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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비평회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이기훈, 뺷청년아 청년아 우리 청년아뺸(돌베개, 2014)

일시: 2015년 2월 24일 오후 3시∼6시


장소: 역사문제연구소 강당
사회: 장신(역사문제연구소)
논평: 박찬승(한양대), 오제연(서울대), 허병식(동국대)

“청년이라는 말은 비어있다”

사회자 역사문제연구 저작비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저작비평회의


대상은 목포대학교 이기훈 선생님의 뺷청년아 청년아 우리 청년아뺸입
니다. 보통 우리가 저작비평회를 할 때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저작을 통해서 토론을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요즘은 서평
조차 잘 나오지도 않고 있는데 저작비평회를 통해서 이야기를 깊게
해보자는 그런 취지가 있고요. 두 번째는 이 책이 토론을 통해서 개선
점이라든지 보완할 점을 통해서 저자가 이후에 개정판을 낼 때 더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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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자는 목적도 있습니다. 일단 간략하게 소개
를 하고, 먼저 저자의 이야기를 좀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을 어떻
게 쓰게 되었는지 그리고 쓰려던 방향은 무엇이었는지 이야기 해주
시면 좋겠습니다.
이기훈 예, 고맙습니다. 이렇게 많이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기훈입니
다. 일단, 토론문, 그러니까 제 책을 다 읽어주신 세 분 토론자 선생님
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단, 세 사람은 읽었다는 것에 대해서 무
한한 감사를 드리고요. (웃음) 사실 박찬승 선생님이 말씀하셨지만 많
이 고쳐야 될, 보완해야 될 내용입니다. 근데 이게 좀 팔려야 개정판을
낼 텐데 (웃음) 저기 지금 저희 돌베개 출판사 김진구 선생님이 와계신
데 그럴 수 있을지 좀 걱정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되게 오래 묵은
책입니다. 박사학위논문에서 시작했으니까 10년이 어영부영 지난 셈
인데요. 이것부터 시작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이 ‘일상
개념 총서’라고 되어있는데. 원래 제 박사학위논문에는 ‘담론’이란 표
현을 썼습니다. (제목이) ‘일제하 청년담론 연구’였습니다. 사학계에서
는 담론이란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심사하시는 선생님
중에 한 분이 ‘꼭 필요하냐?’ 그러셔서 ‘예, 꼭 필요합니다’라고 말씀드
렸죠. 말의 정치성, 즉 말이 어떤 의미와 울림을 갖는지가, 정치적 맥
락과 권력관계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푸코의 용어인 ‘담론’
이라는 표현을 꼭 빌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하면 ‘청
년 담론’이란 표현이 성립하느냐 안하느냐는 이걸 쓸 때부터 제 스스
로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단어가 ‘담론’이라는 표현
에 적합할 것인지, 담론은 지형을 포함하는 말이니까요. 새로 책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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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다른 표현을 써봐야겠다고 고민하고 있던 차에 한림대에서 진행하
는 ‘일상 개념 총서’의 일부로 제안을 받았습니다. ‘일상 개념 총서’는
지금 두 권 나왔지요. 첫째가 병(病)이고 두 번째가 청년인데, 다음이
연애, 이런 일련의 제목들입니다. 저는 제안을 받았을 때 ‘일상 개념’이
정의된 범주인 줄 알았는데요. 사실은 한림대 측에서도 그다지 그렇
게 똑 부러진 정의 없이, 그냥 ‘개념사 총서’가 있으니 ‘일상 개념 총서’
도 만들자는 수준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일상 개념’이라는 말 자체가
조금은 모순적입니다. ‘일상 개념’이 있으면 그건 ‘비일상 개념’도 있어
야 한다는 뜻인데. 모든 개념은 일상적이지요. 일상적이지 않은 개념
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개념’이 적절하냐는 문제는 저도 고
민했습니다. 일상 개념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사실 저로서도 부
족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개념사의 문제의식은 공유한다고 생각합니
다. 개념과 실체와, 또는 개념과 개념 사이의 균열과 불일치 그리고 또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관계라는 측면에서는 개념사의 문제의
식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청년이라
는 일상개념을 상정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
상 개념사로서의 청년이 책으로 나오게 된 것이지요. ‘개념으로서의
청년’을 제가 처음 시작하기 전 제 공부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동화’,
‘어린이’ 등이었습니다. 장신 선생님이랑 같이 공부한 ‘독서의 사회사’
반에서 제가 동화를 맡았는데, 그 전부터 제가 교육에 대해 관심이 있
었으니 어린이도 그런 주제로부터 크게 많이 벗어난 건 아닙니다. 어
린이나 동화를 보면서 제가 느꼈던 것은 이거였습니다. ‘어린이’라는
실체가 등장하고, 그걸 표현하기 위해서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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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는 거죠. 어떤 면에서는 개념이 먼저 선취되고 그 개념을 현실
속에 창출해내는 게 한국의 근대였고, 또 동아시아적 근대가 일반적으
로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
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와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운동
도 그렇고, 정치나 권력, 사상 등의 영역에서 개념이나 범주가 먼저 존
재하고, 그걸 어떤 방식으로 선점할 것인가의 경쟁이 될 수도 있겠구
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뒤 이런 발상에 가장 적합한 단
어인 ‘청년’이 저한테 주어졌습니다. 허수 선생님이 저한테 원고가 하
나 들어온 게 있으니 써보라고 추천해주셨고, ‘1920년대 청년’이라는
담론에 대해 논문을 하나 쓰게 된 것이 결국 지금까지 이르게 된 것 같
습니다. 여러분들이 많은 말씀을 해주셨고, 그게 다 저한테 고마운 지
적이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청년이라는 개념 또는 청년이라는 말은 비
어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오늘 날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죠. 청년이
라는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고 생각해요. 개념이라고 하는 것
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단단하지 않다는 것이 제 전제이
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비어있으면서, 흘러 다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걸 고정시키려고 자꾸 사람들이 노력합니다. 자기가 뜻하는
대로 사회 속에 그걸 고정시키려고 하는 것이지요. 어떤 면에서 본다
면 제가 처음 시작했던 이 연구의 시작점 중의 하나가 ‘연령 개념으로
서의 청년’이라는 건 도대체 언제부터 언제까지냐, 라는 겁니다. 자기
가 스스로 청년이라고 하든지 누가 청년이라고 부르든지, 어느 경우에
나 불분명하거든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아직도 청년이라고 우기고
싶으신 분들도 여기 계실 터인데. (웃음) 실제로 시골에 가면 요즘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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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연한은 계속 뒤로 물려나가고 있습니다. 한 10년 전까지는 환갑까
지 청년회에 계셨는데 요즘은 칠순도 그냥 청년회에 그냥 계십니다.
청년회가 없어질 지경이기 때문에.
의미는 사회적으로 주어지고 그걸 만들어, 고착시켜놓고 있는 거
죠. 거기에서 무엇인가하기를 요구하고 또 그걸 요구받는 겁니다. 제
가 얼마 전에 저희 학교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기자가 저에
게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청년이라는 말은 비어 있다. 여러분들이 분명히 청년이지만 어떤 청
년이 될 것인가는 지금 기존에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빈 곳을
여러분들이 만들어가는 것이고 유동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계속 비어있는 이 말들을. 사실 그러다 보니까
공부를 하면서 고민 중의 하나가 자꾸 움직이니까 저도 스스로도 기
준이 없는 거지요. 제 스스로도 너무 혼란스러웠던……. 지금도 좀,
그 사이를 스스로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모든 역사학적 연구가 그렇
습니다만은. 화자가 내가 읽고 있는 자료로 하고 있는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면 그 속에 매몰되어 버리고요, 제 경우처럼 저는 계속 벗어나
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몰입할 수가 없다라는 것도 사실 어려움 중에
하나였습니다. 동감이, 공감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공감시키면 그
순간 무너져 버리기 때문에, 관점이 무너지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점
중에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러하고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본다면 견강부회도 많고, 또 억지스러운 해석도 좀 많았던 것 같습니
다. 그렇지만 이렇게 끝까지 읽어주신 많은, 아, (웃음) 몇몇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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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 감사합니다. 그래도 오늘 여기 오신 분들은 다 읽었다고 생각하시
고 듣는 게 긴장감을 조금 더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기훈 선생님이 이야기를 할 때 똑 부러지게 하죠, 그리고 반론의 여지
가 없게 이야기를 하는데. 오늘 이 책에 대해서는 상당히 겸손하게 이
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아마 개념사, 그리고 본인도 이야기하셨던 모
호한 ‘일상 개념’이라는 것 때문에 약간 이렇게 발을 좀 빼신 것 같습
니다. 제가 간단하게 느낌을 이야기하면 역사학에서 ‘일상’을 개념으
로서 접근한 경우는 거의 처음이지 않았나 싶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와 현대를 같은 틀에 놓고 정리하는 것 자체가 드물다는 겁니다.
사실 자료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근대사는 근대사, 현대사는 현대
사를 하는데. 이 두 부분을 아울렀다는 것 자체가 큰 성과였고. 또 세
분의 토론자들의 토론문에도 보이듯이 이 책은 아주 깔끔하게 정리
가 잘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또 약점으로 작용
하기도 하는데요. 이 내용에 대해서는 아마 토론자들이 잘 지적해 주
실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책이 훌륭하면 그만큼 토론자도 많이 붙
여야 되겠죠. 저작비평회가 조금 부담스러운 것은 보통 1명의 토론자
도 아니고, 3명이나 붙이거든요. 그리고 면면들이 만만치 않은 사람
들을 붙인다는 거지요. 저자가 세면 셀수록 토론자도 세게 붙입니다.
오늘 세 분을 모셨는데요. 아마도 세 분 다 여러분이 다 잘 아시는 분
이겠지만, 주제 자체가 여러 군데에 걸쳐있기 때문에 제가 따로 소개
를 시켜드리겠습니다. 일단 박찬승 선생님은 저도 어릴 때 책으로 공
부를 했고 우리들의 극복의 대상이었던 뺷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
구뺸를 쓰셨죠. 그리고 뺷민족주의의 시대뺸, 뺷마을로 간 한국전쟁뺸,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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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도 여러 저작들이 있지요. 그렇지만 역시 1920년대, 일제시대 한
국 근대 사상사 연구 쪽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셨기 때문에 이 부분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고요. 오제연 선생님은 학위
논문이 1960년대 대학문화에 관련된, 대학과 학생운동에 관련된 부분
입니다. 그래서 해방 이후의 청년에 대해서 사실 관계 부분부터 내용
적인 부분까지 검토를 요청드렸습니다. 허병식 선생님은 문학 전공자
이시죠. 한국 근대소설을 전공하시면서 교양의 문제를 학위논문으로
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20년대 나오는 ‘문화’라든지, ‘교양’이란 부분
에 대해서 면밀하게 지적을 해주실 것으로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토
론 순서는 박찬승 선생님부터 먼저 하시고 그 다음에 오제연 선생님,
허병식 선생님 순서로 하겠습니다. 박 선생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국의 근대는 왜 ‘청년’을 호명했는가

박찬승 네, 안녕하세요. 박찬승입니다. 제가 정리해온 요지가 있으니까 이


것을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조금 전 저
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림대학에서 진행하고 있는 개념사 프로젝
트와 관련해서 나온 것인데요. 사실은 제가 그 개념사 프로젝트의 편
집위원으로 있기 때문에 저도 이 책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웃음) 거기에서 이제 ‘개념사 총서’를 만들고, 또 다른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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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일상 개념 총서’라는 것을 만들고 있는데요. 저는 그중에서
개념사 총서로 ‘민족’과 ‘민족주의’에 관한 책을 하나 쓴 적이 있습니
다. 양자의 차이가 있다고 하면, 개념사 총서는 문자 그대로 ‘개념어’
를 중심으로 해서 다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민족’
이라든가, ‘문화’라든가, ‘국가’라든가, ‘인민’이라든가 그런 개념어를
중심으로 해서 주로 정리를 하고 있는 시리즈라 할 수 있습니다. ‘일
상 개념 총서’는 그것 보다는 좀 더 일상에서 나오는 용어들을 중심으
로 해서 그 개념의 변천을 정리한다는 그런 취지로 프로젝트를 진행
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일상 개념의 총서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조선에서의 전통적인 ‘청년’
의 용례, 한말 young man의 번역어로서 ‘청년’이 들어온 뒤 ‘소년’과
섞여서 쓰였던 사례 의 설명 등은 개념사의 본래의 의미에 적합하다
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책의 각 시대별 ‘청년’에 대한 서술은 엄격
하게 말하면 ‘청년 개념의 변천사’라기보다는 ‘청년 표상의 변천사’라
고 보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즉 각 시대가 청년들에게
요구한 ‘청년의 역할’, ‘청년의 이미지’의 변천사라고 볼 수 있을 것입
니다. 물론 넓게 보면 이러한 ‘표상의 변천사’도 ‘개념사’에 포괄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과 같이 근대 이후 외래어가 개념어의 주류를 이
루게 된 경우에는, 불과 1백년 정도의 시간 사이에 개념의 변천을 확
인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실상 ‘표상의 변천사’가 ‘개념사’로 원용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기는 합니다. 만일 저자도 같은 생각을 했다면
이 책의 서문에서 이와 같은 사정을 설명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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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책에서는 각 시대별로 ‘청년’이 어떻게 호명되고, 또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몇 부분에서는 꼭 다루
었어야 할 내용이 누락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첫째, 1920년대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청년조
직의 역할, 즉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역할이 반드시
다루어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는 1928년 12월테제 이
후 사회주의 계열에서 계급이 전면적으로 등장하고 청년의 위상이
약화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1929년 광주에서 학생봉
기가 있었을 때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에는 광주청년회-조
선청년총동맹-전국의 청년회로 연결되는 라인이 큰 역할을 했습니
다. 그런 점에서 청년회는 1920년대 말까지는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
었다는 점을 서술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1920년대 학생운동
조직의 배후에는 이를 지도하던 각 지방의 청년회들이 있었고, 당시
조선공산당이 고려공산청년회를 따로 만들었던 것도 청년조직의 학
생조직 지도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둘째, 이 책에서는 해방 직후 좌우익 청년조직의 움직임을 주로 우
익 청년단체들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좌익청년 조직,
즉 민청이나 민애청에 대한 서술이 소략하거나 누락되었습니다. 우익
쪽의 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등에 대한 정
리는 매우 탁월하게 잘 되었다고 보이지만, 이에 상대되는 좌익쪽의
민청과 민애청에 대한 서술이 소략하거나 아예 누락되었기 때문에 당
시 좌우익 청년의 전체적인 상을 충분히 그리지 못했다고 여겨집니다.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27


