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wnload as pdf or txt
Download as pdf or txt
You are on page 1of 90

[UCI]I804:null-200000113133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 아래의 조건을 따르는 경우에 한하여 자유롭게

l 이 저작물을 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 및 방송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조건을 따라야 합니다:

저작자표시. 귀하는 원저작자를 표시하여야 합니다.

비영리. 귀하는 이 저작물을 영리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변경금지. 귀하는 이 저작물을 개작, 변형 또는 가공할 수 없습니다.

l 귀하는, 이 저작물의 재이용이나 배포의 경우, 이 저작물에 적용된 이용허락조건


을 명확하게 나타내어야 합니다.
l 저작권자로부터 별도의 허가를 받으면 이러한 조건들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저작권법에 따른 이용자의 권리는 위의 내용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용허락규약(Legal Code)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한 것입니다.

Disclaimer
석사학위 논문

기억과 이미지에 관한 연구
-사진 Ger
이미지를 기반으로 홀로코스터 기억을 표상하는 리히터( har
d
Ri
cht
er) Ansel
,키퍼( m Ki
efer
),볼탕스키 (
Chr
ist
ian Bol
tanski
)의 작업을
중심으로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회화학과

한 선 정

지도교수 백 미 혜

2013년 2월
기억과 이미지에 관한 연구
-사진 Ger
이미지를 기반으로 홀로코스터 기억을 표상하는 리히터( har
d
Ri
cht
er) Ansel
,키퍼( m Ki
efer
),볼탕스키 (
Chr
ist
ian Bol
tanski
)의 작업을
중심으로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회화학과

한선정

이 논문을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지도교수 백 미 혜

2013년 2월
한선정의 석사학위논문을 인준함

심사위원 인

심사위원 인

심사위원 인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13년 2월
-목 차 -

Abst
ract

Ⅰ.서론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
I
-1.연구목적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
I
-2.연구방법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3

Ⅱ.일상의 역사 -기억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6
Ⅱ-1.역사와 기억의 대립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
1)기억 담론의 대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
2)집단기억과 개인의 기억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9
Ⅱ-2.사진과 기억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8
1)다큐멘트(
Document
):공인된 기억의 증거 그리고 거짓 ·
··
··
·19
2)기념물(
Monument
):숨어 있는 기억의 증거 아마추어 사진 22

Ⅲ.홀로코스터 기억의 예술적 발화 ·


··
··
··
··
··
··
··
··
··
··
··
··
··
··
··
··
··
··
··
··
··
··
··
··
··26
Ⅲ-
1.혼성된 정체성과 기억 이미지 :
게르하르트 리히터(
Ger
har
dRi
cht
er)·
··
··
··
··
··
··
··
··
··
··28
1)혼성된 정체성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8
2)기억의 얼개로써의 이미지 ·
··
··
··
··
··
··
··
··
··
··
··
··
··
··
··
··
··
··
··
··
··
··
··
··
··
··
··33
Ⅲ-2.단절된 집단기억과 충돌하는 기억 이미지 :
안젤름 키퍼(
Ans
elm Ki
ef
er)·
··
··
··
··
··
··
··
·40
1)기억을 기억하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41
2)집단기억이 체험되는 무대로써의 이미지 ·
··
··
··
··
··
··
··
··
··
··
··
··
··
··46
Ⅲ-3.진실과 허구의 기억 이미지 :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Chr
is
ti
anBo
lt
ans
ki)·
··
··
··
··
··
··
·52
1)단절과 상실의 기억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53
2)역사 다시 바라보기로써의 이미지 ·
··
··
··
··
··
··
··
··
··
··
··
··
··
··
··
··
··
··
··
··57

- i -
Ⅳ.결론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64

도판목차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0
도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2
참고문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80

- ii -
A St
udyon Memor
iesand I
mages
-Focusedon t
hewor
ksofChr
ist
ian Bol
tanski
,Ansel
m Ki
efer
,Ger
har
d
Ri
cht
erwhi
ch pr
esentHol
ocaustmemor
iesbasedonpi
ctur
eimages-

Han,Seon Jeong

De
par
tme
ntofPai
nti
ng
TheGr
aduat
eSc
hool
,Cat
hol
icUni
ver
sit
yofDae
gu

(
Supe
rvi
sedbyPr
ofe
ssorBae
k,MiHye
)

(
Abs
trac
t)
The pur
pos
e of t
hiss
tudy was t
o obs
erve t
he wor
ks of Ge
rhar
d Ri
cht
er,
Ans
elm Ki
efe
,Chr
ist
ian Bol
tanskius
ing me
mor
y di
scour
ses as a bas
is,wor
ks
whi
ch al
ldealwi
th Hol
ocaus
tme
mor
ies and c
an be r
efe
rred as t
he st
art
ing
poi
nt of i
nit
iat
ing memor
y di
scour
ses
. Thi
sis be
cause me
mor
ies ar
e mor
e
f
lexi
ble compar
edt
o hi
stor
y and c
an be appr
oac
hedt
hrough di
ver
se me
thods
,
maki
ng i
tmor
e us
efult
o unde
rst
and t
hei
r wor
k whi
ch handl
es pe
rsonaland
publ
ic hi
stor
y. I
n addi
ti
on,due t
othe c
onf
irmat
ion oft
he c
orr
elat
ion bet
ween
pi
ctur
eme
diaandt
hei
rwor
k,t
hispoi
ntwasal
soc
los
elyobse
rve
d.
Thr
ought
hepr
oce
ssofs
tudyi
ngt
hewor
koft
het
hre
ewr
ite
rswhi
chi
mage
sa
gr
oup memor
ycal
ledt
heHol
ocaus
t,wewe
reabl
etoc
onf
irm t
hatt
her
ewasa
gr
oup me
mor
y de
epl
yroot
ed wi
thi
nthe
iri
mage whi
che
xte
nded be
yond t
hei
r
per
sonal me
mor
ies. Si
mul
taneous
ly, we wer
e abl
etor
eal
izet
he c
ommon
e
sse
nti
alpr
obl
ems be
ing handl
edi
nthe
irwor
kinr
egar
ds t
o gr
oup me
mor
ies
l
ike t
he Hol
ocaus
tsuc
h as '
how ar
e you goi
ng t
ore
cal
lthe memor
y'and
'
unc
ert
aint
ysur
roundi
ng t
he aut
hor
ize
d me
mor
y' pr
obl
ems e
tc. Fur
the
rmor
e,
wewe
reabl
etor
eal
izet
hatpe
rsonalme
mor
ies(
unaut
hor
ize
d me
mor
ies
)pl
aye
d
an e
sse
nti
alr
olei
n pr
omot
ing f
urt
herse
lf-r
efl
ect
ion on t
he mi
stake
s oft
hes
e
aut
hor
ized me
mor
ies
.The
sec
ircums
tanc
es we
re ac
cept
ed by t
he wr
ite
rst
o

- iii -
e
nsur
e t
hat t
hei
r mai
n pe
rspe
cti
ves i
nvol
ved r
ecal
li
ng t
he memor
ies of
anonymous be
ings t
oens
uret
hatt
hey(
wri
ter
s)di
d notl
ose t
hei
rtouc
hes of
humani
ty whi
le si
mul
tane
ousl
y ens
uri
ng t
hat t
hei
rfut
ure communi
ty c
oul
d
di
scussofabe
tterl
if
e. Thi
sas
pec
tcan ber
efe
rre
d ast
hear
che
ologi
calval
ue
of ar
t.The i
mpor
tance of '
Memor
y di
scour
se' whi
ch be
came t
he bas
is of
de
duc
ing suc
hre
sul
tcan ber
egar
dedt
obes
igni
fi
cantf
rom t
heper
spe
cti
vet
hat
i
tcan r
efl
ecti
)the gaps be
twe
eni
ndi
vidualme
mor
ies whi
ch c
owe
redi
nthe
f
ront
ier
;and i
i)t
hee
nfor
ced,mani
pul
ate
d,and uni
fi
ed hi
stor
icalme
mor
ieswhi
le
r
eigni
ng wi
tht
he domi
nat
ion di
scour
se.I
nthi
sre
gar
ds,we c
onf
irme
dthat
ar
tist
s we
re al
soi
nduc
ing t
he me
mor
ies oft
he mi
nor
ityt
o st
and agai
nstt
he
aut
hor
ized me
mor
iest
ore
ques
tfort
hei
rshar
e.I
tis gene
ral
lyi
mposs
ibl
efor
ar
tist
s,as or
dinar
y pe
opl
e,t
o appr
oac
h publ
ic spe
cif
icc
ases manage
d by t
he
c
ount
ry. The
ref
ore
,the f
acti
s t
hat i
tis e
xtr
emel
y di
ff
icul
tto pr
oduc
e
obj
ect
if
icat
ionswi
thl
imi
ted dat
a.Howe
ver
,suc
hchar
act
eri
sti
csc
an ber
egar
ded
t
o havepr
ovi
dedt
he ar
tis
tswi
th suf
fi
cie
ntr
oom t
ore
ad t
heappar
ent
ly-c
los
ed
ar
chi
vesi
n di
ver
se pe
rspe
cti
ves
.Thi
sis notst
ati
ng t
hatt
he or
igi
nalpubl
ic
ar
chi
vesandc
ompl
ete
lyer
rone
ous;r
athe
r,e
veni
fthepe
rspe
cti
vesoft
hear
tis
ts
ar
esome
whatdi
stantf
rom t
het
rut
h,t
heval
uel
iesi
n pr
ovi
ding t
hec
apac
ityt
o
ber
ead i
n di
ver
seme
thodswhi
ch my bedi
ff
ere
ntf
rom t
heor
igi
naldi
scour
ses
,
t
her
eby gi
ving car
efulat
tent
ion t
othe mul
ti
ple pr
obl
ems c
aus
ed atl
eas
tfr
om
di
chot
omoust
hinki
ng.
Ass
uch,t
her
eason why pi
ctur
eimagesar
ebe
ing us
ed ase
sse
nti
alme
diai
n
handl
ing suc
h ar
chi
vesi
sduet
othef
oll
owi
ng r
easons
:i)i
tpr
ove
sasevi
denc
e
as an obj
ectwhi
chc
annoti
mpr
ovi
set
he pas
t,t
he pastwhi
chi
s di
stantf
rom
t
hepr
ese
nt;and i
i)t
hec
har
act
eri
sti
csofpi
ctur
eimage
s(i
.e
.,j
ointc
ommuni
on,
uni
li
near uni
que char
act
eri
sti
cse
tc)make t
hem use
fult
o be us
ed f
or me
dia.
Bas
ed on suc
hchar
act
eri
sti
cs ofpi
ctur
eimages
,ar
tis
ts use t
hem as t
ool
sto
c
alc
ulat
ethe
irown e
mot
ions aswe
llas i
nst
ruc
temot
ionst
othevi
ewe
rs. By
ope
ning a pat
hway whi
chc
an pr
omot
e new awar
ene
sst
othe vi
ewer
s,t
he
ar
tist
sfor
m ai
nnumer
abl
e mul
ti
-laye
red gr
ay z
one t
othe vi
ewe
rs wi
thout
maki
ng unc
ondi
ti
onalor
der
s.Thi
sisal
soi
nli
ne wi
tht
he r
eas
ons why ar
tis
ts
handl
ewi
thar
chi
vesi
nthe
irwor
k.

- iv -
Ⅰ.서론

Ⅰ-1.연구목적

20세기 이후의 역사에서 이념과 민족의 충돌로부터 자유로운 대륙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그 이후의 문제들로 인해 현재에도 진통은 이어지고 있다.
홀로코스터,코소보,킬링필드,르완다 까지 이르는 대규모학살(
genoci
de)

옛 사회주의 체제와 각종 독재정권 아래서 자행되었던 인권유린이 바로 그
것이다.이러한 상황과 더불어 변방에 대한 횡포와 이분법적 사고를 탈피하
고 많은 것을 포용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의 심화 등에 힘입
어 기존의 담론체계에 대해 변화를 요구하는 쪽과 과거에 대한 올바른 해석
을 요구하는 쪽이 큰 힘을 얻었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의식의
성장은 기존 가치체계의 정당성에 대한 위기를 동반하는 당연한 결과1)로
이어지면서 공식적으로 기록된 시간들을 다시 바라보게 하였다.그리고 이
러한 과정 안에서 기억담론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사전적 의미로만 해석한다면 ‘
역사’
가 객관적이고 공적인 사실을 다루고 그
권위를 보증하는 종류의 것이라면 반대로 ‘
기억’
은 주관적·
심리적이고 지극
히 파편적이어서 신뢰하기 어렵고 신빙성이 낮은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항상 승리자의 시각을 중심으로 설명된다는 비판적 역사관에
바탕하여 과거의 시간을 바라볼 때 서술된 역사가 승리한 가해자의 기억이
라면 기억은 패배한 피해자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그렇기 때문에 기억은
기존의 담론적 질서를 구성하는 역사에 대항하여 아래로부터 역사를 이끌어
내는 강력한 무기로서 작용할 충분한 여지를 열어두게 된다.실지로 기억에
관해 이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논의 저변에는 과거 사건에 관한 기억과 그
과거에 관해 서술된 역사 사이의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고 있음을 전재하고

1)해체주의( De
cons
truct
ivi
sm)
를 대표하는 데리다(
Jac
que
sDe
rri
da,1
930
~20
04)역시 텍스
트(의미)
는 의도적으로 해체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변화 하면서 스스로 해체되어진다
고 보았다.

- 1 -
있다.
이러한 역사와 기억 사이의 충돌 상황은 기억 연구의 선구자인 프랑스 출
신 유대인 사회심학자인 모리스 알바흐(
Maur
iceHal
bwac
hs,1877~1945)

1930년대 주창한 ‘
집단 기억’
(col
lec
tiveme
mor
y)개념을 부활시켰고,알바흐
의 영양을 받은 독일의 문화학자 얀 아스만(
JanAss
mamm,1938~)
과 알라
이다 아스만(
Ale
idaAss
mamm,1947~)부부의 ‘
문화적 기억’
,프랑스 역사
가 피에르 노라 (
Pie
rreNor
a,1931~)
의 저서인 『기억의 장소』의 발판이
되었다.그리고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듯 각 나라마다 과거의 기억과 관련된
것을 조명하는 사업들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게 되게 되었다.
특히 독일은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독일만의 역사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국가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 하리라 짐작된다.그러기에 그 안에는 드러나지
않는 혹은 드러나지 못하는 무수한 기억들이 존재 할 수밖에 없다.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히틀러(
Adol
fHi
tl
er,1889~1945)
의 군국주의가 시
작되고 전 세계를 뒤흔든 세계 2차 대전의 패배,분단,그리고 다시 통일을
이루기까지 이데올로기적 생채기로 얼룩진 땅이다.그 중에서도 독일인에게
지울 수도 치유 할 수도 없는 주홍글씨로 남겨진 나치 정권의 과오는 정신
적 걸림돌이면서 치욕스런 역사일 수밖에 없다.더구나 서독을 연합국들이
점령하면서 정치적 재교육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고,그 속에서 자신의 역
사 전체 혹은 최소한 근대 이후의 역사 전반을 잘못된 길이었음을 인식해야
만 하는 과제를 새롭게 부여 받았다.이러한 상황은 과거와 현재의 연결선
이 단절시켜야만 하는 파국을 맞이 하게했다.그리고 동․서독의 수교가 이
루어졌고 이러한 과정에서 서독으로 넘어온 작가들 - 예를 들면 바첼리츠
(
Geor
gBas
eli
tz,1938~),리히터Ge
rhar
dRi
cht
er1932~)
-과 전후세대 작가
들은 여느 피해자,가해자들처럼 어느 쪽이든 - 키퍼(
Ans
elm Ki
efe
r,194
5~)
,볼탕스키(
Chr
ist
ianBol
tans
ki,1944~)
-아버지세대와의 간극으로 인해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격어야만 했다.
따라서 본고는 기억 담론을 대두시킨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홀로코
스터2)의 기억을 다루는 작가를 중심으로 집단 기억을 자신의 작업으로 끌
끌어오는 이유와 ‘
집단의 기억’
과 ‘
개인의 기억’
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이미

- 2 -
지화 되는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논문은 최근 미술계뿐만 아니라 역사학,사회학,인류학,경제학에까
지 확산되어 있는 기억 담론에 관한 주요 관점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게
르하르트 리히터,안젤름 키퍼,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작업 분석을 진행 할
것이다.기억은 글자로 기록된 문서상의 역사보다 유연하고 다양한 방식으
로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개인적이면서도 공적역사를 다루고 이들의 작품
을 이해하는데 보다 더 유용할 것으로 판단되며 이들의 작업이 사진과 직접
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음을 주시하여 기억과 사진,그 중에서도 아마추어
사진이 기억과 어떠한 연결고리를 맺고 있는 가에 관해서도 살펴보려한다.

Ⅰ-2.연구방법

본고에서 다루고자하는 집단 기억은 홀로코스터의 기억이다.그리고 홀로


코스터로부터 야기된 기억을 다루기 위해 선택한 3명의 작가들은 모두 조금
씩 다른 입장에서 홀로코스터를 기억한다.즉 리히터는 어린 시절에 나치시
기를 경험하고 청년기에 스탈린치하에서 시간을 보낸 세대로서의 기억이며,
키퍼는 가해국의 2세대로서의 기억,볼탕스키는 유대인 2세대로서의 기억을
대표한다.이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홀로코스터라는 집단 기억과

2)집단수용소에서의 유대인학살을 칭하는 용어들로 홀로코스터,쇼아 등 많은 단어들이 사


용된다.각각의 용어들은 다른 의미와 배경을 가진다.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홀로코스터( Holocaust:1 960
년 이후 앵글로 색슨계 국가들과 미스라엘에서 자주 사용되
고 있지만 , ‘
신에게 바쳐진 성스러운 희생양’또는 번제를 통해 완전히 태워진 희생물‘ 이
라는 의미의 성격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용어로 미국 NBC TV에서 만든 시리즈
물 이후 일반화되었다.
-쇼아( Shoah):프랑스에 많이 사용되는 히브리 단어로 ‘ 지구상에 존재 할 수 없는 큰 재
앙’을 뜻한다.19 85년 클로즈 란츠만에 의해 동일명의 9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가 만들
어 지면서 보편화되었다.
- 제노아이드( Genoc i
de):미국의 법률학자 라파엘 렘킨( RaphalLe
mki
n)이 19
43년 만들어
낸 용어로 국가 나 민족이 다른 인종에게 자행한 학살행위를 뜻한다.
-아우슈비츠( Auschwi tz
):폴란드의 지명으로 그 곳에 존재했던 집단수용소를 칭하는 단어
가 확대 되면서 사용되는 용어이다.이상빈,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은 어디로 가야하는
가』,책세상,20 01,pp.26~27.

- 3 -
각기 다른 개인 기억이 어떠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고 이미지화 되는가에
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기에 앞서 작품 해석에 유
효한 담론으로 판단되는 ‘
기억 담론’
들을 논함이 우선이라 판단된다.다만
이 글이 역사학이나 사회학적 입장에서 쓰여지려는 것이 아니기에 기억 담
론에 대한 심층적이고 면밀한 분석보다는 기억 담론에 관한 이론을 소개하
고 이미지를 읽기 위한 기초 작업임을 알려둔다.
이에 Ⅱ장의 전반부에서는 기억담론이 대두된 배경과 기억담론의 가장 핵
심 어휘라 할 만한 집단 기억에 관해 서술한 모리스 알바흐의 이론을 위시
하여 그 뒤를 잊는 아스만 부부의 ‘
문화적 기억’
,피에르 노라의 『기억의
장소』와 관련하여 공적 기억과 개인의 기억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에
관해 다루게 될 것이다.그리고 Ⅱ장의 후반부에는 Ⅲ장에서 다루려고 하는
일련의 작가들이 기억이 가지는 기본적인 약점들 즉 망각,재구성,자의적
해석 등을 보완해줄만한 것으로 사진이라는 매체가 집단 기억의 문제를 다
루는 예술가들에게 가장 유요한 방식으로 택해지고 있는 만큼 사진의 2가지
주요 성격인 다큐멘트(
Docume
nt3
))적 성격과 기념적(
monume
nt)성격이 기
억 담론들과 어떻게 연관성을 가지고 예술가들에게 받아들여지는가에 관해
고찰 해 볼 것이다.
Ⅲ장에서는 Ⅱ장의 내용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작가들이 개인적 기억위에
공적인 역사 즉 홀로코스터 기억이 어떻게 이미지화하는가에 관해 살펴보려
한다.이러한 과정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리히터는 나치정권과
전쟁 그리고 서독으로 넘어 오면서 파생된 ‘
정체성의 혼성’
에,키퍼는 전후
세대로서 겪은 독일의 불미스런 과거에 대한 앞선 세대와의 내적․외적 갈
등으로부터 야기된 ‘
민족의 트라우마’
문제를,볼탕스키는 피해자인 유대인으
로서 ‘
과거의 망각과 잊혀짐에 대한 염려’
에 가장 큰 초점을 맞추어 논문을

3) 실질적인 용어인 다큐멘터리( Doc


ume ntar
y)는 1
9세기 초에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삼
(Je
remy Bent
ham:1784
~1 832)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하지만 이 단어가 시각적인
이해와 관계되었던 최초의 사례는 1 926
년 로버트 플레허티( Robe
rtFl
ahe
rty)
의 영화에 대
한 존 그리어슨( JohnGr i
erson)
의 비평을 통해서였다.이 용어는 인공적이며 피상적인 특
징을 보여주는 할리우드 영화와 무엇보다도 사실적이며 진실된 지점을 목표로 삼는 영화
사이를 구별하고자 사용되었다.수잔 브라이트 저,『예술사진의 현재』,이주형 역,월간
사진,20 08,p.
158
.

- 4 -
진행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행 과정을 보다 용의하게 하기 위해 두 번째로 주목 하려
는 것은 리히터는 홀로코스터를 다루는 ‘
사진회화’
와 <아틀라스>작업을 통
해 확인되는 대조적이면서도 유사한 성향에 초점을 맞추고자한다.이는 구
체적으로는 프로파간다(
propaganda)
가 되지 않기 위한 객관성 유지라는 주
관을 뚜렷히 하는 점과 그 바탕을 사진에 근거 하고 있다는 점이 될 것이
다.
키퍼는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의도적으로 단절되고 사라져 버린 과거를 현
재로 소환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체험에 가담하는 행위와,집단 기억의 체
험무대로서 자신의 작업을 이미지화 하고 있음에 초점을 맞추어 나갈 것이
다.키퍼 이미지의 구체성으로는 무대를 구성함에 있어 사라져 버린 역사적
공간을 남겨진 사진 자료들로서 접하고 그 공간을 광학적 원근으로 거대하
게 확대 시켜 무대화 하는 점을 지목하려 한다.
볼탕스키는 역사의 망각과 은패라는 문제에 대해 구체적 증거품과 사진이
라는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들을 이용해 허구를 만들어 냄으로써 관객들을
혼란케 하는 이중성,그리고 그 허구성 안에 내재한 역사구성에 관한 문제
에 초점을 맞추어 구성하고자 한다.
이러한 진행에 있어 작가들의 홀로코스터 기억에 관한 입장은 그동안 이루
어진 인터뷰 등을 통해 남겨진 직접적인 발언들을 기반으로 하여 이해하려
하며,수많은 작업들 중에서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작업을 선별하고 그 중에
서 이미지화함에 있어 사진과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작업들을 다시금 선
별하여 논의 하고자 한다.

