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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라틴아메리카

송영복

책을 시작하며
제1장 라틴아메리카 바라보기, 돈 되는 이야기
제2장 라틴아메리카 바라보기 1
제3장 라틴아메리카 바라보기 2
제4장 아메리카 대륙 고대문명의 개관
제5장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명: 마야문명
제6장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 1
제7장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 2
제8장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화 기간
제9장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제10장 19세기 라틴아메리카의 격동기
제11장 멕시코 혁명
제12장 뻬론과 에비따
제13장 쿠바 혁명과 체 게바라
제14장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과 삐노체뜨의 쿠데타
제15장 니카라과 내전
제16장 파나마 운하와 노리에가
제17장 멕시코 사빠따 민족해방군의 봉기와 신자유주의
제18장 21세기 라틴아메리카 좌파 휘몰이
책을 마치며
한 방에 정리하는 라틴아메리카 주요국가 현대사 연표: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
아, 칠레
라틴아메리카 중요 통계자료
책을 시작하며

세계화나 글로벌이라는 말을 참 많이 씁니다. 이제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


가 식상하기까지 합니다. 외국의 역사와 문화, 자연환경 등에 대해서, 그야말로 국경 없이
접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우리와 함께 호흡하는 외국인의 수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스파게티나 피자, 베트남국수, 와인이 일반화된 지는 오래고 라틴아메리카 음식인 부리또
Burrito, 따꼬Taco 등의 이름도 그다지 낯설지 않습니다. 영어도 모자라 제2외국어를 공부
하는 것이 교양인의 기본 소양처럼 느껴지는 분위기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어디 그뿐입니
까. 한국의 문화가 지구촌에서 중요한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국의 문화나 역사와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
다. 세계가 점점 우리와 함께하고, 우리도 세계 속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싫든 좋든 다른
사람, 다른 문화, 다른 언어, 다른 방식, 다른 느낌들이 우리의 것과 어우러져서 혼란스럽기
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것에 대하여 배우고 이해하는 것만큼
이나 다른 세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건 이미 선택이 아닌 필
수입니다.

그런데 정작 외국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타자와 타자의 문화를


잘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명 7박 8일에 유럽 5개국을 돌아보는 것으로 그 나
라를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지적인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관광안내 책
자나 가벼운 개괄서에서 좀 더 나아가 전문 서적을 읽는 것도 외국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
움이 될 겁니다. 물론 7박 8일이든 3박 4일이든 그 나라에 직접 가서 보는 것도 더없이 중
요한 경험이 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영화 한 편이 한 나라를 접하는 결정
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고, 우연히 만난 외국인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된 타국의 문화는 객관
과 주관을 넘나드는 경험을 하게 해줍니다. 요즈음 내용이나 외형이 더욱 폭넓어지는 매스
미디어도 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한편 외국 문화를 이해하는 여러 방법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시각도 존재합니
다. 어떤 사람은 미국의 샌디에이고San Diego에서 살면서 멕시코의 북부 국경 지역을 잠깐
구경하고는 라틴아메리카는 더럽고 칙칙하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계에서 손꼽히
는 멕시코 휴양지 깐꾼Cancún의 호텔에서 하룻밤 묵고는 멕시코가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페루에서 나고 자라 평생을 페루 역사 연구에 바친
어떤 학자는 뚜빡 아마루Túpac Amaru라는 사람을 영웅이요 혁명가라고 말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학자는 그의 사건을 단순한 반란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합니다. 라틴아메리카의 낮잠
자는 문화를 가리켜 “그러니까 못 살지, 중남미 사람들은 게을러서 안 돼!”라고 개탄하는
사람이 많지만, 반대로 “그것은 생을 즐기는 느림의 미학이야”라는 주장도 나름대로 설득력
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이렇듯 한 나라와 그 나라의 문화를 바라보는 데에도 다양한 시각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화 시대에 우리는 다른 나라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혼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가장 옳은 방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또한 각자의 시각에 따라 역사와 문화에 관한 판단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책이 가진 라틴아메리카 이해의 방법과 시각을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의 역사를 선택했습니다. 지긋지긋하


도록 애절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통해서 그들을 바라보겠습니다. 여기서 ‘지긋지긋하다’,
‘애절하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건 제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렇
게 느껴주셨으면 합니다.^^ 강요가 아니고 부탁입니다.ㅎㅎ 왜냐하면 말이죠, 그래야 여러분
이나 저나 재미있게 이 책을 손에 들고 같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 이야기가 여러분
의 구미에 조금 덜 맞더라도 손잡고 한번 같이 가 보시지요. 전체의 역사를 한숨에 바라볼
기회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 저와 같은 감흥과 리듬으로 라틴아메리
카의 역사를 ‘지긋지긋한 애절함’으로 들어주실 감성의 준비를 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눈물
한 방울과 불끈 쥔 주먹, 미지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동정심을 발휘할 분위기도 그
렇게 나쁘지는 않습니다. 너무 감성적으로 흘렀나요? ~~ 아무튼 제 의도를 조금 이해해 주
셨으면 하는 뜻에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다음은 관점의 문제입니다. 그들의 ‘지긋지긋하도록 애절한 역사’, 즉 과거의 이야


기를 통해서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하자는 것이 이 책이 제시하는 타문화 이해의 방법론이라
고 한다면 그런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누구의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의 특징은 바로 이 시각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책
은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가난한 사람들의, 그리고 이들을 대변하는 다양한 그룹의 시각
에서 바라보았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미국이 시각이 아니라 미국에 착취당한 라틴
아메리카의 시각으로 바라봤습니다. 기존 미국의 시각으로 라틴아메리카를 ‘가난하고, 못 살
고, 더럽고, 나쁘고, 거짓말 잘하고, 게으르다’라고 말하는 시각과 조금 다릅니다. 아니, 솔
직히 제 능력이 닿는 한 많이 다르고 싶습니다.
‘라틴아메리카는 못 산다, 문제가 있다!’는 것이 많은 사람이 가진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생각입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겁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핑계 없는 무덤도 없다는데, 누구나 정당한, 또는 궁핍한 변명을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제가 라틴아메리카의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겠다고 한 것은 라틴아
메리카 사람들의 변명이 나름대로 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에는 니카라과의 정치가 불안정한 이유와 가난한 이유를 그들에게 돌려왔습
니다. 그들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해를 돕기 위해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이는 미국과 서방 세계에 적어도 50% 이상의 잘못을 돌려야 한다는,
라틴아메리카의 항변에 동의합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한 것이 세계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오늘
날 라틴아메리카가 저 모양 저 꼴이 된 데에는 미국이 많은 부분 책임이 있다는 점에 공감
하리라 믿습니다. 이 책은 그러한 시각에서 이야기를 정리하였습니다.
또한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러니 우리
가 정해 놓은 비교 기준을 가지고 “너희들은 문제가 있어!”라고 말하는 것을 일단 한켠에
내려놓아 볼까요. 우리는 너무도 일방적으로 아무 의심 없이 “이것은 행복이고 저것은 불행
이다.”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들을 그만 나무라고 싶군요. 라틴아메리카의
가치, 라틴아메리카의 행복이라는 좀 모호한 이야기도 그들을 이해하는 발판으로 같이 생각
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멕시코의 국립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8년 동안 멕시코의 보통 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길거리표 음식을 주식으로 살았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시간만큼이나 유적지들을 보
러 돌아다니고 현지 사람들과 실없는 소리를 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멕시코 전통 복장 가운데 하나인 차로Charro가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습
니다. 미국 할리우드 서부 영화에 나오는 멕시코 말 도둑놈들이 입던 그 유치찬란한 옷이
어느 순간 너무 멋있어 보이더군요. 그러자 그때부터 그들의 울음소리와 미소와 변명과 고
함이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이제는 라틴아메리카를 저의 제2의 조국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
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제2의 조국이 결코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말을 큰소리로 하고
싶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에게 철저히 짓밟혀 온 제 친구들을 대변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들
의 억울함이 저에게도 천형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아래에서부터 바라본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부족하나마 정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림 1 멕시코 전통의상인 차로
Charro. 미국 서부 영화에 항상 말
도독이나 등 뒤에서 총 쏘는 비겁쟁
이들이 입고 나오는 의상이지요.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서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전체 내용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시각과 비판, 그리고 애정을 담은 하나의 주장입니
다.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하려는 사람이나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좀 더 다양한 이해를 원하는
독자를 위해 만든, 논점과 색깔이 있는 개괄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의 역사를 시간의 순서에 따라 고대문화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지리적으로는 라틴아메리카라는 경계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조명한 누구나 전문적인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역사 개괄서입니다. 편하게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그
대로 살려 정리하였습니다.

첫 번째 장에서 세 번째 장까지는 머리말에서 제시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를 바라


보는 시각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어떻게 이들 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지, 경제 문제와 그 이외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오늘날 라
틴아메리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찾기죠. 이른바 세계화 시대에 라
틴아메리카가 갖는 세계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의미를 간과하고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공
부한다는 것은 무책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장부터는 라틴아메리카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다루면서 전체의 흐름을 조망합니다. 고대문화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다
섯 번째 장 역시 고대 문화입니다. 찬란하다, 신비롭다 등의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고대 문
화를 전설과 흥미보다는 현실적인 역사로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6장과 7장은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입니다. 이것을 다른 책에서는 신대륙 발견
이라고 쓰고 있습니다만 이 책에서는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이라는 말을 고집하려고 합
니다. 그리고 1500년에서 1800년대 초까지 이어지는 식민지 시대가 8장을 구성하고 있어
요. 1800년대 초의 독립이라는 사건이 9장입니다. 원주민들의 가치 체계, 경제, 과학, 종교,
인격 등의 모든 분야가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시기입니다. 원주민들의 극단의 고통만큼이나
서양이, 라틴아메리카의 기득권 세력이 원주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독립 이후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격동기라고 이름 붙인 시기
가 10장입니다. 독립은 언뜻 들으면 서양 세력의 퇴출과 더불어 원주민들의 억압이 없어지
는 시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은
말이 독립이지 독립이 아닙니다. 서양에서 온 서양인Peninsular과 라틴아메리카 토착 서양
인Criollo의 갈등의 결과 토착 서양 세력이 승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토착 서양인에게
는 독립이라는 말이 가능하지만 모든 희생의 중심에 서 있던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지배하는 세력만이 바뀌는 –노예의 주인만 바뀐- 착취구조의 연속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후 19세기는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과 같은 서구 열강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떠난 아메리카 대륙을 누가 지배하느냐는 문제로 싸움을 벌인 혼란기입니다. 다
양한 외국 세력에 결탁하려는 국내의 갈등 또한 컸습니다. 그래서 격동기라고 표현해 보았
습니다. 또한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기도 합니다. 식민지시대를 대체한 서구열강들이
더욱 혹독하게 민중의 피를 뽑아댑니다. 그래서 심화기라고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원주민, 하층민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의 불만을 온전히 표출하지 못했
습니다. 식민지시대와 격동기를 통해 착취당한 민중들이 봉기하는 시기가 드디어 찾아옵니
다.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저항이 이어지는 20세기를 여러 개의 장으로 나누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멕시코 혁명과 쿠바 혁명을 각각 11장과 13장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아르헨티나 민중
들의 영웅인 에비따Evita 와 뻬론Perón의 이야기가 시간상으로 보면 이 두 혁명의 중간에 놓여
있어서 12장이 됩니다. 무지렁이 인간들의 희망을 대변하였다는 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입
니다. 칠레에서는 아옌데 정권의 몰락과 함께 세계 최초로 평화적인 방법을 통한 공산주의 정권
이 만들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라틴아메리카의 모순을 극복하겠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에 의하여 철저히 무너지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14장입니다.
한편 상대적으로 가까운 과거인 니카라과 혁명과 미국의 파나마 침공을 15, 16장에서
각각 살펴봄으로써 미국의 기득권에 저항한 나라가 어떻게 철저히 보복당했는지 넋두리라도 하
고 싶었습니다.
17장에서 다루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멕시코 사빠따 민족해방군EZLN의 봉
기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직전의 과거가 됩니
다. 물론 사빠따 민족해방군은 오늘날까지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1, 2, 3장에 이어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하나씩 짚어가는, 4장에서
17장까지의 역사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의 선봉에 서 있는 라틴아메리카 좌파 휘몰이를 낳
았습니다. 오늘날의 모습을 통해 과거를 이해하고, 과거의 모습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000년 이후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좌파에 대한 설명을 마
지막 18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뒷부분에 중남미의 덩치가 좀 큰 나라의 개괄적인 역사의 포인트를 “한 방에 정리
하는 라틴아메리카 주요 국가 현대사 연표”라는 제목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또한
중남미에 대한 통계자료들도 부록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자료는 중남미의 개괄을 이해
하는 데에 도움에 되고 책 중간 중간에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찾아볼 수 있도록 한 것입니
다.

글쓰기에서는 많은 부분을, 그야말로 편안하게 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격식이나


품격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렇게 쓰는 것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저의
만용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길거리에서 들을 수 있는 편안한 말로 썼습니다. 학문은 결
코 대단한 것이 아니라 늘 거리의 생활 속에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똥고집입니다.
정장을 입고 강의실에서 하는 것만이 강의는 아니지 않습니까. 길거리에서 떠들어대는 목소
리, 자판기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하는 이야기의 분위기를 이 책에 실어보려고 하였습니다.
용어에 대한 주의사항도 언급해야겠군요. 한국에서는 ‘라틴아메리카’와 ‘중남미’가
비슷한 뜻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이 두 말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특히 멕시코
는 엄밀하게 따지면 중미나 남미가 아니라 북미입니다. 중남미라는 말은 지리의 경계를 뜻
하는 것이고, 라틴아메리카라는 말은 정치, 문화 등 좀 더 포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
서 될 수 있는 대로 라틴아메리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중남미라는 말도 라
틴아메리카와 같은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발음은 될 수 있는 대로 원어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널리 쓰이
는 말을 제외하고는 그 나라의 발음에 가장 가까운 한국말로 표기하였습니다. 현지 사람들
조차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식 표기와 발음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경복궁’이 ‘켱폭
쿵’으로 ‘김치’가 ‘기무치’로 표기, 발음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머리말이 좀 장황한 것 같군요. 시작만 거창하고 정작 수습은 형편없는 것 같아 부
끄럽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을 손에 든 독자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두렵
기 그지없습니다. 변명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저 ‘열심히 더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마무
리를 짓겠습니다. 격려는 조금^^… 야단은 많이 쳐 주십시오.

송영복 songyb@khu.ac.kr

*이 책은 2007년도에 제가 쓴 “라틴아메리카 강의노트”의 후속작입니다. 같은 내


용을 그대로 가져다 쓴 부분도 있다는 점을 밝힙니다.
제1장 라틴아메리카 바라보기, 돈 되는 이야기

요즘 세계화라는 용어가 아주 식상할 정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
른 더 중요해(?) 보이는 나라들도 많은데 왜 하필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 것일
까요? 도대체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훌륭한 선진국에 대한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틈틈이 머리를 식히기 정도로 하는 라틴아메리카 공부 이상의 가치가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멕시코의 문화는, 칠레의 문학은, 그리고 멕시코와 과테말라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나라인 벨리세의 역사는 프랑스, 영국, 미국의 그것에 비하여 결코
의미 없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단순 무식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역사와 문화 등과 관
련하여 우열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에 문제가 숨
어 있습니다. 과테말라의 역사와 문화가 서양의 그것에 비하여 결코 열등한 것이 아니건만
우리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알아도 노벨평화상을 받은 과테말라 멘추 여사가 알리려는
원주민들 탄압의 역사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노벨상까지 받았는데도 말입
니다. 형편이 그러니 과테말라에 관해서 관심조차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과 집중에 따른 당연한 결과입니다. 즉, 좋은 나라의 것은
죽어라 배우고 익힘으로써 우리도 그들처럼 잘 살자는 것이 교육의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른바 후진 나라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있겠습니까? 뭐 좀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하려면 서양의 어디 어디를 들먹여야 하고, ‘이러지 맙시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류의 부정적인 사례를 들 때나 아르헨티나가 등장하고 베네수엘라 이야기를 합니다. 라틴아
메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해서 도대체 뭣에 쓴단 말입니까?
우리나라의 교통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토론회에서 벤치마킹한다며 독일의 고속도
로 아우토반이 이러니저러니 말들을 합니다. 그럴 때 남미의 어느 도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환경보호의 선진성을 이야기할 때 에콰도르나 칠레를 예로 든다면
누가 귓등으로나 듣겠습니까. 영국이나 독일, 스웨덴 정도는 되어야 그래도 우리가 본받을
나라, 좀 더 나아가 배울 만한 나라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라틴아메리카에 관해 공부하
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돈 많은 나라 = 훌륭한 나라 못 사는 나라 = 배울 필요가 없는 나라
서양 = 공부해보자 기타 나라 = 굳이 뭐 공부까지...

이런 말을 첫머리에 하려니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뻔한 결론으로


이끌어 가야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뻔한 결론이 필자가
중남미를 공부하게 된 동기도 아니고, 지금까지도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나름의 애정을 품
고 있는 이유도 아닙니다. 그 뻔한 결론은, 그들은 앞서지 않아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 것은
없으니 그들의 낙후성을 이용하여 진출하면 돈 벌 기회가 좀 많다, 즉 그 나라들을 공부해
서 돈 많이 벌어 부~자 될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서양 사람들도 못 사는 나라들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해서 그렇게 잘 이용해 먹음으로써 잘살게 되었으니 우리도 관심 가지고 잘해
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우리나라를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로 만드는 초석이 되게 합
니다. 솔직하게 표현하면 지금까지는 우리만 열심히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우리의 경제 규
모도 커졌고 소위 선진국이 되었으니 남의 나라의 것을 이용 (혹은 착취??) 해야만 한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서양의 선진국이야 우리에게 이용만 당할 정도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
으니 라틴아메리카 같이 말랑해 보이는 나라를 공부해서 잘 해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라틴아메리카는 가장 좋은 대상 지역입니다. 상대적으로 만만하니까요.
복잡한 문제인 새로운 제국주의에 대한 논의는 유보하겠습니다. 이 책의 내용이 거
시적 측면에서 그러한 논의를 꾸준히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건 나쁜 짓
이니 하지 맙시다.”와 같은 무책임하고 위선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만나게 될 일련의 역사 과정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것을 제국주의
라고 말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새롭게 따져볼 필요가 분명히 있으니까요.
아무튼 라틴아메리카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공부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좀 더 고민이
필요한 인류의 문제, 문화의 문제, 인간의 삶의 문제 등 시시콜콜하게 느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걸 일반화시켜서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면, 중남
미를 공부하는 두 가지 목적은 형이하학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나눠 볼 수 있다고
정리됩니다. 여기서는 이 두 가지 즉, 라틴아메리카를 공부하는 돈 되는 이야기(경제적인 이
유)와 돈 안 되는 이야기(비경제적인 이유)를 다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장에서
는 그 돈 되는 이야기를 먼저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돈 좀 되는 이야기입니다. 일단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중남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국가입니다. 세계 경제적인 측면에서 혹은 우리나라의 관점으로
본 경제 파트너로서 중남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 보다도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국가 숫자로는 대략 30개가 넘는 독립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멕시코 1개국, 중
미 7개국, 남미 12개국 및 카리브 13개국) 여기에 일부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식
민지까지 합치면 거의 40여 개 국가 정도의 규모입니다. 전 세계 국가 수가 대략 200여 개
정도이니 이 중에 20% 정도가 중남미 국가가 되는 셈입니다. 땅덩어리 넓은 것 또한 잘 알
려져 있습니다. 총면적이 2.055만 ㎢로 한반도의 약 94배에 달합니다. 여기에 지구의 허파
라고 불리는 아마존이 있고, 자원의 보고 안데스산맥도 있네요. 남극대륙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합니다. 인구 면에서도 매력적입니다. 중남미의 전체 인구는 거의 7억에 가깝습니
다. 대략 봐도 지구에 사는 사람 열 명에 한 명은 중남미 사람이라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당연히 먹는 거, 입는 거, 돈 쓰는 거로 봐서도 중남미는 중요할 수밖
에 없는 거고요, 거기에 더하여 그들의 소비 성향이나 구조 면에서도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구매력도 높습니다. 더군다나 개발도상국들이 많다 보니 우리나라가 비교적 경쟁력을 가지
고 있는 차량, 가전 등을 비롯한 소비재 생산품들의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곳이 중남
미 지역이기도 합니다. 나이에 따른 인구구성 비율면에서도 젊은층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어
앞으로의 경제 활성화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듯 우리나라가 제일
먼저 자유무역 협정을 맺은 곳이 중남미의 칠레이고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중남미
는 가치가 아주 높은 우리의 미래 시장입니다.
단순히 한국의 수출 대상지라는 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중남미는 자원면에
서 석유를 시작으로 구리 , 금, 은을 포함해 희귀금속 등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자원민족
주의가 등장하고 다각적 국제 관계가 중시되고 있는 시기에 당연히 우리나라가 필요로 하는
자원들의 안정적 수급을 위한 핵심적인 파트너가 되는 셈입니다.
또한 이런 나라들의 결속력 또한 중요한 변수가 됩니다. 식민지 기간 동안 비슷한
유사한 역사를 공유하다 보니 다양한 동질감을 가지고 있어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외교
등에서 통합의 움직임이 강합니다. 거대한 라틴아메리카 블록이 만들어지게 되면 세계 경제
에서의 중요성이나 파급효과가 엄청날 것이라는 예상이 어렵지 않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제적 중요성: 30개국, 인구 7억, 넓은 땅, 활성화된 소비시장, 많은


천연자원

한국에서도 최근 들어 라틴음악, 춤, 음식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하루가 다르게 퍼


져나가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스페인어로 부르는 노래가사를 듣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
고, 그 이외에도 중남미의 고유한 음식이 이제는 낯설지 않습니다. 중남미가 지구촌에서 상
당히 친근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분야에서도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
었습니다.
이제 중남미가 우리의 중요한 경제 상대국이라는 점은 명확합니다 . 따라서 우리가
라틴아메리카를 공부해야 하는 일차원적인 당위성을 말할 때 이 점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입니다. 우리들이 라틴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 사람을 이해하고 공부하는 것이 당장 우리
가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해서라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무역 상
대국인 미국, 일본, 유럽, 아시아 등지의 관계를 언제나 강조해 왔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한
국 무역 수지 흑자액의 반 가까이가 중남미와의 교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즉, 다른 유럽이나 미국, 일본 등에서 적자 본 것을 메우는
곳이 라틴아메리카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서방 국가와의 무역량이 많아지면 무역 적자가 많
아지고, 라틴아메리카와의 무역량이 많아지면 무역 흑자가 많아집니다. 물론 이렇게 극단적
이고 단편적으로 쉽게 결론 낼 일은 아니고 다른 많은 변수가 있지만, 아무튼 한국의 경우
중남미와의 경제 협력이 다른 어떤 지역의 경제 협력보다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라틴아메리카를 공부하는 데 좀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왜


냐고요? 시대와 상황이 바뀌었으니까요.
쌍팔년이란 말을 합니다. ‘88년 이전에는 이러했는데 88년 이후부터는 이렇게 바뀌
었다, 그러니 88년 이전의 것은 지나간 과거의 것이다, 지금은 맞지 않는다.’ 88년이란 말
은 대강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88년이 라틴아메리카 공부와 무슨 상관
이 있기에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걸까요? 88년 서울올림픽 이전까지만 해도 해외여행은 일부
특별한 사람들에게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휴가 때 외국으로 여행을 간다느
니 어쩐다느니 하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서민층에서는 말입니다. 일단 관광
을 목적으로 한 여권이란 것이 없었으니까요. 이 말을 하면 학생들이 못 믿겠다는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실입니다. 88년 이전에만 해도 관광을 목적으
로 여권을 만든다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었고 그러다 보니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도 폼
잡을 일이었습니다. 외국과의 교류가 지금에 비해 엄청나게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국에 대한 정보도 아주 미미했고, 학문적인 접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필자는 고등학교 때까지도 누가 미국에 가서 몇 개월 살다 오면 혀가 꼬부라져서
한국말을 잘 못 하는 줄 알았습니다. 재미교포가 신랑감 1위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외국이
라는 곳이 마냥 환상적인 미지의 세계, 동경의 대상이 되던 때가 있었지요. 그 정도로 외국
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이해의 정도가 형편없었습니다. 그런데 88년을 계기로 한국
사람들도 외국으로 나가기 시작하고, 한국의 거리에서도 외국인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낯선
풍경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환상들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88년 이전만 해도 외국어가 외국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라 말을
할 줄 알고, 그곳에서 얼마간 체험해 보는 정도의 수준이 대상 국가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한계였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그것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21세기를 살
고 있습니다. 일반 국민의 외국에 대한 이해 수준도 엄청난 발전을 하였습니다. 당연히 외
교, 무역, 국제 협력, 문화 교류 등도 88년이라는 상징적인 시기를 기점으로 새로운 차원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준은 아직도 쌍팔년에서 크게 변한 것이 없는 건 아닌
가요?

이제는 말 몇 마디 할 줄 안다고 해서 그 나라를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국제 감각은 이미 오래전에 마감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학습 역시 이런 점에
서 더욱 심도 있고 광범위한 연구와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경제면에서 이해하
면, 이제는 단순히 텔레비전이나 냉장고를 파는 시대가 아니라 텔레비전이나 냉장고를 만드
는 기계를 파는 시대 혹은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콘텐츠를 파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전의 텔레비전을 직접 팔던 시대와는 이해와 접근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
다.
더욱 심도 있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더욱 전문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전에는 라
틴아메리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대략 이해하면 충분했지만 이제는 다양한 부분의 전
문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다양한 전문가가 학문의 배경을 이루어야 합니다. 텔레비전에 방
영되는 컨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 외국을 제대로 이해하여 한국의 경제를 짊어지고 가야 합
니다. 다시 말해 한국이 돈 많이 벌기 위해서라도 중남미에 대하여 이전과는 달리 심도 있
는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멕시코의 수도가 멕시코 시티이고, 마추픽추라는 잉까 도시가 있는 나라가 페루라
는 것을 외우는 정도에서 그치면 아쉽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왜 전격적으로 세워졌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중요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는 한발 더 나아갈 때이기도 합니다. 아르헨티나 페
론 정권이 가진 역사적인 팩트를 잘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가지
고 비판과 새로운 해석을 해야 할 때입니다. 미국의 해석이, 프랑스 학자의 주장이 항상 옭
은 것은 아닙니다. 그 누구의 이야기와 생각을 배워서 그저 고개만 끄덕거리는 수준에서 아
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그 원천을 비판하고 토의하여 우리 고유의 의미와 가치를 부
여하는 일을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겠지요.
차츰차츰 만들어가야 할 것이기는 합니다. 성급히 지금 마구 강조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 상에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라틴아메리카가 중요하다, 특히 경제면에서 중요하다, 그러니 전보다 깊
이 공부해서 돈 많이 버는 데 이바지하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전처럼 그냥 막연히 접
근하면 안 되고 공부를 많이 해서 그들을 전보다 더욱 확실히 이해해야 그들의 정치와 경제
의 변화 속에서 돈을 좀 벌 수 있겠다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그들은 우리와 많은 차이가 있
습니다. 하나하나의 근본과 현상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크게는 그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
화에서 작게는 소비 구조와 무역 정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럼 그들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이 등장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


지요. 중남미 국가들은 자존심이 무척 강합니다. 뭐 자존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자존심
없는 나라가 어디 있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특이한 형태로 자존심이
강합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우리가 워낙 외교 면에서 자존심이 없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
들이 자존심이 강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특이성, 특히 자존심을
이해하는 것이 그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유럽의 블록화에 따라 미국을 주
축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블록화(FTAA)하려고 하지만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의 자존심과 새
로운 경제 패러다임에 걸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중남미를 완전히 자신들
의 손아귀에 넣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이라면, 미군이라면 그냥 고개 숙이는 그런 사람들
이 아닙니다. 라틴아메리카는 미국에 절대 충성하지 않을뿐더러 늘 적당히 버팅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미국이 국제 무역의 힘을 이용하여 쿠바를 경제 봉쇄할 목적으로 만든 헴스버튼
(Helms Burton) 법안에 대항합니다. 멕시코가 석유 지원을 해주는 등 경제 협력을 강화하
며 보여준 중남미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미국이 쿠바를 경제 봉쇄 조치하고 쿠바에게 협력
하는 나라들은 모두 박살 내버리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이것을 멋있는 말로 바꾸면
쿠바와 통상 무역을 하는 기업체는 미국과의 어떠한 경제 관계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
다. 미국에서 이 법안이 통과하기가 무섭게 멕시코 정부는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미국 눈치 안 보고 가장 중요한 경제 물자 가운데 하나인 석유를 쿠바에 공급해줍니다. 국
민은 국민대로 민간차원에서 구호물자를 보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필자는 “아! 이것이 주권 국가의 자존심이구나.”라는 생각에 한없이 부
러워했습니다.
중남미는 우리의 습관화된 기본 외교와 정치 패턴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
습니다. 깊이 있는 공부를 통해서만이 그들을 이해하고 협력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새
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이해와 연구가 필요합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
해서라는 매우 제한되고 일차적인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88년 이전의 접근 방식이
아닌 좀 더 심도 있는 접근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새로운 이해 방식의 시작이 기존의 미국
식, 또는 서양식 라틴아메리카 이해 방식의 탈피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히 따져보겠습니다.
제2장 라틴아메리카 바라보기 1

앞 장에서 이야기한 것을 토대로 정리해 보면 ‘라틴아메리카를 공부하는 것이 중요


하긴 한데……’ 정도가 되겠지요. 그런 생각이 좀 드셨나요? 좀 더 덧붙이자면 “한국이 잘
먹고 잘사는 문제에 중남미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니 중남미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공
부하자. 하지만 기존의 시각과 접근 방식으로는 곤란하니 심도 있는 공부를 통해 우리 스스
로 중남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자.”라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런 현실적인 문제는 그렇
다 치고, 조금 덜 현실적인 이야기도 좀 해 볼까요
앞에서 돈 버는 것 말고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하고 공부해야 하는 형이상학적인 이
유가 있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이것은 돈 버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현실이나
통계 숫자 몇 개 소개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낼 수가 없습니다. 사실 굉장히 복잡하고 흥미
로워서 여러 번 생각을 우려내는 사색이 필요합니다.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해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라틴아메리카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극복하는 데서부터 그들의 가치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시작해보자.’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배울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보석과 같은 가치는 무엇일까?


그런 가치가 있기나 한 건가?
그런데 그들이 혹시 우리보다 행복한 것은 아닐까?
비록 돈은 없지만, 영혼은 우리보다 더욱 풍요한 것은 아닐까?
열심히 일만 하면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살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는데 왜 저리도 못 사
는 걸까?
마야와 잉까 같은 찬란한 고대 문화를 꽃피운 사람들의 후예들에게 어떤 위대한 가치가
숨어 있을까?’
뭐 이런 정도의 궁금증들을 배경에 두고 시작하면 훌륭합니다.

그런데 이런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생각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


난한 사람, 가난한 나라의 내면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외형의 이미지를 먼
저 벗겨내야 합니다. 길거리에서 붕어빵 장사하는 사람이 외제 차 타는 강남 부자와 비교해
서 게으르고, 어리석고, 더럽고,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나요? 붕어빵 장수에게서는 배울 게
없을까요? 그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나아가 붕어빵 장수는 강남 부자에 비해 가진 돈은
없지만 인간다운 가치는 더욱 클지도 모른다는 점까지 생각해 봅시다. (붕어빵 아저씨들 죄
송합니다! 필자가 그분들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의도로 예를 들고 있다는 것을 이
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ㅠㅠ, ^^)
라틴아메리카를 공부하는 첫 번째 목적은 라틴아메리카에 진출해서 돈 많이 벌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목적은 ‘붕어빵 장수의 가치’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
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선입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붕어빵 장수는 강남 부자보다
이렇다 저렇다’ 하는 기존의 극히 사회 경제적인 가치관이 만든 이미지를 한 켠에 놓고 생
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붕어빵 장수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라틴아메리카’라는 말을 들으
면 어떤 단어,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나요? …… 한 번 생각해 보세요 …….
책을 통해 커뮤니케이션하려다 보니 어려운 점이 많군요. 아무튼 좀 불만족스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자문자답해야겠군요. 쩝-.

필자가 갖고 있던 이미지,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가진 이미지를 대강 모아보면 다음


과 같은 단어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못 사는 나라, 마약, 높은 인플레이션, 게


삼바, 살사, 탱고, 라틴댄스, 멕시칸 치킨,
릴라,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놀기만 좋아하
매혹의 카리브 해변, 정열적인 사람들
는 사람들.

이런 이미지들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부정의 이미지와 환상의 이미지의 대비!!


뭔가 언밸런스한 이런 이미지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부터 생각해 봅시다. 앞에서도 말한 것
처럼 지금 논의하고 있는 새로운 가치의 이해에 대해서는 꾸준한 자극을 통한 사색이 필요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필자와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글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본문을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러한 논의들이
각 역사의 주제와 소재들에 연결될 것입니다. 주로 ‘이들의 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볼 수만
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요.
우리는 “문화는 상대적이다.”라고 배워왔고, 그걸 진리라고 생각해 왔지만 현실에서
는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감성은 교과서와는 다르게 작용하는 것이지요. 아니 사실 우리
가 배웠고 배우고 있는 교과서가 교묘하게 인간 차별, 인종차별, 국가 차별을 조장하고 있
습니다. 그래서 편견을 배제하고 한 문화를, 한 인간 집단을 이해하려는 몸풀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스페인어로 ‘뿐또 데 빠르띠도(Punto de partido)’라는 말이 있는데, 시작점이
란 뜻입니다. ‘중남미 사람들은 바보, 멍청이, 게으름뱅이 , 열등한 넘들, 등등…….’ 또 뭐가
있나요? ‘거짓말 잘하는 넘들…….’ 그런데 진짜 그런가요? 아닐 수도 있을 텐데.
그들 나름대로 그들만의 가치, 진실이 있구먼……, 아! 그리고 이런 이미지들이 많이
왜곡되어 우리에게 온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느낄 수만 있다면 이번 장의 공부는
대만족입니다.

인류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학문 분야가 탄생을 하고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위


한 방대한 양의 저술을 하기 시작한 것이 소위 대항해 시대의 탄생과 더불어 16세기부터입
니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 관한 관심은 다른 어느 지역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양과 질에
서 단연 으뜸이었지요.
1521년 에르난 꼬르떼스Hernán Cortés의 메시까(우리가 일반적으로 아즈텍Aztec
이라고 알고 있으나 바른 이름은 메시까Mexica입니다) 정복을 계기로 식민지화가 급물살을
타고 진행되면서 겨우 20년도 안 되는 기간에 많은 아메리카 대륙의 기존 문명들이 스페인
과 포르투갈 사람들의 칼과 총에 의하여 정복당하게 됩니다.
물론 맨 앞에는 공식적으로 십자가가 내세워지긴 했지요. 정복 이후의 식민지화 정
책에 따른 현지 조사와 연구가 급속도로 이루어지는데 현지 행정관들은 물론이고 가톨릭 선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원주민 문화와 언어 등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최초의 본격 타문화 연구라고 할 수 있는, 그래서 오
늘날 인류학의 시초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연구들이 철저하게 식민지 환경에 의하여 만들
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새로운 지역을 침략했는데 그곳을 정복해서 그 땅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착취하
기 위해서는 그곳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 생활 등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렇
게 식민지를 잘 경영하기 위한 정보를 만들고 그것을 공부하는 학문이 시작된 것입니다. 서
양 사람들이 중심이 된 타문화 이해의 시작점이 식민 상황과 그 가치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식민지주의 하의 타문화 읽기가 지역 연구와 관심의 중심 해석 방법으로 시작
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접하고 있는 타문화에 대한 이해는 전부 노예들을 도망 못 가게
해서 잘 부려 먹으려는 목적과 철학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근본은 오늘날에
도 살짝 겉 화장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옛날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식민지 역사관과 문화관의 가장 큰 특징이자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문화에


대한 수직적 이해예요. 즉, ‘나는 정복한 자요, 너는 정복당한 자’라는 수직 관계가 발전하여
나는 우등한 사람, 너는 열등한 사람, 나아가 나는 주인, 너는 나의 노예 그리고 나의 문화
는 긍정적인 것, 너의 문화는 부정적인 것, 또한 나의 신앙은 종교요, 너의 신앙은 미신이라
는 방식으로 이어져 나갔던 겁니다.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가리켜 ‘말하는 동
물Animal que habla’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어요. 16세기 아메리카 대륙에 살았던 스페
인 신부인 쎄뿔베다Juan Ginés de Sepulveda는 다음과 같이 재미난(?) 견해를 펼칩니다:

“제일 먼저 원주민들은 본래가 노예인데 그들은 야만스럽고 문화적이지도 않으며


인간도 아니다. 그런데 그 원주민들은 자신들보다 더욱 현명하고 힘 있고 완벽한 인간들에
게 사육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La primera es que siendo por naturaleza siervos los
hombres bárbaros incultos é inhumanos, se niegan a admitir la dominación de los
que son más prudente, poderoso y perfectos que ellos… Sepulveda, Juan Ginés de,
Tratado sobre las justas causas de la guerra contra los indios, F.C.E. Mexico, 1987,
153쪽)

이 글만 봐도 당시에는 원주민들을 ‘말하는 동물’로 취급하는 것이 별로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였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식민지 시대에는 몇십 몇백 명의
원주민 노예의 값이 겨우 말 한 마리 값과 견줄 만했으니까요.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등장
하는 영화 등에서 보았던 참상을 되새기면 당시 상황을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을 겁니
다. 지금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죠. 그러나 현실이었죠. 그것이 대항
해 시대의 업적이 만들어 놓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해가 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타민
족을 지배하면서 거기에 원래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부여한 가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역사의 에피소드로서 지나간 이야기일까요? 식민지 시대의 타
민족, 타문화 이해는 몇백 년간 인류 역사의 당연한 부분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방귀 꾀나
뀐다는 학자들은 이러한 현실이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과거의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외형적인 현상은 없어졌지만 그 근원은 오늘날까지
변한 게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도 안 되는 현실이 이 책을 쓰게 한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19세기부터 시작된 과학적인 연구 방법을 갖춘 인류학의 학문적 태도에서도 이러


한 경향을 강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유행하던 진화론적 관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대 잘 나가던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는 저차원에서 고차원으로, 단순한 것에서 복
잡한 것으로,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것으로 진화한답니다. 진화주의는 유럽 국가들이 세
계의 패권을 쥐고 흔들면서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거나 합리화하기 위해 이용됩니다. 그럴듯
해 보이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여태까지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한 마디로, 문화는
진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화가 많이 된 문화와 상대적으로 진화가 덜 된 문화가 존재한다
는 주장입니다. 사람도 똑똑한 사람이 있고 바보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요. 하여간에
그래서 당연히 진화가 많이 된 문화가 긍정적이겠죠. 그리고 진화가 덜 된 문화는 더욱 진
화하여 진화가 많이 된 나라의 모형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을 실제에 적용해 보면 유럽은 진화가 많이 된 곳이고 중남미, 아프리
카 등은 진화가 덜 된 곳이라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유럽 사람들은 우등하고 다른 지역은
열등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지역에서는 유럽을 배워서 더욱 빨리 유럽과 같은 진화된
문화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러니 열등한 중남미의 못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것을
몽땅 버리고 훌륭하고 멋진 유럽의 문화를 무조건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16세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그렇게 큰 변화 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말이 탄생합니다. “똥도 미제가 좋다.” ㅋㅋㅋㅋ

어떻게 하면 백인들의 문화에 가장 빠르게 근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최고의 관


심사가 될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수직 진화의 양상에서 유럽은 우월한 상위에, 그리고 기
타 국가들은 열등한 하위에 위치하게 됩니다. 그 영향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있지요. 우리나
라의 사회, 경제, 정치 문제점들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예외 없이 외국의 예를 드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한국에서 교통사고를 줄이는 방법을 논의하는 시사 토론 프
로그램에서 패널들은 독일의 아우토반이 어떻고 미국의 하이웨이가 어떻고 하는 말을 빼놓
지 않습니다. 의식 무의식중에 ‘우월한’ 유럽이 우리의 미래 발전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런 자리에서 그 누구도 아프리카 어떤 나라의 예를 들지 않습니다, 남아메리카 어떤 나라에
서는 이런 것을 이렇게 잘하고 있으니 우리도 그러한 방법을 검토하자는 얘기를 들어본 적
이 없습니다. 굳이 이러한 것을 억지로 문화 식민주의라고 말하는 것이 극단의 과장이나 소
위 ‘오버’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만일 그런 후진국들이 잘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소
개하였다고 해도 -후진국에서도 잘한 것이 있을 테고 그를 본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그것을 잘했다고 생각해 주겠는
가, 하는 의문이 앞섭니다. 그러니 제가 무슨 말을 한들 멕시코 사람들의 가족문화가 그리
고 엘살바도르 사람들의 행복한 예술이 뭐 그리 중요한 가치가 되겠습니까. 똥도 미제가 좋
은데 그 좋은 미국의 똥만도 못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배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라틴아메리카 수업의 도입 부분에서 제가 학생들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들은 라


틴아메리카에 대하여 아는 것이 뭐가 있나요?” 그럼 일단 강의실에서는 그 어떤 학생도 부
담감으로 손을 성큼 들지 않지요. 그러나 온라인수업의 채팅창에서는 좀 더 활발해집니다.
그중에 참 많이 들어온 대답이 “교수님 저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
습니다, 잘 모릅니다, 관심 없었습니다.”와 같은 대답입니다. 그러면 제가 씨~익 한번 웃고
반박을 시작합니다. “여러분들은 적건 많건 라틴아메리카에 대하여 왜곡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학생들의 찌뿌린 눈살과 짜증 섞인 표정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의
도했던 대로 당돌한(?) 학생들이 출현하게 되지요. “저는 아예 라틴아메리카에 관하여 관심
도 없고 잘 모르는데 도대체 무슨 선입견을 품는단 말입니까! 교수님이 너무 도를 넘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엘살바도르의 교육제도가 미국의 교육제도보다 절대 좋을 수 없다는 견해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음악의 역사에서 베토벤은 기억할지 몰라도 라틴아메리카의 그 어떤
누구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즉 온두라스에는 훌륭한 음악가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최소한 베토벤과 슈베르트, 브람스가 온두라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
으니까요. 우리는 쿠바의 고속도로 정책이 우리가 배워와야 할 그런 훌륭한 국가 도로망 행
정의 예라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독일의 아우토반이 넘버 원이면 중남미의 도로정책과 서비
스는 그것들보다 훠~얼씬 후지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잘 알고 있어요.
우리는 라틴아메리카를 모르지 않습니다.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북유럽의 복지
제도가 좋고, 프랑스의 대혁명을 알고, 이탈리아의 패션이 세상에서 가장 선진적인 훌륭한
가치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 이미 라틴아메리카의 그것들은 후지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안다
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라틴아메리카는 배울 것도 없고 알아야 될 것도 없는 후진 나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미 라틴아메리카에 대하여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우리가 ‘영숙’이가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찬실’이는 최소한 그보
다는 후진 인간이라는 것을 평가하여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좋다, 가장 훌륭하다와
같은 것은 상대평가의 가치잖아요.
그래서 다시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서양과 그의 추종 세력들이 만들어 놓은 가치
평가를 받아들여 라틴아메리카를 쓰레기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서양사람들이 일
본의 시각으로 쓰인 동아시아사를 읽는다면 한국인은 열등한 인간으로 이해하거나 일본군위
안부는 자발적인 매춘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 현실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식민지사관이 바로 이러한 맥락과 유사합니다. 일본은 식민지 기간 동안
“일본은 우월하고 조선은 열등하다”는 명제를 한민족에게 심어주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많은 지식인이 학문인 양 이를 치장하고 주입시키는 데 한몫을 했죠. 특히 소위 방
귀 꾀나 뀐다는 공부한 사람, 고관대작들이 더욱 그랬습니다. “조선 놈들은 안 돼”라는 말
은 곧 “역시 일본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달라”로 이어집니다. 다행히 일제 식민지 사관을
극복하자는 논의와 함께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는 의식과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세계화 시대에 식민지 사관의 잔재는 오히려 타문화를
이해하는 데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진화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계 문화 읽기는 19세
기 이후 외형적으로는 거의 폐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식민
주의 잔재를 가지고 있는 19세기 진화주의의 한계에 머무르고 있다 는 인상이 여전히 강합
니다. 다시 말해 큰 맥락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타문화 읽기가 앞에서 설명한 식민지 관점을
수정이나 비판 없이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문화의 영향이 마치 서양 피
자와 햄버거가 맛있게 느껴지는 것만큼이나 뿌리 깊게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곤 합니다.

멕시코에서 공부할 당시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눈이 번쩍 떠지도록 놀라 벌떡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만든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삼류 영화였습니다. 처음부
터 마음잡고 본 것도 아니고 우연히 별생각 없이 중간부터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 하도 기가 막혀서 지금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미군 병사
와 간호병이 나오고 그들이 한창 사랑에 빠지려 하고……. 뭐 그런 뻔한 정쟁 로맨스였습니
다. 그런데 중간중간 등장하는 피난 가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 하며, 영어를 제법 해서 미국
인과 대화하는 한국인의 이미지가 너무 역겨웠습니다. 영화 ‘람보’에 나오는 베트남 사람들
의 이미지와 거의 비슷했습니다. 무표정한 엑스트라들의 어색한 움직임, 가슴을 거의 드러
낸 한국 여인의 엉성한 한복, 그냥 뭘 좀 달라고 고개만 연신 숙이는 바보스러운 중년 남자
등 한국 사람이나 한국의 문화 뿐만 아니라 주변을 표현한 것 어느 하나도 오글거리지 않는
게 없었습니다.
“아니, 이건 완전히 왜곡이야, 말도 안 돼! 어떻게 한국 사람을 저렇게 바보 같은 인
간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지!”
그야말로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 영화를 내 주변 사람이 보
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고, 멕시코 사람들이 저 영화를 보고 “한국인들은 저렇게 바보로
구나”라고 생각하여 나 역시 바보 취급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까지 되더군요. 이런 영화를
한국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하죠, 이런 것을 한국에서 방영하면 한국인들이 가만히 있
겠습니까?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못 보고 멕시코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미국은 정말로 전쟁
영화를 많이 만듭니다. 삼류 전쟁 영화들도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한국 전쟁과 관련
한 영화도 많이 만들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한국 전쟁도 미군이 참전한 중요한 전쟁이니까
요.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한국 전쟁과 관련한 할리우드 발 영화를 볼 수 없었던 것일까요?
그건 아마도 한국 시청자들에게 많은 항의를 받을까 봐 방영을 안 했기 때문일 겁니다.
자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게 외국인의 눈에는 한국 사람
들이 바보스러운 존재로 각인되었을 테고, 또한 그렇게 할리우드에서 만든 서부 영화를 통
해 멕시코 사람들은 우리에게 더럽고 비열한 말도독놈으로 각인되기도 했습니다.

필자가 초등학교 때 즐겨보던 1,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만든 미국 드라마에서


독일군 병사들은 신기하리만큼 이상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감정도 이성도 없는 듯이 보였습
니다. 전투 중에 미군들은 영리하게 숨어서 기회를 보다가 돌격을 하거나 총을 쏘는데 독일
병사들은 왜 그렇게 바보처럼 그냥 벌떡 일어나서 총을 쏘다 맥없이 죽어 가는지……. 독일
사람들은 머리가 모자란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티브이 화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
는 이미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겁니다. 앞 장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한국
사람을 이렇게 그린 영화가 상영되지 않듯이 독일에서 이런 영화를 공중파로 방영하지는 않
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베트남 전쟁을 다룬, ‘람보’ 같은 류의 영화에 나오는 베트콩들은 어떤가요? 피도 눈
물도 없습니다. 잔인하고, 게다가 생긴 모습조차 왜 그렇게 이상하게 생겼는지....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베트남 사람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이렇게 기분 나쁜 말을 써서요. 하지만
우리나 베트남 사람이나 미국 영화에서의 그 요상한 이미지는 별로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나오는 독일사람, 람보 같은 영화에 나오
는 베트남사람들의 이미지가 필자가 멕시코에서 본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할리우드 전쟁
영화에 나오는 한국 사람들의 이미지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멕시코에서 한국전쟁을 배경으
로 한 영화를 보다가 열 받아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요. 이제 좀 이해가 가시지요. ~~쩝
요즘 영화에서는 아랍 사람들이 그런 역할을 하더군요. 가끔 북한도 한몫하고요. 미
국의 액션 영화에 주연급 악당으로 빠질 수 없는 아랍 사람들…….
그런데 이런 문제를 가지고 할리우드 영화인들을 뭐라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왜곡을 안 하나요? 그런 영화는 할리우드에서만 만든답니까? 이순신 장군님
이 나오는 영화나 사극에서 일본 사람들의 이미지는 어떻습니까? ... ?!... ?!... ?! ... 그렇게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미국이나 한국이나,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역사 왜곡,
이미지 왜곡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자! 이런 인식에 기초해서 제가 하려고 하는 말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한국 사람들
이 영화나 기타 대중 매체를 통해 만나게 되는 라틴아메리카의 이미지는 그리고 그곳에 사
는 사람들의 이미지는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에서 과장, 축소, 왜곡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멕시코와 라틴아메리카에 대하여 가진 상당수의 이미지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걸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미국이 만들어낸 일방적이고 객관적이지 않
은, 열등하게 묘사된 라틴아메리카의 이미지에 현혹되어 있습니다.
징그러운 일입니다. ……아이가 진짜 예쁜 건가,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버스
앞에 앉은 흑인 아줌마가 우는 아이에게 분유를 물리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궁핍해 보입니
다. 갓난아이까지 애가 세 명입니다. 하지만 어느 구석에서 또 두어 명이 금방 튀어나올 분
위기네요. 연년생으로 보이는 열 살 정도의 남매와 갓난아기……. 애를 늦게 봐서 저렇게
예뻐하나 보다. 나머지 아이들은 정신없이 난장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줌마도 좀 신경 쓰이
는 모양입니다. 땟국물이 졸졸 흐르는 아이들입니다. 아줌마가 조금 남은 포도맛 음료수를
두 남매에게 나눠줍니다. 아들 녀석이 동생은 안 주고 혼자 다 먹을 것 같으니까 딸에게 반
을 먹이고 나머지를 사내 녀석에게 줍니다. 싸구려 음료수 가지고, 가난하긴 하구만……. 그
런 느낌이 드네요. 그런 생각이 드는 내가 두렵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늦둥이라 그런지 애가 너무 예뻐 입 맞추고 난리가 났습니다. 사랑스러워하는 것이
역력히 보입니다. 나도 애를 길러봤기 때문에 애 예쁜 것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이런 말
하면 애 엄마가 “지가 기르긴 뭘 길러, 내가 다 길렀지” 하고 팩트를 근거로 한 호통을 치
겠지요~~쩝. 하여간, 생각해 보면 얼마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까. 먼지 하나 없는 깔끔한
옷을 입힌 애를 유모에게 들려 해외 여행을 떠나는 늘씬한 중남미 백인 어머니의 모습에 비
해 숭고하리만큼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정말 징그러운 일입니다……. 새까만 아이가
저렇게 예쁠까? 정말 징그러운 일입니다……. 천벌을 받을 일이죠. 그런데 현실입니다. 징그
러운 현실입니다. 일반적으로 까만 피부를 가진 사람들의 평균적인 삶을 잘 알고 있고, 수
많은 대중 매체와 경험을 통해 알고 느끼고 있는 터라 흑인 아이의 모습이 귀엽다기보다 비
애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불쌍해 보인다고나 할까! 애처로워 보인다고나 할까. 징그러운 일
입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입니다. 가끔 브라질에는 인종차별이 없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정말이야!? 피부 색깔과 수입을 도표로 만들면 결과가 뻔한데 인종차별이
없다고? 말이 안 됩니다. 인종적으로 혐오하는 정도가 다른 지독한 나라에 비하여 좀 적다
는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겁니다.
포르투갈어가 안 되는 상황이라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
다. 몇 번이나 우는 아이를 얼러보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왔다 갔다 하는 그 징그러운 생각
때문에 주저하게 됩니다. 공연히 위선적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브라질의 가난한 흑인 가족,
그들을 보는 우리의 시각은 엄청나게 징그러운 것입니다. 수백 년 노예의 역사를 통해, 오
늘날의 대중 매체를 통해 전해진 까만 피부색의 아이는 분명 저와 우리 사회가 가진 편견으
로 인하여 애처롭게 보입니다. 참 징그러운 일입니다.
(2005년 1월 13일 오후 2시 34분, 송영복의 브라질 여행일기 중에서)

이렇게 보니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평소 갖고 있던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에 대한 부


정적인 이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나요? 독일 군인에 대해 가지는 편견처럼, 멕시코
사람에 대하여 게으르다, 무책임하다, 거짓말 잘한다, 불성실하다, 한심하다, 무식하다 심지
어는 더럽다는 이미지까지 가진 경우도 다반삽니다. 우리가 살아오는 전 과정을 통해 음으
로 양으로 조금씩 쌓여온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제 조금은 비판적인 생각으로, 새로운 생각
으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 정도의 자극
을 받은 것으로 아주 훌륭합니다.
제3장 라틴아메리카 바라보기 2

한국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중남미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가 워낙 부정적이


다 보니 중남미에 진출한 한국 사람들과 현지 사람들과의 조화와 협력에 많은 어려움이 있
습니다. 이민이나 장기적인 생활을 위해서 온 경우는 나름대로 그들을 이해하고 동화하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단기로 나온 경우나 이해관계가 직접 얽힐 때는 그
들의 방식을 이해하기보다는 우리의 방식을 그들에게 주입, 강요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
났습니다. 당연히 많은 문제가 뒤따랐죠. 앞에서 설명한 문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 부정적인
이미지 등은 결국 현실에서는 실질적인 문제로 나타나니까요.
중남미 진출 한국 기업이 격심한 노사 분규를 겪고, 한때 한국 기업은 악덕 기업이
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습니다. 한국 경영진이 현지 노동자들을 폭행한 사건에서부터 멕
시코 한국인 마피아 사건, 과테말라에서 한국 조직 폭력배가 이권 쟁탈전을 벌인 사건에 이
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사건, 사례들이 생겨났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그릇된 이해, 악
의적인 왜곡, 부정적인 이미지들로 인하여 중남미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의 현실적인 만남에
서 주옥같은 사례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다음의 글은 멕시코 “한국 기업의 노동 문화 적응”이라는 제하의 일종의 보고서의


일부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 관리자들은 멕시코의 현지 문화를 존중하기보다는 한국식 경영


이 낫다는 우월감을 갖는 경향이 관찰된다. 특히 한국인 관리자들이 멕시코 종업원들에게
갖고 있는 인상은, ‘게으르고 근로 의식이 부족하다’,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 ‘도덕 의식이
없고 되는 대로 한다’,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다’ 등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한국 관리
자들은 ‘우수한’ 한국식 관리 방법을 적용하게 되고 이러한 시도가 상당한 부작용을 낳은
다음에도 현지에 맞는 경영 기법을 개발하기보다는 한국식 접근 방법을 더욱 강화하는 경향
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해외 법인의 경영을 본사의 통제하에 두려는 기업의 전략으
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분석된다”.1)

제가 여러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직접 내용을 보는 것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음은 “엘살바도르 진출 기업 노무 관리 안내서”로 한국국제노동
재단이 발간한 자료입니다. 역시 유사한 분위기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우리나라가 지금까
지도 적건 많건 가지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사람들과의 비즈니스 만남의 현실입니다.

1) 이진규 외, 멕시코 한국 기업의 노동 문화 적응, 미래인력연구센터, 서울, 2000, 노동 인력의 세계


화 시리즈 3, 83쪽
“특히 한국 기업주들은 현지 근로자들에 대해 ‘우리나라보다 후진국 국민이고 나의 회사가
먹여 살리는 사람들’이라는 무시하는 감정을 갖기 쉬움. 그러나 현지 근로자들이 우리나라
근로자들에 비해 학력 수준이나 생활 수준이 많이 낮은 것은 사실이나 그런 이유로 인격적
무시를 하거나 은연중에라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해야 함”.2)

현실이 이렇다 보니 여러 가지 부정적인 사례들이 계속해서 발생합니다.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납니다. 중미의 한국 공장에 근무하는 한국인들의 현지인 부


당 대우 및 폭행 사건의 전설적인 일화로 소위 ‘담배 빵 사건’이란 것이 있습니다. 담배 빵
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을 위해 굳이 친절하게 설명하자면, 담뱃불을 몸에 대서 화상을 입히
는 것을 말합니다. 건달들이 자신의 깡을 과시하기 위해 스스로 자해하던 것을 일컫는 말이
기도 했는데 이렇게 점잖게 이야기하려니 영 우습군요. 아무튼 중남미 노동자들이 한국인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고 태업을 하자 격분한 한국인 직장 간부가 피우고 있던 담뱃불로 일
을 하고 있던 현지인에게 화상을 입힌 사건입니다. 이외에도 현지 텔레비전 방송을 탄 구타
사건, 성희롱 사건 등도 무수히 많습니다. 이런 사건들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의 구조
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중남미 사람들은 바보 같고 나쁘기 때문에 우리 우월한 사람들과는 동등할 수 없다!?


⇒ 이들을 우리의 방식대로 가르쳐 교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이 이전 장의 ‘말하는 동물’이라는 개념과 비슷한 거 느끼시나요? 16


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에 온 서양사람들이 가진 원주민에 대한 생각, 원주민들은 마치 말하
는 동물과 같이 열등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단순히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인과 현지인의 관계에서만 갈등이 나타나는 것은 아
닙니다. 한국 내의 외국인 노동자 문제와도 맥락이 비슷합니다. 현 경제 중심의, 돈 중심의
가치 기준 속에서 외국, 외국인과의 관계의 근본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는
현실적으로 세계화 시대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됩니다. 우리 생각의 문제점을 더욱 확장
하여 넓게 이해함으로써 그 실체를 정확히 파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업 시간에 500원과 10,000원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특정 노동의 댓가로 -예를


들어 식당의 접시닦이- 우리나라 사람이 한 시간에 10,000원을 받는다면 온두라스 사람은
얼마나 받을까? 혹은 얼마를 받는 것이 맞을까? 라는 질문을 했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
시나요? 물가나 환율 등 경제의 복잡한 논의를 해보자는 게 아니라 다만 우리가 가지고 있
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일반적인 감성을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2) 엘살바도르 진출 기업 노무 관리 안내서, 한국국제노동재단, 서울, 2003, 해외진출기업 HRM시리


즈(7), 137쪽
어느 보험회사에서 인간의 가치를 나름의 객관성을 가지고 계산해 보았다고 합니
다. 직업, 교육, 연령, 경력 등의 기준으로 산출한 자료가 얼마나 객관적이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러한 산출이 가능한, 우리의 의식 구조에 대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인간을 경제 가치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죠. 결국
이 말은 인간 개개인에게 부여되는 가치(점수)가 다르다는 말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만일
특정한 상황이 벌어져서 열 명의 인간 중에 한 명을 살리고 나머지는 죽을 수밖에 없다면
이러한 가치를 산출하여 가장 점수가 높은 사람을 살리겠다는 극단의 가정도 가능해집니다.
잔인한 느낌이 들지만, 사실상 현재 지구에서는 이렇게 잔인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굶어 죽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아프리카와 중남미 국가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계 빈곤율이 이렇고 저렇고 혹은 유아 사망률이 이러네
저러네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식상합니다. 한편 한 국가 안에서의 차이도 극명합니다. 잘 사
는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고액 과외를 받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
서 소위 빽으로 군대를 면제받아 다른 사람보다 빨리 졸업하여 좋은 직장을 부모 찬스로 들
어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반면 그렇지 못
한 무지렁이들은 비싼 종합 진단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생활고에 허덕이다가 결국은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손 한번 변변히 써보지 못한 채 죽고 마는 것이 현실입니다. 너무 극단적인
가요? 그러나 이것이 꾸밈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이야기를 다시 한 시간에 10,000원을 받는 금수저와 한 시간에 500원을 받
는 흙수저의 문제로 바라보겠습니다. 한 학생이 같은 노동에 대한 임금으로 500원과
10,000원의 차이는 물가의 차이가 아니겠느냐고 되물어봅니다. 이 경우 단순히 물가의 차
이뿐만 아니라 그 물가를 구성하는 경제력과 경제 가치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의 등급화가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단순히 경제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
지만 저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당황했습니다. 역시 많은 학생이 현실적이라는 느낌입니다.
요즘 학생들은 인간의 가치의 차이를 전제로 한 임금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가? 쉽
게 얘기하면 나는 저놈보다 잘났으니까 내가 월급을 더 많이 받는 것은 당연하단 말입니다.
이는 정확히 같은 일을 통해 같은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내가 근본적으로 다른 놈
보다 더욱 가치 있으니 좀 더 대우받아야 마땅하다는 신분제의 긍정이기도 합니다.
‘대학 교수는 동네 채소가게 아저씨보다 우월한 존재이다 ? 서울대학생이 경희대학
생보다 생산성이 높다? 의사가 천만 원을 버는 것은 정당하고 당연한 일이고, 단순 근로자
가 200만 원밖에 못 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과연 그럴까요? 니카라과 노동자가
한국 노동자에 비해 열등하니 10%도 안 되는 임금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까요?

지금까지 침이 마르도록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서구세계가, 우리들


이 엉터리로 만든 것이라는 점을 말했습니다. 그럼 그들은 훌륭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도대체 훌륭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바로 머
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돈, 명예, 학식 뭐 그런 건데, 따지고 보면 그런 것들이 훌륭한 사람의 기
준이 돼서는 안 된다느니, 모든 사람은 다 그들만의 가치가 있으며 고귀하다느니. ‘우린 그 자체
로 빛나’ 등등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우리는 배워왔지 않습니까.
일단은 이런 이야기는 시시콜콜합니다. 그래서 별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학
생이 저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돕니다. 그 학생이 그러더군요. 미래가 안 보인다고 울분을
토하거나, 불행해서 죽고 싶다고 술을 퍼먹더라도 명품백 하나 옆에 끼고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죽는 한이 있어도 우아하게 죽고 싶으신가요? 불
행하더라도 말끔하고 고상하게, 간지나게 불행하고 싶으신가요? 이 책이 철학책은 아니니 일단
은 좀 유보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근원적인 질문은 한켠에 두고 좀 더 현실적인 질문을 좀 해
보겠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뭘 잘하나? 잘하는 것이 있기나 한가?’ 그래서 우리가 배울만한 그 잘
하는 뭔가가 있기나 한가? 라는 질문을 해보자고요. 물론 그 이전에 우리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좀 더 원천적인 전제가 있기는 합니다. 정말이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답해 보려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잘해야 하지?” 입니다. 죽어라고 잘해서 좋은 대학 가고 돈 많이
벌어도 불행하다 느끼고, 죽고 싶다면 그 잘하는 게 뭔 의미가 있을까요 ? 잘하는 게 있어야 꼭
행복한가? 그럼 잘하지 못해도 행복한 그들에게 배울 중요한 것은 없을까?’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좋겠군요. 이러한 것들은 전체 역사를 조망하면서 조금씩 언급하겠지만 이곳에서 먼저
생각의 물꼬를 터 봅시다.

