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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화 >

여러가지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본론부터 말하겠다. 나는 작가였다. 유명하진 않았지만 매니아층이


두터웠던 판타지 소설을 집필하는 작가.

물론 환생한 지금은 아니지만.

어째서 내가 느닷없이 환생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었으나 죽음의 기억은 명확했다.


여느 때처럼 소설을 집필하고 있을 즈음, 느닷없이 심장 쪽이 욱신거리더니 이내 숨을 못 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마 심장마비가 아닐까 싶다. 독립하여 혼자 살았던 탓에 누가 도와줄 수도 없었겠지.

뭐, 그렇다고 아쉽거나 그러진 않았다.


애초에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가족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나 혼자 남게 됐다. 어찌 보면 고독사라고 할 수
있겠지.
그나마 걸리는 점이 있다면 진행하던 작품을 미처 끝내지 못 했다는 걸까. 내 죽음은 알려지겠지만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밖에 없다.
그래서 환생했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무료함도 달랠 겸,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새로운 작품을 쓸
생각이었다.

여기가 흔히 '판타지'라 일컫는 세상이라는 걸 자각하기 전까지는.

"...어쩌겠어."

그냥 접고 살아야지.
다행히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상 속에서, 나는 귀족으로 태어났다.
비록 한적한 시골밖에 없는 영지지만 있는 건 다 있는데다가 평민으로 태어난 것보다는 수 백배 낫다.
평민은 말이 평민이지, 귀족에게 감히 대들 수 없는 하층민이니까.
또한 가문을 이을 장남이 아니라 막내로 태어나 괜한 권력 싸움이 휘말릴 일도 없어 느긋한 현생을 보내는
중이다.

"음..."

그리고 다시 돌아와 현재, 시간이 훌쩍 지나 16 살이 됐을 때다.


나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 두터운 책을 읽고 있었다.
독서는 전생에서도 취미 중 하나였던지라 여기서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문제는...

"씨부레. 이게 무슨 말이야."

책이 하나같이 죄다 문학집이다. 그냥 시인들이 시를 갖다 박은 시집이라고 해야할까.


인기라는 로맨스 소설조차도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표현력과 가독성이 난해하다.
굳이 비유하자면 쓸데없는 단어들로 가득 찬 수능 영어 문제 같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외국인조차
못 푼다는 전설의 영어 수능.

"염병할. 이러니까 귀족들만 읽는거지."

나는 책을 대충 집어던지며 성질을 부렸다. 문장을 하나 하나 읽을 때마다 문제 풀이를 해야 하니 머리가


아프다.
그냥 머릿속에 똭! 하고 상상이 될 수 있도록 적으면 얼마나 좋아. 더 웃긴 건 독서가 귀족들 사이에서
기본 교양이라는 거다.
어떤 형식이냐면...

-이 작품 읽어보셨나요? 이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이래저래 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백작 님은요?"
-전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책을 읽고 100 분 토론을 한다.


부모님에게 물어보니 교양이 얼마나 깊은지 시험하는 방식이라고. 어이가 없어서 참.
무엇보다 귀족들은 자기 주장이 강해서 의견이 안 맞으면 싸움도 종종 발생한다고 들었다.
그걸 듣고 속으로 지랄도 풍년이다라며 신나게 까내렸지.

'이 사람들에게는 내 전생이 판타지겠지?'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기는 몬스터도 있고, 엘프나 드워프, 수인, 그리고 마족 등등. 다양한 종족이 존재한다.
종족 특징도 내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존재했다.
엘프는 자연친화적이라던지, 드워프는 손재주가 좋다던지, 수인은 동물의 특징을 닮았다던지.
다만 '마족'은 약간 독특했는데,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저주받은 자'들이라며 배척받고 멸시당하는
편이다.

마족은 아득한 과거, 이 세상을 파멸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악마'들의 후예다.


이것만 본다면 시덥잖은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마족 고유의 종족 특성 때문이다.
악마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지 본인의 '욕망'을 이기지 못 하면 완전히 '악마'가 되버린다.
악마가 된다면 그저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파괴하는 몬스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종족 특징 때문에 마족과 연관이 깊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으며, 마족들도


본인들의 운명을 저주해 '인간'으로 살아가길 소망하고 있다.
대신이라고 해야할지 악마로 변하지 않아도 본연의 힘이 막강해 자기들만의 나라를 세워 주변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는 중이다.

"흠..."

뭔가 재미있는 작품이 떠오를 것 같은데.


이 세상에는 신도 존재하고, 신의 힘을 빌려쓰는 성직자도 있다. 그러니 서로 대비되는 마족과 성직자를
적당히 연결시킨다면 어떨까.
생각보다 재미있을 것 같다.

'원래 비극이야말로 사람의 뇌리에 깊게 박히는 법이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성직자와 마족 간의 사랑 이야기를 넣으면 꽤 큰 이목을 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화려하게 뒷통수를 치는 거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악마가 된다던가,
아니면 몸을 버리면서까지 상대를 막는다던가.
참고로 난 전생에서 독자들에게 사탄대학 교수라고 불렸던 사람이다. 흔히 유열러라고 부르기도 하지.

"오. 괜찮네."

수능 영어 문제 같은 책만 읽다보니 간단하게 읽을만한 책이 필요하다.


허나 지금 이 시대에 그런 책이 나오는 걸 빌 바에야 차라리 내가 직접 적고 말지.
할 것도 없겠다, 누워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쪽으로 향했다.

'에이씨. 이거 한 번 잘못 쓰면 다시 써야하잖아.'

시대가 시대인지라 연필은 커녕 제대로 된 볼펜조차 발명되지 않았다.


그래서 잉크와 펜촉으로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다행히 종이는 꽤나 잘 발달돼 있다.
이윽고 나는 모든 준비를 마친 뒤에 도입부를 어떻게 적어내릴지 고심했다.
언어도 문제없다. 머릿속에 한국말을 입력하면 자동적으로 이 세상의 언어로 통역될 뿐더러 문법 자체도
한국어와 똑같다.

"우선은 배경은 간단하게..."

판타지 세상 속에서 판타지 소설을 쓰려니 기분이 무언가 묘했다.


어디까지나 심심해서 취미로 쓰는데다가 잘 되면 잘 되는 거고, 안 되면 안 된다는 마인드다.
굳이 작가로 먹고 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집안 재력이 풍족하니까.

"좋아. 이렇게 하면 되겠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펜촉을 놀렸다.


여기가 판타지 세상이어도 환생한 나에게는 평범한 판타지 소설을 쓰는 느낌이었다.

'이거 가지고 뭐라 하지는 않겠지.'

여차하면 가족들에게 보여줘서 출판해도 될지 말지 정하면 그만이라 걱정은 없었다.

"아. 혹시 모르니 설정은 그렇다 쳐도 이 모든 이야기가 허구라는 걸 넣어야겠다."

이건 어디까지나 판타지니까. 음음.

*******

'마족'은 악마의 후예다. 이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며 그들에게 내려진 저주다.


악마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뿔, 피처럼 새빨간 적안과 불길함이 감도는 검은 마나까지.
하나 하나 악마와 비슷한데다가 이성을 잃게 되면 진짜 악마가 되어버리니 사람들에게는 기피의 대상이다.

이로인해 그들이 국가를 세워도 다른 나라는 인정해주지 않았으며, 말도 안 되는 힘만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처리했을 거라 치를 떤다.
마족들도 이런 비참한 차별에도 묵묵히 받아들였지만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다.
허나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 틈만 나면 악마화를 한 마족들이 피해를 끼쳐 이들의 소망은 요원한 일이었다.

한 책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소설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뤄낸 작가. 대체 누구인가?


-앞으로 영원히 회자될 영웅의 서사시. 하지만 그 속에는 비극과 슬픔이 담겨있다.
-머릿속에서 바로 상상이 될만큼의 표현력과 가독성. 신분을 막론하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

제논 일대기.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발간된 소설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문학 소설인줄 알았다가 어느 한 귀족이 밤낮을 지새워 읽었다는 소문이 발생한
이후부터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과거, 세상을 파멸 직전으로 몰아넣었던 대악마와 그 악마를 부활시키려는 집단,
그리고 그걸 저지하는 영웅의 이야기다.
겉으로는 평범한 영웅의 서사시로 보였지만 '마족'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부분이 눈길을 끌었다.

-마족의 슬픈 숙명과 외로움을 대변해주는 책.


-반 인간 반 악마로 어느 쪽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외롭게 살아가는 마족들의 소망을 표현했다.
-수많은 독자의 심금을 울린 '사크란'의 최후. 그는 악마가 아닌 인간으로써 몸을 바쳤다.

특히 한 마족의 희생 파트 이후로 신문에는 온통 그 이야기밖에 없었다. 얼마나 감명 깊었는지 평소 감정


변화가 없던 사람들조차 이 부분을 읽고 흐느껴 울었다고 할 정도.
무엇보다 평소 마족을 혐오하던 사람들마저 슬픔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마족을 향한 부당하고도 차별적인 대우. 정말 옳은 일인가?


-그들은 악마가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자들. 우리가 그들을 악마로 만들었다.

더 놀라운 건 마족을 향한 시선이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것.


본래 마족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마로 취급했으나 제논 일대기가 발간되고나서 180 도 달라졌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에서 인간이길 갈망하는 안타까운 종족들로.
악마가 아닌 태어나서부터 비참한 운명을 짊어지게 된 존재들로 말이다.

이 믿지 못할 변화에 마족들의 나라, '헬리움'에서도 제논 일대기에 대한 감평을 꺼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 사람은 마족의 슬픈 숙명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는 자다.
-욕망을 이겨내면서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이야말로 '진심'이라는 글귀. 이 글귀 하나가 모든 마족들에게
절제를 가르쳐줬다.

세상에 '마왕'이라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헬리움의 왕도 책을 쓴 작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달했다.


이처럼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 수록 수많은 사람의 애를 태우는 작가는 현재...

"이.... 이게 머선 일이고."

신문을 읽으며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아직 완결하려면 좀 남았는데...?"

이걸 어쩌지.

< 1화 >

신문을 보게 된 나의 감상평은 딱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고.

나는 그저 킬링 타임용으로 쓴 책이었는데 뜬금없이 세상이 어수선해졌다. 이 세계는 과학이 발달되지


않아 스마트폰은커녕 라디오조차 없어서 오직 신문으로만 세상의 소식을 알려준다.

헌데 이 신문에는 내가 쓴 책을 주제로 대서특필 돼있다. 황당할 수밖에 없다.

"하하하하! 역시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어! 장하다! 우리 막내아들!"

내가 멍청한 표정으로 신문을 읽는 도중에 앞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멍해진 얼굴 그대로 신문에서 시선을 떼어 고개를 들어올렸다.

화염처럼 활활 타오르는 듯한 사지갈기처럼 기른 적색 머리카락과 멋있게 관리한 턱수염. 맹금류처럼


빛나는 금색 눈동자.
역전의 용사처럼 남자다움을 물씬 풍기는 이 중년인의 이름은 호크 듀커르 마이샬.

내 아버지 되는 사람이다.

"당신도 참. 제가 이때까지 말했잖아요. 아이작은 기사가 되는 것보다 학자가 되는 게 좋다고."

그 옆에 아리따운 여자가 두터운 호크의 팔을 축 치며 아양을 떨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남색 머리카락과 인형처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특이하게도 눈동자 색이
보라색이었다.

이쯤되면 모두 다 눈치챘겠지만 많아봤자 겨우 30 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가 내 어머니, 안나


듀커르 마이샬이다.

"우리 아이작도 대단하네. 모두가 널 찾고 싶다고 하더라."

어머니는 우아하게 웃으시더니 행복한 표정으로 내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죄송하지만 어머니. 그 말은 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위의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간신히 억눌렀다. 이 화목한 분위기를 괜히 망가뜨리기 싫었으니까.


그저 바보처럼 어색하게 웃을 뿐이다.

"...되도록 익명을 쭉 유지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나 최후의 방패막이는 있어야하지 않겠나. 나는 소심한 목소리로 부모님에게 부탁했다.


내 소설을 익명으로 발간할 수 있던 것도 부모님이 도와준 것이었으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말하지만 나는 괜히 시끄러운 곳에 얽히기 싫다. 당장 신문에서조차 난리인데 바깥은 어떨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글쎄다. 네가 원한다면 해주겠지만 얼마 안 가서 정체가 들통날텐데?"


"왜죠?"
"이 애비가 귀족이어도 일개 남작에 불과해. 멀리 가지 않아도 황실에서 널 찾고 있다만?"
"아."

나는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아버지가 아무리 귀족이라지만 오등작 중 최하위인 '
남작'이다.

더구나 아버지는 본래 평민 기사 출신으로, 무시무시한 업적을 쌓아 귀족이 된 케이스라 제대로 된


귀족이라 하기에도 애매하다.

그러니 위에서 작정하고 나를 찾는다면 속수무책이라는 의미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나도 네가 무얼 걱정하고 있는지 안다. 이 애비가 손이 닿는대로


막아보마."

내 불안한 표정을 읽었는지 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투박하고 굳은살이 박혀있어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지만 마음이 평온해졌다.

"엄마도 다과회에서 최대한 상황을 살펴볼게. 엄마는 우리 아이작이 힘들지 않았으면 하거든."
"어머니..."

이 얼마나 따뜻한 온기란 말인가. 나는 감동했다는 표정으로 부모님을 바라봤다.


내가 이들을 부모로 인정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따스한 온정 때문이다.
이윽고 어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러니 아이작. 이 엄마가 하나만 물어도 되겠니?"


"뭔데요?"
"다음 편은 언제 나오니?"
"... ..."
"이 엄마는 릴리랑 진이 이어지는 걸 기다리고 있단다."
내 감동 물려내.
나는 방긋방긋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황망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감동도 감동이지만 어머니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진이 최종보스입니다. 어머니...'

내가 쓴 제논 일대기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러브 라인을 타는 조연이 있다. 방금 어머니가 언급한 '


릴리'와 '진'이다.

참고로 진은 마족이고 릴리는 성직자, 그것도 차기 성녀라 추앙받는 인물이다.


이것만 본다면 애틋한 러브 라인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야 전생에서 사탄대학 교수라고 불렸던 인물.

최후반부, 진은 대악마를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해 잔재를 받아들여 이야기의 진 최종보스로 승격할


예정이다.
멘탈이 흔들린 주인공이 쓰러트리지만 유언으로 릴리를 애타게 찾는 건 덤이고.

'...진짜 좆 됐다.'

가족이 내 소설을 읽는 건 괜찮다. 그런데 막상 입으로 들으니 가슴이 쫄린다.

지금이라도 해피 엔딩으로 바꿀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태까지 뿌려놓은 떡밥과 복선이 많아 그럴


수도 없는 노릇.

어차피 엔딩까지 시간이 남아있으니 그때까지 내 목숨줄은 붙어있을 것이다.

"여보. 아이작도 이제 곧 아카데미에 입학할텐데 너무 부담주지 마. 그러다 이야기가 엉뚱하게 흘러가면


어쩌려고?"
"어머. 아이작 작가님? 제가 혹시 실례를 저지른 건..."
"아, 좀!"

결국 수치심에 내가 버럭 소리치자 부모님이 제 개성에 맞는 웃음을 터뜨리셨다. 그에 반해 내 얼굴은


실시간으로 붉어지는 중이지만.

"미안하구나 얘야. 아무튼 아카데미는 무학(武學)보다는 문학(文學)으로 들어갈테냐?"

아버지가 웃음을 멈추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앞으로 내가 입학하게 될 아카데미를
떠올렸다.

아카데미, 그러니까 '헤일로 아카데미'는 이 나라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최고의 교육 기관인만큼 어마어마한 교육 과정을 자랑하는데, 그냥 전생의 대학교와 똑같다.
단지 무력에 집중하는 무학과 지력에 집중하는 문학, 이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을 뿐.

'내가 무학에 왜 들어가?'

이 세상은 몬스터가 존재하는지라 호랑이나 사자, 심지어 코끼리조차 '따위'로 취급하는 괴물들 천지다.
그리고 나는 여타 소설 속 주인공처럼 무력에 재능이 없다.

옛날에는 아버지가 자기처럼 기사가 되라며 혹독하게 훈련시켰으나 내가 워낙 빌빌거려서 포기하셨다.

"네. 전 무학보다는 문학이 더 좋아서요."


"흠... 알겠다. 대신 매일마다 체력 훈련은 필수다. 알겠니?"
"물론이죠."
체력 훈련은 꼬박꼬박 받고 있다. 체력 훈련은 단순히 체력 뿐만이 아니라 인내심도 길러줬으니까.
당장 컴퓨터 앞에 30 분도 못 앉아있던 내가 3 시간 동안 집필할 수 있는 집중력을 갖게 됐다. 그 덕택에
한 달마다 책 한 권 씩 출판할 수 있던 거고.

다만 펜촉으로 집필한 탓에 굳은살이 심하게 박혔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혹시 아카데미에 가서도 계속 쓸 생각이니?"

이번에는 어머니가 질문하셨다. 그녀는 내가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학업에 집중할까봐 염려하는 모습이다.
자식이라면 응당 학업에 집중하는 게 당연한데 어머니는 반대로 내 소설을 더 걱정하는 중이다.

조금 황당하긴해도 내 소설의 파급력을 생각하자면 이해가 되는 수준이다.

"뭐... 쓰긴 써야죠. 쉬는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닐테고. 대신 짧아도 한 두 달에 한 권이 나올 것


같아요."
"아쉽구나. 그래도 학업에 집중하렴. 거기에 형이랑 누나가 있을테니 필요하면 부르고."
"네."

헤일로 아카데미는 귀족이라면 반드시 입학해야 하는 곳이라 내 형제자매가 있다.


다만 학생으로 있는 게 아니라 조교로 활동하고 있다. 조교는 몇몇 뛰어난 학생들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직책이다.

거기다 말만 조교지 이미 그들은 수많은 기사단에서 눈 여겨 보고 있는 인재 중의 인재라 할 수 있다.

"그나저나 신기하구나. 네 형이랑 누나는 전부 기사가 됐는데 너는 작가라니."


"날 닮은 거겠죠. 저도 소싯적에는 글을 꽤 잘 썼다고요."
"그럼 한 명 더 낳아볼까? 이번에는 어떨지 궁금하네?"
"어머. 이이도 참. 아이작? 아빠랑 엄마는 잠깐 나갈테니까 조금 있다 보자~"

부모님은 오붓하게 팔짱을 끼며 내 방에서 나갔다. 나는 한바탕 폭풍이 스쳐지나간 듯한 상황에 눈을


깜빡거렸다.

"...후우."

땅이 꺼져라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여전히 와닿지 않았다.


나는 단지 전생의 직업을 살려 글을 쓴 것뿐인데 그 파장이 무시무시했다.

'오늘 집필은 글렀네.'

그리 중얼거리며 곱게 접었던 신문을 도로 폈다. 신문을 펴자마자 내 작품에 대한 소식들로 빼곡히


차있었다.
가끔 가다가 몇몇 유명 인물들이 문학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비판하는 글귀도 있었으나 말끔히 묻혔다.

'...이게 이렇게 칭송 받을만한 일인가?'

호평은 그렇다 치고 마족들에 대한 취급이 달라졌다는 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악마가 세상을 집어삼켰을 때가 지금으로부터 3000 년 전이고, 마족이 차별 받았던 역사는 무려 1000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다. 그런데 고작 내가 쓴 소설 하나로 그러한 차별이 사라졌다니 쉬이 믿지 못할
수밖에.

사실 내 작품은 깔끔하게 묻혔는데 상심하지 않도록 아버지가 뒷공작을 벌였다는 게 더 신빙성이 높다.

오죽하면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파급력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후우... 그냥 빨리 완결 짓고 다른 거나... 응?"

시큰둥하게 신문을 넘기다가 문득 눈에 밟힌 소식이 하나 있었다.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할 거라고 말해... 미네르바
제국도 흔쾌히 허가.
-제논 일대기의 영향으로 마족을 향한 차별적인 시선이 완화된 지금, 각 국가들의 교우를 위해...

"... ..."

지랄하지 마, 십팔.

******

"정말 괜찮겠느냐? 세실리, 나는 마족의 왕이기 전에 너의..."


"괜찮아요. 아빠. 전 이미 모든 준비를 끝냈는걸요?"

은은한 빛만이 비추는 어두운 공간 속에서 두 남녀가 말을 나누고 있었다.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카락,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핏빛 눈동자. 마지막으로 악마처럼 머리에 솟아나있는
뿔까지.

그들은 마족이었다.

"이건 제가 선택한 일이에요. 그리고 이종족과 마족이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지금이
적기라는 걸 아빠도 아시잖아요?"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미녀가 앞의 남자에게 말했다.

고혹적인 목소리에 맞게 그녀의 미모 또한 치명적이라고 할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며, 몸매 또한 뭇


남성의 음습한 마음을 자극할 정도로 성숙했다.

이러한 외모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홀릴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만..."

그녀의 질문에 앞에 있던 남자가 팔짱을 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여인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것 같지만 마족은 원래 인간보다 수명이 길다. 그러니 마족이


상대적으로 젊은 외모를 갖고 있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어서 여인의 아버지이자 세간에 '마왕'이라 불리는 남자, 데스칼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 헬리움은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빠도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래. 그 책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나서부터 우리 동족을 향한 시선이


달라졌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감정의 골은 쉽게 아물지 않는 법이란다."

데스칼의 말마따나 마족을 향한 차별적인 시선은 대폭 줄어들었지만, 그동안 발생한 갈등의 골은 여전히
깊은 상황이다.

세상에는 아직도 악마가 된 마족들이 존재하고, 그 마족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설령


그것이 자의가 아니더라도 피해가 발생한 순간부터 문제가 생긴다.

그에 마왕의 딸이자 헬리움의 하나밖에 없는 공주, 세실리는 빙긋 웃더니 조곤조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빠도 제논 일대기를 읽으셨죠? 5 권의 마지막에 사크란이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나요?"
"... ..."

데스칼은 답하지 않았다.


그 장면은 마왕인 자신에게도 큰 여운을 남겼던 순간이었으니.

동시에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는 마족이 '악마'가 아니라 '인간으로 증명하길 원하는 종족'으로


각인시켜줬다.
그 순간만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사크란이 진정한 주인공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한편 세실리는 데스칼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본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사크란은 최후의 순간 자기가 지켜낸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어요. 소중한 이들을 위해 스스로
악마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용기이며, 희생일지어니. 나는 악마가 아닌
인간으로 죽는 것이다. 라면서."
"... ..."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저는 절대 허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분명 이 이야기를 쓴 저자는 과거
동족에게 큰 은혜를 입은 게 틀림없어요.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감동적이면서 우리 동족의 애환을
고스란히 드러낸 이야기를 적지 않았겠죠."

두 손을 꽉 마주 잡으며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세실리. 그녀는 감동에 젖어 본인이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 했다.

허나 만약 아이작이 이 모습을 본다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거 게임에서 본 거라고. 어차피 전생의 일이라 표절 문제도 없겠거니 해서 아무 생각없이 쓴 거라고.

안타깝게도 세실리가 그걸 알 도리가 없었다. 스스로 착각하고 있을 뿐.

데스칼은 상상의 나래에 빠져있는 세실리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조용히 거들어줬다.

"...거기다 사크란은 악마화를 한 동족을 처단하는 '악마 사냥꾼(Devil hunter)'의 수장이지. 너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 헬리움에서도 똑같은 임무를 맡는 비밀 단체가 있어."

제논 일대기에는 욕망을 이기지 못해 악마가 된 동족을 처단하는 결사단체가 있다.


명칭은 '악마 사냥꾼'이며 악마의 힘을 일부 받아들여 여타 마족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갖고 있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헬리움에서도 비슷한 임무를 맡는 결사조직이 있다는 것.

"'리퍼(Reaper)' 말씀이시죠? 물론 알고 있죠. 제 추측이지만 아마 이 책의 저자는 리퍼의 단원에게


은혜를 받았을 거예요."

세실리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혼자만의 착각에 빠졌다.

아이작이 이 상황을 본다면 아까처럼 말할 것이다.


그것도 게임에서 본 거라고. 진짜 어떤 의미도 의도도 없이 적은 거라고.

허나 방금도 말했다시피 이들이 아이작의 마음을 알 턱이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때문에 바깥에서도 악마 사냥꾼이 진짜 존재하냐는 의심을 받는 중이란다. 덕분에 양지로 나올 기회로


삼을 수 있게 됐지."
악마로 변한 동족을 같은 동족이 처치한다. 이것만 봐도 리퍼가 얼마나 강한지, 또 얼마나 거룩하고
숭고한 조직인지 알 수 있다.

또한 리퍼는 본래 같은 동족이었던 악마를 처단할 때마다 끔찍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그래서 리퍼는
힘에 취해 악마로 변하는 것보다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율이 훨씬 많다.

이러한 임무의 특수성으로 인해 음지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나 제논 일대기가 나온 이후로 양지로 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더 나아가 책을 읽은 몇몇 고위 마족들이 기왕 이렇게 된 거 정식적으로 창단하는 게 어떠냐는 말까지


꺼냈다. 거룩한 숙명을 스스로 받아들이며 아무런 대가도 없이 활동하는 리퍼에게 호재도 이런 호재가
없다.

"아무튼 네 의지가 그렇다면 말리진 않으마. 대신 미네르바 제국에 저자가 있을 거라는 확신은 하지 마렴.
익명으로 낸 걸 보면 아마 은거한 현자일 확률이 크니까. 설령 우연히 만나도 반드시 예의를 차리렴."
"아빠도 참. 저도 이제 성인이라고요?"

세실리는 데스칼의 걱정섞인 말에 손을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도 데스칼은 자신의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인 것도 있지만, 워낙 장난기가 많은 세실리인지라 아버지로서 불안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혹해 음흉하면서 욕망어린 손길이 뻗어온다? 그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세실리는 산 하나 즈음이야 가뿐하게 날려버릴 힘을 갖고 있다. 괜히 헬리움의 차기 마왕으로 거론되는 게
아니다.

"아~ 빨리 만나고 싶어요. 우리 마족의 은인이시여..."

세실리는 두 손을 꼭 맞잡으며 저자와 만날 일을 고대했다.

데스칼은 중증이나 다름없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2화 >

전에도 말했지만 내 취미는 독서다. 여기는 스마트폰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어서
자연스레 독서를 취미로 삼게 되었다.

언제는 재미없다며, 그래서 직접 판타지 소설을 쓰지 않았냐고 물을 수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에


한해서다.

이 세상은 판타지라 다양한 종족과 몬스터가 존재하며, 미지의 탐험을 즐기는 모험가가 있다. 더구나
실제로 '신'이 존재하여 신화도 널리 퍼져있다.

그리고 나는 모험가가 쓴 탐험 이야기, 그러니까 자서전 또는 신화에 관련된 책을 즐겨 읽는 편이다.

모험가가 쓴 자서전이나 신화는 나에게 판타지 소설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일기나 재미없는 신화 이야기로 치부하겠지만.

'묘사는 여전히 거지같네.'

거기다 묘사가 하나같이 개똥같다. 그나마 좋게 말하자면 직관적이다.

예를 들어 자서전에 몬스터나 어떤 식물을 발견했다는 문구가 있다고 치자. 설명에는 단순히 무엇 무엇을
발견했다는 말만 나올 뿐, 세부적인 묘사는 거의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모험가의 자서전을 읽을 때는 항상 도감을 대동하는 편이다. 도감에는 그림과 설명이
첨부되어있으니 상상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아이작 도련님. 식사할 시간입니다."


"응. 거기에 두고 가."
"저..."

책을 읽는 도중 점심 식사를 트레이로 갖고 온 하녀가 우물쭈물거렸다. 이에 나는 응? 하며 책에서 눈을


떼었다.

갈색 머리카락에 귀염상의 하녀는 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주인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아이작 도련님이 식사를 다 하시는 걸 보고 오시라고..."


"... ..."
"독서는 좋지만 식사 시간은 엄수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에휴... 알았어."

정말로 끝까지 지켜볼 기세였기에 잠자코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하녀가 내 책상 위에 음식을 올려놓기 시작하자 쓰다 말았던 원고를 옆으로 치웠다. 내가 원고를
치우자 하녀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따라갔다.

"... ..."

그러고보니 이 하녀도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모르지. 내가 제논 일대기를 집필했다는 사실은 내


가족밖에 모르고 있다.

비밀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아는 순간 비밀이 아니게 되지만 어쩔 수가 있나. 부모님이 말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비밀이 밖으로 새어나갈 일은 절대 없다.

나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원고를 책상 서랍에다 넣었다. 여기에 더해서 자물쇠로 단단히


봉인하기까지.

음. 아주 완벽해. 이제 맛있게 식사를 즐길 일만 남았다.

"다 먹었어."
"브로콜리도 드셔야합니다."
"싫어."

초장이라도 주던가. 생 브로콜리는 싫다.

하녀는 내가 완강히 거부하자 이내 포기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양새가 반찬투정하는 아이를 보는


것 같다.

"그럼 수고해. 아, 오늘 신문은?"


"여기 있습니다."

이후로 그녀는 빈 그릇들을 트레이에 올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그녀가 나가자마자 자물쇠를 풀고 그
안에서 원고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렸다.

책도 거의 다 읽어가겠다, 이제 슬슬 집필을 할 예정이다.

신문은 작업을 다 끝낸 뒤에 읽을 생각이고.


'유용한 책이 많아서 다행이네.'

누군가 말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그리고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만약 책이 아니었다면 제논 일대기를 집필하는데 꽤나 애를 먹었을테니까. 특히 제일 도움이 되었던 게


바로 신화, 그러니까 종교와 관련된 책이다.

이 세상은 옛날 한 종교에서 저지른 병신짓 때문에 광신도를 매우 안 좋게 보고 있다. 물론 누구든지


자기가 신실하게 믿는 종교를 안 좋게 묘사하면 기분이 나빠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는 않고 누구나 아, 이 종교는 현실의 이 종교를 모티브로 삼았구나,


라며 생각할 정도로 적었다.

'게다가 성녀는 아예 없으니까. 이걸로 트집 잡힐 일도 없겠지.'

오히려 배경이 된 종교의 신자가 대폭 늘어났다는 소식이 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조연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까.

난 제논 일대기에 성녀와 그 호위기사의 애틋한 로맨스를 가미했는데, 알다시피 릴리와 진의 이야기다.

어머니에게 듣자하니 둘의 이야기가 그렇게 사랑스럽고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고.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들었다.

물론 진이 최종보스라는 건 변함없지만.

'죄송합니다. 어머니. 차마 두 사람을 잇게 해줄 생각이 없네요.'

설마 이거 가지고 호적에서 파이진 않겠지?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으나 애써 무시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내 소설로 마족을 향한 대우가 천지차이로 달라졌다는 건 넘어가자.

"끄으응~"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찌뿌등한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4 시 반이었다. 점심 시간이 1 시 반이었으니 무려 3 시간 동안 글만 썼다는


뜻이다.

'집중력이 엄청 늘긴 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처럼 딴짓을 할만한 문물이 없는 것도 있지만 내 집중력 자체도 대단한 수준이다.

