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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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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학위논문

이순신의 ‘별제귀선(別制龜船)’ 연구
-구조와 전술 중심으로-

A Study on Yi Sun-sin’s Byeolje Turtle Ship


-Focusing on Ship Structure and Tactics-

홍익대학교 대학원

영상학과

홍 순 구

2017년 8월
이순신의 ‘별제귀선(
別制龜船)’연구
-구조와 전술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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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교수 장 인 규

이 논문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2
017
년 8

홍익대학교 대학원

영상학과

홍 순 구
홍순구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인준함

홍익대학교 대학원
목 차

국문초록 ························································································································ ⅴ
표 목차 ·························································································································· ⅹ
그림 목차 ······················································································································ ⅹ

Ⅰ. 서 론 ············································································································ 1
1. 문제제기 ············································································································ 5
2. 연구문제 ············································································································ 8
3. 연구방법 및 범위 ···························································································· 11
4. 논문의 구성 ······································································································ 15
5. 선행연구의 조사 및 검토 ·············································································· 16

Ⅱ. 이론적 배경 ································································································ 19
1. 거북선에 관한 사료 ························································································ 19
1.1.『태종실록(太宗實錄)』 ········································································· 19
1.2.『난중일기(亂中日記)』 ········································································· 19
1.3.『임진장초(壬辰狀草)』 ········································································· 20
1.3.1. 제2차 당항포 등 네 곳의 승첩을 아뢰는 계본
[二度唐項浦等四處勝捷啓本]」 ···················································· 20
1.3.2. 해전과 육전에 관한 일을 자세히 아뢰는 계본
[條陳水陸戰事狀]」 ········································································ 21
1.4. 이분(李芬)의 행록 ················································································ 21
1.5.『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22
1.6.『징비록(懲毖錄)』 ················································································· 22
1.7.『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23

i
1.8. 이순신 종가 귀선도(龜船圖) ······························································ 27
2. 별제귀선의 도안과 모형복원 ········································································ 29
2.1. 도안 ··········································································································· 29
2.2. 모형 복원 ································································································· 35

Ⅲ. 거북선의 구조와 해석 ·············································································· 37


1. 선행연구의 거북선 구조와 해석 ·································································· 37
1.1. 노 젓기 방식에 의한 해석과 구조 ······················································· 37
1.2. 높이의 해석에 의한 구조 ······································································· 39
1.3. 전술의 해석에 의한 구조 ······································································· 45
1.4. 통제영 거북선 해석에 의한 구조 ························································· 51
1.5. 전라좌수영 거북선 해석에 의한 구조 ················································· 59
2. 이덕홍의 귀갑선도(龜甲船圖) ······································································ 68

Ⅳ. 이순신 ‘별제귀선’의 구조와 전술 분석 ················································ 77


1. 제원 ···················································································································· 77
1.1. 크기 ··········································································································· 77
1.2. 선형 ··········································································································· 81
1.3. 구조 ··········································································································· 84
1.4. 용머리 포혈 ····························································································· 89
1.5. 거북꼬리와 꼬리 밑의 포혈 ································································· 92
1.6. 개판의 포혈 ····························································································· 96
1.7. 현란, 방패의 구조 ·················································································· 98
1.8. 행선구조 ································································································· 106
1.3. 내부구조 ································································································· 112
1.3. 통풍과 채광 ··························································································· 114
2. 전술 및 운용 ································································································· 116
2.1. 별제귀선의 전술 ··················································································· 116
2.1. 전·후진 노 젓기와 화포의 사용 ······················································· 121

ii
Ⅴ. 조선시대 거북선 분석 ············································································ 122
1. 기본구조 및 유형 ························································································· 122
2. 별제귀선의 차별적 특징 ············································································· 125
3. 거북선의 변천 ······························································································· 126

Ⅵ. 결론 ············································································································ 129
1. 결론 및 연구결과 요약 ·············································································· 129
2. 연구의 한계 및 제언 ·················································································· 133

참고문헌 ··········································································································· 134

ABSTRACT ····································································································· 140

iii
국 문 초 록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는 정조의 왕명에 따라 1795년에 편찬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유고 전집으로 권수도설(卷首圖說)에는 통제영과 전
라좌수영 거북선의 목판화 그림과 694자의 설명문이 있어 임진왜란 이순신
거북선의 원형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된다. 그러나 두 거북선 그림의 설명문에
이 거북선은 1592년 임진왜란 이순신의 거북선이 아니고 1795년 『이충무공
전서』가 편찬될 당시의 거북선 그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이충무공전서』
에 임진왜란 200여년 후의 거북선을 넣었다는 것에 의아해 할 수 있지만 이
책을 편찬할 당시 내용에 넣을 이순신 거북선의 구조나 형태를 알 수 있는 그
림이나 치수의 기록이 계승되지 않았기 때문에 1795년 당시의 거북선을 그림
으로 넣은 것이고 그중에 통제영 거북선이 이순신의 거북선에서 유래되었고,
치수의 가감(加減)이 있으며,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1591년 이순신이 전라좌
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해 있었던 곳이 전라좌수영 이였기에 현재의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을 넣은 것으로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이순신의 거북선과 다르다고
기록되어있다.
임진왜란 해전에서 승리의 요인이었던 이순신 거북선은 대한민국을 세계적
으로 알릴 수 있는 문화유산이며, 거북선의 올바른 교육을 위해서 원형과 실
체를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1934년부터 거북선의 원형과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학술적 연구는 시작되
어 그동안 여러 학자들의 연구내용을 토대로 30여 미터 되는 거북선의 모형
이 1592년 임진왜란 이순신 거북선의 이름으로 2층 또는 3층 구조로 건조되
어 왔다. 그러나 복원된 거북선들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거북선 전
술을 설명할 수 없는 구조와 형태로 복원되었고, 이 거북선들은 원형이라는
근거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지 못하고 있어 거북선의 논쟁은 계속되어 왔다.

v
임진왜란 이순신 거북선의 구조나 형태를 알 수 있는 그림이나 치수는 전해
지지 않기 때문에 거북선 원형 연구는 임진왜란 200여년 후의 거북선인 『이
충무공전서』에 실려 있는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의 해석과 임진왜
란 관련 사료의 연구로 시작된다. 거북선은 해전에서 사용되는 전선(戰船)으
로 물리적인 구조와 형태를 갖는다. 따라서 연구결과는 구체적 형상의 시각화
된 결과물의 제시가 요구되지만 그동안의 거북선 연구는 문헌중심의 연구로
주장만 있고 구체적인 대안제시가 없어 거북선 원형연구에 한계가 있었다.
현재 복원된 거북선들의 구조와 형태가 임진왜란 해전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그동안 원형 연구는 『이충무공전서』의 두 거북선 그림의 해석에 한
정되어 왔고 고증되지 않은 연구결과를 거북선 복원의 설계 자료로 사용되었
다는 것을 선행연구 검토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이순신 거북선의 구조와 전술에 대해 구체적인 연구결과를 제시
하기 위해 사료의 시각화에 기반 해서 분석하였다. 거북선 그림으로는 통제영
과 전라좌수영 거북선, 이덕홍(李德弘)의 귀갑선도(龜甲船圖), 이순신 종가의
귀선도(龜船圖)를 3D 컴퓨터 그래픽 모델로 시각화시키고 시뮬레이션으로 사
료의 내용을 고증하는 연구방법을 적용하였다.
이덕홍의 귀갑선도는 우리나라 현존 최초의 거북선 그림이다. 1592년 이순
신이 거북선으로 해전에서 승리하고 있을 때 왕세자를 호종(扈從)했던 이덕홍
이 국란극복의 대책으로 귀갑선의 전법과 이로움을 왕세자에게 상소문으로 올
리고 1593년에는 왕에게 올린 상소문에 귀갑선의 구조를 그림으로 표현한 구
상도까지 첨부해 귀갑선 제작을 건의하였다. 이 구상도는 아주 단순하게 표현
된 구상도 수준의 표현이지만 거북선 전술의 설명문에는 왜적의 철저한 분석
과 거북선의 기본구조에 대한 당대의 지식이 모두 반영된 내용들을 담고 있어
3D 컴퓨터 그래픽 모델로 복원해 거북선의 기본구조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이
론적 근거를 도출할 수 있었다.

vi
거북선의 구조해석에서 층수를 나타내는 높이와 덮개인 개판(蓋板)의 구조
는 원형연구의 첫 번째 분석대상이다. 현재 사료에 기록된 거북선의 높이에
관한 치수는 『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거북선 설명문에 ‘현란에서 패란까지
의 높이는 4.3척(130cm)’이라는 치수만 있고 전체 높이는 기록에 없다.
거북선이 2층 구조인지 3층 구조인지의 논쟁은 4.3척의 해석에 따라 층수
가 달라진 결과였다. 거북선이 학술적으로 연구되면서 거북선 높이에 관한 주
장들은 분명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해 양립되어왔던 상황에서 본 연구
자는 2015년 4.3척 높이해석에 대한 구체적인 이론적 근거를 논문으로 제시
하였다. 방패높이가 4.3척으로 낮은 이유는 방패 밑에 위치하는 현란이 멍에
와 걸침턱맞춤으로 되어있어 기본적으로 높게 위치하고 또한 왜선과의 충돌로
부터 방패가 부서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방패의 높이를 낮게 하고 두꺼운
현란의 높이를 더 높여 선체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치수이었다.
2층 구조 거북선의 근거는 현란에서 패란까지의 높이 4.3척(130cm)을 2층
의 현측 높이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신장 160cm 정도의 수군이 서있기도 어
려운 낮은 높이로 인해 노군들이 현측에서 노를 젓기 위해서는 머리위로 공간
이 있어야 활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2층 천장인 개판을 둥근 구조로 덮어 2층
구조로 복원하였다. 결론적으로 현란-방패-패란이 고정되는 결구방법을 고려
하지 않고 4.3척의 치수를 2층 현측에 그대로 적용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2층 구조 거북선이 이순신 거북선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결정적인 근거는 통
제영 거북선의 용머리 포혈과 개판 좌우에 있는 포혈이다. 이순신은 용머리
포혈에서 현자포로 철환을 쏘았다고 기록하고 있어 용머리를 2층 전면에 고정
시켜야 하지만 2층 전면에는 닻과 닻 물래가 위치해 있어 용머리를 설치할 수
없고 높게 설치하면 화포를 사용할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개판에는 포
혈을 뚫어도 개판이 높아 화포를 배치할 수 없기 때문에 복원된 2층 구조 거
북선에는 개판에 포혈이 없는 것이다.

vii
이덕홍의 귀갑선이 2층 판옥 구조라는 것은 구상도와 전법의 설명에서 알
수 있다. 개판은 사다리꼴 구조로 쇠 송곳은 경사진 선수전면, 개판 상단, 경
사진 선미의 위치에 그려져 있는데 귀갑선도가 거북선 연구에서 중요하다는
것은 개판의 사다리꼴 구조와 쇠 송곳의 위치에 있다. 거북선 사료의 기록에
는 거북선 앞머리가 ‘뾰족하다’는 표현이 여러 문헌에 나타나는데 1596년
『선조실록』에 이순신 거북선은 ‘쇠못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다’는 기록이 있
고, 1748년 이언섭의 장계에 거북선의 ‘앞머리는 가파르고 뾰족하다’는 형태
를 묘사하고 있다. 1795년 통제영,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3D 컴퓨터 그래픽
모델 시뮬레이션에서도 개판은 사다리꼴 구조로 분석되어 모든 거북선의 기본
구조는 선수 전면이 뾰족한 사다리꼴 구조라는 것이 규명되었다.
거북선의 개판이 사다리꼴의 구조를 갖는 것은 속도와 안정된 복원력을 위
한 돌격선의 특징에 있다. 거북선은 적진 속을 파고들어 임무를 수행하기 때
문에 빠른 이동속도가 요구된다. 또한 방호를 위해 사방을 판자로 높게 막은
구조로 인해 행선할 때 공기의 저항이 크고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데
속도를 높이고 바람의 영향을 제어하기 위해서 거북선은 기본적인 구조로 가
파른 경사의 사다리꼴 구조를 개판에 적용했다.
개판이 전후좌우로 사다리꼴로 상단이 좁아진 구조는 개판의 무게를 줄여
안정된 복원력을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거북선의 전체구조는 상하가 대칭인
‘오뚝이’의 형상으로 거북선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1592년 이순신이 장계에 기록한 ‘용머리를 붙이고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였
다’는 별제귀선(別制龜船)은 3층 구조이며, 개판의 옆과 양머리에 쇠 송곳을
꽂은 사다리꼴 구조로 상하가 대칭인 전형적인 ‘오뚝이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
다.
1591년 이순신은 왜적이 침략을 것을 예상하고 강력한 신무기의 조총과 왜
적의 등선과 백병전, 대규모의 군선이 참전한다는 왜적의 실태를 파악하고 일

viii
당백의 돌격선 기능을 갖춘 거북선을 구상하였다. 선수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화포를 쏠 수 있고, 왜적이 배에 오르지 못하도록 개판에는 칼과 송곳
을 꽂았으며, 선미에는 거북꼬리를 만들어 붙이고 그 밑에도 화포를 설치하였
다. 선내에는 천자, 지자, 현자, 황자포로 무장하였으며, 외형은 신령한 현무의
형상을 거북선 구조에 적용하였다. 현무의 거북선 형상은 조선 수군에게는 막
강한 힘을 지닌 신구(神龜)로 용맹함을 주고 적군에게는 두려움과 위압감을
줄 수 있는 심리적 요소를 거북선의 구조에 적용했다는 것은 구조와 기능의
혁신이라 할 수 있다.
이순신의 별제귀선은 범노선으로 돛대를 눕히고 세우기 위한 개판 중앙에
위치한 1.5척 너비의 긴 통로는 돛과 돛대의 운용과 사방으로 막혀있는 선내
의 채광 및 통풍창의 기능으로 화포의 화약연기가 2층 천장의 중앙통로를 거
쳐 3층 개판의 긴 통로로 배출되는 다목적 용도의 과학적인 구조로 설계되었
다.
전술적인 혁신으로 이순신의 별제귀선은 전·후진 노 젓기가 가능하고, 낮은
2층의 위치에서 대전(大箭)과 탄환으로 왜선을 깨트릴 수 있도록 방패에는 장
방형의 패문과 포혈이 함께 있어 필요에 따라 선택이 가능한 구조였다.
용머리 포혈과 개판 좌우 현측에 위치한 12개의 화포, 꼬리 밑의 화포에서
는 철환을 쏴서 선상에 있는 적군의 조총을 한 번에 무력화 시키고 대량살상
이 가능한 돌격선이 별제귀선이었다.
현재 별제귀선의 학문적 연구는 매우 미흡하다. 별제귀선은 다양한 영역의
학문적 연구로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이 연구가 이순신 별제귀선의 실체를 밝
히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며 별제귀선이 승리의 그 바다에 재현될 수 있도
록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지속적인 연구가 있기를 기대한다.

주요어: 이순신, 별제귀선, 거북선, 임진왜란, 귀갑선

ix
표목차

<표 1> 연구방법 및 연구절차 ······························································································ 12


<표 2> 사료의 시각화분석을 위한 연구모형 ···································································· 14
<표 3> 이덕홍 귀갑선의 구조와 전법 ················································································ 79
<표 4> 이순신 별제귀선의 제원 ·························································································· 88
<표 5> 별제귀선 화포의 수 *실재 사용하는 포혈의 수 ·············································· 106
<표 6> 화포의 종류와 수 ···································································································· 107
<표 7> 사혈의 수 ·················································································································· 108
<표 8> 1592년 이순신 별제귀선과 1795년 통제영 거북선의 비교 ························· 130

그림목차

<그림 1> 통제영 거북선 ········································································································ 24


<그림 2> 전라좌수영 거북선 ································································································ 24
<그림 3> 이순신 종가의 귀선도1, 2 출처: 아산 현충사 ············································· 28
<그림 4> 해군창설 10주년 기념우표(1955년) ································································ 31
<그림 5> USNI뉴스에서 소개된 임진왜란 거북선 ·························································· 31
<그림 6> 충무공독본 (1955) ······························································································· 32
<그림 7> 성웅 이순신(1969) ······························································································· 32
<그림 8> 국보76호 난중일기(1969) ·················································································· 32
<그림 9> 충무공독본 (1971) ······························································································· 32
<그림 10> 국역 난중일기(1978) ························································································· 33
<그림 11> 성웅 이순신(1984) ····························································································· 33
<그림 12> 위인들의 어린 시절 이순신(1973) ································································· 33
<그림 13> 성웅 이순신(1969) ····························································································· 34
<그림 14> 국사 교과서 거북선 ···························································································· 34
<그림 15> 아산 현충사 거북선(1969) ··············································································· 35
<그림 16> 용산 전쟁기념관 거북선 ···················································································· 35
<그림 17> 1960년대 거북선 모형 ······················································································· 36
<그림 18> 해군사관학교 거북선(1980) ············································································· 36
<그림 19> 부분상갑판 3층 구조 거북선(2011) ······························································ 36
<그림 20> 언더우드 거북선의 좌측면도 ············································································ 37
<그림 21> 언더우드 거북선의 횡단면도 ············································································ 38

x
<그림 22> 장학근 거북선의 횡단면도(1995) ··································································· 38
<그림 23> 장학근 거북선의 측면도 ···················································································· 38
<그림 24> 4.3척 치수 해석에 의한 층수 높이와 개판의 구조 ···································· 40
<그림 25> 조성도의 이순신 별제귀선 복원도 ·································································· 41
<그림 26> 김재근의 거북선 중앙단면도 ············································································ 42
<그림 27> 김재근의 통제영 거북선 2층 구조 단면도 ···················································· 42
<그림 28> 이원식의 1795년 전라좌수영 거북선 구조도 ··············································· 43
<그림 29> 이원식의 통제영 거북선 횡단면도 ·································································· 44
<그림 30> 이원식의 임진왜란 거북선 복원 우측면도 ···················································· 44
<그림 31> 남천우의 통제영 거북선 복원도 ······································································ 46
<그림 32> 남천우의 통제영거북선 복원도 ········································································ 46
<그림 33> 장학근의 3층 구조 단면도 ················································································ 48
<그림 34> 정진술의 3층 구조 복원도 ·············································································· 49
<그림 35> 부분상갑판 3층 구조 거북선의 특징 ······························································ 50
<그림 36> 부분상갑판 3층 구조 내부 출처: 경남 사천 ················································ 50
<그림 37> 표현의 오류부분 ·································································································· 52
<그림 38> 3D 모델재현 ········································································································· 52
<그림 39> 중앙통로의 수정 모델 ························································································ 52
<그림 40> 통제영 거북선 개판의 해석 ·············································································· 53
<그림 41> 역원근법 곡선 표현의 특징 ·············································································· 54
<그림 42> 수정된 개판 구조 ································································································ 54
<그림 43> 3D 모델로 복원된 통제영 거북선 ··································································· 54
<그림 44> 판옥선(전선)과 통제영 거북선의 현란과 멍에의 결구 ······························ 55
<그림 45>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현란과 멍에의 결구 ···················································· 55
<그림 46> 이순신 종가 귀선도2의 현란과 멍에의 결구 ·············································· 55
<그림 47> 결구의 차이에 의한 현란 상단의 높이 변화 ················································ 57
<그림 48> 현란, 멍에의 장부맞춤과 2층 높이 ························································ 58
<그림 49> 현란과 멍에의 걸침턱맞춤과 2층 높이 ·························································· 58
<그림 50> 전라좌수영 거북선 ······························································································ 59
<그림 51> 제기도설의 문양 표현과 현전제기 ·································································· 60
<그림 52> 제기도설의 입체표현 ·························································································· 61
<그림 53>『화기도감의궤』백자총통 ·················································································· 62
<그림 54> 개판 상단의 거북무늬 삭제 ·············································································· 63
<그림 55> 개판 상단의 외곽선 삭제 ·················································································· 63

xi
<그림 56> 개판상단의 구조 ·································································································· 64
<그림 57> 개판전면의 수직과 사선구조의 비교 ······························································ 65
<그림 58> 통영의 전라좌수영 ······························································································ 65
<그림 59> 3D 모델로 재현된 전라좌수영 거북선 개판구조 ········································· 66
<그림 61> 3D 모델로 재현된 전라좌수영 거북선 ··························································· 67
<그림 61> 개판의 거북무늬와 흰줄 ···················································································· 67
<그림 62>『간재집』의 귀갑선도 ························································································ 70
<그림 63> 귀갑선의 구조 ······································································································ 72
<그림 64> 이덕홍의 귀갑선 복원도 ···················································································· 73
<그림 65> 귀갑선의 횡단면 내부구조 ················································································ 73
<그림 66> 이덕홍의 2층 판옥구조 귀갑선 복원도 ·························································· 75
<그림 67> 별제귀선의 치수1 (단위: 尺) ·········································································· 78
<그림 68> 별제귀선의 치수2 ································································································ 79
<그림 69> 별제귀선의 부재별 명칭 ···················································································· 80
<그림 71> 엎드린 자세의 거북이 형상 ·············································································· 82
<그림 71> 측면도 ···················································································································· 83
<그림 72> 정면도, 배면도 ····································································································· 83
<그림 73> 개판 출입구와 십자로 ························································································ 84
<그림 74> 개판의 구조와 칼·송곳 위치 ············································································· 87
<그림 75> 개판의 구조와 공기·바람의 저항 ····································································· 88
<그림 76> 용머리 현자포, 대장군전의 위치 ····································································· 90
<그림 77> 조성도의 全羅左水營龜船의 舷版圖 ································································ 92
<그림 78> 미익과 포혈의 위치 출처: 전쟁기념관 ··························································· 93
<그림 79> 현무기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 95
<그림 80>『홍릉천봉주감의궤』 현무도출처: 규장각 ····················································· 95
<그림 81> 통제영 거북선의 현란 ························································································ 99
<그림 82> 수군조련도 출처: 국립진주박물관 ··································································· 99
<그림 83>『국조오례의서례』「병기도설」의 대장군전 ·············································· 100
<그림 84> 통제영 거북선, 이순신 종가 귀선도의 패문 ·············································· 101
<그림 85> 별제귀선 방패의 구조 ······················································································ 101
<그림 86> 별제귀선의 포혈, 패문, 사혈의 위치 ··························································· 102
<그림 87> 창과 사혈의 시야각 ·························································································· 105
<그림 88> 『헌성유고』의 상장식도 ················································································ 107
<그림 89> 돛대의 회전축 위치 ·························································································· 108

xii
<그림 90> 병선(兵船) 출처: 규장각 ················································································ 109
<그림 91> 조선(漕船) 출처: 규장각 ················································································ 109
<그림 92> 한국의 노 ············································································································ 110
<그림 93> 전·후진 노 젓기 구조 ······················································································ 110
<그림 94> 멍에와 방패의 위치 ·························································································· 110
<그림 95> 성가퀴의 사혈, 총안, 타구 ············································································· 113
<그림 96> 별제귀선의 방패와 개판의 구조 ···································································· 113
<그림 97> 선내의 채광, 통풍창 구조 ·············································································· 114
<그림 98> 갑판, 상갑판의 통풍창 구조 ·········································································· 115
<그림 99> 포혈을 위장한 방패의 통풍구 ········································································ 115
<그림 100> 별제귀선의 구조와 전술 ··············································································· 118
<그림 101> 판옥선과 세키부네의 상대적 크기 ····························································· 119
<그림 102> 노의 전·후진 구조와 화포의 위치 ······························································ 121
<그림 103> 귀갑선의 상하 마름모꼴 대칭구조 ····························································· 124
<그림 104> 별제귀선의 상하 마름모꼴 오뚝이 구조 ··················································· 124
<그림 105> 조선시대 거북선 연표 ··················································································· 128

xiii
Ⅰ. 서 론

우리나라 거북선1)이 문헌에 나타난 최초의 기록은 1413년『태종실록(太宗


實錄)』이고 마지막 기록은 1886년이다. 통제영이 폐영되는 1895년까지 거북
선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면 거북선의 역사는 무려 482년이 넘는다.
우리가 박물관이나 기념관에서 볼 수 있고, 학교에서 배워 알고 있는 거북
선은 임진왜란 이순신의 ‘별제귀선’이다.
5월 19일은 발명의 날로 특허청은 2017년 5월 19일 페이스북으로 '국내를
빛낸 발명품 10선'을 조사했다. 1위는 훈민정음, 2위는 거북선으로 선정 이유
는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라는 의견이었다. 지금도 우리국민은 이순신
의 별제귀선이 우리나라와 현재의 나를 지켜준 혁신적인 발명품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순신의 별제귀선이 425년이 지난 현재 어떤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남
아있고 계승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이순신의 별제귀선은 국민의 정서나 관심만큼 연구되어 있지 못하다.
원형으로 복원된 거북선의 구조와 형태는 이순신의 전투기록과 전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료에 기록된 별제귀선은 ‘그 모양이 마치 엎드려 있는 거북
과 같아 거북선이라 하였고 용머리의 입으로 현자포를 쏘았다’고 기록하고 있
다. 그러나 현재의 복원 거북선들은 ‘용머리를 위로 치켜세워 마치 서있는 모
습에 입으로는 화살 하나도 쏠 수 없는 구조로 이순신의 별제귀선 교육에 활
용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거북선의 등이 철판으로 덮여 있고 쇠 송곳이 꽂혀있으며, 목을 길게 치켜
세운 2층 구조 거북선은 사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별제귀선이 독창적이고 혁신적 발명품이라고 하지만 복원된 별제귀선이 그

1) 거북선은 귀선(龜船)의 우리말로 본 논문에서 조선시대 귀선 모두를 총칭할 때는 거북선이란 용어를,


이순신의 거북선은 그가 장계(狀啓)에 기록한 별제귀선(別制龜船)이란 용어를 사용해 구분하기로 한
다.

1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지 검토가 필요하다. 거북선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와
충분한 고증의 과정이 없는 상태에서 별제귀선의 복원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져
모형이 만들어질 때마다 새로운 유형의 거북선이 창제되는 오류가 반복되고
있다.
이순신 별제귀선의 원형연구는 『이충무공전서』에서 시작된다. 권수도설에
는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두 거북선 그림과 구조에 대한 설명문이 있다. 같은
거북선 그림과 설명문이 해석을 달리해 2층과 3층 구조로 논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별제귀선 원형연구의 연구방식의 차이에 있다. 그동안 거북선의 층
수에 대한 해석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1934년 언더우드가 거북선을 2층 구조로 해석한 근거는 서양식 노의 사용
법에 있다. 서양식 노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노가 수면에 닿는 각도가 고려되
어야 하는데 낮은 1층에 노가 설치되어야 노 젓기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2층 구조의 또 다른 주장은 통제영 거북선의 설명문에 2층에 해당하는 “현
란과 패란까지의 높이 4.3척(130cm)”2)을 치수해석에 근거를 두었다. 통제영
거북선 설명문에는 1층 선체의 높이 7.5척과 방패의 높이 4.3척만 기록되어있
고 거북선 전체의 높이에 관한 치수는 언급이 없다. ‘현란과 패란까지의 높이’
란 거북선 2층을 판자로 둘러싼 벽체의 높이를 말하는 것으로 2층의 높이가
4.3척이라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평균 신장은 161cm3)로 천장의
높이를 계산하면 130cm 높이의 천장에서 노를 젓거나 화포를 쏜다는 것은 이
해할 수 없는 치수였다. 따라서 2층 전후좌우 벽체의 높이는 4.3척이고 격군
들이 서서 노 젓기가 가능하려면 머리위에 추가적인 여유 공간이 필요했을 것
으로 해석하였다. 현재 2층 구조 거북선의 덮개인 개판이 둥근 타원형으로 만

2)『李忠武公全書』, 卷首 圖說.
3) Dong-Hoon SHIN ,Chang-Seok OH ,Yi-Suk KIM ,Young-il HWANG, Secular change in
stature of Korean people from ancient to modern periods,대한체질인류학회 학술대회 연제 초록,
Vol.54, 대한체질인류학회, 2011, p.15.

