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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겠어."
그냥 접고 살아야지.
다행히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상 속에서, 나는 귀족으로 태어났다.
비록 한적한 시골밖에 없는 영지지만 있는 건 다 있는데다가 평민으로 태어난 것보다는 수 백배 낫다.
평민은 말이 평민이지, 귀족에게 감히 대들 수 없는 하층민이니까.
또한 가문을 이을 장남이 아니라 막내로 태어나 괜한 권력 싸움이 휘말릴 일도 없어 느긋한 현생을 보내는
중이다.
"음..."
"씨부레. 이게 무슨 말이야."
"흠..."
"오. 괜찮네."
'에이씨. 이거 한 번 잘못 쓰면 다시 써야하잖아.'
*******
제논 일대기.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발간된 소설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문학 소설인줄 알았다가 어느 한 귀족이 밤낮을 지새워 읽었다는 소문이 발생한
이후부터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과거, 세상을 파멸 직전으로 몰아넣었던 대악마와 그 악마를 부활시키려는 집단,
그리고 그걸 저지하는 영웅의 이야기다.
겉으로는 평범한 영웅의 서사시로 보였지만 '마족'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부분이 눈길을 끌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 사람은 마족의 슬픈 숙명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는 자다.
-욕망을 이겨내면서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이야말로 '진심'이라는 글귀. 이 글귀 하나가 모든 마족들에게
절제를 가르쳐줬다.
"이.... 이게 머선 일이고."
이걸 어쩌지.
< 1화 >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고.
내 아버지 되는 사람이다.
나는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아버지가 아무리 귀족이라지만 오등작 중 최하위인 '
남작'이다.
내 불안한 표정을 읽었는지 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투박하고 굳은살이 박혀있어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지만 마음이 평온해졌다.
"엄마도 다과회에서 최대한 상황을 살펴볼게. 엄마는 우리 아이작이 힘들지 않았으면 하거든."
"어머니..."
'...진짜 좆 됐다.'
아버지가 웃음을 멈추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앞으로 내가 입학하게 될 아카데미를
떠올렸다.
이 세상은 몬스터가 존재하는지라 호랑이나 사자, 심지어 코끼리조차 '따위'로 취급하는 괴물들 천지다.
그리고 나는 여타 소설 속 주인공처럼 무력에 재능이 없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질문하셨다. 그녀는 내가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학업에 집중할까봐 염려하는 모습이다.
자식이라면 응당 학업에 집중하는 게 당연한데 어머니는 반대로 내 소설을 더 걱정하는 중이다.
"...후우."
악마가 세상을 집어삼켰을 때가 지금으로부터 3000 년 전이고, 마족이 차별 받았던 역사는 무려 1000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다. 그런데 고작 내가 쓴 소설 하나로 그러한 차별이 사라졌다니 쉬이 믿지 못할
수밖에.
사실 내 작품은 깔끔하게 묻혔는데 상심하지 않도록 아버지가 뒷공작을 벌였다는 게 더 신빙성이 높다.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할 거라고 말해... 미네르바
제국도 흔쾌히 허가.
-제논 일대기의 영향으로 마족을 향한 차별적인 시선이 완화된 지금, 각 국가들의 교우를 위해...
"... ..."
지랄하지 마, 십팔.
******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카락,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핏빛 눈동자. 마지막으로 악마처럼 머리에 솟아나있는
뿔까지.
그들은 마족이었다.
"이건 제가 선택한 일이에요. 그리고 이종족과 마족이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지금이
적기라는 걸 아빠도 아시잖아요?"
"그건 그렇다만..."
이어서 여인의 아버지이자 세간에 '마왕'이라 불리는 남자, 데스칼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 헬리움은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데스칼의 말마따나 마족을 향한 차별적인 시선은 대폭 줄어들었지만, 그동안 발생한 갈등의 골은 여전히
깊은 상황이다.
그에 마왕의 딸이자 헬리움의 하나밖에 없는 공주, 세실리는 빙긋 웃더니 조곤조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빠도 제논 일대기를 읽으셨죠? 5 권의 마지막에 사크란이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나요?"
"... ..."
"사크란은 최후의 순간 자기가 지켜낸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어요. 소중한 이들을 위해 스스로
악마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용기이며, 희생일지어니. 나는 악마가 아닌
인간으로 죽는 것이다. 라면서."
"... ..."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저는 절대 허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분명 이 이야기를 쓴 저자는 과거
동족에게 큰 은혜를 입은 게 틀림없어요.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감동적이면서 우리 동족의 애환을
고스란히 드러낸 이야기를 적지 않았겠죠."
데스칼은 상상의 나래에 빠져있는 세실리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조용히 거들어줬다.
또한 리퍼는 본래 같은 동족이었던 악마를 처단할 때마다 끔찍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그래서 리퍼는
힘에 취해 악마로 변하는 것보다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율이 훨씬 많다.
"아무튼 네 의지가 그렇다면 말리진 않으마. 대신 미네르바 제국에 저자가 있을 거라는 확신은 하지 마렴.
익명으로 낸 걸 보면 아마 은거한 현자일 확률이 크니까. 설령 우연히 만나도 반드시 예의를 차리렴."
"아빠도 참. 저도 이제 성인이라고요?"
세실리는 데스칼의 걱정섞인 말에 손을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도 데스칼은 자신의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혹해 음흉하면서 욕망어린 손길이 뻗어온다? 그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세실리는 산 하나 즈음이야 가뿐하게 날려버릴 힘을 갖고 있다. 괜히 헬리움의 차기 마왕으로 거론되는 게
아니다.
< 2화 >
전에도 말했지만 내 취미는 독서다. 여기는 스마트폰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어서
자연스레 독서를 취미로 삼게 되었다.
이 세상은 판타지라 다양한 종족과 몬스터가 존재하며, 미지의 탐험을 즐기는 모험가가 있다. 더구나
실제로 '신'이 존재하여 신화도 널리 퍼져있다.
모험가가 쓴 자서전이나 신화는 나에게 판타지 소설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일기나 재미없는 신화 이야기로 치부하겠지만.
예를 들어 자서전에 몬스터나 어떤 식물을 발견했다는 문구가 있다고 치자. 설명에는 단순히 무엇 무엇을
발견했다는 말만 나올 뿐, 세부적인 묘사는 거의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모험가의 자서전을 읽을 때는 항상 도감을 대동하는 편이다. 도감에는 그림과 설명이
첨부되어있으니 상상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뒤이어 하녀가 내 책상 위에 음식을 올려놓기 시작하자 쓰다 말았던 원고를 옆으로 치웠다. 내가 원고를
치우자 하녀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따라갔다.
"... ..."
"다 먹었어."
"브로콜리도 드셔야합니다."
"싫어."
이후로 그녀는 빈 그릇들을 트레이에 올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그녀가 나가자마자 자물쇠를 풀고 그
안에서 원고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렸다.
오히려 배경이 된 종교의 신자가 대폭 늘어났다는 소식이 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조연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까.
물론 진이 최종보스라는 건 변함없지만.
"끄으응~"
'집중력이 엄청 늘긴 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처럼 딴짓을 할만한 문물이 없는 것도 있지만 내 집중력 자체도 대단한 수준이다.
우드득- 우득-
너무 오랜 시간동안 책상에 앉아있어서 그런지 허리를 약간만 비틀었는데 리드미컬한 뼈소리가 들린다.
화염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맹수처럼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 여기까지는 아버지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나 이목구비는 아니다.
그나마 불만인 건 기생오래비마냥 여리여리해 보인다는 점인데, 이정도야 넘어갈 수 있다. 이 얼굴에
그것까지 바라면 사치지.
대학교 생활은 전생에서도 해봤지만 그래도 기대가 된다. 과연 아카데미에서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
먼저 입학한 형과 누나의 말을 빌리자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들었다. 하기야 전생의 대학교도
까딱 잘못하면 매장당하는데 신분이 존재하는 여기는 오죽할까.
나는 그나마 남작가 영식이라 괜찮지, 힘든 시험을 통과해 입학한 평민들은 꽤 고달플 것이다.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가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음..."
더군다나 평론가들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나이를 지긋하게 드신 현자로 추정하는 중이다. 20 살조차
되지 않은 파릇파릇한 애송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괜한 의심을 받지 않게 조심하면서 아카데미 생활을 즐기면 된다. 겸사겸사 원고도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 ..."
전생에서도 이런 댓글을 받아본 적이 있지만 웃으며 넘길 수 있다. 그만큼 독자들이 내 작품이 재미있어서
장난을 치는 거였으니까.
존나 무섭다.
*****
"아아아악!!"
그 황궁에서부터 한 남자의 고성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자그마치 황족이 기거하는 황궁인만큼 사소한 것
하나 하나 쉽게 지나칠 수 없는데 하물며 비명이라면?
당연히 난리가 나야겠지만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비명을 지른 남자가 위치한 곳이 철저하게 방음
처리가 된 것도 있으며 무엇보다...
그에 남자, 그러니까 리나의 오빠이면서도 황태자의 직위를 가진 레오르트는 콧숨을 길게 내쉬며 푹신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리나는 혀를 차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녀도 제논 일대기의 열렬한 팬으로써 책이 더 나오기를 바라고 있다.
"후우... 지금은 신문에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야겠네요. 저자가 신문을 본다면 적어도 경각심을
가지겠죠."
"글쎄다. 과연 이 사람이 의지를 굽힐까? 난 아니라고 본다만."
"하지만 세상 일을 다 겪은 현자일 가능성이 높으니 주의를 기울이긴 하겠죠."
아이작은 지금까지 신문으로만 세상 소식을 접하는 바람에 그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다. 바깥에 나간 적이
있어야 말이지.
더군다나 아이작은 남작의 자식, 그것도 아버지가 평민에서 귀족으로 올라간 케이스라 인맥도 좁은 편이다.
어머니가 다과회에서 정보를 수집한다고한들 엄연히 한계가 있는 법이다.
헤일로 아카데미는 미네르바 제국에서 제일 뛰어난 교육 기관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전부터 교류가
없던 사람들만 입학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헬리움의 공주도 입학한다면서요? 듣자하니 그녀도 제논 일대기의 열렬한 팬이라고 들었는데."
"마족은 그럴 수밖에 없지. 이 책이 나온 이후로 대우 자체가 달라졌는데."
"음..."
< 3화 >
전생에서 '만년필'이라고 불리는 펜처럼 생겼으며 검은색 바탕에 황금빛 테가 멋드러지게 조합되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이곳의 마법은 보급화, 그리고 대중화가 이루어지지 않기에 대부분 상위층만 이용하는 편이다.
"네가 벌어다 준 돈에 비하면 이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그리고 막상 너에게 줄 선물하니까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더구나. 이 아빠가 미안하다."
"아버지..."
"가서도 열심히 글 쓰고, 그렇다고 학업을 등한시 하라는 말은 아니다. 힘든 게 있다면 거기 형이랑
누나한테 부탁하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몸 조심하거라! 방학이 되면 형이랑 누나랑 같이 찾아오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마! 모쪼록 건강해야한다!"
'이제 가는구나.'
하지만 때로는 과학이 조금만 더 발명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손재주가 인간보다 뛰어난 드워프조차도
뛰어난 무기 및 아이템을 제작하는데 힘을 쓰고 있지, 교통수단은 뒷전이다.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 때마침 드워프는 신박하다 못해 기괴한 마법 무구까지 제작하는 괴짜가 널려있다.
그러니 교통 및 물자 공급을 위한 목표, 적당히 우울한 과거사만 있다면 개연성은 충분하다.
특히 드워프 사이에서 스승과 제자는 부모자식이나 다름없어서, 스승이 세상을 떠나면 그 제자가 뒤를
잇는 전통이 있다고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다.
설령 그것이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는 일이어도 끝까지 감내하는 편이다. 이걸로 어째서 드워프에 괴짜가
많은지 알 수 있다.
'불우한 과거사는 이만하면 됐고. 마나를 연소시켜서 움직이는 증기 기관차로 설정하면 되겠지.'
나는 아버지가 선물해준 마법필로 수첩에 끄적였다. 잊어버리지 않게 기록하는 버릇은 전생에도 있었기에
지금은 수첩으로 대신하는 편이다.
'딱 옛날 소설 느낌이지.'
"손님?"
"... ..."
"손님?"
"네?"
"우와..."
내 고향은 거리에 나가면 들판이나 농경지가 대부분인데 여기는 건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건물의 양식도
그렇고 거리에 걸어다니는 행인도 그렇고 유럽에 온 듯한 느낌이다.
가끔 가다가 철제 갑옷을 착용한 기사와 지팡이를 든 마법사도 보였는데 아무래도 치안 담당인 듯했다.
'...호그와트인가?'
거짓말이 아니라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가 버젓이 세워져 있다. 성만한 크기와 더불어 원뿔형
지붕까지. 내가 알던 호그와트의 외양을 그대로 띄고 있다.
뒤이어 마부는 한 번 웃어준 뒤에 방향을 돌렸다. 나는 마부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다가 등을 돌렸다.
"히야..."
"...이럴 때가 아니지."
가끔씩 통일된 복장, 즉 교복을 입은 사람들도 보였는데 아마 재학생일 것이다. 교복은 입학생들에게만
지급되는 거니까.
"...오."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도 있구나. 나도 지금 내 얼굴이 꽤 잘생겼다 자부하는데 저 남자 앞에서는 한 수
접어야 할 듯했다.
또한 남자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오는 여자는 어떠한가. 순백의 드레스를 입어 미의 화신이라고 칭해지는
엘프 못지 않게 아름다운 자태를 뿜내는 중이다.
특이한 점이라면 두 명 다 금발에 벽안을 갖고 있다는 건데, 인상이 좀 다르긴 하지만 누가 봐도 남매였다.
웨이브 진 갈색 머리카락과 동글동글한 눈매가 귀여운 소녀였으며 체구도 상대적으로 아담하여 다람쥐
같았다.
"레오르트 님! 오랜만이에요!"
"음? 그대는..."
하지만 레오르트는 소녀가 팔짱을 껴도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그동안 소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기야 누구라도 길을 가다가 모르는 사람이 앵겨붙으면 화가 날만도 하다. 그것도 목적이 뻔히 보이는
수작이라면 더더욱.
절대 들키지 말아야지.
< 4화 >
미네르바 제국에서 최고의 교육기관이라는 헤일로 아카데미의 총장은 분명 높으신 분일테고, 이들은 그
높으신 분이 친절하게 설명하니 좋게 볼 수도 있다.
신입생 뿐만 아니라 학부모는 물론, 유망주를 보러 온 사람도 많기에 수용 인원을 늘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엄청난 크기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하나도 안 보이네.'
전에는 얼마나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살았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마족은 언제나 걸어다니는 시한
폭탄 그 이상으로 취급당했으니 매우 심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족은 어지간해서 헬리움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는 모양이다. 세실리의 결정은 그만큼
파격적이고, 또한 과감했다.
눈매를 좁히며 단상에 시선을 집중해도 공주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 거리에서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면 그것도 이상한 거지만 나에게는 그냥 검은색 덩어리가 움직이는 중이다.
주위에서 예쁘다, 아름답다, 가슴 크다, 섹시하다 등등. 외모와 관련된 극찬이 쏟아지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나는 볼 수 없었다.
우웅-
[아. 아아. 모두들 안녕하신가요? 반갑습니다.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이라
합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지 세실리가 입을 열자마자 강당 내부가 고요해졌다. 목소리가 얼마나 예쁘면
시끄러웠던 강당이 삽시간에 조용해질까.
세실리는 좌중을 한 번 둘러보는 듯하더니 힘있는 목소리로 본인의 심정을 소신껏 표현했다.
"음..."
"아이작!"
"응?"
"여기야 여기!"
고개를 돌리자 나와 같은 붉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맹금류 같은 황금빛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팔을 흔들고
있었다. 또한 그 옆에는 남색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황금색 눈동자를 지닌 여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두 남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반가움에 미소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형! 누나!"
"오랜만이구나. 아이작."
"잘 지냈어?"
형은 아버지를 똑 빼닮아 강직한 전사의 이미지를 풍겼고, 누나는 어머니를 닮아서 상당한 미녀다.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우리 막내 입학식하는 거 보러 왔지."
니콜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째서 그녀가 허리를 숙였냐면 내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다.
그런 내 표정에 데이브는 화들짝 놀라며 변명을 주절주절 내뱉기 시작했다. 옆의 니콜은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참고로 전생의 나이까지 합치면 내가 이 둘보다 나이가 많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건 아제 신경쓰지
않는다.
지금 같은 상황에는 화제를 돌리는 게 최선이다. 데이브는 내 질문을 듣자마자 단상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와 니콜 또한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단상에는 아직까지 세실리 공주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누군가 있었는데 아카데미 입구에서
봤던 리나 황녀였다.
대답을 들은 니콜이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니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나랑 오빠한테 물어봐. 전공이 달라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생활이면 도와줄 수
있을 거야."
"응. 알았어."
"아카데미 생활할 때는 학업에 집중해야한다. 괜히 부담 갖지 말고 글을 쓸 필요는 없어. 알겠지?"
"응."
"착하다. 우리 아이작."
가슴이 따스해지는 재회를 뒤로 하고, 나는 우선적으로 숙소로 향했다. 숙소의 위치는 입학식 전에 지도
조교가 모두 설명해줬다.
"룰루루~"
*****
한편 아이작이 떠난 대강당.
그렇다. 이번에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와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 리나다.
자신이 청순한 이미지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면 세실리는 성숙한 이미지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자태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부위가 있다.
유일한 오점은 그녀가 마족이라는 건데, 솔직히 이정도 미모 앞에서는 굳이 제논 일대기가 발매되지
않았더라도 수많은 남성의 애간장을 녹였을 것이다.
리나도 제논 일대기가 발간되기 전까지 마족을 폭탄 취급했다. 실제로 황궁 밖으로 나갔을 때 악마화를 한
마족에게 습격받은 적이 있었다.
"저도 악마화를 한 마족에게 습격을 받았던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마족이라면 치를 떨었죠. 그런데 이
책이 나온 이후부터 마족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더라고요."
"... ..."
"당장 저조차 이런 생각을 하는데 세실리 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요."
그 질문을 들은 세실리는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리나가 그녀의 아리따운 미소에 속으로 감탄하고 있을 때, 세실리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리나는 순간 당황하며 세실리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녀의 속내를 들으니 자기자신이 초라해졌다.
아. 실수했다.
세실리는 리나의 새하얀 얼굴이 실시간으로 붉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푸에취!"
< 5화 >
심지어 마법으로 구현했는지 몰라도 숙소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장치까지 있었으며, 심지어 냉장고까지
있었다. 도대체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마법으로 한 거겠지.
'좋으면 됐지.'
여기는 판타지 세상이라 전생의 상식이 처참하게 박살나는 곳이다. 당장 운석까지 떨어뜨리는 괴수들이
즐비해 있는데 상식 쯤이야.
나는 전반적으로 깔끔한 숙소를 둘러보다가 안으로 걸어갔다. 푹신한 침대도 있고, 책상도 있고, 있는 건
다 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응?"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하니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지급해주는 교복이었다. 상의는 흰색 와이셔츠고, 바지는
검은색이다. 이외에도 와이셔츠 위에 껴입을 수 있는 여러 옷가지가 존재했다.
남장한 여학생 같은데. 얼굴이 어머니를 닮아 선이 얇고 예쁘장하게 생긴데다가 몸매까지 슬림한 탓이다.
물론 못 생긴 것보다는 훨씬 낫다.
"지금 시간이..."
그러고 보니 원고지를 어디서 판매하는지 우선적으로 알아놓아야 한다. 여분은 차고 넘치도록 들고 왔지만
만약을 위해서다.
여기는 연필과 지우개가 없어서 한 번 삐끗하면 원고를 버려야한다. 그때문에 화를 내거나 욕지거리를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많다.
"푸에취! 아, 씨발."
바로 지금처럼.
시간이 남아돌아 원고를 작성하던 와중에 뜬금없이 재채기가 터져나왔다. 원고에 침이 덕지덕지 발라져
잉크가 번졌다.
"진짜 넓네."
강의를 위한 건물은 물론이고, 도서관, 서점, 상점, 의류점, 식당, 대장간 등등.
딸랑-
"어서오세요~"
"여기 원고지는 없나요?"
"어떤 원고지를 말씀하시는 거죠?"
"이런 재질이요."
지금까지 부모님의 도움으로 원고를 출판사에 주기만 했지, 내 책이 어떻게 팔리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
한 번 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그리고...
"... ..."
내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문구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서 어떤 여자가 앙칼진 목소리로 짜증을 부렸다.
인상을 써서 그런지 고집이 강해보이지만 고양이상의 미인이다. 독특하게도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의
소유자였으며 눈동자는 푸른색이었다.
여자를 말리느라 진땀을 빼는 중인 남자는 그의 오빠로 추정됐다. 이목구비는 달라도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색깔이 완벽히 일치했다.
이제는 어질어질하다.
그래도 덕분에 현재 내 소설이 어떤지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사재기까지 할 정도면 말 다했지.
"...밥이나 먹자."
*****
이번 헤일로 아카데미의 신입생 수는 대략 200 명이다. 여기서 무학은 150 명이고, 문학은 50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어째서 문학보다 무학에 사람들이 3 배 많냐고 물으면 이 세상의 특징 때문이다. 몬스터와 마나가
존재하고, 전생과 달리 기계보다는 사람의 힘에 의존하는 세상.
그러다 보니 교육도 '무(武)'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며, 마법조차 일종의 무력이라 무학에 편입된 상태다.
이때문에 무학 내부에서도 특성에 따라 반이 나뉘어진다고 들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문학이 외면당한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절대 아니다. 일신의 무력이 없어도 세상을
뒤바꾼 사례는 이곳에서도 빈번하다.
거기다 군인에 가까운 무학과 달리 문학은 전문직이라고 할 수 있다. 군인이 국가를 지켜주는 창과
방패라면, 전문직은 국가를 지탱하는 뼈대다.
리나와 세실리가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어떤 한 남학생이 끼어들었다. 세실리와 리나의 얼굴에
순간 불쾌감이 새겨졌으나 금방 사라졌다.
"제 이름은 잭슨 미렐 케리손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마족의 공주님과 제국의 위대한 태양이시여."
잭슨이라는 놈은 리나가 자신의 가문에 대해서 대신 설명해주자 으쓱거렸다. 생긴대로 논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행동 하나하나가 재수없고 느끼함만이 느껴졌다.
뒤이어 자신감이라도 얻었는지 잭슨은 세실리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실리는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도 평온한 얼굴 그대로였다.
"들으셨죠? 어떻습니까?"
"어떻냐고요?"
"네. 혹시 저에게 관심이 있으시다면..."
"관심없으니까 저리 가주실래요?"
"...나중에. 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시하자 잭슨도 급히 사과하며 돌아갔다. 얼굴을 확인하니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으락푸르락해진 상태다.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는데 저 놈은 자기 알아서 깎아먹었다. 그래봤자 백작가 영식이 황녀에게 '
감히' 개길 수는 없겠지.
"어? 너 어제 그 빨간머리!"
"응?"
아닌데.
내가 작가야, 이 사람아.
< 6화 >
아무튼 레킬리스 공작가를 설명하자면 미네르바 제국의 개국공신 중 하나다. 더군다나 예로부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여 미네르바 제국민들에게 평판이 매우 좋다.
물론 가끔씩 개망나니가 나오는 경우가 있기는하나 적발되면 가문에서 호적이 파이고 추방당한다.
전생에서도 권력이 높으면 갑질하는 사람이 많은데 하물며 여기는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는 세상.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도 없어서 증거를 남기기도 어렵다.
이로인해 귀족들이 알음알음 평민을 차별하는 풍조는 여전하다. 심지어 대놓고 핍박해도 권력을 무마시킬
수 있다.
드르륵-
마리랑 신나게 떠드는 와중에 강의실 앞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렀다. 그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웅성거렸던
강의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크흠."
마침내 칠판 중앙에 선 노인은 헛기침을 하더니 좌중을 둘러봤다. 나를 포함한 모든 학생들은 그의 입이
열릴 때까지 진득히 기다렸다.
이윽고 노인의 시선이 오른쪽부터 시작해 왼쪽 끝까지 다다랐을 무렵, 무겁게 닫혀있던 그의 입이 열렸다.
목소리가 상당히 점잖은데다 느긋해서 귀에 속속 들어왔다. 비루스라고 소개한 교수가 허리를 꾸벅 숙이자
학생들은 박수로 맞이해줬다.
그러면서 리나와 세실리가 있는 곳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겨 정확히 마리를 쳐다봤다. 하기야 황녀나
마족의 공주가 아니더라도 마리도 공작가 출신이니 충분히 특별한 사람이다.
"...어쩌라는 거야?"
'아는 것이 힘이다.'
교수가 부가 설명을 요청하자 리나는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이 설명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몸 내부의 마나를 순환시키는 연공법부터 시작해 마법, 오러, 그리고 문명을 재건하기 위한 건축까지.
이 모든 게 지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지식이 없다면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하죠. 그러니 저는
지식이 사람을 높은 곳까지 끌어올려준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좋아요. 모두 박수."
짝짝짝짝짝!
"리나 학생의 말대로 지식은 사람을 더 높은 곳에 나아가게 만들 수 있죠. 하지만 제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에요. 여기서 더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학생이 있습니까?"
"... ..."
교수가 재차 물어도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게 자그마치 황녀의 발표를 축약해야한다.
'빌어먹을 계급 사회.'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스윽-
"오! 아마 이름이..."
"세, 세실리라고 합니다..."
"좋아요. 세실리 학생. 학생은 지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죠?"
당당하게 연설할 때와 달리 상당히 풀이 죽은 목소리다. 아무래도 연설 때와 다르게 확신이 없으니
자신감이 사라진 걸로 추측된다.
"후우..."
세실리는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스스로를 다독이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감을
되찾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로 마족다운 대답이다. 비루스 교수도 흥미가 돋았는지 얼굴을 살짝 내밀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있을리가.
역시나 교수는 전생에서도 그러더니 지금도 빅엿을 먹이려고 한다. 나는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나는 속으로 오만가지 쌍욕을 지껄이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수 십개의 시선들이 정확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최대한 다른 대답을 궁리했지만 전생의 명언만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아다닐
뿐이다.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호."
그러거나 말거나 교수의 눈빛은 한층 초롱초롱해졌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될대로 되라는 듯이
말했다.
진짜로 더이상 할 말이 없었기에 지체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정적이 강의실에 내려앉았다.
나는 정적이 일자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교수를 쳐다봤다. 교수는 내 발표에 감명받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짝짝짝짝짝!
"... ..."
< 7화 >
"오올~ 너 머리 좀 잘 돌아간다?"
"시끄러."
칭찬을 해줘도 전혀 기쁘지가 않다. 칭찬도 칭찬 같아야지 히죽거리는 표정으로 말하니까 놀리는 것 같다.
전생의 대학교 수업처럼 지루하기만 했지, 쓸모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판타지 소설에나 있을법한
아카데미에 다닌다는 걸 실감시켜줬다.
그렇게 교수의 장황한 설명이 약 30 분 동안 이어졌을 때 즈음, 모두의 집중을 이끌만한 이야기가 나왔다.
'아니. 진짜로?'
그거 전생에서 널리고 널린 거예요. 판타지가 거기서 거기지 뭐. 양념만 잘 버무려주면 독자들은 비슷한
이야기여도 재미있다고 해줬다.
"또 얼마나 많은 경험이 있으면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확신하건데, 제논 일대기의 저자는
범인으로써는 상상조차 못할 경험을 겪었을 겁니다."
다른 세상에서 색다른 경험을 겪었을 뿐더러 상상조차 못할 문물을 쉽게 접했다. 이것도 경험이라면
경험이겠지.
비루스가 설명을 이어나가던 도중에 누군가 팔을 번쩍 들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고동색 머리카락의
여학생이었다. 앞자리에 앉아서 그런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가던지 간에 질문을 싫어하는 교수는 없다고, 비루스 교수는 화색을 띄며 그녀에게 물었다.
"물론이지요. 이름이?"
"레오나라고 합니다."
"그래요. 레오나 학생. 질문이 뭐죠?"
레오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에서 온갖 시선들이 쏟아졌다. 이어서 또박또박하면서 무뚝뚝한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어째서 평민이 아닌 귀족들에게만 인지도가 높았냐면, 이전까지의 소설은 대부분 귀족들밖에 못 읽었기
때문입니다. 평민에게는 어려운 단어가 많아서 거의 해독하는 수준이었거든요. 이러니 가독성은 떨어지고,
나중에 가면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한 방향으로 꼬여버리죠."
"... ..."
"하지만 제논 일대기는 평민조차 쉽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문장과 표현력을 구비했습니다. 제논
일대기는 교양을 쌓을 수 없다?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본디 교양이라는 건 응당 학문과 지식을 얻어야만
터득할 수 있는 것."
여기저기 서성거리던 교수의 발걸음을 딱 멈췄다. 그리고 마침내 레오나를 똑바로 직시하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 대답을 들은 마리 왈.
레오나는 대답하지 않고 세실리가 앉아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세실리는 본인이 언급될 줄은
몰랐는지 살짝 움찔거렸으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아무튼 특정 지식을 완전히 자기 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지식이 무엇을 알려주는지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제논 일대기는 그 점이 극도로 진보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죠."
도중에 나조차도 몰랐던 이야기의 의미를 교수가 스스로 꾸며내기도 했다. 정작 작가 본인은 아무
의미없이 적었다는 게 함정이지만.
"아뇨. 여러분이 원하는 강의만 들으셔도 상관없어요. 단, 유급을 당하지 않으려면 일정 이상의 점수가
필요할 겁니다."
"그럼 관심 없는 전공은 출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립니까?"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어차피 교수들도 본인의 강의에 관심있는 학생에게만 집중할테니까요. 대신 아까
말했듯이 일정 이상의 점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되도록 많은 강의를 들어 출석 점수라도 따는 것이 좋을
겁니다."
확실히 이것만 본다면 전생의 대학교와 비슷한 시스템이다. 내가 따로 수강 신청을 하지 않아도 전공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게 차이지만.
강의 시간이 모두 끝남과 동시에 비루스가 허리를 숙이며 신사답게 인사했다. 당연하게도 인상깊은
강의였는지라 학생들은 박수로 응대해줬다.
이윽고 비루스가 강의실 밖으로 나가고, 조교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와 학생들에게 종이를
배부해줬다. 조금 전 교수가 언급한 시간표인 듯했다.
"미친. 이게 뭐야."
그리고 나는 시간표를 확인하자마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오전 9 시부터 오후 5 시까지 빽빽하게 채워진
수업은 상관없는데 전공의 수가 어마어마하다.
"쓸데없이 많기만 하네. 여기서 특정 점수만 확보하면 된다는 거지? 넌 무슨 전공을 들을거야?"
"...일단 다 들어보고. 너무 많아서 나도 모르겠다. 일단 역사랑 신학, 그리고 생물 정도는 고려하고
있어."
"아이작 씨?"
"응?"
그리고...
태양처럼 화사한 미모를 내뿜는 리나가 빙긋 웃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색
눈빛에는 강한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또한 그녀의 옆에는 세실리가 서 있었는데, 리나보다는 아니지만 비슷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옘병.'
저주할테다. 교수 새끼.
< 8화 >
리나는 마리의 퉁명스러운 인사에도 미소를 유지하며 다시 시선을 나에게로 옮겼다. 나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하자마자 최대한 태연한 척을 했다.
뒤이어 리나는 조금 전보다 화사한 표정을 짓더니 우아한 목소리로 스스로를 소개했다.
나는 세실리가 앞으로 나서자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세실리도 긴장한 낯빛으로 내 얼굴을
바라봤다.
무엇보다...
"안녕하세요.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연설에서 들었던 것처럼, 세실리가 특유의 고혹적인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헬리움만의 예법인지
심장 쪽에 손을 대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아까 들으셨겠지만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세실리 공주님."
"저도 리나처럼 편하게 세실리라고 부르셔도 돼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그리 물으면서 주변을 힐긋거렸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수많은 학생들의 시선이 이쪽에 집중돼 있다.
특히 오자마자 세실리에게 추파를 던졌던 백작가 영식. 아마 이름이 잭슨이랬나.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러다 중간에 마리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니 마리가 턱을
괴며 짜증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리나를 향하고 있었는데, 어지간히도 리나가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어쩌다보니 세실리, 리나, 나, 마리 순으로 앉게 됐다. 오른쪽을 봐도, 왼쪽을 봐도 미녀가 있어서 좋긴
하다만 압박감이 장난아니다.
그도 그럴게 내 왼쪽은 공작가 영애가, 오른쪽에는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와 헬리움의 공주가 나란히
앉아있다.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 사이에 끼여있던 병사의 심정이 이러할까. 최대한 태연한 척 하고 있으나
가슴이 긴장으로 세차게 두근거렸다.
"그래서 대답은요?"
'씨발. 어떡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도 그 명언을 전생에서 듣기만 했지, 어떤 경위를
통해 나온 건지 하나도 모르니까.
그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낫다. 괜스레 리나가 꼬치꼬치 파고들면 또다른
거짓말을 구상해야 할테니까.
"...모르겠습니다."
"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딱히 설명할 길이 없네요."
"그냥 그렇게 생각한 거라니..."
"대단하시네요."
"...예?"
"정말 대단하시다시고요. 아이작 씨는 평소에도 지식을 힘으로 생각했다는 거잖아요?"
"아, 어쩐지. 어디서 들어본 성에다 머리도 빨간색이라 했더니 붉은 사자의 아들이었구나? 눈도
황금색이고."
"너도 알고 있어?"
"응? 설마 몰라? 붉은 사자의 아들인데도?"
"몰라. 어머니에게 물어봐도 안 알려주셨어."
"분명 그럴 거예요. 호크 경은 자기가 이룩한 업적을 남에게 알리는 걸 달갑지 않아 했거든요. 본래
백작의 작위까지 받을 수 있었지만 그 자리는 과분하다며 일부러 남작 작위를 하사받으셨죠."
진짜였네.
보아하니 찍혀도 제대로 찍힌 걸로 보인다. 나쁘게 찍힌 것 보다야 낫지만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다.
리나는 내 손가락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오른손 중지 손가락에 배긴 굳은살, 그러니까 '펜혹' 쪽이었다.
< 9화 >
"...그건 왜 물으시죠?"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리나에게 되물었다. 그러면서 오른손을 슬며시 감싸는 건 잊지
않았다.
"황궁에서 일하는 사관들 대부분 그쪽에 굳은살이 박혀있거든. 아이작도 같은 이유인가 싶어서."
그녀의 말마따나 여기는 아직 타자기도 발명되지 않아 오로지 수기로만 문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러니
서류를 작성하는 사람, 특히 황궁에서 일하는 사관들의 손에는 굳은살이 자연스레 배길 수밖에 없다.
다행히 어느정도 통한 모양이다. 비록 내 반응 때문인지 몰라도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지만
들킨 것보다야 훨씬 낫다.
나는 마리의 감탄에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머니에게도 칭찬받았던 부분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들으니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마리가 투덜거렸지만 그녀의 손도 매우 예쁜 편이다. 공작가 영애이니 외모뿐만 아니라 다양한 부분에
신경을 쏟아부었겠지.
세실리는 마리의 기습적인 질문에 붉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가 편하게 반말을 사용했다는 부분은 신경
쓰지 않은 듯했다.
이윽고 세실리는 잠깐 망설였다가 조심스레 손을 보여줬다. 그런데 일국의 공주의 손이라기에는 굳은살이
너무 많았다. 특히 손바닥은 거북이 등껍질마냥 거칠고 갈라져 있다.
"혹시 검을 쓰세요?"
"아."
내 질문에 리나도 뒤늦게 깨달았다는 탄성을 내질렀다. 세실리는 쑥쓰럽다는 듯이 손을 감싸며 대답했다.
마족은 엘프와 더불어 태생적으로 마법에 관해서는 다른 종족보다 월등하다. 인간이 온갖 복잡한 연산을
계산하여 마법을 발현한다면, 마족은 그냥 숨 쉬듯이 마법을 펼친다.
더군다나 마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검은 마나'는 일반적인 마나보다 출력이 몇 배는 강하다. 그래서
일반적인 마법사가 불덩이를 하나 던지면 마족은 아예 메테오를 떨어뜨린다.
좋아하는 걸 못 하고 해야 하는 것만 해야하며 가끔씩 극한의 상황에 몰리니 정신력이 단련될 수밖에 없다.
짜악!
강의실 내부에 난데없이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순한 박수였다면 주변 소리에 묻혔겠지만 메아리가
치는 것처럼 울려 퍼져서 모두의 집중을 이끌었다.
인문학 교수였던 비루스가 전체적으로 깐깐한 이미지였다면, 이번에 들어온 교수는 인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새로 들어온 교수는 학생들이 자기한테 집중하자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이며 지시했다. 나는 간달프처럼
생긴 교수를 쳐다보다가 시간표부터 체크했다.
"내 이름은 리프 메그너, 자네들에게 마법학에 관한 지식을 전수해줄 교수라네. 만나서 반갑네."
메그너 교수가 고저없는 목소리로 자기 이름을 밝히자마자 박수 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나는 박수를
치다가 미리 가져왔던 노트와 마법필을 책상 위로 꺼냈다.
인문학 교수였던 비루스 교수는 딱히 메모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꺼내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를
것 같았다. 애시당초 스타일부터 다를 뿐더러 무려 마법학이다.
옆에서 마리가 의외라는 목소리로 물어도 단칼에 대답했다. 마법! 이 얼마나 멋진 울림인가!
머지않아 강의실을 가득 채웠던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 메그너 교수가 늙수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메그너 교수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은 표정을 짓더니 내 눈 밑을 꿈틀거리게 만들만한 발언을 꺼냈다.
"그딴 저급한 소설은 가능하면 내 강의 시간에 언급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난 그런 걸 소설로 인정하기
싫으니까 말이야."
"... ..."
"...세실리?"
"...응?"
"조금 추워지려고 하는데..."
"아...! 미, 미안..."
다행히 리나가 조용히 지적하자 세실리가 다급히 기운을 갈무리하며 곧장 사과했다. 나는 소름이 돋은
팔을 살살 문지르면서 정면을 쳐다봤다.
갑분싸라고 해야 하나. 메그너 교수가 제논 일대기를 대놓고 까내리자 강의실은 쥐 죽은듯이 고요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그너 교수는 쯧쯧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 본인이 처음부터 어려운 단어를 쓰지 말던가. 귀족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을 집어넣었으면서
남탓하는 꼴이라니. 어이가 저 멀리 손을 흔들며 가출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메그너 교수는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의를 시작했다. 비루스 교수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였으나 일단은 수업을 듣는 것이 좋을 듯했다.
전생과 비교하자면 마법학은 기계의 역사를 배우고, 마법은 그 기계를 제작하는거다. 마법이
고위층에게만 허락된 힘이어도 이미 생활 속에 녹아들어 있으니 그 역사도 매우 방대할 것이다.
사각- 사각-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위의 말들이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저 발언은 비루스 교수의
신념과 정면으로 맞서는 말이다.
"그건 아닐세. 마법에만 국한된 이야기지, 다른 지식은 상관없다네. 마법은 실로 위험한 힘이니까 말이야.
그런 힘을 숨 쉬듯이 쓰는 종족, 그러니까 마족과 엘프를 보면 알 수 있어. 거기다 마족처럼 가끔
가다가 제어까지 못 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재앙 수준이라네."
"... ..."
"그 불쏘시개에서는 비극적인 숙명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지만 마족은 결국 마족일 뿐이야. 아무리 인간인
척 해도 결국 본질은 바뀌지 않는 법이지."
하기야 아무리 제논 일대기가 마족을 향한 시선을 바꾸었다고한들, 마족을 여전히 불안 요소로 취급하는
사람도 많다. 거기다 메그너 교수는 꼰대에다가 제논 일대기를 부정하는 사람이니 더더욱.
리나가 소근거리며 달래줘도 세실리의 얼굴은 도통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의기소침하게
떨어뜨렸다.
"마법은 분명히 위험한 힘은 맞지만, 잘 사용한다면 사람의 목숨을 구하거나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줄
수도 있는 힘입니다."
"뭐?"
"...아이작 씨?"
메그너 교수는 내 발표에 인상을 찌푸렸고, 세실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내가 말을 이으면 이을 수록 메그너 교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솔직히 나 같아도 심기가 불편할 것이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한 것들을 어느 한 풋내기가 모조리 부정한 꼴이니까.
하하하하!
내 말에 강의실에는 미약한 웃음꽃이 폈다. 마리는 푸핫! 하며 웃음을 터뜨렸고 리나도 통쾌했는지
조숙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순간 메그너 교수가 나를 불렀다. 교수가 부름과 동시에 웃음꽃이 폈던 강의실 내부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네. 교수님."
"난 자네같이 불성실한 학생은 필요없어."
"꺼지게."
"...네?"
"원하는 대로 내 친히 눈을 낮춰서 말해주겠네. 나가."
메그너 교수는 강의실 밖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강의실의 분위기가 방금 전보다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는 메그너 교수와 한동안 눈싸움을 하다가 양옆을 둘러봤다. 마리는 눈치를 보고 있었고, 리나는
놀랐다는 표정을, 세실리는 걱정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내는 중이다.
네네. 꼰대 말 잘 들었고요.
"왜 다시 들어오나?"
"뭘 놓고 가서요."
"그게 뭐지?"
메그너 교수가 묻자마자 그와 똑바로 마주했다. 책상에 앉아있는 학생들이 이쪽을 보고 있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다량의 백지로 구성돼 있으며 거기에 기록을 할 수도 있고 배운 지식을 요약하거나 정리할 수도 있으며,
어떤 때에는 정보를 분석하기 위해 필요하고, 어떤 때에는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제작하기 위해서는
인쇄소의 도움이 필요하며 과거에는 비싼 값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시중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요."
"... ..."
어우. 숨 차다. 역시 영화는 영화인 모양이다. 그래도 말을 더듬지 않고 끝까지 해냈으니 만족스러웠다.
"...그게 대체 뭔데?"
뭐긴 뭐야.
"노트요."
하하하!
장황한 설명과 달리 너무나 간단했던 물건의 정체에 강의실에는 다시 한 번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러나
메그너 교수는 굴욕감에 얼굴이 살짝 붉어진 상태였다.
이윽고 메그너 교수는 학생들을 한 번 노려본 뒤에 분노보다는 황당에 가까운 목소리로 나를 질책했다.
하하하하!
결국 웃음밭이 된 강의실 내부와 달리, 메그너 교수의 표정은 썩 볼만했다. 나는 망연자실한 메그너
교수를 놔두고 제자리로 돌아가 노트와 펜을 가져갔다.
이정도 정치질 쯤은 간단하다. 정말로 내가 과도한 징계를 먹게 된다면 메그너 교수의 신상은 보장할 수
없게 된다.
'부모님한테 한 소리 듣겠지만...'
그순간이었다.
"...역시 재미있네."
"네?"
"아냐. 아무것도."
*****
"야. 그거 들었어?"
"뭐가?"
"메그너 교수 있잖아. 교수직 박탈당한 거."
"뭐? 진짜?"
"응. 제논 일대기를 불쏘시개라고 욕한 것부터가 아웃이었다는데?"
"... ..."
< 10 화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첫 수업은 대부분 오리엔테이션처럼 무엇을 배우는지만 가르쳐줬기에 중간중간
시간도 많이 비는 편이었다.
게다가 전공의 수는 총 18 과목이며 한 과목당 최고 점수는 100 점인데, 여기서 도합 900 점을 넘겨야
유급을 면할 수 있다. 도합 점수가 1200 점 이상이라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한다.
당장 한 과목을 100 점 맞는 것도 어려운데 1200 점이라니, 범인에 불과한 나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다.
'일단 철학이랑, 인문학, 생물학, 역사학, 신학은 필수로 하고... 나머지가 문제네. 문과인줄만
알았는데 수학은 왜 있는 거야?'
어쩐지 마법과 관련된 책이 더럽게 어렵더라. 수학자나 물리학자나 쓸 법한 단어를 넣어놨으니 문과인
내가 이해할 수 있을리가 만무하다.
더군다나 여기는 '마나'라는 에너지를 불덩이나 얼음덩어리로 구현시키니 수학과 물리학이 미친듯이
진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마법사는 머릿속에 컴퓨터가 떡하니 탑재된 존재라고 보면 편하다.
전생에서 수포자로 지냈던 경험 때문에 한 번 수학을 배워볼까 했지만 첫 수업을 듣자마자 깔끔히 마음을
접었다.
"...작 씨?"
"... ..."
"아이작 씨?"
"응?"
"...세실리 님?"
"집중하고 계셨다면 죄송해요. 지금 강의실에 아이작 님밖에 없어서요."
"아."
세실리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살인적인 미소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아뇨. 딱히 없어요."
"그럼 이 기회에 서로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게 어때요?"
"... ..."
세실리의 제안에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가 이런 호의를 보이는 건 어색하지 않다. 메그너
교수 사건 이후로 나에게 급격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니.
나는 그녀의 제안을 듣고 시계를 확인했다. 강의가 끝난 시간이 정확히 4 시 반이었는데 지금은 5 시다.
헤일로 아카데미에는 흔히 맛집이라 불리는 식당이 많지만, 그렇다고 아카데미 측에서 무료로 지원해주는
학식이 맛없는 건 아니다
책에서도 수명이 긴 종족일 수록 기억력이 높다는데 사실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장수의 대표격인 엘프는
얼마나 기억력이 좋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전생의 기억이 존재하는 나에게도 트라우마는 있다. 그건 바로 전생의 가족이 예기지 못한 사고로
떠나갔을 때다.
그래도 덕분에 가족의 소중함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현생의 내 가족도 좋은 사람들밖에 없어서
매우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마족에게 100 살은 인간으로 치면 이제 막 성인기에 진입했다고 보시면 돼요. 100 살까지 악마가 되고
진정 인간으로 살아갔다는 풍습이죠. 물론 인간으로 환산해도 제가 아이작 씨보다 나이가 많지만요."
"아... 그러시구나."
"흐응."
그러는 동안 내 시선이 자기 뿔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걸까.
세실리가 야릇한 비음을 흘리더니 눈매를 예쁘게 접었다. 그리고는 은근하면서도 기대가 담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칼같은 내 대답에 도리어 세실리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반응에 이해할 수 없는 건 오히려
나였다.
"글쎄요. 저도 제논 일대기를 읽었는지라 마족도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거든요. 게다가 마족한테 피해를
입은 적이 없어서 선입견 자체가 없기도 하고요."
"...그래요?"
"네."
뒤이어 세실리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질문을 날렸다.
이럴 때는 어떻게 대답해야 될까. 가급적이면 좋게 좋게 말하고 싶으나 때로는 채찍도 필요한 법이다.
본래 기대를 한만큼 실망감도 커지는 법이니.
나는 걸음을 옮기다가 고개를 돌려 세실리를 쳐다봤다. 루비색으로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춰졌다.
"아뇨."
저벅-
식당을 코 앞에 두고 세실리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고.
< 11 화 >
마족(魔族).
3000 년 전 악마들이 전 세계를 파멸로 몰아넣었을 시절, 악마들은 본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종족을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악행을 저질렀다.
살인과 강간은 물론이고, 인체 실험과 더불어 갖가지 끔찍한 행동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엘프도 아니고, 드워프도 아니고, 수인도 아닌 인간에게만 영향을 끼쳤는지 수많은 의견이 오고 갔으나
가장 유력한 가설은 바로 '인간'의 특이성이다.
하지만 인간을 포함한 다른 종족들은 마족을 피해자 즉,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악마'로 단정지었다.
실제로 이성을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격노하거나 욕망을 절제하는데 실패하면 악마가 되어버리니 그들을
배척하는 건 실로 간단했다.
심지어 신성교국 '세이비어'는 악마의 씨앗을 모조리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마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전대미문의 사건까지 일으켰다. 세이비어 입장에서도 악마는 신을 부정하다 못해 끌어내리려고 시도한
자들이니 강경파와 온건파를 나누지 않고 합심하여 나섰다.
하나는 진짜로 '악마'가 되어 세상에 복수를 원하는 자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절제를 추구해 '인간'으로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악마가 된 세력은 머지않아 전부 척결되어 세상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세력, 그러니까 '절제'를 추구해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마족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얼마나 강하면 그들을 침공하는 순간 다른 나라에게 타격을 입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차차 기회를 틈타 정리하자는 말이 나왔다.
그 말이 나오고 무려 1000 년이 훌쩍 넘겨버린 게 웃긴 점이었지만.
*******
소중한 사람을 잃거나 반대로 소중한 사람에게 배신당해 악마화가 되는 건 기본이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차별을 겪어 다시 헬리움으로 돌아온다.
"아빠. 아빠."
"응? 왜 부르니?"
"우리는 왜 인간처럼 살아야 해요?"
내가 20 살이 되던 해.
아빠는 내 물음에 순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쓴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단단하면서
투박한 손으로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셨다.
그러할지언데...
"아뇨."
감히 그런 말을 내뱉는 걸까.
'...왜?'
메그너 교수 사건 때부터 관심을 가졌던 인간이다. 마족이 위험한 게 아니라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 자체가
위험하다고 반박한 남자.
때마침 처음으로 사귀었던 인간이자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 리나도 그에게 깊은 관심을 보여서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하지만 둘이서 이야기 할 기회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아이작 씨."
"네. 세실리 님."
"아이작 씨의 대답에는 모순이 있다는 거. 아시나요?"
"세실리 님."
"말씀하세요."
"세실리 님은 인간이 인간처럼 되고 싶다는 말을 한 걸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네?"
"아마 들어본 적이 없으실 거고, 앞으로 영원히 듣지 못 할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인간이니까요. 마족은 마족으로 태어났으니 마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럼 다시 묻겠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마족 답게 산다는 게 대체 뭐죠? 우리는 인간처럼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어요. 앞으로 그럴테고요."
제논 일대기에서 스스로를 희생한 사크란처럼, 대부분의 마족은 인간으로 살아가길 갈망한다. 평범한
인간처럼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고, 즐거워하고 싶었다.
그것이 절제를 추구하는 마족의 염원이며, 숭고하디 숭고한 운명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리 생각했다.
1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만 했지, 실천에는 옮기지 못 했으나 제논 일대기 덕분에 기회를 붙잡았다.
그 기회를 절대 걷어차고 싶지 않았다.
이에 더 이상 참지 못해 등을 돌리기 직전이었다.
아빠가 하던 말이 이런 거였구나.
마족은 스스로도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인간이 되길 간절히 염원한다.
그러니 악마가 되지 않는 이상 마족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울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본래부터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스스로 인간이 되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없을테니까.
"알았어. 어서 가자."
"응? 갑자기 말을..."
"신경 꺼. 어차피 나이는 내가 더 많잖아? 리나도 반말하는데 상관없잖아?"
"어... 상관은 없습니다만."
******
"이런 씹..."
원고를 확인하자마자 육성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인상이 와락 찌푸려지는 건 덤이다.
왜냐하면...
"이거 내가 한 말이었구나."
< 12 화 >
"으음~ 잘잤다."
그래도 오늘은 마음 편히 쉬면 끝이다. 어제 원고를 검수하지 않았다면 큰일날 뻔해서 부랴부랴 퇴고를
거쳤다.
'그때는 뭐...'
우연이라고 적당히 얼버무려야지.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경험 많은 현자로 추정하고 있다. 나처럼 20 대도 되지 않은 새파란 청소년이 아니라.
헤일로 아카데미에는 테이크 아웃이 가능한 식당이 몇 군데 존재한다. 식사를 할 시간조차 낭비라
생각하는 학생들을 위해서다.
중세 시대에 웬 테이크 아웃이냐고 할 수 있는데, 의외로 이 세상은 요식업이 잘 발달한 상태다. 다양한
향신료가 존재할 뿐더러 무역도 매우 활발하다.
그것까지 있었다면 화학이나 기계공학도 같이 발달했겠지. 마법으로 탄산음료를 제작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나는 간편하게 운동을 끝내고 샌드위치나 먹어야겠다 생각하며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었다. 샤워는 운동을
갔다 와서 할 예정이지만 세수만큼은 생략하지 않았다. 이건 기본이니까.
이런 미묘한 불균형 때문에 기계공학의 발달이 늦어지는 게 아닐까. 이들은 불편한 걸 마법으로 충당하면
그만이니 그럴 가능성이 크다.
대충 듣자하니 마법사 쪽에서도 전투와 지원을 분류한다던데 지원 쪽 마법사는 전생의 공학자와 비슷한
걸로 보인다.
'하긴 세탁기나 증기 기관차 같은 건 기계공학이 더 중요하니까. 마법도 한계가 있겠지.'
나는 내 머리색과 비슷한 빨간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니 상쾌한 아침 공기가
나를 맞이해줬다. 정말로 가볍게 운동하기 딱 좋은 날씨다.
'일단 연무장부터...'
'역시 주말이네.'
가끔씩 나처럼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는데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열심히 뛰는 중이다. 행인들도
그 사람을 한 번 보기만 하지, 그 이흐부터는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헤일로 아카데미 내에서는 익숙한 풍경인 듯했다. 다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즐기기에 바빴다.
주중에는 강의가 끝나면 도서관을 방문하거나 숙소로 직행한 것도 있지만 오가는 사람의 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주말이 되니 사람도 북적북적하고 활기로 넘쳐갔다.
'마족은 뭐...'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마족은 세실리밖에 없으니 당연히 없을 것이다. 수인이 없는 이유는 현재
인간과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일 일 것이다. 왜 좋지 않냐면 역사를 뒤져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며 하염없이 걷고 있을 즈음, 머지않아 내가 원하던 공용 연무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공용 연무장 입구 앞에.
"...진짜 크긴 크다."
말 그대로 '공용' 시설이라 그런지 축구장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대강당도 큰
편이었는데 공용 연무장은 그것보다 훨씬 큰 수준이다.
"어라? 아이작?"
"응?"
내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공용 연무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에
나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누나?"
니콜은 내 대답을 듣고 공용 연무장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될 걸?"
"엥? 어째서?"
"저긴 연무장이잖아. 무술을 펼치는 장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몸을 풀기 위해 적합한 곳은 절대
아니야. '단련'이라면 모를까."
"간단한 운동도 못 하는 거야?"
"가능하기는 한데..."
"아무튼 그런 건 없고, 애들이 장난을 좀 짓궂게 친다고 생각하면 편해. 특히 신입생한테 그러는
편이고."
"혹시 무학생 말고 문학생들도 찾아와?"
"응. 평민은 몰라도 귀족은 꽤 많이 찾아와. 보통 자기 가문에서 기본적인 무술은 배우고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네가 특이 케이스인 거야."
니콜의 설명처럼 나는 기초적인 무술조차 거의 모른다. 정확히 따지자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무학에서 조교를 맡는다는 건 뛰어난 실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니콜은 현재 데이브와 함께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조교로 활동 중이다.
성별에 따라 라커룸과 샤워실이 나뉘어져 있었으며, 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훈련용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병장기가 배치돼 있었다. 호기심에 검 하나를 빼니 역시 훈련용이라 날은 세워져 있지 않았다.
"후우...! 후우...!"
"이야! 잘 한다! 잘 한다! 더 빨리 끌어!"
"마이크! 너 이거 지면 나한테 큰일날 줄 알아!"
"이거 말고 더 큰 거 들고 올까?"
"이정도면 충분해. 시작한다."
"... ..."
덕분에 눈이 즐겁긴 하다만 그것보다 정말로 저들이 사람이 맞긴 한 건가라는 의심부터 들었다.
"어때? 대단하지?"
"... ..."
"여기서 운동할 생각이 있다면 말리진 않을게."
"...아냐. 그냥 밖에서 뛸게."
결국 운동장에서 발걸음을 돌려 대련장으로 향했다. 그나마 대련은 마음편히 볼 수 있을테니 안심이 된다.
지금은 아쉬운대로 머리로 기억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걸 기회로 삼아 매주마다 오면 좋을 듯했다. 때마침
누나도 조교이니 눈치 볼 필요도 없다.
안전을 위해서인지 대련장으로 향하는 통로는 상당히 길었다. 또한 출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 수록 쇠와
쇠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는데 이미 한바탕 대련이 진행 중인 모양이다.
후웅!
텁!
바람을 가르며 세차게 날아오던 물체는 머지않아 내 눈앞에서 멈추었다. 내가 손을 올리기도 전에 니콜이
잽싸게 막아준 것이다.
< 13 화 >
"그러니까 네 말은..."
"... ..."
"내 동생이 무학 신입생인줄 알고 공을 던진거다? 어차피 내가 옆에 있으니 막아줄거라 생각했고?"
"...응."
화를 억누르는 듯한 니콜의 물음에 여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참고로 여자는 니콜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중이다.
니콜이 버럭 호통치자 무릎꿇은 여자가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여태까지 니콜의 상냥한 면모만 보았던
나로서는 상당히 의외의 반응이다.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사죄한 여자. 하지만 니콜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콧김을 길게
내쉬었다.
니콜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나는 그녀가 얼굴이 드러나자 물끄러미 쳐다봤다.
목부근까지 단발로 깔끔히 자른 연갈색 머리카락과 오똑한 콧대, 그리고 긴 속눈썹이 인상적이었다.
전반적으로 보이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녀다.
여자도 니콜이 위험한 기운을 풍기자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다급히 사죄을 말을 전했다.
이러면 둘 중 하나다. 니콜과 계급을 넘어선 절친이거나 생각이 없는 것이거나. 다만 니콜에게 반말을
하는 걸 보면 전자로 추정된다.
아델리아가 대답을 하려다 말고 니콜의 눈치를 봤다. 니콜은 여전히 화가 난 얼굴이었으나 턱을 까닥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니콜이 사나운 목소리로 압박하자 아델리아도 마땅한 변명을 하지 못 했다. 단지 민망한 웃음을 흘리며
쩔쩔거리다가 미안함에 고개를 숙일 뿐.
니콜도 아델리아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 같자 한숨을 푹 내쉬며 마지못해 용서해줬다.
연무장에 올 때마다 이런 장난을 해대니 니콜도 어지간히 짜증났을 거다. 게다가 오늘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동생인 내가 위험할 뻔했으니 더더욱.
"아델리아 씨."
"응? 나 불렀어?"
"아델리아 씨도 안구에 마나를 부여할 수 있어요?"
"당연하지. 이래보여도 실력 하나만큼은 뛰어나다고."
안구에 마나를 주입하는 능력이 실력과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다면, 우리의 눈이 얼마나 예민한 부위인지
생각하면 된다.
안구에 마나를 주입하여 어둠 속에서도 물체를 똑바로 체크할 수 있다는 건 마나 컨트롤에 있어서
뛰어나다는 걸 반증한다.
아델리아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버지는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쓸 수 있다고 하셨는데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기준이었던 모양이다.
"니콜의 남동생이라 했지? 노파심에 말하는 건데 너희 아버지랑 다른 사람이랑 비교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마. 칼질 하나로 지도를 바꾸는 사람인데 비교가 되겠어?"
"아버지가 그정도야?"
하물며 아버지는 무려 기사단장, 그것도 네이비 기사단 소속이었으니 실전 경험이 남들보다 배는 많았을
것이리라. 네이비 기사단은 미네르바 제국 최강의 기사단인만큼 다양한 임무를 부여받는다고 들었으니까.
그중에서는 악마화를 한 마족을 토벌하는 임무도 있다. 사실 악마를 토벌하는 건 네이비 기사단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진행하니 최후의 수단이라고 보는 게 명확하다.
"...알았어. 대신 오늘만이다?"
"생각해보고."
"아, 제발. 그러지 말고."
"내 소중한 동생 얼굴에 시퍼런 멍을 들게 할 뻔한 사람이 누구더라?"
아무래도 아델리아가 약점을 제대로 잡힌 것 같다. 나는 무릎까지 꿇으며 사정사정하는 아델리아와 팔짱을
낀 채 고민하는 니콜을 번갈아봤다.
확실히 이렇게만 본다면 신분을 초월한 절친 사이가 맞다. 우리 가족이 대체적으로 권위와 먼 성격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아델리아의 행동은 다른 사람이 본다면 기겁하기에 충분했다.
조금 전 그녀가 스스로 말했듯이 귀족의 목숨을 위협했다는 죄로 퇴학은 기본이고 실형까지 받았을테니.
아델리아는 니콜이 미리 가져왔던 훈련용 철검을 던져주자 가볍게 잡아챘다. 뒤이어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방정맞게 팔을 흔들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뒤에서 누군가 니콜을 불렀다. 중저음에 듣기 좋은 미성을 지닌 남자의
목소리였다.
'...어.'
그리고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뇌가 정지하는 기분을 실시간으로 느꼈다. 적어도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다 못해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다.
내가 딱딱하게 굳어있는 동안 니콜은 남자와 구면이었는지 반갑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반말을 한 남자와
달리 니콜의 억양에는 전과 달리 예의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리나처럼 황금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청명한 푸른색 눈동자. 리나가 청초하면서 강아지상의 얼굴이라면,
앞의 남자는 호랑이처럼 인상이 강했다.
"그런데 옆은..."
"제 동생입니다. 인사해, 아이작. 미네르바 제국의 황태자이신 레오르트 님이셔."
...씨발. 인생.
< 14 화 >
그것도 머지않아 황제가 될 사람이, 찾기만 하면 작가를 황궁에 가둘 거라는 권위자가 내 옆에 앉아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리나가 말하길, 학생인데도 견문이 상당히 넓은 것 같다고 하더군. 특히 메그너 교수를 골탕먹였다는
소식은 꽤 재미있게 들었다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너무 긴장하지 말게나. 내가 황태자라지만 권위로 누군가를 해할 생각은 없거든."
현재 나는 대련을 지켜보기 좋은 관중석에 앉아있다. 관중석과 대련장 사이에는 반투명한 유리가 세워져
있어 관람하기 편하다. 또한 유리에는 방어 마법이 설정돼 있어서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눈동자 색을 보고 니콜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동생일 줄이야. 그러고 보니 데이브는 머리도
붉은색이었지."
"저희 형도 아십니까?"
"물론이네.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조교로 활동하는 자들은 대부분 높은 티어의 기사단에 입단하니 항상 눈
여겨 봐야지. 아참. 데이브가 견습 기사가 된 건 알고 있나?"
"네?"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데이브는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이가 갈리도록 단련하더니 기어코 네이비
기사단에 입단한 모양이다.
"그럼 언제 돌아와?"
"글쎄? 견습 기사는 훈련만 받아서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 그래도 연락은 할 거야."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몰래 휴가를 넣어줄 수 있네만?"
"괘, 괜찮습니다."
채앵!
대련장 중심에는 니콜의 친구, 아델리아가 장검을 쥔 채 다른 한 명과 싸우는 중이다. 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검으로 맹공을 가하면 아델리아는 여유롭게 받아쳤다.
나는 춤을 추는 것처럼 현란하게 싸우는 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눈으로 따라가는 것조차 벅찼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든 상대를 쓰러뜨려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다 해야 하나. 아무튼
아델리아의 상대는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당연하지만 아델리아는 하나하나 모두 받아치며 반격을
가했다.
옆에서 니콜과 레오르트가 말을 나누는 동안에도 대련에 집중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전투씬을
참조할 때는 아버지에게 조언을 받았으나 역시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 차이가 난다.
제논 일대기는 주인공이 세계적인 영웅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인만큼 수많은 전투를 치루는데 나에게는
판타지여도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현실'이다. 별의 별 괴상한 것들이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계.
그래서 더더욱 궁금해졌다. 앞으로 제논 일대기에는 '증기 기관차'라는 새로운 문물이 등장할텐데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불가능하다고 단언할까 아니면 가능하다고 할까.
"아이작 자네는?"
"...저도 읽었습니다."
"몇 권까지?"
레오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해가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예상치 못한 위기였지만 다행히 어찌 어찌
넘어간 듯했다.
나는 최대한 대련에 집중하는 척 하면서 조용히 엿들었다. 어째서 그녀가 레오르트에게 저런 질문을 한
건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자그마치 황태자가 신문에 그런 말을 넣었으니 누나로서 걱정되는 건
당연하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뭘.
7 권 마지막에 제논은 혼자서 정찰을 떠나는데, 안전한 곳이라는 말과 달리 몬스터는 물론이고 결계까지
쳐져있는 마의 지대였다. 다행히 기지를 발휘해 결계까지 파훼하여 지역을 뚫고 나왔으나 제논을 기다리고
있는 건 수많은 함정과 습격자들이었다.
안 그래도 지친 몸으로 습격자들과 싸우던 제논은 결국 가슴에 화살을 적중당하게 되고, 7 권은 거기서
끝난다.
물론 제논 일대기의 히로인, 메리가 선물해준 목걸이 덕분에 치명상은 면한다. 그 뒤로는 당연히 무쌍을
펼치고 배후를 찾는 거고.
"다른 책도 아니고 하필이면 제논 일대기라서 문제지. 마족의 인식을 뒤바꾼 것처럼 혹여 귀족의 인식도
나쁘게 변할까봐 걱정된다네. 귀족을 비판하는 책은 많지만 대부분 풍자에 가까운데다가 제논
일대기만큼의 파급력은 없었거든."
하지만 괜찮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대비는 충분히 한 상태다. 레오르트가 우려하는 상황은 귀족의 명과
암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명장면이 될 것이다.
백성들을 자기 아래로 보는 귀족과, 백성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보살피는 귀족의 싸움. 정치 싸움의
일환이지만 사지에서 돌아온 제논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시원시원한 맛이 있을 거다.
나는 쓰게 웃으며 대련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대련이 끝났는지 아델리아와 학생이 서로 마주보며
인사하고 있다. 숨을 헐떡이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학생과 달리 아델리아는 대련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벌써 가십니까?"
"나도 눈치가 있어. 내가 있어봤자 그대들만 불편할텐데 빨리 가는 게 좋지. 그래도 즐거웠네."
"아이작."
"응."
"앞으로 조심해야겠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그런데 정말로 제논을 위기에 빠뜨린 범인이 귀족이니?"
내가 범인의 정체를 발설하자 니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졌다. 무언가 충격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 15 화 >
레오르트와의 예상치 못한 만남이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내 집필을 방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탄력을
받아 이야기를 쭉- 쭉- 이어나갔다.
제논이 귀족과의 갈등을 벌이는 에피소드는 8 권 초반에서 중반까지다. 그 이후는 드워프의 나라로 향하여
휴식 겸 신문물을 접하고, 그곳에서 '증기 기관차'를 발명하려는 괴짜 드워프와 인연을 맺는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손가락질 하는 괴짜 드워프의 발명을 제논이 도와주는데, 이후로는 여러가지 오판과
시행착오가 있지만 기어코 증기 기관차를 발명한다. 그리고 나서 '마법'이 아닌 '기계공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을 끝으로 8 권의 이야기가 종료된다.
동서고금, 아니 지구던 판타지 세상이던 전쟁에 있어서 보급의 중요성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판타지
세상이어도 군대는 잘 먹어야 진격하는 법이다.
자기자신에게 사용하는 건 문제가 없다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물체를 이동하는 순간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어마어마한 마나량이 요구될 뿐더러 실패하면 모래알처럼 분해되어버린다. 그런 리스크를 감당할만큼
중요한 상황에서나 사용하지, 그 외에는 대부분 마차를 이용하는 편이다.
'마법이라...'
인문학, 마법학, 역사학, 신학, 연금학, 인류학, 철학, 심리학, 행정학, 군사학, 국제학.
지구에서도 연금술은 현대 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데, 여기는 판타지 세상이라 그런지 몰라도 연금술이
크게 진보됐다. 멀리 가지 않아도 포션이 연금술로 제작된다는 사실을 알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니 긴장되기도 하고, 기대도 된다. 무려 11 개의 전공을 듣자니 벌써
머리가 아프지만 유급을 면하기 위해서는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상대 평가로 점수를 매기지 않고 절대 평가에 가깝다는 거다. 내가 노력만 한다면
만점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
다음 날이 되자 학식으로 아침을 떼우고 곧바로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에 들어서니 익숙한 얼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마리, 세실리, 그리고 리나다. 각각 개성이 뛰어난 미녀들이 한데 모여서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자체적으로 빛이 나는 듯했다.
'자리가 없네?'
일단 하는 수없이 빈자리에 앉았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아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정답게 떠들고 있던 세 명 중 마리와 눈을 마주쳤다.
"앗! 저기 아이작이다."
이름이 잭슨이었던가. 아무튼 첫 날부터 세실리와 리나에게 작업을 걸다가 대차게 까였던 놈이다. 그런
놈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한 쪽 입꼬리를 쭈욱 올렸다.
보아하니 자기한테는 면박을 줬던 여자들이 나한테 관심을 주니까 질투한 모양이다. 학생들을 포섭한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안면이 있던 건지 모르겠으나 매우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괜히 귀찮은 일에는 휘말리기 싫었으니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나는 가급적이면 평탄한 학업 생활을
즐기고 싶다.
"읏차."
"응?"
"안녕?"
"내 인사 안 받아줘?"
"...안녕."
"주말동안 뭐 하고 지냈어?"
"너는?"
"난 오빠랑 같이 여기저기 돌아다녔지. 신기한 게 많더라. 너는 뭐 했어?"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지. 재미있는 책들이 많더라고. 그리고 누나를 따라 대련장에 가서 구경도 좀
했고."
"누나가 있었어?"
"누나 뿐만 아니라 형도 있어."
"너도 막내였구나? 이제 알았네."
수업 전까지 마리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확실히 다른 사람보다는 마리와 얘기하는 게 훨씬
편했다.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먼데다가 성격도 시원털털했으니 마음편히 말할 수 있었다.
가끔씩 식겁할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그나마 다행히 예상했던 질문이었는지라 무난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마리와 떠들다보니 어느새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당연하지만 인문학
교수인 비루스였다.
그로부터 잠시 후, 비루스 교수는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헛기침을 하더니 특유의 잔잔한 목소리로 수업을
시작했다.
교수는 시간 제한을 정확히 40 분으로 두었다. 실로 짧은 시간에 학생들이 볼멘 소리를 내었으나 비루스
교수는 깔끔히 묵살했다.
시작! 이라는 교수의 외침과 동시에 학생들은 혼란도 잠시, 본인이 준비한 노트에 생각을 정리하거나
작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 아이작?"
"음?"
"응? 야. 이건 뭐야?"
"네?"
마리는 내가 전달해준 종이의 뒷편을 보여줬다. 나는 그녀가 보여준 그림을 보자마자 속으로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혹시 네가 그린거야?"
< 16 화 >
나는 마리가 보여준 증기 기관차의 그림을 보고 기겁한 것도 잠시, 곧바로 노트를 확인했다. 원래 노트는
제논 일대기의 전개를 정리하는 노트와 일반 노트로 구분돼 있다.
노트를 잘못 가져왔구나라고.
지난 주에는 비루스 교수가 나를 지목하여 제대로 된 대답을 꺼내지 못 했지만 지금은 시간도 주어졌으니
괜찮다. 전생부터 다져온 프레젠테이션 능력 덕분이다.
비루스 교수는 새파래진 내 안색도 눈치채지 못 했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그가 상상하는 조별
과제라는 무엇일까.
"네. 물론 아이작 학생의 생각처럼 대하기 어려운 학생도 있겠죠.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때까지 조별
과제를 하면서 문제가 될만한 사건은 없었으니까요."
"...그럼 다행이네요."
"설령 문제가 발생해도 저에게 말씀하시면 전부 처리해드릴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마리는 비루스 교수가 엄격하게 다그치자 입술을 댓발 내밀며 아쉬움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조별 과제에
그게 가능했다면 진정한 조별 과제가 아니지.
"이제 시간이 다 지났습니다. 앞자리부터 차례대로 발표하겠습니다."
발표는 무난무난하게 진행됐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말을 심하게 더듬은 학생도 있었고, 그와 반대로
감탄을 자아낼만한 발표를 한 학생도 있었다.
상당히 의외의 상황도 발생했는데, 내 다음 차례인 마리가 말을 더듬으며 발표를 망쳤다는 것이다. 평소
그녀의 밝고 힘찬 면모만 보았던 나로서는 예상 밖이었다.
기본적인 지식과 교양은 남들보다 더 많이 배웠을지는 몰라도 발표 능력은 아니다. 귀족들이 가정에서
배우는 교육을 주입식 교육이라한다면 아카데미는 고등교육이다. 스스로 능력을 끌어올려야 하는 부분이
더 많다는 의미다.
나는 다른 사람의 발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엎드려있는 마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는 차마 고개를
들어올릴 용기가 나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엎드려있었다.
"... ..."
앗. 눈 마주쳤다.
가만히 지켜보는 도중에 내 시선을 느꼈는지 마리가 엎드린 상태로 나를 힐끔거렸다. 물론 그 다음에 다시
얼굴을 파묻었지만 눈을 마주친 건 분명했다.
"마리."
"... ..."
"마리?"
"...왜."
"설마 울어?"
움찔-
나는 그녀가 까칠한 표정으로 노려봐도 책상에 붙였던 뺨은 떼지 않았다. 한동안 나를 내려다보던 마리는
입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굴은 여전히 붉었지만 툴툴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기운을 되찾은 것 같다. 솔직히 발표 하나를
망쳤다고 상심하는 건 말이 안 되긴했다. 잠깐 생각이 필요했던 거겠지.
"...그리고 아까 했던 짓."
"응?"
"아까 나 볼 때 네가 했던 거."
"뭐를?"
"...칙이잖아."
"응? 뭐라고?"
"아무 것도 아냐.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으나 마리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차례가 세실리 쪽으로 넘어갔다.
"보다시피 저는 마족입니다. 엘프보다는 아니지만 적어도 인간보다는 수명이 긴 종족이죠. 그리고 전 100
년이 넘는 시간동안 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지금도 보면 방금 전까지 다른 사람의 발표에 관심이 없었던 학생들도 세실리의 발표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족인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놀라웠다.
"하지만 그 세월이 무색하게 저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저보다 마족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최근에
만났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죠."
그러면서 나를 정확히 쳐다보더니 실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의 진심어린 미소에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세실리가 마족이라서 그런걸까. 비루스 교수는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세실리는 가산점을 준다는 교수의 칭찬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내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빙그레 웃어줬다.
그리하여 모두의 발표가 끝날 때 즈음이 되자 어느새 강의가 끝날 시간이 도달했다. 비루스 교수는 마지막
학생의 발표가 끝나자 손뼉을 치며 모두의 집중을 이끌었다.
"자. 이제 주목. 수업이 끝나기 전에 말씀드릴 부분이 있어요. 아까 아이작 학생에게 했던 말이지만 제
강의에는 '조별 과제'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께는 생소하겠지만 간단히 말해 팀플레이라 보시면
됩니다."
"조별 과제? 팀플레이라고?"
"그게 대체 뭐지?"
그사이 비루스 교수는 웅성거리는 장내가 진정되는 듯하자 조별 과제의 설명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 조별 과제의 목적은 간단합니다. 제가 하나의 과제를 제시하면, 여러분들은 제가 임의로 지정한
팀원과 함께 그 과제를 완수하시면 됩니다. 정말 간단하죠? 단, 불성실한 학생이 있거나 부정 행위가
발각될시 그 학생은 0 점 처리할테니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교수 일을 하면서 본인의 배경을
이용한 학생들을 자주 보았으니 안 걸릴 거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마세요."
형평성 하나는 투철하시네요.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제비뽑기과 비견될 정도로 형평성이 뛰어난
방법은 없을 것이다.
뒤이어 교수는 삽시간에 조용해진 강의실을 둘러보다가 뿌듯한 표정으로 학생들에게 물었다.
"어때요. 정말 쉽죠?"
정말 쉽네요. 교수님.
< 17 화 >
내가 이곳에 환생한 이후로 관심이 가던 게 무엇이냐 물으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를 꼽자면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번 생각해 보아라. 지금까지 살면서 당연시 여겼던 역사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들로 채워져있다.
지구의 운명을 바꾼 1 차 세계대전이나 2 차 세계대전은 사라졌고, 대한민국의 명운을 뒤바꾸었던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도 없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때는 소설을 읽다가 도저히 못 버티겠다 싶으면 역사책을 여러번 정독했다. 역사는
소설과 달리 원인과 결과가 확실하고, 비록 주관적이긴해도 다양한 내용이 실려있으니 흥미를 돋구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이 세상에도 지구의 2 차 세계 대전처럼, 종족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발생한 '종족 전쟁'이
존재했다. 이는 정확히 500 년 전에 벌어졌던 사건으로 인간, 드워프, 엘프, 수인, 마족 가리지 않고
전쟁을 치룬 대사건이다.
엘프는 타종족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선민사상과 고지식함, 그리고 오만 때문에
자충수를 둔 경우가 많고, 드워프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으나 반쯤 인간 편이었다.
어째서 드워프가 인간 편에 들었냐면 간단하다. 인간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또 드워프의 무기를
제일 많이 사들였으며 엘프와는 사이가 안 좋았으니까.
수인은 당시 인간에게 노예 취급을 당해 엘프의 편에 붙었고, 마족은 '분노'와 '절제' 두 분파로 나누어
서로에게 마법을 발사했다. 공통점은 두 종족 모두 인간에게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는 걸까. 그 후로
인간과 수인과의 사이는 나빠질대로 나빠졌고, 엘프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후에도 서로 험악한 편이다.
하지만 이중에서 제일 복잡한 건 당연하게도 인간이다. 겉으로는 담합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온갖
정치와 권모술수가 난무하여 제 살을 깎아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난세에 항상 등장하는 '영웅'이
출현해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종족 전쟁에는 여러가지 대규모 전투가 있었고, 그 전투가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서적도 존재한다.
나는 그 서적들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의문점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읽은 역사서적은 대부분 인간의 관점으로 기록돼 있는지라 온갖 추측만 난무할 뿐,
엘프가 어떤 이유로 자충수를 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종전 직후 세대 교체가 일어난 걸 보면
그것과 연관돼 있는 건 확실했다.
전생에서도 2 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어도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이 발발한 것처럼, 이 세계도 비슷한
과정을 밟은 적이 있다. 다만 과학이나 공학이 발달하지 않고 마법이 급속도로 발달됐다는 게 차이점이다.
문제는 발달한 게 지금 이 수준이다. 과거에는 마법이 얼마나 고차원적인 능력인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인간들은 말 그대로 선택받은 자들만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리라.
"음..."
"... ..."
"...응?"
고민을 하느라 집중력이 살짝 깨진 사이, 누군가 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나는 노트에서 시선을 떼어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얇디 얇은 허리 라인과 존재감을 드러내는 가슴을 넘어서 마침내 얼굴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동그란 안경
너머에 호기심이 듬뿍 담긴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하게 됐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가 얼굴을 마주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교수님?"
엘레나 교수는 연두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안경을 써서 지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미녀지만 가장 큰
특징이라함은 바로 길쭉하게 뻗어있는 귀다.
"이거 다 네가 적은거니?"
내가 살짝 쫄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동안에도 엘레나 교수는 내 노트를 유심히 쳐다봤다. 가끔씩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무언가 골몰하는 것처럼 턱을 어루만졌다.
엘레나 교수가 한 손에 든 노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무어라 대답할지 고민하다가
쑥쓰럽다는 듯이 대답을 꺼냈다.
"잠깐만 기다리렴."
나는 그녀의 질문에 살짝 움찔한 것도 잠시, 중지 부분에 볼록 솟아난 펜혹을 어루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리나는 내 헤픈 웃음에도 빙긋 미소를 지어줬다.
이번에는 오른쪽이다. 목소리에 따라 시선을 옮기니 리나와 완벽하게 반대되는 붉은색 눈동자와 마주하게
됐다. 당연하게도 세실리다.
아쉽게도 마족은 제논 일대기가 발간되기 전까지 폐쇄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어서 정보가 현저히 적었다.
설령 마족에 관한 역사서가 있다고해도 전부 인간의 관점이었는지라 지극히 주관적이었다.
"아뇨. 건국 과정과 세이비어 교국에서 마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는 것만 빼면 거의 모릅니다.