10 살 때였나. 아버지가 형과 누나처럼 나를 기사로 키우려고 시킨 훈련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내가 기사로서 재능이 전무하다는 걸 깨닫고 1 년이 지나 포기하셨지만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집중력과 인내심이 대폭 상승했다.

우드득- 우득-

너무 오랜 시간동안 책상에 앉아있어서 그런지 허리를 약간만 비틀었는데 리드미컬한 뼈소리가 들린다.

나는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는 전신 거울이 배치돼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환생을 통해


새로이 얻게 된 내 얼굴이 거울에 비춰졌다.

화염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맹수처럼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 여기까지는 아버지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나 이목구비는 아니다.

이목구비는 어머니처럼 오밀조밀하며 뚜렷하여 꽤나 귀여웠는데, 인형처럼 예쁘장하게 생겼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피부마저 새하얀 이 얼굴의 주인은 바로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전생의 '김유환'이 아닌, 지금의 나다.

"잘생기게 태어나서 다행이다."

키는 아직 성장 중이라 170cm 를 겨우 넘겼지만 원래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다. 나는 이 얼굴에 충분히


만족한다.

그나마 불만인 건 기생오래비마냥 여리여리해 보인다는 점인데, 이정도야 넘어갈 수 있다. 이 얼굴에
그것까지 바라면 사치지.

나는 관리할 부분이 없나 얼굴을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걸음을 옮겨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제 내일이면 아카데미로 가는구나.'

대학교 생활은 전생에서도 해봤지만 그래도 기대가 된다. 과연 아카데미에서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

먼저 입학한 형과 누나의 말을 빌리자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들었다. 하기야 전생의 대학교도
까딱 잘못하면 매장당하는데 신분이 존재하는 여기는 오죽할까.

나는 그나마 남작가 영식이라 괜찮지, 힘든 시험을 통과해 입학한 평민들은 꽤 고달플 것이다.

'거다가 헬리움의 공주까지...'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가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녀에 대한 건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었는데, 엄친딸이다.

문무겸비는 물론이고, 미모가 그토록 아름답다며 전 세계에 퍼져있을 정도다. 얼핏 들은 바로는


서큐버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데 확실하지는 않고.

유일한 오점이 있다면 그녀가 마족이라는 거지만 이제 이것도 의미가 없어졌다.

"음..."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다. 모든 관심이 그녀에게 집중된다면 내 아카데미 생활은 보다 더 평탄해질 수도


있다.

더군다나 평론가들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나이를 지긋하게 드신 현자로 추정하는 중이다. 20 살조차
되지 않은 파릇파릇한 애송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괜한 의심을 받지 않게 조심하면서 아카데미 생활을 즐기면 된다. 겸사겸사 원고도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우선 될 수 있는대로 비축분을 쌓아야지."


느긋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책상에 앉았다.

"아. 맞다. 그러고보니..."

사흘 전에 최신권이 발매되었구나. 나는 펜촉을 잡다가 말고 하녀가 전해준 신문을 펼쳤다.

'과연 오늘은 무슨 반응이 나올까?'

오랜만에 '절단마공'이라는 스킬을 썼으니 꽤나 과격하지 않겠...

-미네르바 제국의 황태자, 레오르트. 제논 일대기의 저자는 당장 다음 편을 내놓을 것. 그렇지 않겠다면


직접 찾아내어 황궁에 가둬버릴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리나 황녀 또한 다음 편을 신속히 발간하라며 재촉을...
-위기일발의 제논. 과연 그는 어떻게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 동료의 희생? 아니면...
-모든 독자들이 하루 빨리 다음 권이 나오길 바라는 중이며, 시급히 저자의 정체를 밝혀야...

"... ..."

나는 신문을 슬며시 덮었다.

전생에서도 이런 댓글을 받아본 적이 있지만 웃으며 넘길 수 있다. 그만큼 독자들이 내 작품이 재미있어서
장난을 치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여기는 진짜 할 것 같잖아. 씨발.'

존나 무섭다.

*****

"아아아악!!"

황금빛으로 가득 채워져 으리으리하다는 말조차 부족한 미네르바 제국의 황궁.

그 황궁에서부터 한 남자의 고성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자그마치 황족이 기거하는 황궁인만큼 사소한 것
하나 하나 쉽게 지나칠 수 없는데 하물며 비명이라면?

당연히 난리가 나야겠지만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비명을 지른 남자가 위치한 곳이 철저하게 방음
처리가 된 것도 있으며 무엇보다...

"이 망할 놈! 왜 여기서 끊어?! 어?! 왜 하필 여기서 끊냐고!!"

고통이 아닌,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소리를 지른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가 자신이 냅다 집어던진 책을 사납게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을 때, 맞은 편에 앉아있던 한 여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남자만큼은 아니지만 은은한 분노가 서려있었다.

"이... 이건... 이건 분명히 노린 거예요. 어떻게 이 급박한 순간에...!"

빛이 반사될만큼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머리카락. 사파이어처럼 아름다운 푸른색 눈동자.

마지막으로 장인이 한땀 한땀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듯한 이목구비. 그로 하여금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미모를 여실히 뿜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미네르바 제국의 제 1 황녀, 리나 우르미 크리스틴.

리나 또한 제논 일대기의 열렬한 팬이었으나 오늘만큼 분노한 적이 없었다.

"오라버니. 정말로 이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나요?"

리나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앞의 남자에게 다급히 물었다.

그에 남자, 그러니까 리나의 오빠이면서도 황태자의 직위를 가진 레오르트는 콧숨을 길게 내쉬며 푹신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리나가 강아지처럼 귀여운 얼굴을 갖고 있다면, 레오르트는 다소 사나워보이는 호랑이상 얼굴이었으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은 똑같았다.

"...출판사를 찾아가도 말해줄 수 없다는군. 심지어 저자가 건너 건너 원고를 제출한 거라 추적하기도


어려워. 그래도 언젠가 찾을 수 있을 거야."
"빨리 찾아주실 수 없나요? 그전부터 보고는 싶었지만 이런 장난을 친 작가의 얼굴은 꼭 보고 싶어요."
"나도 그러곤 싶지만 굳이 이런 곳에 인력을 소비할 수도 없어. 하물며 찾더라도 저자가 도망가버리면
우리만 손해야. 넌 제논 일대기가 이대로 끝나기를 비는거니?"
"칫..."

리나는 혀를 차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녀도 제논 일대기의 열렬한 팬으로써 책이 더 나오기를 바라고 있다.

제논 일대기는 주인공이 남자라 주로 남성층이 많이 읽을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독자 성별이 정확히


반반으로 나누어져있다.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기도 하고, 제논의 곁을 항상 지켜주는 여주인공이 정말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설마 제논이 여기서 죽는 건 아니겠죠? 전 메리가 슬퍼하는 꼴은 절대 못 봐요. 둘이 반드시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야 한단 말이에요."
"나라고 오죽하겠어? 만약 제논을 반병신으로 만든다면 어떻게든 찾아서 똑같이 만들어 줄 거야."

만약 아이작이 이 대화를 들었다면 부랴부랴 다음 권을 발매했을 것이다. 실제로 황태자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리나는 답답함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가 착잡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우... 지금은 신문에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야겠네요. 저자가 신문을 본다면 적어도 경각심을
가지겠죠."
"글쎄다. 과연 이 사람이 의지를 굽힐까? 난 아니라고 본다만."
"하지만 세상 일을 다 겪은 현자일 가능성이 높으니 주의를 기울이긴 하겠죠."

그들도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경험이 많은 현자로 추정하고 있다.

평민, 그리고 일반적인 귀족보다 월등한 교육 과정을 밟은 그들로서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는


가독성이요, 표현력이었으니.

머릿속에서 바로 재생될만큼 대단한 필력을 갖춘 소설가는 지금까지 없었다.

"어쨋거나 다음 편이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지. 지금까지 제논 일대기가 한 달에 한 권 씩 나왔었나?


빨리 나오면 보름에 한 번 나오고."
"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일부터 아카데미 개학식이라는 거죠. 오라버니도 그렇고 저도 많이
바빠질테니 지금처럼 심심하지는 않을 거예요."
"하아... 귀찮아 죽겠군. 그러고 보니 너도 입학하지?"
"네."

황녀인 리나가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다시 말하지만 공공연한 '비밀'이다.

아이작은 지금까지 신문으로만 세상 소식을 접하는 바람에 그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다. 바깥에 나간 적이
있어야 말이지.

더군다나 아이작은 남작의 자식, 그것도 아버지가 평민에서 귀족으로 올라간 케이스라 인맥도 좁은 편이다.
어머니가 다과회에서 정보를 수집한다고한들 엄연히 한계가 있는 법이다.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발생할 거야. 신분만 보고 알랑방귀 뀌는 년놈들이 태반이거든."


"설마 제가 그것도 모를까 봐요? 이미 기가 질리도록 겪고 있답니다."

헤일로 아카데미는 미네르바 제국에서 제일 뛰어난 교육 기관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전부터 교류가
없던 사람들만 입학하는 게 아니다.

평민은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부터 안면을 익힌 친구가 한 두 명 정도 있고, 귀족은 말할 것도 없다.


귀족은 평민과 달리 무조건적으로 입학할 수 있으니 부모의 손길에 이끌려 미리미리 인맥을 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 기본적인 체력 훈련을 제외하고 바깥에 나간 적이 전무한 아이작이 특이 케이스다. 아이작의


부모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를 해도 그는 요지부동으로 버텼다. 막내 사랑이 지극한 부모도
하는 수 없이 포기했고.

바꿔 말하자면, 아이작은 현재 '친구'라고 할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리고 헬리움의 공주도 입학한다면서요? 듣자하니 그녀도 제논 일대기의 열렬한 팬이라고 들었는데."
"마족은 그럴 수밖에 없지. 이 책이 나온 이후로 대우 자체가 달라졌는데."
"음..."

리나는 버릇적으로 뺨을 콕- 콕- 찌르다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겠네요."

< 3화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입학 당일이 되었다.

며칠 전부터 모든 준비를 끝냈기에 캐리어만 점검하면 끝이었고, 마차도 미리 예약해 놓았다. 남은 건


부모님과의 작별 인사 뿐.

"우리 사랑하는 아이작. 아카데미에 가서도 책은 꼭 내야한다?"


"...어머니는 저보다 책이 더 중요하시죠?"
"물론이지."
"... ..."
"후후. 장난이란다.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렴."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요. 나는 쓰게 웃었다. 그래도 자식 사랑은 지극하신 분이라 포옹은 해주셨다.

"아이작. 이 애비가 선물해줄 게 있단다."

다음 인사는 아버지였는데, 아버지는 내게 펜을 주셨다.

전생에서 '만년필'이라고 불리는 펜처럼 생겼으며 검은색 바탕에 황금빛 테가 멋드러지게 조합되어 눈길을
끌었다.

언제나 펜촉만 사용하던 나에게는 눈이 동그랗게 떠질만큼 멋진 자태를 뿜내고 있었다.

이에 내가 만년필과 아버지를 번갈아보자 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해주셨다.

"마법필(魔法筆)이라고 하는 거다. 마나를 잉크로 치환시키는 마법이 내재되어있지. 마나만 충전시킬 수


있다면 평생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이, 이거 비싸지 않아요?"

이 세계는 과학 대신 마법이 발달했다. 또한 기계나 공학처럼 복잡한 것도 마법으로 대체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의 마법은 보급화, 그리고 대중화가 이루어지지 않기에 대부분 상위층만 이용하는 편이다.

심지어 이런 마법 아이템은 세밀한 작업이 필요하기에 대부분 드워프들이 직접 제작하는 편이다.

그러니 아버지가 내게 선듯 선물해준 이 마법필도 가격이 말도 안 될만큼 비쌀 것이다. 적어도 평민의 1


년치 생활비는 훌쩍 넘기지 않을까. 남작의 지위를 가진 아버지에게도 매우 큰 출혈이다.

"네가 벌어다 준 돈에 비하면 이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그리고 막상 너에게 줄 선물하니까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더구나. 이 아빠가 미안하다."
"아버지..."
"가서도 열심히 글 쓰고, 그렇다고 학업을 등한시 하라는 말은 아니다. 힘든 게 있다면 거기 형이랑
누나한테 부탁하고."

아버지는 따뜻한 목소리로 조언하면서 마법필을 직접 손에 쥐어주셨다. 평생 기사로서 활동하여


딱딱해질대로 딱딱해진 손길이 느껴졌다.

이어서 아버지가 내 중지 손가락의 첫 번째 마디와 둘째 마디 사이에 난 혹을 어루만져주셨다. 지금까지


내가 열심히 집필하면서 얻게 된 굳은살, 흔히 '펜혹'이라 칭해지는 것이다.

"이것도 영광의 상처라고 할 수 있겠지. 아빠는 네가 자랑스럽다."


"... ..."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 스스로 얻어낸 명예야. 그러니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며 행동하려무나."
"...네."

이토록 좋은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자 축복이다. 좋은 부모 아래 성장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비록 전생은 그 은혜를 갚기도 전에 가족들이 사라졌지만, 현생은 아니다. 나는 아버지와 부자 간의 진한


포옹을 나누고 미리 예약한 마차에 탑승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몸 조심하거라! 방학이 되면 형이랑 누나랑 같이 찾아오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마! 모쪼록 건강해야한다!"

부모님은 내가 마차에 탑승하고나서도 끝까지 지켜보고 계셨다.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저택으로


들어가셨지만 자꾸 뒤를 힐끔거리게 된다.

'이제 가는구나.'

나는 덜컥거리는 마차 안에서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아버지가 관리하는 영지는 시골 깡촌이라 해도


될만큼 허전했다.
그대신 몬스터의 출몰도 거의 없고, 영지민도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서 웃음과 활기로 가득한 곳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원래 무시무시한 업적을 쌓았던 기사인지라 청년들 중에는 직접 아버지에게 찾아가서
훈련을 받기도 한다.

간혹 글을 쓸 때마다 바깥에서 곡소리가 나는 경우가 꽤 많은데, 대부분 아버지에게 훈련을 받는 기사


지망생들이다. 아마 그 중 뛰어난 몇몇은 아버지가 이름을 걸고 아카데미에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그것도 못 보겠지?'

지금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하나로 표현할 수 없었다.

기대가 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대인관계가 거의 없던 내가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니까.


하물며 여기는 내가 아는 곳과 전혀 다른 세계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다고 하나 여기서도 그 상식이 통할지 미지수다. 자그마치 신분이 존재하는


세상이니 변수가 너무 많다.

'지금 이렇게 걱정해서 뭐하냐.'

나는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정했다. 사람들은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꿈에도 모를테고, 난 단지


성실한 학생으로 행동하면 그만이다.

아카데미에서 과연 무엇을 배울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타는 게 내 목표다. 만약 생활


도중 트러블이 발생한다면 형이나 누나에게 일러바치면 된다.

'일단 가서 형이랑 누나부터 찾아야지.'

누나의 머리카락은 남색이지만 형은 아버지처럼 붉은 머리카락이어서 찾기 쉬울 것이다. 이 세상에는 붉은


머리카락이 흔치 않으니까. 특히 맹수처럼 빛나는 금색 눈동자는 더더욱.

나는 등받이에 편히 등을 기대었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마부에게 물었다.

"마부 아저씨. 아카데미까지 몇 시간 정도 걸리나요?"


"날이 좋으면 10 시간 정도 소요될 겁니다."
"생각보다 짧네요. 전 최소한 하루 정도는 걸릴 줄 알았는데."
"마이샬 남작 님이 관리하는 영지는 수도와 가깝거든요. 게다가 이 영지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을 뿐이지,
5 년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개발에 들어설 겁니다."

10 시간이라... 적당히 책을 읽거나 낮잠 자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그래도 매우 긴 시간이라는 건


바뀌지 않는다.

처음 환생했을 때 어떻게 하면 쓸데없이 넘쳐나는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지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


결과가 책이었고.

하지만 때로는 과학이 조금만 더 발명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손재주가 인간보다 뛰어난 드워프조차도
뛰어난 무기 및 아이템을 제작하는데 힘을 쓰고 있지, 교통수단은 뒷전이다.

'제논 일대기에 한 번 넣어볼까? 드워프의 장인들이 합심하여 만든 걸작으로.'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 때마침 드워프는 신박하다 못해 기괴한 마법 무구까지 제작하는 괴짜가 널려있다.
그러니 교통 및 물자 공급을 위한 목표, 적당히 우울한 과거사만 있다면 개연성은 충분하다.

특히 드워프 사이에서 스승과 제자는 부모자식이나 다름없어서, 스승이 세상을 떠나면 그 제자가 뒤를
잇는 전통이 있다고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다.
설령 그것이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는 일이어도 끝까지 감내하는 편이다. 이걸로 어째서 드워프에 괴짜가
많은지 알 수 있다.

'불우한 과거사는 이만하면 됐고. 마나를 연소시켜서 움직이는 증기 기관차로 설정하면 되겠지.'

나는 아버지가 선물해준 마법필로 수첩에 끄적였다. 잊어버리지 않게 기록하는 버릇은 전생에도 있었기에
지금은 수첩으로 대신하는 편이다.

'어차피 나도 작동 원리를 모르는데 설마 진짜로 만들기야 하겠어?'

미리 말해두겠지만 난 문과다. 기계 따위 알까보냐.

그냥 대충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표현하고, 정 힘들다면 삽화를 추가하면 된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내가 의외로 그림도 잘 그리는 편이다. 제논 일대기를 처음 발간했을 때도 독자들의


손쉬운 이해를 위해 세계지도를 첨부했다.

물론 그림 실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지만 몰입하기에는 충분했다. 직접 그리는 것도 재미있어서 책이


발간될 때마다 삽화 여러 장을 첨부했다.

'딱 옛날 소설 느낌이지.'

전생에서 웹소설이 히트하기 전, 종이책은 세계관 이해를 위한 삽화가 여러 장 실려있었다. 그 덕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나는 증기 기관차에 대한 설정을 수첩에 기록한 뒤, 잉크가 말랐나 확인했다. 역시 비싼값을 하는지


수첩의 잉크는 금방금방 말랐다.

아버지가 정말 좋은 걸 주셨구나라며 기분이 좋아졌다. 그 이후로는 도착할 때까지 독서에 집중했다.

"손님?"
"... ..."
"손님?"
"네?"

독서에 집중하던 중 마부가 나를 불렀다. 나는 잠시 책을 덮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곧 있으면 헤일로 아카데미에 도착합니다."


"응? 벌써요?"
"허허허. 벌써라뇨. 10 시간이 지났습니다. 집중력이 무시무시하시군요."

마부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그리 말했다. 나는 뻘쭘함에 머리를 긁적였다가 슬쩍 창 밖을 확인했다.

"우와..."

역시 도시, 그것도 수도다. 거리부터가 확연히 다르다.

내 고향은 거리에 나가면 들판이나 농경지가 대부분인데 여기는 건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건물의 양식도
그렇고 거리에 걸어다니는 행인도 그렇고 유럽에 온 듯한 느낌이다.

가끔 가다가 철제 갑옷을 착용한 기사와 지팡이를 든 마법사도 보였는데 아무래도 치안 담당인 듯했다.

"앞을 보시면 헤일로 아카데미가 보이실 겁니다."


"어디... 오."

마부의 말대로 앞을 바라보니 유독 구조가 남다른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본 내 감상평.

'...호그와트인가?'

거짓말이 아니라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가 버젓이 세워져 있다. 성만한 크기와 더불어 원뿔형
지붕까지. 내가 알던 호그와트의 외양을 그대로 띄고 있다.

물론 완전히 똑같진 않고 약간씩 다른 부분이 있으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설마 마법 주문이 아브라카다브라 같은 건 아니겠지?'

마법사를 두 눈으로 본 적이 없으니 문득 그런 생각까지 든다.

"도착했습니다. 그럼 좋은 생활을 하시길."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마차에 내리자 마부가 신사답게 인사했다. 나 또한 집에서 배운대로 예법에 따라 인사했다.

뒤이어 마부는 한 번 웃어준 뒤에 방향을 돌렸다. 나는 마부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다가 등을 돌렸다.

"히야..."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감탄이 자연스레 입 밖으로 나왔다. 지구에서 살다 온 사람이라면 내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화나 소설로만 존재하던 판타지 문명이 내 앞에 있는데 그 누가 감탄하지 않을까. 멀리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대학교가 아니라 성이랑 똑같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변에는 이미 입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대문


쪽으로 향하고 있다.

가끔씩 통일된 복장, 즉 교복을 입은 사람들도 보였는데 아마 재학생일 것이다. 교복은 입학생들에게만
지급되는 거니까.

이에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대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발을 옮기자 짐이 담겨있는


캐리어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났다.

"어머! 어머! 저기 봐! 레오르트 황태자님 아니야?"


"정말이네. 언제 봐도 멋있으셔..."
"그 옆에는 리나 황녀 님이신가?"
"아마 그럴 걸? 황녀 님도 예쁘시네. 부럽다."

그러다 갑자기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다. 아카데미 입구로 향하던 사람들이 중간에 멈춰 서서 어느 한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 또한 무슨 소란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이 부실듯한 미모를 여실히 뿜내는 두 남녀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오."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도 있구나. 나도 지금 내 얼굴이 꽤 잘생겼다 자부하는데 저 남자 앞에서는 한 수
접어야 할 듯했다.

또한 남자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오는 여자는 어떠한가. 순백의 드레스를 입어 미의 화신이라고 칭해지는
엘프 못지 않게 아름다운 자태를 뿜내는 중이다.

특이한 점이라면 두 명 다 금발에 벽안을 갖고 있다는 건데, 인상이 좀 다르긴 하지만 누가 봐도 남매였다.

"...그보다 황태자랑 황녀라고?"

신문에 나를 잡아다 족친다던 그 두 명? 내가 그리 생각할 쯤 즈음 누군가 그들에게 달라붙었다.

웨이브 진 갈색 머리카락과 동글동글한 눈매가 귀여운 소녀였으며 체구도 상대적으로 아담하여 다람쥐
같았다.

"레오르트 님! 오랜만이에요!"
"음? 그대는..."

순간 레오르트의 표정에 금이 간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는 레오르트에게 더욱 달라붙었다. 은근슬쩍 팔짱까지 끼는 걸 보아


주변 사람들에게 레오르트와의 친분을 강조시키려는 걸로 보였다.

하지만 레오르트는 소녀가 팔짱을 껴도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그동안 소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소피아에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아아. 소피아 영애로군. 잘 알고 있지."

구라다. 인위적인 미소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황태자는 지금 매우 불쾌해 하고 있다.

하기야 누구라도 길을 가다가 모르는 사람이 앵겨붙으면 화가 날만도 하다. 그것도 목적이 뻔히 보이는
수작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피아란 영애는 눈치가 없던 것인지, 아니면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건지 더욱 자기


몸을 밀착시켰다.

감동 받았다는 표정은 덤이다.

"기, 기억하시네요! 솔직히 모르실 줄 알았는데...!"


"그대처럼 작고 귀여운 여인을 몰라 볼 리가 있겠나?"
"아아...!"

이야. 입에 침도 안 묻히고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것 보소. 그래도 저 목소리에 저 얼굴이면 누구라도 뻑


갈만하다.

물론 연기를 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황태자도 쉽지는 않구나.'

나는 왠지 모를 안쓰러움에 속으로 피식거린 뒤에 걸음을 옮겼다. 나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이니 괜한


참견은 독이 될 뿐이다.

"그, 그렇지 참! 레오르트 님도 이번에 발간된 제논 일대기를 읽으셨죠?"


소피아가 저런 질문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걸음을 우뚝 멈추며 다시 레오르트 쪽을 쳐다봤다.

레오르트는 제논 일대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전보다 표정이 밝아진 모습이다. 나를 황궁에


가둬버리겠다고 협박할만큼 좋아했으니 당연한 일일 수도.

"물론이지. 그대도 이번에 나온 신권을 읽었나?"


"당연하죠! 그런데 결말이... 작가가 사람 마음 갖고 노는 것 같아서 화가 나더라고요. 레오르트 님도
동의하시죠?"
"그만큼 저자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다는 거겠지. 나 또한 결말을 읽고 화가
났다네. 내 동생도 마찬가지고."
"리나 님도요?"

소피아의 시선이 황녀, 그러니까 리나에게로 향했다. 리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시선이 소피아가 아니라 레오르트 쪽이었다.

"오라버니. 굳이 그런 것까지 말해야겠어요? 창피하잖아요."

왜 나한테 불똥을 튀게 만드냐. 이런 소리로 들린다.

그러나 레오르트도 만만치 않았다.

"원래 취미는 공유해야 재미있는 법이지."

같이 고생해보자. 이렇게 들린다.

온화한 말투하며, 고상한 언어를 쓰고 있지만 어딜 가나 남매의 본질은 안 바뀌는 모양이다.

"두 분은 결말을 읽고 무슨 기분이 드셨어요? 정말 신문에 봤던 것처럼..."


"아아. 그거 말인가? 홧김에 쓴 거라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네."
"저도 마찬가지에요. 소피아 양이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답니다."

그거 저에게는 참 다행인 소식이네요. 나는 한시름 놓은 듯한 기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누가 맨 정신으로 신문에다가 그딴 말을 써놓겠...

"뭐, 황궁에 가둬놓고 싶은 건 반쯤 진심이지만. 하하하."


"... ..."

저 새끼들이랑은 절대 엮이지도, 마주치지 말아야겠다.

나는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 싶어 두 다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아니. 근데 잠깐만. 설마 황녀도 입학하나?'

잘 생각해보니 상황이 더 좆된 것 같다.

절대 들키지 말아야지.

< 4화 >

모두에게 묻겠다. 입학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우리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무한한 영광과 축복이 있길 바라며..."


뭐긴 뭐야.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시지. 여기는 총장이라 불러야하나.

아무튼 길고도 지루한 훈화 말씀은 어딜 가나 변치 않는 모양이다. 대신 나 혼자 지루한 건지 몰라도 내


옆에 서 있는 입학생들의 눈빛은 초롱초롱하기 짝이 없다.

미네르바 제국에서 최고의 교육기관이라는 헤일로 아카데미의 총장은 분명 높으신 분일테고, 이들은 그
높으신 분이 친절하게 설명하니 좋게 볼 수도 있다.

나에게는 그냥 풍채 좋은 영감 님이 좋은 말씀하는 것밖에 되지 않지만. 한시라도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그런데 여기는 돈을 얼마나 처바른 거야?'

입학식은 대강당에서 실시되었는데, 그 규모가 무시무시하다. 일반적인 체육관을 두 개 정도 이어붙은


크기다.

신입생 뿐만 아니라 학부모는 물론, 유망주를 보러 온 사람도 많기에 수용 인원을 늘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엄청난 크기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하나도 안 보이네.'

무엇보다 단상 위에 올라가 있는 총장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총장 뿐만 아니라 옆의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얼굴도.

내가 뒤쪽에 앉아있는 것도 있지만 난 시력이 좀 안 좋은 편이다. 매일매일 책만 읽고 집필하다보니


자연스레 시력이 나빠졌다.

그렇다고 아주 나쁜 건 아니고, 일상 생활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게 아니었으면 진작에 안경을 맞췄겠지.

안경의 불편함은 전생에서 차고 남도록 느꼈으니 관리는 꾸준히 하고 있다.

"...하여, 모두에게 무운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이상입니다."

교장님, 아니 총장의 훈화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잠깐 멍 때리고 있어서 깜짝


놀라 자동으로 박수를 쳤다.

뒤이어 박수 소리가 잠잠해지고 드디어 숙소로 가는 건가 싶을 때, 안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참고로


저거 마법으로 방송하는거다.

[이어서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의 소감 발표를 진행하겠습니다.]

염병. 아직 남아있는 게 있다니.

내가 속으로 꿍얼거리고 있을 때, 대강당 내부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입학하는 거야? 마족이?


-아무리 그래도 조금 불안하긴한데...
-와... 엄청 예쁘다.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기 부끄럽지만 내가 직접 쓴 제논 일대기를 통해 마족을 향한 시선이 달라졌다는


건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달라진 게 이정도다.

전에는 얼마나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살았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마족은 언제나 걸어다니는 시한
폭탄 그 이상으로 취급당했으니 매우 심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족은 어지간해서 헬리움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는 모양이다. 세실리의 결정은 그만큼
파격적이고, 또한 과감했다.

'...근데 하나도 안 보이네.'

눈매를 좁히며 단상에 시선을 집중해도 공주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 거리에서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면 그것도 이상한 거지만 나에게는 그냥 검은색 덩어리가 움직이는 중이다.

주위에서 예쁘다, 아름답다, 가슴 크다, 섹시하다 등등. 외모와 관련된 극찬이 쏟아지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나는 볼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앞에 앉을 걸. 이게 다 전생에서 항상 뒷좌석에 앉던 버릇 때문이다.

우웅-

[아. 아아. 모두들 안녕하신가요? 반갑습니다.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이라
합니다.]

우와. 목소리 진짜 쩐다. 라디오 하면 대박날 듯.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지 세실리가 입을 열자마자 강당 내부가 고요해졌다. 목소리가 얼마나 예쁘면
시끄러웠던 강당이 삽시간에 조용해질까.

그동안 세실리는 고혹적이면서 농염한 목소리로 자기가 하고픈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분들도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믿지 못 하실 거예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존재라 불리는


마족이니까. 아마 여전히 꺼림칙하신 분도 계실거고, 어쩌면 경멸하는 사람도 계실 거예요.]

강한 호소가 깃든 말이라서 그럴까. 나는 잡생각을 치우고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도 나랑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전부 엄숙한 표정으로 경청하는 태도를 취했다.

세실리는 좌중을 한 번 둘러보는 듯하더니 힘있는 목소리로 본인의 심정을 소신껏 표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책이 나온 이후로 마족을 향한 시선이 달라졌죠. 그 책은 우리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에서 인간이길 소망하는 가련한 존재들로 표현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소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줬죠.]

"음..."

나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말을 직접 들으니 내 얼굴이 다 화끈해진다.

과연 세실리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이 강당에 있다는 걸 알기는 할까. 아마 하늘이 무너져도 절대 모를


것이다.

[그러니 전 책에서 보여준 것처럼, 제가 여러분들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우리 마족도 인간처럼 웃고,


떠들고, 슬퍼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께 반드시 보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입에 발린 말보다 본인의 의지와 결심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말.

정말 멋지다. 이순간만큼은 멋지다라는 표현밖에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

과연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절대 못 한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난 세실리, 그녀처럼 굴곡진


인생을 살지도 않았고 용기도 없었으니까.
'...나쁘진 않네.'

나는 단상에서 내려가는 세실리를 보며 진심을 담아 응원했다. 신문으로 볼 때는 황당하기 그지 없었는데


지금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소설 속 여주인공이 현실에 등장했다면 딱 저렇겠지.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얼굴이라도 제대로 봤으면 좋았을텐데.'

눈이 나빠서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게 한이다. 뭐, 그녀도 신입생이니 언제 한 번 쯤 마주치지 않을까.

[이상으로 헤일로 아카데미 제 1012 회 입학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신입생들은 각자 배정받은 반을


확인해주시길 바랍니다. 수업은 내일부터 시작합니다. 이상.]

