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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이기훈, 『청년아 청년아 우리 청년아』 (돌베개
20세기 한국에서 '청년'은 무엇이었나 이기훈, 『청년아 청년아 우리 청년아』 (돌베개
“청년이라는 말은 비어있다”
220 제33호
면 다른 표현을 써봐야겠다고 고민하고 있던 차에 한림대에서 진행하
는 ‘일상 개념 총서’의 일부로 제안을 받았습니다. ‘일상 개념 총서’는
지금 두 권 나왔지요. 첫째가 병(病)이고 두 번째가 청년인데, 다음이
연애, 이런 일련의 제목들입니다. 저는 제안을 받았을 때 ‘일상 개념’이
정의된 범주인 줄 알았는데요. 사실은 한림대 측에서도 그다지 그렇
게 똑 부러진 정의 없이, 그냥 ‘개념사 총서’가 있으니 ‘일상 개념 총서’
도 만들자는 수준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일상 개념’이라는 말 자체가
조금은 모순적입니다. ‘일상 개념’이 있으면 그건 ‘비일상 개념’도 있어
야 한다는 뜻인데. 모든 개념은 일상적이지요. 일상적이지 않은 개념
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개념’이 적절하냐는 문제는 저도 고
민했습니다. 일상 개념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사실 저로서도 부
족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개념사의 문제의식은 공유한다고 생각합니
다. 개념과 실체와, 또는 개념과 개념 사이의 균열과 불일치 그리고 또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관계라는 측면에서는 개념사의 문제의
식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청년이라
는 일상개념을 상정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
상 개념사로서의 청년이 책으로 나오게 된 것이지요. ‘개념으로서의
청년’을 제가 처음 시작하기 전 제 공부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동화’,
‘어린이’ 등이었습니다. 장신 선생님이랑 같이 공부한 ‘독서의 사회사’
반에서 제가 동화를 맡았는데, 그 전부터 제가 교육에 대해 관심이 있
었으니 어린이도 그런 주제로부터 크게 많이 벗어난 건 아닙니다. 어
린이나 동화를 보면서 제가 느꼈던 것은 이거였습니다. ‘어린이’라는
실체가 등장하고, 그걸 표현하기 위해서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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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연한은 계속 뒤로 물려나가고 있습니다. 한 10년 전까지는 환갑까
지 청년회에 계셨는데 요즘은 칠순도 그냥 청년회에 그냥 계십니다.
청년회가 없어질 지경이기 때문에.
의미는 사회적으로 주어지고 그걸 만들어, 고착시켜놓고 있는 거
죠. 거기에서 무엇인가하기를 요구하고 또 그걸 요구받는 겁니다. 제
가 얼마 전에 저희 학교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기자가 저에
게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청년이라는 말은 비어 있다. 여러분들이 분명히 청년이지만 어떤 청
년이 될 것인가는 지금 기존에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빈 곳을
여러분들이 만들어가는 것이고 유동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계속 비어있는 이 말들을. 사실 그러다 보니까
공부를 하면서 고민 중의 하나가 자꾸 움직이니까 저도 스스로도 기
준이 없는 거지요. 제 스스로도 너무 혼란스러웠던……. 지금도 좀,
그 사이를 스스로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모든 역사학적 연구가 그렇
습니다만은. 화자가 내가 읽고 있는 자료로 하고 있는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면 그 속에 매몰되어 버리고요, 제 경우처럼 저는 계속 벗어나
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몰입할 수가 없다라는 것도 사실 어려움 중에
하나였습니다. 동감이, 공감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공감시키면 그
순간 무너져 버리기 때문에, 관점이 무너지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점
중에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러하고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본다면 견강부회도 많고, 또 억지스러운 해석도 좀 많았던 것 같습니
다. 그렇지만 이렇게 끝까지 읽어주신 많은, 아, (웃음) 몇몇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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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도 여러 저작들이 있지요. 그렇지만 역시 1920년대, 일제시대 한
국 근대 사상사 연구 쪽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셨기 때문에 이 부분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고요. 오제연 선생님은 학위
논문이 1960년대 대학문화에 관련된, 대학과 학생운동에 관련된 부분
입니다. 그래서 해방 이후의 청년에 대해서 사실 관계 부분부터 내용
적인 부분까지 검토를 요청드렸습니다. 허병식 선생님은 문학 전공자
이시죠. 한국 근대소설을 전공하시면서 교양의 문제를 학위논문으로
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20년대 나오는 ‘문화’라든지, ‘교양’이란 부분
에 대해서 면밀하게 지적을 해주실 것으로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토
론 순서는 박찬승 선생님부터 먼저 하시고 그 다음에 오제연 선생님,
허병식 선생님 순서로 하겠습니다. 박 선생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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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책에서는 각 시대별로 ‘청년’이 어떻게 호명되고, 또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몇 부분에서는 꼭 다루
었어야 할 내용이 누락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첫째, 1920년대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청년조
직의 역할, 즉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역할이 반드시
다루어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는 1928년 12월테제 이
후 사회주의 계열에서 계급이 전면적으로 등장하고 청년의 위상이
약화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1929년 광주에서 학생봉
기가 있었을 때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에는 광주청년회-조
선청년총동맹-전국의 청년회로 연결되는 라인이 큰 역할을 했습니
다. 그런 점에서 청년회는 1920년대 말까지는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
었다는 점을 서술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1920년대 학생운동
조직의 배후에는 이를 지도하던 각 지방의 청년회들이 있었고, 당시
조선공산당이 고려공산청년회를 따로 만들었던 것도 청년조직의 학
생조직 지도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둘째, 이 책에서는 해방 직후 좌우익 청년조직의 움직임을 주로 우
익 청년단체들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좌익청년 조직,
즉 민청이나 민애청에 대한 서술이 소략하거나 누락되었습니다. 우익
쪽의 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등에 대한 정
리는 매우 탁월하게 잘 되었다고 보이지만, 이에 상대되는 좌익쪽의
민청과 민애청에 대한 서술이 소략하거나 아예 누락되었기 때문에 당
시 좌우익 청년의 전체적인 상을 충분히 그리지 못했다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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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총독부의 관리가 되는 것이었다고 하지요. 물론 유학생 가운데
일부는 학우회를 조직하여 결국 2․8독립선언을 이끌어냈지만, 이들
이 유학생의 다수는 아니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에 경성제국대학이
들어선 이후 조선의 우수한 청년들은 이 대학을 졸업하여 역시 총독부
의 관리가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속류적 입신출
세의 지향이 1930년대에 들어와 비로소 강해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해졌다는 것인지 밝혀야 할 것입니다.
