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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na Roja Dorada 금수의 붉은 달 1 113 1
Luna Roja Dorada 금수의 붉은 달 1 113 1
Luna Roja Dorada 금수의 붉은 달 1 113 1
“사…… 사람 살려…….”
“꺄악!”
【잘도 뛰는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엎드려 비는 연화의 앞에서 호랑이는 어슬렁거리며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호랑이의 예민한
코에 젊은 처녀의 비린내가 느껴졌다.
모든 것이 이 여자 때문이었다.
“산주님……?”
백호는 천천히 걸어서 여자에게 다가갔다. 느릿한 발밑으로 나뭇잎과 자갈들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그의 긴 백발이 밤바람에 날려 뒤로 흩어졌다. 연화는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광경을 바라보며 완전히 정신을 빼앗겼다.
“아, 흑…….”
“……예, 예?”
“아…….”
“앗…….”
백호는 그녀의 육신에서 처녀의 향기를 맡았다. 신선한 향기. 달밤에 올라와 있던 양기가
순간 훅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는 연화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를 뒤로 눕혔다.
달리느라 찢어지고 벌어진 치맛자락이 힘없이 흐트러졌다. 그 사이로 여자의 희고 가느다란
허벅지가 드러났다.
연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백호는 그녀의 가슴골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녀는 깊은 숨을 쉬었다.
백호는 낮게 속삭이며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귓볼을 잘근잘근 씹다가 귓구멍 안으로
혀를 밀어 넣자 연화의 어깨가 떨렸다. 신음성을 삼키려 애쓰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백호는 계속해서 귀를 핥고, 입술로 씹었다.
“그래.”
다른 사내의 손이 단 한 번도 닿지 않았던 몸이다. 생소하고 무서운 쾌락에 연화는 울고
싶었다. 하지만 백호는 그녀를 놀리듯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는 금수의 왕이었고, 그
누구보다 육체로 하는 대화에 익숙했다.
“흐, 흑…….”
“흐윽…….”
“읏…….”
“아, 읏……!”
쾌락과 열기와 공포가 같은 양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앗……!”
“……!”
“젠장.”
“내 암컷.”
“아, 읏.”
내벽이 늘어나는 느낌에 연화는 고통과 쾌락 어느 쪽이 큰지 알지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자꾸만 잇자국이 나는 그녀의 입술에 깊이 입 맞추어 호흡마저 앗아버리면서 백호는
손가락을 빼고 자신의 하의를 풀어헤쳤다.
“하아, 하아…….”
사내의 손이 떨어져 나간 음부가 허해서 연화는 다리를 움츠리려 했지만 곧 백호가 그녀의
다리를 잡아 넓게 벌렸다. 민감한 하지에 사내의 뜨거운 양물이 단단하게 느껴졌다.
“아앗…….”
“……!”
백호는 사정 봐주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양물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넘치는 애액이 간신히
사내의 양물이 밀려들어 가도록 도와주었다.
“아, 아악!”
3화
“아, 흑!”
“그래, 나는 여기 있다.”
그녀는 허덕이면서 자신도 모르게 아랫배를 만졌다. 손바닥 밑으로 꾸물거리며 양물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듯했다. 마른 배 안쪽에서 크고, 두꺼운 것이 부피를 늘려가며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크……!”
“큽……!”
“후우…….”
그는 낮은 신음성을 삼키면서 여인의 몸 안에 자신의 뜨거운 정액을 분출했다. 연화의 경험
없던 몸은 난생 처음 맞이하는 절정에, 머리끝까지 정복하는 진득하고 충격적인 쾌락에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백호는 토정하면서 그녀의 탄력 있는 내벽이 쥐어짜듯 자신의
물건을 조이는 것을 느꼈다.
“…….”
***
백호의 반려 중에는 신령도 있었고 길짐승도 있었고 인간의 여자도 있었다. 인간 반려가
처음은 아니었다.
“또 잔소리냐?”
“또 그러리란 법은 없잖아.”
“구닥다리, 그 소리 좀 그만해.”
호접과 묘우의 입을 다물게 해놓고 그는 휘적휘적 걸어서 침실로 돌아갔다. 거대한 욕실과
연결되어 있는 침실에서 연화는 정신 차리지 못하고 깊게 잠이 들어 있었다.
“……예쁘긴 하군.”
4화
남자는 손을 내려 연화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작은 몸에 비해 소담하고 풍성한 젖가슴이
그의 손 안에 만족스럽게 들어찼다. 아주 얇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잠옷을 입고 있었으나
벗은 것이나 매한가지라, 그는 그냥 옷의 위로 연화의 가슴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
“흐, 응…….”
“배…… 백호 님…….”
“흣…….”
어젯밤의 여파인가 그녀의 다리 사이는 도톰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이 작은 몸으로 나를 잘도 받았군.”
“네 탓이다. 괜히 붉은 달이 떴을 때 죄를 범해서는.”
“응…….”
“……!”
“아……. 응…….”
“흐, 흐으……!”
“흑, 흐응……!”
“아, 아아……!”
“백, 호 님……!”
“큭……!”
“하아, 하아…….”
그는 팔꿈치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며, 밑에서 바르작거리며 경련하듯 떨고 있는 연화에게
입을 맞췄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쁜 호흡마저 뺏어갈 듯 거친 입맞춤이었다.
백호가 미소를 지었다. 연화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흰 머리카락의 남자를 보면서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침햇살이 그의 등 뒤에서 후광처럼 빛났다.
갑자기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되어서 그녀는 다소 멍청한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이 꽤
귀여워서 백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 표정은.”
백호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덥썩 연화를 안아 들었다. 꺅, 소리를 내며 처녀가 남자의
목에 매달렸다.
“무서운 게냐?”
백호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숙여 인간의 여인을 들여다보았다.
연화는 떨리는 속내를 감추고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거대한 호랑이가 형형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이 그리 쉽게 잊힐 리가 없었다. 눈앞의 미남자가 그 호랑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까지 했으니 더욱 그러했다.
“흠, 흠.”
5화
“괜찮습니다, 반려님.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호접은 부드럽게 말하며 연화의 손을 잡았다. 공포와 고통과 쾌락이 온통 뒤얽힌 지난밤에
갇혀 있던 연화는 조금 놀랐지만, 손을 감싸는 더 작고 보드라운 호접의 손길에 다소
안심했다.
나비의 신령은 따스하게 데운 꽃차를 준비해 대령시켰다. 인간계에서는 보지 못했던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에, 붉은 물의 차였다. 조심스레 차를 마시는 연화를 보다가 백호가
불쑥 물었다.
“허.”
“백호 님!”
백호는 긴장하고 있는 연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었다. 그러나
어제의 기억이 아직 몸에 남아 있어 연화는 몸이 저절로 긴장되었다. 비록 지금은
다정하지만 이 손이 지난밤 얼마나 거칠게 자신의 몸을 훑었는지 마치 지금 눈앞에 보이듯
기억이 났다.
“네, 네?”
백호가 그녀를 욕실 한켠에 마련된 침상에 올리자 연화는 옷깃을 움켜쥐며 재빨리 그로부터
멀어졌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는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오나…….”
“싫다기보다는…… 부끄럽습니다.”
“꺅!”
“아……. 백호 님. 그게 아니라…….”
“너무 그러지 마라. 인간의 도덕이 이렇지 않다는 것은 안다만, 이곳은 신령계다. 한 달
동안 나와 즐기는 것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게야. 나는 네 신랑이니.”
커다란 손길에 뇌리를 잠식했던 공포의 기억이 오싹한 쾌락과 함께 다시 살아났다. 귓가에
끝없이 집요하게 속삭이던 백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릴 뿐이었다.
금수의 붉은 달
6화
“아, 읏.”
탕의 따뜻한 온수가 그녀의 몸짓에 따라 이리저리 튀었다. 백호는 자신의 양물이 또다시
부피를 키우는 것을 깨닫고 입맛을 다셨다.
연화는 붉어진 얼굴로 사내의 품 안에 고개를 묻었다. 무서웠지만 도망갈 곳도, 도망갈
능력도 없었다.
기실 도망갈 의지도 없었다. 이 거대한 가슴은 그녀의 몸을 거칠고 아프게 품었으나 연화는
처음으로 알게 된 쾌락과 이 사내의 단단한 가슴이 주는 기묘한 만족감을 어렴풋이 알았다.
“원하시는 대로…….”
“아…….”
사내는 아름답다. 상제가 빚은 사방신이니 당연하다. 너른 어깨에 손을 짚고 그녀는 넋을
잃고 생각했다.
따뜻한 온수 속에서 천천히 둘의 하지가 맞닿아 갔다. 연화의 허리를 잡고 백호는 그녀의
몸을 자신의 중심으로 내렸다. 한껏 벌려진 여자의 양다리가 바들거리며 떨렸다. 어제의
여파로 잔뜩 부어올라 있던 내벽이 간신히 벌어지며 다시 사내의 양물을 받아들였다.
“아, 흐…….”
“흑……. 흐응…….”
“못 참겠군, 정말.”
“……큭, 젠장……!”
“읏! 흑! 흐으읏!”
“흣, 흐앙!”
백호의 양기는 일반적인 인간의 양기와 다르다. 연화는 마치 불처럼 뜨거운 사내의 정액이
자신의 아랫배를 가득 채우는 것을 희미한 의식 속으로 느꼈다. 음부를, 배를, 온몸을
태우는 것 같은 쾌감이 전신을 돌았다.
“목마르지? 이걸 좀 마셔라.”
“……하아, 하아…….”
어제부터 지나치게 충격적인 일의 연속이다. 여태껏 성적인 자극을 전혀 받아보지 않았던
그녀는, 대체 지금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도 힘들었다.
“힘들었지?”
“아니에요, 백호 님.”
금수의 붉은 달
7화
분명히 그녀는 이곳에 공물을 훔친 죄인으로 공물을 대신하기 위해 끌려온 것이다. 하지만
백호는 자비롭고 다정했다. 거칠고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그의 관심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된 것은 묘한 만족감을 주었다.
***
“…….”
연화가 재차 물었다. 호접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다소 의아해서
호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백호의 반려가 된다면 먼저 얼떨떨해하다가 신분이 상승한 듯 기뻐하는 것이
수순이었다. 실제로 인간 중 이곳 사방신의 궁에 들어올 수 있는 자가 몇이나 있겠는가.
보통은 사방신 밑의 신령조차 평생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는 게 일반적이었다.
“아.”
“치유사라.”
“치유의 이능이라…….”
사방신들이 가장 좋아하지 않는 능력이다. 생명이란 적자생존으로 자연 속에서 죽고 나야
한다는 것이 백호의 법칙이었다.
그간 데려왔던 여인들과는 다르게 연화가 상당히 마음에 들어서 호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잘될지도 모른다. 백호의 신부로 꼭 신령이 들어와야 한다는 묘우와는 달리, 호접은
인간 여인이라도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다는 쪽이었다.
그녀는 상쾌한 얼굴로 날개를 파닥였다. 기분이 좋을 때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연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랬습니다만…….”
“대체.”
금수의 붉은 달
8화
“내가 그리도 신령 중에 반려를 맞으셔야 한다고 했거늘.”
백호는 강하고 거칠고 냉정한 산주다. 금수의 왕이니 당연한 순리다. 자연세계에서 강자가
약자를 봐주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금수를 다스리는 그는 그 정점에 서 있는
강자다. 수많은 신령들이 그의 발밑에 엎드리는 것 역시 백호의 강함에 근거를 두고 있다.
“아직은 두고 봐야 하신다고…….”
사영은 원래의 차가운 얼굴로 돌아가서 중얼거렸다. 수조가 놀라서 겁먹은 눈을 껌벅였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당장 가겠다.”
시녀들이 다가와 사영의 머리와 옷차림을 다듬기 시작했다. 사영의 검은 머리에 알맞은
은색의 가느다란 사슬과 붉고 노란 구슬로 장식된 관을 얹고, 창백하게 흰 얼굴에 분을
발라 발그란 홍조를 더한다. 꼬아서 내린 머리카락을 풀어 다시 빗고 몇 갈래로 땋아 그
머리를 다시 꼬아 장식했다.
“가자꾸나.”
“뱀의 일족이십니까.”
“수장 사혈의 딸, 사영이다.”
“지금 백호 님이 계시느냐?”
“묘우.”
“…….”
“묘우!”
“뭘 알고 싶으신 거지요?”
“알면서 묻지 마라. 너희 여우의 일족들이란 그래서 문제야.”
대놓고 말한다면 이쪽도 그렇게 말해 줄 밖에. 그렇게 맞대거리를 하고도 묘우는 태연했다.
금수의 붉은 달
9화
“…….”
“……무슨 헛소리냐.”
“말 그대로입니다. 말씀드릴 만한 이야깃거리들이 있긴 하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글쎄요…….”
***
“으…… 응…….”
“으, 흣…….”
***
연화는 몰랐지만 그녀가 자는 사이 백호가 조심히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신령계의 고약을
펴 발라놓아 상처가 많이 아문 상태였다. 덕택에 그녀가 느끼는 것은 칼로 저미는 듯한
날카로운 상처의 고통이 아닌, 백호로부터 한껏 사랑받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동통뿐이었다.
이불 속에서 연화는 몸을 웅크렸다.
‘게다가…….’
“배, 백호 님?”
“아, 저…….”
금수의 붉은 달
10 화
“괜찮습니다, 백호 님.”
“급한 것만 먼저 풀어야겠군.”
“앗…….”
“아, 아아…….”
백호가 웃었고 연화는 얼굴을 붉혔다. 자신의 손길로 백호가 절정을 맞았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뿌듯했다.
밥상을 물리고 백호는 다과와 술을 가져오게 했다. 연화를 위해서는 연한 향기의 꽃차를
준비하게 했다. 시녀들이 조용히 물러가고, 둘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꽤 좋아하는군.”
“몸이 많이 힘들었느냐?”
“아니요…….”
“아니라고?”
백호는 잠깐 멈췄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는지를 몰라서 연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귀여워서 남자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백, 백호 님.”
“왜, 이제 와서 내빼려고?”
“네가 꽃차 같구나.”
“읏…….”
느릿하게 몸 안을 파고드는 거대한 물건에 여인은 입술을 물었다. 잘못하면 그대로
신음성이 다 튀어나갈 것 같았다.
“아……! 아앙!”
“어딜 가려고?”
으르렁대는 목소리였다.
“아, 흐, 하응……!”
“백, 백호 님! 아! 앗!”
11 화
“후…….”
“……예, 예…….”
“…….”
“네 몸이 너무 맛있으니까 말이야.”
“……상제폐하의?”
“곧 돌아오마. 쉬고 있으렴.”
어디선가 조용히 나타난 신령의 시녀들이 다과상을 전부 내어갔다. 향기로운 꽃차만 협탁에
놓아둔 채 시녀들이 전부 빠져나갔다.
“아마도 사방신 영토의 경계를 지키라는 명일 겁니다.”
“아……. 그렇군요.”
연화는 자신을 생각했다. 그녀 자신도 인간이면서 신령계로 왔다. 인간이자 청룡의 주민인
그녀는 비록 백호의 손에 이끌려 온 것이지만.
묘우의 시선에 연화는 약간씩 좌불안석이 되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우의 신령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순진하지만 눈치가 없지는 않은 연화가 모를 수가 없었다.
“왜 그런 얼굴이냐, 연화야?”
금수의 붉은 달
12 화
남자는 재빨리 연화가 앉은 의자로 다가와 그녀를 안아 들고 침상으로 향했다.
“외롭다고?”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게지?”
“……아무것도요. 그저…….”
“…….”
“……!”
“읏……!”
“으응! 흐, 응!”
“…….”
백호는 침대에 엎드려 그녀를 끌어안았다. 몸을 덮는 묵직한 사내의 무게, 하지만 그녀가
힘들지 않도록 팔꿈치로 지탱하고 있는 백호의 몸은 마치 질이 좋은 이불처럼 아주
아늑하고 따뜻했다. 연화는 눈을 감고 스스로 다리를 벌려 백호를 끌어당겼다.
“흐……. 흐으…….”
그녀의 입구에서 흘러내린 애액으로 인해 살끼리 부딪치며 질퍽이는 소리가 났다. 백호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다리를 완전히 벌리게 했다. 뱃속이 다시 뜨거워져 인두로 지지는 것
같았다.
“아, 흑……!”
절정은 언제나 이것이 쾌락인지 고통인지 모르는 형태로 다가왔다. 지나치게 혹사당한
신경은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녀는 백호에게 매달려 속절없이 울었다.
“큿…….”
“하아, 하아…….”
***
“사방신의 모두에게 제사를 올렸으니 저희의 정성을 알아봐 주신 게지요. 청룡뿐 아니라
백호, 현무(玄武), 주작(朱雀)의 사방신께 전부 공물과 음식을 올렸습니다. 이에 들어간
인력과 재물이 상당하였으니 왕께서 굽어살피신 덕입니다.”
왕은 예의상의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는 정적이 많았기 때문에 수족처럼 부리는 제사장
정도는 적당히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사실 수틀리면 베어버리면 그만이었지만 또 다른
수족을 구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니.
금수의 붉은 달
13 화
“깊은 산속 마을이라…….”
“그렇습니다.”
“흠.”
만희는 턱을 긁었다.
그는 킬킬 웃었다.
“전하……?”
“또 두통이 심하십니까.”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면서 풍만한 가슴이 왕의 시선
앞에 그대로 드러났다. 만희는 검끝을 그녀의 등쪽 옷 밑으로 밀어 넣었다. 날 선 칼날에
시녀의 저고리가 투둑거리며 끊어져 내렸다.
“읏……!”
시녀의 입에서 작은 신음성이 흘렀다. 남자는 그녀의 가슴을 손으로 주물렀다. 아무런
배려도 다정함도 없는, 검사를 하는 것 같은 무감정한 손놀림이었다.
“예, 예. 전하.”
“여자라 하심은…….”
“그 죄인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그 딸 말씀이십니까.”
금수의 붉은 달
14 화
“그래. 너는 내가 믿는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다시 한 번 해주렴.”
“백호 님…….”
“빨리 가셔요.”
“묘우 님.”
“약은 가져 오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예, 예.”
새의 입장에서 여우의 신령인 묘우는 결코 달가운 존재가 아니다. 수조는 굽실거리며 그의
말대로 호리병에서 붉은 액체를 부어냈다.
“훌륭하군요.”
“딱 좋습니다.”
“만약을 위한 거니까요.”
금수의 붉은 달
15 화
‘글쎄, 발정기 아닙니까. 비록 그간은 형식상의 반려를 맞이해 그들의 음기로 기운을
다스렸다지만 백호 님의 정욕은 지금 비정상적으로 높아져 있는 상태입니다.’
‘잘되겠지, 설마.’
‘할 수 있을까?’
“사영이 게 있느냐?”
“아버지.”
“그래. 기대되는구나.”
***
‘감기인가…….’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연화가 미소를 띄었다. 호접이 식사 준비를 이르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예. 그럼 아주 조금만요.”