2
들어진 이유는 가장자리 현측 높이는 4.3척으로 낮고 중심부에서는 서서 활동
이 가능하도록 천장을 높게 해석해서 만들어진 구조이기 때문이다. 앞의 두
가지 근거로 제시된 2층 구조의 근거가 타당성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이순신의 거북선에서 유래되었다는 통제영 거북선 개판에는
있는 22개의 포혈이 그려져 있고, 용머리는 3층 선수전면 앞으로 수평으로 길
게 돌출되어 붙어있는 구조를 전혀 설명할 수 없다는 구조에 있다. 화포는 갑
판 바닥면에 위치하기 때문에 천장에 포혈을 뚫어도 거리가 멀어 쏠 수 없다
는 것이고, 용머리는 2층 선수전면에 닻과 닻을 감아올리는 닻 물래가 위치해
있기 때문에 용머리를 갑판 바닥에 수평으로 붙이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
1975년에 처음 제시된 3층 구조는 『이충무공전서』에 실려 있는 두 거북
선의 개판에 있는 포혈의 표현만으로도 별제귀선은 3층 구조가 명백하다고 주
장하였다.
2009년에는 ‘부분갑판 3층 구조 유형’의 거북선이 제안되었는데, 앞에서의
두 근거를 하나로 통합해 해석하였다. 그림 해석으로는 개판의 포혈 표현으로
3층 구조가 분명하고 현란에서 패란까지의 높이 즉 2층의 높이가 4.3척
(130cm)은 이해될 수 없는 치수로 노 젓기를 하는 공간 머리 위 부분은 갑판
이 비어있는 것으로 해석해 2층의 좌우 현측은 낮고, 3층에는 타원형 개판의
구조로 되면서 포혈이 아니고 활을 쏘는 구멍(射穴)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
다. 문제는 강제로 머리위의 공간을 만들면서 내부에는 완전한 3층 구조가 아
닌 부분 상갑판 3층 구조로 만들어지면서 높이는 높아졌지만 선내 중앙에 위
치해 있는 상갑판으로 인해 2층에서는 노 젓기와 화포 쏘기가 어려울 정도로
공간이 좁아져 문제가 되었다.
2015년 거북선이 학술적으로 연구가 시작된 지 80여년 만에 수수께끼의
4.3척 치수가 결구법의 분석으로 해석되었다. 4.3척 높이의 방패는 현란이라
는 부재위에 얹히는데 이 부재의 높이가 높아서 상대적으로 방패는 그만큼 낮

3
은 높이가 된 것이었다. 현재 2층 구조의 거북선은 좌우 현측의 높이를 4.3척
으로 규정하고 개판을 타원형으로 불룩하게 만든 것으로 해석의 오류로 만들
어진 거북선이다.
이순신의 별제귀선은 혁신적인 구상으로 건조되었으며 그 구조는 공격과 방
어가 가능한 대규모 전투용 돌격선이다.
본 연구에서는 사료의 시각화와 3D 컴퓨터 그래픽 시뮬레이션 연구방법으
로 이순신 별제귀선의 구조 및 전술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4
1. 문제제기

이순신과 별제귀선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의 관심은 매우 높다. 1592년 임


진왜란 7년 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거침없는 돌격선으로 왜적을
깨부수는 독창적인 별제귀선과 이순신 해전의 불패신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순신과 별제귀선에 대해 위인전과 만화로 읽고, 어른
들로부터 이야기로 들으며, 국사교과서에서 배우고 기념관, 박물관 등에서 독
특하게 생긴 별제귀선을 직접 보면서 감탄했던 기억들이 있다.
별제귀선의 등은 철판으로 덮여있고, 날카로운 쇠 송곳이 빽빽하게 꽂혀있
으며, 위로 치켜세운 긴 용머리에서는 금방이라도 불과 연기를 토할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기억하고 있는 별제귀선의 구조와 형태
가 불행이도 우리가 책에서 보고, 교육을 받고, 전시장에서 봐왔던 별제귀
선은 모두 이순신이 직접 기록한 형태와 다르고 현재 초등학교에서 배우고 있
는 별제귀선의 형태 또한 오류의 결과로 만들어진 거북선을 배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이순신의 별제귀선을 모형으로 복원한 것은
1969년으로 전문가의 자문으로 제작되어 모형은 아산 현충사에 기증되었으나
현재 이 모형은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고증의 문제로
전시장에서 볼 수 없지만 이순신의 별제귀선은 복원 초기부터 현재까지 모두
구조해석의 오류로 잘 못 만들어져왔다.
별제귀선의 원형에 대한 논쟁은 거북선이 학술적으로 발표되기 시작한
1934년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논쟁의 대상은 기본구조, 형태, 내부구
조 등 사실상 거의 모두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거북선의 노는 한국식 노를 사용한다는 것이고 아직까지 가장 기본적인 구조
조차 고증되지 못한 상태에서 별제귀선의 원형이라는 명분으로 수년 전까지
경쟁적으로 실물 크기의 모형이 만들어졌다. 별제귀선의 복원에 관한 논쟁이

5
지속되고 복원된 모형들이 타당성 있는 근거제시와 고증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별제귀선의 원형에 관한 학술적 연구의 부족이다. 별제귀선의 구


조와 선형, 전술에 관한 연구는 매우 부족하다. 연구내용들은 거북선의 우수
성,『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에 관한 제원과 해석, 별제
귀선이 출전한 해전과 척수, 통제영 거북선의 높이 해석, 거북선의 치수, 화포
의 위치 등이며 거북선의 내부구조에 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고, 별제귀선
전체를 구조적으로 분석한 논문은 한 편도 없는 실정이다. 그밖에 이순신의
리더십, 해전의 승리, 조선 수군의 편제, 국제전의 대외적 관계, 무기 등으로
상대적으로 부족한 원형에 관한 다양한 학문분야의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두 번째는 연구방법의 문제이다. 그동안 거북선 연구는 특정 학문분야에서


문헌중심의 연구가 대부분이다. 원형연구는 결과를 시각화, 구조화 하고 시뮬
레이션을 통해 검증을 해야 하는 특성이 있다. 20∼30m 되는 크기와 130여
명의 인원이 거북선을 움직이고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특수한 구조의 전함을
문헌의 해석만으로 분석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연구결과를 구체적인 시
각화 자료로 제시하는데 미흡했다. 이러한 연구방법의 특수성으로 인해 거북
선의 구조와 전술에 관한 연구가 풍부하게 논의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세 번째는 지역의 특성화와 관광산업 활성화하기 위한 무분별한 모형복원이


다. 별제귀선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화재로 원형에 관한 다양한
연구와 철저한 고증으로 복원되고 문화재로서 평가와 가치가 우선되어야한다.
특정지역의 볼거리, 관광용 체험을 대상으로 한 외형중심의 조잡한 모형제작
은 복원의 명분을 얻기 어렵다.

6
미국 건축가로 모더니즘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이스 설리번(Louis Sullivan)
은 1891년 세인트루이스에 세계 최초의 고층 빌딩인 웨인라이트 빌딩을 설계
하면서 20세기 건축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겼다. “Form Follows Function”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것으로 기능적 요구조건이 구조와 형태를 만든다고
해석할 수 있다. ‘기능’과 ‘형태’의 관계에 관한 건축가의 명언은 그동안 밝히
지 못한 별제귀선의 원형과 실체에 관한 연구방법을 제시해준다.
그동안 이순신 별제귀선의 원형에 관한 연구는『이충무공전서』에 있는
1795년의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에 제한되어온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
미 형태로 완성되어 있는 200여년 후의 거북선 그림에서 200여년 이전의 기
능을 해석하는 한다는 것은 연구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제부
터는 당시에 거북선이 왜 필요했는지, 이순신 별제귀선이 해전에서 승리의 요
인으로 되기 위해서는 어떤 기능이 필요했는지 분석하면 ‘기능이 형태를 만든
다.’는 설리번의 말처럼 이순신의 지혜를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본 연구에서는 앞에서 제기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행연구와 차별화 된
연구방법을 적용한다. 선행연구의 검토에서 분석된 공통적인 특징은 문헌중심
의 분석만 있고 대안은 제시하지 못해 확장된 연구가 될 수 없었다.
거북선 관련 사료분석과 3D 컴퓨터 그래픽 시뮬레이션을 활용한 연구로 그
동안 밝히지 못했던 이순신 별제귀선과 조선시대 거북선의 실체를 밝히고자
한다.

7
2. 연구문제

이순신 별제귀선의 구조와 전술을 밝히기 위한 연구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다음의 연구문제를 제기한다.

[연구문제 1]
1592년 이순신 별제귀선의 도안과 모형이 1795년 전라좌수영 거북선과 유
사한 형태의 2층 구조로 제작, 활용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충무공전서』에 이순신의 별제귀선은 마치 엎드려 있는 거북형상과 같


아 거북선이라 하였다. 권수도설에 실려 있는 1795년의 통제영 거북선은 이
순신의 별제귀선에서 유래되었고,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이순신의 별제귀선과
다르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거북선은 모두 용머리를 위로 높
이 세우로 있고 등에는 철판과 쇠 송곳으로 덮여 있는 2층 구조의 전라좌수영
거북선 거북선이 이순신 별제귀선으로 설명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거북
선 교육의 오류와 문제의 심각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별제귀선이 학문적으로 연구되기 이전부터 현재까지 출판, 인쇄물의 도안과
모형제작에 『이충무공전서』의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이 자연스럽게 사용되
어왔다. 또한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2층 구조 전라좌수영 거북선 모형들이
별제귀선을 이해하는데 오류를 만드는 것으로 판단된다. 머리가 위로 솟은 전
라좌수영 거북선의 용머리 입에는 화포가 들어있고 불과 대포를 쏜다는 어린
이용 만화나 위인전에 등장하는 거북선 그림과 초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이순신 별제귀선의 그림과 교육에 대해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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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문제 2]
이순신의 ‘별제귀선’이 남해안에서 승전하고 있을 때 국난극복의 계책으로
이덕홍은 ‘귀갑선(龜甲船)’의 건조를 상소하는데 두 거북선은 어떤 관계가 있
고, 어떻게 다른가?

거북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태종 13년(1413)으로 ‘거북선과 왜선으로 꾸


민 배가 서로 싸우는 상황을 임금이 구경하였다’는 기록과 2년 뒤에는 ‘거북
선은 많은 적에 충돌해도 적이 해칠 수 없다’는 기록이 있고 구조, 형태, 치수
등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후 임진왜란까지 177년 동안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1592년에 이순신이 남해안에서 별제귀선으로 해전에서 승리
하고 있을 때 이덕홍은 왜적을 물리칠 계책으로 왕세자와 왕에게 귀갑선 건조
를 상소하면서 귀갑선의 구상도를 첨부했다.
「귀갑선도」는 거북선의 구조가 그림으로 표현된 현존 사료 중에 가장 오
래된 것으로 귀갑선 구조의 표현과 전법의 설명은 임진왜란 전후의 거북선의
구조와 변천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그동안 이순신 별제
귀선의 원형연구에는 1795년『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두 거
북선 그림과 설명문을 중심으로 연구되었고 「귀갑선도」는 거북선 최초의 그
림으로만 소개되는 것으로 그쳤었다. 「귀갑선도」는 표현의 정도에서 구상도
차원으로 단순하게 그려져 있으나 상소문에 거북선의 구조와 전법에 관한 구
체적인 내용이 있어 3D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하면 이순신의 별제귀선과 이
덕홍의 귀갑선은 어떤 관계가 있고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 수 있을 것
이다. 또한 이순신 종가 귀선도,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을 3D 컴퓨터 그
래픽 모델로 복원하고 시뮬레이션 과정으로 비교분석해 조선시대 거북선의 유
형과 변천과정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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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문제 3]
임진왜란 해전에서 승전의 요인이고, 이순신이 장계에 기록한 ‘별제귀선’이
란 어떤 거북선인가?
[3-1] 구조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3-2] 전술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3-3] 어떤 독창성을 보이는가?

1592년 이순신은 당포해전에 거북선을 출전시켜 왜적을 무찌른 후 왕에게


전황을 보고한 장계에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을 염려해 특별한 거북선을 건조
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구조, 형태, 치수에 관한 기록은 현재까지 남아있지
않고 아직까지 정설은 없으며 별제귀선의 원형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복원된 거북선들은『이충무공전서』권수도설에 있는 통제영과 전라좌
수영 거북선을 연구해 복원된 것이다. 특히 통제영 거북선이 별제귀선에서 유
래된 것이라고 하나 임진왜란 후 200여년 이후의 거북선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 기록과 비교하면 구조와 전술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장계와 그의 조카 이분의「행록」에 별제귀선은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입으로는 포혈이고, 뒤로는 꼬리처럼 되어있고 그 밑에 포혈이 있다. 좌
우에는 각각 6개의 포혈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좌우에 있는 포혈이
어느 층에 뚫려있는 구멍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아 본 연구에서 살펴보
고자 한다. 화포를 다루는 화포장과 활을 사용하는 사부의 위치는 연구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이순신 해전의 기록을 근거로 분석하고, 이순신이 창제한
별제귀선은 승전의 요인이 된 것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임진왜란 전후의 거
북선들과 어떤 특징이 있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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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구방법 및 범위

연구방법은 거북선 관련 사료의 분석과 내용을 시각화시키고 검증하는 연


구방법으로 설계하였다. 문헌연구는 사료에 나타나는 거북선 관련 모든 기록
을 대상으로 하며 <표 1>과 같이 선행연구, 복원된 거북선 모형 등 본 연구
와 관련 있는 분석 자료를 포괄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연구문제1은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이 이순신 별제귀선의 거북선 관련 출
판물에 일방적으로 사용되는 왜곡된 영향과 실태의 분석이다. 출판물의 내용
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해방이후 이순신과 거북선 관련 출판물을 살펴본다.
또한 거북선 모형 복원의 연혁을 살펴 복원을 위한 모형들과 전라좌수영 거북
선의 유형이 별제귀선으로 복원된 근거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거북선 관련 사료의 그림은 5종으로『각선도본』,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거
북선, 이덕홍의 귀갑선도, 이순신 종가 귀선도이다. 별제귀선은 유물로 남아있
지 않고 1차 사료로는 구조와 형태를 도출할 수 있는 치수나 그림이 없기 때
문에 거북선 그림의 분석은 구조해석에 중요한 과정이다.
『이충무공전서』의 권수도설에 있는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은
임진왜란 200여년 이후의 거북선이지만 거북선의 기본구조를 이해하는데 중
요한 사료가 된다. 특히 통제영 거북선은 이순신의 구제에서 나왔다는 설명이
있어 철저한 분석이 요구된다. 조선시대 입체표현과 문양의 표현양식은 현대
의 소실점 표현과 전혀 다르다. 사물의 구조를 표현하는 기술도(技術圖)는 현
대의 소실점과는 다르게 멀리 있는 것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뒤에 위치
할수록 크기가 점차 커지는 역투시도법으로 그려지고 문양은 보는 방향에 따
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 정면으로 보인 것으로 그려진다는 고려해 거북선의 구
조를 해석할 것이다.
거북선의 내부구조에 관한 사료는 전혀 없기 때문에 『각선도본』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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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참고자료로 돛대와 닻 물레를 배치한 후 내·외부의 구조를 모델로 제작
한다. 별제귀선은 전후좌우로 이동할 수 있다는 기록이 있어 화포를 사용하는
방패와 노를 젓는 노창의 구조를 분석해 전후진과 화포사용이 가능한 구조를
모델링으로 제작한다.

<표 2> 연구방법 및 연구절차

연구결과
3D 시뮬레이션

구조화, 1413, 1593


판옥선,
시각화 귀갑선 구조·형태
사료분석 통제영 거북선,
전라좌수영 거북선, 1795
『이충무공전서』 통제영 거북선
구조 및 형태 분석
권수도설 그림 분석
공간구조 분석
1795
선행연구 검토
전라좌수영 거북선

1800년대 이후
거북선 구조

별제귀선

전술에 관한 연구로는 이덕홍의 귀갑선 전법과 이순신 장계를 중심으로


기록을 분석한 후 별제귀선의 구조에 적용시킨다. 별제귀선은 돌격선으로 적
진 속을 파고들어 기함을 공격해 적의 전열과 지휘체제를 무너트리는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전후좌우 신속한 기동력과 왜선의 집중적인 공격에도 버텨낼
수 있는 방호의 구조와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는 막강한 무기체제가 필
요하다. 거북선 그람들의 구조에는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특징을 살펴본다. 용
머리, 꼬리와 꼬리 밑의 포혈, 좌우 각각 6개의 포혈은 이순신이 구상한 전술
이다. 별제귀선은 3층 구조로 2층과 3층의 전술적 용도와 지휘체계에 대해서
포혈과 사혈을 기준으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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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는 시각화 분석을 위한 연구모형으로 1592년 이순신 별제귀선은
구체적 치수나 형태의 그림은 계승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림의 분석과정으
로 이순신 별제귀선의 구조와 선형을 도출하고자 한다.
거북선은 판옥선 선체와 기본구조가 같기 때문에 1차 분석대상이 된다.
1593년의 이덕홍의 귀갑선도는 임진왜란 당시의 사료로 구상도와 귀갑선 전
술에 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1795년 통제영, 전라좌수영,
1800년대 이순신 종가의 거북선은 거북선의 구조에 관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
할 것이다. 거북선은 항해와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부재들로 구성되지만 본
연구가 설계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전체적인 구조와 형태, 유형에 한
해 연구범위를 둔다. 『이충무공전서』의 기록에 이순신 별제귀선의 치수는
계승되고 있지 않고 가감이 있을 수 있다는 기록으로 시뮬레이션을 위해 제작
될 별제귀선의 크기는 사료의 분석에서 도출된 치수를 기준으로 한다.
별제귀선의 차별적 특성에서는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의 거북선 변천과정을 살
펴보고 이순신이 창제한 혁신적 별제귀선에 대해 분석하기로 한다.
연구범위는 거북선 관련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정한다.
특히 거북선의 철갑선 문제는 이순신의 장계, 이분의 행록에는 개판위에 뾰족
한 쇠못이나 칼과 송곳을 꽂았다는 기록이 있어 연구대상에 포함되지만 별제
귀선의 철갑선 여부는 조선시대 어떤 사료에도 거북선의 전체 또는 개판을 철
사료의 시각화를 위한 3D 컴퓨터 그래픽 시뮬레이션의 프로그램은 오토데스
크(Autodesk)사의 3D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인 마야(Maya)를 사용한다. 마야
는 가상의 공간에서 3D 공간좌표에 입체구조물을 모델링하고 재현하는 도구
적 특성으로 사용에 적합하고 입체 구조물의 치수를 정확하게 측정이 가능하
기 때문이다. 공간분석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동작표현이 가능하고 외부, 내
부를 자유롭게 가상의 카메라가 촬영할 수 있어 본 연구의 시각화와 해석에
적합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13
<표 3> 사료의 시각화 분석을 위한 연구모형

14
4. 논문의 구성

본 논문의 전체구성은 6장으로 구성되어있다.


1장은 문제제기, 연구문제, 연구방법 및 범위, 논문의 구성, 선행연구의
조사 및 검토로 구성되어있다.
문제제기에서는 별제귀선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순신 별제귀선의 연
구실태, 연구방법의 문제, 무분별한 관광용 복원의 문제를 제기한다.
연구문제에서는 이순신 별제귀선의 오해, 왜곡된 출판물과 교육 문제, 이덕
홍의 귀갑선도, 별제귀선의 구조, 전술에 관한 것으로 이순신 별제귀선의 원형
과 실체를 밝히기 위한 과제와 연구내용들을 제시하였다.
2장에서는 이론적 배경으로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의 조선시대 거북선의
사료, 이순신 별제귀선 도안의 활용과 모형복원의 실태를 살펴본다.
3장에서는 거북선의 구조와 해석에 관한 선행연구 검토, 거북선 개판의
해석에 의한 구조, 이덕홍 귀갑선도의 분석으로 별제귀선을 어떤 이론적 근거
로 구조를 해석하는지 살펴본다.
4장에서는 이순신 별제귀선의 구조와 전술에 대한 사료를 기반으로 3D
컴퓨터 그래픽 모델과 시뮬레이션 연구방법으로 해석하고 검증한다. 크기, 구
조, 선형, 내부구조, 행선구조, 현란, 방패의 구조, 전술, 전·후진 구조와 화포
의 사용에 대해 살펴보고 분석한다.
5장은 조선시대 거북선의 유형, 별제귀선의 차별적 특성, 거북선의 변천과
정을 분석한다.
6장은 결론과 제언으로 분석된 연구결과를 종합한다, 또한 본 연구의 한
계와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원형과 실체를 밝힐 수 있도
록 제안한다.

15
5. 선행연구의 조사 및 검토

선행연구는 거북선의 구조, 치수, 선형, 행선, 전술에 관한 연구논문을 중심


으로 검토한다.
거북선의 구조에 관한 연구로(언더우드;1933, 김재근;1974, 남천우:1976,
최두환; 1999, 이원식:2007, 정진술;2009, 홍순구: 2011, 2014. 2015, 2016,
), 거북선의 높이와 치수에 관한 연구로(조성도:1964, 김재근;2014, 남천
우:1974, 이원식;2007, 홍순구:2015), 거북선의 전술에 관한 연구로(남천
우;1976, 장학근:1995, 2004, 2008, 정진술; 2009, 홍순구; 2015, 2016), 거
북선의 기본구조가 되는 판옥선(戰船)에 관한 연구로(김재근;1976), 거북선의
노와 노 젓기에 관한 연구로(마광남;2009, 홍순구;2016)의 선행연구를 검도
한다.
남천우(1976)는 그의 논문 “龜船構造에 대한 再檢討”에서 임진왜란 거북선
을 3층 구조라고 처음 제기하였다. 1795년 『이충무공 전서』에 실려 있는
통제영,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모두 3층 구조라고 주장하였는데 그 근거는 방
패와 개판에 포혈이 각각 그려져 있다는 것은 층수가 다르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남천우는 거북선의 좌우 개판에 있는 포혈이 실재 사용하
는 포혈이고 2층 방패에 있는 포혈은 간혹 궁시를 사용하거나 실제에 있어서
그것들은 위장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순신의 장계에 기록되어있는
‘좌우 각각 6개의 포혈’은 개판상의 진짜 포혈들만을 말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정진술(2012)그의 논문 “이순신 정론 Ⅳ”에서 부분상갑판 3층 구조 거북선
을 제안하였다. 거북선은 2층에서 화포를 쏘고 3층에서 조총과 활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거북선 2층에서 격군의 희생자자 많은 것은 화포를 쏠 때 틈
사이로 날아드는 조총 때문이라고 하였다. 판옥선의 2층 방패에 포혈이 있는

16
것은 거북선에서도 2층에서 화포공격을 한다는 것으로 거북선은 2층에서 화
포를 사용하고 3층에서 조총이나 개인무기를 사용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또한
통제영 거북선의 현란에서 패란까지 높이 4.3척은 거북선 현측의 높이로 이해
할 수 없는 치수이며, 이 높이로는 노군이 활동하기 어려워 머리 위쪽으로 별
도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장학근(1995)은 그의 논문 “군선으로서의 원형구선”에서 거북선에서 효율
적인 전투가 이루어지려면 2층 구조로는 불가능하다는 논리로 3층 구조의 필
요성 주장하였다. 거북선은 전투가 시작되면 노 젓고, 활과 포를 쏘는 3행위
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2층 구조의 좁은 공간에서는 3행위가 이루어질 수 없
어 3층 구조가 필요하고, 화포는 높은 3층에 있어야 명중률이 높다고 주장하
였다. 또한 임란당시 출전한 거북선의 선제가 남아있는 것은 전라좌수영 거북
선이며 특히 3층 개판에 총혈이 6개가 있는 것은 임란당시 거북선이 3층 구
조였다는 근거라고 하였다.
이원식(2007)은 그의 논문 “1592년 龜船의 主要 置數 推定에 關한 硏究”
에서 1592년 임진왜란 이순신의 거북선 치수에 한하여 연구하였다. 치수 산
정의 근거로는 영조실록의 박문수의 장계와 『여암전서』, 이순신 종가의 귀
선도, 「호좌수영지」를 자료로 본판장의 길이를 산출하였는데 1592년 거북
선의 크기를 저판장 50척, 전선장 84.1척, 상장장 68척, 선두광 13.1척, 선요
광 22.6척, 선미광 11.2척, 저판두광 9.3척, 저판요광 11.2척, 저판미광 8.2척
으로 제시하였다.
김재근(1974)은 그의 논문 “龜船의 造船學的 考察”에서 통제영 거북선의
현란에서 패란까지의 높이 4.3척의 치수에 대한 해석으로 ‘높이가 낮기 때문
에 사람이 불편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나대용이 사부가 거북선에서 이러한 불
편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전라좌수영은 이와 같은 결점
을 시정하기 위해서 개판을 보다 높인 것이라 생각한다. 김재근은 4.3척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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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 전체의 높이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조성도(1963)의 논문
에서도 나타나는데 “龜船考”에서 “통제영 거북선의 4.3척이 방패의 높이만을
이야기 하는 것인지 또는 舷版上에서 牌上의 난간에 이르기 가지 높이를 뜻하
는 것인지는 불명확할 뿐만 아니라 난간의 두께와 몇 개의 방패를 난간위에
꽂았는지는 명시하고 있지 않고 있으므로 현란의 형상에 관하여 비교적 세밀
하게 그려진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에 의거하면 될 것이라는”4) 그의 견해는
김재근과 같다.
마광남(2010)의 논문 “한선의 노와 범의 역할”에서 뱃전 난간(신방) 위에
서부터 패 위 난간(언방)에 이르기까지의 높이는 4.3척으로 군사들이 자유롭
게 움직이기 어렵기 때문에 마광남은 패판의 높이로 보았다. 따라서 언방의
두께를 6촌만 추가해도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고 견해를 밝혔지만 현란
에서 패란까지의 높이가 4.3척으로 왜 낮은지에 대한 견해는 없었다.
홍순구(2015)의 논문 “1795년 통제영 거북선의 높이해석에 의한 임진왜
란 거북선 선형 연구”에서 통제영 거북선의 현란에서 패란까지의 높이의 치수
4.3척 해석의 이론적 근거를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방패의 높이 4.3척은 별제
귀선의 특수설계에 의한 정확한 치수이고 방패를 왜선의 충돌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4)조성도,「龜船考」. 海軍士官學校硏究報告 2, 1963.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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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이론적 배경

1. 거북선에 관한 사료

1.1. 『태종실록』

거북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태종실록』에서 나타난다. 1413년(태종13


년)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이 왜선으로 꾸민 배와 싸우는 모
습을 보았다”5)는 기록이 있다.
1415년(태종15년)에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 1367~1426)이 병비(兵
備)에 대해 올린 사의(事宜) 조목에서 “귀선의 전법은 많은 적에 충돌하더라
도 적이 해칠 수가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
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6)는 뜻을 상소하였다는 기
록으로 이미 조선 초기부터 거북선이 군선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많은 적에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가 없으니”,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라는 내용에서 당시의 거북선은 전체가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졌
을 것으로 추정된다.7) 그러나 태종실록에 기록된 거북선은 구조나 형태에 대
해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1.2. 『난중일기(亂中日記)』

이순신의 임진일기(壬辰日記) 기록에 의하면 거북선은 1592년 4월 11일 베


로 돛을 완성해 항해를 위한 준비를 마쳤으며, 배를 타고나가 최종으로 지자

5)『太宗實錄』 券25, 13년 2月 甲寅, “上過臨津渡, 觀龜船倭船相戰之狀.”


6)『太宗實錄』 券30, 15년 7月 辛亥, “龜船之法, 衝突衆而敵不能害, 可謂決勝之良策. 更令堅攻造作, 以備
戰勝之具”.
7) 최영희는 太宗朝의 거북선은 배 전체가 견고하게 무엇으로 덮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崔永禧,『龜船
考』. 高麗大學校 史學會, 史叢 3, 1958.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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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 현자포 발사를 시험한 것은 임진왜란 하루 전날인 4월 12일 이었다.

