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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인줄 모르고 손을 내밀었다>>

1화

*** 작품에 나오는 시대와 배경, 그리고 내용은 허구입니다. ***

“제발 동생을 돌려보내주세요, 빚은 어떻게 해서라도 꼭 갚겠습니다.”

타냐는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참으며 공사판에서 일해 모은 은전을 내밀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채찍질뿐이었다.

휘익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소가죽으로 만든 긴 채찍이 날아와 타냐의 등에 휘감겼다.

마치 수백개의 이빨을 가진 거머리처럼 채찍은 그녀의 살갗을 파고 들었다.

“아악!”

비명을 지르면서도 타냐는 소지주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러나 소지주가 발길질을 했고 타냐는
진흙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온몸이 진흙범벅이 된 타냐는 이미 말에 올라 멀어지는 소지주를 보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멈춰요 제발!”

진흙이 범벅이 된 채로 타냐는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그러나 소지주를 태운 말은 타냐의 애처로운


목소리는 아랑곳 없이 이미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물러나라! 카딜 하에르 대장군님께서 승전고를 울리고 돌아오신다!”

갑자기 들려온 우렁찬 목소리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허리를 접은채 고개를 내렸다.

“모두들 예를 표하라! 붉은 기사단의 단장이신 카딜 하에르 대장군님이시다!”

우와, 카딜 하에르다.

어머나, 이런 영광이.

조심해 붉은 기사단에게 걸리면 뼈도 못추려.

주위에서 여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던 타냐의 머리 속에 번개같이 뭔가가 스쳤다.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일지도 모른다.

저분이면 전쟁터에 노예로 끌려가신 부모님도 찾고 소지주에게 끌려간 남동생 토디엘도 찾을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어차피 살아갈 의미도 없어진다. 부모님이 끌려가면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당부하셨다. 무슨 일이 있어도 토디엘만은 지켜야 한다고.

결심을 다진 타냐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때마친 카딜의 백마가 보였다. 타냐는 제 몰골이 어찌됐든 신경쓰지 않고 카딜의 말 앞으로 뛰어들었다.

타냐도 알고 있다. 이렇게 하면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렇다면 해보는데까지 해볼 것이다.
“하에르 대장군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다짜고짜 살려달라며 카딜의 백마앞을 가로막는 여자를 본 카딜의 수석호위무사 바훌이 번개같이 칼을
빼들어 타냐의 목에 가져다댔다.

“물러나라,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이 달아날 것이다.”

그때 카딜이 오른 손을 들어올렸다. 바훌은 얼른 칼을 거두고는 허리를 숙였다. 카딜은 타냐를 잠시


내려다 보았다.

머리카락은 산발인데 진흙이 말라붙어 엉망이었고 얼굴에도 진흙이 잔뜩 묻어 보이는건 눈동자와 하얀


치아밖에 없었다. 옷차림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타냐를 왜 그냥 지나치지 못했는지는 카딜 자신도
모른다.

“무슨 소리냐.”

카딜이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자 타냐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바훌이 다시 칼을 빼들려 했지만 카딜이 손을 들었다. 바훌은 카딜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주군의 명에따라 검을 검집에 넣었다.

“날더러 살려달라고 했는데 누굴 누구로부터 살려달라는 거지?”

카딜의 물음에 타냐는 덜덜 떨리는 몸을 겨우 진정시켰다.

이번 기회를 일생일대에 있을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용기를 내어 자신이 왜 이런 미친짓을 하는지


설명했다.

“제 남동생이 소지주에게 끌려갔습니다. 이제 겨우 열네살인데, 제가 빚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겠다고


했는데도 그 어린 것을 끌고갔습니다. 하에르대장군님, 절 소유하시고 제발 제 남동생을 찾아 주십시오,
그 은혜는 제 온몸을 다바쳐 갚겠나이다.”

타냐가 진흙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타냐의 하소연을 듣고 있는 카딜을 이해할 수 없는 바훌이었다. 이런 사연은 길거리에 차이는 돌처럼 수도


없이 많은데 왜 이 여자의 사연을 이렇게까지 신경써서 듣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라도 적국에서 보낸 킬러라면 당장이라도 목을 쳐야하기에 검집을 잡은 바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을 들어라.”

카딜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른채 타냐에게 말했다. 그러자 타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진흙으로 칠갑이된 얼굴과 머리지만 그녀가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사파이어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눈동자가 보였다.

말을 타고 있는 카딜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지만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는 카딜의 회색빛 눈동자와
확실하게 마주쳤다.

그 순간 두 사람에게 묘한 일이 벌어졌다.

마치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두 사람은 동시에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바훌은 눈을 들라 한다고 감히 카딜 하에르와 시선을 맞추고 있는 타냐의 대담성에 속으로 감탄했다.


카딜의 눈빛은 맹수라고 해도 깨갱 소리를 내며 시선을 피할 정도로 날카롭고 강렬했다.

실제 숲속에서 늑대를 만났을 때 눈빛 하나로 늑대 무리를 물리쳤던적도 있었다. 그것은 소문이 아니라
그때 그 순간에 바훌이 함께 있어 직접 제 두 눈으로 본 사실이었다. 그런 카딜과 시선을 마주하고도 얼른
피하지 않는다.

바훌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 카딜과 타냐에게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카딜은 전쟁터에서 생긴 크고 작은 상처들이 욱신거리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통증이 사라져갔고 타냐는


방금전 채찍으로 맞은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져갔다.

말고삐를 잡고 있는 카딜의 손등에 난 상처까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너무 놀란 카딜은 다시 타냐의 연한 청색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어떤 힘이 작용하는지 모르지만 카딜은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타냐 또한 아까 채찍으로 맞은 상처가 아프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북대륙에는 오래전부터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치유의 능력을 가진 샤마란 부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원래 북대륙의 주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하루 아침에 멸족당했다. 이후 치유의 능력을 가진
샤마란족은 그저 전설로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혹시 그 멸족 되었다는 샤마란족의 핏줄인가? 확인해봐야 겠다. 만약 그녀가 샤마란족의 후예라면 이건


어마어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자에 대해서 궁금해진 카딜은 의도적으로 쓸데 없는 말을 늘어 놓았다.

“난 내게 필요한 것만 소유한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내가 만약 네 소원을 들어주면 넌 내게 뭘 해줄 수


있지?”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지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시선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카딜의 물음에 사람들은 일제히 타냐를 쳐다보았다.

타냐는 뭔가 기회를 주는가보다 판단하고 얼른 대답했다. 과연 저 질문에 저 여자는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여기서 나열하면 대장군님의 시간을 너무 뺏는게 되지 않을까요?”

타냐의 간 큰 소리에 바훌이 속으로 요사한 년이라고 욕했다. 주위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들도 옆에
있는 사람과 수군거렸다.

“저러다 모가지가 날아가지 쯧쯧.”

“그러게요, 쯧.”

하지만 카딜은 이미 타냐에게 관심이 많이 생긴 상태였다. 아니 관심이 아니라 반드시 데리고가야만 하는


여자였다.

“좋다, 나와함께 가자, 대신 네가 쓸모없겠다 싶을때는 가차없이 내 심기를 거슬린 죄로 태형을 당할


것이다, 그래도 가겠느냐? 참고로 태형을 당한 여자 중에 살아남은자가 별로 없다.”

카딜의 말에 타냐는 1 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상관없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에르 대장군님!”

“대장군님!”

바훌이 결국 참지 못하고 조금은 무례한 목소리로 주군을 불렀다.

그러나 카딜은 그런 바훌에게 타냐를 마차에 태우라 지시했다.

바훌은 눈을 크게 뜨고 눈빛으로 왜 이러시냐 물었지만 카딜이 두 눈에 힘을 주자 더 이상 거부하지


못하고 타냐를 마차에 태웠다.

그 상황을 지켜본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타냐는 카딜의 저택에 도착했다. 카딜은 황제에게 전쟁에 대한 결과를 보고하러 들어갔고 그녀는 그의
저택으로 왔던 것이다.

“이쪽으로 오너라.”

연락을 받은 카딜의 시녀장 실리아는 진흙투성이인 타냐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특별히 쓰임새가 지정되지
않은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먹을 것을 주라는 지시만 받았다.

타냐는 실리아의 뒤를 따라 세면장에 도착했다. 일꾼들이 사용하는 세면장은 꽤 넓었다.

한쪽 구석에는 칸막이가 있었고 그 안에서는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욕조가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씻고 나오너라. 이건 갈아 입을 옷이다.”

“감사합니다 시녀장님.”

타냐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옷을 받아 들었다. 칸막이 안으로 들어서니 나무로된 욕조에 뜨거운 물이
가득했다. 타냐는 옷을 하나 하나 벗어던졌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녀의 몸에 있던 상처가 모두
사라지고 통증도 사라졌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제 몸 여기저기를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타냐는 아까 카딜과 시선이 맞았을때의 그 느낌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마치 불에 덴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졌었다. 그리고 상처와 함께 통증도 사라졌다.

참으로 신기한 현상에 제 몸을 훑어 내리던 타냐는 또 다른 것을 발견했다. 노동일을 하느라 태양에


거을렸던 피부가 백옥처럼 하얗게 변했고 거칠었던 살갗이 실크처럼 매끄럽게 변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제 몸을 내려다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타냐는 일단 씻어야겠다 생각했다.

사실 목욕도 언제 했는지 기억도 없다.


어쩌면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목욕부터 시키는 것일수도.

제 몸에서 나는 냄새를 킁킁 맡던 타냐는 알몸으로 욕조안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 정도 씻고 나온 타냐는 실리아가 준 옷을 챙겨 입었다. 그저 하녀들이 입는 유니폼이었지만


타냐에게는 그녀의 일생에 가장 예쁜옷이었다.

색이 입혀진 옷감은 구경만 해봤지 이렇게 옷으로 만들어 입어본적이 없어 신기하기만 했다.

옅은 청색드레스와 그 위에 덧입는 앞치마 스타일의 장옷은 베이지색이었다. 머리에 쓰는 두건은


드레스보다 살짝 짙은 청색이었다. 타냐는 젖은 머리카락을 순면으로 열심히 두드려 말린 후 푸른빛의
두건을 썼다.

그녀의 금발이 청색 두건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흘러내린 긴 금발은 살짝 웨이브진채로 그녀의


가슴께까지 흘러 내렸다.

“다 씻었으면…!”

말을 하던 시녀장 실리아가 말을 잇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 씼었습니다 시녀장님.”

타냐가 말을 하자 그제야 그녀가 타냐라는 것을 알아차린 시녀장 실리아가 타냐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씻겨 놓으니 꽤 쓸만하구나.”

실리아는 타냐의 금발 머리카락을 만져보기도 하고 타냐의 볼륨있는 가슴을 꽤 오래 쳐다보았다.

하지만 실리아의 눈을 가장 오래끄는 것은 연한색깔의 청안이었다.

진흙투성이었을때는 전혀 깨닫지 못했는데 씻고 새옷을 입고나니 보통 미모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미인이라고 해도 천민의 신분이다. 천민이 주군의 저택에 왔을때는 궂은 일을 시키기
위함일터였다.

“따라 오너라.”

실리아의 말에 타냐는 예 라고 대답하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2화

실리아는 인상도 그렇고 행동과 말투도 여간 각지지 않았다. 여러 일꾼들을 다스리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그녀는 타고난 것처럼 그런 모습이 잘 어울렸다.

이제 어디로 데려가나 했더니 일꾼들이 식사를 하는 다이닝룸이었다. 몇 가지 반찬들과 고기요리까지 있는


식탁을 쳐다본 타냐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고 해도 인간이기에 배는 고픈 법이었다.

“일단 배부터 채우거라.”

실리아의 허락에 타냐는 얼른 식탁의자에 앉았다. 주방에서 일을 하는 하녀들이 타냐를 힐끔거리자


실리아가 매서운 눈빛으로 쫓아냈다.
태형을 당할 때 당하더라도 허기는 채워야지 버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식탁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전부
비워냈다.

“잘 먹었습니다. 설거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시녀장님.”

“됐다. 설거지 하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넌 날 따라오너라.”

실리아의 말에 타냐는 얼른 일어나 그녀를 또 따라갔다. 그리고 도착한 별채에 타냐는 남겨졌다.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냥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실리아는 가버렸다.

타냐는 멀뚱히 서있다가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방 저방 돌아다니다 카딜의 침실에 도착한 타냐는 비단침상으로 꾸며진 화려한 침실에 넋을 놓았다.

“이런 곳에서 잠을 자면 얼마나 잠이 잘 올까?”

타냐는 아무도 없는데도 주위를 한번 살피고는 천천히 침상으로 다가갔다. 네 개의 기둥이 세워진 커대한
침대는 투명한 비단휘장이 달려 있었다. 침대에 다가온 타냐가 손을 뻗어 기둥을 만지다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실크는 귀족들이나 만질 수 있는 아주 귀한 천이었다. 타냐 같은 천민은 절대 만져볼 수 없는 귀한 천이라


저도 모르게 손이 간 것이다.

황금색 실로 문양이 그려진 이불을 손바닥으로 쓸어보던 타냐가 살며시 그곳에 앉았다.

이런 푹신한 침대 또한 앉아본적도 누워본적도 없었다.

“좋으네.”

혼잣말을 한 타냐가 하품을 길게 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끼니도 챙겨먹지 못하고 죽으라고
일만했던 그녀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배불리 먹었다. 졸음이 쏟아지는 것이 당연했다.

***

부스럭, 부스럭, 뭔가 움직이는 소리에 타냐가 눈을 떴다. 숙면을 취해본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던 타냐는 카딜의 침상에서 한 시간이나 잠들었었다. 그걸 깨닫지 못한 타냐는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눈앞에서 왔다갔다 하는 물체를 응시했다.

향기로운 냄새가 온 방안에 감돈다는 생각에 여기가 어디인가 생각하던 타냐는 눈앞에 보이는 카딜의
섹시한 몸을 보고는 꺅 비명을 내질렀다.

급하게 두 손으로 제 시야를 가렸지만 손가락 사이로 알몸의 남자가 제게 걸어오는 것이 보여 저도 모르게
제 시야를 가렸던 손을 뗐다.

전쟁터에서 생긴 수많은 상처가 아물면서 만들어낸 흉터는 남자의 온몸에 훈장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제야 타냐는 여기가 카딜의 내실이고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짓을 벌였는지 깨달았다.

“내가 단잠을 깨웠나?”

“!”

그의 단전아래에 달려 있는 거대한 양물로 저도 모르게 시선이 내려갔던 타냐는 얼른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대장군님을 기다리다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타냐가 바닥에 넙죽 엎드려 사죄하자 카딜이 말했다.

“일단 따라와.”

“!”

그가 따라오라고 하자 타냐가 고개를 들었다. 카딜은 속살이 훤히 비치는 하얀색 시스루 침의를 걸치고는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하는거지?”

그가 걸음을 멈추고 멍한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타냐를 노려 보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타냐가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문을 열자 나무욕조가 보였고 이미 데워진 뜨거운 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목욕을 하려는 모양인데 왜 따라오라고 했을까?

속으로 생각한 타냐는 아직도 카딜의 알몸에 적응되지 않아 최대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 소용없는 짓이란걸 금새 깨달았다.

“네가 날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말하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고 했지?”

“예? 아, 예, 그렇습니다.”

“일단 내 몸을 먼저 씻겨라, 그것도 네 몸이 할 수 있는 일일테지? 내 몸을 씻기면서 네가 또 다른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말해봐, 그 정도면 시간은 충분하겠지?”

“!”

타냐가 놀라서 마른침을 삼키는 사이 카딜은 이미 침의를 벗어 던지고는 욕조에 들어갔다.

“뭐해?”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생각하던 타냐는 카딜의 무서운 눈빛에 욕조로 다가갔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욕조에 들어앉은 카딜은 나른한 눈빛으로 타냐를 올려다 보았다.

타냐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머릿속이 아찔했지만 이내 남동생을 씻겼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옆에 놓인


목욕용 작은 헝겊을 집어 들었다.

시종들이 미리 준비해 놓았는지 욕조물에서는 향기로운 냄새도 났고 뭔가를 탔는지 온천수처럼 물이


미끄러웠다.

타냐는 젖은 헝겊으로 카딜의 팔부터 닦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지?”

“타냐 이옵니다.”

“타냐, 그래 성은?”

“성은 없습니다. 저희같은 천민들은 그저 이름만 불러주어도 감사할 따름이거든요.”


타냐의 말에 카딜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카딜은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해서 어디 제대로 씻기기나 하겠어?”

그의 말에 타냐가 카딜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카딜 하에르를 쳐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저


멀리서 실루엣 정도만 보았던 타냐는 카딜의 수려한 마스크에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잿빛 머리카락에 잿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꽤 잘 어울렸다.

천민으로 태어난 타냐는 감히 붉은 기사단의 단장인 카딜 하에르의 얼굴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었다.

그가 말을 타고 지나가는 모습만 봐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지척에서 보는 것도 모자라 그의


몸을 만지고 있다. 그것도 발가벗은 몸을 말이다.

혹시 꿈인가 싶을 정도로 타냐는 아직 현실감이 없었다. 그저 입만 벌리고 그의 팔을 잡은채 넋을 놓고


있는 그녀를 본 카딜이 미간을 구겼다.

“내 얼굴 감상 끝났으면 이제 좀 씻어줄래?”

“아, 죄, 죄송합니다. 제대로 씻겨드리겠습니다.”

타냐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이번에는 그의 어깨에 물을 끼얹고 헝겊으로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앗!”

“어머, 죄송합니다. 제가 상처를 보지 못했습니다.”

카딜의 팔뚝에 생채기가 난 것을 모르고 그냥 문질렀던 타냐는 급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계속해.”

카딜은 아까 제 스스로 팔뚝에 생채기를 냈다. 그는 한번 더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

그녀에게 정말 치유의 능력이 있는지.

아까 타냐와 시선이 마주친 후 그의 몸에 나있던 크고 작은 상처들은 이미 아물었다.

그걸 보면 분명 치유의 능력이 맞지만 그것이 이 여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때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 테스트를 해보기 위해 일부러 생채기를 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상처를 치료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장군님.”

“됐어, 그 정도를 가지고 무슨 치료까지.”

카딜은 혹시라도 타냐에 의해 상처가 아무는지 계속 지켜보았지만 아까처럼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살짝 실망이 되었지만 그래도 옆에 두고 지켜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들어와.”

“예?”
“옷 다 벗고 들어오라고, 너만 내 알몸을 보면 불공평하지 않겠어?”

하아, 그러게 누가 벗어랬나? 타냐는 감히 그의 말에 불만을 표하는 제 스스로에게 놀라 얼른 정신을


차렸다.

“하, 하지만….”

어떻게 처음보는 남자 앞에서 알몸이 될 수가 있나 싶어 타냐가 망설였다. 그러자 카딜이 말했다.

“훗, 겨우 이 따위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뭘 할 수 있다는건지, 아까 널 가지라고 했던 말은 역시


빈말이었나보군, 됐으니까 그만 나가봐.”

카딜의 말에 심장이 철렁하고 떨어진 타냐가 서둘러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래, 이까짓 몸뚱어리가
뭐라고. 아클란 대제국을 쥐락펴락하는 대장군 카딜이 부모님과 남동생을 찾겠다 마음만 먹으면 그건 바로
시간문제일텐데.

그렇게 생각한 타냐는 금새 알몸이 되었다.

카딜은 타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하얗다 못해 푸른빛을 띠는 그녀의 피부에서는 광채가 났다.

진흙을 뒤집어썼던 그 여자는 다른 여자인 듯 했다. 천민에 빚에 쪼들렸고 하루 하루 연명하기 위해서는


분명 거친 일들을 해왔을텐데 어떻게 저렇게 투명하고 윤기가 도는 피부를 유지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황금빛 머리카락은 귀족여식들이 매일 같이 관리한 머릿결보다 훨씬 더 윤기가 흘렀다. 이것 또한


아이러니했다. 몸매는 영양실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랐는데 어떻게 저렇게 탱탱한 살결과
윤기있는 머릿결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타냐는 절 훑어 내리는 카딜의 눈길이 욕망으로 들끓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 어떤 것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미 제 입으로 제 몸뚱어리를 가지라고 했기 때문이다.

사자가 사슴을 기다리는 것 같은 눈빛을 한 카딜은 타냐가 욕조 안으로 들어오자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실룩였다.

“이제 제대로 한번 씻겨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은 알고 있을테지.”

그가 욕조 벽에 머리를 기대고 두 눈을 감았다. 타냐는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용기를 내어 목욕용


헝겊을 집어 들었다.

전쟁터에서 한달을 지내다 온 카딜이었다. 제대로 씻지도 못했고 잠도 자지 못했던 그는 타냐의 손길에
피로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타냐는 어느새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도 잊은채 카딜의 몸을 씻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두 눈을 감은채
욕조에 머리를 기댄 그의 얼굴을 닦아 주면서도 여간 조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을 알테지?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정성껏 카딜의 몸을 닦았다. 굵은 목선을 따라 씻어내려가던 타냐는 바윗돌인가


싶을 정도로 단단한 그의 가슴 근육에 속으로 놀랐지만 태연한척 했다.

정확하게 등분된 그의 복근을 닦아 주는 타냐의 얼굴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녀의 긴 금발은


욕조물에 둥둥 떠다녔다. 땀이 눈으로 들어가자 타냐가 욕조물로 세수를 했다. 그 소리에 카딜이 눈을
떴다는 것도 모른채 타냐는 다시 그의 아랫배를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이제 부터가 큰 일이다. 거기도 닦아야 하는걸까? 아니면 그냥 거기는 두고 다리로 내려갈까?

고민이라고 해야될지 뭐라고 해야될지 모르겠지만 타냐는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다 결정을 내렸다.
그곳은 그냥 지나치기로.

그의 배꼽을 배회하던 손이 오른쪽 허벅지 쪽으로 내려갈때였다.

“제일 중요한 곳은 왜 빼먹는거지?”

“!”

3화

터져나오는 비명을 속으로 삼킨 타냐가 시선을 들었다. 연한 옥빛 같은 그녀의 눈동자와 짙은 잿빛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것도 코앞에서.

순간 타냐보다 카딜이 더 놀랐다. 저를 집어 삼킬 것 같은 타냐의 심연같은 눈동자를 보는데 잠시 숨쉬는


것을 잊었다가 현기증을 느끼고 훅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동안 전쟁터를 누비느라 제대로 쉬지도 자지도 못했지만 이렇게 쉽게 잠든적이 없었다. 저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잠이 들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타냐는 잠든줄 알았던 카딜이 저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에 놀라 역시 순간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짙은 회색빛눈동자에 빨려들어갈 것 같아 얼른 시선을 떨구고 사죄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감히 제가 어떻게….”

거길 만지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긴, 쉽지 않을테지, 수고했어, 그만 나가봐.”

“예?”

그만 나가보라고 하자 타냐는 순간 짤린 것인가 하고 오해했다.

“아닙니다, 이번엔 제대로 하겠습니다. 제발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타냐가 두 손까지 모으고 울먹이자 카딜이 그제야 타냐가 쫓겨나는 걸로 오해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푸른빛의 눈동자에 물기가 고이자 북대륙의 끝에 있는 나이브강이 떠올랐다. 옥빛조약돌이 지천으로 깔린


나이브강은 아름다운 물빛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보기와는 달리 마물이 자주 출현하는
곳이라 절대 물에 들어가면 안된다.

카딜은 혹시나 하고 다시 제 팔뚝의 상처를 살폈다.

그러나 팔뚝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아까 같은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살짝


실망했지만 아까 제게 일어난 그 신비한 현상은 분명 꿈이 아니고 현실이었다.

분명 뭔가가 있어.

혼자 생각한 카딜은 겁을 집어먹은 타냐의 푸른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나가서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

잠시 멍한 눈빛으로 카딜을 쳐다보던 타냐가 그제야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얼른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갑자기 알몸이라는 것이 부끄럽다 생각한 그녀가 급하게 일어서려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졌다.

짧고 강한 비명과 함께 타냐는 의도치 않게 카딜의 품에 안겼다.

“아, 죄, 죄송합니다 대장군님.”

“죄송하면 그만 좀 일어나지.”

“아, 예, 예.”

타냐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일어나려고 했지만 미끈거리는 물과 더 미끈거리는 카딜의 몸 때문에 말처럼
쉽지 않았다.

꾹!

바닥을 짚는다는게 카딜의 중요한 부위를 눌러 버린 타냐였다. 순간 카딜은 윽 하는 소리를 내며 미간을


구겼고 타냐는 손에 잡힌 것이 무엇인가 1 초 정도 생각하다 화들짝 놀라서 손을 뗐다.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그런데 그건 왜 그렇게 딴딴하고 뜨거울까? 속으로 드는 야한 생각을 얼른 지운 타냐가 가까스로 욕조에서


나왔다.

***

욕실 밖으로 나온 타냐는 다시 유니폼을 챙겨 입고 카딜이 나오길 기다렸다.

카딜은 젖은 몸을 제대로 닦지도 않고 가운을 걸친채로 나왔다. 이 남자는 이게 컨셉인가?

오랜 세월 검술 훈련과 싸움으로 다져진 근육들에 자꾸만 시선이 가는 타냐였다.

아까의 일이 떠올라 타냐의 두 뺨은 붉은기운이 여전히 감돌고 있었다.

물에 젖은 잿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모습에 타냐가 저도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이 남자가


자꾸만 제게 가까이온다. 타냐는 드디어 흑심을 내보이려는건가 하고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카딜은 타냐의 뒤에 있는 테이블 위에 놓인 옷을 집어들 뿐이었다. 그제야 무안해진 타냐가 뭐라도
해야되나 싶어 말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냥 해본소리였는데.

타냐는 카딜의 반기는 말투에 속으로 끙 앓는 소리를 내고는 대답했다.

“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좋아, 안그래도 옷 입는게 여간 귀찮은게 아니었는데 잘 됐네.”

카딜의 말에 타냐도 공감했다. 귀족들은 왜 그렇게 여러 가지 옷을 겹쳐입는지 평소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천민들은 헝겊으로 대충 기워진 속바지에 겉옷을 걸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카딜이 입어야 할
옷은 다섯겹이나 됐다. 속옷 위에 바지를 입고 상의는 실크로된 속옷에 실크로된 셔츠, 그 위에 공단에
색색의 실로 수가 놓여진 조끼를 입어야 했고 마지막으로 장의를 걸친 후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진
허리끈을 묶는다.

“잘 하는군.”

“동생에게 옷을 입혀 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말은 내가 동생같다는 뜻은 아니렸다?”

“아, 아니옵니다, 그냥 남동생에게 옷을 늘 입혀 주었다는 말이었습니다.”

타냐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게 이상하게 즐거운 카딜이었다.

그때 노크소리가 났다.

“들어와.”

카딜은 이미 실리아인 것을 아는 듯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들어오라고 했다.

문이 열리고 실리아와 하녀 둘이 들어왔다. 하녀 하나의 손에는 찻주전자와 찻잔을 올려 놓은 쟁반이 들려


있었다.

또 다른 하녀는 다과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있었다.

“차와 다과를 준비했습니다 대장군.”

“그래, 거기 놓고 나가봐.”

“예.”

실리아가 눈짓을 하자 하녀 둘이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 놓고 뒤로 물러섰다.

“뭐해 안 나가고?”

실리아와 하녀가 뭔가를 기다리는 듯 어물쩡대자 카딜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타냐, 어서 나오너라.”

실리아가 멍한 눈으로 서있는 타냐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 예.”

타냐가 흠칫 놀라 나가려고 하자 카딜이 그녀의 손목을 턱 잡았다.

“넌 남아, 우린 아직 나눌 이야기가 있지 않아?”

“예? 아, 예.”
카딜의 행동에 흠칫 놀란 실리아는 이게 아니구나 싶어 얼른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거기 앉아.”

“예?”

“꼭 두 번씩 말하게 하는군, 거기 앉으라고.”

“아, 예.”

타냐는 의자라는 곳에 앉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 늘 바닥에 엎드리는 것이 익숙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았다. 그러자 카딜이 앞으로 갈길이 멀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여기 의자에 앉으라고, 내려다 보는게 얼마나 허리가 아픈줄 아느냐?”

말도 안되는 소리로 타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카딜이었다.

“아, 죄, 죄송합니다.”

타냐는 무슨 죽을 죄라도 지은것처럼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카딜은 기다렸고 타냐도 기다렸다.

카딜이 왜 아무말도 않고 저를 쳐다보는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던 타냐는 아차 싶어 찻주전자를 들었다.

그제야 카딜이 말했다.

“눈치가 전혀 없지는 않네, 하지만 좀 느린 것 같은데?”

“죄, 죄송합니다. 이런 일을 해본적이 없어서….”

타냐가 찻잔에 차를 채우자 카딜이 잔을 들었다. 차를 한모금 마신 그가 물었다.

“어디서 태어났느냐.”

“예?”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이곳 도성안입니다.”

“그래?”

“예.”

뭔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타냐를 쳐다보던 카딜이 다시 물었다.

“혹시 제이단 숲이라고 아느냐?”

제이단 숲은 치유의 정령이 지배하는 곳으로 일반인은 접근하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

어딘지 아쉬워하는 듯한 카딜이었다. 그는 아직도 상처가 그대로 있는 제 팔뚝을 한번 만지며 타냐를


쳐다보았다.
분명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말끔해졌다. 단지 아까 일부러 만든 팔뚝의 상처만
그대로있다.

좀 더 지켜보면 알겠지.

혼자 생각한 카딜은 아까 타냐가 했던 말에 대해서 물었다.

“남동생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봐.”

카딜의 물음에 타냐는 드디어 동생을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에 안색부터 밝아졌다.

***

타냐가 눈을 떴을때는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타냐는 자신이 왜 또 카딜의 침상에서 잠이 들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카딜과 마주 앉아 남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것만 기억이 났다.

“어서 일어나거라, 여기가 무슨 네 집 안방인줄 알아?”

여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타냐가 눈을 떴다.

의아해 할 시간도 없이 하녀 피오레에게 머리카락을 잡혔다.

“감히 하녀주제에 어디서 대장군님의 침상에서 잠을 자? 이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피오레는 타냐를 침대 아래로 끌어 내렸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물건인지도 모르는게 자신은 감히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대장군 카딜을 유혹했다 싶어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것이다.

“따라나와!”

피오레의 적대적인 눈빛에 타냐는 의아해했다. 같은 하녀면 서로 도와주고 감싸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다.

카딜의 별채에 딸린 시녀와 하녀들은 전부 열두명이었다. 그들중 여자가 절반이고 남자가 절반이었다.
여자들과 남자들의 일은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여자들은 주로 보통의 여자들처럼 가사일을 하고
남자들은 힘을 써야하는 일들을 했다.

그런데 피오레는 카딜의 침실에서 잠을 잔 타냐에게 적개심이 생겨 남자들이 해야할 일을 시켰다.

“물 떠가지고 와, 한 시간내에 여기 이 독을 다 채워야 해.”

피오레가 나무로 만든 물지개를 타냐에게 턱 맡겼다. 타냐는 사람이 열명은 들어가게 생긴 커다란 독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피오레가 또 고함을 질러 그녀는 물지개를 들고 피오레가 말한 곳으로 향했다.

별채 뒤로 가면 산과 이어진 길이 나오는데 그곳을 한참 올라가다 보면 샘물이 솟아나는 곳이 있다고 했다.

이런 일에 이골이 났기에 아무생각없이 피오레가 시키는대로 물을 길러 그녀가 일러준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조금만 올라가면 있다던 샘물은 30 분 정도를 올라가고 나서야 보였다. 힘은 들었지만 빽빽한
나무숲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보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마치 이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는 것처럼 그녀는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 이유는 당연히 남동생
토디엘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이제 막 솟아오른 태양이 쏟아내는 눈부신 햇살을 올려다 보던 타냐는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높은 곳에 집을 지어놓고 새끼들에게 먹이를 가져다 주는 어미새를 보며 남동생을 떠올렸다.

그러자 토디엘생각에 어느새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하아,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돼.’

그 큰 독에 물을 다 채우려면 몇 시간으로도 부족할 것 같은데 피오레가 한시간내로 다 채우라고 했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최선을 다해보자 싶은 타냐가 눈물을 훔쳐내고 얼른 물지개에 물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무거운 물지개를 어깨에 매고 비탈길을 내려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찰랑대는 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조심 발을 떼보아도 물은 출렁이며 다 흘러내렸다.

‘보기보다 좀 힘드네.’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해놓고 하룻밤 사이에 이 정도를 가지고 툴툴대면 안돼지.

속으로 생각한 타냐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4화

새벽검술 훈련을 마친 카딜은 타냐를 볼 생각에 서둘러 내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여자가 안보인다.

이상하게 여긴 카딜이 여기저기 그녀가 있을만한 곳의 문을 열어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를 간거지?

카딜은 자신이 왜 이렇게 타냐에게 집착하는지 알지 못한채 짜증스럽게 시녀장을 불렀다.

“실리아!”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실리아가 어느새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타냐 어디갔지?”

“타냐가 누구….아, 어제 그 새로 들어온 하녀말입니까?”

“!”

실리아의 입에서 나온 새로 들어온 하녀라는 말에 카딜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실리아는 그의 못마땅해 하는 심기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보고했다.

“조금전 샘물을 길러오라는 지시를 받고 뒷산으로 올라간 것으로 압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몰라도 제가
받들겠습니다 대장군.”

“감히 누가 타냐에게 샘물을 길러오라고 시킨거지?”

“예?”
카딜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실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모시는 주인의 살기어린 눈빛을 그제야
알아차린 실리아가 몸을 흠칫 떨었다.

“타냐는 내 명령만 받을 것이다, 그런데 감히 누가 타냐에게 명을 내린 것이지?”

침착한 목소리지만 칼날처럼 살벌한 기운이 실리아의 몸으로 파고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소인이 그걸 미처 몰랐습니다.”

그저 하녀 하나를 어디서 구해왔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실리아는 덜덜 떨리는 몸을 겨우 가누고


카딜에게 고했다.

“당장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됐다, 내가 직접 가겠다.”

“예?”

또 한번 실리아가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을 때 카딜이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별채에서 나온 카딜은 그의 백마에 올랐다.

뒤꿈치로 말의 배를 살짝 치자 백마가 두발을 높이 들어 뚜레질을 하고는 뒷산쪽으로 달렸다. 그 모습을


보던 하녀들과 시녀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의아해했다. 그 와중에 피오레는 상황파악도 하지 못하고
카딜의 멋진 모습에 매료되어 넋을 놓은채 두 손을 모았다.

“아, 어쩜 저렇게 멋있으실까.”

뒷산을 내달리던 카딜은 멀리서 보이는 타냐를 보고 속도를 늦추었다. 무거운 물지개를 어깨에 진 그녀를
본 그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타냐는 물지개의 중심을 흩트리지 않으려 온갖 애를 쓰며 한발 한발 내딛고 있었다. 땅이 고르지 못해


혹시라도 넘어질까 싶어 땅만 내려다보고 걷는데 갑자기 무거웠던 어깨가 가벼워졌다.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햇살을 등지고 선 남자를 올려다 보던 타냐는 그가 카딜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흠칫 놀랐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을까?

의아해 하는 그녀를 내려다 보던 카딜이 물지개를 던져버렸다.

“어머!”

아까운 물을 던져버리자 타냐가 저도모르게 카딜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시선을 떨구고
화를 누르며 물었다.

“애써 퍼온 물을 왜 버리십니까?”

설마 날 골탕먹이려고? 그럴리 없겠지만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타냐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누가 너더러 이런 험한 일을 하라고 했지?”


“!”

흠칫 놀란 타냐가 고개를 들었다. 햇살을 등진 그가 살짝 비켜서자 이제는 조명을 받은 듯 그의 수려한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심장이 제 마음대로 뛰기 시작하자 타냐가 제 가슴을 지긋이 눌렀다. 이상한 일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딜과 눈이 마주치면 심장이 제 궤도를 벗어난 듯 마구 뛰기 시작했다.

한번씩 정면으로 눈이 마주칠때는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며 팔뚝에 소름까지 돋아 올랐다.

감히 붉은 기사단의 단장 카딜 하에르를 흠모하는 것일까? 감히 그를? 그것도 아클란 대제국의 가장 낮은


신분인 천민주제에?

타냐는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심장을 내려치고 싶었지만 카딜 몰래 숨만 조심스럽게 골랐다.

그때 카딜이 타냐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놀라할 시간도 없이 타냐는 카딜에 의해 그의 백마 앞에 섰다.

타냐는 백마의 높이에 놀라 멍한 눈빛으로 카딜을 쳐다보았다.

“고삐를 잡아.”

“예?”

타냐가 그의 뜻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자 카딜이 고삐를 잡아 타냐의 손에 쥐어 주었다.

“말은 이렇게 고삐를 잡지 않으면 놀라서 날뛸 수도 있어.”

카딜은 타냐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말에 타냐는 얼른 고삐를 세게 쥐었다. 그 모습에 카딜이 피식


웃더니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얼떨결에 백마의 등에 올라탄 타냐는 겁을 잔뜩 집어 먹고 고삐를 더 세게 잡았다. 그때 카딜이 타냐의


뒤로 올라탔다. 그녀에게서 말고삐를 가져간 그가 말했다.

“이제 날 꽉 잡아라, 안 그럼 떨어질 수 있어.”

떨어질 수 있다는 말에 타냐는 카딜의 허리를 꼭 안았다. 두 다리를 한쪽으로 내린 상태로 앉은 타냐는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깜짝 놀라며 그의 몸에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바람을 가르고 숲을 달리던 카딜은 제 가슴팍에 꼭 붙어 있는 타냐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했다.

“타냐, 앞을 봐봐.”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타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백마는 어느새 절벽 앞에 멈춘 상태였다.

그의 말대로 타냐가 고개를 돌려 앞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감탄사를 내뿜었다. 절벽이 보였고 그 절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폭포수가 보였다. 아침햇살을 받은 물줄기는 아직 마르지 않은 이슬이 증발하면서 햇살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어냈다. 마치 폭포수에 무지개가 걸쳐있는 듯한 모습에 타냐가 탄성을
내질렀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이 산속에 숨어 있었다니.

마치 천계에 있는 듯 황홀하기까지 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타냐였지만 카딜은 풍광보다 그런 타냐를


보며 눈꼬리를 은은하게 휘었다.
“너무 아름다워요.”

“저기 절벽 너머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뭐가 있는데요?”

“제이단 숲이 있어. 아직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치유의 정령이 지배하는 곳이지.”

“치유의 정령?”

타냐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이단 숲, 치유의 정령이 지배하는 곳. 그녀는 카딜이 했던 말을 한번 더


입안에서 되새김질 해보았다.

***

“타냐 이년 어디로 간거야 대체? 물독에 물을 채우라고 말한지가 1 시간이 넘었는데 물독은 그대로
비어있잖아?”

피오레가 투덜대는 소리에 시녀장 실리아가 다가왔다.

“네가 시켰어?”

“어머나! 시녀장님!”

갑자기 나타난 시녀장 실리아를 본 피오레는 얼른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때 실리아가 피오레를 뺨을


양쪽으로 갈겼다.

악! 비명을 내지른 피오레는 억울한 눈빛으로 실리아에게 물었다.

“시녀장님,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얘들아, 이년을 당장 형틀에 묶어라!”

피오레의 물음에 대답은 없이 실리아는 옆에 섰던 시종들에게 소리쳤다. 시종들은 피오레를 잡아 형틀로


끌고갔다. 끌려가면서도 피오레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인 후에야 실리아가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타냐는 대장군님의 지시만 받는다고 했다, 그런데 네가 오늘 아침에 물을 길러오라고 시켰다지?”

“!”

실리아의 말에 피오레는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감히 팔려온 하녀 주제에 대장군님의 침소에서 잠이


들었다 싶어 열이 받아서 험한 일을 시켰다. 그것도 남자 시종들이 하는 일을. 이제와서 후회한들 소용이
없었지만 피오레는 실리아에게 애원했다.

“잘못했습니다, 전 정말 몰랐습니다, 그냥 새로온 하녀인줄 알았습니다. 하녀 주제에 감히 대장군님의


침상에서 잠든 것을 보고 괘씸하여 그랬습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시녀장님!”

피오레의 울부짖는 소리에 실리아가 대답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네가 이렇게 벌을 받는 모습을 보셔야 카딜 대장군님의 화가


어느정도 풀리실테니까, 안그럼 우리 모두 초죽음이 될 수도 있어.”
“흐흑, 시녀장님, 제가 잘 몰라서 그런겁니다, 대장군님께 말씀 좀 잘 해주시면 안될까요?”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피오레라서 봐주고 싶지만 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렇게 해야 너도 덜 혼나는 거야, 너 생각해서 이러는 거야.”

실리아의 말에 피오레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그 타냐라는 여자가


미워죽을 것 같았다. 지까짓게 뭔데, 굴러온 돌이 박힌돌을 뺀다더니 딱 그짝이었다.

“미안하게 됐다만 널 위한 일이니까 참아.”

실리아는 옆에 선 시종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태형을 내릴 때 사용하는 긴 채찍을 든 시종 둘이


피오레의 등을 때리기 시작했다. 휙휙거리는 바람소리를 내며 날아든 채찍이 피오레의 등에 휘감길 때
마다 그녀는 죽는다고 비명을 내질렀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도 모른채 타냐는 카딜과 숲속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는


백마의 등에 탄 타냐는 카딜의 권유로 말고삐를 잡았다. 두 다리를 벌려 앉은 그녀는 무서운 생각을
떨쳐내고 카딜이 말하는 대로 고삐를 이러 저리 당겼다. 그러자 그의 백마가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틀어
주었다.

신기하다는 생각에 타냐가 물었다.

“속도를 내려면 어떻게 하는 건가요?”

겁도 없이 속도를 내보고 싶어 하는 타냐를 대담하다 생각한 카딜이 그녀의 발을 잡아 말의 배를 툭 쳤다.


그러자 백마가 히히힝 소리를 내며 살짝 속도를 높였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말이 달리게 하는 법을 배운 타냐는 조금 더 속도를 내고 싶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아까보다 세게 말의 배를 찼다.

카딜의 백마는 아까 보더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말의 등에 올라탄 두 사람은 마치 하나인 듯 함께


리듬을 탔다.

그때 카딜이 타냐 몰래 살짝 말의 배를 세게 찼다. 그러자 백마는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고 급작스럽게 속도가 올라가자 깜짝 놀란 타냐가 말고삐를 놓쳤다.

빠른 속도에 미쳐 대비하지 못한 타냐의 몸이 허공으로 낙하했다. 하지만 그녀를 안은 카딜 덕분에 타냐는


다친곳 하나 없었다.

그러나 카딜은 낙마하면서 바닥에 있던 돌과 나뭇가지에 등쪽에 상처를 입었다.

“괜찮아요?”

작게 신음하며 미간을 구긴 카딜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살피며 묻자 카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어, 어떡해요, 제가 그만 말고삐를 놓치는 바람에….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으면 상처를 낫게 해주면 되겠네.”

“예?”

카딜은 은근히 타냐에게서 어떤 기운이 나오길 기대하며 말했다. 하지만 어제처럼 신기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뭔가 트리글포인트가 있는걸까? 잠시 생각하던 카딜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해본 소리였어.”

카딜은 뭔가 아쉬운 눈빛으로 천천히 일어섰다.

5화

“대장군님, 조반 준비되었습니다.”

시녀장 실리아의 말에 카딜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무말도 묻지않았지만 실리아는 알아서 대답했다.

“아침에 피오레가 멋모르고 타냐에게 물을 길러오라고 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채찍 30 대를


쳤습니다.”

실리아의 말에 한숨을 길게 내쉰 카딜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래, 다른 하녀들에게도 타냐는 내 지시만 받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일러둬.”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타냐도 불러와, 함께 식사하겠다.”

“예? 아, 예, 대장군님.”

‘이 정도라고?’

실리아는 얼른 대답을 하긴 했지만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어젯밤 대장군의 침상에서 잠을 잤다더니 혹시
몸을 섞었나?

실리아는 그제야 뭔가 사태파악을 한 듯 서둘러 타냐의 방으로 향했다.

카딜은 자신의 내실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게스트룸을 그녀의 숙소로 정했다.

카딜의 오른팔인 바훌이 알면 노발대발 할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다른 하녀들과 함께 숙소를


사용하게 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어쩌면 사라진 샤마란족의 후예일지 모르니까.

똑똑!

노크소리에 타냐가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시녀장님.”

타냐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자 실리아가 오히려 예를 표했다.

“타냐님, 카딜 대장군님께서 함께 조반을 드시자고 하십니다, 따라오시죠.”

“!”

실리아의 변한 태도와 말투에 어리둥절했던 타냐는 일단 그녀의 뒤를 따랐다.

혼자 식사하기엔 정말 거대한 다이닝룸에 도착한 타냐는 상석에 앉은 카딜을 보고 얼른 예를 표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타냐의 심장이 또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숨이 차오를 정도로 심하게 뛰는 심장
때문에 타냐의 얼굴까지 붉어졌다.

“여기 앉으십시오 타냐님.”

아까부터 타냐님이라고 불러 불편해 죽겠는데 실리아가 의자까지 빼주었다. 타냐는 몸둘바를 몰라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카딜이 제 옆 자리를 가리켰다.

“이쪽으로 와서 앉지.”

상석에 앉은 카딜과 가장 가까운 곳을 가리키자 실리아가 급하게 그쪽 의자를 빼주었다.

타냐는 어색해하며 의자에 앉았다.

20 명은 앉아서 먹어도 될 큰 식탁의 맞은 편은 사실 이목구비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카딜의 바로 옆에 앉은 타냐는 시녀들과 하녀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한번도 먹어본적없는 고퀄리티의 스테이크를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몰라 카딜이 하는 대로 따라했다.

하지만 스테이크는 생각보다 그렇게 쉽게 썰리지 않았다. 곤란함과 당혹함이 엇갈리면서 이마에 진땀이 밸
때 카딜이 타냐의 접시를 빼앗가 가더니 이미 다 잘라진 그의 스테이크접시와 바꿔치기했다.

시종들의 놀라는 눈빛을 무시한채 그는 다시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타냐는 절대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없는 분위기에 음식이 코로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른채


기계적으로 손과 입을 움직였다.

시종들만 물려도 좀 덜 불편하겠는데.

“실리아.”

“예, 하에르 대장군님.”

“모두 물러가게 해.”

“예?”

실리아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묻자 카딜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러자 실리아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시종들에게 눈짓을 했다.

모든 시종들이 물러나자 실리아가 말했다.

“모두 물렸습니다.”

“너도.”

“!”

너도라는 말에 흠칫 놀랐지만 실리아는 알았다는 듯 목례를 하고는 뒷걸음질 쳤다.

“이제 편히 먹어.”

카딜의 말에 타냐는 그제야 카딜이 왜 그랬는지 알아차렸다. 태연한척 했지만 카딜은 이미 알아차렸던
것이다. 타냐는 감사의 표시로 그와 잠시 눈을 맞추고는 식사를 이어나갔다.
“동생 이름이 뭐라고 했지?”

드디어 동생에 대해서 알아보려는구나 싶어 타냐가 얼른 대답했다.

“이름은 토디엘 이고 나이는 열네살입니다.”

“그래 토디엘이라고 했었지, 소지주 폴란에게 끌려갔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그녀가 살던 지역의 땅을 소유한 소지주들은 천민들의 노동력을 흡혈귀처럼 빨아들이면서 세금은 세금대로
매겼다. 추수가 끝나도 밀가루 한자루도 남지 않을 경우가 많았다. 어쩔 수 없이 밀가루를 빌리면 그
이자는 두배에서 세배가 넘어 해마다 빚은 쌓여만 갔다.

“오늘 당장 알아보지.”

“정말이십니까?”

이렇게 까지 빨리 손을 써줄줄 기대하지 않았던 타냐였다. 여태 보아왔던 귀족들은 약속을 해놓고 제때에
지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천민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아 그런 것이다. 천민과의 약속이 무슨 약속이든가. 그래서 카딜도
한달이나 달포가 지나야 뭔가 물어보고 움직이는 시늉을 할 줄 알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이 수소문하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매달렸던 것이다.

“정말이냐니? 내가 알아본다고 했는데 설마 믿지 않았던거야?”

“아, 아닙니다, 너무 감사해서 저도 모르게 재차 확인하느라….감사합니다, 대장군님.”

타냐가 벌떡 일어나서 허리를 깊이 숙여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카딜은 여전히 무감한 표정으로 식사를
계속하라는 듯 눈짓을 했다. 타냐는 벌떡 일어났던 것이 무안해져 조용히 자리에 앉아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평화로운 식사시간이 지나고 그의 내실로 자리를 옮겨 티타임도 가졌다.

하지만 잠시 평화스러워 보이던 상황은 바훌이 나타나면서 깨졌다.

“대장군, 이게 지금 무슨일입니까? 천한 계집을 내실까지 들이시는 것도 모자라 식사를 함께 하시다니요!


아랫것들이 벌써부터 대장군님의 행동에 대해서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소식을 들은 바훌이 득달같이


달려와서 카딜에게 따지듯 물었다.

“흥분그만하고 이리와서 차나 마시자. 타냐 넌 그만 물러가있어라.”

콧김을 뿜어내는 바훌의 눈치를 보던 타냐는 카딜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내실을 빠져나갔다.
바훌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의 뒤통수에 꽂히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타냐가 내실을 나갈 때 까지 노려보던 바훌이 카딜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장 저 계집을 내보내십시오, 지금 시종들이 뭐라고 수군대는줄이나 아시고 이러십니까? 황제 다음으로


가는 직위를 가지신 분이 천민나부랭이를 곁에 두시는 것도 모자라 함께 식사를 하시다니요?”
“지금 날 훈계하는 거야?”

일순간 날카로워진 카딜의 눈빛에 바훌은 살짝 기가 꺽였지만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황제폐하께서 로젠시아님을 카딜님의 베필로 생각하시는 것 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일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어쩌시려고.”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내 베필을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다, 넌 내가 그의 명에 따를것이라 생각해?”

카딜의 말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아는 바훌이 한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왜 그런 어마어마한 특혜를 왜 뿌리치시려 하십니까? 황제의 사촌 동생과 결혼하면 황제 다음으로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정녕 몰라서 이러십니까?”

바훌의 말에 카딜이 그를 노려 보았다. 바훌은 카딜의 시선에 얼른 두 눈을 내리깔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네가 제일 잘 알텐데?”

누가 들었다면 역모라고 할 소리였지만 바훌은 입을 다물었다. 현재 황제보다 더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카딜이라는 것을 사실 바훌도 알고 있었다.

아클란대제국의 군대를 총괄지휘하는 카딜이었다. 황제라고 해도 카딜의 군대에 함부로 명령을 내릴 수


없다.

특히 그가 이끄는 붉은 기사단은 황제의 명도 듣지 않고 오로지 카딜의 명만 듣는다. 그리고 카딜의 사병


또한 만만치 않았다.

황제의 권력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귀족이 가질 수 있는 사병의 수는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한된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카딜의 사병들은 정예군단이라 황제의 군대와 수적으로는 밀릴지몰라도
투력으로는 절대 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넌 언제부터 내가 하는 일에 이렇게 간섭이 많았지? 내가 천한 계집하나 내 마음대로 하지도


못해서 네 허락을 받아야 하는거냐?”

카딜이 천한계집이라고 하자 바훌은 조금 안도했다.

“그렇죠? 그러신거죠?”

“뭐가?”

갑자기 환해진 얼굴로 제게 가까이 다가서며 묻는 바훌 때문에 카딜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천한계집하나 그냥 데리고 놀다 버리시려는 거죠? 하하하, 난 또 그런줄도 모르고 식겁했습니다.”

바훌이 타냐를 천한계집이라고 표현하자 카딜의 속이 뒤틀렸다. 자신은 그녀를 그렇게 부를 수 있어도
다른 놈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가만히 있는 이유는 이렇게 해놔야 바훌이
타냐를 건드리지 않을 것 같아서다.

아무리 천하를 다스리는 군왕이라고 해도 명분이 있어야 뭐든 할 수 있다. 카딜도 그랬다. 바훌이 자신의
신하지만 자신이 상관으로서의 명분없는 행동을 한다면 아무리 부하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누를수만은 없다.

현재로서는 타냐의 특별한 능력을 바훌에게 말할 수 없다. 한번 더 정확하게 그녀의 능력을 경험하거나
눈으로 보아야만 한다.
만약 타냐가 제가 생각한대로 치유의 능력을 가졌다면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럼 전 걱정 안해도 되는 것입니까?”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듯 묻는 바훌을 노려보던 카딜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바훌의


미간에 잡혔던 주름이 금새 펴졌다.

“알겠습니다, 제가 괜히 아랫것들이 수군대는 소리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에르


대장군님.”

바훌이 너무 정중하게 사과를 하자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진 카딜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향한 마음이


무엇인지 카딜도 헷갈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말 치유의 능력을 찾아내려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감정이 생겨난 것인지.

6화

다음날.

카딜은 타냐가 말한 소지주에게 심부름꾼을 보냈다. 타냐가 그에게 진 빚이 얼마인지 알아보고 빚을 다


갚은 후 토디엘을 찾아오라고 지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카딜은 토디엘을 찾는 것에 그리 어려움이 없을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소지주의 집에 다녀온 심부름꾼의 보고에 카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미 다른 곳에 팔아 넘겼다고?”

“그렇습니다 대장군.”

챙그랑!

카딜의 찻잔에 차를 따르던 타냐는 동생이 다른 곳에 팔려갔다는 소리에 그만 손에 힘이 빠져버렸다.

이제 곧 동생을 만나겠구나 기대하고 있었기에 그 실망감은 대단했다.

카딜은 뜨거운 차가 발에 쏟아졌는데 입술을 꾹 깨물고 참아내는 타냐를 보며 다시 물었다.

속으로 욕을 한 카딜이 다시 물었다.

“언제 누구한테 팔았다는건 알아냈고?”

“안그래도 물어봤습니다만 시장에서 노예장사를 하는 상인에게 넘겨서 어디로 팔려갔는지는 알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노예상인들은 도시에서 도시로, 마을에서 마을로 떠돌아다니기도 하고….”

심부름을 다녀온 시종이 카딜의 화난 음성에 몸둘바를 몰라하며 주절거렸다.

“알았다, 일단 물러가있어.”

카딜은 심부름꾼을 먼저 물렸다. 부서진 찻주전자 조각을 줍는 타냐의 손이 떨렸지만 카딜은 심부름꾼이
나갈때까지 기다렸다. 내실 문이 닫힐 때서야 그가 급하게 일어나서 타냐에게 다가왔다.

“데인거야?”

가죽신을 신은 타냐의 발을 잡자 타냐가 괜찮다고 했다. 이미 눈물이 고인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쳐다본


카딜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괜찮습니다, 별로 심하게 데지 않았습니다.”

타냐가 그의 손을 밀어냈지만 카딜은 힘으로 타냐의 가죽신을 벗겨냈다. 빨갛게 변한 그녀의 발을 본 그가


타냐를 안아 들었다.

“괜찮….”

“입닫아.”

괜찮다고 말하려던 타냐가 얼른 입을 닫았다. 카딜은 그녀를 욕조벽에 앉혔다.

차가운 물을 받아 그녀의 발을 담그게 했다. 한겨울에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자 몸이 절로 떨렸다.

“그, 그럼 우리 동생은 못 찾는 건가요?”

그녀의 발에 물을 끼얹어주던 카딜은 절망감에 뿌옇게 변한 타냐의 청안을 올려다 보며 고개를 저었다.

“반드시 찾을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전 북대륙을 뒤져서라도 찾아서 네 앞에 데려다


줄테니까.”

왠지 모르지만 그의 말에 믿음이 갔다. 붉은 기사단의 총지휘관이자 아클란 대제국의 대장군 카딜


하에르가 마음만 먹는다면 못할 일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눈안에 가득찼던 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카딜은 안쓰러운 생각에 타냐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 속으로 이를 갈았다. 열네살 어린 남자아이를 어디에 쓸데가 있다고 강제로 데려간 것도 모자라
노예상인에게 팔아넘기다니. 동시에 이런 말도 안되는 법을 만든 황제 알테베르에게도 화가 났다.

***

소지주 폴란의 저택.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요!”

시종하나가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달려오며 폴란을 찾았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소란인거야?”

짜증스럽게 묻는 그에게 시종은 턱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다스리고는 사색이 되어 고했다.

“하에르 대장군님께서 친히 오셨습니다요, 어서 나가보십시오 주인님.”

“뭐라고?”

폴란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번개같이 현관으로 내달렸다. 이미 그의 저택 마당에는 백마를 탄 카딜과


그의 부대원 십여명이 도착해있었다.

“아이고, 대장군님, 이 누추한 곳에 어인 행차십니까요.”

폴란은 허리를 절반이상 굽히며 머리를 조아렸다. 붉은 기사단복을 입은 카딜은 누가봐도 뭔가 법을


집행하기 위한 차림새였다. 폴란은 아까 카딜의 복장을 보자마자 뭔가 불안했다. 부대원들은 긴 창을
옆구리에 세운채 카딜의 명을 기다렸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크게 잘못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폴란 도란테 자작, 타냐라는 사람을 알고 있나?”

카딜의 물음에 폴란은 며칠전 일을 떠올리고는 얼른 대답했다.

“예, 압니다만 대장군님께서 어찌 그 천한 것의 이름을 입에 담으시는지….”

타냐를 그 천한것이라고 표현하자 카딜의 머리카락이 쭈삣 일어섰다. 하지만 그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물었다.

“그녀에게 받을 돈이 얼마지?”

“예?”

“내가 갚아줄테니 원금에 이자까지 전부 더해서 불러봐.”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지만 폴란은 원금은 물론 이자까지 전부쳐서 갚아준다는 말에 이게 어인


횡재인가 싶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대충 대답을 하려던 그는 제대로 받아야겠다 싶어서 잠시만이라고
하고는 장부를 가지러 왔다. 그리고 장부 마지막장에 지금까지 받아야할 금액의 배를 기재했다.

횡재할 수 있는 기회다 싶어 원금에 이자, 또 이자에 이자까지 붙였다. 물론 평상시보다 곱절이나 더


붙였다.

“금화 3 천클랑은 족히 넘습니다만 대장군님께서 갚아주신다고 하시니 3 천클랑만 받겠습니다.”

특별히 인심을 쓰는 듯 야비하게 웃으며 금화 3 천클랑이라는 말에 속으로 혀를 찼지만 카딜은 준비해온


금화를 부하에게 꺼내오라 명했다.

폴란은 설마 하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금화 3 천클랑이면 타냐가 진 빚의 20 배가 넘는다. 어제 무슨


꿈을 꾸었나 생각하며 제게 건네는 금화상자를 받은 폴란은 상자뚜껑을 열어 보았다.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금화를 본 그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나 귀에 걸렸을때였다.

“이제 토디엘을 내놓아라.”

“예?”

“왜 그렇게 놀라는 거지? 빚을 갚으면 되돌려 주기로 하고 토디엘을 담보삼아 데려갔지않느냐? 이제 그


빚을 갚았으니 토디엘을 데려다 놓는 것이 정확한 계산이지, 안그런가? 설마 노예상에게 판 것이냐?
그렇다면 이건 계약위반이다. 아무리 빚을 졌다고 해도 담보로 데려간 사람을 판다는 것은 명백한
위법이다, 그 정도는 알고 있을텐데?”

타냐가 그 많은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폴란은 아무 생각없이 토디엘을 노예상에게


팔아넘겼다. 그녀가 죽으라고 일을 해도 불어나는 이자 조차 따라잡지 못할 것은 삼척동자도 알 정도로
폴란의 이자율은 높았다. 그녀의 남동생 토디엘을 팔아 넘겼지만 빚은 별로 탕감되지 않았다. 적당히
시간을 좀 더 준 후 타냐마저 제 소유로 데려오려 했었던 그는 잠시 패닉상태가 되었다.

“지엄한 국법을 어기면 어찌되는지 모르는바 아닐테고, 뭐하느냐, 어서 토디엘을 데려오너라.”

카딜의 말대로 담보물 또는 담보인은 그 소유주가 포기각서를 쓰기전에는 팔아넘길 수 없다는 국법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국법일뿐 천민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항목이었다. 하지만 그 국법을 카딜이
따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이고 대장군님, 그게 아니라-”


폴란이 뭔가 변명을 하려 했지만 카딜이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황제께서 정하신 법을 어긴다는 것은 반역이나 다름없다. 반역자는 단두대에 오른다는 것도 잘 알겠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법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카딜이었지만 폴란은 감히 그에게


따지지 못했다.

“아이고,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요, 제발 한번만 용서해주시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요, 제발 한번만


굽어 살피옵소서, 대장군.”

카딜의 명령 하나면 당장이라도 목이 잘린다는 것을 잘 아는 폴란이 털썩 무릎을 꿇고 두 손 까지 싹싹


빌었다. 그러자 폴란을 가만히 노려보던 카딜이 말했다.

“좋다, 네가 이렇게 까지 용서를 구하니 나도 한 가지 방법이 생각이 나긴 하는데 따르겠느냐?”

“아이고, 그럼요,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습니다요.”

폴란이 악어의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크게 주억이자 카딜이 말했다.

“지금 당장 타냐의 빚을 모두 탕감하고 그 장부를 내가 보는 앞에서 불태워라.”

“아이고, 예예, 당장 그렇게 하겠습니다요.”

목숨이 경각에 달린 폴란은 시종에게 눈짓을 했고 시종이 부싯돌을 가져와 불씨를 만들었다. 폴란은
카딜에게 잘 보라는 듯 장부를 북북 찢어서 불태웠다.

“했습니다요, 이제 타냐는 저한테 빚진 것이 단 한푼도 없습니다요, 그럼 이제 절 용서해주시는겁니까?”

“그럴 수는 없다, 내가 국법을 어긴 널 이렇게 쉽게 용서해준다면 나라의 기강이 바로 잡히지 않을 것이다.


여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다시는 너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엄하게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예?”

타냐에게 받을 빚을 단 한품도 못받았는데 또 뭔가가 남았다는 말에 폴란의 안색이 팥죽색으로 변했다.

“마을 광장에 매달아 놓고 태형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벌금으로 금화 1 천 클랑을 내야 할 것이고 가지고
있는 전답을 모두 몰수할 것이다.”

“!”

카딜의 말이 너무 믿어지지가 않아 폴란은 벙어리처럼 말문이 막혔다. 팥죽색이던 얼굴색은 이제 시커멓게


탄 숯덩이 색으로 변했다.

금화 1 천클랑 이라고 했을때는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는제 전답을 모두 빼앗긴것도 모자라 광장에서
태형까지 받아야 하다니.

“왜 대답이 없는 거지? 아까운것이냐? 네 목숨값인데도? 만약 네가 받아들일 수 없다면 황제폐하께


끌고가서 단두대에 세울 것이다. 당장 결정하라, 네 목숨이냐, 네 재산이냐.”

폴란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재산이 아무리 많은들 제 목숨 잃으면 무슨 소용이든가. 하지만 목숨은
건졌는데 재산이 하나도 없다면 그 또한 살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죽는 것 보다야 낫지 싶어
그는 대답했다.

“말씀하신대로 따르겠습니다요. 으흐흐흐흑.”


절로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종들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저 새끼 안 잡아 가고
귀신은 뭐하나 했었는데 드디어 귀신보다 더 무서운 카딜 대장군님이 떴다.

소문에 타냐가 대장군의 여자가 되었다고 했는데 사실인가 보다. 폴란은 피눈물을 흘리며 가진 전답과
금화 1 천클랑을 나라에 받치고 온마을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광장에서 채찍질까지 당했다. 타냐에게 받을
돈을 불려서 받으려다가 돈은 돈대로 한푼도 못 받고 빚은 탕감해주었고 그도 상거지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이 일을 건너 건너 마을까지 소문냈고 이후 소지주들은 함부로 담보물이나
담보인을 처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카딜은 어떤 소지주에게도 나타나지 않았다.

***

타냐의 복수를 하고 돌아온 카딜은 저 혼자 뿌듯해져서는 연신 입술꼬리가 실룩였다.

소식을 들으면 좋아하겠지?

속으로 생각하며 별채로 온 그가 타냐의 거처로 향했다. 그녀의 남동생 토디엘은 찾지 못했지만 이미
사람들을 풀어 놓았다. 마을마다 돌아다니는 노예상인들마다 찾아가서 물어보면 분명 토디엘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하는 카딜이었다. 물론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그건 카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크흠!”

헛기침을 하자 종종거리는 발걸음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7화

카딜을 본 타냐는 흠칫 놀랐지만 얼른 인사를 했다.

“쉬고 있었어?”

“아, 네, 그냥 좀….”

대충 대답을 얼버무릴 때 카딜이 타냐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게스트룸으로 사용하던 곳을 그녀의 방으로
꾸며주었기에 방의 분위기는 완전 달라졌다. 은은한 꽃향내가 나는 것은 아마도 타냐의 체향일 것이다.

타냐는 카딜의 뒤를 따랐다. 좋은 소식이라도 들고온 것일까 기대를 하며.

타냐의 침상에 털썩 앉은 카딜은 그녀가 덮고 자는 이불을 손바닥으로 쓸며 물었다.

“잠자리는 어때?”

“예, 더 없이 좋습니다.”

평생 이렇게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자본적도 없고 이렇게 고급스러운 이불조차 덮어본적 없는 타냐로서는


그저 고마울따름이었다.

그때 카딜이 침대위로 올라가더니 몸을 뉘었다. 그 모습에 놀란 타냐는 어쩔줄 몰라했다.

타냐의 심장은 아까부터 빠르게 뛰고 있었다.

툭툭!
그가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타냐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두 팔을 접어서
베개처럼 베고 있던 그가 뭔가 뿌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오늘 내가 뭘 하고 왔는지 알아?”

“?”

그의 물음에 타냐는 고개를 저었다.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을 그가 알아차릴까봐 타냐는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너한테 고리대금을 붙여 돈을 뜯어갔던 폴란 그놈을 혼내주고 오는 길이다.”

“!”

타냐가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제 동생은….찾을 수 있는 건가요?”

“흐음, 그건 아니다.”

타냐가 실망한 눈빛으로 온몸에 힘을 쭉 빼자 카딜의 좋았던 기분도 이내 사라졌다. 오직 동생을 찾는


것에만 포커스가 맞추어진 타냐에게 소지주 폴란을 혼내줬다는 것은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제길,

속으로 제 스스로에게 욕을 한 카딜은 실망하는 타냐에게 희망을 주려고 약간은 부풀려서 말했다.

“걱정마, 한달 안에 네 동생을 찾아줄테니까, 이미 사람들을 풀어서 아클란의 노예상들을 이잡듯이


뒤지라고 했으니까.”

“감사합니다.”

대답은 감사하다고 하는데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말이 쉬워 이잡듯 한다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카딜도 알고 타냐도 알고 있었다.

쓴 입맛을 다신 카딜은 다시한번 폴란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하자 타냐의 두 눈에 절로 눈물이 차올랐다.

“흑, 죄, 죄송합니다.”

노예상에게 넘어가면 새로운 주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손과 발에 쇠고랑을 차고 창살로 만들어진


케이지에서 지내야 한다. 노예시장이 열릴때마다 짐승처럼 끌려나와 사람들 앞에 서야하고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맞기가 일쑤다. 그걸 너무 잘 알기에 토디엘 걱정에 절로 울음이 터져나온 것이다.

사람을 물건처럼 소유할수 있는 시대였다. 그래서 돈많은 지주들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사람을 소유했다. 그것이 노예가 되었든 시종이 되었든 아니면 첩이 되었던 가리지 않았다.

귀족들이 오히려 더티하게 노는 경향이 심했다.

남편이 첩을 가질 수 있듯 아내도 남첩을 가질 수 있는 시대였다. 현재의 황제 알테베르 드 파비앙드는


첩의 소생이다. 그래서인지 첩에게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고 첩에 대한 처우개선도 많이 하고 있는
편이었다.
선황제인 부친은 30 명이 넘는 첩을 거느렸었다. 어릴 때부터 보고 배운 것이 그거라 알테베르는 황제가
되자마자 국법을 바꾸었다.

모든 인간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 단, 돈으로 살 능력만 된다면. 이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첩을


하나 가질때마다 세금을 매겼다. 결국 부자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후 나라는 그야말로 개판이 되었다. 흥청망청 쓰기만 하려니 세금을 더 거두어들여야만 했다.

1 년에 한번 물가상승에 따라 올렸던 세금은 6 개월로 짧아졌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감당이 되지않자 3


개월, 이제는 세금을 매달 올린다는 것을 국법으로 정했다. 결과적으로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자는 더 가난해져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하나의 산을 이룰 정도였다.

폭군중에 폭군인 황제 알테베르와 힘을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카딜 하에르였다.

***

다음날.

카딜은 황제의 부름을 받고 황제가 머무는 수이젤궁으로 입궁했다. 화려하다 화려하다 말하지만 이처럼
화려할 수는 없을 터였다. 마치 황금을 쳐발라놓은 듯한 궁 내실 벽을 쳐다본 카딜이 티크 우드에 황금을
쳐발라서 만든 의자에 앉아 있는 황제 알테베르에게 인사를 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에게 한달의 휴가를 주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불러들였는지 궁금했다. 물론 눈치는
챘지만 아니길 바랐다.

“어서와 카딜.”

황제 알테베르의 정겨운 호칭에도 카딜의 표정은 특별히 변하는 것이 없었다.

“부르심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겁니까?”

기사들이 인사하는 방식으로 인사한 카딜은 황제 앞으로 한걸음 더 다가갔다.

“무슨 일이라면 그대가 여기 온 것이 무슨 일이겠지 하하하!”

호쾌하게 웃는 황제였지만 카딜은 전혀 웃지 않았다. 오히려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카딜의 무표정에 황제 알테베르는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혀를 찼다.

사람이 농담도 하고 살아야지 저렇게 앞뒤가 꽉 막혀서야 원. 속으로 생각한 알테베르가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카딜을 살짝 노려보며 대답했다.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국정을 논해보자는 뜻에서 불렀네, 그러니 인상 좀 그만 펴지 그래?”

알테베르의 말에 카딜이 애써 표정을 풀었다.

“그런거라면 이렇게 급하게 사람을 보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휴가중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폐하께서 제게 주신 휴가아닙니까?”

카딜의 말투는 따지는 뉘앙스가 역력했다. 그런 카딜에게 화를 내지 못하는 황제였다. 감히 황제에게


얼굴 똑바로 들고 쏘아보며 따지듯 묻는 자가 카딜 하에르 말고 누가 있겠는가. 다른이가 이랬다면 벌써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알테베르는 노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카딜은 제 권력을 탄탄하게 받쳐줄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확고하게 제편으로 만들기 위해 사촌 여동생 로젠시아와 정략결혼을 시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누구도


황제의 자리를 탐할 수 없게될 것이다.

“휴가를 열심히 즐기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다. 천민 계집 하나를 데려왔다며?”

“!”

황제의 말에 카딜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제게 사람이라도 붙이셨습니까?”

카딜은 노골적으로 기분나쁨을 표했다. 하지만 알테베르 황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당연한 듯이 대답했다.

“나는 아클란 대제국의 황제이다, 내가 모르는 일은 없어야 하는게 당연한 것 아닌가? 특히 내


사촌매제가 될 사람이라면 말이야.”

알테베르의 사촌매제가 될 사람 이라는 말에 카딜의 눈썹이 심하게 꿈틀했다.

“황제폐하-”

뭔가 반박하려는 말을 하려할 때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폐하 로젠시아 드 파비앙드 레이디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시종의 알림에 카딜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이마에 짚었다. 황제가 저를 부를 때 마다 골치아픈일이


벌어졌지만 오늘은 정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제발 그 일만은 아니었길 바랬지만 그의 바램은
그저 바램으로만 끝이났다.

“들라하라.”

“예, 황제폐하.”

시종장 스탈드는 로젠시아를 황제 앞으로 이끌었다.

“오라버니, 로젠시아 파비앙드 인사드립니다.”

로젠시아가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잡고 살짝 무릎을 접어 인사했다.

“그래, 어서 와라, 카딜 하에르 대장군과도 인사 나누어라.”

알테베르의 말에 로젠시아가 카딜을 향해 돌아섰다. 황제에게 하듯 인사를 정중하게 하자 카딜도 어쩔 수


없이 기사들의 인사법으로 로젠시아에게 인사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레이디.”

카딜의 인사에 로젠시아는 의도적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카딜은 못마땅한 표정을
겨우 감추고 로젠시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거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했을 때 소리만 쪽내고 멀어졌지만 로젠시아의 입꼬리는 마구 실룩였다.

“반가워요 카딜. 전쟁터에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내내 걱정했었어요, 이렇게 무사하게 돌아와 다시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여요.”
로젠시아의 말에 카딜은 감사의 뜻으로 목례만 했다. 그의 무뚝뚝함에 황제도 로젠시아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자 이제 올 사람 다 왔으니 식사를 하러 갈까?”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시종장이 세 사람을 다이닝룸으로 이끌었다.

“두 사람 이제 그만 결혼해야 하지 않을까?”

식사가 끝나갈 무렵 황제 알테베르는 식사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참고 참았다가 꺼냈다. 그 말에


로젠시아의 얼굴은 이미 붉어졌다.

어릴때부터 보아왔던 카딜을 혼자 흠모해왔던 로젠시아는 드디어 그의 여자가 된다는 생각에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황제폐하, 제 의사는 분명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카딜은 불편함을 감추지 않고 미간을 구기며 황제에게 따지듯 말했다.

“나도 내 의사를 분명히 말했다 카딜, 한번만 더 거절하면 황명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겠다, 그러니 더
이상 이 건에 대해서는 논하지 말라.”

황제 알테베르가 강경하게 나오자 카딜도 강력하게 반박했다.

“제가 로젠시아와 결혼하는 일은 죽어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식사 즐거웠습니다. 저는 그럼


이만.”

카딜이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 돌아서버리자 알테베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리 파워가 황제인 자신을 넘어선다고 해도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로젠시아는 멀어지는 카딜을 아련한
눈으로 쳐다보다 알테베르를 졸랐다.

“오라버니, 어떻게 좀 해보세요, 황제씩이나 되가지고 저런 기사단장 하나 마음대로 못해요?”

로젠시아가 알테베르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려버렸다. 자존심이 상한 알테베르는 이를 아득 갈더니 시종장


스탈드를 불렀다. 시종장 스탈드는 갑자기 변한 살벌한 분위기에 어쩔줄 몰라 하며 황제 앞에 허리를
숙였다.

“티도를 들라 하라!”

“예?”

티도 올레르는 황제의 비밀병기중의 하나였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시종장밖에 없었다. 너무


놀란 스탈드가 감히 황제에게 반문했다가 그의 매서운 눈빛을 보고 얼른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폐하, 당장 들라하겠나이다.”

스탈드는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사색이 되었다. 카딜 대장군이 저렇게 가고 난 후 티도를 불렀다는 것은


피바람을 예고하는 것과 같았다.

8화

“티도는 왜요?”
로젠시아의 물음에 알테베르는 귀찮다는 듯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만 물러가라, 남자 마음하나 휘어잡지 못하는 주제에 쯧.”

알테베르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로젠시아는 입술을 비죽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남자휘어잡는 기술이 없는게 아니라 카딜 하에르 대장군이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거라구요, 흥!”

돌아서 나가려던 로젠시아는 자존심이 상해서 한마디 던졌다.

그러자 알테베르는 한심한 눈빛으로 말했다.

“모르면 가만히 있어, 이유는 그게 아니니까.”

“그게 아니라뇨?”

로젠시아는 아예 나갈 생각을 접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알테베르의 말에 뭔가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알테베르는 로젠시아를 보며 혀를 차다 말해주었다.

“여자가 이미 있어, 그것도 천민여자나부랭이 말이다.”

“뭐라구요?”

“천민기집 하나를 처소에 숨겨놓고 매일밤 그년을 안고 있다고.”

“하아-, 마, 말도 안돼, 아니 어떻게 카딜이 천민계집을 안아요?”

“나도 그게 궁금하다, 조만간 누군지 알아볼테니까 넌 이제 그만 돌아가, 그리고 조신하게 신부수업이나


하고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해줄테니까.”

알테베르의 말에 로젠시아는 짜증을 겨우 참아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제에 대한 예를 표한 그녀가


내실을 나갔다.

로젠시아가 나가고 티도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그래, 네가 해줘야할 일이 있다.”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티도의 말에 알테베르는 스산한 기운을 뿜어내며 한쪽 입가를 비스듬히 말아 올렸다.

***

황제의 궁에서 나온 카딜은 마차에 올랐다.

“그만 돌아가자.”

“식사를 이렇게 빨리 끝내셨습니까?”

바훌의 물음에 카딜은 대꾸도 않고 마차의 문을 닫아버렸다. 뭔가 또 사단을 냈구나 생각했지만 바훌은
한숨만 내쉴뿐 마부에게 출발하라 지시했다.

카딜을 태운 마차는 황궁을 빠져나와 한참을 달려 그의 저택으로 최단시간 도착할 수 있는 숲길로 들었다.
비적때가 자주 출몰한다는 숲길이라 일반인들은 피해다니는 길이지만 카딜에게는 걱정거리도 아니었다.

감히 카딜의 마차를 습격할 비적은 없으니까.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두 눈을 감은 카딜은 타냐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상하게 그녀만 생각하면 온몸이
저릿해질 정도로 열이 올라왔다. 그 열은 카딜의 정수리를 한번 치고는 다시 아래로 향했다. 묵직한
기운으로 뭉쳐진 열기는 결국 그의 중심으로 몰렸다.

눈을 뜬 그가 제 팔뚝에서 아물어가는 상처를 매만지다가 다시 두 눈을 감았다.

그렇게 또 어느정도 달리는데 갑자기 복면을 쓴 놈들이 산속에서 튀어나와 카딜의 마차앞을 가로막았다.

“비적떼다! 대장군을 보호하라!”

바훌의 고함소리에 카딜을 경호하던 호위대가 일제히 마차를 에워쌌다. 감히 하에르 대장군의 마차를
습격하다니. 괘씸하다 생각한 바훌이 검을 뽑아 들었다.

시커먼 복면을 한 비적떼들은 그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무슨 일이지!”

카딜이 마차의 창문을 열고 물었다.

“비적떼입니다! 안에 그대로 계십시오!”

바훌의 말에 카딜이 다시 창을 닫았다. 비적떼 정도야 식은죽 먹기라는 생각에 카딜은 전혀 당황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늘 비적떼는 보통의 비적떼와는 완전히 달랐다. 무공이 뛰어나서 바훌마저도 힘겨워하며 겨우
방어하고 있었다.

그중 바훌과 싸우는 한놈은 바훌이 밀릴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도 싸움이 끝나지 않자 카딜이 마차 밖으로 나오려 할때였다. 누군가 마차를 끄는 말을
자극했고 말 두 마리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마부는 이미 비적떼에게 당해 마부가 없는 상태에서 말들이 달리자 마차는 미친 듯이 요동치며 벼랑길로


내달렸다.

“대장군님!”

바훌은 마차를 잡기 위해 그쪽으로 향하려 했지만 또 다시 비적떼 우두머리의 공격에 차단당했다.

마차 창문을 열고 밖을 살피던 카딜은 입안으로 욕을 하며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대로 달리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이다.

한낱 비적떼에게 이렇게 당하다니 카딜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목숨부터 건지고 봐야한다.

마차를 끄는 말 두 마리는 벼랑인줄도 모르고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제길, 할 수 없군.”
카딜은 마차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뛰어내릴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돌부리에 걸린
마차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그대로 확 뒤집혔다. 문이 열려 있었던터라 카딜은 뛰어내릴 시간도 없이
마차와 함께 몇바퀴를 굴렀다.

어딘가에 머리가 부딪힌 카딜은 정신을 잃기전 몸을 날렸다.

***

“이게 어떻게 된일입니까요?”

실리아는 들것에 실려 들어오는 카딜을 보고 기함을 했다.

“어서 치료마법을 사용하는 아밀리에를 들라하라!”

비적떼와 싸우다 여러군데 상처를 입은 바훌이 시종에게 소리쳤다. 카딜이 이렇게 심하게 다쳤던적은
없었기에 모두들 우왕좌왕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뒤늦게 소식을 들은 타냐가 달려왔다.

“타냐님, 대장군께서 비적떼의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실리아의 말에 타냐는 의식이 없는 카딜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과 온몸에 난 상처들을 본 타냐는 제일


먼저 남동생 토디엘을 떠올렸다.

이대로 카딜에게 변고라도 생겨버리면 남동생을 찾을 희망이 사라진다. 그때문에라도 타냐에게 이남자는
절대 죽으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카딜님, 카딜님!”

타냐가 카딜의 이름을 불렀지만 카딜은 미동조차 없었다.

“어디를 어떻게 다친건가요?”

눈물이 글썽한채 카딜에게 물었지만 바훌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머리를 다치신 것 같은데 나도 정확히 알수는 없다. 일단 치료마법을 사용하는 아밀리에를 불렀으니
기다려보자.”

카딜이 아끼는 여자라는 것을 알기에 바훌도 이제는 타냐를 무시하지 않았다.

“바훌님! 치료마법사 아밀리에가 도착했습니다!”

시종의 알림에 바훌이 급하게 들어서는 아밀리에에게 말했다.

“어서 치료를 하거라, 어서!”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밀리에는 카딜에게 다가왔다. 타냐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깨어나게 해달라고.

아밀리에는 뭔가 주문을 외우면서 카딜의 얼굴 위에 두 손바닥을 펼쳤다. 뭔가 기를 불어넣는 듯


아밀리에의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두 눈을 감은 아밀리에는 입안으로 계속 주술을 외우면서 기를 불어 넣었다.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도록 한참동안 기를 불어 넣었지만 카딜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왜 깨어나시지 않는 거지?”

기다리다 못한 바훌이 아밀리에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 글쎄요,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상처가 워낙 깊으셔서….죄송합니다만 저의 실력으로는


안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못 고치면 누가 고친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황제폐하를 모시는 치유마법사라면 분명히 깨어나실 것입니다.”

아밀리에의 말에 한숨을 길게 내쉰 바훌이 알았다며 그녀를 물렸다.

“바훌님, 어서 황제폐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치유마법사를 보내달라고 하십시오.”

실리아의 말에 바훌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머뭇거리는 이유가 몇가지 있었다.

첫째로 비적떼가 의심스러웠다. 그 이유는 그들의 검술 실력과 그들이 사용하는 검술때문이었다. 황제를
호위하는 무사들만 사용하는 검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 비적떼를 보낸 사람이 황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황제폐하를 모시는 치유마법사를 부르지 못하는 것이다. 치유마법사를 부르면 카딜 대장군이
심하게다쳤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고 그것은 황제가 카딜을 제거하기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기때문이다.

황제와 카딜은 적과의 동침처럼 아군이면서 기회만 되면 서로를 제거하려는 적이기도 했다.

“내가 알아서 할테니 타냐만 남고 일단 모두들 물러가 있으라.”

바훌의 명령에 시녀장 실리아가 모두를 이끌고 내실을 나갔다. 바훌도 비적떼 우두머리와 맞서싸우면서
생긴 칼에 맞은 크고 작은 상처로 인해 더 버티기 힘들었다.

“타냐, 하에르님을 부탁할게, 나도 상처를 좀 치료해야 할 것 같아.”

“염려마십시오, 제가 잘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타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바훌이 내실을 나갔다. 모두 나가고 타냐 혼자만 남자 그녀는 카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얼굴에 붉고 푸른 멍자국과 크고 작은 상처들을 내려다보던 타냐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불 속에 들어 있는 카딜의 손을 잡은 타냐가 두 눈을 감고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깨어나요, 내 동생 찾아주기로 약속했잖아요, 당신은 입으로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약속 지켜요 제발, 제발 죽지 말아요.”

그때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하늘에 한줄기 빛이 유성처럼 획을 그었다.

두 눈을 감고 있는 타냐의 몸주변으로 밝은 빛이 생겨났고 그 빛은 천천히 타냐가 잡고 있는 카딜의


손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하얀빛은 손에서 팔로 팔에서 어깨를 타고 카딜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두 눈을 질끈 감은 타냐는 그저 마음속으로 기도만 하고 있었다.

‘제발 깨어나요, 제발.’

“하아-!”

갑자기 카딜이 숨을 크게 내쉬는 소리에 타냐가 두 눈을 떴다. 그 순간 하얀 빛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타냐….”

“카딜님, 정신이 드세요?”

타냐는 토디엘을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한 얼굴로 카딜을 불렀다.

카딜은 제 손을 잡고 있는 타냐를 쳐다보다 그의 몸상태를 확인했다.

분명 마차와 함께 뒹굴면서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었는데 지금은 마치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하기만 했다.

“카딜님, 상처가 다 사라졌어요.”

놀란 눈으로 말하는 타냐를 쳐다본 카딜은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생각하다 타냐도 자신이 가진 능력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네가 기도한 것 아니었어?”

“네?”

“나 빨리 낫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 아니었냐고 물었어.”

“아, 기도는 했어요, 제발 낫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기는 했는데….”

“그래서 나았나보다.”

“네?”

카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는 그녀였다.

“곧 알게 될거야. 나 좀 씻어야겠어.”

카딜이 몸을 일으키더니 찌뿌둥한 몸을 풀 듯 이리저리 팔다리를 움직였다. 타냐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아 크게 뜬 눈으로 욕실을 향하는 카딜을 따랐다.

***

대신전에서 기도를 드리던 제사장 비숍은 갑자기 깜짝 놀라며 두 눈을 떴다.

