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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녹- 안개와 속박 3권 (완결)
-하녹- 안개와 속박 3권 (완결)
6. 다시 피어나는 백합 (2)
7. 희게 피어난 백합
에필로그. 안개와 속박
외전. 녹음의 균열
6. 다시 피어나는 백합 (2)
“누이, 로버트 가문은 수도에서 대대로 질 좋은 포도주와 포도잼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해. 복숭아도
재배하고 있지.”
“네, 그렇군요.”
“자작, 잠시 나 좀 보지.”
“아아. 네, 네. 전하.”
지크프리트는 방문을 닫고, 이네트의 방에서 멀리 떨어진 다음에서야 일리야를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됐다. 없던 일로 해.”
“네, 네? 하, 하지만…….”
“누이.”
그가 유감스럽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결코 아니라는 부정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네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누이, 왜 그래.”
그가 상처받은 아이처럼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이네트는 그것을 보고서도 무표정했다. 그는 전보다 마른
그녀의 팔을 바라보며 눈을 좁혔다.
“…….”
“알겠어…….”
지크프리트가 아쉬움을 숨기지 않고 이네트의 뺨에 작별 키스를 남겼다. 이네트는 인사에 화답하지 않았다.
* * *
카시엘 디에드반. 지크프리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자는 페르닌드 디에드반과 함께 누이를 지하실에
가둔 자였다. 그래서 아예 명단에서 제외한 자이기도 했다.
“카시엘 디에드반?”
“하지만 그 자는…….”
지크프리트가 말을 끊고 흐음,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 카시엘 디에드반. 디에드반 공작 가문은 일리아드
제국이 세워질 때부터 대대로 황가에 충성을 맹세한 개국공신 가문이었다. 황가와 인연이 깊었다.
사생아인 이네트가 그에게 과분한 상대라고 말이 나올 만큼, 디에드반 가문이 가진 힘과 명예는 드높았다.
명쾌한 해답이었다. 누이가 혐오하기에 더더욱 디에드반 공작만큼 그녀와 결혼 상대로 어울리는 자는 없다.
“그렇게 해.”
“뭐해? 안 나가고.”
틀린 말은 아닌지라 제롬이 입꼬리를 올렸다. 변명할 거리야 많았지만, 제롬은 구태여 변명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계속 그분의 건강을 걱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집무를 보시면서도 황녀님 걱정을 하시고.”
“밖을 돌아다니게 한다든가, 조금쯤 풀어주는 게 좋으실 겁니다. 그러면 알아서 회복하실 테니까요.”
“…….”
* * *
「페르닌드! 페르닌드!」
「저 애 때문에 내가 죽었어!」
이네트와 페르닌드의 모습은 사라지고, 푸석푸석한 금발을 허리까지 늘어트린 여자가 등장했다.
하얗게 질린 피부와 건조하게 부르튼 입술, 아래에서 흐르는 피……. 어머니의 죽기 직전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
건드려서는 안 될 역린이 꿈속에서 깨어났다. 일부러 머릿속에 묻어놓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 평생 죽은 것처럼 살다가 어느 날 약을 먹었다.
그 애를 사랑하면 안 돼.
아냐.
아니, 아니야…….
“헉!”
‘그대에겐 좋은 기회일 텐데. 그렇지 않아? 나와 그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걸 떠나서 말이야.’
지크프리트는 늘 그랬던 것처럼 화사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농담이 아니었나,
설마?
그가 가늠하듯 여유로운 눈으로 물었다. 뻔히 보이는 던지는 말에도 얼굴에 희미한 균열이 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그 균열을 기민하게 알아챈 지크프리트가 재차 물었다.
카시엘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지크프리트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눈을 휘었다.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황태자의 말대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솔깃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허나, 만약 자신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네트는…….
연달아 떠오르는 음성. 그러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자신은 어떻게든 이네트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 * *
“누구랑 결혼한다고요……?”
“카시엘 디에드반.”
손등에 퍼지는 아픔에 그녀는 이것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깨닫자마자 정신이 통째로 흔들렸다. 그녀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흘렸다.
“지크프리트, 당신 뜻이에요?”
“아…….”
카시엘 디에드반이 이때껏 결혼하지도 않고, 심지어 약혼조차 하지 않은 미혼의 남자라는 건 제국에 있는
모든 귀족 영애들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와 어떻게든 가까워지기 위해 애를 쓰는 영애들도 굉장히 많았다.
실제로 황실에서 열리는 사냥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영애들에게 받는 선물들로 마차 하나를 채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그 어떤 영애와 염문설이 난 적 없었고,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인 적 없었다. 담백하다
못해 철벽이라 해도 무방한 태도는 그가 남색가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에 힘을 싣기도 했다.
“누이.”
“누이!”
“흐으……!”
* * *
“누이.”
“…….”
“다시 자려고?”
“누이와 공작의 결혼식은 앞으로 50 일 뒤야. 넉넉하게 준비하고 싶지만, 되도록 빠르게 식을 올리려고.”
“일리아드 제국에 공작 가문은 두 가문밖에 없어. 디에드반 공작 가문의 충정과 명예는 제국 내에서도
유명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누이?”
“궤변 늘어놓지 말아요! 그자와 결혼한다는 건 그자와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
끔찍한 저택으로 돌아간다는 소리고!”
“누이, 걱정하지 마. 누이가 황족인 게 밝혀진 이상 디에드반 공작도 누이에게 함부로 못 할 거야.”
“누이. 결혼식은 성대하게 열릴 거야. 황실과 디에드반 공작가의 결합이니까. 그날 누이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신부가 될 거고.”
“…….”
“디에드반 공작과는 언제 만날래? 식전에 보기는 해야 할 텐데. 드레스와 연미복, 목걸이랑 반지,
귀걸이도 맞춰야 하고. 누이부터 먼저 정하고 누이가 정한 거에 공작이 맞추게 할까?”
* * *
이네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혼식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됐다. 지크프리트가 손수 의상 디자이너와
주얼리 디자이너를 그녀의 방에 데려왔다. 디자이너들은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는 이네트를 관찰하며
지크프리트를 향해 무어라 연신 떠들어댔다. 실상 드레스와 각종 장신구는 그녀의 의사 없이, 그들
뜻대로 정해졌다.
이네트와 카시엘 디에드반의 결혼 소식으로 제국은 큰 소란이 일었다. 그들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황족이라 할지라도 사생아인데, 그런 반쪽짜리 핏줄이 과연 디에드반 공작과
어울리느니 마느니 저들끼리 입방아를 찧느라 바빴다.
“그런데 그…… 황태자 전하와 모종의 사이라는 소문이 있었지 않나? 그걸 덮으려고 결혼식을 급히
강행하는 거라는 소리가 들려서 말이오.”
추측만이 난무하는 소문이지만, 부정한 소문인지라 이네트의 이미지에 악영향만 주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잠깐 안줏거리로 삼기 용이한 화젯거리였다는 점이다.
그가 아무리 애원해도 그녀는 눈조차 맞춰주지 않았다. 카시엘 디에드반과의 결혼을 이야기한 이후부터
그녀는 입에 아교라도 붙인 듯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조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 시녀에게조차도.
“…….”
“…….”
그렇게 울다가 쇠약해진 그녀가 정신을 잃었다. 지크프리트는 한숨을 쉬며 의사를 불렀다. 의사를 데려와
고치라고 한 것도 수십 번이었으나 의사는 마음의 병이라는 헛소리만 지껄일 뿐, 별다른 소득을 내지
못했다.
제롬의 조언대로 나가게 해주겠다고 해도 그녀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그녀가
나아질까? 그는 좀처럼 답을 찾지 못했다.
“너무 쇠약해지셨습니다. 식사를 통해 영양 섭취를 하시고, 충분한 휴식과 정신적인 안정을 취하시는 게
…….”
“누이, 언제 다시 내게 웃어줄래?”
“…….”
이제 디에드반 공작은 누이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누이에겐 황태자라는 뒷배가 있으니까.
언제나 자신이 지켜줄 것인데, 왜 누이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걸까? 안타까웠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지크프리트가 인상을 찡그리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누이와
단둘이 있을 땐 방해하지 말라고 일렀는데.
“전하, 제롬 르왈드입니다.”
“무슨 일이야?”
“……뭐?”
“저도 그렇게 기사들에게 일렀습니다만, 에로드 데반의 상태가 좋지 않아 기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졌던
모양입니다.”
“도주하면서 남긴 흔적은?”
“무능하군.”
“죄송합니다.”
그가 손을 내려 제롬의 턱을 들어 올렸다. 제롬이 눈을 감았다. 제롬이 예상한 대로 손이 날아들었다.
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제롬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며 피가 터졌다. 제롬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이때껏 그대가 보인 능력을 아니까 이 정도로 끝내겠어. 누이와 관련된 실수는 다시 용납하지 않겠다,
제롬.”
제롬은 예, 대답하며 입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았다. 그리고는 칼같이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꼭 추적하여 잡겠습니다.”
“알겠습니다.”
“…….”
이네트는 눈을 뜨지 않았다.
* * *
카시엘 디에드반은 일과를 마치고 저택으로 퇴근하기 전, 저를 뒤쫓아 온 신입 기사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기사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을 고르다가 이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래.”
동생의 죽음보다도 이네트가 보일 거부가 두려운 자신은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리고 만 것이
틀림없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이어 동생까지 모조리 죽어도 자신은 끝까지…….
“하하…….”
* * *
쨍그랑, 소리와 함께 스푼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광경에 지크프리트가 안타깝다는 듯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트렸다.
“누이, 내가 먹여줄게.”
그건 죽기보다 싫었던 이네트는 시녀가 새 스푼을 가져오자마자 자신에게 달라는 듯 시녀에게 손을 뻗었다.
스스로 스푼을 쥐고선 수프를 한 입 떴다. 뜨고 나서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입가에 가져다 댔다.
오랜만에 들어온 음식물에 위장이 먼저 반응했다. 메스꺼움이 일었다.
“우욱…….”
“괜찮아?”
“욱.”
그녀가 그대로 시트에 토를 했다. 위액과 함께 올라온 음식물 때문에 목구멍이 따끔따끔했다.
지크프리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네트를 위로했다. 그는 시녀에게 시트를 치우라 명하고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
“…….”
이네트는 그가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자 그제야 마지못해 입술을 열었다. 목구멍 안으로 뜨거운 차가
흘러들어 가자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잠잠해졌다.
“…….”
일자로 다물려있던 이네트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심연으로 가라앉아버린 내면도,
깊이 드리워진 체념조차 잠시나마 잊게 할 만큼 치가 떨리는 말이었다.
이네트는 아무도 없는 적막한 방에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가겠습니다, 황녀님.”
지크프리트가 아님에 그녀는 안심하며 다시 허공을 응시했다. 들어온 사용인은 방 안을 정리하고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네트는 청소를 하든 말든 사용인을 바라보지 않았다.
정리하는 소리가 멈추었는데도 나가지 않자, 그제야 이네트의 시선이 사용인에게 닿았다. 사용인은
이네트와 눈이 마주치자 품에서 쪽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이네트가 쪽지를 받아들었다. 그녀가 쪽지를 받자 기다렸다는 듯 사용인이 곧장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쪽지를 천천히 펼쳤다.
『아가씨께.
흐르는 눈물이 쪽지에 후드득 떨어졌다. 이네트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다가 이내 쪽지를 잘게 찢었다.
잘게 찢긴 종이를 입 안에 넣어 삼켰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눈물이 멎었다. 이네트는 말라붙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웠다.
“끄윽…… 흑…….”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카시엘 디에드반과 결혼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은 이후, 자신은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에일은 그렇지 않았다. 이때까지 그가 자신을 위해 한 행동을 알았다. 그마저
잘못된다면 자신은 아마…….
* * *
황태자와 연관되어 있음을 넌지시 알리자 에이든은 굉장히 당혹스러워했다. 에이든은 에일에게 살아만
있으라며 혼자 지낼 수 있을 만한 금전을 넉넉히 주었다. 여차 하면 상황이 잠잠해질 때까지 다른 지방에
갔다 오라고 하며.
에일은 추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염색까지 감행했다. 먹물처럼 짙은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일부러 허름한
로브를 입은 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으로 쏘다녔다. 기사들로 보이는 자들이 있으면 인파 속에
숨었다.
앞으로 결혼식까지 남은 기간은 3 일이었다. 촉박한 기간에 에일은 초조해졌다. 어쩌면 아가씨가 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아가씨였다.
에일은 고민하다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천천히 가게 뒤편의 골목에서 나왔다. 그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본 것처럼, 그녀 또한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비록 머리를 검게 염색했어도, 허름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이네트가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는 기사들과 시녀들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이네트의 눈짓에도 뒤로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네트는 그들의 불복에도 예상했다는 듯 무표정했다.
“에일…….”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에일은 가까이 다가온 이네트의 모습에 경악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오랜 가뭄으로 말라붙은 땅처럼 갈라졌다. 그 목소리에 에일의 마음이 더욱 미어졌다.
“제가, 밉지 않으십니까…?”
“아가씨.”