2월 28일: 이날 거북선의 帆布 29필을 받았다


是日, 捧龜船帆布二十九疋
3월 27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하였으며,
試龜船放砲
4월 11일: 비로소 돛을 만들고...
始製布帆
4월 12일: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았다.
食後騎船, 放龜船地玄字砲

1.3. 『임진장초(壬辰狀草)』

1.3.1. 제2차 당항포 등 네 곳의 승첩을 아뢰는 계본


[二度唐項浦等四處勝捷啓本]」

신이 일찍이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는


데,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
며 안에서는 능히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하여 비록 왜선 수백 척 속에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
번 출전 때에 돌격장이 그 배를 타고 나왔습니다.8)
“···· 먼저 거북선으로 곧장 적의 층루배 밑으로 치고 들어가 용의 아가리로

8)『李忠武公全書』卷2, 狀啓1「條陳水陸戰事狀」,“臣嘗慮島夷之變, 別制龜船, 前設龍頭, 口放大炮, 背植鐵


金尖, 內能窺外, 外不能窺內, 雖賊船數百之中, 可以突入放炮是白乎等用良, 今行以爲突擊將所騎”...“故先
使龜船。直衝層樓船下。以龍口仰放玄字鐵丸。又放天,地字大將軍箭。撞破其船。在後諸船。交發丸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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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철환을 치쏘고 또 천자·지자철환과 대장군전을 쏘아 왜선을 깨트리고 뒤
에 있는 여러 전선도 철환과 화살을 섞어서 퍼부으며····”9)

1.3.2.「해전과 육전에 관한 일을 자세히 아뢰는 계본


[條陳水陸戰事狀]」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연이어 지자·현자총통을


쏘고 이어서 포환과 시석을 빗발치듯 우박을 퍼붓듯 하면 적의 사기가 쉽게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이 해전의 쉬운 점입니다.10)

1.4. 이분(李芬)의 행록

(공께서) 전선을 창작하니 크기는 판옥선만하고, 위에는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十字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위에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
는 온통 칼과 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다.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
어 꼬리 밑에 총 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각각 여섯 개의 총 구멍이 있
는데 대개 그 모양이 거북이 모양과 같아서 이름을 거북선이라고 했다. 뒤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거적으로 칼과 송곳 위를 덮고 선봉이 되어 나가는데 적
이 배 위로 올라오려들다가는 칼날과 송곳에 찔리고 덮쳐 포위하면 좌우전후
에서 한꺼번에 포를 쏘았다. 왜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가는 곳마다 적이 쓰러졌다. 때문에 전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항상 승리했다.11)

9)『李忠武公全書』卷2, 狀啓1 「唐浦破倭兵狀」, “故先使龜船。直衝層樓船下。以龍口仰放玄字鐵丸。又放


天,地字大將軍箭。撞破其船”
10)『李忠武公全書』卷2, 狀啓1 「條陳水陸戰事狀」, “龜船先突, 板屋次進, 連放地·玄字銃筒, 又從以炮丸·
矢石, 如雨如雹, 則賊氣已奪, 投死無暇, 此水戰之易勢也”

21
1.5.『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이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


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
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
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 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 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
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
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
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왜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
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왜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12)

1.6. 『징비록(懲毖錄)』

이순신은 거북선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나무판자로 배 위를 덮으니 위가 활


등처럼 올라온 것이 거북이와 같았다. 병사와 격군 모두 그 안에 있으면서 전
후좌우에 화포를 많이 싣고 베틀의 북(梭)처럼 종횡무진 하였다. 적의 배를
만나면 잇달아 화포를 쏘아 부수었다.13)

11)『李忠武公全書』附錄1, 行錄, 從子 正郞 芬. “創作戰船, 大如板屋, 上覆以板, 板上有十字形細路, 以容


人之上行, 餘皆揷以刀錐, 四無着足之處. 前作龍頭, 口爲銃穴, 後爲龜尾, 尾下有銃穴. 左右各有六穴, 大槩
狀如龜形, 故名曰龜船. 及後遇戰, 以編茅覆於錐刀之上, 而爲之先鋒, 賊欲登船陷之, 則斃於刀錐, 欲來掩
圍, 則左右前後一時銃發. 賊船雖蔽海雲集, 而此船之出入橫行, 所向披靡. 故前後大小戰, 以此常勝焉.”
12)『宣祖修正實錄』券26 25年, 5月 1日 庚申, “舜臣大修戰備, 自以意造龜船. 其制船上鋪板如龜, 背上有
十字細路, 纔容我人通行, 餘皆列揷刀·錐. 前作龍頭, 口爲銃穴, 後爲龜尾, 尾下有銃穴. 左右各有銃穴六,
藏兵其底. 四面發砲, 進退縱橫, 捷速如飛. 戰時覆以編茅, 使錐·刀不露, 賊超登, 則掐于錐·刀, 掩圍則火銃
齊發. 橫行賊船中, 我軍無所損, 而所向披靡, 以此常勝”

22
1.7.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이충무공전서』14)권수도설에는 <그림 1>의 통제영 거북선과 <그림 2>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두 목판화 그림과 694자의 설명문이 있다. 『이충무공전
서』의 귀선도설은 임진왜란 이순신 거북선의 원형을 복원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거북선 그림의 설명문에는 권수의 두 거북선은 1592년 임진왜란
이순신의 별제귀선이 아니고 1795년(정조19) 당시의 거북선이라고 내용에 기
록하고 있다. 이 사실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부분이 <그림 2>의 전라좌수영 거북선이 이순신장군의 별제귀선으로 알
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통제영 거북선이 임진왜란 해전의 승리의 요인
이었던 이순신의 별제귀선에서 유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설명문 내용에는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할 당시의 거북선과 임진왜란 이순신의 거북선에 대
한 내용으로 구분된다.
거북선의 구체적 치수가 제원에 대한 설명은 정조대의 거북선에 관한 설명
이고, 충무공의 행장의 내용과 명나라 화옥(華鈺)의 『해방의(海防議)』에 기
록된 임진왜란 거북선의 구조에 대한 설명 설명은 이순신의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 그림이 임진왜란 거북선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200여년이 지난 후에 편찬된 『이
충무공전서』에 이순신이 창제한 거북선의 구체적 치수나 그림으로 표현된 사
료가 전해지는 것이 없다는 것과 치수의 가감은 있지만 통제영 거북선이 임진
왜란 이순신의 옛 제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설명문에도 나타나있다. 전라

13) 柳成龍,『懲毖錄』 券1, 宣祖 37年(1604).舜臣創造龜船. 以板鋪其上, 其形穹窿如龜. 戰士·擢夫皆在其


內, 左右前後多在火砲, 縱橫出入如梭. 遇賊船, 連以大砲碎之.
14) 李舜臣(1545∼1598), 『李忠武公全書』, 1795. 정조의 명에 따라 윤행임(尹行恁)이 수집, 편차하고
예각(藝閣)에서 1795년 인행(印行)한 초간본(初刊本)으로, 권수(卷首), 8권, 부록6권 합8책(717판)의
활자본(活字本)이다. 권수(卷首)에는 구선(龜船) 등 저자가 제조한 무기의 도설(圖說)ㆍ세보(世譜)ㆍ
연표(年表) 등이 실려 있고 저자의 시문에는 임란 때 올린 장계(狀啓)가 많으며 난중일기(亂中日記)
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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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수영 거북선 설명에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을 대비해
거북선을 건조했지만 지금의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이순신의 것이 아니라고 후
세에 혼란이 있을까 상세히 기록했다.

<그림 2>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 1> 통제영 거북선

“거북선의 제도는 속명 본판(本版)이라고 하는 저판(底版)은 10쪽을 이


어 붙였는데 길이는 64척8촌이고, 머리 쪽 넓이는 12척, 허리 쪽 넓이 14
척5촌, 꼬리 쪽 넓이는 10척6촌이다.
속명 삼판(杉版)이라는 좌우현판(舷版)은 각각 7쪽을 이어 붙였는데 높
이는 7척5촌이고, 가장 아래쪽 첫 번째 판자의 길이는 68척이며, 차례로 점
점 길어져 가장 위쪽 일곱 번째 판자에 이르러서는 길이가 113척이고, 두
께는 모두 4촌씩이다.
속명 하판(荷版)인 노판(艫版)은 4쪽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4척이고
두 번째 판자 좌우에 현자포(玄字砲) 구멍을 한 개씩 뚫었다. 속명 역시 하
판(荷版)인 축판(舳版)은 7쪽을 이어서 붙였는데 높이는 7척5촌, 위쪽 넓
이는 14척5촌, 아래쪽 넓이는 10척6촌이다. 여섯 번째 판자 한가운데 지름
1척2촌의 구멍을 뚫어 속명이 치(鴟)라는 타(舵)를 꽂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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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뱃전에는 속명이 신방(信防)이라고 하는 난간을 설치하고, 난간머리
에 속명 가룡(駕龍)이라는 횡량(橫梁)을 걸쳤는데 바로 뱃머리 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걸친 것과 같다.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 패(牌)를 둘러 꽂았으며, 패 위에 또 속명이 언방(偃防)이
라는 난간을 만들었는데 현란 위에서 패란까지의 높이는 4척3촌이며, 패란
좌우에 속명이 개판(蓋版) 또는 귀배판(龜背版)이라는 판자를 각각 11쪽으
로 비늘처럼 이어 덮고, 등에는 1척5촌의 틈새를 내어, 돛대를 세웠다 눕히
는데 편리하도록 하였다.
뱃머리에는 거북머리를 설치하였는데, 그 길이는 4척3촌, 넓이는 3척이
다. 그 속에서 유황, 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연기를 안개같이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한다.
좌우의 노(櫓)는 각각 10개이고, 좌우 패에는 각각 22개의 포혈(礟穴)을
뚫었고, 12개의 문을 만들었다.
거북머리 위로 2개의 포혈을 뚫었고, 아래에 2개의 문을 냈으며, 문 옆에
는 각각 포혈 1개씩 있다. 좌우 복판(覆版)에도 또한 각각 12개의 포혈을
뚫었으며, 귀(龜)자의 기(旗)를 꽂았다.
좌우 포판(鋪版) 아래 방이 각각 열두 칸인데 두 칸에는 철물을 넣고, 세
칸에는 화포(火礟), 궁시(弓矢), 창검(槍劍) 등을 넣고, 열아홉 칸은 군사들
의 쉬는 곳이다.
왼쪽 포판 위의 방 한 칸은 선장이, 오른쪽 포판 위의 방 한 칸은 장교들
이 거처하는데 군사들이 휴식할 때는 포판 아래에 있고 전투가 벌어지면 포
판 위로 올라와 모든 포혈에서 쉬지 않고 대포를 쏜다.
상고하건대 「충무공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공이 전라좌수사로 있을
때 왜적이 장차 쳐들어올 것을 알고 지혜를 써서 큰 배를 만들었는데, 배의
위를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는 십자(十字)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송곳칼(錐刀)을 깔았는데, 앞쪽은 용머리
로 뒤쪽은 거북꼬리로 되어있으며, 총혈(銃穴)은 전후좌우에 각각 6개씩으

로 큰 탄환(大丸)을 쏘며, 적을 만나면 거적으로 위를 덮어 송곳칼을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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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선봉이 되어, 적이 배에 오르려 하면 송곳칼에 부딪치고, 엄습하려고 하
면 일제히 총을 쏘아 가는 곳마다 휩쓸지 못하는 바가 없어 크고 작은 전투
에서 이것으로 거둔 공적이 심히 많으며 형상이 엎드려 있는 거북과 같아
거북선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라고 하였다.
명나라 화옥의 『해방의(海防議)』에 ‘조선의 거북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
히기를 임의로 하고 역풍이 불건 썰물 때이건 마음대로 간다.’ 하였는데 그
것이 바로 충무공이 창제한 배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 그 치수
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고 있는 것이 없다.
지금의 통제영거북선은 대개 충무공의 옛 제도에서 유래된 것이나 역시
약간의 치수의 가감은 없지 않다. 충무공이 이 배를 창제한 곳은 실로 전라
좌수영이었는데 지금의 좌수영거북선은 통제영거북선의 제도와 약간 서로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제도를 아래에 붙여 써 둔다.
전라좌수영거북선의 치수·길이·넓이 등은 통제영귀선과 거의 같으나, 다만
거북머리 아래에 또 귀신머리를 새겼으며, 복판 위에는 거북무늬를 그렸고,
좌우에 각각 문이 2개 있으며, 거북머리 아래에 포혈이 2개, 현판 좌우에
포혈이 각각 1개씩, 현란 좌우에 포혈이 각각 10개씩, 복판 좌우에 포혈이
각각 6개씩이며, 노는 좌우에 각각 8개씩이다.”15)

15)『李忠武公全書』卷首 圖說, 龜船之制。底版 俗名本版 聯十。長六十四尺八寸。頭廣十二尺。腰廣十四尺


五寸。尾廣十尺六寸。左右舷版 俗名杉版 各聯七。高七尺五寸。最下第一版。長六十八尺。以次加長。至
最上第七版。長一百十三尺。並厚四寸。艫版 俗名荷版 聯四。高四尺。第二版左右。穿玄字礟穴各一。舳
版 俗亦名荷版 聯七。高七尺五寸。上廣十四尺五寸。下廣十尺六寸。第六版正中。穿穴經一尺二寸。揷
舵。俗名鴟 左右舷設欄。俗名信防 欄頭架橫梁 俗名駕龍 正當艫前。若駕牛馬之臆。沿欄鋪版。周遭植
牌。牌上又設欄。俗名偃防自舷欄至牌欄。高四尺三寸。牌欄左右。各用十一版。俗名蓋版又龜背版 鱗次
相向而覆。罅其脊一尺五寸。以便竪桅偃桅。艫設龜頭。長四尺三寸。廣三尺。裏爇硫黃,焰硝。張口吐煙
如霧以迷敵。左右櫓各十。左右牌各穿二十二礟穴。設十二門。龜頭上。穿二礟穴。下設二門。門傍各有一
礟穴。左右覆版。又各穿十二礟穴。揷龜字旗。左右鋪版下屋各十二間。二間藏鐵物。三間分藏火礟弓矢槍
劍。十九間。爲軍兵休息之所。左鋪版上屋一間。船將居之。右鋪版上屋一間。將校居之。軍兵休則處鋪版
下。戰則登鋪版上。納礟于衆穴。粧放不絶。按忠武公行狀云。公爲全羅左水使。知倭將猘。創智作大船。
船上覆以版。版上置十字細路。以容人行。悉以錐刀布之。前龍頭後龜尾。銃穴前後左右各六。以放大丸。
遇賊則編茅覆上。以掩錐刀而爲先鋒。賊欲登船則離錐刀。欲來掩則一時銃發。所向莫不披靡。
大小戰。以此收績者甚夥。狀如伏龜。故名龜船。皇明華鈺海防議云。朝鮮龜船。布帆竪眠
惟意。風逆潮落。亦可行。卽指公所創之船也。然而並未詳言 其尺度。今統制營龜船。盖出
於忠武舊制。而亦不無從而損益者。公之創智制船。寔在於全羅左水營。而今左水營龜船。
與統制營船制。略有異同。故付見其式于下。
全羅左水營龜船。尺度長廣。與統制營龜船略同。而但龜頭下。又刻鬼頭。覆板上。畫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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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순신 종가 귀선도(龜船圖)

이순신 종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귀선도16)는 두 장의 그림이 전해지고 있는


데 <그림 3>의 귀선도1에는 이순신 별제귀선의 구조, 치수, 전술을 칭송하는
내용의 사언시(四言詩)17)가 기록되어있다.
그림의 표현에는 별제귀선의 기록처럼 개판에 송곳칼이 표현되어 있지 않아
후대의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며, 귀선도 2는 개판위에 장대의 그림
이 있고 현무의 도상인 거북머리와 꼬리는 민화풍의 표현양식으로 그려져 있
다. 그림 표현의 정도로는 도면과 같은 거북선의 구체적인 구조분석이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사언시의 내용과 함께 중요한 정보들을 내포하고 있다.
노판은 7쪽, 현판은 8쪽으로 이어 붙여 1795년 통제영 거북선과 노판의 수는
같고, 현판은 한 개가 더 많다. 현판과 현란은 지나칠 정도로 곡선의 형태로
가로 길이가 짧으며, 현판의 미익은 개판 상단보다 높게 그려져 과장되어있다.
노는 좌우에 각각 8개씩 배치되어있다.
귀선도1의 좌우 방패의 수는 각각 13개로 포혈과 패문의 구조는 통제영 거
북선의 것과 유사해 별제귀선의 방패구조가 남아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현란과 멍에의 결구법은 통제영 거북선과 같은 걸침턱의 연결방식을 사용하
고 있다. 이물에서 고물까지 개판의 상단은 직선으로 표현되어있어 개판의 상
단은 평면구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덕홍의 ≪귀갑선도≫에도 개판 상단은
평면으로 그려져 있다. 개판 상단에는 장대가 있다. 거북선은 원래 누각을 따
로 만들지 않는다는 사료를 고려하면 개판위의 장대는 수군훈련에서 지휘관이

紋。左右各有二門。龜頭下礟穴二。舷板左右。礟穴各一。舷欄左右。礟穴各十。覆板左
右。礟穴各六。左右櫓各八
16) 이순신 종가의 귀선도는 종손 이재훈이 1976년에 제공한 것으로 『이충무공 전서』의 도설과 화법이
유사해 18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17) 濫叨梅營 敢粧龜船 長本十把 廣幾五把 體丈十三 輈門二六 内藏八九 外顯四七 有無互環 銃矢并擧 口
尾吐黑 背脇飛红 甲變爲臺 三層加一 上設座幙 大小兩欄 鍊板列立 雲水彩屏 左右插旗 前後植干 發号施
令 一金一鼓 誰知此船 泛彼飛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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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하기 위한 임시 구조물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먼저 치수의 기록으로 본판장의 길이 10파(50척), 배의 너비 5파(25척),
선체의 길이 13파(65척), 방패는 좌우로 26개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치수들
은 임진왜란 전후의 판옥선 크기의 변화를 살펴보면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나
타난다. 입과 꼬리, 등과 옆구리에서 화포를 쏜다는 표현은 별제귀선이 3층
구조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귀선도에 그려져 있는 2개의 돛대,
장방형의 패문과 포혈은 이순신의 별제귀선에서 유래되었다는 1795년 통제영
거북선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이순신 별제귀선의 원형을 해석하는데
앞의 기록들과 함께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순신 종가 귀선도의 치수를 근거로 이순신 별제귀선을 3D
컴퓨터 그래픽 모델로 제작해 분석하였다.

<그림 3> 이순신 종가의 귀선도1, 2 출처: 아산 현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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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별제귀선의 도안과 원형복원

2.1. 도안

2016년 미국 군사전문매체가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세계 해군 역사상 7


대 명품 군함 중 하나로 꼽았다. USNI뉴스는 "선체는 거북 등껍질과 비슷한
볼록한 덮개의 모양으로 덮여 있었다."며 "적군은 선내로 진입이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속도가 빠르고 기동성도 뛰어났다"고 설명했다. 또한 임진왜란 이
순신의 일러스트 그림과 함께 "선수에 장착된 용머리 모양의 연기 분출 장치
는 강력한 심리적 무기"였다고 USNI뉴스는 덧붙였다.18)
<그림 4>는 1955년 해군창설 10주년 기념우표19)이고, <그림 5>는 USNI
뉴스에 실린 일러스트20), <그림 18>은 해군사관학교 거북선21)이다.
USNI가 우수하다고 평가한 항목인 ‘용머리의 연기 분출장치’는 이순신의 별
제귀선이 아니고 200여년 이후의 1795년 거북선이다.
1592년 임진왜란 별제귀선에서는 용머리 입으로 화포를 쏘았지만 200여년
후의 거북선들은 용머리의 입과 코에서 연기를 내품는 기능으로 바뀌었다.
<그림 16>의 전쟁기념관 거북선 또한 이순신의 별제귀선이 아니고 200여년
뒤의 전라좌수영 거북선을 연구해 제작된 거북선이다. <그림 14>의 교과서
에 실린 거북선 사진도 전라좌수영 거북선으로 대한민국의 세계적인 문화유산

18)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4/09/2016040901737.html,
“convex-covered decks resembled a turtle shell...sporting a powerful psychological weapon —
a smoke-spewing dragon’s head at the bow — were not only virtually impenetrable, but also
fast and maneuverable”
19) http://m.archives.go.kr/next/m/monthly/recordView.do;jsessionid=mVFsms2Hp5BWZdSNrFAjnyB4S
8Sz6y2nvZTLgshtHKTbbSBUg4VSSi4XmbjiEBhw.CW-MOBILE_servlet_engine4?archiveEvntId=0051
843819&archiveMonthlyId=114&page=38
20) https://news.usni.org/2016/04/06/survey-results-what-is-the-greatest-warship-of-all-time
21) 1979년 해군에서 학계의 고증을 받아 『이충무공전서』에 기록된 치수를 기준으로 설계하였으며, 해
군 정비창 기술진이 건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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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북선 복원의 오류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국사교과서에서 오류의 결과물로 이순신 별제귀선의 역사교육을 받
았으며 이 문제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어 왜곡된 별제귀선 교육의 정상화를
위한 대책이 요구된다.
아래의 <그림 6>22), <그림 7>23), <그림 8>24), <그림 9>25), <그림
10>26), <그림 11>27), <그림 12>28), <그림 13>29)은 1955년에서 1984년
까지 이순신 출판서적으로 표지 및 만화의 내용에서도 모두 전라좌수영 거북
선 도안 또는 일러스트 이미지를 사용하는 경우가 전부라고 할 수 있다.
표지에 나타난 공통점은 목이 위로 솟아있고, 등은 철판으로 덮여있으며 송
곳이 꽂혀있는 모습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철갑으로 둘러싼 세계 최초의 철
갑선이라는 표현이 강조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해전의 상황에 대한 설명에서
이순신의 거북선은 철갑으로 되어있어 조총을 쏘아도 뚫을 수가 없다는 내용
을 자랑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물론 세계최초의 철갑선으로 되었으면 좋겠지
만 사료의 어디에도 별제귀선을 철갑으로 덮었다는 기록은 없다.
용머리 포혈로 현자포를 쏘았다는 분명한 사료의 기록이 있지만 우리 국민
의 정서에는 용머리 화포가 보여주는 상징성보다 거북형상의 등에 철판과 송
곳이 빼곡하게 꽂혀있어야 이순신의 별제귀선으로 인정된다는 정서가 크게 작
용하고 있다. 아래의 자료사진이나 복원 모형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문제는
1950년대나 지금이나 이순신 별제귀선은 보이지 않고 전라좌수영 거북선을
닮은 모형이 전국의 박물관, 교육기관, 기념관, 관광지에 있고 교육에 미치는

22) 진단학회 편, 『충무공독본』, 박문출판사, 충무공기념사업회, 1955.


23) 이은상, 『성웅 이순신』, 민족문화협회 부설 횃불사, 1967.
24) 이찬도 역, 『난중일기』, 금자각, 1969.
25) 조성도, 『충무공독본』, 동원사, 1973.
26) 이응열 역, 『國譯 亂中日記』, 경문출판사, 1978.
27) 이은상, 『성웅 이순신』, 삼중당, 1984.
28) 김균희 외, 『위인들의 어린 시절 이순신』, 신진출판사, 1973, pp.11∼12.
29) 이주홍 외, 『이순신 장군 외』, 금성출판사, 1984, pp.72∼73.

30
영향에 대해 대책이 필요하다.

<그림 4> 해군창설 10주년 기념우표(1955년)

<그림 5> USNI뉴스에서 소개된 임진왜란 거북선

31
<그림 6> 충무공독본(1955) <그림 7> 성웅 이순신(1969)

<그림 8> 국보76호 난중일기 <그림 9> 충무공독본(1971)


(1969)

32
<그림 10> 국역 난중일기(1978) <그림 11> 성웅 이순신(1984)

<그림 12> 위인들의 어린 시절 이순신(1973)

33
<그림 13> 이순신 장군 외(1984)

<그림 14> 국사 교과서의 거북선

34
2.2. 모형복원

이순신 별제귀선이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인 모형으로 처음 공개된 것은


1969년으로 아산 현충사가 중건될 때 동아일보사에서 실물의 1/6 크기로 기
증한 <그림 15>30)의 거북선이다. 2층 구조로 서양식 노를 젓는 것으로 복원
되었다. 현재는 전시되고 있지 않지만 별제귀선의 원형에 대한 연구부족과 고
증의 과정 없이 복원된 용머리를 치켜세운 2층 구조 거북선들은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 이순신과 별제귀선을 왜곡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림 15> 아산 현충사 거북선(1969)

<그림 16> 용산 전쟁기념관 거북선

30) 현충사관리소,『충무공 이순신과 현충사』, 1999, p.71. 이 안내 책자 73쪽에는 이원식, 김재근, 조인


복 등의 고증에 의해 거북선 모형이 설계 합작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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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7> 1960년대 거북선 모형

<그림 18> 해군사관학교 거북선(1980)

<그림 19> 부분상갑판 3층 구조 거북선(2011)

36
Ⅲ. 거북선 구조와 해석

1. 선행연구의 거북선 구조와 해석

1.1. 노 젓기 방식에 의한 해석과 구조

거북선의 학술적으로 연구는 1934년으로 언더우드(Underwood, H, H.)


「Korean Boats and Ships」의 거북선 구조에 관한 논문에서 시작되었다.
언더우드는31) <그림 20>, <그림 21>과 같이 거북선을 2층 구조로 해석하
였다. 2층 구조 해석의 근거는 서양식 노의 사용법에 특징이 있다. 노를 젓는
방식은 선체 1층 좌우 현판 밖으로 구멍을 뚫어 노 하나에 두 명의 노군이 허
리 높이에서 노를 저어 행선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1층에는 격군이 위치하고 2층에는 전투원이 배치되었다. 용머리는 연기를
뿜어 연막작전을 펼 수 있으며, 개판 상단의 12개 구멍은 거북선에 올라탄 적
군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해 사료의 기록과는 많이 다른 주장
을 하고 있지만 그의 복원도는 거북선이 현대식 도면으로 처음 그려진 것으로
거북선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32)

<그림 20> 언더우드 거북선의 측면도

31)Underwood, H. H., 「Korean Boats and Ships」Transactions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p78, 1934.
32)홍순구,「1795년 통제영 거북선의 높이해석에 의한 임진왜란 거북선 선형 연구」,『조형미디어학』,
18권 3호, 2015, p.326.

37
<그림 21> 언더우드 거북선의 횡단면도

장학근은 거북선은 3층 구조이지만 전·후진이 가능하려면 전통노가 아닌


<그림 22>와 같은 서양식 노처럼 곧은 노였으며 이는 거북선이 단순한 수
송선이나 여객선이 아니라 군선이었기 때문이라고 근거를 제시했다.33) 상장
1층에서 노를 저었다는 것이 언더우드의 선체에서 젓는 것과 다르다.

<그림 22> 장학근 거북선의 중앙단면도(1995)

<그림 23> 장학근 거북선의 측면도

33) 장학근, 「軍船으로서의 原型龜船 -龜船改造論을 중심으로」, 『昌原史學』 第2輯, 1995, p.24.

38
1.2. 높이의 해석에 의한 구조

『이충무공전서』에 통제영 거북선은 현란에서 패란까지의 높이가 4.3척이


라는 치수의 기록이 있다. 이 치수는 방패의 높이로 4.3척(약 130cm)34)의 높
이를 2층 구조 거북선의 좌우 현측 높이로 해석한 경우가 조성도35), 김재
근36), 이원식37)이고, 부분상갑판 3층 구조38) 거북선의 2층 좌우 현측 높이로

해석 한 경우가 정진술39)이다.

4.3척의 방패높이의 치수 해석에 대해 이론적 근거는 2015년에 홍순구의 학


술논문으로 발표40)되었으며 이전에는 조성도가 해석한 아래의 근거로 2층 구
조 거북선이 설계되었고 모형으로 제작되었다.

蓋版이 위로 꾸부리고 있는 形狀에 關하여는 全혀 記錄에 言及하지 않고 있


으므로 正確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아래 난간으로부터 牌上의 난간에 이르기까
지의 높이가 4尺3寸(1.27m)이었다.”라는 말은 甲板上에서 活動하는 戰鬪要員
의 身長과 比較해보면 최소한의 꾸부러진 形狀을 推定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다. <그림 24>. 위의 圖示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甲板上의 砲要員이 自由
로히 움직여야 할 높이(170cm)를 고려하면 蓋版의 中央은 甲板上과의 사이에
약 2m의 높이를 필요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개판의 꾸부러진 형상은 갑판상
의 兩舷側에 세워진 난간으로부터 約 15도의 角度를 維持하면서 위로 꾸부러
지고 있으며 甲板上에서의 높이는 舷側에서 漸漸ㅡ높아지기 始作하여 中央에
이르러서는 約 7척(2.08m)의 높이를 維持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

34) 조선시대 선박의 길이 1척(尺)의 길이가 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달라 연구자는 평균값 30cm로 환산
했으며, 조성도는 다른 척도(29.5cm)로 환산해 4.3척을 127cm로 표기한 것이다.
35) 趙成都, 「龜船考」. 海軍士官學校硏究報告 2, 1963.
36) 金在瑾,「龜船의 造船學的考察」, 學術院論文集, 1974.
37) 이원식,「1592년 龜船의 主要 置數 推定에 關한 硏究」, 박사학위논문, 한국해양대학원, 2007.
38) 부분상갑판: 갑판위에 적정한 높이의 별도로 만들어진 층수로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 공간
39) 정진술, 「이순신 정론Ⅳ」,이순신 연구논총, 2012.
40) 홍순구,「1795년 통제영 거북선의 높이해석에 의한 임진왜란 거북선 선형 연구」,『조형미디어학』,
18권 3호, 2015.

39
다.41)

<그림 24>에서 2층의 좌우현측의 높이는 127cm로 노를 젓는 격군들이 현


측에 서있기도 어려운 낮은 높이이기 때문에 승조원들이 자유롭게 선내에서
활동하려면 선내의 중앙부분의 높이가 2m 정도 되어야 활동이 가능할 것으로
내부구조를 해석하였다.
4.3척 치수의 높이 해석은 결론적으로 좌우 현측은 높이가 낮고 선내 중앙
부분이 높아져야하기 때문에 문헌의 기록에는 없지만 둥근형태의 덮개를 씌울
수밖에 없었다. 조성도의 2층 높이에 대한 해석은 그의 복원도 <그림 25>와
같은 2층 구조의 거북선으로 만들어지며 개판의 형태는 둥근 타원형으로 고정
되었다.42)

<그림 24> 4.3척 치수 해석에 의한 층수 높이와 개판의 구조

41) 조성도 ,龜船考, 海軍士官學校硏究報告, 第2輯, 1963, pp.126~127.