셋째, 이 책에서는 왜 한국의 근대는 청년을 호명했는가에 대한 설
명이 없어 아쉽습니다. 역사는 왜 소년이나 장년이 아닌 ‘청년’을 호
명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평자의 생각을 정리하면 이렇
습니다. 한말에서 일제시기 노동계급은 아직 미약했고, 농민들은 조
직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청년층은 청년회나 학생단체 등
을 통해 조직화하기 쉬웠고, 또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하기 쉬웠습니
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 학생들은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
생운동 당시에 주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청
년 조직은 여러 사회단체 가운데 가장 막강했지요. 그러나 1950년대
까지 청년단체는 경찰의 보조기관에 머물렀습니다. 그만큼 경찰 세
력이 강했어요. 1950년대에 세력이 커진 학생들은 4․19를 성공시켰
습니다. 1961년 이후에는 경찰 대신 군부가 정치를 좌지우지했지만,
이에 대항하는 학생들의 세력도 점점 커졌습니다. 1987년 6월항쟁까
지는 군부와 학생이 대결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들어 세력이 더욱 커진 학생들은 결국 6월항쟁을 통해 군부가 정치에
서 손을 떼게 만들었습니다. 1960, 70년대의 20대 대학생들은 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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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자를 저희가 섭외를 해야 되는데 현대사 쪽에서 코멘트를 할 사람
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아까 소개 받은 대로 대
학 학생운동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썼기 때문에 어떻게 하다보니까
제가 셀프로 토론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아까 사회자도 말씀해주셨
지만 이기훈 선생님의 연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특히 후학들에게 많
은 모범이 됩니다. 특히 근대와 현대를 넘나들면서 연결하면서 연구
를 한다는 것은, 근대사 현대사를 서로 구분해서 완전히 다른 영역인
것처럼 분리해 연구하는 현재의 풍토 속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
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오늘 이 자리
에 역사문제연구소 관련 연구자들이 몇 분 오셨는데 한결같이 다 근
대사 전공자들만 오셨고 현대사 전공자들은 저작비평회 관계자 외에
는 안 오셨습니다. 이런 모습이 현실을 잘 보여주는 거죠. 그렇습니
다. 실제로 근대사 연구 관련 발표를 하면은 현대사 전공자들은 안가
고, 현대사 발표를 하면 근대사 전공자들이 안 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굉장히 기형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한국의 근현대가 합해서
100년 정도 밖에 안 되고 이것이 그렇게 분절될 수 있는 시기가 아님
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료적인 문제들을 하나의 변명거리로 삼아
가지고 서로 단절해서 연구하는 풍토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
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특히 이 연구는 근현대 100년을 아우르려고
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시도였고, 또 굉장히 좋은 결과를 냈
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나름대로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들
을 토론문으로 정리해 왔습니다. 양이 좀 많아 보이는 데요, 사실은
책 본문에서 직접 인용을 많이 해서 그렇지. 실제 내용은 다른 분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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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무지 / 미완성’으로서의 청년은 아직은 여러모로 부족하기 때문
에 미래의 자신, 혹은 가문, 사회, 국가 / 민족 등을 위해 더욱 정진하
고 노력해야 하는 존재이며, ‘순수’로서의 청년은 아직 기성세대의 때
가 묻지 않았기에 진실되고 정의로우며 용기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
습니다. 다음으로 ‘청색’의 이미지는 정신적․육체적 힘과 에너지의
담지자로서 ① ‘지도자 / 선각자’, ② ‘일꾼’의 청년 개념을 창출합니
다. ‘지도자’로서의 청년은 근대화를 위한 계몽의 주체이자 시대의 대
변자이며, ‘일꾼’으로서의 청년은 혈기왕성한 노동력 혹은 사회운동
의 물리력으로 실천 / 행동에 앞장서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
지 청년 개념은 역사적 맥락과 개념 규정의 주체에 따라 강조점이 달
라지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조합 혹은 경합하면서 각 시기별 특징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러한 일반화를 통해 ‘청년’ 개념이 역사 속에서 발
현되는 일정한 패턴을 파악하고 각 시대별 특징을 상호 비교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이 책을 읽고 발표자가 갖게 된 생각을 거
칠게 정리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청년’ 개념에 대
해 깊이 천착한 저자에게 이러한 일반화의 가능성 혹은 그 실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다음으로 이 책에 나온 분석이나 설명이 미진하여 저자에게 좀 더
보충 설명을 들었으면 하는 부분을 몇 가지 언급하자고 합니다.