드디어 길고 길었던 입학식이 종료됐다. 반은 조금 있다 확인하면 될 것이니 우선 숙소부터 갈 예정이다.

나는 사람들이 강당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가도 가만히 있었다. 지금 끼어들었다가 이리저리 치일테니 어느


정도 빠져나간 뒤에 나갈 계획이다.

"아이작!"
"응?"
"여기야 여기!"

그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동명이인을 불렀다면 모를까, 내가 아는


목소리였기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나와 같은 붉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맹금류 같은 황금빛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팔을 흔들고
있었다. 또한 그 옆에는 남색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황금색 눈동자를 지닌 여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두 남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반가움에 미소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형! 누나!"
"오랜만이구나. 아이작."
"잘 지냈어?"

내 형과 누나다. 이름은 각각 데이브와 니콜.

형은 아버지를 똑 빼닮아 강직한 전사의 이미지를 풍겼고, 누나는 어머니를 닮아서 상당한 미녀다.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우리 막내 입학식하는 거 보러 왔지."

니콜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째서 그녀가 허리를 숙였냐면 내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다.

얼굴은 몰라도 신체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아서인지 그녀는 키가 매우 큰 편이다. 아마 어지간한 남자보다


크지 않을까.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었어? 아버지랑 어머니는 어때?"

그때 데이브가 부모님의 안부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의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하며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늘 똑같으시지. 아마 평생 그럴 거 같은데?"


"그래? 부모님도 참. 그렇게도 서로가 좋으신건가."

데이브는 피식 웃었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주변에 빠져나가지 않은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이에 데이브는 고개를 약간 숙여 속삭이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만나자마자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한데, 다음 권이 언제 나오는지 알려줄 수 있니?"


"... ..."

역시나 예상대로다. 나는 순간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내 표정에 데이브는 화들짝 놀라며 변명을 주절주절 내뱉기 시작했다. 옆의 니콜은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아, 아니. 물론! 우리 막내를 더 보는 게 중요하지!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


"시끄러. 오빠는 동생보다 책이 더 중요해? 애가 섭섭해하잖아. 아이작, 저 멍청이 말은 무시해도 돼.
알겠지?"
"...응."

참고로 전생의 나이까지 합치면 내가 이 둘보다 나이가 많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건 아제 신경쓰지
않는다.

괜히 신경 썼다가 머리가 복잡하기도 하고, 이 둘이 나보다 어른스러운 면모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내가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었을 수도 있고.

"쩝... 아무튼 미안하다. 너도 꽤나 스트레스 받고 있을텐데 내가 실언을 했네."


"아냐. 괜찮아. 그나저나 아까 헬리움의 공주가 한 연설 들었어?"

지금 같은 상황에는 화제를 돌리는 게 최선이다. 데이브는 내 질문을 듣자마자 단상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와 니콜 또한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단상에는 아직까지 세실리 공주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누군가 있었는데 아카데미 입구에서
봤던 리나 황녀였다.

두 여자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몰라도 상당히 밝은 표정이었다.

"확실히 공주의 자격이 있긴 있더라. 나 같으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렇게 못 하거든."


"음... 그렇지?"
"그래서 기분이 어때? 사실상 헬리움의 공주를 단상에 세우게 만든 것도 네 책 덕분이잖아."

니콜이 은근슬쩍 그리 물었다. 하지만 나는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묘하다고 해야 하나.

연설을 들을 때는 뭉클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영 어색했다. 정말로 그런가 싶어서.

어째서 내가 왜 이런 기분을 느끼냐면, 전생 때문인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세상 경험이


전무하다.

마족을 향한 차별을 두 눈으로 본 적도 없으며, 악마로 변한 마족이 어떤 사건사고를 저질렀는지 알지도


못 했다. 심지어 이곳의 상식조차 잘 모르는 편이다.
"...솔직히 말해서 와닿지가 않아. 형이랑 누나도 알다시피 난 밖에 나간 적도 없고, 집에서 책만
읽었잖아.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잘 모르겠어."
"얘는. 누누이 말했지만 너무 자신을 깎아내리지 마. 너는 우리 가문의 소중한 보물이니까. 알겠지?"

대답을 들은 니콜이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니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또한 방긋 웃으며 그녀의 기대에 부응해줬다. 그러자 니콜이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나랑 오빠한테 물어봐. 전공이 달라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생활이면 도와줄 수
있을 거야."
"응. 알았어."
"아카데미 생활할 때는 학업에 집중해야한다. 괜히 부담 갖지 말고 글을 쓸 필요는 없어. 알겠지?"
"응."
"착하다. 우리 아이작."

이처럼 니콜은 나를 어린애로 보는 경향이 있다. 사실 그녀 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그런다.

이 세상은 17 살이 되면 성인으로 취급하지만 그들은 20 살이 되기 전까지 이러지 않을까. 그래도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전생에 기댈 수 있는 가족이 갑작스레 사라져서 그런 것일지도.

가족 간의 정이라는 건 참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기에 나에게는 더욱


소중했다.

"그럼 이제 가봐. 우릴 찾고 싶으면 언제던지 연락하고."


"알겠어. 나 갈게."

나는 그들에게서 멀어지면서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두 사람도 나에게 응원을 메세지를 보내며 손을


흔들어줬다.

가슴이 따스해지는 재회를 뒤로 하고, 나는 우선적으로 숙소로 향했다. 숙소의 위치는 입학식 전에 지도
조교가 모두 설명해줬다.

"룰루루~"

오늘 하루는 숙소에서 편히 쉴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

한편 아이작이 떠난 대강당.

대강당의 단상 위에는 엘프 못지 않게 아름다운 두 미녀가 밝은 표정으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한 명은 칠흑색 머리카락과 피처럼 붉은 눈을, 또 한 명은 황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지녀 각자 색다른


매력을 뿜내고 있었다.

특히 칠흑색 머리카락의 여인은 머리에 뿔이 솟아나있어 누가 봐도 마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 이번에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와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 리나다.

그녀들은 여느 때의 평범한 소녀처럼 꺄르르 웃으며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꺄하하하! 정말이지 그거는... 아참. 리나 님. 혹시 그 장면도 아시나요? 메리가 불한당한테 킥을 날린


부분이요."
"아~ 물론 알고 있죠. 아마 그 킥의 이름이..."
"헥토파스칼 킥. 그쪽 세계에서는 폭풍의 이름 중 하나라고 들었어요."
"푸흐! 기억나요. 그때 얼마나 통쾌했던지."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이자 세실리와 같은 입학생, 리나가 조신하게 웃음을 흘렸다.

마음 같아서는 세실리처럼 깔깔 웃고 싶었으나 황녀로서 기품은 지키고 있었다. 오히려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호탕하게 웃은 세실리가 독특한 거다.

"리나 님도 제논 일대기의 열렬한 팬이신가봐요? 이런 세세한 것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물론이죠. 솔직히 제논 일대기를 아예 안 봐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을걸요? 제가 장담할 수 있어요.
그런데..."

리나는 잠깐 말을 흐리며 세실리의 외모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름답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모든 게


완벽하다.

자신이 청순한 이미지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면 세실리는 성숙한 이미지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자태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부위가 있다.

그건 바로 흉부, 즉 가슴이다. 자신도 꽤 큰 편인데 세실리는... 더이상 설명은 생략한다.

유일한 오점은 그녀가 마족이라는 건데, 솔직히 이정도 미모 앞에서는 굳이 제논 일대기가 발매되지
않았더라도 수많은 남성의 애간장을 녹였을 것이다.

이에 리나는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며 세실리에게 물었다.

"...세실리 님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자요?"
"네. 마족의 숙명을 덜어주다 못해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잖아요. 사실상 은인이지 않아요?"

리나도 제논 일대기가 발간되기 전까지 마족을 폭탄 취급했다. 실제로 황궁 밖으로 나갔을 때 악마화를 한
마족에게 습격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마족이라면 악마의 탈을 뒤집어 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논 일대기가 나온


이후부터는 완전히 달라졌다.

"저도 악마화를 한 마족에게 습격을 받았던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마족이라면 치를 떨었죠. 그런데 이
책이 나온 이후부터 마족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더라고요."
"... ..."
"당장 저조차 이런 생각을 하는데 세실리 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요."

그 질문을 들은 세실리는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진심이 담겨있는 미소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는 말이 있다. 지금 세실리가 그러했다.

리나가 그녀의 아리따운 미소에 속으로 감탄하고 있을 때, 세실리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핏빛 눈동자에는 아련함과 애틋함이 한데 섞여 애잔하게 일렁이였다.

"은인... 이라 해도 한참 부족하죠. 그 분은 우리 마족을 악마가 아니라 인간으로 봐준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제 모든 걸 내주고 싶어요."
"그정도에요?"
"네. 저희 마족은 무려 1000 년 넘게 악마로 취급당했던 역사가 있으니까요. 혹시 5 권의 마지막 부분에
사크란이 했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아. 그 부분은..."

아직 완결이 되지 않았지만, 독자들은 제논 일대기의 명장면을 뽑는다면 단연 5 권의 최후반부를 고를


것이다. 그 장면이야말로 마족의 고독한 숙명을 고스란히 대변해줬으니까.

세실리는 아직도 여운에 잠겨있는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사크란처럼 되고 싶어요. 최후의 순간에도 악마가 아닌 인간으로 생을 마감하는 마족으로요."


"... ..."
"그럼 리나 님은 저자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저는..."

리나는 순간 당황하며 세실리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녀의 속내를 들으니 자기자신이 초라해졌다.

그러나 황녀로서의 임기응변 덕분일까. 리나는 서둘러 대답을 입 밖으로 꺼냈다.

"황궁에 가둬놓고 글만 쓰게 하고 싶은 사람?"


"...네?"

아. 실수했다.

리나는 본인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뒤늦게나마 자각하여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한 번 꺼낸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

세실리는 리나의 새하얀 얼굴이 실시간으로 붉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그게 뭐에요! 진심이 나오신 거 아니에요?"


"그, 그게...!"
"어쩐지 신문에서도 그리 말하시더니 진심이셨구나?"
"제, 제발 내 말 좀 들어보세요!"

그리하여 두 여자의 우정은 한층 더 깊어져만 갔고.

"푸에취!"

숙소에 도착해 집필을 하던 아이작은 갑작스레 재채기를 하게 됐다.

"크응. 아, 씨발. 침 묻었네."

침 때문에 잉크가 번진 원고를 쫙- 쫙- 찢어버렸다.

< 5화 >

헤일로 아카데미는 세계 최고의 교육기관이라는 명성에 부합하듯이, 숙소의 시설도 눈이 휘둥그레 떠질


정도로 대단했다.

일단 1 인 1 실인 건 기본이고 방 자체가 매우 넓었다. 원룸 수준이 아니라 거의 20 평짜리 아파트다.

심지어 마법으로 구현했는지 몰라도 숙소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장치까지 있었으며, 심지어 냉장고까지
있었다. 도대체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마법으로 한 거겠지.

'좋으면 됐지.'
여기는 판타지 세상이라 전생의 상식이 처참하게 박살나는 곳이다. 당장 운석까지 떨어뜨리는 괴수들이
즐비해 있는데 상식 쯤이야.

나는 전반적으로 깔끔한 숙소를 둘러보다가 안으로 걸어갔다. 푹신한 침대도 있고, 책상도 있고, 있는 건
다 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응?"

그러다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옷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어딘가 눈에 익은 색깔이다. 나는


캐리어를 질질 이끌며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하니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지급해주는 교복이었다. 상의는 흰색 와이셔츠고, 바지는
검은색이다. 이외에도 와이셔츠 위에 껴입을 수 있는 여러 옷가지가 존재했다.

사계절이 존재하는 미네르바 제국이니 계절에 맞춰 입으라는 듯했다. 나는 내 몸에 딱 맞는 듯한 교복을


이리저리 훑어봤다.

'아까 옷치수를 재더니 바로 바로 지급해주는구나.'

솔직히 사복보다는 교복을 입는 편이 낫다. 사복을 입어도 매일 같은 옷만 입을테니까.

잠시 후, 나는 한 번 시험 삼아 교복을 입었다. 때마침 전신 거울도 있어서 내 모습을 확인하기 편했다.

"스읍... 아무리 봐도..."

남장한 여학생 같은데. 얼굴이 어머니를 닮아 선이 얇고 예쁘장하게 생긴데다가 몸매까지 슬림한 탓이다.
물론 못 생긴 것보다는 훨씬 낫다.

나는 교복을 대충 옷걸이에 걸고 짐을 풀었다. 사실 짐이라고 해봤자 책 몇 권과 주말에 입을 옷,


마지막으로 원고밖에 없다. 챙길 게 있어야 말이지.

"지금 시간이..."

짐을 모두 다 풀고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4 시 30 분. 슬슬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마음 같아서는 형이나 누나랑 같이 식사를 즐기고 싶었으나 그들은 바쁜 몸이다. 괜히 이런 사소한 일에


바쁜 사람을 부를 수는 없는 노릇.

그냥 굶을까 생각했지만 여기 밥이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하기도 하니 가는 게 좋을 듯했다. 그 시간동안


원고를 쓰면 될테고.

"아. 맞다. 종이."

그러고 보니 원고지를 어디서 판매하는지 우선적으로 알아놓아야 한다. 여분은 차고 넘치도록 들고 왔지만
만약을 위해서다.

여기는 연필과 지우개가 없어서 한 번 삐끗하면 원고를 버려야한다. 그때문에 화를 내거나 욕지거리를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많다.

"푸에취! 아, 씨발."

바로 지금처럼.
시간이 남아돌아 원고를 작성하던 와중에 뜬금없이 재채기가 터져나왔다. 원고에 침이 덕지덕지 발라져
잉크가 번졌다.

이제 거의 한 장을 다 채우기 직전이라 눈쌀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아쉽긴 해도


버려야지.

나는 원고를 찢기 전에 새로운 종이에다 미리 옮겨적은 후, 남은 종이를 갈갈이 찢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하지만 재채기 때문에 집중력이 다 깨져버려 마법필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아직 30 분밖에 안 지났네?"

기왕 이렇게 된 거 밥도 먹을 겸 아카데미 구경 좀 해볼까. 나는 살짝 굳어진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고


준비를 갖췄다.

교복을 입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을 못 느껴 사복 차림으로 나갔다. 부모님이 챙겨주신


용돈과 학생증을 챙기는 건 잊지 않았다.

참고로 학생증도 마법 처리가 되어있어 위조는 절대 불가능하다. 위조가 가능했다면 이미 나라에서 직접


모셔갔겠지. 참고로 학생증은 입학 전에 발급했다.

"진짜 넓네."

나는 헤일로 아카데미 내부를 본격적으로 돌아다녔다. 마차에서 봤을 때는 호그와트처럼 성에 가까웠는데


내부는 전혀 다르다. 또 하나의 도시 혹은 마을이라 해도 무방한 수준이다.

강의를 위한 건물은 물론이고, 도서관, 서점, 상점, 의류점, 식당, 대장간 등등.

정말로 작은 도시의 형태를 띄고 있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뒤섞여있지 않고 따로 따로 잘 구분돼 있다. 하긴 이것 저것 섞여있으면 약간


어수선한 느낌이 들었겠지.

처음부터 아카데미를 세우려고 계획한 게 아니라 아예 도시 하나를 설계한 듯했다.

딸랑-

"어서오세요~"
"여기 원고지는 없나요?"
"어떤 원고지를 말씀하시는 거죠?"
"이런 재질이요."

상점에서 원고지를 사는 건 쉬웠다. 미리 준비했던 종이를 가져다가 상점 주인에게 보여주면 끝이다.

또한 종이의 가격도 매우 싼 편이었다. 책이 널리 퍼져있는 걸 보면 제지 기술이 꽤나 잘 발달돼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상점에서 더 볼 게 없는지 대충 둘러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별의 별 이상한 것들이 많았으나 내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했다.

'한 번 서점이나 가볼까?'

숙소로 돌아가던 중, 문득 길을 가다가 봤던 서점이 생각났다. 전생의 대형 서점처럼 건물 규모가 꽤


컸던 걸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 부모님의 도움으로 원고를 출판사에 주기만 했지, 내 책이 어떻게 팔리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
한 번 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이에 숙소로 향하던 발걸음을 서점으로 돌렸다. 길은 이미 머릿속에 외워둔 참이다.

그리고...

[현재 '제논 일대기'는 전권 모두 매진되었습니다. 손님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 ..."

입구부터 범상치 않은 문구가 기재되어있었다. 최근에 발간된 것도 아니고 전권이 모두 팔렸단다. 이게


정말 사실일까.

내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문구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서 어떤 여자가 앙칼진 목소리로 짜증을 부렸다.

"아이씨. 진짜! 나 아직 5 권밖에 못 읽었다고!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조금만 참아, 마리. 출판사에서도 제논 일대기만 인쇄하고 있다고 말했으니 언젠가 나오겠지."
"그 언젠가가 도대체 언젠데?! 여기 와서도 매진됐다는 소리만 하고 있잖아!"

하도 시끄러워서 그녀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생떼를 부리는 여자를 확인했다.

인상을 써서 그런지 고집이 강해보이지만 고양이상의 미인이다. 독특하게도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의
소유자였으며 눈동자는 푸른색이었다.

여자를 말리느라 진땀을 빼는 중인 남자는 그의 오빠로 추정됐다. 이목구비는 달라도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색깔이 완벽히 일치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여자의 히스테리는 계속 이어졌다.

"오빠가 분명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제논 일대기가 있을 거라며! 지금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


"그, 그게...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어."
"몇 권 정도?"
"...6 권은 3 개, 7 권은 아예 없었지."
"지금 장난쳐?! 오빠가 대신 사줬어야지!"
"마리. 너도 알겠지만 제논 일대기는 한 사람당 한 명밖에 못 사도록 규정으로 막혀있어. 옛날에
사재기를 하던 일당이 검거된 거 몰라?"

이제는 어질어질하다.

다른 건 몰라도 책으로 사재기하는 건 처음 듣는 소리다. 무슨 밀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황당함에 헛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운 나쁘게도 백발의 여자가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아까보다


더 화난 표정을 짓더니 나에게 소리쳤다.

"야. 너 뭐야? 방금 나보고 웃은거야?"


"마리!"
"이거 놔. 저 애가 날 보고 비웃었다니까?"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갈 길 가세요."
"놔! 이거 놓으라니까!!"

마리라고 불린 여자는 자기 오빠한테 질질 끌려가면서도 아득바득 나를 노려봤다. 나는 그들이 떠나가도


한바탕 폭풍이 스쳐지나간 느낌에 못 박힌 듯이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현재 내 소설이 어떤지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사재기까지 할 정도면 말 다했지.

"...밥이나 먹자."

저 애도 입학생인 것 같은데 설마 같은 반으로 배정되는 건 아니겠지?

*****

이번 헤일로 아카데미의 신입생 수는 대략 200 명이다. 여기서 무학은 150 명이고, 문학은 50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어째서 문학보다 무학에 사람들이 3 배 많냐고 물으면 이 세상의 특징 때문이다. 몬스터와 마나가
존재하고, 전생과 달리 기계보다는 사람의 힘에 의존하는 세상.

그러다 보니 교육도 '무(武)'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며, 마법조차 일종의 무력이라 무학에 편입된 상태다.
이때문에 무학 내부에서도 특성에 따라 반이 나뉘어진다고 들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문학이 외면당한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절대 아니다. 일신의 무력이 없어도 세상을
뒤바꾼 사례는 이곳에서도 빈번하다.

거기다 군인에 가까운 무학과 달리 문학은 전문직이라고 할 수 있다. 군인이 국가를 지켜주는 창과
방패라면, 전문직은 국가를 지탱하는 뼈대다.

그렇다면 문학의 반배정은 어떻게 되냐고?

어떻게 되긴. 한 반에 50 명을 모두 다 몰아넣는거지.

결국 세실리와 리나와 같은 반이 되었다. 망할.

"아~ 세실리 공주님도 문학이셨군요. 함께 배우게 되어 영광입니다."


"응? 당신은 누구죠?"

리나와 세실리가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어떤 한 남학생이 끼어들었다. 세실리와 리나의 얼굴에
순간 불쾌감이 새겨졌으나 금방 사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학생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제 이름은 잭슨 미렐 케리손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마족의 공주님과 제국의 위대한 태양이시여."

나는 벌써부터 수작질을 벌이는 남자를 보며 코웃음쳤다. 속내가 너무 뻔해서 얼탱이가 터진다.

너무 오버하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개념이 꽉 박힌 사람이라면 저런 식으로 대화에 끼지


않는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리나와 세실리가 나란히 앉은 걸 보고 얼씬도 못 하는 중이다. 저걸 용기라고 해야


할지 만용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눈치가 없는 걸 수도 있고.

세실리는 잭슨의 자기소개를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관심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들어도 전 잘 모르겠네요. 리나 님은 누군지 아세요?"


"...케리손 백작가는 우리 미네르바 제국에서 부유하기로 따지자면 순위권에 드는 가문이에요."

잭슨이라는 놈은 리나가 자신의 가문에 대해서 대신 설명해주자 으쓱거렸다. 생긴대로 논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행동 하나하나가 재수없고 느끼함만이 느껴졌다.

뒤이어 자신감이라도 얻었는지 잭슨은 세실리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실리는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도 평온한 얼굴 그대로였다.

"들으셨죠? 어떻습니까?"
"어떻냐고요?"
"네. 혹시 저에게 관심이 있으시다면..."
"관심없으니까 저리 가주실래요?"
"...나중에. 네?"

물론 세실리가 대놓고 거절하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변했지만.

세실리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며 말했다.

"전 리나님이랑 대화하고 있었는데 끼어들다니 이 무슨 결례인지 묻고 싶네요."

이어서 세실리는 리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리나 님. 미네르바 제국의 귀족은 다 이런가요?"


"아뇨. 저 사람만 그런 거예요. 케리손 백작가라고 하셨죠? 당신은 케리손 백작가에서 레이디에게 함부로
치근덕거리라고 배웠나요?"
"아, 아니. 그게..."
"더이상 할 말이 없으면 돌아가주시겠어요? 곧 수업이 시작할텐데."
"죄,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시하자 잭슨도 급히 사과하며 돌아갔다. 얼굴을 확인하니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으락푸르락해진 상태다.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는데 저 놈은 자기 알아서 깎아먹었다. 그래봤자 백작가 영식이 황녀에게 '
감히' 개길 수는 없겠지.

괜히 개겼다간은 목이 날아가는 건 둘째치고 가문이 완전히 몰락할텐데 처신은 잘 해야 하지 않겠나.


그것마저 못 한다면 병신인거고.

"어? 너 어제 그 빨간머리!"
"응?"

내가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때 옆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어쩐지 매우 익숙한 목소리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이게 웬 걸. 어제 서점에서 마주쳤던 백발의 소녀, 마리가 나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아, 염병. 얘도 문학이었어?'

하늘도 기구하시지. 하필이면 첫 만남이 좋지 않았던 여자랑 같은 전공이라니.

그런 내 속내도 모르는지 백발의 소녀, 마리가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나를 쏘아붙였다.

"어제 나보고 비웃은 거 맞지?"

아닌데.

"뭐, 너도 문 앞에서 서성인 걸 보면 나랑 상황이 똑같았겠지만. 아니야? 너도 책을 사려다 매진됐다는


거 보고 짜증났겠지."

난 책이 아니라 초고를 갖고 있는데. 그리고 짜증이 나기보다는 황당했는데.

그것 외에는 차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더니 마리가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죽거렸다.


아무래도 자기 멋대로 착각하고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뒤이어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선심 썼다는 뉘앙스로 입을 열었다.

"휴우. 그래. 비슷한 처지끼리 싸워봤자 뭘 하겠어. 어제 그 무례는 내가 특별히 용서할게."


"... ..."
"분명 작가 님도 우리가 싸우는 걸 원치 않으실 거야. 게다가 그런 상황은 우리가 아니라 그 분의 명예에
먹칠하는 거겠지. 안 그래?"

내가 작가야, 이 사람아.

< 6화 >

"내 이름은 마리야. 마리 하우젠 레킬리스. 빨간머리 너는?"

흰색 머리카락의 소녀, 마리는 내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자기자신을 소개했다. 방금 전까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잘 하더니만 지금은 또 친근하게 대했다.

아마 욱하는 성질이 있는 듯했지만 어제 일은 오해였으니 성격 자체는 나쁘지 않아보였다. 아무튼 그녀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으니 나도 해야겠지.

나는 방긋 웃는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듀커르 마이샬? 예상대로 귀족의 아들이었네."
"너도 귀족처럼 보이는데."
"맞아. 무려 레킬리스 가문의 딸이라고. 훗."

안 물었는데. 내가 속으로 그리 생각하는 동안 마리는 턱을 치켜들며 의기양양한 반응을 보였다. 본인의


가문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레킬리스 가문이라. 백작도 후작도 아닌, 황제 바로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공작이다.

나 또한 레킬리스 공작가가 얼마나 유명한지 잘 알고 있다. 옛날 어머니에게서 교육을 받을 때 미네르바


제국의 역사까지 배웠으니 당연히 알 수밖에 없다.

아무튼 레킬리스 공작가를 설명하자면 미네르바 제국의 개국공신 중 하나다. 더군다나 예로부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여 미네르바 제국민들에게 평판이 매우 좋다.

물론 가끔씩 개망나니가 나오는 경우가 있기는하나 적발되면 가문에서 호적이 파이고 추방당한다.

'모든 귀족이 다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황제 다음가는 공작이 몸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데 다른 귀족은 어떨까. 안타깝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전생에서도 권력이 높으면 갑질하는 사람이 많은데 하물며 여기는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는 세상.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도 없어서 증거를 남기기도 어렵다.
이로인해 귀족들이 알음알음 평민을 차별하는 풍조는 여전하다. 심지어 대놓고 핍박해도 권력을 무마시킬
수 있다.

나는 마리를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몰라 예의바르게 존댓말을 하는 건 잊지 않았다.

"레킬리스 공작가의 영애셨군요.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그냥 반말 해. 나 그런 거 싫어하니까."

내가 존댓말을 사용하자 마리의 예쁜 얼굴이 구겨진다. 역시 소문대로 권위주의를 싫어하는 모양이다.

이에 나는 그녀가 원하는대로 반말을 쓰기 시작했다. 마리도 그런 내가 편했는지 재잘재잘 떠들었다.

"넌 제논 일대기를 몇 권까지 갖고 있어? 난 5 권밖에 없거든."


"음..."

나 초고 갖고 있다니까.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따로


없다.

나는 무어라 대답할지 궁리하다가 그녀가 납득을 할 수 있겠끔 거짓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나는 따로 소장한 건 없는데 이야기는 다 알아. 어머니가 읽으라고 빌려주셨거든."


"그래? 뭐, 그런 사람들은 많더라. 우리 오빠는 빌려주지도 않던데."
"왜?"
"자기 물건은 끔찍히 여기는 사람이거든. 가족이라도 자기 물건에 손 대는 걸 엄청 싫어해."

오빠라면 어제 마리를 살살 달래주던 그 백색 머리 남자인가. 나는 툴툴거리는 마리를 쳐다보다가 궁금한


점이 떠올라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제 너희 오빠가 하는 말은 얼핏 들었는데, 제논 일대기를 사재기하는 일당이 검거되었다고?"


"응? 모르고 있었... 아, 모를만하네. 최근에 잡힌거라 거라 신문에 소식이 실리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아마 이틀 뒤에 즈음 나올 걸?"

역시 공작 가문이라서 그런지 정보를 얻는 속도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내가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내 속내를 읽었는지 마리가 으쓱거렸다. 아주 그냥 콧대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너무 그렇게 안 쳐다봐도 돼. 우리 가문에서 이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그래도 대단하네. 우리 집은 시골 깡촌이라 소식을 접하려면 신문밖에 답이 없거든."
"시골 깡촌? 푸핫. 너 말 재밌게하네."

드르륵-

마리랑 신나게 떠드는 와중에 강의실 앞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렀다. 그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웅성거렸던
강의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뚜벅- 뚜벅- 뚜벅-

벽 하나를 꽉 메울 정도로 큰 칠판 앞으로 한 노년의 남자가 중앙으로 걸어오는 중이다. 머리카락은 탁한


금색과 흰색이 골고루 섞여있고, 콧수염을 멋드리지게 길렀으나 다소 고집이 강해보이는 인상이다.

옷차림도 딱 교수님들이 입을 법한 양복 차림이었다.

"크흠."
마침내 칠판 중앙에 선 노인은 헛기침을 하더니 좌중을 둘러봤다. 나를 포함한 모든 학생들은 그의 입이
열릴 때까지 진득히 기다렸다.

이윽고 노인의 시선이 오른쪽부터 시작해 왼쪽 끝까지 다다랐을 무렵, 무겁게 닫혀있던 그의 입이 열렸다.

"반갑습니다. 학생 여러분. 전 인문학 교수, 비루스 아르 트리스탄이라고 합니다."

목소리가 상당히 점잖은데다 느긋해서 귀에 속속 들어왔다. 비루스라고 소개한 교수가 허리를 꾸벅 숙이자
학생들은 박수로 맞이해줬다.

이어서 허리를 다시 편 그는 특유의 느긋한 말투를 유지하며 말했다.

"우선 헤일로 아카데미, 그리고 문학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특히 이번 해에는 특별한


사람들도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했죠."

그러면서 리나와 세실리가 있는 곳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겨 정확히 마리를 쳐다봤다. 하기야 황녀나
마족의 공주가 아니더라도 마리도 공작가 출신이니 충분히 특별한 사람이다.

"...어쩌라는 거야?"

물론 마리는 본인이 지목당하자 툴툴거렸지만. 그동안 교수는 점잖게 말을 이었다.

"우선 여러분들이 앞으로 어떤 생활을 하게 될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문학은 2 년 동안 공통된 수업을


듣지만, 그 이후로는 본인의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의술에 관심있는 사람은 의학으로, 행정은 행정학,
정치는 정치학, 그리고 인문은 인문학으로 말이죠. 그때부터는 본인이 원하는 길을 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카데미, 특히 문학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었기에 교수의 말을 경청했다. 형이나 누나는 전부 다


무학이어서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점이 생길테죠. 2 년 동안 길을 못 찾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건 여러분 나이대에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요. 우리는
기다려줄 수 있습니다."
"... ..."
"무엇보다 문학에 들어오신 분들은 대부분 '지식'을 원해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죠. 굳이 길을 찾지
않아도 지식을 원하신다면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길을 찾던 말던 졸업은 할 수 있다는 소리네. 졸업증만 받을지, 아니면 인턴으로 들어갈지.

사실 중세에 가까운 세상에서 이런 발상을 한다는 것 자체도 대단한 수준이다. 나는 턱을 괸 채 교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역사적인 첫 수업이니 제가 간단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좋은 대답을 한 학생에게는 가산점을 주겠습니다."

첫 질문과 동시에 시작된 수업. 나는 그의 질문을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한 가지 명언이 떠올랐다.

'아는 것이 힘이다.'

여기가 지구였다면 누구나 한 번 즈음 들었을 명언 중 하나다. 허나 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라다보니 손을 들어 발표하는 게 영 껄그러웠다.

내가 가만히 있는 동안 어떤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놀랍게도 리나였다.