42) 홍순구,「1795년 통제영 거북선의 높이해석에 의한 임진왜란 거북선 선형 연구」,『조형미디어학』,
18권 3호, 2015. p.328.

40
<그림 25> 조성도의 이순신 별제귀선 복원도

김재근의 4.3척의 해석은 조성도의 해석과 같다. 통제영 거북선은 이순신의


구제에서 유래되었고 치수는 4.3척 밖에 참고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1795년
통제영 거북선과 1592년 임진왜란 거북선을 모두 2층 구조로 해석하였다.
김재근은 통제영 거북선의 높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현란과 패란간의 높이 4자3치는 너무 과소하여 이해하기 곤란하다. 그것


은 아마도 현란 상변으로부터 패란 하변까지의 높이, 즉 방패판의 높이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관점에서 선형을 잡아보면, 거북선의 단면 형상은
<그림 26>과 같이 되며, 그 때 선체높이는 8자 5치이고, 상장의 높이는
11~13자이며 거북선의 전체높이는 19자5치 내지 21자 5치가 된다. 그러
나 그 상장의 높이는 내부구조를 꾸미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고 특히 상장
내부에 부분갑판 같은 것을 설치하는 경우에는 개판의 높이가 5~7자 이
상으로 더 높아져서 전체 높이도 더 크게 늘어날 수 있다. 이것은 통제영
귀선의 높이지만 전라좌수영귀선은 방패부분의 높이가 <그림 26>에 나
타나 있는 6자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다. 통제영귀선의 상장 높이가 너무

41
낮아서 전라좌수영귀선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43)

<그림 26> 김재근의 거북선 중앙단면도

<그림 27> 김재근의 통제영 거북선 2층 구조 단면도

이원식은 <그림 28>44)의 1795년 전라좌수영 거북선과 <그림 30>의

43) 김재근, 韓國의 배,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pp.228~229.


44) 이원식, 「1592년 龜船의 主要 置數 推定에 關한 硏究」, 박사학위논문, 한국해양대학원, 2007.
p.107.

42
1592년 거북선을 모두 <그림 29>45)의 상장과 같은 2층 구조로 해석하고 2
층 갑판의 바닥에서 둥근 개판의 중심부까지 높이를 1795년 거북선은 8.5척
(265cm)과 1592년 거북선은 6.94척(217cm)을 높이로 제시’46)하였다.
이원식의 거북선 높이와 구조에 대한 해석의 근거는 김재근과 같다.
<그림 30>의 1592년 거북선 구조도에서 용머리가 2층 선수 전면에 높게 위
치된 상태는 앞의 김재근의 통제영 거북선의 단면도 <그림 27>과 매우 유사
하다. 조성도, 김재근, 이원식의 거북선 구조의 해석에서 이순신의 별제귀선은
용머리에서 현자포를 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제시된 용머리가 개판 상단의 모
서리 부분에 높게 위치한 포혈에서 어떤 방법으로 현자포를 장전하고 쏠 수
있는지, 이원식의 <그림 30>에서 선수 전면에 용머리가 위치해 있어 닻을
올리고 내리는 공간은 어느 곳에 위치해야 하는지 내부구조에 대한 단면도와
고증이 요구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2층 구조 거북선에서는 노를 젓고, 좌우 방패의 포혈과 사혈에서 화포를 발
사하고 활을 쏴야 하지만 왜선의 3층 선상에 있는 왜적을 <그림 29> 좌측
방패에서와 같이 사수가 앉아 전투가 가능한지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다.

<그림 28> 이원식의 1795년 전라좌수영 거북선 구조도

45) 이원식,『한국의 배』, 대원사, 1990, p.48.


46) 이원식, 앞의 논문, p.139.

43
<그림 29> 이원식의 통제영 거북선 횡단면도

<그림 30> 이원식의 임진왜란 거북선 복원 우측면도

2층 구조 거북선이 이순신의 별제귀선이 아니라는 분명한 근거는 용머리 위


치에 있다. <그림 30>의 용머리는 선수 전면의 상단에 위치시켰는데 높은
위치의 용머리 포혈에 화포를 어떻게 장전할 수 있고 발포 할 수 있는지 선행
연구에는 모두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충무공전서』의 두 거북선과 『각선도본』의 판옥선 선수 전면에는 좌우
에 포혈이 있고 중앙에는 닻이 위치해있다. 안쪽으로는 닻을 감아올리고 내리
는 닻 물래가 모든 전선에 위치해 있는데 모호하게 용머리가 중간에 위치해
있어 시뮬레이션이 필요한 부분이다.

44
1.3. 전술에 의한 해석과 구조

남천우는『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거북선 그림에서 개판 좌우에 포혈이


뚫려있는 것을 근거로 거북선 내부의 상장구조가 2층 부분임을 명백히 말해주
고 있는 것47)이라고 해서 별제귀선의 3층 구조를 처음으로 제기했다.
화포는 3층에서 발사되며 2층에 있는 포혈은 장식에 불과하고 노젓기는 선
체 측면 쪽으로 돌출된 노역 장소에서 한국식 노를 저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림 31>의 중앙단면복원도48)는 통제영거북선의 2층의 높이로 6.5척(약
2m)을 제시하였다. 4.3척의 방패의 높이에 대한 해석에서 그림 표현에 오류
가 있다고 했으며 2층의 상장높이 6.5척은 문헌에 기록되어있는 치수가 아니
기 때문에 당시 노군들의 신장과 머리위의 두꺼운 패란의 높이를 고려해 추정
한 치수로 판단된다.
남천우는 통제영, 전라좌수영 두 거북선의 방패에 있는 많은 수의 포혈
에 대해서 “진짜의 좌우측면의 포혈은 개판에 뚫려져있는 포혈들 뿐 이라
는 점이다. 즉 그 밑에 있는 舷爛牌의 포혈들은 말하자면 假字 포혈이라는
점이다. 간혹 궁시를 쏘기는 하였을 것이나 실제에 있어서는 위장을 겸한
통풍창에 불과하며 화포를 그곳에서 쏠 필요는 없다.”49)는 것이다.
2층에는 노군들의 노젓기와 간혹 활을 사용했을 것이며, 3층에는 포수들
이 화포를 쏘는 공간으로 별제귀선을 3층 구조로 해석하였다.

47)남천우, 龜船構造에 대한 再檢討, 歷史學報, 第71輯, 1976, p.14.


48)남천우, 앞의 논문, p146
49)남천우, 앞의 논문, p.170.

45
<그림 31> 남천우의 통제영 거북선 복원도

<그림 32>남천우의 통제영거북선 복원도

장학근은 3행위(노를 젓고, 활과 포를 동시에 사용하는 전투행위)를 근거로


별제귀선의 3층 구조를 해석했다. “2층 구조의 거북선으로는 3행위를 동시에
수행할 수 없다.” 50)라며 <그림 33>의 3층 구조 거북선을 언급했다. 2층은
노군과 사수가 전투에 임무를 수행하는 장소로 노를 젓고 활을 쏘는데 이용했
고, 3층은 포수의 공간으로 높은 곳에서 아래로 화포를 발사하여 사정거리를

50)장학근, 「戰場環境과 거북선 線型變化, 『軍史』 第51號,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


p.58.

46
멀게 하고 명중률을 높일 수 있다는 논리로 화포가 3층의 개판에 위치해 있는
3층 구조 거북선 구조도를 제시하였고 2층 구조에서 3행위가 어렵다는 이유
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2層構造로 포를 쏘기 위해서는 젓고 있던 노를 뽑아낸 후, 櫓窓을 닫고, 動


車에 실린 銃筒을 防牌 쪽으로 옮긴 후, 고각과 거리를 조준한 다음 포가 움
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키고 심지에 불을 달려 탄환을 발시키는 과정을 반드
시 거쳐야 한다.51)

따라서 거북선이 2층 구조라면 같은 층에서는 노를 저을 때는 포를 쏠 수


없고, 포를 쏠 때는 노와 활을 사용할 방법이 없어 거북선은 3층 구조로 만들
어져 2층 갑판에서는 노 젓기와 활을 쏘고 3층 상갑판에서는 화포로 전투임
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에 3층 구조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3척의 치수와 2층의 높이에 대한 견해는 전혀 없으며, 전투행위에 필요한
거북선의 기본구조만으로 3층 구조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장학근은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개판에 있는 6개의 포혈이 바로 3층 구조의
근거이고, 임란 당시 출전한 거북선의 선제(船制)가 남아있는 것”52)이라고 주
장하고 별제귀선을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구조로 해석하였다.

51) 장학근, 앞의 논문, p.56.


52) 장학근, 앞의 논문, p.61.

47
<그림 33> 장학근의 3층 구조 단면도

정진술은 1795년 전라좌수영 거북선을 부분상갑판 3층 구조로 해석하고


<그림 34>의 임란기 거북선 복원도53)를 제시하였다. 해석의 근거는『이충무
공전서』의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에서 방패의 포혈과 개판의 포혈
은 동일한 갑판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3층 구조로 해석했다. 그러나 노를 젓
는 2층의 높이와 개판의 구조에 대해서는 조성도, 김재근과 동일하게 해석하
였다.

2층과 3층이 전통개판이라면 현란에서 패란까지의 높이가 4.3자(약


129cm)54)라는 『이충무공전서』의 기록은 이해될 수 없다. 조선말기 남자들
의 신장 실측치 163.8cm55)를 고려할 때 노군들이 자유롭게 노질을 하는 것
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어려움 때문에 필자는 1795년 거북선의 3층 갑
판이 전통갑판으로 되어있지 않고 노군들이 노질하는 머리 위 부분은 갑판이
비어있는 것으로 추정하고자한다.56)

53) 정진술, 「이순신 정론 Ⅳ」, 『이순신연구논총』제17호, 2011. p.160.


54)『萬機要覽』에 조선시대 선박건조는 영조척 사용, 영조척 1자: 30.31cm
55) Bishop, Isabella S, Bird, Korea & Her Neighbours, Vol 1 (London : John Murray, 18980, p23 조
선말기 남자의 신장에 대한 기준을 1897년 서울에서 남자 1060명의 신장을 측정한 결과에서 최고와
최저의 수치를 평균으로 계산해서 163.83cm로 신장을 산출했다.

48
<그림 34> 정진술의 3층 구조 복원도

정진술은 『이충무공전서』의 그림에서 통제영 거북선의 경우에는 방패 위


의 여장이 생략된 구조이고,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방패높이
를 4.3척의 높이로 해석하였다.
4.3척의 방패는 노군이 서있기도 어려운 낮은 높이로 현측의 공간에서 노군
이 활동하려면 <그림 34>의 오른쪽 그림과 같이 좌우 현측의 머리위의 빈
공간을 필요하게 된다. 정진술의 4.3척 방패높이와 노군 머리위의 빈 공간의
필요성에 대한 해석은 김재근, 조성도, 이원식과 같다. 다른 점은 김재근은 통
제영거북선의 방패높이가 4.3척이고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통제영보다 높은 것
으로 해석했다. 층수에 대한 해석은 다른 견해로 김재근은 1592, 1795년 거
북선을 2층 구조로 추정하였고, 정진술은 부분상갑판 3층 구조의 거북선으로
해석하였다.
정진술의 4.3척 치수 해석과『이충무공전서』의 두 거북선이 3층 구조라는
해석의 근거로 제작된 것이 <그림 19>의 3층 구조 거북선이다.
부분상갑판 3층 구조에서는 <그림 35>와 같이 상장 중앙에 부분상갑판이 위
치해 있어 중앙공간을 중심으로 전후좌우로 복도처럼 구분되기 때문에 동선이
복잡해지는 특징이 있다. 완전한 3층 구조와 차이는 3층에서 화포사용이 불가능
하다. 부분상갑판에 그려놓은 화포의 표시처럼 포구가 개판과 거리가 멀어 구조

56)정진술, 앞의 논문, pp.133-134.

49
적으로 부분상갑판 위에서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3층에서는 조총이나 쇠뇌
등의 개인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된다. 정진술은 2층에서 노 젓
기와 화포를 사용하고, 3층에서 활과 같은 개인무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구조를
해석하였다.

<그림 35> 부분상갑판 3층 구조 거북선의 특징

<그림 36>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경남 사천의 부분상갑판 3층 구조 거북선


내부의 사진으로 복잡한 내부공간은 격군, 화포장, 사수의 임무수행이 자유롭
지 못한 내부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36>부분상갑판 3층 구조 내부
출처: 경남 사천

50
1.4. 통제영 거북선 해석에 의한 구조57)

이순신 별제귀선의 연구는 통제영 거북선의 연구로 시작되는 것은 『이충무


공전서』에 통제영 거북선은 이순신 별제귀선의 구제에서 나왔다는 내용과
방패 높이가 4.3척이라는 치수의 기록이다.
가장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통제영 거북선 그림의 입체구조 해석이다. 통제
영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소실점으로 표현된 그림이
아니고 1795년 당시 그림의 표현양식인 다시점 역원근법으로 표현되어있어
풍선에 바람을 넣은 것처럼 뒤쪽이 크게 부풀어있다. 입체구조를 해석하기 전
에 설명문의 내용과 다르게 오류가 있는 부분을 수정 후 분석하기로 한다.
설명문에는 통제영 거북선 개판 중앙에는 1.5척(약 45cm)의 긴 통로가 있
어 돛대를 눕히고 세웠다고 하는데 원본 <그림 37>의 화살표 표시에는 뒤쪽
의 통로가 일정한 것 같지만 왜곡으로 만들어진 구조로 패란 끝과 개판의 끝
부분이 크게 열려있는 표현으로 그려져 있다.
3D 컴퓨터 그래픽 모델로 재현하면 <그림 38>과 같이 만들어진다.
이분의「행록」에는 “개판 위는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였다”58)는 기록에 의하면 선미부분이 벌어
져 있는 구조로는 개판 상단으로 사람이 다닐 수 없게 되어있고 구조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구조로 수정하기로 한다. 1.5척의 좁은 통로의 구조로 수정하
면 <그림 39>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통로는 일정한 너비로 수정되었지만 개판의 형태가 타원형으로 포혈이 하늘
방향으로 향하고 있고, 측면에서 관찰하면 포혈이 둥근 호를 그리며 배열되어
있다. 이 포혈에 화포를 배치한다면 바닥면이 계단식으로 만들어져야 하고 병

57) 홍순구,「임진왜란 거북선 개판(蓋板)의 구조」,『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11권 3호, 2011, pp.201∼


208.
58)『李忠武公全書』附錄1, 行錄, 從子 正郞 芬.

51
사가 서있으면 천장의 높이가 모두 다른 구조가 만들어진다.
분석된 입체구조를 해석하면 포혈이 일정한 높이를 가지려면 개판 상단은
평면구조로 되어있어야 한다. 또한 화포나 조총은 하늘방향이 아닌 좌우 현측
전방을 향하려면 <그림 37>과 같이 개판 상단의 통로 안쪽에서 세 번째 판
자에서부터 모서리가 생기도록 꺾여있어야 한다.
통제영 거북선의 구조해석이 어려운 것은 다시점 역원근법의 특징으로 <그
림 41>은 역원근법의 오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한 예이다. 뒤쪽을 크게
그리면서 아래로 급하게 마무리를 하면 원본의 그림처럼 오류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른쪽 그림은 처음 시작되는 선의 방향을 직선으로 시작하
는 경우 <그림 42>와 같은 일정한 높이의 포혈이 그려지고 개판의 상단은
평면이 된다. 또한 포혈은 좌우 정면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것을 3D 컴퓨터 그
래픽 모델로 재현하면 <그림 43>의 복원도가 만들어진다.
분석결과를 종합하면 통제영 개판의 상단은 평면이고 좌우 현측의 포혈이
정면으로 향하려면 개판은 마름모꼴의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림 37> 표현의 오류부분 <그림 38> 3D 모델 재현

<그림 39> 중앙 통로의 수정 모델

52
<그림 40> 통제영 거북선 개판의 해석

<그림 41> 역원근법 곡선 표현의 특징

<그림 42> 수정된 개판 구조

<그림 43> 3D 모델로 복원된 통제영 거북선

53
이순신 별제귀선의 원형연구에서 그동안 거북선의 층수 해석에 논란이 되어
왔던 것은 통제영 거북선의 치수 해석이었다.『이충무공전서』에 거북선의 높
이에 관한 치수는 1층 선체에 해당하는 7.5척의 현판의 높이와 현란에서 패란
까지의 높이 4.3척(130cm)59)의 치수만 기록되어있고 거북선 전체 높이에 대
한 치수의 기록은 없다. 현란에서 패란까지의 높이란 방패의 높이로 2층의 높
이를 말하는 치수로 방패높이 해석의 오류에 대한 검토는 이전의 ‘1.2. 높이
해석에 의한 구조’에서 살펴보았다.
2015년 홍순구는 4.3척의 치수를 현란과 멍에의 결구법으로 해석해 학술논
문60)으로 발표하였다. 통제영 거북선의 4.3척 방패높이는 돌격선 별제귀선의
완벽한 방호와 근접전에서 화포 공격을 위해 특수 설계된 방패 높이의 치수라
고 연구결과에서 밝혔다.
<그림 44>의 현란-방패-패란은 2층의 높이를 결정하는 부재들이다.『각
선도본』에 판옥선(전선)의 방패높이는 5척(150cm)으로 기록61)되어있다. 통
제영 거북선의 방패 높이는 4.3척(130cm)으로 방패만의 높이를 기록한 것이
고 현란과 패란의 결구에 대한 내용은 설명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2층의 높이
의 추정에는 결구법이 먼저 분석 되어야 해석이 가능하다.
판옥선과 통제영 거북선의 방패높이의 치수 기록이 낮은 것은 현란과 멍에
의 결구법이 걸침턱맞춤으로 고정되어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걸침턱맞
춤은 현란의 높이가 기본적으로 높게 위치하기 때문으로 2층을 구성하는 현란
-방패-패란의 높이는 2m 정도로 선내에서 수군이 활동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59) 영조척 1척은 학자의 주장에 따라 달라 평균치 30cm로 환산하였다.


60) 이순신 별제귀선이 학술적으로 연구된 지 81년 만에 4.3척 치수 해석의 이론적 근거를 발표하였다.
홍순구,「1795년 통제영 거북선의 높이해석에 의한 임진왜란 거북선 선형 연구」,『조형미디어학』,
18권 3호, 2015.
61) 『각선도본』, 戰船, “下層信防牌高五尺”

54
<그림 44> 판옥선(전선)과 통제영 거북선의 현란과 멍에의 결구

<그림 45>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현란과 멍에의 결구

<그림 46> 이순신 종가 귀선도2의 현란과 멍에의 결구

55
<그림 44>의 판옥선과 통제영 거북선, <그림 45>의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 46>의 이순신 종가의 귀선도에서 상대적인 크기, 비례가 정확하게 지
켜진 표현은 아니지만 횡량, 현란, 멍에의 결구법62)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판옥선의 경우 멍에 위로 현란이 걸쳐 있고, 통제영거북선 횡량의 결구를
살펴보면 현란이 선수 전면으로 길게 돌출되어 있고 횡량 위에 위치한다. 또
한 다른 부재보다 상대적으로 높이가 두껍게 그려져 있고 멍에와의 맞춤도 멍
에 위로 또는 부분적으로 겹쳐서 현란이 위에 얹혀있는 구조로 확인된다. 현
란에 있는 많은 수의 나머지 멍에도 현란의 중앙보다는 대체로 아래쪽으로 정
렬되어있다.
<그림 45>의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경우 현란의 중간에 구멍을 뚫고 멍에
를 끼워넣고 쐐기를 박아 고정시키는 장부맞춤63)이 분명하게 표현되어있다.
현란과 멍에의 장구맞춤은 방패가 얹어지는 현란의 상단위치가 걸침턱보다 상
대적으로 많이 낮아 2층의 구성에서 방패의 치수는 상대적으로 커져야 2층의
높이가 만들어진다.
<그림 46>의 이순신 종가 귀선도의 경우 두꺼운 현란의 높이와 현란의 밑
에 위치한 멍에는 통제영 거북선과 매우 유사해 걸침턱맞춤의 해석을 뒷받침
한다. 이순신의 별제귀선에서 유래되었다는 통제영 거북선과 이순신 종가 귀
선도는 현란과 멍에의 결구법에서 같지만 방패에 패문이 있는 것도 같아서 별
제귀선의 구제에서 나왔다는 것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그림 47>은 장부맞춤과 걸침턱맞춤을 그래픽으로 표현한 경우로 장부맞
춤은 현란의 중심으로 멍에가 통과해 결구되는 방식으로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62) 김왕직, 『한국건축용어사전』, 동녘, 2007, p.321, 결구란 목조구조물에서 이음과 맞춤으로서 서로
연결되는 부분을 결구라고 한다.
63)한쪽 재료에 장부를, 다른 재료에 장부구멍을 파서 재료를 접합하는 것. 대부분의 경우 비녀장, 쐐기,
꽂임촉 등으로 보강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88496&cid=50320&categoryId=50320

56
맞춤에 적용되었다.
걸침턱맞춤은 멍에 위로 현란이 걸쳐 고정되는 맞춤으로 통제영 거북선과
이순신 종가 귀선도에 적용되었다. *표는 방패가 위로 얹어지는 곳으로 걸침
턱맞춤이 장부맞춤보다 기본적으로 훨씬 높은 것이 특징이다.

<그림 47> 결구의 차이에 의한 현란 상단의 높이 변화

<그림 48>과 <그림 49>는 4.3척의 방패높이를 어떻게 해석 하는지에 따


라 거북선의 층수가 달라지는지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그림 48>은 전라좌
수영 거북선의 현란 높이에 4.3척의 방패를 얹고 신장 161cm의 병사를 세웠
을 때 천장의 높이가 낮아 서있기 조차 어려운 높이가 되기 때문에 개판을 둥
근 타원형으로 설계해 머리위로 공간을 강제로 만든 경우로 현재 복원된 거북
선들은 모두 이 해석을 기준으로 실물 크기의 거북선으로 복원되었다.
<그림 49>는 통제영 거북선의 현란과 멍에를 걸침턱맞춤으로 해석하고 현
멍에, 1.7척(약 53cm)높이의 현란, 4.3척의 방패높이, 패란을 결구시킨 경우
로 천장의 높이는 6.5척(약 2m) 정도로 설계하면 병사는 서서 노를 젓고 밖
의 상황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이상적인 2층이 만들어진다.

57
<그림 48>현란, 멍에의 장부맞춤과 2층 높이

<그림 49> 현란과 멍에의 걸침턱맞춤과 2층 높이

58
1.5. 전라좌수영 거북선 해석에 의한 구조64)

통제영 거북선은 이순신 별제귀선에서 유래되었다는『이충무공전서』의 기


록에도 불구하고 거북선 원형연구에 전라좌수영 거북선이 집중적으로 연구된
배경은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에서 구조와 형태가 분명하게 인식되기 때문이
다. 개판에는 거북무늬까지 그려져 있어 타원형의 구조로 쉽게 해석될 수 있
다. 거북선 개판의 상단은 평면이라는 견해가 언론에 발표65)된 것은 2010년
으로 이전에는 개판에 대한 문제제기가 전혀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누구도
개판의 중앙부분이 볼록한 곡선의 타원형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
나 개판의 구조는 보이는 것과 전혀 다르게 이덕홍의 귀갑선과 통제영 거북선
개판의 구조처럼 상단은 평면이고 마름모꼴의 구조이다.

<그림 50> 전라좌수영 거북선

전라좌수영 거북선 개판의 거북무늬66)는 그려진 것으로 개판의 구조를 해


석하기 위해서는 1795년 당시의 문양과 형태에 관한 표현양식을 살펴볼 필요

64) 홍순구,「임진왜란 거북선 개판(蓋板)의 구조」,『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1권 3호, 2011, pp.201


∼208.
65)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02&num=843
66)『李忠武公全書』, 卷首 圖說. “覆板上 畫龜紋”

59
가 있다.
1795년 당시 문양이 있는 구조물의 입체표현은 눈으로 보이는 소실점과 관
계없이 형태와 문양은 별개의 것으로 간주해 표현되었다. 형태가 그려지면 형
태 안쪽으로는 일정한 문양의 크기로 반복해서 채우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림 52>67)는 제기도설과 현전 제기를 비교한 그림으로 가장 오른쪽 그
림은 현전 제기이고 왼쪽 세 개는 그림으로 표현한 예이다. 가는 대나무를 엮
어 만든 문양의 표현에서 소실점의 표현보다는 형태의 테두리 안에 동일한 문
양을 정면의 시점으로 채워 넣은 경우가 된다. 시점의 표현은 전체적인 형태
는 정면의 시점으로 그려지고 입구부분은 어떤 형태인지 한 장의 그림으로 설
명하기 위해 약간 위에서 본 시점으로 입구부분을 그려서 표현했다.

<그림 51> 제기도설의 문양 표현과 현전제기

67) 하은미, 「宗廟祭器와 朝鮮時代諸器圖說硏究」,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10, p.113.

60
<그림 53>의 경우도 앞의 것과 같은 표현양식으로 그려져 있지만 상단에
위치한 둥근 입구의 형태를 지나치게 위의 시점으로 표현되어 왜곡이 심하게
그려진 경우이다. 여섯 개의 항아리 형태는 바닥면이 거의 수평으로 그려 정
면의 시점으로 표현했다. 표면의 문양은 좌우 양쪽으로 갈수록 왜곡되는 현대
의 소실점 표현이 아니고 정면의 시점으로 문양의 채워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입구부분은 항아리와 같이 평면의 둥근 형태이지만 그림에서는 뒤쪽
테두리선이 지나치게 위로 올라온 형태로 표현되어 있어 입구부분이 앞쪽으로
휘어져 있는 것으로 판단될 정도로 입구의 형태가 왜곡되어있다. 다른 특징으
로는 입체물이 아니라 납작한 평면처럼 지각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1795년의
통제영과 전자좌수영 거북선 그림의 구조해석을 현대의 소실점으로 분석하면
오류가 발생한다.

<그림 52> 제기도설의 입체표현

61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개판이 자연스럽게 타원형으로 보이는 것은 앞에서 분
석한 그림들과 같이 개판의 상단은 평면이지만 상단의 위쪽을 보여주기 위해
불룩하게 표현한 경우가 된다. 또한 우리가 자연스럽게 타원형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단에서 상단까지 거북무늬가 정면의 시점으로 채워져 있고 개판 상단
의 곡선이 선수에서 선미까지 부드럽게 하나의 선으로 표현되어 있어 착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개판의 거북무늬만 살펴보면 벽지처럼 평면적으로 지각되
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기도설의 표현양식은 한 장의 그림에 모든 구조를 설명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앞쪽보다는 뒤쪽이 커지는 다시점 역원근법을 사용했는데 전라좌수영과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에서도 뒤쪽에 위치한 구조물이 크게 표현되고 부풀어
오른 형태는 이러한 표현양식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기술도의 경우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 시점을 달리해서 표현하기 때문에 전제적인 구조와
형태는 소실점이 없어 왜곡되어 보이게 되고 해석을 위해서는 각각을 별개로
해석하고 조합해야 전체의 해석이 된다. 특히 단면이 둥근 형태일 때 왜곡이
심하게 나타나고 해석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림 54>는 1615년 『화기
도감의궤』의 백자총통 도설로 좌우 양끝의 둥근 단면과 두께를 한 장으로 보
여주기 위해 사각으로 잘려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림 53> 『화기도감의궤』백자총통의 입체표현

62
『이충무공전서』의 두 거북선 그림은 현대의 소실점 표현과 반대인 다시점
역원근법으로 입체를 표현했다. 따라서 시대적 입체표현양식의 특징을 고려해
입체구조가 해석되지 않으면 시각적 해석의 오류를 만들어 전혀 다른 구조로
해석하게 된다.
선행연구 검토에서 개판의 구조와 형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과 개판
상단을 평면이 아닌 타원형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거북선
의 개판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타원형으로 해석한 것이 분명하다.
거북무늬의 표현으로 인한 시각적 착시를 제거하기 위해 <그림 55>와 같
이 개판 상단의 거북무늬를 삭제하면 개판 중앙의 윗부분이 평평한 평면구조
로 지각된다.

<그림 54> 개판 상단의 거북무늬 삭제

<그림 55>에서 개판 상단의 외곽선을 삭제한다.

<그림 55> 개판 상단의 외곽선 삭제

63
<그림 57>에서 b와 c의 연결된 사선을 뒤쪽으로 연장시켜 d의 사선을 만
든 후 연결시키면 개판 뒷부분에 면이 생성된다.
개판 앞부분 e의 모서리 곡선을 f와 같이 뒤쪽으로 대칭이 되도록 배치한
후 d와 연결시키면 완전한 평면구조의 개판 상단이 만들어진다. 재구성된 입
체구조는 현대의 소실점처럼 표현되어 양감(量感)의 표현까지 만들어지며, 꼬
리부분의 g와 h는 앞쪽과 뒤쪽의 공간감까지 표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상태로도 개판의 구조는 전후좌우로 마름모꼴의 구조라는 것을 판단
할 수 있지만 용머리가 있는 부분의 구조를 해석하기로 한다.

