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빙크 비평적 전기, 제임스 에글린턴 (남상수, Ph.D. 3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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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빙크 비평적 전기 (제임스 에글린턴)

[BAVINCK: A Critical Biography]


수업: 계시철학(박재은 교수)
발제: 남상수(Ph.D. 3학기)

1. 내용요약

제임스 에글린턴(James Eglinton)은 헤르만 바빙크(1854-1921)의 전기를 새롭게 출간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은 다른 작가들과 달리 더욱 적합한 관점을 가졌다고 보기 때문이
다. 저자는 바빙크를 단순히 뛰어난 신학자로만 보지 않고, 그의 폭넓은 박식함 뿐 아니라, 그
가 살았던 시대적인 다양한 상황과 영역에서 왕성하게 활동을 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바빙크를 단지 신학의 사유나 교리적인 틀에 매여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지성주의자로


보지 않는다. 실제로 바빙크는 심리학의 개척자였으며, 교육학적으로도 개혁자였으며, 여성 교
육의 대변자, 여성 참정권 옹호자, 의회의원, 저널리스트 등 이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
으며, 그의 영향력은 오늘날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작품을 통해서 미치고 있다.

바빙크의 가정적인 배경이 그의 사역과 삶,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은 당연하다. 그의 가문


은 19세기 초 네덜란드 개혁교회(the Dutch Reformed Church)를 떠난 이전의 비밀 교단에
속해 있었고, 종교적인 이견 때문에 바빙크가 출생하기 전까지 국가 주도의 박해에 직면했었
다. 이에 그들은 고립되어 사회에서 성공할 가망이 없었던 상태였다.

이런 점에 저자는 주목한다. 바빙크가 출생할 때 네덜란드는 자발적으로 자유 민주주의 사


회 이념에 접어들기 시작했고, 기회, 평등, 자유의 새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바빙크는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바빙크는 전기 작가들의 구미를 당겼고, 그에 대한 여러 전기
가 출간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전기를 통해 ‘바빙크 새롭게 읽기’가 그동안 제기되어온
가설들에 대한 도전의 일환으로 그 정당성을 주장한다.

저자는 지금까지 바빙크를 다룬 전기 작품들이 그를 “지킬 앤 하이드”(Jekyll and Hyde)


로 부르며, 그에 대해 개념이 모호한 용어들에 의존하고 있다고 보았다. 즉 바빙크를 ‘보수적
칼빈주의 정통’과 ‘현대주의’ 사이의 흔치 않은 조합으로 보면서, 그를 ‘두 개의 분리된 헤르
만 바빙크’로 이해하여, ‘정통적 바빙크’와 ‘현대적 바빙크’라는 식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두
개의 충돌되는 헤르만 바빙크는 서로 반대되고 모순되는 힘으로 인해 한 방향을 결정하지 못
했다는 생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생각들은 저자로 하여금 바빙크 연구에 대한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바빙크에 대한
두 개의 분리된 이해들은 곧 바빙크의 사상에 대한 다양한 구별과 해석을 낳게 되었다. 하지
만 저자는 이러한 시각들에 의문을 품게 된다. 바빙크의 작품들을 그렇게 파편화하는 것은 그
의 사상의 통일성과 유기적인 이해와는 맥을 같이 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바빙크에 대한 저자의 이러한 시각은 그의 책 『삼위일체와 유기체』(Trinity and


Organism)에 잘 반영되었다. 이 책에서 바빙크 신학의 고유한 시각적인 범위에 대해서 질문
을 던지면서 바빙크 내면에서 정통성과 현대성이 모종의 비평적인 균형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 했다.

저자는 다양한 방식 속에서 신적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바빙크의 신론이 함의하


는 구체적인 미묘함을 다루면서, 이 구체적인 미묘함이 바빙크로 하여금 다양한 부분들이 유
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세상 속의 구체적적인 시각으로 발전하게 만드는 범주를 창출해냈다
는 확장된 논지를 전개한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책의 중심 원리를 “내재적 삼위일체 신학이 외재적 유기체의 우주론
을 이끈다”라고 정의한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바빙크의 이해이며, 그를 통한 세계관과 그
세계관을 통과하면서 세상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자기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게 하는지에
대해 통찰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므로 저자의 책, 『삼위일체와 유기체』은 다른 전기 작가들과
달리 자신만의 독특하고 단단한 해석을 보여주는 ‘새로운 바빙크 읽기’인 셈이다.