16 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몸은 밤이 될수록 더 뜨거워졌다. 연화는 더위를 견딜 수가 없어서 결국 일어나 앉았다.
‘백호 님.’
“백호 님.”
“흐, 음…….”
“읏.”
“아……흐…….”
“세상에.”
“이걸 어쩌지.”
“열이 계속 심하군요.”
“그럼요.”
‘빨리 백호 님이 돌아오셨으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복도를 지나던 묘우가 의아한 얼굴로 멈춰 섰다. 호접은 평소 대단히 침착한 성품으로
저렇듯 불안하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은 보기 드물었다. 나비의 신령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도 걱정이고.”
“많이 나쁜 거야?”
“열이 오르고 피부가 붉어. 인간의 건강 상태는 내가 잘 모르지만 좋지 않은 건 확실해.”
“그렇군.”
금수의 붉은 달
17 화
비둘기는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묘우가 내린 명대로 사영의 전각까지 거의 두 시간을
날아가 날개를 접은 새는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렸다.
어차피 오늘밤 백호는 시찰을 위해 뱀의 일족의 영토에 들르고, 연회를 준비해 초대할
예정이었다.
***
“염려놓으십시오.”
“물론입니다.”
“너 자꾸 왜 그러는 거냐?”
파란 새의 눈은 구슬 같았다. 눈을 깜박이면서 검은 눈이 우현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곰의
신령은 잠시 멍해져서 두 손을 풀었다. 새는 다시 날갯짓을 하다가 사람으로 둔갑했다.
곰 중에도 대단히 예민하고 난폭한 자들이 많지만 이렇듯 낮은 계급인 자들은 대다수 사람
좋고 느긋한 성격이다. 그 말은 암시도 잘 걸린다는 뜻이었고 이용하기도 좋다는 뜻이었다.
“새의 일족은 재주가 많은 편이지. 우둔한 자들의 정신을 잠시 조종하는 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고.”
“일이 쉽겠는데.”
싫어한다면 그 증오심을 이용해도 되지만 서로 정사를 맺게 하는데는 물론 호감 쪽이 훨씬
이용하기 편안하다. 연화 쪽은 미약으로 몸이 잔뜩 달아오른 상태고 거부는 하기 힘들
것이다.
***
‘하여간 기분 좋지 않은 땅이야.’
금수의 붉은 달
18 화
“사방신 백호 님을 환영하옵니다.”
“감사합니다.”
“제 이름은 사영.”
“어서 오십시오.”
“손님?”
“착각하지 말게.”
***
“왜…… 왜 이러지.”
‘대체…… 왜…….’
“우, 우현 님?”
“연화 님.”
그는 뭔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시겠습니까?”
“후…….”
“그러셨군요.”
‘대체 왜 이러지…….’
금수의 붉은 달
19 화
“우, 우현 님?”
하지만 우현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 연화의 몸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녀는 허벅지를 꽉 맞물렸다. 사내의 존재감에 다리가 저절로 벌어질 것 같아서 무서웠다.
비좁은 다리의 틈 사이로 축축한 느낌이 났다.
“……냄새 좋아.”
“암컷냄새.”
“우현 님! 이게 무슨!”
경악한 연화는 다리가 저절로 풀리는 것을 느끼며 애써 우현의 머리를 밀어내려 했지만
팔과 손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내다가 통하지 않자 발로 차도
우현은 느껴지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
하지만 지금은.
“우현 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거의 비명처럼 연화가 소리를 질렀다. 이쯤 되면 다른 경비병이라도 올라오지 않을까
그녀는 필사적으로 바랐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창문도 닫아놓았지만 이렇게까지 소란을
모를 일인가.
“놓아주세요……!”
눈물이 흘러서 뺨을 온통 적셨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최소한 자신을 덮치는
사내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백호가 아닌 자가, 낯선 자가 자신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안으려 하는 광경을 맨 정신으로 버텨낼 수가 없었다.
“백호 님…….”
***
“술은 좋군.”
“몇 병 준비시켜 놓겠습니다.”
백호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각 일족의 대표자나 원로들은 공물을 준비해
보내는 것이 일상이다. 이렇게 직접 와서 공물을 가져가 주겠다는데 고맙다고 해야 할
일이다. 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과연 맛이 좋아.”
‘이건 뭐지?’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금수의 붉은 달
20 화
“그렇군요.”
사혈은 탄성을 냈다. 백호는 입맛을 다시며 술을 몇 잔 더 마셨다. 기이할 정도로 달고
맛있는 술이다. 쌉싸름하면서도 끝맛이 달착지근했다. 사혈은 잔을 기울이는 백호를 보며
은근하게 말했다.
“자 보십시오. 비파 역시 아주 잘 탄답니다.”
“황공합니다.”
사영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입은 푸르고 검은 비단옷이 사각거리며 소리를 냈다. 사혈이
눈치를 보다가 얼른 그녀를 불러 올렸다.
“그거 재미있구나.”
“호승심이 있는 게냐?”
“음……?”
“맛을 보시렵니까?”
“백호 님?”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아…….”
“백, 백호 님?”
“백……호 님, 저는 그저.”
“……아. 예, 예. 물론이지요.”
사혈은 급히 백호의 자리였던 곳으로 뛰어들어 갔다. 자리에 쓰러져 있던 사영이 일어나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겉옷을 입고 있었다. 눈매가 붉었다.
“대체 왜!”
금수의 붉은 달
21 화
“…….”
그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똑바로 앉았다. 사혈은 경멸하는 시선을 딸에게 던졌다.
“하여간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 게 없구나. 대체 너 같은 게 왜 내게서 나온 거지?”
“…….”
‘연화는 잘 있겠지.’
‘보고 싶군.’
“가봐야겠어.”
‘……주술?’
“우현 님! 제발!”
“안 돼……!”
“악!”
“암컷.”
“우현 님!”
“암컷…….”
얄팍한 저고리가 힘없이 찢어졌다. 우현의 손아귀가 멍이 들 정도로 연화의 팔목을 잡았고
거의 부러질 것 같은 통증에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암컷.】
곰의 신령의 눈이 흰자위 없이 새카맣게 물들어 갔다. 짐승의 본능이 신령의 이성을 이기고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감히 신의 거처에.”
“여, 연화 님……?”
“커헉!”
우현은 대번에 납작 엎드렸다. 다가오는 백호의 살기에 수조가 걸었던 주술은 단숨에 깨져
달아났다. 덜덜 떨고 있는 곰의 신령을 일으켜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백호의 머리카락이
달빛에 차갑게 빛났다.
“…….”
“말해 봐.”
“백호 님.”
금수의 붉은 달
22 화
익숙한 남자의 체향에 연화의 이성은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 그녀는 완전히 달아오른 몸을
어쩔 줄 몰라 하며 백호의 옷자락을 쥐었다. 말없이 내려다보던 남자는 그녀를 끌어당겨
안아 올렸다.
“백호 님…….”
“쉬, 괜찮다.”
약으로 완전히 정신이 엉망이 되어버렸을 텐데도 연화는 힘겹게 백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을 깨닫고 백호는 기꺼움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차올랐다.
“백, 호 님.”
“아! 아아!”
“흣, 흐윽!”
“으응!”
“……!”
연화는 자신의 밑이 벌어지고 아랫배 속으로 파고드는 백호의 양물이 지나오는 길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세세하게 느꼈다. 내벽 속으로 그의 남근 모양이 낙인을 찍듯 모양이
조각되는 것 같았다.
“그래.”
“흐, 응! 아……앙!”
하지만 참지 못한 것은 연화 쪽이었다.
“학, 하앗…….”
“……연화야.”
“제발…… 제가 부서져도 좋으니, 흣. 더 세게 안아주세요. 으, 흣……. 더 빨리…….”
“…….”
아직까지 완전히 들어온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연화는 신음을 터뜨렸다. 아랫배
깊숙이 배꼽 부근까지 백호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약으로 사내를 갈구하게 된 몸에도 버거울 정도의 양물이다. 연화는 하지만 더 이상
억누르지 않고 신음을 내면서 백호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배, 백호 님! 아! 앙!”
“아! 아흑!”
“아으! 응……!”
금수의 붉은 달
23 화
“흐, 핫…….”
연화가 신음하며 도리질 쳤다. 어지러운 머릿속으로도 백호의 뜨거운 물건만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흐릿한 시야 속으로 손을 뻗어 백호의 허리를 잡고 스스로 몸을
움직였다. 숨이 모자라 정신마저 흐렸지만 쾌락을 잡고 싶었다. 그래야 이 욕망이 해소될
수 있었다.
“그래.”
“…….”
“겁도 없구나.”
연화가 소리를 누르지 못하고 높게 신음을 올렸다. 질꺽이는 소리는 그녀의 신음성에 눌려
들리지조차 않았다. 내벽 전체가 백호의 양물로 가득 차서, 아기집과 내장마저 완전히 눌려
압박에 뭉개질 것 같았다.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연화가 마지막으로 비명을 올렸다. 벌어진 입가로 타액이 흐르고
발음이 전부 샜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었고 시야가 마구 번져 나갔다. 발가락이
곱아들며 뒤꿈치가 침대 이불 위로 필사적으로 비벼졌다. 그녀의 눈이 다시 뒤로 넘어갔다.
지나친 쾌락에 본능적으로 백호를 밀어내려 연화의 양손이 남자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소용은 없었다.
“아, 아, 아아아!”
“큭…….”
그녀가 절정에 오르며 가뜩이나 빠듯하던 내벽은 마치 끊어먹을 듯 양물을 씹었다. 백호가
숨과 함께 신음을 토해 냈다. 진저리 치며 경련을 일으키는 연화의 아랫배 속으로, 백호
역시 참았던 절정을 쏟아내었다.
신의 뜨거운 체액이 연화의 내부를 엉망으로 만들며 채웠다. 그녀는 자신의 안에 차오르는
백호의 정을, 거의 사라진 정신 속에서도 느꼈다.
“과했던 것 같은데.”
“다행이구나.”
그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들어와라……. 묘우.”
“백호 님.”
“……침입자라니요?”
“……죄송합니다.”
“약이라니…….”
“어디로 가시는지요.”
***
밤이 깊어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 백호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불길했다.
일단 사혈은 허리를 굽히고 백호의 앞으로 나아갔다. 일족의 원로들은 그의 뒤에서 허리를
굽힌 채 물러나 있었다.
“재미있는 일을 벌였더군.”
금수의 붉은 달
24 화
“…….”
“…….”
“말이 번지르르하군.”
사혈은 침을 삼켰다.
“사영, 네 딸의 목숨이라!”
백호가 웃었다. 웃음소리는 다소 건조했다. 언제나 호탕하게 웃고 불같이 화내던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얼굴 위로 가면을 쓴 것처럼, 그는 가볍게 웃는 얼굴을 하고서
분노를 내뿜고 있었다.
“신이시여…….”
조롱조였지만 사혈은 불쾌함을 나타내지 못했다. 백호의 목소리 밑에 들끓는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혈은 자신의 손등이 본능적으로 떨리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입 안이 바짝
말라왔다.
분명 연화는 그저 잠시의 발정기를 잠재울 반려일 뿐이라고 들었다. 처음으로 가진
육체관계라 해도 연화의 위치가 달라질 이유는 없었다. 사방신이 자신의 반려로 인간
따위를 들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배, 백호 님!”
“백호 님, 한 번만 용서를!”
고통에 사혈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녹아내린 얼굴 거죽은 지독하게 흉했고 그 밑으로
뱀의 꺼풀이 드러났다. 신령으로서의 외형과 뱀의 원형이 추하게 뒤섞인 모습이었다.
그가 차게 웃었다.
***
25 화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손을 저어 그녀의 근처로 시원한 바람을 불게 했다.
집중한 눈은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머리카락이 살짝 날려서 귀를 간지럽혔다.
그녀는 오히려 관련된 자였던 우현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수조의 주술에 걸렸던 그를
아는지라 백호도 그를 크게 탓하지는 않았다. 다만 더욱더 수련하여 그따위 질 낮은 주술에
걸리지 말라고 호령하고 우현의 엉덩이를 걷어차 밖으로 내쫓았을 뿐이었다.
우직한 곰의 신령은 사색이 되어 도망을 나갔다. 아마 오랜 수련을 거친 후 백 년쯤
뒤라면 다시 궁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왜지?’
하지만…….
***
잠깐 벽에 기대 졸던 연화는 자수를 놓던 옷감을 떨어뜨릴 뻔하고 깜짝 놀라 깨어났다.
그리고 눈을 뜨고 한 번 더 놀랐다. 바로 코앞에 백호의 커다란 푸른 눈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 백호 님.”
“그래.”
그가 웃었다. 어딘지 조금 불안해 보이는 백호의 표정에 연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방신인
그가 불안해 보이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아마도 자신의 마음이 보인 게 아닐까 하면서
그녀는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냐?”
“그럼요. 저는 괜찮습니다.”
연화가 부드럽게 웃었다. 백호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은 이마가
따뜻했다.
“예쁘구나.”
“백호 님.”
익숙한 시녀들이 역시나 익숙하게 백호와 자신의 정사 장면을 피하는 광경을 상상하며
연화는 볼을 붉혔다.
그녀는 다리를 벌리고 백호와 마주앉은 자세가 민망했지만 곧 그 사실을 잊었다. 백호의
단단한 양물이 다리 사이에 지긋이 눌렸다.
“……하, 아…….”
곧 그녀의 안으로 백호가 진입했다. 빠듯하게 벌어진 골반이 힘겨웠다. 연화는 숨을 조절해
쉬면서 그를 받아들였고, 조금 더 앞으로 움직이며 남자를 품었다.
스스로 움직여 자신의 물건을 품어주는 연화를 보며 백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따뜻한 몸 속과 손 안에 잡히는 가느다란 몸, 자신만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담긴
애정.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금수의 붉은 달
26 화
생명력이 부풀어 오르는 봄과 여름의 경계에 신령계의 모든 원로들이 선물을 가지고 백호를
찾는다. 신령계의 원로들은 덕을 많이 쌓아 힘이 강해진 신령들로, 그만큼 나이도
까마득하게 많았다. 몇몇 원로는 백호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백호는 미소를 지으며 연화를 끌어안았다. 인간인 그녀가 낯설어 할 일임은 당연했다. 원래
일시적인 반려는 공식적인 자리에 대동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어쩐지 연화는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자신의 뺨을 감싸는 큰 손에 기대면서 인간의 여인은 미소를 지었다. 손 안에 한 뺨이
완전히 감싸이고도 남는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신은 알 수 없이 가슴을 울리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호접을 위시한 시녀들이 다가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미 그녀들의 손에는 장신구함과
옷가지가 곱게 개어져 들려 있었다.
“하지만 저는…….”
과하게 무겁지 않도록, 과하게 정식으로 치장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연화는
어쨌든 정식 반려는 아니었으니까.
“자, 옷을 입으실까요.”
“제가 걸어드릴게요.”
자신이 단장시켜 놓고도 마음에 들어서 호접은 뒤로 물러서서 흐뭇하게 웃었다. 자그마한
인간의 여인은 아주 위엄 있고 화려했다. 그녀는 나비 날개를 팔락거리며 허리를 굽혔다.
마치 정식 반려에게 하듯 깍듯하고 단정한 자세였다.
“회장으로 납시지요.”
***
“…….”
“호 님…….”
“백호 님…….”
“백호 님!”
곁에서 들리는 큰 소리에 백호가 흠칫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앞에는 신령계의
원로들이 모여 앉아 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수의 붉은 달
27 화
“반려, 연화 님 드십니다.”
“아름답구나.”
“저분이 그…….”
청수희가 어딘가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물었다.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다. 연화는 그녀를 마주 보았다.
“아, 저는.”
신령계에도 아름다운 여인은 많다. 인품이 훌륭한 여인 역시 많다. 하지만 백호는 연화에게
속수무책으로 마음을 빼앗겼고,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백호 님.”
잠깐 생각에 빠진 백호의 손등을 연화가 자신의 작은 손으로 덮었다. 그녀는 백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접문했고, 연회장 안의
원로들이 다 같이 헛숨을 들이켰다.
“누구, 할 말 있는 건가?”
간만에 재미있는 일이다. 신령계를 다스리는 자에게 나타난 반려가 인간 여인이다. 청룡과
분쟁이 있게 될까? 그녀는 눈을 반짝였다.
“그렇군요.”
“허례허식을 말라 그렇게 일러도 고쳐지질 않아. 오히려 그걸 핑계 삼아 잔인한 짓들을
벌이지. 못난 것들.”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백호가 시선을 돌렸다. 아름다운 푸른 머리의 여인이 방긋거리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호접 님.”
“…….”
“이 물기가 제게 알려준답니다.”
젖은 손끝을 들고 샘의 정령은 작게 웃었다. 무관심한 척하고 있지만 백호의 얼굴이
미세하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정말이냐?”
“싫으십니까?”
“그럴 리가.”
청수희는 자신의 발치에 따라온 물그릇을 가까이 당겼다. 그녀는 이제 흥미가 동하는 듯한
얼굴의 백호를 보며 말했다.
“연회가 끝나면 연화 님과 함께 제 거처로 오십시오. 연화 님의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드리지요.”
금수의 붉은 달
28 화
그는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예?”
“우울해하더구나.”
“……아.”
【내 등에 타라.】
【얼른.】
“아……. 네, 네.”
뒤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령과 원로들이 여전히 연회를 즐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순식간에 뒤로 멀어져 갔다.
【그렇다고 봐야지.】
“……아, 정말이지.”
“청수희!”
“아뇨, 그게 아니라…….”
【이상하군요.】
“무, 무슨 말씀이세요?”
【아하.】
금수의 붉은 달
29 화
샘의 정령은 물 표면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고요히 사라져 버렸다. 그 위로 흐린
사람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어머니.”
“연화야!”
“헉……!”
“청수희.”
“마른다 한들 무슨 상관이지?”
【…….】
청수희는 바로 답이 없었고, 백호는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 때 그의 소매를 조금 당기는
손이 있었다.
“백, 백호 님…….”
“그게 무슨 소리냐.”
“…….”
【하지만…….】
샘의 표면이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시작된 파도는 조금씩 철썩이며 수면을
높여, 다시 샘가에 찰랑거리도록 물이 돌아왔다. 그 안에서 푸른 머리의 여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연화 님.】
“……네.”
【…….】
“네?”
【저걸 주세요.】
“……아, 이건 안 돼요.”
【과연, 화끈하시네.】
“백호 님! 그건……!”
【당신의 소원대로.】
샘의 정령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신나게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연화는 멍한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귀해봤자 노리개이지.”
“사방신의 반려가 달 수 있는 물건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물건을 어찌 이런 일에…….”
“들어보렴, 연화야.”
“…….”
“네가 왜 일개 인간이냐.”
“백호 님은 너무 다정하세요.”
“난 다정하지 않아.”
‘난 과연 백호 님을 잊을 수 있을까.’
사실 자신이 없었다. 그가 대단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그가 이토록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서였다.
“…….”
“그만 말씀하세요.”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백호의 옷깃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지극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백호의 부드러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고 그의 따뜻한 호흡을 느꼈다. 그러지
않으면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금수의 붉은 달
30 화
“연화야.”