\
<그림 56> 개판상단의 구조

개판의 전면은 용머리가 앞쪽에 크게 가려져 있어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우


나 상세하게 표현된 용머리 목의 형태와 부착상태를 분석하면 개판 전면 구조
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58>에서 a의 용머리는 대략 10~13도 정도의 기울기로 목의 뒤쪽
두께와 형태는 화살표와 같이 둥근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앞쪽 모서
리에 위치한 용머리를 떼어내 개판 전면의 중앙에 위치시킨 후 목의 둥근 두
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개판 전면이 어떤 구조이어야 하는지 분석하도록 한
다.

64
b의 경우 개판의 전면이 수직구조라면 목의 기울기를 고려할 때 지나치게
돌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목의 뒷부분이 수직으로 잘려져 표현되어야 부착
이 가능하다.
<그림 59>는 통영의 거북선으로 개판의 전면이 수직구조로 만들어져 있어
돌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용머리 목의 중간부분이 잘려 선체 안쪽으로 위치
해 시킨 경우이다. b와 유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c의 경우는 개판 전면을 사다리꼴 구조를 적용시킨 경우로 목의 두께가 유
지되어 원본의 그려진 용머리 표현처럼 부착될 수 있다.

<그림 57> 개판전면의 수직과 사선구조의 비교

<그림 58> 통영의 전라좌수영 거북선

65
사선구조로 만들어진 개판 전면에 용머리가 부착한 상태를 3D 컴퓨터 그래
픽 모델로 재현하면 <그림 60>의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과 일치하게 된다.
앞에서 분석된 통제영 거북선과 함께 거북선 개판은 모두 사다리꼴이라는 것
으로 분명하게 해석된다.

<그림 59> 3D 모델로 재현된 전라좌수영 거북선

앞의 분석에서 거북선 개판은 모두 사다리꼴 구조라는 것으로 해석되었


다. 거북선의 구조가 거북형상으로 보이기 위해서는『선조실록』의 “형상은
거북 등 같으며 옆과 양 머리에 쇠 송곳을 꽂았다”68)는 문헌의 기록을 비교
하면 거북무늬는 개판 전면까지 그려진 상태가 되어야 한다.
전라좌수영 그림에는 용머리가 앞쪽으로 크게 그려져 있어 개판 전면의 거
북무늬의 표현이 생략된 것이다. 3D 컴퓨터 그래픽 모델로 재현된 <그림
61>에서 개판은 전후좌우가 사다리꼴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 거북형상과 더
가깝게 인식된다.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의 거북무늬에는 선수에서 선미로 2개의 흰줄이 길
게 그려져 있다. 실재 거북이 등에는 흰줄이 없기 때문에 상단의 흰줄은 윗면
과 좌우 경사진 면이 만나는 모서리 부분이라고 해석된다. <그림 62>는 개

68)『宣祖實錄』 29年, 11月 7日. “狀若龜背, 以鐵釘揷於頭”

66
판의 현측과 상단의 구조를 형성하는 부재에 색을 칠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둔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개판구조 분석
에서 두 거북선은 완전한 3층 구조로 전후좌우 사다리꼴의 개판 구조라는 것
을 검증할 수 있었다.

<그림 60> 3D 모델로 재현된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 61> 개판의 거북무늬와 흰줄

67
2. 이덕홍의 귀갑선도(龜甲船圖)

「귀갑선도」69)는 1593년 이덕홍이 귀갑선을 사용해 왜적을 물리칠 계책으


로 귀갑선 건조를 건의하기 위한 「상행재소(上行在疏)」에 첨부된 거북선 구
상도이다. 「귀갑선도」는 거북선의 구조가 그림으로 표현된 현존 사료 중에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구조의 표현과 구체적인 설명은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
선 구조와 전술의 이론적 근거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그동안
이순신 별제귀선의 원형연구에는『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전라좌수영 두
거북선 그림과 설명문을 중심으로 연구되어왔고 이덕홍의 「귀갑선도」는 거
북선 최초의 그림으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귀갑선 구상도는 임진왜란 당시
의 전술을 거북선에 적용한 구상도이고 이순신의 별제귀선이 해전에서 승전을
하고 있던 시기와 같아 당시 거북선 전술에 대한 배경을 살펴볼 수 있어 중요
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70)
이덕홍은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많은 수의 왜선들이 해안을 드나들고 있고
왜선이 내륙에 하선하지 못하도록 목책을 해안가에 설치하고, 귀갑선으로 왜
적을 물리칠 계책으로 귀갑선 구상도와 전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상소
문을 올렸다.

귀갑선은 적을 격파하는 좋은 계책입니다. 그 체제는 등에는 창검을 붙


이고, 뱃머리에는 쇠뇌를 매복시키고, 허리에는 판옥을 지어 사수를 그 속
에 두고, 옆으로는 활을 쏘는 구멍(射穴)을 내고 아래로는 배의 내부로
통하게 합니다. 중간에 총통(銃筒)과 큰 도끼를 감추어 때로는 쳐부수고
때로는 탄환을 쏘고 때로는 활을 쏘고 때로는 쳐서 부딪히려는 자와 부수

69)「귀갑선도」는 1766년에 간행된 이덕홍(1541∼1596)의 『艮齋集』중간본에 실려 있는 거북선 그림


으로 현존하는 거북선 그림 중에 가장 오래되었고, 임진왜란 당시의 사료가 된다.
70) 홍순구,「임진왜란 거북선 개판(蓋板)의 구조」,『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11권 3호, 2011,
pp.201-210.

68
어 버리려는 자를 흩어지게 하면 왜선이 비록 많으나 그 계책을 쓸 곳이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 듣건대, 호남의 여러 장수들이 이것을 써서 왜선을
크게 무찔렀다 하오니, 그 효과가 명백히 있었음을 아울러 아룁니다. 만약
강나루에도 이 배를 사용하면 적이 반드시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무릇
이 몇 가지의 조목은 모두 육지에 내리지 못하게 미리 방비하는 기구에
대 한 것으로, 앞의 것을 이어받은 바도 없고, 뒤에 시험한 바도 없습니
다. 단지 병화를 근심하던 가운데 얻은 것을 사리로 미루어 헤아리고, 보
고들은 것을 참작하여 밤낮으로 골똘히 생각하고 궁리해서 감히 한 말 올
린 것입니다.71)72)

귀갑선의 제도는 등에는 창검을 꽂고, 뱃머리에는 쇠뇌를 매복시키고,


허리에 는 작은 판옥을 지어 사수를 그 속에 두고, 옆으로는 사혈을 내고
아래로는 배의 내부로 통하게 합니다. 중간부분에 총통과 큰 도끼를 싣고
서 때로는 때려 부수고, 때로는 화포를 쏘고, 때로는 활을 쏘고, 때로는
공격한다면 적들이 비록 많이 오더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살(목책)과 이 배(귀갑선)를 마련하는 데 그 공력은 매우 적
으나 그 효과는 매우 크므로 아마 각 관원으로 하여금 한 달의 공력(功
力)만 들이면 세상에 없는 효과를 거둘 것입니다. 73)74)

<그림 62>의 구상도에는 주변으로 구조에 대한 설명과 거북선 건조의

71) 이재곤,「艮齋 李德弘의 註釋書 撰述과 壬亂 克服意識」, 安東大學校, 석사학위논문, 2000, p.82.
72)『艮齋集』券 2, 「上王世子書 壬辰 」, 有龜甲之船, 亦破賊之良規也. 其制則背著 劒, 頭設伏弩, 腰置
板屋, 容射手於其中, 傍通射穴, 下通船心. 中藏銃筒及大斧, 或打破或放丸, 或射 或擊, 觸之者碎, 犯之者
潰, 則賊船雖多, 無所用其計矣. 頃聞湖南諸將, 用此大破賊船, 明有其效, 故幷及之. 若於江津, 亦用此船,
則賊必不得渡矣. 凡此數條, 皆豫防下陸之具, 而前無所承, 後無 所試. 只得於兵火憂憫之中, 推以事理, 雜
以聞見, 晝思夜度, 敢爲一說.
73) 이재곤, 앞의 논문, p.82.
74)『艮齋集』, 「上行在疏 幷圖」 , 龜甲之制, 背著鎗劒, 頭設伏弩, 腰置小板屋, 容射手於其中, 傍通射穴,
下通船心, 中載銃筒及大斧, 或打破或放 , 或射或擊, 則賊來雖多, 必無如 之何矣. 然則此箭此船之設, 其
功甚小, 而其效甚遠, 令各官費一月之功, 可成不世之效矣. 伏願 聖明戒此日無前之辱, 忘芻 下之言, 討賊
匡國之後, 特令知首末者, 以宣敎之, 以檢督之, 以防 後日之患焉.

69
세부적인 시행방안까지 적어놓았다.

<그림 62> 『간재집』의 귀갑선도

귀갑선도, 가운데는 비우고 바깥은 덮어서 병기를 숨깁니다. 주, 군 등에 만


들도록 명하신다면 주에는 세 척, 군에는 두 척, 현에는 한 척씩 만들면 몇
백 척은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75)

구상도의 특징으로는 횡단면도와 같은 측면의 표현과 마름모꼴의 개판에는


창검이 꽂혀있고 중앙에는 작은 판옥이 그려져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전형적
인 거북이의 등껍질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선수 전면에는 그림과 같이 6개의
포혈이 가로로 배열될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측면의 표현이 분명하고,
판옥의 오른쪽으로 선내와 개판의 위로 통하는 좁은 통로가 그려져 있는 것은
龜甲船圖의 글자가 위치해있는 오른쪽 부분이 선수부분이 되어 귀갑선의 우측
면도를 표현한 구상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와 돛대의 표현은 없다. 중앙의
판옥에는 사수를 매복시킨다는 전술을 설명하고 있지만 커다랗게 동그라미 하
나로 표현되어있다. 전체적인 구조가 조직적이고 구체적이지 못한 내·외부의
표현들은 설계도가 아닌 전형적인 설명용 그림이라는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

75) 앞의 책, 上行在疏幷圖의 말미에 첨부된 龜甲船圖의 註. 龜甲船圖 中虛外泛以 藏兵器 令州郡辦出而州


三郡二縣一則可得數百船矣

70
다.
1413년, 1415년 태종실록에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있지만 거북선의 구조,
크기, 선형을 알 수 있는 내용은 없다. 이 후 177년 만에 나타난「귀갑선도」
는 거북선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아이디어 수준의 그림이지만 그의 설명에
는 임진왜란 당시의 무기·전술과 거북선이 어떻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구체적
내용들을 상소문에 적고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과 전술에 대한 이해를
배경으로 이순신 별제귀선의 원형과 실체를 밝힐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귀갑선의 구조와 형태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1)거북 등딱지 형태를 가지고 있고, 개판의 상단은 평면이다.


2)개판의 측면은 사다리꼴의 구조로 되어있다.
3)양 머리와 개판 중앙 상단에는 창검을 꽂았다.
4)개판에는 작은 판옥이 허리에 위치하고 활을 쏘는 구멍(射穴)이 있다.
5)높이를 기준으로 중간위치에는 6개의 포혈이 수평으로 배치되어있다.
6)2층 구조에 작은 판옥을 중간에 설치한 2층 판옥 구조이다.
7)항해를 위한 노, 돛대의 표현은 없다.

아래의 <그림 64>는 귀갑선의 내부구조의 분석하기 위한 것으로 갑판의


포혈의 위치와 상소문의 전술이 가능하도록 수군을 배치시키면 이덕홍이 구상
한 거북선은 2층 판옥구조 거북선의 이라고 할 수 있다.
1795년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판옥이 없는 3층 구조 거북선이지만
이덕홍의 귀갑선은 2층 구조에 중앙에 판옥을 세운 거북선의 유형이다.
<그림 64>에서 포혈 옆에 수군이 서있는 곳은 2층 포판으로 많은 수의 격
군이 서서 노를 젓고, 화포도 쏘는 2층 공간이 된다. 작은 판옥에는 지휘관과

71
사수가 위치해 판옥 안에 몸을 숨긴 채로 작은 구멍을 통해 외부를 살피고 명
령을 내리며, 사수는 높은 위치에서 활, 쇠뇌 등을 쏴서 적군을 사살하는 곳으
로 판옥선의 장대와 같은 기능을 한다. 장대와 다른 것은 왜적의 조총과 화살
로부터 완전한 방호를 위해 사방과 천장을 단단한 판자로 막고 사혈을 뚫어
매복한 상태에서 공격하는 것으로 귀갑선은 2층 판옥구조 거북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63> 귀갑선의 구조

그림의 작은 판옥에는 구멍이 크게 하나 그려져 있는데 실재 구멍이 하나라


는 것은 아니고 판옥의 전술을 설명한 것이다. 「각선도본」의 전선에 있는
장대는 지휘관이 위치하는 곳으로 장대 주변에는 사방으로 많은 수의 사혈이
그려져 있다. 그림에서 개판의 통로는 돛과 돛대를 설치하는 등의 임무를 수
행하기 위한 구조가 된다.
귀갑선의 3D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위한 모델은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크
기를 고려해 저판 길이는 50척의 크기로 선정했고, 수군의 신장은 당시의 수
군 평균 신장 161cm를 기준으로 상장의 높이는 수군의 활동에 제약이 없고
전선이라는 특성을 고려해 2m로 설정하였다. 선수와 선미는 이덕홍의 구상대
로 마름모꼴로 구상해 <그림 65>, <그림 66>과 같이 입체구조로 복원되었

72
다. 이덕홍의 구상도는 배의 길이와 높이의 비례를 고려해 그려진 것이 아니
기 때문에 가로의 길이가 짧게 그려져 있어 다르게 보일 수 있으나 시뮬레이
션 모델의 모든 크기는 사람을 기준으로 실재의 비례를 적용해 제작되었다.
귀갑선을 3D 컴퓨터 그래픽 모델로 복원하면 <그림 67>의 구조로 만들어진
다.

<그림 64> 이덕홍의 귀갑선 복원도

<그림 65> 귀갑선의 횡단면 내부구조

73
이덕홍의 귀갑선 구조와 전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3> 이덕홍 귀갑선의 구조와 전법

구 조 전 술
등에는 창검을 붙이고, 왜적의 등선 저지

뱃머리에는 쇠뇌를 매복시키고, 선수에 쇠뇌 배치-인명살상


지휘관은 높은 판옥에서 적군의 동태파
악 및 명령하달,
허리에는 판옥, 사수를 그 속에 두고,
사수를 높은 곳에 배치해서 선상위의 적
군을 사살하는 전술
옆으로는 활을 쏘는 구멍(射穴)을 내고, 전후좌우 사수(射手)의 배치

아래로는 배의 내부로 통하게, 갑판과 부분상갑판의 계단통로

2층 상장 전후좌우 방패의 포혈에 화포


중간에 총통(銃筒)외 큰 도끼를 감추어
배치, 큰 도끼 설치

때로는 쳐부수고, 큰 도끼로 쳐부순다.

때로는 탄환을 쏘고, 화포를 쏜다.

때로는 활을 쏘고, 활을 쏜다.

때로는 쳐서 부딪히려는 자와
충돌로 들이받아 깨트린다.
부수어 버리려는 자를 흩어지게,

<그림 67>의 오른쪽 하단의 측면도가 이덕홍이 구상한 귀갑선의 구조와


형태이다. 왼쪽 상단이 평면도이고 그 아래는 입면도로 구상도와는 느낌이 많
이 다르다. 오른쪽 상단은 사시도로 귀갑선의 전체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돛
대는 기록내용이 없어 제작에서 제외시켰지만 이물, 한판 돛대가 있을 것이다.
이덕홍의 귀갑선의 특징은 2층 구조, 선수와 선미가 뾰족하고, 개판의 쇠
송곳은 개판의 선수 전면, 개판 상단, 선미 후면에만 꽂혀 있다. <그림 65>,

74
<그림 66> 이덕홍의 2층 판옥구조 귀갑선 복원도

<그림 66>의 구조에서 확인이 가능하듯이 좌우 방패가 있는 현측은 수직


구조 이어야 노 젓기와 화포를 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기 때문에 쇠 송곳을
그려 넣지 않은 것으로 이덕홍의 구상도와 정확하게 일치된다. 이덕홍은 왜적
을 물리치고 극난극복을 위한 계책으로 이 구상도를 고민했던 그의 생각이 귀
갑선에 그대로 반영되어있다.

요즈음 듣건대, 호남의 여러 장수들이 이것을 써서 왜선을 크게 무찔렀다 하


오니, 그 효과가 명백히 있었음을 아울러 아룁니다.
만약 강나루에도 이 배를 사용하면 적이 반드시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무릇 이 몇 가지의 조목은 모두 육지에 내리지 못하게 미리 방비하는 기구에

75
대 한 것으로, 앞의 것을 이어받은 바도 없고, 뒤에 시험한 바도 없습니다.
단지 병화(兵火)를 근심하던 가운데 얻은 것을 사리(事理)로 미루어 헤아리
고, 보고들은 것을 참작하여 밤낮으로 골똘히 생각하고 궁리해서 감히 한 말
올린 것입니다.76)

앞의 글은 이덕홍이 왕세자에게 올린 상소문 내용으로 1592년 이순신은 남


해안에서 거북선으로 승리하고 있을 때 이덕홍도 상소문과 구상도를 올려 거
북선의 유용함을 적극 건의했던 것이다. 이 글에서 호남의 장수들이 거북선을
사용해 크게 이기고 있다는 것은 이덕홍의 귀갑선도 구상이 이순신의 별제귀
선에 반영된 거북선으로 이기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왜적
의 특성인 조총과 칼을 들고 등선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는 구조의 거북선을
말한 것이다. 즉, 이순신이 거북선으로 승리하고 있다는 것에 어떤 구조와 형
태이든지 간에 거북선으로 싸우면 승산이 있다는 해석이다. 이순신의 별제귀
선은 이덕홍의 귀갑선과 전혀 다른 구조의 거북선이다.
당시 이덕홍은 귀갑선 구상을 위해 글의 내용처럼 당시의 거북선에 관한 모
든 지식을 동원한 것으로 그의 귀갑선과 전법은 그 당시의 거북선에 관한 종
합적인 정보를 구상도에 담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귀갑선의 발상은 그 구조가 간단하고 2층 판옥구조의 거북선을 구상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귀갑선은 한 달이면 제작할 수 있고 전국에서 만들
면 빠른 시간에 많은 귀갑선을 건조해 조속히 왜적을 물리칠 것을 고민했던
것이다. 이덕홍의 귀갑선은 임진왜란에서 거북선의 기본구조가 어떤 조건을
가져야 하는지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였다.

76)『艮齋集』 上, 155∼156면, 上王世子書 壬辰 , 有龜甲之船, 亦破賊之良規也. 其制則背著 劒, 頭設伏


弩, 腰置板屋, 容射手於其中, 傍通射穴, 下通船心. 中藏銃筒及大斧, 或打破或放丸, 或射 或擊, 觸之者碎,
犯之者潰, 則賊船雖多, 無所用其計矣. 頃聞湖南諸將, 用此大破賊船, 明有其效, 故幷及之. 若於江津, 亦用
此船, 則賊必不得渡矣. 凡此數條, 皆豫防下陸之具, 而前無所承, 後無 所試. 只得於兵火憂憫之中, 推以事
理, 雜以聞見, 晝思夜度, 敢爲一說 .

76
Ⅳ. 이순신 ‘별제귀선’의 구조와 전술 분석

1. 제원

1.1. 크기

별제귀선의 크기에 관한 1차 사료는 이분의「행록」에 “판옥선만 하다”77)라


는 기록이 전부이다. 조선시대 군선의 크기는 저판의 크기를 척도로 삼았다.
별제귀선의 저판 크기는 50척으로 사료분석과 선행연구조사에서 가장 타당성
있는 치수로 확인되었다.78)79)80)81)
이순신 별제귀선의 원형에 관한 치수나 구조를 참고할 수 있는 사료는 통제
영 거북선이지만 200여년의 변천과정이 있었다.
본 연구에서 이덕홍의 귀갑선 분석을 연구문제로 제기한 것은 임진왜란 당
시의 거북선 구조에 대한 지식이나 계승되는 전략과 전술을 살펴보고 이순신
의 별제귀선과 관계를 분석하기 위해서이다. 분석결과 귀갑선과 이순신의 별
제귀선 구조는 전혀 관계가 없었지만 공통점은 개판 상단은 평면이고 사다리
꼴 구조를 기본구조로 사용했다는 중요한 연구 결과를 도출하였다.
별제귀선의 치수는 사료분석과 3D 컴퓨터 그래픽 시뮬레이션으로 분석되었
다. 상장의 길이는 64.7척(20m)으로 추정하였고, 2층 상장의 높이는 통제영
거북선의 방패높이 4.3척과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평균신장 1.61m, 2층
에서 노를 젓고 화포를 장전하는 활동공간을 고려해 6.5척(2m)으로 추정하였
다.

77)『李忠武公全書』附錄1, 行錄, 從子 正郞 芬. “大如板屋”


78) 四龜船, 本板長十把, 左右櫓十六隻, 船將一, 旗牌官二, 捕盜官二, 訓導一, 射夫十, 射手二十四, 火砲匠
十, 沙工八, 船直一, 能櫓軍九十
79) 이순신 종가 귀선도, “...長本十把 廣幾五把 體丈十三...”
80)『旅庵全書』 券18, 車制策, 論兵船火車諸備禦之具, 1939. “龜船則 本板長五十尺 以應對衍之數”
81) 이원식, 1592년 龜船의 主要 置數 推定에 關한 硏究」, 박사학위논문, 한국해양대학원, 2007. p.150.

77
1606년 임진왜란 후 나대용이 “거북선에서 활쏘기가 불편했다”82)는 문헌의
기록은 활을 쏠 수는 있지만 위로 높이 올릴 수 있는 충분한 높이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장 161cm인 사수가 활을 정면으로 세워들었을
때의 높이를 고려해 6.7척(210cm)으로 추정하였다.
별제귀선의 승선인원에 대한 문헌의 기록으로 나대용은 “귀선은 전쟁에 쓰
기는 좋지만 사수와 격군이 125명으로 판옥선보다 적지 않다”83)는 기록과,
이순신의 장계에 “한 전선에 사부와 격군을 합하여 130여 명의 군사를 충당
할 길이 없다.”84)라는 언급이 있어 별제귀선의 정원은 125∼130명 정도가 분
명하다.
치수는 아래의 <그림 67>, <그림 68>과 같다.

<그림 67> 별제귀선의 치수1 (단위: 尺)

82)『宣祖實錄』 39年, 12月 24日 戊午, “射夫赤不便宣”


83)『宣祖實錄』 卷26, 39年 12月 24日 戊午. “加船之策 則龜船雖曰利於戰用 射格之數 不下板屋船
一百二十五名 射夫亦不便宜 故各營各置一隻 不爲加造”.
84) 李舜臣,『李忠武公全書』券2, 狀啓「請反汗一族勿侵之命状」, 25年 2月 10日, “一船射格幷一白三十餘
名之軍充之末由尤悶慮”

78
<그림 68> 별제귀선의 치수2

<표4> 이순신 별제귀선의 제원

구분 사료의 내용 출전
크기(規模) 판옥선만하다 (大如板屋) 이분 「행록」
『선조실록』
승선인원 125∼130여명
이순신 장계
『선조수정실록』
형태(船型) 거북형상(龜船), 엎드린 거북형상
『만기요람』
개판(蓋板) 좁은 길의 십자로, 쇠 송곳 이분 「행록」
방패의 높이 4.3척 『이충무공전서』
범노선(帆櫓船) 『해방의』
행선(行船)
전후좌우로 노 젓기 이동 『선조수정실록』
속도 나는 듯이 빨랐다. 『선조수정실록』
노의 수 16 이순신 종가 귀선도
용머리, 꼬리와 포혈, 좌우 각각 6개의 포혈
화기(火器) 이순신 장계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
“먼저 거북선으로 곧장 적의 층루배 밑으로
전술(戰術) 이순신 장계
치고 들어가 ...”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어도
내부구조 이순신 장계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고..”
채광 개판의 1.5척의 긴 통로 『이충무공전서』
통풍 개판의 1.5척의 긴 통로 『이충무공전서』

79
<그림 69> 별제귀선의 부재별 명칭

80
1.2. 선형

1591년 이순신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면서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거북선을 건조하였다. 왜적은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하고 칼을 잘
쓰며 백병전에 강하고, 일본의 많은 전선과 군사들이 조선으로 이동하게 될
것을 예측하고 대규모 해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일당백이 가능한 혁신적
인 거북선을 구상한 것이 용머리와 꼬리가 있는 3층 구조 거북선이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별제귀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


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
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송곳칼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
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 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 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
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
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
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왜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왜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
나 승리하였다.85)

이순신은 ‘현무’의 형상을 별제귀선에 적용하였다. ‘앞에는 용머리를 붙이고

85)『宣祖修正實錄』, 25年 ,壬辰 (1592), 5月 1日(庚申). 先是, 舜臣大修戰備, 自以意造龜船, 其制船上鋪


板如龜, 背上有十字細路, 纔容我人通行, 餘皆列揷刀、錐。 前作龍頭, 口爲銃穴, 後爲龜尾, 尾下有銃穴。
左右各有銃穴六, 藏兵其底, 四面發砲, 進退縱橫, 捷速如飛。 戰時覆以編茅, 使錐、刀不露, 賊超登, 則掐
于錐、刀, 掩圍則火銃齊發。 橫行賊船中, 我軍無所損, 而所向披靡, 以此常勝。

81
뒤에는 꼬리처럼 되어있고 그 밑에 포혈이 있다’는 것으로 돌출된 구조의 용
머리 입에서 천지를 울리는 요란한 화포소리와 많은 수의 철환을 날려 보내고
현무의 형상과 기운으로 무장된 거북선은 조선 수군의 사기를 높이고, 왜적에
게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거북선 구조에 심리적 요인까지 반영한 독창
적인 돌격선 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북선 사료의 분석에서 거북선에 용머리를 붙여 입으로 화포를 쏘고, 꼬리
까지 적용한 경우는 이순신의 별제귀선이 유일하다.
거북선이 ‘현무’의 형상으로 구상되었다는 것은 1748년 경상좌수사 이언섭
의 장계초고에도 나타는데 ‘외양은 신령한 거북이 물 위를 달려가는 것과 비
슷하다는 표현과’ 1795년 통제용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용머리는 연기를 토
하는 용도로 바뀌었다. 1808년 『순조실록』에 “노 없이 바다에 떠다니는 것
이 마치 거북이 떠 있는 것 같으며, 입과 코에서 연기가 나온다는” 기록에서
이순신 별제귀선을 ‘현무’의 형상으로 창조한 이후 시대가 바뀌어도 신령한 거
북의 상징인 거북선은 지속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인 이분의「행록」에는 별제귀선이 “거북형상 같아 거
북선”86)이라 하였고, <그림 70>은 문헌의 내용처럼 엎드린 거북의 사진으로
용머리가 상갑판과 수평으로 위치해 있는 통제영 거북선과 별제귀선 복원도와
닮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70> 엎드린 자세의 거북이 형상

86)『李忠武公全書』附錄1, 行錄, 從子 正郞 芬.

82
<그림 71> 측면도

<그림 72> 정면도, 배면도

83
1.3. 구조

별제귀선의 구조는 이분의 「행록」에 언급되어있다.

전선을 창작하니 크기는 판옥선만하고, 위에는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

十字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위에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는 온통


칼과 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다.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
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 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각각 여섯 개의 총 구멍이 있는데 대개

그 모양이 거북이 모양과 같아서 이름을 거북선이라고 했다.87)

<그림 73> 개판 출입구와 십자로

전선을 창작(創作)했다는 기록으로 창작이란 사전적 의미로 ‘새로운 것을 처

87)『李忠武公全書』附錄1, 行錄, 從子 正郞 芬. “創作戰船, 大如板屋, 上覆以板, 板上有十字形細路, 以容


人之上行, 餘皆揷以刀錐, 四無着足之處. 前作龍頭, 口爲銃穴, 後爲龜尾, 尾下有銃穴. 左右各有六穴, 大槩
狀如龜形, 故名曰龜船 ”

84
음 만든 것’이라고 한다.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임진왜란 이전 177년 동안 사
료에는 전혀 기록된 것이 없었다. 이덕홍의 귀갑선 구상에서도 어떤 것을 참
고로 했다는 언급은 없다. 거북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413년으로 ‘거북선
과 왜선으로 꾸민 배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는 내용으로 왜구나 왜적을 상
대하기 위해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거북선으로 상대를 해야 하는
지는 별제귀선의 구조에 반영되어 있다. 별제귀선의 개판은 판자로 되어있고
칼과 송곳을 꽂았다는 기록에서 근접전에서 등선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꽂
은 것으로 별제귀선은 돌격선으로 적진 속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완전
한 방호가 되어야 한다. 특히 단병전에서 칼을 잘 쓰는 대상을 일정거리 만큼
저지하고 활을 사용해 격퇴시키는 전술로는 거북선이 승산이 있었다.
개판에는 십자모양의 좁은 길이 있는데 <그림 73>의 복원도에 십자로가
나타나 있다. 십자로는 쇠 송곳을 꽂은 곳과 쇠 송곳이 없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경계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십자모양의 길은 개판 출입구 부
분에서 출입문 주변의 쇠 송곳이 없는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거북선의 층수에 관계없이 모든 거북선은 개판이 있고 3층 구조에서는 지휘
관과 전투원들이 위치하는 곳으로 거북선의 기본적인 구조와 유형이 만들어지
는 구조물이다. 거북선의 원형연구에서 거북선의 층수와 개판의 구조가 완전
하게 규명되면 거북선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선조실
록』, 『장계』,『이충무공전서』의 사료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596년『선조실록』에 이순신 별제귀선의 개판구조를 직접 언급하는 내용
은 다음과 같다.