알다시피 마족은 몇 년 전까지 바깥과 교류를 한 적이 거의 없잖아요."
"음... 하긴 그것도 그렇네. 그럼 내가 몇 권 가져다 줄까? 나중에 아빠한테 부탁하면 되거든."
"정말요?"
생뚱맞은 그녀의 조건에 어안이 벙벙해졌을 때 쯔음, 세실리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말투를 유지한 채
나에게 들이댔다.
이제는 세실리가 당황할 차례였다. 그녀가 내게서 무슨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형이나 누나라고 부르는 건 익숙하다.
세실리는 너무나 간단한 내 대답에 이게 아니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뾰루퉁해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혀를 차며 투덜거린다.
나를 사이에 둔 두 여자가 떠드는 동안 엘레나 교수가 오기를 기다렸다. 참고로 리나와 세실리가 있는데
마리가 강의실에 없는 이유는 그녀가 역사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역사라면 치를 떤다고 얼핏 들은 것 같다.
"자. 여기 책."
"...이건 뭐예요?"
"엘프들의 역사서를 공용어로 해석한거야. 엘프는 본인들 고유의 언어로 책을 쓰는 경향이 강하거든."
"네? 지, 진짜로 이게..."
"응. 맞아. 인간의 시선이 아닌 엘프의 시선으로 본 역사서지. 나도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거야."
"우와..."
< 18 화 >
나는 엘레나 교수가 말한 대로 모든 수업이 끝나자 그녀가 지내는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의 위치는'
역사관'이라는 건물에 있다. 헤일로 아카데미는 비루스 교수가 언급했듯이 2 학년까지 공통 수업을 듣고
그 후로부터는 자신의 진로를 찾아야한다. 그래서인지 각 전공마다 건물이 세워져있어 전문성이 매우 높은
편이다.
'그냥 대학교네.'
오늘은 중간중간 빈 시간동안에 엘레나 교수가 선물해준 엘프 역사서를 읽었다. 스스로를 신이 선택한
자손이라 생각하는 엘프답게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지만 평소 책을 꾸준히 읽은
덕택에 어려움은 없었다. 단어 사전을 뒤적거리며 뜻을 알아야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엘프가 천사의 후예라는 건 나에게 아주 중요한 정보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 악마가
있으면서 어째서 천사는 없는 걸까? 라는 의문을 단번에 해소시켜줬다. 엘프의 마나는 마족과 달리
백색의 마나를 갖고 있다는 점부터가 그 증거다.
'다른 종족들은 악마만 봤지, 천사가 있다는 건 몰랐겠지.'
나는 전생의 기억이 있었기에 악마가 있다면 당연히 천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다른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악마와 완전히 반대되는 건 오직 신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지.
'9 권 중반부터 10 권 결말까지는 엘프와 교류를 맺는 스토리로 가야겠다. 악마측 간부들도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여긴가?"
한참을 걷다보니 약도에 그려진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사관이라 해서 딱히 멋지거나 그러진 않고,
단조로우면서도 실용성이 높은 구조였다. 아무래도 교수 또는 조교만 지내는 건물에다가 무학과 달리
단련실이 필요없기 때문인 듯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은 몬스터와 마나가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 헤일로 아카데미라도 무력을 키우는
무학이 우선 순위일 수밖에 없다. 이로인해 문학 쪽에서 예산 문제로 불평불만을 가진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오..."
정문을 통과하여 복도로 들어서자마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데다가
복도 중앙에는 물레방아까지 있다.
게다가 복도의 벽에는 역사에 이름을 날린 위인들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는데, 책으로는 봤지만 그림으로는
처음 보는 위인도 다수 존재했다. 특히 위인의 초상화 밑에는 이름과 더불어 간략한 역사적 기록도
적혀있었다.
나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복도를 둘러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엘레나 교수의 사무실로 옮겼다.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은 104 호다.
똑- 똑- 똑-
끼이익-
"...누구세요?"
아니. 정정하겠다.
'...엘프?'
"...저기요?"
늘어지는 말투와 대답에 재차 연구실을 팻말을 확인했다.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이 확실했다.
"누구 왔니?"
때마침 시기적절하게 연구실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물음에 조교로 추정되는 엘프가
뒤를 돌아보며 피곤에 쩔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대부분 역사와 관련된 책들밖에 없었다.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실다운 모습이다.
"왔구나. 이리 앉으렴."
책상에 앉아있던 엘레나 교수가 방긋 웃는 표정으로 나를 반겨줬다. 나는 어색한 심정으로 그녀가 가르킨
응대용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내가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 엘레나 교수도 맞은편에 배치된 소파에 앉았다. 참고로 우리 둘 사이에는
테이블이 배치돼 있었다.
신디라는 이름의 엘프는 엘레나 교수의 지시에 흐물흐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하여 나의 맞은편에는
극과 극의 모습을 띄고 있는 두 엘프가 앉게 되었다.
"좀 당황스럽지?"
그러나 위의 말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으니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엘레나 교수도 내 심정을 눈치챘는지
신디라는 엘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설마 나도?'
"그건 우리 엘프도 마찬가지야. 교수 밑에서 조교로 일하면서 학위를 터득해야 하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엘프는 인간보다 배우는 속도가 현격히 느려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야."
"보통 평균적으로 몇 년 정도 걸리나요?"
"몇 년은 무슨,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30 년이야.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자면 약 3~4 년 정도가 되겠네.
게다가 박사, 그러니까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위그드라실' 내에서도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해.
박사논문을 제출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매우 까다롭지."
위그드라실은 엘프들의 나라, 알브헤임의 수도다. 보다시피 북유럽 신화에 나온 것과 명칭이 똑같다.
"얘한테 글 쓰는 법 좀 가르쳐줘."
"네?"
"네에...?"
나는 물론, 가만히 있던 신디마저 당황스러운 눈길로 엘레나 교수를 쳐다봤다. 엘레나 교수는 어깨
올렸던 손으로 신디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엘레나 교수는 내 의문에 하나하나 친절하게 대답했다. 대부분 합리적이고 납득이 갈만한 이유들이라
나로서는 할 말이 없어졌다. 특히 100 년 동안 본 학생들 중에 내 작문 능력이 제일 뛰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이가 없었다.
"여기 있는 서적과 논문 대부분이 내가 교수로 일하면서 모으거나 쓴 것들이야. 인간와 엘프의 관점으로
쓴 역사 뿐만 아니라 드워프, 수인, 심지어 마족도 있지."
"마, 마족이요? 마족은 어떻게...?"
"우연히 연이 닿은 마족이 있었어. 그 사람에게 최대한 뽑을대로 뽑았지. 지금은 아쉽게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말이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아..."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 19 화 >
엘레나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내 일상은 약간이마나 변화했다. 원래 모든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거나 대충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향했는데 요즘에는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에 방문했다.
"안녕하세요. 신디."
"안녀엉..."
아무튼 연구실에 들어서면 엘레나 교수는 가끔씩 출장 때문에 자리를 비운 경우가 많지만, 신디는 아니다.
언제나 초췌한 주검 같은 모습을 나를 맞이해줬다. 나 또한 그녀의 외모에 익숙해져서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신디?"
"으응...?"
"잠깐 쓰는 거 멈추고 신디가 쓴 거 한 번 읽어볼래요?"
"왜에에?"
'내 첫 작을 보는 것 같네...'
전생에서 필력 하나는 좋다고 칭찬받은 나지만 처음부터 좋았던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첫 작은 이게
무슨 스토리야?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가독성이 개판이었다. 현재 신디의 논문도 글을 처음 쓰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드러내는 그녀. 나는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신디의 상황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이 세상의 소설이 수능 영어 문제 같다고 까내렸지만 논문은 예외다. 논문은 연구자가 본인이 연구한
걸 통해 작성한 일종의 기록이니 전문용어가 나와도 상관없다.
엘레나 교수의 도움으로 그녀가 쓴 논문을 한 번 읽은 적이 있다. 중간중간 전문용어가 나와서 곤혹을
치뤘으나 여태까지 책을 많이 읽은 덕에 무리없이 정독할 수 있었다.
기억력은 좋지만 응용력이 뒤떨어지는 편인건가. 인간인 내 기준으로 보면 멍청이에 불과하지만 엘프의
관점으로 보자면 신디는 지극히 정상적이다.
일례로 마법이 있는데, 전에 말했듯이 마법은 본디 역사적으로 신에게 선택받은 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이라며 찬사받았다. 당장 500 년 전 종족 전쟁까지만 해도 마법은 오직 엘프나 마족, 그리고
극소수의 인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3000 년 전의 악마 전쟁? 그때 인간이 마법을 썼다는 기록은커녕 극소수의 엘프만이 사용했다는 말밖에
없다. 500 년 전 종족 전쟁이야 말로 본격적으로 인간에게 마법이 흘러들어간 시점이다.
아무튼 간에 인간은 500 년도 채 되지 않아 배경과 재능, 그리고 노력만 뒷받쳐준다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변모시켰다. 장수종인 엘프의 입장에서는 실로 무시무시한 발전 속도가 아닐 수 없다.
인간들만이 존재하는 세상, 그러니까 지구에 있을 때는 당연시 여겼던 부분이다. 창작물에서도 인간은
다른 종족보다 배움이 빠르다는 설정이 대부분 존재했다.
이어서 그녀는 전보다 착잡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귀까지 아래로 추욱
늘어졌다.
*****
제일 먼저 원고를 검토한 출판사 쪽에서 위의 문구를 실은 것이다. 그 문구에 귀족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평민도 의문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 세상에 지구의 '프랑스 혁명'과 흡사한 사건이 있다. 예로부터 미네르바 제국의 영원한
숙적이라 평가받는 테르스 왕국에서 발발한 '제이로스 혁명'이다. 제이로스라는 위인이 주도자였기에
편의상 제이로스 혁명이라 칭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중대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이 평민을 깔보는 풍토는 여전했다. 오히려 더
악랄하게 은폐시켜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못 하도록 철저하게 막는 경우가 허다했다.
-귀족과 평민은 태생부터 다른 존재다. 아무리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도 이런 모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역시 소설일 뿐. 제논 같은 평민이라면 귀족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 작위를 받았을 것.
이탓에 몇몇 귀족들이 8 권의 초반부에 대해서 강도높은 비판을 꺼냈다. 다만 소수의 귀족만 비난에
가까운 질타를 쏟아붓는 중이고, 대부분의 귀족들은 씁쓸하다는 반응만 보이고 있다.
-이번 이야기를 정독하고 화를 내는 귀족들은 대부분 평민을 노예 취급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 수인은
대놓고 노예 취급하고 있지 않을까? 정말로 귀족다운 마인드라 할 수밖에 없다.
제논 일대기로서는 인간의 나라가 아닌, 최초로 다른 종족의 나라로 향하는 것이었기에 많은 구독자들이
기대했다. 당연하지만 그중 드워프들이 제일 큰 기대와 걱정을 품고 있었다.
"으음..."
"어때요? 한 번 만들어 볼만하지 않아요? 여기 대략적인 설명이랑 그림도 있잖아요."
풍성한 회색 수염과 괴팍해 보이는 얼굴, 마지막으로 짜리몽땅한 키를 가진 드워프가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딱 얼굴만 뒤덮을 정도로 수염을 기른 젊은 드워프가 흥분한
표정으로 재촉하는 중이었다.
회색 수염의 드워프는 옆에서 재잘거리는 드워프의 재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에만 집중했다. 현재
그가 보고 있는 건 이번 달에 발간된 제논 일대기 8 권의 중후반부에서 등장한 그림이다. 중간에 읽다가
떨어지지 않게 접착제 비슷한 걸로 붙여져 있다가 뒤늦게 발견했다.
뒤이어 회색 수염의 드워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책에서 언급된 그림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회색 수염의 드워프가 질문할 때마다 해맑게 답하는 젊은 드워프. 이에 회색 수염의 드워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아들아? 말 같지도 않는 소리는 하지 마렴. 소설은 소설로 봐야지 현실에 대입하면 머리가
아프단다. 우리는 그냥 더 좋은 무기나 제작하면 돼."
"하지만 아버지. 현실성은 있잖아요.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젊은 드워프는 활기차게 대답하며 대장간 밖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회색 수염의 드워프는 아들의 열정적인
모습에 너털웃음을 흘렸다가 다시 한 번 종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림의 퀄리티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외관은 명확했다. 거기다 책에는 설명까지
붙여져 있어서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알 수 있다.
장인의 종족이자 창작의 대가라고 불리는 드워프, 더구나 그 드워프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회색 수염의
드워프조차 감탄할 수밖에 없는 발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법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라고 단정짓는
현 상황에서 이런 '기계'가 등장한다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 20 화 >
제논 일대기 8 권이 출간된지 대략 보름이 흘렀을 때였다. 오늘도 여지없이 상쾌한 하루를 시작하기 전,
나는 숙소 문 앞에 놓여있던 신문을 가져왔다.
신문은 총 두 종류였는데 하나는 호이토르 신문사고, 다른 하나는 투틀리 신문사의 것이다. 호이토르의
신문사는 주로 인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투틀리 신문사는 종족 구별없이 광범위하게 소식을 알려준다는
차이점이 있다.
"음..."
우선적으로 인간쪽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호이토르 신문사부터 읽었는데, 신문을 펼치자마자 내가 바라는
소식이 첫 장부터 기재돼 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앞으로 내밀며 어떤 소식이 실렸는지 체크했다.
아니나 다를까. 가지각색의 반응들이 나열돼 있었다. 이때다 싶어 직설적으로 비난을 하는 평론가도 있는
반면, 씁쓸한 현실을 정확히 바라보며 평가를 내린 평론가도 많았다. 귀족 비판은 이들에게 상당히
민감하고 매콤한 주제일테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래도 딱히 큰 문제는 없는 듯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걸 넣어도 될까? 싶었으나 레오르트의 이야기를
듣고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누군가 작정하고 나를 조지기 위해 찾는다면 곧바로 숨어버리거나 황실에
몸을 의탁하면 그만이다.
제논을 함정에 빠뜨렸던 크로스트 백작이 귀족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인물이라면, 케이 백작은 그와
반대로 귀족의 밝은 면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이 세상에서도 지구의 프랑스 혁명과 유사한 사건이 존재한다. 그때문인지 몰라도 귀족들이 '대놓고'
평민을 겁박하거나 차별하는 경우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귀족이 평민을 깔보는 악습은 여전하다지만
아직까지 그런 상황은 못 봤다.
하물며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는 말처럼, 개념이 착실하게 박혀있는 귀족들도 많다. 당장 멀리
가지 않아도 마리의 가문인 레킬리스 공작가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하고 있다. 황제 다음으로 높은
공작이 그런 모토로 살고 있는데 그 아래의 귀족들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나는 각국의 반응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페이지를 넘겼다. 호이토르 신문사는 미네르바 제국에 뿌리를
둔 회사였기에 다른 나라의 평가는 뒷부분에 있다.
"음..."
역시 예상대로 테르스 왕국이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중이다. 테르스 왕국은 제이로스 혁명이 발발한
나라이니 이런 이야기에는 더욱 예민하겠지.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거의 다 크로스트 백작을 신명나게 까고 있다는 거다. 평민은 물론이고 귀족과
심지어 왕족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전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크로스트 백작의 최후가 꼴 좋다고
즐거워하는 중이다.
테르스 왕국은 입헌군주제에 가까운 통치 방식을 실행 중이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 통치하지 마라는 의미에 가깝다. 한바탕 홍역을 치뤄서인지 귀족이 차별을 저지르면 엄벌에
처해진다.
부모님은 초판이 있으니 읽는데에 지장이 없을테고, 누나와 형이 문제다. 당장 작가 본인조차 초판을
제외하면 책을 구매할 수 없는 실정인데 그 두 명은 어떻게 구할지 의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다양한
이야기가 귀에 속속 들어왔다.
"이번에 나온 8 권 봤어?"
"당연히 봤지. 조금 씁쓸하긴 해도 예상대로라더라."
"평민이 그런 업적을 세웠는데 견제를 안 할 귀족은 없겠지.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야. 너 이번에 나온 거 샀어? 샀으면 나 좀 빌려주라."
"싫어. 나도 아직 다 못 읽었단 말이야."
당장 눈에 들어온 얼굴은 세실리밖에 없었는데 그녀의 곁에는 수많은 여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세실리는 자신한테 붙은 여학생들의 질문 공세에 일일이 대답하면서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무래도
현재 상황이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리나는 쩔쩔매는 세실리와 달리 조곤조곤하면서 우아한 말투로 여학생들을 상대하는 중이다. 마치 어른이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모습이라 살짝 웃음이 새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따로 찢어져, 그것도 멀찍히 떨어져 있는 상태다. 평소 붙어다니던 둘의 모습만 보았던
나로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싸우기라도 한 건가?'
"안녕!"
"...그래. 안녕."
"뭐야. 반응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주말동안 뭐 했어?"
"책 읽었어."
"무슨 책? 설마 제논 일대기 8 권?"
"아니. 역사책."
"엑. 역사책?"
내 대답을 들은 마리가 차마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마리는 역사라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한다.
게다가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에는 여태까지 접하지 못 했던 역사책과 논문이 쌓여있다. 요즘에는 그것들을
읽는 낙으로 살고 있다.
내가 골똘히 생각하는 도중에 마리가 살짝 들뜬 억양으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그녀와
마주했다.
"아니. 너는?"
"후후후."
이윽고 그녀는 나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나는 무럭무럭 차오르는 의문을 가슴에 안고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었다. 그러자 마리가 순간적으로 당황하더니 조용히 소리쳤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서.
< 21 화 >
나는 마리가 알려준 정보를 듣고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제논 일대기의 작가가 바로 나인데 그녀가
어째서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잠깐이나마 블러핑 또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하면 블러핑일 가능성이 적은 게, 정말로 거짓말을 하려고 했다면 지금처럼 은밀히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마리는 정말로 중요한 정보라고 판단하여 나에게 귀를 빌려달라고 한 것이다.
'...뭐지?'
홍철 없는 홍철팀이라고, 전생에서 유명한 밈이 있다. 모든 건 완벽한데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진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팥없는 단팥빵이 있다.
나는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가 마리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는 자신의 제안을 결코 거부할 수 없을거라
판단하고 있는지 씨익 웃으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진짜야?"
"응."
"진짜 제논 일대기의 작가라고?"
"그렇다니까. 나 못 믿어?"
그 이야기를 듣고 내 원고가 출판사에 도달하는 과정을 떠올렸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버지는 사람을
시켜 원고를 출판사에게 전달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다고, 오히려 상식을 역이용한 것일 수도 있다. 마리의 말마따나 감히
공작에게 사기 칠 사람은 없을테지만, 가끔씩 한탕 벌기 위해 자기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하는 사람은
널려있다.
작가를 찾았다는 말만 했으면 모를까, 작가를 저택에 초대한다고 말했으니 사칭 쪽에 무게가 쏠린다.
그러므로 집에 편지를 발송하여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혹시 모를 최악의 수도 염두하는 것이 좋다.
나는 모든 생각을 정리한 후 콧숨을 길게 내쉬었다. 뒤이어 마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응?"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거야? 나한테 뭐 부탁할 거라도 있어?"
하지만 마리에게 들으니 진지하게 사인의 필요성을 느꼈다. 적어도 지금 같은 상황, 그러니까 사칭범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원고부터는 친필 사인을 넣는 게 좋을 듯싶다.
어쨋거나 각설하고,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정했다. 사칭범인지 아닌지 확실치는 않지만
적어도 상판떼기는 보고 싶다.
모두들 알다시피 다음 학년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특정 점수가 필요하다. 그래서 마리도 역사를 포함한
몇몇 전공을 제외시키고 본인이 관심있는 전공에 집중하는 중이다. 가문에서 배운 지식을 복습하는
개념이라 그녀에게는 나름대로 쉬운 편이라고.
허나 가문에서 편지가 온 이후로는 상황이 급변했다. 바로 마리의 아버지, 그러니까 레킬리스 공작이
그녀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우리 레킬리스 가문은 역사를 중요시 여기는 가문이야. 과거의 잘못에서 현재를 바로잡고, 미래의
주도권을 쥐어잡을 수 있다고 믿거든. 그때문에 옛날부터 역사 교육을 시키는 편이지."
"선대부터 이어진 이념이야?"
"응."
"흐음..."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개념이 알차게 박혀있는 건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레킬리스 가문은 그 이상으로
현명한 가문이다. 미네르바 제국이 건국된지 수 백년이 지났음에도 건재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대신 가정 교육은 썩... 좋은 평가를 내리긴 어려울 것 같다. 마리가 역사를 싫어하는 이유가 아마
반항심에서 발로한 것이 아닐까. 전생에서도 아이들이 공부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부모님의 강압
때문이다.
우리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낯익은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뭇 남성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뇌새적인 목소리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전에. 너희 뒷자리가 비어있길래 바로 왔지."
세실리의 대답을 듣자마자 리나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리나의 주변에는 아까부터 재잘재잘
떠들던 여학생들이 주루룩 앉아있었다.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마리의 눈치를 봤다. 마리는 불편하다는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중이었다.
리나라면 모를까, 평소 세실리와는 괜찮게 지냈던 그녀였기에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리도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긍정을 확인한 세실리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럼 나도 껴도 돼?"
아니나 다를까, 내 불안감은 적중했다. 마리도 이 전개를 예상했는지 다 포기했다는 뉘앙스로 대답했다.
나는 달아오르기 시작한 얼굴을 간신히 추스리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화제를 전환시키기 위함이다.
"넌 모르겠지만 아이작은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거든. 마리도 동의하지?"
"어느 정도는."
"...그렇게 티가 나?"
납득이 가는 이유였다.
*****
"제논 일대기 8 권에 첨부된 삽화야. 증기 기관차라고, 스토리에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건데 알려줄까?"
"아니. 절대 알려주지 마. 말하면 알지?"
"그럼 됐고."
그리하여 세실리도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마리는 세실리마저 밖으로 나가자 그림에 더욱 집중했다.
"흐음..."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이 초반부 귀족 비판에 관심을 쏟아붓고 있지만, 증기 기관차에 대한 관심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교통수단을 제작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람도 많았고, 발명되기만 한다면 문명을 몇
단계나 진보시킬거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므로 인류학 수업에서는 각 종족마다 어떤 특이점이 있는지, 또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는지 배우는
중이다.
다만 헤일로 아카데미는 인간을 중점으로 두면서 다른 종족과 비교하는 교육방식을 진행하고 있다.
아무래도 인간이 세운 교육기관인데다가 학생들 대부분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유학생, 그러니까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종족도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다. 세계는 넓고
다양한 종족이 있으나 언제나 사건의 중심이 되는 건 인간이었다는 걸 그들도 잘 알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숫자는 대략 16 억이며, 나머지 종족들은 전부 합쳐도 8 억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런 방대한 인구수와 끝을 모르는 발전 능력 덕분에 인간은 지금까지 우위를 점할 수
있던 것이죠. 그리고..."
노신사의 이름은 로이 매그너스 교수. 보다시피 인류학을 담당하고 있는 교수다. 인문학 교수인 비루스
교수처럼 열정이 있기 때문에 한시라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물론 다른 종족도 고유의 장점이 있기 때문에 시시각각 인간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드워프는 무기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고, 엘프는 일반 전사 한 명 한 명이 기사단장급으로 강력하죠. 그건 수인도
마찬가지고요. 마지막으로 마족은 마법에 한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납니다. 반면 우리
인간은? 태생적으로 특출난 부분이 없죠. 이러한 장단점이 모두 드러난 사건이 바로 종족 전쟁입니다."
"네. 거기다 엘프는 장수한다고 치면 약 1000 년을 살 수 있죠. 인간이 장수해도 겨우겨우 100 년을
넘기는 것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수치입니다. 대충 계산해도 무려 10 배가 넘어요. 하지만 이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엘프의 인구수가 적은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네의 말은 그 1000 년동안 수많은 인간이 사망하는데도 불구하고 엘프의 인구수가 적은 부분이
이상하다. 이 말이지?"
"아, 모두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게. 이건 단편적인 성지식이 있어야 설명할 수 있거든. 어쨌거나
아이작 학생.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어... 알 건 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로이 교수의 설명을 듣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출산률이 극악 수준으로 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히려 생리 주기가 저렇게나 긴데도 불구하고 멸종하지 않는 점이 더 신기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엘프의 문화적 특징이 있지. 엘프는 인간과 달리 성관계를 성스러운 '의식'으로
여기는 편이야. 하물며 엘프 남성의 성욕도 인간에 비해서는 담백한 편이지. 아, 이럴 때는 인간의
성욕이 여타 종족보다 강하다고 설명하는 편이 어울리겠군."
"... ..."
"엘프의 인구수가 적은 이유는 이러한 부분들이 합쳐진 것이라네. 어때, 이해가 됐나?"
로이 교수의 물음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신비로운 종족답게 출산률이 낮은 이유도 신비로웠다.
무엇보다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전생에서 엘프를 설명할 때 출산률이 낮다고만 알려줬지, 그 이상은
없었다.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일종의 '상식' 같은 개념이라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허나 지금은 아니다. 이해가 가면서도 명쾌한 설명 덕에 새삼 내가 판타지 세계에 환생했다는 걸 다시금
실감시켜줬다.
그사이 고동색 머리카락의 여자는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되자 다시 한 번 원하는 질문을 꺼냈다.
레오나의 질문도 일리가 있다. 수인은 인간과 동물을 반반씩 합친 듯한 외양을 가졌으며 과거에는
원시적인 생활을 고집했으나 약 300 년 전 본인들의 국가를 세웠다.
"그건 상당히 복잡한 문제일세. 수인의 문화적 특징도 있지만 종족 전쟁 당시 수인은 우리 인간에게
학살당하다시피 죽었거든. 적어도 수천만에 달하는 수인이 사라졌을걸세. 그로인해 여전히 우리 인간과
사이가 험악한 편이지."
인간측 연합은 본인들이 노예로 부렸던 수인들이 엘프에게 붙자 눈에 보이는 족족 살해했다. 내 눈에는 제
2 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유대인 학살 사건, '홀로코스트'보다 몇 배는 더 심각했다. 더
가관인 건 수인을 살해할시 포상금까지 지급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수인은 태어날 때부터 전투라면 열광하는 종족일세. 인간의 관점으로는 야만적이라 할 수 있고,
수인의 관점으로는 스스로를 명예로운 전사라 생각하는 것이지. 그 문화적 특징으로 인해 자연사보다는
전사하는 경우가 많아. 심지어 자연사하는 수인은 명예롭게 죽지 못 했다며 멸시하는 풍조가 있지."
"... ..."
"그래도 500 년 전과 비교했을 때 인구 증가율은 인간보다는 아니지만 뛰어난 편이야. 레오나 학생이
원하는 대답은 현재 진행 중이기에 명확한 대답을 해줄 수 없지. 그 부분은 염두해두게."
"알겠습니다.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오나는 특유의 무뚝뚝한 대답 이후로 자리에 착석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문득 인간과 수인의
사이가 어떤지 떠올랐다.
수인이 일방적으로 인간을 증오하고, 인간은 그런 수인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 특히 암시장에서 수인이
노예로 팔려나가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얼핏 들은 적이 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은 수인을 본인보다 하등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공공의 적이었던 마족이 있었기에 그
현상이 적어보이는 거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인을 향한 차별도 만만치 않다.
세실리도 그 부분이 궁금했던건지 나에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네. 인간은 수인을 자신보다 하등한 존재로 여기고, 수인은 인간을 동족을 자비없이 학살한 악마로
취급하고 있어요. 아까 교수님이 말씀했듯이 종족 전쟁 당시 발생한 그 사건 이후부터 이어져 온
악순환이죠."
"우리 마족이 모든 종족에게 시한 폭탄 취급당했던 것처럼?"
"비슷하긴 해도 마족과 달리 수인은 인간만 노예 취급을 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태어나서부터 모진 차별을 받았던 마족이라 동질감을 느낀 걸까. 세실리는 미묘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제논 일대기에서 인간과 수인의 이야기가 나오면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마족의 인식조차
완전히 바꿀 정도인데 안 될 건 없잖아."
"글쎄요..."
하물며 인간과 수인 사이는 '증오'라는 연쇄고리로 묶여있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다는 말처럼, 증오로
묶인 연쇄고리를 끊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설령 그것이 제논 일대기라 해도 말이다.
"과연 수인이 제논 일대기를 읽기는 할까요? 인간이 주인공이라 그런지 신문에서도 드워프나 엘프의
평가는 있지만 수인만큼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어요."
"혹시 모르지. 말만 안 할 뿐 사실은 재밌게 읽고 있을지도?"
"그러면 뭐..."
나는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세실리는 절대 모르겠지만 제논과 수인의 왕자가 서로 신뢰를 쌓고 친구로 발전하는 전개가 있다.
그 전개를 통해 인간이 수인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전하고, 악마와 대항하기 위해 연합을 꾸린다는
이야기다.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 23 화 >
아카데미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세실리는 장난기가 많으면서 얄궂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나에게 존댓말을 사용할 때까지만 해도 예의바른 공주님의 표본이었으나 말을 놓은
이후부터는 줄곧 장난을 잘 쳤다.
인류학 강의가 끝나고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식당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세실리의 장난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반드시 내 입으로 대답을 듣기 위해 작정했는지 살랑거리는 목소리로 부추겼다.
당연하게도 나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세실리 때문이다. 그녀의 외모가 튀는 것도 있지만 세실리는 헬리움의
공주다. 입학식 때부터 화제의 인물이었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당장은 세실리와 리나 때문에 주시하고 있는 듯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른다.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학생은 정서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청소년들인데다가 콧대 높은 귀족가 자제들이 많다. 멀리 가지 않아도
잭슨이라는 놈이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중이다.
"...정말이네."
"불편하시다면 제가 따로 떨어질게요."
"아냐. 이정도는 문제없어. 헬리움에서도 줄곧 있던 일이거든."
"헬리움은 왕을 제외하면 귀족이 없지 않아요?"
"꼭 귀족이 아니더라도 왕을 견제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이에 내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녀가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캐묻지 않아서 고맙다는
의미에 가까웠으나 잠시 후, 미소가 더욱 짙어지며 장난기가 듬뿍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아차싶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아이작."
"네."
"아이작은 마족에 대해 궁금한 점은 없어?"
"그건 왜요?"
세실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가 안 된다는 뉘앙스로 묻는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마주하다가
조용히 답했다.
"제가 실수할까봐요."
"실수할까봐?"
"네."
용기가 없다고 할 수 있으나 내 기준으로는 일종의 배려다. 적어도 상대방의 상처는 후벼파지 않아야
원만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이때문에 세실리처럼 짖굳은 장난을 치지 않고 가만히 받아주고 있는 것이다.
세실리도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해줬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어서 그녀는 선심썼다는 투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말을 흐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에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 바깥에 나가서 먹고 오기 때문이다.
"으음..."
툭-
음식을 찍었던 포크를 놓칠만큼 당황스러운 대답이다. 순간적으로나마 진담인지 장난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내 심정과 달리 세실리는 평온한 얼굴 그대로였다.
"너도 알다시피 마족은 악마의 후예야. 그리고 악마는 말그대로 '욕망'의 결정체지. 이때문에 우리
마족은 특정 주기마다 자신의 욕망을 컨트롤하기 힘든 시기가 있어. 이 현상을 '악주기(惡週期)'라고
칭하지만 남자들만 그렇게 말하고 여자들은 그냥 생리로 치는 편이야. 얄궂게도 월경이랑 시기가
겹치거든."
"... ..."
생리 주기라고 할만하다. 그덕분에 정지되었던 머리도 차차 진정되어 사고가 가능해졌다. 그대신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장수하는 종족은 생리 주기가 긴 편인걸까. 엘프도 그렇고 마족도 그렇고 생리 주기가 어마어마 길었다.
아니면 인간과 수인이 비정상적으로 짧은 것일 수도 있다.
'덕분에 하나 넣을 수 있게 됐네.'
평소에는 관심이 없어서 모르고 있었는데 레오나는 다른 여학생과 달리 바지를 입고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과 달리 인상이 워낙 딱딱하고 날카로운지라 멀리서 보면 남학생처럼 보였다.
식당에 학생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는 레오나는 유독 멀찍히 떨어져 앉았다. 오히려 그녀의 주위에
아무도 없는 탓에 더욱 눈에 띄였다.
쫑긋-
"...!"
내가 레오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동안이었다. 그사이 세실리가 생각을 정리했는지 내 이름을 불렀다.
"아이작?"
"...아. 네네. 누나."
"잠깐 멍 때리고 있었나 보네. 질문할 거 생각났는데 해도 되지?"
"네. 질문해도 돼요."
그래도 이거는 확실하다. 인간은 더없이 선해질 수도 있으나 더없이 악랄해질 수도 있는 존재라는 걸.
성선설과 성악설이 치열하게 치고받았던 걸 생각하면 된다.
쫑긋-
< 24 화 >
강의 때 들었겠지만 인간과 수인의 사이는 최악이다. 예로부터 사이가 껄그러웠던 엘프와 드워프보다도 더
좋지 않다. 이로 인해 수인이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렇다면 주말동안 번화가에서 가끔 봤던 수인은 뭐냐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학생이 아니라 경비원으로
고용된 입장이다. 수인은 선천적으로 뛰어난 오감 덕분에 경비원으로써의 능력이 출중하다.
'사정이 있겠지.'
"세실리 님도 알다시피 인간은 뛰어난 습득력을 제외한다면 잘난 게 하나도 없어요. 수명은 물론이고,
육체 능력과 마법, 그리고 지혜와 손재주까지 다른 종족에게 밀리죠. 심지어 마나를 잘 다루는 것도
아니에요. 수명은 짧은데 태생적인 장점이 하나도 없는 종족. 대충 감이 잡히지 않아요?"
"모르겠는데?"
"배움이 빠르다는 장점이 있지만 아예 0 에서부터 시작한 시절에서는? 배운 것도, 배울 수 있는 것도 없을
텐데 어떻게 하면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까요?"
"어? 그러네?"
전생에서는 인간밖에 없어서 동족끼리 경쟁이 가능했지만, 이 세상은 다르다. 당장 인간보다 태생적은
능력이 월등한 종족이 주변에 널려있다.
하지만 인간은 멍청한 건지 아니면 무모한 건지 몰라도 다른 종족과 경쟁하기를 선택했다. 아마 이종족이
보기에는 저 새끼 왜 저러지? 라며 어리둥절하지 않았을까. 당장 나 같아도 웬 원숭이 한 마리가 나와
경쟁한다면 코웃음칠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한들 불세출의 천재가 아닌 이상 태생적인 한계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엘프 전사가 인간으로 치자면 기사단장급 무력을 갖춘 것부터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
"번식 능력이 여타 종족보다 뛰어난 이유도 이때문이라 생각해요. 초기에는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해야
그나마 생존이 가능할테니 무작정 수를 늘린거죠. 이종족이 보기에는 정말 단순무식하고 쓸데없는
발악이라 생각했을 거예요. 수인은 신체 능력이라도 좋지, 인간은 그것도 아니잖아요?"
"음... 그러고 보니 수인도 번식 능력이 좋지 않아? 종족 전쟁 당시 수인들이 인간에게 학살당했다지만
그 전에도 있었을 거 아니야?"
"그때는 인간의 습득력이 진가를 발휘해요. 역사적으도 '문명'을 최초로 건립한 건 엘프였지만,
그다음으로 문명을 이룩한 건 '인간'이에요. 엘프에게서 배운 지식과 능력을 토대로 문명을 세우고,
뿔뿔이 흩어졌던 동족을 모아 힘을 비축했죠. 부족 생활을 하는 종족과 문명과 사회를 만든 종족. 벌써
차이가 나지 않아요?"
"그렇구나. 수인은 겨우 300 년 전에 본인들의 나라를 건국했었지?"
세실리가 정확히 요점을 짚었다. 비록 장황하게 설명했으나 인간이 현재까지 살아남고, 세계의 주도권을
쥘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포기를 모르는 '근성'이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은 부분을 꾸역꾸역 파고들어 가능하게 만든 종족도 인간이고, 3000 년 전
악마와의 전쟁 당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끝까지 대항하던 종족도 인간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인간의
근성만큼은 일종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도 맞지만 인간은 하나가 되는 결집력이 다른 종족보다 훨씬 강해요. 평소에는 자기들끼리 싸우기
바쁘지만 위기가 찾아오면 하나가 되어 물리치는 거죠."
"종족 전쟁이랑 악마 전쟁처럼?"
"바로 그거에요. 포기를 모르는 근성과 위기의 순간 하나가 되는 결집력. 이 두 가지의 특징이 하나로
맞물려 인간이 주도권을 꽉 쥐게 된 거죠."
여기서 더 무서운 건 인간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는 점이다. 인간은 스스로 부족하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끊임없이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전생의 기억이 있기에 단언할 수 있다.
세실리가 개운하다는 듯이 말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의 미소에 따라 웃었다가 뒷편의
레오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디 보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식사는 다 하셨어요?"
"아니. 네 이야기 듣는다고 못 먹었어. 아이작은 이다음에 듣는 수업 있어?"
"전 없어요. 세실리 누나는요?"
"나는 수학 하나 있어."
"수학 엄청 어렵지 않아요?"
"별로? 나는 쉽던데?"
세실리가 모르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식사 자체는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식당에서 세실리와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가끔 모진 장난을 치기도 했으나 주변에 보는
사람도 딱히 없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하여 세실리까지 떠나자 원래부터 사람이 없었던 식당에는 나, 그리고 멀찍히 앉아있는 레오나만이
남게되었다.
"... ..."
"...!"
퐁-
벌떡-
텁-
"어?"
"너 잠깐만 따라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내 멱살을 붙잡고 질질 끌고가기 전까지는. 아예 인지조차
하지 못 했다.
"시, 식기 정리해야하는...!"
"크르릉...!"
"... ..."
< 25 화 >
후기를 읽어주세요!
*****
우뚝-
"...야."
"봤지?"
"... ..."
"아니었으면 네가 그런 행동도 하지 않았을 거야. 솔직히 말해. 봤지?"
부정할 이유가 있겠나. 원래부터 확인을 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다. 그러나 레오나에게서 풍기는 압박감이
장난 아니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겨우겨우 대답을 꺼냈다. 하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쫑긋-
레오나의 고동색 머리에서 세모꼴의 귀가 쫑긋하며 솟아났다. 누가 봐도 사람이 아니라 동물의 귀였다.
"후우..."
레오나는 머릿속이 복잡한 듯,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레오나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잠자코 기다려줬다.
"저기..."
"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
원래라면 최대한 침착을 유지했을터인데 왜인지 몰라도 지금은 정상적인 사고가 힘들다. 레오나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감 때문인걸까.
어째서 레오나는 본인의 정체를 감추면서까지 아카데미 생활을 하는 걸까? 이것까지 묻는다면 그녀가 또
신경질을 부리겠지만 질문할 가치는 충분하다.
레오나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팔짱을 끼자 교복 너머로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전에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수인을 야만인 내지 원시인으로 취급하고 있다. 더 나아가 수인을 노예로
생각하는 인간도 꽤 많다.
"앞으로도 쭉 그럴거야?"
"당연하지. 정체를 들키지 않고 무사히 졸업하기 위해서는 감내해야 하는 일이야."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수인은 다른 종족보다 '본능'이 특히나 강한 종족이다. 내면의 악과 치열하게 싸우는 마족과 달리 수인은
본능을 억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못 한다는 표현이 어울리겠지.
아무튼 수인에게 본능은 뗄래야 뗄 수 없다. 레오나가 아무리 절제력이 뛰어나다고한들 천부적인 본능은
억누를 수 없다. 멀리 가지 않아도 내가 도발하자마자 귀가 퐁! 하고 튀어나온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제는 아예 질린다는 표정으로 신경질을 부린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하고픈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내 질문에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레오나. 표정에 이 새끼 뭐지? 라는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넌 수인이잖아. 당연히 인간을 좋게 볼리가 없지. 그래서 궁금해졌어. 내 이야기를 듣고 수인은 어떤
생각을 할까? 싶었거든."
"너는 진짜... 하. 묘족보다 더한 놈이네, 이거. 인간은 원래 다 이래?"
"내가 좀 호기심이 많아. 특히 이종족한테는."
"참나..."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꾹 다물려 있던 레오나의 입술이 열리며 특유의 시니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알려줄건데?"
"네?"
"안 알려줄 거라고. 설마 내가 대답해줄 줄 알았냐?"
"우부우? 무어하느은..."
"그나저나 우리 빨간 고양이는 궁금한 게 왜 이리 많을까나?"
스윽-
그 후로 레오나는 내 목덜미에 코를 박으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미묘한 감각에 얼굴이 붉어짐을 느끼며
황급히 빠져나가려 시도했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레오나의 머리를 밀어내는 것 뿐.
"뭐, 뭐 하는 거야?"
"뭐긴 뭐야. 네 냄새를 기억하려는거지. 그런데 퀴퀴한 책 냄새가 진동을 하네."
레오나는 내 머리를 툭- 툭- 치고는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손목을 어루만지면서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레오나의 이름을 외쳤다.
"레오나!"
"아, 진짜... 왜?"
내가 그리 중얼거렸을 때였다.
퐁-
< 26 화 >
'신(神)'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신이라...'
이 세상에는 총 3 명의 신이 있다.
제일 먼저 교수가 언급한 빛의 신 '루미너스'. 루미너스는 주로 인간이 믿는 신이며, 신도수가
어마어마한지라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도 가히 무시무시한 수준이다.
그리고 루미너스를 상징하는 단어는 많지만 그중 대중적으로 알려진 건 '태양'과 '희망'이다. 이때문인지
목숨이 왔다 갔다하는 전쟁에 나서는 군인들 중에 루미너스의 신도가 많다. 내 아버지도 루미너스의
신자였던 걸로 안다.
두 번째는 어둠의 신 '모라'다. 모라는 독특하게도 마족이 믿는 신인데, 마족이 모라를 믿는 이유는
그녀가 어둠 즉, '달'과 '안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암울한 마족의 현실을 보면 그들이 어떤 안식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
더군다나 그들은 신이니 내 존재를 진작에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도 신탁이 내려졌다거나
화신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전혀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는 중이다.
이에 기회가 된다면 신전에 방문할 생각이나 그전까지는 평범하게 지낼 것이다. 하물며 내가 만화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세상을 뒤바꾸는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닌데 그들이 신경 쓸...
나는 교수의 설명을 듣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신학은 역사만큼 지루한 수업이라 그런지 강의실에
앉아있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학생들은 자기가 섬기는 신의 신실한 신자일 확률이 농후하다.
꾸벅- 꾸벅-
이윽고 마리의 눈꺼풀이 완전히 감기고 고개가 아래로 스르르 내려갔다. 졸음을 넘어 완전히 잠에 빠져든
것이다.
딱!
"...으음?"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리는 몸을 흠칫거리더니 아래로 떨어뜨렸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고개를
들어올리자 커튼처럼 쳐졌던 머리카락도 약간 걷혔는데, 옆모습을 바라보니 어딘가 멍한 표정이었다.
"정신이 드냐?"
"...응?"
내 질문에 마리가 비몽사몽한 상태로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몽롱하면서도 색다른 매력을 풍기는 마리의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활기찬 모습만 보여주던 그녀였던지라 새롭게 다가왔다.
"...설마 나 졸았어?"
"응. 꾸벅 꾸벅 잘 졸더라."
"끄응..."
내 대답에 마리가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침음성을 흘렸다. 나는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는 동안 속에 담았던
의문을 꺼냈다.
"1 권부터 최신권까지 다시 읽느라 밤 샜어. 원래는 3 권까지만 읽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다
읽었더라고..."
"... ..."
"너도 알잖아. 비루스 교수가 조별 과제로 제논 일대기의 전개를 예상하랬던 거."
이뿐만 아니라 신디에게 작문을 가르치고, 마리와 세실리에게 역사까지 가르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아예
없는 수준이다. 공강 시간 때마다 숙소로 돌아가서 집필을 하고 있다지만 나도 여유가 필요한 몸이다.
연구실에 있는 논문과 서적은 나에게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다. 게다가 신디도 작문 능력이 떨어질 뿐이지
역사에 관해서는 박학다식한 편이라 내가 궁금했던 점들을 명쾌하게 설명해줬다.
왜냐하면 악마측 간부에는 인간과 수인, 마족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엘프까지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배경 설정은 전생의 서브컬쳐에서 흔히 활용되던 '칠죄종'이며 각각 특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마리는 내가 필기한 부분을 보여주자 밝게 웃으며 옮겨적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음냐..."
"... ..."
평소 마리는 리나를 껄그러워하는 편이다. 마리가 리나를 바라볼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니 그 정도는
눈치챌 수 있다.
"아이작."
"네."
"혹시 아이작은 모임에 관심있어?"
"모임이요?"
"응. 모임."
"곧 있으면 모임이 하나 있는데 모임이라고 해봤자 신입생밖에 없어. 대신 문학, 무학 가리지 않고
모여서 사람이 많을 거야."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난 오라버니가 미리 알려준 거거든. 그리고 조금 있으면 아카데미에서도 알려줄거야. 어때?"
말이 좋아 권유 또는 부탁이지.
'...서럽네.'
< 27 화 >
리나가 언급한대로 아카데미 측에서 신입생 모임이 예정돼 있다고 공지를 기재해줬다. 복도 게시판에
대자보마냥 공지를 붙여놓았으니 모르는 학생들은 아무도 없을거라고 확신한다. 나도 게시판에 붙여진
공지문을 하나하나 읽으며 자세한 일정 및 개최 위치를 재빠르게 확인했다.
모임이 개최되는 시기는 다음 주 토요일이며 위치는 입학식이 진행되었던 대강당이다. 참석 여부는 개인
자유지만 나는 리나의 압박 때문에 참석하는 편이 이롭다.
"어이~"
"응?"
그에 고개를 돌리니 멀리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니콜의 친구, 아델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도 이제
막 모든 대련이 끝났는지 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리는 중이다.
부드러운 맨살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질 뿐 더러 땀과 섞여 은은하게 풍기는 체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가족을 제외하고 이성과의 접촉이 전무했던 나로서는 실로 자극적이었다.
전생에서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충격 때문에 교류를 하지 않아 더더욱 곤혹스러웠다.
니콜도 아델리아의 스킨십은 예상치 못 했는지 버럭 소리치며 황급히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덕분에 내
목은 아델리아의 팔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델리아는 그 뒤로도 니콜이 표독스러운 시선으로 쏘아보자 약간 무안했는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델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하늘색 눈동자에는 진한 흥미로움이 담겨있었다.
"아무튼 신입생 모임은 사교회와 비슷한 점이 많지만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야. 신입생들이랑 선배들이
한데 모여서 웃고 떠들고 놀면 돼. 아이작이 생각하는 것보다 꽤 재미있을걸?"
"그거밖에 없어? 사교회나 무도회처럼 정치적인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하진 않아?"
"너 같은 애들이 무슨 정치를 알겠니? 단어 그대로 친분을 다지기 위한 모임이야."
"음..."
니콜은 과연 알고 있을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제국의 황녀, 리나가 나를
꼬드겼다는 걸. 하지만 괜한 걱정을 줄 것 같으니 입 밖으로 꺼내진 않을 것이다.
갑자기 전개가 쇼핑으로 바뀌는 기분이다. 그래도 썩 나쁘지 않은 것이, 나는 여지껏 집에서 틀어박혀
지냈던지라 패션은 니콜이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신입생 환영회라도 전생의 대학교처럼 장기자랑을 하거나 그러진 않을 것이다. 여기는 놀이 문화가 그닥
발달되지 않은데다 어쩌면 천박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리나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참석하게 된 모임이지만, 은근히 기대가 된다. 어쩌면 협소하디 협소한 내
대인 관계를 약간이나마 완화해주지 않을까?
낯선 사람에게 먼저 다가갈 용기도 없고, 만난지 고작 몇 초만에 친구가 될 정도로 뛰어난 친화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솔직히 내게 선뜻 다가와준 이들이 고마웠다.
"아이작?"
"응?"
"왜 그리 멍 때리고 있어? 이제 출발하자."
상념에 잠겨있는 와중에 니콜이 환복까지 마치고 돌아왔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들으니 아버지가 얼마나 강하신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평범한 기사단원이 아니라 무려
기사단장까지 꿰찬 몸이셨으니 미네르바 제국에서 전술병기급으로 다뤘을 것이다.
하물며 네이비 기사단은 인간보다는 이 종족과 싸우는 일이 더 많다. 최근에는 잠잠하다지만 과거에는
시도때도 없이 국경을 넘나드는 수인과 충돌을 빚었으며, 더 나아가 엘프와도 싸운 적이 있다.
"...그닥 좋은 기억은 없어. 남자들이 하도 들러붙어서 제대로 즐기지도 못 했거든. 다음부터는 모임에
일절 나서지도 않았고."
아무튼 간에 남매의 다정한 이야기를 뒤로 하고, 우리 둘은 머지않아 옷가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헤일로
아카데미 번화가에 위치한 옷가게라 그런지 규모가 상당히 큰 편에 속했다.
옷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원이 영업용 미소를 지어주며 우리를 환대해줬다. 나는 옷가게에 처음 온지라
살짝 주춤거린 반면 니콜은 능숙하게 받아쳤다.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걷다보니 남성용 예복 코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성용 예복 코너라는
말에 어울리는 듯, 다양각색의 예복들이 나열돼 있었다.
'저 녀석은...'
또한 고함을 친 남자는 엄청나게 화려한 예복을 입었다. 이 세상 패션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엄청난
가격을 자랑할 듯했다.
"네 놈은..."
"... ..."
화려한 예복을 입은 남자의 이름은 잭슨. 첫 날부터 세실리와 리나에게 작업을 걸었다가 대차게 깨졌던
백작가 영식이다.
"안녕."
"... ..."
내 무덤덤한 인사에 잭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 28 화 >
첫 인상이 좋다면 특정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그 사람에게 호감을 품기 마련이고, 그 반대라면 아무리 그
사람이 선행을 펼쳐도 고까운 시선을 보내 거나 그럴 일 없다고 부정한다.
"아는 사람이야?"
기묘해진 분위기 속에서 니콜이 나에게 물었다. 그녀는 눈치가 빠른 편이니 잭슨이 나를 불편해한다는
것정도는 알아챘을 것이다.
애초에 질문부터가 '친구'가 아닌 '아는 사람'이었다. 일단은 '아는 사람'이 맞긴 하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같은 문학생이야."
"아~ 그렇구..."
"네 놈이랑 나를 같은 동급이라 생각하지마. 불쾌하기 짝이 없으니까."
1 골드는 대한민국 돈으로 환산하면 약 10 만원이다. 그리고 1 골드는 100 실버이니 대충 276 만원이라고
보면 된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되도록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지 의상을 대충 벗어던지고 렉스라는 시종에게
명령을 내렸다. 렉스는 잭슨이 바닥에다 내팽겨친 예복을 주섲주섬 주워들었다.
이어서 잭슨이 명령한대로 가격을 지불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자루를 꺼내더니 하나하나 셈을 하고 금화를
종업원에게 전달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빨리 빨리 좀 다녀. 그리고..."
이후로 시종은 본인이 다 미안했는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죄했다. 주인과 달리 시종이 인성면에서 더
완벽하다.
"...저 새끼 뭐니?"
머지않아 잭슨과 시종이 완전히 떠나갔을 때 즈음, 니콜이 분노와 황당이 두루 섞은 목소리로 물었다.
욕까지 섞은 게 그녀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니콜의 말처럼 잭슨은 혼자서 열폭하고 있는 거다. 본인이 호감을 품던 여자들이 나와 친하니 배알이 꼴릴
수밖에. 더군다나 그 여자들은 잭슨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는 수준이다.
그사이 니콜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당부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과
마주했다.
"어..."
"설마 누나한테 문제가 생길까봐 대답을 못 하는 거야? 그런 거라면 걱정마. 누나도 인맥이 좀 있거든."
"...알았어."
"그럼 이제 옷을 사볼까? 저기요?"
"아,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니콜의 부름에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여종업원이 후다닥 달려왔다. 말끔한 피부와 더불어 어리숙해 보이는
인상이다.
"얘한테 입힐 옷이 필요해서 그런데 빨간색 정장이 있나요? 얘 머리색과 최대한 비슷한 색으로."
"음... 선홍빛 정장이라... 잠깐만요. 우선 치수부터 잴 게요."
사소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내 예복을 맞추는 일정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종업원이 줄자를 가져오자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저... 몸에 손을 대도 될까요?"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까 손님은 몸에 손대지 말라고 하셔서..."
"... ..."
이놈은 오기 전에도 진상을 부리고 갔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대답했다.
치졸한 계급 사회 같으니라고.
*****
그리고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는 주말을 리나와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고나서 처음으로 사귄 인간 친구였으며 취미도 맞으니 그녀에게 리나만큼 편안한 상대는
없었다.
"자. 여기 있어."
잠시 후, 리나가 전달해준 책이 진짜라는 것까지 확인한 세실리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책을 덮었다.
리나는 그녀의 행동에 다소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흥미진진한 전개가 이어지는 와중에 누군가 결말을 발설해버리면 분노하길
마련이다. 설령 실수로 말했다고한들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는 건 변함없다.
그런데도 리나는 제논을 함정에 빠뜨린 사람의 정체가 누구인지 세실리에게 알려줬다. 세실리가 당연히 8
권을 읽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참사였다.
이후로는 세실리가 드물게 화를 내고, 리나도 기분이 나빠져 언쟁까지 벌였다. 다행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화해를 했다만 그 뒤로 세실리는 리나의 옆자리에 앉지 않았다.
리나는 8 권을 꼭 껴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세실리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녀가 무덤에 들어갈 때
즈음이면 아마 자신의 후손도 같이 들어가지 않을까.
잠깐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됐지만 리나는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8 권이 아니라
그녀의 근황에 대해 묻는거다.
세실리는 100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지만 인간 사회에서 생활하는 건 처음이다. 다행히 마족의 문화는
인간의 문화와 유사한 점이 많아 지금까지는 무리없이 지내고 있다.
하지만 가끔가다가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가장 큰 예시가 바로 마법을 이용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다. 헤일로 아카데미는 특정 구역을 제외하면 마법은 금지이기에 리나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리나도 세실리가 탁자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주자 머릿속으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세실리가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리나의 얼굴은 놀람을 넘어 점점 멍해졌다.
더 나아가 종래에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해졌는데, 리나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려 중간에 멈추었다.
리나는 그로부터 시선을 살짝 더 들어올려 세실리의 얼굴과 마주했다. 설명을 모두 마친 세실리는 태연한
표정 그대로였다.
"난 뭘 입던 간에 야할 걸?"
"... ..."
< 29 화 >
시간이 상대적으로 빨리 흘러가는 경우는 몇이나 있을까. 사람마다 기준은 다 다르겠지만 구분하자면 두
가지가 있다.
결과적으로 누나랑 같이 예복을 구매한지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금요일이다. 나는 금요일 마지막 강의인
경제학을 듣지 않아서 3 시가 되면 모든 수업이 끝난다.
군사학 교수는 간결하게 설명해주고는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가 강의실 밖으로 나가고 난 뒤에도
얼떨떨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강의 도중에 질문한 주제는 '명량해전'이다. 성웅, 이순신 장군이 이루어낸 업적이며 한국인이라면
결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역사적 진실.
물론 자세한 시대적 배경은 설명하지 않고, 내가 나름대로 이 세상에 걸맞게 대입시켰다. 명량해전에서도
조선 수군은 숫자가 부족할지언정 스펙 자체는 훌륭했으니 이것저것 덧붙이는 건 잊지 않았다. 이 하나를
위하여 2 주 동안 조용히 강의만 들었으며 오늘이 되어서야 질문했다.
하지만 군사학 교수는 딱 잘라 말했다. 상대방에도 큰 피해를 입히는 건 가능하겠지만 승리를 점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심지어 지휘관이 신의 선택을 받은 '화신'이라 할지어도 말이다.
심지어 내가 교수에게 말했던 수군의 상황보다 원역사의 상황이 더 최악이었다. 혹시나 해서 배경과
상황을 조금 더 좋게 만들었는데도 교수는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었다.
그런데도 이순신 장군은 이겼어. 심지어 왕에게 반쯤 버림받은데다 자기 손으로 일군 군사는 원균이 그
전에 다 말아먹었다고.
우리 두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뒤에 앉아있던 리나가 부드러운 음색으로 물었다. 참고로 리나의 옆에는
세실리가 앉아있다.
그동안 마리가 까칠함이 묻어나오는 어조로 대답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마리가
리나를 불편해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이전까지는 알음알음 경계했다면 지금은 거의 대놓고 까칠하게
대했다.
그 대신 다른 주제로 분위기를 전환하는 게 좋다. 나는 마리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니콜은 모임을 신입생들이 웃고 떠들고 즐기는 행사라 말했지만, 마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건 또 아는
듯싶었다.
인맥이 없다면 위기의 상황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없을테고 무엇보다 귀족에게 있어서 정치는 빼놓을 수
없는 사안이다.
"진짜 사람 불편히게 만드는 재주는 있네. 설마 리나가 압박한 건 아니지? 솔직히 말해."
"절대 아니야. 내가 자발적으로 참여한 건데?"
"음..."
잠시 후,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마리가 애매하다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다행히 얼굴색이 변하진
않은 모양이다.
"그럼 너는?"
"나는 가문에서 갖고 온 게 있어. 아빠가 생일 선물로 준 건데 무려 그 유명한 젤트가 나를 위해 제작해준
드레스야."
마리가 우쭐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나는 젤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아마 재봉과 관련된 장인이지
않을까.
"엄청 비싸겠네."
"당연하지. 어림잡아도 100 골은 거뜬히 넘어갈걸? 뭐, 젤트가 제작한 것치고는 싼 편이지만."
마리는 이야기를 하다가 장난기가 돌았는지 악동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자신감을 듬뿍 담으며 나에게
선언하듯이 말했다.
"지금도 예쁜데."
"...에?"
"지금도 충분히 예쁘다고."
"어... 어어..."
무뚝뚝하지만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린 걸까. 백설기 같은 그녀의 피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내 대답이
꽤나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마리가 아름다운 미녀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나는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했을 뿐이고.
"...아이작."
"응."
"나 정말로 예뻐?"
"정 못 믿겠으면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 열에 열은 다 예쁘다고 하지."
"...히히."
그렇게도 좋은 건가.
마리는 내 무뚝뚝한 대답을 듣고 배시시 웃었다. 괄괄했던 첫 인상과 달리 사춘기 소녀다운 풋풋함이
묻어나오는 중이다.
"아이작."
"응."
"방학 때 우리 저택에 꼭 올 거지?"
왠지 그 말이 이상한 방향으로 다가온 건 내 착각일까. 화기애애한 지금의 분위기도 그렇고 마리의 반응도
그렇고 묘하게 느껴졌다.
마리에게서 그 사실을 듣고나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아버지는 꼬리가 밟힌 적은 전혀 없고,
사칭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답장을 보내주셨다.
그녀의 질문에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마리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초대받은 작가가 사칭으로 들통난 이상
내가 그녀의 저택에 방문할 이유는 없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갈 필요도 없고...'
공작이 사람을 시켜 사칭을 잡았다지만 마리의 이야기를 들으면 원래부터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작과 대면하고 악수를 나누는 순간 내 펜혹의 존재를 알아차릴 가능성이 높다.
특히 공작은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둘테니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나이를 지긋하게 드신 현자로 생각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변태도 아니고 호랑이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머리를
들이밀 이유가 없다.
"...아마도?"
"에이씨... 그냥 말하지 말... 아니지."
도대체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기에 저렇게 진지한 걸까. 저렇게 진지한 얼굴은 내가 그녀와 지내면서 처음
봤던지라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왜."
"내가 초대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아빠가 초대해도 거절할 거야?"
"...야."
"그리고 말은 안 했지만 우리 아빠도 너한테 관심이 있으시더라고. 얼마나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
학생이 역사를 가르쳐준다는 걸까, 라고 하셨어. 게다가 여기서 내가 역사 점수를 좋게 받으면 더더욱
관심을 주시겠지?"
"... ..."
"어떡할래? 내가 부탁할 때 올래, 아니면 우리 아빠가 부탁할 때 올래?"
"그래. 갈게. 가면 되잖아. 치사해서 진짜."
"좋았어!"
그나마 마리라서 마지못해 수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조건적 거절했다. 마리는 인지하지 못
했겠지만 방금 상황은 엄연히 '권력'을 이용한 거다. 그녀의 가문, 레킬리스의 이념으로부터 한참
동떨어진 행위다.
하지만 지금 그 사실을 알려줬다간 마리가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 일은 가슴 속에 묻어두는 편이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좋겠지.
거기다 마리가 방방거리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부정적인 마음조차 사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모임은 문학생만이 아니라 무학생까지 한데 모이는 행사다. 니콜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는 했으나 걱정이
되는 건 여전했다.
이어서 책상에 앉아 강의용 노트가 아닌, 전개를 정리한 노트를 펼쳤다. 세심하게 정리된 전개 및
에피소드가 적혀있었으며 등장인물의 특징과 대략적인 설명 또한 기록되어있었다.
< 30 화 >
"좋네."
'조금 긴장되네.'
전생에서도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지만, 지금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신입생 모임이다. 누구는 신나게 웃고
떠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누구는 인맥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자리일 것이다.
누누이 말했지만 모임은 문학생 뿐만 아니라 무학생도 참석하는 행사다. 전공을 대표하는 선배나 조교도
참석할 수 있으니 인원이 꽤 많을 것이다.
'나도 키 크고 싶다.'
"아이작?"
"음?"
이제 슬슬 대강당 도착하기 직전,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뒤이어 고개를 옮기자마자 눈에 들어온
얼굴에 살짝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레오르트 님?"
"역시 아이작이 맞군. 멀리서 붉은색이 보이길래 따라왔는데 진짜일줄이야."
"여기는 웬일이시죠?"
"이 옷을 보면 자네도 짐작했을텐데? 당연히 모임에 참석하기 위함이지. 자네도 보아하니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강당으로 향하는 중인 것 같은데?"
"네."
"음..."
내 간단한 대답을 들은 레오르트가 턱을 살살 쓰다듬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거의 제복 수준으로
화려한 그의 예복과 비교했을 때 나의 것은 검소하다 못해 볼품없는 수준이다.
"아뇨. 읽지는 않았지만 신문은 봤습니다. 8 권에 귀족을 비판하는 이야기와 증기 기관차라는 운송수단을
선보였다고 하더군요."
"그래. 귀족을 비판하는 건 그렇다 쳐도 증기 기관차는 나조차도 놀라웠지. 정말로 증기 기관차 같은
교통수단이 발명된다면 세상은 크게 변화하겠지."
"레오르트 님은 정말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그러므로 산업혁명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특정 기준 이상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의미인데, 이 세상은 과학과
마법 사이에 미묘한 언밸런스함이 존재한다.
냉장고 같이 원리가 간단하다면 마법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증기 기관차처럼 복잡한 기계는 마법으로
대체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것조차 마법이지 공학이 아니다.
내가 초조한 심정으로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머지않아 대강당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하자 레오르트는
나에게 말했다.
본격적인 행사가 5 시 30 분이지, 그전부터 대기하는 건 상관없었기에 입구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입구를 통과하여 대강당 내부에 진입했을 때였다.
"...대단하네."
'사람들은... 꽤 많네.'
문학생, 무학생 가리지 않고 참석하는 모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바글바글거렸다. 참석 여부는 분명히
자유였던 걸로 알고 있는데 정말 많은 학생들이 참석했다. 저중에는 신입생뿐만 아니라 전공을 대표하는
선배와 조교들도 포함돼 있을 것이리라.
"아이작!"
"... ..."
"아이작! 여기야! 여기!"
그에 나는 반쯤 포기하며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그러나 내 생각은 거기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세실리가 가까이 다가오면 올 수록 그녀의 파격적인 의상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올 때마다 가슴이 조금씩 흔들거려 음심을 자극시켰다.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세실리가 늘 그랬듯이 친근하게 대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반가운 인사에도
쉬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복장도 복장이지만 향수라도 뿌렸는지 장미향이 내 후각을 자극했으며, 은연히 풍기는 색기가 평소
묻어두었던 내 음습한 욕망을 수면 위로 끌어내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실리는 내 기분도 모르는지 드레스의 양끝을 잡아올리며 물었다. 목소리에는 기대와
특유의 장난기가 담겨있었다.
꿀꺽-
"풋."
"... ..."
"아이작 얼굴 엄청 빨개졌어."
"... ..."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얼굴이 안 빨개지는 남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필시 고자거나 게이가 확실하다.
< 31 화 >
모임에 나가는 길에 마리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나 그녀는 무난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공작 가문의
출신인만큼 14 살 때부터 '사교회'에 나선 덕에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다.
나쁘게 말하면 말괄량이 같은 성격이지만 뒷배가 뒷배인지라 대놓고 험담을 내놓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속이 뻔히 보이는 달콤한 말로 아부를 떨기 바빴다.
비록 마리는 연기를 못 하지만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표정을 통해 간파할 수 있다.
관찰력이 뛰어난 리나와 다른 점이라면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치챈다는 점이랄까.
친근하게 대하는 제니아라는 학생에게도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떻게든 고위급 귀족과 연줄을
이으려는 계산적인 행동. 겉으로는 티내지 않았지만 마리는 지금 상황이 매우 불편했다.
마리는 제니아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속으로는 최근에 인연을 가진 붉은 머리의 남학생을 떠올렸다.
멀리서도 눈에 띌만한 선홍빛 머리카락과 맹수처럼 빛나는 금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
'...세실리?
"... ..."
*****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나온 이유는 평범한 여자도 화장으로 꾸미면 아름답게 변하는
경우가 흔하여 나오게 된 일종의 격언이다.
"아이작 얼굴 엄청 빨개졌어."
"... ..."
'진짜...'
하지만 남자라면 내 심정을 이해해줄 것이다.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아름다운 미녀가, 그것도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고 내 앞에서 야릇한 장난을 치는데 그 어떤 남자가 반응하지 않겠나.
"후우... 누나...?"
"왜?"
"...옷이 조금... 과하지 않아요?"
"뭐가 과한데?"
"그... 옷이 좀..."
"야하다고?"
"...네."
다른 사람이 이런 옷을 입는다면 험담을 내뱉겠지만, 확실히 세실리가 입으니까 다르게 느껴졌다. 색기와
더불어 본래부터 갖고 있던 품위가 기품으로 승화되어 그녀의 매력을 더 크게 발산시켰다.
그녀의 말처럼 인간의 방식을 다른 종족에게 들이미는 행동은 한심하기 그지없는 짓이다. 어쩌면 이런 내
행동이 그녀를 기분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내 사과에 세실리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빙긋 웃었다. 나 또한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시선과
마주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응?"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사이를 파고들었다. 세실리는 물론이고 나 또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세실리 못지않게 아름다운 미녀가 팔짱을 낀 채 당당히 서 있었다. 뭐가 불만인지 몰라도
잔뜩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순간적으로 이 미녀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새하얀 백발과 더불어 영민하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을 통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설마 마리?"
"왜 불러?"
마리의 이름을 입에 담자 아리따운 미녀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나는 약간 멍해진 얼굴로 마리의 모습을
훑어봤다.
허리까지 길게 길렀던 흰색 머리카락은 포니테일로 묶어 사슴같은 목덜미를 드러냈고, 화장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어른스러운 자태를 뿜냈다.
마지막으로 공작가 영애에 걸맞게 비싸보이는 장신구를 착용했지만 그녀의 미모에 비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기가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학생으로써의 마리가 활발한 소녀다움을 풍겼다면, 현재의 마리는 세실리처럼 성숙미를 풍기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는 내 대답에 충분히 만족스러웠는지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뒤이어 그녀는 나와
정면으로 마주한 채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나와 잡담을 나누던 마리는 말을 흐리며 내가 아닌 세실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빠르게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리도 나와 비슷한 심정인 듯했다. 하기야 어떤 사람이던지 간에 세실리를 본다면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뭐, 뭐 하는..."
"이 드레스를 입으면 아이작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궁금했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장난 아닌데? 그리고 이렇게 팔짱을 끼는 건 욕망을 이겨낸 상대에게 해주는 일종의 포상이야. 우리
헬리움의 오래된 문화지."
"그건 너희 마족에게 통용되는 이야기겠지. 우리 인간들은 지금 네 행동을 별로 좋게 보지 않을 걸? 지금
네가 아이작에게 하는 행동은 연인끼리나 하는 행위라고. 정조를 의심하게 만들 수도 있어."
"아까 아이작에게도 말했지만 인간의 기준을 다른 종족에게 대입시키는 건 좋지 않아. 그리고 우리 마족도
정조관념은 매우 보수적인 편이야."
"인간 세상에 왔으니 인간의 법도에 따라야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두 여자 사이에 한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공방이 오고 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리가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진 얼굴을 지은 반면, 세실리는 시종일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까.
헬리움의 공주와 레킬리스의 영애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싸운다.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전개인가.
아마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집에 가고 싶다.'
현재 내 심정이 그렇다.
< 32 화 >
함부로 대하기 곤란한 상황이 수 분간 이어지고 있을 때 부드러운 여인의 음색이 끼어들었다. 목소리에
의아함과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 목소리에 나는 물론이고 내 팔을 붙잡은 두 여자도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옮긴 곳에는 금발의 여자가
한 손에 와인잔을 들며 의문에 찬 표정으로 우리를 보는 중이다.
웨이브 진 황금색 머리카락과 사파이어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 금색과 흰색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오프솔더 드레스로 하여금 우아하고 고고한 기품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분위기가 180 도 바뀐 마리처럼, 이전과 달리 학생의 모습이 아닌 일국의 '황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나타난 리나였다.
"...치정 싸움?"
"...아!"
그러다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내 팔을 붙잡은 손을 떼어내는 마리. 리나의 말을 듣고나서 남들에게 현재
이 상황이 어떻게 비추어질지 뒤늦게 깨닫은 모양이다.
그사이 세실리도 장난은 그만두려는지 붙잡았던 내 팔을 슬며시 놓아주었다. 가슴에 거의 파묻힌 것처럼
밀착돼 있던 내 팔이 드디어 자유로워지는 순간이었다.
상황이 종료되고 마리가 리나에게 왁- 왁- 소리쳤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일어난 홍조하며, 말을
더듬는 걸 보면 누가 봐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째서 그녀가 이런 장난을 벌였는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장난이라고 해도 그
정도가 조금 과했으니까. 포상이니 뭐니 해도 서슴없이 팔을 붙잡는 건 누가 봐도 애정 표시에 가깝다.
세실리는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착각이 아니라 평소에 나를 대하는 태도나 장난을 본다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알게 되는 법이다.
일개 남작의 아들인 나와 헬리움의 공주인 세실리. 이것만 보아도 나와 그녀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리나의 살가운 칭찬에도 마리는 매몰차게 대했다. 마리가 아무리 공작가 영애라지만 그보다 높은 황녀에게
무례한 태도를 연이어 보여주고 있다.
마리는 못마땅하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리나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리나는 특유의 부드러운 음색으로
대답했다.
"아이작을 데리고 다니려 했지. 이참에 아이작에게도 내가 아는 친구를 소개시켜주면 어떨까 싶어서."
"꼭 아이작이 너랑 같이 있을 거라는 말투네? 아이작의 의견을 안 물어?"
"그럼 지금 물어보면 되겠네. 아이작의 생각은 어때?"
마리의 적의가 담긴 질문에도 리나는 능청스레 대답했다. 그녀는 마리의 얼굴이 구겨지던 말던 나를 보며
내 의견을 물었다.
차라리 리나가 실망을 느낄지언정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귀족들의 복잡한 정치 세계에 발을 디디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지난 번처럼 압박을 가해도 한사코 거절할 것이다.
내가 예의 바르게 거절의 의사를 표하자 리나가 예상했던 말을 꺼냈다. '부탁'이라고 했지만 엄연히
황녀가 내리는 명령에 가까웠다.
직설적으로, 그것도 평소처럼 이름을 부르지 않고 황녀라는 명칭을 입에 담았기 때문일까. 리나의
눈동자가 살짝 크게 떠졌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몰랐다는 반응이다.
리나는 세실리를 데리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실리도 떠나기 전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살갑게 인사해줬다.
나는 왠지 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겪은 듯한 데쟈뷰에 손을 흔들어줬다. 옆의 마리는 세실리에게만 인사를
해줬지, 리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자연스레 우리라고 칭한 마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곧바로 답하지 않은 이유는 생각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리나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정치적으로 얽히기 싫은 것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리나를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리나 세실리처럼 마음을 놓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마리는 경우가 약간 다르다. 나름대로 친하다고 생각하는데다가 그녀는 현재 나에게 모종의 호감을
품고 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마리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말문이 막혔는지 곧바로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 푸른 눈동자가 데록데록
굴러가며 어떻게든 이유를 찾는 모습이다.
제아무리 권위의식과 거리가 먼 마리라지만, 그녀는 엄연히 레킬리스 공작가 출신이다. 피하고 싶어도
복잡한 일,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엮일 수밖에 없는 위치다.
하물며 그녀가 전에 비슷한 요지의 말을 꺼낸 적이 있다. 모임에 참여하기 싫어도 레킬리스 가문의
딸인만큼 인맥을 넓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여해야 한다고. 이건 빼도박도 못 하는 진실이다.
과연 마리는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나는 그녀의 생각이 모두 정리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줬다.
나처럼 모임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면 함께 다닐만 했지만, 아쉽게도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뒤이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더니 얼굴을 살짝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아까보다
작아진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이제는 말을 흐린 수준이 아니라 말이 없어진 마리. 그와 동시에 얼굴이 점점 노을처럼 붉어지기 시작했다.
내 무뚝뚝한 대답에 마리는 힘없이 화답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등을 돌리고 나서야 드레스의
등부분이 훤히 파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실리보다는 아니지만 마리의 드레스도 과감한 편이다.
나는 뒷모습만으로도 아름다운 자태를 내뿜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도 잠시, 상황이 일단락된
듯하자 등을 돌렸다.
"...응?"
"이봐! 거기 빨간 머리!"
"응?"
빨간 머리는 나를 부르는 걸까. 귀에 속속 박히는 목소리도 그렇고 이름이 아니라 빨간 머리라 부르는
것도 그렇고 누구인지 대충 알 것 같다.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가까운 거리에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에 사람들로 둘러
쌓여있지만 재수없는 상판떼기만큼은 명확했다.
나는 재수없는 얼굴과 더불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혹시나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래도 역시
빨간 머리는 나 혼자밖에 없다.
"나?"
그 의문이 전달되었을까.
이어서 잭슨의 앞에 선 나는 저번에도 그랬듯이, 무뚝뚝한 인사를 건넸다. 보는 사람이 많아도 개의치
않았다.
"안녕."
"... ..."
"네놈은...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군. 가문에서 자기보다 높은 작위를 가진 상대에게는 존댓말을 하라고
배우지 하지 않았나?"
"... ..."
그런데 잭슨은 어디서 잘못 배웠는지 몰라도 이상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잭슨처럼 남들을 깔보는
마인드를 가지지 않는 이상 보통 서로 존댓말을 하며 존중하는 편이다.
"아무리 그래도 서로에게 격식을 갖춰야 하지 않나?"
"반말은 저 빨간 머리가 먼저 했잖아."
"잭슨은 쟤를 불렀을 때부터 빨간 머리라고 했어."
내 질문에 정신을 차렸는지 잭슨이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는 특유의 깔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별 일 아니야.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네 모습이 보였거든. 그전에 재밌는 상황도 있었고 말이야."
"... ..."
"레킬리스 공작가의 영애와 헬리움의 공주. 누가 뭐래도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분들이지. 누구랑은 사는
세상이 달라."
"그래서 본론이 뭔데? 구구절절 이상한 얘기할 거면 나 간다."
"자, 잠깐! 말 좀 들어!"
음...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겠다는 건가? 자기가 나보다 머리가 더 좋을거라 단정
짓고?
갑자기 그게 왜 나오는거야.
내가 적잖이 당황하는 동안 잭슨은 두 팔을 펼쳐 주위를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너도 알다시피 제논 일대기에는 제논과 메리가 주연이지만, 진과 릴리의 비중도 만만치 않아. 거기다
마족인 진과 성직자인 릴리의 애처로운 사랑 이야기는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애태우는 중이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제를 그것으로 하여 의논을 나누었고."
"그건 나도 알고 있어."
하물며 복선과 떡밥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추리하는 경우라면? 내 작품을 이렇게나 사랑하는구나, 라며
생각하여 더욱 열심히 쓰게 된다.
그래서 더더욱 잭슨에게 기대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이어질 거라 생각하고 있는 진과 릴리인데
혼자서 안 된다고 하니 무언가 있을 거라...
"씨발. 뭐?"
< 33 화 >
커플링 가지고 의논을 나누는 것까지는 껄껄 웃어넘길 수 있다. 아마 몇몇은 잭슨이 말한 논리 대결의
주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비교하자면 이런 거다.
국어 시간에 문학 소설 등장인물의 관계를 해석하는 것처럼, 제논 일대기도 비슷한 형식이다. 또한 제논
일대기는 이 세상의 여느 소설처럼 베베 꼬아서 설명하지 않고 눈에 확 들어오도록 썼으니 인물 관계도가
명확한 편이다.
당장 주인공 제논과 히로인 메리의 관계가 어떠한지, 진과 릴리의 관계가 어떠한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여기서 제논의 동료와 조력자까지 포함한다면 꽤나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다.
"씨발. 뭐?"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잭슨에게 물었다. 당장이라도 소리 지르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래. 지나가듯이 언급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 했겠지만 악마 사냥꾼들의 수장, 사크란은
진에게 이리 말했지. '자네처럼 뿔이 크고 검은 마나의 농도가 짙은 마족은 지극히 드물다'라고. 또한
제논 일대기 속 마족은 세대를 거치면 거칠 수록 악마의 피가 조금씩 옅어진다는 특징이 있어."
"... ..."
"이 모든 걸 종합하자면 이래. 진은 마족과 마족 사이에 태어난 게 아닌, 진짜 악마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마족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 악마의 특징이 더욱 강하게 두드러질 수밖에 없을거야."
"와..."
짝- 짝- 짝- 짝-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박수를 쳐줬다. 첫 시작은 이상했지만 과정은 전부 내가 원했던 이야기에
부합한다.
실제로 진은 여타 마족과 달리 인간보다는 악마에 한없이 가까운 마족이다. 어머니가 악마에게 강간당하여
어쩔 수 없이 낳았으며 어린 시절 때부터 모진 학대를 받고 자라난 비운의 마족.
심지어 진의 어머니를 강간한 악마도 평범한 악마가 아니다. 앞으로 등장할 칠죄종 중 '식탐'을 맡고
있으며 그에 걸맞게 남의 힘을 강탈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동안 잭슨은 내가 박수까지 쳐주며 감탄하자 뿌듯했는지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우러러
보라는 자신감이 뿜어져나왔다.
잭슨의 추리는 정말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원작자으로써 부정해야 할 건 부정해야 한다. 실제로 잭슨의
설명은 그럴 듯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내가 반박하자 잭슨은 불쾌감을 담으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본인 딴에는 열정을 부었던 추리가
부정당하니 기분이 영 좋지 않은 모양이다.
"네 말대로 진의 출생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어쩌면 나중에 큰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지. 아니,
걸림돌이 되는 건 확실할 거야. 악마의 특징이 타인보다 짙다는 건 그만큼 인간보다 악마에 더 가깝다는
걸 의미하니까."
"... ..."
"그런데 릴리가 과연 그 사실을 모를까? 어릴 때부터 함께 한 그녀라면 그 사실을 알고도 곁에 있을걸?"
"그리고 릴리가 제논에게 보여준 호의는 이성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의 호의에 가까워. 특히 제논은 진이
악마가 될 뻔한 적을 몇 번 막아줬잖아? 릴리 입장에서는 정말 고마운 사람이 아닐 수가 없겠지. 거기다
진과 릴리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어. 가끔가다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는 묘사라던가,
은근슬쩍 손을 잡았다는 묘사가 꽤 많지."