백호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의 감정이 고조되어 있을 때 몸을 나누어도 되는 것인가,
망설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연화가 급히 손을 들어 백호의 옷깃을
벌리기 시작했을 때 생각은 사라졌다.
“하, 흣…….”
“이……상해, 진다니요……?”
“응, 흐으…….”
“안아주세요. 백호 님…….”
“아아, 아아아.”
“흣, 흐읏…….”
“나무바닥이 부드럽네요.”
“고사한 연리지를 베어 만든 정자란다. 두 개의 나무가 한데 묶여 합쳐진, 기이한
나무지.”
“그랬군요…….”
‘당신들이 부러워요.’
연화는 속으로 나무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은 한 몸이 되어 정자를 지탱하고 있는, 누군지
모를 두 신령. 서로가 얽히고설켜 완전한 사랑을 이루어낸.
***
만희는 비웃었다.
제대로 치장하지 못하고 수수한, 더럽지만 꽤 청순한 이목구비였다. 만희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처연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 일가족을 궁으로 들이라 했다.
금수의 붉은 달
31 화
신음하는 가족들의 사이로 다가가 만희는 손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창백하게 핏기를 잃은
그녀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만희는 히죽 웃었다.
“왜, 싫으냐?”
“아…….”
자비로운 척하는 말투에 손녀는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하지만 알고 있었다. 만희는 결코
대가 없이 그냥 놓아줄 자가 아니었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옵니다.”
채찍질에 소리를 지르던 목은 갈라져 거친 소리가 나왔다. 얌전히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
깐 여인을 보면서 왕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
“음? 무슨 소리냐.”
만희는 그녀의 턱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사내의 거대한 손은 언제든 여자의 목을 조를 수
있었다. 두려움에 떨리는 그녀의 어린 얼굴을 보면서 왕은 입가를 올렸다.
그는 천천히 여자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사내의 뜨거운 숨결에 그녀는 흠칫하고 고개를
숙였다. 여자에게서는 오래된 몸냄새와 흙냄새가 났다. 비위가 상하면서 동시에 구미가
당기는 이상한 냄새다.
만희는 웃었다.
“목숨만은, 전하!”
“시끄럽군.”
일가족이 일제히 터뜨린 애원에 만희는 얼굴을 구겼다. 약하고 가난한 자들의 목소리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손목만큼 굵은 채찍을 휘둘렀다.
“크헉!”
“……넌 뭐냐.”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관리의 비명이 터졌다. 갑자기 시작된 신하에 대한 매질에
백관이 움찔했으나 누구도 나설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런다면 매질의 대상은 자신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오호라.”
***
“깨었느냐?”
금수의 붉은 달
32 화
“아……. 옷이.”
“백호 님, 그래도…….”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백호 님!”
“그래, 그래.”
“흣!”
예상치 않게 예민한 끝에서 올라오는 쾌감에 연화가 신음하면서 앞으로 고개를 떨궜다.
“백호 님, 정말이지.”
“뭐 어떠냐.”
“이렇게 밝은 데서는…….”
“빨리……. 으, 응…….”
“뭐라고?”
고개를 숙이고 감각을 버티는 연화의 옆으로 백호의 긴 머리카락이 후두둑 흘러내렸다.
그가 고개를 숙여 연화의 뺨에 입을 맞추고 몸을 완전히 밀착시켰다. 가뜩이나 힘겨운 그의
양물이 더 깊이 들어와 완전히 자리 잡았다. 아랫배의 내장이 전부 밀려 올라가는 듯한
느낌에 연화는 힘들게 숨을 내쉬었다.
“하, 흣, 흑…….”
뒤에서 안기자 삽입은 더 깊어진 것 같았다. 백호는 연화가 적응할 수 있도록 느린 속도로
허리를 움직였다. 허리를 꽉 잡아 자신의 품 안에 넣고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몸을
보고 있자니 만족스러운 정복감이 차올랐다.
“아!”
“…….”
금수의 붉은 달
33 화
‘언제쯤일까, 내가 떠나는 시간.’
“공기가 찬데 나와 있구나.”
“참 작고 가느다란 몸이야.”
“배, 백호 님, 여기는…….”
“왜?”
“백호 님!”
너무 놀라워서 연화는 입을 벌렸다. 오전의 햇살이 쨍하게 빛나며 호수의 수면을 비췄다.
하늘만큼 푸른 그 수면은 잔물결만 있을 뿐 고요했다.
“마음에 드느냐?”
그는 그녀의 콧등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연화는 따뜻한 입술을 느끼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 때 그들의 뒤쪽 나무 사이에서 낑낑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지요?”
“하지만요.”
“연화야.”
“잠시만…….”
“만족스러우냐?”
금수의 붉은 달
34 화
“……아.”
연화는 찔끔했다. 백호는 금수의 왕이다. 그가 지키는 세계의 법칙은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연 그대로의 법칙이 그의 수호 아래 돌아간다. 자신의 법칙을 눈앞에서 거스르는 꼴을 본
것이 그에게 결코 기쁜 일일 수는 없을 것이다.
“…….”
남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하지만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약사여래로부터 그렇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약자가 있다면 돕고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을
돌려주는 것. 그것이 연화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죄송합니다.”
“하여간 보살들이란.”
저승사자가 와도 그 멱살을 비틀어 영혼을 내리게 만든다는 약사여래. 그의 능력은 현무가
가장 싫어했다. 지하와 저승의 지배자인 현무는 자신의 주민이 될 영혼을 자꾸 끌고
이승으로 내려버리는 약사여래가 마땅할 리 없었다. 현무만큼은 아니어도 적자생존의
법칙을 수호하는 백호 역시 그를 싫어했다.
“백호 님.”
연화는 가만히 백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녀를 대하는 데 있어,
처음으로 보는 불편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묘우는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호접은 가끔 인간과 다른 세계를 불신하고 싫어하는
묘우의 성격 탓에 두통이 올 때가 있었다.
***
자신의 인생을 부정할 수도 없어 그녀는 초조히 기다릴 뿐이었다. 백호의 심기가 풀리기를.
묘우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호접은 미소를 지었다. 백호의 몸에서 향긋한 풀내가 온통
풍겼다. 발에 신은 장화에도 풀물이 들어 있었다.
“방금, 얼굴 빨개지셨지?”
“그렇군. 내 참.”
“너 너무 못마땅한 거 티 나는 얼굴이야.”
연화는 몸가짐이 고상하고 차분했다. 함부로 신령의 시녀나 시종들에게 하대하고 부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합격점이었다. 조심스럽고 사랑스러운 언동은 호접이 보기에도 좋았다.
백호가 연화에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것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
금수의 붉은 달
35 화
‘차라리 그게 나았을지도.’
자꾸만 앞길을 방해하는 토끼에게 말을 걸면서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꽃길이 절벽 아래로
쭉 이어져 있어 향기롭다. 그녀는 야생화를 구경하면서 외길을 따라 내려갔다.
“꺄악!”
손목의 피부가 찢어지는 것 같아서 연화는 비명을 질렀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를 질질 끌고 밑으로, 더 밑으로 내려가는 희끄무레한 형체는…….
‘……귀신?!’
“이거 놔!!”
그녀는 혼령을 걷어차려 했지만 발은 헛되이 허공을 지나갔다. 그 와중에 혼령의 악력은
지독하게 세서 연화의 손목에는 벌써 새빨갛게 울혈이 올라왔다.
형체는 흐물거리면서 연화의 사지를 결박하고 그녀의 육신을 끌어당겼다. 날카로운 통증이
냉기와 함께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
“……무어냐.”
마음이 심란해서 백호는 사방을 떠돌다가 침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연화가 없었고, 그는
시종들의 말에 따라 정원으로 나갔다. 그곳에도 연화는 보이지 않았다.
연화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려던 그의 발치에서 자그마한 동물 하나가
바지를 물었다. 백호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조금 의아해했다. 아주 작은 토끼.
백호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하지만 토끼는 필사적으로 백호의 다리에 매달리면서 뭔가를
말하려 애썼다.
“이런 젠장……!”
토끼가 알려준 방향을 향해, 백호는 몸을 날렸다. 그의 육체가 허공중에 떠올랐다가 빠르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수직으로 강하하며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연화야!”
“백호 님!”
백호가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혼령의 얼굴에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검도
무엇도 쓰지 않은 말 그대로 원초적인 공격이었다. 순수한 물리력으로 주먹을 정통으로
맞은 악귀는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난 연화는 백호의 뒤에서 덜덜 떨면서 몸을
웅크렸다.
분노한 사방신은 사라지려는 영혼을 바닥에 패대기치고 연달아 주먹질을 해댔다. 신력에
의해 현계에 고정된 혼령이 사라지지도 못한 채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죽음의 비명을
올렸다.
연화는 백호의 뒤에서 귀를 막았다. 원한, 원통함, 비통……. 모든 감정이 그녀의 뇌리를
점령했다.
금수의 붉은 달
36 화
“백호 님!”
연화는 벌벌 떨고 있었다.
“이리 와라.”
백호는 아주 불쾌했다.
“가지 마세요.”
남자는 그녀를 잃을 뻔했다는 위기감으로, 여자는 저승에 끌려갈 뻔했던 두려움으로 서로를
찾았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백호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췄다.
“안아주세요……. 안아주세요.”
“백호 님, 백호 님…….”
‘체온이 낮군.’
그렇지 않아도 강한 그녀의 음기가 넘칠 듯 높아져 있다. 체온은 낮아졌고 혈액이 느리게
흐른다. 악귀가 저승으로 끌어당긴 영향일 것이다.
백호는 자신의 양기를 전신에 돌리면서 연화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손바닥 중심을 통해 아주 느릿하게 사방신의 기운이 인간 여인에게로 흘러들었다.
“흐…….”
“아……. 흐…….”
“연화야.”
“백호 님…….”
“백호 님.”
“내가 이곳에 있으니 염라대왕이 직접 오더라도 너를 데려가지 못한다. 너는 내 곁에
있으니.”
사방신은 여인의 반듯한 이마에 뜨거운 입술을 내렸다. 지금 연화는 약해져 있다. 극도로
깨질 듯 연약한 그녀에게 손을 대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참지 못하고
여인을 끌어안았다. 연화 역시 필사적으로 백호의 목덜미에 손을 감았다.
원래도 가늘고 부서질 것 같은 몸이다. 지금은 한결 더했다. 새처럼 가늘고 가벼운 골격이
백호의 손 안에서 마치 그대로 부러질 것 같아서 그는 애정 어린 손길로 가볍게 여인의
늑골을 끌고, 그 아래 허리를 손에 쥐었다.
백호는 연화를 무리시키지 않고 자신의 기운을 조금씩 천천히 불어넣었다. 연화는 사지를
활짝 벌린 채 침대에 늘어져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달빛을 후광처럼 두른, 희고 흰 머리카락의 남자. 그의 형형한 눈동자에는 걱정과 애정이
가득 차 빛나고 있었다. 세상 어느 보석보다 귀하고 귀한 자.
연화는 깨달았다.
“백호 님…….”
37 화
“아, 아아!”
“백, 백호 님…….”
연화가 허덕이며 간신히 신음처럼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백호는 미소를 지으며 연화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자거라, 아침까지.”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손목의 피부가 지독히 아팠다.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연화의 치유력은 본인 스스로에게는 쓸 수 없었다. 그걸 두고 백호는 ‘약사여래의
악취미적인 자기희생 취향’이 반영된 결과라고 못마땅하게 평했다.
그녀는 느른한 몸을 억지로 움직여서 손목을 살펴보다가 일어나 앉았다. 침실로 들어오던
백호가 연화를 보고 미소 지었다.
“일어났느냐.”
“이…… 이걸 어떻게…….”
“세상에.”
“감사, 감사합니다…….”
“백호 님.”
차마 사랑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것이 사랑이라 확신하였으나, 그것을 밖으로
꺼내어 말할 수 없었다. 연화는 눈물을 참으면서 그의 품 안으로 무작정 머리를 묻고
파고들었다.
백호는 연화가 마음에 들었다. 아니, 마음에 든다고 표현하는 것도 우스울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발정기이니 그런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이제는 그것이 아니었음을 안다.
“정말 이상한 일이로구나.”
어쩌면 연화 자신은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백호는 자신이 멋대로 여인을
끌고 왔던 밤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백호는 조심스럽게 연화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붙이고, 커다란 손으로 연화의 부드러운
피부 위를 매만졌다. 여인의 모양 좋은 가슴은 백호의 한 손에 잡혔다. 흰 피부에 말랑한
가슴을 만지면서 그는 봉긋 솟은 분홍색의 유두를 입 안에 머금었다.
“으응…….”
백호의 고개가 숙여져 여인의 음부에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그의 두텁고 뜨거운 혀가
예민하고 부드러운 연화의 은밀한 피부 위를 훑었다.
“흣……! 흑.”
“흐읏……. 하, 앙!”
“연화, 연화야…….”
금수의 붉은 달
38 화
“글쎄요.”
“……돌려보낸다고?”
“……시끄러워.”
침실에서 시녀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연화는 불안한 심정이 되었다. 어쨌든 자신이 섣불리
길을 나서 벌어진 일이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백호가 저승의 주민을 소멸시켰다. 그
때문에 다른 사방신과의 분쟁이 벌어지면 그 빚은 고스란히 백호가 떠안게 된다.
“넌 신경 쓰지 마라, 연화.”
백호는 거친 성질을 애써 잠재우면서 미소를 지었다.
백호는 연화를 침실에서 기다리도록 하고 자신의 수행실로 자리를 옮겼다. 현무가 공간을
옮기기 위해서는 어둠이 필요한 법, 이곳에 마땅한 지하의 공간은 없었으므로 백호는
사방이 꽉 가로막힌 수행실을 택한 것이다.
“올 테면 빨리 와라, 현무.”
백호가 못마땅하게 말했다.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현무가 천천히 가느다란 촛불 아래로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백호만큼이나 장신인 사내는 앉아 있는 백호를 내려다보다가
흐흣거리며 웃었다.
백발의 남자는 인상을 썼다. 청룡이 일부러 백호의 신경을 건드린다면 현무는 언제나
백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에 무신경했다.
“오랜만이다.”
“그건 그렇지.”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죄라.”
백호가 코웃음을 쳤다.
“흠.”
현무는 흥미로운 얼굴로 백호를 살폈다. 흰 머리카락의 남자는 사나운 눈으로 어둠의 신을
노려보았다.
“안 돼.”
현무가 웃었다. 스산한 미소에 백호가 못마땅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지하에서 올라온
자들에게는 흙 밑 특유의 축축함과 기분 나쁨이 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수행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신령계의 생명력 가득한 햇빛이 온통 어두운
수행실로 쏟아져 들어왔으나 현무의 검은 장포 자락에는 미치지 못했다. 저승을 다스리는
사방신의 존재는 생명력과 빛을 모두 빨아들여 무저갱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
“호접 님.”
금수의 붉은 달
39 화
“흠.”
백호는 사방신 중 가장 격렬한 성품의 소유자다. 비교적 선하고 온화하고, 스스로 자비롭다
말하는 성향이긴 했으나 그것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향하는 것일 뿐.
“저 때문에 하필…….”
“하지만…….”
“괜찮아요, 연화 님.”
“오, 이런.”
호접이 중얼거리며 날개를 접고 허리를 굽혔다. 연화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다가
호접이 인사하는 방향을 보고 움찔했다.
백호만큼이나 장신인 사내가 그의 곁에서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긴 흑발과 검은 장포가
바닥에 끌릴 만큼 길고 얼굴은 얼음처럼 창백했다. 빛을 담은 듯 밝은 백호와 완벽하게
대비되는 사내였다.
“현무 님을 뵙습니다.”
“이, 인사드립니다…….”
연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백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현무를 쳐다보다가 손을 저었다.
“…….”
“뭐…….”
“무엇을?”
“……아까는 그런 소리 전혀 없었잖은가.”
“하지만 그곳을 넘기면 주작이 난리를 치겠지. 그곳을 통해 남방으로 저승사자들이 출입할
테니 주작이 기겁할 텐데.”
백호는 잠깐, 아주 잠깐 반성했다. 신령계의 존재를 현무가 해했다면 대번에 난리를 피웠을
자신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이봐, 인간의 여인이여. 네 반려가 이리도 마음이 곱다. 너 때문에 영토마저 수월히
내놓는구나.”
“현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아무렴 그렇지.”
“닥쳐라.”
“백, 백호 님…….”
***
금수의 붉은 달
40 화
“내 복이 이쯤인 것을.”
이제 사영은 거의 포기 상태였다. 원래 백호의 곁을 차지해 신의 반려가 되겠다는 욕심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우물물을
내려다보았다.
“잠깐, 아가씨.”
어디선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사영은 흠칫했다. 그녀는 드디어 환청이 들리나 해서 주변을
슬그머니 둘러보았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두 눈 안에서 눈동자가 굴러가며 숲을 살폈다.
하지만 근방은 아무도 없이 고요했다.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사영은 미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다시 우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 누구……!”
“누, 누구요?”
“나 말이지, 나는…….”
청수희가 높게 웃었다.
“…….”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난 주고 싶은 게 있어.”
“대체, 자꾸……!”
“이거, 뭔지 알아?”
“음, 역시 아는 얼굴이네.”
“받았어.”
“……뭐라고요?”
“받았다고.”
“그냥.”
“이유가 결과인가, 결과가 이유인가. 그건 모르는 거잖아? 반려가 되었기 때문에 노리개를
가지게 되는 건지, 아니면 노리개를 가져서 반려가 되는 건지.”
***
“무슨 일이래요?”
“언제부터 없어졌느냐?”
촌장은 우는 소리를 했다. 수령도 눈치를 보면서 손을 비볐다. 그들은 관리의 자비를
바랐다. 이왕 이곳에 왔으니 자신들의 사정도 좀 돌아봐 주기를, 제사도 잘 치러냈으니
말이다.
금수의 붉은 달
41 화
“왕께서 내게 연화를 찾아오라 명하셨다. 그 여자애는 죄인 아니냐, 어쩌자고 마을
바깥으로 나가게 둔 게야!”
“그 여자를 데려와라.”
“아닙니다, 아닙니다…….”
성현은 수령에게 소리를 질렀다. 심약하지만 나름대로 자비로운 성품의 수령은 쩔쩔매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의 곁에서 촌장도 어쩔 줄 모르며 엎드려 있었다.
제사장 성현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하늘 위로 작은 새 한 마리가 아까부터 맴돌고 있었다.
관아의 하늘 위로 낮게 날던 새는 곧 허공 중으로 사라졌다.
***
“……이런.”
묘우는 과연 이 소식을 연화에게 전해야 하는가, 아니면 백호에게 전해야 하는가 고민했다.
아마도 다수의 신령이 거기에 동의할 것이다. 신의 반려는 신령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 그렇군요.”
“네?”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국왕전하께서요……?”
금수의 붉은 달
42 화
‘어머니…….’
“오……. 이런.”