셋째, 이 책의 마지막 장은 1970년대로 끝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어 그 이유를 알기 어렵습니다. 평자의 생각으로는 ‘청
년’이 역사의 주체로서 그 역할을 다한 것은 1987년 6월항쟁 전후까지
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1983년 민
청련,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청년’층의 역사 속에서의
역할이 절정에 다다랐던 시기였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 책의 부제를
“근대, 청년을 호명하다”로 붙였습니다. 그렇다면, 역사가 청년을 호
명하던 마지막 시기였다고 볼 수 있는 1980년대까지를 다루어 대미
를 장식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을 그렇게 썼다면 책의 주
제의식은 더욱 분명하게 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제 책을 읽으면서 의문이나 아쉬움을 가졌던 부분들을 언급해보
겠습니다.
첫째, 117∼118쪽에서 일본의 주류 청년 담론은 젊은이들의 폭발적
행동력을 국민국가 체제 내로 끌어들여 착실한 청년상을 구축하려
한 반면, 조선의 주류 청년 담론은 청년을 민족의 선도자로서 대중의
사회정치적 힘을 집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 규정하려 했다고
보았습니다. 만일 그러하였다면 그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또 조선의 그러한 청년 담론은 순전히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인가 하
는 의문을 떠올리게 됩니다.
둘째, 이 책의 226∼227쪽을 보면 1930년대에 청년은 속류적 입신출
세를 지향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 가운
데 입신출세를 지향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은 이미 1910년대부터 지
적되어 오던 바였습니다. 1910년대 대다수의 유학생들의 목표는 귀국

228 제33호
하여 총독부의 관리가 되는 것이었다고 하지요. 물론 유학생 가운데
일부는 학우회를 조직하여 결국 2․8독립선언을 이끌어냈지만, 이들
이 유학생의 다수는 아니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에 경성제국대학이
들어선 이후 조선의 우수한 청년들은 이 대학을 졸업하여 역시 총독부
의 관리가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속류적 입신출
세의 지향이 1930년대에 들어와 비로소 강해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해졌다는 것인지 밝혀야 할 것입니다.
셋째, 이 책에서는 왜 한국의 근대는 청년을 호명했는가에 대한 설
명이 없어 아쉽습니다. 역사는 왜 소년이나 장년이 아닌 ‘청년’을 호
명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평자의 생각을 정리하면 이렇
습니다. 한말에서 일제시기 노동계급은 아직 미약했고, 농민들은 조
직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청년층은 청년회나 학생단체 등
을 통해 조직화하기 쉬웠고, 또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하기 쉬웠습니
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 학생들은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
생운동 당시에 주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청
년 조직은 여러 사회단체 가운데 가장 막강했지요. 그러나 1950년대
까지 청년단체는 경찰의 보조기관에 머물렀습니다. 그만큼 경찰 세
력이 강했어요. 1950년대에 세력이 커진 학생들은 4․19를 성공시켰
습니다. 1961년 이후에는 경찰 대신 군부가 정치를 좌지우지했지만,
이에 대항하는 학생들의 세력도 점점 커졌습니다. 1987년 6월항쟁까
지는 군부와 학생이 대결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들어 세력이 더욱 커진 학생들은 결국 6월항쟁을 통해 군부가 정치에
서 손을 떼게 만들었습니다. 1960, 70년대의 20대 대학생들은 흔히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29


‘청년 학도’라고 불리었습니다. 한국근현대의 역사에서 청년 내지 학
생들은 항상 선진적 사상을 갖고 있고 또 조직화되기 쉬웠기 때문에
역사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
는 ‘자본’과 ‘노동’, ‘권력’과 ‘시민사회’의 힘이 훨씬 커졌습니다. 반면
에 청년이나 학생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으며, 21세기에 들어
서면서 그러한 경향은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청년, 학생의 시대는 막
을 내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그런 점에서 한국의 20세기는 청년
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에서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고, 아쉬운 점들을 언급해
보았습니다. 비록 아쉬운 점들이 있지만, 이 책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의 ‘청년의 개념’, ‘청년의 표상’을 잘 정리한 훌륭한 책이라는 점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위에서 지적한 몇 가지 아쉬운 점들은 저자가
훗날 개정판을 낸다든가 할 때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청년, ‘백색’ 이미지와 ‘청색’ 이미지의 교차

사회자 토론 감사합니다. 다음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의


오제연 선생님의 토론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제연 네, 방금 소개받은 서울대 규장각의 오제연입니다. 일단 저도 이
뺷역사문제연구뺸의 편집위원입니다. 제가 이 토론을 맡게 된 것은, 토

230 제33호
론자를 저희가 섭외를 해야 되는데 현대사 쪽에서 코멘트를 할 사람
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아까 소개 받은 대로 대
학 학생운동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썼기 때문에 어떻게 하다보니까
제가 셀프로 토론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아까 사회자도 말씀해주셨
지만 이기훈 선생님의 연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특히 후학들에게 많
은 모범이 됩니다. 특히 근대와 현대를 넘나들면서 연결하면서 연구
를 한다는 것은, 근대사 현대사를 서로 구분해서 완전히 다른 영역인
것처럼 분리해 연구하는 현재의 풍토 속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
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오늘 이 자리
에 역사문제연구소 관련 연구자들이 몇 분 오셨는데 한결같이 다 근
대사 전공자들만 오셨고 현대사 전공자들은 저작비평회 관계자 외에
는 안 오셨습니다. 이런 모습이 현실을 잘 보여주는 거죠. 그렇습니
다. 실제로 근대사 연구 관련 발표를 하면은 현대사 전공자들은 안가
고, 현대사 발표를 하면 근대사 전공자들이 안 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굉장히 기형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한국의 근현대가 합해서
100년 정도 밖에 안 되고 이것이 그렇게 분절될 수 있는 시기가 아님
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료적인 문제들을 하나의 변명거리로 삼아
가지고 서로 단절해서 연구하는 풍토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
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특히 이 연구는 근현대 100년을 아우르려고
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시도였고, 또 굉장히 좋은 결과를 냈
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나름대로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들
을 토론문으로 정리해 왔습니다. 양이 좀 많아 보이는 데요, 사실은
책 본문에서 직접 인용을 많이 해서 그렇지. 실제 내용은 다른 분들과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31


비슷합니다. 그래서 요령 있게 토론문을 읽는 방식으로 토론을 진행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난 약 100년 동안 각 시기 별로 당시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청년’이라는 개념이 갖는 경계가 어떻게 달라지고, 그에
따라 청년 개념의 정의와 특성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했습니다. 이를 통해 각 시대의 주체들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
회적 전략을 작동시키기 위해 서로 다른 청년상을 창출하는 과정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단, 이 책은 각 시기별 청년 개념이 갖는 정의와 특성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이를 종합하여 한국근현대사에서 ‘청년’이라는 개념이 갖
는 역사적 의미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
습니다. 이는 이 책의 결론이 본문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요약 정리하
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과 직접 연결됩니다. 결론에서 각 시기별 특
징들 속에 담긴 일정한 공통점들을 끌어내어, 이를 통해 한국근현대
사에서 ‘청년’이라는 개념이 갖는 특징을 보다 ‘일반화’ 시켜 설명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청년’ 개념은 각 시기별로 구별되는 독자적이고 다양한 특성을 갖
고 있지만, 토론자가 보았을 때 그 특징들 속에서 몇 가지 공통된 요
소가 발견됩니다. 사실 이 책에서도 ‘청년’에 대한 비슷한 표현 또는
서술, 이미지가 여러 시기에 걸쳐 계속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한국근현대사에서 ‘청년’ 개념은 크게 ‘백색’과 ‘청
색’의 두 가지 색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백
색’의 이미지는 ① ‘무지 / 미완성’, ② ‘순수’의 청년 개념을 창출합니

232 제33호
다. ‘무지 / 미완성’으로서의 청년은 아직은 여러모로 부족하기 때문
에 미래의 자신, 혹은 가문, 사회, 국가 / 민족 등을 위해 더욱 정진하
고 노력해야 하는 존재이며, ‘순수’로서의 청년은 아직 기성세대의 때
가 묻지 않았기에 진실되고 정의로우며 용기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
습니다. 다음으로 ‘청색’의 이미지는 정신적․육체적 힘과 에너지의
담지자로서 ① ‘지도자 / 선각자’, ② ‘일꾼’의 청년 개념을 창출합니
다. ‘지도자’로서의 청년은 근대화를 위한 계몽의 주체이자 시대의 대
변자이며, ‘일꾼’으로서의 청년은 혈기왕성한 노동력 혹은 사회운동
의 물리력으로 실천 / 행동에 앞장서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
지 청년 개념은 역사적 맥락과 개념 규정의 주체에 따라 강조점이 달
라지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조합 혹은 경합하면서 각 시기별 특징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러한 일반화를 통해 ‘청년’ 개념이 역사 속에서 발
현되는 일정한 패턴을 파악하고 각 시대별 특징을 상호 비교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이 책을 읽고 발표자가 갖게 된 생각을 거
칠게 정리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청년’ 개념에 대
해 깊이 천착한 저자에게 이러한 일반화의 가능성 혹은 그 실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다음으로 이 책에 나온 분석이나 설명이 미진하여 저자에게 좀 더
보충 설명을 들었으면 하는 부분을 몇 가지 언급하자고 합니다.
첫째, 이 책에서는 각 시대별로 청년 개념의 지배적인 경향이 잘 정
리된 반면, 이러한 지배적인 경향들이 갖고 있는 ‘동요’와 ‘균열’ 지점
은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책도 이러한 ‘동요’와 ‘균열’
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청년 담론의 ‘동요’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33


와 ‘균열’은 그 원인이 외부적인 권력에 의한 것이지, 청년 담론 혹은
식민지 조선 사회의 내부적 모순이나 한계, 혹은 주체의 전유 등에 의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책에서 권력(특히 조선총독부)의 청년
정책 혹은 청년 담론은 절대적인 힘이었던 것처럼 서술되어 있습니다.
권력의 청년정책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실제로 청년들을 포섭해
나갔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국가와 민족이 괴리된 상황에서 그 속에도
균열지점이 존재하고 그 균열을 따라 권력의 의도와 다르게 움직였던
청년들이 있었을 텐데, 이들의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청년들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는 “전시체제하에서 저항하는 청년이 완
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일반 대중에게 그 저항이 알려질 가능
성은 매우 낮았다”라고 단 한 줄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930∼40년대를 다룬 3부의 마지막에는 “황국신민화를 선도하는 청년
이 ‘반도의 주인공’으로 호명”되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이 청년 ‘운동사’가 아니라 청년 ‘개념사’ 연구서이기 때문
에 지배적인 담론과 개념에 주목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그 담론
과 개념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영향을 끼쳤고 효과를 내었는지, 그리
고 그 동요와 균열지점은 어디에 있었고 동요와 균열의 결과는 무엇
이었는지에 대해 추가적인 언급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정병욱 교수가 쓴 뺷식민지 불온열전뺸 속에 등장하는 전시체제
기 불온한 조선인 청년들을, 당시 청년 개념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이
해할 수 있을지에 대해 저자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둘째, 이 책은 청년이라는 ‘일상 개념’에 주목했지만, 정작 본문 속
에서 청년의 일상적 모습 혹은 엘리트가 아닌 다수 청년들의 모습은