첫째, 이 책에서는 각 시대별로 청년 개념의 지배적인 경향이 잘 정
리된 반면, 이러한 지배적인 경향들이 갖고 있는 ‘동요’와 ‘균열’ 지점
은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책도 이러한 ‘동요’와 ‘균열’
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청년 담론의 ‘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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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청년들의 ‘일상’과 관련해서는 1920년대 ‘여성’
의 문제와 1970년대 ‘문화’의 문제가 언급되었을 뿐입니다. 특히 ‘청년
단’을 중심으로 서술된 전시체제기나 해방 직후 청년들의 모습은, 그
것이 다른 시대의 청년들과 비교했을 때 도드라지는 모습일 수는 있
지만, 이를 당시 다수 청년들의 일상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
입니다. 물론 ‘일상 개념’의 역사와 ‘일상’의 역사는 다를 수 있고, ‘일
상 개념’을 다루는 이 책에서 당시 청년들의 ‘일상’ 전부를 설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상 개념’이 ‘일상’ 자체
를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남습니다.
셋째, 이 책의 4부인 해방 이후 부분은 1∼3부와 비교했을 때 내용
적으로 소략할 뿐만 아니라, 사실 관계 차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내용이 종종 눈에 띱니다. 특히 이 책에서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 4월
혁명 이후 1960년대까지는 ‘청년학도’ 혹은 ‘청년학생’이라는 개념이
많이 쓰인 것처럼 언급하지만, 실제로 4월혁명이나 1960년대 학생운
동 관련 글들을 살펴보면 ‘학생’을 ‘청년’으로 규정하여 ‘청년학도’ 혹
은 ‘청년학생’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경우는 이 책에서 언급한 사례 외
에는 찾기가 힘듭니다. 당시 ‘청년학생’이라는 말은 식민지기를 회상
하는 글이나, 이미 조직되어 있는 반공단체명에서 자주 언급되었고,
그 외에는 대부분 ‘청년’과 ‘학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가끔
학생을 ‘젊은’이라는 수식어로 지칭하기도 했지만 이는 대부분 당시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세대’ 담론 속에서 ‘기성’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학생에 대한 압도적인 호명은 ‘학도’, ‘학우’
혹은 ‘지성’이었습니다. ‘청년’ 개념 대신 ‘학생’ 개념이 부각된 것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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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적 혐오주의가 오늘날 청년층 내부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청년들과 비교될 만한 과거 청년들의 모습
들을, 지난 100년간의 청년 개념의 변천을 설명한 이 책 곳곳에서 얼마
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시체제기 청년들에게 주입된 파시
시트 독재자에 대한 ‘감상적 지도자론’, ‘속류 영웅주의’ 그리고 ‘남성중
심적 입신출세 의식’ 등은 오늘날 ‘일베’의 모습과 그대로 오버랩 됩니
다. 따라서 앞으로 ‘청년’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앞서 언급한 학문적인
문제제기에 대한 답을 찾는 것과 더불어, 오늘날 청년들을 이해하는
역사적 길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아직도 잠재
되어 있을지 모르는 청년들의 힘을 어떻게 다시 깨워 역사에 유의미한
방향으로 결집할 수 있을지 시사점을 제공해야 합니다. 이 책이 던져
주는 가장 강렬한 고민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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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투쟁, 그가 상징투쟁이라고 말한 투쟁의 장으로 봅니다. 이러한
투쟁 속에서 작품의 물질적 생산과 소비뿐만 아니라 문학예술의 가
치와 신념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도 사회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
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청년이라는 근대적 개념에 대한 구분짓기
와 상징투쟁의 과정이 작동하는 방식을 근대초기부터 해방 이후에
이르는 한국 근현대사의 시기를 대상으로 추적하고 있는 것이 이 책
의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 상징투쟁의
과정에 대해서, 그리고 상징투쟁 속에 포함되지 않는 자율성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조선인 부르주아 계급은 문화정치의 공간 속에서
적극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고, 이것이 1920년대 전
반기의 문화운동이었다”(104쪽)라고 말하면서, 1900년대의 애국계몽
운동과 구분되는 1920년대의 문화운동이 부르주아의 주도권을 강화
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는 저도 충분
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문학에 한정해서 보자면, 이광수와 염상섭을
포함한 문화운동의 세대가 그 운동과 청년을 통해 부르주아의 민족
적 사명을 강화하려고 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선생님도 면밀하게 검토하신 조선인유학생들의 학회지였던
뺷학지광뺸의 담론은 이러한 시도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이 유교적 자기규정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주체인 ‘청년’
으로 스스로를 정립해 가는 과정은 자기를 인식하고 개성을 자각하
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상정한 근대적 주