저자의 시각에서 바빙크는 더 이상 “지킬 앤 하이드”(Jekyll and Hyde)가 아니다. 도리어


그의 책 ‘삼위일체와 유기체’는 바빙크의 생각 속의 긴장들로부터 나오는 어려운 현실을 부정
하지 않고서도 바빙크를 창조적인 사상가, 즉 신학적 상상력을 가지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구별되는 표현을 자신의 현대적 환경 가운데 마음속에 그리는 인물로 그려낸 것이다. 따라서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두 바빙크들” 모델은 실패이고,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청
되므로 바빙크 읽기에 바른 시각과 해석을 그의 책 ‘삼위일체와 유기체’을 통해서 제시한다.

그리고 저자는 ‘신학자’로서 바빙크보다 바빙크의 ‘신학’에 관심을 기울인다. 바빙크를 긴


장하게 했던 그 신학적 체계의 작동 방식들이 무엇인지가 그에게 더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
이다. 또한 저자는 자신의 책 ‘삼위일체와 유기체’이 바빙크의 사상을 다양한 영역에서 탐구되
는 수많은 신학적 속편 연구들을 낳았다고 자평하면서도, ‘두 바빙크들’ 해석과 이론을 능가하
면서 어떤 독특한 형태를 지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전기가 기존의 전기들과 비교했을 때 차이점을 가진다는 점도 지적한다.


저자의 기획은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빙크의 개인의 삶의 이야기가 신학
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가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정통적인 삶을 살아간 것이 어떻게 가
능했는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의 기획은 바빙크를 더욱 바빙크답게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그는 바빙크의 모든 토대


와 확신들을 무시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바빙크를 독자들의 다양한 관점에 맞추려고도
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다양한 독자들의 관점이나 입장들에 대해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로움으로 인해서 바빙크의 삶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며, 더욱이 바빙크의
신학적 관점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시도라고 자평한다.

저자는 이 전기에서 세 가지의 핵심 용어로 헤르만 바빙크의 생애와 시대를 이야기 한다.
현대(modern), 정통(orthodox), 학문(science)가 그것들이다.
첫째, 현대의(modern) 주제는 1848년의 사건을 통해서, 네덜란드의 근대 초기(early
modern)의 마지막 단계가 근대 후기(late modern)에 길을 내주었는데, “현대 유럽 문
화”(modern European culture)로 칭해지는 특정 시기로부터 다른 시기로 이동이 있던 시기
가 바빙크의 삶을 풍성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근대(modern)를 다루는 방식을 “복수의 현대성”(multiple modernities) 개


념1)에 많이 기대고 있다. “근대화”(modernization)는 무수히 많은 방식이 실현되는 과정이
다. 이러한 현대화의 과정 가운데 바빙크는 보수적인 칼빈주의 신학자였지만, 유럽인이기도
했다.

1) 슈무엘 노아 아이젠슈타트(Shmuel Noah Eisenstadt)가 주장한 개념.


둘째, 정통(orthodox)의 주제를 통해서 바빙크 전 생애에 걸쳐 유지되어온 지적, 신학적,
교회적 헌신을 보여주려 한다. 정통이라는 용어는 기독교 2천 년에 걸쳐 형성된 문서, 신조,
신경, 기관(교회)과 역사적 네덜란드 개혁신학 전통의 독특한 맥락에 순종하려는 바빙크의 충
성과 의욕을 지칭한다.

셋째, 학문(science)이라는 용어도 바빙크의 삶을 설명하는데 핵심 역할을 한다. 이 단어는


사색적 지식의 고등 형태를 폭넓게 다루며, 신학 같은 인문학 분야도 물리학, 화학, 생물학처
럼 묘사한다. 바빙크 자신도 이런 언어적 차이에 대해 의식했으며, 자연과학에만 특권을 부여
하는 영어의 경향성을 비판했던 것이다. 에글린턴은 이러한 정의들로 바빙크를 현대적인 유럽
인, 정통적 칼빈주의자, 학문의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이것이 에글린턴이 기획하고 있는 바빙
크의 이야기이다.

2. 장단점

본고가 에글린턴의 바빙크 전기를 전체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으므로 섣불리 그의 책을 판


단하기란 부적절 할 것이다. 하지만 서론에서 엿볼 수 있는바 저자의 기획과 아이디어는 기존
의 바빙크 전기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해 볼 만하다. 이러한 점은
본고에게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한 시대를 살아온 위대한 신학자인 바빙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은 전기 작가들


에게 그들이 어떤 프리즘을 갖고 바빙크를 이해할 것인가 하는 해석학적인 관점의 문제에 직
면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매우 뛰어난 시각을 갖고서 다른 작가들과 달리 유리한 입
장을 취했다고 말하고 싶다.