234 제33호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청년들의 ‘일상’과 관련해서는 1920년대 ‘여성’
의 문제와 1970년대 ‘문화’의 문제가 언급되었을 뿐입니다. 특히 ‘청년
단’을 중심으로 서술된 전시체제기나 해방 직후 청년들의 모습은, 그
것이 다른 시대의 청년들과 비교했을 때 도드라지는 모습일 수는 있
지만, 이를 당시 다수 청년들의 일상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
입니다. 물론 ‘일상 개념’의 역사와 ‘일상’의 역사는 다를 수 있고, ‘일
상 개념’을 다루는 이 책에서 당시 청년들의 ‘일상’ 전부를 설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상 개념’이 ‘일상’ 자체
를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남습니다.
셋째, 이 책의 4부인 해방 이후 부분은 1∼3부와 비교했을 때 내용
적으로 소략할 뿐만 아니라, 사실 관계 차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내용이 종종 눈에 띱니다. 특히 이 책에서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 4월
혁명 이후 1960년대까지는 ‘청년학도’ 혹은 ‘청년학생’이라는 개념이
많이 쓰인 것처럼 언급하지만, 실제로 4월혁명이나 1960년대 학생운
동 관련 글들을 살펴보면 ‘학생’을 ‘청년’으로 규정하여 ‘청년학도’ 혹
은 ‘청년학생’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경우는 이 책에서 언급한 사례 외
에는 찾기가 힘듭니다. 당시 ‘청년학생’이라는 말은 식민지기를 회상
하는 글이나, 이미 조직되어 있는 반공단체명에서 자주 언급되었고,
그 외에는 대부분 ‘청년’과 ‘학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가끔
학생을 ‘젊은’이라는 수식어로 지칭하기도 했지만 이는 대부분 당시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세대’ 담론 속에서 ‘기성’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학생에 대한 압도적인 호명은 ‘학도’, ‘학우’
혹은 ‘지성’이었습니다. ‘청년’ 개념 대신 ‘학생’ 개념이 부각된 것은 일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35


차적으로 1950년대 각급 학교의 학생 수가 급속히 팽창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해방 이후 1960년까지 약 15년 동안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교 학생 수는 각각 10배 정도로 팽창했습니다. 이 책은 당시 대학생 수
가 여전히 많지 않았다고 지적하지만, 그 엄청난 팽창 속도는 규모와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은 ‘학도호국단’과 같은 관제 방식으로 조직적인 힘을 지속적으로 유
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은 점차 ‘청년’과 분리, 구분되
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1970년대가 되어서야 “청년학생이 주체가 아
닌 청년운동의 출발”(308쪽)이 이루어졌다고 했지만, 이러한 경향은 이
미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해방 이후
1950년대 이후 청년 담론 혹은 개념 분석 과정에서 ‘청년’과 ‘학생’의 구
분과 분리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결국 우리가 흔히 ‘청
년’이라고 뭉뚱그려 부르지만 사실은 이질적이고 구분되는 다양한 주
체들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집니다. 청년을 호명하는 주체의 다양성,
청년으로 규정되는 주체의 다양성, 그리고 청년과 구별되는 주체의 다
양성을 고려하면서 이들 다양한 주체 간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앞으
로의 ‘청년’ 관련 연구에서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청년 개념의 역사적 변천을 다룬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오
늘날 청년의 모습이 떠오르고, 과거의 청년들과 오늘의 청년들을 비
교하게 됩니다. 특히 학생운동이 쇠퇴하고, 청년들이 무한경쟁에 내
몰린 오늘날, 또 교육에 따른 신분 상승의 기대가 사실상 사라진 오늘
날 청년의 모습은 ‘스펙 쌓기’라는 현실 속에서 이전 청년들보다 훨씬
나약하고 무기력해 보입니다. 반면 ‘일베’로 대표되는 파시즘 혹은 극

236 제33호
단적 혐오주의가 오늘날 청년층 내부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청년들과 비교될 만한 과거 청년들의 모습
들을, 지난 100년간의 청년 개념의 변천을 설명한 이 책 곳곳에서 얼마
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시체제기 청년들에게 주입된 파시
시트 독재자에 대한 ‘감상적 지도자론’, ‘속류 영웅주의’ 그리고 ‘남성중
심적 입신출세 의식’ 등은 오늘날 ‘일베’의 모습과 그대로 오버랩 됩니
다. 따라서 앞으로 ‘청년’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앞서 언급한 학문적인
문제제기에 대한 답을 찾는 것과 더불어, 오늘날 청년들을 이해하는
역사적 길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아직도 잠재
되어 있을지 모르는 청년들의 힘을 어떻게 다시 깨워 역사에 유의미한
방향으로 결집할 수 있을지 시사점을 제공해야 합니다. 이 책이 던져
주는 가장 강렬한 고민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낭만적 개인’의 등장과 청년 담론의 상관성

사회자 감사합니다. 이어서 허병식 선생님께서 토론을 해주시겠는데요.


앞에 하신 분들의 양에 너무 구애받지 마시고 준비해오신대로 또 생
각이 드는 부분 그대로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허병식 예, 저는 동국대에서 한국 근대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허병식이라고
합니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불러주셔서 오늘 처음 참석하게 되었는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37


데. 반갑습니다. 토론문을 읽으면서 질의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기훈 선생님의 저서 뺷청년아 청년아 우리 청년아뺸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근대 이후 청년이라는 개념과 청년 담론이 정착되고 변
모되어가는 과정을 세심하게 추적한 이 저서는 청년 개념의 형성과
변모만이 아니라 그 내부의 균열과 청년을 둘러싼 세대, 계급, 성별
대립의 양상까지도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있어서, ‘청년’이라는 주제에 대한 가장 의미 있는 연
구서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독서의 과정에서 많
은 것을 배웠을 뿐, 덧붙여서 할 수 있는 말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토
론자로는 결격임에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별 생각 없이 토론을 수락
한 순간을 거듭 후회했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제가 맡은 소임을 다하
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책에서 여러 번 강조하신 것으로 보입니다만, 청년이
라는 개념은 근대의 많은 개념들이 그러한 것처럼, 특정한 시기에 출
현한 근대적인 관념이며, 언제나 특수한 계급과 문화의 이데올로기
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굳이 부르디외를 빌려오자면, 문학예술이 상
상력의 산물이 아닌, 장(場 : champ)이라는 특수한 사회적 관계의 공간
이듯이 청년 또한 그러한 특수한 시공간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장’과 ‘제도로서의 문학’이라는 개념
을 통하여 문학적 질서가 부르주아 생산체계 속에서 자율적 구조화
에 이르면서 고유의 약호와 ‘승인제도’를 갖고 이를 재생산하는 독립
적이고 신성화된 형식을 구축해왔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문
학 예술의 장을 문학예술이라는 특수한 형태의 권력과 위신을 추구

238 제33호
하는 투쟁, 그가 상징투쟁이라고 말한 투쟁의 장으로 봅니다. 이러한
투쟁 속에서 작품의 물질적 생산과 소비뿐만 아니라 문학예술의 가
치와 신념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도 사회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
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청년이라는 근대적 개념에 대한 구분짓기
와 상징투쟁의 과정이 작동하는 방식을 근대초기부터 해방 이후에
이르는 한국 근현대사의 시기를 대상으로 추적하고 있는 것이 이 책
의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 상징투쟁의
과정에 대해서, 그리고 상징투쟁 속에 포함되지 않는 자율성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조선인 부르주아 계급은 문화정치의 공간 속에서
적극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고, 이것이 1920년대 전
반기의 문화운동이었다”(104쪽)라고 말하면서, 1900년대의 애국계몽
운동과 구분되는 1920년대의 문화운동이 부르주아의 주도권을 강화
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는 저도 충분
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문학에 한정해서 보자면, 이광수와 염상섭을
포함한 문화운동의 세대가 그 운동과 청년을 통해 부르주아의 민족
적 사명을 강화하려고 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선생님도 면밀하게 검토하신 조선인유학생들의 학회지였던
뺷학지광뺸의 담론은 이러한 시도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이 유교적 자기규정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주체인 ‘청년’
으로 스스로를 정립해 가는 과정은 자기를 인식하고 개성을 자각하
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상정한 근대적 주
체의 이념은 정적인 영역의 만족을 추구하고 감각의 혁명을 이룩하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39


려는 노력에 의해 산출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한 사정은 문학예술에서의 근대적 주체가 낭만적 개인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되새기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국
가나 사회의 요구로부터 분리된 자율적인 개인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들 세대는 자율적인 개인들의 왕국과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정치 사이에서 통합하기 어려운 균열을 안고 있던 세대
였다고 판단됩니다. 이러한 균열은 여러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는 것
이기도 합니다. “자수자양을 표방하는 청년회라는 자율적 공간은 ‘비
정치의 정치화’를 가능하게 하는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권력으로부터의 자율성을 표방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면에서
는 총독부 권력의 실체를 인정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123쪽)라고
지적하셨듯이 그 자율성은 식민주의의 맥락 속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었습니다. 다만 제가 여기서 좀 더 예각화하고 싶은 것은 앞서 언급한
‘낭만적 개인성의 이념’이 이 시기 청년 담론 속에서 좀 더 강조될 필
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선생님은 1910년대 이후의 청년 개념을 다루는 대목에서 수양론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1910년대 이후 교양은 지식 엘리트가 누리는 고
급 학문과 사상으로 분리되고, 수양은 통속적이고 대중적이며 지성
보다는 덕성의 연마와 훈련이라는 측면이 강하게 부각됐다. 수양주
의는 청년단, 종교단체 등을 통해 대중 속으로 침투했으며, 이 과정에
서 국가주의와 결합해 전시체제하에서는 ‘연성’의 이념에 합류하게
된다”(130쪽)는 주장은 인상 깊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인격
주의 수양론이 통속화되면서 국가주의적 속성을 강하게 지니게 된

240 제33호
과정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단락에서 1920년대 조
선의 수양론을 일본의 것과 구분하면서 그것이 교양 개념과 분리되
지 않았던 상태였고, 그만큼 합리적인 경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교양이나 수양론이 합리
적인 것으로만 머물러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1920년대 조선의 교양주의의 맥락은 개인 수양
과 인격의 함양이라는 본래의 자리를 지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러나 그것은 또한 교양의 어원에 대한 검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언제
나 정치적인 것이며 국가주의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기도
합니다. 레이먼드 윌리엄즈는 교양의 어원을 검토한 바 있습니다. “교
양(culture)의 원형은 라틴어 cultura(경작)으로 그 어원은 라틴어의 col-
ore에서 왔다. colore의 의미는 산다, 밭갈다, 지킨다. 존경하여 우러르
다 등으로 넓다. 이러한 의미의 몇 가지는 최종적으로 분화되어 파생
명사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산다라는 의미는 라틴어의 colonus(경작
민)을 거쳐서 영어의 colony에로 발전했다”(레이먼드 윌리엄즈, Keywords)

는 설명에서 보듯 교양이 그 지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개인의 내면


만이 아니라, 아직 교양을 성취하지 못한 야만적인 존재들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근대의 이념으로서 교양의 자기발전적 전개를 처음으로
보여주었던 이광수에게 나타난 교양의 정치학이 그 안에서 여성 주
체에 대한 억압과 식민지 담론을 내면화한 식민지적 무의식의 전개
로 드러났던 것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1920년대
교양론이 이후의 ‘연성’이나 ‘심전개발(心田開發)’과 같은 것과 어떤 관
계를 지니는가에 대해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41


책의 제3부인 ‘제국주의 권력과 ‘청년’ 개념의 변화’에서는 총독부의
정책과 시국의 변화에 따른 청년 개념의 변화양상을 살피고 있습니
다. 그런데 앞 장의 논의들과는 다르게 이 시기의 청년이라는 개념에
는 균열이나 분기하는 양상이 잘 포착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생
각인 것처럼 보입니다. 30년대 중반 이후 청년담론이 그 힘을 잃고 국
가주의와 파시즘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던 점에 대해서는 큰
틀에서 동의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속에서도 청년이나 교양에 대해
서 많은 논의들이 있었던 점은 간과하기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30년
대 후반에 이르러 뺷문장뺸이나 뺷인문평론뺸 같은 문예지들이 교양의
논의를 재개한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유진오는 뺷인
문평론뺸 제2호(1939)에 실린 「구라파적 교양의 특질과 현대 조선문
학」이란 글에서 현대 조선문학의 비극은 유럽적인 교양의 정신을 체
득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원조는 뺷문장뺸 창간
호(1939)에 실린 「교양론」에서 최근에 대두한 지성론이 교양론으로
전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면서, “이렇게까지 살펴보면 우
리가 이야기하려는 교양의 거점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현대적 모
랄 그것이라는 것이 자명되지 아니할까?”라고 말하며, 지식인의 윤리
적 사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임화, 박치우, 최재서 같은
사람들이 교양의 필요를 논의한 글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들
의 논의 또한 자율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겠지
만, 이러한 논의를 포함하여 제국주의 파시즘으로 회수되지 않았던
청년 담론에 대해 논의할 수는 없는 것인지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
습니다. 두서없는 질문이 되어 버렸습니다.