짧은 소설책 하나 추천해 드릴게요. 루이스 쎄뿔베다(Luis Sepulveda)라는 칠레 작가


가 쓴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이란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와 있습니다. 그 책에서는 남미의
밀림에 사는 한 노인이 삼류 연애 소설 읽는 것에서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을 느끼며 다른 권력과
재산, 명예 등을 거부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소설을 보통 환경 소설이라고 말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문제와 맞아들어가는 소설입니다. 우리는 돈과 명
예, 권력 등을 갖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노인은 ‘연애 소설 읽기’라는
아주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것에 인생의 행복을 두고 살아갑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덜 중요해 보
이는, 아니 하나도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며 사는 그를 바보라고 하겠습니까 ?
게으르고 멍청하다고, 또는 열등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혹시 그 노인을 통해 또 다른
규격화되지 않은 행복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닌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돈 많이 주는 회사가 가장 좋은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여
가가 많아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회사가 가장 좋은 회사입니다. 개념이 바뀌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맛있는 음식이 좋은 것이었는데 이제는 건강한 음식이 좋다고들 합니다. 행복의
기준, 즐거움의 기준, 가치의 기준이 바뀌고 있습니다.

중남미에 가면 그 행정의 느려터짐과 불합리함에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낮잠 자는


문화인 시에스따Siesta도 그중 하나입니다. 보통 현지에서 일을 보려면 아침 10시에서 오후
1시까지가 가장 확실한 시간입니다. 왜냐고요? 보통 1시에 시작되는 점심시간이 하늘이 두
쪽 나도 4~5시까지는 이어지니까요. 밥 먹고 한숨 자고……. 그리고 적당히 귀찮으면 하루
의 일과 땡!
그런데 한국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그러니까 못 살지. 게으른 놈
들…….”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꼭 그럴까요.
필자가 살던 동네에는 길거리에서 자동차를 고치는 루벤Ruben이라는 정비공이 있
었어요. 그는 차 안에서 먹고 자며 무허가 정비를 하지만 기술이 좋아 제법 벌이가 짭짤했
죠. 근데 마흔이 넘은 이 노총각에게 장미라는 뜻을 가진 로사Rosa라는 이름을 가진 애인
이 있었어요. 그 커플은 주말이면 휴양 도시인 아까뿔꼬Acapulco로, 꾸에르나바까
Cuernavaca로 열심히 놀러 다니며 1주일 동안 번 돈을 남기지 않고 다 쓰고 돌아옵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터라 지방 축제에 초대를 받아 같이 놀러 갔는데, 거기에서 정말 무허
가 정비공치곤 너무 돈을 잘 쓰는 거예요. 저야 물론 좋았죠……^^ 아무튼 돌아오는 길에
필자는 친근한 마음으로 루벤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잊지 않았어요. 무슨 말을 했는지 한
국 사람이라면 대강 짐작하시겠죠?
“저축해라, 낭비하지 말아라, 미래를 생각해야지... ” 등등. 필자가 건방지게 우쭐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했다는 건 안 봐도 다들 아시겠죠, 쩝……. 저의 그 근거 없는 자신감과
건방짐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그런데 제 말을 은근한 미소로 조용히 듣
고 있던 루벤은 대뜸 “송, 넌 무엇을 위해 사니?”, ¿Song para que tu vives? 하고 묻는
거예요. 사실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 정도 반격에 질 수 없지” 하며 또다시 이것저것 늘
어놓는 필자에게 루벤은 현실에 충실하려는 그들의 인생관을 들려주었어요.
너는 뭐가 그렇게 바빠서 토요일 일요일에도 놀러 다니지 못하느냐며 오히려 나무
라는 투였어요. 그리고 필자에게 “너는 한국에 돌아가서 직장 잡고, 집 사고, 차 사고, 저축
많이 해놓은 다음에 놀 거니?”라고 물었어요. 필자가 왜 지금 놀 수 없는지, 그걸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말이에요. 그는 한국 사람들이 왜 그렇게 안달복달하면서 사는
지, 그걸 이해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한국이 쿠바 옆에 있는 나라냐고 물을 정도로 학교 공
부와 담쌓은 그가, 그래서 너희 나라는 그렇게 잘살고 있구나, 참 본받을 만한 나라라고 말
했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어요.
과연 어떤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대답을 알고 계시나요? 그들의 속담
가운데 “Los ricos(부자들) tambien(
́ 역시) lloran(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멕시코의
한 경제학자가 한국의 경제 발전을 다룬 텔레비전 특집 프로그램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만큼만 일한다면 한국보다 열 배는 더 잘 살 텐데……"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
이 있습니다. 그는 자국민에게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했지만 어감
은 결코 냉소적이지도, 그렇다고 부러워하는 것도 아닌, 그들만의 독특한 여유가 있었습니
다.
나이 먹고 즐기는 방법도 모르고 인생을 되돌아볼 여유도 없이 그저 달리고 또 달
리는, 그러다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도 모르고 사는 과거의 우리들을 생각할 때 그들의 말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도 또다시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뭔가 중요한 일들을 하느라 놀러 다니는 데
인색했던 걸 보면 필자 역시 어쩔 수 없는 한국사람인가 봅니다. 루벤과 로사의 모습이 아
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결코 한심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필자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그들 삶의 철학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자위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봅니
다. 언젠간 나도 열 일 제쳐놓고 라틴아메리카식 낮잠을 즐길 수 있는, 그런 게으른(?) 사람
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조금도 부끄럽게 느껴지지 않는 건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나
쁜 것일까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문화의 차이를 우등과 열등으로, 야만과 문명으로 나
누고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열등한 야만인으로, 그리고 서양과 한국 사람들은 우등한 문명
인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행복 지수
에서 보는 것처럼 어떤 것이 우등하고 어떤 것이 열등한 것인지에 대한 기준은 애매합니다.
우리가 만원을 받는데 그들은 중남미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500원을 받는 것
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을 한 차원 낮게 보고 업신
여기는 분위기입니다. 라틴아메리카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들의 노사 관계를 통해 우리가
현실에서 많이 접하는 문화 접촉 현상에서 그러한 점들을 관찰해 보았습니다.
문화에서 열등과 우등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동의하시나요?^^ ~~ 야만과
문명을 나누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차별이야말로 가장 야만스럽고 비문
명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차등의 역사가 엄연히 존재했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그것들을 접하게 되고, 의식 무의식으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차등의 배경에 서양 사람들의 패권주의, 식민지주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와 배
경으로 형성된 이미지를 고정관념으로 갖고 우리와 라틴아메리카와의 만남에서 서양의 가치
관을 그대로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큰 벽을 마주하게 됩니다. 두 가지 면에서 큰
손실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 라틴아메리카와의 경제 협력 관계에서 동반자가 아닌 침략자 분위기를 가
지고 간다면 우리로서는 백전백패할 것입니다.
두 번째, 인류사적인 측면에서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긍정적인 면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무엇이든 부정적으로 바라봄으로써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
다.
따라서 어쭙잖은 서양의 식민주의 역사관과 가치관을 답습하는 것은 그야말로 꼴불
견일 뿐만 아니라 부당하며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것도 하나 없습니다.
제4장 아메리카 대륙 고대문명의 개관

중요 연대
인류의 기원~기원전 7,000 : 구석기시대Paleolítico
기원전 7,000~2,000 : 신석기시대Neolítico
기원전 2,000~기원 원년 : 전고전기Preclásico
기원 원년~기원후 900 : 고전기Clásico
기원후 900~1492 : 후고전기Posclásico
7세기 : 북미의 떼오띠우아깐, 남미의 띠아우아나꼬 쇠퇴
14세기 : 북미의 메시까(아즈떼까), 남미의 잉까문화 시작
1492년 :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라틴아메리카 고대 문화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잉까, 마야, 메시까(아즈떼


까). 뭐, 이런 단어들 아닌가요? 그런데 그렇게 친근하게 알려진 단어들에 비해 이런 문명들
의 실체에 대해서는 사실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저 피상적인 이해를 하는 것이 현실 입
니다. 마치 외계인이 만든 신비한 문명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의 고대문명으
로 말이지요. 그 이유는, 직설적으로 말해, 이 문명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 부족과 서양사람
들의 잘못된 역사관에 근거합니다. 서양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여 그곳을 무너뜨
리고 원래 원주민들의 모든 책과 유물들을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탄압을 거듭하여 거의 사멸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곳의 고대 문화는 그 오랜
기간의 단절만큼이나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냥 이렇다 저렇다 상상하기 일쑤입
니다. 또한 자연스럽게 신비니 수수께끼니 하는 말이 따라다니는 겁니다.
한편 이들이 뭐 좀 괜찮은 것을 해놓은 것을 보면 “이렇게 열등하고 미개한 문명이
훌륭한 것을 할 수 있었겠어? 우리같이 훌륭한 서양에서도 이러한 것은 해본 적도 없는데”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신비나 수수께끼란 말을 하면서 외계인이 와서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문명들을 공부
하기에 앞서 이에 대한 왜곡과 오해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또한 이들의 역사
문화 속에서 우리와는 다른, 그래서 이해하기 힘든, 또는 오해하기 쉬운 점들을 이들의 시
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라틴아메리카 고대문명 이해의 시작점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명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로 우리의 시각에 대


하여 지적하고 넘어가 볼까요.
우리는 이른바 세계 4대 문명이라고 부르는 중국, 인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
이 각각 황하, 인더스강, 유프라테스-티그리스강, 나일강의 온화한 기후와 기름진 땅을 배경
으로 발전하였다고 배워왔습니다. 별로 의심하지 않는 이 명제에 대해 먼저 좀 삐딱한 말부
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대학 입시에서 세계 4대 문명이 어디냐는 문제가 나온다면 그동안 죽어라 외운 위
에서 말한 4개의 문명을 찾아서 거기에 동그라미를 치면 되겠지요. 문명과 연결되는 강의
이름도 시험에 나올 법한데요. 예를 들어 중국 문명이 나일강과 연결된 항목이 있다면 이는
틀린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정말 이러한 명제들이 그렇게도 정확하게 진실을 이야기하
고 있습니까? 명확한 기본 진리인 것처럼 보이는 이 말에 다양한 문제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가요? 또는 일종의 ‘역사 왜곡’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런 생각을 해보자고 하
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라틴아메리카의 고대문명을 이해하는 시작으로 삼아 보자는 것
이지요.
먼저 세계 ‘4대 문명이라는 규정’ 자체가 올바르냐는 질문부터 해보고 싶습니다. 굳
이 문명이나 문화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떤 것은 그런 중요 문명에 들어가고
다른 어떤 것은 안 들어간다는 게 말이 안 되지요. 왜 세계 4대 문명에 한국 문명은, 아프
리카 문명은, 또는 북미의 고대 마야나 남미 안데스 문명은 포함되지 않는 걸까 요? 도대체
기준이 무엇인가요? 발전인가요? 행복인가요? 그 기준에 모든 인간이 보편타당하게 현재든
미래든 다 동의할 수 있습니까? 소위 요즘 잘 나간다는 -경제적으로 잘 산다는, 또는 국제
사회에서 힘이 있는- 나라들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4대 문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만약 앞으로 10년 후 유럽이 쇠퇴하고 중남미가 세계 경제와 정치의 주도권을 잡
게 된다면 분명 우리는 바뀐 세계사 답안을 적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이런 가정을 해보면
승자에 의해 쓰인 역사의 한계를 알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가서 보았던 잊을 수 없는 석굴암 앞바다의 장관이 세계 3
대 미항보다 뒤지지 않는데 과연 누구의 눈으로 바라본, 누구의 시각으로 강요당하는 세계
3대 미항이란 말입니까? 라는 반문도 듭니다. 같은 맥락에서 저의 삐딱한 마음에 곱게 느껴
지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그들의 규정을 마치 절대 진리인 것처럼 온전히 받아들이고 외우
고 또한 다른 이에게 강요해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수와 질의 문제로
그저 세계 4대 문명, 3대 미항이라는 것을 규정하였다고 백번 양보하여 이해한다 해도 위의
명제는 다음과 같은 다른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인류 문명의 발전이 강이 만들어주는 비옥한 환경을 바탕으로 발전하였다는 진리


아닌 진리 역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이는 마치 한강 변의 아파트가 강원도 포장도로도 안
닿는 곳의 집보다 당연히 비싸야 한다는 생각의 연장입니다. 연봉 오천만 원의 직장이 연봉
이천만 원 직장보다 훌륭하다는 무조건적 단정입니다.
몇십 톤에 달하는 정교한 돌들을 마치 무를 잘라 맞추어 놓은 듯 면도칼도 들어가
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가공하여 쌓을 수 있었던, 고도로 발달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던
잉까 문명과 강은 그렇게 큰 연관을 맺지 못했습니다. 잉까 이전에 발전하였던 나스까 문화
는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건조한 기후 덕택에 엄청난 규모의
지상 그림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당대 세계의 가장 높은 기술력을 자랑하였던
안데스 문명들은 강이 인간에게 주는 풍요와는 다른 배경을 바탕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온난
한 기후를 비롯한 인간이 살기 좋다고 말하는 환경들이 이들 문명을 꽃피우는 데 절대 조건
으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나일강 삼각주와 같은 지역의 높은 농업 생산력과 강이 주는 다양한 혜택 등이 문
명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면, 잉까의 경우는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생산성
을 증대시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계단식 농법이나 자연 친화적인 비료 등이 일찍부터 많
은 시행착오를 통해 발전하면서 다른 대륙의 강이 만들어주는 높은 생산성을 대치하였던 것
으로 보입니다. 중남미 최대 유적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마추픽추의 경우만 하더라도
산악 지대의 험난한 곳에 도시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변에 간신히 샘 정도
가 있을 뿐 강이 주는 풍요와는 애당초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들은 잉까가 한
창 팽창하였던 시기에 자신들의 행정권 안에 유명한 아마존 강의 상당 부분을 포함하게 됩
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강원도 오지의 작은 농가주택을 선택하듯 그렇게 그들의 도시를
만들 장소를 선택하였습니다. 한강 변의 고급아파트가 아니라 말입니다.

이미 다양한 농사 방법을 통해 몇천 종에 이르는 감자를 비롯해 현재 인류가 먹는


작물의 3분의 1이 남미 안데스 문명에서 나올 정도로 잉까 사람들은 농업 분야에서 축적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연을 자신들이 살아가는 생태
의 하나로 조화시켜 나갈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자연에 한계 지워진 인간이기보
다는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통해 자연과 대화를 하였던 것이지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생산성이 높은 나일강 유역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아니었
습니다.
고대 마야나 메시까(일반에게 아즈텍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많이 알려져 있지만 올
바른 이름은 메시까다) 사람들이 만든 치남파스Chinampas 역시 이러한 일면을 잘 보여줍
니다. 이들은 유럽인과 만나기 이전부터 일종의 수경 재배 기법인 치남파스 농법을 발전시
켰습니다. 바둑판 같은 경작지 사이로 물을 흐르게 하여 경작지를 마치 떠 있는 섬처럼 만
들어 물의 유기 성분이 효과적으로 작물에 전해져 높은 수확을 가능케 하는 농업 방식입니
다. 그들은 자연환경을 잘 이해하고 적절히 이용하여 인간이 가장 살기 힘든 환경인 열대밀
림의 숲속에서, 몇십만 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강 하나 존재하지 않는 대평원
에서, 그리고 3,000미터가 넘는 고산 지대에서 자신들의 문명을 꽃피웠습니다. 욕심을 내지
않으면 바로 그곳은 인간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됩니다. 세계 4대강 문명 발상지 따위와
비교할 것이 없지요. 결코 자연에 한계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곳은 농사짓기는 힘든 곳이
었을지 몰라도 가족이 모여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기 좋은 곳이어서,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포옹을 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장소이기에 선택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이게 사실 같은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즉 강이 주는 혜택을 이


용하여 발달한 문명을 이룩한 동서양의 문명처럼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명도 그렇게 자연
이 주는 환경을 이용하여 –비록 그게 강의 형태는 아닐지언정- 문명을 발달시켰다는 점에
서 유사하다고도 말할 수 있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동서양의 경우는 전제 조건으로 강이나 물이
존재한다면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 강이나 물은 그 과정이거나 결과물에 가깝다고 하는 점이
다릅니다.
두 사람이 연애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사귀면 행복할 수
없다는 전제가 동서양의 경우입니다. 즉 비옥한 강이 주는 풍성한 농업 생산성이 없다면 좋
은 문명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생각을 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
런 것 다 필요 없고 나는 사랑이 제일 중요해, 그래서 그놈의 사랑 타령으로 사귀지요. 그
러다가 그 사람과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돈을 버는 거예요. 즉 돈이 물이고 풍부한 생산
성이라는 것입니다. 돈은 목표가 아니고 과정이요 결과인 겁니다. 이 장소가 너무 사랑스러
운데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수로를 만들고 종자를 개량하고 다양한 농법을 개발하
는 것이지요. 본질은 사랑이고 목표는 그 사랑하는 인간과 편하게 살고 싶다. 그래서 옥수
수, 감자 수확 좀 많이 해보자는 겁니다. 어떤 커플이 더 행복하게 잘 살까요? 전자의 금수
저 커플이 잘살 확률이 높겠지요. 월급 받아 저축해서 여유 있게 사는 게 어디 쉽겠습니까.
그렇지만 흙수저를 사랑한 사람이 금수저 커플보다 항상 불행한 것은 아니지요 . 아니 오히
려 본질을 본다면 흙수저 커플이 더욱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멕시코가 좋고
중남미 사람들이 얄밉고 짜증 나지만 미울 수가 없네요.
금수저 커플이 돈 욕심에 흙수저 커플을 침략하고 그 흙으로 만든 수저마져 빼앗아
간 것이 1492년의 사건이요, 이를 계기로 기득권을 잡은 인간들이 쓴 역사에 세계 4대 문
명이라는 말이 실리게 된 것입니다.
서양 문명의 발전은 수직적인 혹은 직선적인 진화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좋고 나
쁜 것, 위와 아래, 더 많은 것과 적은 것,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라는 수직적인 가치
가 존재하지요.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은 그러한 수직적이고 양적이며 직선적인 발전의 양태
가 적었어요. 즉 훨씬 더 다양한 요소의 행복을 생각하였다는 것이고, 이는 곧 생산량, 효
율, 속도와 같은 가치와는 조금 달랐다는 것이지요.
물은 인간에게 공기와 마찬가지로 생활, 아니 생존에 절대로 필요한 요소인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 또한 물을 얻고
이용하는 방법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했습니다. 그런데도 단순히 서방의 예가 마치 유
일한 방식이요 가치라고 생각하는 데에 의문을 제기해 봅니다.
오늘날 유럽의 식민지 착취의 전통이 만든 경제 빈곤 때문에 서양의 시각에서 본
세계 4대 문명 안에 끼지 못하는 부당함은 겪고 있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화는 단지
기술면에서도 같은 시기 서양의 그것에 비하여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는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모든 인류의 문명은 하천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해
도- 단순히 예외가 아닌 엄연한 인류의 다양한 가능성을 넓힐 수 있는 문명의 예로 의미가
있습니다.

요즈음 이른바 세계화라는 말이 너무도 쉽게 쓰이고 있습니다. 마치 단일한 세계화


의 방향과 가치, 모양이 존재하는 것처럼 세계화를 보는 경향도 있고요. 그리고 세계화의
속내에는 미국화 또는 서양화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화는 서양화 혹은 중심국가에
편입되거나 빨려 들어가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계 4대 문명 이라는 이미지 결
코 전 인류를 아우르는 시각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인류의 ‘발달한 문명’은 온난한
지역의 하천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운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다양한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을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몇 개의 지역, 몇 개의 그룹, 몇 개의 이기적
사고에 긍정적인 것을 국한함으로써 진정한 세계화에 역행하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볼 때 라틴아메리카 문명이 서양 문명과 비교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
로 후진 것으로 비추어진 부분들이 많습니다. 이 정도로 입에 침이 마르게 이야기를 드렸으
니 “서양 중심의 역사 속에서 아메리카 대륙 고대문명이 객관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을 수
있겠구나”라고 공감할 정도가 되셨나요?
그럼 이제는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고대문명 전반에 걸쳐 개괄해 보겠습니다. 고
대문명이 하나의 문명으로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에서 어떠한 내용
을 가졌는지 차근차근 관찰해보자고요. 먼저 메소아메리카와 안데스 문명이라는 큰 테두리
로 분류되는 문화군의 정의에 대해 살펴본 뒤 이러한 정의에 따른 현재 사용상의 문제점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커다란 지리적 테두리 안에 있는 다양한 문화의 특성을 일반


화시켜 지역적 혹은 문화적으로 분류하고 이름을 붙여서 정의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각각에 독특한 개별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
요. 한국, 중국, 일본의 문화가 서로 각각 다르기는 하지만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최초 문명 형성기에서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빙하기
가 끝나고 기후 변화와 더불어 정착 생활을 하면서 원주민들은 그들 나름대로 독특한 문화
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캐나다의 퀘벡과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를 연결하는
선의 북쪽과 남미 지역의 남위 40도 이남(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남부 일부) 원주민들은 처음
그들 조상이 가지고 있었던 유목 문화 형태를 상당히 많이 유지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의
그들이 사는 모습이 당시 최초 문화 형성기와 많이 닮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을 제외한, 그러니까 북미의 북쪽 끝 지역과 남미의 남쪽 끝 지역
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정착 농경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기 시작합니다. 아메리카 대
륙에는 유럽인들의 침략 이전에 발달한 정착 농경 생활을 중심으로 형성된 두 개의 커다란
문명군(文明群)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남미의 안데스산맥을 중심으로 발
전한 안데스(Andes) 문명군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북중미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메소아메
리카(Mesoamérica) 문명군입니다. 나름대로 독특한 특징들을 가지고 발달한 각각의 문명들
은 상호 긴밀한 관계를 맺고 발전하여 전 아메리카 대륙의 곳곳에까지 많든 적든 영향을 미
칩니다.

먼저 북미 지역에 있었던 메소아메리카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메소


아메리카라는 용어는 -지리적 경계를 기준으로- ‘1492년 스페인 정복 이전에 발전한 중·북
미 지역의 고대 문화’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용어는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다
소 생소하지만 미주 유럽에서는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어원을
통해 보면 ‘메소아메리카’ 라는 말은 ‘중앙아메리카’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훨씬 복잡하고 많은 학술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보통 메소아메리카 문명을 지리적인 면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세부적인 문화 군으로 다시 나뉩니다.

1. 멕시코 북부의 유목 문화(Norte)


2. 멕시코 서부의 서부 문화(Occidente)
3. 멕시코 동부의 멕시코 만 문화(Golfo de México)
4. 멕시코 중부 내륙의 고원 문화(Altiplano Central) - 이걸 소위 아즈텍이라고 말합니다.
5. 멕시코 중남부의 오아하까 문화(Oaxaca)
6. 마야 문화(Maya)

이러한 문화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상호 긴밀한 영향 아래 발전하였기 때문에 이것


들을 묶어서 메소아메리카 문화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지역들이 메소아메리카
의 공통된 문화 특징들을 모두 다 공유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지역 경계를 구분하는 데에
많은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략적으로는 지금의 멕시코를 중심으로 남쪽의
과테말라 온두라스까지 이어지는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 그 중심지역에 해당한다고 보면
됩니다.
메소아메리카의 경우 지리적인 방대함과 교통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준의
상호 문화와 물자의 교류가 있었습니다. 미국 남부 인디언 문화 역시 메소아메리카 문화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들이 주로 도구와 장식품 등으로 많이 사용하였던
흑요석의 왕래가 잦았습니다. 종교적인 면에서도 메소아메리카와의 공통점이 많습니다. 즉
우주관이나 세계관 등이 유사하지요. 그래서 미국 남부 원주민 문화를 메소아메리카에 집어
넣어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한편 안데스 문화는 말 그대로 안데스 산맥 주변에서 발달한 문화로 크게 태평양
연안을 따라 발전한 해안 문화, 해발 고도가 높은 안데스의 산악 지역에 발전한 산악 고지
대 문화와 고원 분지 문화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차빈(Chavín), 모치까(Mochica),
치무(Chimú), 나스까(Nazca), 띠아후아나꼬(Tiahuanaco), 잉까(Inca) 등이 대표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안데스 문화와 메소아메리카 문화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이 더욱 과학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에 주로
많이 사용하는 ‘잉카’, ‘마야’, ‘아즈텍’과 같은 통칭은 정확하지 못한 표현일뿐만 아니라 이
로 인해 많은 오해와 혼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
명을 개괄할 때 잉까, 마야, 메시까(아즈떼까)라는 말보다 남아메리카는 안데스 문화 그리고
중미와 북미 지역에는 메소아메리카가 문화가 중심에 놓였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로 시대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친숙하게 들어
온 마야, 잉까, 메시까는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할 당시에 존재했던 일부
중요 문화의 이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즈떼까, 또는 아즈텍이라고 알고 있
는 메시까는 기원후 1376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니까 메시까는 스페인의 정복자들에게 멸
망당하기까지 겨우 15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 이전에 올메까(Olmeca), 떼
오띠우아깐(Teotihuacan) 등이 발전했고, 지리적으로도 동시대에 북미 지역만 하더라도 믹
스떼까(Mixteca), 사뽀떼까(Zapoteca), 따라스꼬(Tarrasco), 북부 문화 등이 흥망성쇠를 거
듭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즈텍’은 상당히 짧은 기간에 발달했었고 따라서 전체 메소
마에리카 문화를 대신하기 힘들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즉 ‘잉카’, ‘마야’, ‘아즈텍’
이라고 만 말하면 마치 구한말 ‘대한제국’ 시대가 한국 문화의 대표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잉까를 남미 문화의 대표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문제가 많습니다. 잉까는
1438년에 본격적인 역사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즉 잉까가 일정한 형태의 국가 체계와 유
사한 문화를 만든 것은 1438년의 일입니다. 그 이전 시대의 최고 지도자에 관한 이야기들
이 전해 내려오고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설 수준입니다. 백번 양보해 그 전설의 시대까
지 다 계산해도 1438년으로부터 기껏해야 100년 정도만 뒤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그
러니까 삐사로(Pizarro)라는 스페인의 침략자가 잉까의 수도를 정복한 해인 1532년까지 잉
까의 실질 역사는 100년이 채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설에 가까운 부분까지 다 합쳐
봐도 200년이 넘기는 힘든 거지요.
그런데 그 이전에 이미 잉까 문화에 견줄 만한 문화가 많이 있었습니다. 보통 ‘잉
까 황금 유물’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실제로는 잉까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습니
다. 잉까시대 이전부터 금세공에 관한 꾸준한 관심이 남미의 잉까 이외의 지역에서도 다양
하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사뽀떼까, 믹스떼까
혹은 중미의 파나마 지역, 현재 콜롬비아 지역의 금세공 등도 화려하게 발전했었습니다. 그
런데 이를 모두 잉까라고 명명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 문화를 소개하는 용어들이 문제의 소지가 있는데도
북미 대륙의 문화를 메시까(아즈떼까), 또는 마야로 일반화시켜 이야기하거나 남미의 문화
를 잉까라는 말로 대명사화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미 굳어진 것이다 보니 그
런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용어 사용의 현실적인 면을 감안하여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
만 용어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앞에서 말한 오해와 왜곡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원전의 유물을 가져다 놓고 잉까 유물이라고 한다면 분
명 많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명을 지칭하는 용어의 문제를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이들


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특색은 다음 장에서 공부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먼저 라틴아메리카
고대 문화를 만든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의 기원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언어학, 인류학, 민속학, 고고학 등의 다양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학설들이
소개되기 시작했지요. 그중에서도 남방인류 유입설과 북방인류 유입설이 가장 대표적인 것
들입니다. 남방인류 유입설은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이 폴리네시아 쪽 남방의 섬에서 이주
해 왔다는 학설입니다. 일부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 아직도 이 학설이 언급
되고 있지만, 학문적인 설득력이 거의 사라졌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즉 학계에서는 아메
리카 대륙 원주민들이 몽골리안 계통이라고 주장하는 북방인류 유입설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북방인류 유입설의 요지는 현재의 베링 해협을 통해 아시아 대륙의 사람들이 아메
리카 대륙에 건너왔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몇만 년 전 빙하기에는 지구의 온도가 지
금보다 훨씬 낮았고, 그 결과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지금보다 더 발달했었습니다. 엄청난
빙하의 발달은 바다의 수면을 낮추기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이렇게 위스콘신 빙하기(빙하 3
기)를 즈음하여 지금은 바다인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베링 해협이 육
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육지로 연결되어 있던 현재의 베링 해협을 통하여 동아시
아의 바이칼호 근방에서 유목과 채집 생활을 하며 살던 몽골리안 계통의 인종들이 동물을
쫓거나 계절에 따른 이동을 하며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를 넘나드는 몇천 년에 걸친 자연스러
운 이주를 하였던 것입니다. 학자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략 지금으로부터 3만 년 전
에 최초의 인류가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뎠으며 1만 3천 년 전에도 많은 수의 몽골리안
계통의 인류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인간이 살기 시작하면서 빙하기가 끝나고 다시 베링 해협의 수면
이 올라가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수렵과 채취
활동의 영역을 넓혀 나갔을 것이고, 인구의 점진적인 증가와 함께 여러 방면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따뜻한 남쪽으로 서서히 이동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렇게 북미 지역은
지금으로부터 약 3만 년 전, 그리고 남미 지역은 약 1만 년을 전후하여 큰 규모의 원주민들
이 정착하여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초의 기원이 동북아시아 근처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우리나라 민족과 유사한 인
종이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간 셈이죠. 이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신체적 특징 중에 몽고
반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과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조상이 같다 혹은 형제
관계이다” 라는 말이 가능한 것입니다.

아메리카 대륙 고대문화의 시대구분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 특이성에 있습니


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들의 문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들과는 달리 그 발전의 형태나
방법이 아주 다릅니다. 서양식 역사와 문화 바라보기로 시대구분을 한다면 그 자체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개괄적으로 –물론 개별적인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 아메리카 대
륙의 고대사를 다음과 같이 시대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구석기시대(Paleolítico): 아메리카 대륙 인류의 기원~기원전 7,000


신석기시대(Neolítico): 기원전 7,000~기원전 2,000
전고전기(Preclásico): 기원전 2,000~기원원년
고전기(Clásico): 기원원년~기원후 900
후고전기(Posclásico): 기원후 900~1492
그런데 이러한 시대구분에 사용되는 개념이나 용어 등이 거의 서양식 역사관에 기
초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구분에 무슨 역사관이 있을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지 모르
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고 다양하게 서양적 기준이 우리의 마음속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나름대로 재단하고 있습니다. 국민 소득으로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를 이야기하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수로 각 나라 문학의 수준
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 말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겠죠. 하지만 그에 대한
타당성을 논하기 전에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건 과연 얼마
나 타당하고 얼마나 합리적일까요?
사실 매우 많은 일반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자세히 알고 나면 터무니없는 경
우가 많습니다. 신석기시대와 구석기시대의 개념과 구분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 상식이
얼마나 막연한지를 보게 되는 하나의 예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신석기, 구석기시대를
나누는 건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명을 이야기할 때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자 한번 변두리를 거쳐 그 이유의 핵심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고등학교 졸업 연도가, 첫 회사 출근일이 혹은 첫 아이의 탄생일이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이
되겠지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첫 데이트에서 연인과 손을 잡았던 날, 큰 감동을 준
영화를 2번째 본 날 혹은 길거리의 코스모스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졌던 그 날이 한 인
간 시대구분의 더욱 중요한 핵심이 될 수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
았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그 변화의 시간이 우리에게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삶이 다
른 각도와 시각에서 변화를 준 중요한 시기 역시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은 우리 삶 전체에 더 큰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모여 만든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른바 제도 교육 속에서 인류
의 문명이 구석기와 신석기를 거쳐 청동기와 철기로 발전했다고 배우고 있고 그 논리에 별
로 의심을 안 해 봤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인류 사회의 발전 단계는 하나의 유형일 뿐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 발전 단계를 보면 석기 사용
의 여부로 단계를 구분하는 것이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92년이라는 상징적인 해에 인류 역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 일어났죠. 바
로 끄리스또발 꼴론(콜롬버스, Cristóbal Colón)의 아메리카 대륙 도착입니다. 그 당시 마야
나 잉까, 또는 메시까(아즈떼까) 문명은 서양의 어떠한 나라와 비교해도 결코 수준이 떨어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과학, 건축, 예술 등의 많은 분야는 당대의 유럽이나 동양에 비교
하여 볼 때 비슷하거나 훨씬 발전한 것도 많았었죠. 물론 어떤 문명이 더 발전했다 아니다
하는 말 자체가 모순이지만 서양의 잣대로 보아도 고대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은 당대의 다
른 지역과 비교하여 상대적인 열등 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많은 학자가 인정하고 있습
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이 유럽과 만나던 시대인 16세기를 기준 삼아 고대 아메리카 문
명이 석기 시대를 넘지 못한 원시적이고 열등한 문명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사용하는 도
구의 재료를 가지고 문명의 발전 단계를 나누다 보니 그러한 말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책을 통해 모든 문명의 발전 단계, 인류의 발전을 말하는 시각이 너무
경직되어 있다 보니 하나의 그럴듯한 이론에 모든 것을 공평(?)하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아
메리카 고대 원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찬란한 문화는 독창적인 인류 문명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문화를 서양의 문화 발전 단계의 잣대로 재단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석기를 사용하면서도 다른 형태의 발전을 원했던 고대 아메리카의 문명들
은 이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서양 중심 세계관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역사 인식에서도 재고되어야 하는 중요한 문제로 지적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전통 예의범절이 전 근대적인 행동으로 인식되고 한국의 발전을 저
해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말에 등산하는 사람이 낚시하는
사람들은 잘못되었다고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과 궁극적으로 보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또
한 수억짜리 자동차를 타는 강남 아파트 사는 부장님이 지리산 골짜기 작은 농가주택에서
경차타는 개똥이 아빠보다 훌륭한 사람, 발전한 사람이라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돈
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의 선택과 발전을 가늠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
준으로 보니 마야는 미개한, 덜 발전한, 그래서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해서 좋은 자동차를 타
게 될 날을 염원하는 그런 미개한 문명이 되더군요.

기존의 서양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인류 역사의 발전 단계는 국가라는 기준을 중심


에 놓고 생각합니다. 국가라는 것이 마치 모든 인류 사회의 최종 목표 인양, 국가가 형성되
어가는 과정을 직선적으로 관찰합니다. 그래서 작은 국가에서 큰 국가 형태로 발전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씨족 국가 → 부족 국가 → 부족 연맹체 국가 → 고대 국가 – 근대적
국가 – 현대적 국가, 뭐 대강 이런 식으로 발전된다는 것이지요.
이에 따른 여러 가지 사회 현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적합니다:

․ 정치 - 중앙 집권화, 권력의 형성과 발전


․ 경제 - 노동을 하지 않는 지배 계층의 형성과 발전
․ 사회 - 사회 엘리트 그룹 형성과 발전

즉 다음과 같은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친다고 배워왔습니다.


→ 지방 분권 ⇛ 중앙 집권
→ 정치, 사회, 경제적 평등 구조 ⇛ 계층 구조

그러나 고대 아메리카 대륙의 사회는 이러한 형태로 국가가 발전되어 나갔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보입니다.

→ 중앙 집권 × ⇛ 지방 분권 O
→ 정치, 사회, 경제 계층 구조 × ⇛ 평등 구조 강화 ○

문화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과 마찬가지로 집단적인 선택의 연속입니다. 내가


국가라는 형태의 더 큰 정치 단위를 발전시킬지 말지는 선택이지 당위가 아니라는 거지요.
즉 아프리카나 인도 혹은 동남아시아, 호주같이 부족공동체가 국가를 안 만들고 그대로 몇
천 년간 그대로 부족 공동체 수준으로 그냥 지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들 지역은 유럽 사
람들이 침략해 오기 전까지 그렇게 살았었거든요.
즉 모든 사람이, 모든 사회가 다 그렇게 하는 사회나 국가 발전 형태가 있지 않다
는 겁니다. 과학발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속에 관한 지식을 천문학보다 중요하게 여겨 더
발전시킬지 말지는 각자의 개성의 영역입니다. “넌 천문학이 더 좋아 금속공학이 더 좋아?”
뭐 그 정도의 질문일 수 있죠. 만일 금속이 더 좋다는 선택을 했더라도 그것으로 무기를 만
들지 아니면 장식품을 만들지 역시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집단에 따라서 말이
지요. 그 선택은 일반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선호하는 패턴은 있
을 수 있겠으나 모두가 같을 수는 없지요. 마치 주5일 근무하고 300만원 받는 직장과 주 6
일 근무하고 500만원 받는 직장 중에 모두 500만원짜리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것처
럼 말이지요. 여담입니다만 주 4일 근무하고 200만원 받는 직장은 어떻습니까? 충분히 매
력적이지 않나요?
하여간 그런 의미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명은 서양과는 다른 그들 특유의 선
택을 하였고 그 선택이 철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서양과 비교
하여 덜 발전한 것인가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골자입니다. 하
여간 아메리카 대륙 고대문화는 석기, 청동기, 철기로 이어지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그
런 시대구분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역사의 다양한 단계를 거쳐 변화되어 온 -여기에서는 발전이


라는 말보다 변화라는 말을 한 번 써봅시다-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명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세부적인 다양한 문화권들이 존재합니다. 그것들이 각각의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존재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기원전 문화로는 메소아메리카의 기원이라고 이야기되는 북미의 올메까
Olmeca가 있었으며 남미에서는 대략 같은 시기에 차빈Chavin이라고 불리는 문화가 성장하
게 됩니다. 기원후에는 북미의 떼오띠우아깐Teotihuacan과 마야Maya(마야는 기원 이전부
터 꾸준히 발전하였으나 기원후에 융성기를 맞이한다) 등이 있고, 남미에는 나스까Nazca나
띠아우아나꼬Tiahuanaco가 있습니다. 기원후 1000년을 넘어서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메
시까(아즈떼까)와 잉까가 각각 북미와 남미에서 융성합니다.

0년 1400년
⇓ ⇓
올메까 떼오띠우아깐 아즈떼까
북미
마 야
남미 차빈 띠아우아나꼬, 나스까 잉까

일반적으로 올메까 문명은 기원전 12세기에서 2세기까지 멕시코의 동쪽, 멕시코


만을 중심으로 발달한 메소아메리카의 가장 오래된 문명을 일컫습니다. 특히 천문학, 문자,
종교, 건축, 조형 예술 등이 고도로 발달하여 그 이후의 문명들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 특징으로 꼽힙니다. 그래서 올메까를 메소아메리카의 모태(母胎) 문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도시 개념의 확립, 피라미드의 건설, 문자의 기원, 달력의 시작, 재규어
숭배, 두개골 변형 등은 그 이후에 융성하게 되는 메소아메리카문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올
메까 때에 일반화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올메까는 워낙에 오래된 문명이다 보니 그리고 사료조차 남아 있는 것이 없
다 보니 여러 가지 의문과 오해가 많습니다. 이러한 점을 그 문명의 특징과 더불어 살펴보
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올메까Olmeca, Olmec’라고 하는 말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그 어원부
터 따져보면 그 뜻은 ‘고무Olli, Ule의 장소ca’, ‘고무가 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실
제로 이 지역에는 지금도 고무나무가 많이 있습니다.
이 올메까 문명과 관련되어 제일 먼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올메까는 나라
이름이 아닙니다. 올메까는 하나의 문화 형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치 ‘르네상스’처럼 문
화 흐름의 하나로 이해해야 하지요. 이전까지만 해도 거대한 단일 국가 형태를 가진 올메까
라는 나라가 존재하여 전체 메소아메리카 지역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
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영향이 군사적 정복의 결과였다고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올메까 문화가 메소아메리카 지역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는 특징 때문에 생긴
오해입니다. 즉, 올메까 특유의 문양이나 조각 등이 전 중북미 지역, 그중에서도 특히 멕시
코 고원이나 마야, 오아하까 등의 지역에 걸쳐 나타나기 때문에 올메까라는 나라의 중심지
는 멕시코 만(Golfo de México)에 있고 그 외곽 지역은 그들에게 복속된 국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멕시코 만 지역의 올메까가 원형이고 나머지는 그들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올메까의 식민지, 또는 아류(亞流)라고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야 지역, 멕시코 고원 지역, 또는 오아하까 지역에 이르기까지 올메까 문
화는 하나의 문화적인 흐름으로 서로 같이 공유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가 나
타나는 지역 간의 관계가 정치적으로 주종 관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중심부와 주변부로 이
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단일 국가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올메까를 당시
폭넓게 유행한 문화의 한 유형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합니다.
물론 올메까 문화가 멕시코 만 지역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그곳이 이 문화
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고, 가장 발전한 곳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문화
가 가장 발전한 곳이 꼭 모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양한 문화 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항상 우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른 많은 인류의 역
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중국과 한국 등
다른 지역에서 더욱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인도가 중국이나 한국을 정복해서 불교를 전파한
것은 아닙니다. 인도가 훨씬 문화적으로 발달해서 그런 것만도 아니고요. 그러한 방식으로
이 올메까 문화와 그 문화를 같이 공유하였던 주변 지역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거
지요.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올메까라는 말을 정의해 보면, 넓은 의미에서는 전 메소아
메리카 지역에 나타난 문화, 예술적 흐름으로, 그리고 좁은 뜻으로는 멕시코만 지역의 올메
까 문화 형태를 지닌 부족 국가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올메까 문화와 관련하여 한가지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올메
까 문화와 멕시코 만 문화(Cultura de Golfo de México)의 혼동이 그것입니다. 보통 메소
아메리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접하는 아메리카 대륙 정복 시대의 사료에 쓰여 있는 올메까
는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올메까 문화가 아닙니다. 16세기 스페인 사람들이 쓴 사료들
에 보면 멕시코 만 지역의 올메까에 대한 언급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올
메까는 16세기 당시 그쪽에 살고 있던 멕시코 만 문화를 가진 다른 부족 국가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올메까 문화의 잔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복 시기를 전후한 다른
어떤 메소아메리카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미 멕시코 만 문화는 다른 문화로 보는 것이 타당
합니다. 시기적으로도 여기에서 살펴보고 있는 올메까 문화와 16세기 멕시코 만 문화는
2000년 이상의 터울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다른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 문화를 다룰 때 이야기하는 올메까는 일반적으로 기원 이전에 발전했던 문화이고, 식
민지 시대에 유럽어로 쓰인 사료들에 나타나는 올메까는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 당시
멕시코 만 지역에 발전했던 다른 문화입니다.
사실 올메까라는 이름 자체가 사학자들에 의해 멕시코 만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지
칭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고 보면 그런 오해의 소지가 더욱 깊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올메까의 개념들은 엄격하게 구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로 미루어 볼 때 기원
이전의 올메까 문화는 ‘올메까’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기원
전 올메까 문화에 대한 사료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시 이 문화를 지칭하는 하
나의 단어가 존재했는지, 그리고 존재했다면 어떻게 불렀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올메까 문명이 어떤 중요한 특징들이 있는지 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이 문명이 발


전한 시기는 기원전 12세기에서 2세기 정도라는 점은 앞에서 강조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
의 문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 개념이 올멕으로부터 확립되었습니다. 고대문명의 피
라미드가 이 시기에 최초로 건설됩니다. 문자도 이때 처음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지요. 물
론 아직 덜 발달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문자들의 원형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달력의 시
작되었다는 점도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중요한 특징으로 언급될 수 있습니다. 종교 예술적
인 면으로는 재규어 숭배라고 하는 현상이 보이고, 인간의 두개골을 변형시키는 풍습이 이
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하여 이후의 문화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올메까 문화는 남
미에서는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후 100년 사이에 발전한 차빈(Chavin) 문화와 시기적으
로나 특징적인 면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올메까 문화를 대표하는 조형물로서 거대한 두상을 꼽을 수 있는데 애
당초부터 머리만 제작된 것들로 그 생김새나 머리만 제작된 점 등의 특이점 때문에 주목을
받습니다. 또한 이들 조형예술의 특징으로 자유롭고 다양한 소재와 주제 표현을 들 수 있는
데 앞에서 언급한 거대한 두상에서부터 난쟁이 또는 어린이 혹은 장애인 뿐만 아니라 동식
물 그리고 인간과 동식물을 조합해서 표현한 상상의 조형물들이 많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인간 반식물 또는 반인간 반동물의 특징을 가지는 조형예술품들이 많이 존재합
니다. 이러한 소재와 주제의 자유로움은 그만큼 창작자의 생각이나 그들이 살았던 사회와
문화의 분위기가 자유로웠다고 하는 것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그림 2 올메까의 거대한 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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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올메까 이후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두드러진 문명은 떼오띠우아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문명 역시 당시에 뭐라고 불렀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
다. 이런 걸 보면 세삼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가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명에 대하여 온
전히 아는 것이 참 적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각 나라의 이름 조차도 아는 것이 거의 없으니
말입니다. 스페인 사람들의 침략 이후 엄청남 파괴와 탄압으로 원주민들의 숫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억과 문화 마져도 송두리쳐 뽑혀나간 인류 최대의 비극을 보고 있는 것이라는 생
각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나마 우리는 돌과 흙 등에 남아 있는 아주 미미한 고고학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이들의 삶을 추정해 보고 있습니다. 떼오띠우아깐은 기원전 500년경에 서서히 문명의 시작
을 준비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다 기원 전후를 거치면서 발달한 형태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 기원후 300년 이후부터 꽃을 피웠고 650년경에 사라지게 됩니다. 당시의 인구가
적게는 5만에서 많게는 20만에 이를 정도로 상당히 집중된 도시형태를 보여줍니다. 단일
도시에서 그 시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건축적으로도 뛰어난 도시 계획을 통해 도로와 피라미드들이 잘 배
치되었고 여기에 목욕탕, 상하수도 시설을 완비한 건물들이 들어서고 시장이 있고 각 기능
에 따라 도시가 잘 배분되어 심지어는 외국인 거주구역까지도 지정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건축의 특징 중에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덧씌우기 기법이 있는데 이것은 건물
을 짓고 일정 기간 후에 기존의 건물을 허물지 않고 그 위에 또 다른 건축물을 덧씌워 짓는
것인데 왜 그랬을지에 대하여는 아직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가능성이
추정될 뿐입니다:
1. 기존 건물의 마모에 따른 보완
2. 유행의 변화
3. 종교적 의미를 가진 특정한 날짜를 기념
4. 백성들의 노동력 착취 목적
이 도시는 당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문화적인 중심지였습니
다. 무역이 활발해서 도자기나 흑요석 같은 무역품들이 아메리카 전 지역에 걸쳐 광범위하
게 유통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도시는 아주 독특하게도 전혀 성곽의 흔적이 없을 뿐만아
니라 다른 방어의 개념이 도시 구조에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많은 조각과 벽화 등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데 전쟁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조각 등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또한 독특합니다.
이 문명은 기원후 650년경에 몰락을 했다고 앞에서 밝혔는데 동서양의 역사처럼
어떤 분명한 사건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자체적인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알 수가 없
습니다. 다만 그 시기를 전후하여 더는 건물을 짓거나 보수하지도 않고 모든 이들이 도시에
서 흔적을 지우고 사라지게 됩니다. 당연히 이 또한 큰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에 대한 다양한 추측이 이어지게 되지요.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외적의 침입 그중에서도
북쪽지방에서 발달한 뚤라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침입하여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하
는 설이 있지만 여러 가지 과학적인 면을 충족시키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내부 반
란이 일어나서 도시가 버려졌다고 하는 학설과 전염병에 의하여 더는 살 수 없는 곳이 되어
모든 주민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설 등 다양한 원인이 제시되고 있지만 외부 침입설과 마
찬가지로 여러 가지 정황이나 물리적인 면들에서 전체 상황을 잘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즉
우리는 이 떼오띠우아깐이라는 당대 세계 최고의 도시이자 문명이 왜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
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메시까는 멕시코 중앙 고원지역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할 때 융성했던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따라서 정복자들의 탐욕을 제일 먼저 받
아 내야만 했던 비운의 운명을 맞았지요. 그들의 전설에 따르면 메시까의 기원은 아즈뜰란
이라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하여 메시까라고 그들 족속의 이름을
바꾸고 현재의 멕시코 시티의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들을 아즈
떼까(아즈뜰란에 사는 사람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전설이다 보니 실
제 역사상에서 그들이 아즈떼까 라고 불린 적이 없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이러한 이
유로 이들을 메시까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아즈떼까
라는 말 자체가 1800년대 프랑스 사람들이 쓰기 시작하면서 일반화되었으니 그러한 측면에
서 본다면 이들을 아즈떼까 혹은 아즈텍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래
서 메시까라는 말이 맞는다고 그리고 더욱 사용되어야 한다고 이렇게 수다를 떠는 것입니
다.
당시의 멕시코시티는 늪지대가 많았던 곳으로 수로를 만들고 다리를 놓는 등 치수
사업을 잘하였습니다. 농업분야 역시 이와 관련하여 많은 발전을 보였는데 치남빠스라고 불
리는 일종의 수경재배(Floating Garden)를 통해 생산량을 극대화하는 등의 고도의 농업 기
술이 발달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정복 혹은 연맹의 형태로 주변부의 세력들과 함께 세력을 불려 나갔
습니다. 그중에서도 현 멕시코 시티 주변 세력이었던 테노치티틀란, 텍스코코, 틀라코판의 3
자 동맹이 유명합니다. 또한 정치 지배구조에서도 권력 분화의 현상이 두드려져서 도블레
까베세라(Doble Cabecera)라고 불리는 두 개의 권력구조가 서로 견재하며 집권하는 형태가
존재하였습니다. 즉 기존 토착 지배 세력과 메시까 중앙세력의 연합지배 체제가 발전한 것
입니다.
건축적으로는 수도의 한가운데에 규모가 큰 피라미드를 건설하였으나 서양사람들이
침입하면서 대부분은 없어졌고 그 자리에 기독교 성당과 스페인의 행정관청 등이 들어섰습
니다. 오늘날에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규모가 큰 국가답게 주변지역과의 무역이 발달하여 뛰앙기스(Tianguis, 전통시장)
라고 불리는 대규모의 시장이 열리고 정부는 이를 관리하고 발전시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전체 메소아메리카 지역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아메리카 대륙의 상당히 먼
지역에까지 장거리 무역이 발전하게 되고 메시까가 그 중계지의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북미지역에 올메까를 시작으로 마야와 메시까를 포함하는 메소아메리카문명이 있었


다고 한다면 남미지역에서는 안데스산맥 주변으로 안데스 문명이 꽃피웠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문명이 잉까(Inca)문명입니다. 잉까는 여러모로 북미의
메시까와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기적으로도 14세기에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유사
합니다.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으로 인하여 서양사람들에 의하여 몰락하였다는 점에서
역시 잉까와 메시까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잉까는 전설에 등장하는 창시자인 망꼬까빡에 의하여 시작됩니다. 이분이 우리나라
로 하자면 단군 할아버지 정도 되겠네요. 그의 지팡이가 가장 깊이 박히는 곳에 수도를 정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페루 꾸스꼬입니다. 당시의 이름은 따후안띤수유
(Tahuantinsuyu)였어요. 그렇게 시작된 잉까는 안데스 문명의 주변지역을 어우르는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들 왕가의 역사는 근친혼인을 통하여 전해 내려왔습니다. 최고 지도자인 꾸시 유
빤끼에서 시작하여 형제자매간에 혼인했다는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정치적인 중심
지는 따후안띤수유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후난 꾸스꼬, 후린 꾸스꼬로 나뉘었고 이것이 다시
수도를 중심으로 친차수유(Chinchasuyu, 북서), 안띠수유(Antisuyu, 북동) 꼰띠수유
(Qontisuyu, 남서), 꼬야수유(Collasuyu, 남동)의 네 지역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
은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구분이고, 각각의 마을들은 아이유(Ayllu)라고 불리는 강력한 자치
권을 가진 집단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습니다.
상업 분야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북미의 다른 문명들과는 성격이 조금 달라, 민간이
운영하는 시장의 발달이 미약한 반면 중앙 정부의 관활 혹은 도움 아래 지방의 특산물들을
상호 교류하는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높은 안데스 산지의 주변 지역은 그 높이
와 위치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기후와 생태의 특성을 보이는데 이러한 차이로 인해 각 지역
에서 생산하는 농수산물 역시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따라서 각양각색의 특산물을 서로 교
환하여 이용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잘 발달되어 왔는데 잉까의 정부는 일종의 교환 유통 시스
템을 만들어 운영하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잉까의 건축은 마추픽추(Machu Pichu)와 같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도시들에 의하
여 우리에게 친숙합니다. 돌과 돌 사이에 면도칼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접합 부
위를 가지는 석조 건축이 최고로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건축술에 힘입어 넓은 지
역에 걸쳐 도로망 역시 잘 발달하였습니다. 마추픽추가 가장 유명한 도시로 현재에는 명성
을 날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잉까의 도시 가운데 보존이 가
장 잘 된 도시지만 잉까의 가장 발달하거나 화려한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꾸스꼬(Cusco)가 여러 측면에서 더욱 발달한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
페인 사람들이 엄청나게 파손하여 지금은 그 흔적의 극히 일부 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제5장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명: 마야문명

앞의 장에서 라틴아메리카 고대 문화의 일반적인 개괄과 함께 전반적인 특징을 설


명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이 서양인들에 의하여, 그리고 우리들에 의하여, 이것은 부정적이
고 저것은 긍정적이다, 이것은 우등하고, 저것은 열등하다고 비쳤다는 점과 그러한 시각 자
체에 대한 의문도 제기했습니다. 짜장면을 좋아하는 사람과 우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각자의
취향이 다를 뿐,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쁜 것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시대
구분에 있어서도 우리가 습관되어진 일반적인 시대 구분과 발전 단계로 단정하는 것은 억지
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국가’라는 개념도 적용하기 힘들 수
있다는 점 역시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배경적인 논의들을 시작점으로 하여 이번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들의 정
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가 도대체 얼마나 다른지 관찰해 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전반
적인 개괄을 하기보다는 하나의 문명을 -이 경우는 마야문명을- 좀 더 깊이 있게 관찰해
보고자 합니다. 그냥 막연히 “이들은 좀 달라”라고 말하면 감이 잘 안 잡힙니다. 그런데 구
체적인 사항들을 세밀하게 관찰하다 보면 “아! 정말 참 다르구나! ...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구
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에는 글로벌시대다 보니 외국이라는 곳이, 그리고 그곳의 문화가 우리와 이렇게


도 다르다는 점을 여러 번 경험했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다는 생각도 했
을 테고요. 좀 있어 보이는 말로 하면 ‘세상살이가 어디나 다 비슷하다’는 것을 보편성이라
고 하고, ‘참 다르다’는 것을 특수성이라고 합니다. 문화에는 보편성과 특수성이 존재합니다.
‘인간은 배고프면 음식을 먹으려 한다’가 보편성이라고 한다면, 한국 사람은 쌀밥이 떠오르
고 멕시코 사람은 옥수수로 만든 전병인 또르띨야Tortilla가 생각나는 것이 특수성입니다.
고대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에 앞서 그러한 다름을 이해하는
기본 배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여담을 하겠습니다. 한국의 모 도지사가 멕시코의 한 주와 자매결연을 하는
자리에서의 일입니다. 멕시코 도지사가 공식 서명식을 하는 자리에서 큰소리를 내며 코를
풀었습니다. “크응~~~”. 그 순간 한국 기자들과 멕시코 기자들의 반응이 참으로 달랐습니
다. 한국 사람들은 “저런 실례를 범하다니 ... ...*^&^$$#&^*^%&$^ ”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멕시코 사람들은 별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더군요. 지금도 그때의 코 푸는 소리가 생생합니
다.
멕시코에서는 코 푸는 것이 한국처럼 크게 실례가 되는 행동이 아니거든요. 문화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개고기 먹는 한국 사람을 프랑스 사람들이 이해하고 거위 간에 물을
집어넣어 먹는 프랑스 사람들을 한국 사람이 거부감 없이 이해해 주는 것이 상호 이해의 시
작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변죽은 그만 울리고, 문화는 서로 다르다는 걸 바탕으로 우리
와는 많이 다른 아메리카 고대문명, 그중에서도 마야문명의 특징에 대해서 좀 더 세부적으
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정치, 사회, 경제, 종교의 주제로 나누어서 관찰해보겠는데 이러한 주제들은 마


치 하나의 세트와 같아서 어느 부분을 떼어서 독립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색이 이러이러하므로 사회적으로도 이런저런 특색이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또한 정치
나 사회와 연관된 경제의 개념과 운영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종교 또한 제정일치의
성격을 갖는 아메리카 고대 문화의 특징상 당연히 다른 정치, 사회, 문화 요소와 밀접한 관
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편의상 따로따로 설명하고 있지만 독자 여
러분은 이러한 요소들을 좀 더 포괄적인 시각으로 멀찌감치 바라보면서 음미해 주시기 바랍
니다. 즉, 정치적으로 이러한 성격을 갖고 있으니까 종교에서도 이렇게 다르구나, 또는 문화
적으로 이런 색깔을 좋아하니까 사회적으로 이런 특색이 나타난다고 하는 식으로 넓게 이해
해 주시기 바랍니다.
뒷부분에서는 이들의 수학과 달력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그야말로 이렇게 다르게
생각하고 계산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수리 체계의 다름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뜻에서 20진법의 세계와 마야 문자 이해를 수박 겉핥기식으
로나마 시도해 보겠습니다. 21세기 디지털 혁명의 시대는 2진법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합니
다.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에게 습관 되어 온 10진법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무의식중에 생각
하고 있습니다. 손가락도 열 개, 발가락도 열 개, 십진법에 익숙해 있다 보니 그 십진법이
늘 기준이 되어 온 것이죠. 그러나 마야 사람들은 우리가 엄청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20진
법을 이용해 당대 최고의 수학과 천문학의 업적을 이루어냈습니다.

마야 문명이란 말은 우리에게 상당히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그만큼 많이 알려져 있


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사실 그렇게 많이 알려진 것만큼 잘못 알려진 것도 많습니다. 우리
가 마야라고 부르는 그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마야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당시의
마야는 수십, 수백 개의 독립된 씨족 국가들이 각각 다른 명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
서 오늘날 마야라는 용어의 정의는 학문적 편의를 위해 현대 사람들이 만들어낸 기준이라는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이러한 각각의 다른 단위들을 한데 모아
서 마야 문명이라는 단일한 용어로 모아서 부르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공통된 특징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역시 마야어
의 사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각 지역에 따라 마야어도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른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까지 사용하는 30여 개나 되는,
또는 이미 사라져버린 여러 마야어는 쁘로또 마야(Proto Maya)라는 하나의 언어에서 생겨
난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문법 체계나 용어들이 유사합니다. 이러한 마야어의 사용이라는 가
장 큰 공통점 이외에도 마야 문자의 사용, 마야 달력의 사용을 들 수 있겠고 건축적으로는
벽면에 문이나 창을 만들 때 그 윗면을 원형으로 만드는 마야 아치(Arco Maya)의 사용 등
과 같은 것들이 마야라는 문화를 구분 짓는 중요한 특징들로 꼽힙니다.
지리적으로 볼 때 마야 문명은 멕시코 남부(유까딴 주, 깜뻬체 주, 낀따나루 주, 따
바스꼬 주와 치아빠스 주의 일부), 과테말라, 벨리세 전역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의 서부
등을 포함한 약 400평방킬로미터에 걸쳐 발전하였습니다. 그러한 곳들의 지형이나 기후도
다양해서 열대우림과 열대사바나 기후가 많기는 하지만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고원 기후
지역도 넓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얇은 반팔 조차 버거운 더위가 일년 365일 계속되
는 지역에서부터 밤과 이른 아침에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서도 어색하지 않은 지역도 있습니
다.

마야의 기원 신화로 많이 알려진 뽀뽈부(Popolvuh)라는 마야인들의 설화에 따르면


마야 사람들은 우주와 세계의 창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여기 그 첫 번째 이야기, 첫 번째 역사가 있다. 아득히 먼 옛날, 아직 인간, 동물,
새, 물고기, 게, 나무, 돌, 동굴, 협곡, 풀, 숲이 없던 시절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하늘뿐이
었다. 땅의 얼굴은 아직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다만 고요한 바다와 끝없이 펼쳐진
하늘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던 세상에 우여곡절 끝에 인간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렇게 새로운 세상에 나온 마야 사람들은 신과 함께 어우러져 세상을 운영해 나아가기 시작
합니다. 이리고 이러한 과정에 인간은 주체적인 존재가 됩니다. 인간이 종교의 중요한 역할
을 담당한다는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특징 속에서 신은 울고 웃으며 인간과 같이
하는 세상 속에 있습니다. 인간이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이 세상을 바꾸어 나아갈 수 있
다는 인간 중심의 종교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야 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집니다.

- 다신, 희로애락을 가진 인간적인 신, 전지전능하지 않은 불완전한 신.

이러한 종교적 특징과 변화무쌍한 많은 신들은 당연히 인간이 참여하는 종교의 영


역을 중요하게 만듭니다. 많은 수의 크고 작은 종교 행사가 마야인들의 일상이 되었겠지요.
주변에서 금식, 금욕, 피공양(Autosacrificio: 자기 신체의 일부에 상처를 냄으로써 심신을
정화하고 그 피를 신에게 바치는 행위), 정화 의식 등을 행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으며 또
한 수시로 꽃, 음식, 동물 등을 신들에게 정성으로 바쳤습니다. 너무나도 깊이 인간의 일상
속에 파고 들어간 이들의 종교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는 도그마적 종교의
모습을 많이 상실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종교적인, 그러므로 너무나 비종교적
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이 이들의 종교관에 적용됩니다.

기존의 전통적인 마야 사회구조에 대한 견해에 따르면 도시 중심에 있는 장엄한 건


축물에 왕과 그의 친인척을 중심으로 한 귀족과 제사장들이 특권을 누리고 살았고, 평민이
나 노예처럼 사회적 중요성이 적은 사람들은 그 신분에 따라 도시 외곽에 살면서 생산 노동
에 종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세심하게 고고학 연구와 사료를 분석해 보면 이러
한 중앙 집중적인 권력을 배경으로 한 촌락 구조와 그 사회 계층에 대한 해석에 의문을 제
기할 수 있습니다. 가족 단위의 자급자족 촌락 구조와 독자적인 정치 운영의 특징을 보이는
마야는 사회 신분구조에서도 재미난 현상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구성의 원리를 이
해하는 것은 마야 사회의 전반을 이해하는 중심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복 이전 마야는 어느 지역에서나 반(半)독립적 대가족 촌락 구조가 가장 중요한
정치사회의 구심점이었습니다. 특히, 광범위한 규모의 발굴과 지표 조사 보고서, 촌락 구조
에 중점을 둔 심도 높은 고고학 연구의 결과들도 이를 뒷받침 해 줍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
순히 고고학 분야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정복기를 전후로 한 역사 사료에도 잘 나
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상대적으로 연구가 활발한 유까딴 지역의 유럽정복 이전의 정치 사
회 체제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가족 단위들은 꾸츠떼엘
(Cuchteel)이라는 가장 강력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의 반독립적 단위를 말하는데,
이들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ㄱ) 실질 혹은 가상의 친족 관계를 중심으로 한 대가족 모임으로 가족 대표를 통해 중앙


정부에 정치 참여를 한다.
ㄴ) 독자의 마을 이름을 가지며 가족 중심의 농업을 행하는 자체 토지를 경작한다.(토지
는 공동 소유이며, 각 경제 활동 단위들이 경작권을 행사한다.)
ㄷ) 독립적 행정과 군사 유지를 담당한다.
ㄹ) 상호 부조와 협동을 통한 자립 경제 활동을 한다.