체의 이념은 정적인 영역의 만족을 추구하고 감각의 혁명을 이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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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단락에서 1920년대 조
선의 수양론을 일본의 것과 구분하면서 그것이 교양 개념과 분리되
지 않았던 상태였고, 그만큼 합리적인 경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교양이나 수양론이 합리
적인 것으로만 머물러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1920년대 조선의 교양주의의 맥락은 개인 수양
과 인격의 함양이라는 본래의 자리를 지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러나 그것은 또한 교양의 어원에 대한 검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언제
나 정치적인 것이며 국가주의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기도
합니다. 레이먼드 윌리엄즈는 교양의 어원을 검토한 바 있습니다. “교
양(culture)의 원형은 라틴어 cultura(경작)으로 그 어원은 라틴어의 col-
ore에서 왔다. colore의 의미는 산다, 밭갈다, 지킨다. 존경하여 우러르
다 등으로 넓다. 이러한 의미의 몇 가지는 최종적으로 분화되어 파생
명사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산다라는 의미는 라틴어의 colonus(경작
민)을 거쳐서 영어의 colony에로 발전했다”(레이먼드 윌리엄즈, Key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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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개념의 비일상성과 개념 연구의 난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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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에 가깝죠. 나이로 따지면 ‘노년’과 ‘소년’으로 구별을 하구요. 세
대로 따지면 ‘부로(父老)’와 ‘자제’로 구별이 됩니다.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용어에서 ‘젊다’와 같은 말들이 어떤 식으로 고정이 되어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로서도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는 끝까지
고민했는데 못 푼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이 ‘청년’을 일상 개념으로
파악하는 접근에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
같은데, 실제 생활 속에서는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죠.
‘청년’으로 뺷동아일보뺸 같은 걸 검색을 하시면 몇 만 건이 나와 버립
니다. 근데 일기 자료들, 아까 (말씀하신) 분열, 수용자 내부의 분열이
나 균열의 가능성들 그걸 제가 사실 찾아보려고 일기 자료들을 많이
뒤졌거든요. 근데 생각해 보시면, 일기 쓸 때 ‘청년’이란 말 쓸까요?
(웃음) 단 1건도 확인을 못했습니다. 일기 자료에는 ‘젊은이’ 이런 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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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해도 ‘반공청년단’ 등에 1950년대 청년 이미지가 남아 있어서 그
말을 잘 안 씁니다. 그냥 ‘학도’ ‘젊은 사람’ ‘젊은이’ 이렇게 표현할 뿐
이죠. 그런데 ‘청년’의 개념사를 서술해야 하니 남아 있는 거라도 주
워 와야 하게 된 거죠. 일단 개념을 구성하고 설명을 하다보니까 여기
에서 서술상의 왜곡이 좀 생겼던 것 같습니다. 해방 직후부터 1950년
대까지의 청년의 폭력이 큰 단절을 만들어 줍니다. 다시 복권 되는 게
1970년대입니다. ‘민청학련’ 같은 경우도 있었지만 ‘청년문화’라고 하
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하면서 복권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
이지요. 그런 면에서 사실 제가 1970년대로 책을 마무리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청년문화’라는 게 청년이 다시 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민청학련의 선언문에서도 ‘청년’이 ‘학도’와
긴밀하게 결합해 있지는 않다는 거죠. ‘청년’과 ‘학도’가 긴밀하게 붙
어서 ‘청년학도’를 형성하는 건 1980년대 후반입니다. 극단적으로 말
씀드리면, 이건 NL(민족해방계열)이 본격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
한 용어입니다. 그 전까지는 잘 안 씁니다. ‘청년 학도’는 거의 대부분
의 청년 세대가 대학생이 되면서 가능해진 용어입니다. 이게 1970년
대와 1980년대를 가르는 기준인데, 사실 정리를 제가 못한 거죠. 구상
은 대충 이렇게 있는데. 그걸 명확하게 말씀 못 드린 측면이 있죠.
사회자 잠깐만요. 질문이 많이 좀 확산되어 나갔는데. 개념사로서의 저작
의 의미에 대해 본인의 평가가 좀 필요한 부분인데, 아까 여러 가지
관련어를 설명하면서 해방 후로 넘어갔거든요. 아까 이기훈 선생님
께서 어떤 답변을 하셨냐면, 박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한(下限)
을 왜 1970년대로 끊었냐’ 하는 부분을 지금 ‘민청학련’ 부분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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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겠구나, 라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도식화의 위험은 존재합니다. 일
반화할 경우 좋은 결과 보다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겠다는 두
려움이 좀 있었습니다. 답은 이정도로 하겠습니다.
사회자 이기훈 선생님이 일단 비판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면서 현실적으로
한국에서 코젤렉의 개념사 같은 방법론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좀 회의를 표시한 것 같아요. 박찬승, 오제연 선생님 두 분 일
반화 부분에 대해서 좀 더 더 부연하실 것 있으십니까.