그는 급하게 일어나서 대신전의 휘장을 걷었다. 그 순간 시커먼 하늘너머에서 한줄기 빛이 휙 지나갔다.

“이게 도대체….”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비숍은 제 입을 막았다. 하지만 튀어나온 눈은 더 커지기만 했다.

9화
“폐하! 제사장 비숍이 급하게 알현을 청하옵니다!”

시종의 말에 알테베르는 티도를 물렸다. 티도는 비숍이 들어오기 전에 내실의 뒷문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들라하라.”

알테베르는 밤늦은 시각에 제사장이 웬일인가 싶었다. 시종은 비숍을 안내해주고 물러갔다.

“황제폐하!”

“무슨일이오 대제사장.”

“방금전 아무일도 없으셨습니까?”

“아무일이라니? 무슨일?”

알테베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비숍도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아무일도 없으셨습니까?”

“아무일도 없었다니까, 자꾸 말 돌리지말고 날 찾아온 용건을 말하시오.”

“그게…아무일도 없으셨다면….그럼 됐습니다.”

“지금 장난하나?”

“아니 그게 아니오라…방금…저….”

비숍은 커튼이 드리워진 창쪽으로 손을 가리키다 멈추었다.

“아닙니다, 그저 제가 기도를 드리는중에 뭔가 계시같은 것을 받아서 혹시 황제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 싶어서 달려왔습니다.”

“그래? 보다시피 난 아무이상이 없다네.”

“아, 정말 다행입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서 기도를 다시 올리겠습니다.”

비숍의 말에 알테베르는 별 싱거운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내실을 나온 비숍은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빛을 보았는데….”

비숍은 혼자 중얼거리며 대신전으로 왔다. 혼자 기도를 올리고 있었던 그는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방을 살피다가 신전의 밀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금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읽어서는 안되는 금서였기에 대제사장인 비숍이 신전
밀실에 숨겨놓았다.

밀실에서도 아주 깊숙한 곳에 숨겨진 금서를 꺼낸 비숍은 접혀진 쪽을 펼쳤다.

““붉은 어둠이 은빛 달을 집어 삼키는 날에는 밤이 둘로 나뉠터이니, 하늘에서 하얀 섬광이 크게 획을


그으면 세상은 뒤집히고 산자는 죽을 것이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똑 같은 구절을 여러번 읽은 비숍은 아까 자신이 보았던 그 하얀빛을 떠올렸다.


“아니겠지, 그냥 유성이겠지, 내가 너무 예민해졌나보군.”

금서를 다시 덮은 그는 원래 있던 자리에 고이 넣고 밀실을 나왔다.

***

마법석을 하나 넣자 욕조의 물은 금방 따뜻하게 변했다.

욕조에 들어앉은 카딜을 보며 타냐는 그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분명 갈비뼈도 부러지고 머리도


다치고 성한 곳이 없다 싶을 정도로 다쳤다고 들었다. 마법치료법을 사용하는 에밀리에마저 가망이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카딜은 마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긁힌 상처하나 없었다.

혹시 아밀리에의 치유마법이 시간차를 두고 효과가 나타난 것인가?

“그렇게 보기만 할거야?”

“네? 아, 죄송합니다.”

타냐는 헝겊을 꾹 짜서 카딜의 얼굴을 살살 닦아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현기증이
느껴진다. 타냐는 이게 뭐지 하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왜 이러지?’

타냐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색색대는 숨소리와 함께 타냐의 눈동자가 충혈되더니 초점은 점점 사라져갔다. 마치 그녀의 몸 속에서


뭔가가 눈을 뜬 것처럼 타냐는 제 몸인데도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타냐, 왜그래?”

“하아, 카딜님….제발….절 좀 어떻게 해주세요.”

타냐가 옷을 입은채로 욕조 안으로 들어오더니 카딜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이미 그녀는 타냐가 아니었다.

“타냐, 왜그러냐니까? 어디 아파?”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이 분명 탈진상태 같았지만 눈동자는 애욕으로 가득했다.

“하아, 카딜님….카딜님….”

타냐가 카딜의 뺨을 쓰다듬다가 갑자기 그에게 입을 맞추어왔다. 얼떨결에 그녀에게 입술이 빼앗긴 카딜은
당황했지만 거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녀로 인해 사경을 헤매다가 거짓말처럼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 그녀는
카딜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또한 타냐를 볼때마다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는 것을 여러번 참았었다.

카딜이 타냐의 옷을 찢어 발기듯 벗겨냈다.

“카딜님, 어서…어서…..”
타냐의 붉어진 두 뺨이 그녀가 지금 얼마나 다급한지 말해주고 있었다.

“하아응!”

카딜의 굵은 성기가 타냐의 좁은 곳으로 밀려 들어오자 타냐는 통증으로 몸을 바르르 떨었다. 카딜은
상상이상으로 좁은 타냐의 질구에 놀랐다.

처음인 것이 분명했다.

남자를 몰랐던 그녀가 왜 갑자기 제게 이렇게 애원하면서 달려드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다른게 더 급했다.

“이러다간 다칠거야 타냐.”

처음하는 여자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한다는건 거의 고문에 가까울 것이다.

카딜은 타냐를 안아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쌓인 것을 풀지 못한 카딜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강한 쾌감에 이를 사리물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다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욕실을 나온 카딜이 침상으로 와서 타냐를 내려 놓았다. 하지만 타냐는 눈물까지 흘리며 어서 안아달라
사정했다.

“나도 급해 타냐, 하지만 널 위해서 천천히 하려는거야.”

“하아, 안돼요, 얼른, 얼른요, 죽을 것 같아요.”

실제로 타냐는 숨을 거의 쉬지 못해 새파랗게 넘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카딜도


타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급하게 그의 성기를 그녀의 안에 밀어 넣었다.

처음 남자의 품에 안기는 여자치고는 너무 적극적이었다. 타냐는 제 스스로 두다리를 활짝 벌리고 카딜의


성기를 최대한 품었다. 벌겋게 부푼 음순사이로 파고든 카딜의 성기가 빠져나올 때마다 붉은 속살까지
딸려나왔다.

“아흐으윽!”

아픔을 참느라 카딜의 등을 손톱으로 긁어대는 타냐였지만 카딜은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 할퀴어, 마음껏 할퀴어, 네 아픔이 조금이라도 줄어든다면 기꺼이 네 손톱정도는 받아줄게.”

신체부위중에 가장 예민한 곳이라 쾌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만큼 아픔에도 예민했다.

하지만 타냐가 숨이 넘어가게 안겨들어 아무생각도 할 수 없었다. 타냐가 느끼는 통증보다야 못하겠지만
카딜도 함께 통증을 느끼며 두 사람은 절정에 올랐다.

정말 벼락같은 정사였다.

하지만 타냐는 아직도 부족한지 다시 그를 재촉했다.

“한번만 더요, 한번만 더…제발요.”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지 않아도 이제 시작이라 더 할 생각이었던 카딜은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튕겼다.

또 다시 질펀한 소음이 카딜의 내실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두 번을 한 후 타냐는 까무러치듯 잠에 빠져 들었다.

잠든 타냐를 가만히 내려다 보던 카딜이 그녀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네가 정녕 샤마란의 후예인가? 그렇다면 왜 그동안 전혀 그 능력이 발현되지 않았지?”

혼자 중얼거리던 카딜은 타냐가 제쪽으로 몸을 돌리자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타냐의 알몸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카딜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또 중얼거렸다.

“네가 샤마란의 후예라는게 세상에 알려지면 위험할지도 몰라, 그러니 당분간 너와 나만 아는걸로 하자,
아니, 아니지, 너도 모르고 있으니 나만 아는게 되는건가?”

혼잣말을 한 카딜은 타냐의 윤기나는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다음날 아침.

타냐는 카딜의 침대에서 잠든 자신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서 침대에서 내려섰다.

순간 느껴지는 진한 통증에 작게 신음한 그녀는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과 제 몸에 새겨진 순흔을 확인하고


잠든 카딜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순결을 앗아간 카딜이 원망스럽진 않았다.

하지만 그와 섹스를 나눈 기억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제 상처가 다 나은 카딜이 씻어야겠다 말했고


그녀는 그의 몸을 씻겨주기 시작했다.

이후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으음, 타냐, 일어났어?”

카딜이 깨어나자 타냐가 얼른 그의 앞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카딜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타냐의 붉어진 뺨을 본 카딜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내가 얼마나 완전하게 나았는지 어제 경험했을텐데 또 묻는 거냐?”

“어제? 경험?”

타냐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웅얼거리자 카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설마 기억이 안나는 거냐?”

“죄송합니다만 전 카딜님을 씻겨드리려고 했던 것 까지만 기억이납니다.”

“뭐?”

카딜이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가 완전한 알몸인 것을 본 타냐가 얼른 그의 가운을 가져다 공손하게 건넸다.
가운을 받아들며 수줍어하는 타냐를 가만히 쳐다보던 카딜은 어제 애욕덩어리 같았던 타냐를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제게 안겨들던 타냐와 지금의 타냐는 판이했다.


‘뭐지? 설마 두 개의 인격체를 가졌나?’

고개를 갸웃하던 카딜은 일단은 타냐에게 어제의 상황을 이야기해주기로 했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기억이
날 수도 있으니까.

“네가 나한테 달려들었던 것도 기억이 없는거냐?”

“예? 제, 제가요?”

타냐는 카딜이 강제로 저를 가졌다 생각했다. 설령 그렇다치더라도 그녀는 화를 낼 수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 제 몸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받치겠다고 약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달려들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렇다고 카딜이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여자를 품어 놓고 네가 먼저 달려들었다며 변명을 할 남자도 그럴 직위의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저런 거짓말을….

“타냐, 너 지금 내 말을 안 믿는거냐? 정말 아무 기억도 안나?”

카딜은 졸지에 타냐를 덮친 치한으로 치급받는 것 같아서 어이가 없었다.

“나 아냐, 네가 나 덮친거야, 진짜라고.”

“아, 네, 알겠습니다 카딜님.”

타냐가 알겠다며 수긍을 했지만 표정이나 말투가 전혀 아니어서 카딜은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타냐, 너 내가 그렇게 치사한 인간으로 보였어? 내가 어디 여자가 없어서 너 같은-”

말을 하던 카딜이 정말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타냐를 보다 그만 입을 닫아 버렸다.


희한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물론 타냐에게 끌리고 있는 것은 확실했지만 어제는 정말 타냐가 저를 덮쳤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런 취급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여자를 강제로 취하고 오리발 내미는 천하에 둘도 없는 양아치가 되는 느낌은 결코 즐겁지 않다.

“괜찮습니다 카딜님. 어차피 전 카딜님의 소유물입니다. 전 괜찮으니 너무 개념치 마시기바랍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고, 네가 날 덮쳤다니까?”

“아, 예, 알겠다고 했습니다, 전 조반드시기전에 모닝티를 준비하겠습니다.”

“야, 거기 서, 타냐, 거기 서라고.”

카딜이 억울해하며 타냐를 쫄쫄 따라갈 때 바훌과 실리아가 내실 앞에 도착했다.

10 화

“카딜님은 괜찮으신가?”

“죄송합니다, 저도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그래? 그럼 들어가지.”

“예.”
“타냐는?”

“어제 밤새 카딜님을 지킨 것으로 압니다.”

“그렇군, 어서 들어가지.”

“예, 바훌님.”

실리아는 형식적으로 카딜에게 고했다.

“대장군님, 실리아입니다. 바훌님도 오셨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바훌과 실리아는 멀쩡한 카딜을 보고는 자신들이 헛것이라도 보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떴다.

“카딜님?”

“대장군님, 괜찮으십니까?”

바훌과 실리아가 동시에 물으며 카딜에게 다가왔다. 타냐는 얼른 바훌과 실리아에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바훌과 실리아는 타냐의 인사를 받을 정신이 없었다. 멀쩡한 카딜을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 내렸다.

제발 의식이라도 돌아왔으면 하는 바램으로 내실로 들어섰는데 멀쩡하게 걸어다니고 있다.

“대장군, 괜찮으십니까?”

카딜은 어깨와 팔에 붕대를 감은 바훌을 보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어지간한 장수와 맞붙지 않고서는
다치지 않던 바훌이 어제 비적떼에게 저렇게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괜찮아.”

“정말이십니까?”

바훌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카딜의 얼굴과 몸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의 말대로 생채기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일까 생각하다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설마 어제 아밀리에의 치료마법이 통했던겁니까?”

“아밀리에가 다녀갔었나?”

“예, 한참동안 치료마법을 사용하다가 제 힘으로는 역부족이라며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럼 그 치료마법이 늦게 효과가 나타났나보군, 보다시피 멀쩡해.”

카딜은 타냐의 힘을 숨기기 위해 바훌이 아밀리에이야기를 하자마자 그녀의 힘이라고 얼른 거짓으로


말했다.

“하아, 그렇군요, 아밀리에가 얼마전 신전에서 하는 마법치료 3 기 과정을 수료했다고 하더니 실력이
늘었군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멀쩡하실 수가…..”

바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카딜의 상처를 자꾸 살폈다.


“상처자국하나 없습니다 대장군님.”

“그러게, 아밀리에의 치료마법 실력이 정말 많이 발전했나보군, 상이라도 내려야겠어, 그보다 어제


비적떼 말인데.”

“예, 안그래도 그에 대해서 보고를 드리려했습니다.”

바훌의 말에 카딜은 실리아에게 지시를 내렸다.

“실리아, 아침 준비해줘, 한 시간 뒤에 타냐와 함께 먹을거야.”

“예, 대장군님.”

실리아는 죽어가던 카딜이 살아나서 기쁜지 발걸음도 가볍게 내실을 나갔다.

“타냐, 어디가?”

실리아를 따라 나가려던 타냐가 다시 돌아서서 대답했다.

“조반준비를 도우려고….”

“아냐, 넌 여기 있어.”

카딜이 그의 옆자리를 툭툭치자 바훌의 표정이 싹 변했다. 아무리 밤새 간호했다고 감히 옆자리를


내주다니. 여간 못마땅한 것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전 나가서.”

“여기 앉아, 명령이다.”

명령이라는 말에 타냐가 우물쭈물 바훌의 눈치를 보며 카딜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실 아랫도리가 따가워서
걸음을 걷기도 힘들긴했다.

그걸 알아차리고 저를 불러 앉힌다는 것을 알지만 아까 저더러 그를 덮쳤다고 했던 말이 서운해서 심기가


뒤틀린 타냐였다.

“내가 아니라 너라고 했다, 그러니 그 표정 풀어.”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타냐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카딜이 다시 속삭이려다 저를 노려보는 바훌 때문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타냐에게 귓속말을 한 카딜이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바꾸고 바훌에게 물었다.

“비적떼에 대해서 보고할게 있다며, 보고해봐, 나도 궁금한게 많으니까.”

“아, 예, 어제 그 비적떼는 일반 비적떼가 아니었습니다.”

“근거는?”

“검술실력과 검법 때문입니다.”

바훌의 말에 카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 비적떼에게 당할 바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때문이었다.


“검법이 어디 검법이었지?”

카딜의 물음에 바훌이 타냐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타냐가 듣는 와중에 이런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괜찮아, 타냐는 나와 한몸이나 마찬가지니까 걱정말고 말해.”

그녀와 몸을 섞었다는 뜻으로 이해한 바훌은 못마땅한 표정을 겨우 풀고 말했다.

“감히 짐작하건데 황실검법이었습니다.”

“알테베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제 좁은 소견으로는 어제 황궁에서 카딜님이 로젠시아님과의 정혼을 거절한 이유로


선전포고를 하는 뜻으로 자객을 보낸 것 같습니다.”

“같은 생각이야, 지금쯤 알테베르 황제는 통쾌해하고 있겠지?”

“소식 들어갔을겁니다. 마차가 벼랑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을 확인했을테니까요.”

“내가 심하게 다쳤다는 것도 알테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그럼 이때쯤 연락이 와야 하는데.”

카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리아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대장군님, 황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요!”

“이것봐, 내 말이 맞지?”

카딜의 말에 바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사이 카딜은 또 타냐에게 어제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타냐, 잘 들어봐, 이게 어찌된 일이냐 하면 말이야, 네가 어제 날 씻겨주다가 갑자기 숨이 막


거칠어지면서 나한테 안아주세요 카딜님이렇게.”

“그만하세요 카딜님, 제가 괜찮다고 했잖아요.”

타냐가 전혀 믿어주지 않자 카딜은 답답해서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때 황궁에서


보낸 황제의 시종이 내실로 들어왔다. 타냐는 얼른 예를 표하고 그 자리에서 물러갔다.

멀어지는 타냐를 시종이 힐끔쳐다보았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카딜은 황제가 보낸 비적떼에게 당한터라 표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게….어제 비적떼를 만나 심하게 다치셨다는 소식에 황제폐하께서 안부를 물어보라시며 절 보냈습니다,


그런데….”

시종은 카딜의 멀쩡함에 의아해했다.


“보다시피 멀쩡해, 가서 전하게, 카딜 하에르는 멀쩡하다고, 비적떼 따위에게 다칠 정도로 약하지 않다고,
설마 부고소식이라도 있나 확인하러 보낸건 아니겠지?”

“예? 그, 그럴리가요, 그저 걱정이 되셔서 절 보냈을뿐입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참, 비적떼들은 내가 확실히 목숨줄을 끊어놓겠다고 전해.”

“예? 아 예, 그렇게 말씀전하겠습니다. 그럼.”

시종이 인사를 하고 내실을 나가자 카딜의 잿빛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알테베르, 네가 시작한거야.”

혼잣말을 한 카딜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타냐 때문에 미치겠군.”

카딜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무구한 타냐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

“폐하, 카딜 하에르 대장군님은 무사하십니다,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사옵니다.”

황제 알테베르는 시종의 보고에 가늘게 눈을 떴다. 무공이 뛰어나다 못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돌 정도라는건 알지만 그 상황에서 살아나다니. 그래도 심하게 상처는 입었을테지.

“그래 얼마나 심하게 다쳤더냐?”

“소인이 보기로는 다친곳이 전혀 없어보였습니다.”

“뭐라고? 다친곳이 전혀 없다고?”

“그렇사옵니다. 소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붕대 하나 감긴 곳이 없었습니다요.”

말도안돼.

알테베르는 분명 티도의 보고를 받았다. 마차와 함께 돌밭을 뒹굴었다고. 마차는 산산조각이 나서


벼랑아래로 떨어졌다고. 설령 마차에서 뛰어내렸다고 해도 최소한 몇 개월은 운신을 못할 정도로
다쳤을거라고 했었다.

그 보고에 알테베르는 카딜에게 제 말을 거역하면 어떻게 된다는 선전포고를 분명히 했다 싶어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단 하룻밤사이에 멀쩡하게 깨어났다고?

“정말이냐? 정말 붕대하나 감은 곳이 없었더란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제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요,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제 대장군을 습격한


비적떼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겠다고요.”

“흐음.”

알테베르는 등줄기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감각에 뒷골이 띵해졌다.

시종에게 굳이 이 말을 전하라는 것은 카딜이 비적떼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뜻과 같았기 때문이다.


“알았다, 일단 물러가라.”

“예, 폐하.”

시종이 뒷걸음질로 물러가자 알테베르는 앉아있던 소파의 손잡이를 세게 쥐었다.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건 아니겠지?”

내 말 잘 들으라는 뜻으로 겁을 주려했는데 멀쩡하게 걸어다닌다는 소식에 알테베르의 마음이 급해졌다.

“거기 누구 없느냐!”

“예, 폐하, 시종장 스탈드 폐하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탈드의 말에 알테베르가 지시했다.

“당장 신전으로 가서 비숍 대제사장을 불러오라!”

“분부 받잡겠습니다.”

스탈드의 대답을 들은 알테베르는 턱에 힘을 주며 이를 사리물었다.

잠시 후.

대제사장 비숍이 알테베르앞에 머리를 숙였다.

“부르셨사옵니까.”

“그래, 어젯밤 말이야, 그대가 내게 달려와서 무슨 일이 없느냐 물었지?”

“예, 그랬습니다만….혹시 괴이한 일이라도 겪었사옵니까?”

비숍은 혹시나 싶어서 이미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그게 내가 아니고 카딜 하에르에 관한건데 말이야.”

“예, 말씀하십시오, 들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폐하.”

“카딜이 분명 어제 비적떼의 습격을 받고 마차와 함께 벼랑으로 굴렀다고 했는데 오늘 아침 걱정이 돼서


사람을 보내보니 다친곳은 하나도 없고 멀쩡하다더라고, 내가 듣기로는 못해도 갈비뼈 몇 개는 부러지고
머리에도 큰 상처를 입은 것으로 아는데 말이지, 치료마법으로 그렇게 하룻밤사이에 부러진 뼈까지 붙을
수가 있는가해서.”

알테베르의 말을 듣고 있던 비숍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갔다. 설마 그 하얀빛이 그 하얀빛?

“그대 얼굴색이 왜 그런가?”

알테베르는 말을 하던 중에 비숍의 안색을 보고 물었다.

“그, 그게, 그런 정도의 치유력은…..저도 힘듭니다.”

“뭐야?”

“그렇습니다, 하룻밤사이에 부러진 뼈를 단번에 붙이고 상처까지 말끔하게 낫게 하는 능력은 저도


불가합니다. 그런 치유마법을 터득한 사람은 우리 북대륙에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야?”

“그렇습니다 폐하.”

비숍은 간이 오그라들고 손이 벌벌떨리는 것을 겨우 감추고 대답했다.

“그럼 카딜이 어떻게 그렇게 하룻밤만에 멀쩡해진거지? 그대는 아는 것이 없는가?”

“그게….그러니까….”

하얀 백발의 대제사장은 자신의 긴 수염을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으며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어서 고하라, 그대는 뭔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황제인 내게 감히 숨기는 것이 있는 것이냐?”

알테베르가 당장 고하지 않으면 목이라도 벨 기세로 묻자 비숍은 어쩔 수 없이 금서에 적힌 내용을


말해주었다.

11 화

“그런 책이 있었던가? 그런데 황제인 내가 왜 몰랐지?”

국법으로 정한 금서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알테베르는 대제사장 비숍을 노려보았다. 감히 그런 것을


제게 숨겼다싶어 화가 난 것이다. 하지만 그 금서는 알테베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선황제에 의해 신전
밀실에 봉인되었었다. 그 책에 관해서는 입에 올릴 이유도 없었고 필요도 없었다.

“그게 선황제님께서 봉인하셨던 금서라서 황제폐하께서는 알 필요도 없었기에 지금까지 밀실에 보관만
되어있었습니다.”

비숍의 설명에 화가 조금 누그러진 알테베르가 물었다.

“그런데 그 책내용하고 카딜이 멀쩡한 것 하고 무슨 연관이 있지?”

“그것은 만약 카딜님의 상처가 하룻밤사이에 아문 것이 치유의 정령의 피가 흐르는 샤마란족이라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샤마란족? 그 전설로만 전해오는 샤마란족?”

“그렇사옵니다.”

“나도 들은적은 있다, 그런데 그 부족은 백여년전 몰살된 것으로 아는데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더냐?”

“그게, 아직 저도 확실하게 모르겠사옵니다, 다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어젯밤에 떨어진 그 하얀


빛입니다.”

“하얀빛? 금서에서 언급했던 그 하얀빛 말이더냐?”

“그렇사옵니다. 제가 그 빛을 어젯밤에 봐서 그렇게 다급하게 황체폐하께 달려왔던것입니다.”

“흐음, 그래?”

“예, 폐하.”

“그럼 그 빛이 그 빛이라고 치면 이제 어떻게되는거지?”


“저도 그건 잘 모릅니다만 재앙이 닥칠것으로 예상됩니다. 아직 그 금서에 적힌 글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정확히 재앙이 어떤 재앙인지는 모르오나 저의 신전에서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세상이
뒤집힌다고 했습니다.”

“하아, 답답하긴, 그러니까 세상이 어떻게 뒤집힌다는거냐고, 땅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땅이라도 된다는
거야?”

“!”

알테베르는 무심코 내뱉었다. 하지만 비숍의 얼굴이 사색이되었다.

그 이유는 하늘은 황제를 뜻하는 것이고 땅은 백성을 뜻하는 것이기때문이었다.

방금 황제의 입으로 하늘과 땅이 뒤바뀐다고 말했다. 즉 금서대로라면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에게 재난이


닥친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놀라?”

“아, 아닙니다.”

하지만 비숍은 차마 제 생각을 황제에게 말할 수 없어 모른척 했다.

그말이 그뜻이었구나. 그뜻이었어. 혼자 금서에 적힌 글의 뜻을 깨우친 비숍이 잠시 생각하다 황제에게


고했다.

“폐하.”

“말해봐.”

“일단 하에르대장군이 어떻게해서 멀쩡해졌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러셨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대제사장은 금서를 내게 가져오도록 해.”

“금서를요?”

“아니, 아니, 내가 직접 가서 보는게 낫겠군, 안내해.”

“지, 지금요?”

“급하다면서 한가하게 디데이라도 잡아야 하나?”

알테베르의 눈썹이 꿈틀하자 비숍은 얼른 대답하고는 황제를 신전으로 안내했다.

***

“이게 맛있다 많이 먹어.”

오늘따라 카딜이 타냐의 눈치를 살살 보는 것을 시종장 실리아와 하녀들도 알아차릴 정도였다.


식사내내 그녀에게 이것도 맛있다, 저것도 맛있다며 그녀의 접시에 음식을 잘라서 올려주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후식까지 양보했다.

“내가 에그타르트를 무척 좋아하지만 오늘은 널 위해 양보하는거야.”

“아닙니다, 카딜님 드십시오, 제 것 여기 있습니다.”

타냐가 카딜의 에그타르트 접시를 다시 그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아냐, 아냐, 너 먹어, 난 너무 많이 먹어서 질리려던 중이었어.”

“그럼 질려서 제게 주시는겁니까?”

“응, 으응? 아니다, 내 말은 그런뜻이 아니라 네가 부담가지지 말고 먹으라는 뜻에서 말한거였어?


질리다니, 그 에그타르트는 삼시세끼 평생 먹어도 절대 질리지 않는 정말 맛있는 후식이야.”

“그럼 카딜님 드십시오, 전 벌써 배가 부릅니다.”

에그타르트 접시가 타냐쪽으로 갔다가 카딜 쪽으로 갔다가 하는 모습을 시녀장과 다른 시녀들이 보느라
눈동자가 오른쪽 왼쪽으로 정신없이 돌아갔다.

에그타르트 접시의 양쪽 끝을 잡은 카딜과 타냐는 눈싸움 아닌 눈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명령이다 먹어.”

결국 타냐가 졌다. 명령이라며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고 말하는 카딜을 쳐다보던 타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치열한 상황을 두 사람보다 더 긴장하며 치켜보았던 실리아와 다른 시녀들이 겨우 속으로 안도하는


숨을 내쉬었다.

“명령이라시니 먹겠습니다만 지금은 못 먹겠습니다, 뒀다가 입이 궁금할 때 먹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타냐의 말에 카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모두 끝난 후 카딜은 소화도 시킬겸 타냐에게 튤립정원을 걷자고 했다.

“이런곳에 이런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줄 몰랐어요.”

타냐가 튤립꽃을 보고 감탄을 하자 카딜은 뿌듯해하며 어깨에 힘을 주었다.

“아무나 이곳에 데려오진 않아, 여자와 함께 이곳에 들어온건 처음이다.”

“영광이네요, 감사드립니다 카딜님.”

“뭘 그렇게 까지 정중하게 감사할 필요까지야. 크흠.”

카딜이 헛기침을 하며 목에 힘을 줄 때 타냐가 물었다.

“저기 혹시 우리 토디엘소식은 아직도 없나요?”

갑자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을 하자 바짝 힘이 들어갔던 카딜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안타깝게도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어.”


“아, 네……..”

고개를 푹 숙인 타냐를 본 카딜이 뭐라도 해서 분위기를 좋게 해야겠다 싶어 빨간 튤립꽃 하나를 꺽어


타냐의 귀에 꽂아 주었다.

하지만 타냐의 두 눈에는 이미 물기가 그득했다.

“우는거야?”

“죄송합니다, 토디엘만 생각하며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아서요, 나는 이렇게 카딜님 덕분에 매일


맛있는 것을 먹고 편하게 지내는데 토디엘은 어디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어, 울고 싶으면 울어, 나도 사실은 전쟁으로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 동생을 잃어버린적은
없지만 가족을 잃은 슬픔은 충분히 알고 있어.”

카딜의 가족에 대해서 처음 듣는 타냐는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타냐의 푸른 눈동자에 고인 눈물을 내려다보던 카딜이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타냐, 조금만 더 기다려, 곧 소식이 올거야, 내가 수십명의 사람들을 풀어서 전국의 노예상인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알아보고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카딜님, 근데 카딜님.”

“응?”

타냐는 카딜의 품에서 천천히 나왔다. 카딜은 타냐가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회색빛 눈동자를 빛냈다.

“카딜님은 왜 절 도와주시는건가요? 그날 카딜님 마차 앞을 가로막아선 절 왜 죽이지 않고 데려와서


이렇게까지 잘해주시는지 내내 궁금했어요. 전쟁노예로 끌려가서 가족을 잃은 사람이 저 말고도 수백
수천인데….”

사실 타냐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게….”

카딜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할까 하다 그만 두었다. 지금은 그녀 본인도


알지못하는 그 치유의 힘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제 잇속을 차리려 타냐를 제
곁에 둔다는 것도 그녀가 알게하기 싫었다. 실망 할수도 있으니까.

“카딜님?”

“어? 아, 그러니까 네 그 미모에 반했다, 너는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이해해?”

“예?”

타냐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정도 수긍이 가는 소리를 해야 고개가 끄덕여지는법이다. 그런데 온몸은
물론 얼굴까지 진흙투성이의 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니?

타냐가 벙찐 눈빛으로 카딜을 올려다 보자 카딜이 첫날의 그녀를 떠올리고는 속으로 아차 했다.

“그게 그러니까 네 그 파란 눈동자에 끌렸거든.”

이건 사실이었다.
“제 눈동자에요?”

“그래, 너의 그 파아란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내 몸의 상처가 전부 나았거든) 여기가 막 찌르르


하더라고.”

카딜이 제 심장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말하자 타냐가 또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도 카딜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온몸이 찌르르 했고 몸에 있던 상처들이 순식간에 나았었다.

아직도 그 현상이 카딜의 힘이라고 믿고 있는 타냐였다. 카딜과 눈이 마주치면서 제 몸안에 있던


치유능력이 발현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타냐로서는 그렇게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카딜님 눈동자도 아주 매력적입니다.”

“그래?”

“네, 저도 그날 카딜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이상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거든요.”

“정말이야?”

“예, 정말입니다. 그날….”

타냐는 제 몸에 있었던 상처가 다 나았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누가 들어도 거짓말같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그날 뭐?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카딜은 뭔가 중요한 말을 하는가 싶어 타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를 올려다 보던


타냐는 갑자기 멍해져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와 정면으로 이렇게 눈만 마주치면 제 몸안에 잠자던
뭔가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마치 피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아 온몸이 뜨거워진다.

“타냐, 얼굴이 붉어지고 있어, 왜그래?”

카딜이 타냐의 붉어진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자 타냐는 저도모르게 뒤꿈치를 들어 카딜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기습 키스를 받은 카딜은 오히려 기뻐하며 그녀의 허리를 한팔로 꽉 안았다.

그의 몸에 타냐의 몸이 완전 밀착되자 잠자고 있던 욕정이 눈을 떴다. 카딜은 타냐에게 키스하며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걸음을 옮겨 튤립정원을 관리하기 위해 지어진 창고로 들어왔다.

정원을 가꾸기 위한 여러 가지 연장들과 땅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한 거름들이 쌓여 있어 큼큼한 냄새가


났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 어떤 향기보다 향기로웠다.

타냐와 키스를 하던 카딜은 급하게 그의 겉옷을 벗어 짚단위에 던졌다. 카딜의 긴 코트는 짚단위에
융단처럼 펼쳐졌다. 그 위에 타냐를 눕힌 카딜은 갈증으로 미쳐버릴지경에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타냐에게 달려 들었다.

카딜과 하나가 되는 순간 타냐의 몸에서 하얀 빛이 퍼져나갔다. 타냐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어 그것을


몰랐고 카딜은 그저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타냐의 백옥같이 하얀 몸이 빛을 낸다 생각했다.

햇살이 가장 좋은 5 월의 봄날 오전이었으니까.

카딜의 성기가 타냐의 몸안 깊숙이 파고들어 휘저을때마다 타냐의 몸은 더욱 더 하얀 빛에 휩싸였다. 그


빛은 이제 카딜의 몸까지 퍼져나갔다. 하지만 절정을 향해 치닫는 중이라 하얀빛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카딜이었다.

“하아, 타냐…하아….”

카딜은 타냐의 몸을 으스러져라 끌어 안고 절정에 도달했다. 카딜보다 먼저 고지에 도달한 타냐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두 사람을 감쌌던 하얀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12 화

“타냐, 자는거야?”

“…………”

“뭐야, 하기만 하면 자는군, 버릇인가? 아니면 내가 너무…흠흠.”

차마 뒷말은 하지 못한 카딜이 헛기침을 하며 잠든 타냐를 내려다보았다.

솔직히말하면 한번 더 하고 싶은데 잠이 들어버린 타냐가 야속한 카딜이었다. 혀를 차며 잠든 타냐를


내려다보던 카딜은 그녀의 붉으스레한 뺨에 입을 맞추고는 그도 편하게 누웠다.

창틈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찡그린 눈으로 올려다보던 카딜이 갑자기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타냐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착각했었나?”

카딜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분명 저 햇살에 타냐의 몸이 눈부시게 빛이 났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햇살은 그대로인데 아까 같은 그 밝은 빛은 없었다.

의아해 하던 카딜은 아까 너무 흥분해서 그녀가 눈부시게 느껴졌었나 하고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카딜이 아쉬워하는 것도 모르고 타냐는 꿈속을 거닐고 있었다.

꿈속에는 또 다른 타냐가 그녀를 보고 빙긋 웃고 있었다. 타냐는 신기해했다. 자신을 이렇게 타인처럼


쳐다보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넌 나잖아.”

“그래, 너 맞아.”

“근데 왜 내 몸에서 빠져나갔어?”

“걱정마 또 들어갈테니까.”

“뭐?”

타냐가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을 때 자신과 꼭 닮은 또 다른 타냐가 빙그레 웃으며 연기로 변하더니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헉!”

뜨거운 기운이 느껴져서 저도모르게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잠에서 깬 타냐였다. 그 소리에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있던 카딜이 흠칫 놀라며 타냐를 쳐다보았다.
“타냐, 깨어났어?”

“!”

카딜을 본 타냐가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그래? 설마 그 짧은 시간에 꿈이라도 꿨어?”

“네, 꿈을 꿨어요, 근데 왜 제가 여기 누워있는거죠? 여긴 어디예요?”

‘뭐야, 또 기억이 없는거야?’

속으로 놀란 카딜은 설마 하며 물었다.

“여기 왜왔는지 우리 둘이 뭐했는지 기억이 안나?”

“둘이 뭘….했는데요?”

젠장, 또 기억이 없다고?

카딜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 혀를 차고는 말했다.

“타냐가 나한테 먼저 키스했잖아, 그래서 날 원한다 생각해서 급하게 여기로 들어왔지, 지난밤처럼
타냐가 꽤 급해보였거든, 그리고 애써 가꾼 튤립꽃밭을 망가뜨릴 순 없잖아, 내 거처로 돌아가기엔 네가
너무 급해보였기도 했고.”

“아, 네, 제가 또 그랬나보네요.”

너무 쉽게 긍정을 하는 모습에 그녀가 자신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딜은


아침과 똑 같은 기분을 느끼며 다시 한번 아까의 상황을 말했다.

“이번엔, 아니 이번에도 진짜라니까? 진짜 네가 먼저 나한테 키스했다고.”

“제가 뭐래요? 오늘 아침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괜찮다고 했잖아요, 저는 카딜님의 소유물입니다,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 설명안해주셔도 괜찮아요.”

“그래 그랬지, 그런데 내 기분은 왜 이럴까?”

“기분이 어떤데요?”

“그게….그러니까 뭔가 당한 기분이야, 기분이 아주 불쾌해.”

“저 때문에요?”

“응?”

카딜은 타냐의 맑은 눈동자를 보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말해 뭐하겠어, 내가 앓느니 죽지.

“아냐, 됐어, 기억 안나는 사람하고 이야기해봐야 뭐하겠어, 신경 쓰지마.”

카딜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흥분하면 기억을 잃는구나 정도로만 치부해버렸다. 참 희한하다 싶었지만
그렇다고 타냐가 기억이 안나는척 연기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기억이 안나는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또 그냥 넘어가려니 어딘지 모르게 억울했다.

“저기 타냐.”

“네?”

“어디까지 기억이 나는거야?”

“그러니까 카딜님과 제가 식사를 마치고 튤립정원에 산책을 나왔어요.”

“그래, 그랬지,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제가 동생일에 대해서 물었고 카딜님은 열심히 알아보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 맞아, 그리고?”

“그리고는 제가 눈물을 흘리니까 카딜님이 제 귀에 튤립 꽃을 꽂아주었어요, 그리고 절 빤히 쳐다보셨는데


….”

“그래,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뭐?”

카딜은 바로 그 다음이 타냐가 제게 키스를 했기 때문에 타냐를 계속 추궁했다.

“그리고….그리고…기억이 사라졌어요.”

“하아!”

이거야 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한테 갑자기 키스했잖아.”

“제가요?”

“그래 네가.”

“제가 왜요?”

“아니 지금 그걸 나더러 물으면 어떡하라는 거지? 나야 그건 모르지, 갑자기 동했나보지 뭐.”

“갑자기?”

“그래 갑자기.”

“갑자기 왜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너무 멋지고 섹시하게 생겨서 갑자기 동했을 수도 있지.”

“그건…..”

“그래, 말해봐.”
“그건 맞는 것 같아요.”

“그렇지, 응? 뭐라고?”

카딜은 무심코 대답했다가 타냐가 한 말이 자신이 생각한 그 말이 맞는지 다시 물었다.

“뭘요?”

타냐는 시치미를 뚝 뗐다. 대화를 하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카딜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말해버린 것 같아서.

“뭘요라니? 방금 말했잖아 내가 너무 섹시하고 매력적이라고.”

“제가요?”

끄응.

카딜은 그만 두손 두 발 다 들었다. 하지만 타냐와 이렇게 하는 대화가 여간 즐겁지가 않아 화는 전혀


나지 않았다.

“좋아, 됐고, 결론을 말하자면 타냐가 먼저 내게 키스를 했고 나는 타냐의 키스에 적극적으로


임했을뿐이야, 그리고 내 본능에 충실했고, 이건 내 이름을, 아니 붉은 기사단의 명예를 걸고 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맹세할 수 있어.”

“그게 그렇게 중요한건 아닌 것 같아요 카딜님, 그러니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해요, 그리고 어서 나가요,
여기 냄새 심하지 않나요?”

타냐가 코를 막으며 일어서자 카딜도 그제야 냄새가 지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냐를 따라 창고에서
나오는 카딜은 혼자 고개까지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어차피 타냐는 내 소유잖아.”

그런데 기분은 마치 화장실을 다녀와서 뒤를 닦지 않은 것 같았다.

“타냐, 그런데 왜 나하고 그러고 나면 잠이 드는거야?”

카딜은 타냐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저도 어떻게 잠드는지 조차 모르고 잠이 들어버려서.”

타냐는 꿈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꿈이었다. 꿈인데 너무 생생해서 마치 진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마치 쌍둥이가 된 기분이었다.

“근데 아까 깜짝 놀라며 깨어났잖아, 도대체 무슨 꿈을 꾸었길래 그렇게 놀라면서 깨어났어?


귀신꿈이라도 꿨어?”

마침 카딜이 꿈이야기를 물어보자 타냐가 말을 꺼냈다.

“무서운 꿈이라기보다는 이상한 꿈이었어요.”

“어떤 꿈인데?”

“그러니까 꿈에서 제가 절 보았거든요.”

“타냐가 타냐를 보았다고?”


“네, 전 분명 여기 있는데 제 앞에서 똑 같은 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그랬어? 그거 신기하긴 하네, 그래서? 무슨 대화라도 나눴어?”

“네, 아주 짧았지만 대화를 나누었어요.”

“뭐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그게…..”

타냐는 갑자기 아까 나눈 대화가 기억이나지 않아 두 눈동자를 굴리며 기억을 해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까먹었어요.”

“뭐?”

잔뜩 기대를 하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던 카딜은 또 한번 타냐에게 뒷머리를 강타당한 느낌에 허탈하게


웃었다. 이상하게 늘 타냐에게 당하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전혀 기분은 나쁘지 않고 오히려 즐겁기만
하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타냐의 묘한 매력에 빨려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빠져나오기도
싫고 더 깊이 빠져들고만 싶다.

“생각안나면 생각하지마, 개꿈인가 보지 뭐.”

“그런가봐요.”

타냐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꿈에 대한 생각은 지워버렸다.

***

그날 오후.

갑자기 카딜의 저택에 비상이 걸렸다. 시종들과 시녀들, 그리고 카딜의 호위무사들까지 평소와 다르게
우왕좌왕했다.

“황제폐하께서?”

“그렇습니다, 이제 곧 도착하신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황제폐하께서 왜 갑자기 우리집에?”

카딜의 말에 바훌이 그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고했다.

“혹시 대장군님의 상태를 살피러 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훌의 말에 카딜도 고개를 끄덕였다. 비적떼를 보냈고 마차가 벼랑으로 굴렀고 적어도 몇 달은 운신을
못할 정도로 다쳤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시종을 보냈는데 다치기는커녕 멀쩡한
모습이라고 보고를 받았으니.

“반쯤 죽어있어야할 내가 이렇게 멀쩡한 것이 어찌된 일인가 궁금해서 미치겠는 모양이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직접 행차하시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래, 그 성질에 시종을 보내면 답답해서 숨이 막힐테지, 알았어, 준비해.”


“예, 대장군님.”

“참, 내가 나은 것은 아밀리에의 치유마법 덕분이라는 것을 잊지마.”

“그럼 다른게 있습니까?”

바훌의 물음에 카딜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말은 혹시 엉뚱한 소문이라도 났나 싶어서 노파심에.”

“그럴리가요, 이미 시종들이고 하녀들이고 할 것 없이 아밀리에의 치유마법덕분이라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갔습니다.”

이럴때는 입싼 시종들이 기특하게 여겨진다.

“그래, 알았어, 나가봐.”

“예, 대장군님.”

바훌이 인사를 하고 나간 후 카딜은 타냐를 불렀다.

“타냐.”

“예, 카딜님.”

“넌 황제가 돌아갈 때 까지 꼼짝도 하지 말고 네 거처에 들어가있어라.”

“아, 네, 알겠습니다.”

“절대 나오면 안된다 절대.”

“네, 알겠습니다.”

“내가 부르기 전에는 절대 대답도 하지말고 나오지도 마.”

“알겠습니다. 걱정마세요 카딜님.”

타냐는 천민인 자신이 이곳 카딜의 거처에 머무르는 것이 황제가 봤을 때 법을 어기는 일이 될 수도


있나보다 싶어 염려말라는 듯 두 눈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하지만 카딜이 여전히 불안한 눈빛이었다.

백여년전 샤마란족이 몰살당한 것과 타냐의 능력이 연관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황제가 단순히 자신의
상태를 살피러 오는 것인지도 의심스러웠다. 혹시 뭔가를 알아차리고 타냐를 찾아온 것이라면 타냐는 절대
황제의 눈에 들켜서는 안된다.

13 화

갑자기 이렇게 들이닥친 이유가 느낌상 자신의 상처가 어떻게 그렇게 빠른시간에, 그리고 완벽하게
치유되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함인 것 같았다.

“황제폐하 드십니다!”

시종 스탈드의 큰 목소리에 카딜은 직접 문을 열었다.

“어서오십시오 폐하, 이렇게 누추한 곳에 직접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카딜의 인사에 알테베르는 가식적으로 크게 걱정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적떼를 만나서 크게 다쳤다는 소식으로 가슴을 졸였는데 다행히 완쾌되었다는 말에 이렇게 왔어. 정말
보고대로 전혀 다친적이 없어 보이는군, 크게 다쳤다 들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하루 아침에 거뜬하게
나았지?”

‘역시 목적은 이거였어.’

카딜은 알테베르를 자신이 늘 앉던 소파로 안내했다. 알테베르는 자리에 앉으면서도 카딜을 아래 위로


살폈다.

“그것은 치유마법사 아밀리에의 수고 덕분입니다. 이번에 신전에서 치루었던 치유마법사 레벨 3 과정을


수료했다고 하더니 실력이 대단히 늘었더라구요.”

“아, 그래?”

“예, 그리고 사실 마차만 그렇게 부서졌지 전 마차가 부서지기전에 뛰어 내렸습니다. 그래서 크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아마 그래서 더 치료가 쉬웠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까지 몸소 방문하실 필요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래? 그런데 내게는 왜 그렇게 크게 다쳤다고 보고를 한거지?”

“누가요? 누가 따로 보고를 드렸습니까?”

카딜의 눈동자가 반짝 하고 빛을 내자 알테베르가 얼른 얼버무렸다.

“응? 아, 그러니까….소문에 말이지, 소문이 어찌나 파다하게 퍼졌는지 황궁안까지 들리더라고.


시종들이 수군거리기에 나도 알아보라고 했지.”

황제가 대충 둘러대는 것을 눈치챘지만 카딜은 그냥 넘어가주었다.

“그러셨군요, 염려해주셔서 황공할 따름입니다, 안그래도 그 비적떼들 때문에 제가 직접 황궁으로


들어가서 폐하를 알현하려 했었습니다.”

“그랬던가?”

“예, 아직도 그런 비적떼들이 선량한 사람들을 헤치고 그들의 소중한 재산을 갈취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
확실하게 알았으니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지않겠습니까? 게다가 이번 비적떼는 감히 제 마차까지
공격했습니다. 그 말은 간이 배밖으로 나왔다는 뜻도 되겠지요, 그런 놈들은 아예 진짜로 간을 빼내서
들판에 사는 늑대무리에게 던져줘버릴겁니다.”

크흠!

카딜의 말이 섬뜩했는지 알테베르고 괜한 헛기침을 했다.

“그럼, 참으면 안돼지, 이 나라가 얼마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데 그런 비적떼라니, 말도 안되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당혹감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건데 제가 그 비적떼들을 소탕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응? 아, 그, 그래, 안그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그대에게 비적떼를 소탕하라 명을 내리겠다.
감히 내 이름에 먹칠을 하는 놈들을 잡아다가 단두대에 세우고 그 잘린 머리는 성탑에 매달아 비적질을
하면 어찌된다는 것을 모든 국민들이 알게하라.”
알테베르는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카딜에게 비적떼 소탕을 맡겼다.

“그런데 말이야, 그 아밀리에라는 치유마법사를 한번 만나고 싶은데.”

“그 치유마법사를요?”

“그래, 실력이 좋으면 내가 황궁으로 데리고 가겠다.”

“황궁에는 그런 실력의 치유마법사가 넘쳐난다 들었습니다만, 그리고 제 상처가 워낙 가벼워서 그 정도는


치유마법사 2 급만 되도 가능했지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래? 하긴 많이 안 다쳤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래도 데리고 가시겠다면 불러드리겠습니다.”

“아냐, 됐어, 이야기를 듣고 보니 데려갈 필요 없겠군.”

황제와 카딜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바훌과 시종들은 말은 못하고 속으로 의아해 했다. 분명 목숨을
잃기 직전까지 갔는데 왜 상처가 가볍다고 말을 하는거지?

아밀리에를 황제에게 빼앗길까 싶어서인가?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바훌도 시종들도 모두 똑 같은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좋다 하는 것은 무조건 제 것으로


만드는 악취미가 있었다. 설령 빼앗아간 사람이든 물건이든 결국 쓰지 않고 버리면서도 말이다.

“오랜만에 오니 감회가 새롭군.”

황제는 대화주제를 바꾸기 위해 내실을 두리번거렸다.

“그렇죠, 정말 오래간만에 오셨습니다. 황자시절에는 자주 놀러도 오셨는데 말입니다.”

“그랬지. 그때는 내가 그대를 친형처럼 따랐었지,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하하하.”

“그랬었죠. 하하하.”

그렇게 두 사람이 겉도는 대화를 이어나갈 때 밖이 소란스러웠다.

“바훌, 무슨 일인지 나가봐.”

“예, 대장군.”

바훌이 각지게 대답하고 돌아서려할 때 밖에서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군님! 급한 전갈이옵니다!”

황제와 카딜이 놀라서 서로를 쳐다볼 때 시종이 내실 문을 열어 주었다.

뛰어 들어오다시피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마물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도성 외곽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였다.

“무슨 일이냐!”

바훌이 급하게 묻자 병사가 황제를 보고 놀라서 바닥에 엎드리며 보고했다.

“화이트고스트가 출몰하였습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 놈들입니다요!”


화이트고스트란 말 그대로 형상이 없는 마물이었다. 하얀 빛을 내며 허공을 떠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공격하는 마물이었다. 아직 그 마물의 정체를 정확히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이트고스트 마물에게 먹히면 뼈만남고 피와 살은 매말라서 죽게 된다. 마치 수백년전 죽은 미이라처럼


변해버려 화이트고스트가 나타나면 병사들은 겁을 집어먹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하지만 화이트고스트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하얀빛의 가운데를 검으로 가르거나
화살로 쏘면 마물은 괴이한 비명소리를 내면서 연기처럼 사라진다. 달려드는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라
무술이 뛰어나지 않은 사람들은 칼을 빼들 시간도 없이 당하게 된다.

“대장군! 어찌할까요!”

바훌의 물음에 카딜이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어떡하긴 당장 출동해야지!”

“예! 알겠습니다. 붉은 기사단을 집결시키겠습니다!”

“그래, 난 갑옷을 챙겨입고 나가겠다.”

“예!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카딜은 실리아에게 갑옷을 입히라 지시했고 시녀들과 하녀들이 우르르 내실의 뒤쪽 정 중앙에 옷걸이에
걸려 있는 갑옷을 내렸다.

“폐하, 혹시 모르오니 서둘러 황궁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래, 내 걱정은 말고 얼른 그 마물을 처리하라.”

“분부받들겠습니다!”

카딜이 겉옷을 벗어던지자 시녀들과 하녀들이 카딜에게 갑옷을 입혀주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황제의
태도는 이상하게 느긋했다. 어떻게 저렇게 태평하지? 카딜은 속으로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얼른 갑옷을
조이는데 집중했다.

잠시 후.

카딜은 마물을 처치하기 위해서 붉은 기사단 1 군단을 이끌고 출정했고 저택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알테베르는 뭔가를 찾는 사람처럼 카딜의 내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티도의 보고에 의하면 분명 엄청나게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카딜은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치유마법 레벨 3 인 아밀리에가 치료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숨기고 있다는 뜻이다. 그 누군가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는 말과 상통한다.

만약 신전의 대제사장 비숍의 말이 맞다면 여기 이 저택내부에 전혀 새로운 인물이 숨어 있을 것이다.

스탈드는 황제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문을 열어라.”

“하지만 폐하.”
“내 명을 거역하는 것이냐?”

스탈드는 알테베르의 사나운 눈빛에 할 수 없이 문을 열었다. 서재, 게스트룸, 욕실, 화장실 할 것 없이


문이란 문은 하나하나 열어가던중 드디어 타냐의 방문 앞에 섰다.

“이 문도 열어라.”

“예, 폐하.”

한편, 카딜은 말을 타고 마물이 나타났다는 곳으로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붉은 기사단 1 군단 역시 각자


말을 타고 카딜의 뒤를 따랐다.

“아직도 멀었느냐!”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요!”

바훌의 뒤에 탄 병사가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기 저 시커먼 숲속입니다요!”

병사의 말에 카딜은 말의 배를 힘차게 찼다.

“타하! 어서 가자!”

카딜의 백마는 주인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아까보다 더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저기입니다!”

병사의 말에 카딜은 말의 고삐를 잡아 당겼다. 이제부터는 조용히 가야한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바훌이 다시 손을 들었고 붉은 기사단원들도 말을 멈추었다.

따가닥 거리며 지천을 울렸던 말발굽소리가 사라지자 갑자기 사방은 조용해졌다.

그런데 한참을 시커먼 숲속을 살폈지만 화이트고스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카딜이 속삭이듯 병사에게 물었다.

“그 사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분명 여기서 나타났었는데….”

“다른 병사들은 어디에 있느냐.”

“그게 전부 당했습니다, 저만 겨우 도망쳤거든요. 저도 싸우고 싶었지만 더 큰 피해를 입기전에 어서


대장군께 알려드려야 한다는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도망친 널 탓하는게 아니다, 당연히 누군가는 상황보고를 해야하니까.”

“송구합니다요.”

병사는 혼자 살아남은 것이 죽을죄라도 되는 듯 안절부절 못했다. 카딜은 바훌에게 숲속을 한번 더 샅샅이


뒤지라 명했다.

그렇게 30 분 정도를 더 살폈지만 마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워낙 여기 저기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터라


카딜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마물에게 당한 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돌아가자.”

“예, 대장군.”

카딜의 명에 붉은 기사들은 커다란 구덩이를 판 후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한곳에 모았다. 죽은 사람을


불에 태워야 천국으로 오르고 내세에 다시 태어난다 믿기에 시체아래 마른 나무들을 깔아놓고 불을 붙였다.

그런데 화이트고스트에 당했다는 시체가 꽤 오래되어 보여 카딜이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마물에게 당하면
미이라처럼 변하긴 하지만 이건 오늘 당한 시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 까지만 해도 카딜은 황제가 타냐를 찾아내기 위해 꼼수를 부렸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그러십니까?”

바훌이 카딜의 묘한 표정을 보고 물었다.

“마물에게 당한 시신들이 오늘 당한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대장군을 이곳으로 유인한 것 같은 느낌이 자꾸듭니다.”

“!”

바훌의 말에 카딜의 두 눈에서 광기로 가득한 섬광이 번쩍했다.

“돌아가자!”

“예?”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자 이랴!”

카딜이 갑자기 말에 올라 내달리기 시작하자 바훌도 놀라서 붉은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렸다. 병사에게
시체의 화장을 책임지라 명한 바훌이 멀어지는 카딜을 따라잡았다.

14 화

카딜이 그렇게 다시 저택을 향해 달려오고 있을 때 알테베르의 시종 스탈드가 방문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지만 문이 꽉 잠겨 있었다. 밖에서 하는 이야기 소리를 들은 타냐가 문을 일부러 잠갔던 것이다.

-절대 나오면 안돼,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열어주지마, 알았지?

타냐는 아까 카딜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 열립니다 폐하.”

“그래?”

“예, 아마 창고인 듯 합니다, 다른 방으로 가볼까요?”

“이런 곳에 창고가 있을 리가 없다, 창고 위치치고는 좀 이상하지 않느냐?”

“그러고 보니 그렇긴 한데요, 그렇더라도 이제 그만 하시면 안되겠습니까? 카딜 하에르 대장군이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넌 나보다 카딜이 더 무서운 것이냐?”


“예? 아,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절대 아닙니다, 소신은 그저 카딜 하에르 대장군의 심기를
건드려봐야 좋을게 없을 것 같아서.”

“그 말이 그말이지 않느냐?”

“아,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사옵니다.”

“그렇다면 어서 열어라, 황제의 명이다.”

알테베르의 화난 눈빛을 본 스탈드는 어쩔 수 없이 문을 발로 찼다. 하지만 60 대의 남자가 부수기에


방문고리는 너무 단단했다.

“그렇게 차서 열리겠느냐?”

“아니, 그게, 문고리가 생각보다 강합니다.”

스탈드의 말에 알테베르는 혀를 쯧쯧 차고는 데리고 온 호위무사 하나를 불렀다.

“문을 부숴라.”

“예, 폐하.”

호위무사는 문고리 쪽을 노려보더니 오른발을 휙 들었다. 덩치도 크고 발도 큰 호위무사가 문고리쪽을 퍽


찼더니 문은 아주 쉽게 열렸다.

타냐는 열린 문 뒤에 얼른 숨었다.

그때 였다. 숨을 헉헉거리며 카딜이 들어섰다.

“거기서 뭐하시는겁니까 폐하?”

제길.

알테베르는 너무 빨리 돌아온 카딜을 보고 속으로 욕을 했다.

“아, 화장실이 갑자기 가고 싶어서 말이지, 여기가 아닌가보군.”

말도 안되는 소리에 어설픈 연기까지. 카딜은 재빠르게 눈을 돌려 방 안을 쳐다보고는 얼른 문을 닫았다.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게 하도 오래되어가지고 기억이 잘 안나서 꽤 헤맸어, 어디지?”

알테베르의 능청맞은 말에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카딜은 일단 그를 이곳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앞장서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카딜이 타냐의 방과 정 반대방향을 가리키자 알테베르는 방 안에 누가 있는지 살펴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 누군가를 숨겨 놓은 것 같은데.

-여자 일것입니다. 샤마란족의 치유능력은 대대로 족장의 딸에게 이어지거든요.

-어떻게 그 여자를 구분할 수 있지?


-저도 아직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보시는 순간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치유의 능력이
발현되었다면 보통 사람들과 다른 기운을 품고 있을테니까요.

알테베르는 대제사장의 말을 떠올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카딜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알테베르를 노려보았다.

분명 뭔가 알고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내가 타냐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금서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카딜이었다.

‘이런식으로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어, 뭔가 방법을 써야한다. 타냐를 편하게 대할 수 있게.’

스탈드는 서릿발 같은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카딜과 시선을 마주하지 못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방문을 왜 부셨느냐 추궁하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었지만 카딜은 묻지 않았다.

잠시 후.

“마물은 잡았고?”

다시 소파에 마주 앉은 황제와 카딜.

“아, 예, 완벽하게 소탕하고 시신들은 화장시킨 후 돌아왔습니다.”

“흐음, 그런 것 치고는 시간이 아주 짧게 걸린 것 같군, 역시 하에르 대장군의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하하하.”

카딜은 이번에도 그냥 넘어 갔다. 황제가 일을 꾸몄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으니까. 게다가 지금 일을 크게


벌여봤자 오히려 타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과찬입니다 폐하.”

“하하하, 그래, 그건 그렇고 난 이만 가봐야겠네, 밀린 정사가 많아서 말이지.”

황제가 일어서자 카딜도 따라 일어섰다.

“참, 이번 주말에 사냥대회가 있는건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전 휴가중입니다.”

“당연히 알지, 하지만 사냥대회는 업무가 아니고 일종의 놀이가 아니던가, 그러지 말고 같이 사냥하면서
하루를 즐겁게 보내자고, 어떤가? 황제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설마 거절하진 않겠지?”

알테베르의 교활한 작전에 말려 들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 말하는데 거절할 수는 없었다. 또한


사냥대회라는 말에 카딜의 머릿속에 뭔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참가하겠습니다.”

“하하하, 당연히 그래야지, 그럼 그렇게 알고 난 이만 궁으로 돌아가겠네.”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화이트고스트를 물리치느라 피곤할테니 그만 쉬어.”


“아, 네, 그럼 멀리 안나가겠습니다. 폐하.”

“그래, 그래.”

알테베르는 또 한번 호탕하게 웃고는 돌아섰다. 스탈드와 그의 호위무사들은 황제의 뒤를 따랐다. 돌아선


알테베르의 표정은 완전 똥 씹은 얼굴이었다.

“바훌 네가 게이트까지 모셔라.”

“예, 대장군.”

바훌이 나가고 나자 카딜은 급하게 타냐의 방으로 왔다.

“타냐, 거기 있어? 타냐?”

방 안에 아무도 안보여 카딜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때 타냐가 침대 아래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카딜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거기 숨어 있었어?”

“네, 혹시 들킬까봐서요.”

카딜은 침대아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낑낑대는 타냐를 도와주었다. 그녀의 손을 잡아 당겨주자 타냐가 쑥


빠져나오면서 그의 품에 안겼다.

쪼그리고 앉아서 타냐를 끌어 당겼던 카딜은 그녀를 안은채 뒤로 넘어졌다.

졸지에 카딜의 단단한 갑옷 위에 엎드린 자세가 된 타냐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죄, 죄송합니다 카딜님.”

타냐가 일어서려 하자 카딜이 얼른 그녀를 끌어 당겨 입을 맞추었다.

“!”

타냐는 너무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의 부드러운 키스에 이내 두 눈이 스르르 감겼다.

“타냐, 눈떠봐.”

키스를 마친 카딜이 눈떠보라고 하자 타냐는 부끄러운 것을 참아내며 눈을 떴다.

“타냐, 또 기억안나?”

“아뇨, 그럴리가요.”

“하아, 다행이네.”

카딜은 타냐를 안은채 한바퀴 굴렀다. 그리고 다시 타냐에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타냐는 어찌할바를
몰라하면서도 그가 하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키스라는 것을 어찌하는지 모르는 그녀로서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가 혀로 치아를 밀자 타냐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벌어진 입안으로 밀려 들어온 카딜의 혀가 타냐의
혀를 찾아 유영했다.

생전처음 맛보는 남자의 혀와 타액이었지만 거부감이라고는 없었다. 오히려 황홀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듯 하여 마치 뼈가 없는 동물처럼 온몸이 흐느적거렸다.

“타냐.”

“!”

두 눈을 감고 그의 키스에 빠져들었는데 또 카딜이 타냐의 이성을 깨웠다.

“예, 카딜님.”

“우리 방금전 뭐했지?”

“키, 키스요.”

“기억하는구나. 난 네가 또 기억을 잃어버릴까 불안해서 자꾸 물어보는거야.”

그제야 타냐는 카딜이 왜 자꾸 키스하다말고 제 이름을 부르는지 알아차렸다. 그의 말에 의하면 벌써 두


번이나 카딜의 품에 안겼다. 그런데 타냐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이번에는 절대 기억 잃어버리지마 알았지?”

“네, 그럴게요.”

타냐가 공손하게 대답을 하자 카딜이 그녀의 옷을 하나 하나 벗겨내기 시작했다. 타냐의 호흡이 빨라지고
그녀의 흉곽은 심하게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눈처럼 하얀 살결이 드러나자 카딜이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입을 맞추며 나머지 옷도 벗겨냈다.

완전한 알몸으로 변한 타냐는 부끄러움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카딜이 타냐의 턱을 잡아 저를
보게했다.

“이번에는 절대 기억 잃어버리지마 알았지?”

그의 명령같은 부탁에 타냐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자 카딜이 그의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하지만 갑옷은 혼자 벗기에 조금 무리가 있었다.

“타냐 이것 좀 풀어봐.”

결국 타냐에게 도움을 청했고 타냐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카딜의 갑옷을 풀어주었다.

갑옷 상의가 벗겨지자 카딜이 급하게 나머지 옷들을 벗어 던졌다. 카딜은 알몸인채로 알몸의 타냐를
이끌어 침대에 눕혔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부채살처럼 활짝 펼쳐진채 타냐는 다소곳이 누웠다. 전쟁에서 얻은 훈장같은 흉터들이
곳곳에 있는 카딜의 몸을 올려다보는 타냐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그를 볼때마다 안타까웠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얼굴 왼쪽뺨에 나있는 십자가 모양의 검상이었다.

콧잔등에도 옆으로 그어진 흉터가 있지만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렇게 얼굴에도 두군데나 흉터가 있지만
그의 이목구비가 너무 뚜렷하여 그의 수려한 마스크에 흠도 하나 주지 못했다.
타냐는 카딜의 얼굴에 나있는 흉터를 가만히 만져 보았다.

“이거 많이 아팠겠어요.”

“훗, 아냐, 별로 안아팠어.”

카딜이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데 타냐의 심장이 널을 뛰었다. 카딜은 타냐의 눈부신 알몸을 훑어 내리다
그녀의 젖가슴을 양껏 쥐어 보았다. 그녀와 두 번 몸을 섞었지만 두 번다 이렇게 여유롭지 못했었다.

오늘은 타냐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천천히 할 생각이었다.

“아, 으읏.”

타냐가 허리를 뒤틀며 신음을 흘리자 카딜이 고개를 내렸다. 이내 그의 입안으로 타냐의 가슴 하나가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아, 앗.”

타냐는 저도 모르게 카딜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활처럼 휘어지는 등 밑으로 카딜의 손이 파고 들었다.

15 화

흡입력이 어찌나 강한지 온몸이 그의 입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휘어진 몸은 허공에 떠있는
상태였다. 저도모르게 더 빨아달라는 듯 가슴을 카딜에게 내민 모양새였다.

유두가 빨갛게 부풀어 오르도록 빨아당긴 카딜이 옆에 있는 젖가슴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 다시 새로운 감각이 정수리를 내리치는 느낌에 타냐의 잇새로는 쉴새없이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껏 타냐의 가슴을 농락하듯 개걸스럽게 빨아대던 카딜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타냐, 기억해, 지금 우리가 뭘 하는지.”

타냐는 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후 카딜은 다시 타냐의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찬찬히 그녀의 몸을 탐닉한건 처음이었다.

두 번의 정사때는 늘 그녀가 애원하며 달려들어 모든 절차를 건너뛰고 삽입부터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제대로 하고 싶었다.

“하으응, 거, 거긴 제발.”

동그란 진주알을 혀로 둥글리자 타냐의 몸이 제 마음대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딜은 그녀가
도망갈 수 없게 골반을 꽉 누른채 타냐의 진주알을 핥아댔다.

처음 느껴보는 짜릿한 감각에 타냐의 음부는 홍수가 난 것처럼 애액이 줄줄 흘러 내렸다.

혓바닥을 넓게 편 카딜이 그녀의 진주알 같은 음핵을 빙글빙들 돌려가면서 문지르기 시작했다. 분홍빛
음순을 활짝편 혀로 부드럽게 핥아 올리기도 했다.

타냐의 허리가 춤을 추듯 이리저리 뒤틀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더니


쾌락의 늪으로 빠져버렸다. 오르가슴을 처음 느낀 타냐는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비명같은 교성을 내질렀다.
울컥이며 흘러내린 애액을 맛있게 빨아 마신 카딜이 드디어 삽입을 시도했다. 프리컴이 흘러내린 그의
젖은 선단은 흥분으로 벌름대는 그녀의 안으로 무리없이 빨려 들어갔다.

“타냐, 잘 봐.”

뭘 굳이 보라고 하는지. 타냐는 카딜을 야속한 눈빛으로 흘겨 보았다.

“타냐 보고 있어?”

“하아앙, 네…보, 보고….있어요.”

타냐는 제 음순 사이에 끼어있는 그의 성기를 내려다보며 겨우 대답했다. 그가 자신이 이 순간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다는 것은 알지만 이건 살짝 고문에 가까웠다.

남자를 처음 맞이하는, 물론 기억이 없는 사이 두 번이나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지금의 타냐에게는


처음인데 그걸 굳이 눈으로 보라고 하다니.

“그래, 착하네, 잘 보고 있어, 눈 감지 말고.”

타냐는 카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단은 쉽게 들어갔지만 그 이후에는 뭔가에 걸린 것처럼 좀처럼 안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하아, 여전히 좁아.”

카딜은 되도록 타냐가 아프지 않게 삽입하려고 노력했다.

“하아, 카딜님…아파요.”

두 번이나 했다는데도 그의 거대한 성기가 좁은 내벽을 밀며 파고들자 골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알아, 하지만 어쩔 수 없어 타냐.”

카딜이 타냐의 몸을 끌어 안았다.

이불자락을 쥐어뜯듯 잡은채 몸서리치는 타냐의 미간은 심하게 구겨졌다. 그 모습은 카딜의 성욕에 불이
붙었다.

“미안해, 타냐.”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카딜이 엉덩이를 퍽 쳐올렸다.

“아앗!”

타냐는 깜짝 놀라 카딜의 등을 손톱으로 긁었다. 하지만 고통은 아주 짧았다. 타냐는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이제 움직일거야 타냐, 지금까지는 기억하지?”

“하아, 네, 기억해요.”

타냐의 대답을 들은 카딜이 드디어 피스톤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찔걱이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은행나무로 만들어진 침상이 흔들릴 정도로 폭주한 카딜은
얼마지나지 않아 타냐의 몸안에 정액을 쏟아냈다.
하지만 욕정이 사그라들긴커녕 더 치솟았다. 몇 년동안 여자라고는 모르고 전쟁터만 누비고 다녔던 그는
몇 번의 정사로 욕정이 풀어지지 않았다. 오늘이 디데이라도 되는 듯 카딜은 타냐의 몸안에 쌓인 욕정을
풀고 또 풀었다.

그 사이사이 카딜은 어김없이 타냐에게 기억하느냐 물었다.

카딜은 타냐의 몸안에 다섯 번의 사정을 한 후 타냐를 안고 잠이 들었다. 타냐 역시 두시간 넘게 그의


성기를 받아내느라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다.

두 시간 정도 지난 후 실리아의 목소리에 카딜이 눈을 떴다.

실리아는 내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도 카딜이 보이지 않아 결국 타냐의 방문앞에까지 온 것이다. 여기


아니면 있을 곳이 없기때문이었다.

“카딜님, 실리아 이옵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카딜은 제 팔베개를 한 채 잠든 타냐가 깰까 싶어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식사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래, 알았다.”

“예, 그럼 천천히 나오십시오.”

“그래.”

실리아가 물러가고 난 후 카딜은 타냐를 깨웠다. 깨우는 방법은 키스였다. 그녀의 이마와 볼에 입을 맞춘
후 입술로 향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그의 입술을 사선으로 겹친 후 혀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타냐가
두 눈을 떴다.

“깼어?”

“카딜님….”

“제발 여긴 어디? 라고 묻지마 타냐.”

카딜이 애원하듯 말하자 타냐가 피식 웃었다.

“여긴 제 방이잖아요.”

“기억해?”

“그럼요. 다 기억해요.”

“하아, 다행이다.”

카딜이 타냐를 끌어 안을 때 타냐가 말했다.

“이번에는 카딜님이 절 덮쳤어요.”

“훗, 기억하는구나?”
“기억한다고 했잖아요.”

“그래, 장하다 우리 타냐. 정말 장해, 맞아 내가 덮쳤어, 네가 아니고 이번에는 내가 덮쳤어, 하지만


지난번에는 분명 네가 덮쳤어.”

그걸 굳이 또 확인하려는 카딜이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든 타냐가 그의 목을 끌어 안으며 말했다.

“네, 알았어요, 내가 덮쳤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 이야긴 좀 그만해요, 제가 언제 제가 안그랬다고


했던가요?”

“그건 아니지, 그런데 인정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잖아, 지금은 인정해?”

“네, 인정해요.”

하지만 너무 쉽게 인정한다고 하자 카딜은 또 의심가득한 눈빛을 했다. 그러자 타냐가 얼른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을 닫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지만 카딜은 기꺼이 타냐의 키스를 받아 들였다.

***

“호위무사라뇨? 전 무술을 하나도 모르는데요?”

식사를 마친 후 카딜은 그의 생각을 타냐에게 말했다.

“그래야 내 곁에 24 시간 붙여 놓을 수 있어, 그래서 그래. 그리고 너도 무술을 배워야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방어 정도는 하지 않겠어?”

카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럼 무술을 가르쳐주세요.”

“안그래도 그럴 작정이었어, 네 무술은 내가 책임지고 가르쳐줄게, 미리 말해두는데 나한테 무술을


배운다는 것 자체만으로 넌 큰 영광을 입은 거다.”

“아, 네.”

“아, 네? 너 그 대답 살짝 비웃는 것으로 들리는데?”

“아니예요, 비웃다니요, 진짜 영광이구나 싶어서 대답한건데요?”

타냐의 말에 카딜은 이상하게 또 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진짜라니까? 궁금하면 호위무사들 아무나 잡고 물어봐, 내가 누구한테 무술을 가르쳐준적이 있는지,


그리고 만약 내가 무술을 가르쳐준다면 기분이 어떨지.”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아니 왜?”

“제가 영광이라고 생각하니까요.”

“……….”

말문이 막혀버린 카딜은 앞에 놓인 냉수를 짜증나게 마셨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대화를 하다보면
매번 타냐에게 당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딱히 짚고 넘어갈 것이 없어서 따질 수도 없다.

“정말 영광입니다 카딜님, 저 열심히 배울게요.”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데 카딜의 기분은 썩 좋게 바뀌지는 않았다.

“좋아, 그럼 당장 시작해볼까?”

“당장요?”

“응, 당장, 이번 주말에 사냥 대회가 있어, 널 거기에 데리고 갈거야.”

“사냥대회?”

“그래, 황제가 주최하는 사냥대회에 초대 되었거든, 어서 나가자. 3 일밖에 시간이 없어.”

카딜은 차라리 타냐를 제 눈앞에 두기로 했다. 24 시간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의 호위무사가
적격이었다. 설령 황제 앞에 타냐를 내보인다고 해도 그게 더 안전할 것이다 생각했다. 꽁꽁 숨기는데는
한계가 있으니까.

게다가 오히려 황제 앞에 내놓으면 큰 의심을 사지 않을지도 모른다. 황제가 자신의 내실을 샅샅이
뒤졌다는 것은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차라리 호위무사라며 내놓으면 오히려
타냐를 유심히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니까.

타냐는 얼떨결에 연무장까지 왔다.

“그렇게 입으니까…..”

“입으니까 어떤데요?”

타냐는 저를 아래 위로 훑어보는 카딜을 위해 한바퀴 돌았다. 금발을 끌어 올려 꽁지머리로 단단히 묶고


머리띠를 했고 호위무사들이 입는 훈련복을 입었지만 타냐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렇게 입으니까 더 섹시하다.”

카딜이 입맛을 다시는 모습에 할 말을 잃은 타냐는 얼른 서두르는척 했다. 이대로 있다간 손가락 발가락이
다 오그라들 것 같아서다.

“뭐부터 하면 될까요?”

“일단은 목검으로 시작하자.”

카딜은 갑자기 훅 하고 끼쳐오는 열기를 얼른 식히고 목검 하나를 타냐의 손에 쥐어 주었다. 타냐는 처음


잡아보는 목검을 내려다 보았다.

좀 무거운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휘두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저런 노동으로 그래도 꽤 깡다구가


생긴 그녀였다.

바훌은 타냐의 검술 훈련을 직접 하겠다고 한 카딜을 조금은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섰다.

그녀를 호위무사로 둔갑시키려하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를 24 시간 곁에 두고 싶어서라는


것쯤은 알아차렸다. 그래서 더 걱정인 바훌이었다.

천민계집에게 흠뻑 빠진 카딜을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그저 잠시 욕정이나 풀기 위함이겠지 했는데


아니었다. 카딜의 타냐를 향한 마음이 가볍지 않아 보여 바훌의 걱정은 커지고 있었다. 황제의 사촌
여동생과의 혼인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결혼까지 황제의 명을 따를 수 없다며 버틴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황제의 명을 따라야 할 것이다.
카딜이 이렇게 까지 강경하게 결혼을 피하려 하지는 않았었다. 타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녀가
나타난 후 더 심하게 로젠시아와의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있는 카딜이었다. 바훌은 어떻게 하면 타냐를
카딜에게서 떼어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이 더 심각하게 되기전에 피바람을 막아야 한다.

16 화

“자 일단 검을 어떻게 쥐느냐부터 시작할게.”

카딜은 타냐의 뒤로 와서 그녀의 몸을 감싸듯 안았다. 어깨 너머로 그의 얼굴이 넘어오더니 어느 순간


볼에 입을 맞추었다.

“검술 가르쳐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지금 하고 있잖아, 집중해.”

카딜이 괜히 엄한 표정으로 꾸짓듯 말하자 타냐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또 번개같이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춘 카딜이 타냐의 손을 덮어 잡고 검을 잡는 법을 알려주었다.

“자 오른손은 검의 크로스가드에 딱 붙이고 왼손은 손잡이 아래쪽을 잡아서 힘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게


해야해.”

“이렇게요?”

“그렇지, 잘 하네.”

뭐 한게 있다고 벌써 잘한다 칭찬을 했지만 타냐는 그의 칭찬이 좋아서 미소지었다.

“자 이제 검을 잡았으니까 스텝을 익혀볼까?”

“벌써요?”

“벌써라니?”

“아니, 제 말은 또 다른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없어, 그냥 내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돼.”

아닌 것 같은데…. 타냐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일단 카딜이 하라는 대로 따라했다.

“자, 내가 시범을 보여 줄테니까 그대로 따라해봐.”

카딜은 자신의 검을 꺼내더니 타냐에게 가르쳐준대로 자세를 잡았다.

“일단 한 발을 앞으로 내밀고 뒷발은 뒤꿈치를 살짝 들어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거야.”

타냐는 카딜의 스텝을 보고 그대로 따라했다.

“오오, 잘 하는데?”

또 뭘 했다고 칭찬을 하자 타냐의 어깨가 우쭐했다. 그녀 생각으로는 너무 쉬웠던 것이다. 하지만 검을


잡는 것과 스텝을 떼는 것이 타냐의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멀리서 구경을 하고 있던 바훌도 속으로 제법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요?”

“몇번 연습을 해야 다음단계로 넘어가지.”

“연습할게 없는데요? 검을 잡고 전진과 후진 자세를 취하는 것, 그것밖에 없잖아요.”

“무슨 소리야, 그것도 하루종일 연습해야할 과정이야.”

“에이, 이런걸 하루종일 연습하다뇨, 말도 안돼요. 얼른 다음 단계 가르쳐주세요.”

타냐의 열성에 카딜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알았다고 했다.

“그럼 이건 초급과정의 끝부분에 하는 간단한 검형인데 해볼래?”

“네.”

타냐가 자신있게 대답하자 카딜이 일부러 초급과정의 제일 어려운 검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바훌이 코웃음을 쳤다.

처음 검을 잡아보는 사람에게 석달은 훈련해야 따라할 수 있는 검형을 가르치려 하다니. 아무리 마음이
급하기로서니 쯧쯧. 혀를 차며 카딜을 쳐다보던 바훌은 타냐가 얼마나 못따라 할지 궁금해져서 아예
팔짱을 끼고 구경태세에 들어 갔다.

“자, 이정도야, 할 수 있겠어? 혹시 못 따라 하더라도 실망하지마, 이건 초급과정의 제일 마지막


과정이니까.”

“네, 해볼게요.”

타냐는 아까 카딜이 가르쳐준 준비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조금전에 카딜이 보여주었던 검형을 천천히
시전해나갔다. 30 초정도 되는 검형이지만 3 개월정도 배워야만 할 수 있는 자세였다. 하지만 타냐는
순식간에 카딜이 보여준 검형의 기초를 똑같이 따라했다.

“!”

“!”

카딜은 물론 바훌의 두 눈까지 커다랗게 변했다.

“타냐, 완전 천재잖아?”

“네?”

“혹시 검술연습 평소에도 했었어?”

“아뇨, 오늘이 처음인데요?”

타냐는 카딜이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다. 누가봐도 한번에 따라할 수 있는 검형을 따라했다고 이렇게까지
좋아하다니. 역시 뭐든 배울때는 아는 사람에게 배우면 안되는 거였어.

“그런데 이렇게 잘 한다고? 바훌! 너도 봤지?”


저 멀리서 팔짱을 끼고 있던 바훌이 얼른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예, 봤습니다. 좀 하시는 것 같습니다.”

“좀 하시는 것?”

카딜이 눈썹을 꿈틀대며 바훌을 노려보자 바훌이 얼른 말을 바꾸었다.

“제법 잘 하십니다.”

“정말입니까?”

타냐는 카딜의 말은 믿을 수 없다 생각하고 바훌에게 물었다. 그러자 바훌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 과정은 3 개월은 훈련해야 할 수 있는 검형입니다. 그런데 딱 한번보고 따라하다니 소질이 좀 있으신


것 같습니다.”

바훌이 타냐에게 공손한 어투로 말하자 타냐가 오히려 어색해했다. 그냥 편하게 대해주면 좋을텐데.

“그렇게 어렵지 않던데….”

타냐는 이게 그렇게 어려운가 하면서 다시 한번 검형을 해보았다. 겨우 30 초 정도에 몇 가지 안되는


동작을 했다고 두 남자가 저렇게 잘한다고 하니 칭찬이라기보다는 놀리는건가 싶기도 했다.

“하아 하아, 이정도면 정말 잘하는 건가요?”

타냐는 숨이 좀 차는지 심호흡을 해가며 물었다.

“사람말을 못 믿는 버릇이 있나보네. 정말 잘 하는 거라니까.”

“카딜님 말고 바훌님께서 대답해주시면 좋겠는데, 저 정말 잘해요?”

“네, 정말 잘 하십니다.”

“와, 진짜인가보네, 기분좋다.”

카딜은 제 말은 안 믿고 바훌의 말만 신뢰하는 타냐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타냐는 검형이 재미가 있어


계속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파워만 키우시면 정말 잘하실 것 같습니다 카딜님.”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대로 가르쳐볼 생각이다.”

카딜의 두눈에 가르침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지만 바훌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타냐, 이제 검형 2 형으로 넘어가자.”

카딜이 땀을 흘리는 타냐에게 다가가며 하는 말에 바훌은 이마에 손을 짚었다. 황제가 주최하는


사냥대회에 분명 로젠시아공주도 올텐데. 저렇게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안될텐데.

“검형 2 형으로요?”

“그래, 검형 2 형을 하려면 6 개월은 걸리는데 내가보기에 타냐는 일주일이면 될 것 같아.”

“정말요?”
“그렇다니까? 일단 내가 하는대로 따라해봐.”

카딜이 자신의 검을 잡고 자세를 잡자 타냐도 그의 흉내를 냈다.

“하나.”

“하나.”

“두울.”

“두울.”

둘이서 시간차를 두고 검형의 동작을 취하는 모습을 보던 바훌은 놀라움과 걱정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하지만 바훌의 걱정과는 상관없이 카딜은 타냐가 검형 2 형까지 잘 따라하자 혀를 내둘렀다.

갑자기 천재적인 검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바훌의 말대로 파워만 키운다면 1 년안에 붉은 기사단에
들어갈 실력쯤은 될 것 같았다.

***

“하아, 하아, 이젠 못 할 것 같아요.”

검술을 연습한지 2 시간째.

타냐와 카딜은 온몸이 땀으로 젖은 상태였다.

“나는 벌써부터 그만하고 싶었어, 타냐가 계속하길래 그냥 했을뿐이야, 검술이 재미있어?”

“네, 재미있어요. 그런데 전 언제 진짜 검을 잡을 수 있어요?”

“하하하, 타냐, 검에 대한 욕심이 많았나보네.”

“이 목검보다 카딜님의 검이 백배는 멋지잖아요.”

타냐는 자신이 연습했던 목검을 카딜의 검에 가져다 댔다. 카딜의 검은 손잡이에는 그의 이름이, 그리고
칼날에는 무슨 뜻인지 알수 없는 상형문자가 적혀 있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칼날은 어떤 단단한 것이라도 단번에 벨 것처럼 날카로웠다.

“벌써부터 진검을 가지고 연습하면 다쳐, 조금만 인내심을 가져봐 타냐, 오늘은 그만하고 씻으러가자,
배도 고프다.”

“네.”

타냐는 목검을 거치대에 올려 놓고 카딜과 나란히 그의 거처로 향했다. 바훌은 두 사람의 검술훈련이 끝날
기미가 안보이자 일이 있다며 물러갔다.

내실에 들어온 카딜은 실리아에게 욕조에 물을 받으라 지시했다. 마법석을 이용하여 물을 따뜻하게 데운
실리아가 준비가 끝났다고 아뢰고 식사준비를 하겠다며 물러갔다.

그녀가 나가길 기다렸던 카딜이 타냐에게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제가 걸어갈 수 있어요.”


“알아, 내가 안고 가고 싶어서 그런거니까 가만있어.”

카딜의 명령 같은 말에 타냐는 그의 목을 가만히 끌어 안았다. 카딜이 피식 웃고는 타냐에게 키스를 했다.

욕조로 걸어가는 그 시간도 아까운지 카딜은 타냐의 입술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무욕조에 도착한 카딜은 타냐을 안은채 안으로 들어갔다.

“옷도 안 벗었어요.”

“들어가서 벗으면 돼지.”

“물에 젖으면 벗기 힘들텐데….”

“그런 걱정은 안해도 돼, 내가 다 알아서 하니까.”

카딜의 말에 타냐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둥근 욕조에 두 사람이 들어가자 물이 출렁이며
넘쳤다. 타냐는 카딜에게 안긴채 물에 잠겼다. 타냐의 머리끈을 풀어 내리며 카딜이 입을 맞추어왔다.
머리끈이 풀어지자 긴 황금빛 머리카락이 물위에 둥둥 떴다. 2 시간의 검술훈련에 타냐는 지쳤는데 카딜은
전혀 지친기색조차 없었다. 그녀의 젖은 옷을 벗겨내는게 재미가 있는 듯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다.
동그란 어깨가 보이자 그곳에 입을 맞추고 다시 타냐의 입술을 삼키는 카딜.

그의 손길이 맨살을 더듬거릴때마다 타냐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이번에도 기억하는거지?”

“네, 기억해요.”

“신기하네.”

“뭐가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타냐가 막 덤벼들때만 기억이 사라졌어.”

“그런가요?”

기억이 없는 타냐는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카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두 번 다 타냐가 내게 덮쳤거든, 그 두 번만 빼고는 기억을 하잖아, 난 그게 이상하다는 거지.”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하긴 하네요, 으흣!”