이 꾸츠떼엘은 모든 영역에서 고대 마야의 가장 핵심이 되는 기본 단위입니다. 여


기에서 이들이 반독립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은 경제면에서 이들이 자급자족적인 성격이 강
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근데 그러면서도 주변 지역과의 물물 교환과 교역을 활발히 했다
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치면으로는 각 꾸츠떼엘이 독자의 의사 결정권을 유지하면서 동맹의 형태
로 상위 정치 단위들을 구성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위 정치 단위들로는 꾸츠떼엘들
의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바따빌(Batabil)이나 꾸츠떼엘과 바따빌, 그리고 바따빌들로 이루어
지는 연방체적 부족 국가의 형태를 가지는 꾸츠까발(Cuchcabal)이 있으며, 이 바따빌과 꾸
츠까발에서는 각 꾸츠떼엘에서 하기 힘든 대규모 장거리 무역, 종교의식 등을 관리하였습니
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자급자족을 하며 살아가는 작은 마을인 꾸츠떼엘이 가장 중요하
고 중심이 되고 그 밖의 국가나 기타 더 큰 나라와 같은 것은 이 꾸츠떼엘 에 비하면 별 볼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큰 나라도 별로 없고 있어도 그 나라의 왕보다 마을 촌장이 더 힘이
강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이러한 성격은 꾸츠떼일들 간의 동맹의 목적과 운용 방식을 설명합니다. 즉, 실질
면에서 생각한다면 꾸츠떼엘의 상위 정치 단위들은 실용적인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진 대행
기관의 요소가 더 많습니다. 실질적인 권력이나 경제, 사회적 주체는 바로 꾸츠떼엘이라는
최소의 단위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국가보다는 지방자치단체가 더욱 강한 힘을 가진
독특한 형태의 연맹체라는 점도 보여줍니다. 꾸츠떼엘의 상위 연합 단위들의 특성을 살펴보
면 위에 언급한 점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꾸츠떼엘들이 모여서 만든 연합인 바따
빌이나 그 위의 꾸츠까발 등에서 권력의 중앙 집중적인 성격이나 강력한 대표성을 찾아보기
가 어렵습니다.
유까딴 반도의 정복사는 이를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는데, 이곳을 정복한 스
페인의 몬떼호(Montejo) 장군은 몇 개의 큰 국가인 꾸츠까발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독립된 작은 씨족 단위들과 일일이 싸워야 했다는 점입니다. 마야는 국가는 없고 꾸츠떼엘
이라고 하는 작은 정치 단위가 핵심이 되어 필요에 따라 연맹체를 구성해서 필요한 사업들
을 해 나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국가의 개념과는 상당히 달랐던 것을 알 수 있습
니다.

아메리카 대륙은 현재 인류가 먹고 있는 중요 작물의 원산지로 유명합니다. 옥수


수, 감자, 토마토, 호박, 고추, 땅콩, 파인애플, 카카오 등과 같은 작물이 모두 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기원하여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들입니다. 이렇게 많은 농작물이 발달한
것은 단순히 기후나 지리적인 조건 때문만이 아니라 이들이 자연의 산물들을 과학적으로 잘
발전시킨 덕분이지요. 즉 그만큼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명들은 농업을 발달시켰다는 것입
니다. 마야의 경우에는 옥수수 농사가 가장 중요한 농업이었고, 이 밖에 콩, 호박, 고추, 토
마토, 면, 담배, 바닐라, 차요떼(오이와 비슷한 채소로 씨를 먹는다), 코코아, 베후꼬, 에네껭
(베후꼬나 에네껭은 식물성 재료로 마닐라 삼(杉)과 같이 줄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열대
지역에서는 고구마, 유까, 히까마(콩과 식물로 그 뿌리를 먹는다) 등도 재배하였습니다.
열대우림의 무성한 숲을 잘라낸 후 불을 질러서 지력을 높이는 화전(火田) 농법도
많이 이용하였습니다. 마야 고원 지방 농지는 대략 10년 경작에 15년의 휴경 기간이 필요
하고, 저지 지방의 농지는 15년 경작에 5년의 휴경 기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주기를 잘
계산하고 계획하여 화전을 기반으로 한 농사를 지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화전은 여건이 허
락하는 곳에서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즉 다른 자연환경을 가진 곳에서는 각 장소와 기후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농법들이 발달하였습니다. 경사진 경작지 개간을 위해 벽을 쌓아 밭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인공 수로를 이용한 관개 시설을 만드는 등 다양한 농사 기술들이 현지
사정에 맞게 개발되었습니다. 물이 풍부한 곳에서는 수경(水經)재배((hydroponics)도 이루어
졌습니다.
발달한 농사기술 덕택에 생산성도 높았습니다. 실바누스 몰리(Sylvanus G.
Morley)와 같은 학자는 집안의 가장 한 사람의 48일간의 노동으로 5인 가족 전체에게 필
요한 충분한 양의 식량 생산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알베르또 루스(Alberto Ruz
Lhuillier)는 여러 가지 부수적인 노동 행위까지 다 합친다면 족히 240일의 노동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주장이 현실에 더욱더 가까운지는 논쟁의 대상이겠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적어도 가장 한 사람이 1년에 7~8개월 정도는 농업 생산 이외의 활
동에 참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마야의 농업기술의 발전은 마야 문명을 발전시
킬 수 있는 유휴 노동력을 제공할 정도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는 것입니다.
농업이나 과학 기술이 융성하여 다양한 생산물들이 생겨나고 이러한 것들이 왕성한
교역을 통해 전 아메리카 지역에까지 퍼져나갔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
한 무역 혹은 상업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영리추
구의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닙니다. 단순히 부(副)를 추구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교역품은 식량이 아니라 대부분 종교적인 물건이었으며 종교 행사
자체가 마을 전체의 일이기 때문에 무역 역시 각 마을의 행정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습니
다. 그것을 담당하는 것 역시 행정을 담당한 마을 지도층의 일이었지요. 일부 최고지도자와
그의 가족들이 이러한 교역에 참여했습니다. 실제로 식민지 시대 초기의 사료에는 마야빤
(Mayapan)의 최고 지도자인 꼬꼼(Cocom)의 아들이 교역에 참가하였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개인의 부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우리가 가진
일반적 개념의 상인이라고 못 박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중세 유럽과 동양의 교역만큼이나 많고 복잡한 무역 체계가 아메리카 대륙의 북쪽
끝 알래스카에서부터 남쪽끝 파타고니아까지 마치 실크로드와 같이 이어져 있었고 각 지역
은 지역대로 현지 교환시스템과 시장 등이 발전했습니다.

이번 파트에서는 마야 사람들의 과학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요 대표적인 예로 수학과 0의 개념에 대하여 보자구요. 마야 사람들은 수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그것이 지식으로 전수되었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 것 같습니다. ‘0’의
개념을 다른 어떤 동양이나 서양 세계보다도 먼저 알았다고 하는 점은 마야의 과학 수준을
이야기할 때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0’의 개념을 알았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이
며 또한 그 차이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결론적으로 예를 들어 말하자면 ‘0’의 개념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는 마치 컴퓨터를 사용하고 안 사용하고의 차이 정도일 수 있습니다. 컴퓨터
가 있다면 수학 문제를 푸는 데에 있어서 속도와 양 그리고 정확도의 면에서 그냥 암산하는
것보다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수학뿐만 아니라 천문, 건축, 토목 등의 모든 과학 분
야에서 어마어마한 차이를 가집니다.
그럼 ‘0’의 개념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뭐죠? 굳이 정의하자면 각 단위자리의 숫자
가 채워졌음을 의미한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1에서부터 9까지, 다음이
10인데 그 10이라는 것은 일 단위가 ‘0’ 그러니까 하나도 없고 십 단위가 하나 있다는 뜻
입니다. 그래서 십 단위에는 ‘1’을 쓰고 영단위에는 ‘0’을 써서 결과적으로 ‘10’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0’의 개념을 마야 사람들은 기원전부터 사용하였고 이로 인해 무한대의
숫자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 것이다.
‘0’의 개념을 알고 있는 집단과 모르고 있는 집단의 차이는 엄청나다고 말씀드렸지
요. 이게 극명하게 들어나는 것이 ‘0’의 개념을 몰랐던 로마 숫자와 ‘0’의 개념을 가진 아라
비아 숫자의 차이에서 입니다. 우리가 아직까지도 사용하고 있는 로마 숫자를 아시지요? 복
잡해서 아예 도표로 그려봤습니다. 그 놈의 ‘0’의 개념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로마
숫자를 복잡하게 하는지 확인해 보시지요.
아라비아숫자 로마숫자
1 I
2 II
3 III
5 V
10 X
50 L
100 C
500 D
1000 M
1984 MCMLXXXIV
8888 VIII DCCCLXXXVIII
88888 LXXXVIII DCCCLXXXVIII
888888 DCCCLXXXVIII DCCCLXXXVIII

이 복잡한 로마 숫자를 보여드린 이유야 간단하죠. ‘0’의 개념이 없는 로마숫자가 얼마나 비


효율적이고 어려운지, 그에 반해서 마야 사람들은 ‘0’의 개념을 이용하여 수학과 천문학 등
을 발전시킨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점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야 사람들은 ‘0’의 개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0’의 개념을 일찍부터 알고


사용하였다는 점 이외에도 마야 수학의 가장 큰 특징이자 우리의 산술 체계와 다른 점은 이
들이 20진법을 사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10진법을 사용하지만, 마야는 20진법을 사
용합니다. 이건 아주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기도 하지만 엄청난 차이이기도 합니다. 그럼
그 차이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 건지 볼까요.
20진법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이들의 숫자 기록 체계에 대해서 살펴보면 1에 해당
하는 것은 점 하나 ‘’ 이고, 5에 해당하는 것은 선 ‘―’ 입니다. 선과 점이 같이 쓰일 때는
점이 위에, 선이 아래 놓이게 됩니다. 실제 예를 보면 도표와 같습니다. 이렇게 점과 섬으로
모든 숫자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더 복잡한 방법들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기초적
인 것만을 소개하겠습니다.
󰁒3)이 마야 숫자 체계에서 볼 수 있는 ‘0’입니다. 사실 이 20
도표의 20에 보이는 󰀀
도 다양하게 쓰고 있습니다만 그냥 여기서는 이것 하나만 소개하는 겁니다. 하여간 이들은
20진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10이 채워지면 한 자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20이 채워져야
한 자리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51이라는 숫자를 이용해 10진법과 20진법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라비아 숫자, 10진법의 51이라는 수는 십 단위가 5개 있고 1단위에 하나가 있다
는 뜻으로 십 단위 5개는 50이 되고 일 단위 1은 1이니까 합이 51이 된 것입니다. 너무 당
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우리가 생활에서 익숙해져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지요. 마야 사람들 역시 20진법이 그들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

3) 이 그림은 필자가 사료를 참조하여 ‘0’을 비슷하게 그린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양
해하여 주기 바랍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조개 모양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단지 편의상 그렇게 부
르는 것이지 실제 조개를 도안의 소재로 잡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것을 당연한 것으로 느낍니다.
그렇다면 마야 숫자에서 말하는 ‘51’, 즉 ‘―’, ‘’은 어떤 것일까요? 아라비아 식으
로 읽으면 51이 됩니다. 그러나 그 최종값은 101이 됩니다. 앞의 단위는 20진법이기 때문
에 20이 되면 하나씩 올라가서 결국 앞의 단위가 5라는 것은 20씩 채워진 것이 5개가 된
다는 말입니다. 즉 20×5는 100이고 거기에 1이 더해져서 마야 숫자의 ‘―’, ‘’은 우리식으
로 10진법으로 표기하면 101이 됩니다. 이렇게 아라비아 숫자와 마찬가지로 20진법이라는
점만 다르고 무한대까지 숫자의 표기가 가능합니다. 도표의 예들을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 󰀀
󰁒 = (1×20) + 0 = 20
‥ ・ = (2×20) + 1 = 41
‥ ‥ = (2×20) + 2 = 42
… ・ = (3×20) + 1 = 61
… − = (3×20) + 5 = 65
‥‥ − = (4×20) + 5 = 85
‥‥ −̇ = (4×20) + 6 = 86
‥‥ ☰⃜ = (4×20) + 19 = 99
− 󰀀
󰁒 = (5×20) + 0 = 100
☰⃜ ☰⃜ = (19×20) + 19 = 399
・󰀀
󰁒󰀀󰁒 = (1×400) + (0×20) + 0 = 400
☰⃜ ☰⃜ ☰
⃜ = (19×400) + (19×20) + 19 = 7999
・󰀀
󰁒󰀀󰁒󰁒
󰀀 = (1×8000) + (0×400) + (0×20) + 0 = 8000

메소아메리카 지역, 특히 마야는 여러 다른 문명에 비해 매우 체계적인 달력을 가


지고 있었습니다. 크게 나누어 52년을 주기로 하는 짧은 달력(Cuenta corta)과 다른 체계
를 가진 긴 달력(Cuenta larga)이 있었습니다. 마야 달력의 체계는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지
는 않지만 서양식 달력 체계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이질적으로 느껴져 마냥 쉽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하나 차근차근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짧은 달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 달력은 다시 쏠낀(Tzolkin)이라는 260일
달력과 하압(Haab)이라는 365일 달력으로 나뉩니다.
달력의 숫자들은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점과 선, 그리고 조개와 같은 모양을 한 0
의 값을 가지는 숫자들, 그리고 우리가 쓰는 달력의 달(月)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고유의
39개 문자(기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65일 달력에 해당하는 19개 문자와 260일 달력
에 해당하는 20개의 기호가 바로 그것이지요.
260일 달력 쏠낀은 20개의 기호와 13개의 숫자로 이루어져서 이의 조합은 260일
(260=13일×20달)이 됩니다. 다양한 주기를 가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260일을 주기
로 하는 이유와 이 260일의 기능과 의미에 대하여는 아직까지도 분명하게 알려진 것이 없
습니다. 그렇지만 260이라는 숫자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아가 성장하는 기간과 유사합니다.
또한 옥수수의 파종에서 수확에 걸리는 시간이라고도 생각되며, 특정한 천문과 관련된 시간
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단순한 20×13의 성스러운 숫자의 조합이라는 이야기
도 의미 있게 들립니다.
365일 달력인 하압은 태양력으로 18개의 달에 해당하는 기호와 20일의 날짜, 거기
에 우아옙(Uayeb)이라는 5일 짜리 달이 더해져【365=(20일×18달)+5일】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 일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레고리력과 매우 비슷합니다. 이것은 태양력
으로 365일을 그 주기로 가진다는 특징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 260일 달력과 365일 달력은 항상 260, 365의 차례로 다음과 같은 형태
로 구성되어 운영됩니다.

마야의 260일 달력과 365일 달력

260×365〓【13숫자(1~13) × 20기호】×【20숫자(0~19) × 18기호(+1기호)】


긴 달력은 무한의 주기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계산 방법은 마야 수학의
계산 체계에서 본 방법과 비슷합니다. 기본이 20진법으로 이루어졌지만, 태양력과 날짜를
맞추기 위하여 두 번째 자리에서 세 번째 자리인 뚠(Tun)으로 한 자리 올라갈 때는 18진법
이 적용된다는 예외가 존재합니다. 긴 달력은 다섯 자리로 구성되는데 각각의 이름은 낀,
우이날, 뚠, 까뚠, 박뚠입니다. 이것이 수학에서처럼 20진법의 규칙적인 값을 가진다면 낀은
1, 우이날은 20, 뚠은 400, 까뚠은 8,000, 박뚠은 160,000이 되겠지만 뚠이 18우이날에서
다음 자리로 올라가기 때문에 각각의 자리는 다음과 같은 값을 가집니다.

1낀(Kin) = 1낀 = 1 × 1 = 1일
1우이날(Uinal) = 20낀 = 1 × 20 = 20일
1뚠(Tun) = 18우이날 = 20 × 18 = 360일 = 대략 1년
1까뚠(Katún) = 20뚠 = 360 × 20 = 7,200일 = 대략 20년
1박뚠(Baktún) = 20까뚠 = 7,200 × 20 = 144,000일 = 대략 400년

일반적으로는 박뚠까지 이용하지만 실제로는 다음과 같이 계속되는 더 많은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1삑뚠(Pictún) = 20박뚠 = 대략 8000년


1깔랍뚠(Calabtún) = 20삑뚠 = 대략 160,000년
1낀칠뚠(Kinchiltún) = 20깔랍뚠 = 대략 3,200,000년
1알라우뚠(Alautún) = 20낀칠뚠 = 대략 64,000,000년
....

이러한 계산 방법이 달력에 이용되는 것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4.3.2.1.0이라는 날을 기준으로 이 날의 다음날은 4.3.2.1.1이 되고 그 다음날은 4.3.2.1.2,
그리고 20일 후는 한 자리 숫자가 채워져서 다음으로 올라가면서 4.3.2.2.0 이 됩니다.
모든 달력은 기준일, 즉 시작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달력 역시 시작일이 있는데
마야의 이 긴 달력은 0.0.0.0.0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13.0.0.0.0을 기준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마야의 역사는 그들의 기록에 따르면 긴 달력으로 13.0.0.0.0, 짧은 달력으로 4아
하우(260일 달력) 8꿈후(365일 달력)에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을 우리의 달력으로
계산해보면 기원전 3114년 8월 15일로 이것이 일종의 마야 원년(元年)이라 말할 수 있고,
그때를 기준으로 긴 달력이 0에서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날짜가 정확한 것
은 아닙니다. 마야의 모든 문화나 과학 수학 등이 식민지 기간을 겪으면서 워낙에 불경한
것으로 치부되어 탄압을 받았고 그렇게 지금은 실생활에서 완전히 사라져 이해가 쉽지 않습
니다. 그러다 보니 원년의 기준점에 대한 의견도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3114년 8월
13일 또는 3113년 8월 12일, 3114년 8월 13일 등 여러 의견이 있으나 3114년 8월 15일
이 일반적으로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13.0.0.0.0의 다음날인 기원전 3114년
8월 14일은 0.0.0.0.1 그 다음날인 8월 15일은 0.0.0.0.2가 되며 20일 후는 0.0.0.1.0이 됩
니다. 이런 식으로 마야의 긴 달력 계산이 이루어집니다. 단군이 우리나라를 열었다는 단기
원년인 기원전 2333년 1월 1일은 마야 긴 달력으로는 1.19.11.13.10이 되고, 기원후 2000
년 1월 1일은 마야 달력으로는 12.19.6.15.0입니다.

이상과 같이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명에 대하여 두 장에 걸쳐 그 내용과 특징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고대 문화의 일반적인 개괄을 말하기보다는 우리 문화와 비교해서 다른 특
징에 대하여 좀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습니다. 각각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같은 것
보다는 다른 것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러
한 특징들이 정복 이후의 식민지화 과정에서 완전히 무시되어 많은 부분 사라졌습니다. 정
복자들에게는 이들의 고유한 문화가 불편하고 불합리하고 불경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들은 중간의 혼혈 과정을 거치면서 라틴아메리카의 중요한 문화의
특징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즉, 혼혈이 되었는데 그 혼혈의 여러 가지 요소 중에서 가장 중
요한 것이 스페인적인 것과 원주민적인 것입니다. 겉으로는 스페인의 요소가 완전히 전체를
지배하여 원주민의 것이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문화의 내면에서 원주민의 요소
가 그대로 면면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의식․ 무의식으로, 또는 많든 적든 간에 고대 원주민
들의 문화는 동화와 변화 등의 과정을 겪으면서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
에서 라틴아메리카의 고대문명에 대한 평가와 이해가 좀 더 깊이 있는 라틴아메리카 이해의
바탕이 됩니다. 한마디로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이 서양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고대 문화의 전통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라틴아메리카의 오늘날 문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
는 것입니다. 고대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라틴아메리카 공부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는
점을 명심해 주십시오.
제6장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 1

중요 연대
1492년~16세기 초(초기 식민지 과정)
1492년(끄리스또발 꼴론의 아메리카 대륙 도착)
1521년(에르난 꼬르떼스의 멕시코 정복)
1524년(삐사로의 잉까 정복)

1492년 8월 3일 스페인 남부에 있는 로스 빨로스(Los Palos)라는 작은 항구를 출


발한 산타 마리아(Santa Maria), 라 니냐(La Niña), 라 삔따(La Pinta) 라는 이름의 세 척
의 배가 88명의 선원과 항해하여 우여곡절 끝에 기적처럼 구아나하니(Guanahani)라는 작은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1492년 10월 12일, 어슴푸레한 새벽안개를 뚫고 망루에 올라 있던
선원의 눈에 육지가 보였습니다. 띠에라!(Tierra!, 육지다!), 띠에라!, 띠에라!
이곳의 원주민들은 처음 보는 새로운 사람들을 극진히 맞아 주었고, 스페인 사람들
은 자신들을 죽음에서 구한 섬이라는 뜻으로 이 섬을 산 살바도르(San Salvador)라고 명명
하였습니다. 이것이 훗날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
다. 이 사건은 아메리카 대륙의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재앙으로, 그리고 유럽 사람들에게는
신의 축복으로 세계의 주도권을 쥐는 계기가 됩니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신대륙 발견’이라
고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신대륙 발견’이란 무슨 뜻인가요? “1492년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


였다.” 우리들은 내내 그렇게 알아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에 시비를 좀 걸어야겠습니
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핵심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쓰던
이 말은 명백한 서양 사학자들의 역사 왜곡으로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또는 좀 양보
해서 완곡하게 표현한다 해도 ‘유럽과 아메리카의 만남’이라는 말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왜
냐하면 역사가 완전히 왜곡되었고, 우리는 서양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아무런 비판
없이 그냥 그대로 교과서에 싣고 가르쳐 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역사 왜곡에는 항상 이유가 있다
는 것입니다. 일본의 한일 관계사 역사 왜곡이 분명한 원인과 의도가 있듯이 1492년의 역
사 왜곡에도 그 원인과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이러한 역사가 왜 그리고 어
떻게 잘못된 것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왜곡된 역사가 어떻게 바로
잡아져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역사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원
인과 의도에 따라 1492년 사건의 의미를 다시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공부
하는 라틴아메리카 역사에서 이 사건이 갖는 오늘날의 의미와 성격이 올바로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1492년의 사건은 그야말로 지난 1000년간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
다. 1492년을 계기로 인류는 커다란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1492년 이전에는
세계적인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지구에 사는 인류에게 인
위적인 공통의 사건이나 공통의 문제 등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유럽인은 유럽인 대로 살
고,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들 나름대로 살았습니다. 서로 간섭이나 영향 관계가
미미했습니다. 동양도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실크로드니 뭐니 해서 가끔 서양과 무역을
하긴 했지만 간섭을 하거나 지대한 영향을 주거나 할 정도의 수준은 못 되었지요. 몽고사람
들이 서양을 박살 낼 뻔한 사건도 있기는 했지만 긴 역사의 시간으로 본다면 에피소드에 불
과했었으니 말이지요. 아메리카 대륙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동서양 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이 있고 거기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아메리카 사람들도 다
른 대륙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1492년 이전에는 서로 단절된 각각
의 개별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1492년의 사건을 통해 이른바 ‘대항해 시대’로 식민지 개척
시대가 도래하면서 단순히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만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동안 자기들끼리 잘살고 있던 아프리카 사람들은 대항해 시대를 맞아 서구 열강
들의 침입을 받으면서 노예로 붙잡혀가는 엄청난 수난을 겪습니다. 피식민지 국가의 역사를
가진 오늘날의 많은 나라들, 즉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호주 등이 서구 열강의 땅따먹
기 게임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등을 쓰는 나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치열했던 변화의 양상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
를 보고 자기들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군침을 흘리던 유럽 제국들에 의하여 세계 전체가 식
민지 쟁탈전에 휩싸이게 됩니다.
동양도 마찬가지입니다. 필리핀은 나라 이름 자체가 펠리페(Felipe)라는 스페인 국
왕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지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스페인의 국왕인 펠리페에게 정복당해
300여 년에 걸친 스페인 식민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인도차이나의 기구한 외세 침탈의 역
사도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
배한다.’ 등의 말들이 생겨납니다. 배를 타고 전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식민지를 건설하여
자국의 깃발을 꽂은 나라가 세계의 주도권을 쥐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사에
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 1492년에 일어났고, 그 사건을 계기로 대항해 시대와 식민지 시대
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개항을 안 해 영향을 매우 늦게 받긴 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음으로
양으로 세계 조류의 파장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 사람들이 사용한 조총은
포르투갈 사람들이 전해준 것이고, 외국인 선원들이 표류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도 했
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서양 사람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나라로 인식되지 않은 덕택에
그나마 조용했지만 영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백김치만 먹던 우리가 아메리카 대
륙에서 건너온 고추를 유럽을 통해 알게 되어 오늘날과 같은 빨간색 김치를 먹게 된 것도
유럽의 영향입니다. 이렇듯 1492년의 사건은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실질적이고 상
징적인 계기가 됩니다.
말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딴죽을 걸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엉터리 소리가
그런대로 설득력을 갖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입니다. 로마라는 단어를 그냥 서양이라는 말
로 대치해 보면 1492년 이전에는 각 대륙 간 상호 영향 없이 살았는데 ‘한 군데로 통하는
길’이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겠습니까? 서양 사람들이 자기네 역사를 치장하기 위해서
“유럽 일부의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것을 “세계의 길이 로마로 통한다”라고 과장한 겁니
다. 오히려 1492년 이전의 세계 중심은 동양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그
런데 1492년의 사건을 통해 진짜 모든 길이 비록 로마는 아닐지언정 세빌야나 파리나 런던
이나 뉴욕 정도로 통한다는 말이 가능해집니다. 그 시작점을 만든 인간이 바로 무식한데다
용감하기까지 했던 1492년의 주인공 끄리스또발 꼴론(크리스토프 콜럼버스)입니다. 이 인간
이 왜 무식한데다 용감했는지는 차츰 설명하겠습니다.
경제면에서도 겨우 지중해 안에서 행해지던 유럽의 경제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돌
아다니며 무역을 펼치는 식민지 무역의 시대로 바뀌게 됩니다. 사회 제도만 해도 그렇습니
다. 이때를 계기로 봉건적인 사회 신분 제도가 본격적으로 극복되기 시작합니다. 무역을 통
한 상업 자본이 발달하고 이 자본을 바탕으로 한 부르주아의 등장과 더불어 전통 신분 제도
가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변화들이 사회 전반을 총체적으로 변화시켰으리
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이고 종교, 문화, 인구, 의식주
등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적든 많든 혹은 빠르든 느리든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
래서 1492년의 사건은 인류의 역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
메리카 대륙의 변화만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변화의 촉매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
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16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세계사의 중요한 맥락이 됩니
다. 그렇기 때문에 1492년에 일어난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이라는 사건을 이해하는
것은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또한 세계의
역사, 나아가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
에 없는 것입니다.
이때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유럽이 지금까지도 그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492년 이후 지구가 최초로 상호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되고, 이를 바
탕으로 유럽이 제일 힘이 센 대장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장 노릇을 오늘날까지
하는 것입니다.

유럽사람들은 왜 멀쩡하게 많은 사람들이 잘살고 있는 곳에 쳐들어와서 사람들이


없는, 그야말로 신대륙이라고 말했을까요? 그 점부터 먼저 따져봐야겠습니다. 그다음에는-
사실 이게 더 중요할 수도 있는데- 신대륙 발견이라는 말이 일방적인 식민지 지배자의 시
각에서 나온 것이 아주 명명백백한데도 아직도 그 말이 우리들 사이에서 친근하게 들리는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 살펴봐야겠습니다. ‘왜 처음에 신대륙 발견이라고 말한 걸까 ?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것인데도 계속 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
입니다.
일단 이해를 돕기 위해 ‘신대륙 발견’이란 말의 허구를 좀 극단적인 방법으로 정리
해 보겠습니다. 한 가지 가정을 해보죠. 프랑스 사람이 한국에 쳐들어와서 우리나라 전체를
식민지화하고 이곳이 신대륙이었다고 말했다면, 그리고 아직도 그 식민지의 정치, 경제의
기득권이 그대로 한반도에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당연히 병인양요라는 말은 무언
가 긍정적인 문구로 바뀔 겁니다. ‘프랑스의 한반도 발견 기념일’ 이런 정도로 표현되려
나?^^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한 시각은 계속 이어져서 오늘날까지도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들
어온 건 정말 좋은 일이었다고 합리화시키고 있겠죠.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이러한 장면
이 있죠? 뭐겠습니까? 신라의 백제 침공, 신라의 고구려 침공, 그게 성공을 하고 나니 우리
는 화랑이 어떻고 김춘추가 어떻고 하며 그들의 그러한 무력 행사를 당연한 것처럼, 훌륭하
고 용감한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프랑스가 우리나라를 점령해서 지금까지 이
어지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프랑스의 침공을 미화시키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또한 일본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한국의 처지에서는 경술국치가 일본의 입장에서는
한일합방이 되는 것이죠.(그런데 왜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한일합방이라는 일본 입장의 역
사 시각의 용어가 그대로 쓰이기도 할까요?!) 만일 일본이 세계대전에서 지지 않았고, 우리
나라가 계속해서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있다면 유관순 누나와 윤봉길, 안중근 의사는 테러리
스트가 될 테고, 독립군은 반정부 게릴라 부대가 되지 않겠습니까. 공식 역사, 즉 교과서는
승리한 자가, 기득권자가 쓰는 것이니까요. 여러분 스스로 이러한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 데 실패했다면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 반란 사건’ 정도로 기
록되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침공을 신대륙 발견이라고 기록한 것은 정복자 입장


에서 정복이라는 부당한 행위를 합리화, 정당화시키려는 방법이었고 이것이 명백히 잘못된
것인데도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배우고 있는 이유는 그러한 결과를 통해서 이득을 본 집단
이 그 기득권을 유지하고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세계의 가장 힘 있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
문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도둑질 한 도둑놈들이 역사를 쓴 것입니다. “이거 빼앗은 게 아
니고 주인 이 없는 신대륙이었어”.... 그리고 직접 연관이 없는 우리나라에서까지도 침략자
중심의 식민지 역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는 그러한 세계 구도를 인정하거나,
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인디언들을 다 죽이고 북미 대륙을 정
복한 것을 ‘그거 나쁜 일이네’ 라고 말하면 지금 미국의 기득권 세력들이 좋아하지 않겠지
요. 미국의 주류사회가 싫어하는 말을 하면 우리나라에도 별로 좋은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
겠죠. 이런 학문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이런 역사 왜곡을 당연한 것으로 교육받아 온
서양 시각 중심의 학자와 학계가 한 몪을 합니다. 이와 관련된 역사 다시 보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니 여기서는 간단히 문제 제기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의 주 관심사는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침공, 또는 아메리카와 유럽 만남의 과정을 통해 라틴아메리카는 구
체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있으니까요. 즉, 이 사건이
갖는 라틴아메리카적인 의미는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세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이런 영향 관계로 변화된 세계와 라틴아메리카와의 상호 관계가 어떠한지
를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물론 이 책에서, 이번 장에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풀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번 장의
중심 구도는 아메리카와 유럽의 만남을 통해 맨 처음에 형성된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구조가 어떻게 형성, 변화, 발전, 갈등의 국면을 거치는 계기가 되었
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메리카와 유럽의 만남을 통해 맨 처음 형성되었다고 말
했는데, 이게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가 앞 장에서 다룬 1492년 이전의 가치와 구조 등
이 유럽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철저히 부정되고 새롭게 유럽의 것이 이식되어 결국 유럽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곳 아메리카 원주민의 것도 아닌 제3의 라틴아메리카 사회가 만들
어진 계기가 바로 지금 우리가 공부하려는 ‘아메리카와 유럽의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입니다. 그 당시 정복을 한 백인들이 오늘날까지도 기득권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중남
미국가에 가보십시오. 백인 거지가 있나요? 없습니다! 이렇게 된 극단적이지만 분명한 이유
가 1492년에 최초로 형성된 사회구조에 있습니다. 즉 그때의 지배자들인 백인들이 지금까
지도 지배세력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이 가난할 일이 없습니다. 거지
가 될 일은 더욱 없구요. 물론 백인 거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피부의 하얀 정도와
경제력을 조사해서 그래프를 그린다면 분명히 비례 관계입니다. 그런 연구를 아직 발견하지
못해 여기에 인용할 수 없음이 애석할 따름입니다만, 과연 그런 연구를 할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인종 갈등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 테니까요. 아무튼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 사회
계층 구조에 1492년의 사건이 있습니다. 오늘날 정치 갈등의 배경에 직간접으로 1492년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좀 극단적으로 보면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하
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의 갈등, 대안, 고통과 그들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는- 1492년 사건의 이해가 필수 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1492년 사건의 구체적인 면들
을 살펴보자구요.

1492년 이전의 유럽은 참 많이도 미화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가난뱅이가 갑자


기 벼락부자가 된 상황입니다. 이제는 떵떵거리며 잘 살게 되니 그 이전에 못살았던 때가
미화된 상황입니다. 즉 1492년 이전의 유럽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유럽보다도 훨씬
암울한 곳이었습니다.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종교적인 모든 면에서 그랬습니다.
정치 군사적으로 유럽은 몽골에 시달리며 큰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몽고의
칭기즈칸이 얼마나 유럽 사람들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겨 줬는지는 여러 정황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최정예 부대들을 격파한 테무진의 군사들은 자진해서 물러갔고 더는 기댈
곳이 없었던 유럽은 기적적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랍사람들에 대한 군
사적인 실패도 유럽에게는 항상 열등감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요소였습니다. 그 유명한 십
자군전쟁을 통해 유럽의 모든 군사력을 총동원하고도 뼈아픈 패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
는 계속됩니다. 유럽 기독교의 성지이자 무역의 관문인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함락은
십자군과 유럽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기술적인 분야는 더욱 할 말이 많습니다. 이미 앞에서 마야 문명의 과학에서 ‘0’의
개념을 이야기하며 로마숫자와 아라비아 숫자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하여 언
급하였습니다. 한편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에 이르는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유럽은 과학
기술면에서 미개함을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만들게 됩니다. 항해술과 관련하여 기존까지
사용해 오던 사각돛의 한계를 이해하게 되고 처음으로 삼각돛을 아시아로부터 배워오게 됩
니다. 삼각돛은 동양에서 이미 10세기 이전부터 사용하였는데 사각돛은 많은 한계가 있었습
니다. 빠른 방향 전환 불가능, 역풍에서의 사용 불가능과 같은 한계를 가졌죠. 그런데 삼각
돛응 사용함으로써 극적인 변화가 생긴 겁니다. 항해 분야에 있어서 가히 게임체인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동양으로부터 삼각돛의 원리를 배워오기 전의 유럽은 인력에 의한 노젖
기에 의존였습니다. 순풍이 아닌 경우 아예 출항 조차 못하는 경우도 있었죠.그런데 삼각돛
을 알게 되면서 노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배를 더욱 빠르고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것
이죠. 노를 질 사람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으며 노를 질 장소도 필요가 없었고 노를 질 사
람들을 유지할 공간과 식량 등을 다 따져보면 이것이 얼마나 획기적인 변화인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니 그 이전의 유럽이라는 곳의 항해 기술이 얼마나 열악한 것이었는지
를 쉽게 짐작해 볼 만 합니다. 사실 대항해를 가능하게 한 건 유럽의 개척 정신이니 뭐니
이런것 보다도 동양에서 그들에게 전해준 항해술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어
디 이뿐입니까. 이제까지 단 한 개의 돛대를 사용하던 유럽의 선박이 다수의 돛대를 사용하
는 방법도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터득하게 됩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돛을
매다는 돛대가 하나인 배와 몇 개인 배의 속도와 조타 능력이 얼마나 차이가 날지는 충분히
짐작이 갈 만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나침반, 해도, 조선 등의 기술을 동양에서 배워옴으로써
그야말로 미개하다는 말이 가능할 정도로 수준이하 이던 유럽의 항해 도구와 기술이 획기적
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한두 가지 더 말해볼까요. 해도와 나침반이 없던 유럽에는 대서양으로 계속 나가면
세상의 끝이 나오고 거기에 큰 괴물이 입을 벌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습
니다. 망망대해에 나가서 해도도 없고 나침반도 없는 상황에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도 없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방법 자체를 몰랐습니다. 하늘에 별이나 태양이 뜨는 지점을 보고 방
향을 알 수는 있지만 구름이 낀 날은 난감한 일이지요. 그래서 이전까지 유럽 사람들은 육
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항해 자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바로 방향을 잃
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육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
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런 미개한 유럽에 다양한 동양의 획기적이고 수준 높은 기술들이
들어오게 된 것이지요. 그야말로 센세이션했습니다.
이러한 찌질한 유럽의 현실은 음식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동양의 향신료는 당대 유
럽의 최고 상품이었습니다.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부터 후추와 계피가 사용되어 상당
히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1세기 로마의 박물학자인 플리니우스Plinius는 “후추
같이 영양도 아무것도 없는 것 때문에 매해 5,000만 세스루티우스의 돈을 유출하고 있다”
라고 개탄 할 정도였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마른고기 등을 그냥 먹기에는 맛이 없었는
데 후추와 같은 식품은 썩은 냄새를 없애 주는 등 약품으로서의 효과와 미약으로서의 효과
를 주었던 것입니다. 유럽은 육류 소비가 많았는데 프랑스 지역만 하더라도 1년에 양 20만
마리, 소 2만 마리를 소비하였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이들이 동양
과 무역을 하고 싶은, 동양의 것을 배우고 싶은 욕망이 얼마나 컸을 것이냐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찌질한 유럽이 동양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거둘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것
이 바로 1492년 지리상의 발견이라고 하는 사건의 큰 배경이 됩니다.
이렇게 찌질 찌질한 유럽이 멋진 동양을 한없이 흠모했는데 그 사랑에 방해물이 생
겨났습니다. 교통에 필요한 무역로를 이슬람이 점령하게 된 것이죠. 14세기부터 맹위를 떨
치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은 지금의 터키, 헝가리, 폴란드,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집트, 알제
리 등의 넓은 지역에 세력을 뻗치게 되는데 그 과정에 동양과 서양의 무역 중심지인 이스탄
불이 오스만에 의해 점령되게 됩니다. 원래 이름이 비잔티움이었는데 이곳은 기원전 512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에게 점령당했다가 이후 로마의 속주가 되어 기원후 330년에 그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도읍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로마 제국 분열 이후 동로마의 중심지가 됨으로써 유럽의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중심지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의 중심지가 됩니다. 그런데
이곳이 오스만 제국에 의하여 위협을 받습니다. 그러자 십자군이 소집되어 유럽이 이곳을
점령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은 결국 1453년 이곳을 손에 넣습니다. 유럽 각지에서
모인 최정예 병사들도 이곳을 탈환하는데 실패하게 된 것이죠. 결국 이것이 동로마 제국의
멸망이 되는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지금의 이름인 이스탄불로 이름도 바뀝니다. 상황
이 이렇게 되자. 우리의 찌질 유럽은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렇지만 깊어진 사랑은 어쩔 수가 없었던 겁니다. 즉 다른 방도를 동원해서라도 사랑하는 동
양에 가서 향신료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물자도 가져오고 기술도 배워오고 싶었던 것이죠. 그
리고 그게 바로 1492년의 무모한 항해의 배경이 됩니다.

군사, 기술, 경제, 등등의 모든 분야에서 너무나도 찌질해서 동정심 마져 일으키게


하던 유럽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유럽처럼 세계에서 가장 멋있고 , 힘센 세상이 된 사건이
바로 1492년입니다. 그래서 1776년 아담 스미스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이 신대륙의 발
견이다.’라고 역설하였고 미국의 타임지는 서기 1000년 이래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1위 구텐베르그의 금속 활자 발명을 그리고 2위에 지리상 발견을 꼽았습니다. 역시 가장 중
요한 사람으로 1위 에디슨, 2위 꼴론을 꼽았지요. 이것은 유럽이 전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
한 시발점 즉 서양 중심 세계 구도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소위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전통적인 신분 제도가 붕괴하기 시작하였으며, 부르조아가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였고, 기술혁신이 시작되는 한편, 식민지 경영을 통해 서양이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었고, 탐욕은 군사적인 우위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합니다.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서구 문화 중심의 정치, 경제, 사회, 예술, 종교 등의 시발점이 됩
니다. 즉 서방이 세상의 패권을 잡고 그 영향력을 우리나라를 포함한 온 세상에 뻗친 시작
점이 바로 1492년입니다. 우리가 쓰는 달력, 우리가 쓰는 도량형, 우리의 의복, 교육제도,
정치체제, 경제 원리, 언어. 종교, 음식, 음악, 예술, 과학, 철학 ... 등등등등 입니다.

1492년의 원인으로 새로운 팽창에 대한 갈망, 즉 찌질한 유럽을 탈출해서 새로운


세상을 살아보고 싶은 욕망을 지적했습니다. 대항해 시대 이전 유럽은 지중해 중심의 한계
를 벗어나지 못했고 새로운 동양의 기술과 문화 생산품들을 접하면서 그야말로 열광적으로
유럽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싶은 욕망을 꿈꾸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지요.
그런데 사실 말이 그렇지 그렇게까지 모든 유럽사람들이 동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이것들에
대한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니 그럴 만큼 잘 알지도 못했었지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동양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새로운 항로를 통해 동양으로 가는 길을 뚫어봐야겠다
고 생각하게 만든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은 바로 후추였습니다. 저는 만일
1492년의 사건을 한 단어로 정리하라고 한다면 “1492는 후추다”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후추는 대표적인 향신료로서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시대(1520-66)를 즈음하여 유럽으로
들어가기 힘들어지게 됩니다. 사실은 못 들어간 것은 아니고 더욱 비싼 대가를 치러야 된다
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이에 따라 당시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던 헤노바(Genova)의 상인
들이 동방 루트의 본거지였던 스페인의 세비야나 포르투갈의 리스보아로 모여들어 새로운
무역의 활로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동안 후추로 쏠쏠하게 재미를 보며 중세의 영주나
기사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어 인생역전을 하게 된 지중에 연안의 상인들은 상업자본을 형
성해 그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들에게 부귀영화를 가져다주었던 무역을
하지 못하게 된 겁니다. 혹시 최초의 은행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 생각나는 데가 아딘가요?
미켈란젤로에게 돈을 주어 성당의 벽화를 그리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십니까?, 십자
군 전쟁의 막바지에 전쟁 승리를 위해 돈을 대던 사람들이 누구였지요? 정답은 모두 ‘이태
리의 상인’입니다. 즉 그들은 최초의 부르조아 즉 상업자본가의 탄생으로 소위 돈맛을 본
찌질찌질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맛을 본 이들에게 동양과의 무역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
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지요.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지도 않았지요. 그
들의 열망은 후추 팔아 부자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아무리 이들의 찌질 탈출 욕망이 컸다 하더라도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여건이 만


들어지지 않았다면 가히 엄두를 내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가능성을 열어준
사건이 생기게 됩니다. 십자군을 통해 동양의 문물에 접하는 사람이 많게 되면서 신비하고
막연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동양과의 사회 정신적인 거리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여기에 마
르코 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도 큰 몫을 합니다. 유럽 이외 지역에 대한 인지와 동
경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사회에 동양 사회를 실존,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계기가 되
었던 것이죠. 동방견문록에 자세하게 쓰여있는 후추에 관한 이야기가 신분 상승을 노리는
유럽의 상인들에게 구미를 당기게 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요. 사실 동방견문록이 그 당
시에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아니 좀 더 구체적
으로 말하자면 동양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동경과 흠모 그리고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마르코 폴로는 이탈리아 상인으로 베네치아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일단 지중해 무역
의 중심지였던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점이 범상치 않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
는 1271년에서부터 129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여행했으며, 17년 동
안 중국에 머뭅니다. 그는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여행담을 글로 남기게 되는데 그것이 《세
계의 묘사(Divisamentdou Monde)》라는 책인데 우리는 이것을 흔히《동방견문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상당 부분이 동양에 있는 후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당
시의 중요 관심사였던 후추와 동방무역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이들의 새로
운 무역로 개척의 열망에 불을 지핍니다. 마르코 폴로가 진짜 동양에 가보기나 한 것이냐
아니냐 혹은 그 내용이 맞냐 안 맞냐 여러 가지 논쟁이 있기는 합니다만 어찌 되었건 이 책
은 당시 유럽을 뒤흔든 베스트셀러엿고 그 내용은 새로운 세계를 열망하던 유럽에게는 큰
사회적인 촉매제가 됩니다. 즉 1492년의 사회 문화적인 배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서 제일 먼저 발 빠르게 움직인 사람들이 바로 포르투갈 사람


들입니다. 바르똘로메 디아스가 1488년 희망봉(폭풍의 곶)을 발견하였는데 부정할 수 없는
그 최고의 동력은 무엇이었는지 앞에서 구구절절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새로운 인도 항로를 개척하여 무역을 하고 싶어요”

그렇게 새로운 항로를 통해 동양에 도착하는 가능성을 연 포르투갈은 쾌재를 불렀


습니다. 우리가 드디어 동양에 가서 무역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에 들떠 있었던 거죠. 그리
고는 1502년 15척의 함대를 이끌고 인도에 가서 인도 무역 독점의 기회를 잡게 됩니다. 그
런데 이 상황을 수수방관하면 무역의 주도권이 모두 포르투갈에 가게 되니 뭔가 다른 수단
을 세워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우리가 콜롬버스라고 부르는 꼴론이 ‘짠’하
고 등장을 하게 됩니다. 사실 꼴론은 탐험가라기보다는 야심 있는 상인(비단과 향료무역),
또는 무모한 벤처 기업가 혹은 사기꾼 이라는 표현이 더 적당한 인물입니다. 아시아까지의
거리가 17,000km에 달하는데도 이것을 4,000km 정도로 계산 착오를 하였습니다. 혹은 일
부러 거짓 계산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새로운 무역로를 자기가 개척하겠다는 허황한 꿈을 꾼
것이지요. 기술적으로 보면 4,000km 정도가 당시 유럽의 낙후한 배들이 항해 가능한 최대
거리였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계획은 그들의 찌질 탈출의 욕망이 낳은 무모한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꼴론은 17,000km에 달하는 거리를 무식하게도 4,000km로 계산하였습니다. 그런


데 그의 무식함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가 1492년에 가져간 배 가운데 가장 큰 배인 산따
마리아 호의 길이가 30미터가 채 안 됐습니다. 다른 두척의 배도 20미터 전후 정도로 추정
하고 폭도 7미터 정도로 전체 선박의 규모가 200톤 정도 수준입니다. 사실상 이러한 배로
동양에 이르는 항해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동안의 항해에 필요한 식량을 적재할 공간조차 없
었습니다. 우연히 풍랑을 만나지 않아 순조롭게 항해한다 해도 오랜 항해 기간을 견디지 못
하고 목말라 죽거나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당대 유럽의 선박 건조 기술로는
그 긴 항해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단순히 당시 동양에서 만든 선박과
비교해 봐도 유럽의 조선기술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신라 장보고 시대에 만들어진 배의
규모가 꼴론이 사용한 가장 큰 배인 산따마리아 호와 거의 유사합니다. 임진왜란때 사용된
중간 크기의 배인 거북선만 하더라도 산타마리아보다도 큰 배였습니다. 꼴론의 항해가 있기
이전인 1400년대 초에 활약한 정화라고 하는 명나라 탐험가의 배는 길이만 해도 44장으로
우리의 미터법으로 계산했을 때 140미터에 달하며 폭도 56미터 정도로 추정됩니다. 결국
1492년 꼴론의 항해를 가장 잘 표현 한다면 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무식해서 용감했다.

이 말이 거칠기는 하지만 이 상황에 가장 적절한 표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아이


러니 하군요.

꼴론이 원래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의 제노바입니다. 그곳이 동서양 무역의 중심지


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직물업자인 아버지와 함께 직물이나 포도주 등을 운반하며
뱃사람으로 지중해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을 거점으로 하는 유럽의 지중해
무역이 점점 위축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배가 해적의 습격을 받아 고생을 하는 과정에서 포
르투갈의 리스본에 가기도 하면서 다양한 경험들을 하게 되지요. 그런 와중에 마르코 폴로
의 ‘동방견문록’과 같은 책을 접하면서 서쪽으로 항해하면 동양에 도달하리라는 망상(?)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483년과 84년을 거치며 포르투갈의 왕 주앙2세에게 자신
의 계획을 올립니다. 포르투갈은 당시 희망봉을 발견하고 동양무역의 거점을 마련한 최고의
해상국가로서 그의 계획을 실현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당시 최고의 항해술과 과학을 겸비한 포르투갈에서 이런 허황한 계획을 승인할 리가 없었지
요. 굳이 오늘날과 비교한다면 지금 우주선을 타고 안드로메다 성운에 가서 금은보화를 케
올 테니 나에게 우주선을 내어 달라는 정도의 무모한 계획과 같은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당대의 과학자들이나 항해가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스페인 국왕에게 청원하게 됩니다. 1486년 1월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을 처음 만나서 자신
의 벤처사업이 엄청나게 수익성이 좋은 투자라고 설레발을 치게 됩니다. 포르투갈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발 국가인 스페인으로서는 나름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스페
인의 모든 과학자와 항해가들이 다 말리고 나섭니다. 계획의 타당성에 대하여 심사를 하고
여기에 꼴론도 참여해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워낙 말이 안 되는 계획이라 다들 반대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왕이 덜컥 허락하게 된 것이지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뒷말이 무성합니다만, 여왕이 꼴론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설이 상당히 설득력
을 얻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끼던 금은 보화를 팔아 꼴론의 항해비에 보태기도 했으니 사실
좀 여러 가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기는 합니다. 하여간 1492년 2월에 항로 개척에 따른
무역 수익의 10퍼센트(%)를 꼴론이 가진다는 파격적인 내용의 산따페(Santa Fe)조약을 맺
습니다. 그리고 그해 8월 3일에 3척의 배는 스페인 남서부의 시골 작은 항구인 빨로스
(Palos)를 출발합니다. 실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꼴론이 탄 산따 마리아Santa Maria와 라 니냐La Niña, 라 삔타La Pinta의 세 척
이 스페인을 출발해서 카나리아 제도에 정박을 합니다. 대부분의 선원들은 자신들이 어디를
가는 건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대서양을 건너 바다 반대편으로 간다고 한다면 따라
갈 사람이 없었을 테니 당연히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 겁니다. 거짓말과 사기로 이
들을 항해야 참여시킨 것이지요. 이러한 사기행각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항해 도중
선원들이 돌아가기를 원하며 반란을 일으킬 때에도 꼴론은 역시 감언이설과 폭력, 회유 등
을 동원해서 항해를 이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2달이 지나 마침내 10월 12일 새벽, 산살바
도르(구원자)San Salvador라고 명명한 지금의 카리브 연안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도착하
게 됩니다. 구원자 이긴 구원자이지요. 만일 몇일이라도 더 항해했다면 굶어 죽거나 선상
반란이라도 일어날 판에 육지를 만나게 되었으니 구세주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리고 이곳
을 인도라고 생각해서 이곳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을 인디오(Indio) 혹은 인디언(Indian)이라
고 부르게 됩니다. 물론 그는 죽을 때까지도 이곳이 인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곳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가 생각하던 무역도 생각처럼 잘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금은보화도 충
분치 못했어요. 결국 그는 계속 변명과 사기만 치다가 불후한 말년을 맞아 쓸쓸하게 죽습니
다. 사기를 쳤다는 말이 다소 과장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과장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원들에게 자신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리지
도 않고 계속 곧 도착한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선상 반란을 두려워해 선원들에게 지나
온 항해 거리를 속였습니다. 제일 먼저 육지를 발견한 사람에게 포상하겠다고 하고서는 그
포상금이 아까워 자신이 제일 먼저 봤다고까지 했습니다. 그 이후로 이어지는 2차 3차 항해
등에서는 그곳에 다시 가면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호언을 하는 등 계속
투자를 받기 위한 사기꾼 전형의 과장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런 종류
의 사기 수법은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거듭되는 사기 행각으
로 투자를 받아 항해를 이어나갔고 그 결과는 비참한 최후가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이전까지 동양의 문물과 기술 등에 의존하거나 동경하던 유럽의 동양에 대한 관심


이 증가하였습니다. 또한 경제면에서도 동양과의 교류가 유일하고 가장 훌륭한 무역이 되었
지요. 그런데 이슬람 사람들이 그 길을 막거나 무역에 과도한 관세를 부과하자 십자군을 동
원하여 해결해 보려 하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결국 당시 항해술이 가장 뛰어난 포르투갈은
‘에라! 지중해를 거쳐서 못 가면 아프리카를 돌아서라도 가자’ 하고 아프리카 항로를 개발했
습니다. 이런 상황을 수수방관하고 있다간 모든 것을 포르투갈에게 빼앗기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다른 나라들은 무언가 대책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 가운데 대항해 시대의 후발 국
가인 스페인이 모험으로 대서양을 횡단해서 동양에 이르려는 무모하고 과감한 투자를 하게
된 것이지요. 그 상황에서 사기꾼 꼴론의 제안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된 것입니다. 조금
투자해서 되면 좋고, 아님 말고…. 그래서 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잃을 것도 그렇게 많지 않더라. 그래, 밑져야 본전이지. 꼴론아, 다녀오너라 !’ 뭐, 대강 이
정도 시나리오로 아메리카와 유럽의 만남의 배경을 이해하면 될 겁니다.
제7장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 2

1500년 포르투갈의 브라질 식민지 개척


1521년 스페인의 멕시코 정복
1532년 스페인의 페루 정복

우리가 교과서에서 위대한 발견이요 개척정신의 총화라고 배운 꼴론의 항해는 그야


말로 몽상을 가진 사기꾼의 무지와 우연이 만들어낸 에피소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취
성은 무모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동기나 과정과 결과에서 보여준 치졸한 욕망은
그 어떤 것도 인류의 가치라고 하는 측면에서 미화될 수 없는 것이었지요. 하여간 그렇게
시작한 원정에서 엉뚱하게도 커다란 대륙을 만나게 됩니다. 동양인 줄 알았는데, 웬걸 동양
이 아니네. 물론 여기가 일본이나 인도가 아니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아무튼 이제까지
다른 나라가 갖지 못한 굉장한 이권이 이곳에 있을 것 같았습니다. ‘금이 있으면 아주 좋고,
없으면 땅이라도 가지면 되지.’ 그런데 그 금이나 땅이 어디 유럽인들의 것이랍니까. 원래
살던 사람들은 허수아비인가요? 그러다 보니 원주민들의 원래의 소유권, 나아가 그 존재 자
체를 인정하면 유럽인들이 공들여 찾아낸 금과 땅의 이권을 독점하기 힘들게 되는 것입니
다. 그래서 ‘여기 원래 사람 안 살았어요’라는 의미로 신대륙이란 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는 빼앗은 것이 아니라 아무도 없던 땅을 개척한 거예요’라는 말을 합리화시
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콜럼버스의 숭고한 개척정신이고 또한 나아가 그 유명한 미국
‘개척정신’의 실체입니다.

처음으로 백인들을 만나게 된 원주민들은 대부분 이들을 극진히 환대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황금뿐이었고 돈을 위해서라면 원주민들을 때
리고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수천 년간 토대를 이루고 살아왔던 사람들은
당연히 거부하고 저항했겠지요. 땅과 금을 원하는 유럽사람들을 향해 순순히 “맞아요, 이거
다 당신 땅이에요, 당신 금이예요. 금을 많이 못 구해온 저를 죽여주세요~~”라고 하지는
않았겠지요. 결국 유럽 침략자들의 칼과 총이 맨 앞에 서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남들
이 멀쩡히 잘살고 있던 땅을 빼앗은 사람들도 뭔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구실이 필요
했겠죠. 거기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즉 전쟁과 살육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종
교가 따라간 겁니다. 공식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러한 하
나님의 뜻을 전파하려는 유럽의 국왕을 위해서 정복을 수행한 것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
안 믿는 나쁜 놈들이니까 하나님 믿게 해주려는 거야!. 우리가 너희들을 위해서 좋은 일 해
주는 거야, 짜샤!” 뭐 대강 이 정도의 합리화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 원주민들은 다양하고 인간적이며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종교관을
가지고 있던 터라 서양사람들이 가지고 온 기독교를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이기도 했습니
다. 근데 이런 상황이 스페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좀 황당한 겁니다. 원래 주목적은 금은보
화, 그리고 그게 없으면 땅, 나아가 그 땅에서 일할 원주민 노동력인데 그렇게 대놓고 노골
적으로 말할 수 없어 기독교들 들이댄 것인데 원주민들이 이걸 덥석 믿겠다고 하면서 좋다
고 하니 말입니다. 자 그럼 유럽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 그래,~~~ 우물쭈물 우물쭈물 ~~~ 근데 너희들 거짓말 하는 거지. 너희들 말
은 그렇게 하고서 우상을 계속 믿고 있는 거지?... 그러니 너희들을 때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건 어쩔 수 없는거야!!. 너희들이 그렇게 많이 죽고 힘든 것은 살인적인 노동과 핍박 때문이
아니야. 너희들이 기독교를 잘 믿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거야. 우리가 너희들을 교화
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정복의 과정은 잔인하고 철저했습니다. 기존 원주민들의 모든 것―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관습, 재산 등―그야말로 모든 게 철저히 무시되고 스페인사람들의 차지가 되었
습니다. 이러한 배경과 이유로 정복은 잔인하고 철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저하지 않으
면 신대륙이라고 말할 수 없을 테니까요.

☞ 잠깐! 추천 영화 : ‘1492 콜럼버스’, 감독: 리들리 스콧, 제작년도: 1992년

당시 유럽에서 별로 볼 일 없는 나라였던 스페인이 대박을 터트렸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금과 은이 유럽으로 들어오고 새로운 땅에서 온 물건들이 유럽을 열광
시킵니다. 다들 부러워 미칠 지경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제일 배가 아팠던 나라가 어디
일까요? ... 포르투갈입니다. “아 짜증나!, 희망봉 돌아 새로운 무역로를 막 개척했는데, 이
거 제대로 활용해보지도 못했는데 더 좋은 무역로가 생겼네 ㅜㅜ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었는
데 그걸 스페인에 빼앗기게 되었데. 아이고 배 아파라! 더군다나 우리는 현재 최고의 항해
술과 국력을 가진 국가 아닌가.~~”
그러나 당시 유럽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던 교황은 1493년에 이미 ‘인떼르 꼬
에떼라Inter Cohetera 칙서’를 통해 스페인에 모든 권리를 주게 됩니다. 대서양의 서쪽 끝
에 위치한 섬인 까보 베르데Cabo Verde의 서쪽 100레구아(약 400km) 지점을 기준으로
그 서쪽의 땅을 모두 스페인의 소유로 인정한 겁니다. 즉 스페인이 발견한 땅에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얼씬도 하지 말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시 최고
의 국력을 가진 포르투갈이 마지막 남은 모든 권력을 동원해서 교황청에 로비를 하게 됩니
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 애잔한 노력의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브라질이 됩니다.
1494년 6월 7일 포르투갈의 청원으로 ‘또르데실야Tordesilla 조약’이 맺어집니다.
‘까보 베르데’의 서쪽 370레구아(약 1,500km)에 그어진 자오선을 기점으로 서쪽은 스페인
의 소유, 동쪽은 포르투갈의 소유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즉 전에 100레구아였던 스페인 땅
의 경계선이 서쪽으로 1000km이상 옮겨가면서 브라질 땅을 포르투갈이 차지하게 된 것입
니다. 물론 이때 이미 아메리카 대륙의 지리적인 실체를 잘 알고서 한 것은 아니고 다만 모
든 권리를 스페인에게 줄 수만은 없다는 포르투갈의 마지막 의지가 관철된 것입니다. 사실
상 이때를 기점으로 포르투갈은 당시 세계 최고의 패권국가로서의 영향력을 마지막으로 발
휘하고 화려하게 은퇴합니다. 그런데 포르투갈은 부자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브라질 땅을 건
지게 된 겁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지도를 보면 브라질이 제일 동쪽에 두드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1500년 3월 9일 포르투갈의 까브랄Pedro Alvares Cabral이 지금의 브라질 땅에 발을 들
여놓게 됩니다. 이후 포르투갈의 정복자들이 이 땅에서 파우 브라질(Fau Brasil: 적색 연료)
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를 싣고 귀환하게 됨으로써 브라질이란 이름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즉 또르데실야 조약의 결과 스페인의 영토선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가장 끝자락에 있
었던 남미의 현 브라질 땅이 유럽의 망한 부자 포르투갈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지요.

그림 5 또르데실야 조약으로 변화된 해상 국경과 브라질의 탄생배경(저작권?)

1492년은 사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아메리카 대륙과는 별 상관이 없는 연도입니


다. 1492년에는 아메리카 대륙 근처에도 못 갔었고 카리브해의 섬과 그 근처에나 왔다 갔
다 하는 정도였습니다. 꼴론은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도착한 곳이 이전까지 듣도 보도 못한
땅이라는 사실조차 몰랐으니까요. 유럽 사람들은 여기가 어디인지 그야말로 “노 아이디어”
였던 거지요. 마젤란이라는 사람이 남미대륙을 통과해서 세계를 한 바퀴 도는 항해를 시작
한 것도 1519년의 일입니다. 그가 어마어마한 태평양을 건너 구사일생으로 필리핀에 도착
한 것이 1521년의 일입니다. 그러니 유럽사람들은 1492년 이후 20~30년 정도나 지나서야
“여기가 동양이 아니라 새로운 땅인가?” 하는 의심을 할 수 있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카리브해 연안에 웅크리고 있던 스페인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본격적으
로 발을 디뎌 보려고 노력을 하기 시작한 것이 1517년의 일입니다. 꼬르도바(Córdoba)라고
하는 사람이 주축이 되어 멕시코 남쪽, 지금의 유까딴 반도를 처음으로 정찰하게 됩니다.
당시 유럽인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을 보게 된 이들은 현재의 쿠바에 있던 스페인 정부로부
터 탐험의 임무를 띠고 왔습니다. 그런데 꼬르도바는 그곳에 있던 원주민들과 전투를 벌이
게 되었고 여기에서 원주민들의 화살을 맞아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결국에는 쿠바에 돌아
가서 그 후유증으로 죽게 되지요. 그런데 탐험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강력한 저항을 받은
데다 유까딴 반도의 건축물들이나 원주민들의 행색이 대단했다는 소식은 사람들을 자극하게
됩니다. 황금에 욕심을 가지고 있던 쿠바의 스페인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꼬르도바가 탐험
한 지역에 금은보화가 가득할 거로 생각하게 됩니다. 구미가 당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다음으로 나선 사람이 바로 그리할바Grijalva입니다. 1518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리할바 역시 주변을 정찰하는 임무만을 수행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돌아와
서 이야기해대기 시작합니다. 굉장한 사람들을 보았고 화려한 도시가 유럽의 그 어떤 곳보
다도 크고 웅장했다느니 등등...어쩌고 저쩌고.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쿠바에서 기회를 노
리던 인간들 중에 내가 먼저 기회를 잡아야겠다는 야심을 불태우는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이제 진짜 쎈 놈이 등장하게 됩니다. 아메리카 대륙 침공의 선봉장이라 할 수 있는 꼬르떼
스Cortés란 인물이 탄생한 겁니다. 1519년의 일입니다. 1517년 꼬르도바의 최초 아메리카
대륙 정찰에서부터 1518년의 그리할바 탐험 그리고 1519년까지 이어지는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습니다. 사실 이때가 진정한 의미에서 아메리카와 유럽의 만남의 시기라고 할 수 있
을 겁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면 몇 날이 걸립니다. 꼬르떼스가 작성한 편지도 지금까
지 남아있고 그를 충실히 따르던 부하인 베르날 디아스 델 가스띨요Bernal Díaz del
Castillo의 일기도 아주 두꺼운 책으로 만들어져 잘 보존되고 있는 등 관련 자료도 아주 많
거든요. 하여간에 꼬르떼스는 아주 야심이 큰 인물이었습니다. 이전에 정찰을 한 꼬르도바
와 그리할바가 여러 난관을 만났었기 때문에 쿠바에 있던 총독은 꼬르떼스에게 조심스럽게
정찰만 하고 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 꼬르떼스는 흥미로운 소식을 접하게 됩니
다. 메시까라고 하는 족속들이 멕시코 고원지방에 살고 있는데 이놈들이 아주 강력하고 호
화로운 생활을 하는 족속으로 금은보화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사
실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정보였지요. 하여간 이런 말을 들은 이상 꼬르떼스는 애당초 쿠바
를 떠나 항해를 시작할 때부터 이곳을 정복해서 금은보화를 내 손아귀에 넣겠다고 생각하고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배 11척, 선원 500명 그리고 말 16필이 그와 같이합니다. 야심찬
계획을 차곡차곡 수행해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중간에 유까딴반도에서 만난 원주민들을 회
유하거나 정복해서 그곳에서 메시까에 대한 정보도 얻고 또한 통역을 담당할 사람도 구하게
되고 등등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 베라끄루스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됩니다.

