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신앙

You might also like

Download as docx, pdf, or txt
Download as docx, pdf, or txt
You are on page 1of 8

성도의 신앙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제 주변에 사랑하는 동역자들이 신앙의 기준과 판단을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길 원하는 마음에 작성합니다.

오늘날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소망을 품고 살아갈 때, 내가 바라는 모습과 다른 삶을 살아갈지라도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세상 속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만 예배하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하는 말이 틀릴 수도 있기에,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마시고 본인의 신앙에 있어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글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믿고 의지하는 주님에 대해 제가 살아오며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적고자 합니다.

주변 동역자들에게 이 글을 나눌 때 시험 받는 이들이 있다면 사랑으로 다독여주시고, 그들의 믿음이


더욱 견고히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혹여, 이 글을 적는 제 태도가 신앙의 교만이 담기지 않게 하시고 정말 사랑의 마음으로 적게


하여주시사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예배자의 삶에 대해 적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 더하여 주시고 이 글을 읽는 자들의 삶 속에 이스라엘을 인도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언제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1. 교리

교리는 교회의 근간이 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교리 위에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리를 세우기 위해


믿음의 선조들이 많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장로교의 교리는 칼빈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칼빈주의 5 대 교리 배경

- 인간의 전적 부패 (Total Depravity)

-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 불가항력적인 은혜(Irresistible Grace)

-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

장로교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 그리고 예정을 강조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감리교의 알미니안-웨슬리안 주의는 인간의 자율과 책임을 강조하는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신학파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신앙의 발달 정도와 기질, 성경-신학적인
지식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복음주의(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자들이나 제가 생각할 때 칼빈주의가


성경적이라 생각합니다.

이때 주의할 점은 칼빈의 원래 주장이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약간 변질 혹은 강화되었다는 점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후대의 칼빈주의는 칼빈이 원래 주장하던 것보다 예정을 더 강조하는 형태로 변했다고 신학자들은
봅니다. 온건한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예정을 인정하지만 비대칭적인 예정을 주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 얻을 자들은 예정하셨지만 그러나 불신자들의 심판은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라


그들의 책임으로 받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감리교 신학이 그르고 장로교 신학이 다 맞는다는 말은 아니고 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각각 성경적인 면과 그렇지 않은 면들은 조금씩 가지고 있습니다.

감리교의 알미니안 주의는 구원이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고 인간의 자율적 의사에 의해
구원의 여부가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즉, 인간의 타락한 행동에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장로교단과 감리교단의 가장 큰 차이는 구원의 예정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교회

제가 생각하는 교회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로 세우셨고 사랑하시는 교회입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많은 성도들이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교회를 꼭


가야하는지에 대한 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를 가든 안가든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깊이가 흐르는 시간을 카이로스, 그저 흘러가는 시간 자체를 의미하는 크로노스 2 가지의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 영에 영향을 주는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예배가 될 수도 있고, 새벽기도, 큐티 시간, 찬양을 듣는 와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이든 우린 하나님과 깊게 교재 하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한 시간을 가져야 성도인 우리는 세상 속에 살아갈 지혜와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 카이로스의 시간을 이미 집에서도 잘 보내고 있다고 교회를 안가도 될까요.

저는 가급적 교회에 나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칼빈의 5 대 교리처럼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며


매우 나약한 존재입니다.

쉽게 상처받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낙담하고, 넘어지는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는 성도들이 서로를 의지 하도록 해줍니다. 동일한 신앙을 가진 공동체가 세상


속에 있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같은 하나님, 같은 공동체에서 서로 동역하고 의지하며 세상 속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비록 사람이 모이다 보니 교회 속에서도 상처를 받고 안좋은 모습이 보일 때도 있지만, 기억해야할


것은

교회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공동체이자 예수께서 피와 살로 세우신 몸 된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소망이 없다고 함부로 판단해서도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판단은 오직 주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로써 교회의 일원으로써 교회를 위해 눈물 흘리고 기도하며,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


성도가 교회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라고 믿습니다.

3. 직분

교회에는 다양한 직분이 존재합니다. 교역자, 장로, 권사, 안수 집사, 집사 등 다양한 직분들이
존재합니다. 직분을 받기 위해 교회에서 선거도 하고 투표도 하며 민주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섬길
일꾼을 선출합니다.

이렇다 보니 직분을 담당하는 것이 마치 엄청난 권력을 가지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습니다. 장로가
되면 신앙이 좋은 것처럼, 권사가 되면 구원을 받는 것처럼 착각을 하곤 합니다.

직분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직분이 있다고 해서 구원을 받게 해주진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람의 믿음,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우리를 구원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선거를 통해 더 낮아진 곳에서 섬길 한사람의 일꾼을 뽑아야 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기 위해 이새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첫째 아들과 다윗의


형들의 출중함을 보며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들판에 나가 양을 치고 있는 다윗을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명하여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십니다.