그녀에게 기회를 주고 애정을 주었던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보내줄까? 사실 보내주지 않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애초에 그녀는 공물을 훔쳐낸
벌로 이곳에 와 있는 인간이었다.
그녀의 어두운 얼굴을 보면서 묘우는 눈을 굴렸다. 한낱 인간의 여자다. 사방신의 세계는
확고하게 나뉘어져 있고 신령들의 세계에서는 가치가 없는 생명이었다. 그저 백호의
눈속임만 할 수 있다면 된다.
그러면서도 꺼림칙함이 느껴졌지만 묘우는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죄책감 같은 건 느끼고
싶지 않았다.
“예…….”
“…….”
‘지금 당장 가야 해.’
“백호 님.”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왜 그러느냐.”
“배…… 백호 님.”
대답 없이 그는 여인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손으로 쥐고 벌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백호의 양물은 뜨겁고 단단해졌다.
“백호 님, 잠시만.”
“……연화야?”
단호하게 밀어내는 손길에 백호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아무리 수줍고 부끄러워도 연화는
여태 부드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단호함이 남자에게 확실하게 보였다.
“죄송? 무슨 이야기냐?”
“……너의 양어머니가?”
금수의 붉은 달
43 화
“백호 님.”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인간의 여인. 한 달이 되어가니 벌써 인간계가 그리워서 몸이
아플 지경이어요. 양어머니께 내려가 그곳에서 살고자 한다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이 뾰족하게 나갔다. 연화는 엎드린 그대로 어깨를 움찔했다. 백호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
입술을 물었다. 차마 그 이상을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백호는 고집을 부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연화의 얼굴을 보면서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백호 님.”
“……보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마을에 정 붙인 이가 있는 거겠지.”
남자는 여인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달빛이 그대로 들이치는 누각 위에서 맨 다리에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연화는 몸을 떨었지만 백호의 손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연화야.”
“백호 님…….”
연화는 허리를 움찔했다. 남자의 손가락이 은밀한 틈을 가르고 들어와 예민한 돌기를
건드렸다. 천천히 밑이 젖기 시작했다. 매끈한 내벽을 더듬으면서 백호는 여인에게 입을
맞췄다. 그는 자신의 허리끈을 푸르고 그녀의 다리를 벌려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려 앉혔다.
“흡…….”
“……연화야…….”
“…….”
그는 느릿하게 말했다.
호접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팔랑이는 그녀의 날개를 따라, 연화는 자꾸만 힘이 빠지려는
다리에 힘을 넣으면서 걸어갔다. 인간계까지 가는 길은 나비의 신령이 가장 잘 안다.
언제나 그 길을 오가는 유일한 자이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내가 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연, 연화냐?”
“……왕의 제사장이요.”
“그래.”
“맙소사.”
44 화
남자는 다시 엉엉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체, 대체 왜…….”
연화는 입을 가렸다. 잠시 신령계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이렇게 처참한 현실을 마주해야
하는 것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저씨…….”
“…….”
불을 지르고 사람도 죽였다. 중앙의 관리는 잔인했고 하나밖에 없는 협소한 입구를 막아선
병사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달아날 구석 같은 건 없었다.
“그건…….”
“신묘한 물…….”
“감사했어요, 아저씨.”
“……연화야.”
“갈게요, 아저씨.”
“그게 무슨 말이냐……?”
“……제가 없어도 저 대신, 그 우물이 마을분들께 도움이 될 거예요. 어쩌면 저보다 더.”
“…….”
“…….”
슬픔과 죄책감에 연화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흘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미 죽고 다친 이들을 애도하고 그들에게 사죄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러니 가야지.”
“누구냐.”
“누구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네가 바로 그 약사여래의…….”
“맞습니다.”
“더러운 천민 계집!”
금수의 붉은 달
45 화
“연화야, 연화야.”
“어머니.”
연화는 떠나온 신령계의 신령들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적대적인 신령들도 있었으나 대다수
부드럽고 상냥했다. 그것이 백호에 대한 경의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궁의 시녀들과 호접은
그녀를 아껴주었다. 적어도 천민이기 때문에 그녀를 경멸하는 일은 없었다.
“…….”
“저자를 옥에 잡아넣어라!”
“예!”
관리의 얼굴에 은밀한 웃음이 번졌다. 아무리 가난한 천민 부락이라 하지만 마을 하나를
털면 재물은 제법 나올 것이다. 하다못해 솥 단지 하나가 나와도 녹여서 팔아버리면 금이
된다. 그는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제사장님.”
“확실히 이행해라.”
“흠, 몸이 아프다?”
“뭘 하느냐, 먹지 않고?”
“……예…….”
버티기 위해서는 뭐라도 먹어야 한다. 그건 연화도 알았다. 그녀는 묶인 팔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마치 기듯이 그릇 쪽으로 다가갔다.
“…….”
46 화
그녀는 무엇이든 먹어야 했다. 그래야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의 안위를 나중에라도 확인할
수 있었다. 최소한 왕에게 갈 때까지라도 버텨서 그의 요구를 들어야 했다.
***
‘나는 어찌 되는 걸까.’
“나와라, 계집.”
연화는 넓은 알현실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좌우에 늘어선 내관과 어의, 시녀와
시종들이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높은 옥좌에 앉은 왕의 눈이
가장 차가웠다. 그녀가 정말 치유력을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허풍쟁이인지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더럽고 작은 여자로군.”
“그렇사옵니다, 전하.”
“황공하오나 그렇사옵니다…….”
“빌어먹을.”
그는 손을 내밀었다.
“가까이 오라.”
“어서, 어서 가까이…….”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연화는 두려움을 참으며 말했다. 왕의 새빨간 눈동자는 그녀의 얼굴을 탐색하듯 훑어보고
있었다. 두통을 견디느라 얼굴이 일그러진 채였다.
왕은 그 죄를 지금 받고 있는 것이다.
금수의 붉은 달
47 화
만희는 헛소리라 치부하겠으나 그녀는 왕의 머리 뒤쪽 희미하게 보이는 검은 그림자들을
보고 두통의 원인을 다시 확인했다. 저승의 주민이 되는 것을 거부한, 망자의 혼령들. 이
세상에 지나치게 많은 원과 한을 두고 죽어버린 자들.
“…….”
【저 비츤 무어신가…….】
혼령 중 하나가 뭉개진 발음으로 말하며 연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흐릿한 형체였으나
머리통이 절반쯤 날아간 형태였다.
【따뜻해…….】
“다 괜찮으니 빨리 해봐라.”
“잠시만, 잠시만…….”
“아.”
【그자는 악마야.】
원한과 혼란이 뇌리를 맴돌았다. 슬픔, 분노. 그들이 지나온 전쟁과 잔인한 광경들 속을
함께 걷는 것 같아 연화는 어깨를 떨었다.
【못나고 악한 자.】
‘잠시만, 잠시만…….’
“……참으로 신묘하군.”
만희는 연화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치유의 이능, 그것이 실존할 줄이야. 머릿속은
마치 비온 뒤 갠 하늘처럼 맑았다. 태어나서 거의 최초로 느끼는 명료한 머릿속이었다.
“망극하옵니다.”
“예쁜 아이로군.”
“예?”
금수의 붉은 달
48 화
“숫처녀인가? 쯧.”
“뭘 하는 게냐, 어서 오지 않고!”
“예, 전하.”
“제법 볼 만한 가슴이군.”
“그러하옵니다, 전하.”
시녀들을 따라온 내관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어차피 왕은 상당히 자주 백관들 앞에서
여자를 안았다. 특별할 일도 없는 노릇이다.
“받들겠나이다.”
기름으로 미끌거리는 검지와 중지가 한꺼번에 밀고 들어와 그녀는 아파서 신음을 삼켰다.
내관에게 방중술 교육을 받았던 몸이라 갑작스러운 삽입에도 찢어지지는 않았으나 억지로
열린 내벽이 고통스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연화는 자꾸만 떨리려는 입술을 물었다. 자신이 당하는 게 아닌데도 수치심과 모욕감이
밀려들었다. 알현실에 늘어선 모든 수하들이 전부 시녀가 능욕당하는 모양을 빠짐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간혹 연화의 얼굴을 보며 그녀가 느끼는 모욕감 역시 구경하고
있었다.
게다가 밑에서 연화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울음을 참는 것인지 눈가가 붉어져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예쁜 분홍빛입니다.”
금수의 붉은 달
49 화
만희는 히죽거렸다.
“제대로 빨거라.”
“재미있구나.”
이것도 또 새로운 여흥이다. 왕이 기껍게 웃었다. 아마도 연화는 남자를 모르거나, 최소한
익숙하지는 못한 여자일 것이다. 숫처녀를 특별히 선호하지는 않았으나 별식으로 나쁠 일은
없었다.
“얼굴이 반반해서 훈련을 좀 받았나 했더니 그것도 아닌데 승은을 입다니 정말 분에 넘치는
줄 알아라.”
“윽, 아읏……!”
“계집, 눈을 들어라!”
“아!”
“윽, 아앗……!”
그녀에게 정사란, 백호와 나누었던 그 순간이다. 힘없는 여인이 왕에게 강제로 범해지며
만인에게 그 광경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제발, 이제 그만.”
“백호 님…….”
“재미있는 아이군.”
‘그래도…….’
그래도 보고 싶었다.
“연화야.”
백호는 염원을 담아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신의 염원은 강렬했고 그 힘이 시야를
이끌었다. 아주 천천히, 천리안의 앞에 흐린 그림자가 떠올랐다.
‘다행히 잘 지내는구나.’
“고통이라.”
“연화야.”
“…….”
“연화야.”
“…….”
다과상을 내가려 왔던 호접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그녀는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함께 왔던 묘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호접의 날개가 간헐적으로 파닥였다.
“왜 그러지, 호접?”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글쎄다.”
묘우는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연화를 배웅한 것은 호접이었으나 별다른 말을 듣지는
못했던 듯싶었다.
51 화
‘미안하지만, 연화 님.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너 뭔가 아는 것이 있는 게냐?”
“뭘?”
***
“괜찮아. 견딜 수 있어.”
은연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연화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흑발을
구름처럼 틀어 올려 금으로 장식한, 눈이 기름하고 뺨이 흰 은연은 과연 대단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드셔야 합니다.”
“…….”
시녀의 눈빛은 냉랭했다. 그녀는 그릇의 뚜껑들을 모두 열었다. 함께 온 다른 시녀가
뚜껑과 아침식사 쟁반을 치웠다. 물론 음식은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뭐라구요?”
“어째서일까요,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음식이 그대로인 쟁반을 보자마자 벤 것이니 사실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하지.’
“……그래요.”
“전하, 용서하소서.”
“…….”
왕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52 화
“…….”
“아, 아니옵니다.”
“날 봐라. 눈을 들어.”
만희의 긴 눈꺼풀 안 새빨간 눈동자가 한동안 뚫어져라 연화를 주시했다. 시선의 마주침이
길어지며 연화는 두려움에 손이 떨려왔다.
“마음에 들어.”
만희는 미소를 짓고 그녀의 턱을 놓아주었다. 곧 그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가지고 들어와라!”
“뭐지?”
“어찌 저 같은 것이 전하 앞에 함께…….”
“…….”
“나는 빼어난 능력을 지닌 미인들을 아주 좋아하거든. 하긴 싫어할 자가 어디 있으랴만.”
그녀가 아무리 순진하다지만 만희의 다정한 태도가 평상시 모습과 다르다는 것쯤은 쉽게
알았다. 지금은 그저 그가 ‘다정하고 싶은 순간’일 뿐이었다.
“…….”
“제가 어찌 감히 전하께.”
“예.”
***
“개처럼 핥아먹었다면…….”
53 화
“무슨 말씀이신지…….”
그제야 알아듣고 내관이 마주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성현은 짐짓 엄격한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예!”
“……게 누구냐?”
그녀는 방 앞까지 다가와 자연스레 창문을 넘어 방에 들어와 섰다. 그제야 여자의 머리가
푸른색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성현은 흠칫 놀랐다. 인간의 머리가 저런 색일 수가 있는가?
“존경하는 제사장님.”
***
“호접.”
“……예.”
잠깐 놀라서 나비의 신령은 가슴을 눌렀다. 뒤를 보지 않고 있었지만 이미 알고 계셨구나,
하며 호접은 재빨리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그녀의 팔랑이는 한 쌍의 날개를 바라보다가
백호가 입을 열었다.
“연화의 마을 말이다.”
“마을이 많이 해를 입은 모양이더군.”
“누……구에게 말씀이십니까?”
“중앙의 관리에게.”
“그렇다면 연화 님은요?”
“백호 님.”
“…….”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백호님…….”
호접은 그의 옷자락을 놓아주지 않았다. 백호의 시선이 돌아오자 나비의 신령은 고개를
저었다.
“백호 님이 인간계에 현신하시는 일은 드무니 저승의 이목을 끌게 될 겁니다. 물론 청룡
님의 눈도요. 저는 언제나 인간계를 다니고 있으니 제가 가서 그 사태를 막아보겠습니다.”
“…….”
혹시라도, 혹시라도…….
54 화
“좋다.”
호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혈질인 백호가 이 정도나마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안심이었다. 그녀는 백호의 옷자락을 놓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묘우에게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곧 호접은 차비를 차리고 백호에게 인사를 남기고 팔랑이며 사라졌다. 인간계에 자유로이
드나드는 나비의 신령은 곧장 연화의 마을로 향하는 숲길로 향했다.
“거 누구요?”
‘……됐어.’
***
무관은 미소를 지었다. 제사장은 마을을 파괴하고 나오는 재물은 마음대로 나눠가지라
허락했다. 비록 천민의 마을이라고 하나 마을 하나에서 나오는 것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하다못해 호미 하나, 솥뚜껑 하나도 녹여서 팔면 전부 재물이 될 수 있었다.
곧 군졸들이 전부 모여들어 창칼을 들었다. 음식과 술, 계집이 고파서 산자락의
이웃마을까지 내려와 머물고 있던 군사들이다. 마음대로 살육하고 재물을 빼앗을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왔다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었는데?”
마을 어귀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아무리 인적이 드물어도 한둘은 어귀에서 도망을 치거나
근처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야 했다.
“누가 먼저 알린 거 아닙니까?”
“1 할을 드리지. 내 크게 인심 썼소.”
“1 할? 흠.”
“1 할 5 푼. 그 이상은 안 되오.”
군졸들 사이에서 빈정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거친 말투에 내관이 속으로 움찔했다. 무관은
사람 좋은 척 허허 웃었다.
“신기하구만.”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55 화
“빌어먹을.”
“전하, 전하.”
“전하.”
다시 한 번 연화가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그녀는 치유사였고, 환자에 대해서는 인내심이
매우 뛰어났다. 만희는 연화의 부름에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프지 않게 해줘.”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다행입니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만희가 인상을 구겼다. 조용하고 편안해졌던 머릿속이 다시 시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문간에 나타난 제사장 성현을 노려보았다. 제사장은 불쾌해 보이는 왕을
보고 연화에게 호통을 쳤다.
“……시끄럽다.”
만약 지금 침상이 아니고 평상시의 옷차림이었다면 바로 검을 뽑아 성현의 목을
내리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사장은 대귀족이었고 쉽게 죽이면 곤란한 인물이긴 해도
만희의 성격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았다.
“아뢸 것?”
“예, 그렇습니다.”
“내 이마에 손을 올려라.”
“아, 저어…….”
“손!”
“예, 예!”
“예?”
“꽤 미남이지?”
“…….”
“그, 그게 아니오라…….”
“…….”
“아이?”
별다른 반응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만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것만도 다행이었다.
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은 듯해서 연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절을 했다.
“물러가겠나이다.”
“……그래.”
“건방진 계집.”
금수의 붉은 달
56 화
“그래……. 백호 님은 뭐라 하시던가?”
“그건 그래.”
“정말 그럴까?”
묘우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동시에 의심이 갔다. 호접은 백호의 그늘진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의 긴 삶 동안 사방신이 저토록 가라앉은 얼굴을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백호는
여태껏 호접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번만 더.’
‘그림자만이라도.’
“연화야…….”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천리안이 급속도로 멀어지며 끊겼다. 백호는 다소의 현기증을 느끼며
미간을 짚었다. 아마 천리안은 이제 한동안 이 정도의 세기로도 발동하지 못하리라. 그는
깊이 한숨을 쉬며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백호는 가만히 바닥을 보았다. 스스로 행했던 일에, 처음으로 후회라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는 깊이 탄식했다.
***
‘함정은 아니겠지.’
연화를 보여주겠다는 청수희의 제안을 받아들이긴 했으나 가슴에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인간계는 완벽하게 미지의 세계였고 샘의 정령은 지독히 장난을 좋아했다. 그녀
혼자의 장난으로 끝나면 좋지만 남아 있는 뱀의 일족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번잡한 거리를 지나고, 한참을 걸어서 사람이 줄어든 대로를 지나쳤다. 저택은 번화가에서
그리 머지않아 걸어서도 갈 수 있었다.
57 화
“청영(靑影)…….”
“고맙소.”
“알겠소.”
사영은 투덜거렸다.
그 말에 청수희는 활짝 웃었다.
“…….”
“그러시군요.”
“진짜라구.”
“네.”
“궁궐이요?”
“연화가 원한 일이야.”
“원했다구요?”
“그런…… 거군요.”
“그래, 내가 이렇게까지 힘을 써주는 일은 잘 없다구. 감사해야 해.”
청수희가 건 술수는 일종의 암시였다. 그녀가 앞에서 사영을 시녀의 한 명으로 설명했고,
성현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당연히 연화의 거처 근처에서 일하는 시녀라는
사실도 받아들였다. 성현은 청수희가 말할 때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성현의 눈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생이 마감된다구요?”
“……저승까지 가시는군요.”
“욕탕을 준비시킬까요?”
“예? 아, 예에…….”
“아, 아니옵니다.”
“더워 보여.”
“죽어라, 이 악마!”
“건방진.”
“크윽!”
“전, 전하!”
“꽤 오래 일한 내관 아니냐, 이것은.”
“그, 그것이…….”
“전하, 해독약을!”
“됐다.”
“오셨습니까, 전하.”
맨 가슴팍을 내놓은 매우 방만한 옷차림의 만희는 휘적거리며 작은 정원에 걸어들어 와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세상에.”
그녀는 서둘러 손에 빛을 떠올렸다. 은은한 노란 빛의 힘이 연화의 손에서 일어나 만희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그녀는 정신을 집중하다가 말했다.
“독이 있군요.”
“…….”
“안 됩니다! 그 무슨 말씀을.”
“그래?”
만희는 벌떡 일어섰다. 왕궁 안에 있는 의료실이라면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그가 일어서다
연화가 손을 떼려 하자 혀를 찼다.
“아, 아직 아프십니까?”
“저 시녀가 많이 다쳤느냐?”
“긴장을 풀고 누워 계십시오.”
59 화
“그만해라. 이제 됐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구해주었다. 적어도 은연의 생사와 안전에
관심을 기울였던 게 아니란 말인가. 그녀는 아연해져서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전하, 전하.”
“왜? 자꾸 시끄럽군.”