대답하는 순간 카딜이 타냐의 젖가슴을 한껏 베어물어 타냐가 흠칫 놀라며 신음을 흘렸다. 카딜은 이제
타냐의 상의를 다 벗겨내고 그녀의 하의를 벗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의 젖가슴을 계속 농락했다.

타냐의 몸이 저절로 뒤로 젖혀지고 그녀는 물속에 잠기지 않으려 욕조의 벽을 두 손으로 잡고 버텼다.

타원형의 나무욕조에 거의 누운자세가 된 타냐였다. 젖가슴 두 개만 물위에 볼록 올라와서 여간 야한


모습이 아니었다. 단단해진 핑크빛 유두가 어서 빨아달라는 듯 춤을 춘다.

하지만 카딜은 이제 타냐의 아래를 공략하느라 젖가슴따위에는 신경쓸 정신이 없었다.

물에 젖은 바지를 벗겨내자 속옷이 나왔다. 속옷의 허리끈을 풀어내면서 옷 위로 타냐의 음부를 비벼댄다.
손가락을 세워 옷위로 구멍쪽에 대고 살살 찔러대자 속살이 벌름대며 애액을 토해냈다.

예민한 곳을 비벼대자 타냐의 몸이 이리저리 뒤틀리며 물까지 출렁였다.

드디어 속옷까지 벗겨져나가고 타냐는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카딜은 타냐의 질구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돌려대며 제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음대로 안됐는지 타냐에게 도움을 청한다.

“도와줘 타냐.”

“하아, 모, 못해요.”

구멍에 손가락 두 개가 들어와 이리저리 휘저으며 찔러대는통에 타냐는 그저 온몸을 뒤틀기에도 바빴다.

타냐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물위로 올라온 젖가슴이 출렁대는 모습에 흥분감이 극에 달한 카딜이 제
옷을 찢어 버렸다.

찢어진 옷을 벗을 정신도 없이 그는 두꺼운 성기를 타냐의 질구에 찔러 넣었다.

17 화

물속에서의 삽입은 뭔가 더 야했고 더 흥분됐다. 좁은 욕조에서 이루어지는 카딜과의 정사는 침대에서


이루어지는 것보다 몇배는 더 타냐를 타오르게했다.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어 가다 마지막에는 타냐가 욕조벽을 쥐고 엎드린 상태가 되었다.

뒤에서 찰박이는 소리를 내며 제 안을 들쑤시는 카딜의 성기에 타냐는 또 한번 허우적댔다.

성기가 안으로 밀려 들어올때마다 물이 찰랑이면서 음부를 자극하자 묘한 쾌감이 추가되었다.

오후의 햇살이 창을 타고 들어와 타냐의 젖은 몸을 비추었다. 하지만 지난번 창고에서처럼 타냐의 몸은


그렇게 반짝이지 않았다.

카딜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쾌락에 빠져들어 낮고 거친 신음을 흘렸다. 그것이 타냐의


치유능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카딜은 그녀의 붉은 속살을 벌리고 제 성기를 한껏
찔러넣고 그녀의 몸 안에 뜨거운 액을 뿜어냈다.

***

아클란대제국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검은숲 양지바른 곳에 황제를 상징하는 깃발이 꽂혀있다.

삼면이 막힌 가즈보가 세워졌고 안쪽에는 뷔페테이블이 차려져있다.

가즈보(천막) 안쪽과 주변에는 오늘 사냥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귀족들과 그 호위무사들이 집결해있다.

황제와 카딜이 참가한 사냥대회는 귀족들에게도 큰 관심거리였다. 제 1 귀족부터 제 4 귀족까지 참가해서


검은숲은 평소와 달리 사람들로 붐볐다.

황좌가 위험할까 싶어 왕족 남자들은 모조리 죽여버리거나 유배를 보내버려 황족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은 공주들 밖에 없었다. 특히 직계피를 이어받은 황자나 공주는 알테베르가 황위에 오르면서 모두
숙청됐다.

알테베르는 황후 메리엔에게서 낳은 딸이 하나 있고 후첩들에게서 낳은 아들이 둘, 그리고 딸이 여러명


있었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살이라 아직도 몇 명의 후손을 볼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30 여명의 후첩들 중에는 황제와 딱 한번 첫날밤을 치르고 아직 얼굴 한번 보지 못한 후첩들도 많았다.

오늘 사냥대회에는 황후와 아들을 낳은 제 3 후첩 아리샤, 제 8 후첩 에블린만 참석했다. 황후는 후첩의


아들을 안고 환하게 웃고있는 황제 알테베르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하, 우리 드비스가 많이 컸구나.”

알테베르는 한 살이 된 드비스를 안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 모습에 제 8 후첩 에블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제 3 후첩 아리샤가 얼른 세 살이된 아들 로키를 알테베르앞에 데리고 왔다.

“로키, 아바마마께 인사드려야지?”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아바마마.”

로키의 뜬금없는 인사말에 알테베르가 로키를 내려다 보았다. 황후를 비롯한 제 8 후첩이 속으로 웃었다.

여러 가지 인사법을 가르쳤는데 하필 오늘 만수무강하라는 인사를 한 것이다.

평소에 아버지를 볼 기회가 많이 없었던 로키는 알테베르앞에서도 우물쭈물하며 겁을 집어 먹었다.

하지만 한 살이된 드비스는 아버지의 품에 자주 안기고 사랑도 많이 받아 알테베르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하하하, 그럴수도 있지. 그래 로키 만수무강할테니 걱정말거라.”

다행히 알테베르도 웃어넘기자 아리샤는 안도했다.

“그런데 카딜 하에르 대장군은 왜 아직도 안보이는 거냐?”

스탈드에게 묻는 알테베르의 말투에 약간 짜증이 묻어났다. 감히 황제를 기다리게 하다니.

“아, 저기 오십니다.”

스탈드는 등줄기에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끼며 저 멀리서 보이는 하얀 백마를 가리켰다.

하얀백마를 탄 카딜과 그 양쪽 옆으로 흑마 두 마리가 보였다. 한 마리는 바훌인걸 알겠는데 다른 한


마리는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알테베르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로젠시아는 카딜을 보자 두 눈이 하트로 변했다 싶을 정도로 꿀떨어지는 시선을 보냈다.

“바훌 말고 반대쪽 흑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

알테베르의 물음에 스탈드가 노안으로 안좋아진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글쎄요, 아직 누군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호위무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

“예, 폐하, 아마도 바훌 다음으로 실력있는 무사를 데려온 듯 합니다요.”


스탈드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젠시아는 카딜을 맞을 생각에 시녀에게 거울을 가져오라 명했다.

시녀가 은과 니켈을 혼합해서 만든 손거울을 들어주었다.

“아, 잘 좀 들어봐, 잘 안보이잖아.”

짜증을 확 내자 시녀가 안절부절못하며 손거울의 위치를 이리저리 바꾸었다.

“아, 진짜, 그거하나를 제대로 못해?”

로젠시아는 카딜이 거의 가까이에 오자 얼른 돌아섰다. 사냥터에 온 여자인지 디너파티에 온 여자인지


알수 없는 화려한 드레스의 자락을 잡은 로젠시아가 카딜앞에 섰다.

치마를 펼쳐보이며 살짝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한다.

“카딜 대장군님 어서 오세요.”

로젠시아의 인사에 카딜은 굳은 얼굴로 짧게 ‘네’ 라는 대답만 하고는 말에서 내려섰다. 바훌과 타냐도
말에서 내려서서 황제에게 대한 예의를 표했다.

“카딜 하에르 황제폐하를 뵈옵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사죄드리겠습니다.”

“하하하, 늦기는, 원래시간보다 빨리 도착했는데 뭘.”

“황송합니다.”

“그보다 바훌곁에 있는 저 여무사는 누구인가?”

붉은 기사단제복을 입은 타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지않았지만 그 미모는 여기 참석한 어떤 여자들에게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얀피부에 붉은 제복이 오히려 타냐의 미모를 돋보이게 해주었다.

파란 눈동자에 금발을 가진 타냐에게 입맛을 다시는 황제를 본 카딜은 얼른 타냐를 소개했다.

“아, 여긴 이번에 비무대회에서 좋은 성적으로 붉은 기사단에 입단한 타냐라고 합니다. 타냐 황제폐하께


인사드려.”

카딜의 말에 타냐가 얼른 한발 앞으로 나와 기사들이 하는식의 인사를 했다.

“오호, 비무대회에서? 언제 그런 비무대회를 열었지? 난 왜 안 불렀지?”

“아, 큰 비무대회는 아니고 추가인원모집을 위해 작은 비무대회를 열었습니다. 지난 전쟁에서 잃은


무사들이 제법되서 충원하기 위해서 했습니다. 폐하까지 참석할 정도의 비무대회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군.”

알테베르는 타냐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그만하시고 이리와서 목부터 축이세요.”

황후의 말에 모두들 뷔페식으로 차려진 테이블로 왔다. 사냥대회를 시작하기전 간단하게 다과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스탠딩파티개념이라 황제와 황족들을 위한 의자외에는 없었다. 황제를 비롯한 황족사람들만 의자에 앉고
나머지는 서서 다과를 즐겼다.

“오늘 사냥대회에서 1 등한 자에게는 울프팽과 함께 금화 1 천클랑을 지급하겠다.”

올프팽은 황제가 주는 구명특혜권이었다. 한번 정도는 죽을죄를 지었어도 사해준다는 울프팽이 걸려


있다는 생각에 귀족들은 벌써부터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금화 1 천클랑은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카딜을 한번 쳐다본 후 모두들 희망을 잃은 표정이었다. 카딜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란걸 알기


때문이다.

카딜은 울프팽을 얻기위해서라도 오늘 사냥에 1 등하자 마음 먹었다. 어쩌면 울프팽이 필요한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자, 그럼 다과도 어느정도 드신 것 같으니까 사냥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시종장 스탈드의 안내말에 모두들 사냥을 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오늘 사냥대회에서 1 등하려면


무조건 거대한 곰을 잡아야 한다.

“시간은 5 시간드립니다. 그럼 나팔소리와 함께 시작합니다!”

스탈트가 신호를 보내자 나팔부대가 힘껏 나팔을 불었다. 황제는 황금마스크를 씌운 백마에 올라탔다.
황후와 후첩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알테베르가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뒤로 호위무사 둘이 흑마를
타고 따랐다.

“카딜님, 이것 받으세요.”

로젠시아가 말에 올라탄 카딜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알고 봤더니 그녀의 손수건이었다.

“됐습니다.”

“아뇨, 받아요.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마법이 담긴 부적이 그려진 손수건이예요, 오늘 꼭 1 등하시길
빌게요.”

로젠시아가 강제로 카딜의 손목에 그녀의 손수건을 감아 주었다. 카딜은 속으로 끙 앓는 소리만 하고 말을
출발시켰다. 그의 뒤로 타냐와 바훌의 흑마가 따라붙었다. 어느정도 달린 후 카딜은 손목에 감긴
손수건을 풀어서 숲속으로 휙 던져버렸다. 나중에 찾으면 잃어버렸다고 하면 되니까 말이다.

카딜보다 조금 앞서 달리는 황제는 묘하게 타냐에게 끌리고 있었다. 일개 호위무사로 두기에는 그녀의
미모가 너무 아깝다 생각하며 뒤에서 카딜의 뒤를 따르는 타냐를 힐끔거렸다. 호위무사하나쯤이야 달라고
하면 주겠지. 속으로 생각한 황제 알테베르는 혼자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미소지었다.

“타냐,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지난 3 일동안 검술과 말타기를 쉬지않고 연습한 결과 타냐는 제법 말도 잘 타고 검술도 곧잘 한다.

“네, 카딜님.”

어제 처음으로 진검을 받은 타냐는 오늘 약간 흥분상태였다.

“여기 곰이 출몰하는 지역이야, 그러니 한시도 사방경계를 늦추어서는 안돼,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타냐가 큰 소리로 대답을 했지만 카딜은 영 마음이 놓이질 않는 표정이었다. 하긴 옆에 바훌이 지키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황제와 다른길로 접어든 카딜은 점점 더 깊은 숲으로 내달렸다. 검은숲이라 이름이 지어진 이유는 숲의
나무들이 모두 검은색이었기 때문이다. 새싹이 날때는 붉은 빛으로 피었다가 점점 커지면서 색이 짙어졌고
성체가 되면 검은색으로 변했다. 왠지 음산한 분위기라 일반인들은 거의 접근을 하지 않아 짐승들이 더
많았다.

가끔씩 마물들도 출현하는 곳이라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황제와 다른길로 접어든 카딜은 속도를 늦추었다. 오늘은 울프팽이 걸려 있는 사냥대회라 대충 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부턴 조심해야 해, 바훌, 타냐를 잘 지켜라.”

“예, 대장군.”

바훌이 염려말라는 표정으로 대답을 하자 카딜은 안심하고 사냥에 집중했다. 타냐도 말 위에서 숲속을
이리저리 살폈다. 흑곰이 나타나기 때문에 나무들과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들었다.

화살통을 등에 짊어진 카딜의 한손에는 활이 들려 있었다. 두 손을 놓고도 엄청난 속도로 달릴 수 있는


기마실력을 가진 카딜이었다. 타냐는 카딜의 뒷모습을 감상하느라 넋이 빠진 상태였다.

부스럭!

그때 뭔가 숲속에서 움직였다. 타냐가 카딜에게 알려주려했지만 카딜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타냐를 향해


검지손가락으로 제 입술에 가져다댔다. 조용히 하라는 그의 신호에 타냐는 숨소리조차 죽였다.

부스럭, 부스럭.

뭔가 검은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뭔가 움직이는 숲속을 노려보는데 검은빛깔의 야생고양이 한 마리가 오히려 카딜을
보고 놀라서 빠르게 도망쳤다.

휴우!

타냐, 카딜, 바훌, 이렇게 세 사람은 동시에 안도하는 숨을 내쉬었다.

18 화

한 시간 정도 검은숲을 헤매고 다녔지만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카딜은 타냐에게 체면이 깍이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급했다.

오늘 아침에 흑곰을 잡는 모습을 꼭 보여주겠다고 약조를 한터라 더 조바심이 나는 것이다.

“대장군님, 허기를 좀 채우시면 어떨까요?”

오늘 아침 주방팀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준 샌드위치도시락이 생각난 바훌이 제안했다.

한시간 이상이 지났는데 아무런 성과도 없어 자꾸만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카딜이 약간 불안해보였기
때문이다.

“그럴까? 타냐 배고파?”
“배가 고프기 보다는 좀 쉬었다 하면 어떨까 싶어요.”

타냐의 미간이 찡그려진 것을 본 카딜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편평한 바위를 찾아냈다. 바훌은 괜히 둘 사이에 끼었다가 카딜에게 혼날 것 같아서 망을 본다


핑계를 대고 두 사람이 앉은 바위에서 좀 멀리 떨어져서 있는 바위에 앉았다.

“타냐, 어디 아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이는 타냐에게 카딜이 물었다. 타냐는 샌드위치도시락을 열어서 펼치며 바훌을
한번 쳐다보고는 카딜의 귀에 속삭였다.

“여기 아래가 좀 아파요, 아무래도 며칠동안 말타기를 너무 심하게 해서 까진 것 같아요.”

타냐가 눈짓으로 아래를 가리키며 속삭이자 카딜이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내가 한번 봐줄까?”

“!”

타냐의 두 눈이 커다랗게 변하며 아연실색하는 모습에 카딜이 피식 웃고는 그녀의 입안에 샌드위치 조각을
넣어 주었다. 벌어진 입으로 샌드위치가 들어오자 어쩔 수 없이 씹긴했지만 카딜의 손이 자꾸만 타냐의
허리춤을 더듬거려 하마터면 목이 막힐 뻔했다.

“이럴땐 훈련복이 원망스럽군, 치마를 입었으면 금방 살펴볼 수있었을텐데 쯧.”

정말 심하게 실망하는 카딜의 표정을 본 타냐가 배시시 웃고는 그의 입에 샌드위치 조각을 넣어 주었다.

둘이 서로 먹여주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바훌은 사방을 더 경계했다. 혹시 황제의 무리라도 지나가도
볼까 싶어서다.

한시간 넘게 숲속을 헤맸던 사람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고 쉬면서 간식으로 배를 채우는 중이었다.

“자 이제 또 다시 시작해볼까?”

카딜이 일어서자 타냐도 일어섰다.

“말 탈 수 있겠어?”

카딜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견딜만 해요.”

타냐의 대답에 안쓰러웠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더 카딜이 바훌을 불렀다.

“바훌.”

“예, 대장군님.”

“넌 여기서 타냐를 지켜라, 타냐가 요며칠 말타기를 너무 심하게 해서 더 이상 말타기가 어렵다고


하는군.”

“하지만….”

카딜을 경호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바훌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전 괜찮아요 카딜님.”

타냐가 얼른 나섰지만 카딜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바훌에게 명령을 내렸다. 타냐 주변을 떠나지
말라고. 바훌은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해야만 했다.

하긴 여긴 사냥터라 카딜이 위험할 일은 없었다. 그렇게해서 타냐는 바위에 앉아서 좀 더 쉬기로했고


바훌은 그녀의 곁을 지키기로 했다. 카딜은 말에 올라 타냐와 바훌에게 말했다.

“집채만한 곰을 잡아올테니 쉬고 있어.”

카딜의 말에 바훌은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말고삐를 잡지 않고도 활을 능수능란하게 쏘는 그였기에


애초에 곰에게 당할거란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다만 늘 카딜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 카딜 혼자 멀리보내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을 뿐이었다.

일종의 습관이랄까, 뭐 그런 것이었다.

카딜의 모습이 멀어진 후 바훌이 타냐를 쳐다보았다.

“많이 아픕니까?”

“아뇨, 참을 수 있는데 카딜님이….”

타냐가 뒷말을 얼버무리자 바훌이 약간은 싫어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 좀 많이 싫어하는 눈빛이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카딜님은 아까 보셨던 황제폐하의 사촌여동생 로젠시아 공주님과 정혼을


하신사이십니다.”

“!”

타냐의 두 눈이 커지자 바훌은 좀 더 강경한 눈빛으로 말했다.

“타냐와 카딜님의 사이가 보통사이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 카딜님은 위험에 처하실겁니다.”

“위험에 처한다는게 어떤건지…..”

“황제와 적이 된다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황제폐하의 성정은 적에게 관대하지 않습니다.”

바훌의 말에 타냐는 100% 이해했다. 알테베르 황제가 얼마나 포악한지는 이미 백성들이 더 잘 알고


있으니말이다.

타냐는 고개를 푹 숙이는 것 밖에는 달리 할 것이 없었다. 그녀가 카딜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것은 남동생


토디엘 때문이었다. 카딜이 반드시 남동생 토디엘을 찾아준다고 했고 그녀는 그 대가로 그의 소유물이
되었다. 카딜이 떠나라고 말해도 떠날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그러니 바훌이 말해도 절대 카딜에게서
떠날 수 없다.

바훌이 이런 소리를 하는 이유는 딱 하나일테니 말이다.

“전 아무것도 아닙니다. 카딜님께서는 로젠시아 공주님과 결혼하시면됩니다. 그러니 저더러 카딜님을


떠나라고는 하지 말아주세요. 전 이미 카딜님의 것입니다.”

“네 남동생은 내가 찾아주마, 그러니 넌 아무걱정말고 원래 니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

갑자기 말투가 사나워진 바훌 때문에 타냐의 몸이 절로 위축되었다. 하지만 동생 토디엘을 찾겠다는


의지는 그녀의 위축되었던 몸을 꼿꼿이 세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어차피 죽음도 불사하겠다 다짐한
타냐였다.

“전 카딜님에게 부탁드렸고 그 대가로 절 소유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 그저 카딜님의 소유물입니다,


그리고 카딜님은 제게 약조하셨습니다. 반드시 제 동생 토디엘을 찾아주겠다고, 전 그분이 꼭 그렇게
해주실거라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가 있다고 해서 로젠시아공주님과의 혼인에 방해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는 타냐를 노려보던 바훌은 속으로 생각했다. 길거리에 떠돌아다니는 길고양이나
유기견같았던 것이 언제 이렇게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변했을까 하고.

바훌도 카딜보다는 못해도 감히 천민이나 평민이 시선을 맞추고 말대꾸를 할 위치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바훌은 타냐에게 무엄하다 꾸짖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단지 카딜의 여자라서라기 보다는 그녀의 눈빛에서
흐르는 오묘한 기운때문이었다.

그때 그 시장통에서 만났던 진흙을 온몸에 묻힌 천민나부랭이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귀족의


피를 이어받은 여자처럼 고고하기까지 했다.

“카딜님께서 떠나라고 해도 전 매달릴겁니다. 차라리 절 죽이십시오, 그러기전에는 전 절대 카딜님의


곁을 떠나지 않을것입니다.”

타냐의 오기가득한 눈동자를 본 바훌은 어금니를 아득 깨물고 말했다.

“네가 카딜님의 여자라는 것을 로젠시아 공주님이나 황제폐하께서 아시는 날에는 네 목숨을 거두어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카딜님까지 위험해진단 말이다. 내 말을 못 알아듣는거냐?”

“다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전 아무데도 가지 않을 것입니다.”

스르릉!

갑자기 바훌이 칼을 뽑아 들었다. 타냐는 시퍼렇게 빛이나는 바훌의 검날을 보면서도 위축되지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죽이십시오, 그 방법외에는 절 내칠 수 없을겁니다.”

타냐가 목을 쭉 뻗으며 바훌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타냐의 온몸에서 하얀 빛이 스멀스멀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흠칫 놀란 바훌은 저도모르게 칼을 떨어뜨렸다.

챙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 아래로 칼이 떨어졌다. 그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에 정신을 차린 바훌이 얼른


바위 아래로 뛰어내려 검을 다시 집어 들었다.

내가 잘못봤나?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을 집중한 바훌이 다시 타냐를 올려다보았다. 바위 위에 우뚝 선 타냐는 마치


여기 검은숲의 주인처럼 하얀빛을 뿜어내며 바훌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잘못본게 아니었어. 저 하얀빛은 뭐지?

“타….타냐, 너…”

바훌이 말을 더듬으며 손가락질을 하자 타냐는 그제야 온몸의 힘을 풀었다. 순간 그녀를 감쌌던 오로라
같은 하얀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가 뭘요?”

타냐의 물음에 바훌은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어버버 거렸다.

그때 저 멀리서 짧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카딜님?”

바훌은 카딜의 신음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말에 올랐다. 타냐 역시 카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 싶어 아랫도리가 쓰라림에도 불구하고 말에 올라 바훌의 뒤를 따랐다.

“대장군님!”

바훌은 말 아래로 굴러 떨어진 카딜을 보고 급하게 말에서 뛰어내려 카딜에게 다가갔다.

카딜은 사냥용 화살을 맞고 쓰러져있었다.

“카딜님!”

곧바로 도착한 타냐도 말에서 뛰어 내렸다. 바훌이 심장근처에 화살을 맞은 카딜의 곁에서 어찌해야할바를
몰라 했다.

“누가 좀 도와주십시오!”

바훌이 카딜의 몸에 꽂힌 화살을 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자 저쪽에서 황제 일행이 달려왔다.

“세상에, 곰이 아니었어?”

알테베르의 말에 바훌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분명 일부러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 듯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겁니까 황제폐하!”

바훌은 황제라는 것도 잊을 정도로 화가났다. 설마 곰인줄 알았다고 하는건 아니겠지? 제발 그 소리만은


하지마라.

속으로 뇌까리며 이를 갈고 있는 바훌.

그러나 애석하게도 황제는 바훌이 예상했던대로 말했다.

“시커먼 물체가 숲속에서 움직이길래 흑곰인줄 알았지.”

백마를 타고 있는데 흑곰인줄 알았다니,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었지만 바훌은 감히 따지지 못했다.

“일단 화살을 뽑고 황궁의에게 보여야겠다. 어서 서둘러라!”

갑자기 카딜을 엄청 위하는 듯 시종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알테베르가 역겨웠지만 바훌은 일단 카딜을 먼저
살리기로 했다.

바훌과 황제의 호위무사가 힘을 합쳐 카딜을 말에 태웠다. 여기서 막사가 있는 곳까지는 거리가


제법있었다. 이미 혼수상태에 빠진 카딜이었다.

황제는 카딜의 곁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타냐를 한번 쳐다보고는 말에 올랐다.


황제가 일부러 카딜에게 화살을 쏜 이유는 또 다시 그가 하루아침에 멀쩡해지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지난번에는 사고로 인한 것이었고 그가 얼마나 다쳤는지 제 두 눈으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카딜이 하는


거짓말에도 그저 고개만 끄덕였어야 했다.

그래서 오늘은 마음먹고 실험을 해보기 위해 일부러 곰인줄 알았다며 화살을 쏜 것이다.

이렇게까지 중상을 입혔는데 내일 아침 멀쩡해지면 분명 대제사장 비숍이 말한 것처럼 샤마란족이 돌아온


것일터였다. 그 샤마란 족이 누구인지 밝히는건 시간 문제일테니까.

죽으면 뭐 어쩔 수 없고.

황제가 쓴 입맛을 다시며 입안으로 웅얼거렸다.

어차피 제 편이 안될바에야 죽이는 편이 더 나으니까 말이다. 황제는 그래서 사냥대회에 굳이 휴가중인


카딜을 오라고 했던 것이다.

19 화

잠시 후.

막사에 도착한 카딜은 황궁의에게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치료마법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황궁의는


카딜을 보더니 자신없어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시도는 해보겠지만 회복되실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요?”

타냐가 저도 모르게 나서자 바훌이 얼른 그녀의 앞을 가로막아서며 타냐를 뒤로 숨겼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너무 심하게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심장을 비켜가긴 했지만 폐를 다치신 것 같습니다. 피도 많이 흘렸고
…..제 소견으로는 오늘밤이 고비일 것 같습니다.”

황궁의의 말에 황제가 화를 내며 명령을 내렸다.

“카딜 하에르 대장군을 살려내지 못하면 넌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누가봐도 약간은 오버하는 것으로 보였다.

“폐하, 저를 죽이셔도 대장군님은 살릴 수 없으실 것입니다.”

황궁의의 대담한 발언에 타냐의 심장이 발아래로 떨어졌다.

“정말 그렇게 심각한 것이더냐?”

황제의 물음에 궁의는 죄송하다는 대답만 했다. 제 목을 친다고 했는데도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카딜의
상처가 위중한걸 알 수 있었다.

“일단 지혈을 하고 치료마법을 걸어 놓았으니까 잠시동안은 버티실겁니다. 그 후에는 두고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폐하. 소신의 실력이 이것밖에 되지않아 송구할 따름입니다.”

황궁의가 머리를 조아리자 황제는 모두에게 알렸다.


“오늘 사냥대회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카딜 하에르 대장군이 위독하니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도록!”

황제의 명에 사냥대회에서 울프팽을 얻으려 했던 사람들은 살짝 실망한 표정으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카딜은 카딜이고 사냥대회는 그냥 해야 하는게 아니냐며 수군대는 귀족도 있었다.

“대장군은 내 마차에 태워 저택까지 모셔다드리도록 하라.”

황제의 명에 마차꾼들이 인사를 하고 카딜을 황제의 마차에 태웠다.

“저도 같이 타게 해주십시오.”

타냐가 바훌에게 애원을 하자 바훌은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타냐가 옆에 있는 것이 카딜이 먼길 떠나는 길에 덜 외롭지 않을까 해서다.

바훌의 허락이 떨어지자 타냐도 황제의 마차에 올라탔다. 말에게 채찍질하는 소리가 들리고 마차는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 탄 타냐는 카딜의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두 눈을 감은 그녀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죽으면 안돼요, 내 동생 찾아주기로 약속했잖아요. 절대 죽으면 안돼요, 내가 당신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거야.’

그 순간 타냐의 손에서 하얀 빛이 생성되었다. 카딜의 꺼져가던 생명의 불길이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 손에서 나오는 하얀빛을 본 타냐는 너무 놀라서 카딜의 상처에서 손을 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딜은 의식을 차리며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으음, 으으, 타냐….”

“카딜님? 정신이 드세요?”

그 짧은 시간에 발현된 치유력으로 카딜은 눈을 떴다. 화살이 폐에 박혀 생겨났던 상처가 아물었던 것이다.
폐에 생긴 상처가 아물어서인지 카딜은 숨도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카딜님…흐흑, 죽지마세요, 당신이 죽으면 내동생 토디엘은 누가 찾아줘요 흐흑.”

타냐는 남동생을 찾아줘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카딜이 정신을 차리게 도와주었다.

카딜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손을 뻗어 타냐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아…울지마….나 안 죽어.”

“하지만, 흑, 황궁의가 오늘밤을 못 넘긴다고….”

“지금은 아냐 타냐.”

“지금은 아니라뇨?”

타냐가 놀라서 울음을 멈추고 의아한 눈으로 카딜을 쳐다보았다.

“타냐, 내 말 잘들어.”

카딜의 말에 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전 혹시 하얀빛 보지 않았어?”

“어, 어떻게 알았어요? 방금전 제가 카딜님 상처에 손을 대고 제발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제


손에서 하얀 빛이 나왔어요, 그래서 너무 놀라서 손을 뗐더니 사라졌어요.”

“그래, 으으, 맞아 그 하얀빛이…으으…”

카딜은 상처가 난 가슴쪽에 통증으로 신음을 참아가며 천천히 말했다.

“그 빛이 지난번에도 날 살렸어, 내가 마차에서 굴렀을 때 말이야.”

“!”

타냐는 아직도 카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제 두 손을 이리저리 앞뒤로 돌려가며


쳐다보았다.

“말도 안돼….내가 어떻게 그런….능력이….”

타냐는 제 두손을 들여다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카딜은 분명 경험해서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특별한 치유능력이 있다는 것을.

“타냐, 내 말을 믿어, 그리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봐.”

“어, 어떻게요?”

타냐는 겁에 질린 눈빛으로 물었다.

“아까처럼 나한테 해봐, 내 상처에 손을 대고 내가 낫게 해달라고 빌어봐, 그럼 하얀빛이 나올거야. 그때


놀라지 말고 계속해.”

카딜의 말에 타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 토디엘을 찾아줄 사람은 카딜밖에 없다. 이 남자가 죽으면
저도 살 이유가 없다.

타냐는 눈물을 닦고 카딜이 시키는대로 했다. 카딜의 말이 믿기지가 않았지만 해보고 싶었다. 그의
말대로 제발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그런데 타냐가 두 눈을 감고 기도를 하려는 순간 그녀의 안에서 누가 말을 걸었다.

[안돼, 하지마.]

“!”

깜짝 놀란 타냐가 두 손을 거두어 들였다.

“왜그래 타냐?”

“아, 그게….누가 하지말라고.”

“하지말라고? 누가?”

“여자 목소리였는데….”

타냐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마차 안에는 카딜과 타냐밖에 없었다. 달리는 마차 밖에서 누가
말을 걸리도 없었다.
“그게 무슨소리야 타냐, 누가 말을 걸었다고?”

“그게….방금 내 귓가에 들렸어요, 하지말라고, 아마 잘못 들은 모양이예요, 다시 할게요.”

타냐가 다시 두 손을 카딜의 상처에 대고 눈을 감았다. 그때 또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치유력을 쓰면 누군가 네 힘을 눈치챌거야, 네 능력을 들키는 날에는 네 목숨이 위험해져, 아까


힘으로도 살아났으니까 그냥둬.]

타냐는 아까 들렸던 목소리가 잘못들었던 것이 아니란걸 깨달았다. 타냐는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카딜이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았다.

“카딜님, 아까 그걸로도 살아나셨다고 이제 그만하라네요.”

“누가?”

“제가요.”

“네가?”

“네, 제가요.”

“그게 무슨….”

카딜이 두 눈을 깜빡이며 의아한 눈빛을 하자 타냐가 말했다.

“지금 힘을 쓰면 누군가 알아차린다고, 그럼 내 목숨이 위태롭다고 하던데…”

“!”

타냐의 말에 카딜의 두 눈이 커질대로 커졌다. 타냐의 말은 절대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타냐, 혹시 말을 걸수도 있어?”

카딜은 지난번 타냐의 꿈을 떠올렸다. 그녀와 똑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했고 말도 걸었다고 했었다. 만약


그 또다른 타냐가 치유의 정령이라면 지금 타냐의 말이 이해가 된다.

“한번 해볼게요.”

타냐는 두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다.

“정말 카딜님은 살아나는 거야?”

[그래,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완쾌될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힘을 쓰지마.]

타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냐가 두 눈을 감은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카딜이 말을 걸었다.

“타냐, 대화했어?”

“네,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완쾌될거라고 더 이상 힘을 쓰지 말래요, 힘을 쓰면 제 목숨이 위험해진다고


하면서요.”

타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딜은 마치가 공격을 받은 다음날 자신의 상처가 완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달려왔던 황제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 했었다. 혹시 황제가 타냐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자라면? 오늘 사고도 사고가 아닐지도.

“타냐.”

“네, 카딜님.”

“마음속에서 말하는 소리대로 따라, 그게 맞는 것 같아.”

“정말 그런걸까요? 혹시 내가 미쳤다거나 한건 아닐까요? 그리고 제가 어떻게 그런 힘이 있는지 아직


믿어지지가 않아요.”

타냐의 말에 카딜이 말했다.

“너 치유의 힘 가지고 있어, 내가 봤어, 그리고 경험했어, 그러니까 네 자신을 믿고 네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말을 따라 타냐, 네 자신을 못 믿겠으면 날 믿어 타냐, 넌 분명 특별한 사람이야.”

카딜의 말에 타냐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그녀도 분명 제 두 손에서 하얀빛이 나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헛것을 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카딜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황제의 마차는 카딜의 저택에 도착했다.

“타냐, 나 아직 혼수상태야, 알았지? 내가 벌써 나아간다는 것을 황제가 알면 안돼.”

“왜요?”

“내 생각에 네 목숨을 노리는 자는 황제인 것 같아.”

카딜의 말에 타냐는 겁이 덜컥 났지만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카딜은 아까처럼 혼수상태인척 두 눈을 감았다. 마차 문이 열리고 소식을 들은 시종들이 달려와 카딜을


이동식 침대에 옮겼다. 바훌은 치유마법사 아밀리에를 불렀다. 이미 황궁의가 손을 썼지만 그래도
지난번처럼 카딜을 낫게 해주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때도 거의 죽어가던 카딜이 하루만에 완쾌되었으니 말이다.

“조심, 조심!”

바훌이 소리치자 카딜을 옮기던 시종들의 발걸음이 조심스럽게 바뀌었다.

***

“이미 궁의께서 손을 쓰시어 제가 할 수 있는건 없습니다만 그래도 해보겠습니다.”

아밀리에는 두 눈을 감고 카딜의 몸 위에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녀의 힘이


먹혀들어가기 시작했다.

타냐가 이미 손을 써놓아 깊은 상처는 나은터라 그렇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아밀리에는 자신이 황궁의보다


실력이 좋은가 하는 착각을 하기 시작했다.

“상처가 많이 아물었습니다 바훌님.”


“그래?”

“예, 한 3 일 정도면 일어나실 것 같습니다.”

아밀리에는 제 스스로도 자신이 대견한지 어깨에 힘을 주고는 말했다.

지난번에도 하루만에 완쾌된 카딜이 자신의 치유마법때문이라고 이미 자화자찬을 하고 돌아다니는


그녀였다.

아밀리에의 말에 바훌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황궁의는 오늘밤을 넘기기 힘들거라며 소용없다고 했었는데 저택으로 오는 동안 치유마법이 효과를


보았나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이 카딜의 무쇠덩어리같은 강한 체력과 불굴의 정신력이 만들어낸 기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황제폐하 드시옵니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시종의 목소리에 카딜은 메소드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의식이 없는
것처럼 온몸에 힘도 뺐다.

내실 문이 열리고 황제 알테베르와 로젠시아가 들어섰다. 로젠시아는 카딜이 죽기라도 한 것처럼 울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다가왔고 황제는 카딜에게 치료마법을 펼치고 있는 아밀리에를 눈여겨 쳐다보았다.

20 화

황제와 로젠시아를 본 아밀리에가 치료를 멈추려하자 황제가 손을 들어 올리며 그녀에게 계속하라고


눈짓했다. 아밀리에는 황송해하는 표정으로 목례를 하고는 다시 치유마법을 시전했다.

알테베르가 바훌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저 치유마법을 행하는 여자가 혹시 전에 말한 그 아밀리에더냐?”

“그렇습니다 폐하, 아밀리에 말로는 한 3 일이면 완쾌하실 것 같다고 합니다.”

“뭐?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알테베르는 아까 황궁의가 말했던 것을 떠올리며 동공을 확장했다. 아클랑, 아니 북대제륙을 통털어


그래도 꽤 실력이 있다는 황궁의가 오늘밤을 못넘길지 모른다고 했는데 3 일이면 된다니? 설마 저 여자가
비숍이 말한 그 여자인가?

알테베르는 실눈을 뜨고는 아밀리에를 지켜보았다. 아멜리에는 황제의 시선을 느끼고 더 열심히 하는 듯한
과장된 포즈를 취했다.

마치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듯 미간에 주름을 몇 개나 만들고 끙끙 앓는 소리까지 냈다.

그때 타냐의 마음속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저 여자 가까이에 다가가.]

“뭐라고?”

저도 모르게 말을 해버린 타냐는 일제히 제게 쏟아지는 시선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어서 저 여자 가까이에 가라고.]

또 제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타냐는 주춤대다가 아밀리에의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보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혹시몰라 생수와 손수건을 챙겨서 쟁반에 들고 있던 시녀에게 다가가 손수건을 들었다.

타냐가 아밀리에에게 다가가더니 그녀의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그때 아밀리에의 몸에서 하얀 빛이 생겨나면서 그 빛이 카딜의 몸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순간 본인인 아밀리에도 놀라서 멈칫했고 황제의 눈동자는 번쩍 하고 빛이났다. 주변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시종들과 시녀들, 그리고 로젠시아까지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타냐, 방해하지마.”

바훌의 말에 타냐가 얼른 죄송하다 말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하얀빛이 이내 사라졌다.

-샤마란족이 치유를 행할때는 하얀빛이 생성됩니다. 그 빛의 강함에 따라 치유의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 비숍이 했던 말을 떠올린 황제 알테베르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아밀리에를 아래 위로 훑어


보았다.

타냐는 그제야 제 안에서 왜 그런 소리를 냈는지 알아차렸다. 방금 그 일로 타냐는 제 안의 자신이 어떤


능력을 얼마나 가졌는지 궁금해졌다. 아니 자신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지만 분명 자신은 뭔지 모를 거대한 힘을 가진 것 같았다.

“으으음…”

“어머! 깨어나나봐요!”

긴장한 얼굴로 카딜의 상태를 바라보고 있던 로젠시아가 제일 먼저 카딜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으으, 하아…”

카딜은 아까 보다 훨씬 좋아진 자신의 상태가 이상했다. 조금전 어떤 강한 기운이 제 몸안으로 들어왔다.


이건 분명 타냐의 능력인데 어떻게 아밀리에에게서 나왔는지 궁금했다. 두 눈을 감고 의식이 없는척
메소드 연기를 펼치느라 타냐가 아밀리에의 신체와 접촉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정신이 들어요 카딜님?”

로젠시아가 의녀 아밀리에를 밀치고 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제길.

속으로 욕을 한 카딜이 눈을 떴다. 제일먼저 타냐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찾았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광경을 보고 있는 타냐와 눈이 마주친 카딜은 의아해 했다.

조금전 바훌이 타냐에게 방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타냐가 뭘 했나?

카딜이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로젠시아가 얼른 그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아직은 움직이면 안돼요 카딜님.”


로젠시아의 말에 카딜은 의도적으로 아밀리에를 향해 말했다.

“아밀리에, 이번에도 그대 도움을 받는군, 고마워.”

“아, 아닙니다 카딜대장군님, 저야말로 오히려 영광입니다. 대장군님께서 워낙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강하셔서 제 치유마법이 효과를 더 많이 발휘한 것 같습니다.”

아밀리에는 황제의 표정을 곁눈질로 살피며 자신의 능력이 이정도라는 듯 말했다.

“아니야, 지난번에도 느꼈는데 그대는 치유마법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것 같군, 그쪽으로 대성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흠흠, 그래서 하는 말인데.”

갑자기 황제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왔다. 아밀리에는 뭔가 큰 상을 내릴 것 같은 그의 표정에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황제에 대한 예를 표하며 머리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폐하.”

카딜은 이미 황제의 의중을 읽고 그를 재촉했다.

“아밀리에를 궁으로 데려가려 한다.”

“예?”

아밀리에는 옳다구나 싶어 춤이라도 추고 싶은 감정을 겨우 절제하며 놀라는 척했다.

“폐하, 아직은 안됩니다, 카딜님의 치료가 끝나면 데리고 가시죠.”

로젠시아는 그저 카딜 걱정뿐이었다. 알테베르는 철없는 로젠시아를 흘겨보며 혀를 차고는 다시 말했다.

“보다시피 카딜은 무사하다, 그렇지 않은가 아멜리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카딜 대장군님은 내일이면 멀쩡해질 것입니다.”

이미 자신이 죽어가는 카딜을 두 번이나 살렸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아밀리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말했다.

“정말 대단해, 우리 아클란 대제국에 이런 실력을 가진 치유마법사가 있었다니, 놀랍구나, 당장 나와


함께 궁으로 들어가자, 내 너를 황궁의의 자리에 임명할 것이다.”

“황궁의라구요?”

아밀리에는 꿈에도 그리던 직책을 받게 되었다는 기쁨에 저도모르게 황제에게 반문을 했다가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아직 카딜님을 더 치료해야 할 것 같은데….”

로젠시아는 여전히 카딜만 걱정하며 입안으로 웅얼거렸다. 하지만 카딜은 어서 황제가 아밀리에를 데리고
가기를 원했다.

그래야 타냐가 안전할테니까.

“이제 카딜도 무사한 것을 보았으니 난 궁으로 돌아가야 겠다.”


황제의 말에 로젠시아는 아쉬운 표정으로 잡고 있던 카딜의 손을 놓았다.

“카딜대장군, 몸조리 잘해.”

“예, 그럼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보다시피 아직 몸이 성치않아서.”

“그럼, 그럼, 인사는 여기서 해도 충분해, 뭐하느냐 아밀리에, 얼른 따라 나서지 않고.”

“예? 아, 예 폐하.”

아밀리에는 좋아서 어쩔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겨우 감추고 알테베르의 뒤를 따랐다.

카딜의 저택에서 어느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황제가 스탈드에게 명을 내렸다.

“아밀리에를 죽여라.”

“예? 아, 예 폐하.”

황제의 뜻을 알지 못하는 스탈드는 호위무사중 하나에게 명을 내렸다. 황제의 마차 안에서 이제


부귀영화를 누리겠구나 좋아하던 아밀리에는 갑자기 창을 뚫고 들어온 검에 심장을 찔렸다.

누가 왜 자신을 죽이는줄도 알지 못한채 아밀리에는 숨을 거두었다. 잠시 후, 산속 깊은 곳에 아밀리에의


시체가 던져졌다.

어느새 피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들이 튀어나와 아밀리에의 몸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황제는 아밀리에가 죽었다는 보고를 듣고 안도했다.

대제사장 비숍이 어젯밤 그를 찾아왔었다.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샤마란족이 살아 있으면 황제의
목숨이 위태롭다며 보이는대로 죽여야한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었으나 대제사장 비숍은 그저 금서에 그렇게 적혀있다고만 했다.

한편 카딜은 당분간은 타냐가 안전하다는 것에 안도했다. 황제가 타냐를 죽이려 한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타냐의 안에 있는 또 다른 타냐가 해준 말에 카딜은 확신했다.

만약 타냐의 정체가 밝혀지는 날에는 황제가 그녀를 죽일 것이라는 것을.

아밀리에에게는 미안하지만 카딜에게는 타냐가 더 소중했다.

“타냐는 어디갔지?”

잠시 숙면을 취하고 난 후 깨어난 카딜의 몸 상태는 거의 완쾌한것과 같았다.

옆에서 저를 지키고 섰던 바훌에게 물었더니 그가 대답했다.

“아, 옷을 좀 갈아 입는다고 나갔습니다. 카딜님의 피가 너무 묻어서요.”

“그렇군, 나도 옷 좀 갈아입어야 겠어, 타냐 좀 불러와.”

“카딜님, 아직 움직이시면 안됩니다.”


카딜이 침상에서 내려서려 하자 바훌이 얼른 말렸다.

“괜찮아, 아밀리에의 실력이 꽤 좋아서인지 상처가 벌써 아물었어.”

“정말이십니까?”

“그렇다니까, 상처보여줄까?”

카딜이 상의를 펼쳤다. 바훌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에게 다가와 상처를 살폈다. 정말 거짓말처럼
상처가 아문 것을 본 바훌의 입이 벌어졌다. 아밀리에를 황제가 데려갈만하다 생각한 카딜은 타냐를 불러
오겠다고 했다.

“아니다, 그냥 내가 직접 가는게 좋겠어, 바훌 넌 나가도 좋다.”

바훌은 카딜이 타냐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카딜은 내실을
나와 타냐의 방으로 왔다.

“타냐, 옷 다 갈아 입었어?”

“………..”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이상하다 생각한 카딜이 문을 열었다.

“타냐!”

옷을 갈아 입기위해 방으로 들어왔던 타냐는 알몸으로 기절해 있었다. 옷을 갈아 입는 도중에 기절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타냐, 타냐!”

카딜이 의식이 없어 보이는 타냐의 뺨을 살살 두들기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으음…하아…하아…”

겨우 정신을 차린 타냐는 카딜을 보자 갑자기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카딜은 그녀가 깨어났지만 어디가 안
좋은가 싶어서 제 입술을 마구 빨아대는 그녀를 살며시 밀어내고 물었다.

“의사를 불러올까? 나 때문에 너무 걱정해서 진이 다 빠진거야?”

오늘 하루 말을 타고 한시간 넘게 숲을 헤맸다는 생각에 타냐가 힘들어한다 생각한 카딜이었다.

그러나 타냐는 몽롱해진 눈빛과 붉어진 두 뺨으로 색색대다가 다시 카딜의 목을 끌어 안으며 입을


맞추어왔다.

카딜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뭐랄까, 데자뷰랄까? 두 번을 타냐가 먼저 덮쳐서 성관계를 했고 그 이후 타냐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했다.

혹시 지금도 그런 경우라면?

“으읍, 타냐.”

“하아, 안아줘요, 제발.”


타냐가 애원을 하자 카딜도 순식간에 욕정이 치솟았다.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타냐가 달아오르면 카딜도 여지없이 달아 올랐기 때문이다. 카딜은 이미 알몸인 타냐를 침대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그의 옷가지도 전부 벗어 던졌다.

언제 화살을 맞았느냐는 듯 카딜의 몸은 이미 회복된 상태였다.

아까 아밀리에를 통해 하얀빛을 쐰 것이 그의 상처를 완전히 아물게 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알몸으로 변한 카딜은 두 다리를 활짝 벌리고 저를 기다리는 타냐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러자 타냐가 손을 뻗어 카딜의 성기를 쥐고는 제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느새 흥건하게 젖은 그녀의
안은 카딜의 성기를 강한 흡입력으로 빨아 들였다.

21 화

제 안에 카딜의 성기가 가득차자 타냐가 그의 목을 끌어 당겼다. 그때 카딜은 깨달았다. 이 여자는 또


다른 타냐라는 것을. 분명 타냐는 또 잠들것이고 깨어나서는 무슨 일이 있었냐며 묻겠지? 젠장.

그렇다할지라도 카딜은 개의치 않았다. 그 여자 또한 타냐니까.

아직은 이 두 개의 인격체가 어떻게 하나의 몸에 자리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치유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건 틀림이 없다.

“하아, 카딜…더 깊이…”

타냐는 카딜의 목을 끌어 안고 상체를 일으켜 그에게 찰싹 들러 붙었다.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이 카딜의
돌덩이 같은 가슴근육과 맞닿을 정도로.

“하아, 미치겠네.”

카딜은 타냐의 입술을 삼키며 엉덩이를 더 강하게 튕겼다. 뒤로 쑥 빠져나갔던 그의 엉덩이가 다시 앞으로
튕겨지면 그의 검붉은 성기는 귀두만 걸친채로 빠져나왔다가 성기뿌리까지 밀고 들어왔다.

자궁을 밀어올리는 듯 그의 성기가 깊이 파고들자 타냐는 오히려 기꺼워하며 카딜에게 더욱 더 매달렸다.

젖은 살이 비벼지는 야하고 쫀득한 소리가 타냐의 방에 울려퍼졌다. 카딜의 혀가 타냐의 혀와 엉켜들었다.


혀뿌리를 뽑아버릴 듯 강하게 빨아댔지만 타냐는 카딜에게 더 매달렸다.

더해달라는 듯 매달리는 그녀 때문에 카딜의 성욕은 끊임없이 솟아났다. 황홀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아, 타냐…”

카딜은 타냐의 이름을 부르며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그녀와 키스를 갈무리한 그는 제게 매달리는
타냐를 밀어내고 그녀의 두 손목을 휘어잡았다. 타냐는 흐릿한 시선으로 카딜을 올려다보며 붉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야하든지.

찔걱,찔걱,

탁탁탁탁,

애액에 절은 카딜의 성기는 쉴새없이 타냐의 안을 들락거렸다. 도톰하게 부푼 타냐의 음순이 카딜의
성기를 한껏 조였다. 깊게 빨려 들어간 카딜의 선단이 타냐의 극점을 자극하자 타냐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타냐의 두 다리는 어느새 카딜의 어깨위에 올려졌다. 그러자 엉덩이마저 허공에 뜬 타냐의 몸이 카딜이
허리를 흔들때마다 속절없이 따라 흔들렸다.

탁탁 탁탁.

타냐의 뽀얀 엉덩이살은 카딜의 말근육 같은 허벅지 근육에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지금은 아무런 대화가
필요 없었다. 그저 초점이 흐려진 몽롱한 눈동자를 주고 받으며 두 사람은 같은 목적을 향해 내달렸다.

어서 먼저 욕망의 고지에 도달하려는 듯 두 사람은 싸움아닌 싸움을 벌인다.

타냐의 얼굴 양쪽 옆에 팔을 지탱한 카딜은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올 것처럼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노려본다.

타냐의 푸른 눈동자에 카딜의 눈부처가 섰다. 하지만 타냐는 카딜을 본다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절정을
향한 애욕으로 가득찼을뿐 초점이라고는 없었다.

점점 더 열이 오르고 타냐의 좁은 방안은 두 사람이 뿜어내는 열기로 더워지기 시작했다. 야한 살내음과


비릿한 애액 냄새 또한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절정이 가까워졌다 싶을 때 카딜이 타냐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노크도 없이 밀려든 그의 부드럽고


따뜻한 혀를 타냐가 감쳐물었다. 누가 누구의 혀를 빨아 당기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두 사람은 동시에
절정에 도달했다.

***

“또 제가 덮쳤나요?”

“그래.”

타냐는 이제 이런 상황이 익숙해져 카딜의 표정만 보고 먼저 물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완전한 알몸으로 역시 완전한 알몸인 카딜의 품에 안겨 있었으니 말이다.

타냐는 이제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제 안의 또 다른 타냐가 말을 걸면 그때 물어볼 생각이다.

네가 한 짓이냐고. 그랬다면 왜 매번 그러느냐고.

“카딜님.”

“응, 말해.”

“상처는 다 나았어요?”

“응, 보다시피 다 나았어.”

카딜의 말에 타냐는 이미 화살에 찔렸던 그의 가슴 근처를 손끝으로 만져보고 있었다.

“내가 누굴까요?”

“……….”

타냐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이전에는 그저 천민부모님에게서 난 천민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자신이 자신이 알던 그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카딜과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부터 뭔가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다.

“글쎄,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노력하면 언젠가는 알아내지 않을까?
한가지 확실한건 하나 있어.”

“그게 뭔데요?”

타냐가 고개를 위쪽으로 들어 카딜을 올려다 보았다. 카딜은 그런 타냐를 내려다 보며 대답해주었다.

“타냐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는거, 그거 하난 확실해.”

“정말 제가 중요한 사람일까요? 그냥 한낱 천민나부랭이가 아니라?”

“아냐, 절대 한낱 천민나부랭이가 아냐.”

카딜이 두 눈에 힘을 주고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자 타냐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그냥 천한


천민나부랭이는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카딜은 타냐와 눈을 맞추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 미소에 타냐는 또 힘을 얻는다.

타냐도 카딜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때 밖에서 실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딜님, 브릴트라는 자가 대장군님을 뵙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시키신 일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고


하는데 어찌할까요?”

실리아의 말에 카딜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바람에 타냐까지 일어나 앉았다.

“알았다 내실로 들라하라.”

“예, 대장군님.”

“타냐, 타냐도 옷 입어, 토디엘에 관한 소식을 가져온 모양이다.”

“정말요?”

“그래.”

카딜의 말에 타냐의 얼굴은 이미 활짝핀 함박꽃처럼 밝아졌다.

잠시 후.

카딜은 소파에 앉았고 타냐는 그의 옆에 섰다. 타냐는 이미 심하게 벌렁대는 심장을 다스리느라 애를 쓰는
중이었다.

“그래, 보고하라.”

“예, 대장군.”

브릴트는 제 나름대로 뭔가 정리를 해왔는지 허리춤에서 양피지를 꺼냈다.

“폴란소지주가 팔아넘긴 천민들 중에 토디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열 네살의 아이를 찾아서 사방으로 쫓아


다닌 결과, 토디엘은 현재 소규모 전쟁이 자주 발발하는 북대륙의 남쪽 끝에 있는 죽음의 계곡 쪽으로
향하는 중이랍니다. 그곳에서 많은 전쟁노예들을 비싼값에 사들인다는 소문이 퍼져 대부분의 노예상들은
그쪽으로 향하고 있답니다. 전쟁도 전쟁이지만 마물들이 출현하여 현상금을 노리는 자들까지 몰려
노예들이 많이 필요로 하다고합니다. 노예들이 하루에도 수십명씩 죽어나가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아…”

브릴트가 보고를 다 올리기도 전에 타냐가 짧은 한탄과 함께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카딜이 깜짝 놀라서 타냐를 일으켜 소파에 앉혔다.

“타냐, 괜찮아?”

“하아….토디엘….흑…”

타냐가 울기 시작하자 카딜이 실리아에게 지시했다.

“실리아, 타냐를 방으로 모셔라.”

“예, 대장군님.”

“아니예요, 이제 괜찮아졌어요, 저도 여기 있겠습니다.”

타냐가 싫다며 고집을 피우자 카딜이 실리아에게 물러가라 눈짓으로 말했다. 실리아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계속하라.”

“예, 대장군, 그래서 북대륙의 남쪽 끝에 있는 죽음의 계곡 쪽으로 쫓으시면 토디엘이란 아이를 찾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속 쫓을지 말지도 여쭤봐야 하고 중간 보고도 드려야 해서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말이라고 하느냐, 계속 쫓아서 토디엘을 데리고 있는 노예상을 찾아라.”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인원도 더 필요하고 그에 따른 자금도 더 있어야 합니다만.”

브릴트의 말에 카딜은 내실 한쪽 옆에 있던 키가 높은 서랍장을 열어 은전을 한주머니를 꺼냈다.

“이거면 십여명이 한달은 버틸수 있을 거다, 당장 진행하라.”

“감사합니다 대장군님.”

브릴트는 제 앞에 던져진 은전주머니를 집어 들고는 황급히 인사를 하고 나갔다.

“타냐, 들었지?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토디엘을 찾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살아있기는 할까요?”

“당연하지, 죽었다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왔겠지, 북대륙의 남쪽에 있는 죽음의 계곡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리를 너도 들었잖아.”

카딜의 말에 대답없이 시선을 내리고 있던 타냐가 갑자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카딜님, 저도 아까 그 사람 팀에 합류하게 해주세요.”

“뭐?”

“저도 그 사람들과 함께 그쪽으로 떠나겠습니다, 허락해주세요 네?”


타냐가 얼른 무릎을 꿇어 앉으며 두 손까지 합장했다. 제게 애원하며 눈물을 흘리는 타냐를 본 카딜은
마뜩찮은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이제 타냐는 그냥 천민이 아니었다. 황제가 노리는 샤마란족의 한 사람이 틀림이 없다. 그런 그녀를
위험하게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럼 나도 같이 가겠다.”

“!”

타냐는 카딜의 뜻밖의 말에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타냐, 아까 내가 말했잖아, 넌 특별한 사람이라고, 그런 널 그 위험한 곳에 혼자 보낼 수는 없어,


더군다나 산도적같은 놈들만 득실대는 그 무리들과는 절대 함께 보낼 수 없어.”

“하지만 카딜님은 여기서 하실 일이 많으실텐데….”

“아직 휴가 중이야, 휴가가 끝나려면 3 주나 남았다. 그 안에 우리 함께 토디엘을 찾아서 돌아오자.”

카딜의 말에 타냐는 감격한 눈빛으로 그의 품에 파고 들었다.

“감사합니다 카딜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다, 나야 말로 내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주어 너에게 감사하고 있어.”

카딜은 제 품에 쏙 안긴 타냐를 꽉 끌어 안고 다짐했다. 3 주내에 반드시 토디엘을 찾아 오겠다고.

황제도 이제 아밀리에가 샤마란족인줄 알고 데려갔으니 안심하고 있을 것이다.

***

다음날 아침.

카딜은 바훌과 다른 두 명의 호위무사와 함께 길떠날 차비를 했다. 타냐는 이번에도 호위무사차림으로


나섰다. 사냥대회에 나갈때와 다른점이라면 그녀를 남장으로 변장했다는 것이다.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힘들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남자처럼 꾸몄다.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래도 여자라기 보다는 미소년으로 보였다.

바훌은 타냐가 뭣이 그리 중요한지 그녀의 남동생을 찾아 이 험악한 여정을 떠나려는 카딜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제 목숨처럼 모시는 주군이라 어쩔 수 없이 따랐다.

22 화

카딜과 타냐 일행이 30 분쯤 행군했을때였다. 저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카딜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카딜은 손을 들어 행군을 멈추게 했다.

말을 타고 카딜 일행에게 달려오던 사람은 다름아닌 카딜의 시종이었다.

“대장군님!”

“무슨 일이냐?”
시종은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카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제폐하께서 진군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뭐라고?”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지가 일주일전인데 또 진군이라니? 카딜의 두 눈썹이 갈매기 날개처럼 휘어질 때
시종이 자세하게 정리하여 보고했다.

“동대륙에서 연합군을 만들어 어젯밤 선전포고도 없이 동쪽 진영으로 밀고 들어와 동쪽의 최전방병영이


뚫렸다고 합니다!”

이런, 괘씸한 놈들을 봤나. 카딜의 두 눈에 살기가 희번득였다.

“그래서 놈들이 지금 중앙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더냐?”

“예! 동쪽병영은 이미 그들에게 점령당했고 군사들은 연락병만 빼고 전멸했다고 합니다요, 지금도


중앙쪽으로 진군중이라 황제폐하께서 당장 가서 막아내라고 하셨답니다.”

“황제가 보냈다면 표식을 가져왔을텐데?”

“예, 안그래도 여기 받아왔습니다요.”

시종이 품에서 황제의 진군명령이 적힌 칙서를 내밀었다. 황제의 칙서는 일반족자와 모습이 달랐다.

황금비단에 양피지를 바른 칙서를 펼쳤다.

-대장군 카딜 하에르는 지금 즉시 붉은 기사단을 이끌고 동쪽 병영으로 출군하여 동대륙 연합군을


격멸하고 돌아오라. 황제 알페베르 드 파비앙드.-

칙서의 내용을 다 읽은 카딜이 마지막에 황제의 직인을 확인하고는 알았다 말하고 타냐를 쳐다보았다.

“타냐, 아무래도 동생은 저 사람들에게 맡겨야겠다. 전쟁이 일어났어.”

“그럼 어서 가십시오, 하지만 전 이 사람들과 동생을 찾으러 떠나겠습니다.”

“안돼, 바훌도 나를 따라나설텐데 너 혼자 어떻게 그 험한 여정을 간다고 그래? 절대 안돼, 넌 나와 같이


저택으로 돌아가자, 저택에서 브릴트에게서 소식오기만 기다려라 알았어?”

“싫습니다, 전 브릴트씨를 따라 토디엘을 찾으러 갈겁니다.”

타냐가 고집을 부리자 카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는 화를 참고 있는 듯


일렁였다.

“토디엘을 찾는 것도 중요한 것 다 알아, 하지만 너 혼자서는 절대 그 험악한 죽음의 계곡으로 보낼 수


없다.”

“브릴트씨와 그 일행이 저를 도와줄겁니다, 저도 이제 검술도 하고 말도 잘 타잖아요.”

“겨우 검형 2 초식을 끝냈다고 검술 운운하는거야?”

“지금 검형 3 초식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전 무조건 브릴트씨와 죽음의 계곡으로 떠날겁니다.”

타냐가 뜻밖에 고집을 강하게 부리자 바훌이 나섰다.


“제가 타냐님을 보호하겠습니다.”

“뭐?”

“대장군께는 다른 호위무사들이 많으니 제가 남아서 타냐님을 보호하면서 토디엘을 찾아오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대장군.”

바훌이 이렇게 나올줄 몰랐던 카딜은 그를 노려보았다. 솔직히말하면 카딜은 타냐를 그곳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바훌이 카딜의 속내도 모르고 나섰던 것이다.

“죽음의 계곡까지는 일주일이나 걸린다. 말타고 쉬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린다면 3 일이나 4 일로 줄일 수


있겠지만 그건 불가능하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젠장, 바훌 너 미쳤냐?’

카딜이 복화술을 하며 눈동자를 아래위로 굴리는 것을 그저 타냐를 걱정해서그러는줄 알고 바훌이


믿음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목숨을 걸고라도 타냐님을 지키면서 토디엘까지 찾아오겠습니다 대장군.”

“야, 넌 날 전쟁터에 혼자 보내겠다고?”

“예?”

“날더러 오른팔 하나를 떼어놓고 전쟁터에 나가라는거냐 지금?”

“아니 그게….타냐님을 걱정하시니까…”

바훌이 얼떨떨해하며 얼버무리자 카딜이 다시 한번 복화술을 시전했다.

‘타냐를 집에 데려다 놓아야한다, 알아들어?’

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바훌이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

“그, 그렇군요, 제가 없으면 카딜님 오른팔이 없는 것과 진배없죠, 그럼 안되겠네요, 저도 대장군님을


따라가야 하겠네요.”

타냐에게 미안해서 바훌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난 대장군님을 따라 전쟁터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타냐님 혼자서


떠나기에 위험하니까 일단 저택에 돌아가서 브릴트의 소식을 기다리시는게 좋겠습니다. 브릴트, 뭐하고
있지? 당장 출발하게!”

바훌의 우렁찬 목소리에 브릴트 일행이 얼른 인사를 하고 떠나려했다. 그러나 타냐가 말고삐를 잡아
당기며 그쪽 일행에 합류하려 할때였다.

‘안돼, 가지마.’

“뭐라고?”

“뭐?”
타냐가 제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되묻는 소리였지만 카딜은 제게 한 말인줄 알고 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타냐는 카딜의 말은 듣지 못하고 제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카딜을 따라가야해, 안그럼 넌 죽어.’

“무슨 소리야, 죽다니?”

타냐가 또 혼잣말을 하자 그제야 카딜은 그녀가 또 다른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사이 브릴트일행은 이미 어느 정도 멀어졌다. 타냐는 안절부절 못하며 제 안의 목소리에게 물었다.

“어서 말해줘, 왜 내가 죽어?”

‘너만 죽는게 아냐, 카딜도 너 없으면 죽어, 너희 둘은 항상 붙어 있어야 해. 카딜의 목숨은 너한테 달려
있고 네 목숨은 카딜한테 달려 있어, 그리고 동생은 살아있어, 그러니 걱정안해도 돼.’

“정말이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알아, 너도 언젠간 느끼게 될거야, 그러니 어서 카딜과 함께 가도록 해.’

“아, 알았어.”

타냐가 대답을 하고는 말고삐를 돌렸다. 그 모습에 카딜은 뭔지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카딜님, 카딜님을 따라가래요.”

“그 목소리가?”

“네, 카딜님과 저는 떨어지면 죽는다네요.”

“무슨 소리야?”

“모르겠어요, 우리 두 사람은 떨어지면 서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고 하네요. 카딜님의 목숨은 제 손에


달려있고 제 목숨은 카딜님 손에 달려 있데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말했어요.”

두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바훌은 가만히 명령을 기다렸다.

“왜 그런지는 설명 안해주고?”

“네, 나중에 느끼게 될거라면서 동생도 살아 있다고 했어요.”

“그게 정말이야?”

카딜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사실 전쟁이 일어나서 떠나야하긴 했지만 타냐의 남동생 토디엘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다행이네, 그런데, 그렇다면 너도 전쟁터에 따라가야 한다는 소리잖아?”

카딜의 안면근육이 다시 굳어졌다. 타냐를 칼과 화살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데리고 가야 하다니.

“그건 안될말인데….”

“제가 옆에 있어야 죽지 않는다고 했어요, 나도 마찬가지구요.”


타냐의 말에 카딜은 고민이 되는지 입술에 힘을 주고는 잠시 타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옆에서 바훌이
재촉했다.

“한시가 급합니다 대장군님.”

바훌의 말에 카딜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지금 즉시 붉은 기사단을 이끌고 동쪽병영으로 출격한다, 바훌, 너는 붉은 기사단에게 전령을


보내라. 최소한의 인원만 저택에 남고 나머지는 모두 출전준비를 하여 앞마당으로 모이라 일러라.”

“예, 대장군님!”

바훌이 인사를 하고는 먼저 저택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라 여섯명의 호위무사들도 달렸다.


타냐와 카딜 둘만 남은 상황에서 카딜이 다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했는지 확인한번 더해볼래?”

하지만 타냐는 고개를 저었다.

“물어도 똑 같은 대답만 할거예요, 내가 알아요.”

그럴 것이다, 그 여자 또한 타냐니까.

“타냐, 전쟁터는 네가 상상하는 정도가 아냐.”

“나도 알아요, 모르시겠지만 전 하루하루가 전쟁을 치루듯 살았어요, 칼과 창으로 사람을 찔러죽여야
죽이는건 아니예요, 먹을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것은 칼에 찔려 죽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장면이랍니다.
그리고 가끔은 채찍을 견디지 못해 죽을때도 있어요, 채찍이 살을 파고 들어 살갗이 찢어지고 뼈가 보이고
피는 흘러내려 웅덩이를 만들어요. 그런걸 매일 한번씩은 보고 살았어요.”

타냐의 말에 카딜은 이 나라가 그런 나라였구나 처음 깨닫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시체를 빨리 처리하지 못해 구더기가 생긴 것도 여러번 치워봤어요, 이만하면 되겠어요?”

“하아-, 그래 알았다, 같이 가자, 너와 내가 살길이 그것밖에 없다는데 같이 가야지.”

드디어 카딜의 최종결정이 떨어지자 타냐가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카딜은 여전히 걱정이었다.

***

“여기 지도를 보면 저들이 진군할 곳은 이 방향 뿐이다. 우리는 여기 이 나이브상류를 가로지른


르에타브릿지를 끊어야 한다. 이 다리가 중앙으로 돌격하는데 가장 빠른 길이다. 저들이 다리를 지나오기
전에 무너뜨려서 진군하는 시간을 늦추어야 한다. 이 다리만 끊으면 3 일 정도는 더 시간을 벌 수 있다.”

카딜은 출정하기 전에 전략부터 짜기 시작했다. 타냐도 붉은 기사단복을 입고 카딜의 설명을 듣고 섰다.

“이 나이브상류를 가로지르는 르에타브릿지를 무너뜨리는데 실패했을 경우 중앙까지 도착하는데 일주일도


안 걸릴 것이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게 해서는 안된다. 테일러!”

“예, 대장군님.”

“제 1 붉은 기사단을 이끌고 이곳으로 향해라, 반드시 동대륙 연합군이 도착하기전에 이 르에타브릿지


나무다리를 끊어야 한다.”

“예, 대장군님, 지금 당장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만약 실패하거나 다른 상황이 생기면 곧바로 전령을 보내, 그리고 너희들은 제 2 집결지인 여기로
모인다.”

카딜이 지도상에 보이는 점을 가리켰다. 테일러는 그곳이 어디인지 확인하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고 그곳으로 집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가 인사를 하고 나가자 카딜은 다음전략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 2, 3, 4, 5, 붉은 기사단 단장들이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카딜의 전략을 듣고 있으면 이미 이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카딜은 싸움도 잘하지만 지략가였다. 북대륙의 곳곳을 제 안방처럼 잘 알기도 했고 지형과 지물을 십분
이용하여 작전을 짰다.

그 결과 그가 참가했던 전쟁은 늘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카딜은 제 2, 제 3, 제 4, 제 5 군단에게도 각자의 임무를 던져주었다.

“동대륙은 어쩌면 이것을 마지막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싸울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이 전쟁에서 지면


동대륙에 흡수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동대륙의 속국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 국민들에게
그런 치욕을 겪게 할 수는 없다.”

카딜의 말에 모두들 비장한 눈빛으로 ‘예’ 라고 대답했다.

카딜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했다.

23 화

“내가 늘 말했듯이 목숨을 내건 단 한명의 병사를 수십명의 병사가 이길 수 없다고 했다, 너희들은 살고자
하지말고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싸움에 임해야 할 것이다. 후퇴명령은 오직 나만이 내린다, 만약
후퇴명령도 없이 후퇴하는 병사가 있다면 너희들이 직접 죽여라, 전쟁은 기술싸움이 아니라 사기싸움이다,
사기가 떨어진 병사는 나머지 병사들에게 독이나 다름 없다, 알았나!”

“예! 대장군!”

카딜의 회색빛 눈동자에 살기가 보였지만 타냐는 그의 멋진 모습에 매료되었다. 저래서 모두가 카딜
장군을 우러러 보는거였어.

“자 이제 출발하자.”

“예!”

모두들 일제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바훌과 타냐만 남은 상태에서 카딜은 두
눈을 감고 조용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조용히 심호흡을 하던 카딜이 눈을 부릅뜨고는 타냐를 쳐다 보았다.

“타냐, 각오는 됐지?”

“네.”
타냐 또한 두 눈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그 모습이 카딜에게는 가소롭고 귀여울뿐이었지만 그는 웃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너 내곁에서 1 미터 이상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예, 예?”

고분고분 대답을 하던 타냐가 한박자 늦게 카딜의 말을 이해하고는 그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왜그래?”

타냐의 커다랗게 변한 푸른 눈동자를 보던 카일이 그녀가 왜 놀라는지 다 알면서도 놀라는척 물었다.


사실상 1m 이내에 붙어 있기는 불가능이었다. 말을 타고 아무리 붙어도 1m 가 넘는 거리였다.

“1m 는 무리일 것 같은데요?”

“말이 그렇다는거지, 그만큼 내 곁에 바짝 붙어있으라는 뜻이지.”

“아, 네, 알겠습니다.”

타냐의 대답에 카딜이 만족한 듯 미소를 짓고는 갑옷 고리를 다시 확인했다.

허리와 팔목의 고리까지 단단하게 채워진 것을 확인한 카딜은 그녀에게 나가자고 했다. 타냐도 붉은
기사단들만 입는 갑옷을 입으려 했지만 갑옷이 너무 무거워서 거동이 불가한 상태라 어쩔 수 없이
가죽보호대만 사용하여 보호할 수 있는 곳은 다 보호했다. 가슴보호대, 그리고 팔목에서 팔꿈치까지 오는
보호대와 발목에서 무릎밑에까지 올라오게 한 보호대를 찼다.

그것때문인지 카딜은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철갑옷을 입어야 그나마 창과 검이 덜 파고 드는데 말이다.


아니 그보다 갑옷하나 소화해내지 못하는 연약한 몸이 어떻게 전쟁터를 누빌지가 더 걱정이었다.

***

행군이 시작된지 3 시간만에 붉은 기사단은 제 2 지점인 목적지로부터 절반 정도는 도착했다.

붉은 기사단은 기마병이었기에 모두 말을 타고 이동한다. 마상에서 싸움을 하는 기사단은 줄을지어


내달리면 마치 모래사막같이 뿌연 먼지구름을 만들어낼 정도로 빠르게 달린다.

그들의 속도와 맞추기 위해 온신의 힘을 다해 달린 타냐는 이미 지친상태였다.

그래도 절대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 타냐였다. 20 년동안 살아오면서 10 년은 동생 토디엘을 키우느라


온갖 궂은일을 다 한 그녀였다.

약한 뼈대지만 매일같이 남자들과 대등한 노동을 하여 어느정도 단련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수년동안 훈련된 남자들과 함께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대장군님!”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카딜이 말고삐를 당겼다. 말이 뚜레질을 하며 멈추었고 카딜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제 말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니 어쩌다가?”
“조금전 바위산을 넘다가 이끼에 미끄러져서 발목이 부러진 것 같습니다!”

말 또한 훈련으로 단련되었지만 착지하다 이끼에 의해 미끄러지자 발목관절이 나가버린 것이었다.

말은 이미 서지를 못하고 드러누운 상태에서 거칠게 호흡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망이 없어 보여 죽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카딜의 미간이 구겨졌다.

기마병은 말이 없으면 제대로 싸울 수가 없지만 붉은 기사단은 달랐다. 말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전천후였기에 다른 걱정은 없지만 말없이 나머지 3 시간을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 문제였다.

한 마리 말은 한 사람을 태워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데 두 사람을 태우면 아무래도 뒤쳐질 것이다.

여유분의 말은 동대륙연합군과 접전을 한번 하고 난 후 황제로부터 지원될 예정이었다.

카딜이 말에서 내려섰다. 타냐 또한 그를 따라 말에서 내려서서 다친 말에게 향했다.

덕분에 다른 기사들은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발목이 완전히 부러진 것이냐?”

“그런 것 같습니다.”

카딜이 말의 발목을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검을 빼들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붉은 기사단들은


무표정이었지만 타냐가 나섰다.

“잠시만요.”

“왜그래 타냐?”

“제가 치료를 해볼게요.”

타냐의 말에 카딜의 두 눈이 확 커지면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런곳에서 단순히 말 한 마리때문에


그녀의 능력을 밝힐 수는 없었다.

아직도 황제가 완전히 의심을 거두었는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었다.

“안돼, 설령 치료한다고 하더라도 부상당한 말을 둘러매고 갈 수는 어 타냐.”

하지만 타냐는 카딜에게 눈짓으로 괜찮다 말하고 기사단들이 들을 수 있는 크기의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예전에 마굿간일을 했었어요, 그때 부러진 관절에 좋은 약초가 무언지 알게 되었거든요, 그 약초만
바르면 1 시간내에 뼈가 붙어요.”

타냐의 말에 붉은 기사단이 웅성대며 신기해했다. 카딜은 타냐의 속뜻을 알지못해 그저 두 눈을 아래위로


부라리며 그만두라는 눈짓을 했다. 하지만 타냐는 주변을 살피더니 아무 풀이나 뜯어왔다.

“이거예요.”

“아니 저 흔한 풀이 그런 귀한 약초라고?”

붉은 기사단 한명의 말에 모두들 사방으로 흩어져서 약초를 뜯어왔다.

“이것도 맞습니까?”
“네, 맞아요, 고마워요.”

붉은 기사단은 카딜이 타냐를 꽤 아낀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녀에게 공손했다. 마치 공주를 대하듯


타냐에게 풀을 뜯어 바치는 모습에 카딜은 속으로 끙 앓는 소리만 냈다.

타냐는 약초를 돌로 찧어 달라고 했고 그 사이 말의 발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사람들이 약초를 찾아


다니고 일부는 약초를 찧느라 정신없는 사이 타냐의 손에서 하얀 빛이 살짝 났다. 이정도는 그녀에게 크게
에너지를 쓸 일도 아니었다.

잠시 보였던 하얀빛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이 찧은 약초 한주먹을 타냐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타냐님.”

“고마워요, 이제 발목을 감쌀 천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긴천을 가져왔다.

“여기 있습니다.”

“아, 네, 고마워요.”

타냐는 얼른 약초를 듬뿍바르고 말의 발목을 긴 천으로 동여맸다. 말은 이미 회복이 되어 일어서려


바둥거렸다. 하지만 그 모습이 마치 고통을 참느라 바둥대는 것으로 보여 붉은기사단원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정말 타냐의 말대로 말이 일어서는지 궁금하여 모두 동그랗게 원을 만들어 에워싼 것을 본 카딜이 명을


내렸다.

“이왕 멈추었으니 식사나 하고 가자!”

“예! 대장군.”

그의 명이 떨어지자 붉은 기사단원들은 일제히 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환경이 열악한 전쟁터를 제 집처럼


여기는 붉은기사단원들의 식사준비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 사이 카딜이 타냐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러다 황제가 알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이 정도는 괜찮아요.”

“또다른 타냐도 동의했어?”

카딜의 귓속말에 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네, 내가 위험한 일만 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요.”

“아, 그래?”

“네, 그러니까 걱정마세요 카딜님.”

“휴으-내가 어떻게 걱정을 안해?”


카딜은 이마를 짚으며 한탄처럼 말하고는 입안으로 투덜거렸다. 벌써부터 이러니 내가 마음놓고 싸울수나
있을지 걱정이네 쯧.

“대장군님, 여기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타냐님도 함께 드십시오.”

제 2 단장 퓌르오가 직접 음식을 내려 놓았다.

“그래, 고맙다, 너도 가서 식사해.”

“예, 대장군님.”

퓌르오는 절도있는 인사를 하고는 물러갔다. 차려진 음식은 별것 없었다. 말린 양고기를 여러 가지 역시


말린 야채와 넣고 끓인 스튜와 함께 조금은 딱딱한 빵이었다. 말린 양고기는 이미 익혀져있어 불을 피울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냥 육포처럼 뜯어 먹는다고 했다.

전쟁터에서는 간단하면서도 고단백 고열량이 필요하기 때문에 말린음식을 주로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무게또한 가벼워 이동할 때 크게 부담을 주지 않고 시일이 오래도록 지나도 썩지 않는다며 카딜이
말해주었다.

“어서 먹어 타냐, 이거 먹고 나면 또 서너시간은 달려야 해.”

“예, 카딜님부터 먼저 드세요.”

타냐의 말에 카딜이 나무수저로 스튜를 떠서 타냐의 입앞에 디밀었다. 타냐는 주위 군사들의 눈치를 보다
얼른 입을 벌렸다. 그녀가 순순히 받아 먹는 모습에 카딜의 두 눈꼬리가 은은하게 접혔다.

“맛이 어때?”

“맛있어요.”

“헐, 이걸 맛있다고 하다니.”

“맛있는데요?”

타냐는 음식은 무조건 맛이 있었다. 왜냐하면 늘 굶었기 때문에.

카딜의 저택에서 살면서도 타냐는 지난날을 잊지 않고 있었다. 어릴때부터 굶었던 타냐는 음식에 대한
예의가 대단했다.

“너 다 먹어.”

“왜요? 맛이 없어요?”

“응, 굶어죽을 상황아니면 먹기 힘든 맛이야.”

“이상하네, 진짜 맛있는데?”

타냐는 나무그릇을 가져와 맛있게 먹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상에 양고기도 이렇게나 부드럽고
맛있을수가 업는데. 야채는 말려서 끓여서 그런지 고기처럼 쫄깃거렸다.

“네가 맛있게 먹으니 내 배가 부른 것 같아 하하하.”

카딜의 호쾌한 웃음소리에 식사를 하던 붉은 기사단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카딜이 저렇게 소리내어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얼음심장을 가진 붉은 악마라는 별명이 붙은 그였다. 하지만 카딜은 타냐를 만난 후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 맛있다.”

타냐는 국물하나 남기지 않고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는 배까지 두드렸다. 그 모습에 카딜은 또 한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말의 발목관절이 다 나았나봅니다!”

저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사람들이 우르르 다가갔다. 말은 이미 벌떡 일어나서 어서 달리기만을 기다리는


듯 두 개의 앞발을 허공으로 차올리며 휘휘휘잉 소리를 질렀다.

“우와, 그 풀이 진짜 신기하긴하네, 다음에 말의 관절이 부러지면 나도 써봐야 겠다.”

붉은 기사단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카딜은 또 한번 속으로 앓는 소리를 하고는 타냐를 쏘아보았다.

24 화

한편 황제 알테베르는 급하게 찾아온 비숍에게서 놀라운 말을 들었다.

“무슨 소리냐?”

“아직도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직도 살아 있는 것 같다니? 내가 죽였는데 어떻게 살아 있다는 거지?”

“그 아밀리에라는 의녀는 아무래도 샤마란족이 아닌 듯 합니다.”

“그럴 리가? 분명 다 죽어가던 카딜을 살렸는데? 황궁의도 그날밤을 넘기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
아밀리에가 살렸어, 그런데 그녀가 샤마란족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그 여자는 그냥 치유마법능력이 좋았을 수도….”

비숍이 말끝을 흐리자 황제가 짜증을 내며 암체어의 팔걸이를 탁 쳤다.

그리고 그 화는 비숍에게 쏟아졌다.

“비숍, 그대가 너무 광범위하게 말을 해주니까 내가 찾아내기가 힘들잖아! 누구라고 딱 찝어서 말을


해줘야 할 것 아냐? 젠장 괜히 실력좋은 의녀만 죽였네, 그정도 실력이면 황궁의 자리를 내주어도
될법한데, 쩝.”

알테베르의 짜증에 비숍은 어찌할바를 모르고 그저 황공하다는 말만 했다.

비숍도 황제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저도 누군지 확실하게 알면 딱 찝어서 말을 해주고 싶었다.

“금서를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거기에 혹시 뭔가 단서가 더 있을지모르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제가 금서를 다시 한번 정독하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읽을테니 내게 가져오너라.”

“하지만 금서는 신전에서 나오면 안된다고….”


“그런게 어디있어? 황제인 내가 말하면 그것이 곧 법인데!”

알테베르의 말에 비숍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는 당장 금서를 가져오겠다고 말하고 물러났다.

알테베르는 쯧쯧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죽인 아밀리에가 아까운 그였다.

“도대체 누구지? 분명 아밀리에가 병을 치유하는걸 보았는데 아니라니…..”

알테베르는 고개를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일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동대륙 연합군과의 전쟁은 어찌되어 가는지, 왜 이리 전령에게서는 답이 없는거야 쯧.”

동대륙 연합군이라고 해봐야 별볼일 없을 것이라 여기는 알테베르는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특히 카딜을
그쪽으로 보내놓았으니 더 안심하는 그였다.

북대륙을 통합한 알테베르는 동대륙도 속국으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북대륙을 통합할때 그
중심에는 카딜과 그의 붉은 기사단이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시간이 이미 지난터라 북대륙을 통합한 것은
카딜의 공이 아니라 자신의 힘이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알테베르가 동대륙을 차지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소금이었다. 동대륙에서만 나는 귀한 고산지대


소금을 매번 비싼 돈을 주고 수입했었다. 하지만 점점 욕심이 늘어난 알테베르는 돈을 주고 수입하기
보다는 그 소금산 자체를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소금산을 제것으로 만들면 그것을 가공하여 남대륙이나 서대륙으로 수출 할 수도 있어 국가의 매출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북대륙의 황제 알테베르의 힘은 더 강해질 것이고 감히 누구 하나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대손손 권력과 재력을 누리기 위해 알테베르의 욕심은 목까지 차올랐다.

그의 시커먼 속내를 꿰뚫었는지 동대륙에서 연합군을 형성했다.

북대륙의 속국이 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 알테베르는 동대륙 연합군이 쳐들어왔다고 해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이 기회에 동대륙을 차지할 흑심을 키우고 있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사람은 딱 한 사람 카딜 하에르일뿐이다. 하지만 카딜은 어차피 황제인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였기에 그리 걱정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것도 비숍이 금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금서가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 현재로서는 알테베르를 가장 위협하는 사안이었다.

대신전에 도착한 비숍은 밀실로 들어가 금서를 꺼냈다. 이것을 신전 밖으로 가지고 나가면 절대 안된다고
선대 제사장이 신신당부했었는데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에 잠시 망설이던 비숍은 밖에서 시종장 스탈드의
목소리에 얼른 밖으로 나왔다.

그것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라는 걸 알지 못하는 비숍이었다.

금서의 힘을 신전의 힘으로 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비숍은 스탈드와 함께 내전으로 향했다.

같은시간 제이단숲에 하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샤마란족의 고향이자 치유의 정령들이 사는 곳 제이단
숲이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듯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

“자 다시 출발한다!”

카딜의 명에 붉은 기사단은 모두 말에 올랐다. 앞으로 3-4 시간만 더 달리면 제 1 군단과 만나기로한


집결지에 도착한다. 1 군단에게 맡긴 작전이 성공했다면 그들은 그곳에 없을 것이고 그들이 지금 가고
있는 목적지인 후방 병영에서 카딜을 기다리고 있다면 작전에 실패한 것일 터였다.

카딜은 타냐에게 눈짓을 하고 말의 배를 힘차게 찼다. 바훌도 곧바로 출발했고 타냐도 카딜처럼 뒤꿈치로
말의 배를 찼다. 세 마리의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붉은 기사단들도 뒤를 따랐다.

발목이 부러졌던 말은 언제 다쳤느냐는 듯 이전보다 더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어떤 기사들은 타냐가 말한 풀을 한줌씩 뜯어서 배낭에 넣기도 했다.