- 5 -
Ⅱ.일상의 역사 - 기억

현재 진행되고 있는 많은 예술작품들이 개인 혹은 집단의 기억에 관해 이


야기 하고 있다.이것은 곧 개인 혹은 집단의 아카이브에 대한 관심이라고
풀이 할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현상은 미술계에 한정된 일시적인 유행 현
상이 아니라 역사학,사회학,인류학,정치학 등 전반에 걸쳐 진행되어 오고
있는 큰 지류이다.사전적 의미로만 본 다면 ‘
역사’
와 ‘
기억’
은 본질적으로
정 반대에 위치한 개념이긴 하지만 현재에는 ‘
역사’
라는 단어가 있어야 할
자리를 ‘
기억’
이 점거해가고 있는 상황이다.역사와 기억의 불일치 즉 ‘
공식’
역사와 ‘
비공식’역사의 불일치로 인해 공식 역사가 신뢰를 잃고 권위마저
퇴색되는 과정에서 기억이 역사 보다 더 각광받는 대상이 된 것이다.즉 20
세기 이후의 역사에서 이념과 민족,종족과 민족 간의 충돌로부터 자유로운
대륙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홀로코스터,코소보,킬링필드,르완다에 이르
기 까지 반복되는 대규모학살(
genoci
de)
과 더불어 옛 사회주의 체제와 각종
독재정권 아래서 자행되었던 인권유린이 바로 그것이다.거기에 변방에 대
한 횡포와 이분법적 사고를 탈피하고 많은 것을 포용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
과 후기구조주의의 심화 등은 모더니즘과 구조주의적 의식체계에 변화를 가
져왔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의식의 성장은 기존 가치
체계의 정당성에 대한 위기를 동반하는 당연한 결과로 이어졌고 공식적으로
기록된 시간들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데 지대한 형향을 미쳤다.그리고 이러
한 과정 안에서 기억담론은 큰 지류를 이루었다.
기억이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고 하면 과도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으
나 예술가들에게는 더 이상 ‘
기억’
은 역사의 하위에 머물러만 있는 대상이
라고 할 수 없다.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흐름을 미술서적이나 전시회를 통
해 이미 적어도 20여년 동안 만나오고 있다.동시대 작가들은 단순한 감상
의 기능에 작품을 맞기지 않는다.스스로가 한명의 사회학자,한명의 역사가
로서 과거를 적극적으로 탐험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그리고 남겨진 자

- 6 -
료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기
억들을 통해 공적 기억으로 승화시키고 공감하려 하는 경향을 강하게 드러
내고 있다.그들에게 기억이란 수명을 다해 죽어버린 것들이 아닌 잠시 잠
들어 있는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그렇기에 예술가들은 기억을 깨워 다시
해석하고,변경하며,심문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 시작점에는 양차대전
과 홀로코스터라는 인류 최악의 그늘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대재앙이 자
리 잡고 있다.
이에 이 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자하는 내용은 독일의 홀로코스터 기억
과 관련된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기에 앞서 작품을 해석하기에 유효한 담
론으로 판단되는 기억 담론과 이들이 홀로코터라는 기억을 이야기함에 있어
주요한 매체로 사진을 택했음을 주시하여 사진과 기억의 연결고리에 관해
살펴보려고 한다.

Ⅱ-1.역사와 기억의 대립

1)기억 담론의 대두

기억’
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모습,사실,지식 경험 따위가 잊히지 않고 남
아있는 것을 의미한다.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기억은 문자가 발명되고 인쇄
4
술이 보급되면서 국가에 의해 관리 되어 왔다.) 기억을 관리하는 일은 경제

나 권력의 분배 못지않게 사회적으로 중요한 과제였음은 우리는 현시점에


제기 되고 있는 멀지 않은 과거의 여러 사례만 보더라도 -정신대문제,군부
정권의 억압 문제 등-쉽게 이해 할 수 있다.그리고 현재에도 무언가를 이
야기할 때 언론은 ‘
제 2의OO'
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이러한 단순
한 상황을 통해서도 우리는 지금도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고 되새김질 하도
록 부추기는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을 감지 할 수가 있고,공식된 기억이라
는 것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된다.

4)신주백,「기억연구의 르네상스( 2)한국 기억 연구의 흐름과 과제」,서울대 사회발전연구


소,2
006
,ht
tp:
//
blog.
nave
r.c
om/j
unor
ex/
9001
152
480
3

- 7 -
1990년 동․서독이 해체되고 이듬해 사회주의권의 맹주였던 구 소련이 몰
락과 함께 냉전의 시대가 해체됨을 우리는 목격했다.뿐만 아니라 독재자들
이 몰락한 라틴 아메리카,1994년 아파르트헤이트(
apar
the
i 5
d))가 종식된 남
아프리카 공화국 등 확고해보이던 한 국가의 이념적 권위가 눈앞에서 연이
어 와해됨으로 인해 국가 이념에 대한 신뢰성은 자연스럽게 불신으로 이어
졌다.그리고 이러한 불신의 심화는 ‘
개인의 기억’
과 ‘
공적 기록’
의 불일치
상황을 직접 확인시키면서 결국 자연스럽게 ‘
기억’담론이 화두에 오르게 만
들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기억 담론이 꽃피우게 된 불씨를 집
힌 것은 양차대전과 홀로코스터라는 인류 최악의 그늘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대재앙을 지목해야 할 것이다.대재앙 이후 소수 지배 권력의 폐쇄적
이고 일방적인 자기정체성에 불과했던 과오를 잊지 않기 위해 본래의 상황
이 어떠하였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기억에 대한 담론이 본격적으로 가속화되게 된 것이다.
기억에 관해 국내․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논의 저변에는 과거
사건에 관한 기억과 그 과거에 관해 서술된 역사 사이의 엄청난 간극(
틈)이
존재하고 있음을 전재하고 있다.그리고 이 같은 인식과 더불어 역사가 항
상 승리자의 시각을 중심으로 설명된다는 비판적 역사관까지 더해지면 버려
진 기억들이 더욱 힘을 얻게 된다.즉 서술된 역사는 승리한 가해자의 기억,
기억은 패배한 피해자의 역사라는 결론이 만들어 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
다.이와 같은 도식으로 볼 때 기억은 기존의 담론적 질서를 구성하는 역사

5)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apar


the
id)체제는 전 국민의 16
% 밖에 안 되는 백인이 84
%의
비백인( 非白人)을 정치적·경제적· 사회적으로 차별해 왔다.백인우월주의에 근거한 이 인종
차별은 17세기 중엽 백인의 이주와 더불어 점차 제도로 확립되었는데,194 8년 네덜란드계
백인이 아프리카나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의 단독정부 수립 후 더욱 확충· 강화되어 아
파르트헤이트로 불리게 되었다.이 정책은 흑인과 토착민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의 종류를
제한함은 물론 노동조합의 설립을 금지하였다.뿐만아니라 도시외곽 지역의 토지를 소유
하지 못하게하고,백인과의 결혼을 금지하였다.또한 백인과 흑인이 같은 버스를 타지 못
하며,흑인이 공공시설을 사용하는 것 또한 제한하고,선거인 명부도 따로 작성하였다.이
처럼 흑인을 철저히 차별 대우해 온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았고,결
국 1994년 5월에 처음으로 실시된 자유 총선거에서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뽑
히면서 아파르트헤이트는 철폐되었다.『21 세기 청치학 대사전』,정치학사전 편찬위원회,
2
010.

- 8 -
에 대항하여 아래로부터 역사를 이끌어 내는 강력한 무기로서 작용할 충분
한 여지를 열어두고 있다.우리는 이미 안네라고 하는 작은 여자아이의 지
극히 개인적인 기억의 기록인 일기를 통해 숨어있는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그 어떤 역사서보다도 진정성 있게 체험한 바 있다.
이러한 역사와 기억사이의 충돌 상황은 기억 연구의 선구자이면서 2차 대
전 말기에 독일의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학살당했던 프랑스 출신 유대인 사
회심학자인 모리스 알바흐(
Maur
ice Hal
bwac
hs)
가 1930년대 주창한 ‘
집단
기억'
6)(
col
lec
tiveme
mor
y)개념을 부활시켰고,알바흐의 영양을 받은 독일
의 문화학자 얀 아스만(
Jan As
smamm)
과 알라이다 아스만(
Ale
ida
Ass
mamm)부부의 『문화적 기억』과 프랑스 역사가 피에르 노라 (
Pie
rre
Nor
a)의 『기억의 장소』의 기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마다 과거의
기억과 관련된 것을 조명하는 사업들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우리나라의 경우에도 1990년 김학순 할머니의 자기 고백으로 본격
화된 종군위안부 문제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억에 관한 연구는 동시대를 읽는 중요한 코드로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영역을 아우르며 현재에도 다양한
연구 자료가 발표되고 있다.그리고 기억에 관한 이러한 담론들은 뒤이어
다룰 홀로코스터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도 유용한 바탕이 되어 줄 수 있
음을 주지하여 다음 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2)집단 기억(
col
lect
ivememor
y)과 개인의 기억

집단 기억’
이라는 개념을 처음 이야기한 이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모리스
알바흐이다.그는 그의 스승인 베르그송(
Henr
iBe
rgs
ong)
의 무의식에 의해
제한된 기억 즉 과학적 사고로 부터 한발 물러나 있던 순수기억의 주관성에
관한 논의들을 다른 스승이였던 뒤르켐(
Emi
lDur
khe
im)
의 ‘
집단의식’
을 수

6)한국에서는 김영범이 모리스 알바흐를 소개하면서 ‘col


le
cti
veme
mor
y’를 최초로 ‘집합 기
억’으로 번역하였으나 본인은 보다 더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전진성의 소견을 따라

집단 기억’으로 표기한다.그리고 모리스 알바흐의 글에 등장하는 ' gr
oup me
mory'
라는
용어 역시 집합기억,집단 기억으로 해석되어 있는 경우가 있어 그 경계를 매우 모호하게
하는 경우가 종종 확인되었다.

- 9 -
용함으로써 사회학의 장으로 옮겨놓은 장본인이다.
베르그송에게 집단 기억이란 각 개인들에 의해 공유된 기억일 뿐인 것으
로 취급되었지만 알바흐는 이와 반대로 개인의 기억 속에는 본질적으로
집단의 기억이 내제 되어 있다는 전제를 바탕하여 출발한다.그는 순수한
개인의 기억이란 존재 할 수 없으며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기억은
집단 기억일수 밖에는 없다고 정의한다.이는 기억 자체가 말과 글이라는
사회적 소통수단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철저한 개인의 기억이란 존재
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즉 기억을 소유하는 단위가 개인인 것이
지 개인의 기억은 곧 사회로 부터 각인된 것이라 보는 것이다.기억이 지
극히 개인적인 것이라는 논리로 점철되어 지던 것을 사회집단 안에서의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이라는 논리를 더함으로서 기억이라는 영역을 사회학
의 안으로 끌어 들인 것이다.
7)

다만 그는 한명의 개인적 기억이 다른 이들의 기억과 함께 연결 될 때에


하나의 사회 집단의 성원으로서 국한된 기억을8) 가진다고 이야기 한다.그
러기에 민족이든,가족이든,인종이든,정당이든 사회집단들이 존재하는 만
큼의 많은 기억들이 존재한다고 이야기 한다.
9) 다시 말해 기억은 인류보편

적인 것이 아니라 제한된 집단이 갖는 특수한 기억이라고 볼 수 있다는 입


장을 취하고 있다.이것은 기억이라는 것이 특정 공간과 특정 시간의 문제
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효과적인 기억을 위해서는 특정 장소
를 선정한 후 의식 속에서 간직하고 싶은 대상에 대한 심리적 상을 만들어
그 장소와 결부 시켜야 한다는 것이 전통적 기억술의 중요 요소이다.즉 기
억이란 일련의 공간들을 연상함으로써 그 공간과 관련된 일련의 사물들을
연속적으로 회상하게 됨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특히 집단 기
억에서 장소성은 우리의 기억을 보다 더 구체화 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장소에 대한 특정 (
사회적)시간과의 결속을 이루어냄으로서 보

7)최호근,「집단 기억과 역사」, 『역사교육』85,역사교육연구원,20


03,pp.
162
~163.
8)니당 바슈텔(Nat
han Wachtel
),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
서론」,윤택림 역,『역사연
구』9,역사학 연구소,20 01,pp.
253
~254.
9)이용재,「프랑스 역사 어떻게 쓸 것인가-피에르 노라의『기억의 장소』에 대한 고찰」,
『프랑스사 연구』23,p.188,재인용.

- 10 -
다 더 구체화 된 기억을 가능케 한다.예를 들면 정치적 사건과 관련된 날
(
5.18과 광주)
,문화적 축일(
88올림픽과 서울,2002월드컵과 시청 앞 광장)
등을 통해 우리의 기억은 보다 더 실재화10) 되어 질 수 있다.그리고 그러
한 기억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집단에 대한 귀속감의 확인으로 이어 질 수밖
에 없다.안타깝게도 홀로코스터 공간의 구체적 확인이 표면적으로 귀속감
보다는 고통과 통증을 수반한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민족이 나누어 가진 공
동의 기억이기에 공감과 덩어리로 결집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 준다.
이런 입장을 알바흐는 『집단 기억』에서 “
역사 기억 이라는 용어자체가
모순된 듯하다.즉 역사는 인류 보편적 기억으로 묘사 될 수 있다.그러나
보편적 기억이란 없다.모든 집합 기억은 공간과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한 집단에 의해 지시 된다.
”11
)라고 쓰고 있다.이와 같은 견해는 그 뒤를 이
은 기억 담론 연구자들에서도 큰 오류 없이 받아 들여 지는 부분이다.이러
한 기억의 범주를 알바흐는 사회적 집합적 차원의 ‘
사회적 틀’
(cadr
es
s
oci
aux)
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우리가 똑같은 상황 혹은 사물을 두고
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작게는 가족,크게는 민족의 관습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서의 기억이 다르기 때문이다.다른 사람과 함께 경험했고 또한 매
우 강하게 느꼈던 사건에 대한 문제일 때조차도 이야기는 극도로 다양하다.
그 이유는 항상 자신의 삶의 프리즘을 통과해 그 기억을 불러내기 때문이
다.이러한 알바흐의 이론은 시대와 집단에 따라 기억의 대상이 왜 바뀌어
지는가에 관한 문제를 쉽게 이해시킨다.기억이란 것은 결국 현 집단의 시
점에서 잊어버릴 기억과 전승할 기억이 필터 된다고 할 수 있다.이는 왜
과거의 기억이 망각 되어 질 수밖에 없는 가로 이어지는 문제이기도 한 것
이다.이러한 입장은 뒤이어 다룰 전쟁 2세대로 불리는 키퍼나 볼탕스키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할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는 불과 얼마 전 까지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하

10)이러한 것은 거창한 예를 들지 않더라도 생일날 친구와 함께 같던 곳,지난 여름 휴가때


같이 여행 했던 곳 등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는 다시 그 곳에 가더라도 지난 기억을 너무
나 자연스럽게 상기시키고 다시금 재생 시킨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작은 체험을 통해 알
고 있다.
11)이용재,op.
ci
tp.
118,;니당 바슈텔,op.
ci
t.
,p.
257
.재인용.

- 11 -
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고,느끼고,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인 주체라고 확신하고 있지만 그것
은 어디까지나 상당히 제한적이고 억압되어 있는 자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지금 우리의 선과 악의 구분이나 아름다움과 추함의 판단은 그다
지 보편적이라 할 수는 없다.왜냐하면 우리에게 지금 자연스러운 것은 우
리 시대, 우리가 사는 곳, 우리가 속한 집단에서만 유요한 민족지학
(
ethnogr
aphi
c)적 편견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집단 기억들이 예술로 승화 될 때는 자신의 것들로 자
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기 때문에 민적지적 특징을 강하게 드러내게 된다.
민족지학적 예술들은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것 토속적인 것과 연관 짓는 성
1
향이 있다.2) 이러한 과정에서 민족1
3)이라는 것이 외적이든 내적이든 강조
되는 것을 불가피 하다.문제는 민족이라는 단어자체가 본질적으로 타자에
대한 배척을 내포하고 있어서 민족의 강조가 민족적 우월감을 북돋으려는
시도로 보여 질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데 있다.이러한 사례는 안

12)한금현, 「동시대 한국사진의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연구」,이화여대 박사학위,200 7,


p.1
12.
13)민족은 f ol
k또는 r ac
e라는 말로도 표시된다.민족의 개념은 문화인류학에 속하는 민족학
(et
hnol
ogy)
에서 원시 미개한 주민의 생활양식을 연구하는,또는 민간의 전승을 연구할
때 민속학( f
olkl
ore
)등에서 사용되는데,일반적으로는 같은 선조를 가졌다는 의미로 막연
하게 민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먼저 그 발생을 보면,봉건제하에서 세분화된 경제ㆍ정치의 분산 상태가 자본주의가 나타
나면서 분산상태가 아닌 공통의 경제 속으로 편입되는 것에 의해 공통의 생활조건이 생
겨나고,여기에다 역사적으로 계속 집적되어 왔던 언어의 공통성,똑같은 역사과정 내부
에서의 심리적 공통성 등 문화의 공통성을 조건으로 해서,일정 지역의 범위에 걸쳐 사람
들의 공동체가 만들어진다.이렇게 해서 생겨난 인간집단을 민족이라고 부른다.
자본주의가 출현하여 공통의 경제생활을 만들어낸 일정지역의 범위에 그 이전부터 차츰
집적되어 왔던 언어와 심리ㆍ문화에 대한 공통점이 나타나는 것이 그 조건으로 된다.동
시에 경제생활상의 공통성이 이루어지자,그러한 조건들이 한층 진전되고 강화된다.여기
에서 민족이란 봉건제 사회 하의 생활 범위로서 만들어진 집단보다도 넓은 것으로 된다.
이렇게 해서 출현된 민족은 민족 내에서 지배적인 것은 자본가 계급이고,자본주의가 본
래 가지고 있는,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경쟁과 대항이 점차 민족 간에 생겨나게 된다.자
본주의에 의한 민족의 성립은 여러 민족 사이에 대항 적대적 관계를 낳고 또 여기에서
자본가 계급에 의한 부르주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지게 된다.그래서 억압 민족
과 피억압 민족의 차이가 생기고 자본주의의 침략에 의해 식민지와 반식민지에 있어서
민족간의 대립도 발생하기에 이른다.임석진 외 편저, 『철학사전』,200
9,중원문화.

- 12 -
젤름 키퍼(
Ans
elm Ki
efer
)가 198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들이 신
극우파 작업으로 평가절하 받으며 나치 이데올로기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
라 칭송하고 영속시키기 위한 것14)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 데서도 단적으
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에 대두 대고 있는 민족의 의미는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한 것
이 아니라 지금의 나 자신으로 있게 한 (
한국인,유대인,노동자,흑인,알제
리인 등.)당위의 형식을 의미하는 정체성과 관련이 되어 있다.즉 ‘
민족’

내가 속한 민족이 중요하다고 외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가치로 할 것
인지,그 가치를 표상하는 기억의 형상은 무엇인지에 중점을 둔 의미의 ‘

족’
이다.
1
정체성이라는 것은 외부로부터 정의되는 집단범주로 볼 수도 있다.5
) 그러

기에 정체성이란 용어는 자신 내부에서 일관되게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다른 사람과의 특정한 어떤 것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 둘 다를 의미한다
고 할 수 있다.이는 다시 말해 개인의 기억 혹은 집단 기억들이 어떻게 만
나고 갈라지며,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모되고 궁극적으로 어떻게 뿌
리 내리게 되는지가16) 분명해 질 때 지금의 나 자신으로 있게 한 당위성이
성립 될 수 있고,정체성 또한 분명해 진다고 할 수 있다.따라서 민족을 구
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들 수 있는 것은 역사적 계승의식에 입각한 ‘

동의 기억들’
이 도리 수 있음을 의미한다.다시 말하자면 공동의 기억을 유
산으로 가지면서 현재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 구축된 고유의 기억들이 민족
을 구성하는 가장 유요한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
알바슈의 이론을 대부분 수용한 아스만 부부는『문화적 기억』에서 기억을

모방적 기억,
’‘사물의 기억,
’‘소통적 기억,
’‘문화적 기억’
으로 분류하고 소통
적 기억과 문화적 기억을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소통적 기억이
란 어떤 발생한 사건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세대가 그 사건을 추억하는 기억
이며,문화적 기억이란 일정한 시간이 지나간 뒤에,기억의 창고에 보관되었

14)배혜경, 「안젤름 키퍼의 작품해석과 기억담론」,홍익대 석사학위,200 9,p.


12.
15)Er
iks
on,E.H.Te rpr
obl
em ofe
goi
dent
it
y.J
APA,(
195
6),4:
56-12
1
16)이용대, 「해외 석학과의 대화 -피에르 노라와『기억의 터전』」, 『역사비평』6 6,역사비
평사,20 04,p.
328
.

- 13 -
던 그 사건을 사후적으로 꺼내드는 소통적 기억을 뜻한다.즉 후세대가 지
나간 시대에 대하여 소통하는 기억이 문화적 기억이라 말하고 있다.이러한
의사소통적 기억은 최근 과거의 사건과 동시대적 기억이기 때문에 각각의
개인이 기억의 담지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첫 번째 특징이라면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첫 번째 특징으로 부터 야기되는 일명 라쇼몽 효과
(
Ras
homon Ef
fect
)로 불리는 한 사건이 대한 자의적 해석,억압,망각 등을
통해 재구성 되면서 상이한 기억으로 변질될 가능성의 특징이다.즉 이러한
문화적 기억이란 그 사건과 연루된 개개 사람들에 의해 지각된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기억은 역사서에 짜여진 스토리만큼 체계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못하
다.기억은 발생하는 그 순간부터 망각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점진적으로 사라진다고도 할
수 없다.왜냐하면 기억은 외적 영향에 의해 언제든 쉽게 왜곡되고 조작될 가능
성을 가지고 있어 기본적으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가지기 때문에 기억은
항상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 형태로 존재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가장 쉬운
예로는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과거사 청산문제를 생각해면 될 듯하다.같은
사안을 두고도 양측은 너무나 상이한 기억의 갈등을 겪고 있지 않은가? 이는
기억이 시간에 의해서가 아닌 기억의 고착상태 혹은 기억들간의 상호 유대
관계 등의 다양한 간섭현상에 따라 달라지 때문이다.그럼에도 우리는 최근
의 기억이 과거의 기억보다 선명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기억의
망각은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나의 경향과 관심의 정도,사건의 쇼크적 강
도라는 자신만의 의미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고 그 기준에 준하여 기
억을 분류하고 배열한다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결국 기억은 주관성 때문
에 같은 사건을 관찰하더라도 서로 다르게 기억하게 될 수밖에 없는 단점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의 주관성이라는 맹점에도 불고하고 기억 담론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된 근거로 본인은 영국의 폴 톰슨(
P.Thompson)
의 「과거의 목소리」라
는 연구를 예를 들려고 한다.톰슨은 이 연구를 통해 학교를 떠나 9개월이 지나
자 친구들의 이름을 반 정도 밖에 기억하지 못했으나 34년이 지난 후에도 그들

- 14 -
은 친구들의 이름을 1/
4정도는 기억하고 있음을 밝힌바 있다.즉 기억이 아무
리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 형태로 존재하더라도 일정부분 확실성을 가지고 있
는 것이 분명하다.이러한 기억의 내구성이 공적 기억과 개인의 기억 사이에 존
재하는 틈을 좁혀 줄 수 있는 것이다.하지만 문제는 기억을 역사화 하는 과
정에 있다.즉 역사화 과정을 담당하는 이는 소수의 직업적 역사가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의미 판단 기준이란 것은 결국 이들이 속한 사회집단의 가치
관,이데올로기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마련이고,그 과정에는 기본적으
로 ‘
선택과 배제’
의 문제가 내제되어 있음으로 하여 수용된 것은 기억된 것
의 기억이고 배제되는 것은 결국 기억된 것에 대한 망각과 버림으로 점철되
는 아이러니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건에 대해 동시대인들이 공유하는 기억이 그들의 의식 속에서 유
지되는 기간은 인간의 생물학적 수명의 한계 때문에 3~4세대,시간으로 환
산하면 80년을 넘기기 어렵다.그리고 이러한 문제로 인해 동시대인들이 기
억해야할 사건들은 사건이 일어 난 후 대략 40년 이내에 문서화 과정을 밟
게 된다.80년이 지난 기억들은 결국 직접 증언을 통해 기록되기에는 힘든
기억이 되고 마는 것이다.아스만은 이러한 불운의 사건들을 ‘
어두운 시기
(
dar
k age
)' 17
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다. ) 이러한 기억의 속성을 생각해 나치

즘과 관련된 담론과 인터뷰가 1980년 정도에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에 대한


시기적 논의에 여러 의견18)이 있지만 이 또한 지대한 영향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피에르 노라는 「기억의 범세계적 도래」19)에서 기억의 도래에 관해 크게
두가지 큰 요인을 말하고 있다.그 첫 번째는 다니엘 알레비(
Dani
elhal
ery)

17)최호근,op. ci
t.
,p.175.
18)-유태인 음모설 :각 분야를 장악한 엘리트 유태인들에 의한 자기민족적 사건을 확대한
소주민족의 정치적 표출이라는 설.
-홀로코스터 산업설 :홀로코스터 열풍 이면에는 보상금 증액,홀로코스터 상품화를 통
한이윤추구를 위함이라는 설.
-억압회기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의거 강력한 트라우마가 사회적 여건이 만들어
지면서 지면화 되어 었다는 설.최호근, 「미국에서의 홀로코스터 기억 변화」,『미국사
연구』1 9,2004,pp.1
34~135
.
19)Pie
rreNora,
「L' veneme
ntmondi
aldel
ame
moi
re」『프랑스 연구사』14
호,이용재 역,
2006
,pp.
177~196.