242 제33호
‘청년’ 개념의 비일상성과 개념 연구의 난점들

사회자 네, 감사합니다. 세 분의 토론을 들었고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


자가 정말 책을 꼼꼼히 읽어와 주셔서 고맙다고 했는데, 토론문도 정
말 열심히 써주셨죠. 그래서 질문이 정말 많습니다. 그것들을 나름대
로 정리를 해보니까 겹치는 부분들이 있고, 그리고 각각 선생님들이
따로 질문하신 부분이 있어요. 크게 겹치는 부분이 세 가지 정도 있고
요. 그 세 가지 질문부터 먼저 풀고 개별적인 문제들을 단답하는 형식
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진행 방식은 일단 각 토론 주제에 대해서 이기
훈 선생님께서 간략하게 한 3분 정도 답변해주시고, 거기에 대해서
토론자들이 또 추가적으로 질의하는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답변이
너무 길어지게 되면 청중들이 논점을 놓칠 수 있기 때문에, 그 점을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겹치는 주제 중의 하나는 이 책이 개념사를 다루고 있는데 그 개념사
저작으로서의 부족한 점들은 무엇인가, 하는 부분이 있고요. 두 번째
는 1930년대, 1940년대 전시체제기(戰時體制期)에 들어가지고 ‘청년’ 개
념, ‘청년상(靑年像)’에 대해서 이기훈 선생님께서는 청년이란 것을 ‘제국
주의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청년’ 또는 ‘황국신민화를 선도하는 청년’으
로 정리하셨습니다. 단일화라고 하기는 좀 애매하지만, 여기서 균열하
거나 붕괴하는 점들이 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토론자들의 지적이었
습니다. 세 번째는 해방 후의 청년의 실재(實在)에 대해서 내용이 빠진
부분들, 또는 사실 관계가 다른 것들, 또는 소략한 부분에 대한 저자의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43


해명 내지는 반론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 개념사 저
작으로서의 의미를 짚어주고 약간 한계로 보이는 부분에 대한 것인데,
이와 관련해 오제연 선생님께서 청년 개념의 일반화가 조금 부족한 게
아닌가라고 지적하셨고요. 박찬승 선생님께서 청년 개념의 변천사라
기보다는 ‘표상’의 변천사에 가깝지 않은가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해주시는데, 다만 두 번째 문제와 관련해서는 세대
개념의 유무(有無)라든지 그 다음에 ‘청년’ 외의 다양한 용어들이 있을
터인데. 그 부분들을 놓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이
에 대한 것도 간략하게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기훈 뒤의 것부터 말씀드리죠. 개념 부분부터요. 아주 잘게 쪼개고 세밀
히 검토하고 비교해야 되는 게 개념사입니다. 청년을 개념사로 재구
성하기 위해서 비교해야 되는 다른 개념들이 많은데요. 비교가 제일
힘든 말이, 아까 박찬승 선생님이 말씀하신 ‘젊다’ 와 같은 순수한 우
리말이죠. ‘젊다’, ‘젊은이’ 같은 말들이 사료상에 그대로 표현이 안 되
거든요. 신라 시대 관직 중에 보면 ‘소년서성(少年書省)’이니 ‘소년감전
(少年監典)’이니 하는 관직이 나옵니다. 이 ‘소년’은 분명히 ‘젊다’나 ‘어

리다’나 ‘작다’라는 뜻의 신라어였을 터인데, 사료에는 ‘소년’으로 나


와 버립니다. 일본어 ‘와카모노’는 ‘약자(若者)’로 나오니까 고정이 되
는데, 우리 사료에서는 ‘젊다’, ‘젊은이’라는 표현이 고정이 안 되기 때
문에 추적하는 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읽을 수 있도록 정리된 한
글소설들을 살펴봤는데, ‘젊다’는 표현 자체가 잘 안 나옵니다. ‘어리
다’라는 표현은 좀 확인을 했는데, ‘젊다, 젊은이’ 대신 나오는 말 중에
서 ‘소년(少年)’, ‘약년(弱年)’이 연령 개념에 가깝고, ‘자제(子弟)’는 세대

244 제33호
개념에 가깝죠. 나이로 따지면 ‘노년’과 ‘소년’으로 구별을 하구요. 세
대로 따지면 ‘부로(父老)’와 ‘자제’로 구별이 됩니다.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용어에서 ‘젊다’와 같은 말들이 어떤 식으로 고정이 되어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로서도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는 끝까지
고민했는데 못 푼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이 ‘청년’을 일상 개념으로
파악하는 접근에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
같은데, 실제 생활 속에서는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죠.
‘청년’으로 뺷동아일보뺸 같은 걸 검색을 하시면 몇 만 건이 나와 버립
니다. 근데 일기 자료들, 아까 (말씀하신) 분열, 수용자 내부의 분열이
나 균열의 가능성들 그걸 제가 사실 찾아보려고 일기 자료들을 많이
뒤졌거든요. 근데 생각해 보시면, 일기 쓸 때 ‘청년’이란 말 쓸까요?
(웃음) 단 1건도 확인을 못했습니다. 일기 자료에는 ‘젊은이’ 이런 말도

사실 잘 안 씁니다.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이건 인간의 자기


중심성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자기 연령을 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구도 다른 사람한테 ‘젊다’ 뭐 이런 이야기를 잘 안하는 겁니다. 간
혹 보면 ‘어리다’, ‘늙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젊다’라는 건 자기
자신을 굳이 스스로 표현할 이유가 없으니까 거의 없더라구요. ‘청년’
이란 말은 더더욱 없고. 그래서 더 청년이 진짜 ‘일상 개념’ 맞나, 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한국어 개념사 연구의 특성
이자 고민 중의 하나입니다. 근대 한국어의 개념이 수입된 말이기 때
문에, 굉장히 자주 쓰는 말이고 일상적인 말인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
지도 않다는 것이죠. 제가 영어 일기를 못 봤습니다만, ‘young man’이
란 표현은 자주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말에서 ‘청년’은 어색한, 굉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45


장히 어색한 단어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좀 더 발본적인 고민이 필요
한 것 같습니다. 한국 개념의 역사, 아까 전에 박찬승 선생님이 말씀하
셨듯이 도입된 말로서의 한국의 개념사, 근대 개념사라고 하는 것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발본적 고민이 좀 더 필요하다는 거죠.
그리고 박 선생님이 질문하신 것 중에 ‘왜 한국의 근대는 청년을 호명
했는가’에 대해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청년’이라는 젊은 집
단, 그리고 ‘도입된 말로서 청년’이 새롭고 역동적인 근대적 주체를 표현
할 때 아주 좋았다는 것이지요. 쫓아가고 따라잡아야 되는 한국 근대를
이끌어 나가는 주체로 만들 때 가장 이상적인 집단이며 표상이었죠. 추
격하는 집단으로서의 ‘계급’이라든가 ‘민족’보다 그걸 더 아주 역동적으
로 보여주는 표상이자 개념이 ‘청년’이었다, 라는 게 청년을 선택한 첫
번째 동기였을 것이고. 두 번째는 청년이 굉장히 통합적이었다는 거죠.
민족과 등치시킬 수 있는 굉장히 통합적 연령 개념이었기 때문에 전략
적으로 선택했고, 또 사람들이 무난하게 받아들였겠죠. 이건 이후에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청년을 쉽게 주체
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그런 동인(動因)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약간 건너뛰는 건데, 오제연 선생님이 하신 질문하고
관계있는 거라서 그냥 여기서 대답을 하지요. 기실 해방 이후 청년 중
에 특히 1960년대의 ‘청년’이 잘 안 나옵니다. 지적하신대로 ‘청년’이
라는 말 자체가 잘 안 나옵니다. 오제연 선생님이 토론문에서 ‘여기
이것 말고는 별로 없다’고 하신 게 맞습니다. 뺷4월 혁명 자료집뺸을 다
뒤진 겁니다. ‘청년’이라는 말 자체를 거의 거부하다시피 합니다. 몇
건 있는 것만 골라내니 ‘청년학도’가 몇 개 나오는 겁니다. 1960년까

246 제33호
지만 해도 ‘반공청년단’ 등에 1950년대 청년 이미지가 남아 있어서 그
말을 잘 안 씁니다. 그냥 ‘학도’ ‘젊은 사람’ ‘젊은이’ 이렇게 표현할 뿐
이죠. 그런데 ‘청년’의 개념사를 서술해야 하니 남아 있는 거라도 주
워 와야 하게 된 거죠. 일단 개념을 구성하고 설명을 하다보니까 여기
에서 서술상의 왜곡이 좀 생겼던 것 같습니다. 해방 직후부터 1950년
대까지의 청년의 폭력이 큰 단절을 만들어 줍니다. 다시 복권 되는 게
1970년대입니다. ‘민청학련’ 같은 경우도 있었지만 ‘청년문화’라고 하
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하면서 복권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
이지요. 그런 면에서 사실 제가 1970년대로 책을 마무리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청년문화’라는 게 청년이 다시 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민청학련의 선언문에서도 ‘청년’이 ‘학도’와
긴밀하게 결합해 있지는 않다는 거죠. ‘청년’과 ‘학도’가 긴밀하게 붙
어서 ‘청년학도’를 형성하는 건 1980년대 후반입니다. 극단적으로 말
씀드리면, 이건 NL(민족해방계열)이 본격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
한 용어입니다. 그 전까지는 잘 안 씁니다. ‘청년 학도’는 거의 대부분
의 청년 세대가 대학생이 되면서 가능해진 용어입니다. 이게 1970년
대와 1980년대를 가르는 기준인데, 사실 정리를 제가 못한 거죠. 구상
은 대충 이렇게 있는데. 그걸 명확하게 말씀 못 드린 측면이 있죠.
사회자 잠깐만요. 질문이 많이 좀 확산되어 나갔는데. 개념사로서의 저작
의 의미에 대해 본인의 평가가 좀 필요한 부분인데, 아까 여러 가지
관련어를 설명하면서 해방 후로 넘어갔거든요. 아까 이기훈 선생님
께서 어떤 답변을 하셨냐면, 박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한(下限)
을 왜 1970년대로 끊었냐’ 하는 부분을 지금 ‘민청학련’ 부분을 이야기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47


하면서 곁들여서 설명하셨거든요. 그래서 뜬금없이 나온 답변처럼
되어 버렸고. 그 다음에 용어의 문제, 여러 가지 다양한 주체어들이
있는데 필자가 쓰는 ‘청년학도’, ‘청년’, ‘청년학생’ 용어 자체는 사실은
일부이지 않는가라는 것에 대한 답변들이 갑자기 확대되어 나간 것
이지요. 이 부분은 조금 뒤로 미루고. 다시 첫 번째 부분을 마무리하
고 넘어가도록 하지요.
이기훈 네. 개념의 일반화, 대충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몇 가지 사례들, 용
례들을 제가 제시를 하기는 했는데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의 개
념사 자체가 코젤렉(Reinhard Koselleck)이 했던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불가능한 면들이 좀 있습니다. 그렇게 확연한 의미 변화 같은 것도 없
구요,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개념어들은 두 개나 세 개의 한자를 결합
해서 만든 단어들입니다. 근데 원래의 한문에서는 한 글자로 만으로
도 충분한 의미를 가지는 글자들을 조합해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
게 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습니다. 조어법과 문법 자체가 변화시켜 만
든 개념어들을 이전의 개념들과 연결하는, 그리고 그걸 통으로 볼 수
있는 개념사의 연구법은 아직까지는 그렇게 잘 정리되어 있는 것 같
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일상 개념이 아닌 단어들의 경우에는 그나마
추적이 좀 가능한 면들이 있는데. ‘청년’의 경우는 그야말로 문맥이
없습니다. 한자 문맥은 전혀 의미가 없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개념사
연구법의 새로운 조망과 비교사가 필요하겠다, 라는 게 제 답입니다.
그 다음에 청년 개념의 일반화에 대해서는. 기실 지금도 시대별로 끊
어놓은 것도 폭력적 도식화라는 욕을 먹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
다. 사실은 오제연 선생님이 정리해 놓은 걸 보고 이렇게 해석할 수도

248 제33호
있겠구나, 라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도식화의 위험은 존재합니다. 일
반화할 경우 좋은 결과 보다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겠다는 두
려움이 좀 있었습니다. 답은 이정도로 하겠습니다.
사회자 이기훈 선생님이 일단 비판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면서 현실적으로
한국에서 코젤렉의 개념사 같은 방법론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좀 회의를 표시한 것 같아요. 박찬승, 오제연 선생님 두 분 일
반화 부분에 대해서 좀 더 더 부연하실 것 있으십니까.
오제연 일반화에 대한 문제제기는 제가 했으니까,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
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면서 들었던 생각을 바탕으로 이
렇게 토론문에서 근현대 청년 개념의 일반화를 거칠게나마 시도했던
겁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던져준 것 자체만으로 이 책이 굉장히 의미
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토론문에서 제시한 일반화의 가능성이
라는 것도 이 책에 있는 내용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거는 동
의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토론문에서 제시한 이런 일반화된 설명이
일반화의 오류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안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있
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연구라고 하는 게 완벽한 논증을 하고, 완벽
한 결과물을 내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이런 문제제기를 먼저 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비판을 하든,
극복을 하든 그 다음 연구에 징검다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저도
이 책에 대한 기대치가 있었기 때문에 결론이 본문 요약이 아니라, 본
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번 새롭게 총체적으로 분석해주는 그런 결
과물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차원에서 말씀을 드린 겁니다. 앞으로
선생님도 계속 이 주제를 공부하실테고, 저도 ‘학생’이라는 주제에 대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49


해서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계속 연구를 하다 보면 조금 더 이런 일
반화의 오류를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그
런 기대가 있습니다.