에일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네트를 불렀다. 그녀가 듣지 못한 듯 멍하니 있다가 잠시 후에야 대답했다.
“…….”
“……네?”
그녀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히끅거리는 울음소리가 귓가에 아프게 박혀 들었다. 그녀의 어깨가
가파르게 들썩거렸다. 에일이 그녀를 품에 껴안았다.
“아가씨 없이 저보고 어떻게 살라는 말씀입니까? 전 아가씨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은
마세요, 제발…….”
에일이 싫다고 말하며 이네트의 몸을 꽉 껴안자 뒤에 있던 기사와 사용인들이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황녀님을 놓아주십시오.”
에일이 그리 말하며 이네트를 다시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그녀만 들리도록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 * *
이네트는 결혼식 당일, 이른 오전부터 시녀와 사용인들이 달라붙어 치장을 시키는데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지크프리트는 얌전한 그녀의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
“넓긴 하지만, 그래도 가까운 이들로만 초대했어. 복작거리는 것보단 그게 낫잖아. 누이도 그렇지?”
“누이를 생각해서 디에드반 공작과 결혼식 전까지 만나지 않게 했고, 결혼식은 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이에게 걸맞게 아주 화려하게 준비했어.”
지크프리트가 다정히 웃으며 말했다. 이네트는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제가 고마워하리라 여긴 걸까?
우스울 따름이었다.
온실로 가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이네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눈과 입을 닫았다.
“…….”
“지킬 거라 믿어.”
“14 대 선황제 폐하께서 황후께서 아이를 가지신 것에 감복하여 황후께 선물한 정원이야.”
바닥에 깔린 두터운 은색 융단 주변에는 갖가지 색의 꽃들이 심어져 있었고, 천장에는 금과 은으로 장식된
줄들이 매달려 있었다.
마침내 앞에 도달한 순간, 카시엘이 이네트의 손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이네트는 미동도 없었다.
“이네트.”
“…….”
“많이, 말랐구나.”
“…….”
주례를 맡은 신부가 주례사를 읊으며 결혼식을 이어나갔다. 이네트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결혼식이 이어지는 내내 카시엘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이따금 그의 시선이
닿는 걸 느낄 때마다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괜찮아. 견딜 수 있어. 괜찮을 거야. 나만, 조금만 견디면……그러면 에일은 괜찮을 테니까…….
눈물이 그득 차올랐다.
‘네.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에로드 데반만 살려주세요.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정말?’
‘네.’
‘네.’
“…네.”
누군가 질문하면 틀에 박힌 대답을 하고, 누군가 부르면 멍하니 바라보고, 그것의 반복이었다. 결혼식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흐리멍덩했다.
“이네트.”
“…….”
“…….”
“옆에만 있어 줘.”
그가 빌어도, 무어라 말해도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끔찍하게 싫어하며 증오해 마지않던
남자였는데, 그 모든 감정이 재가 되어 사라진 것처럼 그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빈 깡통 같았다.
“피곤해 보이는군…….”
“…….”
“…….”
“잘못했어…….”
너는 평생 나를 사랑할 수 없겠지.
* * *
이네트는 다음 날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이네트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침하셨습니까, 주인마님.”
“…….”
“마님.”
곧이어 뜨거운 물을 받는 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물을 다 받고, 시녀가 나가자 그제야 이네트가 몸을
일으켰다. 오랜 시간 잔 것 때문인지 몸이 결렸다.
따스했다. 허나 그게 다였다. 목욕을 하면서 콧노래를 불렀던 게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데, 기력이 없었다.
비누칠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콧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마음도, 그 어떤 의욕도 나지 않았다.
“…….”
“들어가겠습니다.”
“몸을 씻겨드릴까요?”
“…….”
“씻겨드리겠습니다.”
“마, 마님…….”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마를린이 침울한 눈으로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비누칠을 시작했다.
“배고프실 텐데…….”
그러더니 이내 깨달았다는 듯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갑자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마님!”
카시엘과 페르닌드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 그들은 나를 사랑하는 걸까? 그들이 하는 그게……
사랑인가?
“이네트.”
“…….”
“원래라면 어젯밤 초야를 치렀어야 했어. 네가 잠이 든 바람에 치르지 못했지만. 결혼의 증거를 마땅히
남겨야 해.”
이마, 눈가, 콧등, 뺨, 턱에 연거푸 이어지던 입맞춤은 마지막이 되어서야 입술로 향했다. 녹아내린
분위기 속에서 부드럽게 입술이 겹쳤다.
이네트의 아랫입술을 오래도록 빨던 카시엘이 허락을 구하듯 혀끝으로 입술 사이를 눌렀다. 입술이
벌어지자 그제야 혀가 입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그의 혀가 천천히 그녀의 입 안을 유영했다. 치열을
훑었다가, 말랑한 점막을 스치고, 입천장을 긁어내렸다.
“음….”
카시엘이 키스를 하면서 입술이 살짝 떨어질 때마다 중얼거렸다. 이네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기분
좋은 듯 눈을 휜 채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신음이라도 좋아.”
“으읍…!”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이네트가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고개를 내젓자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그가 붉게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수초 간 응시하다가 눈을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
“…….”
그제야 이네트는 이때껏 페르닌드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결혼식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그때조차 페르닌드의 목소리 한 번 들은 적 없었다. 결혼식에도 오지 않은 듯했다.
“페르닌드는 지금 본인의 방에서 치료 중이다. 의사 말로는 가망이 없다고 하더군. 많이, 다친 상태야.”
“…….”
“왜 다친 건지 묻지 않아?”
그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궁금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는 침울한 눈동자로
그 어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그녀의 목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망아지처럼 날뛰던 그녀가, 이렇게 얌전한 인형처럼 변한 이유에 자신도 포함되는 걸, 그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까.
이전에 저지른 추악한 죄와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깊은 내면에 묻어두었던 죄책감과 혼란에 불씨가
지펴졌다. 어머니와 이네트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언제부터 잘못된 걸까. 이네트에게 눈길이 간 그 순간? 이복누이라 생각했던 그녀에게 그릇된 욕정을
품은 순간? 잠든 그녀에게 손을 뻗은 순간? 지하실로 끌어들인 순간? 싫다고 소리치고 나가게 해달라고
외치는 그녀의 외침을 무시한 순간?
그럼에도 욕망하고, 욕정하고, 그릇되게 탐했다. 제 욕망을 그녀의 잘못이라 떠넘기며 제대로 마주
보지도 않았다.
너저분하고 역겨운 본심이었다. 스스로에게 구역질이 났다. 사냥터에 숨겨둔 오두막처럼 그의 본심도
숨겨야 마땅한 것인데, 시도 때도 없이 본심이 튀어나와 그녀더러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소리 없는 외침을
부르짖고 있었다.
“이네트, 네가 많이 보고 싶었다.”
“…….”
“…요즘 식사를 잘하지 못한다고 들어서 묽은 수프를 준비해 달라 일렀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도 준비했다.”
이네트는 잔뜩 긴장한 사용인들의 눈빛을 알아차리고는 마지못해 스푼을 쥐었다. 수프를 한 입 떠먹자
그제야 카시엘이 안도한 표정으로 그 또한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는 아주 조용히 이루어졌다. 사용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또 공작이 식기를 떨어트리거나 토를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요 근래 들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갈까?”
“…….”
“시끄럽다는 말이에요.”
“…….”
“익숙해요.”
“…….”
“내가 끔찍한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그가 말끝을 흐리며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스스로 죄악을 읊기엔 두려웠던 것이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음울한 그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지나치게 담백한 목소리였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가 걷혔다.
기억하고 눈에 담는 것으로는 모자랐다. 그 때문에 엉성하게나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림에
대한 열망으로 기인한 것이 아닌, 그녀를 오롯이 기억하고 놓치고 싶지 않다는 기이한 열망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어쩌면 그와 결혼해야 한다는 통보를 들었을 때부터 자신은 무너져 내린 것과 다름없었는지도 모른다.
자조적인 생각이 스쳤으나 이네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
이네트가 거절하지 않음에 안심하면서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신경
쓰지 말고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오히려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였다. 그녀의 눈치가
보였다.
“이네트, 잘 자.”
* * *
“신혼여행지는 정했나?”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네트와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이었습니다.”
“으음…….”
“바스타드…… 왕국이요.”
“바다를 보고 싶어서요.”
“누이, 바다를 좋아했구나? 그래. 좋아. 바스타드 왕국의 해변은 참 아름답지. 아 참, 그때 이야기했던
것 기억나? 드네아라는 특산물이 맛있다고 했었는데.”
“…네.”
“누이는 달달한 걸 좋아하니까 입맛에 맞을 거야. 드네아 말고도 바스타드 왕국에는 당도가 높은 과일이
많고.”
“…….”
“많이도 낳았군.”
지크프리트가 웃음을 흘렸다. 카시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웃음기가 사라진
지크프리트는 이내 걱정스럽다는 듯 눈을 좁히며 턱 밑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별일 없을 겁니다.”
“그러길 바라야지.”
일리아드 제국, 아니 제국의 수도에서도 벗어나 본 적 없는 이네트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녀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을뿐더러 대화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네.”
이네트는 그 이후로도 카시엘과 지크프리트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다가 지크프리트가 떠나기 전,
볼에 입술을 맞추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
“표정이 좋지 않아.”
사용인들은 오리가 어미를 따르듯, 공작부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공작의 모습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주인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 * *
다만…….
어쩌면 여행을 다녀온 사이, 죽음의 문턱을 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떠나기 전에 이네트의 얼굴이라도
보여주어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카시엘의 물음에도 이네트는 대답이 없었다. 그가 후우, 한숨을 쉬며 포기하려는 찰나 그녀가 대답했다.
“볼게요.”
“…괜찮겠어?”
“네 이름을 계속 부르더군.”
“…….”
이네트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황궁의 연회장에서 페르닌드가 울면서 가지 말라고 빌었던 모습이
겹쳐서 떠올랐다. 후회하게 될 거라고 했는데, 이러려고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스스로 찌른 건가요?”
“아니, 페르닌드는…….”
* * *
“…네.”
“바스타드 왕국에 도착하면 곧바로 그곳의 왕과 인사를 나누기로 했어. 부담 갖지 않아도 돼. 일리아드
제국과 바스타드 왕국의 사이는 나쁘지 않으니까. 그들이 호위 또한 붙여주기로 했다.”
이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철저했다. 지크프리트, 그 작자는 만약의 가능성이라도 철저히
막아두고 싶은 듯했다.
* * *
“……가서 먹을게요.”
“그래.”
“……이제 갈까?”
이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 밖으로 나서고 쭉 걷던 중,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요.”
“어디? 왜?”
“네가 말한 게 이거야?”
“…….”
이제는 전처럼 격렬한 증오도, 미움도 없다. 그저 멍했다. 꼭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저 흘러가는 대로, 떠밀리는 대로 떠밀리고, 하라는 대로 하고…….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던 악귀가 죽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조금 예상 외일 뿐이다. 슬프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그냥…….
“…넷.”
“이넷…….”
“가지 마…….”
“…….”
“가지… 마, 제발….”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페르닌드가 이네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실 달린 인형처럼 휘청거리며 부들거리던
손은 이내 다시 시트에 풀썩, 쓰러졌다.
“…….”
“이거, 꿈 아니지…?”
그의 질문에 이네트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도저히 카시엘 디에드반과 결혼하게 되어 공작부인으로
이곳에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내기엔 수치스러운 사실이었다.
“이, 넷, 나…….”
“사람 불러올게.”
“……올 거야.”
“정말로?”
“정말… 다시 올 거지?”
“그래.”
“정말로?”
“……응.”
“이네트.”
이네트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자 카시엘의 얼굴에 복잡한 상념이 내려앉았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이어 물었다.
“네.”
카시엘은 안도한 듯, 그러면서도 무어라 형연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근처에 있던 사용인에게
주치의를 불러 페르닌드를 돌보라 지시했다.
“더 늦기 전에 이만 떠나지.”
수도에 자리한 디에드반 공작저에서 검문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네트는 처음으로 검문소를
통과했다. 맥이 빠질 정도로 쉬웠다. 기사들이 진을 치고 막고 있는 검문소는 디에드반 공작 가문의
마차라는 소리에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마차를 수도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
이네트는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창밖의 풍경에 집중했다. 그렇게나 벗어나고 싶었는데, 막상 수도를
벗어나니 느끼고 싶은 해방감은커녕 속이 막힌 듯 답답하기만 했다. 목 밑까지 물이 차오른 듯했다.
마차는 두 시간을 달려서야 항구에 도착했다. 이네트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코끝을 스치는 바다 냄새에
숨을 들이켰다. 처음 맡는 바다 냄새였다. 짜고 비리면서도 시원하고 습했다. 난생처음으로 느껴보는
향기에 그녀의 마음이 덜컹거렸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의 모습 또한 그녀의 마음을 더욱 덜컹거리게 했다. 푸르고 드넓었다. 바다는 끝도
없이 넓었다. 끊어질 기미 없이 죽 이어진 바다는 두려워질 만큼 광활했다. 순식간에 바다에 압도당할
만큼.