비루스 교수는 리나가 손을 들자마자 그녀를 바라보며 손을 선듯 내밀었다.

"이름이... 리나 학생. 맞죠?"


"네. 교수님."
"리나 학생은 지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죠?"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라 해도 교수에게는 학생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다. 리나도 그 점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대답을 꺼냈다.

"사람이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흠...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교수가 부가 설명을 요청하자 리나는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이 설명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몸 내부의 마나를 순환시키는 연공법부터 시작해 마법, 오러, 그리고 문명을 재건하기 위한 건축까지.
이 모든 게 지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지식이 없다면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하죠. 그러니 저는
지식이 사람을 높은 곳까지 끌어올려준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좋아요. 모두 박수."

짝짝짝짝짝!

교수가 박수를 종용하자 우렁찬 박수 소리가 강의실 안을 가득 채웠다. 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 박수를


치다가 옆을 힐긋거렸다.

마리는 시큰둥한 얼굴로 느릿느릿하게 손뼉을 치는 중이었다. 한 쪽 입꼬리를 삐죽 올리는 걸 보아 어딘가


불만에 찬 얼굴이다.

"리나 학생의 말대로 지식은 사람을 더 높은 곳에 나아가게 만들 수 있죠. 하지만 제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에요. 여기서 더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학생이 있습니까?"
"... ..."

교수가 재차 물어도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게 자그마치 황녀의 발표를 축약해야한다.

괜히 발표했다가 이상한 대답이라도 하게 되면 분명 비웃음을 살테고, 만에 하나 교수가 흡족해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여러 의미로 찍히게 될테니까.

'빌어먹을 계급 사회.'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마 모두들 내심 이대로 시간이 지나가길 빌고 있을 것이다. 교수가 실망하는 것보다야 다른 사람들에게


찍히는 것이 더 무서울테니. 적어도 세실리나 마리가 발표해야 영향이 적을 것이다.

스윽-

그 생각을 하자마자 리나의 옆에 앉아있던 세실리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엉거주춤한 모습을 보니


자신감이 없어보였다.

물론 교수에게는 발표할 학생이 나타났으니 기쁘기 그지 없는 일이다. 비루스 교수는 세실리가 손을


들자마자 화색을 띄며 입을 열었다.

"오! 아마 이름이..."
"세, 세실리라고 합니다..."
"좋아요. 세실리 학생. 학생은 지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죠?"
당당하게 연설할 때와 달리 상당히 풀이 죽은 목소리다. 아무래도 연설 때와 다르게 확신이 없으니
자신감이 사라진 걸로 추측된다.

"후우..."

세실리는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스스로를 다독이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감을
되찾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로 마족다운 대답이다. 비루스 교수도 흥미가 돋았는지 얼굴을 살짝 내밀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네. 리나 님이 발표했던 것처럼 지식은 사람이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전에 그 '사람'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발전 가능성이 없는
짐승에 불과할테니까요."
"실로 원초적인 대답이군요. 하지만 훌륭해요. 모두 박수!"

리나 때처럼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나는 묘한 표정으로 자리에 급하게 앉은


세실리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족인 그녀가 저런 대답을 꺼내니 뭔가 가슴에 와닿는 기분이다.

"두 학생 모두 아주 훌륭한 대답을 꺼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어요. 혹시


다르게 발표할 학생이 있나요?"

있을리가.

세실리까지 발표한 마당에 더이상의 발표 지원자는 없을 것이다. 내가 장담할 수 있다.

이대로 아무런 일없이 끝났으면 좋겠다만...

"더이상 발표할 학생이 없다면 제가 직접 지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나 교수는 전생에서도 그러더니 지금도 빅엿을 먹이려고 한다. 나는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제발 나만 찍지마라. 제발...'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고.

"거기 고개 숙이고 있는 빨간머리 학생? 학생이 대답해보세요."

이 세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빨간머리를 물려준 아버지를 원망했다. 정말로 어딜 가도 눈에 띄는


색깔이지 아닐 수 없다.

"야. 교수님이 너 말하는 거 같은데?"


"...나도 알아. 후우."

나는 속으로 오만가지 쌍욕을 지껄이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수 십개의 시선들이 정확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뭘 노려보냐고 신경질을 부리고 싶었지만 꾹 내리담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비루스 교수가 물었다.

"빨간머리 학생. 학생의 이름이 어떻게 되죠?"


"...아이작이라고 합니다."
"네. 아이작 학생. 학생은 지식이 무엇이라 생각하죠?"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최대한 다른 대답을 궁리했지만 전생의 명언만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아다닐
뿐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고민하는 척 하다가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호."

뭐요. 씨발. 그 감탄사는 뭐고 눈은 또 왜 빛내는건데요.

내가 속으로 집씹듯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 교수는 전과 달리 들뜬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것 참 흥미로운 대답이군요."


"... ..."

나는 교수의 질문을 듣자마자 리나와 세실리가 앉은 자리를 쳐다봤다.

한 쌍의 푸른 눈과 한 쌍의 붉은 눈이 호기심을 담으며 나를 직시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실시간으로


불안감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것을 체감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예로부터 지식은 문명을 발전시키는데 두루 쓰였습니다. 불을 어떻게 피우는지, 농사를 어떻게


짓는지, 건물은 어떻게 세우는지, 또 몬스터를 잡기 위해 어떤 지식이 필요한지처럼 말이죠. 이를통해
지식은 무력보다 더 강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리나 학생의 발표를 요약했군요. 그렇다면 세실리 학생의 발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이거면 됐잖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교수의 눈빛은 한층 초롱초롱해졌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될대로 되라는 듯이
말했다.

"...혼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은 명백히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끼리의 교류를 하거나 또는


싸움을 통해 강탈할 수도 있죠. 그리고 사람 답다는 건... 하나로 정의할 수 없으니 여기까지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짜로 더이상 할 말이 없었기에 지체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정적이 강의실에 내려앉았다.

나는 정적이 일자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교수를 쳐다봤다. 교수는 내 발표에 감명받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리나와 세실리가 발표했을 때와 달라도 너무 다른 표정이다.

뒤이어 교수는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정~말! 흠잡을데 없이 멋진 대답이었습니다! 아이작이라고 하셨죠?"


"...그런데요."
"아이작 학생에게 가산점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힘찬 박수 소리로 맞이해주세요!"

짝짝짝짝짝!
"... ..."

나한테 이러지 마. 씨발.

< 7화 >

"오올~ 너 머리 좀 잘 돌아간다?"
"시끄러."

칭찬을 해줘도 전혀 기쁘지가 않다. 칭찬도 칭찬 같아야지 히죽거리는 표정으로 말하니까 놀리는 것 같다.

무엇보다 지금 나에게는 교수의 가산점보다 아까 전 내게 쏟아졌던 무수한 시선들이 신경쓰였다. 리나와


세실리는 호기심이었으나 몇몇 시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앞으로 전개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입 꾹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뒤이어 박수


소리가 점차 잦아들자 비루스 교수는 느긋한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이작 학생의 대답처럼 지식은 곧 힘이 될 수 있는 무기나 다름없어요. 사람에게 있어서 힘이란 결코


뗄래야 뗼 수 없는 관계죠. 또한..."

발표 때와 달리 지루하게 이어지는 그의 강의 시간. 그래도 나는 물론 모든 학생들은 교수의 강의에


집중했다.

전생의 대학교 수업처럼 지루하기만 했지, 쓸모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판타지 소설에나 있을법한
아카데미에 다닌다는 걸 실감시켜줬다.

그렇게 교수의 장황한 설명이 약 30 분 동안 이어졌을 때 즈음, 모두의 집중을 이끌만한 이야기가 나왔다.

"여기서 잠깐 질문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제논 일대기라는 책을 읽어보신 학생 있습니까?"


"...응?"

왜 갑자기 내 책이 왜 언급되는 거야. 내가 속으로 당황하는 동안 교수는 아차하며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말했군요. 여기서 제논 일대기를 한 번이라도 읽지 않은 학생 있습니까?"

나는 교수가 그 질문을 하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논 일대기가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50 명 중 한


두 명 정도는 관심이 없지 않을까.

그러나 그 예상이 모두 내 오판이라는 듯, 손을 드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진짜로?'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마냥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마법이 존재하는 판타지 세상이라고한들 여기는


아직 중세 시대에 가깝다. 여가 시간에 즐길만한 문화가 매우 적을 것이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는 물론, 텔레비전까지 발명되지 않았으니 여가 생활에 즐길 수 있는 건 극히 한정돼


있다. 거다가 귀족들은 본인의 교양을 위해서 책을 읽을테니 제논 일대기를 자연스레 접했을 것이리라.

이렇게 생각하니 시대를 정말 잘 타고났다고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럼 이야기가 쉬워지겠군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제논 일대기는 1 년 전, 혜성처럼 등장한 작품이죠.


전 이 작품을 읽으면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만한 능력을 갖고 있을까?"

그거 전생에서 널리고 널린 거예요. 판타지가 거기서 거기지 뭐. 양념만 잘 버무려주면 독자들은 비슷한
이야기여도 재미있다고 해줬다.

"또 얼마나 많은 경험이 있으면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확신하건데, 제논 일대기의 저자는
범인으로써는 상상조차 못할 경험을 겪었을 겁니다."

...집에서 책을 많이 읽었을 뿐이다. 그래도 교수의 말이 아주 틀리지만은 않은 게, 나는 '환생자'다.

다른 세상에서 색다른 경험을 겪었을 뿐더러 상상조차 못할 문물을 쉽게 접했다. 이것도 경험이라면
경험이겠지.

더군다나 다른 사람이 창조한 이야기, 그러니까 만화나 소설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었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 쯤이야 아주 쉽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바로 표현력과 가독성입니다. 머릿속에서 그 장면이 생생하게 재생되는


기분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이러한 문장을 쓰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고심하고, 또
연구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렇게 칭찬만 하시면 내가 다 부끄러운데요. 나는 쓴웃음을 지을 뻔했다.

당장 내가 쓴 책을 보고 저러는데 반지의 제왕이나 셜록 홈즈를 본다면 기절초풍하지 않을까.

톨킨이나 코난 도일이 이곳에 환생했다면 어떤 파장을 일으켰을지 궁금하다.

아. 톨킨은 본인의 직접 창작한 세계관이 현실로 변했으니 당황할 것 같다.

"제논 일대기 같이 불후의 명작을 쓰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이지만,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이미 길을


닦아놨으니 그 길을 따라가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단,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만한 지식과 경험은
필수겠지요."
"교수님. 혹시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비루스가 설명을 이어나가던 도중에 누군가 팔을 번쩍 들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고동색 머리카락의
여학생이었다. 앞자리에 앉아서 그런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가던지 간에 질문을 싫어하는 교수는 없다고, 비루스 교수는 화색을 띄며 그녀에게 물었다.

"물론이지요. 이름이?"
"레오나라고 합니다."
"그래요. 레오나 학생. 질문이 뭐죠?"

레오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에서 온갖 시선들이 쏟아졌다. 이어서 또박또박하면서 무뚝뚝한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교수님의 설명처럼 제논 일대기는 소설을 넘어 문화계에 한 획을 긋다 못해 새로운 길을 제시했습니다.


덕분에 지금도 전무후무한 인기를 끌고 있고요."
"그렇죠."
"하지만 몇몇 평론가들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계급을 막론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은 맞지만,
교양을 쌓기에는 부족하다고. 교수님의 생각은 어떤지 묻고 싶습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충 알 것 같다. 제논 일대기가 대박을 치자 대부분 호평을 쏟아냈지만


소수는 비난했다.
그 내용은 이러한데, 교양을 쌓기에는 부적절해도 한참 부적절하다고 말이다. 나는 그걸 보고 코웃음쳤다.

'꼬우면 자기들도 나처럼 쉽게 쓰던가.'

전에도 언급했지만 이 세계의 소설은 수능 영어 문제급이다. 태어나서 한 번 들을까 말까 한 단어들이 한


책에 전부 몰려있으니 스토리는 커녕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

교수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는지 레오나의 질문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학생의 질문처럼 제논 일대기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지만, 그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죠. 하지만 그거 아십니까?"
"무엇을 말이죠?"
"비평을 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소설 작가라는 겁니다. 그것도 제논 일대기가 세상에 나오기 전, 평민이
아닌 귀족들에게'만' 인지도가 가장 높았던 작가들이죠. 그중 한 명은 메그너 교수라고, 저 말고도
여러분에게 지식을 전수할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유독 '만'을 강조한 교수다. 비루스 교수는 레오나에게서 시선을 떼더니 칠판 앞을 왔다 갔다거리며


느긋한 음성으로 설명해줬다.

"어째서 평민이 아닌 귀족들에게만 인지도가 높았냐면, 이전까지의 소설은 대부분 귀족들밖에 못 읽었기
때문입니다. 평민에게는 어려운 단어가 많아서 거의 해독하는 수준이었거든요. 이러니 가독성은 떨어지고,
나중에 가면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한 방향으로 꼬여버리죠."
"... ..."
"하지만 제논 일대기는 평민조차 쉽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문장과 표현력을 구비했습니다. 제논
일대기는 교양을 쌓을 수 없다?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본디 교양이라는 건 응당 학문과 지식을 얻어야만
터득할 수 있는 것."

여기저기 서성거리던 교수의 발걸음을 딱 멈췄다. 그리고 마침내 레오나를 똑바로 직시하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자, 그럼 레오나 학생. 제가 반대로 질문을 하겠어요."


"네. 교수님."
"레오나 학생은 제논 일대기를 몇 권까지 읽으셨나요?"
"최근에 나온 것까지 모두 읽었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마리 왈.

"와씨. 나도 최근에 나온 건 못 읽었는데. 쟤는 어떻게 읽었데?"


"방법이 있었겠지."

우리가 떠들던 말던 레오나의 대답을 들은 교수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제논 일대기를 읽은 후에 마족을 어떻게 생각하시죠?"


"... ..."

레오나는 대답하지 않고 세실리가 앉아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세실리는 본인이 언급될 줄은
몰랐는지 살짝 움찔거렸으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잠시 후, 세실리와 몇 초간 마주하던 레오나는 납득이 갔는지 무뚝뚝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질문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아뇨. 정말 예리한 질문이었어요. 레오나 학생에게 가산점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예상치 못한 가산점에도 레오나는 고저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로봇 같다고
생각할만하다.

"아무튼 특정 지식을 완전히 자기 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지식이 무엇을 알려주는지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제논 일대기는 그 점이 극도로 진보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죠."

이야. 아무 생각없이 취미로 쓴 소설을 저렇게 포장해주시네.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그동안 교수는 마침 잘 됐다 싶었는지 중간중간 제논 일대기를 언급하며 강의를 이어나갔다. 학생들도


전보다 흥미가 돋은 얼굴로 교수의 강의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특히,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아마 마지막 순간에도 절대 오만해지지 말라는..."

도중에 나조차도 몰랐던 이야기의 의미를 교수가 스스로 꾸며내기도 했다. 정작 작가 본인은 아무
의미없이 적었다는 게 함정이지만.

너무 똑똑한 사람은 쉬운 함정을 오히려 더 복잡하게 해석한다는데 딱 그 모양이다.

그래서 중간부터는 듣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한 표정으로 강의를 들었다. 옆을 힐긋거리니 마리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듣는 중이다.

"음... 이제 슬슬 시간이 다 끝나가는군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교수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끝이 다가옴을 알렸다.

나는 몰라도 학생들에게는 꽤 재미있었는지 탄식하는 소리가 조금씩 들렀다. 그렇게도 재밌는가.

비루스 교수는 탄식 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너무 아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말고도 시간은 많으니까요."


"교수님 말고 다른 교수님은 무엇을 가르쳐주나요?"
"역사, 신학, 마법, 의술, 행정, 정치, 철학, 생물 등등. 각 교수마다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쳐 줄
겁니다. 또한 이 시간이 끝나면 여러분들께 시간표를 발부할 예정입니다."
"혹시 전부 다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 건가요?"

어느 한 학생이 불안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확실히 저걸 하나 하나 들으려면 머리가 아플 것이다.


비효율의 극치를 달린다고 해야 하나.

하나 비루스 교수는 그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아뇨. 여러분이 원하는 강의만 들으셔도 상관없어요. 단, 유급을 당하지 않으려면 일정 이상의 점수가
필요할 겁니다."
"그럼 관심 없는 전공은 출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립니까?"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어차피 교수들도 본인의 강의에 관심있는 학생에게만 집중할테니까요. 대신 아까
말했듯이 일정 이상의 점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되도록 많은 강의를 들어 출석 점수라도 따는 것이 좋을
겁니다."

아까 설명한 것처럼 2 학년까지는 공통된 수업을 듣지만, 일정 이상의 점수를 얻을 수 있다면 굳이


관심없는 강의를 들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확실히 이것만 본다면 전생의 대학교와 비슷한 시스템이다. 내가 따로 수강 신청을 하지 않아도 전공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게 차이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나름대로 익숙한 시스템이라 만족스러웠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군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학생 여러분."

강의 시간이 모두 끝남과 동시에 비루스가 허리를 숙이며 신사답게 인사했다. 당연하게도 인상깊은
강의였는지라 학생들은 박수로 응대해줬다.

이윽고 비루스가 강의실 밖으로 나가고, 조교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와 학생들에게 종이를
배부해줬다. 조금 전 교수가 언급한 시간표인 듯했다.

"미친. 이게 뭐야."

그리고 나는 시간표를 확인하자마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오전 9 시부터 오후 5 시까지 빽빽하게 채워진
수업은 상관없는데 전공의 수가 어마어마하다.

얼마나 많으면 같은 전공을 찾으려 해도 전부 다 다른 전공이다. 마리도 혀를 쯧 차며 곤란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많기만 하네. 여기서 특정 점수만 확보하면 된다는 거지? 넌 무슨 전공을 들을거야?"
"...일단 다 들어보고. 너무 많아서 나도 모르겠다. 일단 역사랑 신학, 그리고 생물 정도는 고려하고
있어."

마리의 질문에 대충 답하며 시간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가 말한 세 가지 과목은 솔직히 자신있었다.


책을 통해 얻은 풍부한 지식이 내 머릿속에 저장돼 있었으니까.

당연히 관심없는 전공은 한 번만 듣고 이후로는 무시할테지만 걱정되는 게 딱 하나 존재했다.

'점수는 상관없는데 여기에도 조별 과제가 있으려나? 그럼 귀찮아지는데.'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아이작 씨?"
"응?"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이에 나는 시간표에서 시선을 떼어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역사와 신학, 그리고 생물을 고려하고 계신다고요?"

태양처럼 화사한 미모를 내뿜는 리나가 빙긋 웃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색
눈빛에는 강한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또한 그녀의 옆에는 세실리가 서 있었는데, 리나보다는 아니지만 비슷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옘병.'

저주할테다. 교수 새끼.

< 8화 >

내가 마음 속으로 교수를 저주하고 있을 때, 리나가 옆에 앉아있는 마리를 바라보며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마리 님도 계셨네요. 오랜만이에요."


"그래. 그것 참 오랜만이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서로 안면이 있는 듯했다. 다만 미소를 짓고 있는 리나와 달리 마리는 불만 가득한


표정이라는 걸까.

마리가 반말을 하는 건 그녀의 가문이 미네르바 제국의 개국공신이라 가능한 일이겠지만, 대충 봐도


마리가 리나를 대놓고 껄그러워하는 중이다. 정작 리나는 개의치 않아하지만.

리나는 마리의 퉁명스러운 인사에도 미소를 유지하며 다시 시선을 나에게로 옮겼다. 나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하자마자 최대한 태연한 척을 했다.

뒤이어 리나는 조금 전보다 화사한 표정을 짓더니 우아한 목소리로 스스로를 소개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아이작 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미네르바 제국의 1 황녀, 리나 우르미


크리스틴이라고 해요. 편하게 리나라고 불러주세요."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리나 황녀님."
"듀커르 마이샬?"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식으로 소개하자 리나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그리고는 내 머리카락과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붉은 머리카락과 금색 눈... 왠지 익숙하다 했더니... 그런데 문학이라..."


"네?"
"아니에요. 아무튼 황녀를 빼고 리나라고 불러주세요. 세실리? 세실리도 인사할래?"
"아, 응!"

리나는 능청스레 넘기더니 뒤의 세실리를 불렀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서로 말까지 놓은 걸 보면


그사이 꽤 친해진 모양이다.

나는 세실리가 앞으로 나서자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세실리도 긴장한 낯빛으로 내 얼굴을
바라봤다.

'진짜 하나같이 다들 비현실적으로 예쁘구나.'

마리도 그렇고, 리나도 그렇고, 세실리도 그렇고.

전부 다 비현실적으로 예쁜 나머지 확 와닿지가 않는다. 사람이 아니라 정성을 들여 그린 캐릭터가 현실에


툭 튀어나온 기분이다.

하물며 세실리는 마족이다. 이 세상에 환생나고 처음으로 마주한 이종족.

칠흑색 머리카락은 익숙하니까 넘길 수 있는데 피처럼 붉은 눈동자와 머리 양 옆에 솟아난 뿔은 정말로


이질적이었다.

무엇보다...

'...셔츠가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중이네.'

약간 과장해서 가슴이 본인 머리만하다. 교복으로 가리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위압감을 자랑하는 중이다.


옆에 서 있는 리나도 나름 큰 편인데 세실리에 비해서는 역부족이다.

그에 반면 마리는... 적당히 큰 편이다. 앞의 두 여자가 너무 큰 거지 결코 작지 않다. 애시당초


귀족이라 잘 먹고 잘 자는만큼 발육이 좋은 건 당연한 일이겠지.
각설하고-

"안녕하세요.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연설에서 들었던 것처럼, 세실리가 특유의 고혹적인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헬리움만의 예법인지
심장 쪽에 손을 대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리나 덕분에 자신감을 얻어서 목소리에도 약간 활기찬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에 나는 어떻게든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대답했다. 시선 처리도 고역이다.

"아까 들으셨겠지만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세실리 공주님."
"저도 리나처럼 편하게 세실리라고 부르셔도 돼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나는 리나와 세실리를 번갈아보다가 본론부터 꺼냈다.

"두 분께서 저에게는 어쩐 일로?"

그리 물으면서 주변을 힐긋거렸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수많은 학생들의 시선이 이쪽에 집중돼 있다.

대부분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으나 개중에는 적대 어린 시선도 더러 존재했다.

특히 오자마자 세실리에게 추파를 던졌던 백작가 영식. 아마 이름이 잭슨이랬나.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놈은 아주 죽일 듯한 기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조만간 따로 불려나갈 것 같다.


두렵기보다는 귀찮았기에 당분간 쟤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그사이 내 질문을 들은 리나가 우아한 말투로 말했다.

"수업 때 발표가 인상적이었거든요. 지식이 곧 힘이 된다니, 전 생각치도 못한 대답이었어요. 정말


멋졌죠."
"과찬이십니다."
"아뇨. 전혀 과찬이 아니에요. 그러다 문득 궁금해지더군요. 아이작 님은 어째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라고 말이죠."

만약 지구에 사셨다면 한 번 쯤은 들으셨을 명언입니다. 황녀님.

물론 위의 말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빠르게


궁리했다.

"계속 서 있지 말고 앉아서 얘기하지? 보니까 다음 시간에도 옆자리에 앉을 거 같은데."

그러다 중간에 마리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니 마리가 턱을
괴며 짜증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리나를 향하고 있었는데, 어지간히도 리나가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아. 이거 제가 실례했군요. 그럼 자리에 앉을까요?"


"...네."

어쩌다보니 세실리, 리나, 나, 마리 순으로 앉게 됐다. 오른쪽을 봐도, 왼쪽을 봐도 미녀가 있어서 좋긴
하다만 압박감이 장난아니다.
그도 그럴게 내 왼쪽은 공작가 영애가, 오른쪽에는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와 헬리움의 공주가 나란히
앉아있다.

까닥 입을 잘못 놀리면 내 목이 날라가는 건 물론이고, 집안도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 사이에 끼여있던 병사의 심정이 이러할까. 최대한 태연한 척 하고 있으나
가슴이 긴장으로 세차게 두근거렸다.

"그래서 대답은요?"

내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리나가 재차 질문했다.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눈동자에 호기심과 기대감이


담겨있었다.

'씨발. 어떡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도 그 명언을 전생에서 듣기만 했지, 어떤 경위를
통해 나온 건지 하나도 모르니까.

그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낫다. 괜스레 리나가 꼬치꼬치 파고들면 또다른
거짓말을 구상해야 할테니까.

나는 다른 의미로 콩닥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달래면서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딱히 설명할 길이 없네요."
"그냥 그렇게 생각한 거라니..."

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떨떠름히 중얼거렸다. 실망한 건지 아니면 놀라워한 건지 모르겠으나 아마


실망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나 이 모든 순전히 내 착각에 불과했다.

"대단하시네요."
"...예?"
"정말 대단하시다시고요. 아이작 씨는 평소에도 지식을 힘으로 생각했다는 거잖아요?"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건데? 대체 어떤 착각을 했길래 저런 결론을 내놓는 거지?

내가 황당해 하는 동안 리나는 아까 전보다 눈을 더욱 빛내더니 직설적으로 물었다.

"이런 말 하기 죄송하지만 아이작 씨는 육체적인 재능이 없으시죠?"


"어... 네. 아버지도 중간에 포기하셨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어째서 호크 경의 아들이 무학이 아니라 문학에 들어왔는지 의문이었지만... 이제서
이해가 가요. 호크 경이라면 분명 무력을 쌓지 못 한다면 지력을 쌓으라고 하셨겠죠."
"저... 리나? 아이작 씨의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세실리가 리나에게 질문했다. 나 또한 내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고


있기에 자연히 궁금해졌다.

아버지는 본래 평민이었다가 기사로 활동할 때 어마어마한 위업을 세워 귀족이 된 케이스인데, 정확히


어떤 업적을 세웠는지 모르고 있다. 아버지 스스로도 나한테 말하기 꺼려하는데다가 어머니도 크면 알게
된다고 애매하게 대답해주셨다.
헌데 지금 듣자하니 무려 황녀, 그러니까 황족의 귀에도 들어갈 정도로 대단한 분인 걸로 예상된다.
집에서는 그저 호탕하고 친근한 이미지의 아버지인데.

내가 그리 생각하는 동안 리나는 세실리를 바라보며 내 아버지, 호크에 관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냈다.

"혹시 미네르바의 붉은 사자라고 들어본 적 있어?"


"붉은 사자라면... 설마?"

세실리는 리나의 질문을 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나를 쳐다봤다. 자기들끼리만 알고 나는 전혀


모르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아, 어쩐지. 어디서 들어본 성에다 머리도 빨간색이라 했더니 붉은 사자의 아들이었구나? 눈도
황금색이고."

심지어 마리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정작 아들인 난 모르고 있는데.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가 의문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마리에게 질문했다.

"너도 알고 있어?"
"응? 설마 몰라? 붉은 사자의 아들인데도?"
"몰라. 어머니에게 물어봐도 안 알려주셨어."
"분명 그럴 거예요. 호크 경은 자기가 이룩한 업적을 남에게 알리는 걸 달갑지 않아 했거든요. 본래
백작의 작위까지 받을 수 있었지만 그 자리는 과분하다며 일부러 남작 작위를 하사받으셨죠."

리나가 대신 설명해줬다. 나는 마리에게서 시선을 떼어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은 전보다 한층 더 부담스러워졌고, 그 옆의 세실리는 호기심이 더욱 강해진 표정이다. 다른


건 몰라도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다.

'대체 현역 시절 때 뭘 하시던 분이지?'

백작의 작위까지 받을 뻔했다고 했으니 네이비 기사단의 기사단장이기라도 하셨나.

참고로 네이비 기사단은 미네르바 제국에서 제일 유명하고, 또 가장 강한 기사단이다. 시골 깡촌에만


지내던 내가 알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지 얼추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호크 경은 네이비 기사단의 단장으로써 셀 수도 없는 업적을 세우셨어요. 편하게 쉬고 싶다는 본인의


의사만 아니었더라면 기사단장의 자리는 몇 십 년간 묵묵히 지켰겠죠."

진짜였네.

"아무튼, 그 호크 경의 아들이니 평소에도 만일에 대비해 힘을 쌓으라고 하셨을 거예요. 그렇죠? 호크


경은 늘 기사단원에게 변수에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라고 하셨거든요."
"...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지만 나에게는 천만다행이다. 훌륭한 아버지를 둔 덕에 리나가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으니.

리나는 내 대답에 듣고 전보다 진한 미소를 짓더니 기대를 담으며 나에게 말했다.

"조금 전에 분명 역사, 신학, 생물을 고려하고 계신다고 하셨죠? 그것 말고는 없나요?"


"아마... 철학이랑 인문학 정도?"
"철학이라... 기대하고 있을게요."
잘 부탁한다는 말이 아니라 기대하겠다는 말. 나는 그 속에 담겨있는 의미를 깨달았다. 앞으로 본인의
기대에 어울리는 활약을 보여주라는 뜻이다.

보아하니 찍혀도 제대로 찍힌 걸로 보인다. 나쁘게 찍힌 것 보다야 낫지만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다.

뭐, 어쩌겠나. 지금은 어떻게든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것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아참. 그러고 보니 아이작 씨?"


"편하게 말 놓으셔도 됩니다."
"알았어. 아이작. 아까 전부터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말씀하세요."
"이거."

리나는 내 손가락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오른손 중지 손가락에 배긴 굳은살, 그러니까 '펜혹' 쪽이었다.

그에 살짝 의문을 가졌을 때 리나가 궁금하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굳은살, 펜을 자주 써야 나는 거 아니야?"

< 9화 >

"...그건 왜 물으시죠?"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온 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이러할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리나에게 되물었다. 그러면서 오른손을 슬며시 감싸는 건 잊지
않았다.

리나는 내가 당황하자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윽고 질문에 대한 대답을 꺼냈다.

"황궁에서 일하는 사관들 대부분 그쪽에 굳은살이 박혀있거든. 아이작도 같은 이유인가 싶어서."

그녀의 말마따나 여기는 아직 타자기도 발명되지 않아 오로지 수기로만 문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러니
서류를 작성하는 사람, 특히 황궁에서 일하는 사관들의 손에는 굳은살이 자연스레 배길 수밖에 없다.

나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재빨리 두뇌를 회전시켰다. 그나마 다행인 건 리나는 내가 책을 쓰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른다. 이에 납득이 갈 수 있겠끔 대답하면 상황을 슬기롭게 넘길 수 있다.

그리하여 고민에 고민을 거친 결과, 간신히 알맞는 대답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공부하다가 생긴 겁니다. 공부하면서 노트에 필기하는 습관이 있거든요. 조금 더 쉽게


기억하려고요."
"흐음... 그래? 하긴 지식을 온전히 습득하려면 그런 습관이 생기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네. 나도 한때
황궁에서 가정 교육을 받으면서 그랬으니까."

다행히 어느정도 통한 모양이다. 비록 내 반응 때문인지 몰라도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지만
들킨 것보다야 훨씬 낫다.

이후로 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쯤, 리나가 아닌 마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너 손 엄청 예쁘다. 한 번 봐도 돼?"