"... ..."
"무엇보다 릴리는 진에게 꽃을 몇 번 선물해준 적이 있어. 그게 무슨 꽃인지는 알아?"
잭슨은 내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미리 정답을 말하자면 릴리가 진에게
선물했던 꽃은 백합(릴리)이다.
백합의 꽃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대표적인 건 단연코 '순정'이다. 릴리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그녀는 진을 향한 사랑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중이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대답은 잭슨이 아닌, 우리의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한 명에게서 나왔다.
"릴리는 진에게 백합을 선물해주면서까지 본인의 마음은 변치 않을거라 강조하고 있어. 진도 그 마음을
알기에 누구보다 더 헌신을 하는 거고. 그러니 두 사람이 이어지지는 못 해도 릴리가 제논에게 간다는 건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개연성과 릴리의 캐릭터성에 완벽하게 어긋나는 이야기지. 애당초 릴리라는
이름부터가 그 증거야."
"... ..."
"그래도 아까 전 감탄은 진심이었어. 남들이라면 쉬이 넘길만한 복선들을 캐치해서 진의 출생이 심상치
않다고 말했잖아. 솔직히 그건 나도 좀 놀라웠어."
"크윽...!"
거기다 평소 잭슨이 나에게 시비를 걸었던 걸 상기하면 딱히 정정할 필요성도 못 느꼈다. 그냥 자기가
알아서 열폭하라지.
잭슨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와중에 누군가 나에게 질문했다. 조금 전, 백합의 꽃말에 관한 대답을
꺼냈던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 그리고 잭슨과 달리 한껏 예의를 차린 그를 바라보며 잠깐 고민의 시간을
거쳤다. 앞으로의 전개를 곧이곧대로 말하자니 스포일러가 되는 것 같아 양심이 찔렸다.
"어... 아마 그것도 일부겠죠? 어쨌거나 진은 릴리를 위해 본인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준비가 되어있어요.
설령 악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불쌍해라... 진짜 그렇게 될까?"
"그건 작가만이 알겠지. 그래도 나는 둘이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숙소로 돌아가면 하나하나 찾아봐야겠다.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들으니 정말 신기해."
잭슨은 본인이 생각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자 분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글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것이 좀 추하게 느껴진다.
진과 릴리가 이어지지 못할 거라는 확신은 좋게 볼만하지만, 그렇다고 순정의 표본인 릴리가 제논에게 갈
거라는 건 도저히 가만 둘 수가 없었다.
이빨을 깨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고, 잭슨은 더이상 나와 마주치기도 싫다는 듯이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잭슨이 다른 곳으로 걸어가도 그를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끔 가다 니콜의 이름도 언급이 되었는데, 보아하니 신임생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것 같다. 하기야 그
얼굴에 그 실력인데 유명하지 않으면 이상한 거겠지.
그래도 뭐, 잭슨과 달리 나에게 시비를 걸지도 않을테고 몇 가지 궁금한 점도 있었으네 거부할 생각은
없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겸사겸사 인맥도 늘리면 좋고.
'한 입 마셔볼까?'
"...오."
나는 와인의 맛에 만족감을 느끼며 아까의 자리로 돌아갔다. 잭슨이 떠나가도 무리가 해체되지 않는 걸
보아 정말 제논 일대기의 팬만 모은 것 같았다.
"네. 다들 메리의 출신을 두고 의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이작 님도 아시다시피 메리는 마법사잖아요?
하지만 마법은 평민이 배우기에는 매우 힘든 능력이죠. 그러니 대부분 메리가 귀족, 그것도 후작
이상이라는 부분에 가능성을 두고 있습니다."
"흐음... 그래요? 에딘 님의 생각은요?"
"저는 메리가 엘프와 연관돼 있지 않을까라며 추측하고 있어요. 제논 일대기는 외모 묘사를 꾸준히 하는
편인데 유독 메리는 풍성한 머리카락에 귀가 가려져 있다는 언급이 항상 나오거든요. 하물며 엘프는
마족처럼 마법의 대가이니 귀를 숨기는 것정도는 쉬울테죠."
"... ..."
"아이작 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34 화 >
하지만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과 그들이 사용하는 악기에 관심을 가진 것도 잠깐이었지, 나는 에딘과
신나게 떠들기 바빴다.
에딘도 서슴없이 다가온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차가운 인상이 무색하게 이따금씩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와인을 좀 많이 마셔서 그럴까. 평소였다면 약간의 경계심을 담았겠지만 알딸딸한 기분이 머리를 지배하여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와인이 쓰지 않고 단맛이 더 강하여 너무 많이 마셨던 탓이다.
그사이 에딘은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어서 우리 근처에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속삭이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그냥... 세실리 누나가 장난친 거야. 마리는 그걸 보고 손 떼라고 한 거고. 너도 알다시피 팔짱을 끼는
건 연인들끼리나 하는 행위잖아? 그런데 마족은 좀 다르더라고. 마리도 그걸 걱정해서 떼라고 한 거야."
"세실리 누나? 너 설마 세실리 공주님을 친근하게 누나라고 부르는 거야?"
"아..."
"모르겠는데?"
"모르겠다고?"
"응. 맛있어서 잔이 빌 때마다 마셨어."
"... ..."
에딘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지만 지금 내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 마신 와인이 기점이 되었는지
전보다 머리가 더 헤롱헤롱거렸으니까.
"아이작?"
"...세실리 공주님?"
"아."
"안녕하세요.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이라고 해요. 편히게 세실리라고 불러주세요 "
"시, 시그너 백작 가문의 장남, 에딘 마비 시그너라고 합니다. 헬리움의 후계자와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에딘은 그녀의 정중한 인사에 순간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예법에 따라 인사했다. 저거 분명 가슴
쪽으로 시선이 간 것이 틀림없다. 말까지 더듬거리는 걸 보면 확실하다.
역시 너도 남자였구나. 솔직히 지금 세실리의 모습을 본다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시선을 끌었을 것이다.
아마도.
"흐응."
세실리는 내 상태를 체크하더니 미묘한 비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시야가 흐릿했지만 그녀의
장난기가 발동될 때마다 나오는 미소가 확실했다. 그 미소에 약간 불안해진 건 덤이고.
결국 세실리의 손길에 이끌려 발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실수로 와인잔을 놓칠까봐 남아있던 신경을
그쪽에 쏟아부었다.
이어서 세실리에게 이끌려 도착한 장소는 다양한 먹거리가 놓여있는 테이블이었다. 세실리는 테이블에
도착하자마자 와인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웨이터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탁했다.
세실리의 말에 따라 와인잔을 내미니 웨이터가 정갈한 자세로 와인을 따라줬다. 보라색이 아니라 진한
붉은색에 가까운 와인이었다.
내가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감상하는 동안 세실리는 빙긋 웃더니 나에게 말했다. 고혹적인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전생에서는 어쩌다 보니 생겨난 문화이지만, 여기서는 인간이 드워프들을 따라해서 생겨난 문화다.
다양한 역사책을 읽다 보니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건배를 인간의 문화로 착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인간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을
뿐 더러 드워프들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저그면 좋겠지..."
"적는다라... 아이작?"
"...네에?"
"우리 건배할까?"
세실리가 싱긋 웃더니 와인잔을 내밀며 나에게 권유했다. 와인잔에 담긴 붉은 액체가 찰랑이는 모습 눈에
들어왔다.
땅-
"으으..."
"아이작."
"네에... 누나아..."
"내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물어봐도 되겠니?"
"그게 뭔데여어...?"
이제는 시야가 흐릿한 정도가 아니라 뿌옇게 변했다. 또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악단의 연주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메아리처럼 울렁거렸다.
"너 혹시 글 쓰는 거 좋아해?"
< 35 화 >
여태까지 소설이라함은 문장이 이리저리 꼬여있고, 단어마저 복잡하기 그지없는 서적밖에 없었으나 제논
일대기는 정반대의 노선을 타고 있다. 머릿속에 재생이 되는 듯한 문장력과 묘사, 그리고 여운을 남기는
명장면과 메시지들.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던 한 평민이 '기연'을 만나 재능을 개화하고, 더 나아가
세상을 구하는 영웅으로 성장하는 일대기. 거기다 매력적인 여주인공과 조연들.
"...그건 왜 물어여?"
눈이 반즈음 풀려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 아이작이 흐물거리는 목소리로 세실리에게 물었다. 호박처럼
빛나던 금색 눈동자는 빛을 잃어 탁해졌고, 무뚝뚝하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귀엽네.'
물론 평소 노트에 기록하는 습관을 가진 아이작이니, 굳은살 정도야 충분히 가질 수 있다. 거기다 공부를
좋아한다고 직접 말했으니 여기까지는 넘길만하다.
또한 아이작은 여태까지 집에서 생활하고 밖에 나갔던 적이 거의 없다고 본인이 스스로 밝혔다. 하물며
제논 일대기에는 경험이 많거나 그 경험을 직접 눈으로 봐야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가득 채워져 있다 .
세실리는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안에 담긴 와인이 출렁이는 모습을 보다가 아이작에게 시선을 두었다.
술에 취해서 그럴까. 평소였다면 얼굴에 모든 생각이 드러나는 아이작이나 지금은 분간하기가 힘들다.
마법의 활용성은 무궁무진하다. 생활에 용이하게 쓸 수 있는 마법도 있고 정신을 조작해 본심을 토해내게
만드는 마법도 있다.
하지만 마법은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특정 지역을 제외하면 사용이 불가능 할 뿐 더러 정신계 마법은 위험
요소와 후유증이 적지 않다. 괜히 확신을 가진답시고 호감이 있는 상대의 머릿속을 헤집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아이작이 작가일 확률은 현저히 적지만, 연관된 사람이라면 약간이나마 상승한다. 세실리는 그의 주변에
누가 있는지 곰곰이 파악하는 것도 잠시, 아이작의 상태를 확인했다.
세실리는 대강당 구석진 부분에 배치된 의자를 가리켰다. 벽도 있으니 기대어 휴식을 취하기는 딱 좋은
곳이다.
아이작도 그녀가 가르킨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이내 비척비척 발걸음을 옮겼다. 한 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있어 약간 웃긴 모양새였으나 그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이제는 헤실헤실 웃기까지 한다. 세실리는 아이작의 웃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웃으니까 더 귀엽네.'
"전 그런 거 몰라여어..."
"... ..."
평소에는 어른스러운 면모가 강했는데 지금은 어린아이 같다. 술에 취하면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다던데
이게 아이작의 본성인 걸까. 참으로 바람직한 본성이다.
그동안 아이작은 세실리가 쓰다듬어주자 아까처럼 헤실거리며 웃었다. 기분이 좋다는 감정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세실리는 아이작의 힘찬 대답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혹시하며 아이작을 확인하는
건 잊지 않았다.
"쿠우..."
< 36 화 >
"...나."
"... ..."
"어나...!"
"...어나!"
"으음..."
"일어나!"
"으응...?"
그러나 이번에는 귀에 생생하게 들렀다. 누군가 나에게 일어나라고 외치는 소리가 맞다.
이윽고 침침해진 시야가 차차 밝아지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백색 머리카락과 파란색 눈동자.
그리고 어딘간 불만스러운 표정까지.
마리의 불만 가득한 물음에도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자마자 두통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겨우겨우 입을 때었다. 물을 마신지 오래 되어 상당히 메마른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긴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대강당이지."
마리가 한심하다는 말투로 말하는 것이 귀에 쏙쏙 박혔다. 질책까지 섞여있어 그녀의 진심이 우러러
나왔다.
"...몰라."
"그래. 모르겠지. 자."
"응?"
어질어질한 정신 때문에 한동안 멍하니 유리컵을 바라보고 있을 즈음, 마리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컵에
담긴 액체가 무엇인지 알려줬다.
나는 그제서야 아, 하며 유리컵을 조심스럽게 건내받았다. 얼음이 있어서 그런지 받자마자 시원한 냉기가
두 손을 타고 전해졌다.
"후아!"
마리가 내 반응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어지러웠던 머리가 점차 호전되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덕분에. 이거 어디서 난 거야?"
"테이블 위에 있었지. 와인만 있는 게 아니라 칵테일도 있거든."
"그... 혹시..."
"네가 언제부터 잤는지는 나도 몰라. 나도 이제 막 여유가 생긴 참이었거든. 일단 너랑 나랑
헤어지고나서 4 시간 정도 지났어."
"움직일 정도는 돼. 그리고 아버지에게 들은 게 있어. 숙취가 있을 때마다 마나를 순환시키면 해소될
거라고."
"아, 그거? 나도 오빠한테 들은 적이 있어."
"읏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체내의 마나를 순환시켰다. 내가 아무리 무예에 재능이 없더라도 마나를
가동시키는 것까지는 가능하다.
이어서 정신을 약간 집중하자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던 체내의 마나가 세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나를 돌릴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이 시원하면서 청량한 느낌은 언제 봐도 생소했다.
이윽고 그녀는 다급한 표정으로 내 팔을 붙잡더니 버럭 외쳤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묻어나오는 표정이
압권이다.
띠잉-
느닷없이 엄습한 그 두통에 비틀거리며 내가 앉았던 자리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냉수로 차분히 가라앉혔던 속이 뒤집혔는지 메스꺼움마저 느껴졌다.
"마나를 운용하면 숙취가 더 심해진단 말이야! 숙취가 느껴지는 시간을 줄이는 대신 그걸 전부 앞당기는
식이라고!"
"으으..."
"정말이지... 알고 있는 건 제대로 알고 있던가 이게 뭐 하는 짓이니?"
쓴소리가 연이어 이어져도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겨우 진정되었던 두통과 메스꺼움이 한꺼번에
몰아쳐서 정신이 없다.
"...미안. 이럴 줄은 전혀 몰랐네."
"시끄럽고 물이나 마시기나 해."
얼음 덕분에 냉기는 여전하여 목구멍 너머로 시원한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뒤집혔던 속이 진정되는
듯하여 약간이나마 살만해졌다.
"으으..."
"힘들면 내가 사람 불러서 숙소로 데려가게 해줄게. 보통 이런 행사에는 너처럼 술에 취한 사람들이
많아서 웨이터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거든."
내 상태가 보기보다 영 좋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마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권유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배려 속에 숨겨져 있던 실망감을 눈치챘다.
"... ..."
"쟤 너 보고 있는 거 맞지?"
"...아이작."
"응."
"문득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넌 이상형이 어떻게 돼?"
"이상형?"
"응. 이상형."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이상형이라..."
솔직히 말하자면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전생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내 주위에 미녀가 발이 채이도록
널려있기 때문이다.
마리를 포함해서 리나, 세실리, 레오나, 아델리아, 마지막으로 미의 화신이라 일컫는 엘프, 신디까지.
세실리처럼 파격적인 건 아니지만 마리의 드레스도 나름 과감한 편이라 가슴 부분이 약간이나마 노출돼
있다. 눈처럼 뽀얀 속살이 수많은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 같다.
'아니. 이게 아니지.'
술기운 때문에 이야기가 잠깐 샜으나 본론으로 돌아왔다. 나는 시선을 끌어올려 그녀의 얼굴과 재차
마주한 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마리가 음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기 직전이었다. 나는 머릿속을 번쩍하며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급히
덧붙였다.
"...역사는?"
"응?"
"역사도 좋아하지 않아?"
"좋아하지. 왜?"
"생각나서 물어본 거야. 별 이유는 없어. 아, 그리고..."
"언젠가..."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냐. 그나저나 머리는 이제 좀 괜찮아?"
"토할 거 같아."
"여기서 토하면 소문날... 아, 이미 나겠구나. 술에 잔뜩 취한 채 의자에서 퍼질러 잔 빨간 머리로.
정말 재밌겠다. 그지?"
"진심으로 한 대 때려도 되냐?"
"때리면 우리 아빠 부를거야."
< 37 화 >
집에서는 빠르면 보름, 늦어도 한 달마다 원고를 제출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그러기가 매우 힘들었다. 사실 2 달도 잡은 것도 대단히 빠른 수준이다.
아마 산업 혁명에 도달해도 전생처럼 완전한 기계가 아니라 약간의 마법이 포함돼 있지 않을까. 나는 8
권에 적었던 증기 기관차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거기까지는 내가 신경 쓸 게 아니지.'
조별 과제하니 미간이 절로 좁혀진다. 전생에서는 조별 과제를 하면서 좋았던 기억이 하나도 없다.
무슨 종점의 기적도 아니고 조별 과제 기간에 부모님이 아프다시거나, 장례식에 가야한다거나, 휴대폰이
고장나 연락을 할 수 없다는 등등.
몇몇 사람은 여기는 아예 세상이니 다르지 않겠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간'의 본질은
어딜 가나 달라지지 않는 법이다. 더군다나 계급이 존재하니 더 심해질 수도 있다.
입학식 때 들은 소문에 따르자면 서큐버스의 후예라고 했던가. 하는 행동이나 고혹적인 분위기만 본다면
신빙성이 아주 높다.
****"
난 조별 과제를 할 때마다 개똥거지 같은 팀원을 만나서 문제지만. 덕분에 인간을 혐오하게 되는 과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오늘은 임의로 조를 짠 뒤 과제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주제는 제논 일대기의
전개를 예측하는 것. 그 가설이 어째서 나왔는지, 그리고 그 가설을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있는지
설명해주시면 됩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던 전생에서도 조별 과제는 인간 불신에 걸리기 딱 좋았는데 여기는 어떨지 정말
궁금해졌다.
그동안 교수는 강의실 내에 있는 학생의 수를 하나하나 세더니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실리의 옆에 착석해있던 리나가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세실리는 태연자약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리나가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마리의 안색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마리는 뒤를 돌아보며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비루스 교수가 이름이 적힌 종이를 하나하나 회수하여 박스에 넣었다. 그리고 종이가 골고루
섞이도록 만들기 위해 상자를 요란하게 흔들거나 안에 손을 넣어 휘저었다. 무슨 비빔밥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골고루 섞으신다.
"아이라 벤 마티우스."
"네!"
이름을 호명하자마자 뒷쪽에서 힘찬 외침이 들렀다. 이름도 그렇게 귀에 들어온 목소리로 보아하건데
여자인 듯했다.
전생과 비교하자면 중학교 과정만 걸어온 학생이 정시로 서울대학교에 합격해야하는 수준이다. 머리가
천재 수준으로 뛰어나지 않는 이상 입학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잠깐만. 뭐라고?
그에 레오나도 당황한 표정을 다급히 지우고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인사를 씹힌 것 같아 마음이
상했지만 그녀의 입장이 입장이니 이해해줬다.
"하필이면 그 놈이랑..."
마리는 인상을 와락 구긴 채 똥씹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기야 잭슨이 리나와 세실리에게 추파를
던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이런 반응을 지을만도 하다.
참고로 설명하자면 잭슨은 마리에게 한 번 집적대고 그 다음부터는 하지 않았다. 마리가 대놓고 꺼지라고
욕부터 박았으니 그럴만도하다.
"... ..."
< 38 화 >
이어서 비루스 교수가 다음 호명을 시작하자 잭슨을 찾기 전, 마리의 반응부터 확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잭슨, 리나, 세실리 이 세 사람과 한 조가 됐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일 것이라.
'위로는... 안 하는 게 낫겠다.'
'힘들긴 하겠다.'
"...진짜 안 바꿔주시려나?"
그걸 보고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헛기침을 토하는 것으로 무마했다. 마리가 저런 표정을
짓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뒤이어 나는 비루스의 교수의 설명을 듣다가 손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하고 싶은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루스 교수도 내가 손을 들자마 화색을 띠며 나에게 선뜻 손을 내밀었다.
"상관없습니다. 시각 자료를 사용한다는 건 그만큼 투철한 준비를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이번 주제가 주제인 만큼 시각적인 자료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왜죠?"
"이번 조별 과제의 주제는 전개를 예측하는 것이지, 평가를 내리는 게 아니니까요.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칠판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켜보는 것도 재밌겠네.'
운이 좋으면 내가 예상치 못 한 전개를 제시해 주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모임에서 잭슨을 보듯이
세세한 복선이나 떡밥을 잘 캐치한 학생도 있을 테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마지막으로 비루스 교수가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을 끝으로 수업이 종료되었다. 나는 자리에 일어나기 전,
옆의 마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로 열심히 하는 게 어떠니? 교수님이 조원을 바꾸지 말라고 하셨으니 단념하는 게
좋지 않을까?"
"...개년."
마리가 욕을 하는 건 처음 듣는다. 그만큼 화가 많이 났다는 의미겠지. 그나마 작게 말한 탓에 리나는
듣지 못했을 거다.
리나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정확히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의 시선에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리나가 아니라 세실리가 나에게 한 질문이다. 목소리에 확신이 가득 찬 걸 보아 리나도 그렇고
세실리도 나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세실리의 질문에 쓴웃음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전생의 이야기는 꺼낼 수 없으니 그럴싸한 변명을
거냈다.
"그렇긴 하지만 간혹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장점이 뛰어난 사람에게는 그 장점에 가려지는
단점이 반드시 있는 법이죠. 나중에 장점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단점만 노출될 겁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당장 나조차 한 번 생각을 거치지 않으면 다양한 실수를 범한다. 지난번에 실수로
강의용 노트가 아닌 소재 노트를 가지고 갔다가 마리에게 들킨 뻔한 적이 있다.
세실리는 리나, 그리고 마리를 각각 한 번 씩 쳐다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녀도 현재 조원의 밸런스가
극악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말끝이 흐려지는 걸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야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녀들에게도 이런 경험은 필요하지 않겠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레오나
쪽으로 향했을 때쯤이었다.
그리고 세실리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는 마리와 상념에 잠긴 리나를 대신해 인사를 받아줬다. 그녀
특유의 장난기어린 표정은 온 데간데없이 사라져 있고 딱딱함만이 존재했다.
'레오나랑 잘 할 수 있겠지?'
"어."
"아! 안녕하세요! 벤자민 블랭크라고 합니다!"
'이 놈의 계급 사회란.'
이 때문에 벤자민이 나를 어려워 하는 건 이상하지 않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가 그에게 말했다.
웬지 모르게 전생의 군대가 떠오르는 상황이다. 벤자민은 내가 장난이라고 덧붙이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면서 낄낄 웃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걸음을 옮기자 벤자민도 서둘러 따라왔다.
벤자민과의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레오나가 앉아 있는 책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레오나는 공책에
뭔가를 기록 하고 있다가 우리가 다가오자 조용히 덮었다. 뒤이어 고개를 들어 올려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는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소개했다. 본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태도에 약간
괴리감이 느껴졌으나 꾹 억눌렀다.
"어머. 벌써 모이셨네요?"
< 39 화 >
가령 스터디룸을 전액 대여해준다던가 아니면 토론에 참석할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사준다던가 등등.
이같은 경우는 무임승차가 아니라 정식으로 교통비를 내고 편한하게 버스를 타게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녀가 인사하기 전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벤자민과 레오나를 훑어보던 그 시선을. 적어도
동등한 입장이 되어 보내는 시선은 절대 아니었다.
아이라는 내 인사를 입꼬리를 더욱더 말아올리더니 이번에는 벤자민을 쳐다봤다. 벤자민은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자 몸을 흠칫거렸다가 황급히 인사했다.
"베, 벤자민 블랭크라고 합니다! 자, 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도 잘 부탁해. 그리고..."
호들갑을 떨었던 벤자민과 달리 레오나는 목석마냥 딱딱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인사했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성격이 유별나구나라며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라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레오나가 무뚝뚝하게 인사하자 그녀의 올라갔던 입꼬리가 약간
내려갔다.
"...그게 끝이야?"
"전 인사했습니다만?"
"...아냐. 성격이 좀 독특하구나 싶어서."
다행히 어찌어찌 넘어가는 듯했다. 아이라의 얼굴에 일말의 불쾌감이 깃든 것이 포착되었지만 모른 척했다.
나는 그걸 보며 속으로 탄식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귀족과 귀족은 몰라도 귀족과 평민 사이의 격차는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평민은 상대방이 아무리 낮은 신분의 귀족이라도 무조건 까라면 까야 한다.
기묘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을 때 아이라가 본론부터 꺼냈다. 그녀도 이 상황이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조장할 사람?"
'차라리 내가 해야겠다.'
나에게는 그게 더 마음이 편하다. 전생에서도 불편하게 눈치를 볼 바에야 내가 한다는 마인드로 나섰다.
아이라가 허리에 손을 척 얹더니 당당한 태도로 자신이 조장을 맡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녀를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단, 아까 말했던 '물주'가 되어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이라는 모르고 있겠지만 나에게 이 과제는
혼자 전부 도맡아 할 수 있을 만큼 쉽다. 내가 제논 일대기 작가인데 그것도 못 하면 펜을 내려놓아야지.
오죽하면 정말로 그녀가 무임승차가 맞을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나는 다시 봤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다 읽었습니다."
나야, 작가이니 그렇다 쳐도 레오나는 어떻게 구매한 걸까. 무려 레킬리스 공작 가문의 딸인 마리조차
구하기 힘들었다는 제논 일대기다.
반응을 보아하니 그녀는 나와 레오나가 제논 일대기를 구하지 못 했다고 짐작한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볼 점은 그녀가 상당히 아쉬워했다는 것이다.
제논 일대기는 발매되었다하면 곧바로 매진될 만큼 인기가 무시무시한 도서인데 오히려 다행히라 여겨야
정상적이다. 과제를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한 권이라도 더 읽어야 과정이 편할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몰라도 불편해 했다. 무언가 상황이 자기 마음대로 흘러 가지
않기라도 한 걸까.
"네가 나 대신 해야 할..."
"책이라면 제가 빌려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레오나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있던지라 아이라를 올려다 보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아이라의 연이은 압박 질문에 레오나는 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얼굴에는 '굳이
해야겠냐?'라는 속마음이 담겨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벤자민은 레오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면서도 아이라의 눈치를 봤다.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니 조금 불쌍해
보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평민은 상대방이 공식적으로 작위를 이어받지 않은 영식 또는 영애라 할지어도 허리를
굽혀야 한다. 이건 일종의 '상식'같은 개념이다.
'이러면 조금 피곤해지는데...'
"아이작."
"네. 말씀 하세요."
"너는 잘할 수 있지?"
아무래도 그녀는 평민보다 같은 귀족, 그것도 학급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내가 믿음직스러웠던 모양이다.
'다시 보니 선녀같네.'
< 40 화 >
비록 첫 시작이 삐끗거렸지만 진행 자체는 무난했다. 조별 과제의 주제가 나에게 안성맞춤인 부분도 있고,
아이라와 갈등을 벌였던 레오나도 이후로는 군말없이 따라줬다.
심지어 약속 시각에 늦으면 경고를 하겠다고 언질까지 했는데 정작 본인이 약속 시간을 어겨버렸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신분 차이가 어마어마하니 벤자민은 자연스레 아이라를 높으신 분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신분 제도의
병폐인지라 무어라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또한 평민이 귀족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고 반말을 한다는 건 엄연히 '권위'를 해치는 일이다. 레킬리스
가문도 권력을 이용해 행패를 부리지 않을지언정 권위에 접근하는 건 칼같이 막고 있다.
물론 한 때 권위주의가 심해져서 전생의 프랑스 혁명과 유사한 사건, 제이로스 혁명이 발발했다. 그
영향으로 나라를 불문하고 권위주의가 옅어졌으나 권위만큼은 건재했다.
"... ..."
"야. 펭귄."
컨셉을 유지할 때와 달라도 너무 다른 말투. 나는 시크한 그녀의 부름에 흠칫한 것도 잠시, 레오나가 입
밖으로 꺼낸 펭귄이라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참고로 이 세상에도 펭귄이라는 동물이 있다. 남극이나 북극처럼 빙하가 생성될 정도로 추운 지역에서
살고 있으며 외형도 도감에 실린 걸 보자면 똑같았다.
하지만 여기는 판타지 세상답게 빙하 지대가 아닌 용암지대에서 살아가는 종이 있다. 그것들은 동물이
아니라 사람을 해치는 몬스터다.
주변에 사람이 없자 컨셉을 풀었는지 낄낄 웃으며 놀리는 레오나. 나는 순간 황당해졌다가 곧바로 반격을
날려줬다.
"넌 개 같아."
"...죽을래? 개가 아니라 사자거든?"
"그럼 고양이?"
"겨우 묘족 따위랑 비교하지 말아줄래? 나 같이 위대한 사족(獅族)에게는 매우 실례되는 말이거든."
"너는 인간보고 펭귄이라 했으면서."
"... ..."
하물며 구관이 명관이라고, 대환장 파티를 떠올릴 때마다 그나마 낫지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만약
아이라가 아니라 잭슨이었다면 조별 과제는 그대로 개박살 났을 것이다.
화장실에 갔다는 내 대답에 아이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금 장난하냐는 심정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중이다.
"도망친 건 아니지?"
"아니에요."
"화장실은 언제 갔어?"
"약 5 분 전쯤에 갔습니다."
"그런데 아직 안 온 걸 보면..."
"큰 걸 보러 간 거니까 의심하지 않으셔도 돼요."
우리에서 레오나는 포함되지 않는걸까. 아이라는 싱글싱글 웃으면서도 레오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아이라의 정신세계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귀족들의 마인드가 이런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각하다.
결국 듣다못 한 레오나가 아이라에게 충고했다. 컨셉대로 특유의 딱딱하디 딱딱한 말투였으나 그 속에는
미약한 분노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아이라는 귀족도 아닌 '평민'인 레오나가 충고를 해서일까. 아까 전보다 표정이 더욱더
험악해졌다.
아니면...
그윽하면서도 탐욕에 젖어있는 눈빛하며 미묘하게 올라간 입꼬리. 결코 먹잇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끈적한
집착이 묻어나오는 표정이다.
'내가 뭘 했다고?'
평소 연고도 없던 그녀가 어째서 이런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나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라 씨."
"응."
"지금은 레오나 씨가 하는 말이 옳아요. 그러니 이거 놓아주세요."
"... ..."
꿈틀-
"네이비 기사단은 주로 국경을 수호하면서 제국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
겉보기에는 명예로워 보이지만 내 눈에는 위험한 일에 스스로 나서는 미련한 사람들로밖에 안 보여."
말로만 국경인 곳이지, 사실상 전선이나 다름없다. 네이비 기사단의 순직률이 다른 기사단에 비해 3 배를
훌쩍 넘기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어림잡아 알 수 있다.
"네. 잘 알겠네요."
이렇게 된 이상 하는 수 없다.
"쌍년아."
다 같이 뒤져보자.
< 41 화 >
어지간한 대인배도 가족을 건드리게 되면 화를 내는데 그럼에도 참는다? 그 사람은 대인배가 아니라 그냥
호구다.
물론 아이라가 내가 환생자라는 걸 알리는 없겠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최소한의 개념이 있다면 저딴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도 군사 가문의 딸이라는 사람이.
"...뭐, 뭐? 너 지금 뭐라고..."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나는 아이라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가는 모습을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모두 알다시피 나는 웬만해서 욕을 잘 안 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이라는 내 입에서 걸쭉한 욕설일 나오게 만들었다. 모임 당시 잭슨은 어이가 없어서 황당한
마음에 나온 거라면 지금은 화가 나서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는 차이가 있다.
나는 활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삭히면서 입을 열었다.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려
했으나 목소리만큼은 낮게 깔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전생으로 치자면 4 성 장군의 딸이 휘화 군인을 싸잡아 모욕한 격이다. 당연히 그 얘기가 군인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신뢰가 흔들리다 못해 박살 날 공산이 크다.
여기에 더해서 17 살이라는 나이까지. 스스로 조장을 역할을 맡은 이유도 본인이 잘 컨트롤할 거라고 굳게
믿은 것으로 보였다.
내가 진심어린 충고를 해줘도 아이라는 불신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상관 살해'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다.
비록 그녀가 가족을 건드렸다지만 괜스레 건덕지를 줬다가 또 어떤 지랄을 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익...!"
부디 비루스 교수에게 융퉁성이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단순한 불화 정도면 모를까 이건 아이라가 선을
넘었기에 발발한 사태다.
전생의 대한민국조차 군인에 대한 위상은 낮을지언정 아이라처럼 대놓고 모욕한다면 사회적으로 뭇매를
맞는다. 군인을 영웅 수준으로 대우받는 미국에서는 아예 매장당하는 수준이고.
게다가 미네르바 제국은 영토가 워낙 넓어서 타국보다 군인의 전사 비율이 높은 편이다. 그래서 군인에
대한 위상도 따라 높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저딴 말을 지껄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선에 나서는 군인들이 어떤 상황에 직면하는지 몰라서 저러는 것일 수도 있다. 본인은 직접 겪어본 적이
없으니 저리 말하는 거겠지.
'전쟁이라...'
제논 일대기에도 전쟁 파트가 있다. 본래는 제논의 영웅적인 활약을 보여주는 장면이 될 예정이었나
아이라를 보고 나서 약간 고민되었다.
거기다 제논 일대기는 사람이 아니라 악마가 주적이다. 악마와의 전쟁은 몰라도 같은 사람끼리의 전쟁은
없을 예정이다.
"물론이지."
"자신만만하네? 어디 한 번 지켜보겠어."
"설마 너도 업히려고?"
"난 저 새끼처럼 양심을 팔아먹진 않아. 아, 그나저나..."
이어서 벤자민은 화장실을 갔다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밖에 없는 걸 확인하고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해서 우리 3 명만 토론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군인을, 그것도 국경에서 근무하는
형제를 건드리니 저도 참을 수 없어서요."
"음... 알겠습니다. 원래라면 전원 다 감점을 시켜야 평등하겠지만 이번 일은 특수한 경우이니 아이라
학생만 감점을 매기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다음 주 월요일에 비루스 교수를 따로 찾아가 아이라에게 아주 큰 엿을 먹여줬다.
< 42 화 >
잠깐 흥분을 가라앉힌 레오나가 특유의 시니컬한 음색으로 나에게 물었다. 팔짱을 끼며 새침하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 속에는 걱정과 우려가 섞여있었다.
숙소로 돌아오고 침대로 몸을 던지면서 미래를 생각한다. 첫 수업당시 비루스 교수가 설명했던 것처럼 2
학년까지는 특정 점수 이상을 받아야 다음 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다.
하지만 3 학년이 되어서는 자기가 집중하고 싶은 전공을 선택하고 그 전공만 집중적으로 파고들면 끝이다.
지난 주 월요일에 비루스 교수를 따로 찾아가 아이라의 실태를 고발했을 때 겸사겸사 알게 된 정보다.
'나는 뭐...'
당연히 역사학이 목표다. 이 세상에서 역사만큼 흥미가 가는 전공도 없다.
이렇게 빈둥빈둥거리는 시간조차 아깝다. 최근에는 아이라의 문제도 그렇고 신경써야할 부분들이 한 두
곳이 아니어서 조금 피곤했으나 참을만하다.
그에 노곤한 몸을 이끌며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숙소 밖으로 나가기 직전까지 집필하다 말았던
원고지가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주륵-
뚝- 뚝-
손에 묻은 코피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때 원고지에 피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다급히
원고지를 치워버렸다.
"휴, 휴지..."
*****
"야. 너희 설마 다 준비했어?"
"다 했는데."
"흥. 그래? 알았어. 난 조장이니까 네가 사과한다면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
"좆까."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 아이라가 불쑥 찾아와 뻔뻔하게 굴었지만 다시 한 번 욕을 강하게 박아줬다.
자기 혼자 밥상을 뒤엎은 주제에 어디서 남의 밥상에 숟가락을 올리려고. 아이라의 상상을 초월한
뻔뻔함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욕을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너 쟤랑 싸웠어?"
내가 거기까지 말해도 마리는 이해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기야 워낙 유명한 가문이니 마리가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다.
나는 그녀가 끄덕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혹시나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도 아이라처럼 군인을 천대하는
건지 걱정이 되었다.
"마리. 넌 군인을 어떻게 생각해?"
"응? 그건 왜?"
"내가 아이라랑 싸운 이유가 내 형제 문제도 있지만 군인을 집 지키는 개 정도로 취급했거든. 설마 모든
귀족이 그런 건가 싶어서."
집이라는 보금자리가 얼마나 따스한지, 가족과 사회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마지막으로 군대가 얼마나 좆
같은 곳인지 처절하게 알게 될테니까.
"아무튼 너네 조는 다 준비했어?"
"사실 조 배정이 그딴 식으로 된 순간부터 포기했어. 점수가 좀 뼈아프긴 하겠지만 심하지는 않을테니까.
정 안 되면 다른 전공에 집중해야지."
"전공이라... 넌 3 학년이 되면 무슨 전공에 들 거야?"
"전공이라... 글쎄? 마음 같아서는 정치학에 들어가고 싶지만 리나가 있을테니 패스. 지금으로서는 딱히
생각나는 건 없어. 난 졸업만 하면 그만이거든. 너는?"
"난 당연히 역사학."
내가 부정하자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마리의 시선은 정확하게 펜혹이
자리잡혀있는 오른손을 향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손을 숨길 뻔했지만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간신히 억눌렀다. 마리도 이이상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인지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만하라는 듯이 투덜거려도 마리는 키득키득 웃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진담이 아니라 장난으로
한 말인 듯했다.
'너도 참 고생이다.'
이리하여 여차저차 모든 발표가 끝나고 인문학 수업이 종료되었고, 다른 수업도 별 일없이 평범하게
진행되었다.
"음?"
'무슨 일이시지?'
"... ..."
나는 그 경고문을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 43 화 >
그런데 내용만 본다면 무슨 첩보물을 찍는 것도 아니고 비장함이 실려있다. 이탓에 이해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으나 머지않아 표정을 딱딱하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꼬리가 밟혔다고?'
내가 익명으로 출판사에 원고를 제출할 수 있던 이유가 아버지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아버지가
어떤 작업을 거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인맥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얼추 짐작하고 있다.
'누구인지는 모르시나?'
주어가 깔끔히 생략돼 있어서 누가 꼬리를 밟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 성격상 짧게 쓰셔도 중요
부분은 다 적으셨을텐데 없는 걸 보니 누구인지 모를 확률이 크다.
누가 꼬리를 밟았는지도 모르고, 꼬리가 밟혔다고 내 정체가 완전히 들통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만에
하나 아버지의 경고대로 따르는 것이 좋다.
괜스레 신경이 쏠렸다간은 집필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평소처럼 행동하되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옳다.
보통 부모님은 함께 편지를 보내시니 아버지가 편지를 쓰셨다면 어머니의 편지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짧게 썼다지만 어머니는 내 안부를 묻을 겸 진척도를 확인하기 위해 장문의 편지를
쓰셨겠지.
A4 용지 크기에 가득히 채워진 문장들을 읽고 가슴이 저절로 따스해지는 기분이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엄마라는 존재들은 자기보다 자식밖에 생각하지 않는 천사인 게 분명하다.
가끔씩 몇몇 귀족가 안주인들은 본인의 자식을 정치적 도구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으나 우리 어머니는
아니다. 그저 평범한 한 가정의 어머니에 불과했다.
나는 진심이 우러러 나오는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가 쓰신 편지를 천천히 읽어내렸다. 유려한 필기체로
하여금 눈이 저절로 즐거워졌다.
'...실망시켜드리지 말아야지.'
'우선은...'
******
하지만 그런 미네르바 제국에게도 예로부터 영원한 숙적이라 평가받는 국가가 있었으니, 바로 테르스
왕국이다.
음악, 문학, 교육, 과학, 기술, 마법, 심지어 이종족의 문화까지. 이 세상의 모든 문화가 테르스
왕국에 포함돼 있다고 해도 무방할만큼 방대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미네르바 제국도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지 않고 테르스 왕국을 압박해 문화를 침탈한 경우가 적지
않다. 단적인 예로 세계 최고의 아카데미라 칭해지는 헤일로 아카데미가 있다.
미네르바 제국에서 아카데미를 설립할 당시 테르스 왕국에 속해있던 교수와 관련 장인들을 모두 포섭하여
생긴 결과다. 테르스 왕국 입장에서는 눈 뜨고 코 베인 격이라 거세게 항의했으며 이후로 법으로 철저하게
막기 시작했다.
아무튼 간에 미네르바 제국이 군사력이나 경제력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힘이 강하다면 테르스 왕국은
내실이 단단하다고 봐야했다. 별명조차 문화의 나라였으며 이건 엘프조차 인정할 정도다.
그에 맞은편에 기립해 있던 검은 제복의 남자가 허리를 깊숙히 숙였다. 송구하다는 본인의 마음을 여실히
표현했다.
정말로 우연히 기회가 닿아 꼬리를 밟게 되었으나 아쉽게도 도마뱀 꼬리에 불과했다. 잡히는 순간 알아서
잘려나가게 되는 그런 꼬리.
미네르바 제국에서도 황실을 포함해 고위급 귀족들이 인력을 동원하여 찾고 있는 상황이나 테르스
왕국만큼은 아니었다.
미네르바 제국 입장에서는 괜히 자극해봤자 도망가면 큰일이니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중이라면, 테르스
왕국은 그딴 거 없이 마구잡이로 단서를 모으는 중이다.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도 결국에는 '돈'이 가장 중요한 법인데 미네르바 제국은 어마어마한 돈을 빌미로
수많은 장인과 예술가들을 데려갔다. 테르스 왕국에게는 복창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거기다 역사적으로 제논 일대기의 작가처럼 단순히 소설로만 세상을 바꿔놓은 경우는 없었다네.
전대미문이라고 봐야겠지."
"네. 마족의 공주가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도 놀라운데 곧 있으면 우리나라에 사절단을 보낸다니...
정말로 믿기 힘든 현실입니다."
"만약 그 작가가 우리나라를 비판하는 글을 쓰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할 거야.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리고 나라를 통치하는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외세의 침략이 아닌, 내부에서부터 무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기둥이 무너지게 되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특히 제이로스 혁명을 통해 큰 홍역을 치뤘던 테르스 왕국이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우선은 알겠네. 지원이란 지원은 모두 해줄테니 반드시 작가를 찾아주게나. 그대신 찾더라도 '정중하게'
모시고 올 수 있도록. 알아들었나?"
"명심하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좋은 소식을 갖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다른 소식은 없나?"
"아델 왕녀님에 관한 소식이..."
보좌관이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더이상 말하지 말라는 것처럼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만. 내 자식이었으면 헤일로 아카데미가 아니라 테르스 아카데미에 입학시켰겠지. 내 자식은 4 명밖에
없어. 이건 명심하게."
"...알겠습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 것일까. 프리드리히는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보좌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한마디로 더럽게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조별 과제라는 큰 산을 넘겨도 언덕이 엄청나게
많아 비지땀을 뻘뻘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시험'을 치는 과목은 별로 없었으나 그대신 과제가 미친듯이 많았다. 집필은커녕 과제를 하느라
시간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 살려줘..."
마리가 앓는 소리를 육성으로 내며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그러자 눈처럼 새하얀 그녀의 흰색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내려앉았다.
"후우..."
마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뒤이어 턱을 괴면서 착잡하다는 음색으로 내 질문에
대답해줬다.
"네가 알려준 건 다 외웠지. 네가 이해하기 쉬우라고 필기까지 해줬는데. 그래도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는 힘들 것 같아."
아무튼 마리에게 역사를 가르쳐 주면서 열심히 노력했다. 나도 그렇게 남을 잘 가르쳐준다고 할 수 없어서
조금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마리도 열정적으로 임한데다가 기억력도 준수해서 수고를 덜었다는 점일까. 덕분에
막히는 부분없이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런 걸 왜 물어. 내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마리가 시선을 슬며시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녀가 꺼낸 이야기를 듣고 시선을 위로 올리며 골똘히 생각했다. 막내 사랑이 넘쳐나는 니콜은 나에게
다정한 누나의 표본이었다.
가끔 가다가 내가 잘못을 해도 따끔하게 충고를 하는 정도에 그치지, 언성을 높히거나 물리적인 폭력을
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오빠가 성격이 좋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면서
알려줬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던 너희 오빠가 널 아끼는 확실해. 안 그랬으면 서점에 직접 데려오지도 않았겠지."
"...그렇겠지. 그래서 느낌이 더 이상해."
"어쨋거나 더 할 말은 없지? 6 시까지 약속이긴한데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음..."
마리는 내가 노트를 겨드랑이에 끼우며 묻자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그녀가 생각을 다 정리하는
동안 옆에서 기다려줬다.
적어도 다양한 나라를 방문하여 문화를 즐길대로 즐겨야하지 않을까. 대신 여느 소설처럼 위험한
모험담보다는 소소한 일상을 만끽하고 싶다.
"...가능하면... 싶네."
"뭐?"
"못 들었으면 됐어. 그런데 저기 저 사람 너희 누나 아니야?"
마리가 화제를 돌리자 나는 의문을 내려놓고 그녀가 가르킨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와. 너희 누나 진짜 멋있으시다."
마리도 니콜을 보았는지 진심어린 감탄성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녀의 말마따나 현재 니콜의 모습은
웬만한 모델 저리가라 할 정도로 멋있었다.
"음? 아! 아이작~!"
분수대 앞에서 서성거리던 니콜도 나를 발견했는지 팔을 들어올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팔을
들어줌으로서 화답했다.
내가 팔을 들자 니콜은 자기가 먼저 오겠다는 건지 길쭉한 다리를 힘차게 뻗으며 나한테 걸어왔다. 그리고
머지않아 코앞까지 다가왔다가 내 옆에 서있는 마리를 보고 의문어린 표정을 지었다.
"얘는 누구야?"
"아! 안녕하세요! 레킬리스 공작가의 마리 하우젠 레킬리스라고 합니다!"
그동안 니콜은 마리가 본인의 이름과 가문을 밝히자 금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더니 나를 쳐다봤다.
어째서 이런 사람이 네 옆에 있냐는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내 대답에 듣고 니콜도 공손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인사를 하는 순간에도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지
않고 있었다.
마리도 니콜의 말 속에 미약한 경계가 담겨있다는 재빠르게 눈치챈 것인지 곧바로 대답을 꺼냈다.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
"네. 친구에요."
"흐음... 알겠어. 조금 의외긴하네."
게다가 마리뿐만 아니라 리나와 세실리까지 친해졌다고 하면 니콜은 무슨 반응을 지을까.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해 가만히 있었다.
"의외라니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 네 이야기는 아니야. 우리 아이작이 무뚝뚝하고 자기 일에만 신경 써서 친구를 만들 수 있을까 조금
걱정됐거든. 그런데 막상 친구를 사귀고나니 공작의 딸일 줄은 몰랐지."
"후우..."
그사이 마리는 안심이 되었는지 몰라도 가슴에 손을 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그녀는
전보다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기뻐하는 마리와 반비례로 니콜은 불안해진 모양이다. 그녀로서는 나와 마리가 가까워진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마리와 친구로 지낸다면 내 아카데미 생활이 편해질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밀을 들키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니콜의 입장에서 마리는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닌가?"
"아..."
< 45 화 >
아무래도 친근한 나와 마리의 사이를 보고 혹여 비밀이 들키지 않았을지 우려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 달리 몇몇 실수를 제외한다면 들킨 적은 없었다.
내가 실수로 다른 사람에게 그림을 보여줬다는 사실은 니콜도 알고 있다. 단, 그녀는 실수를 범한 대상이
마리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알려줘봤자 괜한 걱정을 살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마리와 안면을 텄으니 이정도는 알려줘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약간 들어서 말한
것이다.
"후우..."
나의 되물음에 니콜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나처럼 부모님에게 편지를 전달받은
모양이다.
어쩌면 니콜에게는 다른 편지가 갔을테니 어쩌면 그것과 관련돼 있는 걸까.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린 것도
잠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에게 부쳐진 어머니의 편지에는 걱정 말라며, 말 그대로 꼬리가 밟힌거라 큰 문제는 없을거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솔직히 그것만 제외한다면 평소 보냈던 안부 편지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니콜은 그런 내 반응을 보더니 더욱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듯한 부모님의
얼굴과 흡사해보였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그마치 1 년이나 집 상황을 듣지 못 했으니
그녀로서는 집에서 보내는 편지가 그리웠을 것이다.
나는 집 위치가 헤일로 아카데미와 상당히 가까워서 길어봐야 일주일밖에 소요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다. 대게 일주일은 기본으로 깔며 집이 멀리 떨어져 있다면 무려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곳도 있다.
그러나 마법으로 우편을 보낼 수는 없어서 마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렇다보니 편지를 발송하고
수신인이 받기까지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음?"
"...레오르트 님?"
"안녕? 우연이네."
"...그러게요."
심지어 레오르트의 곁에는 리나까지 있었다. 나는 리나가 반갑다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떨떠름한 마음으로 인사했다.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레오르트와 리나도 남매끼리 식사를 할 예정이었던 것 같다. 사복이
아니라 교복 차림인 걸 보면 미리 약속을 잡아놓은 듯했다.
나는 속으로 상황이 꼬였다고 직감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니콜의 얼굴을 체크했다. 그녀도 두 사람과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부디 불길함이 들어맞지 않기를 속으로 바라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하는 법.
그런 우리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리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조신하게 웃었다. 덕분에 더욱 창피해졌다.
니콜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감지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표정도 약간이나마
굳어있었다.
이윽고 레오르트가 종업원에게 부탁했던 4 인실, 그것도 방음이 되는 공간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깐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못 드렸네요. 아이작의 누나이자 마이샬 가문의 장녀 니콜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제국의 태양이 되실 황녀님과 만나서 영광입니다."
이에 리나는 딱딱한 말투로 스스로를 소개한 니콜과 얼굴을 마주했다. 뒤이어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가슴 중앙에 손을 얹으며 제국의 예법대로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니콜. 아시겠지만 저는 미네르바 제국의 1 황녀, 리나 우르미 크리스틴이라고 해요.
편하게 황녀가 아닌 리나라고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미소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걸까. 나조차도 그리 느끼고 있으니
니콜도 마찬가지일 것이리라.
아무래도 식사를 모두 끝내고 할 생각인 것 같다. 니콜은 레오르트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나는 무시무시한 그녀의 눈빛에 서둘러 두 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무슨 오해를 샀는지 몰라도 진짜
아무것도 안 했다.
혹시 그때 자신의 권유를 거절해서 앙심을 품기라도 한 걸까. 다른 사람과 달리 리나와는 친하지 않아서
그것조차 잘 모르겠다.
더구나 레오르트가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준 덕분에 대화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리나도 중간중간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내어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줬다.
우리 남매의 시선이 모두 레오르트 쪽으로 쏠리자 레오르트는 냅킨을 테이블 위에 살포시 올리며 입을
열었다.
벌써부터 불길함이 엄습하는 질문이다. 그와 동시에 '꼬리가 밟혔다'라는 아버지의 편지가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떠올랐다.
"...모릅니다."
편지는 오늘을 기준으로 정확히 이틀 전에 받았다. 아버지가 꼬리가 밟혔다는 소식을 듣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기까지의 시간과 얼추 맞아떨어졌다.
"결국 보다못해 출판사를 압박해서 계약서를 보여달라고 했지만 그것도 큰 의미가 없었다네. 가명을 써서
계약을 하면 그만이니 말이야. 그래서 출판사를 압박하는 건 멈추려고 했다네. 우연히 그들의 납세서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납세라면... 세금 말입니까?"
"그래. 세금. 자네도 알다시피 세금이라는 건 생각보다 복잡한 걸세. 법에 따라 납세해야하는 금액이
천차만별로 바뀌니까. 그리고 출판사도 세율에 따라 세금을 냈다네. 사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
계약서에는 출판사에서 미리 세금을 내는 것으로 되어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여기서 한 번 더
세금을 내는 걸로 되어있다는 거지."
"...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평민은 소득을 얻었을시 세율에 따라 영주에게 납세를 한 번만 하면 되지만
영주는 아니야. 평민에게 받은 세금을 제국에게 일부 지급해야하고 본인 또한 특정 세율에 따라 세금을
납세해야한다네. 부를 쉽게 쌓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이지."
게다가 이 세상은 '화폐'가 잘 발달돼 있다. 화폐가 잘 발달돼 있다는 뜻은 경제가 크게 진보했다는
의미이며 그만큼 나라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네르바 제국은 경제력과 달리 과학이 따라주지 못 하고 있다. 아까 레오르트가 말했던 세율도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계산해야하다보니 여러가지 차질이 많은 편이다.
< 46 화 >
"...?"
어째서 레오르트는 나를 놔두고 우리 아버지, 호크를 제논 일대기 저자로 단정지을 것일까. 상황이
상황인지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으나 니콜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꽈악-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무언의 압박에 당황한 것도 잠시, 니콜을 표정을 보자마자 말을 하려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니콜의 표정은 진중했다.
비록 아버지를 팔아넘기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했지만 그녀에게도 따로 생각이 있는 것 같았으니 믿을
수밖에 없다.
"아까도 말했지만 납세라는 건 매우 복잡한 것일세. 특히 우리 미네르바 제국은 세금과 관련된 부분은
매우 깐깐한 편이라 더욱 복잡하지. 하지만 복잡한만큼 확실한 효과가 나타나. 우리 미네르바 제국의
자본이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많은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네."
"... ..."
"허나 그마저도 완벽하지는 않다네. 지금 이순간에도 탈세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을 걸세. 특히 마이샬
경이 사용한 방법은 탈세로 악용될 여지가 충분히 있었어. 마음만 먹었다면 세금마저 내지 않고 완벽하게
정체를 숨겼을 수도 있었겠지. 다행히 기사 시절부터 이어져 온 굳은 심지 덕분에 그러진 않았지만."
드디어 내 입이 열렸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 몰랐으나 나의 아버지는 한때 드높은 위상을 지녔던
기사다.
그것도 인간측 괴물들만 득실거리는 네이비 기사단의 단장이었으며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못할 공적을
쌓았다.
이 공적이 얼마나 무시무시하냐면 본래 남작이 아닌 백작의 작위를 받았어야 정상이었다고. 평민이 귀족의
신분을 받는 것조차 놀라울 일인데 하물며 백작이었으니 아버지의 공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흐응..."
리나는 내 질문을 듣고 미묘한 비음을 흘리더니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뒤이어 빙긋 웃더니 상냥함만이
느껴지는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이어서 리나는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버지가 쌓았던 공적을 하나 하나 알려주기 시작했다.
"마이샬 경은 그것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진 않았어. 30 년 전인가? 새끼를 잃어버려
흉폭해졌던 드래곤이 수도를 습격했던 적이 있었어."
"아. 그거 혹시..."
최근에 발간된 역사서적에서 본 적이 있다. 정확한 명칭은 '아스카날 사건'이며 제국 수도를 습격했던
드래곤의 명칭이 아스카날이었기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이 세상은 판타지인만큼 드래곤도 있는데, 그냥 단순한 몬스터에 불과하다. 폴리모프를 한다던가, 마법에
능통하다던가, 레어에 금은보화를 쌓아놓는다던가 하는 '종족'은 절대 아니다.
어쨌거나 아스카날 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다름아닌 인간의 욕심 때문이다. 불법밀수를 하던 인간들이
해츨링을 발견하여 잔혹하게 죽인 후, 그대로 해체하다가 어미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당연히 어미는 격노하여 가장 가까웠던 인간들의 나라, 미네르바 제국을 습격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불법밀수를 저지르던 인간들은 미네르바 제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였다는 점.
미네르바 제국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미쳐버린 드래곤이 습격했으니 그야말로 난리도
이런 난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칭호가 있을만큼 드래곤은 토벌하기 위해 '군단'에 해당하는 전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전력이
있다고한들 그 누구도 얼마나 큰 피해를 입을지 가늠할 수 없다.
나도 아버지가 아스카날 사건을 꺼리는 걸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가 아무리 강해도 결국 사람이니 그
업적을 떠올릴 때마다 브레스에 산화된 본인의 친구가 생각날 것이다.
비극적인 사정이 알려지자 우리들 사이에는 침묵이 가라앉았다. 다행히 그 침묵은 리나가 서둘러 입을
엶으로서 사라졌다.
그도 그럴게 내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가정에 헌신하고 가족들을 사랑하는 평범한 가장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드래곤을 토벌했다니, 붉은 사자라니 하면서 명성이 높았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마이샬 경이 근무하기 전까지 국경지대는 하루가 멀다하고 부족 생활을 하던 수인들과의 전투로 전사자가
속출하던 곳이었네. 더구나 수인들도 네이비 기사단급 전력이 아닌 이상 막는 것조차 힘들었지. 하지만
마이샬 경이 오고나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네."
"달라졌다는 말씀은..."
"마이샬 경이 국경지대에 살던 수인 대부분을 처치했다네. 위기를 느낀 수인들도 세력을 합쳐 총공세에
나섰지만 오히려 그게 악수가 되었지. 만약 마이샬 경이 아니었더라면 국경이 아니라 영토를 빼앗겼을
수도 있었다네. 그만큼 수인들이 어마어마하게 강했거든."
수인들이 시시때때로 국경을 넘보는 이유는 아마 국경너머의 환경 때문일 것이다.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수인 입장에서는 빼앗는 게 더욱 편할테니까.
니콜의 시원시원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레오르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뒤이어 상체를 천천히 앞으로 내밀어 깍지를 끼더니 턱을 받쳤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예상 외의 대답을
꺼냈다.
레오르트는 우리의 격한 반응을 보더니 손을 내저었다. 진정하라는 의미였기에 니콜도 표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나와 니콜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자 곁에서 지켜보던 리나가 행동에 나섰다. 그녀는 니콜이 아니라
정확히 나를 바라보더니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작. 황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 마이샬 경과 네 가문, 그리고 네 가족에게는 결단코 피해가 가는
일이 없을거라고. 오히려 정체가 드러나는 걸 막아줄 수 있어."
"...그러면 두 분께 무슨 메리트가 있는거죠?"
"제논 일대기의 다음권이 더 빨리 나오겠지. 그것 뿐이야."
"알겠습니다."
"...누나?"
"부디, 그 약속을 지켜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어느새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레오르트와 니콜과 달리, 앞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 ..."
그녀는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도대체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시선이 내 오른손에 향하고 있다는 건 얼추 알 수 있었다.
뒤이어 리나는 아래로 내렸던 시선을 다시 올리더니 내 얼굴과 마주했다. 내가 그런 그녀의 이상 행동에
의문을 가질 쯤이었다.
[잘 부탁해.]
< 47 화 >
마이샬 남매와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난 이후였다. 아이작과 니콜이 먼저 자리를 떠나도 황족 남매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리나는 맞은편 자리에 한가롭게 차를 마시는 레오르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자리잡혀있어 한폭의 모델 같은 모습이었다.
"오라버니."
"응?"
레오르트는 리나의 부름을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한 쪽 눈썹을 치켜뜬 채 왜 불렀냐는
표정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남매에게 이 정보를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도리어 알려주지 않고 꽁꽁 숨기는 편이
서로에게 윈윈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오르트는 그러지 않았다. 확인성을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지만 되려 의심만 한가득 품게
만들어버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리나조차 레오르트의 꿍꿍이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어요? 권위를 이용해 겁박하는 사람들로 보이겠죠. 이러다가 마이샬 경이
화나서 연재를 중단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아. 그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니콜이랑 아이작은 몰라도 마이샬 경은 우리 황실을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라서."
리나의 걱정과 달리 레오르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에 리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PTSD 라고, 죽음을 넘나드는 전선에 자주 나서는 군인들이 곧잘 겪는 후유증이다. 호크도 '대외적으로'는
그 후유증이 심각해진 탓에 일찍 은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물며 너무 유명해졌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수많은 압박을 받았다. 때마침 평민 출신이겠다, 무례한
귀족들 몇몇이 호크를 압박하여 못 살게 굴기도했다.
황실에서도, 그리고 군부 내에서도 그의 은퇴를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호크는 한사코 거부했다. 실제로
증상이 완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한 번씩 신전에 방문했으니 그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다.
레오르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챈 리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부디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결과가 아니기를 빌었다.
단순히 후유증 때문에 본인의 공적을 알리는 걸 자제하는 줄 알았는데 저런 내막이 숨겨져 있다니. 두
남매가 호크의 업적을 잘 모르는 이유가 있었다.
더구나 윗쪽에서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가던 호크의 입지를 약간이나마 줄일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윈윈이었을 것이다.
"...잠깐만요."
리나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머지않아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그의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도 있는데 레오르트가 남매에게 한 행동은 호크를 심기를 거슬리게 만드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평민이 귀족의 신분을 받는 것조차 100 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하는데 심지어 호크는 백작의 작위까지 받을
뻔했다. 신분만 낮지 위상은 결코 고위급 귀족에 뒤지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다.
레오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작과 니콜을 불러 자리를 마련한 것도 제 딴에는 확실한 확인을
위해서다.
그러나 위치가 위치이다보니 두 남매에게는 협박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황족이나 되는
사람들이 따로 부르면 이 놈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 거지? 라며 잔뜩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근차근 접근하는 건데 조금 성급했나 싶어. 흥분을 좀처럼 자제할 수 없었다는 게
뼈아프네. 다른 것도 아니고 제논 일대기라서."
"그것도 있지만... 오라버니는 정말로 마이샬 경이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고 생각하시나요?"
레오르트가 아쉬운 소리를 하자 리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레오르트는
반신반의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한 쪽 눈을 치켜뜨며 되려 의문을 드러냈다.
"흠?"
******
"연중할까?"
"... ..."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이내 착잡하게 변했는데, 아무래도 나를 안쓰럽게 생각한 모양이다. 그동안 나는
주문한 커피를 티스푼으로 휘적거리며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아버지를 방패로 삼을 필요가 있나 싶어. 그냥 마음편히 밝히면 안 될까? 어차피 다 들통난 마당에
숨길 필요도 없잖아."
"아이작.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돼. 레오르트 님이 솔직하지 못 하셔서 그렇지, 황실에서도 딱히
터치하지 않을거야."
내 기습 질문에 니콜이 대답을 회피했다. 그 반응에 약간 의심이 들었으나 그녀의 말마따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 가볍게 넘겼다.
"아무튼 레오르트는 님은 정말로 확인을 위해 자리를 마련한 가능성이 커. 솔직하지 못 하신만큼 행동으로
드러내는 편이거든. 무엇보다 레오르트 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잖아? 자기들쪽에서 압박하다가 연재를
중지한다면 욕을 먹는 건 자기들이라고. 사실상 서로에게 무기가 있는거야."
"제논 일대기의 인기가 떨어지면 우리 쪽이 더 안 좋은 거 아니야?"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래도 아니야. 인기가 떨어진다면 우리에게 향하는 관심도 줄어들겠지. 정 못
믿겠으면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아버지도 기꺼이 너를 위해 도와줄 걸?"
너무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니콜은 내가
침울해할까봐 어떻게든 위로를 해주는 거라고.
덕분에 기운을 약간이나마 되찾을 수 있으나 마음이 싱숭생숭한 건 여전했다. 나 하나 잘 살겠다고 가족이
고생하는 게 과연 옳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니콜의 말을 듣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어 사정을 설명하는 건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다.
"...아이작."
"응."
"너무 힘들면 의무적으로 연재할 필요는 없어. 글은 네가 좋아서 쓰는거니까. 너는 잘 모르겠지만 취미가
의무로 변하는 순간 열정이 식어버리거든. 누나는 그 열정이 식을까봐 걱정 돼."
니콜이 진심이 담긴 이야기를 꺼내자 나는 고개를 슬며시 들어올렸다. 걱정과 우려가 한데 섞여있는 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원망할 필요는 없어. 정말로 안 되겠다 싶으면 네 말대로 한동안 휴식하면 돼.
너에게 소설이란 행복한 취미지, 고통스러운 의무가 절대 아니니까. 알겠니?"
"...알았어."
니콜의 말대로 소설을 의무적으로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에 더 쓰고 싶었다.
내가 명예와 명성을 위해서 글을 쓴 것도 아니고, 단지 취미로 쓴 것에 불과했다. 어느순간부터 인기가
미친듯이 치솟아져서 연재에 대한 부담감이 생겼을 뿐이지.
나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니콜을 바라봤다. 니콜도 내 표정을 보고 안심이 되었는지 전보다 표정이
풀어진 모습이었다.
확실히 여유가 사라지니까 무언가 쫒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한 니콜의 위로를 듣고 굳게 결심할 수
있었다.
< 48 화 >
[아이작. 네 누나에게 소식은 들었다. 황태자와 황녀가 너희를 찾았다 하더구나. 다행히 두 분이 네가
아닌 나를 작가로 착각해서 다행이긴 하다만 그래도 네가 침울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카데미에 방문하고 싶지만 나도 여유가 되지 않는구나. 그러니...(중략). 우리 가족은 전적으로 너를
응원한단다. 네 글이 잘 되지 않아도 우리는 상관없어. 우리 가족은 네가 웃는 걸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다. 이 아비를 이용한다고 너무 상심하지 마렴. 나는 기꺼이 너의 방패가 되어줄테니까.
아버지는 자식들이 기꺼이 기댈 수 있는 존재란다.]
평소에는 이해가 쉽게끔 간단한 말만 적어서 편지를 보내시는 편인데 이번에는 어머니 못지 않게 장문의
편지가 왔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편지를 보고 살짝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는 이런 든든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하고, 도리어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이깟 글이
대체 뭐라고 매달리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러나 이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기에 더더욱 노력해야한다. 그게 제논 일대기가 되었든, 신작이 되었든,
아니면 학업이 되었든. 나는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니까.
"시험은 괜찮았어요?"
"음... 조금 어렵더라. 역시 외우는 걸로는 한계가 있나 봐. 주제가 그럴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세실리는 생각보다 시험이 꽤 어려웠는지 살짝 아쉽다는 표정이었는데 그녀의 말처럼 역사 시험은 단순히
역사만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잔인하리만큼 어려운 서술형 시험이다.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끔
간단하게 적어야할지, 아니면 구구절절 설명을 적어내려야할지 고민해야되니까.
여태까지 세실리를 관찰한 결과, 나에게 장난을 치기 전에 입꼬리를 먼저 올리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도
그걸 보자마자 장난을 칠 거라는 걸 예감하고 미리 선수를 친 거고.
"...어떻게 알았어?"
"누나."
"왜 부르니?"
"누나는 저한테만 이런 장난을 치는 편이에요,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도 치는 편이에요?"
그 세월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느꼈을텐데 세실리는 지금처럼 의외의 부분에 미숙한 경향이 있다.
그것이 인간 사회에 처음으로 발을 디뎌서인지 아니면 그녀가 자라온 환경 때문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기분 나쁜 건 아니고 약간은 자제해줬으면 해요. 방금처럼 장난보다는 재밌는 이야기도 서로 나누고
싶으니까."
"...알겠어. 미안해. 내가 너무 과했나 봐."
세실리가 내 부탁에 미안하다는 얼굴로 사과했다. 나는 분위기가 어두워질 기미가 보이자 서둘러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러니 인맥을 쌓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사람과 만났을테고, 그 인연이 이어져 친구로 발전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세실리는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라는 의미다.
이전까지는 제아무리 친한 사람이어도 가족을 제외하면 비밀을 숨긴다는 마인드였지만, 가족들의 진심어린
위로를 받고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비밀은 여전히 숨기되, 내가 믿을만한 사람에게는 암암리에 단서를 흘리는 것으로.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알아도 단순히 그래? 라는 반응이 나오는 사람들 말이다.
마리는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녀의 가문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마리는
나를 이용할만한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비밀을 밝히면 많이 놀라긴 하겠다만은.
나로서는 저절로 흠칫할만한 사항이지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세실리였기에 그나마 괜찮았다. 만약 리나가
저 말을 꺼냈다면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크게 당황했겠지.
"...글쎄요. 그건 작가 마음이겠죠."
"난 되도록이면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짧은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길더라고."
심지어 지난 번에는 코피까지 흘려서 원고에 묻지 않았던가. 피곤하면 곧잘 코피를 흘리는 체질이라
여러모로 신경쓰는 편이 좋다.
< 49 화 >
'신'은 신도들에게 있어서 그 누구보다 의지가 되는 영적인 존재다. 직접적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더라도
실존한다고 굳게 믿으며 신들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려 세상을 이롭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전혀 달랐다. 꽉 막혀있던 댐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처럼 다양한 의견이 오고 갔으며
그에 따른 반박도 수도 없이 쏟아져나왔다.
"특히 교만의 죄는 눈 여겨 보아야 하오. 그대들도 아시다시피 예로부터 교만한 자들은 반드시 몰락했지.
멀리 가지 않아도 엘프를 보시면 될 것 같소. 이 작가도 그걸 알기에 교만을 담당하는 악마를 엘프로
넣었더군."
"교만이라... 다른 건 연구해봐야 알겠지만 교만의 죄는 부정할 수 없겠군. 루미너스 님께서도 오만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라는 가르침을 내리셨으니."
"교만은 그렇다치고 다른 죄악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 것 같소?"
대주교들이 한 곳에 모여서 토론을 나누는 이유는 다름아닌 이번에 언급된 제논 일대기 속 내용 때문이다.
최근에 발간된 제논 일대기 속에는 악마측 간부들이 등장했는데, 아이작은 이들을 '칠죄종'의 설정을
투입했다.
지구였다면 흔하디 흔한 설정 중 하나였기에 아무 생각없이 넘겼겠지만 이곳은 사뭇 달랐다. 칠죄종이라는
개념은 성직자들에게 큰 충격을 선사하기 충분했다.
"헌데 정말로 소설에 나온 이야기를 차용해도 될지 모르겠다만... 이 저자가 신학에 대해 얼마나 소양이
깊은지 알 수 없잖소?"
물론 긍정적인 의견만 있는 게 아니라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다. 소설에 등장한 개념을 그대로 학문에
적용시키는 것이 옳은가? 라는 정론이었다.
거의 다 반박당했다.
아이작 입장에서는 전생에서 요긴하게 쓰이던 설정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나 이들에게는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설정이 신학을 뒤흔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다.
대주교 중 한 명이 얼굴을 찌푸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루미너스 교단은 세력이 가장 넓은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처럼 다른 교단을 싫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있다.
"아니. 지금은 우리 교단에서만 연구하는 것이 좋겠소. 모라와 히르트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고
있으니."
"흠... 알겠소. 그러면 이 저자를 찾는 건 어떻게 할 생각이오?"
대주교는 제논 일대기의 작가, 아이작을 찾을거냐고 물었다. 그에 대주교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이번에 제시된 칠죄종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긴 했으나 사람들은 그보다 출판사가 알려준 아이작의 건강
상태를 걱정했다.
"당장 찾으려고 하겠지. 안 그래도 종족전쟁 당시 본인들의 교만 때문에 전쟁을 대차게 말아먹는데 그걸
콕 집었으니까."
*****
9 권이 세상에 등장하고 칠죄종이니 뭐니 하면서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신학의 연구 진척도를 더욱 높였다니, 이토록 상세하게 구분한 적이 없다니 등등.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전생에 자주 쓰였던 칠죄종을 그대로 가져온 건데 황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이없는 건 출판사에서 내 건강 상태를 걱정하는 기사를 올렸다는 거다. 원고에 묻었던
코피를 보고 내 건강 상태가 심히 걱정스럽다나 뭐라나.
전에도 말했듯이 독자들은 나를 나이 지긋하게 드신 현자로 추측하는 중인데, 그것과 맞물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다.
앞날이 창창한 17 세를 시한부 인생으로 둔갑시킨 그들의 착각에 경탄할만한 했지만 지금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나는 입 안에 든 음식을 목구멍 너머로 넘기면서 맞은편에 앉아있는 세실리를 바라봤다. 걱정과 불안이
한가득 담겨있는 세실리의 예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세실리처럼 아름다운 미녀가 손수 걱정해주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내 건강을
신경쓰고 있구나 생각해서 마음이 편해질 정도다.
"당연히 알고 있죠."
"색욕을 담당하는 간부도 알고 있지?"
세실리가 붉은눈을 반짝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 50 화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숙한 미모를 지닌 세실리가 저런 포즈와 목소리로 말하니 뭐랄까. 파괴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비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섹시한 외모인데 포즈, 표정, 목소리 이 세 가지가 합일을 이루어 빠져들 듯한 기분이 들었다.
"크흠... 큼..."
실제로 색욕을 관장하는 간부, 릴리스의 외모는 세실리와 놀라울만치 흡사한 편이다. 릴리스는 악마로
타락한 마족으로 세실리처럼 흑발적안, 그리고 노출이 심한 복장 덕분에 농염한 몸매를 뿜낸다는 설정이다.
아무튼 세실리를 참고한 건 맞지만 몇몇 부분은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변명하자면 세실리를 참고한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 든 릴리스가 내 앞에 존재하는 격이다.
"그래? 너무 똑같아서?"
"네."
"흐음..."
무뚝뚝한 내 대답에 세실리는 미소를 유지하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실로 부담스러운 눈빛에 시선을
스윽- 돌려버렸다.
어쨋거나 그녀가 풍기던 매력적인 분위기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화끈거렸던 얼굴은 가라앉았고 눈치없이
두근거리던 심장도 점점 차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왜 물은거예요?"
"그냥 물어본 거야.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싶었거든."
"아까도 말했지만 누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자의식 과잉이라고 했을 거예요."
"흐응."
내 대답에 세실리가 야릇한 비음을 흘리더니 눈매를 반쯤 접었다. 접힌 눈매 사이로 붉은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식당에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파악하고는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얼굴의
미소는 여전했다.
비밀이 아닌 본심이 나왔겠다, 긴장이 탁- 하며 풀려서 담담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비밀을 들킨 것보다
본심이 들킨 게 더 부끄러웠다.
싱글거리는 미소만 본다면 장난인 것 같으나 말투는 매우 진지했다. 이를보아 진실일 확률이 크다.
문헌 상에서 나오는 서큐버스는 전생과 비슷하게 남성의 정기를 흡수하며 힘을 키우지만, 여기는 진짜
악마답게 정기를 죽을 때까지 흡수한다.
아, 물론 좋다고 생각하는 건 금물이다. 역사에 기록된 바로는 성기에 피가 나와도 관계를 이어나간 걸
물론이고 고환을 잡아뜯었다는 기록도 있다. 정말로 끔찍하지.
과연 비밀이 무엇이길래 평소 야시시한 농담도 서슴치 않고 꺼내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일까. 나로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그녀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칠흑색 머리카락을 베- 베- 꼬더니 창피하다는 어조로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생리 때 성욕이 폭발한다던가?"
"... ..."
"서큐버스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유독 참기 힘든 편이야. 그래서... 여기까지만
말할게."
본인도 말해놓고 창피했던 건지 그녀의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졌다. 나 또한 어안이 벙벙해져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호, 혹시나 오해할까봐 하는 말인데 나는 그런 경험은 전혀 없다? 욕구도 하루종일 명상만 한다면 참을
수 있어."
100 년이라는 세월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길다. 전생과 현생을 합친 내 나이가 40 살도 안 되는데
세실리는 무려 100 년을 넘게 살아왔다. 그 세월 동안 많은 일들이 발생했을텐데 연애 경험이 없다는 건
약간 믿기 어려웠다.
얼굴에 올라온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손부채질을 하던 세실리가 설명했다. 인간인 나에게는 팔짱을
낀다는 부분이 더 이상했지만 문화 차이라며 넘겨짚었다.
이후로 서로에게 오고 가는 대화가 없어 단절되려던 찰나, 세실리는 눈치를 살살 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는지 얼굴에는 미약한 붉은빛이 은은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이작은 이런 비밀 같은 거 없어?"
"비밀이요?"
"응. 남들에게는 차마 말하기 힘든 비밀. 사실 내가 연애 경험이 없는 이유도 서큐버스의 후예기
때문이거든. 너도 알다시피 서큐버스는 남자의 정기를 죽을 때까지 흡수하잖아? 헬리움의 남자들은 그
소문을 철썩같이 믿는 바람에 나를 꺼려하는 편이야. 독이 든 꽃이라고 생각하는거지."
"오..."
나야, 세실리가 서큐버스든 서큐버스의 후예던 상관하지 않으나 마족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본인들이 악마의 후손인만큼 그런 부분에는 민감한 듯했다.
"비밀이라..."
그녀가 나에게 비밀을 알려준 걸 보면 신뢰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걸까. 세실리는 살살 떠볼지언정
리나와 달리 내 입으로 말하기 전까지는 추궁하지 않고 있다.
세실리와 인연을 맺은지 두 달이 흘렀으나 아직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것들이 많다. 비밀을 스스로
밝혔다고한들 그녀를 신뢰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하기 꺼려한다면? 오히려 그녀가 실망할 수도 있다. 자기는
비밀을 알려줄 정도로 믿고 있는데 나는 그렇지 않구나라면서.
"...누나."
"응. 아이작."
"누나는 입이 무거운 편이에요?"
세실리는 내 진중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표정이 매우 진지한 것이 장난을 칠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콧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최소한 조용한 공간에서 말해야
좋을 것 같다.
< 51 화 >
"흐흐흥~ 흥~"
백발의 미소녀, 마리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길을 걷고 있었다. 항상 품위를 지켜야 하는 귀족의
모습과 한참 동떨어진 위풍당당한 걸음걸이였다.
'진짜 운이 좋았어.'
제논 일대기는 신작이 나왔다하면 한 시간도 안 되어 품절되는 경이로운 인기를 자랑한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출판사에서 제논 일대기가 나온다는 소식을 뿌리면 그때부터 전쟁이라고.
다행히 각각 나라에서 심각성을 알아차려 엄벌에 처하자 그런 해프닝은 사라졌지만 서점 앞에서 대기하는
사람들은 그대로였다. 이 부분은 불법도 아니었던지라 막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달랐다. 제논 일대기가 상상 그 이상으로 엄청난 판매량을 자랑하자 출판사
측에서 작정했기 때문이다.
원래도 모든 인쇄소를 갈아넣어 공장마냥 제논 일대기를 찍어냈지만 그것마저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아예
새로운 대형 인쇄소를 하나 신설하고 새로운 기술까지 도입시켰다.
그때는 너무 떨려서 하마터면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뻔했으나 간신히 선수쳐서 구매했다. 경쟁하던 대상이
분하다는 눈길을 보냈지만 마리는 개의치 않았다.
이후로 지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과제와 시험도
중요하지만 머리를 식히기 위해 제논 일대기부터 읽을 계획이다.
'아이작은 샀으려나?'
마리는 행복한 마음으로 길을 걷다가 문득 아이작이 생각났다. 요즘들어 아이작의 얼굴이 머릿속에 자주
떠오른다.
본래는 단순히 호감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점점 더 명확해졌다. 마리는 품 속의 제논 일대기를 더욱 강하게 껴안으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어떠한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고나서 아이작과 얘기하면 눈 녹듯이 사라졌으며, 그전에 아이작이 자신의
표정을 캐치해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물어본다.
리나에게 아이작은 흥미로운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나 세실리처럼 아이작에게 장난을
치거나 친근하게 대하는 경우는 여태까지 잘 없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리나의 태도였는데 리나는 흔히 '가면'을 쓰며 사람을 대하는 편이다. 황녀라는
직위상 어쩔 수 없다지만 한 번 크게 데인 적이 있는 마리로서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마리가 석연찮은 기분을 느끼며 숙소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불현듯 아주 익숙한 색상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시야에 잡혔다.
시간대 상으로 모든 수업이 끝나는 시간대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선홍색이라 눈에 확 띄였다.
마리는 그 색깔을 보자마자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아이...!"
"... ..."
마리는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서둘러 파악했다.
마음 같아서는 불쑥 끼어들고 싶었지만 우선 뒤를 밟을 생각이다.
왠지 미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실제로 미행이 맞다. 마리는 혹여 그들에게 들킬까봐 매사에 신중을
기울였다.
'...카페?'
마리는 아이작과 세실리가 들어간 카페를 멍하니 바라봤다. 자신도 오빠에게 가문의 상황을 주고받을 때나
방문하지, 그 외에는 이 카페 발을 디딜 일이 아예 없다.
'...아니겠지?'
*****
잠시 후, 우리는 방음이 철저한 방으로 배정받아 안으로 들어왔다. 비좁지도 넓지도 않은 곳이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이다.