책에서 글자로 보던 바다였다. 이때껏 자신이 보았던 설명은 바다의 위용을 다 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스스로 낯설 정도로 오래간만에 느끼는 들뜬 감정이었다.
“발밑을 조심해.”
“…….”
이네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입 안으로 달달한 메이플 시럽이 퍼졌다. 달고 맛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이네트는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고 삼켰다.
* * *
여정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카시엘은 그녀가 어디론가 나갈 때 함께 따라 나가도 그녀가
저지하지 않아 좋았고, 좁은 선실 안에서 이네트와 단둘이 붙어 있는 상황이 좋았다. 정작 이네트의
마음은 알 수 없었으나.
이미 항구에는 바스타드 왕국에서 보낸 수하들이 카시엘과 이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일리아드
제국에서 이곳까지 머나먼 여정을 마치고 여행 온 디에드반 공작 부부를 환영했다.
이네트는 일리아드 제국과 달리 습하고 머리가 뜨거울 정도로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찡그렸다.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두 햇빛 때문인지 피부가 구릿빛이었고, 옷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짧고 노출이
심했다. 일리아드 제국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는 이국의 남다른 분위기에 곧바로 적응하지 못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들이 준비한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곧장 바스타드 왕국의 수도, 레아난으로 향했다. 이네트는 마차 밖으로 보이는 야자수와 아무렇지
않게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들개들을 바라보다가 지나친 햇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자 카시엘이
손을 뻗어 햇빛을 가려주었다.
“상관없어요.”
그녀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허름한 여관이든, 호화로운 호텔이든 어디든 간에 상관없었다.
바스타드 왕국에서 붙여준 수하들과 카시엘이 데려온 사용인들이 많아 주변이 북적거렸다. 생소한
게르단어도 귀에 박혔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자들 모두 즐거워 보였다. 심지어
잡일을 하기 위해 따라온 사용인들마저도 즐거운 듯 얼굴에 웃음기가 스며있었다.
카시엘은 현지인인 호텔 지배인과 능숙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네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대화하고
있는 그의 옆에 멀거니 서서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이네트, 올라가자.”
그가 그렇게 말하며 방문을 열었다. 연 순간, 불쾌한 광경이 펼쳐졌다. 호텔 측에서 신혼부부라고
스위트룸으로 잡아준 것인지 침대 모양이 하트 모양인 데다 침대 위 천장은 거울로 되어있었다.
욕실은 투명한 창으로 되어있었고, 욕조도 하나였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안이 훤히 보이는 욕실을
흘긋 보았다. 목욕하는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네.”
이네트가 귀찮다는 듯 눈을 피해도 카시엘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는지 기어코 그녀의 머리를 다 말려준
다음에야 그도 목욕을 하러 들어갔다. 그녀는 굳이 그가 나가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보고 싶지 않아
밖으로 나갔다.
“아.”
“걱정한 거 아니에요.”
“아뇨. 안 먹을래요.”
그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식당의 음식들을 쭉 둘러보았다. 바스타드 왕국의 음식은 일리아드 제국의
음식과 달리 익힌 과일과 생선 요리가 많았고, 간이 센 편이었다. 그는 음식 중에서 덜 달고 덜 기름진
것을 골라 식사를 시작했다.
“공작님, 괜찮으세요?”
사용인이 조마조마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녀님과 결혼한 이후로는 토를 하거나 식기를 떨어트리는
일이 없다시피 했기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 * *
다음 날, 잠에서 깬 이네트는 카시엘과 함께 식당에 내려가서 식사를 했다. 그녀는 일리아드 제국과 달리
고기와 익힌 과일이 가득한 식당의 음식들을 신기하다는 듯 둘러보았다.
“맛있나?”
“이네트?”
“이네트!”
그가 곧바로 그녀를 뒤쫓으며 그녀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렀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 *
점심 쯤 돼서야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이네트는 어제보다 더 심해진 햇빛에 차창 구경을 포기하고 마차에
몸을 기댔다. 덥고 습해서 잠은 오지 않았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 * *
마차는 수도에 도착한 다음, 곧바로 바스타드 왕궁으로 향했다. 아치형으로 된 거대한 궁은 색채가
무척이나 화려했으며 기둥과 높은 천장에 보석이 알알이 박혀 있었다. 바스타드 왕국의 부를 뽐내는
것처럼 으리으리했다.
“네.”
시장에 도착한 카시엘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사용인과 바스타드 왕국의 수하들에게 일렀다.
사용인들과 수하들이 환호하며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곧 카시엘이 이네트의 손을 움켜쥔 채,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네트는 북적거리고 시끄러운 주변을 힐끔힐끔 둘러보았다. 생김새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달라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북적거리고 웅성거리는 분위기가 그리 싫진 않았다.
상인들이 딱 보아도 외국의 귀족으로 보이는 카시엘과 이네트를 향해 손을 흔들며 영업을 해댔다.
바스타드 왕국의 바다에서 난 커다란 진주 목걸이, 드네아 주스, 양꼬치, 사파이어 팔찌 등등 그들이
호기롭게 들이미는 물건들은 확실히 눈길을 사로잡는 것들이 많았다. 그중 이네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녹색 비취였다. 별다른 세공을 하지 않은 직각 모양의 비취였다.
“이것, 얼마지?”
“5000 데르한이라지요, 나으리.”
“감사합니다, 나으리!”
“……갖고 싶던 것 아니었나?”
기억이 이어지자 그녀의 입술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눈물샘이 고장 났다. 그녀는 울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이네트.”
“…….”
“…….”
죽어버렸다 생각한 분노와 심장에 드리운 체념, 심연에 가라앉아 버린 자유에 대한 갈망이 갑작스레
타올랐다. 그동안 오랜 무기력에 쇠약해진 육체가 한계를 넘어선 감정에 사시나무처럼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
그가 숨을 멈추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허공을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목덜미에 오래도록
머무르다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눈에서 코로, 코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목덜미로, 쇄골로, 가슴으로, 결국엔 배로…….
누군가 크게 외치고 지나갔다. 카시엘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붙박인 것 마냥 서 있기만 했다.
이네트가 손을 탁, 쳐내자 그의 손이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이네트….”
그가 조그맣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타오르는 분노에 잠식되어 그에게서 벗어나는 것만 생각했다.
그녀가 겁 없이 인파 속으로 헤쳐 들어가자 초점 없이 흐려져 있던 그의 눈이 순식간에 빛을 되찾고 번뜩
뜨였다.
“이네트!”
“이네트!”
“아…….”
“이네트!”
카시엘 또한 시장 여기저기를 헤집으며 이네트를 쫓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
발견할 수 없었다. 은색 머리카락은 이곳에서 흔하지 않았고, 그녀가 입고 있는 원피스는 이곳의 복식과
달라 눈에 띌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보이지 않았다.
“아…….”
이네트, 넌 그토록…….
7. 희게 피어난 백합
이네트는 제 입가를 틀어막고 빠르게 어두운 뒷골목으로 내달리는 남자의 품에서 발버둥 치다가, 이내
낯익은 품과 익숙한 냄새에 반항을 멈췄다.
“으, 으읍.”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입이 막혀 있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알았는지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뒤에서 안고 있던 에일이 자세를 고치고, 그녀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았다. 그제야 이네트는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전보다 마르긴 하지만 에일이 맞았다. 색이 조금 빠지긴 했지만 검은색으로 염색한 머리도 여전하였고,
무엇보다 따스한 녹색 눈동자가 그라는 것을 증명했다.
다시 보게 되었다는 기쁨과 그리움은 잠시, 곧이어 공포와 불안이 밀려왔다. 이네트의 몸이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아가씨.”
에일이 이네트의 뺨을 쓸었다.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던 그녀의 말소리가 끊겼다. 아직도 그녀의 눈에서는
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말씀 마십시오.”
오래도록 이 기회를 기다렸다. 바스타드 왕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신이
내려주신 선물이라 생각했을 정도였다. 바스타드 왕국은 지금 왕위 다툼으로 인해 내정이 엉망이었다.
가뜩이나 나라의 관리들은 부패해 돈만 조금 쥐여 주면 수도의 문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벌컥벌컥
열어주었다. 철저히 자본 중심적인 나라였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가능했다.
“……갈로아 공국?”
“생소하시겠지요. 에벨루넨 대륙에 있는 작은 공국입니다. 그곳이라면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그가 애타는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그녀의 고개가 꺾인 꽃처럼 아래로 툭, 떨어졌다. 옷깃을 거머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리 죽여 울던 이네트가 천천히 에일의 가슴팍에 뺨을 댔다. 계속해서 솟아나는 눈물로 가슴팍이 눈물로
젖어 들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부둥켜안은 연인은 오래도록 눈물이 가득한 재회를
만끽했다.
* * *
카시엘은 이네트가 없어진 이후, 식사는커녕 잠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바스타드 왕국을
샅샅이 뒤져도 이네트를 찾을 수 없었다.
이 소식은 황태자의 귀에도 들어갔다. 황태자는 소식을 듣자마자 직접 바스타드 왕국에 행차했다.
바스타드 왕이 붙여준 수하들이 있는데도 황녀가 사라졌다. 황녀의 안위에 문제가 있을 시, 자칫하면 큰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공작, 도대체 무슨 정신머리를 가졌기에 누이를 놓친 거지? 누이는 네 부인이기 전에 황녀일 텐데?”
자신이 이네트를 자극했던 것인가? 사라지기 전날부터 이네트의 상태가 이상하긴 했다. 갑자기 식사를
하다가 도중에 자리를 뛰쳐나가고는, 그날부터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가 짓밟은 손수건을 떠올리자 마음
한편이 욱신거렸다.
부들거리며 떨리는 몸은 좀처럼 떨림이 멎지 않았다. 황태자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몸이
제어되지 않았다. 카시엘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자 지크프리트가 제길, 욕설을 뇌까리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던졌다.
“일단 왕국을 샅샅이 다 뒤져. 우선 나는 제국으로 돌아간다. 공작, 어떻게 해서든 찾아. 그대가
죽더라도. 알겠나?”
“알겠습니다.”
황태자가 탄 마차가 떠나자마자 카시엘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식은땀이 손바닥에 흥건히
묻어났다. 아랫입술을 깨물자 부르트고 창백하게 질린 입술에서 피가 터졌다. 그는 씁쓰레하게 감도는 피
맛을 느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
“흐으…….”
“이네트…….”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울컥, 무언가 차올랐다. 카시엘은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상체를 느끼며 감았던 눈을
떴다. 눈을 뜸과 동시에 고여 있던 것이 후드득, 떨어졌다. 시야가 흐릿했다.
내가 울고 있는 건가?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운 적 없는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눈가를 쓸었다. 눈물이 손가락에
묻어났다.
후드득, 눈물은 계속해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아무리 눈물을 참으려 애써도, 눈을 감아도 둑이 터지듯
넘쳐버린 감정은 속절없이 그를 침몰시키고, 무너트렸다.
“으윽, 흐….”
억눌린 울음은 오래도록 멈추지 않았다. 이네트, 그가 어미를 찾는 아이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나
흐느끼는 신음과 억눌린 울음소리만이 대답으로 돌아왔다.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 * *
게르단 대륙에서 에벨루넨 대륙까지의 여정은 길고도 길었다. 여정이 길어져 날씨가 안 좋거나 파도가
심하게 치는 날엔 근처에 있는 아무도 없는 섬에서 표류하는 날도 제법 있었다.
“저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야?”
“…괜찮아? 혹시 모르잖아.”
이네트가 생선을 뜯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스레 살을 뜯어 먹는 모습에 에일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난 이것도 좋은데?”
“아냐, 나 가시 발라 먹을 줄 알아.”
그가 못 말리겠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며 작살에 꽂혀 있는 생선을 빼더니, 정성스레 가시를 바르기
시작했다. 살에 촘촘히 박혀 있는 가시를 세심하게 다 빼고 나서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왜? 너 먹어.”
“전 배가 불러서 더 못 먹어요.”
지금이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 당시엔 아찔한 상황일 것이다. 그럼에도 에일은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저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그가 안쓰러워
이네트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미안해, 에일…….”
그녀가 말없이 다정한 에일의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비취를 품에서 꺼냈다.
녹색 비취는 투박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나, 그 빛만큼은 영롱하고 투명했다. 에일의 다정한 눈동자가
절로 생각날 만큼 따스한 빛이었다.
달빛을 머금은 비취에서 빛이 났다. 그 빛에 비치는 에일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도 진중했고 사려 깊었다.
그 진심을 알기에 이네트의 심장이 쿵, 쿵, 가파르게 맥동했다.
* * *
갈로아 공국으로 가려면 보르비아 제국을 거쳐 가야만 했다. 이네트와 에일은 보르비아 제국에
도착하자마자 제국을 느긋하게 구경할 새도 없이 바로 말을 한 필 구매했다. 누군가의 눈에 띄어봤자 좋을
것 없었다.
에벨루넨 대륙은 몹시 추웠다. 무척이나 습하고 더웠던 바스타드 왕국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네트는
차라리 더운 것보단 추운 것이 낫다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 * *
“그, 그렇지만…….”
“부, 부인….”