상이 이르기를, “귀선(龜船)의 제도는 어떠한가?” 하니,


남이공이 아뢰기를, “사면을 판옥(板屋)으로 꾸미고 형상은 거북 등 같으며
쇠못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는데, 왜선과 만나면 부딪치는 것은 다 부서지
니, 수전에 쓰는 것으로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85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많이 만들지 않는가?” 하니,

조인득(趙仁得)이 아뢰기를, “소신이 황해도에 있을 때에 한 척을 만들어


검(劍)을 꽂고 거북 등과 같이 하였는데, 그 제주가 아주 신묘(神妙)하였
습니다.” 하고,

남이공이 아뢰기를, “전선은 가볍고 빠른 것이 상책입니다. 지금은 군사가


없는 것이 걱정이지 배가 없는 것은 걱정이 아니니, 바닷가에 사는 공천과
사천을 오로지 수군에 충당하면 국가의 계책에 좋을 것입니다.”하였다.88)

위의 내용은 임진왜란 당시로 남이공의 ‘사면을 판옥(板屋)으로 꾸미고, 형


상은 거북 등 같으며, 쇠못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다’는 것은 이순신 별제귀선
의 구조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특히 ‘옆’과 ‘양머리’에 쇠못을 꽂았다는
표현에서 옆은 개판의 좌우 현측을 나타내고, 양머리는 선수와 선미에 경사진
면이 있다는 시각적 표현으로 <그림 62> 이덕홍의 「귀갑선도」에서도 선수
의 개판 전면과 선미의 후면이 사다리꼴로 표현되어있다. 또한, 조인득89)이
임진왜란 중(1594년)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관직으로 있을 때 한 척을 제작했
다는 것으로 ‘등에는 검(劍)을 꽂고 거북 등과 같이 하였다’는 것은 이덕홍의
귀갑선도와 기본구조가 같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거북선의
기본적인 구조는 첫 번째로, 밖을 살필 수 있는 높은 위치가 필요하고 둘째로
는 왜적이 칼을 들고 배에 오르지 못하도록 사방을 판자로 막고 왜적이 기어
오를 수 있는 개판에는 칼이나 쇠 송곳을 꽂고, 세 번째는 화포와 활 등 무기

88)『宣祖實錄』券82, 29年 11月 7日 己亥, 上曰: “龜船之制若何?” 以恭曰: “四面飾以板屋, 狀


若龜背, 以鐵釘揷於傍兩頭。 若與倭船遇, 則所觸皆破。 水戰之具, 莫良於玆。” 上曰: “何不多
造乎?” 趙仁得曰: “小臣在黃海道時, 造一隻, 揷之以劍, 似若龜背。 其制殊爲神妙。” 以恭曰:
“戰艦, 以輕捷爲上。 當今只患無軍, 不患無船。 以公私賤之居海濱者, 專委舟師, 則其於國計,
可謂得矣。”
89) 趙仁得 (?∼1598).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황해도관찰사로 해주 앞바
다의 섬으로 피신하였다가 1594년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전직되었다. 비변사의 건의로 정병
(精兵)을 모집하였으며, 그 뒤 판결사를 지냈다.

86
를 장착한다는 것이다.
<그림 74>는 거북선 개판의 유형을 그래픽으로 표현한 것으로 앞과 뒤가
마름모꼴 구조인지, 전면이 수직구조인지에 따라 쇠 송곳이 꽂히는 위치가 다
르다. 사다리꼴에서는 경사진 기울기가 있어 세 개의 면에 쇠 송곳이 있고, 수
직구조에서는 적이 올라설 수 있는 구역이 개판 상단에만 있기 때문에 한 곳
에 쇠 송곳이 위치한다. 별제귀선은 전후좌우가 사다리꼴로 모든 단면에 쇠
송곳이 꽂힌다.
선조와 남이공의 대사에 ‘옆’과 ‘양머리’는 <그림 74>의 오른쪽에 위치한
전후좌우 마름모꼴의 별제귀선으로 쇠 송곳은 모든 면에 꽂힌 상태가 되며,
엎드려있는 거북이 등의 형상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현재 원형이라고 복원되
어있는 국사교과서, 박물관, 만화, 화폐 등에 있는 거북선들은 모두 선수, 선
미가 수직구조의 유형으로 <그림 75>의 왼쪽구조로 복원되어있다.

<그림 74> 개판의 구조와 칼·송곳 위치

거북선의 선수, 선미가 사다리꼴구조라는 것은 1748년 이언섭의 장계에


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장계의 내용에는 임진왜란 이순신의 공적을 높이 칭송
하면서 누선을 거북선으로 대치할 것을 극구 주청하고 있는데 이 시기의 거북
선은『이충무공전서』의 두 거북선보다 47년 이전의 것으로 거북선 개판의

87
구조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머리는 가파르고 뾰족하게 만들었으며”90)
라는 내용과 “누선과 비교한다면 그 빠르고 둔함이 하늘과 땅의 차이로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91)의 내용에서 선수부분이 경사진 사선구조로 뾰족하다는
것으로 현재 선수 전면이 수직구조로 복원된 거북선들과 형태가 전혀 다르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원된 <그림 18>의 해군사관학교 2층 구조 거북선, <그림 19>의 3층
구조 거북선, KBS 드라마 ≪임진왜란 1592≫, 영화 ≪명량≫에서 등장한 거
북선은 선수 전면이 수직으로 잘려 날렵하고 뾰족한 구조라고 볼 수 없다. 거
북선 앞쪽이 뾰족하다는 것은 47년 후 『이충무공전서』에 있는 통제영과 전
라좌수영 거북선의 개판도 사다리꼴이라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누선보다 나는 듯이 빠르다’는 것은 거북선이 판옥선의 여장과 장대와 같
은 수직구조물이 있는 판옥선보다 선수 전면이 사다리꼴로 되어있는 <그림
75>의 별제귀선 개판이 공기의 저항을 덜 받아 속도가 빠른 구조라는 것이
다.

<그림 75> 개판의 구조와 공기·바람의 저항

전선의 특징은 선수 전면의 폭이 넓어 무기와 병사를 배치해 전투하기에는


유리하나 방패와 여장의 높이로 전면의 면적이 커져 공기의 저항이 크고 행선

90) 李彦爕 ,「慶尙左道水軍節度使 狀啓草本」, 英祖24年(1748), “頭製峭尖”


91) 李彦爕 , 앞의 장계, “比之樓船其病其純判若霄壤分叱不喩”

88
에서 바람을 제어하기가 취약하다는 것은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다.
영조10년(1735)에는 별군직 윤필은(尹弼殷)의 “전선이 크고 높아 바람을
제어하고 달려가지 못한다.”92)는 상소에 따라 형조판서 장붕익(張鵬翼)과 이
삼(李森)은 전선 상갑판의 방패를 별도의 제도를 만들어 때에 따라 눕혔다,
세웠다 하는 접이식으로 만들었다.93)는 기사의 내용으로 누선의 전면이 수직
구조로 되어있어 거북선보다 속도를 낼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4 용머리 포혈

이순신의 장계와 이분의 「행록」에 이순신의 별제귀선은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뒤에는 거북의 꼬리처럼 되었는데 그 밑에도 포
혈이 있다. 좌우에는 각각 여섯 개의 포혈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난중일기」에 3월 27일에는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하였으며,94)배
를 타고나가 최종으로 지자포, 현자포 발사를 시험한 것은 임진왜란 하루 전
날인 4월 12일 이었다.95)
1592년 당포해전에서 용머리 포혈에 있는 현자포로 철환을 쏘았다는 기록
이 있어 거북선이 3층 구조라는 근거를 확인할 수 있지만 꼬리 밑의 포혈과
좌우에 각각 있는 여섯 개의 포혈은 2층의 방패인지, 3층의 개판인지 위치에
대한 언급이 없고 현재까지 이것에 대한 분명한 근거는 제시되고 있지 않다.

92)『英祖實錄』卷38, 10年 5月 26日 辛丑.“ 所謂戰船, 甚高且大, 決非制風赴戰之器”


93)『英祖實錄』卷40, 11年 1月 20日 辛卯.“而戰船之二層上粧甚重, 遇風難制, 故上層防牌, 別作制度, 隨時
偃竪”
94)『李忠武公全書』卷5, 亂中日記1, 壬辰年 三月 二十七日丁亥, “試龜船放砲”
95)『李忠武公全書』卷5, 亂中日記1, 壬辰年 四月 十二日辛丑, “食後騎船, 放龜船地玄字砲”

89
<그림 76> 용머리 현자포, 대장군전의 위치

거북선에서 용머리가 등장하는 것은 1592년 이순신의 거북선에서 부터이


다. 1413년 최초의 거북선 기록에는 구조와 형태에 대해 전혀 알 수 없고 임
진왜란 당시에 이덕홍의 상소문에 귀갑선도라는 거북선 구상도가 있지만 귀갑
선 전법에 용머리에 관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거북선에 용머리를 부착한 것
은 이순신 별제귀선에서 최초로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별제귀선의 용머리 중심에는 화포를 쏘기 위한 포혈이 뚫려있고 1592년 6
월 14일 당포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승리한 후 올린 장계에 용머리의 포
혈과 사용한 화포에 대한 언급하고 있다.

“먼저 거북선으로 곧장 적의 층루배 밑으로 치고 들어가 용머리 포혈로 현


자철환을 치쏘고 또 천자·지자철환과 대장군전을 쏘아 왜선을 깨트리고 뒤
에 있는 여러 전선도 철환과 화살을 섞어서 퍼부으며···”96)

96)『李忠武公全書』,卷2, 狀啓1 唐浦破倭兵狀, “故先使龜船。直衝層樓船下。以龍口仰放玄字鐵丸。又放


天,地字大將軍箭。撞破其船 在後諸船。交發丸箭”

90
이순신의 장계「당포파왜병장(唐布破倭兵狀)」에는

“비록 왜선 수백 척이 있어도 그 속을 돌입하여 대포를 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번 싸움에 돌격장으로 하여금 이 거북선을 타고 왜선 속으로 먼저 달려 들어
가 천자, 지자 현자, 황자 등의 화포를 쏘게 하였다.”97) “사방으로 포를 쏠 수
있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적이 덮쳐 포위하면 화
포를 일제히 쏘았다. 그렇게 왜선 속을 횡행하는 아군은 손상입지 않고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왜선을 격파하였다.”98)

라는 문헌의 기록들은 거북선의 막강한 성능과 뛰어난 돌격선의 구조를 전


투상황과 함께 묘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용머리 포혈의 기본구조는 『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거북선 그림에 표현
되어 있는데 이순신 별제귀선의 구제(舊制)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명문을 통해
200년 뒤에는 용머리의 용도가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1795년 통제영, 전
라좌수영 거북선의 용머리에서는 화포를 쏘는 것이 아닌 유황이나 염초를 태
워 연기를 내뿜은 연기효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통제영, 전라좌
수영 거북선의 머리 구조와 형태이다. 통제영 거북선은 200여년 이전의 이순
신 별제귀선의 구조가 남아있는 것은 용머리의 위치로 통제영 거북선은 3층
상갑판의 하단에 위치해 있어 화포의 배치가 가능하지만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목이 길게 위로 솟아있어 화포의 사용이 전혀 불가능한 구조로 200년 전에
화포를 쏠 수 있었던 용머리 구조는 통제영 거북선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
내고 있다.

97) 李忠武公全書 券2 狀啓1 唐布破倭兵狀


98) 宣祖修整實錄 선조 25년 5월 庚申

91
1.5. 거북꼬리와 꼬리 밑의 포혈

이분의「행록」에 별제귀선의 “뒤에는 거북꼬리처럼 되어있고 그 밑에 총혈


이 있다”99)고 기록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위치, 형태에 대해 언급된 내용은 없
다. 거북선의 사료에서 꼬리가 있는 것은 이순신의 별제귀선이 유일하다. 현재
까지 모형으로 복원된 거북선들은 모두 꼬리를 볼 수 없으며, 선행연구검토에
서 별제귀선의 꼬리를 언급한 것은 조성도의 논문100)으로 그의 현판도 <그림
79>의 에서 그가 복원한 거북선 그림의 좌우 현판 끝부분의 미익(尾翼)이 위
로 구부러져 올라간 것을 이분의「행록」에 기술된 ‘뒤로는 꼬리처럼 되어있
고(後爲龜尾)’로 해석하였다.

<그림 77> 조성도의 全羅左水營龜船의 舷版圖

이순신 별제귀선의 구상은 조형적인 현무를 표상하고 있어 좌우 현판의 미


익을 거북꼬리로 해석하는 경우는 타당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림 79>는 전쟁기념관 거북선의 선미부분으로 앞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부분을 꼬리로 해석한다는 것은 이해되기 어렵다.

99)『李忠武公全書』附錄1, 行錄, 從子 正郞 芬. “後爲龜尾 尾下有銃穴”


100) 趙成都,『龜船考』. 海軍士官學校硏究報告 2, 1963, p.117.

92
<그림 78> 미익과 포혈의 위치 출처: 전쟁기념관

현재 복원된 모형 거북선들의 미익은 1795년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처럼


모두 구부러져 올라간 것으로 제작되어있다. “조선시대 군선 꼬리가 치솟아
있는 것은 일종의 멋으로 위용을 과시하려고 배꼬리의 길이를 늘이고 힘껏 위
로 치올리는 것”101)이라고 하지만 이순신의 별제귀선에는 적용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별제귀선의 좌우 현판은 전·후진과 왜선과의 충돌로 현판의 파손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림 71>의 측면도에서 미익은 매우 짧고 밖으로
길게 돌출된 현란 안쪽에 위치한다.
두 번째로 이순신의 별제귀선은 ‘뒤로는 거북꼬리처럼 되어있고 그 밑에 포
혈이 있다’고 하였다. <그림 78>과 같이 꼬리가 길게 위로 치솟아 있으면 선
미의 꼬리와 꼬리 밑의 좌우 방패에 있는 화포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1795년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선미에 포혈이 없는 것으로 설명되

101) 김재근, 한국의 배,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p.213.

93
어있다. 전라좌수영의 경우 그림처럼 꼬리를 길게 위로 치솟게 제작할 수 있
으나 별제귀선은 그렇게 될 수 없어 현재 선미에 포혈이 있고 위로 치솟은 꼬
리가 있는 거북선들은 어느 시기의 거북선인지 설명되기 어렵다.
이순신 별제귀선의 구상은 현무로 꼬리의 복원을 위한 형태적 근거는 현무
도에서 추정할 수 있다. 거북선에 꼬리가 표현된 그림의 사료는 이순신 종가
의 귀선도에 표현되어 있으나 민화적 화풍의 표현으로 거북선의 구조에 적용
되기 어렵고, 궁궐에서 의장기로 사용되는 <그림 79>의 현무기와『홍릉천봉
주감의궤』에 그려져 있는 현무도 <그림 80>102)의 꼬리는 세 개로 그려져
있지만 현무의 도상적 표현을 별제귀선의 구조에 반영하면 <그림 69>, <그
림 71>의 구조로 복원될 수 있다.
별제귀선의 선미에 꼬리와 꼬리 밑에 포혈을 위치시키는 근거는 별제귀선의
전술에서 추정할 수 있다. 이순신의 별제귀선과 이덕홍의 귀갑선 전술의 공
통점은 2층에서 화포를 쏴서 왜선을 깨고 3층이나 높은 위치의 판옥에는 인
명살상용 무기를 배치한다는 것으로 별제귀선 꼬리 위치는 3층 개판에 실재
거북이 꼬리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있고 바로 밑에 화포가 배치되었을 가
능성이 높다.
2층 상장의 선미 쪽으로 꼬리와 화포를 배치하기 어려운 이유는 키를 조정
하는 구조물이 위치해 있어 화포를 설치하기에 어렵기 때문이다. 앞의 내용을
요약하면 선수 전면의 용머리 포혈에 현자포가 숨겨져 위치하듯이 선미에도 뾰
족한 꼬리가 있고 바로 밑에는 철환이 장전된 화포가 숨겨져 있어 왜선이 근접
하면 선상의 적군을 향해 화포를 발사하는 위한 전술적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
다.

102)『洪陵遷奉主監儀軌』 卷下, 欑宮, 1919.

94
<그림 79> 현무기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그림 80> 『홍릉천봉주감의궤』 현무도


출처: 규장각

95
1.6. 개판의 포혈

이순신 별제귀선의 전술적 구상과 거북선 변천과정의 사료를 종합하면 이분


의 「행록」에 기록되어있는 “좌우에 각각 6개의 총혈이 있다”103)는 것은 3층
개판 좌우에 위치한 포혈로 추정된다. 이 총혈의 전술적 목적과 여섯 개로 배
열되는 공간적 특징을 살펴보면 어느 곳에 위치하는지 해석될 수 있다.
1751년 영남 균세사(均稅使) 박문수(朴文秀)가 영조에게 전선(戰船)의 일
을 아뢰는104) 기사의 내용에서 별제귀선 총혈의 수와 전선의 크기와 관계에
대한 내용으로 ‘좌우 각각 6개의 총혈’ 위치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영남 균세사 박문수가 아뢰기를,


“신이 전선과 거북선의 제도를 상세히 보았더니, 전선은 매양 개조할 때마다
그 몸뚱이가 점차 길어져 결코 운용하기가 어렵고 귀선에 있어서는 당초 체
제는 몽충(艨衝)105)과 같이 위에 두꺼운 판자를 덮어 시석(矢石)을 피했습
니다. 그리고 신이 충무공 이순신이 기록한 바를 보았더니, 귀선의 좌우에
각각 여섯 개의 포혈(銃穴)을 내었는데 지금은 각각 여덟 개의 포혈을 내었
으니, 거북선이 종전에 비해 지나치게 커진 것을 알 수가 있으므로 개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06)

별제귀선 크기는 50척107)으로 추정하였다. 이정도의 크기는 이순신 종가


귀선도의 크기로 2층 좌우에는 각각 13개의 방패에 포혈과 패문이 그려져 있
다. 방패와 방패기둥의 간격은 노를 젓는 위치에 관계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103)『李忠武公全書』附錄1, 行錄, 從子 正郞 芬. “左右各有六穴”


104)『英祖實錄』 券73, 27年(1751) 辛未.
105) 몽충(艨衝): 좁고 긴 병선으로 소가죽으로 전체를 싸서 돌과 활을 막고 왜선을 충돌해서 부순다.
106) "嶺南均稅使朴文秀奏曰: "臣詳見戰船、龜船之制, 戰船則每於改造時, 其體漸長, 決難運用, 至於龜船,
則當初體制, 如艨衝上覆厚板, 以避矢石。 而臣得見忠武公 李舜臣所記, 則龜船左右, 各開六銃穴, 而今則
各開八穴, 龜船之比前過大, 亦可知不可不改造矣。" 上曰: "令新伯, 巡審狀聞。"
107) 김재근, 앞의책, p.235 ; 이원식, 앞의 논문, p.150.

96
방패의 수는 6개보다 훨씬 많다. 따라서 2층 방패에 특별히 포혈을 6개만 남
기고 나머지는 모두 막아버릴 이유가 없는 한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앞의 기사 내용은 영조 때의 거북선이 별제귀선에 비해 더 커졌음을 보여주
는 자료로 ‘좌우 각각 6개의 포혈’이 2층 방패의 포혈 수를 말하는 거라면 원
래 많은 수의 포혈이 있는 2층의 방패에서 구멍을 6개에서 8개 뚫었다고 해
서 거북선이 거대해졌다는 것은 설명되기 어렵다. 거북선 2층의 방패는 8개보
다 더 많기 때문에 방패에 2개의 구멍을 더 뚫어도 크기는 변하지 않는다. 그
러나 3층 개판은 선수, 선미가 경사진 마름모꼴로 개판 상단의 길이가 3층 상
갑판의 길이보다 짧고, 좌우 현측의 공간도 사다리꼴의 천장으로 위로 올라갈
수록 좁아지기 때문에 화포를 배치한다면 화포간의 좌우 공간이 더 필요하게
되어 포혈의 수를 늘리면 개판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커져야 하고 또한 거북선
전체의 길이도 같이 커져야한다. 3층 개판은 사다리꼴로 인해 수군이 서있을
수 있는 바닥의 면적은 2층의 45% 정도가 된다. 결론적으로 3층 개판의 포혈
의 수는 거북선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것으로 기록의 ‘좌우 각각 6개의 포혈’
은 3층 개판에 있는 포혈이 분명하다.
2층 구조 거북선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사료에 나타난 ‘좌우 각각 6개의
포혈’ 수를 강제로 일치시키기 위해 2층 방패에 좌우로 각각 6개의 포혈만을
위치시킨 것은 오히려 거북선 전술을 약화시킨 구조라고 볼 수 있다.
통제영, 전라좌수영, 이순신 종가의 거북선 좌우 방패에는 많은 수의 포혈과
패문이 있다. 특히 이순신 종가 귀선도의 경우 별제귀선과 같은 50척의 크기
로 많은 수의 포혈과 패문이 위치해 있는 것과 비교하면 2층 구조 거북선의
포혈이 있는 방패에는 노를 젓는 격군, 화포를 다루는 방포장, 활을 쏘는 사수
가 6개의 포혈이 있는 같은 장소를 사용해 돌격선의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2층 구조 거북선은 이순신 별제귀선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97
1.7. 현란, 방패의 구조

통제영 거북선의 방패높이는 4.3척으로 낮은 방패높이와 높고 긴 현란의


구조는 거북선 좌우의 방패가 왜선과의 충돌로부터 부서지지 않도록 어떠한
상황에서도 방호하고 돌격선의 임무수행이 가능하도록 특수하게 설계된 구조
로 해석되었다.
<그림 81>의 통제영 거북선의 현란이 선수 앞으로 길게 돌출되어있는 이
유는 두 가지 기능으로 설명된다.
첫 번째는 거북선이 적진 속에서 돌격선의 임무를 수행할 때 용머리와 선수
전면에 위치한 닻을 왜선과의 충돌로부터 보호하고 길이가 2m정도 되는 대장
군전을 사용하려면 그림과 같이 장전된 대장군전과 화포의 앞부분이 패문 밖
으로 빠져나와 있어야 발포가 가능하기 때문에 왜선과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
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된다.
두 번째는 현란이 멍에위로 높게 위치하고 높이가 높은 것은 적진 속에서
돌격선의 임무를 수행할 때 좌우 측면의 방패가 왜선과의 충돌이나 공격으로
부터 부서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왜선들 사이에서 종횡무진 움직이
며 사방으로 화포와 화살을 쏴대는 거북선에 대해 왜적들은 강력한 충돌로 맞
서거나 선내로 들어가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다. 적
진 속에서 사방으로 둘러싼 방패가 깨진다면 거북선의 병사는 전멸하는 경우
가 발생할 것으로 많은 충돌로부터 방호를 위한 특수한 설계이었다.
<그림 82>는 조선시대 수군조련도 병풍그림으로 거북선과 판옥선이 행선
할 때 닻을 배위로 올려 고정시킨 상태를 표현한 그림이다. 돌출된 용머리, 수
평으로 돌출된 닻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돌출된 현란의 길이가 닻의 앞머리보
다 더 길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98
<그림 81> 통제영 거북선의 현란

<그림 82> 수군조련도 출처: 국립진주박물관

이순신 종가 귀선도의 방패는 통제영 거북선의 세로로 긴 패문과 동그란 포


혈의 형태는 같으나 구성과 배열이 약간 다르다. 구성과 배열이 다른 것은 선
체의 길이와 방패의 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방패의 구조와 형태, 구체적인 크기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임진왜란 거북선
에서 사용된 무기를 배치시켜 포혈과 문의 용도를 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천, 당포해전을 승리한 후 조정에 올린 이순신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에는 “거북선을 적의 층루선 밑으로 쳐들어가게 하여 용의 아가리에서 현자대
포로 철환을 치쏘고 천자, 지자대포에서 철환과 대장군전을 쏘아 왜선을 깨부
수고....”108)라는 기록과 천자·지자·현자·황자대포 모두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99
있다.
<그림 76>은 별제귀선의 3층으로 용머리 입에서 현자포를 발포하는 상황
이고, 2층 선수에서는 천자총통에 굵기가 10cm정도 되고 길이는 2m정도의
쇠로 만들어진 깃이 달린 <그림 83>의 대장군전이 장전된 상태를 표현한 것
으로 대장군전을 발포하려면 방패의 동그란 포혈에서는 전혀 불가능하고 그림
과 같이 대장군전의 쇠로 만든 날개깃(鐵羽)이 방패를 빠져 나갈 수 있는 너
비와 세로로 긴 장방형의 패문이 필요하게 된다.
<그림 83>의 선수 전면의 방패에는 넓은 패문이 좌우에 각각 한 개씩 그
려져 있다. 이 패문은 대장군전, 장군전의 큰 대전(大箭)을 쏠 수 있는 패문이
다. 선수 쪽에는 노군들과 겹치지 않는 독립된 공간이 좌우 현측에 있어 천자
총통과 같은 대형 화포를 배치하기에 적합하다. 이러한 방패의 특징이 통제영
거북선과 이순신 종가의 방패에서 나타나는 것은 두 거북선이 별제귀선에서
유래된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림 83> 『국조오례의서례』「병기도설」의


대장군전

108)『李忠武公全書』, 卷2, 狀啓1 「唐浦破倭兵狀」.

100
<그림 84> 통제영 거북선, 이순신 종가 귀선도의 패문

<그림 85>는 이순신 종가 귀선도의 방패구조와 ‘전후좌우로 일제히 화포


를 쏘았다’는 이분의 「행록」을 근거로 복원한 별제귀선의 방패이다. 방패의
수는 좌우 각각 13개이고 방패의 유형은 3종류로 구분된다. 그림의 4, 6, 8,
10번 방패의 특징은 하나의 방패에 포혈이 2개가 뚫려있다. 화포를 위치하기
에는 좁은 공간으로 포혈을 위장한 통풍구로 분석되었다. 4, 10의 방패는 좌
우 각각 출입문이 위치하는 곳이 된다. 1, 2, 12, 13은 탄환을 쏠 수 있는
포혈이고 3, 5, 7, 9, 11의 방패는 탄환, 또는 대전을 필요에 따라 선택해 쏠
수 있는 패문이 된다.

<그림 85> 별제귀선 방패의 구조

101
<표 5>는 별제귀선 포혈의 수이다. 2층 좌우 현측의 통풍을 위한 구멍은 포
혈의 수에서 제외하였다.

<표 5> 화포 사용을 위한 별제귀선 포혈의 수(패문도 포혈에 포함)

현측
층 선수 선미 소계 합계
좌 우
용머리 개판 개판 꼬리 밑
3층 14
1 6 6 1
방패 좌우 방패 방패 방패 좌우 40
2층 원형 2 원형 4 원형 4 원형 2 26
패문 2 패문 5 패문 5 패문 2

<그림 85>는 별제귀선의 포혈, 패문, 사혈의 배치도이다.

<그림 86> 별제귀선의 포혈, 패문, 사혈의 위치

102
<표 6>은 별제귀선에 기본으로 배치되는 화포의 종류와 수를 요약한 내용
으로 모두 16개이다. 필요에 따라 2층 좌우 현측에는 예비의 화포를 패문에
추가배치 할 수 있다.
해전의 기록을 검토하면 별제귀선은 적진 속으로 돌격해 근접한 목표대상이
나 주변을 에워싼 왜선들을 2층의 낮은 위치에서 전후좌우로 동시에 화포를
쏴서 한 번의 공격으로 치명적인 효과를 내는 근접당파전술을 사용하였다.
송규빈의 『風泉遺響』海防總論에는 화포의 배치에 대한 원칙이 나타난다.
“선수와 선미에는 천자포와 지자포를 설치하고 현측으로는 불랑기포를 각각 3
문씩 설치한다.”109)는 내용에서 화포의 크기와 발사 시 선체에 미치는 충격의
영향을 고려해 대형의 화포는 선수와 선미에 위치시켰다. 좌우 현측의 허리부
분에는 노 젓는 곳과 겹치지 않도록 좌우 현측의 앞쪽, 중간, 뒤쪽으로 현자포
3문을 설치해 현측의 모든 방향으로 화포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3층 개판의 전면은 이순신 장계의 기록을 근거로 현자총통을 설치하고, 개
판 좌우 현측에는 각각 6문의 황자총통, 선미 꼬리 밑에는 현자총통을 배치하
면 합이 24문으로 <표 6>의 화포의 종류와 수로 요약된다.