"정말이에요? 전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몰랐어? 하긴, 몰랐으니까 여기로 온 거겠지. 그래도 이상한 소문은 안 날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연인이 자주 방문하는 곳이지 진짜 그런 곳은 아니니까."
"그런 곳이 대체 뭐예요?"
"음... 그런 게 있어. 어린애는 몰라도 돼."
내 물음에 세실리는 요망한 미소를 짓더니 검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덕분에 연인들이 이 카페에 와서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대충 알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
"들켰나?"
"...네?"
세실리는 내가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묻자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잠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갈 뻔했으나 다행히 직원이 주문을 요청하면서 풀어졌다. 세실리는
아메리카노를, 나는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아이작."
"네. 누나."
"아이작은 글을 쓰는 걸 좋아해?"
"네. 좋아해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이작."
"네."
"혹시 2 달 전에 네가 나에게 해줬던 이야기를 기억해? 마족이 어떤 존재인지 네가 알려줬잖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세실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때 있었던 일을 입 밖으로
하나하나 꺼냈다.
"그때 너는 우리 마족을 이렇게 표현했지.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 누구보다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존재라고."
"... ..."
"그 이야기는 평생동안 잊지 못할 거야. 그런데 제논 일대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지. 사크란이
사망하고나서 진이 고민하고 있을 때 제논이 말해줬던 거야. 알고 있니?"
"그 펜혹은 오랜 시간동안 펜을 잡아야 나는 거라며?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증거가 안 되지. 아이작은
노트에 기록을 하는 습관이 있으니까."
"... ..."
"두 번째로는 제논 일대기에 시큰둥한 너의 태도. 지난 번 모임에서 잭슨과 주고받았던 이야기를 엿들었어.
시큰둥한 태도치고는 스토리를 거의 다 꿰차고 있더라고. 보통 그정도면 열정적이어야 정상인데 너는
제논 일대기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무심했어."
모임에서 잭슨과 나눴던 대화를 들은 건가. 그때 세실리는 멀리 떨어져 있던 걸로 아는데 어떻게 들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네가 나에게 말해줬던 마족의 정체성. 악마로 취급받던 우리 마족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비록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지극히 드물겠지. 아무리 제논 일대기를
읽었다하나 그런 생각을 가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과거에 우리 마족이 받았던 차별을 고려하면
더더욱."
"... ..."
"위의 세 가지만 종합해도 충분히 의심할만해. 거기다 방금 전에 네가 글을 쓰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지?
이 모든 단서를 종합하자면 한 가지 결론이 나와."
여기가 갈림길이다. 만약 세실리가 솔직담백하게 대답해준다면 기꺼이 밝히고, 그렇지 않다고 다음으로
미룰 생각이다.
"어..."
물컹-
아직 비밀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그녀가 이런 행동을 취하는 건지 혼란해하는 것도 잠시, 세실리가
색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어때?"
"... ..."
"더 만지고 싶지?"
그동안 세실리는 얼굴을 앞으로 쭈욱- 내밀며 내 얼굴에 가까이 접근했다. 뒤이어 귀를 살살 간지럽히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냠..."
할짝-
'에라이. 씹팔.'
여기서 물러난다면 남자라고 할 수 없다. 비밀을 밝히고 자시고 지금은 본능에 충실해야할 것 같다.
똑- 똑- 똑-
"하필이면...!"
짓씹듯이 중얼거리는 세실리. 그 덕분에 끊겼던 이성이 복구되어 황급히 팔을 빼내었다. 세실리는 내가
팔을 빼내자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종업원이 아니라 아주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과 더불어 푸른색 눈동자.
그리고 아름다운 미모까지.
"...마리?"
< 52 화 >
마리가 찾아온 타이밍도 타이밍이지만, 그전에 여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가 더 의문이다. 우연히 이
카페에 있다가 우리를 발견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뒤를 쫒아온건지.
이윽고 그녀는 세실리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푸른색 눈동자 속에는 강한
의심이 담겨있었다.
"...아이작."
스산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마리. 나는 그녀의 부름에 어어? 하면서 마리와 마주했다.
"얼굴이 빨갛네?"
"... ..."
왜냐하면 방금 전까지 하마터면 세실리와 사고를 칠 뻔했으니까. 만약 마리가 도중에 난입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진행되었을 확률이 높다. 이걸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상한 거다.
"그..."
"세실리가 또 장난친거지?"
내가 우물쭈물거리며 대답하기 망설이고 있을 때 마리가 훅- 치고 들어왔다. 아까도 말했지만 입은 웃고
있어도 눈은 웃고 있지 않으니 왠지 모르게 섬뜩해졌다.
"그렇지?"
"... ..."
이제는 내가 아닌 뒤의 세실리를 보면서 확인을 구하는 마리. 동시에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으며 푸른색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이상 대답을 피했다간은 사단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거짓말이 아니라 마리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으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는 약간 안도하는 듯하더니 올렸던 입꼬리를 일자로 그렸다. 뒤이어 세실리에게
고정시켰던 시선을 다시 나에게 옮기며 서늘하게 말했다.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에 종업원과 마주쳐서 계산을 하고 나왔다. 종업원이 순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봤으나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곧 있으면 선택을 해야할 날이 올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세실리가 내 비밀을 눈치챈
순간부터 나를 향한 시선이 180 도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후우..."
'부디 아무 일 없기를...'
*****
주문한 커피가 테이블 위에 올라와도 두 여자는 서로만 바라본 채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종업원은 숨이
멎을 듯한 분위기 속에 서둘러 자리를 피신했다.
뒤이어 종업원이 자리를 비우고 황량한 침묵만이 감돌게 되어도 두 여자 사이에 오고 가는 말은 없었다.
차이점이라면 마리는 잔뜩 굳어있는 얼굴이었고 세실리는 여유가 있다는 걸까.
세실리는 맞은편에서 사나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마리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아메리카노가 시야에 잡혔다.
달그락-
남자들은 본능에 충실해서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편이다. 하물며 세실리처럼 아름답고 농염한
외모를 가진 여자가 유혹한다면?
몸은 언제나 솔직한 법이라고, 아무리 철벽을 쳐도 남자는 본능을 이길 수 없다. 어째서 남자가 슬픈
동물이라고 하는지 여기서 기인한다.
으득-
그만큼 아이작은 자신의 본능을 잘 억제하는 편이며 혈기왕성한 나이답지 않게 점잖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아니면 숙맥이라 할 수도 있고.
헌데 이번에는 전혀 달랐다. 남자의 본능이 튀어나왔다는 의미는 즉슨, 세실리가 정도를 넘었다는
뜻이었으니까.
"... ..."
한편 세실리는 아메리카노를 음미하면서 마리의 표정을 관찰했다. 마리는 사나움을 넘어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달그락-
이에 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임 당시에도 예감했으나 오늘로서 확신이
들었다.
눈 앞의 소녀, 마리는 아이작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고. 풋풋한 나이에 어울리는 마음이었으며 애정이다.
방 내부를 가득 메웠던 고요함을 모두 물리게 만드는 세실리의 매력적인 음성. 그녀는 두 손으로 턱을
괴며 마리에게 물었다.
"...세실리."
"응."
"솔직하게 말해. 여기서 아이작이랑 뭐 했어?"
"마리."
"말해."
"너는 아이작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니?"
한동안 세실리의 의도를 파악하던 마리는 일단 대답부터 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작에
대한 건 자신있다.
마리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녀도 아이작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 사이가 지금보다 가까워진다면 그 비밀을 말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중이었다.
정말로 그녀는 아이작을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런 거라면 아이작은 자신보다 세실리와 더 가까운
관계인 걸까. 부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세실리는 마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승기를 잡았다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이작과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야. 심지어 내가 약점을 잡은 것도 아니고 아이작이 스스로 알려줬지.
반면에 너는? 그렇지 않잖아?"
"... ..."
"네가 아이작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그렇게 티를 내니 모르는 사람이 이상한
거겠지."
세실리는 마리에게서 아무런 말조차 돌아오지 않자 너무 과했나 싶어 그녀의 표정을 살펴봤다. 눈동자는
정처없이 떨리고 몸이 빳빳하게 굳어있는 모습이었다.
"...그것 뿐?"
"응?"
"그것 뿐이라고 물었어."
어느새 침착을 되찾은 마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세실리에게 물었다. 세실리로서는 절로 의문이 들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라... 그래. 좋지. 자기 입으로 비밀을 공유한다는 건 그만큼 상대방을
신뢰한다는 의미니까."
"... ..."
"하지만 나는 아이작이 그깟 비밀을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비밀을 공유해야 형성되는 신뢰라면 개나
줘버리라고 해. 그건 거래지, 진심이 아니야."
이번에는 세실리의 표정이 굳을 차례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마리는 아이작이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다. 심지어 짐작조차 못 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리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아닌, '아이작' 그 자체에게 호감을 품고 애정을 느끼는
중이다. 그것만큼 '진심'이 있을까.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당장 세실리 본인도 아이작에게 호감이 있을지언정 그 이상은 아니었다. 아이작이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아니었더라면 방금처럼 대놓고 유혹하지도 않았겠지.
마리는 세실리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확신을 가졌다. 아이작의 비밀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설마?'
'증기 기관차'의 삽화도 그렇고, 글 쓰는 걸 좋아한다는 아이작의 취미도 그렇고. '마족'인 세실리가
아이작을 유혹한 것도 그렇고.
'어쩌라는 거야.'
"...고마워라."
"덕분에 잘 알았어."
< 53 화 >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연달아 발생하여 혼란을 겪었으나 숙소로 돌아오고 잘 무마할 수 있었다.
침대에 몸을 던져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니 뜨거웠던 머리가 서서히 식은 덕분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머릿속이 뒤죽박죽 얽혀있는 건 여전했다. 오늘 세실리가 나에게 보인 행동도 그렇고,
마리가 우리를 뒤따라온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복잡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하루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 안일했나...'
여기에 더해서 세실리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 즉 나에게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되어있다고 스스로 밝혔다.
장난이 아니라 결의와 진정성이 담겨있었으며 진심어린 본인의 의지였다.
이로인해 물 흘러가듯이 인생을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변수에 확실한 대처를 못 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행히 황족과 세실리라서 망정이지, 이러다가 나중에 진짜 큰 사단이 나버릴 거야. 아버지도 못 막을
수 있어.'
아버지라는 든든한 빽이 있다지만 그것조차도 '국가'라는 거대한 세력 앞에서는 힘없이 무너질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능력이 아닌 내 힘으로 타파할 능력을 키워야 옳다.
그러니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 상황에 알맞게 대처하되,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가족의 힘을 빌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가족들도 이런 내 의견을 존중할테고.
이런 생각을 거치다보니 그동안 내가 너무 멍청했나 싶다. 생각없이 지내는 것보다는 타산적인 면모가
존재해야 앞날이 편해질 것 같다.
'그리고 마리는...'
그리고 그에 대한 내 반응은...
황제와 공작의 사이는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좋은 편도 아니다. 서로 치열하게 경쟁과 견제를 하여
미네르바 제국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자칫 삐긋하기라도 한다면 제국이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다.
'마리는 딱히 신경쓰지 않겠지만...'
하지만 그녀가 그렇다는 거지, 그녀의 가문이 과연 나를 가만 놔둘지는 의문이다. 그러니 마리와 교제를
한다더라도 그녀가 눈치채기 전까지는 직접 말하기 애매하다.
신문에서는 소설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니, 마족의 숙원을 이루어준 은인이라니, 신학을 재정립했다니 등등.
나는 속으로 갑갑한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현실 감각이 좀 부족한
편이다. 그러나 다양한 사건을 겪고나니 마음가짐을 바꿔먹을 필요성을 느꼈다.
그 생각을 하면서 책상에 앉아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서랍을 여니 두툼한 원고지가 한가득 쌓여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평범한 원고지는 아니다. 여태까지 내가 정성스레 쓴 원고들, 그러니까 제논 일대기의 초판본이다.
겉보기에는 볼품없는 원고지로만 보인다. 하지만 높으신 분들 눈에는 어떻게 비추어질지 궁금했다.
일종의 안식처라고 해야할까. 내 안일함으로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적어도 그녀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는
편이 좋을 듯했다.
'지금 당장은...'
이미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했고,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본디 비밀은 혼자만 알고 있어야 비밀인 법.
*****
빛 한 점조차 들어오지 않는 방 안.
"... ..."
'아이작...'
세실리는 그동안 마족이 받아왔던 핍박을 떠올렸다. 100 년이라는 세월은 마족에게도 상당히 긴 시절이다.
이로인해 헬리움은 외교적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갔으며 반강제적으로 폐쇄적인 입장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최근 헬리움이 테이로스 왕국과 외교를 시작했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업적이다.
'이 모든 게 다...'
붉은 머리의 소년, 아이작 덕분이다. 세실리는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천장으로 뻗었던 손을 가슴에
대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요동치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진정하려고 노력했으나 쉽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인지하는 순간 심장이 더욱 크게 날뛰었다.
이 감정은 과연 사랑인 것일까, 아니면 존경인 것일까. 태어나면서 이런 감정은 생소했기에 세실리로서는
쉽게 감을 잡지 못 했다.
'은인...'
"하아..."
세실리는 달뜬 숨소리를 내면서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리고 오늘 마리가 자신에게 해줬던 말을 기억했다.
'큰일날 뻔했어.'
원래는 단지 귀여운 동생으로만 보였지만, 지금은 마족의 숙원을 이루어준 은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귀여운 동생과 마족의 은인. 그때 당시는 이 두 가지가 합쳐진 바람에 실수를 범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아아..."
< 54 화 >
가족에게 의지하는 것보단 나 스스로의 능력을 키우자고 말이다. 마음가짐을 이렇게 잡으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연히 인연이 닿아 힘겹게 쌓아올렸던 관계인데 내 안일한 판단으로 한꺼번에 무너질까봐 걱정된다.
게다가 마리는 눈치가 상당히 빠른 편이라 어쩌면 낌새를 파악했을 수도 있다.
리나는 몰라도 어제 마리와 세실리는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분명히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과연
내가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으나 지금은 나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한동한 이러한 상황이 반복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상황은 상황대로 꼬이게 되고 나와
더불어 다른 사람도 난처해진다.
"엇."
"어?"
"안녕. 좋은 아침이네."
"아... 네. 좋은 아침이네요."
"후훗."
"어제 일은 정말 미안했어요."
"네?"
"당신에게만큼은 그랬으면 안 됐는데... 제 잘못이에요.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뜬금없는 사과와 존댓말에 당황을 숨길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세실리의 태도가
이리 바뀐걸까.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실리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꾸벅 숙이며 제 마음을
표현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앞으로 둘만 있을 때는 이렇게 대할 거예요. 당신은 우리 마족의 은인이니 은인에 걸맞는 대우를
해줘야할테니까."
"... ..."
"그럼 안으로 들어갈까요?"
'은인이라...'
더군다나 은인을 만난다면 자신의 몸을 기끼어 바치겠다는 의지까지 피력했다. 나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바뀔만도하다.
'...뭐지?'
'그래도 뭔가...'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뒤이어 내가 마리에게 천천히 다가갈 때 쯤, 기척이라도 느꼈는지 책상에 고정했던 그녀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졌다. 하지만 나는 어제 일 때문에 그녀가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
"...아이작!"
푸른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반갑게 맞이하기 전까지는. 심지어 팔까지 흔들며 격하게 반겨줬다.
나는 상심했을 것으로 추정되던 마리가 활발하게 대해주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피식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녀답다고 생각해서.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헤어리지도 못한 채 실수를 저질렀으니 사과를 하는 건 변함이 없다. 그래도
납덩이로 짓누르는 것 같던 마음은 약간이나마 가벼워졌다.
"안녕."
"응. 안녕."
"어제는 잘 들어갔어?"
마리는 인지하지 못 하고 있겠지만 입꼬리가 미약하게나마 떨리고 있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지은 미소라는 의미다.
아무래도 나와의 관계가 어색해지는 것이 싫어서 이런 행동을 보이는 듯했다. 그러면 그럴 수록 마리에
대한 죄책감이 증가했다.
마리는 내 질문을 듣고 큼지막한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한
모습이다.
"일단 '내'가 아닌 '레킬리스 가문'의 일원으로서 말하자면, 우리 가문은 물론 제국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거야. 저자가 세계에 끼친 영향력이 무시무시하거든."
"정말 그정도야?"
"당연하지. 특히 우리 제국과 테이로스 왕국이 저자를 포섭하려고 안달이 나있을 걸? 문화라면 서로
가지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중이니까. 국가의 내정을 다스리는데 문화만큼 효과가 뛰어난 것도 없지."
"문화라..."
중국은 과거에 문화강국이라 칭송받았지만, 역사적으로 엄청난 실수를 저질러 본인들이 그 문화를 다
말아먹었다. 그때문에 훗날 미국과 경쟁할 정도로 성장해도 문화가 발목을 잡았다.
나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국가의 문화가 크게 발전된다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이란 말인가. 하물며
이 세상은 중세 시대를 표방하고 있어 문화를 더욱 중요시 여길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쓴 책이 무기가 될 수도 있어. 마족의 인식을 뒤바꾼 것처럼, 다른 종족의 인식도 바꾸는
건 일도 아니겠지. 물론 저자가 그런 의도를 담지 않겠지만 많이 위험할 거야."
"위험하다고?"
"응. 자칫하다간 안 좋은 사상이 멀리 퍼져나갈 수도 있으니까. 이때문에 국가에서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
하기야 여기는 스마트폰은커녕 인터넷조차 없다. 결국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한정돼 있다는 것인데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신문이다.
인맥이 협소한 나로서는 바깥 세상 소식을 알기 위해서는 신문밖에 없다. 그게 날조된 것인지, 아니면
진실인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기왕 이렇게 된 거 매번 피하는 건 정답이 아니다. 최소한 대응책은 마련해야
내가 원하는 책을 쓸 수 있을테니까.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야?"
"마리."
"응?"
"혹시... 오늘 시간 있어?"
"...에?"
< 55 화 >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 리나의 아카데미 생활은 의외로 평범한 편이었다. 그녀는 입학 전까지만 해도
피곤한 일들만 있을거라 예상했다.
피곤한 일이라함은 자신의 오라버니이자 황태자, 레오르트가 줄곧 겪는 것처럼 파리가 꼬이는 것이다.
실제로 입학 당시 소피아라는 영애가 달라붙은 걸 시작으로 첫 강의 시작 전에 잭슨이 무모하게 접근한 걸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입학식부터 비범한 행동을 선보여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고, 더 나아가 아름다운 외모와 더불어
고혹적인 분위기로 기품을 뿜내는 미인.
이미 세실리에 대한 이야기는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파다하게 퍼진지 오래다. 이때문에 세실리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찾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아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무산되었다.
리나의 옆에 세실리가 있듯이, 세실리의 옆에는 리나가 떡하니 있었으니까. 어지간한 용기가 아니라면
감히 이 둘에게 접근할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 하나 있다. 세실리와 정답게 대화를 나누던 리나는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질문을 날렸다.
"세실리.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응? 물어봐. 리나의 질문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니까."
리나의 부탁에 세실리는 흔쾌히 허락했다. 이에 리나는 가면 따위는 벗어던진 채 그녀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그리고 리나, 자신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꿰뚫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공동 저자'라고 할
수 있겠지.
'붉은 사자가 해준 이야기를 아이작이 적은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중지 손가락에 굳은살이 심하게
박히지도 않을테고.'
황태자, 레오르트는 붉은 사자로 명성을 떨친 호크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로 확정지었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게 생각하는 중이다.
평생동안 무예만 단련한 기사에게 그만한 필력이 있다? 리나로서는 근거가 빈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호크가 스토리를 대략적으로 알려준다면 아이작이 대필하는 식으로 제논 일대기가 발간된다고
예상했다.
세실리의 대답에 리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신 같았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을텐데
세실리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래? 알았어."
그래서 세실리에게 힌트를 주는 건 관두었다. 마음을 주고받는 친구끼리, 그리고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는
팬들끼리 이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다짐을 듣고 접어버렸다.
리나는 그녀의 제안을 가볍게 수락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강의실 문 밖으로
나가기 직전, 그녀의 눈에 한 사람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책상에 엎드려 얼굴을 숨기고 있는 마리의 모습이. 평소와 달라도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이런 부분에서는 눈치가 '살짝' 부족했다. 리나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마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문 밖으로 향했다.
*****
그리고 현재로 돌아와, 나는 약속한 식당 앞에서 마리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다. 복장은 사복을
입기에 애매하여 교복을 입고 있었다.
"아이작!"
확실히 다른 사람에게 묻혀서 그렇지, 마리도 예쁘긴 예쁜 편이다. 특히 오늘은 작정하고 만나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예쁜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돌아다녔다.
"내가 너무 늦진 않았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마리가 헤헤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행복 바이러스를 뿜내는 그녀의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에 저절로 잔잔한 미소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항상 말했지만 마리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다른 곳에 신경 쓸 필요가 하나도 없고 오로지 그녀에게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만약 평상시에, 그것도 남성이 여성에게 이 행동을 선보인다는 건 '나는 당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품고
있어요'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것만으로도 나에게 기겁할만한 사유인데 문제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응."
꼬옥-
'나 또한 당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품고 있다'라는 화답이다. 그게 아니라면 웃음만 흘리고 정중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 ..."
"...안으로 들어갈까?"
"...응."
< 56 화 >
식사는 당연하게도 방음과 보안이 철저한 방에서 이루어진다. 황족 남매와 식사하기 전까지 이런 공간이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지금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대신 가격이 상당히 비쌌는데 거의 보름치 생활비에 육박했다. 아무래도 방의 구조상 가격을 이리
책정한 것 같은데 약간 비싸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거디가 먹튀를 방지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가격 때문인지 몰라도 선불이었다. 이에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가격을 지불할 생각이었다.
"돈은 내가 대신 낼게."
"마리?"
"괜찮아. 내 가문이 어디인지 잊었어? 이정도는 간식거리도 안 돼."
뒤이어 마리가 가격을 지불하자 직원이 따라오라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손을 그대로 붙잡은 채
직원의 뒤를 따라갔다.
'부끄럽네...'
물론 상대적으로 규모가 적다는 거지, 2 인실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비싼 가격을 책정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당당하게 가격을 지불했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고개를 내리깐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붙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았으니 귀여울 따름이다.
"마리."
"...응."
"이제 손 놓고 자리에 앉자."
그 말과 동시에 아래로 내려갔던 마리의 고개가 올라가며 나를 직시했다.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눈동자에는
진한 아쉬움과 약간의 간절함이 담겨있었다.
활발하고 시원털털한 성격을 지닌 마리가 촉촉하게 젖은 눈빛으로,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애처롭게 말하니
뭐라고 해야할까.
내 대답에 마리가 환하게 웃으며 힘차게 답했다. 나는 그렇게도 좋은건가 싶어 못 말린다는 웃음을 흘렸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주문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 ..."
무엇보다 마리에게 호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전까지의 마리는 단순한 여사친에 불과했지만 그녀가
나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다르게 느껴졌다.
"아이작."
"응."
"아이작. 아이작."
"응. 나 여기 있어."
"히히히."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부르는 마리. 나는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대답해줬다.
마리는 단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건지 새하얀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얘가 나를 좋아하긴 한 모양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미소녀가 나를 좋아한다고 티를 낸다면 그 어떤 남자가 싫어할까. 나는 해맑게 웃는
마리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마리."
"응."
"마리."
"왜에?"
이번에 내가 이름을 부르자 마리가 애교를 담아 대답했다. 그러면서 몸을 좌우로 살짝 흔들며 본인의
기분을 표현하기까지.
'이거 참...'
곤란하기 짝이 없다. 원래는 이런 의도로 만남을 가진 게 아닌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변했다.
그러나 모임 당시 마리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건 또 아니다. 마리는 여러모로 매력이 넘치는 여자가
확실하다.
내가 마리와 교제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을까? 물론 대외적인 시선으로는 공작의 딸과 남작의 아들이
서로 사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마리?"
"응. 아이작."
"이제 슬슬 앉을까?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이대로 말하면 안 될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아서."
"그럼 앉을까?"
"응..."
이윽고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맞은편에 조신히 앉은 마리에게 시선을 두었다. 때마침 마리도 타이밍 좋게
나를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 ..."
"...히."
"마리."
"응. 아이작."
"아카데미 생활은 할 만해?"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음... 처음에는 힘들겠구나 싶었는데..."
다행히 이야기는 도중에 끊기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나갈 수 있었다. 중간에 식사가 들어와도 우리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가 단절되는 일은 없었다.
나와 마리는 식사를 하면서도 신나게 웃고 떠들기 바빴다. 식사 예절에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아. 물론.
"... ..."
아마 마리도 내심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식사가 모두 끝나는 순간부터가 본격적인 주제가 시작된다고.
"...마리."
"...응."
내가 이름을 부르자 마리는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는지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동안
나는 허벅지 위에 있던 초판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마리는 테이블 위에 초판본이 올라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나를 쳐다봤다. 그도 그럴게 마리의
눈에는 단순히 우편물로밖에 보이지 않아 이게 뭐냐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후우..."
하지만 막상 말하려고하니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긴장을 풀기 위해 한숨을 내쉬어도 식은땀이
날 것 같이 두근거렸다.
'괜찮을거야.'
"...아이작."
"...?"
헌데 지금은 마리의 얼굴이 바로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당황하고
있을 때, 뒤늦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기울였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쪽-
그러나 내 입술에 전달된 느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가볍다지만 이 입맞춤은 일종의 선포나 다름없다.
덕분에 내 사고가 정지될 수밖에 없었다. 마리가 이런 과감한 행동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중간
과정을 모두 생략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으니까.
그사이 마리는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로 베시시 웃더니 따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57 화 >
하지만 이 감각은 절대 착각이 아니다. 찰나의 시간동안 입에 느껴졌던 말랑말랑한 감촉은 뇌리에 선명히
맴돌았다.
"어때?"
"... ..."
"네가 무슨 말을 하던 간에, 이게 내 대답이야."
아, 저 말을 하는 걸 보면 착각이 아니구나.
...세상에 맙소사.
화악!
3 번의 이성적인 판단 이후에 소리없는 아우성이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내 얼굴은 1 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되새겨도 마리가 나에게 버드 키스를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키스는 단순한 이성
친구를 넘어 연인끼리나 할 법한 행위.
아직 정식적으로 교제를 시작한 것도 아닌데 저렇게 저돌적으로 나오니 나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웠다. 전생에서 여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지만 언제나 내가 리드했지, 여자 쪽에서 나서는 경우는
결단코 없었다.
'어질어질하다...'
가끔씩 고혈압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딱 이런 느낌일 것 같다. 차이점은
그들은 지병이고 나는 일시적인 거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세실리의 가슴을 만졌을 때보다 훨씬 심했다. 나도 마리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어서
그런 걸까. 하물며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음습한 '욕망'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에 가까웠다.
"후우..."
뒤이어 고개를 천천히 들어 맞은편에 앉아있는 마리를 바라본다. 그녀는 본인이 무슨 행동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하는건지 방실거리기 바빴다.
"...마리."
"응. 응."
내가 이름을 부르자 애교가 듬뿍 묻어있는 음성으로 말하는 그녀. 흔히 '꽃받침'이라는 포즈를 취하며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하아..."
"히히히."
"...마리."
"왜에~?"
"푸흐흐..."
"후으..."
다행히 웃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정처없이 날뛰던 심장과 불처럼 타올랐던
얼굴이 대부분 다 가라앉았다.
그걸 보며 살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긴장이 풀렸다고하나 비밀을 내 입으로 직접 밝히는 것만큼
긴장되는 건 없을테니까. 심지어 내가 밝히는 비밀은 마리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이다.
"... ..."
"하아..."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초판을 빠르게 훑어보던 마리가 원고지를 슬쩍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로 그녀는 한동안 초판에 시선을 고정시키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녀의 푸른빛
눈동자에 약간의 의심이 서려있었다.
"...진짜일 줄은 몰랐네."
"...정말로 믿는거야?"
"솔직히 믿기 힘들어. 너도 알다시피 세간에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현자라고 추측하고 있잖아. 너처럼
20 살도 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너희 아버지가 붉은 사자로 유명한 사람이니 아마 전부 다 그쪽으로
생각할 걸?"
마리는 내 감탄에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약간 붉혔다가 헛기침을 토했다. 그리고 원고지를 힐끔거렸다가
타박하는 듯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내가 오늘 말했었지? 제논 일대기 저자, 그러니까 너는 나라에서 극진히 모셔갈 정도의 거물이라고.
아니지. 거물을 넘어 걸어다니는 문화라고 보면 돼. 원래 문화라는 건 그 나라만의 고유의 특징인데 너는
그 특징 자체가 되는거지. 우리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가진 국가다! 라고 세상에 알릴 수 있다는
거야."
"...위험한 건 아니지?"
"너 하기에 따라서 위험해질 수도 있어."
"아이작."
"...응."
"아까 내 대답을 들었겠지만 나는 네가 비밀을 밝히던 상관없어. 하지만 이건 조금 다른 문제야. 나는
네가 불순한 의도로 글을 쓸까봐 걱정 돼. 마족의 인식을 바꾸는 건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지만...
제논 일대기 8 권 초반부에 나온 이야기 있지? 귀족을 명과 암을 드러난 장면."
다소 논란이 되었던 장면이 마리의 입에서 언급되었다. 그녀도 귀족, 그것도 공작가 일원이니 염려스러울
수밖에 없는 문제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깨달아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마리의 걱정은 쓸데없는 부분이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마리."
"응. 말해."
"난 절대 그런 의도를 담아 글을 쓸 생각은 전혀 없어. 나는 단지 독자들이 내 글을 읽고 즐거워하면
그만이거든."
마리가 말한듯이 특정 의도를 담아 쓸 생각은 절대 없다. 마족의 인식이 모조리 뒤바뀐 건 나조차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며 인기가 나날이 증가하면 증가할 수록 중압감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렇구나."
마리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마리가 투덜거리자 민망하다는 웃음을 흘렸다. 뾰족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마리도 내 웃음에 기분이
풀렸는지 피식 웃었다.
얼굴도 미약하게 붉어진 걸 보아 입 밖으로 꺼내기 부끄러운 듯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 의문은 점차
증폭되었다.
마리는 다른 사람과 달리 이상한 부탁을 하지 않을테니 평범한 것일텐데 왜 저러는 걸까. 그 생각을 들 때
쯤 마리가 헛기침을 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헤헤헤..."
귀엽다.
< 58 화 >
누군가가 말했던가. 서로의 비밀을 터놓은 사이만큼 가까운 관계도 없다고. 하물며 마리는 원래부터
부담스러운 상대가 아니었던지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아참. 궁금한 게 있는데 아이작은 어디서 그런 작문법을 배운거야? 누가 가르쳐 주기라도 한 거야?"
"배운 건 아니고 나 스스로가 터득한 거야. 솔직히 나도 취미로 쓴 제논 일대기가 이렇게 잘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오옹... 신기하네. 정말로 취미가 맞아? 취미인 것 치고는 다양한 이야기가 안에 녹아들어있던데?"
여기에 대해서는 마땅한 변명거리도 떠오르지 않아 살짝 난감했다. 다행히 마리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믿어주는 모양새였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도중에 확인 도장이라도 찍어줘야할 것 같다. 지금은 분위기 상 도장을 찍어주기에는
어울리지 않으니 꾹 참을 수밖에.
마리는 내 대답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개구쟁이 같은 미소다.
이제는 짱구처럼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불만을 표시하는 마리다. 그래봤자 내 눈에는 귀여운
앙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노트에 전개가 적혀있어. 그때는 실수로 갖고 온 거지만 앞으로 강의실에 가져올 일은 없을거야."
"흐응. 대단하네. 네 머릿속에 또다른 세상이 있는 거잖아? 정말로 나랑 같은 나이가 맞는지 의심스럽단
말이야."
"그런 낯간지러운 칭찬을 해도 떨어지는 콩고물은 없어."
"쳇. 너무 뻔했나?"
저번에는 장난식으로 나에게 책을 쓰냐고 묻기도 했고, 지금은 내가 환생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데도
저런 말을 꺼냈다. 하나같이 찔리게 만드는 질문들이다.
"응. 3 학년이 되는 순간부터 시간적 여유가 늘어나니 그때부터 써야지. 조금 시끄럽긴 해도 학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음... 취미라 하더니 진짜였던 모양이구나? 그냥 작가로 쭉- 살아도 되지 않아?"
"그건 아카데미 졸업하고나서 생각해야지. 일단 역사 쪽으로 진로를 잡고 있긴 해."
"역사가 제일 좋은 거 같아."
"... ..."
"가문에서는 강압적으로 배우라해서 싫어했는데 지금은 아니야. 누구 덕분에."
"크흠. 큼..."
*****
우리 둘도 너무나 빠르게 흘러간 시간에 아쉬워하면서 숙소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알콩달콩한 시간이 완전하게 끝을 맺은 건 아니었다.
"... ..."
짙은 어둠이 가라앉고 미약한 등불만이 비추는 거리.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닫은데다가 지나가는
행인들조차 거의 없어서 한적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조금이라도 이 달콤한 시간이 늦게 가기를 빌면서. 조금이라도 숙소에 도착하는 시간을 늦추기 위해서.
"... ..."
식당에 나오고나서 내가 먼저 손을 잡았을 때 화들짝 놀라던 그녀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과감하게
키스를 했을 때와 달리 너무나도 귀여운 반응이었다.
별들이 어둠 속에 촘촘히 박혀있어 하나의 은하수를 이루고 있었다. 정말로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광경에
넋이 나갈 뻔했다.
우뚝-
어째서 멈추었는지 확인하니 어느새 갈림길 앞에 도착한 상황이다. 각 숙소로 향하는 갈림길이다.
마음 같아서는 여학생용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카데미 규정상 그랬다간은 엄중한
경고를 받게 된다. 왜 이런 규정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따라야겠지.
"... ..."
"...아이작."
"...응."
"그... 있잖아. 우리..."
"사귀는 거 맞냐고?"
내 말에 마리가 얼굴을 천천히 들어 나와 똑바로 마주했다. 긴장하고 있는지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스윽-
쪽-
식당에서 마리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내 입술과 마리의 입술이 서로 맞닿았다. 버드 키스라면 여기서
바로 떼어야겠지만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읍...!"
더구나 입술이 꾹하고 다물린 건 아마 극도로 긴장했기 때문에 마리조차 자각하지 못 했을 확률이 크다.
마음 같아서 혀를 이용해 노크 하듯이 입술을 톡- 톡- 두드리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진도는
천천히 빼면 그만이다.
지금은 그저 입술만 진하게 부딪힌 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 되겠지. 마리도 이걸 원했을 것이다.
"후아!"
"... ..."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흐르고, 내가 입술을 떼내자 마리가 참았던 호흡을 터뜨렸다. 그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펑! 하고 터질 것처럼 빨개진 상태였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자 마리의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스르르 풀렸다. 뒤이어 그녀도 두 팔을 들어 나를 조심히 껴안아줬다.
"...응."
두 남녀가 은하수가 펼쳐진 밤하늘 아래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체온을 나누고 있을 쯤이었다.
"... ..."
무언가 복잡한 눈빛으로 연인의 달콤한 분위기를 지켜보던 사람은 이윽고 눈매를 반으로 좁혔다.
"...아냐."
< 59 화 >
그리하여 충치가 날 정도로 달콤한 시간은 끝이 났지만 혀에 감도는 아릿함은 다음 날에도 쭈욱 이어졌다.
"히히히."
"이러다 누가 보면 어떡해?"
"보라고 해. 어차피 숨길 필요도 없는데."
"아앙."
"악! 왜 깨물어?"
"그냥 깨물고 싶어서. 가끔 몇몇 사람들이 애인 얼굴 뜯어먹고 산다던데 왜 그러는지 알 거 같아."
그래도 하루하루가 즐거운 건 변함이 없다. 숙소에서 원고를 작성할 때도 마리의 해맑은 미소가 생각나고,
길을 걷다가도 생각나고, 밥을 먹을 때도 생각난다.
전생에서 연애를 안 한 건 아니었으나 이런 기분은 나에게 활력소가 되어줬다. 그덕분인지 몰라도 원고를
작성하는 속도가 무시무시하게 빨라졌다.
"...자악."
"... ..."
"아이자악?"
"네?"
나는 누군가의 부름에 다급히 정신을 차렸다. 마리에 대해 생각하느라 실수로 잠깐 상념에 빠져버렸다.
나는 신디의 질문에 시선을 피하며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마리와 키스했던 기억이
떠올랐다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신디는 내 대답에 생기없는 눈동자로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린 쪽에는 노트
한 장이 놓여있었다.
엘레나 교수에게 제안을 받은지 거의 세 달이 지나가지만, 정작 연구실에 방문한 횟수는 현저히 적었다.
제안을 받고나서부터 다양한 사건사고가 덮쳤기 때문이다.
하기야 인간은 엘프가 이룩한 문명을 모방했으니 교육 기관도 따라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나에게는
새로운 지식이나 다름없어서 살짝 놀라운 건 마찬가지였다.
간혹 신디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엘프가 어째서 인간을 그대로 방치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들한테는 안 된다는 자신감 때문인걸까.
아무튼 각설하고-
신디의 배움은 실로 파멸적이라 할 수 있었다. 같은 설명을 여러번 반복해야 간신히 이해할 정도다.
입으로 잘게잘게 씹어서 억지로 넘겨줘야 받아들이는 수준이라고 해야할까. 인간에 비해서 다른 종족은
배움이 느리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하물며 엘레나 교수의 언급에 따르자면 신디는 다른
엘프보다 머리가 둔한 편이라 했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신디."
"으응?"
"지난 번에 제가 말했던 책은 읽어보셨어요?"
"제논 일대기이? 읽어봤지이... 엄청 재미있더라아...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됐어어..."
도움이 많이 된 게 이정도 수준이라... 재미있게 읽었다니 기분은 좋지만 왠지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 질문에 신디는 노트에 끄적이던 펜을 멈추며 입술을 오므렸다. 아무래도 내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독특하게도 신디는 내가 질문하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착실히 대답해주는 편이다. 본인은 모르고 있겠지만
천성적으로 남들에게 무언가 설명하는 걸 좋아한다. 심지어 설명도 잘해준다.
반대로 말하자면 엘프측에서도 나를 잡기 위해 벼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여왕의 성격이 온건하여
막고 있을 뿐, 만약 여기서 문제가 더 커진다면 말이 새어나오겠지.
정확히는 엘프 여왕과 제논을 가르쳤던 '스승'의 이야기다. 본래라면 아무 생각없이 썼을테지만 마족과
칠죄종의 영향력을 떠올리자니 함부로 쓰기가 어려웠다.
"음... 신디."
"왜에?"
"신디는 엘프가 인간이랑 깊은 연을 맺는 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으응?"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세상에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다른 로맨스 소설에서조차
엘프와 인간 사이의 러브 스토리는 전무했다.
마족과 증기 기관차, 그리고 칠죄종까지 3 연타를 쳐버리니 나로서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것도 파급력이 심하다 싶으면 과감하게 배제할 생각이다.
신디는 의심의 눈초리로 거두고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한참동안 머리를 굴리는 것 같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우리가 인간과 연을 맺는다는 거언...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아... 엘프에 비해서 인간의 수명은 극도로
짧거드은..."
"그럼 인간이 아니라 다른 종족도요?"
"그을쎄... 너도 알다시피 우리 엘프는 다른 종족을 경시하는 편이라아... 세대가 교체되면서 그런
시선이 줄었들었다지만 아직까지 남아있거드은... 자기가 인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같은 취급을 잘 안
해줘어..."
역시나 교만의 종족 다웠다. 하지만 그 교만의 뿌리가 어디인지 고려하자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 60 화 >
"헤헤헤."
"왜 웃어?"
"그럼 아이작은 왜 웃어?"
"그냥 웃음이 나오는데?"
"나도. 나도."
주변에서 수근거리던 말던. 세실리와 리나가 수상한 눈초리로 보던 말던. 남들이 복잡미묘하거나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말던.
아무튼 나와 마리가 서로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어느정도 시간이 흘렀을 시점이다. 모든 시험과 과제가
종료되고, 상대적으로 여유 시간이 많아져 우리 둘끼리 돌아다니는 빈도가 많아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른 곳도 아닌, 주말에 방문한 연무장에서 나타났다. 주말은 각자 개인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마리와 협의를 본 참이다.
아델리아가 민소매를 펄럭거리며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땀으로 푹 젖은 그녀의 미모가
눈에 들어왔다.
이에 나는 다급히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머릿속으로는 최대한 마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상한
생각이 날 뻔한 걸 최대한 억눌렀다.
"...어떻게 아셨어요?"
"우연히 네가 어떤 백발의 여자애랑 서로 껴안는 걸 봤거든. 아주 대놓고 우리 연애해요, 라고
광고하더라?"
"그래서요? 그것 뿐이에요?"
"그것 뿐이라니? 친한 친구 동생이 연애를 한다는데 궁금해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냐? 누가 먼저
고백했어? 아니지. 그 녀석 이름이 뭐야? 머리카락 색이 흰색인 걸 보면 대충 누구인지 알 것 같은데."
만약 본성이 좋지 않았다면 니콜이 챙겨주지도 않았겠지. 게다가 아델리아의 장난은 왠지 관심을 갈구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었다.
물론 나도 그렇고 마리도 몸조심을 하겠지만 앞날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한 방에 둘만 남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으음~ 글쎄?"
설명을 듣고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늘 말했지만 귀족과 평민 사이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존재한다. 그것이 권력이던 재력이던 간에.
만에 하나, 사고를 쳤다고해도 마리를 책임질 자신이 있다. 물론 그녀의 부모님이 곱지 못한 시선으로
보겠지만 내 정체를 밝히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달라진다.
연애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그쪽으로 주제가 넘어갔다. 아델리아는 주구장창 내 연애사에 집중했지
본인과 관련된 건 일체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아델리아는 내 질문을 듣자마자 당황을 넘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로서는 의외의 반응이다.
오똑한 콧날, 쾌창한 하늘을 연상시키는 하늘색 눈동자과 긴 속눈썹. 마지막으로 갈색 단발머리까지.
전체적으로 잘생겼다는 이미지에 가깝지만 붉은 입술로 하여금 여성적인 매력도 함께 뿜내고 있다.
솔직히 이 얼굴이 평민이라는 걸 도저히 믿지 못할 정도로 아델리아의 미모는 상당한 편이다. 정체를
숨기고 들어온 사람이라던가 아니면 사생아가 아닌지 싶을 정도로.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도중에 아델리아는 머쓱했는지 뒷목을 살살 매만졌다. 뒤이어 피식거리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 주제에 무슨... 나보다는 네 누나한테 물어보는 게 나을 걸? 넌 모르겠지만 니콜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냐면..."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은글슬쩍 니콜의 연애사로 주제로 돌리려던 찰나에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땀으로 점칠된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다가오는 니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니콜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후우. 덥다."
이어서 니콜은 방금 전 아델리아가 했던 것처럼 상의를 벗어던져 땀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녀도 안쪽에
민소매를 입었지만 친누나인지라 아델리아처럼 눈길은 가지 않았다.
그대신 곳곳에 박혀있는 잔근육들에게 시선이 뺴앗겼다. 여자는 태생적으로 근육을 다듬기 어렵다던데
니콜의 모습을 보자면 그 생각이 틀렸나 싶다.
"응. 그건 왜?"
"그냥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별 일은 없지?"
"잘 지내고 있지."
"그럼 다행이고. 읏차."
"그러고보니 글은 잘 쓰고 있어?"
"응. 아마 보름이면 될 거야."
"빠르네. 하긴 시험도 끝났으니 여유 시간이 많아졌겠지. 10 권에 엘프 여왕과 제논의 스승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응."
"오~ 그거 기대되네. 엘프와 인간의 사랑이라, 또 한 번 히트치는 거 아니야? 그건 엘프 쪽에서도 말이
나오겠다."
그래. 겉으로는 엘프와 인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스토리가 이어질 수록
사람들은 무언가 잘못 됐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엘프 여왕은 스승이 죽었다는 사실에 통곡하며 눈물을 펑펑 흘리게 된다. 본디 이 장면은 제논을
각성시키기 위한 장치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름 재미있을 것 같아 세세하게 적을 예정이다.
"응. 엄청 재미있을거야."
나에게만.
< 61 화 >
마리와 알콩달콩한 연애를 시작한지 어언 2 주일 가량이 흘렀다. 2 주일이는 시간이 흐른만큼 많은 것들이
변화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건 학생들이 나와 마리를 보는 시선이다.
제일 가까운 지인들인 리나와 세실리도 대놓고 묻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의 사이를 확신하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인지 마리가 내 곁을 떡하니 지키고 있는 이상 함부로 다가올 입장이 못 됐다.
그것 외에는...
"딱히 없는데?"
"정말로?"
"응. 네 말한 잭슨도 뭐라고 하지는 않았어. 대신 뭐랄까... 측은지심?"
"엥? 측은지심?"
그러다 마리는 손을 내저으며 조신한 말투로 나에게 부탁했다. 방금 전까지 털털했던 면모와 전혀 다른
행동이요, 말투다.
이렇듯 마리와 단 둘이 있다면 시시한 이야기조차 즐겁게 느껴진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한다는 시간 자체가 더욱 중요했다.
물론, 스승과 엘프 여왕의 비극적인 서사는 알려주지 않았다. 참고로 그 이야기는 10 권에 나오지 않고
빠르면 11 권, 늦어도 13 권에 나올 예정이다.
그때까지 스승과 엘프 여왕과의 관계는 직간접적으로 묘사하면서 독자들의 마음을 애태울 생각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스승이 데드 플래그를 똭! 하고 꽂아넣는거다.
지난 번 모임에서 에딘이 예측했던 것처럼, 메리의 정체는 엘프이며 인간인 제논에게 마음이 있다. 허나
본인이 엘프인 탓에 마음을 표현하고 못 하는 중이다.
'어쩌다 보니 로맨스 파트가 되버리겠네. 뭐, 상관없지.'
로맨스 파트라면 여성 독자들이 꽤 많이 좋아할 것이다. 거기다 사람들이 잘 다루지 않았던 엘프와 인간의
사랑이었으니 더욱 자극적일터.
엘프 쪽에서 말이 나와도 상관없다. 칠죄종 중 교만을 담당하는 악마측 간부가 엘프라는 설정을
추가했는데도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신디가 내부적으로 회의를 하고 있을거라고 했으나 그닥
신경쓰이진 않았다.
하지만 엘프의 경우는 사람들 머릿속에 장수하는 종족이라는 인식이 꽉 박혀있다. 그와 반대로 인간은
수인과 더불어 수명이 짧다는 인식이 꽉 박혀있는 상태다.
"게다가 엘프는 마족보다 오래 사는데다가 고귀하고 오만한 종족이라고 알려져 있어. 신디한테 들으니
엘프 사이에는 다른 종족을 경시하는 풍습이 있다더라고."
"신디? 그 사람은 누구야?"
"응?"
"설마 여자야?"
마리가 눈초리를 매섭게 뜨며 노려보자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오는
게 상당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녀에게 수많은 지식을 받았지만 그것 뿐이지, 이성적인 호감은 전무한 수준이다. 그냥 동료다.
"그리고 네가 훨씬 더 예뻐."
"읏..."
그래서 그 생각을 고스란히 꺼냈다. 그러자 마리의 얼굴이 삽시간에 노을처럼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재미가 없겠지. 나는 역공의 기회를 잡자마자 능글거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
마리는 연이은 공격에 버터내지 못 했는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나는 그녀가 이마를 테이블 위에 박자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하도 놀려대서 그럴까.
"아앙!"
"악! 미안! 미안! 다시는 안 그럴게! 미안!"
"아이작."
"네?"
"목에 그거 뭐야? 맹수한테 물리기라도 했어?"
"... ..."
"...네. 행복하죠."
"그렇구나. 하긴,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긴 하겠지. 마리가 조금 부럽긴하네."
"은인을 향한 내 진심 정도랄까?"
"... ..."
< 62 화 >
세실리가 내 귓가에 속삭이면서 말하길, 은인을 향한 자신이 진심이 담겨있다고. 돌려 말했지만 사실상
나에게 주는 편지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디 평범한 봉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내용물은 꽤 두툼했다. 최소
편지가 3 장 이상 들어있는 건 확실하다.
그녀는 은인을 향한 진심을 담았다고 했으니 팬레터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여태까지 내 신분을 꽁꽁
숨겨놓아서 팬레터를 직접 받은 적은 없다. 이탓에 기분이 더욱 묘해졌다.
하지만 첫 문장에 집중해봤자 나오는 건 없었다. 일단 의문은 접어두고 다음 내용을 천천히 읽어내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읽다보니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편지에서 보듯이 세실리는 상당히 저자세로 나오고 있다는 것.
세상에 끼치는 내 영향력이 막강하다지만 세실리가 고개를 숙이며 나올 필요는 없다. 하물며 헬리움은
현재 다른 국가와 외교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니 그녀의 입지는 무궁무진할 터.
'그런데...'
가슴 속에서 꾸물꾸물 기어올라오는 이 음습한 감정은 도대체 뭘까. 지난 번 세실리가 나에게 존댓말을
했을 때도 이같은 감정이 들었다.
나는 머리를 세차게 털어내며 그 감정들을 모조리 떨쳐버렸다. 세실리가 아무리 저자세로 나온다고한들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았다.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갈무리한 뒤 편지에 시선을 두었다. 유려한 필기체와 더불어 세실리의
아름다운 문체가 눈을 즐겁게 만들어줬다.
그리고 그 진심은 나에게 여과없이 전달되는 중이다. 비록 의도치 않았다지만 그 결과가 긍정적이라면
어느 사람이라도 뿌듯해할 터.
하지만 지금 이 편지를 읽고나니 그녀가 얼마나 힘든 인생을 보냈는지, 또 나에게 얼마나 큰 감사를
느끼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진짜 많이 힘들었겠네.'
100 년이라는 세월은 다른 종족이면 모를까, 인간에게는 터무니없이 길다. 세실리는 그 100 년이라는
세월동안 동족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셀 수도 없이 노력하는 중이었다.
나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생생하게 느끼며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무려 3 페이지나 달하는 내용이라
전부 읽는데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두 번째 페이지는 세실리가 어떤 포부를 갖고 있는지에 말하고 있다. 이덕분에 입학식 당시 그녀의 연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본인의 포부를 당당히 밝힐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라면 절대 못할 일이다.
세실리의 용기있는 행동은 마족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평소 나에게
장난을 치느라 깜빡했던 부분이다.
'비범하다는 말이 이럴 때 하는 거겠지?'
내가 원한다면 몸과 마음을 기꺼이 바치겠다. 그러나 지금은 내 곁에는 마리가 있으니 원하지 않는다면
그러지 않겠다.
한 명의 여자로서 모든 걸 바치겠다는 글에 정신이 혼미해지기보다는 난감해졌다. 지난 번에는 단지 나를
유혹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스읍..."
여태까지 부모님을 제외하면 편지를 보낼 대상이 없을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로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고보니 팬레터라...'
제논 일대기가 세계적인 히트를 쳤는데도 팬레터 한 장 없다는 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법했다. 어쩌면
아버지가 조금의 단서를 흘리지 않기 위해 철저히 막았을 가능성이 높다.
왠지 기대가 된다.
*****
"푸엣췽! 엣..."
< 63 화 >
단순히 책 하나로 인해 종족 전체의 명운이 뒤바뀌었으며 마족이 본격적으로 활동하자 세계의 정세마저도
요동쳤다. 그동안 마족은 반강제적으로 폐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가 태동하기 시작했으니 다른 나라에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
"흠흠~ 흠흠흠~"
책상에 앉은 중년의 남자가 콧노래를 부르며 노트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현재 기분이 매우 좋은 것인지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현재 그가 펜촉으로 쓰고 있는 노트의 정체는 장부다. 그것도 단순한 장부가 아니라 남자가 관리하고 있는
상회와 큰 연관이 있는 장부.
평범한 장부였다면 남자가 아니라 다른 직원이 관리하고 있겠지만, 높은 직급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관리하고 있는만큼 장부의 용도는 특별했다.
의외로 남자는 제논 일대기의 정체를 알고 있다. 정확히는 아이작이 아니라 호크로 착각하는 중이다.
똑- 똑- 똑-
"누군가?"
"사장님. 저 매튜입니다."
"오. 매튜! 어서 들어오게."
끼익-
사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매튜는 슬며시 문을 열었다. 갈색 곱슬머리에 흐리멍텅한 눈동자, 그리고
안경까지.
사장은 매튜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소를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기대감에 두 손을 맞잡은 건 덤이다.
매튜는 사장의 질문에 피곤에 쩔어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항상 저런 식으로 보고를 하는 편이다.
더 나아가 마족이나 드워프, 심지어 간간이 엘프나 수인들이 보내는 편지도 있었다. 그 편지에 무슨
내용이 담겨있는지는 모르지만 국가와 종족 가리지 않고 인지도가 넓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사정상 작가에게 직접 보내지는 못 하고 출판사에게 보내는 중이다. 출판사조차 작가와 소통을
주고받기 힘들어 하염없이 쌓아두고만 있는 상황이었는데 때마침 잘 되었다.
사장이 엄지손가락으로 뒷쪽을 가리키자 자연스레 매튜의 시선도 따라갔다. 사장이 가르킨 곳에는
네모반듯한 상자가 놓여있었는데 그 상자에 팬레터가 가득 담겨있다.
매튜가 원고를 전달하자 사장은 의문을 가지면서도 아무런 의심없이 받았다. 이어서 이미 개봉된 우편
안에서 원고를 꺼내 매튜가 말한대로 마지막 페이지로 넘겼다.
마지막 페이지는 평소 작가가 적지 않았던 '작가의 말'이 실려있었다. 사장은 세상과 소통하려는 건가
싶어 놀라는 것도 잠시, 작가의 말을 읽고나서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이게 정말로...?"
사장은 행복했던 마음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끼며 매튜와 원고를 번갈아봤다. 떨리는 목소리와
두려움에 빠져있는 듯한 표정이 압권이다.
"후우... 보시는대로입니다."
이에 매튜는 생기없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고 착잡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본인도 믿을 수
없다는 뉘앙스로 입을 열었다.
사장은 한동안 혼이 나간 것처럼 우두커니 앉아있다가 다급히 고개를 세차게 털었다. 그동안 회사를
운영하면서 위기를 맞은 적이 한 번도 없던 건 아니다.
상당히 공손한 내용이지만 저자의 상황과 비교하자면 이야기가 다르다. 현재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찾기
위해 다양한 곳에서 추적하는 중이다.
독자들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지는 걸 넘어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난의
화살이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이 뻔하다. 당연하게도 세상이 한동안 뒤숭숭해지겠지.
물론 아이작 입장에서는 학업에 집중하고 싶어서 이렇게 적은거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자를
현자로 추측하는 중이다. 한 술 더 떠서 지난 번에는 코피를 흘렸다고 건강을 우려하는 소식까지 신문에
실렸다.
이렇다보니 정말로 저자가 위험한 건 아닐까? 라는 불안감을 독자들에게 심어줄 가능성이 높다. 제논
일대기를 영영 못 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 ..."
"...빨리 소집해."
"네?"
"긴급회의 할테니까 당장 직원들을 소집하라고! 어서!"
"네, 네! 알겠습니다!"
매튜가 반문하자 사장은 전에 없던 노호성을 터뜨렸다. 이윽고 매튜가 문 밖으로 줄행랑을 치자 사장은
씩씩거린 것도 잠시, 곧바로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히히힝."
"좋아?"
"응! 응!"
"그냥 껴안고 있는데도?"
"응!"
< 64 화 >
원래 편지를 보내면 일주일 정도가 지나야 답신이 돌아오는 편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는 살짝 늦었다.
거기다 우편물 또한 두터웠다.
'뭐가 들어있는거지?'
'이게 전부 다 팬레터인가?'
[네가 부탁했던 팬레터 중 일부를 간추려서 보내마. 출판사에서도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보낼 수 없다고
하는구나. 나중에 차차 보내도록 하겠다.]
[참고로 출판사에서 네 휴재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아마 우리와 소통이 힘드니 포기한 거겠지.
그대신에 파장이 꽤 클 거야. 대비하고 있거라.]
어머니는 늘 그랬듯이 장문의 편지를 보내셨다. 대부분 시험은 잘 쳤냐니, 아카데미 생활은 할 만하니
등등. 대부분 내 안부를 묻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걱정하시는만큼 내 마음이 힐링되는 기분이다. 이런 장문의 편지를 한 달마다 보내는
것도 귀찮으실텐데 꼬박꼬박 정성을 담아 보내주신다.
'이게 일부라고?'
그것도 간추려서 보낸 거라고 했으니 대체 얼마나 쌓여있는 걸까. 이거 전부 읽는데만 며칠이 소요될 것
같다.
[앞으로 2 년 후면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돼요! 작가님처럼 지식이 많다면 언젠가 제논 일대기 같은
글을 쓸 수 있겠죠?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작가님을 직접 만나서 글을 어떻게 쓰는지 배우고 싶어요.
하지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시니 참아야겠죠. 열심히 노력할게요!]
"음?"
'이런 건 간직해야지.'
'다음으로는...'
게다가 귀족들이 보낸 팬레터보다 평민이 보내준 팬레터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본래 소설은 평민보다
귀족들이 즐겨있는 편이었지만 제논 일대기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읽기 좋은 소설이다.
또한 귀족의 숫자는 전체 인구로 따졌을 때 약 1%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다보니 평민이 보낸 팬레터의
수가 더 많을 수밖에.
특히 귀족들 중에는 본인의 지위를 어필하면서 본인의 가문을 끌어들이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건 대충
읽고 말았다.
그렇게 팬레터를 쭈욱 읽다보니 마리가 보내준 팬레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새하얀
편지 봉투를 바라보다가 이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안녕하세요? 존경하는 작가님. 저는 레킬리스 가문의 마리라고 해요. 작가님 작품은 정말 재미있게 읽고
있답니다.]
어떻게 되긴.
등짝 맞았다.
*****
권위가 높은 귀족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불평을 할지언정 불만은 가지지 않았다. 괜히 들쑤셨다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잠적해버리기라도 한다면 본인들에게 큰 피해가 간다.
"흐응~ 흐흐흥~"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 리나는 본인의 숙소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어떤 우편물을 정성스레 개봉하고 있었다.
"짜잔~"
누가 본다면 참 쓸데없는 곳에 권력을 낭비하는 중이라고 까겠지만 리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정치계에 입문한 그녀에게 권력을 이용하는 건 일종의 상식 수준으로 박혀있다.
제논 일대기를 바라보니 자연스레 아이작도 떠올랐다. 그녀는 여전히 호크가 스토리를 알려주고 아이작이
글로 옮기고 있다 착각하는 중이지만, 그럼에도 아이작의 글솜씨가 뛰어나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보니 어느새 끝까지 다 읽게 되었다. 하필이면 스승이 악마측 간부가
관리하는 지역에 잠입했던지라 더욱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리나는 그 감정을 억지로 누르며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스토리는 모두 끝났지만 남은 게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버릇이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니 '작가의 말'이라는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 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을 표하다가 작가의 말에 실려있는 글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소개에 불과했다. 게다가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 것부터 리나에게는
예상 밖이었다. 필명을 알려준 것부터가 세상과 소통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어?'
큰일났다는 걸.
'그것도 2 년이나...?'
"...어라?"
< 65 화 >
출판사에서 제논 일대기의 발매일을 잡았다는 소식이 신문에 실렸다. 그것 외에는 이렇다 할 소식은
없었다.
아무래도 출판사는 제논 일대기가 발매되는 날에 내가 휴재를 할 거라는 소식을 알려줄 생각인 것 같다.
나야 상관없는 문제다.
"추천서요?"
"응. 추천서."
하지만 추천서는 교수가 직접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기에 절대 남용할 수 없다. 말 그대로 교수가
판단하기에 인재 중의 인재를 골라야 하는 것이다.
엘레나 교수도 위의 이유로 나에게 저런 말을 꺼냈을 가능성이 높다. 나에게는 조금 당황스러운 이야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엘프인 엘레나 교수가 저렇게 말하니까 무게감이 확 달라졌다. 도대체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 얼마나 적다는 거야.
수도, '위그드라실'에는 성지(聖地)인 세계수가 존재하고 있으며 최초의 문명이 세워진만큼 살아있는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엘프 입장에서는 문명도 모자라 하나부터 열까지 모방하려는 인간을 좋게 볼 수 없으니 당연한 입장이다.
하물며 종족전쟁에서도 인간과 혈전을 치뤘으니 더더욱.
엘레나 교수는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처럼 신디가 우려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맞아. 네 말대로 인간이 알븐하임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귀찮은 절차가 필요하지. 하지만 나와 동행하면
이야기가 달라져. 우리 엘프는 자기가 인정한 사람에 한해서 자비롭거든. 본인이 인정할만큼 상대방이
고귀하다는 의미로서 자격을 부여하는거야."
"그거 좀..."
"그래. 실로 엘프다운 마인드지. 종족전쟁에서 된통 당했는데 여전하단 말이야."
역사학 시험에서 내가 적었던 답안지를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낸 엘레나 교수. 나는 안경 너머로 빛나는
연두빛 눈동자와 마주했다.
전생에서 널리 퍼져있던 명언을 그대로 베껴적은 거라 양심이 찔리긴 했지만, 이런 말을 해봤자 큰 의미는
없을거다. 이때는 침묵만이 답이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나라 사이의 전쟁을 보자면 이유가 비슷한 경우가 많다. 세세히 파고들자면 여러가지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다.
"그리고 전쟁이라 해서 무력만 사용하는 건 아니에요. 미네르바 제국과 테이로스 왕국 사이에 발발한 문화
공방도 일종의 전쟁이라 볼 수 있죠. 그게 심화되면 무력으로 변질되는 거고."
"흠. 확실히 일리가 있네. 종족전쟁도 종족 간의 문화 차이에서 발생한 전쟁이었으니까."
엘레나 교수는 내 설명에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종족전쟁이 발발한 이유에는 여러가지
굵직한 사건들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문화 차이 때문에 발생했다.
엘프는 힘도 없으면서 욕심만 많은 인간을 탐탁치 않아했고, 인간은 겉으로 고결한 척 하지만 자신들을
깔보는 엘프의 면모를 싫어했으니까.
이런 이념 차이가 점점 크기를 부풀리다가 종족전쟁이 터져버렸다. 그 후로 각 측마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나서 전쟁이 끝났으나 후유증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나는 엘레나 교수의 질문에 시선을 위로 두며 곰곰이 생각했다. 현재 이 세상에는 다양한 나라가 존재하고
각각 고유의 문화와 특성이 있다.
이때문에 여러모로 갈등을 벌이고 있지만 상당히 평화로운 편이다. 이렇다 할 문제점도 없을 뿐더러
건덕지를 잡을만한 부분도 없다.
"너도 알겠지만 제논 일대기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종족을 가리지 않고 전세계적으로 상한가를 달리고 있어.
여기서 문제는 특정 나라에서만 인기가 있다면 모를까, 국가를 가리지 않는다는 게 제일 큰 문제지."
"겨우 책 하나 때문에 전쟁이 발생한다고요?"
특정 물품에 관세를 매긴다는 건 경우에 따라서 아예 유통을 못 시키게 막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불 보듯 뻔하다.
크트디부아르가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을 당시, 드록바가 카메라 앞에서 무릎을 꿇어 전쟁을
멈춰달라 호소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나라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내전이 멈췄다. 축구선수조차 그정도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나라고 못 할 건 없다.
"와우."
이건 좀 예상을 벗어났는데.
< 66 화 >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지도 않았고, 빙빙 돌려서 말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제논 일대기를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거나 문장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파악하여
스스로 깨닫는 경우가 많다.
제논 일대기와 판권 계약은 것으로 유명한 출판사 입구 앞.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중이다.
평범해 보이는 자유민부터 시작해서 잔뼈가 굵은 것 같은 모험가, 이밖에도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까지.
이처럼 공통점없이 다양각색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물며 선동을
하는 사람조차 없는데 시위를 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아, 물론 공통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단지 제논 일대기 10 권이 나오고 이틀이 지나자 해일처럼 몰려든 인파를 막기에 급급했다. 다행히
시위대가 과격하게 나오지 않아 당장은 막을 수 있다는 걸까.
하지만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자극되었다간 정말로 출판사가 점령당할지도 모른다. 그전에 어떻게든 진화
작업을 해야되는데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든 좀 해봐!'
시위대를 막고 있는 직원은 본인의 회사를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면서 소리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그렇다면 현재 출판사 내의 상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사장은 귀부인 다음으로 애처로운 귀족의 부탁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옴을 느꼈다.
잘 싸운다, 잘 싸워.
사장은 결국 본인들끼리 언쟁을 벌이기 시작한 귀족들의 모습을 보며 해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말마따나 지금 이 현상은 이들보다 더 윗쪽에게 불안한 징조로 보일 것이다. 심지어 제이로스 혁명
당시에 있었던 징조보다 더욱 과격했다.
'루미너스시여...'
*****
시위는 제논 일대기와 계약한 출판사 앞에서만 이루어진 건 아니다. 제논 일대기가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친만큼 곳곳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광장에서 팻말을 들며 열심히 목소리를 높이는 시위대는 물론이고, 심지어 국가의 주요 시설 앞에서
시위를 펼치는 전대미문의 일까지 발발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각 나라마다 높으신 분들은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골머리를 앓았지만 이내 한 묘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제논 일대기의 저자, 즉 제논은 없다. 애시당초 출판사도 미네르바 제국에 있다.]
[목소리를 높이는 시위대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에게 따져봤자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도 제논의 장기 휴재 소식에 당황스러우며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제논이 심적으로 힘들었다면 분명 국가 차원의 압박이 있었을 것. 문화라면 죽고 못 사는 나라라면 두
곳밖에 없다.]
그건 바로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에게 책임을 돌려버린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미네르바 제국은 테르스 왕국의 문화를 침탈하는 것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이때문에 테르스
왕국에서 엄격한 규율을 새로 지정한 건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사실.
더군다나 테르스 왕국은 제이로스 혁명 같은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 전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런
사건까지 겪었는데 제논 일대기 저자를 압박한다는 미친짓은 저지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불안감은 수도에 위치한 헤일로 아카데미에도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강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미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강의실 내부를 둘러봤다.
그녀는 아무런 걱정도 되지 않는지 특유의 방실거리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마리는 황제 다음 가는 권력을 지닌 레킬리스 가문 출신이다.
뒤이어 그녀는 뒷쪽을 힐긋 바라보더니 나에게 손짓했다. 귀를 빌려달라는 듯한 제스쳐에 얼굴을 천천히
갖다 대었다.
"후우~"
"으핫!"
"히히. 좋았어?"
"아, 진짜... 이런 장난 좀 하지 마."
"미안. 미안. 그리고 옆을 한 번 볼래?"
"또 뭐..."
또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지만 그녀의 말에 따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한 사람의 모습에 눈을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내려오고,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와 청초한 인상의 미녀가 내 옆에
서 있었다.
"...아이작."
"어... 네."
내 이름을 부른 그녀는 마리를 한 번 쳐다봤다. 그 시선에 마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마음대로 하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마리에게 허락도 받았겠다, 리나는 어딘가 결의를 다진 표정을 짓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끊어서 말하는 마리가 짜증났던 걸까. 리나가 약간 표독스러워진 얼굴로 마리를
쏘아봤다.
하지만 리나는 이렇게 소모전을 펼쳐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를 바라보며 부탁의 말을 꺼냈다.
"...부탁할게."
목소리에는 힘이 상당히 빠져있었다.
< 67 화 >
어째서 리나가 시간을 내달라는 건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분명 제논 일대기를 휴재하면서 몰아치기
시작한 폭풍을 잠재우기 위해서겠지.
즉, 리나가 재빨리 나를 찾아와 해결해야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의미. 신문에서도 그렇고 주변에서
들리는 말로는 제국 곳곳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중이라 들었다.
"그런데 너는 꼭 있어야겠니?"
"네가 아이작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참고로 나와 리나만 있는 게 아니라 마리까지 합세했다. 위의 말처럼 마리는 리나가 나에게 이상한
말이라도 할까봐 걱정되어 따라왔다.
물론 마리가 내 비밀을 모르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다. 마리도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는지 리나를 힐긋
쳐다봤다.
리나는 특유의 포커 페이스가 완전히 부서지고 눈쌀을 찌푸린 채 쌀쌀맞은 표정이었다. 그에 마리는
같잖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더니 한 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무래도 본인도 찔렸던 모양이다. 실제로 계급 차이에서 발생하는 간격은 실로 막대하며, 그것이 지도자
계층이라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더구나 리나는 어릴 때부터 정치계에 입문했을테니 그 사실을 모를리가 없다. 실제로 그 간격을 이용하여
나와 니콜을 압박하고, 조별과제 당시 잭슨을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리나는 벌써부터 피곤해진 듯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재촉했다. 마리도 더이상 놀리지 않기로 결정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벌써부터 개판으로 가버릴 듯한 분위기 속에서 리나의 눈치를 보다가 마리와 눈을 마주쳤다. 마리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베시시 웃더니 슬며시 팔짱을 꼈다.
"...좋아보이네."
황제가 황태자를 불러 문책할 정도면 사안이 심각하긴 심각한 모양이다. 아마 나중에 레오르트도 나와
니콜에게 사과를 하지 않을까싶다.
아무래도 레오르트가 황궁으로 돌아가서 그런 모양이다. 납득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과는 한다니 일단
넘어갈 수는 있다.
이후로 리나가 데려간 카페에 도착하고, 방음과 보안이 확실한 방까지 잡았다. 카페는 지난 번 세실리와
독대했을 때 왔던 곳과 같은 장소다.
하마터면 세실리와 거하게 사고를 칠 뻔했던 곳이라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내 옆에
마리가 앉아있고 맞은편에는 리나가 앉아있다는 걸까.
물론 거절했더라도 리나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자그마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녀인데
일개 카페 따위가 감히 이의를 낼 수는 없을테니.
나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바라보더가 리나의 얼굴을 바라봤다. 리나는 마셔도 된다는 듯이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나는 리나의 부름에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대답했다. 리나는 긴장 때문에 굳어진 얼굴로 나를
마주하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름에 잠겨있는 그녀의 모습이 썩 불쌍했지만 미안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이 잘못한 건
맞으니까.
부정할 생각은 티클만큼도 없었기에 담담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리나는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연이어 말을 걸었다.
"그래서 말인데..."
애처롭게도 들릴법한 그녀의 물음에 속으로 골똘히 생각했다. 아까 전에도 말했지만 휴재를 결정한 이유는
학업과 재충전을 위해서다.
하지만 리나와 레오르트가 압박을 가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겠지. 근본적인 원인이 이
둘에게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네요."
"... ..."
애매한 내 대답에 리나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 해 입술을 앙 다물었다. 보아하니 스스로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 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나는 입술을 앙 다문 리나에 의외라고 생각하다가 뒷목을 매만졌다. 지금은 내 마음을 진솔하게 꺼내야 할
듯했다.
"제가 휴재를 결정하게 된 이유는 아카데미 생활과 재충전, 그러니까 설정 정립을 위해서에요.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주위에서 보내는 압박감이 컸죠. 만약 두 분께서 부르지 않았더라면 휴재를 안 했을
거예요."
"... ..."
"미리 말하는데 저는 휴재를 번복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이미 한 번 결정을 내린 건 철회하지
않는 성격이거든요."
"...알았어."
한동안 고민하던 리나는 결의를 다진 표정을 짓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 옆에 앉은 마리는
신경쓰지도 않는 모습이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리나가 고개를 천천히 숙이며 나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황금을 실로 짠 듯한 머리카락이 서서히
내려앉으며 테이블 위에 살포시 얹어졌다.
나는 그녀의 사과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턱을 서서히 젖혀올렸다. 예상은 했다지만 자그마치 황제의
딸인 황녀가, 나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있다.
세실리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처럼, 가슴 속에서 이상한 감정이 다시 한 번 꾸물꾸물 기어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유명세라는 게 참 무섭구나."
< 68 화 >
우선 리나의 사과는 받아줄 생각이다. 제국의 황녀가 고개까지 숙이며 사과했는데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될 것이다.
권력(權力)
과연 누가 이 욕심에 휘둘리지 않을까. 단언컨데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 본래 권력을 싫어하던 사람도
한 번 맛보게 되면 헤어나올 수 없는 힘이 권력이다.
그러니 여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내딛는다면, 그대로 권력에게 잡아먹히겠지. 하지만 권력은 언제나
사람을 파멸로 이끌게 되는 법이다.
'권력보다는...'
내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자 리나는 아래로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려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사이 온갖 번민을 거쳤는지 아름다웠던 미모가 약간이나마 퇴색될 정도로 표정이 매우 어두웠다.
그렇게 약 1 분가량 정도가 흘렀을까. 나는 커피잔에 담겨있는 커피에 내 얼굴이 투영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리나님과 레오르트님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에 휴재를 결정한 거예요. 저는 제
가족을 정말로 사랑하거든요. 만약 그때 저희 누나가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아예 펜을 놓았을 수도
있었어요."
"아..."
자신은 만인이 우러러 보는 황제의 딸이며, 그만큼 행동할 수 있는 범위가 남들보다 훨씬 넓다고. 그러니
제논 일대기의 작가에게 압박을 가해도 된다고.
나는 전생의 기억이 있기에 권위와 동떨어진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지, 리나는 아니다. 리나는 옛날부터
교육을 그렇게 받았을테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크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는 것이 힘들다면, 반 정도만 내딛으면 되지 않냐고. 그것도 아니면 내딛자마자
바로 떼면 되지 않냐고.
내 성격이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누군가를 하대하는 것보다 차라리 동등한 입장으로 대하는
것이 편하다. 반대로 누군가 나를 권력으로 대놓고 찍어누르는 걸 매우 싫어한다.
조별과제 당시의 아이라와 달리 리나는 대놓고 누르지 않아서 참을만했지만 상황이 급격히 반전되었다.
허나 나는 불편한 관계가 싫다. 마리처럼 서로가 서로를 편하게 대하는 편이 나에게 훨씬 좋다.
"... ..."
"...그것 뿐이에요?"
잠깐의 침묵 이후로 리나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나에게 물었다. 정말이냐는 표정을 보아 쉬이 납득이
가질 않는 듯했다.
"...이해할 수 없어."
"흥."
< 69 화 >
그렇다면 권력을 얻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주 간단한 방법은 상대방보다 힘이 강하면 된다.
힘이 강하다면 상대방 쪽에서 아무리 덤벼도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역으로 당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강한
자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자의던 타의던 따르게 되기 마련이다.
미네르바 제국의 1 황녀, 리나도 그런 케이스다. 그녀는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권력이
막강한 편에 속했다.
"... ..."
평소였다면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겠으나 오늘은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리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최근
사흘동안 발생했던 사건들을 상기했다.
제논 일대기 10 권에서 휴재 공지가 나온 이후, 미네르바 제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전국 각지에서 해명을
요구하는 시위가 빗발쳤으며 수습을 하기 위해 윗쪽 사람들이 발빠르게 움직였다.
다른 나라들은 출판사가 미네르바 제국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국에게 책임을 돌렸으며, 평소 문화를
침탈하는 악명이 자자한 제국이었기에 비난은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어떻게든 진정시키기 위해서 리나가 나선 것이다. 정말로 아이작이 휴재를 한 이유가 자신과
레오르트 때문이라면, 사과를 해야만 사태를 무마시킬 수 있을테니까.
'이해할 수 없어.'
그때 마리도 다른 사람처럼 권력을 탐하기 위해 접근한 거라 착각했지만, 마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가
되기 위해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그녀의 기대를 배신했다.
리나는 붉은 머리가 특징적인 소년, 아이작을 떠올렸다. 붉은 사자로 명성을 떨쳤던 호크의 아들이면서
제논 일대기의 작가라는, 아주 독특한 특징을 가진 소년을.
그리고 아이작은 이상하리만큼 권력을 껄그러워하는 중이다. 지난 번에 모임에서도 자신의 곁에만 있다면
위치를 공고히 알릴 수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평범하게 모임을 즐기고 싶다며, 그 부분(정치)과는 얽히기 싫다며 단호하게 의사를
피력했다. 부담스럽기보다는 정말로 평범하게 모임을 즐기고 싶어했다.
비록 정체를 밝히지 않아도 아이작은 문화계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가졌고, 자신은 신분상으로
압도적인 권위를 가진 상태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룬다면 그야말로 무엇이던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작은 그러지 않았다. 권위를 갖고 있어도 권력만큼은 행사하기 싫었는지 자기가 계획한대로
휴재를 때려버렸다. 덕분에 리나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아이작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구나. 그에게 괜히 덤벼들었다간 오히려 자기자신이
큰일나겠구나.
작가의 말에서 휴재 공지를 알렸을 뿐인데 세계가 들썩거리 못해 광분했다. 리나는 권력이 아닌 권위로도
어떻게 하지 못할 대사건에 처음으로 당황했고, 그 다음으로 아이작이 꺼낸 본심에 두 번째로 당황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하고 싶었다. 어째서 아이작이 권력을 껄그러워하는지. 그리고 자신과 말을
놓는다는 제안을 한 것인지.
스스로 뽐내지 않았음에도 전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사람. 리나는 아이작이라는 사람이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접근한 거지만 오늘로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아이작의 능력과 배경이
아니라 사람 자체에 대해 알아보자고.
'할 수 있어.'
어쩌면 마리와 사이가 가까워져서 그때 일을 용서받을지도 모르지. 리나는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를
떠올리자 우울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곧바로 다짐했다.
'우선은...'
아이작은 황궁에서 대변인을 내세우면 여러모로 문제가 많을테니 자기가 직접 출판사에 편지를 부치겠다고
말했다. 중립을 원하는 아이작이었기에 시간은 걸리겠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잘 끝나겠지?'
*****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던 시위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날이 가면 갈수록 과격해졌다.
출판사 앞에 몰려든 인파가 더 늘어난 건 물론이고, 하루하루 찾아오는 귀족들이 어떻게 해달라며
애원하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 ..."
출판사 사장은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두 눈에는 초점이 사라져
있었으며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이 일품이다.
시위대는 지치지도 않는지 보름동안 고래고래 소리까지 지르고 있다. 사장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만 이제는 그럴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개개인이 권력과 대항하기는 힘들지만 하나로 뭉쳐서 결집한다면 아무리 제국이라도 두손두발 들 수밖에
없었다. 사장은 제논 일대기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제이로스 혁명 같은 사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것도 조만간일 것이다. 이때문에 곳곳에서 군대를
주둔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혁명이 발생한다면... 출판사는 끝장이다. 당장 바깥에 있는 시위대가 우르르 몰려들텐데
용병을 고용한다고한들 의미가 없다.
"아으으... 진짜..."
사장은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했다. 편지를 보낸지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벌컥!
사장이 손을 뻗으며 재촉하자 매튜는 지체없이 그에게 전달했다. 뒤이어 사장은 편지 봉투를 대충
확인하고 서둘러 내용물부터 꺼냈다.
그리고 편지에 써져있는 내용을 확인했다. 필체를 보아하니 진짜로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맞다.
"좋았어!"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 과연 시민들이 이 편지를 믿어줄까? 상황이 상황인만큼 거짓말이라 치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필체를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초고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 70 화 >
그 편지가 정말로 아이작이 쓴 게 맞냐고, 화산이 폭발할 것 같으니까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하기 위해
거짓 편지를 쓴 게 아니냐고 외쳤다.
물론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시위대 입장에서는 편지도 그렇고 출판사가 초고라 발표했던 원고지가
진짜라는 걸 쉽게 믿지 못 할 수밖에 없다.
뒤이어 대변인은 수집가에게서 원본을 재빨리 가로챈 뒤, 자신에게 집중된 군중들을 향해 외쳤다.
출판사에서 목소리가 큰 사람을 따로 뽑았던거라 쩌렁쩌렁 울리는 듯한 크기였다.