이네트 또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고, 에일은 고민하다가 “네, …부인.”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구부러지는 손가락을 주먹을 쥐어 숨기고는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들었다.
“좋아.”
* * *
에일과 함께하며 상처가 조금씩 아물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크게 벌어진 상처는 채 아물지 못한 듯 터지고
아픔을 호소했다. 조금이라도 불안감을 느끼거나, 그때 일을 회상하기라도 하면 악몽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벌레 같은 것.」
차가운 눈동자로 식사 자리에서 대놓고 경멸을 내뱉던 형제와 아무 말 없이 무심한 얼굴로 식사를
이어가던 공작. 다시 생각해도 숨 막히는 식사 시간이었다.
「이넷, 다리 벌려.」
장면이 지하실로 뒤바뀌었다. 반항하는 자신을 제압하며 억지로 지하실로 끌고 간 카시엘과 욕망에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다리를 벌리라고 명령하는 페르닌드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두 남자는 어느새 뱀처럼 몸을 감싸고 억지로 다리를 열어젖혔다. 아무리 싫다고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포기한 채 늘어져도 그들의 탐욕스러운 눈동자는 여전했다.
그러다 두 남자의 인영은 사라지고, 다른 남자의 인영이 나타났다. 싱긋 웃는 얼굴, 즐거운 듯 빛나는
회색 눈동자…….
「누이, 괜찮아?」
“…인!”
그건 나를 위한 게 아냐!
“…부인!”
“흐읍!”
“부인, 괜찮으십니까?”
에일이 이네트의 어깨를 조심스레 붙잡으며 시선을 맞췄다. 허공에서 정처 없이 흔들리던 눈이 초점을
되찾고 에일을 바라보았다. 따스한 녹색 눈동자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또 안 좋은 꿈을 꾸신 건가요?”
“…….”
에일을 바라보던 이네트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독하기 짝이 없었다.
벗어나고 나서도 기어코 자신을 놔주지 않는 사특한 망령들이 아직까지도 저를 괴롭히고 목을 졸랐다.
“진정해요, 부인.”
이네트는 익숙한 데자뷔에 헛웃음을 흘렸다. 마치 과거, 에일의 저택에서 불안감에 떨던 제 모습과
지나치게 흡사했다. 그때도 악몽에 시달리고, 이렇게 에일에게 매달려 위로받고…….
“부인.”
“벗어나려 애쓰지 말아요. 시간이 지나면 점점 괜찮아질 거예요. 이제 그들은 부인을 해치지 못해요.”
“이젠 제가 항상 곁에 있을 거예요.”
“응…….”
* * *
이네트는 에일과 함께 말을 기르고, 에벨루넨어를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직까지 갈로아 공국민들의
배타적인 시선은 여전했지만, 처음보단 다소 누그러진 상태였다.
엉성하던 에벨루넨어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문장의 형태가 잡혔다. 짧지만 문장 구사가 가능해졌다.
추워, 배고파, 가자, 와 같은 짧은 문장이었지만 에일은 이네트의 실력이 많이 늘었다며 기뻐했다.
“시장……?”
“알겠습니다.”
에일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네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에벨루넨어가 서툴러서 그렇다는 말은
사실 핑계에 가까웠다. 아직 다른 사람과 부대끼며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불신은 마음속
깊이 뿌리박혀 뽑히지 못했다.
“부인, 부인?”
“……아.”
“응…….”
이네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에일과 함께 살면 일상이 편안하고 행복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행복이 깨질까 봐 두려웠고, 늘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몸을 떨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문을 열고 지크프리트가 이곳에 쳐들어올 것 같았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달랐다. 그는…… 애원이 통하지 않았다. 말 자체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두려웠다. 그 어떤 것도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상황이 눈에 선해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깜깜한 미로 속에 갇힌 것 같아서.
자신이 잘한 게 맞을까? 차라리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됐을까.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에일의 목숨만큼은…….
이네트는 떨리는 손으로 목도리를 움켜쥐었다. 두려움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밭은 숨을
내쉬다가 이내 침대에 누웠다. 베개가 흐르는 눈물을 흡수했다.
* * *
이네트는 천천히 에벨루넨어를 배워갔다. 간단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수준에서,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고 상대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발전했다. 발음이 엉성한 것만 빼면 에일이
보기에 준수한 수준이었다.
“부인, 정말로 밖에 나가볼 생각 없어요? 부인이 걱정돼서 그래요. 계속 집에만 있으면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질 텐데……. 날씨가 추워서 더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걱정됩니다.”
에일은 최대한 그녀를 배려하여 돌려 말했다. 그녀와 대화를 하다가도 그녀가 넋을 놓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 대화를 하지 않을 땐 그녀는 늘어진 풀잎처럼 침대에 누워 있거나, 의자에 앉아 공부를 했다.
공부를 할 때만큼은 그녀의 상태가 괜찮아 보이다가도, 그렇지 않을 땐 걱정스러울 정도로 무기력하고
우울해 보였다.
“얼음 광산?”
이네트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내리깐 속눈썹이 약하게 떨린다 싶더니, 이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은 다소 놀랐다. 제안하면서도 그녀가 거절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말요? 괜찮습니까?”
“기다려. 장갑 끼고 신발 신고 올게.”
“응.”
“…응. 괜찮아.”
“여긴 왜 왔어요?”
이네트가 침을 삼키며 에일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가 그에게 무언가 잘못됐다는 듯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예감이 썩 좋지 못했다.
“알겠어.”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에 맞닥뜨리자 그는 난처한 기색으로 이마를 짚었다. 조그마한 공국이다 보니
외지인에게 배타적인 건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보르비아 제국으로 가고 싶지만, 그곳은 조금 위험합니다. 보르비아 제국은 일리아드 제국과 사이가
긴밀한 편이라 황태자가 개입하기 훨씬 수월해요.”
“그래, 그게 좋겠어.”
* * *
여러 마을을 떠돌면서 이네트와 에일은 그 얼음광산이 사실은 날카로운 서리가 가득하고, 길이 위험천만해
들어가면 다신 나올 수 없다고 악명이 자자한 곳이란 걸 알게 됐다. 일부러 에일에겐 아름다운 곳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 의심은 일리가 있었다. 갈로아 공국은 온천으로 유명한 보르비아 제국과 달리 영토가 좁은데다 온천을
가진 마을이 단 한 곳뿐이라 관광 오기에 적합한 나라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마지막 마을을 남겨두고 있었다. 온천을 가진 마을, 두란카 마을뿐이었다. 여태껏
정착할 마을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 마을에 모든 희망을 걸어야 했다.
에일이 부러 희망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네트는 손끝을 오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갑을 끼고
있지만 장갑까지 뚫은 추위에 손등은 물론이고 손가락 마디마디 전부 빨갛게 부르터 손이 따끔따끔했다.
“좋아.”
두란카 마을은 여태껏 지내왔던 다른 마을들보다 마을의 규모가 컸다. 갈로아 공국에서 유일하게 온천이
있는 마을답게 호텔과 여관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는 그중 제일 작은 여관을 가리켰다.
“저곳에 갈까요?”
이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몰라 그들은 규모가 큰 여관이나 호텔은 가급적 피했다. 그 탓에 벌레가
들끓거나 침대가 너무 낡아 자다가 중간에 부서지는 경우도 있었다. 떠도는 생활이 길어질수록 그저
문제없이 씻고, 먹고, 잘 수만 있다면 나름대로 만족하게 됐다.
“그래그래, 무슨 방을 줄까?”
열쇠를 받아들고 비용을 결제하자마자 에일과 이네트는 곧장 계단을 올랐다. 3 층 방문을 열자, 제법
괜찮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로가 두 개나 있었으며, 침대 또한 겉보기에 썩 튼튼해 보였다. 마련된
가운과 각종 위생용품도 질이 나쁘지 않았다. 겉은 허름할지라도 속은 괜찮은 여관이었다.
“부인께서 먼저 씻겠어요?”
그는 이제 익숙하게 그녀를 부인이라 칭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허물을
벗는 뱀처럼 두텁게 껴입은 옷을 하나하나 벗었다. 털옷인지라 옷들이 무거웠다. 벗을 때마다 몸이
가벼워지고 상쾌해졌다.
그녀는 알몸으로 욕실 안에서 덜덜 떨면서 물을 틀었다. 수압이 다행히도 셌다. 이네트가 가슴을 쓸면서
안심했다. 이전에 수압이 약한 걸로도 모자라 목욕 도중에 물이 나오지 않아 고생했던 적이 한 번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후로는 물이 나오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안심하게 됐다.
이네트는 욕실에 있는 욕조를 흘끔 보았다. 생각보다 욕조가 넓어서 두 명이 들어가도 넉넉할 것 같았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물을 끄고 욕실의 문을 열었다.
“좋아요.”
“물을 받겠습니다.”
“들어오세요, 부인.”
“아, 좋아…….”
“에일, 물이 신기해!”
그간 우울해하거나 힘들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그 또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그녀가 고생하는
게 다 제 탓인 것만 같았다.
“…네?”
“내 벗은 몸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에.”
“몇 번 몸을 섞어봤잖아?”
“네, 그렇죠.”
그가 붉어진 얼굴을 감추듯 손으로 코와 입가를 가렸다. 살짝 내리깐 속눈썹이 작게 떨렸다. 그는 그녀의
핀잔을 들은 후, 조금 고민하는 듯 손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그녀의 가슴 밑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마치
소중한 것을 깨지지 않게 어루만지듯 손길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응….”
“부인…….”
“아응!”
에일은 거의 이네트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힌 채 아이가 어미의 젖을 빨 듯 그녀의 가슴을 빨았다. 츕,
츄웁……. 젖은 소리가 욕실을 메웠다.
“흐읏, 응… 아….”
이네트의 알몸을 보고 부끄러워했던 게 언제였냐는 마냥, 에일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출렁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벽에 붙었다. 그가 뒤에서 그녀를 껴안으며 등줄기를 손가락으로
스윽 훑어 내렸다.
“흑….”
“으응!”
그가 뒤에서 성기로 둔덕부터 회음부까지 미끄러지듯 비벼댔다. 귀두에 묻은 쿠퍼액과 질에서 흘러나온
애액이 서로 마찰하며 쿨쩍거리는 소리를 냈다.
에일은 벌름거리는 질에다 성기를 조준하고는 천천히, 제일 두터운 귀두부터 넣었다. 이네트가 느껴지는
압박감에 눈을 가늘게 뜨며 벽을 짚은 손에 힘을 줬다.
“으응….”
“후우…….”
“에, 일….”
“네, 부인.”
평소보다 낮지만, 여전히 다정함을 머금은 목소리였다. 그녀가 고민하다가 작게 움직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나직한 한숨을 쉬더니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이가 약하게 살점에
박히자마자, 그의 허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탓에 접합부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가 더 야릇하게 울렸다. 젖은 살끼리 마찰하는 소리와
살갗과 살갗이 부딪혔다 떨어지는 소리가 지나치게 외설적이었다. 그녀는 그가 안 깊숙한 곳을 뭉근하게
찌를 때마다 허리를 바르르 떨며 들어온 것을 꽉 조였다.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크읏.”
에일이 작게 신음하며 한 손으로 이네트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유두를 거칠게 문지르고 가슴을 소젖
짜듯 세게 주물러댔다. 그녀는 아픔과 쾌락을 동시에 느끼며 앓는 신음을 흘렸다.
“흐응, 흐… 아!”
“부, 인… 헉. 흐으.”
“아앙! 아, 흣!”
다정하게 부르면서도, 아래의 움직임은 다정함과 거리가 멀었다. 에일이 콰득, 목덜미를 한 번 세게 깨문
뒤 벽에 붙은 그녀의 상체를 제게로 끌어당기며 앞으로 숙이게 했다. 순식간에 시야가 아래로 내려간
그녀가 숨을 들이켜며 흔들리는 욕조의 물살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팔이 붙잡힌 채로 뒤에서 처박혔다. 그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그녀가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파르르 떨며 허리를 활처럼 휘었다. 욕조를 딛고 선 다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욕조
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다.
그 위험천만한 느낌과 아래를 헤집고 긁는 쾌락, 질 안을 꽉 채우는 압박감이 뒤섞여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었다.
좋았다. 지나친 쾌락에 정신을 놓고 싶었다. 어쩌면…… 이걸 바랐을지도 몰랐다. 끝없는 불안과 좀먹는
초조를 피해 일시적으로나마 제정신을 앗아 줄 쾌락을…….
가늘게 뜨인 푸른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정신없이 신음하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이상했다.
좋으면서도, 슬퍼서 눈물이 났다.
“더, 더 해줘…….”
“부인. ……울었어요?”
“아냐, 그런 거 아냐.”
“정말입니까?”
* * *
이네트는 욕조에서의 섹스 이후, 에일에게 자주 섹스를 요구했다. 에일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위로 방식이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응할 수 있었다.
침대 시트가 축축하게 젖지 않는 날이 없었고, 아래에서 흐르는 액이 마를 새도 없었다. 수없이 몸을
섞고, 섞고, 또 섞었다. 안에 싸지른 정액이 너무 많아 허벅지를 타고 주르륵, 기다랗게 흐를 정도였다.