오제연 일반화에 대한 문제제기는 제가 했으니까,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
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면서 들었던 생각을 바탕으로 이
렇게 토론문에서 근현대 청년 개념의 일반화를 거칠게나마 시도했던
겁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던져준 것 자체만으로 이 책이 굉장히 의미
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토론문에서 제시한 일반화의 가능성이
라는 것도 이 책에 있는 내용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거는 동
의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토론문에서 제시한 이런 일반화된 설명이
일반화의 오류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안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있
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연구라고 하는 게 완벽한 논증을 하고, 완벽
한 결과물을 내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이런 문제제기를 먼저 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비판을 하든,
극복을 하든 그 다음 연구에 징검다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저도
이 책에 대한 기대치가 있었기 때문에 결론이 본문 요약이 아니라, 본
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번 새롭게 총체적으로 분석해주는 그런 결
과물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차원에서 말씀을 드린 겁니다. 앞으로
선생님도 계속 이 주제를 공부하실테고, 저도 ‘학생’이라는 주제에 대
해방 직후 좌익 청년운동과 ‘청년’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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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정적 표현들이 많아지고요. 주도권을 도로 찾아오기 위한 시도
나 노력을 많이 하는데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워낙
청년 단체나 조직들이 우익 쪽이 많이 생기고, ‘청년 단체’라는 이름을
가진 것들이 많이 늘어나면서. 우익이 자연스럽게 청년이라는 말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좌익들이 거기에 대한 도전들이 몇 번 나타나
기는 하는데. 뺷청년해방일보뺸를 읽어봐도 그렇게 두드러진 게 잘 안
나옵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저도 그렇게 깊이 있게 분석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좌익이 ‘청년’이란 용어를 잘 안 쓰게 되는 것이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밀리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
습니다. 논설에서도 잘 안 쓰고 대중에게도 별로 잘 안 먹히는 거죠.
좌익이 민해청같은 조직들은 만드는데, 이런 조직의 문건에서도 청
년을 호명하거나 주체화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사회자 그렇다면 이기훈 선생님이 1920년대에 대해 서술하신 부분하고 관
련시켜 보면, 1920년대 후반에 사회주의자들이 노동계급 중심으로
가게 되는데. 그 연장에서 1940년대 해방 이후에도 노동조합 중심으
로 가서 그런 건가요?
이기훈 아니, 딱히 그렇지는 않거든요.
사회자 그건 아니고.
오제연 제가 좀 말씀을 드릴 수 있을까요. 일단은 이러한 난점이 생기는 이
유는 현재의 현대사 연구사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방 후 우익 청년단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진행됐는데, 좌익에서
청년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지 않습니다. 좌익의 경우
특히 ‘민청’이 중요한데. 사실 민청이라는 조직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252 제33호
남한에서 좌익이 수세로 돌아섰을 때의 문건들이거든요. 그거를 보
면, 이게 수세의 시기이기 때문에 주체를 호명할, 적극적으로 호명할
일이 별로 없는 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사건에 대한 이야
기는 되게 많죠, ‘이렇게 부당하다’ ‘우리도 나서야 한다’ 이런 방식으
로 청년을 적극적으로 주체화되는 호명이별로 안 등장하는 게 설명
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54 제33호
사회자 박찬승 선생님의 아까 질문하신 요지를 보면 청년이 1980년대 운동
의 실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부분으로 관심이 가는 것 같거
든요. 처음에 이 ‘청년’이라는 단어가 처음 들어왔을 때 실체는 없는데
번역어로 들어오면서 어쨌든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실체는 있는데 마치 그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식의 엇갈림
이 존재하는 것 같은데. 박 선생님, 질문과 어떻게 이해하셨나요.
박찬승 제 생각은 1950년대까지는 우익 반공청년단의 이미지가 ‘청년’이라
는 말에 강하게 투영되어 있었고, 1960년대 이후에는 지금 말씀하신
재건청년단이라든가, 지금 내 기억으로는 농촌의 경우에는 4H청년
회가 상당히 강했다고 생각이 되고요. 그리고 1970년대, 1960년대와
1970년대 또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어 가고 있었는데 관련된 청년회가
마을마다 만들어졌지요. 어떻게 보면 그것은 1930년대 이후에 총독
부가 청년들을 장악하는 노력을 했던 것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
니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 청년문화론이 등장합니다. 그러
니까 1960년대에 ‘청년’이라는 단어가 신문이나 잡지에 별로 등장하
지 않는다고 해서 청년 담론이 사라졌다라고 보기에는 좀 어렵지 않
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방금 얘기한 재건청년단, 4H청년회, 새마
을청년회와 같은 것들이 각각 하나의 실체로서 있었다는 것이죠. 그
런 점에서 관변 쪽의 자료들을 뒤져보면 오히려 그 쪽에 더 많이 청년
에 대한 담론들이 나올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들고요. 그런데 1970년대
에 들어와서 이를테면 민청학련에 ‘청년’이 들어간다든가, 또 청년문
화론과 같은 것이 나온 것은 ‘관(官)에서 장악하지 못한 청년’이 다시 등
장한다는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1980년대까지 이
256 제33호
중 10% 정도 밖에 안됐던 시점이니까, 학생만 가지고는 젊은 사람들
을 포괄하기가 힘들었던 거죠. 그러니까 ‘청년’과 ‘학생’이라고 하는
것을 어쨌든 같이 섞어서 ‘청년학생’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
던 겁니다. 따라서 ‘청년학생’을 ‘청년’과 ‘학생’이라는 용법으로 봐야
지, ‘학생’을 ‘청년’으로 규정해서 호명하는 것으로 보기는 조금 어렵