베라끄루스라는 도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멕시코 최고의 항구로 인식되는 곳입니


다. 메시까 족의 본거지이자 멕시코 중앙고원지방의 중심지인 멕시코 시티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로서 지리적인 요충지이기도 합니다. 꼬르떼스가 이곳에 서양인 처음으로 발을 들인 이
후 지금까지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오가는 배들이 가장 많이 정박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곳이 꼬르떼스의 메시까 진격의 교두보가 됩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베라끄루스에
도착한 꼬르떼스는 같은 배에 타고 온 선원들의 저항에 부딪힙니다. “쿠바에 있는 부황이
분명히 정찰만 하고 오라고 했는데 왜 정복을 위해서 상륙을 하느냐 이건 안된다. 위험하
다.” 뭐 이런 항의가 빗발쳤던 거지요. 그러자 꼬르떼스는 배수진을 칩니다. 타고 온 배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고 전해집니다. 이제 돌아갈 수도 없으니 오로지 진격만이 남아있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지요. 그런데 엄밀하게 보면 이건 역사적인 사실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많은 멕시코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학술적인 사실과는 별개로 당시 모든 배를 불
살랐다고 하는 극적인 이야기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하게 되었고, 그냥 그렇게 이야기가 굳
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배를 불태우지는 않았고 일부 배를 분해해서 당장 항해
가 불가능하게 만든 정도로 보입니다. 하여간에 꼬르떼스는 부하들을 향해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다. 그러니 모두 나를 따르라! 그렇게 하면 메시까 족속들이 가지고 있는 황금을 갖
게 될 것이고 우리는 부자가 돼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설득한 것이지요. 결국 선
원들도 황금에 대한 욕심으로 꼬르떼스를 따라 메시까 정복의 길에 오릅니다. 그리고 이것
이 아메리카 대륙 정복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됩니다.

그림 6 베라끄루스 안띠구아 식민지시대 최초의 건물

우여곡절 끝에 주변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400Km가 넘는 행군을 하고 해발고도


3000m에 달하는 고봉을 넘어 드디어 1519년 11월 8일 메시까(Mexica)의 최고 지도자인
목떼주마(Moctezuma)와 꼬르떼스가 멕시코시티에서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나름 화기애
애했습니다. 선물도 주고받고 수도의 한가운데로 스페인사람들을 모셔와 융성이 대접도 했
습니다. 금은보화를 달라고 해서 있는 거 없는 거 다 모아 주기까지 했지요. 그런데 스페인
사람들은 이들이 이렇게 친절한 것에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이러다가
갑자기 우리를 공격해서 금은보화도 다 뺏고 우리를 죽이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경계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사를 찾아봐도 서양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원
주민들이 극진히 대접을 해줘서 그나마 생명을 부지하고 새로운 땅에서 정착해서 살았던 것
이 일반적입니다. 원주민들이 먼저 폭력적으로 유럽사람들을 대한 경우는 극히 예외적입니
다. 그런데 스페인사람들은 그 불안함으로 인하여 원주민들이 몇 명 모이는 것만 봐도 의심
을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로 먼저 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메시까 원주민들의 심장부입니다. 병력면에서도 열세에 있었던 스페
인 사람들의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결국 도망을 가게 됩니다. 1520년 6월 30일 밤의 일입니
다. 스페인사람들은 이 밤을 노체 뜨리스떼(슬픈 밤)Noche Triste - 스페인사람들에게 슬
픈 패배를 안겨준 밤이라 하여 그렇게 부릅니다. 그때 가지고 도망가다가 물속에 빠뜨린 황
금이 지금 어디에 있느니 없느니 하는 풍문들이 오늘날까지도 떠돌고 있습니다. 물론 그걸
찾아내 인생 역전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여간 그 당시 전투에 패배하고 간신히 도시를 빠져나온 꼬르떼스가 힘들고 원통
해서 나무를 붙잡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슬픈 밤의 나무’라고 이름 붙
여진 그 나무가 아직도 멕시코시티에 있습니다. 그 사건이 지금으로부터 500여년이 지난
일이니 정말 그때 꼬르떼스가 울기는 한 건지 그리고 그 나무가 그 나무인지 정확히 알 수
는 없지만, 당시의 이야기는 아직도 사료와 전설을 오가며 멕시코의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로 전해 내려옵니다.
그런 슬픈 밤을 겪은 꼬르떼스와 스페인사람들이 그냥 물러설 사람들이 아니지요.
더군다나 이미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황금을 보았던 터라 욕망을 채우기 위한 피
비린내 나는 살육은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슬픈 밤’의 악몽을 극복하고 잔인한 방법으
로 원주민들을 살육한 스페인사람들은 1521년 8월 13일 지금의 멕시코 시티를 완전히 손
아귀에 쥐게 됩니다.

그림 7 현재 멕시코수도에 있는 노체 뜨리스떼(슬픈 밤)의 나무

멕시코에서 꼬르떼스가 황금을 손아귀에 쥐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


막 도착하기 시작한 스페인사람들에게 그야말로 황금의 열병을 앓게 할 만한 큰 화제가 되
었습니다. 여기에 용감하게 뛰어든 사람 중 한 명이 피사로Francisco Pizarro입니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온 사람들을 보면 전형적인 야망가가 많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본국인
스페인에서 안정적인 기득권을 가진 사람보다는 뭔가 부족하고 아쉬운 것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신분 상승이나 인생 역전의 기회를 노리고 온 경우가 많았지요. 위험도 불사하는 탐
험 등을 통해서라도 기회를 잡고 싶은 것이죠. 그러나 그런 과정은 항상 부담이 따랐으며
생각보다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근데 성공을 하게 되더라도 결국
욕심은 끝이 없게 되고 그렇게 계속 무리를 하다 보면 언제가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얻게 된 황금은 주변의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키고 이를 지키기 위한 암투는 끝이 없게 됩
니다. 결국 언급한 꼴론이나 꼬르떼스, 그리고 지금 살펴보고 있는 피사로까지 그 어느 누
구도 편안한 여생을 보낸 사람이 없습니다. 피사로도 이러한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그렇
지만 불행한 생을 살았던 인물의 전형입니다.
그는 군인인 아버지와 불우한 가정환경을 가진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냈을 뿐만 아니라 교육도 온전히 못 받아 평생을 문맹으로 살 정도였
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인생 역전을 꿈꾸며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가게 되는데 별 신통한
결과가 안 생기자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1513년 다시 아메리카에 건
너갑니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당시 파나마 지역에 있던 관리들 사이에서 정권
을 거머쥐려는 암투가 일어났고 그때 총독에 대항하는 세력을 제거하는데 피사로가 충성을
바침으로써 총독의 신임을 얻게 됩니다. 이것을 계기로 그의 신분은 급상승하게 되지요. 그
러는 와중에 피사로는 꼬르떼스가 멕시코에서 거둔 승리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 염원하던 남미 본토 정복의 꿈을 이룰 항해를 하게 됩니다. 1530년의 일입니다.
불과 3척의 배와 200여 명의 선원을 이끌고 잉카 정복에 나섭니다. 역시 원주민들
은 외지에서 온 손님들을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극진히 대접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외지
인들이 바라는 건 극진한 대우가 아니라 극진한 황금일 뿐이었습니다. 1532년 11월 15일
삐사로와 잉까의 최고 지도자인 아따후알빠Atahualpa는 현재 페루의 까하마르까Cajamarca
라는 곳에서 역사적인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스페인사람들은 어떻게든 이들을 무력으로 굴
복시킬 수작을 벌였고 결국 스페인 군대의 살육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마치 황금의 저주와
도 같이 이 당시 현장에 있던 주요 사람들은 다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따후알
빠는 파사로의 군대에 의하여 처형되고 그의 항해를 도왔던 부관인 알마그로Diego de
Almagro는 삐사로와의 갈등으로 역시 처형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삐사로는 자신이 죽인 부
하의 아들에게 복수를 당해 칼에 찔려 죽게 됩니다. 그 어떤 누구도 행복하지 못한 탐욕의
결과를 보는 듯합니다.
한편 스페인 세력에게 저항하던 뚜빡 아마루Túpac Amaru라고 하는 원주민 지도자
가 1572년에 빌까밤바Vilcabamba에서 사지가 잘려 죽음으로써 남미의 가장 큰 원주민 세
력인 잉까가 공식적으로 망하게 됩니다. 드디어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시대가 열리는
것이지요.

피시로의 잉까정복에도 황금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많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코르


테스의 메시까 정복에서 황금 이야기가 나왔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꼬르떼스 일행이 원주민
에게 공격을 당해 밤에 급하게 도망을 가면서 황금을 떨어뜨렸다는 것, 그리고 도망을 나온
것이 억울해서인지 아니면 황금을 못 가지고 나온 것이 억울해서인지, 하여간 슬픈 밤
(Noche Triste)의 나무를 붙잡고 울었다는 이야기... 여기 페루도 만만치 않습니다. 잉까의
최고지도자인 아따우알빠를 붙잡아 세우고는 건물의 벽면에 그의 머리 높이에 선을 긋고,
여기까지 금을 채우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황금은 그 방에 가득 채워졌지요. 그런
데 그 약속을 지킨 아따우알빠는 어찌되었을까요? 예~~ 예상한 대로 얼마 안 가서 죽임을
당하게 되지요.
스페인 정복자들의 황금에 대한 채울 수 없는 욕망을 보여주는 삽화가 유명합니다.
스페인정복자와 원주민 촌장이 앉아서 대화를 나눕니다.
원주민이 그들의 언어인 깨추아어로 묻습니다: “너희는 뭘 먹니? Cay coritacho
micunqui”
스페인 사람이 대답을 합니다: “우리는 황금을 먹고 살아. Este oro comemos”
그 당시 스페인 사람들의 황금에 대한 욕망이 어땠는지를 잘 모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림 8 Guaman de Poma의
Conquista del Perú의 삽화

유럽의 다른 주변 나라들은 처음에는 스페인의 발견과 발전에 숟가락을 얹는 것만


으로도 행복했습니다. 항해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주거나 돈이 많아진 스페인의 상류층들
이 소비하는 물건들을 만들어 팔아서 신대륙에서 가지고 온 황금과 각종 산물을 받는 것만
으로도 엄청난 장사가 됐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어디 욕심이 그런가요. 기껏 스페인을 위한
물건이나 만들면서 그들이 잘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기에는 아쉬움이 많았죠. 변화하는 세상
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고 싶다는 욕망이 유럽을 온통 흥분의 도가니로 만듭니다. 유럽의 목
동이나 농부들이 수백 년간 이어져 오던 정치, 경제, 사회의 틀을 깨고 새로운 땅을 발견하
여 일확천금하겠다는 욕망으로 바다로 나가게 됩니다. 이때부터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
상을 지배한다.”라는 말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사실 대서양의 바다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공식적으로 점령하고 있었습
니다. 그래서 결국 이들은 공식과 비공식 혹은 합법과 불법을 오가는 식민지 개척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대서양을 항해하던 이들이 아메리카 대륙 주변의 작은 섬들을 노략질하거나
바다를 지나는 배들을 공격하여 황금을 빼앗기도 합니다. 그 유명한 ‘카리브의 해적’이 여기
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빼앗은 금은 보화를 숨겨놓은 섬이 ‘보물섬’이 되는 거고 십오소년표
류기, 피터팬, 톰소여의 모험 등과 같은 이야기들의 배경과 분위기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 독일, 영국 등의 유럽열강들 이 여기에 참여하게 됩니다.

앞서 유럽이 1492년 이전에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찌질이였다는 것을 이야기했습


니다. 군사적으로도 몽골에 당하고 아랍사람들에게 빼앗기며 열등감에 사로잡혔고, 기술적
으로도 동양에서 배워온 것이 당대 유럽의 기준이 될 정도였으며,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도
동양에 대한 흠모와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위 신
대륙발견이라고 이야기하는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이 성공하고 난 이후 유럽은 그야말
로 천지개벽을 하게 됩니다. 서양은 지리상의 발견 이전과 이후의 세계가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고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유럽 혹은 서양의 이미지는 모두 그 이후에 발전하게 된 유
럽의 모습입니다. 제일 먼저 경제적인 면을 보면 대항해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새로운 물자
의 유입 등으로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정도로 발전한 상업자본이 생겨납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엘도라도의 꿈은 현실이 되었고 그렇게 유입된 금과 은이 유럽의 은 가격을 1/3
로 떨어뜨릴 정도로 큰 파급 효과를 가져옵니다. 당연히 산업구조도 바뀌게 됩니다. 기존의
농업 중심에서 이제 겨우 상업을 시작하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엄청난 자본을 바탕으로 소비
구조가 바뀝니다. 제조업을 필두로 해서 서비스업 등의 다양한 분야의 산업이 발전됩니다.
이러한 자본이 부르주아Bourgeoisie라는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면서 사회구조에 막대한 영
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부르주아들을 환영하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해 준 땅 네덜란드
가 새로운 신흥강국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존의 봉건 체제하에서 신분의 한계로 인하여 변할 수 없었던 중
간과 하급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인 권력에까지 영향을 주기에 이릅니다. 돈 없는
양반은 몰락하고 돈 많은 중인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우리나라 조선 말기의 상황이 유럽에서
는 일찍이 아메리카 대륙 정복의 결과로 급속도로 확산하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기존의 사
회질서가 뿌리째 흔들리면서 절대왕권의 권위가 추락하고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들게 됩니
다. 봉건 왕권의 쇠퇴와 공화정의 태동이 되겠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유럽의 종교도 바꾸어 놓습니다. 1500년 이후 유럽 종교의 변화를
이야기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 마틴루터의 종교개혁과 그 이후 신교의 탄생과 같은
사건들이 단순히 종교적인 측면에서만 해석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존의 교
황 중심의 권위적인 체제가 무너지게 됩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제외한 유럽의 기타 국
가들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가톨릭 체제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가톨릭
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종교개혁을 부채질하는 원동력이 됩니
다.
제8장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화 기간

중요 연대
1535년 멕시코에 누에바 에스빠냐Nuva España 부왕청 건립.
1543년 페루에 페루Perú 부왕청 건립.
1545년 볼리비아 포토시Potosi 광산 개발.
1716년 까를로스 3세의 중상주의 시작.
1739년 콜롬비아에 누에바 그라나다Nueva Granada 부왕청 건립.
1776년 아르헨티나에 리오 데 라 쁠라따Rio de la Plata 부왕청 건립.

이번 장에서는 앞에서 공부한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을 통해서 형성된 식민지시대의


아메리카가 어떻게 3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변화되어 정착되었는지를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이 식민지 기간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리하고 넘어가 보도록 하지요. 이 기간
의 굵직한 배경을 설명하는 한 개념을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시작”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라틴아메리카는- 꼭 라틴아메리카만 말고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두 개의 시기로 나누라고 한다면 1492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180
도 바뀌었으니 이 시기가 당연히 모든 것의 기점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정복 이전의
원주민들은 그들 방식의, 서양과는 완전히 다른 그들의 독특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
술, 사상 등의 체제로 살다가 1492년으로 인하여 완전히 다른 세상의 것을 폭력적으로 강
요받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때 만들어진 모든 체제가 이후에 굴곡의 과정을 거치기는 하
였지만 특별한 구조적, 근본적 변화 없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식
민지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시발점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 배경과 구
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것은 라틴아메리카 식민
지 시대에 만들어져서 변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식민지기간의 가장 중요한 사회작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극


단적인 신분의 차이입니다. 정복한 사람들은 좋은 사람, 힘센 사람, 똑똑한 사람, 긍정적인
사람, 돈 많은 사람, 멋지고 예쁜 사람이고 원주민들은 그 반대로 돈 없고, 힘없고, 머리 나
쁘고, 고약하고, 고칠 것이 많은 부정적인 인간에 못생기고 흉측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피부
색에 따라 사회는 원주민과 유럽 지배계층으로 이분화되었습니다. 이후 흑인 노예들이 들어
오면서 이들 역시 사회의 최하층이 됩니다. 의복, 음식, 주거, 언어, 관습 등 모든 면에서 극
단의 차이를 보입니다. 사실 이런 정도의 이야기는 현실을 잘 반영하지 못합니다. 무엇을
상상하던 지금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극단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핵심이 되는 개념은 이겁니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그럼 뭐로 보았는냐? 인간 취급을 해줄 수 없는, 형태만 인간의 모습을 한 동
물로 본 것입니다.
원주민 = 동물 vs 유럽인 =인간

이게 바로 현실이었고 식민지 시대의 사회계층구조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오늘날


의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서의 식민지시대를 말한다고 하였으니 당
연히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인종차별, 빈부격차의 배경이 바로 이 현실에서 출발한 것입니
다. 다시 말해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원래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
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이 형성된 기간이 바로 식민지 기간이고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어느
정도의 변화와 포장의 과정을 거치고 있기는 하지만 큰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지
요. 엄청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흑인과 백인은 같은 화장실을 쓸 수 없다. 극장에서도 같은 입구로 들어갈 수 없다.
백인이 버스에 타면 흑인은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등등의 미국 흑인 인권 관련 이야기가
미국의 20세기 중 후반까지의 현실입니다. 즉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진 철저한 신분의 격차
가 오늘날까지도 크게 변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 기간의 사회구조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수직
적인 신분차이를 들었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유럽의 훌륭한 인간과 대비되는 개나 돼지
와 같은 원주민이라는 이분법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
만, 이러한 극단적인 차별이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사회구조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원리입
니다.
이러한 개념을 잘 나타내는 당시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에 대한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주민은 말하는 동물이다(Animal que habla)

식민지시대가 지나면서 수직적인 사회관계는 굳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새로운 중간계층이 생겨납니다. 메스띠소(Mestizo)라고 불리는 이 두 계층의
혼혈이 탄생하여 중간 사회 계층을 형성하게 됩니다. 혼혈인들은 그나마 좀 더 백인적인 정
체성이 있다 보니, 스페인어를 전혀 못 하거나 잘하지 못하는 대다수 원주민에 비하여 스페
인어 구사 능력을 갖춘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백인과의 접촉이 많을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어서 중간계층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말이 중간계층이지 극소수의
유럽인이나 그 후손들이 모든 권력과 부의 대부분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사회적
인 신분은 그렇게 높을 수가 없지요. 인종적인 부분을 기본으로 하여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던 백인들이 자신들의 피가 조금 섞였다고 하여 동
물과 같이 취급하던 원주민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지는 않
았던 것이지요.
종합해 보면 3개의 신분이 존재합니다. 1.원주민, 2.유럽인 그리고 그 둘의 혼혈인
3.메스띠소.
그리고 이제 또 다른 제4의 계층이 탄생합니다. 바로 4.끄리올요(Criollo) 라고 하는
그룹이지요. 이들은 인종적으로는 유럽의 백인입니다. 그렇지만 출생지만 아메리카 대륙인
유럽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즉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서 자란 토착 아메리카 백인을 가리킵니
다.

뻬닌술라르(Peninsular) – 스페인에서 태어난 스페인사람

끄리올요(Criollo) -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스페인사람

그런데 이들의 혈통은 비록 유럽인이지만 태어난 곳이 아메리카 대륙이란 점에서


스페인에서 온 사람들이 괄시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결국 스페인에서 태어나 아메리카
에 온 뻬닌술라르(Peninsular)라고 불리는 집단이 최상부의 권력을 독점하고, 아메리카 대
륙에 기반을 둔 끄리올요(Criollo)라는 토착 스페인 후손들은 그 아래에 위치합니다. 이건
우리나라의 진골, 성골의 개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혈통과 더불
어 지역적인 정체성이 신분의 차이를 만든다는 점이 재미납니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온 스페인사람들은 이 대륙이 단순히 부임지


라서 곧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경우도 있었고 자신들은 본국인 스페인의 이
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스페인과의 밀착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끄리올요의 경
우 식민지기간이 삼백여 년간 지속되다 보니 이곳에서 나고 자라 2세나 3세, 4세, 5세로 이
어지며 기반을 만든 경우는 스페인과의 정체성의 고리가 점점 약해집니다. 또한 토착적인
그들만의 문화나 이권 등이 생겨납니다. 여기에 뻬닌술라르를 더욱 신임하고 중시하는 스페
인 본국의 태도 역시 문제가 됩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중요 행정직에서 끄리올요들은 상대
적으로 페닌술라르에 비하여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뿌리를 내렸고 현지
사정을 더욱 잘 알 뿐만 아니라 인종적으로도 스페인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끄리올료는 자신
들이 받는 서자 취급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지요.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끄리올요는
스페인과 뻬닌술라르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갈망하는 세력으로 부상합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기간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의식주 등 모든 면에


서 극단의 양극화 현상이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독차지한 자와 전혀 갖지 못한
자의 양극화 현상, 돈을 버는 자와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자들의 양극화 현상이지요. 물론 권력
이 있고 돈을 버는 사람은 유럽 백인의 피를 가진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제가 양극화 현상을 강
조하다 보면 여러분은 너무 심한 과장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전혀 과장이 아닙니
다. 인종차별이나 양극화가 다른 나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다고 느낄 수 있는 우리나라의 현
실에서 이러한 것들을 아무리 말로 설명을 해보려 해도 현실을 느끼기에는 뭔가 부족한 면이 항
상 느껴집니다.
인종의 양극화 현상은 한 마디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였다는 점을 앞에서부터 강조해
오고 있습니다. 하기야 요즈음에는 동물 애호가가 많아 애완견이 인간보다 더 호의호식을 하는
경우도 많으니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좀 애매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아무튼 식민지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상하 신분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었습니다.
포토시와 같은 광산에서는 열두세 살의 어린이들에게도 지옥 같은 노동을 강요했습니
다. 일단 한 번 지하 갱도에 들어가면 시체가 되기 전에는 지하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지요.
캐낸 은을 건네주고 음식과 담배, 코카 잎을 받기 위해 광산 입구의 작은 쪽문이 하루에 한 번씩
열리는 것이 그들이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고리였습니다. 그들은 열일곱 여덟 살이 되어 진폐
병에 걸려 죽기까지 하나님과 스페인 왕의 영광을 위해 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라틴아메리카 전 지역에 걸쳐 많든 적든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일부 상류층을 위한 절
대 다수 민중의 희생이라는 표현을 식민지 시대의 중요한 특징으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강
조할 만하지 않습니까.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시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근간이 그 시
대에 다 만들었다고 하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즉 식민지시대에 만들어진 사회구조가 오늘날까
지도 대략의 변천을 거치기는 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비슷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야기한 징글징글한 인종차별과 신분차별은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사회구조의 근
간이요 그 이해의 시작입니다.

식민지시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우리는 ‘유럽인들의 부귀영화를 위한 극단적


인 이분화 현상’을 보았습니다. 즉 백인과 원주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부자와 가난뱅이, 권력
자와 무지랭이 등의 결코 만날 수 없는 엄청난 거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시스템이 만들어
져서 정착된 시기가 바로 300여년 간의 식민지 기간이었지요.
그런데 문화면에서는 재미나게도 그와는 조금 다른 현상도 일어납니다. 서로의 삶과
가치가 어우러지는 혼혈화의 특징을 보입니다. 역시 문화는 힘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
을 여기에서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스페인화 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스페인사람들이 원주민의 문화에 동화되어 가는 부분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아
닌 제3의 것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가톨릭도 원주민 전통 종교와 어우러져 새로운 라틴아메리카적인 가톨릭을 탄생시킵
니다. 원주민들의 종교관과 우주관에서 자주 등장하는 요소들이 식민지시대의 가톨릭전통과 융
합하면서 과달루페라고 불리는 원주민의 외모를 한 성녀도 탄생합니다. 성당의 장식을 위해서
그리고 신에 대한 경배와 기도의 한 방법으로 꽃을 바치는 행위도 원주민적인 종교전통에서 유
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원주민 전통 종교의 숭배대상에 가톨릭의 신을 대입 혹은 영입하
는 양상이 된 것입니다. 애당초 이곳 원주민들은 다양한 신을 숭배하였고 그러한 신중에 가톨릭
의 신을 그대로 하나 더 받아들인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스페인의 가톨릭 사제들은 혼
란스럽습니다. 이들이 믿고 있는 것이 가톨릭인지 아니면 전통 종교인지 혹은 이들이 믿고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로 개명을 한 퀘잘코아뜰Quetzalcoatl이라는 원
주민 신인지 갸우뚱해집니다.
예술의 분야도 예외는 아닙니다. 도자기의 경우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마요리까
Mayorica 도자기나 청화백자가 아메리카 대륙에 소개되면서 재현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딸라베라Talavera라는 원주민의 예술적 느낌이 강조되는 독특한 제3의 라틴아메리카 도자기가
탄생합니다.
종교적인 면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정서와 미적인 취향 등에서는 이분화 현상만을 보이
는 것이 아니라 조화 속에서 통합되기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것들 외에 다양한
생활과 문화 그리고 정서적인 면의 많은 것들이 만남과 동화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들이 만든 사회정치 구조는 이곳에서는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일부는 스페인
적인 것과 만나 동화되어 새로운 제3의 정체성을 탄생시키는가 하면 또 다른 하나의 맥락 속에
서는 원주민의 정서가 끈질기게 남아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라틴아메리카의 독특한 가치의 세
계를 이어갑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 문학과 종교, 예술, 철학 등을 이해하기 위해
서는 원주민의 정서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이번에는 식민지시대의 경제면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배경


적인 부분으로, 다시 한번 상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1492년의 사건이 바로
‘돈’ 때문에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시작에만 ‘돈’이 중심에 놓인 것이 아니고 그 과정도 마
찬가지고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들도 다 그놈의 ‘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밀접한 관계 정도가 아니고 바로 ‘돈’ 즉 경제적으로 내가 얼마나 부자가 될 수 있느
냐가 모든 원인이 된다고 봐야 합니다. 식민지 시대의 정치적인 면, 행정적인 면, 사회적인
면, 문화적인 면의 큰 주제에서부터 건축, 도시, 음악, 언어, 종교, 예술 등의 다양한 세부
테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이 ‘돈’ 벌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돈에 미쳐서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된 사람들에게 식민지 초기 항해 시대는
기대만 컸을 뿐 실질적으로 큰 이익을 주지 못합니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하여 1492년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꼴론Colon
́ 도 큰돈을 벌어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서 불행
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그리고 등장한 것이 엘도라도El Dorado를 찾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대륙에 대한 환상이 유럽 전역에 퍼지면서 일확천금을 꿈꾸고 신대륙에 건너오는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쿠바는 엘도라도 사냥꾼이 모이는 거점도시가 됩
니다. 그곳에서는 여러 가지 환상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퍼져나가게 됩니다. 아마존이
라고 불리는 여전사들이 온통 황금으로 만들어진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소문도 퍼져나갑니
다. 실제로 남미 아마존 밀림 일대에서는 오늘날까지도 빠이띠띠(Paititi)라고 부르는 황금
도시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당시의 쿠바는 황금을 찾은 사람들의 무용담
이 판을 치는 곳이었습니다. 야심에 찬 인간들의 탐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 었습니
다. 물론 그들의 허리에는 총과 칼이 항상 쩔렁거리고 있었지요.

볼리비아 남부 고원지방에 뽀또시Potosi라고 불리는 유명한 도시가 있습니다. 소금


호수로 잘 알려진 우유니Uyuni에서도 그렇게 멀지 않은 곳입니다. 평균 해발 고도가 4,000
미터인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1545년 스페인사람들
에 의하여 은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 이곳에 인구가 집중되고 도시가 세워져서 식민
지 기간동안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가 됩니다. 산속에서 나는 덜거덕
거리는 소리 때문에 '폭발하다'라는 뜻의 케추아 인디언어인 ‘뽀또흐치Potocsi’에서 도시의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알려집니다. 그 소리는 다양한 광물질이 풍부한 이곳 땅의 현상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650년경 한때 인구가 16만 명에 달했을 정도로 식민지시대 폭발적
인 개발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남미 대륙에 포토시가 있었다고 한다면 북미 대륙에는 사까떼까스(Zacatecas)가
있습니다. 멕시코 중북부에 위치한 이곳 역시 해발고도가 2,500여미터에 이르는 고원지역
입니다. 스페인 식민지 초기인 1548년에 도시가 형성되었으나 이후 은이 발견됨과 동시에
1585년경 대단위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광산들이 개발되게 됩니다. 엘도라도를 찾는 사람들의 집요함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황금에 대한 욕
망은 어느정도 현실이 됩니다. 실제로 엘도라도의 황금 방석에 앉은 셈이기도 합니다. 그리
고 스페인이라고 하는 나라를 부유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귀영화는 일장춘몽에 불
과하게 됩니다. 식민지 초기 개척과정에서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황금을 약탈했지만 욕심
은 끝이 없었고, 포토시나 사까떼까스 같은 곳에서 생산되는 은의 상당량은 대서양을 건너
가는 과정에서 해적들에게 약탈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스페인에 무사히 도착한 금과 은조차
도 스페인 부자들의 허영과 사치에 탕진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항해와 식민지 건설 등에 필
요한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 다음과 같은 표현이 당시 스페인의 경제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경제는 이빨 사이에 낀 찌꺼기에 불과하다.

입에서 느껴지는 달콤함에 잠시 즐거웠을 뿐 모든 영양분은 뱃속(유럽의 다른 국


가)으로 넘어가고 남은 것은 달콤함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결국 이후 무적함대의
굴욕 그리고 스페인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차지한 스페인은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린 것이 됩니다. 별 볼일
없던 유럽의 국가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주역이 되는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그중에서도 아메리카 대륙은 그들의 이상 실현의 중심이 됩
니다. 부푼 희망에 차고 이곳의 정치와 행정, 경제와 사회 제도를 만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꼰세호 데 라스 인디아스Consejo de las Indias 라는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의 행정을 총
담당하는 관청이 1523에 세워집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경제 분야에서 까사 데
꼰뜨라따씨온Casa de Contratación이라는 무역을 총괄하는 일종의 세관과 같은 곳이 그보
다 앞서 1503년 만들어집니다. 또한 아우디엔시아Audiencia라고 불리는 행정과 사법 기관,
그리고 오이도르(Oidor)라는 ‘듣는다’는 뜻을 가진 일종의 감찰 기관까지, 본격적인 중앙 집
중적 식민지지배 정책을 펼칩니다.

식민지 통치기구

꼰세호 데 라스 인디아스(Consejo de las Indias) - 행정


까사 데 꼰뜨라따씨온(Casa de ontratación) - 무역
아우디엔시아(Audiencia) - 사법
오이도르(Oidor) - 감찰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기관의 설립은 결국 경제적인 수탈에 중점이 맞춰집니다.


그런데 아메리카 대륙은 정복하였으나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만한 황금은 모자
랐고 탐험과 정복에 필요한 경비 등으로 인하여 제정은 어려워져갑니다. 식민지 건설 계획
에 일확천금을 꿈꾸며 참여하였던 사람들의 불만은 쌓이게 되죠. 결국 스페인 정부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정복한 땅을 정복자들에게 나눠주게 됩니다. 엄청나게 넓은 땅을 식민지의
귀족 한 명 혹은 한 가족이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남한 면적에 버금가는 땅을 한 명이
소유하게 될 정도입니다. 이러한 토지제도는 외형적으로는 스페인 국왕의 땅을 위탁경영한
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뜻을 가진 단어에서 기원한 엔꼬미엔다Encomienda제도라고 말합니
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정복자들의 끝없는 욕망과 스페인 정부의 통제와 관리라는 상반된 욕
망의 대립으로 인하여 오래가지 못하고 폐지됩니다. 그러나 이름이나 제도의 형식적인 면은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땅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
자로서 넓은 땅을 소유하면서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큰 수익을 올리게 됩니다. 이때
부터 정착한 대농장을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아씨엔다(봉건적인 대농장)Hacienda라고 부릅
니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주요 관광지에 가면 이 아씨엔다라는 이름의 호텔이나 고급
음식점이 많습니다. 식민지 시대 아씨엔다의 성이나 저택 등이 그대로 남은 것도 있고 이를
복원 개조하여 관광 상품화한 것들입니다. 당연히 그 지역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이 살았던
호화 저택이고 제일 좋은 곳에 훌륭하게 지어진 건물들이다 보니 화려한 당시의 모습을 그
대로 간직한 경우가 많습니다.
한편 이러한 엔꼬미엔다나 아씨엔다를 소유한 지역 호족을 가리켜 까우딜요
(Caudillo)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지역의 가장 강력한 정치, 경제, 사
회, 문화적인 기득권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 주요 가문의 전통은 오
늘날까지도 남아있어 이들의 영향력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현재까지도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경제적 중요 변수가 됩니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무역을 스페인이 독점하기에 이르는데(브라질의 경우에는 포르


투갈) 스페인 본국에서 수출하는 품목을 식민지에서 생산하는 것을 금지시킵니다. 그 이유
는 간단하죠. 스페인 정부에서 독점적으로 고가에 판매하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스페인도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수입한 물건을 아메리카 대륙에 수출하는 형태가 많다 보니 앞에서
이야기한 “잠시의 달콤함과 이빨 사이에 낀 찌꺼기”처럼 스페인의 수익은 그야말로 찌꺼기
정도의 수준밖에는 안 됩니다. 무역에서 큰 이익을 거두지 못합니다. 한편 금과 은 같은 아
메리카 대륙에서 생산한 광물들이 스페인에서 수입한 물건들의 지불 비용이나 세금의 형태
로 기타 유럽 국가로 유입되게 됩니다. 그 결과로서 유럽은 무역과 상업의 폭발적인 발달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의 중심이 되었던 대서양의 교역 물품들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교역 물품
스페인 수출품: 포도주, 알코올, 양말, 레이스, 모자, 외투, 금속 제품, 강철, 철물, 칼 등

아메리카 대륙 수출품: 금, 은, 동, 귀금속류, 진주, 염료, 설탕, 카카오, 담배, 과일, 고급


목재, 피혁 등

교역의 양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기에 이릅니다.

1500~1510: 왕복 항해 226차례
1511~1515: 왕복 항해 279차례, 교역량 2만 톤
1591~1595: 왕복 항해 920차례
1596~1600: 왕복 항해 943차례
1606~1610: 교역량 27만 5천 톤

찌질하던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생겨난 변화는 단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변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유럽 전체는 아메리카 대륙에 팔 물건들을 만들어 수
익을 올리는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새로운 상인 계층이 생겨나고 공업이 발달을 하게 됩니
다. 이에 따른 사회 구조의 변화와 정치적인 이해관계도 변하게 되는 등 실로 근원적인 변
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조금 비약적으로 예를 들어 본다면, ... 프랑스 시민혁명의 원인 역시
–큰 의미에서 본다면- 대항해시대에 살펴본 무역의 결과라는 말이 가능하겠지요. 무역을 통
한 상업자본의 확충과 부르주아의 탄생 그리고 전통적인 신분제도를 타파하는 시민의식의
성장이 유럽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켰으니 말이죠.

유럽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입니다. 큰 흐름에서 보면 종교개혁도 이런 측면에


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봉건을 상징하는 중세적 종교 권위를 떨쳐버리는 새로운 종교관을
찾게 됩니다. 신교는 교황이 인정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기득권을 무시할 수 있는 대안이
되기도 합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가치에 어울리는 종교의 탄생은 필연입니다. 좀 더 자
유분방한 종교를 원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전까지만 해도 성경책은 라틴어로 되어 있어 공부를 많이 한 사제들만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일반 평민들은 읽을 수도 없었고 읽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지요. 읽으려는 시도
자체가 불경이요 이단이 되는 것이었지요. 마녀사냥과 화형식이 이들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돈 많이 번 평민들에게는 상류 지도층으로 여겨지던 사제의 권위까지도 이제 별 볼
일 없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온 것이 “내가 성경책을 읽으면 왜 안 되는 거니?”,
“나도 읽을 수 있게 번역 좀 해주라.” 역사책에서 많이 들어오던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경책
의 번역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이러한 맥락과도 연결됩니다. 중세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세계
관 종교관이 신분 질서의 파괴와 함께 심각한 도전을 맞아 변화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리
고 등장하는 것이 성공회나 신교 등이 되겠습니다.

스페인은 신대륙을 발견함으로써 최초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발돋움합니다. 그


러나 세계의 주도권을 오래 이어가지 못합니다. 발전과 영광은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
유럽 국가에 돌아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식민지인 아메리카 대륙의 경제와 사회가 독자성을
가지고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느냐 하면 그렇게 되지도 않았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 자
체적인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정치, 경제, 사상,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유럽에 의존하는
구조를 면치 못합니다.
산업 면에서도 아메리카 대륙 스스로를 위한 농업, 산업이 아니라 유럽에 수출할
작물을 한 지역에서 대단위로 경작하는 모노꿀띠보Monocultivo의 형태가 발전함으로써 기
형적이고 종속적인 경제구조의 한계를 키워갑니다.
행정적인 면에서는 식민지 본국과 아메리카 대륙을 이어주는 유기적인 관리체계가
만들어지지 못합니다. 스페인 왕의 직속 부왕청이 아메리카 대륙에 세워지게 되는데 그 또
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아메리카 대륙 스페인 부왕청 건립연도


*1535년 누에바 에스빠냐(Nuva España) 부왕청 – 현 멕시코 멕시코시티
*1543년 페루(Perú) 부왕청 – 현 페루 리마
*1739년 누에바 그라나다(Nueva Granada) 부왕청 – 현 콜롬비아 보고타
*1776년 리오 데 라 쁠라따(Rio de la Plata) 부왕청 – 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18세기 중반이 되도록 북미 전체를 멕시코 부왕청이, 그리고 남미 전체는 페루 부


왕청이 담당하였습니다. 그 큰 땅덩어리를 단 두 곳의 부왕청에서 온전히 관리하기 힘들었
습니다. 여기에 관료적인 경직성 또한 한몫하지요. 유럽을 오고 가는 사람과 물자를 철저히
관리 감독해야 한다는 정책은 무역의 활성화에 악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유럽에 신교가 생
겨나면서 신교를 믿는 사람들의 입국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가 하면 무역에서도 경제
성과 효율성보다도 종교적으로 불경스러운 물건들이 유통되는 것을 막는 것이 중요 관심사
가 됩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으려는 다른 유럽 국가의 스파이가 맹활약
을 하기도 합니다. 부패한 관료들은 이를 효과적으로 막지도 못했지요. 토마스 게이지
Thomas Gage같은 영국사람은 몰래 쿠바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가서 여행을 하며
보고서를 남기기도 합니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이러한 저술이 역사적으로는 아주 귀
한 자료가 돼서 좋기는 합니다만 당시의 스페인 처지에서는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지요.
결과적으로 본다면 실효성도 없는 명분에 집착하여 정작 중요한 경제적 실익조차 못 챙기게
된 꼴입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가 동양으로, 아프리카로, 등등, 세계로 뻗어나가며 다양한 무역을
통해 새로운 상업시대를 열고 있을 때 스페인은 구시대적인 왕권의 권위를 온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답보한 것이지요. 또한 스페인 정부는 유럽 최고의 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다양
한 국제적인 문제에 간섭을 합니다. 심지어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제정 상황을 악화시킵니
다. 전 세계에 걸쳐 가장 기름진 식민지를 거느린 세계 최고의 국가라는 위상에 맞는 화려
한 생활과 사치는 덤이었고 말입니다. 그 결과는 혹독했습니다. 잘 나가던 스페인이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망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바꾸어 보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스페인의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책이 없음을 간파한 까를로스 3세는 대서양 무역 활성화, 아
메리카 대륙의 무역항 확대를 골짜로 하는 중상주의 카드를 꺼내 들게 됩니
다.(1716~1759) 이건 마치 조선 말기 개항의 요구가 빗발쳤던 우리나라의 상황과 유사합
니다. 위정척사파와 개화파의 입장이 맞붙었습니다. 즉 국가적인 정체성과 기존의 체제를
지키려는 측과 문호를 개방하고 세계 경제의 흐름에 편승해야 한다는 입장이 갈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이 아메리카 대륙에도 나타난 것이고 까를로스 3세는 여기에서 국가
의 정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과감하게 보호무역을 축소하고 개항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부르봉의 개혁Reformismo Borbónico’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스페인의 까디스Cadiz
́ 와 베네수엘라의 까르따헤나Cartagena, 멕시코의 베라끄루스
Veracruz, 쿠바의 아바나Habana, 파나마의 뽀르또 벨요Porto Bello에만 집중되었던 제한
무역을 풀고 많은 항구에서 자유무역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미 분위기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그 정도로 바뀔 수 있는 상
황도 아니었습니다.
군사적인 주도권을 잃게 됨으로써 다른 방도조차 의미 없게 됩니다. 1588년 무적
함대(Armada Invencible)의 패배라는 상징적인 사건을 기점으로 해상 군사력 면에서 주도
권을 빼앗기게 된 스페인은 군사적으로 식민지를 지켜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뭔들 소용
이 있겠습니까. 아메리카 대륙의 다양한 도시와 지역들이 점차 유럽 열강의 실질적인 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스페인은 이를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 아메리카 대륙
에서 영어와 프랑스어 등을 쓰는 지역이 존재하는데 바로 이러한 곳이 다 지금 설명하고 있
는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지요. 영국의 약진과 미국의 탄생도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결국에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의 몰락으로 이어집니다. 스페인의 예술과 문
화에서 ‘98세대’라고 칭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참패한 스페
인이 쿠바와 필리핀 등을 빼앗기고 최종적으로 세계 패권을 완전히 상실한 암울함을 담고
있는 시기입니다. 1492년에 시작된 반짝이는 황금빛 영광은 식민지 경영의 실패라는 회한
을 남기고 그렇게 1898년에 끝이 납니다.
제9장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중요 연대
1776년 미국 독립
1780년 뚜빡 아마루 혁명 발발
1808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1804년 아이티(Haiti) 독립
1810년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지역에서 독립운동 시작

우리는 앞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성립 과정을 1492년 사건의 연장선에서 이해해 보았


습니다. 1492년의 불평등이 식민지화 과정에서 고착되어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에 지대한 영
향을 주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지요. 이때 형성된 현상들이 어떠한 특징들을 가지는지도 살
펴보았습니다. 1492년의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사회의 극단적 이분화 현상이 어떤 이유
로 만들어졌으며, 그 불평등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강조해 보았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형성되어 고착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독립이라고 하
는 사건을 거치며 어떻게 면면히 이어졌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라틴아메리
카가 독립이라는 과정과 19세기의 격동기를 거치며 그 친일파의 뿌리를 어떻게 계속 이어
갔는지를 보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뚱딴지같이 친일이라는 말을 꺼냈습니다. 그 이유
는 간단합니다. 일본 식민지 세력이 물러가고 우리나라가 독립했지만 친일 세력이 청산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역시 이와 유사하게 식민지시대
의 친유럽파들이 지금까지도 기득권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은 이러한 역사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
다는 말인가요? 1492년에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까지 바뀐 게 없다고 한다면 과연 독립이라
고 하는 사건이 가질 수 있는 의미가 도대체 뭐가 있기나 한가요? ... 맞습니다. “그까짓 독
립이라는게 뭐 별로 의미 없다”. 이게 바로 이번 장에서 이야기하려는 핵심적인 내용이 됩
니다.
즉 외형적으로 지배계층이 바뀌는 정도의 변화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 평민,
원주민에게는 거의 의미 없는 사건입니다. 상류층은 바뀌었으니, 지배층이 스페인에서 프랑
스 사람과 같은 유럽사람들로 혹은 아메리카 토착의 유럽 추종 세력으로 바뀌는 변화가 있
었으니 독립이라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와 이
해관계를 같이 하는 일부 상류층이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냥 고통의 연장선상으로 노예
의 주인이 바뀐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이 전 주인보다 더 혹독한 노동을 강요한 사건
이 바로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이 됩니다. 굳이 이것을 우리나라와 비교하자면 친일파 앞잡이
들이 광복 이후에도 독립운동가와 민초를 일제 강점기보다 더 악랄하게 탄압한 것과 비교될
것입니다.
앞에서 식민지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미 뻬닌술라르와 끄리올요라는 개념
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간단하게 다시 정리하면, 뻬닌술라르: 스페인에서 태어난 스페인
사람. 끄리올요: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스페인사람.
이 둘 중에 독립을 이끈 중심 주체는 스페인사람들의 후손인 끄리올요입니다. 이들
은 스페인 사람들을 물리친 장본인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외세의 도움도 많았지만 말입
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끄리올요들은 순수한 토착 세력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유럽의 것을 완전히 물리치는 독립 자체가 이론적으로나 혹은 실질적으로나 불가능합
니다. 즉, 혼혈의 문제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개별적으로 독립된 인종, 사회, 문
화, 종교 등이 존재하여 독립을 통해 스페인이 완전히 물러가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
지요. 백인의 피와 원주민의 피를 반반씩 가진 혼혈인의 경우, 피를 뽑아 백인의 피와 원주
민의 피를 나누어서 반은 다시 스페인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 반은 아메리카 대륙에 그대로
남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입니다.
따라서 의미를 한껏 축소해서 말한다면,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이라는 사건은 정치 주
체만이 스페인사람에서 스페인사람의 후손인 끄리올요로 바뀐 사건입니다. 완전히 물러간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부만 돌아갔을 뿐 그들의 잔재는 라틴아메리카의 뼛속 깊숙이. 피
속 깊숙이 뗄 수 없는 상태로 그대로 남아있는 겁니다. 여기에 라틴아메리카 문제의 복잡성
과 난해함이 존재합니다. 21세기 오늘날의 치열한 라틴아메리카의 문제 말입니다.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상황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한 좋은 예가 미국의 독립입니다. 미
국의 독립을 누가 이끌었지요? 우리가 선진국의 역사는 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소위 교양이 좀 있는 사람들은 -그게 진짜 교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보스턴 차 사건’ 뭐
이런 이야기를 좀 들어봤을 겁니다. 그 보스턴 차 사건을 누가 일으켰지요? 아메리카 대륙
의 영국식민지에 살고 있었던 영국사람들입니다. 아메리카 식민지 지역에 살고 있던 영국사
람들(이후 이들이 미국 사람들이 됩니다)이 “우리에게 세금만 많이 걷어가고 나쁜 짓만 해
대는 영국 놈들 물러가라”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제 독립할 거야.”라
고 선포한 사건이 미국 독립의 본질이요 발단입니다. 그 시발점이 바로 보스턴 차 사건입니
까. 그러니 미국의 독립이라고 하는, 혹은 보스턴 차 사건이라는 에피소드의 주역은 아메리
카 대륙에 살고 있는 영국사람들인 것이고, 거기에 아메리카 대륙에 원래 살고 있던 원주민
이나 미국에 끌려와 노예 생활을 하는 흑인들은 거의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제가 왜 라틴아메리카국가들의 독립을 이야기하면서 미국 독립 이야
기를 하는지 느낌이 오시나요? 미국의 독립이나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이 똑같은 원리를 가지
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에서 원래 살고 있었던 원주민이나 흑인들, 다
시 말해 가장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하층민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라
틴아메리카 독립 최대의 주체와 객체는 역시 스페인사람 그리고 스페인사람의 후예들입니
다. 즉 독립은 유럽의 백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그들만의 리그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생각해보면 아메리카 대륙의 대다수 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원주민과
혼혈인들에게 이 독립이라는게 그야말로 ‘개 뿔’입니다. 즉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겁니다.
자 이러 저러하니,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은 “스페인 사람들의 후손으로 라틴아메리카
에서 나고 자란 끄리올요와 스페인 본국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에 따른 정치 주체의
변화.” 뭐 이 정도로 정리됩니다.
독립의 성격은 당연히 보수적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원
주민들이나 다른 민중이 배제된 상태에서 단지 엘리트만의 놀이였습니다. 상류 기득권층 간
의 갈등과 이에 따른 변화가 독립의 실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독립은 보수적이다’라는 말
이 설득력을 가집니다. 대다수 민중은 독립 이전이나 이후나 변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19
세기 중,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민중들의 삶은 더욱더 피폐해집니다.
오늘날과 같은 라틴아메리카 각 국가의 영토 분할도 이때 각 끄리올요들의 이해관
계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독립 이후 극도의 정치 혼란도 각 끄리올요들의 이해관계의 차이
에 따른 정치 투쟁입니다.
한 지역의 실권을 가진 ‘지역 호족’이라는 의미의 ‘까우딜요Caudillo’는 스페인이 물
러간 자리에 정치적인 실권을 행사하게 된 끄리올요에 붙여진 호칭입니다. 모든 끄리올요가
다 까우딜요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지역의 경제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일부
를 가리킵니다.
이들의 권력관계에 따라 한 나라가 되거나 여러 나라로 갈라지기도 합니다. 원래 북
미 대부분의 지역과 브라질을 제외한 남미 전역은 스페인 식민지라는 통일된 정체성을 가졌
습니다. 그런데 이제 독립적인 국가가 만들어지면서 중북미 지역이 멕시코, 과테말라, 온두
라스,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등의 다양한 나라로 나뉩니다. 남미에서도 다양한
나라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남미의 경우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콜롬비아, 파나마, 페루,
브라질, 가이아나, 코스타리카 영토의 전체 혹은 일부가 그란 꼴롬비아Gran Colombia라는
이름의 한나라였는데 그러한 정체성을 그들의 국기 색깔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독립 이
후 라틴아메리카는 까우딜요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할됩니다.

그림 10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4813123

민중들은 이러한 일련의 역사 과정에서 대부분 배제되었지요. 절대 권력을 가진 스


페인 국왕이 독립이라는 과정을 통해 물러나자, 달리 정치 경험이 없었던 라틴아메리카 지
도층은 권력 투쟁의 과정을 치열하게 겪게 됩니다. 이러한 혼란에서 누가 더 빨리 벗어나느
냐가 국가 발전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즉, 식민지 잔재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
에서 기득권의 향방이 라틴아메리카의 독립과 그 이후의 정치와 경제, 사회에 걸친 역사의
주요 쟁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의 이해를 전제로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과정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배경’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할 말이 참 많아져요. 80세가 훌쩍
넘으신 저의 어머니와 대화를 하다 보면 “내가 오늘날 발톱이 이렇게 못생겨진 이유가 ...”
라는 말을 시작으로 시집오셔서 버선 신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 아픈 버선을 벗을 수
없었던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거쳐, 결국은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대략 1절이 끝이 납니
다.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돌리지 않으면 이어서 바로 2절이 시작되지요. 그런 이야기를 듣
다 보면 어떤 하나의 현상이나 결과물이 생기기까지 그 원인이라는 것이 참 멀기도 하고 복
잡하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이라는 주제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역사이자 넋두리입니다. 시간적인 면만을 보더라도
1492년을 기점으로 하는 300년 이상의 식민지화 과정이고 그 이후의 식민지를 극복하자고
하는 독립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뭔 이야기를 간단하게 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는 것
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간단히 정리하라면 그렇게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간
단한 정리가 얼마나 허망할 수 있는지를 일단 언급하고, 소위 밑밥을 깔고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그야말로 초간단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배경과 원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초간단 정리를 하자면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겠지
요. 그렇다면 저는 자신 있게 ‘돈’을 꼽겠습니다. 제일 먼저 ‘돈’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
이 현실입니다.
이미 앞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살펴보았듯이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의 만남 그리고
정복의 과정이 다 경제적인 문제, 즉 돈, 부르조아, 상업자본 ... 뭐 이런 것과 실질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구조는 간단합니다. 19세기, 소위 식민지개척, 온 세상이 너 나 할 것
없이 잘 살기 위해 식민지를 가지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때에 식민지를 온전히 관리하지 못
하고 독립을 시킬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스페인의 경제적 몰락입니다. 그 배경을 간단히 보
면 다음과 같습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 정복 이후 돈을 엄청나게 벌었다. ⇨


금과 은도 많이 얻게 되었다. ⇨
그런데 그걸 잘 지키지 못했다. ⇨
다른 나라 좋은 일만 시켰다. ⇨
해적들도 많이 빼앗아 갔고 유럽 다른 나라의 산업 발전과 비교해 스페인은 산업을 발
전시키지 못하고 흥청망청 소비만 했다. ⇨
결국 폭삭 망했다.

위에서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현실 인식은 빈약합니다. 내가 세계 최강국이라는 자


존심과 명분만 중시하며 유럽의 정치와 사회에 깊게 개입하여 전쟁 등으로 재정은 더욱 피
폐해집니다. 그리고 나폴레옹과의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에 대한 착취가 더욱
심해지지요. 결국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해 보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무역의 활성화, 부
왕청의 다각화를 골자로 하는 행정제도의 개편 등을 포함한 소위 부르봉의 개혁이라고 부르
는 경제 개혁조치가 1700년대 중후반을 거치며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해는 기울고
있었고 300년간의 구조적인 습성은 하루아침에 고쳐지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이라고 하는 사건의 가장 큰 원인 하나만을 고른다고
한다면 역시 경제문제, 즉 돈입니다.
아메리카와 유럽의 만남의 원인이 돈이고, 이후의 식민지 지배의 원리와 과정도 돈
이고, 스페인의 몰락과 라틴아메리카국가들의 독립이라고 하는 사건도 돈인 것입니다. 오늘
날 모든 것이 돈인 것처럼 그 맥락이 연연히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대륙 독립은 옆 동네의 영향도 많이 받습니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분


위기가 한몫을 합니다. 미국은 일찍이 1775년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해서 1783년에 이르러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이미 앞에서 미국의 독립과 라틴아메리카 독
립의 배경이나 성격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니 미국이라는 나라가
본국의 간섭이나 수탈 등에서 벗어나서 이제 자유롭게 사는 모습을 본, 주변국가에서는 “우
리도 저렇게 하면 좋겠네”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마련이지요.
마침 1804년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아이티Haiti도 프랑스의 간섭에서부터 벗어
나 독립을 하게 됩니다. 원래 처음에 한 명이 하면 조심스럽게 관망을 하게 되는데, 이제
아이티 역시 독립을 이루는 모습을 보고나니 “아 ~ 이게 대세구나, 우리도 할 수 있겠다”
라고 하는 자신감이 폭발하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주변의 분위기는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
에게 독립에 대한 자각을 싹트게 합니다.
사상적으로도 이 시기를 즈음하여 소위 ‘계몽주의’라고 하는 것이 널리 퍼집니다.
근데 그게 무슨 연관이 있냐 하면 계몽주의의 정의를 보면 이해가 됩니다. 다음과 같은 문
구가 나옵니다: “틀의 변화, 방식의 변화, 생각의 변화 나아가 고정관념의 탈피를 통한 인간
진화를 목표로 ...”(위키백과, 계몽주의) 즉 기존의 체계나 생각들을 벗어던질 수 있다는 것
이고 이러한 상황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사회신분제 등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만
듭니다. 즉 “내가 꼭 왕에게 복종해야 하나?”라는 이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할 발칙한 생
각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내가 왕보다 못난 게 뭔데?”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사람들도 기존의 왕의 권위, 피식민
지 국가의 권위에서 벗어나 우리끼리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란 파격적인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시대가 사건을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사건이 시대를 만들고 당시의 철학을 만드
는 것인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비슷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인
지가 성장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가능성이 만들어지는 열병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
다. 19세기는 라틴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볼 때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
술, 종교, 철학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생각과 형태와 행동, 악기와 그림 그리고 발명품 등
이 실험되던 변화의 시기였지요.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가 독립이라는 형태로 발현되어 다양한 정치적인 실험을 기꺼
이 받아들이는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건도 이러한 맥
락에서 시민정신의 발현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국왕과 귀족의 특권을 부정하고 만인의 평
등을 주장하는 프랑스의 분위기가 라틴아메리카에 살고 있었던 끄리올요들에게도 나타난 것
이지요. 그리고 그게 결국은 독립의 사상적 배경으로 발전합니다.
앞에서 끄리올요와 뻬닌술라르의 갈등이 독립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 점을 이미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인 신분 차별은 정치적인 문제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스페인 정부는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스페인에서 나고 자
라서 스페인 본국의 입장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식민지의 주요 관리가 되어
행정과 정치적인 결정을 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결국 아메리카 대륙 출신인 끄리올요는
고위직에 오르기가 힘들었습니다. 사실상 300여 년간에 걸친 전 식민지 기간 중 북미 대륙
을 대표하는 누에바 에스빠냐Nueva España 부왕청의 경우 61명의 부왕이 재임하였으나
그중에서 식민지 멕시코 출신 부왕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남미 지역도 사정은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 지역 부왕청에 부임한 70명의 부왕 중 단지 네 명만이 끄리올요 출신이었습니
다. 또한 602명의 총독, 지사, 왕실, 사법, 행정원의 의장 등 주요 요직 중 단지 열네 명만
이 끄리올요 출신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끄리올요 출신들의 불만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신분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우리나라 홍길동의 설움이 아닐 수 없습
니다. 그런 홍길동이 주요 관직에서까지 차별을 받는 상황입니다. 그런 길동이에게 좋은 명
분이 될만한 사건이 터집니다. 1799년 나폴레옹이 집권을 하고 1808년 스페인을 침공하기
에 이릅니다. 그 결과 스페인의 국왕 까를로스 4세(1788-1808)가 폐위되고 그의 아들인
페르난도 7세는 투옥되기에 이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공식적으로 본다면 스페인 식민
지 국가들이 충성을 할 대상이 모호해진 것입니다. 물론 이에 항거하여 “프랑스 물러가라!,
나폴레옹 물러가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스페인의 국왕과 그 체제에 대한 불만이 쌓일 대
로 쌓인 끄리올요 들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던 거지요. 오히려 이러한 기회를 틈타서
우리도 독립하겠다는 목소리를 높이게 됩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이 라
틴아메리카에 미친 영향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겠네요.

원래 나라가 망하려면, 기업이 망하려면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치면서 악순환이 이어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겨나기 시작하면 그에 따라 다양한 사회, 문화
종교적인 문제들이 같이 일어나게 되기도 하지요. 라틴아메리카의 종교는 지금까지도 변함
없이 가톨릭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 이르러 그 절대적 지위가 조금 위협
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가톨릭은 수백년의 역사를 거치며 라틴아메리카 문화와 사회 속에
깊숙이 자리 내려 이제는 정체성의 큰 부분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은 한 손에 칼, 한 손에 십자가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의 이름으로 잔인한 살육을 이 땅에서 자행하였습니다. 전체
적인 맥락을 보면 가톨릭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있어 침략자, 강탈자의 다른 이름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게 선악이 나뉘는 것만은 아니더군요.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종교적 박애와 사랑을 구현하려는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닙
니다. 식민지 초기 원주민에 대한 수탈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한 용기 있는 사제들도 있었습
니다.
바르똘로메 데 라스 까사스Bartolomé de las Casas(1484–1566) 같은 신부님은
원주민과 백인이 같이 평화롭게 살아보자는 이상을 구현해 보려 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의
오보에’라는 영화음악으로 더욱 잘 알려진 영화 ‘미션’에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제들의 모습
이 등장합니다. 순수한 종교적 헌신과 사랑으로 이곳에 복음을 전파하려던 사람들이 나옵니
다. 그러나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결국 주류 가톨릭은 식민지 지배라는 정치적인 열망 그리
고 돈에 대한 욕심과 결탁하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탐욕과 피로 얼룩진 라틴아메리카
식민지개척의 파수꾼이 됩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700년대 후반에 이르러 신앙의 본질을 지키려는 사제들이
경제, 정치적인 이유로 하여 추방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으로 식민지 억압 정치에 반대 입
장을 가진 예수회 신부들이 추방됩니다. 예수회는 신앙적인 면에서 근본주의적인 엄격함을
보이기는 하였지만, 어린아이・병자・죄수・창녀・군인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을 뿐만 아
니라 원주민들의 권익 보호를 위하여 큰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추방은 사회 저
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적으로 큰 상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19세기를 즈음하여 식
민사회의 인권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힘을 얻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 스페인
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그나마 원주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려던 세력마저 추방되거
나 약화되니 이제 더 이상 사회 내부의 불만을 대변해줄 소통 수단마저 없어지게 된 것입니
다.
마침내 현재의 베네수엘라지역에서 사제 활동을 하던 미란다Miranda신부는 라틴아
메리카 독립의 선구자로 최초의 독립 선언을 하기에 이릅니다. 즉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생
겨난 독립이라는 정치 사회적 분위기에 아메리카 대륙의 정신적인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종
교마저도 한 몫을 담당하게 된 것이지요.

앞에서 경제적인 어려움, 스페인에 대한 불만, 주변국가들의 독립, 나폴레옹의 스페


인 침공, 계몽사상의 확산, 종교적 환경의 변화, 독립에 대한 기대 등과 같은 독립의 배경들
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분위기가 무르익다 보니 독립운동이 안 일어나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이지요. 아메리카 대륙의 곳곳에서 식민 지배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나게 됩
니다. 1742~1761년 사이에는 아따후알빠Juan Santos Atahualpa가 지금의 페루지역에서
옛날 잉카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켜 주변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기
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란은 사회적으로 스페인에 대한 구체적인 저항의 토대를 마련
하게 됩니다. 1780~1781년 사이에는 뚜빡 아마루Túpac Amaru, 뚜빡 까따리Túpac
Katari의 반란이 일어납니다. 뚜빡 아마루의 반란은 규모가 더 커서 식민지시대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입니다.
이를 주도했던 뚜빡 아마루라고 하는 인물을 살펴보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
게 해주는 여러 가지 단서들이 나옵니다. 그는 1738년생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태어나
자란 시기가 이미 스페인이 쇠퇴하면서 여러 가지 행정적, 정치적인 한계상황을 보이는 18
세기 중 후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재미납니다. 식민지 초기인 16세기
정복 당시에 침략 세력에 맞서 싸운 뚜빡 아마루 1세의 이름을 따서 자신을 뚜빡 아마루 2
세로 스스로 명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사실 따지고 보면 정통 원주민출신이 아니라 혼혈인
으로서 페루 남부 틴타Tinta 지역의 비교적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한 배
경에 힘입어 당시의 유일한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의 예수회 수사에게 정식으로
교육도 받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사회적인 모순에 눈을 뜨면서 자신이 원주민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적인 불평등과 경제
적인 착취의 구조 속에 살아가는 당시 식민지사회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드디어 원주민들을 위해 분연히 일어납니다.
동학 농민들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압정으로 인하여, 그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봉기한 것처럼 뚜빡아마루는 코레히도르Corregidor라고 불리는 지방 행정관 안토니오 아리
아가Antonio Arriaga를 체포해 처형함으로써 혁명에 불을 붙입니다. 우리나라의 조병갑은
이때 잘 빠져나가 친일의 거두로서 동학군을 핍박하며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산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부러울 따름입니다. 하여간 이 반란은 처음에는 일부 끄리올요의 지지를 받
았고 페루 남부와 볼리비아, 그리고 아르헨티나까지 퍼져나갔습니다만 원주민과 유럽인 사
이의 격렬한 전투로 발전함에 따라 끄리올요의 지지를 잃게 되고 차차 원주민들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와 그의 가족은 1781년 3월 붙잡혀 쿠스코로 보내졌고 뚜빡 아
마루 2세는 사지가 찢기는 형별을 받아 죽게 됩니다. 결국 뚜빡 아마루 운동은 이후의 독립
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주기는 합니다만 그 자체로는 실패에 그치고 맙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독립을 달성한 나라는 카리브해에 있는 작은


나라인 아이티입니다. 1804년에 아이티가 흑인 지도자 투우산Toussaint Louverture의 지
도하에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독립 국가를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운동들이 다
승리한 것만은 아닙니다. 300여 년간의 스페인 지배구조는 어찌 되었건 견고한 전통을 유
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806년에는 현 베네수엘라지역에서 프란시스코 미란다Francisco
Miranda가 당시 이미 독립을 달성한 미국과 아이티의 도움을 받아 군사작전을 펼쳤으나 실
패하게 됩니다. 1809년 7월에는 볼리비아에서 스페인 총독을 폐위하고 자치 평의회를 건설
하였으며, 같은 연도 8월에는 현 에콰도르의 키토에서 자치 평의회를 구성했으나 이 또한
좌절로 끝납니다.
그러나 독립은 이미 아메리카 대륙의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됩니다. 1810년 5월
에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같은 해 7월에는 현
콜롬비아의 수도인 산타페 데 보고타에서도 독립운동이 시작됩니다. 역시 같은 해 9월에는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그리고 멕시코에서 역시 같은 해 9월 이달고Hidalgo 신부가 독립을
외치게 됩니다. 1810년이라는 해는 그래서 가히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이 바로 독립으로 연결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산발적인 전투와
정치적인 공방 등의 과정을 거쳐 10여 년 후인 1820년을 넘어서면서부터 구체적으로 독립
의 윤곽이 잡혀갑니다. 다만 그러한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시작된 해가 1810년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 해를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해로 삼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과정 중에서 멕시코의 독립운동은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성격


과 한계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독립운동의 시작 시기인 1810년에서부터 독립을 달성한
1821년까지 이 운동을 이끈 주요 인물이 시대순으로 다음과 같이 4명이 있습니다.