- 15 -
가 말한 ‘
역사의 가속화’현상을 들었다.이는 날로 빨라지는 변화의 속도에
비래해 점점 더 빨리 과거와 멀어지고 그로 인해 과거와 현재 사이에 일어
나는 단절의 동요,다시 말해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던 연결선이 깨어져 점
점 단선화 되면서 미래가 더욱더 불확실해지고 이러한 불확실성이 시간을
기억해야할 의무 부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즉 미래에 대한 예측 불가
능함이 지금의 내가,우리가 누구이며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가를 증명해
줄 수 있는 모든 흔적과 표시들을 긁어모으는 일을 의무화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20세기를 넘어 오면서 대부분의 집단이 과속 페달만을 계속해
서 밟으며 누가 목적지에 먼저 도착하는가에 집중했고 그 과정에서 목적성
과 위배되는 많은 것들은 버려졌다.이러한 상황은 결국 상실감과 소외의
덩어리 또한 속도에 비래해 덩치를 불리는 결과를 초래했다.이 또한 기억
에 대한 의무를 가중 시킨 요인이라 할 수 있다.그렇게 되면서 박물관,기
록보관소,도서관,자료집,등의 아카이브를 집적하는 일을 기구화 하거나
제도화 하는 양상이 두드러지게 되고 기억의 담론이 중요하게 자리하게 된
것이다.
노라는 기억 담론이 대두하게 된 두 번째 요인으로 ‘
역사의 민주화’즉 포
스트식민주의(
post
col
oni
ali
s 2
m)0)
를 꼽는다.이와 관련해 노라는 우리나라와
의 인터뷰를 통해 “
1970~80년대 서구에서는 지난날 숨죽였던 소수파들 즉,
여성,노동자,촌사람,종교적,성적 소외집단들이 고립된 개토(
ghe
tto)
에서
해방되어 더 큰 공동체들 안에 편입되었습니다.기억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사회현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고 믿습니다.왜냐하면 모리스 알바흐가 적
절히 지적하듯이 기억이란 곧 집단을 뜻하며 집단 기억은 해당집단이 더 큰
2
공동체 안에 편입되는 바로 그때 비로소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1
).”
라고 밝
히고 있다.
노라는 기억을 보다 더 급진적인 장치로 바라보고 있다.권력자 또는 학문
적,직업적 권위자의 손에 쥐어져 있는 역사와는 달리 기억은 ‘
민주적 항의

20)‘
post
’라는 단어가 국내에서 후기,탈(
脫),신(新),반(
反,)등의 여러 의미로 해석되는 만
큼 이 논문에서는 번역된 단어를 대신해 pos
t를 그대로 쓰기로 한다.
21)이용대,2004,op.
ci
t.p.
338.

- 16 -
의 외침’
이라는 새로운 위엄을 발휘해 억눌린 자.핍박당하는 자,지금껏 역
사에서 시민권을 갖지 못했던 이들의 역사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다.
이러한 기억과 역사의 틈을 파고드는 현상들은 현재 미술계에서도 중심에
서 논의되고 있는 문제들임을 우리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동시대의 많
은 미술은 모더니즘정신이 품지 못했던 사회적인 문제와 동시대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모더니즘 권위에 대항한다.비 백인미술가들을
지원하는 다문화주의운동(
mul
ti
cul
tur
ali
sm)
22이 1980년 중반부터 진행되면
)

서 미술계에서 그간 소외되어 왔던 소수계층의 미술가들의 활동이 활발해


졌고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사회․문화․종교적 쟁점들을 적극적으로 드러
내는 양상을 보여 왔다.서구권에 대응하는 비서구권자신들 스스로를 주체
의 외부에 있는 타자로 인정하는 전략적 방식을 택함으로서 식민주체와 하
위문화 속의 이데올로기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어 포스트식민주의를
드러내는 방식을 보여 왔다.그리고 이때도 그들 스스로를 타자로 인식하기
위해 필연적이고도 불가피한 민족지적인 집단의 기억과 특징들을 강하게 표
출하고 있음을 우리는 감지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카이브를 바라봄에 있어 자신들의 과거가 ‘
어떻게 말해
져 왔는가?’보다는 ‘
어떻게 말해지지 않았는가?’
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고 말하는 편이 옳다고 판단된다.그리고 그것을 사회전체의 기억을 직접적
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기억들을 통해 공적 기억
으로 승화시키고 공감하려 하는 경향으로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비주류에 속해 있던 집단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변방에서 움츠렸던 개개의 기억들과 지배담론으로 군림하면서 강요되거나
조작되면서 단일적으로 역사화 되고 고착된 기억 사이에 벌어져 있던 틈들

22)다문화주의의 개념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여러 유형의 이질적인 문화를 세계주의


(c
osmopol
it
ani
sm)
나 다원주의(
plur
ali
sm)
의 입장에서 유연하게 수용하자는 말로서 여성문
화,소수파문화,비서양문화 등 여러 유형의 이질적인 문화의 주변문화를 제도권 안으로
수용하자는 입장을 이르는 말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논지라 할 수 있다.『두산백
과』

- 17 -
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됨으로서 갈등이 야기됨은 자명하다.그러나 그 갈등
은 선순환을 위한 자연스러운 해체의 과정 인 것이다.즉 소수자의 집단 기
억이 공인된 기억과 맞서 자기 몫을 요구할 수 있도록 유도함으로써 기억과
기억 사이의 틈들을 이해를 통해 메우고 현재의 시점에서 잘못 된 매듭을
풀어 다시 묶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 간략하게 나마 집단의 기억과 개인의 기억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에


관해 살펴보았다.살펴본바와 같이 기억은 역사의 문제를 근본부터 다시 점
검하게 함으로써 역사가 못다 이룬 자기 성찰의 임무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현재 라는 시점은 지나온 과거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하는 출발점임과
동시에 역사적이고 통시적(
sync
hroni
c) 제한과 억압에서 벗어나 공시적
(
diac
hroni
c)관점에서 재해석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23) 이는 기억이 역사

서에 활자화된 추상적이고 균질한 역사보다도 구체적이고 자발적인 역사라


불릴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 기억의 문제
는 예술가들에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들 또한
공인되지 못한 기억의 소유주이면서 공인된 역사의 기억으로부터 절대 자유
로울 수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인되지 못한 개인의 기억을 이야기할 때에 빼 놓을 수 없는 부분
이 사진이라 할 수 있다.사진은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과거를 급조되지
않은 물질적 증거로서 재현시켜 주기 때문이다.그리고 현재 많은 동세대
미술에서 사진은 너무나 당연한 매체로 자리하고 있고 Ⅲ장에서 다둘 작가
들 역시 사진을 통해 많은 기억들을 소급하고 보존하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
에 다음 절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 살펴보려 한다.

Ⅱ-2.사진과 기억

23)이것 또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더 많은 아카이브들이 집적되면 하나의 통시적 시선


에 그칠 수 있는 해석이라일 수 있으나 현재라는 시점 안에서는 새로운 담론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데리다가 텍스트 해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주요 개념인
차연(Di
ff
eranc
e)속에도 의미란 것이 항구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음에 오는 세대
혹은 이론에 의해 심화,확대 되면서 달라짐( di
ff
er)
을 담지하고 있다.

- 18 -
앞서 살펴 본 것처럼 기억이 가지는 기본적인 약점들 망각,재구성,자의적
해석 등을 보완해줄만한 것으로 사진만큼 훌륭한 동지를 찾는 것은 그리 쉬
운 일이 아니다.이는 한 장의 사진이 우리의 수많은 무형의 기억보다 객관
적이고 분명한 영상으로 존재하는 장점을 가지기 때문이다.그런 이유로 기
억과 역사를 예술로 끌어 들이는데 가장 유요한 방식으로 많은 예술가들은
사진을 택하고 있고,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들이 사진을 활용하는 중요한 이유들 중 우선되는 것이 재현되는 이미지
에 대한 객관적 진실성 때문이라 한다면 두 번째는 오히려 그 반대로 사진
이 가진 리얼리즘 자체보다는 사진의 제작과 사용과정,그리고 그 안에 내
제하는 이데올로기성을 폭로해 사진 매체의 중립성이나 순수성에 대한 믿음
을 공격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사진의 2가지 주요 성격인 다큐멘트(
Doc
ume
nt)
적 성격과 또
다른 하나인 기념물(
monume
nt)
로서의 성격이 기억 담론들과 어떠한 연관성
을 가지는지 그리고 예술가들은 어떻게 사진을 활용하는 가에 관해 살펴봄
으로서 Ⅲ장에서 다루려고 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보탬이 되고자
한다.

1)다큐멘트(
Document
):공인된 기억의 증거 그리고 거짓
사진은 찍혀지는 순간 진행되고 있던 사건들과 상황을 잘라낸 하나의 단면
에 불과하다.그럼에도 외부의 세계가 한 장의 사진으로 찍혀지는 순간 그
사진은 외부세계와 ‘
닮은 것’
이 아니라 ‘
같은 것’
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선사
한다.무언가를 틀로 찍은 것처럼 그 틀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믿는 것이
다.이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대표적인 고유특징 중에
하나이다.이러한 성격은 기록과 진실을 증명한다는 다큐멘트(
Doc
ume
nt)

는 용어로 규정되어 진다.다큐멘트라는 용어의 성격자체가 부차적 설명 없
이 사진은 사실을 기록하고 그대로를 보여 준다 라고 하는 ‘
증거’
로써의 관
점을 강력하게 증명해주는 용어라 할 수 있다.다시 말하면 다큐멘트라는
용어는 사전적으로 ‘
기록’
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기본적으로 사진 매체가 가

- 19 -
지는 전통적 힘과 동일시된다 해도 오류는 없다는 것이다.
실재로 모든 개개의 사진은 여타의 예술작품들처럼 단일한 예술적 감각의
차원을 지니고 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하나의 다큐멘트라고 할 수 있
다.그리고 이러한 기록적 성격은 사진이 스스로에게 ‘
진실의 증거’
로서 존
재하도록 오랫동안 고착시켜온 부분이기도하다.
그러나 이러한 통념은 사진이 주관성이나 편견,이데올로기를 단호하고 오
차 없이 철저하게 비켜나서 현실의 세계를 우리들에게 있는 그대로 재현
(
repr
esent
ati
on)
해 낼 수 있는 중립적 매체라고 ‘
가정’할 때만 가능한 일이
다.안타깝게도 한 장의 사진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촬영
자의 눈에 비친 해석으로 부터 완전히 피해 갈 수는 없다.즉 자신의 체험
과 학습-억압과 검열들이 포함된- 등에 의거하여 자신이 살았던 환경 속에
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다큐멘트적 성격은 결국 사진에게 주어졌던 최초의 역할
즉 외부세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기록수단의 성격을 부여했음과 동시에 사
진이 가장 충실하고 공정한 재현의 수단으로 등극 할 수 있는 특권까지도
부여했다.그리고 이것은 곧 사회 지배계층의 욕망을 위한 최상급의 도구로
서의 책무도 함께 씌운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상황을 존 버
거는 실증주의라는 부모의 희망을 한 몸에 받은 아이가 고아가되자 기회주
2
의자가 입양했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4
) 이는 한 장의 사진이 우리들의

생각을 형성하고 우리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점을 이용하는 것으로25) 사진의 증거적 객관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인위적인가를 확인 할 수 있는 부분이다.역사가 이데올로기를 같이하는 소
수의 전문가에 의해 모든 것이 진실인 듯 기록되는 것처럼 사진의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성과 사실성의 능력은 지배계층에게 너무나 충직한 군
사가 되어 줄 수 있었다.그리고 이렇게 지배층의 군사가 된 사진들은 결국
소수의 역사가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허용된 기억을 근거하는 역사서에 증거
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24)존 버거 & 장 모로,


『말하기의 다른방법』,이재희 역,눈빛,2 004
,p.
98.
25)지젤 프로인트,『사진과 사회』,성완경 역,눈빛,1998,p.
7.

- 20 -
사진은 현실이라는 믿음을 키우는 것이다’26) 라는 볼탕스키의 말처럼 이

러한 이유들은 예술가들에 의해 최근 사진이 가진 리얼리즘 자체보다는 사
진의 제작과 사용과정에 내제하는 이데올로기성을 폭로해 사진 매체의 중립
성이나 순수성에 대한 믿음을 공격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이행되도록 만든
근거이기도 하다.즉 예술가들의 손으로 옮겨온 다큐멘트 사진은 이제 통상
적으로 사진의 평가를은 뒤로하고 이례적인 방법으로 목록이 만들어지기도
하고,허구적 사실을 사실처럼 보이게도 하고,출처가 불분명한 사진을 연이
어 모으기도 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의사와 감성,논리를 표명하는
데 사용되어지고 있다.이는 우리들이 쉽게 사진이 ‘
과거에 존재했던’혹은

발생했었던 어떤 사건’들을 보존해주는 것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이용해 사
진의 단선적이고 불규칙하고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이로써 사진에 대한 환상
과 신뢰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다.결과론적으로는 사
진이 찍혀진 상황의 사회적 정치적인 이면을 파고들어 탐구하고자하는 예술
가들의 ‘
과거의 기억’즉 닫혀진 아카이브에 접근하고자하는 열망과 의구심
을 극명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현재에도 작가들이 제시하는 다큐멘트적 사진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사실
을 전달하는 기본적인 기능을 완전하게 소진 한 것은 아니다.그러나 단지
작가들은 표면에서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내용 보다는 오히려 단선적 모호함
을 더 부각 시키고 관객들로 하여금 보다 더 자유롭고 두터운 층리의 해석
이 가능하도록 유도한다.이것은 사진이 아무리 사실을 증거 한다 하더라도
포착된 사진의 단절된 단편이 모든 것을 말해 줄 수는 없기 때문에 가능해
진다.가령 아무리 잘 알고 있는 사건이라고 가정하더라도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사진이 찍혀진 그 순간의 구체적 사실을 판단할 수 없다.단지 한 순
간이 정지되어 있을 뿐 전․후의 상황은 할 수가 없다.즉 사진이 모든 상
황을 이어진 직선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앞서도 언급하였다.이런 이
유로 결국 그 끊어진 단선 사이의 불연속을 파고들 수 있는 것은 그 사건을
목격하거나 경험한 개인의 기억이 될 수 밖 에는 없는 것이다.

26) Boltans
ki,Idrnt
it
e/I
dent
if
icat
ions,e xhi
bit
ion c
atal
ogue
, Bor
deaux: Ce
nte
r d'
Art
e
Plas
tiquerConte
mporai
ns.1976,p.24.

- 21 -
그러기에 다큐멘트적 사진 한 장이 작가들에게는 단순히 ‘
명백한 현실의
확인’
이라는 경계에서 점철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을 넘어 ‘
주관적 해석이
가능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그림’
으로써의 의미,하나의 선택된 오브제로써의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
27) 즉 시각적으로 재현된 이미지로 이해되는 것이 아

니라 하나의 개념적 도구로 이용된다 하겠다.


사진이 피사체를 그대로를 찍어서 보여주는 기계적 사실성을 구현하기는
하지만 그 대상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근거는 우리의 기억과 사회의 제도와
관습 아래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국 사진의 진실성이라는 것은 외부세계가
포착된 그 순간이 아니라 포획자와 포획된 순간을 바라보는 개인의 기억 마
주할 때 이루어지게 됨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예술가들은 자
신의 작업을 통해 확인시킨다.
이런 사진의 다큐멘트적 성격이 역사서에 허락된 공적 기억과 비견 될 만
한 사진의 특징이라면 다음 절에서 다룰 아마추어 사진은 기록되지 못한 개
인의 역사를 대변하는 사진의 특징이라 이야기 할 수 있다.

2)기념물(
monument
):숨어 있는 기억의 증거 아마추어 사진
사전적 의미로만 해석한다면 ‘
역사’
는 객관적이고 공적인 사실을 다루고 그
권위를 보증하는 종류의 것이라면 반대로 ‘
기억’
은 주관적·
심리적이고 지극
히 파편적이어서 신뢰하기 어렵고 신빙성이 낮은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저장하는 방식은 다르지 않다.개인이 자신
의 좋은 면만을 선취해 기억하고 남기고 싶어 하는 것처럼 역사 역시 목적
과 이익에 의해 선별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다른 점이 있다면 개인의 기
억은 내가 원하지 않더라고 어두운 기억들이 내안에 트라우마의 형태로 존
재할 수 있으나 공식된 역사의 경우 선별뿐만 아니라 왜곡되고 버려지기 때
문에 공식적으로 더욱더 쉽게 잊혀지기 마련이고 한번 배재된 것들-위임
(
cons
ign)
되어 이루어진 배재-은 쉽게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27)벤자민 부흘로(B․H․D Buc


hloh)
는 이러한 사진을 표현도구로 이용하는 혼합적 표현의
시도를 19
70년대 말 탈-장르의 개념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용과 혼합으로 발전하는
출발점이라고 언급한다.김경률, 『현대미술 사진과 기억』,사진마실,2 005
,P.
37,재인용.

- 22 -
역사를 쉽게 바꿀 수도 없다는 점이다.그러기에 오히려 남겨진 역사의 아
카이브는 기억보다 더 임의적이고 선택적이고 인위적인 것들의 산물이라고
도 할 수 있다.그런 입장에서 그 틈을 파고드는 개인의 기억이란 것은 왜
곡되고 조작된 역사를 증명하고 폭로 할 수 있는 힘을 내포 하고 있는 것임
을 앞서 우리는 고찰 한 바 있다.이와 동일한 입장에서 아마추어 사진들
역시 쉽게 무시되어 사라지는,그리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지 않은 많은 역
사의 사실들을 남겨놓은 좋은 증거품이라 할 수 있다.즉 개인의 사진 앨범,
잡지 속 스치는 사진 속에는 역사의 질주를 막아설 많은 실재했던 기억의
사실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런 의미에서 아마추어 사진은 기
념물로서의(
monument
)성격을 가지게 된다.
사실 신문,잡지를 뒤 덮은 대중매체 속 사진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술가들
에게는 좋은 재료가 되어 미술사의 페이지마다 깊게 각인되어있고 그것에
대해서도 거리감은 없다.앤디 워홀(
Andy War
hol
,1928~1987)이 ‘
사진은
현실을 번역하는 기계’
라고 말하기도 하였듯이 대중매체 사진은 많은 사회
적 지표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시대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많은
예술가들이 대중매체 사진에 주목하는 중요한 이유 역시 재현되는 이미지에
대한 절대적 신빙성 즉 확실한 증거성과,집단 사회의 상징적 아이콘을 재
현하기 위해서이다.이때 사진은 내시는 극소화 되며 외시를 극대화 할 수
있는 대중이미지를 찾기 마련이다.이러한 예는 팝아트를 통해 드러나는 이
미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외
시를 극대화 하는 이미지 보다는 모호해 보이고 언 듯 무엇을 이야기 하는
지를 판단하기 힘든 보다 더 개인적인 스넵 사진을 사용하는 경우가 확산되
고 있다.
현대는 수많은 소프트웨어를 사용에 합성,보완,삭제 가능해졌다.그리고
누구나 조금의 시간을 투자하면 즐비한 서적과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 시각
적으로 우수한 사진을 만들어 낼수 있다.그리고 이러한 디지털 테크놀로지
는 사진의 고유한 특성들을 무너뜨리기도 했고 이러한 부분은 회화와 사진
의 경계가 불분명해는 부분이기도 하다.이렇게 만들어진 사진들은 전통적
으로 인정되는 작품성 이라 던지 완성도라는 부분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을

- 23 -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감동을 주기에는 그 한계성이 너무 쉽게 드러난다.그
러기에 사진 자체가 줄 수 있는 감동은 오히려 아마추어 사진에서 감지되는
경우가 더 많다.사진의 형식적인 측면 즉 조형성,기술성,솜씨 등 테크닉
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찍혀진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진들은 오히려 우리
에게 사진으로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해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함
으로써 그 속에 나를 이입시켜 보다 깊은 사유작용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
다.결국 아마추어 사진은 모더니즘적 예술언어와는 반대로 모두에게 이해
될 수 있는 공통적 교감이나 상징으로 작용이 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평범하고 일상적이어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무언가가 없어 순간 당황스러
울 수 있는 화면 속에서도 마치 푸르스트 효과처럼(
prous
tef
fec
t)꼬리를
물고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연상은 잠겨진 기억의 첫 번째 창을 열수 있는
열쇠로서 작용하여 몽롱하고 뿌옇게 흐려져가던 과거의 한 장면이,구체적
인 장면으로 재현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지극
히 개인적 경험에 머무르지 않는 공동체적 기억들을 들추어 낸다는데 힘을
가진다.
예를 들면 70년대 평범하게 찍힌 수학여행 기념사진 속에서도 우리는 그
시간의 역사를 읽을 수가 있다.그 안에 존재하는 통기타,교련복 등 그 당
시 대변하는 다양한 코드가 존재하고 있게 됨으로서 그 스넵 사진은 단순한
개인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에토스(
ethos
)를 가지고
있게 되는 셈이다.결국 이렇게 사용된 사진의 이미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진이 함축하고 있는 작가의 분명한 의도를 이해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공통된 문화 즉 에토스를 동시에 이해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
나’라는 주체에 의해 경험되지 않은 기
억은 쉽게 잊혀져 버리지만 사회적으로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나에
의해 체험된 기억은 잘 잊혀 지지 않는다.이러한 의미에서도 아마추어 사
진은 우리에게 공통된 기억을 상기시키는 보다 더 훌륭한 코드를 가지고 있
기 때문에 그와 관계된 시간 속으로 강력하게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고 결
국 망각되어 가고 있는 기억을 다시금 끄집어냄을 가능하게 하는 은유적 대
상으로 관계하게 된다.그리고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더 이상 ‘
예술사진’

- 24 -

사진을 이용하는 예술가들’
(Ar
tis
tsus
ing phot
ogr
aphy)
의 작업을 구분하는
일은 거의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았음을 많은 평론가들은 지적한다.
28)결

국 동시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사진을 이용하는 바탕에는 작가로서 자신의


감정을 산출하기 위함을 넘어서서 관객들에게 감정을 지시하기 위한 도구로
써 작용시키기 위한 전술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즉 이러한 평범한 사진
들은 관객에게 인식의 통로를 열어주는 은유적 예시(
met
aphor
ical
e
xempl
if
icat
ion)
로서 열려있다.이처럼 아마추어 대중사진들은 개인과 집단
의 공통된 시각을 들추어내는 예술적 방식의 특징 특히 과거 공통된 기억이
나 역사적 시간을 재구성하는 재현도구로서 아주 유용하게 활용된다.

2012년 2월 영국 데일리지에 약 2000명의 영국인을 상대로 살면서 가장 후


회하는 10가지를 설문한 결과가 실렸다.그리고 9위에 ‘
추억 등의 경험을 사
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
이 올랐다.그만큼 현대인들에게 사진은 자기 자신을
기억하고 추억하기에 가장 가깝고도 중요한 도구임을 의미한다.그리고 그
안에는 자신의 개인의 기억뿐만 아니라 공감할 만한 시대의 기억도 담겨질
수밖에 없다.현대인에게 있어 사진은 외부로 자신을 드러내고,이웃과 세계
를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가강 쉽고도 편안한 방법이라는 것에 대해 누
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동시대 작가들에게 사진은 앞서 언급하였듯 ‘
명백한 현실의 확인’
이라
는 전통적 선을 넘어서 주관적 해석이 가능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서 의미,선택된 오브제로서의 의미를 동시에 가짐으로서 하나의 개념적 도
구로 이용되는 것임을 분명히 인지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28)앤디 그룬버그( Andygr


unbe
rg)
는“장차,예술로서의 사진을 실행하는 사진가들과 작품에
서 사진을 이용하는 작가들을 더 이상 구별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언급하였다.수잔 브라
이트,op.
ci
t.
,p.
8.재인용.