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제가 이기훈 선생님하고 의견이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부분인데, 저도 그런 부분은 분명 있다고 생
각합니다. 1970년대의 민청학련이든, 여기서 또 예를 드셨던 1971년
의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이런 조직들이 왜 ‘청년’이란 말을 쓰
느냐. 그건 아까 박찬승 선생님이 말씀하셨고 이 책에도 나오지만, 이
학생운동권들이 대학을 졸업하거든요. 졸업하고 학생의 적(籍)이 없
는 상태에서도 계속 뭔가 운동을 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자기들을 규
정할 수 있는 새로운 호명이 필요한 거죠. 그때 가장 적합한 게 ‘청년’
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들도 ‘청년’과 ‘학생’ 개념을
분리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드는 생각은, 박찬승 선생님
이 방금 말씀하셨지만, 이게 모순적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학생들은
끊임없이 스스로 ‘나는 대학 안 다니는, 학교 안다니는 저 애들과 나
이는 같지만 달라’라고 하는 그런 엘리트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지만
그러나 문화적으로 보면 사실 살아가는 모습들은 비슷하거든요. 그
러니까 1970년대에 청년문화 논쟁이 발생하는 겁니다. 뭔가 새로운
문화 조류가 들어와서 많은 젊은 사람들이 거기에 따라갔는데, 그건
학생들도 마찬가지였거든요. 그런데 엘리트의식이 강한 학생들 입장
에서는 ‘우리가 저 소위 말해서 학교 안다니는 애들하고 똑같이 노는
258 제33호
이라든지 아니면 ‘제국에 헌신하는 청년’. 이러한 부분들이 존재하는
데 허 선생님 말씀하신 것처럼 ‘제국주의 파시즘에, 일제에 흡수되지
않았던 청년담론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부분들. 그리고 오제연 선생
님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뺷식민지 불온열전뺸(정병욱, 역사비평사, 2013)
에 나오는 그 불온한 청년들은 어디에 위치 매김, 자리 매김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균열하고 있는 지점들
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데 이들을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이기훈 이걸 제가 해결하는 방식을 되게 고민을 했습니다 사실은. 이건 근
대사 연구자들이 항상 봉착하는 문제입니다. 1937년 이후가 되면 목
소리가 사라지는데 이걸 어디 가서 확인할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그
래서 유언비어도 좀 뒤져보고, 그 다음에 일기 자료도 뒤져 봅니다.
그런데 일기는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청년이라는 말이 잘 안 나옵
니다. 더군다나 강상규의 일기같은, 뺷식민지 불온열전뺸(의 ‘경성 유학생
강상규, 독립을 열망하다’ 참고)의 이중성은 극히 드문 케이스라고 단언할
260 제33호
재판기록들에 보면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당시 청년층의 의식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조금은 있죠. 그러니까 거기에 ‘청년’이란 단
어는 안 나온다고 해도 나이가 청년층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어떤 의
식을 갖고 있었는지 이런 식으로 간접적으로 그것을 거론해주는 방
법 밖에는 없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사회자 저도 고민해 보니까 이기훈 선생이 말했던 것처럼 1945년 이후에
나타났던 폭발적인 양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실 ‘균열’이나
어떤 ‘틈’이 있었어야만 그것이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은폐되어 있는
거죠. 마치 우리가 1910년대 뺷학지광뺸이라는 존재가 있기는 하지만
뺷학지광뺸도 3․1운동이 없었으면 사실 이후에 주체로 나올 수 있는
형편이 안 찾아지잖아요. 그러니까 이후의 과정을 보고 앞으로 찾아
들어가는 것인데. 지금도 아마 1945년 이후의, 그 앞의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과정들을 아직 못 찾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까 박 선생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유언비어라든지, 사실 ‘청년’이라는 말을 하지
는 않지만 이 시기의 청년이나 학생들이 여전히 체제에 대한 불만들
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드러내지는 못하고 잡혀서 드러나는 그런
기회가 있을 것인데.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박찬승 한 가지 저도 덧붙여서 말씀드리면. 1930년대 중후반부터 1945년까
지 시점에서 우리가 별로 주목을 안 한 것이 ‘야학(夜學)’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저희 어머니가 저한테 해주신 말씀을 들어보면, 저희 어머니
는 당시 보통학교 문턱에도 못 가보신 분인데 야학에 가서 한글을 배
우셨다고 하더라고요.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에 야학에 가면 당
시 청년들이 한글을 가르쳐 줬다는 거죠. 그런데 나중에 해방 이후,
262 제33호
되고 나서 그것이 통합되었던 뺷국민문학뺸이라는 잡지를 이끌었습니
다. 그 뺷국민문학뺸에 일본어로 여러 좌담회같은 것들이 있고, 요즘에
는 그 좌담회를 포함해서 뺷국민문학뺸에 쓰인 여러 가지 글들 주로 일
문(日文)으로 쓰인 글들에 대한 연구들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요. 거기에서 최재서가 뺷국민문학뺸에 관여했던 문학가들이 일본의
문학가들이나 총독부 관리나 도서관장이나 이런 사람들과 여러 가지
조선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서 여러 논의를 하는데. 그 속에 보면 우
리가 ‘철저하게 황국신민의 길을 가야 된다’라고 주장하고 파시즘에
복무한 것으로 알려져 온 최재서라는 사람은 끊임없이 일본의 문학
자들이나 총독부 관리들의 여러 주장들과 어긋나면서 조선, 식민지
조선의 어떤 길을 따로 확보하려고 하는 그러한 모습들을 보여주는
점들이 있거든요. 물론 그것을 최재서의 특별한 공(功)이 있다거나 이
런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지만. 어쨌거나 파시즘에 복무했던 청
년이나 문학가나 역사학자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무엇을 위해서
이 길을 가는가, 결국에는 그것이 이광수가 이야기했던 대로 ‘민족을
위한 길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일본과는 다른 조선인의
자리나 위치를 끊임없이 확보하고자 했던 측면이 있다’라는 점은 상
상이 아닌 증거로서 제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이 시기에 청년 담론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뚜렷하게 어떤 사
료나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 대목들을 이면에서
좀 읽어볼 수는 있지 않을까, 라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여러분의 토론을 들으면서 저자가 아닌 게 상당히 행복해 집니다.