만희의 단호한 불허에 연화는 채 일어나지도 못하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시녀와 내관들이
재빠르게 높은 탁자와 고운 무명 식탁보를 가져오고 그 위에 시원한 과일화채와 마실 것을
내왔다. 다디단 당과도 함께 나왔다. 그녀는 맛있는 다과상을 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
계속해서 의료실 쪽을 흘긋거리며 바라보았다.
“딴 데 신경 쓰지 마.”
“예? 아, 예.”
다시 한 번 청해볼까 했지만 만희의 얼굴은 빈틈이 없었다. 결국 연화는 치유를 포기하고
얌전히 앉아 입 안에 화채를 밀어 넣었다. 자꾸 먹으라고 만희가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네 앞에 왕이 있는데, 집중해라.”
왕은 곁에 선 내관에게 물었다.
“예.”
“성현이? 지금?”
“예.”
“…….”
“악당들! 감히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신 전하를 해하려 시도하다니! 천하고 악하며 멍청한
자들이 아니옵니까! 전하!”
평범한 얼굴인데 뭔가 이질적이다. 주변을 둘러싼 인간들 사이에서 그녀는 차분한 표정으로
연화를 흘긋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인데 어디선가 많이 느낀
기색이었다.
성현은 자신이 연화를 데려왔다는 사실을 뻐기면서 뿌듯한 어조로 말했다. 만희는 그
말투가 거슬려서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대귀족이니 가능하면 죽이지 않는 게 귀찮지 않은
길이다. 그는 그래서 검을 드는 대신 지적했다.
“……예?”
제사장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서 연화와 만희를 번갈아 보았다. 그저 치유의 이능을 지녔을
뿐, 연화는 천한 신분이 맞았다. 그러나 그 단어가 왕의 기분을 거스른다는 사실을
알아챘으니 다시 그렇게 부를 수는 없었다.
성현은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흘긋거리며 연화를 살폈다. 설마 저 계집이 그사이에 침상에서
밤일로 왕을 홀렸나? 싶었다. 천한 것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왕이
천것이라 부르지 말라 경고까지 했겠지.
“됐으니 이제 물러가라.”
***
그녀는 오전이면 작은 전각의 전부를 돌면서 세탁할 옷감들을 거두어 들였다. 동시에 새로
빨아 바느질한 옷들을 개어 장에 넣어두었다.
“안녕하세요.”
60 화
오전의 햇살 속에서 희게 배꽃처럼 빛나는 연화의 모습을 보고 과연 미인이로구나, 하며
사영은 속으로 감탄했다.
오전에 일어나면 연화는 말끔히 차림을 단장한 후 수를 놓았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수를 놓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만 그녀가 놓는 수가 흰 호랑이의 그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영은 말없이 인정했다.
‘정말로 평범하군.’
그 야무진 손매가 부럽지는 않았다. 세도가 있는 일족의 아가씨로 살아온 평생이 사영은
자랑스러웠다. 그게 그녀의 인생이었다.
“아, 피곤하네.”
그녀는 복잡한 기분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연화가 나쁜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지금, 미워할 대상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어때, 사영 아가씨?”
고요한 개인실에서 흘러나온 여자의 목소리에 사영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글쎄, 잘 모르겠네요.”
“…….”
분명히 청수희는 뻔히 알고 있다. 사영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굳이
알면서도 묻는 말에 바로 대답하기가 싫어서 사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침묵만으로도 이미 청수희가 충분히 재미를 얻고 있을 거라는 사실도 알았다.
“좋은 사람이에요.”
“…….”
***
“내가 죽인 건가?”
“누구의 명을 받아 이런 짓을 벌였지?”
순간, 고막 속에서 기묘한 울림이 들려왔다. 관자놀이가 당겨서 만희는 인상을 찌푸리고
목을 주물렀다. 서서히 두개골 전체가 조여드는 듯 고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피를 보고 싶지 않은가.
만희는 두통을 따라오는 충동에 귀를 기울였다. 마치 뇌에 대고 직접 새겨 넣는 듯한
욕구와 충동이었다. 잘 드는 조각칼로 뇌를 한 점 한 점 파내면서, 눈앞에 있는 인간을
죽이면 이 고통이 사라질 거라고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착각.
그는 이마에 손을 짚고 히죽 웃었다.
“…….”
“너 같은 벌레들을 죽이러.”
“대체, 대체 왜.”
“뭐가 말인가?”
“…….”
61 화
“저, 저놈이!”
사내가 쏟아놓는 말들에 병졸들과 백관이 기겁했다. 모두가 알지만 쉬쉬하며 누구도 입밖에
꺼내지 않았던 사실이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한 중년 사내는 입에 거품을 물며 다물지
않았다.
팔척장신의 사내는 조용히 다가와 사내의 코앞에 섰다. 얻어맞아 쓰러진 사내는 눈앞에
놓인 왕의 발끝을 보았다. 고개를 들어 만희를 보는 중년 사내의 독기 어린 눈에 만희는
씩 웃어 보였다.
“인두를 가져와라.”
“끅, 윽, 읍……!”
바람 빠지는 소리만이 입 안에서 샜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사내가 오줌을 지렸는지 바지
주위가 젖어들었다. 만희는 신경 쓰지 않고 그를 걷어찼다. 거센 발길질에 뻐걱 하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
“뭘 하는 게야, 죽고 싶으냐?”
***
인간들을 중간지대에 데려다 놓은 이후로 시간이 지나며 백호는 조금이나마 감정을 추스른
모습이었다.
나비의 날개가 팔락였다. 중간지대에 누워 환영에 홀려 어두워져 있던 사람들의 눈이
나비를 따라 느리게 움직였다. 호접은 정신이 흐려진 사람들의 틈으로 날아들어 한
명씩만을 깨웠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물과 죽을 먹고 사람들은 한 명씩 조용히 다시
잠이 들었다.
노파와 직접적인 대화는 세계의 규칙을 깨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그녀의 잠꼬대를
간접적으로 듣는 것은 규칙과 상관없다. 호접은 노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궁까지 끌려가서…… 멀쩡한 게냐, 대체 네가 뭘 잘못했다고, 우리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네 치유의 능력이 그리도 탐이 났을까, 수도에는 더 대단한 사람도 많을 텐데
대체 왜.”
그러나 그녀는 연화가 걱정되었다. 인간의 여인은 여리고 부드럽고 상냥했다. 호접은
그녀와 함께 지내는 사이 어느새 마치 자매 같은 애정을 품었다. 연약하고 보살펴주어야 할
것 같은, 어린 여동생.
돌아가기금수의 붉은 달
62 화
“보고 싶어요.”
“백호 님.”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수틀을 품에 안고 깊이 숨을 쉬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스스로 만지는 자신의 음부는 기묘한 감촉을 선사했다. 까슬한 음모가 젖어들어 손가락에
감겼고, 갈라진 틈은 좁았다.
손톱에 긁히면서 올라온 날카로운 감각에 연화가 조금 놀라서 흠칫했다. 처음으로 쾌감과
비슷한 것이 아주 조금이나마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백호가 만져 주던 것과 희미하게나마
닮은 감각이었다.
“백호 님…….”
“아……. 백호 님…….”
연화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엄지손가락 밑에 있는 돌기가 살짝 부풀어 올랐다. 애액이
울컥 쏟아져 흘러내렸고 작은 쾌락이 이곳저곳에서 솟아올라 온 몸의 피부 위에
불꽃놀이처럼 터졌다. 아랫배가 뜨거웠다.
“날이 꽤 덥구나.”
63 화
“문이 조금 열려 있더군.”
왕의 말에 연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 이런 실수를 한단 말인가. 수치스러운 짓을
하면서 제대로 문단속도 하지 않고. 혹시라도 그가 보지 않았을까? 작은 소리였지만
목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서 연화는 무릎이 떨릴 지경이었다.
“아, 예…….”
“죄송합니다.”
“그래.”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
“빌어먹게 날이 덥군.”
“예……. 죄송합니다.”
“전하……?”
“‘백호 님’이라.”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
청룡이 코웃음을 쳤다. 청수희는 긴장을 숨기며 미소를 지었다. 대범하며 사소한 일은
호쾌하게 넘어가 주는 백호와는 달리 청룡은 까다로운 존재였다.
“하하, 재미라.”
“작은 충돌?”
청룡이 킬킬 웃었다.
“…….”
64 화
“뭐라?”
“…….”
“…….”
“네가 그랬지, 수십 명의 목숨은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가 된다고. 내가 인간들의
목숨을 좀 앗아가더라도 그것으로 갚음이 되겠구나.”
“명 받들겠나이다.”
‘사영 쪽도 조심시켜야겠군.’
***
백호가 인간계로 넘어갈 수 있는 공식적인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중 대부분이 인간들이
산주(山主)와 신령에게 제사를 올리는 날이었다. 제사가 있는 날은 세계의 규칙이 사방신의
걸음을 허용했기 때문에 그가 경계를 넘는다 해도 영향이 가지 않았다.
“피로라니, 날 뭘로 보는 게냐.”
묘우의 말에 백호가 피식 웃었다. 사방신에게 피로라니 그보다 안 어울리는 말이 없었다.
물론 원로로서 걱정에서 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는 여전히 인간계에 있을 연화를
백호가 찾아갈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딱 이런 밤이었지.’
“지금 왕은 미친놈이라니까!”
65 화
노인이 푸념했다. 그는 모든 희망을 놓은 듯 허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을
벅벅 문지르는 두 손의 손톱 열 개는 흉할 정도로 닳아 빠져 있었다. 평생 동안 죽도록
고된 노동을 한 자의 손이었다. 일생을 소처럼 일했으나 갈아입을 옷도 없이 더럽고 구멍
난 옷을 입은 빈민층.
“들으라지!”
수도의 하늘을 날면서 백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번화가와 빈민가의 차이가 극명하게
보였다. 겨우 1 할도 될까 말까 한 멀쩡한 동네와 나머지 빈민가. 그는 다른 것보다 연화가
걱정되었다.
“그만두자.”
“…….”
백호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은 연화였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왜 네가 여기에 있느냐.
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
“날이 좋구나.”
하늘이 높고 푸르다. 환한 햇빛 아래 신록이 우거졌다. 만희는 궁의 안이라면 원하는 대로
걸음을 옮겨도 된다 말했지만 연화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나가 봤자 새장 안의
새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
순간 연화는 고개를 들었다. 뺨 주위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목덜미와 귀 뒤로도 적당히
기분 좋을 만한 상쾌한 공기가 흘러들었다.
“여전히 곱구나.”
66 화
“내가 너를 사랑하는구나.”
연화의 뺨에 실체 없는 손을 얹으며 백호가 속삭였다. 설사 연화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더라도 알아듣기 힘들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무얼 하고 있는 게냐?”
“전하.”
‘부러운 사내로구나.’
‘원혼.’
‘웃는다 한들 어쩌겠는가.’
“……글쎄요.”
그리운 기분이 들어서 연화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백호와 함께 허공을 노닐던 신령계의
나날들이 자꾸만 뇌리에 맴돌았다.
***
“예.”
“전각은 넓어. 높은 분들이 오시는 곳이니 바닥의 깔개까지도 보름마다 바꿔야 한다.
지난번에는 가장 큰 방의 깔개를 바꾸지 않았다지?”
“죄송합니다. 미처 알지 못해서…….”
“나흘 말씀이십니까?”
“예.”
“행동……이라면.”
“예.”
“알겠습니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세상은 너를 신의 반려로 생각할 거야. 세계의 규칙은 이 노리개의
주인이 사방신의 옆자리에 있는 자라고 말하지.’
‘특히 방금 저 침방시녀.’
***
아침이 되어 제사장 성현은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했다.
“그, 그것이.”
“왔나?”
“그래.”
“명 받들겠나이다.”
***
“수령아.”
“재미있구나.”
【글쎄요.】
68 화
청룡의 취향에 연화는 지나치게 얌전하고 곱기만 하다. 하지만 백호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청룡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저, 청룡 님?】
“왜 그러느냐?”
“……백호가? 왜?”
“교분?”
“역시 제 말 하면 오는 게 호랑이로군.”
그가 낄낄대며 웃었다.
***
신들은 대다수 시대의 흐름을 안다. 정확한 시기와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어도 그들은 한
일족이, 혹은 한 세대가 흥하고 망하는 과정을 육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대체적으로 십여
년 안에 그들의 예감은 현실로 드러나고는 했다. 그것이 자신의 영토가 아닌 다른 세계여도
마찬가지였다.
인간계에 내려갔을 때 백호는 그것을 느꼈다. 아주 진하고 끈적한, 쇠퇴와 멸망의 냄새.
아마도 곧 다가올 새로운 세계의 풋내. 거기에는 짙은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될 인간들의 피 냄새일 것이다.
“그래.”
“여전히 악취미로군.”
인간계를 다스리는 청룡과 주작은 유달리 화려한 것을 좋아했고, 현무와 백호는 소박한
것을 선호했다. 서로 맞지 않는 취향이었다.
“그럴 리가. 하지만 재미있는 일일 것은 확실할 듯해서 왔지. 재미없는 일이라면 여기다가
바다를 소환하고 가버릴 테다.”
“아, 이런.”
백호가 중얼거렸다.
“민물고기야.”
69 화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슬프지. 안 슬플 수가 있나.”
“부탁이 있다.”
“…….”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다.”
“…….”
“왜?”
“…….”
“조건을 봐서.”
“그건 알아. 그런데 왜 그 여자를 데려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수국의 멸망을 늦춰달라는
게 부탁이냐는 거다.”
“……뭐, 좋아.”
“…….”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이자가 대체 얼만한 반대급부를 요구하려 이렇게 말이 많은가
싶었다.
“왜 내 눈을 달라는 거지?”
백호는 헛소리 작작하라는 얼굴이 되었다. 설마 청룡도 진심은 아닐 게다. 상제가 안다면
벼락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백호뿐 아니라 요구한 청룡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거래를
유리하게 하기 위한 수작일 뿐이다.
“그건 또 왜.”
“……좋아.”
“흠, 거래 성립인가?”
“그래, 받아들이지.”
“성격 한번 고약하군.”
다만.
비웃음과 섞인 냉소였다.
70 화
“맹세를 해라.”
백호가 요구했다.
“까다롭기는.”
“당연하지 않은가.”
그녀가 그리워서 백호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고통보다 그녀가 떨어져
나간 고통이 수백 배는 더 힘들었다.
***
“여봐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예.”
“눈을 들어라.”
“예, 예 전하.”
“예,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서 여자, 아니, 연화 님이 나타났고 그 자리에서 죄수용의
마차에 태워 수도까지 이송했습니다.”
“묶었느냐?”
“모두가 보는 앞에서?”
“…….”
“전하, 제발 용서를!”
“……그리고, 그 외는?”
“마을은…….”
군졸은 다시 한 번 망설였다.
그는 사실 무관과 함께 천민 부락을 불태우는 데도 동참한 자였다. 내관의 시중을 들며
쫓아가서 다른 군졸들이 재미를 보는 것을 함께 즐겼다.
군졸은 눈을 굴렸다.
“대답해라.”
“뭐지?”
군졸이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감사를 외쳤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만희의 얼굴이 마치 귀신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71 화
“그랬군.”
“그래…….”
“여봐라!”
“예, 전하.”
“전, 전하?”
시녀는 황급히 뛰어가 가까운 전각에서 처음으로 만난 시녀에게 매달렸다. 갑자기 달려온
시녀를 붙들고 이웃 전각의 시녀, 은연은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디입니까?”
“예.”
은연과 시녀가 앞장서고 연화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걸음을 급히 옮겼다. 그 때
중앙전각 쪽에서 뛰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 살려!”
“전하, 전하!”
“더러운 새끼.”
“전하!”
“전하, 제발!”
더 필요해, 더 죽여.
작게 잠긴 목소리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까이 다가와 품으로 파고든 연화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검고 둥글고 순한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물이
맺혀 있었으나 울지는 않았다. 얼굴도 감정의 동요로 인해 붉었다. 흰 피부에 달아오른
홍조가 열꽃 같았다.
72 화
【더 줘, 더 많은 빛을.】
【쓸데없는 짓이야.】
평온하게 가라앉은 신경을 느끼며 만희는 눈을 떴다. 느리게 초점이 잡힌 시야에 연화의
얼굴이 들어왔다.
“미안하구나.”
“거짓이겠지요?”
눈물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저 반들거리는 눈동자를 한 채 그녀는 만희를 올려다보았다.
빨리 거짓이라고 말해 달라는 듯 물끄러미 보는 시선과 함께.
***
“예? 하, 하지만…….”
“예, 예…….”
“좋아. 내 돈을 주지.”
성문 밖으로 삼삼오오 나가는 보부상들 사이에 섞여서 걸어가며 성현은 속으로 계산했다.
“너는…….”
성현은 그를 훑어보았다.
“예, 나리.”
가뜩이나 오전 내내 무거운 것을 지고 걸어 배가 고프던 천씨는 식사를 하자는 말에
반색했다.
“물을 한 잔 떠 오거라.”
“빨리 일어나지.”
“그래?”
“괜찮으니 누워.”
***
73 화
이 궁 안에 제사장을 그렇게나 편드는 자가 있다는 말이지. 하기사 중앙전각의 내관이었던
황씨조차 그랬으니 누가 제사장의 편이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대귀족인 성현에게는 돈이
많았고 어떤 인간들은 매수가 참 쉬웠다.
“…….”
“하나뿐이었습니다.”
어지간히 급하게도 도망친 모양이군. 만희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는 제사장을 꽤 잘
알았다. 머리가 좋은 자이고, 또한 욕심이 많은 자다. 집 안의 온갖 패물을 다 짐에 집어
처넣고 도망쳤겠지.
‘어쩔까.’
“저자는 하옥해라.”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예, 전하.”
만희는 못마땅한 얼굴로 백관에게 해산을 명하고 일어섰다. 하인을 잘못 잡아왔던 군사들은
모두 죄를 물어 곤장형에 처했다. 그들 역시 전과 같았다면 전부 채찍이나 검으로 목숨을
빼앗았을 일이었다.
갑자기 몹시 피곤해져서 만희는 발길을 돌려 중앙전각에서 나섰다. 피로할 때면 으레
연화가 보고 싶었다. 지금 역시 그랬다.
‘지금 가도 되는 것인가.’
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연화의 슬픔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는 지키고 싶었던 가족이 없었고, 소중한 사람이
없었다.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잃었으니 슬플 거라는 사실은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책에서 읽은 듯이 머리로 이해하는 사실일 뿐이었다.
멀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만희는 그것이 사내의 이름임을 알았다. 백호 님이라고
불렸던 그자의 이름. 아마도 연화의 정인일 사내.
만희는 치밀어 오르는 화와 질투와 후회의 감정에 눈앞이 아찔해져서 나무에 기댔다.
미간을 누르며 그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
그녀는 다소 걱정스러운 어조였다. 백호는 그녀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기적인
청룡이나 차갑고 어두운 현무와 비교하면 그들 둘은 상성이 좋았다. 백호가 다소 뜨겁고
다혈질인 성격이라서 주작은 그를 걱정할 때가 자주 있었다.