“에일…….”
“네, 부인.”
그녀의 물음에 그가 고민하는 듯 유두를 빠는 입술의 움직임이 더뎌졌다. 수초가 흘러서야 대답이
흘러나왔다.
“…….”
“그렇지 않아…….”
“…….”
“그러니…… 부담 갖지 말아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이렇게 쓰다듬어 주지 않았다. 괜찮다고 달래주지 않았다. 넌 잘못한
게 없다고 감싸주지 않았다. 모두가 손가락질했다.
전부 다 너 때문이야.
네 잘못이야.
“에일, 정말 내 잘못이야?”
봇물 터지듯 그 물음이 터졌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온 질문에 물음을 꺼낸 이네트 스스로가 당황하며
입가를 가렸다. 입가를 가린 손이 잘게 떨렸다.
에일은 떨리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는 그녀가 갑작스레 내뱉은 질문에도 당황한 기색을
일절 비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
“……정말?”
“정말?”
흐으. 그녀가 작은 흐느낌을 내뱉었다. 솟아올라 흐르는 눈물은 어느새 폭포수가 되어 그녀의 뺨을 흠뻑
적셨다. 히끅, 이네트가 딸꾹질을 하며 몸을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차라리…… 이렇게 감정을 토해내는 그녀가 좋았다. 마음속에 묻으면 묻을수록 깊이 묻어둔 감정은
썩어가기 마련이었다. 허나 우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쓰라렸다.
탈진하기 직전까지 눈물을 흘린 이네트가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에일은 빨갛게 짓무른 그녀의 눈가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눌렀다. 젖은 뺨에는 연신 입을 맞추었다.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 * *
관광으로 먹고 사는 마을답게 시장이 발달되어 있었으며, 이따금 하늘에 불꽃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여러
마을을 지나치며 느꼈던 삭막하고 건조한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그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네요.”
어린아이 여럿이 우와아, 소리를 지르며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조그마한 아이들이 펄쩍 뛰었다가,
우다다다 달렸다가 소리 지르는 모습이 천진난만하고 아기자기했다. 그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귀여워라.”
어른들이 안아주고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아이는 언제 울었냐는 듯 눈물을 뚝 그쳤다. 에일이
그 모습을 보고 훈훈한 미소를 띠었다.
“부인?”
“아…… 응?”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러십니까?”
이네트가 속삭이듯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떠오른 기억을 반추하는 듯 그를 바라보던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내리깐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
“모두가 넘어진 날 바라보기만 했어. 그게, 너무 서러워서 어린 마음에 계속 울었던 거 같아. 아프고,
서럽고, 원망스럽고…….”
그가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페르닌드 디에드반이야.”
아까와는 달리 이네트의 표정이 밝아졌다. 에일은 확연히 달라진 그녀의 얼굴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응. 괜찮아.”
* * *
이상하게도 에벨루넨 대륙은 생각했던 것만큼 아련하거나 아름답지 않았다. 상상 속의 에벨루넨 대륙은
온천 때문인지 따스하고, 습기가 찬 이미지였으나 막상 땅을 밟고 보니 습하기는커녕 건조하다 못해
삭막하고, 춥고, 거칠었다.
이네트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콧속으로 들어오는 고기 냄새에 정신을 차렸다.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에일 또한 배가 고픈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 눈길을 주었다.
“부인, 뭐 먹고 싶은 것 있어요?”
“꼬치 먹을까?”
“좋아요.”
그들은 곧장 양고기 꼬치를 파는 곳으로 갔다. 양고기와 두껍게 썬 파와 양파를 하나씩 교차해서 넣은
양꼬치에서는 달짝지근한 냄새가 풍겼다. 우선 이네트와 에일은 한 사람당 하나씩 꼬치를 주문했다.
“더 먹을래요?”
“응.”
“나 저거도 먹을래!”
“…네, 부인.”
그녀는 깨물었을 때 와삭, 설탕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입 안으로 들어오는 과즙의 시원한 맛을 느끼며
으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거 맛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단지 예전에, 카시엘과 페르닌드가 던져준 곰 인형이 떠올라 그런 것이었다. 그녀가 말꼬리를 흐리자
에일이 부드럽게 물었다.
“……인형을?”
잡화점에 들어서자 희미한 나무 냄새와 함께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무 바닥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건물 자체는 허름했지만 향기 때문인지 그것조차 묘한 감상을 일으켰다.
잡화점엔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많았다. 에일이 찾는 실과 바늘, 솜뿐만 아니라 펠트지 또한 다양하게
있었다. 곰, 병아리, 양, 말 등 여러 동물 모양의 펠트지가 있었고, 꽃과 건물 모양의 펠트지도 있었다.
그의 물음에도 이네트는 시선을 굴리기만 할뿐, 곧바로 고르지 못했다. 말을 좋아하긴 해도, 말 인형을
갖고 싶진 않았다. 가장 무난한 것은 곰 모양의 펠트지였으나, 곰 인형은…….
“응.”
“이것도 하나 살까요?”
“응.”
“예뻐.”
“부인도 한번 해보세요.”
“이런, 몇 개 더 사오겠습니다.”
연이은 실패에 이네트가 실망한 듯 눈꼬리를 내려트렸다. 에일이 다시 한번만 도전해보라며 준 마지막
폭죽은 이전까지의 실패를 만회하듯 힘 있게 하늘에서 예쁜 흰색 꽃을 피워냈다.
“됐다!”
이네트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어느새 실망한 기색은 사라지고 없었다. 흰색 불꽃은 크고 아름다웠다.
이네트는 그 불꽃이 사그라지기를 기다리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하늘에서 고개를 내렸다.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에일은 오래간만에 보는 그녀의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그 또한 활짝
웃었다.
시장 근처를 좀 더 산책한 다음, 여관으로 돌아왔다. 에일은 잡화점에서 산 것들을 정리하며 이네트에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어…… 떠난다고?”
아무리 가지고 있는 금전이 많다 해도, 언젠가는 동나기 마련이었다. 완전히 정착한 다음, 일을 해야
했다.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 * *
“어디서 왔는감? 설마, 보르비아 제국에서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거여? 귀족인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림자 같던 불안은 점점 희석되어, 언제나 우울한 기색을 드리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은 전과 달리 많이 밝아졌다. 시간이 약이었다.
* * *
“에일, 나 실 사고 올게!”
“혼자서요?”
결연한 그녀의 표정에 그가 끄응, 낮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좁혔다.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그녀가 말을
무르지 않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시장 입구에 들어설 땐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이네트는 심호흡을 하고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에
사람들이 왁자지껄했다. 이네트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목도리를 올려 눈만 빼고 얼굴을 전부 가렸다.
한 생명을 들이고, 함께 한다는 건 신중한 선택을 요했다. 그녀는 한순간의 충동으로 생명을 들이고 싶진
않았다. 그와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고, 고민 끝에 데리고 오고 싶었다.
“에일!”
엇갈렸나 보다. 그녀는 그럴 것이라 굳게 믿으며 집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 순간, 이네트의
몸이 뒤로 확, 끌려갔다.
“쉬이.”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아…….”
“겨우 다시 만났는데.”
“흐읍, 흐…….”
또다시 악몽이 도래하리라는 미지의 공포가 그녀의 깊숙한 내면까지 엉망으로 뒤흔들었다.
“누이.”
“부인?”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물었다. 내려다보는 눈빛에 살의가 일렁거렸다. 지크프리트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소꿉놀이라도 한 모양이야.”
“이런 조그마한 나라에 숨어들 줄은 몰랐어, 누이. 누이가 이 변방 공국을 알았을 린 없고……. 이 새끼
생각이지?”
“안 돼! 싫어, 안 돼!”
억눌린 신음을 흘리던 이네트가 발작하듯 토해냈다. 말과 말 사이에 섞인 비명이 애처로웠으나 그뿐이었다.
지크프리트는 눈물을 비처럼 쏟아내는 이네트의 눈가를 흘긋 바라보고는 다시 에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네트!”
언제나 아가씨, 부인이라는 호칭으로만 그녀를 부르던 에일이 처음으로 이네트의 이름을 외쳤다. 그녀의
감긴 눈이 움찔 떨렸다.
“넌 닥치고 있어.”
이네트의 늘어진 어깨가 가파르게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헐떡거리며 매달리듯 모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겨우 돋아난 희망은 환상처럼 사라졌고, 구둣발에 짓밟힌 개미처럼 밟혀 죽었다. 하루살이처럼 덧없었다.
비워진 마음에 그때처럼 체념이 그득 들어찼다. 이네트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무신경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에일이 바닥에 주저앉은 이네트를 보며 말했으나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그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그녀에게 다가가는 세 남자를 저지하였으나 그조차 바람 앞의 등불처럼 하등 소용이 없었다.
페르닌드가 귀찮다는 듯 세게 쳐낸 손길에 폭행으로 한계에 다다른 몸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으니까.
“…….”
부풀어 오른 뺨에 언제나 불그스름하게 감돌던 혈색은 공포에 스러져 하얗게 질려있었으나, 그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럽게 보일 따름이었다. 이네트가 비틀거리자 옆에서 카시엘과 페르닌드가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어깨에는 페르닌드의 팔이, 허리에는 카시엘의 팔이 둘러졌다.
“부인!”
난 아무것도 안 들려.
“잠시…….”
“…….”
고개를 돌리고 선 지크프리트가 으음, 고민하는 듯 턱을 쓸었다. 그리고는 말해보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떤 건데?”
“인형…이랑 오르골이에요….”
“지크, 부탁이에요….”
지크프리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이네트가 곧바로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챙겨야 했다. 카시엘과 페르닌드는 당연하다는 듯 그 뒤를 따랐다.
“살려줘요…….”
“으음.”
이네트는 저를 앞으로 이끄는 카시엘과 페르닌드에게 몸을 맡기고 에일을 지나쳤다. 눈물이 칼처럼 날이
서려 아팠다. 눈물이 흐르는 살결 하나하나에 생채기가 생겼다.
* * *
그들은 지체 없이 이네트를 데리고 일리아드 제국으로 향했다. 그녀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배에 올라탔다.
그들은 저들끼리 누가 그녀의 방에서 지낼 것이냐로 의논했다. 이네트는 그들이 저를 옆에 두고 떠들어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지크프리트와 단둘이 방에 남겨져 있었다. 그의 목소리엔 설렘과 기대가 가득했다.
“누이와 같이 자는 건 처음이야.”
“누이를 만나려고 제국의 일은 다 팽개치고 여기까지 왔어. 누이를 만나면 화를 내야지, 했는데…… 역시
난 누이에게 화낼 수 없나 봐.”
“…….”
“누이는 내가 미워?”
“왜 그랬어요, 지크프리트?”
“…….”
지크프리트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빠져나갔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이 이어질수록 그녀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웃음기가 싹 가신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제게 저런 표정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누이. 내가 무서워?”
“…….”
“……뭐라고요?”
“누이를 사랑해.”
그가 말하면서도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그래, 난 누이를
사랑해……. 그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녀는 경악했다.
이네트가 비명처럼 외쳤다. 그리고는 떠오른 기시감에 순간 몸을 멈칫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눈으로
외치던 카시엘 디에드반과, 사랑을 말하며 버리지 말라 빌었던 페르닌드 디에드반…….
그들 모두 이런 눈을 하고 있었다.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면 뭐야?”
“…….”
이제 더는 익숙해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할 수도, 다 괜찮을 거라는 희망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
“누이.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다시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누이가 도망갈 걸 대비해서 기사단을 데리고
왔으니까.”
“…….”
* * *
이네트가 배에서 할 일이라고는 시간을 죽이는 일밖에 없었다. 이곳에서는 에일과 함께 지낼 때처럼
산책을 한다든가, 말에게 여물을 먹인다거나, 인형을 만들 수 없었다.
문밖으로 발을 한 발자국 내딛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집중되는 이목에 나가고 싶은 마음은 흩날리는
눈발보다 못하게 사라져버렸다.
“이네트.”
“……이네트.”
……날 좀 봐줘.
불러도 반응하지 않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따금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황태자와 이야기를
나눌 때뿐이었다. 그조차 빌어먹을 간자 새끼를 두고 하는 협박 때문에 겨우 내뱉는 대답이었다.
에일, 그자의 목소리를 부르던 행복한 목소리 또한 환청처럼 어른거렸다. 그녀가 보이는 웃음과 밝은
목소리, 애정을 품은 눈빛 모두 제 것이 아닌 그 남자의 것이었다.
자신은 그녀의 행복을 훔쳐보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그조차 빼앗고, 짓밟아 없애버리고서…….
‘에일!’
카시엘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에 휩싸였다. 지금이라도 이네트를 보내주어야 할지, 아니면…… 그녀의
아픔을 모른 척하고 끝까지 곁에 둘지.
껍데기라도 좋아.
“늦었어요.”
“…….”
* * *
“…….”
“망루에라도 가보자. 너 여기서 나간 적 없잖아. 아직 바람이 차갑기는 하지만 참을 만해. 갈수록 햇볕도
뜨거워지고.”