- 25 -
Ⅲ.홀로코스터 기억의 예술적 발화

2012년 2월 23일 조직적인 네오타치들에 의해 희생 된 이들을 기리기 위한


침묵의 추모식이 12시에 1분 동안 독일에서 진행되었다.이는 1945년 9월 2
일 세계 2차 대전이 종식된 후 전국적인 규모로 열린 최초의 추모제였다.
독일의 소도시 쯔비카우(
Zwi
kau)
에 본거지를 두고 네오나치들이 외국인을
상대로 10년 동안 조직적으로 벌여온 암살테러의 전말이 밝혀지면서 독일
수상 앙겔라 마르켈(
Ange
laMe
rke
l)이 암살자들을 가리켜 ‘
독일의 수치스런
존재들’
이라는 공식적인 발표도 함께 이루어진 대규모 애도 행사였다.이처
럼 독일의 나치즘은 끝나지 않은 진혼곡이라 할 수 있다.그러기에 독일의
나치즘을 어떻게 해석 할 것인가 라는 모체와 같은 문제는 지금도 역시 해
결해야 할 큰 과제이다.
독일은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독일만의 역사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국가
이다.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히틀러의 군국주의가 시작되고 전 세
계를 뒤흔든 세계 2차 대전의 패배,분단,그리고 다시 통일을 이루기까지
이데올로기적 생채기로 얼룩진 땅이다.그 중에서도 독일인에게 지울 수도
치유 할 수도 없는 주홍글씨로 남겨진 나치 정권의 과오는 정신적 걸림돌이
면서 치욕스런 역사일 수밖에 없다.더구나 연합국들이 서독을 점령하면서
독일인을 상대로 한 정치적 재교육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독일인들은 자신의 역사 전체,혹은 최소한 근대 이후의 역사 전반을 잘못
된 길이었음을 인식해야만 했다.이는 결국 과거와 현재의 연결선을 단절시
켜버린 파국을 낳았다.그렇게 되면서 독일의 민족사와 전통에 대한 재검토
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진지한 반추 없이는 정상적인 역사를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이런 시련들을 극복하고 이미지를 쇄신하기에 예술만큼 좋은 것이란 없다
는 것을 독일만큼 잘 알고 있는 집단도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이를 증명이
라도 하듯 독일 연방 공화국 즉 서독은 1955년 제 1회 카셀 도큐멘타

- 26 -
(
Kas
selDokume
nta)
를 시작했고 5년마다 한번 씩 개최해 2012년 13회 전시
를 맞이했다.그리고 현재는 세계적인 전시회로 거듭나 있다.그러나 이미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카셀 도큐멘타는 비엔날레와는 성격이 다른 사회
적이며 정치적 다큐멘터리적 주제를 다룬 작품들을 모아 보여주는 세계적인
예술제이다.따라서 ‘
카셀 도큐멘타’
전은 미술적인 감각도 중요하지만 작품
들 속에는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를 동시에 지녀야 한다는 이중성을 띠고 있
다.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독일만큼 도큐멘터 전시회가 개최되기에 적합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예술가들 또한 국가의 부담스러운 과거와 늘 같이한
평범한 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속에도 사회적 정치적
요소들을 함축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과정의 일환으로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양 독
일은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며 수교를 하였고 동독으로부터 많은 미술가들이 서
독으로 넘어왔다.이장에서 다룰 리히터(
Ger
ghar
dRi
cht
er)
역시 그러한 역사적
맥락 속여 놓여져 있던 예술가이다.그러나 동독에서 서독을 선택한 작가들은
상이한 이데올로기 안에서 ‘
독일인 아닌 독일인’
으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는 없었다.그러나 정체성의 문제는 전후세대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
다.전쟁이 종식된 조금은 빛나는 환경 속에서 태어난 전후 세대들은 정치적 교
육과 경제 성장의 문제 앞에 입을 닫아버리거나 기억의 망각을 원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올바르게 알 수 없는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환경이 결국은 붓을 들어 자신들의 역사를 끄집어 낼 수밖에 없도록 만
들었다고 할 수 있다.즉 과거에는 정치가 권력을 지배하기위해 프로파간다
(
propaganda)
로 미술을 사용하였으나 이제 그 정치를 위해 희생된 매체를 통해
29) 지금부터 다
정치권의 권력과 대치하고 끊임없이 통제하고 성찰케 하고 있다.
룰 3명의 작가들 역시 닫혀진 역사,잊혀져가는 역사에 대해 예술가로서 책임감
의 문제를 통감하고 그에 대해 접근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9) 김향숙,「미술과 정치:통일의 굴곡에 투영된 독일 현대미술과 정치의 헤게모니」,『미


술사학』2
2,한국미술사교육학회,200
8.p.
386.

- 27 -
Ⅲ-1. 혼성된 정체성과 기억 이미지 : 게르하르트 리히터
(
Ger
har
dRi
cht
er1932~ )

1932년 출생해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전쟁의 역사로부터 자유


로울 수 없었던 리히터의 가족사는 아마도 그에게 어린날의 트라우마로 깊
숙이 각인되어 그의 삶을 통채로 관통하는 일이었을 것이다.또한 리히터는
가해자이면서 적어도 자국 내에서는 연합국의 피해자로 위치할 수 있는 트
레스텐폭격(
1945년 2월 14일)
의 현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그리고 이러
한 기억은 리히터의 작업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마치 다가갈수록 점점 더 실체를 지우는 정치적 계략처럼 리히터 역시 자
신의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독일인으로서의 삶을 흐린화면으로 드러낸
다.그것이 독일인이 아닌 독일인으로 살 수 밖에 없던 자신을 보호하기 위
해 스스로가 고용한 대변인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반면 그가
보여주고 있는 또 하나의 오랜 연작인<아틀라스> 속의 홀로코스터는 잊혀
질 수 없는 과오를 두고 자신이 사회적 삶30)을 지탱하기 위해 무엇을 기억
해야하는 가에 관한 가해국의 국민,전쟁의 피해자로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최소한의 책임에 관한 물음과 같은 것이라 사료된다.이에 다음 절에서는
복다 구체적으로 늘 정치적 문제와 멀리 있으려 하면서도 그 주변을 떠날
수 없는 개인의 삶이면서 평범한 독일인의 삶이 동존하는 리히터 개인의 기
억이라는 캔버스 위에 홀로코스터로 대표되는 독일의 나치즘의 집단 기억이
어떻게 이미지화 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혼성된 정체성
전쟁의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동독의 트레스텐에서 출생한 리히터는 장벽

30)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 동물이다.그러한 사회적 동물이


되려면 결국 기억이라는 것은 삶의 전제조건이 될 수 밖 없다.왜냐하면 어제는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리고 사람 혹은 대
상들과 무슨 생각을 나누었는지를 잊지 않고 있을 때에만 사회스런 삶이 지탱 될 수 있
기 때문이다.기억이 온전하지 못한 치매 환자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힘든 예를 통
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 28 -
이 세워지기 전인 1961년 뒤셀도르프로 이주했다.동독에서 서독으로 건너
온 바첼리츠가 “
전쟁이후 독일에는 진정한 예술가도 문화도 없었다.독일에
는 엄청난 전쟁 반대자들만 있었다.
”라고 회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건너온 많은 작가들이 혼성된 이데올로기로부터 야기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지울 수 없는 과오에 대한 죄책감,영국의 폭격으
로 말미암은 피해의식,새로운 이데올로기 아래서의 정체성 확립 등의 문제
는 리히터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는 뒤셀도르프로 이주해 제일 먼저 시
작 했던 것이 미술재료의 사용이나 기법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이상적인 사
3
회주의적 사상을 깨뜨리는 것이었다고 회고 한바 있다.1) 그가 이러한 정체

성에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비단 자신 내면에서 일으키는 리히터


라는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리히터는 아더 헤리스에 의해 대공습이 이루어진 트레스텐에서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도판1.
2)그리고 리히터의 아버지는 미군의 포로로 끌
려가 풀려난 뒤 알콜중독자로 1943년 생을 마감했고,반면 어머니의 남동생
(
루디 삼촌)
(도판7)
은 그의 그림에도 등장하듯 가족의 자랑스런 나치 장교였
으며,어머니의 여동생(
마리엔느 이모)
(도판5)
는 19세 때 정신분열 증세로
입원 한 후 Akt
ion T432)의 총책임자 중에 한명이었던 하이데에 의해 8년
뒤인 1945년 희생되었다.그러나 자신은 나치의 만행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
고 나치열혈당원이었던 의사(
오이핑어)
(도판3)
의 딸 엠마와 1957년 결혼하고
마리엔느 이모와 (
리히터)
와 나치열혈당원(
엠마)
의 피를 같이 이어받은 딸
베티도 1966년 얻었다.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가족사적이면서도 독일 역
사의 한 단면인 것이다.안네를 통해 나치즘시기의 유대인 가정을 들여다

31)Gehar
tRi
cht
re,i
ntextFrankfur
t/M,1993,s.p.
9.김향숙,op.ci
t.p.
391,재인용.
32)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순수혈통을 가려내는 일과 더불어 인종정책의 일환으로,안락
사를 이용해 신체적 장애가 있거나,정신 질환자,알콜 및 마약중독자들 역시 위대한 게
르만 순수혈통을 더럽히는 존재로 분류 존재 할 가치가 없는 수치스러운 존재들로 평가
하여 가스로 안락사 시킬 것을 히틀러는 명했다.베를른 티어가르덴( Tie
rgar
ten)4번가에
총 사령부가 위지 해있어 작전명은 Akt ionT4라 불리우며 이는 나치의 또 하나의 어두
운 역사이다.이 ' 행동 T4 '라는 작전으로 194 1년 8월까지 70,
273명이 희생되었다고 알려
져 있다 그러나 19 41년 8월 1 8일,나치 독일은 공식적으로 계획을 중지한다고 발표했으나
그 이후에도 비밀리에 장애인 학살이 이뤄져 실질적인 희생자는 더 많은 것으로 보고되
고 있다.

- 29 -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리히터의 삶을 통해 평범한 독일인의 가정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그리고 그 안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존하고 있
음을 쉽게 확인하게 된다.이러한 확인은 결국 ‘
과연 그를 전쟁의 가해자 편
에 정당하게 세울 수 있는가’
의 문제에 답하는 것은 그리 쉽고 단순한 문제
아 아님을 인식하게 한다.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리히터 본인에게 독일
인의 삶은 영원한 가해자도 피해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존재할 수
없다는 말로 단정 지음이 오히려 더 정확한 표현 일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리히터에게 도덕적 책임감을 명료히 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문제로 받아 들여졌을 것이다.어쩌면 어려움을 넘어 피하고 싶었던
문제였던 것으로 사료된다.결국 리히터는 어린 시절 자신의 가족을 뒤 덮
은 전쟁의 기억과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 오면서 겪었던 이데올로기의 변
화로 인해 홀로코스터로 대표되는 역사의 암막을 이미지화함에 있어 흑과
백 어디에도 닿을 수 없으면서,둘 다를 포옹하는 회색빛의 흐릿한 화면으
로 귀결 시켰다.이는 이미지의 내용을 떠나 시각적 이미지만을 놓고 판단
하더라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상황으로 풀이된다.속도를 내며 질주한 전 세
계적인 광기의 역사가 그의 기억속에서도 절대로 손을 뻗어 잡을 수 없는
매캐한 잿빛화염 속에 대상으로 남겨진 것일 수 있지 않겠는가?
리히터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1
988
년 이루어진 벤자민 부흘로(
Benj
ami
n
He
inz
-Di
ete
rBuc
hloh,1941~)
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회화적 분위기에가
어떠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에 대해 논의하면서 “
보다 나은 세계
대한 열망”
,“절망이나 비참함과는 반대되는”그리고 “
구원”
과 “
희망”
이라는
단어들로 말하고 있다.그리고 이것이 인식론적 측면은 물론이고,감성론,
심리학적,정치학적 모든 관점에서 성취되기를 바람 했다.그러면서도 그는

사회정치적인 용어를 논쟁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은 회화이
지 이데올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좋은 회화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그것의
사실이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라고 밝힌다.
33) 이렇게 그는 늘 이데올로기

에서 멀리 있으려 하면서도 늘 그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

33),벤자민 부흘로,「게르하르트 리히터:회화의 유산」 ,진 시켈,『현대미술의 변명 :모더


니즘 미술가 25인과의 인터뷰』 양현미 역,시각과 언어,199
6,p.
134.

- 30 -
할 수 있다.이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를 오가며 중간 위치에서 그 어
느 것 과도 타협하거나 결탁하기를 원치 않은 그의 신념이기도 하고 ‘
급진
적이지 않기를’
바란 그의 바람을 함축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그가 이루어낸 ‘
사진회화’
라는 방식을 통해 더욱더 분명히
드러난다.
(도판1~8)
리히터는 “
사진은 양식도 규범도 없습니다.사진은 저로 하여금 제 이전의
개인적 경험을 떨쳐버리게 해 주었습니다.처음에 그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그것은 순수한 이미지였어요.이것이 바로 제가 그것을 가
지고 또 보여주고 싶었던 이유입니다.
”34
) 리히터에게 사진은 회화처럼 대상

을 이해하고 받아 들여 다시금 내보이는 행위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


대상
을 본다’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졌다.어떤 대상 혹은 상황을 비판한다는 것
은 -설령 리히터가 비판적 함의를 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보다 더 객관
적인 기준으로 보다 더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리히터가 미
술이 가지는 비판정신을 드러내기에 사진은 회화보다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
는데 유용한 방법이었을 것이며,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자기검열이 강요
한 한 방도였을 것이다.
그에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것은 결국 이데올로기에 헌신하는 예술
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자신의 삶,조국의 삶을 통해서 너무나 잘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시각의
객관성을 통한 표현의 자유였다.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일률적인 체제아
래 감춰야했던 그의 열정을 서독이라는 자유가 공식된 사회 안에서 펼치기
위해서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사물을 개인의 경험이나 주변의 간섭,
의지로부터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 방편을 찾는 것이었다.

만약 미술이 확실한 판단을 보여준다면(
특정 사건에 대해)미술이 시대를
수정하는 사회적 작업이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나는 침묵했으며 익명에 머
물렀다.
”35
)는 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국 어떤 특정사건을 특정 입장
에서 옹호하거나 정확하게 묘사하고 판단하는 것은 동독에서의 그의 미술처

34)국립현대미술관,「독일현대미술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 展」,2 006,p.11


9.
35)Di
ti
etmarEl
ger
,Ge
har
tRi
cht
re,Mal
erKol
n,200
2S.p.
172,김향숙,op.c
it.
,p.39
3,재인용.

- 31 -
럼 정치적,도덕적 잣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프로파간다에 다가가는 미
술에 머물 수밖에 없음으로 판단해 스스로를 냉담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작가의 모습으로 드러낸 것이다.그럼에도 그는 부흘로와의 인터뷰에서 ‘

무것도 발견하지 않는 것,아이디어도 없고,구성도 없고,대상도 없고,형태
도 없는 그러나 모든 것을 갖춘 구성,대상 그리고 형태,아이디어의 그
림’
36
)이라는 설명을 한다.이는 매우 모순적 설명으로 보여 진다.그리고 이
러한 모습 역시 그가 정치에서 멀리 있으려 하면서도 늘 그 언저리에 있는
모습과 매우 유사하게 읽힌다.
이러 듯 그의 의사 표명 속에서 일관되게 확인되는 것은 회화의 중립이다.
이것은 곧 동․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 3의 노선을 택하고자하는 모습
과 그 사이를 떠도는 정체성의 혼성 그리고 그 사이 어느 지점을 강하게 열
망하는 리히터의 모습과 동일시해도 무방하다고 사료된다.사진을 닮아 가
려 하면서도 늘 회화에 머무르고 있는 그의 작업과도 유사성을 읽을 수 있
다.즉 우리는 자주 리히터의 작업을 ‘
사진 같다’
라는 입장만을 주시해 바라
보고 해석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사진이 그에게 묶여진 자신의 내면세
계에 날개를 달아 주었더라도 결국 그가 도착 할 수 있었던 곳은 흐린 사진
으로 위장한 ‘
회화’
였다.아무리 자신의 기억,시대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려
해도 동독에서의 자신과 가족 그리고 민족을 통과한 기억을 완전히 떨쳐 낼
수 없었던 것처럼 그가 사진의 객관성에 매혹 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따르고
자 한 것은 사진의 외시적 이미지일 뿐 결국 그의 예술적 성취는 회화와 함
께 이루어지고 있다.즉 리히터의 사진회화가 그림과 사진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오가고 있다는 것은 곧 그의 정체성 또한 동독과 서독의 언저리에서
위치했고 그것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심리적요소와 직결되어 있다고 해석
할 수 있다.
이렇게 부담스러운 민족사를 품은 독일인의 정신 상태에 대해 사회심리학
자 미철리히(
Mit
sche
rli
ch)
부부는 『애도 능력 결여』(
Unf
ähi
gke
it z
u
t
raue
rn)
”로 규정한 바 있다.즉 히틀러라는 우상이 사라지면서 독일인들은

36) 벤자민 부흘로,


op.
cit
.,pp.
133
~149.

- 32 -
과거와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해자인 자기 민족과 피해자
측 어느 누구도 겸허하게 ‘
애도’
하지 못한 채 자기연민에 빠져 ‘
우울’할 뿐
37
이라는 것이다. ) 이러한 입장을 누구보다 잘 견지하고 있는 이가 리히터라

고 할 수 있다.이처럼 늘 모호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며 외면적으로 중립적


입장을 취하지만 그의 내면은 늘 가해자와 피해자로서 홀로코스와 대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그의 심경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또 다른 예
가 그의 작업노트와도 같은 <아틀라스>작업이라고 판단된다.

2)기억의 얼개로서의 이미지


앞 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리히터의 삶 속에는 홀로코스터에 관한 경험과
기억들이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다.그러나 본래 기억은 역사서에 짜여진 스
토리만큼 체계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기본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기
억은 발생하는 그 순간부터 망각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달린다.리히터의 흐
린 화면 역시 뒤에서 다룰 볼탕스키의 확대된 흐린 이미지처럼 기억의 잊혀
짐이라는 맥락에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은 시간에 의해서가 아닌 기억 다양한 간섭현상 즉 나
의 경향과 관심의 정도,사건의 쇼크적 강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는
것을 앞에서 논의한바 있다.그러기에 리히터의 삶속에서 나치즘의 기억이
란 프로이드가 말하듯이 자기검열과정 즉 너무나 끔찍했던 기억을 자신 스
스로가 살아내기 위한 한 방편으로 기억을 의식의 심연에 묻어 두고자 “

3
도적 망각”8)
이 이루지지 않았다면 자신의 삶속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설령 이러한 망각을 유도 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자
기 방어적 억압에 머물러 있던 강력한 기억들을 의식으로 끌어 올려 직접

37) Alexander and Margar


ete Mitscher
li
ch,Di e Unf
ahi
gkei
tz ut rauer
n.Gr undl
agen
koll
ektive
n Ve r
hal
tens
,Munc hen,1967;Margaret
eMi t
sche
rli
ch,Eri
nnerungs
arbei
t.Zur
Psychoanalys
ede rUnfähi
gkeitzutr
auern,Frankf
urta.M.,1987,pp.
73-74.전진성, 「우
울애서서 애도로 :안젤름키퍼의 작품에 나타나는 역사적 트라우마」, 『현대미술사연구』
22,2007,현대미술사학회,pp. 65~66,재인용.
38)프로이드적 의미로는 억압과 검열에 의한 의도적 망각( oubl
iactif
)으로도 볼 수 도 있다.
즉 억압이란 과거 고통스럽거나 불쾌한 기억으로부터 자아의 손상을 막기 위해 그러한
기억이 의식으로나타나는 것을 자신이 스스로 업압하는 보호적 메카니즘을 말한다.

- 33 -
대면하지 않고서는 정신적 통증에서 벋어 날 수 없음을 프로이드도 지적한
바 있다.즉 기억의 객관화 과정을 거쳐야만 정신적 고통에서 벋어 날수 있
는 것이다.
리히터가 망각의 흐린 물결 속에 흘려보려고 했던 기억들은 다시금-일종
의de
ath dr
ive 같은 것이라 한다면- 적극적으로 객관화 하기위해-이것은
l
ivedr
ive
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뛰어 들고 있는 작업으로 1962년부터 현
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거대 프로젝트인<아틀라스>를 지목할 수 있을 것이
다.이 작업은 바부르그의 기억프로젝트<기억 아틀라스>39)(
도판9.
10)
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아틀라스는 리히터가 작품제작을 위해서 모아온
자료집에서 출발된 작업이지만 지금은 사진,오려낸 신문,드로잉 그리고 초
안 등을 포함한 만 오천점의 자료들이 정리 된 약 800여 점의 단독 작품이
기도 하다.리히터는 1972년에 처음으로 이 자료들을 패널에 붙여 정리하기
시작해 <아틀라스>라 명한 후 꾸준히 자료의 첨부가 더해지면서 자신의 아
이디어 발상에서부터 그의 모든 작업형성과정을 소상히 밝혀줌과 동시에 대
중매체에서 선취된 사진들을 통해 정치적 사회적 역사의 이미지를 보여 준
다.이처럼 자신의 체험과 남겨진 기억 그리고 보관된 아카이브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이 <아틀라스> 작업은 리히터의 작업을 어느 비평가보
다 잘 이해 시켜주는 해설집 같은 존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최근 2012년 2월 4일~4월 22일까지 자신이 태어난 드레스덴에서 팔
순 기념전으로 <아틀라스>를 전시하기도 했다.자신의 아틀라스가 만들어
지기까지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드레스텐에서의 전시는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를 생각해보면 적극적으로 정치사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 주
변인의 한사람이 감당해야만 했던 평범한 삶을 보여주는 자서전임과 동시에
역사의 한 중앙에 선 이 도시가 아직 다 아물지도 않은 폭격의 상처를 혹시
잊고 있을지도 모를 개인과 집단의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39)도상학자인 아비 바부르그(AbyWar
bur
g19
66~19
29)
가 자신의 말련인 192
4~192
9에 기
획한 거대 프로젝트인 <기억 아틀라스>는 그가 보디첼리 연구에서 시작해 이탈리아 르
네 상스 미술에 나타난 정념의 표현이나 점성술의 도상까지로 확대시켜가며 서적,잡지,
신문,광고 등에서 도상을 검은 스크린 패널에 구성한 것으로 바 비부르그의 고대 잔재를
둘러싸고 전개된 생애의 연구 활동을 압축해 놓았다고 평가된다.