<표 6> 기본으로 배치되는 화포의 종류와 수

현측 소
층 선수 선미 합계
좌 우 계
용머리 개판 개판 꼬리 밑
3층 14
현자총통 1 황자총통 6 황자총통 6 현자총통 1
24
방패 좌우 방패 방패 방패 좌우
2층 10
천자총통 2 현자총통 3 현자총통 3 지자총통 2

109) 송규빈,『風泉遺響』,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90, p.210.

103
별제귀선의 사료에는 활을 쏘는 사부의 내용들을 찾아볼 수 없다. 사부가
높은 3층에 위치하는 근거는 이덕홍의 귀갑선 구조와 거북선 전법에 대한 상
소의 내용에 있다. 귀갑선에 판옥을 설치하고 사수를 매복시킨다는 내용과,
『각선도본』의 판옥선 장대의 주변에는 활을 쏠 수 있는 사혈이 많이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거북선에서 사부의 인원수는 적지만 높은 3층에
위치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거북선은 사방이 막혀있어 지휘관이 전후좌우의 외부상황을 한 번에 볼 수
없다. 따라서 사각지대가 없도록 구역별로 배치된 사수로부터 외부의 상황을 보
고받는 지휘체계와 거북선의 운용방법에 사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후좌우에 배치된 사부는 3층 선수 쪽에서 지휘하는 선장(船將)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구역별 명령을 하달하며 화포가 준비될 때 까지 엄호하고 활로 선상
의 적을 사살하는 여러 역할을 하게 된다.
별제귀선 사부의 수는 사료를 근거로 10명하고, 사혈은 <그림86>, <그림
87>과 같이 위치하고 있으며 좌우 각각 5명씩 모두 3층에 배치되었다.

<표 7> 사혈의 위치와 수

현측
층 선수 선미 합계
좌 우

좌 우 좌 우
3층 3 3 10
2 2

<그림 87>은 선수, 선미의 가로로 좁은 창과 사혈로 전후좌우 주변상황을


살피는 범위를 나타낸 그림으로 정확한 시야각은 구멍의 상하좌우 크기와 판
자의 두께, 개판의 경사진 기울기에 따라 보이는 범위는 다르지만 분명한 것
은 사각지대 없이 모든 방향으로 감시가 가능하도록 배치되었다.

104
거북선은 근접전을 위한 돌격선으로 왜적과의 근거리의 조총이나 화살의 공
격으로 부터 피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필요한 크기의 포혈과 활을 쏘는 사혈을
뚫어 놓고 그 밑에 안보이도록 매복해 있다가 공격의 명령이 있을 때 화포를
쏘거나 활을 쏘았다.

<그림 87> 창과 사혈의 시야각

105
1.8. 행선(行船)구조

별제귀선이 범노선(帆櫓船)이라는 것은 이순신의 난중일기110)111)와『이충


무공전서』의 설명문에 돛대의 운용에 관한 내용으로 알 수 있다. “명나라 화
옥(華鈺)의 『해방의(海防議)』에 ”조선의 거북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고 역풍이 불건 퇴조 때이건 마음대로 간다. 그것이 바로 충무공이
창제한 배를 가리키는 것이다.”112)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순신 별제귀선
의 구제와 가깝다고 하는 1795년 통제영 거북선에는 <그림 1>과 같이 10개
의 노와 개판 중앙에는 1.5척(약 45cm)의 긴 통로가 그려져 있고 두 개의 돛
대는 선미 쪽으로 눕혀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있다.
<그림 88>은 헌성유고의 상장식도113)이다. 한선의 기본구조를 나타낸 그
림으로 거북선 2층 갑판의 바닥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돛대의 위치는 상장
식도에 표시되어 있듯이 앞쪽으로 이물돛대와 중앙에 허리돛대가 위치한다.
범노선의 행선은 바람이 있을 때는 돛으로 배를 움직이고 바람이 없거나 전
투 시에는 노를 저어 이동했다. 돛은 해전에서 적의 화공(火攻)에 의해 불이
붙어 거북선 전체가 위험해지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개판 중앙통로의 안쪽
으로 넣어 선내에 보관하였다. 별제귀선은 개판으로 덮여있고 개판 상단에는
좁은 십자로를 제외하고 칼과 송곳이 꽂혀있어 돛을 올리거나 내리고 무거운
돛대를 세우거나 눕히는 과정은 선내에서 설치가 이루어져야한다.
돛대의 회전축은 <그림 89>의 구조로 되어있을 것으로 그림과 같은 구조
는『각선도본』의 <그림 89> 병선과 <그림 90>의 조선에 그 원리가 있어

110)『李忠武公全書』卷5, 亂中日記1, 壬辰年 三月 初八日己亥, “是日, 捧龜船帆布二十九疋”


111) 앞의 책, 亂中日記1, 壬辰年 四月 十一日庚子, “始製布帆”
112)『李忠武公全書』, 卷首 圖說.
113) 헌성유고(軒聖遺稿)는 1972년 경남에서 발견된 사료로 순조22년(1822) 대마도에 파송된 문위사선
(問慰使船)의 배를 만든 기록으로 상장식도(上粧式圖) 그림에는 노를 거는 멍에, 노창의 형태, 2층의
평면이 도면에 그려져 있다.

106
가능성을 높여준다.
돛대의 회전축은 2층 갑판에 있고 3층에서 돛대를 세우고 눕히는 원리로
무거운 돛대를 세우거나 눕힐 때 용이하도록 과학적 지식이 적용되었다. 이
구조가 필요한 추가적인 이유는 선내 상·하층의 통풍과 채광에도 관계한다.
<그림 98>에서 볼 수 있듯이 2층의 천장 중앙은 3층 개판의 통로와 같은
크기인 1.5척의 너비로 뚫려있어 선내 전체의 공기순환과 채광기능도 하는 원
리가 적용되어있다.
판옥선도 같은 구조로 되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판옥선 2층의 밀폐된 구조
에서 공기의 순환과 채광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특히 전투에서 화포를 사용
하는 경우 판옥선에서도 통풍을 위한 창이 필요하기 때문에 같은 원리가 적용
되었을 것이다.

<그림 88> 『헌성유고』의 상장식도

107
<그림 89> 돛대의 회전축 위치

<그림 90> 병선의 돛대는 갑판의 하단부분을 회전축으로 세우거나 눕히고


돛을 사용하는 경우 돛대를 세워 좌우에 고정시키는 받침대에 일치시킨 후 고
정막대를 구멍에 끼워 사용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림 91> 조선에서는 이물돛대, 한판돛대의 간격만 병선과 다르고 갑판
의 돛대를 눕히고 세우는 구조와 원리는 병선과 같은 것으로 분석된다.
“키는 여섯 번째 판자 한가운데 지름 1척2촌의 구멍을 뚫어 속명이 치(鴟)
라는 타(舵)를 꽂게 되어있다.”114) 1795년 통제영,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에
는 개판으로 모두 덮여있어 조타수(舵工)는 어느 층에 위치하는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이분의 행록에 “뒤로는 거북의 꼬리처럼 되어있고 그 밑에 총혈이
있는데...”115)라는 기록으로 꼬리와 총혈이 3층 개판 선미부분에 위치해있어
키의 조정은 2층 선미부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14)『李忠武公全書』, 卷首 圖說., “第六版正中。穿穴經一尺二寸。揷舵”


115)『李忠武公全書』附錄1, 行錄, 從子 正郞 芬. “後爲龜尾, 尾下有銃穴”

108
<그림 90> 『각선도본』 병선(兵船) 출처: 규장각

<그림 91> 『각선도본』조선(漕船) 출처: 규장각

109
<그림 92>116)는 전통적인 한국식 노의 구조로 노봉을 멍에에 박혀있는 회
전축 위로 얹어 구멍에 고정시킨 후 노 끈을 바닥과 연결해 일정한 높이를 유
지시킨다. 손잡이 부분의 노손을 잡고 앞뒤로 밀고 당기면 배가 이동하는 구
조로 되어있다.

<그림 92> 한국의 노

일반적인 노 젓기 구조는 멍에의 한쪽에 노의 회전축이 위치하게 된다. 그


러나 별제귀선은 전후진이 가능한 특수한 구조로 <그림 93>과 같이 멍에 모
서리가 아닌 멍에와 멍에 사이에 별도로 제작된 노의 회전축에 위치시키게 된
다. 이 구조는 멍에와 멍에의 중간에 노의 회전축을 위치시켜 상황에 따라 신
속하게 전진 또는 후진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림 93> 전·후진 노 젓기 구조

3D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의한 노 젓기에서 노창의 너비는 3척 정도로 노군

116) 마광남,『배목수가 쓴 돛단배 이야기』, 미래촌, 2009. p.60.

110
을 배열하면 공간3과 같이 안쪽으로는 노군이 한 명 설 수 있는 공간만 만들
어진다. 따라서 2명씩 마주보기에는 공간의 문제로 어렵고 안쪽에는 1명, 반
대쪽으로 2∼3명이 배치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군선과 같이 여러 개의 노가
배열된 상태에서는 노의 배치된 순서에 따라 홀수와 짝수로 구분해 밀고 당기
는 것을 반대로 젓기 때문에 노의 손잡이 끝부분이 앞의 노와 가깝게 위치하
는 경우가 반복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고려하면 노 하나에 3명이 배정되어
노를 밀고 당기게 된다.
<그림 94>는 방패의 내부구조를 외부에서 본 그래픽으로 멍에와 멍에의
중간에 방패기둥이 위치하고 내부에서는 방패기둥, 노, 노창이 직선상에 위치
하게 된다. 현재 복원된 <그림18>, <그림 19>의 거북선은 멍에에 노의 회
전축이 위치해있어 전진만 할 수 있는 구조로 멍에와 방패기둥이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94> 멍에와 방패의 위치

노의 운용에 대해 김병호는 “『호좌수영지』에 수록된 宿字2호는 거북선의


경우 본판장이 47척(14m)인데 승선 인원이 155명이다. 이 가운데 농노군이
96명이다. 농노군이 96명이라는 것은 노가 16척으로 노 1척당 6명씩 담당했
다는 것이다. 2교대로 노를 저을 경우라 하더라도 3명씩(3×16)이 노를 젓고
있다는 것”117)으로 해석하고 있다.

117) 김병호, 「2층 구조와 전라좌수영 거북선(토론문)」『여수해양문화연구소, 한일관계사학회, 『임진

111
1.9. 내부구조

이순신의 당포해전 장계「條陳水陸戰事狀」에는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118)라고 내부구조에 관한 언급이
있으나 구체적인 구조와 형태는 알 수 없다. 이덕홍의 귀갑선 전법에서 작은
판옥을 만들고 옆으로는 사혈을 내고 밑에서 매복한다고 설명하였다.
나대용은 거북선에서 사부가 활쏘기가 불편하다.”119)고 언급하였다. 거북선
에서 사부는 3층에 위치하게 된다. 전후좌우 사다리꼴의 개판 구조로 상부가
좁고 천장의 높이가 마음대로 활을 높이 들기에 제한이 있어 판옥선의 개방된
상갑판 보다는 활을 사용하기에 불편한 구조였을 것이다.
거북선은 개판으로 덮어 완전하게 엄폐된 상태에서 돌격선의 임무를 수행한
다. 적진 속에서 초근접전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작은 구멍의 창을 뚫어 외부
의 상황을 살피고 화포나 활 등의 개인무기를 사용했다. 엄폐된 상태에서 전
투를 하는 구조는 성곽의 상단에 위치한 성가퀴와 같은 구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95>의 성가퀴120)는 여장(女墻), 타(垜)라고도 하는데 총안(銃
眼), 사혈(射穴), 타구(垜口)의 구멍을 뚫어 그 밑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적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타구의 세로로 긴 틈새는 활이나 쇠뇌, 조총 등 개인의
무기 사용에 있어 상하로 조준이 가능한 구조이고 총안은 화포를 사용하기 위
한 구멍이다.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에는 포혈과 패문만 설명되어있고 사혈이나
밖을 감시하는 등의 창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별제귀선에서 사혈은 활과
같은 개인무기를 사용하기 위한 목적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와부상황을 살펴
지휘관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그림 87>은 사수의 배치도로 지휘관은 전

왜란과 전라좌수영 그리고 거북선』, 京仁文化史, 2011, p.119.


118)『李忠武公全書』卷2, 「條陳水陸戰事狀」, “內能窺外 外不能窺內”
119)『宣祖實錄』 39年, 12月 24日 戊午, “射夫赤不便宣”
120) 김왕직,『알기쉬운 한국건축용어사전』, 2008, p.382.

112
방의 좁은 창으로 밖을 살피고 명령을 내리지만 개판으로 막혀있어 모든 방향
의 상황을 한 번에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3층 전후좌우에 배치된 사수의 보
고로 지휘했을 것이다.

<그림 95> 성가퀴의 사혈, 총안, 타구

<그림 95>는 별제귀선을 밖에서 보았을 때 왜적은 포혈과 작은 사혈만 볼


수 있고 선내는 전혀 볼 수가 없는 구조이다.

<그림 96> 별제귀선의 방패와 개판의 구조

113
1.10. 통풍과 채광

거북선은 철저하게 엄폐된 상태에로 근접전을 수행하게 되기 때문에 선내


의 채광, 통풍, 온도조절에 관해 설계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했다. 사료의 그림
에는 거북선 방패와 개판에 포혈과 패문만 그려져 있고 유일하게 전투 목적이
아니고 열려있는 곳은 개판 상단의 1.5척(약 45cm)의 중앙통로이다. 이 통로
는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 위한 통로로『이충무공전서』에 설명되어있다.
완전하게 엄폐된 공간에서 길게 열려있는 이 공간은 돛대를 위해서는 통로
이지만 채광, 통풍, 실내 온도조절을 위해서는 창으로 다목적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창은 과학적 원리가 적용된 구조로 기능을 살펴보면,
첫 번째는 돛대를 세워서 항해를 하거나 또는 눕혀서 돛을 관리, 수리할 수
도 있고, 특히 전투 시에는 돛을 내려 선내에서 보관하는 기능을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채광의 기능으로 열려있는 길이가 32척(11m) 정도로 어두운 선
내를 밝혔다.

<그림 97> 선내의 채광, 통풍창 구조

세 번째는 통풍과 온도조절의 창으로 거북선은 2층과 3층에서 화포를 쏘았


다. 2층에는 승선인원의 3/4의 인원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화약연기
와 열기를 빠르게 순환시키기 위해서는 고기능의 창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114
것으로 <그림 98>과 같은 순환구조가 적용되었을 것으로 분석되었다. 신선
한 공기는 2층의 노창과 좌우 현측의 방패에 있는 뚫려있는 포혈을 위장한 통
풍구에서 신선한 공기가 들어와 2층 천장의 긴 통로를 거쳐 3층 개판의 중앙
의 통풍창으로 빠져나가 순환된다.

<그림 98> 갑판, 상갑판의 통풍창 구조

<그림 99 > 포혈을 위장한 방패의 통풍구

갑판 길이의 3/4이나 되는 긴 통로는 채광, 통풍, 온도조절의 기능으로 충분


했을 것으로 판단되고 별제귀선의 구조는 과학적인 구조로 설계된 돌격선으로
분석되었다. 판옥선에서도 2층의 구조와 임무수행의 환경은 같기 때문에 상갑
판에 통로를 뚫어 같은 구조와 원리가 적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15
2. 전술 및 운용

2.1. 별제귀선의 전술

별제귀선의 전술은 돌격선의 기본적인 구조와 2층의 근접당파전술, 3층의


대량인명살상전술로 구분해 설명될 수 있다.
이분의 행록에는 “전투가 벌어졌을 때 거적으로 칼과 송곳 위를 덮고 선봉
이 되어 나가는데 적이 배 위로 올라오려들다가는 칼날과 송곳에 찔리고 덮쳐
포위하면 좌우전후에서 한꺼번에 포를 쏘았다. 왜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
름같이 모여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가는 곳마다 적이 쓰
러져 전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항상 승리했다.121)라는 기록의 내용에서 별제
귀선은 돌격선으로 선봉이 되어 적진 속에서 기함(旗艦)을 공격해 지휘체계를
무너트리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순신은 왜적이 별제귀선을 에워싸고 무자비하게 조총과 화살을 쏘아대고
별제귀선의 선내로 진입하기 위해 근접전을 시도할 것을 예상하고 방어와 공
격이 가능한 별제귀선을 창제하였다.
방호를 위한 구조로 왜적이 칼을 들고 등선을 시도할 것을 예상해 별제귀선
을 3층 구조로 설계하였다. 근접전에서 칼을 잘 쓰는 왜적의 등선을 저지하기
위해 개판 상단에는 병사가 다닐 수 있는 최소한의 좁은 길만 남기고 칼과 송
곳을 꽂았다. 이러한 구조는 해전에서 적을 만나면 띠풀을 엮어 위를 덮어 송
곳과 칼날을 가리고 선봉에 나서 적이 배에 오르려고 하면 송곳과 칼에 찔려
죽는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122)

121)『李忠武公全書』附錄1, 行錄, 從子 正郞 芬. “及後遇戰, 以編茅覆於錐刀之上, 而爲之先鋒, 賊欲登船


陷之, 則斃於刀錐, 欲來掩圍, 則左右前後一時銃發. 賊船雖蔽海雲集, 而此船之出入橫行, 所向披靡. 故前
後大小戰, 以此常勝焉.”
122)『萬機要覽 』1808年, 軍政編四 , 舟師

116
별제귀선의 2층에서는 근접당파전술을 위해 전후좌우로 왜선을 깨트릴 수
있는 화포를 배치하였다. 적진 속에서 에워싼 왜선과 기함을 깨트려 무력화시
키기 위해 선수에는 천자총통, 선미에는 지자총통, 좌우 현측으로는 좌우 현측
은 노 젓기와 화포의 간격을 고려해 현자포를 좌우에 각각 3문씩 배치함으로
써 노를 젓고 현자포를 쏴서 왜선을 깨트리는 전술로 배치되었다. <그림
103>은 2층에 대전이 설치된 상태의 표현이다.
이순신의 장계「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 별제귀선은 대장군전으로
왜선을 깨트렸다는 기록이 있듯이 대전은 해전에서 유용한 무기였다.
『명종실록』에 의하면 1555년(명종10) 전라관찰사 김주(金澍)가 “왜선(賊
船)을 깨뜨리는 기구로는 대장군전(大將軍箭) 보다 나은 것이 없다”123)고 총
통을 주조할 것을 건의하였다. 해전에서는 낮은 2층에서 두께가 10cm 정도
이도 길이는 2m 정도의 길고 쇠로된 날개가 달린 대전이 왜선을 깨트리는데
확실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포르투칼 예수회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는 1592년 임진왜란『예수회 연례보
고서』부록에 거북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의 선박들은 크고 견고하며 상단이 덮여있다. 화약통과 화기를 사용하고,


쇠로 된 사석포(射石砲)와 비슷한 것이 있는데 탄환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사
람 넓적다리 굵기의 나무 화살에 물고기 꼬리처럼 갈라진 쇳조각을 붙여 사용
한다. 이것은 부딪치는 것이라면 모두 절단하기 때문에 아주 위력적인 무기이
다. 이 밖의 무기들은 별 위력이 없다.124)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대장군전의 위력에 대한 기록으로 왜선에서는 상당히

123)『明宗實錄』 19券, 10年 7月 22日 甲寅 , “撞破賊船之具, 無過於大將軍箭, 而銃筒所鑄鍮物, 準備無


策,”
124) Luís Fróis, 정성화·양윤선 역, 『임진란의 기록, 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 살림, 2008,
p.46.

117
위협적인 무기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2층의 방패에는 대전과 탄환을 필
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패의 구조는 앞의 내용들을 뒷받침하
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의 별제귀선의 혁신은 3층 구조의 개판에 있다. 일본에 조총이 있기
이전에는 칼을 쓰는 왜적을 상대하기에 거북선 개판에 칼·송곳을 꽂아 대응이
가능했으나 강력한 신무기인 조총이 위력을 보이면서 이순신은 일본의 조총을
무력화 시킬 일당백의 공격용 무기가 필요해 거북선을 3층 구조로 창제하고
전후좌우로 화포를 설치하였다. 높은 3층에는 사수가 위치했지만 적진 가운데
서 전후좌우에서 쏘아대는 일본의 집중적인 조총의 탄환을 사부의 활쏘기로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이순신은 분석하고 있었다. 따라서 별제귀
선에서는 개판의 전후좌우에 화포를 배치하고 조총보다 더 강력한 화포로 다
량의 소철환을 쏴서 선상에 있는 왜적의 대량살상과 왜적의 조총을 한 번에
무력화 시키는 전술을 구상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림 103>은 3층 개판의 선수 전면으로 용머리와 현자포가 설치되어있고
좌우 현측으로 황자총통을 설치해 소철환을 쏘고 사부는 사혈로 활을 쏘는 상
황을 나타낸 그래픽이다.

<그림 100> 별제귀선의 구조와 전술

118
용머리와 꼬리 밑에 현자포는 3층 상갑판 바닥에서 현자포를 쏠 수 있는 위
치이고 포혈의 방향은 근거리에서 선상에 있는 왜적을 철환으로 쏠 수 있도록
거의 수평방향으로 설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림 103>125)은 판옥선과 일본의 안택선, 세키부네의 크기와 높이를 상
대적으로 비교한 경우이다. 3층 구조의 거북선은 판옥선과 높이가 같기 때문
에 거북선에서 수평으로 쏴야하는 이유는 철환을 쏴 퍼지는 것을 고려해야하
기 때문이다. 복원 거북선들은 현자철환을 ‘치쏘았다’는 것을 구조에 적용시키
기 위해 머리의 방향을 심하게 위로 향하고 있으나 현자총통은 포구가 넓어
빠져나오는 순간 철환이 퍼진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림 101 > 판옥선과 세키부네의 상대적 크기

1598년 흥양의 현감이었던 최희량(崔希亮)의「임란첩보서목(壬亂捷報書


目)」에는 전선의 건조와 무기 보유의 수량을 보고한 내용에 소철환(小鐵丸)
이 3천개로 다른 철환보다 훨씬 많은 것은 당시 별제귀선이나 판옥선에서 조

125) 조성진,「시뮬레이션을 이용한 역사적 전투사례의 승패요인 분석: 임진왜란 시 명량해전 사례 연


구」, 『經營科學』, 第27卷, 第1號. 2010, p.66.

119
총으로 무장한 왜적에게 화포로 철환을 쏴서 대량인명살상의 전술을 펼친 것
으로 해석된다.126)
별제귀선에 관한 임진왜란 당시의 사료는 매우 단편적으로 나타난다. 기록
의 관점에서 포혈의 위치를 분석한다면 이순신의 장계와 이분의 「행록」에
“앞에는 용머리의 포혈 있고, 뒤에는 꼬리처럼 되어있고 그 밑에 포혈이 있다.
좌우에는 각각 6개의 포혈이 있다”는 별제귀선의 전술은 이전부터 전해져 오
는 것이 아니고 혁신적인 발상의 특수한 거북선 구조였기 때문에 특별히 기록
을 남긴 것으로 판단된다. 이순신이 ‘용머리 포혈, 꼬리와 꼬리 밑의 포혈, 좌
우 각각 6개의 포혈’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장계, 조
카 이분의 「행록」에도 기록되어 있어 왜적을 물리칠 중요한 전술이었다는
것을 고증하고 있다. 3층 구조의 특별한 거북선을 처음 건조하면서 판옥선의
2층 방패에 많은 포혈처럼 거북선 2층에 기본적으로 있는 포혈 이었다면 용
머리와 함께 ‘좌우에 각각 6개의 포혈이 있다’고 특별히 기록하지 않았을 것
이다. 즉, ‘이전에 없던 혁신적인 3층 구조의 거북선’에 관한 기록인 것으로
이순신의 장계에 기록된 ‘別制龜船’, 이분 행록의 ‘創作戰船’, 류성용 『징비
록』의 ‘創造龜船’은 표현은 이를 뒷받침 한다.
이덕홍의 상소문과 귀갑선도 그림에서 거북선의 구조와 전술에 대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었다. 2층에는 화포를 설치하고 높은 판옥에는 사수를 매복시킨
다는 것으로 층수의 높이에 따라 무기배치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선
행연구의 남천우127)와 장학근128)은 별제귀선이 3층 구조라는 근거와 전술에
서 3층에만 화포를 위치시켜야 한다는 해석은 이덕홍과 이순신 별제귀선 전술
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126) 최희량 ,이영호·이라나 역. 『임진왜란의 명장 일옹 최희량』, 문자향. 2008, pp.397∼398, “...大鐵


丸 十二介. 中鐵丸 四十介. 小鐵丸 三千介. 小小鐵丸 五百介...”
127) 남천우,「龜船構造에 대한 再檢討」, 歷史學報, 第71輯, 1976.
128) 장학근,「戰場環境과 거북선 線型變化」, 『軍史』 第51號,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

120
2.2. 전·후진 노 젓기와 화포의 사용

적진 속에서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돌격선은 막강한 무기체계와 전후좌우


신속한 기동성을 특징으로 한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듯이 빨랐다”129)라고 별제귀선의 구조
와 전술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별제귀선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은 공기의 저항을 줄이고 바람의 저
항을 제어하기 위해 적용된 사다리꼴의 개판구조와 노창의 구조에 있다.
<그림 105>에서 왼쪽과 오른쪽의 차이는 노를 거는 방패기둥과 멍의 위치
이다. 왼쪽의 구조는 전진만 할 수 있는 구조로 방패기둥과 멍에가 상하로 위
치해 있고 노는 멍에의 한쪽 모서리를 회전축으로 회전되기 때문에 전진만 가
능한 일반적인 한선의 노 젓기 구조이다.
오른쪽은 전·후진 노 젓기가 가능한 구조로 멍에와 멍에 중간에 노를 거는
별도의 부재를 설치하고 노창의 구멍은 노가 반대방향까지 회전되도록 공간이
있어야 하고 이 구조에서만 노와 노 사이로 화포의 배치가 가능해진다.

<그림 102> 노의 전·후진 구조와 화포의 위치

129)『宣祖修正實錄』券26 25年, 5月 1日 庚申, “四面發砲, 進退縱橫, 捷速如飛”

121
Ⅴ. 조선시대 거북선의 분석

1. 기본구조와 및 유형

1413년(태종13)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이 왜선으로 꾸민


배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130)는 기록은 우리나라 거북선의 기원이 되는 최
초 기록이다. 2년 뒤인 1415년(태종15)에 “귀선의 전법은 많은 적에 충돌하
더라도 적이 해칠 수가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131)는 기록에서 거북선
의 등장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많은 적에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가 없으니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라’는
내용에서 거북선의 전술을 추정할 수 있다.
거북선은 사방과 천장을 판자로 막아 엄폐된 상태로 적진 속에서 임무를 수
행하는 돌격선이다. 따라서 많은 수의 왜선과 충돌하게 되고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견고하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은 1795년 통제
영 거북선에서도 나타난다. 현란에서 패란까지의 높이 4.3척이 그것이다.
통제영 거북선은 200여년 이전에 이순신의 구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순신이 창제한 별제귀선도 현란을 높고, 두껍게 하고 방패의 높이를 상대적
으로 낮게 했다는 것이 된다.
이덕홍의 귀갑선과 이순신의 별제귀선은 모두 왜적을 상대로 구상되고 창
제된 거북선들이다. 왜구 또는 왜적을 상태로 하는 전투에서 거북선이 계책으
로 사용되는 배경에는 적군의 무기에 있었다. 조선 수군의 강점은 활과 화포
의 사용에 있고 왜구나 왜적의 강점은 단병전에서 칼을 잘 쓰는 것이다. 따라

130)『太宗實錄』 券25, 太宗13년 2월 “甲寅條, 上過臨津渡, 觀龜船倭船相戰之狀”


131)『太宗實錄』 券30, 太宗15년 7월 “辛亥條, 龜船之法, 衝突衆而敵不能害, 可謂決勝之良策. 更令堅攻
造作, 以備戰勝之具.”