사람을 보기보다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겸손하게 낮아진 곳에서 섬기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한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직분을 감당하는 것은 그런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야고보와 요한은 그의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의 영광 좌우에 앉길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정녕 이 잔을 감당할 수 있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감당할 수 있다고
알지도 못하고 대답하였지만 그들의 말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대답대로 이끄셨습니다.

직분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영광을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하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섬기고
낮아져야 합니다.

직분 또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면 기억해야합니다. 내가 영광 받으려 하고 있는지,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감사로 직분과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내 영광을 위해 사역을 맡으면 금방 지치고
주변에 안좋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감사로 사역을 감당하면 감사함이
넘칩니다.

교회에서 자신의 영광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요.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4. 성도의 삶

성도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것인가 참 많이 고민했습니다.

내가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것인가. 내가 돈을 많이 벌어 주변 이들을 위해 살아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인가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성도다운 삶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주어진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자녀로 오늘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만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또


있을까요? 혼란한 이 세상 소망 하나 없다는 찬양의 고백처럼 세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오늘 하루
주어진 삶을 하나님의 자녀로 자녀답게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의 흔적이 곧 예수의
흔적이라 고백합니다.

누군가에게 우린 보여지며 살아갑니다. 우리 또한 누군가의 모습을 보며 살아갑니다.

그들의 삶, 행동, 태도, 마음 많은 것들을 보며 우리는 그 사람을 판단하고 생각하며 그렇게 관계를
이어갑니다.

여러분의 삶이 만약 하나님 보시기에 자녀답게 살아간다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하나님 나라를 잠깐이나마 생각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예배당에서만 드리는 예배뿐만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예배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우린 각자의 삶의 자리에 보내진 작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5. 은사

은사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로마서 12:6-8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고린도전서 12:7-11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을 통역함.

은사는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주시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방언과 기도의 은사를
주시는 반면, 누군가에게는 분별함과 지혜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은사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우리의 상황과 형편에 맞는 은사를 베풀어 주시고 나에게 그런 은사가 없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초조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몇몇 교회에서는 이러한 은사를 너무 사모한 나머지 은사를 받길 강조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렇게
받은 은사는 거짓된 은사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은사를 부정하는 것 또한 올바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치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가 적어졌다고
하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은사 역시 필요에 따라 주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지나친 은사 위주의 신앙은 자칫 은사, 행위를 통해 믿음을 얻는 잘못된 신앙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필요하시면 돌멩이를 들어 찬양하게 하실 것처럼 필요에 따라
주님의 종들에게 그에 맞는 은사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6. 삶의 인도하심 (1)

우리는 삶에서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며 살아갑니다. 학교, 직장, 자녀, 건강, 경제적 형편 등 많은
문제들 앞에 좌절하기도 하고 무력해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리라 믿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당장 놓여진 문제에 고민하고 기도하여보지만 당장 답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건너 가나안으로 가기까지 40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40 년이라는 시간


동안 세대가 바뀌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광야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 받았으나 골리앗과 마주하였고, 사울에게 미움을 받아 도망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죽이면 안된다는 믿음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으로 그 생활을 버텼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날 포도주는 잔치의 사람들이 다 마셔버려 텅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바램과 달리 십자가에 달려 힘 없이 죽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다윗의 골리앗과 도망자의 삶, 비어 버린 포도주,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삶의


관점에서 본다면 끝과 같은 결말이라고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주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스라엘을 결국


가나안으로 인도하셨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세우셨고, 비어 있는 포도주를 통해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역사를 행하셨으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부활과 구원을 보이셨습니다.

인생이 막막하고 때론 탄식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무력함과,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 우리를 집어 삼킬 때도 있습니다. 할 수 있는게 없어 그저 주님 앞에 우는 것 밖에 할 수
있는게 없을 그때 조차도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의미 없는 시간이라 여겼던 시간 조차
주님의 뜻 아래 있습니다. 때론 막막한 그 시간이 주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더욱 성숙시키는 시간임을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물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며 본인도 물위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옆에서 치는 파도에 믿음이
두려움으로 바뀌어 물에 빠졌습니다. 때론 삶의 문제가 우리의 믿음을 두려움으로 바꿀 수 있으나
베드로에게 오신 예수님이 손을 내미셨 듯 우리에게 손 내미시는 주님의 손길을 항상 기대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신실하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7. 삶의 인도하심 (2)

앞서 말한 삶의 과정을 통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른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존경하는 인물들 중 누구를 가장 닮고 싶냐고 묻는다면 누구를 말하겠습니까? 다윗,
요셉, 바울, 예수님 등등 많은 인물들을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윗과 같은 인물이 되겠다고 말한 당신에게 ‘당신은 당신의 장인이 당신을 죽도록
싫어하여 죽이기 위해 쫓아다닐 것이고 도망자의 생활을 하다가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어떠실 것 같나요.

또는 요셉이 되고 싶다고 말한 당신에게 ‘당신은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타국으로 팔려나가고 노예


같은 삶, 감옥에서의 삶을 살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한 당신에게 ‘당신은 모두가 당신을 증오하고 반역자로 몰아 흉악범으로 만들고
사형을 당할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래도 그 인물이 되고 싶은가요?