"으응? 내 손?"
"응. 나랑 한 번 비교해보자."
마리가 쫙 편 손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권유했다. 나는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딱히 상관없는
문제였기에 곧바로 받아들였다.

"우와. 너 손 진짜 예쁘다. 나보다 더 예쁜 거 같은데?"

자기 손과 내 손을 비교한 마리가 진심을 담아 감탄했다. 그도 그럴게 펜혹 때문에 그렇지, 손 자체는


매우 예쁜 편이었다.

손가락이 길고 가느다란 건 물론이고, 피부마저 하얗고 맨들맨들해 '섬섬옥수(纖纖玉手)'라는 사자성어가


잘 어울렸다.

나는 마리의 감탄에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머니에게도 칭찬받았던 부분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들으니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혹시 따로 관리라도 하는거야?"


"아니. 그냥 원래부터 이랬어."
"완전 부럽다. 난 걸핏하면 피부가 갈라져서 짜증나는데."

마리가 투덜거렸지만 그녀의 손도 매우 예쁜 편이다. 공작가 영애이니 외모뿐만 아니라 다양한 부분에
신경을 쏟아부었겠지.

분위기가 바뀐 덕분일까, 긴장으로 두근거렸던 심장이 차차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자기 손을 보며


투덜거리는 마리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아, 맞다. 세실리도 한 번 손 보여줄래?"


"네? 저요?"
"응. 마족의 손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세실리는 마리의 기습적인 질문에 붉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가 편하게 반말을 사용했다는 부분은 신경
쓰지 않은 듯했다.

이윽고 세실리는 잠깐 망설였다가 조심스레 손을 보여줬다. 그런데 일국의 공주의 손이라기에는 굳은살이
너무 많았다. 특히 손바닥은 거북이 등껍질마냥 거칠고 갈라져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의 손 상태에 모두가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그녀의 손바닥이


어디서 본 듯한 기분이 들어 자세히 들여다봤다. 가만 보니 아버지, 그리고 형과 누나의 손 상태와
똑같다.

이건 무수한 단련의 흔적이다.

"혹시 검을 쓰세요?"
"아."

내 질문에 리나도 뒤늦게 깨달았다는 탄성을 내질렀다. 세실리는 쑥쓰럽다는 듯이 손을 감싸며 대답했다.

"네. 어릴 때부터 검술을 배웠거든요."


"마족은 마법에 특화돼 있지 않나요?"

내가 마족과 관련된 정보를 모을 당시에는 그렇게 들었다.

마족은 엘프와 더불어 태생적으로 마법에 관해서는 다른 종족보다 월등하다. 인간이 온갖 복잡한 연산을
계산하여 마법을 발현한다면, 마족은 그냥 숨 쉬듯이 마법을 펼친다.
더군다나 마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검은 마나'는 일반적인 마나보다 출력이 몇 배는 강하다. 그래서
일반적인 마법사가 불덩이를 하나 던지면 마족은 아예 메테오를 떨어뜨린다.

"그것도 맞지만 저는 헬리움의 공주다보니 여러가지 무술을 배운 상태에요. 알다시피 '절제'는 우리


마족에게 필수적인 소양이거든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이 말이죠?"

전생에서도 운동선수나 소방관, 특수부대 군인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몸도 그렇고 정신력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좋아하는 걸 못 하고 해야 하는 것만 해야하며 가끔씩 극한의 상황에 몰리니 정신력이 단련될 수밖에 없다.

내가 그 생각을 하며 말을 건내자 세실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니,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뒤이어 세실리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정말 좋은 말이네요. 늘 새겨들어야겠어요."


"...도움이 됐다면 저야 영광입니다."

슬쩍 리나의 눈치를 보니 그녀의 눈빛이 미묘해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애써 무시했다.

그로부터 잠시 후, 리나의 입술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짜악!

강의실 내부에 난데없이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순한 박수였다면 주변 소리에 묻혔겠지만 메아리가
치는 것처럼 울려 퍼져서 모두의 집중을 이끌었다.

이에 나는 물론, 세 사람도 고개를 앞쪽으로 돌렸다. 언제 강의실에 왔는지 모를 노년의 남자가 칠판


앞에 당당히 서 있었다.

인문학 교수였던 비루스가 전체적으로 깐깐한 이미지였다면, 이번에 들어온 교수는 인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거기다 풍성한 수염하며, 길게 기른 백색 머리카락을 보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처럼 생겼다.

"흠. 이제 말할 준비가 되었군. 이제 쉬는 시간은 끝났으니 모두 집중해주게."

새로 들어온 교수는 학생들이 자기한테 집중하자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이며 지시했다. 나는 간달프처럼
생긴 교수를 쳐다보다가 시간표부터 체크했다.

시간표에는 '리프 메그너'라고 적혀있었는데, 마법학 교수이자 제논 일대기를 비난하던 평론가 중 한


명이다.

"내 이름은 리프 메그너, 자네들에게 마법학에 관한 지식을 전수해줄 교수라네. 만나서 반갑네."

메그너 교수가 고저없는 목소리로 자기 이름을 밝히자마자 박수 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나는 박수를
치다가 미리 가져왔던 노트와 마법필을 책상 위로 꺼냈다.

인문학 교수였던 비루스 교수는 딱히 메모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꺼내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를
것 같았다. 애시당초 스타일부터 다를 뿐더러 무려 마법학이다.

판타지하면 자연스레 떠올리는 힘, 마법.


전에도 말했다시피 마법은 고위층만 사용할 수 있는 특권에 가깝다. 하물며 마법과 관련된 지식을 책으로
내도 온통 이해하지 못할 단어들 천지다. 마법사끼리만 알아볼 수 있도록 기록해 놓아서 너무 불친절했다.

"마법에 관심이 많나 봐? 아까는 지금처럼 안 하더니."


"응. 관심 많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옆에서 마리가 의외라는 목소리로 물어도 단칼에 대답했다. 마법! 이 얼마나 멋진 울림인가!

비록 무학처럼 마법을 직접적으로 발현하지는 않겠지만 이론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구인이었던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값진 지식이다.

머지않아 강의실을 가득 채웠던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 메그너 교수가 늙수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내 귀에 조금 거슬리는 말이 있더군. 제논 일대기라고 했나?"


"...음?"

왜 시작하자마자 제논 일대기가 언급되는 거야. 그리 생각할 때였다.

메그너 교수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은 표정을 짓더니 내 눈 밑을 꿈틀거리게 만들만한 발언을 꺼냈다.

"그딴 저급한 소설은 가능하면 내 강의 시간에 언급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난 그런 걸 소설로 인정하기
싫으니까 말이야."
"... ..."

신개념 악플인건가. 아니지. 악플은 신문에서 봤던 거고 저건 그냥 악담이다. 그것도 당사자 앞에서


퍼붓는 악담.

정작 본인은 악담의 주인공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걸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좋지


않음을 넘어서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있겠나. 그냥 꼰대라고 생각해야지. 나는 답답함에 콧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양옆을


번갈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같이 죄다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특히 그중 세실리가 가장 심했는데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사나운 기운을 내뿜는 중이다.

어찌어찌 인내심을 발휘해 갈무리하고 있는 걸로 추정된다만 일반인인 나로서는 조금 무서웠다.

"...세실리?"
"...응?"
"조금 추워지려고 하는데..."
"아...! 미, 미안..."

다행히 리나가 조용히 지적하자 세실리가 다급히 기운을 갈무리하며 곧장 사과했다. 나는 소름이 돋은
팔을 살살 문지르면서 정면을 쳐다봤다.

갑분싸라고 해야 하나. 메그너 교수가 제논 일대기를 대놓고 까내리자 강의실은 쥐 죽은듯이 고요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그너 교수는 쯧쯧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쯧쯧쯧... 그 놈의 불쏘시개가 눈을 낮추게 만들었구만. 안타까워. 정말 안타까워."

그러면 본인이 처음부터 어려운 단어를 쓰지 말던가. 귀족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을 집어넣었으면서
남탓하는 꼴이라니. 어이가 저 멀리 손을 흔들며 가출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메그너 교수는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의를 시작했다. 비루스 교수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였으나 일단은 수업을 듣는 것이 좋을 듯했다.

"우선 미리 알아둬야 할 점이, 마법학을 배운다고 해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아니라네. 그럼 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간단해. 마법학은 마법과 관련된 지식을 배우는 거고, 마법은 말 그대로 마법을
배우는거지."

전생과 비교하자면 마법학은 기계의 역사를 배우고, 마법은 그 기계를 제작하는거다. 마법이
고위층에게만 허락된 힘이어도 이미 생활 속에 녹아들어 있으니 그 역사도 매우 방대할 것이다.

'처음에 쓸데없는 말만 안 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마법학에는 관심이 많다. 그런데 교수가 참 좆같다.

메그너 교수에 대한 비호감은 이미 바닥을 뚫고 맨틀까지 나아간지 오래다. 어떤 사람이라도 자기가


공들여 창작한 작품이 바로 앞에서 비난당하면 빡이 칠테지.

사각- 사각-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면서 마법필로 노트에 기록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노트와 펜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끄적이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렀다.

"그렇다면 질문하기 전에... 거기 빨간머리 학생."


"...네?"

왜 또 나야. 이 놈의 빨간머리 때문인가.

내가 크게 당황하는 동안 메그너 교수가 나를 부른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아까부터 무언가 기록하는 거 같은데, 마법과 관련된 거라면 기록하지 말게나."


"...어째서죠?"
"마법은 본디 예로부터 선택받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힘. 결코 함부로 퍼져나가서는 안 되는 것이네.
설령 그것이 단편적인 지식이라고 해도 말이야."
"아니, 그게 뭔..."

꼰대같은 발상이지? 그럼 이 마법필이랑 숙소에 배치돼 있는 온도 조절 기능은? 냉장고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위의 말들이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저 발언은 비루스 교수의
신념과 정면으로 맞서는 말이다.

어쩐지 마법과 관련된 책이 드물더라니 마법사는 저런 꼰대들밖에 없는 듯했다. 저런 생각을 당연히


여기는 걸 보면 알만하다.

"그럼 교수님은 지식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걸 부정하시는 건가요?"

결국 보다 못한 한 학생이 질문을 날렸다. 나 또한 저 말을 하고 싶었기에 메그너 교수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메그너 교수는 질문을 듣고 풍성한 수염을 쓰다듬더니 예상 밖의 대답을 꺼냈다.

"그건 아닐세. 마법에만 국한된 이야기지, 다른 지식은 상관없다네. 마법은 실로 위험한 힘이니까 말이야.
그런 힘을 숨 쉬듯이 쓰는 종족, 그러니까 마족과 엘프를 보면 알 수 있어. 거기다 마족처럼 가끔
가다가 제어까지 못 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재앙 수준이라네."
"... ..."
"그 불쏘시개에서는 비극적인 숙명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지만 마족은 결국 마족일 뿐이야. 아무리 인간인
척 해도 결국 본질은 바뀌지 않는 법이지."

저거 대놓고 종족차별을 하는 거잖아. 당연하지만 메그너 교수가 저 발언을 꺼내자마자 많은 시선들이


세실리 쪽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혹여 세실리가 분노하지 않을까 걱정됐지만 그녀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이정도는 대충


예상했다는 표정이다.

하기야 아무리 제논 일대기가 마족을 향한 시선을 바꾸었다고한들, 마족을 여전히 불안 요소로 취급하는
사람도 많다. 거기다 메그너 교수는 꼰대에다가 제논 일대기를 부정하는 사람이니 더더욱.

"괜찮아. 세실리. 저 교수가 하는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알았지?"


"...응."

리나가 소근거리며 달래줘도 세실리의 얼굴은 도통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의기소침하게
떨어뜨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 최대한 궁리했다. 강의실에서 쫒겨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메그너 교수에게 엿을


먹이자고. 그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빅엿을 먹이자고 말이다.

때마침 운 좋게도 메그너 교수가 나를 재차 지목했다.

"그럼 쓰잘데기 없는 말은 뒤로 미루고, 거기 빨간머리 학생."


"...네. 교수님."
"학생은 마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뭐긴 뭐야. 존나 신기한 힘이지.

그걸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엿도 못 먹이고 당장 쫒겨나가기만 할테니 대충 대답했다.

"...사람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겠나?"
"음..."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비루스 교수 때도 그렇고 내가 다시 한 번 일어서자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뒤이어 나는 방금 전, 메그너 교수가 했던 발언을 그대로 되돌려줬다.

"마법은 분명히 위험한 힘은 맞지만, 잘 사용한다면 사람의 목숨을 구하거나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줄
수도 있는 힘입니다."
"뭐?"
"...아이작 씨?"

메그너 교수는 내 발표에 인상을 찌푸렸고, 세실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법은 선택받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생활 속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지금


강의실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것도 마법이고,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발급받은 신분증도 마법이
깃들어있습니다. 이처럼 마법은 양날의 검이나 다름없는 힘입니다. 어떤 때에는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에는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뿐더러 생활에 편의를 더해주죠."
"... ..."
"설령 그 힘을 사용하는 주체가 마족이어도 상관없습니다. 당장 우리 인간도 마법을 대량살상무기로
사용하는 마당에 마족이라고 차별하는 건 어불성설이죠. 그러니 교수님이 언급하신 재앙은 마족이 아니라,
마법사 그 자체라고 봐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말을 이으면 이을 수록 메그너 교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솔직히 나 같아도 심기가 불편할 것이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한 것들을 어느 한 풋내기가 모조리 부정한 꼴이니까.

메그너 교수는 화를 가라앉히는 것처럼 한숨을 푹 내쉬더니 착 가라앉은 톤으로 입을 열었다.

"...개소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도 능력이겠지. 하지만 내가 한 질문은 마법의 정의지, 그딴 변론이


아니라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마법의 정의를 말하라는 걸세. 마법의 정의."

그 질문에 나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어려운 단어들로 설명해봤자 더 못 알아들을텐데요?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여기 학생들은 눈이


낮아서요."

하하하하!

내 말에 강의실에는 미약한 웃음꽃이 폈다. 마리는 푸핫! 하며 웃음을 터뜨렸고 리나도 통쾌했는지
조숙하게 웃음을 흘렸다.

다만 세실리만큼은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녀와 눈을 마주친 나는 빙긋 웃어줬다.

내가 웃어주자 아까 전까지 침울해있던 그녀도 작게나마 웃음을 흘렸다.

"후우... 이보게. 학생."

그순간 메그너 교수가 나를 불렀다. 교수가 부름과 동시에 웃음꽃이 폈던 강의실 내부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네. 교수님."
"난 자네같이 불성실한 학생은 필요없어."

이어서 메그너 교수는 화가 단단히 난 얼굴로 내게 선고했다.

"꺼지게."
"...네?"
"원하는 대로 내 친히 눈을 낮춰서 말해주겠네. 나가."

메그너 교수는 강의실 밖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강의실의 분위기가 방금 전보다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는 메그너 교수와 한동안 눈싸움을 하다가 양옆을 둘러봤다. 마리는 눈치를 보고 있었고, 리나는
놀랐다는 표정을, 세실리는 걱정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내는 중이다.

그에 나는 피식 웃으며 안심하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다음 시간에 다시 들어올 거예요."


"뭘 그리 중얼거려? 빨리 나가지 못 해!"

결국 메그너 교수가 화를 참지 못해 고함을 질렀다. 화가 제대로 났는지 메아리가 울려 퍼질 정도로


엄청난 성량이다.
나는 그가 버럭 소리치자마자 다급히 문쪽으로 내려갔다. 문쪽으로 내려가면서 메그너 교수가 나를 보며
집씹듯이 중얼거렸다.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요즘 애들이란..."

네네. 꼰대 말 잘 들었고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빅엿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거.

나는 문 쪽으로 가는 척 하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되돌아갔다. 메그너 교수는 되돌아가는


나를 보자마자 짜증난다는 투로 내게 물었다.

"왜 다시 들어오나?"
"뭘 놓고 가서요."
"그게 뭐지?"

메그너 교수가 묻자마자 그와 똑바로 마주했다. 책상에 앉아있는 학생들이 이쪽을 보고 있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그럼 이제 마지막 빅엿을 먹을 차례다. 이 꼰대 악플러야.

나는 단 한 번도 더듬지 않고 방대한 양의 말들을 줄줄이 입 밖으로 꺼냈다.

"다량의 백지로 구성돼 있으며 거기에 기록을 할 수도 있고 배운 지식을 요약하거나 정리할 수도 있으며,
어떤 때에는 정보를 분석하기 위해 필요하고, 어떤 때에는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제작하기 위해서는
인쇄소의 도움이 필요하며 과거에는 비싼 값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시중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요."
"... ..."

어우. 숨 차다. 역시 영화는 영화인 모양이다. 그래도 말을 더듬지 않고 끝까지 해냈으니 만족스러웠다.

나는 겉으로 최대한 담담한 척 하면서 메그너 교수의 반응을 확인했다. 그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자기가


무엇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대체 뭔데?"

뭐긴 뭐야.

"노트요."

일부로 놔두고 갔던 내 노트지.

하하하!

장황한 설명과 달리 너무나 간단했던 물건의 정체에 강의실에는 다시 한 번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러나
메그너 교수는 굴욕감에 얼굴이 살짝 붉어진 상태였다.

이윽고 메그너 교수는 학생들을 한 번 노려본 뒤에 분노보다는 황당에 가까운 목소리로 나를 질책했다.

"그냥 노트라고 하면 되지 왜 그렇게 설명했나? 나를 시험하는건가?"

아뇨. 엿 먹이려고 하는건데요.

위의 말을 그대로 말할 수 없었지만 비슷한 요지의 대답은 할 수 있었다.


"눈이 높으신 교수님이라면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하하하하!

결국 웃음밭이 된 강의실 내부와 달리, 메그너 교수의 표정은 썩 볼만했다. 나는 망연자실한 메그너
교수를 놔두고 제자리로 돌아가 노트와 펜을 가져갔다.

"너무 무모하지 않아? 그러다 정학을 넘어서 퇴학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노트와 펜을 가져가던 중, 리나가 내 안위를 염려해줬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도 내심 통쾌했는지


미소짓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한 음성으로 대답해줬다.

"그러면 저 교수의 평가가 더 안 좋아질 걸요? 뭐, 지금도 평가가 나락이긴 하겠지만."

이정도 정치질 쯤은 간단하다. 정말로 내가 과도한 징계를 먹게 된다면 메그너 교수의 신상은 보장할 수
없게 된다.

메그너 교수는 많은 학생들이 듣는 앞에서 파란을 몰고 온 제논 일대기를 저급한 소설이라고 폄훼했으며


더 나아가 마족까지 차별했다. 이것만으로도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가능성이 약간이나마 존재한다.

'부모님한테 한 소리 듣겠지만...'

그순간이었다.

"...역시 재미있네."
"네?"
"아냐. 아무것도."

내가 다시 물어도 리나는 빙긋 웃어줄 뿐이었다.

*****

다음 날이 되었다. 내가 강의실 자리에 앉자 백색 머리카락의 미녀, 마리가 내 옆자리에 앉으며 엄청난


소식을 알려줬다.

"야. 그거 들었어?"
"뭐가?"
"메그너 교수 있잖아. 교수직 박탈당한 거."
"뭐? 진짜?"
"응. 제논 일대기를 불쏘시개라고 욕한 것부터가 아웃이었다는데?"
"... ..."

난 새삼 내 작품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다.

'이러다 배드엔딩으로 내면 화형 당하는 건 아니겠지?'

< 10 화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첫 수업은 대부분 오리엔테이션처럼 무엇을 배우는지만 가르쳐줬기에 중간중간
시간도 많이 비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1 주차 마지막 강의였던 '경제학'이 종료되고, 나는 다른 학생들이 밖으로 나가는 동안에도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미친. 고등학교의 단점을 모두 다 퍼부었네.'

여기는 전생의 대학교처럼 3 개월 동안 강의를 듣고, 또 3 개월의 긴 방학을 거쳐 다음 학기로 넘어가는


방식이 아니다. 무려 4~5 개월 동안 수업을 듣고 방학 기간은 고작 두 달 내지 한 달이다.

게다가 전공의 수는 총 18 과목이며 한 과목당 최고 점수는 100 점인데, 여기서 도합 900 점을 넘겨야
유급을 면할 수 있다. 도합 점수가 1200 점 이상이라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한다.

당장 한 과목을 100 점 맞는 것도 어려운데 1200 점이라니, 범인에 불과한 나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다.

'일단 철학이랑, 인문학, 생물학, 역사학, 신학은 필수로 하고... 나머지가 문제네. 문과인줄만
알았는데 수학은 왜 있는 거야?'

내심 툴툴거렸지만 이 세상에서 수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마법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보니 자연스레 수학도 발달됐다.

왜, 옛날 판타지 소설 보면 마법을 연산할 때 수학 공식을 쓰는 경우가 있지 않나. 중고등학교 때 배운


공식을 그대로 담습하여 주인공을 마법 천재로 만드는 클리셰다.

근데 여기서도 유용하게 쓰더라. 대신 소설처럼 학창 시절 때 배운 수학이 아니다. 새로운 마법을


발명하면 그 마법에 관한 수를 논리적으로 써서 좀 더 쉽게 사용하기 위함이다.

'마법이 수학과 물리학이라니. 이 무슨 끔찍한 혼종인가.'

어쩐지 마법과 관련된 책이 더럽게 어렵더라. 수학자나 물리학자나 쓸 법한 단어를 넣어놨으니 문과인
내가 이해할 수 있을리가 만무하다.

더군다나 여기는 '마나'라는 에너지를 불덩이나 얼음덩어리로 구현시키니 수학과 물리학이 미친듯이
진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마법사는 머릿속에 컴퓨터가 떡하니 탑재된 존재라고 보면 편하다.

전생의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수학은 깔끔히 포기했다. 그건 진짜배기 천재들만 배울 수 있는 전공이다.

전생에서 수포자로 지냈던 경험 때문에 한 번 수학을 배워볼까 했지만 첫 수업을 듣자마자 깔끔히 마음을
접었다.

"...작 씨?"
"... ..."
"아이작 씨?"
"응?"

내가 앞으로의 계획을 노트에다 기록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매력적인 미성이 귀를 간지럽혔다.

이에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이름을 부른 사람을 확인했고, 약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가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세실리 님?"
"집중하고 계셨다면 죄송해요. 지금 강의실에 아이작 님밖에 없어서요."
"아."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말처럼 강의실에는 아무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이 놈의 집중력 때문에 사람들이 다 떠나가도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리나 님이랑 마리는요?"


"아이작 씨가 집중하는 거 보고 먼저 가셨어요. 저는 계속 남아있다가 아이작 씨가 도통 나갈 생각을 안
하셔서 부른 거고요."
"하하하..."

나는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마터면 밤까지 강의실에 있을 뻔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시간 낭비를 하지 않게 됐네요."


"아니에요. 아이작 씨는 평소에도 이러시나요?"
"음... 네. 자주 이러는 편이죠."
"장점이긴한데 지금 보면 은근 위험한 것 같기도 하네요."

세실리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살인적인 미소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처음에는 만화 캐릭터 같아서 이질감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점점 익숙해졌다. 익숙해지면 좋은 게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익숙해져서 그녀의 미모가 더욱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내가 시선을 돌린거고.

"아이작 씨는 이 시간 이후로 바쁘시나요?"

내가 뜨거워진 얼굴을 간신히 식히고 있을 때, 세실리가 내게 물었다. 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가까스로


달래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무슨 이유로 저런 질문을 한 건지 모르겠다만 일단 대답은 해야겠지. 숙소로 돌아가서 책을 읽거나


원고를 작성하는 것 빼고는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하다.

"아뇨. 딱히 없어요."
"그럼 이 기회에 서로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게 어때요?"
"... ..."

세실리의 제안에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가 이런 호의를 보이는 건 어색하지 않다. 메그너
교수 사건 이후로 나에게 급격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니.

나는 입을 열기 직전, 이정도는 괜찮다 싶어 장난을 곁들인 대답을 꺼냈다.

"혹시 그거 데이트 신청인가요?"


"당연하죠."
"... ..."

도리어 내가 반격당했다. 나는 생글생글 웃는 세실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굴이 실시간으로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저 얼굴에 저 미소라면 어떤 남자가 와도 못 막는다.

그동안 세실리는 내 반응을 보고 미약한 웃음을 흘리더니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

"아이작 씨? 머리색이랑 얼굴색이 똑같아지셨는데요?"


"...장난이 짖궂으십니다."
"장난은 아이작 씨가 먼저 치셨죠."
"...죄송합니다."
어차피 들킨 거,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상태로 대화를 잇기로 결정했다. 다 들킨 마당에 부끄러움은
사치다.

"...아무튼 간에 딱히 할 일은 없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도 책만 읽을테고."


"그럼 자리부터 옮길까요?"
"생각해둔 곳이 있습니까?"
"간단하게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나는 그녀의 제안을 듣고 시계를 확인했다. 강의가 끝난 시간이 정확히 4 시 반이었는데 지금은 5 시다.

저녁을 먹기에는 약간 이르지만 그렇다고 너무 빠르지도 않은 시간이다. 밤에 배가 고프다면 냉장고에


미리 넣었던 야식을 먹으면 괜찮을 듯했다.

"좋아요. 그런데 전 식당을 잘 모릅니다만..."


"학식을 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알겠습니다."

헤일로 아카데미에는 흔히 맛집이라 불리는 식당이 많지만, 그렇다고 아카데미 측에서 무료로 지원해주는
학식이 맛없는 건 아니다

돈이 궁한 평민을 위한 공간이긴 해도 뷔페 형식이라 다양한 먹거리가 존재한다.

이것도 다 돈을 쏟아부어서 가능한 것이며 타국에 있는 아카데미보다 헤일로 아카데미가 평판이 좋은


이유다. 계급을 막론하고 학생들을 위한 복지가 대단한 수준이다.

그리하여 나는 노트를 한 손에 끼고 펜은 교복 앞주머니에 꽂아넣었다. 세실리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궁금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작 씨는 평소에도 노트랑 만년필을 들고 다니시나요?"


"아뇨. 노트는 강의 때만 준비하는 편입니다."

평소에는 수첩을 들고 다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보나마나 왜 수첩을 항상 갖고 다니는지


물어볼 게 뻔하다.

세실리는 내 앞주머니에 걸린 마법필과 손에 든 노트를 번갈아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나도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그녀에게 질문했다.

"세실리 님은 필기를 안 하세요?"


"전 마족이라 한 번 들은 건 다 웬만해서 기억해요. 당장 10 년 전 새해에 먹은 음식도 기억하는걸요?"
"와..."

장수하는 종족이라 그럴까. 기억력이 장난 아니다.

책에서도 수명이 긴 종족일 수록 기억력이 높다는데 사실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장수의 대표격인 엘프는
얼마나 기억력이 좋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력이 좋다는 건 결코 '장점'이 될 수 없다.

"장점으로 보여도 많이 힘드시겠네요."


"네?"
"안 좋은 것도 다 기억한다는 거잖아요."

망각의 축복이라는 말이 있다. 안 좋은 기억은 되도록 빨리 잊어버려야 좋지만 그게 불가능하면 평생


짊어져야 할 상처가 된다.

세실리는 내가 안쓰럽다는 투로 말하자 멍해진 얼굴이다. 허나 그 표정은 이윽고 진한 미소로 변했다.

"처음부터 생각했지만 아이작 씨는 생각이 깊으시군요. 기억력이 좋다는 건 누구나 장점으로


생각할텐데."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니죠."

전생의 기억이 존재하는 나에게도 트라우마는 있다. 그건 바로 전생의 가족이 예기지 못한 사고로
떠나갔을 때다.

그때의 기억은 정말이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내 옆에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이 예고도 없이


사라지니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가족의 소중함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현생의 내 가족도 좋은 사람들밖에 없어서
매우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속으로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세실리는 신기하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끔씩 아이작 씨랑 대화하다보면 저보다 나이가 더 많은 어르신이랑 얘기하는 것 같아요. 아이작 씨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순간 가슴이 뜨끔거렸지만 태연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이제 17 살 입니다. 세실리 씨는요?"


"105 살이요."
"아, 그러... 네?"

105 살?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세실리를 바라봤다.

그에 세실리는 뭐가 문제라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이내 아, 하며 깨달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족에게 100 살은 인간으로 치면 이제 막 성인기에 진입했다고 보시면 돼요. 100 살까지 악마가 되고
진정 인간으로 살아갔다는 풍습이죠. 물론 인간으로 환산해도 제가 아이작 씨보다 나이가 많지만요."
"아... 그러시구나."

나는 그리 중얼거리면서 그녀의 머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마족이라는 걸 증명해주듯 두 개의


뿔이 솟아나있었다.

간혹 세실리가 마족이라는 걸 잊고 지낸다. 평소 행실을 보면 악마가 아니라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이다.


이렇게 예쁘고 장난기 많은 여자를 누가 악마라고 생각하겠나.

그럼에도 종종 위화감이 생기는 건 그녀에게 이런 생활은 처음이기 때문이겠지.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대충


납득이 간다.

'그럼 이때까지 헬리움에서만 지냈던 건가?'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다. 헬리움에서 거주하는 마족들은 평생을 거기서 산다고 했으니.

애시당초 마족이 다른 나라와 인연을 맺기 위해 바깥으로 나온 경우는 최근 100 년 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세실리가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다고 신문에 대서특필된 거고.

"흐응."
그러는 동안 내 시선이 자기 뿔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걸까.

세실리가 야릇한 비음을 흘리더니 눈매를 예쁘게 접었다. 그리고는 은근하면서도 기대가 담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어때요? 이렇게만 보면 정말로 평범한 인간 같죠?"


"네."
"...응? 그게 끝이에요?"

칼같은 내 대답에 도리어 세실리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반응에 이해할 수 없는 건 오히려
나였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가 그녀에게 역으로 질문했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예요?"


"그... 마족답지 않다던가, 인간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던가..."

말을 꺼내면 꺼낼수록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나는 의아함도 잠시, 마족으로서 그녀가 살아온 길을


떠올렸다.

제논 일대기가 출간되기 전까지는 마족이라고 천대받고, 또 악마라고 멸시받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기억력도 좋으니 안 좋은 기억들은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을 터.

나는 여기서 딱히 더 해줄 말이 생각나지 않아 뒷목을 어루만졌다. 그래도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저도 제논 일대기를 읽었는지라 마족도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거든요. 게다가 마족한테 피해를
입은 적이 없어서 선입견 자체가 없기도 하고요."
"...그래요?"
"네."

뒤이어 세실리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질문을 날렸다.

내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표정에 긴장과 결의가 담겨있는 듯했다.

"그럼 아이작 씨는 마족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음..."
"정말로... 우리가 인간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럴 때는 어떻게 대답해야 될까. 가급적이면 좋게 좋게 말하고 싶으나 때로는 채찍도 필요한 법이다.
본래 기대를 한만큼 실망감도 커지는 법이니.

제논 일대기 덕분에 마족을 인간으로 대우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한들, 결국 태생적인 본질은


제아무리 신이어도 바꿀 수 없는 법이다. 어쩌면 지금 이순간에도 악마화를 한 마족이 날뛰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걸음을 옮기다가 고개를 돌려 세실리를 쳐다봤다. 루비색으로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춰졌다.