- 34 -
한다.
리히터가 최초로 <아틀라스> 작업을 시작했을 때 첫 번째 주제는 당연히
가족사였다.
(도판11)서독으로 이주하기 전 개인적인 기억이 담긴 사진들이
주를 이루는 이 작업은 어린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들과 전쟁과
독일의 공적 역사를 담은 이미지를 같이 병치하여 보여주고 있다.이 역시
평범한 동독에서의 스넵 사진을 통해 어린 시절을 기억함에 있어 아련하고
푹신한 기억만이 아닌 날카롭고 깊은 베임의 흔적이 혼재하고 있음을 분명
히 기억해 두고자하는 그의 행동으로 평가된다.뿐만 아니라 단순한 개인의
추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독일의 공통된 기억과 나란히 하나의 패널 안
에 보여줌으로써 동일한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억이 마주하게 하여 서로
에게 질문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그 일예로 앞서 잠시 언급한<마라엔느 이
모>와 <하이데>를 들 수 있다.이들을 배치함에 있어 리히터는 서로 마주
보게 배치함으로써 가해자와 희생자를 다시 현재의 기억으로 불러내 가해자
와 희생자를 대질시키는 것 같은 모습으로 이미지를 완성하고 있다.
4) 그리
0

고 리히터는 1965년 흐린 사진이미지로 그들을 그렸다.이렇게 리히터는 처


음부터 흐린 화면을 야기시키는 것은 아니다.자신의 철저한 개율 안에서
운영된 자료를 이미지화 하는 최종 과정에서 흐린 사진회화을 통해 드러낸
다.분명히 존재하는 기억이지만 껄끄러운 기억 그것이 독일 전체를 관통하
는 어두운 홀로코스터의 과거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그리고 리히터가 피해
자이이면서도 어쩔 수 없는 가해자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있는
유요한 한계치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작업과 관련해 좀 더 살펴보면 리히터가 서독에 정착해 생활하던 1964
년 우연히 TV에서 ‘
전후 시대와 나치 시대’라는 타이틀의 재판에서 ‘
베르
너 하이데’
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도판6)그리고 그는 그 재판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 받았다.리히터는 이 사건으로 인해 또 다시 내면의 혼란을 경
험하게 된다.즉 한때는 나라의 위대한 영웅이었을 그가 승자의 입장에서

40) J uli
a Ge l
shor
n, 『Ge schi
chtt
sre
zepti
on und Re z
ept
ions
ges
chi
cht
e, Zur
Ze
itgenosse
nschsftGehar
tRi
chtre
,』 koll,2007,p.
87.김향숙,『미술이론과 현장』1 1,
「현대미술에 투영된 아포리아( apori
a):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아틀라스」,현대미술이론학
회,2 011,p.
108.

- 35 -
기록되는 역사의 소명아래 공식적으로 처단되어야만 하는 대상으로 지목되
고 대중매체가 그것을 진두지휘하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삶이 그러했
듯 하이데의 삶을 통해 다시 한 번 한 사건의 확실성과 정당성에 관한 혼란
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그리고 리히터는 1959년 신문에서 그의 모습을 찾
4
아 중절모에 안경을 쓴 흐린 모습으로 그리게 된다.1
) 그리고 그러한 아이

콘의 연작으로<마이엔느 이모><루디 삼촌>등을 그렸다.


(도판5.
7.
8)나치 장
교의 군복을 갖춰 입고 웃고 있는 루디의 모습도,자신에게 가족사 안에서
는 너무나 따뜻하고 다정했던 마리엔느의 모습도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지모
를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나치시대의 장교의 모습으로 웃음을 띠고 분명
한 신분을 드러내고 있는 루디의 모습에서 조차도 자신의 가족사 안에서,
독일이라는 집단 안에서 어떻게 감지되어야 할지 알 길이 없는,오히려 슬
그머니 자신의 붓질 속에서 사라져 주길 바라는 욕심이라도 부려 보고도 싶
은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이는 리히터 개인의 가족사
안에서만 존재하는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독일인의
가족사 안에서 누구나 어찌 할 도리가 없는 더이상 부유하지 않고 가라 앉
아 있기를 바라는 기억으로 자리하게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리히터의 이
러한 태도를 드라텐(
Von Dr
aht
en)
은 “
예술을 정치적인 잣대나 도덕적인 가
치의 잣대로 이용하려는 것으로부터 보호하고자하는 장치이며 더 나아가 지
나친 기대감으로부터 오는 이상적인 부담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하는
의도”
라고 보았다.
42
)

그리고 리히터는 공식적인 사건에 대해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는 행위 자체


를 극도로 자재하기에 이른다.뿐만 아니라 전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
업에서 회화로 그린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
아틀라스에서 나
는 일반적으로 사실과 연관되어 사진을 많이 사용했는데 그 사실을 단지 회
회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사진
도 분명 지극히 객관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매체이지만 이 말에서 리히터가

41)김향숙,20 08.op.
cit
.pp.190~191.
42)Von Dr ahten,『Ge har
tRi chite
r,An di e Machtdre Bil
dergl
aube
n』,Kunst
for
um
Int
renat
ionale,Band(131)
(kol
n,1995),p.
260.김향숙,2 011
,p.1
08,재인용.

- 36 -
사진을 자신의 영역으로 빌어오는 이유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부분
이라 하겠다.즉 사진의 객관성과 중립성이라는 사진의 전토적 고유성 자체
를 작업의 전략적 매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리히터의 <아틀라스> 작업에서 처음으로 구체적인 홀로코스터 작
업을 시작 된 것은 1963년 작업으로 기록된 11she
et이다.
(도판12)그는 여기
서 길거리에 내동댕이쳐진 뼈만 남은 시체들이 가득한 한 장의 사진을 독일
의 자연풍광과 같은 종의 사슴이 뿔을 맞대고 힘을 겨두는 여러 장의 사진
들이 주를 이루는 패널에 함께 병치하고 있다.이러한 병치에 대해서도 리
히터는 ‘
무의미’
와 ‘
우연’으로 일관할지 모르겠으나 홀로코스터 사진 한 장
이 패널에 위치하는 순간 그 주변을 채울 사진 이미지들은 이미 그의 사유
안에서 추구된 이미지일 수밖에는 없다고 판단된다.그러기에 11s
hee
t는 그
는 단순히 한 장의 사진이 홀로코스터를 말해주고 있다기보다는 나치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독일의 환경은 그들 스스로에 의해 파고되었고 다른
피가 흐르지만 같은 피도 흐르는 동족을 무차별하게 살해 해 버린 비극의
아이러니가 분명한 존재성을 드러내고 있는 s
hee
t라 판단된다.그러나 그
뒤 몇 년 동안은 홀로코스터의 이미지가 담긴 shee
t는 확인되지 않는다.그
후 다시 홀로코스터의 이미지가 등장하는 것은 1967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s
hee
t16~20번이다.
(도판13~17)이 5개의 s
hee
t에서는 보다 더 구체적인
홀로코스터의 모습을 담고 있다.가해자로서의 나치의 모습,혼자서는 설수
조차 없는 뼈만 앙상히 남은 굶주림과 협소한 공간속에 들어찬 헐벗고 생의
끝에 거의 도달해 있는 피해자의 모습들,마치 버려진 누더기 폐기물처럼
싸여 있는 시체들의 사진을 담고 있다.그러나 처음 홀로코스터의 이미지들
담았을 때는 사진을 직접 오려서 옮겨 놓았으나 두 번째 작업에는 자신의
카메라로 대신 찍거나 혹은 일부러 초점을 흐리게 찍기도 하는가 하면 의도
적으로 색을 덧칠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이러한 과정은 접근 불가능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예술가로서 미약하게나마 역사와 접촉을 시도하는 과
정임과 동시에 여러 장르가 혼합되고 구분이 불분명하고 혼란스러운 미술을
통해 스스로 심경의 대변을 시도 한 것으로 이해 될 수 있을 것을 판단된
다.그 후 다시 홀로코스터의 이미지가 등장하는 것은 30년 뒤인 1997년에

- 37 -
이루어진 s
hee
t635~646이다.
(도판18~25)이 작업은 그가 당시 독일의 ‘

회의사당’
에 소장할 작품을 제작해 달라는 요청에 의해 수집이 시작된 것으
로 200여장의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이 사진들을 살펴보면 국회의당이라
고 하는 독일 정부를 대표하는 장소가 기억해야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
히 이야기 해주고 있다.그럼에도 그는 장소와 주제적인 문제로 정부와 마
찰을 겪으면서 쉽게 포기한 작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약간의 마찰 과
정에서도 리히터는 예술가로서 철회하기 힘든 자신의 주장을 쉽게 꺾고 다
른 작업으로 바꾸어 버렸다.이러한 부분 역시 히리터의 정체성의 혼성이
잘 드러난 일예라 할 수 있다.43)
살펴본 것처럼 그가 홀로코스터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업들은
긴 시간차를 두고 단발적으로 드러내는 특징을 보인다.이 또한 그가 극도
로 정치적인 것을 피해가려하면서도 어떨 수 없이 내제된 자신 안의 집단
기억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라고도 보여 진다.<마리엔
는 이모>를 처음에 <어머니와 아이>라고 명명한데서 알 수 있듯이 숨기고
감추려 해도 어느 순간 다시 살아나는 문제이고 그 한계에 도달했을 때 다
시금 그는 혼성된 정체성을 극복하기 위해 그 기억을 끄집어내 객관화 하는
과정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살펴본바와 같이 리히터는 재현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모습에서도 확인


할 수 듯이 인류 사상 최악의 역사적 사건을 탐구하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그 또한 전쟁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의 역사적 과오를 기꺼이 자신의 정체
성의 일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삶 속에 놓여 있는 한 사람
이였다.이러한 리히터의 이미지 안에서 본인은 단순히 개인의 기억을 넘는
집단 기억이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 트라우마
안에서 혼란을 겪으면서 늘 모호한 대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그의 삶을
확인 할 수 있었다.이러한 예는 랄프 딘스트와의 인터뷰에서도 확인된다.

나는 잘 알려진 이슈에 관해 작업하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한다.나는 명확

43)김향숙,20
11,op.
ci
t,p.
115.

- 38 -
한 것이나 진부한 주제로부터 유래하는 모든 것을 피하려고 노력했다.그리
고 그것은 나의 예술방법이며 나의 애매한 행동이다.
”4) 그리고 이러한 대
4

답은 비단 리히터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온 독일인 대부


분이 심경을 대변하는 것이라 사료된다.
전쟁의 잔인함은 상대방과 함께 느끼지 못하는데 있다.우리는 지금도 전
쟁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들에서 적군의 불탄 시체 앞에서 환호하는 모습 포
로들에게 가혹행위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언론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나치 시대의 독일인이나 혹은 전후의 독일인의 공통점이 바로 이 슬
퍼할 수 없다는 문제로 귀결 되어 지는 듯하다.독일인들은 과거를 애써 억
압하려하지만 여전히 과거의 심리적으로 고착되어 있고 독일인들은 공식적
으로는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가해자
들에게 심리적 애착을 느끼지 못함으로 인해 그들과 공감하고 애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들은 상실감을 견디지 못하고 우
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수많은 유대인을 죽이면서도 마치 해충을 박멸하
는 역사적 사명감만을 고취시켰고 그들 스스로도 역사의 피해자가 되어 독
일 사회는 ‘
슬퍼’
하지 못하는 사회 즉 ‘
우울’
한 사회 가 되어 마첼리히 부부
의 표현처럼 애도의 능력이 결여된 상황을 낳은 것이다.리히터도 결국 가
해자,피해자 그 어느편에도 온전히 설수 없는 슬퍼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자신의 작업을 통해 이러한 극복하려하고 있다.그리고 그의 작업을 통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사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현실사회를 마음답게 포장해
미화하는 맹목적 애착과 순응으로 일관하는 삶에 대해 정당화 하는 것이 아
님을 확힌하게 된다.리히터 역시 동독이라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서독이라
는 자유가 허락된 삶 안으로 넘어 왔음에도 흡수되지 못하고 흐린 화면으로
일관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잔인할 정도로 가혹한 자신의 혼성된 삶 안에
서 그것을 넘어서는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어느 쪽도 긍정할 수
없었던 그의 태도에 분명한 이유가 되어 주는 것으로 사료된다.

44)I
nter
vie
w with Rol
f-Di
ens
t,1970
,e dit
.by Hans-Ul
ri
ch Obr
ist
,Ge har
tRi
cht
re,t
ext
,
Wiri
ti
ngs,I
nte
rvi
ewsandl e
att
ers1961-2007,p.
5.김향숙,2011,p.
116,재인용.

- 39 -
그러나 이러한 정체성의 위기는 비단 전쟁을 경험한 이들만의 몫은 아니었
다.다음 장에서 다룰 전후 세대인 키퍼는 이러한 정체성의 위기의 늪지대
를 빠져나오기 위해 리히터보다 민족적 유산들과 더 정면으로 맞서는 강인
함을 보여준다는 데서 일차적 차이점을 가지만 독일인으로서 홀로코스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기본적인 사안은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다.

Ⅲ-2.단절된 집단 기억과 충돌하는 기억 이미지 :안젤름 키퍼


(
Ansel
m Ki
efe:1945~ )

물려받은 것이든 계획한 것이든,꿈이든 현실이든,축하를 받든 비난을 받


든 민족은 거기에 있다.그것은 우리의 소여(
所與)
이다.민족은 우리의 겉옷
이자 우리 자신이며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민족은 우리의 더불어 살기의
양식이다.
이 말은 노라의 『기억의 장소』 제 2부에 해당하는 ‘
민족’
의 첫머리에 등장
하는 문장이다.이 문장을 통해 우리는 민족과 개인이 분리 될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재확인 하게 된다.
이렇게 민족과 분리 될 수 없었던 또 한명의 개인인 안젤름 키퍼는 1945년
에 출생하여 리히터처럼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가지는 못했다.그렇
기 때문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전쟁의 참상과 대면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
었을까?라는 물음으로 이해 될 수도 있다.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민주주
의 개념이 새삼스럽게 터를 잡기 시작한 서독에서 출생한 그는 독일의 불미
스런 과거에 대해 무조건적 침묵과 경제 부흥에만 앞장서는 사회 분위기 속
에서 성장해야했다.
.그러나 무조건 침묵만으로 덮힐 수 없는 전 인류가 목
격한 민족의 분명한 과거의에 대한 기억은 키퍼로하여금 내적․외적 갈등을
야기 시켰고,홀로코스터의 문제는 결국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절박하지
만 해결하기 힘든 숙제 일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었다.그렇기에 그가 적극
적으로 문제와 부딪침을 시도한 것은 자신을 찾기 위해 내면에 귀를 기울인
너무나 자연스러운 시작이었다고 판단된다.그리고 그의 이러한 반감은 당

- 40 -
시 시대상과 맞물려 소위 68세대라 불리 우는 세대들과도 다르지 않았다.
이러 상황이 예술가라는 위치에선 자신에게 신경의 날을 세우게 했고 바로
그 지점이 그의 예술적 출발점이 된 것이라 사표된다.그렇기에 키퍼의 작
업 모티브는 대부분 역사에서 출발한다.그리고 그것은 그가 독일 민족임을
스스로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을 전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 생각
된다.
또한 이러한 키퍼의 행동 즉 기억을 기억 하려는 이러한 행위가 참을 수
없는 삶이 부끄러움과 견딜 수 없을 만큼의 마음의 아픔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 기억과 마주해야만 한다는 책임의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키퍼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인간다움을 잃게 만들었던 역사를 기
억하고 그 기억의 기억을 다시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할 소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민족의 트라우마에서 벗어 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알바흐는 “
사실 내가 사회로부터 걸어 나가버
릴 때조차도 나는 계속 사회의 영향하게 있다.내가 내 자신을 사회성원들
과의 관계 속에서 구별 짓고,그들의 환경 속에 다시 침잠하게 하고 집단의
한 부분으로 느끼게 하는 모든 것은 내 자신 속에,내 정신 속에 가지고 있
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45
)고 말하고 있다.이러한 알바흐의 발언에서 우리는
아무리 깊은 시간 아래 묻혀있는 신화 같은 지경에 이른 기억이라 할지라도
한 집단의 성원으로서의 기억은 내 안에 내제 되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재
확인 하게 된다.키퍼 역시 이러한 부분을 잘 인지하고 있는 이였고 그러기
때문에 민족성을 과도하게 내뿜는 극우주의자라는 호된 통증들을 기꺼이 감
례하며 집단의 기억을 이미지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키퍼는 구체
적으로 어떠한 방식을 통해 홀로코스터 기억을 이미지화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기억을 기억하기
전후 독일의 문화는 나치 과거가 남긴 상처들을 치유하기 보다는 마치 그

45)Maur
iceHal
bwac
hs,LaMe
moi
rec
oll
ect
ive
,195
0,p.
118,니당 바슈텔,op.
ci
t.
,p.
254,재
인용.

- 41 -
들이 유대인을 대했듯이 현실과 멀리 떨어 뜨려 놓거나,가두어 두려는 노
력들로 특징 지어 질 수 있다.그럼에도 십 수 년간 지속된 독재체제와 참
담한 패배로 마무리된 침략전쟁,무엇보다 홀로코스터의 씻을 수 없는 죄업
은 독일 전후 세대에게 민족사적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성찰을 고무
시킬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키퍼에게 홀로코스터의 트라우마는 리히터처럼 가족적 유대관계 속에서 형
성 된 것은 아니다.키퍼의 기억은 아스만 부부가『문화적 기억』에서 언급
한 ‘
문화적 기억’즉 후세대가 지나간 시대에 대하여 소통하는 기억의 범주
에 해당한다.민족적 트라우마를 운명적으로 덮어쓴 전후 세대인 키퍼는 과
거의 집단 기억과의 관계 맺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어떤 이도 진공 속에서 살 수 없다.개인의 기억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가는 집단의 기억이 있다.당신 자신에 대해 알려면 당신의 나라와 그 역사
를 알아야한다.과거에 어떤 일이 행해져 왔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
을 내 작품의 시작으로 삼았던 것은 매우 정상적인 것이다.
(…)나는 기억을
깨워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46
)

이러한 키퍼의 초기 작업 들은 (
1960년대 말에서 80년 초)그의 말처럼 나
치즘의 문제와 직접적인 부딪침을 시도한다.그리고 그러한 키퍼의 시도는
찬양인지 비아냥거림인지 구분 할 수 없는 것들로 받아드려지면서 독일 내
에서는 극우적인 성향으로 받아 들여져 “
조야한 결합의 거장,독일 이데올
로기의 퇴비(
堆肥)
,신화를 복제하는 일이야말로 그의 전공 분야”
47) 라는 식

의 거침없는 폄아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불미스런 과거에 대해 의식적으


로라도 배재하고자 했던 독일인의 정서에 ‘
독일 고유의 토속성’
을 과도하게
내뿜는 작업들은 독일인들에게 다시금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으로 이끄는 이
미지로 비춰졌던 것이다.이러한 현상은 1987년에서 1989년에 걸쳐 미국 전

46) Germano Ce lant, Ansel


m Ki efe/text bt Germano Ce lant
, Mi
lan:
London :Ski
ra
:Thame s&Hudson.,2007,p.294.김지예, 「사후기억을 통한 홀로코스터의 시각적 표상」
『현대미술사연구』29 ,현대미술사학회,20 11,p.
17,재인용.
47) Hanno Re ut
e r,
“Fres
ken f ürs kunft
ige Reich? We rkschau Ansel
m Ki e f
er in
Düsseldorf
,”
Frankfurt
erRunds chau,no.104,May4198 4,p.21.김지예,op. ci
t.
,p.17.;전
진성,op. ci
t.p.
68,재인용.

- 42 -
역의 주요 미술관들에서 일련의 회고전이 이어지면서 폭발적인 키퍼에 대한
수용이 이루어졌음에도 미국에서의 인기도 독일에서는 달갑지 않았고 어줍
쟎게 교육받고 미술시장과 대중매체에 놀아나는 다수가 옛날식의 천재를 바
라는 욕망,즉 파블로 피카소,마르셀 뒤샹,앤디 워홀이 떠난 뒤 채워지지
못했던 욕망을 다시 채우려는 데 지나지 않는다거나48) 유대인들이 키퍼 작
품을 많이 사들이는 것에 대해서도 위험한 독일적 상징들에서 짜릿함을 느
마조히즘’이라는49) 비아냥거림으로 일관했다.
끼는 일종의 ‘
이러한 논란의 시작은 1969년 자신의 졸업 작품을 위해 시도된 <점령들
(
Occ
upat
ions
)>연작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판26~29)이 일
련의 퍼포먼스 작업들은 그가 뒤 이어 다루는 홀로코스터를 연상케 하는 공
간 이미지들의 작업들 보다 최소한 시각적으로 더 직접적이고 강한 도발성
을 보여준다.키퍼는 이 작업에서 오른 손을 치켜든 히틀러식 경례(
Sel
i
He
il)
를 하며 노골적으로 나치를 연상시키고 있다.화면의 한 중앙에서 시선
을 한 몸에 받으며 관객들과 마주하고 있는 키퍼의 모습은 오해를 넘어 유
대인 당사자라면 키퍼의 의도를 듣는다는 일이 무의미하게 다가 올 만큼 극
우주의자처럼 비춰질 소지가 다분해보인다.이 퍼포먼스는 나치에 의해 점
령된 바 있는 유럽의 각국,즉 스위스,이탈리아,프랑스 등지를 돌며 촬영
한 것이다.바르트가 『밝은 방』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사진으로 증명되
는 그의 행위는 그가 거기에서 그러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그는 그렇게
금기시했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다.그러기에 그는 더욱더 민족
적 우월감을 북돋으려는 시도로 비춰 진다.그러나 과거를 다시 소환해 현
재의 자신과 첩촉하게 하는 일은 20대 중반 예술가의 금기에 대한 혈기가
아닌 키퍼가 전혀 격어보지 못한 자신의 민족의 정체성을 직접 체험하는 행
위였다.독일 사회가 억압하고 금기시하는 나치의 과거 그러나 자신의 것으

48)FrankTr omml er,


“Germany’sPas tasanAr tif
act
,”
TheJ ournalofMode rnHistor
y,vol .
61,no.4 ,De c1989,p.725.전진성,op. cit
.p.68,재인용.
49)We rnerSpi e s
,“GebrochenerZaube r:DerFal lKi ef
er,ein Mal e
r-Problem und se i
ne
zwiespält
ige Wi rkung,”Frankfurt
e r All
geme i
ne Zeit
ung,Nr .2 4,J an.2 8,1989,Pe t
er
Schjel
dahl,“Our Ki ef
er,
” Arti nAme ri
ca,vol .76,no.3,Mar ch 198 8,124;Pe ter von
Berg,“Enge l der Naz ist
ischen Apokl aypse. ZurAnselm-Kie f
er-Rezepti
on i n de n
USA, ”SüddeutscheZe it
ung,no.2 82,Dec71 988,p.
37.전진성 op. ci
t.,p.
68~6 9재인용.

- 43 -
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기억과의 대면이었다.
이러한 키퍼의 생각은 1987년 프리데리시아눔 미술관(
Mus
eum
Fr
ide
rici
anum)
에서 도날드 스쿠핏(
Donal
dBur
tonKuspi
t,1935~)
과의 인터
뷰 내용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인터뷰에서 그는 예술이 책임을 져야 한다
는 믿음에 관해 이야기 한바 있다.그리고 자신의 작업의 내용이 현대적이
지 않을지 모르지만 정치적이다 라고 분명히 밝히고 미술의 고고학적 가치
에 관해서도 언급하였다.즉 과거로 되돌아가고자 함이 아닌 과거의 상처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데 예술가로서의 힘을 발휘 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역사에서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고자 하는 키퍼
의 소망을 담고 있는 내용이라 판단된다.
또한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은 외국인을 싫어하는 신비
스러운 옛 독일을 그리워한다고 생각한다 라는 물음에 “
나는 그리워하지 않
습니다.기억하고 싶을 따름 입니다”“
유태인들은 독일인들에게 하나의 교
훈”
50라는 짧은 답변을 한바 있다.이러하듯 키퍼의 작업을 독일의 과거를
)

미화하거나 민족주의를 고수하는 독일의 우파적 성향으로 평가하는 것은 적


절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그는 자신의 작품을 히틀러와 동일시하는 것
이 아니라 그의 광기를 체험하기 위해 그를 재현 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5) 그러나 그가 앞서 이야기 하였듯 자신이 분명히 그러한 행동을 했
1

음을 증명하는 사진으로 증거하며 책자에 기고까지 함으로 해서 그는 더 혹


독한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회화가 외부 세계에 대해 일정
한 해석이나 번역을 통해 이해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사진은 외부
세계를 그대로 잘라낸 한 조각을 따온 인용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즉 회
화는 주관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여지가 있으나 사진은 매체의 특성상 현
실의 직접적 투영의 의미를 강하게 지닌다.반박할 수 없는 사실의 증거로
5
만 관람객들에게 보여 지기 때문이다.2
) 그리고 그의 이러한 행동은 1970년

50)도널드 스쿠핏, 「안젤름 키퍼」,진 시켈, 『현대미술의 변명: 포스크모더니즘 미술가 25인
과의 인터뷰』,양현미 역,시각과 언어,199 6,pp.
111
~11 7.
51)Mar k Ros
ental
,「Ans
elm Ki
efe
r」,Chi
cago and Phi
ll
adel
phi
a,19
87,p.
17,전진성,op
.c
it.
,p.7
4,재인용.
52)김경률,op. c
it.
,pp.
5~6.44
~46참조.