들판을 지나고 숲속을 지나고 바위산을 지나는 동안 타냐의 말타는 솜씨는 계속 발전해나갔다.

이제는 드레스보다 기사단 제복이 더 어울리는 그녀였다.

그렇게 3 시간을 달린 후 카딜 일행은 제 2 집결지인 후방병영에 도착했다. 벌써 날은 저물었고 기온은


많이 떨어졌다.

카딜은 그곳에 제 1 군단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입안으로 욕을 짓씹었다.

“실패했나?”

“송구하옵니다, 저희가 도착했을때는 이미 다리의 절반을 건너온 상태였습니다. 화살부대가 화살을


쏘아대는 바람에 다리에는 접근할 수조차 없어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좀더 일찍
도착했어야 했는데.”

제 1 군단의 지휘자 테일러가 무릎을 꿇었지만 카딜은 일어서라 명했다. 이것은 테일러의 잘못이 아니었다.
소식을 들었을때는 이미 그들이 동쪽끝의 병영을 뚫은 후였다. 그곳에서부터 두 번째 병영까지의
최단거리가 그 곳 나이브상류를 가로지르는 르에타브릿지다리라는 것쯤은 적군들도 이미 파악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다리로 달리는 시간과 카딜의 저택에서 그곳으로 달리는 시간은 벌써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북대륙의 아클란 대제국은 황궁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작은 거점들과 병영이 있었다. 하지만 북대륙은
지형이 가로로는 좁고 세로로만 길게 생겨 동쪽에서의 공격은 황궁까지 꽤 가까운 거리였다.

동쪽의 가장 끝부분에 있는 병영이 뚫렸기 때문에 지금은 카딜이 도착한 이곳이 최전방이 되는 셈이었다.

하루종일 달렸던 관계로 말도 지쳤고 사람도 지쳐 일단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곳 병영의 지휘자인
마테스가 카딜과 붉은 기사단을 위해 만찬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만찬이라고 해봐야 아까 오다가 먹었던 스튜 같은 음식과 음료들이 전부였지만 전쟁터에 나가는


군사들에게는 만찬이었다. 아까와 다른 것이라면 과일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오늘새벽에 놈들이 이곳으로 도착하겠구나.”

식사를 하며 카딜이 지휘자들을 모아놓고 의논중이었다.

“그렇습니다. 저들이 오는 길은 여기와 여기 두곳입니다.”

이곳 병영지휘자 마테스가 지도를 펼쳐놓고 깃발이 달린 나무토막을 옮기며 설명했다.


카딜은 가만히 지도를 보다가 전략을 설명했다.

“부대는 4 개로 편성한다. 우리 붉은 기사단이 다섯부대니까 2 군단부터 5 군단까지는…….”

카딜의 전략을 타냐도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다. 카딜은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전을 펼치자고 했다.

앞에서 막는척 하다가 밀리는척 하면서 뒤로 후퇴하면 놈들이 기세등등하여 따라올 것이다. 그때 갑자기
산등성이에 매복해 있던 다른 군단들이 습격하는 방법이었다.

마치 독안에 든 쥐처럼 에워싸고 무찌르자는 것이었다.

타냐는 카딜이 지휘자들과 회의를 하는 모습에 또 한번 반해서 멍한 상태가 되었다. 창과 화살도 뚫지


못하게 생긴 두꺼운 철갑옷을 입은 그는 타냐의 눈에 전쟁의 신처럼 보였다.

새벽에 벌써 동대륙 연합군들이 이곳까지 도착한다는 소리에 타냐의 심장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드디어 첫 전쟁을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미 손에는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카딜이나 바훌에게 짐이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짐이 되지 않고 저들에게


도움이 될까 고민했더니 답은 하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무술실력이었다. 적어도 내 몸하나는 지킬 수 있는 실력은 되어야겠다 생각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카딜이 지휘자와 군단장들과 회의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슬금슬금 막사를 빠져나온 타냐가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공터로 왔다.

허리에 찬 검을 뺀 그녀가 검형 초식 제 3 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제 2 형까지는 마스터를 했는데 제 3


형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카딜이 가르쳐주려는 검형의 초식은 12 초식이었다. 그런데 3 초식에서 이렇게 애를 먹고 있으니 제가


생각해도 한심했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카딜과 바훌에게 짐이 되지 않고 도움을 줄수가 있을지 걱정이다.

한번 연습했는데 벌써 온몸이 땀으로 젖어버렸다. 하지만 타냐는 멈추지 않았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또
넘어지면 일어섰다.

“이건 힘든게 아냐, 즐거운 일이지.”

타냐는 지난날을 떠올렸다. 어린 동생을 건사하기 위해 채찍을 맞아가며 무거운 돌을 나르기도 했고


철광석을 캐는 일도 했었다. 곡괭이를 든 손에 살갗이 다 벗겨져서 피가 흘러도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
덕분에 그녀의 손바닥에는 마디마디 굳은 살이 박혀 있었다.

그런 힘든 노동들이 만들어준 굳은 살이 오늘 검형을 할 때 이로울줄 그때는 정말 알지 못했다.

“타냐, 거기서 뭐해?”

카딜의 목소리에 타냐가 동작을 멈추었다.

“하아, 하아, 검술 연습중이었어요.”

“뭐라고?”

카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타냐에게 다가왔다.


“이런, 땀이 범벅인데?”

“네, 카딜님, 검형 3 초식은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한번 봐주실래요?”

“3 초식을 한다고?”

“네, 사실 몇 번 연습해봤거든요.”

“하아, 하여튼 사람 놀래키는데는 재주가 있어, 그래 어디 한번 해봐.”

카딜은 주변에 보이는 나무토막 하나를 세우고 그곳에 앉았다. 타냐는 카딜에게 보여준다는 생각에
두근대는 심장을 다스리며 검형을 시작했다.

3 초식부터는 점프하는 것이 많아 타냐에게는 무리가 좀 있었다. 하지만 막노동으로 단련된 몸이라 일반


여자들은 할 수 없는 점프도 타냐는 어느정도 해냈다.

카딜은 벌어지는 제 입을 얼른 닫았다. 제 3 초식은 현재 병영을 지키는 일반군사들이 하는 초식이었다.

그걸 4 주일만에 해내다니.

“하아, 하아, 어때요 카딜님?”

타냐는 숨을 몰아쉬며 카딜의 말을 기다렸다.

“그거 몇 번 연습했어?”

“며칠전부터 하루에 한번씩 했고 방금 세 번정도 했어요.”

“하아,”

카딜이 한숨을 내쉬자 타냐는 실망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정도로 형편없어요?”

“아냐, 그 반대야 타냐.”

“네?”

“그 반대라고, 형편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잘해서 감탄하는 소리였어.”

“정말요?”

타냐가 좋아서 환하게 웃자 카딜이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땀이 정말 많이 났네, 냄새가 심해.”

“어머, 죄송합니다.”

“씻어야겠어, 이대로는 내가 널 안을 수가 없겠는데?”

“네?”

카딜의 말이 무슨 뜻인가 생각하기도 전에 그가 타냐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안그래도 좀 씻으려고 물을 받아 놓으라고 했거든, 얼른 가자.”

카딜에게 이끌려 막사로 들어온 타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뜻한 물과 그 물이 담긴 나무욕조를


보고 감탄했다.

이와중에도 할건 다 하는구나 싶어서다. 병영에서는 정말 24 시간 훈련만 하는줄 알았던 그녀였다.

“이리와봐.”

카딜이 타냐를 앞에 세우더니 그녀의 허리끈부터 풀려했다.

“어머, 뭐하시는….”

“뭐하긴, 옷벗기잖아, 이대로 들어갈래?”

“아뇨, 그건 아니지만….”

타냐가 수줍어하자 카딜이 장난을 쳤다.

“아직도 내가 옷벗기려하면 그렇게 부끄러워? 보여줄거 안보여줄거 다 보여줘놓고?”

25 화

“그렇긴 하지만….”

타냐는 조금은 조급해 보이는 카딜의 손을 막지 못했다. 가죽으로 가슴을 덧대고 있던 것이 떨어져 나가자
몸이 한층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무게가 꽤 나가는거였네.’

타냐는 이제는 제 손목과 팔뚝에 덧대진 아대를 푸는 카딜을 쳐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눈도 못 뗄 정도로 잘 생기긴 했지. 하지만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지마 심장이 살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으니까.”

카딜의 말에 타냐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하며 얼른 눈길을 내렸다. 그런데 내린 눈길에 보이는


것은 그의 중심이었다.

어느틈에 불룩 솟아 올라 앞섶에 텐트를 친 모습에 타냐는 어쩔 수 없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뻥뚫린 막사의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천막을 들추고 들어섰던 것이 그제야 기억이 났던 것이다.

군사들이 지나가면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도 다 들릴정도인데 여기서 그걸 한다고?

“어딜봐 난 여기 있는데.”

카딜이 손으로 타냐의 턱을 잡아 저를 보게했다.

“아까는 그만 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건 그때고 또 시선이 다른곳으로 가니까 기분이 별로야, 나만봐.”

“알았으니까 이 손 좀 놓아주면 안될까요? 턱이 아파요.”

타냐의 말에 카딜이 얼른 손을 떼주었다. 그 모습이 웬지 귀엽다는 생각을 하던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카딜 하에르가 귀엽다니, 말도 안된다. 너무 예뻐해줘서 주제를 잊어버렷나보다 싶어 그녀는 제게
야단쳤다. 초심을 잃지 말라고.

타냐가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카딜은 어느새 그녀의 몸에 덧대어졌던 가죽패드들을 풀어냈다. 이제 그녀의


옷을 벗기려할 때 타냐가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

“그런데 카딜님, 문이 없는데 여기서….”

“그게 뭐 어때서? 누가 감히 내 막사에 들어올거라 생각해? 이 밤중에?”

“그렇긴 하지만 소리가….”

“아, 소리, 그렇지 소리가 심하게 나긴 하지.”

카딜의 놀리는 말에 타냐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소리로 치자면 자신이 내는 소리가 꽤 높으니 말이다.

카딜은 낮은 신음정도만 내기 때문에 밖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이톤의 제 신음소리는


아무래도 밖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의 귀에 들릴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인데 병영에서는 자제를 하는게….”

“설마 지금 나더러 이 상태에서 자제를 하라고?”

그가 제 아래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건 불가능 할 것 같긴 했다.

“걱정마 네가 소리를 내지 못하게 이 작은 입술을 내 커다란 입술로 봉인해줄테니까.”

그렇다고 또 그렇게 말을 하다니. 타냐의 얼굴은 카딜의 튤립정원에 핀 붉은 튤립꽃잎처럼 붉어졌다.


그때 카딜이 그녀의 머리를 묶은 끈을 풀어내렸다. 윤기가 흘러내리는 타냐의 웨이브진 황금색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출렁 늘어지자 카딜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웅큼 쥐고는 코에 가져다 댔다.

땀냄새가 엄청날텐데 그걸 왜 코에다 가져다 대는지. 타냐가 얼른 머리카락을 잡아 빼려했다.

그러나 카딜이 숨을 크게 들이키며 말했다.

“어떻게 이런 향기가 날까?”

“땀을 많이 흘렸으니까 그렇죠, 카딜님도 땀흘리고 나면 냄새 지독하거든요 흥.”

저도모르게 새침하게 말했는데 카딜은 다른 말을 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땀을 그렇게 흘렸는데 왜 이렇게 냄새가 좋은거야?”

“네?”

“혹시 어디 향내가 나는 뭔가를 숨겨 놓았나?”

그가 타냐의 마지막 남은 옷가지를 아래로 밀어 내리고는 정말 뭔가를 찾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몸을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했다.

타냐의 몸이 절로 배배꼬였다. 카딜은 그녀의 젖가슴을 한입베어물고 빨아 대다 다른쪽 젖가슴으로


옮겨갔다. 땀을 많이 흘려 더러울텐데 하는 생각에 타냐가 카딜의 입술을 밀어내며 말했다.

“씻어야 해요.”
“내가 혀로 씻겨주고 싶은데?”

“말도 안돼요, 저기 물있잖아요.”

타냐가 욕조를 가리키자 카딜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허리끈을 풀고는 입고 있던 옷을
단번에 벗어 던졌다. 웅장하다는 표현과 어울리는 그의 근육질의 몸이 드러나자 타냐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읏차!”

“꺅!”

타냐를 번쩍 안아들자 타냐가 깜짝놀라 소리를 지르다가 얼른 제 입을 막았다. 열을 내는 마법스톤이


들어간 욕조물은 아직도 따뜻했다.

땀으로 젖었던 몸이 식어 한기가 들기직전 따뜻한 물 속에 들어가자 이내 몸이 더워졌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욕조벽에 몸을 기댄 카딜이 그대로 바짝 일어선 그의 성기 위에 타냐를


내리 꽂았다.

“아읍!”

소리를 내려하자 카딜이 타냐의 뒷목을 잡아 당겼다. 이내 그의 입술이 타냐의 입술을 덮어 버렸다.

그의 굵고 뜨겁고 단단한 성기가 타냐의 자궁을 밀어 올리며 퍽퍽 찔러대기 시작했다.

읍읍, 으읍! 타냐의 교성은 카딜이 말한대로 그의 입안에서만 울려퍼졌다.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이
카딜의 얼굴에 비벼지자 카딜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젖가슴으로 입술을 옮겼다. 동시에 옆에 던져 놓았던
자신의 옷을 들어 타냐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타냐는 기다렸다는 듯 카딜의 옷을 재갈처럼 물고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가슴이 통째로 그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미칠지경인데 그의 두꺼운 성기는 타냐의 극점만


공격했다.

나무욕조의 물이 밖으로 넘실댔지만 둘 다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쓸 겨를이 없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땀이 다시 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까 훈련때와는 완전 다른 종류의 땀이었다.

***

카딜은 잠든 타냐의 얼굴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알몸의 타냐는 잠든 상태라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은밀한 곳을 다 드러내고 있었다.

핑크빛 유두가 평소보다 더 크게 부풀어 올라 있는 것을 본 카딜이 피식 웃고는 유두를 한번 빨아 들였다.

배꼽아래 삼각지를 손바닥으로 슥 쓰다듬다 음순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본다.

뭔가 느꼈는지 타냐가 다리 하나를 접으며 몸을 돌렸다. 카딜은 얼른 손가락을 빼고는 빨아대던 유두도
뱉어냈다. 또 다시 욕정이 치솟아 타냐의 몸과 딱 붙여 누운 그가 그녀의 다리 하나를 제 허리에 걸쳤다.

다시 좁아진 그녀의 음부에 이미 완전히 발기한 그의 성기를 찔러 넣었다.

잠결에도 타냐는 그의 성기를 잘도 삼켰다. 카딜이 본격적으로 타냐의 안을 찔러대기 시작하자 타냐가
눈을 떴다.

“하아, 깼어?”
타냐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딜이 그녀의 목덜미를 핥기 시작했다. 이내 찔걱이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자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카딜의 말에 타냐가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카딜은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정자세로 타냐를 눕힌 카딜이 그녀의 두 다리를 활짝 벌려 제 허리에 감게 했다. 틈하나 없이 맞물린


곳에서 젖은 소리가 요란하게 나기 시작했다.

***

새벽동이 트는 시간.

카딜과 타냐는 어느새 일어나서 전쟁준비를 완료하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바훌, 적군들이 어디까지 왔는지 보고해.”

“1 시간 후면 우리가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겁니다.”

“좋아, 지금 출발하면 딱 맞겠어. 출발하자.”

“예, 대장군님.”

바훌이 예를 표하고 돌아섰다. 카딜은 그의 백마에 올라 그의 명을 기다리고 있는 부대의 가운데 섰다.

“오늘 오전안으로 적들이 차지한 동쪽 최전방 병영을 찾는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병사들이 사기충전하여 창과 칼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카딜이 손을 들어 올리자


다시 조용해졌다.

“최전방 병영을 찾은 후 그대로 밀고 들어가서 오후에는 동대륙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저들의 최전방
병영을 차지한다! 병영을 차지한 후에는 저들이 다시 공격해올 것을 대비하여 사방에 거점을 설치하고
주둔군을 배치한다! 배치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그때 알려주겠다! 모두 준비됐나!”

“예!”

붉은 기사단 500 명과 이곳 병영에서 주둔하던 군사 1000 명이 자신있게 함성을 내질렀다.

동대륙 연합군은 5000 이라 들었다. 천오백과 오천의 싸움이었지만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붉은 기사단
500 이면 1 만명의 병사와 싸워도 밀리지 않는다.

거기에 천명이나 되는 병영 주둔군까지 있으니 이 싸움은 보지 않아도 승리할 것이 명확했다.

“출발하라!”

카딜이 검을 높이 빼들고 소리를 지르자 군사들이 또 다시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대답했다.

히랴!

카딜이 말의 배를 차자 그의 백마가 달리기 시작했고 그 뒤로 바훌과 타냐가 따랐다. 바훌은 오늘


전쟁에서 타냐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새벽에 카딜이 바훌을 따로 불러서 타냐를 목숨을 걸고 지키라 명령했다.


바훌은 주군의 말을 지킬 것이다. 그의 명령은 바훌에게는 법이었다. 황제의 명령보다 우선하기도 했다.

설령 타냐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카딜의 명을 지킬 것이다.

***

아클란 황실.

알테베르는 전령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오늘 안으로 동대륙 경계를 무너뜨리고 저쪽 최전방 병영을 장악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알았다, 혹시 모르니 상황을 자주 보고 하도록 하라.”

“분부받들겠사옵니다 폐하!”

전령이 내실에서 물러가고 나자 로젠시아가 알현을 청했다. 철없는 사촌 여동생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한숨이 나왔지만 일단 카딜과 정혼을 시켜야 하니 함부로 대할 수 없어 들라 하였다.

“폐하, 저 카딜 대장군님이 계시는 병영으로 위문을 갈까합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하고 알테베르의 두 눈이 커졌다. 지가 무슨 위문공연단이야 뭐야?

게다가 이 전쟁은 단기간에 끝날 것이다. 확실히 이길 것이기 때문에 위문같은 것은 필요도 없을테고.

“그럴필요 없다.”

“그럴필요 없다뇨?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 일은 오래전부터 해오던


관례이옵니다.”

“그거야 위문공연단이 할 일이지 네가 할 일은 아니지 않느냐?”

“그건 그렇지만 카딜 대장군님에게는 제가 위문공연단 보다 더 큰 힘이 될것이옵니다.”

카딜이 로젠시아를 싫어한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이야기인데 저런 소리를 하다니.

속으로 혀를 차던 알테베르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전쟁터에서는 뭐든지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로젠시아의 말대로 그녀를 싫어하는 카딜이지만 전쟁터라는
분위기에 위로를 받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테크닉은 좋으냐?”

“예?”

“아, 아니다, 쩝, 내가 별소릴 다 했군, 못들은걸로 해.”

“혹시 그 테크닉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프로급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만.”

로젠시아의 말에 알테베르의 두 눈이 커졌다.

“그래?”

“그럼요, 아무리 차가운 이성을 가진 카딜대장군이라 할지라도 전쟁으로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제가


위로하면 안 넘어올 수 없을겁니다.”

로젠시아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알테베르가 말했다.

“좋아, 황제의 근위대 1 개분대를 내줄테니 당장 카딜에게 가도록 해. 서둘러서 오늘 밤 까지 그곳에


도착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네 말대로 테크닉 제대로 부려봐.”

알테베르의 말에 로젠시아는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며 내실을 나갔다.

26 화

카딜이 예상했던 바로 그곳에서 동대륙 연합군과 마주쳤다. 카딜은 작전했던대로 부하들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지금은 후퇴하는 것이 목적이라 카딜은 뒤에서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병사들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조금만 더.”

혼잣말을 하던 카딜이 갑자기 손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1 군단장 테일러가 소리를 질렀다.

“후퇴하라! 모두 후퇴하라!”

단 1000 명의 군사로 5000 의 군사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동대륙 연합군의 대장


갈라스는 수적으로 열세한 아클란의 군대를 보고는 자신들을 얕잡아본 결과라고 오해했다.

처음 공격을 할때부터 어떤식으로 할지 의견이 분분했지만 갈라스가 힘이 분산되면 오히려 힘들다며


하나로 뭉치자고 주장했다.

처음부터 강한 힘으로 진격하여 빠른시일내에 아클란의 황궁까지 돌격하자는 그의 작전에 동대륙 제국의
왕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갈라스의 작전은 먹혀 들어갔다. 워낙 빠르게 최전방 병영을 정복한 덕분에 아클란 제국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인 나무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클란군대는 나무다리를 막으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오늘 이곳 병영을 접수하고 곧바로 다음 병영으로 이동할 생각에 갈라스는 목청을 높였다.

“진격하라!”

카딜은 자신의 군사들이 모두 지나갔을때서야 움직였다. 동대륙 연합군들은 사기충천하여 따라붙었지만


카딜은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두고 후퇴했다.

눈앞에 도망치는 군사들이 보이니 동대륙 연합군은 추격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들은 함정에 빠져들었다. 협곡을 지나는 순간 언덕위에서 매복하고 있던 붉은 기사단이
괴성을 지르며 언덕길을 달려 내려온 것이다.

마치 우물안 개구리처럼 적군으로 둘러싸인 동대륙 연합군의 대장 갈라스는 당황했다.

어쩐지 붉은 기사단이 안보인다 했더니.

협곡에서 달려내려오는 붉은 물결을 본 갈라스가 소리쳤다.

“퇴각로를 확보하라!”
그의 지시에 군사들은 다시 방향을 돌렸다. 도망쳤던 군사들이 카딜의 명에 뒤로 돌았다.

이번에는 카딜이 맨 앞에서 진두지휘했다. 그의 뒤로 타냐가 따랐고 바훌이 타냐를 보호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카딜이 지나갈 때 마다 좌우로 여러명의 적군이 가을 낙엽처럼 쓰러졌다.

그때 타냐는 전쟁의 잔인함을 처음으로 느꼈다. 붉은 기사단의 옷이 왜 붉은 색인지 확실하게 이해했다.

적군의 피가 옷에 튀어도 표가 나지 않았다. 카딜이 말을 타고 적군의 대열을 깨뜨리며 중앙을 돌파하자


적군들은 저들의 대장인 갈라스를 보호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동대륙 연합군의 5 천의 군사는 벌써 3 분의 1 로 줄어 들었다. 목숨을 건 후퇴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다리를 건넜다.

시간은 벌써 꽤 되었고 군사들은 지쳤다. 상대편은 더 심하게 지쳤기에 이대로 진격하고 싶지만 카딜은 두
번째 계획을 위해 멈추었다.

오늘 오후에 저들이 차지한 최전방 병영을 되찾을 것이다. 동대륙연합군도 병영으로 들어가서 마지막
싸움을 위해 준비중이었다.

군사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카딜 대장군을 위한 임시 막사를 지었다.

“타냐, 괜찮아?”

살짝 넋이나가보이는 타냐에게 다가온 카딜이 물었다. 타냐는 멍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카딜이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타냐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와 눈을 맞춘 타냐는 천천히 정신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금전 너무 엄청난 것을 본 그녀는 전쟁터를 너무 가볍게 생각한 제 자신을 질타했다.

그동안 전쟁터와 다를바 없는 삶을 살았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녀가 살았던 그 힘들었던 삶도 오늘


전쟁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구나를 깨달았다.

“타냐.”

카딜이 타냐의 이름을 한번 더 부르자 타냐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왜그래 타냐? 어디 다치기라도 한거야?”

카딜은 타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적의 칼에 맞았나 싶어 울고 있는 그녀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하지만 타냐의 몸 어디하나 다친곳은 없었다.

“타냐, 왜 울어? 으응? 왜 우냐니까? 너무 힘들어서그래? 아니면 겁이났었던 거야?”

카딜은 애가 타서 타냐의 두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그러나 타냐는 울음소리조차
내지않고 그저 굵은 눈물만 폭포수처럼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 어깨를 들썩이자 카딜은 미칠 것 같아 그녀를 끌어 안았다.


고집을 부렸어도, 또 다른 타냐가 그렇게 말했다고 했어도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하며 타냐를 달래는 카딜이었다.

타냐는 카딜의 어깨에 턱을 얹고 한참을 울었다. 눈물도 닦지 않고 끙끙 앓아가며 그렇게 한참을 지난 후


타냐는 까무러치듯 정신을 놓았다.

기절한 타냐를 자신의 장포를 깔아 눕힌 카딜은 눈물로 얼룩진 타냐의 볼을 연신 쓰다듬으며 혀를 찼다.

“전쟁을 처음 겪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대장군.”

바훌이 어느새 막사 안으로 들어와있었던 모양이었다. 바훌은 다음작전을 의논하기 위해 지휘관들이


카딜을 기다린다 보고하러 들어왔다가 타냐가 우는 모습을 본 것이다.

바훌의 말에 카딜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카딜의 맥빠진 모습에 바훌은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목례를
한 후 막사를 나갔다.

카딜은 바훌이 나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채 타냐만 뚫어져라 내려다 보고 있다.

1 시간 후 타냐는 깨어났다.

“타냐, 넌 여기서 기다려.”

“네?”

“아무래도 그게 좋겠어.”

“아뇨, 따라가겠습니다.”

“너 또 아까처럼 그렇게 넋이 나가서 울려고 그래?”

“아뇨, 이번에는 안그래요. 아까는 좀 충격을 받아서….”

타냐가 카딜의 옷깃을 붙들자 카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말 이번에는 안 울 자신있어?”

“네, 자신있어요, 절대 안 울어요.”

타냐가 다짐을 하자 카딜은 잠시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한번 믿어볼게.”

“감사합니다.”

타냐의 감사하다는 말에 카딜이 아직도 안심이 안되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안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는 더 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어?”

카딜의 말에 타냐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아까처럼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네, 카딜님.”
한편 로젠시아는 아직도 멀었느냐며 재촉중이었다.

“방금 최전방 병영으로 향하는 지름길인 나이브상류를 가로지른 르에타브릿지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이대로 가시면 카딜님께서 최전방을 되찾았을 때 그곳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공주님.”

그녀를 호위하는 부대의 부대장의 말에 로젠시아는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좀 더 서둘러봐.”

“지금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습니다 공주님, 여기서 더 빨리 갈 수는 없습니다.”

부대장의 말에 로젠시아는 마차의 창문을 짜증스럽게 닫아 버렸다.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그녀가 타고 있는 화려한 마차때문이라는 것을 부대장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무슨 전쟁터에 가면서 파티에 가는 사람처럼 드레스를 입은 것도 어이가 없는데 몇 벌의 여유분에


화장품과 그녀의 개인 목욕제품까지 챙기고 그녀의 시중을 들 하녀들도 3 명이나 데리고 가는 중이었다.

“공주면 단가, 젠장.”

혼잣말을 한 부대장은 마차의 마부에게 더 속력을 내라고 명령했다.

로젠시아가 그렇게 달려 오고 있는 것도 모르는 카딜은 타냐와 함께 두 번째 작전을 위해 진군했다.

나무다리에서 최전방 병영까지는 기마로 달리면 1 시간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남아 있는 3 천 5 백의 동대륙 연합군은 붉은 기사단 500 으로도 충분하여 나머지 군사들은 서두르지 않고


도보로 행군하여 오기로 했다.

1 시간을 내달린 결과 북대륙의 최전방 병영앞에 도착했다.

카딜은 병영의 게이트를 지키고 있는 군사들을 보았지만 그대로 진격하라 명령을 내렸다.

게이트를 지키던 군사들은 카딜의 말발굽아래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수비군들을 모두 처치한 카딜이
굳게 닫힌 게이트의 위쪽을 올려다 보았다.

게이트보다 두배로 높은 병영의 테라스에서 연합군의 대장 갈라스가 카딜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본 그가


소리쳤다.

“나는 북대륙 아클란제국의 붉은 기사단장 카딜 하에르다!”

카딜이 제 이름을 말하자 갈라스의 부하들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이트를 열어라! 그렇게 부하들 뒤에 숨어서 있을거라면 애초에 전쟁을 시작하지 말았어야하는 것
아니냐! 전쟁은 너희들이 먼저 시작했다! 지금 네가 있는 그곳은 북대륙의 병영이다! 나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고 이곳을 되찾을 것이다! 그렇게 숨어서 비겁자로 죽을 것이냐 아니면 나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겠느냐! 네 선택에 삶은 없다, 오로지 죽는 길밖에! 그러니 명예롭게 죽을 것인지 비굴하게 죽을
것인지만 선택하라!”

그러자 갈라스도 카딜에게 소리쳤다.

“나는 동대륙 최강왕국 고블린 제국의 갈라스 달타뉴 황자다! 네 말대로 전쟁은 우리가 먼저 시작했다!
하지만 아클란제국의 황제 알테베르가 우리를 북대륙의 속국으로 만들어 우리의 소중한 자산인 소금산을
통째로 삼키려 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연합군을 만들었다! 가만히 앉아서 우리의 고귀한
재산을 빼앗길 수 없으니까!”
“뭐?”

카딜은 처음 듣는 소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알테베르가 동대륙을 속국으로 만들려 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우리 동대륙은 평화를 원하지만 북대륙에서 우리를 속국으로 만들려한다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느니 차라리 목숨걸고 싸우다 죽겠다!”

“무슨 오해가 있는거 아닌가! 난 그런 소문을 들은적도 없다! 우리의 황제가 그런 계획이 있었다면
나한테 언질을 주었을것이다!”

“흥! 네 황제가 당신을 속였나보군!”

“뭐라고?”

카딜은 황제의 간악한 얼굴을 떠올렸다. 사실 그는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동대륙의 소금산을 가지고
싶어한 것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는 북대륙은 소금이 금화만큼이나 귀했다. 북대륙에는 동대륙에 있는 소금산 같은


것도 없었다.

“게이트를 열어주겠다! 난 비굴하게 죽고 싶지 않으니까!”

카딜이 황제의 간악함에 치를 떨고 있는 와중에 게이트가 열렸다. 그리고 동대륙 연합군이 카딜의 붉은
기사단쪽으로 진격해오기 시작했다.

카딜은 생각할 겨를이 없이 밀려드는 적군과 싸워야만 했다. 싸움은 카딜의 말대로 아까보다 더 처절했다.

동대륙 연합군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에 임했다. 그 모습에 카딜은 심정이 착찹해졌다.

하지만 자신의 본분이 있어 그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27 화

3 천오백명의 동대륙 연합군들을 모두 죽일 수 없다 생각한 카딜은 저들의 대장인 갈라스를 찾았다.

이미 천여명이 죽은 상태였다.

그 시간 갈라스도 이 전쟁에서 무고한 생명들이 모두 죽어나가겠다 생각했는지 카딜을 찾던 중이었다.

두 지휘관이 서로를 보며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에 바훌이 나팔수에게 지시했고 나팔수가 동작을 멈추라는
뜻의 나팔을 불었다.

그 소리에 아군은 물론 적군까지 동작을 멈추었다.

붉은 기사단원들은 죽은 사람은 없고 부상을 입은 사람은 많았지만 동대륙 연합군들은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일당백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갈라스는 제게 다가오는 카딜에게 외쳤다.

“카딜 하에르 대장군! 나와 1 대 1 로 겨루어 이 전쟁을 끝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원하던 바입니다!”
카딜의 말에 갈라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대장부였어. 소문이 맞았어. 저런 영웅의 검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겨야


하겠지.

바훌이 붉은 기사단에게 지시를 내렸다.

“원형경기장을 만들라!”

그의 명령에 기사단원들이 동그랗게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쪽 진영 절반을 그렇게 에워싸자 나머지는


동대륙 연합군이 원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이내 붉은 군복과 황색 군복이 반으로 나뉘어진 동그란 경기장이 생겼다.

“대결을 시작하기 전에 부탁이 있습니다!”

갈라스의 말에 카딜이 대답했다.

“하시죠!”

“만약 내가 이기면 더 이상 살생없이 길을 터주십시오! 그리고 황제의 목을 칠 수 있게 더 이상 방해하지


마십시오, 물론 그때가 되면 당신은 이미 죽었겠지만 그래도 당신 부하들에게 명령은 내릴 수 있지
않습니까!”

젊은 혈기의 갈라스의 말에 카딜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만약 당신이 이긴다면 그리하겠습니다만 그럴 일은 없지 싶습니다만!”

카딜의 말에 갈라스의 등줄기에 땀이 솟아 올랐다. 그의 명성도 명성이지만 지금까지 싸워본 결과 그의


말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갈라스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했다. 어차피 이 싸움에서 패자는 자신이 될 것을
알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절대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건 싸워보면 알겠죠, 그리고 한가지 더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 많군, 말하시오, 곧 죽을 목숨인데 그 정도 자비는 베풀죠.”

“만약 내가 지더라도 내 군대는 살려서 돌려보내주십시오! 내 목숨을 거두어 가는대신 내 백성들은


살려달라는 말입니다! 저들은 오직 내 명령을 따랐을뿐입니다!”

부하를 챙기는 마음이 카딜에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카딜도 자신의 부하를 잃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부하들이 죽지 않게 하기 위해 그는 더 열심히 싸워서 그들을 지켜냈다. 방금전 갈라스의 눈빛에서 카딜은


제 모습을 보았다.

묘하게 자신과 닮아 있는 갈라스가 마음에 들었지만 그는 적군이었다.

“좋소! 약속하겠소!”

카딜의 대답을 들은 갈라스는 참담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 보았다. 그러자 동대륙 연합군 군사들이 모두
그에게 경의를 표하듯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카딜은 살짝 감명받았다. 자신의 붉은 기사단만 그런줄 알았더니 동대륙의 연합군도 대장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 그것도 갈라스의 제국인 고블린 군사만 있는게 아니라 다른 제국들의 군사들도
있는데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에 감명을 받은 것이다.

“더 부탁할건 없습니까?”

카딜의 물음에 갈라스는 고개를 젖고 칼을 높이 들었다. 카딜은 갈라스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그의 레저렉션 소드(부활의 검)가 스러지는 오후 태양빛을 받아 피묻은 칼날이 붉은 빛으로 번득였다.

타냐는 저 싸움을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감히 나서지 못했다.

갈라스와 카딜이 서로를 향해 내달렸다. 허점이 많은 그의 동작이었다. 하지만 카딜은 단 한방에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갈라스의 공격을 방어만 여러번 하자 동대륙연합군들은 이기는가 싶어 함성을 내질렀지만 북대륙의


군사들은 조용히 감상만 했다.

그들의 눈에도 카딜이 봐주고 있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쉬익! 챙!

다시 한번 두 개의 칼날이 맞부딪히고 두 사람은 서로를 코앞에서 대치했다.

“왜 봐주시는겁니까?”

“내가 언제 봐줬다고,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봐주는건 더 치욕스러울뿐입니다!”

갈라스가 젊은 혈기로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그대야 말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 같군, 죽고 싶은건가? 그 죽음으로 당신 부하들을 살리려고?”

“!”

“왜, 내 말이 정곡을 찔렀나?”

카딜의 말에 갈라스가 기합소리와 함께 힘껏 검을 밀었다. 뒤로 밀려난 카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작 그렇게 할 것이지.”

“당신같은 사람이 왜 그 포악한 황제를 섬기는지 모르겠지만 정신 차리길 바랍니다, 알테베르는


악마입니다, 그것도 사악한 악마.”

다시 두 사람의 칼날이 맞닿았다. 카딜은 일부러 대치하는 상황을 만들고 물었다.

“정말 황제폐하께서 소금산을 차지하기 위해 동대륙을 속국으로 만든다고 했습니까? 그 정보는 어디서
들었습니까?”

카딜이 정말 모른다 알아차린 갈라스가 대답해주었다.

“원래 음흉하고 사악한 놈은 자기 부하도 속이는 법입니다, 특히 당신 같이 곧고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부하라면 더 숨기겠죠, 반대할 것이 뻔하니까.”
갈라스의 말에 뭔가 묵직한 것으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카딜이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알테베르가 사악한 놈인건 카딜이 가장 잘 아니까.

“이제 끝을 냅시다.”

말을 마친 갈라스가 이번에는 정말 카딜을 죽일 생각으로 검을 휘둘렀다. 어쩔 수 없이 카딜은 갈라스의


심장을 찔렀다.

크흑!

갈라스가 카딜의 칼에 맞은채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카딜이 레저렉션 소드를
확 잡아 빼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그는 앉은채 숨을 거두었다.

그때 타냐의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살려야 해!’

“뭐라고?”

조용한 가운데 타냐의 목소리가 꽤나 크게 들렸다. 사람들이 타냐를 쳐다보았고 타냐는 카딜에게 달려왔다.

“타냐, 왜그래?”

“살려야 한다고 했어요, 이 자를 살려야 한 대요.”

“뭐?”

타냐의 말에 놀라서 말문이 막힌 사이 타냐가 방금 숨이 끊어진 갈라스에게 팔을 뻗었다. 그런데 죽은줄


알았던 갈라스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지체하면 분명 죽을 것임을 알고 타냐가 갈라스를 눕히고 피가 쏟아지는 가슴에 손바닥을 펼쳤다.

동대륙 연합군도 북대륙 군사들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되지 않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타냐의 온몸이 하얀빛으로 쌓이고 잠시 숨이 끊어졌던 갈라스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왈칵 하고 그의 입에서 선혈이 쏟아진 후 그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타냐를 쳐다보았다.

하얀빛으로 휩싸인 타냐를 본 갈라스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혹시 당신은…..”

“나를 알아요?”

“아뇨, 그게 아니라 당신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을 알아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게 무슨 말이예요? 나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인데 지금은 죽었다는게 무슨 소리죠?”

“그보다 왜 저를 살린겁니까? 전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병사들을 살릴 수 있는데.”

“그보다 난 당신 대답이 필요해요, 내가 누구죠?”


타냐가 갈라스에게 바짝 다가가며 묻자 카딜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타냐,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카딜의 말에 타냐가 귀신에게 홀린듯한 눈빛으로 저를 보고 있는 군사들을 인지했다. 동대륙 연합군도


카딜의 붉은 기사단도 그리고 바훌까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믿지 못하는 눈빛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타냐 안의 타냐가 시키는대로 했는데 일이 커져 버린 것이다.

“카딜, 저 황자께서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나도 들었어, 일단 병영 안으로 들어가자.”

말을 마친 카딜은 갈라스에게 다가갔다.

“잠시 휴전합시다, 서로 할 말이 많은 것 같으니까.”

“그러죠.”

갈라스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그리고 카딜은 그의 붉은 기사단에게 휴전이라는 것을 알렸다. 두 나라의


군사들은 함께 병영 안으로 들어갔다.

다친사람들은 치료를 하기 시작했고 죽은 사람들은 땅에 묻어준 후 지친 병사들에게 음식도 나누어 주었다.

동대륙 군사들과 북대륙 군사들은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도보로 걸어오고 있는 북대륙의 병사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카딜은 타냐와 바훌을 지휘관이 머무는 내실로 들어오게 했다. 갈라스는 그의 호위무사로 보이는 남자와
함께 들어왔다.

죽어가는 갈라스를 살려준 타냐를 본 갈라스의 호위무사 에이단이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테일러가 부하 몇 명을 데리고 음식을 가져와서 테이블 위에 놓아 주고는 나갔다.

“일단 허기부터 달래지.”

카딜의 말에 갈라스가 인사를 하고 그와 마주보고 앉았다. 타냐는 허기를 채우기 보다는 아까 갈라스가
했던말이 궁금해서 미칠지경이었다.

“황자님, 아까 하셨던 말을 좀 자세하게 해주시겠습니까?”

카딜도 타냐를 말리지 않았다. 타냐못지 않게 그도 그 이야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바훌은 아직도 아까
타냐가 했던 그 성스러운 일이 믿어지지 않아 넋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그녀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줄이야.

그렇다면 혹시 지난번에 카딜님이 다쳤을때도 아밀리에가 아닌 타냐의 능력이었던 걸까?

바훌이 그런 생각을 할 때 갈라스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릴때부터 저를 돌봐주셨던 유모할머니가 계셨는데 그분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모두에게 비밀로 하라고 하셨고 제가 아프거나 다쳤을때는 두 손에서 하얀 빛을 내어 낫게 해주셨습니다.”
갈라스의 말에 타냐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분은 지금 어디 계세요?”

“아까도 말했듯이 돌아가셨습니다.”

갈라스의 침울한 표정과 말에 타냐의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분이 누구인가요? 어떻게 해서 그런 능력을 가지고 계셨는지 혹시 아세요?”

“그건 잘 모릅니다만 그쪽의 몸에서 생성되었던 그 하얀빛은 분명 절 치료해줄 때 보여줬던 유모할머니의


것과 똑같은 빛이었다는 건 장담할 수 있습니다.”

결국 타냐가 누군지 아는 것에 실패했다. 하지만 타냐는 갈라스에게 그 유모할머니에 대해 좀 더 물었다.


타냐 안의 타냐가 갈라스를 살리라고 한 이유가 분명 있을 터였다.

28 화

“대장군, 지금 이러고 있을때가 아닌줄로 압니다.”

바훌이 조심스럽게 카딜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지금 보병들이 도착할 시간이 다 됐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만 나누실게 아니라 뭔가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지금 이 모습을 황제폐하가 알게된다면 적군과 내통하는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바훌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지금 이곳을 향해 오고 있는 보병들은 방금전 상황을 모른다.

“알았다, 바훌, 기병 하나를 보내서 보병들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알아보게 하고 내게 보고하라.”

“예, 대장군님.”

바훌이 나가고 나자 카딜이 갈라스에게 말했다.

“상황정리를 해야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갈라스도 각오가 되어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카딜에게 집중했다.

“갈라스 황자의 말에 의하면 황제폐하께서 동대륙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정보는 절대 거짓 정보가 아닙니다.”

갈라스의 확고한 눈빛을 본 카딜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어나갔다.

“난 아직도 황제가 내게 그런 언질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 의심스럽지만 일단 황자의 말을 믿어 보겠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전제로 두고 말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을 볼모로 데리고 가야겠습니다.”

“예?”
“더 이상 무고한 백성들을 죽게 만들지 않게 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황자도 알다시피 알테베르
황제는 포악한 성품을 가졌습니다. 동대륙의 가장 큰 제국 고블린의 황자를 볼모로 잡고 소금산의 소금을
대가없이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돈을 주고 사왔지만 지금부터는 공짜라는 겁니다.”

“………”

갈라스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강자의 말에 반박하면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카딜 하에르 대장군은 나름 자비를 베풀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황제폐하에게 진군을 멈춘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황제가 원하는 것이 소금산이라고 했으니 일단
소금산의 소금을 무한정 가져다 쓴다는 것과 당신을 볼모로 잡는 것으로 이 전쟁을 종식할까 합니다. 혹시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약한 우리 동대륙이 강한 북대륙에게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갈라스의 표정과 말투에 타냐는 안타까웠다. 강국이 약국을 공격하는 것은 사자가
사슴을 잡아 먹는것과 다를바 없었다.

당하지 않으려면 강해지는 수 밖에 없고 살려면 강국에 머리를 조아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저를 볼모로 잡아 가시고 소금산의 소금을 마음대로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알테베르 황제가
만족할지가 더 궁금합니다. 그 자는 분명 이번 기회를 잡아 동대륙을 자신의 발아래 두려고 할텐데
말입니다.”

“그건 내게 맡겨 주시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우리 군사들에게 선포하겠습니다. 갈라스 황자는 황자의 군사들에게 이 협의 사항을


알리시죠.”

“예.”

자리에서 일어선 갈라스가 타냐를 쳐다보았다. 타냐도 갈라스를 쳐다보자 그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미스.”

“제 이름은 타냐예요, 그리고 인명은 제천이라고 했습니다. 황자님께서 살아나신 것도 하늘의 뜻이리라
믿습니다.”

“타냐님, 말씀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 타냐님 덕분에 살았으니 감사를 드리는겁니다.”

다시 한번 정중하게 인사를 한 갈라스가 자신의 군사들을 모았다. 그리고 방금전 카딜과 협의사항을
알려주며 급하게 서신을 작성해서 호위무사 중 한명에게 건네주었다.

“아바마마께 이 서신을 전해라.”

갈라스의 명을 받은 호위무사는 급하게 말등에 올라탔다. 갈라스는 나머지 군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에게
명령했다.

모두를 이끌고 동대륙으로 돌아가라고, 그리고 더 이상 연합군을 모집하지 말라고.


그렇게 동대륙 연합군이 떠나고 난 후 정찰보냈던 붉은 기사단이 돌아왔다.

“30 분 정도있으면 보병들이 도착합니다.”

정찰내용을 보고받은 바훌이 카딜에게 와서 그 사실을 보고했다. 카딜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30 분 후 도착한 보병부대와 지휘관은 이미 상황이 종료된 것을 보며 다시 한번 카딜의 실력에 감탄했다.

갈라스에게 한명의 호위무사를 허락한 카딜은 그 두 사람을 병영내에 있는 맨 끝방에 머물게 했다.

보초를 세울까 하는 바훌의 말에 카딜이 고개를 저었다. 갈라스를 오래 겪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는 절대


도망을 치거나 비겁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타냐가 죽어가는 그를 살려낸 것이 갈라스에게는 놀라운 경험이었던 것이다. 은혜를 꼭 갚겠다는 그


말은 그저 지나가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 그 말은 카딜에게 타냐를 위해 목숨도 바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황제폐하께 전갈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바훌의 건의에 카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그래도 오늘 이 상황을 전하고 이곳 최전방 병영에 주둔군을 보내달라 서신을 쓰려했다. 주둔군이
올때까지는 우리가 이곳을 지켜야 한다. 황제께 서신을 띄울 것이다 준비하라 바훌.”

“예, 대장군님.”

***

“하아, 카딜님….”

그날밤 타냐는 어김없이 카딜에게 안겨들었다. 카딜은 이제 이런 상황이 익숙해져 기다렸다는 듯 타냐를
안았다. 타냐는 일어나려는 카딜을 밀어서 눕히고는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이미 단단하게 부푼 카딜의
성기기둥을 음부로 비벼대며 그에게 키스를 해왔다.

카딜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키스를 받아 들여 혀를 뒤섞었다. 성기기둥을 비벼대는 그녀의


음순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며 찔걱이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애액이 묻어 미끈거리는 감각에 카딜의 뒷머리로 찌르르한 감각이 치솟았다.

타냐의 혀를 힘있게 빨아 당기던 카딜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손을 내려 제 성기를 잡았다. 타냐가


엉덩이를 살짝 들어주었고 카딜은 선단으로 이리저리 비벼대며 구멍을 찾다가 드디어 입구를 발견하고
힘을 주었다.

뻐근한 감각과 함께 치솟는 쾌감은 카딜의 이성을 단번에 잡아 먹었다. 굵은 성기가 타냐의 좁은 질구를
벌리며 안으로 쑥 밀려 들었다.

타냐는 제 혀를 뽑아 버릴 듯 빨아대는 카딜의 키스를 마다하고 상체를 세웠다. 그러자 삽입이 더


깊어졌다. 등을 활처럼 휜 타냐는 고개를 젖힌채 엉덩이를 아래위로 흔들기 시작했다.

또 다른 타냐는 평소의 타냐보다 색기가 충만했다. 카딜은 양쪽 다 만족스러웠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쪽 타냐와의 섹스 후 평소의 타냐는 기억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일까. 문제는 없다.
그쪽도 이쪽도 다 타냐니까.

그런데 왜 힘을 쓰고나면 이렇게 안달을 내는 걸까? 카딜은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타냐가 빠르게 몸을 흔드는 바람에 급격하게 쾌감이 솟구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제 검붉은 성기를 삼킨 타냐의 음부에서 하얀 거품이 일었다.

거대해진 카딜의 성기를 한껏 삼키고 움찔대는 모습에 절정은 아주 빨리 찾아왔다.

“하아…흐으읍, 타냐…하아.”

카딜의 성기가 살아있는 듯 꿈틀대며 타냐의 안에 파정했다. 하지만 카딜은 이제 시작이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카딜이 타냐를 엎드리게 했다.

타냐도 그걸 기다린 듯 야한 모습으로 돌아 앉아 엉덩이를 높이 들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음순이


벌럼대며 카딜의 성기를 기다렸다.

붉은 속살마저 움찔대는 모습에 카딜은 지체없이 제 선단을 그곳으로 찔러 넣었다.

또 다시 음탕한 소음들이 병영내실에 울려 퍼졌다. 침대 시트를 움켜쥔 타냐는 구멍이라도 뚫을 듯


파고드는 카딜의 성기로 인해 날카로운 교성을 쏟아냈다.

그렇게 한시간 가량 여러번 절정을 맛본 두 사람은 하나인 듯 알몸을 포갠채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새벽 동이 트기 직전 로젠시아 일행이 병영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게이트에서 보초를 서는 군사의 고함소리에 로젠시아를 모시는 황제의 호위무사가 소리쳤다.

“난 황제의 호위대 분대장이고 여기 마차에 타신분은 로젠시아 공주님이시다 게이트를 열어라!”

보초를 서던 군사는 깜짝 놀라 게이트를 열었다.

“귀하신 공주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쩐 일이신지.”

보초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허리를 숙이자 로젠시아가 마차의 창을 열고 짜증스럽게 말했다.

“피곤하니까 얼른 카딜님의 방으로 안내나 해.”

“아, 예, 공주님.”

보초는 분대장에게 알렸고 분대장은 빠르게 움직여 카딜의 방 앞에서 노크를 했다.

똑똑똑!

하지만 방금전 뜨거운 정사를 한시간 동안이나 나누었던 카딜은 타냐를 품에 안고 완전히 잠에 빠진
상태였다.

“대장군님! 대장군님!”

분대장이 방문을 더 세게 두드리며 카딜을 불렀을 때 겨우 카딜이 눈을 떴다. 타냐는 여전히 실신한 듯
깊이 잠든 상태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잠옷 가운을 여미며 카딜이 문을 열어 주었다. 짜증이 잔뜩 묻은 그를 보고 몸이 굳었지만 분대장은


로젠시아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뭐라고?”
“방금 로젠시아공주님께서 이곳 병영에 도착하셨습니다.”

“하아, 미친거 아냐? 여기가 어디라고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당장 대장군님 방으로 안내하라고 소리를 치셨습니다.”

“내 방에는 왜?”

“그거야 저도 잘은 모르…”

“그냥 다른 방으로 안내해, 나는 깊이 잠들어서 깨지 않는다 말하고.”

카딜이 문을 쾅 닫아 버리자 분대장은 안절부절 못하다가 할 수 없이 로젠시아에게 다시 왔다. 로젠시아는


오랜 여행으로 얼굴이 헬쑥해진 상태였다.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해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온 그녀는
분대장의 보고에 폭력까지 행사했다.

분대장의 정강이 뼈를 걷어찬 그녀가 소리쳤다.

“당장 카딜님 방으로 안내하라고!”

“그, 그렇지만 카딜대장군님께서 크헉!”

로젠시아가 옆에 섰던 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분대장의 목에 가져다댔고 분대장은 두 눈을


화등잔만하게 뜨며 숨을 멈추었다.

“죽고 싶어? 너 내가 누군줄 알기나 하는거야?”

“죄, 죄송합니다, 당장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분대장의 말에 로젠시아는 검을 휙 던져버리더니 그를 따랐다.

치렁치렁대는 드레스를 따라온 시녀들이 들어 올렸다. 돌계단을 돌아가면서도 왜 이리 방이 멀리 있느냐며


짜증을 쉴새없이 냈다.

그 모습을 본 황제의 호위부대원들은 욕도 못하고 어금니만 꽉 깨물었다.

똑똑똑!

“카딜 대장군님, 로젠시아 공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분대장의 알림에 카딜은 이를 아드득 갈고는 침상에서 내려섰다. 잠든 타냐에게 이불을 한번 더 덮어준
카딜이 문을 열었다.

“로젠시아 공주마마께서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입니까?”

카딜은 형식적인 예를 표하며 물었다. 로젠시아는 잠옷 가운 사이로 보이는 카딜의 가슴근육을 보고 침을


꼴깍 삼키고는 말했다.

“카딜대장군께서 이렇게 나라를 위해 고생하시는데 제가 조금의 위로라도 해드릴까 하고 왔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죠?”

로젠시아가 안으로 들어서다 침상에 보이는 긴 머리카락을 보고는 멈칫했다.

카딜은 그런 로젠시아를 느른한 눈빛으로 쳐다 보고 섰다. 마치 이제 봤으니 그만 나가줄래? 하는


눈빛이었다.

29 화

“이미 위로는 충분히 받았는데 그만 나가주시죠.”

카딜이 로젠시아의 팔을 잡아 문 밖으로 끌어냈다. 로젠시아는 한발 늦었음을 아쉬워했지만 크게


상관하지는 않았다.

“제가 좀 늦었군요, 하지만 이제 저 계집은 그만 내보내시죠, 앞으로 카딜님의 위로는 제가 책임질게요,


우리 어차피 결혼할 사이잖아요.”

“누구 마음대로 결혼을 합니까? 난 로젠시아님하고 결혼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이왕 오셨으니 하루
정도 피로를 푸시고 황궁으로 돌아가십시오.”

카딜의 말에 로젠시아는 질투심으로 금발머리카락을 한번 더 노려보고는 돌아섰다.

당장 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내서 죽여버리겠다 다짐하면서.

로젠시아가 물러가고 나자 카딜이 분대장에게 지시했다.

“다시는 로젠시아가 내 잠을 방해하지 않게 하라, 알았나?”

“예, 대장군님.”

분대장이 물러가고 나자 카딜은 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걸어 잠갔다.

***

병영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타냐는 제 알몸을 내려다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카딜의 키스자국으로
울긋 불긋했지만 그녀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또 다른 타냐는 왜 이렇게 하는걸까? 왜 치유의 힘을 쓰고나면 이렇게 카딜에게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것일까?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딱 맞아 떨어지는 답을 찾지는 못했다. 아니 찾았다고 해도 그건 말도


안된다 생각하고 지워버렸다. 타냐가 떠올린 해답은 다름아닌 에너지 보충이었다.

치유의 힘을 사용하고 난 후에는 기력이 떨어져 뭔가로 기력을 다시 체워야 하는데 그것이 카딜과의
성관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게 아니고서는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왜 카딜인지, 왜 이 남자와만


그게 가능한지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성관계로 떨어진 기력이 체워진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아닐 수 없었다.

카딜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타냐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었다. 머리를 동여매고 이마에 띠를
두를 그녀가 붉은 기사단 복장을 입은채 카딜의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 모습을 로젠시아가 보낸 시녀가 보고 있었다. 시녀는 붉은 기사단 복을 입은 타냐를 보고는


놀라서 로젠시아에게 달려갔다.

“뭐라고? 붉은 기사단 중의 하나였다고?”

“예, 그리고 그 기사단은 지난번 사냥대회에서 카딜님과 함께 왔던 그 여자 기사단이었습니다요.”


“하아, 그게 사실이야?”

“네,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요, 황금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 기사단의 얼굴을


제가 어찌 다른 사람과 혼동하겠습니까요.”

시녀의 말에 로젠시아가 벌떡 일어서더니 시녀지만 경호원 임무를 하고 있는 베리타를 불렀다.

“베리타, 당장 가서 그년을 죽여라.”

“예?”

“예 라니? 내 명령이 장난으로 들려?”

“아, 아닙니다, 당장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만 그 뒤처리를 어찌하실런지요, 붉은 기사단중의 한 명이면


막무가내로 죽일 수 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카딜님께서 아시면 어쩌시려고요.”

“그러니까 머리를 써야지 이 멍청아!”

로젠시아가 인격적인 모욕을 하자 베리타는 얼른 사죄부터 했다.

“분부를 내리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공주마마.”

그제야 화가 좀 풀린 로젠시아가 음흉한 눈빛으로 베리타를 가까이 오라고 했다.

***

한편 타냐는 병영내를 구경중이었다. 병영이라고는 하지만 작은 성과 같았다. 군대가 주둔하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을 돕는 평민들도 함께 생활하고 있어 마치 일반 동네를 구경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갈라스는 군대는 모두 죽였어도 평민들은 죽이지 않았다.

동대륙 연합군들이 점령한 후에는 저들의 시중을 들었지만 지금은 원래대로 북대륙 병사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아침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분주하게 주방을 오갔고 청소를 하는 사람들과 무기 정리를 하는 사람들 등등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우리 토디엘도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갑자기 토디엘 생각이 나서 타냐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예전처럼 걱정은 심하게 하지 않았다.
제 안의 또 다른 타냐가 토디엘은 무사하다는 말때문이었다. 이상하게 그 말에 신뢰가 갔다.

“안녕하세요!”

붉은 기사단복을 입은 타냐를 본 꼬마가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병사 중


한명과 결혼을 해서 태어난 아이인지 아이는 다섯 살 정도로 보였다.

어린아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그것 외에는 짐작되는 것이 없었다.

전쟁터에서도 사랑은 꽃피고 아이도 태어난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안녕, 꼬마야.”

“난 꼬마가 아닌데, 내 이름은 사무엘인데.”

“아, 미안, 사무엘, 안녕?”


타냐가 미안하다며 아이에게 인사를 하자 사무엘은 타냐의 허리에 찬 검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게 신기해?”

“네, 만져봐도 돼요?”

“그럼, 하지만 위험한거니까 살짝만 만져.”

“네.”

사무엘은 신기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타냐의 검집을 만졌다. 그때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아이를 부르자
사무엘은 얼른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실례합니다.”

멀어지는 사무엘을 쳐다보고 있는데 로젠시아의 시녀이자 경호원인 베리타가 타냐앞에 나타났다.

“누구?”

“저는 로젠시아 공주님을 모시는 베리타라고 하는 시녀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아니 근데 로젠시아 공주님이 이곳에 오셨습니까?”

“네, 새벽에 도착하셨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요?”

“공주님께서 잠시 보자고 하십니다.”

“저를요?”

“예,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카딜님에 대해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저한테요?”

“그렇습니다, 어서 가시죠.”

베리타가 타냐를 재촉하자 타냐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녀를 따라갔다. 병영의 뒷문을 빠져나와 가까이
보이는 언덕을 오르던 타냐가 멈추었다.

“저기, 베리타님, 어디까지 가시는건가요? 이 아침에 공주님께서 그리 멀리까지 가신겁니까?”

“아, 네, 아침 산책을 좋아하시거든요, 오랜만에 황궁이 아닌 다른 곳이라 마음이 들떠셔서 잠도


일찍깨신탓에.”

“아, 그렇군요.”

타냐는 아무래도 이상하다 여겼지만 그냥 베리타를 따랐다. 그렇게 또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언덕을 올라왔더니 병영건물이 발 아래 보였다.

땀이 흥건해진 타냐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베리타에게 물었다.

“공주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그러자 갑자기 안색을 확 바꾼 베리타가 품에서 단검을 빼들더니 타냐에게 빠르게 달려 들었다.

순간 타냐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움직여 겨우 단검을 피했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죠?”

“시끄럽다, 넌 죽어줘야겠어.”

베리타는 단검을 고쳐 잡고는 아까보다 더 빠르게 타냐에게 달려 들었다. 타냐는 그녀의 눈빛과 단검의
속도로 보아 저를 죽이려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고 검을 빼들었다.

같은 시간 카딜은 잠에서 깨어나 텅빈 옆자리를 보고는 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타냐 못봤느냐?”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보고하려 찾아왔던 바훌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안에 안계십니까?”

“안에 없으니까 묻는거지.”

“아, 그런데 전 못봤습니다만.”

“그래? 화장실에 갔나?”

“그런 것 같습니다. 여긴 화장실이 따로 있어서요, 제가 가보겠습니다.”

바훌의 말에 카딜이 얼른 그를 말렸다.

“어딜 가보겠다는 거야, 내가 갈테니까 넌 침상정리나 해.”

“아, 예, 대장군님.”

바훌이 얼른 인사를 하는 사이 이미 카딜은 화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바훌이 못말리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긴, 그런 엄청난 능력을 가진 분이니 함부로 대할 수는 없지.

바훌은 어제 갈라스를 살리던 타냐의 모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직접 보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신이
헛것을 보았나 싶을 정도로 신기한 모습이었다.

혼자 보았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일이었다.

“타냐, 거기 있어?”

카딜은 화장실 밖에서 안쪽을 보며 크게 말했다. 하지만 안에서는 다른 사람이 헛기침을 하며 인기척을
냈다.

화장실에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카딜은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 설마 아니겠지. 뒷모습이라 타냐인지
절대 알지 못했을텐데….

로젠시아를 떠올린 카딜은 고개를 저었다. 제발 로젠시아가 타냐를 불러들인 것이 아니길 바라며 그는
로젠시아의 숙소로 향했다.

“어머, 대장군님.”
로젠시아의 방을 지키고 섰던 시녀가 카딜을 보고 놀라서 인사를 했다.

“안에 공주님 계시지?”

“예, 대장군님께서 오셨다고….”

알리겠다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카딜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로젠시아는 잠옷차림으로 카딜을 보고는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카딜은 로젠시아보다 그녀의 방안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없다. 타냐는 없었다.

“카딜님, 아침 같이 들어요, 안그래도 아침 같이 먹자고 전갈을 보내려고 어맛!”

카딜은 로젠시아를 밀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로젠시아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를 아드득 갈았다.

“하, 그년을 찾으러 온 모양이지?”

혼잣말을 한 로젠시아는 시녀들에게 드레스를 가져오라 지시했다. 그때 카딜이 다시 문을 확 열고


들어왔다.

깜짝 놀란 로젠시아가 정신도 차리기 전에 카딜이 으르렁거리듯 뇌까렸다.

“만약, 공주가 한짓이라면 가만 있지 않을겁니다.”

“뭐, 뭘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공주께서 더 잘 알겠지요.”

뜻모를 말이었지만 로젠시아는 알아 들었다. 그러나 이미 저세상으로 갔을 타냐를 떠올리며 로젠시아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흥, 그 기사단 년이 뭐가 그리 중하다고.”

로젠시아가 그렇게 겁없는 소리를 하고 있을때 타냐는 그녀의 시녀 베리타와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검형
4 초식을 익힌 타냐는 베리타에게 절대 밀리지 않았다.

30 화

베리타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전쟁으로 잃은 붉은 기사단의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 작은 비무대회를


열었고 거기서 1 등했다는 여자치고는 실력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타냐 본인도 놀라는 중이었다. 검형 4 초식이라고 해봐야 붉은 기사단 일반 병사의 실력의 절반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이었다.

그런데 칼을 꽤 잘 다루는 베리타를 너무 쉽게 대하고 있다.

매일같이 검형을 연습했더니 그 사이 실력이 또 늘어난 것인가?

“이번엔 네 숨통을 끊어 버릴테다!”

베리타는 생각보다 뛰어난 타냐의 검술에 흥분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초조해지는 순간 그녀의
자세에 허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서 타냐를 죽일 생각에 방어도 없이 무작정 달려드는 베리타를 타냐가 단번에 제압했다.


쭉 뻗어 오는 단검을 든 손을 발로 걷어차면서 몸을 돌려 뒤차기로 배를 걷어찼다.

으윽!

배를 정통으로 맞은 베리타가 단검을 놓친 상태로 뒤로 나뒹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간 타냐가 그녀의 목에 칼끝을 겨누었다.

“사, 살려줘!”

이럴때는 죽여라 라고 말하는게 맞지 않나? 모시는 주인을 위해 그 정도 각오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이런 무모한 짓을 했다니. 타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왜 날 죽이려고 한거죠?”

“로젠시아 공주님께서 시켰어, 네가 카딜님의 침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거든.”

“뭐라구요?”

“알다시피 로젠시아 공주님은 카딜님의 정혼자야, 그런데 너 같은 천한 것이 감히 카딜님을 공주님보다


먼저 차지한 것을 공주님께서 보고계실 리가 없잖아?”

그랬구나. 내가 카딜님의 침실에서 나오는 것을 봤구나. 그런데 어떻게 봤지? 사람을 시켜 엿보고
있었나보네.

의문은 금방 풀렸다.

“당신을 살려줄테니까 나하고 같이 카딜님께 가야겠어요. 가서 로젠시아 공주님이 날 죽이려 했다는 것을


당신 입으로 증언해줘야겠어요, 할 수 있겠어요? 아니면 여기서 죽일 수 밖에 없어요.”

타냐가 검의 끝을 베리타의 목젖이 있는 곳에 가져다 댔다.

“하, 할게, 할테니까 살려줘.”

“좋아요, 그럼 같이 내려가죠.”

타냐는 베리타의 두 손을 등뒤로 돌려 그녀의 이마에 두르고 있던 천으로 묶었다. 베리타는 로젠시아
공주라면 이 상황에서 저를 구해줄 것이라 믿고 타냐가 이끄는대로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대장군님, 타냐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뭐?”

“그런데 로젠시아 공주님의 시녀 베리타와 함께 병영 앞마당에 계십니다. 그것도….”

“그것도 뭔데? 왜 말을 하다가 말아?”

“가서 보시면 알 것 같습니다. 저도 아직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몰라서요.”

바훌의 말에 카딜은 서둘러 병영 앞마당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빙둘러 싼 곳의 중심에 타냐가 로젠시아의
시녀 베리타의 두 손을 묶은채 무릎을 꿇려 놓았다. 늘 알고 있던 타냐가 아닌 듯 신기한 장면이었다.
“타냐, 무슨 일이지!”

카딜을 본 타냐는 로젠시아 공주가 저를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말을 베리타에게 하게 하려했다. 그런데


그때 로젠시아가 시녀들과 그의 호위무사들과 급하게 병영앞마당으로 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감히 내 시녀를 이런꼴로 잡아 놓다니?”

타냐를 쏘아보며 묻자 타냐가 일단 공주에 대한 예를 표했다. 그 모습을 노려보는 로젠시아는 아주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래, 타냐, 이게 무슨 일인지 어디 한번 말해봐.”

카딜까지 재촉하자 타냐가 말했다.

“여기 이 베리타 시녀의 말에 의하면 로젠시아 공주님께서 저를 죽이라고 하셨다는군요.”

“뭐?”

“뭐라고?”

카딜과 로젠시아가 동시에 되물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극명하게 달랐다. 카딜은 로젠시아가 그런 명을
내렸다는 것에 화가 났고 로젠시아는 자신이 그런 짓을 시키지 않은 것처럼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것처럼
놀라는 눈빛이었다.

“베리타, 당신이 말해보세요, 아까 나한테 했던 말 그대로 하시기바랍니다. 아니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것입니다.”

타냐의 당찬 모습에 카딜은 꽤 흥미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 베리타를 쳐다보았다.

베리타는 로젠시아와 눈빛을 교환했다. 로젠시아가 하지 말라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베리타는 살기 위해 진실을 말했다.

“맞습니다, 로젠시아님께서 제게 당신을 죽이라 명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뭐지?”

타냐가 일부러 물었다.

“그건 타냐님께서 카딜님의 방에서 크윽!”

그 순간 로젠시아가 옆에 섰던 호위무사의 검을 빼들어 베리타의 심장을 푹 찔렀다. 베리타는 로젠시아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타냐는 베리타를 살리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하지마, 안돼.’

그녀의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 능력을 로젠시아가 알면 안돼.’

그 목소리에 타냐는 뻗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죽어가는 그녀를 다시 살려 카딜 앞에서 로젠시아의 죄를


밝혀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감히 붉은 기사단원을 죽이려 했다니, 이건 역모에 가까운 중죄이다. 게다가 날 모함하려들다니, 네


과잉충성심이 낳은 결과를 나한테 뒤집어 씌우려 하다니.”

치를 부르르 떨며 심장에 꽂혔던 검을 빼내자 베리타의 가슴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치며 그녀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로젠시아는 제 얼굴과 옷에 튄 피를 보며 인상을 확 구겼다가 얼른 칼을 버리고 카딜에게 말했다.

“카딜님, 제발 오해 없으시길바랍니다.”

로젠시아의 놀라운 임기응변 대처능력에 카딜은 혀를 내둘렀다. 타냐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기 때문에


베리타의 말이 진실임을 그는 이미 알아차렸다.

하지만 로젠시아가 베리타를 죽여버렸으니 이젠 사실을 알아낼 방법마저 사라졌다.

“하긴, 로젠시아 공주님께서 타냐를 죽이라 명할 이유가 없겠군요, 안 그렇습니까?”

카딜은 이번기회에 로젠시아가 타냐를 죽이지 못하게 못을 박자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할 생각으로 말했다.

“그럼요, 제가 왜 그러겠습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베리타가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공주님께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베리타 혼자서 판단하고 제 핑계를 대고 저지른 짓이


아닐까 싶네요.”

“그렇군요.”

카딜은 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없음을 깨닫고 바훌에게 베리타의 시신을 치우라 명했다. 바훌은 부하에게
다시 지시를 내리고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해산시키라고 했다.

그렇게 로젠시아 공주의 악행은 어이없게도 마무리되었다.

“타냐, 내방으로 와.”

“예, 카딜님.”

타냐가 카딜과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본 로젠시아의 두 눈에 시퍼런 살기가 감돌았다.

“흥, 저 천한 것을 옆에 두고자 붉은 기사단제복을 입힌거였어.”

로젠시아는 타냐의 목을 당장이라도 조르고 싶었지만 일단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한편 방으로 들어온 카딜은 먼저 타냐를 끌어 안았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줄 알고 헤매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댄다.

“왜 말도 없이 나갔어?”

“그냥 병영 구경도 하고 바람도 쐴겸 나갔다가 베리타가 로젠시아 공주님이 날 보잔다고 하길래


따라갔었어요.”

“그랬군, 그래서?”

카딜은 타냐를 풀어 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침상에 나란히 앉으며 물었다.


“이상하게 병영뒤쪽에 있는 산으로 올라가길래 왜 이렇게 멀리가느냐고 했더니 공주님이 산새가 좋아서
산책중이시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전 아무런 의심없이 따라갔죠.”

“하아-, 그래서?”

“그런데 숲이 우거진 곳에 다다르자 갑자기 단검을 빼들고 날 죽이려고 했어요. 얼떨결에 막아내면서 나도
맞서싸웠죠, 그리고 제가 이겼어요. 헤.”

마지막에 헤벌쭉 웃는 타냐의 모습에 카딜이 대견한 표정으로 잘했다 칭찬했다.

“검술 연습을 매일같이 한 턱을 단단봤어요.”

“그러게, 앞으로는 더 열심히 가르쳐야겠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래서 제가 이겨서 손을 묶어서 끌고 내려왔죠, 로젠시아 공주님이 날 죽이려 했다는 것을 카딜님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돼버렸지.”

카딜의 말에 타냐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내 안에서 말리지만 않았으면 베리타를 살렸을텐데.”

“말렸어?”

“네.”

“아주 잘했네, 타냐의 능력을 공주가 알게되면 황제가 알게 되는건 시간 문제야, 앞으로도 네 안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겠다.”

“네, 그런데 붉은기사단과 갈라스와 그 무리들은 내 능력을 봤는데 비밀이지켜질까요?”

“입단속은 확실히 해놓았어,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봤다고 생각할거야, 그 일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었잖아.”

카딜의 말에 타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딜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걸테니까.

“그리고 타냐.”

“네, 카딜님.”

“앞으로는 그렇게 막 함부로 나다니지마, 내가 내 곁에서 1m 도 떨어지지 말라고 했던말을 잊은거야?”

카딜의 농담반 진담반 말에 타냐는 미안한 표정으로 피식 웃어보였다. 그때 노크소리가 나고 바훌이


들어섰다.

“조찬 준비가 다됐습니다.”

“그래, 알았다.”

카딜은 타냐와 함께 병영내에 있는 컨퍼런스룸으로 들어왔다. 지휘관들이 회의를 할 때 사용하는 큰 홀은


다함께 식사를 하는 곳이기도 했다.

갈라스가 카딜과 타냐를 보고 예를 표했다. 볼모로 잡힌 몸이지만 동대륙 고블린 제국의 황자이니 그
대우를 확실히 해주라 카딜이 명령했었다.
길게 이어진 돌로만든 테이블에 카딜과 갈라스가 나란히 앉았다. 카딜은 타냐를 옆에 앉히려다 로젠시아
공주가 들어오자 일단 타냐를 좀 멀리 앉게 했다. 그러자 로젠시아가 카딜의 곁에 앉았다.

공주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밥맛이 뚝 떨어졌지만 카딜은 표정관리를 하며 로젠시아에게 식사를 권했다.

갈라스는 타냐가 저 멀리 앉으려 하자 그녀를 불렀다.

“타냐님, 제 옆으로 오시죠.”

“아, 네, 갈라스황자님.”

타냐가 갈라스 황자의 옆자리에 앉자 황자가 그녀앞으로 음식들을 밀어 주며 말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타냐님.”

“아, 네, 감사합니다, 갈라스님도 맛있게 드세요.”

두 사람이 웃는 얼굴로 대화하며 식사를 하는 모습에 카딜의 심기가 뒤틀렸다. 로젠시아는 아무것도
모른채 카딜의 곁에 딱 붙어 앉아 교태스럽게 웃으며 샴페인을 권했다. 카딜은 타냐와 갈라스를 보다가
로젠시아가 샴페인잔을 채워주자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로젠시아는 카딜의 옆에 앉은 갈라스 황자를 유심히 쳐다보다 카딜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저 사람이 이번에 볼모로 잡은 갈라스황자군요.”

갈라스가 바로 옆에 있어서 제게 바짝 붙어 속삭이듯 묻는 로젠시아였지만 카딜은 그녀의 짙은 향수냄새에


미간을 구겼다.

31 화

“그냥 죽여버리고 동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지 그랬어요? 어차피 저들은 우리 북대륙의 상대가
안되잖아요.”

로젠시아의 말에 카딜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로젠시아가 그제야 자신이
너무 못된년으로 보였을까 싶어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어머, 제가 말이 좀 심했나요? 호호호, 제가 원래 이렇게 막 독하진 않은데.”

독하지 않긴, 독종중에 독종이면서.

카딜은 속으로 생각하고 그녀를 슬쩍 밀어내며 일어섰다.

“잠시 화장실 좀.”

“아, 네.”

로젠시아는 멀어지는 카딜을 아쉬운 눈빛으로 쳐다보다 갈라스에게 갑질을 하고 싶어 카딜의 자리로 왔다.

“고블린 제국의 갈라스 황자라 들었어요, 볼모로 잡히셨다면서요?”

“네? 아, 네, 그렇습니다.”

갈라스가 타냐와 이야기를 나누다 로젠시아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주제에 이렇게 무례해도 되는건가요?”

“네?”

“내가 누군지 모르진 않을테고 어째서 내게 예를 표하지 않는거죠?”

반말로 찍찍 내갈기고 싶은 것을 겨우 참으며 로젠시아가 갈라스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노려 보았다.


그러자 갈라스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로젠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로젠시아가
그의 손에 제 손을 턱 얹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고블린 제국의 황자 갈라스 달타뉴 로젠시아 드 파비앙드 공주님을 뵈옵니다.”

갈라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로젠시아의 손등을 그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
인사는 상대를 존경한다는 뜻이었다.

“손등에 키스해도 좋아요.”

그녀의 허락에 갈라스가 어금니를 깨물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그만 편하게 식사해요.”

로젠시아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괜찮으세요?”

타냐가 굳은 얼굴의 갈라스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공주의 말대로 저는 북대륙의 볼모인걸요, 이렇게 황자 대접을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타냐는 갈라스의 침울한 표정에 마음이 짠했다.

잠시 나갔다가 들어온 카딜은 타냐와 갈라스가 머리를 가까이 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두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타냐 옆에 앉아야 겠다 생각한 카딜은 그녀의 옆에 앉은 바훌을 보고는 그에게 성큼이며 걸어갔다.

“바훌, 옆으로 좀 가봐.”

식사를 하던 바훌은 갑자기 저를 밀치는 카딜 때문에 어리둥절했다가 옆에 타냐를 보고는 얼른 옆사람을


밀었다. 마치 도미노현상처럼 모든 사람들이 한 자리씩 물어나는 웃지못할 현상에도 카딜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타냐의 옆에 턱 앉았다.

그리고 바훌에게 뭔가 의논하는척 말을 걸었다.

“음식 맛이 어떠냐?”

“예?”

바훌은 카딜의 질문의 진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벙찐 표정을 짓다가 대답했다.

“아, 맛있습니다.”

“맛있긴, 맛없잖아.”
“아, 뭐, 먹을만 하다는 뜻이었습니다.”

바훌이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할 때 카딜의 한 손은 뒤로 뻗었다. 그리고 타냐의 허벅지를
잡았다.

흠칫 놀란 타냐는 제 허벅지를 잡은채 등을 지고 있는 카딜을 보며 피식 웃었다.

로젠시아는 바훌과 뭔가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카딜을 보며 입술을 비죽였다.

졸지에 혼자 동떨어져 앉아 식사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부하와 뭔가 진지하게 상의를 하고


있는 카딜을 부를 수도 없었다.

“먹을만 하다는 건 무슨 뜻이지? 마지못해 먹는다는 뜻인가?”

“글쎄요, 그건 그러니까….근데 카딜님 지금 이거 뭐하는 겁니까?”

“뭐하긴 너하고 농담 따먹기 하면서 타냐 몸 만지는 짓이지.”

“헐.”

“놀랄필요 없어, 계속 이야기 하는척 해, 그것도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알았지?”

바훌은 카딜의 뒤로 돌아간 손이 타냐의 허벅지를 만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하긴 로젠시아가 옆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고 있으니. 카딜의 성정에 대놓고 로젠시아를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침에 카딜의 방에서 나오는 타냐를 죽이라 명령했던 로젠시아를 생각하면 아무리 막무가내인 카딜도
조심해야 할 것이다.

“공주는 언제 황궁으로 돌아가지?”

“내일이면 가지 않을까요?”

“내일은 안돼, 오늘 꼭 돌아가게 만들어라, 알았냐?”

“제가요?”

“그럼 내가 하리?”

“아니 제가 무슨 수로 공주님을 오늘 황궁으로 돌아가시게 한답니까?”

“네 능력을 한번 보겠다.”

“카딜님, 그건 불가능합니다, 로젠시아공주님은 아마 카딜님이 황궁으로 돌아갈때까지 버티려 할겁니다.


내일 돌아가시게 하는것도 의문인데 오늘 이라뇨?”

“그러니까 네 능력을 보겠다고 하는거잖아.”

“그러지말고 카딜님께서 능력을 발휘해보심이….”

“너 지금 개기냐?”

“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카딜의 살기등등한 눈빛에 바훌은 얼른 앞에 놓인 샴페인을 들이켰다.

그렇게 어디 하나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카딜은 타냐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타냐는 한손으로
포크질을 하다가 내려놓고 다시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써는 대단한 기술을 선보이며 카딜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때 하필 갈라스가 샴페인을 권했다. 타냐는 얼른 카딜의 손을 떼어내고 잔을 들었다. 그러자 카딜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는 이번에는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고개는 여전히 바훌을 보면서.

그러나 로젠시아는 등뒤로 돌아간 카딜의 팔을 눈치채고 갈라스의 등뒤로 시선을 보냈다. 타냐의 허리에
감긴 카딜의 팔을 본 로젠시아는 포크로 스테이크를 콱 찍었다.

그리고 마구 짓이기기 시작했다.

“고기가 왜 이렇게 질겨, 짜증나게.”

그녀가 포크로 고기를 난도질하자 당황한 시녀가 얼른 다른 고기를 구하러 주방으로 내달렸다.

***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원.”

황제 알테베르는 금서를 펼치고 읽어내려갔다.

“멸망의검과 부활의 검이 맞닿으면 새로운 세상이 탄생하리라.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대제사장 비숍도 아리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황제폐하. 송구스럽습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비숍을 노려보던 알테베르가 다시 금서의 다음장을 넘겼다.

“잠자던 눈동자가 눈을 뜨면 잠자던 의식이 깨어나고 하늘과 땅을 뒤집을 기운이 땅에서부터 흘러나와
하늘을 뒤덮을 것이다. 미친, 이게 도대체 무슨 헛소리라더냐?”

“글쎄요, 저는…”

비숍이 또 고개를 갸웃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알테베르가 금서를 확 던졌다.

“별 것도 아닌데 유난스럽게 금서니 어쩌니 떠들어댔던건 아닐까?”

“그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건 저희 신전에서 100 년동안 밀실에 가두어 두었던 금서이옵니다. 설마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봉해놓았을 리가 없습니다요. 아무래도 다시 밀실에 넣어 두는게 나을 것
같습니다.”

비숍이 바닥에 널부러진 금서를 집어 들었다.

황제 알테베르는 그러든가 말든가 하는 식으로 하품을 길게 하고는 시종장 스탈드를 불렀다.

“예, 황제폐하.”

“동쪽 병영으로 보낸 군사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더냐?”


“오늘 밤이면 도착한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그래? 그럼 로젠시아는?”

“공주님은 어젯밤에 도착하여 이미 하루를 그곳에서 지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자신의 턱을 만지며 알테베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카딜을 제 남자로 만들었는지 궁금하네. 쯧. 테크닉이 좋다고 했으니 카딜이 고자가 아니고서야
로젠시아를 마다하진 않았겠지.’

알테베르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카딜이 로젠시아와 결혼을 하고 자신과 인척관계가 되면 더 이상 자신을 배신할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후 마음을 합쳐 동대륙을 치면 자신은 북대륙뿐만 아니라 동대륙까지 차지한 역대 최고의
황제가 될 터였다.

이미 동대륙 연합군을 동쪽 경계선까지 밀어넣고 동대륙의 최강국인 고블린 제국의 황자를 볼모로 잡고
있으니 동대륙이 제 손안에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하하하하하.”

갑자기 황제 알테베르가 미친 듯이 웃자 스탈드와 다른 시종들이 어찌해야할지 몰라하며 서로 눈길을 주고


받았다.

드디어 저 황제가 미쳤나 하는 눈빛들이었지만 누구도 황제에게 왜 웃느냐 묻지 않았다.

알테베르는 앉아 있는 소파의 팔걸ㅈ이를 쾅쾅 내리치며 한참을 그렇게 통쾌하게 웃었다.

***

한편 식사를 마친 카딜은 모두에게 자유시간을 주고 자신은 타냐와 함께 거처로 돌아왔다. 로젠시아는


카딜과 타냐가 나란히 걸어가는 것을 보고도 어쩌지 못하고 제 숙소로 돌아와 괜히 시녀들에게 짜증만
부려댔다.

방으로 들어온 카딜은 타냐를 거칠게 침대로 밀어서 눕혔다.

깜짝 놀란 타냐가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카딜이 그녀의 몸위로 올라오며 조금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갈라스하고 너무 가까이 지내는거 아냐?”

“네?”

“갈라스는 적국의 황자야, 그리고 남자야, 널 보는 갈라스의 눈빛이 영 마음에 안들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너무 다정하게 식사를 하더군.”

질투의 화신같은 카딜의 눈빛을 본 타냐가 그제야 빙긋 웃으며 그의 목을 두 팔로 휘감으며 말했다.

“제게 남자는 카딜님 뿐인데요?”

그녀의 말이 마음에 쏙 들었지만 카딜은 한번 더 타냐에게 경계를 주기 위해 일부러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그런 말로 아까의 그 상했던 속이 풀어질 리가 없어.”

“속이 상하셨어요?”

“응, 아주 많이 상했어,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할거야?”

“그렇다면.”

타냐가 잠시 카딜의 뺨을 어루만지더니 손을 아래로 내렸다.

“위로해 줄게요.”

“읏, 그렇다고 그렇게 바로 잡아 버리면 내가 당황하잖아.”

“당황하는거 보고 싶어서 일부러 그랬는데요?”

“허, 이젠 도발까지?”

카딜은 날로 발전하는 타냐의 색기가 흐뭇한 듯 약간은 장난스럽게 타냐의 두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으읏. 아파요.”

타냐가 미간을 구기자 카딜이 그녀의 군복을 헤집듯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놈의 군복은 너무 벗기기가 힘들어 쯧.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낸 카딜은 급하게 바지부터 벗겨 내리고는 타냐의 두 다리 사이에 얼굴을 내렸다.

갑자기 그의 혀가 타냐의 클리토리스를 쓸어 올리자 타냐가 허리를 바르르 떨며 엉덩이를 뒤틀었다. 훤한


대낮에 야한 교성을 흘리며 카딜과 하는 섹스에 타냐의 이성도 점점 흐려졌다.

32 화

“카딜님.”

“응?”

한바탕 그와 미친 듯이 몸을 섞은 후 타냐는 내내 마음속에서 맴돌기만 했던 말을 꺼냈다.

“갈라스 황자한테 그 유모할머니에 대해서 좀 더 물어보고 싶어요.”

타냐의 말에 카딜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체없이 대답했다.

“나도 궁금한게 좀 많았었어.”

“정말요?”

“그래, 너처럼 하얀 빛을 이용하여 상처를 치유했다는 말은 너와 분명 어떤 연관이 있다는 뜻이잖아.”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돌아가셨다고 하는 말에 더 이상 묻지 못했었거든요.”

카딜은 다시 붉은 기사단 제복을 차려 입은 타냐를 보며 아쉬운 표정으로 그녀의 허리끈을 조여주며


물었다.
“그럼 갈라스를 불러올까? 비밀스러운 대화니까 여기가 좋지 않겠어?”

“좋은 생각이예요.”

잠시 후.

갈라스가 방으로 들어오자 타냐는 준비했던 차를 내왔다. 돌로 만들어진 조금은 투박해보이는 테이블위에
조심스럽게 차주전자를 내려놓은 타냐가 카딜의 옆자리에 앉았다.

찻물이 좀 더 우러나게 하기 위해 그대로 둔채 카딜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러자 카딜이 갈라스를 이곳에
오라고 한 연유를 설명했다.