“두 바빙크들”의 관점과 해석은 한 시대의 사람, 신학자로서 바빙크를 합당하게 다루지 못


하고 도리어 애매모호한 개념을 발생시켜 이로 인해서 많은 오류들을 연쇄적으로 일으키게 한
다. 결과적으로 바빙크를 잘못된 개념으로 해석함으로써 한 사람을 잘못 다루게 되는 것뿐 아
니라, 그가 살아왔던 시대에 대해서도 잘못 보게 한다.

또한 ‘신학자’가 아닌 ‘신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바빙크를 이해하고자 하는 저자의 기


획 의도는 매우 주효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상가는 시대(역사와 문화, 사상)의 맥락과 문법 속
에서 그의 사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만약 역사와 문화와 사상과 괴리된 단지 한 인간 바빙크
를 이해하겠다고 한다면 분명 그 전기는 좋은 결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신학을 통해서 바빙크를 이해하겠다는 저자의 시각은 매우 뛰어나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바빙크의 정신을 두 갈래로 나뉘어서 볼 수 없도록 만들어 주며, 하나의 통일된 정신
가운데서 바빙크의 신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와도 일치한다. ‘삼위일체와 유기체’라
는 저자의 저서는 바빙크의 이러한 사상적 지평과 근원이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지를 바르게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무엇이든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본고가 생각할 때 이 저서의 단점이란 저자의 해석의 관점을 지나칠 정도로 과신한다는 점
이다. 바빙크를 신학자가 아닌 신학으로 이해하겠다고 말한 저자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바빙
크를 바빙크 답게 하는 것은 사실 인물론이 아니라 신론이며, 계시론에서 볼 수 있는 담론이
기 때문이다.
물론 정통칼빈주의 개혁신학이 바빙크라는 인물과 삶의 중심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바빙
크의 신앙과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천착하여 탁월한 삶을 살아간 것을 전기 작가로서 해석하
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바빙크의 믿음의 삶과 이야기를 너무나 신학적
인 공식의 틀 속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이 본고에게는 조금 어색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경건과 내면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그렇게 항상 중용의 상태 가운데


서 유지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바빙크가 그처럼 완벽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볼 때
저자의 관점과 해석은 자칫 지나친 해석을 개입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3. 개인과 교회의 적용점

헤르만 바빙크가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성도와 신학도들,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미치는 영


향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신학자 바빙크의 전기를 읽고 그의 삶을 아는 것은 그의 신학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분명 유익할 것이다.

바빙크에 대한 저자의 관점과 해석은 독자들에게도 매우 중요하며, 이 책의 가치를 판단하


는 기준이 될 것이다. 즉 독자가 바빙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신학적인 해석의 프리즘이
야 말로 독자 자신의 신학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삶이 아무런 영향력 없이 개인의
삶의 의미에서 그칠 수 있겠지만, 어떤 이의 삶은 그 자신뿐 아니라 타인들의 정신과 삶의 깊
은 곳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한 시대의 인물이었던 바빙크를 그의 신학을 통해서 살펴봄으로써 그 시대를 보


는 시각을 가질 수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적인 상황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동
일한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란 쉽지 않지만, 이런
접근법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도 객관적인 프리즘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가 바빙크 전기를 다룸에 있어서 세 가지 주제, 즉 현대(mordern)와 정통(orthodox)


과 학문(science)에 대한 이해와 접근은 오늘날 여전히 바른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신학도인
본고에게도 매우 유익한 관점이다. 바빙크처럼 생각할 수 있고, 또 현실과 괴리된 신학이 아
닌 실천성과 직접성이 매우 뛰어난 학문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준다.

무엇보다 저자의 바빙크에 대한 접근과 해석의 개념, 시각은 교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


다. 교회가 추구하는 바른 신앙은 바른 신학과 삶의 상황이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어떤 신앙과 신학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저자는 그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바른 신
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속에서 교회는 믿음으로 현실(시대)을 해석하고 하나
님의 말씀의 뜻 가운데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또한 저자가 던져준 삼위일체와 유기체로서의 바빙크 이해는 오늘날 우리들 모두에게 매우


유익하고 의미가 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과 세상의 삶과 역사는 동떨어진 사변이나 관념으
로만 존재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담지해 내고 해석하는 것은 신학자나 교회에게 맡겨진 사명과도 같다. 우리가 살아


가고 있는 우리의 시대도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경륜이 계속되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두 지평이 우리의 현실적인 삶 속
에서 현대성과 정통성과 학문이라는 차원에서 여전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본고는 예견하
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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