- 44 -
대 퍼포먼스,해프닝,행위예술,대지예술들을 행하며 사라져가는 자신들의
작품의 증거로서 사진을 이용하는 작가군 들과도 맥을 같이 할 뿐만 아니라
요셉 보이스와 플렉서스 그룹과의 접촉을 상기 시키는 부분이기도 하다.이
러한 키퍼의 행동은 당시 68세대의 저항문화와 직결되어 있다.마치 파국으
로 이른 민족적 과거를 적극적으로 대면하지 못하고 침묵하며 멀리하고 벗
어나기에만 급급한 아버지 세대들을 향해 시위 하는 듯 한 그의 행위는 예
술을 위한 예술,다른 미술에 반응하는 미술에 머무르지 않는 세계에 반응
하는 미술이 되기 위한 예술가로서의 책임감,끈기 있는 물음으로 읽혀짐이
바람직하다고 사료된다.
아카이브를 예술로 끌어 들이는데 가장 유요한 방식으로 많은 예술가들은
사진이라는 형식을 택하고 있다.이것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지금도 무언가를 진실하게 기록하고 남
기기에 사진 만큼 유용한 수단을 찾는 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앞서
살펴본 리히터가 사진의 객관성이라는 부분에 집중했다면 키퍼는 사진의 증
거성에 관해 매혹 당했음을 알 수 있다.자신들의 과거가 그러 했었음을 스
스로 증명하고 자료로 남김으로써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퍼포
먼스)
을 던지고 스스로 답(
증거의 사진)
을 내린다.
직접 나치즘을 겪지 않은 2세대로서 자신의 조국 독일의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포용할 것인가,그리고 독일의 저널리스트 랄프 졸타노가 언급한

제 2의 죄’즉 기억을 가두고 외면하려고 하는 압도적 다수의 독인인의 죄
를 비판하며 진정성 있는 반성을 촉구하는 예술가로서의 책임이라 해도 좋
은 것이다.
오늘날 ‘
민족’
이란 것은 작은 정치 공동체 테두리 안에 갖혀있는 것이 아니
다.노라는 이러한 입장을 『기억의 장소』에서 민족의 개념을 순수혈통적
개념이 아닌 프랑스 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라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민족
개념53)을 표방하여 설명하고 있다.즉 하나의 민족을 공동된 기억으로 통합
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앞서 말하였듯이 공동의 기억을 유산으로

53)김응종,
「파에르 노라의『기억의 장소』에 나타난 ‘
기억’
의 개념」,
『프랑스사 연구』2
4,
한국프랑스사학회,20
11,pp.
120
~122.

- 45 -
가지고 현재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 구축된 민족 고유의 기억들이 민족을 구
성하는 가장 유요한 요소 중 하나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민족이 공동
의 기억이 공감을 기반으로 한다고 가정한다면 현재 ‘
동감’
의 영역은 영토의
경계를 넘어서서 세계무대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그리고 그 속도는 보다
더 가속화 되어 가고 있다.이렇게 빨라지는 범세계적 공동체는 어떤 이유
로든 그 안에서 홀로코스터와 같은 재앙으로 인간다움이 짓밟히지 않는 이
상위에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키퍼 역시 인간성을 유린하는 참혹한 사건들
을 기억하려 하는 이유 또한 약자들 즉 총칼을 든 자들보다 총칼을 들지 못
한 익명의 존재들에 대한 기억을 기억하는 일이 자신의 인간다움도 잃지 않
을 수 있는 일이고 동시에 후대 공동체가 보나 낳은 삶을 기약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이러한 스스로의 확신이 황폐화된 이데올로기의
심장부에서 무모하리 만큼 당당히 또박 또박 키퍼 자신을 새겨 놓을 수 있
게끔 한 것이라 하겠다.

2)집단 기억 체험되는 무대로써의 이미지



5월 8일은 기억의 날입니다.기억 한다는 것은 한 사건을 진심으로 순수
하게 기념함으로써 그것이 자신의 내면 가운데 일부가 되도록 만드는 일입
니다(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는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는 것이 왜 그
토록 중요한지를 이해하도록 서로 도와야만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습니
다.중요한 것은 과거의 극복이 아닙니다.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과거를 차후에 바꾸거나 발생하지 않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그
러나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에 대하여 맹목적이게 됩니다.과
거의 비인도적 행위를 기억하지 않으려하는 사람은 새로운 감염의 위험에
다시 쉽게 노출됩니다.
”54)
이 내용은 1985년 독일이 패전 40주년을 맞이해 당시 독일의 대통령 이었
던 리차드 반 바이츠재커(
Ric
har
dvonWe
izsäc
ker
)의 연설 내용이다.
홀로코스터와 관련된 기억은 독일의 근현대사를 정리함에 있어 집단적 트라

54)1
985
년 5월 8일 패전기념일에 서도 연방의회에서 행해진 Ri chardvonWei
zsäcke
r의 연
설.Deut
sche
rBunde
stagAr
chi
veonl
ine
.,최호근,op.
ci
t.
,pp.
184~185,재인용.

- 46 -
우마의 극복을 위해 반드시 제기 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키퍼는 바이츠
재커가 말하는 것처럼 치유보다는 망각을 택한 이들과 정면으로 마주서서
새로운 감염에 노출되는 독일은 치유하기위해 초기의 대범한 퍼포먼스 이후
키퍼는 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독일역사를 직접적으로 자신의 작업으로 끌어
들인다.
이렇게 키퍼에 의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홀로코스터를 상기시키는 공간이
라던가 신화와 관련된 주제들을 할 포스트너(
HalFos
ter
,1892~1982)는 반
퇴행적 이어거나 문화적으로 혁명적인 것이 라기보다는 외설스럽고 퇴행적
유혹의 기미를 띤 기분 나쁜 멋일 뿐이라고 비난했다.이것은 그들의 생채
기가 아니고 선택의 여지없이 무조건적으로 주워진 그들의 삶이 다르기 때
문으로 보인다.이러한 홀러코스터와 같은 대재앙 역사가 인류의 보편적 기
억처럼 보일 수 있으나 앞서 살펴본 기억 담론가들이 모두 주지하였듯이 보
편적 기억이란 없다.모든 집단 기억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제한된 집단
이 갖는 특수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안젤름 키퍼를 포함한 전후세대 독일
신표현주의 작가 일군들의 개인적,국가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본능적이고
도 절실함에서 비롯된 주제들에 관해 절충적 역사주의나 기분 나쁜 멋 부리
기로 치부하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기득권의 횡포로 보여 질 따름이다.키
퍼가 과거의 것들을 부여잡고 있는 것은 역사적 권위를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님은 앞 절에서 확인하였다.이번 절에서는 이와 더불어 과거 사실들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관객 스스로에게 잊혀져 가는 기억을
끄집어내고 새롭게 구성시키도록 유도하는 행위에 주목하려한다.키퍼의 이
러한 행동은 이를 통해 지나온 시간을 잊지 않음으로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후세대 작가들을 이해하기위해 앤드류 벤자민(
Andr
ew
Benj
ami
n)의 의견을 살펴보면 「테마의 반복 :하케와 키퍼,보이스」라는
글을 통해 전쟁 혹은 전후 세대인 작가들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전쟁이나 나
치의 유산과 같은 역사적 테마들은 유령의 출몰처럼 계속된다고 말하고 있
다.이러한 입장은 우리 민족의 독특한 역사와도 맞물려 있기에 보다 더 잘
이해 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우리가 직접 격지 않은 상흔들이지만 우리는

- 47 -
같이 느끼고,같이 분노하고,같이 슬퍼하고 아직 다 아물지 않은 그리고 앞
으로도 아물기 힘든 언제나 현재 인 것처럼 나와 동실시하지 않는가?그리
고 이러한 전후 세대의 상처는 남겨진 전쟁의 흔적과 마주할 때 더 구체적
으로 재생된다.그리고 이러한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는데 훌륭한 능력을 발
휘해 줄만한 것으로 ‘
상흔의 장소’
를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는 피해자로서 ‘
서대문 형무소’라는 잊지 못한 역사적
장소가 그대로 남겨져 있음을 들 수 있다.키퍼에게도 가해자로서의 홀로코
스터라는 대학살을 상기시키는 공간들이 독일 내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매
일 같이 현실에서 맞닥트리지 않을 수 없는 공간 들이였을 것이다.그러한
상황은 전쟁 종식 후 45년이 지난 1990년에 가진 인터뷰에서도 확인된다.

우리는 곳곳에서 철로를 보게 된다.그리고 아우슈비츠를 생각하게 된다.
이는 그런 식으로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55
)(도판
38.
39)그의 언급을 통해 특정 기억이 구체적인 장소와 만남이 이루어 질
때 얼마나 더 깊게 사색되는가를 새삼 확인 된다.
키퍼가 홀로코스터를 다루기 위해 이미지화 하고 있는 많은 작업들에서 우
리는 하나의 깊은 소실점을 향해 관객을 흡수한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
다.이러한 시선은 우리의 시각으로 확인되는 범주를 넘어서는 광학적 효과
에서 만들어지는 과장된 시선이다.키퍼는 홀로코스터라는 심연의 깊은 트
라우마와 직면하기위해 압도적 원근법이라는 하나의 특징적 접근을 시도 하
고 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으나 민족적 트라우마로 각인된 사건들 사이의
간극을 전후 세대들은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생
각해 본다면 문헌의 기록도 물론 유효하겠으나 남겨진 사진이나 영상은 그
틈을 메워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실지로 키퍼가 다루는 나치즘
의 공간들은 알버트 스피어(
Arbe
rt Spe
er,1905~1981)
,빌헤름 크라이스
(
Wil
hem Kr
eis
,1873~1955)등 시대에 편승했던 건축가들에 의해 지어졌다

55)Patr
ickJordan,「Outoft
heASHES.
'」 Commonwe
al1
26,no3
,199
9,p.
19,재인용,
임지영, 「안젤름 키퍼의 비평적 접근에 있어서 역사․사회적 이해문제」,홍익대 석사,
2004
,p.20,재인용.

- 48 -
가 종전 후 사라진 건물들이기 때문에 사진 등의 남겨진 자료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는 건물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도판31~36)
파괴되어 버린 역사의
기억을 복원하는 작업에서 키퍼는 사진 자료들을 통해 공간을 확대하고 그
깊이 감을 극대화 시켰다.뿐만 아니라 그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 사라진 공
간들을 자료들과 자신의 유요한 상상을 통해 체험하고 누군가와 공감하기를
바램 하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공간을 이동이라도 한 듯이 압도적이고도
거대한 공간으로 열어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글로 쓰여 진 전쟁의 기사보다.강한 사진 한 장은 더욱더 오랜 잔
상을 남기기 마련이다.지금도 커다란 사건이 생기면-예를 들면 천안함 사
건,911테러 등-언론 매체들은 최대한 강한 인상을 남기는 사진을 찾고,고
가에 매입하기도 하고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데 망설이지 않는다.그리고 그
중 선택받은 몇 장의 사진은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로 남아 그 사건을 대변
하는 이미지로 고착되어 지기까지 한다.키퍼에게도 당시의 체험하지 못한
시간들에 대한 사진과 영상 이미지들은 강한 기억으로 남았음이 분명해 보
인다.
메튜 바이로(
Mat
the
w Bi
ro)
는 철길을 소재로 한 키퍼의 작업들에 대해

열차를 운전하는 가해자의 입장과 동일시하도록 기회를 준다.키퍼의 형식
적 전략의 폭력성은 독일인의 자기비판적 표상이라 할 수 있다.
” 56) 라고
언급한 바 있다.이렇게 깊은 소실점을 행해 달려가는 키퍼의 행동은 <점
령>에서 확인 한 것처럼 가해자로의 과거의 사건을 다시 한 번 현재로 소
환해 체험하게 하는 또 다른 회화적 퍼포먼스라 말할 수 있다.즉 <점령>
은 스스로가 체험자로서의 위치에 머무른다면 그는 이제 자신의 회화 작품
을 통해 모두가 체험하기를 바라며 무대를 만들어 둔다.화면과 관객사이에
는 짧은 텍스트,다양한 매체의 마티에르가 매개하고 있으나 어둡고 큰 공
간은 그가 말하는 ‘
정신적․심리적 정화’
를 희망하는 체험의 공간이자,집단
의 기억과 개인 기억이 만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즉

56)Mat
thew Biro,
“ Represe
ntat
ion and Event:Ans
elm Ki
efe
r,Jos
eph Beuys
,and the
Memory oftheHolocaust
”,TheYal eJ our
nalofCri
ti
ci
sm,vol
.16,no.1,2003,p.
117.
김지예,op. ci
t.
,p.
29,재인용.

- 49 -
키퍼는 거대한 캔버스와 과장된 광학적 원근법을 통해 과거의 홀로코스터의
공간을 현재로 소환해 관객들로 하여금 몰입을 극대화시키고 있다.키퍼는
기본적으로 히틀러를 이해하기 위해 행동을 재현한다고 말한 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작업은 체험을 통한 부딪침과 이해,극복을 중요시 하는 성
격을 가진다.
이러한 소실점은 그의 초기 작업인<독일의 정치적 영웅들(
1973)
>에서부터
현재 진행되고 있는 그의 작업 전반에서 확인되는 특징적인 요소 중에 하나
이다.
(도판30.
40.
41)평면회화에서는 16세기경부터 소실점을 사용하여 실제에
는 없는 상상의 점이 우리를 더욱 실재와 가까이 접촉 할 수 있도록 해주었
음은 설명 할 필요 없이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키퍼의 하나의 깊은 소실
점이란 나치즘을 경험하지 못한 자로서 가지는 상상의 점이자 무한한 공간
을 열어주는 유일한 점으로 해석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무엇이 있는지 가
보지 않고서는 확인할 수 없는 그 끝점에 키퍼는 전후 세대로서의,코스모
폴리탄이 될 수밖에 없는 독일인으로서의 자신이 정체성과 역사에 대한 책
임,전쟁의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상정해 두도 있다.그러기에 그는 끊임
없이 그 끝 점을 만나기 위해 고집스럽게 자신의 전통과,역사의 기억을 깨
워내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 집단의 기억작업이 피해자 집단의 기억 작업보다 어려운 이유는 정
체성 수립의 문제와 직결 되어 있기 때문이다.피해자 집단이 홀로코스터의
현장을 방문 했을 때는 피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
가 아닐 수 있지만 가해자 집단의 성원이 그 현장을 방문했을 경우 피해자
의 고난과 상처를 통감하고 그것을 넘어 가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그러나 이러한 과정 없이는 진정한 애도가 이루어 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앞선 것들에 대한 기억 없이는 최소한 자기 자신에 대한
헤아림 조차도 불가함을 키퍼는 먼저 인지하고 있는 듯 사료된다.
독일이 패전직후 기억을 지우기 위해 가장 치중했던 부분 중 하나가 나치
의 건축들을 즉 자신들의 공적 장소의 흔적을 지우는 행위였다.그것은 장
소란 결코 그 장소를 경험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고 장소는 장소 경험의 주체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지기

- 50 -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장소는 독일의 치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증거적 존
재가 된다.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로 키퍼는 그 공간들을 다시금 재건한다.
키퍼가 보여주는 공간들은 나치가 사랑하는 독일을 위해 택한 정당한 공간
들이었으나 이제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대재앙을 부른 폐허의 공간들로
남겨졌을 뿐이다.그렇기에 역사적 좌절과 통증들은 그 안에서 보다 더 구
체성을 드러낸다.물리적 흔적과 정신의 상흔이 만나 체험을 통해 단절에
대한 거부를 표명 할 때에만 과거는 다시 체험되고 진정한 속죄와 애도로
이어 질 수 있음을 키퍼는 스스로에게 의무화 하고 있다.
설령 데리다가 말하듯 진정한 애도는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일 지도
모르나 그러한 사유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을 멈추지 않을 때 그 한계점에 보
다 더 가까이 다가 갈 수 있음을 키퍼는 우리에게 시사한다.
Ⅱ장의 두 번째 절에서 기억과 장소에 관한 문제에 관해서 살펴보았듯이 장
소는 우리의 기억을 더욱더 구체화 시켜준다.에드워드 렐프(
Edwar
dRe
lph,
1944~)
역시 『장소와 장소의 상실』에서 “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
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라고 언급한바 있다.
이 또한 장소의 의미의 중요성을 잘 함축하고 있는 말로 받아 들여 진다.

이상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홀로코스터 기억을 상기시키는 공간을 이


미지화 하고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살펴본 바와 같이 안젤름
키퍼는 자신이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자신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개인의 기
억이면서 민족의 기억인 홀로코스터의 기억을 드러내기를 원한다.이와 반
대로 앞선 세대들은 불미스런 과거대해 무조건적 침묵과 경제 부흥에만 앞
장섰고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야기된 내적․외적 갈등은 그에게 홀로코스터
기억을 끄집어내야할 절실함을 고취시켰다.그리고 그는 이를 해결하고 자
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리히터보다 적극적으로 대면하기를 원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그는 당시 금기시 되었던 위험을 무릅쓰고 독
일역사를 자신의 작업으로 끌어들였고 자신은 물론 모든 이와 함께 과거의
기억을 다시금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속죄와 애도가 이루어지를 바
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51 -
인간의 생활에서 과거의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는 미래의 기대란 있을 수
없다.또한 미래에 대한 기대 없이 행해지는 현재의 행위도 있을 수 없다.
키퍼 회화의 경험은 이런 것이다.지금 여기라는 현실 안에서 기억을 통해
이루지는 반성활동을 기반으로 앞날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 하는 것,그리고
고통의 장소 안에서 위기의 정점을 재확인함으로써 독일인으로서의 트라우
마를 벗고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과정으로서의 경험인 것이다.
이렇듯 키퍼가 가해자로서의 문제의식에 입각한 홀로코스터를 다룬다면 뒤
이어 다룰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또 다른 코스모폴리탄이 될 수밖에 없었
던 유태인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Ⅲ-3. 진실과 허구의 기억 이미지 :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
Chr
ist
ian Bol
tanski:1944~ )

전쟁과 홀로코스터의 두려움으로 어린시절을 보낸 유태인 볼탕스키에게


과거의 기억은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문제이다.볼탕스키
는 자신이 말하듯이 작은 기억(
smal
lme
mor
y)5
7)으로 집단의 기억 즉 홀
로코스터의 기억을 암시한다.그리고 이렇게 작은 기억을 증거 하는 스넵
사진이나 오브제를 작업의 주된 소재들로 사용하고 있다.볼탕스키의 대
부분의 작업들은 전쟁 2세대로서의 홀로코스터에 관한 기억으로부터 출발
해 가족의 트라우마,그리고 주변 지인의 경험을 되살려 유대인을 대표하
는 홀로코스터 기억들을 작품으로 재현한다.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
의 작업에 대해 예술계인사들이 홀로코스터 아카이브 작가로 분류하면서
도 그 보다 더 집중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취하는 그의 태도 즉
모호하고 역설적인 것을 표상하는 것에 대해 주목한다.실지로 2008년 1
월 8일에서 5월 18일까지 뉴욕 I
CP에서 ‘
Arc
hive Fe
ver
’전시를 기획한
오쿠이 엔위저(
OkwuiEnwe
zor
,1963~)역시 이러한 모호함에 대해 주목

57)Marti
n Gol
ding,“Me mor
y,Comme
morat
ion,and t
he Phot
ogr
aph”
,Mode
rn Pai
nte
rs,
vol
.12,no.1
,19 99,p.
94.김지예,op.
ci
t.
,p.
11,재인용.

- 52 -
5
하고 있다.8)

1)단절과 상실의 기억
1944년 전쟁이 끝날 무렵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한 볼탕스키 역시 키퍼처럼
전쟁의 시간을 온전히 걸어 나온 세대가 아닌 전후 세대이다.그러나 그는
일정기간 게슈타포(
Ges
tapo)
와 프랑스 밀고자들의 눈을 피해 숨어 살아야만
했고 전쟁이 완전히 종식 된 후에도 결코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고립을 경험해야만 했던 홀로코스터의 공식적 피해지인 유대인이었다.결국
그는 프랑스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러시아계 유대인이었던 아버지로부터 홀
로코스터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성장했다.모든 작가들에게 개인적 삶
의 기억들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겠지만 특히 홀로코스터와 관련된 작가
군들에서는 그 영향력의 정도가 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볼탕스키 역시
어릴 때부터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차별과 고립,그리고 유대인 자손으
로서의 상흔은 그의 작업을 전개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앞서
살펴본 키퍼가 가해자로서의 기억으로부터 출발 된 애도를 전재하고 있다면
볼탕스키는 피해자로서의 상실의 기억에 대한 애도를 전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그렇기 때문에 볼탕스키의 작업에서 홀로코스토를 대표하는 기억
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참혹한 장소로 기억되는 수용소59)를 암시하는 표상들
이 우위를 점한다.즉 감금과 절멸을 상징하는 산물들이 그의 작업 전면에
드러나게 된다.볼탕스키는 전후세대로서 홀로코스터 기억의 영향력과 자신
의 충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나는 예술가에게 있어 어디에서 왔느냐하는 문제 즉 고향과 개인사에 관
심을 갖는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다만 개인의 역사는 보편
적이어야 한다.나의 경우는 전쟁직후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나의 유년시절
을 지배했다.그때 내가 듣는 이야기는 거의 유대인 집단학살에 대한 것이

58)OkwuiEnwe z
or,「Ar
chi
veFe
ver:Us
edoft
heDoc
ume
nti
nConte
mpor
ayAr
t」200
8,
pp.
30~32.
59)수용소 안에 가스실이 존재 했는가의 여부에 따라 절멸수용소( 또는 학살수용소)와 집단
수용소가 엄밀히 구분되며 이런 관점에서 나치의 모든 수용소가 학살수용소는 아니다.이
상빈.op.ci
t.,p.
27.

