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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울한 암흑에 휩싸여 있었던 먼 미래

오로지 전쟁만이 있을 뿐이었던 별들 사이

아스라이 비쳐 보이는 작은 공백 속에서

반짝이는 하늘 아래를 걷는 소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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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03. 먼 옛날 우주를 호령한 제국의 행성 분류법을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기꺼이 '파이-람다(φλ)'


클래스를 붙여 주었을 이 작은 행성은 은하 북부 세그멘툼 옵스큐러스의 최외곽을 맴돌고 있는 페럴
월드였다. 한때 같은 분류 내에 속했던 대부분의 행성들이 그러하였듯이, 그리고 현재 이 은하에 속해
있는 행성의 3 할 정도가 그러하듯이, 이 행성 또한 제멋대로 울쑥불쑥 자라난 초록빛의 카르보늄
(Carbonium) 기반 유기생명체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상태였다. 한때 이 행성을 지배하던 오코이드
균류 기반 포자생명체들이 멸절된 후 이 행성의 6 할 가량을 점령한 이 유기생명체의 선조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1 만 8 천년 전 이 행성에 정착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먼 친척뻘 되는 종족이 관상용으로
들여온 약간의 씨앗과 열매, 그리고 그들이 뿌린 일산화이수소(H2O)에서 태어났는데, 그들은 이것을
플랜타에, 즉 식물이라고 부르곤 했다.

"빨리요, 빨리! 일분일초가 급한 일이란 말이에요!"

"나한테 빠르게 같은 주문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꼬마야. 내가 충분히 빠르게 움직이면, 너는 내


그림자조차도 보지 못할 테니까."

수백 수천여 가지의 식물들이 복잡하게 뒤엉킨 삼림 지대의 한 구석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소년이 내는 하이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짐승의 그르렁거림이 섞인 사내의 거친 목소리.

"그래서... 여기가 마지막으로 너의, 그, 레푸스(Lepus)를 본 지점이다 이거냐, 꼬마야?"

울창한 풀숲을 뚫고 나온 얀센 경의 길쭉한 주둥이가 불쾌함을 담아 씰룩거렸다. 이곳의 피톤치드 향은


예민한 후각을 지닌 그에게 이따금 약한 알러지성 반응을 일으키곤 했다. 비록 그 자신이 이 행성에
정착한 지 햇수로 육천여 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행성의 식물들은 그의 인내심을 시험이라도 하는
듯, 매번 질리지도 않고 다채로운 자극을 선사하고 있었다. 어떨 때는 달게, 어떨 때는 알싸하게, 어떨
때는 씁쓸하게. 그는 이 행성에 처음 표류한 날 자신이 앞으로 평생 이 냄새에 익숙해지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설마 그 때 내 입에서 튀어나온 충동적인 외침이 일종의 사이킥-예지
같은 건 아니었겠지?' 같은 의문은 의식의 저편으로 고이 치워둔 채, 그는 크게 입을 벌려 재채기를 했다.
푸엥취! 그의 입김을 타고 무수히 흩날리는 초록빛 잎사귀들 사이에서, 그는 자신이 육천이백년 전
워프에 던져두고 온 헬멧을 그리워했다.
"맞아요. 그 겁쟁이 녀석이 어찌나 재빠르던지 원. 저희 발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더라니까요?"

"하! 고작 그런 이유로 날 여기까지 데려와서 부려먹으려고 하다니, 네 어미가 알면 까무러치고 말


거다!"

소년이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그가 너스레처럼 내뱉은 말이 결코 너스레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얀센 경과 숲으로 놀러나갔다는 소식이 귀에 들어가는 순간, 소년의 모친은 그 즉시 선 채로
졸도할 것이 뻔했다. 기실 소년의 모친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의 모친이었어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이는 얀센 경이 가진 기벽과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였다.

이따금씩, 빌어먹을 초록 풀뿌리들이 뿜어대는 향의 패턴이 바뀔 때마다 얀센 경은 행성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고자 하는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난동을 피운 것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318 일
전이었는데, 소년은 아직까지도 그 날을 자기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날로 여기고 있었다. 새벽부터
닥치는대로 나무를 무너뜨리고 덩굴줄기를 잡아채던 거구의 표효와, 졸린 눈을 비비며 천막에서
기어나오다 나무뿌리에 걸려 지면과 입을 맞추어야 했던 부족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이루는 파괴적인
앙상블. 그것은 어린 소년에게 있어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와 같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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