▶ 멕시코 독립의 계보:


이달고Hidalgo ⇨ 모렐로스Morelos ⇨ 게레로Guerrerro ⇨ 이뚜르비데Iturbide

이 인물들의 성격과 지향하는 바를 보다 보면 독립운동의 성격과 내용 그리고 그


이후에, 즉 독립을 달성한 이후의 멕시코의 변화가 보입니다. 첫 번째 인물이 미겔 이달고
라고 하는 신부님입니다. 이분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고 하면 저는 스페인 혹은 식민지배
철학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네요. 독립운동을 주창하였으나 사
실은 스페인이 물러나야 한다는 것 보다 스페인의 못된 탐관오리들이 물러나야 한다는 쪽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독립을 하더라도 스페인의 정체성 혹은 유럽의 정
체성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그게 사실 진정한 의미의 독립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
문을 자아냅니다. 이러한 점은 멕시코에만 잇었던 것은 아니고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운
동이 가진 일반적인 한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으로 언급할 인물이 모렐로스인데요, 이 인물은 이달고와는 반대의 성격을
가집니다. 원주민의 피를 가진 혼혈인으로 정치적으로는 왕정이 아닌 공화정의 형태를 주장
하여 삼권 분립을 외쳤습니다. 즉 정치적인 면에서 당시 유럽의 전통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
을 만들어 보자는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생각을 가졌습니다. 또한 경제적인 면에서도 토지
재분배를 주장하면서 빈부 격차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즉 그는 그냥 외
형적 정치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독립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에 이르는 국가 철
학을 변화시키려는 의도가 강했습니다. 여기에 가난한 자, 원주민들이 국가경영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는 등 사회 반란의 성격이 강합니다. 모렐로스의 주장은 원주민
들과 사회 하층민들에게 들불과 같이 퍼져나가게 되었지만 결국 그가 1815년 12월 22일에
붙잡혀 처형됩니다. 사실상 진정한 의미의 독립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 전반의 변화를 추
구하는 독립의 노선은 모렐로스의 죽음과 더불어 힘을 잃게 됩니다. 그렇지만 독립을 추구
하는 세력 가운데에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려는 사람도 있었다는 점은 독립운동의 성격과 내
용 그리고 추구하는 바가 다양하였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모렐로스에 이어 그다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렐로스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습니
다. 특히 최종적으로 독립을 완성하였다고 이야기하는 이뚜르비데는 독립 멕시코의 최초의
대통령이 아닌 최초의 황제가 됩니다. 즉 기존의 구시대적인 가치인 왕정의 한계를 벗어나
지 못했습니다. 진보적인 독립운동을 주장하였던 모렐로스를 탄압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는 기존의 유럽중심, 백인중심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독립을 외치며 주장
한 내용 또한 이러한 점을 잘 반영하고 있어서 스페인사람(뻬닌술라레스)과 끄리올요의 평
등을 내세우고 있는데 여기에 혼혈인이나 원주민들에 대한 고민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또한 기존의 세계관과 종교관을 대표하는 로마 가톨릭교의 우월권과 기타 종교의 금지를 주
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식민지시대에 만들어진 가치관을 독립이라는 과정을 거
쳐 멕시코라고 하는 국가에 그대로 이어가자는 것이지요. 내용적으로는 변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이어갔던 이뚜르비데가 독립을 완성하게 됨으로써 그의 생각은 결
국 이후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한계를 그대로 답습하게 된 것입니다. 또는 역으로 당시의 상
황이 식민지배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보다는 정치적으로 새로운 세력이 부상하는
정도로 최소한의 변화를 원했던 사람들이 만든 운동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은 민중이 배제된 상태에서 상부 기득권층의
변화였을 뿐이라고 점이 통렬합니다. 하긴, 역사적으로 민중들이 정권을 잡을 만한 여건이
아직 성숙되지도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멕시코의 독
립이 보수적이라는 점을 이달고 신부 봉기의 배경, 모렐로스의 실패, 이뚜르비데 같은 보수
적인 인물의 집권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지리적으로 나누면서 ‘중미America Central, Centroamérica’라고


하면 과테멜라Guatemala, 벨리스Belize, 온두라스Honduras, 엘살바도르El Salvador, 니카
라과Nicaragua, 코스타리카Costa Rica, 파나마Panama로 구성된 인구가 대략 사천오백만
정도의 지역을 가르칩니다. 식민지시대에는 아메리카 대륙 전체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
민지였고 그러한 식민지가 지금의 국경과는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중미 국가들도 다른 아메리카 지역과 유사하게 비슷한 배경과 과정을 거
쳐 1820년을 지나서면서 독립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부 국가는 20세기가 되어서 독립을
합니다. 지금의 벨리스라는 나라는 일부 지역이 영국 사람들에 의하여 불법으로 점유되었던
곳인데 원래는 과테말라의 영토입니다. 그런데 영국이 안 돌려주고 영국령으로 가지고 있다
가 1981년에 독립 국가가 됩니다. 과테말라 입장에서는 아직도 거기는 내 땅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파나마의 경우는 원래 남미 콜롬비아에 속해 있던 지역이었는데 이후 파나
마 운하의 이권과 관련하여 미국의 농간으로 분리 독립합니다.
독립의 과정에서 중미의 나라들이 모두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국경과 정체성을 가
지고 개별적인 독립을 이룬 것은 아닙니다. 중미 각 국가 간에 개별성과 독특함이 강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스페인 식민 지배로 인해 하나의 행정 체제 속에 상당히 오랜 기간 속해 있다
보니 독립과 더불어 하나의 국가였던 적도 있습니다. 1811년~1814년 엘살바도르 출신 끄
리올요 신부인 호세 마띠아스 델가도José Matias Delgado에 의하여 독립이 선포됩니다. 그
리고 멕시코 독립과 함께 중미 대표들이 모여 연합세력을 구축한 후 1821년 12월에는 중
미가 멕시코와 합병을 결의하기에 이릅니다. 이 시기에는 중미로서의 독자적인 정체성이 상
당히 미흡했을 때이다 보니 식민지 시대와 같이 전통적인 중심지였던 멕시코의 정체성에 편
입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후 멕시코와 중미연합 세력 간의 이견이 발생하면서 중미연방
이 멕시코에서 분리되어 독립합니다.
1821~1823년의 2년 동안 멕시코와 여러 중미 국가들은 모두 한나라였던 것입니
다. 그런데 멕시코에서 분리가 되면서 중미 국가들이 자체적으로 하나의 국가를 구성합니
다. 과테말라, 벨리스,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가 그 당시 중미 연합
República Federal de Centro América을 구성하는 국가가 됩니다. 연방 헌법을 공포하고
모라산(José Francisco Morazán)이 대통령에 선출됩니다. 그렇지만 각 지역의 이해관계와
갈등 그리고 정치적 부정, 무능 등으로 연맹의 존속이 어렵게 됩니다. 결국 중미연합은 하
나의 국가가 된 지 15년 만인 1838년 분리되어 오늘날과 유사한 지리적인 경계를 가지기
에 이릅니다.
앞에서 파나마라는 나라는 미국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20세기에 들어 콜롬비아에서
독립해 나갔다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콜롬비아 입장에서는 원래 그들 국토의 일부였던 지
역이 독립을 한다고 하니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겠지요. 이는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제주도
가 일본의 비호와 사주 아래 독립된 국가가 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파나마가 독립한 지 100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파나마는 우리땅이야.”라고 외
치는 콜롬비아 사람들도 많고요. 이러한 배경이 있다 보니 콜롬비아와 파나마 사이에 오늘
날까지도 미묘한 갈등이 남아 있습니다.
그 결과가 재미난 곳에까지 불똥이 튀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하는, 기네스
북에 오른 세계에서 가장 긴 도로인 판아메리카 도로가 있습니다. 북미의 최북단인 알래스
카Alaska 프루드호 베이Prudhoe Bay에서부터 남미의 최남단 아르헨티나의 우슈아이아
Ushuaia까지 연결됩니다. 그런데 길이 중간에 끊긴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이 두 나라
의 국경지역입니다.
이 지역을 영어로는 디리엔 갭Darién Gap 이라고 부르지만, 라틴아메리카 사람들
은 따뽄 데 다리엔Tapón del Darién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남미라는 병의 마개같이 생겼다
하여 뚜껑 혹은 꼭지라는 뜻의 따뽄Tapón이라는 말을 씁니다. 크기만 해도 거의 남한 면적
의 반 정도 됩니다. 말이 국경이지만 대부분의 지역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초소가 있거나
뭐 그런 게 있지도 않습니다. 이 근방 수십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이 사람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을 정도로 우거진 열대우림지역입니다. 우리가 떠 올릴 수 있는 최고의 열대
오지를 상상하면 됩니다. 판아메리카 도로를 온전히 육지로 지나기 위해서 시도하다 실종된
사람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란 공식적인 수식어도 존재합니
다.
이곳이 이렇게 방치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열대우림으로 지구상에 남아
있는 가장 극한의 오지라는 점을 제일 먼저 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 여러 게릴라 조
직이 활동하는 것도 개발이 힘든 이유 중의 하나가 됩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곳이 자
연의 상태로 그대로 남기를 바라는 환경주의도 역시 한몫을 합니다.
그렇지만 중장비를 이용한다면 산을 깎고 바다를 메우는 세상입니다. 두 나라가 마
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개발을 해서 판아메리카 도로를 이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이
곳이 이렇게 방치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두 나라의 오래된 역사적 앙금에서 시작된 갈등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콜롬비아의 입장에서 파나마의 독립은 미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땅을 빼앗아간 명백한 만행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이 100년을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것 같지는 않네요. 언젠가 우리가 판아메리카
도로를 통해서 아메리카 대륙 육로 종단이 가능할 수 있을지 기대해 봅니다.
그림 11 다리엔 뚜껑: 출처:
https://www.bbc.com/mundo/noticias-america-latina-414059
70

남미의 독립 역시 멕시코나 중미와 유사하며 당시에 가지고 있던 한계와 문제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남미의 독립을 이야기하자면 빠지지 않는 두 명의 걸출한 인물
이 있습니다. 독립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미란다Francisco de Miranda와 볼리바르Simon
Bolivar입니다. 미란다는 1750년생으로 식민지 시대 말기 군인으로 스페인 정부의 한계와
문제점 등을 통렬하게 보고 느꼈습니다. 또한 당시 막 독립을 쟁취한 미국에서의 생활을 통
해 독립된 국가의 이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미란다의 불순한 생각을 눈치챈 스페인 정
부의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도주를 합니다. 결국 독립이라는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결심을 굳히고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독립혁명을 진행하며 ‘독립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은 스페인에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는 볼리바르나 기타 남미의 많은 사람
에게 독립의 의지를 심어준 선구자의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간단히 살펴본 그의 인생의 여정에서도 당시 남미의 독립운동가들이 가진
생각의 한계 혹은 당시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의 한계가 보입니다. 외세의존과 백인에 의한
독립운동이라는 점이 그것입니다. 미국과 영국에게서 도움을 받아 독립을 이루겠다는 생각
은 당시로서는 합리적일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그 이후의 내정간섭 혹은 이해관계의 상충이
라는 그야말로 독립 이후의 독립적이지 못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문제를 전재합니다. 실제
이러한 중남미의 상황은 결국 독립 이후 1800년대 다양한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라
틴아메리카의 한계를 만듭니다.
남미 독립의 다른 영웅으로 볼리바르를 꼽습니다. 그는 남미의 독립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또한 오늘날에도 그의 생각은 막대한 영향을 미쳐서 베네
수엘라República Bolivariana de Venezuela 같은 나라는 2000년 이후 원래의 나라 이름을
고쳐 나라의 공식 명칭에 그의 이름을 집어넣을 정도입니다. 그가 이렇게 상징적인 인물이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자주적인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이를 위한 ‘남미의 협력 투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외세를 완전히 몰아내고 우
리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하자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남미가 분열되어
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하였지요.
그리하여 군사적인 승리를 통해 스페인 세력을 물리치고 1819년 콜롬비아를,
1821년에는 베네수엘라를, 그리고 1822년에는 에콰도르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세
나라를 통합한 대콜롬비아 공화국(Gran Colombia)을 수립합니다. 또한 1825년에는 볼리비
아 공화국을 만듭니다. 그는 남미가 한나라로 통일되어 영국이나 프랑스 혹은 미국과 같은
강력한 서구 열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미 국가
가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나라로 분열되는 상황을 막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안타까
운 상황을 비판하며 남미국가들이 지금과 같이 분열된다면 우리는 영원히 서양사람들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예언적 저주를 남기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왜 오늘날 남미국가들이 그를 다시 소환하고 있는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나라 이름을 ‘볼리바르의 베네수엘라 공화국’이라고 할
정도니 말입니다. 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날 중남미가 현재까지도 외세의 경제적인 침탈,
정치적인 간섭, 영향력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규정하고 시몬 볼리바르의 이상을
부활시켜 볼리바르가 추구했던 이상에 걸맞은 진정한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1
세기 제2의 독립운동을 주창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를 위하여 역시 볼리바르가 추구했던
이상인 국민들의 대동단결과 중남미 국가의 단합을 부르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서방 자본이나 미국과 같은 신제국주의적 망상을 가진 나라들의 압력에 굴하지 말아야 한다
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합니다. 볼리바르의 모습을 통해 21세기 국가의 방향으로 진보적인
대안을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 12 남미의 독
립영웅 Simon
Bolivar
제10장 19세기 라틴아메리카의 격동기

중요 연대
1845 ~ 1853년 멕시코 땅이던 미국 남부가 미국 영토가 됨
1857 ~ 후아레스(Juarez)가 최초의 원주민 출신 멕시코 대통령으로 취임
1862 ~ 1867년 프랑스와 보수주의자가 멕시코 집권
1877 ~ 1911년 포르필리오 디아스가 멕시코 독재
1879 ~ 1883년 페루+볼리비아 대 칠레의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 승리

19세기 라틴아메리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혼란’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과정에서 본 것처럼 끄리올요가 중심이 된 독립운동은 스페
인 군대를 축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회 전반에 걸쳐서는 유럽의 그늘을 온전히 벗
어나지 못했습니다. 행정 경험이 미숙한데다 정치면에서는 기존의 식민지체제가 사라진 이
후 다양한 세력들 간의 갈등이 갓 탄생한 국가들의 숙제로 남게 되었지요. 멕시코를 비롯한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두 부류가 생겨납니다. 유럽에서 새롭게 왕을
모셔 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왕당파가 보수적인 성향을 대변합니다. 그리고 왕이 아닌 헌법
에 따른 통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화파가 진보 진영의 태두가 됩니다. 이 이외에도
조금씩 다른 입장을 가진 정치세력까지 등장하면서 다양한 이해관계로 인한 정치 사회적 그
리고 군사적인 싸움이 계속되었지요. 특별한 정치 경험이 없었던 새로운 라틴아메리카 국가
들의 현실에 잘 어울리는 기발한 대안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대부분은 유럽의 체제를 중남미 국가의 정치 사회 모델에 적용하는 쪽으로 문제 해
결의 가닥이 잡힙니다. 당시 가장 앞선 체제를 갖고 있었던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델을 라틴아메리카에 이식할 수밖에 없었지요. 나름 안정적인 19세기를 만든 칠레와 같은
나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유럽의 모델을 적용
하는 과정에서 현지화시키거나 비판적인 논의를 통한 선별적인 수용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적용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멕시코는 프랑스의 모델을 적용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인물을 데리고 와서
멕시코 황제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후반부터 서구 유럽의 이민을 적극
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칠레는 영국 모델을 수용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의 가장 큰 문제
점은 답습이 갖는 한계입니다. 역사와 사회, 문화가 완전히 다른 라틴아메리카에 단지 선진
적이라는 이유로 유럽의 전통을 비판이나 변형 없이 받아들이는 건 애당초 문제투성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과 국경을 같이 하는 멕시코의 경우 이런 문제들 때문에 결국 국토의
반 이상을 빼앗기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서양 모델의 적용과 그에 따른 시행착오의 최대의 피해자는 역시 사회의 가
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일반 민중들입니다. 19세기 멕시코를 대표하는 독재자인 뽀르피리오
디아스 정권은 서양 모델을 적용하기 위한 이상적인 조건이 서양의 가치와 문화를 받아들이
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원주민들의 삶을 다시 한번 철저히 열등한 것, 가치 없는 것으
로 취급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19세기 말기가 되면서 서양의 문물뿐만 아니라 가치와 문화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분위기가 치열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한복보다는 양복이, 놋쇠보
다는 양은이, 서당보다는 학교가 더욱 주목을 받았고 종교와 철학, 예술 등과 같은 면에서
도 우리의 원래의 것 보다 서양의 것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라틴아메리카 역시 유사한 분
위기 속에서 서구의 것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전통의 것은 타파해야 할, 바
꾸어야 할, 나아가 열등한 구태가 된 것이지요.

라틴아메리카의 모순이 유럽인의 착취로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유럽인이 되돌아간


독립 이후의 시대에는 문제가 해결된 것 아닌가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쫓겨났으니 그들이
오기 이전의 정체성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아!! 여기서 큰 한숨 한 번 쉬고….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300여
년의 식민지 기간은 너무 길었습니다. 그동안 바뀐 것이 너무 많아 이제는 그 식민지가 라
틴아메리카의 본질이 되어 버려 유럽적인 것이 나간다는 의미와 원래의 것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혼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라틴아메리카 인구의 대다수가 혼혈이 되었다는 점
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미 혼혈이 되어 라틴아메리카화 된 인종과 문화 등을 정확하게 편
가르기를 해서 ‘이것은 유럽 것’, ‘저것은 라틴아메리카 것’이라고 딱지를 붙여 내보낼 것은
내보내고 남길 것은 남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겁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
났지만 그 잔재가 여러 면에 남아 꾸준히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라틴아메리카는 우리나라처럼 40여 년이 아니라 300여 년 동안 식민지로 있었습니다. 얼마
나 많은 영향이 있었는지 대략 상상이 가시지요.
오랜 식민지 기간을 통해 유럽 것도 아니고 원주민 것도 아닌 새로운 제 3의 세계가
창조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강간한 서양인 아버지와 강간당한 원주민 어머니 사이에
서 태어난 아이의 혼란과 갈등이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라틴아메리카를 아이에 비
유하고 있습니다. 침략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강간했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나 어
머니를 다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싫든 좋든 그 아이의 몸속에는 이미 두 개의 피가 분리할
수 없는 상태로 흐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강간한 인간이 나쁘다 해도 아버지를 증오하며 아
이의 본질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아이가 온전히 원주민이냐 하면 그것
도 아닙니다. 이미 섞여서 분리할 수 없어진 상태입니다. 누구를 미워하기도 참으로 모순된
상황입니다. 그렇게 라틴아메리카가 탄생했습니다. 처음 태생부터 참으로 많은 갈등 요소를
갖고 말입니다. 그것이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독립과 함께한 정체성, 문화의 탄생입니다.

멕시코 독립운동의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이뚜르비데Iturbide 인데


그는 독립전쟁을 마무리하고 1822년 5월 19일 스스로 멕시코의 황제에 오릅니다. 그러나
체 일년이 안되 1823년 3월 19일 하야하고, 1824년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그
이후의 멕시코 나아가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상황은 대부분 극심한 혼란기를 맞이합니다. 그
누구도 확실히 정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지리한 논쟁과 전쟁이 이어지는 시기라고 할 수 있
습니다. 심지어 멕시코의 경우 1821년부터 1860년에 이르는 40년 동안 50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데 그중 35번은 군사 쿠데타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멕시코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산타 안나(1794~1876)Antonio López Santa Anna, 입니다. 그는 이 혼란
의 와중에 9차례나 대통령을 한 사람으로 겉으로는 진보인 척했지만 사실 내용이나 지향점
은 철저한 보수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공화, 연방, 반 교회, 자유주의를 표방
하였으나 당시의 보수적인 성향을 그대로 이어가는 전제, 중앙 집권, 친 교회, 보수주의의
입장을 대변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지 않고 일정한 지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도 충직하게 속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지 명분이나 철학을 바꾸는 카멜레온 같은 속성에 있었던 것입니다. 철저히 기회주의적인
행태를 보였던 그는 당시 멕시코를 쥐락펴락하는 중요한 양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
와 보수 그리고 미국과 프랑스 세력사이를 오가면 자신의 정치적인 역량강화를 최우선 목표
로 삼았습니다. 당시의 혼란한 국제정세와 국내정치적인 상황 등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그
의 양다리 정책과 입장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중남미 국가들이 독립을
하기는 했지만 얼마나 그 독립이라는 것이 불완전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19세기 독립 이후의 라틴아메리카, 특히 그중에서도 멕시코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미국 이


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500년 이후 사실상 아메리카 대륙 전체는 당시의 국제법
이라 할 수 있는 규칙에 따른다면 모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땅입니다. 스페인 입장에서 굳
이 영토 분쟁을 하게 된다고 가정하면 미국도 캐나다도 원래 내 땅이니 내가 차지하겠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그러나 16~17세기를 거치며 성장한 유럽의 열강들은
식민지경영을 통한 국가와 개인의 부 창출이라는 열병과도 같은 황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는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의 각축장으로 만들고 말았지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미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하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미국은 영국의 끊
임없는 해적 행위의 결과로 탄생한 것입니다. 1670년 스페인과 영국이 맺은 마드리드 조약
에 의하여 영국 정부가 꼬르사리오(영국의 해적)Corsario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는 조건으로
북미의 주권을 인정받은 것이 미국이라는 국가 탄생의 계기가 됩니다. 북미지역에 진출한
프랑스 역시 이 지역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러한 상황이 미국과 프랑스의 필연적인 갈등으로
연결되었고 결국 1757~1763년간의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고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영국이 입지를 공고히 하게 됩니다. 이후 미국이라는 나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고
이렇게 북미 지역에서 군사적인 힘으로 패권을 장악한 미국은 이후 라틴아메리카 정치와 경
제, 사회, 문화에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됩니다.
미국은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를 자신의 세계 패권 장악의 시발점이라고 생
각했습니다. 멕시코 영토의 찬탈이 첫 작품이 됩니다. 1847년 미국은 멕시코를 침공합니다.
외형적으로는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근처의 분쟁이 원인이었다고 하지만 미국의 영토 확장
주의가 전쟁의 핵심입니다.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말이 전쟁이지 어린아이와 어른의 싸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일방적인 멕시코 구타에 가까운 것이었지요. 미국이 멕시코 최
고의 항구인 베라크루스Veracruz에 상륙하고 여기를 거쳐 멕시코 수도를 손쉽게 점령합니
다. 어린 영웅들Los niños heroes이라 불리는 사관생도들이 미국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
사하였고 이들이 우리나라로 하자면 유관순 열사와 비슷한 정도로 멕시코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멕시코는 속수무책으로 수도를 내주고 대통령은 도망을 쳤
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그렇게 도망간 대통령을 살려주겠다고 회유하여 1848년에 ‘과달루뻬
-이달고Guadalupe-Hidalgo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 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멕시코는
1,500만 달러를 받고 텍사스, 애리조나, 뉴멕시코, 유타, 콜로라도, 네바다, 캘리포니아를 인
도하게 되는데 이때 멕시코가 미국에 인도한 영토의 규모가 2,200,000㎢ 에 달하는데 이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지금 현재의 미국의 영토가 9,372,614㎢.이고 멕시코 현 영토
가 1,958,201㎢입니다. 대강 어느정도 인지 느낌이 오나요? 이때 멕시코는 영토의 반 이상
을 빼았긴 것이고 미국은 반대로 지금 현재 영토의 1/4을 이때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상황
이 이렇고 보니 이것을 과연 정당한 조약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야겠지요.
이를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교해 본다면 대한민국이 일본의 위협 속에서 체결할 수 밖에 없
었던 을사늑약과 비교될 것입니다. 공식적으로야 멕시코가 미국에 판 것이지만 미국이 멕시
코의 수도를 점령한 상태에서 맺어진 조약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는 뭔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나라 초등학교에 세종대왕 동상이 있다면 멕시코의 초등학교에는 베니또 후아


레스의 동상이 많습니다. 그는 1806년에 멕시코의 오지 산골인 오아하까Oaxaca주의 산 파
블로 겔라타오San Pablo Guelatao라는 작은 원주민 마을에서 태어나 1872년에 멕시코 시
티에서 죽었습니다. 부모가 모두 원주민 출신이었는데 그들 마져도 그가 세 살 때 모두 돌
아가십니다. 친척들의 손에 의해서 키워진 그는 열두 살 때 오악사카라고 하는 대도시로 진
출하여 그곳에서 정규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때까지 스페인어조차 온전히 못 하던
원주민 고아 촌뜨기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 1831년 법학 학위를 받게 되고 시
의회 의원과 전국의회 의원을 거쳐 1841년에는 판사가 되었으며 이후 주지사로 재직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만들게 됩니다. 원주민 출신의 정치인이 없던 시대에 그의 성공은 엄청난 것
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1861년에 대통령이 되어 72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오늘날까지
도 멕시코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됩니다.
그는 당시 멕시코를 지배하려던 외세들에 대항하여 싸웠는데, 당시 이러한 외세의
상징이었던 막시밀리안 황제와 프랑스 세력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그
이전까지 국가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지 못하고 혼란을 거듭하던 멕시코의 정치와 행정을 정
비하여 민주적인 연방공화국을 세우기 위한 입헌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한편 당시의 멕시코
사회의 전형적인 보수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가톨릭 세력의 막강한 권력을 견제한 인물이기
도 합니다. 정치와 가톨릭과의 분리는 그야말로 커다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진일보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당시 가톨릭 교회가 전 국가 토지의 3분의 1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습
니다. 그 토지는 세금도 안 낼뿐더러 어떤 경우에는 유휴지로 관리도 잘 안 되었지요. 그런
데 그러한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고 유휴지를 강제 매각하도록 하는 소위 레르도 법Ley
Lerdo이라고 불리는 법안을 제정하였습니다. 1855년에는 군대와 교회의 재판, 사법권을 제
한하는 후아레스 법Ley Juárez을 통과시킴으로서 사법 제도를 근대화시키게 됩니다. 가톨
릭 교회가 대부분의 국가 땅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출생과 결혼, 사망 등의 많은 행정적
인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죄지은 자를 재판하기도 하는 등 엄청난 특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하나씩 국가 체제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그렇지 기존의 체제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득권의 저항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철통같은 의지를 가진 후아레스
대통령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변화를 추진합니다. 멕시코라고 하는 나라가 현대적인 입헌국
가로서의 면모를 갖추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인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독립 이후 수십 년간의 기간은 그야말로 정쟁과 쿠데타로 점철된 정치 부재의 상황이었는데
이러한 상황을 정리한 것이지요.
이러한 강력한 변화를 끌어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강인함이 있습니다. 1867
년에 프랑스 세력의 상징적인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막시밀리아노Maximiliano 황제를
처형한 그의 결단에서도 이러한 면이 잘 나타납니다. 모든 국제사회가 막시밀리아노의 인도
적인 차원에서 사면을 호소하였지만 그는 눈 하나 깜작하지 않고 멕시코를 위해 그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냉정한 말을 하고 원칙을 지켰습니다.
물론 그의 치적에 항상 다 긍정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토지 기반은
빼앗았으나 원주민에 대한 토지 분배는 결과적으로 대토지 소유 지주들에게 이익을 주었다
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의 사후 독재자가 등장하여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역사의 시계를
반대로 돌렸다고 하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의 정치적인 한계 혹은 당시 사회의 한계가 극명
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늘날까지도 멕시코 초
등학교에 가장 많이 세워진 동상의 소재가 되고 있다는 점은 시사점이 많습니다. 또한 역사
적으로 당대의 사회, 경제, 정치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19세기의 라틴아메리카 역사에는 가톨릭 교회가 중요한 변수로 자주 등장합니다.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교회가 가장 중요한 정치 변수 중 하나로 작용하였
습니다. 교회는 식민지 기간을 거치면서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고, 납세 의무로부터도 자유로
웠습니다. 지방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교회가 경제적으로 중요한 기득권이 된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교회에 반대한다는 것은 식민지 지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교회
가 정치에도 많은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사법 제도 역시 종교 재판과 같은 형식
을 통해서 가톨릭교회의 영향력 밑에 있었습니다.
한편 교육이나 문화면에서도 교회의 영향력은 뿌리가 깊었습니다. 학교가 모두 교회
소속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모두 다 미션스쿨인 셈이죠. 스페인의 종교관으로 볼 때 하
나님을 위한 교육 이외에는 다른 어떤 교육도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공교육의
개념이 생기기 이전에는 모든 교육은 기독교적 가치관을 벗어나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행정에서도 식민지 기간 동안 통계의 상당 부분은 교회에서 만든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한 마을의 인구는 그 지역 교회의 세례자 명단을 확인하면 됩니다. 교회를 안 나가거나 세례를
안 받는 것은 당시 사회로서는 상상도 못할 행위였으니 말입니다. 이렇듯 교회는 단순히 종교를
떠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중추 역할을 하였고, 그것이 19세기 혼란기의 중
요한 논쟁거리가 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교회의 토지를 국가가 환수하고 세금을 물리고 공립학교를 건립하는
등의 정책을 펼쳐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보수주의의 기반을 줄이고 정부의 힘을 늘리려 하였
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보수파들을 옹호하면서 기존의 자신들의 권력과 경제에서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1800년대 이후 정치 변동의 가장 중요한 요소
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회의 기득권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그런 양상은 20세기에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가 공식으로 80~90%
에 달하는 라틴아메리카 대부분 국가들의 현실에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무시
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교회가 항상 이런 보수적인 기득권과 영합한 것은 아닙니다. 해방 신학
계열의 신부들은 라틴아메리카 빈부격차의 현실을 개탄하고 핍박받는 민중들을 위하여 자신들
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숭고한 면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민중 신학의 맥락은 16세기의 바
르똘로메 데 라스 까사스Bartolome de las Casas, 바스꼬 데 끼로가Vasco de Quiroga 신부로
시작해 식민지 시대의 예수회 신부들(Jesuitas)을 거쳐 20세기의 해방 신학으로 그 맥락이 끊이
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멕시코는 독립 이후 왕당파라고 일반적으로 불리는 절대왕권과 유럽중심주의로 무


장한 세력과 공화파라고 불리는 자유주의자가 갈등을 거듭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세력의 지리한 싸움이 19세기 중반,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862년이 되어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보수주의자가 득세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자 국가 전체가 보수주의에 기반한 친프랑스
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급기야는 우리가 훌륭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유럽에서
왕을 모셔다 통치를 맡겨야 한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한 맥락으로 1864년에
프랑스 세력이 비호하였던 유럽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아노(1832~1867)가 멕시코의
황제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는 사실상 국제적인 복잡한 관계로 인하여 별생각 없이 제위에
올랐으며 멕시코에서 벌어진 정치적인 싸움에 휘말려 생명을 잃었지만 그 자신은 정작 이러
한 사건들에 걸맞지 않은 소박한 자유주의자였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으로 오스트리아 해군 소장으로 복무했
고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총독을 지냈습니다. 1863년 멕시코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
로 열렬히 추대했다고 생각하고 멕시코 왕위 제안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멕시코의
자유주의 세력을 전복시키려는 멕시코 보수주의자들 그리고 자신의 제국주의 야욕을 펼치려
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정치적인 계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막시밀리아노는
벨기에의 왕 레오폴트 1세의 딸인 아내 카를로따와 함께 멕시코로 건너갑니다. 그렇게
1864년 6월 10일 황제에 오른 그는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정책을 펴거
나 대토지 소유자들을 비판하는 등 나름 진취적인 정책을 이어갑니다. 노동면에서도 자유
노역을 금지하는 등의 진보적 성향을 보였고 교회가 가진 토지를 몰수하는 데에 찬성함으로
써 전통 가톨릭과의 갈등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즉 진취적인 정책을 통한 진심으로 멕시
코의 발전을 원했다는 거지요. 그러나 국제적인 환경의 변화 등으로 막시밀리아노를 지원해
주던 프랑스 군대가 본국으로 돌아가고 유럽의 지원도 끊기게 되자 막시밀리아노를 포함한
외세의 침탈에 반대하던 자유주의자들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선봉이 앞에서 살펴
본 초등학교 동상의 주인공 베니또 후아레스가 있습니다. 여차여차하여 그의 군대는 항복을
하고 그는 붙잡히게 됩니다. 그의 아내 까를로따는 남편을 구하려고 국제사회에 청원하는
등 온갖 노력을 하였으나 실패하게 되고 막시밀리아노는 결국 멕시코의 작은 지방도시 게레
따로의 한 언덕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1867년의 일입니다.
이후 까를로따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미치광이가 됩니다. 유럽 왕가의 인물
로서 그들 부부의 만남에서부터 멕시코 시티의 프랑스풍 황제궁에서의 화려한 생활과 그가
보여준 가난한 원주민에 대한 깊은 공감 그리고 그 이후의 처참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설
적 역사로 남게 됩니다. 그와 부인의 이야기는 마치 우리나라의 춘향전처럼 멕시코의 많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입니다. 또한 당대의 시대상을 이야기
해 주는 중요한 역사적인 에피소드이기도 합니다.

독립 이후의 정치적인 혼란기를 거치면서 미국에 영토를 빼앗기게 되고 이후에는


프랑스에 나라를 내주는가 싶다가 자유주의가 승리하며 들어선 베니또 후아레스 정권이 프
랑스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렇게 19세기 초중반을 거치면서 신생 독립국 멕시코는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에 등장하는 뽀르피리오 디아스라는 인물에 의하여
많은 피와 땀은 결국 다시 풍비박산 나고 맙니다. 디아스는 앞에서 등장한 막시밀리아노에
게 대항해 후아레스가 주도한 반 프랑스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군인 출신입니다. 그리
고 이때 세운 공훈을 기반으로 정치의 본 마당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877년부터
1911년까지 34년간 멕시코의 대통령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됩니다.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30년에 멕시코 정치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오아하까에
서 태어납니다. 오아하까라는 지역이 기억나시지요? 앞서 설명한 베니또 후아레스 대통령의
출생지이기도 합니다. 어려서는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나 미국과 멕시코의
전쟁이 터지면서 군에 입대하여 군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움으로서 군인으로 성공하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유주의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후아레스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는 등 진보적인 성격을 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독재자가 그러듯이 기회주의적으로 자신의 정치 성향을 필요에 의하여 버리거나 취합니다.
카멜레온과 같은 변화와 배신을 통해 최고 권력의 정점에 이르게 되는겁니다. 1877년 5월
정식으로 대통령에 당선이 됩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인종에 근간한 계급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원주민은 열등하
고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띠소는 비천하며 백인만이 우월한 존재로 국가를 이끌어갈
수 있으며 긍정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외국자본의 투자에 지
원을 아끼지 않고 서구와의 경제적 동반관계에 매진하였습니다. 다양한 경제, 사회적인 불
만을 잔인하게 탄압되었고 중앙집중적인 일인 독재체제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어떠한 목소
리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언론 탄압은 기본이요, 사법권 통제는 덤이 됩니다. 대농장주를
비롯한 부자들의 권익은 보호되었고 원주민으로 대변되는 사회 하층민은 철저히 무시되었습
니다. 당시 기득권세력을 옹호하던 가톨릭은 보호받았고 이러한 정책을 통해 이익을 챙기게
된 정치, 사회, 경제적인 엘리트 세력은 그의 든든한 지원자가 됩니다. 결국 빈부격차는 극
단을 치달았고, 농민들은 빚더미에 앉았지만 국가의 경제는 외국인들의 이윤추구를 위한 놀
이터로 전락합니다. 대단위 상업 작물을 재배하는 소수 매판 자본가들의 프랜테이션 농장이
확장되어갑니다. 모렐로스지방에서는 사탕수수 농장이, 치아파스주는 커피와 고무 농장이
그리고 유까딴 반도에서는 밧줄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던 에네켄 농장이 가난한 농민들의
피를 빨아먹습니다. 사회적인 불만의 목소리는 폭발 일로에 놓였고 그 결과가 다음 장에서
보게 될 멕시코 혁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독립 이후 멕시코의 19세기 역사는 산따 안나, 베니또 후아레스, 뽀르피리오 디아스의


세 명의 대통령으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황제였던 막시밀리아노(막시밀리안)를
넣어주느냐 마느냐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요. 아무튼 정신없던 19세기 초 혼란
기를 기회로 정권을 이어가던 산따 안나는 멕시코 독립 이후의 혼란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는 멕
시코 영토의 반 이상을 미국에 빼앗기고 맙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이라
기보다는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역량이 그러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
니다. 그러니 그에게 마냥 돌을 던지는 것도 좀 가혹한 일이 아닐까요?^^
그 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등장한 강력한 카리스마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
이 베니또 후아레스입니다. 원주민 혈통인데다 시골에서 자라는 바람에 스페 어조차 할 줄 몰랐
던 지독한 촌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멕시코의 대통령, 그것도 아주 훌륭한 치적을 이룬 대
통령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국가의 영웅입니다. 멕시코 시내 중심가의 가장 큰 공원인 알라메
다에 아주 크고 화려한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에 대한 멕시코 국민들의 애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 후아레스는 당시 국가 권력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교회의 토지
를 회수함으로써 정부 주도의 효과적인 경제 정책 실현을 가능케 하였으며 교회가 갖고 있던 사
법권 등을 정부로 가져와서 명실상부한 중앙 집권적인 국가 형태의 기틀을 갖추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조처는 당시 기득권들의 반발을 초래했고, 그 결과 막시밀리아노(막시밀리안) 황제의 제
위를 가져왔지만 후아레스를 중심으로 한 자유파가 결국 이를 타도하고 정권을 잡게 됩니다.
그 이후 누가 등장하지요? 유명한 독재자 뽀르피리오 디아스입니다. 역사에 가정을 한
다는 것이 참으로 무의미한 일이기는 하지만, 만일 뽀르피리오가 30년 이상 독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재미난 상상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민주 국가가 되어 미국이
나 칠레처럼 정치 안정을 가져오고 이것이 멕시코의 오늘날의 모습을 180도 바꾸어 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겠죠. 그나마 디아스 시절에 이룩한
중앙집권화와 이에 따른 정치 안정마저 깨져서 유까딴 반도도 독립을 하고 국가는 더욱 사분오
열되어 지금의 멕시코보다 훨씬 더 형편없는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런 가정
은 디아스 정권의 장단점을 잘 보여줍니다. 최대의 단점으로는 독재와 사회의 이원화를 들 수
있고, 장점으로는 국가 분열을 막았다는 점과 이를 통한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그를 박정희 전 대통령과 비교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성격이
비슷하죠. 경제를 발전시킨 독재자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물론 그게 진짜 발전 인지 아닌지는
일단 접어 두고 말입니다.

독립 이후 서양 모델의 무비판적인 수용과 그 이후의 혼란은 엘리트보다도 무지렁


이 백성들에게 더 많은 고통을 줍니다. 민중의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상황이 독립 이전보
다도 더 악화됩니다. 결국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더 견디지 못하고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
게 됩니다. 사실 원주민들이야 더 나빠지려야 나빠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죠. 식민지 시대만
해도 자기가 태어난 마을 주변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그럭저럭 먹고살던 원주민들의 삶은
19세기에 유럽의 경제 모델과 함께 들어온 대규모 기업체에게 유린당합니다. 유나이티드 후
루츠(United Fruits) 같은 서방 기업들은 중남미 땅을 독점하여 농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의
신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합니다. 이들이 대단위 농장을 만들면서 원주민들은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땅마저 빼앗기고 더욱 처참한 생활에 이르게 되었지요. 바로 이러한 결과가 체제에 대
한 저항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19세기 초 라틴아메리카에 나타난 전반적인 분위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세기는 혼란기다.’ ‘왜 혼란했느냐 ?’ 이제 막 독립을 하고 행정의 미숙 , 정치권의
권력 다툼,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제적인 피폐와 독점의 악순환이 거듭되었기 때
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인가 ? ⇒ 앞선 유럽 모델을 이
식하는 것이다 ⇒ 이것은 원주민과 하층민 소외의 가속화를 가져왔다.
이런 구도가 20세기로 넘어가면서 사회 갈등의 폭발, 그리고 그 대안 찾기로 발산됩니다.
제11장 멕시코 혁명

중요 연대
1910년 혁명 시작: 마데로가 디아스 대통령의 당선 무효 주장
1911년 디아스 망명
1911 ~ 1913년 마데로 대통령
1914년 사빠따와 빌야 멕시코시티 점령 — 요 때가 혁명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지요
1913 ~ 1914년 우에르따 대통령
1914 ~ 1920년 까란사 대통령
1919년 사빠따 사망
1920 ~ 1924년 오브레곤 대통령
1923년 빌야 사망
1934 ~ 1940 까르데나스 대통령

앞에서 우리는 1800년대의 라틴아메리카 상황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1492년의


사건이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고정화되어 혼혈이라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라틴아메리카라
는 정체성을 탄생시켰고, 이것이 독립을 통해 특별한 변화를 주지 못한 채 일부 상위 계층
의 이동에 국한한 독립을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변화가 없다는 표현은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처지에서 본 것이지요. 오히려 일반 민중들의 삶은 훨씬 더 어려워
진 겁니다. 서구의 모델을 가지고, 서구의 가치를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한다는 커다란 밑그
림 속에서 원주민이나 혼혈은 부정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고 가장 서구적인 것, 가장 서구
적인 사람, 가장 서구적인 가치만이 긍정적인 것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러한 것들에서 멀
어질수록 그 중요성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요? 원주
민들의 소외와 더불어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문제인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게 됩니다.
결국 이것이 멕시코 혁명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30여 년간의 독재 정권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그 중심에 있는 뽀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는 앞에서 설명한 정치, 사회, 문화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적
인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디아스 정권은, 그리고 그의 정책은 그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 기득권층의 거대한 분위기였습니다. 즉, 디아스가 아니라 당시의 사회 전체가, 그
리고 그러한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멕시코 혁명이라는 민중의 저항을 초래한 것입니다.
1492년 이후부터 끊임없이 핍박받았던 민중이 처음으로,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기
존의 가치에 저항한 것이지요. 이러한 성격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에밀리아
노 사빠따Emiliano Zapata입니다. 그는 ‘땅과 자유’라는 구호로 이제까지의 부당함을 어떠
한 타협도 없이, 너무나도 이상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적인 것은 그야
말로 이상만을 남긴 채 현실과 접목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의 진보 혁명은 보수
색깔을 가진 기득권층에 의하여 좌절됩니다. 그러나 사빠따로 대표되는 민중의 목소리는 많
은 부분 현실에 적용됩니다. 1917년에 제정된 헌법이 그것이요, 이후의 까르데나스Lázaro
Cárdenas 대통령이 보여준 친민중적 정치 역시 이러한 면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80여 년간 멕시코의 공식 여당이었던 제도혁명당(PRI)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 것
처럼 혁명이 완전히 그 이상을 실현하지는 못하였지만 멕시코 국민들의, 그리고 라틴아메리
카 민중의 존재를 보여주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더 이러한 압제를 참
고만 살지 않는다.’ 소위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고, 이는 라틴아메리
카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멕시코혁명 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적인 사건이 그러하듯이 어떤 사건이 터지는 이


유는 외면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으로도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 등으로 구분해서 볼 수도 있습니다. 뭐 이러한 것들이 정확하게 그 사건을 발
생시킨 전체라고 말하는 것이 힘든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한계와 전제를 두고서 혁명의
원인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면 일단 누가 뭐래도 가장 직접적이고 큰 외적 원인은 뽀르피리
오 디아스라고 하는 대통령의 독재정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0년이 넘는 독재와 부패
의 결과 그의 통치에 대한 반발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그러던 차에 미국 언론사와의 인터
뷰에서 이제 더는 대통령을 그만하고 정계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그러니 그에
반대하는 세력은 희망을 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정권을 바꿀 수 있겠다고 말입니다. 그런
데 웬걸 약속을 저버리고 다시금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
다 보니 야권에서는 아예 영구 집권을 획책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지면서 강력한
반발로 이어집니다. 아니나 다를까 대선에서 디아스가 다시 승리하게 됩니다. 마데로
Francisco I. Madero라고 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디아스 대통령의 당선은 무효라는 선언
을 하게 되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혁명이 시작되게 됩니다. 즉 직접적인 원인은: 마데로
의 당선 무효 투쟁입니다. 80세 디아스의 재선을 부정 선거로 규정하고 인정하지 않은 것이
지요.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호응하여 멕시코의 남쪽에서는 사빠따가 그리고 북쪽에서는 빤
초 빌야Pancho Villa가 혁명에 가세합니다.

멕시코 혁명의 과정은 크게 민중 세력과 보수 세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민중 세


력에는 에밀리아노 사빠따와 빤쵸 빌야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혁명을 정치 문제가 아
닌 사회 전체의 문제로 생각하여 근본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이상
을 가지고 무력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사빠따는 1919년에, 그리고 빤쵸 빌야는 1923년에
각각 암살당했는데 그들의 죽음의 시기를 혁명의 마지막 시점으로 잡는 견해도 많습니다.
그만큼 이들이 혁명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와는 반대로 혁명을 정치 문제로 국한하여 이들 민중 세력과 맞선 정치권은 네
명의 대통령으로 대표될 수 있습니다. 디아스의 독재에 항거하여 무장 투쟁을 벌임으로써
혁명의 도화선을 제공한 마데로가 1911년에서 13년까지, 그의 뒤를 이어 우에르따라는 인
물이 13년에서 14년까지 재임합니다. 그리고 1914년서부터 1920까지 까란사가 정권을 잡
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에 만들어진 1917년 헌법을 계기로 혁명이 끝났다 고 보는 견해도
많습니다. 민중 세력이 약화 되면서 혁명 정신이 헌법이라는 제도로 결론을 맺었다고 생각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오브레곤은 1920에서 1924년까지 재임하면서 혁명의 마지막을
수습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들은 모두 공식 대통령직을 맡으면서 민중 세력과 협상과
제휴를 하기도 하지만 혁명의 진보 세력과는 근본 철학이 달라서 병립이 힘들었습니다.

멕시코 혁명의 결과를 이야기할 때 “보수적으로 끝났다 ” 라는 평가를 하는 것이 일


반적입니다. 1959년의 쿠바혁명과는 대비를 이룹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땅과 자유를
갈망하며 마치 바퀴벌레(라 꾸까라차)와 같은 삶을 살아야만 했던 멕시코의 가난한 사람들,
원주민들 그리고 핍박받는 사람들이 1800년대를 거치며 서구열강의 침탈과 함께 서구적 대
안으로 점철되었던 시대를 지나 숨쉬기조차 힘든 현실적 고통에 봉착하게 되고 이것이 혁명
이라는 방법으로 분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의 발발 원인이 완전히 해결되
지 못한 채 적당히 그들의 일부 요구사항만이 제도적으로 수렴되며 혁명의 막이 내려졌습니
다. 혁명 정신을 반영한 1917년 헌법이 만들어지고 1919년에는 혁명 주축 세력 중의 하나
인 에밀리아노 사빠따가 죽게 됩니다. 그리고 1923년에는 마침내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북군 혁명 세력의 판쵸빌야가 죽음으로서 혁명은 끝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혁명의 정신
이 법에 반영되고 사회적인 합의도 이끌어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혁명의 중심
에 서 있었던 세력들이 그들의 생각을 다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됨으로써 그들이 추구하던 이
상적인 국가와 사회가 미완성으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혁명의 정신을 이어
받은 헌법의 완성 그리고 그 이후의 정치, 사회적인 변화에 혁명이 영향을 미친 점은 존재
합니다. 그렇지만 혁명은 온전히 자신의 봉기 이유를 완전히 달성하지 못한 꼴이 됩니다.
뽀르필리오 디아스라는 인물의 보수적 독재가 그에 반하는 혁명이라는 진보 이념과의 절충
을 통해 중도 성향으로 발전한 것이 멕시코 혁명 이후 멕시코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멕시코 혁명을 생각하며 벅찬 가슴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에밀리아노 사빠따(1879~1919)라고 하는 분입니다. 그는 멕시코의 몰레로스Morelos주 아
네네쿠일코Anenecuilco라는 시골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말 조련사 일을 하
는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님마저 여의고 고아로서 동생들
을 돌봤습니다. 당시 정부의 부당함에 항의하다 체포되는 전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비판적인 현실에 여러모로 눈을 뜨게 된 것이지요. 그는 점차 경제적 착취구조의 모순과 이
에 따른 가난한 자의 현실에 반발하며 농민저항운동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에 때
마침 멕시코 혁명이 발발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지주들이 가지고 있는 토지를 무력으로 빼
앗아 나누어 가지는 일을 벌이게 되고 이렇게 멕시코 혁명의 한가운데로 나아가게 됩니다.
1910년 사빠따와 그의 군대는 주변 지역을 점령하고 1911년에는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
시티에 입성할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게 됩니다. 이후 1919년 죽을 때까지 혁명가
로서 이상적인 사회건설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의 지지기반은 가난한 농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표어는 “땅과 자유(Tierra
y Libertad)”입니다. 땅의 주인은 그 땅을 경작하는 사람의 것이어야 하고 그러한 권리를
침해받지 않을 자유를 쟁취하자는 것입니다. 즉 농민의 권리를 담보하는 것이 그가 꿈꾼 혁
명의 원인이요 방향성인 셈이지요. 그의 이러한 정치적인 행보는 그의 투쟁 과정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혁명 세력의 최초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던 마데로라는 인물이 사빠따가 원하던
사회, 경제 개혁에 부진하자, 사빠따는 그와의 협력을 깨면서까지 원칙을 지키려 합니다. 그
는 그러한 면에서 자신의 이상을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함으로써, 한편으
로는 소신을, 다른 한편으로는 아집 혹은 비현실성을 가진 혁명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빠따의 이상은 토지와 가난에 대한 그의 철학에서 잘 나타납니다. 사실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 이전에는 토지의 사유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모든 토지가 스페인 국왕의 소유가 됩니다. 사빠따는 이러한 상황의 근원적인 부
당함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합니다. 즉 “이 땅이 왜 너희들 것이냐?, 원래 우리 민중의 것이
었는데 너희들이 부당하게 차지한 것이다.”는 항변에서 출발합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식민
지 시대에도 농민들은 토지를 완전히 빼앗긴 것은 아니었고 과도한 조세의 의무에 시달린것
이었습니다. 공동 경작 형태의 농업도 존재 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열
강의 침탈과 더불어 매판 자본이 농업을 급속도로 잠식해 나아갑니다. 이에 농민들은 토지
를 잃고 참담한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빠따가 살았던 지역의 경우 도미니크 수도원 소속의 꼬아우이스뜰라 장원
Hacienda de Coahuistla과 오스삐딸 장원Hacienda de Hospital 등 혁명 발발 이전까지
17개 가문이 37개의 장원을 소유하면서 자본가에 의해 토지가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납니
다. 독재자 포르필리오 디아스는 토지조사 사업과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돈 있는 사
람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결국 커다란 장원이 중심이 된 사탕수수 농장이 맹
렬한 속도로 원주민의 땅을 잠식해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현장의 한가운
데에서 어린 사빠따가 현실을 보게 된 것이지요.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농민의 가축을 빼앗아가는 대농장주의 횡포를 보며
어린 사빠따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저 부당한 일을 왜 막지 않습니까, 아버지?” 그의
아버지의 대답은 처참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강하기 때문이다.” 결국 무력 혁명을 통
하지 않고서는 제도권 하에서의 ‘촛불 혁명’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어린 사빠따에게
들었던 것이지요.
이제 장성하여 30이 갓 넘은 혁명가는 결국 자본가들에게 빼앗긴 말을 농민에게
돌려줍니다. 혁명의 과정에서 점령한 대농장에 불을 지르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어오던 농민
들에게 그 땅을 나누어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땅을 받은 농민들은 농사를 짓다가 필요하면
군대의 형태로 모여 싸우러 갔고 전투가 끝나면 다시 농사를 지었습니다. 당연히 군사적으
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군대는 분명한 문제의식과 그에 바탕을 둔 행
동양식에 있어서 투철했습니다.

멕시코 혁명의 원인은 포르필리오 디아스의 독재라는 이야기를 앞에서 했습니다.


이 독재자가 다음번 대선에서는 나가지 않겠다고 밝히고 이로 인하여 많은 반대 세력들이
이제는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되었죠. 그러나 1910년에 포르피리
오 디아스는 한 번 더 대통령후보로 나서겠다고 발표를 합니다. 무슨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
입니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까지 참아왔던 반대 세력과 국민들이 더는 안되겠다
고 분연히 일어난 사건이 멕시코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포르필리오
디아스의 반대세력을 이끌던 정치인으로 프란시스코 마데로라는 사람이 부상하게 됩니다.
원래 이 마데로라는 사람도 따지고 보면 지극히 보수적인 정치인입니다. 멕시코 북부 지방
의 지주이기도 한 그는 독재자인 뽀르피리오 디아스에 반대하는 전선을 구축하다 신변의 위
협을 느끼고 미국으로 도망갑니다. 그곳에서 스스로 대통령임을 선언하고 멕시코로 돌아옵
니다. 그사이에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1911년 3월에 사빠따는 수도 주변의 중소도시를 점령
하며 디아스의 사퇴를 압박합니다. 결국 디아스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망명길에 오르게 되
고 혁명 세력은 마데로를 대통령으로 추대합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데로가 멕시
코시티에 입성하며 공식적인 대통령이 됩니다.
그렇게 혁명은 이상을 달성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그렇게 간
단하게 끝날 수가 없지요. 새로운 대통령인 마데로는 애당초 정권교체에만 관심이 있었지
근원적인 문제인 빈부격차 극복이나 민생안정 등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사빠따와 마
데로의 갈등은 필연이 되고 맙니다. 사빠따는 개혁을 요구하였고 마데로는 사빠따 군대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며 이 둘은 접점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갈등의 상황과 더불어 마
데로는 자신의 정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데에도 실패하게 됩니다. 그 결과 1913년 2
월 빅토리아노 우에르타Victoriano Huerta 장군이 마데로를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됩니다. 그
러나 그 역시 베누스티아노 까란사라는 좀 더 온건한 성격을 가진 북부세력에 밀려 정권을
내주고 1914년 7월 국외로 쫓겨나게 됩니다. 마데로에서 우에르따를 거쳐 까란사에 이르는
정권의 변화는 기득권 중심의 변화입니다. 즉 이들은 공통적으로 정치적인 권력에 중점을
둔 반면 근원적인 사회 구조의 문제나 경제적인 부당함에 대한 관심은 적었습니다. 특히 하
층민들의 삶에 대한 이해나 문제 해결은 항상 핵심에서 벗어나 있었지요.
그 와중에서도 농민 세력 특히 사빠따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의 중심 세력은 토지와
자유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정치적인 개혁과 함께 민중 중심의 경제정의 실천을 굳건히 요구
합니다. 당시의 대통령으로 공식적인 정권의 수장이었던 까란사는 1914년 10월에 모든 혁
명 세력이 참가하는 회의를 소집하여 혁명의 종결을 선언하려고 합니다. 물론 자신을 중심
으로해서 정치적인 통합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전선 구축을 통한 정치적
인 안정을 꾀하려던 까란사의 노력도 결국은 무력 충돌을 면치 못하는 상황으로 악화되기에
이릅니다. 다양한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힘든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
죠. 아직도 보수적인 면을 가지고 있던 주류 정치세력과 근본적인 정치, 경제의 구조를 바
꾸려는 민중 세력은 합일점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이에 북부 지역에서 강력한 군대를 배경
으로 혁명의 돌풍을 일으켰던 빤초 비야와 남부의 사빠따 군대는 혁명의 민중 세력을 대표
하는 집단으로 멕시코시를 점령하며 혁명을 진보적인 색채로 만드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 시기가 멕시코 혁명의 정점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정치적으로 독재에 반발하여 발발
한 멕시코 혁명이 무지렁이 농민과 가난한 노동자들에 의하여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되었으
니 말입니다. 그들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정당하게 분배하기 위한 정책을 펼치는 한편 농촌
대부은행을 설립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가며 그들의 이상을 제도적으로 구현하려는 노력을
펼칩니다. 그러나 수백년간 기득권을 유지했던 보수 제도권 세력이 그렇게 쉽게 물러날 수
는 없겠지요. 1917년 까란사는 판쵸빌랴의 군대와 싸워서 승리를 거두고 자기 스스로 대통
령의 직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판쵸빌랴에 이어 싸빠따 역시 까란사 군대의 꾐에 빠져
죽게 되면서 혁명은 일단락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둘의 죽음으로서 혁명은 끝이 납니다.
빤쵸 빌야Pancho Villa, Francisco Villa의 본명은 Doroteo Arango로 1878년 멕
시코의 북부지방인 산 후안 델 리오San Juan del Río라는 곳에서 태어나 1923. 역시 북부
의 파랄Hidalgo del Parral이라고 하는 곳에서 최후를 맞았습니다. 멕시코 혁명을 대표하는
양대 민중 세력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던 북부군단을 이끈 사람입니다. 멕시
코 혁명을 생각하면 두 명의 인물이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 떠오르는 데 그중에 한 명이 앞
에서 본 에밀리아노 사빠따고 다른 한 명이 바로 여기서 살펴보고 있는 판쵸 빌야입니다.
그는 가난한 농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됩니다. 그리고 그의 일생은
파란만장하게 펼쳐지게 되지요. 일하고 있던 농장의 주인이 누이를 강간하자 그 농장주를
살해한 후 산으로 도망쳐서 그때부터 유랑 생활을 하며 산적과 같은 생활을 하며 강력한 생
존력을 바탕으로 군사적인 재능을 뽐냅니다.
1910년 혁명이 시작되자 그는 혁명에 제일 먼저 뛰어들어 군대를 통솔하게 됩니
다. 처음에는 최초의 혁명 세력인 마데로와 손잡고 독재자를 축출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습
니다. 그러나 마데로가 죽고 이후에 등장한 우에르따를 축출하기 위하여 베누스티아노 까란
사와 연합을 합니다. 이때 빌야의 군사적인 재능이 빛을 발휘합니다. 우에르따 군대와의 전
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둠으로써 그는 한때 멕시코 최고의 군사력을 가진 일인자가 되
기도 합니다. 북쪽 치와와 주의 주지사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까란사와 함께 우
에르따 군대를 무찌르고 멕시코를 혁명정부로 통일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기득권을 옹호
하고 부자들을 지원하는 까란사의 보수적인 행태가 비야의 생각과 계속 같이 갈 수는 없었
죠. 판쵸 빌야나 사빠따와 같은 민중세력은 기득권 세력과 타협하기를 거부합니다. 급기야
이들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지요. 1914년 까란사와의 갈등의 결과 빌야는 빌야데로 그리고
사빠따는 사빠따데로 멕시코시티를 떠나 주류 정치를 버리고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가게 됩
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사건은 멕시코 혁명의 가장 아쉬운 대목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로인해 혁명이 보수적으로 끝이 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멕시코 시티를 지키며 보수적인 혁명 세력을 몰아내고 진취적인 혁명 이상을 구체적으로 실
현하도록 투쟁했어야 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든 거지요. 그러나 역사를 가정해서 비판하는
것은 재미있기는 하지만 의미가 없는 것이기도 하지요. 하여간 이때를 시작으로 멕시코 혁
명은 보수적인 세력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민중을 대표하는 판쵸 빌야와 에밀리아노 사빠따
의 세력은 점점 힘을 잃어가게 됩니다. 결국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리고 그것을 노린 사
람들의 습격을 받아 1923년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멕시코 혁명의 마지막 민중
세력의 죽음이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고 맙니다.

까란사(대통령 재임 기간: 1914-20)는 정치적으로 보수나 진보냐로 구분하기 힘든


대통령입니다. 혁명의 대표적인 양대 민중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에밀리아노 사빠따와 빤쵸
빌야와 척짐으로써 혁명을 보수적으로 만든 장본인 이란 점에서 그의 보수성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특히 그의 집권과 더불어 혁명이 사실상 종결되었다는 점, 혁명의 불씨를 꺼버린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 처지에서는 괘씸하기 그지없는 인물
이지요.
그러나 그의 정치적인 행보를 보면 그렇게 마구잡이로 몰아세우기 힘든 부분 또한
있습니다. 그는 확고한 민족주의적 태도를 보입니다. 미국과의 분쟁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
다. 보수가 일반적으로 친미라는 공식을 깬 것입니다. 특히 미국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점은
잘 드러납니다. 1914년 4월 미국이 멕시코의 가장 중요한 항구라고 할 수 있는 베라크루스
를 점령하였을 때 그는 이러한 미국의 행동이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침입은 우리의 자존심과 주권국가로서의 독립성을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하
며 강력히 저항합니다. 또한 미국의 군대가 그의 정적인 빤쵸 빌야를 체포하기 위해 북쪽
멕시코 영토를 침략했을 때도 강력히 항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빤쵸 빌야의 도주에 도움을
줍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경제적으로도 멕시코의 주요한 기간산업인 석유 산업을 미국에
넘기지 않으려는 민족주의적인 정책을 펼칩니다. 이렇듯 보수라고 하기에는 조금 서운한 면
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다 그만두고라도 그의 가장 큰 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1917년의 소위 17년 헌법이라고 불리는 멕시코 헌법 제정이 그
것입니다. 여러 가지 설명에 앞서 먼저 그 헌법의 주요 사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3조: 교회 교육권 박탈.


▶ 23조: 교육 관계 법령- 공교육 무상.
▶ 27조: 모든 토지와 지하자원은 국가가 소유권을 가진다. 소유권 양도 가능.
▶ 123조: 진보적인 노동법 - 노동 시간, 최저 임금, 보건과 주거, 노동 복지, 여성 노동 조
건, 파업권, 조합 결성권 등을 보장.