비록 청룡이 자신과 가까운 사이였으나 청수희는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작이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청룡과 대등하게 겨룰 정도로 교활해질 수 있었으나 백호는 아니다.
청룡은 명시적인 단어 그대로의 뜻만 남겨둔 채, 약속의 의미를 얼마든지 비틀어버릴 수
있는 사내였다. 주작은 생각만으로도 눈살을 찌푸렸다.
74 화
“…….”
“그래. 때문에 초국은 세가 기울어 한동안 대단히 고생을 했지. 상업과 외교에도 능했던
자라 교역의 통로도 막아버려서 사정은 계속 악화되기만 했다. 그건 나로서도 어찌 해주지
못하니 좋지 않은 일이었다.”
나라와 나라의 흥망은 결국 서로를 얼마나 앞서느냐로 결정된다. 초국의 부(富)를 강탈해
자국의 발전에 사용했던 수국은 그로 인해 흥했다. 그러나 치세에 관심이 없는 왕이 왕좌에
오르면서 수국의 부흥기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초국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호오, 약사여래라.”
백호는 확실히 앞뒤 가리지 않고 연화를 뺏어올 것이다. 지금은 그녀의 선택이라 생각해
수국을 지켜주려 할 뿐이지만.
가능하면 청룡이 엿이나 먹었으면 좋겠는데. 주작은 그 얄미운 작자의 면상을 생각하면서
입을 삐죽였다. 영토끼리 국경을 마주 대고 있었으므로 청룡의 행태를 가장 잘 아는 것
역시 주작이었다.
“알겠습니다, 주작 님.”
***
“감히 나의 명령을 어기고 사적으로 재물을 탐하기 위해 왕궁의 내관과 군사를 이용해 일을
저질렀다. 어찌 이리 간악한 자가 있단 말인가.”
“많이 차분하시군.”
킬킬대는 소리에는 경멸과 혐오가 스며들어 있었다. 만희는 이미 신하와 백성들의 마음을
잃어 이제 와서 부드러워진다 해서 한순간에 여론이 바뀔 리는 없었다.
“황 장군.”
“나라에는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여전히 담대하십니다.”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
“원한을 가진 자와 우습게 보는 자가 모두 생기게 되겠지요. 자비라는 것을 마음에 들인
이상 왕 자신의 손속에는 망설임이 생기게 마련이고.”
“왕이라는 자리는 잔인함이 필수인 위치지요. 그러나 중간에 태도를 바꾼 자는, 그것이
필요한지 아닌지 판단하지 못하고 전부 내다버리기 때문에 백성을 통제할 힘을
잃어버립니다.”
오유는 미소를 지었다. 황영은 그가 급진적인 젊은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아마도 언젠가
이 왕조를 뒤집을 이가 나타난다면 그건 바로 이 오유이리라.
75 화
황영은 노인답게 걱정이 앞서 말을 붙였지만 오유는 젊은이 특유의 대담한 미소를 지었다.
***
‘곧 피바람이 불겠군.’
“오 장군.”
제사장은 들어선 오유를 보자마자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그래도 대귀족이라고 대접한
좋은 음식과 비단옷이 한껏 마음에 들었던 탓이었다.
성현이 손바닥을 비볐다. 젊은 장군은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오유의 얼굴에 감탄하며 한동안 살폈다. 그는 빈민층 출신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기품
있는 미남자였다. 오유는 천천히 자리에 앉아 성현을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열린 귀만으로는 모자랄 것이니, 그대의 심장도 열어두어
주시오.”
“저런.”
“그렇군요.”
“뭘 말입니까.”
“장군께서 왕명을 그저 받들기만 하는 멍청한 자는 아니라는 사실을요!”
“…….”
“그 판 값을 내 숨겨두었지!”
“……글쎄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제 부하를 그곳으로 보내보고 제사장의 말씀이 맞다면 거래를 하지요.
제사장께서 합당한 값을 치르신다면 제가 숨겨드리는 것으로.”
76 화
“어머니.”
“뭘 하는 거냐.”
“……네 탓이 아니다.”
“전하,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마을?”
연화는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자신이 염치가 없음을 알았다.
왕에게가 아닌, 백호에게.
“전하, 제발.”
“그리워하는 분?”
“…….”
“그를 사랑하느냐.”
“……예.”
“닥쳐라.”
“……죄송합니다.”
왕의 심기를 거슬렀다.
눈물은 뜨겁지도 못하고 미지근했다. 죽어버린 소중한 사람들, 스스로 떠나와 버린 백호.
허무함에 심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77 화
“……나가.”
“치, 치유사님을.”
“전, 전하?”
“오지 말라고…….”
“…….”
연화의 검은 눈은 부드럽고 순했다. 비록 지울 수 없는 고통과 슬픔에 찌들어 있었지만
만희를 향한 원망 같은 것은 없었다. 그 눈에 넋을 잃고 만희는 손을 내렸다. 그녀의 눈
안에 있는 평화와 안식에 그는 안도감을 느끼며 매혹되었다.
이래서 너를 부르면 안 되었던 것이다. 만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머리를 조여드는 고통이
극심해 코 안에서 단내가 나는데도 연화의 얼굴을 보자 그것은 견딜 만해졌다. 두통은
여전히 구토가 날 정도로 심했지만 그녀의 존재만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났다. 그
사실을 깨닫고 만희는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
“연화야!”
적안에 담긴 뚜렷한 애정과 걱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연화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녀는
혼령들에게 힘을 빼앗겨 전신이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체온이 낮아져 차가운 연화의 손을
눈치채고 만희가 놀라 그녀의 손을 잡고 연화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왜 여태까지 몰랐을까.
그녀는 남자의 어깨 너머로 혼령들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가까이에 있었으나 다행히 거리는
조금 멀어져 있었다. 원혼들은 그러나 언제든 덤빌 수 있는 태세로 눈을 빛내며 그들의
주위를 돌았다.
***
청룡은 자신이 가호하는 수국의 상태를 잘 알았다. 빈민들은 고통받고 있었고 귀족들의
사치는 극에 달했다. 밖으로는 외세가 쳐들어오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으며 안으로는
평민의 반란군이 녹적의 이름을 달고 세를 키워가고 있었다. 귀족들은 왕의 치세가 허술한
틈을 타서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느라 바빠 어느 누구도 반란의 낌새를 감지하지 못했다.
78 화
***
‘조만간 무슨 일이 나긴 하겠다.’
“청수희 님.”
“오랜만이야, 사영 아가씨.”
“나 보고 싶었나 봐, 사영 아가씨.”
“누가요?”
“아니야? 섭섭한걸.”
“바다 밑 땅이요?”
“……역시 그런가요.”
“…….”
어쩌면 자신의 힘으로 누군가 살고, 상황이 바뀔지도 모른다. 평생 뱀 일족의 전각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사혈의 딸로만 살아왔던 사영으로서는 대단히 큰 결심이었다.
“…….”
***
“제사장을 모셔 와라.”
“예.”
79 화
“……말도 마시지요.”
성현은 왕의 악행을 잔뜩 부풀려서 이야기했다. 만희는 수많은 사람을 죽여 굳이 더 부풀릴
것도 없는데도 지어낸 사실을 덧붙였다. 평민의 재산을 몰수하고 강제로 땅을 점거하는 등
자신이 했던 잘못들도 죄다 만희의 것처럼 이야기하며 그는 눈을 번뜩였다.
엄숙하게 선언하는 성현의 말을 들으며 오유는 웃음을 참았다. 글쎄, 왕보다 오히려 앞서서
악행을 저질렀던 자가 누구던가. 앞에 있는 사람을 바보로 아는 행태에 짜증과 화도 났지만
오히려 그 어리석음이 재미있기도 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멍청한 작자를 바라보는
눈으로 성현을 훑어보았지만 자신의 말에 취한 제사장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흠……. 특이점이라.”
오유는 왕의 약점을 요구하고 있었다. 성현은 그것을 재빨리 눈치채고 머리를 굴리다가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제사장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오유는 무심해 보였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인지.”
반란은 그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아야 한다. 성현은 지나치게 눈치가 빨랐다. 빈민들의
등골을 빼먹으며 누구보다 그들의 사정에 밝았기에 빨리 눈치를 챌 수도 있었다. 그 모두가
오유는 못마땅해 견딜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깨달은 성현이 비척비척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양손을 들어 빌었다.
“장군, 장군……. 내 말했지 않소, 이보다 몇 배나 되는 재물이 있다고. 내 집안에 묻혀
있으니 비밀 장소를 말씀드리겠다고.”
“…….”
“무, 무엇을.”
“최소한 자신의 마지막 정도는 스스로 정하게 할 만한 자비심이 나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왕과 나의 다른 점이겠지요. 자, 어떠십니까, 제사장.”
오유는 진심이다. 무릎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곡도를 늘어뜨리고 그는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렸다. 정말 성현 자신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태도였다.
* * *
“이 모든 것이 다 그 계집 때문이다.”
“더러운 계집.”
“내 가만히 둘 줄 아느냐.”
“한 번쯤 해볼 만한 도박이지.”
“수조, 네놈.”
“예, 예 사혈 님.”
“부탁이라 하시면…….”
“저, 저승 말씀이십니까.”
“……용서를, 제발.”
“어쩌겠느냐.”
묻는 말투만은 부드러웠다. 수조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구나.”
80 화
“저, 저승사자요…….”
“예, 예. 꼭 유념하겠습니다.”
* * *
안심시키려는 백호의 말에도 나비의 신령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그녀는 날개를 파닥이면서
양손을 꽉 쥐었다.
“예.”
시원하고 서늘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러나 동시에 습기가 찬 대기이기도 했다.
신령계의 하늘은 계속해서 어둡고 비가 오락가락했다. 백호의 기분을 반영한 날씨는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계속 이래서야 다스리는 영토와 주민들에게 미안할 일이다.
그립고 보고 싶다. 지금도 눈앞에는 연화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아름다운 긴 흑발과
작고 부드러운 얼굴. 그에게 매달려 침대에서 뜨겁게 달아올라 허덕이던 입술과, 품 안에
안겨 하늘을 날 때 설렘과 긴장감에 물들어 있던 눈. 조심스럽게 백호의 목덜미에 손을
감으며 가슴에 머리를 기대던 그 감촉까지도.
* * *
연화는 조심스럽게 왕의 곁에 앉았다. 두통에서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만희는 지독히
지친 얼굴이었다. 연화는 내관이 두려워하며 은쟁반에 받쳐 가지고 온 광목천에 물을 묻혀
왕의 이마를 닦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짙은 색의 피부 위에 붙어 있었다.
“전하.”
“…….”
“……그게 무슨 소리냐.”
“…….”
“혼령이라. 내가 죽인 자들인가.”
“저런.”
81 화
연화는 자신의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혼령들에게 온기를 빼앗겨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 정도라면 조금 쉬면 바로 돌아오겠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혼령들은 점점 더 힘을 얻었고 바라는 바도 커져 갔다.
“…….”
‘죽음이 두려운가?’
그는 느릿하게 말했다.
“…….”
만희는 머리를 짚었다. 귀족들의 절차란 복잡하고 느리기 짝이 없다. 연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왕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연화는 만희가 가여웠다. 비록 잔인한 사내였으나 동시에 안쓰럽고 연민이 들었다. 하지만
연정은 아니다. 그녀의 심장은 백호에게 주어버려서 남은 조각조차 없었다. 만희는 체격이
좋고 건장한 사내였으나, 그가 아무리 다정하게 군다 한들 연화는 그를 남자로서 볼 수
없었다. 아예 그럴 만한 마음이 그녀에게 남지 않은 탓이다.
“연화야.”
“손이 차구나.”
그녀는 조심히 일어서서 물러가기 위해 절을 했다. 만희는 멀거니 물러서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러가겠나이다, 라는 작은 인사를 끝으로 문밖으로 그녀의 치맛자락이
사라졌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가늘고 예쁜 옷자락이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인 그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 * *
‘다녀오기만 하면 상도 받고 쉴 수도 있을 테니.’
“현무…….”
82 화
“재미있구나, 새의 신령아.”
“이리 오라.”
현무의 낮은 목소리가 천둥과 같았다. 수조의 날개는 저절로 움직여 홰를 쳤다.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날아오른 몸은 저승의 공기 속을 날아 현무가 내민 손가락 위에 안착했다.
“신령아, 말할 수 있게 변하라.”
“자, 새의 신령아.”
“정신 차려라.”
“…….”
“생각보다 명이 긴 놈이로다.”
“……예, 예?”
그 말은 살려주겠다는 뜻인가? 애초에 현무가 자신의 생명을 가져갈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수조가 벌벌 떨었다. 현무는 편지를 그 자리에서 태워버렸다. 검은
불꽃이 그의 손가락 주변으로 불타올라 종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예?”
“…….”
현무는 손을 들었다.
* * *
“예에.”
“저런.”
“그렇지요.”
“그랬다가 제사장 성현이 돌아와 무죄로 판명되거나, 아니면 새 제사장을 임명해 제사를
지나치게 크게 일으키면 어쩌시려구요. 지금 국고에 그만한 돈이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83 화
재상의 현명함에 대신들이 모두 찬사를 보내며 회의가 해산되었다. 오유는 탁자에서 일어나
황영과 함께 걸어 나왔다.
“재미있군요.”
제사장 성현의 퉁퉁한 몸뚱이에는 멀쩡한 곳이 없었다. 지독할 정도로 두들겨놓아 절반쯤
짓뭉개진 얼굴은 이제 알아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요.”
* * *
‘허무하구나.’
“차를 가져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입맛은 조금도 당기지 않았지만 일부러 다과상을 차려준 은연의 성의를 보아서 연화는 애써
당과를 집어 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 파삭 하며 입 안에 끈적하고 달콤한 과자가 씹혔다.
쌉쌀한 차를 한 모금 머금으니 맛이 좋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은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맛있습니다.”
“네…….”
“……그렇군요.”
연화의 눈에도 그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에는 만희의 뒤에 매달린 원혼들의 선명한
모습까지도 보였다. 이제 원혼들은 더 강하고 커지고 뚜렷해졌다. 만희를 조롱하는 말을
지껄이며 연화에게까지 저주를 속삭여 왔다.
84 화
호접은 자꾸만 신경을 건드리는 뭔가의 정체를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쳤다. 이것이 언제부터
생긴 고민인고 하며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연화의 마을 사람들을 데려다가 중간지대에
넣어놓은 뒤부터였다. 저대로 두어도 괜찮은가 싶은 고민부터 시작해서……. 무엇보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기분이 자꾸 들었다.
그런데 만약, 연화의 곁에 머무는 수국의 왕이 진실한 정인이 아니라면 호접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백호는 자신의 살을 베어내 힘의 손실까지 입으면서 수국의 멸망을 뒤로
미루도록 청룡과 거래를 하기까지 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반대로 말하면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뜻이다. 나비란 원래도 세계를 오가는 존재였으므로
특별히 큰 문제만 없다면 발각될 일은 없었다. 게다가 백호는 현재 칩거 상태로 들어갔기
때문에 호접이 행동하다가 발각되어도 독단적 행동으로 책임을 질 수 있었다. 백호에게까지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니 좀 더 자유로이 움직여도 된다.
수상한 낌새를 지나치지 못하고 알아보러 가면서도 호접은 간절히 빌었다. 부디 별다른
일이 아니기를. 그저 연화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정인에게 간 것이기를. 그렇다면 호접은
그냥 헛수고를 한 셈치고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뭐, 뭐지?”
“대, 대체 왜 우리 마을을.”
“누가 그런 짓을 한 겁니까.”
“그것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저 인간의 군사들이 한 짓이라는 것밖에는.”
“왕이 연화를 찾겠다며 제사장을 보내왔는데, 당시 연화가 마을에 없어서 분노한 나머지
마을 사람들을 벌주고 집을 태우며 연화를 데려오라고 협박했었지요.”
“그랬군요…….”
호접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데려간 게 아니었다.
“왜 연화 님을 찾는다고 하던가요.”
“…….”
‘뭐지?’
‘신령?’
“물러나라.”
“사혈? 뱀의 일족의?”
“무슨 복수 말입니까.”
【사, 정이…… 복잡하지만.】
“……!”
“정신 차리세요.”
【더러운 뱀, 귀신 같은 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백호가 저승으로 가버린다면 신령계는 혼돈의 상태가 되어버릴 것이다. 관리하고 다스리는
신이 없는 세계라니. 호접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예상치 않은 사태에 옥황상제가 새로이
후대의 사방신을 빚어낸다 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오래 걸리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주군인 백호가 죽음을 맞이하게 할 수는 없었다.
* * *
“빌……어먹을 것들.”
“빌어먹을, 개 같은 잡놈들!”
【잡놈이라니, 잡놈이라니.】
【네놈이 죽였잖아.】
【소중한가, 그 여자가.】
“저, 전하!”
“숨……기라는 말씀은.”
“며, 명을 받들겠습니다.”
86 화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맙소사.”
“그게.”
* * *
‘갑자기 무슨 일이지.’
“이건…….”
* * *
아주 이른 새벽이었다.
“누, 누구냐?!”
간신히 숨을 쉬도록 놓여난 재상은 현명하게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랬다간 단칼에
맞아죽으리란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는 덜덜 떨면서 벽으로 붙었다.
“생각하는 꼴 하고는.”
“병력은 모두 모였겠지.”
“좋아.”
사내는 재상의 멱살을 틀어쥐어 들어 올렸다. 노인은 피투성이가 된 입가를 가리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사내가 복면을 벗어 던졌다.
“……뭐, 무엇…….”
87 화
최대한 비굴하게 보이길 바라며 재상이 대답했다. 오유는 가만히 뚫어져라 재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묘우!”
“묘우는 어디 있느냐?”
“지금, 일이 안 좋게 됐어.”
“뭐가?”
호접은 가능한 간단한 문장으로 구성해 상황을 전달했다. 최대한 상황을 축약한 설명에도
묘우는 재빠르게 알아들었다.
“맙소사.”
“알지.”
“……그렇군. 그럼 지금 당장 가보겠어.”
“알겠어. 지금 간다.”
“어떤 일?”
명부상의 백호가 사방신 백호를 말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의 주군을 가리킬
확률은 상당히 높았고, 묘우는 결코 백호가 저승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백호의 반려는 분명 연화를 말하는 것일 테다. 묘우 자신은 그녀를 반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백호가 그토록 깊이 마음을 주었던 상대는 그녀 하나였으니.
* * *
“나오세요, 청수희.”
짜증스러운 목소리였다.
88 화
“객의 예를 다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샘의 정령이여.”
【……궁으로요? 어째서요?】
청수희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백호는 수하들을 궁으로 불러들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본래 번잡한 것을 싫어해 연례행사로 있는 연회 때에도 간혹 얼굴을 구겼다.
“자, 그럼 이제…….”
【백호 님.】
나비인 채로 최대한의 전음(傳音)을 보냈다. 수직으로 뚫려 있는 동굴이라 인간의 몸으로
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목소리가 주군에게 닿기를 바라며 수직 동굴
밑으로 한도 끝도 없이 날아 내려갔다.