"이제 증명은 충분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여기 이 원본과 편지의 필체는 완벽히 일치하는 바! 그러니 이
편지에 담긴 내용은 제논 작가님이 여러분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이런데도 시위를 하고 싶으십니까!
만에 하나, 이 시위가 더욱 격해져서 몸을 숨기고 계시는 작가님에게 피해가 가신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가 더이상 뭐라 할 말이 있겠어?"
"작가님이 그러시다면 가야겠지."
"돌아가자. 2 년은 길지만 어쩔 수 없겠어? 작가님이 쉬고 싶으시다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에잉... 2 년동안 일만 해야겠네."
그리하여 길고 길었던 시위대는 점차 해산되었다. 해산되는 와중에도 아쉬운 눈길로 출판사를 바라보는
이들이 간혹 있긴 했지만 그들도 머지 않아 발걸음을 돌렸다.
자그마치 국보로 지정해야할 정도로 가치가 높은 물건이 눈 앞에 있는데 욕심이 들기 마련. 직원도 무언가
이상해진 분위기에 소름이 돋아 서둘러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복도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하는 사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장은 포고를 한 직원이 초고를 들고 돌아오자 서둘러 다급히 그에게 물었다.
직원은 겉으로 웃음을 띄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은근 기대하고 있었다. 평소 출판사 사장은 실적이 좋을 때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지급하는 편이었으니.
사장이 너털웃음을 흘리자 직원도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보통 직장 생활은 상사 때문에 꼬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문제는 그래봤자 상사라는 거지만. 그래도 직원은 두둑한 포상금과 더불어 퇴근할 생각에 싱글벙글했다.
직원은 사장의 재촉에 아무런 의심없이 그에게 초고를 전달했다. 사장은 제논 일대기의 초고가 맞는지
여러번 확인하고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폭풍이 잦아들 기미가 보인다. 사장 입장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귀족들을
상대할 일이 더이상 없을 거라는 의미다.
"오셨습니까."
사장실로 돌아가니 사장이 신뢰하는 비서, 매튜가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와서 대기하라고 일러뒀기에
여기 있는 것이다.
"후우..."
"일은 원만하게 끝났습니까?"
"그래. 이제 더이상 저 시위대 놈들이 소리지르는 일도, 귀족년놈들이 찾아올 일도 없을거야."
"다행입니다."
"다행이고 말고. 하마터면 우리 소중한 회사가 불탈 뻔했는데."
직장인의 꿈 중 하나가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불타는 일이다. 하물며 매튜는 사장의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라 더더욱 그런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 그의 속마음도 모르는지 사장은 진중한 얼굴로 초고를 들여다봤다. 오늘부로 이 초고가 진품이라는
소식이 각지에 퍼져나갈테니 서둘러 처리하는 게 급선무다.
그러나 전에도 말했다시피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작가는
일종의 증거품으로 초고를 제시한거지 소유권을 완전히 넘기지 않았다.
다시 말해 초고를 마음대로 하는 순간 인생이 끝난다. 사장은 초고를 소중히 쓸어담다가 고개를 들었다.
사장실에 있는 금고의 비밀번호는 사장만 알고 있다. 어차피 오늘 당직을 서는 매튜는 사장실에 위치한
금고만 지킬 예정이다.
"누누이 당부하지만 금고는 반드시 지켜야하네. 이게 사라지면 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 출판사 모가지가
날라간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알고 있습니다. 근데 어째서 회사 금고에 넣는 겁니까? 사장님이 직접 관리하지 않고."
"우리 집에는 마땅히 넣을 곳이 없어서 그렇다네. 무엇보다 회사 금고만큼 안전한 것도 없지. 저걸 봐."
본래는 사장이 직접 관리하는 장부를 관리하는 곳이다. 겸사겸사 탈세와 뇌물을 통해 얻은 현금을
보관하는 곳이기도하고.
그러니 보안성 하나만큼은 믿을 수 있다. 비밀번호도 비밀번호지만 저런 걸 통째로 뜯어낼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사장은 상황은 일단락된 듯하자 의자에 등을 기대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최근 며칠동안 한숨도 자지 못
하고 회사에서만 생활했더니 진이 다 빠져버렸다.
오늘만큼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이제 끝이구나...'
"사장님! 큰일났습니다!"
"뭐? 갑자기 또 왜? 귀족이라도 찾아왔나?"
"아닙니다! 오늘 출근하니 매튜와 엘리스가 쓰러져 있고 무엇보다...!"
-금고를 도난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상황을 완전히 받아들인 뒤에는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허겁지겁 사장실로 달려갔다.
사장실로 다급히 뛰어가는 도중에 당직을 서던 매튜와 한 직원이 실려나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상황이 급박하다보니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사장은
자신의 사무실로 달려가는 중에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거쳤다.
하물며 비싼값을 치루고 마법 처리까지 한 금고여서 파괴하는 것조차 어렵다. 설사 파괴를 했더라도
소음이 커서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다.
그러할진데...
"...허."
털썩-
'...난 끝났다.'
< 71 화 >
심각성을 감지한 높으신 분들, 그것도 황궁에서 파견나온 조사단이 직접 금고를 조사하기 시작했으니까.
사람들은 괜히 불똥이 튈까봐 의심을 품으면서도 각자 할 일을 하러 돌아갔다.
자그마치 국보로 지정될만큼 가치가 어마어마한 초고이니 암시장에 팔리거나 어두운 루트를 통해 경매로
흘러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황궁도 이 점을 알고 있기에 샅샅이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로 조사에 더욱 박차를 가했지만 안타깝게도 증거를 거의 남기지 않아서 실마리조차 잡기
어려웠다.
이뿐만이 아니라 엘프의 나라, 알븐하임과 수인의 나라, 애니머스에서 반발했다. 그것도 개인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말이다.
이러다가 아이작이 정말로 절필을 선언해버리기라도 한다면 어떡할까 싶어서. 사람들은 아이작이 공식적인
입장을 취하기 전까지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현 사태에 분노하고 있을까, 슬퍼하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무던하게 넘기고 있을까?
******
"...짜증나."
짜증이 머리 끝까지 오르기 직전이라는 것을. 평소 무뚝뚝하다는 평가를 받는만큼 나는 감정을 밖으로 잘
표출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짓씹듯이 내 심정을 입 밖으로 꺼낸다는 건 그만큼 내가 화가 났다는 의미다. 솔직히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도 나와 비슷한 처지에 속해있으면 그 누구라도 화가 날 것이다.
초고의 가치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높으니 어딘가에 팔아먹을 생각인 걸까.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적다.
조사된 것만 따져도 초고를 훔쳐간 범인은 일개 도둑 수준이 아니다. 어쩌면 높으신 분들도 건드리기 힘든
세력에서 꾸민 일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왜?'
범인은 무슨 목적으로 초고를 가져간 것일까. 들킨다면 국가 차원에서 비난 성명을 날리는 건 물론이고
여러모로 후유증이 심각할텐데.
"...마리."
"응. 아이작."
"잠깐 이리로 와."
포옥-
포옹은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해 가장 확실하면서도 간단한 방법이라고 하던가. 그녀와 포옹을 하자마자
꿀꿀했던 마음이 모두 씻겨져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나 마리와 포옹을 하게 되면 힐링이 된다. 나는 그녀를 껴안자마자 아이처럼 얼굴을 마구 비볐다.
이대로 쭉 있었으면 좋겠지만 주변에 보는 시선이 많으니 아쉬움을 뒤로 하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좀 괜찮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황궁에서 직접 발벗고 조사하고 있으니까 머지않아 범인을 밝혀낼 수 있을거야.
나도 도와주고 싶은데 황궁에서 직접 나선 이상 도와주기는 힘들거야."
"그냥 내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돼."
"우와... 빨리 안아줘."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마리가 팔을 활짝 벌리며 안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녀의 부탁을 흔쾌히 승낙하며
그녀와 다시 한 번 포옹했다.
'어련히 잘 하겠지.'
아니. 잘해야지.
황궁에서도 무능함을 입증하기 싫다면 반드시 범인을 찾아야할 것이다. 거기다 리나의 입장에서는
파탄나기 직전이었던 나와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불철주야 고생해야할테고.
*****
그리고 이러한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홀로 조용히 앉아있는 사람이 있었다. 로브를 뒤집어 써서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호리호리한 체형과 더불어 약간 드러난 얼굴은 선이 매우 고왔다.
이로서 여자라는 것을 얼추 예상할 수 있었으며 피부 또한 독특하게도 구릿빛이었다. 다른 사람과 달리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는 그녀는 맥주로 목을 축이면서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비록 마지막에는 마나로 작업하기 힘들어서 무식하게 문짝을 뜯어냈지만. 그래도 결과가 좋으니 괜찮지
않은가.
'여왕님이 좋아하시겠지?'
< 72 화 >
아름답다는 표현조차 부족한 외모부터 시작해서 태생적으로 뛰어난 신체. 그리고 신의 축복을 받아 숨
쉬듯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 능력까지.
그러나 제아무리 완벽에 가까운 엘프라할지어도 여러 방면에서 큰 오점을 안고 있다. 전통과 역사를
중요시한다는 건, 바꿔 말해 변화를 싫어한다는 의미다.
여태까지 이렇게 살아왔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 다른 종족도 아니고 엘프이다보니 자연스레
고착화된 사고 방식일 수밖에 없다.
드워프는 엘프를 말 많은 꼰대로 취급하는 중이며 엘프도 드워프를 시끄러운 종족이라 생각하고 있지,
적어도 '동급'이라 여기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다. 다른 종족도 인간을 특출난 장점이 없는 종족이라 보고 있다. 그런데 엘프는 유독
깔보는 경향이 강하다.
수인이 인간을 증오한다면 엘프는 인간을 원숭이 취급하고 있달까. 완벽에 가까운 엘프로서는 잘난 게
거의 없는 인간을 동급으로 여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하고 있다.
그러나 세간의 평가대로 오만함이 스스로를 옥죌 것이라고, '종족전쟁'이 터지고나서 엘프는 본인들이
틀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실제로 엘프가 저지른 실책은 하나 하나 피해가 막심했다. 굳이 전력으로 상대할 필요가 없다며
방심하다가 전략적 요충지를 보기 좋게 점령당한 건 기본이다.
심지어 전쟁동안 혁혁한 전공을 쌓던 전사를 단지 '법률'에 위반되는 행위를 저질렀다며 감옥에
투옥시키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당연하게도 인간은 그 전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맹공을 펼쳤다.
덕분에 인간은 종전 당시에도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지만 엘프는 완전히 반대였다. 본인들이 평소
무시하던 인간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큰 혼란을 주기에 충분했다.
천만다행히도 그들 스스로도 잘못됨을 인지했다. 그리고 잘못을 인지했다면 바뀌는 건 당연히 행해져야
하는 일.
다만 왕이 원로원처럼 위기의 순간에 삽질하지 않도록 많은 제한을 두었으며, 법률을 고쳤을 뿐이지 법률
위에 왕이 군림하지 못 하도록 지정했다.
이로인해 분열이 극심해져서 하마터면 큰 사태로 번질 뻔했지만 다행히 잘 무마시킬 수 있었다. 이후로
왕을 만들되 원로원은 그대로 유지시키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그러므로 현재 알븐하임은 세대 차이의 끝판왕에 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명이 짧아 세대 교차가 자주 일어나는 인간과 비교했을 때 확실한 차이다.
다행히 원로원도 본인의 실책을 깨달아 현재까지는 잡음만 발생했을 뿐, 큰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다.
종족전쟁 이후 알븐하임이 다른 국가와 활발할 교류를 하기 시작했을 때도 그들은 못마땅할지언정
거절하지는 않았다.
******
위그드라실.
아무튼 세계수는 최초의 문명이 시작될 수 있던 원동력이었으며 신화에 따르자면 신들이 엘프를 직접
교육했다고 알려져 있다. 엘프도 그 신화에 따라 위그드라실 안에 고등교육 기관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이밖에도 세계수는 사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신화에 기록된 걸 보자면 당연하디 당연하 현상이다.
그렇다면 정치 기관은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 감히 신들이 직접 기른 세계수 안에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세계수 바로 앞에 위치해있다.
어느 한 엘프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누군가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 노화가 다른 종족보다 더딘
엘프이나 자글자글한 주름과 더불어 늙수레한 목소리로 보건데 상당히 고령의 엘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장으로 추정되는 노년의 엘프가 다시 한 번 거세게 항의했다. 그에게 동조라도 하는 것처럼 양옆에
기립해있던 엘프 남녀가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악마의 부하, 그것도 최고간부를 우리 엘프로 지정한 것도 모자라 '교만'이라는
모욕까지 선사했습니다."
"아무리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지만 이 책이 전세계에 퍼지고 있는만큼 우리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여왕님까지 건드리셨지 않습니까? 인간과 여왕님의 사랑이라니, 저는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들도 재미있다며 즐겁게 읽고 있었다. 그러나 '칠죄종'의 등장 이후부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더니 이번에 나온 신권에서 말이 많아졌다.
엄밀히 따지자면 원로원을 포함한 기성 세대에서 격한 반응을 나타냈고, 이밖에는 그닥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역사를 철저하게 배운 신세대는 다양한 관점으로 흥미롭게 지켜봤다.
"후우..."
아르웬이 깊은 한숨을 내쉬자 강하게 항의하던 원로원도 입을 꾹 다물었다. 몇 백년간 아르웬을 지켜보던
그들로서는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느냐? 그대들의 오만함으로 종족전쟁에서 치욕을 겪었지 않았더냐?
이런데도 역사를 부정하려 들다니 참으로 재미있는 짓이로구나."
그녀가 묵직한 팩트를 날리자 원로원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족전쟁은 치욕보다
더한 수준이다.
하지만 원로원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여기서 화를 냈다간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차분함을 유지하며 조곤조곤 본인의 의사를 피력했다. 말은 저렇게 하고 있으나 본질은 이거
하나다.
"... ..."
그들이 저자를 찾는다면 어떻게 될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다. 엘프에 대해 좋지 못한 묘사가 나오지
않도록 협박하거나 그 이상의 부정을 저지를 터.
보통 같으면 화병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견제지만, 아르웬은 아니다. 그녀가 100 년 넘게 여왕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가 하나 있다.
이처럼 상대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알븐하임의 왕들이 원로원의
견제에 버티지 못 했으나 아르웬은 이야기가 달랐다.
도통 물러갈 생각이 없는 원로원. 아르웬은 그들의 호소를 듣고 눈쌀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아르웬은 꼰대의 정석을 보여주는 원로원의 행태에 다시 한 번 한숨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막았다.
지금처럼 소모전을 하는 건 자신에게 좋지 않았다.
여왕의 노호성이 터지자 원로원도 결국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밀어붙였다간 역효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
길고 길었던 싸움이 끝나고, 원로원은 알현실 밖으로 움직였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까지 아르웬에게
매서운 눈빛을 쏘아보내는 건 잊지 않았다.
"후우..."
아르웬은 원로원이 모두 나가자 참았던 한숨을 토해냈다. 이어서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마법으로
확인한 후, 작게 투덜거렸다.
"좆 같은 꼰대 새끼들."
여왕의 입에서 나올만한 단어는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양아치에게나 어울릴 법한, 실로 걸쭉한 욕설이다.
따악!
이어서 아르웬은 허공에 생성된 책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붙잡았다. 표지에는 '제논 일대기'라는 제목이
떡하니 박혀있다.
"재미있기만 한데."
< 73 화 >
"재미있기만 한데."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은 두 손으로 소중히 붙잡은 제논 일대기 10 권을 바라봤다. 철부지 소녀처럼
입술이 댓발 튀어나와 속에 담겨있던 불만을 여실히 표현하는 중이다.
만약 원로원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여왕으로서 품위를 지켜야한다니, 시덥잖은 견제를 했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도청의 위험도 알현실이기에 전혀 없다.
"엘프는 고귀해야한다며 쫑알쫑알. 책에서 엘프가 교만을 담당하는 건 싫다며 궁시렁궁시렁. 엘프 인간의
로맨스는 말도 안 된다며 칭얼칭얼. 애새끼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인지."
아르웬은 주위에 보는 사람도 없겠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압박했던 원로원을 신랄하게 까내렸다.
대외적으로는 자애롭고 다정한 여왕이라 칭송받는 아르웬이지만, 이렇듯 지극히 소녀다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었다면 그것도 많은 나이라며 태클을 걸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이다. 엘프의 기준으로
따져도 사회의 한 일원이 되기에 충분하나 그럼에도 어린 편에 속한다.
'원로원 같은 사람들 때문에 제논이 휴재에 들어간 거겠지. 인간들은 원로원보다 심한 곳이 있다던데 엄청
힘들겠다.'
제논 일대기가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
쉽다는 것 또한 인지하고 있다.
어쩌면 알븐하임의 여왕인 자신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까.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엘프조차 '
문화'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신분을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심적으로 고생 중이라 했으니 작가가 얼마나 큰
부담감을 안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제논 작가도 참 대단해. 어떻게 엘프의 신화를 세세하게 꿰뚫고 있는거지? 엘프와 관련된 신화와 역사는
인간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텐데. 알븐하임에서 교육받았던 학자인가?'
그리고 독특하게도 아르웬은 1 권부터 꾸준히 읽은 애독자다. 옛날부터 책을 좋아하던지라 세계를 강타한
제논 일대기를 자연스레 접했으며 뛰어난 문장력과 흡입력에 매료되어 그대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칠죄종이 등장하고, 주인공 일행이 알븐하임에 들어오고나서는 상황이 반전되었다. 악마측 간부
중 한 명이 엘프, 그것도 '교만'을 담당하고 있다는 건 여러가지 구설수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엘프는 타종족보다 몇 배에 달하는 수명을 가진만큼, 기록된 역사가 매우 방대하다. 인간이 최초로
기록한 역사가 5000 년 전 본인들의 문명을 세웠을 때부터인데 엘프는 그보다 약 2 배에 달하는 10000 년
전부터다.
그 만년의 세월동안 수많은 사건 사고가 존재했다. 태생적인 능력을 이용해 세상을 지배하려던 시기도
있고 동족끼리 내전을 벌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약 5000 년 전에 심각한 내전이 일어났다. 내전이 발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종교.
엘프는 루미너스, 모라, 하르트 이 3 명의 신들을 함께 모시고 있으나 그건 현재에 해당하는 이야기고
과거에는 서로 견제하고 싸우기 바빴다.
당연하게도 신들은 신탁까지 내리며 한사코 말렸으나 엘프는 듣지 않았다. 신의 목소리를 더 명확하게
듣기 위해 타종족보다 긴 귀를 가진 엘프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필요할 때 듣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빛을 섬기는 루미너스 입장에서는 모라가 눈엣가시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르트와 힘을
합쳐서 그들을 추방시켰다. 추방시키는 과정에 무력으로 진압하는 건 당연했다.
여기서 추방된 자들은 대부분 갈색 피부를 가진 '다크 엘프'이며 알븐하임에서 생활하는 다크 엘프가 거의
전무한 이유이기도하다. 대부분의 다크 엘프가 모라를 섬기고 있었는데 싹 다 쫒겨났으니 남아있을리가
없다.
'그래도 인간의 눈에는 다 똑같이 보이겠지. 다만 역사를 잘 알고 있으니 언젠가 나오려나? 나오면
어떻게 나올까? 진짜 사람 궁금하게 만드네.'
다행히 악마를 퇴치하기 위해 동족을 도와줬으나 그들은 알븐하임에 발을 디디지는 않았다. 2000 년간
쌓였던 서로 간의 불신 때문이었다.
그들도 결국 한 뿌리에서 나온 동족이며 그들이 있어야만 '엘프'라는 종족이 하나로 완성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전통과 법률을 우선시 여기는 원로원만 다크 엘프를 싫어할 뿐이지 깨어있는 자들은
그들에게 미안함을 갖고 있다.
샤아아아-
"응?"
이에 아르웬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누가 침입했는지 서둘러 확인했다. 원로원이 미쳤다고 알현실에 마법을
사용하지는 않을테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윽고 마법을 푼 상대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는데 로브를 뒤집어 써서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허나 아르웬은 이 신원미상의 침입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레인."
"안녕하세요. 여왕님!"
스윽-
신원미상의 여인은 인사를 하고나서 로브를 뒤로 젖혔다. 은은한 붉은기가 도는 밀색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구릿빛 피부의 소유자였다.
레인은 방긋방굿 웃으면서 아르웬에게 물었다. 아르웬은 원로원을 대놓고 까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헛기침을 했다.
원로원을 욕하는 건 상관없지만 여왕의 품위를 지키지 않았다는 부분이 아르웬에게 더욱 신경쓰였다.
아무리 사적으로 친하다지만 지켜야할 건 지키고 싶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레인을 보낸 것이나 아르웬은 레인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 천진난만한 소녀 같은
레인을 싫어할 이유도 없거니와 제논 일대기의 신권이 나올 때마다 항상 가져와주기 때문이다.
심부름꾼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레인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거라 아무런 문제도 없다. 오히려
아르웬이 그녀를 더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레인이 제논 일대기와 관계있는 선물이라 말하자 아르웬의 은회색 눈동자에 의문으로 채워졌다. 제논
일대기 10 권은 이미 레인이 선물해줬다.
"짜잔!"
겉보기에는 낡아빠진 종이뭉텅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의문이 더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요!"
"고맙구나."
그녀는 설마하면서 발빠르게 원고지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문장들 하나 하나가 아르웬의 뇌를
강타했다.
"...어라?"
순간적으로 아르웬이 사고가 정지되었을 쯤이다. 그런 그녀의 속마음도 모르는지 선물을 전달한 레인은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뿌듯하게 설명했다.
좆됐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그녀는 다시 한 번 더 생각했지만.
"이걸로 제논 일대기 작가와 만나시면 될 거 같아요. 초고를 빌미로 작가에게 말한다면 그 사람도 분명히
찾아올 수밖에 없겠죠."
"... ..."
"저 잘했죠? 헤헤."
< 74 화 >
이처럼 엘프는 태생적으로 폭넓은 지식을 얻기에 유리하나 인간의 습득력에 비해서는 다소 빛바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대신 그들은 적어도 인간처럼 지식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없어서 유리한 건 똑같다.
엘프치고는 지극히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100 년간 알븐하임을 다스린 엘프 여왕, 아르웬은 레인이 해맑게
웃어도 입도 벙긋하지 못 했다. 도통 이게 무슨 일인지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최근에는 제논 일대기 때문에 원로원이 지랄을 했으나 이제는 쉬이 넘겨버릴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풋내기 여왕으로 시작했던 시절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 수준.
'...좆됐다.'
'아이고. 얘야...'
"하아..."
결국 아르웬은 참아왔던 한숨을 밖으로 꺼낼 수밖에 없었다. 악의라고는 하나도 없는 저 얼굴을 보자니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다.
"...여왕님?"
그들은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보다 더한 걸로 복수하며, 반대로 은혜를 입었다면 어떻게든
배로 갚기 위해 노력한다.
'...미쳐버리겠네.'
무엇보다 지금 출판사는 미네르바 제국의 황실에서 조사단을 파견한 상황이다. 제아무리 레인의 은신술이
뛰어나도 만에 하나, 들키는 순간 정치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모두 끝장이다.
알븐하임을 다스리는 아르웬으로서는 최악만큼은 무조건 피해야하기에 차라리 차악을 택하는 편이 낫다.
그러니 초고는 당분간 놔두는 게 이롭다.
신에게 선택받은 종족인 우리가 어째서 고개를 숙여야 하냐고. 종족 전쟁 당시에는 삽질을 했으나 지금은
다를 거라고 말이다.
[인간은 자기보다 아래인데 굳이 동급으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잘못을 저질러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저 자만심부터 어떻게 고쳐야지 않을까. 아르웬은 훗날 레인을 제대로 교육시키겠다 다짐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네 생각대로 우리는 신의 선택을 받았지. 하지만 그렇다고 잘못은 변하지 않는단다. 용서받지
못할 짓은 용서할 수 없어."
"그래도 저는..."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니? 마음 같아서는 호통 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거야. 지금은 머리가 아프니
잠깐 물러가 주겠니?"
레인은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다크 엘프 특유의 인삿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주변 환경과 하나로 동화되는
완벽한 은신술이다.
아르웬은 레인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자 곧바로 탐지 마법을 펼쳤다. 레인의 기척은 물론이고
알현실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후우..."
딱!
"끼아아아아아!!"
한동안 히스테리를 부리던 그녀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겨우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속에 있던 울분을
모두 토해내니 그나마 나아졌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적립된 상황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최악의 위기를 맞이해버리니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여왕의 권위고 나발이고 머리부터 박을 생각이다. 레인을 막지 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거니와 작가의
비위를 어떻게든 맞춰야 알븐하임이 박살나지 않는다.
빈말이 아니라 제논 일대기의 영향력을 고려하자면 이 초고는 대량살상마법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자그마치 국보로 지정해야할 물건인데 선전포고를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이때까지 원로원의 문제도 있고 다양한 이유 때문에 작가를 찾진 않았지만 오늘 상황이 달라졌다. 작가를
찾아서 어떻게든 사과하고 초고를 넘겨야만 자신과 알븐하임이 후폭풍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
"으으으으..."
순간적으로 원로원에게 뒤집어 씌울까?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원로원이 반격을 가하게 되면 자신은
끝장난다. 그들은 영악한 뱀들이니 역으로 이용할 능력은 충분하다.
'일단 다크 엘프 장로부터 만나야 해. 위험성이 따르더라도 작가를 찾을 수밖에 없어.'
확실한 증거도 없을 뿐더러 알븐하임은 최강대국 중 하나다. 본래 외교에서는 말보다 국력이 앞서는
법이니 미네르바 제국조차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어딜 가나 원로원이 문제다. 아르웬은 헛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이마의 은빛 서클렛을
매만졌다. 중앙에 푸른색 보석이 영롱하게 박혀있었으며 왕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 75 화 >
하지만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벌어지자 화가 나기보다는 황당했다. 솔직히 초고가 최초로 공개된지
하루만에 도난 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고, 또 금고 입구를 통째로 뜯어버릴 줄은 전혀 예상치 못 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리나가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사과했다. 나는 미리 주문했던 커피를 마시며 그녀의
얼굴을 살펴봤다.
더이상 리나를 닥달해봤자 범인이 자수하는 것도 아니고 초고 문제는 넘기는 편이 정신 건강이 이롭다.
초고를 도난당했을 때는 화가 났으나 시간이 지나니 차차 진정된 것도 있다.
"아니.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제논 일대기가 그 출판사와 계약된 상태라서 힘들어. 대신 벌금을
좀 많이 물고 말 거야."
"벌금이라면 얼마 정도?"
"보통 탈세는 금액에 따라 200%에서 300%를 징수해가니까... 많이 나오긴 할 거야. 최소 단위가 100 만
골드일걸?"
"우와."
100 만 골드면 한화로 최소 100 억은 넘는 수치인데. 제논 일대기로 벌어들인 수익이 많은지라 탈세금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만약 내가 휴재를 하지 않았더라면 피눈물을 흘리며 벌금을 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휴재를 한 상태다.
벌금을 내는 순간 출판사가 부도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리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출판사의 미래에 관해 입을 열었다.
연재는 약 2 년 뒤부터 할 생각이지만 그동안 원고지 말고도 집필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알아봐야 할
듯했다.
물론 아버지가 선물해주신 마법필은 꾸준히 사용할 거다. 아버지가 거금을 이용해 나에게 선물해주신 거니
초고 다음으로 나에게 정말 소중한 보물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리나를 힐끔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리나."
"...으, 응?"
"...아냐. 아직 제논 일대기가 제국에 종속되지 않았으니 의미가 없겠지. 미안해. 요즘 정신이 없어서
흥분했나 봐."
"음... 만약 내가 제국에 종속된다면 어떻게 돼?"
"뭐?"
그에 나는 미약한 웃음을 흘렸다가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하지만 아직은 제국에 종속될 마음은 없다. 그냥
일종의 떠보기다.
하물며 리나가 부탁하는 순간 황제마저도 의심할 가능성이 높다. 괜스레 황궁으로 불려가기는 싫다.
"... ..."
< 76 화 >
"누나는 집에 안 올 거야?"
"아마 방학 중간에 돌아와서 일주일 정도 머물 생각이야. 아버지와 대련해야하거든."
"왜 일주일이야? 그냥 계속 있지. 나 심심한데."
"얘도 참. 정 그러면 너도 여자친구네 집에서 계속 지내지 그러니? 그리고 아카데미에 할 일이 많아서
그래. 나는 곧 있으면 졸업인데다가 근무지도 알아봐야 하거든."
본격적인 방학을 보내기 전 니콜과의 이야기를 모두 끝냈다. 그녀와 만나기 전에는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각자 방학 동안 할 일이 많아 보였다.
우선 리나는 초고 도난 사건의 범인을 끝까지 추격할 계획이라 말했고, 세실리는 따로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상냥하게 웃으며 비밀이라고 알려줄 뿐.
비밀이라고 하니 더이상 캐묻지 않았으나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 심상치 않았다. 틈틈이 기회를 노린다고
설명해야 할까. 순전히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으나 나와 깊은 연관이 있을 듯했다.
'뭐,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그리고 그녀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특유의 시니컬한 목소리로 대답해줬다.
나는 레오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종족이 다르니 이정도 말 실수는 용납해줄
수 있다. 레오나 본인도 미안해하는 중이고.
그리고...
"아이작!"
그에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하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는 마리가 시야에
잡혔다. 사복이 아니라 여전히 교복을 입고 있었다.
"우웅... 왜 이리 늦었어?"
서로의 따스함을 느끼는 도중에 마리가 고개를 들어올리며 나에게 물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나는 그녀의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만져주면서 입을 열었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나에게 있어서 마리의 존재는 점점 커져갔다. 주위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거나 수근거려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이제 슬슬 갈까?"
"응! 응!"
*****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는 방학이 시작된지 1 시간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헬리움으로 복귀했다.
세실리는 마법에 한해서 엘프와 함께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마족일 뿐더러, 차기 마왕으로 예약돼 있는만큼
뛰어난 마법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니 공간의 제약을 모두 무시하는 텔레포트를 사용하는 것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왕성의 좌표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니 누구보다 빨리 왕성에 도착할 수 있던 것이다.
데스칼도 그런 세실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갑작스러운 복귀에도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곧 있으면
돌아올거라며 세실리가 편지를 보냈으니 미리 예상은 하고 있었다.
데스칼은 안심한 것도 잠시, 곧바로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세실리를 추궁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다.
그에 세실리는 깔깔 웃더니 손을 흔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역시 시간이 지나도 자신의 아빠는 한결 같았다.
더구나 잭슨을 제외하면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아름다운 꽃이라 해도 가시가 있다면
꺾는 걸 주저하기 마련이니.
세실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년을 떠올렸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소년만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으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편지를 주고 받는 것도 그 공략의 일환이다. 진심을 보여주는 것만큼 상대방의 마음을 열기에 효과적인
방법도 없다.
설사 시간이 오래 걸려도 세실리에게는 상관 없었다. 자신은 장수종 중 하나인 마족이며 어릴 때부터 '
절제'를 길렀기에 인내심이 매우 강하다.
세실리는 그 순간이 언젠가 오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머릿속에는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의 모습이
여전히 재생되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의 우려처럼 데스칼은 눈치를 못챈 모양이다. 데스칼은 세실리의 질문을 듣고 턱을 매만지다가
조용히 대답을 꺼냈다.
데스칼은 제국이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서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는 부분을 단서로 잡았다. 세실리는
그의 말을 듣고 납득이 되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족과 다크 엘프는 여태까지 큰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로서 접점이 생기게 되었다.
초고 도난 사건은 인간뿐만 아니라 마족의 분노를 키우기 충분했다. 제논 일대기는 마족의 염원을 이루게
해준 보물 중의 보물, 다시 말해 '성유물'이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
마족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초고를 찾아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띌 수밖에 없다.
실제로 헬리움의 결사단체 '리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
"...?"
< 77 화 >
하지만 두 가지 모두 나라가 흔들리는 건 변함이 없다. 후자의 경우는 당연히 암중모략을 펼쳤다는 의미고
전자는 어린 후계자를 바지사장 삼아 폭정을 저지르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탓에 많은 매체에서 공작의 지위를 지닌 사람들은 대부분 왕의 숙적으로 표현되는 편이다. 허나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상식이 똑바로 박혀있는 국왕이라면 공작에게 많은 사병과 거대한 부를 축적하게
가만히 놔둘 리가 있나?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주변에서 가해지는 압박이 심해지고, 더이상 존속이 위태로워질 듯하자
레킬리스 가문은 황제에게 모든 영토와 군사력을 반납했다.
당시에는 모두가 경악할만한 판단이었으나 시간이 흐르고 그 선택은 옳았다. 공작을 견제하던 세력들은 붕
떠버렸고 이내 분열되었으며 자연스레 없던 일이 되었다.
사실상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그야말로 윈윈 전략이었다. 황제는 왕권을 강화할 수 있으니
이득이었고 레킬리스 가문은 힘이 없을지언정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레킬리스 가문이 반납한 영토는 현재 둘로 나뉘어 백작급 귀족 둘이서 통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후작급 인사는 보통 야전 사령관을 맡고 있으니 대부분 국경지대에 포진돼 있다. 이런 기묘한 구조로 인해
실세라 할만한 귀족은 대부분 백작들이다.
게다가 레킬리스 공작가는 제국민들에게 평판이 압도적으로 좋다. 만약 레킬리스 가문이 견제를 받아
위험해진다면 제국민이 먼저 발벗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특히 레킬리스 가문은 인성을 더욱 중요시 여기는 편인데 전에도 말했지만 망나니가 나오면 가차없이
추방시켜버린다.
덕분에 미네르바 제국은 500 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 번의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원한 라이벌이자
문화강국인 테르스 왕국에서는 반란을 넘어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물론 미네르바 제국의 귀족이 순한맛이라면 혁명 전의 테르스 왕국의 귀족은 매운맛을 넘어선 수준인 것도
감안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테르스 왕국은 반란이 아니라 '혁명'이 발발했다.
"아참. 아이작."
"응?"
"혹시 우리 저택에서 하룻밤 머물고 갈 생각은 없어?"
마리가 진심으로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만 곧바로 포기하는 반응을 보아 내가 거절할 걸 알면서도
권유한 것 같다.
'그나저나 약혼이라...'
독심술 같은 건가. 전생에서도 유독 사람의 심리를 잘 읽는 사람이 있는데 마리도 부류인 듯했다.
끼익-
이윽고 마리가 하차하자 손을 떼려고 힘을 풀었을 때였다. 마리는 내가 손을 떼려고 하자 어림도 없다는
듯이 확- 잡아챘다.
귀여운 그녀의 장난에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나는 못 말린다는 듯이 웃음을 흘리고는 목적지인 저택을
바라봤다.
"우와..."
"어때? 정말 대단하지? 우리 가문이 영토는 없지만 저택만큼은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있어. 드워프
장인에게 설계를 맡겼지."
옆에서 마리가 우쭐거리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나는 대문 너머에 위치한 저택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궁금한
점이 떠올라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서 몇 명이 사는거야?"
"한 100 명 정도 살고 있을 걸? 정원사만 해도 5 명이야."
그사이 마부가 예의바르게 인사하며 떠나가자 마리는 활기찬 목소리로 배웅해줬다. 나 또한 떠나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뒤이어 마차가 점점 멀어졌을 때 쯤, 마리가 나에게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얼굴에 상큼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제 들어갈까?"
"응."
나도 이에 질새라 손에 힘을 강하게 주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우리가 연인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응?"
제복이 아니라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검이 걸려 있다. 겉으로 보이는 무장 상태만
보아도 단순한 경비병 수준이 아니다.
전에 말했듯이 레킬리스 가문은 황실에게 모든 영지와 사병을 반납했다. 그런데 지금 대문 앞에는 단단히
무장을 한 병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대기하는 중이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소리치려는 찰나였다. 병사는 마리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의문을 드러냈다.
"시... 응? 마리 공녀님?"
"앗. 릭스 아저씨. 오랜만이네요."
마리와 정답게 대화하던 병사의 시선을 나에게로 옮겼다. 이에 내가 당황하며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와락!
"제 남자친구에요!"
릭스가 같이 근무를 서던 병사에게 명령을 하자 그 병사는 대문 중앙으로 걸어갔다. 이어서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눌렀다.
끼이이익-
마침내 대문이 완전히 개방되고, 릭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우리를 진심으로 환영해줬다.
"청춘이구나."
"... ..."
끼이이익-
저벅- 저벅-
"... ..."
꾸욱-
하지만 이내 마리가 팔짱을 더 강하게 끼면서 다시 그녀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아까는 인식하지 못 했지만
팔짱을 끼게 되니 말랑말랑한 가슴의 감촉이 교복 너머로 전달되었다.
아무튼 간에 이런 상황은 나에게 너무 자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세실리도 그렇고 여자의 가슴은 남자의
마음을 들끓게 하기에 너무 효과적이었다.
스윽-
"으으응..."
"...아이작."
"응."
"아까 내가 묻다가 만 거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물어봐."
거기다 혼담이 오고 간다는 건 본질적으로 정략결혼에 가깝다. 아버지가 과거, 붉은 사자라 명성을
떨쳤다고한들 그건 기사 시절이지 정치력은 입증되지 않은 상태다.
"...그래? 다행이네."
애가 점점 매워지기 시작했다.
< 78 화 >
******
그래도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는지라 얼굴의 화끈거림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해도 마리의 말마따나 얼굴에 다 드러나서 큰 의미가 없었다.
"꾹. 꾹."
"하지 마."
"싫어. 더 할 거야."
남자친구가 된 입장에서 조금 부끄럽긴 해도 자신감 넘치는 그녀가 좋다. 가끔씩 나보다 더 남자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리의 인사를 받은 노인이 숙였던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나를 바라봤다. 허리를 숙였을 때는 몰랐는데
혀를 펴고나니 그의 키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판타지 세계 답다고 해야겠지. 나는 예리하게 빛나는 집사장의 눈빛에도 전혀 물러서지 않으며 대답했다.
세바스찬이 나긋나긋하지만 능청스럽게 이야기했다. 하기야 아직까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으니 눈치를
못 채면 그 사람이 이상한 거겠지.
그에 나는 쓴웃음을, 마리는 더욱 진하게 웃으며 우리의 관계를 과시하듯이 어깨에 기대었다. 세바스찬은
우리의 달달한 관계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세바스찬. 지금 안에 누가 있어요?"
"두 분 모두 안에 계십니다. 특히 주인님께서는 아가씨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일을 하루만에
처리했다고 들었습니다."
벌써부터 딸바보의 냄새가 스멀스멀 풍기는 것 같다. 솔직히 마리 같은 딸이 있다면 누구라도 딸바보가
되는 것이 정상이다.
"아빠도 참. 못 말린다니까."
"우선 두 분 모두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영식께서는 잠깐 손님방에 머물러야 할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전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성심성의껏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윽고 저택의 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정문부터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목재로 구성된 정문에는
레킬리스 가문을 상징하는 독수리가 조각돼 있었으며 당장이라도 하늘 위로 비상할 듯한 위엄을 풍겼다.
끼이익-
아무튼 화려함이 없다는 말은 취소다. '하늘'이나 마찬가지인 천장에 저런 그림을 그렸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다.
"미네르바 제국은 종족전쟁 당시 평범한 왕국에 지나지 않았죠. 하지만 초대 황제의 뛰어난 능력과
레킬리스의 정치력을 바탕으로 제국으로 다시 건국되었습니다. 종족전쟁 이후 있는 냉전 시기를 무사히
거쳐왔고 지금에 이를 수 있었죠."
종족전쟁 당시에 마족은 두 부류로 나뉘어서 각 연합에 참전했다. 인간을 증오하는 마족과, 그렇지 않은
자들.
하지만 지금 천장의 그림에는 마족의 모습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족은 시대 특정상 차별 때문에 큰
공로를 세우진 못 해도 나름 역할이 큰 편이었다.
이윽고 손님방으로 따라가는 중, 길게 이어진 복도의 벽에 설치된 초상화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초상화 밑에는 이 세상에서 사용되는 연도와 더불어 간략한 설명이 덧붙여진 상태다.
가끔씩 마리처럼 머리가 흰색인 사람의 초상화도 있는 걸 보면 확실하다. 내가 초상화를 보면서 천천히
걸어가자 안내를 하던 세바스찬도 내 걸음걸이에 맞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음?"
호부견자라고, 호랑이 밑에 언제나 호랑이가 태어나는 법은 아니다. 이처럼 인품이 출중한 인재를
배출하는 레킬리스 가문이라 할지어도 악인은 존재하는 법이다.
"주변 귀족과 결탁했다면 이거 반란의 징조가 아니었나요? 레킬리스 가문은 황실의 측근일텐데..."
"다행히 황실이 눈치채기 전에 다음 대 가주께서 막으셨습니다. 당연히 헤이즐 공작은 폐위되었고 그의
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았죠. 그 사람이 바로 인디스 하우젠 레킬리스이며 현 공작님의 조부님이십니다."
"음..."
끼익-
'기다릴게.'
덜컥-
이게 바로 진정한 재벌집 내부의 풍경이라는 걸까. 중앙에는 손님 응대용 테이블이 길게 설치돼 있었으며
바깥에는 테라스도 존재했다.
뭐야. 다 읽은 거잖아.
[제논 일대기]
"... ..."
심지어 책 특유의 눅눅함과 퀴퀴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최근에 구매했거나 습기마저 철저하게 관리한
거겠지.
샤락-
"어? 이건 못 봤던 거네?"
이에 희희낙락하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간 뒤 손님용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마리가 돌아올 때까지 이
책을 보면서 진득하게 시간을 보내면 될 듯했다.
'횡재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 페이지를 넘겼다. 아래쪽에 꽂혀있던 책이라해도 열심히 관리한 흔적이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다.
뒤이어 집중력을 발휘해 책이 전달해 주는 지식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책이었던지라 더욱 재밌게
감상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종족전쟁이 발발한 근본적인 원인을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구나. 이것도 흥미롭네.'
책이란 본래 사람이 쓰는 지식의 양성소. 당연하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책에서 전달되는 지식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국민이 전쟁을 반대할 수도 있으나 나치는 자국민을 세뇌시켜 눈과 귀를 가렸다. 그때는 인터넷도
보급되지 않았으니 세뇌하기는 더욱 쉬웠을 것이리라.
"...흠."
"... ..."
"으흠!"
그러다 누군가 헛기침을 토하는 소리가 귓가에 박혀들었다. 동시에 단단했던 내 집중력이 한순간에
깨졌으며 지식의 바다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큰일났다.'
< 79 화 >
그래서 가급적 혼자만의 시간이 아닌 이상 집중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내가 손님방에서 독서에
집중하는 것도 나중에 세바스찬이 나를 부를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내 뛰어난 집중력은 장점이 아니라 단점으로 나타났다. 그것도 최악이 될 수도 있는
상황으로.
'신사'의 이미지를 표현한다면 딱 눈 앞의 남자를 내세우지 않을까. 그만큼 말끔한 외모와 더불어 양복이
매우 잘 어울렸다.
'...어?'
하지만 레킬리스 공작은 그러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응접실로 초대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행차했다.
그 덕분에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섥히던 머릿속이 말끔해졌다. 머릿속이 깔끔해지니 현재 상황을 더
정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하하하. 너무 그러지 않아도 된다네. 놀리는 게 아니라 칭찬이었으니까."
내가 공손하게 악수를 받으며 자기소개를 하자 레킬리스 공작, 드미트리는 내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원래부터 딸바보의 냄새가 풍기던 드미트리여서 이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니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런 질문하지 말랬잖아. 이미 집사장님한테 다 들었으면서."
오히려 중간중간 농을 던지면서 분위기를 풀어보려 시도하는 중이다. 마리도 그가 장난을 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어서 저리 격하게 반응하는 것일테고.
"별 이유는 없다네. 최근에 내 딸아이가 저택에 초대한 사람이 거의 없어서 그렇거든. 그것도 남자를
말일세."
"...아빠."
이제는 마리의 목소리가 스산해졌다. 옆에 있는 내가 다 흠칫거릴 정도로 은은한 분노가 실려있었다.
"전에 마리가 보내 준 편지를 본 적이 있다네. 마리가 그토록 싫어하던 역사를 가르쳐 준 장본인이
자네라더군. 내 말이 맞는가?"
"부족한 실력이지만 맞습니다."
"겸손을 유지할 필요는 없네. 오히려 마음에 드니까. 우리 레킬리스 가문은 역사를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거든. 역사는 과거와 대화하고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수단이니까 말일세."
그만큼 레킬리스 가문은 대대로 역사를 우선 순위로 두었다는 의미다. 레킬리스 가문에게 역사란
신념이면서 동시에 명예일 것이리라.
"남을 가르친다는 건 그만큼 폭넓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니 언제, 어디서, 누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건 묻지 않겠네. 이건 기초 중의 기초니까 말이야. 대신 다른 질문을 꺼내도록 하지."
"...네."
"보아하니 자네는 펜을 오래 잡은 것 같더군. 아닌가?"
여기서 물러났다간 기세에 억눌려 말도 제대로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니 절대 물러설 수 없다.
< 80 화 >
펜은 칼보다 강하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명언이며 여기에는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드미트리가 나에게 말한 '펜을 잡은 사람'도 비슷하다. 은유적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펜으로 작품을 쓰는
문학 작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신문을 작성하는 기자일 수도 있다.
사회가 몇 단계 더 진보한 지구조차 선동 하나로 끔찍한 역사가 새겨졌는데 이곳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제논 일대기는 이미 '마족'이라는 날카로운 검을 자기 수중에 넣은지
오래다.
게다가 드미트리는 레킬리스 소속이다. 과거와 대화하고 미래를 엿본다는 본인의 말처럼, 역사에
한해서는 그 누구보다 폭넓은 지식을 자랑하는 가문.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 낯부끄러운 평가이지만 신문의 평론가들이 위처럼 평가해준 거다. 난 단지 그들의
말을 빌린 것밖에 되지 않는다.
드미트리는 내 설명을 듣고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인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설명을 이어서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드미트리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종족전쟁 관련 서적을 지목하며 나에게 물었다. 그의 말마따나 세상이
급변한다는 건 그 과정이 혼돈 그 자체라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기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시간'이 늘어났으며 동시에 전세계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제국주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수많은 나라가 약탈당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역사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잘 꿰뚫는 사람이니 제논 일대기를 단순한 문화가 아니라 강력한 펜대로
취급하는 중이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펜대를 잘못 눌리게 되는 순간 끔찍한 비극이 발생할텐데 이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라 치부할텐가? 나는 너무 낙관적이라 생각하네만."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그런 전쟁이 터졌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대한민국은 강대국으로 발전했다. 곳곳에
전쟁이 흔적이 남아있긴 하나 서울의 모습을 보면 절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을 그저 과거에 있었던 일로만 생각할 겁니다. 당연하게도 받아들이는
과거로 말이죠."
"... ..."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매우 혼란스럽겠지만, 결국 기나간 역사의 흐름에 몸을 담고 있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미래의 사람들이 보면 그저 그렇구나라며 자연스럽게 넘기는 역사로."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거대한 변화 속에서 발생하는 일 모두 역사적인 관점을 보자면 전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거군. 그러니 가만히 방관하던 대항을 하던 전부 의미가 없다는 거고. 변화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건 엄연히 역사적인 관점이고 현실적으로는 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후대에게 보다 나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죠."
"흠."
어떻게든 이야기를 쥐어짜낸거라 당분이 부족해진 기분이다. 차를 마시니 달콤한 향기가 일품이었다.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져있던 드미트리가 잔잔한 미소를 띄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찻잔을 완전히
내려놓은 뒤에 대답했다.
"예뻐서요."
"야! 대답하지 마!"
대답하자 옆에서 마리가 빼액 소리쳤다. 이것만 해도 그녀에게 수치심을 주기에 충분할텐데 여기서
드미트리가 한 술 더 떴다.
< 81 화 >
덕분에 대화의 흐름이 끊길 일은 없었으며 오죽하면 마리가 지루함을 표출할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재미없는 역사 이야기만 하면서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니 그녀로서는 불평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애가 나한테 노트를 빌려달라 했어?"
"야!!"
뿐만 아니라 드미트리도 드물게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직 마리만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웃지
못 하고 있었다.
똑- 똑-
[주인님. 이제 곧 점심 시간입니다.]
"이 친구는 점심을 먹지 않고 집으로 복귀하니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어. 대신 요리사에게 테이크
아웃처럼 간단하게 먹을 걸 준비하라고 해둬. 보아하니 마차에서 먹을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내 집무실에 들려서 '리무버'를 가져다 주게나. 아마 서랍에 새 리무버가 있을걸세."
"예."
나는 어딘가 익숙한 물건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동안 드미트리는 세바스찬에게 물건을 전달받아
나에게 보여줬다.
"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자네가 마음에 들어서 선물해주는 것이니. 설마 거절하지는 않겠지?"
"...저에게 너무 비쌉니다."
"그래도 우리 레킬리스 공작에게는 푼돈이나 다름없지. 좋은 말로 할 때 받게나. 마리에게 역사 공부를
시켜줬으니 그에 맞는 대가를 치뤘다고 생각하게."
"...감사합니다."
"그렇게 좋아?"
"응."
"네가 애처럼 기뻐하는 건 또 처음 보네. 좋아하는 건 정말로 좋아하는 성격이구나."
아버지에게 마법필을 선물 받았을 때는 기쁨과 뭉클함이 섞여서 표출하지 않았을 뿐이지, 심정은 지금과
별 반 다를 게 없었다.
*****
떠나기 전, 마리가 아쉬움을 담아 하룻밤만 머물면 안 되냐고 부탁했으나 아이작은 단칼에 거절했다.
한시라도 빨리 부모님과 재회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예의에서 어긋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럼 키스해줘."
"기꺼이."
이후로 마리는 아이작이 탑승한 마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저택의 정문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비록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작을 못 본다고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윽고 마차가 공작가 대문을 지나가고,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마리는 세바스찬의 말에 따라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여전히 아쉬운지 그녀는 저택으로 들어가기 전 뒤를 돌아봤다.
단단하게 닫혀있는 대문 밖으로도 아이작이 탄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후우..."
"아쉬워하는 표정이구나."
"너무 티났어?"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기분도 모르는 건 말이 안 되지."
드미트리가 능청스럽게 대답하자 마리가 피식 웃었다. 대외적으로 공작이니 뭐니 하면서 제국민의 존경을
받는 드미트리이지만 마리의 눈에는 그저 딸을 사랑하는 아빠에 지나지 않았다.
마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세바스찬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그 손짓에 세바스찬은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정문 앞에는 마리와 드미트리 부녀만이 남게 되었다. 마리는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는지 재차
확인하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드미트리에게 질문했다.
다시 말하지만 마리는 사람의 심리를 본능적으로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때문에
아이작과 드미트리의 대화 속에서 일종의 위화감을 느꼈고, 리무버를 선물해줬을 때는 확신을 가졌다.
아이작에게 질문을 했던 것처럼, '펜을 쥔 사람들' 중에 최고의 위치에 당당히 앉아있는 사람. 그러니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리는 드미트리의 질 낮은 농담에 불안함도 잠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쏘아봤다. 참고로 공작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저 경박한 말투는 전부 다 자신의 엄마에게 옮은 것이다.
'...다시 한 번 고려해봐야겠군.'
레킬리스 저택의 요리사가 해준 음식은 일종의 케밥이었는데 채소도 채소지만 고기의 육질이 일품이라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가는 길에 꾸준히 먹으라고 3 개 정도 포장해준 덕분에 배고프지 않았다.
어쨋거나 드미트리가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건 확실하며 딸바보 같은 면모도 그리 심하지도 않았다.
드미트리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아버지다.
나는 케밥을 모두 해치우고 남은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적당한 포만감이 느껴지자 시간을 체크하기
위해 창문 밖을 바라봤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서서히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이었다. 점심 시간 쯤에 출발하고 약
6 시간 정도가 흘렀다.
도착하자마자 부모님과 인사하고 저녁 식사까지 끝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갈 것이다. 나는 집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방학 동안 무엇을 할지 골똘히 계획했다.
나는 방학을 어떻게 보내야만 알차게 보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는 와중에, 머릿속에서 기발한 계획이
번뜩 스쳐지나갔다.
'외전이라도 쓸까?'
어떻게 해서 두 사람이 종족을 초월한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며, 스승이 무슨 이유로 늙을 때까지 엘프
여왕만 바라보게 되었냐는 궁금증.
제논 일대기 본편에서도 간간이 과거사를 묘사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수많은
독자들이 추측을 하는 중이지만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절대 모를 것이다.
스승이 제논에게 가르침을 내려줄 때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괴짜다. 또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경박한
말투까지 사용하니 엘프 여왕과의 관계가 드러났을 때 충격을 받은 독자들이 적지 않아 있었다.
부모님이 아카데미에 보내준 편지들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빈말이 아니라 쌓여있는 양을 보면
다 읽는데까지 며칠은 걸릴 것 같다.
이에 정신을 차리고 어머니가 나에게 전달한 편지들을 확인했다. 몇몇 편지는 화려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으며 편지 하나는 평범했다.
'리루스 악단?'
[안녕하십니까, 작가님. 저는 테르스 왕국에서 리루스 악단을 운영하고 있는 지휘자 리루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작가님의 작품 제논 일대기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죠. 이 편지가 작가님에게 전달이 될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작은 바램이 있어서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작은 바램이 있다길래 이상한 제안인 걸로 예상했다. 하지만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내 표정은 점점 더
놀람으로 번질 수밖에 없었다.
[...하여 부족하지만 사크란의 일생을 저희가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의 최후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는 그 장면이 아련하게 재생되며 동시에 음악이 흘러나오더군요. 부디 부족한 실력이지만
작가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작곡을 하고 싶습니다. 이를 통해 발생하는 수익은 작가님이 원하는대로
결정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저희에게 이 천금 같은 기회를 주신다면 반드시 멋진 곡으로
보답해드리겠습니다. 이상 리루스 올림.]
나는 리루스 악단이라는 단체에서 보내준 편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급히 다른 편지도 확인했다.
어머니가 골라준 것이니 분명 이와 비슷한 곳에서 보내주었을 터.
나는 비슷한 제안을 한 편지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올려 어머니와 마주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셨다.
"...어머니?"
"말하렴."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 편지를 보낸 사람들 전부..."
*****
"에휴..."
제논 일대기가 휴재를 선언한지 보름이 흘러가고, 출판사 사장은 하루하루 깊어지는 시름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갑자기 제논 일대기가 휴재를 선언하여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지 않나, 초고를 공개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도난을 당하지 않나, 그 뒤로 탈세 조사를 받아 어마어마한 벌금을 받지 않나.
초고를 훔쳐간 범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제국이 파견한 조사단에서도 단서가 하나도 없다며
난색을 표했으며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야했다.
"으으으... 직원들 월급을 깎아야 하나... 아냐. 그러면 또 인력을 뽑아야 하잖아... 차라리 아끼고
아낄 수밖에 없어."
본래 사람의 위기의 순간에 제 실력이 발휘된다고 하던가. 인생 최대의 위기에 목도한 지금, 사장은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현명하게 타파할 수 있을지 최대한 궁리했다.
그리고 사장은 고민도 잠시 매튜의 기습적인 방문에 화들짝 놀라며 펄쩍 뛰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예의를 얻다 팔아먹었는지 몰라도 노크도 하지 않은 매튜를 싸늘하게 노려봤다.
매튜가 우편물을 보여주며 알려준 소식에 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매튜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우편물 속에 든 건 그야말로 구원줄이나 다름없다.
매튜의 말처럼 우편물은 상처없이 깨끗한 외양을 자랑했다. 사장은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깨닫고
허겁지겁 우편물을 개봉했다.
이어서 우편물 안에서는 원고가 저장되어 있었는데, 사장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으로 원고를 꺼냈다.
원고를 꺼내니 그 사이에 끼여있던 편지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에 사장은 원고를 매튜에게 전달하고 편지부터 체크했다. 어째서 마음을 바꾸었는지 모르겠지만 편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사장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곱게 접혀있는 편지를 확인했다. 익숙하디 익숙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제논입니다. 아마 휴재를 선언했는데 원고를 보냈다니 이상하게 여기겠죠. 하지만
저는 제논 일대기를 휴재한다고 했지, 외전을 내지 않을거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외, 외전!"
외전을 썼다는 편지의 내용에 사장의 얼굴에는 함박 웃음이 지어졌다.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를 넘어선
소나기 수준이다.
[외전의 이름은 '카이르 외전'이며, 제논의 스승의 이름입니다. 카이르가 어째서 엘프 여왕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해서 사랑을 꽃피웠는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독자분들이
즐거워할지는 모르겠지만 심심하실 것 같아 보내드립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사장에게는 구원이나 똑같았다. 그런데 내용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쿠웅!
모든 편지를 읽은 사장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사장이 무릎을 꿇자 원고를 읽던 매튜가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그를 불렀다.
< 83 화 >
카이르 외전은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카이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아냈으며, 많은 독자들은 기대와
의문을 가지며 책을 구입했다.
다른 사람의 책이었다면 금방 관심을 껐겠지만 자그마치 제논 일대기 작가의 작품이다. 그러니 외전이어도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외전을 정독한 독자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위의 평가처럼 단순한 외전 정도가 아니었으며 본편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구입해야 하는 책으로 탈바꿈되었다.
왜냐하면 '카이르'의 정체는 바로 제논의 스승이었으며, 외전에는 스승의 과거사를 다루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 설명했지만 종족을 불문하고 마나를 수준급 이상으로 다룬다면 노화가 더디게 진행된다. 엘프와
마족이 장수하는 이유가 이때문이며 반대로 인간과 수인이 단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카이르도 이 점을 잘 알고 있기에 불에 달군 쇠를 망치로 두드리듯이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엘프에 비해서
짧디 짧은 수명을 악착같이 늘려 사랑하는 여인, 엘리샤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
이 과정 속에서 훗날 '질투'를 담당할 사람을 만나 가르침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제논'과 만나는 것으로
외전을 깔끔하게 끝냈다.
하지만 독자들은 외전이 등장하자 더욱 불안해졌다. 카이르와 엘리샤의 애절한 스토리가 끝에는 비극으로
치닫을까봐.
특히 테르스 왕국의 반응이 아주 격렬했는데 당연하게도 문화강국인 테르스 왕국에게 있어서 예술은 큰
폭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비록 미네르바 제국에서 다양한 술수를 동원해 많은 문화를 빼았겼지만 테르스 왕국에는 여전히 유명한
예술가들이 모여있다.
또한 제이로스 혁명이 터지고 나서 예술은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로 바뀌었다.
이러한 이유로 테르스 왕국으로서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절대 놓칠 수가 없었다.
테르스 왕국의 귀족들이 미네르바 제국의 귀족에 비해서 맵다지만 문화에 한해서는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반대로 미네르바 제국은 예술을 귀족의 전유물로 인식하는 중이라 대다수의 예술가들이 테르스 왕국으로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제국에서 막대한 양의 자금을 지원해도 예술가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명예'라면
죽고 못 사는 이들이 널려있는 중세였으니까.
그러니 귀족의 전유물이 될 바에야 모든 사람이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그런 예술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또한 이번에 발생한 '이벤트'는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제논 일대기 속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지, 그리고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에 따라 본인의 평가가 극명하게
나뉠테니까.
[리루스 악단의 지휘자 리루스.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사크란의 일생을 작곡할 거라 말해... 작품의
명성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화가 이마르 또한 사크란의 최후를... 인생에 있어서 가장 뜻깊은 경험이 될 것이다.]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또한 정말 기대가 된다는 말까지 남기며 시간이 되면 전시회에 방문하겠다고
언급했다.
물론, 사크란의 최후 외에도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있는 명장면들은 다양하다. 독자들은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렸으며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개성적으로 표현했다.
이탓에 사람들은 거장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의외의
상황이 펼쳐졌다.
신인은 물론이고 이름을 날린 기성마저도 수익을 창출하지 않고 기부 형식으로 받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이유는 실로 간단했다. 제논 일대기는 단순한 소설 정도가 아니라 계급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이작은 단지 '팬아트'를 받는다는 개념으로 2 차 창작을 기꺼이 허락한 거지만 그 파급력은 예상을 한참
웃돌았다.
특정 계층만 즐기는 문화가 아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가 탄생하기 시작했으며 발전을 앞당기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
심지어 전시회를 어디에서 개최할지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이 서로 피터지게 싸우는 중이다.
미네르바 제국은 출판사가 자기네 나라에 있으니 출판사 근처에 개최해야 한다며 소리쳤고, 테르스 왕국은
개소리 말라며 자신의 수도에서 개최할 거라 꿋꿋하게 버티는 중이다.
초고의 경우는 우편물로도 보낼 수 있어서 추적당할 염려는 없지만 예술품 같은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나도 보고 싶은데..."
편지를 집으니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1 년이 넘는 기간동안 꾸전히 팬레터를 보내준 독자의
이름이다.
"이건 또 뭐야."
< 84 화 >
좋은 문화를 가졌다면 사람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효과가 발생한다. 깨끗한 물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문화가 가진 힘은 겉이 아닌 속에서부터 천천히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세뇌나 교육을 통해 얄팍하게 박힌 관념이 아니라 그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따르는 것이니
효과가 뛰어날 수밖에 없다.
또한 예술계에는 인간 뿐만 아니라 문명의 시초를 닦았던 엘프, 장인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워프도
섞여있다.
수인은 전투 종족이라 예술에 큰 관심이 없었고, 마족은 예술보다는 인권 운동(?)에 집중하여 이렇다 할
자랑거리는 없었다.
문화의 나라, 테르스 왕국은 문화가 지닌 힘을 일찍감치 깨달아 문화력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으며 그
결과 미네르바 제국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미네르바 제국이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테르스 왕국을 압박할 수도 없는 것이, 이미 테르스
왕국에서 발생한 문화가 제국의 뿌리까지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강압적으로 정복 전쟁을 펼치고 싶지만 문화가 너무 강력하여 다른 나라는 물론 제국민조차 꺼려하고 있다.
이탓에 외부에서 압박하는 것보다 테르스 왕국의 문화를 침탈하여 균형을 유지하는 걸로 노선을 바꾸었다.
"그건 알겠는데 어째서 수도도 아니고 우리 영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는 거냐고. 그것도 헤일로
아카데미의 개학을 늦추면서까지."
그에 맞은편에 앉아있는 황금빛 머리카락의 여인, 리나는 전보다 더 고생한 듯한 얼굴로 쓰게 웃었다.
본인도 따로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우리도 제국에서 전시회를 개최할 생각은 없었어. 네가 아직 제국에 종속되지 않은데다가
명망있는 예술가들은 전부 테르스 왕국에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우리 제국이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
보여주려고 한 거야."
"그런데 테르스 왕국에서 갑자기 제국에게 전시회 개최를 넘겼다?"
"그런 거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문화라...'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교양이 필요한 문화가 아니라, 누구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문화로.
나는 제논 일대기가 끼치는 영향력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찻잔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달그락- 거리는
소음과 함께 리나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일단 테르스 왕국은 넘어가고, 왜 하필이면 우리 영지야? 제논 일대기의 작가가 여기에 살고 있다는 걸
대놓고 알려주기라도 하는 거야?"
"맞아. 발전 가능성도 높고 수도와 거리도 멀지 않겠다, 자연스레 마이샬 영지가 채택된 거야. 더구나
호크 경도 정치에 관심이 없으니 힘을 실어줘도 상관없을테고."
"아버지 머리에 흰 머리가 늘어나실 거 같은데? 서로 합의는 했어?"
"지금 오라버니가 설득하고 계실거야. 물론 호크 경은 네 의견을 우선적으로 여기시겠지만..."
나는 묘하게 역전된 듯한 관계 속에서 골똘히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곧바로 허락하고 싶다.
다른 영지처럼 특산물이 있다던가, 아니면 먹거리가 다양하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귀중한 광물이
발견되었다던가 등등. 이런 특징이 하나도 없다.
"음..."
나는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냐, 아니면 거장들의 작품을 보는 것이냐.
마지막에는 아버지와 상의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나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중인 리나를 바라보며
내 생각을 꺼냈다.
드물게 의욕을 활활 불태우는 리나다. 절대로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푸른색 눈동자에 똑똑히
새겨져 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국제적인 축제에 지나지 않지만 정치인들에게는 복잡하디 복잡한 축제.
물론 나에게는 희대의 사기 스킬, '연재 중단', 혹은 '절필'이 있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할 것이다.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의 관계를 고려하자면 각 나라의 통치자가 직접 오진 않고 대리인을 내세울터.
"우선 너도 예상하고 있다시피 나와 오라버니는 물론이고 레킬리스 공작가도 참여할 거야. 헬리움에서는
세실리가 찾아올 수도 있지. 테르스 왕국에서는 빅토르 문화대신이 방문할거고."
"그거 말고 다른 나라는?"
"세이비어 교국에서는 주교가 찾아올 수도 있겠지. 벨루스 왕국은 잘 모르겠네. 벨루스 왕국은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라 자기들이 오고 싶어서 올테니까."
'치안을 좀 더 신경 써야겠네.'
"...미안하기도 하고."
"흠."
"힘내."
*****
이대로 가다간 본래의 목적이었던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의 의미가 퇴색될 가능성이 높았다.
원래는 사심도 채우고, 겸사겸사 작가의 정보를 찾기 위해 전시회에 참석하려 했으나 원로원이 거세게
반발했다.
고작 그런 곳에 자기들이 찾아갈 필요가 있냐고. 오히려 그들 쪽에서 알븐하임에 찾아와야 한다고 말이다.
< 85 화 >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대인에게 있어서 '농사'란 특히 더 중요한 수단이었기에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에
민감했다. 설령 농사를 짓지 못 하는 환경이라 해도 계절마다 환경이 바뀌는 법.
세월이 흐르고 문명이 발달할 수록 축제는 다양한 형태로 띄기 시작했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행하는
축제는 여전히 했지만 역사가 쌓이고 쌓일수록 사람들은 특별한 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중 유명한 축제의 종류라함은 당연히 '건국제'와 새해 축제다. 건국제는 그 나라에 있어서 갖가지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왔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어서 가장 방대한 규모의 축제가 열린다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런 건국제조차 새해 축제에 비하면 역부족이다. 새해는 종족을 불문하고 모든 이들에게 다채로운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당연히 제일 클 수밖에 없었다.
"우와..."
그래도 시골 깡촌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언제나 한적한 편이었다. 청년들이 이곳에 남아있는 이유도
아버지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얼굴에 불만이 새겨질 일은 없었다. 오히려 마을이 번창하여 행복감에 힘든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라.
언제나 그렇듯 강직한 얼굴로 하여금 남자다움이 물씬 풍겼지만 오늘따라 퀭한 모습이셨다. 며칠동안 잠을
못 자서 피로가 겹겹이 쌓인 안색이라 해야 할까.
실제로 전시회가 마이샬 영지로 결정되고 아버지는 부쩍 바빠지셨다.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결제 서류를
처리하는 건 기본이고 다양한 사람들과 대면했다.
호기심을 가지고 영지에 방문한 상단과 계약을 한다던지, 건설 책임자와 상담한다던지, 레오르트와 함께
전시회 계획을 세밀하게 짠다던지.
갑작스럽게 폭등한 업무량으로 인해 하루가 멀다하고 야근을 하시니 피곤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기사단장이셨지. 평범한 기사단의 일원도 아니고 자그마치
단장이었으니 사무적인 업무도 하셨을 것이다.
더군다나 네이비 기사단은 국경을 담당하여 배분받은 예산을 알뜰하게 쓸 수밖에 없다. 돈이야, 다른
곳보다 많이 받겠지만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부족한 곳이 군대다.
'그래도 힘드시겠지.'
"너무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상 이 축제는 오롯이 너를 위한 축제니까 말이야.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나조차도 못 하는 걸 네가 모두 하나 하나 이루고 있잖느냐."
"아버지가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힘들었을 거예요."
"내가 너에게 해준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만이라도 좋구나."
부모님의 심정이 뚝- 뚝- 묻어나오는 말이다. 자식은 부모의 사랑과 정성이 없다면 아무것도 못 하는데
정작 그 부모는 자식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고 말한다.
내가 찡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아버지는 말없이 내 머리를 헝클어주셨다. 부모님의 앞에만 있으면 철없는
아이처럼 굴고 싶어진다.
아버지의 설명처럼 전시회는 우리 영지 전체를 이용하여 개최된다. 그러니까 박물관처럼 복잡하게 설계된
건물에서 진행되는 행사가 아니라 의미 그대로 축제에 가까운 형식이다.
물론, 악단과 극단이 오는 만큼 계획에 맞게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활발한 낮에는 미술품을 관람하고
고요한 저녁에는 극단과 연극에 집중할 것이다.
이때문에 공연장이 설립되는 곳도 평야였으며 관람석도 만만치 않게 넓었다. 심지어 반투명한 막까지
설치하고 있었는데 아카데미 대련장에서 보던 것과 흡사했다.
"음..."
"내가 네 엄마랑 본 연극은 무대 위에서 하던 연극이었어. 하지만 이번에 찾아오는 극단이 여러 의미로
유명하다더구나."
"어떤 의미로요? 이름이 매트릭스 극단이라는 것만 알고 있는데."
"가장 현실적인 표현으로 유명한 극단이지. 예를 들어 눈이 내리는 배경이라면 실제로 눈을 내리게 만들고,
비가 오면 비를 내리게 한다더구나. 게다가 폭발까지 일으켜 생동감이 다른 극단보다 몇 배는 뛰어나다고
들었어."
'나중에 한 번 찾아가야겠다.'
부실 공사라도 했다가 어떤 참상이 벌어질지 모른다. 전생에서도 부실 공사 때문에 건물이 무너진 경우가
매우 많았으니 각별히 주의하는 편이 좋다.
"편지요?"
"그래. 우리야, 네가 작가라는 걸 알고 있어서 너를 위한 축제라고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위한 축제잖니. 정작 그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과연 이 축제에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구나."
다시 말하지만 이 전시회는 전세계의 거장들이 제논 일대기를 읽고 감명받아 본인의 작품을 내놓은 축제다.
그러니 홍철 없는 홍철팀이라고, 정작 원작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재미도 반감될 뿐더러 축제에 참석한
예술가들도 크게 실망할 수도 있다.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니 잠자코 따르는 게 좋다. 아버지도 내가 기꺼이 수락하자 피식
웃으셨다.
오로지 제논 일대기의 팬들을 위한 축제. 한산했던 영지는 활기와 생동감으로 채워졌으며 얼굴에는
웃음꽃이 폈다.
나는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감상에 젖었다. 내가 쓴 작품이 또 하나의 문화가 되어 영지에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신문으로 소식을 듣는 것도 아니고 직접 눈으로 보니 체감이 전혀 달랐다.
김광석 거리라고, 김광석의 출생지였던 지역에 문화거리를 조성하여 그 지역만의 특색으로 변화했다.
순식간에 변화하는 영지의 모습을 보자니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 랜드마크가
되어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지금처럼 일정 주기마다 축제를 펼친다.
이 얼마나 뿌듯하단 말인가. 돈과 권력에 욕심이 없다지만 내 소설이 하나의 문화가 된다는 건 참기 힘든
묘한 매력이 있다.
"나를 위한 축제라..."
과연 먼 미래에 이 영지는 어떤 형태로 발전해 있을까. 김광석 거리처럼 하나의 문화 도시로 성장할까,
아니면 그저 그런 영지로 남아있을까.
그러니 출생지만 마이샬 영지라는 것만 알고 있을테니 약간의 조사만 할 뿐, 그 이상은 없을 확률이 높다.
출생지가 마이샬 영지일 뿐이지 현재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으니까.
< 86 화 >
"흠..."
"취지는 좋긴 한데..."
애매하시다는 반응을 보이셨다. 아버지는 생각이 깊으시니 그렇다 쳐도 어머니까지 선듯 동의하지 않으신
건 의외였다.
"아이작."
"네. 아버지."
"네가 한 이야기는 분명 너에게도, 그리고 우리 영지에게도 정말 좋은 일이란다. 발전력을 보다 더 빨리
늘릴 수 있는데다가 관광 효과가 극대화되겠지. 어쩌면 전시회 장소가 아예 이곳으로 고정될 수도 있고
말이야."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작품의 인기가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그럴
일은 희박하다.
미네르바 제국의 문화 욕심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흡수한 문화를 바탕으로 테르스 왕국을 집어삼켜 세계의
패권을 단단히 잡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참 중세 시대 답네.'
허나 이곳은 중세 시대가 배경인 판타지.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지구인이 본다면 실로
야만적이라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곳.
아버지의 설명처럼 내가 버젓이 살아있는 이상 전쟁이 터지진 않겠지만 문제는 내가 죽고 나서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나의 작품을 이용해 미친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다.
"원래 가시적인 결과가 나타나면 너처럼 욕심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정상적인 반응이지. 하지만
지금은 약간 성급한 감이 없지 않아 있구나."
"...그렇죠."
"그렇다고 아예 하지 말라는 건 아니야. 나는 어디까지나 충고를 해준 것 뿐이지, 선택을 강요하는 건
아니야. 네가 책임질 자신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지원해줄 거란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 자라신 분이다. 전생의 상식이 뿌리깊게 박혀있는 나와 생각이
여러 방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하마터면 욕심에 눈이 멀 뻔했다. 전생의 상식을 이 세상에 대입해서는 안 되는데 가장 기본적인 부분조차
간과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은근슬쩍 어머니의 손을 만지며 능글맞게 대하셨다. 어머니도 부끄러워하면서도 아버지의 듬직한
어깨에 머리를 기대셨다.
어쨋거나 욕심이 가득 들어간 내 계획은 보류되었으나 전시회 준비는 아무런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황실에서 지원이란 지원은 모두 해준 덕분에 하루가 멀다 하고 영지가 실시간으로 변화했다.
그렇다고 우리 가문의 생활이 바뀌는 건 없었다. 나는 출판사에게 편지를 보내고, 부모님은 밀려오는
결재 서류를 처리하느라 진땀을 빼셨다.
물론 변화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안녕! 우리 귀염둥이!"
"어? 아델 누나? 누나도 전시회에 가려고?"
"물론이지! 이런 일은 어떻게 참아?"
하지만 전시회가 개최되는 지금, 아델리아도 호기심에 찾아온 모양이다. 그리고 니콜에게 초대해달라고
부탁했겠지. 눈으로 직접 보진 않았지만 아델리아다 보니 상상이 간다.
'뭐, 몇 명은 알 것 같지만.'
"아이작~"
그녀의 어머니, 사라는 마리처럼 방실거리는 미소를 짓는 중이었고 케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얘가 점점 요망해지구나.'
"알았어."
*****
한편 비슷한 시간 알븐하임에서는...
"알았지, 레인? 이번에는 절대 사고치면 안 된다."
"알겠어요. 여왕님. 사고 안 칠 게요."
"그래. 어서 가자구나. 원로원에게 들키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 87 화 >
전에도 말했지만 축제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로 축제로 변하는 법이다. 그걸 반증하듯 우리
영지에는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지금 노점상보다 중요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부모님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서류를 처리하느라
바쁘다면 나는 손님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국에 사는 귀족은 물론이고, 심지어 다른 나라의 귀빈까지 맞이하여 긴장감이 장난아니었다. 여기서
실수라도 했다간 나는 물론이고 우리 부모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프링글스 아저씨다.
'지휘자'라는 직업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으며 단정하게 차려입은 예복으로 하여금 정중함을 풍겼다.
리루스는 독특한 콧수염을 살살 잡아당기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본인의 콧수염을 일종의
아이덴티티로 생각하는 것 같다.
겉모습처럼 성격도 독특하다고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한거라 따로 입을 열지 않았다.
실제로 저런 콧수염을 관리하려면 어지간한 노력과 정성이 아닌 이상 매우 힘들다.
나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는 프링글스 아저... 아니, 리루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리루스의 말마따나 제국에게 시간만 충분했더라면 훨씬 멋진 무대를 건설했을 것이다. 테르스 왕국에서 엿
먹어보라는 심보로 전시회 개최를 떠넘겨서 문제지만.
그래도 마음에 든다고 하니 나에게도 제국에게도 다행인 부분이다. 하지만 불안 요소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무엇보다 제논에게 보여주고 싶은 무대가 있소. 매트릭스 극단도 기꺼이 허락한 일이라 더 아쉽군."
"보여주고 싶은 무대요?"
"그렇소. 단언컨대, 제논 일대기 팬에 있어서 완벽한 무대가 될 것이오."
이후로 리루스는 자신의 무대를 즐겁게 시청하기 바란다며 자리를 떠났다. 떠나기 직전까지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그에게 호감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그나저나 콜라보라...'
공작 이상의 귀빈들은 이미 수도의 황궁에 도착한 상황이다. 황실에서 머무르다가 시간이 되면 마차를
이용하려 우리 영지에 도달할 것이다.
"아이작!"
"어?"
이에 설마하며 고개를 돌리니 내가 통과한 대문에서부터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브리스 형? 진짜 형이야?"
"이야. 이거 얼마만이니? 못 본 사이에 키가 큰 것 같기도 하고?"
"훈련은 할만해?"
"말도 마. 덕분에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한 달 동안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내내 싸워본 적 있어?"
"그런 걸 인간이 어떻게 해? 엘프도 엄청 힘들어할텐데."
"내 말이. 그런데 악으로 깡으로 버티니까 되긴 하더라. 아버지는 지금 안에 계셔?"
"서류 더미에 파묻히고 계셔."
"아버지도 고생하시고 계시네. 아, 그렇지. 아이작. 너 혹시 헬리움의 공주와 친분이 있어?"
"응?"
하긴 마법을 숨 쉬듯이 사용할 수 있는 마족인데 굳이 마차를 이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수도가
아니라 곧바로 우리 영지에 찾아왔다는 건 의외였다.
뭐, 네이비 기사단 같은 경우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를 치루는 곳이라 부조리를 일으킬 시간도 없을거다.
"그리고 최근에는 소속 가문의 아가씨가 망언을 했다는 소문까지 돌더라고. 이때문에 분위기가 좀 안
좋아."
"망언?"
"응. 군인은 집 지키는 짐승이라고 했다던데? 다행히 가문에서 추방까지는 안 시켰지만 지금쯤 엄청
고생하고 있을거야. 단순한 훈련소가 아니라 기사 양성소에 집어넣어더라고."
따로 조사하지 않아도 100%의 확률도 아이라다. 자업자득이라고, 나는 입 안까지 번지는 고소함에 속으로
키득거렸다.
*****
"여기가 그의 저택이구나."
아이작과 브리스가 저택 안으로 들어간 직후였다. 푸른색으로 가득 채워진 하늘에서 그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였다.
인간이었다면 하늘에 당당히 서 있는 세실리를 보며 경악했겠지만 그녀는 마족. 엘프와 더불어 마법의
축복을 받았다는 종족이다.
마법을 이용해 하늘을 돌아다니는 건 기본이고, 공간과 공간 사이를 넘나드는 텔레포트까지 사용할 수
있으니 이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공주님?"
세실리가 머릿속으로 아이작을 떠올리고 있을 때 그녀의 옆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세실리를 불렀다.
당연히 그도 마족이었으며 세실리가 위로 솟아나 있는 뿔을 갖고 있다면 그는 양의 뿔 같은 형상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저택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사뭇 다르다. 갈무리 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
하나가 저택을 당당하게 수호하는 중이었으니.
'...마리도 있구나.'
세실리는 아이작과 마리가 남들 모르게 포옹까지 하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윽고 아이작의 방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째서 확신을 내릴 수 있냐면 다른 방보다
책장이 훨씬 많았으니까.
아이작이 책벌레라는 것 정도는 이미 꿰뚫고 있다. 그리고 역사를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는 것까지도.
'그리고 저곳에...'
1 권을 제외한 제논 일대기 초고들이 잠들어 있다. 마족에게 있어서 보물을 한참 넘어선 성유물이나
다름없는 초고들이.