하염없이 내 대답만을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저벅-
식당을 코 앞에 두고 세실리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고.

"마족은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차가운 분위기가 우리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 11 화 >

마족(魔族).

악마의 후예이자 상징인 뿔과 붉은 눈, 그리고 검은 마나를 가진 종족.

3000 년 전 악마들이 전 세계를 파멸로 몰아넣었을 시절, 악마들은 본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종족을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악행을 저질렀다.

살인과 강간은 물론이고, 인체 실험과 더불어 갖가지 끔찍한 행동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그리고 악마의 씨를 받아들여 임신을 하게 되거나, 인체 실험을 통해 받아들인 마나로 통해 돌연변이로


변하거나 등등. 이러한 끔찍한 경위로 '마족'이 탄생했으며 독특하게도 오로지 인간만이 마족으로 변했다.

엘프도 아니고, 드워프도 아니고, 수인도 아닌 인간에게만 영향을 끼쳤는지 수많은 의견이 오고 갔으나
가장 유력한 가설은 바로 '인간'의 특이성이다.

인간은 타종족보다 수명이 짧고, 태생적으로 신체 능력이 좋지 않은 대신 어마어마한 '습득력'을 갖게


되었는데, 그 습득력이 안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하물며 인간은 여타 종족보다 '명(明)'과
'암(暗)'이 너무나 뚜렷한 존재였기에 악마의 씨앗을 더욱 짙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언젠가 악마로 변하게 될 존재들.]


[인간인 척하지만 악마의 피가 흐른다.]
[반드시 척결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을 포함한 다른 종족들은 마족을 피해자 즉,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악마'로 단정지었다.
실제로 이성을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격노하거나 욕망을 절제하는데 실패하면 악마가 되어버리니 그들을
배척하는 건 실로 간단했다.

심지어 신성교국 '세이비어'는 악마의 씨앗을 모조리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마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전대미문의 사건까지 일으켰다. 세이비어 입장에서도 악마는 신을 부정하다 못해 끌어내리려고 시도한
자들이니 강경파와 온건파를 나누지 않고 합심하여 나섰다.

이 광기에 찬 대사건 이후로 마족은 두 세력으로 분열됐다.

하나는 진짜로 '악마'가 되어 세상에 복수를 원하는 자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절제를 추구해 '인간'으로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악마가 된 세력은 머지않아 전부 척결되어 세상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세력, 그러니까 '절제'를 추구해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마족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세이비어를 포함한 다른 강대국이 서로 간의 이념 차이로 전쟁을 벌이는 동안 절제를 추구하는 마족들은


기회를 틈타 헬리움을 건국했다. 당연히 헬리움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대부분이었으나 절제를 추구하여
힘을 갈고 닦은 그들은 실로 막강했다.

얼마나 강하면 그들을 침공하는 순간 다른 나라에게 타격을 입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차차 기회를 틈타 정리하자는 말이 나왔다.
그 말이 나오고 무려 1000 년이 훌쩍 넘겨버린 게 웃긴 점이었지만.

허나 그 시간 속에서 마족을 향한 차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을 싫어하는 종족은 인간만이


아니었으니까.

이대로라면 마족의 염원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어느 한 책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

헬리움의 공주이자 마왕의 딸로 태어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우리 마족은 다른 종족들에게 차별을 받는 것일까? 겉보기에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우리가


어째서 이토록 각팍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 걸까?

무엇보다 다른 종족도 아니고 어째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대부분의 마족은 헬리움에서 태어나고, 또 대부분 헬리움에서 생을 마감한다.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밖으로 나간 마족은 대게 좋지 못한 비극을 겪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거나 반대로 소중한 사람에게 배신당해 악마화가 되는 건 기본이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차별을 겪어 다시 헬리움으로 돌아온다.

그중 최악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악마로 취급받아 살해당하는 경우다. 헬리움 밖은 단지 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아빠. 아빠."
"응? 왜 부르니?"
"우리는 왜 인간처럼 살아야 해요?"

내가 20 살이 되던 해.

나는 헬리움의 왕, 그러니까 아빠에게 물었다. 우리가 꼭 인간처럼 살 필요가 있냐고.

아빠는 내 물음에 순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쓴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단단하면서
투박한 손으로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셨다.

"세실리. 우리 마족이 어떤 경위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알고 있니?"


"악마가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저질러 지금의 마족이 탄생한 걸로 알아요. 그중 인간만이 마족이
되었구요."
"그래. 본디 우리의 조상은 인간이었지. 지금도 다른 종족들보다는 인간에 가깝고 말이야. 그러니
인간답게 살아야 우리도 한 명의 사람으로 대우받을 수 있을 거란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가 꼭 인간처럼 살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마족으로 살면 되지 않아요?"

내 의문에 찬 질문에 아빠는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뒤이어 무릎을 살짝 굽혀 내 눈높이와 맞추었다.

마족이라는 걸 알려주듯, 피처럼 붉은 눈동자 속에 내 얼굴이 거울처럼 비춰졌다. 아빠는 한동안 나와


얼굴을 마주하더니 내 어깨를 살포시 붙잡으며 이해하지 못할 대답을 입 밖으로 꺼내셨다.

"그게 우리 마족이란다. 세실리."


"... ..."
"지금은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 아빠의 말을 이해할 날이 올 거란다. 그 깨달음은 분명 너의 '인생'에 큰
도움을 줄테니 절대 잊지 말고 새겨들으렴. 알겠지?"
"...알겠어요."

아빠의 말은 그로부터 80 년이 흘러도 깨달을 수 없었다. 앞으로도 쭉 그럴 거라 생각했다.

마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 책에 담겨있는 교훈이야말로 아빠가 언급했던


깨달음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아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세실리. 그 책은 분명 우리 마족의 비극을 드러내고, 또 우리의 삶은 바꿔준 건 맞아. 하지만 내가


말하는 마족의 정체성은 아니란다."

그럼 도대체 뭘까. 아빠는 우리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걸까.

나는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도 그 의문을 가슴에 품었다. 부디 처음으로 디딘 인간 사회에서 답을


찾을 수 있기를 빌었다.

그러할지언데...

"아뇨."

어째서 마족도 아닌 당신이.

"마족은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감히 그런 말을 내뱉는 걸까.

나는 식당으로 향하던 걸음을 우뚝 멈추고 눈 앞의 인간 남자를 쳐다봤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인간을.

얼굴은 선이 얇아 잘생겼다기보다는 예쁘장하다는 말이 어울리고, 몸매 또한 호리호리해서 중성적인


이미지를 물씬 풍기는 남자다. 여학생이 남장을 했다면 곧이곧대로 믿을만큼 예쁜 수준.

'...왜?'

약을 삼킨 것처럼 입 안이 쓰다. 그러나 가장 먼저 의문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메그너 교수 사건 때부터 관심을 가졌던 인간이다. 마족이 위험한 게 아니라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 자체가
위험하다고 반박한 남자.

때마침 처음으로 사귀었던 인간이자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 리나도 그에게 깊은 관심을 보여서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하지만 둘이서 이야기 할 기회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된 건데, 그는 상당히 배려가 깊은 인간이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그가 말 한 마디 한 마디 꺼낼 때마다 뇌리에 맴돌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아이작 씨."
"네. 세실리 님."
"아이작 씨의 대답에는 모순이 있다는 거. 아시나요?"

붉은머리의 남자, 그러니까 아이작은 조금 전만 해도 이리 말했다. 내가 인간처럼 보인다고. 전혀 악마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다.
헌데 마족은 인간이 될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실로 모순적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느라 골몰하고 있을 때, 아이작이 눈을 몇 번 깜빡였다가 입을


열었다.

"세실리 님."
"말씀하세요."
"세실리 님은 인간이 인간처럼 되고 싶다는 말을 한 걸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네?"

저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일까.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작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잠자코 새겨 듣는 것이 좋다. 그의 말은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것들이 많았으니까.

아이작은 내가 고개를 젓자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마 들어본 적이 없으실 거고, 앞으로 영원히 듣지 못 할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인간이니까요. 마족은 마족으로 태어났으니 마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럼 다시 묻겠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마족 답게 산다는 게 대체 뭐죠? 우리는 인간처럼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어요. 앞으로 그럴테고요."

제논 일대기에서 스스로를 희생한 사크란처럼, 대부분의 마족은 인간으로 살아가길 갈망한다. 평범한
인간처럼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고, 즐거워하고 싶었다.

그것이 절제를 추구하는 마족의 염원이며, 숭고하디 숭고한 운명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리 생각했다.

1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만 했지, 실천에는 옮기지 못 했으나 제논 일대기 덕분에 기회를 붙잡았다.
그 기회를 절대 걷어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런 내 마음도 모르는지, 세상 태평한 태도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마족입니다. 헬리움의 공주님."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뭔데요? 당신 말, 하나같이 전부 모순투성이야."

이제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한다. 이 사람이 나를 놀리는 건가 싶었다.

메그너 교수를 물 먹였던 그의 입담이 왜 여기서 발휘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단지 속이 답답해


터질 지경이다.

나는 한동안 아이작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입은 도통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더 이상 참지 못해 등을 돌리기 직전이었다.

"가장 밝은 빛이 될 수도 있지만, 가장 추악한 어둠이 될 수도 있는 존재."


"...네?"

무겁게 닫혀있던 그의 입이 열리며, 쉬이 넘길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어안이 벙벙해졌을 때 즈음, 아이작의 입이 다시 한 번 열렸다.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인간이 되길 위해 간절히 소망하는,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종족."


"... ..."
아. 그렇구나.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마족이며, 마족이 '사람'답게 사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세실리 님."

아빠가 하던 말이 이런 거였구나.

마족은 스스로도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인간이 되길 간절히 염원한다.

그러니 악마가 되지 않는 이상 마족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울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본래부터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스스로 인간이 되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없을테니까.

마족은 정말로 악마가 될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누구보다 인간적인 종족이 될 수 있다.

내가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아이작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예의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비단 마족 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도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모를 겁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건


결국 같은 사람이니까요. 방금 말은 전적으로 제 의견이라는 것만 알아주세요."
"... ..."
"세실리 님?"
"네? 아, 네네. 잘 들었어요. 고마워요."

아이작의 부름에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내가 정신을 차리자 빙긋 웃어줬다. 나는 그의 미소를 멍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 미소는 정말이지, 푸른 하늘의 태양처럼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또한 그 어떤 보석들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손으로 잡아 채 고이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그럼 이제 밥 먹으러 갈까요?"

그의 물음에 나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아닌, 진심이 우러러 나오는 미소로 대답했다.

"알았어. 어서 가자."
"응? 갑자기 말을..."
"신경 꺼. 어차피 나이는 내가 더 많잖아? 리나도 반말하는데 상관없잖아?"
"어...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 날따라 저녁 식사가 더 맛있게 느껴진 건 결코 착각이 아닐 것이다.

******

세실리와의 단란한 저녁 식사 이후, 나는 별일없이 곧바로 숙소로 돌아갔다. 세실리가 잠깐 따로


생각해야 할 게 있다며 먼저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세실리에게 했던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최근에


들은 건데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 후로 숙소에 복귀하고 퇴고를 위해 원고를 확인할 때였다.

"이런 씹..."
원고를 확인하자마자 육성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인상이 와락 찌푸려지는 건 덤이다.

왜냐하면...

"이거 내가 한 말이었구나."

세실리에게 했던 조언이 내 원고에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 12 화 >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갖게 된 주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중세 시대를 표방하고


있으나 일주일이라는 개념 자체는 전생에서도 고대의 시절부터 이행해왔다.

"으음~ 잘잤다."

오랜만에 늦잠까지 자니 몸도 정신도 개운하다. 뒤이어 기지개를 펴면서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8 시


반밖에 되지 않았다. 나름 늦잠을 잤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오늘은 마음 편히 쉬면 끝이다. 어제 원고를 검수하지 않았다면 큰일날 뻔해서 부랴부랴 퇴고를
거쳤다.

'진짜 하마터면 위험했지."

나는 침대에서 빈둥빈둥거리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책상 쪽으로 바라보니 어제 저녁부터 밤까지 퇴고를


하느라 고생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내가 어제 식당 앞에서 세실리에게 해줬던 말은 모두 원고에 적어놓았던 것들이다. 제논이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두 번째 주인공, 진을 위로하기 위해 건낸 말.

그 상황을 통해 진이 내면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하니 상당히 중요한 장면이다. 헌데 하필이면


그 말을 그대로 세실리에게 해버렸다는 게 문제랄까.

결국 약간 수정하는 걸로 대체했으나 뉘앙스는 비슷해서 약간 거슬렸다. 마족의 놀라운 기억력으로는 내가


한 말을 모두 기억할테니 어쩌면 수상함을 눈치챌 수도 있다.

'그때는 뭐...'

우연이라고 적당히 얼버무려야지.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경험 많은 현자로 추정하고 있다. 나처럼 20 대도 되지 않은 새파란 청소년이 아니라.

나는 배를 긁적였다가 아침 식사를 어떻게 해결할지 궁리했다. 주중에는 학식이 지원되지만 주말은 따로


식당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래도 학생에게는 혜택이 주어져서 가격은 싼 편이다.

'그런데 운동은 어디서 하지?'

집에 있을 때는 아침마다 가볍게 운동을 하는 편이었다. 아버지가 매일매일 책상에 앉아있으면 허리도


굽어지고 몸도 뻣뻣해지니 운동을 장려했다.

나 또한 건강을 챙길 겸 겸사겸사 아버지를 따라 열심히 운동했다. 조깅은 기본이고, 굳은 몸을 풀기


위해 다양한 스트레칭을 병행했다.

그 덕분인지 몸의 어딘가 불편하다거나 아픈 곳은 거의 없었다.


가끔씩 일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눈이 건조해져 시력이 하락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러고 보니 여기 연무장이 넓어 보이긴 하던데...'

시간이 날 때마다 아카데미 곳곳을 돌아다닌 결과, 공용 연무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기사와 마법사를 교육하는 무학이 있는 마당에 연무장이 없는 게 더 이상한 수준이다.

다만 직접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굳이 들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으니까.

'아침은 운동 끝나고 대충 테이크 아웃으로 먹어야지.'

헤일로 아카데미에는 테이크 아웃이 가능한 식당이 몇 군데 존재한다. 식사를 할 시간조차 낭비라
생각하는 학생들을 위해서다.

또한 무학생보다는 문학생들이 테이크 아웃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무학생은 몸이 중요하기 때문에 균형


잡힌 식사를 꼬박꼬박하는 편이지만 문학생들은 아니니까.

중세 시대에 웬 테이크 아웃이냐고 할 수 있는데, 의외로 이 세상은 요식업이 잘 발달한 상태다. 다양한
향신료가 존재할 뿐더러 무역도 매우 활발하다.

약간 과장을 보태서 음식만큼은 전생과 큰 차이가 없었으며, 길거리에서 파는 간식거리도 있다.

'콜라 같은 탄산 음료는 없지만.'

그것까지 있었다면 화학이나 기계공학도 같이 발달했겠지. 마법으로 탄산음료를 제작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나는 간편하게 운동을 끝내고 샌드위치나 먹어야겠다 생각하며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었다. 샤워는 운동을
갔다 와서 할 예정이지만 세수만큼은 생략하지 않았다. 이건 기본이니까.

"어디 보자... 내가 분명 사복을 여기에다가... 아, 있다."

집에서 갖고 온 옷은 몇 벌 없었으나 운동할 때마다 입는 옷은 갖고 왔다. 손재주의 대표격인 드워프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옷의 종류가 전생만큼 다양한 편이다. 트레이닝복은 고사하고 레깅스까지 있으니 말
다했지.

하지만 산업혁명의 상징이자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공장'이 없기에 종사자들이 한땀 한땀


열심히 제작해야 한다. 그러므로 트레이닝복이나 레깅스처럼 특수한 재질로 제작한 옷은 더럽게 비싸다.

내가 귀족이어서 망정이지, 평민이었다면 손을 벌벌 떨면서 구매했을 것이다.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기묘한 세계네.'

마나와 마법이 있고, 인간 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까지 있으니 이런 결과를 낳은 듯하다.

이런 미묘한 불균형 때문에 기계공학의 발달이 늦어지는 게 아닐까. 이들은 불편한 걸 마법으로 충당하면
그만이니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럼 냉장고나 에어컨 비슷한 온도 조절 장치는 뭐냐고 물을 수 있는데, 나도 모르겠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지 마법사가 아니다.

대충 듣자하니 마법사 쪽에서도 전투와 지원을 분류한다던데 지원 쪽 마법사는 전생의 공학자와 비슷한
걸로 보인다.
'하긴 세탁기나 증기 기관차 같은 건 기계공학이 더 중요하니까. 마법도 한계가 있겠지.'

나는 내 머리색과 비슷한 빨간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니 상쾌한 아침 공기가
나를 맞이해줬다. 정말로 가볍게 운동하기 딱 좋은 날씨다.

'일단 연무장부터...'

식당은 미리 생각해 둔 곳이 있으니 나중에 찾아가면 그만이다. 맛이 좋은데다가 가격도 싸서 나에게


안성맞춤이다.

'역시 주말이네.'

나는 공용 연무장으로 걸어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말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교복보다는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야. 저거 맛있어 보이는데 갈까?"


"가자. 가자."
"샐리 님! 같이 가요!"
"빨리 따라와, 케이! 이거 엄청 재미있어보여!"

귀족은 누가 봐도 공들여 제작한 티가 나는 옷을, 평민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옷을 입고 있다.

가끔씩 나처럼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는데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열심히 뛰는 중이다. 행인들도
그 사람을 한 번 보기만 하지, 그 이흐부터는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헤일로 아카데미 내에서는 익숙한 풍경인 듯했다. 다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즐기기에 바빴다.

'대학교 번화가랑 비슷하구나.'

주중에는 강의가 끝나면 도서관을 방문하거나 숙소로 직행한 것도 있지만 오가는 사람의 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주말이 되니 사람도 북적북적하고 활기로 넘쳐갔다.

거기다 평소 잘 보지 못 했던 종족들도 드문드문 보였는데, 미의 화신이라 일컫는 엘프는 물론이고 드워프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수인만큼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마족은 뭐...'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마족은 세실리밖에 없으니 당연히 없을 것이다. 수인이 없는 이유는 현재
인간과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일 일 것이다. 왜 좋지 않냐면 역사를 뒤져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며 하염없이 걷고 있을 즈음, 머지않아 내가 원하던 공용 연무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공용 연무장 입구 앞에.

"...진짜 크긴 크다."

말 그대로 '공용' 시설이라 그런지 축구장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대강당도 큰
편이었는데 공용 연무장은 그것보다 훨씬 큰 수준이다.

건물 형식은 전체적으로 콜로세움과 유사했으며 방어 마법을 떡칠했다고 입학식 때 설명했으니 아마


튼튼함으로 따지자면 최상위일 것이다.

"어라? 아이작?"
"응?"
내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공용 연무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에
나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누나?"

긴 남색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고 남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미녀이자 내 친누나, 니콜이 서 있었다.

그녀는 나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팔짱을 끼더니 의문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여기는 웬일이야? 설마 운동하려고?"


"아, 응. 간단하게 운동하려고 왔어."
"음..."

니콜은 내 대답을 듣고 공용 연무장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될 걸?"
"엥? 어째서?"
"저긴 연무장이잖아. 무술을 펼치는 장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몸을 풀기 위해 적합한 곳은 절대
아니야. '단련'이라면 모를까."
"간단한 운동도 못 하는 거야?"
"가능하기는 한데..."

그녀는 설명하기 난감하다는 듯, 턱을 긁적거리며 공용 연무장을 바라보더니 애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랄까... 워낙 이상한 녀석들이 많아서. 남 괴롭히는 걸 즐기는 녀석들도 있거든."


"어떤 식으로? 갑자기 장갑을 던지면서 대련하자거나..."
"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거니?"

내 물음에 니콜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대신 니콜이 언제적 이야기냐고 반문하는 걸 보면 그런 문화 자체는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런 건 없고, 애들이 장난을 좀 짓궂게 친다고 생각하면 편해. 특히 신입생한테 그러는
편이고."
"혹시 무학생 말고 문학생들도 찾아와?"
"응. 평민은 몰라도 귀족은 꽤 많이 찾아와. 보통 자기 가문에서 기본적인 무술은 배우고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네가 특이 케이스인 거야."

니콜의 설명처럼 나는 기초적인 무술조차 거의 모른다. 정확히 따지자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또한 마나를 컨트롤해서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까지는 가능하나 그게 끝이다. 전생에서도 몸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 판타지 세상에 환생했다고 다를 건 없었다.

집중력 하나는 아버지도 놀랄만큼 상승했지만 체력이 받쳐주질 못 하니 말짱도루묵이었다.

"그래도 한 번 들어갈래. 누나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해졌어."


"에휴. 말하지 말 걸 그랬나? 괜히 말했네."

니콜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더니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말했다.

"알겠어. 경험 삼아 오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대신 안으로 들어서면 널 도와주기는 힘들거야."


"왜?"
"학생들이랑 대련해야 하거든. 누나가 조교인 거 잊었어?"
"아. 그렇지 참."

무학에서 조교를 맡는다는 건 뛰어난 실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니콜은 현재 데이브와 함께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조교로 활동 중이다.

만약 무슨 역할을 하는지 감을 못 잡겠다면 대충 무술 사범이라고 보면 편하다. 체력이 소진되어도 학생이


대련을 원하면 꿋꿋이 나서야하므로 육체적으로 꽤 고된 일이다.

나는 그녀의 경고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불현듯 생각난 게 있어 입을 열었다.

"그럼 대련하는 거 구경해도 되는거야?"


"구경 정도는 괜찮아. 책에 쓰려고?"
"응."
"알았어. 그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나는 니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공용 연무장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내 기대와 달리


구조는 의외로 매우 간단했다.

성별에 따라 라커룸과 샤워실이 나뉘어져 있었으며, 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훈련용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병장기가 배치돼 있었다. 호기심에 검 하나를 빼니 역시 훈련용이라 날은 세워져 있지 않았다.

내가 훈련용 철검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을 때, 갈림길 앞에서 멈춘 니콜이 나에게 물었다.

"어디부터 볼래? 대련장 아니면 운동장?"


"응? 운동하는 곳이 따로 있어?"
"당연하지. 운동하는데 옆에서 대련을 해봐. 제대로 될 리가 있겠어? 위험하기도 하고."
"그럼 운동장부터 갈래."

공용 연무장에 온 이유도 운동을 하기 위함이다. 니콜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아참. 미리 말하는데, 보고나서 위축되지 마. 알겠지?"


"알겠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니콜이 저런 말을 하는 걸까.

"후우...! 후우...!"
"이야! 잘 한다! 잘 한다! 더 빨리 끌어!"
"마이크! 너 이거 지면 나한테 큰일날 줄 알아!"

그렇게 생각하던 시기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나는 운동장에 입장하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벌어진 턱을 다물 수 없었다. 정말로 내가 보고


있는 게 현실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우선 상황 설명을 하자면 각각 두 남자가 허리에 줄을 묶고 쇳덩어리를 질질 끌고 가는 중이었는데,


크기가 어찌나 큰지 거의 집채만하다. 그런 쇳덩어리를 고작 사람 한 명이 끌고 가는 중이다.

"이거 말고 더 큰 거 들고 올까?"
"이정도면 충분해. 시작한다."
"... ..."

하지만 다른 쪽도 만만치 않았다. 팔굽혀펴기를 하는데 등 위에다가 무쇠덩어리를 얹는 사람은 양반이고,


턱걸이로 예술 행위를 펼치는 사람도 널려있었다.
공통점이라면 남녀노소, 그리고 종족 구분할 것 없이 육체미를 온전히 드러내는 복장이라는 걸까. 남자는
대부분 옷통을 깐 상태고 여자들은 전부 민소매다.

덕분에 눈이 즐겁긴 하다만 그것보다 정말로 저들이 사람이 맞긴 한 건가라는 의심부터 들었다.

내가 입을 벌리며 경악하고 있는 사이, 니콜이 한 쪽 입꼬리를 쭈욱 올리며 내게 물었다.

"어때? 대단하지?"
"... ..."
"여기서 운동할 생각이 있다면 말리진 않을게."
"...아냐. 그냥 밖에서 뛸게."

차마 저 괴수들 사이에 낄 용기가 나질 않았다. 니콜은 괜찮다는 듯이 내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럼 누나가 대련하는 모습 1 시간 정도 보고 운동하러 가. 알겠지?"


"응."

결국 운동장에서 발걸음을 돌려 대련장으로 향했다. 그나마 대련은 마음편히 볼 수 있을테니 안심이 된다.

'다음부터는 수첩이랑 마법필도 들고 와야겠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건 천지차이다. 더군다나 다소 빈약했던 제논 일대기의


전투씬에도 큰 도움을 줄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아쉬운대로 머리로 기억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걸 기회로 삼아 매주마다 오면 좋을 듯했다. 때마침
누나도 조교이니 눈치 볼 필요도 없다.

'그나저나 통로가 꽤 기네.'

안전을 위해서인지 대련장으로 향하는 통로는 상당히 길었다. 또한 출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 수록 쇠와
쇠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는데 이미 한바탕 대련이 진행 중인 모양이다.

이윽고 나와 니콜이 출구에 다다랐을 때 즈음이었다.

후웅!

느닷없이 어떤 한 물체가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 내가 그 소리를 인지했을 쯤이었다.

텁!

바람을 가르며 세차게 날아오던 물체는 머지않아 내 눈앞에서 멈추었다. 내가 손을 올리기도 전에 니콜이
잽싸게 막아준 것이다.

나는 무슨 일인지 몰라 눈을 깜뻑거렸다가 니콜이 막아준 물체가 무엇인지 확인했다.

그냥 단순한 공이었다. 말랑말랑할 것 같이 생긴 공. 그런데도 상당히 빨리 날아와 내가 잡기도 전에


니콜이 먼저 잡아챘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눈을 깜빡이며 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슬쩍 니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


반응이 좀 느린 것일 수도 있지만 니콜도 대단한 반응 속도였다.

"...이 새끼가 진짜... 이런 거 하지 말래도...!"

그러거나 말거나 니콜의 인상이 구겨질대로 구겨진 상태였다.


동생으로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며, 또 처음 들어보는 욕설이었다. 그리고...

"아~ 미안. 미안. 내가 던진 공이 그쪽으로 날아가버렸네."

출구 밖으로 허스키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13 화 >

"그러니까 네 말은..."
"... ..."
"내 동생이 무학 신입생인줄 알고 공을 던진거다? 어차피 내가 옆에 있으니 막아줄거라 생각했고?"
"...응."

화를 억누르는 듯한 니콜의 물음에 여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참고로 여자는 니콜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중이다.

나 또한 니콜의 옆에 서서 그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니 드넓은 연무장 외곽에


있어서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끔씩 누군가 지나가도 한 번 보기만 하고 자기 할 일을
하러 떠났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신경 쓰기 보다는 저기 멀리서 대련 중인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걸로 보인다.

내가 그리 생각하는 동안 니콜이 무릎을 꿇은 여자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해?! 어?!"


"... ..."
"아무리 장난이어도 내가 그딴 장난은 함부로 치지 말랬잖아! 내 말이 말 같지 않지?!"

니콜이 버럭 호통치자 무릎꿇은 여자가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여태까지 니콜의 상냥한 면모만 보았던
나로서는 상당히 의외의 반응이다.

하기야 굳이 니콜이 아니라 그 어떤 형제자매라도 화를 내긴 할 것이다. 하마터면 소중하게 키웠던


막내동생이 크게 다칠 뻔했으니까.

평소 언성을 높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그녀였기에 지금 이 상황이 신선했을 뿐이다.

"대답을 해, 아델리아. 내 말 틀려?"


"미, 미안..."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사죄한 여자. 하지만 니콜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콧김을 길게
내쉬었다.

"나한테 사과할 게 아니라 우리 아이작한테 사과해. 다음부터 그딴 장난질하면 교수님에게 정식으로


항의할테니까 주의하고. 알겠어?"
"응..."
"자. 그럼 이제 사과해."

니콜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나는 그녀가 얼굴이 드러나자 물끄러미 쳐다봤다.

목부근까지 단발로 깔끔히 자른 연갈색 머리카락과 오똑한 콧대, 그리고 긴 속눈썹이 인상적이었다.
전반적으로 보이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녀다.

내가 하늘색에 가까운 그녀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을 때, 그녀 또한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 예쁜..."

저 입이 문제인가. 여자의 입에서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오자 니콜의 기세가 한층 더 무서워졌다. 저건


솔직히 한 대 맞아도 할 말이 없다.

여자도 니콜이 위험한 기운을 풍기자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다급히 사죄을 말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장난이 지나쳤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장난은 절대 안 치겠습니다."

보이시한 외모처럼 목소리톤도 허스키한 것이 꽤나 잘 어울렸다. 아까 그 경박한 말투는 니콜에게 장난을


칠 때만 나오는 모양이다.

나는 그녀가 머리까지 숙이며 사죄하자 살짝 얼떨떨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아, 네. 괜찮아요. 그나저나 아델리아 씨라고 하셨나요?"


"네. 아델리아 크로스라고 합니다."

귀족에게만 하사받는 미들네임이 없는 걸 보면 아델리아는 평민이다. 미모만 보고 귀족인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살짝 놀라웠다.

'그런데 장난이랍시고 나한테 공을 던졌다라...'

이러면 둘 중 하나다. 니콜과 계급을 넘어선 절친이거나 생각이 없는 것이거나. 다만 니콜에게 반말을
하는 걸 보면 전자로 추정된다.

나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아델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가지 질문을 날렸다.

"혹시 우리 누나랑 친구에요?"


"어..."

아델리아가 대답을 하려다 말고 니콜의 눈치를 봤다. 니콜은 여전히 화가 난 얼굴이었으나 턱을 까닥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에 아델리아는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네. 친구에요. 입학할 때부터 지금까지 쭉 같이 지내고 있죠."


"그럼 그냥 반말하세요. 우리 누나 친군데."
"정말? 그래도 되지?"

그렇다고 바로 반말을 해버리네. 나는 아델리아가 활짝 웃으며 묻자 내심 어이없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델리아는 이제서야 살겠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더니 말을 속사포로 꺼내기 시작했다.

"정말로, 정말 정말 미안해. 내가 진짜 다시 한 번 사과할게. 난 니콜이 누구를 데려왔나 싶어서 그랬던


거거든. 그런데 동생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아까도 말했지만 전 괜찮아요. 이미 지나간 일인데다가 어차피 아델리아 씨도 누나가 충분히 막을거라
예상하고 던진거잖아요? 단검을 안 던진 게 어디에요."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하지. 니콜이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던졌으면 난 그대로 퇴학감이었다고."
"잘 아는 년이 그딴 장난질을 하냐?"

니콜이 사나운 목소리로 압박하자 아델리아도 마땅한 변명을 하지 못 했다. 단지 민망한 웃음을 흘리며
쩔쩔거리다가 미안함에 고개를 숙일 뿐.
니콜도 아델리아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 같자 한숨을 푹 내쉬며 마지못해 용서해줬다.