* * *
왕궁의 경비병들은 기강이 해이해 은연이 연화를 만나고자 옥에 오는데도 은근히 재물을
요구했다. 동전도 아닌 은전을 원했다. 그러고도 조금 오랜 시간 머무르려 하면 밖에서
헛기침을 하고 소리를 치며 빨리 나오라고 유세를 떨어댔다.
은연은 연화의 손을 잠깐 잡았다가 얼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주 잡았던 희고 가는
손끝이 차가워서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
【내 아이…….】
【내 아이.】
‘큰일이야.’
이곳에 들어온 지 사흘. 연화의 생기를 먹고 여인의 영혼은 서서히 힘을 얻고 있었다.
처음에 약사여래의 온기를 내보내 여인을 위로하려던 적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온기를 전부
빨아먹고 연화에게 달라붙어 생기를 흡수하려 들어 기겁했다.
【내 아이를 내게 보내줘…….】
기운이 쭉 빠진다. 만희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혼령은 연화의 근처를 맴돌며 그녀의 생기를
빨아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는 육신은 마치 너절한 낡은 옷처럼 늘어졌다. 연화는
허덕이면서 힘겨워했다.
【내 아이.】
* * *
저승을 지배하는 그는 언제나 죽음을 마주했다. 비극과 희극, 양극단 사이에서 모든 죽음이
이루어진다. 지독하게 오랜 세월 동안 모든 극단적인 죽음들을 마주하며 지내온 그에게는
세상만사가 모두 지루했지만 최근 들어 재미있는 일이 늘어났다.
“어떤 이야기이십니까?”
“어느 작은 새가 해준 이야기일세.”
“겁이 없군요.”
89 화
“…….”
견암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속으로 그는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예.”
* * *
“아니, 웬일이지…….”
너무 오랜만에 갑자기 맑아진 머릿속이라 오히려 멍했다. 아무런 소리도 고통도 없는 상태.
수없는 목숨을 스스로 죽였으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한 시체의 모습에 만희는
당황했다. 그는 주춤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여자의 시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왔다. 더러운 맨발 밑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내 아이.】
높은 비명과 닮은 웃음소리였다.
【내 오라비가 지은 죄의 증거. 내 시궁창 같은 삶의 결과물, 내 아이야.】
“닥쳐!”
여인의 형상은 천천히 사라져 갔다. 하지만 목덜미와 어깨, 머리에 남은 차가운 손아귀의
감촉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강해졌다. 만희의 눈이 텅 비어갔다. 생생하게 타오르던
붉은 눈동자는 검게 죽었다.
【그 여자를 찾아.】
【어디에도 갈 수 없도록.】
“전하.”
“염 내관은 어디 갔지?”
재빨리 경비병 한 명이 뛰어나가 내관을 부르러 갔다. 시간이 어쨌든 왕이 부른다면 당연히
와야 했다. 머지않아 염 내관이 제대로 매무새도 갖추지 못하고 황급히 뛰어왔다.
“그래.”
* * *
밖에서는 그들을 반란군이라 불렀으나 오유는 자신의 군대를 혁명군이라 불렀다. 지배층을
완전히 갈아엎고 새 시대를 열 자랑스러운 군대. 이 지리멸렬한 왕조를 뒤엎어버리고 새
나라를 개국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그의 군사.
“그래, 고맙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알 거 없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이거 곤란한데.”
* * *
91 화
“정말 곤란해.”
【백호 님!】
“호접, 무슨 일이냐?!”
【예, 백호 님. 빨리 손을 써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
“모두, 진실이겠지.”
“그래, 과연 그렇구나.”
백호는 조심스럽게 바람 위에 호접을 놓아주었다. 그녀가 날갯짓을 하지 않아도 백호가
부리는 바람은 그녀를 실어 나무 위로 옮겨 놓아주었다. 호접은 지친 채 주군을
바라보았다.
【현무님을 뵈러 가실 겁니까?】
“……아니.”
【그, 그럼요?】
“인간계에 다녀오겠다.”
【백호 님!】
* * *
“계집은 어디 있지?”
“마지막 기회인데.”
“뜻대로 하시옵소서.”
“…….”
“전하……?”
“…….”
“……전하.”
염 내관은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화비(花妃) 전하.”
불러서는 안 되는 금단의 이름을 들은 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귀신 같은 형상을 한 채
그는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이 늙은 내관의 목을 뚫고 지나갔다.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고 단숨에 목의 절반이 달아났다.
“자, 이리들 가까이 오너라. 너희들 중 그 계집, 치유사 계집의 위치를 아는 자가 있겠지?
내게 말해 보거라.”
92 화
‘연화야.’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끝없이 여인의 이름만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평생토록 이렇게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는 순간은 처음이었다. 그는 눈앞이 멀어버릴 것 같은 다급함 속에서,
빠르게 스치는 지난 시간들을 생각했다.
한 번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 생각은 계속해서 지난날의 일들을 조각내어 맞추기 시작했다.
연화의 마을이 갑자기 공격받은 것, 정원에 앉아 있으며 다소 쓸쓸해 보였던 연화의 얼굴,
그저 말없이 고요히 떠나가던 그녀의 뒷모습.
【네 뜻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빨리도 시작되었군.】
수국 따위의 멸망은 백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문제는 정인이든 아니든, 현재 연화가
왕의 곁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청룡, 청룡!】
【젠장.】
백호는 거칠게 말하며 호랑이에서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둔갑해 허공에 나타났다. 희디흰
머리카락이 어두운 새벽하늘에 날렸다.
‘빌어먹을.’
93 화
“가능할 겁니다.”
세계의 규칙은 엄중한 동시에 허점이 있다. 모두가 죽음 앞에서 평등하지만 동시에 그
죽음의 눈을 속여 넘기는 것도 가능했다. 묘우는 신령계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읽은 신령 중
하나였고, 그래서 옛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얻으려 했다. 그는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써
내려가던 내용을 정리했다.
지하 서고에 가득한 먼지에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샘물의 정령인 그녀에게 건조한
지하 서고의 공기는 몹시 불쾌하게 다가왔다.
【찾아내셨나요?】
“…….”
【물건이라.】
“예?”
“……알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 * *
“고개를 들어라.”
“…….”
한순간의 잘못된 오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말없이 만희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고통에 젖어 있었지만 동시에 강단 있게 고집을 드러냈다.
“미치려면 혼자 곱게 미치십시오.”
“불쾌하군.”
그렇다면 쓸모없고 불쾌한 존재를 가만히 놓아둘 이유도 없었다. 만희는 천천히 손을 내려
은연의 가느다란 목을 감싸 쥐었다. 손에 힘을 주자 서서히 은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숨이
모자라 허덕이는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일부러 느리게 숨통을 조이자 은연의 몸이 퍼덕이며 성기를 조이는 힘이 더 강해졌다. 그
감각을 만끽하면서 만희가 히죽 웃었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그 쾌감만이
전신을 지배했다.
“…….”
“잘 생각했다.”
“용서를, 전하.”
“그래. 한 번 말해 보거라. 그 치유사 계집은 어디에 있지?”
은연은 흐릿한 머릿속으로도 필사적으로 말하지 말라고 고개를 흔들고 버둥대었다. 하지만
왕의 커다랗고 두터운 손이 내려와 그녀의 입을 막았다.
94 화
“……하.”
만희가 히죽 웃었다. 염 내관, 깜찍한 짓을 했군. 절대 그의 발로는 찾아가지 않을 곳을
골라 연화를 숨겨두었다. 과연 명만은 제대로 지켰어. 그리고 머릿속 한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대로 본신을 소환하여 바닷속으로 들어가 청룡을 끌어내고 결계를 걷어내라고 한바탕
난동을 부릴까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눈이 어두워졌지만, 그러다간 본신을 찾아
진입하기도 전에 연화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빌어먹을”
끝없이 뱅글뱅글 이어지는 통로. 청룡의 특기도 아니고 현무의 특기인 땅굴에 가까웠다.
【정신 차려.】
“……주작?”
“이놈 저놈 다 구경이군.”
【바쁘다고 해도 어쩔 건데? 이곳에 펼쳐진 청룡의 결계는 현무의 땅굴과 합쳐져 네놈과는
궁합이 최악이다. 어쩔 테야?】
“찾아야지.”
【결계는 어쩌구?】
“…….”
【멍청한 짓.】
백호의 극한에 달한 분노를 눈치챈 주작이 날개를 팔랑거렸다. 이대로 백호가 본신의
힘까지 동원해 결계를 터뜨린다면 그 영향은 본인에게만 미치지 않는다. 수도 전체가, 혹은
수국 전체가 폐허가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래. 그 다음은?】
“도와줄 건가?”
【날 따라와라. 길을 알려주지.】
“고맙다.”
95 화
* * *
“사영 아가씨.”
“……청수희 님?”
“여기, 화병.”
꽃이 꽂힌 도자기 안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사영은 도자기 쪽으로 다가가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워서 청수희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예, 뭔데요?”
“물론이에요.”
“…….”
“……알겠습니다.”
눈앞에 온화하고 부드럽던 연화의 모습이 스쳤다. 괜히 그녀를 미워하여 큰일을 당하게
하려던 과거 자신의 모습 역시.
“미안합니다, 연화 님.”
쓸모없는 인생을 기다려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한 번이라도 세상에 태어난 쓸모를 하고
죽을 것인가. 저승으로 간다는 사실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걸 모를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 없어요.”
【뭐가?】
“이거.”
* * *
“아.”
“……갑작스럽군.”
“오랜만이구나, 연화야.”
“보고 싶었다.”
“…….”
“그래, 말을 해보거라.”
만희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듯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답했다. 저것은 아마도 그의
진심이리라. 연화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녀를 해할 것이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기억이 전부 섞여서 흐렸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날 듯 하면서 나지 않았다.
만희는 큰 손으로 지쳐서 초췌한 연화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연화야?”
“……전, 하…….”
“대체 이게…….”
“함께 가자꾸나.”
“전, 전하…….”
무릎이 후들거렸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연화는 여기서 무릎을 꿇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의 검이 사납게 번들거렸다. 그대로 자신을 조각 내어버릴 살의가 피부가
아프도록 느껴졌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잠, 잠깐!”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더 백호를 보고 싶었다. 이제 와서 무슨 염치없는 생각인가
했지만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한 번만 더 뵐 수 있다면.’
만희는 미친 자처럼 웃었다. 미꾸라지처럼 달아나는 연화를 보면서 갈데없는 분노가 그녀를
향했다. 그는 악귀 같은 몰골로 그녀를 쫓아갔다.
“살려, 살려주세요.”
‘그때와 같아.’
‘백호 님.’
연화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하겠지만 그래도 슬펐다.
백호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죽는다 말도 하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것이.
허둥거리며 달리던 그녀는 아래를 보지 못했다. 정원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뒤늦게 그것이
생각났고, 발밑이 물컹 했다. 숨이 턱에 달한 연화는 밑을 보지 못했고 헛디딘 발끝에
몸이 기울었다.
‘차라리 물에 빠져 죽고 싶습니다…….’
“계집!”
“내 칼로 죽였어야 했는데.”
97 화
【신.】
“네놈이.”
“인간 주제에…….”
“우습구나.”
“넌, 넌 대체 뭐야!”
손잡이만 남은 검자루를 휘두르면서 만희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거대한 덩치의 사내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공포로 점점 더 이성이 마비되고 있었다. 아무리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폭군이었다 하나, 신의 존재는 일개 인간이 감당할 것이 아니었다.
백호는 분노만이 타오르는 눈으로 만희를 바라볼 뿐이었다. 머리뼈 속이 푸른 불꽃으로
자글거리며 타들어 가는 듯했다.
연화는 이미 죽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사방신의 극한에 달한 분노와 슬픔에 반응해 자연이 스스로 죽어가고 있었다. 초목과 땅의
소리 없는 비명 소리가 메아리쳤다.
“…….”
험악한 인상의 사내는 넓은 어깨를 웅크리고 백호의 발치에 엎드렸다. 마치 용서를 바라는
것 같은 모양새로 만희는 부들부들 떨었다. 식은땀이 몸 전체를 적셨다. 저 깊은 본능이
지금 앞에 있는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네가 죽인 여인이 누구인지 아느냐.”
“…….”
“저승으로 함께 끌고 간다라.”
“금수보다도 못한 것이 인간이니.”
“네 죄는.”
“크악!”
98 화
【내 삶을 구렁텅이로 몬 그자들을!】
오래지 않아 사내의 거대한 육체가 경련을 일으켰다. 고개가 푹 떨궈지며 흙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만희의 육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꿈틀거리던 원혼도 단말마를 내뱉었다.
허공중에 검은 틈이 벌어지고 창백한 손이 나왔다. 죽은 사내의 머리채를 움켜쥐자 만희의
영혼이 그 손에 잡혀 육신에서 끌려나왔다. 육체의 고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사내의 혼은
귀가 찢어져라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갈퀴 같은 흰 손은 그 혼을 그대로 빛
한 점 없는 검은 틈으로 끌고 들어갔다.
“연화야…….”
사내는 연못가에 무릎을 꿇었다. 사방신으로 태어난 그는 본능적으로 세상의 법칙을 알았고
법칙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지금만은.”
“현무, 답해라!”
* * *
“왜 그러려고 해?”
“…….”
“이유를 알고 싶어. 그러기 전에는 움직이기 곤란해.”
“알고 있어요.”
“모르……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
“…….”
“과연 누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알겠어.”
“뭐죠, 이거?”
“불을 질렀어.”
“빨리 가야겠어요!”
99 화
눈에 띄게 아름다운 푸른 머리의 여인이 웃어 보이자 군사들의 눈이 벌게졌다. 샘의
정령이니 인간의 여자와는 완전히 다른 미모를 지닌 미인으로 보여, 사내들은 더러운
욕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기특하기도 하지.”
“아아, 잠시만.”
* * *
【연화야.】
들어본 적이 있지만 낯선 목소리. 여인은 그 주인공이 기억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소리인데도 온기가 느껴질 만큼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누구세요?”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얼굴을 묻었다. 매끄럽고 따스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다독이듯 상냥하게 얼굴을 감싸고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녀는 소리 내어 그를 불렀다.
“약사여래 님.”
“뵙고 싶었어요.”
연화가 속삭였다.
“저곳으로 가고 싶지 않아요.”
“누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연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희고 보드라운 여래의 손이 다가와 여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무언가를 닦아내는 것 같았다.
“백호 님.”
* * *
“용건이 있어 불렀다.”
현무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저승의 명부를 탁탁 책상에 쳤다. 바빠서 자리에서 일어날 틈도
없어 공간 자체를 열어 소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을 바삐 오가는 하위 저승사자들과
그들에게 끌려온 영혼들의 행렬이 보였다. 저승의 판관과 염라대왕의 곁에 책상을 둔
현무는 바삐 붓을 들어 영혼들의 죄목과 앞길을 써 내려갔다.
“……그래.”
“연화는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지?”
100 화
“이유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저 외에도 또 한 명이 있지 않습니까.”
알면서 능글거리며 말을 돌리는 염라대왕을 보며 백호가 답했다. 또 한 명이라, 하면서
염라대왕이 유쾌하게 머리 뒤로 손깍지를 꼈다.
“안 됩니까?”
“당연하지 않나.”
“……백호.”
“그래? 그거 잘됐군.”
“…….”
“백호.”
“…….”
백호가 중얼거렸다. 현무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백호의 주변에서
거대한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만둬라, 백호.”
“백호.”
“…….”
“기다리세요.”
일촉즉발로 두 기운이 부딪히려는 찰나,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뱀의 일족, 사영.
“무슨 뜻이지?”
“말씀 그대로.”
“네가? 무슨 수로?”
“…….”
“그래서 네가 대신 죽겠다?”
“……예.”
101 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 거야.’
“그래, 재미있구나.”
염라대왕의 기색을 엿본 백호의 기세가 한층 줄어들고 있었다. 그는 신중하게 염라대왕과
현무를 번갈아 보았다. 판관들 역시 서로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것 좀 보거라.”
염라대왕이 웃었다.
“생명을 거두는 이곳에서 모자란 게 무엇이겠느냐, 목숨이지.”
“호오.”
“…….”
‘내가 가야 할까.’
현무 역시 한탄했다.
“오랜만입니다, 염라대왕.”
“……연화야.”
“아.”
“…….”
“물론입니다.”
“그래요. 어차피 그것이 없으면 넘어갈 수 없습니다. 설마 여래께서 여분의 목숨을 지니고
계시지는 않을 것이고.”
“…….”
“할 수 없군.”
“……자네가 그렇다면야.”
연화의 영혼이 하늘거리며 사영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조심히 사영을 살펴보았다. 그녀가
전각의 시녀로 일했던 그 여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챈 듯했다. 검은 눈 안에 있는
미안함을 알아채고 사영이 웃었다.
사영은 똑바로 현무를 바라보았다. 재미있다는 듯 가늘게 좁혀진 눈동자를 보면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102 화
사영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백호가 조심스럽게 연화의 혼령을 잡으려 했지만
하늘거리는 혼령은 잡히지 않았다. 애타서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백호를 보고
여래가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나 말인가, 현무?”
“헛소리.”
현무가 투덜거렸다. 이 고요하고 안정적인 저승을 한바탕 뒤집어 엎어놓고서 하는 소리 좀
보라지. 백호는 가벼운 웃음만을 남기고 훌쩍 인간계로 나가버렸다. 빨리 달려가서 연못
곁에 앉아 약사여래가 연화를 돌려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기대하고 있어요.”
* * *
“돌아와, 빨리 돌아오거라.”
‘백호 님…….’
진작에 그랬어야 했다. 어째서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얼굴만 보아도 이렇게 가슴이
녹고 애간장이 닳게 그립고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연화의 정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남자는 조용히 혼자 끊임없이 말했다.
약사여래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음이 조급했다.
“백호 님.”
“울지 마세요.”
“……돌아왔구나.”
“그리웠습니다, 백호 님.”
연화가 흐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백호의 뺨을 감싸 쥐었다.
용기를 내어 그의 입술에 다시 짧게 입을 맞추고, 연화는 전에 없던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사랑합니다, 백호 님.”
“사랑한다, 연화야.”
백호는 여인의 머리에 이마를 댔다. 아직 창백했지만 온기는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감사함에 남자의 전신이 떨렸다.
“죄송합니다, 백호 님.”
“되었다. 돌아왔으니까.”
더 이상 묻지 않고 백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남자의 커다란 품 속으로 연화는 얼굴을
묻었다. 따스하고 묵직한 남자의 체향에 파묻혀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103 화
‘따뜻해.’
【행복하니?】
우아하고 맑은 목소리가 부드러운 어둠 저편에서 들려왔다. 옅은 온기를 두른 이의
존재감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나쁜 존재는 아니다. 연화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오히려 아주
호의적인 목소리였다.
“행복합니다.”
【그래, 잘되었구나.】
【참 잘되었어.】
상냥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굳이 눈을 떠보지 않아도 말은 맑은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연화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흘러내린 눈물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잘되었지요, 어머니.”
“돌아왔구나…….”