만약 여기서 초고가 모두 다 도난당하게 된다면... 아이작이 낙담하는 걸 넘어서 절망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제논 일대기를 절필할 수도 있겠지.
"발락 경."
"네. 공주님.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투시 마법으로 2 층 오른쪽에 있는 방을 보세요. 다른 방보다 책장이 많이 있으니 구분하기 쉬울 겁니다.
확인하셨다면 고개를 끄덕이세요."
"확인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저택으로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저 방에 들어서는 순간 감지 마법을 설치하세요. 누가
침입하면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 88 화 >
수도를 거치지 않고 마이샬 영지에 직접 방문한 사람들은 대부분 평민이거나 예술가, 그리고 백작 이하의
귀족들이다.
그 이상의 계급은 대부분 국가에서 중요 관직을 맡고 있어서 방문할 나라에게 공식적으로 초청을 보내는
편이다.
특히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은 견원지간이나 다름없는 사이인만큼 사소한 방문이라도 복잡한 절차를
거치고 있다.
그리고 현재, 테르스 왕국은 본래 자신의 수도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미네르바 제국에게
떠넘기듯이 권한을 양도했다.
미네르바 제국은 개최할 생각은 없고 그저 어필만 했으나 갑작스레 양도받으니 바쁘디 바쁜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500 년의 역사 속에서 황제가 다양한 실책을 저질러도 나라를 말아먹을 수준의 암군이 탄생하지 않은
이유다. 게다가 레킬리스 공작가가 옆에 착 달라붙어 지켜보고 있으니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반면 푸른색 머리카락의 미공자이자 테르스 왕국의 왕태자, 라오스 듀커드 폰 커쳐스는 멀쩡했다. 오히려
멀쩡하다 못해 활기로 넘쳐났으며 여유까지 묻어나왔다.
대외적으로 라오스가 제국을 방문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전시회 관람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유이지 내적으로는 복잡한 정치가 얽혀있었다.
테르스 왕국으로서는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어도 그만, 실패하면 쌍수를 들만한 일이었기에 마음을
편하게 먹고 올 수 있었다.
솔직히 전시회가 성대하게 망했으면 좋겠으나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적다. 제국에서도 테르스 왕국의
의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만큼 촉박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을테니까.
"근데 제국에서 무리를 해서라도 전시회를 빨리 개최할 이유가 있었나요? 저는 이해가 안 가는데."
라오스의 왼쪽에 앉아있던 귀여운 소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라오스처럼 푸른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녔으며 긴 생머리와 단정하게 자른 앞머리가 특징이었다.
"하면 안 되는 질문이었어요?"
"그래. 우리는 어디까지나 전시회를 즐기러 온 거라고 몇 번을 말했잖니?"
"그럼 사과할게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히라야의 말처럼 결례를 저지른 건 변하지 않았기에 라오스도 진중한 목소리로 사과를...
이런 복잡하고도 더러운 정치 세계는 그녀에게 질색이었지만 입장이 입장이다보니 억지로 참석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왕국에 잔류하여 남은 훈련에 매진하고 싶었다.
그사이 라오스는 이 기회에 제대로 압박할 생각이었는지 생글거리는 얼굴로 남매에게 물었다.
"전시회를 개최하는 건 시간이 오래 걸려도 상관없는 일이지. 그런데 지금처럼 급히 준비를 할 필요가
있나 싶어."
"다 사정이 있다네. 자네들이 알 필요는 없어. 어차피 즐기면 되지 않은가?"
"흠. 혹시 제논 일대기의 작가와 크게 관련된 일인가?"
예리한 라오스의 지적은 레오르트는 물론 괜찮은 척 커피를 마시던 리나마저도 흠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역시 눈치가 빠르군. 자네의 말이 맞아. 제논에게 하루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개최 일정을 앞당긴
거라네."
"거짓말도 잘 하는군."
개최 일정을 어떻게든 앞당겨 아이작에게 보여준다. 그동안 레오르트와 리나가 그에게 저지른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무리를 감행한 것이다.
'많이 성급했지...'
넉넉잡아 1 년 후에 전시회를 개최해도 되지만, 그렇게 되면 테르스 왕국에게 기회를 빼앗길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작은 당연히 테르스 왕국에 방문할 가능성이 크지만 더 나아가 그곳의 문화에 심취할
수도 있다.
제국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눈 뜨고 코 베이는 식으로 빼앗길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런 레오르트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라오스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시종일관 여유롭게
대했다.
"당연히 우리 왕국으로 정중히 모셔가야지. 참고로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정중하게 데려갈 거야.
너희 제국에서 채가기 전에 말이지."
"제논은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본인의 마음을 드러냈어요. 그러다가 또 연재를 중단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우리 왕국이 언제 예술가들을 압박한 적이 있어? 리루스 악단에게 애국가를 작곡해달라고 했어, 아니면
매트릭스 극단에게 선전용 연극을 만들어달라고 했어? 심지어 제이로스 혁명을 연극으로 재현시켜도 우린
가만히 있었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위 전까지 아이작의 명성을 이용할 계획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제국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고한들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게 되는 순간 의미가 없어지니까.
그러나 흔히 말하는 휴재 사태가 발생한 이후에 그 마음을 깔끔하게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제이로스 혁명
같은 사건이 다시 한 번 발생하는 것만큼은 막아야했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미네르바 제국은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밖에 없다. 테르스 왕국은 제이로스 혁명으로
인해 흔들리던 내실을 더욱 탄탄하게 마련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라오스는 팔짱을 끼며 묵묵히 앉아있는 히리야와 햄스터처럼 과자를 우물거리는 중인 라라를 번갈아봤다.
두 여자 모두 각자 개성에 맞는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으며 직위 또한 일국의 왕녀다.
무엇보다 제논은 현재 나이가 많은 현자로 추정되고 있는 바, 여자에 욕심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래도
이정도 정성을 보여준다면 제논도 마지못해 승낙해줄 터.
더군다나 굳이 히리야와 라라가 아니어도 된다. 비록 내다버린 자식이지만 '핏줄'이 이어진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까.
이에 라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오르트의 생각이 맞다는 걸 알려줬다. 다만 얼굴에는 미미한 불쾌함이
실려있었다.
그런 히리야의 무례한 반응에도 레오르트는 개의치 않았다. 앞뒤가 꽉 막혀있는 히리야의 성정은 여태까지
많이 보았기에 어련히 넘길 수 있다.
"만약 성을 버리고 평범하게 살았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사생아 주제에 인정받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아바마마도 본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실수라 말씀하셨고."
"아카데미에서는 크로스라는 성을 갖고 있다만."
"아카데미로 보내기 전에 왕족의 성을 사용하지 말라고 협박했거든. 아마 크로스라는 성은 자기 어머니의
성일 거야. 천하디 천한 창녀의 성이지."
"... ..."
제이로스 혁명 이전의 매운맛이 잔존해 있는 대답이다. 레오르트는 테르스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의
개인사를 떠올렸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터졌으니, 바로 프리드리히가 왕비를 만나기 전 욕정을 해소하기 위해 만났던
매춘부와의 관계다. 하필이면 그때 피임을 실패하여 아이가 생겼다고.
다행히 그 사건을 철저하게 은폐한 덕분에 바깥으로 새어나갈 일은 없었고, 아이는 받아들였지만 어머니는
쥐도 새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 사람의 탄생과 인생을 단순히 '실수'라고 여기는 태도. 아이작이 듣는다면 눈쌀을 찌푸릴만한
태도였지만 이들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식이다.
군주가 정치적으로 실책을 저지르면 백성이 불만을 토하겠지만 사생활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그렇구나~ 라며 넘겨짚을 뿐, 개인적인 인성은 중요하지 않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환영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저희가 공주님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죠. 그나저나 정말로 아름다우시네요."
"감사합니다. 아이작의 얼굴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했는데 남작 부인에게서 물려받은 모양이에요."
"어머. 그 말씀은 우리 아이작이 예쁘다는 건가요?"
그녀의 방문에 처음에는 모두가 당황했지만 세실리의 화려한 말재간을 통해 자연스레 녹아내릴 수 있었다.
심지어 아이작의 어머니와는 말이 잘 통했는지 벌써부터 이야기꽃을 피우는 중이다.
"아이작."
"...응."
"너의 여자친구로서 미리 말할게. 전시회 동안에는 나랑 항상 붙어있기. 떨어지거나 다른 여자를
바라보면 손도 못 잡게 할 거야."
"그럼 키스는 해도 돼?"
"...넌 진짜 변태야."
마리의 아이작의 역공에 얼굴이 붉어짐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에 아이작은 능글거리는 말투로
연이어 물었다.
비록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부랴부랴 결정된 전시회지만 제국에서 수많은 자원과 인력을 투입한 덕택에
구실 정도는 마련했다.
게다가 전시회의 구성 자체가 조용한 건물에서 작품을 관람하는 형식이 아니라 축제에 가까운 형식이다.
텅 비어있는 영지에 작품을 전시할만한 공간을 따로 정하고 그 외에는 주민들끼리 즐겁게 놀면 끝이다.
"어때? 잘 어울려?"
어깨는 완전히 노출된 반면 가슴은 살짝 드러났으며 백색의 드레스라 그녀의 우유빛 피부를 더욱
강조시켰다.
전반적으로 화려한 문양이 거의 없는 수수한 외관이고 치맛단도 무릎에 간신히 닿을 정도다. 덕분에
유려하면서도 길쭉하게 뻗은 그녀의 맨다리가 온전히 드러나 시선을 빼앗았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하던가. 이런 변신이면 어느 남자던 간에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이렇게 예쁜 여자가 정말 내 여자친구가 맞는지 현실을 의심할 정도다. 그만큼 마리가
비정상적으로 예쁘다는 뜻이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마리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솔직한 감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예뻐."
"겨우 그걸로?"
"하늘에서 내리는 새하얀 눈을 닮았다는 여자를 표현할 때 너를 참고하면 될 것 같아."
"그게 뭐야? 정말 소설 작가다운 감상평이네."
마리는 내 칭찬이 낯간지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며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황궁에서 친히 경비경을 파견하여 치안에도 신경 썼으니 범죄가 발생할 확률은 극히 낮다.
"혹시 나도 같이 가도 될까?"
'그런데 목걸이가...'
"와... 저건 반칙인데..."
같은 여자이자 세실리를 고깝게 바라보던 마리마저 감탄을 입 밖으로 내뱉을 정도이니 현재 세실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옷차림 하나만으로도 야시시함을 풍기고 있는데다가 고혹적인 외모로 하여금 내 시선을 강탈하는 중이었다.
꽈악-
유혹당하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걸까. 나도 모르게 마리의 손을 붙잡아버렸다.
"알았어. 오늘만이다?"
"정말? 정말로 허락한 거지?"
마리가 허락할 줄은 생각치도 않았는지 세실리가 격한 반응을 보이며 반겼다. 붉은색 눈동자가 살짝 크게
떠지며 환희를 드러내더니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물론이고 마리조차 떨떠름한 반응을 지을 정도다. 게다가 이쪽을 향해 걸어올 때 살짝씩 흔들리던
세실리의 가슴에 시선이 빼았겨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푸른색 눈동자가 미약하게 떨리는 걸 보아 무시무시한 존재감에 압도된 모양이다. 심지어 이쪽을 향해
걸어올 때 조금씩 흔들렸으니 남녀를 불문하고 시선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을 것이다.
자꾸만 시선이 아래쪽으로 가려는 걸 막으려는지 마리의 눈동자가 약간씩 흔들리는 게 포착되었다.
비밀을 밝혀냈을 때 그녀가 나에게 저지른 행동이 떠올랐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찔하다 못해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듣자하니 헬리움에서도 능력이 뛰어난 기사라고 했던가. 마족의 기준으로도 능력이 출중하니 안심할 수
있다.
'비가 안 와서 천만다행이다.'
저택 정문에는 경비원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대문을 여는 중이다. 마리의 저택과 달리 간소하고 평범한
외양의 대문이었지만 불만은 없다.
축제가 진행되고 있는 마을과 저택 사이의 거리는 약간 떨어져 있으니 조금만 걸으면 금방 도착할 것이다.
그때까지 뭘 하나면, 당연히 잡담이다. 때마침 마리가 세실리에게 먼저 말을 걺으로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의 푸른색 눈동자에는 짙은 호기심과 미약한 열망(?)이 담겨있었다. 세실리도 그걸
눈치챘는지 본인의 가슴을 한 번 쳐다봤다가 마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건 왜 묻는 거야?"
"아이작이 자꾸 쳐다봐서."
"야."
"왜 부정하려고 해? 내가 모를 줄 알고?"
세실리는 투정을 부리는 아이를 타이르는 것처럼 사근사근한 말투로 마리에게 말했다. 실제로 그녀의
말마따나 세실리가 압도적인거지 마리도 평균보다 큰 편이다.
"왜? 부끄러워?"
"당연히 부끄럽지.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잠깐 귀 좀 빌려줘."
"...재밌네."
그리고...
"...미친. 이게 뭐야?"
"조각상이네."
"조각상인 건 나도 알아. 그런데 이게 무슨... 왜 이렇게 커?"
< 90 화 >
전에도 언급했지만 예술가는 배고픈 직업이다. 본인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며, 그
도구의 가격조차 만만치 않다.
더군다나 예술가들은 본인만의 신념이나 철학 같은 부분이 확고하여 기껏 완성된 작품을 폐기하기 일쑤다.
이탓에 돈은 돈대로 나가고 작품은 작품대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런 구조로 인해 예술은 귀족들이나 즐기는 문화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귀족에게 돈이란 도박이나 사치를
심하게 부리지 않는 이상 썩어넘치는 것이니 예술계에 종사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예술가들을 훑어보면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귀족이거나 돈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상단이다. 때문에 예술은 한동안 귀족의 전유품이었으며 현재처럼 악단이나 극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테르스 왕국에서 제이로스 혁명이 발발한 이후 문화가 전국민적으로 퍼졌으며 평민이나
하층민임에도 불구하고 예술계에 몸을 던지는 이들이 증가했다.
예술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정작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는 이들이 있어야 돈을 벌 수 있는,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허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본인만의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이 있는 법이다. 애시당초 예술가는
돈보다 명예를 택한 부류가 많으니 손을 뗄래야 뗄 수 없다.
이때문에 평민이나 하층민 출신의 예술가들은 하나 같이 독기가 강하며 본인만의 신념이나 철학이
확고하다. 여기에 더해서 지칠 줄 모르는 인내심과 체력까지.
'변태'라고.
"...이게 뭐야?"
"조각상이네."
"조각상인 건 나도 알아. 그런데 이게 무슨... 왜 이렇게 커?"
세실리의 감상평에 마리가 대신 받아쳤다. 하지만 그녀도 나처럼 어마어마한 위용을 뿜내는 조각상에
정신을 빼앗긴 모습이다.
젊은이는 때리지 말라는 것처럼, 쭈글거리는 자세로 막기에 급급했고 중년인은 신난다는 표정으로
몽둥이를 휘두르는 중이다.
생동감이 넘쳐야 된다고 말해야할지, 아니면 진짜 사람의 표정을 본따서 조각했다고 할지.
조각상을 보자마자 이미 직감한 거지만 1 권 초반부에 있던 장면을 고스란히 묘사할 줄은 생각치도 못 했다.
"많고 많은 장면 중에 왜 이걸..."
"그것도 여기 적혀있어. 스승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배우는 게 남일 같지 않아서 조각했다네."
게다가 특히 조각가는 스승의 도움이 없이는 성장이 거의 불가능하며 심지어 천부적인 재능에 결과물이
바뀐다.
가끔 가다가 세실리나 마리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작품을 관람하는데 집중했다.
"저 여자 마족 아니야?"
"그러게. 마족 중에 참석한다고 한 사람이 있었나?"
"보아하니 귀족들인 것 같은데 괜히 건드리지 말자."
딱!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세실리가 말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마법을 숨 쉬듯이 사용하는 마족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다.
이에 세실리에게서 얼굴을 떼어 마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는 전시회 자체에 빠져들었는지 조각상을
뚫어져라 감상하는 중이었다.
"마리도 괜찮지?"
"응? 뭐가?"
"음... 아냐."
이후로 마을 깊숙히 들어가 본격적으로 전시회를 빙자한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황궁에서 다양한 지원을
해준 덕분에 먹을거리는 물론이고 볼 거리도 풍부했다.
"...마족도 있네요."
"그러게... 나 혼자만 참석한 게 아니었구나. 꿈만 같아..."
세실리는 자신을 제외한 마족이 전시회를 즐기는 모습에 놀람도 잠시, 살짝 젖어있는 목소리로 본인의
심정을 꺼냈다.
아버지는 이 전시회 자체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여지가 있다고 했지만, 막상 전시회를 두 눈으로 지켜보니
욕심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었다.
마족이 주로 모시는 신, 모라에게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자니 내 가슴이 다 뭉클해졌다. 본인은 공주의
신분이어서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다른 마족은 아니었을테니 더 감동스러웠겠지.
나는 마리의 볼을 꼬집고는 세실리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이윽고 세실리가 천천히 눈을
뜨며 촉촉하게 젖은 붉은눈이 드러나자 그녀에게 제안했다.
"누나. 한 번 저 사람에게 가보는 건 어때요?"
"응?"
내가 권유하자 세실리가 의문에 찬 표정으로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왠지 모르지만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더욱 짙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헬리움 밖으로 나와 세상을 떠돌고 있는 낭인이나 모험가일 확률이 높다는 것인데 제논 일대기는 1
년 전에 막 출범했으니 여태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윽고 세실리는 한 인간 여자와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마족을 지켜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알았어. 한 번 가보자."
"좋아요. 마리?"
"흥. 이번만 봐줄게."
세실리도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전보다 환한 표정을 지으며 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마족을 향해 다가갔다.
< 91 화 >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응?"
마족은 내 부름에 연인으로 추정되는 인간 여자와 대화하는 것을 멈추며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연인으로 추측되는 인간 여자 또한 마리와 세실리에 비해서 떨어질 뿐이지, 단아하면서 아기자기한 미모를
드러내고 있다.
"...무슨 일이십니까?"
"라이..."
그사이 아직도 팔을 붙잡고 있던 여자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마족을 불렀다. 우리가 귀족이라는 걸
알자마자 더욱 불안해진 얼굴이다.
"우리 나쁜 사람 아니에요. 정말로 궁금한 게 있어서 접근한 거니까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라이 씨라고 하셨나요?"
"네. 라이 에스토르라고 합니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영지에 어떻게 오셨는지 궁금해서요."
내가 설명을 이으면 이을수록 라이는 무덤덤한 표정인 반면 여자의 표정에는 의심이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제논 일대기가 출범되고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마족의 인식은 완전히 바뀌었고 악마로 취급받는
일은 대폭 하락했죠. 그러니 제 질문은 이겁니다. 라이 씨는 언제 헬리움 밖으로 나왔고, 또 어떤 인생을
살았으며 마지막으로 옆의 연인 분과 만났는지 궁금해서요."
"그런 거였습니까? 이거야 원. 의심한 제가 다 민망해지는군요. 하하하."
내 질문을 듣고 의심을 완전히 풀었는지 라이가 호방하게 웃었다. 덕분에 여인도 살짝 의심이 풀어진
모습이다.
뒤이어 라이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밝은 미소를 지으며 본인의 인생사를 하나 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라이는 질문을 한 세실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본능적으로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실로 남자다운 반응에
하마터면 피식 웃을 뻔한 걸 간신히 막았다.
뒤이어 그는 억지로 세실리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켜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눈동자가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 게 포인트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 이들같은 존재가 있을거라 예상하고 있었다만 막상 직접 만나게 되니 기분이
묘해졌다.
그 명장면 이후부터 마족을 향한 인식이 180 도 뒤바뀌었으니 그때부터 본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낸 걸로
추측된다.
세실리의 질문이다. 그녀는 헬리움의 공주이니 차별적인 시선으로부터 어느정도 자유로웠으나 평민의
사정은 잘 모르고 있다.
이 걱정은 자연스러운 것이, 마족이 다른 종족들에게 핍박을 받은 기간은 무려 1000 년에 달한다. 1000
년이라는 시간동안 서로의 감정이 희석되기는커녕 유지되었다는 의미다.
더군다나 세이비어에서 마족을 악마로 단정지으며 학살한 역사도 있었으니 둘 사이의 갈등의 골은
협곡보다 깊을 터.
그러니 마족 측에서도 그들을 고깝게 바라보거나 경멸할 수도 있으며, 다른 종족도 여전히 그들을 악마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맞습니다. 제논 일대기 덕분에 생활은 편해졌지만 여러모로 차별적인 시선은 잔존해 있죠. 한 달 전에는
마족이라는 이유로 여관에 묵지 못 하거나 의뢰를 못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 ..."
"...우린 아직 멀었구나."
라이는 만면에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충실히 대답했다. 확고한 신념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었으며 의심이라고는 하나도 묻어있지 않았다.
"빛이라..."
이어서 한동안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는 생긋 웃더니 라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외모처럼 소심하디 소심한 대답이다. 세실리는 베로니카의 대답을 듣고 빙긋 웃더니 나에게 말했다.
"우리도 이제 가자."
"네. 마리?"
"...그래."
덕분에 물컹한 감각이 느껴져서 당황했지만 마리의 표정을 보고 의문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마리의
푸른색 눈동자에는 짙은 경계심이 깔려있었으니.
"...세실리."
"응? 왜?"
"너 혹시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 92 화 >
방금 전 상황을 유추하건데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대강 예상이 간다만 끼어들 여지가 없어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으음..."
어쩌다 혼자 남게 되었지만 마을에 오가는 행인들은 여전히 많았다. 다들 전시회를 관람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며 축제를 즐기는데 여념이 없다.
조각상이 건물처럼 길 양옆에 나열되어 있다면 미술품은 마을 곳곳에 전시되어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또한 예술품만 전시회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성 위에 귀족이 있고, 귀족 위에 왕이 있으며, 왕국은 국가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오. 하지만
그 국가를 지탱하는 건 엄연히 백성이지. 즉, 왕이건 귀족이건 백성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라오. 헌데 크로스트 백작 그대는 그 국가의 근간을 단지 거슬린다는 이유로 모함하는 중이지.
정말이지 참된 귀족의 행실이구려. 그렇지 않소?"
"그 입 닥치게나! 감히 나를 우롱하려 들어?!"
"우롱이라니. 난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 사람은 사실을 콕- 집으면 화를 낸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구려."
미리 말하지만 전시회에는 매트릭스 극단만 방문한 것이 아니며 꼭 극단이 아니더라도 취미 생활로 연극에
종사하는 배우도 간간히 존재한다.
거기다 매트릭스 극단처럼 스케일이 거대하지 않을 뿐이지 배우들의 연기력은 내 기준으로도 뛰어난
덕분에 몰입이 가능했다.
이러한 이유들 덕분에 연극을 감상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편이었다. 앞에 배치된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복장을 보아 대부분 귀족이고 뒤에 서서 관람 중인 사람들은 평민인 것으로 추측된다.
본인의 기득권이 제논으로 인해 위협을 받자 그를 함정에 빠뜨렸으나 도리어 역으로 관광당하는 사이다
장면.
솔직히 원작자로서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기우였던 모양이다. 실제로 귀족들도 8 권
초반부의 장면을 보고나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으니 그 일환인지도 모른다.
여자애가 난리를 피우던 남자아이에게 드롭킥을 먹이는 장면으로, 장면도 장면이지만 헥토파스칼이라는
어감 자체가 막강하여 밈으로 승화되었다.
'진짜 잘 그렸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깡패에게 드롭킥을 날리는 메리와 양팔을 교차하며 드롭킥에 가격당하는
깡패의 표정까지.
"후우~"
"흐이익?!"
"...아델 누나?"
"하핫. 여기서 만나네?"
나보다 먼저 전시회를 관람하러 저택을 떠났던 아델리아였다. 나는 그녀가 특유의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반가워하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 아델리아는 주말에도 단출한 복장을 입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축제라서 그런지 옷에 힘을 강하게 준
듯했다.
아델은 내가 헛웃음을 흘리자 본인도 민망했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뺨을 긁적거렸다. 본인이 말해놓고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서둘러 화제를 돌리려는 그녀의 질문. 덕분에 사정이 있다는 걸 대충 간파했지만 모르는 척 하기로 정했다.
보아하니 그녀에게 생각보다 복잡한 과거가 얽혀있는 듯했다. 원래 웃음이 많은 사람들은 내면의 상처가
많다고 들었다.
"아쉽겠어요."
"뭐가?"
"지역이 멀어서 가족이랑 축제를 즐기지 못 한다는 거요."
"가족이라..."
옛날에는 일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가 어느 때보다 행복했던 시절. 누구보다 든든한 우군이었던
가족들.
"음..."
그런데 갑자기 왜 나를 쳐다보는 거죠. 아련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델리아가 상념에서
빠져나왔는지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봤다.
하늘색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아델리아에 의문을 품었을 쯤, 그녀가 씨익 웃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였다.
아델리아와 재잘재잘 떠들면서 전시회를 구경하면서 중간중간 길거리 음식도 구매했다. 당연하지만
가격은 모두 내가 지불했다.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를 유추하건데 아무래도 테르스 왕국에서 귀빈들, 그것도 왕족들이 찾아온 모양이다.
무언가 큰 충격이라도 받은 걸까. 아델리아의 안색이 급속도로 창백해지며 하늘색 눈동자가 정처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누나."
"... ..."
"누나. 정신차려."
"아? 아아."
어쩌면 아델리아는 그들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테르스 왕국에서 왕족들이 찾아왔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자마자 혼이 빠져나간 반응을 보였으니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귀염둥아?"
"여기 있지 말고 다른데나 가죠. 사람이 많아서 비집고 들어가기도 어렵겠네."
"그... 잠깐 여기 있으면 안 될까?"
"왜요?"
"화,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내 개인적인 일이니까 너 혼자 가."
아델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창백한 안색과 떨리는 눈동자, 그리고
뺨에서 흐르기 시작하는 식은땀까지.
이대로 가다간 아델리아에게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극도의 불안 상태에 놓이면 사람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법이니.
"안 돼요. 지금 누나 상태가 어떤지나 알아요? 저쪽이랑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안정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 절대 아니야.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니까 어서 손 떼. 잠깐만, 잠깐만 확인하면 된다니까?"
내 권유에 아델리아가 본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본인의 상태를 파악했는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아델 언니?"
"아델 언니다!"
이윽고 소녀가 아델리아에게 다가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기 직전,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제지시켰다.
제복의 여인이 중저음의 간결하고 무뚝뚝한 말투로 저지하자 소녀가 의문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소녀의 의문에도 히리야라 불린 여인의 시선은 오롯이 한 곳에 고정된 상태였다.
"... ..."
두근- 두근- 두근
< 93 화 >
아이작과 아델이 테르스 왕족들과 미묘한 만남을 갖고 있을 때, 자리를 떠났던 마리와 세실리는 마을
외곽에 인적이 드문 장소에 도착했다.
황실의 막대한 지원의 도움을 받았다고한들 마이샬 영지 곳곳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장소가
드문드문 존재했다. 특히 마을 외곽 쪽으로 나갈 수록 그 현상이 두드러졌다.
마을과 외곽은 공간이 서로 분리된 것처럼 뚝- 하고 떨어져 있다. 덕분에 몰래 숨어들기 적합한 곳이
매우 많았다.
세실리는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마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경계심이 자연스레
풀릴 정도로 아름답고도 싱그러운 미소였다.
하지만 마리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눈매를 가느다랗게 뜬 것이 경계심만 한층 더 강해진 모습이다.
이어서 그녀는 세실리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보다가 콧김을 길게 내쉬더니 가슴에 손을 척- 얹으며
선언하듯이 말했다.
단호하면서도 선을 확실히 그어버리는 마리의 발언. 절대 양보하지 못 한다는 본인의 의지를 세실리에게
드러냈다.
무엇보다 일부다처제는 로맨틱한 사랑보다 정치적인 이유가 얽혀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힘없는 약소국이
강대국과 끈끈한 연을 맺기 위해 왕녀를 시집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마리에게는 다른 걸 다 제쳐두고 세실리가 아이작을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한다는 부분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일부다처제고 나발이고 그런 건 절대 허락할 수 없다.
어쨋거나 아이작은 소박하고, 남을 배려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으며 글쓰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청년이다.
애초부터 정치적인 의도로 아이작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호의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발전한
관계다. 적어도 아이작을 향한 사랑은 누구보다 더 순수하다고 자신할 수 있다.
세실리는 마리의 연이은 독설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여기에 더해서 생글생글 웃으며
얼굴을 살짝 붉히기까지.
이로인해 도리어 당황한 건 마리였다. 전에도 말했듯이 그녀는 사람이 말할 때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본능적으로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났다.
"...언제부터?"
"믿어주는 거야? 정말로?"
그에 마리는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침묵으로 대응했다. 세실리의 마음이 진심이던 거짓이던 상관없다.
진심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었으니.
마리는, 모처럼 한치의 가식 없이 진실된 아이작을 누군가와 공유할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다.
매일매일 얼굴을 보고 싶고, 그걸 넘어 하루종일 포옹을 하고 싶을 뿐더러 다양한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공유하게 되는 순간 그 시간마저 반으로 뚝 갈라지게 된다.
알다마다. 그 이후에 약간 조급해져 아이작과 독대하여 이애기를 나누었고, 마리가 먼저 키스를 함으로서
교제를 시작했다.
마족 특유의 인내심으로도 억누르지 못 할만큼 강하게 뛰었으며, 악주기가 다가와서 그런지 욕망이 강하게
이는 것도 느껴졌다.
'예정보다 더 빨리 찾아오겠어...'
아주 명쾌했지만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운 결론이었다. 허나 마리는 곧바로 이어진 세실리의 설명으로 인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기적의 논법이 세실리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마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실제로 그녀의 말이 모두
맞다.
비단처럼 내려오는 칠흑색 머리카락과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붉은색 눈동자. 전반적으로 성숙한
이미지를 풍기는 아름다운 외모였으며 앵두 같은 입술은 미묘한 색기를 뿜내고 있다.
"그래도 난 절대 아이작을 다른 사람이랑 공유할 생각이 없어. 너에게 빼앗길 생각은 더 없고."
"미안하지만 네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 아이작의 의견이 중요하지."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
'...절대 안 돼.'
'...응? 잠깐만.'
마리는 머릿속에서 의문이 하나 두둥실 떠올랐다. 세실리가 매력이 뛰어난 건 맞지만 그녀는 마족이며
아이작은 인간이다.
기본적으로 수명 차이가 3 배 이상 나는데 세실리가 이 부분을 모를리가 절대 없다. 더군다나 마족은 참을
수 없는 분노나 슬픔을 느끼면 악마로 변하게 된다.
제논 일대기 속에 등장한 스승과 엘프 여왕처럼 애절한 스토리도 기대할 수 없다. 아이작은 스승처럼
마나를 다루는데 극에 달한 강자가 아닌, 그저 평범하디 평범한 인간이다.
장수해도 100 년인데 마족에게 있어서 100 년은 인간으로 따졌을 때 대략 20 년 정도가 된다. 게다가
아이작은 현재 17 살로, 장수를 해도 90 년이다.
"...세실리."
"응. 마리."
"너는 아이작과 함께 할 시간이 정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 아이작이 죽고 난 이후의 시간보다?"
"...드디어 눈치챘구나."
세실리는 마리가 본질을 꿰뚫는 질문을 하자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뒤이어 그녀는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나무로 가려져 있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푸르런 하늘이 밋밋하게 보였다. 따사로운 햇빛마저 가려주는
중이다.
그녀는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다시 고개를 내려 마리를 바라봤다. 마리는 세실리의 대답이 나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는 중이다.
"네 말이 맞아. 나는 마족이고 아이작은 인간이지.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고, 언젠가 나와 아이작은
헤어지게 될 거야."
"괴로울 거야."
"그래. 당연히 괴롭겠지. 그래서 네가 아니라 아이작의 의견이 중요하다 한 거야. 종족간의 수명 문제는
신조차 해결할 수 없을테니까."
인간을 포함한 사람은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유산'을 남기려고 애를 쓰는 중이다. 그것은 '지식'이라는
형태로 스며들어 사람을 더욱 발전시킨다.
세실리는 마리에게서 시선을 옮겨 마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로 마나로 감지하지 않아도 시끌벅적한
기운이 여기까지 전달되었다.
마리는 머나먼 미래까지 넘보는 세실리의 혜안에 감탄한 것도 잠시, 왠지 모르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렇게까지 지극정성인데 수명이라는 매우 커다란 벽이 막고 있었으니.
세실리는 마리의 선언에 색기가 담긴 비음을 흘리더니 눈매를 반으로 접었다. 그에 마리가 불길함을
느꼈을 때 쯤, 세실리가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
곧이어 백설기 같은 피부가 점점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귀까지 노을처럼 빨개졌다. 세실리가 무슨
뜻을 담고 이야기했는지 명확히 인지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실리가 그 말을 했기에 함부로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로 할 기세였으니까.
"그럼 난 이만 가볼게."
"... ..."
그렇게 세실리가 멀찍히 떨어졌을 때 쯤, 마리는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세차게 돌렸다. 세실리는 이미
마을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 94 화 >
누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복잡한 관계를 묻는다면,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혈연(血緣)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이렇게나 떠는 이유는 바로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세 명의 남녀들. 전시회에 참석한 테르스
왕국의 왕족들 때문일 것이리라.
"잠깐 실례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개최한 마이샬 가문의 차남,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테르스 왕국의 하늘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흠. 테르스 왕국의 정당한 계승자, 라오스 듀커드 폰 커쳐스라고 한다."
내가 예법에 따라 정중하게 인사하자 남자는 고저없는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소개하는 도중에도 그의
시선은 정확히 아델리아를 향하고 있었다.
뒤이어 라오스의 옆에 있던 여인도 특유의 중저음의 목소리로 무뚝뚝하게 소개했다.
낭랑한 목소리와 귀여운 외모가 합쳐져 심장에 무리가 올 것 같았으나 그보다는 그녀의 예법이 신경
쓰였다.
타국의 귀족이라고한들 라라는 엄연히 왕족이어서 공손하게 인사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라오스와
히리야처럼 대충 이름만 밝혀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반말을 사용하는 건 라오스가 왕족이었기에 그닥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왕족이 타국의 귀족에게 존댓말을
하는 건 어디까지나 공적인 자리에서다.
이번 전시회는 공적인 자리기보다는 축제에 가까운 개념이라 말을 놓아도 외교적으로 손실을 보는 건 없다.
라오스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탕하게 웃었다가 슬그머니 아델리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제는 시선조차 마주치지 어려웠는지 아델은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고 있다.
온갖 복합적인 감정이 두루 섞여있어 함부로 정의할 수 없었으며 식은땀이 비오듯이 쏟아지고 있다.
그리고 라오스는 아델리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가족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아델리아가 짓던 미소와 완벽하게 똑같았다.
"흐음... 그래?"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목구멍이 막혀버린 듯, 입술이 열렸다 닫았다 반복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도대체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아델리아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무슨 사이냐고?"
"... ..."
라오스와 정면으로 마주한 아델리아는 고양이 앞에 선 쥐마냥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뻐끔거리던 입조차 꾹
다물린 채 식은땀만 줄줄 흐르는 중이다.
그러나 라오스와 달리 아델리아의 표정은... 세상이 무너졌다는 표현조차 부족했다. 심장이 덜컹- 하며
떨어졌는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으며 눈의 초점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델리아의 초점이 이미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지만, 라오스는 그녀에게 독설을 퍼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끄윽... 윽..."
가슴 속에 묵혀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분출된듯, 그녀의 하늘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것이
아닌가.
가족에게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만큼 충격적인 일은 이 세상에 없을 터. 그녀는 본인은 가족에게, 그것도
내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부정당했으니 그 충격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리라.
타닷!
"어? 아델 누나!"
주변에 모여있는 인파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모두 통과하며 헤쳐나갔다. 이때문에 그녀의 모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게 되었다.
히리야는 무심하게 나를 지나친 반면, 라라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지나갔다. 이윽고 그들이
완전히 지나쳤을 때 뒤에서 라라의 낭랑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끄으윽... 흐으윽...
언제나 당당하고 매사에 열정적이었던 아델리아가 눈물을 터뜨리고 있다. 감정을 억지로 그러모았던 둑이
완전히 박살난 것처럼, 본인의 슬픔을 모조리 토해내는 중이다.
나는 통곡에 가까운 수준으로 오열하는 아델리아를 가만히 보다가 천천히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그녀는
내가 왔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 했는지 눈물을 쏟아내기 바빴다.
"누나."
"흐윽... 끄윽..."
"아델리아 누나."
"으윽... 어?"
묵혀놨던 감정을 약간이나마 쏟아냈는지 아델리아가 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통곡을
했으면 눈이 퉁퉁 부어있었으며 콧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아이작?"
"이게 필요할 거 같아서요."
"...날 따라온 거야?"
"그냥 받아요."
"으, 응..."
내가 그리 말하자 아델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손수건을 받았다. 그리고는 내 눈치를 살살 보더니 눈물콧물
범벅이었던 본인의 얼굴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패앵!"
"... ..."
"...고마워. 못 볼 꼴을 보였네."
"아니에요. 그런데 아델 누나. 아까 그 테르스 사람들이랑은..."
"훌쩍. 맞아. 내 가족들이지. 그것도 피가 반만 섞여있는."
"...우리 어머니는 매춘부였어. 그리고 아버... 지는 혈기왕성한 시절에 어머니와 관계를 맺었지.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나고."
"테르스의 왕이면..."
"평소 로맨티스트이니 뭐니 하면서 유명한 그 사람 맞아."
금슬이 얼마나 좋은지 첩을 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슬하에 자식이 4 명이나 두었다. 심지어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따르자면 자식을 더 낳으려고 했으나 왕비가 너무 힘들어하여 더 낳지 않았다고.
라오스가 아델리아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한 것과, 히리야가 라라의 접근을 막았던 것. 이것만 해도
아델리아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대략 유추할 수 있다.
비록 창녀의 삶은 피했지만 가족에게 멸시와 경멸을 받는 생활을 했겠지. 어쩌면 학대까지 받았을지도
모른다.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나이가 되자 쫒겨나듯이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거야. 그래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면
가족으로 인정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안 될 거라 직감한 거네요."
"맞아. 적어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인정해줄 거라... 고... 끄읍..."
뚝- 뚝-
손수건으로 닦을 생각도 나지 않는지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차가운 바닥에 떨어졌다.
"누나."
"흐윽... 왜에..."
"그 사람들에게 미련을 가진 이유가 어머니 때문이에요?"
어쩌면 니콜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던 이유도 그녀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입학
전까지만 해도 가족에게 육체적, 정서적 학대를 받았을터이니 니콜은 아델리아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얼마나 심한 학대를 받았는지 아델리아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뇌리에 각인된 공포와
두려움이 그녀를 차근차근 좀먹고 있다.
"...아이작?"
"괜찮아요. 누나. 울지 마세요."
아델리아를 이해할 수는 있어도 공감할 수는 없다. 그러니 지금은 어떤 위로를 해줘도 그녀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알겠죠?"
"... ..."
"그러니까 오늘 있었던 일은 모두 눈물로 토해내고 내일부터는 제가 아는 아델 누나로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늘 그랬듯이 저를 귀염둥이라 불러주고요."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억지로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우는 건지 아니면
웃는 건지 모를 기괴한 미소였다.
"이, 이렇게?"
"...지금은 그냥 우는 게 낫겠네요."
"미, 미안..."
"자, 잠깐만."
"네?"
"그 손수건... 내가 빨아서 줄게."
아델리아는 내 이름을 부르더니 전처럼 특유의 활기찬 미소를 지었다. 눈은 부어있고 코 끝은 붉어져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그녀의 미소가 확실했다.
"그런 게 맞아."
< 95 화 >
******
시간이 흐르고 아델리아는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렸는지 진정될 수 있었다. 하지만 통곡 수준으로 눈물을
터뜨렸기 때문인지 가끔 가다가 히끅! 거리며 딸꾹질을 해댔다.
전시회를 구경하고 싶어도 구경할 수 없는 상태일 뿐더러 자칫하다 테르스 왕족과 또 만나게 된다면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
괜히 나까지 휘말리게 할 수 없는데다가 전시회 구경에 방해될 것 같다고. 아쉽지만 납득이 가는 말이어서
하는 수 없이 그녀를 저택에 데려가줬다.
설령 자기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아도 정서적인 학대만큼은 해서는 안 된다. 솔직히 아델리아가 올바르게
성장한 것도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제논 일대기에 사생아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싶었지만, 개연성이 부족할 뿐더러 테르스
왕족에게 들킬 가능성이 크다. 아델리아와 테르스 왕족 간의 관계는 비밀로 붙여져 있는만큼 용의자가
크게 좁혀진다.
"아델!"
"응?"
니콜은 아델리아를 혼내려다 말고 퉁퉁 부어있는 그녀의 눈을 확인하고 의문을 드러냈다. 복잡한 사정이
있는 아델리아로서는 당연히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기에 얼버무렸다.
아델리아의 조심스러운 부탁에 니콜의 황금색 눈에 의아함이 새겨졌다. 하기야 평소 아델리아가 보이던
태도와 달라도 너무 다르니 의문을 품을만도 하다.
뒤이어 니콜은 부어있는 아델리아의 눈과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모습에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니콜도
눈치가 빠른 편이니 아델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대강 예상하고 있을 터.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니콜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아델리아의 말을 들어주기로 정했다. 자세한
속사정을 묻지 않는 걸 보면 나름대로의 배려인 듯했다.
"알았어. 그럼 나랑 그때 같이 나가자."
"아, 아냐. 나만 쉬는 거고 너는 전시회 구경하면 돼."
"불안해서 그래. 불안해서. 나중에 또 싸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저택에만 있을 건데 길을 잃을리가 있어?"
"됐고, 잔말말고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작 너는?"
니콜이 나를 보면서 묻는다. 곧 있으면 세실리와 마리가 돌아올 것 같았기에 전시회를 관람할 생각이다.
그리하여 니콜과 아델리아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나는 두 사람이 대문 너머로 이동할 때까지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전에는 대장간과 간단한 의류품, 그리고 물건을 사는 상점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그보다 더 많아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 눈에는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자주 방문했던 서점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루나 씨. 오늘 많이 바쁘신가요?"
"말도 마세요. 책이 어찌나 많이 들어오는지. 아마 도련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신간은 어디에 있어요?"
"저쪽 코너에 있어요."
그녀의 친절한 대우에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전하며 발길을 돌렸다. 뒤이어 책장과 아래의 전시대에
빼곡히 채워져 있는 책들을 보며 입을 헤- 벌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데?'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에서 엘프와 관련된 책은 원없이 읽고 있었지만 서점에 나온 건 조금 다르지 않을까.
솔직히 연구실에 있던 책은 연구용 서적에 가까워서 이해하기가 난감했다.
"큼. 큼큼."
"음?"
"...응?"
"겉보기에 허울 좋은 말들만 번지르르하게 있을 뿐, 실제로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는 책이니라."
내가 귀족인 걸 모르는 것인지 하대하고 있지만 어쩌면 아까의 테르스 왕족들처럼 그에 준하는 작위를
갖고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초면부터 하대를 할 이유는 없다.
"이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니?"
후드를 쓴 걸 보아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굳이 존댓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까. 이걸 빌미로
외교적으로 뭐라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건 소녀 쪽이겠지.
"물론 읽었다. 하지만 읽어보면서 눈쌀을 찌푸리게 되었지. 우리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자가 엘프를
폄훼하기 위해 쓴 책이다."
"음... 그건 알겠는데 우리?"
"...앗."
"얘. 너 혹시 엘프야?"
"아,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리고 애도 아니다!"
"그렇게 부정하면 더 의심이 가는데."
새가 날개짓을 하는 것처럼 두 팔을 파닥거리며 당황하는 소녀. 외모도 그렇고 행동거지도 그렇고 어른인
척 하는 아이 같다.
본래 역사와 관련된 기록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다. 역사는 승자가 기록한다는 격언이 있는 것처럼
신이 아닌 이상 역사는 결코 객관적으로 변할 수 없다.
그러니 많고 많은 책들을 접하고, 그 속에서 공통점을 찾아야만 역사는 진정한 의미로 역사가 되는 법이다.
더군다나 눈 앞의 소녀는 엘프로 추정되는 바, 결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내 이름은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이번 전시회를 개최한 마이샬 가문의 차남이지. 꼬마 숙녀님의
이름은?"
오싹-
"응?"
그러다 문득 뒷목이 서늘해져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하지만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책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는 책장만 눈에 들어올 뿐.
"뭐지...?"
< 96 화 >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녀는 나에게 엘프와 인간 사이에 간극이 얼마나 큰지 실감시켜줬다.
그래도 오만함이나 자만심은 아닌 것이, 이 둘은 남이나 자기자신에게 해악을 끼쳐야 진정한 의미로
탄생하는 법. 아르웬 같은 경우는 순수한 의미로 자부심에 가까웠다.
물론 소녀처럼 귀여운 외모를 가진지라 어린아이가 재롱을 부리는 것 같다. 분명 나이가 나보다 훨씬
많은데 행동거지는 영락없는 어린애다.
내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팩트를 때려버리자 아르웬의 미소가 유리마냥 와장창 깨져버렸다.
아르웬은 고개를 반대쪽으로 스윽- 돌리고는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부정하지 않는 걸 보면 개념이
확실하게 박혀있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반응에 작게 웃었다가 곧바로 긍정적인 이야기를 꺼내어 기분을 풀어줬다. 엘프에 대해 나쁜
말만 했다간 아르웬이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걸 반면교사 삼아 엘프도 큰 발전을 이루었지. 중간에 다시다난한 사건사고가 터졌지만 지금은
주변 국가와 교류도 활발히 하고 말이야. 듣자하니 이번 대 엘프 여왕이 본격적으로 개방 정책을 펼쳤다고
했지?"
신디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과거의 엘프는 스스로를 신에게 선택받은 종족이라 굳게 믿으며 다른 종족과 거리를 두었다. 정확히는
다른 종족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본인들이 나서봤자 힘으로 억누르는 것밖에 되지 않았으며 굳이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 했으니까. 실제로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다른 종족의 문명이 엘프에 버금갈 정도로 발전하고, 종족전쟁이 터지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엘프는 스스로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필멸자임을 똑똑히 인지하고 주변과의 교류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 그렇다. 알븐하임은 불과 100 년 전까지만 해도 주변과 단절하다시피 국가를 운영했지. 하지만
여왕이 즉위하고나서는 완전히 바뀌었니라."
아르웬의 말처럼 이번에 즉위한 엘프 여왕이 전반적으로 통치를 잘한 건 맞다. 그러나 엘프 치고는 지극히
어린 나이에 여왕이 된 탓인지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만약 연륜이 깊거나 조금만 더 신중했다면 곧바로 사기에 가깝다는 걸 눈치챘겠지만 엘프 여왕은 그러지
못 했다. 이럴 때 나서야 하는 세력이 원로원인데 아마 일부러 엿을 먹은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여태까지 엘프의 왕들은 원로원의 압박을 이기지 못 하고 스스로 자리에 내려왔으니 그 일환이지 않을까
싶다.
본인의 감정을 숨길 생각이 하나도 없는 이 순수한 아이가 정녕 100 살이 넘는 것일까. 인간은 나이를
먹는다는 걸 인지하면 성격이 점점 변하는 법인데 엘프는 그 과정이 느린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기대감에 차 있는 아르웬의 얼굴을 지그시 마주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의견을 입 밖으로 꺼냈다.
엘프는 본인들이 다른 종족보다 우월하다 믿으며 밖으로 잘 나가려 하지 않았다. 가끔씩 몇몇 별종들이
밖으로 나가 세상을 경험하지만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많은 엘프 학자들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는 중이고, 그걸
토대로 알븐하임을 차근차근 발전시키는 중이다.
"대신 현명한 왕이라면 그 반발의 원인을 알고, 그 반발이 단지 자신을 정치적으로 끌어내리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나라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인지 파악해야 돼. 만약 후자라면 훗날 부작용이 없도록 신중하게
고려해야겠지. 전자라면 뭐... 난 정치를 몰라서 모르겠네. 두 개 다 섞인 경우도 많아서."
"... ..."
내 설명이 끝나도 아르웬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말똥말똥하게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에 나를 향한 흥미로움이 담겨있었다.
"...대단하구나. 약관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니."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거야."
"그건 지식이지 그대와 같은 시선은 아니다. 지식을 갖고 있는 것과 응용하는 건 천지차이니라."
"그래? 난 잘 모르겠네."
전생의 영향으로 남들에 비해서 남들과 다른 시선을 갖고 있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나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들이 이 세상에서는 파격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니.
아르웬은 우아한 목소리로 사근사근 본인의 생각을 꺼냈다. 종족 특유의 자부심과 그녀만의 신념이
깃들어있는, 아주 개성적인 대답이었다.
"그럼 제논 일대기는?"
"응?"
"엘프인 네가 생각하기에 제논 일대기는 어떻게 생각해?"
"...있다."
"뭐?"
"정말 재미있다고 말했느니라."
아르웬은 나와 눈높이가 맞자 당황했지만, 나는 그녀의 은회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안타깝지만 얘야.
"그랬으면 좋겠네."
카이르는 죽어.
< 97 화 >
이후로 나는 다양한 서적을 구입한 후에 서점 밖으로 나왔다. 새로 출간된 책이 많아서 고르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으나 아르웬이 곁에서 설명을 해준 덕분에 약간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
다만 예외가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마족이다. 천사의 후예인 엘프는 악마의 후예인 마족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으며 암암리에 충돌이 있었다고 책에 기록돼 있다.
아르웬은 무뚝뚝한 내 대답을 듣더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뒤이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앞으로 돌리면서 본인의 생각을 꺼냈다.
"그대의 말마따나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허나 인간은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갖춘데다가 우리 엘프조차
함부로 예측할 수 없는 종족.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마법이 대중들에게 퍼질 수도 있다. 당장 제논
일대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마족의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대도 알고 있잖느냐."
"하긴, 이 세상은 예측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니까."
마법은 상류층에게나 허용된 특권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자연스레 고착화된 현상이다.
어릴 때부터 고등 교육을 받는 귀족과 달리 평민은 자력으로 힘을 터득할 수밖에 없으며, 마법에 접근하는
것조차 차이가 난다.
가끔씩 평민에게 마법사의 소질이 나타나지만 그건 정말로 희박한 확률이다. 또한 범상치 않은 재능을
보유한 것이기에 나라에서 집중적으로 케어한다.
엘프나 마족이 마법에 조예가 있는 건 태생적인 부분이 가장 크겠지만 접근성 이 하나가 압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엘프는 인간을 한 수 아래로 본다는 게 맞아? 너도 그렇고 이때까지 만난 엘프는 그런 경향이
없는 것 같은데?"
"그건 편견에 불과하노라. 인간마다 엘프를 다르게 보는 것처럼 우리도 인간을 다양한 시선으로 보고 있지.
다만 종족 전쟁을 겪은 엘프들 대부분은 여전히 인간을 경시하는 중이다."
"어째서? 그정도 굴욕을 겪었다면 생각이 달라질 법한데."
"이유는 간단하다. 종족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이유가 본인들이 잘못했기 때문이지 결코 인간이 뛰어난
거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 실로 우스운 일이로다."
"... ..."
어딜가나 꼰대가 문제다. 아르웬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린 걸 보면 그들을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
"이렇게 만나는 것도 인연인데 먹거리 정도는 사줘야지. 그리고 영주의 아들로서 이정도는 기본이야."
"큼. 큼. 그렇다면야 거절하지는 않겠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는데..."
"무슨 조건?"
"그것이..."
하지만 텅 비어있는 허공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에 살짝 의문을 품었을
쯤이었다.
"...두 개를 사다오."
"뭐?"
"살 거면 두 개씩 사줬으면 하는구나. 하나는 바로 먹고 다른 하나는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고 싶으니."
"두 개 다 바로 먹지는 않고?"
"나, 나중에 생각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니라."
팟!
그리 어렵지 않다는 투로 이야기한 아르웬이지만 그녀가 엘프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인간에게는 고난이도
마법 중 하나다.
아공간이 엘프에게 미리 준비된 도구로 바느질을 하여 주머니를 만드는 형식이라면 인간은 아예 0 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 그만큼 아공간은 효용성이 크지만 매우 어렵다.
"그럼 다시 꺼낼 수 있어?"
"으, 응?"
"보관했으니까 다시 꺼낼 수 있잖아."
"그, 그것이..."
물방울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그녀의 실력에 매료되었을 쯤, 아르웬이 물방울을 터뜨리며 놀리듯이
말했다. 여태까지 어린애 취급을 당했던 것에 대한 복수인 듯싶다.
마법이란 건 남자에게 동심을 품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비록 재주 수준에 불과하겠지만 마법은 마법이다.
이에 고개를 뒤로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개인적인 대화를 막 끝냈는지 세실리가 서 있었다. 마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 98 화 >
세실리가 싱긋 웃으며 묻자 오른팔에서부터 오소소 돋아난 오한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체내에 흐르는
피가 싸늘하게 식으며 몸이 꽁꽁 얼어붙는 느낌이다.
'뭐지? 대체 누가...'
세실리는 아르웬에게 이 분이 아니라 '이 분들'이라 칭했다. 하지만 내 곁에는 아르웬 한 명밖에 없다.
내가 모르는 척 하자 세실리가 야릇한 비음을 흘리며 샐쭉 웃었다. 그러면서 아르웬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팔짱을 끼며 흥미롭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아르웬은 오늘 처음 만났을 뿐더러 세실리는 그녀가 엘프임을 이미 눈치채고 있다. 나로서는 딱히 대답할
거리가 없었다.
저벅-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기묘한 대치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세실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르웬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굳이 자기가 헬리움의 공주임을 드러낼 필요를 느끼지 못 했는지 간단하게 이름만 밝힌 세실리다.
그래도 은연 중에 흘러나오는 기품과 카리스마로 하여금 그녀의 신분이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웬이라 불러다오."
과거를 기준으로 엘프는 인간을 하등종족으로 보았다면 마족은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보았으니까.
천사의 후예인 엘프와 악마의 후예인 마족. 이것만 봐도 사이가 어떤지 각이 나온다.
서로가 품고 있는 기운이 상극에 상극이다보니 가까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불쾌함을 느낀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다.
아무래도 저건 먹기 힘들 것 같...
"얌."
"... ..."
약간 무례한 행동이긴 했지만 아르웬의 귀여운 외모가 그 부분을 가려주어 특유의 귀여움을 증폭시켰다.
나는 세실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때까지 본 아르웬의 성격은 절대 나쁘지 않았으며 반대로
생각이 깨어있다.
아르웬은 가슴 중앙에 오른손을 올리며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우아하면서 자애로움이 묻어나오는
인사였다.
그러고 보니 엘레나 교수가 언급한 적이 있다. 추천 학생으로 역사학에 입문한다면 자신이 알븐하임의
성지로 데려갈 것이라고.
"아쉬워?"
"...조금은요?"
"저 분이 마음에 들었나보네."
"취미도 비슷하고 엘프치고는 생각이 열려있었거든요. 그리고 마법도 보여줬..."
세실리는 마족, 그것도 다음 대 마왕으로 예정되어있다. 그러니 마법에 관해서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을 터.
스윽-
그에 내가 의문을 품으며 세실리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
"대체 뭐를... 으헉!"
슈욱!
왜냐하면...
결국 30 분 동안 하늘을 날아다녔다.
*****
아이작과 헤어진 아르웬은 그 이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작품을 관람했다. 그녀의 손에는 아이작이 대신
사줬던 딸기 사탕이 쥐어져 있었다.
레인의 말마따나 현재 세실리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지극히 위험했다. 원래 마족은 평상시에 인간과 별
반 다를 바 없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지만 이건 종족을 불문하고 느껴지는 것이고, 마족과 상극인 엘프는 보다 더 세밀하게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세실리에게서 풍기는 검은 마나의 농도는 악마보다는 아니지만 약간 위험한 수준이다. 경계할
필요는 있다.
이 세상에 극히 드문 빨간 머리와 황금색 눈동자로 하여금 그 얼굴을 아른거리게 만들었다. 모처럼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없었던 그녀에게는 신선한 경험을 선사했다.
세실리가 헬리움의 공주라는 건 아르웬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세실리도 자기가 누구인지 얼추 짐작한
것 같고.
아르웬은 두 남녀의 관계가 어떻게 돼 있는지 고민하다가 레인을 힐끔거렸다. 레인은 여전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다.
< 99 화 >
갑작스레 중력이 사라진데다가 세실리가 장난이랍시고 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손가락을 요리조리 움직이니 놀이기구를 탄 것마냥 내 신형이 상하좌우 가리지 않고 요동쳤다.
"우욱..."
"미안해. 그... 괜찮아?"
그녀의 설명처럼 검은 마나는 악마의 전유물이다. 성직자들이 쓰는 신성력과 완벽히 대치되는 기운.
신성력이 마족을 제외한 모든 종족에게 이로운 효과를 준다면, 검은 마나는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악영향을
끼친다.
"그럼 아까 그 마법은..."
"레비테이션(Levitation)은 회복 마법처럼 체내에 마나를 흘려보내는 방식이 아니라서 그래."
그러기 위해서는 세실리처럼 마법에 조예가 깊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세실리는
마족이다보니 공식보다는 이런 이런 느낌이다~ 라는 식으로 설명해줄 것이다.
그녀도 딴에는 재미있는 장난을 쳤다가 이렇게 됐으니 죄책감을 느낄 터. 나는 괜찮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억지 웃음을 지었다.
"...토할만도 하네."
상냥하고 따뜻한 그녀의 손길 덕분인지 상태가 호전된 것 같았으나 어지러움은 미약하게 남아있었다.
마리의 말마따나 본래 축제의 진정한 시작은 해가 떨어지고 나서다. 지금도 시끌시끌하지만 저녁이 된다면
이 분위기는 한층 더 달아오르겠지.
전시된 작품도 저녁에 관람해도 상관없다. 하이라이트가 따로 있을 뿐 전시된 작품은 그대로 남아있어
소외되지 않는다.
살짝 어지럽긴 해도 저택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면 회복될 것이다. 그동안 이번에 새로 구매한 책을
읽어도 된다.
그런데 얘가 모르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몰라도 내 팔을 가슴 쪽으로 잡아당긴다. 덕분에
찹쌀떡 같이 말랑말랑한 감촉이 생생히 전달되었다.
그래서 부끄럽냐고?
그래도 예의상 말은 해야겠지. 나는 거의 가슴골 사이로 파묻히기 직전인 내 팔을 느끼면서 마리를 조용히
불렀다.
"마리?"
"응?"
"좀 많이 느껴지는데."
"남자들은 이런 거 좋아한다며?"
"흐응."
내 예상과 달리 세실리는 색기가 가득한 비음을 흘리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눈매 또한 장난기가 들어간 게
여러모로 불안감을 자극시켰다.
"이렇게 하는 거야?"
뭉클-
"야! 너 그 손 놓지 못 해?!"
"왜에? 나도 너처럼 장난치는 건데?"
"이건 연인끼리나 할 수 있는거야. 지난 번 행사에서도 인내심 테스트라면서 그러더니!"
"그때는 그런 거고 지금은 그냥 장난친 건데? 네가 자꾸 옆에서 그러니까 못 참겠잖아."
"이...!"
마리와 세실리 사이에 스파크가 튀기는 건 착각일까, 아니면 보는 그대로일까. 문제는 그 사이에 내가
있다는 것이다.
고개를 아래로 내린 탓에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더불어 질식하기 직전인 내
팔이 사이에 끼여있다.
이다음에 시선을 더욱 위로 올리니 세실리의 요망한 얼굴이 보였다. 점점 더 빨갛게 변해가는 두 개의
뿔까지.
'진짜 호강하는구나...'
"아이작. 너 이리 따라와."
"왜?"
"...아니다. 그냥 여기서 깨물어야지. 앙!"
"악!"
*****
"후우."
나는 속을 달래기 위해 찬물을 마시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하늘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경험은 처음이었던
탓에 생각만 해도 어지럽다.
"읏차."
이렇게 걱정해서 뭐 하겠나.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걸어갔다.
저녁 식사까지 개인 휴식 시간이니 그때동인 책이나 읽으면서 여가를 보내면 된다. 때마침 서점에서
구입한 도서가 있으니 그걸 읽으면 될 터.
똑- 똑- 똑-
그러고보니 저택에 들어오기 전 세실리는 잠깐 침실에 방문해도 되냐고 나에게 부탁한 적이 있다. 나는
딱히 상관없었기에 기꺼이 허락했고.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할게."
덜컥-
출입 허가가 떨어지자 세실리는 문을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호위 기사인 가르츠는 어디로 갔는지
몰라도 혼자였다.
허리를 숙이니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는 서랍이 보였는데, 나는 늘 갖고 다니는 열쇠를 이용해 가볍게
해제했다. 이어서 서랍을 개방하자 시간이 흘러 변색된 원고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나. 이거 한 번 보실래요?"
"이건..."
"제논 일대기 초고들이에요. 누나라면 좋아하실 것 같아서."
"아...!"
"...네."
설령 그것이 세실리라 해도 말이다. 마족인 그녀가 초고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거라 생각은 안 하지만
시기가 일러도 너무 일렀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성급했네요."
세실리는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평소의 모습과 완전히 딴판이라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지금은 시기가 시기인지라 어쩔 수 없죠. 마족에게 이 초고의 가치가 어떤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여러모로 걸리는 점이 많거든요. 누나도 대충 알고 있죠?"
"네. 하지만 우리 마족은 결코 이 초고를 이용하지 않을 거예요. 제논 일대기는 우리들에게 신이
내려주신 구원과 같은 것. 그리고 이 초고는 신이 내려준 성물이나 다름없어요."
"크흠..."
그동안 세실리는 아쉽다는 눈길로 초고를 살펴보다가 다시 나에게 반납했다. 반납된 초고는 서랍에 넣고
자물쇠로 단단히 봉인시켰다.
더군다나 출판사에서도 초고를 성능이 좋은 금고에 보관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째로 털렸다고하지 않았나.
그정도 실력이면 어줍잖은 금고는 모두 의미가 없다.
리나와 레오르트는 전과가 있어서 맡기기 껄그럽고, 테르스 왕국은... 정치는 몰라도 인성이 별로라서
싫다.
마리의 가문, 레킬리스에게 맡겨도 그 위에 황족이 있으니 분란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 레킬리스 가문도
그 점을 우려하여 초고를 다른 곳에 맡길테고.
무엇보다 마족은 인간보다 수명이 훨씬 길다. 내가 죽고나서도 세실리가 보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세실리는 내 대답을 듣고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뭇 남성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아리따운 미소였다.
그만큼 인간의 악랄함이 때로는 악마보다 더하다는 상징적인 짤이다. 실제로 천사와 악마는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다는 속설이 있다.
늘 언급했지만 수명은 신이 정해준 운명이나 다름없다. 인간은 100 년조차 오래 산 것이며 엘프는
기본적으로 300 년은 훌쩍 넘는 수명을 자랑한다.
'엘리샤도 그럴거고...'
제논의 스승, 카이르의 죽음 이후로 엘프 여왕 엘리샤는 큰 비탄에 빠진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나 표현을 하지 못 했다는 후회가 사무쳤기 때문이다.
나는 잠자코 대답을 기다리는 세실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 속에는 긴장과 염려가
담겨있었다.
"누나의 말대로 수명은 신이 정해준 거예요. 서로가 사랑해도 헤어지는 건 어쩔 수 없죠. 인간은 몰라도
엘프는 그 부분을 두려워할 거고요. 어찌 보면 인간이 이기적이라 할 수도 있죠."
"...그럼 포기해야하는 걸까요?"
내 대답에 세실리가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카이르와 엘리샤가 이어지지 못 한다는 게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녀는 카이르와 엘리샤의 비극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며 고민하게 되지만, 이윽고 마음을 다잡으며
제논에게 다가간다.
제논도 아버지나 다름없던 카이르의 죽음에 슬퍼하던 와중에 메리의 고백을 듣게 된다.
"그리워하면 돼요."
"... ..."
"평생을 후회에 묻혀서 사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헤어짐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짧은 시간을 행복한 그리움으로 채울지, 아니면 슬픈 후회로 채울지 정하는
건 본인의 몫이에요. 그래도 저라면 그리움을 선택할 것 같네요."
"...은인다운 대답이네요."
끼익-
어느새 문까지 도달한 세실리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고정돼 있었다.
탁!
문이 굳게 닫혔다.
< 100 화 >
주로 건국제처럼 특별한 의미가 붙어있는 축제가 그러는 편이고 규모가 다른 축제에 비해서 월등히 큰
편이다.
활기가 강해지는 이유도 일종의 착각에 가깝다. 많은 사람들은 고된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밤에 숙면을
취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락한 보금자리는 물론, 안식에 빠져들 고요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밤은 조용하다'
라는 인식이 사람들 머릿속에 기본적으로 박혀있다.
하지만 이러한 밤 중에도 축제가 계속된다면? 고요하기는커녕 시끄럽다면? 오히려 낮보다 더 강렬하고
재미있는 공연이 펼쳐진다면?
이렇듯 큰 규모의 축제의 진면목은 저녁이 되어서야 드러나고,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공연들도 밤부터
시작된다.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된 마을의 입구. 브리스와 니콜이 북적거리다 못해 사람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마을의 풍경에 하나 둘 씩 말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눈치채지 못 했다. 그녀는 엘프와 인간의 사이가 아닌, 장수종과 단명종의
사랑에 대해 질문한 것이었으니.
이후로 그녀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침대가 넓다니 뭐니 하는 건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설마 진짜로?'
"아이작."
"... ..."
"아이작?"
"...네?"
"무슨 생각을 하길래 표정이 굳어있니?"
어머니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중이다. 보라색 눈동자 속에는 자식을 향한 걱정이 뚝-
뚝- 묻어나왔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쓴웃음을 흘렸다. 가족이 다 있는데도 딴 생각을
하다니, 나도 참 못난 자식이다.
어머니의 상냥한 말씀에 고개를 돌려 마을의 풍경을 둘러봤다. 낮에도 비슷한 질문을 들어본 것 같은데
저녁이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축제로 정신없는 마을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고민했다. 엘레나 교수에게 추천 학생으로 등록된 이상,
사실상 2 학년부터는 역사학에만 집중하면 끝이다.
그러니 2 학기가 끝나고 난 이후부터 시간이 널널하다는 의미인데, 그때부터 연재해도 큰 문제가 없다.
내가 연재를 중단한 이유는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으니까.
무엇보다 내가 쓴 제논 일대기를 위한 축제를 두 눈으로 직면하자니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엘프 측에서 멋진 인물이 등장할 예정이라서 집필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생각해볼게요."
"정말이니?"
"정말로?"
"진짜?"
내가 그리 답하자 어머니 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도 화들짝 놀라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적잖이 당황하며
가족들의 표정을 하나 하나 훑어봤다.
아침에는 세실리와 마리, 이 셋이서 구경을 했다면 저녁에는 가족끼리 전시회를 즐기기로 계획했다.
마지막으로 아델은... 니콜이 괜찮다고 그녀를 데려오려고 했으나 부담스럽다며 거절했다. 지금쯤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전시회를 즐기고 있겠지만 걱정이 되는 건 여전했다.
혹여, 그 쓸데없는 미련 때문에 테르스 왕족에게 접근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녀의 눈물을 곁에서 지켜본
나로서는 걱정이 안 될 래야 안 될 수가 없다.
"자자. 이제 얘기는 그만하고 축제나 즐깁시다. 아버지, 공연 예약은 하셨죠?"
"넌 이 아비를 뭐라고 생각하는게냐? 이래보여도 이 영지를 직접 관리하는 영주다. 맨 앞에서 볼 수
있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니콜. 저기로 한 번 가보자. 화장품을 파는 것 같은데?"
"엄마. 전 화장에 관심 없는데..."
"얘는. 여자는 언젠가 꾸며할 때가 오는 법이야. 지난 번 네가 드레스를 입었을 때 얼마나 예뻤는지는
알고 있니?"
다행히 망나니처럼 굴진 않고 스스로 절제하고 있다는 걸까. 군대에서 뼈가 깎이도록 고생했으니 여자에게
시선이 갈만도한데 희한하게도 일체 눈길을 주지 않았다.
"어?"
레오르트, 리나 남매였다. 아침에는 보이지 않더니 저녁이 되어서야 축제에 참가한 모양이다.
외모와 더불어 고귀한 분위기가 은은하게 흘러나오다보니 그들의 공간만 따로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그들의 곁에 호위 기사가 붙어있으니 마냥 비유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그런데 얼굴이 많이 피곤해보이네.'
'공연 때 만나겠네.'
아무튼 이렇게 놀다보니 본격적인 축제의 시작이자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공연이 코 앞까지 다가왔다.
망나니처럼 노느라 정신없었던 브리스도 아버지에게 잡혀왔다.
건물을 세우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어쩔 수 없었으나 그래도 공연을 치루는 사람들은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오히려 무대가 넓어서 마음에 했던가.
나는 리루스 악단의 지휘자, 리루스가 나에게 넌지시 언질했던 것이 기억났다. 매트릭스 극단과
콜라보레이션을 이루어 환상적인 무대를 선보이겠다고.
"아이작!"
"마리?"
마리가 찾아오면서 내 양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가족들의 시선도 마리에게 향했다. 그녀는 가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어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아름답게 웃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그래. 축제는 충분히 즐겼니?'
"건국제만큼 정말 재미있는 축제였어요. 볼 거리도 엄청 많았고요."
"다행이구나. 가족들은?"
"저쪽에 앉아있어요."
마리는 바로 밑 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정말로 그녀의 가족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드넓은 평야 주위에 관람석들로 둘러쌓여있는, 진귀한 무대라는 뜻이다. 모든 축제가 끝나고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겠으나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신경 껐다.
현실남매의 투닥거림은 뒤로 하자. 나는 마리의 손길에 이끌려 그녀가 미리 봐두었던 객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히힛."
"... ..."
"둘이 좋아보이네."
"?!"
"읏차."
세실리는 우리가 당황스러워하는 도중에 내 옆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나와 마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마리는 세실리의 속삭임을 듣지 못 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세실리는 이제
더이상 숨기지 않겠다는 듯이 내 팔을 감쌌으며 어깨에 머리까지 기대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훈훈하고 달달한 장면처럼 보이겠지만, 문제는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바로 옆에 앉아있다.
아무리 세실리에게 호감이 있다고 한들, 이건 단호하게 대처해야 옳다. 마리가 실망할 수 있을 뿐더러
최소한의 예의다.
세실리도 내 단호한 지적에 뒤늦게나마 본인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뒤이어 그녀는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내 옆에 앉은 마리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녀에게는 호시탐탐 남자친구를 노리는 세실리가 요망한 여우처럼 보일 터. 더군다나 외모와 매력도
본인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뒤처지지 않아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이번만은 봐줄게."
그사이 마리도 진정이 되었는지 손부채질을 하며 자세를 바로세웠다. 뺨에 은은한 붉은기가 감도는 건
여전했다.
"우선 리루스 악단이 연주를 할 거야. 그 다음에는 매트릭스 극단이 연극을 할 거고."
"공연 시간은?"
"총 합쳐서 약 3 시간. 리루스 악단이 30 분에서 40 분가량 연주하고, 매트릭스 극단이 남은 시간동안
연극을 하겠지."
"리허설도 없이 괜찮아?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이런 공연은 리허설이 필수라고 들었거든."
"그렇긴 하죠. 그래도 리루스 악단에게 듣기로는 리허설을 충분히 했다고 말했으니 괜찮을 거예요."
"그럼 다행이긴 한데..."
"누나는 리루스 악단의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어요?"
그러니 세실리는 두 집단과의 접점이 없다는 뜻인데 말을 들어보면 예술에 조예가 깊어보였다.
"그건 아니야. 다만 헬리움 내에서도 악단이 있어서 어느 정도 상식은 가지고 있어. 리루스 악단이 세계
최고의 악단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그런데 왜 불안해하는 거예요?"
"만에 하나, 그들이 제 실력을 못 낼까봐 그래. 앞으로 리루스 악단이 연주할 음악은 사크란의
일생이잖아. 사크란의 일생은 우리 마족의 인생을 단편적으로 드러내줬지."
세실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것 같다. 리루스 악단이 연주할 음악의 내용은 사크란의 인생이다.
한 마디로 마족의 인생을 대변하는 거라 해도 무방하다. 세실리는 리루스 악단이 그 내용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까봐 우려하고 있다.
웃긴 상황에 구슬픈 음악을 추가해 그 상황이 더 재미있게 만드는 것처럼, 슬픈 장면과 대비되게 흥을
돋구는 음악을 넣어 왠지 모를 비극성을 더 강조시키는 것처럼, 음악은 오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무대를 빙자한 평야 위에는 앞으로 리루스 악단이 연주할 악기들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자연과 하나로
동화되어 있는 느낌이 운치 있고 보기 좋다.
게다가 황궁 쪽에서 무슨 마법을 펼쳤는지 몰라도 바깥의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마을에 축제가
한창인데도 말이다.
시간을 거의 짜내는 식으로 부랴부랴 준비했지만, 레오르트와 리나가 미친듯이 고생한 덕에 무난히 진행될
것 같다. 특히 건물을 세우지 않고 평야 자체를 무대로 임의로 지정한 건 그들의 센스가 돋보이는
선택이었다.
"아이작. 저기 좀 봐."
"응?"
고개를 돌리니 전에 봤던 리나와 레오르트, 그리고 테르스 왕족이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VIP 정도가 아니라 VVIP 급에 해당하는 인원들이니 우리보다 무대를 보기에 더 적합한 자리에
앉아있다.
가지각색의 매력을 뿜내는 그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리나가 이쪽을
쳐다봤다. 리나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눈에 살짝 크게 떴다.
나는 리나가 우리를 보자마자 말없이 손을 흔들어줬다. 리나도 옆에 앉아있는 레오르트와 테르스 왕족을
힐긋거렸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는 걸로 인사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가면을 써서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는 사람보다 처음부터 본심을 드러내는 사람이
훨씬 좋다. 그래서 내가 마리와 사귀는 거고.
"음..."
보아하니 리나가 마리를 배신한 정황이 있는데 괜한 트라우마를 자극할까봐 지금까지 안 묻고 있었다.
하지만 미래를 보았을 때 리나와 친분을 쌓는 건 나에게 좋으면 좋았지, 결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니 리나나 세실리 같은 권위자와 손을 잡아야하는 건 피할 수 없다. 마리의 가문이 레킬리스 공작이라
해도 나라 간의 다툼에 끼어들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나는 준비가 한창인 무대에 시선을 고정시킨 마리의 옆모습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마리."
"응?"
"축제가 끝나면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할 이야기가 있거든."
다행히 세실리는 악단이 준비되는 과정을 지켜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실제로 지금 무대에는 악기를
정비하기 위해 간단하게 연주 중이었으니 시선이 팔릴만도 하다.
멍한 얼굴 그대로인데 피부만 빨개지니 어딘가 고장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에게는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의문이었다.
내가 의문을 품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마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흰색 머리카락 사이로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귀는 붉어질 대로 붉어진 상태였다.
손으로 얼굴을 덮어서 웅얼거리는 탓에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하지만 내가 실수를 했다는 건 분명했다.
침실로 부른 이유도 어차피 부모님과 마리의 부모님이 계시니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실리도
그래서 침실로 부른 거고.
나는 마리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그녀를 연이어 불렀다. 허나 마리는 이거 놓으라는 듯이 어깨를 털며
마른세수를 하기 바빴다.
"신사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려셨습니다. 곧 있으면 리루스 악단의 공연이 시작될 예정이니 모두 자리에
착석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이에 고개를 앞으로 돌리니 말끔하게 정복을 차려입은 중년인이 무대 중앙에 당당히 서 있었다. 아침에
봤던 리루스 악단의 지휘자, 리루스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아이작."
"응?"
"'초대'는 받아줄게. 알았지?"
내가 꺼냈던 말은 '라면 먹고 갈래?'에 정확히 부합한 권유였다.
하지만 나는 사교계에 참석한 적도 없고, 대인관계도 비교적 최근에 가진 터라 기본적인 상식이 부족한
상태.
"알았어."
부모님과 함께 찾아온 아이들과 나이가 지긋하신 노부부, 그리고 모험가와 더불어 이종족들까지.
리루스 악단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는 막대한 가격을 지불해야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이들을 포함한
예술가들은 후원 형식으로 받는다고 미리 선언했다.
어차피 이번 연주도 팬아트 개념으로 작곡했겠다, 후원금을 문화계에 기부하면 그들에게 더 큰 명예를
안겨줄테니 좋은 선택이다.
나는 아직까지 꿍얼거리는 마리를 힐끔거렸다.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는 건지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있다.
하지만 집에서 배웠던 예법을 아무리 뒤져봐도 오해를 살만한 발언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냥 침실에서
커피나 한 잔 마시며 이야기를 좀 나누자는 것밖에 되지 않는데 말이다.
두웅!
천둥 소리가 무대 전체를 감돌자 시끌벅적했던 관람석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덕분에 남아있는 건 여전히
잔존해 있는 북의 울림 뿐.
리루스는 방금 전에도 그러했듯이 우렁찬 음성으로 또박또박 외쳤다. 마나로 음량을 증폭시켰는지
목소리가 무대 전체에 퍼져나갔다.
"여러분들께 제 연주를 들려줄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앞으로 제가 보여줄
공연은 제논 일대기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이죠. 그저 제 공연을 보기 위해 와주신 분도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이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기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장황하게 이어지는 그의 설명. 나는 원래 공연 전에 항상 이러는 건가 싶어 잠자코 듣다가 양옆을
힐긋거렸다.
어느새 진정이 되었는지 마리는 공연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중이고, 세실리도 마찬가지였다. 헬리움에서만
지내던 세실리보다는 마리가 좀 더 리루스 악단에 대해 알고 있을테니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마리."
"으, 응?"
소심한 목소리로 나에게 부탁하는 그녀.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진 마리를 바라보다가 손을
붙잡아줬다.
이전에 리루스는 사크란의 최후를 보고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니 그가 앞으로 보여줄
곡은 사크란의, 그리고 마족의 인생을 드러내줄 터.
예상이지만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가 특징이지 않을까 싶다. 마족에게 미안한 말일 수도 있지만 마족은
어둠이 잘 어울리는 종족이니까.
공연의 분위기가 어떤지 예상하고 있을 쯤, 리루스가 관람객들로 하여금 혼란을 주기에 충분한 발언을
꺼냈다. 이로인해 관람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기나긴 설명이 끝나고,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려는 조짐이 보였다. 나는 마리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눈에
힘을 주고 귀를 열었다.
딱!
그러다 갑자기 세실리 쪽에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세실리를 바라봤다.
리루스는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한 번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있었다. 무대가 떠나갈 듯한 박수 소리가
이어지고, 리루스는 빙글 몸을 돌려 본인의 악단을 바라봤다.
그리고...
우우웅-
마족의 인생을 표현했다는 본인의 말처럼, 현악기 중심의 어둡고도 엄숙한 분위기의 곡이었다. 중간중간
울리는 북소리가 심금을 울렸으며 애잔함마저 느껴졌다.
마족은 삶 그 자체가 투쟁인 수인처럼, 자기자신과 평생을 싸워야 하는, 그런 숙명을 지니며 태어났다.
곡을 들으면 들을수록 녹음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무럭무럭 차올랐다. 곡이 내 취향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도 있지만, 제논 일대기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는 부분이 가장 컸다.
전생에서도 마음에 드는 bgm 이나 ost 를 휴대폰에 저장하고 다녔는데 리루스 악단의 연주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다.
결국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하나는 잊지 않도록 기억하는 것과, 다음에도 리루스 악단을 우리 영지로
부르는 것.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자주 잊어버리는 내 기억력 한계상 전자는 거의 불가능하고, 남아있는 건 사실상
후자밖에 없다.