- 53 -
었고,부모님과 친구들이 모두 유족이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첫 번째 충격이
었다.나는 전쟁을 직접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로부터 직접 파생된 결과를
견디어야 했다.
”60)

한민족에 의한 타 민족의 완전한 말살의 흔적이 그의 어린 시절을 통째 삼


겨 버렸음을 짧은 회고에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그럼에도 그에게 홀로
코스터의 기억은 전승된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기억,다시 말해 애수
와 모호함을 동반하는 이미 지나가 버린 시절의 기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전달자들조차도 경험의 시간에 대한 언급은
자신 혹은 주변인들의 사유와 뒤섞어 재구성하여 되새김된 기억들이다.기
억은 외적 영향에 의해 언제든 쉽게 왜곡되고 조작될 가능성 있어 기본적으
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불확실하고 의심스러
운 형태로 존재한다는 맹점을 가지고 있음을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훈육된 기억들은 외적으로 드러난 홀로코스터의
단서들과 만날 때 또 다시 볼탕스키에 의해 재구성되는 ‘
기억된 기억의 기
억’
으로 남겨진다.그렇기 때문에 볼탕스키에게 홀로코스터의 기억이란 것은
언제나 분명히 존재하고 자신을 억압하는 기억이면서 맹목적 믿음을 요구하
는 한계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대상으로 존재하고 만다.
볼탕스키처럼 문화적 기억에 의존할 경우는 기억이 생성된 출발점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질수록 그 간격은 벌어지고 그 틈을 타고 다양한 새로운 해석
이 시도 될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가령 집단의 정체성이 시대가 변
화하면서 바뀌게 되면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 시킬 수 있는 기억만을 집중
적으로 발굴할 소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61)

키퍼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직접 체험하기를 원했다면 볼탕스키


는 객관적 사실들과 관련된 증거들을 수집하기로 한다.사진,옷,상자들 즉
증거품이라고 하는 보다 더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피해자 1세대와 2세대
사이에 존재하는 경험의 부재와 막연한 공포와 불안감의 틈을 메우기로 한
것이다.그 이유는 이렇게 수집된 물건들은 ‘
분명한 사건’
에 대한 보다 ‘
객관

60)국립현대미술관,『볼탕스키:겨울여행』,국립현대미술관,1
997
,p.
46.
61)최호근,op.
ci
t.pp.
177~178

- 54 -
적인 증거’
를 제기함으로 인해 보다 확실하고 명확하게 홀로코스터의 존재
를 드러내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러한 수집 행위가 아무리 강력한 사실을
이야기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증발해버리고 없는 것들을 대신해 자리
하고 있는 것들이고,자신에 의해 또 다시 선취된 기억일 뿐임을 확인하는
과정에 불가하다는 사실 또한 볼탕스키는 확신하게 된다.이러한 증거품들
의 수집과정에서 확인한 남겨진 것들의 맹점과 불안감에 대한 근본적인 호
소는<10장의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자화상1946-1964(
1972)
>(도판42) 라는
대표적 작업에서도 잘 확인된다.그는 이 작업에서 전혀 다른 사람의 사진
10장에 자신의 이름과 촬영일자,나이를 임의로 기록해 자신의 기록 ‘
인 것
처럼’우리에게 확인시킨다.그러나 사실 캡션은 사진이미지를 증거 해주지
못하는 것들이다.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조금의 관심만 가지면 쉽게 알아차
릴 수 있도록 제시하고 있다.사진이 어떤 사건에 대한 증거로서는 최상의
도구일수 있지만 글의 도움 없이는 순간만이 포착된 사진의 단절된 단편이
모든 것을 말해 줄 수는 없다.그리고 설사 잘 알고 있는 사건이라고 가정
하더라도 그 구체적 사실은 우리의 기억과 지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그
렇기 때문에 사진의 일반적인 성질인 생생한 전달력과 글이 합해지면 설령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
마치 진실인 것처럼’확고한 믿음의 힘을
선사 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 이것은 글로서 역사화 된 기록과 만
들어진 사진 1장이면 모든 것이 완전한 진실인 것처럼 인식되어 질 수 있음
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업들이 직접적으로 홀로코스터의 이미지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미지와 캡션의 불일치시키는 방식을 통해 드러내고 있고 이러한
것들은 그가 홀로코스터 이미지를 다루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게 사용하는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20대 후반인 된 그에게 전쟁
의 기억이라는 것 역시 ‘
~이라고’훈육되었지만 언제나 불완전하고 혼란스
러운 사실들에 대해 재구성하기를 전재하는 기억이었던 것과 맥을 같이하도
있다.이는 곧 어쩌면 자신에게 전달된 기억조차도 거짓 정보일 수 있는 가
능성을 늘 내재하고 있음을 동시에 함의한다.그렇기 때문에 볼탕스키의 작
업에서 드러나는 기억의 이미지를 과거의 참상을 재현시키는 것이라거나 가

- 55 -
해자들을 현재로 소환해 비판하고자 함으로 이해 할 수는 없다.이러한 불
안정한 기억에 대한 평가는 ‘
사후 기억’
의 개념을 심화시킨 마리엔는 허쉬
(
Mar
ianneHi
rsc
h)에 의해서도 평가된 바 있다.“
볼탕스키의 교훈은 역사적
교훈이 아니다.이것은 명확한 지식이 부재하는 것 안에서 회복 될 수 없는
과거를 상기시켜야 할 때에 대한 교훈이다.이것은 단절과 상실의 한 형태
에 관한 교훈이다”
라고 쓰고 있다.
62)

그리고 볼탕스키 역시 인터뷰63)에서 “


나는 결코 수용소의 사진을 사용해 본
적이 없다.내 작품은 홀로코스터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관한 것이
다.
”라고 밝히고 있다.
본고의 Ⅱ장에서 어떠한 사건에 대해 문서화를 전재 하지 않으면 기억을
공유하는 것은 3~4세대,시간적으로는 80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것을 언급
하였다.이러한 역사화의 논리에도 불고하고 볼탕스키는 바로 전세대가 격
은 사건에 대해서도 단절을 경험해야만 했다.이것은 그로 인해 허쉬가 이
야기 하듯 모든 것이 단절되는 시기 즉 기억이 역사화 되는 과정에서 사회
집단의 가치관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선택과 수용의 문제에서 탈락당한 기
억들로 인해 어느 시점에는 완전한 허구가 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누구도
그것이 허구임을 판단하기 어려운 순간이 올 것이라는 것을 볼탕스키는 우
리에게 상기 시킨다 할 수 있다.즉 이러한 막연함과 단절에서 오는 상실과
잊혀짐 그리고 원래에 대한 갈구가 그의 작업으로 접근 할 수 있는 열쇠라
할 수 있다.이러한 요소들은 결국 그의 작업에서 모호함과 불확실성,허구
를 집합시킨 결정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잘 알려진 작품인 <어느 프랑스 가족의 1939~1964의 사진 앨범>(

판43)
역시 홀로코스터에 관한 것들을 직접적으로 표상하고 있지는 않지만
잊혀진 기억에 관해 이미지와 캡션의 충돌을 야기 시키는 대표적 작업 중
하나이다.친구 마이클(
Mic
helDur
andDe
sse
rt)
의 가족 앨범에서 선별한 사

62)MarianneHi r
sch,Fami
lyFr ame s:phot
ography,narrat
iveandpost
memor y,p.
263.김
지예.op. ci
t.
,p.
22.재인용.
63) Georgia Marsh,
'An Int
erview wi t
h Chr i
sti
an Bol t
anski
, < Chri
sti
an Boltans
ki
Recnsti
tuti
on>,LondonWhitechapleArtGall
ery,1990,p.
10.김지예,「사후 기억을 통한
홀로코스터의 시각적 표상」,홍익대 석사,2 010,p.
63,재인용.

- 56 -
진들을 활용해 누구나 알고 있고 경험 했을법한 일상적인 모습의 사진을 활
용해 보여주고 있는 이 작업은 한 개인의 특수한 기억 보다는 누구나 경험
했을 법한 - 앞서 볼탕스키는 개인의 역사가 보편적 이어야 한다는 것을
앞서 언급한바 있다 - 사진들로 채워놓아 관객들로 하여금 어떠한 지나온
과거의 시간을 연상을 유도하는 오브제로서 역할을 임명하고 있다.즉 사진
을 보는 이들은 사진을 통해 평화롭고 따뜻한 가족사를 관람하고 자신의 추
억을 고스란히 떠올리며 아련함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그러기에 사진 속
상황의 주인공의 기억은 곧 우리 모두의 기억으로 전이되면서 개인의 기억
은 곧바로 응시자 모두의 공통된 경험과 기억을 암시하게 된다.그러나 볼
탕스키는 그러한 기억의 틈에 망각이라는 시간을 숨겨두고 있다.즉 캡션에
서 이야기 하듯 1939~1964년은 프랑스사에 있어 전쟁과 전후 복구 등 너무
나 큰 상처와 통증들로 얼룩진 시기이다.이런 시간을 볼탕스키는 ‘
평화로
움’
이라 상징될만한 이미지들로 채워 놓음으로서 결국 잊혀져버린 망각의
기억에 관해 이야기 한다.뿐만 아니라 그는 이 작업에 대해 “
나는 유대인
가정에서 왔다는 것을 결코 말하지 않았다.나는 그것을 평범한 프랑스 가
정으로 묘사했다.
”6) 라고 밝힌다.이것은 이러했어야할 자신의 시간 더 나
4

아가서는 시련의 시간을 통해 사라져버린 유대인 전체의 향수어린시절 향한


한없는 동경을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이러한 유년 시절로 대표되는 애
수는 <샤스 고등학교><퓨림축제>등 홀로코스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
업에서 보다 더 구체화 되어진다.
이처럼 볼탕스키의 작업에서 우리는 실재와 허구 그리고 그 사에 존재하는
모호한 경계에 관한 그의 관심을 확인 할 수 있다.그리고 그 바탕에는 홀
로코스터라는 집단 기억이 남긴 상흔이 깊게 자리하고 있음 또한 알 수 있
다.

2)역사 다시 바라보기로써의 이미지


앞 절에서 언급하였듯이 볼탕스키는 전후 세대 유태인으로 홀로코스터를

64)LynnGumpe
rt,Chr
ist
ianBol
tanski
,Fl
ammar
ion,
1994,p.
97,김지예,op.
ci
t.
,p.
27,재인용.

- 57 -
자신의 작업으로 발열시키기 위해 다양한 오브제들을 수집했다.이렇게 수
집된 일련의 오브제들 중에 볼탕스키가 초반에 작업한 <재구성> 시리즈부
터 <어둠의 교훈>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끝임 없이 다루고 있는 오브제는
사진이다.이러한 바탕에는 사회학자이면서 사진에도 조회가 깊어 피에르
브르디외(
Pie
rreBour
die
u,1930~2002)
와 함께 아마추어 사진을 통해 사회
학적 분석을 시도한 도서를 공동 집필해 출판하기도 한 형 뤽 볼탕스키
(
Luc Bol
tans
ki,1940~)
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
다.볼탕스키가 이렇게 사진 그 중에서도 아마추어 사진 즉 스넵 사진을 자
주 이용하는 것은 ‘
발견된 사진’
의 개념으로 스넵 사진들이 가지는 절대적
평범성,그리고 어떠한 예술적 특징을 가지지 않는 특징 때문이다.말하자면
리히터가 흑과 백 양쪽을 포기하면서 둘 다를 아우르는 회색의 화면을 택해
양쪽을 모두 택한 것처럼 스넵 사진의 평범성과 일상성은 작가로 하여금 자
신의 의향대로 조작과 재생이 허락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사진
의 보편성은 이분법적 논리를 거부고 많은 것을 포용하려는 사고에 바탕 함
으로서 개개인의 존엄성과 자유의 존중,중심의 변방에 대한 횡포의 탈피
등과 더불어 후기구조주의의 주요한 핵심 키워드 중 하나를 담지하고 있다
고 할 수 있다.스넵 사진을 통해 작가의 의향대로 재구성된 그럴듯하게 꾸
며진 이야기들은 ‘
스토리아트’
라는 개념미술의 한 장르를 이루기도 한다.볼
탕스키는 이런 종류의 개념 미술을 개척한 대표적 작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실지로 볼탕스키의 많은 작업들을 사진에 의지해 진행하고 있고,뒤이
어 다룰 작업들을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확인 할 수 있다.
볼탕스키가 홀로코스터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작업에 드러낸 것은 1987년
부터 시작된<샤스 고등학교>연작과(
도판51.
52)1988년부터 시작된<뷰림축
제>연작(
도판48~50)
에서부터 하고 할 수 있다.
<샤스 고등학교>와<퓨림축제>연작은 볼탕스키가 처음으로 1930년대 유대
인의 사진을 직접 이용한 작품이다.
(도판44.
45)유대인들의 단체 사진에서
얼굴만을 분리해 전기줄과 램프,주석상자 그리고 옷들을 이용해 설치한 이
작업에서 사진 속 사람들의 모습은 크게 확대되어 개개인의 모습은 정확히
판단 할 수 없고 매 사진마다 전등이 정면에서 비추고 있어 그 모습을 판단

- 58 -
하기에는 더더욱 어려움이 있다.마치 취조를 위해 켜진 눈을 아리는 불빛
으로 인해 상대방을 전혀 바라 볼 수 없는 자신만을 주시하는 조명을 연상
시키는 듯하다.그리고 사진이 확대되면서 같이 확대된 음영들은 괭한 눈과
코 ,입을 상기시키며 살점은 모두 사라진 두개골의 모습으로 까지 비춰진
다.이는 그의 철저한 계획아래 택해진 어두컴컴하고 비정상적인 공간들과
함께 홀로코스터에 의한 죽음을 관람객에게 직접적으로 현시한다.
이 작업에서 사용된 사진들은 1931년 빈의 유대인 고등학교 졸업사진과
1939년 퓨림 축제 중인 분장한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단체 사진을 이용
한 작업이다.이는 촬영된 시점으로 볼 때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로 이송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실제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피해자로서 당시에
존재했음을 분명히 증거 해 주고 있는 오브제이다.그러나 실제 샤스 고등
학교는 집단수용소로 이송된 유대인들을 위한 기관이었으며 사진 속 인물들
6
은 대부분 생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 이렇듯 그의 작업은 홀로코스터의

죽음을 다루면서 조차도 한편으로는 사실과 전혀 상관없는 대상들을 화면으


로 끌어 들이는 이중성을 드러낸다.이러한 방식은 앞절에서 살펴본 두 작
품의 작업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이는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실에 대한
진정성에 대해 스스로 반문하는 행위인 동시에 역사적 왜곡과 불연속성에
대해 물어오는 것으로 평가 되어질 수 있다.허쉬 역시 “
내용이 빈 상자들
과 사진의 보편성은 우리에게 사진의 기록적 측면에 대해 믿는 것 그리고
의심하는 것 둘 다를 허락한다(
…)지식과 특정성에 대한 상실을 인정하면서
66
도,기억해야할 필요를 확장한다”라고 말한다. )

아무리 역사적 사실이 사실로 기억되기를 바라더라도 역사가 기록하는 기


억이란 여전히 일부 권력에 양도된 채 기록된 기억일 뿐이다.자신 또한 유
태인 피해자 2세대이면서도 전쟁의 기억이 온전하지 못 하듯 전승되지 못하
는 기억들은 어느 순간 망각의 강물 속에 휘말려 사라지고 말 것임을 그는
표명한다.이것은 누군가 전혀 다른 역사를 이야기 한다 하더라도 그대로

65)Br
ettAshley Kaplan,
“Ae s
thet
icMour
ning:Ans e
lm Kief
er,Chr
ist
ianBol
tans
ki,And‘
Li
ghtPulsi
ngThr oughAs h’
”,p.
132
.김지예,20 10,op.
ci
t.
,p.20,재인용.
66)Mari
anneHirsch,FamilyFrames:phot
ography,narr
ati
veandpostmemor
y,p.263.김
지예.op.ci
t.
,p.70,재인용.

- 59 -
받아들여 질 수 있는 허구성을 그리고 하나의 완전히 정리된 듯 보이는 사
건 안에 들어 찬 뒤틀림,부재,무수히 많은 구멍들을 정의한다고 할 수 있
다.이는 곧 우리가 객관이라 믿고 있는 아카이브들 속에 과연 얼마나 많은
왜곡과 은패가 공존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 질수 있다.그렇다면
관객들은 이러한 허구와 불확실성,뒤섞임으로 드러나는 작업 안에서 무엇
을 선취해야하는 것일까? 남겨진 것은 불확실성과 의문뿐이다.즉 그 의문
과 불확실성은 기존에 받아들여졌던 담론과 체제에 대한 흔들기로 이어 질
수밖에 없고,최대한 객관에 가깝게 가기위한 노력으로 이어지기를 촉구하
는 것이다.결국 볼탕스키의 작업은 내가 객관이라 믿는 것들이 얼마나 그
렇지 않을 수 있는 가로 귀결되는 철저히 계획된 허구적 짜임이라 할 수 있
다.
볼탕스키가 허구성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오브제로 택한 사진은 결국
확실한 알리바이를 형성하는 듯 한 사진의 맹점을 찬양하는 것이다.즉 맹
신에 대한 불확실성을 보여주기에 가장 완전한 오브제로 인정되어졌기 때문
이다.앞서 Ⅱ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점점 더 역사의 가속화가 심화되면서 과
거에 대한 기억은 가속화와 발맞춰 더더욱 흐려지기만 한다.그의 작업 속
에 등장하는 확대 된 흐린 사진 역시 기억의 망각 즉 잊혀짐과 연결 지어
질 수 있다.리히터의 흐림은 보다 더 자의적 이였다면 볼탕스키의 흐림은
기억의 변질로 설명되어 질 수 있다.
또한 그는 사진을 사용하는 것에 관하여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 “
내가 사진
매체를 쓰는 데는 사진이 삶을 상실한 죽음과 관계해 있기 때문이다,사진
은 찍자마자 3초 후에는 실상은 지나가 버리고 운동감은 얼어붙어 그 순간
죽어 버린다.어떤 사람,어떤 주체는 죽었고 단지 한 장의 종위 위에 기록
된다.그러므로 사진은 죽음을 얘기하게에 적절한 매체이다.
”라고 말한 바
6
있다.7
) 이는 그가 사진을 사용해 기억 이미지를 보여주는 이유 중 또 다른

측면을 확인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기가 볼탕스키의 작업에서 홀로코스터와 관련해 사유하게 되는 또 하나

67)l
ajoumalde
scat
acombe
s,kanal
.N12/
13,199
1.신혜정,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작품에
나타난 사진성」,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1 0,서양미술사학회,199
8,pp.
150~15
1.

- 60 -
의 정서는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직 어린아이 이거나 사회
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확인된다.
이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송두리째 홀로코스터라는 기억에 저당 잡혀버린
것에서 출발하는 안타까움과 고리를 맺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제단에 받
쳐져야 할 만큼 숭고한 시간<기념비(
1985)
>(도판46,
47)
들은 다시는 돌아 갈
수도 없음은 물론이며 서서히 자신의 기억에서도 잊혀져가고 있는 현재와
완벽한 단절로서 존재하는 시간인 것이다.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허구로
다룬 작품들에 대해 “
나는 내 초기 작들에서 내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해
이야기 하려고 했다.그러나 나의 진짜 어린시절은 사라졌다.나는 이것에
대해 자주 거짓말을 했다.이 시기의 진짜 기억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
다,
” 68
라고 말한다. ) 이는 그 개인의 시간이 결국 나치즘과 홀로코스터라는

재앙의 층리를 지나오면서 얼마나 많은 자신의 과거를 잃게 했는가를 생각


하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흐린 잔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대인 모두의 애수가
깃든 시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그리고 이제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유대인
을 대변할 수 있는 정체성이라는 것은 그가 카셀도큐멘트<문서보관소
(
1987)
>(도판53.
54)
와 <페르손(
2010)
>(도판55.
56)
에서 보여주었듯이 포로수
용소와 밀실의 공포로 암시되는 죽음의 흔적과 개인성이 드러나지 않는 익
명의 더미로서의 존재 인 것이다.결국 나치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쓸모없음
의 범주로 분류된다라고 하는 홀로코스터의 원리로 점철되어지는 유대인으
로서의 삶을 드러내는 것인 동시에69) 현재 집적 되고 있는 아카이브에 대한
의구심이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즉 자신들의 현재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진술(
stat
ement
)은 일정한 시스템 속에서 구성자의 편의와 목적과
유리한 방향으로 걸러지고 정재된 것일 뿐이다.이와 축을 나란히 해 현재
집적되고 있는 아카이브 또한 과거에 나치들이 자신의 선조들에게 행했던
만행만큼이나 확인되지 않는 수수께기 같은 무의미한 집적일 수 있음을 시
사한다.

68)김지예,20 11,op.ci
t.
,.p.
27,재인용.
69)ErnstVan Alphen,
“Vi sualAr
chi
veasPr
epos
ter
ousHi
stor
y”,Ar
tHi
stor
y,vol
.30
,
no.3,20
07,p.
368.

- 61 -
이러한 지점이 앞장에서 살펴본 키퍼가 미술의 고고학적 잠재력을 언급한
부분과 닿아 있는 부분이다. 과연 홀로코스터 이후 아도르노(
The
odor
Wi
ese
ngr
und Ador
no,1903~1963)가 “
서정시를 쓰는 것은 불가피하다”

고 말하고 있는 미의 무책임에 대해 예술이 얼마나 효과적일 있는 가를 보
여주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살펴본 것처럼 볼탕스키는 전후 세대 유태인으로써 홀로코스터를 자신의


작업으로 발열시기 위해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관객들을 혼란시킨다.그리
고 허구를 사실로 변장시키기 위해 가장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방법을 암시
하는 사진과 아카이브의 소재들을 사용해 사건을 재구축한다.그러나 이는
단순한 사건의 재구성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홀로코스터라는 집단적 기억
이 망각되고 흐려지는 것에 대한 교훈임과 동시에 전승될 역사적 기억에 대
한 우려라고 파단하여야 바람직 할 것으로 사료된다.

이상 우리는 홀로코스터라는 특수한 기억을 지닌 3명의 작가들을 통해 집


단의 기억이 개인의 기억과 중첩되어 어떻게 이미지화 되는가에 관해 살펴
보았다.이러한 집단의 기억을 자신의 삶속으로 끌어들여 이미지화 하는 접
근방식에는 다소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확인되지만 홀로코스터 기억의 문
제에 대해 ‘
어떻게 기억 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다.
리히터는 이들 중 전쟁을 직접 보고 격은 세대로서 전쟁이 종식 된 후 이
데올로기의 변화와 그 변화에 따른 정당성의 평가가 확연하게 달라지는 상
황 속에서 겪은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에 대해 흐린 화면과 사진의 수집,재
촬영,덧그리기 등의 방식을 통해 닫혀져 버린 역사와 접촉하고 모호한 자
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이미지화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혼란은 전후세대인 키퍼도 겪는 문제였지만 키퍼는 리히터 보다 적
극적으로 1세대와의 틈을 들여다보기를 바라고 있다.이 또한 키퍼와 리히
터의 개인적인 삶이 조금은 다른데서 야기되는 문제인 것으로 판단된다.전
쟁의 화염 속을 직접 지나오지 않음으로서 무조건적인 과거와의 단절로만
이행되는 사회분위기를 받아들이기에는 키퍼에게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그

- 62 -
리고 이러한 무조건적인 침묵과 단절만으로는 모든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자신들의 트라우마에서 벗어 날 수 없음을 확신하고 직접 이데올
로기의 검은 그림자를 체험하기도하고,장소로 대표되는 기억의 흔적 안에
서 모두가 체험을 통해 과거가 맹목적으로 잊혀지지 않기를 소망하였다.그
렇게 될 때만 진정한 애도로 이어 질 수 있다는 그의 신념과 예술가로서의
책임의식을 담아 어둡고 거대한 홀로코스터의 공간을 확대하고,과장된 원
근법을 통해 이미지화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본 볼탕스키는 전후 세대 유태인으로서 홀로코스터를 자신
의 작업으로 발열시켰다.이를 위해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관객들을 혼란시
키고 있음을 확인했다.이는 단순히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이야기 하는 것
을 넘어 모든 역사속의 기억들이 온전하게 이어지지 못하고 망각되고 흐려
지는 것에 대한 염려에 출발점을 두고 있으며,현재를 지나고 있는 기억들
이 또다시 역사라는 이름으로 기록 될 때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작업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 63 -
Ⅳ.결론

홀로코스터라는 특수한 기억을 지닌 리히터,키퍼,볼탕스키 3명의 작가들


의 작업을 통해 ‘
집단의 기억’
이 ‘
개인의 기억’
과 중첩되면서 어떻게 상호작
용하고 이미지화 되는가에 관해 살펴보았다.그리고 이들 3명의 작가들의
작업을 살펴보는데 있어 기억 담론은 단일한 역사적 입장보다 유연한 방식
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줌을 확인하였다.이와 더불어 이들의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사진매체와 연관성을 확인하였기에 이 점도 주시하여 살펴보았
다.

