차관보) 부상) 부부장) (외무부 차관) (외무성 국장)
- 19) 차관보)
1단계 크리스토퍼
송민순 김계관 우다웨이 알렉산드르 사사에
(2005.1 힐
(외통부 (외무성 (외교부 알렉세예프 겐이치로
1.9 (국무부
차관보) 부상) 부부장) (외무부 차관) (외무성 국장)
- 11) 차관보)
5
차 2단계 천영우 크리스토퍼
김계관 우다웨이 알렉산드르 사사에
6 (2006.1 (한반도 힐
(외무성 (외교부 알렉세예프 겐이치로
자 2.18 평화교섭 (국무부
부상) 부부장) (외무부 차관) (외무성 국장)
회 - 22) 본부장) 차관보)
담
3단계 천영우 크리스토퍼
김계관 우다웨이 알렉산드르 사사에
(2007.2. (한반도 힐
(외무성 (외교부 로슈코프 겐이치로
8 평화교섭 (국무부
부상) 부부장) (외무부 차관) (외무성 국장)
- 13) 본부장) 차관보)
- 86 -
견할 수 있다. 이는 북한 대표단이 하나의 회담에 집중할 수 있는 유
리한 조건이자, 회담장에서 보다 익숙한 환경을 조성하고 회담에 임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약소국이 강대국과의 회
담에서 반드시 양보와 패배만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약소국일수
록 하나의 회담에 전력 집중하는 집중력이 보다 강할 수 있기 때문이
다. 위의 대표단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은 북한이 이러
한 집중력을 보다 더 강하게 가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앞서 보았던 남북 대화의 표면에 등장했
던 협상가들의 특징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북한 대남, 대외협상가들의 가장 큰 특징은 전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의 관료들이 정권교체나 조직 내
인사에 따라 변화되는 것에 비해 북한의 협상가들은 큰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경우 계속 협상에 나오게 된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조평통 간부로 활동하며 무려 30년 가까이 각종 대남협상에 나왔던 전
금진 조평통 부위원장이 대표적 사례이다.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대
외협상을 전담하고 있는 김계관 외무성 부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처럼 오랫동안 하나의 분야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그에 따른 전문성을
갖추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당 분야의 역사적 변동을 잘 알고 그
추세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됨을 의미한다. 북한의
대남․대외 협상가들의 경우 전문성과 경험을 갖춘 협상가들로 성장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이들은 체계적인 연구과 경험을 쌓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
고 있다. 통일전선부 회담과, 조평통의 서기국에서 활동하는 대남간부
들은 노동당에 부원으로 들어온 이후부터 현장체험과 과거 회담 분석
및 문헌 학습을 체계적으로 받는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남북장관급회
담을 이끌고 있는 권호웅 내각참사의 경우 1990년대 중반부터 남한과
의 각종 회담과 교류현장에 나와 현장경험을 쌓았다. 또 대부분의 조
평통 간부들은 1972년 남북공동성명 당시의 남북회담부터 시작해 최근
- 87 -
회담까지 모든 회담록과 동영상을 통해 회담기법을 학습한다. 또한 북
한의 체제 속성상 현안을 다루는 태스크포스의 구성과 해체가 쉽게 이
뤄지고, 일단 태스크포스가 구성되면 이 조직에 모든 실무적 권한이
주어진다.
다른 한편, 북한 외무성 안에도 참사실이 설치돼 협상가들의 전문성
을 높인다. 유사시 북한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각종 성명․담화 작
성이 모두 참사실의 몫이기 때문이다. 성명․담화 등은 사안에 따라
발표주체가 각기 다르게 나오고 있지만 작성기관은 예외없이 외무성
참사실이다. 종종 외무성 대변인이 조선중앙통신 기자의 질문에 대답
하는 형식으로 입장을 표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외무성에 대변인이 실
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기자와 회견을 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외무성 참사실이 작성한 자료를 조선중앙통신사에 보내 회견 형식으로
발표하는 것일 뿐이다.
외무성 참사실에는 책임참사 아래 외무성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
는 10여 명의 참사와 연구원들이 포진해 있어 그때그때 발생하는 현안
에 나름대로 발빠르게 대응한다. 김계관, 박길연 부상 등이 모두 참사
실을 거치면서 인정을 받은 간부들이다. 이들은 이렇게 연구, 학습, 훈
련, 경험을 거치면서 협상가로서의 자신들의 자질을 검증, 발휘하게 되
는 것이다.