그리고 비극적인 운명으로 태어난 것처럼, 대부분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하는 게 대부분이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며 전반적으로 곡 전체의 분위기가 음울한 이유도 이때문일 것이다.
"...훌쩍."
"... ..."
"훌쩍... 흐윽..."
다행히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아 몰골이 꼴사납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충격을 선사하기에는
충분했다.
'뭐... 뭐지...'
설마하며 마리에게 고개를 돌렸으나 그녀도 세실리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을 뿐이지, 울먹이면서 연주를
감상하는 중이었다. 이밖에도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니 하나 같이 눈이 촉촉해졌거나 훌쩍이며 코를 먹고
있다.
오직 나 혼자만 태연하게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는 뜻이다. 중세 시대의 감성인지 아니면 나만 감수성이
메마른 것인지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곡은 분명히 좋은데... 이게 울만한 일인가?'
끼이이익...
맛보기라는 말처럼, 그 뒤에 분명히 뭔가가 있는데 일부러 끊은 듯했다. 그 이유는 음도 음이지만 악단의
곁에 있는 '성악대'의 존재다.
성악대는 공연 시작부터 끝까지 입 하나 벙긋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리루스 악단이 그들을 괜히
앉혀놓지 않았을테니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짝짝짝짝짝!!
나는 자국이 생기기 시작한 세실리의 옆모습을 응시하다가 주머니를 뒤적거려 손수건을 꺼냈다.
당연하지만 아델리아에게 줬던 손수건이 아닌 새로운 손수건이다.
"누나. 여기요."
"훌쩍... 응?"
"아... 고, 고마워..."
세실리는 내가 손수건을 보여주자 창피하다는 듯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내 손에서부터 손수건을 가져간
뒤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이윽고 리루스 악단의 뒷편, 그러니까 평야의 중앙 쪽에서 새까만 무언가가 발견되었다. 적절하게도
조명이 그쪽을 비추었던 터라 더욱 상세히 볼 수 있었다.
"끄... 끄아아악..."
바닥에 엎드려 꿈틀거리던 사람이 괴로워하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도통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
눈만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뭐, 뭔데.'
꾸득! 꽈득!
"으아아아악!!!"
"씨발. 뭐야, 저건."
괴인이 등 뒤로 악마의 날개를 드러내면서 괴성을 지르자 결국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시도했다.
촤악!
"아아아악..! 커윽!"
그를 비추는 조명 뒤의 어둠에서, 커다란 낫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그의 목을 낚아채듯이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자연히 악마로 변하던 남자의 신형은 조명 뒤로 사라졌으며 조명이 비추는 원 안에는 그 누구도 서 있지
않았다. 오직 그 곁에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있을 뿐.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악마로 변하는 남자의 등장도, 그의 목을 낚아챈 거대한 낫의 등장도.
'...저게 다 연출이라고?'
예고편 하나 굉장하다.
하지만 방금 전 예고편 형식으로 보여준 무대는 결코 가극이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조차도 10
점 만점의 10 점을 줄 수 있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연출력이었다.
평야 중앙에 난입한 남자가 괴성을 지르더니 점점 악마의 형상으로 변하고, 머지않아 날개가 완전히
돋아났을 때 어둠 속에서 거대한 낫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그의 목을 낚아챘다.
마지막으로 특정 인물의 등장을 암시하는 기도문까지. 아무리 판타지라지만 연출 하나는 전생과 비교했을
때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았다.
어쩌면 극단에게 마이크 같은 장비가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아카데미 입학식에서도 단상에 마이크가
배치되어 있었으니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
매트릭스 극단의 뛰어난 연출력은 비밀에 부쳐져 있다. 게다가 극단 감독의 정체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대리인을 내세우는 편이다.
실제로 우리 저택에 방문했던 사람도 대리인이었지 리루스처럼 책임자는 아니었다. 책임자는 어디 있냐고
물으니 감독님은 사람과 만나는 걸 꺼려한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이러한 신비주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중이었다. 당장
나조차도 시대를 한참이나 앞서나간 연출력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한 마당에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어디 가?"
"어디 가니?"
객관적으로 보아도 아름다운 내 여자친구가 방실방실 웃으며 애교를 부리는 걸 본다면 그 누구라도 참기
힘들겠지만, 난 그 어려운 걸 해냈다.
뒤이어 화장실을 빠르게 갔다 와서 볼일을 해결한 후에는 마리와 함께 공연동안 마실 음료수를 고르기
시작했다. 음료수를 고르는 동안 매트릭스 극단에 대해 묻는 건 잊지 않았다.
오늘이 특이한 게 아니라 늘 특이했던 모양이다. 나는 새삼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의 정체가 더 궁금해졌다.
현재 그녀는 벤치에 앉아있었는데, 무언가 고민이 되는지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고심하는 중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작?"
"잠깐만."
오지랖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호의를 보여준 사람을 무시하고 지나칠 정도로 매정하지는 않았다.
"아르웬?"
"...응?"
내가 혹시나 하며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던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은회색 눈동자와
소녀처럼 앳된 얼굴을 보아하니 아르웬이 확실하다.
그래도 관람석의 구조가 평평하지 않고 위로 점점 올라가는 식이라 아르웬처럼 단신의 사람들도 공연을
무리없이 시청할 수 있다. 처음에는 평평하게 지을 뻔했다가 설계자의 센스 덕분에 참사를 방지할 수
있었다.
이윽고 마리에게로 돌아가자 어딘가 불만으로 가득찬 그녀와 만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아르웬과
대화를 나눴던 것이 불만인 모양이다.
마리는 내 물음에 여전히 벤치에 앉아있는 아르웬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매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하가야 세실리도 참가 의사를 밝히지 않고 가르츠와 함께 우리 영지를 방문했다. 아르웬도 그녀와 비슷한
상황일지도 모르지.
이후로 VIP 석으로 돌아오고,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콜라보레이션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리루스 악단은 여전히 무대에 올라가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위치가 살짝 아래로 내려와 관람석과 가까이 붙었다는 걸까. 그와 더불어 잠깐 휴식을 하는
동안 무대를 정비했는지 반투명한 막 같은 것이 무대와 관람석을 갈라놓았다.
콰앙!
"... ..."
심지어 마력을 사용하는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땅바닥이 파이는 건 물론이고, 무기와 무기가 서로
부딪히자 큰 폭음과 함께 커다란 푸른빛 폭발이 일어났다.
다행히 보호막 덕분에 관람석까지 영향이 끼치지는 않았지만, 정말이지 극한의 리얼리티를 추구하고 있다.
'쩌... 쩐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팝콘이라도 들고 올 걸.
*****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은 조금 전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 착석하여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그런데...
[확인할 게 있다니?]
그녀가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레인은 어딘가 들떠있는 듯한 억양으로 아르웬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보험은 들어놨으니까...'
어떻게 분장을 했는지 몰라도 내가 삽화로 추가했던 모습과 완벽히 일치했다. 특히 진은 진짜 마족이라도
섭외했는지 눈동자의 색이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렌즈 같은 게 있나 싶을 정도다.
마지막으로, 매트릭스 극단의 근본이자 아이덴티티 자체인 연출력. 연기력과 분장은 다른 극단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연출력만큼은 어찌하지 못 했다.
채앵! 챙!
"우와..."
연무장에서 봤던 대련처럼, 보호막 너머로 제논을 연기하는 배우와 사크란을 연기하는 배우가 서로
치열하게 전투를 치루고 있다.
제논의 검이 화려하게 움직여 사크란을 압박하고 있다면, 반대로 사크란의 거대한 낫은 간결하지만 한 방
한 방이 위협적이었다.
실제 전투 상황을 방불케하는 모습이 펼쳐지자 나는 저들이 얼마나 준비를 열심히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저 합을 하나 하나 맞추기 위하여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못할 연습을 했겠지.
원작에서도 사크란은 어딘가 꺼림칙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설정이 있다. 그걸 고스란히 투영시킨 극단의
정성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우우웅-
하지만 이뿐만이 아니다. 이 무대는 리루스 악단과 매트릭스 극단의 콜라보라는 걸 증명하듯, 주요
장면마다 리루스 악단이 음악을 연주했다.
세계적인 거장 둘이서 하나의 작품을 위한 공연을 펼치면 어찌 되는지, 현재 이들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공연은 점점 하이라이트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악마측 세력의 계략으로 마족의 나라, 데빌즈
전체가 어둠에 먹힐 뻔한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이다.
그곳에서 사크란은 그간 쌓아놓았던 경험과 혜안을 통해 어둠이 발생하는 지역에 먼저 도달하고, 그곳에서
개떼처럼 쏟아져나오는 악마들과 사투를 벌인다.
제논 일행도 마찬가지로 사크란과 악마 사냥꾼을 돕지만, 어둠은 걷잡을 수없이 커져가고 결국 사크란이
큰 결단을 내리게 되는 식인데...
"...저거 진짜 마법 아니야?"
"그런 거 같은데?"
개떼처럼 몰려오는 악마를 어떻게 묘사할지 기대를 했는데 정말로 그대로 구현했다. 평야 뒤쪽 전체가
구멍 뚫린 것처럼, 거대한 검은색 소용돌이가 발생하더니 그곳에서 문헌에서만 보던 악마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다만 한계 때문인지 소설처럼 '하늘을 가득 메웠다'라 묘사만큼 많지는 않았고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 소용돌이 하나만으로도 무대 전체를 집어삼킬만큼 거대했다.
"저거 진짜 마법이잖아?"
"저게 진짜 마법이라고요?"
"응. 일종의 환영 마법이야. 대상자가 원하는 환영을 만들어내 실체처럼 움직이는거지. 하지만
환영이다보니 일정량의 충격을 받으면 소멸돼. 지금처럼."
세상은 넓고 이상한 사람은 많다지만 저 마법을 발현한 마법사는 분명 여러모로 독특한 사람인게 분명하다.
옆에서 세실리가 작게 중얼거리며 심상치 않음을 표했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니 무언가 감이
잡힌다는 듯, 손가락으로 볼을 툭- 툭- 두르리고 있다.
"끄으으윽... 흐아아아악!"
둥! 둥! 둥!
사크란이 소용돌이를 흡수하기 시작하자 긴장함을 추가하듯, 커다한 북소리가 울려퍼졌다. 원작자인
나조차도 긴장되는 순간인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털썩-
"사크란 씨!"
"사크란! 자네 괜찮은겐가!"
소용돌이의 모든 기운을 흡수한 사크란이 무릎을 꿇었다. 악마들과 혈투를 펼치던 다른 일행들은 사크란이
쓰러지자 서둘러 그에게 달려갔지만...
"오지 말거라!"
모두가 숨을 죽이며 사크란이 서서히 악마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던
사크란이 서서히 등을 돌렸다.
마지막 명령이라는 말에 마음을 굳게 다잡았는지 무기를 꽉- 말아쥐는 제논과 사냥꾼들. 그들의 표정에는
긴장과 결의, 그리고 안타까움과 비통함이 골고루 섞여있다.
한때 스승이었던 자를, 동료였던 자를, 그리고 마족을 위한 일생을 바쳤던 자를.
"모르페시여..."
"우리를 구원해주소서."
사크란은 기도문 다음으로 일행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조금이라도 싸움을 늦추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아직까지 내면의 어둠과 투쟁을 벌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으나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으아아아아!"
"안 돼! 크로트!"
푸악!
따로 확인할 것도 없이 즉사였다.
휘익- 쿠당!
사크란은 쓰레기를 버리는 것처럼 팔을 휘둘러 사냥꾼을 내팽겨쳤다. 사크란의 팔에 꿰뚫렸던 사냥꾼의
시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제논은 아니다. 그는 딱딱해진 표정으로 사크란을 바라보다가 발을 떼었다.
"제논..."
"... ..."
보라색 머리의 여인, 메리가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지만 제논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벅- 저벅- 걸어갔다.
누구보다 인간적이었던 사크란에게 안식을 전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눈 앞의 강력한 악마를 막기 위해서.
"모르페시여..."
우우웅-
그와 동시에 연주되는 리루스 악단의 음악. 놀랍게도 리루스 악단이 선보였던 '인생'의 도입부이자
마지막 부분이다.
현악기의 구슬픈 음이, 사크란과 더불어 마족이라는 종족 전체에 대입되어 엄숙하면서도 애잔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족의 비극성을 더욱 강조시키며 짜릿한 전율을 일으켰다.
사크란의 무기가 다른 것도 아닌 거대한 '낫'인 이유도 제논의 마음과 비슷했다. 사크란은 악마로 변한
마족을 악마가 아니라 인간으로 생각했다.
'...하 씨. 우는 건 좀 부끄러운데.'
영화를 방불케하는 장면들이 속속 이어지다보니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걸까. 리루스 악단의 인생,
그리고 사크란과 제논의 전투가 눈 앞에 펼쳐지자 울컥했다.
실제로 연주에 묻혔지만 곳곳에 흐느낌이 들리는 중이다. 나는 콧잔등을 꾹- 눌렀다가 세실리의 반응을
확인했다. 음악만 들었는데도 눈물을 흘리던 그녀다.
그러니...
"끄흑흑흑... 흐엉..."
"... ..."
"너무... 너무 슬프잖아... 끄흑..."
아예 통곡 수준으로 울고 있구나.
'...그냥 놔두자.'
나는 다시 공연에 집중했다.
*****
모두가 사크란의 비애에 흐느끼거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마음 같아서는 세실리의 옆자리에 앉아 구경하고 싶었으나 리퍼는 언제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지켜야하는 법. 그래서 관람석이 아닌 마법을 통해 하늘에 둥둥 떠다니면서 공연을 관람하는 중이었다.
"...슬프군."
감정이 메말라 보이는 사람이어도 결국 그도 마족. 가르츠는 사크란과 제논의 전투, 그리고 구슬픈
연주가 이어지자 눈꼬리에 맺혀있던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마족뿐만 아니라 공연을 지켜보는 사람들 대부분이 흐느끼거나 슬퍼하고 있다. 그만큼 공연의
연출력과 전달력이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음?"
가르츠는 저택에 설치했던 방범 마법에 누군가 포착되자 표정을 싹- 굳혔다. 감지된 것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누군가 침입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개 같은 새끼."
마이샬 저택에는 황궁에서 파견나온 기사단이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며 경계하는 중이다. 전시회가
마이샬 영지에 개최되는만큼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비록 소수의 인원이 저택을 지키고 있으나 그들은 레오르트, 리나 남매가 직접 지목하여 파견을 보낸
기사단.
특히 코 앞에서 축제가 벌어지는데 본인들은 저택을 수호해야하니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몸을 숨기는 것 정도가 아니라 공간과 하나로 동화되어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숙련된 다크
엘프의 은신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인간 기준으로 최소한 기사단장급 능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것조차 '감지'하는 거지, 다크 엘프는 한 명 한 명이 산전수전 거친 노련한 전사들이라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이곳도 아닌가?"
이번 아르웬의 호위로 나오게 된 다크 엘프, 레인은 자기가 조사했던 서류를 모두 원래대로 되돌리면서
의문을 표했다.
아이작과 마리가 서로 대화를 나눴을 때다. 아이작 딴에는 속삭이듯이 말했으나 기본적으로 감각이 뛰어난
다크 엘프에게는 생생하게 들렸다.
인간치고는 준수한 외모와 뛰어난 지식을 자랑했지만 아르웬에게 비빌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작과 친분이
있던 것으로 추측되는 마족이 가장 신경 쓰였다.
과연 저 인간에게 무엇이 있길래 저만한 강자가, 그것도 제논 일대기 출간 전까지 악마로 차별받던 마족이
붙어있는 것일까.
그러니 레인으로서는 반성의 의미로 어떻게든 증거를 찾아야한다. 증거를 찾게 된다면 몰래 훔친 초고를
돌려줄 수도 있을 뿐더러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지니까.
물론, 초고는 확인만 하고 훔치지는 않을 것이다. 호되게 혼난만큼 제논 일대기의 초고가 어떤 파급력을
지니고 있는지 몸소 실감했기에 어리석은 선택은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
다행히 저택의 경계는 레인의 기준에서 허술한 편이었다. 방범 마법이 깔려있었지만 다크 엘프의 힘을
이용하면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이다음은...'
이윽고 레인은 재차 서류를 조사하다가 제논 일대기와 관련된 건 없다고 확신. 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파앗!
'여기에는 없을 것 같네.'
부부가 아닌 한 사람이 머무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간소한 외양이 특징적이었다. 게다가 은은하게
남아있는 퀴퀴한 책 냄새와 남자 특유의 체향이 코를 찔렀다.
레인은 아이작만 만났지 그의 형제 브리스는 만나지 않았지만 책 냄새가 진동하는 걸 느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특히 이건 아르웬에게서 나던 체향이었으니 분명하다.
이어서 그녀는 흥분된 마음으로 방 내부를 둘러봤다. 침대와 화장대, 그리고 책상은 작은 편이었으나
책장이 무수히 많았다.
자연히 책들도 다른 방들에 비해서 무수히 많았다. 레인은 아이작이 아르웬처럼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그럼 남은 건...'
그래서 정말 이곳에 있는지 의심이 갔지만, 차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자물쇠로 봉인되어
있어서 해제하기도 쉽다.
딸깍-
이제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 서랍장.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가 서랍장을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한가득 쌓여있는 원고지를 발견하자 레인의 만면에 미소가 새겨졌다. 설마설마했는데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레인이 잔뜩 흥분한 심정으로 맨 위에 있는 초고를 꺼냈다. 최근에 발간된 카이르 외전의 도입부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콱!
"케흑!"
부지불식간 누군가 그녀의 뒷덜미를 낫처럼 낚아채 바닥에 꽂아버렸다. 레인은 미처 인지하지도 못한 채
단말마를 지르며 땅바닥과 키스할 수밖에 없었다.
'마, 말도 안 돼. 대체 누가...'
그녀가 어떻게든 자신을 제압한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레인을 제압했던
사람이 작게 읊조렸다.
"그 엘프 곁에 있던 녀석이었군."
"크으으..."
"네놈들은 남의 저택을 터는 취미라도 있는건가?"
복면으로 입 부근을 가리고 있었으나 잔뜩 찡그린 미간으로 하여금 그가 얼마나 불쾌해하고 있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기습을 통해 레인을 손쉽게 제압한 가르츠는 텔레파시를 통해 세실리에게 전언을 보냈다. 세실리는
침입자가 나타났을지 마음대로 처리해도 된다 지시했으나 다크 엘프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 엘프 여왕 곁에 있던 아이죠?]
가르츠의 보고에 공연에 집중하고 있던 세실리가 답변을 보냈다. 그녀도 아르웬이 알븐하임의 여왕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왜 그 저택에 침입했는지,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들어왔는지만 캐내고 발락 경이 알아서 처리하세요.
이건 엄연히 그쪽에서 잘못한 것이니 아무 말도 못 할테니까.]
[알겠습니다.]
[아. 대신 저택에서 처리하지는 말고 밖에서 처리해주세요. 괜히 피가 튀면 그 분께서 의심을 품을지도
모르니까.]
세실리는 전적으로 가르츠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간단한 지시만 내리고 다시 공연에 집중했다. 곧
있으면 하이라이트가 펼쳐지기에 정말 급한 일이 아닌 이상 저택으로 갈 일이 없었다.
가르츠도 세실리와의 연락이 끊기자마자 레인을 내려다봤다. 현재 그녀는 힘이 모두 빠져서 저항을 멈춘
상태였으며,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어린 아이가 처연하는 떠는 모습은 동정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했지만, 가르츠에게는 의미가 없다. 마족과
더불어 다크 엘프처럼 주변에게 배척받는 존재들은 어릴 때부터 살생을 저지르는 일이 태반이다.
그러니 레인을 어린 아이로 볼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전사라 보아야 옳다. 아쉽게도 경험이 뼈저리게
부족한 탓에 이 꼴이 났지만 말이다.
뒤이어 초고를 한 줄 한 줄 읽은 가르츠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발간된 카이르 외전도
읽었기에 이것이 어떤 초고인지 눈치챈 것이다.
그래도 마족에게 소중한 보물인 건 변하지 않아 초고를 가지런히 바닥에 놓았다. 이 검은 귀쟁이 놈을
처리한 뒤에 다시 돌아와 정중하게 돌려놓을 계획이다.
이것만큼은 대답하기 싫었는지 망설이는 레인. 그와 동시에 가르츠의 눈매가 사나워지며 허리춤에
걸려있던 단검을 꺼내들었다.
레인은 단검이 달빛에 반사되어 눈을 찌르자 기겁하며 모조리 실토하기 시작했다. 옛날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았던 그녀지만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는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가르츠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두려움에 떠는 레인을 바라보다가 단검을 허리춤에 꽂았다. 일단 저택에서
빠져나와 으슥한 곳으로 이동한 뒤 처리할 계획이다.
시잉-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가르츠의 목덜미에 은빛 단검이 겨누어졌다. 검면이 달빛에 반사되어 찬란한 빛을
발했다.
"그래..."
그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도 가르츠의 목에 겨눈 단검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머지않아 가르츠는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자신처럼 복면으로 입을
가렸지만, 화려한 미색을 띄는 미녀라는 건 확신할 수 있다.
어리디 어린 레인과 달리 성숙한 몸매를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으며, 구릿빛 피부와 대비되는 흰색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가 눈에 띄었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자면 다크 엘프는 특정 나이를 먹을 때마다 귀걸이를 차는 풍습이 있다고 들었다.
레인의 귀에는 아무것도 없는 반면 눈 앞의 여인은 정확히 3 개의 귀걸이를 차고 있다.
적어도 레인과 달리 단련된 전사일 확률이 높다는 의미. 마법과 감각을 모두 속이고 남몰래 접근한 걸
보면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그 손 놓는 것이 좋을거다."
한동안 피가 말리는 대치 상황이 이어지고 있을 때 여자가 단검을 더욱 가까이 대며 싸늘하게 말했다.
허스키하면서도 낮은 톤의 목소리로 하여금 성인으로서의 완숙미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이와 더불어 형형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에는 짙은 적의가 담겨있다. 아이작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라면, 시리스의 눈은 맹수처럼 위협적으로 빛나고 있다.
하지만 가르츠는 목에 단검이 더 가까이 다가와도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피식거리며 도리어
어이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중요한 건 레인에 대한 처우, 그리고 만일에 대비하는 것이다. 우선 시리스라는 다크 엘프가 등장한
이상 가급적 전투를 피할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리스의 목적을 파악하고, 레인에 대한 처우를 결정지어야 한다. 이에 가르츠는 레인의
목을 더욱 강하게 짓눌렀다.
"악...!"
"...당장 그 손을 놓지 않으면 좋은 꼴은 못 볼 거다."
보아하니 시리스라는 다크 엘프는 레인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가르츠가 더 강하게
압박하자마자 시리스가 살기가 스멀스멀 풍겨나왔으니.
가르츠는 적의를 넘어선 무시무시한 살기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움을 유지했다. 겉으로 보면 자신이 불리해
보여도, 주도권은 엄연히 자신에게 있다.
무엇보다 목이 베어지는 순간 레인의 가녀린 목은 힘없이 부러질 것이다. 목숨을 교환하는 것이나 이미
세실리가 모든 정황을 속속 파악하고 있으니 뒷일을 맡기면 그만이다.
가르츠가 조목조목 팩트를 집어내자 시리스가 미간을 좁혔다. 하나 같이 죄다 맞는 말이라 무어라 반박할
수가 없다.
이건 엄연히 레인이 무단으로 남의 저택에 침범하여 벌어진 일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지만 이건
시리스조차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레인은 순전히 좋은 의도로 초고를 훔치고, 그 후로 상황이 꼬여버리자 초고를 되돌리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그때까지는 시리스도 제지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봤다. 방식이 잘못되었지만 어쨌거나 '책임'을 지려는
모습은 나름대로 괜찮았으니.
그리고 만약 레인이 초고를 훔치려 했다면 곧바로 제지할 생각이었다. 지난 번에는 가벼운 징계로
끝났으나 이번에도 잘못을 저질렀다면 '엄벌'에 처해졌을 것이리라.
다행히 초고를 훔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지만 상황이 꼬일대로 꼬인 바람에 이 사단까지 와버렸다. 유독
이 방에만 고도로 설정된 방범 마법이 설치돼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의심스러웠는데 너무 늦어버렸다.
"...원하는 게 뭐지?"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면 벌써부터 그 단계가 삐걱거리고 있다. 그것도 아르웬이 아닌 레인의 잘못 때문에.
비록 고향은 자신들을 버렸지만 다크 엘프는 여전히 고향을 향한 마음이 남아있다. 만일 아르웬의 집권
동안 알븐하임으로 돌아가지 못 한다면 다음 세대까지 기다려야 할 가능성이 있다.
세실리도 공연에 집중한 것도 잠시,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 같자 진지한 마음으로 임했다. 곧 있으면
하이라이트 중의 하이라이트지만 다크 엘프의 처우가 더 중요하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잘못은 잘못이지. 애한테 책임을 묻기 싫으면 어른에게 돌려주면 되잖아?]
[하지만 이 년들은 다크 엘프입니다. 마음 속으로 칼을 갈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칼이 누구를 겨누느냐에 따라 우리의 반응도 달라지겠지. 은인에게 겨누어지면 숨기는 거고 뭐고 다
퍼뜨릴 거야. 그러면 뭐... 알지?]
가르츠는 세실리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시리스를 노려봤다. 시리스도 여전히 싸늘한 표정이었으나 황금빛
눈동자 속에 일말의 불안감이 심어져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간단하다. 너희가 이 년의 목숨을 바치기 싫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보여주면
된다. 설마 잘못을 저질러놓고 뻔뻔하게 굴지는 않겠지?
"... ..."
"여왕에게 전달해라. 모든 공연이 끝나고 우리가 헬리움으로 복귀했을 때, 이 꼬마랑 함께 헬리움에
찾아오라고. 여왕이 하는 사과는 받지 않겠다. 사과는 우리가 아닌 은인에게 해야하는 것이니. 너희는
책임을 지면 그만이다."
실제로 아르웬이 세실리에게 무릎을 꿇으며 사과해도 큰 의미가 없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초고를 보호하는
것이지, 실제로 피해를 볼 뻔한 건 아이작이다.
그러므로 이건 일종의 협박성 거래나 똑같다. 아르웬과 다크 엘프 쪽에서 레인에게 엄벌을 내린다면 아무
일없이 넘어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이작에게 모두 말할 거라고.
'이러면 레인을...'
[제안을 받아들이거라.]
"?!"
시리스가 복면 아래로 숨겨진 입술을 꽉 깨물고 고뇌하고 있을 때, 뒤늦게나마 마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르웬이 그녀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아르웬으로서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아이작이라는 부분에 충격을 받고, 두 번째로
레인이 그 초고를 확인하기 위해 잠입했다는 사실에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하, 하지만...]
[아니. 이건 나와 레인이 잘못한 일이다. 곧바로 알븐하임으로 복귀할 준비를 할테니 한시라도 빨리
레인을 데리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아르웬이 결정을 내린 듯했다. 시리스는 단검을 완전히 거두고는 가르츠를 바라봤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현명한 결정이군."
꾹-
시리스가 결정을 내리자 가르츠는 레인의 목을 압박하던 손에 힘을 완전히 풀었다. 물론 풀면서 그녀의
뒷목을 엄지 손가락으로 누르는 건 잊지 않았다.
"어, 언니..."
가르츠의 축객령에 시리스는 레인을 데리고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이윽고 달빛조차 비추지 않은 어둠
속에 완벽히 스며들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후우... 모두 끝났습니다.]
[수고했어. 이제 정리하고 돌아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새를 못 참고 원고를 찾았겠지만 가르츠는 마족, 그것도 인내심 하나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리퍼의 단원이다. 그는 원고를 찾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억누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 같은 사태가 다시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무엇보다 아이작의 정체를 파악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속속 등장하는 중이다.
"악!"
그나마 다행히 방음 마법을 진작에 펼치고 있던터라 바깥의 기사들에게 들키진 않았지만, 얼얼한 고통에
한동안 침음성을 흘렸다.
"끄으으... 짜증나는군..."
중간에 제논이 밀리는 듯하자 진으로 추정되는 마족 한 명이 뒤늦게 난입하여 합을 이루기도 했다. 5
권부터 제논과 진 듀오가 하나가 되어 싸우기 시작했으니 적절한 타이밍이다.
"흐아아아아!"
여태까지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성악대의 장엄하고도 서글픈 코러스. 그와 동시에 최후의 전투가
이어지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나는 인생과 성악대의 합창에, 그리고 리루스 악단의 준비성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리루스가 어째서
맛보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합창은 빠르지 않고 느릿느릿하게 이어졌으며 마지막은 절규에 가까운 합창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대 위의 전투를 끝나지 않았는데 리루스 악단은 한 번 더 합창을 반복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 엄청난 무대를 일궈낸 두 집단이 정말로 중세 시대에 어울리는 인재들인지 의심스러웠다. 이정도
실력이라면 전생의 문화계에서도 전혀 꿇리지 않았다.
촤악!
"끄헉! 끄으으으..."
그동안 누적된 데미지 때문인지, 악마의 회복력으로도 사크란의 상체에 길게 베어진 자상은 복구되지
않았다. 그리고 제논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푸욱!
"...쿨럭!"
제논은 사크란이 고개를 듦으로서 시선을 마주치자 딱딱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심장에 찔렀던 검을
세차게 빼냈다. 검을 빼자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 피가 튀겼다.
털썩!
"사크란 님!"
"사크란!"
악마가 되었더라도 사크란은 마족을 수호했던 스승이자 영웅.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마족들은 사크란이
무릎을 꿇자 서둘러 그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심장에 검이 관통당한 이상 사크란에게 더이상 가망이 없다는 것을.
결국 악마로 죽는다는 것을.
일생을 바치고, 본인이 악마가 되면서까지 끝내 지킨 사람들. 사크란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섞여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다가 읊조리듯이 입을 열었다.
"사냥꾼들이여... 이 말은 명심하거라..."
"... ..."
"소중한 이들을 위해... 스스로 악마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사람이 눈 앞에 있다. 사크란은 최후의 최후의 순간까지
동족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숭고하고 거룩한 운명인 걸까. 내가 만든 캐릭터라지만 사크란만큼 헌신적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와 손등으로 눈꼬리를 비비는 동안, 사크란은 헐떡이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사크란의 희생 파트는 주인공 일행, 특히 진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최후반부, 대악마의
영혼을 흡수해야 완전히 소멸하는데 진은 기꺼이 자기자신을 희생시켰다.
사실상 사크란의 비극을 통해 진의 운명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일종의 복선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진은 스토리가 진행되면 진행될 수록 사크란을 생각하는 경우가 빈번해지니.
아무튼 사크란의 희생 파트는 여기가 끝이다. 뒤이어 사크란이 밝은 입자가 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인생의
종착점에 다가가지만...
제논은 사크란의 질문에 놀란 것도 잠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그거 다행이군..."
"정말로... 다행이야..."
샤아아아아-
"...어?"
원작을 초월해도 한참 초월한 결말에 멍한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을 때,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져내렸다. 그에 나는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아..."
"우와..."
"예쁘다..."
짝- 짝- 짝-
짝짝짝짝-
짝짝짝짝!
"우아아아!"
"멋지다!"
"최고다! 최고!"
그러므로 마법에 능통한 단원이 있다는 의미인데 그런 마법사가 뭐하러 연극일에 동참하는 것인지도
의아했다. 말빨로 구워삶았는지 아니면 마법사가 감독인지 모르겠지만 능력이 출중하다는 건 변함이 없다.
짝짝짝짝...
리루스는 겸손하게 이 모든 감동을 매트릭스 극단에게 전했지만, 사실 리루스 악단의 연주도 굉장하면
굉장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요리로 치자면 매트릭스 극단의 공연은 메인 디쉬고, 리루스 악단의 연주는 맛을 내기 위한 설탕이나 소금,
그리고 각종 향신료다. 만약 인생이 연주되지 않은 채 연극이 이어졌다면 어딘가 밋밋함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로브를 뒤집어 써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듬직한 체구를 보아하니 남자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결코 배우라고 볼 수 없는 음침함이며 분위기다.
"...크흠."
그사이 무대 중앙에 도착한 남자는 헛기침을 통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연스레 관객들의 웅성거림도
멈추었다.
"아마 모두들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여태까지 정체를 꽁꽁 숨기던 감독이 어째서 이곳에 나타났는지
의문이 들었을테니까요. 참고로 사칭이 아니라 진짜 감독이 맞으니 의심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 ..."
"오늘 여러분들에게 제 모습을 보여준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연이 정말로 즐거우셨는지 묻고 싶었거든요.
어때요. 공연은 즐겁게 시청하셨나요?"
"""네!!""
우렁찬 대답은 VIP 석이 아니라 평민들이 앉는 자리에서 터져나왔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 VIP 들은 말없이
박수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크란의 유언에 대해 언급한 감독이다. 사실 그건 원작을 초월했다고 무방할 정도로 캐릭터 해석이
훌륭했다.
"이 자리에 계실지 모르겠지만 제논 님이 계신다면 감사의 말씀과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소설을 써주셨는데 겨우 이것밖에 표현하지 못 했으니까요. 심지어 제 마음대로 해석까지 했죠."
"... ..."
왜냐하면...
"뿌, 뿔? 설마..."
"마족이었어?"
"세상에..."
칠흑색 머리카락과 더불어 머리에 솟아난 악마의 뿔. 그리고 피처럼 새빨갛게 빛나는 눈동자까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극단의 감독이 마족이라는 사실에 관객석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시끌시끌해졌다. 감독은 이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빙긋 웃더니 특유의 나긋나긋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훌쩍."
그냥 울기에 바빴거든. 나는 어느새 흥건히 젖어있는 손수건을 바라봤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옮겼다.
짝짝짝짝짝!!!
스칼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하자 귀가 멀 듯이 박수 소리가 다시 한 번 더 터져나왔다.
이윽고 스칼의 곁에 몇몇 사람이 다가왔는데 아무래도 극단의 배우들인 듯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마족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었다. 매트릭스 극단은 제논 일대기가 발간되기 한참 전부터
유명했는데 이때까지 함께 한 걸 보면 그들도 생각이 깨어있는 사람들인 모양이다.
그리하여 여러모로 여운이 남는 공연이 끝이 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했다.
여운을 즐기느라 감상에 젖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아이작."
"응."
"침실에는 언제 가면 돼?"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어딘가 부끄러운지 양볼을 붉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더더욱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뭐를?"
"음... 아무것도 아냐. 난 이만 가볼게."
그러면서 후다닥 도망치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지는 마리.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대체 뭐지?"
내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옆에서 세실리가 나에게 물었다.
"흐극... 아이작..."
"네?"
"나랑 훌쩍... 잠깐 얘기 좀 할래? 크읍..."
아, 물론.
"알았어요."
"흑... 고마워..."
시대를 초월한 명작 그 자체였던 공연이 모두 종료되고, 나는 세실리의 부탁에 그녀를 따라갔다. 무대가
종료되었음에도 마을의 축제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여전히 후끈거렸다.
공연이 시작된 시간이 6 시인데 현재 시간은 정확히 8 시이다. 체감상 1 시간도 안 된 것 같았는데 시간이
그냥 녹아버렸다. 그만큼 공연이 재미있었다는 의미겠지.
아무튼 간에 마리와의 약속은 9 시로 잡았으니 그전까지 세실리와 이야기를 나누면 그만이다. 세실리도
나와 마리의 대화를 들었을테니 적당히 시간을 끊을 것이다.
"훌쩍..."
"이제 좀 진정이 돼요?"
리루스 악단의 연주만 들었을 때도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던 그녀다. 매트릭스 극단의 공연에서는
아예 통곡 수준으로 서글프게 울었으니 심신이 지쳐있을 터.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 가깝다. 세실리는 차기 마왕으로 예정돼 있으니 본신의 무력이 강할테고,
그녀의 호위기사 가르츠가 주변을 지키고 있을테니.
이전까지 마족이 핍박받았던 것도 있지만 역사적으로도 이들이 전투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활약한 펼친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마족을 향한 시선은 완전히 달라졌으며 마족을 악마가 아닌 사람으로
대우해주기 시작했다.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 스칼도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인식이 달라지니 용기를 내어 본인의 정체를 밝혔을
것이다. 인식이 바뀌었다고 한들 선입견까지 바뀌는 건 아니었으니.
세실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촉촉하게 젖어 은은하게 빛나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정말 아름다웠다.
나는 그녀의 얼굴과 한참을 마주하다가 부끄러움에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은근슬쩍 내 손을 붙잡았다.
마리처럼 말랑말랑함이나 부드러움이 아닌, 수 십년간 단련하여 거칠거칠한 느낌이 전해졌다. 니콜이나
아델리아 같은 손이다.
대답은 했지만 세실리와 눈은 마주치지 못할 것 같다. 마주치게 된다면 홀린듯이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
사실 세실리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지금까지의 행동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모르고
있다면 둔탱이를 넘어 아예 모르는 척 하는 거겠지. 그러나 나는 한사코 거부할 생각이다.
무엇보다 마리에게 큰 상처가 될 게 뻔하며 나에게는 전생의 사고방식이 뿌리깊게 박혀있다. 천성이
모질지 못한 나로서는 거부감이 자연스레 들 수밖에 없었다.
"...이러려고 부른 거군요."
"이제 눈치채셨나요?"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묻자 세실리가 미약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때 여운에 빠져있을 뿐더러
세실리가 울고 있어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전생에서는 별 하나 보기 힘들었는데 이곳은 공기가 맑아서인지 별들이 강을 이루어 은하수가 펼쳐져 있다.
육안으로도 이런 광경이라 내가 정말로 다른 세상에 왔다는 걸 실감시켜줬다.
뒤이어 한동안 은하수로 가득 채워져 있는 하늘을 올려다 보고,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꽉!
"하아아아..."
전에도 말했다시피 마족들은 특정 기간마다 악주기라는 생리와 비슷한 현상이 찾아오는데, 욕망이 가득
차오르는 시점이라 보통 하루동안 명상을 하는 편이다.
다행히 선은 넘지 않은 모양...
이다... 가 아니라 한계에 봉착했다. 그와 동시에 미묘한 체향이 그녀에게서 점점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남자의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시키는, 일종의 페로몬 같은 것일까. 나는 점점 색기로 가득해지는 세실리에
가슴이 두근거린 것도 잠시, 황급히 입을 열었다.
세실리는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했으나 가슴을 퍽-
퍽- 치는 걸 보니 곧 있으면 폭발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퍽!
"...누나?"
"죄송해요. 정말로 죄송해요."
"누나!"
"욕망에 진 저를... 용서해주세요."
지난 번에는 마리가 난입하여 사고를 막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이러다가 정말로 야외에서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
스윽-
이로인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하반신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으나 최대한 마리를 떠올리면서 거부
의사를 나타냈다.
이에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호위기사라던 가르츠는 어디로 갔는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번쩍!
암흑으로 채워진 주변을 일순간 밝게 비출 정도의 세기라 눈이 부실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이 멀 듯한
밝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작스레 빛이 터져나온 탓에 시야에 희뿌연 무언가가 걸렸지만, 물건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큰일날 뻔했네요."
어느새 내 위에서 떨어진 그녀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얼굴에는 안도와 민망함이
섞여있었다. 나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세실리가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슬쩍
뿔의 상태를 확인했다.
'와... 그럼 진짜 좆될 뻔했네?'
"저... 은인."
"...아, 네. 말씀하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지난 번에도 그랬지만 욕망에 이기지 못해 이번에도 은인에게 큰
실례를 끼쳐드렸네요..."
"그... 괜찮아요. 그런데 악주기가 내제된 욕심이 튀어나온 거라고 했으니 아까 전에는..."
"...네. 부끄럽지만 제 진심이죠."
"어우..."
세실리는 전처럼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돌직구를 날려버렸다. 창피함에 고개를 숙이며 고백하는 모습을
보자니 정말로 귀엽고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최대한 이성을 유지해야한다. 비록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세상이라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한 둘이 아니다.
"...누나. 솔직히 말해서 저도 누나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책임질 자신이 없어요.
당장 마리도 신경 써야 하는데 둘이라니... 여러모로 많은 문제를 낳겠죠."
"알고 있어요."
"상황에 따라서 누나에게 사랑을 주지 못 할 수도 있어요."
"전 괜찮아요."
"제가 그렇게 좋은 건가요?"
그런 의문을 가지며 세실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는 아래로 내렸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리며 나와
똑바로 마주했다.
받아주지 않아도 끝까지 마음을 유지하겠다. 나는 세실리의 결연한 다짐을 듣고나서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감정은 받아들이라고 소리쳤지만, 이성은 마리와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외치고 있다. 나는 이성과 감정
사이에 갈팡질팡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결정을 내렸다.
할 말을 잃어버렸다.
마족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세실리가 독특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 세상의 문화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마리 다음으로는 자신의 차례라니, 나로서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생각이었다.
"그... 누나?"
"네? 무슨 일이시죠?"
"제가 멍청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마리 다음으로는 누나라는 게 무슨 소리에요?"
너무 당황하는 바람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세실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나와 몸을 섞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무래도 내 반응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들으면 기겁할만 이야기에 그녀를
쳐다봤다. 세실리는 현재 애처롭기 그지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중이다.
얼굴은 설명해봤자 입만 아프니 생략하고 몸매는... 이것도 넘어가자. 천상의 아름다움을 모조리 갖다
박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마리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여성으로서의 매력은 세실리가 훨씬 뛰어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녀의 외모라던지, 몸매라던지 아니다. 모든 과정을 스킵하고 몸부터 섞으려는
세실리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 뿐이다.
깨가 쏟아지던 나와 마리의 연애가 떠올랐는지 야릇한 숨소리를 내쉬는 세실리.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는 것이 스위치를 누른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녀의 물음을 듣고 골똘히 기억을 되새겼다. 아카데미에 있을 당시 세실리가 사과의 의미로 나에게
부쳤던 팬레터가 있다.
그러고 보니 팬레터에 그런 내용이 담겨있긴 했다. 몸과 마음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각오가 듬뿍 담겨있던
팬레터.
세실리는 그 내용에 따라 본인의 몸과 마음을 나에게 바치려 노력하고 있다. 언뜻 추종자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제논 일대기가 마족에게 끼친 영향을 고려하자면 마냥 이상한 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그녀의 진심만큼은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빈말이 아니라 현재 세실리는 나만을 바라보는
추종자나 다름없는 상태다. 몸을 바치라 명령하면 기꺼이 바치는 추종자.
'...아까 전 그 색기 때문이겠지.'
말을 놓으니 추종자가 아니라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세실리다. 역시 말을 놓는다는 건 단순히 친근감을
표시가 아니라 서로 간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효과가 있다.
정말이지, 자꾸만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세실리다. 마리와 만나지 않았다면 진작에 일을 저질렀지
않았을까.
그만큼 세실리는 남자로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여자이며 나에게 너무 과분했다. 그래도 본인이
좋다니 넘어가겠지만.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헬리움의 공주인 세실리가 더욱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공작의 딸을 여자친구로
두고, 헬리움의 공주를 또다른 애인으로 두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경우일까.
소중한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던 아델리아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세실리가 그녀처럼 펑펑 운다고 상상만
해도 마음이 불편하다 못해 찢어지는 기분이다.
세실리는 내가 안색을 굳히며 단호하게 답하자 기분 좋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포옹을 하게 되는 순간 그녀와의 관계는 빼도박도 못하게 된다. 확실하게 책임을 져야된다는 소리.
하지만 이미 마음은 결정을 내린 참이다. 나를 위해 무한한 헌신과 사랑을 보내는 세실리에게 이정도
보답은 해야하지 않겠나.
세실리가 내 품에서 귀여운 소리를 내어도 아무런 말조차 할 수 없었다. 포옹을 하게 되면서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자랑하던 가슴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달되었으니까.
숨이 막힐 정도로 짓눌리는 것이, 남자의 원초적 본능을 살살 건드리다 못해 머리채를 붙잡아 끄집어내는
느낌이다. 마리와 포옹을 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마리는 사랑이 성욕을 가볍게 눌러버린다면, 세실리는 성욕이 사랑을 강제로 짓밟아버린다. 체취 또한
활활 불타기 시작한 장작에 기름을 들이부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참자. 참아... 이때까지 잘 버텼잖아...'
누나는 욕망을 해소하고, 누구는 욕망이 한가득 쌓이다니 이 얼마나 불합리한 구조일까. 어쩌면 그녀의
욕망이 나에게로 전달된 것일 수도 있다.
"그... 조금 부끄럽네."
"마리랑 비교하면 어때? 묵직함이 느껴지지?"
"... ..."
"아이작 얼굴 또 빨개졌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정말이지 걸어다니는 음란물 수준이다. 이러다가 나중에 얼굴을 보기만 해도
흥분할까봐 두려웠다.
내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달래고 있을 때 세실리는 웃는 얼굴이 아닌, 살짝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우리는 기회를 통해 그 범인을 색출해냈어.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후에 헬리움을 방문할 거야.
그때 너도 같이 왔으면 해서."
"알았어. 범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긴 하네."
"어린 아이라면 용서해줄 거야?"
이제는 내가 부끄러워질 차례다. 세실리가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하자 나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아무튼, 일주일 뒤에 헬리움으로 가면 된다고?"
"그때는 내가 발락 경을 시켜서 네 저택으로 보낼거야. 너는 그냥 준비만 하고 있으면 돼."
"알겠어."
"아. 혹시 이것 때문에 제논 일대기에다가 나쁜 말을 적을거야?"
하지만...
이에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후로 우리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도중에도 마을은 축제의 열기로 후끈거렸으며 멈출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맛있어 보이는 먹거리가 있어 사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시간이다보니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갔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중에 세실리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는 건 덤이다.
팔짱을 끼게 되니 가슴의 촉감이 그대로 전달된다. 나는 차곡차곡 쌓여가는 성욕을 느끼면서 인내심을
발휘했다.
비록 마리가 상처를 받겠지만, 그 상처가 아물 수 있도록 내가 어르고 달래주면 된다. 그리고 이전에
세실리와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으니 설득은 쉬울 것이다.
그리하여 불빛이 켜진 저택으로 돌아오고, 세실리는 우리 가족보다는 마리부터 찾아갔다. 나도 뒤를
따라가 마리와 만나고 싶었으나 세실리가 나를 제지했다.
유독 침실을 강조한 세실리다. 반쯤 접힌 눈매와 고혹적인 목소리로 말하니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 상상이
간다.
쪽-
촉촉한 느낌과 더불어 이 따스한 감각을 보자면 확실히 그녀가 나에게 볼 뽀뽀를 한 게 맞다. 세실리도
장난이라는 듯 싱글벙긋 웃고 있으나 얼굴이 미약하게 붉어져 있다.
세실리는 가슴 중앙에 손을 얹으며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그리고 나에게 빙긋 웃어주더니
등을 돌려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똑- 똑- 똑-
"아이작? 안에 있니?"
"응?"
노크와 동시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마리가 오려면 시간이 남았고, 하녀인 줄만
알았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니 고개를 퍼뜩 들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할게."
끼익-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니는 어딘가 흐뭇해 보이는 표정을 유지한 채 나에게 물었다.
"...이상한 거 아니죠?"
"얘는. 엄마가 우리 아들에게 이상한 걸 먹이겠니?"
"그건 그렇죠."
꿀꺽-
공작의 직위도 아무런 문제도 없다. 내가 제논 작가라는 걸 밝히게 되는 순간부터 입장이 뒤바뀌는 셈이니.
'신붓감이라...'
나는 어머니가 언급했던 신붓감이라는 소리에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마리와
결혼하고, 알콩달콩 신혼을 보내다가 뜨거운 밤을...
'...미친.'
"어머. 부끄러운 거니?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나이대에 약혼은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저희 연애한지 겨우 1 개월밖에 안 됐어요."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해. 정략결혼이라는 게 왜 있겠니? 애당초 귀족들 사이에 연애는 흔치
않은 일이란다. 보통 가문끼리 합의를 통해 약혼을 맺는 일이 다반사지."
똑- 똑- 똑-
멀리 떨어져 있어서 둘끼리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모르겠다. 마리의 모습도 어머니에게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머지않아 어머니가 문 밖으로 나가고, 마리가 어머니에게 공손히 인사하셨다. 나는 문 너머로 보이는
마리의 모습을 보고 감탄을 자아냈다.
마리는 섹시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저 모습을 보고나서 완전히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세실리가
대놓고 섹시미를 강조한다면 마리는 평소와 달라도 전혀 다른, 이른바 반전 매력을 선사했다.
'와... 진짜...'
전이었다면 부끄러움에 시선을 돌렸을텐데 지금은 시선을 돌릴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아름답다는 말조차
부족한 그녀의 자태를 두 눈으로 똑똑히 각인시키고 싶었다.
은글슬쩍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깊게 파인 그녀의 가슴골을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나는 한동안 마리의 얼굴과 가슴을 번갈아보다가 손으로 얼굴을 덮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마리."
"왜?"
"...아냐."
"...일단 앉을까?"
눈치 채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눈치를 챈 이상 마리와의 대화가 서먹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내가 예상하고 있는 게 맞다면 어머니가 약을 주지도 않았을테고, 마리가 이런 옷을 입고 오지도 않았겠지.
정말로 세실리가 작정한 건지, 아니면 본의 아니게 색기를 흩뿌린 건지 모르겠으나 점점 버티기가
어려워졌다. 환생하고나서 처리하기 어려웠던 성욕인데 오늘로서 한계를 맞이하기 직전이다.
나는 아래로 내렸던 고개를 슬금슬금 들어올려 마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가슴 면적 대부분을 거의 드러낸,
노출이 심한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내 앞에 앉아있다.
심지어 아까는 멀리 있어서 확인하지 못 했으나 가까이서 바라보니 더욱 파격적이다. 왜냐하면 드레스가
시스루 같은 재질인지 새하얀 속살이 은연히 비치는 중이었으니까.
남자는 완전히 벗은 여자보다 이처럼 은밀하게 속살을 보이는 여자에게 더욱 강한 욕구를 느낀다는데 그
말을 실시간으로 체감하고 있다.
내가 최대한 인내를 발휘하며 욕구를 간신히 억제하고 있을 때 마리가 말을 걸었다. 마리 특유의 상큼한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다보니 목소리마저 야하게 들렸다.
이에 나는 얼굴에 덮었던 두 손을 떼어내며 마리와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도 나처럼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미묘하게 붉어져 있었으며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다행히 긴장하고 있는 건 나 혼자가 아니었던 모양. 덕분에 자신감을 얻어 겨우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시간이 길다고 말한 게 아닌, '밤'은 길다. 언뜻 보기에 사소한 차이여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완전히
다른 의미다.
사실상 마리의 바람을 들어주겠다는, 나의 간접적인 허가나 다름없었으니. 마리도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백설기 같은 뺨이 더 붉어졌으며 방실거리던 얼굴도 점차 깨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색한 상황이 내려앉아 침묵만이 가라앉기 직전, 본론부터 들어서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마리를
침실로 불러들인 이유는 모두 알겠지만 리나와의 관계 때문이다.
비록 리나와 레오르트가 나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들은 미네르바 제국의 황족이다. 적으로
만들어봤자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고 이번 전시회처럼 든든한 우군으로 만들어 놓아야된다.
세실리가 나를 보호하겠다고 선언했으나 마족의 입지는 현재 확실하지도 않는 상황. 그러니 리나를 확실한
내 편으로 만들어야 앞날이 편해진다.
역시 사람의 앞날은 아무도 모른다. 정치를 싫어하던 내가 리나를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마리를
설득시키려 하다니.
"마리."
"응."
"이 이야기는 너에게 민감할 수도 있어. 리나와 관련된 거라서."
움찔-
금방이라도 불탈 것처럼 무르익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추락하는 느낌. 괜히 말했나 싶었지만 이건 언젠가
해결해야하는 난제 중 하나다.
"...리나는 왜?"
이에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려던 시선을 최대한 그녀의 얼굴에다 고정시켰다. 여기서부터 입을 잘 털어야
마리도 더이상 기분 나빠하지 않고, 가라앉았던 분위기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터.
레킬리스 공작가 출신답게 마리는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냈다. 다만 불만스러운 얼굴은 여전했다.
아마 그녀로서는 자존심이 상할만한 이야기일 것이다. 레킬리스 가문 출신인 자신이 있는데 어째서 황족을
끌어들이는 거냐고.
하지만 내 정체가 탄로났을 때, 수많은 시선들이 나에게로 집중될 것이며 어두운 손길 또한 뻗쳐올 것이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아군을 많이 두어야 된다.
하지만 가족은 아니다. 지금까지 가족들이 나에게 보여준 사랑과 헌신을 고려했을 때 그들은 나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이나 마찬가지다.
전생에서 가족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사고로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미연에 방지하고 싶다.
뒤이어 그녀는 눈을 천천히 감으며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눈을 열어 나와 똑바로 마주했다.
리나를 아군으로 만들었다고 한들, 마리와 껄그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이상 진척이 더딜 게 분명하다.
어떻게든 이 둘의 사이를 풀어주어야 앞날이 편할 것이다.
트라우마를 건드렸는지 눈쌀을 찌푸리며 대놓고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내는 그녀였다. 전과는 달라도
확연히 다른 반응.
"아군으로 두어도 사람 사이의 묵힌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키기 마련이야. 무엇보다 리나도 너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는 것 같거든.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만일에 대비하고 싶어."
"... ..."
"너를 믿지 못 하는 건 아니야. 황족과 척을 지는 건 지금은 몰라도 언젠가 부메랑처럼 돌아올 거야.
혹여 리나가 나쁜 마음을 먹게 된다면 우리에게 최악의 적이 나타나는거지."
"후우..."
내 설득으로 머리가 냉정하게 식었는지 마리가 눈을 감으며 재차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히 먹혀들어간
모양이다.
특히 마리와 리나는 엄청난 관심을 받았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무려 황녀와 공작 영애였으니. 관심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다.
"너도 알고 있지만 나는 사람의 진심을 본능적으로 꿰뚫어볼 수 있어. 지금은 괜찮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서 표정 관리를 하나도 못 했지. 반면 리나는 완전히 달랐어. 표정 관리가 완벽한 건 물론 화려한
말재간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지."
"설마 질투한거야?"
"에이. 나를 뭘로 보고. 그냥 대단하구나~ 라고 생각했지."
나는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마리를 바라봤다. 언제나 당당하고 활기차던 모습은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져
있으며 친구에게 배신당한 사람만이 남아있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것만큼 끔찍하고 괴로운 기억은 거의 없다. 특히 어린 나이에 그런 경험을
겪었으니 상처는 더욱 깊게 새겨졌겠지.
마리는 손등으로 눈물을 대충 훔치고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아주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몰라도 불편하다는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후련함에 가까운 느낌.
나는 속으로 다행이라 여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내 볼을 꼬집은 마리의 손목을 슬며시
붙잡았다.
"... ..."
가녀린 목덜미부터 시작하여 면적 대부분이 노출돼 존재감을 자랑하는 가슴, 그리고 이브닝 드레스 너머로
은은하게 비춰지는 속살까지.
"...아이작."
"...응."
"후회하지 않아?"
"너니까 후회하지 않아."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고 때에 따라서 답답할 수도 있어."
"나는 왈가닥인데다가 고집이 세."
마리는 내 우려 섞인 질문들을 하나하나 명료히 받아쳤다. 그러면 그럴수록 용기를 얻었는지 이윽고 나와
정면으로 마주해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결의와 긴장, 그리고 기대와 애정이 골고루 섞여있는 마리의 눈동자를 직시하다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도 내가 에스코트하듯이 손을 붙잡은 채 일어서자 따라 일어났다.
"...아이작."
"응. 마리."
"사랑해."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미소를 머금으며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마리.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귀엽고, 또 섹시해서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얼굴을 서서히 가까이 접근시키다가 마리의 코앞에 멈춰세웠다. 마리는 내 얼굴이 코 앞까지
다가와도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도."
스윽-
지금까지 정면만 보고 있어서 몰랐지만, 등까지 시원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등의 감촉이
내 손을 타고 그대로 전달된다.
"하아..."
포옹을 하니 마리가 뜨거운 숨소리를 내쉬었다. 뒤이어 내 몸을 더듬거리면서 조심히, 그리고 강하게
나를 껴안았다.
이때까지 했던 포옹과 달리, 그녀의 살결과 심장 소리가 온전히 느껴졌다. 이브닝 드레스 너머로 커다란
가슴이 나를 짓누른다.
"흥악!"
은밀한 비처까지는 아니지만, 엉덩이와 넓은 골반을 도자기 다루듯이 쓸어줌으로서 그녀의 애를 태우기
시작했다.
"흐응... 하앙..."
마리는 신선한 자극이 연거푸 이어지자 몸을 부르르 떨면서 신음을 흘렸다. 나는 그녀가 차마 나를
바라보지 못 하고 고개를 떨구자 한 손으로 턱을 붙잡아 억지로 들어올렸다.
"으응...? 읍!"
그리고 이어지는 기습적인 키스. 마리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몸을 뻣뻣하게 굳혔으나 이윽고 힘을 빼며
받아들였다.
츕! 츄웁! 츕!
단순히 입술을 맞추는 키스가 아닌, 서로를 탐하는 것처럼 격렬한 딥키스. 내가 마리의 머리를 단단하게
고정시킨 것처럼, 마리도 내 목을 껴안으며 호응했다.
"후아..."
"... ..."
그렇게 탐닉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 둘은 사전에 합을 맞춘 것처럼 입술을 떼었다.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은색 실선이 길게 이어졌다가 뚝- 하고 끊어졌다.
"...마리."
"하아... 하아..."
"사랑해."
"나, 나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마자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그녀의 얼굴을 상냥하게 쓰다듬어주다가 고개를
아래로 내려 가늘고 긴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혀로 상냥하게 핥으면서 살내음을 마음껏 음미했다. 씻고 와서 달달한 비누향이 오감을 자극시켰다.
"흐응..."
그녀도 만족스러운지 야릇한 비음을 흘리며 몸을 흠칫흠칫 떨었다. 나는 그녀를 천천히 침대 쪽으로
이끌었고...
"하앙!"
"하앙!"
마리는 아이작이 자신의 가슴을 우악스레 붙잡자 순간적으로 교성을 내질렀다. 이 행동만으로도 그녀는
하복부가 욱신거렸으며 몸을 크게 뒤틀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정말 이 여자를 탐하려는 거구나. 아이작은 마리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그녀의 새하얀 목을
핥기 시작했다. 동시에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열심히 희롱한다.
"흐으응...!"
스윽-
한동안 마리의 목덜미와 가슴을 자극시키던 아이작이 서서히 뒤로 물러난다. 마리는 점점 익숙해지던
쾌락이 순간적으로 사라지자 의문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이작도 침대에 누워있는 마리를 내려다봤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산발처럼 흩어져 있고, 한 쪽만 드러난
가슴은 중력에 의해 물방울처럼 살짝 처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그녀의 표정. 눈이 풀리기 직전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의 얼굴은 아이작에게 또다른 흥분을
선사했다.
"...마리."
"...응."
"벗겨도 돼?"
"...벗겨도 돼."
손은 이미 흘러내린 드레스 끈이 아닌, 아직까지 마리의 어깨에 걸려있는 끈 쪽으로. 끈을 붙잡은 후에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 그녀의 전라가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으응..."
마리는 드레스가 벗겨짐으로서 자신의 가슴이 완전히 드러나자 창피했는지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나
드레스가 완전히 벗겨지니 한 팔로는 가슴을, 한 손으로는 은밀한 비처를 조심히 가렸다.
마침내 이브닝 드레스를 모두 벗겨낸 아이작은 실오라기 하나 거치지 않은 마리의 자태를 감상했다.
매끄럽고 눈처럼 새하얀 피부. 한 팔로 가렸음에도 살이 빠져나오는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 아래로
매력적인 굴곡을 이루는 골반까지.
마리의 나신은, 그야말로 백색의 여신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성스럽게 느껴졌다.
'...속옷도 안 입고 있었네.'
보통 이브닝 드레스를 입어도 속옷은 입는 편이다. 하지만 마리는 이브닝 드레스 안으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 상태였다.
"...예뻐."
"... ..."
"정말로 예뻐. 마리. 세상에서 제일. 그러니까..."
아이작은 뒷말을 삼켰지만 마리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분명 가슴과 아래를
가리던 팔을 치워달라는 부탁일 터.
이윽고... 분홍색 유두가 첨예하게 선 가슴과 더불어 은밀한 공간이 전부 드러났다. 새하얀 머리카락처럼,
마리의 비부는 흰색 수풀로 에워쌓여진 상태다.
이에 아이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상체를 천천히 내렸다. 이어서 마리의 뺨을 부드럽게 붙잡아 정면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하음..."
츕- 츄웁-
아이작은 마리의 혀 뿐만 아니라 입술, 치아, 그리고 그 안까지 전부 게걸스럽게 탐했다. 마리는 그가
혀를 놀릴 때마다, 자신의 입 안을 침범할 때마다 다리를 움찔거렸다.
"츄릅... 흐읍!"
눈을 감으며 아이작의 키스를 받아들이던 마리가 얕은 신음을 흘렸다. 아이작의 손이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행해지는 쾌락에 마리는 아이작의 입에서 벗어나 뜨거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아이작이 곧바로 입을 덮어 혀를 놀림으로서 그녀는 혀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푸하! 우음!!"
이전까지 아이작이 혀를 놀리면 그녀가 호응을 하는 식이었지만, 이제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아이작의 입
안에 혀를 집어넣어 마음껏 음미한다.
쾌락이 젖어 이성이 거의 마비되기 직전이라는 의미. 아이작은 그녀의 혀놀림을 말없이 받아주다가
허벅지와 하복부를 쓰다듬던 손길을 서서히 아래로 움직였다.
"흐으으읏?!!"
마리가 짐승 같이 울부짖으며 날뛰어도 아이작은 비어있는 한 손으로 어떻게든 고정시키며 질내를 쑤시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불꽃에 마른 장작을 추가하여 더 강한 불꽃이 일어날 때까지,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 마리의 보지를 쑤셨다.
마리는 한참동안 쾌락의 파도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몸부림쳤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며 이따끔씩 눈 앞이 번쩍거리는 현상도 일어났다.
스스로를 달래는 위로가 아닌, 사랑하는 사내가 전해주는 첫 번째 절정. 그 절정은 마리에게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마약에 가까웠다.
"끄으으윽...!"
털썩-
"후우..."
아이작은 숨을 내쉬며 절정으로 제대로 가버린 마리를 바라봤다.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 흰자위가 차지하는
부분이 더 많아졌으며, 몸은 간혈적으로 부들부들거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음부에서 흘러나오는 애액이 홍수가 난 것마냥 흘러내려 침대보가 흥건히 젖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음부를 쑤셨던 그의 손 또한 마찬가지로 마리의 애액으로 흠뻑 젖은 상태다.
본방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절정으로 가버린 천박한 모습. 아이작은 애액으로 뒤덮힌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 안에 넣었다.
"헤엑... 헤엑..."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렬하고, 짜릿한 쾌락.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처음은 힘들더라도 한
번 쾌락을 맛보게 되면 절대 헤어나올 수 없을거라 하셨다.
주섬- 주섬-
슬슬 본방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겠다는 듯, 아이작이 잠옷을 한꺼풀 한꺼풀 벗고 있었다. 마리는 최대한
호흡을 다스리며 아이작의 몸을 바라봤다.
아이작의 몸은 의외로 잔근육이 탄탄하게 박혀있어 뭇 여성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과거에는 호크가
아이작을 기사로 키우기 위해 단련시킨 적이 있으며 최근에도 꾸준히 운동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가문에서 성교육을 받았을 때, 남자의 성기는 발기가 충분히 된다면 단검 정도 되는 길이라고 교육받았다.
그것만으로도 비좁디 비좁은 자신의 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 걱정했다.
마리가 머릿속으로 단검만한 길이를 생각하고 있을 쯤, 아이작은 갑갑했던 바지와 속옷을 그대로 멀리
벗어던졌다. 그와 동시에 마리의 탁해진 눈동자에 아이작의 물건이 거울처럼 비춰졌다.
"...아?"
단검이 아니라 근력이 뛰어난 기사들이 들고 다니는 클레이모어 수준으로 아이작의 물건은 마리가
보기에도 매우 컸다.
심지어 단순히 큰 것에만 끝나지 않았다. 흥분할대로 잔뜩 흥분한 아이작의 심정을 대변하듯, 꼿꼿하게
선 그의 물건에는 핏줄이 오돌토돌 돋아나 있었으니.
찔꺽-
"흐응?!"
찌걱- 찌걱-
"흐앙! 잠까안...!"
"마리도 궁금하지 않아? 손가락은 여기까지밖에 못 오는데 내 건 그 너머까지 들어갈 수 있어."
"으응! 아앙!"
쩌억-
"아, 아이작..."
"... ..."
"어서 빨리... 넣어줘..."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지. 마리는 떨리는 두 손으로 보지를 벌리며 아이작을 재촉했다.
이에 아이작은 마리의 질내를 쑤시던 손가락을 빼며 자신의 물건을 어루만졌다. 전생과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크기가 컸으며 강직도도 무시무시하다.
"히익...!"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미약한 기대감이 담겨있다. 저것이 안으로 들어오면 얼마나 큰 쾌락을 얻게 될까.
보통 같으면 처녀를 잃는다는 부분에 신경이 쏠려야 정상이지만, 방금 전 남자가 전해주는 절정의 맛을
알아버린 상태.
현재 그녀는 아이작과의 섹스를 통해 쾌락을 탐하는, 원초적인 본능을 더욱 갈구하는 중이다.
스윽-
아랫배에 올라가 있던 자지가 아래로 내려왔다. 마리가 보지를 벌린 덕분에 질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윽!"
귀두를 이용해 보지를 살살 문질러 자극만 시키고, 그때마다 애액이 졸졸졸 흘러나와 침대보를 적신다.
쯔읍-
"흐극...!"
여기서 선택을 해야된다. 천천히 넣어 머리가 고통에 익숙해지기까지 기다리는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깊게 박아 한 번에 처리할지.
쩌억! 쿵-
"!!!"
보지 안에 아이작이 물건이 빠른 속도로 침범하고, 귀두의 끝이 무언가와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히 들린다.
마리는 배 안이 가득찬 느낌에 눈을 부릅 뜨며 입을 꽉 깨물었다.
"흐으으윽!!"
하마터면 또다시 절정으로 가버릴 뻔했지만, 지금은 쾌락과 고통이 뒤섞인 탓에 겨우겨우 버틸 수 있었다.
그녀는 입을 벌렸다 닫았다를 반복하다가 떨리는 눈으로 아래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이작의 물건이 보지에 삽입되어 이어져있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진정한 의미로 하나가 된
것이다.
"으으으..."
아이작의 물건은 흉악했던 겉모습처럼 뜨겁고, 단단했다. 빈말이 아니라 불방망이를 질 안에 삽입한 것
같다.
아이작도 자신의 물건을 감싸는 마리의 질벽에 침을 꼴깍 삼켰다. 크기가 큰 것도 있으나 처녀인만큼
상당히 비좁고 또 압박감이 굉장했다.
"마리."
"응? 우웁! 츄읍..."
아이작은 움직일까 말까 고민하다가 우선 그녀에게 키스부터 해줬다. 그녀가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줄
셈이다.
몸에 힘이 풀어졌다는 건 그만큼 긴장이 완화되었다는 소리. 아이작은 마리의 입술에서 얼굴을 떼었다.
"움직일게."
"...응."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작은 허리를 서서히 뒤로 물렸다. 그러자 마리의 안을 가득 채웠던 물건 또한 질벽을
살살 긁으면서 물러났다.
"아앙..."
질벽이 긁히는 느낌에 마리가 약한 신음을 흘린다. 물건이 커서 그런지 뒤로 물러나는 시간도 오래 걸렸다.
쩌억!
"하앙!"
쾌락에 젖은 마리의 신음 소리. 아이작은 그녀의 반응에 더욱 감정이 더욱 고조되어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거의 절정에 다다르기 시작한 것일까. 마리는 머리에 뭔가가 차오르는 느낌에 이를 악 깨물었다.
아이작도 그 징조를 알 수 있었다. 더 강하게 박아주길 원하는 것처럼, 마리의 두 다리가 자신의 허리를
감쌌으니까.
정말이지, 처녀라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음란하고 천박한 몸뚱아리다. 아이작은 상체를 숙여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나서 더욱 박차를 가했다.
아이작이 보지를 유린하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자 마리의 입에서 쾌락에 젖은 신음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그가 자신의 안에 씨앗을 뿌리려 한다고. 마리는 점점 더 고조되는 쾌감에 아이작을 감싸던 팔과 다리에
힘을 주었다.
쑤걱 쑤걱 쑤걱
마리의 보지를 쑤시던 아이작도 옅은 신음을 흘리며 그녀를 강하게 껴안았다. 그리고 처음 삽입했던
것처럼, 허리를 밀착시켜 자궁구에 귀두를 부딪혔다.
큐웅-
"꺄아아아앙!!!"
자궁구에 귀두가 충돌하는 느낌에 마리가 울부짖었다. 아이작의 허리를 감싸던 두 다리가 일직선으로
펴지며 부르르 떨렸고, 발가락은 오므렸다 퍼졌다를 반복한다.
마리는 자궁에 씨앗이 토해지면서 아랫배가 뜨거워짐을 느꼈지만, 그것보다는 절정에 허우적거리기 바빴다.
눈은 흰자위가 차지하는 부분이 더 많아졌으며 눈물샘이 고장난 것처럼 눈물이 흘러나왔다.
푸슉! 푸슉!
뿐만 아니라 결합된 보지에도 애액이 흩뿌리듯이 흘러나왔다. 아이작은 마리의 애액으로 배가 축축해짐을
느끼면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절정으로 인해 가버려도 제대로 가버린 모습. 눈은 눈대로 풀려있고 혀까지 삐져나와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쯔극!
"흐앙..."
이에 그는 마리의 얼굴을 쪽으로 다가가 슬그머니 물건을 갖다 대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입 쪽으로 가까이
대었다.
"...할짝."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지의 짙은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자 마리는 혀를 내밀어 기둥을 핥았다. 아이작은
쾌감에 몸을 떨었다가 자지를 더욱 가까이 대었다.
마리는 정액과 애액으로 지저분해진 자지를 혀와 입을 이용해 정성스레 청소해주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그녀의 혀놀림에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가 자지를 밀착시켰다.
"우욱. 우움..."
"좋았어?"
"우웅. 쭈웁. 쭙. 쭈움. 후아... 쭈우웁..."
아이작의 물음에도 마리는 자지를 빠는 걸로 답했다. 여태까지 이런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니, 아이작은
물건에 불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를 옮겼다.
눈 앞에서 자지가 사라지자 마리의 혀가 허공을 놀았지만, 그녀는 아쉬울 할 틈도 없었다. 아이작이
그녀의 몸을 빙글 돌리더니 엉덩이만 올라가도록 만들었으니.
덕분에 슬슬 정신이 들려는 찰나, 아이작은 탐스러운 마리의 엉덩이를 쓰다듬다가 다시 한 번 보지에
물건을 삽입했다.
푸욱!
"하앙..."
본래 시간은 한정돼 있지만 열락의 밤은 길게 이어졌다. 늦은 밤부터 시작된 두 남녀의 정사는 새벽이
지나서도 꾸준히 유지되었다.
아이작은 그간 쌓여있던 욕정을 모두 풀겠다는 것처럼 마리의 몸을 제 마음대로 탐했고, 마리도 아이작의
물건이 안을 휘저을 때마다 해일처럼 몰려오는 쾌락에 허우적거리기 바빴다.
물론 마리가 아이작의 물건을 모두 집어삼키려 노력해도 크기가 평균보다 한참 웃도는 바람에 밑동이 살짝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마리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쾌감에 몸부림치기 바빴다.
"사랑해. 아이작."
"나도."
아이작의 위에 올라탄 마리는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아이작에게 키스를 요구했다.
아이작도 그에 따라 열렬히 환영해줬다.
쭈웁- 쭙- 쭈웁-
혀와 타액이 뒤섞이는 키스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그들은 서로 결합된 상태였다. 수없이 반복된 절정으로
지칠대로 지친 마리였지만, 그녀는 내재돼 있던 음탕함을 가식없이 전부 표출했다.
아이작도 밤부터 시작된 거사가 새벽까지 진행되어도 체력적으로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그는 옛날부터
꾸준히 운동을 했지만 마리는 아니다.
현재 그녀는 체력이 모두 바닥난 상황이고, 체력이 아닌 기력을 소모하고 있었기에 머지않아 기절할
것으로 보였다.
쯔걱!
갑작스러운 자극에도 마리는 놀라기만 할 뿐, 아이작의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단단히 고정시켜 어떻게든 유지했다.
덕분에 물건이 쉽게 드나들 수 있었으며 아이작은 마리가 스스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하자 그녀의 리듬에
맞췄다. 그녀가 허리를 위로 올리면 자신은 자지를 살짝 빼내고, 마리가 내리는 순간 강하게 삽입한다.
여체의 신비라고 해야할지 그나마 남아있던 밑동마저 삼켜버린 마리는 다시 한 번 쾌락에 울부짖었다.
몸을 흔들릴 때마다 풍만한 가슴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었다. 딱딱하게 선 핑크빛 유두
또한 탐스럽게 익은 과실 같아 먹음직스러웠다.
"좋아?"
아이작은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 음란하게 몸을 흔드는 마리에게 조용히 물었다. 체력은 마리보다 훨씬
뛰어난 그였기에 목소리에는 여유가 담겨있었다.
반면 이미 기력을 모두 소진하기 직전이었던 마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허리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행동을
잠깐 멈추고 힘겹게 답했다.
"좋아..."
"얼마나 좋아?"
"그냥 조아... 하응."
아이작은 혀까지 내밀며 기절하기 직전인 마리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남자로서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듯이 상승하는 건 물론이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절정을 선사했다는 건 매우 뿌듯한 일이었다.
뒤이어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파묻어 바짝 솟아난 유두를 혀로 살살 굴렸다. 그리고 쓸어올리듯이 혀를
움직여 목덜미에 입술을 맞췄다.
쪽-
"흐윽..."
"마리."
"헤에..."
이윽고 그는 마리의 얼굴과 똑바로 마주하며 빙긋 웃었다. 마리는 아이작이 웃어주자 망가질대로 망가진
표정으로 베시시 웃었다.
눈은 눈대로 풀린데다가 수도꼭지마냥 눈물이 줄줄 흐르고, 억지로 올라간 입꼬리는 남자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욕망을 주입시켰다.
"이제 슬슬 끝낼게."
"안 대에... 조금만... 히익?!"
푸욱!
마리는 안을 가득 채웠던 물건이 서서히 빠져나가려 하자 앙탈을 부렸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물건이
다 바깥으로 나오려고 할 때 아이작이 기습적으로 찔러넣었으니까.
1 초도 안 되는 시간에 덮쳐온 쾌감에 마리는 가느다란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뻗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뇌수를 휘젓는 쾌락에 고개가 절로 뒤로 넘어갔으며 크게 벌어진 입에는 혀가 빠져나왔다.
퍽! 퍽! 퍼억!
"꺼윽! 악! 하악!"
남녀가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하는 대면좌위. 아이작은 마리의 엉덩이를 움켜잡은 채 보지를 휘저었다.
마리는 아이작이 기습적으로 물건을 쑤셔넣은 순간부터 정신이 혼미해졌으나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쾌락에
몸에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큐웅!
"흐기이이익!!"
포옹!
물건을 빼내자 코르크 마개를 따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아이작의 물건이 비좁은 공간에서
빠져나오자 그 안에 묵혀있던 정액이 줄줄 흘러내린다.
푸쉬이이이-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던 탓일까. 그순간 마리의 보지에서 새하얀 액체가 분수처럼 터져나와
침대를 흥건하게 적셨다.
오줌인지 애액인지 모르겠으나 아이작에게는 신비로운 현상이나 다름없었다. 전생의 야동에서만 보았던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구경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이작은 음부에서 더이상 액체가 나오지 않자 개구리처럼
허벅지를 벌린 채 누워있는 마리에게 다가갔다.
"마리?"
"... ..."
아이작은 마리가 기절할 때까지 섹스를 한 것에 뿌듯해한 것도 잠시, 우선적으로 마리부터 신경 썼다.
지금은 하녀를 부를 수 없으니 지금은 젖을대로 젖은 이불로 그녀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생각이다.
펄럭-
다행히 침대보만 젖었지 이불은 멀리 치워둔 덕분에 상대적으로 멀쩡한 편이었다. 이에 아이작은
어느새인가 새근새근 잠을 청하기 시작한 마리의 위에 이불을 덮어줬다.
"마리. 자?"
"흐응..."
"자는구나."
도리어 색다른 매력을 풍기는 것이, 아이작으로서는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드러운
웃으며 마리의 귓가에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마리."
"새근..."
"그럼 잘 자."
*****
정확히는 일어나지 못 했다. 마리는 체력과 기력을 모두 소모하면서까지 섹스에 매진했으니까. 더군다나
태어나서 처음 겪는 쾌락이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어 강제적으로 수면에 취하도록 만들었다.
"흐아아암..."
"... ..."
그제서야 아이작은 어젯밤과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떠올릴 수 있었다. 어제 자신은 마리와
성관계를 맺었고, 짐슴마냥 그녀를 범했다는 것을.
처음에는 배려를 해주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쾌락과 욕망이 정신을 지배하여
배려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마리도 절정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어서 망정이지, 멀쩡했다면
오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리라.
"으응..."
"일어났어?"
"... ..."
겨우겨우 눈을 뜬 마리는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고개를 스윽- 돌렸다. 지금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길의 주인과 동일인물일 터.
아니나 다를까. 마리는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는 아이작의 황금색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그녀는 흐릿해진 시야를 복구하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빡였다가 이윽고 해맑게 웃었다.
"아이작..."
"응. 마리."
"헤헤헤."
마리는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아이작과 바짝 밀착시켰다. 아이작은 마리가 알몸으로 가까이 붙자 물건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쪽- 츄릅-
아이작은 키스로 인해 자신의 하반신이 뜨거워짐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마리는 어젯밤 정사로
인해 일어서지도 못 할테니까.
"또 섰어?"
"흐윽!"
"우와..."
마리는 속으로 그리 생각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자지를 가리던 이불을 걷어버렸다. 그러자 우람한 자태를
내뿜는 아이작의 남성이 온전히 노출되었다.
그녀는 아이작의 남성기를 만지작거리다가 아이작을 쳐다봤다. 아이작은 마리가 손으로 기둥을 붙잡은
이후부터 뜨거운 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하아..."
"... ..."
역시 남자는 여기를 만져주면 좋아하는구나. 마리는 천천히 왕복하던 손놀림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러는 동안 기둥을 위아래로 애무하던 마리는 남은 한 손으로도 아이작의 물건을 희롱했다. 길이가
길이인지라 두 손으로 감쌌음에도 불구하고 수월히 왕복할 수 있었다.
"하움."
"윽!"
탁- 탁- 탁- 탁-
입으로는 넣을 수 있는 곳까지 물건을 집어넣고, 혀로는 가끔씩 기둥을 핥거나 귀두를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한 손은 기둥을 빠르게 훑으며 또 한 손은 그 밑의 고환을 만지작거렸다.
남자의 고환은 약간의 타격에도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고 들었으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루는 중이다.
이것 모두 가문에서 기본적으로 알려준 성지식 중 하나여서 응용할 수 있었다.
"마, 마리!"
푸슛! 퓨웃!
아이작이 마리의 이름을 부르짖음과 동시에 정액이 배출되었다. 어제 그만큼 쌌는데도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쮸읍? 꺄악!"
마리는 아이작의 물건이 전보다 더욱 팽창함이 느끼자마자 서둘러 귀두에서 입을 떼었다. 그와 동시에
마리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정액이 덕지덕지 묻게 되었다.