"후우. 아까부터 말했지만 지금부터라도 그런 장난은 하지 마. 한 두 번이면 모를까, 연무장에 올 때마다


이러니 나도 슬슬 짜증나거든."
"미안..."
"누나. 원래부터 자주 이랬어?"
"내가 연무장에 올 때마다 항상 이랬어."

어쩐지 반응이 빠르더라니. 아델리아의 전과가 한 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연무장에 올 때마다 이런 장난을 해대니 니콜도 어지간히 짜증났을 거다. 게다가 오늘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동생인 내가 위험할 뻔했으니 더더욱.

나는 머리를 헤집는 니콜을 쳐다보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연무장 입구 쪽을 쳐다봤다. 입구는


기다란 통로 같은 형식이라 내부는 어두컴컴했는데, 빛이 있다고하나 인영 정도만 간신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델리아는 그 어둠 속에서 니콜이 오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비록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오고


있다고한들 그것만으로 확신은 서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아델리아 씨."
"응? 나 불렀어?"
"아델리아 씨도 안구에 마나를 부여할 수 있어요?"
"당연하지. 이래보여도 실력 하나만큼은 뛰어나다고."

자부심이 한가득 담겨있는 대답이었다. 확실히 누나를 따라 조교를 하는 걸 보면 실력은 이미 입증된


셈이다.

안구에 마나를 주입하는 능력이 실력과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다면, 우리의 눈이 얼마나 예민한 부위인지
생각하면 된다.

안구에 마나를 주입하여 어둠 속에서도 물체를 똑바로 체크할 수 있다는 건 마나 컨트롤에 있어서
뛰어나다는 걸 반증한다.

제논 일대기를 처음 집필할 때 아버지의 자문을 받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아버지도


즐거워하면서 이밖에 이런 저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그것 외에는 전생의 기억을 빌려 내가
따로 창작했다.

나는 기운을 되찾은 듯한 아델리아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체온을 구분하는 것도 돼요?"


"뭐? 내가 그걸 어떻게 해? 그건 최소 기사단장 정도가 되어야 쓸 수 있는 기술이라고."

아델리아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버지는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쓸 수 있다고 하셨는데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기준이었던 모양이다.

"니콜의 남동생이라 했지? 노파심에 말하는 건데 너희 아버지랑 다른 사람이랑 비교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마. 칼질 하나로 지도를 바꾸는 사람인데 비교가 되겠어?"
"아버지가 그정도야?"

아버지가 굉장한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가 사실이냐는 표정으로


니콜에게 묻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너도 알잖아. 언제 우리 아빠가 자기 입으로 뭘 말한 적이 있었니?"
"없었지. 그런데 왜 그러신데?"
"그 업적이 남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희생한 기사단원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하시더라. 아이작 넌
모르겠지만 네가 태어나기 전만 해도 술이 없으면 밤에 못 주무셨어."

증상을 보아하니 전형적으로 PTSD 를 호소하는 군인이다.

하물며 아버지는 무려 기사단장, 그것도 네이비 기사단 소속이었으니 실전 경험이 남들보다 배는 많았을
것이리라. 네이비 기사단은 미네르바 제국 최강의 기사단인만큼 다양한 임무를 부여받는다고 들었으니까.

그중에서는 악마화를 한 마족을 토벌하는 임무도 있다. 사실 악마를 토벌하는 건 네이비 기사단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진행하니 최후의 수단이라고 보는 게 명확하다.

이런데도 삼남매를 무사히 길러낸 걸 보면 정신력 하나는 대단하신 분이다.

"아무튼 간에 아델리아. 너 지금부터 대련 준비할 거지?"


"해야지. 신입생도 많아서 꽤 바쁠거야."
"그럼 오늘은 벌로 너 혼자만 해. 나는 동생 데리고 다닐테니까."
"뭐?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그거는..."
"뭐?"

아델리아가 곧바로 항의하자 니콜은 한 쪽 눈을 치켜뜨는 걸로 대신했다. 결국 큰 죄가 있던 아델리아가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대신 오늘만이다?"
"생각해보고."
"아, 제발. 그러지 말고."
"내 소중한 동생 얼굴에 시퍼런 멍을 들게 할 뻔한 사람이 누구더라?"

아무래도 아델리아가 약점을 제대로 잡힌 것 같다. 나는 무릎까지 꿇으며 사정사정하는 아델리아와 팔짱을
낀 채 고민하는 니콜을 번갈아봤다.

확실히 이렇게만 본다면 신분을 초월한 절친 사이가 맞다. 우리 가족이 대체적으로 권위와 먼 성격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아델리아의 행동은 다른 사람이 본다면 기겁하기에 충분했다.

조금 전 그녀가 스스로 말했듯이 귀족의 목숨을 위협했다는 죄로 퇴학은 기본이고 실형까지 받았을테니.

'이 사람은 어떻게 누나랑 친구가 된 거지?'

내가 의문을 갖는 동안 니콜이 아델리아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됐다.

"그럼 이제 대련이나 하러 가. 난 관중석에 있을거니까 사람들한테 상황 설명은 잘 해주고."


"알았어. 아이작이라고 했나?"
"네. 아이작이라고 합니다."
"이 누나가 대련하는 거 잘 봐 둬. 바로 반하게 해줄테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가기나 해."

아델리아는 니콜이 미리 가져왔던 훈련용 철검을 던져주자 가볍게 잡아챘다. 뒤이어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방정맞게 팔을 흔들었다.

철없는 아이마냥 천방지축이지만 신기하게도 밉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점점 멀어지는 아델리아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니콜에게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누나. 저 사람이랑 어떻게 해서 친구가 된 거야?"


"그냥 어쩌다 보니까. 입학 때부터 계속 주변을 걷돌길래 말을 걸었더니 지금까지 쭈욱 이어졌지. 성격이
좀 천박... 아니, 이상해도 실력 하나는 보장할 수 있어. 아까도 장난이 지나쳤던거지 나쁜 애는 절대
아니야."
"니콜?"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뒤에서 누군가 니콜을 불렀다. 중저음에 듣기 좋은 미성을 지닌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에 니콜은 물론 나도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확인했다.

'...어.'

그리고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뇌가 정지하는 기분을 실시간으로 느꼈다. 적어도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다 못해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다.

내가 딱딱하게 굳어있는 동안 니콜은 남자와 구면이었는지 반갑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반말을 한 남자와
달리 니콜의 억양에는 전과 달리 예의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레오르트 님?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이번 주는 새학기가 시작되는 주였으니까. 바쁜 건 하나도 없었지."

리나처럼 황금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청명한 푸른색 눈동자. 리나가 청초하면서 강아지상의 얼굴이라면,
앞의 남자는 호랑이처럼 인상이 강했다.

한편 니콜과 대화를 나누던 남자는 나에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조용히 말을 흐렸다.

"그런데 옆은..."
"제 동생입니다. 인사해, 아이작. 미네르바 제국의 황태자이신 레오르트 님이셔."

내 마음도 모르는지 니콜이 내 등을 두드려주며 인사를 시켰다. 나는 잔뜩 긴장하며 레오르트와 얼굴을


마주했다.

예기치 못한 만남에 퍽 당황스러웠지만 어찌 되었던 간에 인사는 해야겠지. 더군다나 굳이 긴장할 필요는


없는 것이 나와 레오르트는 초면일 뿐더러 그는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전혀 모른다.

느닷없이 황궁에 갇히게 될 염려는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그 생각이 들자 나는 집에서 배운 예법을 토대로 레오르트에게 인사했다. 지금은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안녕하십니까.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만나뵈어서 영광입니다, 레오르트 님."


"아하. 니콜의 동생이었군. 어쩐지 닮았다했어. 반갑네. 미네르바의 정당한 계승자, 레오르트 우르미
재클리스라고 한다네. 그나저나 아이작이라고?"
"네."
"호."

왜요. 왜 그런 탄성을 지르는 것이죠. 불안하게스리.

내가 불안감에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쯤, 레오르트가 무척 반갑다는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리나가 말했던 학생이 자네였군?"

...씨발. 인생.
< 14 화 >

아마 그런 짤을 본 적이 있을 거다. 4 성 장군 옆에서 병장 한 명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모습을 말이다.

각은 각대로 잡혀있고 한치의 실수조차 용납하지 못 한다는 표정이 포인트다. 물론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해지지 않는 이상 웃어넘길 수 있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내가 그런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면 무슨 기분이 들까?

그것도 머지않아 황제가 될 사람이, 찾기만 하면 작가를 황궁에 가둘 거라는 권위자가 내 옆에 앉아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리나가 말하길, 학생인데도 견문이 상당히 넓은 것 같다고 하더군. 특히 메그너 교수를 골탕먹였다는
소식은 꽤 재미있게 들었다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너무 긴장하지 말게나. 내가 황태자라지만 권위로 누군가를 해할 생각은 없거든."

나는 레오르트가 사람 좋은 표정으로 말해도 웃을 수 없었다. 그가 황태자인 것도 있지만 나를 황궁에


가둬버리고 싶다는 사람이 옆자리에 버젓이 앉아있는데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다.

'하필 자리 배치도 이래서...'

현재 나는 대련을 지켜보기 좋은 관중석에 앉아있다. 관중석과 대련장 사이에는 반투명한 유리가 세워져
있어 관람하기 편하다. 또한 유리에는 방어 마법이 설정돼 있어서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허나 제일 큰 문제는 자리다. 내가 레오르트와 한 칸 떨어져있다면 모를까, 레오르트가 중간에 앉고 나와


니콜이 양옆에 앉은 상황이다. 부담감이 장난 아니다.

"눈동자 색을 보고 니콜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동생일 줄이야. 그러고 보니 데이브는 머리도
붉은색이었지."
"저희 형도 아십니까?"
"물론이네.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조교로 활동하는 자들은 대부분 높은 티어의 기사단에 입단하니 항상 눈
여겨 봐야지. 아참. 데이브가 견습 기사가 된 건 알고 있나?"
"네?"

처음 듣는 이야기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한 칸 떨어져 앉은 니콜을 쳐다봤다. 니콜도 깜빡하고 있었는지 아차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 깜빡하고 있었네. 사실 입학식을 하고 이틀 후부터 견습 기사로 발탁됐거든. 그때 오빠도 널


만나느라 잠깐 잊고 있었나 봐."
"어디로 갔어?"
"네이비 기사단. 어디인지 알고 있지?"

알다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데이브는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이가 갈리도록 단련하더니 기어코 네이비
기사단에 입단한 모양이다.

동생으로써 자랑스러웠으나 말도 안 해주고 가버리니 약간 섭섭했다.

"그럼 언제 돌아와?"
"글쎄? 견습 기사는 훈련만 받아서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 그래도 연락은 할 거야."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몰래 휴가를 넣어줄 수 있네만?"
"괘, 괜찮습니다."

중간에 앉은 레오르트가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농담을 던지자 어색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는데 그가 한 농담은 전혀 농담 같지가 않았다.

채앵!

잠깐의 잡담을 뒤로 하고 드디어 대련장에서 대련이 시작되었다. 나는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음이 귀에


들어오자 대련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레오르트와 니콜도 마찬가지였다.

대련장 중심에는 니콜의 친구, 아델리아가 장검을 쥔 채 다른 한 명과 싸우는 중이다. 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검으로 맹공을 가하면 아델리아는 여유롭게 받아쳤다.

나는 춤을 추는 것처럼 현란하게 싸우는 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눈으로 따라가는 것조차 벅찼다.

'실제 싸움은 이렇구나.'

가끔씩 방학 기간 때 집으로 돌아온 데이브나 니콜이 아버지와 대련하는 건 자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격렬하지는 않고 아버지가 문제점을 하나 하나 가르쳐주는 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든 상대를 쓰러뜨려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다 해야 하나. 아무튼
아델리아의 상대는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당연하지만 아델리아는 하나하나 모두 받아치며 반격을
가했다.

"지금 아델리아와 대련 중인 학생이 누구지?"


"이안이라고, 검술 부분에서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흐음."

옆에서 니콜과 레오르트가 말을 나누는 동안에도 대련에 집중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전투씬을
참조할 때는 아버지에게 조언을 받았으나 역시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 차이가 난다.

제논 일대기는 주인공이 세계적인 영웅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인만큼 수많은 전투를 치루는데 나에게는
판타지여도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현실'이다. 별의 별 괴상한 것들이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계.

내 기준으로 말도 안 되는 능력을 묘사해도 아버지가 매우 현실적이라고 칭찬했을 때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능력이어도 다 된다고 하니까...'

그냥 마나를 이용해 이런 이런 능력을 발휘했다고 하면 모든 게 용납이 간다. 오히려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철덩어리가 바다에 둥둥 떠다니거나 말도 없이 마차가 움직이는 게 불가능하다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궁금해졌다. 앞으로 제논 일대기에는 '증기 기관차'라는 새로운 문물이 등장할텐데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불가능하다고 단언할까 아니면 가능하다고 할까.

기대가 된다. 당연하지만 나는 그저 멀리서 팝콘만 뜯을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니콜. 자네는 이번에 출간된 제논 일대기를 읽었나?"


"네?"
내가 속으로 앞으로의 스토리를 구상하는 도중에 레오르트가 대뜸 니콜에게 물었다. 대련에 집중하고 있던
니콜은 레오르트 질문에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인 듯했다.

나 또한 당황스러운 건 똑같았으나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척 연기했다. 괜히 여기서 과하게


반응했다간 이상한 눈초리를 받을지 모른다.

"자네도 제논 일대기를 좋아하던 걸로 안다만."


"아... 네. 7 권이라면 읽었습니다."
"그렇군."

짤막하게 대답한 레오르트는 이번에 나를 쳐다보며 질문을 날렸다.

"아이작 자네는?"
"...저도 읽었습니다."
"몇 권까지?"

이미 머릿속에 완결까지 구상해 놓았습니다. 새드 엔딩으로 말이죠.

나는 눈을 데록데록 굴리다가 마리에게 했던 거짓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5 권까지만 읽었습니다. 책을 사려고 해도 매번 매진되는 바람에..."


"응? 니콜은 7 권까지 읽었다하지 않았나? 동생에게 빌려주지 않은건가?"
"안 그래도 빌리려 했습니다. 방학이 아닌 이상 누나가 집에 있는 시간이 적어서 빌리기에도
미안했거든요."
"아. 그런 이유라면 납득이 가는군."

레오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해가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예상치 못한 위기였지만 다행히 어찌 어찌
넘어간 듯했다.

이후로 대화가 단절되는가 싶어 대련에 집중했을 때였다.

"저... 레오르트 님."


"응? 왜 부르나?"
"레오르트 님은 정말로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찾으면 황궁에 가둬버리실 건가요?"

니콜이 우려와 걱정이 한가득 담겨있는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기 전까지는.

나는 최대한 대련에 집중하는 척 하면서 조용히 엿들었다. 어째서 그녀가 레오르트에게 저런 질문을 한
건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자그마치 황태자가 신문에 그런 말을 넣었으니 누나로서 걱정되는 건
당연하다.

그동안 레오르트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피식거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학 당일 날에 보여줬던


반응과는 약간 달랐다.

"장난이야. 장난. 너무 진지하게 새겨듣지 않아도 돼.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났지만 지금은 천천히


기다리자는 마음이거든."
"그럼 저자를 찾는 일은..."
"그 일은 계속 진행해야지. 더구나 앞으로 예상되는 전개를 본다면 저자가 조금 위험해질 것 같기도 해."

레오르트의 대답에 니콜은 물론 나 또한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남들보다 정보력이 우월한


황태자가 저런 말을 하니 쉬이 흘려들을 수 없었다.

나는 한 칸 옆에 떨어져 앉은 니콜과 시선을 교차했다가 조용히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죠?"
"난... 아, 그전에 아이작?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을 해도 되겠나? 7 권의 줄거리가 포함돼
있어서 말이네."
"전 상관없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뭘.

레오르트는 내 쿨한 대답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는 이어서 설명했다.

"어쨌거나 마지막에 제논을 위기에 빠뜨린 주범이 귀족으로 예상하고 있다네."

나는 다른 의미의 놀란 얼굴로 레오르트를 바라봤다. 그의 예상은 정답이다.

7 권 마지막에 제논은 혼자서 정찰을 떠나는데, 안전한 곳이라는 말과 달리 몬스터는 물론이고 결계까지
쳐져있는 마의 지대였다. 다행히 기지를 발휘해 결계까지 파훼하여 지역을 뚫고 나왔으나 제논을 기다리고
있는 건 수많은 함정과 습격자들이었다.

안 그래도 지친 몸으로 습격자들과 싸우던 제논은 결국 가슴에 화살을 적중당하게 되고, 7 권은 거기서
끝난다.

물론 제논 일대기의 히로인, 메리가 선물해준 목걸이 덕분에 치명상은 면한다. 그 뒤로는 당연히 무쌍을
펼치고 배후를 찾는 거고.

'대놓고 떡밥을 뿌린 것도 아닌데...'

아마 여러번 정독하다가 의아한 부분들을 하나 하나 찾은 게 아닐까 싶다. 왠지 모르지만 작가로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 그 생각은 던져버렸다.

"정말로 주범이 귀족이라면... 무슨 큰 문제라도 생기는 겁니까?"

이 질문은 내가 아니라 니콜이 한 거다. 레오르트는 대련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다른 책도 아니고 하필이면 제논 일대기라서 문제지. 마족의 인식을 뒤바꾼 것처럼 혹여 귀족의 인식도
나쁘게 변할까봐 걱정된다네. 귀족을 비판하는 책은 많지만 대부분 풍자에 가까운데다가 제논
일대기만큼의 파급력은 없었거든."

그런 거였나. 그런 걱정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갈만하다.

내가 항상 허구의 이야기라고 도입부에 적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족의 인식이 상전벽해 수준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제논을 함정에 빠뜨린 주모자가 귀족으로 드러난다면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괜찮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대비는 충분히 한 상태다. 레오르트가 우려하는 상황은 귀족의 명과
암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명장면이 될 것이다.

백성들을 자기 아래로 보는 귀족과, 백성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보살피는 귀족의 싸움. 정치 싸움의
일환이지만 사지에서 돌아온 제논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시원시원한 맛이 있을 거다.

"...만약 정말로 그리 된다면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니콜이 실로 조심스러운 톤으로 레오르트에게 물었다. 그에 레오르트는 손을 휘적거리며 대충 대답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글은 계속 쓰게 할테니까. 어디까지나 보호 개념이지, 압박하는 건 결코 아니야.
애시당초 저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 쓸데없는 가정이라네."
"그렇습니까..."

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압박이 됩니다, 황태자님.

나는 쓰게 웃으며 대련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대련이 끝났는지 아델리아와 학생이 서로 마주보며
인사하고 있다. 숨을 헐떡이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학생과 달리 아델리아는 대련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뭐, 이만하면 됐겠지. 난 이제 가보도록 하겠네."

대련이 끝나자 레오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가 일어서자 의문에 찬 눈빛으로 쳐다봤다.

"벌써 가십니까?"
"나도 눈치가 있어. 내가 있어봤자 그대들만 불편할텐데 빨리 가는 게 좋지. 그래도 즐거웠네."

레오르트는 그 말만 남기며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니콜을


바라봤다.

때마침 니콜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우리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녀도


나처럼 가슴이 쫄깃쫄깃했던 모양이다.

"아이작."
"응."
"앞으로 조심해야겠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그런데 정말로 제논을 위기에 빠뜨린 범인이 귀족이니?"

아까 전 레오르트가 예상했던 전개가 인상깊었던 모양이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응. 크로스트 백작이라고 알아? 그 사람이 범인이야."


"... ..."
"누나?"

내가 범인의 정체를 발설하자 니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졌다. 무언가 충격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그에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니콜이 망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누구인지는... 안 물었는데..."


"아."

본의 아니게 스포일러를 해버렸다.

< 15 화 >

레오르트와의 예상치 못한 만남이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내 집필을 방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탄력을
받아 이야기를 쭉- 쭉- 이어나갔다.

'여기서 캐슬락 백작이 소리치는 거지. 국가란 곧 백성이다라고.'

전생에 유명한 영화가 하나 있다. 군사정권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결사적으로 항의하는 한


변호사의 이야기.
특히 명장면은 감명깊게 봤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저게 정말로 연기인건가 싶을 정도로 몰입감이
어마어마했다.

'레오르트의 말대로 조금 욕을 먹긴 하겠지만...'

평민 출신인 제논과 귀족간의 갈등은 절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본래 기득권을 굳게 쥐고 있던 세력은


누군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편이니까.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이야기다.

그래도 상관없다. 당근과 채찍이라는 말이 있듯이, 귀족의 좋은 면도 보여주면 괜찮을 것이다.

하물며 정당한 비판이라면 어느 정도 용납해준다. 레오르트의 말을 듣고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봤더니


정말로 귀족을 향한 풍자가 널려있었다. 비록 직설적인 비판록은 없다는 게 흠이지만.

'증기 기관차의 외관은... 그냥 그림을 그리자. 노트에다가 연습용으로 그리면 되겠지.'

제논이 귀족과의 갈등을 벌이는 에피소드는 8 권 초반에서 중반까지다. 그 이후는 드워프의 나라로 향하여
휴식 겸 신문물을 접하고, 그곳에서 '증기 기관차'를 발명하려는 괴짜 드워프와 인연을 맺는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손가락질 하는 괴짜 드워프의 발명을 제논이 도와주는데, 이후로는 여러가지 오판과
시행착오가 있지만 기어코 증기 기관차를 발명한다. 그리고 나서 '마법'이 아닌 '기계공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을 끝으로 8 권의 이야기가 종료된다.

'여기는 보급을 마차로 하고 있지?"

동서고금, 아니 지구던 판타지 세상이던 전쟁에 있어서 보급의 중요성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판타지
세상이어도 군대는 잘 먹어야 진격하는 법이다.

여기서 굳이 증기 기관차를 발명할 필요없이 텔레포트나 워프 같은 마법으로 떼우면 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불가능하다. 텔레포트나 워프를 이용한 보급 방식은 지극히 비효율적이면서도 위험한
마법이기 때문이다.

자기자신에게 사용하는 건 문제가 없다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물체를 이동하는 순간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어마어마한 마나량이 요구될 뿐더러 실패하면 모래알처럼 분해되어버린다. 그런 리스크를 감당할만큼
중요한 상황에서나 사용하지, 그 외에는 대부분 마차를 이용하는 편이다.

'물론 마족을 제외하고. 가만 보면 진짜 사기 종족이라니까.'

마족들의 나라, 헬리움이 미네르바 제국조차 건드릴 수없는 강대국이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말도 안


되는 수송 능력 덕분이다. 다른 나라가 마차를 이용해서 보급을 할 때 마족은 마법을 사용해 거리를
무시한다.

이게 전부 마법을 숨 쉬듯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 그들에게 마법이란 상상하면 다 이루어지는


'권능'에 가깝다.

비록 지금까지 마법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굉장할 것 같다.

'마법이라...'

퇴고까지 마친 원고를 책상의 가장자리에 놔두고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10 시 30 분. 내일을


위해서라도 지금 자는 편이 좋다.

이어서 간단하게 씻은 후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신한 매트릭스의 감각이 등을 타고 전해졌다.


'내일은 인문학이랑 마법학, 그리고... 인류학밖에 없네.'

어떤 전공을 들을지는 이미 다 구상해놓았다.

인문학, 마법학, 역사학, 신학, 연금학, 인류학, 철학, 심리학, 행정학, 군사학, 국제학.

이렇게 총 11 과목이며, 다른 건 몰라도 '연금학'은 다들 처음 들어봤을거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세상의


화학이다.

지구에서도 연금술은 현대 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데, 여기는 판타지 세상이라 그런지 몰라도 연금술이
크게 진보됐다. 멀리 가지 않아도 포션이 연금술로 제작된다는 사실을 알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화학처럼 정립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신기해.'

원자라던지, 분자라던지 세부적으로 정립된 건 아니지만 먼 미래에는 누군가가 정립해주지 않을까. 나는


깜깜한 천장을 올려다 보다가 눈을 조용히 감았다.

앞으로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니 긴장되기도 하고, 기대도 된다. 무려 11 개의 전공을 듣자니 벌써
머리가 아프지만 유급을 면하기 위해서는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상대 평가로 점수를 매기지 않고 절대 평가에 가깝다는 거다. 내가 노력만 한다면
만점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제논 일대기는... 당분간 주말에만 써야겠... 다...'

침대에 몸을 뉘어서 그럴까. 잠이 솔솔 오면서 눈꺼풀이 닫혔다.

이윽고 온전한 암흑 속에서, 나는 의식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이 되자 학식으로 아침을 떼우고 곧바로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에 들어서니 익숙한 얼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마리, 세실리, 그리고 리나다. 각각 개성이 뛰어난 미녀들이 한데 모여서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자체적으로 빛이 나는 듯했다.

저 세 명 모두 인문학을 같이 듣는 걸까. 나는 남는 자리가 있는 둘러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리가 없네?'

세 여자의 주위에는 앞뒤 양옆 할 것 없이 학생들이 앉아있었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그들의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나로서는 의문이 드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앞쪽에는 빈자리가 많은 걸 보면 더더욱.

일단 하는 수없이 빈자리에 앉았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아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정답게 떠들고 있던 세 명 중 마리와 눈을 마주쳤다.

"앗! 저기 아이작이다."

마리가 소리치자마자 세실리와 리나도 따라 나를 쳐다봤다. 그들과 눈을 마주친 나는 손을 흔들어주는


걸로 인사했다.

"근데 쟤는 왜 우리 옆에 안 앉... 뭐야? 언제 꽉 찼지?"


"응? 그러게."

말을 들어보니 그들도 이제서야 주변 상황을 눈치챈 듯했다. 나는 의아해하는 세 명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들의 오른편에 앉아있는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이름이 잭슨이었던가. 아무튼 첫 날부터 세실리와 리나에게 작업을 걸다가 대차게 까였던 놈이다. 그런
놈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한 쪽 입꼬리를 쭈욱 올렸다.

실로 비열한 미소에 직감할 수 있었다. 저 놈 짓이라고.

보아하니 자기한테는 면박을 줬던 여자들이 나한테 관심을 주니까 질투한 모양이다. 학생들을 포섭한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안면이 있던 건지 모르겠으나 매우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벌써 파벌이 생기는 건가?'

돈 많은 백작가 아들내미라고 했으니 돈으로 매수했을 가능성이 높다.

'애새끼도 아니고 뭐하는... 아니지. 17 살이면 애새끼가 맞구나.'

괜히 귀찮은 일에는 휘말리기 싫었으니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나는 가급적이면 평탄한 학업 생활을
즐기고 싶다.

"읏차."
"응?"
"안녕?"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마자 누군가 내 옆에 앉으며 살갑게 인사했다.

백색 머리카락의 미녀, 마리가 빙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 옆자리에 앉자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그냥 제자리에 앉아있지 왜 굳이 내 옆에 앉은 건지


살짝 의문이 든다.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마리가시원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내 인사 안 받아줘?"
"...안녕."

그제서야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거리는 마리였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봤다.

세실리는 어딘가 불편하다는 듯이 고운 미간을 좁혔고, 옆의 리나는 미묘한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잭슨 쪽을 바라보니 그는 짜증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본의 아니게 엿을 먹여서 기분이


통쾌했다.

"주말동안 뭐 하고 지냈어?"
"너는?"
"난 오빠랑 같이 여기저기 돌아다녔지. 신기한 게 많더라. 너는 뭐 했어?"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지. 재미있는 책들이 많더라고. 그리고 누나를 따라 대련장에 가서 구경도 좀
했고."
"누나가 있었어?"
"누나 뿐만 아니라 형도 있어."
"너도 막내였구나? 이제 알았네."
수업 전까지 마리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확실히 다른 사람보다는 마리와 얘기하는 게 훨씬
편했다.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먼데다가 성격도 시원털털했으니 마음편히 말할 수 있었다.

오히려 마리처럼 특색이 강한 미녀와 대화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정도다. 또한 운이 좋게도 대화


코드 또한 잘 맞았다.

"아이작은 제논 일대기를 5 권까지 읽었다고 했지? 내가 빌려줄 수도 있는데."

가끔씩 식겁할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그나마 다행히 예상했던 질문이었는지라 무난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마리와 떠들다보니 어느새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당연하지만 인문학
교수인 비루스였다.

"안녕하십니까, 자랑스러운 학생 여러분. 그럼 오늘부터 본격적인 수업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의가 시작되자 강의실은 지난 주처럼 학생들의 박수 소리가 가득 채워졌다.

그로부터 잠시 후, 비루스 교수는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헛기침을 하더니 특유의 잔잔한 목소리로 수업을
시작했다.

"지난 주는 '지식'에 관한 걸 설명해드렸죠. 그럼 지금 수업에서는 무엇을 배우느냐.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책을 통해, 아니면 어떤 경험을 통해 어떤 지식을 얻었는지 말씀하시면 됩니다. 너무
갑작스러우시다고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은 충분히 드릴테니까요."

교수는 시간 제한을 정확히 40 분으로 두었다. 실로 짧은 시간에 학생들이 볼멘 소리를 내었으나 비루스
교수는 깔끔히 묵살했다.

"아, 그리고 제논 일대기가 아닌 다른 책이나 경험을 연관지어 발표한다면 가산점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제논 일대기와 연관되어도 발표 내용이 훌륭하다면 가산점을 드리겠습니다. 단, 어떤 지식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말해주세요. 그럼 이제..."

시작! 이라는 교수의 외침과 동시에 학생들은 혼란도 잠시, 본인이 준비한 노트에 생각을 정리하거나
작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미리 준비해온 노트에다가 머릿속에 든 생각을 적어내렸다. 지금까지 읽은 책과 그걸 토대로 얻은


지식이 많았기에 자신있었다.

"저... 아이작?"
"음?"

그때 마리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나는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내가 바라보자 마리는 약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머쓱한 웃음을 흘리며 부탁했다.

"...노트 한 장만 빌려줄 수 있어? 마법필만 갖고 와서..."


"그런 거라면야."

나는 기꺼이 노트 한 장을 찢어주어 그녀에게 전달했다. 마리는 내가 선뜻 종이를 주자 환한 표정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마리의 감사 인사를 받고 다시 노트에 집중할 즈음이었다.

"응? 야. 이건 뭐야?"
"네?"

마리는 내가 전달해준 종이의 뒷편을 보여줬다. 나는 그녀가 보여준 그림을 보자마자 속으로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마리는 궁금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나에게 물었다.

"이거 혹시 네가 그린거야?"

페이지 뒷편에는 어제 내가 연습용으로 대충 그렸던 증기 기관차가 그려져 있었다.

< 16 화 >

나는 마리가 보여준 증기 기관차의 그림을 보고 기겁한 것도 잠시, 곧바로 노트를 확인했다. 원래 노트는
제논 일대기의 전개를 정리하는 노트와 일반 노트로 구분돼 있다.

그에 혹시나 싶어 페이지를 계속해서 넘겼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제논 일대기의 전개에 관한 내


기록들이 떡하니 적혀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아차할 수 있었다.

노트를 잘못 가져왔구나라고.

하필이면 노트의 책 커버가 비슷해서 이런 실수를 저지른 듯했는데 이건 엄연히 내 불찰이다. 매번


조심해야지 생각하면서도 결국 실수를 저질렀다.