“전에 유모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를 좀 더 상세하게 듣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아, 네.”

갈라스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 평온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타냐가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른 후 갈라스 앞에 놓아주었다.

“드세요. 민트와 레몬을 섞은 차예요.”

“감사합니다.”

갈라스가 감사하다 말하고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일 때 카딜에게도 차를 따라주는 타냐였다. 그녀의


신경은 갈라스에게 갈 수 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그렇게 몇 초간 차를 음미했다. 작은 찻잔을 다 비우고 새로운 차를 따를 때 갈라스가 입을


열었다.

“유모 할머니는 제가 아주 어릴때부터 제 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하시지 못했습니다.”

“!”

“!”

뜻밖의 말에 타냐도 카딜도 흠칫 놀라며 갈라스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유모할머니와의 대화는 그저 눈빛이나 손짓 발짓 등등으로 했었습니다. 하지만 답답하지 않았어요,


유모할머니는 그저 제 수발을 드는 것이 주요업무였거든요.”

“그럼 어떻게 해서 그곳에 들어왔는지 왜 말을 하지 못하는지, 그것이 선천적인지 아니면 후천적인


사고였는지도 모르겠네요?”

“어렸을때는 몰랐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시종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은적은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타냐가 조급함을 누르지 못하고 다그치듯 물었다가 얼른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갈라스는
이해한다는 듯 그녀의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북대륙에서 왔다는 것과 고문을 당해서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제 유모가 된 것은


어마마마의 눈에 띄셨기때문이라 들었습니다.”
그 할머니가 어떻게 해서 갈라스의 어머니눈에 띄었는지는 타냐가 물을 필요도 없이 그가 이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갈라스의 부친이 고블린제국의 황제가 되기전 어느 귀족가의 티파티에 초대되었던 그의 어머니가 돌정도
지난 갈라스를 무척 잘 돌보는 것을 보고 돈을 주고 사들였다고 했다. 마침 유모를 구하던 중이었고 그
할머니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장점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워낙 말이 많은 귀족가라 말을 못하는
하녀나 일꾼들은 오히려 귀족가에 인기가 있었다고 했다. 비밀스러운 일이 밖으로 새나갈 일이 없기
때문에.

그후 얼마지나지 않아 황족의 피를 물려 받았던 부친이 고블린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갈라스는 황자가


되었다고 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을 타냐는 특별히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해 아쉬웠지만 유모할머니의 능력이 궁금해졌다.

“그분은 전에 말씀드린대로 그저 넘어져서 까진 상처라든지, 감기같은 가벼운 질병에 걸려 아파할 때


고쳐주는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제가 심하게 아플때는 힘들어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연세가
있으셔서 몸이 쇄약하신탓이 아닐까 싶네요. 저를 한번 고쳐주고 나면 그 다음날부터 며칠 동안은
식은땀을 흘리시면서 힘을 못쓰셨거든요, 그래서 급할 때 저한테만 그 능력을 쓰셨던 것 같습니다.”

타냐와 카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갈라스가 이제야 생각이 난 듯 살짝 좁아진 미간으로 말했다.

“어쩌면 그 능력을 너무 쓰셔서 돌아가신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카딜이 갈라스의 말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냐하면 타냐가 능력을 사용하면 그
유모할머니처럼 수명이 짧아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불현 듯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유모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 그 이유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게 뭡니까?”

타냐도 갈라스의 말에 관심이 갔다.

“그날 제가 열병을 앓았었거든요, 치유마법을 사용하는 황궁의사가 다녀갔지만 열이 내리지 않았었습니다.


그대로 3 일이상 열이 내리지 않으면 사망할 확률도 높다고 황궁의가 말했었는데 그날밤 유모할머니가
제게 모든 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다음날 저는 열이 모두 내려 거뜬하게 일어났지만 그날 이후
유모할머니는 몸져 누우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시지 못하시고 세상을 뜨셨습니다. 제가 열이
내린지 한 일주일 쯤 후에 말이죠.”

“그렇다면 치유능력을 사용하면 수명이 줄어든다는 것입니까?”

카딜의 물음에 갈라스는 100% 자신은 없어하는 눈빛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갈라스의 대답에 카딜은 타냐를 쳐다보았다. 그때 갈라스가 물었다.

“타냐님, 혹시 저를 그렇게 살리신 후 몸이 아프다거나 하시진 않았습니까?”

“아, 그게….”

타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를 잘 아는 카딜이 대충 얼버무렸다.

“타냐는 그런적이 없습니다.”

능력을 사용한 후 미친 듯이 카딜에게 달려들어 격렬하게 섹스를 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입니다.”

갈라스는 정말 안도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조심하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아직 젊어서 그럴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갈라스의 걱정하는 말에 타냐가 조금전 야한 생각으로 붉어진 얼굴로 얼른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다시 대화는 끊어지고 남은 차를 다 마신 갈라스가 일어섰다.

“달리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십시오, 그리고 혹시 불편하신게 있으시면 호위무사를 보내 알려주십시오, 최대한 불편함 없이


해드리고 싶으니까요.”

“현재는 불편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볼모인 절 이렇게 알뜰히 살펴주셔서 감사할따름입니다.”

“볼모지만 한 제국의 황자시지않습니까, 당연한 거라 여깁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갈라스가 목례를 하고는 물러갔다. 갈라스가 나가고 나자마자 카딜이 타냐를 이끌고 소파에 앉았다.

“타냐, 혹시 치유마법을 사용한 후 내게 달려드는 것이 에너지 보충인걸까?”

카딜의 말에 타냐가 잠시 눈꺼풀을 깜빡이며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럴수도 있겠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치유능력을 사용했을때마다 제 기억이 사라졌어요, 그 기억이


사라진 동안에는 어김없이 당신을 덮쳤구요.”

“그럼 내가 당신의 에너지원이라는 건가?”

“그런 것…..같아요.”

타냐의 대답에 카딜이 갑자기 어깨에 힘을 주고 말했다.

“그럼 나한테 잘보여야 하는거네?”

“그게 또 왜 그런 쪽으로….”

타냐가 인정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웅얼거렸지만 카딜은 이미 그가 그녀의 에너지원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뭔가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한테 잘해, 안그럼 에너지를 안주는 수가 있으니까.”

아직 확실치도 않은데 확신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카딜의 모습에 타냐의 입술이 비죽였다. 그때 카딜이
타냐를 와락 끌어 안았다.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하는 눈빛으로 타냐가 놀랄 때 카딜이 안도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타냐 너도 그 유모할머니처럼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을지


모르잖아.”
카딜은 진심으로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동시에 되도록 타냐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실 자신이 그녀의 에너지원이라는 것이 그럴지도 모른다 라는 것이지 아직 확실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설령 타냐와 자신의 육체적 교합으로 그녀의 에너지가 충전된다고 할지라도 자제해야할 필요가
있다 생각했다.

만약 아닐 경우 어느날 갑자기 타냐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도 끔찍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이제는 그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 힘들 것 같았다.

카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한채 타냐는 그의 품에 안겨 코끝으로 파고드는 그의 체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

그날 밤.

황제가 보낸 지원병들이 도착했다. 1000 명의 주둔군들이 도착하면서 갑자기 동쪽최전방 병영이


시끌벅적해졌다.

동대륙 연합군을 단번에 무찔렀고 고블린 제국의 황자를 볼모로 잡았다는 것에 병사들은 완전히 긴장이
풀린채 새벽까지 마시고 먹고 하다 동이 트기 직전에 겨우 잠이 들었다.

카딜도 타냐를 안고 숙면에 빠져든 시간이었다. 그때 희뿌연 새벽공기를 가르고 하얀색의 물체가 병영쪽
건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화이트고스트였다. 동쪽 최전방 병영인 이곳은 가끔씩 화이트고스트가 나타나곤 했었지만
지난 1 년정도는 전혀 나타나지 않아 저들이 아지트를 옮겼다 생각했었다.

화이트고스트들은 술에 취해서 잠든 병사들에게 달려 들었고 숙면에 빠져든 병사들은 작은 신음소리하나


내지못하고 피륙이 상접한 미이라로 변해갔다.

아무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카딜은 뭔가를 느끼고 눈을 떴다.

본능적으로 창밖으로 시선을 보낸 카딜은 하얀물체가 휙 지나가는 것을 보고 화이트고스트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타냐, 일어나.”

카딜이 조용한 목소리로 타냐를 먼저 깨우고 침상 옆에 세워둔 레저렉션 소드(부활의 검)를 들었다.

“왜 그래요?”

타냐는 카딜이 급하게 옷을 챙겨 입는 것을 보고는 그녀도 옷부터 챙겨입으며 물었다.

“화이트고스트야, 사방에 깔렸어.”

“그, 그럼 병사들을 깨워야 하잖아요.”

“안그래도 지금 그럴 생각이야.”

카딜은 창문을 열고는 구석에 놓여 있던 커다란 물항아리를 던졌다. 장정 두 명은 있어야 들어 올릴 수


있는 거대한 도자기 항아리를 혼자서 들어 올린 그였다.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벼락같이 크게 들리자 잠들었던 사람들의 절반이 깨어났다. 카딜의 방 앞에서 잠시
잠이 들었던 바훌이 깨어났다.

“대장군님! 화이트고스트입니다!”

“알아, 어서 병영 꼭대기에 있는 비상종을 울려라! 이대로 있다간 전멸당할지도 몰라!”

“예!”

바훌이 병영의 꼭대기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내달릴 때 로젠시아의 방쪽에서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이런 제길! 타냐, 여기서 꼼짝도 하지말고 있어 알았지?”

“아, 알았어요!”

타냐의 대답을 들은 뒤 카딜은 로젠시아가 머무르는 방쪽으로 달렸다. 눈앞에 나타나는 화이트고스트들은
카딜의 검날에 먼지처럼 산화되었다. 타냐는 겁에 질려 검을 들고 구석쪽에 쪼그리고 앉았다.

하지만 어느새 사람냄새를 맡은 화이트고스트들이 카딜의 방쪽으로 우르르 몰려 들었다.

33 화

하얀 물체가 로젠시아를 향해 달려들자 시녀하나가 그 앞을 가로 막아섰다. 그 순간 시녀의 몸이 점점


말라들어가기 시작했다.

“공주님!”

문을 박차고 들어온 갈라스가 시녀의 피와살을 빨아들이는 화이트고스트의 중심을 가르며 달려 들었다.

파삿!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화이트고스트는 먼지로 변해서 허공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또 다른 놈이


달려들었다. 로젠시아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뒤에 숨었다. 세 마리의 화이트고스트가 갈라스를 삼면으로
에워싸고 일시에 달려들려 할 때 카딜이 나타났다. 갈라스의 호위무사도 제게 달려드는 화이트고스트를
겨우 죽이고 주군을 호위하기 위해 달려왔다.

세명의 무사가 세 마리의 화이트고스트를 한꺼번에 처치했다.

같은 시간 타냐는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삐걱이기 시작하자 들고 있던 검을 꽉 쥐며 천천히 일어섰다.


놈들이 달려들면 무조건 검을 휘두를 생각으로.

덜컥, 덜컥,

문고리가 헐거워지는 소리가 나기시작하자 타냐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두 눈을 부릅떴다.

화이트고스트라고는 하지만 일종의 마물이라고 들었다. 검으로 놈들의 한가운데를 가르면 죽는다고
알고있었기에 타냐는 검형 4 초식을 떠올리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문고리는 떨어져나가고 나무로된 문이 활짝 열렸다. 일시에 밀려드는 하얀


무리들을 본 타냐는 도망갈곳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두 눈을 부릅떴다.

“덤벼, 나도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을거야.”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비장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화이트고스트는 타냐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타냐를 가운데 두고 사방을 에워싼
하얀물체들은 갑자기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타냐의 방안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이곳을 덮쳤던 모든 화이트고스트들이 힘을 잃고 흩어져버린 것이다.

잔뜩 긴장하여 한바탕 싸움을 벌이려 했던 타냐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멍한 눈동자를 끔뻑였다.

카딜과 갈라스와 그의 호위무사 에이단도 갑자기 사라진 화이트고스트들로 인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하아, 카딜님! 절 구하러 오셨군요!”

로젠시아는 화이트고스트가 사라지자 그 핑계로 카딜의 품에 안겨들었다. 작위적으로 몸을 벌벌떨며 그가


밀쳐내지 않게 했다.

“죽는줄 알았어요, 이렇게 날 살리러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카딜님, 흑흑.”

뒤늦게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카딜은 쓴입맛을 다셨다. 벌벌떨며 울어대는데 밀어내지는
못하겠고 미칠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놈들이 사라진걸까요?”

갈라스가 검을 거두고 카딜에게 물었다.

“글쎄요, 나도 그게 이상하다 생각중입니다.”

“혹시 카딜님을 보고 놀라서 도망간걸 아닐까요? 놈들도 카딜님의 기에 눌린거겠죠.”

로젠시아의 말에 카딜은 그녀를 슬며시 밀어내며 말했다.

“그럴리가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카딜이 저를 밀어내자 떨어져 나가지 않으려 버티는 로젠시아였다. 그러자 카딜이 힘을 더 주어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병사들의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공주님을 보호하고 있겠습니다.”

갈라스의 말에 로젠시아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감히 볼모로 잡힌 주제에 자기가 무슨 뭐라도


되는줄 착각하는 모습때문이었다. 갈라스가 카딜보다 더 빨리 달려와 자신을 위해 화이트고스트와
싸웠다는 것은 벌써 잊어버린채 말이다.

“그럼 당분간 부탁하겠습니다. 놈들이 다시 올지 모르니 말입니다.”

“염려마십시오, 여긴 저와 에이단이 지킬 것입니다. 그런데 타냐님은 괜찮으신겁니까?”

“!”

갈라스의 말에 갑자기 타냐 생각이난 카딜이 급하게 로젠시아의 방을 나갔다.

그 모습을 본 로젠시아는 어젯밤부터 곰곰이 생각했던 계략을 진행해야 겠다 다짐했다.


***

“타냐!”

카딜이 자신의 부서진 방문을 보고는 하얗게 질려서 타냐를 부르며 안으로 들어섰다.

“카딜님!”

카딜을 본 타냐는 기쁨과 반가움에 그에게 달려 들었다. 달려오는 타냐를 품에 안은 카딜은 그녀가 어디
다친곳이 있나 없나부터 살폈다.

“화이트고스트가 왔었어? 문이 왜 부서져있는거지?”

“왔었어요, 그것도 엄청난 무리들이.”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바훌은? 다친데는 없어? 놈들은 어디로 갔지?”

수도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타냐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자 카딜이 그제야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타냐의 말을 기다려주었다.

“이상했어요.”

“뭐가?”

“나한테 공격하지 않고 날 빙 둘러싸고 있다가 갑자기 사라졌어요.”

“뭐?”

“마치 나하고는 적의가 없다는 듯 보였어요. 나는 잔뜩 긴장하고 싸울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래?”

“네. 참 이상하죠?”

“그럼 혹시 놈들이 갑자기 사라진게 타냐 때문일까?”

“!”

타냐도 놀라서 카딜을 쳐다보았다.

“싸우는데 갑자기 모두 사라져버렸거든.”

카딜의 말에 타냐는 뭐라 할 말을 못 찾고 파란 눈동자만 반짝였다.

“어쨌든 네가 무사한걸 보니 마음이 놓인다. 바훌 이 자식은 어딜 간거야?”

카딜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릴 때 바훌이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넌 종을 울리라고 했는데 도대체 뭐한거냐?”

“계단을 올라가는데 놈들이 하도 많이 나와서 싸우느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종을


칠 필요도 없이 말입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어.”

카딜의 말에 바훌은 혹시 싶어 그의 옆에 서있는 타냐를 보며 물었다.

“그럼 이번에도 타냐님의 힘입니까?”

“제가요?”

타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훌을 볼 때 카딜이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타냐에게는 달려들지 않고 주위만 맴돌다가 사라졌다고 하니 말이다.”

카딜의 말에 바훌은 다시한번 타냐를 존경심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도대체 저 여자의 능력은 어디까지일까 하는 눈빛이었다.

“바훌, 일단 우리의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부터 살펴봐.”

“예, 대장군님.”

바훌이 얼른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로젠시아 공주님은 무사하시죠?”

“응, 갈라스 황자가 먼저와서 공주를 구했어.”

“갈라스 황자께서요?”

“응, 볼모지만 그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사람인 것 같아.”

“그런데 질투했어요?”

“뭐?”

카딜은 타냐의 눈꼬리가 가늘어지자 흠흠 헛기침부터 했다.

“내가 무슨 질투를 했다고?”

“카딜님도 저처럼 단기 기억상실증이신가봐요, 뭐 기억이 안나신다면 어쩔 수 없죠.”

타냐가 모른척 넘어가주자 카딜은 괜히 멋쩍어서 다른 소리를 했다.

“같이 병영이나 둘러보자.”

“네, 좋아요.”

아침은 이미 밝았고 두 사람은 모닝데이트를 하듯 밖으로 나왔다. 카딜은 타냐를 호위무사처럼 옆에


세우고 병사들의 피해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크게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열명정도되는 시신을 묻어주고 조의를 표했다.

***

“이제 주둔군도 도착했고 하니 우리는 황궁으로 돌아간다.”


카딜의 말에 붉은 기사단은 기쁜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속으로 좋아했다. 며칠동안 가족과 떨어져 죽을
각오로 싸운터라 그 어느때보다 가족이 그리운 것이다.

물론 한달씩 전쟁을 치루었던 때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카딜 일행이 황궁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로젠시아 일행도 떠날 차비를 서둘렀다. 카딜의 붉은 기사단이


말을 타고 앞장서고 그 뒤로 로젠시아의 마차가 따라붙었다.

갈라스 또한 호위무사 에이단과 나란히 말을 탄채 카딜 일행을 따랐다. 로젠시아는 그런 모습에 속으로


투덜거렸다.

볼모로 잡아가는 황자를 마치 같은 부대인것처럼 대우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황궁까지는 하루가 걸릴 것이다. 나이브강 상류를 가르는 르에타브릿지만 지나면 그곳에 또 하나의 병영이
있기에 오늘의 목적지는 그곳이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황궁으로 가서 황제에게 지난 며칠간의 상황을 보고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르에타 다리를 건너 동쪽 병영에 도착했을 때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저건 황제폐하의 알바트로스기가 아닙니까?”

바훌의 말에 카딜은 이미 눈치를 채고 가늘게 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왜 이곳 병영에 와있는 것일까? 설마 동대륙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리려는건 아니겠지?

이미 전령사를 보내 상황을 모두 설명했는데 말이다.

황금색에 전설의 새라는 알바트로스가 그려진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병영 안으로 들어선 카딜은
곧장 황제를 알현했다.

“폐하! 소신 폐하의 명을 완수하고 돌아오는 길인데 여긴 어쩐일이신지요?”

카딜의 인사에 황제는 그의 뒤에 서있는 타냐를 힐끔 쳐다보았다.

로젠시아가 보낸 전령매의 다리에 묶여있던 편지에 의하면 저 여자 때문에 카딜이 저와 결혼하지 않으려
한다고 되어 있었다. 미모가 보통이 아니니 황제의 여인으로 삼으라는 내용도 함께 있었다.

그때 사냥대회에서 보았을때도 어딘지 모르게 끌렸던 타냐였기에 황제의 관심은 폭주했다. 특히 카딜이
미치게 좋아한다는 말에 더 관심이 생겼다.

원래 남의 떡이 커보이는 법이니까 말이다.

특히 카딜의 여자에 로젠시아와의 정략결혼에 방해까지 된다고 하니 어떤 방식으로든 제 여자로 만들


생각으로 이렇게 달려온 것이다.

“그래, 나도 그대의 공을 치하하려 이렇게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내 명령은 동대륙을 공격하라고 했는데
황자만 볼모로 잡고 진격은 하지 않았더군.”

알테베르는 카딜에게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전령사를 통해 상황을 모두 보고드렸사옵니다. 그후 폐하께서도 특별한 지시를 내리시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만.”

카딜이 밀리지 않고 반박하자 알테베르는 다른 트집을 잡았다.


“황제의 명은 곧 법이다 라는걸 모르지 않을터인데 그대는 황제의 또다른 명도 어겼다.”

카딜은 알테베르의 속셈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회색빛 눈동자를 굴리다 대답했다.

“어떤 명을 어겼는지 모르겠으니 일깨워주십시오 폐하!”

카딜의 말에 황제 알테베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분명 로젠시아 공주와 정혼하라 일렀는데 천한 계집을 옆에 두고 있다 들었다. 결혼 후 본처가


허락한 상태에서는 첩을 거느려도 좋지만 이건 아니지, 안그래?”

그제야 카딜이 로젠시아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황제에게 뭔가를 알려주었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34 화

타냐를 천한계집이라 일컫는 것도 못마땅한데 그녀를 곁에서 떼어내려 하다니.

“거기 타냐라고 했던가?”

황제가 타냐의 이름을 부르자 타냐는 놀라서 한걸음 앞으로 나와서 예를 표했다.

“타냐, 황제폐하께 인사드립니다.”

타냐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알테베르가 명했다.

“이리가까이 와라.”

“!”

“!”

“!”

알테베르의 말에 카딜, 타냐, 그리고 바훌과 붉은 기사단까지 놀란 눈을 했다.

“뭐하는거지? 내 말이 안들려?”

그 상황을 즐기는 사람은 오로지 로젠시아뿐이었다. 속으로 우리 사촌오빠 잘한다를 외치는 가운데 타냐는
쭈삣거리며 황제 앞에 가까이왔다.

알테베르가 타냐의 턱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 검을 쥔 카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바훌이 얼른


한걸음 다가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참으십시오.”

아드득!

카딜이 이를 가는 소리가 바훌에게까지 들렸다. 검을 잡은 카딜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흐음, 듣던대로 미모가 장난이 아니네.”

누구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타냐는 그의 손에 턱이 잡혀 굴욕감을 느꼈다.

알테베르는 타냐의 머리밴드를 풀고 묶여있던 머리도 풀었다. 출렁하고 떨어지는 황금빛 웨이브진
머리카락이 비단결같이 고왔다.

하얀 피부에 잘 익은 체리처럼 붉은 입술은 도톰했다. 저를 노려보는 푸른 눈동자에 알테베르의


아랫도리가 꿈틀했다.

30 명의 첩을 거느리고 있지만 하나같이 지겨운 상황에 카딜의 여자를 탐할 생각을 하자 벌써부터 욕정이
뒷머리를 타고 올라왔다.

이 욕정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생각한 알테베르가 청천벽력같은 명을 내렸다.

“너는 오늘부터 내 여자다.”

“!”

카딜이 검을 빼들려 할 때 바훌이 그의 손을 잡았다.

지금 여기서 검을 빼들면 역적이 되는 것이다.

“잠시만 진정하십시오, 방법이 있을겁니다.”

바훌이 카딜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그때 로젠시아가 나섰다.

“폐하! 아클란대제국의 지존이신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당연히 타냐는 폐하의 것입니다, 안그런가?”

로젠시아가 자신의 시녀들과 황제의 호위무사들을 노려보며 묻자 모두들 예! 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카딜의 꽉 쥔 두 주먹의 뼈마디에서 투툭하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카딜 대장군이 반할만하군, 뭐하느냐 타냐에게 드레스를 갖춰 입히고 오늘밤 내 침실로


보내도록하라.”

황제의 명령에 시종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타냐는 시종들에 의해 끌려갔고 카딜은 어금니가 깨지도록 세게
물었다.

시종들과 함께 나가며 타냐가 카딜과 눈을 맞추었다. 카딜이 타냐에게 다가오려 하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절대 가볍게 행동하지 말라는 듯 타냐는 두 눈에 힘을 주고 카딜의 분노를 눌렀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타냐를 되찾아올 방법을 연구하면 된다는 바훌의 속삭임에 카딜은 벌벌떨리는 몸을
겨우 다스리고 있었다.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보면 여자 하나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 수도 없이 많았다. 카딜은 이미 결심했다.

타냐를 황제따위에게 절대 빼앗길 수 없다고.

그 결심을 하는 순간 카딜의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이성을 찾아야 한다. 역사에 여자하나 때문에 제
황제를 배신한 천하에 둘도 없는 어리석은 역적이라고 기록이 된다고 하더라도 절대 타냐를 황제에게
바치지 않을 것이다.

그전에 이런 일을 꾸민 로젠시아의 목부터 칠 것이다.

카딜이 그런 생각으로 로젠시아를 노려보았는데 로젠시아는 아무것도 모르고 교태가 섞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웃어라. 그 간악한 입꼬리부터 찢어주마.


카딜은 턱이 부르르 떨리도록 이를 사리물고 돌아섰다.

***

“폐하, 지시하신대로 타냐에게 드레스를 입혔습니다!”

시종의 보고에 알테베르가 대답했다.

“안으로 들이라.”

“예, 폐하.”

병영지휘관이 머무는 곳에 일시적으로 황제의 침실을 만들었다. 별다른 가구도 없이 침상하나만 있던


그곳은 어느새 화려한 침실로 바뀌어 있었다.

문이 열리고 타냐가 들어섰다. 알테베르는 드레스를 입은 타냐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아까 붉은기사단복장을 했을때도 여간 아름답지 않았던 그녀가 황제가 하사한 번쩍이는 보석이 달린


드레스를 입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안으로 들어온 타냐는 드레스자락을 잡고 살짝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황금빛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한쪽으로 길게 땋아 내린 머리가 그녀의 가슴위로 내려와있다.

코르셋으로 허리를 최대한 조여 가슴은 크게 부풀어 올랐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때마다 가슴이 들썩일 정도였다.

황제 알테베르는 입안이 바짝타들어가는 것 같아 혀로 입술을 축이고 말했다.

“이리 가까이 와.”

타냐는 그의 말대로 가까이 왔다. 그러자 알테베르가 타냐의 허리에 팔을 두르려했다. 하지만 타냐는
뒤로 살짝 물러서며 말했다.

“뭐하는거지? 감히 내 명을 어기려는 것이냐?”

알테베르는 이미 달아올라 마음이 급한 상황이었다.

“아니옵니다, 제가 어찌 감히 폐하의 명을 어기겠사옵니까, 다만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어서….”

타냐는 일부러 말꼬리를 흐트렸다.

“걱정되는 것이라니?”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곳에서 카딜님의 여자인 저를 욕심내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황제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흠흠, 뭐 그럴 수도 있지.”

“아니옵니다, 절대 그럴수는 없습니다.”

타냐가 강단있게 고개를 흔들자 알테베르는 타냐의 또다른 매력을 찾아냈다. 지금까지는 모든 여자들이
그가 시키는대로만 했다. 그런데 타냐는 감히 자신의 명을 어겨가며 충고를 하려한다.

아주 괘씸하지만 흥미를 돋우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너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절 취하시는건 언제든지 가능하십니다, 그러니 품위는 손상시키지 마시기바랍니다.”

타냐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알테베르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내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고 널 가질 수 있지?”

“황궁으로 돌아가시어 절 첩으로 삼으시고 취하시기바랍니다. 그래야 황제가 카딜의 여자를 갈취했다는
소문은 돌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소문은 말도 안돼지.”

“그러니까요, 말도 안되는 소문이 내일이면 당장 황궁을 시작으로 전국에 퍼질 것입니다. 그러니 며칠만
참으셨다가 절차를 거치시고 절 가지십시오.”

“넌 아름답기만 한게 아니구나, 다른 여자들이 가지지 않은 지혜도 가졌어.”

황제의 말에 타냐는 그의 아이큐를 의심했다. 저런 머리로 아클란제국의 황제가 되었다니.

저런 머저리에 욕심만 그득한 자가 황제가 되었으니 나라가 그모양이지.

타냐는 자신이 그동안 겪었던 수많은 억울한 일들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날 가지려는 그 순간 나는 네
목젖을 딸 것이다. 흥!

일단 시간을 벌었으니 검술연습을 더 열심히 해야겠어.

“황공하옵니다 폐하.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당분간 시녀들의 숙소에서 머물겠습니다.”

“벌써 가려고?”

알테베르는 당장이라도 타냐를 안고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며칠만 기다리시면 전 황제폐하의 여인이 될 것입니다.”

“하하하, 그래, 원래 갖고 싶은 것을 바로 가지면 금방 싫증이 나는 법이지, 오랜만에 네 덕분에 뭔가를


가지기 위해 마음을 졸이는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겠구나.”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폐하,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타냐가 다시 인사를 하고 멀어지자 알테베르는 뭔가 찜찜해서 쓴 입맛을 다셨다.

황제라는 것이 사실은 무슨 일을 하든 명분이 정확해야 한다. 타냐의 말대로 아까 같은 상황에서는 그저


카딜의 여자를 탐하는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알테베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황제로서의 품위가 땅에 떨어질뻔 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알테베르가 시종 스탈드를 불렀다.

“부르셨사옵니까 폐하.”
“그래, 넌 당장 나가서 소문을 좀 퍼뜨려라.”

“예?”

“당장 나가서 입싼 놈들에게 내가 타냐를 후첩으로 들인 후 취하겠다 했다고 소문을 퍼뜨려라.”

“아, 예, 알겠습니다 폐하.”

“절대 카딜의 여자를 무조건 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리고.”

“예?”

스탈드는 도대체 이 자식이 또 왜이러나 하는 눈빛이었지만 얼른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요 폐하.”

“그래, 얼른 움직여라, 나쁜 소문이 퍼지기전에.”

“예, 폐하.”

스탈드가 서둘러 방을 나가고 나자 알테베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안그래도 후첩이 30 명이나 돼서


여자만 밝힌다는 소문이 자자한테 오늘일이 또 퍼져나가면 안된다. 특히 카딜을 우러러 보는 백성들의
귀에 들어가면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니 말이다.

***

“카딜님!”

바훌이 황제를 어떻게 조져버릴까 고민하고 있는 카딜에게 달려왔다.

“왜 그래? 타냐 소식이라도 들은거냐?”

“예, 맞습니다, 타냐님이 황제의 침소에서 나왔다는 소식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타냐님께서 무슨 말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황궁으로 돌아가서 후첩으로 삼은후에 취하시겠다고


하셨답니다.”

“이런 제길, 그게 무슨 반가운 소식이라고 이리 호들갑이야?”

카딜이 다시 칼을 집어 들려 하자 바훌이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그게 아니라 타냐님께서 시간을 벌어놓았다는 것을 알려드리려는 겁니다, 제발 흥분 좀 하지 마시죠.”

“너 같으면 흥분 안하게 생겼어? 너 같으면 사랑하는 여자를 눈앞에서 빼앗겼는데 가만히 있을


수있겠어?”

“그건 아니죠, 카딜님 흥분하신 것 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 진정하시라는겁니다. 이건 분명


타냐님의 지혜입니다, 타냐님의 지혜로 기껏 시간을 벌어놓았는데 망치실겁니까?”

바훌의 말에 카딜은 한숨을 훅 내쉬고는 마음을 다스렸다. 타냐의 일이라 카딜이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봐.”
“나가긴 어딜 나갑니까?”

“뭐?”

“오늘밤은 카딜님을 지킬겁니다. 밤에 갑자기 무슨 짓을 저지를지 걱정이 돼서 안되겠습니다.”

바훌이 그의 검을 가슴에 품은채 구석에 있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카딜이 끙 앓는 소리를 하고는
그도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타냐가 없이 잠들어야 한다는 것이 짜증은 나지만 황제의 침실에 타냐가
없다는 것에 위로를 삼기로 했다.

***

새벽빛이 몰려오려 능선너머에 희뿌연 빛이 떠오를 무렵.

카딜은 타냐가 머무는 황제의 시종들의 거처로 왔다. 모두들 잠이들 시간이라 시종들도 모두 곯아떨어졌다.

“읍!”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던 타냐가 겨우 잠이 들었을 때 누가 손으로 입을 막자 타냐가 놀라서 눈을 떴다.

카딜을 본 타냐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딜이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바로 키스부터


했다.

잠시 그렇게 뜨거운 키스를 나눈 후 두 사람은 방을 나왔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아무도 안봐.”

카딜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타냐를 아래 위로 훑어 보았다.

“예쁘네.”

황제가 준 드레스라 확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겨우 참으며 말했다.

“우리 도망갈까?”

카딜의 말에 타냐의 두 눈이 커졌다.

35 화

“카딜님 답지 않아요.”

“나다운게 뭔데?”

카딜의 물음에 타냐는 곰곰이 생각했다. 카딜 다운게 뭘까?

“카딜님은 도망치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그건 맞아. 도망치기보다는 죽기를 각오하고 전진하는 타입이지.”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러게, 내가 겁먹었나보지 뭐.”


“네?”

타냐는 걸음을 멈추었다. 카딜은 타냐의 잡은손을 제 가슴에 가져갔다.

“이것봐, 겁먹어서 심장이 이렇게 미친 듯이 뛰고 있어, 사실은 널 잃게될까봐 너무 겁난다.”

타냐는 속으로는 엄청 놀랐지만 겉으로는 아닌척 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무서워하지 않을 남자인줄


알았는데 겨우 자신을 잃을까봐 겁이난다고 말하다니.

나같이 천한 것이 뭐가 그렇게 중하다고.

“나도 겁나요, 하지만 도망치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할건데요? 평생 도망만 칠건가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생활이 과연 행복할까요?”

타냐의 푸른 눈동자가 너무 반짝여 눈이 부시다 생각한 카딜이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긴장하면서 살겠지, 불안해서 잠도 못자고.”

“그러니까요, 난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살고 싶지는 않아요.”

“너 표정이 좀 실망한 표정인데?”

카딜은 솔직한 속마음을 이야기 하긴 했지만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널 그만큼 아끼고
사랑한다라는 뜻으로 한 말을 진짜 도망갈 찌질이로 취급하다니.

그래서 괜히 삐뚜룸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가늘게 뜬 눈으로 물었다.

“실망했어요 사실.”

“뭐?”

“아니 어떻게 도망가자는 말을 하세요?”

“도망안가면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 나더러 두 눈 멀뚱히 뜨고 널 황제에게 빼앗기라는 거야?”

카딜이 이제는 서운한티를 내며 물었다.

“아뇨, 나도 황제의 여자가 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어요.”

타냐의 굳은 의지가 보이는 말투에 카딜의 심장이 철렁 하고 떨어졌다. 자결이라니. 말도 안된다.

“타냐, 알고봤더니 꽤 극단적인 면이 있네?”

“지금 농담이 나와요? 나는 당장 황궁에 돌아가면 황제의 수청을 들어야 하는데?”

타냐의 눈꼬리가 축 쳐지며 금방이라도 울 듯 눈물까지 그렁이자 카딜이 그녀를 품에 안고 말했다.

“그럴일은 없을거야.”

“정말요?”

“그래, 내가 있는데 어떻게 널 황제에게 보내겠어? 생각 좀 해보자.”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특별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때는 타냐 안의 타냐가 뭔가
아이디어라도 주면 좋겠는데 잠잠하기만 하다.
“방법은 딱 하나 밖에 없어.”

“뭔데요?”

타냐가 얼른 말해달라는 듯 그의 팔을 흔들었지만 카딜은 쉽사리 입을 띠지 못했다.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요?”

“네가 생각하는게 뭔데?”

카딜은 설마 하며 물었다. 설마 타냐도 같은 생각을 할리는 없을거라며. 그러나 타냐의 입에서는 감히


올리지 말아야할 단어가 튀어나왔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

“!”

자신은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만 타냐가 입밖으로 그 소리를 내뱉자 잠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하지만 타냐는 오히려 카딜보다 간담이 더 큰 것 같아 보였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평민들과 천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번 보세요, 날마다 올라가는 세금을 내지
못해 하루에도 수백명이 굶어죽어가고 있어요, 귀족들은 매일같이 고급진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파티를 여는데 말이죠. 그들이 먹다 남아서 버리는 그 음식들만으로도 수백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어요.”

“계속해봐.”

카딜이 타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실컷 하게 기회를 주었다. 그러자 타냐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품어왔던 생각을 카딜에게 풀어 놓았다.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 같은 인간인데 왜 계급이 나뉘어졌는지 모르겠어요. 천민들은


귀족가의 개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어요. 그렇다고 일을 안하는것도 아니라구요, 뼈가 으스러지게
매일같이 중노동을 해도 받는 일당은 고작 입에 풀칠하는 정도죠, 그런데 자고 일어나면 세금은 올라
있어요.”

타냐는 점점 더 열을 올렸다.

“귀족들은 일도 안해요, 자기들이 잘 먹고 잘 사는 이유가 모두 그들이 부리는 노예들이 일한건데 그런


노예들을 개돼지 취급도 안해줘요, 노예가 죽어나가면 또 사들이면 되니까요, 사람을 사고 파는 것부터
금지해야 해요, 세금은 가진 재산을 기준으로 내야하구요, 세상은 발란스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잘 돌아갈
거예요,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 버리면 기울어진 그 편에 있는 사람들은 죽기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하거든요.”

타냐의 놀라운 언변에 카딜은 잠시 할말을 잃었다. 카딜은 나라를 지키는데만 집중하느라 타냐같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북대륙을 오늘의 북대륙으로 이끄는데 10 년이 걸렸다. 카딜은 그 10 년동안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이 백성을 위한 길이라며 그의 청춘을 받쳤는데 정작 그가 지키려했던
나라는 썩어가고 있었다.

알테베르 황제의 폭정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타냐를 만나기전까지는 천민들의 고초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제가 너무 심하게 말했나요?”


카딜이 가만히 저를 쳐다보는 것을 나중에 깨달은 타냐가 멋쩍어 하며 물었다.

“아냐, 다 맞는 말이야.”

“그럼 카딜님도 저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던건가요?”

“흐음, 그렇다고 봐야지.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런데 말이야. 방금든 생각인데 네가 황제를 하면
정치를 참 잘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예? 에이, 무슨 말도 안되는”

“아냐, 장난아니고 진짜 그런 생각이 들었어.”

“말도 안돼요, 저 같이 근본도 모르는 천민이 어떻게 황제가 돼요, 카딜님이라면 모를까?”

타냐의 말에 카딜은 쓰게 웃었다.

그런데 이렇게 두 사람은 너무나도 쉽게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

그 시간 제이단 숲에는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샤마란족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제이단 숲에


죽어가던 식물들이 새싹을 피우기 시작했다. 서서히 생겨난 하얀 기운은 어느새 제이단 숲을 뒤덮었다.

북대륙의 주인이었던 샤마란족이 멸족된 후 죽음의 숲으로 변해버린지 100 년 이었다.

그런데 제이단 숲 안에서 화이트고스트들이 무리를 지어 떠다녔다. 또한 사방에서부터 화이트고스트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

다음날 아침.

황제일행은 아침일찍부터 황궁으로 향했다. 타냐를 후첩으로 만들 생각에 아침조차 간단하게 먹고 출발한
것이다. 카딜은 로젠시아를 태운 마차를 경호하며 상황을 살폈다. 그 안에 타냐가 타고 있기 때문이다.

로젠시아와 마주 보고 앉은 타냐는 그녀의 독기어린 눈길을 피하느라 괜히 자는척 했다.

그러자 로젠시아가 눈치를 채고 발로 툭툭 타냐의 발을 찼다. 어쩔 수 없이 눈을 뜬 타냐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공주님.”

“넌 이 상황에 잠이 오니?”

“아, 어젯밤에 잠을 설쳐가지고, 죄송합니다.”

타냐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자 로젠시아가 시녀를 두고 타냐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깨가 좀 아프네, 주물러봐.”

“제가요?”

“그럼 누가해? 여기 있는 시녀들도 귀족들이야, 넌 천민이잖아, 감히 공주인 나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는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는 주제에.”

로젠시아가 혀를 차자 타냐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타냐는


로젠시아의 어깨를 꽉꽉 주물렀다.
“아야, 이게 진짜, 너 일부러 아프게 하는거지?”

“아닙니다, 워낙 칼만 잡다보니 힘조절이 잘 안되네요. 죄송합니다, 살살 하겠습니다.”

타냐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살살 주물렀다.

“야, 너무 살살하잖아, 지금 장난해?”

로젠시아는 시원하지만 괜히 트집을 잡았다. 사실 어깨도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타냐를 괴롭히고
싶을 뿐이었다.

자신과 결혼할 카딜과 정사를 나누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장에 목이라도 치고 싶은 그녀였다.

“시원하십니까?”

“뭐, 나쁘지 않네.”

적당한 힘을 사용하여 어깨를 주무르자 로젠시아는 더 이상 트집을 잡지 못했다. 시녀들은 로젠시아가


타냐를 괴롭히는덕분에 그동안은 편하게 지냈다.

그렇게 로젠시아의 시중을 들며 가던 중 갑자기 마차가 멈추었다.

“무슨 일이지?”

로젠시아의 물음에 시녀 하나가 마차의 창을 열었다.

“잠시 쉬면서 점심을 먹을 모양입니다 공주님.”

“아, 그래? 안그래도 배가 고팠는데 잘됐네. 마차를 너무 오래탔더니 머리가 아파서 신선한 공기라도
쐬야겠어, 타냐, 네가 내 시중들어.”

“아, 예.”

타냐는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로젠시아가 내리기 전에 손을 내밀었다.

“카딜님, 손 좀 잡아 주세요.”

은근히 카딜의 손을 잡아보겠다는 흑심이 있었지만 카딜은 손대신 검의 손잡이를 내주었다. 로젠시아는
입술을 비죽여가며 어쩔 수 없이 카딜이 내민 검의 손잡이를 잡고 내려섰다.

타냐가 내리려 할때는 카딜이 얼른 말에서 내려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제 대놓고 그녀를 연인처럼
대하는 그였다.

그 모습에 로젠시아는 심통이 나서 식식대며 타냐에게 말했다.

“앞장서 타냐, 저기 그늘에서 좀 쉬어야겠으니까.”

“예, 공주님.”

타냐가 로젠시아와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본 카딜의 눈동자에 비장한 뭔가가 담겼다.

시종들과 시녀들은 점심을 준비하느라 분주히 움직였고 병사들은 사방에 흩어져 경계를 강화했다.

오늘밤이면 황궁에 도착할 것이다.


카딜은 황제의 안전을 위해 붉은 기사단에게 사방을 잘 주시하라 명령을 내려 놓고 저 멀리 걸어가는
로젠시아와 타냐를 쳐다보았다.

황제와 로젠시아 공주를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명분도 없이 그런일을 저지르면 단두대에
오른다는 것을 잘 알기에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명분없이 황위를 찬탈하고 황제가 되면 대신들과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된
정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악법도 법이라고 지키는 것처럼 폭군도 황제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알테베르는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유일한 사람이라 황제가 된 것이다. 그가 황제의 자질이 있든 없든 그것은 두 번 째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어젯밤 이후로 카딜은 진심으로 황제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게다가 후대
황제로 타냐를 생각하고 있는 그였다. 그녀가 만약 샤마란족의 후예라면 충분히 이나라의 황제가 될
자격이 있다. 원래 북대륙의 주인이 황제를 하는 것이니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36 화

카딜은 로젠시아와 타냐가 언덕위에 있는 나무그늘에 앉은 것을 보고 그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알테베르가 그를 불렀다.

“카딜!”

젠장.

황제의 목소리에 카딜이 욕을 짓씹으며 뒤로 돌아 그의 앞으로 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어딜 가는 것이냐? 나와 같이 식사하자.”

“로젠시아 공주님을 지키려고 가던중이었습니다. 그럼 공주님도 불러 오겠습니다.”

“아, 그거 좋은 생각이네. 이왕 가는거 타냐도 불러 오너라.”

“예, 폐하.”

듣던중 반가운 소리라며 카딜은 타냐에게 갔다.

로젠시아는 카딜이 제쪽으로 오자 또 타냐를 챙기러 오는구나 하는 생각에 벌써부터 심기가 뒤틀렸다.

“공주님, 황제폐하께서 같이 식사하시자고 했습니다.”

“어머, 그래서 날 모시러 온건가요?”

“당연합니다. 타냐 또한 불러오라 하셨습니다.”

“피, 타냐는 뭐하러.”

로젠시아는 황제에게 타냐를 소개시켜준 것을 잠시 후회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황제가


타냐를 카딜에게서 떼어줄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니꼽지만 저 꼴을 계속 봐야한다.
‘하아, 이러다 올케언니로 모셔야 하는건 아니겠지?’

만약 타냐가 후첩이 된다면 로젠시아 공주보다 높은 위치가 된다. 그녀가 천민출신이라고 해도 서열상
그런 것이다. 로젠시아는 황제의 친 여동생도 아니었다.

이러다 제가 친 덫에 걸리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로젠시아의 표정이 초조하게 변했다. 가만히 겪어보니
타냐 이것도 보통내기가 아닌데 말이다.

황제의 점심식사 테이블은 황궁에서 못지않게 고급진 음식들로 그득했다. 식재료들을 황궁에서 가져와
쿨링 마법스톤으로 보관했다가 요리를 한 것이 틀림이 없었다.

쿨링마법스톤 하나마련한 돈이면 백성들 수천을 먹여살릴 수 있을텐데 그 귀한 것을 이딴 곳에 사용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제 몸아끼듯 백성을 아꼈으면 벌써 성군소리 들었을텐데.

혼자 생각한 타냐는 황제가 옆에 앉으라고 하자 그의 옆에 앉았다.

“카딜님도 같이 드시죠.”

로젠시아의 말에 카딜이 기다렸다는 듯 타냐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로젠시아가 얼른 카딜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앉고 보니 카딜과 타냐의 양쪽 옆에 로젠시아와 황제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카딜은 타냐에게 스테이크를 주기 위해 로젠시아에게 먼저 주었다.

“레이디 퍼스트.” 라고 하면서.

“감사해요 카딜님.”

좋아서 입이 헤벌쭉 벌어지던 로젠시아는 타냐에게도 스테이크를 건네주자 이내 눈꼬리를 사납게 올렸다.

뒤늦게 타냐를 챙기기 위한 카딜의 꼼수였다는 것을 깨달은 로젠시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다짐했다.
언젠가는 타냐를 없애겠다고.

어차피 황제도 타냐와 몇 번 자고 나면 싫증낼 것이니 그때는 죽여도 별 문제가 없을 터였다.

물론 누가 죽였는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것이다.

그녀의 검술실력이 제법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번에는 꽤 실력있는 자객을 보내겠다는 꼼꼼한 계획까지
세워본다.

***

그날 밤.

황제일행은 황궁에 도착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황제도 잠을 자기위해 거처인 수이젤궁으로 갔다.

타냐는 후첩들이 기거하는 궁으로 안내되었다.

카딜은 타냐가 후첩들이 기거하는 궁으로 들어가는 모습에 돌아설 수가 없었다.

황궁에는 카딜을 위한 집무실이 따로 있었기에 그는 그곳으로 향했다. 바훌은 붉은 기사단원들을 황궁


안에 있는 숙소에서 쉬라 명하고 카딜과 함께 그의 집무실로 왔다.
“어떻게 하실겁니까?”

카딜의 고민을 모를리 없는 바훌이 물었다.

“글쎄.”

그가 글쎄라고 말하면 뭔가 아주 중요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바훌의 뒷머리가 삐죽섰다.

카딜의 고민은 물어볼 것도 없이 황제를 죽이는 것일 터였다. 그래서 함부로 더 묻지 못하는 바훌이었다.

“너도 그만 쉬어.”

“예, 전 여기 소파에서 자겠습니다.”

“그래.”

카딜은 그의 침실로 항하며 대답했다. 그모습마저 바훌에게는 위태로워보였다. 그러나 바훌이 채 잠이


들기도 전에 카딜이 다시 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뭐 필요한거라도 있으시면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냐, 바람 좀 쐬고 올테니까 넌 쉬어라.”

카딜이 검을 챙겨들고 나가자 바훌은 쉴수가 없었다. 한숨을 내쉰 바훌이 카딜의 뒤를 따랐다.

카딜은 예상했던대로 후첩들이 머무는 궁으로 향했다. 이 밤중에 그쪽으로 가는 이유는 당연히 타냐를
불러내기 위함일터였다. 바훌은 황제가 알까 싶어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이미 그가 자신의 후첩으로 삼겠다 발언한 이상 타냐는 황제의 여자였다.

후궁들이 머무는 궁은 여러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워낙 많은 후첩들이 있어 1 년에 한칸씩 건물을


늘려나가는 상황이었다. 그 비용 또한 만만치가 않아 세금은 자꾸 올라가는 것이었다.

30 명의 후첩이 기거하는 별채만해도 벌써 12 채가 되니 말을 더할 필요도 없이 세금이 올라가는 이유를 알


것이다.

타냐는 새로지어진 후첩궁으로 안내되었다. 카딜은 이미 그곳의 위치와 내부도까지 다 알아놓았다.

별채의 뒤로 돌아가 타냐가 머무는 방쪽에 도착한 그는 작은 돌맹이를 하나 던졌다.

정확하게 날아간 돌맹이가 탁 소리를 내고 떨어지자 창문이 열렸다. 카딜을 본 타냐가 걱정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안에 아무도 없지?”

창 아래에까지 접근한 카딜이 물었다.

“네, 아무도 없긴 한데, 이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타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카딜이 펄쩍 뛰어 올랐다. 깜짝 놀란 타냐가 뒤로 물러서자 카딜은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바훌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앓는 소리를 내고는 얼떨결에 보초를 섰다.
“카딜님, 이렇게 무모하게 읍.”

타냐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카딜이 재빠르게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그의 힘에 밀린 타냐가


침대로 넘어졌다. 예비후첩이라서 인지 타냐에게는 이미 후첩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주어진
상태였다.

하늘거리는 잠자리날개 같은 잠옷은 카딜의 손에 의해 북북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오랜만에 그녀를 안는


카딜의 이성은 이미 끊어졌다.

황제의 예비후첩을 이렇게 탐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지만 카딜은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여자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찢어진 틈사이로 삐져나온 그녀의 봉곳한 젖가슴이 카딜의 입안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아읏.

타냐의 잇새로 절로 신음이 흘러 나왔다. 그녀의 젖가슴을 모조리 먹어치우겠다는 듯 카딜은 타냐의 등
밑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휘어진 등때문인지 그녀의 젖가슴이 한층 높게 고개를 내밀었다.

핑크빛 유두를 따먹을것처럼 심하게 빨아대자 타냐의 음부가 젖어들기 시작했다.

찢어진 시스루 잠옷 때문에 타냐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색정적이었다. 속바지를 벗겨내자 촉촉하게 젖은


그녀의 비부가 보였다.

카딜은 이제 젖가슴을 놓아주고 아래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신음소리가 높아질까 싶어 타냐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 막았다. 하지만 끙끙 앓는 소리까지 나오지 않게 할 수는 없었다.

“으으응, 아으응.”

카딜의 혀가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쓸어 올리자 타냐의 허리가 뒤틀리고 그녀의 두 다리가 허공에서 덜덜
떨렸다. 작은 알갱이를 집중적으로 쓸어 올리고 혀끝으로 톡톡 치자 간지러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아랫배가 땡땡해질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질내벽은 타냐도 느낄정도로 심하게 진동했다.

소음순과 대음순을 번갈아 가며 빨아 당기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불빛은 없고 달빛만 있었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정염에 들뜬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카딜은 다급한 손놀림으로 제 옷을 벗어던졌다. 속바지를 내리자 이미 프리컴을 머금은 그의 성기가


흉폭한 모습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야말로 흉폭하다는 말이 어울릴만한 그런 모습이었다.

굵은 성기는 배꼽을 향해 빳빳이 서서 프리컴을 흘려댔다.

“하아, 타냐, 사랑해.”

카딜이 사랑한다 말하며 그녀의 질속으로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이미 애액으로 젖어든 그녀의 음부는
힘겹게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벌럼대며 그의 성기를 빨아들였다.

“하아, 타냐….미치게 좋아.”

카딜은 타냐의 입술을 삼키듯 빨아 들이고는 허리를 천천히 돌렸다. 사방을 마사지 하듯 돌려가며 아래로
누르자 타냐는 그만 절정에 도달해버렸다.
끙끙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질내벽이 미친 듯 조여들자 카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허리를 힘차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찔걱대는 소리는 고요한 방안에 꽤나 크게 들렸다. 밖에서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잠자리 날개같은 잠옷은 이제 너덜너덜한 누더기가 되어 타냐의 몸 여기저기 휘감겨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묘하게 카딜을 흥분시켰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붉은 시트에 사방으로 흩어졌고 미간을 구긴 타냐는 카딜의 등을 마구 긁어대며 앓는


소리를 냈다.

타냐의 손톱이 카딜의 등에 붉은 선을 죽죽 만들어냈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의 욕정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타냐의 혀를 뽑아버릴 듯 빨아대며 카딜의 추삽질은 더욱 더 격렬해졌다. 자궁을 밀어 올리다 못해 자궁


안으로 파고들 것 같은 느낌에 절로 몸이 뒤로 물러나는 타냐였다. 하지만 그녀가 물러나면 더 큰
움직임으로 따라 붙어 타냐의 안을 있는 힘껏 들쑤시는 카딜이었다. 침대시트는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실크이불은 이미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하아, 카딜님….아흐흣.”

타냐는 또 한번 찾아드는 오르가슴에 카딜의 이름을 앓는 소리로 불렀다. 그녀를 있는 힘껏 끌어 안은


카딜이 드디어 고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타냐의 몸은 종이인형처럼 마구 흔들렸다.

마지막으로 절정에 오르기전 한번 더 그녀의 쾌감을 위해 카딜은 사정감을 참아내고 타냐의 몸 안에


들어있던 제 성기를 빼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다리를 활짝 벌린채 흥분하여 벌름대는 그녀의 속살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한껏 부푼 진주알같은 클리토리스를 혀끝으로 굴리는 그의 손 안에는 타냐의 젖가슴 두 개가 잡혀있다.

손가락 사이로 튀어오른 유두를 조이며 혀로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쓸어 올리자 타냐는 침대 시트를 끌어
당겨 제 입안에 재갈처럼 물었다.

그때 카딜이 다시 타냐의 음부에 제 성기를 찔러 넣고 격렬하게 허리짓을 하기 시작했다.

37 화

격렬한 정사 후 카딜은 타냐를 안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날이 새기전 창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가 창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가고 손을 흔든 후 문을 닫는 순간 밖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들어와요.”

타냐는 찢어진 잠옷을 침대 아래에 구겨넣고는 방금 일어난 것처럼 침대에서 내려섰다.

“어머? 설마 그렇게 하시고 주무셨습니까?”

하녀의 물음에 타냐는 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황제가 준 드레스를 입은 제 몸을 확인하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드레스가 너무 예뻐서 한번 입어본다는게 그만 잠이 들었네요. 호호.”

어색하게 웃었지만 하녀들은 천민주제였던 타냐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은 다른 드레스를 입으실거니까 일단 벗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 그런가요?”

타냐는 영혼 1%도 들어가지 않은 표정과 말투로 감탄하는척 했다. 하녀들은 저희들보다 못한 천민이었던
타냐가 황제의 서른한번째 후첩이 되는 것이 못마땅한지 썩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

잠을 설친 황제 알테베르는 아침부터 대제사장 비숍 때문에 골치가 아파 한껏 인상을 구겼다.

“어젯밤 꿈이 심상치 않았습ㄴ다. 폐하, 아무래도 금서를 다시 밀실에 넣어둬야 하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아침일찍부터 폐하를 뵈러 왔습니다.”

비숍의 말에 황제는 자신의 암체어 옆 작은 협탁 위에 둔 금서를 쳐다보다가 집어 들었다.

“뭐가 그리 호들갑이야? 꿈은 꿈일뿐이다, 네가 보다시피 이 금서를 여기 아무렇지 않게 두었는데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지 않느냐? 도대체 무슨 꿈을 꾸었길래 아침부터 내 심기를 흩트리는 거지?”

“그게 말씀드리기도 어려운 내용인지라….”

“괜찮아, 꿈인데 뭘? 누가 날 죽이기라도 했나보지?”

알테베르는 금서를 들어 휘리릭 책장을 넘기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차마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 말씀대로 그저 꿈이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 말해봐.”

대제사장 비숍은 예지몽을 잘 꾸는 사람이었다. 매일 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한번 예지몽을 꾸면


평소의 꿈과 달라 비숍은 그것이 예지몽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젯밤 꿈도 분명 예지몽이었다.

“하늘이 두 조각이 났고 그 틈으로 하얀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빛은 점점 커져서 세상을 뒤덮었고 어둠의
끝에 황제폐하께서 위태롭게 서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놈의 하얀빛, 쯧쯧.

황제 알테베르는 속으로 혀를 차며 물었다.

“하얀빛이 황제폐하의 심장을 찔렀고 폐하께서는 그만…..”

“죽었어?”

“송구하옵니다만 그렇사옵니다.”

“길몽이네.”

“예?”
“꿈은 반대라고 했지 아마? 그리고 꿈에서 죽으면 길몽이라고 다들 좋아하잖아. 좋은 꿈이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것은 예지몽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하시면 아니되옵니다.”

비숍의 이마에서 진땀이 삐질삐질날 때 밖에서 시종의 알림소리가 들려왔다.

“조반 준비가 끝났다고합니다 폐하! 모두들 황제폐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탈드의 보고에 황제 알테베르가 일어섰다.

“그래, 알았다, 비숍, 자네도 온김에 함께 식사하지.”

“예? 아, 예, 폐하.”

금서는 다시 알테베르의 암체어 옆에 있는 협탁위에 올려졌다.

비숍은 금서를 저렇게 함부로 둔 것에 안절부절 못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황제를 따라나섰다.

다이닝룸은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다가 가끔씩 특별하게 대신들과 조찬회의가 있을 때나 아니면 귀빈들이
방문했을때 사용하는 곳이었다.

오늘 알테베르가 이곳에서 식사를 하게 하라 명한 이유는 바로 타냐때문이었다.

어제 알테베르는 급령으로 4 대 귀족가에 소식을 전했다. 전갈을 받은 4 대귀족가문 부부들도 족족


도착하여 그를 기다리고 있는중이었다.

황궁에서 중요한 자리는 모두 이 4 대귀족가 사람들이 맡고 있었다. 큰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이 있을때는


늘 이렇게 4 대 귀족 부부들을 불러 놓고 먼저 논의하곤 했다. 물론 이번에는 논의 라기보다는 알리는
것이었다. 제 31 대 후첩을 들이는데 4 대귀족들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알테베르가 만든 법으로 저들도 후첩을 서너명에서 열명까지도 거느리고 있으니 말이다.

“황제폐하드십니다!”

스탈드의 목소리에 다이닝룸에 도착해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이제 막 도착한 4 대가문 부부들도 자리한 상태였다.

알테베르는 가장 먼저 타냐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가 보내준 화려하지만 품위가 있어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황후와 세명의 후첩들 사이에서도 단연코 빛이 났다.

황후외에 다른 후첩들은 별로 초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모두 오늘 초대한 4 대가문의 영애들이라 3 명의


후첩들도 초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 3 후첩 아리샤가 얼른 머리를 굴려 아들 드비스를 내려 놓았다. 그러자 드비스가 알테베르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뒤뚱거리며 달려오는 드비스를 본 알테베르는 그냥 휙 돌아서서 자리에 앉았다.

아리샤의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드비스는 아무것도 모르고 알테베르에게 와서 안아달라고 했다.

“아리샤, 드비스 좀 챙기지?”

“아, 예, 폐하, 송구하옵니다, 드비스가 아직 너무 어려서….”

아리샤가 허둥지둥 드비스를 챙겨서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에 황후 메리엔의 입꼬리가 살짝 실룩였다. 옆에
있던 에블린 또한 고소하다는 듯 몰래 비웃었다.
이런자리까지 아들을 내세워서 눈길을 끌려는 아리샤가 안되보이기 까지 했다.

“비스텔 가문 데자르백작 황제폐하께 문안여쭈옵니다.”

황후의 부친인 데자르 백작을 선두로 4 대 가문에서 온 부부들이 알테베르에게 인사를 올렸다.

인사를 받는데만 30 분이 걸려 알테베르는 이미 짜증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이 4 대가문을 함부로 대할 수 없기에 그는 극강의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마지막으로 카딜이


인사를 했다.

“카딜 하에르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또한 4 대 백작님들께도 인사드립니다.”

카딜의 늠름한 모습에 백작들은 물론 그의 부인들까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늘날 아클란대제국을 있게만든 장본인이기에 그에 대한 경외심은 황제와 비교해서 모자라지 않았다.

그때 뒤늦게 도착한 로젠시아가 허겁지겁 다이닝 룸으로 들어왔다. 태어나서 그렇게 긴 여행은
처음해보는지라 로젠시아는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쯧쯧, 이런자리에 시간도 못 맞추다니.”

혀를 찬 알테베르는 미리 마련해 놓은 카딜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늦을거면 아예 오지 않는게 낫겠네, 쯧, 어서 앉아라.”

알테베르의 핀잔에 로젠시아는 졸지에 죄인처럼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예, 폐하.”

늦게온 탓에 로젠시아는 모두와 눈빛으로만 인사를 했다.

“이제 다 모였으니 식사를 하기전에 소개부터 해야겠지 싶습니다.”

알테베르의 말에 타냐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던지라 이미 모두들 그녀가 이번에
새로 맞을 후첩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카딜을 차지하기 위한 로젠시아의 계략인걸 모르는 황후와 후첩들은 벌써부터 타냐에게 보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당연히 적의에 가득찬 눈빛이다.

“여기 있는 타냐가 바로 이번에 후첩지를 받을 사람입니다. 타냐, 인사해.”

알테베르의 말에 타냐는 카딜과 한번 눈을 맞추고는 일어섰다. 타냐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들은 4 대가문의


백작들은 떫은 감을 씹은듯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그들은 황후와 후첩을 들인 상태라 새로운 후첩이 들어오는 것이 절대 반갑지가 않다.

“안녕하세요, 타냐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타냐는 일단 인사를 했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지는 아직도 생각중이었다. 타냐가 이렇게
흘러가는대로 두는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늘 자신이 위기에 처할때마다 또는 뭔가 필요할때마다 그녀의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이유를 타냐는 기다리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뭔가 위험이 닥칠때는 반드시 그녀의 안에서 목소리가
들릴 것이라 믿고 이렇게 겁도 없이 일이 흘러가는대로 두고 보는 것이다.

비숍은 타냐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뭔지 모르게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지만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을 할만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금서를 밀실에서 빼내와서 그렇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비숍은 그저 타냐를 보며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타냐의 후첩신고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무도 반박을 하거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간언도 올리지
않았다. 황후는 물론 이 자리에 참석한 후첩들은 타냐의 운명을 잘 안다는 듯 소 닦보듯 했다. 아니
조금은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한달 정도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 다행일터였다. 30 명의 후첩들 중에 아직도 황제의 은총을 입지 못한


후첩이 15 명이나 된다.

그들도 타냐처럼 황제의 눈에 띄어 후첩이 되었지만 막상 후첩이 되고난 후 황제는 흥미를 잃고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식사가 끝난 후 황제는 스탈드에게 후첩식을 준비하라 일렀다. 4 대가문에 보고를 했기에 더욱 더 타냐와
잠자리를 하기 어려워졌다.

그렇게 타냐를 제 여자로 만드는 절차를 마친 황제는 카딜에게 볼모로 잡혀온 갈라스를 내실로 불어오라고
했다.

“갈라스 달타뉴 황제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인사여쭙니다.”

갈라스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황제는 떨떠름한 눈빛으로 말했다.

“볼모로 잡혀온 황자치고는 참으로 태평한 모습이군.”

어딘지 모르게 빈정대는 듯한 태도였지만 갈라스는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볼모인 저를 인격적으로 무시하지않고 황자대접을 해주신 황제폐하의 은덕에 감사할따름입니다.”

갈라스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알테베르는 똥씹은 얼굴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내 요구사항은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소금산을 가지는 것이다. 소금산이 우리


북대륙 아클란대제국으로 넘어오게 되면 동대륙 제국들도 소금을 함부로 캐갈 수 없다.”

“!”

이건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다. 카딜은 이미 황제가 저렇게 나올 것을 알고 있기에 속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갈라스는 방금전의 태연했던 표정이 사라지고 눈동자를 무섭게 빛내며 따졌다.

“그건 말도 안됩니다, 소금산을 북대륙에서 자유자재로 캐가는 것은 허락하지만 동대륙 제국들에게 돈을


주고 소금을 캐가야한다는 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 그럼 할 수 없군.”

카딜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삼켰다. 알테베르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튀어나올지 알기때문이었다.

“그럼 전쟁을 해야지 뭐.”

“!”
갈라스가 놀라서 황제를 쳐다보았을 때 알테베르가 말했다.

“내가 그래도 넓은 아량으로 동대륙만은 자유제국으로 남겨둘려 했는데 황자가 내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폐하! 그것은 너무 받아들이기 힘든 계약입니다! 욕심이 너무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뭐야?”

알테베르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듯한 갈라스의 발언에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같은 시간 타냐는 황후에게 불려갔다.

38 화

사람 기죽이려 작정을 했는지 어느새 황후궁에는 30 명의 후첩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1 개 군대를


만들어도 될 것 같은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하지만 타냐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차라리 문제가 생겨 후첩이 되지 못하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이라 그런 것이다.

타냐가 황후의 뒤를 따라 들어오자 60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물론 함께 식사를 했던 3


명의 후첩들도 마찬가지였다.

황후 메리엔은 양쪽으로 죽 늘어선 후첩들을 지나 상석으로 갔다.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후첩들이 일제히 메리엔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녀가 착석하기를 기다렸다가 황후가 착석하자 자리에 앉았다.

타냐의 자리는 아직 없었다. 양쪽으로 15 명씩 줄을 지어 앉은 후첩들과 중앙에 대장처럼 자리하고 있는


황후. 그 가운데 타냐가 섰다.

실크처럼 반들거리는 황금빛 머리카락과 대서양을 품은 듯한 짙푸른 눈동자는 사람의 눈길을 끄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황제가 하사한 드레스는 황후의 드레스에도 달아본적 없는 값비싼 보석들이 곳곳에
달려 그 빛을 발했다.

후첩들은 벌써 타냐의 드레스에 대해서 수군대기시작했다. 특히 머리장식은 타냐가 황후라고 착각할


정도로 화려하고 기품이 있어 보였다.

아까부터 그것이 눈에 거슬렸던 제 8 후첩 에블린이 갑자기 타냐에게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에 꽂힌


장식을 뽑으려했다. 타냐는 본능적으로 에블린의 손을 잡았다.

“뭐하시는겁니까?”

“무례하다, 어디서 감히 내 손을 잡아?”

에블린은 타냐의 손목힘에 이미 손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미간이 일그러졌다.

“마마님께서 더 무례하신 것 같습니다만.”

“뭐?”

에블린의 눈동자가 생쥐를 발견하고 달려드는 사냥매의 것처럼 희번득였다.


“말씀도 없이 갑자기 제 머리장식을 뽑으려고 하시니까 저도 제 나름대로 방어를 한 것입니다. 머리장식이
탐나시면 그냥 달라고 청을 하시지요.”

“뭐, 뭐라고?”

에블린은 황후에게 잘 보이려고 타냐의 기를 꺽으려다 자신의 기가 꺽여 당황했다.

“에블린, 그만둬. 그깟 머리장식이 뭐라고, 설마 탐이라도 난 거야”

메리엔의 말에 에블린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옵니다, 탐이나서가 아니라 감히 황후마마보다 더 화려한 머리장식을 하고 있어서….”

“황제폐하가 하사하신거라니까 그냥 둬.”

“아, 네, 황후마마.”

에블린이 타냐의 손에 잡힌 제 손을 훽 뿌리치고는 휙 돌아서 자신의 자리로 갔다.

타냐라고 이 머리장식이 좋아서 꽂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은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그가


준 드레스와 장식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널 여기 부른 이유는 모두에게 인사를 시키기 위해서다. 아직 후첩지를 받은건 아니지만 받은거나
마찬가지니까 정식으로 제 소개부터 해보거라.”

황후의 말에 타냐는 알았다는 듯 살짝 허리를 접어 인사하고는 제소개를 했다.

“전 타냐라고 합니다. 붉은 기사단원으로 있던 중 황제의 명을 받고 이렇게 여기에 궁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붉은 기사단?”

사냥대회때 참석 못했던 후첩들은 뜻밖이라는 듯 자기네들끼리 수군댔다.

“붉은 기사단이라면 무술 실력이 말도 못하게 좋은 것 아닌가?”

“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황제의 후첩이 된 순서대로 서열은 정해져있었다. 하지만 황제와 하룻밤도 지내지 못한 후첩들은 서열이
높아도 황제와 동침한 서열이 낮은 후첩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럼 혹시 무예실력을 한번 볼 수 있을까?”

제 3 후첩이면서 얼마전에 아들 드비스를 낳아 기고만장한 아리샤의 말에 타냐는 황후를 쳐다보기만 했다.

“뭐하는거야? 내 말이 안들려?”

황후빼고 현재 후첩들 중에 제일 파워가 세다 자신하는 아리샤는 제 말을 듣고도 꿈쩍도 않는 타냐를


도끼눈으로 노려보며 재촉했다.

“당연히 잘 들립니다 마마, 하지만 전 황후마마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뭐?”

타냐의 발언에 다른 후첩들도 꽤 놀라는 표정이었다. 저러다 후첩이 된후에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저러나 걱정하는 후첩들도 있었다.

“황후마마께서도 저의 무예를 보시고 싶으신지 여쭙겠사옵니다.”

메리엔은 타냐의 말에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요즘 아리샤와 에블린 때문에 황후로서의 품위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타냐의 한 마디로 모든 후첩들이 저를 우러러 보듯 쳐다본다.

역시 내궁의 최고 수장은 황후라는 듯한 눈빛에 메리엔이 말했다.

“그럴필요 없다. 붉은 기사단으로 뽑혔다는 것만으로도 네 무예가 출중하다는 것은 증명되었다. 굳이 이


좁은 내실에서 검무를 출 필요는 없지 싶구나.”

“황후마마!”

아리샤가 제 분수도 모르고 황후를 나무라듯 큰 소리로 부르자 타냐가 한마디를 했다.

“마마, 이 무슨 무례이십니까, 제 3 후첩이신 아리샤마마께서 이렇게 황후마마에게 무례를 범하시면


내궁의 기강이 어떻게 지켜지겠습니까? 집에서 키우는 개도 주인이 발로 차면 남들도 무시하고 발로
찬다고 했습니다. 저희같은 후첩들이 황후마마를 제대로 보필하지 않으면 저히들 또한 아래 후첩들에게
무시를 당할 것입니다. 물은 아래로 흐르는 법입니다. 물이 위로 치솟으면 홍수가 나고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생기는 법입니다.”

타냐는 생각나는대로 말을 내뱉었다. 사실은 그 말들이 그녀의 안에 있는 타냐가 시키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채 제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놀라는 중이었다.

“아니 이것이? 폐하가 예쁘다예쁘다 하니까 니가 뭐라도 된줄 아나본데? 넌 아직 후첩비도 받지 않은


일개천민일뿐이라고!”

“제 3 후첩 아리샤는 그 입을 다물라!”

황후가 오랜만에 어깨에 힘을 주고 큰 소리를 쳤다. 최근 몇 년간 메리엔은 후첩들에게 이렇게 소리를


쳐본적이 없었다.

“타냐의 말이 틀린 것이 없다! 너야말로 아들 하나 낳았다고 아래위도 모르고 설쳐대는 모습이 아주


가관도 아니구나! 당장 자리에 들어가서 앉지 않으면 태형을 내릴 것이다!”

황후의 무서운 눈빛에 다른 후첩들까지 어깨를 움찔했다. 현재 하늘 높은줄 모르고 콧대를 쳐들고 다니는
아리샤를 저렇게 묵사발을 만들다니. 괜히 통쾌해져서 옆에 앉은 후첩들과 키득이며 웃었다.

아리샤는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타냐를 애초부터 내리누르려 작정을 했다가 되려 당하기만 했다.

이를 아드득 갈며 두고보자를 마음속으로 뇌까린 그녀는 황후까지 노려 보았다. 언젠가는 저 황후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황후가 되겠다는 다짐을 한번 더 제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며 화를 눌렀다.

한편 카딜은 황제의 말에 한발 앞으로 나섰다.

“폐하, 그 일은 이미 결정이 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번복하시면 황제폐하의 체면이 많이


상하실 일이될것입니다. 북대륙의 대제국 아클란의 황제폐하께서 이미 허락한 동맹을 며칠만에 손바닥
뒤집듯 한다면 주변국가들이 폐하를 우습게 여길것입니다. 방금 그 말씀은 통촉해주십시오. 폐하.”

카딜의 말에 알테베르는 달리 할 말이 없어서 이만 갈았다. 꽉쥔 두 주먹이 부르르 떨리지만 반박할 말이


없어 앓는 소리가 올라와도 참고 겨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 하긴 그렇겠군.”
속으로 자신이 왜 며칠전 카딜의 보고에 그리하라고 대답했는지 후회가 됐다. 아무래도 오늘은 2 보
전진을 위한 1 보 후퇴를 해야할 것 같았다.

“갈라스 황자, 내가 좀 심했어, 소금산은 카딜 하에르 대장군이 말한대로 그렇게 하도록 하지.”

1 년 정도 두고보다 적당한 꼬투리를 잡아 다시 동대륙을 치면 되니까 오늘은 참지 뭐. 타냐와 첫날밤도


기다리고 있으니.

“황제폐하의 너그러움에 동대륙의 제국들을 대신하여 감사말씀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폐하.”

갈라스는 분해 죽을 것 같지만 겨우 화를 누르고 감사하다 말했다.

“하하하, 뭘 그 정도를 가지고, 아까는 내가 잠시 흥분했어, 이해 하게.”

“당연합니다 폐하, 벌써 이해했습니다.”

갈라스의 말에 알테베르는 눈엣 가시같은 카딜을 쳐다보며 말했다.

“카딜, 오늘 밤은 타냐와 첫날밤을 위해 연회를 베풀 것이다. 갈라스 황자도 카딜 대장군도 참석하도록.”

“!”

“!”

카딜과 갈라스가 동시에 놀라서 두 눈을 떴다. 황제가 이렇게 빨리 첫날밤을 치루겠다 결정할줄 몰랐던
것이다. 갈라스는 그동안 지내오면서 카딜과 타냐가 연인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황제에게 받쳐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기에 갈라스는 달리 위로의 말도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밤 타냐를 취하겠다는 알테베르의 말은 갈라스에게도 충격이었다.

제 3 자인 자신이 이런데 카딜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아직 후첩지를 내리시지 않으신걸로 압니다, 대신들이 이 일로 황실의 규칙을 깨뜨렸다고 트집을
잡을지도 모릅니다. 날짜는 신전의 대제사장을 통해 길일을 잡으시는 것이 어떨런지요.”

속에서는 욕이 튀어나왔지만 카딜은 겨우 화를 누르고 간언했다.

저 돌아이 황제는 소유욕을 부리면 부릴수록 빼앗으려할 것이다. 그래서 카딜은 최대한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대신들도 그렇고 대제사장 비숍도 그렇고 느려터져서 언제가 될지 예측을 못하겠단 말이지.”

알테베르의 말에 갈라스가 나섰다.

“원래 귀한 것은 아껴뒀다 제일 마지막에 취한다 했습니다. 타냐님을 아끼신다면 급하게 서두르시지


마시고 천천히 그 기쁨을 음미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갈라스의 말에 알테베르의 마음이 조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보이자 카딜이 또 나섰다.

“원하는 것을 가졌을 때 보다 가지기 전에 더 행복감이 크다 들었습니다. 원래 가진 것은 하찮아 보이고


가지지 못한 것은 귀해 보이지 않습니까?”
카딜은 이미 가지고 또 가졌지만 그럴수록 더 가지고 싶고 더 애가 탔지만 황제에게는 반대로 고했다.
그래야 멍청한 황제가 타냐를 쉽게 가지지 못할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을 벌면서 타냐를 어떻게
빼돌릴지 묘안을 찾아야 한다.

“하긴 그렇지, 세상 모든 것이 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애가 타고 갖고 싶은 법이지.”

알테베르는 30 명의 후첩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사실 갈라스의 말도 카딜의 말도 맞았다. 가지기 전에는


내것으로 만들고 싶어 물불 안가리고 제 것을 만들었더니 궁안에 데려다 놓고 보니 시들해졌다.

이미 30 명의 후첩을 들이면서 여러번 경험했던 일이라 쉽게 수긍하는 그였다.

“알았다, 그럼 그대들의 말대로 대제사장 비숍과 대신들과 의논하여 황실의 규칙을 따라 타냐와 첫날밤을
가지겠다.”

“현명하신 판단이시옵니다.”

갈라스가 먼저 황제를 칭찬했고 카딜도 뒤이어 칭찬했다.

“그럼 연회날짜도 제대로 잡아야겠군.”

“그러시지요, 이왕이면 동맹이된 동대륙 제국들의 대공들도 초대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카딜의 말에 알테베르의 눈동자에 빛이 반짝 났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이번기회에 아클란 대제국이


얼마나 막강한 국가인지도 보여주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황제 알테베르는 당장 스탈드를 불렀다.

39 화

“부르셨사옵니까 황제폐하.”

“그래, 너는 지금 당장 황실의 사신들을 동대륙으로 보내도록 해라.”

“예?”

느닷없이 사신들을 동대륙으로 보내라는 말에 스탈드의 주름진 미간에 한 개의 주름이 더 잡혔다.

“제 31 번째 후첩을 들이는 연회라고 알리고 초대장을 보내도록 하라, 만약 참석하지 않는 대공이 있다면
내가 꽤 실망할 것이라는 뜻도 확실하게 전하고.”

“아, 예, 황제폐하,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잠시만요!”

카딜의 말에 당장 명을 받들려던 스탈드가 멈추어섰다. 황제는 카딜이 왜 그러나 싶어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법으로 몇 명의 후첩을 거느려도 상관없다고는 하나 제 31 번째 후첩을 들이기 위한 연회라고


하는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좀 그렇긴 하군, 그럼 뭐라고 하지?”

“그냥 동대륙과 동맹을 맺은 기념으로 황제폐하께서 연회를 베푼다고 하시면서 초대장을 보내시는게
어떨런지요.”

“흠, 괜찮은 생각인것 같긴 한데…”


알테베르가 고민하는 모습에 갈라스가 나섰다.

“저도 카딜 하에르 대장군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런의미로 초대를 한다면 참으로 뜻깊은 연회가 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 나도 사실 그럴까 하고 생각했었어.”

황제의 순간적인 임기응변에 카딜도 갈라스도 어이가 없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스탈드도 사실 31 번째 후첩을 맞이하기 위한 연회라는 말에 제 얼굴이 화끈거렸다. 국제적으로 나라


망신시킬뻔한 일을 카딜이 막은 것이었다. 속으로 안도한 스탈드가 말했다.

“그럼 동대륙 제국의 대공들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폐하.”

“그렇게 하도록 하라. 그리고 대제사장을 들라하라, 아니다 내가 가는게 좋겠어.”

알테베르는 타냐를 가지는데 점점 시간이 걸리자 안달이 났는지 의자에서 일어섰다. 스탈드는 다른
시종에게 황제를 모시라 지시하고 그는 황궁사신들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해 서둘렀다.

“따로 지시하실말씀 없으시면 저희들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카딜의 말에 알테베르는 뭔가 찜찜한 표정이었지만 알았다 대답했다. 두 남자가 돌아서서 나가는 모습에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지만 알테베르는 별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마음속에는 타냐를 품을 생각만
간절했다.

“이상하단 말이야.”

알테베르는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혼잣말을 했다. 그를 지키고 섰던 시종들은 황제의 말에 대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가만히 있었다.

“왜 저렇게 평온한거지? 길길이 날뛰어야 제 맛인데, 쩝.”

황제는 카딜이 타냐를 제 후첩으로 들이는데도 가만히 있는 것이 이상했다. 아무래도 뭔가가 있다 생각이
들자 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티도를 들라하라.”

갑자기 티도를 데려오라는 말에 시종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서로 바라보았다.

“뭘하느냐? 어서 티도를 들라는 전령을 보내라, 내가 지금 당장 보잔다고 하라!”

“아, 예, 폐하!”

얼른 대답을 한 부시종장은 황급하게 내실을 나가서 황실전용 전령매가 있는 곳으로 갔다. 황제의 부름을
알리는 징표를 전령매를 부리는 남자에게 주었더니 그가 그것을 매의 발에 싸매주었다. 하늘 높이 매를
띄우자 전령매는 티도가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

그날 밤.

카딜은 또 다시 타냐가 머무는 후첩궁으로 향했다. 연회가 열리는 날까지 황궁에서 머물라는 지시를
받았던 그는 속으로 기뻐했다. 안그래도 타냐를 두고 저택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였다.
톡!

창문에 작은 돌이 날아들자 타냐가 얼른 창문을 열어 주었다.

“카딜님, 제발 조심 좀.”

창문을 뛰어 넘으려던 카딜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보초나 잘 서.”

“걱정마십시오, 그런데 좀 빨리 끝내시면…”

“그게 마음대로 돼? 오늘도 어제처럼 새벽에 빠져나갈거야.”

또 밤을 새게 생겼다 싶은 바훌의 입꼬리가 비죽였다. 그러나 카딜은 타냐를 안을 생각만 간절하여 서둘러
창문을 넘었다.

바훌은 석상처럼 곧은 자세로 서서 눈동자만 열심히 굴려 사방을 주시했다. 그런데 저 멀리서 뭔가 검은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 바훌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바훌은 제발 밤고양이 이기를 바라며 그쪽으로 달렸다.

하지만 검은 물체는 밤고양이가 아닌 사람이었다. 시커먼 복장이 어디서 눈에 익다 생각한 바훌은 끝까지
놈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시커먼 복장을 한 남자는 황제가 머무는 침소건물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바훌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분명 황제가 보낸 첩자다.

바훌은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와서 창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무슨 일이지?”

이제막 타냐와 뜨겁게 하나가 되기직전의 카딜의 눈동자에 짜증이 가득했다.

“방금 검은물체가 여기를 염탐하다 도망쳤습니다.”

“뭐?”

“분명 황제가 보낸 염탐꾼 같습니다. 이제 카딜님이 여기 계신다는 것을 황제폐하가 알게되는건


시간문제인 것 같습니다. 어서 피하셔야….”

바훌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후첩궁의 사방이 밝아졌다. 이미 황제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떡해요 카딜님.”

타냐가 안절부절못할 때 카딜은 일단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마, 아무일 없을거야.”

타냐를 안심시킨 카딜이 창문을 훌쩍 뛰어넘을때였다.

“이런 쥐새끼 같은놈을 봤나, 감히 황제의 후첩이 될 여자와 내통을 하다니.”

황제 알테베르가 어느새 카딜의 앞에 나타나서 카딜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제길.
카딜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욕을 삼켰다.

“뭣들 하느냐? 저 년놈을 당장 포박하지 않고!”

알테베르의 명에 그와 함께 왔던 황실호위부대가 우르르 카딜에게 다가왔다. 일부는 타냐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몸을 밧줄로 묶었다.

“이놈도 묶어라!”

바훌을 가리키자 황실 호위부대가 바훌에게도 달려 들었다. 소란스러움에 후첩들이 밖으로 우르르 나왔다.
타냐가 카딜과 내통하다 포박당하는 모습에 기함을 했지만 대부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카딜 대장군이었다. 카딜을 향한 경외심은 후첩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모든 원성을 타냐에게 돌리는 분위기였다.

처음부터 보통 끼가 많지 않았다부터 시작하여 이남자 저남자 꿰어내는 발칙한 년이라며 타냐를 욕하기
시작했다.

감히 후첩궁에 남자를 끌어들이다니 하늘이 분노할 짓이라고도 했고 황제의 후첩으로도 성이 안차


카딜까지 유혹하는 천하의 색녀라고도 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대신들을 불러놓고 내가 직접 재판하겠다, 일단 지하감옥에 하옥시켜라!”

“예 폐하!”

호위대장은 평소에 존경했던 카딜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실망한 얼굴로 그를 지하감옥으로


이끌었다.

철커덩 하고 철창문이 닫히는 소리가 지하감옥에 울려 퍼졌다. 지하감옥은 사형을 당하기 직전의 죄인들을
가두는 곳이었다. 황제가 카딜을 이곳에 가두었다는 뜻은 그를 사형시키겠다는 의미였다.

나라가 이렇게 크게 발전하는데 크나큰 공을 세운 카딜이 잡혀 들어오자 지하감옥을 관리하던 트로이의 두


눈이 커졌다.

게다가 그의 롤모델이었던 바훌마저 함께 잡혀오자 트로이는 실망감에 어깨에 힘이 빠졌다.

카딜이 왜 잡혀왔는지 알아보는건 어렵지 않았다. 함께 잡혀온 타냐가 31 번째 후첩이 될거라는 소문은
이미 황궁에 다 퍼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원래 카딜의 여자였다는 것도 대부분 아는 사실이었다.

확실하게 죄를 묻는다면 황제가 카딜의 여자를 빼앗은 죄였다. 하지만 그가 황제였기에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던 것이다.

“물한모금도 주지 말도록!”

“예, 폐하!”

트로이는 황제의 명이라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지하감옥을 나온 알테베르는 오히려 잘되었다 생각했다.


이번기회에 밤낮으로 저를 배신할까 두려워했던 카딜을 없애버리면 차라리 잠도 잘 올 것이다 싶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지하감옥을 빠져나왔다.

뒤늦게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로젠시아가 황급하게 황제를 찾았다.

“폐하께서는 지금 침소에 드셨습니다, 내일 아침에 오시지요 공주마마.”