다음으로, 부서별 경쟁과 협의구조가 체계적으로 조직돼 있음을 들
수 있다.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총괄적 지도 아래 조평통, 아태평화위원
회, 민화협, 민경협 등 다양한 대외명칭을 사용하며 부서별로 경쟁하면
서도 현안이 생기면 치열한 토론을 통해 합의된 안을 도출해 내는 것
이다. 특히 중대사안의 경우 각 부서별 주요 간부들이 단일한 안을 만
들 때까지 토론을 지속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중대한 사안일 경
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실무 부서들 간의 충분한 토론을 통해
합의된 안을 제출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정세인식, 의제,
협상방식, 협상대표 등이 결정되고, 일단 결정되면 이견이 없이 일사불
- 88 -
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북한 대남협상방식이고, 대표로 나온 협상가들
은 이 결정의 위임 범위 안에서 자율적으로 회담에 임한다. 따라서 우
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북한 대표단의 자율권은 이 범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자율적인 결정권한에 있어서는 제한을 받지만, 결정
된 사안의 범위안에서는 자율성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현안
에 대한 치열한 토론을 통해 단일한 안이 도출되기 때문에 현안에 대
한 대응이 늦게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대체로 이러한 협의과정
에서 합의 도출이 지연된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최근에
최근 북한의 신진협상가들은 과거 오랜 협상경험을 가진 고위급협상가
들보다는 융통성이 떨어지고 상황대처 능력도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으로, 북한의 협상가들이 2000년대 들어와 빠르게 세대교체가 이
뤄지고 있다. 사회 전반적인 세대교체와 더불어 협상가들의 경우도 세
대교체가 거의 다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대남 협상에서 세대교체의
출발점은 바로 2005년 남북 장관급회담의 북한측 수석대표로 40대 후
반의 권호웅 조평통 부국장이 발탁된 것이었다. 이후 장관급 대표단의
북한측 대표들은 전원 40대의 실무형으로 교체됐다.107) 이들은 이전세
대가 논리적이고 공세적이었던 반면에, 불필요한 논쟁 대신 협상전략
에 따라 움직이는 실무형 인사들이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북한
은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분야별 전문가를 협상 대표로 참여시켜
실리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최근 북한의 실리주의의 강
화현상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과거의 이데올
로기를 중시하고, 투사형의 협상가들보다는 실리주의의 강화속에서 실
리에 밝고, 이에 따라 대처할 수 있는 실리형 협상 태도를 보이고 있
는 것이다.
외무성의 대외협상가들도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 김계관 부상 등 부
- 89 -
상급 인사들은 대부분 60대로 구성돼 있지만 그 아래 실무국장, 부국
장들은 30-40대들로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활발한
세대교체가 이뤄진 만큼 과거의 선례로 볼 때 한동안 현재 등장한 협
상가들이 상당 기간 활동할 것으로 예상된다.
위와 같은 북한 협상가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전문성과 경험 그리고
경쟁과 협조의 구조 속에서 협상가들의 길러지고 실제 운영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 최근에는 세대교체와 함께 과거의 투사형의
협상가보다는 실리추구형의 협상가들이 보다 더 전면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즉, 북한이 현재 처한 조건에서 과거의 투사형의 협상가들보다는 실무
형, 실리형의 협상가들이 요구되고, 젊은 세대로 교체되고 있는 상황에
서 실무, 실리형의 협상가들이 앞으로의 북한 협상가의 특징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 90 -
V. 나가며 -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 91 -
첫째, 우리 협상가들 역시 전문적인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러한 전
문적인 역량은 단지 지식의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
하게는 북한에 대한 다양한 지식의 습득과 동시에 전문적인 분야에서
의 능력의 고양을 의미한다. 우리의 경우 장관급 회담 등에서 수석대
표는 대체로 대북 사업을 오랫동안 해왔던 인사라기보다는 정치권 인
사가 대부분이다. 이들의 경우 협상가라기보다는 정치가라고 할 수 있
으며, 이들의 대북 통일 정책에 대한 능력과 대북 협상력을 일거에 끌
어올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이러한 우리의 현실이
어쩔수 없는 것이라면, 대북 협상에 대한 오랜 경험과 북한에 대한 제
대로 된 정보와 능력을 갖춘 협상팀을 운영하는 것도 좋은 방안일 것
이다. 남북회담 사무국, 통일부, 국정원 등의 유관 기관 등의 지금까지
의 방식을 보다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이 요구된다.
둘째, 북한의 협상가들의 경우 오랫동안의 경험이 이들의 전문적인
분야에서의 능력을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경우 정
권 교체 등으로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협상가들이 자주 바뀌는 편
이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으로 전문분야에서 협
상에 임할 수 있는 구조적인 대책이 요구된다. 특히, 앞으로 여러 각
분야에서 남북 회담이 진행된다고 했을 때, 각 분야의 전문가 역량과
현재 대북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단체 및 인사들과의 상시적인 의사소
통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간접적인 경험과
이를 통한 협상력의 제고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학문적으로 협상학 등 협상에 관련한 여러 가지 기초적인 이론
과 실지 경험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정 - 관
- 학의 결합이 요구된다. 협상학은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중요한 학문적
요구이며, 남북관계에서도 갈수록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가능성이 큰
조건에서 매우 중요한 학문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학술적 대
응이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북한에 대한 협상가들의 면면을 올바로 파악하고, 그들
- 92 -
의 정보를 축적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어야 한다. 현재 북
한의 인물에 대한 분석은 대체로 각 개인들에 대한 프로파일 정도로
한정되어 있다. 즉, 개인들에 대한 이력서 수준이며, 그들의 직위 변동
과 관련한 사항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수준의 인물 데이터베이스는 사
실상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구체적이고 생생한 정보가 데이터베이스
화되어 축적되어야 할 것이다.
- 93 -
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국가 이익에 대한 신념, 그리고 타협과 투쟁을
병행할 수 있는 종합적 능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 역시 그에 맞는 협상가들을 키워내고, 관리하는 일을 조금도 소
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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