이어서 그녀는 얼굴에 발라진 정액을 손으로 대충 쓸었다. 아이작의 정액은... 매우 끈적했다. 그리고
은근히 기분 좋은 향기까지 난다.
"할짝."
한편 마리의 손길로 인해 아침부터 시원하게 싸지른 아이작은 누워있는 채로 마리에게 물었다. 아침부터
사정을 하는 바람에 몸이 바람빠진 풍선처럼 빠져버렸다.
아이작은 피식 웃었다.
밤부터 시작하여 새벽 늦게까지 이어진 쾌락은 끝이 나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리가 엉큼한 짓을 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또다시 쾌락으로 빠져들 뻔했다.
하지만 덕분에 약간이나마 쌓여있던 욕구를 배출시켜 몸을 섞지는 않았다. 마리도 호기심에 내 아랫도리를
건드렸을 뿐이지 이미 지칠대로 지친 탓에 하는 건 무리였다.
이후로 나는 남아있는 일과를 처리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잠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옷을 입으면서 어젯 밤 나와 마리가 정사를 치루며 남긴 흔적을 확인한다.
온갖 액체란 액체로 범벅이 된 침대는 하녀에게 부탁하면 알아서 처리해줄테니 문제가 없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후암..."
"일어나. 마리. 하녀가 치워야 돼."
"나 좀 더 잘래..."
업히는 게 아니고 안은지라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이탓에 내 아랫도리가 또다시
불끈거리는 건 물론이고, 마리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할 말이 없어지게 만드는 대답이 마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빈말이 아니라 마리와 사귀지 않았다면
세실리와 먼저 거사를 치렀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첫 여자라는 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나에게 매달린 상태로 더욱 강하게 껴안는 마리. 그러면서
은근슬쩍 몸을 비비는 것이 그녀의 숨겨져 있던 음란함을 자랑했다.
마리도 잔말하지 않고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중간중간 야릇한 신음소리를 내는 바람에 위험할 뻔했으나
가까스로 욕정을 억눌렀다.
"여기도 씻겨줘."
"...거긴 네가 하면 안 될까?"
"우우웅. 빨리."
심지어 아랫부분까지 대신 씻겨달라고 부탁하여 곤란해졌다. 원래는 거절하려 했으나 마리가 볼까지
부풀리며 투정을 부린 탓에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리고 뭐... 결국 참지 못 하는 바람에 그녀를 다시 씻겨줄 수밖에 없었다. 부디 바깥에 하녀가 없기를
바래야지.
첨벙-
"후아..."
"물 온도는 딱 맞아?"
"으응..."
"배고파..."
"조금 있으면 식사가 도착할거야. 손은 움직일 수 있지?"
"아마도."
본래라면 하녀를 시키면 되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제 그만큼 나를 받아들였는데 이정도는
기본적인 매너라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사랑스럽고도 귀여운 여자란 말인가. 어제는 요부와 같은 음탕함을 보였다면 지금은 풋풋한
소녀의 사랑스러움을 드러낸다.
나는 마리의 사랑 고백에 따스한 미소로 맞이해줬다. 마리도 내 미소에 얼굴을 살짝 붉히며 해맑게
웃어줬다.
똑- 똑- 똑-
"네!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할게."
덜컥-
문이 열림과 동시에 식사가 올려진 트레이가 먼저 안으로 들어왔다. 놀랍게도 트레이를 끄는 사람은
하녀가 아니라 어머니다.
"좋은 밤 보냈니?"
어머니는 마리에게 존댓말이 아닌, 반말을 사용했다. 이미 그녀를 예비 며느리로 확정지은 듯했다.
그동안 마리는 어머니의 질문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조용히 대답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 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정말로 귀여웠다.
"...네."
"아프지는 않았고?"
"아프기 보다는... 엄청 좋았어요."
"어머. 그거 정말이니? 다행이구나."
"저..."
너무나 정직하디 정직한 그녀의 표현에 내가 다 수치스러웠으며 얼굴을 두 손으로 덮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해주세요. 제발.
"그럼 앞으로도 우리 아이작을 잘 부탁한다. 아이작 너도 마리를 소중하게 다뤄주고. 여자의 몸은 은근히
튼튼할지 몰라도 마음은 유리처럼 섬세한 법이니까."
"명심할게요."
"네."
"배가 많이 고플테니 식사는 여기 두고 가마. 아참. 아이작?"
"네?"
그런 내 생각을 전혀 모르는 어머니는 우리에게 인사를 하시고는 침실에서 나가셨다. 나는 한바탕 폭풍이
스쳐지간 듯한 기분에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그... 아이작?"
"응?"
"정말로 제논 일대기에 쓸 거야?"
"... ..."
"응..."
"... ..."
"안 될까?"
"...일단 식사나 하고 생각하자."
다양한 의미로 화려하고, 또 화끈했던 전시회가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전시회에 예술품들은 관광객들에게
수많은 관심을 이끌기 충분했고 특히 리루스 악단과 매트릭스 극단의 합작 공연은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훌륭했다.
또한 여태까지 베일에 감싸져 있던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이 마족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세상의 주목을
이끌었다. 그러나 감독이 말했던 것처럼 그는 예술가에 불과했으며 마족이라고 차별하는 시선은 거의
없었다.
이렇듯 여운이 반드시 남을 법한 축제가 모두 끝나고, 사람들은 미네르바 제국과 마이샬 영지에 대한
호평을 내렸다. 준비 기간이 촉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이 얼마나 기술적으로 뛰어난지 보여줬으니.
물론 테르스 왕국이 가만히 지켜볼리가 만무하다. 테르스 왕국은 다음 전시회는 무조건 자신의 수도에서
개최할 거라 엄포를 놓았으며, 미네르바 제국도 아쉬워할지언정 바톤을 넘겨줬다.
"후우..."
사장은 사무용 책상에 앉아 이번 달 매출이 기록된 서류를 보며 복잡하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서류에는
전시회 개최 전과 그 이후의 기록이 적혀있다.
제논 일대기의 휴재가 시작되면서 매출이 급락한 건 물론이고, 심지어 초고가 도난까지 당했을 때는
매출이 바닥을 찍을 뻔했다. 바닥을 찍어도 회사의 규모가 규모인만큼 큰 편에 속했으나 유지비를
고려하면 심각한 적자다.
이렇게만 본다면 출판사가 휘청이는 건 당연지사. 그러나 정말로 신이 축복을 내려주시는 건지 몰라도
전시회가 개최한 이후에 다시 한 번 매출이 상승했다.
전시회에 참석한 관광객들 대부분은 제논 일대기의 팬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공연에 감동을 받아 원작을 보기 위해 제논 일대기를 구매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무엇보다 아이작이 카이르 외전을 발매해준 덕분에 매출이 꾸준히 상승하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는, 사장으로서는 불안하기 그지 없는 현실이다.
초고 도난 사건 이후로 금고는 새로운 걸 구매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쿵! 쿵! 쿵! 덜컹!
"사장님! 속보입니다!"
"으악!"
사장은 호통을 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매튜가 팔랑거리고 있는 손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의 손에는 평범한 편지 한 통이 쥐어져 있었다. 다급하게 오는 바람에 약간 구겨진 상태였으나 사장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사장은 떨리는 손으로 매튜에게서 편지를 전달받았다. 뒤이어 두 눈을 빠르게 굴려 친필 사인을 체크했다.
제논 특유의 사인이 맞다는 걸 직감한 사장은 허겁지겁 편지 봉투를 뜯었다. 매튜는 편지를 보자마자
곧바로 사장실에 직행했는지 뜯은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마침내 편지의 내용물이 공개되고, 사장은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편지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전시회가 개최되어서 놀랍다는 반응이 적혀있다. 허나 여기서 괄목할 점은 '태어난 지역'이다.
사장은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어 흥분한 것도 잠깐, 집중력을 끝까지 유지하며 내용을 읽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고향에 방문할 겸, 전시회가 어떻게 개최될지 궁금하여 마이샬 영지에 방문했습니다.
수 십년 전에는 이름도 없는 고향이었는데 마이샬 영지라는 지역명이 붙어있어 새로웠습니다.]
미네르바 제국은 마이샬 영지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이유를 수도가 포화 상태이기 때문이라 설명했지만,
막상 제논이 마이샬 영지 출신이라고 하니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우연에 우연일 수도 있었기에 속단은 금물이다. 사장은 전시회가 개최된 마이샬 영지에
대해 곰곰히 떠올리다가 매튜에게 물었다.
이 편지에는 수 십 년 전에 고향을 떠났다고 언급돼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논을 고령의 현자로
추정하고 있는 바, 설득력이 매우 깊었다.
사장은 무슨 이유로 이런 사실을 밝혔는지 의문을 품은 것도 잠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제논이 떡밥을
뿌리든 말든 사장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마이샬 영지에 도착하니 여러 작품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림은 물론이고 조각상과 연극, 그리고
음악까지... 그림 중에는 '칼스 즈바사'의 헥토파스칼 킥이 제일 마음에 들더군요. 제 머릿속에 있던
장면과 놀라울만치 똑같았습니다. 여태까지 심오한 주제를 드러내는 예술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칼스 씨의
작품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임팩트가 강한,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제논 일대기를 쓰는 이유가
독자 분들에게 '재미'를 선물해주기 위해서였는데 제 마음에 쏙 들더군요.]
이밖에도 편지에는 리루스 악단의 연주를 통해 귀가 정화되었다니, 매트릭스 극단의 연극은 생애 최고의
공연이었다니 등등.
본인의 전시회에 참석했다는 증거를 하나하나 드러내면서 예술가들을 칭찬했다. 이에 사장은 기분이 점점
고조됨을 느끼면서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이 편지 하나만으로 그 부분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본인의 회사는 가치가 수직상승하겠지.
휴재를 번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문장 하나가 사장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동앗줄이나 똑같았다.
"아아...!"
사장은 감격에 젖은 표정으로 편지를 바라봤다. 개인 사정상 신간이 발매되는 기간이 길어질거라니, 이번
1 년동안은 길면 3 개월에 한 번 나올거라는 부가 설명이 들어있었으나 사장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기나긴 장문의 편지가 드디어 끝이 났다. 하지만 사장은 편지를 모두 읽었음에도 망부석처럼 꼿꼿하게 서
있을 뿐, 작은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저... 사장님?"
"...매튜."
"예?"
"당장 신문사 기자 불러."
*****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제논의 출신이 미네르바 제국, 그것도 마이샬 영지라는 부분을 주목했지만
연재 재개보다는 관심이 덜했다. 이 부분은 팬들보다는 나라의 수뇌부가 더욱 관심을 끌었다.
미네르바 제국은 이게 왠 떡이냐면서 제논의 출신지에 대해 언급하며 기분이 좋다는 성명문을 보냈고,
반대로 똥줄이 탄 테르스 왕국은 미네르바 제국이 헛짓거리를 한 게 아니냐며 반박했다.
그러나 제논(아이작) 특유의 친필 사인이 드러나면서 상황은 미네르바 제국에게 유리하게 작용되었다.
벌써부터 마이샬 영지를 문화 거리로 만들겠다는 등, 문화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도약 단계에 나섰다.
예술가 특유의 붉은색 빵모자와 물감을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앞치마. 독특하게 기른 콧수염과 땡그란
푸른색 눈동자. 아이작이 보았다면 '마리오'를 닮았다고 말했을 것 같이 생긴 인물.
무명의 예술가이자 헥토파스칼 킥을 그려낸 화가, 칼스 즈바사였다. 아이작의 편지에 칼스의 작품이
언급됐을 뿐만 아니라 재미있다고 표현했으니 자연스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칼스는 지금까지 흔하디 흔한, 무명의 예술가였으나 제논의 언급 하나로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덕분에 느닷없이 본인의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보며 크게 당황했다.
사람들에게 재미와 웃음을 선사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예술계에 몸을 던졌으나 여태껏 소득을 본 경우는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본인의 귀족도, 부자도 아닌 평민이었던지라 하루하루 굶주리며 그림에 매진했다.
칼스는 쏟아져 나오는 방문 요청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증표를 하나하나 받아냈다. 무명에다가 가난한
예술가였던 그에게는 이런 대접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윽고 방문 허가증을 무더기로 받은 칼스는 집에 들어오고 나서도 한동안 떨떠름히 멍하니 서 있었다.
이게 정말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집에 들어오고나서 물감 특유의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제논 일대기의
한 장면을 그렸을 뿐인데 단기간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는 것을.
특정 계층만 느낄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 아닌, 모두에게 재미와 웃음을 선물하는 본인의 예술품이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 ..."
칼스는 방금까지 그리다가 말았던 캔버스를 바라봤다. 본인의 이름이 제논의 편지에 언급되어 기쁜 나머지
또다른 장면을 그리는 중이었다.
"이, 이게 머선 일이고..."
"마리."
"왜?"
"언제까지 우리 저택에 있을거야?"
"평생동안 있고 싶은데?"
모두들 알다시피 나는 세실리와 약속을 잡아놓은 상태다. 헬리움을 소개시켜줄 겸 내 초고를 도난한 다크
엘프에 대한 처벌이다.
한시라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건 물론, 그쪽에 눈을 뜨기라도 했는지 낮밤을 가리지 않고 관계를
요구했다. 나 또한 한창 욕정이 끓어오르는 나이인지라 가뿐하게 받아줄 수 있었다.
마리도 처음에는 그녀의 어머니, 그러니까 앞으로 장모님이 될 분에게 부탁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장모님의 말마따나 우리 저택에서 지낸지 벌써 수 일이 지났으니까.
"그럼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얼마나?"
"씻어야 하니까 2 시간 정도...?"
"그럴 줄 알고 마차를 나중에 예약했단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장모님도 만만치 않으신 분이구나. 마리는 장모님에게 허락을 받자마자 내 손을 재빠르게 잡아채더니
침실로 이끌었다.
솔직히 가슴이 뜨끔거렸기에 서둘러 키스로 무마시켰다. 마리는 나와 가볍게 입술을 부딪힌 뒤에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탑승한 마차가 앞으로 서서히 움직인다.
나는 막내가 생긴다면 이름을 뭘로 짓냐니, 얼마나 귀여울까 행복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 어머니를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피임약을 꾸준히 드셔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자식을 5 명 이상 낳았지
않을까 예상한다.
헬리움은 여태까지 반강제적으로 폐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던지라 어떤 곳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하늘이 붉은색을 띄어 불길하다거나 악마가 습격을 하고, 사람의 신체 부위를 사고 판다는 등등. 별의 별
괴상한 소문만 무성할 뿐 제대로 밝혀진 바는 없다.
하지만 나는 마족이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그닥 걱정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세실리나 가르츠가 나를 지켜줄테니 문제도 없을거고.
"왁!"
"흐악!"
그녀는 내 반응을 보고 마음에 쏙 들었는지 시원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매력적인 보이스다.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서둘러 머리를 좌우로 털었다. 마리가 저택으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한 판 했는데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아델리아는 우물쭈물거리며 대답하기 망설이다가 내 눈치를 보더니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개의치 않다는 듯이 얘기하자 아델리아가 드물게 흥분까지 하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다. 잘생긴 것
같으면서도 예쁜 얼굴이 코 앞까지 다가오니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나는 기대감으로 부풀려진 하늘빛 눈동자를 떨떠름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손수건은 널려있으니 아델리아에게 하나 선물하는 셈 치고 줘도 큰 상관이 없다.
이뿐만이 아니라 셔츠 너머로 특유의 부드러운 촉감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내 욕정을 자극시켰다. 하지만
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아델리아를 천천히 밀어냈다.
천만다행히도 마리가 없어서 망정이지, 그녀가 봤다면 불륜 현장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아델리아는 내가
가당치도 않다는 것처럼 말하자 나를 껴안은 팔에 힘을 풀었다.
"...뭐지?"
"그런데 이건..."
"제가 직접 제작한 마법 금고입니다. 이걸로 은인의 귀중품을 소중하게 보관할 수 있을 겁니다. 이틀테면
제논 일대기의 초고 같은 물건을 말이죠."
"...가르츠 씨도 알고 계셨어요?"
"사정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은인의 손바닥을 대시면 마법이 자동적으로 스캔할 겁니다. 은인의 손이 비밀번호이자 열쇠나
다름없는 거죠."
"...이걸 헬리움에서 만들었다고요? 드워프가 아니라?"
"금고는 대장장이가 제작했고 마법은 제가 넣은 겁니다. 별로 어렵진 않았습니다."
"... ..."
역시 십사기 종족답다.
엘프의 나라 알븐하임, 드워프의 나라 마키나, 수인의 나라 애니머스 등등. 이 세상에는 다양한 종족이
존재하는만큼 각 종족을 대표하는 나라가 다수 존재하고 있다.
인간은 인구가 인구이다보니 미네르바 제국, 테르스 왕국, 벨루아 공국, 세이비어 교국 등등 다양한
나라가 있으나 다른 종족은 대부분 나라가 하나밖에 없다. 인간들도 그러하듯 사람은 같은 종족끼리
규합하려는 특징 때문이다.
악마에게 짙은 영향을 받은데다 악마에 가까웠던 탓에 모진 차별을 받고, 심지어 인간들에게 학살까지
당한 비극적인 역사를 갖고 있다. 이탓에 헬리움이 건국되기 전까지는 도망자 신세였으며 기반조차 제대로
닦지 못 했다.
그 결과, 마족들이 도망친 땅에서 '헬리움'이 건국되었다. 사실 초대 헬리움의 국왕은 본인들의 안전을
위하여 헬리움을 세웠으며 만약 다른 종족이 받아준다면 기꺼이 땅을 내줄 포부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제논 일대기가 발간된 이후부터는 180 도 달라졌다. 헬리움은 진정한 의미로 국가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 헬리움은 도망자들의 요람이 아닌, 하나의 종족으로서 나아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언어로 '외교'를 시작한 것이죠. 며칠 전 테르스 왕국으로 헬리움의 사절단이 방문하여 특산품을
선물했습니다."
"특산품이 뭐에요?"
"마법으로 짠 비단입니다. 우리 헬리움은 도망자들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마법을 연마한 바, 마법과
관련된 물품을 제작하는 건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드워프보다요?"
"드워프가 제작 그 자체에 능력이 치중되어 있다면 저희는 마법 물품에만 집중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드워프는 기본적인 검마저도 명검으로 만든다면, 우리 마족은 자체적인 제작 능력은 부족할지언정
마법으로 충당해 명검을 제작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마법에 인챈트를 걸어 절삭력이나 내구성을 높이는
거죠."
듣기만 해서는 역시 개사기 종족답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설명을 한 가르츠를
바라봤다.
가르츠가 우리 저택을 방문하고 하루가 지나고, 현재 나는 헬리움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중이다. 인간이
엘프의 문명을 모방한 것처럼, 마족도 인간의 생활상을 모방하여 내가 알던 거리와 매우 유사했다.
마차가 지나다니는 도로와 그 옆에는 다양각색의 건물이 세워져 있고, 건물의 형식 또한 미네르바 제국의
수도에서 본 것과 비슷하다.
그래도 '사람'이 사는 곳인지라 거리는 활기를 띄었고,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뛰어다니는 모습은 나로
하여금 안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가르츠에게 어떤 원리라고 물으니 마나의 흐름을 불규칙적으로 꼬아버려 실패 확률을 높히는 거라고. 물론
마족들에게조차 복잡한 마법이라 내가 들어서 알아들을리가 만무하다.
"엄마! 엄마! 저거 봐! 저 빨간 머리 남자 인간이지?"
"쉿! 이리 오렴. 그러면 못 써!"
그러다 귓가를 파고드는 아이의 철없는 외침이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엄마로 추정되는 젊은 여인이
자그만한 아이를 급하게 말리는 모습에 내 눈에 잡혔다.
나는 문득 마족의 나이는 어떻게 구별하는지 궁금해졌다. 엘프는 신에게 선택받은 종족인만큼 상대방을
보면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만 마족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헬리움의 국력을 보았을 때고, 그 안은... 인간들의 나라도 다를 게 하나도 없다.
하늘은 푸르기 그지 없었으며 그 아래에 사람들은 각자 할 일을 하러 가기 위해 바쁘다.
"별 생각 없는데요?"
"별 생각이 없다는 말씀은..."
"제가 지금까지 봤던 거랑 똑같아요. 나라가 세워지고, 그 나라를 왕과 귀족이 다르리고, 백성들은
통치에 맞게 행동하면서 생활을 즐긴다. 끝."
"... ..."
"저에게서 무슨 대답을 원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사람 냄새를 풍기는 곳이네요."
"...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갖는 동안, 가르츠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한 권의 책이 쥐어졌다.
"사인 부탁드립니다."
"... ..."
"원래 공주님이 받고 나서 받으려 했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못 받을 것 같습니다."
너무 진심이라서 그냥 해줬다.
아무튼 간에 가르츠에게 사인을 해주고는 세실리와 약속을 잡았던 별장으로 이동했다. 왕성으로는
들어가지 못 하니 세실리의 개인 별장으로 약속을 잡은 것이다.
그런 성지에 마음대로 들어와도 되는지 걱정되었지만 가르츠는 세실리가 허락한 이상 괜찮다고 답했다.
덕분에 아무런 걱정없이 숲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아이작!"
푸욱-
세실리와 안게 되면서 가슴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달되었지만, 나는 끝까지 인내했다. 둘밖에 없었다면 못
참았겠지만 지금 곁에는 가르츠가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재회의 감동에 젖어들 수 없다. 내가 헬리움에 온 본질적인 이유가 따로 있다.
"누나. 도둑은 어디에 있어? 가능하면 빨리 처리하고 헬리움을 돌아다니고 싶거든."
"그 사람들은 미리 도착해 있어. 어서 가자."
"응."
세실리도 어서 빨리 처우를 결정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내 말고 동시에 나와 팔짱을 끼더니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르츠는 그런 우리의 뒤를 따라왔다.
"500 년 형."
"뭐?"
"감옥에서 500 년 동안 투옥되는 거래.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다보니 다크 엘프 내에서도 중형을 내린
모양이야."
"... ..."
"...아르웬?"
"... ..."
"네가 왜 여기 있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힘없이 말하는 아르웬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지난 번처럼 로브를 입고 있었으나
후드를 완전히 벗어 그녀의 외모가 완전히 드러난 상태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르웬이 이곳에 있는 것일까. 내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으며 곧바로
그녀의 옆을 바라봤다.
'이 사람들이...'
새하얀 피부의 아르웬과 달리 구릿빛 피부가 유독 눈에 띄는 두 여자가 곁에 서 있었다. 중앙에는
붉은기가 약간 도는 밀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의 소녀가, 그 옆에는 흰색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었다.
특히 이중에서도 성숙한 매력을 뿜내는 여인에게 눈길이 간다. 아르웬과 소녀 모두 로브를 쓰고 있었지만
여인 혼자만 방어력이 절륜할 것 같은 방어구를 착용 중이다.
탄탄할 것 같은 허벅지는 물론이고, 앙증맞은 배꼽과 더불어 11 자로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으로 하여금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있다.
'저러면 안 춥나?'
나와 똑같은 황금색 눈동자로 이쪽을 노려보는 다크 엘프는 몰라도, 중앙의 소녀는 죄인처럼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있다. 위치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분명 저 소녀가 내 초고를 훔친 범인일 터.
"...저 애야?"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다크 엘프 소녀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아르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르웬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르웬."
"말해라."
여전히 우아하면서도 근엄한 말투를 사용하는 아르웬. 아무래도 외모가 외모인지라 미묘한 간극이
느껴진다.
근엄한 말투로 보나, 은연히 흘러나오는 기품으로 보나 높으신 분인 건 예측하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여왕일 줄은 생각치도 못 했다.
'과인'이나 '짐'처럼 스스로를 낮추는 특유의 문체를 사용하지 않는데다 축제 당시의 행적을 고려하자면
격식을 따지지 않는 성격인것 같다.
뒤이어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와 정면으로 바라봤다. 두려움에 제대로 잡아먹힌 듯한, 두 눈이
덜덜 떨리고 연신 입술을 축이고 있다.
아무래도 500 년 형이라는, 엘프에게도 엄청난 형량이 떨어졌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나 같아도 징역 50 년
형을 받으면 정신이 아득할텐데 저 소녀에게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 불쌍하긴 하네.'
비록 이 세계가 중세를 표방하는 판타지 세계이지만, 남의 물건을 훔치면 안 된다는 건 사람의 기본적의
양심이다. 그런 양심을 팔아버릴만큼 내 초고를 훔치게 된 경위가 대체 무엇일까.
"그럼 왜 훔쳤니? 그리고 어째서 저택에 몰래 침입해서 내가 제논이라는 걸 알고 싶어한 거야?"
"그건..."
"레인은 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그대의 초고를 훔친 것이다."
나는 아르웬도 입을 다물었겠다, 레인이 스스로 말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줬다. 레인은 아르웬이 본인의
편이라는 걸 알게 되어 긴장이 살짝 풀렸는지 아까보다 좀 더 커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나 레인은 이미 범죄를 저질렀고, 더 나아가 저택에 침입했다. 이것만으로도 문제가 많다.
"아르웬."
"...말해도 좋다."
"너도 잘못된 건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
"그럼 왜 초고를 바로 돌려주지 않은거야? 출판사에 돌려놓기만 해도 괜찮잖아."
솔직히 레인이 일을 저질렀어도 아르웬이 잘 수습만 한다면 문제가 없다. 말이 좀 많겠지만 초고를
출판사에 돌려놓기만 해도 상관없었으니까.
그러나 아르웬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 사단이 나버렸고.
"...그 부분은 내가 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인간들은 의심이 많으니 바로 돌려놓아도 진짜라는 걸 믿지
않을거라 생각했지."
"쩝..."
하지만 그녀의 교육 방식은 매우 잘못되었다. 도덕심이 부족한 어린애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따끔하게 혼을
내야지, 오냐오냐하니까 이리 된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레인이 우리 저택에 침범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르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는 후견인으로서의 자격이 매우 부족했다.
"아르웬. 인간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의심이 많지는 않아. 오히려 의심이 많은 건 너희 엘프겠지.
다른 종족보다 심지가 굵고 신념이 확실한만큼, 무언가를 배척하는 경향이 강할테니까."
"... ..."
"어쨌거나 아르웬 너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건 알겠어. 그러면 두 번째. 우리 저택에 침입해서 초고를
훔치려 한 건..."
"그, 그건 절대 아니에요! 전 정말로 확인만 하려 했다고요!"
레인은 내가 말을 하다가 말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억울한 표정을 보아 정말로 초고를 훔치지 않고 확인만
하려고 한 듯했다.
하지만 저택의 침입한 것도 많은 문제를 낳는다. 그때 당시 저택에는 황궁에서 파견한 기사가 경계 근무를
서는 중이었는데 그 삼엄한 경계를 뚫고 내 침실에 들어왔다는 의미이니.
레인이 항의하려는 찰나, 그 옆에서 묵묵히 서 있었던 다크 엘프 여인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에 레인은 황금처럼 빛나는 여인의 눈과 마주했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저들의 입장을 들어보아야겠지. 나는 레인이 아닌 아르웬을 바라보며 질문을 꺼냈다.
솔직히 엘프와 다크 엘프가 어찌 되었던 간에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거다.
"...아마 무산될 확률이 높을 것이다. 레인에게도 잘못이 있지만 내가 후견인으로서 부족한 점이 많으니
다크 엘프도 나를 믿기 힘들겠지."
"흠..."
"그대가 이대로 형을 집행하라고 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그대에게 전하고 싶구나."
저벅- 저벅-
저벅-
사실 드레스라기 보다는 타이트한 원피스에 가까워서 그녀의 몸매가 부각되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외모와
달리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아름다운 몸.
투욱-
그녀는 이미 결의를 내린 표정을 짓더니 서서히,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굽히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당황한 레인이 다급하게 아르웬을 불렀으나 시리스가 곧바로 제지시켰다.
"죄송합니다."
"... ..."
"제가 후견인으로서 부족한 탓에 레인이 잘못을 저지르고, 더 나아가 사태를 수습하지 못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못 드리겠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머리까지 박으며 용서를 구하는 아르웬을 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왕으로서는 물론,
한 사람으로서 매우 굴욕적인 자세다.
솔직히 말해 허리만 숙여도 그녀의 진심이 나에게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약간 과할 정도로
사과를 구하는 걸 보면 그녀에게 있어서 레인이 얼마나 큰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아르웬이 납작 엎드린 상태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은회색 머리카락이 땅 위에
흩뿌려진 상태이며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여, 여왕님..."
"... ..."
"끄윽... 흑..."
아르웬을 망연히 바라보던 레인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의 곁에 있는 시리스는
차마 이 광경을 못 보겠는지 눈을 감는 중이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 ..."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죄송합니다."
"... ..."
"레인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막지 않고 방관한 점.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니. 당신까지 이러시면 어떡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왜 또 엎드리는 거야. 이 사람도 무슨 잘못을 한
건가.
무슨 연쇄작용도 아니고 시리스까지 이러니까 난감하기 그지 없다. 게다가 그림이 이상하다 못해 기묘하다.
"후우.."
아르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울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바닥에 엎드려서 그런지 그녀의 무릎이 흙으로
지저분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일어나자 레인과 시리스도 연달아 일어났다. 레인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히끅거리는 중이었고,
시리스는 무표정이었으나 어딘가 슬퍼보이는 눈빛이다.
"아까 세실리 누나에게 들었어. 다크 엘프 자체적으로 레인의 형량을 결정했다고. 500 년 동안 감옥에
있는 거라고?"
"그렇다."
"500 년이라... 분명 엘프에게도 적지 않은 기간이야. 그렇지? 자그마치 인생의 반을 감옥에서만 있어야
하는 거니까."
10 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500 년이면 세상은 설명조차 부족할 정도로 변화되어 있다. 오랫동안 옥살이를
한 사람들이 후에 석방되어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 하는 이유가 바로 너무나 크게 바뀐 세상과 사회
때문이다.
그러니 레인이 500 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다 석방되어도 적응을 아예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제 막 인격이
형성되려는 어린 아이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단, 초고를 훔친 건 명백한 잘못이며 더군다나 내 저택에 침입까지 했다. 아무리 미성숙한 아이여도
용서받지 못할 일은 해서는 안 된다.
당장 500 년 동안은 괜찮을 것이다. 내가 천수를 누려 사망해도 세실리에게 미래를 맡기면 그만이니까.
"누나."
"응. 말해."
"누나는 나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지?"
"맞아. 그런데 그건 왜? 이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거니?"
"모두 알다시피 나는 인간이야. 마족이나 엘프에 비해서 짧디 짧은 수명을 가진 인간이지. 500 년은커녕
100 년조차 버티지 못 하는 건 당연해."
"... ..."
"그러니 레인에 대한 관리는 전적으로 세실리에게 맡길 거야. 단, 레인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데다가
어린 나이라는 걸 감안하고 어느 정도 감형을 시켜줄거고. 500 년이 아니라 300 년 정도?"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들을 생각과 달리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집행유예의 진정한 대목은 지금부터 나온다.
"아직 내 설명 안 끝났어. 여기서 조건이 붙어."
"조건이라함은..."
"이미 다크 엘프 내부에서 500 년 형을 확정지었으니 이건 바꾸지 않을거야. 300 년이라는 소리는
집행유예, 그러니까 일종의 감시라고 해야되나? 아무튼 레인이 300 년 동안 특별한 사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대로 500 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는거지. 또한 범죄의 강도에 따라 500 년
형에서 더 추가시킬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러므로 레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되, 또다시 비슷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면 가차없이 500 년 동안
감옥에서 썩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 레인이 특별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300 년 동안 얌전히 지내면 무죄라는 겁니까?"
명심할 것은, 레인이 무죄가 아니라 유죄라는 것이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세실리에게 맡긴 이유도
이때문이다.
"이 시간 이후로 평소처럼 행동해도 상관없지만, 레인은 앞으로 세실리의 감시를 받게 될 거야. 아르웬이
그러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계약이나 각서라도 쓰는 게 좋겠지. 혹시 마법으로도 가능해?"
"가능해. '맹약'이라고, 억지로 부수는 건 거의 불가능한 마법이지. 보통 주종 관계에서나 쓰는
거지만..."
"... ..."
세실리가 말을 흐리며 아르웬을 바라보자 아르웬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악마의 후예인 마족과 신의
선택받은 엘프와의 맹약.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마. 사실상 우리에게 선처를 해준거나 다름없는 형식의 형벌이니."
"아르웬도 명심해. 이건 무죄가 아니라 유죄를 선고한 거야. 만약 레인이 이와 비슷한 일을 저지른다면
그때는 선처고 뭐고 없어. 무조건 500 년 형이야."
"명심하도록 하마. 이는 레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저, 절대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진짜로요!"
레인이 명심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강렬하게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에게는 지옥문에 한
발짝 내딛었다 겨우겨우 빠져나온 격이니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뭐, 이렇게 해도 아르웬이 후견인으로서 자격이 박탈당하는 건 어쩔 수 없을거다. 그러나 이건 그들의
사정이고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레인의 처우만 결정한 것이지 아르웬과 시리스가 남아있다. 나는 레인에게서 고개를
돌려 아르웬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공범이 아니라 방관자였으니 강도는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처벌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시리스. 당신은 저와 아르웬 사이의 심부름꾼 역할을 해주세요. 제가 아르웬에게 할 말이나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연락을 할 수 있도록."
"심부름꾼이라... 알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곁에 계속 있어야 하는 겁니까?"
"음... 혹시 제가 필요할 때마다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있나요? 아니면 소환을 한다던가."
그러니 마법으로 때우는 게 가능한지 궁금해 했는데, 때마침 세실리가 적당한 방법 하나를 가르쳐줬다.
심지어 엘프에 관한 비판적인 서적도 존재하는데, 엘프는 이상한 부분에서 고집이 강했기에 폐기하지 않고
온전히 보관하는 중이다.
"그, 그걸로 되겠느냐? 그정도라면 시리스에게 지시하지 않고도 내가 공간 이동 마법으로 그대에게
전달할 수 있다."
도저히 못 믿겠는지 재차 묻는 아르웬. 그녀는 여왕이니 당연히 쉽겠으나 인간인 나에게는 아니다.
엘레나 교수가 알려줬듯이, 성지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깐깐하면서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한다. 알븐하임에
들어서는 것조차 엄격한 심사가 이루어지는데 성지는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이들이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마족도 그랬는데 이제와서 무슨
의미를 부여한다고.
실제로 권한은 나에게 있으니 수틀리면 그녀는 500 년 확정이다. 덕분에 철이 좀 든 것 같지만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줄 필요가 없다.
"누누이 말하지만 너는 무죄가 아니라 유죄야. 300 년 동안 세실리의 감시 아래에 살아야하는 건 물론,
그 사이에 범죄를 저지르면 500 년에다 더 심한 형벌까지 받을 수도 있어. 알겠지?"
"며, 명심할게요! 당신이 죽은 후에도 반드시 가슴에 담을게요!"
"뭔가 어감이 좀 이상한데... 어쨌던 알겠어."
"...혹시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시리스는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도 특유의 날카로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질문을
하려는지 궁금해하여 턱을 까닥였다.
"말하세요."
"심부름꾼의 기간은 언제까집니까?"
"아, 그걸 생각 안 하고 있었네. 제가 죽을 때까지 할래요? 어차피 전 인간이라 당신에게는 짧은
기간일텐데."
"나, 나도 그대가 신들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마. 어차피 성지에 있는 책들은
나조차도 전부 읽지 못 했으니 80 년의 기간이 매우 짧게 느껴질 것이니라."
"... ..."
아무튼 간에 이후로 레인에게 초고를 돌려받음으로서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고, 초고가 진품인지, 그리고
훼손된 부분이 없는지 체크했다.
"흠... 아참.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저택에는 어떻게 침입한 거야? 분명 황궁에서 파견한 기사단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조금 이상해서. 다크 엘프가 그정도로 강해?"
"강하기 보다는 그들의 능력이 이질적인 것이니라. 마법사가 없는 이상 그들을 감지하는 건 매우
어렵지."
설명을 들으니 다크 엘프는 전생의 여러 매체에서도 나온 것처럼, '은신'에 특화된 종족인 듯했다.
직업적으로 도적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다.
하지만 전황이 불리해지자 어떤 엘프 전사는 어떻게든 승기를 잡기 위해 뒷공작을 벌였다가 엘프의 명예를
실추했다며 구속당했다.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방법을 그 전사가 가장 먼저 깨닫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책에서는 감옥에 투옥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전쟁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확실히 조국에서 배신당한 군인의 아픔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본인의 선택이 정답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면 원망이 더더욱 깊어졌겠지.
"아아..."
털썩!
긴장이 풀리기라도 한 것일까. 레인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옆에서 시리스가 다급하게 부축해준 덕에 겨우겨우 일어설 수는 있었지만, 갓 태어난 산양처럼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감사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자비를 베풀어줘서 고맙다는 건지. 어쨌거나 호의적인 감정인 건 확실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지저분해진 그녀의 무릎이 신경 쓰였다. 그녀가 엎드려 사과한 것도 영 그랬는데
더러워진 무릎을 보니 내가 다 불편하다.
"잠깐 실례할게."
"그, 그대여? 지금 무슨..."
툭- 툭-
나는 아르웬이 당황하건 말건 허리를 살짝 굽히며 그녀의 더러워진 무릎을 손으로 털어줬다. 순백에
가까운 은회색 드레스라 세탁을 해야겠지만 일단 흙먼지나 털어주는 식이다.
"...알겠다."
"그럼 이제 다 끝났으니까..."
"우리는 이만 가볼게."
세실리와 아르웬 사이의 맹약도 마법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마법에 문외한인지라 둘이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세실리가 종이를 허공에 소환시키더니 손가락으로 유려하게 움직인 후, 그곳에 아르웬이
사인하듯이 이루어졌으니.
어쨌거나 맹약도 끝났겠다, 나는 아르웬 일행이 떠나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말라는 듯이 말했다.
"...그대는 보면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구나. 책으로 얻는 지식은 한계가 있을텐데 또다른 세상을 창조할
능력을 갖고 있다니. 심지어 약관도 되지 않아 보이는데."
나는 그저 지구의 문화를 받아들인 환생자에 불과하며, 여기서는 세상을 뒤흔드는 대문호일지는 몰라도
지구에서는 평범하디 평범한 웹소설 작가였다.
"여왕님."
"말이 길어졌구나. 우린 이만 가보겠다."
시리스의 부름에 아르웬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나와 세실리 또한 각자 예법을 갖추며
떠나가는 엘프 일행을 배웅했다.
인간들은 언제쯤 저런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까. 인간들이 마법을 본격적으로 사용할 수 있던
시기가 종족 전쟁 이후부터였으니 100 년 정도 지나면 되는 것일까.
나는 아르웬 일행이 사라진 장소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옆으로 옮겼다. 세실리가 빙글빙글 웃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아이작."
"응. 누나."
"했구나?"
"...했지."
"흐응."
내가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담긴 목소리로 답하자 세실리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야릇한 비음까지
흘리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으며 긴장의 끈이 붙잡게 되었다.
이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마리와 몸을 섞었으니 이제는 자신이라고 말하려는 걸까. 가르츠도 있는데 그런
말을 했다간...
눈치가 쓸데없이 빠르다고 해야할지. 남몰래 자리를 비켜준 그의 약삭빠른 행동에 살짝 어이가 없어졌다.
스윽-
그사이 세실리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나에게로 서서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와 세실리 사이의 거리는 숨소리가 느껴질만큼 가까워졌으며 아름다운 그녀의 미모가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좋았어?"
마침내 우리 둘의 사이는 살짝 벌어졌고, 이렇게 보니 그녀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져 있다는 걸 확실하게
체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장난기가 많은 그녀의 성격상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남자가 사실상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은 즉슨, 방금 전 그 행동도 나름대로 용기를 낸 것일 터.
"...엄청 좋았어."
"그, 그렇구나..."
역시라는 말을 보면 그녀도 마리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던 듯하다. 그녀는 어깨를 붙잡은 내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아 천천히 내렸다.
"아이작...!"
그러나 세실리는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가 그대로 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꼭 기쁘게 해줄게! 그때까지만 열심히 마리랑 하고 있어. 알겠지? 나도 마리한테 들으면서
노력할테니까."
"언제는 내가 원할 때마다 해준다고 하지 않았어?"
"원래는 그랬지만 어머니에게 들었어. 남자든 여자든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상대방에게 더욱 큰 쾌락을
선물해줄 수 있다고. 난 네가 과일처럼 농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먹을거야."
하마터면 '여기서 확인해도 돼'라는 말을 꺼낼 뻔했지만, 가르츠가 어디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가까스로 억누를 수 있었다.
"...아이작."
"응."
"키스는... 지금 해도 될까?"
그 물음에 품 안의 세실리를 슬며시 떼어냈다. 곧이어 기대감과 긴장으로 채워진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던 것일까. 세실리는 본인의 욕망에 휩쓸린 듯, 내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입술을 갖다 대었다.
톡-
"하아..."
세실리는 달콤한 숨소리를 내뱉으며 나를 쳐다봤다. 몽롱하게 풀려있는 붉은색 눈동자와 눈에 띄게 올라온
홍조.
나는 마리에게 모텔처럼 생긴 건물로 질질 끌려가며 속으로 되뇌었다. 정말로 수업을 끝날 때마다 마리랑
몸을 섞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
그동안 전시회가 열렸던 마이샬 영지에 방문하거나 다양한 팬아트를 만드는 등. 이 세상에 별로 없는
유희거리를 즐기면서 시간을 소비했다.
모두가 기다리던 소식이 신문에 실리면서 환호를 이끌어 내었다. 드디어 기다림의 끝이 왔다며, 또다시
제논 일대기에 빠져들 시간이 도래했다면서 가히 신앙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제논 일대기 11 권을 마음껏 사들였고, 서점은 물 밀듯이 쏟아져오는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혼이 빠져나갈 것 같았다.
[충격! 제논의 스승, 카이르의 죽음. 과거, 자신의 제자였던 '질투'에게 전사해...]
[카이르 외전이 나온 이유가 여기 있었다. 더 큰 슬픔과 비극을 선사하기 위한 초석.]
[별이 떨어진다는 묘사를 통해 카이르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 엘프 여왕, 엘리샤. 과연 그녀의
반응은?]
[수많은 독자들이 카이르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오열한 나머지 탈진 증상을...]
[정녕 수명을 초월한 사랑은 이루어 질 수 없단 말인가? 소식을 듣게 될 엘리샤와 제논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제논이 질투를 죽이는 건 정해진 수순. 하지만 스승마저 이긴 질투에게 어떤 방식으로 승리를 점할
것인가?]
사크란의 희생에서도 보았듯이, 카이르의 죽음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절대 다수의 독자들이 카이르의
죽음에 슬퍼하며 진심으로 애도했다.
"...매튜."
"네. 사장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뭐지?"
"추모 행렬입니다. 카이르의 죽음으로 인해 독자들이 우리 출판사 앞에 꽃을 놓고 가더군요."
"아니. 마이샬 영지도 아니고 왜 우리 출판사에?"
"마이샬 영지에도 행렬이 이어지는 중이랍니다. 특히 카이르와 관련된 예술품 앞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꽃이 놓여져 있다고 들었어요."
"... ..."
사람들이 출판사 뿐만 아니라 마이샬 영지에 전시된 예술품에 애도의 의미로 꽃을 선물했다. 비록 상상
속의 인물이라지만, 워낙 임팩트가 강렬하고 캐릭터 자체가 매력적이어서 사람들이 스스로 행동에 옮긴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크란의 희생 당시에는 이런 일이 없었나?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그때는 전시회도 개최되지
않았고 마족들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던 시기였다.
하물며 카이르는 제논의 스승으로서 꾸준히 인기를 끌었고, 외전을 통해 인기가 수직상승한 케이스다.
흔히 '덕질'을 하려는 사람이 막 생기려는 찰나에 캐릭터가 죽어버린 것이다.
아무튼 카이르의 죽음은 아이작이 예상하지 못 했으나 또다른 문화를 낳았고, 마이샬 영지는 때아닌
관광객 방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건 또 뭔데?"
레킬리스 공작가의 딸, 마리 하우젠 레킬리스는 최근 행복한 나날을 즐기는 중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아카데미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건 물론이고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거의 없었다.
아이작의 조언을 받아 둘이서 담판을 지었고 리나가 그때는 정말 미안하다며, 허리를 굽혀 사과하는
것으로 둘의 관계는 조금이나마 가까워졌다. 물론 마리도 스스로가 너무 쪼잔했다며 리나에게 사과하는 건
잊지 않았다.
이처럼 실타래처럼 얽히고 섥혔던 리나와의 악연을 청산하니 남은 건 단 하나. 남자친구 아이작과의
관계다.
아이작이 누구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정체를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난 제논 일대기의 저자, 제논이다.
마리가 학업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이작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케어해주니 불행할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너무 행복한 바람에 가끔씩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아이작."
"응?"
그전까지는 갓 태어난 새끼 펭귄마냥 귀엽고 순수한 미모를 지녀 보호 욕구를 일으켰는데, 지금은 눈매가
날카로워지고 젖살도 눈에 띄게 빠져 전보다 늠름해졌다.
"불렀어?"
"흐으."
마리는 아이작이 입을 열자마자 귓가를 속삭이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에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에
띄게 커져버린 몸도 몸이지만 그녀가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바로 목소리다.
남자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여자에게 큰 호감을 주기에 충분한데, 아이작은 목소리 뿐만 아니라 개성적인
미모까지 보유하고 있다.
"아이작. 아이작."
"응. 마리."
"헤헤."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이런 완벽한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일까. 그녀는 베시시 웃으며 아이작의 팔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아이작도 그녀의 애교에 황금색 눈동자를 깜빡였다가 피식 웃으며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에
마리는 더욱 쓰다듬어달라는 듯이 고양이처럼 고롱고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으응~"
"내가 그렇게도 좋아?"
"응."
"나도 좋아."
그러면서 은글슬쩍 전보다 살짝 커진 가슴 사이에 끼우는 건 잊지 않았다. 아이작이 성장한 것처럼 그녀도
다양한 의미로 성장한 덕분에 성숙한 매력을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작은 팔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못 말린다는 듯이 웃기만 할 뿐, 전처럼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하지는 않았다. 이미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에 이정도는 애교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마리 쪽에서 장난을 쳤으니 자신 쪽에서도 장난을 칠 생각이다. 그는 얼굴을 천천히 내밀어 마리의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따르자면 가슴은 누군가 만져주면 크기가 커진다는데 아마 그 영향도 있지 않을까.
속옷을 새로 맞춰야한다며 투덜거리던 마리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예쁘고 몸매도 훌륭한 여자가 내 여자친구라는 게 가끔씩 믿기가 어려웠지만, 그래서인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정신을 차렸는지 마리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겨우겨우 대답했다. 손가락으로
볼을 누르면 붉은 물이 뚝- 뚝- 흘러나올 것 같다.
"이번에는 무슨 시험이야?"
"수학 시험. 아이작은 부럽다. 역사학만 시험을 보면 되잖아."
하지만 이 세상의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 다른 강의에 참관하기도 한다. 대신 시험은
거의 치지 않고 정말로 참관만 하는 식이어서 교수들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노트를 정리하는 동안 엘레나 교수가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다. 이후로 연구실에 방문하고 신디에게
작문법을 가르쳐주는 대가로 서적과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일을 저지르고 싶었지만 내일이 시험이다보니 겨우겨우
인내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나중을 기약하면 된다.
"그나저나 너는 괜찮아?"
"뭐가?"
"지금 11 권 때문에 난리도 아니잖아. 너희 영지에는 조문을 오는 사람들까지 있다며?"
"... ..."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카이르의 죽음, 더 나아가 인간과 엘프 간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났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실제로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카이르를 위한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고.
어머니의 편지에 적힌 내용에 따르자면, 하나같이 엄숙한 표정으로 카이르와 관련된 예술품 앞에 흰색
국화꽃을 놓고 간다고. 참고로 전시회 당시에 배치되었던 예술품은 그대로 놔둔 상태다.
11 권에는 카이르의 죽음이 하이라이트고, 12 권은 제논과 메리의 관계가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메리가
스스로 엘프임을 밝힘과 동시에 제논에게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세실리에게 해줬던 대사가 등장한다. 누구처럼 후회하며 살 바에야 차라리 그리워하며
사는 편이 낫다고. 그러니 너를 사랑하겠다고 말이다.
다행히 지금 주변에 돌아다니는 행인이 없어서 망정이지, 마리의 발언은 꽤 위험한 편이었다. 마리도 그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는지 헙! 하며 손바닥으로 다급히 입을 막았다.
이어서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등장인물을 죽이는 건 좀 위험할 거 같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카이르가 부활하거나
그러진 않아?"
"음... 안 할 걸?"
"안 할 걸은 또 뭐야? 고민하고 있다는 거야?"
"등장해도 결말부에 등장할 거야. 애초에 확정된 것도 아니고."
원래는 카이르는 등장이 전혀 없을 예정이었지만, 독자들의 성토가 심하게 이어지다보니 마음이 조금씩
바뀌는 추세다. 단, 스토리가 꼬일 것을 염려하여 등장해도 에필로그에 등장할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 등장하냐면, 내가 이 세상에 환생한 것처럼 카이르와 똑같은 영혼이 환생하는 식이다.
엘리샤와 만나는 순간 전생을 모두 기억해내 다시 한 번 이어진다는, 그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
스토리를 변경하면 여태까지 뿌려놓은 떡밥과 복선을 회수하지 못 하는 꼴이라 졸작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고 그대로 진행하면 독자들에게 욕을 무진장 얻어먹을 것이다.
설마 파혼당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엘레나 교수가 부른다면 재깍재깍 연구실로 달려가야 된다. 그녀가 나를 추천 학생으로 임명했으니
사실상 그녀의 조수나 다름없다. 물론 파릇파릇한 신입생이라 신디처럼 막 굴리지는 않는다.
이렇다 보니 글을 쓰다가 쉬고 싶으면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에 방문하는 편이다. 마리나 세실리는 수업이
전부 끝나고 만나는 편이니 그때까지만 있으면 상관없다.
연구실에서 신디에게 작문법을 가르쳐 주는 건 일상이니 넘어가고, 엘레나 교수가 나에게 의견을 묻거나
아니면 내가 그녀에게 질문을 하여 서로 토론을 하는 등.
마지막으로 내가 보기와 달리 뛰어난 지식량와 독특한 관점을 자랑하니까 이런 저런 논문과 서적을 주면서
나를 대학원생으로 키우려는 조짐까지 보였다.
"신디에게 듣자하니 엘프는 종족 전쟁을 치른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의 갈등이 심하다고 들었거든요.
실제로도 그런가요?"
"음..."
요즘 애들은 버릇없다.
더군다나 다크 엘프 측에서 지원을 보내려고 했으나 원로원 쪽에서 칼같이 거절했다고 아르웬이 알려줬다.
인간 연합에게 밀리는 와중에도 다크 엘프가 추방자라는 이유때문에 거부한 것이다.
반대로 인간들은 어떻게든 승리를 점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암살자를 보내는 건
기본이고, 많은 희생이 있을지라도 보급로를 차단시켰다.
"정녕 엘프가 하나로 규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종족 전쟁 같은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을
때 법률이니 뭐니 하면서 따질 것 같긴 한데."
"여왕님은 그러지 않겠지만 아마 원로원 쪽에서 말이 나오겠지. 이빨 빠진 호랑이라 해도 다리가 없어진
건 아니거든. 지난 번 네가 시험지에 적었던 말처럼,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야."
"많이 힘들다는 거군요."
"그렇지. 무엇보다 신세대라 해서 구세대랑 다른 건 크게 없어. 종족 특징인지 모르겠지만 엘프는 본인이
옳다고 믿는 걸 굳게 믿는 편이거든. 이때문에 아이케르 전사장 같은 위인이 더욱 눈에 띄었던 거고."
아르웬도 신세대 엘프답게 여러모로 파격적인 정책을 고루 펼치고 있지만, 간혹 가다가 융통성이 없는
면모를 보면 확실하다. 현재 내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있는 시리스도 마찬가지고.
이처럼 불편한 생활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이유는 알븐하임에서 본인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는 거라고
시리스가 설명해줬다.
이뿐만이 아니라 제논 일행도 악마들의 계속된 위협에 엘프 전사장과 함께 정찰을 나갔으며, 그때부터
의회의 트롤링이 시작되는 것이다.
똑- 똑- 똑-
"저에요오... 들어갈게요오..."
피곤에 쩔어있고 흐물거리는 말투가 인상적인 엘프 여인, 신디의 목소리였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그녀의 얼굴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어때? 잘 됐어?"
"네에... 무사히 통과되었어요오... 이제 편히 잘 수 있겠다아... 헤헤헤..."
신디는 베시시 웃으며 후련하다는 얼굴이었다. 전에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을텐데 엘프는 걸어다니는
도서관이라 불리는만큼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된다.
하지만 신디는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맑게 웃었다.
이제 신디도 마음만 먹으면 교수 혹은 학자가 될 수 있다. 엘레나 교수의 조수 노릇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신디도 그걸 알았는지 내 손을 풀어주고 곰곰히 생각했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12 권의 반응이 참 기대되는구나.
물론 엘레나 교수가 부른다면 재깍재깍 연구실로 달려가야 된다. 그녀가 나를 추천 학생으로 임명했으니
사실상 그녀의 조수나 다름없다. 물론 파릇파릇한 신입생이라 신디처럼 막 굴리지는 않는다.
이렇다 보니 글을 쓰다가 쉬고 싶으면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에 방문하는 편이다. 마리나 세실리는 수업이
전부 끝나고 만나는 편이니 그때까지만 있으면 상관없다.
연구실에서 신디에게 작문법을 가르쳐 주는 건 일상이니 넘어가고, 엘레나 교수가 나에게 의견을 묻거나
아니면 내가 그녀에게 질문을 하여 서로 토론을 하는 등.
마지막으로 내가 보기와 달리 뛰어난 지식량와 독특한 관점을 자랑하니까 이런 저런 논문과 서적을 주면서
나를 대학원생으로 키우려는 조짐까지 보였다.
"신디에게 듣자하니 엘프는 종족 전쟁을 치른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의 갈등이 심하다고 들었거든요.
실제로도 그런가요?"
"음..."
요즘 애들은 버릇없다.
더군다나 다크 엘프 측에서 지원을 보내려고 했으나 원로원 쪽에서 칼같이 거절했다고 아르웬이 알려줬다.
인간 연합에게 밀리는 와중에도 다크 엘프가 추방자라는 이유때문에 거부한 것이다.
반대로 인간들은 어떻게든 승리를 점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암살자를 보내는 건
기본이고, 많은 희생이 있을지라도 보급로를 차단시켰다.
"정녕 엘프가 하나로 규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종족 전쟁 같은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을
때 법률이니 뭐니 하면서 따질 것 같긴 한데."
"여왕님은 그러지 않겠지만 아마 원로원 쪽에서 말이 나오겠지. 이빨 빠진 호랑이라 해도 다리가 없어진
건 아니거든. 지난 번 네가 시험지에 적었던 말처럼,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야."
"많이 힘들다는 거군요."
"그렇지. 무엇보다 신세대라 해서 구세대랑 다른 건 크게 없어. 종족 특징인지 모르겠지만 엘프는 본인이
옳다고 믿는 걸 굳게 믿는 편이거든. 이때문에 아이케르 전사장 같은 위인이 더욱 눈에 띄었던 거고."
역시 소설은 소설로 써야할 듯했다. 객관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엘레나가 저리 말할 정도로 엘프라는
종족은 그만큼 융통성이 더럽게 없는 모양이다.
아르웬도 신세대 엘프답게 여러모로 파격적인 정책을 고루 펼치고 있지만, 간혹 가다가 융통성이 없는
면모를 보면 확실하다. 현재 내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있는 시리스도 마찬가지고.
이처럼 불편한 생활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이유는 알븐하임에서 본인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는 거라고
시리스가 설명해줬다.
이뿐만이 아니라 제논 일행도 악마들의 계속된 위협에 엘프 전사장과 함께 정찰을 나갔으며, 그때부터
의회의 트롤링이 시작되는 것이다.
똑- 똑- 똑-
내가 머릿속으로 열심히 스토리를 구상하는 동안 누군가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이에 문 쪽으로 고개를
들린 순간, 문 뒤로부터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에요오... 들어갈게요오..."
피곤에 쩔어있고 흐물거리는 말투가 인상적인 엘프 여인, 신디의 목소리였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그녀의 얼굴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어때? 잘 됐어?"
"네에... 무사히 통과되었어요오... 이제 편히 잘 수 있겠다아... 헤헤헤..."
신디는 베시시 웃으며 후련하다는 얼굴이었다. 전에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을텐데 엘프는 걸어다니는
도서관이라 불리는만큼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된다.
이제 신디도 마음만 먹으면 교수 혹은 학자가 될 수 있다. 엘레나 교수의 조수 노릇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신디도 그걸 알았는지 내 손을 풀어주고 곰곰히 생각했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12 권의 반응이 참 기대되는구나.
아무튼 위의 조건들을 고려하여 사람들은 나를 수 십년간 홀로 세상을 경험한 현자로 추측하는 중이며,
동시에 알븐하임의 성지까지 방문한 이력이 있는 학자라 생각하는 중이다.
만약 전생에서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썼다면 흔히 말하는 '고증'을 지적했겠지만 여기는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판타지 세상.
오히려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전투와 마법이 난사되는 게 지극히 정상이고, 반대로 '증기 기관차'가
고증으로 지적될 정도로 상식이 뒤바뀐 곳이다.
하물며 스토리가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종족을 비추기 시작했다. 인간, 마족, 엘프, 드워프, 수인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할 예정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자문을 받아야 할 사람이 필요한데, 마족은 세실리가 있으니 괜찮고 엘프는 아르웬과
시리스가 있다. 드워프는 책으로도 알려진 지식이 많을 뿐더러 비중이 크지 않아 문제는 없다.
그나마 친분이 있는 수인이 레오나 뿐이지만 그녀와의 관계는 좋다고 할 수도,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냥 가끔 가다가 안면을 비추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비록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되었지만 그렇다 해서 일상이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역사학
강의만 듣고 있어서 그녀와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다.
무엇보다 지금은 수인보다 엘프가 급선무다. 알븐하임 침공만 해도 무려 2 권에 달하는 분량을 할애할
예정이다.
그리고 보통 전사하면 검과 방패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을 떠올리겠지만, 엘프는 마법사까지 포함한다.
대신 마법에 특화된 전사들은 '마도사'라고 부르는 편이다.
그러니 알븐하임이 침공 당해도 꿋꿋이 버티겠지만, 악마측 간부와 전투를 벌이면서 전력이 야금야금
깎여나가게 될 것이다.
물론 편협하고 고지식한 엘프들은 정면승부를 당당하게 고집하니 이것조차 비겁한 술수라며 무시할 확률이
높겠지만. 이건 제논 일대기에 전사장 한 명을 더 추가하면서 설정을 넣는 게 좋을 듯하다.
애당초 '공군'이라는 개념이 이 세상에는 없으니 허허 웃으며 넘어갈 수도 있다. 증기 기관차처럼 웃기는
소리로 치부하겠지.
정면승부를 고집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들이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지, 그리고 마법을 병행하면서
싸우는지, 마지막으로 편제가 어떻게 돼 있는지 등등.
다크 엘프는 마족처럼 각박한 생활을 보낸만큼 손재주가 상당히 좋다고 시리스가 언급한 적이 있다.
'그래도 묻는 편이 훨씬 좋겠지.'
다크 엘프는 평범한 엘프보다 융통성이 있다지만 시리스는 딱딱한 편이다. 다행히 숙소에만 소환을 하여
걸릴 일은 없다지만 왠지 긴장된다.
스윽-
쫘악!
종이는 정확히 두 갈래로 찢기자마자 푸른 입자로 변하여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제 시리스에게 연락이
갔을테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오늘은 조금 늦네.'
차마 거절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면 소환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고 언질을 해뒀으니 아마 그때문이지
않을까. 시리스는 아르웬의 호위도 겸하고 있으니 다방면으로 바쁠 수밖에 없다.
"부르셨습니까?"
"응?"
허스키하면서도 낮고 중후한 여인의 목소리. 이처럼 독특한 목소리의 주인은 딱 하나밖에 없다.
이에 나는 반쯤 돌렸던 등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시리스의 모습을 보고 기함했다.
저번처럼 목욕을 하다가 알몸 상태로 온 건 아니나 속옷만 입고 온지라 거기서 거기였다. 심지어 구릿빛
피부와 어울리는 검은색 속옷이라 시선이 엄한 곳으로 향했다.
11 자로 갈라진 복근은 물론이고, 풍만한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속옷이 선정적으로 다가왔다.
평상시의 옷차림도 노출이 많은 편이었는데 지금은 속옷만 달랑 입고 와서 내 남심을 자극시켰다.
융통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리스의 행동에 머리가 아파왔다. 호위로서는 적격일지는 몰라도 일상은 영
젬병인 모양이다.
문제는 시리스 그녀는 뭐가 문제라는 걸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는 거다. 덕분에 다크 엘프의
성문화를 심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다가 시리스를 힐끔 바라봤다. 구릿빛 피부와 더불어 여전사 특유의 탄탄한 몸매까지
합쳐지니 그 파괴력이 가히 무시무시했다.
"그... 다크 엘프는 정조라던가 그런 건 없어요? 아르웬에게 듣기로 엘프는 반려가 아닌 타인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정조가 더럽혀진다는데..."
"그건 엘프의 관습입니다. 저희는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가기에 성에 있어서 관대한 편이죠. 반려가
사고나 병으로 죽어도 마음이 맞는다면 또다른 반려를 들일 수 있습니다. 물론 불륜이나 강간은
규율에서조차 크게 엇나가는 행위이기에 엄격한 처벌이 내려지게 됩니다."
"무슨 처벌이요?"
"남자는 성기를 잘라내고 여자는 불에 달군 꼬챙이로 안쪽을 지져서 불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히익..."
본래 숙소는 타인의 침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반대로 몰래 들여보내면 아무도 모른다. 시리스가 여기서
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시리스는 소환되자마자 내가 자는 침대에 비척비척 들어가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피로해 보이던
얼굴처럼 푹신한 침대에 눕자마자 잠을 청하...
다행히 일정하게 내쉬는 호흡을 확인한 후에는 안심할 수 있었지만, 엘프의 신체 능력을 고려하자면
그녀가 얼마나 피로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일반인에 가까운 신디도 며칠동안 밤을 지새워도 흐물거리기만 하지, 일상 생활에는 무리가 없다. 다크
서클은 어쩔 수 없으나 수면의 중요성을 상기하면 이것도 가뿐한 편이다.
호위 기사는 자그만한 기척조차 감지해야 될만큼 예민한 감각을 갖고있어야 된다. 하물며 그게 엘프,
그것도 어둠과 익숙한 다크 엘프라면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헌데 시리스는 내가 접근하여 호흡을 확인했는데도 불구하고 꿀잠을 청하고 있다. 약간 과장을 보태어
내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였다.
마리, 그리고 세실리와의 데이트도 시험 기간의 특징상 나중으로 미룬 참이라 시간적 여유는 많다.
시험은 이번 주 금요일에 모두 끝나니 그때 지인들과 만나지 않을까.
환경도 환경이지만, 리무버의 존재 덕분에 글쓰기의 효율이 배로 늘어났다. 가끔 가다가 뒤늦게 오탈자를
발견하여 대대적인 수정을 거쳐야 됐는데 이제는 그럴 일도 없다.
알븐하임이 침공당함과 동시에 제논 일행이 서둘러 복귀하는 걸 가로막는 악마측 간부가 있다.
제논은 카이르의 죽음과 메리의 고백 이후로 각성했기에 전보다 훨씬 강해진 상태였으며 악마들도
경시하지 못하는 실력자로 성장한다.
그리고 색욕을 관장하는 악마, 릴리스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 매료시킬 정도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으며 태생이 마족인만큼 마법도 병행한다.
"... ..."
"...응?"
"...언제 일어나셨어요?"
"정확히 5 분 전에 일어났습니다."
나는 머리를 매만지다가 시리스를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몽롱한 건지 귀엽게 하품을 하는 중이었다.
아르웬의 호위 기사로 있을 때는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 같았는데 지금은 상당히 풀어진 모습이다.
뭐, 대부분의 호위 기사가 그렇긴 하다. 언제 어디서든 주인을 지켜야 하기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고,
휴식 때만큼은 풀어놓아야 다음이 편해진다.
그러니 시리스가 저렇게 풀어진 모습을 보여주는 건 별로 이상한 게 아니다. 특히 그녀는 엘프 여왕,
아르웬을 비밀리에 호위하고 있으니 업무 난이도가 극악일 것이다.
"피곤하시면 더 자도 돼요."
"아닙니다. 잠은 모두 깼습니다."
초롱초롱한 황금색 눈동자와 점점 예기가 실리는 눈매를 보아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이에 자문을 구해도
되겠다 싶어 말을 하기 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그녀의 앞에 도착한 나는 흘러내린 이불 자락을 끌어올려 약간이나마 노출된 구릿빛 살결을
감추었다. 덕분에 얼굴 빼고 그 밑은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은...
펄럭-
시리스는 내가 목까지 이불을 끌어올리자마자 팔을 휘둘러 무위로 만들었다. 심지어 아까보다 이불이 더
내려가서 속옷이 다 보였다.
이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도 잠시, 당황한 나는 당황과 황당이 뒤섞인 목소리로 시리스에게 물었다.
"아니. 왜 벗어요?"
"덥습니다."
"이것도 못 참아요?"
"네."
"... ..."
딱딱한 말투로 대답하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녀는 심부름꾼이지 완전한 노예가 아니었기에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자문을 구하는 것조차 이렇게 힘든 일인 걸까. 그래도 겨우 이불만 덮었는데 답답하다고 내팽개치는 건
약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크 엘프는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인가요, 아니면 시리스 씨가 유별난 건가요? 평소 복장도 노출이
심하던데."
"의상은 다크 엘프 특유의 전투 방식과 깊게 연관이 있습니다. 저희 다크 엘프는 일반 엘프보다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마나에 민감하고, 더 나아가 주변과 동화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로
노출되는 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동화율이 상승하죠. 간혹 은신한 다크 엘프가 있던 자리에 일렁임이
발생하는 건 모두 의상 때문입니다."
"그럼 덥다는 거는요?"
"다크 엘프는 언제 어디서든 어둠에 몸을 숨길 수 있도록 평상시에 마나를 순환시키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체온이 높은 겁니다."
"그럼 마나 소모가 심하지 않아요? 아무리 다크 엘프여도 연소가 장난 아닐텐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크 엘프는 피부로도 공기 중의 마나를 흡수할 수 있는, 일종의 전승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죠."
"오..."
그래. 이런 게 바로 자문이지.
덕분에 시리스의 야시시한 몸매에 눈길이 가지 않고 오로지 조언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시리스 본인도
딱히 신경 쓰고 있지 않아 큰 무리는 없었다.
"다크 엘프가 머무는 마을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나요? 그러니까 알븐하임에는 여왕과 원로원,
그리고 전사장이 있듯이 다크 엘프는 어떤 구조인지 궁금해요."
"우선 다크 엘프마다 각각의 부족이 있습니다. 총 3 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라트나, 쿠미르,
드론으로 칭해지고 있죠. 각각의 장로들이 마을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시리스 씨는 어디 부족 출신이에요?"
"저는 라트나입니다. 주로 전사들을 배출하는 곳으로, 쿠미르는 마법사, 드론은 기술자를 배출하는 걸로
유명합니다."
"단순한 마을 정도가 아니라 도시 수준인 것 같은데?"
"맞습니다. 숲에서만 지내고 있을 뿐, 생활 수준을 본다면 여느 도시나 다름없습니다. 단지 인적이 드문
숲에서 생활하고 있을 뿐이죠."
나는 시리스가 알려준대로 노트에 열심히 적으면서 앞으로의 스토리를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적어도
고증만큼은 철저히 지키고 싶었기에 오늘 제대로 뽕을 뽑을 작정이다.
"다크 엘프 내에서 알븐하임의 엘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 참고로 시리스의 의견이 아니라
다크 엘프 전체의 의견이요. 아르웬이 융화 정책을 펼쳤다지만 그간의 앙금이 해소되진 않았을텐데."
"음... 종족전쟁을 겪었던 세대는 호의적으로 보고 있지만 그 이후의 세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세대는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도움조차 거절한 알븐하임에 왜 들어가야 되냐고 항의 중이고, 반대로 구세대는
종족 전쟁을 통해 쓴맛을 겪었으니 이제 유해졌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와..."
겉보기에는 20 대 초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엘프를 호의적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있는데도 형벌이라며 불평불만 가지지 않았다.
"저희는 100 년을 넘길 때마다 귀걸이를 하나씩 차는 관습이 있습니다. 제 나이가 정확히 241 살이니 2
개가 걸려있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역시 인간이 느끼기에는 까마득한 나이네요."
"100 년조차 힘든 인간이 보기에는 그렇겠죠."
시리스는 특유의 무표정을 유지한 채 대답했다. 세실리도 그렇고, 아르웬도 그렇고 100 년 이상 살았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솔직히 현실의 친구만큼 개성적인 인물도 없다. 친구의 성격을 약간만 수정해서 책에 등장시키면
놀라울만큼의 개성을 가진 등장인물이 나타난다.
"정말입니까?"
"네?"
"... ..."
만약 알븐하임의 엘프가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전수받았다면 모를까, 너무나 추악한 진실을 알리기 싫었던
원로원은 과거를 꽁꽁 숨겼고 더 나아가 다크 엘프를 '이단자'로 취급하는 중이다.
원로원 뿐만 아니라 알븐하임의 엘프들도 본인들의 귀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옛날부터 교육을 받기에
다크 엘프를 본다면 혐오어린 시선으로 본다는 말이 있다.
'나에게는 정말 좋은 소재감이지.'
다행히 역사적 진실을 알게 된 엘프측 영웅이 다크 엘프를 무난히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침공당한
알븐하임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된다.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 리나였다. 전시회 개최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몇 개월이 지난 현재, 그녀의 미모는
한층 더 물이 오른 상황이었다.
비록 껄끄러운 관계로 시작했으나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후에는 살갑게 대하고 있다. 특히 마리와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손꼽혔다.
전이었다면 리나도 눈치가 보여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 했겠지만, 마리와의 사이가 가까워진 지금은
평범한 친구처럼 대하는 중이다. 내가 직접 총대를 메고 둘의 관계를 회복시켜준 보람이 있다.
그러니 가문에서 받은 교육의 질조차 다를 수밖에 없으며 리나가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환생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내가 장난식으로 말하자 리나는 인상을 지으며 치가 떨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든 권력과 권위를
내려놓고 친근하게 대한지 몇 개월이 지나서 그런지 격식을 차리면 진저리를 치는 편이다.
'사생아가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미네르바도 대외적으로 알려진 황족은 레오르트와 리나밖에 없다. 그러나 테르스 왕국을 보듯이,
아델리아처럼 숨겨진 자식이 아예 없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져서 망정이지,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서로 머리채를 잡고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다 불현듯 스테이크를 썰고 있던 마리가 나에게 불쑥 질문했다. 그와 동시에 리나와 세실리의 시선도
내 쪽으로 향했다.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 것이, 방을 따로 잡아놓았기에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
아무래도 이미 구성과 전개를 탄탄하게 마련해놓은 데다가 시리스에게 자문까지 받았으니 집필에 막힘이
없었다. 게다가 신경써야 할 일도 거의 없어서 오로지 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적당히 좋은 소재만 있으면 글을 쓰는데 무리가 없다. 굳이 문제를 꼽자면 첫 문단을 쓰는 거겠지.
첫 문단에 따라 그 이후의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경우가 많으니 나로서는 고심에 고심을 거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칠죄종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당시를 말하는 것 같다. 그때는 어디까지나 떠보기 식으로 물은
거라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듯하다.
"응."
"와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세실리의 표정이 태양처럼 밝아졌다. 붉은빛을 띄는 눈동자도 한없이
초롱초롱해지며 감동받았다는 표정이다.
자기가 책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기뻤던 것일까. 세실리는 드물게 열정을 보이면서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누나의 전투 방식을 참고하고 싶어. 릴리스는 악마가 된 마족이거든. 그러니 마법도
사용해서 누나를 참고하면 안성맞춤일 거야."
"전투 방식이라... 혹시 릴리스가 검술도 사용하니?"
"응. 근데 현란하진 않고 마법이나 기술을 사용하기 위한 매개체밖에 안 될 거야."
"내가 배운 검술도 그래. 인간은 부족한 힘을 채우기 위해 기술을 연마하지만, 우리 마족은 힘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기술을 연마하거든. 음..."
더듬- 더듬-
이윽고 마리의 부드러운 손이 그 위에 안착하는 순간, 나는 그녀의 손목을 조심히 붙잡았다. 아직은
참아달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아이작."
"응."
"식사가 다 끝나면... 알지?"
아이작이 약을 가져오기 위하여 잠깐 숙소로 떠났을 때였다. 리나는 아이작이 떠나자마자 맞은편에
앉아있는 마리를 불렀다.
"마리."
"응?"
머리카락도 새하얀 백발이라 홍조가 더욱 눈에 띄었으나 리나에게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아이작이 말했던 '약'의 정체다.
"아이작이 먹는 약이 뭔지 알아?"
"그건 왜?"
"너라면 알 것 같아서. 이때까지 아이작이 약을 먹는 건 본 적이 없거든."
"설마 지병 같은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냐. 그냥... 응. 정말로 예방약이야."
"예방약?"
리나는 마리와 함께 황궁에서 성교육을 받은 적이 있지만 말 그대로 받기만 했다. 남녀 사이에 오가는
은밀한 분위기나 은어 같은 건 하나도 모르고 있다.
마리가 어떻게 하면 리나가 알아들을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세실리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지만 마리는 상대방이 진심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반면, 리나의
경우는 관찰력이 뛰어나다. 관찰력이 뛰어나다는 건 그에 따라 추리하는 능력도 준수하는 의미.
"... ..."
그 행위가 연상되자 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재미있는 점은 굳어있는 채로 얼굴만 서서히
붉어졌다는 점.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서둘러 정신을 차렸지만, 아무래도 남녀의 사생활과 깊게 연관돼 있다보니 리나조차
어버버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리?"
"...왜."
"너 설마... 아이작이랑..."
"했어. 네가 생각하는 그거."
"언제부터?"
그러거나 말거나 세실리는 현재 상황을 흥미롭게 관망하는 중이다. 특유의 장난기 어린 표정은 덤이고.
"...전시회가 끝나고."
"그럼 그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맨날 했어. 시험 기간 때는 바빠서 못 했고. 이제 하러 갈 거야."
"어머..."
이제는 입까지 틀어막으며 어쩔 줄 몰라하는 리나였다. '가면'이 홀라당 벗겨진 채 당황하는 리나의
반응은 새롭기 그지 없었다.
세실리는 두 손을 일정한 간격으로 벌리며 반문했다.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이었으며 그녀다운 방식이었다.
그리고 리나는 세실리가 표현한 몽둥이의 길이를 보며 놀람을 넘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황궁에서 배운
것보다 한참을 웃돈 길이였으니.
성장하면서 길이가 더 길어졌다는 증언(?)에 이번에는 세실리가 놀랄 차례였다. 그녀는 아이작의 여인이
되고 난 이후, 틈틈이 마리에게 '조언'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마리가 아직까지 아이작을 독점하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악주기'가 슬슬 다가오는 중이다.
최근에는 약이 발명된 덕분에 악주기로 고생하는 마족이 줄어들었지만, 세실리는 악주기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악주기가 된다면 고통보다 쾌락이 먼저 앞설테니까. 마리는 아이작 덕분에 첫날밤부터 즐거웠다지만 본래
사람마다 궁합이 다른 법이다.
"저... 세실리?"
"응?"
"설마 세실리 너도..."
리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세실리에게 물었다. 그녀는 현재 빨갛게 익어버린 얼굴을 조금이라도
식히려는 건지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강아지처럼 귀여운 외모가 합쳐지니 야한 이야기에 창피해 하는 처녀의 매력을 풀풀 풍겼으며 황녀로서
근엄함과 카리스마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납득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세실리는 헬리움의 공주이니 정치적으로도 아이작에게 큰 도움이
되어줄 터.
"...저게 사실이야?"
"응. 참고로 내가 정실이야. 이건 세실리도 인정한 거고. 그렇지?"
"사실 결혼을 안 했으면 정실의 자리는 공석이라 생각해."
"야이씨... 안 되겠어. 너 나가. 아이작한테 떨어져."
"싫은데~"
마리와 세실리가 서로 장난 아닌 장난을 쳐도 리나는 여전히 마음을 추스릴 수 없었다.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갖 상상이 맴돌았다.
리나는 마리와 세실리가 서로 자기가 정실이니 뭐니 하면서 투닥거리는 동안 슬며시 자기 아래를 바라봤다.
아이작이랑 사귀는 건 절대 아니나 그녀도 한참 성에 관심이 많을 나이.
뒤이어 둘의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비교했다. 무엇을 비교하는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으니
말하지 않겠다. 그리고...
또다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 다 받아들인 마리가 대단하기도 하고, 새삼 인체의 신비를 느끼게
되었다.
"저... 마리?"
"응?"
"정말 그게... 다 들어가? 아프진 않아?"
마리는 눈을 깜빡이며 질문을 한 리나와 마주했다. 얼굴은 타들어가듯이 붉어졌으며 푸른색 눈에는
호기심이 담겨있다.
자기가 알던 리나의 모습은 전부 사라졌으며 성에 관심이 보이는 소녀만이 존재했다. 황녀가 아닌, 제
나이대에 어울리는 귀엽고 깜찍한 소녀.
"리나."
"으, 응?"
"첫날밤에 있었던 일을 전부 설명해줄까, 아니면 네가 질문한 것만 대답해줄까? 네가 골라봐."
"으으..."
마리가 야릇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묻자 이제는 아예 증기가 날 정도로 얼굴이 뜨거워진 리나.
그러면서도 대답은 듣고 싶은 것인지 시선은 마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세실리가 언급되자 리나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세실리는 이목이 자기에게로 쏠리자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스레 대답했다.
이성은 그만해야 된다고 소리치고 있지만, 마음은 더 들어도 된다며 유혹하는 중이었다.
마리의 첫날밤 이야기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리나는 더욱 흥분했다. 이따금씩 달뜬 숨소리를 내쉬는 걸
보아 완전히 빠져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침까지 삼키면서 결코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마리는 공작가 출신답지 않게 적나라한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이어나갔다.
그런 리나와 다르게 세실리는 이미 여러번 들었던지라 아무렇지 않았지만, 아이작과 깊게 관련된 이야기라
가만히 경청했다.
최근 마리의 얼굴이 밝아지고 묘하게 예뻐진 듯한 느낌이 있었는데 전부 아이작과의 동침 때문인 것일까.
리나는 마지막까지 화려했던 그들의 첫날밤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우리의 첫날밤은 여기가 끝이야. 그 이후에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해버려서 뭐라 말해줄 게 없네."
"그럼 감상평을 말해볼래?"
"... ..."
단순히 듣기만 해도 이정도인데 실제로 한다면 어떨지 가늠이 잡히질 않는다. 아이작과 사귀는 건
아니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는 기준으로 잡혀버렸다.
똑- 똑- 똑-
이윽고 아이작이 문을 엶과 동시에 그녀의 시선이 엄한 곳으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 마리가 유달리
강조했던 부분으로.
만약 마리에게 이야기를 듣지 못 했다면 저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리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자마자 앞으로 그들이 무엇을 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에는 손님을 위한 여관이 마련되어 있지만, 꼭 손님만 머무는 건 아니다. 귀족들을 위해 방음이
철저한 방 또한 존재했다.
"...꿀꺽."
이러면 안 된다는 건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으나 막상 이야기를 듣고나니 남몰래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어쩌면 먼 훗날에 있을 자신의 첫날밤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자신은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이니
남자와 결혼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으니까.
"흐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