시종장 스탈드의 말에도 로젠시아는 그를 확 밀치고 알테베르의 침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온 스탈드가 로젠시아의 앞을 막았지만 알테베르가 그를 저지 시켰다.

“모두 물러가있으라.”

알테베르의 명에 시종장 스탈드와 다른 시종들도 물러갔다. 내실에 로젠시아와 알테베르만 남았다.

“오라버니, 카딜은 저와 결혼할 남자입니다, 그런데 지하감옥이라뇨?”

“너는 소식을 듣고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감히 내 후첩이 될 여자와 내통했다. 그것도 내 황궁안에서
말이다!”

“원래 카딜의 여자를 오라버니가 빼앗은거잖아요!”

머리가 나빠서 상황판단이 잘 되지 않은 탓에 로젠시아의 입에서는 알테베르의 뼈를 때리는 말들이


쏟아졌다.

“너, 너, 지금 말 다했어!”

“아직 다 안했어요! 이런일이 벌어지면 카딜님은 살려두고 타냐만 죽이면 되잖아요! 후첩이 삼십명이나
있는데 타냐를 굳이 후첩으로 삼을 필요가 있어요? 찾아보면 타냐보다 예쁘고 몸매좋은 여자가
널렸을텐데?”

“그 입 안 다물어! 감히 황제에게 하는 말투가 그게 뭐지!”

“황제이기 이전에 제 사촌 오라버니잖아요! 지금은 사촌오라버니로서 말하는 겁니다, 저렇게 카딜


대장군을 죽여버리면 북대륙의 힘이 약해질텐데 괜찮겠어요! 아니할말로 북대륙이 이렇게 강해진건 다
카딜 대장군 덕이잖아요!”

“닥쳐! 확 감옥에 가두기전에!”

“하아-이젠 마지막 남은 핏줄인 나까지 감옥에 가두시려구요! 마음대로 하세요! 황좌를 차지하려고 그
많은 형제자매를 다 죽였는데 나하나 못 죽일 리가 없겠죠!”

로젠시아는 큰 대자로 팔다리를 뻗고는 그 자리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어이가 없어진 알테베르는 스탈드를
불렀다.

“이거 당장 좀 치워!”

“아, 예, 폐하!”

스탈드가 로젠시아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로젠시아는 스탈드를 발로 차버렸다.

어이쿠 소리를 내며 스탈드가 뒤로 나자빠지자 다른 시종 둘이 달려 들었다. 그러나 로젠시아는 작정을


했는지 두 시종의 팔을 돌아가며 물었다. 여기 저기서 비명소리와 함께 시종들이 두로 물러나자
알테베르는 끙 앓는 소리로 말했다.

“저거 머리가 나빠 다루기 쉽겠다 싶어 살려뒀더니 더 골치가 아프네, 확 죽여버려?”

40 화

로젠시아가 황제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지하감옥에서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갈라스는 로젠시아가 자신을 찾아온 것에 놀랐다. 안그래도 갈라스도 소식을 접하고 어떻게 하면 카딜과
제 생명의 은인인 타냐를 구할까 고민중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로젠시아가 찾아와서 카딜과 타냐를 구할 방안을 제시했다. 자신이 황제에게 찾아가
시간을 끌며 주위를 흐트릴테니 카딜과 타냐를 구해서 황궁을 빠져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녀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지난 며칠동안 보아왔던 것을 토대로 말하자면 로젠시아는 천하에 쓸모없는
여자였다.

그녀를 칭찬할 만한 것은 오로지 예쁜 얼굴과 몸매뿐이었다. 그런데 극적인 순간에 이런 멋진 계략을


생각해내다니.

“카딜대장군님,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지하감옥 관리자 트로이는 그의 부하들과 일렬로 서서 카딜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하긴 날 풀어줬다는 것을 나중에라도 황제가 알면 그대들도 무사하지 못하겠지.”

“그렇습니다. 어차피 죽을바에는 카딜대장군님과 함께 하면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좋다, 허락하겠다, 일단 붉은 기사단들을 집합시켜야 하니까 저택으로 먼저 가야겠다.”

“말을 준비해놓았습니다.”

트로이의 안내로 지하감옥을 빠져나온 카딜과 타냐, 그리고 바훌은 황궁의 뒷문으로 빠져나와 트로이가
미리 데려온 그의 백마에 올라 타냐에게 손을 뻗었다. 타냐가 그의 손을 잡자 힘껏 끌어 당겨 제 앞에
앉혔다. 나머지 말에는 바훌이 올랐다.

말을 타고 저택으로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트로이는 멀어지는 카딜을 쳐다보다 서둘러 지하감옥으로


돌아왔다. 내일 아침까지 카딜이 지하감옥을 빠져나갔다는 것을 황제가 알면 안되기에 평소처럼 평온함을
유지하라 지시했다.

한편, 로젠시아에게 한시간 동안 시달린 알테베르는 겨우 그녀를 끌어내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정말 확 죽여버려야 하나?

사실 카딜도 끝장낼텐데 이젠 로젠시아가 별로 필요하지 않긴 했다. 날이새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서


로젠시아도 카딜과 묶어서 제거해버릴까 하며 그는 잠에 빠져들었다.

***

저택에 도착한 카딜은 붉은 기사단부터 소집했다. 그의 저택 훈련장을 가득 매운 붉은 기사단은 500


명이었다.

한밤중에 모이라는 지시에 실전 훈련이라도 하나 하며 모여들었던 붉은 기사단은 카딜이 갑옷을 입은


모습에 어리둥절해 하며 옆사람과 시선을 주고 받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말 잘 듣고 판단하길 바란다. 미리 말하지만 절대 강요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나는


이 시간 이후로 아클란 대제국의 카딜 대장군이 아니기때문이다!”

웅성웅성

붉은 기사단원들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할 때 바훌이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조용! 아직 대장군님 말씀이 남았다.”


그의 말에 수군대던 붉은 기사단원들이 곧장 입을 닫았다.

카딜이 다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나라는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래서 나는 황제를 죽이고 대의를 이루려고 한다! 백성이 편히
살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천민과 평민이 고통받지 않고 귀족만 배불리는 세상이 아닌 인간이라면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제국을 만들것이다! 내 뜻에 따를자는 남고 그렇지 않은자는 지금 당장
자리를 떠나도 좋다!”

말을 마친 카딜은 붉은 기사단원들을 훑어 보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꿈쩍조차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섰다.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겠느냐!”

“예! 대장군!”

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자 저택이 울릴 정도였다. 같은시간 갈라스는 그의 호위무사 에이단과 함께


동대륙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어서 동대륙으로 가서 카딜이 혁명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전해야 한다.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카딜은 붉은 기사단 하나 하나와 시선을 맞추겠다는 듯 천천히 좌에서 우로 시선을 훑었다.

“저희는 대장군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분대장의 큰 목소리에 여기 저기서 소리를 질렀다.

“저희 목숨은 대장군님의 것입니다!”

“저희들은 대장군님이 아니셨다면 이미 전쟁터에서 죽었을 목숨입니다. 기꺼이 대장군님의 뜻에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대부분의 붉은 기사단원들은 평민이었다. 그중에 몇몇은 아주 드물게 천민 출신도 있었다. 카딜 덕분에


부모형제가 편하게 먹고 산지 수년이었다.

황제는 자신밖에 모르고 제 호화스러운 생활을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거머리같은 놈이란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저희는 지금까지 카딜 대장군님을 위해 싸웠습니다! 절대 황제를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또 한명의 목청높은 소리에 모두들 함성을 지르며 검을 높이 쳐들었다. 횃불이 밝혀진 카딜의 저택
훈련장은 당장이라도 황궁으로 쳐들어갈 기세로 함성을 지르는 붉은 기사단원들로 인해 지축이 울릴
정도였다.

바훌이 또 검을 높이 들어 올리자 일시에 고요해졌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해진


순간 카딜이 말했다.

“그럼 너희들의 진심을 믿고 한가지 비밀을 말해주겠다.”

갑자기 카딜이 하는 소리가 뭔지 몰라 하는 사람은 붉은 기사단 뿐이아니었다. 타냐도 바훌도 이게 뭔가


싶어 카딜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카딜이 타냐의 손을 잡아 제 곁에 세웠다.

결혼발표라도 하나 싶었던 붉은 기사단원들은 박수를 칠 준비까지 했다. 하지만 카딜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소리가 나왔다.
“여기 있는 타냐는 그냥 천민이 아니다.”

“!”

모두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카딜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여기 이 사람은 북대륙의 주인인 샤마란족의 후손이다.”

카딜의 말에 타냐 자신도 놀라서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뜨고 카딜을 쳐다보았다.

“지난번 갈라스 황자가 내 검을 맞고 죽기 직전에 타냐가 그를 살린 것을 기억하느냐?”

카딜의 질문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바훌은 설마 하며 타냐를 쳐다보았다.

너무 엄청난 일이라 며칠이 지났을때는 모두들 뭔가 잘못 봤겠지 했었다. 사람이 어떻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겠는가 말이다. 검술에 뛰어난 카딜 대장군이 아마도 갈라스 황자를 죽지 않을만큼 찌르지 않았을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옮겨가던 중이었다.

“그 하얀빛은 나를 두 번이나 살렸다. 그 두 번이 언제인지는 너희들도 알 것이다.”

“그건 아밀리에가 치유마법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한 붉은 기사단의 물음에 카딜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가 왜 아밀리에를 내세웠는지도 말해주었다.

“알테베르황제는 샤마란족을 죽이려고 일부러 날 다치게 했고 일부러 내게 활을 쏘았다. 황제가 왜


샤마란족을 죽이려는지 그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황제의 선대, 아니 그 위의 선대황제가 이
북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이 곳의 주인인 샤마란족을 몰살했다.”

카딜의 말에 타냐는 제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카딜의 말이 사실이야, 넌 샤마란족의 후예가 맞아.’

그제야 타냐는 자신이 왜 그런 힘을 가졌는지 이해가 됐다.

‘넌, 그러니까 다시말해서 난 샤마란족 족장의 딸이야, 네가 나고 내가 너니까 지금부터는 나라고 할게.’

타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테베르와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우리의 원수야, 평화로웠던 우리 숲을 쑥대밭을 만들고 우리


종족을 몰살했어, 족장이신 아버지는 어머니와 날 데리고 피신했지,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천민행세를
하며 아클란 제국에 숨어 살았어.’

타냐의 두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하다 저들이 북대륙으로 들어왔어?”

‘처음에는 마법석이 무한정으로 쏟아지는 광산을 찾아 왔었어, 그때는 그들이 그렇게 변할지 모르고
증조할아버지께서 우리가 사는 제이단 숲만 건들지 않으면 자유롭게 광산을 이용하라고 하셨어, 그런데
욕심이 많은 당시 황제가 약속을 어기고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제이단 숲을 불지르고 우리 샤마란족을 전부
죽였어, 그리고 북대륙을 집어 삼켰지.’

‘그리고 화이트고스트들은 사실 우리 샤마란족의 힘으로 움직이는 마물들이야. 우리 샤마란족을 몰살한


군대만 공격하는 이유가 그거였어.’
타냐는 제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계속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황제의 내실에 금서가 있다, 그걸 가져와야 해. 그게 있어야 해. 금서를 네가 가지는 순간 우리 제이단


숲의 정령들이 깨어날거야, 그건 바로 너와 나의 파워가 될거야.’

“알았어, 금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니까 네가 알려줘.”

‘그래, 내가 알려줄게. 황궁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내실부터 뒤져.’

“응.”

“그래서 나는 여기 있는 타냐를 북대륙의 여황제로 만들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원래 이곳의


주인이었으니까!”

타냐가 제안의 목소리와 대화하는 사이 모든 설명을 마친 카딜은 결론을 선포했다.

“반대하는 자가 있느냐!”

카딜의 물음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자 카딜이 다시 한번 물었다.

“타냐를 여황제로 추대할 것에 동의하는가! 동의 하면 당장 무릎을 꿇어 여황제가 될 타냐에게 예를


표하라!”

타냐는 어리둥절했다가 얼른 카딜에게 아니라고 말하려 두 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이미 붉은 기사단원과


바훌마저도 타냐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카딜이 타냐를 향해 돌아서더니 그녀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북대륙의 주군으로 받들겠습니다, 저희의 청을 받아 주십시오!”

“카딜님, 그건 절대 안될 일이예요, 제가 뭐라고 여황제라니 말도 안돼요. 얼른 일어나세요.”

그때 바훌이 나섰다.

“타냐님은 여황제가 되실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바훌은 고개를 더 깊이 숙이고 타냐의 말을 기다렸다. 느닷없이 여황제가 되어달라는 말에 타냐는 어떻게
하느냐며 제 안의 타냐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 안의 타냐는 아까와 달리 잠잠하기만 했다.

이런 경우는 타냐가 대답을 해야만 한다. 그녀가 위험에 처하거나 잘못된 판단을 하면 목소리가 들렸기에
지금상황은 받아들이라는 뜻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여황제라는 자리가 너무 어마어마해서 타냐는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카딜이 고개를


들어 타냐와 눈을 맞추었다.

“대답해 타냐, 내가 네 곁에 있으니까 아무걱정 말고.”

카딜의 든든한 말에 타냐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는 저를 향해 무릎을 꿇은 기사들과 바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알겠어요, 제게는 너무 엄청난 일이지만 당신만 믿고 받아들일게요.”

그녀의 말에 카딜이 벌떡 일어나더니 타냐를 와락 끌어 안았다.


“역시 당신은 보통 여자가 아니었어. 내 말 앞에 뛰어 들어 내 길을 막아설 때부터 난 당신에게서 특별한
기운을 느꼈거든.”

41 화

카딜의 말에 타냐는 그를 처음 만났던 그 날을 떠올렸다. 별로 얼마되지 않았는데 지금의 자신과 그때를


비교해보니 마치 십년은 지난 것처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때는 그저 동생 토디엘을 찾아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전쟁노예로 끌려가시며 동생을 잘 돌봐달라


부탁하셨던 부모님의 말씀을 지키고 싶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 말이 바로 유언이셨던 것이다.

부모님의 유언과도 같았던 부탁을 지키지 못할바에는 차라리 죽는게 낫다 생각했었다. 그래서
두려움같은건 애초에 없었다.

“사실 나도 말을 안했었는데요…..”

“응? 무슨 말?”

타냐는 카딜을 우러러보듯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날 당신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온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전율과 함께 그동안 채찍에 맞았던 상처며
노동하느라 여기저기 찍혔던 상처들이 싹 나았었어요. 그리고 거칠었던 머리카락과 피부까지 윤기로
반짝였어요.”

“그래서 그렇게 깨끗하고 맑은 피부와 머릿결을 가졌었던거였어? 난 속으로 꽤 놀랐었거든, 천민에


온몸이 진흙으로 뒤덮인 여자의 피부와 머릿결치고 너무 윤기나고 매끄럽다고 생각했었어.”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그날 그렇게 바뀌었었어요. 어쩌면 당신과 나는 운명이었나봐요, 어떤


연결고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과 나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인가봐요.”

“그 말을 다른말로 풀이하면 이런거야, 우린 천생연분, 결혼을 할 수 밖에 없는 하늘이 짝지어준 베필.”

“지금 혹시 청혼하는 건가요?”

“그렇게 생각든다면 그런거고.”

“뭐야, 그런 말이 어딨어요?”

“그보다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카딜의 눈빛이 다시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타냐에게 예를 표하고 있는 붉은 기사단과 바훌에게 말했다.

“너희들의 뜻은 이제 수렴되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모든 것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진 않겠다. 우리는 하늘도 우리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오늘 밤 안에 4 대귀족가 중 우리와 뜻을
함께할이가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 단 한 귀족가라도 우리와 함께 한다면 우리의 대의는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우리편이 되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걱정할 것 없다, 우리에겐
샤마란족의 후예 타냐가 있으니까!”

카딜의 말에 붉은 기사단원은 다시 한번 함성을 내질렀다.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그들을 진정시킨 카딜은 바훌에게 전쟁준비를 철저하게 하라 지시를 내리고는
타냐와 함께 황후의 아버지인 데자르백작을 찾아갔다.
자정이 다되어 가는 시간임에도 카딜은 4 대가문의 수장을 만나기 위해 급하게 움직였다.

4 대가문중에 가장 강하다는 황후의 아버지 데자르부터 찾아온 카딜이었다. 데자르 백작만 제 편으로
돌아서도 이 대의는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것이다.

자신을 찾아온 카딜을 본 데자르는 뭔가 일이 있구나를 짐작했다. 하지만 그가 황제를 바꾸려는 역모를
꾀하기 위함이란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디 변방에 적군이 쳐들어왔나 생각하며 카딜을 집안으로 들였는데 카딜의 입에서는 상상도 못할 말이
나왔다.

“방금 뭐라고 했소 카딜 하에르 대장군?”

“혁명이라고 했습니다. 데자르 백작.”

“감히 황후의 아버지인 내 앞에서 혁명을 일으킨다고 하다니, 하에르 대장군 지금 제 정신인가? 그리고
저 여인은 분명 황제의 서른한번째 후첩인데 어찌 하에르 대장군과 함께 있는것이오? 아니, 상관없소, 더
들을말도 할 말도 없으니까 그만 나가주시오, 내 그동안 대장군의 공을 생각하여 방금 들었던 말은 못들은
것으로 해줄테니.”

데자르백작이 소파에서 일어서자 카딜이 검을 빼들었다.

“!”

데자르 백작은 카딜이 이렇게까지 나올줄 예상못했다가 너무 놀라서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카딜은 검의 끝을 데자르백작의 목젖이 있는 곳에 겨누었다.

“나를 역모자로 비하시키지 마십시오, 잘 생각해보시면 데자르백작이야 말로 황제 알테베르의 최대


피해자가 아닙니까?”

“무, 무슨…소리인가?”

데자르는 떨리는 입술로 겨우 되물었다.

“황후마마 슬하에는 딸 하나 있고 제 3 후첩과 제 8 후첩에게만 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황제 알테베르


역시 후첩 소생입니다. 현재 황후마마의 권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들을 낳은 후첩들에게 밀려 그
어떤 일에도 입도 떼지 못하는 투명인간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후첩의 아들이 황태자직위라도
받는 날에는 언제 비명에 가실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자리가 될 것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그, 그렇다고 황제를 죽이는 역모에 내가 가담할거라 생각하는가? 차라리 날 죽이게나.”

“죽이는건 쉽습니다. 하지만 데자르백작께서 저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황후마마 또한 목숨을 잃게


될것입니다. 따님이 목숨을 잃어도 좋습니까? 그리고 혹시 오해하실까봐 말하는데 제가 여기에 온 것은
힘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최대한 적은 수의 인명피해를 위해서입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구요.”

카딜의 말에 데자르백작은 제 목에 겨누어진 칼날 때문에 고개를 뒤로 뺀채 말했다.

“차라리 죽여라, 황제를 배신한 역적으로 역사에 기록되느니 그게 낫다.”

“할 수 없군요.”

카딜의 말에 데자르가 두 눈을 감았다. 카딜은 검을 뒤로 빼더니 그의 어깨를 푹 찔렀다.


“크헉!”

데자르는 제 심장을 찌르지 않고 어깨를 찌른 카딜의 의중을 모르겠다는 듯 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타냐가 나섰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데자르는 카딜의 검이 빠져나가자 본능적으로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을 치우시죠, 제가 낫게 해드리겠습니다.”

“!”

데자르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눈빛으로 타냐와 카딜을 번갈아 쳐다보다 타냐의 몸에서 하얀 빛이


생성되는 것을 보고는 너무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타냐는 그의 상처에 두 손바닥을 펼치고 치유의 힘을 끌어 올렸다. 그렇게 몇초 지난 뒤 데자르는 자신의


상처가 말끔하게 사라진 것에 기함했다.

“다, 당신 혹시….?”

“예, 맞습니다, 샤라만족의 후예입니다.”

“아, 아니 어떻게….그럴수가…샤마란족은….”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데자르에게 카딜이 설명해주었다.

“선대 황제가 멸족시킨 샤마란족의 후예가 맞습니다. 방금 그녀의 능력을 직접 경험했지 않습니까, 믿기
어려우시면 한번 더 찔러드릴 수있습니다.”

“그, 그만하게, 아무리 낫게 해준다고 해도 칼에 찔리는 고통은 장난이아니니까.”

데자르의 말에 카딜이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며 웃었다. 그러자 데자르가 일어서서 제 상처를 살피며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말했다.

“혹시 병든자도 고칠 수 있습니까?”

갑자기 타냐에게 존대를 하는 데자르였다.

“누가 아픕니까?”

“예, 사실은 황후마마께서 병에 걸렸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아픈 사람처럼 안보였는데요?”

타냐가 놀라서 묻자 데자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제가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치유마법도 사용해보고 좋다는 약도 다 써보았지만 병의


진행은 느리게 했는데 낫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니 그걸 왜 황제께 알리지 않았습니까?”

타냐의 물음에 카딜이 대답했다.

“황후가 아프면 폐황후가 되거든, 특히 폐결핵에 걸렸다고 하면 전염된다고 화형을 당할 수도 있어.


폐결핵은 마녀만 걸리는 병이라고 오해하고 있으니까.”
카딜의 말에 데자르가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그래서 황궁의에게 말도 못하고 내가 몰래 궁을 드나들면서 약재를 공급했었는데 이젠 거의 한계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타냐님, 제 딸을 살려주시면 시키는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갑자기 데자르가 타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타냐가 얼른 데자르의 손을 잡아 소파에 앉게 했다.

“당연히 살려드려야죠, 완전히 죽은자까지는 모르겠지만 샤마란족의 치유능력은 그 어떤 상처나 병도 낫게


합니다. 하지만 힘을 너무 쓰면 에너지가 고갈되어 좀 쉬어야하긴 하지만요.”

타냐의 말에 카딜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있잖아, 당신 에너지원.”

카딜이 윙크까지 찡긋하자 타냐의 두 뺨이 화르륵 타올랐다. 그녀는 얼른 카딜의 팔을 떨쳐내고는


데자르에게 말했다.

“아무걱정 마세요, 제가 황후마마의 병을 고쳐드리겠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뜻하지 않게 타냐덕분에 데자르가 카딜의 편으로 돌아섰다. 타냐가 그녀의 치유능력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목숨을 걸고 역모를 반대했을 그였다. 그런 인격이었다는 것이 오히려 카딜은 믿음직스러웠다.

쉽게 변절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수 있기에 말이다.

그렇게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가 했는데 제 3 후첩과 제 8 후첩인 렐리츠가문과 발키리가문은 카딜의 제안을
거절했다. 어쩔 수 없이 두 가문의 수장과 그 가족들은 포박하여 지하실에 가둘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왜 카딜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두 가문 모두 다음 황제 자리가 자신의


외손자가 될 것이라는 허황된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카딜은 개의치 않았다. 이미 제 1 가문 데자르백작의 사병들만해도 그 수가 5 천이었다. 황제가 큰


소리치는 이유가 4 개의 가문들이 가지고 있는 사병들때문이었다. 그 네 개의 가문중에 제 1 가문인 데자르
백작이 가장 많은 사병을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 백작들은 2 천정도만 보유하고 있었고 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해서 카딜이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살길을 제안했지만 저들이 거절했기에 그 기회는 사라진 것이다.

4 개의 가문을 돌고나니 시간은 벌써 새벽 4 시가 되었다.

“힘들지 않아? 아까 치유능력을 사용했잖아.”

“그 정도로는 힘들지 않아요.”

타냐의 말에 카딜은 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타냐가 나한테 달려들길 기대했는데, 쩝.”

“뭐라구요?”

타냐가 웃는 얼굴로 되묻자 카딜이 말했다.


“네가 달려들면 못이기는척 받아주려고 했는데.”

“당신이 워낙 에너지를 차고 넘치게 줘서 에너지가 고갈될 시간이 없어요.”

타냐의 말에 카딜은 그런가? 하고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때 타냐가 곰곰이 생각했던 그녀의
생각을 말했다.

“카딜님.”

“응, 왜?”

“제 안의 타냐가 말했어요, 금서를 손에 넣어야 한다고.”

“금서?”

42 화

“네, 금서가 내 손에 들어와야 모든게 이루어진다고 했어요, 뭐가 이루어지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일단 금서부터 손에 넣어라고 하더라구요, 그 금서는 지금 황제의 내실에 있다고 했구요.”

“그래?”

타냐의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앞날을 예측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아는 카딜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럼, 황제의 내실에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데…..”

카딜이 뭔가 계책을 떠올리려 곰곰이 생각할 때 타냐가 말했다.

“네, 그래서말인데 우리 다시 지하감옥으로 가야해요. 아침에 황제가 당신과 나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내가 황제를 알현하고 싶다고 할거예요.”

“너무 위험하지 않아? 그리고 황제가 널 알현해줄까?”

“제 생각에는 알현해줄거 같아요, 아마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을거예요, 당신하고 내가 같이 있는 것을


보고 화를 그렇게 내는 것을 보고 짐작했어요.”

“그건 그냥 모험이잖아, 그것도 너무 위험함 모험.”

“아니면 다른 방법도 있어요, 이게 더 위험하긴 하지만.”

타냐의 두뇌 회전이 빨라진 것에 카딜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자신이 샤마란족장의 딸이고 북대륙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여황제로 추앙받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의 타냐가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도 넘치고 리더십도 생겨난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모습이 카딜에게는 섹시미로
다가와서 문제이긴 했다.

자꾸만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다.

“위험하다는 그 다른 방법은 뭔데?”

카딜은 설마 아니겠지 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타냐의 눈빛을 보니 맞는 것 같았다. 그녀의 정체를
밝히자고 할 것 같아 카딜은 벌써부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샤마란족의 후예라고 밝히는 거예요.”

“하지마, 너무 위험해.”

자신의 예측에서 한치도 빗나가지 않은 타냐의 말에 카딜은 완고했다.

“그 방법 밖에 없어요, 당신 말대로 황제가 샤마란족의 후예인 나를 찾기위해 그런 여러 가지 짓을


꾸몄다면 반드시 날 만나줄거예요, 그때 황제의 내실에서 금서를 손에 넣으면 되요.”

“말처럼 그게 쉬운줄 알아?”

카딜이 급기야 화를냈다.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아직 인지하지 못한 듯 해서였다.

“지금 화내는 거예요?”

“내가 화 안나게 생겼어? 겁도 없이 제 몸을 던지려고 하는데?”

“……….”

“왜 말이 없어?”

“화 좀 가라앉으면 말하려구요.”

“뭐?”

“카딜님 지금 이성이 살짝 나간 것 같아요, 그래서 말 안하려구요.”

타냐는 어느새 카딜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주물러대는 기술까지 익혔다. 그녀가 입을 꼭 다물자
카딜이 얼른 부드러운 음성으로 설득했다.

“차라리 황제를 없애고 금서를 손에 넣자. 그게 더 나아, 난 절대 널 황제한테 보내지 않을거야.”

“지금 고집부릴때가 아니예요, 한발 물러서서 제 3 자의 입장으로 생각해봐요.”

“내가 어떻게 제 3 자의 입장이 돼? 이미 너와 일심동체가 되어버렸는데.”

카딜의 말에 타냐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중요한 순간에 웃으면 안되는데 그냥 웃음이 터져나왔다.


태산같이 크고 철옹성같이 단단해보였던 카딜이 순간 어린아이처럼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방금 웃은거야? 남은 애가 타서 죽겠는데?”

카딜의 말에 타냐는 얼른 늘어난 입꼬리를 끌어 당기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잘 들어봐요, 카딜님, 황제는 그나마 나한테는 털끝을 바짝세우지 않아요, 내가 나서야 황제의 경계심을
약하게 만들 수 있다구요, 그리고 내가 샤마란족이라고 하면 두말 않고 날 제 앞에 데려다 놓으려
할거예요, 정 내가 걱정되면 내가 황제와 만날 때 카딜님은 지하감옥을 나와서 내실밖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 되겠네요, 어차피 재판에는 나가지 않을거잖아요.”

타냐의 아이디어가 좋지만 카딜은 일부러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타냐가 카딜의 두 손을 잡더니
그의 두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했다.

“금서만 내 손에 들어오면 힘이 생긴다고 했어요, 그 힘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난 내 안의 타냐목소리를


믿어요. 타냐가 그랬어요, 내가 그 목소리이고 그 목소리가 바로 나라고, 그러니까 나 한번만 더
믿어줘요. 으응?”
타냐가 카딜의 두 손을 잡은채 몸을 살살 흔들자 카딜은 미치겠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동이 트기전에 동대륙연합군들이 국경에서 대기하기로 되어 있었다. 국경에서 황궁까지는 쉬지않고 말을


타고 하루종일 달리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사실 황제가 날이 밝는 대로 재판을 집행하면 일이 순조롭지가 않다.

“카딜님, 얼른 대답해요, 시간이 없어요.”

타냐가 재촉을 하자 카딜이 그녀에게 말했다.

“좋아, 타냐 네 말대로 시간도 없고 묘책도 없어, 그래서 나는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이 타냐의 말대로


해야할 것 같아, 대신 할 수 있으면 하루 정도 내 재판을 뒤로 미루게 해봐.”

“왜요?”

“동대륙 연합군이 내일 도착하거든, 황궁에 있는 호위부대와 황실병사들의 수가 만만치가 않아, 물론


우리 붉은 기사단과 데자르 백작의 사병과 힘을 합치면 승산은 있어, 대신 희생이 많이 따를거야, 나는
되도록 무력으로 황제를 밀어내기 보다는 황제의 항복을 받아 내고 싶어.”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예요, 황제 때문에 무고한 병사들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 그러니까 우리의 힘이 황제의 군대보다 막강하다는 것을 알려줘야 해, 그래야 황제가


항복할테니까.”

“그럼 당신하고 내 재판일을 내일로 미루기만 하면 되는건가요?”

“그래, 그렇게만 되면 무력없이 황제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거야.”

“알았어요, 노력해볼게요, 만약 일이 틀어지면 원래대로 싸워야 하는 거죠?”

“그렇지, 그렇게 되면 타냐는 제일 먼저 피신해야해, 당신은 차기 여황제가 될 아주 중요한 인물이니까.”

카딜의 두 눈에 타냐를 여황제로 만들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보였다.

타냐는 그가 안심할 수 있게 연한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얼른 황궁 지하감옥으로 다시 돌아가야겠지?”

“네.”

“시간이 없다는게 아쉽네, 안그랬으면 널 한번 안고 가는건데.”

“대의를 위해 그건 뒤로 미뤄줘요.”

타냐의 말에 카딜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한가지 말 안한게 있어요.”

“뭔데?”

“내 안의 다른 타냐의 말에 의하면 화이트고스트가 우리 샤마란족의 정령들이라고 했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네, 그래서 화이트고스트들이 황제의 군대만 공격했던거라고 했어요. 샤마란족의 원수라서.”

“그랬었군, 어쩐지 이상하다 했었어. 화이트고스트들이 병영에만 나타났었거든.”

“그 화이트고스트하고 금서가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긴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지난번에 동쪽 병영에서 화이트고스트들이 공격했었잖아요.”

“응, 그랬었지.”

“그때 화이트고스트들이 나한테 덤벼들지 않고 물러갔잖아요.”

“응, 그랬지.”

“그게 아마 금서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내 안의 목소리에 의하면 금서만 손에 들어오면 파워가


강해진다고 했거든요.”

“그래?”

“네, 제 추측으로는 화이트고스트가 샤마란족의 후예인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어요.”

타냐의 말에 카딜이 고개를 끄덕이다 그녀를 가느다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당신이 점점 위대해보여서, 이러다 아내에게 꼼짝 못하는 남편이 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도 되고.”

“풋, 그거 또 청혼을 돌려서 말하는 건가요?”

“글쎄, 그거야 나도 모르지.”

카딜이 딴청을 피우자 타냐가 그의 목을 끌어 안으며 폴짝 뛰어 올랐다.

“읏, 설마 또 다른 타냐?”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묻는 카딜에게 타냐가 고개를 가로로 젓고는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확
겹쳐들었다. 카딜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는 그녀의 키스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타냐의
두 다리가 카딜의 허리에 착 감겼다.

이렇게 이대로 그녀를 안고 저택 침실로 들어가서 뒹굴고 싶었지만 카딜은 이성을 챙겼다.

***

다음날 아침.

동이트면 황제의 여자를 탐한 카딜을 참수시키겠다는 재판을 열 생각으로 알테베르는 일찍 일어났다.

“폐하! 스탈드 이옵니다!”

스탈드의 목소리에 알테베르가 대답했다.

“들라.”
그의 대답에 스탈드는 문을 연채로 고했다.

“지하감옥 관리자 트로이가 황제폐하를 알현코자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지하감옥 관리자 트로이가 무슨일로? 죄인들이 탈옥이라도 했다더냐?”

“그게 아니옵니다 폐하!”

스탈드가 대답하기전에 트로이가 모습을 드러내며 고했다. 덩치가 보통 사람의 두배는 거뜬히 넘는
트로이가 머리를 조아리자 알테베르가 물었다.

“그게 아니라면 네가 무슨 일로 이리 이른 아침에 날 보자고 한 것이더냐?”

“그게….제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들어서 그냥 넘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장난이 아닌 것 같아서 이렇게
황제폐하께 달려 왔습니다.”

“답답하다, 어서 본론만 말하라!”

알테베르가 짜증을 내자 트로이가 말했다.

“지하감옥에 잡혀 들어온 타냐라는 여자가 자신이 샤마란족장의 후예라고 했습니다. 황제폐하께 고하면
분명 무슨 분부가 있을것이라면서요.”

“뭐?”

타냐가 샤마란족의 후예라는 말에 황제의 두 귀가 쫑긋해졌다. 그는 자신의 침대 옆에 있는 협탁위에 놓인


금서를 한번 쳐다보고는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했어?”

“예, 제가 믿을 수 없다며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더니 눈앞에서 그 증거를 보여주겠다면서 우리 병사 중에


팔이 부러진자가 있었는데 하얀빛을 내서 금방 낫게 했습니다. 정말 감쪽같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급하게 달려왔습니다만.”

트로이의 말에 알테베르가 벌떡 일어섰다.

“그것이 진짜더냐?”

“예, 제 이 두눈으로, 아니 지하감옥을 관리하는 병사들도 다 같이 보았습니다요.”

“이런, 어쩐지 묘한 기운이 흘러나온다 했더니, 타냐가 바로 샤마란의 후예였어. 여봐라, 당장 타냐를
내 앞에 데리고 오너라.”

알테베르의 명령에 트로이가 큰 목소리로 대답하고 물러갔다. 알테베르는 드디어 뭔가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스탈드에게 지시했다.

“당장 가서 대제사장 비숍을 데려오너라!”

“예, 폐하!”

스탈드는 방울소리가 나게 대신전으로 향했다. 아직 모두가 알테베르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지못하는


알테베르는 이제야 뭔가 일이 제대로 풀리는구나 하는 눈빛으로 스산하게 미소지었다.

비숍이 그렇게 겁을 집어 먹고 난리를 떨었는데 별거 아니네 하는 눈빛이었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다느니 온갖 소리를 다 지껄였는데 겨우 여자하나때문이었다니.
알테베르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실소를 터뜨렸다.

43 화

같은 시간.

황후 메리엔이 지하감옥을 찾아왔다. 어젯밤 부친에게서 급한 전갈을 받았기 때문이다.

카딜과 타냐와 만나서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이야기를 모두 들은 황후는 타냐를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후마마.”

지하감옥에서 근무하는 병사가 메리엔을 보고 깜짝놀라며 예를 표했다.

“여긴 어인일이십니까, 폐하께서 아시면…..”

“괜찮다, 타냐와 카딜 장군에게 안내하라.”

“하지만….”

“시간이 없다, 어서.”

메리엔의 근엄한 눈빛에 지하감옥 병사는 얼른 알았다 대답하고 그녀를 안내했다. 이미 카딜의 혁명에
동참하기로했고 황후의 가문인 부친 데자르백작도 합세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기에 다른 의심은
없었다.

“황후마마, 여긴 어떻게….”

타냐가 먼저 황후를 보고 놀라서 물었다. 병사가 철문을 열어주자 황후는 안으로 들어섰다. 옆방에
감금된 카딜도 철창사이로 황후에게 인사를 했다.

메리엔은 카딜에게 눈인사를 하고 타냐에게 예를 표했다.

그녀가 인사를 하자 타냐는 몸둘바를 몰라하며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황후마마.”

“아닙니다. 제가 귀하신 분을 몰라뵈었습니다. 혹시 제가 무례했던적이 있었다면 용서해주십시오.”

메리엔의 진심어린 사과에 타냐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황후마마의 부친 데자르백작께서 저희의 편이 되어주셔서 얼마나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해야죠, 그리고 병이 있으시다 들었습니다. 제가 고쳐드리겠습니다.”

타냐의 말에 메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여기 병고치려고 온게 아니예요, 난 그저 샤마란족의 후예인 타냐님을 한번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사죄도 드리구요.”

“미안해하실 필요없어요, 잠시만요.”

말을 마치자마자 타냐의 몸에서 하얀 빛이 생성되었다. 그 하얀 빛은 잡고 있는 메리엔의 손을 통해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몸안에서 뭔가 꿈틀대는 듯한 느낌과 함께 그 하얀빛은 어느새 메리엔의 온몸을
감쌌다.

세포 하나하나가 눈을 뜨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뭔지 모르게 온몸이 가뿐해졌다. 힘도 솟아났다.

“이제 됐어요, 황후마마.”

“감사합니다 타냐님, 그런데 직접 경험을 했는데도 믿기가 어렵네요.”

“감사하긴요.”

두 여자가 서로 손을 잡고 마주보고 있을 때 카딜이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마마, 어서 거처로 돌아가셔서 공주마마와 함께 궁을 빠져나오십시오.”

“안그래도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궁을 나가기 전에 내가 도울일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왔는데….혹시 내가 도울일은 없나요?”

“없습니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너무 위험합니다. 데자르백작께서 사병을 이끌고 황궁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은 곧 황제의 귀에 들어갈것입니다. 그러니 어서 황궁을 빠져나와 본가에 가서 몸을
숨기시기바랍니다.”

카딜의 말에 황후 메리엔은 알았다며 급하게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때 트로이가 왔다.

“폐하께서 타냐님을 바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타냐님 준비되셨습니까?”

“예, 준비되었습니다.”

타냐가 결의에 찬 두 눈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조금전 힘을 써서그런지 타냐가 비틀했다.

“타냐!”

카딜은 타냐의 에너지가 많이 고갈되었다는 것을 이내 눈치챘다. 어젯밤에도 여러번 힘을 썼고 방금도


힘을 썼기 때문이다.

“왜그러십니까 타냐님?”

트로이가 놀라서 그녀를 부축하자 타냐가 갑자기 카딜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트로이의 손을 뿌리치고
카딜에게 다가갔다.

“하아, 키스해줘요.”

타냐가 아닌 그녀 안의 타냐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카딜이 트로이에게 문을 열라고 했다. 그러자


트로이가 놀라서 철창문을 열어주었고 카딜이 타냐에게 왔다.

타냐를 번쩍 안아들은 카딜이 트로이에게 명령했다.

“타냐가 에너지를 너무 써서 조금 쉬어야 한다, 너희들은 잠시만 물러나 있어라. 어서!”

카딜의 지시에 트로이와 다른 병사들은 지체없이 대답하고 그곳을 물러났다. 병사들이 모두 물러나고
마지막으로 트로이가 나가면서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카딜님.”

“알았다, 30 분이면 된다. 30 분만 쉬고나면 타냐는 괜찮아질거야.”


“네, 알겠습니다.”

트로이가 인사를 하고 나가자 카딜은 반대편 철창안에 갇혀있는 바훌에게 말했다.

“넌 돌아서서 귀막고 있어.”

“예?”

“명령이다, 어서.”

“아, 예, 알겠습니다.”

바훌이 돌아서서 뒤 귀를 손으로 막았다. 그러자 카딜은 제게 엉겨드는 타냐와 키스를 하며 그녀의 옷을
벗겨내렸다.

타냐가 카딜보다 더 서두르는 것 같았다. 그의 바지끈을 풀어내고 손을 안으로 밀어 넣어 페니스를 쥐었다.

이미 굵고 단단해진 페니스를 쓰다듬는 사이 카딜이 타냐를 그의 옷을 깔아놓은 바닥에 눕혔다.

“그래서 내가 새벽에 해야한다고 했잖아.”

타냐의 몽롱한 시선은 카딜의 말을 알아듣는지 마는지 알 수 없었다. 카딜은 애액으로 흠뻑젖은 타냐의
음부를 더듬다 제 페니스를 쥐고 구멍을 찾아 밀어 넣었다.

“하아…”

초점이 완전히 사라진 눈동자의 타냐가 신음을 흘리자 카딜이 얼른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30 분이라는
시간은 두 사람의 욕정의 불을 끄트리는데 부족한 시간이라 카딜은 평소와 달리 급하게 움직였다.

빠르게 허리를 튕기던 카딜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 그녀의 몸속에 자리한 그의 페니스가 자잘하게
떨어대며 사정했다.

그의 정액이 타냐의 에너지원인지 타냐의 눈동자에 생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좀 부족한 듯 타냐는 다시
카딜의 품으로 파고 들며 그를 재촉했다.

“나도 이걸로는 부족해 타냐, 그러니 사람 미치게 색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아도 돼.”

카딜은 다시 허리를 튕기기 시작했다. 결합된 곳에서 애액과 정액이 뒤어 두 사람의 사타구니를 적셨다.

뒤로 돌아서서 두 귀를 막고 있던 바훌이 안되겠는지 이마에 감긴 머리띠를 풀어 두 눈을 가린 채


검형연습에 들어갔다. 속으로는 카딜을 욕하며 온 정신을 검형에 몰두하려 애를 쓴다.

그 사이 카딜의 두 번째 파정이 이어졌다.

“이제 된거야?”

카딜은 타냐가 까무러치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이렇게 까무러치고 잠시 후 깨어나면 기억을 못할 것이다.


젠장, 왜 기억을 못하는지.

속으로 툴툴대며 잠든 타냐의 옷을 챙겨 입혀주고 자신도 옷을 입었다.

“바훌, 끝났으니까 그만해라.”

혼자 머리띠로 두 눈을 가린채 검형 연습을 하고 있는 바훌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카딜이 말했다.


그제야 바훌이 두 눈을 가렸던 머리띠를 풀어 다시 이마에 묶으며 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 그게 가능합니까?”

바훌의 말뜻을 아는 카딜이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믿지 않겠지만 타냐는 치유의 힘을 쓰고나면 에너지가 고갈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에너지는 내
사랑으로 채워진다.”

“헐.”

역시 예상했던대로 바훌이 절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진짜라니까? 에너지가 채워지고 나면 타냐는 이렇게 잠이 들어, 그런데 더 이상한건 깨어나고 나면


조금전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야.”

“……….”

바훌이 아무대답도 없이 저를 쳐다보자 카딜이 혼자 흥분해서 다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진짜라니까? 내가 미쳤다고 이런 거짓말을 하겠어? 그리고 타냐는 미쳤다고 이 급박한 상황에 나한테
키스해달라고 하겠어?”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뭐?”

“그렇게 일부러 변명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바훌의 말은 카딜을 더 열받게 했다. 아직도 전혀 믿지 못하는 눈빛으로 저를 변태성욕자처럼 쳐다보고


있으니 더 열이 난 것이다. 카딜이 다시 아니라고 설명을 하려할 때 밖에서 트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30 분 지났습니다 대장군님.”

카딜은 바훌을 노려보다 대답했다.

“들어와.”

카딜의 허락에 트로이가 들어왔다. 잠든 타냐를 본 트로이가 놀라서 물었다.

“설마 지금 주무시는겁니까?”

“아냐, 잠시 기절했어.”

“예? 아니 왜요?”

트로이의 궁금증 가득한 눈빛을 본 카딜은 설명을 하려다 포기한 듯 고개를 저었다.

“피곤했나봐, 내가 깨울테니까 잠시만 기다려봐.”

카딜의 말에 트로이가 바훌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바훌이 어깨를 으쓱해보이기만 했다. 트로이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카딜이 타냐를 깨웠다.

“타냐, 일어나봐, 타냐.”


그가 타냐의 뺨을 살살 두드리자 타냐의 눈꺼풀이 천천히 오라갔다. 파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타냐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또 제가…”

“그래, 네가 내게 안겨들었어.”

“서, 설마 여기서요?”

“그래, 여기서.”

“세상에, 거절하시지 왜 여기서….”

타냐는 바훌을 쳐다보고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변했다.

“괜찮아, 바훌은 우리 안봤어.”

“바로 저기 있는데 어떻게 안봐요?”

“내가 못보게 했거든, 그러니까 걱정하지마, 바훌은 내가 죽으라면 죽을 수 있는 사람이야. 절대 안봤어,


귀막으라고 해서 소리도 못 들었어, 그러니까 걱정마.”

둘이 소곤소곤 뭔가 속삭이는 모습에 트로이가 헛기침을 했다.

“황제폐하께 빨리 가셔야 합니다. 지금쯤 왜 안오느냐며 화를 내실 수도 있습니다.”

트로이의 말에 타냐가 얼른 일어섰다. 축축한 아랫도리를 느끼며 타냐는 서둘러 트로이를 따라 나섰다.

“조심해 타냐.”

“걱정말아요 카딜님.”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타냐님을 보호하겠습니다.”

트로이의 듬직한 말에 카딜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냐는 트로이를 따라 황제의 내실로 향했다.

금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내실에 들어가면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아 그것만 믿고 이렇게 위험한
곳에 직접 가는 것이다.

***

“폐하, 타냐가 도착했습니다!”

스탈드의 보고에 알테베르의 눈동자가 희번득였다. 이미 그녀를 여러번 봤던 알테베르는 저를 속인 앙큼한


타냐의 얼굴이 새삼 궁금했다.

“어서 들이라!”

“예, 폐하!”

스탈드의 대답이 들린 후 내실 문이 열렸다. 트로이와 함께 들어오는 타냐를 본 알테베르의 입꼬리에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44 화

‘샤마란족의 공주라는 말을 들어서그런가 괜히 더 짓밟고 싶네. 훗.’

혼자 음흉한 생각을 하며 가늘게 뜬 눈으로 타냐를 노려보던 알테베르가 입을 열었다.

“이리 가까이 와.”

타냐는 황제의 음험한 눈빛을 느끼며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동시에 황제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의
뒤쪽에 있는 협탁을 훑었다.

타냐가 황제와 3 미터 거리가 되었을 때 스탈드의 목소리가 나고 비숍이 들어섰다.

“폐하! 소식 들었습니다, 정말로 타냐-”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며 묻던 비숍은 타냐를 보고 헙 하고 입을 닫았다.

저렇게 눈앞에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가 금서가 밀실에서 나와서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비숍이었다.
금서가 밀실에 보관되어 있을때는 밀실을 둘러싼 결계 때문에 타냐가 힘을 쓰면 비숍이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금서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황제 때문에 금서는 자유를 찾았고 비숍은 이후 하얀빛이
생겨나도 인지하지 못하게된 것이었다.

비숍조차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 정말로 타냐가 샤마란족의 후예라네, 이제 그 증거를 봐야겠지? 뭐든 확실히 해야 하니까


말이야.”

알테베르의 말에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입안이 바짝 타들어간 비숍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그녀가까이로 왔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눈앞에 섰는데도 그녀의 힘을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대대로 대제사장은 샤마란족의 힘을 느낄 수 있다고 들었다.

‘혹시 금서가 밀실에서 나와서 그런걸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비숍이 얼른 금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만약 그렇다면 저 금서를 어서 밀실에 가두어야 한다. 비숍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알테베르가 에포칼립스


소드(멸망의 검)를 들어 올렸다.

“어디 한번 그 증거를 볼까?”

황제의 의자에 앉아 있던 그가 일어서더니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섰다. 타냐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숍은 아포칼립스소드를 든 황제를 흥분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타냐를 겨누었던 칼날이
갑자기 비숍에게로 향했다.

“헉, 폐하, 왜 이러십니까?”

“타냐가 샤마란족이라는 증거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겠어? 그렇다고 날 찌를 수는


없잖아?”

황제의 말에 기함을 한 비숍이 한걸음 뒤로 물러날 때 이미 그의 검끝이 비숍의 복부를 찔렀다.


비숍은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피가 수돗물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에
알테베르가 타냐에게 말했다.

“네가 샤마란족 후예라는걸 증명하려면 비숍을 살려야 할거야.”

타냐는 고심했다. 대제사장을 살리고 자신이 샤마란족 후예라고 밝혔을 때 황제의 반응이 어떨까 하는 것
때문이었다. 그의 증조부가 그랬듯이 황제도 자신을 죽일까? 당연히 그럴것이라는데 의심이 없는
타냐였다.

그렇다면 비숍이 죽도록 두고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하면? 그래도 황제는 자신을 죽일 터였다.

하지만 한가지 희망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금서였다.

“시간을 너무 끌면 비숍은 죽는다. 비숍이 죽는다면 넌 샤마란의 후예가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럼 너도


죽는다, 서두르는게 좋을거야.”

황제 엘테베르는 에포칼립스 소드를 타냐의 목젖에 겨누었다.

‘금서를 손에 넣어야해.’

제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타냐는 정신을 차렸다.

“사, 살려줘…제발…살려…으윽!”

비숍이 타냐를 애원하는 눈빛으로 올려다 보며 말했다. 조금만 더 피를 흘리면 출혈과다로 죽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타냐는 어쩔 수 없이 비숍에게 다가갔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트로이가 황제의 시선이 타냐에게 있는 틈을 타서 천천히 옆으로 이동했다.

-황제의 내실 협탁위에 있는 금서를 찾아야 해요.

아까 황제의 내실로 오면서 타냐가 했던 말을 떠올린 트로이는 아까부터 그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협탁 위에는 금서처럼 보이는 오래된 책이 하나 올려져 있었다.

그래서 트로이는 황제가 타냐에게 집중하고 있을 때 조금씩 그쪽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아직은 섣불리 행동할 수 없어서 이러는 것이다. 데자르백작의 사병들은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않았고
동대륙 연합군은 내일이 되어야 도착한다.

카딜이 트로이를 포함한 모두에게 지령을 내린 상태였다. 내일이 D 데이라고, 내일까지는 황제의 군단과
싸움을 일으켜서는 안된다고.

타냐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트로이의 움직임까지 확인하며 비숍에게 다가왔다.

비숍은 이미 의식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타냐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창조주라도 만난 듯 반가운
눈빛으로 타냐의 손을 잡아 마지막 남은 힘으로 그녀를 제게 가까이 오게 했다.

타냐가 못이기는 척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입술가까이 귀를 가져다댔다.

“사, 살려….주시면…이 은혜는…잊지 않겠습니다.”

비숍의 말은 진심으로 들렸다. 하긴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꾀를 부릴 정신이 있을까?

타냐는 눈빛으로 대답을 하고는 비숍을 반듯하게 눕혔다. 피가 심하게 흘러 타냐의 발밑이 축축할
정도였다.

타냐는 두 손바닥을 펼쳐 상처 위에 놓았다.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비숍과 시선을 맞춘 타냐가 정신을 집중하자 그녀의 손에서 하얀 빛이 생겨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황제의 두 눈이 커질대로 커졌다.

전설로만 듣던 모습을 실제 눈앞에서 지켜보자니 저도모르게 가슴이 떨렸다.

하얀빛은 타냐의 몸에서 비숍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비숍의 상처는 눈깜짝할 사이에 아물었다.
멀쩡해진 비숍이 벌떡 일어나더니 타냐에게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황제는 생각이 달랐다.

“널 살려두면 내 자리가 위태롭다고 했다, 맞지 비숍?”

알테베르의 물음에 비숍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힉 고개를 끄덕였다.

알테베르는 아포칼립소 소드를 높이 들었다. 트로이는 그 순간 금서를 잡았다. 이제 이 금서를 타냐에게


건네주기만 하면 되는데 황제의 칼날은 이미 타냐의 목을 베려는 듯 허공에 높이 들렸다.

그때 비숍이 타냐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뭐하는 짓이냐!”

알테베르가 비숍에게 소리쳤다.

“폐하, 진정하십시오, 방금 제가 큰 것을 깨우쳤습니다! 금서의 내용에 관한것입니다요!”

금서의 내용에 관한 것이라고 하자 알테베르가 칼을 내렸다.

“뭘 깨우쳤다는 거지?”

알테베르가 검을 내려놓자 타냐는 잔뜩 긴장했던 몸을 겨우 풀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뻔 했는데


비숍이 살려 주었다.

타냐 또한 비숍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아직 금서의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뭔가 큰 것을 알아낼 수


있을것같은 기대감이 들어서다.

“금서의 내용에서 멸망의 검과 부활의 검이 마주치면 새로운 세상이 탄생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랬지, 근데 그 뜻을 방금 깨우쳤다는 거냐?”

“예, 그렇습니다요.”

“좋아, 말해봐.”

알테베르가 다시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트로이가 얼른 금서를 품안에 숨기고 뒤로 물러섰다.

알테베르는 황제의 자리에 앉으며 비숍을 재촉했다.

“어서 말하라니까?”

“아, 그게 방금 깨우쳤는데 멸망의 검은 지금 폐하께서 들고 계신 검이고 부활의 검은….”


“그래 부활의 검은 어디에 있지?”

부활의 검이라는 말에 타냐는 속으로 카딜의 검을 떠올렸다. 카딜의 검에 분명 레저렉션(부활)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럼 카딜의 검과 황제의 검이 마주하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탄생한다는 뜻인가?

타냐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비숍이 타냐를 가리키며 말했다.

“부활의 검은 바로 타냐님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타냐는 사람이다, 어떻게 검이 될 수가 있지?”

“그건 아마도 은유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타냐님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부활과 다를바가 없지 않습니까? 방금전 저도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마찬가지구요.”

비숍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날 멈춘이유가 그것이냐?”

“그렇습니다, 만약 금서의 내용대로라면 폐하의 검으로 타냐님의 몸을 벨 때가 바로 부활의 검과 마주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못하시게 말렸던 겁니다.”

“그래?”

“예, 폐하.”

비숍의 말에 알테베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타냐를 죽이면 새 세상이 탄생한다는 뜻인데, 그게 나한테 해로운 것인지 날
새로운 영웅으로 만드는 것인지 어떻게 알지?”

“예?”

“그렇잖아,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바로 나일수도 있잖아, 지금보다 더 멋진 세상이 펼쳐진다는 뜻이면
내가 망설일 이유가 없지않겠어?”

황제의 덜떨어진 말에 비숍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뭐하러 금서에 그렇게 서놓았겠는가
말이다. 위험하고 안 좋으니 그것을 하지 말라고 써놓았을것인데.

“일단 타냐님을 지하감옥에 가두시고 하루 정도 생각을 더 해보심이 어떨까 싶습니다만.”

비숍의 말에 알테베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일단 타냐를 다시 지하감옥에 가두도록 하라!”

황제의 명에 트로이가 얼른 대답했다.

“예, 폐하!”

트로이는 일부러 타냐를 거칠게 다루며 큰 소리로 말했다.

“어서 가자!”

타냐도 얼른 트로이가 가자는대로 움직였다. 왜냐하면 그가 품속에 금서를 숨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알테베르는 검을 내려 놓고는 혀를 쯧쯧 찼다. 하긴 지하감옥에 가두면 절대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비숍이 금서의 내용을 좀 더 확실하게 연구하면된다.

“비숍.”

“예, 폐하.”

“그대는 신전으로 가서 기도를 올리도록 하라.”

“안그래도 그럴 참이었습니다.”

“내일아침까지 신전의 뜻을 받아 내게 고하도록 하라.”

“예, 폐하. 대신 제가 기도를 드리는 동안 절대 타냐님께 아무런 해코지도 하시지 마시기바랍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큰 해를 당할지도 모르니까요.”

비숍의 말이 못마땅했지만 알테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숍이 물러가고 난 후 알테베르는 티도를 불렀다.

“안그래도 알현을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래, 무슨 성과라도 있어?”

“예, 타냐의 남동생 토디엘을 황궁으로 데리고 오는 중이랍니다.”

“오호, 그래?”

알테베르는 카딜의 뒷조사를 하다가 그가 토디엘이라는 열네살 짜리 남자아이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티도에게 알아보라고 했더니 토디엘은 타냐의 남동생이었다. 빚을 갚지 못해 노예로
팔려갔다는 것을 알아낸 후 엄청난 인원을 동원하여 토디엘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드디어 토디엘이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얼마나 걸린다더냐?”

“한 시간 후면 황궁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도착하면 어찌할까요?”

“일단 내게 데리고 오너라, 그 녀석도 치유의 능력을 가졌을지 모르니까.”

비숍이 분명 족장의 딸에게만 능력이 전해진다는 것을 들었지만 황제는 그걸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다.

티도는 토디엘을 찾아서 카딜의 저택으로 돌아오고 있던 무리를 기습해서 토디엘을 쉽게 손에 넣었던
것이다.

그걸 모르는 카딜은 오매불망 브릴트에게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5 화

“금서 여기 있습니다 타냐님.”

지하감옥으로 돌아온 트로이는 품에 숨기고 있던 금서를 꺼냈다. 100 년이 된 양피지로 만든 책은 사람의


손이 전혀 타지 않은 듯 여전히 새 것 같았다.

어느새 지하감옥은 혁명집단의 아지트로 변해있었다. 카딜과 바훌, 그리고 지하감옥을 지키던 병사들까지
타냐가 있는 곳으로 모여 들었다.
“타냐, 얼른 받아.”

카딜의 재촉에 타냐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떨리는 손을 뻗었다. 바르르 떠는 손이 금서를 잡았다.
그런데 그 순간 금서에 적혀있던 글들이 허공으로 모두 솟아 올랐다. 하얀빛과 함께 떠오른 글들이 타냐의
정수리로 쑥쑥 빨려 들어갔다.

모든 글들이 타냐의 정수리로 빨려들어가고 난 후 타냐는 기절했고 양피지로 만든 금서는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는 사람들의 입은 저절로 크게 벌어졌다. 놀라움의 감탄사조차 나오지 못할


정도로 신비한 현상이었다.

“타냐, 타냐!”

카딜이 잠든 것처럼 누워있는 타냐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자 타냐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며 카딜을 올려다 보던 타냐가 흠칫 놀라며 일어나 앉았다.

“카딜님…..”

“그래, 나야, 정신이 들어?”

“네, 정신이 들어요.”

말을 마친 타냐는 절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카딜의 목을 끌어 안았다. 제게 안겨드는 타냐를 카딜은


마다하지 않고 꽉 안아 주었다.

타냐는 카딜의 체향을 맡으며 마구잡이로 뛰는 심장을 겨우 다스린 후 그에게서 떨어졌다.

“금서에 적혀있던 글자들이 네 머릿속으로 다 들어갔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넌 괜찮은거야?”

타냐를 이리저리 살피며 묻는 카딜에게 타냐가 피식 웃어 보였다.

“꿈을 꾸었어요.”

“그 짧은 시간에?”

“네.”

“무슨 꿈인데? 이번에도 네 안의 타냐가 보였어?”

“아뇨, 그게 아니라 금서의 내용들이 꿈으로 나타났어요, 그리고 이제 내 안의 목소리는 없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 안의 타냐와 내가 하나가 되었거든요.”

타냐의 말에 카딜은 신기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자 타냐가 카딜에게 꿈 내용을
말해주었다.

“금서로 인해 우리 샤마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림처럼 선명하게 보였어요.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알게 되었구요.”

“그래?”
카딜은 아직도 이 신비한 현상을 받아들이기 힘든 눈빛으로 물었다. 타냐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내가 동서남북대륙을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땅으로 만들 책임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했어요. 내가 그걸


해내기 위해서는 카딜님이 꼭 필요하구요. 당신이 가진 부활의 검으로 황제 알테베르를 죽여야 그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했어요.”

“내 부활의 검으로?”

“네, 황제가 가진 칼이 멸망의 검이고 당신이 가진 칼이 부활의 검이거든요.”

같은 시간 제이단 숲에 떠돌던 하얀빛의 화이트고스트들이 제 모습을 찾았다. 그들은 제이단 숲의 나무와


돌과 땅과 바람의 정령들이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정령들은 타냐가 금서를 손에 넣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금서가 타냐의 손에 들어가기전에는 완전하게 결계를 풀지 못했었다. 하지만 타냐의 손에
금서가 들어가는 순간 아클란 대제국의 신전에서 걸어 놓은 결계가 완전히 풀렸던 것이다.

하얀 괴물로 살아왔던 정령들은 아름다운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그 힘도 되찾아 제이단 숲을 100 년전 그
아름답고 신비한 숲으로 되돌렸다.

100 년전처럼 숲속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치유의 능력이 생겨났고 풀한포기, 돌멩이 하나까지 치유의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족장의 후예, 그것도 딸에게만 있는 치유의 능력으로는 세상을 다 치유할 수 없어 치유의 정령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아픈 사람이 제이단 숲에 있는 무엇이든 손에 넣으면 어떤 병이든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제이단 숲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정령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제이단 숲에 악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 글이 금서에 적혀 있었어?”

“네.”

타냐의 대답에 카딜은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검으로 황제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
카딜이 품고 있던 목적이기도 했다.

“그런데 타냐.”

“네.”

뭔가 중요한 질문이 있다는 눈빛으로 카딜이 타냐를 부르자 타냐도 신중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대답했다.

“네 안의 타냐하고 이제 하나가 되었다고 했으니까 묻는건데 말이야.”

카딜의 회색빛 눈동자가 살짝 음흉하게 변하자 타냐는 이미 그가 무슨 질문을 할지 짐작 했다.

“이제 날 덮치는 타냐도 네가 맞으니까 기억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겠네?”

다른 사람이 들을까 싶어 타냐의 귓가에 속삭이는데 그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진 타냐의 목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타냐의 대답에 카딜은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끌어 안았다.


흠흠,

옆에서 바훌이 헛기침을 하자 카딜이 얼른 그녀를 놓아 주었다.

“그럼 이제 동대륙 연합군만 도착하면 되겠어.”

“네, 그리고 되도록 무고한 생명은 죽이지 않았으면 해요.”

“나도 알아, 그래서 동대륙연합군과 데자르백작의 군대가 도착하길 기다리는거잖아.”

카딜의 말에 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알테베르가 토디엘을 인질로 잡고 있을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채.

***

“폐하, 토디엘을 데려왔습니다.”

티도의 목소리에 알테베르가 얼른 대답했다.

“들어와.”

알테베르는 기대감 가득찬 눈빛으로 내실 입구를 쳐다보았다. 문이 열리고 티도가 토디엘을 데리고
들어왔다.

전쟁노예로 팔려갔다더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파란색의 눈동자 빼고는 온몸이 오물과 때로 뒤덮여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토디엘이 가까이 오자 악취가 장난아니게 심해 알테베르의 인상이 절로 구져졌다. 코를 막은 알테베르가


엄한 티도에게 화를 냈다.

“일단 좀 씻겨. 냄새 때문에 미칠 것 같으니까.”

말똥, 소똥 할 것 없이 오물을 뒤집어쓴 탓에 토디엘의 몸에서는 인간세상에 없는 듯한 지독한 악취가


났다.

티도도 먼저 씻겨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황제가 급해보여 그냥 데리고 왔던 것이다.

역시 씻기고 왔어야 했다.

“예, 폐하.”

티도는 다시 토디엘을 데리고 내실을 나갔다. 토디엘이 나가고 나서도 한참동안 악취가 남아 있어
알테베르는 시종들에게 창문을 모두 열고 향수를 뿌리라 지시했다.

어찌나 묵은때가 많은지 토디엘을 씻기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동안 데자르백작이 이끄는 사병들은
황궁과 아주 가까운 곳에 매복하여 카딜의 지시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듯 점심 시간이 지났고 황제는 점심 식사후 대신들과 잡다한 정사를 논한 후 낮잠에 빠져들었다.

대제사장 비숍이 그렇게 벌벌 떨었던 샤마란족의 후예 타냐와 그의 남동생까지 손에 넣은 황제는 그야말로


온세상을 다 가진 듯 편하게 낮잠에 빠져들었다.

오후 4 시.
알테베르는 다시 토디엘과 마주했다. 깨끗이 씻기고 옷까지 갈아 입혔더니 아이의 온몸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래, 이거지.

알테베르는 흡족한 눈빛으로 토디엘을 불렀다.

“토디엘, 이리 가까이 오너라.”

황제의 부름에 토디엘은 두려움에 떨리는 마음을 겨우 다잡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감히 황제를 눈앞에서 본다는 것자체가 토디엘에게는 무서운 일이었다. 누나가 말하길 황제는 천하에 둘도
없는 악한자라고 했다.

그런자가 자신을 왜 잡아 왔는지 알길이 없어 더 두려웠다.

“배고프지?”

알테베르는 토디엘이 배가 고플 것을 알기에 이미 시종들을 시켜 산해진미를 차려 놓았다.

“먹고싶지?”

토디엘은 두려움에 흔들리는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서 먹어, 널 위해 차려 놓은거야.”

그때 토디엘은 누나가 뭘 잘못 알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상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제게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라고 하는 모습이 누나가 말한 것과 너무나도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토디엘은 얼른 감사하다 말하고 닭다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한입 베어물자 너무 맛이 있어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꿈이든 현실이든 상관없었다. 너무 배가 고파 토디엘은 양손에 고기를 쥐고 마구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알테베르는 허겁지겁 먹어대는 토디엘을 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데 음식을 한참 먹던 토디엘이 목이 막혔는지 옆에 있던 물을 벌컥이며 마셨다. 그리고는 갑자기 픽


쓰러졌다.

티도와 시종장 스탈드는 쓰러진 토디엘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아직 어린아이를 볼모로 잡은 황제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토디엘이 황제 알테베르가 미리 독극물을 타놓은 물을 마셨기 때문이다. 이 독은 황제가 궁의에게 특별히


제조한 약이었다. 몸속에 퍼진 독은 해독제를 먹으면 하루는 버티지만 매일 같이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특별한 독이었다. 그 해독제는 당연히 황제의 손에 있었다.

누군가를 제편으로 만들 때 탁월한 효과를 볼 수 있는 독극물이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제 말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디엘은 황제가 제게 독극물을 먹였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그저 병명도 모르고 시름시름 앓는 아이에게 약을 주면 그 아이는 저를 은인으로
생각할 터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시키는대로 다 할 것이다.
알테베르의 입꼬리가 즐거움으로 비스듬히 말려 올라갔다.

“아이를 침대에 눕혀라.”

“예, 폐하.”

침대에 눕혀진 토디엘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사실 황제가 토디엘에게 독을 먹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만약 토디엘에게 이 독극물이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 아이에게도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토디엘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다면 유용가치가 크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감언이설로 아이를 세뇌시켜서 제
곁에 두면 자신은 병에 들지 않고 불노장생할 수 있을 것이다.

타냐가 비숍을 치료하는 것을 본 후 탐이 났었다. 하지만 타냐는 이미 성인이고 저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제 편이 될 가망성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카딜의 여자라서 아깝지만 죽여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토디엘이 있으니 아까워할 필요도 없이
죽여도 될 것 같다.

“흐흐흐.”

황제가 음흉하게 웃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티도와 시종장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46 화

스르륵.

대신전에서 철야기도를 드리던 비숍은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저절로 눈이 떠졌다.

뒤에서 느껴지는 스산한 기운에 고개를 돌린 비숍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입마저 쩍
벌렸다.

하얀기운은 신전을 거의 집어삼킬 듯 점점 크기를 키워나갔다.

비숍은 온몸조차 얼어붙었다. 누가 발바닥에 제 발을 누르고 있는 듯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


하얀 기운이 비숍을 덮쳤다.

벌어진 입과 커다랗게 뜨진 두 눈 그대로 비숍은 숨이 끊어졌다. 선대황제때부터 대대로 신전을 지켜왔던


그의 가문이었다. 비숍의 할아버지는 선황제가 샤마란족을 멸족시키는데 1 등 공신이었다. 그가 바로
금서를 신전의 밀실에 가둔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비숍의 부친이 대제사장이 되었고 그 또한 금서를 철저하게 신전에 가두어 두는데 큰 힘을
보탰다.

현재 비숍이 그 일을 이어받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샤마란족을 또 다시 가두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그였지만 이미 금서가 타냐의 손에 들어가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뼈와 가죽만 남긴채 미이라로 변해 버린 비숍이 동상처럼 신전의 재물대 앞에 서있다.

하얀 기운은 그대로 조용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
비슷한 시간.

카딜과 타냐는 트로이의 배려로 그의 숙소로 옮겼다. 지하감옥의 차가운 바닥에서 귀하신 분을 잠들게 할
수 없다며 자신의 숙소를 내준 것이다.

황제는 안심하고 세상모르고 잠들었을테니 내일에 대한 걱정은 접어 두기로 했다.

카딜의 손이 더듬거리며 타냐의 가슴쪽으로 향했다. 아랫배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손이 걸음마를 하듯


올라와 타냐의 옷깃사이로 파고 들었다.

타냐도 마다하지 않고 그의 손이 제 젖가슴을 움켜쥐길 은근히 기다렸다.

슥.

옷깃 사이로 파고든 그의 손이 타냐의 젖가슴을 움켜쥐자 타냐의 잇새로 짧은 탄성이 흘러 나왔다.

“하응.”

그녀의 신음을 시작으로 카딜의 손길이 빨라졌다. 타냐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친 카딜이 상체를 일으켰다.
여유롭던 손길은 어디로 가고 타냐의 옷을 벗겨내는 손길이 거칠면서도 빨라졌다.

휙휙 벗겨져 나간 옷들이 방바닥으로 떨어지고 타냐의 하얀 살결이 노출되었다.

타냐에게 거칠게 키스하며 제 옷까지 벗어 던진 카딜은 타냐의 몸을 힘차게 끌어 안았다.

그의 단단한 몸과 타냐의 부드러운 살결이 맞닿자 마치 전류가 흐르는 듯한 짜릿한 감각에 저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아, 타냐, 사랑해.”

카딜은 타냐에게 사랑한다 말하며 그녀의 온몸을 마사지하듯 쓸었다. 단단하게 솟아오른 페니스는 어느새
타냐의 비부를 비벼대며 프리컴을 흘려보냈다.

벌려진 타냐의 두 다리는 허공에서 흔들거리고 카딜의 페니스기둥이 타냐의 클리토리스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하으응, 카딜님, 나도 사랑해요.”

타냐의 사랑고백을 들은 카딜은 움켜쥐었던 젖가슴 하나를 제 입안으로 빨아 들였다. 영혼까지 빨려들 것
같은 강한 흡입력에 타냐의 음부는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혀끝으로 유두를 잘근대던 카딜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쪽쪽대는 소리를 내며 타냐의 몸 구석구석에 입을 맞추며 아래로 내려가더니 어느새 타냐의 음부에
도착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혀가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문지르고 핥기시작하자 타냐는 허리를 부르르
떨어대며 앓는 소리를 냈다.

혹시 있을지 모를 내일을 위해 타냐는 에너지를 비축하고 싶었다. 충분히 비축된 치유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야만 내일 누군가 다친다면 쉽게 치료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녀안의 또 다른 타냐와 하나가되어서인지 타냐도 꽤 적극적이었다.

허리를 들썩이며 카딜이 더 많이 빨아주기를 몸으로 원하고 있었다. 부풀어 오른 음순은 심장이라도 달린
듯 저혼자 펄떡이며 경련했다.

질구아래에서부터 클리토리스가 있는 곳까지 단번에 핥아 올리기를 여러번, 카딜은 더 이상 인내하기


힘든지 상체를 세웠다.

흉곽이 절로 들썩이고 숨소리는 거칠었다.

창으로 들어온 달빛에 타냐의 젖가슴 정점에 달린 유두가 들썩이는 흉곽으로 인해 춤을 추는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아, 타냐….”

카딜은 제 성기 기둥을 쥐고 타냐의 좁은 구멍 안으로 귀두를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들어가기 힘이 드는


듯 서로가 살짝 고통스러워했지만 귀두가 안으로 들어간 후에는 막힘이 없었다.

쑥 밀려들어오는 엄청난 질량감에 타냐는 이미 황홀경에 빠진 듯 허리를 뒤틀었다.

퍽 하고 한번 쳐올리자 타냐가 비명같은 교성을 흘리며 침대시트를 꽉 쥐었다.

자궁안까지 밀려든 것같은 압력에 타냐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카딜이 허리를 흔들기 시작하자 타냐의 몸도 정신없이 흔들렸다.

찔걱대는 소리와 탁탁 살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해질 때 카딜은 타냐의 두 다리를 제 어깨에 걸쳤다.

좀더 깊이 파고들고 싶은 욕망에 엉덩이를 뒤로 뺐다가 퍽 쳐올리자 벼락같은 쾌감이 뒷머리를 강타했다.

질내벽의 자잘한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 카딜의 잇새로 욕설이 삐져나왔다. 너무 미치게 좋아 절로 욕이
튀어나온 것이다.

안그래도 미칠 지경인데 타냐가 더 깊이 찔러달라는 듯 엉덩이를 들썩이며 카딜을 재촉했다.

달빛에 비친 타냐의 푸른 눈동자는 정염으로 물들었고 생리적인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 내렸다.

너무 좋아도 눈물이 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카딜은 그녀의 눈물을 혀로 핥아주며 허리를 더 강하게
튕겼다.

오래된 나무 침대가 삐걱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빠져든 두 사람은 미친 듯이 서로를
원하고 또 원했다.

영혼마저 녹아내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뜨거운 쾌락에 빠져들어 온몸에 힘이 빠져 잠시 쉬었다가 다시


또 시작하기를 여러번 반복하는 사이 새벽이 으스름하게 밝아왔다.

***

갈라스의 전갈을 받은 로젠시아가 그를 맞이 하기 위해 새벽빛을 가르며 마차를 달렸다.

갈라스의 전갈은 로젠시아의 마음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동대륙 연합군을 이끌고 오는 와중에 로젠시아가 걱정된다며 괜찮다면 자신에게 오라는 내용이었는데 그
내용이 로젠시아에게는 꽤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누구하나 저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그녀는 제일 먼저 그녀에게 전갈을 보낸다는 갈라스의 말에 괜히


눈물이 났다. 다른 사람이 읽었다면 그저 네가 걱정되니 나한테 오라 하는 정도인지 몰라도
로젠시아에게는 그 말이 심장깊은 곳을 쿡쿡 찔러대는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카딜과의 결혼이 깨지면서 이미 황제는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제밤
카딜이 지하감옥을 탈출하도록 도왔다. 그것을 황제가 알게 된다면 그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친 동생도 아니었고 사촌여동생인 그녀를 황제 알테베르가 살려둘 리가 없었다. 카딜과의 정략결혼에
쓰려고 살려 두었었는데 그게 깨졌으니 그녀의 미래가 어떨지는 아무리 머리가 나쁜 로젠시아라고
하더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황후의 부친인 데자르백작까지 카딜의 편에 섰고 갈라스가 동대륙 연합군을 몰고 오고 있으니 이 전쟁의


결과는 뻔했다.

“더 빨리 달릴 수 없어?”

로젠시아가 마차 문을 열고 호위무사에게 물었다. 그녀의 호위무사가 마부에게 전달했고 마차의 속도는 더


높아졌다.

처음 갈라스 황자를 만났을 때 못되게 굴었던 것이 후회가 되는 로젠시아였다.

그렇게 한시간 쯤 달렸을 때 갈라스가 이끄는 동대륙 연합군과 만날 수 있었다.

로젠시아의 마차를 본 갈라스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

“굿모닝 베이비.”

카딜의 아침 인사에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타냐가 배시시 웃었다. 그의 달콤한 모닝키스가 이어졌다.

타냐는 알몸인걸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그의 목을 끌어 안고 모닝키스를 만끽했다.

타냐의 유연한 등과 허리를 왔다 갔다 하던 카딜의 손이 떨어져 나가고 키스도 갈무리 되었다.

춥춥!

두 번 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카딜이 말했다.

“오늘이 바로 D 데이라는 거 알지?”

“네, 알아요.”

“그럼 준비해볼까?”

“네.”

카딜은 타냐와 함께 일어나 그녀의 옷을 챙겨주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는 카딜의 말에 타냐의
심장이 갑자기 두근대기 시작했다. 관자놀이에서 진땀이 솟아나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타냐가 어딘지 모르게 경직된 것을 본 카딜이 눈치를 채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허리끈을 묶어야 하는데 손끝이 떨려 말을 듣지 않아 애를 먹던 타냐였다.

“내가 해줄게.”

전쟁에서 잔뼈가 굵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카딜에게 D 데이는 흥분되는 말이었지만 타냐에게는


아니었다.

카딜이 타냐의 허리끈을 묶어 주고는 그녀의 양어깨를 잡았다.


“내 눈을 봐봐 타냐.”

그의 말에 타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를 응시하자 긴장되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나만 믿어, 알았지?”

타냐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다 잘될거야.”

“당신말 믿어요, 다 잘될거예요.”

“그래, 그럼 됐어, 이제 갑옷을 챙겨 입어야 겠어.”

카딜의 말에 타냐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알테베르는 아침부터 4 대 가문에 황제의 칙서를 전하기위해 전령을 보냈다. 오늘이 바로 카딜과
타냐와 바훌을 처형할 그날이었기 때문이다.

카딜은 감히 황제의 후첩이 될 여자를 탐한 죄로 사형을 당할 것이고 타냐는 황제의 후첩이 될 몸을


함부로 놀린 죄로 사형될 것이다. 바훌은 그 두사람을 위해 보초를 섰다는 죄로 사형될 것이다. 그들이
사형되고 나면 붉은 기사단은 황궁의 호위부대로 존속시킬 심산이었다.

그렇게 되면 4 대가문이 가진 사병을 모두 합쳐도 황제의 군대에 맞설 수 없을 터였다.

“비숍을 불러라.”

시종장 스탈드에게 명을 내리자 스탈드가 대답하고 신전으로 향했다. 그 사이 황제는 잠에서 깨어난
토디엘에게 왔다.

내실 한쪽에 마련된 침대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난 토디엘은 온몸에 힘이 없어 황제를 보고도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알테베르는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그대로 있어,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몸이 많이 허약해졌다고 하더구나, 내가 황궁의에게


지시를 내려 약을 가져왔다. 이 약을 마시면 몸에 금방 힘이 솟을거야.”

알테베르가 내미는 약병을 받은 토디엘이 감사하다 말하고 약을 마셨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몸이


가벼워지면서 머리도 맑아졌다.

이렇게 귀한 약을 저를 위해 만들었다는 것에 감동한 토디엘이 알테베르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황제폐하.”

“감사는 무슨, 내 막내 동생 같아서 그러는 것이다.”

알테베르의 말에 토디엘은 살짝 놀란 눈빛으로 알테베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알테베르가 더 자상한


미소로 토디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그런 모습에 긴장이 풀린 토디엘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죄송하지만 누나한테 돌아가고 싶어요. 누나가 많이 기다릴 것 같아서요.”

47 화

“네 누나는 잠시 잊고 네 건강부터 챙겨라.”


“예?”

토디엘이 무슨소리인가 이해하지 못한 눈빛으로 알테베르를 쳐다보았다. 알테베르는 잠시, 아주 잠시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하느냐 아니면 적당히 둘러대느냐. 그리고 빠른시간 안에 결정했다. 일단은 적당히
둘러대는 것으로.

“네 누나는 곧 만나게 될거야, 안그래도 내가 궁으로 불렀거든.”

“아, 정말요?”

토디엘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며 알테베르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널 찾아달라는 부탁도 네 누나가 했어.”

“예? 누나가 어떻게 황제폐하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가 있는지….”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토디엘의 마음속에 의구심이 자꾸 솟아 올랐다. 분명 브릴트라는 사람이
누나가 절 찾아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따라 오는데 갑자기 습격을 받았고
다른이들은 모두 죽고 자신은 누군가 휘두른 뭔가에 뒷머리를 맞고 기절했었다. 깨어나보니 황궁의
호위무사와 함께 있었다.

누나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에 반가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네 누나는 특별한 사람이거든.”

“누나가 어떻게….”

토디엘이 또 질문을 하려 하자 알테베르가 시종을 불러 토디엘을 별채로 데려가라고 했다. 토디엘은


아무말도 못하고 시종과 함께 별채로 가야만 했다.

“비숍데리러간 스탈드는 왜 이리 늦는거냐?”

부시종장에게 묻자 부시종장이 얼른 대답했다.

“제가 당장 달려가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폐하.”

“그래, 어서 가봐, 이렇게 한가하게 있을시간이 없다.”

“예, 폐하.”

부시종장이 내실을 나가고 나자 알테베르는 혼자 중얼거렸다.

“어서 신전에서 답을 내놓아야 오늘 재판을 결정하지, 쯧.”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그는 이미 카딜과 타냐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4 대가문에 공표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기에 신전 대제사장 비숍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비숍이 카딜과 타냐를
죽여선 안된다고 해도 그는 비숍을 협박해서라도 죽여야 한다는 답을 내놓으라고 할 것이다.

***

“뭐라고? 데자르 백작 사병들이 황궁으로 향했다고?”

제 2 귀족가문 메클렌가문의 메클렌 백작은 놀라운 소식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 1 가문 데자르백작의


사병이 왜 황궁쪽으로 향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분명 혁명일 것이다.

“카딜 대장군은? 붉은 기사단도 움직였어?”

“그렇다고 합니다요.”

“이런, 제길.”

제 1 귀족가문 데자르 백작이 카딜과 손을 잡을줄 예상도 못했던 메클렌 백작은 안절부절 못하고 거실을
서성였다.

이럴줄 알았으면 카딜 대장군이 함께 하자고 했을 때 손을 내미는 것이었는데. 황제의 병사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제 1 귀족가문 데자르 백작의 사병과 힘을 합친다면 그 승패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만약 황제의 병사들이 패한다면 자신과 자신의 가문은 끝이다.

“너 어서 제 3 가문 렐리츠가문에-”

말을 끝내기도 전에 렐리츠가문의 렐리츠 백작이 들이 닥쳤다.

“메클렌 백작, 큰일 났소.”

“안그래도 지금 막 소식을 듣고 나도 백작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습니다.”

“소식을 들었습니까?”

“예, 방금 들었습니다.”

“하-, 나도 그 소식을 듣고 어찌하면 좋을까 싶어서 이렇게 달려 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미 하얗게 질린 얼굴의 렐리츠 백작이었다.

“나도 고민중입니다. 만약 혁명군이 성공한다면 우린 모두 단두대에 오를 것입니다. 카딜 대장군이 손을


잡자고 했을 때 거절 했거든요. 황후의 호위군단도 있는데 데자르백작의 사병까지 붉은 기사단과 손을
잡는다면 승산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절대 못 이깁니다. 보나마나입니다. 그래서 난 데자르 백작과 뜻을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그럼 나도 뜻을 같이 하겠습니다.”

렐리츠 백작이 번개같이 머리를 굴렸다는 것을 알아차린 메클렌 백작이 얼른 말했다.

그대 제 4 귀족가문 발키리 백작이 당도했다고 시종이 보고했다.

발키리 백작은 두 백작이 한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눈치를 보며 물었다.

“두 분 이렇게 이른 아침에 무슨 일로 함께 있는 것입니까?”

“그러는 발키리 백작은 이렇게 이른 아침에 우리집엔 어쩐 일입니까?”

메클렌 백작의 물음에 발키리 백작은 넌지시 물었다.

“소식 들었습니까?”
“벌써 들었습니다.”

렐리츠 백작이 대답하자 발키리 백작이 눈치를 채고 물었다.

“누구의 편에 설지 결정을 했습니까?”

“우리는 카딜 대장군과 데자르 백작과 힘을 합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하하, 이런 우연이 있나, 나도 그렇게 할 생각으로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발키리의 임기응변에 메클렌백작과 렐리츠 백작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뜻을 같이 하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우리 사병들도 어서 데자르 황궁으로 보냅시다.”

“그럽시다. 너무 늦으면 우리가 한편인줄 모르고 공격받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 카딜 대장군에게 전령을


보냅시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소.”

메클렌백작의 말에 나머지 두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한 마음이 되자 서둘러야 한다며 황궁에서 보자며 각자 흩어졌다. 이들이 이렇게 겁을 집어 먹는


이유는 자신들의 딸 때문이었다. 황제의 후첩으로 있는데 황제가 폐위되면 그의 후첩들은 산채로 황제와
함께 그의 무덤속에 매장될 것이다. 어서 데자르백작과 카딜 대장군에게 혁명에 가담하겠다는 소식을
전해야 딸을 살릴 수가 있다.

잠시 후 3 대 귀족가문의 사병들이 일제히 황궁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황궁까지는 그리 멀지 않아 1


시간정도면 도착할 것이다.

***

“폐하! 큰일 났습니다!”

스탈드의 다급한 목소리에 알테베르가 짜증을 냈다.

“무슨 일인데 이리 호들갑이야?”

스탈드도 그를 데리러 갔던 부시종장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모습에 알테베르의 눈빛이


바뀌었다. 비숍을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이렇게 사색이 달려온 것을 보면 뭔가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지?”

알테베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스탈드가 겨우 숨을 고르고 말했다.

“밤새 화이트고스트가 다녀갔는지 비숍 대제사장께서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뭐?”

“뼈와 가죽만 남고 미이라처럼 말라비틀어진채 신전 기도실 제단 앞에….”

알테베르는 스탈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실을 나왔다. 제 두 눈으로 직접 보기전에는 믿지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화이트고스트가 어떻게 황궁까지 들어왔단 말인가. 만약 들어왔다면 대제사장만 죽일
리가 없었다.
수도 없는 병사들이 궁을 지키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병사는
하나도 죽이지 않고 대제사장만 죽였다니.