제가 증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토론 문제를 제기만 하고. (웃음)
264 제33호
아까 오제연 선생이 제안했던 것처럼 더 다양한 방식의, 다양한 단어
들과 의미들을 추적해가고, 유사한 단어들의 의미를 쪼개가는 방식
으로 접근해야 되지 않을까. 오늘은 사실 그런 면에서 채찍질을 당해
서 부담이 이루 말할 수가 없네요. (웃음)
사회자 이기훈 선생님 혼자서 할 일은 아니고, 문제가 제기되었다는 것은
학계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거든요. 이 부분에 대한 해답
내지는 이걸 증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걸 제기하면 사실 커다
란 연구 성과가 될 수 있겠죠. 중복되는 문제들은 좀 정리를 했고요.
이제 속도를 좀 빨리해서 답변을 좀 간결하게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요. 박 선생님이 질문하신 것 중에서 1920년대 후반 청년운동에서 청
년회의 기준이 우측에 맞춰진 것 아닌가, 고려공산청년회라든지 조
선청년총동맹의 역할이 좀 약화되어 서술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
지 않은 것 아닌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기훈 서술하다보니 생긴 문제인데, 1920년대 1930년대를 구별을 하다보
니까 상대적으로 그 영향력에 비해 서술이 축소된 부분이 분명히 존
재합니다.
사회자 예, 알겠습니다. (이기훈 : 그 다음에. 일본과 다른 조선의 청년 담론……)
아, 질문은 제가 할께요. 사회까지 보지 마시고.
이기훈 그냥, 마음이 급해서. (웃음)
사회자 그건 조금 뒤에 부분에 하기로 하고요. 1930년대 입신출세 지향, 청
년의 입신출세 지향을 저자는 1930년대부터 시작된 것처럼 쓰고 있
는데 토론자는 이미 1910년대부터 존재했던 게 아닌가, 그리고 1930
년대에는 그것이 강화된 게 아닌가라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266 제33호
라는 부분들과 같이 연결해서 답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기훈 이건 제가 아이디어는 있는데 감당을 다 못해서 못 쓴 부분입니다.
일본과 조선과 중국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흔히 일본에서는 ‘청년(靑
年)’과 ‘장사(壯士)’를 흔히 많이 비교를 합니다. 일본에서는 엘리트들이
268 제33호
시대입니다. 그런데 1920년대처럼 역동성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이지
요. 훨씬 더 잘 가다듬어져 있고 이론의 수준도 깊음에도 불구하고 그
런 역동성이 보이지 않는 건 그럴 가능성들이 차단되어 있는 새로운
것들, 원론들이 등장해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합
니다. 그런 면에서 허 선생님의 지적이 옳은 것이죠. 어떤 면에서
1920년대의 역동성이 더 이상 계승되지 못하는 시대의 아쉬움, 그런
면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의 관계성이
라든가 사람들의 인적 메커니즘과 네트워크의 역동성이 소멸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지역 사회에서도 보면 3․1운동을 경험한
1920년대 운동 중심 세대들하고 광주학생운동을 경험한 1930년대 운
동 중심 세대들은 그렇게까지 역동적으로 결합되지는 않습니다. 해
방이 되었을 때 지역사회에서 1920년대 운동 세대들은 복귀하는 경
우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1920년대 운동 세대들은 희
생된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익으로 가버리는 경우들도
있고요 아니면 정치에서 그냥 손 떼어 버리는 사람들도 꽤 많이 생깁
니다. 이런 것들이 인적 네트워크나 맥락의 측면에서도 단절의 모습
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이기훈 선생님이 답변을 길게 하시는 걸 보니까 어려운 모양입니
다. (웃음) 허 선생님, 추가로 더 보충하실 것 있으신가요.