122
서 원거리에서는 활을 쏘거나 화포를 사용하는데 유리하지만 초근접전에서 왜
적이 칼을 들고 등선을 하면 불리하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등선을 저지하기 위
해 크기가 크고 높은 판옥선과 거북선을 개발하게 되었다. 특히 거북선의 경
우에는 초근접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판 전후좌우에 쇠 송곳을 꽂아 찔려
죽거나 등선하는 것을 저지했다.
이덕홍의 귀갑선과 이순신의 별제귀선은 구조에서 서로 다르지만 전술은 같
다. 두 거북선 모두 2층에 화포를 설치해 왜선을 깨트리고, 높은 위치의 판옥
이나 3층 개판에서는 적군을 사살하는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 귀갑선은 2층
판옥구조로 이덕홍의 귀갑선에 나타난 임진왜란 거북선의 기본구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판자로 사방을 감싸고 등선이 가능한 곳은 쇠 송곳을 꽂아 저지한다.


2)거북선은 모든 방향으로 막혀있기 때문에 판옥을 만들어 높은 위치에서
밖의 모든 상황을 살피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다.
3)선봉에서 적과 근접해 전투하기 때문에 많은 충돌을 고려해야 하고, 때로
는 왜선을 충돌로 부수기 위해 견고해야 한다.
4)화포와 활을 쏘는 전투원의 공간을 분리해 전투의 효율성을 높인다. 2층
에서는 화포를 사용해 왜선을 깨부수고, 높은 판옥에는 사수를 매복시켜 선상
의 적군을 사살한다.
5)선내와 개판으로 통하는 통로를 만들어 사용한다.

이덕홍의 귀갑선 전법에는 개판이 사다리꼴로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에 대


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그의 구상도에 그려진 사다리꼴은 상소문 내용처럼
병학에 관한 문헌을 보거나 구전으로 전승되고 있는 거북선의 이야기를 들어
구조에 적용한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 거북선의 개판은 모두 선수, 선미가

123
경사진 사선구조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은 신속한 이동과 좌충우돌 거북선의
충돌에서 전복되는 경우가 발생되지 않도록 안정된 복원력을 고려한 과학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거북선의 ‘머리는 급하고 뾰족하게 만들었으며 누선보다 빠르다’는 내용들을
종합하면 사다리꼴의 개판은 공기의 저항을 감소시켜 속도를 높이고, 선수와
선미의 방패가 직접적인 충돌로부터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거리유지, 개
판의 상부의 무게를 감소시켜 안정적인 복원력에 필요한 기본구조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림 102>의 이덕홍 귀갑선, <그림 103> 이순신의 별제귀선,
1795년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거북선 모두는 2층 상장을 중심으로 물속에 잠
기는 하체와 2층 또는 3층 구조의 개판은 상하가 대칭형으로 ‘오뚝이’의 구조
를 가지고 있어 적진 속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전복되지 않는 과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림 103> 귀갑선의 상하 마름모꼴 대칭구조

<그림 104> 별제귀선의 상하 마름모꼴 오뚝이 구조

124
2. 별제귀선의 차별적 특징

이순신의 별제귀선이 갖는 차별적 특징은 과학적인 구조와 전술의 혁신에


있다. 별제귀선은 천하무적의 현무를 상징하는 용머리와 꼬리를 붙였으며 완
전한 3층 구조의 거북선을 창제하였다. 선수에 용머리를 붙여 포혈로 사용하
고 선미에도 거북꼬리를 만들어 그 밑에도 화포를 설치하였다.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별제귀선의 모습에 조선수군은 심리적으로 용맹함을, 왜적에게는 공
포의 대상으로 별제귀선에 심리적인 요소를 적용한 것은 외형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조의 혁신으로 이순신의 별제귀선은 공격과 방어가 가능한 3층 구조이다.
근접전에서 등선을 저지하기 위해 개판은 좁은 십자로를 제외하고 쇠 송곳을
꽂았다. 많은 적과의 충돌로 인해 방패가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4.3척
높이로 방패의 높이를 낮추고 현란의 높이를 두껍게 해서 완전한 방호구조를
갖췄다.
선수 전면으로는 현란을 길게 돌출시켜 전면에 위치한 용머리와 닻을 보호
하고 대장군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이격을 고려했고, 개판은 전후좌우 마름모
꼴 구조로 선수 전면의 공기저항을 줄여 이동속도를 높이고 안정된 복원력을
갖도록 상하가 대칭이 되는 ‘오뚝이’구조로 설계하였다.
노를 저어 전후좌우로 이동이 가능하며 동시에 화포를 쏠 수 있는 방패구조
로 설계되었다.
전술의 혁신으로 이순신은 왜적의 신무기 조총과 대규모 해전을 예상하고
일당백의 전투력을 가진 돌격선을 구상하였다. 적진 속에서 왜선이 에워싸고
조총과 활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 것에 대비해 2층, 3층에서 전후좌우로 동
시에 화포의 공격이 가능한 구조로 설계하였다. 낮은 2층에서는 대장군전과
같은 대전을 발사해 근접해 있는 왜선을 깨는 근접당파전술을 사용하고 3층

125
에서는 용머리, 좌우 개판에 각각 위치한 6개의 포혈, 꼬리 밑의 화포로 소
철환을 발사해 대량인명살상이 가능한 전술을 사용하였다.
별제귀선의 과학적인 설계는 개판 중앙에 위치한 돛을 세우고 눕히는 1.5척
의 통로에 있다. 개판 중앙의 이 통로는 사방이 막혀있는 거북선 내부의 채광
과 온도조절 및 통풍창의 다기능의 과학적 원리가 구조에 있었다.

3. 거북선의 변천

1413년, 1415년 태종실록에 기록된 조선 초기 거북선 기록에서 거북선이


견고해야 한다는 것 외에 알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지만 거북선 전술을 위한
기본구조에서 이덕홍의 귀갑선과 같은 선체 중앙에 작은 판옥이 있고 등선을
저지하는 창, 검을 주변에 꽂은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그 근거로
는 전선은 모두 높은 망루를 기본적인 구조물로 가지고 있고 거북선은 사방과
천장을 판자로 덮어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용머리와 꼬리가 있는 3층 구조 거북선의 원형은 이순신 별제
귀선으로 1592년부터 시작되었다. 200여년 후 1795년 통제영 거북선의 용머
리는 포혈의 기능은 사라지고 연기를 입과 코로 토하는 토연의 기능으로 바뀌
었으며 판옥선과 함께 거북선의 크기도 점차 커졌다.
1795년 통제영 거북선은 이순신 별제귀선의 구제에서 나왔다는『이충무공
전서』의 기록과 본 연구로 밝혀진 200여년 이전의 별제귀선과 변화를 요약
하면 <표 8>과 같다.

126
<표 8> 1592년 이순신 별제귀선과 1795년 통제영 거북선의 비교

이순신 별제귀선(1592) 통제영 거북선(1795)


본판장의 길이 50척 65척
3층 구조 3층 구조
엎드린 거북형상 엎드린 거북형상
개판의 쇠 송곳 없음
범노선 범노선
좌우 각각 노의 수: 7∼8 좌우 각각 노의 수: 10
용머리의 용도: 포혈(현자포 철환 사용) 유황, 염초를 태운 연기를 입으로 토함
선수 전면의 포혈 수: 3 선수 전면의 포혈 수: 4
(패문포함: 5) (패문포함: 6)
개판의 좌우 각각 포혈의 수: 6개 12개(두 배로 많음)
거북꼬리와 꼬리 밑의 포혈 없음
포혈의 수: 40 포혈의 수: 72
패문의 수: 14 26

거북선의 구조에 대한 사료의 마지막 기록은 1808년『순조실록』에 “노 없


이 바다에 떠다니는 것이 마치 거북이 떠 있는 것 같으며 입과 코에서 연기가
나온다.”132)는 기록이 있어 선수 전면에 용머리가 부착된 1592년 이순신의
별제귀선 이 후 216년 동안 지속되었다. 용머리의 포혈 기능이 사라진 것은
오래되었지만 이순신 별제귀선의 위용을 지키기 위한 거북선의 용머리는 상징
적으로 남아있어 1895년 조선수군의 통제영이 폐영 될 때까지 지속되었을 것
이다. 거북선이 전선으로 사용되고 있는 마지막 기록은 1886년(고종 23년)으
로 “나주의 두 귀선장(龜船將)의 부대는 군오(軍伍)가 정돈되고 있고...”133)라
는 기록이 『고종실록』에 남아있다.

132)『純祖實錄』11券, 8年, 1月 10日 丁未, “泛海無楫, 如龜之浮, 烟生口鼻中”


133)『高宗實錄』 23券, 高宗 23年 4月 20日(癸未), “羅州二龜船將之隊, 則軍伍整齊...”

127
<그림 105> 조선시대 거북선 연표

128
Ⅵ. 결 론

1. 결론 및 연구결과 요약

본 연구의 시작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의 별재귀선이 사료의 기록과


전혀 일치하지 않고 출판물의 도안이나 모형들로 제작되어 진실을 왜곡시키고
있는 원인에 대해 살펴보고 별제귀선의 원형과 실체를 밝히는 목적으로 연구
가 시작되었다.
별제귀선이 원형과 멀어지고 왜곡된 원인은 해방이후 외세로부터 벗어나 우
리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고 시대적 어려움을 성웅 이순신의 정신으로 극복하고
하고자 하는 출판물이 많이 등장하면서 성웅 이순신의 무패신화와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이 우리나라에서 제작되어 왜적을 거침없이 무찔렀다는 내용
들이었다. 출판물에 등장하는 별제귀선은 철갑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왜군의
강력한 조총도 무용지물이었고, 길게 치켜세운 용머리는 불을 뿜어 왜선을 공
격하였다. 겉표지에는 치켜세운 용머리에 등에는 거북무늬 철판에 쇠 송곳이
꽂혀있는 전라좌수영 거북선이 인쇄되었다.
복원된 거북선 모형에서도 전라좌수영 거북선을 닮은 모습들로 계속해서 나
타났다. 이순신의 별제귀선이 연구되기도 전에 이미 전라좌수영을 닮은 거북
선 모형들이 등장한 배경에는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에는 풍선처럼 부풀어 있
고 엎드려 있는 자세에, 개판에는 철판이나 쇠 송곳이 꽂혀 있지 않고 판자로
만 덮여있는 모습에 관심이 멀어졌다. 이러한 문제가 현재까지 지속되는 있는
이유는 이순신 별제귀선의 원형연구 부족에 있다. 연구의 부족으로는 어떤 논
의와 대안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대책이 요구된다.
이순신 별제귀선 연구에 이덕홍의 귀갑선을 연구문제로 살펴본 이유는 이덕
홍의 귀갑선은 임진왜란 당시의 것으로 거북선에 대한 지식이나 전승되고 있

129
는 내용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귀갑선 구상도의 복원을 통해 확인된 것은
거북선 개판의 구조로 개판 상단은 평면이고 사다리꼴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
다. 공기의 저항을 줄여야 돌격선으로 빠른 속도를 유지할 수 있고, 안정된 복
원력으로 많은 충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이다.
1795년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거북선 구조분석에서도 개판 상단은 평면이고
전후좌우로 사다리꼴의 개판 구조로 확인되었다.
1591년 이순신은 왜적이 반듯이 쳐들어온다는 것을 예상하고 왜적의 신무
기인 강력한 조총, 왜적의 등선과 칼을 사용한 백병전, 대규모의 해전에서 왜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일당백의 돌격선 기능을 갖춘 거북선을 구상하였다.
선수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화포를 쏠 수 있고, 왜적이 배에 오르지
못하도록 개판에는 쇠 송곳을 꽂았으며, 선미에는 거북꼬리를 부착하고 그 밑
에도 화포를 설치하였다. 선내에는 천자, 지자, 현자, 황자포로 무장하였으며,
외형은 신령한 현무의 형상을 거북선 구조에 적용하였다. 현무의 거북선 형상
은 조선 수군에게는 막강한 힘을 지닌 신구(神龜)로 용맹함을 주고 왜적에게
는 두려움과 위압감을 줄 수 있는 심리적 요소를 거북선의 구조에 적용했다는
것은 혁신적이라 할 수 있다.
전술적인 혁신으로 이순신의 별제귀선은 낮은 2층의 위치에서 대전(大箭)과
탄환으로 왜선을 깨트릴 수 있도록 방패에는 장방형의 패문과 포혈이 함께 있
어 필요에 따라 선택이 가능한 구조였다.
개판의 옆과 선수, 선미의 양 머리에는 쇠 송곳을 꽂아 근접전에서 왜적의
등선을 저지했다. 3층 선수 전면의 용머리 포혈과 좌우 현측에 위치한 12개의
화포로는 철환을 쏴서 선상에 있는 왜적의 조총을 무력화 시키고 대량살상이
가능한 대규모 해상전투용 돌격선이 임진왜란 이순신의 거북선이었다.
이순신의 장계에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고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다’는 내
부구조는 성곽의 상단에 위치한 성가퀴와 같은 구조로 적으로부터 몸을 숨겨

130
보호하고 효과적인 공격을 위한 것이다.
별제귀선의 3층 개판에는 10개의 사혈을 뚫고 10명의 사부가 사방으로 배
치되는 이유는 활을 사용해 적군을 사살하는 목적 이외에 각각의 위치에서 별
제귀선 밖의 상황을 지휘관에게 보고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해석
되었다. 사방으로 막혀있는 거북선에서는 외부의 상황을 지휘관 혼자 살필 수
없기 때문에 사부와의 소통으로 지휘하는 시스템이었다.
별제귀선의 방호는 근접전에서 칼을 잘 쓰는 왜적이 등선하지 못하도록 개
판의 전후좌우와 상단에 좁은 십자로를 제외하고 쇠 송곳을 꽂았으며, 왜선의
집중적인 충돌로부터 방패가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방패의 높이를 4.3척
으로 낮게 하고 두꺼운 현란의 높이를 크게 설계하였다.
별제귀선이 적진 속에서 전후좌우로 자유로운 행선이 가능했던 것은 멍에
모서리에 노의 회전축을 위치시키지 않고 멍에와 멍에의 중간에 노가 위치하
고 필요에 따라 너를 역방향으로 회전될 수 있는 노창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
기 때문이다.
별제귀선은 범노선으로 무거운 돛대를 눕히고 세우기 위해 회전축을 2층 갑
판에 두었다. 돛대를 세우기 위해서는 3층에서 힘들이지 않고 작업이 가능했
으며, 개판으로 덮여있는 거북선 구조에서는 필요한 구조였다. 돛대를 운용하
는 방법은『각선도본』의 병선과 조선에 그림으로 나타나 있어 가능성을 더
높여주었다.
개판 상단의 중앙과 상갑판 바닥면이 돛대를 세우기 위한 1.5척 너비의 긴
통로는 돛과 돛대의 운용과 사방으로 막혀있는 선내의 채광 및 통풍창의 기능
으로 화포의 연기가 2층 중앙 통로를 거쳐 3층의 긴 통로로 배출되는 다목적
용도의 과학적인 구조로 설계되었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덕홍의 귀갑선이 2층 판옥 구조라는 것은 3D 컴퓨터 모델제작으로 확인
되었으며 개판은 사다리꼴 구조로 쇠 송곳은 경사진 선수전면, 개판 상단, 경

131
사진 선미의 위치에 그려져 있는데 귀갑선도가 거북선 연구에서 중요하다는
것은 개판의 사다리꼴 구조와 쇠 송곳의 위치에 있다. 이덕홍은 본인의 구상
도를 귀선이 아니고 귀갑선으로 기록한 것은 전체의 모습이 이순신의 별제귀
선과 같이 머리, 개판, 꼬리를 붙인 완전한 거북형상이 아니고 개판부분만을
사다리꼴로 덮은 방호기능의 등딱지만 고려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거북선 사료의 기록에 거북선 앞머리가 뾰족하다는 표현은 1596년 『선조
실록』에 이순신 별제귀선은 ‘쇠못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다’는 기록과, 1748
년 이언섭의 장계에 거북선의 ‘머리는 가파르고 뾰족하게 만들었으며’라는 구
조의 묘사가 있다. 또한 1795년 통제영,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3D 컴퓨터 그
래픽 모델 시뮬레이션에서도 개판은 사다리꼴 구조로 분석되어 모든 거북선
개판의 구조는 선수와 선미다 뾰족한 사다리꼴 구조라는 것을 규명할 수 있었
다.
거북선의 개판이 사다리꼴의 구조를 갖는 것은 행선 속도와 안정된 복원력
을 위한 돌격선의 특징에 있다. 거북선은 적진 속을 파고들어 임무를 수행하
기 때문에 빠른 이동속도가 요구된다.
거북선은 방호를 위해 사방을 판자로 높게 막은 구조로 이동할 때 공기의
저항이 크고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데 공기의 저항을 줄여 속도를 높
이고 바람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 거북선은 모두 가파른 경사의 사다리꼴 구
조를 개판에 적용해왔다. 또한 개판이 전후좌우로 사다리꼴로 상단이 좁아진
구조는 개판 상단의 무게를 줄여 안정된 복원력을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거북
선의 구조는 상하가 대칭인 ‘오뚝이’의 구조를 갖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순신의 별제귀선이 이덕홍의 귀갑선도가 전해져 만들어졌다는 설이나 나
대용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설은 사실이 아니다. 이덕홍의 귀갑선은 2층 판옥
구조의 거북선으로 완전한 3층 구조의 별제귀선과는 층수, 전술, 화포의 배치
등에서 전혀 다르기 때문에 관계가 없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또한 왜적을 물

132
리치기 위한 혁신적인 돌격선은 이순신의 구상으로 실현되었다는 근거로이순
신 장계에는 ‘別制龜船’, 이분 「행록」에는 ‘創作戰船’, 류성용 『징비록』에
는 ‘創造龜船’, 『선조수정실록』에는 ‘自以意造龜船’ 으로 모두 이순신에 의하여 구
상되고 건조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2. 연구의 한계 및 제언

본 연구는 임진왜란 이순신 별제귀선의 구조와 전술에 관한 연구로 사료


의 분석과 시각화를 연구방법으로 별제귀선을 해석하였다. 거북선은 행선과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전선으로 본 연구결과로 이순신 별제귀선의 전체를 해
석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밝힌다.
이순신 별제귀선의 원형연구에 관한 문제는 사료의 부족보다 연구의 목적
이 별제귀선의 모형에만 목적을 두어 외형만 있고 분야별 다양한 관점의 폭
넓은 학술적 연구가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결과로 제시한 별제귀선의 구조와 형태는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
고 박물관 또는 관광지에서 본 거북선과는 너무 달라 의아해 할 수 있다. 현
재 우리주변에서 볼 수 있는 거북선들은 학술적으로 충분히 논의되고 철저한
고증과정 없이 제작된 것들로 이제는 다시 검증되어야 한다. 이순신 별제귀선
의 올바른 교육을 위해서 원형과 실체를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본 연구가 별제귀선의 원형과 실체를 밝히는데 토대가 되기를 기대하며 이
순신 별제귀선이 승리의 그 바다에서 재현될 수 있도록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지속적인 연구가 있기를 기대한다.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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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ABSTRACT

A Study on Yi Sun-sin’s Byeolje Turtle Ship


-Focusing on Ship Structure and Tactics-

Hong, Soonkoo

Dept. of Film & Digital Media


Graduate School of Hongik University

Leechungmugong Jeonseo is collection of late Chungmugong Lee


Sun-sin’s writings complied in 1795 by the order of King Jeongjo. The
first part of the book contains wood-block print of Tongjeyeong and
Jeolla Jwasuyeong turtle ship and explanation of them with 694
characters, serving as important historical sources to know the original
figures of the ship during Imjinwaeran. But, according to the explanation
of two Turtle ships, the turtle ship drawings in the book did not
represent the ships actually used by Admiral Lee in 1592 when Japanese
troops invaded Korea, but those of the time when the book was compiled
in 1795. One may wonder why the compilers of the book inserted the
drawings of ships of 200 years after the war. But, there was no drawings
of the ships or records of measurement. So, the compilers used the
drawings of the turtle ships in the days when the book was compiled in
1795. Among others, the book describes that the Tongjeyeong turtle ship
was derived from Turtle ship of Admiral Lee, and there had been some
changes in measurements, and that the drawing of the Jeolla Jwasuyeong

140
turtle ship was used simply because Admiral Lee had worked at the
camp, but the ship was not Admiral Lee’s ship.
The Turtle ship used by Admiral Lee Sun-sin was part of the
reasons why Admiral Lee could win the naval battles in the Imjinwaeran.
Thus, it is a cultural asset serving to make Korea known in the world, It
is very important to discover the original figure of the ship, for
educational purposes.
Scholastic researches to reveal the original figure of Turtle ship has
continued since 1934, and, based on such researches, models of the ship
30m long, and 2-3 tier structures in the name of Admiral Lee’s Turtle
ship used in the 1592 war. However, the problem is that recovered
Turtle ship can not explain how Admiral Lee used the ship in the battles,
and the builders of the ship have not been able to offer convincing
evidence that the models represent the original.
As there are no drawings and measurements allowing us to know the
structure and form of Admiral Lee’s Turtle ship, drawings and explanation
of the Tongjeyeong and Jeolla Jwasuyeong turtle ship contained in
Leechungmugong Jeonseo and other historical records regarding the war
are used as sources for researches on the original form of the ship.
Turtle ship has physical structure and form as warship. Consequently,
researches are required to provide visualized output of concrete figure.
But, as existing researches on the ship have focused on literature, and
have not offered specific figures, they have limits in describing structure
and form of the ship.
The reason why the structures and forms of recovered Turtle ship do

141
not match the records of naval battles during the war can be found that
existing researches on the ship depended only on the explanations of the
two Turtle ships contained in Leechungmugong Jeonseo and used
un-confirmed research results as sources to design the models.
This study, to suggest concrete research findings on structure and
form of Admiral Lee’s Turtle ship, analyzed sources based on
visualization of historical records. To draw the figure of Turtle ship, this
study visualized the Tongjeyeong and Jeolla Jwasuyeong turtle ship and
Guigapseondo [Drawing of Turtle shell ship] of Lee Deok-hong and
Admiral Lee’s Head family’s Guiseondo as a 3-dimension computer
graphic model, and used a method to investigate contents of documents
by simulation.
Guigapseondo of Lee Deok-hong is the first drawing of Turtle ship
among all the remaining drawings of the ship. While Admiral Lee scored
victories in naval battles, Lee Deok-hong who was escorting the prince,
submitted a memorial asking the prince to consider strategy using turtle
ships to win the war. In 1593, he submitted a memorial to the king
attaching the drawing of Turtle ship describing the structure of it. While
the drawing is simple idea-level one, its explanation of Turtle ship
strategy contains thorough analysis of Japanese troops and all the
knowledges available in those days. Thus, it was used in this study as
theoretical backgrounds to recover the ship and understand and interpret
the basic structure of Turtle ship.
In the Analysis of the structure of Turtle ship, the hight of one tier
and structure of gaepan, deck, is the first object of analysis. As

142
measurement of the height of the ship remaining in the historical records
is the explanation of the Tongjeyeong turtle ship in Leechungmugong
Jeonseo. The explanation only mentions that ‘the height from hyeonran to
peran is 4.3 cheok (130cm)’, but there is no mention on the total height.
The controversy over whether Turtle ship was of 2-tier, or 3-tier
structure is caused by the fact that the number of tiers can be different
from the understanding of 4.3 cheok. In the situation where the
arguments on the height of Turtle ship were not solved because of lack
of clear theoretical bases, I suggested a concrete theoretical basis on the
Analysis of the height of 4.3 cheok in scholastic paper in 2015
The reason why the bangpae height is as low as 4.3 cheok is from the
fact that hyeonran located beneath bangpae was Bird’s mouse joint with
meonge, and located high, and that, to prevent bangpae from breaking
when the ship collided with a Japanese ship, and protect the ship body,
designers of Turtle ship specifically made bangpae low, and heightened
thick hyeonran.
The reason why it is assume that Turtle ship was of 2-tiers is from
the Analysis that the height 4.3 cheok (130cm) from hyeonran to peran
was the height of 2-tier hyeoncheok. For oarsmen about 160cm tall to
paddle oars at hyeonccheok, there should be space over their heads. So,
the recovered model made gaepan, the second tier ceiling, a round
structure. In conclusion, without considering the method of dovetailing
hyeonran-bangpae-peran, the model directly applied the measure of 4.3
cheok to hyeoncheok.
The crucial ground of why Admiral Lee’s Turtle ship was not of

143
2-tier one was the cannon hole at yongmeori [dragen head] and cannon
holes located on the left and rights sides of the at Tongjeyeong turtle
ship. Lee Sun-sin wrote that soldiers shot iron balls with hyeonjapo from
the cannon hole at yongmeori. To shoot them, yongmeori should be
placed at the front of the 2nd tier. But, as ankle and ankle mulrae are
placed at the front of the 2nd tier, it was impossilbe to install yongmeori
there. And, if it is installed at higher position, cannons could not be used.
Even if cannon holes are cut on gaepan, cannons cannot be placed
because gaepan is placed high. Thus, there is no cannon holes in gaepan
in the recovered 2-tier structure Turtle ship.
The fact that guigapseon [Turtle shell ship] of Lee Deok-hong was of
2-tier panok structure can be confirmed from his drawings and
explanation of battle techniques. Gaepan was of trapezoidal structure, and
iron awls are drawn to be on sloped front, upper part of gaepan, and
sloped stern. The reason why Guigapseondo is important for research on
Turtle ship is its description of trapezoidal structure and positions of iron
awls. Various historical records on Turtle ship described that the front of
the ship was sharp. Seonjosillok made in 1596 describes Turtle ship as

‘iron awls are positioned on the sides and two heads’. The 1748 janggae,
report to the king, of Lee eon-seop, describes Turtle ship as ‘its head is
steep and sharp’. In the 3-dimensional simulations of Tongjeyeong and
Jeolla Jwasuyeong turtle ship as well, gaepan was analysed as trapezoidal
structure. Thus, it was determined that the basic structure of all the
Turtle ship was of sharp trapezoidal structure.
The rapezoidal structure of Turtle ship gaepan was from the fact that

144
the ship needed speed and stable restitutive force to attack enemy ship.
As it penetrated the group of enemy ships, it needed rapid movement. As
all the sides of the ship was covered by panels for protection from
enemy, it faced strong air resistance when it moved, and it was greatly
influenced by wind. So, to reduce air resistance and influence of wind,
designers of the ship made gaepan as steep trapezoidal structure.
The gaepan structure with all its sides being of trapezoidal structure,
and its top being narrow can be interpreted to have been intended to
secure stable reduce weight of gaepan and stable restitutive force. The
whole structure and form of the ship can be summarized as the form of
‘tumbler’ with symmetric bottom and top.
Byeolje turtle ship, which Lee Sun-sin described as ‘dragon head was
attached, and let the cannon fire balls through its mouth’ in his jangge,
was of 3-tier structure, and its gaepan sides and two heads had iron
awls. It had a typical ‘tumbler shape’ with trapezoidal structures.
In 1591, expecting that Japanese troops would invade Korea, and the
characteristics of prospective war such as strong jochong, Japanese rifle,
climbing of Japanese soldiers on the Korean ships, hand-to-hand fights,
and large Japanese fleets, Lee Sun-sin designed Turtle ship as an attack
ship which could fight with 100 ships. Dragon head would be attached on
the bow, and cannon balls would be shot from its mouth. Iron awls would
be installed on gaepan to prevent Japanese soldiers from climbing the
ship, On the stern, turtle tail would be attached, and cannons would be
mounted beneath it. Inside the ship, Cheonjapo, Jijapo, Hyeonjapo would
be arranged. Holy hyeonmu figure was applied to the outward feature of

145
the ship. It is innovative that the ship was designed to the effect that
the turtle feature would provide Joseon navy with mysterious power of
God Turtle, and Japanese soldiers with fear and oppression.
Lee Sun-sin’s Turtle ship, as sail and oar ship, contained long space
of 1.5 cheok wide at the center of gaepan to lower and erect its mast. It
was scientifically designed to serve multi-purposes: to receive sunlight,
and ventilate, and let cannon smoke exit through the central passage in
the 2nd tier and the 3 tier passage.
rd

Due to tactical innovation, the attack ship of Admiral Lee allowed


forward and backward rowing. And, to make soldiers to destroy enemy
ships with arrows and cannon balls from low 2nd-tier, the bangpe of the
ship was equipped with both rectangular paemuns and cannon holes
allowing soldiers to use any of them. On the sides of gaepan, and both
heads at the row and stern, iron awls were inserted to block enemy
soldiers to climb the ship at hand-to-hand fights. The cannon hole at
the dragon head at the front of the ship and 12 cannons installed at the
sides of the ship were to disable Japanese rifles on Japanese ships. Lee
Sun-sin’s Turtle ship was attack ship for grand-scale marine battles, and
for mass destruction.
The aim of this study is to reveal the structure and Tactics of Lee
Sun-sin’s Turtle ship with analysis of historical records and visualization
method. Therefore, it has limits to reveal the whole Turtle ship. The real
characteristics of the ship can be reveled by multidisciplinary convergent
studies. I expect that additional researches will make Turtle ship appear
again on Lee Sun-sin’s sea.

146
Key Word: Yi Sun-sin, Byeolje Turtle Ship, Geobukseon, Imjinwaeran,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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