우선 리히터의 경우 자국 내에서는 연합국의 피해자로 위치할 수 있는 트


레스텐 폭격 현장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자신의 가족을 뒤 덮은 전쟁의 기
억 그리고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 오면서 겪었던 이데올로기의 변화라는
개인적 기억들이 홀로코스터라는 집단 기억과 중첩 되면서 그를 항상 동․
서독 이데올로기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가장자리를 맴돌게끔 만들었
다.그리고 이러한 잔인할 정도로 혼성된 그의 삶은 그의 작업에도 투영되
어 흑과 백 어디에도 닿을 수 없으면서,둘 다를 포옹하는 회색빛의 흐릿한
사진 화면으로 자신의 회화이미지를 귀결시키게끔 만들었다.이것은 스스로
를 보호하기 위한 자기검열이 강요한 한 방도임과 동시에 그 또한 피해자이
면서도 가해자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리히터 스스로가 허용할 수 있는 한계
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이는 또한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것은 결국 이데올
로기에 헌신하는 예술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자신의 삶,조국의 삶을 통해서
너무나 잘 숙지하고 있는데서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이러한 상황
에 놓인 리히터가 자신의 정체성 혼란의 문제를 넘어서 객관적 중립을 유지
하며 예술가로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든데 가장 큰 공헌을
한 매체가 사진이었음도 확인 할 수 있었다.즉 사진이 가지고 있는 시각의
객관성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획득함으로서 그는 홀로코스터라는 기억을 이

- 64 -
미지화 할 수 있었고 자신만의 당당함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하겠다.그러나
그는 이러한 한계치에만 머물지 않고 망각의 흐린 물결 속에 가두려했던 기
억들을(
deat
h dr
ive
)다시금 적극적으로 객관화 하기위해(
li
vedr
ive
)뛰어들
어 기억해야할 역사들과 접촉하고 있음을 1962년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
는 거대 프로젝트인<아틀라스>를 통해 파악하였다.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가 발 딛고 있는 사회를 사랑한다는 것이 현실사회를 마음답게 포장해 미화
하는 맹목적 애착과 순응만으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
다.
그리고 홀로코스터의 역사적 과오를 기꺼이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
들여야만 하는 쉽지 않은 삶 속에 놓여 있던 또 다른 한 사람인 키퍼는 전
후 독일에서 출생해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가지지 못했다.뿐만 아
니라 독일의 불미스런 과거에 대해 무조건적 침묵과 경제 부흥에만 앞장서
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성장해 앞선 세대와 극심한 내적․외적 갈등 겪어야
만 했다.이러한 전승된 문화적 기억에만 의존해야하는 상황을 해결하고 자
신의 정체성 문제와 민족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과거의 기억
과 적극적으로 대면하기를 원했다.그러기에 키퍼는 당시 금기시 되었던 위
험을 무릅쓰고 독일역사를 직접적으로 자신의 작업으로 끌어들여 이미지화
하였다.이는 기억을 기억 하려는 행위가 마음에 더 깊은 상처를 새롭게 만
들어 준다고 하더라도 그 기억과 마주해야만 한다는 책임의식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확인하였다.이는 동시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인간다움을 잃
게 된 역사를 기억하고 그 기억의 기억을 다시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할
소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민족의 트라우마
에서 벗어 날 수 있음 분명히 하기 위한 것으로도 해석되었다.이를 위해
키퍼는 스스로가 이데올로기의 심장부에서의 체험을 떳떳하게 사진으로 남
김으로써 스스로가,자신의 민족이 그러했음을 증거 하였다.뿐만 아니라 키
퍼는 홀로코스터의 기억으로 대표 되는 독일의 장소들을 남겨진 자료에 근
거하여 거대하고 왜곡된 원근법을 통해 자신의 작업에서 승화 시켰다.이는
사라져버린 역사적 공간을 다시금 재건해 열어 보임으로써 물리적 흔적과
정신의 상흔이 만나 과거가 다시 체험되고 그 안에서 진정한 속죄와 애도가

- 65 -
이루어지기를 바램 하는 또 하나의 회화적 퍼포먼스와도 같은 것이라 이해
된다.왜냐하면 장소란 결코 그 장소를 경험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고 장소는 장소 경험의 주체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즉 키퍼가 다시금 재건한 상흔의 장소 이미지는
결과적으로 독일의 치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존재로 대표되어 지게 되는
것이다.결국 키퍼가 신극우주의자라는 극심한 통증을 견디면서 까지 자신
의 회화적 이미지를 철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망각을 택한 이들과 정
면으로 마주서서 새로운 감염에 노출되는 독일을 치유하기 위함이라는 예술
가로서의 분명한 소명을 가졌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볼탕스키는 키퍼와는 또 다른 상흔,즉 망각으로부터 야기된 문제들을 떠
안은 전후 유태인으로서 홀로코스터를 자신의 작업으로 발열시켰다.볼탕스
키에게 홀로코스터의 기억은 전승된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기억임에도
언제나 분명한 존재로 자신을 억압하고 맹목적 믿음을 요구하는 한계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기억의 대상임을 알 수 있었다.키퍼가 가해자로서 이러
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직접 체험하기를 원했다면 볼탕스키는 피해자로서
객관적 사실들과 관련된 사진,옷,상자들 즉 증거품들의 수집을 통해 피해
자 1세대와 2세대 사이에 존재하는 경험의 부재와 막연한 공포와 불안감의
틈들을 극복하는 쪽을 택했다.그 이유는 이렇게 수집된 물건들은 ‘
분명한
사건’
에 대한 보다 ‘
객관적인 증거’
를 제기함으로 인해 보다 확실하고 명확
하게 홀로코스터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러한 수집 행위는
곧 증거품들이 아무리 강력한 사실을 이야기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증
발해버리고 없는 것들을 대신해 자리하고 있는 것일 뿐이며,자신에 의해
또 다시 선취된 기억일 뿐임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는 결과도 동시에 가져
왔다.그로 인해 그는 허구를 사실로 변장시키기 위해 가장 객관적이고 역
사적인 진실을 암시하는 사진과 아카이브의 소재들을 사용해 사건을 재구축
해 홀로코스터를 드러내게 된다.즉 자신의 체험 속에서 확인된 ‘
역사의 진
정성’
이라는 문제가 그로 하여금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관객들을 혼란시키
는 방식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단순한 사건의 재구성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홀로코스터로 대표되는 집단

- 66 -
적 기억의 망각과 잊혀짐,흐려지는 것에 대한 교훈임과 동시에 선취와 배
제의 과정을 통해 전승될 역사적 기억에 대해 우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
다.
이와 같은 홀로코스터라는 집단 기억을 이미지화하는 작가들의 작업 연구
과정을 통해 그들의 이미지 안에는 본인의 개인 기억을 넘는 집단 기억이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했음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 도달
할 수 있었다.

우선 집단의 기억을 자신의 삶속으로 끌어들여 이미지화 하는 접근방식에


는 다소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확인되지만 홀로코스터와 같은 집단 기억의
문제에 대해 ‘
어떻게 기억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두 번째는 그러한 공인된 기억이라는 것은 승자의 입장에서 쓰
여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왜곡과 은패 드러나지 않는
상처의 기억들이 내재 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음으로 남겨진 것에 대한 맹목
적 믿음이 더 큰 비극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며 이러한 비극과 맞설 수 있
는 것이 개인의 기억이라는 점이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과거를 올바
르게 인식하기 위한 출발점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홀로코스터와 같은
재앙으로 인권이 짓밟히지 않아야 한다는데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즉 홀로
코스터의 문제를 어떻게 기억 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예술가들의 주요 관
점 역시 총을 들지 못한 익명의 존재들에 대한 기억을 기억 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인간다움도 잃지 않을 수 있을 뿐만아니라 후대 공동체는 보나 낳은
삶을 이야기 할 수 있음을 결과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 도출에 바탕이 된 ‘
기억 담론’
은 집단의 기억을 이야기
함에 있어 중심에서 잊혀졌던 존재들 즉 비주류에 속해 있던 집단들의 목소
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즉 지배담론으로 군림하면서
강요되거나 조작되고 단일적으로 역사화 된 기억과 변방에서 움츠렸던 개개
의 기억들 사이에 벌어져 있던 틈들을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미술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소수자의
기억이 공인된 기억과 맞서 자기 몫을 요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기억과

- 67 -
기억 사이의 틈들을 이해를 통해 메우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현재라는 시점에서 잘못 매어진 매듭들을 풀어서 다시 묶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을 시도하고 획일적으로
강요되던 시각의 문들의 열어 보이는 것 이것은 홀로코스터 이후 예술에게
주어진 사명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정보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와 대변되
는 일반인으로서의 예술가는 특정 사건에 대한 접근 자체가 불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그래서 객관화 하기는 매우 어렵다.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곧
다양한 시선으로 읽어 낼 수 있는 충분한 여지를 예술가들에게 쥐어 준 것
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즉 기존의 공적 이카이브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예술가들의 시선이 사실과 거리가 있다고 하더
라도 기존 담론과는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읽힐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함으로
서 최소한 이분법적인 사고로부터 야기 되었던 많은 문제들에 대해 귀를 기
울이게 되는데 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이는 데리다가 그의 저서
『아카이브 열기』 서문에서 이야기 듯 아카이브라는 것이 정해진 룰 안에
서는 최대한 권위성을 가지지만 (
aut
hor
itar
iant
ranspar
ent
),반면 그 안에는
수많은 권위 있는 논의와 증거들이 은폐되어(
aut
hor
itat
ivec
onc
eal
ed)존재
하고 있다는 상반되는 두 성격을 전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그리고 이와 더불어 사진이 아카이브를 다루는 작업에 많이 사용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이해되는데 사진은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
는 과거를 급조되지 않은 물질적 증거로서 재현시켜 주기 때문이다.뿐만
아니라 사진은 사실에 대한 증거성,누구나 공감하는 공통적 교감,그리고
이어진 선이 아닌 컷으로만 남는 즉 단선적 특수성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특징들은 결국 한 장의 사진이 가진 리얼리즘 자체를 넘어 사진의
제작과 사용과정,그 안에 내제하는 이데올로기성을 폭로하고 사진 매체의
중립성이나 순수성에 대한 믿음을 공격하는 일이 가능하게 하는 매체적 특
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진의 특징을 기반으로 하여 현재 많은 예술가들은 사진을 자신의
감정을 산출하는 도구가 아닌 관객에게 감정을 지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

- 68 -
하고 관객에게 새로운 인식의 통로를 열어주는 은유적 예시(
met
aphor
ical
e
xempl
if
icat
ion)
로서 우리 앞에 내보인다.이는 곧 관객들에게 맹목적 지시
성이 없이 의미층을 열어놓음을 의미한다.이러한 상황 안에서 관객들은 무
수한 다층적 그레이 죤(
gray z
one
)을 형성하게 된다.이는 곧 예술가들이
다양한 아카이브를 활용해 작업하는 이유와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그리고 사진 아카이브를 활용해 이러한 두터운 층리를 형성하기에는
기술의 힘을 빌은 완성도 높은 사진보다는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평범한 일
상의 사진이 보다 더 유용하다.평범한 일상의 사진은 관객을 경험의 대상
자로 끌어 들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당시를 대변하는 다양한 코드가 자연
스럽게 존재하고 있게 됨으로서 지극히 개인적인 사진들일지라도 단순한 개
인의 기억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공동의 기억을 이야기하는데 좋은 단서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본인은 홀로코스터와 관련된 기억을 다루는 작가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홀로코스터 보다 더 현재와 가까운 시점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젊은 작가들
-테시타 딘(
Tac
ita De
an)
,조 레너드(
zoe l
eonar
d), 로나 심슨(
Lor
na
Si
mpson)
등-에게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의 작업도 표면적으로 지극히 사소한 개인의 기억들을 들추는 작업을
진행하는 듯 보여 진다.그러나 이들의 작업 역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지
극히 개인적이어 보이는 기억 너머에 있는 공동체적인 기억과 레미니센스
(
remi
nisc
enc
e)70
)를 풀어내기 위한 방식으로써 개인적 기억을 들추는 것으
로 사료된다.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본인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을 공적
기억들로 승화 시키는 작가들의 작업에 관한 관심을 추후 과제로 남겨두고
자 한다.

70)레미니센스( r
emini
sce
nce
):회상,추억,옛 생각 등 잊혀진 기억들과 연관 된다.이경률,
op.
ci
t.
,pp.
169~176

- 69 -
<도판목차>

도판1. 게르하르트 리히터, 2439<폭탄>, 1963, 130 x 180 cm


도판2. 게르하르트 리히터, 9053<비행기>, 1964, 131 x 86 cm
도판3. 리히터, 2463<바닷가에서의 가족>, 1964, 150 x 200 cm
도판4. 리히터. 2560<호르스트와 강아지>, 1965, 80 x 60 cm
도판5, 게르하르트 리히터, 87<마리엔느 이모> 1965, 120×130 cm
도판6. 게르하르트 리히터, 100<하이데씨>, 1965, 55×65 cm
도판7. 게르하르트 리히터, . 85<루디삼촌>, 1965, 87×50 cm
도판8.게르하르트 리히터, <Gerhard Richter: Panorama>, Centre Ponpidou,
전시장면, 2012. 6.6~9.24
도판9. 아비 바부르그, 1929<기억 아틀라스>
도판10. 아비 바부르그, 1929<기억 아틀라스>
도판11. 게르하르트 리히터, 4433<아틀라스>2sheet, 1962, 51.7 ×66.7cm
도판12. 게르하르트 리히터, 4442<아틀라스>11sheet, 1963, 51.7 ×66.7cm
도판13. 게르하르트 리히터, 4447<아틀라스>16sheet, 1967, 66.7 ×51.7cm
도판14. 게르하르트 리히터, 4448<아틀라스>17sheet, 1967, 66.7 ×51.7cm
도판15. 게르하르트 리히터, 4449<아틀라스>18sheet, 1967, 66.7 ×51.7cm
도판16. 게르하르트 리히터, 4450<아틀라스>19sheet, 1967, 66.7 ×51.7cm
도판17. 게르하르트 리히터, 4451<아틀라스>20sheet, 1967, 66.7 ×51.7cm
도판18. 게르하르트 리히터, 5057<아틀라스>639sheet. 1997, 51.7 ×71cm
도판19. 게르하르트 리히터, 5058<아틀라스>640sheet. 1997, 51.7 ×71cm
도판20. 게르하르트 리히터, 5059<아틀라스>641sheet. 1997, 51.7 ×71cm
도판21. 게르하르트 리히터, 5060<아틀라스>642sheet. 1997, 51.7 ×71cm
도판22. 게르하르트 리히터, 5061<아틀라스>643sheet. 1997, 51.7 ×71cm
도판23. 게르하르트 리히터, 5062<아틀라스>644sheet. 1997, 51.7 ×71cm
도판24. 게르하르트 리히터, 5063<아틀라스>645sheet. 1997, 51.7 ×71cm
도판25. 게르하르트 리히터, 5064<아틀라스>646sheet. 1997, 51.7 ×71cm
도판26. 안젤름 키퍼, <점령>, 1969
도판27. 안젤름 키퍼, <점령>, 1969
도판28. 안젤름 키퍼, <점령>, 1969

- 70 -
도판29. 안젤름 키퍼, <점령>, 1969
도판30. 알버트 스피어, <총독 관저>, 1939
도판31. . 안젤름 키퍼<실내>, 1981, 287×311cm
도판32. 알버트 스피어, <제국의 대사관>, 1939
도판33. 안젤름 키퍼, <알 수 없는 화가>, 1983, 189.9 x 260.4cm
도판34. 안젤름 키퍼, <독일의 정신적 영웅들>, 1973, 307×682cm
도판35. 빌헤름 크라이스, <전쟁영웅을 위한 봉안실>, 1939
도판36. 안젤름 키퍼, <슐라미트>, 1983, 290×479cm
도판37. 1945년 비르케나우 집단수용소의 문으로 이끄는 사진
도판38. .안젤름 키퍼, <철길>, 1986, 220x380cm
도판39. 안젤름 키퍼, <부른히데에게 가는 비르게나우 집단수용소>
도판40. 안젤름 키퍼, <영웅의 상징>, 49x76cm
도판41. 안젤름 키퍼, <템펠호프>, 2010, 380 x 760cm
도판42.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10장의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자화상
1946-1964>, 1972
도판43.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어느 프랑스 가족의 1939~1964의 사진 앨
범>, 1971
도판44. 비엔나 샤스 고등학교 졸업반, 1931
도판45. 파리 이디슈 언어학교 퓨림축제, 1939
도판46.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기념비>, 1985
도판47.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기념비>, 1985
도판48.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보관 : 퓨림축제>,1989
도판49.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보관 : 퓨림축제>,1989
도판50.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보관 : 퓨림축제>,1989
도판51.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샤스고등학교>, 1991
도판52.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샤스고등학교>, 1991
도판53.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아카이브>, 1987
도판54.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아카이브>, 1987
도판55.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페르손>2010, 프랑스 그랑 팔레
도판56. 아우슈비츠 전시관 내 유대인 유품

- 71 -
도판1. 리히터, 2439<폭탄>,
1963, 130 x 180 cm

도판4. 리히터. 2560<호르크


스와강아지>, 1965, 80 x 60

도판5. 리히터, 87<마리엔느 이모>, 1965,


도판2. 리히터, 9053<비행기>, 120×130cm
1964, 131 x 86 cm

도판6. 리히터, 100<하이데씨>,


도판3 리히터, 2463<바닷가에서의 1965, 55×65 cm
가족>, 1964, 150 x 200 cm

- 72 -
도판10. 아비 바부르그, 1929,
<기억아틀라스>

도판7. 리히터, 85<루디삼촌>,


1965, 87×50 cm

도판11. 리히터, 4433<아틀라스>


도판8. 리히터, <Gerhard Richter: 2sheet, 1962, 51.7 ×66.7cm
Panorama>, Centre Ponpidou, 전시장면,
2012. 6.6~9.24

도판9. 아비 바부르그,
1929<기억아틀라스> 도판12. 리히터, 4442<아틀라스>11sheet,
1963, 51.7 ×66.7cm

- 73 -
16sheet

19sheet

17sheet

20sheet

18sheet

도판13~17 . 리히터,
4447~4451<아틀라스>16~20sheet,
1967, 66.7 ×51.7cm

- 74 -
639
sheet 643
sheet

640
sheet
644
sheet

641
sheet
645
sheet

642
sheet 646
sheet

도판 18~25. 리히터, 5057~5064<아틀


라스>639~646 sheet. 1997, 51.7 ×71cm

- 75 -
도판26~29. 키퍼, <점령>,1969

도판30. 알버트 스피어, <총독관저>, 도판31. 키퍼, <실내>1981, 287×311cm

도판32. 알버트 스피어, 도판33. 키퍼<알 수 없는 화가>


<제국의대사관>, 1939 1983, 189.9 x 260.4cm

- 76 -
도판34. 키퍼, <독일의 정신적 영웅들>,
1973, 307×682cm
도판37. 1945년 비르케나우
집단수용소의 문으로 이끄는 사진

도판35. 빌헤름 크라이스, <전쟁영웅을


도판38. 키퍼, <철길>, 1986,
위한 봉안실 >1939
220x380cm

도판36. 키퍼, <슐라미트>, 1983,


290×479cm 도판39. 키퍼, <부른히데에게 가는
비르게나우 집단수용소>

- 77 -
도판43. 볼탕스키,
<어느프랑스가족의
1939~1964의 사진
도판40. 키퍼, <영웅의 상징>, 49x76cm 앨범>, 1971

도판41. 키퍼, <템펠호프>,2010, 도판44. 비엔나 샤스 고등학교 졸업반, 1931


380 x 760cm

도판42. 볼탕스키, <10장의 크리스티앙 도판45. 파리 이디슈 언어학교 퓨림축제,


볼탕스키 자화상 1946-1964>, 1972 1939

도판46.47.
볼탕스키,
<기념비>, 1985

- 78 -
도판51.52. 볼탕스키, 샤스고등학교, 1991

도판53.54. 볼탕스키,<아카이브>, 1987

도판55.
볼탕스키,
<페르손>
2010,
프랑스
그랑 팔레

도판56. 아우슈비츠
전시관 내 유대인
유품

도판48~50. 볼탕스키,
<보관 : 퓨림축제> ,1989

- 79 -
<참고문헌>

단행본
• 이토우 도시하루, 『사진과 회화』, 김경연 역, 시각과 언어, 1994.
• 진 시첼, 『현대미술의 변명 : 포스트모더니즘 미술가 25명과의 인터뷰』,
양현미 역, 시각과 언어, 1996.
• Jacuques Derida, 『Archive Fever : A Freudian Impress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 이영철, 『현대미술의 지형도』, 시각과 언어, 1998,
• 미셜 푸코, 『지식의 고고학』, 민음사, 2000.
• Daniel Arasse, 『Anselm Kiefer』, Thames&Hudson, 2001.
• 이상빈,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책세상, 2001.
• 수잔브라이트, 『예술사진의 현재』, 이주형 역, 월간사진, 2008.
• 지첼 프로인트, 『사진과 사회』, 성환경 역, 눈빛, 2004.
• John Berge & Jean Mohr,『말하기의 다른방법』, 이재희 역, 눈빛, 2004.
• 김경률, 『현대미술의 사진과 기억』, 사진마실, 2005.
• 위르켄 슈라이버, 『한가족의 드라마 독일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 김정
근,조이한 역, 한울, 2005.
• 전진성,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 휴머니스트, 2005.
•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의 상실』, 김덕현외 역, 논형, 2005.
• Graham Allen, 『문제적 텍스트 롤랑 바르트』, 송은영 역, 도서출판 앨피,
2006.
• 할 포스터, 벤자민 H․D 브글로 외, 『1900년 이후의 미술사』, 배수희, 신정
훈 외 역, 세미콜론, 2007.
• 진동성, 『현대사진의 쟁점』, 푸른세상, 2008.
•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김인중,유희수 외, 나남, 2010.
• 조야 코커& 사이먼 릉, 『1985년 이후의 현대미술』, 서지원 역, 두산동아,
2010.
• 알다이다 아스만, 『기억의 공간』, 변학수, 최연숙 역, 그린비, 2011.

- 80 -
학술 논문
• 신혜정,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작품에 나타난 사진성」『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10, 서양미술사학회, 1998.
• Nathan Wachtel, 「『기억과 역사 사이에에서』: 서론」, 윤택림 역, 『역사연
구』9, 역사학연구소, 2001.
• 최호근, 「집단 기억과 역사」『역사교육』85, 역사교육연구원, 2003.
• 이용재, 「해외석학과의 대화-피에르노라와『기억의 터전』」, 『역사비평』66,
역사비평사, 2004.
• 최호근, 「미국에서의 홀로코스트 기억 변화」『미국사연구』19, 한국미국연
구사학회, 2004.
• Pierre Nora, 「L'venement mondial de la memoire」, 『프랑스 연구사』14
호, 이용재 역, 2006.
• 전진성, 「우울에서 애도로 : 안젤름 키퍼의 작품에 나타나는 역사적 트라
우마」『현대미술사연구』22, 현대미술사학회, 2007.
• 김향숙, 「미술과 정치: 통일의 굴곡에 투영된 독일 현대미술과 정치의 헤
게모니」, 『미술사학』22,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08.
• 오미일, 「장소성과 집단 기억: 로콜리티 연구의 한시각」, 『로컬리티의 인
문학』9,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9.
• 이용재, 「프랑스역사 어떻게 쓸 것인가-피에르 노라의『기억의 장소』에 대
한 고찰」, 『프랑스사연구』23, 한국프랑스사학회, 2010.
• 김지예, 「사후기억을 통한 홀로코스터의 시작적 표상」, 『현대미술사연구』
29, 현대미술사학회, 2011.
• 김향숙, 「현대미술에 투영된 아카이브의 아포리아(aporia): 게하르트 리히
터의 <아틀라스>」, 『미술과 현장』11, 한국미술이론학회, 2011.
• 김응종, 「피에르 노라의『기억의 장소』에 나타난 ‘기억’의 개념」, 『프랑스사
연구』24, 한국프랑스사학회, 2011.

학위 논문
• 이은정, 「현대미술에서 나타난 사진의 비판적 이미지에 관한 연구」, 홍익

- 81 -
대 석사학위논문, 2003.
• 임지영, 「안젤름 키퍼의 비평적 접근에 있어서 역사․사회적 이해문제」, 홍
익대 석사학위논문, 2004.
• 한금현, 「동시대 한국사진의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연구」, 이화여대 박사
학위논문, 2007.
• 정은정,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에 나타나는 사진의 본질」, 중앙대 석사
학위논문, 2007.
• 배혜경, 「안젤름 키퍼의 작품해석과 기억 담론」, 홍익대 석사학위논문,
2009.

전시 도록 자료
• 국립현대미술관 <독일현대미술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 展>, 2006.
• Okwui Enwezor, 「Archive Fever : Used of the Document in
Contemporay Art」, 2008.
• 국립현대미술관, 『볼탕스키: 겨울여행』, 국립현대미술관, 1997.

기사
• 이종근, <전경미의 문화유산의 향기를 찾아서>16, 새전북신문, 2012.7.1.
• 김경률,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1~10, 『월간 사진예술』

인터넷 자료
• 신주백, 「기억연구의 르네상스(2) 한국 기억 연구의 흐름과 과제」,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2006 ,http://blog.naver.com/junorex/90011524803
• www.gerhard-richter.com/

- 82 -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