해방 직후 좌익 청년운동과 ‘청년’ 담론

사회자 알겠습니다. 세 번째로 하려고 했는데, 두 번째로 가버렸는데요. 그


문제를 다시 한 번 질문을 하면. 해방 이후 청년에 대한 설명이 조금 부
족하거나 빠진 것들, 아니면 사실 관계 부분을 이야기를 했는데. 두 가
지 부분은 이미 답변을 하셨어요. 하나는 아까 ‘하한을 언제까지 둘 것
인가’ 하는 부분에서 이야기하고, 또 하나는 그 아까 ‘용례’에 대해서 설
명이 있었죠. 질문은 박찬승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해방 후 좌익
청년’에 대한 내용들이 좀 많이 빠진 것 아니냐. 그래서 좌익과 우익에
대한 균형 잡힌 서술이 필요한 데 이 부분에서 좀 아쉽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아까 나왔던 답변은 피하시면서 이 해방 이후 서술에 대
해서 본인이 어떤 입장으로 준비했는지 답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기훈 네, 제가 나름 설명하려고 했는데 잘 표현이 안 됐던 것 같아요. 어
떻게 볼까요, 우익이 급속도로 ‘청년’을 점거했다고 해야 할까, 장악
해버리면서 좌익들이 1945년 말 쯤 되면 이미 ‘청년’이라는 말의 주도
권 경쟁에서 밀려버리는 것 같습니다. 좌익이 쓰는 논설에서도 ‘청년’

250 제33호
이 부정적 표현들이 많아지고요. 주도권을 도로 찾아오기 위한 시도
나 노력을 많이 하는데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워낙
청년 단체나 조직들이 우익 쪽이 많이 생기고, ‘청년 단체’라는 이름을
가진 것들이 많이 늘어나면서. 우익이 자연스럽게 청년이라는 말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좌익들이 거기에 대한 도전들이 몇 번 나타나
기는 하는데. 뺷청년해방일보뺸를 읽어봐도 그렇게 두드러진 게 잘 안
나옵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저도 그렇게 깊이 있게 분석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좌익이 ‘청년’이란 용어를 잘 안 쓰게 되는 것이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밀리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
습니다. 논설에서도 잘 안 쓰고 대중에게도 별로 잘 안 먹히는 거죠.
좌익이 민해청같은 조직들은 만드는데, 이런 조직의 문건에서도 청
년을 호명하거나 주체화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사회자 그렇다면 이기훈 선생님이 1920년대에 대해 서술하신 부분하고 관
련시켜 보면, 1920년대 후반에 사회주의자들이 노동계급 중심으로
가게 되는데. 그 연장에서 1940년대 해방 이후에도 노동조합 중심으
로 가서 그런 건가요?
이기훈 아니, 딱히 그렇지는 않거든요.
사회자 그건 아니고.
오제연 제가 좀 말씀을 드릴 수 있을까요. 일단은 이러한 난점이 생기는 이
유는 현재의 현대사 연구사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방 후 우익 청년단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진행됐는데, 좌익에서
청년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지 않습니다. 좌익의 경우
특히 ‘민청’이 중요한데. 사실 민청이라는 조직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51


힘을 많이 발휘했던 지역은 남쪽이 아니라 북쪽입니다.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기, 전시체제기이든 해방 직후든 ‘청년’이라는 개념은 권력과 떼
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는 거지요. 남쪽에서는 갈수록 우익
이 주도권을 잡아가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청년’이라는 개념
을 우익들이 선취해서 그것을 이용하는 거고, 반면 북에서는 ‘민청’이
라고 불리는 조직이 굉장히 세를 확대하거든요. 제가 노획문서 자료
를 봐서 말씀을 드릴 수 있지만 북에서는 민청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
합니다. 근데 문제는 이 민청과 관련돼서 현재까지 연구가 거의 진행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학계의 연구 상황에서는 아마 이기
훈 선생님이 직접 그 노획문서 박스들을 다 열어가지고 민청을 본격
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굉장히 좀 어렵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
습니다. 해방 후 좌익이 청년을 어떻게 호명하고 동원했는가는 굉장
히 중요한 연구주제이지만, 현재로서는 우리가 아직 돌파하기가 조
금 어려운, 앞으로 계속 연구가 쌓여야지만 돌파가 가능한 부분이 아
닐까 싶습니다. 저는 그래서 단순히 좌익이 계급을 더 중시했기 때문
에 이때에 청년 개념을 안 썼다고 하는 데에 있어서는 조금 의아한 면
이 있습니다. 오히려 권력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그래서 남쪽에서 권
력을 가진 사람들과 북쪽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달라지면서, 각
각의 지역에서 권력이 ‘청년’을 선취하는 그런 모습을 파악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기훈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좀 이해가 되는데요. 제가 말한 뺷청년해
방일보뺸가 뺷해방일보뺸의 후신이고, 좀 뒤쪽의 시기입니다. 확실히

252 제33호
남한에서 좌익이 수세로 돌아섰을 때의 문건들이거든요. 그거를 보
면, 이게 수세의 시기이기 때문에 주체를 호명할, 적극적으로 호명할
일이 별로 없는 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사건에 대한 이야
기는 되게 많죠, ‘이렇게 부당하다’ ‘우리도 나서야 한다’ 이런 방식으
로 청년을 적극적으로 주체화되는 호명이별로 안 등장하는 게 설명
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년’을 둘러싼 지배와 저항 진영의 경합

사회자 박찬승 선생님이 질문하신 1987년까지 서술을 안 한 부분은 답이


조금 미흡하다는 생각이 되거든요.
이기훈 1960년대만 하더라도 권력이 ‘청년’을 많이 쓰는 시대입니다. ‘재건
청년회’가 대표적이죠. ‘재건청년회’가 마을마다 다 만들어지거든요.
이런 ‘반공청년단’ 류의 권력의 청년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면서 ‘민청학련’ 전까지는 선언문 등에서 ‘청년’이라는 표
현을 거의 안 씁니다. ‘청년학도’ 이렇게 붙여서 쓰지 ‘청년’이라는 말
을 독립해서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체제 지향적인 쪽에
서는 ‘청년’을 따로 쓰죠. ‘재건청년회’는 ‘청년’이 따로 나오는 데, 그
렇지 않은 쪽에서는 ‘청년’만 따로 쓰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민청
학련의 선언서에도 제목 말고는 안 나옵니다. 제목이 아니고…….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53


사회자 조직 이름?
이기훈 네, 조직 이름도 뭘 하나 정해야 되니까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으로 하자, 라고 해서 정한 거거든요. 아주 의미심장한 것은 아니었습
니다.
사회자 이기훈 선생님 답변을 들어보니까 개념사, 청년 개념의 변천을 보
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문건이라든지 당대의 매체 속에서 ‘청년’이 얼
마나 등장하고 있는가, 얼마나 쓰이고 있는가를 보니까 1970년대가
한계인 것 같다, 라고 본인이 보시는 거지요.
이기훈 1970년대가 어떤 면에서 보면 새로운 변화의 시기이고 새로운 등장
의, 재등장의 시기였던 겁니다. 그것 중의 하나가 청년문화론입니다.
청년문화론은 당시 이질적인 존재감을 확 불러일으켰거든요. 굉장히
격심한 논란을 초래한 이질적인 존재감이죠. 이건 제가 다음 후속 연
구를 하면 고민을 해봐야 될 부분인데. 왜 이렇게 이게 논쟁이 됐을까
를 생각해 보면. 사실 청년문화의 실체 자체는 별거 아니거든요. 뭐 ‘청
년문화’라는 새로운 게 있다라는 수준이죠. 그런데 오히려 학생운동권
이나 대학언론에서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입니다. 파르르 떨죠. 그게
당시에 실제 대학생들을 비롯한 민족주의 담론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세대 주체론을 끌고 나왔기 때문이죠. ‘세대’를 주체화하고 한 세대가
다른 세대를 적대하는 논리를 끌고 나오니까 이게 굉장히 파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오히려 이 파란이 실제로는 새로운 청년이라는 것을 가
능하게 해주었고 그게 민청학련 이후에 다시, 자연스럽게 ‘청년’을 붙
일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닌가, 청년문화론이 불러일으킨 파란이
하나의 변곡점을 만들어 준 게 아닌가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254 제33호
사회자 박찬승 선생님의 아까 질문하신 요지를 보면 청년이 1980년대 운동
의 실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부분으로 관심이 가는 것 같거
든요. 처음에 이 ‘청년’이라는 단어가 처음 들어왔을 때 실체는 없는데
번역어로 들어오면서 어쨌든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실체는 있는데 마치 그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식의 엇갈림
이 존재하는 것 같은데. 박 선생님, 질문과 어떻게 이해하셨나요.
박찬승 제 생각은 1950년대까지는 우익 반공청년단의 이미지가 ‘청년’이라
는 말에 강하게 투영되어 있었고, 1960년대 이후에는 지금 말씀하신
재건청년단이라든가, 지금 내 기억으로는 농촌의 경우에는 4H청년
회가 상당히 강했다고 생각이 되고요. 그리고 1970년대, 1960년대와
1970년대 또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어 가고 있었는데 관련된 청년회가
마을마다 만들어졌지요. 어떻게 보면 그것은 1930년대 이후에 총독
부가 청년들을 장악하는 노력을 했던 것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
니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 청년문화론이 등장합니다. 그러
니까 1960년대에 ‘청년’이라는 단어가 신문이나 잡지에 별로 등장하
지 않는다고 해서 청년 담론이 사라졌다라고 보기에는 좀 어렵지 않
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방금 얘기한 재건청년단, 4H청년회, 새마
을청년회와 같은 것들이 각각 하나의 실체로서 있었다는 것이죠. 그
런 점에서 관변 쪽의 자료들을 뒤져보면 오히려 그 쪽에 더 많이 청년
에 대한 담론들이 나올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들고요. 그런데 1970년대
에 들어와서 이를테면 민청학련에 ‘청년’이 들어간다든가, 또 청년문
화론과 같은 것이 나온 것은 ‘관(官)에서 장악하지 못한 청년’이 다시 등
장한다는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1980년대까지 이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55


어지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예를 들면 1980년대 ‘민청련’의 경
우, 대학을 마치거나 그만둔 사람들을 ‘청년’이라고 부르지 않았나 여
겨집니다. 그래서 단체 이름을 그때는 아예 ‘청년 연합’이라고 붙였던
것 같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청년’과 ‘학생’을 분리시켜서 사용한다
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되거든요. 일정한 대학생층
이 형성이 되면서 양자를 이렇게 분리시켜서 쓰려고 하는 경향이 한편
에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그런 운동의 조직에서는. 그러나 이제
‘청년문화’라고 할 때는 그거는 대학생들이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었고,
주로 대학생 문화를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거기
서는 구분이, 청년과 학생이 1970년대에는 구분이 안 되었다고 생각이
되거든요. 결국 쓰는 사람들에 따라서 청년과 학생이라는 말을 어떤
사람들은 분리시켜서 쓰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냥 묶어서 쓰려고
하는 경향들이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제연 제가 좀 말씀드리면, ‘청년’과 ‘학생’ 개념과 관련하여 특히 4․19 때
쓰는 용법들을 보니까 ‘청년학생’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제
가 아까 토론문에서 이것은 ‘청년으로서의 학생’이 아니라 ‘청년’과
‘학생’으로 구분된다고 말씀드린 이유가 뭐냐면, 이 책에서도 언급이
되어 있지만. 4․19가 학생들만의 것이 아니거든요. 거기에는 수많
은 젊은이들이 참여를 했습니다. 특히 학생이 아닌 사람들, 구두닦이
라든지 신문팔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참여를 했어요.
물론 나중에 학생들이 결국 4․19의 주체 자리를 독점하는 상황이 되
지만, 학생이 아닌 많은 젊은이들의 참여를 부정하기가 힘든 그런 상
황이었다는 거죠. 게다가 이 책에도 나오지만 대학생이 전체 동년배