“…….”
“이넷.”
“이네트 디에드반!”
페르닌드가 고함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고막이 울리는 큰 목소리에도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분한
듯 씩씩거리던 페르닌드가 젠장, 욕설을 중얼거리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응.”
그녀의 목에서 꽉 막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그마한 목소리임에도 알아들은 페르닌드가 후우,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가늘게 뜨인 눈 속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오르골을 내팽개치듯 침대에 던지며 그녀의 몸을 안아서 들어 올렸다. 그녀는 높아진 시야에 눈을
깜빡거리다 이내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는 눈을 감았다.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기라도 하듯 숨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뭘 봐. 눈 깔아.”
그가 기사들을 향해 뇌까리며 서슴없이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이네트는 차오르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몸을 부르르 떨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
햇빛에 반사된 파도가 반짝거리며 빛나더니, 이내 사라졌다. 잠잠하게 가라앉았던 수면에서 이윽고
또다시 파도가 넘실거렸다. 그때마다 포말 또한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잡아도 잡은 거 같지 않고…….”
“…….”
바스타드 왕국에서 보르비아 제국으로 넘어갈 때, 바다는 지겨울 정도로 숱하게 보았다. 파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에일이 옆에 있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나눠 가졌다. 그와 있으면 그저 바람결에 흔들리는 닻만 보아도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불안한 마음이
컸으나, 그와 당장 함께 있는 순간이 즐거웠으니까.
차라리 시름시름 앓다 이대로 죽었으면 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에일을 죽여 버린다고 했으니,
차라리 앓다 죽어버린다면…….
“이넷.”
“나, 많이 다쳤었는데.”
이네트는 고개조차 젓지 않았다. 게르단 대륙으로 떠나기 전만 해도 다쳤다는 페르닌드가 궁금해 얼굴을
보러 가기라도 했건만, 지금은 그런 마음 따위 언제 있었냐는 듯 일말의 걱정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널 두고 내가 어떻게 가겠어.”
“…….”
“……그때처럼 걱정해줘.”
잡히지도 않는 옛 시절을 이야기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었다. 순수했던 기억과 행복했던 추억을 더럽힌 건
바로 그였다.
* * *
“우욱.”
“누이, 못 먹겠어?”
그녀가 입술을 꾹 물었다. 제대로 식사하지 않으면 에일을 죽여 버리겠다는 그의 협박이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게 식사가 되지 않았다. 먹고 싶어도 몸이 음식을 받아주지 않고 속을 게워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몸의 반응이었다. 그가 당장이라도 배를 돌린다고 할까 두려워졌다.
“머, 먹을게요.”
이네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정박하면 다른 곳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져 제국으로 돌아갈 날이 더
늦춰진다.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괜찮아요.”
“……네.”
그가 그녀의 어깨를 껴안으며 입가를 손으로 닦아주었다. 그녀가 고개를 홱 뒤로 젖혔으나 그가 괜찮다는
듯 웃었다.
지크프리트와 달리 이네트는 정색한 채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자 그가 서서히 웃음을 그쳤다.
“욱.”
“흐으…….”
그가 그녀의 입가를 부드럽게 닦으며 물었다. 그녀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카시엘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갈수록 더 말라가는군…….”
아니겠지…….
아니어야 했다. 만약, 생각하는 그게 맞다면 그들이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곳에 온 뒤, 그들과
한 번도 관계를 가진 적 없으니까…….
아이를 바라보는 에일의 눈동자는 언제나 따스했다. 산책을 할 때마다 아이가 보이면 늘 ‘귀엽군요.’
라고 말하며 눈을 휘었다. 그의 다정한 눈빛을 떠올리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나는…… 행복했을까?
“이네트, 피가 나잖아.”
“내가 항상 네 편이 되어주겠다.”
“…….”
“그러니, 나를 이용해.”
* * *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 제국에 도착하기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이네트는 그다지 부르지 않은 배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른 팔다리에 비해 배가 납작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이상할 정도로
부른 것은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다.
“지크프리트!”
“지크!”
이내 이제는 부르지 않는 그의 애칭까지 부를 정도로 그녀의 마음이 궁지에 몰렸다. 아무리 뛰어다니며
불러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가 허탈한 표정으로 우뚝 선 채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안 돼…….”
눈을 질끈 감았다가 고개를 들자, 주변을 빙 둘러싼 기사들이 보였다. 기사들이 제각기 다양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옷과 검으로 무장한 기사들의 모습에 이네트가 겁을 질린 얼굴로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온몸의 피가 아래로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저 멀리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한 명, 아니 두 명…… 세 명. 이네트가
멍하니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이!”
“누이, 왜 그래?”
“아, 아…….”
“아, 안 돼요….”
“왜, 누이?”
지크프리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그럼에도 이네트가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녜요. 그럴 필요 없어요. 하루라도 빨리 제국에 도착하고 싶어요. 중간에 정박하지 말아요.”
“왜 그렇게 싫어하지?”
그가 눈을 휘었다.
휘어진 회색 눈이 반짝 빛났다. 웃음기가 서려 있지만 위험한 빛으로 반짝이는 눈빛에 이네트가 흐읍,
숨을 들이켜며 시선을 피했다. 지크프리트는 나직한 숨을 내쉬며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애써
눈을 내리깔고 있지만 동요가 엿보였다.
“그런 거… 없어요.”
“정말?”
“……없어요.”
그가 떨리는 이네트의 입술을 한 손으로 훔치며 물었다. 겁에 질린 이네트의 동공이 고양이처럼 커졌다.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던 카시엘과 페르닌드조차 이네트의 변화를 알아차릴 정도였다. 카시엘이
조심스레 그들 곁으로 다가와 지크프리트의 손을 이네트에게서 떨어트렸다. 지크프리트가 카시엘을 째릿
노려보았다.
“이네트.”
카시엘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도닥였다. 어깨를 마사지하듯 주무르자 그녀의
몸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황태자는 사람을 궁지로 모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황태자와 가까이 지내는 자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카시엘은 이네트가 무엇을 숨기든 그녀가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들추고 싶지 않았다. 허나
황태자는 달랐다. 그는 억지로라도 들추고 마는 이였다.
“임신했지?”
“뭐야, 임신?”
“임신이라고?”
아직 제국에 도착하려면 일주일은 더 남았는데…… 일주일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참아왔는데
…….
결국, 들키고 말았다. 그녀가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처럼 잔뜩 움츠린 채 고개를 떨구었다.
“이넷. 그 새끼 애야?”
“그 새끼 애냐고!”
“내 아이다.”
“……뭐?”
“뭐라고, 공작?”
“제 아이입니다. 전하.”
이네트가 아, 나직한 탄성을 내뱉었다. 카시엘이 떨리는 그녀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녀는 부드럽게
파고드는 손가락에 미약한 불쾌함을 느끼면서도 거부하지 못했다.
그가 부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우습다는 듯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누이가 디에드반 공작을 얼마나
혐오하고 경멸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누이가 디에드반 공작의 아이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누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잖아. 그대와 자발적으로 몸을 섞을 리가. 그대가 강제로 누이를
취한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건 결코 아닙니다.”
카시엘이 강력히 부정하자 지크프리트가 후후, 한숨과도 같은 웃음을 흘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아이가 아닌 에로드 데반의 아이인 게 확실하군. 그렇지, 누이? 내게 더는 거짓말해선
안 돼.”
질문의 화살이 이네트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차마, 제 입으로
카시엘의 아이라고 말하긴 힘들었다. 꼭…… 아이의 진짜 아버지인 에일을 배신하는 것 같아서…….
“디에드반 공작. 그대가 누이를 감싸기 위해 거짓말한 마음은 기껍지만… 주제를 넘었군.”
“…….”
“카시엘의 아이예요!”
“…뭐?”
“후.”
“하하, 하하하!”
지크프리트의 웃음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공기가 완전히 가라앉을 때서야 그가 웃음을 그치고 눈가를
훔쳤다.
“흐으…….”
이네트가 앓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공포, 두려움, 서글픔이 봇물 터지듯 심장을
뒤흔들었다. 동요를 보이지 않으려 해도 속이 턱, 막혀와 상체가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누이.”
“내가 미워서?”
“…….”
현악기의 현이 팽팽하게 당겨진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날카로운 공기가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지나친
긴장과 오랜 적막을 깬 것은 페르닌드였다.
“…….”
“말도 안 돼.”
페르닌드의 말이 맞았다. 허나 이네트는 이 순간만큼은 진실을 구태여 이야기하지 않고, 거짓이 진실로
굳어지기를 택했다. 페르닌드는 멍한 표정으로 카시엘의 품에 얼굴을 묻은 이네트와, 그녀와 손깍지를
끼고 있는 제 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이. 이리 와.”
“…….”
카시엘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는 이네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것을 알아차린 카시엘이 가지 말라는
듯 눈빛으로 그녀를 말렸으나, 그녀는 천천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누이는 내가 뭘 하든 밉지?”
“…….”
“내가 누이를 아무리 사랑하고 아껴도, 미움받지 않기 위해 아무리 애를 써도 누이에게 미움받을 거라면…
….”
“전하!”
“누이, 내게 키스해.”
“얼른.”
“읏…….”
이네트가 미약한 신음을 내며 눈을 찌푸렸다. 손가락이 입속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입천장을 긁고, 혀
밑을 세게 훑었다. 아픔과 희미한 쾌락이 뒤섞인 와중에도 그녀는 저를 바라보는 카시엘과 페르닌드의
시선에 수치심을 느꼈다. 지크프리트는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겹쳤다.
“시, 싫어….”
“으흑…….”
그녀가 황급히 입술을 닦았다. 붉어진 얼굴로 주변을 살피자 굳은 얼굴로 지크프리트를 노려보고 있는
카시엘의 옆모습이 보였다. 페르닌드 또한 형형한 기세로 지크프리트를 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네트가 젖은 입술을 손등에 묻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날의 실수를 이곳에서 언급하는 그의
저의가 눈에 뻔했다. 그녀의 자존심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카시엘과 페르닌드를 도발하기
위한 수작질이었다.
페르닌드는 그 도발에 보기 좋게 넘어갔다. 분노한 듯 살기 띤 눈으로 지크프리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지크프리트는 늘 그렇듯 미소를 매달았다.
“…….”
……미워하지 말라니, 그건 그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미워할 수밖에 행동한 것은 그였다.
괴롭게 하고,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고……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그였다. 선택지조차 주지 않았다.
* * *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야.”
“이네트, 괜찮나?”
카시엘이 질질 끌려가듯 힘이 빠진 그녀의 다리와 창백한 안색을 번갈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이네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프리트는 이네트의 손을 쥐고서 가벼운 손장난을 쳤고, 카시엘은 묵묵히 팔짱을 낀 채 그녀의 손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멍하니 페르닌드의 정수리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둘러 싼 이들의 체온
때문에 잠이 슬슬 몰려왔다.
이네트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지나간 감정을 덧그려 보아도 이상하게도 그 시절 느꼈던 깨끗한 감정은
죽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텅 비어버린 제 감정에 위화감을 느꼈다.
이제 더는 페르닌드를 보아도 전과 같은 증오와 불타는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희미한 불쾌와 진절머리,
성가심……. 그런 자질구레한 티끌 같은 감정만 남았다.
그를 향한 증오와 경멸조차 식어버린 걸까. 아니면 지나친 배신감 때문에 그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져 버린
걸까.
“……이넷?”
“나 보고 있었어?”
“……미안해.”
페르닌드가 지나가는 바람결처럼 읊조렸다.
“미안해, 이넷.”
“…….”
“미안…….”
이제 와서. 이네트는 비웃음조차 머금지 않았다. 그저 감정이 사라져 버린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차라리 화를 내줘.”
“…….”
절대로 그들이 바라는 걸 주지 않겠노라. 페르닌드는 어떻게든 반응을 이끌어 내고자 이전부터 노력해왔다.
그가 원하는 것이 제 반응이라면 결코 줄 생각이 없었다.
“윽…….”
“…….”
“…….”
그가 싱긋 웃었다.
지크프리트가 떠나자 페르닌드가 기다렸다는 듯 이네트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품에 뺨을 묻었다.
카시엘은 아까처럼 이네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는 눈치를 보듯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이네트는 그가 제게 기대든 말든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저 시간이 가기만을
바라는 사람처럼. 인형 같은 모습에 카시엘이 더는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디에드반 공작 저택에 도착했다. 이네트는 익숙한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정말로 일리아드 제국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이곳은 에벨루넨 대륙의 살얼음 같은 추위도 없고, 숨을 내쉬면 나는 허연 입김도 없었다. 그리고……
에일이 없었다.
이네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에일이 없다는 걸 실감할 때마다 솟구치는 슬픔을 그녀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다. 카시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울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손가락으로
그녀의 젖은 뺨을 쓸어내렸다.
* * *
공작 저택의 사용인들이 돌아온 안주인을 기쁜 얼굴로 맞이했다. 이네트는 연신 다행이라고 말하며 반갑게
맞이하는 그들을 보며 의구심을 품었다. 그렇게 잘해주지도 않았는데 왜 저렇게 기쁜 얼굴로 맞이할까
싶어서.