1917년은 아직도 근대적 사회, 정치, 문화 분위기가 멕시코에서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시기입니다. 즉 인권의 문제나 노동의 문제, 여성의 권리와 같은 개념이나 교육의 보
편성과 같은 것들이 이제 막 논의되는 수준의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인 한계
에도 불구하고 이 헌법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개념을 과감하게 적용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멕시코 혁명 정신을 제도적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헌
법이 – 물론 그 실행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구현되었는지는 일단 차치하고라도 – 법조문으로
멕시코의 미래에 바탕이 되었다는 점은 실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조에 규정
하고 있는 종교로부터 분리된 행정의 구현이라는 점은 당시의 후진적인 정치환경의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23조에 명시하고 있는 보통교육의 적극적인 실현은 오늘날까지 중
남미 대다수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보편적인 인권의 근간을 이룬다는 점에서 실로 그 의미
가 큽니다. 또한 독립 국가로써, 외교적인 간섭을 배제하고 국가 고유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점에서 27조 역시 당시의 국제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지요. 123조의
조항과 이 조항에 따른 다양한 관계 법령은 복지 국가를 지향하는 멕시코의 진보적 이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 어떤 선진국의 헌법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
이 없는 노동자의 권리를 규정하고 있으며 모든 국민의 보편적인 행복 추구를 위한 기본적
인 삶을 국가가 책임진다는 전위적인 개념을 이 당시에 이미 채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
인권에 관한 문제도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당시 혁명을 일으키며까지 지키려고 했던 이들의
이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혁명이라는 과정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
에 세워진 헌법정신이 아쉬우나마 나름의 의미를 가집니다.
멕시코 혁명 이야기의 마지막 인물로 1934년부터 40년까지 재임한 까르데나스 대
통령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까르데나스 대통령의 재임 기간을 혁명기로 보는 사람은 드뭅니
다. 그런데도 혁명을 다루고 있는 이번 장에서 그를 굳이 소개하는 것은 그가 혁명 정신을
실제 정치에서 가장 잘 구현한 대통령이란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1917년 헌법이
제정되면서 혁명은 거의 끝났지만 제도권 안에서는 그 혁명의 정신을 담은 헌법을 구체적으
로 실현하지 않고 여전히 보수 색채를 유지하게 됩니다. 멕시코 혁명은 “보수의 부르주아적
혁명이었다, 실패한 혁명이었다.”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단 혁명의 진
보 세력인 사빠따와 빤쵸 빌야가 죽음으로써 그들이 구현하려고 했던 국가가 만들어지지 않
았다는 점에서는 실패한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멕시코 혁명 이후
의 정치와 경제는 혁명 정신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그
러니까 혁명 정신을 제도권 안에서 실천하려고 했던 인물이 바로 까르데나스 대통령입니다.
그는 원주민들이 많이 사는 미초아깐Michoacán 출신의 군인으로 이전 대통령인
까예스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까예스를 망명 보내고 독
자 노선을 구축함으로써 자신의 정치 세계를 펼쳐나갑니다. 가장 특징적인 정책으로 손꼽히
는 토지 무상 분배에서 “내가 가난한 농민의 편이다”라고 하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에히도
Ejido라는 공동 토지 소유 제도를 통해서 가난한 농민들에게 많은 양의 토지를 무상으로 나
누어주는 획기적인 정책을 과감하게 시행합니다. 그는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강력한 자주 정
책으로 일관했습니다.
멕시코 영토 내에서 생산되는 모든 천연자원은 국가의 것이라는 1917년 헌법의 근
거로 뻬멕스PEMEX라는 멕시코 석유 회사를 설립하여 미국이 점유하고 있던 석유 산업을
국유화한 일은 멕시코 역사에 길이 남는 자주 외교의 승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단순
히 경제적인 이득뿐만 아니라 국가의 자존심을 세운것입니다. 멕시코 국민들이 두고두고 이
얘기를 하면서 미국이 약탈해 간 자신들의 석유 주권을 다시 찾았다며 뿌듯해하는 것을 자
주 보았습니다. 물론 세계 대전 중의 혼란이 없었다면 쉽게 이루어 낼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미국으로부터 당시 멕시코 수출의 80%와 국가 재정 수입의 50%를 차지하는 중대
한 산업을 국유화시킴으로써 멕시코 경제 발전의 초석을 마련하게 됩니다. 까르데나스는 이
와 같은 민중적인 성격과 외교를 통해서 멕시코 혁명의 정신을 정치권 안에서 수용한 대통
령으로 멕시코 국민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한편 그의 개인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서도 그가 얼마나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멕시코라고 하는 나라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아들의
이름을 과우떼목Cuauhtémoc이라고 지었습니다. 이 과우떼목은 1521년 아즈텍이라고 불리
는 메시카의 최고 지도자로 스페인군의 침략에 맞서 끝까지 원주민 문화를 지키기 위해 저
항했던 인물입니다. 스페인군에 잡혀 보물이 있는 곳을 실토하라며 자행했던 고문까지도 견
디며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며 죽어간 멕시코 민족주의자의 영웅입니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유일한 아들의 이름을 과우떼목이라고 지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미국이나 서양의 세력과
는 다른 멕시코 고유의 정체성을 중시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증표가 될 것입니다. 그리
고 과우떼목이라는 이름의 라자로 까르데나스 대통령의 아들은 훗날 도지사를 거쳐 멕시코
진보정당의 대통령 후보에까지 이릅니다. 그것도 무려 3번에 걸쳐서 말이지요. 실질적으로
부정선거가 아니었다면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멕시코의 민족주의
적인 맥락이 혁명과 더불어 시작되어 사빠따와 빌야를 통해 구체화되고 까르데나스를 통해
구현되어 –비록 아쉬운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살아 숨 쉬는 것을 만
나게 됩니다.
제12장 뻬론과 에비따

중요 연대
1870년대 세계 10위권의 잘 사는 나라 아르헨티나
1919년 에바 뻬론 탄생.
1946년 뻬론 대통령 당선.
1952년 에바 뻬론 사망.
1955년 뻬론이 군부에 의하여 망명.
1973년 뻬론 대통령 재선.
1974년 뻬론 사망. 부통령이던 그의 부인 이사벨 뻬론이 대통령이 됨.
1976년 군부의 반발로 이사벨 뻬론 실각.
1976~1989: 군부정권
1989년 뻬론당의 메넴이 대통령이 됨.

멕시코에서 1492년 이후부터 시작된 400여 년간의 민중들에 대한 억압이 혁명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한다면, 아르헨티나에서는 뻬론이즘Peronismo을 통해 나타납니다. 억압
받던 사람들, 핍박받던 사람들, 그래서 억울한 사람들의 울분이 멕시코에서 혁명이라는 극
단적인 무력투쟁의 형태로 나타났다면 아르헨티나에서는 제도권 안에서의 변화를 추구하였
습니다.
일단 에비따와 뻬론의 정치에 대한 평가는 잠시 유보하고, 현상적으로 볼 때 에비따
가 당시 대중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절대 신뢰를 받고 가히 종교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과연 그 원인은 무엇일까
요. 왜 이리도 많은 사람이 한 정부(政府), 한 여인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보냈을까요? 이 질
문이 에비따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일 것입니다. 즉,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에
비따와 뻬론에 보낸 절대적인 애정의 원인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이번 장에서 가장 중
요한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제까지 한 번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한 번도 저
부자처럼, 저 지주처럼 잘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조차 품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
었기 때문입니다. 몇백 년간을 “나는 언제나 바닥 인생이야”. “나는 하인, 저 사람은 주인
님”이라는 것을 강요받아 고착, 습관화된 라틴아메리카 사회에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
능성, “나도 존귀한 사람이다, 나도 저 사람들과 동일한 권리와 인권을 가진 사람이고 그래
서 나도 그들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과 의식을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좀 과장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사회 분위기가 바뀌고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실마리를 보여주었
습니다. 이제까지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어 절대로 터질 것 같지 않던 저수지의 옹벽에 망치
로 구멍을 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입니다. “아! 저렇게 구멍이 나고
옹벽 아래에도 물이 닿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본 것이지요.
이제까지 몇백 년간 계속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에서 민중을 향한 획기적 발상
의 전환이 에비따와 뻬론에 의해 시도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에비따가 아르
헨티나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사랑을 받는 이유입니다. 뻬론이즘이 오늘날까지도 아르헨티나
정치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저는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면서 만나는 사람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일이 에비따


에 대하여 다양한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양한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
다. 그런데 세대 차이가 큽니다. 에비따는 50~6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은 사랑
을 받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비따는 못 가진 자에게 - 이들을 뻬론 당에서는 웃통을 벗고 일하는 노동자 라는
뜻을 가진 데스까미사도Descamisados라고 불렀죠- 처음으로 이성뿐 아니라 감성적으로 희
망을 준 사람입니다. 정치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일단 이러한 배경을 이해한 이후에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당시의, 그리고 오늘날의 에비따에 대한 애정을 이해하는 가장 중
요한 부분이니까요.
평생을 하인으로 살아 온 한 여인의 아들은 엄마가 일하는 주인집 아들이 타는 자
전거가 너무도 부러웠습니다. 그것을 안 아이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에게 자전거 하나 사
주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자전거는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라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평생 그런 부러움을 가지고 살아온 어머니는 운명과도 같은 자신의 처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에비따가 그 아들에게 자전거를 보내온 것
입니다. 학교도 가게 해 주고 무료로 여름 캠프를 보내 주기도 하였습니다. 몇백 년간 그녀
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당연히 자신과 주인집 어른과는 다른 사람이었는데
말입니다. 그야말로 언감생심 그들과 비슷해질 수도 있다는 상상을 단 한 번도 할 수 없었
던 사람들에게 보여준 변화의 가능성은 에비따 시대를 산 민중들의 횃불이 되었습니다.
저는 에비따를 생각할 때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평가서를 읽거나 토론할 때마다
스스로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비따의 정책을 뽀뿔리스모(대중 인기 영합
주의)Populismo라고 비하합니다. 저도 일정 부분은 공감합니다. 자전거 사주고, 학교 만들
어 주느라 정부의 재정이 바닥나고 경제가 어려워져서 결국은 나중에 더 힘들게 되었다는
비판 역시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득권은, 권력자는, 돈 많은 기업가들은 국민과 사원에게 항상 지금은 때가
아니니 나중을 위해 참으라고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은 어려우니 회사를 위해서 좀
희생해라, 나중에 회사 잘 되면 월급 올려줄게.”, “지금은 우리나라 경제 개발할 때니 허리
띠 졸라매고 희생해라. 그래야 희망이 있단 말야!” 우리는 이런 말을 참으로 많이 들어왔습
니다. 그리고 순진한 우리 국민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열심히, 그야말로 충성을 다해 일했
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발전해도 항상 아쉽고 한국 최고의 기업이 되면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어야 하고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면 경쟁자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또 다른 피나는 노
력이 필요하고…….
그럼 언제 말단 사원들에게 혜택을 자율적으로 베푼 적이 있나요? 이런 질문을 아
르헨티나의 현실에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이 이제는 배곯지 않고 살지만, 허리띠 졸
라매야 한다고 강조하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민중들이 허리띠 졸라맨 덕택에 훨씬 더 잘먹고
잘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에게 “지금 회사가 어려워서……” 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한국까지 들먹거리는 것은 아르헨티나, 라틴아메리카의 역사가 그렇게
500년이 넘게 흘러왔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지배 계층은 항상 이들에게 약속
만을 해왔습니다. “너희들도 조금만 참으면 이렇게 잘 살 수 있어”라며 지키지 않을 약속만
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희생을 강요해온 것입니다. 장장 500년 동안 말입니다. 만일 에비따
나 뻬론 정부 없이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잘 되었다면 -물론 그 가정에 대한 결과도 논란의
대상이지만- 이제는 진짜 민중들에게 혜택이 골고루 돌아갔을까요? 가난한 사람도 자전거
를 살 만큼 국민 개개인의 사정이 나아졌을까요? 그에 대한 대답은 정말 부정적입니다. 즉
에비따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하는데, “만일 그들이 없었다면 나라가 더 발전을 하였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 시대에 정권을 잡았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라는 것도 의문
입니다만 그보다 하나 더 나아가서 비록 경제가 나아졌다 해도 대다수 민중의 삶은 나아지
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나마 에비따와 뻬론이 있었기에 아르헨티나 국민은 수백 년간의 거
짓된 약속의 반복을 처음으로 깨고 인간다운 대접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처
음으로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자전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결국 에비따는 성녀인가 악녀인가
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습니다.

뻬론과 에비타의 페로니즘과 관련하여 한국에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평가는 ‘포


플리즘’, ‘망국’, ‘경제 파탄’과 같은 혹독한 것들입니다. 아예 아르헨티나라고 하는 나라의
가장 대표되는 이미지가 이런 것들이니 말입니다. 보통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보수계열의
언론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주로 생산해 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좀 더 따져보면 그렇게 말
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뻬론과 에비타 정권이 자신의 정치적인 인기를 위해 국가 경제
를 걱정하지 않고 무책임한 정책을 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부자, 기득권 중심의 정
책으로는 국가의 발전을 담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진보적 경제학자들의 고민의 결과였습니
다. 그러나 이것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운 건 좌파와 진보를 정책을 무조건 폄하하고 싶
은 사람들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오늘날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 경제의 문제는 오히려
뻬론 정권 이후의 군부독재 세력이나 반 뻬론이즘을 부르짖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결과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당초 뻬론정권이 들어섰을 당시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개발 정책은 전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경제 육성정책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이나 ‘경제개발계획’ 혹은 미국
의 ‘마샬플랜’이나 대공황 시대에 후버댐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것들은 시장경제가 가진 한
계를 국가 주도로 극복해 보자는 노력의 일환이지요. 즉 뻬론이 내세운 국가가 주도적으로
관여하여 경제를 이끌어 간다는 계획은 사실 시장경제를 무시하고 경제에 간섭한 뻬론의 실
책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억지라는 것입니다. 국가는 경제를 부양하기 위하여 중산층부양
혹은 소비시장 진작, 독점체제 단속과 같은 다양한 개입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만 봐도 뻬론의 경제정책은 결코 실패했다고 치부하기 힘듭니다. 뻬론이
통치하던 시기의 국민총생산은 계속해서 늘어나서 130%에 달하는 성장을 보입니다. 개인소
득 역시 200% 이상의 성장률을 보입니다. 아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플레이션은 떨
어지고 실질임금은 올라가면서 국민들의 삶은 점차 나아지게 됩니다.
한편 경제의 구조 면에서도 기존의 농업 중심의 국가 경제 체제를 벗어나 공업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구조적인 변화도 성공적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경제를 이끌
어가는 기반과 기초체력 면에서 뻬론의 빈민구제 정책과 소수자에 대한 배려는 빈곤층을 감
소시키고 중산층을 탄탄하게 유지하게 힘으로서 전체 국가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는데에 큰
역할을 합니다. 아래의 도표는 뻬론이 정권을 잡고 있던 시대에 어떻게 빈곤층의 비율이 지
속적으로 줄면서 관리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즉 국민 개개인의 경제를 개선하여 향
후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초를 잘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1976년 군사 구테타에 의하여 비델라와 군부세력이 경제를 주도하면서 그동
안 뻬론이 힘들여 만들어 놓은 아르헨티나 경제의 기반을 무너뜨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빈곤층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그 당시의 군부독재는 인권이나 문
화 등의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팩트입
니다. 영국과의 전쟁을 일으켜 패전함으로써 국가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경제에까지 악영향
을 미치는 등 수많은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군사정권의 실책을 상당 부분
뻬론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독재자 비델라 시절 아르헨티나의 빈곤률이 4%에서 38%까지 폭등하는 일이 벌어
지고 이에 대하여 불만을 말하는 사람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당시의 상
황이었습니다. 뻬론은 외환 관리, 무역 보호, 산업 보조금 장려, 관세를 통한 경제성장 도모
등과 같은 정책을 병행하였고 수입대체와 국내 생산품 육성을 통한 국가 소비시장 활성화와
같은 정책을 펼쳐 국가 경제의 체질을 개선해 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물론 많은 부분 실패
를 한 것도 있고 선진국과의 경쟁에서 역부족이었다는 점 또한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
나 뻬론 정권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정권 창출과 개인의 탐욕을 위해 아무런 계획 없는 인기
영합주의를 채택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평가는 뻬론을 깎아내리기 위한 비판을 위한 비판
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림 13 1945~1955년의 실질임금과 인
그림 14 1965~2005년까지 절대 빈곤 비
플레이션. 빨강 실질임금, 연두 인플레이
율. 출처:INDEC para Gran Buenos Aires
션. 출처: Didáctica de la Historia

아르헨티나는 아메리카 대륙에 18세기에 세워진 4개의 부왕청 중의 하나가 있던


장소일 정도로 교통과 상업이 발전하였던 곳이었습니다. 물론 전 지역이 다 교르게 발전한
것은 아니고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 주변 지역에 국한된 발전이었습니다. 남미 지
역에서 포르투갈이 지배하고 있던 브라질과 더불어 대서양을 통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중요한 해상교통로 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유럽사람들이 많이 건너와
살았습니다. 거기에 원주민들의 숫자도 적었고 그나마 있었던 원주민마저 백인들의 손에 의
해서 죽임을 당하고 나니 인구 구성면에서 백인의 숫자가 많았지요. 1778년의 인구 분포를
보면 백인 38%, 원주민 22%, 혼혈 3%, 흑인 37%로 유럽에서 온 사람의 비율이 높았던 것
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인구 구성은 둘째치고 절대 인구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독립이
이루어지던 1800년대 초의 인구가 기껏해야 40만으로 다른 주변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적
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시기의 멕시코가 대략 600만 정도였으니 그 차이가 느껴
지실 겁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르헨티나에서는 적극적으로 외국인들의 이민을 장려하
게 됩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대규모로 사람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러한 유입은 인구 구성
에도 영향을 줘서 독립 이후 100년 정도가 흐르고 난 후인 1940년의 인구 구성 분포를 보
면 백인이 전체인구의 94%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원주민은 이미 정벌과 인종청소를 거치는
과정에서 1% 미만의 소수민족이 됩니다. 여기에 혼혈이 5% 정도였고 흑인이 15,000명 정
도로 추산합니다. 대부분 유럽사람입니다. 이탈리아 44%, 스페인 31%, 프랑스 4% 정도이
고 나머지 폴란드,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아랍 등에서도 일부 인구가 유입됩니다. 그래
서 아르헨티나를 가리켜 백인의 나라, 남미의 유럽이라고도 하고, 백인 거지가 있는 유일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라는 타이틀까지 따라다니는 거지요.
유럽 사람과 유럽의 제도, 유럽의 건축양식과 유럽의 학문 등등의 모든 유럽의 것
들을 들여와서 서양처럼 발전하겠다는 라틴아메리카의 유럽을 지향합니다. 아르헨티나는 그
러한 과정을 통해 유럽화를 지양했지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녹록지 않습니다. 물론 한
때 유럽의 그 어떤 국가보다도 더 잘 사는 나라로 떵떵거린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영광
은 잠시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겪은 독립 이후의 혼란과 저발전의 양태를 거의 그대로
이어가게 됩니다.
로사스Juan Manuel de Rosas라고 하는 인물의 철권 정치를 통해 19세기 중반까
지 그나마 정치를 안정시깁니다. 그러나 그는 독재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미뜨레
Bartolomé Mitre에게 정권을 양도하게 되는데 미뜨레는 사실상 아르헨티나의 19세기 후반
경제 번영의 기반을 만든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리고 1868년 사르미엔또Domingo
Faustino Sarmiento에 의한 최초의 민간정부가 출현하게 되고 아르헨티나 경제 번영의 기
반이 이때 이루어집니다. 이 당시 교육 개혁을 통해 서반구 최고 수준의 교육 역량을 갖추
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는 현대화되고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이 활성화됨으로써 활력이 생겨
납니다. 정치적으로도 공포 정치가 종식됨으로서 형식적이나마 민주주의가 안정화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맞추어 아르헨티나의 경쟁력 있는 중요 산업인 농축산업이 활성화되
고 여기에 세계 시장에 육류를 수출할 수 있는 냉동선이 개발되면서 아르헨티나는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유럽 사람과 돈이 아르헨티나로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이때 우리나라에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만화를 통해 소개된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상황이
펼쳐지게 되는 겁니다. 이탈리아의 가난뱅이들이 아르헨티나로 막노동이나 식모살이를 하러
갈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부유한 나라 아르헨티나에서 식모로 일하고 있는 엄마를
보고 싶어 마르코라는 어린 소년이 엄마를 찾아 아르헨티나까지 여행하게 되는 기막힌 이야
기가 나온 것이지요. 하여간 그 당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발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제 발전과 사회적인 안정 등을 배경으로 삼아 이민 중산층을 중심으로 소
수의 엘리트 귀족 정치를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됩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 노동자들
의 권익 보호를 위한 투쟁 사회적 정의 구현 등의 선진적인 고민이 이때 생겨난 것이지요.
이후 정치적으로도 서민 출신의 대통령이 탄생하게 됩니다. 1912년 보통 선거법이 제정되
고 1916년에는 최초의 서민 대통령인 이리고옌Hipólito Yrigoyen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됩니다. 즉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서 볼 때 아르헨티나의 뻬론과 페로니즘의 등장은 한 개인
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인 축척의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자연스
러운 결과물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뻬론의 정식이름은


후안 도밍고 뻬론(Juan Domingo Perón)입니다. 뻬론은 아버지의 성姓이고 후안이 이름이
고 도밍고는 엄마의 성입니다. 그는 1895년생인데 죽은 년도가 1974년으로 한국 나이로
80세까지 산 거니 나름 장수를 한 셈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사실 좀 남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대통령이 된 사람이니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남다른 면을 보였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원주민이었
다는 사실이 좀 특이합니다. 보통 그 당시에는 아르헨티나의 정치, 사회적인 특성과 원주민
엄마와 백인 아버지와의 결합은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인거죠. 정식결혼에서 생겨난 아이가
아니다 보니 9살의 어린 나이에 엄마를 떠나 그의 출신 성분을 숨긴 체 아버지 집에서 자
라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부분에서 어린 뻬론의 마음고생도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
입니다.
그리던 뻬론은 16살의 나이에 아르헨티나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군인
으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합니다. 사실 이러한 그의 출생과 관련한 배경으로 인하여 그가 엘
리트나 주류보다는 비주류와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들에 관한 관심과 배려를 키우게 되
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여간 그렇게 군인으로 승승장구하던 그가 1943년 군사 쿠데타에
참여하며 군인에서 정치가로 변화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 에비타를 만나게 되고 정치적으
로도 승승장구하면서 노동부 장관을 거쳐 1944년부터 ~ 1946년까지 부통령을 그리고 결국
에는 1946년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반뻬론주의 군인들의 쿠데타에
의해 1955년 축출되어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여 1973년에 다시 대통령이 됩
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는 오늘날 아르헨티나라고 하는 나라에서 정치적인 가장 중요
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이 됩니다.
에비타는 뻬론 대통령의 부인으로 퍼스트레이디였지만 단순히 거기에 그치지 않습
니다. 실질, 상징적인 정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아르헨티나 불멸의 역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본명은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 뻬론María Eva Duarte de Perón
으로 1919년에 태어나 1952년에 33세라는 짧은 인생을 불꽃같이 살다간 사람이지요. 앞에
서 설명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을 지낸 후안 뻬론의 두 번째 부인으로, 일반적으로 그녀의
이름 에바의 에칭인 에비타Evita라고 불립니다. 그녀는 남편인 뻬론만큼이나 출생과 성장
과정에서 많은 아픔을 겪습니다. 본처가 아닌 유부남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에비타는 정식으
로 아버지의 딸로서 인정을 받을 수 없었고 첩의 딸이라고 하는 열등감과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하여 소위 무작정 상경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행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파란만
장한 인생이 펼쳐지게 됩니다. 수도에 도착한 그녀는 모델, 영화배우, 성우와 같은 연예계
일에 종사하며 그 방면에서 사회성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후안 뻬론이라는 정
치인을 만나게 되고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를 아르헨티나의 성녀로 만드
는 결정적인 사건이 됩니다.
이후 뻬론이 대통령 선거 유세를 하기 위하여 다니는 곳마다 같이 다니며 유세를
도왔고 그렇게 뻬론이 대통령이 되는 데에 큰 조력을 하게 됩니다. 뻬론이 대통령이 되고서
도 그녀는 단순히 영부인으로서 남편을 보조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자기 생각을 실천하는 적
극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회활동에 힘써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운동을 진보적으로
펼치게 됩니다. 특히 여성, 장애인, 어린이, 노약자 등과 같은 사회 취약계층을 위한 복지에
큰 노력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녀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됩니다. 대통령인 뻬론과
함께 영부인의 자격으로 유럽을 순방할 때조차 그의 대통령 남편보다도 더 큰 유명세를 치
릅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신여성으로서의 활약 등도 한몫을 했습니다.
그녀는 에바 뻬론 재단을 만들어서 사회취약계층을 위한 사업을 펼칩니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1950년 그러니까 그의 남편인 뻬론이 대통
령이 되고 4년이 지나 이제 막 그녀의 활동이 무르익을 무렵 자궁암 진단을 받고 투병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1952년 7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맙니다. 그녀를 애도하는
물결은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수많은 곳에서 긴 행렬을 만듭니다. 그녀는 살아생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쳐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인 여자들, 노인과 가난한 노동자와 같
은 사람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데에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엘리트나 부자들과
같은 사회 기득권세력과 척지게 됩니다. 에비타에 대한 평가를 보면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회 저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성녀로
그리고 기득권 엘리트들에게는 창녀로 불리곤 합니다.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정치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뻬론주의를 빼놓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이미 앞에서 습니다. 이 뻬론주의는 아르헨티나 좌파의 진보적 정치성
향을 집약적으로 설명할 때 유용합니다. 아르헨티나 좌파 맥락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1951년 에비타가 죽고 1955년에는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뻬론마저 망명길에 오릅
니다. 그러나 뻬론과 에비타가 가진 강력한 대중적인 기반은 아르헨티나 좌파의 아이콘이되
어 진보 정치운동을 집결하게 만듭니다. 결국 18년간 긴 군사독재와 혼란의 시간에도 불구
하고 아르헨티나 국민은 다시 뻬론을 대통령에 앉힙니다. 1973년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일 년 만에 병으로 사망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와 그의 부인이었던 에비타에
대한 지지는 뻬론의 재혼 부인인 이사벨 뻬론에게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뻬론이 1973년
부터 1974년까지 그리고 이사벨 뻬론이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대통령을 하게 됩니다. 뻬
론과 뻬론으로 대표되는 아르헨티나 좌파가 정점을 찍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군사독재의 망령이 다시 덮쳐옵니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고 이사벨 뻬론
은 하야합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군부 통치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게 칠년간의 군사
독재를 경험하며 영국과의 전쟁을 치르는 등 국력은 쇠잔해지고 다시 민간정부로 전환됩니
다. 그리고 등장한 인물이 1989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어 10여년간 집권한 뻬론 당의 까르로
스 메넴Carlos Menem입니다. 그는 뻬론의 후예라는 수식어가 붙는 사람으로, 뻬론을 쿠데
타로 몰아낸 군사정권에 저항하다 감옥살이와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 정치적 안정과 경제 발전을 이루어 94년 8월의 개헌을 통해 재선되어 99년까지 대통령
직을 수행합니다. 이후 뻬론이즘이 잠시 주춤하는가 합니다만 실제로 내용을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99년 10월 24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연합 데 라 루아(De
la Rua) 49%, 뻬론당 두알데 후보 38% 로 야당이 승리를 하게 되는데 이 야당도 사회민주
주의 성향의 정당으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소속인 정당이다. 즉 진보 성향의 정당으로 페
로니즘과 맥락을 같이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한편 대통령 선거에서는 졌지만 뻬론당은 상
원의원 선거에서 35석을 차지함으로서 여당 연합 21석, 기타 16석을 차지한 상황과 비교해
볼 때 뻬론당과 뻬론이즘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여전히 건제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
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뻬론과 에비타로 대표되는 정
당이 이러한 역사 과정에서 아르헨티나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축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어서입니다. 이렇게 페로니즘은 2001년 이후 다시 정권을 잡아 2015년~2019년 사이의
4년을 제외하면 아르헨티나의 집권 여당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즉 그만
큼 아르헨티나의 정치에서 뻬론과 에비타는 여러 가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오는 것은 사실
이지만 가장 사랑받는, 가장 지지받는 정치적인 인물이라고 하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
니다. 즉 우리가 아르헨티나에 가서 만나게 되는 아르헨티나 사람 중에 최소 반 정도는 뻬
론과 에비타의 정책이 무책임한 대중영합주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
라에서 포풀리즘을 이야기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아르헨티나의 페로니즘은 사실 실체가 그
런 것도 아닐뿐더러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정치적 대안이라는 점을 강조하
고 싶습니다.

치미추리Chimichurri를 소스라고 해야 하나, 아님 뭐지? 어쨌든 양파와 희한한 풀


을 섞어서 만든 치미추리라는 양념을 곁들어서 먹는 아르헨티나의 고기 맛은 일품이다. 이
곳이 원래 목축으로 발전한 나라인데다가 그 무한한 빰빠Pampa를 보고 나서 그런지 고기
맛이 더욱 좋다. 오늘이 아르헨티나의 마지막 날이 되기를 빌면서 좀 사치스럽긴 하지만 고
기에 쌀밥까지 먹어야겠다. 웨이터가 뭘 곁들여서 먹겠냐고 묻는다. 나도 좀 호사스럽게 놈
들 하는 대로 한번 시켜볼 요량이다. 뿌레Puré가 있었는데 -그놈의 뿌레라는 감자 으깬 것
은 무슨 맛에 먹는지 이해가 안 가는지라- 폼을 잡고 고개를 저은 다음 그 옆에 있는 쌀밥
을 시켰다.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며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고 있는데 현 대통령인 키르츠네
르가 한 말이 에비따의 사진과 함께 들어가 있는 정치 포스터가 길 밖으로 보인다. 옳거니
하면서 나가 열심히 카메라로 찍었다. 거기에 나와 있는 말이 오늘날 중남미 좌파의 성격을
그대로 말해 주는 것 같아 인상 깊다.
"성장은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저는 정의롭지 못한 아르헨티나를 방관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함께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여기에 서 있습니
다. 우리 정부는 부의 분배에 관한 문제에서 중립 자세를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키르츠네
르(2003년 선출된 아르헨티나 대통령)

그림 17 키르츠네르Néstor Carlos Kirchner 대통령 당선사례

좌파 우파의 다름 또는 사회주의 신자유주의의 차이는 부의 근원에 대한 이해에 있


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입장, 기득권의 입장에서는 지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부가
정당한 것이기 때문에 이 부는 유지,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부가 또 다른 부를 창
출하도록 정부가 어떠한 제약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면 사회주의, 좌파, 키르츠네
르의 입장은 이러한 부가 꼭 개인에 의하여 창출된 것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한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창출하는 데 도움을 준 대중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 회사가 돈을 많이 벌었다면 사장 입장에서는 그거야 내가 경영을 잘해서 돈을 많이 번
것이니 노동자에게 월급을 조금 올려주는 정도야 가능하지만 모든 것은 내 것이라는 전제가
있는 것이다. 반면 후자의 입장은 사장이 경영을 잘한 면도 없지 않지만 결국 우리가 피땀
흘려 일을 열심히 한 덕택에 회사가 성장한 것이니 우리가 상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다.
서로가 조금씩 양보해서 타협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근본적 생각이 달
라서 분쟁이 끊임없다. 하다못해 세금 문제에서도 같은 평 수의 강남의 10억짜리 집을 가진
사람이 지방의 2억짜리 집과 비교하여 세금을 많이 내야 하느냐 마느냐도 큰 의견의 차이
로 나타난다. 이런 것도 결국 위에서 이야기한 근본적인 차이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중남미
에는 엄청난 부자들이, 10%의 상류층이 국가 부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이룬 부
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정당하다면 어디까지 정당한 것인가?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
자본은 이윤을 만들고 그 이윤은 다시 새로운 자본이 되는 선순환이 자본가들에게
존재하고, 없는 놈은 없어서 배우지도 못하고 자본의 부족으로 변변한 가게 하나 내기 힘들
다. 결국 없는 놈은 계속 없게 되는 악순환을 거듭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남미의 좌파인 키르츠네르가 부자들의 선순환과, 가난한자들의 악순환 고
리를 변화시켜 보겠다는 것이다. 이런 계획과 정책의 기조에는 부를 바라보는, 경제를 바라
보는 근본 철학이 존재한다. 16세기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을 철저히 착취하여 오늘날의 부의
배경이 되는 그들의 자본과 권력과 교육과 사회 구조를 만들었다. 그것의 부당함을 이제야
중남미의 좌파가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도 이러한 정치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사회 개혁의 목소
리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러한 계획과 철학의 가장 큰 걸림돌은 한
국이나 아르헨티나나 모두 국가의 정치 권력과 경제적 부와 사회적 신분을 가지고 있는 기
득권층이다. 이제까지 누리고 있던 그들의 독점적인 기득권을 양보하라는 정부가 들어섰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들을 보호해 주고 이권을 챙기던
미국도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외국과 자국 내의 기득권 세력의 반발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할 것이다.
키르츠네르는 최소한 위에서 소개한 포스터에서 보는 대로라면 부의 분배 문제에서
의지가 단호해 보인다. 과연 얼마나 철저히 이러한 의지를 관철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의
지로 기득권의 반격에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참으로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은 1971년 결국 ‘중립 자세’를 취하지 않은 바람에 미국이 비
호하는 삐노체뜨Augusto Pinochet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대통령 궁에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국민의 높은 참여와 희생으로 만든 니카라과의 민주화는 미국의 꼰뜨라Contra에
대한 지원으로 하루아침에 무산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조금 다르려나? 브라질과 아르헨티
나, 역사상 처음으로 좌파 성격의 정부를 출범시킨 우루과이, 혁명 이후 지금까지 못 먹더
라도 같이 못 먹고, 잘 먹더라도 같이 잘 먹는다는 부의 분배를 기치로 삼은 쿠바, 막대한
석유를 바탕으로 큰기침을 하는 베네수엘라의 좌파 정권 등이 같이 발을 맞추고 있다. 이제
는 나름대로 각국의 의지가 결연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적도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중과부적이라 할 만큼 기
득권은 5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패배하는 일 없이 그들의
권익을 잘 지켜오고 있다. 자, 이제 한판 붙을 차례다. 아주 쉽게 승부가 날지도 모른다. 아
니면 아주 지루한 전투가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무지렁이 가난뱅이
들의 저항은 계속 그 의미를 더해갈 것이다.
제13장 쿠바 혁명과 체 게바라

중요 연대
1902년 쿠바 독립
1901 ~ 1934년 실질적인 미국의 보호령
1934 ~ 1959년 바띠스따 정권
1956년 쿠바 혁명 시작
1959년 1월 1일 혁명군 승리
1961년 사회주의 선언
1979년 경제 붕괴, 쿠바 난민 미국에 상륙
1995년 외국인 직접 투자 유치

쿠바라고 하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독특한 나라라고 감히 이야기하고 싶을 정


도로 재미있는 나라입니다. 쿠바는 그렇게 큰 나라도 아니라서 전체 국토 면적 110,922평
방㎢로 한반도(99,500㎢)에 비해 약간 큰 섬나라입니다. 인구는 11,210,000명 정도로 우리
나라와 비교해 인구밀도는 상당히 낮습니다. 그런데 이 쿠바섬은 1492년 이전까지만 해도
별 독특한 것 없이 원주민들이 평화롭게 살던 곳이었는데, 유럽사람들이 침략을 한 1492년
부터 그야말로 천지개벽을 합니다. 일단 식민지 이후 지금까지 이어오는 역사를 통해 애당
초 이 섬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죽임을 당해 지금은 원주민들이 단 한 명도 살아남아 있지
않으니 이게 천지개벽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다른 것들의 변화도 엄청나겠지
요.
쿠바는 식민지 시대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스페인의 아
메리카 대륙 정복 전초기지로 1511년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부왕청이 만들어져 통치를 시
작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곳인 만큼 시련도 많이 겪습니다. 1500년대 중반부터 해적
들이 출몰하기 시작해서 급기야는 프랑스의 해적들이 부왕청이 있는 아바나를 봉쇄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그래도 쿠바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끝까지 지켜
내야 할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그렇게 쿠바를 지켜냅니다. 이곳에 대한 애정과 정성은 그
어떤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메리카 대륙 대부분 지역이 독립하거나
다른 나라의 손에 넘어가더라도 끝까지 쿠바만은 놓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1700년대가 시작되면서 담배라고 하는 새로운 작물이 들어와 중요한 생산품이 되
고 농업의 발달에 따른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하여 노예들이 대거 유입되게 됩니다. 세계와
의 교역 중심지로 발달하면서 전 세계 설탕의 3분의 1이 쿠바에서 생산될 정도로 사탕수수
농업이 발달합니다. 이때부터 미국과의 무역도 중요하게 됩니다. 당연히 지리적으로 가깝게
있으며 경제가 발전하면서 인구도 늘어나고 있는 나라인 미국과의 관계가 부상합니다.
1800년대를 넘어서면서 아메리카 대륙의 대부분 나라는 독립을 하는데 쿠바만큼은 스페인
이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곳이었고, 그렇게 쿠바는 스페인 지배를 이어갑니다.
1853년 미국이 쿠바를 매입하겠다고 제안을 해오기도 하였지만 스페인은 버팁니
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의 열망을 완전히 틀어막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미국은
쿠바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야욕을 키워갑니다. 급기야 1886-1878년 소위
야라선언Grito de Yara을 시발점으로 독립 투쟁이 시작되고, 1881년에는 쿠바 독립의 영웅
으로 칭송받는 호세 마르띠José Martí가 뉴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아갑니다.
여기에서 뉴욕이라고 하는 장소에서 쿠바의 독립운동이 펼쳐졌다고 하는 점이 중요
합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스페인이 지배하는 쿠바보다 독립된 쿠바 그렇지만 미국이 좌지
우지할 수 있는 쿠바가 훨씬 더 매력적이었을 테니 쿠바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 것
입니다. 결국 이러한 미국의 속내는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으로 귀결되게 됩니다. 1898년 -
미국 선박 메인호의 원인 모를 화재를 발단으로 미국과 스페인이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게
말이 좋아 원인 모를 화재이지 실질적으로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입니다. 미국
의 역사를 보면 배에 스스로 불을 질러 전쟁의 구실을 만들었던 스토리가 상당히 많습니다.
미국 독립의 역사에서 등장한 보스턴 차 사건이 그렇고 상대적으로 최근에는 베트
남과의 전쟁을 불러일으킨 통킹만 사건도 이와 유사하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하여간 미국은
이렇게 시작한 전쟁에서 스페인을 묵사발이 나도록 만들었고 스페인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
었던 현실은 참혹했습니다. 스페인은 필리핀, 쿠바, 괌,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빼앗기게 됩
니다. 그야말로 화려했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의 영광이 모두 잿더미가 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이 전쟁이 시작된 1898년을 상징해 소위 ‘98세대’ 라고 하
는 염세적인고 패배적인 문화적 성찰이 있습니다. 이때의 좌절이 얼마나 컸으면 문학 사조
가 됐을 정도인지 상상이 가시나요. 세계를 호령하던 한 나라가 이 때 철저히 몰락한 것입
니다.
스페인은 그렇다 치고 쿠바는 미국과 스페인 전쟁의 결과로 독립을 하게 되는데 이
후 1898-1902년 기간 동안 미국이 쿠바에서 군정을 실시합니다. 이후 1902년부터 미군이
철수하기는 하였지만 그 영향력이 사라진 것은 전혀 아닙니다. 쿠바섬의 일부인 관따나모
Guantánamo 지역을 미국에 넘겨주고 쿠바의 독자적인 국제 협약을 금지하는 플래트 수정
안이 쿠바 헌법에 명시되는 등 미국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1933년에는
바띠스따(Fulgencio Batista)가 구테타를 통해 정권을 잡아 친미 독재를 실시합니다.
바띠스따는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바나나 농장 노동자, 식당 종업원, 이발사를 거
친 무학의 군인 출신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 미국의 비호하에 지식인 탄압, 부패 만연, 보수
유산자 계급 옹호, 대학 폐쇄, 반대 세력 추방 등을 통해 정권을 공고히 해 나아가면 25년
넘게 장기 집권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빈부격차, 부의 독점, 부
정부패가 심화되면서 혁명이 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쿠바 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오르나요? 일반적으로 쿠바를 상징하는 여러 가지 이


미지가 있죠. 시거(Cigar)나 야구, 복싱 같은 스포츠도 떠오르고 피델 까스뜨로, 체 게바라
같은 인물들도 있습니다. 살사도 많이 알려진 것 같아요. 춤이나 음악 등도 쿠바에 대한 대
중적인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필자는 쿠바 하면 정열적인 리듬과 춤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
고 있는 쿠바 출신의 가수들도 많지요. 좀 지난 시절의 사람으로는 닐 세다카(Neil Sedaka)
를 비롯해 글로리아 에스테판(Gloria Estefan) 같은 가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쿠바가 춤이나 음악으로 알려지게 된 데에는 그 역사적 이유가 제법 깊습니
다. 쿠바가 음악과 향락의 메카가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1900년
대 초부터 쿠바 혁명 이전인 1958년까지, 이른바 미국에서 좀 논다, 돈 좀 있다 하는 사람
들이 모이는 곳이 쿠바의 수도 아바나Habana였습니다. 쿠바는 다른 라틴아메리카에 비해
늦은 시기인 1898년에 독립했습니다. 그나마도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결과 독
립을 하게 되었죠. 그러다 보니 당연히 미국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의존 정도가
엄청났습니다. 아바나에 각종 카지노가 생기고, 거의 미국의 작은 주처럼 되었습니다. 음악
이나 춤도 이때 많이 개발, 보급되었죠. 카지노와 해변이 있고 술과 돈이 넘쳐나는데 춤과
음악이 빠질 수 없잖아요. 아무튼 우리가 알고 있는 쿠바의 춤과 음악은 1900년대부터 우
리가 공부하려는 쿠바 혁명이 발발하기 이전까지의 기간에 걸쳐 상업적으로 발전한 것입니
다.
쿠바 혁명 이전의 상황을 좀 이해하시겠습니까? 쿠바 관광의 주 상대국, 아니 절대
고객인 미국에서 쿠바까지는 겨우 200킬로미터도 되지 않습니다. 한편 다른 산업도 절대적
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쿠바에서는 전 세계 생산량의 30%가 넘는 사탕수수가
생산되었고, 생산량 대부분이 미국으로 수출되었습니다. 그러니 친미 성격의 정부 이외에는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 외교 정책의 기조가 언제나 그렇듯이 친미 성격이면 그 정부
가 아무리 독재나 부정을 해도 이에 상관하지 않았죠. 오히려 미국의 비호하에 정권을 인정
받아야 독재나 부정 축재가 가능했습니다. 그것을 재빨리 알아챈 독재 정권들은 미국에게
충성했고, 그 대가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부패 정권을 인정받았습니다. 그 좋은 예
가 바로 쿠바 혁명 이전의 바띠스따Fulgencio Batista 정권입니다. 그리고 부패하고 무능했
지만 미국에게 절대 충성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해 가던 바띠스따 정권을 타도한 사건이 바로
쿠바 혁명입니다.
국가는 향락 산업으로 멍들어가고 농민들은 점점 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관광과
서비스 산업의 이익은 고스란히 미국 자본가의 손에 넘어가고 쿠바 국가 산업으로서의 원동
력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였습니다. 민중은 의존적인 경제의 한계로 희망 없는 사탕수수 농
업에 동원되었고 정부는 부패했으며 사회 전반에 걸친 부정의 고리는 민중의 삶을 파괴해
나갔습니다.

쿠바 혁명의 원인은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독립 이후 쿠바의 부정부패와 대내외적


인 종속, 엘리트 그룹에 집중된 부 그리고 이에 반하는 일반 민중들의 극한의 빈곤입니다.
한마디로 쿠바라고 하는 나라에는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세상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대다
수 민중의 지독한 가난과 그에 반하는 엘리트 세력의 지독한 부의 독점과 향락이 함께 공존
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혁명 시작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또한 혁명 성공의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혁명은 1953년 몽까다Moncada병영습격이라는 사건으로 구체화 되기 시작합니다.
1953년 7월 26일은 쿠바 독립의 영웅이자 민족주의의 상징인 호세 마르띠José Martí의 탄
생 10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이 상징적인 날을 디데이로 삼아 피델 까스뜨로Fidel
Castro는 친미 바띠스따 정권을 무너뜨리려 몽까다 병영을 습격하기에 이르지만 이내 잡혀
구금됩니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멕시코로 망명을 가게 됩니다. 그는 멕시코
에서도 쿠바 혁명의 꿈을 버리지 않습니다. 동지들을 규합하고 군사 훈련을 합니다. 그때
만난 동지 중에 쿠바 혁명의 상징이요 영웅인 체 게바라도 있습니다. 그렇게 멕시코에서 와
신상담 혁명을 준비한 까스뜨로의 조촐한 군대는 1956년 11월 25일 그란마Granma라고 하
는 허름한 배로 멕시코 베라끄루스에서 출항해서 쿠바를 향합니다.
근데 이 배가 원래는 12인승으로 만들어졌는데 여기게 80여 명의 사람이 탔으니
당시 혁명군의 열악한 상황이 짐작됩니다. 없는 돈에 간신히 사들인 낡고 작은 배에 형편없
는 장비를 가지고, 그렇지만 용기와 의욕으로 넘쳐난 군대는 결국 처음에 계획했던 곳이 아
닌 엉뚱한 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나마도 바띠스따 군대에 발각되어 상륙과 더불어 대부
분이 사살당하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합니다. 죽은 사람과 붙잡힌 사람을 제외하고 나니 처
음에 82명으로 시작한 혁명군은 12명만 남게 됩니다.
겨우 전열을 정비해서 씨에라 마에스뜨라Sierra Maestra라는 꾸바섬의 동쪽 끝에
있는 산맥에서 게릴라전을 시작합니다. 이듬해인 1957년 1월 16일을 기해 정부군의 요새를
기습하는 첫 군사작전을 펼칩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뉴욕타임즈는 피델 까스뜨로와의 인터
뷰 기사를 지면에 게재함으로써 쿠바혁명은 급속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200~300명 정도의 소규모 였지만 근처 주민들의 도움으로 세력과 힘을 키워갑니
다. 마치 우리나라 지리산 빨치산과 같은 그런 투쟁을 이어간 것이지요. 사탕수수밭에서 죽
어라 일하고도 인생의 그 어떤 희망도 느껴 볼 수 없었던 무지렁이 농민들의 지원과 동참에
힘입어 혁명은 나날이 힘을 얻어갑니다. 미국의 그 많은 지원과 협조에도 바띠스따 정권은
혁명의 열기를 꺾지 못합니다.
원래 혁명이란 일반 민중에서 시작된 것이고, 민중 그 자체이며, 역시 민중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특히 장기간에 걸친 게릴라전이 이
어진다고 한다면 게릴라의 처지에서는 일반 민중의 지지와 지원은 게릴라들 생존의 절대 관
건이자 전투 성공의 결정적 요인이 됩니다. 앞에서 말한 혁명이전의 사회, 정치, 경제 분위
기는 쿠바 혁명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기존의 부패한 친미 엘리트가 이끄는 바띠스따 정부군은 군사적으로 모든 유리
한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지만 민심이 완전히 돌아선 상태에서의 싸움은 결과가 뻔했습니
다. 세게 던진 공의 반동이 더욱 강력한 것처럼 바띠스따 정권이 부패한 만큼, 그리고 민중
이 고통받은 만큼 쿠바 혁명에 대한 민중들의 지원은 더욱 열렬했습니다. 적은 인원으로 보
잘것없이 무모하게 시작한 혁명은 활활 타오릅니다.

1959년 1월 1일을 기해 드디어 쿠바 혁명군이 아바나를 빼앗음으로써 혁명은 성공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점차 안정을 찾아 가지요. 외국 소유 농장들은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
자들에게 분배되고, 그렇게 혁명의 정신을 구현해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1960년에는 언론과
은행, 산업체를 국유화하고 주택을 징발하여 모든 국민의 기본적인 주거권을 보장합니다.
한편 교육의 국유화를 통해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의 차별 없이 모든 국민이 언제나 교육받
을 권리를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상황을 좋아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겠죠. 기존 바띠스따 정권의 엘리트 그
룹은 황당합니다. 그들은 돈이나 땅을 빼앗기거나 그냥 놔두고 미국의 마이애미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은 쿠바에 더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으며 미국의 자본가과 미국 정부의 이익이 상당 부분 훼손되는 상황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충격이요 아픔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잘 먹고 잘
살던 기존의 쿠바 기득권층도 정말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미국이나 쿠바의 기득권 세력은 쿠바를 자신들의 반대 세력에게 고스란히 넘겨줄
수 없었습니다. 미국 마이애미로 도망 나온 쿠바 엘리트들과 그들의 일당이 선봉에 서서 미
국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다시 쿠바에 쳐들어갑니다. 물론 미국은 자신들이 직접 개입한 것
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고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증거들로 볼 때 미국 정부는 직간접적
으로 쿠바 공격을 시도합니다. 이것이 피그만 공격Invasión de bahía de Cochinos 혹은 히
론 전투La Batalla de Girón라고 알려진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3일이 가지 못해
끝이납니다. 대부분의 반혁명 침입자들은 죽거나 붙잡히게 됩니다. 쿠바 민중의 의연한 저
항 앞에 모두 허사가 되고 맙니다.
쿠바 혁명정부는 사회주의 개혁을 이어나갑니다. 1972년 구 소련의 지원으로 사회
주의 국가 경제 협력체인 COMECON에 가입하는 한편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진 혁명을 지
향하였던 앙골라에 1976년에서부터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기에 이릅니다. 즉 세계 사회주의
의 수호자로서 전 세계에 자신들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내
부적으로는 개인 평균 수명이 선진국수준으로 올라가고,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교육의 질이 담보되는 한편 국가 스포츠는 활성화 되는 등 새로운 사회가 열리게 됩니다.
출생자 1,000명에 대한 생후 1년 미만의 사망자 수를 나타내어 국가의 발전 정도를 가늠하
는 영․유아사망률에 있어서 쿠바가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치를 보입니다. 볼리
비아의 경우 60명, 페루는 40명인데 반해 쿠바의 경우는 7명으로 수치에서만 보더라도 가
히 기적과 같은 이상국가가 탄생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몇 차례에 걸친 우여곡절과 과도기를 거치면서 쿠바는 구소련과 손을 잡고 안
정된 사회주의 정권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킵니다. 민중이 주도한 국가 전체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성공을 거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쿠바라는
국가의 모든 것을 뒤바꾼 그야말로 ‘혁명’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몇백 년간을, 특히 쿠바의
경우 노예로 팔려 온 흑인들은 바꿀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이 사회적인 신분과 경제적인 바닥
생활을 당연한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혁명의 성공과 더불
어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수직적인 착취 구조가 사라졌습니다.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
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죠.
그러나 구 소련의 몰락과 더불어 쿠바의 경제도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미국의 지
속적인 경제압박은 사회주의 경제블록의 쇠퇴와 더불어 쿠바의 국가 경제뿐만 아니라 개인
경제 마져도 추락시킵니다. 그들이 내세웠던 모든 국민이 풍요롭고 행복한 나라는 이렇게
붕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생겨납니다. 1979-1980년에는 쿠바에서 출발한
125,000명의 보트피플이 미국에 상륙하는가 하면 같은 해인 1980년에만도 1만 명의 쿠바
인이 페루로 망명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혼란을 거듭하며 금방이라도 붕괴 돨 것 같던 쿠
바는 내적으로 모두 다 같이 먹고, 모두 다 같이 교육받으며 건강할 권리가 있다는 이상을
굽히지 않고 유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씁니다.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도시생태 농업을
실시하는 한편 외국인의 투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골자로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조금씩 받아
들이기 시작합니다. 즉 국가의 기본적인 틀은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고립된 사회주의 경제
에 활력을 주기 위해 자본주의적 요소를 과감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실험을 단행하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제한적인 시도가 과연 어떤 결론으로 이어질지는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
습니다. 21세기를 맞으며 외국인 투자가 늘고 관광이 활성화되는 한편 자본주의 경제가 큰
무리없이 이식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쿠바 혁명의 의의와 가치는 독재 정부의 붕괴와 쿠바 민중의 승리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국내외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는데 내부에서는 빈부격차가 극심하던 사회
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드는, 모든 것을 다 바꾸는 개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필자는 외부
의 변화에도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쿠바 혁명을 지켜본 주변 나라들은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요? 멕시코, 아르헨티나, 니카라과의 사람들이 쿠바 혁명의 성공을 보면서 어떤 생
각들을 했을까요? 잘 사는 사람들은 “아이고, 무서워라. 우리나라도 저 무식한 노동자, 농민
들이 저런 식으로 혁명하면 어쩌나” 하고 겁을 먹었을 테고, 민중들은 “야! 대단하다! 저들
이 해냈구나! 저렇게 하면 우리도 차별받지 않고 모두가 동등하게 살 수 있구나. 신분의 귀
천에 따라, 피부 색깔에 따라, 엄청난 기득권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눈 역사의 굴레
를 깰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했겠죠. 안 그렇겠습니까! 지금까지 500년이 다 되는 기간 노
예나 하인처럼 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세상의 주인이 되는 모습을 보았는데요.
우리나라의 동학이나 천주교의 전파, 활빈당이나 정여립의 대동계 등도 이와 같은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은 귀천이 없다. 우리는 왜 항상 굶어 죽고 저 사람들은 항상
배터지게 먹고 방귀만 뀌냐. 이건 잘못된 거다.” 이런 생각으로 시작한 혁명이 성공해서 이
제까지 머슴 살던 사람이 양반과 똑같이 먹고 똑같은 대우를 받는 사회가 이웃 나라에서 생
겨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빨리 퍼졌겠습니까. 라틴아메리카는 서로 같은 말을 쓰
지요, 게다가 원래 국경의 개념도 다른 곳에 비하여 약할 수 있죠, 서로 문화면에서도 같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소식과 분위기가 얼마나 급속도로 전파되었겠습니까? 전체 라틴아
메리카 사회에 말입니다. 쿠바 혁명은 결과적으로 라틴아메리카 게릴라 운동의 시발점이 되
었습니다.
앞에서 멕시코 혁명이 보수적으로 끝났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혁명의 정신이
여러 면에서 헌법에도 반영되고, 국가 통치 이념에도 반영되었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사회 전체를 바꾸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도 사회주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멕시코 혁명을 중단된 혁명Revolución interrumpida,
계속 진행되고 있는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실패라는 거지요.
에비따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정치적으로 제도권 내에서 라틴아메리카 500여 년의
불평등과 착취의 관계를 해결해 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실패로 그치고 말았
습니다. 다른 나라들이라고 왜 이러한 노력과 저항을 안 했겠습니까. 많은 시도가 있었습니
다. 교육을 통한, 정치를 통한, 경제를 통한 혁명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
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곳에서도 이제까지의 그 지긋지긋한 모순을 타파한 적이 없었습
니다. 그런데 쿠바에서 훌륭하게 모든 기득권을 무너트리고 민중이 승리한 것입니다. 게다
가 그에 그치지 않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대졸자의 수가 가장 많고, 문맹자의 수가 가장 적고, 국민 의료 보험 제도가 가장
잘 되어 있고, 국민 스포츠가 발전하는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한 것입니다. 바로
혁명을 통해서 말입니다. 까스뜨로와 체 게바라가 홍길동이 되어 부패한 양반을 때려잡고
모든 사람이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든 것입니다. 물론 새로운 소련에 대한 종속과 같은 내면
의 문제점과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모든 국민이 높은 생활의 질을 가진
이상적인 국가가 기존의 라틴아메리카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쿠바 혁명의 가장 중요한 의미이고, 이러한 점이 주변 라틴아메리카에 미친 파장
은 엄청났으리라는 점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쿠바 혁명을 얘기할 때면 가슴이 벅찹니다. 필자가 좀 무늬만 빨갱이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참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필자만 그렇게 생각
하는 게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체 게바라 관련 책이 팔리는 거 아니겠어요? 영화로 치면 이
부분이 극적인 클라이맥스에 해당합니다. 학교는커녕 굶어 죽는 자식들을 속수무책으로 봐
오던 깜둥이 쿠바 아저씨의 아들이 대학을 나와 자랑스럽게 정부의 관리가 되는 사회가 만
들어진 것입니다.