256 제33호
중 10% 정도 밖에 안됐던 시점이니까, 학생만 가지고는 젊은 사람들
을 포괄하기가 힘들었던 거죠. 그러니까 ‘청년’과 ‘학생’이라고 하는
것을 어쨌든 같이 섞어서 ‘청년학생’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
던 겁니다. 따라서 ‘청년학생’을 ‘청년’과 ‘학생’이라는 용법으로 봐야
지, ‘학생’을 ‘청년’으로 규정해서 호명하는 것으로 보기는 조금 어렵
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제가 이기훈 선생님하고 의견이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부분인데, 저도 그런 부분은 분명 있다고 생
각합니다. 1970년대의 민청학련이든, 여기서 또 예를 드셨던 1971년
의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이런 조직들이 왜 ‘청년’이란 말을 쓰
느냐. 그건 아까 박찬승 선생님이 말씀하셨고 이 책에도 나오지만, 이
학생운동권들이 대학을 졸업하거든요. 졸업하고 학생의 적(籍)이 없
는 상태에서도 계속 뭔가 운동을 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자기들을 규
정할 수 있는 새로운 호명이 필요한 거죠. 그때 가장 적합한 게 ‘청년’
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들도 ‘청년’과 ‘학생’ 개념을
분리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드는 생각은, 박찬승 선생님
이 방금 말씀하셨지만, 이게 모순적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학생들은
끊임없이 스스로 ‘나는 대학 안 다니는, 학교 안다니는 저 애들과 나
이는 같지만 달라’라고 하는 그런 엘리트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지만
그러나 문화적으로 보면 사실 살아가는 모습들은 비슷하거든요. 그
러니까 1970년대에 청년문화 논쟁이 발생하는 겁니다. 뭔가 새로운
문화 조류가 들어와서 많은 젊은 사람들이 거기에 따라갔는데, 그건
학생들도 마찬가지였거든요. 그런데 엘리트의식이 강한 학생들 입장
에서는 ‘우리가 저 소위 말해서 학교 안다니는 애들하고 똑같이 노는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57


게 이게 말이 되느냐’ 그러니까 대학 내에서 청년문화에 대한 엄청난
반발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빠다에 버무린 깍두기다’ 뭐 이런 식으
로 막 비판했던 겁니다. 근데 이게 모순이라는 거예요. 제가 제 논문
에서도 그런 부분을 많이 지적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미 청년문화를 누리며 사는데, 대학 언론이나 지식인들은 마치 대
학생과 일반 청년들이 다른 것처럼 자꾸 구분하려고 하는, 그런 모순
지점들이 있었던 겁니다. 제가 아쉬웠던 게, 그런 부분을 이기훈 선생
님께서 이 책에 더 써주셨으면 지금의 이러한 의문들 또는 여러 가지
논란들이 조금은 더 잘 정리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제가 토론문을 통
해 이 책에서 현대사 부분 서술이 상대적으로 소략하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저는 충분히 이기훈 선생님이 이 지점을 의식하고 있었는데,
조금 압축적으로 쓰시다 보니까 그런 부분들이 많이 빠진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국의 청년’과 ‘불온한 청년’ 사이에서

사회자 저도 이기훈 선생님께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답변을 더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웃음) 두 번째 부분들. 소위 전시체제기에
청년으로 호명되는 주체 자체를 단일하게 보는 듯한 부분에 대해 질
문이 있었거든요. 다시 한 번 말하면, ‘황국신민화를 선도하는 청년’

258 제33호
이라든지 아니면 ‘제국에 헌신하는 청년’. 이러한 부분들이 존재하는
데 허 선생님 말씀하신 것처럼 ‘제국주의 파시즘에, 일제에 흡수되지
않았던 청년담론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부분들. 그리고 오제연 선생
님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뺷식민지 불온열전뺸(정병욱, 역사비평사, 2013)
에 나오는 그 불온한 청년들은 어디에 위치 매김, 자리 매김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균열하고 있는 지점들
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데 이들을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이기훈 이걸 제가 해결하는 방식을 되게 고민을 했습니다 사실은. 이건 근
대사 연구자들이 항상 봉착하는 문제입니다. 1937년 이후가 되면 목
소리가 사라지는데 이걸 어디 가서 확인할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그
래서 유언비어도 좀 뒤져보고, 그 다음에 일기 자료도 뒤져 봅니다.
그런데 일기는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청년이라는 말이 잘 안 나옵
니다. 더군다나 강상규의 일기같은, 뺷식민지 불온열전뺸(의 ‘경성 유학생
강상규, 독립을 열망하다’ 참고)의 이중성은 극히 드문 케이스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상규가 특이한, 일기를 2개 쓴 특이한 사람


이었기 때문에 그 이중성이라는 게 확연히 드러나는 케이스였던 거
죠. 그런 자료들은 정말 천운이 따라야 찾을 수 있는 것들이구요. 그
래서 해외로 눈을 돌려 무장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헌을 찾아볼
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면 그 전 문헌들도 다 검토해야 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연구 영역이 사방팔방으로 넓혀지면서 감당을 못 하겠
더라고요. 청년상 내부에서 균열의 가능성은 명백하지만 기술적으로
통합해서 다룰 방식을 찾지 못했습니다. 자료만의 문제가 아니고 자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59


료를 통합하는 방식도 문제죠. 한쪽에는 권력의 이야기가 관철되고
있는 조선에서 만들어진 자료가 있고, 반대쪽에는 조선의 바깥으로
완전히 나가버린 사람들, 임시정부라든가, 아니면 조선의용군이라든
가 하는 곳에서 나온 문건들이 있습니다. 거기 담론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둘 다 존재하는 데, 둘 다 ‘일상’은 아닙니다. 사실 균
열의 실제 모습은 이것 또한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이것을 어떻
게 사료로 확인을 할 것인가. 상상이나 이야기로는 포장이 가능한데
역사학적으로 사료로 이걸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그걸 제가 찾을 수
가 없었던 것이죠.
사회자 그렇다면 상상은 가능하나 증명하기는 힘들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나요.
이기훈 그 또한. 사실 제 스스로 자폭을 하자면. (웃음) 전시체제의 상황과
직후인 1945년 8월 15일 이후, 근대와 현대를 넘어가면서 완전히 달
라지는 상황. 이 폭발 이 극단적인 단절을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
는 것도 당혹스러웠습니다. 연구자들이 항상 봉착하는 문제가 1937
년 이후의 역사적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료가 말하지 않는
부분. 그건 1945년 8월 15일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출하는 사료
들은 이게 내면인가, 라는 면에서는 아닐 가능성이 굉장히 높기 때문
에. ‘균열’이라는 건 극히 공감함에도 불구하고 이걸 보여줄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는 같이 고민해보자, 라는 것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
니다.
사회자 질문하신 분들은 다른 증거를 좀 제시하실 수 있으신가요. (웃음)
박찬승 아까 유언비어 이야기 잠깐 했습니다만, 유언비어 사건과 관련된

260 제33호
재판기록들에 보면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당시 청년층의 의식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조금은 있죠. 그러니까 거기에 ‘청년’이란 단
어는 안 나온다고 해도 나이가 청년층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어떤 의
식을 갖고 있었는지 이런 식으로 간접적으로 그것을 거론해주는 방
법 밖에는 없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사회자 저도 고민해 보니까 이기훈 선생이 말했던 것처럼 1945년 이후에
나타났던 폭발적인 양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실 ‘균열’이나
어떤 ‘틈’이 있었어야만 그것이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은폐되어 있는
거죠. 마치 우리가 1910년대 뺷학지광뺸이라는 존재가 있기는 하지만
뺷학지광뺸도 3․1운동이 없었으면 사실 이후에 주체로 나올 수 있는
형편이 안 찾아지잖아요. 그러니까 이후의 과정을 보고 앞으로 찾아
들어가는 것인데. 지금도 아마 1945년 이후의, 그 앞의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과정들을 아직 못 찾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까 박 선생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유언비어라든지, 사실 ‘청년’이라는 말을 하지
는 않지만 이 시기의 청년이나 학생들이 여전히 체제에 대한 불만들
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드러내지는 못하고 잡혀서 드러나는 그런
기회가 있을 것인데.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박찬승 한 가지 저도 덧붙여서 말씀드리면. 1930년대 중후반부터 1945년까
지 시점에서 우리가 별로 주목을 안 한 것이 ‘야학(夜學)’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저희 어머니가 저한테 해주신 말씀을 들어보면, 저희 어머니
는 당시 보통학교 문턱에도 못 가보신 분인데 야학에 가서 한글을 배
우셨다고 하더라고요.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에 야학에 가면 당
시 청년들이 한글을 가르쳐 줬다는 거죠. 그런데 나중에 해방 이후,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61


그리고 6․25 때 보니까 그 사람들, 자기를 가르쳤던 그 선생들이 대
부분 좌익이 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6․25 때 대부분 죽었다는 거예
요. 거기서 유추를 해보면 1930년대 후반 이후에 청년층들이 다 죽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야학이라든가, 서당이라든가 이런 걸 통해서 나
름대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해방 직후에
젊은 층이 인민위원회라든가 민청이라든가 하는 조직들을 빠른 속도
로 만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은 1930년대 중반 이후에도 그들이 나름대
로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기를 우리가 청년운동의 공백기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이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광주학생운동 이후에 농
촌으로 들어간 젊은 층들이 ― 적색농민조합운동이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만, 그런 수준까지는 안 간다 하더라도 ― 야학이라든가 이
런 것을 통해서 나름대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봐야 되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사회자 작품이나 평론에서 그런 가능성들은 좀 더 없을까요.
허병식 좀 전에 박찬승 선생님께서 공백기로 봐서는 안 된다, 라고 말씀을
하셨는데요. 문학 연구에서도 이전에는 1940년대를 ‘암흑기’라는 식
으로 명명을 했었거든요. 최근에는 1940년대가 결코 암흑기가 아니
고 그 안에 있었던 여러 가지 다양한 움직임들을 살펴봐야 된다는 논
의들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청년 담론과 관련해서 제가 무
슨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1940년대 암흑기의
대표적인 파시즘 이데올로그였던 최재서라는 인물이 있는데요. 이
사람은 1940년대 아까 말했던 뺷문장뺸이나 뺷인문평론뺸이 강제로 폐간

262 제33호
되고 나서 그것이 통합되었던 뺷국민문학뺸이라는 잡지를 이끌었습니
다. 그 뺷국민문학뺸에 일본어로 여러 좌담회같은 것들이 있고, 요즘에
는 그 좌담회를 포함해서 뺷국민문학뺸에 쓰인 여러 가지 글들 주로 일
문(日文)으로 쓰인 글들에 대한 연구들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요. 거기에서 최재서가 뺷국민문학뺸에 관여했던 문학가들이 일본의
문학가들이나 총독부 관리나 도서관장이나 이런 사람들과 여러 가지
조선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서 여러 논의를 하는데. 그 속에 보면 우
리가 ‘철저하게 황국신민의 길을 가야 된다’라고 주장하고 파시즘에
복무한 것으로 알려져 온 최재서라는 사람은 끊임없이 일본의 문학
자들이나 총독부 관리들의 여러 주장들과 어긋나면서 조선, 식민지
조선의 어떤 길을 따로 확보하려고 하는 그러한 모습들을 보여주는
점들이 있거든요. 물론 그것을 최재서의 특별한 공(功)이 있다거나 이
런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지만. 어쨌거나 파시즘에 복무했던 청
년이나 문학가나 역사학자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무엇을 위해서
이 길을 가는가, 결국에는 그것이 이광수가 이야기했던 대로 ‘민족을
위한 길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일본과는 다른 조선인의
자리나 위치를 끊임없이 확보하고자 했던 측면이 있다’라는 점은 상
상이 아닌 증거로서 제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이 시기에 청년 담론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뚜렷하게 어떤 사
료나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 대목들을 이면에서
좀 읽어볼 수는 있지 않을까, 라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여러분의 토론을 들으면서 저자가 아닌 게 상당히 행복해 집니다.
제가 증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토론 문제를 제기만 하고. (웃음)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63


‘잊힌 세대’, 광주학생운동 세대의 청년들

이기훈 개념사나 담론 연구라고 하는 건 항상 실제와 개념, 혹은 담론 사이


의 긴장관계를 전제로 하고 그 긴장감을 잃어버리면 무너져 버리거
든요. 이게 제일 문제입니다. 1937년 이후는 실재는 어딘가에 존재하
는데 이 실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 말로 표현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역시 실재에서, 아까 말씀하신대로, 유추해 보는 수밖에 없
고. 그 실재들을 통해서 다시 증명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될 겁니다.
제가 여기서는 아직까지 해본 적이 없고, 사실 그런 게 가능한지도 모
르겠습니다. 고민해 봐야 될 것인데.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지
점. 즉, ‘단절이 아니다’라는 측면은 사실 세대의 측면에서 보면 박찬
승 선생님 논문에서는 언급하신 광주학생운동 세대들을 주목해야 한
다고 생각합니다. 1929년 무렵에 학교를 다니면서 운동에 참여하거
나 퇴학당하거나 혹은 목도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향리로 돌아와
서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한다고 고생만 무지하게 하고 해방되고 나
서는 이 사람들이 30대이기 때문에 실제 좌익운동의 주역들이거나
그렇게 연루되어 버린 사람들이고, 거의 못 살아남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대들이 아까 말씀하신 야학을 했던, 잊힌 세대들이죠. 잊
힌 세대들의, 잊힌 청년 이야기들이 있을 터인데. 이건 담론 연구뿐만
아니라, 역사학자들이 사실은 지금까지 방기하고 있는 생애들입니
다, 삶들이구요. 어떤 면에서 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
없다 하더라도, 말의 역사는 잊힌 말들을 찾아가는 게 진짜일 것이고.