“잘 잤느냐.”
“예.”
자신이 베고 있는 것은 그의 팔이다. 연화는 마주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여
짧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여인은 조금 더 그에게 몸을 깊게 기대어 안겼다. 너른
품이 안온하고 따스했다.
“대충 알고 있다.”
백호는 목덜미에 닿는 그녀의 숨결을 느꼈다. 작고 가녀린 호흡이었다. 지난밤 손수 그녀의
몸을 닦아주며 몸에 큰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
“솔직히 답해 주겠느냐.”
“예, 백호 님.”
“보고 싶었다.”
“저도요, 백호 님.”
“…….”
“난 이제 네가 없으면 안 되니까.”
정확히 말하면 이미 만났을 때부터 그랬을지 모른다. 이제 와서 하기에는 새삼스러운
소리였으나 그동안 멍하게 앉아 그녀를 손에서 놓고 있던 시간이 너무 길어, 굳이 입 밖에
낼 수밖에 없었다.
“모두 제 잘못이지요.”
“내가 네게 말한 적이 없었지.”
둘의 입술이 가까웠다. 숨결이 서로 섞이며 흘러든다. 연화는 뺨에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이리 떨릴 줄은 몰랐다.”
“연모한다, 연화야.”
“백호 님.”
연화의 동그란 눈은 깜박이는 것도 잊은 듯했다. 그녀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조금씩
일부러 호흡을 해야 했다.
“백호 님.”
연화는 백호를 불렀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창밖만을 바라보며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흰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104 화
신이 말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한낱 인간인 연화에게서 평생의 자유를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연화야.”
“그래.”
연모는 함께 하였으되 먼저 심지 굳게 그를 향한 마음을 인정한 것은 연화였다.
“기꺼이, 나의 백호 님.”
* * *
‘그랬다간 백호 님께 꽤나 경을 치긴 했겠지만.’
하마터면 백호가 저승부터 시작해 정말로 세상을 날려버릴 뻔했다는 이야기에 여우의
신령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설마 그렇게까지 일이 진행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사영 아가씨요…….”
“그분은 이제 어찌 되신 겁니까?”
“어찌 되다니?”
“왜죠?”
“그럼…….”
“허어.”
예상외의 말에 호접과 묘우 둘 다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 빨리 윤회의 수레바퀴
안으로 들어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현무가 즐거워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묘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죠, 뭐.”
청수희가 씩 웃었다. 그녀는 사실 그렇게 되리라 생각하기는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영의
결심을 몇 번쯤은 더 만류했으리라. 청수희는 현무와도 제법 친분이 있었고, 최근 그가
무료함에 지쳐 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았다. 사영은 그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군요.”
“아이고, 그러셔.”
105 화
“호접 님.”
“예, 연화 님. 좋은 아침이지요.”
“……네.”
‘백호 님의 반려.’
백호와 부부가 된다. 그 아름답고 강한 사내가, 연화가 사랑해 마지않는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여 영생의 아내로 받아주는 것이다.
“양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행복하라고 하셨어요.”
“그랬군요.”
* * *
“당연한 걸 묻는데.”
“물론이지.”
주작은 예쁜 것을 참 좋아했다.
106 화
“묘우를? 왜?”
주작이 투덜거렸다.
“곧 오시(11 시)다.”
남자의 긴 백발이 바람에 날렸다. 하늘은 쨍하게 맑았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모든
공간에 빼곡히 채운 꽃더미 덕분에 바람을 타고 꽃향기가 솟아올라 하늘을 수놓았다.
“슬슬 오실 때가 되었어.”
해시계의 그림자가 정확히 오시를 가리키는 순간 광장의 중앙에 바람이 불었다. 수없이
많은 명주실들이 바람에 날려 찰랑이는 소리가 하늘을 메웠다.
“오랜만이로구나, 나의 아이들아.”
“상제님.”
“감사합니다, 상제 폐하.”
상제가 혀를 찼다. 현무는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나 멋대로 이성을 즐기는 편인 주작은
얌전히 손을 모으고 서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말을 보탰다가는 제발 그만 정착하라는
소리나 들을 게 뻔했다.
“손님이시라면…….”
“상제님을 뵙습니다.”
수많은 인간들 중 몇이나 옥황상제를 대면하는 영광을 얻을까. 상제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이도 몇 없을 것이다.
107 화
“넌 이제 내 아이란다.”
기쁨이 가득 찬 목소리였다. 백호와는 독립적으로 연화 역시 상제의 아이가 된다. 소녀의
몸을 한 신은 무릎 꿇은 연화의 앞에 다가갔다. 그녀의 희고 고운 발이 연화의 바로 앞에
섰다.
【오랜만입니다, 상제.】
“오랜만이외다, 여래.”
“약사여래 님……?”
“……엄마?”
“가보렴, 너의 어머니에게.”
저쪽에서도 여래가 어머니를 밀어 앞으로 보냈다. 연화는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허둥지둥 일어서서 치맛자락을 들추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길디긴 혼례복의 자락 때문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며 달려가자 어머니는 마주 달려
올라와 딸을 끌어안았다.
“어머니……. 엄마.”
“아가…….”
어머니 역시 울었다. 그녀는 손으로 연화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었다. 이마에 입을 맞추며 어머니는 자신의 온기를 돋워 딸의 몸을 감싸 안았다.
“내 아가.”
그래, 이제는 괜찮을 것이다. 연화도 어머니도 이제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예상하시리라 믿습니다만…….”
“흠.”
“예?”
옥황상제가 웃었다.
연화가 상제의 아이가 되었다지만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인간의 몸을
지녔고 그 몸에 따라 노화하고 죽고 다시 윤회의 굴레로 들어간다. 그것이 법칙이었다.
상제는 농담처럼 말했다. 백호는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상제가 비록 가볍게
말하고는 있으나 이것이 보통의 요청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래.”
“그건 아니고.”
108 화
붉은 옷을 입은 신부의 피부에서는 은은히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단 위의 의자에
앉아서 사태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약사여래는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띠고 셋을
바라보았다.
“……뭐라고요?”
“이혼이나 안 하면 다행이겠다.”
“……그 언약 무를 수는 없습니까?”
“안 돼.”
“젠장.”
밖에서 마지막까지 상제와 사방신을 대접하던 백호가 걸어들어 왔다. 그에게서 밤의 냄새가
났다. 창문을 열어놓아 살랑거리는 밤바람이 남자의 긴 백발을 허공으로 날렸다.
“그래.”
연화의 어머니는 여래의 수행자다. 그녀는 아마도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또 다른 보살이
될 때까지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영원의 시간 동안, 모녀는 그 깊은
인연을 쭉 이어갈 수 있겠지. 백호는 느른하게 미소를 지었다.
“너무 먼 길을 돌아왔어.”
“백호 님.”
“내가 모자라서…… 너무 먼 길로 왔다.”
백호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가 깊이 입을 맞췄다. 서로의 타액이 섞이고
점막을 애무한다. 연화는 백호의 목에 손을 감고 그의 입맞춤을 받았다.
향유를 발라 단장한 연화의 매끄러운 몸이 달빛 아래에 드러났다. 가냘프고 여린 몸.
희디흰 배꽃 같은 피부가 곱고 예뻤다.
“백호…… 님…….”
“그래. 내가 여기 있다.”
백호의 긴 백발이 연화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가슴의 유두를 깨물고 핥고, 그 밑으로
내려와 예민한 아랫배 위로 깊은 입맞춤을 남긴다.
“아...흣, 아!”
아랫배 깊숙히고 불같은 감각이 터졌다. 전신에 불꽃이 터지면서 뇌가 하얗게 표백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백호를 마구잡이로 끌어안았고 남자 역시 거의 동시에 절정을
맞이했다. 그가 거칠게 허리를 떨며 연화의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읏……. 연화야……!”
109 화
그녀는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쓰면서 고개를 저었다. 밤바람은 적당히 서늘했고
뺨을 감싸고 살랑거리며 불었지만 달아오른 뺨은 쉽게 식지 않았다. 오히려 자꾸 생각이
예전의 그 밤들로 되돌아갔다.
“……백호 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백호는 신령계를 돌보기 위해
나가 이틀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그게 다행이었다. 이렇게 얼굴이 달아오른 것을
보면 필시 백호가 눈치채고 무엇이냐 물었을 것이다.
연화는 발개진 얼굴을 감싸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둥실 떠오른 것은 그때와 똑같은
달이다. 필시 백호의 몸 상태 역시 비슷할 터. 그녀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가만히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끼워준 옥가락지가 손끝에 걸렸다.
욕실의 창문은 사방팔방 열리게 되어 있었지만 연화는 하나만 열어두었다. 백호는 신선한
공기 속이 좋지 않냐며 문을 모두 위로 올려 묶고 목욕을 즐겼지만, 아직도 그녀는 노출된
공간에서 맨 살을 내보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발끝을 담그자 미온수가 느껴졌다. 한쪽으로 따뜻한 온천물이 솟아올랐고 한쪽으로 시원한
폭포가 쏟아져 중간에서 합쳐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물 안에 몸을 완전히 담그고
머리까지 적신 뒤 시원한 물 쪽으로 갔다. 몸이 여전히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
“…….”
한숨처럼 그의 이름이 샜다. 저녁마다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피부에 입술을 대던 백호의
체온이 그립다. 겨우 사흘째인데, 그에게 얼마나 길이 들었으면 이렇게까지 못 견디게
그리울까.
“안아주세요.”
“백호 님…….”
“……!”
“……읍, 흐……!”
놀라 밀어내려는 여자의 가느다란 손목이 잡혀 눌렸다. 반항하려는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고 도톰한 입술과 혀를 잘근거리면서 사내의 두터운 혀가 그녀의 입 안을 마구 범했다.
타액이 흘러 내렸다. 손바닥에 차가운 털과 같은 감촉이 느껴지고, 사내의 팽팽한 옷과
상체가 연화의 상체를 눌렀다.
“……백호 님?”
대답 대신 낮게 웃는 소리만이 돌아왔다. 흰 얼굴 가운데 형형히 빛나는 새파란 눈이 살풋
접혔다. 그는 길게 혀를 내어 연화의 뺨을 핥았다. 마치 고양잇과 짐승이 하는 행동
같았다.
“놀랐느냐?”
“……세상에.”
“이 모습이라 하시면.”
“백, 백호 님.”
“내가 그리 보고 싶었더냐?”
“설마 전부 보신 건가요…….”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아하, 그래.”
110 화
“그렇다면 달의 명에 따라야지.”
“백, 호 님.”
간신히 입술이 놓여나 허덕이면서도 연화가 목숨줄처럼 백호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 답하듯
그가 연화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완전히 벌어져 벗은 샅에 그의 거대한 양물이
느껴졌다.
“……시기가, 시기니까요.”
“……흐, 으흐……응……!”
연화가 덜덜 떨었다. 계속 입을 놀리면서 살점 안에 있는 깊은 음문 안으로 혀를 밀어
넣자 기어코 그녀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찌걱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폭포
소리로 결코 조용하지 않은 욕탕 안인데도 그랬다.
“아흣……!”
“평소보다 좀 거칠 것이다.”
“흐…….”
“차이가 좀 나지?”
백호가 물었다. 스스로 욕망을 억제하려 애쓰는 목소리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연화를
끌어안고 가차 없이 안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반려에게 그런 짓을 할 만한
자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다칠 수도 있었다.
연화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숨을 삼키고 백호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볐다.
“평……소보다, 더…….”
“그래.”
“조금 힘, 힘들…….”
“읏, 흐, 아……!”
“빨, 빨리 해, 주세요…….”
“…….”
“안에…… 받고 싶어요.”
“……으, 흐응……!”
“아, 아아읏……!”
눈물과 타액이 흘러서 얼굴이 온통 엉망이 되었다.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감각에 백호를
밀어내다가 그의 강인한 팔에 속절없이 끌려와 다시 안겼다.
“……연화야.”
“미안하다.”
“아, 이, 이거…….”
그녀가 정신을 제대로 차리려고 노력하면서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으로 물었다. 문장은커녕
단어도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지만 백호는 알아듣고 그녀를 고쳐 안았다.
111 화
성기의 변형에 연화가 덜덜 떨며 허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백호가 잽싸게 그녀의 몸을
낚아채 꽉 잡았다.
“……글쎄.”
“미안하구나, 내가 금수인지라.”
“……괜, 찮아요.”
간신히 말했지만 목소리는 완전히 갈려서 거칠었다. 근래 이렇게까지 정신을 놓고 비명을
질러댔던 관계가 있었던가. 그녀는 힘겨운 상태에서도 어딘가 충만한 기분으로 반려의 품에
고개를 기울였다.
‘가신 건가…….’
‘다 끝내면 오시겠지.’
어제의 관계가 조금 무리였던지 몸을 움직이자 아랫배와 허벅지 쪽으로 달콤한 통증이
찌르르 지나갔다. 다리를 좁히자 아직도 약간 화끈한 기가 남은 은밀한 틈이 쓸려 조금
아팠다. 백호가 좋은 약을 발라주고 갔는지 조금 미끈거리는 느낌이 있었다.
‘정말이지.’
‘생각하면 안 돼, 아침부터.’
“몸은 괜찮고?”
“그깟 일정 따위.”
“예에?”
“돌아보는 길이 있어서, 그 길을 뚫어주어야 신령계 전체로 기가 원활히 순환되거든.
순찰뿐 아니라 기맥을 뚫어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
“저런.”
“세상에, 그러게요.”
이러면 못된 건데, 싶으면서도 연화는 충만한 기분으로 백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끝없이
배려받고 끝없이 사랑받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그녀는 이제야 알아가고 있었다.
“무리는 하지 마세요.”
“흠, 붉은 달과 발정기라.”
“그렇군요.”
“…….”
“……아.”
연화는 한숨을 쉬면서 붉어진 볼을 토닥였다. 어차피 둘 사이의 일이니 특별히 부끄러울
것도 없지만, 그래도 민망한 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애꿎은 볼만 세게 문질러댔다.
“…….”
“조금…… 묘하구나.”
“그래, 이상해.”
“……허.”
하지만 뭔가를 느낀 백호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연화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니, 그게.”
“놀라지 마라.”
연화는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배 위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백호의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반려의 벗은 어깨를 끌어안고 그 위에 입을 맞췄다.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떨려서 나오지 않도록, 백호는 애써 목에 힘을 주었다.
“……예?”
연화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혼인을 맺었으나 신과 인간이라는 태생적인 차이로 인해 계속해서 후사를 보는 데 실패했던
둘이다. 백호는 지나치게 강했고 그의 씨를 잉태하기에 인간인 연화는 지나치게 연약했다.
후사 따위 없어도 상관없다며 백호가 개의치 않았으나 연화는 언제나 그것을 마음에 걸려
했다.
“세, 세상에.”
“아이가 찾아왔구나.”
112 화
장마가 길다.
“도저히 더 못 견디겠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그마한 흰 호랑이, 백호와 그녀의 아들인 백랑은 지금쯤 위층
침대에서 고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동안 어린 아들을 돌보아야 하는 데다가 날씨가 궂어
좋아하는 산책도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 연화는 곧 시녀에게 우산을 받아 들었다. 화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기름칠한 종이우산이었다.
“알겠어요, 호접.”
“물냄새도 좋네.”
“아, 저런.”
연화가 중얼거렸다. 개구리는 힘겹게 돌 위를 올랐지만 자리 자체가 위태로웠다. 하필
물줄기가 꽤 거센 가운데라 물방울이 위태롭게 튀었다. 평소라면 연화의 무릎 정도까지밖에
차지 않는 시내였으나 지금은 물이 불어 허벅지까지 올 듯했다.
“아, 안 돼!”
“헉, 허억…….”
일어서려 해도 물살이 너무 세고 젖은 긴 치마가 감겨 다리를 들 수가 없다. 그녀는
개구리라도 뭍으로 던지려 했지만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없어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 구조 요청을 할 수도 없었다.
“앗……!”
“연화야!”
“연화야, 연화야!”
“……개구리?”
“……죄송해요.”
“그게 아니라…….”
“…….”
하지만 연화는 변함이 없었다. 단호한 그녀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백호는 불쾌했다.
자칫하면 물에 쓸려가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알겠다.”
* * *
“뭐가 문제인데?”
“그럼 뭐, 좋은 건 줄 알고 혼인했냐?”
“애초에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보살과, 세상의 규칙을 지켜야 하는 우리가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는 없지. 뭐 다 알고 있었잖아.”
“그건…… 아니고.”
“흠.”
“아니, 뭐. 나도 들은 바가 있어서.”
“시끄러워, 닥쳐!”
“시끄럽다고 했다!”
“예쁘잖아.”
“그건 그렇다만.”
“뭐 문제 있어?”
태양처럼 웃고 있는 백호를 멀거니 보다가 청룡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저만큼의 확신이,
자신에게 있었던가. 그랬다면 후회할 일이 없었을지도.
“아니, 아무것도.”
“싱거운 놈.”
“가려고?”
113 화
“늦으셨어요.”
“미안하구나.”
“……어디 다녀오셨어요?”
“……들어오셔요.”
“이건…….”
“세상에.”
“감사합니다.”
창가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비가 조금씩 잦아드는 듯 바람에 묻은 습기도 한층
덜했다. 연화는 작게 웃으며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조금씩 밝아져 가는 흐린 하늘의 빛이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
“몸이 차구나.”
백호의 커다란 손이 연화의 허리춤을 잡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체온은 인간보다
높았다. 뜨거운 손바닥이 얇은 침실용의 저고리와 치마 위로 흘러내렸다.
“춥겠어.”
“백호 님!”
“백, 호 님! 여, 여기서?”
“쉿. 백랑이가 옆방에서 듣겠구나.”
“흐……으응……!”
연화가 채 신음을 삼키지 못했다. 쏟아진 애액 덕분에 미끈거리는 내벽으로 거대한 양물의
끝이 박혀 들어왔다. 좁은 골반과 아랫배가 순식간에 꽉 차고 터질 듯한 느낌에 그녀는
허덕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연화가 적응할 수 있도록 백호가 잠시 기다렸다. 쥐어짜는 듯 조여대는 탄력 있는 내벽의
감각에 그 역시 당장 거칠게 허리를 털고 싶었지만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연화를
배려해야 했다. 입을 벌리고 붉은 혀를 내민 채 하닥이는 그녀의 입가에 입을 맞추고,
자꾸만 흘러내리는 연화의 두 다리를 다시 허리에 걸치면서 그는 모든 자제심을 다
동원했다.
“백호…… 님. 백호 님…….”
이윽고 백호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녀를 배려하려 느리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으나 곧 그는 인내를 잃고 거세게 허리를 쳐올렸다. 철썩거리며
그녀의 허벅지 깊은 곳과 회음부에 백호의 샅이 부딪쳤다.
“백…… 백호 님! 백호……!”
“흐, 아응…….”
“백랑아……?”
“엄마, 내가 깨웠어요?”
“왜 그러세요, 백호 님.”
“이 녀석이?”
“저런…… 저 녀석.”
“예?”
“저건…….”
“이 비를 몰고 왔던 청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