피델 까스뜨로(1926년 ~ 2016년)는 미국의 쿠바에 대한 영향력이 극대화되던 시


기인 1920년대에 태어났습니다. 전형적인 중산층 집안으로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에서 이주해 와서 쿠바의 독립을 위해 투쟁도 하였고 이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
며 많은 자식을 낳았는데 그 중에 한명이 피델까스뜨로 였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종교를 거
부한다던가 기숙학교에서 퇴학을 당하는 등의 저항적인 기질을 보여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운동하기 좋아하고 공부는 뒷전인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법률에 대한 열정을 발견하
게 되어 법학 공부를 하겠다고 아바나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결국 1945년 아바나 대학
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됩니다. 그런데 그의 저항적이고 사회비판적인 기질이 대학을 다닐
때도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대학 재학 때에도 여러 가지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
게 됩니다. 1947년에는 이웃 국가인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독재자 트루히요가 민중들을 탄
압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를 타도하겠다고 직접 참여한 일도 있을 정도입니다. 1948년 콜
롬비아 보고타에서 발생한 도시 폭동 사건에 개입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청년 피델은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그리고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키워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자기가 살고있는 쿠바의 현실에 주목
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결국 그는 거사를 계획합니다. 그게 그 유명한 몽까다 병영 습격
사건입니다. 쿠바 혁명의 상징적인 시작을 알리는 계기로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사건이지요.
1953년 7월 뜻을 같이 하는 동지 156명과 함께 쿠바의 산티아고에 있는 군사 시설인 몬카
다 병영을 습격합니다. 그러나 혈기 왕성함 만으로 무장한 그들의 계획은 좌절하게 됩니다.
결국 피델은 실패하고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그러나 대 내외적인 민주화 분
위기에 힘입어 1955년 특사로 풀려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쿠바에 있으면 당시의 정치
적인 분위기나 치안 상황으로 볼 때 언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옆 나
라인 멕시코로 망명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다시 사람들을 모아 다시 쿠바에 들어
가 무장투쟁을 할 준비를 합니다. 그렇게 그는 혁명 준비과정을 거쳐 앞에서 본 것과 같은
혁명을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1959년 바티스따 정권을 무너뜨리고 총리가 되었고 피델 스
타일의 정치, 사회, 경제 개혁을 단행하며 죽기 전까지 쿠바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인 영향
력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생전 그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이기도 했으며 역시 가
장 비판받는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서방국가들은 그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
회주의 국가나 사회주의적 신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존경받는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암살 위협도 항상 노출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여러 차례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체 게바라(1928~1967) 라고 하는 인물은 21세기 들어 소위 포스트모던적인 정치


와 사회 문화 대안들이 더욱 주목받으면서 우리들에게 더욱 친숙하게 다가선 인물입니다.
농담 반 진담 반 이기는 하지만 일단 잘 생겨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아무리 잘생
겼더라도 어디 그거 하나 가지고 그렇게 유명해질 수 있는건 아니겠지요. 하여간 잘생긴 것
은 덤이고 그의 생각과 그 생각을 가지고 했던 행동이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체게바라’ 혹은 중남미 사람들은 간단하게 애칭으로 ‘체’라고도 부
르는 그의 본명은 에르네스또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로 1928
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의 중류 가정에서 5남매 중 맏
아들로 태어났는데 뭐 그렇게 건강하고 특출난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병치레가 잦
아 천식을 앓았으나 운동을 좋아했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1953년도에 아르헨티나의 의과대
학을 졸업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의사가 된 셈이지요. 젊은 시절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많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경험이 바탕이 되어 민중들의 고난한 삶
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 것으로 보입니
다.
결국 그는 당시의 모순된 세상의 문제를 행동으로 바로잡아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
고 중미의 작은 나라 과테말라에 가서 첫 현실 참여를 시작합니다. 당시의 과테말라는 하코
보 아르벤스Jacobo Árbenz라는 대통령에 의하여 가난하고 핍박받는 민중을 위한 정치운동
이 시도되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는 농지개혁과 같은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미국
소유의 대농장을 국유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정권이 미국의 국익에 저해
된다고 생각해 갖은 압박을 가해 결국은 아르벤스를 하야시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인간적
인 사람을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에 동참하고 싶었던 체 게바라도 설 자리를 잃습니다.
그리고는 멕시코로 가게 됩니다.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위해서는 더 구체적이고 계획적으로 투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핍박받는 사람들이 해방되는데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리고 기득권
세력은 결국 양보하거나 타협하기 힘든 장애물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 계기도 됩니다. 즉
과테말라의 정의로운 정부가 무력에 의하여, 기득권의 탐욕에 의하여 무참하게 짓밟히는 모
습을 무기력하게 보면서 청년 체 게바라는 무장 혁명은 필연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일 테
지요.
그리고 멕시코에서 쿠바를 등지고 망명해 온 피델 까스뜨로와 그의 동생 라울 까스
뜨로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들과 함께 쿠바 혁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지
요. 초기 전투에서 부상을 입는 등 많은 역경이 있었지만 그는 까스뜨로가 가장 신뢰하는
동료 중 한 명이 되어 혁명의 성공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원래 아르헨티나 국
적이었던 그가 혁명 성공 이후 쿠바 시민이 되었고 쿠바 국립은행 총재와 산업부 장관을 역
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정된 쿠바 생활은 그의 가슴속에 불타고 있던 열정을 완전히 끄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핍박받는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좀 더 구체
적인 것을 하고 싶다는 그의 열망은 또 다른 세계에 눈을 돌리게 만듭니다. 그렇게 그는 안
정되고 행복할 수 있는 생활을 박차고 1965년 다른 쿠바의 혁명가들과 함께 아프리카 콩고
에서 민중의 해방을 원하는 혁명 세력을 도와 내전에 참전합니다. 이 세상에 핍박받는 사람
들이 단 한 명도 없을 그 날까지 투쟁하겠다는 그의 생각은 어처구니없는 극단적 이상이지
만 그러한 일을 실현하고자 스스로 편안함과 명예를 모두 뒤로하고 목숨을 바쳐가며 투쟁한
다는 것이 가히 인간으로서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는 그렇게 그의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1966년 가을에는 콩고에서 반란군 교육을 하고 이후 볼리비아로 갑니다. 그곳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여 지휘했습니다. 그의 쿠바 혁명에서의 경험을 살려 민중 게릴라들을
교육하고 지휘한 것입니다. 그러나 볼리비아의 상황은 아직 혁명이 충분히 그 열매를 맺기
에 시기상조였던 것 같습니다. 결국 1967년 10월 8일 미국이 특별히 신경을 써서 지원하는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하여 체 게바라의 부대는 괴멸되었습니다. 그는 다치고 사로잡히게 됩
니다. 그때 그가 한 말이 다음과 같이 남아있습니다.
“너가 나를 죽이려고 온 것을 난 알고 있어. 어서 쏴! 겁쟁이야! 너는 오늘 그저 한 사람을
죽일 뿐이야 ... 다른 누군가가 내 총을 들고 계속해서 혁명을 이어간다면, 나는 이렇게 죽
어도 그만이야.”
그렇게 그는 40세의 나이에 가난하고 핍박받는 민초가 단 한 명도 없는 세상을 꿈
꾸며 숨을 거둡니다.
제14장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과 삐노체뜨의 쿠데타

중요 연대
1800년대 100여 년 동안 정치적인 안정기가 계속됨
1879 ~ 1983년 태평양 전쟁, 볼리비아+페루 vs 칠레: 칠레 승리⇒경제 발전
1970년 아옌데 사회주의 집권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아옌데 사망, 삐노체뜨 독재시작
1989년 삐노체뜨 하야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정치, 사회, 경제적인 극단적 상하관계로 요약되는


1492년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것이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면,
같은 모순을 선거로 바꾸어 보려는 이상적인 시도가 칠레에서 있었습니다. 아옌데Salvador
Allende의 공산당 정권이 바로 그것입니다. 공산당이란 말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모두 다
같이 공평하게 산다”는 뜻으로 간단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이제까지 “나는 주인 너는 하인, 나는 윗사람 너는 아랫사람, 나는
사장 너는 종업원”, 이렇게 수직적이던 이분법을 극복하여 다 같이 공평하고 정의롭게 살자
는 이상을 실현해 보고자 했던 아옌데와 그 아옌데를 국민 투표로 뽑아준 칠레 사람들의 투
쟁 과정과 그 좌절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쿠바에서는 피델 까스뜨로나 체 게바라 같은
사람들이 죽어도 바뀌지 않는 국내 기득권 엘리트 세력 그리고 미국의 야욕을 타도하기 위
하여 총을 들고 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앞에서 본 멕시코 혁명도 같
은 맥락이지요.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에서 모두 그런 피를 흘리는 방법만을 선택한 것은 아
닙니다. 사실 혁명이나 무력투쟁과 같은 방법은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다양한 방법의 시
도를 해본 이후에 그야말로 죽기 일보 직전의 최후 선택이 바로 무력에 의한 방법이었던 것
이지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칠레 같은 나라는 축복받았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
가 공부하려는 아옌데 정권 시절 투표라는 합법적 방식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권
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꿈의 정부는 미국과 보수 엘리트에 의해 주도된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무참히 짓밟힙니다. 이러한 배경과 과정을 이번 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
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에서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면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잘 사는


나라로 많은 사람이 칠레를 꼽습니다. 중남미에 별로 관심이 없는 분들 처지에서는 페루나
칠레나 볼리비아나 그 옆에 있는 파라과이나 다 거기서 거기, 고만고만한 나라라고 생각하
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여러 가지 지표를 따져보거나 개괄적인 정보를 살펴보아도
칠레가 주변의 다른 나라에 비하여 매우 안정되고 발전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남미 현지에 가서 국경을 넘어 다니다 보면 이러한 점을 매우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육
로로 국경을 건너가면 경찰들의 옷차림에서부터 분위기가 다릅니다. 물론 선입견을 갖고 있
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탓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필자가 결코 과장하는 게 아니라는 걸
해당 당사국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군사력도 강해서 주변 국가인
페루나 볼리비아, 아르헨티나까지 칠레랑 싸움해서 이겨본 나라가 하나도 없어요. 정부와
공직자의 부패 지수에서도 칠레는 세계의 선진국 수준에 도달해 있습니다. 그래서 칠레를
남미의 양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 정도로 칠레는 남미에서 나름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미국이 멕시코 영토의 반을 빼앗아 간 역사가 기억나시죠? 알라모 전투, 텍사스의
독립, 미국 해병대의 멕시코시티 점령 등의 일련의 역사적인 사건의 시리즈를 통해서 미국
이 멕시코의 현 영토보다도 더 많은 땅을 미국 땅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앞에서 이미 공부하
였습니다. 이런 것을 보노라면 국제 질서란 역시 힘 있는 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부서지고,
합리화되고 뭐 그런 거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남미 칠레와 주변 국가의 역사에
서도 이런 현실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볼리비아와 페루는 이미 100여 년 전에 그들 영토의
상당 부분을 칠레에 빼앗깁니다. 볼리비아는 원래 바다를 끼고 있던 나라였는데 칠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지금은 바다가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현재 볼리비아에도 해군
이 있는데 훈련을 내륙에 있는 띠띠까까 호수Lago de Titicaca에서 합니다. 볼리비아의 해
군 본부는 해발 4,000미터에 있습니다. 희한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아무튼 넓은 호
수에서 카누를 타고 훈련을 하는 해군 본부의 벽에는 ‘우리의 바다를 되찾자’Recuperemos
Nuestro Mar라는 구호가 걸려 있습니다.
영토를 빼앗긴 나라의 서러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추끼까
마따Chuquicamata라는 노천 구리 광산도 원래는 볼리비아의 영토였는데 1800년대 말에
칠레에 빼앗겼습니다. 칠레가 빼앗은 땅은 광산이나 초석 등으로 칠레, 아니 세계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했었고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칠레와 직접 전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19세기를 전후하여 발생한 국경
분쟁으로 현재의 파타고니아 땅을 빼앗겼습니다. 아르헨티나 경찰과 칠레 경찰이 전투를 벌
여 아르헨티나 쪽만 여러 명 죽은 사건도 있었습니다. 또한 아르헨티나와 영국이 싸운 말비
나스 전쟁(포클랜드 전쟁)에서는 칠레가 아르헨티나와 인접해 있는 칠레의 군사기지인 뿐따
아레나스Punta Arenas를 빌려줌으로써 영국이 승리하고 아르헨티나가 패배하는 데에 중요
한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마치 칠레 사람들이 죽일 놈처럼 표현되는 것 같아 좀 그
렇군요. 아무튼 칠레가 주변의 남미 국가와 비교하여 정치, 경제, 군사 면에서 훨씬 안정되
었고, 그 안정을 바탕으로 사회 경제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정치면에서도 꽤 일찍부터 앞섰
다는 점을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칠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이곳은 옛날에는 별 중요한 곳도 아니었


고 변방에 불과한 땅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변방은 소위 별 볼 일 없는 곳이었다는
것이지요. 항시 중심은 돈 많은 곳이고 변방은 별 볼 일 없는 싸구려니까요. 그렇게 중심과
변방, 즉 비싼 금싸라기 땅과 평당가격이 몇 푼 안 되는 땅이 구분되는 시기가 아메리카 대
륙에서 언제부터 나뉘었냐 하면 바로 1492년 이후가 되겠습니다. 즉 식민지 시대에 들어와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인들이 침략을 하면서 유럽인들이 더 좋아하고 더 많이 사는 곳은 그
야말로 좋은, 비싼 곳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곳은 별 볼 일 없는 땅이 되는 것이지요.
하여간 그래서 이곳 칠레는 그런 식으로 본다면 식민지 시대에는 인기가 높지 않은
변방이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칠레 북부지방의 대부분 땅은 사막으로 인간이 살기
가 힘들고 그 반대편인 남쪽도 남극대륙과 맞닿아 있어 상당 지역은 혹독한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사람이 살기 힘든 곳입니다. 기껏해야 중부지방 그러니까 칠레의 수도가 있는 산띠
아고Santiago de Chile와 그 주변 지역만이 인간이 살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렇다 보니 이런 멀기도 하고 대단한 금이나 은이 나는 것도 아니며 원주민 노동력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이 아주 넓은 것도 아닌 이 지역에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
자들은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가졌던 것이지요. 애당초 이곳에 스페인의 행정력이 미친것도
상대적으로 늦어서 1557년부터 페루 부왕령副王領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스페인의 통치하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나라들과 비슷한 시기인 1800년대 초에 유사한
식민지지배에 대한 불만 축적 특히 경제적인 이권에서 스페인 분국과의 이해 충돌이 원인이
되어 혼란의 과정을 거쳐 독립하게 됩니다.
여기에 독립의 두 영웅이 등장하게 되는데 오이긴스Bernardo O'Higgins는 칠레
지역 사람으로 독립을 이끈 사람이고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은 이후 그와 손잡고
독립을 완수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독립 초기에는 중남미 대다수 나
라가 그러하듯이 혼란과 갈등이 거듭되었지만 내전을 수습하고 국가의 기반이 되는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정치적인 안정과 발전을 이루는 초석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후 전 세계의 공
업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발견된 구리와 초석硝石은 칠레의 경제 발전을 이
끌게 됩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경제적인 이권을 늘리려는 칠레의 야욕은 주변 국가와의 이
해관계에서 갈등을 빚게 되고 급기야는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그렇지만 볼리비아·페루를 상
대로 한 태평양전쟁Guerra del Pacífico(1879∼83)에서 칠레가 승리함으로써 주요한 초석
광산을 획득하여 잘나가는 국가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이어서 칠레는 구리와 광업을 중심으로 서구열강 이권 다툼의 중심에 놓이게 됩니
다. 주로 영국과 미국이 광산업에 진출하여 칠레의 정치에 감 놔라, 대추 놔라 참견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칠레는 칠레대로 이 중요한 자원 주권을 외국에 넘길 수 없다는 좌파 정
부도 한 축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왼쪽과 오른쪽, 반외세정권과 친외세정권이 공방전
을 벌이게 됩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사회주의 급진 정당들이 집권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좌우가 격돌을 벌이는 양상을 벌이다가 어찌 보면 급진 좌파의 총화라고도 할
수 있는, 우리가 이번 장에서 주로 살펴보고 있는 아옌데 정권이 탄생합니다. 1970년의 일
입니다.

칠레는 주변의 다른 어떤 나라에 비해 잘 살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었다. 그렇다면


아르헨티나나 멕시코, 페루 등과는 뭐가 달라도 좀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악령과도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모순인 빈부격차, 쿠데타, 암살, 독재의 전통을 이들도 고스란히 가지
고 있습니다.
공산당이 지구상에서 최초로 합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지금 우리가 공부하려는 아옌데 정권입니다. 경이로운 일이지요. 물론 보수 색채의 가톨릭
당과 공조한 것이 큰 역할을 했지만, 아옌데 대통령은 사회주의적인 사상을 국가의 기본 통
치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당연히 미국이 중심이 된 외국의 독점 자본 등이 가만히 있지 않
았죠. 국유화 등으로 자국 이익의 중요한 부분을 상실하게 되고 주변 국가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한 미국으로서는 자신의 앞마당과 같은 남미 국가에 미국의 이익에 비협조적인
공산당이 유지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상 아옌데 정권이 공산당이라고는 하지만 혼합경제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우리
가 생각하는 철저한 국가 주도적 공산사회를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가 기간 산업인 구
리광산이나 금융 등과 같은 분야만 국가가 주도하고 기타 산업 분야에 있어서는 자본주의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언론과 노조 등을 매수하여 반정부 활동을 벌이
는 한편 칠레의 주요 산업인 구리 산업을 위축시키는 방법으로 그들이 싫어하는 아옌데 정
권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경제가 나빠지고 공약 이행이 어렵게 되면 많은 국민이 이 사회주
의 정권에서 등을 돌릴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칠레 국민은 이러한 미국의 전
방위적인 계략에 굴복하지 않고 그들이 직접 손으로 뽑은 아옌데 정권에 대한 지지를 멈추
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미국은 삐노체뜨라는 인물을 내세워 군사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아옌데
는 반란군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대통령궁에서 자살을 하기에 이릅니다. 수십 년이 지난 이
후 공개된 미국의 비밀문서에서 삐노체뜨의 쿠데타가 미국의 지원,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
는 증거들이 나왔습니다. 이제는 칠레 군사 쿠데타의 배후가 미국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아니, 배후라는 말보다 좀 다른 말이 필요할 것 같군요. 계획, 지시, 협력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이 사건을 주도하였으니 말입니다. 한 마디로 미국이 없었다면 이러
한 일이 일어날 수도, 성공할 수도 없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가 갖고 있던 사회적 정치적 모순도 적었고, 그래서 여러 면에서 안정
을 이룰 수 있었던 칠레, 그걸 바탕으로 분배의 문제, 즉 빈부 격차의 문제를 제도권의 틀
안에서 변화시킬 수 있었는데 그 기회가 미국에 의하여 무참하게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중남미 정치 불안정의 원인을 각 해당 국가의 문제로 돌립니다. 당연히
국가와 국민 스스로 책임과 문제의식을 느껴야 하겠죠.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으니 말입니
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 실패의 주원인은 미국에 있습니다. 미국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기만
하면 독재 정부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고 묵인하는가 하면,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정권의 경우, 그것이 아무리 합법적이고 이상적인 분위기에서 국민의 공감을 통해 민주적
방식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가만히 놔두지를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그리고 유일
한 가치 기준은 미국의 이익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국만 그런 것은 아니지요. 아무튼
라틴아메리카 국가가 어떠한 정부 형태, 어떠한 정책의 방향을 취하더라도 미국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그것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 그리고 죽이느냐 살리느냐를 결정하고 실행한다
는 것을 칠레의 쿠데타 사건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1970년 9월 세계 최초로 공산당의 대통령후보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으


로 집무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미국에게 미운털이 박힙니다. 미국은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아옌데로 축출하겠다고 결심하였고. 그가 취임한지 3년이 되는 1973
년 9월에 피노체트라고 하는 칠레 역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고문하고 죽인 인물이 아옌
데의 시체를 밟고 대통령궁을 장악합니다.
작전명은 “유에베 소브레 산띠아고Llueve sobre Santiago”입니다. 아옌데가 대통령
이 되고 미국은 정말이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정치, 경제, 언론, 노조, 군대 등 다양
한 곳에서 반정부 활동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하달합니다. 이에 따라 극우세력들의 준동은
극에 달했고 대통령의 군사고문관 역활을 하는 해군 사령관이 암살되기까지 합니다. 이 밖
에도 아옌데를 지지하는 사람과 그룹에 대한 다양한 위해가 가해집니다. 그러나 칠레 국민
들은 계속해서 아옌데 정권에 지지를 거두지 않고 아예데를 중심으로 의지를 굽히지 않습니
다. 이에 초조함을 느낀 미국 대통령 닉슨Richard Milhous Nixon은 1971년 12월 9일 백
악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직접 칠레의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계획은 구체화
되기 시작합니다. 사실상 피노체트는 이 계획에 처음부터 가담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맙니다. 9월 11일 이른 아침 산띠아고에 비가 내리기 시작합
니다. 새벽부터 구테타 군은 수도의 중추 역활을 하는 항구도시인 발빠라이소Valparaíso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산띠아고 시내에서도 작전이 이어집니다. 아침 7시 20분 아옌데
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쿠바의 피델 까스뜨로가 그에게 선물해준 AK47소총을 메고 대통령
궁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반란군은 언론기관을 장악하고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며 점점 목
을 조여오기 시작합니다. 아침 10시 15분 아옌데는 결과적으로 그의 마지막 목소리로 남은
연설을 시작합니다. “... 나는 사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칠레 국민을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힘이 있을지 모르지만 역사는 그런 힘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믿습니다. 역사는 우리들의 것이며 우리들이 만들어 갈 것입니다. 저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란군의 비행기에서 투하한 폭탄이 대통령궁의 정문을 관통합니다. 그리
고 산티아고의 시계가 정오를 알리면서 대통령궁에 대한 진입이 시작됩니다. 반란군은 대통
령궁을 반란군에게 내줄 수 없다는 결의를 다지며 끝까지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사실 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냅니다. 아옌데는 자신을 지키는 주변 사람들
에게 총을 내려놓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을 가지고 있던 총으로 죽음을 택합
니다.

아옌데 이후에 들어선 삐노체뜨 정권은 미국의 도움과 강압적인 계획경제 그리고
많은 노동자와 인권의 희생을 바탕으로 안정을 이룹니다. 아엔데 정권하에서 미국의 경제
제재 조치에 의하여 발생하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였고 외국의 광산 회사들이 진출하면서
재벌과 엘리트들의 주머니는 더욱 두둑해져서 경제 지표 자체는 좋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정치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암흑의 기간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살해, 감금, 실
종되어 오늘날까지도 이들을 찾아달라는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인권탄압
의 희생자만 4만여 명에 사망 실종자가 3000명이 넘습니다. 아옌데 정권을 지지하던 정치,
예술, 종교인들이 이 시대에 박해 혹은 죽임을 당했으며 이를 피해 외국으로 떠난 사람이
100만 명에 이릅니다. 칠레의 전체인구가 대략 일천만 명 정도이니 칠레 사람 10명 중 한
명이 독재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나라를 등져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이에 대한 역사 청산의 문제가 오늘날까지도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피노체트 정권을
우리나라의 박정희나 전두환과 비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이 죽을 때까지도 자
신의 죄를 반성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점에서도 유사합니다. 한편 미국은 국민의 합의로
탄생한 정권을 친미 성향이 아니라 하여 무참하게 짓밟고, 자신들이 꼭두각시로 내세운 정
권이 행한 20년에 가까운 독재 정치는 지지하고 방관했습니다. 그래서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1973~1989시기를 정치, 사회적으로 칠레 역사의 가장 암울한 시기라고 하
는 것입니다.
멕시코의 경우 부르주아 성향으로 혁명이 좌절됨으로써 1492년 이후 성립된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아르헨티나는 페론의 대안이 세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또
는 이에 반하는 기득권의 반격을 견디지 못해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 칠레에서는 미
국의 사주를 받은 군사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식민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식의 시도가 자연 발생적으로 여러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실험되었지만, 쿠바를 제
외하고는 성공을 거둔 곳이 없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이런 놈도 있고, 저런 놈도 있고, 그러다 보면 꼭 말 안 듣고 깽판 치
는 놈들이 있게 마련이니 나라 꼴이 잘 되려면 이런 놈들 다 잡아다 넣고 좀 강하게 할 필요가
있지!’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전두환 시절 삼청교육대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사
회 부랑자들의 정신을 개조한다면서 하던 말입니다. 독재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이
런 분위기의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나라가 발전하려면 독재가 필연이라는 논리 말
입니다. 그런데 그 진정한 타당성을 말하기 이전에 삼청교육대에 보내진 사람들이 다 사회 부랑
자였답니까? 삼청교육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정적을 축출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독재
세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칠레 역시 이와 유사한 독재와 폭력의 역사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보다도 더 지독
할지도 모릅니다. 삐노체뜨가 쿠데타를 통해서 잡은 독재 정권의 유지 방법이 바로 이러한 공포
정치입니다. 무력은 정권을 창출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정권은 관성을 가지고 정권에 기생하는
정치, 경제, 사회의 기득권층을 결속시킵니다. 그리고 국가의 외형적 경제 성장을 가능케 합니
다.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혼란스러운 국가가 잘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재를 해야만
하는 겁니까? 독재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란 말입니까? 국가가 발전하기만 하면 독재는 눈감
아 줄 수 있는 건가요? 칠레의 경제 발전을 이룩한 삐노체뜨와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고 자화
자찬하는 박정희 정권이 자꾸만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제15장 니카라과 내전

중요 연대
1838년 니카라과 독립
1912년 ~ 1933년 미국 해병대 주둔
1926년 산디노의 반미 투쟁
1934년 소모사가 산디노 암살
1937년 소모사Anastasio Somoza García대통령 집권
1957년 소모사의 첫째 아들 루이스 소모사Luis Somoza Debayle 집권
1962년 반 소모사 혁명 단체인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FSLN 결성
1967년 소모사의 둘째 아들 아나스따시오 소모사Anastasio Somoza Debayle 집권
1978년 소모사 정권 몰락
1981년 미국이 본격적인 반 니카라과 경제 및 군사 조치 시작

이번 장에서는 니카라과의 식민지 모순 극복의 과정과 좌절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


다.
라틴아메리카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답답한 것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사
실 어디 라틴아메리카뿐이겠습니까, 우리나라의 역사만 봐도 절절하고 안타까운 대목이 끝
이 없습니다. 현실의 모순과 부정의를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도 그 결과가 참
으로 억울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로봇 태권
브이에 나오는 정의로운 세상을 현실에서 발견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유럽인들의 침략에서 시작된 불평등과 이에 따른 끊
임없는 착취의 악순환 구조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쿠바 외에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
어 보겠다는 여러 노력과 투쟁이 모두 수포로 돌아갑니다. 쿠바 혁명처럼 시원하고 속이 확
트이는 그런 이야기가 별로 많지 않군요. 이번 장에서 살펴보게 될 니카라과에서도 역시 이
러한 역사가 다른 형태로 거듭됩니다.
그런데 왜 이런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거냐고요? 그때그때 다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 장에서 살펴본 칠레의 경우는 공산당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공산당
과 관계가 먼 데도 미국이 또 자기 마음대로 정권을 세우고 무너뜨리고 합니다. 즉 미국의
개입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을 이곳 니카라과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
다.
공산당 하면 일단, 무조건 거부감이 들지 않나요? 새빨간 얼굴에 꼬리 두어 개 달리
고, 뿔도 몇 개 달린 괴물 같은 존재가 빨갱이 아닌가요? 필자가 반공, 승공, 멸공 뭐 그런
단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듣던 세대이다 보니 공산주의에 대한 본능에 가까운 이런 기막
힌 이미지가 존재합니다. 물론 북한이 60년대 70년대, 그러니까 필자가 반공 포스터 그리던
시대에는 우리보다 잘살았었다는 사실을 안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학교에
서는 북한 어린이들이 모두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가르쳤지요. 그런 거짓말을 필자와 같이
순진한(?) 어린이에게 가르친 것이 부끄럽지도 않나 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필자처럼 빨갱
이 기질이 있는 사람이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공산주의가 그렇게 나쁜 건가요?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온전히 알기나 하고, 이해나 하고 비판하는 건가요? 사실 공산주의와 사회주
의는 엄연히 다른 것인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다 똑같은 것으로 치부하고 빨갱이로 만들
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북유럽 쪽에 빨갱이 아닌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야기가 엉뚱한 데로 흘렀네요. 우리나라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중남미 문제와
연관 지어 생각해 봅시다. 우리만 공산당 하면 얼굴이 빨간 돌연변이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더군요. 빨갱이라고 하면 미국도 거품 물고 경기를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반공 이데
올로기는 미국의 답습과 아류인 면도 많습니다. 유명한 메카시 사건 같은 것들이 비일비재
합니다. 그러니 남미의 빨갱이 대통령인 아옌데를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것도 미국인
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하다고 오백 배 양보해서 이해하고 넘어간다고 합시다. 칠레의
경우는 빨갱이니까 미국이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생각할 만한 여지가 있습니다. 빨갱
이는 일단 다 나쁜 놈들이니까요(?). 그런데 니카라과의 경우는 빨갱이도 아니었습니다. 오
히려 훨씬 중립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을 지향했습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반정부군인 꼰뜨라
Contra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죠. 무슨 이야기인
지 어리둥절하시죠? 자! 하나하나 차분히 살펴봅시다.

니카라과의 역사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는 이야기가 결코 과장이 아닐 정도로 흥


미진진한 우여곡절로 이어집니다. 미국과의 그 질긴 인연…… 내란의 연속…… 경제 쇠
퇴……. 뭐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민중들의 자
생적 민주화 열기가 국가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고 있지만 결국은 독재와 외
세라는 두 가지 한계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중남미 국가의 현실이 니카라과의 역
사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니카라과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교통 중심지이자 중미에서 가장 넓은 나라
입니다. 다른 나라가 들으면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주변 지역에서는 가장 크고 중요한 나라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미의 다른 작은 고만고만한 나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정치, 경제
문화적인 면 등에서 의미가 큰 나라입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뭐니 뭐니해도 아메리카 대륙의 교통 중심지였다는 점에
서 시작됩니다. 미국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서부 개척과 관련이 있습니다. 말 두 마리가 끄
는 커다란 왜건Wagon이라고 불리는 마차를 타고 미국의 동부에서 서부로 미국 개척자들이
이동하는 장면이 떠오르시나요? 중간에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나타나 화살을 쏘거나 하면서
선량한(?)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도 있고 그러다가 곧 미국의 기병대가 출동해서 그런 나쁜
짓을 하는 인디언들을 처단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말 나온 김에 잠깐 언급을 하고 지나가
자면 사실상 인디언들이 잔인한게 아니고 미국인들이 더 잔인했습니다. 그것도 몇십 배 몇
백 배 더. 미국 백인들이 죽인 인디언들의 숫자나 그 잔혹함이 인디언의 그것과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원주민들을 그들이 원래 사는 땅에서 내쫓고 집단학살을 하거나 인디
언 보호구역으로 집단이주를 시키는 등의 만행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초에 걸쳐
300만 명의 인디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인디언들의 머리 가죽을 벗겨 팔기까지
했습니다.
인디언들의 모습은 잔인하고 미국 사람들의 모습은 멋있게 그려지는 승자의 역사가
만든 이미지가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하여간 모든 개척자들이 말을 타고 서부로 간 것이
아니라는 말을 먼저 하겠습니다.
실질적으로 서부 개척에 참여한 미국인들의 상당수는 미국의 뉴욕이나 뉴올리언스
같은 곳에서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 교통의 중심지인 니카라과를 거쳐 서부로 이동했습니
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니카라과는 중요한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로 성장하게 됩니다.
당연히 문화와 예술 등도 발전을 했습니다.

이렇게 니카라과는 교통의 요지로써 활발하게 개방적인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와


문화를 외부로부터 받아들이게 됩니다. 중요한 장소라는 특수성, 외부 문화에 대한 개방성
이 외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요소가 됩니다. 미국의 영향력도 증가하게 됩니
다. 1856년에는 워커라는 미국인이 군대를 끌고 가 니카라과를 점령하고 스스로 대통령을
할 정도입니다. 즉 처음부터 이놈의 나라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좌지우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니카라과가 그렇게 참담한 정치 수준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그렇
지도 않습니다. 나름 민주적 전통이 빛나는 곳입니다. 멕시코와 중미 국가들이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을 하면서 니카라과는 중미연합 국가에 잠시 참여했다가 독자적으로 독립을 선언
하게 되는데 그렇게 최초의 국가 정체성 성립과정에서 그라나다Granada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 세력과 레온León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세력이 갈등을 겪습니다. 이 두 도시는
지금까지도 니카라과에서 가장 중요한 전통을 가진 두 개의 도시로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1858년에는 결국 이 두 도시의 중간인 마나구아Managua에 수도를 건설
하게 되는데 이렇게 오늘날까지 니카라과의 수도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민주적인 합의
가 결실은 거둔 것입니다.
일찍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한 니카라과는 다양한 외부 문물에 대한 유입이 빨
라 개방적이고 발전된 정치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하나의 통합된 마나구아라는
도시를 건설할 정도로 성숙한 정치적 합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성숙
한 전통을 바탕으로 미국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보수와 진보의 정치가 어느 정도 조화를 이
뤄갑니다.
그러나 역시 관건은 미국입니다. 1900년을 즈음하여 반미주의가 득세하게 되자 미
국은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게 됩니다.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미국인의 체포를 계기로 미국
이 군사 개입을 하고 정부의 친미 반란군 진압을 가로막게 됩니다. 이때부터 이미 미국은
힘 있는 나라로 성장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구석구석을 자신의 입맛대로 만들어가고 있었습
니다. 그런데 니카라과라고 하는 중요한 곳을 반미 세력에게 그냥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
었던 것이지요. 결국 이러한 미국의 정치적인 압력과 군사적인 개입은 국내 정치를 바꿔놓
게 됩니다. 1912년 친미 보수파인 아돌포 디아스Adolfo Díaz Recinos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군이 니카라과에 아예 상주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후 20여 년간 유지됩니다.
미국은 그렇게 미군을 상주시키면서 확실하게 친미 정권을 닦아놓은 것입니다. 그
렇게 미군은 1933년에 가서야 니카라과 땅에서 철수합니다. 중간에 약간의 공백 기간이 있
었습니다. 1925년에 미국 해병대가 잠시 철수한 적이 있는데 이때 니카라과의 친미 보수파
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러니 이 상황을 놔두고 볼 수 없었던 미국은 1927년 다시 2천
명의 미국 해병대를 파견함으로써 아예 반미 정권이 못 들어서도록 전통을 공고히 한 것이
지요.
이렇게 미국이 확고하게 니카라과의 정치와 사회를 자기 입맛대로 쥐락펴락하다 보
니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우리가 무슨 미국의 식민지냐!”, “Yankee Go Home!” 이렇게
외친 유명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니카라과 역사의 최대 영웅 산디노Augusto
César Sandino입니다.
그는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친미 세력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여 대다수 사람들이 가
난하게 죽어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비판하며 미국으로부터의 진정한 독립을 외쳤던 것입니
다. 반대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 당시의 상황에 게릴라 운동으로 맞선 산디노는 1933년 정
부 측과 협상 도중 미국의 지원을 받는 당시 국경 경비대장인 아나스따시오 소모사
Anastasio Somoza García에게 암살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니카라과는 암흑의 시대를
맞게 됩니다.

니카라과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역사상 한 시대로 묶는 1937년부터 1979년의 42


년의 긴 세월이 한 가지 색깔로 칠해져 있습니다. 바로 소모사 정권이라는 독재 정권 기간
입니다. 원래 소모사는 산디노라는 니카라과의 영웅을 암살한 흉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산디
노는 미국의 해병대가 지배하던 니카라과를 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투쟁한 사
람이지요. 그러니까 민족의 영웅을 암살한 산디노가 정권을 잡은 것이 1937년의 일이고, 이
후 그에 이어서 그의 두 아들에 걸친 2대 동안의 군사 독재가 1979년까지 40년 넘게 이어
졌습니다. 민주 세력을 암살하고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아버지가 대통령의 기반을 닦
고 이어서 그의 맏아들인 루이스 소모사 데바일레Luis Somoza Debayle가 그리고 이어서
둘째 아들인 아나스따시오 소모사Anastasio Somoza Debayle가 대통령을 하였으니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대단한 집안의 대단한 정치가 그리고 대단한 니카라과가 탄생한 것입니
다. 갑자기 우리나라의 박 뭐시기라는 사람과 그 딸과 친인척이 42년간 우리나라를 통치하
고 있다면 어떨까 하는 끔찍한 상상이 듭니다. 하여간 니카라과가 이런 상황이었다는 것입
니다.
중남미가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식민지의 정치, 경제, 사회 전통의 배경에 더하여
한 가족이 40여 년간 미국의 비호를 받으며 정권을 잡았으니 어땠겠습니까? 권력 집중, 억
압, 부패, 경제 편중 현상 등 그야말로 독재의 전형적인 폐단을 여실히 드러냈겠죠. 40여
년간 형성된 정권 주변의 기득권 세력은 공고해지고 민중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졌습니다.
에피소드가 참 많았습니다. 니카라과 사람 1만 명 이상이 죽는 지진이 났을 때 소모
사의 권력 유지를 담당하던 군인과 경찰들이 직접 나서서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도시의 재
건에도 소모사 일족이 경영하는 회사에 재건을 맡기는 등 자신들과 그 측근의 권력에 빌붙
어 있는 세력들을 위한 권력 집중과 이에 따르는 피해는 날로 심해졌습니다. 이를 보다 못
해 들고 일어난 것이 이른바 산디니즘Sandinismo이라고 부르는 니카라과 혁명입니다.

소모사와 관련된 어록을 몇 개 소개합니다. 한나라를 한 집안이, 중세시대도 아니고,


그것도 20세기에, 42년간 통치를 하다 보니 에피소드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내용을
보면 서글프고 기가 막힌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Plata para los amigos, palo para los indiferentes, plomo para los enemigos.
친구에게는 돈(Plata)을, 무관심한 놈에게는 몽둥이(Palo)를, 적에게는 총알(Plomo)을.
스페인어의 P로 시작하는 단어로 운율을 주어 만든 아주 멋진(?) 말이군요. 소모사의 공
포 정치를 잘 보여줍니다.

Darle democracia a Nicaragua es como darle chile a un niño


니카라과에 민주주의를 주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고추를 주는 것과 같다.

이건 확인된 것은 아니고 떠도는 이야기입니다만 충분히 그럴 만해서 세상에 돌아


다니는 것이라 여겨져 여기에 옮깁니다. 소모사가 집권하던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프랭
클린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가 한 말이랍니다.: “소모사는 개새끼일 수도 있
지. 하지만 그는 우리의 개새끼야.Somoza may be a son of a bitch, but he's our son of
a bitch.”
이런 이야기 들을 통해서 당시 니카라과라고 하는 나라가 혁명이 안 일어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의 상황이었다는 것을 느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음 꼭지는 이제
혁명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니카라과 국민들의 반소모사, 반독재 투쟁은 소모사가 산디노를 죽이고 독재를 하는


순간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산디니스모란 단어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지요. 이들은 FSLN(Frente Sandinista de Liberación Nacional)이라는 이름으로 뭉쳐
서 투쟁을 전개합니다. 중간에 그리고 이러한 투쟁의 흐름을 바꿀 중요한 전환점이 1978년
1월 10일 발생합니다.
뻬드로 호아낀 차모로Pedro Joaquín Chamorro라는 사람은 자신이 경영하는 라 쁘
렌사La Prensa라는 신문에 소모사 정권이 달가워하지 않을 만한 기사들을 써대기 시작합니
다. 반소모사 운동을 주동하는 대학생들의 인터뷰 기사도 라 쁘렌사의 지면에 실립니다. 소
모사과 그의 패거리 들을 이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었겠죠.
전날 어머니의 생일파티를 하고 돌아온 차모로는 1월 10일 아침 8시, 불과 보름 전
에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새로 산 자동차를 몰고 자신의 직장인 신문사를 향하고 있었습니
다. 그렇게 수도 마나구아의 변두리를 지나가고 있었지요. 뒤따르던 자동차에 자신을 노리
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8시 15분 그의 차 옆에
멈춰선 괴한의 차에서 총격이 가해집니다. 그의 자동차는 전신주를 들이받고 멈춰 섰고, 그
날 오후 그가 일하던 라 쁘렌사 신문의 일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가 암살되다! 니카라과 전 국토에 그의 피가 튀겼다!


¡Mandaron a asesinarlo! y Su sangre salpica a toda Nicaragua!
이 사건을 계기로 니카라과는 반소모사 투쟁의 깃발 아래 결집합니다. 이때를 계기
로 다양한 반 소모사 투쟁이 FSLN이라는 이름으로 뭉치게 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이
를 산디노주의란 뜻의 산디니스모Sandinsmo 혹은 산디노주의자 라는 뜻의 산디니스타
Sandinista 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연대 혹은 개별적으로 게릴라 활동을 하며
수도를 향해 압박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차모로가 죽고 일 년 반이 지난 1979년 7월
20일 소모사 타도를 외치던 산니니스모 병사들이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구아에 입성 합니다.
제가 처음 니카라과에 갔을 때, 그러니까 1993년으로 기억합니다. 아직도 전후 복
구가 충분치 못해 온통 폐허에, 경제 사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버스도 변변치 않고, 또 필
자가 히치하이킹으로 여행을 다니기 때문에 픽업 화물차의 뒤 칸에서 니카라과 사람들과 같
이 가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왔다는 신기한 외국인이 니카라과 혁명에
대하여 꼬치꼬치 묻는 것이 신기했는지 혁명의 분위기를 알고 싶어 하는 필자를 뚫어질 듯
쳐다보던 한 사람이 자신의 다리를 허벅지까지 걷어 붙이고는 깊은 흉터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시에 자신이 입은 총상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아저씨가 생각나는군요. 그렇게 니카라
과는 민주주의와 국민들의 생존권을 위해 총인구 4백만 중 3만 명이 사망하고 50만 호의
가옥이 파괴되는 희생을 거치며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가히 자랑스러울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 투쟁을 떠올리면 될 것 같습니다.


독재에 대항하여 정의의 투쟁을 한 니카라과 국민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혁
명과는 달리 니카라과 국민은 혁명 이후의 처리를 가장 현실적으로 해나갔습니다. 혁명에
성공하고도 보수 세력에까지 화해의 손을 내밀어 그들을 끌어안습니다. 중립 내각을 구성하
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화합 정책을 폈습니다. 한마디로 빨갱이를 안 했
단 말입니다.
국민 통합을 끌어내며 출범한 1980년의 정권이 내세운 국가의 기본 원칙이 이러한
점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치 다원주의, 혼합 경제 질서, 비동맹 외교’가 바로 그것입니
다. 이러한 정책 표방은 혁명 이후 니카라과 정부의 성격과 방향, 즉 국가의 모델을 제시한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쿠바나 칠레처럼 빨갱이 정권 안 만들겠으며, 외국 자본도 관대하
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어떤 나라와도 친하게 지내겠다는 의사 표시입니
다. 혁명 지도자로 대통령이 된 오르떼가가 나중에 미국 포드Ford사의 무스탕Mustang 오
픈카를 타고 선거 유세를 다니기도 합니다. 자본의 상징, 미국 멋쟁이의 상징이었던 미국에
서 만든 스포츠카를 타고 연호하는 국민들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우리가 만들 정부는 반
미도 아니고 반자본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혁명이라는 고달픈 과정을 거쳐 탄생한 정부는 그들이 벌였던 투쟁의 목표
를 하나씩 실천해 나갑니다. 1979년 당시 50%에 달하던 문맹률이 2년 만에 13%로 떨어지
게 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보건 복지 기반을 확충하여 어린이들의 백신 접종을 시행하고 보
건교육을 실시하여 유아사망률을 극적으로 낮춥니다.
그러나 미국은 중립마저도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조폭들
사이에서나 등장하는 편 가르기가 미국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중립은 없다. 우리 편 할 거
야, 안 할 거야?, 미국에 절대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면 다 필요 없어 ” 하는 막가파 미국
스타일이 니카라과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미국은 기존 소모사 정권 때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로 구성된 꼰뜨라(현 정권
에 대한 ‘반대’, 혁명에 대한 ‘반대’라는 뜻)Contra에게 군사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미
국 전대통령 부시George_H._W._Bush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에게 -그 당시는 사담이 미
국 편이었습니다.- 무기를 판매하여 벌어들인 자금으로 니카라과 꼰뜨라를 지원해 주기도
합니다.
1984년 산디노 해방 전선 즉 혁명 세력의 지도자인 오르떼가Daniel Ortega가 63%
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선거를 부정선거라고 규정하고
반정부 세력인 꼰뜨라를 지원하는 한편 1985년에는 무역 금지령, 외국 은행의 대출 금지
등 경제 봉쇄 조치를 하게 됩니다. 이미 1981년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니카라과 경제 원
조를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미국이 압박을 가하자 1988년 니카라과의 인플레이션이
30,000%에 달하게 됩니다. 봉쇄로 인한 경제 침체로 혁명과 선거 공약인 교육, 보건, 주택
사업 등을 실행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1990년 2월 선거에서 1978년 소모사에게 암살당
한 페드로 차모로Pedro Chamorro의 미망인이자 혁명 이후 혁명의 급진화에 반대하여 보
수 연합 세력을 조직하여 이를 지도한 비올레따 차모로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중도적인 대안
을 모색하게 됩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독재 정권을 비호하던 미국이, 그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정권이 비록 사회
주의 외교와 경제 정책을 포기하더라도, 미국에게 절대 충성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정
부군을 도와 혁명 정권을 무너뜨렸다.
정리한다는 게 오히려 더 복잡해졌나요? 쩝~~. 좌우간 말도 안 되는 깡패 짓입니
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전면에 내세우는 정치의 정당성이나 민주화라는 말은 과거나
지금이나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은 독재 정권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
고 오직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느냐 안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충성을 바치면
정권을 유지시켜 주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이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미국의 정책입니다.
미국의 대 중남미 정책에서는 정의도 필요 없고 이데올로기도 필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확
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20세기 민중의 저항이 미국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1492년 이후 식민지 시대 초기의 저항이 스페인 정복자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1800년대의
저항은 상부 기득권 끄리올요들,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외국 세력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20
세기는 신식민지주의의 선봉에 섰던 미국에 대한 저항으로 라틴아메리카 민중 저항의 역사
를 요약할 수 있습니다.
민중의 저항은 불평등에 대한 저항이요 부정의에 대한 저항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평등과 부정의를 통해 배를 불린 집단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어 가지만 그 밑에서 착
취를 당하는 사람들은 늘 그 모양 그 꼴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부당함을 감수하며 투쟁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라틴아메리카의 이러한 저항은 이곳 니카라과에서 보는 것
처럼 대부분 짓밟힙니다.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쓰고
그래도 힘들면 미국의 적극 개입을 통해 자기 뜻대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민중항쟁이 성공하고 난 이후 니카라과는 미국의 경제, 외교, 군사 개입에 의해 지
루한 소모전이 이어졌습니다. 혁명 이후 만들어진 민중 정부에 대항하는 미국의 군사 지원
을 받는 꼰뜨라의 내전 양상이 되었습니다. 결국 동네 어귀에서 기관총을 들고 다니는 사람
들을 대수롭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불안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고 새롭게
도약하려는 노력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내전이 끝나고서도 수년이 지난 다음입니
다.
미국은 소모사 독재는 묵인해 주고 그 후에 생긴 민주 정부는 친미가 아니라는 이
유로 경제 봉쇄와 반군 지원을 해서 친미 정부를 부활시켜 노력합니다. 미국이 이야기하는
긍정적인 국가, 부정적인 국가의 기준은 오직 ‘반미냐, 친미냐’입니다. 전면에 내세우는 인
권, 민주, 평화, 복지 이런 말은 말짱 다 뻥입니다요~~.^^
제16장 파나마 운하와 노리에가

중요 연대
1903년 파나마 독립.
1914년 파나마 운하 완공.
1940년 반미 아리아스 대통령.
1941년 쿠데타로 아르아스 하야.
1977년 카터-또리호스 조약으로 1999년까지 파나마 운하 파나마로 양도 약속.
1878년 또리호스 사망.
1983년 노리에가 집권.
1989년 미국의 파나마 침공.
1992년 미국이 노리에가 종신형 선고.
1999년 파나마 운하 미국에서 파나마로 양도.

여러분, 한국이 한국 전쟁 이후 오늘날까지 경제 성장을 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머릿속에 금방 떠오르는 것이 여럿 있지요. 근면, 성실, 교육열, 국민 통합 등등
의 단어들이 생각날 겁니다. 혹시 박정희의 얼굴이 떠오르는 사람도 있나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이번 장에서 한국 정치사를 말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뭐가 되었든 좋
습니다. 한국이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한 가지 재미있는 의견을 덧붙여 볼
까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빠른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나라가 별
볼 일 없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괴변인가요? 혹시 파나마 이야기를 하면서 왜 한국 경제 성장의 원인
이 별 볼 일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란 엉뚱한 말부터 시작하는지 그 이유가 있기나 할까요?
ㅎㅎ. 자, 왜 그런지 이야기를 시작해 볼겠습니다.
지구상에서 군사 강대국 빼고, 그러니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별 볼 일 있는 것을
지킬 힘이 있는 나라 빼놓고, 별 볼일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필연적으로 서구 열강
에게 그것들을 빼았겼습니다. 19세기 이전에는 대놓고 서구열강의 식민지가 되었고, 19세기
이후에도 역시 서구열강의 경제 침탈, 정치 간섭 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차근히
여러 예가 되는 나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특히 석유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별 볼 일 있는 나라(말이 좀 웃기기는 한데……)라서 서구 열강의 각
축장이 된 곳치고 오늘날 제대로 사는 나라들이 없어요. 그런대로 적당히 사는 나라도 있지
만 대부분 정치적인 절대 의존이 나타나는 등 장기적 국가 발전에 중요한 요소들에 문제가
많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번 주제와 거리가 있으니 여러분 각자 따져보세요.
하여간 우리나라가 석유도 없고 파나마 운하와 같은 전략적 요충지도 아니기 때문
에 그나마 요만큼이라도 먹고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략적 요충지……. 대한민국은 일본
과 중국의 수많은 침략을 받아왔습니다. 식민지도 겪었고 서구 열강에 전쟁터를 제공한 한
국 전쟁도 겪었습니다. 반도 국가라는 지리적 중요성이 없었더라면 적어도 이 가운데 몇 개
는 피해 갔을 겁니다. 물론 역사를 가지고 가정한다는 것이 애당초 모순된 설정이기는 합니
다만 탐나는 것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외세의 간섭이 심해지고, 그것이 결국은 자국 안위와
발전에 결코 도움이 안 됩니다. 파나마가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 .

파나마는 탄생부터 이권이 많아 모든 나라가 빼앗고 싶었던 땅이라는 운명을 안고


있었습니다. 원래 파나마란 나라는 없었습니다. 남미 콜롬비아에 속한 땅이었지요. 라틴아메
리카 나라들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하고, 역시 콜롬비아도 독립을 하고, 이후 100여 년
동안 그렇게 콜롬비아의 땅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런데 콜롬비아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을 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콜롬비아가 파나마 운하와 관련해서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으니
까 아예 미국이 파나마란 나라를 독립시킨 겁니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거의 자신들의
속국으로 지배해서 파나마 운하에 대한 절대 권리를 보장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파나마의
독립은 운하를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 독립하는 게 좋은데……’ 라
고 말한 일부의 현지 사람들을 앞에 내세워 그들이 독립의 주체가 되었다고 말하지요. 그러
나 어디까지나 그들은 미국의 절대 원조와 지시에 따라서 행동한 것입니다.
미국은 참으로 다양한 형태로 외국에 간섭을 합니다. 그런데 중남미 쪽에서는 바로
이 독립 정책을 가끔 사용했습니다. 미국의 절대 지원하에 독립을 시키고 그렇게 탄생한 독
립 국가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면에서 미국에 절대 복종을 하게 만드는 정책입니다.
쿠바가 그랬고, 이곳 파나마가 그랬습니다. 또 하나가 있죠. 바로 텍사스의 독립입니다. 원
래 텍사스는 멕시코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독립을 해서 여기는 아예 미국 땅으로 자진해서
복속을 한 경우지요.

미국이 멕시코로부터 땅을 빼앗는 과정에 텍사스라는 나라로 독립을 한 기간이 있


습니다. 그 이후에 텍사스가 자율(?)적으로 미국에 통합한 것이지요. 미국이 텍사스 땅을 집
어삼켰다고 하는 것보다 얼마나 모양새가 좋습니까. 멕시코의 압제로부터 독립한 텍사스가
자율적으로 미국에 통합한 것과, 미국이 멕시코 땅을 군사적으로 빼앗은 것은 벌써 어감부
터 다르잖습니까? 정당화라든지 모양새라든지 어느 면으로 보나 전자가 훨씬 낫습니다. 자
주독립 국가인 텍사스를 괴롭히는 멕시코라는 나쁜 나라를, 국제 질서를 어지럽히는 나라
를, 세계 정의를 수호하는 나라인 미국이 응징한 것입니다. 지구의 정의를 어지럽히는 멕시
코의 행동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미국이 용감하게 멕시코의 수도를 점령하는 번거로움
도 감수하셨습니다. 공식 역사를 보면, 그냥 읽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것들의 이면
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미국 정규교육과정의 학생들은 역사 시간에 알라모 사건에 대해서 배웁니다. 알라모
가 바로 텍사스의 요새 이름이거든요. 그 당시 멕시코가 행한 만행에 대하여 배우고 텍사스
독립의 정당성과 이후 미국과의 병합의 과정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겁니다. 미국이 멕시코
수도를 점령해서 젊은 사관생도들을 모두 죽여 버린 사건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일본의 우익 역사책에 일본이 한국에서 저지른 만행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
지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파나마와 파나마 운하를 설명해도 될만한 어느 정도의 배경 자극


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중심 주제인 파나마로 들어가 봅시다. 너무 주변 이야기가
많았나요? 쩝.
아무튼 파나마 운하의 이권 때문에 미국에 의하여 콜롬비아에서 분리 독립되어 탄
생한 나라가 파나마입니다. 다른 중남미 국가와 비교해 100여 년 가까이 늦은 1903년의 일
입니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가 파나마를 독립시키는 데 많은
이바지를 한 사람입니다. 독립 이후의 파나마는 정치면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사회, 문화,
정신면에서도 미국에 절대 의존하게 됩니다. 파나마 영토를 동서로 관통하는 파나마 운하가
1914년에 완공됩니다. 그리고 운하의 남북 10마일을 미국에 영구 임대한다는 조약을 맺습
니다. 그냥 무상으로 영구 임대한다고 하면 너무 속이 보였겠죠. 그래서 돈을 좀 줍니다. 매
년 임대료 25만 달러입니다. 대략 한화로 따지면 약 3억 정도 되려나요. 삼억에 파나마 운
하 전체와 그 주변을 다 가질 수 있엇습니다. 강남 아파트 한 채도 안 되는 가격에 말입니
다. 뭔 말을 더하겠습니까. 한 마디로 파나마 운하는 영구적으로 미국 땅이나 다름없게 된
겁니다.
그런데 1999년 12월 31일 운하가 파나마에 반환되었습니다. 이 운하를 돌려받기
위해 삐비릿내 나는 투쟁의 역사가 파나마의 역사입니다. 운하라는 이권 덕택에 역사가 만
들어지고 다시 쓰이는 운명을 겪은 겁니다. 파나마의 역사에서 지면을 가장 많이 할애하고
있는 두 명의 대통령이 아리아스Arnulfo Arias Madrid와 또리호스Omar Torrijos Herrera
입니다. 아리아스는 세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고도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세 번이나 대통
령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던 비운의 인물로 파나마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명입니
다. 또리호스는 다음 꼭지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이 이외에 한 명이 더 있기는 한데 잠깐 기
다리세요, 그가 오늘 이야기의 피날레니까요. 아리아스와 또리호스는 모두 반미라고 하기에
는, 파나마에서 반미라는 말을 하기가 좀 힘들어서 표현이 어색합니다만, 아무튼 미국과 어
느 정도 동등한 입장 내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한 대통령입니다. 경제적으로 달러를 사
용하고, 자국의 군대도 없이 경찰이나 방위대 정도만 있고 , 미군이 주둔해서 영토를 가로지
르는 영구 임대한 운하 지대를 관할하는 있는 그런 나라에서 반미라는 말은 분명 한계가 있
겠죠.

오마르 또리호스(1929~1981)는 1968년부터 1978년까지 파나마의 대통령을 역임


했던 분입니다. 미국에 밉보이면서까지 파나마의 운명을 바꾼 인물입니다. 원래는 군인 출
신으로 엘살바도르와 미국, 베네수엘라에서 군인으로서 엘리트 과정을 거쳤습니다. 미국과
관련된 교육기관에서 공부를 좀 해줘야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는 나라의 엘리트
가 될 수 있습니다. 이건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방귀 궤나 뀌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미
국 거시기 뭐시시 대학을 다녔다든가 하면 좋고, 적어도 영어를 잘한다든가 해야 하지 않습
니까. 말을 할 때도 혀 꼬부라진 단어들을 적당히 섞어 줘야 좀 수준 있어 보이는 것도 다
이런 상황의 연장입니다.
하여간 또리호스는 이런 엘리트 과정을 거쳐 1952년 군대가 존재하지 않는 파나마
의 국가방위대Guardia Nacional de Panamá 장교로 임관하게 됩니다. 그 뒤 승승장구하여
1969년에는 준장으로 승진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서서히 삐딱(?)해 지기 시작합니다.
1968년 10월에 당시의 대통령인 아르눌포 아리아스Arnulfo Arias Madrid 대통령을 타도하
기 위한 쿠데타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본인 스스로가 대통령에 오릅니다.
그러더니만 점점 요상한 정치 행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쿠바의 피델 까스뜨로를
방문한 몇 안 되는 라틴아메리카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됩니다. 미국이 제일 싫어하는 나라
의 최고지도자인 피델 까스뜨로를 만났다는 사실 만으로도 미국은 또리호스를 탐탁지 않게
볼 수 있겠지요.
결국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영구 임대를 보장받고 있는
파나마 운하를 파나마가 돌려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공공연히 하고 다니기 시작합
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의 요상한 노력이 나름의 열매를 맺습니다. 마침 민주당 정권이 미
국에 들어서고 또리호스는 대 중남미 온건 유화정책을 펴던 카터에게 줄기차게 자신의 생각
을 전달해, 급기야 1977년 9월 7일 당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과 카터-또리호스 협정을
조인합니다. 그로부터 23년 후인 2000년에 미국이 운하를 파나마에 돌려준다는 약속 을 하
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내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직위
와 권한을 내려놓고 1978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납니다. 그리고 그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써
야 할지 모르겠네요. ... 하여간 그가 탄 비행기가 파나마의 정글 지대에서 원인 모를 폭발
을 하게 되고 그는 그렇게 사망합니다. 원인과 배후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말이 많습니다만
아마도 영원히 안 밝혀질 가능성이 크겠지요. 독자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또리호스가 예고편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반미를 한 대통령이 파나마에


서 탄생합니다. 노리에가Manuel Antonio Noriega(1938~2017)입니다. 앞에서 본 또리호스
와 마찬가지로 군인 출신의 인물입니다. 사실상 파나마라고 하는 나라가 공식적인 군대가
존재하지 않고 국가방위대나 경찰 정도만이 존재하는데, 그런 곳에서 군인 출신이 정치의
큰 맥락을 이어갔다는 것은 그만큼 무력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비민주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역시 페루의 육군사관학교를 나왔고 파나마로 돌아와서
는 국가방위대 장교로 임관하여 또리호스와 친분을 쌓게 됩니다.
그런데 이후의 행보에서 특이한 점은 미국과의 적극적인 관계입니다. 국가방위대의
중요한 부서인 정보부의 장교가 되면서 미국 정보기관과 아주 긴밀한(?) 협조 관계를 형성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미국의 협조와 방조 아래 정치적인 입지를 넓혀나가게 됩니다. 결국
1981년 또리호스가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뒤 그가 국가방위대를 장악하고 여기의
수장이 됩니다. 실질적인 대통령이 된 셈이지요. 그 이후 그의 정치적인 행위와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립니다. 그러나 중요한 포인트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역시 파나마 운하와
관련된 사항입니다. 또리호스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사이에 맺은 파나마 운하 반환 협정
을 둘러싸고 미국과 갈등을 빚은 것입니다. 미국은 이 조약을 이행할 생각이 없었을 것이고
노리에가는 이에 대한 이행을 강력히 촉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파나마의 위상을
높이고 미국으로 부터의 실질적인 독립을 위해서 파나마 방위대를 정규군화 시키려는 시도
도 합니다.
미국이 니카라과의 민주 정부를 전복시킬 목적으로 반정부군을 도왔다는 점을 바로
이전의 니카라과 편에서 보았습니다. 이 반정부군을 돕기 위해 주변 국가의 협조가 필요했
고 노리에가는 이때 파나마 국가방위대의 실권자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미
국이 주는 표창장도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마약 단속을 도운 공으로 받은 상
이긴 했지만, 어찌 되었건 미국과 노리에가는 아주 긴밀한 협력자 관계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노리에가가 무럭무럭 자라나서 대통령이 됩니다. 이제 더는 예전의 애송
이가 아닙니다. 미국에 무엇인가를 요구하거나 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갈등이 생겨났을 것
으로 보입니다. 이 요구가 파나마 운화와 관련될 것이라는 추정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
다. 미국의 불법적인 군사 개입에 대하여 잘 알고 있던 노리에가가 이 점을 가지고 미국과
줄다리기를 벌였겠지요. 이렇게 애매하게 이야기드리는 점에 대하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
러나 관련 내용이 온전히 밝혀지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그 과정과 결과들을 가지고
당시의 상황을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간 이제 미국은 그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앞에서 니카라과나 쿠바 같은 경우
에서도 보았고, 다른 더 많은 예가 무수히 많은 것처럼, 미국은 중남미의 대통령이 독재자
인가 아닌가 혹은 정당한가 아닌가 등의 관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정권이 문제가 많더
라도 친미라고 한다면 묵고 할 뿐만 아니라 방조하고 부추기기까지 한 예가 전 세계에 넘쳐
나니까요.
1989년에는 노리에가에 반대하는 군사 쿠데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패로 끝나
게 됩니다. 경제봉쇄조치를 단행하여 파나마의 경제를 꼬꾸라뜨립니다. 항상 하는 기본적인
수순이지요. 그러나 노리에가와 파나마는 저항합니다. 결국 미국은 스스로 칼을 뽑아 듭니
다. 미군은 '저스트 코즈'(Just Cause)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정당한 이유’라는 작전명은 미
국이 파나마의 독재자를 벌주는 것이 정당하다는 점을 애써 강조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유
엔UN마져도 찬성 75, 반대 20, 기권 40으로 미국의 파나마 침공은 국제법을 위반한 명백
한 부당행위“flagrant violation of international law”라고 의결합니다.
결과는 애당초부터 너무나 뻔한 것이었습니다. 변변한 군대조차 없는 파나마에 세
계최강의 미국이 침공을 했는데 그것도 파나마 영토 안에 주둔해 있는 미군의 협조를 받아
서 작전을 수행했으니 파나마가 이를 격퇴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습니다. 민간인 사망
자만 3000명이 넘습니다. 미군은 23명 파나마 군은 314명이 사망합니다. 물론 나라마다 기
관마다 사상자 통계 수치는 차이가 큽니다. 하여간 보름도 안 돼 전쟁은 맥없이 끝납니다.
1990년 1월 3일 노리에가는 미군에게 잡혀 미국으로 끌려갑니다. 죄목은 마약 밀매와 독
재, 불법 자금세탁, 인권 탄압……. 뭐 대강 그런 겁니다. 파나마 군은 방위대로 다시 위상
이 격하되었습니다. 노리에가 자신은 파나마로 돌아가 파나마 사람에게 재판받을 것을 희망
했으나 그게 어디 언감생심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1992년 7월 미국 법원에서 종신형을
받습니다. 그리고 파나마운하는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로 양도
됩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나 국무장관 등이 가지 않습니다.
노리에가는 미국에서의 감금 생활 이후에 프랑스에서의 감금 생활 그리고 고국인
파나마로 이송되어 다시 거듭되는 감금 생활을 하다 건강상의 이유로 가택 연급 상태에서
2017년 사망하게 됩니다.
그가 꼭 하고 싶어서 반미를 했다고 말하기 힘든 부분도 있고, 내부의 부정부패 등
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약 밀매에도 관여한 정황이 있고요. 하지만 그런 것들
은 노리에가에 대한 평가와 역사의 본질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건 반미를 하는 중남미의
대통령은 응징된다는 것이 당시 미국의 철칙이었고, 그 철칙이 잘 지켜졌다는 점입니다.

또리호스Omar Efraín Torrijos 전 파나마 최고지도자와 지미 카터Jimmy Carter 미


국 대통령과의 조약에 따라 운하가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로 돌아갔습니다. 이 역사적
인 자리에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참여하였는데, 미국은 냉담했습니다. 미국 공화당에서는
운하를 넘겨준 것이 미국의 이익과 안보에 막대한 위협이 된다고 계속 불만을 표시하고 있
습니다. 오늘날에도 운하를 파나마에 넘겨준 것이 미국의 실패한 정책 중 하나라고 생각하
는 공화당 계열의 보수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운하 주변을 관할하는 기업 중에 홍콩계 기업
들이 있는 것도 미국으로는 중국의 압력을 느끼는 마당에 영 신경 쓰이는 일입니다.
아무튼 지금 운하는 파나마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파나마는 새로운 도약을 위
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의 이해관계에 따라 탄생한 한 나라가 조금이나
마 종속 관계를 극복하고 홀로 서려는 노력을 하기까지 100여 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노리에가의 경우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
라고 말하기 힘든 부분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주권 국가의 대통령이 주변의 이해관계에
따라 무참하게 미국에 잡혀가 재판을 받았고 , 이러한 과정에서 파나마인들의 의견과 권리는
철저히 무시, 배제되었습니다.
제17장 멕시코 사빠따 민족해방군의 봉기와 신자유주의

중요 연대
1910년 : 멕시코 혁명.
1928 ~ 2000년 : 좌파와 우파를 아우르는 일당(PNR→PRI) 집권.
1968년 : 대규모 반정부 학생 시위. 발포함으로 300여 명 사망.
1994년 : EZLN 무력 투쟁 발발.
1996년 : 산안드레스 조약.
2018년 : 좌파 마누엘 로뻬스 오브라도르 대통령 집권

1994년 1월 1일은 사빠따민족해방군Ejercito Zapatista de Liberación Nacional이


치아빠스Chiapas주의 주요 도시 7개를 점령한 날입니다. 멕시코는 1월이라도 그다지 춥지
않아서 필자는 반팔 티셔츠를 입고 외국에서의 새해를 쓸쓸히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녁 뉴스를 통해 괴상한 소리와 영상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홈비디오 같은, 정신없이 찍은
영상들과 함께 하꼬보 사블루돕스키Jacobo Zabludovsky라는 유명한 방송국 앵커가 긴장한
모습으로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치아파스주의 일부를 농민들이 무력으로 점령하였다고
요….
그 당시에는 사실 이게 무슨 말인지, 무슨 의미를 갖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습니
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고 학교에 가서 친구,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빠따 민
족해방군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깊어졌습니다. 필자가 다니던 학교가 멕시코에서 가장 규모
도 크고-전체 학생 수가 30만 명이니까요- 좌파 전통을 가진 국립 대학교Universidad
Nacional Autónoma de México라 그런지 사빠따민족해방군을 지지, 지원하는 다양한 활동
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홍보용으로 직접 제작한 비디오 발표회를 보다 보니 그전까지 막
연하게 느끼던 멕시코의 현실이 점점 구체적으로 몸에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멕시코는 1994년 이전까지만 해도 라틴아메리카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되었다고
자랑했습니다. 사빠따민족해방군 이전까지만 해도 라틴아메리카 정치 변동의 가장 중요한
변수였던 게릴라가 멕시코에는 없었거든요. 60년대에 게릴라의 조짐이 있었지만 구체화하지
못했습니다. 70년 가까이 일당이 지배를 하고 있지만, 합의에 따라 정권이 창출되어 국민의
통합을 이끌어내고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식의 논리였습니다. 주변 국가와 비교해 안정된
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빠따 민족해방군의 봉기를 계기로 이 신화가 깨졌습니다. 신화 같지 않은
신화, 즉 정치의 안정은 내외적으로 많은 모순과 허구를 안고 문제를 적당히 봉합해 놓은
채 가식으로 유지되었을 뿐이라는 점이 사빠따 민족해방군의 봉기를 계기로 드러나게 되었
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마 이 정
도인 줄은 몰랐다, 현실이 이렇게까지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었는지 몰랐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일단의 사람들은 그 정도의 문제는 당연한데 일부 불순 세력이 국가의 통합과 발전을
해치는 망동을 한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렇게 1994년 멕시코 역사에서 획을 그을 만한
사건이 터지고 사빠따 민족해방군이 활동을 시작합니다.
사빠따 민족해방군을 소위 21세기의 사이버 혁명이라고도 말합니다. 자신들의 공식 홈
페이지(http://www.ezln.org)를 통해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알리고 동의를 구
하는 새로운 방식의 혁명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세간의 관
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문제의 발단과 과정을 역사의 맥락에서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1492년의 사


건을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치아빠스 주에 사는 원주민들은 1492년 이후 오늘
날까지 변화된 생활 모습이 거의 없을 정도로 사회, 경제 혜택을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아
이들은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고, 어른들은 농사지을 땅이 없어 대도시로 무작정 상경해야
하는 현실의 문제는 1492년 이후 오늘날까지 식민지 모순이 가속화되어 온 결과입니다. 그
러다 보니 한마디로 말해 배고파 밥을 달라는 것이 치아빠스 농민 봉기의 핵심이요 동인입
니다.
민족해방군은 여러 가지 정치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치권 인정이니 문화
정체성의 인정이니 하는 일련의 다양한 요구들은 그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세부 조치들입
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가 1994년 1월 1일 미국과의 자유 무역 협정을 시작하는 날에 구
체화한 것도 많은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정부와 기득권에 의하여 만들어진 신자유주의적
인 국가 발전 모델에 원주민들과 농민들은 배제되었습니다. 민중들은 그러한 국가 발전 모
델에 찬성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즉 “그동안 우리를 이렇게 수탈하더니만 이제는 다국적 기업까지 들여와서 그나마
있던 땅마저도 빼앗고 있다. 우리의 생존권은 안중에도 없는 국가 발전 모델은 의미가 없
다. 그러니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아! 멕시코 원주민들은 빵이 아닌 옥수수가 주식이니 옥수수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 해야겠군요. 아무튼 원주민들이, 민중이 철저히 배제되고 소외되는 신자유주의는 받아들
일 수 없다는 원주민들의 단호한 의사 표현입니다.