264 제33호
아까 오제연 선생이 제안했던 것처럼 더 다양한 방식의, 다양한 단어
들과 의미들을 추적해가고, 유사한 단어들의 의미를 쪼개가는 방식
으로 접근해야 되지 않을까. 오늘은 사실 그런 면에서 채찍질을 당해
서 부담이 이루 말할 수가 없네요. (웃음)
사회자 이기훈 선생님 혼자서 할 일은 아니고, 문제가 제기되었다는 것은
학계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거든요. 이 부분에 대한 해답
내지는 이걸 증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걸 제기하면 사실 커다
란 연구 성과가 될 수 있겠죠. 중복되는 문제들은 좀 정리를 했고요.
이제 속도를 좀 빨리해서 답변을 좀 간결하게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요. 박 선생님이 질문하신 것 중에서 1920년대 후반 청년운동에서 청
년회의 기준이 우측에 맞춰진 것 아닌가, 고려공산청년회라든지 조
선청년총동맹의 역할이 좀 약화되어 서술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
지 않은 것 아닌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기훈 서술하다보니 생긴 문제인데, 1920년대 1930년대를 구별을 하다보
니까 상대적으로 그 영향력에 비해 서술이 축소된 부분이 분명히 존
재합니다.
사회자 예, 알겠습니다. (이기훈 : 그 다음에. 일본과 다른 조선의 청년 담론……)
아, 질문은 제가 할께요. 사회까지 보지 마시고.
이기훈 그냥, 마음이 급해서. (웃음)
사회자 그건 조금 뒤에 부분에 하기로 하고요. 1930년대 입신출세 지향, 청
년의 입신출세 지향을 저자는 1930년대부터 시작된 것처럼 쓰고 있
는데 토론자는 이미 1910년대부터 존재했던 게 아닌가, 그리고 1930
년대에는 그것이 강화된 게 아닌가라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65


대해 이야기를 해주시죠.
이기훈 예, 맞는 말씀입니다. 이건 제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사실
1910년대부터 다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다 존재하는 이야기들이
죠. 그걸 다 쓰게 되면 역사적 맥락이 사라져 버릴 정도로 다 퍼져버
릴 것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부각시킨 면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럼요.

왜 조선의 ‘신청년’은 새로운 문화주체로 거듭나지 못했는가

사회자 예, 충분히 알겠습니다. 여기에 관련해서는 이태훈 선생님이 좋은


글을 쓴 게 있습니다.1 입신출세 경향, 그리고 기존에는 계몽․자강
여기에만 연구의 초점을 뒀는데 대부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관
료가 되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는 그런 모습이 잘 그려져 있거든요. 어
떻게 보면 실제 대부분의 청년들의 일상적인 모습인데 우리가 그동
안 민족운동 측면에서만 강조해서 그런 것들을 조금 간과한 측면이
있지요. 박 선생님이 ‘조선의 청년 담론이 실제 조선에서만 만들어진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셨는데. 허 선생님이 질문하셨던 ‘교양’과 관련
해서, 약간 맥락이 좀 다르지만 조선의 교양 담론이 합리적이었는가,

1 이태훈, 「한말 일본유학생들의 자기인식과 계몽논리-1900년대 일본유학생을 중심으로」, 뺷한


국사상사학뺸 45, 2013.

266 제33호
라는 부분들과 같이 연결해서 답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기훈 이건 제가 아이디어는 있는데 감당을 다 못해서 못 쓴 부분입니다.
일본과 조선과 중국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흔히 일본에서는 ‘청년(靑
年)’과 ‘장사(壯士)’를 흔히 많이 비교를 합니다. 일본에서는 엘리트들이

‘청년’이라는 단어를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모범적인 청년층을 만들어


가면서 국가가 장악하려고 했다고 연구자들이 흔히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중국의 경우입니다. 중국은 우리와 어떤 차이와 공통점이 있
을 것인가. 도입부터도 거의 비슷한 시점에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입 과정에 정치성이 존재하는 것도 비슷하고요. 다만 이런
면들이 존재합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청년’이라는 것에서 근대적
역동성의 담지자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동일한 것 같습니다. 근데 중
국의 경우에는 ‘신청년(新靑年)’을 만들어내면서, ‘신청년’이라고 하는
문화적 주체로서 다음 세대를 이끌어가는 역동성을 창출해내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경우에는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나 새로운 청년성을 부여하고 청년주체화 하기는 하는데 이게 새로
운 힘까지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신청년’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문화적 주체로서의 재구성이라든가, 이런 방식으로
이끌어 나가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 같은 경우는 사회주
의 청년들이 계급 주체 속에 함몰되는 경향에서 한계를 볼 수 있지 않
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가 계급 담론에 함몰되는
것처럼 민족주의도 어떻게 청년이라는 걸 사회주의와 대별되는 주체
로서 표상할 것인가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 그걸 어떻게 더 밀고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운동으로서의 역동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67


성 또는 추진력이 쇠퇴함과 개념으로서 역동성이 쇠퇴하는 것은 거
의 궤를 같이 합니다. 선생님 말씀하신대로, 이게 아주 역동적인 게
아닌 거죠. 민족주의 청년운동의 몰락, 청년 주체의 몰락이라고 하는
건 수양 또는 교양의 몰락하고 궤를 같이해서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
다. 그러니 더 이상 합리성도 아니고 합리적 주체도 아닌 것으로 몰락
해 가는 것이죠. 전반적으로 더 이상 중국의 뺷신청년뺸처럼 미래와 세
대를 연결해가는 역동성 같은 걸 보기는 힘든 거죠. 이건 한국사지만,
냉정하게 인정해야죠. 사실 그런 가능성이 전혀 없었느냐하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중국의 신청년이나 또는 신청년 운동으
로 표상된 청년들이 아주 개념적으로 세련되거나 우아하거나 잘 갖
춰진 것은 아닙니다. 사회와 문화의 역동성이 개념에 힘을 주는 것인
데. 한국에도 그럴 가능성들은 보이는 것이지요. 1920년대 한국에서
도 어설프지만 역동적 개념들이 존재하는데 그게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돈화의 청년수양론, 수양청년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원래부터 완결된 개념으로서 역동성이나 완결성을
갖추고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것이 연결되고, 이어받고 만들
고 같이 창출해 가지 않는다는 것, 또는 문화운동으로 발전하지 않는
다는 것. 그러니까 신청년은 운동이 되는데 조선의 청년 담론이나 운
동들은 아이디어로 종결되어 버리고 원론들이 그 자리를 대체해 버
립니다. 기독교 청년들이 들어와서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리고, 사회주
의 계급론이 그 자리를, 그 주체들을 차지해 버리고 밀어내버리는 것
이죠. 세련되고 아니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구요. 1930년대가 훨씬 더
개념적으로 세련되고 잘 갖춰져 있고 논리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는

268 제33호
시대입니다. 그런데 1920년대처럼 역동성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이지
요. 훨씬 더 잘 가다듬어져 있고 이론의 수준도 깊음에도 불구하고 그
런 역동성이 보이지 않는 건 그럴 가능성들이 차단되어 있는 새로운
것들, 원론들이 등장해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합
니다. 그런 면에서 허 선생님의 지적이 옳은 것이죠. 어떤 면에서
1920년대의 역동성이 더 이상 계승되지 못하는 시대의 아쉬움, 그런
면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의 관계성이
라든가 사람들의 인적 메커니즘과 네트워크의 역동성이 소멸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지역 사회에서도 보면 3․1운동을 경험한
1920년대 운동 중심 세대들하고 광주학생운동을 경험한 1930년대 운
동 중심 세대들은 그렇게까지 역동적으로 결합되지는 않습니다. 해
방이 되었을 때 지역사회에서 1920년대 운동 세대들은 복귀하는 경
우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1920년대 운동 세대들은 희
생된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익으로 가버리는 경우들도
있고요 아니면 정치에서 그냥 손 떼어 버리는 사람들도 꽤 많이 생깁
니다. 이런 것들이 인적 네트워크나 맥락의 측면에서도 단절의 모습
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이기훈 선생님이 답변을 길게 하시는 걸 보니까 어려운 모양입니
다. (웃음) 허 선생님, 추가로 더 보충하실 것 있으신가요.
허병식 맥락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아까 앞서 나왔던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 담론의 양적인 차이나 집중도에 대해서 말씀
을 하실 때 제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청년 담론이 교양하
고 관련이 된다면, 교양의 문제라든가 교양 소설의 문제와 관련해서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69


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문학에서 교양의 형성의
과정에 나타나는 교양 소설에 대해 살펴봤는데 그 내용은 민족주의
문학자들 계열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주의나 경향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교양을 형성한다라는 문제가 절실한 문제가
아니다라는 거죠. 어떤 방식으로 자기를 주체화할 것인가라는 문제
가 이미 결정나 있는 사람들, 이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주체가 되느냐가 아니라 어떤 운동을 할 것이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맥락에서 보면, 어떻게 본다면 청년의 문제도 어느 정도 관련이
되어 있지 않을까라는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습니다.
사회자 무식한 질문이지만 교양 소설의 대표적인 것들이 어떤 게 있을까요.
허병식 엄밀하게 말해서 ‘교양 소설’이라고, ‘Bildungsroman’이라고 하는 독
일의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을 한국에 적용시켜서 ‘이것이 교양 소설
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한국에서는) 제가 처음 그런 작업을 했
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이광수의 뺷무정뺸같은 게 대표적인 교양 소설
이고, 아까 말씀하신 1920년대 뺷만세전뺸같은 작품은 아주 활력 있는
교양 소설이라 이렇게 볼 수가 있고. 사실은 1930년대에 가서 좀 더
세련된, 세련되었다고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어쨌든 본격적인 의미
의 교양 소설에 부합하는 뺷삼대뺸라든가 이태준의 뺷사상의 월야뺸라든
가 그러한 이런 소설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270 제33호
‘반공청년’의 탄생, 증오와 적대의 재구성

사회자 네, 알겠습니다. 질문이 한 두 개 더 남았지만, 조금 방향을 돌려서


청중들에게 질의할 시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청중(김영명) 연세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김영명이라고 합니다.

선생님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궁금함 중의 하나는 결국 1930년 전시


체제기를 거치고 1940년대가 되면서 사실은 청년 담론이라고 하는
게, 그 이전에는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 정도에서 어떤 일정
한 ‘계급성’과 ‘세대’라는 두 개념들이 같이 가다가 결국 1941년에 조
선청년단을 결성을 하고 본격적으로 총독부에 의해서 청년 담론이
주도되기 시작하면서 ‘계급성’이라고 하는 것이 상실되고 전(全) 인민
으로 청년 담론이라는 것이 확대가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요. 이
것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조금 듣고 싶다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기본적으로 해방 이후의 청년이 우익
청년단에 의해서 굉장히 청년 담론이 많이 주도가 되는 양상을 선생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보이는데. 그때 굉장히 재미있는 현상 중의 하
나는 그 이전에 ‘청년’이라는 주체로 자기를 형상화하지 못했던 집단
들, 대표적으로 보면 대한민청의 경우 깡패들이 ‘청년’이라는 이름을
걸고 자신을 조직을 하는 경우도 있게 되고. 그런 것들이 어떻게 해서
가능했던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는 총독부에 의해서 ‘청년’이라고 하
는 것이 전(全) 세대적인 것으로 확대가 되면서 청년들이 자신들, 기
존에는 청년으로 호명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자신을 청년이라는 주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71


체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해방 이후에 그렇게 폭발적으로 ‘우익청
년운동’이라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았나는 생각이 읽으면서는 좀 들
어서.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에 대한 의견이
궁금합니다.
사회자 제가 다시 정리하면, 해방 후 우익청년단이 급속히 확대되고 힘을
가지게 되는데. 과거에 청년으로 제대로 호명되지 못했던 집단들의
역사적 경험 자체는 일제 말기의 청년단 조직, 관제(官製) 청년단 거기
에 연루되어 있는 게 아닌가하는 의문이죠.
이기훈 저는 사실은 처음에는 확실히 그렇다, 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과연 그런지는 쉽게 단언할 수 없는 측면들이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해방 이후에 우익청년들이 실체로서 국가 권력이 없는 상태에서 국
가를 표상하는 거거든요. 1945년에 등장하는 우익 청년단체의 표어
는 정말 되게 웃깁니다. 애국을 목이 터져라 이야기하는데. 사실 실
체로서 국가는 없거든요. 실체로서의 국가가 없기 때문에 임시정부
를 국가화하는 그런 논리적인 술책을 쓰기도 하죠. 그런데 이게 식민
지 말기의 황민화 경험과 직결될 수 있는 것인지는 그렇게 자신할 수
없네요. 황민화 시기에는 일원화된 충성의 논리 체계와 청년들이 황
민 전체를 대표하는 자로서 대표성을 부여받은 것인데 비해, 해방 후
에 등장하는 우익청년단의 논리는 증오와 적대감에 의한 재구성이
죠. 쉽게 생각하면 연결시킬 수도 있는데, 차이가 좀 있지요. 그러니
까 전체주의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대한청년단 쪽으로 가면 실체로
서의 국가권력이 존재하니까 그것을 매개로 해서 그런 연결은 가능
할 겁니다. 그런데 해방 직후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른바 반공청년

272 제33호
단들이 이런 식의 경험들이 투영된 것일까, 라는 측면에 대해서는 단
언하기는 어렵습니다.