본궁에서 신전으로 갈 때 사용하는 마차에 오른 알테베르는 뭔가 싸한 기분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마차는 이내 신전에 도착했고 알테베르는 급하게 마차에서 내렸다. 신전 안으로 들어선 그는 썩은


나무동상처럼 죽어있는 비숍을 보고는 휘청하고 중심을 잃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알테베르는 급하게 본궁으로 돌아와 내실로 들어왔다.

“금서, 금서가 없다.”

“예?”

금서에 대해서는 비숍과 알테베르만 알고 있었다. 시종장과 부시종장은 황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하지만 알테베르는 자신이 금서를 올려두었던 협탁의 위와 아래, 그리고 서랍까지
하나 하나 열어보며 소리쳤다.

“금서가 사라졌다고!”

“금서라뇨? 폐하, 소신들은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책, 양피지로 만든 책인데, 크기는 이 정도 하고 두께는 이정도인데 못봤느냐? 내가 분명 저 위에 올려


두었는데.”

알테베르는 흡사 미친 사람처럼 중얼대며 다시 내실의 여기 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비숍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금서가 밀실에서 나오면 안된다는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알테베르는 가구란 가구는 다 넘어뜨리고 들추면서 금서를 찾아 다녔다.

같은 시간 카딜은 갈라스의 연락을 받았다. 데자르백작의 사병들과 동대륙연합군까지 준비가 되자 카딜은


드디어 붉은 기사단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카딜이 이렇게 황제를 폐위하기 위해 출동명령을 내렸을 때 알테베르는 뭔가를 느끼고 티도를 불렀다.
황제의 호위부대장인 티도는 호위부대를 황제의 거처 밖에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그래, 호위부대는?”

“밖에 있습니다. 폐하의 안전을 책임질테니 걱정마십시오.”

“그래, 그럼 일단 지하감옥에 갇힌 카딜일행을 끌고 와.”

“4 대가문에 전령을 보낼까요?”

티도의 물음에 황제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당장 전령매를 띄워라, 최대한 빨리 황궁뜰로 모이도록 하라.”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티도가 예를 표하고 나가고 난 후 알테베르는 스탈드에게 명했다.


“토디엘을 데리고 와라. 어서.”

“예, 폐하.”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시종들과 시녀들, 그리고 하녀들까지 바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황제가 저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인 비숍이 죽었다는 소식까지 들었기에 더 불안해
하는 것이었다.

알테베르는 자신의 소파에 앉은채 불안하게 입술을 물어 뜯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창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할 때 티도가 급하게 내실로 들어왔다.

“폐하! 반란이옵니다!”

“뭐!”

“카딜대장군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카딜은 지금 지하감옥에 있지 않느냐!”

“지하감옥 간수들까지 그와 한패가 되었습니다!”

“뭐야!”

“일단 황실 군대와 호위부대가 맞서 싸울것입니다! 폐하께서는 4 대 귀족가문에 위급한 상황을 알리시고


사병을 이쪽으로 보내라는 칙서를 보내시기바랍니다!”

“알았다! 넌 무슨 일이 있어도 저들을 막아내야 한다! 시간을 끌어다오! 사병들이 도착하려면 1 시간은
걸릴 것이다!”

“제 목숨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티도가 절도 있게 인사를 하고 내실을 나갔다. 알테베르는 급하게 칙서를 썼다. 반란군이 황궁을
습격했으니 모든 사병들을 이끌고 황궁으로 와서 황궁과 황제를 지키라는 내용이었다.

호위무사중 하나에게 칙서를 건네주며 알테베르가 말했다.

“뒷문으로 빠져나가서 데자르 백작에게 제일먼저 전하고 그 다음 나머지 백작들에게도 전하라!”

“예, 폐하!”

48 화

알테베르는 지금 이 현실을 받아 들이고 싶지 않았다. 4 대귀족가문에 사병을 황궁으로 보내라는 칙서를


보내기도 전에 병사들이 당도하여 기쁨을 참지 못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미 4 대귀족가문의 수장들도 카딜과 한편이었다니. 제 두 눈으로 보고 있지만 믿을 수가 없다.

저항하던 황궁의 병사들은 이미 가을낙엽처럼 황궁 여기저기에 쓰러졌다.

남은 병사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항복을 한 상태였다.

황제의 내실까지 병사들이 쳐들어왔고 알테베르는 몇 안되는 호위무사들과 티도만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데자르백작, 그대의 딸 메리엔이 내 아내이지 않는가, 메클렌 백작, 렐리츠백작, 발키리백작,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게, 그대들의 딸이 내 후첩이란걸 잊었나? 내가 죽으면 그대들의 딸도 단두대에 오를거야,
저 카딜놈이 살려 둘 것 같은가? 그리고 손자 손녀들은 무사할 것 같은가?”

알테베르는 마지막으로 4 대가문의 백작들을 설득하려 노력해보았다.

그러나 데자르가 황제의 말을 막고 나섰다.

“폐하, 이제 그만 전부 내려놓으십시오, 폐하의 세상은 끝났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십시오, 폐하의 편이


어디에 있습니까? 몇 안되는 호위무사로 이렇게 많은 군사들, 아니 카딜 대장군이 이끄는 붉은 기사단을
어떻게 이기실겁니까?”

“시끄럽다! 난 절대 너희들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것이다! 이건 반란이다, 황위를 찬탈하는 반란!


오늘의 이야기가 역사에 어떻게 남을건지는 생각해 봤어! 너희들 가문은 길이길이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역적의 가문이라고 새겨질 것이다!”

알테베르의 말에 타냐가 나섰다.

“아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뭐? 하하하, 이젠 한낱 천민나부랭이까지 나서는 구나, 이것봐봐,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감히 아클란 대제국의 황제에게 천민나부랭이가 얼굴 빳빳이 들고 대드는 꼴을! 이래서 나라가
어찌되겠는가 말이야!”

“나는 천민나부랭이가 아닙니다.”

타냐의 푸른 눈동자에서 묘한 기운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알테베르도 그를 보좌하고 있던


티도와 호위무사들도 흠칫 놀랐다.

타냐는 황제를 노려보며 자신이 하고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북대륙의 주인이었던 샤마란족장의 딸 타냐입니다, 폐하의 할아버지가 언약을 깨고 우리 샤마란족을


몰살하고 빼앗은 나라가 바로 북대륙 아클란 제국입니다, 나는 잃어버린 내 고향을 찾으려는 것
뿐입니다.”

타냐의 말에 알테베르는 달리 할 말이 없었지만 이대로 타냐에게 나라를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황제께서 순순히 물러나시면 더 이상의 희생은 없을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시에는 여기 있는


사람들까지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결정 하십시오.”

“하아, 웃기고 있네, 내 손에 누가 있는지 알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군. 끌고나와!”

알테베르의 명령에 티도가 내실 침실에 가두어 놓았던 토디엘을 데리고 나왔다.

“토디엘!”

“누나!”

타냐는 물론 카딜과 바훌도 토디엘이 황제의 손에 있는 것에 기함했다. 토디엘을 찾아서 돌아오는


중이라고 연락을 받은 후 소식이 끊어져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간악한 황제가 미리 손을 썼던 것이다.

카딜이 레저렉션 소드를 꺼내 들었다.


“당장 토디엘을 보내주시오, 아니면 내 검이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것이오.”

“하하하, 마음대로 하거라, 토디엘은 이미 중독되었다.”

“!”

“!”

황제의 비열함에 타냐가 두 주먹을 쥐었다. 손등이 새하얗게 변하도록 힘을 주고 부르르 떨었다.

그제야 상황파악을 한 토디엘이 티도에게서 빠져나가려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이거놔! 놓으란 말이야! 누나! 누나!”

토디엘이 소리치자 티도가 토디엘의 급소를 쳤다. 이내 푹 쓰러진 토디엘을 본 타냐가 이를 갈며 황제를
노려보았다.

“이 비열한 인간, 끝까지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하하하, 네가 용서 안하면 어쩔건데? 네 동생을 살리려면 내가 필요할 거다, 해독제는 나만 가지고


있거든, 하하하.”

알테베르가 미친놈처럼 소리내어 웃을 때 카딜이 그의 배를 걷어 찼다.

짧은 신음과 함께 황제가 뒤로 넘어가자 티도가 검을 꺼내들고 토디엘의 목에 가져다 댔다.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아이는 죽습니다 대장군.”

티도의 말에 카딜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매서운 눈빛에 티도는 주춤했다. 카딜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무사로서 모시는 주군을 지키려는 뜻은 백분 이해했다, 하지만 아이를 볼모로 잡아서 협박하다니
무사답지 않구나 티도.”

“4 대가문을 협박하여 제 편을 만들어서 황위를 찬탈하려는 대장군은 무사다운 겁니까?”

“말 잘 했다. 난 4 대가문을 협박한적 없다, 황제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세금율을 한달에 한번씩 올리고
날마다 굶주려 죽는 사람이 수백 수천이 되어 곳곳에 시체가 쌓여도 내 알바 아니라며 저만 호위호식하는
황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북대륙의 원래 주인이었던
샤마란족에게 북대륙을 돌려주려는 것 뿐이다.”

“그 말씀은 설마 저 타냐라는 여자를 여황제로 섬기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그렇다, 원래 황위의 주인이신분이다. 그러니 돌려줘야하지 않겠나? 너는 훔친 것을 네 것이라 할 수


있어? 네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훔칠 필요도 없었겠지 안그래?”

“티도! 카딜 말에 현혹되지 마라! 저놈은 저기 타냐하고 연인사이야! 그래서 저렇게 지껄이는 것이다,
타냐가 여황제가 되든 누가 되든 황위자리는 제것이될테니까!”

알테베르의 말에 카딜이 대답했다.

“황위자리는 타냐의 것입니다, 그건 이미 여기 계신 4 대귀족가문의 수장들도 동의했습니다.”

“뭐?”
“이제 그만 토디엘을 풀어 주시죠, 더 질척대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테니 말입니다. 폐하 입으로 대
아클란 제국의 황제라면서요, 황제셨던 분이 너무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거 아닙니까? 나 같으면
자결했어도 벌써 했을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토디엘이 중독되었다고 했습니까?”

“그래, 내 해독제가 아니고서는 하루도 못넘길 것이다. 매일 같이 일정량의 해독제를 마셔야만 살 수


있다. 중독된 독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 독이다, 그래서 단 하루라도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바로 죽을
것이다.”

그때 타냐가 나섰다.

“그런건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그딴 것으로 협박하지 마십시오.”

“뭐?”

알테베르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타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타냐가 입꼬리를 늘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유의 힘이 그 정도라니. 알테베르는 절망했다. 치유의 힘은 그저 상처만 치료하는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이젠 협박할건 토디엘의 목숨 뿐이었다.

알테베르가 급하게 자신의 검 아포칼립스 소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티도를 밀어내고 자신이 토디엘을
잡았다. 아이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고 소리 질렀다.

“물러나라! 안그럼 이 아이는 내 손에 죽는다! 절대 나 혼자는 죽지 않을 것이다! 카딜! 타냐! 날


죽이고 싶으면 죽여! 하지만 토디엘도 같이 죽을 것이다!”

마지막 발악을 하는 모습이 두 눈뜨고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안쓰러웠다.

기절한 토디엘이 천천히 눈을 떴다. 타냐는 토디엘과 눈을 맞추고 안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토디엘이
눈으로 알았다고 하자 타냐가 카딜에게 속삭였다.

“토디엘 걱정은 말아요 카딜님.”

타냐의 말에 안도한 카딜이 알테베르에게 한발 다가갔다. 카딜이 가까이 다가오자 알테베르는 토디엘의
목에 칼날을 가져다 댔다.

날카로운 칼날에 토디엘의 목에 상처가 나고 피가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 생각한 카딜이 지체없이 검을 뻗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했던 알테베르는 무심결에 카딜의 칼을 막았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카딜의 검과


알테베르의 검이 맞닿았다.

카딜의 힘이 어찌나 강한지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싶을 때 카딜이 맞닿아 있던 검을 아래로 내리면서


한바튀 돌았다.

그 동작은 눈꺼풀이 깜빡하는 시간보다 짧았다.

마치 마법이라도 쓰는 듯 카딜의 몸은 빛의 속도로 한바퀴를 돌았고 그와 동시에 그의 검이 알테베르의


몸을 갈랐다.

황제가 쓰러지는 모습에도 그의 호위무사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티도 역시 감히 검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토디엘!”

“누나!”

타냐가 토디엘에게 달려 가서 동생을 안았다. 부둥켜 안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

햇살이 유난히도 좋은 가을날.

타냐는 튜울립 정원을 카딜과 함께 거닐고 있었다. 지금은 봄이 아니라 튤립은 없고 대신 노랗고 하얗고
빨간 국화꽃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아직도 지난 한달이 꿈만 같았다. 자신이 샤마란족장의 후예라는 것도 놀라운데 대 아클란제국의


여황제까지 되었다.

한낱 천민나부랭이였던 지난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현실감이 없는 것이다.

여황제 즉위식도 마쳤고 카딜과의 결혼식을 한달 앞둔 날이었다.

“여기 어딘지 기억나지?”

“당연하죠.”

“아니 내 말은 여기서 당신이 날 덮쳤던 것 기억나냐고.”

“아뇨, 내가 언제 당신을 덮쳤어요?”

카딜은 타냐의 시치미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타냐는 정말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말해주어서
알고는 있었다.

“알면서 나 약올리려고 모르는척 하는거지?”

“헤, 눈치챘어요?”

타냐가 배시시 웃으며 그의 팔에 매달리자 카딜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훌은 다정하게 거니는 두 사람의 뒤에서 따라 걸으며 사방을 호위했다. 그런데 점점 거리를 더 두는
그였다. 왜냐하면 지나친 애정행각을 두 눈뜨고 보기가 힘들어서였다.

“폐하!”

저 멀리서 달려오는 갈라스를 본 카딜과 타냐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뭔가 급한 용무가 있어보여 두


사람은 갈라스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바훌은 갈라스를 보고 인사를 했다.

“바훌, 오랜만입니다.”

“예, 갈라스 황자님.”

바훌과 인사를 한 갈라스가 타냐 앞으로 와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갈라스 제발 그러지 말라니까요.”

타냐의 말에 갈라스는 끝까지 예를 표하고는 일어섰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왜 그렇게 급하게 달려왔습니까?”

카딜의 물음에 갈라스가 타냐를 한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전에 제 유모할머니에 대해서 궁금하다고 하셨지요?”

“네? 아, 네, 그랬죠.”

타냐도 카딜도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제가 어마마마께 그 유모 할머니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드렸었는데 어제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래요?”

“그게 뭡니까?”

타냐도 카딜도 참을성 없이 급하게 물었다.

49 화

갈라스의 긴 이야기의 내용은 결국 토디엘이 자신의 친 동생이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100 년전 샤마란족이 몰살당할때 타냐의 할아버지 할머니셨던 족장님부부는 다행히도 목숨을 구했고
시종들과 함께 도망을 쳤다고 했다. 이리저리 떠도는 짚시 생활을 하다가 두 분은 객사하셨고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아들마저 험난한 여정을 버티지 못하고 병을 얻어 목숨을 잃었고 딸만 살았다고 한다.

그 딸이 성인이 되어 결혼을 했고 그 두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바로 타냐라고 했다.

하지만 타냐의 부모님도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병을 얻었고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타냐의 부모님은 그분들을 모셨던 시종부부였다고 한다.

갈라스의 유모할머니는 그 시종부부의 친척이었는데 모여 있으면 들키기 쉽다고 서로 뿔뿔이 흩어지다보니


동대륙까지 흘러 들었다고 했다.

“우리 동대륙에도 아마 찾아보면 많은 샤마란족이 살고 있을 듯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해준 사람도


샤마란족이라고 했다더군요.”

갈라스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타냐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토디엘이 제 친동생이 아니라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렇다고 친동생이 아니라고 여기기도 싫었다.

“이 이야기는 토디엘에게 하지 않는게 좋겠어요.”

타냐의 속내를 읽은 카딜과 갈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훌은 이야기를 다 들었지만 못들은척 했다.

그의 입에서 방금전의 이야기가 새어나갈리는 없을 것이다.


결국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타냐의 마음은 무거웠다.

“타냐, 샤마란족을 다시 제이단숲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카딜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샤마란족을요?”

타냐가 되물을 때 갈라스가 말했다.

“나도 그 생각을 했어요.”

“정말요?”

“예, 이번에 알았는데 생각보다 샤마란족이 많이 살아 있는 것 같더라구요.”

갈라스의 말에 타냐가 생각에 잠겼다. 그때 카딜이 뭔가 떠올랐는지 말했다.

“이러면 어때?”

“어떤?”

“우리 결혼식에 모두 초대하는거 어때?”

“결혼식에요?”

“그래, 결혼식을 제이단 숲에서 올리자, 그럼 다들 제이단 숲으로 돌아올 수 있잖아.”

“그건 곤란합니다 카딜님.”

바훌이 나섰다. 카딜은 또 뭐가 불만이냐는 식으로 바훌을 노려보았다. 원리원칙을 꽤 따지는


바훌이었는데 황궁호위무사가 되고 난 후에는 그 증세가 더 심해졌다.

그래서 바훌이 태클을 걸고 나서면 카딜의 눈썹은 절로 구겨진다.

“여황제님의 결혼식을 궁밖에서 한다는게 말이 안됩니다.”

“뭘 말이 안되기까지, 하면 되는거지 안그래 타냐?”

카딜의 말에 갈라스가 나섰다.

“그건 바훌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만.”

갈라스까지 그렇게 나오자 타냐도 카딜의 말에 동의해주지 못했다.

“그럼 그냥 동,서,남, 북 할 것 없이 모든 대륙에 방을 붙이면 어떨까요?”

“방?”

“네, 샤마란족은 모두 제이단 숲으로 모이라는 방 말이예요. 샤마란족이라면 제이단 숲을 알거든요.”

타냐의 말에 모두들 괜찮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뜻은 그 다음날 바로 실행되었다. 북대륙의 주인 여황제 타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곧


법이었으니 말이다.

***

하얀달빛이 유난히도 밝았다. 카딜은 혼자서 튤립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분명 밤인데 대낮같이 달빛이
밝다. 카딜은 하늘을 올려다 보며 하얀 달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그러자 그 하얀달이 싱긋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갑자기 제 품안으로 쑥 빨려 들어왔다.

깜짝 놀란 카딜이 눈을 떴다.

“꿈?”

카딜은 방금전 꾸었던 꿈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으로 괴이한 꿈이었다.

옆에서 곤히 잠든 타냐를 쳐다본 카딜의 입매가 살짝 비틀려 올라갔다. 입술 끝에 걸린 미소는 어쩐지


색기가 내비쳤다.

갑자기 타냐가 미치게 가지고 싶은 그가 잠든 타냐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무리 여황제가 되었다고 해도 그녀는 이제 명실공히 제 부인이었다. 물론 정식 결혼식은 한달 남았지만.

“으음, 카딜…”

타냐가 그의 손길을 느끼고 카딜에게 안겨 들었다. 안겨드는 타냐와 키스를 하며 카딜은 그녀의 잠옷을
벗겨냈다.

“하으음, 졸려요.”

타냐가 졸리다며 칭얼댔지만 카딜은 이미 욕정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라서 멈출 수가 없었다. 이불을
걷어낸 카딜이 타냐의 두 다리를 벌렸다.

츄릅대는 소리와 함께 타냐의 옅은 신음도 흘러 나왔다. 자다가 느닷없이 꿈을 꾸었고 잠이깬 카딜이 잠든
타냐를 보자마자 욕정이 분출된 것이다.

사실 타냐는 요즘 매일 일정한 숫자의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느라 꽤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미 잠들기 전에 그녀에게 에너지를 충분히 주었지만 지금 또 갈증이 난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은 타냐에게 에너지를 주고 나면 그 이상으로 성욕이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하아, 카딜…”

타냐는 이제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 제 비부를 핥아대는 카딜의 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카딜의 회색빛
머리카락이 타냐의 열 손가락 사이사이에 들어왔다.

츄웁! 추우웁!

“하아, 아흐응.”

도톰한 음순을 손가락을 이용해서 벌린 카딜이 그 안속에 내비친 붉은 속살을 거침없이 핥아 올렸다.

열에 들뜬 타냐는 몽롱한 눈동자로 제 음부를 할짝대는 카딜을 내려다 보며 우는 소리를 냈다.

타액으로 흥건하게 젖어든 음부가 어서 뭔가를 달라는 듯 벌름대자 카딜이 상체를 세웠다.
심장박동은 이제 주체할 수 없게 빨라졌다. 모공 하나하나가 열리는 듯한 느낌에 타냐의 몸이 절로
휘어졌다.

“하아, 이제 그만…넣어줘요.”

타냐의 말에 그나마 겨우 잡고 있던 이성이 끊어진 카딜이 제 선단을 그녀의 음순사이에 넣었다.

타냐를 안으며 힘을 주자 두껍고도 거친표면을 가진 그의 페니스가 타냐의 몸안으로 힘겹게 밀려 들어왔다.

이내 온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공 하나하나에서 땀이 세어나올정도로 카딜의 몸짓은 타냐를 들뜨게


만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보름달이 그의 허릿짓에 따라 함께 흔들렸다.

자꾸만 밀려 올라가는 몸을 카딜이 제 품에 옭아매듯 안았다. 카딜의 몸 안에 폭 파묻힌 타냐의 두 다리가


안쓰럽게 허공에서 흔들린다.

“사랑해, 타냐.”

“사랑해요, 카딜.”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맞추었다. 오가는 눈길에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퍽퍽!

찔걱,찔걱,

야한 소리와 함께 타냐의 교성이 여황제의 침실에 퍼져나갔다.

***

한달 후.

드디어 여황제의 국혼이 황궁 뜰에서 거행되었다.

북대륙은 타냐가 여황제가 되면서 신분제도부터 바뀌었다. 그런데 그 신분제도라는 것이 참으로 특이했다.

총 다섯가지로 구분된 신분제도는 사실 직업군이었다.

군인, 상인, 농민, 건축가, 그리고 의사였다. 여기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자녀나 부모가 어떤 직업군이냐에 달렸기에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이전에 귀족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상인이나 농민에 속했다. 이 다섯가지 신분제도는 실험단계에 있다.
그 결과에 따라 유지될 수도 폐지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는 별다른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세금은 벌어들이는 소득에서 퍼센테이지로 내도록 했다. 이 제도 역시 타냐에 의해 만들어졌고 이것도


실험중이었다. 신분제도가 직업군으로 바뀌면서 귀족이니 평민이니 천민이니 하는것도 노예제도도
폐지되었다.

이제 북대륙은 인간은 평등하며 그 누구도 돈으로 인간을 사고 팔 수 없게 되었다.

타냐는 알테베르가 만들어 놓은 모든 악법들을 폐지하고 새로운 법을 시행하느라 하루도 편하게 쉴 수


있는 날이 없었지만 행복해 했다.
“여황제폐하의 결혼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타냐와 카딜이 나란히 서서 버진로드를 걸어 들어가서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자 모두들 일어서서


여황제에게 축하인사를 했다.

결혼식 예복 또한 수수했다. 그저 연한 살구빛 드레스에 영롱하게 빛을 내는 큐빅이 전부였다. 카딜은


직업이 군인임을 나타내는 제복을 입었다.

두 사람이 손을 흔들자 하객들이 환호성을 보냈다. 타냐와 카딜의 결혼식이 있는 오늘은 황실의 창고를
열어 전 가구에 밀가루 20kg 과 소금 1kg, 그리고 설탕 5kg 이 배급되었다.

황궁 밖에서도 국민들의 함성 소리가 엄청나게 들려왔다.

“여황제폐하 만세!”

“아클란대제국 만세!”

“샤마란족 만세!”

들려오는 환호성을 들으며 카딜이 타냐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타냐가 헛구역질을 했다.

“웁!”

“왜 그래 타냐?”

“우웁!”

헛구역질을 하는 타냐를 본 카딜의 시녀장 실리아가 급하게 달려왔다.

“폐하, 혹시 임신하신 것 아닙니까?”

실리아의 말에 카딜은 이미 동공이 최대치로 커졌다. 타냐도 놀라서 카딜을 쳐다보았다.

“폐하, 감축드립니다.”

“실리아님,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감축이라뇨.”

“제 느낌은 맞습니다. 제가 아이를 한 두 번 받아본게 아니거든요.”

“아이 많이 받아본 것 하고 임신한걸 아는 것 하곤 다른 문제 아닌가요?”

타냐의 말에 잠시 두 눈을 깜빡이던 실리아가 다시 말했다.

“임신인지 아닌지도 딱 보면 압니다. 폐하의 헛구역질은 분명 임신이십니다. 제 말이 틀린지 보십시오


호호호.”

실리아가 좋아서 웃자 카딜이 타냐를 번쩍 안아 들더니 한바퀴 빙글 돌고는 키스했다.

그모습에 하객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웅성거리다가 입에서 입으로 소식을 전해 듣고는 모두들 무릎을 꿇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임신을축하드립니다 폐하!”

황궁이 떠나가도록 축하한다는 소리가 울려퍼지자 타냐의 두 뺨이 빨갛게 변했다.


“내가 태몽을 꾸었는데 아마 그날 아이가 찾아왔나봐.”

“태몽을 꾸었어요?”

“응, 지금 생각하니 태몽인 것 같아.”

“어떤 태몽인데요?”

“하얀 보름달이 내 품에 안겼어,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고 갑자기 당신이 너무 그리워서 막 덮쳤잖아,
기억나?”

“설마 그날 밤에?”

“그래, 맞아 그날 밤.”

타냐는 자는 사람을 깨워서 미친 듯이 욕정을 불태웠던 그날을 떠올리고는 얼굴이 더 심하게 붉어졌다.

“하지만 검사부터 해봐야 해요. 아닐지도 모르니까 너무 기대하진 말아요.”

“분명할거야.”

카딜의 자신있는 말에 실리아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50 화

아클란 대제국 여황제의 임신 소식을 들은 동, 서, 남대륙에서 선물들이 속속 도착했다. 동대륙에서는


갈라스 황자가 직접 선물을 가지고 왔다.

임신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부터 카딜은 타냐의 그림자처럼 그녀의 곁을 지켰다.

“황제폐하, 임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 선물은 저희 고블린 황제이신 아바마마께서 직접 고르신


선물입니다. 우리 동대륙에서만 생산되는 휩툰이라는 귀한 보석을 연마해서 만든 테이블입니다. 부디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어머나, 그렇게 귀한 것을 이렇게 보내시다니 정말 감사히 잘 쓰겠다고 전해주세요 갈라스 황자님.”

“저희가 오히려 감사할따름입니다. 폐하 덕분에 우리 동대륙은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갈라스의 말에 타냐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 덕분이라뇨, 카딜 대장군님 덕분이죠 호호호.”

타냐의 말에 카딜이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저렇게 쌓인 선물들을 열어보시기에도 몇날 며칠이 걸리실 것 같습니다 하하하. 온세상이


황제폐하의 임신을 축하하는 듯 합니다.”

갈라스는 내실 한쪽을 막을 저어도로 쌓인 선물상자를 보며 말했다.

“그러게나 말이예요, 내 임신이 뭣이 그렇게 축하할 일이라고, 너무 고마워서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그건


그렇고 황자님 일단 자리에 앉으세요, 같이 다과라도 나눠요, 내가 물어볼 말도 있거든요.”

“예, 예? 물어볼 말이라니요?”

갈라스는 대답을 했다가 나중에서야 타냐의 말을 알아듣고 되물었다.


“잠시만 기다려봐요. 곧 손님이 한분 더 올테니까요.”

타냐의 말에 갈라스가 의아한 눈빛을 했을 때 시종의 알림소리가 났다.

“폐하, 로젠시아 레이디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들라하세요.”

타냐가 대답하자 문이 열리고 로젠시아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타냐와 카딜에게 먼저 예를 표하고
갈라스와 눈빛을 교환했다.

당황한 빛이 역력한 갈라스였지만 늘어나는 입꼬리는 어쩔 수 없었다.

1 시간전.

타냐는 로젠시아가 머무는 공주궁으로 찾아갔었다.

“폐하께서 직접 저를 다 찾아주시고 영광입니다.”

로젠시아가 여황제가 납시셨다는 알림에 깜짝 놀라서 문을 열고 나와서 인사를 했다. 지난날 카딜과
결혼하고 싶다는 욕심에 타냐에게 함부로 대했던 것이 있어서인지 로젠시아의 태도는 여간 예의바른 것이
아니었다. 샤마란족의 후예, 그것도 족장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난 후 더 타냐에게 경외심을 가지는
그녀였다.

“영광은 무슨, 얼른 들어가죠.”

“예, 폐하.”

타냐가 안으로 들어서자 로젠시아는 자신의 자리를 내주었다. 타냐가 괜찮다고 했지만 어찌 폐하를
아랫자리에 앉게 하느냐며 극구 그녀를 상석으로 안내했다.

시녀들에게 다과상을 준비하라 이른 후 로젠시아가 타냐의 앞에 앉았다.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폐하?”

로젠시아는 타냐가 직접 자신의 거처를 찾아온 것이 처음이라 몸둘바를 몰라했다.

“앞으로는 자주 만나서 다과도 하고 수다도 떨고 해요 우리.”

“예?”

“뭘 그렇게 놀라요? 혹시 내가 불편한가요?”

“아, 아뇨, 그게아니라 너무 황송해서 그러는거예요. 정사보시기에도 바쁘실텐데 저같은 것 하고 담소를


나누시겠다 하시니까…”

로젠시아의 말에 타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궁안에 로젠시아 말고는 여자들의 수다를 떨 사람이 없잖아요, 그렇다고 시녀들과 수다를 떨수도 없고
말이예요.”

“어머, 그렇긴 하겠네요, 호호호, 그런데 전 폐하께서 수다를 좋아하시는줄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좀
놀랍기도 하고 친근감이 느껴지기도 해요. 저야 언제든 환영합니다 폐하, 폐하만 괜찮으시다면 전 폐하의
시녀가 되어도 좋습니다.”
“시녀는 무슨, 말도 안돼요.”

타냐이 말에 로젠시아는 손사레까지 치며 말했다.

“말이 안되긴요, 사실 전 제대로 따지자면 죽어 마땅한 역적인걸요.”

로젠시아의 안색이 어둡게 내려앉자 타냐가 벌떡 일어나더니 로젠시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깜짝 놀란 로젠시아가 얼른 일어났다.

“로젠시아, 그런 생각 말아요, 로젠시아는 내가 내 나라를 되찾는데 일등공신이예요, 갈라스 황자에게


이야기 다 들었어요, 로젠시아가 도와서 황제가 우리를 처단하는 재판을 하루 미루었다고.”

“그건….”

로젠시아가 말을 잇지 못하자 타냐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우리 앞으로 친자매처럼 지내요. 그래줄 수 있죠?”

“!”

로젠시아는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타냐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감격했다는 감정이 철철 흘러 넘쳤다. 타냐는 피식 웃어주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 사이 시녀들이 다과상을 차려주었다.

“폐하, 변변치 않지만 드셔보십시오, 이 카모마일차는 심신에 안정감을 주고 숙면도 취하게 해준다고
하네요. 임신하셔서 예민해졌을텐데 주무시기전에 이 차를 한잔씩 마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로젠시아의 말에 타냐는 진심으로 감동받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타냐와 로젠시아가 카모마일티를 한모금 마신 후 주방 세프가 만들어온 땅콩 쿠키도 하나 먹었다.

“저기 갈라스 황자 말인데요.”

타냐가 본론을 꺼냈다. 그녀가 오늘 로젠시아를 찾아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네?”

갈라스라는 이름만 나와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로젠시아에게서 벌써 뭔가 눈치를 챈 타냐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동대륙의 고블린제국 황자와 내 친자매 같은 로젠시아와 결혼을 한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타냐의 말에 로젠시아가 놀라서 커진 눈으로 타냐를 쳐다보며 찻잔을 내려 놓았다.

“싫어요?”

타냐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묻자 로젠시아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싫다뇨, 좋습니다 폐하.”

급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들켜버리는 말을 해버린 로젠시아가 당혹스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럴줄 알았어요. 그럼 갈라스 황자와의 혼례를 진행하도록 하죠, 어때요?”

“폐하….전 이제 아무것도 아닌데 갈라스 황자가 저와 혼인하려 할까요?”

“아무것도 아니라뇨, 아클란 대제국 여황제와 친자매같은 사이인데요?”

타냐의 말에 로젠시아의 두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들기 시작했다. 살짝 붉어진 눈시울을 본 타냐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로젠시아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언니하면 되겠네요.”

“하, 하지만 어떻게 감히 여황제폐하를 동생으로 대하겠습니까, 말씀만으로도 황송합니다 폐하.”

로젠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드레스자락을 잡고 인사를 했다. 환하게 웃은 타냐가 말했다.

“그럼 갈라서 황자를 불러서 혼례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저기.”

“왜요,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네, 사실 갈라스 황자는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어요. 조금있으면 도착할겁니다 폐하.”

“아 맞다, 내 임신축하한다고 고블린 제국의 대공이 선물을 보냈다고 전갈이 왔었지.”

“네, 맞습니다. 저에게도 온다고 미리 전갈을 보냈더라구요.”

“호호호, 벌써 이렇게 서로 은밀하게 전갈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니 축하해줘야 겠네요.”

타냐의 말에 로젠시아의 두 뺨이 붉어졌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후 지금 타냐는 갈라스와 로젠시아를 한자리에 부른 것이다.

“어서와요 로젠시아.”

응접실로 들어서는 로젠시아에게 타냐가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갈라스는 살짝 당황하는 눈빛이었지만


은근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로젠시아는 갈라스에게 형식적인 예를 표하고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카딜, 이제 당신이 알아서 말씀하세요.”

타냐가 카딜에게 미루자 카딜이 기다렸다는 듯이 갈라스 황자에게 말했다.

“갈라스 황자, 여기 로젠시아와의 혼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이미 그녀와 사랑을 나눈터라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갈라스는 당황한 기색으로 카딜과 타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타냐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채 고개를 끄덕이자 갈라스는 그제야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타냐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폐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저는 무조건 좋습니다.”


“내 허락이 필요하다면 허락해줄게요, 안그래도 이미 로젠시아와 이야기 끝냈어요, 앞으로 로젠시아는 내
친언니 같은 사람이니까 갈라스 황자가 잘 좀 챙겨주세요.”

친언니 같은 사람이라는 말에 갈라스는 많이 놀란 표정으로 타냐를 쳐다보았다.

북대륙의 대제국 아클란의 여황제와 친자매처럼 지내는 사이라고 하면 본국에 계신 아버지도 허락해줄
것이다.

“혹시 부모님께서 반대하신다면 제가 기꺼이 가서 청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아, 아닙니다. 감히 저희 같은 약소국이 어떻게 대제국의 황제폐하를 오라가라 하겠습니까, 와도 저희가


와야죠, 하지만 그러실 필요없습니다. 로젠시아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부모님께서는 무조건
찬성하실겁니다.”

갈라스의 말에 카딜과 타냐는 서로 마주 보며 미소지었다. 갈라스는 슬쩍 손을 뻗어 로젠시아의 손을


잡았다. 서로 마주보며 미소짓는 모습이 꽤나 사랑하는 사이로 보였다.

***

“카딜, 이리와요.”

임신 6 개월인 타냐는 제법 부른 몸으로 오늘따라 나른한 눈빛으로 카딜을 불렀다.

오늘 불치병에 걸린 환자 여럿을 치료해주었더니 에너지가 고갈되었던 것이다.

로젠시아와 갈라스는 3 개월전에 결혼해서 고블린 제국으로 가서 잘 살고 있다. 타냐가 바꾼 제도는


아직까지는 아무런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고 하루에 10 명 정도를 정해놓고 병세가 심각한 사람들만
특별히 타냐가 치유의 힘을 써서 고쳐주고 있었다. 가벼운 증세는 제이단 숲으로 가서 고쳐도 충분했지만
중병인 사람들은 타냐의 힘이 필요했다.

매일 치유의 힘이 필요한 사람들의 명단은 빼곡하게 들어차고 있었다.

카딜은 임신한 아내가 힘들까봐 치료하는 사람의 숫자를 줄이라고 종용하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타냐가 고집을 피우는 실정이었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었는지 카딜이 강경책을 쓰기로 했다.

“이제 에너지 안 채워줄거야.”

“!”

놀란 타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카딜이 침대로 와서 걸터 앉아 타냐의 볼록한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신 임신했어, 우리 베이비가 힘들거라는 생각은 안해봤어?”

“카딜, 갑자기 왜 이래요? 늘 해왔던거잖아요, 그리고 중병에 걸린 사람들은 한시가 급하다구요.


생각같아서 하루에 20 명으로 늘리고 싶어요.”

타냐의 말에 카딜의 눈꼬리가 무섭게 올라갔다. 흠칫 놀란 타냐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그의 눈치를 봤다.

“오늘부터 혼자 자.”

“네?”
“난 백성들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당신과 우리 베이비가 더 중요하니까, 굿나잇.”

“카딜!”

타냐가 얼른 카딜의 손을 잡았다. 지금 당장 그와 섹스를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데 그가 거부하자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어, 나하고 같이 자고 싶으면 하루에 치료하는 환자를 다섯명으로 줄여.”

카딜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나가려 하자 타냐가 얼른 말했다.

“여덟명.”

“여섯명.”

“일곱명.”

“콜!”

카딜은 세명을 줄인게 어디냐 싶어 일단 허락해주었다.

“이제 얼른 안아줘요 카딜.”

타냐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잠옷을 미리 벗어던지기 시작하자 카딜도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두 다리부터
벌렸다.

비단속옷을 벗길 시간도 아까워 옆으로 젖힌 그가 혀로 타냐의 음부를 핥아 올리기 시작했다. 타냐의


허리가 뒤틀리고 엉덩이가 절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애액은 이미 흥건하게 흘러나온터라 더 이상의 전희는 필요없었다. 아니 전희를 할 여유가 없었다.

카딜이 강한 허벅지 근육을 이용해 타냐의 두 다리를 더 벌려 음순이 갈라지게 하고는 붉은 속살이 보이는
곳으로 선단을 밀어 넣었다.

하아, 카딜.

타냐가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카딜의 허리가 앞뒤로 리드미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볼록한 그녀의 배를 두 손바닥으로 쓰다듬다 출렁이는 젖가슴을 모두 쥐었다.

“사랑해요 카딜.”

“그걸로는 부족해 타냐.”

“그럼 뭘 더 원해요?”

“몰라, 그냥 부족해, 모든게 부족해.”

카딜이 어린아이처럼 매달리자 타냐가 배시시 웃고는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살과 살이 마찰하는 젖은


소리가 내실에 울려퍼졌다.

- 본편 끝—

51 화
“이제서야 샤마란족의 진정한 핏줄이 생겼네요, 축하해요 폐하.”

로젠시아의 말에 옆에서 태어난지 한달된 조카 비안느를 보며 즐거워하던 토디엘이 고개를 돌렸다.

“어머, 제가 말실수를…”

그냥 있으면 적당히 둘러댈텐데 로젠시아가 또 다시 토디엘이 의심할만한 말을 했다. 어딘지 모르게


다분히 계략적으로 보였지만 타냐는 애써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갈라스와 결혼하여 동대륙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지만 로젠시아는 타냐에게 자주 놀러 왔었다.

그때마다 타냐는 아무리 정사가 바빠도, 아무리 피곤해도 그녀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제 입으로 친자매처럼 지내자고 한 말도 있었고 핏줄이라고는 없는 로젠시아가 안쓰럽기도 해서


그래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제버릇 개 못준다는 말처럼 지난날의 로젠시아 모습이 조금씩 나왔었다.

시녀들에게도 상냥하게 대하던 그녀는 어느순간 타냐의 시녀를 자기 시녀처럼 부리기 시작했고 시종들
또한 자신의 시종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사로이 일을 시키기도 했다.

이래서 인간은 고쳐쓰는게 아닌가 보다 생각하며 조금씩 거리를 둬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오늘 이상한
소리를 한 것이다.

타냐가 얼른 토디엘이 더 깊이 생각하기전에 말을 돌렸다.

“말실수는 무슨, 내 아이라서 그렇게 말한거죠 로젠시아?”

로젠시아가 얼른 고개를 끄덕여주길 바라며 타냐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로젠시아가 다행히도
박수까지 치며 타냐가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네, 그럼요, 제 말이 바로 그런 뜻이었답니다. 호호호.”

로젠시아와 타냐가 그렇게 노력했지만 이미 토디엘의 안색은 굳어졌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어서 눈치가 빨라진 것도 있지만 요즘 그는 타냐와 카딜을 대하는데 있어서 약간의
거리를 두는 것처럼도 보였다.

“전 이만 가볼게요 폐하.”

토디엘이 굳은 얼굴로 말하자 타냐가 얼른 그를 잡았다.

“가긴 어딜가려고 같이 점심 먹기로 했잖아 토디엘.”

“배가 별로 안고파서요, 훈련장에 가서 검술 연습이나 할까 합니다.”

“갑자기 검술 연습이라니?”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토디엘이 붙잡는 타냐의 손을 뿌리치고 내실을 나가버리자 타냐가 로젠시아를 노려 보았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튀어나온 말이라서….”

“이번은 용서해줄게요, 하지만 다시는 토디엘 앞에서 핏줄이니 어쩌니 하는 소리는 하지 말아요.”
“예, 폐하,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만 나가봐요.”

“예?”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그만 나가보라고 하자 로젠시아는 서운한 표정으로 인사하고는 나갔다.

검술훈련장으로 온 토디엘은 목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열다섯살이 된 토디엘은 1 년만에 훌쩍


어른스러워졌다. 사춘기에 접어 들었는지 말수도 적어졌고 잘 웃지도 않았다.

-이제서야 샤마란족의 진정한 핏줄이 생겼네요.

토디엘은 조금전 로젠시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안그래도 이상하다 생각했었다. 누나는 자신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 아니, 부모님과도 하나도 닮지 않았다. 어릴때는 그것을 몰랐는데 커가면서 이상하다
생각했었다. 그리고 누나가 샤마란족의 핏줄이고 아클란대제국의 여황제가 되면서부터는 그녀와 자신은
정말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느꼈다. 그런 와중에 로젠시아가 던진 말은 토디엘의 귀에
팍 꽂혔던 것이다.

휙휙! 바람을 가르며 토디엘의 목검이 허공에서 춤을 출 때 로젠시아가 훈련장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토디엘은 하던 검술을 마저했다. 로젠시아는 최근 토디엘에게 부쩍 잘 대해주었다. 그러다보니


정사를 보느라 피곤한 타냐보다 로젠시아와 대화를 더 많이 나누게 되었다. 그녀가 갈라스황자와 결혼하기
전부터 가깝게 지냈고 결혼하고 동대륙으로 떠난 후에도 자주 찾아와 토디엘의 말벗이 되어주기도 했다.

가끔은 타냐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로젠시아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토디엘.”

로젠시아가 그를 부르자 토디엘이 검술을 멈추었다. 이미 땀이 나기 시작하여 토디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나 이제 갈거야, 가기전에 너 얼굴 한번 보고 가려고 왔어.”

로젠시아의 말에 토디엘이 얼른 그녀에게 다가왔다.

“로젠누나, 가기전에 내 말에 대답부터 해줘요.”

토디엘의 말에 로젠시아는 살짝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놀라는 것 같기도 한


그녀의 표정에 토디엘이 직선적으로 물었다.

“로젠누나는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죠?”

“무, 무슨 소리야 토디엘, 내, 내가 뭘 알고 있다는 거야?”

말을 더듬는 것을 본 토디엘이 아까 그 말에 대해서 물었다.

“진정한 샤마란족이 이제야 생겼다는 그 말뜻은 나는 샤마란족이 아니라는 뜻이죠?”

“!”

흠칫 놀라는 로젠시아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토디엘이 다그쳤다.

“괜찮아요, 나도 이제 열다섯살이예요, 타냐누나에게는 모른척 할게요. 로젠 누나가 알고 있는 것 다


말해줘요.”

“그게….”

로젠시아는 자꾸만 토디엘이 궁금해질만한 표정과 말투로 곤란해 했다. 그 모습에 이미 토디엘은
알아차렸다. 자신이 타냐와 친남매지간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토디엘은 진실을 알고 싶었다.

“내 입으로는 절대 말해줄 수 없어, 누나에게 직접 들어 토디엘.”

로젠시아의 말은 토디엘의 의심에 확신을 주었다.

“나 타냐누나하고 친남매 아니죠? 사실 전에부터 느꼈어요, 하나도 닮지도 않았잖아요, 어쩐지 엄마아빠
하고도 안 닮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랬었구나.”

토디엘이 체념한 듯 돌아서려하자 로젠시아가 급하게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훈련장의 구석으로 온


로젠시아는 주위를 한번 살피고는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리고 타냐가 누구인지 토디엘의 부모님은 누구인지 말해주었다. 잠 자리에서 갈라스 황자를 유혹해
타냐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들은 그녀였다.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은 그저 샤마란족 공주인 타냐누나를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희생되었다는 거죠?”

“그래, 안타깝게도 그래.”

로젠시아는 토디엘에게 다른건 다 차치하고 타냐 하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했는지를


강조했다. 그 희생자들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토디엘의 부모님이라는 말까지.

이야기를 전부 들은 토디엘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물을 흘렸다.

열다섯살 토디엘의 가슴에 그렇게 사랑했던 누나가 원수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울먹이는 토디엘을 조심스럽게 끌어 안은 로젠시아는 그의 등을 쓸어 주며 위로했다.

하지만 두 눈에는 사악한 빛이 가득했다.

***

“토디엘! 너 대체 어디에 있었니? 누나가 걱정했잖아.”

타냐는 토디엘을 찾아 황궁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혹시나 싶어 그가 머무는 왕자궁으로 왔다. 아까 이곳도


다녀갔던 그녀는 한번 더 침실을 둘러보려다가 침대위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는 토디엘을 본 것이다.

걱정했던만큼 목소리도 커졌고 말투는 야단치는 쪽으로 향했다.

“누나가 한 시간 이상을 너 찾아 다녔잖아.”

“누가 찾으러 다니래?”

이불을 확 겉어낸 토디엘이 화를 버럭 냈다. 타냐에게 이렇게 정색하고 대드는 것이 처음이라 타냐가
오히려 놀라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누구는 동생 걱정에 점심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안절부절 못해가며 저를
찾아 다녔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니? 동생이 눈에 안보이는데 걱정안하겠어?”


“내가 누나 눈에 안보인게 한두번이야? 로젠 누나가 한 말 때문에 뭔가 찔리기라도 했나보지?”

“뭐?”

“누나가 언제부터 나 챙겼다고 이래? 누나는 매형하고 비안느하고만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잖아, 나
같은건 그저 귀찮은 존재일뿐이잖아!”

“너 그 입 안 다물어!”

타냐가 버럭 화를 내자 토디엘이 비꼬듯 말했다.

“네,네, 감히 저 같은 것이 황제폐하에게 무례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뭐?”

타냐는 토디엘의 말에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자신이 언제 토디엘에게 까지 황제 행세를 했던가 말이다.


정사가 바빠서 알뜰살뜰 챙겨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딴에는 챙긴다고 챙겼다.

“나 당분간 로젠누나집에 가있을까 해.”

“뭐?”

타냐는 너무 충격을 받아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뭐? 소리만 여러번 하는 동안 토디엘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토디엘, 그만두지 못해?”

“누나도 내가 없어졌으면 했잖아.”

“뭐, 뭐라고?”

“매형하고 비안느만 있으면 행복하잖아, 내가 그동안 눈치가 없었어 미안해 누나.”

토디엘이 대충 챙긴 봇짐을 들고 나가려 하자 타냐가 얼른 그의 팔을 잡았다.

“너 정말 로젠시아 집에 가겠다는 거야?”

“응, 로젠 누나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뭐라고?”

타냐는 혀가 얼어붙었는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충격에 충격이 더해져 그녀는 입만 벌린채로 토디엘이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보기만 했다.

그러다 토디엘이 나간 후에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왔다. 토디엘의 말대로 밖에는 로젠시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로젠시아, 지금 이게 뭐하는 거죠?”

“폐하,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사춘기이다 보니 감정조절이 잘 되지 않는가


보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우리집에가서 좀 쉬다 오면 어떻겠느냐 제안했는데 그러겠다고 하길래, 너무
걱정 마십시오.”

토디엘은 이미 로젠시아가 타고온 마차에 오른 상태였다. 타냐는 마차안에 있는 토디엘을 의식하며


로젠시아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설마 이상한 소리 한건 아니죠?”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토디엘이 저렇게 행동한다는게….”

“아마 사춘기라서 예민해져서 그럴겁니다. 그리고 한동안 카딜님도 폐하도 비안느 공주님께 신경쓰느라
토디엘에게 좀 무심했잖아요, 그래서 서운했나봅니다. 제가 데리고 있으면서 마음 풀어주겠습니다.”

로젠시아의 말이 의심스러웠지만 타냐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잘 부탁할게요, 대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줘요.”

“당연히 그래야죠, 그럼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폐하, 다시 만날때까지 부디 강건하세요.”

로젠시아가 황제에 대한 예를 표하고 마차에 올랐다. 타냐는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기분이 묘했다. 방금전 로젠시아의 눈빛은 그녀가 제게 적대적으로 대할때의 눈빛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디엘 찾았어?”

뒤늦게 카딜이 타냐를 발견하고 그녀곁으로 다가왔다.

“네, 저기 로젠시아의 마차를 타고 동대륙으로 떠났어요.”

“뭐라고? 동대륙으로 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52 화

“추측이지만 토디엘이 알아챘나봐요.”

타냐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본 카딜은 그녀의 말을 알아차렸다. 아까 로젠시아가 했던 말이 무심결에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상황이었다.

카딜은 일단 타냐부터 달래야겠다 생각했다.

“시간을 좀 가지는 것도 나쁘진 않을거야, 너무 걱정하지마 타냐.”

카딜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말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지만 타냐는 뭔지 모르게
불안했다.

“정말 괜찮을까요?”

“그럼, 토디엘도 이제 어른이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거야. 난 처남을 믿어.”

카딜의 말에 길게 한숨을 내쉰 타냐는 그와 함께 본궁으로 향했다.

로젠시아와 함께 떠난 토디엘이 걱정되었지만 카딜의 말대로 어쩌면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릴적부터 토디엘을 최우선으로 챙겼던 타냐는 토디엘이 누나가 저를 얼마나 위하는지 다 알고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타냐는 굶어도 토디엘은 끼니를 거르는 일이 없게 했다. 부모님께서 전쟁노예로
끌려가시고 난 후부터는 부모님몫까지 다 하느라 토디엘을 더 정성껏 챙겼었다.

아무리 어렸다고는 하나 토디엘이 그것을 잊었을 리가 없다 생각했다.

그런데 로젠시아와 함께 잠시 지내겠다고 했던 토디엘은 두 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간간히 로젠시아를 통해서 토디엘은 잘 지내고 있다는 전갈만 받았고 그때 마다 타냐는 편지를 보냈다.
그녀의 편지에 토디엘은 잘 지내고 있다는 답장을 해주었고 타냐는 동생이 보고 싶기는 하지만 국정을
돌보느라 동대륙에 방문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황제이기 때문에 특별한 행사가 없이는 다른 나라를 함부로 방문할수도 없었다.

그래서 타냐는 한달 뒤에 열리는 북대륙과 동대륙이 함께 하는 추수감사절축하행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대륙과 동대륙이 형제나라라는 뜻에서 여러 가지 행사들을 함께 하기로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추수감사절행사였다. 올해에는 동대륙에서 유치하기로 했기 때문에 타냐와 카딜은 의무적으로 동대륙으로
가야한다.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타냐는 토디엘과 편지만 주고 받았다.

***

“일주일 남았네요.”

욕조에 물을 받아 그 안에 피로를 풀게하는 마법석을 하나 둘 넣고 있던 카딜이 타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타냐는 잠자리 날개같은 하늘거리는 가운을 걸친 채 카딜을 향해 다가왔다.

카딜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고 그가 두 팔을 벌리자 타냐가 망설임없이 그의 품에 들어왔다.

“하아, 역시 남편의 품은 너무 좋아요.”

오늘도 환자들을 치유해주고 국정을 논하느라 지쳐있던 타냐는 카딜의 품에 쓰러지듯 안기며 말했다.

“남편 없이는 안되겠지?”

“당연하죠.”

당신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데 카딜의 입술이 타냐의 입술을 덮어버려 말을 하지


못했다.

타냐에게 키스하며 카딜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는 욕조에 앉았다. 두 사람은 가운은 입었지만 이미
물속에서 활짝 벌어져 알몸이나 다름없었다. 타냐와 키스하면서 카딜은 한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쥐었다.
이미 도돌하게 튀어오른 유두를 지분대며 카딜의 혀는 타냐의 혀와 뒤섞었다.

작은 신음소리가 욕실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물에 젖어 둥둥떠다니는 가운은 완전히 벗었을때보다 더


그녀를 선정적으로 보이게 했다. 카딜 역시 물에 젖은 가운덕분에 섹시한 느낌이 배가되었다.

가슴을 움켜쥔채 손끝으로 유두를 긁어대던 카딜은 이제 손을 더 아래로 내렸다.

아랫배를 쓸어가며 내려가던 손끝이 타냐의 음핵에 닿았다. 중지로는 음순사이를 아래위로 문질러대면서
엄지로는 음핵을 둥글린다.

충분한 애액이 흘러내리자 물속이지만 미끈거리는 감각이 카딜의 중지 끝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중지로지분대던 그는 약지까지 합세하여 타냐의 질속을 쑤석대기 시작했다.


완전히 맞붙은 입술, 뒤섞이는 혀, 바르작거리는 타냐의 몸과 달뜬 숨소리.

모든 요소들이 두 사람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마법석 덕분인지 뭉쳐있던 타냐의 어깨 근육들이 풀어졌다. 하지만 카딜이 질속으로 손가락을 찔러넣고
도돌한 내벽근육을 간질이자 타냐의 아랫도리는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하아, 타냐, 사랑해.”

그녀의 혀를 한껏 빨아당긴 후 카딜은 자잘한 키스를 퍼부으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두툼한
귀두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읏!”

타냐는 고개를 젖히며 날카로운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녀의 음부는 카딜의 페니스를 반가이 맞이했다.
수압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결합력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제 안을 가득채우는 그의 페니스로 인해 타냐의
파란 눈동자가 정염으로 흐려졌다.

제 허벅지 위에 올라 앉은 타냐와 시선을 맞춘 카딜은 그녀의 젖가슴을 쭉쭉 소리가 나게 빨아대며 그녀의


골반을 잡고 아래로 찍어내렸다.

욕조의 물이 사방으로 출렁였다. 출산후 그녀를 배려해 유사섹스만 했던 카딜은 그의 페니스가 타냐의
몸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이 너무 황홀해 미칠 것 같았다.

쾌락에 항복한 카딜의 회색빛 눈동자가 초점없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하아, 카딜…사랑해요.”

“사랑해 타냐.”

욕조의 물이 폭풍이 이는 바다처럼 심하게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절정이라는 고지를 향해 함께


달렸다.

뇌에서 쥐가 내린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아찔한 감각이 뇌를 마비시켰다. 타냐는 카딜이 주는
쾌감을 거부하지 않고 만끽했다.

쏟아지는 키스세례와 함께 맞이한 절정은 타냐의 온몸이 축 늘어지게 만들었다.

카딜도 오랜만에 느끼는 벼락같은 절정에 거칠게 호흡하며 타냐를 꽉 끌어 안았다.

서로의 흉곽이 함께 들썩인지 한참 후에야 카딜은 타냐를 돌리고 그녀의 두 손을 잡아 욕조를 짚게 했다.

“잠깐만요.”

타냐의 말에 카딜이 왜 그러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만하자고? 그럼 정말 서운할텐데.

혼자 생각하던 카딜은 타냐가 몸을 빙글 돌려 제쪽으로 다가오자 배시시 웃었다.

타냐는 카딜을 밀더니 그를 욕조에 걸터앉게 하고는 여전히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그의 페니스를
그러쥐었다.

카딜이 이미 그녀의 다음 행동을 짐작하고 나른한 미소와 함께 손을 뻗어 타냐의 뺨을 만졌다. 타냐는 두


손으로 그러쥔 그의 페니스 기둥을 아래위로 쓸어 대다가 입을 벌렸다. 분홍빛 혀가 밖으로 나와 카딜의
귀두를 슥슥 핥아 주자 카딜의 잇새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뜻밖의 선물을 받은 느낌에 카딜의 입꼬리는 길게 늘어났다.

그녀가 페니스 기둥뿌리에서부터 귀두까지 길게 쓸어 올리고는 입안으로 페니스를 빨아 당기가 카딜의


고개가 절로 뒤로 젖혀졌다.

이내 타냐는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며 그의 페니스를 빨아당기기 시작했다. 양쪽 볼이 홀쭉해지도록 힘있게


빨아가며 두 손으로는 기둥을 치댄다.

좋아서 죽을 것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일터였다. 카딜은 치솟는 사정감을 느끼며 타냐의 머리카락을


모두 쥐었다.

“입벌리고 있어봐.”

이미 초점이 사라진 그는 한 마리 발정난 야수였다. 타냐가 시키는대로 하자 카딜이 그녀의 뒷머리를


고정하고는 허리를 잘게 흔들었다. 목젖까지 찔러대는 그의 귀두로 인해 타냐의 눈가에 생리적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타액이 줄줄 흘러 내려 욕조물로 떨어질때까지 추삽질을 하던 카딜은 타냐의 눈알이 빨갛게 변하자 얼른


페니스를 빼냈다.

그리고 그녀를 뒤로 돌리고 후배위로 삽입했다.

타냐가 욕조벽을 쥔채 고개를 젖혔다. 터질 듯 부푼 카딜의 페니스는 여지없이 타냐의 극점을 찔러댔고 두
사람은 얼마가지 않아 또 절정에 도달했다.

그렇게 두 번의 황홀한 감각에 빠져들었던 카딜은 더 하고 싶은 마음을 겨우 다스리고 타냐를 품에 안았다.

“카딜.”

“응?”

타냐는 따뜻한 욕조물에 몸을 담근채 카딜의 품에 안겨 그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카딜도 노곤한지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딸 비안느 정말 사랑스럽지 않아요?”

“말하면 뭐해, 입만 아프지.”

카딜의 말에 타냐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카딜도 타냐와 시선을 맞추자 타냐가 걱정스러운
눈빛이 되었다.

“왜그래?”

“그게….우리 비안느도 나처럼 치유의 힘을 가졌을까요?”

“글쎄, 나도 그건 잘 모르겠어, 원래 샤마란족만이 그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으니까.”

카딜의 말에 타냐는 내내 걱정했던 근심거리를 털어 놓았다.

“차라리 안가졌으면 좋겠어요.”

“왜?”

카딜은 뜻밖이라는 듯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너무 어깨가 무거울 것 같아서요.”

타냐의 말에 카딜은 그제야 그녀가 힘들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아둔함으로 아내가 자신이 가지
능력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자신을 한 대 줘패주고 싶었다.

“당신 힘들면 치유그만 하도록 해.”

카딜의 말에 타냐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그게 말처럼 쉬우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내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그래요?
아마도 이건 내가 받아들여야할 숙명일텐데.”

타냐의 말에 카딜은 그녀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내가 함께 할게, 죽을 때 까지 당신의 짐을 함께 들어줄게 타냐.”

카딜의 말에 타냐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카딜.”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이제 그만 씻고 나갈까? 갑자기 우리딸 비안느가 보고 싶어졌어.”

카딜의 말에 타냐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비안느가 보고 싶어졌어요.”

두 사람은 서둘러 씻고 욕실에서 나왔다. 곤히 잠든 비안느 곁으로 온 카딜과 타냐는 말없이 딸을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또 낳으면 더 이쁘겠죠?”

“또?”

“네, 다음번엔 아들이었으면 좋겠는데.”

타냐의 중얼거리는 소리에 카딜은 속으로 웃었다. 벌써 둘째 생각을 하다니, 출산때의 고통을 3 개월만에
잊은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둘째는 우리 비안느가 돌이라도 지난 후에 생각해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타냐의 뺨을 만지는 카딜의 얼굴에 행복에겨운 미소가 퍼져나갔다.

***

“급한 전갈이옵니다 폐하!”

황실 호위무사대의 수장으로 진급한 바훌이 급하게 내전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예요 바훌?”

타냐는 대신들과 국정을 논하다 놀란 눈으로 바훌에게 물었다.

“동대륙에서 사신이 왔는데 남대륙과 국경근처에서 접전이 벌어졌다면서 도움을 청해왔습니다.”


“뭐라구요?”

타냐는 심장이 철렁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서 카딜 대장군님을 찾아 보세요, 어서요.”

타냐의 지시에 바훌은 예를 갖추어 대답하고는 내전을 나갔다. 타냐는 또 남편이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심장이 제 궤도를 벗어났다.

53 화

오랜만에 황실 내전의 공기가 싸늘했다. 갑옷을 챙겨서 입혀주는 타냐의 얼굴은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있어 쉽게 그녀의 속내를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철컥거리는 갑옷소리만 울려퍼지는 가운데 카딜은 타냐와 시선이라도 맞추려 그녀가 움직이는대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타냐는 카딜과 시선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듯 묵묵히 갑옷고리만 채워주었다.

손목에 덧대어진 가죽패드를 정성스레 동여매주는 타냐를 내려다 보던 카딜이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떴다.

가죽패드에 타냐의 눈물이 한방울 떨어졌기 때문이다.

“타냐, 우는거야?”

카딜이 타냐의 턱을 들어 올리려 하자 타냐가 얼른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뇨, 눈에 뭐가 들어갔나봐요.”

먹히지도 않을 거짓말을 하는 타냐를 보며 한숨을 내쉬던 카딜이 제 갑옷을 다시 정리해주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무 걱정하지마, 남대륙군사들은 우리 붉은 기사단과 상대도 안돼.”

“알아요.”

“알면서 왜 우는거지? 그럼 혹시 내가 보고싶어질까봐 그래서 우는거야?”

“맞아요, 당신이 보고싶어질까봐 그래서 우는 거예요.”

“풋, 아까는 눈에 뭐가 들어갔다더니?”

카딜이 그 사이에 타냐를 놀리는 말을 하자 타냐가 두 눈을 곱게 흘겼다. 피식 웃은 카딜이 타냐를 품에


안고는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없을때는 치유마법 쓰지마, 알았지?”

“그래야 하는데 이미 예약한 사람들이 있어서 걱정이예요.”

“이미 예약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을 설명하면 이해해줄거야.”

카딜이 타냐의 두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대답해, 그래야 내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카딜이 그녀의 대답을 종용하듯 회색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타냐의 두 눈을 응시했다.


“알았어요.”

할 수 없이 대답하는 듯한 그녀의 대답에 뭔가 못미더워하는 카딜이었지만 상황이 급박하여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카딜은 유모에게 안겨있는 비안느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딸에게도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했다.

그모습에 타냐의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쟁터에 떠나는 남편의 마음이
무거울까 싶어 얼른 눈물을 닦고 애써 환한 미소로 배웅했다.

카딜과 바훌이 붉은 기사단과 함께 황궁을 떠난 후에도 타냐는 쉽사리 몸을 돌리지 못했다.

***

“기회는 딱 한번 뿐이니까 절대 실수하면 안돼요.”

로젠시아의 말에 갈라스가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대륙과 손을 잡고 북대륙을 무찌르자고


제안한 사람은 바로 로젠시아였다.

마법석이 가장 많이 나는 북대륙을 탐내는 나라는 늘 많았고 지금도 많았다.

특히 제이단 숲이 되살아난 후로 동대륙에서도 수많은 환자들이 들어와 그곳에서 병을 치유하고 돌아갔다.

카딜과 타냐가 평화정책을 펼쳐서 4 대륙이 평화롭게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고마움은 무뎌져갔다.

고마움을 잊어버리게 되자 욕심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중에 가장 욕심을 내는 사람이 바로 로젠시아였다. 사촌오빠 알테베르가 황제였던 시절을 잊지못하고


아직도 북대륙이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타냐만 잘 붙들고 있어.”

“그건 염려말아요. 카딜 대장군이 출발했다고 하니까 당신도 어서 출발해요.”

로젠시아의 말에 갈라스가 갑옷을 여미고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원래부터 북대륙에 억하심정이 많았던
갈라스는 로젠시아와 결혼한 후로 그녀의 꼬임에 넘어가서 북대륙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허황된 꿈을
가지게 되었다.

로제시아는 타냐가 여황제가 되는 것을 본 후 자신도 여황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왕가의 핏줄이기에 자신이 북대륙의 여황제가 되는 것에 명분은 충분했다. 그 명분에 갈라스도 넘어간
것이다.

물론 대대로 북대륙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그를 부추긴


로젠시아 덕분에 카딜을 죽이자는 계략까지 짜낸 것이었다.

갈라스가 멀어진 후 토디엘이 로젠시아에게 다가왔다.

“갈라스 폐하가 왜 군대를 이끌고 가시는 거죠?”

토디엘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라서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사냥가는거야.”
“사냥요?”

“그래.”

“그럼 저도 갈래요 로젠누나.”

“아냐, 이번 사냥대회는 마물을 잡으러 가는거라서 너같은 어린아이가 갈 수 없어. 나도 안가잖아, 평소


같았으면 나도 따라가거든, 그러지 말고 우리는 이참에 북대륙에 놀러가자. 너 타냐누나 안 보고 싶어?”

“뭐 별로.”

토디엘이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로젠이 꺄르르 웃으며 그의 뺨을 만졌다.

“타냐누나보다 내가 더 좋아?”

로젠시아의 물음에 토디엘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열다섯살 사춘기 남자아이로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친누나로 알았던 사람이 자신의 핏줄이 아니란걸 알았고 그 누나는 남편과 제 아이에게만 정신이 팔렸다.
그런데 로젠시아는 피한방울도 안 섞였지만 타냐보다 더 저를 걱정해주고 챙겨주었다.

타냐에 대한 안좋은 감정일 때 로젠시아가 잘해주니 그녀에게 더 확 정이 가는 것이었다.

게다가 로젠시아는 지난 3 개월동안 토디엘을 친 동생보다 더 친동생처럼 잘 돌봐주었고 해달라는 것은 다


해주었다.

“아무리 내가 타냐누나보다 좋아도 그래도 누나인데 그러면 안돼, 준비해, 오랜만에 북대륙 구경이나
가자.”

로젠시아가 재촉하자 토디엘은 어쩔 수 없이 북대륙으로 갈 차비를 했다.

지도상으로 접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동대륙과 남대륙의 국경보다 고블린 제국의 황궁에서 아클란 대제국
황궁까지의 거리는 배 이상은 짧았다.

카딜도 이미 붉은 기사단을 이끌고 동대륙 국경으로 출발했다는 전갈을 받았기에 로젠시아는 마음놓고
타냐가 있는 아클란 황궁으로 향했다.

이제 곧 카딜과 타냐를 죽이고 아클란의 여황제가 된다는 생각에 로젠시아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

“토디엘!”

토디엘을 본 타냐가 빠르게 다가와 그를 안아주었다. 하지만 토디엘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성의없이 타냐의
포옹을 받아 주었다.

“세상에, 그 사이에 많이 컸구나, 키가 또 자란거지? 180cm 도 넘겠는데?”

타냐는 카딜이 전쟁터로 떠난후 안그래도 마음이 울적했는데 토디엘이 와주어 너무 반가웠다.

“폐하, 로젠시아 드 파비앙드 인사드립니다.”

로젠시아가 평소와 다르게 더욱 더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자 타냐가 얼른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인사는 되었고 얼른 응접실로 가요.”


참으로 무력해지는 순간에 토디엘을 데리고 와준 로젠시아가 고마워 타냐는 지난날 그녀가 쓸데없는
비밀을 이야기한것도 용서해줄 태세였다.

“토디엘이 오지 않겠다는걸 겨우 데리고 왔어요.”

“아니 왜요?”

“모르겠어요, 동대륙이 더 좋은가 보죠 뭐 호호호.”

로젠시아의 웃음소리가 은근히 타냐의 심기를 건드렸지만 타냐는 토디엘을 염두에 두었기에 로젠시아의
말을 웃음으로 넘겼다.

“로젠시아가 너무 잘해주니까 그런가보죠.”

“호호, 그렇긴했죠, 제 친동생보다 더 챙겨주었거든요.”

생색을 내는 로젠시아가 얄미웠지만 토디엘을 볼 수 있게 데려왔으니 그것도 용서해주기로했다.

“토디엘,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누나는 네가 보고 싶어 죽는줄 알았잖아.”

“그러면서도 한번도 오지 않았잖아.”

토디엘의 퉁명스러운 말에 서운했지만 타냐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한 나라의 황제이다 보니


함부로 다른 나라에 방문할 수가 없었다는 말을 토디엘은 그저 변명으로 듣는 것 같아 타냐의 마음은 좋지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 어린아이니까 라고 제 스스로를 다독였다.

“비안느는 안보이네요? 많이 컸죠?”

로젠시아의 말에 타냐가 유모를 불렀다. 공주를 안고온 유모가 타냐의 허락을 받아 비안느를 로젠시아에게
건네주었다.

비안느를 품에 안은 로젠시아는 아이의 볼을 매만지며 속으로 미소지었다. 타냐를 죽이고나면 비안느를 제


딸로 키울 심산이기 때문이다.

샤마란족 핏줄이니 분명 치유의 능력이 있을테고 그 능력은 곧 자신의 것이니까.

“토디엘, 너도 한번 안아봐, 네 동생이잖아.”

타냐의 말에 별로 반응하지 않는 토디엘이었지만 로젠시아가 비안느를 건네주자 물리치지 못하고 받아


안았다.

3 개월동안 못봤더니 아이는 훌쩍 자라있었다.

자신을 보며 방긋방긋 웃는 비안느 때문에 토디엘도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지었다.

친동생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던 토디엘은 얼른 잡생각을 떨쳐내고는 아이를 유모에게 건네주더니
일어섰다.

“난 황궁 좀 둘러보고 올게요, 두 분 말씀 나누세요.”

타냐는 아쉬운 눈빛을 했지만 토디엘이 싫어할까봐 붙잡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토디엘이 나가고 나자
로젠시아는 카딜이 이곳에 없음을 재확인차 물었다.

“카딜 대장군님은 지금쯤 국경으로 열심히 달리고 있겠군요.”


“그럴거예요, 전쟁이 크게 번지지 않고 빨리 끝나야 할텐데 걱정이네요.”

타냐의 걱정하는 말에 로젠시아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제 저 도도한 타냐도 제 앞에서


살려달라며 무릎을 꿇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자꾸만 입술끝이 실룩여서 애를 먹고 있다.

카딜은 갈라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고 타냐는 제 손에 죽을 것이다. 원래 진짜 적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법이다.

카딜은 갈라스를 의형제처럼 여기고 있다. 그러니 카딜은 절대 갈라스를 경계하지 않을테고 그틈을 타서
갈라스는 간단하게 카딜을 죽일 것이다.

칼에 찔린 카딜은 타냐가 곁에 없기 때문에 다시 살아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 벌써 여러번


죽을고비를 타냐덕분에 넘긴 그였다.

이번이 그의 진짜 죽음이 될 것이다.

“왜 그렇게 혼자 웃어요?”

저도 모르게 입술끝이 자꾸만 말려 올라갔던 모양이었다. 타냐의 물음에 로젠시아는 얼른 잡아뗐다.

“제가요?”

“네, 방금 혼자 쿡쿡대며 웃었잖아요.”

“어머, 그랬나요? 그랬다면 아마 폐하와 함께 다과를 나누는 것이 즐거워서 그랬나봐요. 여기 오면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로젠시아의 이해가지 않는 대답에 타냐가 고개를 갸웃했다.

동대륙과 남대륙이 국경에서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갈라스 대공도 전쟁터로 달려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남편이 걱정도 되지 않는 건가?

자신은 전쟁터로 떠난 남편 걱정에 속이 타서 죽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요?”

“네, 어릴때부터 자랐던 곳이라 그런지 오면 내 집같고 편하고 좋아요, 그래서 아마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나봐요.”

“그렇군요, 하긴 여기서 자랐으니까 그렇겠군요, 그런데 갈라스 대공이 전쟁터로 향했는데 걱정은
안되나봐요?”

“예? 아, 아뇨, 걱정되죠, 안그래도 너무너무 걱정되서 미칠 것 같아요, 그래서 폐하와 이야기라도
나누면 마음이 안정될까 싶어서 온거거든요, 물론 토디엘도 보고싶어 할 것 같기도 해서요.”

방금전과 다르게 금방 표정을 싹 바꾸고는 갈라스를 걱정하는 로젠시아가 이상하게 의심이 가는 타냐였다.

설마 이상한 짓을 꾸미고 있는건 아니겠지?

54 화

로젠시아와 다과를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시녀장 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오늘 치료해주실 환자들이 당도했습니다.”


카딜이 자신이 없을때는 치료를 멈추라고 했지만 이미 예약한 사람들의 상태가 위독해서 강행하기로했던
타냐였다.

“그래? 그럼 치료실로 모셔요, 내가 바로 갈테니까요.”

“오늘도 치료하시는군요.”

로젠시아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타냐와 함께 일어났다.

“카딜이 못하게 했지만 이미 쾌차할 것을 기대하고 꿈에 부푼 사람들을 실망시킬수가 없어서요.”

“그러시겠죠, 저기 방해가 안된다면 저도 같이 가서 구경해도 될까요?”

로젠시아의 말에 타냐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있고 없고 그건 그녀의 치료에 어떤 방해도


되지 않으니까.

타냐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젠시아는 살짝 들뜬 눈빛으로 타냐의 뒤를 따랐다.

황궁의가 근무하는 클리닉건물에 도착한 타냐는 오늘 치료받을 일곱명을 순서대로 치유해주기 시작했다.

한명은 귀신병이라 불리는 폐결핵환자였고 나머지는 말기암환자들이었다.

이미 말기라서 피골이 상접한 환자들은 타냐의 두 손에서 나온 하얀빛을 쐬자 시커멓게 죽어들어갔던


얼굴에 화색이 돌었다.

타냐가 가진 에너지의 절반 이상을 소모한 그녀는 힘이 빠져 잠시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카딜이 곁에 있으며 그와 당장 키스만해도 3 분의 1 의 에너지가 돌아오지만 지금은 그가 곁에 없어서 힘을


거의 못 쓰는 것이다.

“괜찮으세요 폐하?”

로젠시아는 걱정해주는 척 하면서 타냐의 상태를 살폈다. 숨을 색색쉬는 타냐는 로젠시아의 눈에도
확연하게 기운이 없는 것이 보였다.

환자들은 좋아서 춤을 추며 클리닉을 나갔지만 타냐는 에너지 고갈로 소파에 몸을 길게 누울 수 밖에


없었다.

시녀장 실리아와 원기를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는 허브티를 가져왔다. 타냐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실리아가 건네주는 허브티를 마셨다.

“이제 좀 나아졌어요 폐하?”

로젠시아는 걱정이 가득찬 눈빛으로 말했다.

“아픈사람들을 치유하고 나면 이렇게 기운이 빠지시는줄 몰랐어요. 그래서 하루에 몇 명씩만


치료하셨던거로군요.”

로젠시아의 말에 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핏기가 사라진 하얀 얼굴이 되자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더 맑고


신비로워보였다. 같은 여자가 봐도 묘하게 끌리는 눈빛과 이목구비를 가진 그녀였다.

실리아가 가져다준 허브티를 다 마신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타냐는 다시 내전으로 향했다.

살짝 현기증이 느껴졌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두 눈을 부릅뜨고 내전까지 왔다.


“미안한데 내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서요.”

타냐의 말에 로젠시아가 얼른 허리를 접으며 인사했다.

“아, 네, 폐하, 그럼 전 이만 물러가있겠습니다.”

“고마워요. 나중에 저녁식사는 같이 해요.”

“황송합니다 폐하. 그럼 푹 쉬십시오.”

로젠시아가 나가고 나자 타냐는 시녀들에게 부탁하여 자신을 침실로 데려다달라고 했다.

“카딜대장군님이 안계시니까 폐하께서 영 기운이 없으신 것 같지않아?”

한 시녀가 다른 시녀에게 소곤거리자 실리아가 매서운 눈초리로 말했다.

“그 입 찢어지고 싶어?”

흡!

놀란 시녀둘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타냐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카딜 대장군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남대륙 군사들이 줄행랑을 쳤다는게 정말 신기할 따름입니다.”

카딜은 갈라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동대륙과 남대륙이 국경제서 접전을 벌인다며 도움을 청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남대륙군은 없었다.

국경을 지키는 동대륙 군사들만 나와서 카딜을 맞이했다.

갈라스의 말에 어딘지 모르게 뿌듯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자신이 붉은 기사단을 이끌고 온다는
소리만으로 줄행랑을 쳤다니.

자신이 남대륙 국왕이었다면 한심해서 혀를 찰 일이었다. 어쨌든 싸울 일이 없어졌다고 하니 카딜은


하루만 머물면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전쟁을 치룰 생각으로 입고왔던 갑옷을 벗어서 한쪽에 세워놓은 카딜은 갈라스가 준비한 저녁상을 받았다.

“이런 병영에서 이렇게 진수성찬을 차릴 수 있다니, 괜히 나 때문에 군사들 힘들게 족친건 아니겠죠?”

카딜의 말에 갈라스는 아니라며 어서 드시라고 했다.

“먼저 이곳 국경부근에서만 자라는 머루로 담근 와인한잔 어떻습니까?”

“머루와인이라….좋지.”

전쟁은 없고 마치 여행온 기분에 카딜의 긴장감은 많이 늦추어졌다. 그는 갈라스가 따라주는 와인을


받았다. 갈라스도 제 와인잔을 채워 카딜을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

“건배!”
두 개의 잔이 부딪히고 두 사람은 와인을 쭉 들이켰다.

갈라스는 와인을 입안에 머금고 마시지는 않으면서 카딜이 술을 목너머로 넘기는 것을 유심히 살폈다.

“카하, 좋군요.”

술맛이 좋다고 말한 카딜은 갈라스가 갑자기 술을 뱉어 버리자 두 눈을 크게 떴다. 갈라스는 비열한


눈빛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지었다.

“지금 뭐하는….커읍!”

믿었던 사람에게 발등을 찍한다는 말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갈라스 대공이 자신을 독살할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상상도 하지 않았었다.

카딜은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도 부활의 검을 빼들었다. 몸에 힘이 빠져 검끝으로 바닥을 찍어서 제 몸을


지탱하게 했다.

“갈라스…하아…하아…은혜를 원수로…하아…크윽!”

카딜의 입에서 또한번 한뭉텅이의 핏덩어리가 쏟아졌다. 갈라스는 카딜이 아직도 죽지 않고 버티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바…후..울.”

바훌을 불러 보며 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카딜은 타냐와 비안느를 떠올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내 아내와 내 아이도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절대 죽을 수 없다며 정신을 모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힘이 솟아 났다.

카딜은 검끝으로 땅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 모습에 갈라스는 경악하는 눈으로 검을 빼들었다.

“감히 이런 짓을 벌이다니…하아, 하아…간이 배밖으로 나온 모양이군.”

카딜은 입가로 흘러 내리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내고는 부활의 검을 바로 잡았다.

한모금만 마셔도 즉사할거라는 극약을 마시고도 저렇게 긴 시간을 버티다니.

갈라스는 눈동자마저 핏줄이 터져 눈알이 빨갛게 변한 카딜을 보면서 두 손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신급의 검술실력을 가졌다고 해도 독에 중독되었으니 힘을 쓸 수 없을 것이다.

갈라스는 칼을 높이 쳐들고 비열한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죽기보다 괴로우시죠? 제가 끝내 드리겠습니다. 제 마지막 자비입니다.”

자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카딜은 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미 내상을 입어 장내출혈이 심했지만 그는 단전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은 이미 온몸으로 퍼져나갔고 그의 얼굴조차 시퍼렇게 변하기 시작했다.

‘타냐, 비안느….하아…너무 보고싶다. 죽기전에 딱 한번만 얼굴을 볼수만 있다면….’


마음속으로 생각한 카딜은 제게 달려드는 갈라스를 보고 검을 세웠다.

카딜에게 달려든 갈라스는 그의 복부에 검을 찔러 넣는 것은 성공했지만 카딜이 마지막 힘을 다해 휘두는


검날에 옆구리를 벴다.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옆구리를 내려다본 갈라스는 작게 신음하며 말했다.

“역시 카딜 하에르 대장군이십니다. 죽여야 하지만 존경합니다.”

옆구리를 다친 갈라스는 쉽사리 다음 공격을 하지 못했다. 카딜은 다시 검을 세워 잡았다. 갈라스의 검에


찔린 복부에서 피가 수돗물처럼 흘러 내려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지만 두 눈을 부릅뜬채 그대로
서있었다.

“로젠시아냐?”

“!”

“하아, 네게…하아… 북대륙을 주기라도 한다더냐?”

“죽어가면서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이제 그만 끝내시죠.”

갈라스가 다시 검을 세워 들었다.

카딜은 두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타냐와 비안느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점점 두 다리에서 힘이 빠져 더 이상 서있기 힘들 때 갈라스가 제게 짓쳐들었다. 카딜은 마지막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나 혼자는 죽을 수 없지.

“하앗!”

갈라스가 카딜의 심장을 노리고 달려들 때 카딜이 털썩 두 무릎을 꿇었다.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자
갈라스의 검날이 갈곳을 잃었다가 다시 아래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그 사이 카딜은 마지막 남은 힘으로
제게 달려드는 카딜의 복부를 그었다. 같은 찰라에 갈라스의 칼이 카딜의 심장을 찔렀다.

크헉!

크악!

갈라스의 복부는 가로로 찢어져서 내장이 다 보일 정도였다.

갈라스 역시 힘이 빠져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곧 숨이 끊어질 카딜이었지만 온힘을 다해


마지막 한마디를 했다.

“너와 로젠시아를..하아…하아… 절대 용서하지 않을…거야… 지옥…불도…아까운…것…들…하아”

카딜이 그대로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카딜이 숨을 거두었다 생각한 갈라스는 살기위해 자신의 옷을 찢어 배를 감쌌다.

하지만 피는 계속 흘러내려 현기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독약하나도 쉽게 죽일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자신의 오판이었다. 그 오판 때문에 갈라스도 곧 죽게 생겼다.


밖에 있는 부하들을 부르려해도 부를 수가 없다. 바훌과 카딜의 붉은 기사단이 있기 때문이다.

계획은 독약으로 카딜을 제거하고 그가 쓰러지면 아무일도 없다는 듯 나와 카딜은 피곤해서 이미 잠들었따
말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리고 그길로 황궁으로 내달려 타냐를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도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

갈라스는 병영내실의 뒷문으로 엉금엉금 기었다. 뒤쪽으로만 나가면 보초를 서고 있는 자신의 호위무사가
기다리고 있다.

그 호위무사와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살 가능성은 100%다. 이대로 말을 타고 북대륙황궁으로


달려가 타냐에게 싸우다 다쳤다 말하고 치유마법을 써달라 하면 금방 나을 것이다.

그다음 타냐는 죽이면된다. 카딜의 안부를 묻는다면 무사하니 아무걱정 말라고 거짓말을 하면 쉽게
넘어가줄 것이다. 카딜도 타냐도 겪어본 바로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아주 쉬운일이다. 특히 저를 아무 의심없이 믿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갈라스가 그렇게 뒷문으로 기어나가는 사이 병영내실의 문이 열렸다. 시커먼 망토를 걸치고 후드모자를 쓴
사람이 들어오더니 쓰러진 카딜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55 화

“타냐야, 일어나거라.”

“……………”

“타냐야, 얼른 일어나거라.”

“으음….누구….시죠?”

타냐는 잠에서 깨어나 제 두 눈앞에 있는 여자를 보며 물었다. 여자는 묘하게 자신과 닮아 있었다.

아직 잠에서 덜깬 눈을 비비며 타냐가 다시 한번 눈동자의 초점을 모아 저를 깨운 여자를 쳐다보았다.

“엄….마아?”

아주 어릴적 헤어졌기에 아버지의 얼굴은 기억에도 없고 엄마는 아련하게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래, 나야, 타냐야. 역시 우리딸 엄마를 알아보는구나.”

뭔지 모를 뭉클함에 타냐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전쟁노예로 끌려간 부모님이 친부모님인줄


알고 있었던 탓에 조금 낯설긴 했지만 천륜이라서인지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엄마….흐흑.”

뒤늦게 타냐는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그녀의 델라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타냐를 안아주었다.

마치 생시인 듯 아기때 맡았던 엄마의 냄새에 타냐의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타냐, 이러고 있을때가 아냐. 어서 카딜에게 가거라, 카딜의 목숨이 위태롭다.”

“네? 카딜의 목숨이요?”

“그래, 지금 출발해야 시간에 맞출 수 있다 어서 일어나거라, 아무것도 하지말고 곧바로 말에 올라라,


그리고 전속력으로 달려, 말이 널 목적지로 안내해줄거야 어서 타냐야.”
델라는 하얀빛속으로 사라지면서도 어서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타냐는 엄마를 외쳐 부르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아까 사람들을 치유해주고 에너지가 떨어져서 점심시간에 낮잠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타냐는 델라의
말을 떠올리며 입고있던 옷에 검은 망토만 걸쳤다.