우리는 다윗, 요셉, 바울, 예수님이 되고 싶다고 말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고난의
과정 속에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닮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왕, 총리, 사도, 온 세상의
구원자임을 알기에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즉, 과정이 아닌 결과를 닮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결과를 보고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객관적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훌륭한 업적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반역자,
선동자, 이단, 온갖 안좋은 꼬리표가 다 붙은 채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삶의 길이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하는 삶의 길입니다.

우리는 때론 비전을 찾기 위해, 하나님의 사명을 찾기 위해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비전과


사명이 만약 의미 없어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스쳐 지나가는 말씀 구절에 이름도 없는 그들처럼 살아가야 한다면 그렇게 살 수


있으십니까. 세상의 관점에서 대단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은 비전이 아니라 야망에 가깝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 앞에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시대가 악해지고 타락해질지라도 그 속에서


중심을 하나님으로 향하게 하는 삶, 모두가 비난하고 미련하다 할지라도 구원을 믿는 우리에게
십자가는 자랑이자 나의 힘이라고 말하는 삶,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결과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는 말에 불과합니다.


하루하루의 삶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때, 세상 속에서 세상을 쫓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진리를 쫓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살아갈 줄로 고백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 장 12 절)

8. 술과 담배
우리나라 초대 기독교가 들어올 때 선교사들이 한국의 생활상을 보고 3 가지를 금해야겠다고
판단하였습니다.

1. 술

2. 담배

3. 첩

이는 한국 사람들의 생활에서 술과 담배, 첩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데 방해가 될 것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술과 담배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죄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지만 첩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생각해봐야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첩을 두지 않습니다’ 라고 말을 한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술과 담배도 이와 마찬가지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 와서 술과 담배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 음주 후 판단이 흐려짐으로 인한 범죄 등 사회적


분위기가 과거와 많이 바뀌어 가고 있고 음주율, 흡연율을 보아도 과거에 비해 현대에 와서는 많이
낮아지고 있는 추세를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미래에는 ‘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술, 담배를 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말이 ‘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첩을 두지 않습니다.’ 라는 맥락과 비슷하게 받아들여질 수 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럼 술을 어떻게 얘기하고 있을까요? 성경에서 술은 2 가지 측면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1. 빵과 포도주

2. 술에 취하지 말라

첫 번째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식으로써 술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감사한 일상 속에 음식이며 포도주는 당시 사람들에게 음식, 건강을 위한 수단이였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말씀을 더욱 가까이 하라는 관점에서 말하는 말씀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한국


교회에서는 이 구절로 술을 마시는 것은 죄라고 얘기하였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술에 취하여 성령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가까이하라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술을 정의하고 있으면, 우리는 술을 마음껏 마셔도 될까요?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한 사건이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어도 되는지 안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출신의 초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으면 안된다는 것이 관습처럼


박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먹어도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유일한 주님
되시기 때문에 먹어도 상관없다 주장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어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따라가는 이들에게 우상의 의미는 그저 헛된 것, 의미 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먹어도 된다는 것을 앎에도 실제 삶은 먹지 않아야 한다는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였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본인의 삶, 본인의 욕구를 우선시 하기 이전에 공동체에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음이
죄라고 받아들이는 성도들에 대한 배려이자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이였습니다.

오늘날 술을 마시고 마시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교회에는
술을 마심이 죄라고 여기며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절제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우선시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술을 마신다는 것을 굳이 티내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 형성된 공동체입니다. 예수의 몸 된 교회이자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라가는 성도는 그렇게 모인 공동체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할 의무가
있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에서 소리내어 술을 마신
것을 자랑하거나 떠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길 소망합니다.

글을 마치며,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때론 세상의 관점에서 비합리적이게 보일 수 있습니다. 본인의


시간을 투자하며 교회의 예배를 드려야 하고,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내기도 하며, 때론 편하지 않은
길을 걸어가며 불이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길은 편한 길이 아니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지나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정말
힘들고 때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은 쉽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불가능하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12


사도, 바울, 야곱 등 흠 많은 자들을 통해 연단하시고 하나님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들처럼 대단한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매일 매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길
노력하며,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분별력을 지닌 예배자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수많은 믿음의 동역자들과 신앙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 안에 늘 거하기를 힘쓰십시요.


바울이 말했듯이 그리스도께서 박히신 그 십자가가 바리새인에게는 미련해보이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나 십자가의 구원을 믿는 우리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종으로, 이쁜 자녀로 살아가는 동역자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부족한 주의 종이 제가 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짧게 얘기해보았습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시험이 든다면 용서하여 주시고, 이 글을 읽고 깨닫는 이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와 영적
분별함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세상 속에 어렵게 믿음 유지하고 있는 이들에게 주님 늘 함께하여 주시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던 주님의 말씀 기억하며, 하루하루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되도록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