허병식 맥락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아까 앞서 나왔던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 담론의 양적인 차이나 집중도에 대해서 말씀
을 하실 때 제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청년 담론이 교양하
고 관련이 된다면, 교양의 문제라든가 교양 소설의 문제와 관련해서
270 제33호
‘반공청년’의 탄생, 증오와 적대의 재구성
272 제33호
단들이 이런 식의 경험들이 투영된 것일까, 라는 측면에 대해서는 단
언하기는 어렵습니다.
274 제33호
를 혁명하라 뭐 이런 식의 논의들이 나왔던 것 자체가 그런 일을 실행
하는 사람이 청년이라는 것으로도 이어질 수 있지 않겠느냐. 굳이 청
년 담론에 합류를 시킨다면 1920년대, 혹은 1910년대 뺷학지광뺸 세대들
은 그런 자아의 각성을 청년 됨의 조건으로 생각하지 않았는가라고 본
다면 그런 지점들, 그러니까 극도로 비정치적인 어떤 지점들이 어떤 방
식으로 청년 담론 속에서 드러났는가에 대해서 좀 더 그 부분을 더 분
명하게 말씀을 하시고 나서 그것이 결국 어떤 방식으로 이를테면 공적
인 영역이라든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공로라든가 사명이
라든가, 이런 것으로 이어졌는가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저도 사실은 그게 되게 모순적이라는 것을 느
끼고 있는 상태에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의문을 던져 봤던 맥락입니다.
사회자 개정판을 내야되는데. (웃음)
허병식 아까 말씀하신 부분에 다 나오는 것 같습니다.
276 제33호
죠. 그렇지만 제가 학교에서 제일 많이 들었던 건 ‘청년학도들이 나서
야 된다’라는 저항의 호명이었어요. 그렇지만 저의 주체성은 ‘백만청
년 학도’라는 호명으로도 환원될 수 없었죠. 저의 청년 시대의 경험은
그랬던 것 같거든요. 대부분의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이와 비슷한 각
각의 경험들을 가지고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어로서 자기 자신을, ‘청년’이라는 언어로 규정하지 않았지만 제가
제일 최근에 가장 인상 깊게 본 청년적인 자의식은 문학평론가인 김현
이 1988년에 책을 내면서 “내 육체적 나이는 늙었지만, 내 정신의 나이
는 언제나 1960년의 18세에 멈춰있다”고 쓴 글이었어요. 18세는 4․19
때이죠. ‘4․19청년 세대의 자의식을 갖고 살겠다’라는 주체의식을 표
명한 글이에요. 1980년대의 혁명적인 상황 속에서도 4․19세대의 자의
식을 가지고 가는 그런 부분들을 생각해 봐도 그렇고. 결국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호명하는가도 중요하지만은 어떤 경험 속에서 자기 주체
성을 구성하는가라는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려
면 연구 방법론이 개념사적인 접근도 분명히 필요하지만 실제로는 문
화연구로 가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선생님이 아까 청년문화, 책에서도
다루고 계시고 1970년대 청년문화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또 하시
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세대가 자기 문화를 자신의 경험에 기반을 두어
표현하는 방식․스타일, 그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고요. 역사가
들은 사료로서 말을 하니까 그러한 현상을 비난하거나 거리두기 하는
방식으로서 사료들은 대부분 남아 있지만, 그걸 좀 뒤집어 읽어서 실제
문화적 행위들을 통해서 세대의 특징, 그것의 시대성 이런 것들을 독해
하는 작업이 좀 더 된다면 개념사 연구의 난점․한계 이런 것들을 좀 풀
278 제33호
거치게 되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지적을 하고 같이 고민을 하면서
무엇이 미흡한가, 그렇게 질문해야만 새로운 연구 방법․연구 고민이
나올 것 같습니다. 이 과제는 저자의 몫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자리에
모여서 공부하는 우리 모두의 몫이기도 하죠. 그런 면에서 상당히 의
미가 있었던 자리라는 생각을 하고요. 정리하면서 저자에게 마지막
말씀을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책에도 나와 있지만 20세기는 청년의
시대라고 했었는데 21세기는 무슨 시대인가. 우리가 지금은 청년이라
는 말 자체보다도 20대․30대․40대 같은 세대, 연령별로 구분하기 시
작하는데. 그렇다면 이제 청년이라는 역동성, ‘청년’이란 개념의 수명
은 이제 끝난 것인가. 오제연 선생님이 토론문의 마지막에 말했던 것
처럼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 버린 사람들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역사라는 것
이 과거의 모습을 보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가장 많이 고민하셨을
이기훈 선생님께서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이기훈 이 질문을 되게 많이 들었던 겁니다. 20세기가 청년의 시대면 그럼
21세기는 뭐냐. 한 세대가 모든 세대를 대표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
다고 생각 하는 거죠. 두 번째는 세대로 인간의 집단들을 나눌 수 없
다는 게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대로 표현해서, 세대로 구분 짓는 그
구분법이 과연 얼마나 지금도 유효하고 타당한 것인가. 별로 그렇지
않다, 라는 것이지요. 청년이 지금 더 비어있는 이유는 그 주체성들을
자기 세대들이 만들어가지만 그게 절대적일 수는 없다, 라는 겁니다.
청년적 세대성, 청년적 특성들이 이전처럼 한 시대를 이끌어갈 것인
가. 어렵죠. 단일한 주체, 동질적 주체가 형성되지 않는 것이고, 그러
280 제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