그리고 말에 올랐다. 무조건 발을 굴렸지만 말은 마치 목적지를 알고 있는 듯 힘차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편 로젠시아는 갈라스에게 전갈을 받았다. 저녁시간에 그에게 독극물을 탄 와인을 먹이고 죽일거라는
계획이 적힌 편지였다. 그 시간에 맞추어 로젠시아도 타냐를 죽이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로젠시아는 편지를 불에 태우며 사악하게 미소지었다. 이제 북대륙의 여황제가 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저녁시간에 토디엘이 누군가 보낸 킬러에게 칼을 맞았다 말하고 타냐에게 치료를 부탁할 것이다.
아니 타냐는 치료를 부탁하기전에 앞장서서 토디엘을 치유하려 할 것이다.

안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로 힘이 없는 그녀는 죽이기 쉽다.

약간의 독극물을 마시게 한 후 에너지가 고갈되어 죽었다 말하면 북대륙을 다스릴 다음 황제는
로젠시아자신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4 대 귀족들도 명분을 어찌하지 못하고 자신을 여황제로 추대할 것이다. 같은 시간


공교롭게도 동대륙의 전쟁에 참가한 카딜도 적군의 칼에 맞아 죽었다는 부고가 들려올터이니 5 대 부서의
장들도 반박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단 하루도 황제의 자리를 빈자리로 남겨둘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낮잠을 자던 타냐가 황궁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로젠시아는 물론 궁안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

서너시간을 내달려 도착한 곳은 동대륙과 남대륙이 접전을 벌이는 국경이었다. 말은 카딜이 쓰러진
병영앞에서 멈추었고 타냐는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는 병영을 이상하게 여기며 안으로 들어섰다.

까만 망토에 달린 후드를 쓰고 있던 타냐는 바닥에 쓰러진 카딜을 보고는 기함하며 그에게 다가왔다.

“카딜! 카딜!”

그의 이름을 부르자 카딜이 얕은 신음소리를 냈다. 타냐는 남아 있는 기를 모두 끌어 모아 그의 상처를


치료했다.

오늘 일곱명의 중환자를 치료하고 남은 에너지가 별로 없었지만 카딜이 곁에 있어서인지 그녀의


치유에너지는 병영지붕을 뚫고 하늘 높이 솟아 오를 정도였다.

카딜이 있는 병영안에서 하얀 빛이 뚫고 나와 하늘 높이 하얀 빛기둥을 만들어내자 붉은 기사단들이


카딜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달려왔다.

붉은 기사단과 바훌은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에 긴장감을 풀어 놓았다. 그리고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며 감사의 뜻으로 갈라스가 차려준 만찬을 즐기고 있다가 놀라서 달려왔던 것이다.

“하아, 타냐,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카딜은 온몸이 피투성이이지만 상처는 모두 아물었다. 하지만 타냐의 상태가 안좋아 일단 그녀에게
키스부터 했다.
의식을 잃어가던 타냐는 카딜의 키스로 에너지를 얻고 혼곤한 상태로 잠이 들었다. 그녀가 고른 숨소리를
내는 것을 확인한 카딜은 타냐를 안아 침상에 눕혔다.

이렇게 또 네 도움으로 살아나는구나. 카딜은 타냐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골라주면서 속으로 고마워했다.

“카딜님!”

바훌이 다급하게 카딜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들어왔다.

“카딜님!”

온몸이 피투성이인 카딜을 본 바훌은 검부터 빼들고 그를 호위하는 자세를 취했다.

“다치신겁니까? 적군이 왔었습니까? 우린 아무소리도 못들었는데요!”

바훌이 사방을 경계하며 카딜이 어디 다친데 있나 없나 물었다.

“죽을뻔했지만 이젠 괜찮아, 타냐가 왔으니까.”

카딜의 말에 바훌은 침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타냐가 곤히 잠든 모습을 본 바훌이 물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갈라스가 날 배신했다.”

“예?”

“갈라스 대공이 날 죽이기 위해 작전을 짰단 말이다, 그가 내 술잔에 독극물을 탔어, 난 그걸 모르고


안심하고 마셨고, 독극물을 마시고도 내가 바로 죽지 않으니 칼로 날 베었다. 타냐가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아마 지금쯤 황천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이런, 개-”

욕을 삼킨 바훌이 물었다.

“갈라스는요?”

“놈도 많이 다쳤어,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어서 사방을 뒤져라, 그리고 항복하는 동대륙 군사는
포로로 잡아 두고 저항하는 놈들은 전부 죽인다, 당장 시행해!”

“예, 대장군!”

힘찬 대답을 한 바훌이 병영 밖으로 나갔다. 카딜의 지시를 붉은 기사단에게 전달하자 붉은 기사단을


이끌던 다섯명의 분대장이 콧김을 뿜어대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바훌은 처음부터 동대륙과의 자매관계를 탐탁치 않게 여겼었다. 하지만 윗선에서 하는 일이라 그저 묵묵히
지시에 따르만 했었다. 로젠시아와 갈라스가 결혼할때에도 바훌은 뭔지 모르게 불안했었다. 그런데 결국
일이 터진 것이다.

카딜은 모든 병사들이 밖으로 나간 후 타냐의 옷을 벗겼다. 그녀에게 에너지를 빠르게 채워주는 것은


섹스뿐이었기 때문이다.

급하게 옷을 벗긴 카딜은 잠든 타냐에게 키스하며 애액이 나오지 않아 빠듯한 그녀의 안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타액을 충분히 묻혔지만 그래도 잘 들어가지 않아 이리저리 페니스를 비벼대는데 타냐가
눈을 떴다.

“타냐, 정신이 들어?”

이미 몽롱해진 눈빛의 타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급하게 카딜에게 키스해왔다. 페니스를 절반만 끼운채
부드러운 키스가 농밀하게 변해갈 때 타냐의 음부에서 애액이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몇 번 추삽질을 하자
찔걱이는 소리와 함께 카딜의 페니스를 타냐의 몸 안으로 완전히 밀려 들어왔다.

피로 얼룩졌던 카딜의 몸은 이제 땀으로 얼룩졌다.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었던 단 한번의 섹스로는 부족했다. 한번의 정사로 절반정도 에너지가 차자 타냐가
카딜을 밀었다. 카딜이 몸을 눕히자 타냐가 그의 위로 올라탔다.

여전히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카딜의 페니스 기둥을 잡은 타냐가 제 구멍에 귀두를 끼우고 아래로
체중을 내렸다.

“하아, 타냐….비안느는?”

“유모가 잘 보살피고 있어요…하아…걱정 말아요…하아…”

그녀의 말에 안심한 카딜이 엉덩이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타냐는 카딜과 입을 맞춘채 온몸을 들썩이며
그의 페니스를 오롯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세 번의 정사가 끝나고 난 후 카딜의 앞에는 상처입은 갈라스와 그의 호위무사들이 끌려 왔다.

타냐는 혈색이 좋아진 상태로 카딜의 곁에 앉아있었다.

“살려 주십시오! 폐하!”

갈라스는 병영의 구석진 방에서 치료를 하고 누워있다가 바훌에게 들켜서 잡혀온 것이다.

“갈라스, 방금 나더러 살려달라고 했어?”

타냐는 갈라스에게 호칭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엄마가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카딜은 죽었을 것이다.

갈라스는 그 시간에 타냐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알길이 없어 당황스러웠다. 분명 로젠시아에게 타냐를
붙들고 있으라고 했는데 말이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뻔히 알기에 갈라스는 머리를 땅바닥에 닿도록 조아리고 애원했다.

“저는 절대 이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로젠시아가 다 시켰습니다!”

인간이 죽음을 앞에 두면 본심이 나온다더니 갈라스의 로젠시아에 대한 마음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저혼자 살고자 아내인 로젠시아를 팔아 넘기는 갈라스를 내려다 보던 카딜이 입을 열었다.

“사실이냐?”

카딜이 혹하자 갈라스가 반가워하며 고개를 들었다.

“사실입니다. 이 모든 계략은 로젠시아가 꾸민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은 북대륙의 여황제가 되고 전


여황제의 남편이 되어 같이 북대륙을 다스리자며 저를 꼬였습니다! 이건 진실입니다 못미더우시면
로젠시아를 불러서 고문해보십시오 폐하!”
타냐는 너무 한심하고 실망스러워 할 말도 없었다. 차라리 모두 자신이 한 짓이라며 로젠시아만은
살려달라고 했다면 기분이 이렇게 더럽진 않을 터였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더니, 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좋아, 그럼 황궁으로 가서 누가 주동자인지 한번 가려보자고.”

타냐의 말에 카딜도 그녀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게 제살 뜯어먹기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타냐는 각 부서의 장을 불러놓고 이 사실을 공론화 해서 국법으로 다스릴 생각이었다. 그래야 갈라스와
로젠시아를 공개처형하고 동대륙과는 전쟁을 선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안그래도 각 부서의 장을 맡은 사람들 중에는 동대륙을 봐주는 것에 불만인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핑계가 없어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던 차에 참으로 좋은 꼬투리를 갈라스와 로젠시아가 만들어준
것이다.

이젠 여황제 타냐가 갈라스와 로젠시아를 사사로이 봐주고 있다는 말도 쏙 들어갈 것이다.

***

이튿날 아침.

소식을 들은 5 대부서의 장관급들이 황궁으로 모여 들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거야? 왜 이리 궁안이 어수선하지?”

로젠시아는 갈라스의 계략이 성공했다는 편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래서 이 어수선함이
카딜의 죽음에 의한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싶었다.

“글쎄요,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시녀장의 말에 로젠시아가 화를 냈다.

“모르면 가서 알아가지고 와야 할 것 아냐? 월급은 공으로 받아?”

놀란 시녀장이 급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다. 로젠시아는 어두워진 밖을 내다보며


짜증스럽게 기지개를 켰다.

저녁먹고 잠시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던 그녀였다.

시녀장이 아무일도 아니라고 하면 타냐의 침소로 가볼 생각에 그녀는 옷을 갈아 입었다.

오늘은 그녀가 북대륙의 여황제가 되는 첫날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가져온 드레스 중 가장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 입었다.

시중을 드는 시녀들에게 몇 번이나 물어가며 머리에 꽂을 핀과 귀걸이, 목걸이까지 고른 그녀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제 모습을 확인했다.

화려하지만 우아해 보이는 모습을 원했지만 그저 화려하기만 해서 짜증이 나려던 순간 시녀장이 황급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로젠시아님! 큰일 났습니다!”
“왜 이리 호들갑이니? 경망스럽게, 쯧.”

로젠시아는 혀를 차며 시녀장에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56 화

“로젠시아님 그게 아니라….지금…..”

“뭐야, 왜 그렇게 말을 더듬어? 얼른 보고 안할거야?”

로젠시아는 갈라스에게서 연락이 왔다 확신하고 시녀장을 재촉했다. 그러나 시녀장이 말을 하기도 전에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나면서 붉은 기사단이 들이 닥쳤다.

붉은 기사단을 본 로젠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지금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

로젠시아가 소리를 질렀지만 제 1 기사단 단장인 테일러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당장 로젠시아를 묶어라.”

“예!”

한 음성으로 대답한 붉은 기사단 두 명이 바둥대는 로젠시아의 몸을 밧줄로 묶었다. 방금 차려입은 그녀의


화려한 드레스가 몸통을 가로지른 황색 밧줄과 컬러가 묘하게 매칭되었다.

“야! 조심하지 못해? 이게 얼마짜린줄 알고! 그리고 너희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내가 여황제님과
언니 동생하는 사이라는 걸 잊었어!”

로젠시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기사단들은 들은척도 않고 그녀를 이제 곧 재판이 열릴 황궁내전의


뜰로 끌고왔다.

그곳에는 이미 갈라스가 끌려와있었다.

갈라스를 본 로젠시아는 그제야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개단 높은 곳에는 5 개 부서의 수장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여황제와 황제의 남편인 카딜의 자리만
공석인채였다.

죄인들을 고문할 때 사용하는 나무의자에 묶인 갈라스는 이미 상처가 깊어 생과사의 갈림길에서 겨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피칠갑된 갈라스를 본 로젠시아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해야 겠다며 그녀는
갈라스를 발로 툭툭 찼다.

“어떻게된거야.”

목숨이 간당간당하는 상황이라 존대고 뭐고 없었다. 갈라스는 로젠시아가 제 발을 툭툭차는 바람에 힘겹게
눈을 떴다. 숨이 넘어가게 생긴 남편을 보고 한다는 첫 소리가 발로 툭툭 차며 어떻게 되었냐니?

그동안 그녀와 부부로 살아온 세월이 꿈인가 여겨진다.

“어떻게 된거냐니까? 우리 둘이 입을 맞춰야 살수 있어, 얼른 상황 설명좀 해달라고.”

“하아…모…목…”
“목이라니? 목이 뭐 어쨌다는 거야?”

로젠시아는 자신의 목이 달아난다는 소린줄 알고 허옇게 질려서는 갈라스를 닦달했다.

“목, 목이 말라…무, 물 좀….”

물달라는 말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로젠시아는 들은척도 하지 않고 궁금한 말만 해댔다. 그 사이


카딜과 타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의 남편이자 아클란 대제국의 황궁 호위대장인 카딜 하에르를 살해하려 했다가 잡혔기에 역모와
진배없는 재판이라 타냐와 카딜은 정복을 차려 입고 있었다.

맹독에 중독되어서도 바로 죽지 않고 검술을 시전하던 카딜을 떠올리며 갈라스는 또 한번 후회했다.

로젠시아의 말을 들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여황제의 자리에 앉으려던 타냐가 갈라스에게 다가왔다.

이대로 죽어버리면 안될 것을 알기에 그녀는 손을 들어 갈라스의 상처를 조금만 아물게 했다.

그러자 이제 곧 죽을 것 같았던 갈라스에게 생기가 살짝 올라왔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흥, 좋아하지 말아요, 내가 필요해서 한거니까.”

타냐의 싸늘한 눈빛과 말투에 갈라스는 또 한번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제게 늘 친절하게 대해줬던 타냐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카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검을 빼들 기세로 갈라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카딜을 쳐다보자 그의 곁에 타냐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상냥하고 착하고 예쁘고
치유능력도 있고. 그에 비해서 자신의 아내 로젠시아는 정말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다. 아니 가진게
많긴했다.

욕심, 시기심, 질투심, 폐악, 야망, 등등. 못된것만 다 가지고 있다.

그런 여잔줄 모르고 사랑에 빠졌던 제 발등을 찍고 싶다. 그나마 아클란의 여황제 타냐와 언니 동생하고
지낸다는 것 하나가 이점이긴 했었는데 그것도 이젠 끝이다.

갈라스가 그렇게 후회에 후회를 할 때 재판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났다.

재판의 의장을 맡은 데자르 백작이 재판의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 카딜 하에르 대장군님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갈라스 달타뉴와 로젠시아 드 파비앙드의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들 여황제폐하에게 예를 갗추시오!”

데자르백작의 말에 모두들 타냐에게 예를 표하자 타냐가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로 인사를 받았다. 카딜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아내이지만 지금은 황제로서 예를 표한 것이다.

“오늘 이 재판은 증인도 증거도 필요 없는 재판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카딜 하에르 대장군과


황제폐하가 바로 증인이고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견을 재기하시는 분이 있다면 손을 들어
주시오.”

데자르 백작은 딸 메리엔을 살려준 타냐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나머지 4 개부서의 수장들도
한번씩은 타냐의 치유능력으로 가족의 일원 중 한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앞으로 몇 번이나 타냐의 도움을 받을지 알수 없기에 그들은 타냐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의 있습니다!”

“!”

갈라스의 목소리에 모두들 그를 쳐다 보았다. 갈라스는 타냐의 도움으로 생기를 찾아 목청도 제법 높았다.

“전 로젠시아가 시키는대로 했을뿐입니다!”

“뭐, 뭐라고?”

옆에 앉은 로젠시아는 갈라스의 말에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아니라고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닙니다, 사실은 갈라스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갈라스가 어느날


제게 그랬습니다. 저야말로 북대륙의 왕족이라면서 여황제의 자리에 올라야할 사람이라구요!”

“뭐?”

갈라스는 어이를 상실한 눈빛으로 로젠시아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네가 먼저 그랬잖아! 카딜만 제거해주면 타냐는 네가 알아서 죽이겠다고!”

이 모든 상황을 저 멀리서 지켜보던 토디엘은 기함했다. 타냐보다 더 따랐던 로젠시아의 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시끄럽다! 여기가 어느안전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것이냐!”

데자르가 탁자를 탕 치며 소리치자 갈라스와 로젠시아가 흠칫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그때 토디엘을 발견한 로젠시아가 그를 애처로운 음성으로 불렀다.

“토디엘! 이건 모략이야!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겠어! 동대륙은 늘 우리 북대륙에게 시달려왔어,


그래서 갈라스가 날 이용해서 북대륙을 제 손에 넣겠다는 야망을 품은거야! 토디엘! 너는 알잖아 그지!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 기억해봐!”

로젠시아가 악을 쓰며 토디엘에게 소리치자 열다섯살인 토디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했다.

그때 바훌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데자르가 타냐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타냐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판의 의장으로서 바훌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바훌은 한발 앞으로 나와서 토디엘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토디엘님에게 저기 있는 로젠시아의 사촌오빠 알테베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한마디 하러 나왔습니다!”

바훌의 말에 토디엘이 그의 말을 자세하게 듣고 싶어 몇 발 앞으로 나왔다. 안그래도 로젠시아의 본모습이


어떤 것인가 헷갈려 괴로워하고 있었다.

바훌은 타냐가 노예로 끌려간 남동생 토디엘을 찾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부터 말했다.


그리고 카딜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가며 사람을 구해서 토디엘을 찾았다는 것도 말했다.

“아냐 토디엘! 저건 다 거짓말이야! 믿지마!”

로젠시아가 큰일 났다 싶었는지 사생결단으로 울부짖었다. 그러자 토디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로젠시아와 타냐의 눈치만 봤다.

열다섯 어린나이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 충격적이라 바훌의 말도 제대로 믿지 못하고 그렇다고
로젠시아의 말도 이제는 믿을수가 없어 힘들어 할 때 바훌이 결정적인 말을 했다.

“토디엘님, 브리텔이라는 사람을 알죠?”

“네, 알아요.”

“그 사람을 어떻게 알죠?”

“그 사람이 사냥꾼의 노예로 팔려간 저를 구해줬어요, 그리고 누나한테 데려다 준다면서 절 데리고 가던
중에 비적떼들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알테베르 황제가 보낸 군사들이 저를 구해주었구요.”

“그건 토디엘님이 잘못 알고 계신겁니다. 비적떼는 다름아닌 알테베르 황제가 보낸 군사들이었고 브리텔도


그들이 죽였습니다. 황제 알테베르가 토디엘님을 인질로 잡고 누나를 협박했던 것을 기억하신다면 제 말이
맞다는 것을 알겁니다.”

바훌의 말에 토디엘은 그제야 자신이 정말 바보같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친 동생도 아닌데 저를 구하려고 목숨을 건 타냐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


미안해 눈물이 났다.

이 모든 이야기를 타냐나 카딜이 해줄 수도 있지만 하지 않은 이유는 로젠시아에게 완전히 홀린 듯


빠져있는 토디엘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바훌이 말을 했기 때문에 토디엘은 그 모든
말들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냐! 토디엘!”

로젠시아는 토디엘만이 자신의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소리쳤다.

“시끄러운데 어떻게 좀 해보시죠.”

카딜이 한마디를 하자 데자르가 군사들에게 지시해서 로젠시아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로젠시아는 재갈이
물린 상태에서도 읍읍대며 토디엘을 불렀지만 토디엘은 타냐의 곁으로 갔다.

“누나….미안해.”

“아냐, 넌 아직 어리잖아, 어른들의 일을 판단하기에는 역부족이야. 이제 여기 있지 말고 들어가서


비안느하고 놀고 있어, 금방 끝날거야.”

타냐가 토디엘의 손을 잡고 그의 뺨을 만져주자 토디엘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누나.”

“고맙긴, 얼른 들어가.”

토디엘은 저를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카딜에게도 미안하다 말하고 안으로 들어 갔다.

데자르백작은 타냐가 결재를 마치자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갈라스 달탸뉴, 그리고 로젠시아 드 파비앙드는 누구의 죄가 더 크다 적다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죄는 크다. 아클란대제국의 호위단장인 카딜 하에르 대장군을 죽이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사형감인데 북대륙을 차지하려는 마도 안되는 야망을 꿈꾸었다. 이는 절대 자비를 베풀 수 없는 중죄 중에
중죄이다. 그리하여 황제폐하와 여기 계신 5 개부서의 수장들이 내린 판결문은 아래와 같다.”

데자르는 심호흡을 한번 한 후 판결문을 읽었다.

“갈라스 달타뉴, 로젠시아 드 파비앙드의 판결은 단두대이다. 사형은 이틀 후 오전 10 시, 황궁의 동문


밖 아테르 광장이며 온 국민들이 보는 가운데 시행될 것이다.”

탕탕탕!

나무 망치소리가 황궁 뜰에 울려 퍼졌지만 아무도 재판 결과에 대해서 반박하는 이가 없었다. 다만


로젠시아의 울부짖는 소리만 사방에 울려 퍼졌다. 갈라스는 이미 포기했는지 그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그때 카딜이 손을 들었다.

데자르 백작은 그에게 마음대로 발언하게 자리까지 내주었다.

“나 카딜 하에르는 여기계신 황제폐하에게 동대륙을 멸할 것을 명받았습니다, 오늘부터 북대륙은 동대륙과


전쟁상태에 돌입한다는 것을 공표합니다!”

카딜의 말에 재판장을 호위하던 모든 군사들이 창과 검을 들어 올리며 함성을 내질렀고 갈라스는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57 화

“살려주십시오 대장군!”

힘이 빠져 겨우 갈라진 목소리로 애원하는 목소리에 카딜은 갈라스를 노려 보며 물었다.

“살려달라니? 방금 너의 죄에 대한 심판이 내려졌는데 못 들은 것이냐?”

카딜의 말에 갈라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한번 마지막 에너지를 모아 애원했다.

“전 죽어도 좋습니다. 죽을 짓을 했다는 것 압니다, 하지만 저희 동대륙만은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


부친과 다른 제국의 대공들은 제가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갈라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카딜이었다.

이렇게 큰 일을 벌이면서 고블린의 대공인 부친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이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을 단 1%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어이가 없다 정말.

카딜은 짜증스럽게 이마를 손끝으로 툭툭 치고는 말했다.

“그건 니 사정이고.”

카딜의 느른한 눈빛에 갈라스는 소름이 돋아오름을 느꼈다. 길게 대답하지 않는 그의 말투에서 이미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무고한 동대륙 제국민들을 죽게 할 수는 없다.

“제발 이렇게 사정하겠습니다. 제 몸을 불사르시고 사지육신을 찢어 발기시어 까마귀떼에게 던져주셔도


좋습니다만 제발 동대륙만은 살려주십시오!”

평소 같았으면 그의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 감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검은 머리짐승은 거두는게 아니라는 말을 몸소 체험했다.

그러니 두 번은 없다.

“네 몸을 불사르고 찢어진 사지육신을 까마귀떼에 던져준다고 해도 내 배신감은 상쇄되지 않을 것이다.


너도 내 입장이 한번 되어보면 이해하겠지, 하지만 그럴 기회는 애초에 없으니 희망은 접어라.”

“대장군! 제발 우리 동대륙만은 살려주십시오!”

“끌고가라!”

카딜이 명령을 내리자 갈라스와 로젠시아는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내일 아침 10 시면 저들의 머리는


몸에서 떨어져나와 성밖 높은 탑에 매달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로젠시아와 갈라스의 머리는 또 다른 곳에 유용하게 쓰일 터였다.

***

그날 저녁.

둥그런 원탁에 다섯 개 부서의 수장들과 타냐, 그리고 카딜이 둘러앉아 동대륙과의 전쟁에 관한 회의가
열렸다.

“동대륙과의 전쟁에는 저만 빼고 만장일치로 찬성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되면 전쟁을 해야겠지요 하지만


제 이야기를 좀 들어 주십시오.”

타냐의 말에 카딜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빛으로 왜? 냐고 묻자 타냐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자 데자르 백작이 말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폐하.”

그의 말에 다른 부서의 수장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타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동대륙을 우리의 속국으로 만드는 겁니다. 대신 무혈입성을 하자는 거죠.”

무혈입성이라 함은 피를 보지 않고 다른 나라를 속국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타냐의 말에 모두들 서로 소곤거리며 의견을 나눌 때 카딜이 타냐에게 말했다.

“괘씸해서 그렇게 못하겠어, 지난번에도 평화롭게 넘어가줬더니 겁을 상실하고 이런 짓을 벌였잖아.”

카딜이 타냐의 귓가에 속삭이자 타냐도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알아요, 당신만큼 나도 화가 나요, 하지만 무고한 백성들을 다 죽일 수는 없어요. 동대륙을


속국으로 만들면 저들도 나의 백성이 되는거잖아요.”

“아니, 속국이 되어도 저들은 타냐의 백성이 될 수 없어.”

“네?”

타냐는 카딜의 화난 얼굴을 보며 속으로 걱정했다.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본다. 물론 타냐도


갈라스와 로젠시아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제 손으로 저들의 목을 베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황제라는
자리에 있어서인지 몰라도 생각이 깊어졌다.

후에 이 전쟁이 역사에 어찌 기록될지도 걱정하고 있는 그녀였다.

카딜 하에르가 이끄는 붉은 기사단이 말처럼 피의 군단으로 기억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여태 명예로운


기사로 살아오며 목숨을 내걸고 적들과 맞서서 북대륙을 지켜왔는데 한순간의 감정으로 그 커리어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왜 제 백성이 될 수 없어요?”

타냐가 카딜의 화를 다스리려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를 살살 만지며 물었다.

“이러면 반칙이야 타냐.”

“어쩔 수 없어요, 당신 지금 너무 흥분해 있어요. 조금 마음을 진정할 필요가 있어요.”

“그게 아니라 더 흥분되서 문제라는거지”

카딜이 타냐의 손을 잡아서 제 위치에 놓아주고는 말했다.

“저들이 왜 당신의 백성이 될 수 없느냐하면 저들은 분명 틈만 나면 우리 북대륙을 공격하려 모의를


꾸밀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백성으로 대하면 절대 안돼, 그러자 또 뒤통수 제대로 맞는 날이 올지도
몰라.”

그의 말이 절대 틀리지 않다 생각한 타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대로 전쟁을 치르게 할 수는


없었다. 남편이 카딜이 다칠까봐도 걱정이되어 어떻게든 평화적으로 해결하자 싶었다.

“이제 당신 전쟁터에 내보내기 싫어서 그래요, 내 마음 모르겠어요?”

타냐가 다시 손을 뻗어 카딜의 허리를 만졌다. 그러자 카딜은 터져나오는 신음을 겨우 삼키고 말했다.

“그럼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방법은 있어요, 그게 먹혀들지 모르겠지만.”

타냐가 카딜의 옷속으로 손을 슬며시 집어 넣자 카딜이 끄응 않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다. 5 개 부서의 수장들이 둘이서 속삭이는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들의
눈초리를 느낀 카딜과 타냐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흠흠, 카딜 하에르 대장군님과 의논을 좀 했습니다.”

타냐가 자세를 고쳐잡고 말하자 데자르 백작이 손을 들었다. 타냐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자르 백작이
말했다.

“저희들도 의논을 해본 결과 폐하의 의견이 맞다는 것에 결론이 모아졌습니다. 무혈입성을 할수만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피를 보는 것만이 전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혈입성은 사실 전쟁중에 제일 멋진
승리라 말할 수 있습니다, 혹시 복안이라도 가지고 계신지요 폐하.”

데자르 백작의 물음에 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갈라스와 로젠시아의 머리가 있습니다. 그 머리를 들고 동대륙의 최강국이 고블린
제국의 대공을 찾아가서 선전포고를 하는겁니다.”
“어떻게요?”

발키리 백작의 물음에 모두들 타냐를 쳐다 보았다.

***

다음날 아침 10 시 아테르 광장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단두대는 백성들이 잘 볼 수 있게 특별히 더 높이 설치했다.

“로젠시아를 찢어죽여라!”

갑자기 한 백성이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가 돌을 집어서 로젠시아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알테베르때부터 호위호식에 제 배만 불린 사악한 년이다!”

“저년의 사촌오빠 알테베르 때문에 내 아들이 굶어 죽었어!”

“우리 부모님도 전쟁노예로 끌려가서 돌아가셨어!”

“우리 아들은 후첩들이 지낼 성을 짓다가 돌에 맞자 죽었어!”

“죽여라!”

“단두대도 아깝다!”

여기 저기서 로젠시아에게 돌을 던지자 날아오는 돌에 맞은 로젠시아는 그만 기절을 했다.

군사들이 막지 않았다면 아마 돌에 맞아서 죽었을 것이다.

잠시 후 백성들이 진정된 후 저들의 심판이 이루어졌다. 물을 뿌려 로젠시아의 정신이 들게 한 후


심판관은 신호를 보냈다.

그 모습을 성벽 높은 곳에서 타냐와 카딜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시퍼렇게 벼러진 칼날은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높이 매달려 있던 칼날이 쉬이익 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려오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죄인들의 목이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목은 성벽의 높은 탑에 걸렸다. 이 모습을 본 북대륙에서 살던 동대륙 사람들은 야반도주하기에


바빴다.

북대륙에서 아량을 베풀어 동대륙 사람들도 이곳으로 와서 장사도 하고 농사도 짓고 뭐든 할 수 있게


해주어 반가워하며 북대륙으로 이주를 했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동대륙과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은 이미 북대륙 전체에 퍼졌다.

오늘밤 동대륙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동네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

고블린 제국.

갈라스의 부친이자 고블린제국의 황제인 니콜라스는 시종의 말에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지금 궁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나가셔서 제대로 맞이하시지 않으시면 당장 궁 안으로 쳐들어
오겠다고 하셨습니다요.”

시종은 거의 울먹이며 고했다.

니콜라스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갈라스와 로젠시아는….어찌 되었다더냐…하아…”

“이미 목이 달아났고 카딜 하에르 대장군이 이미 그 목을 가지고 와서…흑흑.”

시종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아들의 잘린 목을 들고 왔다는 말에 니콜라스는 무너지려는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건만 갈라스는 자신의 뜻대로 일을 진행했다. 그 모든 것이 로젠시아가


갈라스의 허파에 바람을 불어 넣어그랬다는 것을 알지만 부부가 왜 부부겠나 싶어 며느리 원망은 않기로
했다.

아들의 시신이라도 아니 머리라도 돌려 받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궁 밖으로 나온 니콜라스는 아직도 피가 덜말라 붙어 붉은 보자기를 들고 말위에 있는 카딜을 향해 큰


절을 했다.

“나는 북대륙 아클란 대제국의 황실 호위무사대장 카딜 하에르입니다.”

“알고있습니다, 먼길 오시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아들의 머리를 들고 있지만 절대 화를 낼 수 없는 굴욕적인 인생이었다. 이래서 강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강국이 된다는 것이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다.

전쟁을 선포했다 들었는데 이렇게 찾아와주어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었다.

“저희가 어찌하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까요, 그 묘책을 알려주십시오 대장군!”

니콜라스가 머리를 조아리며 묻자 카딜이 말했다.

“동대륙은 북대륙의 속국이 되고 북대륙에 매년 생산품과 특산품을 진상해야 한다, 그리고 북대륙인들은
동대륙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사업을 할수 있지만 동대륙인들은 북대륙에 들어올 수 없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요.”

“그리고 북대륙 동쪽진영에 흐르는 나이브강줄기를 따라 24 개의 다리를 건설할 것이다. 그 다리로 우리


북대륙인들이 자유로이 동대륙을 오갈 것이다.”

“뜻대로 하시옵소서.”

“지금부터는 동대륙에 있는 소금산을 비롯한 모든 자원은 우리 북대륙의 것이다 해서 우리 북대륙


군사들이 소금산, 철광산, 목재생산지, 금광, 크리스탈 광산 등등 모든 자원 생산지를 관장할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니콜라스는 아들의 시신을 거두고 싶어 황제를 대신하여 사신으로온 카딜의 말을 모두 받아 들였다.


이외에도 수십가지나 되는 조건들을 모두 수용하겠다 대답했다.
카딜은 니콜라스가 왜 이렇게 고분고분한지 이미 짐작했다.

“이상이다. 할 말이 있는가?”

“저기….제 아들의 시신을 좀 거둘 수 없을까요?”

“아들만?”

58 화

카딜의 물음에 니콜라스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카딜을 올려다 보며 대답했다.

“예, 아들만 필요합니다.”

로젠시아의 시신을 거론하지 않는 니콜라스를 보며 카딜은 그가 어떤 마음인지 이해가 좀 갔다. 이것은


결혼생활하는 내내 로젠시아가 시부모에게 미운털이 많이 박혔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어쩌면 니콜라스는 로젠시아 때문에 아들을 잃었다며 속으로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좋소, 하지만 지금은 몸뚱어리만 돌려드리겠소.”

“!”

니콜라스가 놀라서 크게 뜬 눈으로 카딜을 쳐다보았다.

“이 머리는 동대륙이 다시는 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성문의 가장 높은 곳에 효수할 것이오, 살과 피가


말라비틀어져 뼈만 남았을 때 돌려 드리죠.”

“크흑!”

니콜라스는 그만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딜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동대륙이 우리 북대륙에 대한 충성심이 확고하고 다시는 쓸데없는 도발을 하지 안겠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돌려 드리겠소, 그렇게 하려면 당신의 정치적인 능력을 십분 발휘해야 할 것이오.”

서늘한 기운이 들어찬 카딜에게 니콜라스는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오열만 할 뿐이었다.

국으로 가만히 있었으면 태평성대를 누릴 것을 욕심이 너무 과하여 명을 재촉했다.

이제와서 후회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니콜라스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허공을 바라보며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

갈라스와 로젠시아의 사건이 계기가 되어 오히려 북대륙은 동대륙을 점령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동대륙에서 먼저 갈라스와 타냐를 죽이고 북대륙을 차지하려 했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져 다른 소제국들은
그저 제게 불똥이 떨어지지 않게하기 위해 숨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타냐는 반항없이 북대륙에서 정해준 법을 잘 따르는 소제국들에게는 많은 이익을 주었고 다른 소제국들이


침략할 수 없도록 도와주기도 했지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기세가 보이는 대제국들은 미리 그
불씨를 키우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대응했다.
남대륙과 서대륙은 큰 바다를 끼고 있어 북대륙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이미 북대륙이 얼마나
강대한지 알기에 도발자체를 하지 않아 문제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바다를 건너서 오기도 쉽지 않아 애초에 북대륙과 동대륙 쪽으로는 세력을 넓힐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동대륙을 속국으로 만들고 두 대륙을 오가며 정치를 하는 사이 3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아빠!”

비안느는 검술연습을 하고 있는 카딜에게 두 팔을 마구 휘저으며 반가이 불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가 자신을 부르자 카딜은 검을 내려 놓았다. 바훌이 손수건을 건네주자
얼굴에 흘러 내리는 땀을 닦은 후 비안느를 불렀다.

“이리와 안느.”

카딜이 두 팔을 벌리자 비안느가 짧은 두 다리고 투다다닥 뛰어 카딜의 품에 안겼다.

“아빠한테 냄새나.”

“무슨 냄새?”

“으, 똥냄새나.”

“뭐?”

땀냄새를 똥냄새라며 작은 손으로 제 코를 잡는 비안느가 너무 사랑스러워 카딜은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똥냄새가 아니고 땀냄새야, 아빠가 검술 연습을 한시간이나 했거든.”

“땀?”

“응, 땀, 여기봐봐 지금도 흘러 내리지?”

카딜이 이마에서 다시 솟아오르기 시작한 땀방울을 가리키자 비안느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땀을
쳐다본다.

“이게 땀이야?”

“응, 비안느도 열심히 정원에서 뛰놀면 이마에 땀이 나잖아 그지?”

비안느가 고개를 끄덕인다. 엄마를 닮아 푸른 눈동자를 가졌고 자신을 닮아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비안느는 볼때마다 깨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그래도 안느는 똥냄새 안나는데?”

비안느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말하자 카딜은 두 눈을 깜빡이다 대답했다.

“그렇지, 우리 안느는 땀냄새도 향기로운 장미꽃향 같긴하지.”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비안느의 말은 사실이었다. 네 살인 비안느는 땀을 흘려도 꽃향기가


난다.
“아빠, 얼른 씻어.”

비안느가 코를 막고는 카딜의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살짝 서운하긴 하지만 안그래도 땀냄새 때문에
씻어야하기에 서운함을 뒤로 하고 샤워장으로 향했다.

“안느는 엄마한테 가있어. 아빠 깨끗이 씻고 갈게.”

“응, 아빠, 바훌, 손 잡아줘.”

비안느가 고사리같은 손을 내밀자 바훌이 피식 웃으며 아이의 손을 잡았다. 바훌을 유독 잘 따르는


비안느였다.

바훌이 비안느를 데리고 황제궁으로 향하는 것을 본 후 카딜은 돌아섰다.

***

타냐는 토디엘에게서 온 서신을 읽으며 눈물을 훔쳤다. 1 년전, 열일곱살이 된 토디엘은 붉은 기사단에
들어갔고 훈련이 끝나자 마자 변방으로 보내달라 청했다.

토디엘의 다짐이 확고하여 타냐는 말릴수가 없었다. 변방에서 근무하며 어른이 되어서 돌아오겠다는 말에
기특하다 싶긴 했지만 타냐 눈에는 아직 어린 토디엘이었다.

하지만 붉은 기사단 훈련을 모두 통과한 토디엘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키는 188cm 였고 온몸은 근육질로 변했다. 모두가 강한 군인이라 말하지만 타냐의 눈에는 아직도
어린아이로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떠났던 토디엘은 일주일에 한번씩 이렇게 타냐에게 서신을 보내왔다.

“폐하, 비안느 공주님 드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시종의 목소리에 타냐가 얼른 눈가를 정리했다.

“어서 들여보내거라.”

타냐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비안느와 바훌이 들어섰다.

“어마마마!”

비안느가 타냐를 향해 달려오자 타냐가 얼른 배부터 감싸 안았다.

그녀는 현재 임신 6 개월이었다. 제법 배가 부른데 비안느가 달려들어 충격을 받은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물론 몸집이 작은 아이라 태아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안느! 어서오렴.”

타냐가 비안느를 안아 주었다.

“어디 갔다 왔어?”

“아빠한테 다녀왔어.”

“아빠?”

“응, 근데 아빠 한테서 똥냄새가 나서 아빠는 씻고 온다고 했어.”


“똥냄새?”

타냐가 무슨 소리인가 싶어 바훌을 쳐다보자 바훌이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땀냄새가 지독했는지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그제야 상황파악을 한 타냐가 비안느를 나무랐다.

“그래도 아빠한테서 똥냄새가 난다고 하는말은 무례하다 안느, 아빠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니?”

“!”

타냐가 살짝 나무라는 투로 말하자 비안느가 바훌에게 도움을 청하듯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바훌도
어쩔 수 없었다. 바훌이 도움을 주지 않자 비안느는 곧바로 사과부터 했다.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똥냄새 난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야단맞을때는 저절로 존대어를 사용하는 비안느였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린 비안느를 타냐가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기죽을건 없어 안느.”

타냐가 비안느의 뺨에 입을 맞추자 어느새 헤헤거리며 웃는다.

“근데 어마마마, 내 동생은 언제 나와요?”

“16 주, 그러니까 4 달만 있으면 나와.”

타냐가 친절하게 알려 주었지만 비안느는 알쏭달쏭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러자 타냐가
다시 설명해주었다.

“우리 안느가 다섯 살이 되면 동생 볼 수 있어.”

“다섯살?”

“응.”

하지만 비안느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던 타냐의 두 눈이 커졌다.

“안느, 열있는것야? 이마가 왜 이렇게 뜨거워?”

뒤늦게 아이의 얼굴이 발그스레하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타냐가 비안느의 몸 여기저기를 짚어가며 열을


체크했다.

“안느, 어디 아픈데 없어?”

타냐가 묻자 비안느가 대답했다.

“안느는 힘이 없어.”

힘이 없다는 애가 그렇게 크게 엄마를 부르며 달려 왔나 물으려 할 때 갑자기 비안느가 정신을 잃었다.

“안느! 안느!”
놀란 타냐가 실신한 안느를 흔들 때 카딜이 들어왔다.

“카딜! 안느가 기절했어요!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 까지만 해도 괜찮았었는데!”

카딜은 타냐의 품에서 축 늘어진 비안느에게 달려왔다. 아이를 받아 안은 카딜은 침실로 향하면서
바훌에게 소리쳤다.

“궁의를 불러와라 바훌!”

“예!”

바훌도 놀라서 서둘러 움직였다. 아까 아이의 손을 잡고 황제궁으로 올 때 약간 열기를 느끼긴 했지만


별것 아닌줄 알았다. 바훌은 사랑스러운 비안느가 어떻게 될까봐 바람처럼 빠르게 궁의가 있는 의궁으로
내달렸다.

“타냐, 당신이 고치면 돼잖아.”

어찌나 놀랐든지 타냐가 치유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잊었던 카딜이 뒤늦게 깨닫고 말했다.

“해볼게요.”

타냐도 그제야 정신을 집중하고 두 손바닥을 펼쳐 아이의 얼굴위에 놓았다.

정신을 집중하려 미간을 구긴채 기를 모으던 타냐는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왜 그래? 왜 하얀 빛이 안나오지?”

카딜도 뭔가 이상하다 싶어 타냐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치유마법이 통하지를 않아요.”

“뭐?”

카딜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타냐를 쳐다보다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다시 해봐 타냐.”

카딜의 말에 타냐도 동의했다. 그럴 리가 없다. 어떤 중병도 그녀가 기를 모으면 다 고쳐지는 능력을


가졌는데 열병에 걸린 딸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타냐는 다시 한번 비안느를 치료하기 위해 두 팔을 뻗었다. 이번에는 이마에서 땀이 솟아 오를 정도로


온몸의 기를 다 모았다. 하지만 그녀의 두 손바닥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빛도 나오지 않았다.

“하아-, 안돼요.”

타냐의 말에 카딜은 절망했다. 지난 3 년동안 북대륙의 중환자라는 중환자는 거의 다 치료를 해주었다.


그런데 정작 딸아이의 열병하나를 다스리지 못하다니.

“다시 해봐 타냐, 당신은 할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카딜이 타냐에게 딥 키스를 했다. 어젯밤에도 에너지를 넘치도록 채워주었지만 혹시나 싶어서 한번 더
키스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타냐의 두 손에서는 아무런 빛도 나오지 않았다.
절망한 타냐의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어떡해요 카딜, 우리 비안느 어떡해요, 흐흑.”

59 화

카딜과 타냐가 절망할 때 바훌과 함께 궁의가 도착했다.

“폐하! 궁의가 도착했습니다.”

실리아의 알림에 카딜은 내실로 들어서는 궁의를 구세주라도 되는 듯 반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어서 우리 비안느 좀 살펴보아라.”

“예, 카딜님.”

궁의는 실신한 비안느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타냐가 아무리 기를 쓰도 치유하지 못했던 열병을
치유마법레벨 4 인 궁의가 너무나도 손쉽게 아이의 열을 내렸다.

“이제 곧 깨어나실겁니다 폐하.”

궁의는 타냐가 이런 쉬운 병을 치유하지 못했다는 것이 의아한지 약간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고했다.

궁의의 의아해 하는 눈빛을 느끼고 카딜이 재치있게 그를 이해시켰다.

“그래, 수고했다, 이런 사소한 치료는 궁의인 자네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시피 폐하께서 몸이
무거우시고 피로하신 관계로 요즘은 치유마법을 자제하고 있는 중이라.”

“아, 그러시군요, 앞으로도 어지간한 병쯤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맡겨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궁의의 머릿속에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실 황궁의 궁의로 있으면서 별로 하는 일이 없었던
그였다. 치유마법레벨 4 인 그가 나설 필요도 없이 가벼운 병은 그보다 레벨이 낮은 의사들이 처리했기
때문이다.

“별다른 이상은 없는거지?”

카딜은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며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제가 보기엔 그저 아이들의 성장통 같은 그런 가벼운 열병으로 보입니다.”

카딜은 궁의의 말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이 가벼운 열병조차 타냐가
치유하지 못했을까 하고.

“그래, 그런 것 같더라니. 수고했네 어서 가보게.”

“예, 카딜님,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궁의는 황제인 타냐에게 최대한 예를 표하고 물러갔다. 그런데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자신의 실력을 시험하려했다면 왜 그렇게 숨이 넘어가도록 다급하게 자신을 불렀을까 말이다.

고개를 갸웃하며 궁의가 내실을 빠져나간 후에야 타냐는 비안느에게 다가왔다.

“비안느, 아가, 정신이 드니?”


타냐가 비안느의 손을 잡고 볼을 살살 만지자 비안느가 눈을 떴다.

“어마마마,”

힘이 조금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열은 완전히 내려갔기에 마음이 놓였다.

그날밤.

“아,으응, 카딜….오늘따라, 하아…왜 이렇게 격해요.”

타냐는 제 음부를 모조리 먹어 치울 듯 빨아 대는 카딜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겨우 물었다.

“내가 당신 임신했다고 너무 조심했나봐, 그래서 에너지가 떨어진게 틀림이 없어.”

그의 말에 타냐는 아까 비안으를 치료하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타냐도


카딜의 리듬에 맞추기 시작했다.

대여섯명이 누워도 남을 것 같은 넓은 침상은 이미 전쟁이라도 치른 듯 마구 흐트러졌다.

이리저리 뒤틀다보니 몸은 가로로 향해있었다. 활짝 벌려진 두 다리 사이에 위치한 여성에 묽은 액이


흥건하게 고여있었다. 핏줄이 성성한 그의 페니스는 살짝 옆으로 휘어진채 프리컴을 흘려대며 타냐의 음부
안으로 진입하려 준비중이었다.

조명이 모두 꺼져 어두웠지만 어둠에 익숙해진탓에 사랑을 나누는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임신 6 개월차인 타냐의 볼록한 배가 달빛에 엎어진 하얀박처럼 어둠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돌기가 있는 혓바닥이 타냐의 음순을 헤집고 들어와 여린 속살을 쓸어 올리자 그녀의 엉덩이까지 딸려
올라갔다.

추르릅 대는 야한 소리는 어둠때문인지 더 요란하게 들렸다.

“하아앙, 카딜…이제 그만 넣어주세요.”

타냐는 더 기다리기가 괴로웠다. 남편의 거대한 페니스가 제 안에 가득 들어찼을때의 그 환희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녀의 음순이 길게 늘어나고 통통 부풀도록 빨아댔던 카딜도 더 이상은 무리인 듯 상체를 세웠다.

달빛을 받아 하얀 박속같은 타냐의 동그란 배에 수도 없이 입을 맞춘 그가 허벅지 걸음으로 그녀의


아랫도리에 바짝 다가왔다.

달빛을 받은 타냐의 알몸은 카딜의 성욕을 부추기는데 단단하게 한몫을 했다. 애액으로 흥건한 그녀의
음순 사이에 제 페니스를 비벼대던 그가 뾰족한 귀두를 구멍에 끼웠다.

엉덩이를 살살 흔들어 가며 타냐의 안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더니 절반정도 걸쳐지자 타냐의 가슴 양쪽에
손을 짚더니 엉덩이를 푹 쳐올렸다.

“하아앙!”

타냐는 갑자기 안으로 쑥 밀려드는 그의 페니스로 인해 저절로 잇새로 야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부채처럼 퍼져있는 그녀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집어 키스를 여러번 한 카딜이 타냐의 유두를 잘근 깨물었다.
“하아, 카딜….어서…”

어서 푹푹 찔러달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카딜을 재촉하자 카딜이 천천히 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푹.

“여기 좋지?”

“으응, 좋아요.”

푸욱, 퍽, 퍽,

“여기도 좋지?”

“으응…하아…아흐흥. 카딜.”

타냐를 놀리듯 그녀가 좋아하는 곳만 골라서 찔러대던 카딜도 더 이상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쫀쫀하게
들러붙는 타냐의 젖은 속살이 오롯이 느껴져 머릿속에서 쾌락의 폭풍우가 치닫기 시작했다.

아이가 위치한 위쪽을 피하기 위해 카딜은 최대한 아래쪽으로 추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탁탁탁탁,

그녀의 엉덩이살과 카딜의 치골이 부딪히는 소리가 참으로 외설적이었다.

그 사이 타냐의 교성은 극에 달했다. 잠시동안 신음소리와 젖은 살이 부딪히는 소리만 내실에 가득했다.

이후 타냐가 한층 높아진 교성으로 카딜에게 매달렸다. 그녀가 오르가슴에 도달했다는 것에 만족한 카딜은
이제 제대로 해보자는 표정으로 그녀의 다리 하나를 옆으로 넘겼다.

옆으로 돌아누운 타냐의 두 다리를 나란히 누른 카딜이 본격적으로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치대는 소리가 더 커졌고 타냐는 또 다시 치솟는 쾌감에 침대시트를 입에 밀어 넣었다. 밖에서 불침번을
서는 시종들과 호위무사들이 여황제의 이 난잡한 교성소리를 들을까 싶어서다.

물론 내실과 시종들이 불침번을 서는 곳과의 거리가 제법 있어 들릴턱이 없겠지만 기우에서였다.

“하아-, 마음껏 사랑해줄테니까 모자란 에너지를 가득 채워 타냐.”

카딜의 말은 진심이었다. 아까 비안느를 치유하지 못했던 것이 임신이라 너무 그녀와 멀리 해서


에너지고갈로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동안 중병이 걸린 백성들도 없어서 타냐는 한동안 치유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었다.

철퍽, 질퍽, 찔걱, 찔걱,

온갖 야한 소리가 절정을 이룰 때 카딜도 절정에 올랐다. 그녀의 안에 뜨거운 정액을 마음껏 쏟아 부은


카딜은 다시 타냐의 다리를 들어 활짝 벌어지게 했다.

볼록한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쓰다듬던 그가 타냐에게 키스했다. 타냐는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휘감고


카딜의 혀를 받아 들였다.

제 안에 머문 그의 페니스가 또 다시 움찔대는 것이 느껴져 다시 기분이 묘해진 그녀가 의도적으로 음부를


조였다.
“하아, 또 해달라고?”

“응, 또 해줘요.”

타냐의 응석부리는 말투와 함께 제 페니스를 조여오는 내벽을 느끼며 카딜이 웃었다.

“후회 안할거지?”

“후회를 왜 해요?”

“괜히 또 해달라고 했다며 울어도 소용없다는 소리야.”

“좋아서 우는건 패스 해줘요.”

“후훗, 알았어, 너무 좋아서 실컷 울게 해줄게, 아니 엉엉 통곡하게 해줄게.”

카딜의 말에 타냐는 살짝 겁을 집어 먹었다. 하지만 그가 페니스를 뺐다가 다시 깊이 밀어 넣는 동장을


여러번 하자 섹스에 목마른 여자처럼 교성을 내지르지 시작했다.

***

며칠 후.

타냐는 급한 환자가 있다는 소식에 궁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며칠동안 카딜에게서 에너지를 듬뿍 받은
그녀는 그 환자를 아주 가볍게 치유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타냐는 자신이 비안느를 치료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달 후 비안느가 감기에 걸렸을 때 그게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북대륙의 겨울은 혹독하다. 영하 40 도를 쉽게 내려갈 정도로 겨울이 길고 춥다. 그래서 겨울에


얼어죽거나 병에 걸려 주는 인구가 제법 많다.

비안느는 궁안에 있는 얼어붙은 연못에서 썰매를 하루종일 탔다. 너무 재미있어서 유모와 시종들이 그만
들어가자고 해도 고집을 부리며 몇 시간째 썰매를 타더니 결국 감기에 걸린 것이다.

타냐는 감기 정도야 생각하며 열이 40 도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비안느를 눕혀 놓고 그녀의 치유기운을


모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떻게 된건지 그녀의 치유의 힘은 생성되지 않았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이 치유하는 것은 포기하고 또 다시 황궁의에게 맡겼다.

이번에도 황궁의의 실력을 썩히지 않기 위해서라며 카딜이 얼버무렸다.

설마 했는데 황궁의는 비안느의 감기를 금새 낫게 해주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타냐는 카딜과 함께


제이단 숲으로 향했다.

하얀 눈이 쌓이다 쌓이다 얼음길로 변하여 썰매 이동수단이 없었다.

카딜은 임신 7 개월차인 타냐가 감기라도 들까 싶어 동물가죽으로 만든 코트를 겹겹이 덮어 주고도 모자라


그의 품에 꼭 안았다.

평소 말을 타고 달리면 1 시간이면 도착하는 제이단 숲을 3 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샤마란족 족장의 딸 타냐가 온다는 소식에 제이단 숲에서 모여살던 샤마란족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제이단 숲의 주인이자 북대륙의 주인인 타냐는 그들에게 신보다 더 높은 귀한 분이었다.

이곳에 모여사는 샤마란족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루아다가 타냐에게 인사했다.

루아다는 100 살이 넘어 제이단 숲이나 샤마란족에 관한 것이라면 제일 많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샤마란족의 넘치는 환대속에 인사를 나눈 타냐는 루아다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러자 루아다는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몰랐느냐는 듯
대답했다.

“폐하, 샤란족의 치유마법은 직계가족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요.”

“!”

루아다의 말에 타냐의 안색이 놀라움과 안타까움으로 어두워졌다. 카딜 또한 루아다의 말에 걱정가득한


눈빛으로 타냐를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 비안느가 아무리 아파도 내가 치유할 수 없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폐하.”

세상에….타냐는 갑자기 현기증이 느껴져 카딜에게 기댔다. 카딜도 어지간히 충격을 받았지만 타냐를
챙기기에 바빴다.

이건 너무 불공평 한것 아닌가? 세상 모든 아픈 사람들을 다 치유할 수 있는데 왜 내 직계 가족만은


치유하지 못할 수가 있단 말인가?

60 화

“하지만…”

루아다가 하지만 이라고 하자 타냐와 카딜이 얼른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라는 말은 늘 앞의 말을


부정할 때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에 타냐와 카딜의 안색이 약간 밝아졌다.

“하지만 만약 비안느 공주님께 치유마법이 발현된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타냐가 미간을 살짝 모으며 물었다. 그때 카딜이 뭔가 떠올랐는지 안도하는 눈빛을 했다.

그것은 타냐의 몸은 누가 치료해줄 필요도 없이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유마법이 발현되면 공주님의 몸은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도 그건


아시고 계실텐데요.”

그제야 타냐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 생각을 왜 못했을까? 그런데 만약이라는 말이 거슬린다.

“만약 치유마법이 발현된다면은 무슨 뜻이죠?”

“그것은….”
루아다가 카딜을 잠시 쳐다보더니 입술만 달싹이고 말을 하지 않았다.

눈치빠른 카딜이 혹시 자신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할 때 루아다가 입을 열었다.

“원래 샤마란족 족장의 피를 이어받은 딸만이 치유능력을 가집니다, 그런데 송구스럽지만 카딜


대장군님께서는 샤마란족이 아니시라서…..그래서 만약이라고 했습니다.”

루아다의 말에 카딜은 괜히 죄인이 된 것 같아 절로 안색이 굳어졌다.

하지만 타냐는 생각이 달랐다.

“루아다, 그건 걱정은 안해도 될 것 같은데요?”

“네?”

“카딜을 만난 후 내 치유마법이 발현되었고 치유마법을 사용한 후 기가 빠졌을 때 카딜만이 그 기를


채워줄 수 있어요, 그러니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될 것 같은데요?”

타냐의 말에 루아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확신은 없는 얼굴이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겠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봅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루아다가 허리를 굽혀 사과를 했다.

“괜찮아요, 그래도 궁금한 것을 알게 되어 좋네요, 그런데 한 가지만 더 물어 볼게요 루아다.”

“물어 보십시오 폐하, 제가 아는 한도에서 정성껏 답변 올리겠습니다.”

루아다가 두 손을 배꼽 근처에 모으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다른게 아니라 내 경우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혹시 우리 비안느도 운명의 베필을 만나면 치유마법이
발현될까요? 그렇다면 그 나이는 언제가 될까요? 나처럼 성인이 된 후에 발현되는 걸까요?”

갑자기 질문이 쏟아지자 루아다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가 대답했다.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제가 100 년을 살아 오면서 딱 두 번 밖에 치유마법이 발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거든요, 폐하의 조부모님과 부모님 이렇게요, 그런데 그분들은 모두 샤마란족과 결혼을 하셨고
발현도 성인이 되시면서 나타나셨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경우는 제가 처음 보는 상황이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시원하게 답변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루아다는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시 허리를 깊이 숙여 사죄했다. 그러자 타냐가 오히려 미안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아니예요, 그래도 루아다 덕분에 많은 것을 알고 가네요, 앞으로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찾아올테니까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지금도 오래 살았는걸요, 하지만 제가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도와드리겠습니다 폐하.”

“고마워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타냐는 샤마란족 마을을 한번 둘러 보고는 혹시 힘든일이 있나 없나 살핀 후에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휴우-.”
마차안에 타냐의 한숨이 계속 이어지자 카딜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걱정마, 우리 안느는 건강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안느에게 내 치유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나니 괜히 불안해서 마음이 안


놓여요.”

“황궁의도 있고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치유마법이 발현된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 안해도 될거야. 그렇게
한숨쉬면서 걱정하면 뱃 속에 있는 아이에게도 안 좋아 타냐.”

카딜의 말에 타냐는 그제야 제 볼록한 배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감기에 걸린걸 가지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대서 미안해요.”

“미안하긴, 안느는 내 딸이야, 내가 말은 안해도 아마 당신보다 더 겁먹고 걱정할걸?”

“겁을 먹어요?”

“당연하지, 타냐 당신만 믿고 있는데 당신 치유마법이 안 통하잖아, 내가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상상도


못할거야.”

카딜의 약한 모습을 처음본 타냐가 피식 웃고는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냥 감기일뿐이예요, 황궁의가 이미 치유했구요. 그러니 우리 걱정 그만해요 이제.”

“훗, 알았어.”

카딜은 타냐의 손을 잡더니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앞으로는 안느를 좀 더 조심해서 챙겨야 겠어,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 당신 믿고 너무 방심했어.”

“네, 나도 그랬어요. 이렇게 빨리 알게되서 다행이지 뭐예요.”

“그래.”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미소지었다.

***

다행히 비안느의 감기는 일주일만에 깨뜻이 완쾌 되었다.

몇 개월 지난 후 비안느는 여섯 살 생일을 맞이했다.

공주의 생일이라 황궁안은 떠들썩했다. 타냐는 출산달이 되어 배가 꽤 부른 상태였다.

봄이 찾아와 기온도 많이 올라갔고 황궁뜰 여기저기에는 가지각색의 꽃들이 서로 경쟁하듯 피었다.

“거기서 나비야, 언니하고 놀자.”

비안느는 꽃밭을 날아다니는 호랑나비에 홀려서 정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생일이라고 엄마가 직접 골라준 예쁜 드레스를 입은채 나비를 잡아 뛰어가다 그만 치맛자락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그런데 몸이 땅에 닿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를 받아 주었다.

“!”

두 눈이 동그래진 비안느가 저를 내려다 보고 있는 남자를 큰 눈으로 올려다 봤다.

“이렇게 예쁜 드레스를 입고 그렇게 마구 뛰어다니면 위험해 비안느.”

“누군데 감히 내 이름을 부르는거지?”

비안느는 어리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엄마와 아빠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안본사이에 엄청 자랐구나.”

“내가 방금 누구냐고 물었는데 왜 엉뚱한 소리만 하는 거지?”

비안느가 토디엘의 품에서 쏙 빠져나와서 허리에 양손을 얹었다. 토디엘은 비안느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웃기만 했다. 자신의 허벅지 정도 오는 비안느가 양허리에 손을 얹고 씩씩대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꽉
깨물어주고 싶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하긴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못 알아볼 수도 있겠네, 내가 너 기저귀도


갈아줬는데.”

“안느는 기저귀 안 차!”

퍽!

“윽!”

비안느가 토디엘의 정강이를 작은 발로 찼다. 예민한 곳이라 작은 아이가 찼는데도 제법 아팠다. 물론


의도적으로 더 아픈척을 한 것도 있었지만.

“감히 나한테 존대도 하지 않고, 무엄하다!”

비안느가 고운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는 고개를 최대한 쳐들고 토디엘을 노려 보며 말했다.

“안본사이에 꽤 매서워졌는데? 엄마아빠는 잘 계시지?”

“이씨, 누구냐니까?”

비안느가 금방이라도 한번 더 찰 기세로 노려보자 토디엘이 대답해주었다.

“난 토디엘이야, 너의 외삼촌.”

“토디엘? 내 외삼촌?”

“그래, 엄마가 내 이야기 안해줬어?”

“……..!”

잠시 생각을 하던 비안느가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토디엘을 올려다 보았다.
토디엘은 비안느가 자신이 누군지 알아본다는 생각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잠시 멍한 눈으로 토디엘을 쳐다보던 비안느의 두 뺨이 빨갛게 변하더니 갑자기 치맛자락을 들고는 빠르게
기둥뒤로 가서 숨었다.

토디엘은 비안느의 요상한 행동이 귀여워서 천천히 일어서서 기둥쪽을 쳐다보았다.

그때 비안느가 고개를 빼꼼 내밀다가 토디엘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기둥뒤로 숨었다.

비안느가 아주 어렸을때는 자주 놀아주었지만 아이가 네 살이 되었을 때 부터는 잘 보지 못했었다.

붉은 기사단에 들어가서 훈련받느라 보지 못했고 이후에는 전방으로 떠났기 때문에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인지 비안느는 토디엘을 어색해 했다.

“안느, 이리나와, 같이 엄마아빠 만나러 가자.”

토디엘이 손을 내밀자 비안느는 쭈삣거리며 나와서 그의 손을 잡았다.

여섯 살 치고는 키가 제법 커서 얼핏 보면 아홉 살이나 열 살로 보이는 비안느였다.

아빠를 닮아서 회색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고 두 개의 푸른 눈동자는 엄마를 닮아 사파이어처럼 반짝인다.

분홍빛 피부는 잘 익은 복숭아를 닮아 있었다.

“우리 비안느 안본사이에 많이 컸네, 외삼촌이 한번 안아보면 안될까?”

손을 잡고 걸어가던 토디엘이 부탁하듯 말하자 비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토디엘은 피식 웃고는 비안느를
안아 들었다. 비안느는 토디엘의 목에 두 팔을 감고는 그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토디엘도 비안느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토디엘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유도 없이 심장이 빠르게 토디엘은


당황했다. 그 순간에도 비안느의 청안이 토디엘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토디엘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오늘 비안느 생일이라고 특별히 휴가를 받아서 나왔어, 엄마아빠도 내가 나온걸 모르실거야, 우리 몰래
들어가서 서프라이즈 해줄까?”

토디엘은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을 이상하다 여기며 애써 분위기를 바꿨다.

비안느가 고개를 끄덕이자 토디엘은 피식 웃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심장박동은 점점 더 거세질뿐
가라앉지가 않았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토디엘은 심호흡을 여러번 하면서 타냐와 카딜이 있는 내궁에 도착했다.

그런데 만삭인 타냐에게 서프라이즈를 하기엔 좀 무리가 있는 듯 하여 토디엘은 그냥 누나를 불렀다.

“누나.”

“!”

“!”

카딜과 타냐는 토디엘의 목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토디엘?”

타냐는 완전히 멋진 상남자로 변신한 토디엘을 보더니 잰걸음으로 다가와서 토디엘을 안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타냐가 토디엘에게 안긴 모양새였다.

“처남, 휴가나왔어?”

카딜은 제게 다가오는 비안느를 안아 들며 물었다.

“네, 비안느 생일이라서 나왔어요.”

“그래, 잘 왔어.”

카딜이 토디엘을 보며 환하게 웃을때도 비안느는 토디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타냐는 잠시 그렇게


토디엘의 품에서 반가움의 눈물을 흘리다 떨어졌다.

“세상에, 얼굴 그을린 것 좀 봐.”

타냐가 토디엘의 뺨을 어루만지며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말했다.

“훈련 받다보면 다 그래 누나, 그보다 둘째는 언제 태어나? 곧 태어날 것 같은데?”

“이달이 산달이야, 일주일 정도 남았어.”

“그렇구나, 귀여운 조카를 얼른 보고 싶다, 나 2 주일 휴가 받았는데 잘하면 둘째 조카 얼굴 볼 수도


있겠네?”

“어머, 그럴 수도 있겠네, 너 있을 때 출산하면 좋겠다.”

“그러게, 하하하.”

토디엘이 호쾌하게 웃다가 비안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또 심장박동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61 화

비안느 공주의 여섯 번째 생일파티가 한창일때였다. 시녀장 실리아가 많이 당혹해하는 눈빛으로 타냐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녀의 표정만 보고도 뭔가 일이 터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타냐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지금 황궁 정문밖에 한 남자가 아이를 품에 안고 폐하를 뵙게 해달라며 애걸하고 있답니다.


보아하니 아이가 위독한 모양입니다.”

“저런, 그럼 당장 들여보내지 뭘하는 거야?”

“하지만 폐하께서는 지금 만삭이시라 치유마법을 사용하실 수 없지 않사옵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황궁의가 있으니 황궁의에게 보이면 될 것이야, 그렇게 다급하게 쫓아와서 날 보자고
하는데는 그만큼 아이가 위독하다는 뜻도 되지 않느냐?”

“그렇긴 합니다만….그럼 들여 보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황궁의도 같이 불러 들이도록.”

“예, 폐하.”
실리아는 다시 잰걸음으로 파티장을 나갔다.

“타냐, 무슨 일이지?”

카딜이 눈치를 채고 타냐에게 물었다.

“어린아이가 위독한가봐요, 지금 황궁 앞에서 날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한다고 해서 일단 들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지금 힘을 쓰면 안되잖아.”

걱정이 가득한 눈빛이 타냐에게 향했다.

“걱정말아요, 되도록 황궁의에게 고치라고 할테니까요.”

“만약 그게 안되면 결국 당신이 힘을 써야 하잖아, 왜 그렇게 사람이 모질지를 못해, 우리 아이도


생각해야지 언제까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할거야?”

카딜이 오늘따라 예민한 것은 그녀가 언제 출산을 할지 알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걸 모르는바가 아니라서


타냐는 그저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린 아이라잖아요, 아마도 여기저기 손을 써보다가 안되서 날 찾아온걸거예요, 내가 만삭인 지금


치유마법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찾아왔다는건 꽤 위독한 병일지도 몰라요.”

하아—

카딜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사이 황궁의가 도착했고 이어 아픈 아이를 안은


남자가 타냐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이렇게 기쁜날 이렇게 무작정 찾아오면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제 딸아이가 너무 위독하여 목숨을
내놓고 이렇게 달려 왔습니다. 제발 제 딸아이를 좀 살려 주십시오.”

남자의 품에 안긴 아이는 비안느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토디엘은 비안느와 나란히 앉아서 식사를 하다가 비안느가 일어나서 아이에게 다가가자 그도 따라갔다.

노란 개나리꽃 같은 샤틴재질 드레스를 입은 비안느는 제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끙끙 앓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다가갔던 것이다.

“많이 아파?”

“예, 공주마마, 제 딸이 아주 많이 아픕니다요, 제발 폐하께 부탁하여 제 딸을 좀 살려 주십시오.”

남자의 말에 비안느는 작은 손을 뻗어 아이의 이마를 만졌다. 그런데 그때 비안느의 손에서 하얀 빛이


생겨나더니 아픈 아이의 온몸을 감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이들이 놀라서 입을 벌렸다. 감탄사조차 내뱉지 못하는 사이 숨이 넘어가던


아이가 두 눈을 떴다. 비안느는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괜찮아?”

아빠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품에서 나와 비안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안 아파.”
“헤, 다행이야…으움.”

해사하게 웃던 비안느가 갑자기 작은 신음과 함께 픽 쓰러졌다. 치유마법을 사용하고 나면 에너지가 딸려


힘이 없지만 비안느는 아직 너무 어려 기절을 해버린 것이었다.

타냐와 카딜, 그리고 토디엘까지 달려왔다.

“안느가 치유마법을 썼어요 카딜, 이게 어떻게 된거죠?”

카딜이 비안느를 들쳐 안고 내실로 향했다. 병이 다 나은 여자아이는 이게 무슨 소란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아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고쳐준 후 공주가 기절한 것에 큰 죄책감으로 어찌할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내실로 들어온 카딜은 비안느를 침대에 눕혔다. 하지만 비안느의 빠져나간 기운을 누가 채워주어야 하는지
알지못해 당황했다.

혹시 아빠나 엄마의 기가 아이를 깨어나게 할 수 있을까 싶어 손도 만져보고 입술에 뽀뽀도 해보고


안아보기도 했지만 비안느는 깨어나지 않았다.

“안되겠다, 황궁의를 불러라 어서!”

카딜이 평소같지 않게 침착성을 잃었다. 실리아와 시종들은 황급히 대답하고 파티장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던 황궁의를 불러 왔다.

“어떤가? 고칠 수 있겠는가?”

타냐가 불안한 눈빛으로 황궁의에게 물었다. 사실 황궁의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녀였다.

루아다 말로는 비안느도 정인을 만나면 치유마법이 발현될 것이라고 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성인이 되고 난 후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겨우 여섯 살인 비안느가 언제 정인을 만나 치유마법이
발현되었을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저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이옵니다.”

예상했던 대로 황궁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죽을죄를 지은 죄인처럼 머리를 숙였다.

“하아, 한번만 더 치유마법을 사용해봐요, 한번만 더.”

타냐가 황궁의를 재촉했지만 황궁의는 장승처럼 선채로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카딜이 정신을 차리고
황궁의를 물렸다.

그때 갑자기 타냐가 꺅 하는 비명과 함께 배를 움켜잡았다. 출산일 일주일을 앞두었지만 방금 충격을


받아서인지 양수가 터진 것이다.

카딜은 타냐의 두 다리 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내리자 얼른 그녀를 안아 들었다.

“실리아, 아기가 태어날 모양이다 얼른 준비해!”

카딜의 명에 실리아와 하녀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이 급박한 순간에 아이까지 태어나기 위해 진통이
시작되자 모두들 타냐에게 집중했다.

미리준비되어 있는 산실로 타냐가 옮겨지고 아이를 받아내기 위해 모두가 타냐에게 신경을 쓸 때 토디엘이
정신을 잃고 침대에 눕혀진 비안느에게 다가왔다.
복숭아 속살 같은 뽀얀 두 뺨을 내려다 보던 토디엘이 저도 모르게 아이의 두 뺨에 번갈아 가며 뽀뽀를
했다. 그리고 축 늘어진 비안느를 안아 들었다.

침대에 걸터 앉은 그가 아이를 품에 안고 가만히 내려다 보다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안느, 그만 자고 일어나, 동생이 태어나려는 중요한 순간이라고.”

말을 마친 토디엘이 비안느의 이마에 다시 입을 맞추었을 때 비안느가 눈을 떴다.

“!”

“!”

서로 눈이 마주치자 둘 다 흠칫 놀라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비안느의 파란 눈동자가 토디엘의 갈색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다 그의 목을 끌어 안았다.

흠칫 놀란 토디엘이 비안느를 꼭 안아주었다.

“외삼촌이 내 꿈에 나타났었어.”

“그래?”

“응, 그리고 안느야 하고 불렀어.”

“그랬어?”

“응, 그래서 내가 잠에서 깨어났어.”

“그랬구나, 잘 했어, 안느야, 잘 깨어났어, 어디 아픈데 없지?”

“응, 없어.”

“그럼 우리 손잡고 동생 맞이하러 갈래?”

“동생?”

“응, 우리 안느 동생이 지금 막 엄마배에서 나오려고 하거든,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안느가 엄마한테


가서 나 무사하니까 아무걱정 말고 동생 만나게 해주세요 하고 말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좋아.”

비안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게 손을 내밀고 서있는 토디엘의 손을 잡았다. 침실에서 나오자 아까 병에


들었다가 쾌차한 여자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 너 이제 안 아파?”

“예, 공주님, 공주님께서 절 살려 주셨잖아요,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기다렸어요 공주님, 절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자아이는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았는지 비안느에게 공손하게 인사까지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주님, 이 은혜는 어떻게 갚아야 할지….아까 쓰러지셨는데 괜찮으십니까? 제가 너무


죄송스러워서 떠날 수가 없었답니다.”

“이젠 아무렇지 않아요, 그만 가봐도 돼요 아저씨.”


“아이고, 정말 다행입니다요,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요.”

“잠깐만요.”

토디엘이 남자를 불렀다.

“네?”

“이왕 오셨으니까 음식 좀 싸가셔서 동네 사람들과 나누어 드시라구요. 마리아, 여기 이분께 음식 좀


푸짐하게 싸주시죠.”

“아, 네, 토디엘님.”

토디엘의 지시에 마리아라는 시녀가 하녀들에게 지시했다. 남자는 너무 고맙고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감사하다고 했다.

“네 이름이 뭐니?”

“내 이름은 아드레일입니다 공주님.”

“이름이 예쁘네, 난 비안느라고 해,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가워, 아드레일, 우리 다음에 또 만나면
친구하자.”

“정말요?”

“그래, 약속해.”

비안느가 손가락을 내밀자 일곱 살인 아드레일도 손가락을 내밀어 서로 약속했다. 그렇게 아드레일과


작별인사를 한 비안느는 다시 토디엘과 함께 타냐가 산고를 겪고 있는 산실 쪽으로 향했다.

타냐의 신음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겹겹으로 칸이 쳐진 산실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카딜


뿐이었지만 비안느가 나타나자 모두들 놀라서 그녀에게 길을 터주었다.

토디엘은 마지막 한겹의 벽을 남겨두고 멈추었고 비안느는 실리아가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하얀 커튼으로 타냐의 몸은 가려져 있었지만 얼굴은 볼 수 있었다.

산파가 그녀의 진통에 맞추어 아이를 받아내기 위해 준비중이었다. 카딜의 손을 꼭 잡고 힘을 쓰던 타냐는


잠시 진통이 멈춘 사이 비안느를 쳐다보았다.

“안느?”

“안느, 깨어났어?”

카딜도 멀쩡한 비안느를 보고는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응, 깨어났어.”

“아니 어떻게?”

“토디엘 삼촌이 깨워줬어.”

“뭐?”
“뭐라고?”

타냐와 카딜이 동시에 동공을 확장했다. 그런데 하필 그때 또 진통이 시작되어 타냐는 아이를 출산하는데
집중해야만 했다.

카딜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실리아에게 비안느를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 비안느가 무사한 것을 본 타냐는
몇 시간 만의 산고 끝에 튼튼한 아들을 카딜의 품에 안겨 주었다.

비안느때와는 달리 우람한 체격을 가진 아이는 카딜의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대신 머리카락이


황금빛이었다.

카딜은 아직도 아들을 얻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지 산파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 아들이 맞느냐고.
그러자 산파가 확실히 왕자님이 맞다며 환하게 웃었다.

방금 출산한 타냐의 몸은 신기하게도 한시간도 되지 않아 출산전의 몸으로 돌아갔다.

깨끗하게 씻고 나온 타냐의 품에 아들 헤르딘이 안겨졌다. 아들이 태어나면 지어주겠다며 미리 준비해


놓았던 이름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황궁 밖에는 이미 왕자님이 탄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백성들은 황제부부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축제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타냐는 아들 헤르딘을 유모에게 넘겨주고 토디엘을 찾아갔다.

62 화

“토디엘, 누나하고 이야기좀 할까?”

토디엘은 비안느와 함께 있었다.

“쉬이, 누나 안느가 이제 막 잠들었어.”

토디엘이 검지를 입술에 세우고 조용히 말하자 타냐는 속에서 튀어 나오려는 앓는 소리를 겨우 삼켰다.

아직 기운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는지 잠투정을 하던 비안느는 토디엘의 토닥임을 받으며 잠이 들었다.

잠이든 비안느를 쳐다본 타냐는 잠시 그렇게 아이가 깊은 잠에 빠져들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무슨 이야기?”

비안느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토디엘이 이불을 여미어주며 물었다.

“나가서 이야기 하자.”

“그래.”

토디엘은 조금전 아이를 낳은 타냐가 멀쩡한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샤마란족의 치유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번 몸소 느끼며 타냐를 따라 그녀의 집무실로 왔다.

“차 마실래?”

“괜찮아, 근데 무슨 심각한 이야기야? 누나 표정이 안 좋아 보여.”

토디엘은 타냐와 맞은편에 앉으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토디엘의 표정과 말투로 보아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 보였다. 타냐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하나 고민하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안느가 어떻게 깨어났는지 알아?”

“응,”

“어떻게 깨어났는데?”

이제 여섯 살인 안느에게 토디엘이 어떻게 에너지를 채워주었는지 타냐는 그것이 궁금했다. 물론


카딜에게서 에너지를 채울 때 어떻게 하는지 다 알고 있지만 토디엘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걱정되서 쳐다보다가 손도 잡아주고 볼에 뽀뽀도 해주었더니 깨어났어.”

역시, 그랬구나.

타냐는 토디엘이 비안느의 운명의 배필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운명의 상대와는 가벼운 키스만으로도
에너지가 채워진다. 그런데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다. 물론 토디엘과 비안느는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라 베필이 되는건 문제가 안되지만.

“무슨 문제있어 누나? 안느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아픈걸 보니 안타까워서 만져도 보고


뽀뽀도했는데 그럼 안되는 거야?”

“응? 아, 아냐, 안되긴.”

“그런데 표정이 왜그래? 무슨 근심이 가득한 사람처럼 안색이 안좋아 누나. 혹시 쉬어야 하는거 아냐?”

토디엘은 아무것도 모른채 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더 이야기 하기가 힘든 타냐였다.

차라리 지금은 모른채로 그냥 둘까?

혼자 생각하던 타냐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토디엘, 너 황궁호위대로 와.”

“응? 갑자기 왜?”

“이제 그만 떨어져 있자, 나도 너 보고 싶어서 안되겠고 안느도 너를 잘 따르니까…..”

타냐는 말끝을 흐리면서 토디엘의 반응을 살폈다. 다행히 토디엘도 마음이 흔들리는지 당장에 싫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안느때문이라는 것을 타냐는 모르고 있었다. 사실 토디엘도 아까 비안느 때문에 황궁근무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비안느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가슴도 간질거리는 것이 무슨
이유인지 파악하고 싶기도 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누나, 나도 변방에 있으면서 누나생각도 많이 나고 안느 생각도 많이 나더라고.”

“정말?”

“응, 이젠 가족과 가까이 있고 싶어.”

토디엘의 말에 타냐는 속으로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 겨우 여섯 살인 안느와 막


스무살이 된 토디엘과의 나이차이는 열여섯살.

아까는 가벼운 병을 치유해서 기절정도해서 뽀뽀로 기운을 차렸지만 더 큰 병을 치유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큰일이다.
아직 어린아이인 비안느가 본능적으로 병든 사람을 치유하게 된다면 에너지가 방전될 것이고 어서
에너지를 채워주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토디엘에게 비밀로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타냐였다.

“저기 토디엘.”

“응 누나.”

토디엘은 타냐의 표정이 살짝 변하자 그녀의 말을 경청하려 자세를 바로 잡았다.

“사실 누나가 해줄말이 있어.”

“뭔데?”

“놀라지 말고 들어.”

“누나가 내 친누나가 아니라는 말보다 더 놀라운 말은 아니지?”

토디엘이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고 농담을 했다. 그 말에 타냐는 웃지 못했다.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고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네 이야기를 하기전에 카딜하고 누나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아.”

“매형하고 누나 이야기를?”

“응.”

타냐가 진지한 눈빛으로 토디엘을 쳐다보자 토디엘도 뭔가를 느꼈는지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되었으니까 해 누나.”

토디엘의 진중한 눈빛을 본 타냐는 카딜과 자신이 어떻게 해서 운명적인 사이가 되었는지 말해주었다.

“그 이야기는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 누나, 뜸 그만 들이고 본론을 말해줘, 안 놀랄테니까.”

“그래,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게.”

타냐는 길게 심호흡을 한 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가 보기에 토디엘 너하고 비안느가 운명으로 이어진 사이같아.”

“!”

토디엘은 다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타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타냐가 다시 말해주었다.

“카딜과 내가 운명인것처럼 너하고 비안느가 운명이라고 말하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네 스킨십에
기절했던 비안느가 깨어날 리가 없거든.”

“누나….그걸…아니.. 안느하고 내가….하아…안느는 이제 겨우 여섯 살이야.”

토디엘은 비안느를 향해 뛰는 제 심장 때문에 사실 꽤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래서 제 입으로 비안느는


안된다는 뜻으로 여섯 살이라는 것을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이미 살갗밖으로까지 느껴질
정도로 심하게 뛰고 있었다.
어버버 거리며 부정하려는 토디엘을 봤지만 타냐는 토디엘이 당황하는 것을 이미 알아차렸다.

귀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토디엘은 목이 타는지 테이블 위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고는 벌컥이며 들이켰다.

“나도 알아, 그래서 나도 미치겠어, 이제 겨우 여섯 살인데 치유마법이 발현했어, 왜 그렇게 일찍


치유마법이 발현되었는지 알아?”

타냐의 물음에 토디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바로 너 때문이야, 내가 카딜을 만나면서 치유마법이 발현되었던것과 같은 상황인거지.”

“…………”

토디엘은 할말을 잃은 표정으로 타냐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심장이 달음박질을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하지만 차마 여섯 살짜리 비안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고 인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토디엘이 혼란스러워할 때 타냐는 그녀가 진짜로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었다.

“안느는 이제 여섯 살이라서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어, 그래서 아픈사람만 보면 본능적으로 치유마법이


발현될거야, 그때마다 기가 딸려서 기절하거나 쓰러질거야, 빠져나간 기운은 오로지 운명의 상대만이
채워줄 수가 있어, 너도 그건 알지? 에너지를 채워주지 않은 상태에서 또 치유마법을 사용하면 죽을 수도
있어.”

“!”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토디엘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해 누나?”

그 사랑스러운 비안느가 죽는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은 토디엘이었다.

“그래서 내가 황궁 호위무사로 근무지를 바꾸라고 부탁했던 거야, 네가 안느 곁에 있어야 하니까.


아까처럼 안느를 깨워줄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너도 봤다시피 황궁의 조차 어떻게 하지 못했잖아.”

“누나가 하면 안돼?”

“안돼, 직계가족은 치유 할 수 없어. 그래서 아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거야.”

“그럼 안느가 아무도 치유하지 못하게 감시하면 안돼?”

토디엘의 말에 타냐가 고개를 저었다.

“여섯살짜리 아이를 성의 탑에 가두기라도 하라는 거야?”

“말도 안돼.”

“그러니까, 특히 안느는 다른 또래의 여자아이들보다 활동적이야, 매일같이 밖으로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라고, 책하고는 거리가 멀고 칼싸움을 더 즐기는 아이거든.”

“아빠를 완전히 빼닮은 모양이네.”

토디엘의 말에 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카딜과 완전히 닮았어, 사내아이로 태어났으면 더 좋았다 싶을 정도라니까, 그런 아이를 아무데도
못나가게 할 수 있겠어?”

토디엘이 고개를 저었다.

“안느도 너 좋아하고 잘 따르지?”

“으응, 그런 것 같아.”

“당연한 일이야, 베필이니까.”

타냐의 말에 토디엘의 얼굴이 다시 빨갛게 변했다. 비안느 말만 하면 얼굴은 물론 귀까지 빨갛게 변하는
토디엘을 보면서 타냐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본의 아니게 토디엘에게 무거운 짐을 떠안기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

황궁호위대로 들어온 토디엘은 공주인 비안느의 호위무사를 맡았다. 덕분에 24 시간 비안느와 함께 한다.
비안느는 토디엘이 자신의 호위무사가 되었다는 말에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럼 안느하고 하루종일 같이 있는거야?”

“응, 하루종일 같이 있을거야.”

토디엘의 말에 비안느는 꺄르르 웃으며 그의 목에 매달렸다. 비안느를 안은 토디엘은 타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픈 사람 근처에도 못가게 해야해.

사실 비안느의 호위도 호위지만 그녀의 시야에 아픈 사람이 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이 더 큰 임무였다.

“엘 삼촌.”

“응?”

“우리 썰매 타러가자, 공주궁뒤에 보면 언덕이 있는데 거기 눈썰매타기 진짜 좋아.”

애칭으로 토디엘을 엘이라 부르는 비안느였다.

“감기들면 어쩌려고.”

“감기 안들게 털옷 입고 가면돼, 얼른 가자.”

비안느가 토디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작은 아이가 끌어 당겼지만 토디엘은 그녀에게 질질 끌려갔다.

하긴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썰매를 타는 것이 안전하긴 하지.

그렇게 생각한 토디엘은 비안느와 함께 공주궁 뒤쪽에 있는 작은 언덕으로 향했다.

눈이 새하얗게 덮힌 언덕을 한번 쳐다본 토디엘이 비안느앞에 등을 내밀었다.

“업혀.”

“응.”
1 초의 망설임도 없이 토디엘의 등에 폴짝 뛰어 오른 비안느가 이랴! 하고 외쳤다. 토디엘은 깃털보다
가벼운 비안느를 업고 눈쌓인 언덕을 올라가며 생각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언제 키워서…..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하얀 눈 위에 토디엘의 발자국이 하나 둘 생겨났다. 그의 등에 업힌 비안느는 마치


말 위에라도 올라탄듯 몸을 팡팡 굴려댔다.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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