페르닌드가 부득불 이네트가 지내는 방까지 따라 들어오려 했으나, 카시엘이 완강히 저지했다. 그녀는
그들이 무어라 다투든 짐을 든 사용인과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사용인은 구석에 짐을 내려놓고는 곧바로 허리를 숙인 다음 자리를 피했다. 피곤한 안주인의 기색을 눈치
빠르게 파악한 것이었다.
“……이네트.”
“…….”
“욕조에 물을 받아줄까?”
이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시엘은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다, 이내 혼자서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물을 받는 소리가 들렸다. 이네트는 등 너머로 들리는 물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에 들려고 애썼다.
노력에도 잠은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에일과 매일 밤마다 들었던 오르골 소리를 들으면 잘 수 있을까? 이네트가 아까 사용인이 가져다준 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인형과 오르골을 들고 침대로 향했다. 머리맡에 인형과 오르골을 두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겨우 이런 것이라도 그가 남긴 흔적이 있다는 것이 행복해서…….
오르골 소리가 끝나기 전에 욕실에 들어갔던 카시엘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씻은 건 아닌지 머리카락이
젖어 있지 않았다. 그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오르골과 침대 맡에 놓인 인형을 흘긋 보더니 이네트의 이름을
불렀다.
“이네트.”
“물 온도는 괜찮나?”
“…….”
“고개를 뒤로 젖혀줘.”
얼마간 마사지를 하던 그가 머리에 비누칠을 했다. 그녀가 가만히 있자 비누칠한 머리카락을 따스한 물로
헹구어 주었다.
“…….”
“…….”
“잔존 세력을 이전부터 뿌리 뽑으려고 유망한 기사들을 여럿 파견했지만 생각보다 성과가 없어, 그들의
거점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페르닌드를 보내야 될 듯해. 아마 가게 된다면…… 적어도 3 년은 그곳에 있을
거다.”
“…….”
이네트가 속으로 실소를 내뱉었다. 카시엘이 대답을 바라듯 그녀를 계속해서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물이
차게 식어버릴 때까지 욕조에 앉아 입을 열지 않았다.
“…….”
“장작을 피울까?”
“…….”
“피우겠다.”
“……이네트?”
그녀가 젖은 머리를 스스로 털어서 닦으며 욕실 밖으로 나갔다.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를 두고 나가는
이네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쳐냄과 동시에 짝, 소리가 들리며 그의 손등에 발간 자국이 남았다. 그는 돌아선 그녀의 등과 발갛게
달아오른 제 손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알아.”
카시엘이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래도…… 괜찮다.”
껍데기라도 좋아.
* * *
카시엘이 방을 찾아올 때부터 불편한 심기를 내보이던 페르닌드가 인상을 확 찌푸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카시엘은 예상했다는 듯 덤덤한 얼굴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거긴 하디랑 세드릭, 로울이 가 있잖아? 왜 이제야 날 보내려는 건데?”
카시엘은 부정하지 않았다. 분노하는 페르닌드의 눈동자를 본 그가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하, 그 말을 믿어? 형한테는 그렇게 말해놓고 나한테 와서는 내가 보고 싶다고 했어. 이미 알면서 왜
그래?”
“…….”
단도였다. 페르닌드가 단도의 날집을 바닥에다 팽개치고는 단도를 꽉 쥐었다. 은색 날이 날카롭게 빛났다.
비록 짧지만 충분히 사람을 죽이는 게 가능한 무기였다.
“진정해라, 페르닌드!”
“형은 다 가졌잖아! 검 실력도, 단장의 자리도, 작위도! 다 가진 주제에 내게서 이네트까지 빼앗아
가려고?”
카시엘은 결국 공격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지우고 맨주먹으로 페르닌드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날을 피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윽.”
“제기랄!”
“악!”
오른쪽 손목을 가격당한 페르닌드가 신음과 함께 단도를 놓쳤다. 챙, 소리와 함께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페르닌드가 분한 듯 씩씩거리더니 이내 다시 단도를 쥐기 위해 몸을 수그렸다. 허나 카시엘이
좀 더 빨랐다.
“페르닌드, 그만해.”
수그린 몸을 일으킨 페르닌드가 카시엘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카시엘은 그 시선을 마주하다, 짧은 한숨과
함께 눈을 허공으로 돌렸다.
“……이네트?”
모습이 다 보이지 않아도 카시엘은 그 인영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문틈 사이에 있는 이의 이름을 부르자,
페르닌드가 숨을 헉, 들이키며 눈을 크게 키웠다.
살짝 열려 있는 문틈이 완전히 열렸다. 이네트가 방 안으로 발을 들이며 바닥에 떨어진 단도와 카시엘,
그리고 페르닌드를 천천히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 언제부터…….”
형제와 단도를 몇 번이고 번갈아 바라보던 이네트가 단도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의 시선이 그곳에 오래
머물자 페르닌드가 어쩔 줄 몰라 했다.
페르닌드가 황급히 단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단도를 주워 쥐고선 재빨리 칼집에 단도의 날을 숨겼다.
그리고는 또다시 기가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
“……내가 왜?”
“어……?”
“왜, 왜…….”
“…….”
“널 위해 보러 간 게 아니야.”
“…….”
잊히지 않는 지하실의 기억, 억압하는 그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제
마음…….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지하실에서 강간당한 순간? 카시엘과의 결혼이 정해진 순간? 피투성이가
된 에일을 본 순간? 에일과 함께할 수 있었던 행복이 짓밟히고, 협박으로 제국으로 향하는 배에 탄 순간?
그녀는 자신이 망가지고 짓밟힌 순간을 떠올렸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꼭 제 것 같지 않았다.
그 속의 자신은 언제나 울면서 빌고, 왜 그러는 거냐고 울부짖고 있었다. 울부짖음은 모두 묵살 당했다.
‘사랑해.’
자신을 강제한 셋 모두 사랑을 말했다. 사랑……. 이네트는 입속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사랑
…….
“…….”
내가 죽인 거구나. 내가…….
이네트의 옷자락을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낯빛이 초라하게 시들며, 페르닌드의 새파란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잃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요, 용서해줘…….”
“…….”
페르닌드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용서를 빌었다. 이네트는 뒤돌아보지 않고 망설임 없이 방 밖으로
나갔다. 페르닌드가 엉금엉금 기면서 계속해서 용서를 빌었다.
이전의 이네트는 이렇지 않았다. 원망을 드러내고, 원하는 것을 호소했다. 허나 이젠 그렇지 않았다.
모서리부터 차츰차츰 닳기 시작해 결국 모두 닳아 없어진 사람처럼…… 그녀가 희미해 보였다. 그것이
그를 무척 두렵게 만들었다.
“이네트, 난 두려워.”
“…….”
“알잖아요. 당신 아이 아닌 거.”
말을 이으려던 이네트가 돌연 말을 멈췄다. 그녀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허공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가
옅은 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 부질없어.”
* * *
“…….”
“저는 화가가 그린 줄 알았지, 주인님께서 그리셨을 줄 꿈에도 몰랐지 뭡니까.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검 실력뿐만 아니라 그림 실력까지 뛰어나시다니. 대단하신 분입니다.”
집사가 다가와 흐뭇한 얼굴로 떠들었다.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데도 이네트의 시선은 초상화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저게 나인가?
있었다.
에일과 함께 있어서가 아닌, 본연의 자신으로 있었던 그때.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었던 그때.
“아, 아…….”
“마님?”
“흐으…… 흐…….”
이네트가 소리죽여 오열했다. 가슴을 쥐어뜯던 그녀가 몸을 허물어뜨리곤 손톱으로 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마음속의 무언가 완전히 죽었다. 다시는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없다. 설령 카시엘의 말대로 에일이 제게
돌아온다 해도 죽어버린 마음은 회생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정신이 뿌리째 흔들렸다.
“아아…… 아…….”
그녀의 유리알 눈에서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계속해서 울던 그녀는 결국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마님께서 미치셨다.
이네트가 길길이 날뛰던 광경을 본 사용인들이 모두 그리 떠들었고, 저택으로 돌아온 카시엘 디에드반은
일을 전해 듣자마자 일부를 제외한 사용인 대부분을 해고했다.
* * *
“누이.”
“…….”
누이가 미치길 바라서 다시 데려온 건 아니었다. 계획이 이런 식으로 틀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가 바랐던 결말은 이런 게 아니었다.
배 안에서도 그렇고, 일리아드 제국으로 막 도착했을 때도 그렇고 멀쩡해 보이던 누이가 갑자기 정신이
이상해졌으니, 그는 이 모든 게 공작의 탓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간에서는 미쳐버린 부인과 이혼하지 않고 성심성의껏 돌보는 공작을 애처가라고 칭송했다. 지크프리트는
그 사실이 몹시도 못마땅했다.
“…….”
“조금만 더 봐주지…….”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누이에게 애원하는가 싶다가도, 누이이기에 가능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누이니까 괜찮아.
백합을 꽂은 화병을 들고서 이네트의 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녀는 제 방 창가에 놓이는 흰 백합과 붉은
백합을 빤히 바라보았다.
“…….”
이네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꽃을 바라보던 그녀가 서서히 침대에 몸을 뉘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죽은 듯이 숨만 쉬었다.
* * *
“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이네트가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흐릿한 정신이 단박에 차려질 정도로 예리한
통증이 배에서 느껴졌다. 그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흐읏…….”
“으으흑…….”
예상했던 출산일보다 빠르게 찾아온 진통이었다. 그녀는 예고 없는 통증에 괴로운 신음을 냈다.
지나친 고통에 눈앞이 흐려졌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시트를 쥐어뜯고 몸을 이리저리 구부려
보아도 고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아파, 아파…….”
그녀가 헐떡거리며 중얼거렸다. 다리 사이의 무언가 펑,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미지근한 액체가
허벅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계를 넘어선 고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네트가 겨우 고개를 내려 젖은 허벅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줄줄 새고 있었다. 머리가 핑, 하고 돌았다. 허나 그래도 줄을 흔들지 않았다.
“이네트!”
“정신 차려!”
“왜… 울어…요?”
이네트가 통증과 신음을 삼키며 물었다. 카시엘이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산파와 의원이 번갈아 외쳤다. 카시엘이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괴로워했다.
“뭐가 됐든 산모부터 살려. 아이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아아악!”
지나친 통증에 차라리 의식을 잃고 싶었다. 힘을 주세요, 조금만 더, 산파와 의원의 목소리가 뒤죽박죽
섞였다. 그 사이로 카시엘이 흐느끼며 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
‘…….’
아. 안 돼. 이네트, 너만은…….
죽지 않았다…….
의원이 서둘러 지혈 작업을 시작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산파가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아이를
이네트와 카시엘에게 보였다.
“예쁜 따님이십니다.”
“……안 죽었어요?”
“이네트!”
카시엘이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네트가 눈물이 말라붙은 카시엘의 뺨을 흘긋
보았다가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산파가 별거 아니란 듯이 말하며 카시엘을 향해 아이를 건네주었다. 그제야 그가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죽은 채 나왔던 제 여동생보다 크고 울긋불긋했다.
“이네트, 우리 딸이야.”
“…….”
“아이를 한 번 안아줘.”
“이네트, 우선 다른 방으로 옮기도록 하지. 산방이 아닌 네 방에서 출산을 했으니……. 이봐, 아이를
유모에게 주도록 해.”
그가 아이를 산파에게 건넸다. 산파는 아이를 안아 들고선 아연한 얼굴로 우뚝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원과 함께 방 밖으로 나섰다.
“죽게 해줘요.”
“그럼 나도 따라가겠다.”
“…….”
이네트가 피식 웃었다. 자조적인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번졌다. 어차피 죽고 싶어도 자신은 죽지 못한다.
스스로 죽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겁쟁이니까.
* * *
“누이!”
“왜 그래, 누이?”
“…….”
그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에반젤린입니다, 전하.”
“누이가 지은 이름이야?”
“아뇨, 제가 지었습니다.”
카시엘이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반젤린 디에드반. 아이에 관심 없는 이네트를 대신해 카시엘이
지은 이름이었다. 이네트는 아이의 이름이 에반젤린이라는 말을 들어도 듣지 못한 척 반응하지 않았다.
알겠노라는 대답도 없었다.
부드러운 어조에 그렇지 않은 신랄한 언어였다. 이네트는 시선을 내리깔며 시트를 거머쥐었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뒤흔드는 저자가 그저 끔찍했다.
후후, 그가 산들바람 같은 미소를 흩뿌리며 즐거워했다. 그가 떠나기 전까지, 카시엘과 이네트는 얼굴에
내려앉은 그늘을 지우지 못했다.
* * *
이네트는 아이를 보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볼 때마다 휩싸이는 이상한 감정을 또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카시엘이 물었다. 이네트는 대답 없이 시선을 사선으로 비꼈다. 싫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중에서 딱 하나 확실한 건, 아이를 보고 싶지 않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카시엘은 아이에게 어미의 사랑을 알려주고 싶었다. 아이에겐…… 죄가 없었다.