2005년 1월 1일을 기해 치아빠스뿐만 아니라 다른 원주민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도 비슷한 형태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치아빠스 사빠따 민족해방군에 대한 지지요
현 신자유주의적인 세계 경제 흐름에 발맞추려는 멕시코 경제 정책에 대한 경고입니다. 미
초아깐 주의 빠라쵸Paracho라는 마을에서도 시위가 있었습니다. 역시 따라스꼬Tarasco 원
주민들이 많이 사는 지역입니다. 이미 60년대에 반란의 기미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고요.
80년대 이후 중남미 전체에 거스를 수 없는 대세처럼 유행하던 신자유주의는 2000
년을 즈음하여 민중들의 진지한 저항을 받고 있습니다. 멕시코 역사에서 원주민들은 1492
년 이래 한 번도 사회의 중심에 놓여본 적이 없습니다. ‘착취’라는 단어는 이럴 때 가장 잘
어울립니다. 너무 과격한 표현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중남미의 역사 현실
은 더하고 뺌 없이 그야말로 착취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흑인이나 원주민들
은 항상 배고프게 살아왔다는 것과 지금도 피부 색깔에 따라 소득의 차이가 엄격하게 구분
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이 끝없이
서양사람에게 착취당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지금까지 원주민들은 식민지 시대는 두말할 나위가 없고 독립 과정을 통해 역사의
중심에서, 사회의 중심에서, 경제의 중심에서 배제되었습니다. 19세기 혼란기 때의 국가 발
전 모델은 선진 유럽이었습니다. 이 시기 역시 바뀐 것이 한개도 없습니다. 그리고 소외된
민중들이 멕시코 혁명의 주체 세력으로 잠깐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는 희망을 품었지만 혁명
의 보수성으로 좌절되고 맙니다. 혁명의 보수화는 근원, 생태적으로 진보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혁명의 좌절을 의미합니다. 이후 혁명 사상, 즉 민중을 어느 정도 제도권 안에
서 수용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원주민들은, 민중들은 여전히 사회의 소외 계
층으로 극단의 경제 불이익, 즉 죽음에 이르는 빈곤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21세기를 앞두고 멕시코 신자유주의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을 발효하는 날 민중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만 것입니다. “여태까지도 참고 참았는
데 신자유주의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다 죽으란 말이냐, 총 맞아 죽나 굶어 죽나 죽기는 마
찬가지다”라는 절박함이 이 사건의 본질입니다. 치아빠스 주에 가면 그 현실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50년대의 현실이 -필자도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 - 그대로 있습니
다. 60년대도 아니고 50년대 말입니다. 하루에 몇백 명의 아이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는
치아빠스 주에 부자들이 사용하는 경비행기장의 수가 멕시코 서른한 개 주 중에서 가장 많
습니다. 문맹률이 가장 높은 이곳 토지의 80% 이상은 외지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루 수입
1달러 이하의 원주민이 절대 다수입니다. 이러한 현실이 1994년 이후 속속 알려졌지만 단
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조금 놀라는 건 그나마 순진한 외국인들뿐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전통과 같은 이야기를 새삼스레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빠따 민족해방
군은 정치, 사회 문제의 차원을 넘어 죽고 사는 생존권의 문제라고 표현해야 이해가 빠릅니
다.
“500년 역사의 과정에서 거듭되어 온 모순을 해결하라! 우리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는 이들의 기본 주장은 착취의 결과가 만들어낸, 정말로 절박한 현실의 문제입니다.

멕시코에서 2018년에 거의 최초라 말할 수 있는 진보 대통령이 탄생합니다. 그 과


정은 참으로 험난했습니다. 바퀴벌레와 같은 대접을 견디며 살아온 500년 이상의 민중 저
항이 제도권 안에서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뭐 딱히 그렇게 막 찬란한 빛은 아니
더라도 그나마 제도권 안에서 어떻게 가난한 자들의 권리와 먹거리가 해결되고 인간으로서
의 최소 존엄이 지켜질 수 있는가의 문제가 거론되어가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늘날의 움직임은 그동안의 수많은 희생을 배경으로 한 아래와 같은 저항의 맥락에서 이어
져 왔습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멕시코 독립 이후의 민중 저항의 계보를 정리해 보자면 다음
과 같습니다.
- 19세기 초 모렐로스의 민중중심적 독립 운동.
- 19세기 중반 Benito Juarez의 자유주의 사상.
- 20세기 초 Zapata의 멕시코 혁명 정신.
- 1948년 혁명 정신 퇴색에 따른 노동자 소요.
- 1968년 학생 운동과 뜨랄떼롤꼬 사건.
- 1994년 EZLN 반정부게릴라 활동 시작
- 2001년 3월 11일 EZLN 평화롭게 멕시코시티 입성:
- 2006년 10월 오아하까 지방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격화
- 2018년 진보 오브라도르Andrés Manuel López Obrador대통령 당선

멕시코의 역사는 PRI라고 부르는 정당에 의하여 멕시코 혁명 이후부터 2000년에


이르는 역사가 주를 이룹니다. 따라서 여러 정당이나 정치 세력에 대한 관찰보다도 그 PRI
라는 이름의 정당의 내부적인 변화와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빠따 민족해방군
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일련의 착취가 멕시코 혁명 이후 오늘날까지 제도권 안에서 어떻
게 이어져 왔는지 정치 변동의 과정을 각 대통령의 정책과 사건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겠습
니다.

▶ 알바로 오브레곤Álvaro Obregón(1920-24): 나름 노력은 했지만 혁명을 보수화 시키


는 데 공헌
- 혁명으로 파괴된 국가 재건을 위해 노력.
- 문교부 장관에 호세 바스꼰셀로스José Vasconcelos - 문화의 부흥, 멕시코 대학 발전,
벽화 운동 등.- 요러한 면에서는 진보적인 성격을 띄었다고 할 수 있음
- 이후 정권에 욕심을 품다 암살당함.

▶ 프루타르코 에리야스 깔예Plutarco Elías Calles(1924-28) - 보수화


- 평화로운 정권 교체, PRI의 전신인 민족혁명당PNR 결성.

▶ 라사로 까르데나스Lázaro Cárdenas(1934-40): 멕시코 혁명의 제도적인 진보성을 만


들어냄, 진보 짱!
- 토지 무상 분배를 대단위로 행함 - 에히도 제도 활성화(Ejido: 민중들이 토지를 공동으
로 소유하는 제도)
- 석유 산업의 국유화, PEMEX 창립. 80년대까지 멕시코 수출의 80%, 국가 재정 수입의
50%를 담당.
- 미국과의 분쟁을 마다하지 않고 진보 정책을 펼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 아빌라 까마초Manuel Ávila Camacho(1940-46): 보수화


- 까르데나스의 급진적인 경향에 반하는 정책.
- 최대의 경제 발전 - 5만 개의 공장 건립.
- 민족혁명당(PNR)에서 제도혁명당(PRI)으로 집권당 개명.
-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멕시코인의 미군 입대 허용.

▶ 미겔 알레만 발데스Miguel Alemán Valdés(1946-52): 발전지향적 보수화


- 1947년 멕시코 노무자들이 미국에서 정식 노동을 할 수 있는 협정 체결.
- 1948년 교사와 노동자들이 소요. 이후 한국 전쟁 등으로 농업 수출 증가. 위기 모면.

▶ 루이스 꼬르띠네스Adolfo Ruiz Cortines(1952-58)


- 1954년 총파업 선언. 봉급 인상. 새 경제 모델, 수출을 위한 수입 관세 인하. 1955년
이후 노동자 소요 진정.

▶ 아돌포 로뻬스 마떼오스Adolfo López Mateos(1958-1964)


- 사회 안정을 중요하게 여김. 그러나 1958-59년 사이 가장 강력한 노동 운동 발생. 해
결책: 좌경화. 쿠바를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와의 유대 강화, 농지 배분. 공업 성장.

▶ 구스따보 디아스 오르다스Gustavo Díaz Ordaz(1964-1970): 좌파 운동을 탄압한 대


통령으로 유명
- 1968년 10월 2일 68 학생 운동과 뜨랄떼롤꼬Tlatelolco 반정부시위 발생 올림픽을 앞
두고 강경 진압 - 발포 –몇백, 몇천의 사람이 사망
- 1968년 10월 12일 - 멕시코 올림픽개최

▶ 루이스 에체베리아Luis Echeverría Álvarez(1970-76)


- 1970년 1인당 국민소득 2000 달러.
- 제3세계 운동 주도.

▶ 호세 로뻬스 뽀르띨요José López-Portillo y Pacheco(1976-82)


- 1973년 중동 전쟁으로 석유값 인상 8%의 고도 성장(석유가 중요 요인)
- 1982년 석유값 하락. 외채 모라토리움 선언.
- 자유 시장 체제의 도입.

▶ 미겔 데 라 마드리드Miguel de la Madrid Hurtado(1982-1988)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 까르로스 살리나스 고르따리Carlos Salinas de Gortari(1988-94)


- 1988년 선거에서 제도혁명당(PRI) 사실상 패배
- 여당 대통령 후보가 선거 유세 중 암살됨

▶ 에르네스또 쎄딜요 뽄세 데 레온Ernesto Zedillo Ponce de León (1994-2000): 우파


의 꼭두각시라고 불림
- 1994년 1월 1일 EZLN 반군의 활약 시작.

▶ 비쎈떼 폭스Vicente Fox Quesada(2000-2006): 완전 신자유주의 이명박과 비슷


2000년 9월 7일 국가행동당(PAN: Partido Accion Nacional) 대통령. 멕시코 혁명 이후
최초로 제도혁명당(PRI)이 아닌 다른 당이 집권. 80년 만의 정권 이양.

▶ 펠리페 깔데론Felipe Calderón(2006~2012)


우파인 국가행동당(Partido Acción Nacional)출신 대통령. 2006년 중남미의 좌파휘몰이가
가장 극심하던 시기에 좌파 대선후보와의 경쟁에서 근소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

▶엔리케 페냐 니에토Enrique Peña Nieto(2012년~ 2018)


PRI가 다시 정권을 잡음

▶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Andrés Manuel López Obrador(2018~2024)


최초 좌파 대통령탄생
제18장 21세기 라틴아메리카 좌파 휘몰이

중요 연대(좌파 대통령 현황, 빨간색은 2022년 현재)

년도 국가 대통령
1959년 쿠바 피델 까스뜨로
1999년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2004년 우루과이 따바레 바스께스
2004년 아르헨티나 네스트로 키르츠네르
2005년 볼리비아 에보 모랄레스
2006년 칠레 미첼 바첼렛
2006년 페루 알란 가르시아
2006년 브라질 룰라 다 실바
2006년 에콰도르 라파엘 꼬레아
2018년 쿠바 미겔 디아스 카넬
2018년 멕시코 로뻬스 오브라도르
2018년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2019년 아르헨티나 알베르또 페르난데스
2020년 볼리비아 루이스 아르세
2021년 페루 뻬드로 까스띨요
2022년 칠레 가브리엘 보리치
2022년 니카라과 다니엘 오르떼가

이제까지 20세기 역사 속에 나타난 라틴아메리카 나라 민중 저항의 과정을 보았습


니다. 일일이 구체적인 사건들을 다 다루지도 못했고, 필자가 다 알지도 못합니다. 그저 중
요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식민지 기간이나 19세기에도 민중의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그렇게 많지 않고,
대부분 지역적인 반란의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멕시코의 게라 데 까스따
Guerra de Casta나 페루에서 18세기 말에 발생한 뚜빡 아마루Túpac Amaru의 투쟁, 그리
고 칠레 남부 지방에서 독립 상태를 유지한 아라우까노Araucano의 저항 등이 꽤 규모가 큰
압제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멕시코 혁명, 에비따와 뻬론 정권, 쿠바 혁
명,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 니카라과 혁명 등이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도들은 실패하고 맙니다. 실패냐 성공이냐는 목적이 무엇이었나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일
이죠. 그들의 목적은 불평등의 해소였습니다.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굶어 죽는 민
중들에게 밥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오늘날의 현실이 말하고 있습니다.
폭력은 꾸준히 심화되었고 오늘날에도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국가 부의 90%를 10%의 상
류층이 가지고 있고 국민의 다수가 절대 빈곤 상태에 있는 현실이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었으니 이러한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아주 분명하고 간단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민중들은 무슨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목숨이 붙
어 있는 한 포기할 수 없는 일이잖습니까. 제 자식은 콜레라에 걸려도 병원에 갈 돈이 없어
죽어 가는데 주인집의 개는 예방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는 현실을 보며 투쟁을 멈출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 투쟁의 양상을 이해하는데 그들이 상대하려는 대상의 변화도 중요한 요인이
될 것입니다. 요즘에는 중남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다국적 기업이라는 것이, 신자유주의
라는 것이, 그리고 세계화라는 것이 각 국가의 무역 장벽을 없애고 자유 경쟁을 원칙으로
한 효율성과 이윤 창출을 유일한 선으로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한 국가의 문제
가 아니고 역류하기 힘든 세계 전체의 분위기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경제의 유일한 선택으
로 받아들여져 그 누구보다도 앞다투어 신자유주의적인 대안을 국가의 목표로 삼고 1980년
대와 90년대를 통해 매진하였던, 그야말로 올 인을 하였던 중남미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
습니다.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많은 희생을 통한 경험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자유주의와 미국 중심의 세계화가 오늘날 민중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되었습니다.
2000년 이전까지는 분배의 문제보다는 성장의 문제를 더욱 중요시해야 한다는 점에
많은 민중이 어쩔 수 없이 동의해준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입이라도 더 많이 먹기
위해서는 어떻게 나누겠는가의 문제에 앞서 먼저 큰 피자덩어리를 만들자는 의견에 동의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피자가 아무리 커져도 결국은 먹는 놈만 더 먹게 되는군요. 없는 사람,
못 배운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외되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생리라는 점을 라틴아메리카 국민
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소위 신자유주의의 실험이라는 것입니다. 피자 자체도 커질 수 없
었습니다. 커질 만하면 실속은 다 외국으로 나가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국가 기간산업마저
도 민영화라는 말로 외국 자본에 넘어가고, 상황이 처음보다 더 나빠졌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페루에 가면 제일 많이 팔리는 콜라 중에 잉까 콜라Inca Kola라는 게 있습니다. 노


란색 콜라인데 맛이 독특합니다. 더운 페루의 사막 지대에 딱 어울리는 것 같아 필자도 잘
먹습니다. 이 잉까 콜라를 페루 토종 기업에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 1935년부터니까 역사가
꽤 깊죠. 한 마디로 페루의 자존심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시장 점유율에서 코카나 펩시에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페루의 자존심, 페루의 맛이 1999년에 코카콜라와 합병을
했습니다. 말이 합병이지 흡수가 된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외국 자본 유치, 다국적 기업과
의 연대, 뭐 이런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나라도 한때 기업체란 기업체는 다 외
국 자본에 팔아야 되고, 외국 자본 유치가 국가의 생존이 걸린 일인 것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잉까 콜라도 이때 비슷한 맥락에서 코카콜라에 팔린 것입니다.
지금 많이들 후회하고 있지요. 코카콜라 회사는 잉카 콜라의 생산 방법이나 외형까
지 하나도 바꾸지 않고 이전과 같은 맛과 디자인 등을 유지합니다. 다만 전에는 민족 기업
이던 것이 이제는 코카콜라가 되었다는 것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잉카
콜라가 토종 기업인 줄 알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의 여파에 알맹이는 없고 무늬만 페루 기업
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를 열망하고 받아들인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이 남겨
놓은 결과입니다.
국가 경제 구조는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고 외국인 투자를 통한 고용 창출, 국가 경
쟁력 강화, 수출 산업 육성과 같은 환상은 신기루가 되어 무너져 내렸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외국 자본이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그나마 남아 있던 경쟁력 있는 산업 분야를 잠식한
것입니다. 긍정적인 효과는 반짝이고 장기적으로 구조 조정, 산업의 기계화 등에 따른 실직
으로 이어집니다. 국내 자본 시장의 약화로 국가 경제의 몰락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러한 부정적 결과들은 민중의 삶을 신자유주의 이전보다 훨씬 더 악화시켰습니다. 결국 스
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외국 기업에 의한 국내 산업과 자본의 잠식은 피자를 크게 만
들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분배의 문제가 병행된 국가 번영이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 잊을 수 없
는 교훈으로 남은 것입니다. 누구와 협력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미국이나 서구 열강보다는
같은 이해와 아픔을 가지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국가 간의 결속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다
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21세기의 세계화 분위기 속에서 국가 경제를 유지, 발전시키
기 위해서는 싫든 좋든 국제적 협력을 통한 경제 통합과 같은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러한 결론의 종합판이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생겨
난 좌파 정부 붐의 배경 중 하나가 됩니다.

2000년을 시작으로 베네수엘라가 차베스 정권을 세웁니다. 쿠바는 원래 좌파였고


요. 파라과이가 여기에 가세하였고, 우루과이에서까지 100년이 넘는 역사 전통에서 최초로
좌파 대통령이 탄생하기에 이릅니다. 브라질에서는 2003년 룰라 대통령이 당선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키르츠네르도 같은 해에 공동 전선을 폈으며, 2004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의 작은 나라 우루과이에서도 좌파가 집권합니다. 2006년에는 진보 진영의 미첼 바첼
레트가 칠레에서 당선됩니다. 남미의 에콰도르에서도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이 좌파 깃발을
들고 당선됩니다. 그다음 해인 2007년에는 중미의 거인 니카라과에서 혁명군 출신의 다니
엘 오르테가 대통령이 됩니다. 위에 열거한 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비록 대통
령은 중도, 또는 우파 성향을 가지고 있어도 국민들의 좌파 경향은 넓게 확산되었습니다.
2010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좌파 휘몰이가 주춤하는 듯한 인상을 보입니다. 브라질
과 아르헨티나, 칠레 등의 굵직굵직한 나라들에서 우파가 집권하게 되지요. 한국의 신문들
은 연일 “포풀리즘의 종말”이나 “좌파의 최후” 등과 같은 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2020년
을 즈음하여 제2의 좌파 붐이 다시 불고 있습니다. 일찍이 멕시코에서 좌파가 만들어지더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등지에서 좌파가 파격적인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것은 중남미 국민들의 새로운 저항 방식이요 현실적인 대안의 총화라고 할 수 있
습니다. 그래서 남미 공동체가 급속히 진전되었습니다. 유럽 공동체처럼 라틴아메리카 공동
체를 만든다는 목표하에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의 목적으로 남미의 각 국가가 미
국과 맺으려던 자유 무역 협정을 거부하는 것으로 그들의 의지를 결연하게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남미 통합이 거의 미친 짓이란 생각이 들기
도 합니다. 미국과의 관계, 라틴아메리카 국가 간의 이해관계 상충 등 실로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각 국가의 중점 산업의 문제 등도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고요.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는 200년 전 시몬 볼리바르가 만들려던 남미 통합 국가의 이상이 실패할 때
의 원인이었던 지역주의, 각 국가의 개별적인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에 대한 우
려의 목소리도 큽니다. 게다가 미국이 자신들의 뒷마당이었던 라틴아메리카의 반항을 가만
히 지켜보기만 할까요? 참으로 궁금합니다. 과연 특별한 산업이나 기술력이 없는 상태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을 가지고 경제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걱정과 의문
이 앞섭니다.
이렇듯 문제가 많다 보니 좌파 휘몰이와 남미 연합은 불가능할 것처럼 느껴지는 것
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각 해당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또다
시 주변 국가가 아닌 다 같이 중심인 국가로 발전하겠다는 꿈과 의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요!

추이Chui는 우루과이와 브라질의 국경 마을이다. 먼저 우루과이 쪽의 마을이 형성


되고 이후에 큰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브라질 쪽의 추이라는 마을이 형성되었다. 우루과이
쪽은 표기를 ‘Chuy’로 하고 있다. 두 마을이 전혀 문제없이 한 동네를 이루고 있다. 이민국
이나 세관은 각 마을에서 2킬로쯤 떨어진 곳에 있다. 우루과이는 일찍부터 남미에서 0%의
문맹률을 자랑하는 나라다. 목축을 중심으로 한 산업 덕택에 높은 경제적 안정을 기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 사회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이는 교육으로 재투자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루과이 쪽 이민국 앞에서 우루과이 국립대학교의 심리학과에 다닌다는 아구스띤
이란 학생을 만났다. 이 친구는 우루과이의 치안 상태가 안전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택시
운전사나 아침 식사를 할 때 서빙을 해주던 종업원도 이런 점을 확인시켜준다.
지난 10월, 우루과이 역사상 최초의 중도 좌파 대통령 따바레 바스께스Tabaré
Vázquez가 당선되었다. 표 차이도 상당히 났다. 신자유주의의 유행이 커다란 고비를 맞는
전환점에서 우루과이 역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대한 반감이 이번 선거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장기적인 면에서 실업률이 증가하고 외국 자본에 의한 국내 자본의 붕괴, 경제의
종속, 그리고 이어지는 국가 경제의 잠식 등이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여 국민들의 좌파 성
향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분석한다.
우루과이는 워낙 안전한 나라이고, 이제 브라질처럼 스페인어가 안 통하는 것도 아
니니 - 스페인어 안 통한다고 히치를 안 한 것도 아니지만 - 여기에서는 히치를 하면서 사
람들의 이야기를 좀 듣고 싶다. 남미에서 가장 알찬 나라 중 하나인 우루과이. 작은 나라가
큰 대국 사이에 끼어 어떻게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룩하며 여러 면에서 앞설 수 있었는지 알
고 싶다. 통계 수치나 책에 나와 있는 그런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자못 기대된다.
여행 일정이 빡빡해서 빨리 리마로 돌아가야 하지만 우루과이라는 새로운 나라에
들어오니 또 다른 의욕이 팍팍 생긴다. 아구스띤이라는 녀석이 몬테비데오에서 꼴로니알 도
시로 가는 히치하이킹 포인트를 알려주었다. 시내 꼴로니알Colonial이란 이름의 도로에서
494번 버스를 타고 바라 데 산따루씨아Barra de Santalucia라는 곳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
면 거기에 히치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란다. 원래 경쟁자가 많으면 히치하는 데 짜증이 나게
마련이지만 그런 걸 특별히 가릴 필요는 없다. 지금도 다른 녀석이 먼저 와서 자기를 데려
갈 차를 기다린다. 나는 여유 있는 마음에 이 친구와 경쟁할 생각이 없다. 앉아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이놈이 빨리 타고 가면 내가 다음으로 본격적으로 히치를 할 생각인데, 통
행하는 차량의 수가 적어서 그런지 영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오후 12시 10분
집권당인 프렌떼 암쁠리오 엔꾸엔뜨로 쁘로그레시스따 누에바 마요리아Frente
Amplio Encuentro Progresista Nueva Mayoria - 이 이름을 굳이 직역하자면 ‘진보를 원
하는 다양한 국민들의 새로운 다수당’ 정도 될 것이다. 이름이 길어서 헷갈리지만 약진당과
의 연합을 통해 중도 색채를 띠려고 노력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레닌과 마오쩌둥 등을 모
델로 삼았던 50년대와 60년대의 좌파는 이제 중남미에서 대부분 사라졌다. 사회민주주의
색채라고 표현되는 좌파는 공산주의가 아닌 사회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파 등과의 제휴를 통해 자신들이 급진적이지 않다는 점을 애써 강조한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실용적인 측면에서 가난
한 사람들을 위한 비엘리트 정당이라는 점은 양보하지 않는다. 우파와 신자유주의의 모순들
로 인한 경제의 침체와 국내 자본의 침식에 대한 경각심과 우려를 충분히 보여준다. 신자유
주의에 따른 경제 지표의 하락과 발맞추어 다른 중남미 국가와 마찬가지로 이곳 우루과이에
서도 좌파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여기는 산따 떼레사Santa Teresa라는 요새이다. 식민지시대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
경 분쟁의 중심에 놓였던 곳이다. 워낙 요새나 성곽의 전경을 좋아하다 보니 히치한 차에서
내려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여행 일정이 아무리 바빠도 이번 기회에 볼 수 있
는 것은 놓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많은 시간이 소비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역시 한
국식 빨리 빨리는 지울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쩝) 그런데 여기에서 다시 큰길로 걸어 나
와 히치를 하려니 경쟁자가 너무 많다. 사회가 안정된 덕택에 히치를 하는 연놈들이 너무
많다. 치안이 좋은 나라에서는 또 이런 문제가 있구먼. 으그! 저 경쟁자들을 워찌 물리치고
성공한담? 버스가 먼저 오면 버스를 타야겠다.
책을 마치며... 총정리

벌써 책의 마지막 장이 되었군요. 이 책 전체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고 하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겠죠. 그런데 여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
문자답을 할 수밖에 없네요.
1492년의 사건에 대해 참 많이 말했습니다.
왜 그랬지요?
1492년의 사건이 출발점이라고 했습니다.
뭐의 출발점이죠?
당연히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모순, 갈등, 해결책이 이 사건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생각합
니다. 물론 1492년이란 말 자체가 상징적인 것이지만요. 그렇다면 무엇을 상징하나요? 불평
등을, 그리고 그러한 불평등에 따른 사회의 수직 구조, 경제적인 착취, 정치적인 부당, 문화
적인 이질성.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이고, 해결하지 못하는 가장 큰 문
제입니다. 이러한 것의 출발점이 1492년입니다.
유럽인들이 들어오면서 좋고, 똑똑하고, 멋있고, 바르고,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서양
인과 나쁘고, 우둔하고, 못생기고, 그릇되고, 부정적인 원주민이라는 수직적인 관계가 맺어
졌습니다. 그리고 그사이의 갈등이 바로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사람 위에 사람이 있어 왔고, 사람 밑에 사람이 있어 왔습니
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나 서양이나 다 비슷했지요. 라틴아메리카의 500여 년의 역
사는 형태가 조금 바뀌기는 했지만 인종에 따른 인간 가치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했고, 지금
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밑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살다 보니 착취로 인해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 이국적으로 접하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에 대한 이미지가 있습니
다. 그들은 전통을 사랑하여 고수하며 오늘날까지 그 맥락을 이어온다 생각합니다. 원시적
인 도구로 물건을 만들고 사냥을 하는 아마존의 원주민이나 마야의 원주민들을 소개하는 것
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원주민들이 말이지요.
돈이 있으면 그렇게 살 사람 정말 몇 명 없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옛날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차 타면 10분이면 갈 곳을 전통이 좋다면서 짚신 신고 두세 시간씩 걸어 다닐 사람
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믹서기가 있으면 1분이면 할 일을 절구에다 놓고 한 시간씩 빻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물론 요즈음 웰빙이니 뭐니 해서 이러한 개념에 혼란이 있을 수
도 있겠지만 그건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굳이 여기에서 부연할 필요는 없겠지요. 이들
은 500년 전의 생활 모습과 거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디지털 시대니 메타버스가
어떻니 하며 떠들고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를 이야기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30~40% 이상의
인구는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달라진 것이 없는 생활을, 그야말로 돈이 없어서 그대
로 하고 있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사실 500년 전보다 상태가 훨씬 나빠졌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굶어 죽는 일도 지금
보다 적었고, 상대적인 극빈 상태도 적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는 500년 전
과 비교하여 발전은 고사하고 생존권마저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총 들고 칼 들
고 혁명을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혁명이니 게릴라니 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거부감부터 느낍니다. 그런
데 가서 한번 보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멕시코시티에서 구걸을 하다 길바닥에서 자
는 원주민들이 수도 없습니다. 이상 기온으로 날씨가 추워지면 죽는 사람들도 속출합니다.
그런 노숙자 중에 백인이 하나라도 있는 줄 아십니까. 모두 원주민이거나 혼혈입니다.
1492년은 지독히도 라틴아메리카의 운명을 따라다녔습니다. 500년 동안 그렇게 살
았습니다. 참으로 모순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여기에 라틴아메리카의 한이 있고, 깊이가 있
고, 문학이 있고, 그들의 다른 세상이 존재합니다.

1492년의 사건이 식민지 시대라는 공고화 과정을 거칩니다. 1800년대 초에 대부분


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이 독립하게 되지만 그 과정은 민중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
다. 위에 계신 지체 높으신 어른들의 내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에 사는 스페
인사람과 아메리카 대륙에 뿌리를 둔 스페인사람의 갈등에 불과합니다. 이게 독립입니다.
별게 없습니다.
더욱더 부정적인 변화는 독립 이후에 찾아왔습니다. 19세기 혼란의 과정에서 서양
식 모델을 쫓았던 상류 계층이 원주민에 대한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민중들의 삶은 더욱 악화되었고, 서양의 가치 앞에 라틴아메리카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혼
혈의 문화나 원주민의 독특함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굶어 죽는 현실은 더욱 참혹
해 집니다. 이러한 결과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다양한 방식의 민중 저항으로 나타납니다.
멕시코 혁명, 에비따, 쿠바 혁명, 니카라과 혁명, 칠레의 사회주의 실험, 파나마의
저항 등을 통해서 천형과도 같은 그들의 모순을 극복하고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꿈틀대 보았
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실패하였습니다. 이때 미국이 바로 옆에 있습니다. 너무나도 가까
워서 깊은 이해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그들이 마수를 뻗칩니다. 양키의 막대한 군사, 경
제력 앞에 힘없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너무나도 왜소했습니다.
이도 저도 안 되니 신자유주의라도 받아들여 봤습니다. 1980년대를 말하고 있습니
다. 그래도 나라가 잘 살면, 부자들이 더 잘 살면 떡고물이라고 좀 더 떨어지겠지 하는 생
각이 신자유주의 환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참혹한 결과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구 선진국의 자본은 자신들의 뱃속을 불리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습
니다.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도 내 입에 초콜릿 단맛을 느끼는 것이 훨씬 큰 기쁨이지요.
그게 자본의, 신자유주의의 속성입니다. 또 다른 희생이 따랐습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휘몰이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습
니다.
1492년의 사건이 만든 모순이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변
화의 도전 앞에서도 굳건히 유지되었는지를 보았습니다 . 잘 사는 백인과 못 사는 민중의 관
계가 굳어져 왔는가를 보았지요. 이것이 라틴아메리카 역사의 부정할 수 없는 중심입니다 .

오늘날의 첨예한 현안들을 좀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면 이러한 역사의 맥락으로 이


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일제 식민지 시대의 문제와 그
이후 친일파의 재집권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무엇을 역사의 가장 중요한 맥락으로 볼 것인가, 어떤 시각으로 역사를 이해할 것인
가, 오늘날의 문제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이 하나의 세트이고, 따지고 보면 같은 말입
니다. 그래서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역사 인식의 차이로 나타나는 것
이고, 역사 인식의 차이가 오늘날의 문제점을 치료하는 방법의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
한 역사의 시각대로라면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발전의 전제는 국민 통합이고, 이는 불평등하
고 부당한 민중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삶의 질을 끌어올려 바르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필자가 이런 주장을 하다 보니 빨갱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성장보다 분배라
는 것은 이미 당연한 얘기가 된 지 오래고, 분배는 부당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서는 부당한 간섭을 극복해야 합니다. 기득권의 권력, 경제력 집중의 관성을 극복해야 합니
다. 미국 극복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1492년을 극복하는 것 아닙니까. 그 당시의
부당함을 바로잡는 것이지요. 이러한 맥락으로 라틴아메리카를 설명해 보았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싶은 분을 위해 말씀드립니다. 발달한 인터넷


을 통해 중남미 뉴스들을 따로 볼 수도 있습니다. 현지 미디어 매체들도 번역 서비스를 이
용하면 그럭저럭 이해할 만합니다. 한 사건에 대한 발단과 전개 그리고 그 사후 처리 과정
등을 지금 공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살펴보면 필자의 생각에 동의하거나 그렇지 않
거나, 또는 그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 하는 나름의 시각이 생기면서 흐름에 관한 판단이 가
능해질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지요. 볼리비아에서 천연가스 수출과 관련하여 정국이 혼란한 적
이 있습니다. 민중들은 천연가스 수출을 반대했습니다. 수출하더라도 외국 세력의 독점과
착취라는 단물 빨아먹기식은 안 된다, 그러니 원재료 값이나 지분 등을 올려 자국의 경제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죠. 반면 우파는 하루라도 빨리 국가의 경제 개발을 위해 외국 자본
을 유치하여 수익을 올리자는 것입니다. 민중들은 외국 기업의 약속을 믿지 않습니다. 몇백
년간 그런 식으로 외국 자본이 들어왔어도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 없다, 그러니 이제 다시
속지 않겠다고 외치는 겁니다. 우파는 우파대로 불만이 있습니다. 민중이 소외된 상태에서
국가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중남미 협력 모색의 발판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원을 적극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는 그런 것이 아니니 좀 믿어 달라, 그거 외
에는 달리 경제를 발전시킬 길이 없다는 것을 당신들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 …. 그렇지
만 민중들은 막무가내죠. 거짓말 마라, 그렇게 속아온 것이 500년이다. 전에 포토시Potosi
광산(볼리비아에 있는 식민지 시대 세계 최대의 은광) 개발할 때도 그랬고 항상 그래왔다.
독립 이후에도 외국 자본 들여와서 지금과 똑같은 말 하고 우리 자원 다 바닥냈다. 그리고
우리는 요 모양 요 꼴로 못살고 있다. 우리는 더는 속지 않을 거다. 그런 행위를 이제는 더
묵고 할 수 없다. 그래서 21세기를 시작하며 볼리비아는 좌파를 선택했습니다. 과연 그들은
외국 매판 자본 없이 국가 발전을 이룰 수 있을까요? 국민은 어디까지를 그 발전의 만족할
정도라고 생각할까요? 이러한 식으로 중남미의 현안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그야말로 역사의
흐름과 분위기가 들어오기 시작할 겁니다. 꾸준한 관심과 흥미를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꼭 한 번 따지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반미에 관한


것입니다. 용어 자체가 좀 과격하지요.^^ 제 글의 스타일이 좀 그렇기도 하지만 다른 점잖
은 표현보다 가장 현실감 있는 단어가 아닐까 합니다. ‘반미’. 20세기의 라틴아메리카를 말
아먹은 것이 미국이다, 그러니까 반미를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많은 부분 공감
하지만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아니, 이제 와서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여태까지 미국 놈은 다 죽일 놈들이라고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만 갑자기 반미가 마음에 안
든다니, 비겁해도 이만저만 비겁한 게 아니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가 미국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힘이 있었다면 그들과 똑같이 안 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 솔직히 질
문해봅시다. 자신 있습니까. 혹시 우리의 죄와 욕심을 가리기 위한 대리 희생양 삼기로 반
미를 하는 건 아닌지 신중하고 겸허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종 차별은 한국 내에서 일하는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을 대하
는 태도에서, 그리고 중남미와의 관계에서는 현지 주재 한국 기업체의 경영 사례를 통해 많
이 지적되었습니다. 미국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고 말하면 많은 분들이 저에게 항의하
실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도 미국의 입장이었다면 만만치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듭니다. 최소한 라틴아메리카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체의 사례를 보면 그렇습니다. 우
리나라도 제국주의적인 매판 자본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미국만을 나쁘다고 하기가 영 찜찜합니다. 미국의 행위는 분명히 잘못되고 그런 일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만약 그러한 결과가 우리의 잇속을 챙기는 데 도움이 된다
면……. 그것을 수수방관하거나 나서서 한몫 거들지는 않을까요? 앞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
을까요?
반미, 좋습니다. 그러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
아야 합니다. 그래서 필자는 대놓고 반미 하는 것이 찜찜합니다.
충분한 비판과 이해를 한 후의 반미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반미의 문제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모든 미국인을 다 나무랄 것인가? 미국에서도 흑인과
같이 기득권의 그림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사회 바닥층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쟁의 총알받이로 이용되는 등 미국이 행한 제국주의 침략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도 많습니다. 이들까지 싸잡아 욕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미국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의 책임인가?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 스스로에 대한 반성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합니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세계 질서가 만들어 놓은 문제에 우리도 큰
몫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면을 통해서 세계 평화를 논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럴 목적으로 쓴 것도 아닙
니다. 그렇지만 결론에 대신하여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원칙적이고 긍정적인 뜬구름 잡는 이
야기를 해보라고 한다면, “라틴아메리카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없어질 때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백인이나 혼혈이나 원주민이나 서로 더 편하
고 안전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이는 기득권의 양보나 파괴를 통해서만이 가능합
니다. 그래서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1492년이 만들어 놓은 짐을 벗어 던져야 라틴아메리
카에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요, 그래야만 경제도 발전하고 정치도 안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는 비단 라틴아메리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고 세계의 문제이
기도 합니다.
한 방에 정리하는 라틴아메리카 주요 국가 현대사 연표: 멕시코
1810년 독립
1910년 멕시코 혁명(민중혁명)
1934~1940 라사로 까르데나스 대통령(진보적 정치행보)
보수화
1968년 Tlaltelolco 학살 사건 – 보수화 심각
1971년 Halconazo 학살사건 – 보수화 결정판
1989년 Partido de la Revolución Democrática 창당(좌파정당)
1994년 EZLN – 진보적 자치 혁명
2000 ~ 2006년 – Vicente Fox 대통령 (PAN, 극우)
2006 ~ 2012년 - Felipe Calderón 대통령 (PAN, 극우)
2012 ~ 2018년 – Pena Nieto 대통령 (PRI, 중도)
2018 ~ 2024년 - Andres Manuel Lopez Obrador (최초의 좌파 대통령)

한방에 정리하는 라틴아메리카 주요국가 현대사 연표: 브라질


1500년 포르투갈 식민지
1815 ~1821 리우데 자네이로가 브라질 포르투갈 의 수도
1822년 브라질 독립
1889 ~ 1930년 공화국시대 개막 – 왕정폐지. 노에제폐지 등 진보적
1930 ~ 1945년 바르가스 시대, 파시즘 영향
1946 ~ 1964년, 좌파, 1960년 수도이전(브라질리아), 군대의 반항
1964 ~ 1985년 쿠테타, 군사독재, 경제성장, 빈부격차, 인권침해, 반정부게릴라
1985 ~ 2003년 신자유주의 정책
2003 ~ 2011년 룰라, Fome Zero, 볼사 파밀리아, 부패 혐의
2011 ~ 2016년 지우마 호세프(좌파 룰라의 후계)
2016 ~ 2018년 테메르 대통령(우파), 반 룰라
2018 ~ 2022년 보우소나루(극우)

한방에 정리하는 라틴아메리카 주요국가 현대사 연표: 아르헨티나


1810년 독립
1870년 외국이민급증, 원주민 탄압
1880~1926년 경제 발전 세계 10대 부국
1946 ~ 1955년 뻬론대통령(좌파)
1955 ~1973년 군사 구테타 이후 군사정권
1973~1974년 뻬론 2차 정권, 뻬론 사망
1974 ~1976년 뻬론 부인 이사벨 집권
1976 ~1983년 군사구테타 이후 군부 독재
1982년 포클랜드 전쟁
1989 ~1989년 라울 알폰신 대통령, 외환위기
1989 ~ 1999년 까를롤스 메넴 대통령
1999 ~ 2000년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
2001 ~2003까마노 두알데 대통령
2003 2007년 키르츠네르 대통령
2007년 네스트로 키르츠네르 사망
2007~2015년: 키르츠네르의 미망인인 크리스티나 키르츠네르 대통령
2015~2019 마우리시오 마크리(우파)
2019년 ~ 2013 페르난데스 대통령, 크리스티나 키르츠네르 부통령

한방에 정리하는 라틴아메리카 주요국가 현대사 연표: 콜롬비아


인구 4천 800만 한국과 유사
면적 남한 10배 (아메리카 대륙 순위: 캐나다,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콜롬비아,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칠레, 에콰도르)

1700년 누에바 그라나다 부황청


1819년 독립: 그란 콜롬비아(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1186년 현재의 콜롬비아 성립(누에바 그라나다, 그란 안디나)
1903년 파나마 독립
1953~1957년 군사독재
1957~1974년 양당체제(보수당과 자유당의 국민전선 협정)
1960년부터 좌익 게릴라와 우익준군사조직(Paramilitar)간의 갈등격화
2002년 극우 우리베 대통령
2010년 중도우파 산토스 대통령- 내전 종식을 위한 내전종식 노력- 노벨 평화상
2018년 8월 우파 이반 두께 대통령(4년임기)

게릴라 조직
FARC(Fuerzas Armadas Revolucionario de Colombia)
ELN(Ejercito Liberacion Nacional)- 마르크스 레닌주의
M19- 1986년 대법원 습격, 현재 정당활동 M-19 민주연합(M-19 Democratic Alliance)

한 방에 정리하는 라틴아메리카 주요국가 현대사 연표: 칠레


1810년 독립
1879~1883년 테평양 전쟁 – 페루, 볼리비아 vs 칠레 (국토의 30%이상 획득)
1932년 까지 구테타등 정치적 불안
1932~64년 급진당등의 좌우 정권교체
1964년 좌파 기독민주당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 – 개혁 미흡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 – 좌파 공산당 – 국유화
1973년 ~ 1989년 피노체트 피살자 3197명, 고문피해자 만명, 가혹행위 10만명
1989~2006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 협의체 소속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당의 연립정권
2006년 진보 미첼 바첼레트(Michelle Bachelet) 53%
2010년 보수 피녜라 대통령(Sebastián Piñera) 51%
2014년 진보 미첼 바첼레트 62%
2018년 칠레의 트럼프 피녜라 대통령재선
2019년 대규모 반정부시위
라틴아메리카 중요 통계자료

국 시
명4) 지 인구7)

원어식표 (단위:천
정식명칭 역 면 적 구 수 도 인 종 정부형태 의 회
기/ 명)
6)
영어식표 (2005년) 율
기5) (200
5년)
1,972,5 양원제
Los 50㎢ 씨우닷 데 메스띠소 60%, (정원:상원
메히꼬 연방공화제,
Estados 북 (한반도8) 106,14 76. 메히꼬 인디오계 30%, 128명, 하원
/멕시 대통령중심
Unidos 미 의 약 9배, 7 5% (Ciudad de 백인계9%, 500명,
코 제
Mexicanos 세계 제 México) 기타1% 임기:상원 6년,
하원 3년)
14위)
구아떼 La 108,89 씨우닷 데
인디오 54%, 공화제, 단원제
말라 República 0㎢ 50. 구아떼말라
12,700 메스띠소 40%, 대통령중심 (정원:158명,
/ 과테말 de (한반도의 0% (Ciudad de
기타 6% 제 임기 4년)
라 Guatemala 약 1/2) Guatemala)
22,966 양원제
흑인 34.1%, 입헌군주제
㎢ 48. 벨모판 (정원상원
: 12명,
벨리즈 Belize 270 물라토 46.4%, (영연방9)),
(한반도의 6% (Belmopan) 관선, 하원 29명,
인디오 10% 의원내각제
약 1/10) 임기 5년)
La 112,09 메스띠소 90%,
떼구시갈빠 공화제, 단원제
온두라 República 0㎢ 47. 인디오 7%,
7,347 (Tegucigalp 대통령중심 (정원:128명,
스 de (한반도의 9% 흑인 2%,
a) 제 임기 4년)
Honduras 약 1/2) 백인1%
21,040
República 중 메스띠소 91%, 공화제, 단원제
엘살바 ㎢ 57. 산살바도르
de 미 6,875 (San 백인 6%, 대통령중심 (정원:84명,
도르 (한반도의 8% Salvador)
El Salvador 인디오 3% 제 임기 3년)
약 1/10)
니까라 131,81 메스띠소 69%,
República 공화제, 단원제
구아 1㎢ 56. 마나구아 백인 17%,
de 5,483 대통령중심 (정원:92명,
/ 니카라 (한반도의 9% (Managua) 흑인9%,
Nicaragua 제 임기 5년)
과 약 3/5) 인디오5%
꼬스따 La 51,100 스페인계백인
공화제, 단원제
리까 República ㎢ 62. 산 호세 94%,
4,322 대통령중심 (정원:57명,
/코스타 de Costa (한반도의 6% (San José) 흑인 3%,
제 임기 4년)
리카 Rica 약 1/4) 메스띠조 등 3%

빠나마 República 75,517㎢ 씨우닷 데 메스띠소 60%, 공화제, 단원제


빠나마 65.
/파나 de (남한의 약 3,228 백인11%,흑인13 대통령중심 (정원:78명,
8% (Ciudad de
마 Panamá 3/4) Panamá) %,인디오 10% 제 임기 5년)

양원제
꼴롬비 1,138,910
República 메스티죠 58%, 공화제 (정원:상원
아 남 ㎢ 76. 보고따
de 46,039 백인20%,뮬라토14 ,대통령중심 102명, 하원
/콜롬 미 (남한의 6% (Bogotá)
Colombia %,흑인 4% 제 165명, 임기
비아 약 12배)
4년)
República 912,05 메스띠소 67%,
공화제, 단원제
베네수 Bolivariana 0㎢ 까라까스 92. 백인21%,
26,577 대통령중심 (정원 165명,
엘라 de (한반도의 8% (Caracas) 흑인10%,인디오
제 임기 5년)
Venezuela 약 4배) 2%
에꾸아 283,56 메스띠소 65%, 단원제
República 공화제,
도르 0㎢ 62. 끼또 인디오25%,백인10 (정원:100명,
de 13,215 대통령중심
/에콰 (한반도의 8% (Quito) %, 지역구 100명,
Ecuador 제
도르 약 1.3배) 흑인 10% 임기 4년)

214,97 인디오계 50%,


Cooperativ 흑인 36%,
0㎢ 공화제(영연 단원제
가이아 e 38. 죠지타운 아메리카 인디오
(한반도 751 (Georgetow 방),대통령중 (정원:65명,
나 Republic of 5% 6%,
정도의 n) 심제 임기 5년)
Guyana 백인 및
크기) 중국계1%
인도계37%, 크레올
163,27
파라마리보 31%, 단원제
Republiek 0㎢ 77. 공화제,
수리남 449 (Paramarib 인도네시아계인 (정원:51명,
Suriname (한반도의 2% 대통령제
o) 15.3%, 임기 5년)
약 3/4)10)
흑인 10.3%
1,285,2
메스띠소 45%, 단원제
뻬루 República 20㎢ 72. 리마 공화제,
27,947 인디오 37%, (정원 120명,
/페루 del Perú (한반도의 6% (Lima) 대통령제
유럽계 백인 15% 임기 5년)
약 5.8배)
양원제
República 8,511,9 백인 52.1%, (정원:상원
브라실 연방공화제,
Federativ 65㎢ 187,59 83. 브라질리아 혼혈 41.4%, 81명, 하원
/브라 대통령중심
e (한반도의 7 4% (Brasilia) 흑인5.9%,인디오1 513명,
질 제
do Brasil 약 37배)11) % 임기:상원 8년,
하원 4년)
라빠스(La 양원제
1,098,5
Paz,행정 인디오 50%, 공화제, (정원:상원
볼리비 República 80㎢ 64. 수도),수끄레(
9,427 메소띠소 35%, 대통령중심 27명, 하원
아 de Bolivia (한반도의 2% Sucre,
헌법상수도, 백인 15% 제 120명, 임기
약 5배)
사법수도) 5년)
양원제
(정원:상원
756,95 메스띠소 66%,
공화제, 48명{선출 38명,
República 0㎢ 산띠아고 86. 백인계 29%, 임명 9명,
칠레 16,267 대통령중심
de Chile (한반도의 6% (Santiago) 인디오3%, 종신1명},하원
제 120명,
약 3.5배) 기타2%
임기:상원 8년,
하원 4년)
양원제
빠라구 406,75
República 메스띠소 95%, 공화제, (정원:상원
아이 2㎢ 58. 아순시온
del 6,216 백인 및 인디오 대통령중심 45명, 하원
/파라 (한반도의 4% (Asunción)
Paraguay 5% 제 80명,
과이 약 1.8배)
임기 5년)
양원제
우루구 176,22
República 몬떼비데오 백인 88%, 공화제, (정원:상원
아이 0㎢ 91.
Oriental del 3,455 (Montevide 메스띠소8%, 대통령중심 30명, 하원
/우루 (한반도의 9%
Uruguay o) 흑인4% 제 99명,
과이 약 4/5)
임기 5년)
양원제
아르헨 2,766,8 (정원:상원
부에노스 이탈리아계 35.5%, 공화제,
띠나 República 90㎢ 91. 아이레스 72명, 하원
38,592 스페인계 28.5% 등 대통령중심
/아르헨 Argentina (한반도의 8% (Buenos 257명,
Aires) 백인 97% 제
티나 약 12.5배) 임기:상원 6년,
하원 4년)
110,86 뮬라토 51%,
아바나 단원제
꾸바 República 0㎢ 76. 백인37%, 공화제,
11,369 (La (정원:609명,
/쿠바 de Cuba (한반도의 1% 흑인11%, 중국인 공산당1당제
Habana) 임기 5년)
약 1/2) 1%
10,991
㎢ 양원제
(한반도의 입헌군주제 (정원:상원
자메이 52. 킹스톤 흑인 91%,
Jamaica 1/20로 2,651 (영연방), 21명, 하원
카 2% (Kingston) 인도계 1.3%,
경기도와 내각책임제 60명,
비슷한 임기 5년)
면적)
양원제
Commonweal 13,878 흑인 85%,
입헌군주제 (정원:상원
th km² 90. 낫소 백인 12%,
바하마 323 (영연방), 16명, 하원
of The (남한의 약 0% (Nassau) 아시안,히스패닉
의원내각제 49명,
Bahamas 1.5배) 3%
임기:5년)
양원제
27,750 (정원:상원
아이띠 Républiqu 포르토 공화제,
㎢ 41.
프랭스 흑인 95%, 27명, 하원
/아이 e 9,151 대통령중심
(남한의 약 8% (Port-au-P 뮬라토 5% 83명,
티 d'Haïti rince) 제
3배) 임기:상원 6년,
서 하원 4년)
라 인
양원제
레뿌브리 도 48,432
La 산또 도밍고 물라또 73%, 공화제, (정원:상원
까 제 ㎢ 65.
República 9,100 (Santo 백인16%, 흑인 대통령중심 32명, 하원
도미니까 (한반도의 6%
Dominicana 도 Domingo) 11% 제 150명,
나/도미니 약 1/4)
임기 4년)
카공화국
The
754㎢ 흑인(90%), 단원제
도미니 Commonweal 74. 로쏘 공화제,
(제주도의 79 카리브계 인디오 (정원:30명,
카 th 4% (Roseau) 의원내각제
약 1/4) (약 3천명) 임기 5년)
of Dominica
세인트 Federation 바스테르 단원제
261㎢ 31. 대부분 흑인, 소수의 입헌군주제,
키츠 of St. Kitts 43 (Basseterre (정원:14명,
12) 8% 백인계 및 혼혈 의원내각제
네비스 and Nevis ) 임기 5년)
양원제
입헌군주제 (정원:상원
엔티가 Antigua 38. 세인트 존스 아프리카계 흑인 및
442㎢ 81 (영연방), 17명, 하원
바부다 and 4% (St. John's) 혼혈
내각책임제 17명,
Barbuda
임기 5년)

양원제
입헌군주제
세인트루 Saint 31. 카스트리즈 흑인계 90.3%, (정원:상원
616㎢ 161 (영연방),
시아 Lucia 3% (Castries) 혼혈 5.5% 11명, 하원
의원내각제
17명,
임기 5년)
St.Vincent 아프리카흑인 65%,
세인트빈 킹스타운 입헌군주제 단원제
and the 60. 혼혈유색인 19%,
센트 389㎢ 119 (Kingstown (영연방), (정원:21명,
Grenadine 5% 유럽계백인3%,
그레니딘 ) 내각책임제 임기 5년)
s 인도계7%
양원제
브릿지타운 흑인 90%, 입헌군주제 (정원:상원
바베이 52.
Barbados 431㎢ 270 (Bridgetow 아시아 및 혼혈 (영연방), 21명, 하원
도스 9%
n) 6%, 백인 4% 내각책임제 30명,
임기 5년)
양원제
세인트조지 입헌군주제
(정원:상원
그레나 42. 스 흑인 84%, (영연방),
Grenada 344㎢ 103 13명, 하원
다 2% (St. 혼혈 13% 의원내각제
15명,
George's) )
임기: 5년)
Republic 양원제
포트 오브 흑인 39.5%,
트리니 of 공화제(영연 (정원:상원
5,128㎢ 76. 스페인 인도계 40.3%,
다드토 Trinidad 1,305 방),의원내각 31명, 하원
13) 2% (Port-of-S 혼혈 18.4%, 백인
바고 and pain) 제 36명,
1%
Tobago 임기 5년)

4) 이 표는 카리브 해에 위치하지만 프랑스의 해외 레지옹(프랑의 지방행정구역 단위)인 과들루프, 마


르티니크, 프랑스령 기아나, 미국의 속령인 푸에르토 리코, 영국의 해외영토인 몬트세랫, 영국령 버
진아일랜드, 앵귈라, 케인맨제도, 터크스 케이커스와 네덜란드의 해외영토인 아루바와 네덜란드령
안틸레스 등의 총 11개 비독립국을 제외한 독립국 33개국의 자료이다. CEPAL(유엔 중남미 경제
위원회)ㆍ외무부ㆍ국정원ㆍ각국대사관 홈페이지, 네이버ㆍ위키ㆍ야후 백과사전 등을 참고하였다.
5)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16개국의 경우, 영어식 표기를 따른 경우와 원음에 가까운 표
기법을 따른 경우 그 결과를 비교하면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는 바, 이번 자료에서는 원음에 가장
가까운 한국어로 표기 하였으며, 현재 한국에서 많이 통용되고 있는 영어식 표기를 병기하였다. 포
르투갈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나라 역시 해당언어의 발음에 가장 근접한 한국어 표
기를 병기하였다. 영어를 국어로 사용하는 경우를 포함해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국가명과 원 발
음이 차이가 없을 경우는 한가지 표기만 하였다.
6) 국가의 순서는 먼저 북미, 중미, 남미, 서인도 제도로 지역 별로 구분한 뒤 같은 지역 내 국가의
순서는 지도상에서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오며 위치한 순서에 따라 기재하였다.
7) 여기서 ‘도시’라는 용어는 각 국에서 이 말이 적용되는 지역을 가리킨다.(La definición del
término “urbano” corresponde a la utilizada en cada país, : CEPAL, Anuario estadístico de
América Latina y el Caribe, 2005)
8) 한반도는 약 22.2만km2, 남한은 약 9.9만km2이다.
9) 영국 본국과 구(舊)영제국 내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로 구성된 연방체. 2006년 기준으로 영국
연방에는 53개국이 가입되어 있다.
10) 면적의 90%가 원시자연림이다.
11) 세계 제 5위로 남미대륙의 47.3%를 차지한다.
12) 세인트킷츠 섬 168㎢, 네비스 섬 93㎢.
13) 트리니다드섬 4,828㎢, 토바고섬 300㎢.
유아사
문맹
지니
망률
률 실업
나라이 름 (천명 당 계수
공 식 (15세 률14)
(원어에 가장 화 폐 단 위 독 립 종 교 사망률) 15)
가까운 표기법)
언 어 이상) (200
(2000년-2 (2002
(2005 4년)
005년평균 년)
년)
)
0.51
멕시코 뻬소 1810-09-16 스페인 카톨릭 92%, 개신교 7.4 5.3 6
메히꼬 28.2%
(Peso) (스페인) 어 6%, % %* (2004
)
퀘찰(Quetzal), 1821-09-15 스페인 카톨릭 70%, 개신교 28.2 4.0 0.54
구아떼말라 38.6%
dollar (스페인) 어 30% % % 3
카톨릭 50%, 개신교
벨리즈 Dollar 1981-09-21 5.3 11.6
벨리즈 영어 27%, 30.5% -
(1弗=2 고정) (영국) % %
기타 14%
1838-11-15 스페인 22.0 8.0 0.58
온두라스 렘삐라 (Lempira) 카톨릭 97% 31.2%
(스페인) 어 % %* 8
0.52
엘살바도르 꼴론 카톨릭 70%, 개신교
1821-09-15 스페인 18.9 6.5 5
엘살바도르 (Colon,2001.1.부 25%, 26.4%
(스페인) 어 % %* (2001
달러화 통용실시)16) 기타 5%
)
0.57
꼬르도바 1838-09-15 스페인 카톨릭 85%, 개신교 31.9 9.3 9
니까라구아 30.1%
(Cordoba) (스페인) 어 15% % %* (2001
)
꼴론 1821-09-15 스페인 3.8 6.7 0.48
꼬스따리까 카톨릭, 개신교 10.5%
(colon) (스페인) 어 % %* 8
발보아
1903-11-03 스페인 카톨릭 85%, 개신교 7.0 14.1 0.51
빠나마 (Balboa1弗=1 20.6%
(콜롬비아) 어 15% % %* 5*
고정환율), US$
콜롬비아 뻬소 1810-07-20 스페인 7.1 15.4 0.57
꼴롬비아 카톨릭 90% 25.6%
(Peso) (스페인) 어 % %* 5*
볼리바르 1811-07-05 스페인 카톨릭 96%, 개신교 6.0 15.3 0.50
베네수엘라 17.5%
(Bolivar) (스페인) 어 2% % % 0
1809-08-10 스페인 7.0 11.0 0.51
에꾸아도르 美 Dollar 카톨릭 95% 28.9%
(스페인) 어 % % 3*
개신교 57%, 힌두교
가이아나 1966-05-26 1.0
가이아나 영어 33%, 49.1% - -
Dollar (영국) %
회교 9%, 기타 1%
힌두교 27%, 회교
수리남 1975-11-25 네덜란 20%, 7.0
수리남 25.6% - -
Guilder (네덜란드) 드어 카톨릭 23%, 개신교 %
25%
스페인 0.52
누에보 솔 1821-07-28 어, 8.4 9.4 3
뻬루 카톨릭 90% 33.4%
(Nuevo Sol) (스페인) 케츄아 % %* (2003
어 )
카톨릭 85%, 개신교 0.62
레알 1822-09-07 포르투 11%, 11.1 11.5 1
브라질 27.3%
(Real) (포르투갈) 갈어 기타 % %* (2003
토속종교(Umbanda) )
볼리비아노 1825-08-06 스페인 11.7 8.5 0.61
볼리비아 카톨릭 95% 55.6%
(Boliviano,BS) (스페인) 어 % %* 4
0.55
칠레 뻬소 1810-09-18 스페인 카톨릭 89%, 개신교 3.5 8.8 2
칠레 8.0%
(Peso) (스페인) 어 11% % % (2003
)
0.57
스페인
구아라니 1811-05-14 5.6 10.0 0
빠라구아이 어,과라 카톨릭 97% 37.0%
(Guarani) (스페인) % %* (2000
니어
)
카톨릭 66%,
뻬소 1828-08-25 스페인 2.0 13.1 0.45
우루구아이 개신교15%, 13.1%
(Peso) (스페인) 어 % %* 5*
유대교 1%
0.53
카톨릭 92%,
뻬소 1816-07-09 스페인 2.8 13.6 7*
아르헨띠나 개신교2%, 15.0%
(Peso) (스페인) 어 % %* (2004
유태교 2%, 기타 4%
)
쿠바 뻬소 1902-05-20 스페인 2.7 1.9
꾸바 카톨릭 85%17) 7.3% -
(Peso) (스페인) 어 % %
자메이카 1962-08-06 11.3 11.7
자메이카 영어 개신교, 카톨릭 14.9% -
Dollar (영국) % %
침례교 32%, 성공회
바하마 Dollar 1973-07-10 4.2
바하마 영어 20%, 카톨릭 19% 13.8% - -
(1弗=1 고정) (영국) %
,감리교 6%
프랑스
구르드 1804-01-01 어, 카톨릭 80%, 개신교 45.2 70%
아이티 59.1% -
(Gourde) (프랑스) 크레올 16%, 부두교18) % 19)


도미니까 도미니까 뻬소 1844-02-27 스페인 카톨릭 94% ,개신교 14.5 18.4 0.54
34.4%
공화국 (Peso) (스페인) 어 3% % % 4
도미니카 동카리브 Dollar 1978-11-03 카톨릭 77%, 개신교 17.13 6%
영어 - -
연방 (1弗=2.7 고정) (영국) 15%, 기타 8% %20) 21)

세인트키츠 동카리브Dollar 1983-09-19 9.21% 3%


영어 성공회, 감리교, 개신교 - -
네비스 (1弗=2.7 고정) (영국) 22) 23)

엔티가 동카리브Dollar 1981-11-01


영어 성공회, 카톨릭 - - - -
바부다 (1弗=2.7 고정) (영국)
카톨릭 90%, 개신교
동카리브Dollar 1977-02-22 14.39 17.5
세인트루시아 영어 7%, - -
(1弗=2.7 고정) (영국) % %24)
성공회 3%
세인트빈센트 동카리브Dolla 1979-10-27
영어 성공회, 감리교, 카톨릭 25.6% 4% - -
그레니딘 (1弗=2.7 고정) (영국)
바베이도스Dollar 1966-11-30 개신교 67%, 카톨릭 0.3 9.8
바베이도스 영어 10.8% -
(1弗=2 고정) (영국) 4% % %
그레나다 동카리브 Dollar 1974-02-07 영어 카톨릭 53%, - -25) - -
성공회13.8%,
(영국)
개신교 33%
카톨릭 29.4%, 힌두교
트리니다드 1962-08-31 1.2 8.6
T&T Dollar 영어 24%, 13.7% -
토바고 (영국) % %
성공회 11%, 회교 6%

14) * 표시가 된 곳은 대도시의 실업률이며 *표시가 없는 곳은 국가 전체의 실업률을 나타낸 것이다.


15) 2002년의 자료가 아닌 다른 연도의 자료인 경우만 따로 표시하였으며, *표시가 되어있는 곳은
나라 전체가 아닌 도시지역의 지니계수를 나타낸 것이다.
16) 2004.12 현재 달러 통화량은 99% 달하여 사실상 달러통화만 유통되고 있다.
(주 엘살바도르 대사관,
http://www.mofat.go.kr/ek/ek_a002/ek_svsv/ek_a02/ek_b06/1176844_10303.html)
17) 로마 가톨릭신자가 대부분이며, 개신교도 소수 있다. 쿠바가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
가 된 후 종교는 탄압을 받았으나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 등을 계기로 종교의 자유를 허
용받고 있다. 이를테면 야외에서의 종교 집회의 경우 국가에서 허락을 받으면 가질 수 있
다. 또한 개신교 신자와 가톨릭 신자 모두 사실상 쿠바 유일의 정당인 쿠바 공산당(1961년
결성)에 당원으로 가입할 수 있게 하는 등, 쿠바의 종교정책은 혁명초기에 비해서 많이 온
건화 되었다.
(위키백과사전, 쿠바의 종교, http://ko.wikipedia.org/wiki/%EC%BF%A0%EB%B0%94)
18) 공식통계로는 주민의 과반수 이상이 카톨릭을 믿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인구의 반 이상
이 부두교를 믿는다고 한다. (네이버 백과사전, 아이티의 주민,
http://100.naver.com/100.nhn?docid=715177).
19) 많은 국민이 빈곤층에 속하며 실업률은 70%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백과서전, 아이티의 경제, http://100.naver.com/100.nhn?docid=715180)
20) 2000년 자료.
21) 2000년 자료.
22) 2001년 자료.
23) 1995년 자료.
24) 2001년 자료.
25)
1) 교육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고 전 국민이 거의 글을 읽거나 쓸 수 있다. (네이버사전, 그
레나다의 사회,
http://100.naver.com/100.nhn?docid=715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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