‘낭만적 개인성’의 이중성과 모순

사회자 그런 걸 많이 상상했을 것이라고 저도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했는


데요. 우익청년단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경험들을 가지고 왔을까 하
는 게 여전히 의문이 되겠죠. 답을 지금 바로 안 하셔도 되고요. 생각
하실 동안 제가 보류해 뒀던 질문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원래 허 선생
님이 하셨던 건데 ‘비정치의 정치성’ 부분에서 ‘낭만적 개인성’을 조금
더 강조를 하셨는데 저자는 이 부분을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이기훈 낭만적 개인성. 즉, 개성이나 개인이라는 측면일 겁니다. 출발은
1910년대 뺷학지광뺸에서 출발을 하는데 1920년대 놀라울 정도로 확산
되어 가는 면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독자투고’ 같은 데 보면
‘개성의 시대’라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이게 함정이 있죠. 개성의 시
대고, 개인주의의 시대라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모든 건 다 공개해야
됩니다. 개성이 중요하다면서 또 굉장히 공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라
는 이야기를 같이 합니다. 개성의 시대고, 그래서 이혼(離婚) 가능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도, 연애를 하다가 여자가 남자를 버리고 갔다 그
러면 실명 공개하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실상 개성이란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73


발상 자체가 없는 거죠, 아예. 개성이라는 이야기는 하는데 실제로 개
성에 대한 자각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될지. 개인성이나 개성이라는 이 단어들을 소비하는 소비자들, 그러
니까 정작 청년들에게 얼마나 울림이 있었을까 하는 문제는 고민입
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굉장히
강하고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게 뭐야’ 할 정도로 위축되는 거죠. 의미
가 없어져 버립니다. 이것들이 아마 이 시기가 갖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고 또 위험성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개성이라는 측면들을, 개인성,
낭만성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는 절대 건드리면 안 돼’라고 하는 겁
니다. 그런데 이게 진짜 어떤 의미일까. 나는 건드리면 안 되는데 남
은 건드려도 되요. 남을 막 건드려도 되는 건 그건 공익(公益)이기 때
문입니다. 그 논리적 근거로 ‘공(公)’을 갖고 들어오거든요, 제 눈에 보
기에는 공익이 아닌데, 공익이라고 그러는 거지요. 많은 경우에 개성
강조하는 건 자유연애를 주장하는 건데, 이중성이 있는 거죠. 이런 이
중성들이 개성․인격․수양․교양 이런 단어들로 청년을 주체화할
때 실제 어떻게 나타날까 하는 점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사회자 허 선생님, 아까 제가 다시 비정치의 정치성에서 마지막 부분이 그
부분인데. 낭만적 인격성이 강화된다는 것은 비정치적인 부분을 강
화시켜 나감으로 인해서 정치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이런 맥락에서
쓰신 건가요?
허병식 그런 맥락으로 궁극적으로 가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떤, 선생님께
서 모순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어떤 공적인 영역에 합류되지 않는 낭만
적 주체성을 자각함으로써만 우리가 근대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자기

274 제33호
를 혁명하라 뭐 이런 식의 논의들이 나왔던 것 자체가 그런 일을 실행
하는 사람이 청년이라는 것으로도 이어질 수 있지 않겠느냐. 굳이 청
년 담론에 합류를 시킨다면 1920년대, 혹은 1910년대 뺷학지광뺸 세대들
은 그런 자아의 각성을 청년 됨의 조건으로 생각하지 않았는가라고 본
다면 그런 지점들, 그러니까 극도로 비정치적인 어떤 지점들이 어떤 방
식으로 청년 담론 속에서 드러났는가에 대해서 좀 더 그 부분을 더 분
명하게 말씀을 하시고 나서 그것이 결국 어떤 방식으로 이를테면 공적
인 영역이라든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공로라든가 사명이
라든가, 이런 것으로 이어졌는가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저도 사실은 그게 되게 모순적이라는 것을 느
끼고 있는 상태에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의문을 던져 봤던 맥락입니다.
사회자 개정판을 내야되는데. (웃음)
허병식 아까 말씀하신 부분에 다 나오는 것 같습니다.

‘청년’이라는 호명과 자의식의 불일치

사회자 오늘 토론이 만족스러우신 모양이죠? 질문들이 별로 없으신 것 보


니까. (웃음)
청중(이상록) 질문이라기보다는 연구 방법론과 관련해서 말씀을 좀 드리고 싶

습니다. 토론자 선생님들도 개념사 관련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75


전반적으로 토론을 들어보니까 ‘청년’이라는 주제 자체가 개념사에
적합한가. 그것이 일상개념이든 아니면 다른 개념이든 그런 부분에
서 저도 좀 의심이 드는데요. 많은 선생님들이 지적하신 것처럼, 사실
청년 담론이 각 시대에 따라서 굉장히 다른 여러 가지 변곡점들이 있
었고 담론 지형 속에서 다른 의미들을 발휘해 왔지만. 전반적으로 ‘청
년’이라는 호명의 용례는 계몽의 언어, 그리고 동원의 언어였고, 지배
든 저항이든 권력과 굉장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맥락 속에서 주체를
구성하려는 자의 호명과 관련된 것 같습니다. 선생님 책의 부제를 봤
을 때 알튀세(Louis Althusser)가 제일 먼저 생각이 났는데요. 굉장히 이
데올로기적인 호명의 언어로서 ‘청년’을 다루는 것이 청년 연구의 기
초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런 면에서 굉장히 중요한 책이라는 생
각이 듭니다. 전시체제기의 문제라든지 또 해방 직후 청년 문제와 관
련해서도 제기되었듯이, 실제 용례들이 사용되는 빈도라든지 방식과
실제 과연 현실에서 청년들이 느끼고 경험했던 것들, 자기 주체성을
구성하려고 하는 방식들과 어긋나는 지점들이 확인되는 것 같아요.
제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봐서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 스스로, 제가
청년으로 호명되었던 것과 저의 주체성 사이에는 물론 깊은 상관성
이 있기도 했지만 분명히 다른 차이가 존재했거든요. 저는 1990년대
에 대학생활을 했는데. 그때 저를 호명하는 방식은 한편에서는 ‘소비
주체다’라는 의미의 ‘X세대’라는 식으로 규정을 했는데 당시 저희들
은 그런 규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웃음) 그런데 또 문화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또 그걸 받아쳐서 뺷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뺸(현실문화연
구, 1993) 그런 책도 내고, 세대 투쟁과 문화운동을 결합시키기도 했었

276 제33호
죠. 그렇지만 제가 학교에서 제일 많이 들었던 건 ‘청년학도들이 나서
야 된다’라는 저항의 호명이었어요. 그렇지만 저의 주체성은 ‘백만청
년 학도’라는 호명으로도 환원될 수 없었죠. 저의 청년 시대의 경험은
그랬던 것 같거든요. 대부분의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이와 비슷한 각
각의 경험들을 가지고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어로서 자기 자신을, ‘청년’이라는 언어로 규정하지 않았지만 제가
제일 최근에 가장 인상 깊게 본 청년적인 자의식은 문학평론가인 김현
이 1988년에 책을 내면서 “내 육체적 나이는 늙었지만, 내 정신의 나이
는 언제나 1960년의 18세에 멈춰있다”고 쓴 글이었어요. 18세는 4․19
때이죠. ‘4․19청년 세대의 자의식을 갖고 살겠다’라는 주체의식을 표
명한 글이에요. 1980년대의 혁명적인 상황 속에서도 4․19세대의 자의
식을 가지고 가는 그런 부분들을 생각해 봐도 그렇고. 결국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호명하는가도 중요하지만은 어떤 경험 속에서 자기 주체
성을 구성하는가라는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려
면 연구 방법론이 개념사적인 접근도 분명히 필요하지만 실제로는 문
화연구로 가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선생님이 아까 청년문화, 책에서도
다루고 계시고 1970년대 청년문화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또 하시
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세대가 자기 문화를 자신의 경험에 기반을 두어
표현하는 방식․스타일, 그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고요. 역사가
들은 사료로서 말을 하니까 그러한 현상을 비난하거나 거리두기 하는
방식으로서 사료들은 대부분 남아 있지만, 그걸 좀 뒤집어 읽어서 실제
문화적 행위들을 통해서 세대의 특징, 그것의 시대성 이런 것들을 독해
하는 작업이 좀 더 된다면 개념사 연구의 난점․한계 이런 것들을 좀 풀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77


수 있는 그런 지점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회자 꼭 길게 답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기훈 네, 고맙습니다. (웃음) 개념사적인 방법론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책의 처음 부분, 도입과 정착 부분 정도고요. 좀 지나면 데이터가 너
무 많아져가지고 그런 식의 쪼개기가 굉장히 힘들어지기 시작합니
다. 너무 많이 튀어나오니까요. 말씀하신 것 같은, 한국의 개념사 연
구가 꼭 코젤렉처럼 하라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웃음) 굉장히 중요
한 전범(典範)이긴 한데 라틴어적 어원을 갖고 있는 말․개념들과 번
역된 말이며, 또 번역된 말이지만 한자의 조합을 사용함으로써 갖고
있는 독특한 뉘앙스들이 많이 있는 한국이 개념어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선생님이 많이 지적하셨던 것과 같이. 말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한국적 상황에 맞추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
지 않을까 생각하고, 그런 면에서 이상록 선생님 말씀은 굉장히 중요
한 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의 시대’, 그 이후……

사회자 한국 근대사․현대사 연구가 많이 진전된 것 같지만 사실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거든요. 모든 주제를 연구할 때마다 새로운 연구 방법론
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죠. 완성될 수도 없고 시행착오를

278 제33호
거치게 되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지적을 하고 같이 고민을 하면서
무엇이 미흡한가, 그렇게 질문해야만 새로운 연구 방법․연구 고민이
나올 것 같습니다. 이 과제는 저자의 몫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자리에
모여서 공부하는 우리 모두의 몫이기도 하죠. 그런 면에서 상당히 의
미가 있었던 자리라는 생각을 하고요. 정리하면서 저자에게 마지막
말씀을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책에도 나와 있지만 20세기는 청년의
시대라고 했었는데 21세기는 무슨 시대인가. 우리가 지금은 청년이라
는 말 자체보다도 20대․30대․40대 같은 세대, 연령별로 구분하기 시
작하는데. 그렇다면 이제 청년이라는 역동성, ‘청년’이란 개념의 수명
은 이제 끝난 것인가. 오제연 선생님이 토론문의 마지막에 말했던 것
처럼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 버린 사람들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역사라는 것
이 과거의 모습을 보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가장 많이 고민하셨을
이기훈 선생님께서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이기훈 이 질문을 되게 많이 들었던 겁니다. 20세기가 청년의 시대면 그럼
21세기는 뭐냐. 한 세대가 모든 세대를 대표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
다고 생각 하는 거죠. 두 번째는 세대로 인간의 집단들을 나눌 수 없
다는 게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대로 표현해서, 세대로 구분 짓는 그
구분법이 과연 얼마나 지금도 유효하고 타당한 것인가. 별로 그렇지
않다, 라는 것이지요. 청년이 지금 더 비어있는 이유는 그 주체성들을
자기 세대들이 만들어가지만 그게 절대적일 수는 없다, 라는 겁니다.
청년적 세대성, 청년적 특성들이 이전처럼 한 시대를 이끌어갈 것인
가. 어렵죠. 단일한 주체, 동질적 주체가 형성되지 않는 것이고, 그러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279


한 세대를 형성하겠다는 시도 자체가 한 시대 전의 계몽적 논리 속에
서나 가능한 것이지, 오늘 날에서도 그런 시도는 저는 가능하지도 않
거니와 별로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좀 더 희망적인 것은 없나요?
이기훈 그것 자체가, 희망을 바라는 것 자체가 지극히 계몽적인 거죠. (웃음)
사회자 한 방 먹었네요.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고민을 좀 해봤습니다.
저는 뺷학지광뺸 세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요. 1910년대 보
면 사실 암울하잖아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우리가 나중에 발견해
서 뺷학지광뺸을 뽑아낸 거지, 그 시대에는 한 줌도 지나지 않았다는 것
이거든요. 4․19세대도 1950년대에 다 마찬가지였겠죠. 지금 저도 그
렇고, 강의하면서 20대를 보면서 갑갑할 때도 많고 미안할 때도 많은
데 사실은 어떤 주체가 형성되고 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방
식으로. 그리고 어떤 상황이 존재했을 때 그들이 어떤 중심이 될 수 있
겠죠. 너무 그렇게 실망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싶습니다. 다만, 이기훈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의 세대라든지, 균질하지 않은 것을 균
질한 것처럼 모아놓고 비판하는 것들은 좀 지양해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 시간 토론자들이 수고해 주시고 저자가 아
주 성실하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참여해주셔서 의미
있는 저작 비평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문제연구소가 1년에 2
번 정도 저작 비평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나왔던 이야기들을 뺷역사
문제연구뺸에 싣고 논의를 확산시켜 나가고 있는데요. 다음에는 새로
운 저작을 찾아서 진행하겠습니다. 다음에도 빠짐없이 많이 찾아주시
면 고맙겠습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끝)

280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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