죄인이라면 그였다. 죄 없는 아이가 미움의 대상이 되는 건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카시엘이 애처로이 중얼거리며 이네트에게 아이를 건넸다. 그녀는 고집스레 시선을 주지 않다가, 스치듯
아이의 녹색 눈을 보고선 잠깐 숨을 멈췄다.
그녀가 천천히,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망설이던 그녀가 마침내 눈물을 주륵 흘리며 아이를 품에
안았다. 껴안은 두 손이 잘게 떨렸다. 아이는 어미의 품에 안기자 잠든 듯이 조용해졌다.
“……이네트.”
카시엘이 다가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는 그녀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이를 안으니 뒤늦게 모정이 살아나서? 아니면, 그 남자와의 아이라는 사실이 상기되어서? 그녀에게
묻지 않는 이상 정확한 답을 알 수 없었다.
그가 부러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이가 기어 다니고, 걷고, 말을 하는 게 상상되지 않나? 분명히 널 닮아서 아이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울
거야.”
언제나 고아했던 남자가 어느 때보다 초라한 모습으로 허물어졌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비쳤다. 그녀는 그를 보지 않았다.
“이네트, 제발…….”
“…….”
하나둘, 하나둘, 차츰차츰 잃다가 마지막 보루마저 잃고 적진에 홀로 남겨진 패잔병처럼 짙은 허무가
내려앉은 얼굴이었다.
―넌 내게 보루가 되지 못하는구나.
에필로그. 안개와 속박
“그렇지 않아.”
“정말요?!”
“…….”
“에반젤린 디에드반.”
“그래.”
에반젤린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걷는데, 저 멀리 삼촌이 보였다.
“지크프리트 삼촌!”
“응! 삼촌!”
그가 자연스럽게 에반젤린을 품에 안아 들었다. 에반젤린이 방긋방긋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 보고 싶었어?”
에반젤린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아버지가 삼촌이 황제가 되었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삼촌은 황제가 된 후로 저택 방문이 뜸해졌다. 서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가 언제나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으니까.
하지만 가더라도 다카르를 자주 볼 순 없었다. 아나스타시아 이모가 지크프리트 삼촌과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자신까지 모두 미워했기 때문이었다.
에반젤린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는 왜 아나스타시아 이모가 모두를 미워하는 건지,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왜 제게 설명해 주지 않는 걸까? 비밀이라고 말해주면 될 텐데. 나는 이제 더는 아기가
아닌데!
“착하네.”
에반젤린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제 방이 있는 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이야기를 엿듣는 건 나쁜 짓이라고 유모가 그랬지만, 에반젤린은 궁금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고민은
짧았다. 에반젤린이 다시 아버지와 삼촌이 있는 층으로 후다닥 올라갔다.
방문이 가까워질수록 나쁜 짓을 한다는 마음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문에 귀를 댔다.
“…아…도 그 남자…….”
“하아. 누이의 상태가 괜찮아지긴 하는 거야?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
“응? 죽였는데.”
“……뭐라고요?”
“죽였다고.”
“어떻게, 그런…….”
“기쁘시겠어요, 공녀님.”
“응! 정말 좋아!”
어머니가 어색하고 어렵긴 했지만, 에반젤린은 여전히 어머니가 좋았다. 이따금 어머니가 가끔 다정한
눈으로 바라볼 때도 있었던 것이다. 그 눈빛이 어딘지 슬퍼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에반젤린은 그런
눈빛으로라도 자신을 바라봐주는 게 좋았다. 어머니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다.
“그래? 그렇겠지?”
“네…….”
마차에 올라탈 때가 되자, 카시엘이 에반젤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에반젤린이 의아해하며 아버지를
올려다보자, 아버지가 마치 풋맨처럼 마차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에반젤린이 놀라 숨을 헉,
들이켰다.
마차는 곧바로 번화가로 향했다. 그동안 마차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에반젤린이 이따금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지만, 대화가 길게 이어지진 못했다.
“……네.”
“에반젤린!”
카시엘이 꾸짖듯 낮은 목소리로 불렀으나, 에반젤린은 주변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왁자지껄한
주변과 저 멀리 보이는 말의 모습이 에반젤린의 가슴을 뛰게 했다.
카시엘은 한숨을 후우, 쉬며 우선 이네트를 부축하여 마차 밖으로 내리게 했다. 그리고는 에반젤린이
마음대로 뛰어다니기 전에 품에 단단히 껴안았다.
“악, 아버지!”
에반젤린이 품 안에서 바동거렸으나 카시엘은 놓아주지 않았다. 이네트는 무감한 표정으로 경마장 주변을
빙 둘러볼 뿐이었다.
“이네트. 미안해.”
외전. 녹음의 균열
에반젤린 디에드반은 저를 둘러싼 꽃밭 속에서 행복하게 자랐다. 모두가 활달하고 아름다운 그녀를
사랑스럽게 여겼다. 무도회에 참석할 때도 그녀는 뭇 남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놈은 이래서 안 된다, 저놈은 저래서 안 된다, 안 되는 이유가 너무 많았다. 그 이유도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에반젤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뭐가 좋다고 저렇게 어머니만 바라보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아무리 표현하고 애정을 쏟아부어도 애정에 보답하기는커녕 싸늘할 때가 더
많은데. 물론 어렸을 때보다야 나아졌다지만, 에반젤린 눈에는 어머니가 여전히 차가워보였다.
“들어와요, 삼촌.”
‘그래. 알고 있어.’
아버지도 그렇고, 지크프리트 삼촌도 그렇고, 페르닌드 삼촌도 그렇고…… 왜 그렇게 어머니를 좋아할까?
에반젤린은 마냥 차갑기만 한 어머니를 좋아하는 세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크프리트 삼촌은
어머니와 남매 사이니까 아끼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와 페르닌드 삼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방적인 애정을 그렇게 쏟아붓는 게 지치지도 않는지, 참…….
“그래… 맞아.”
“응. 그때 봐.”
* * *
“다카르! 어서 와!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그게 그거지.”
“조금 달라요.”
“아…….”
“응….”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저 혼자만 마시긴 뭣했다. 에반젤린은 다음부터는 다카르가 마시는 차로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에반젤린이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의 말대로 어쩌면 정답을 바로 알려줄 이들에게 물으러 가지 않았다.
무슨 감정에서 기인한 건지 모를 두려움과 회피가 용기를 어그러트렸기 때문이었다.
나라가 건국된 날을 기념하여 열리는 연회였다. 건국제는 모든 황궁 연회를 통틀어 가장 성대하게 열렸다.
허나 아버지께선 이번 년만큼은 절대로 참석하지 말라 일렀다. 이유를 물어도 답해주지 않고, 절대로
참석하지 말라고 강조하기만 했다. 괜히 청개구리 심보만 치솟았다.
“기대해도 좋아요.”
* * *
건국제는 성대하게 열렸다. 이날은 황궁에서 열리는 건국제뿐만 아니라 제국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귀족이고 평민이고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축제를 즐겼다.
에반젤린은 건국제도 좋았지만, 한 번쯤은 평민들의 축제에도 참여하고 싶었다. 친구 릴리엔이 말하기를,
평민들의 건국제 축제는 귀족들이 참여하는 그것과는 사뭇 분위기도 다르고 훨씬 즐겁다고 했다. 남녀가
길거리로 나와 신나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에반젤린은 자유로운 분위기의 축제가 좋았다. 귀족들이 품위니 명예니 따지며 리르넷과 에데이아를 추는
게 어쩔 땐 가식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에반젤린은 흘긋,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오늘도 어머니를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머니가 스푼을 들고 수프를 떠먹기만 해도 감격한 듯 바라보곤 했다. 에반젤린이 생각하기에
아버지는 좀 중증이었다.
“…네.”
아버지의 눈이 어머니의 얼굴과 몸 이곳저곳에 닿았다. 눈빛엔 걱정과 염려가 가득 묻어났다. 아무래도
과보호는 아버지의 천성인 듯했다. 저뿐만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저리 심한 걸 보면.
“저 먼저 일어날게요.”
“그래, 이브.”
아버지께서 대답하고는 다시 어머니의 상태를 살폈다. 에휴, 에반젤린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식당 밖으로
나갔다.
“어서 출발해!”
지크프리트 삼촌이 농담처럼 의회에서 늘 “차기 황제는 에반젤린 디에드반이야.”라고 떠들어댔던 것이다.
농담도 한두 번이어야 농담이지, 그 말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모두들 황제 폐하께서 차기 황제로 에반젤린
디에드반 공녀를 생각하고 있노라 쑥덕거렸다.
하지만 에반젤린이 황제가 되기엔 정통성에 큰 문제가 있었다. 에반젤린의 어미, 이네트 디에드반이
선황제의 사생아라는 점 때문이었다. 비천한 평민의 피를 반이나 가졌으니, 반쪽짜리 황족이라는 좋지
않은 별칭까지 쉬쉬 돌았다.
하지만 지크프리트 삼촌은 진심인지 “다음 황제는 너야, 조카야.” 하고 에반젤린에게도 헛소리를
지껄였다. 정말이지 농담으로라도 듣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
“꺄아아아아악!”
“아, 아, 아아아악!”
곧이어 학살이 시작되었다. 비명소리, 사람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 누군가 부리나케 도망치는 소리,
그러다 다시 잡혀 검에 베이는 소리, 소리, 소리…… 수많은 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점령했다.
에반젤린은 이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그 어떤 사고도 되지 않았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바위처럼 굳어서는 다리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카르…….”
“다카르. 너, 왜 그래……?”
“뭐가요, 이브?”
“사, 삼촌이 죽었다니까? 왜 놀라지 않아? 왜 아무렇지 않아? 아무리 삼촌과 사이가 좋지 않았어도……
그래도 가족이 죽었잖아.”
“맞아요.”
왜?
“다카르, 어째서…….”
“이브, 그거 알아요? 제국의 황족은 사촌끼리 결혼이 가능해요. 8 대 황제도 사촌누이를 황후로
맞이한걸요.”
“이브는 정말 순수해요. 자유롭고, 생명력 넘치고, 사랑스럽고. 그래서 어리석게도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공작과 공작부인은 무사히 집에 계시니 안심해요. 아마 이브가 없어진 걸 알고서 찾으러 오시겠지만.”
“싫어, 싫어!”
에반젤린이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싫다고 했잖아, 싫어. 집에 갈래. 더는 여기 있기 싫어.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아…….”
“…….”
다카르가 에반젤린의 몸을 고쳐 안으며 속삭이듯 괜찮냐고 물었다. 에반젤린은 멍하니 금붕어처럼 입술만
빠끔거렸다.
* * *
새 황제의 즉위식이 열렸다. 아나스타시아 마르델 아르비스, 황녀의 즉위였다. 친동생을 죽인 황제, 피로
물든 여제, 온갖 부정한 수식어가 따라붙었으나 아무도 그녀의 즉위를 무르지 못했다.
* * *
에반젤린 디에드반은 이제 더는 예전처럼 어머니와 아버지를 바라볼 수 없었다. 더는 아버지가 아버지로
보이지 않았다.
에반젤린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때껏 아버지! 하고 외칠 때마다 보였던 어머니의 싸늘한 표정,
가끔씩 저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슬픈 눈동자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건, 나였다.
에반젤린은 눈을 꾹 감았다. 아버지는 다카르와의 결혼을 무척이나 반대했다. 절대로 허락할 수 없노라고
아버지답지 않게 크게 화를 냈다. 허나 그녀는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에도 뜻을 무르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정면을 보자, 거울에 비친 제 모습과 다가온 다카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뒤에서 껴안으며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처음에는 오랫동안 아끼는 동생으로 여겨왔기에, 다카르의 스킨십이 불편하고 어색했으나…… 이젠 그렇지
않았다.
“읏….”
아프게 주무르는 손길에 신음이 절로 나왔다.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자 뒤통수가 그의 배와 부딪혔다.
그가 다른 손으로 젖혀진 그녀의 턱을 쓰다듬었다. 꼭 강아지를 예뻐하듯이. 이젠 이런 손길도 익숙했다.
“으응, 아….”
그가 옷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완전히 드러난 알몸에 에반젤린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저히 정면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와 제 모습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였다.
“벌려요, 이브.”
“어서.”
“착하네요.”
“아흐응!”
“흐읏, 응… 시, 싫어….”
“어서, 이브.”
그가 허벅지를 가볍게 찰싹, 내리쳤다. 아흑! 에반젤린이 신음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다카르가 제 다리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개처럼 흘레붙은 모습이 거울 속에 보였다. 자신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더없이
음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흐읏, 흐…….”
“흑, 흐윽….”
귀두가 입구를 문질러댔다. 은근한 감촉에 에반젤린이 보채듯 흐응, 신음하며 엉덩이를 위로 들었다.
어느새 거울 속에 비치는 제 음란한 모습에도 무뎌졌다.
다카르가 계속해서 에반젤린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는 다정하기 짝이 없었으나, 움직이는 아래는
거칠고 빨랐다.
“이브가 딴 놈과 결혼할까봐, 헉… 얼마나, 걱정, 후우… 했는지… 몰라요.”
“아흑, 아!”
‘에반젤린…….’
“흐읏, 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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