'계속 주의했어야 했는데...'

나는 속으로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전생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내


허술함이 낳은 참사다.

가족들이 나를 싸고 도는 이유가 늦둥이 막내인 것도 있지만 이런 덜렁이 같은 성격 때문이다. 어릴 때는


뭣도 모르고 책을 뽑으려다 미끄러진 바람에 큰일날 뻔한 적도 있다. 그때 아마 아버지가 잽싸게
잡아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이것 뿐만이 아니라 당장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바로 내가 원고에 적었던 대화를 세실리에게


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허당인지 짐작할 수 있다.

"여기 바퀴가 달려있는 걸 보면 마차처럼 생겼는데? 뿔 같은 게 있는 걸 빼면은."

마리는 내가 그린 증기 기관차를 여기저기 둘러보며 갸웃거렸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증기 기관차의


앞부분만, 그것도 엉성하게 그렸다는 걸까. 이곳 사람들이 본다면 마차와 비슷해 보일 것이다.

특히 3D 로 그린 게 아닌, 2D 처럼 평면 형식이라 증기가 배출되는 기관만 빼면 언듯 마차와 매우 유사해


보일 것이다.

이에 나는 수습할 기회가 남아있다고 판단,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마리에게 말했다.

"심심해서 그린거야. 그거 말고 다른 페이지 줄게."


"음... 알았어."

마리는 별 의심없이 증기 기관차가 그려진 페이지를 내게 돌려줬다. 나는 돌려받은 페이지를 꾸깃꾸깃


접고는 다른 종이를 그녀에게 전달했다.

지금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기 위해 앞뒷면을 확인하는 건 필수적인 절차였다.


"넌 어떻게 발표할 거야? 난 딱히 할 게 없어서 제논 일대기를 적을건데."
"난 읽은 책들이 많아서 그중 하나 고르려고."
"부럽다. 가산점은 따놓은 당상이네."
"그건 발표해봐야 알겠지. 단순한 거라도 발표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걸?"

지난 주에는 비루스 교수가 나를 지목하여 제대로 된 대답을 꺼내지 못 했지만 지금은 시간도 주어졌으니
괜찮다. 전생부터 다져온 프레젠테이션 능력 덕분이다.

사실 대학교 시절에 조별 과제를 할 때마다 매번 발표 담당을 맡게 되어 자연스레 성장한 케이스지만.


중간중간 한 두 명이 계속 빠지는 바람에 그걸 내가 대신 메꾸는 식으로 발표를 담당했다. 당연히 별의 별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조별 과제에서 빠져나간 조원에게는 엿을 먹였고.

'근데 발표 형식을 어떻게 하는거지?'

문득 그 의문이 떠올라 손을 슬며시 들었다. 비루스 교수는 내가 손을 들자마자 반색하더니 나에게


질문했다.

"무슨 할 말이 있으신가요? 아이작 학생?"

역시 비루스 교수는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혹시 발표를 칠판 앞에 나서서 하는 건지 묻고 싶습니다."


"그건 나중에 할 겁니다. 조별 과제라고, 팀원을 임의로 묶어서 진행할 과제가 있거든요."
"...조별 과제요?"

세상에. 여기에도 그 끔찍한 조별 과제 존재하는구나.

비루스 교수는 새파래진 내 안색도 눈치채지 못 했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그가 상상하는 조별
과제라는 무엇일까.

"네. 물론 아이작 학생의 생각처럼 대하기 어려운 학생도 있겠죠.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때까지 조별
과제를 하면서 문제가 될만한 사건은 없었으니까요."
"...그럼 다행이네요."
"설령 문제가 발생해도 저에게 말씀하시면 전부 처리해드릴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문제가 없도록 연기하거나 덮은 게 아닐까. 신분이 존재하는 사회다보니 신빙성이 간다. 아마 높은


지위를 가진 학생이 팀원들을 실컷 부려먹었겠지.

앞서나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세상이다. 이러니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부디 정신이


똑바로 박힌 놈이랑 같은 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편 옆의 마리는 우리 둘의 대화를 듣더니 교수에게 질문했다.

"조별 과제가 있는 전공이 인문학 말고도 더 있나요?"


"몇몇 과목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냥 낙담하고 받아들여야겠다. 아까도 말했지만 정상적인 애들만 있기를 빌 수밖에 없다.

"아까 임의로 팀원을 조율한다고 하셨죠? 만약 같이 하고 싶다는 애들이 있으면 어떡해요?"


"안 됩니다. 형평성에 어긋나니 그 부분은 절대 불가합니다."
"에잉..."

마리는 비루스 교수가 엄격하게 다그치자 입술을 댓발 내밀며 아쉬움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조별 과제에
그게 가능했다면 진정한 조별 과제가 아니지.
"이제 시간이 다 지났습니다. 앞자리부터 차례대로 발표하겠습니다."

발표는 무난무난하게 진행됐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말을 심하게 더듬은 학생도 있었고, 그와 반대로
감탄을 자아낼만한 발표를 한 학생도 있었다.

나? 나는 그냥 저냥 평범했다. 뛰어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못 하지도 않은 수준. 그러나 집에서 책만


읽은만큼 지식이 폭넓은 덕에 비루스 교수도 흡족해했다.

"저... 그러니까 제가 이 부분을 어떤 느낌이 들었냐면... 그..."

상당히 의외의 상황도 발생했는데, 내 다음 차례인 마리가 말을 더듬으며 발표를 망쳤다는 것이다. 평소
그녀의 밝고 힘찬 면모만 보았던 나로서는 예상 밖이었다.

"수고했어요, 마리 학생. 다음부터는 조금 더 자신감있게 발표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알겠죠?"


"...네."

결국 어찌어찌 발표를 마칠 수는 있었지만 마리는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에 엎드렸다. 살짝 드러난 귀가


새빨개진 걸 보아 창피함이 엄습한 모양이다.

'뭐, 집에서 교육이면 몰라도 프레젠테이션 능력을 길러주진 않았을테니까.'

기본적인 지식과 교양은 남들보다 더 많이 배웠을지는 몰라도 발표 능력은 아니다. 귀족들이 가정에서
배우는 교육을 주입식 교육이라한다면 아카데미는 고등교육이다. 스스로 능력을 끌어올려야 하는 부분이
더 많다는 의미다.

더구나 앞으로 이런 발표가 더 많을텐데 그녀로서는 비관적일 것이다. 처음 느낀 굴욕감과 수치심,


그리고 창피함이 마음을 가득 채우지 않았을까.

"여기서 괄목할 점은, 전 아버지의 수련을 보면서..."

나는 다른 사람의 발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엎드려있는 마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는 차마 고개를
들어올릴 용기가 나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엎드려있었다.

이에 마리의 기분이라도 풀어줄 겸 장난도 칠 겸 겸사겸사 내 뺨을 책상에다 찰싹 붙였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쳐다볼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렸다.

"... ..."

앗. 눈 마주쳤다.

가만히 지켜보는 도중에 내 시선을 느꼈는지 마리가 엎드린 상태로 나를 힐끔거렸다. 물론 그 다음에 다시
얼굴을 파묻었지만 눈을 마주친 건 분명했다.

"마리."
"... ..."
"마리?"
"...왜."
"설마 울어?"

움찔-

장난식으로 묻자 마리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뒤이어 그녀는 책상에 파묻었던 얼굴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나를 쳐다봤다.
까딸스러운 표정과 반대로 빨개질 대로 빨개진 얼굴이 인상적이다. 오죽하면 내 머리카락과 자웅을 겨룰
정도.

나는 그녀가 까칠한 표정으로 노려봐도 책상에 붙였던 뺨은 떼지 않았다. 한동안 나를 내려다보던 마리는
입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변명하자면 집에서는 이런 거 안 가르쳐줬어."


"오빠가 알려주진 않았어?"
"내 오빠는 무학이야. 문학이 아니라. 그리고 너는 좋겠다. 발표도 잘하고 책 읽은 것도 많고."

내 장난 덕분에 마음이 풀렸는지 투덜거리는 마리. 나는 피식 웃으며 책상에 붙였던 뺨을 떼어냈다.

얼굴은 여전히 붉었지만 툴툴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기운을 되찾은 것 같다. 솔직히 발표 하나를
망쳤다고 상심하는 건 말이 안 되긴했다. 잠깐 생각이 필요했던 거겠지.

"...그리고 아까 했던 짓."
"응?"
"아까 나 볼 때 네가 했던 거."
"뭐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마리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자기 놀리냐는 표정이다.

그 반응에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나였다. 마리는 그런 내 반응에 답답하다는 듯이 콧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냐. 됐어. 그냥 마음대로 생각해."


"그..."
"거기 두 학생? 발표 중에는 조금만 목소리를 줄여주실 수 있나요?"

이크. 너무 떠들었나보다. 나는 교수에게 지적을 당하자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

마리도 마찬가지로 입을 꾹 다물었는데, 얼굴의 화기는 가라앉았으나 귀는 아직까지 붉었다. 하필이면


머리색깔도 흰색이라 더욱 눈에 띄었다.

"...칙이잖아."
"응? 뭐라고?"
"아무 것도 아냐.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으나 마리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차례가 세실리 쪽으로 넘어갔다.

"보다시피 저는 마족입니다. 엘프보다는 아니지만 적어도 인간보다는 수명이 긴 종족이죠. 그리고 전 100
년이 넘는 시간동안 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연설 때도 느낀거지만 목소리는 정말 홀릴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사람으로하여금


빠져들게 만드는 힘과 매력이 존재했다.

지금도 보면 방금 전까지 다른 사람의 발표에 관심이 없었던 학생들도 세실리의 발표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족인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놀라웠다.

나는 세실리의 발표를 유심히 경청했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까지 언급하는 걸 보면 분명 좋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하지만 그 세월이 무색하게 저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저보다 마족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최근에
만났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죠."
그러면서 나를 정확히 쳐다보더니 실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의 진심어린 미소에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지난 주에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건가. 내용을 들으면 정황상 그것밖에 없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옆에 있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죠?"

세실리가 마족이라서 그런걸까. 비루스 교수는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에 세실리는 비루스 교수를 쳐다보며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냈다.

"마족이 어떤 종족인지 단편적으로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저 스스로도 몰랐던 것이었죠. 교수 님께서


원하신다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흠... 안타깝게도 전 인간인지라 정의를 들어도 공감하지는 못 하겠군요. 그래도 훌륭한 발표였습니다.
세실리 학생에게 가산점을 드리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세실리는 가산점을 준다는 교수의 칭찬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내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빙그레 웃어줬다.

나는 그 미소에 쑥쓰러워하면서도 박수는 쳐줬다. 발표 자체는 깔끔하고 완벽했다.

이다음으로는 세실리 옆에 앉아있던 리나였는데, 그녀도 세실리 못지 않게 발표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특히 우아하면서도 나긋나긋한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그리하여 모두의 발표가 끝날 때 즈음이 되자 어느새 강의가 끝날 시간이 도달했다. 비루스 교수는 마지막
학생의 발표가 끝나자 손뼉을 치며 모두의 집중을 이끌었다.

"자. 이제 주목. 수업이 끝나기 전에 말씀드릴 부분이 있어요. 아까 아이작 학생에게 했던 말이지만 제
강의에는 '조별 과제'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께는 생소하겠지만 간단히 말해 팀플레이라 보시면
됩니다."
"조별 과제? 팀플레이라고?"
"그게 대체 뭐지?"

비루스 교수가 조별 과제에 관해서 언급하자 강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들 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저


조별 과제가 얼마나 시궁창 같은지, 또 얼마나 거지 같은지 잘 알고 있다.

저 불쌍한 어린양들은 그걸 모르고 있겠지. 내가 예상컨데, 조별 과제가 종료되는 순간 학생들 마음


속에는 사람을 향한 불신이 자리잡혀 있을 것이다.

그사이 비루스 교수는 웅성거리는 장내가 진정되는 듯하자 조별 과제의 설명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 조별 과제의 목적은 간단합니다. 제가 하나의 과제를 제시하면, 여러분들은 제가 임의로 지정한
팀원과 함께 그 과제를 완수하시면 됩니다. 정말 간단하죠? 단, 불성실한 학생이 있거나 부정 행위가
발각될시 그 학생은 0 점 처리할테니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교수 일을 하면서 본인의 배경을
이용한 학생들을 자주 보았으니 안 걸릴 거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마세요."

저렇게 경고해도 권력을 이용할 놈은 결국 이용하게 돼 있다. 씁쓸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게다가 굳이 집안 배경을 이용하지 않아도 꼼수를 부리는 놈도 있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학생들에게 조별 과제는 처음일테니 참석은 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또한 제가 지정한 팀원이 아닌, 다른 팀원과 협동하는 것도 0 점 처리하겠습니다."
"그럼 교수님. 팀원은 어떤 방식으로 지정되나요?"
"형평성을 고려하여 제비뽑기를 실시할 예정입니다."

형평성 하나는 투철하시네요.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제비뽑기과 비견될 정도로 형평성이 뛰어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조별 과제는 지금으로부터 3 주 후에 실시될 예정이지만, 내용은 미리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은


여러분들이 좋아시는 제논 일대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 ..."

내 책이 교과서라도 되는 걸까. 이거 참 기묘한 일이다.

내가 속으로 허허 웃고 있을 때, 비루스 교수는 나에게 충격을 안겨줄 과제 내용을 입 밖으로 꺼냈다.

"제가 여러분들께 내줄 과제는 바로 제논 일대기의 전개가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하여 분석하고, 또


조리있게 발표하는 것입니다. 제논 일대기에는 앞으로의 전개를 충분히 예상하실 수 있는 단서가 많이
포함돼 있지요. 저 또한 몇 개 찾은 상태고요."
"... ..."
"설사 제논 일대기의 신권이 발간되었을 때 가설이 틀리셔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단서를
종합하여 원인과 결과를 명확하게 분석하고, 또 그 가설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예상하는 것이니까요.
제가 지금 말하는 이유도 최근에 발간된 제논 일대기를 읽지 못한 학생을 배려하기 위함입니다."

뒤이어 교수는 삽시간에 조용해진 강의실을 둘러보다가 뿌듯한 표정으로 학생들에게 물었다.

"어때요. 정말 쉽죠?"

정말 쉽네요. 교수님.

제가 그 책의 작가라서 누워서 떡 먹기 급으로 쉬울 것 같아요. 물론 그대로 적었다간 의심을 한무더기로


받을테니 그대로 적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럼 난 어떻게 해야되지? 발표나 할까?'

뭔가 진퇴양난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17 화 >

내가 이곳에 환생한 이후로 관심이 가던 게 무엇이냐 물으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를 꼽자면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번 생각해 보아라. 지금까지 살면서 당연시 여겼던 역사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들로 채워져있다.
지구의 운명을 바꾼 1 차 세계대전이나 2 차 세계대전은 사라졌고, 대한민국의 명운을 뒤바꾸었던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도 없다.

사실 없다라는 말보다는 행성 자체가 달려져서 발생한 현상이지만 그래도 실로 흥미롭다. 전생에서도


궁금한 역사는 인터넷 뿐만 아니라 책을 뒤져서라도 찾는 편이었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때는 소설을 읽다가 도저히 못 버티겠다 싶으면 역사책을 여러번 정독했다. 역사는
소설과 달리 원인과 결과가 확실하고, 비록 주관적이긴해도 다양한 내용이 실려있으니 흥미를 돋구기에는
충분했다.

'도서관에도 책이 엄청 많던데. 빨리 읽고 싶다.'


전생으로 치자면 월요일 다음 날인 화요일. 나는 역사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노트를
끄적거렸다. 어제의 실수 덕분에 오늘은 강의용 노트를 들고 왔다.

강의용 노트에는 내가 따로 정리한 이 세계의 역사가 분석되어있었는데, 단순히 특정 나라의 역사가


적혀있는 것이 아니다.

전생으로 치자면 '2 차 세계 대전' 속에 어떤 사건이 터졌는지, 또 어떤 전투가 발생했는지, 또 어떤


인물이 활약했는지에 대한 분석글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도 지구의 2 차 세계 대전처럼, 종족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발생한 '종족 전쟁'이
존재했다. 이는 정확히 500 년 전에 벌어졌던 사건으로 인간, 드워프, 엘프, 수인, 마족 가리지 않고
전쟁을 치룬 대사건이다.

'인간끼리도 아니고 종족끼리 전쟁을 치룬 경우라 분석하기 빡세네.'

엘프는 타종족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선민사상과 고지식함, 그리고 오만 때문에
자충수를 둔 경우가 많고, 드워프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으나 반쯤 인간 편이었다.

어째서 드워프가 인간 편에 들었냐면 간단하다. 인간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또 드워프의 무기를
제일 많이 사들였으며 엘프와는 사이가 안 좋았으니까.

수인은 당시 인간에게 노예 취급을 당해 엘프의 편에 붙었고, 마족은 '분노'와 '절제' 두 분파로 나누어
서로에게 마법을 발사했다. 공통점은 두 종족 모두 인간에게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는 걸까. 그 후로
인간과 수인과의 사이는 나빠질대로 나빠졌고, 엘프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후에도 서로 험악한 편이다.

하지만 이중에서 제일 복잡한 건 당연하게도 인간이다. 겉으로는 담합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온갖
정치와 권모술수가 난무하여 제 살을 깎아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난세에 항상 등장하는 '영웅'이
출현해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각 종족마다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중 가장 수혜를 입은 건 당연히 드워프겠지. 돈도 많이 벌고 인명


피해도 적었으니까.'

만약 다른 종족이 드워프를 건드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종족 전쟁은 상처만 남은 무승부가 아니라 한


쪽으로 기울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엘프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알아서 무너진거지? 너무 얕본건가?'

종족 전쟁에는 여러가지 대규모 전투가 있었고, 그 전투가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서적도 존재한다.
나는 그 서적들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의문점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읽은 역사서적은 대부분 인간의 관점으로 기록돼 있는지라 온갖 추측만 난무할 뿐,
엘프가 어떤 이유로 자충수를 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종전 직후 세대 교체가 일어난 걸 보면
그것과 연관돼 있는 건 확실했다.

'엘프측의 주요 전력이었던 아이케르가 갑자기 체포된 것도 그 이유에서겠지. 하여간 어딜 가나 꼰대가


문제야.'

무려 10 년 간의 기나 긴 시간 끝에 전쟁은 막을 내렸다. 무려 10 년동안 전쟁을 치뤘으니 드워프만


제외하면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인간 측에서 몇몇 왕국은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파산하거나 미네르바 제국에게 흡수당했다.

종족끼리의 전쟁은 끝났으나 인간끼리의 전쟁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단 말이야.'

전생에서도 2 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어도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이 발발한 것처럼, 이 세계도 비슷한
과정을 밟은 적이 있다. 다만 과학이나 공학이 발달하지 않고 마법이 급속도로 발달됐다는 게 차이점이다.

문제는 발달한 게 지금 이 수준이다. 과거에는 마법이 얼마나 고차원적인 능력인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인간들은 말 그대로 선택받은 자들만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리라.

"음..."
"... ..."
"...응?"

고민을 하느라 집중력이 살짝 깨진 사이, 누군가 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나는 노트에서 시선을 떼어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얇디 얇은 허리 라인과 존재감을 드러내는 가슴을 넘어서 마침내 얼굴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동그란 안경
너머에 호기심이 듬뿍 담긴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하게 됐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가 얼굴을 마주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교수님?"

역사학을 담당하는 교수, 엘레나 헤븐싱어 교수다.

엘레나 교수는 연두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안경을 써서 지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미녀지만 가장 큰
특징이라함은 바로 길쭉하게 뻗어있는 귀다.

이즈음되면 눈치챘을텐데 엘레나 교수는 미의 화신이자 여러 종족 중에서도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알려진


종족, '엘프'다.

어째서 엘프가 헤일로 아카데미에 있는지 물어볼 수도 있으나 사실 별로 신기한 일은 아니다. 아까


말했듯이 엘프는 종족 전쟁 이후 세대 교체가 일어났으며, 그 세대 교체에는 이종족과의 활발한 교류도
포함돼 있다.

그렇기에 그녀가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교수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엘레나 교수 뿐만 아니라


무학에서도 중에서도 엘프 신입생과 교수가 있다. 안타깝게도 문학에는 엘프 신입생이 없는 것 같지만.

"이거 다 네가 적은거니?"

내가 눈을 껌뻑거리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엘레나 교수가 노트를 가리키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녀가 가르킨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 놈의 집중력 때문인지 바로 앞에 누가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제논 일대기에 관한


필기가 아니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질문에 화답했다. 엘레나 교수는 손으로 턱을 괸 채 내 노트와 나를


번갈아보시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잠깐 보여줄 수 있니?"


"네. 뭐..."

그녀에게 노트를 주면서 시간을 확인하니 수업 시작까지 10 분 정도 남아있었다. 지난 주에도 약 20 분


전에 오셨으니 딱히 이상할 건 없다. 단지 내 필기에 관심을 보이는 게 조금 당황스러울 뿐.

내가 살짝 쫄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동안에도 엘레나 교수는 내 노트를 유심히 쳐다봤다. 가끔씩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무언가 골몰하는 것처럼 턱을 어루만졌다.

뒤이어 마지막 페이지까지 정독한 엘레나 교수는 짤막한 감평을 꺼냈다.

"분석은 꽤 잘 되어있네. 종족 전쟁이라는 큰 틀 안에 각 종족 간의 상황도 잘 설명돼 있는데다 원인과


결과도 명확해. 인간의 역사만 집중돼 있는 건 조금 아쉽지만 이건 차차 보안하면 될 거고. 조금만
다듬고 보안한다면 논문으로 제출해도 손색이 없겠는 걸?"

감평을 내놓던 엘레나 교수는 뒤늦게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아, 하며 정정했다.

"아니지. 이건 애시당초 논문 형식으로 쓴 게 아니잖아? 그런데도 이정도면 엄청 대단한 거지. 글을 엄청


잘 쓰는구나?"
"치,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작이라고 했지? 이런 건 누가 가르쳐 줬어?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은데?"

엘레나 교수가 한 손에 든 노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무어라 대답할지 고민하다가
쑥쓰럽다는 듯이 대답을 꺼냈다.

"스스로 터득한 거예요."


"정말로?"
"네."

전생의 대학교에서 배웠다는 건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다. 엘레나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뭇


놀랐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난 주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맨 앞자리에 앉은 걸 보면 역사에 관심이 많나보네?"


"재밌잖아요."

다른 건 몰라도 이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전생에서도 역사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파고들면 파고들 수록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와 내 상상력을 자극했다.

엘레나 교수도 그런 내 대답에서 진심이 느껴졌는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잠깐만 기다리렴."

그녀는 나에게 노트를 돌려주더니 저 말만 남긴 채 강의실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의문도 잠시,


왼쪽에서부터 들린 목소리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교수님에게도 칭찬받는 걸 보면 아이작은 글쓰기 능력이 뛰어난가봐? 펜혹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네."

리나였다. 그녀는 턱을 괸 채 흥미와 관심이 담긴 푸른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살짝 움찔한 것도 잠시, 중지 부분에 볼록 솟아난 펜혹을 어루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리나는 내 헤픈 웃음에도 빙긋 미소를 지어줬다.

"혹시 아이작은 우리 마족에 관한 역사도 잘 알고 있어?"

이번에는 오른쪽이다. 목소리에 따라 시선을 옮기니 리나와 완벽하게 반대되는 붉은색 눈동자와 마주하게
됐다. 당연하게도 세실리다.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곰곰히 생각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게도 마족은 제논 일대기가 발간되기 전까지 폐쇄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어서 정보가 현저히 적었다.
설령 마족에 관한 역사서가 있다고해도 전부 인간의 관점이었는지라 지극히 주관적이었다.
"아뇨. 건국 과정과 세이비어 교국에서 마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는 것만 빼면 거의 모릅니다.
알다시피 마족은 몇 년 전까지 바깥과 교류를 한 적이 거의 없잖아요."
"음... 하긴 그것도 그렇네. 그럼 내가 몇 권 가져다 줄까? 나중에 아빠한테 부탁하면 되거든."
"정말요?"

나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호의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세실리를 쳐다봤다. 세실리는 내 반응에 살풋 웃더니


장난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몰론이지.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그게 뭐죠?"
"누나라고 해보렴."
"네?"

생뚱맞은 그녀의 조건에 어안이 벙벙해졌을 때 쯔음, 세실리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말투를 유지한 채
나에게 들이댔다.

그녀가 들이대자 나는 순간적으로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누나라 해보라고. 왜? 혹시 부끄럽니?"


"세실리 누나."
"... ..."
"했는데요?"

이제는 세실리가 당황할 차례였다. 그녀가 내게서 무슨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형이나 누나라고 부르는 건 익숙하다.

이미 친형과 친누나가 있는마당에 뭐가 어렵다고.

세실리는 너무나 간단한 내 대답에 이게 아니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뾰루퉁해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혀를 차며 투덜거린다.

"쳇. 재미없어. 그러고 보니 친누나가 있다고 했나?"


"푸흣."

세실리가 투덜거리는 동안 상황을 지켜보던 리나가 웃음을 살짝 흘렸다. 당연하지만 세실리가 그걸 듣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응? 리나. 설마 비웃은 거야?"


"아니? 세실리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아닌 거 같은데..."

나를 사이에 둔 두 여자가 떠드는 동안 엘레나 교수가 오기를 기다렸다. 참고로 리나와 세실리가 있는데
마리가 강의실에 없는 이유는 그녀가 역사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역사라면 치를 떤다고 얼핏 들은 것 같다.

심지어 어제 인문학 수업 때 나에게 골탕을 먹이려던 잭슨 그 놈도 없었다. 확실히 역사는 관심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지루한 건 어딜 가나 똑같은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강의실에 대략 30 명 정도만
자리에 앉아있었다.

"자. 여기 책."
"...이건 뭐예요?"

잠시 후, 강의실로 돌아온 엘레나 교수가 나에게 두꺼운 책 한 권을 전달했다. 퀴퀴한 종이냄새가 날


정도로 오래된 책이었는데, 책 표지에 제목조차 없었다.
그에 내가 책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엘레나 교수가 대답해줬다.

"엘프들의 역사서를 공용어로 해석한거야. 엘프는 본인들 고유의 언어로 책을 쓰는 경향이 강하거든."
"네? 지, 진짜로 이게..."
"응. 맞아. 인간의 시선이 아닌 엘프의 시선으로 본 역사서지. 나도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거야."
"우와..."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낡디낡은 책을 들여다봤다. 비록 낡고 볼품없는 외관이나 나에게는 그 어떤


물품보다 값진 보물이었다.

이 역사서를 통해 이 세상의 엘프가 어떤 종족인지, 그리고 제논 일대기에서 등장할 예정인 엘프에 어떤


설정을 추가시킬지 정할 수 있다. 안 그래도 엘프를 어떻게 묘사할지 고민이었는데 엘레나 교수가
시기적절하게 도움을 줬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 은혜를 어떻게 해야..."


"감사는 딱히 필요없고, 혹시 이 수업이 끝나면 다른 수업 듣는 거 있니?"

이어서 그녀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없다면 잠깐 나 좀 찾아올 수 있는지 묻고 싶어서."

< 18 화 >

나는 엘레나 교수가 말한 대로 모든 수업이 끝나자 그녀가 지내는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의 위치는'
역사관'이라는 건물에 있다. 헤일로 아카데미는 비루스 교수가 언급했듯이 2 학년까지 공통 수업을 듣고
그 후로부터는 자신의 진로를 찾아야한다. 그래서인지 각 전공마다 건물이 세워져있어 전문성이 매우 높은
편이다.

'그냥 대학교네.'

2 학년까지는 고등학교고, 그 후부터는 강의를 듣기 위해 건물 여기저기 돌아다녀야하는 대학교다. 나는


엘레나 교수가 준 약도를 통해 역사관을 찾아 헤맸다.

헤일로 아카데미는 자체적으로 작은 도시만해서 걷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간단하게 한 끼 먹고 갈 걸 그랬다.

'책을 얻었으니 상관없지.'

오늘은 중간중간 빈 시간동안에 엘레나 교수가 선물해준 엘프 역사서를 읽었다. 스스로를 신이 선택한
자손이라 생각하는 엘프답게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지만 평소 책을 꾸준히 읽은
덕택에 어려움은 없었다. 단어 사전을 뒤적거리며 뜻을 알아야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성과는 많았다. 아직 10 분의 1 도 읽지 않았는데 엘프가 어떤 종족인지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마족이 악마에 의해서 발생한 변종이라면, 엘프는 '천사'의 후예에 가까웠다.

인간의 관점으로 쓴 역사서에서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사실이었는데, 아무래도 엘프가


장수종이다보니 유실된 기록이 거의 없었기에 가능한 일인 듯했다. 아니면 기록을 중시하는 습성이
있다거나.

어쨌거나 엘프가 천사의 후예라는 건 나에게 아주 중요한 정보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 악마가
있으면서 어째서 천사는 없는 걸까? 라는 의문을 단번에 해소시켜줬다. 엘프의 마나는 마족과 달리
백색의 마나를 갖고 있다는 점부터가 그 증거다.
'다른 종족들은 악마만 봤지, 천사가 있다는 건 몰랐겠지.'

나는 전생의 기억이 있었기에 악마가 있다면 당연히 천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다른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악마와 완전히 반대되는 건 오직 신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지.

'9 권 중반부터 10 권 결말까지는 엘프와 교류를 맺는 스토리로 가야겠다. 악마측 간부들도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역사관으로 가는 도중에 수첩에다가 제논 일대기의 전개를 간략하게나마 기록했다. 8 권의 원고는 이미 다


작성했으니 부모님에게 우편으로 부치면 끝이다.

"여긴가?"

한참을 걷다보니 약도에 그려진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사관이라 해서 딱히 멋지거나 그러진 않고,
단조로우면서도 실용성이 높은 구조였다. 아무래도 교수 또는 조교만 지내는 건물에다가 무학과 달리
단련실이 필요없기 때문인 듯했다.

'무학은 단련실도 있어야하니까. 숫자도 더 많고.'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은 몬스터와 마나가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 헤일로 아카데미라도 무력을 키우는
무학이 우선 순위일 수밖에 없다. 이로인해 문학 쪽에서 예산 문제로 불평불만을 가진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약도와 건물을 번갈아보다가 입구에 쓰여진 '역사관'이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정문은 꽤 잘 관리되었는지 반질반질한 느낌이 드는 나무문이었다.

"오..."

정문을 통과하여 복도로 들어서자마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데다가
복도 중앙에는 물레방아까지 있다.

게다가 복도의 벽에는 역사에 이름을 날린 위인들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는데, 책으로는 봤지만 그림으로는
처음 보는 위인도 다수 존재했다. 특히 위인의 초상화 밑에는 이름과 더불어 간략한 역사적 기록도
적혀있었다.

'각 종족마다 위인이 있구나.'

또한 종족마다 위인을 구분하여 벽에 기재돼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수명이 짧지만 인구수가 가장 많은


인간의 초상화가 많았다. 다른 종족은 손에 꼽을 적도로 적은 편이었으며 심지어 마족은 아예 하나도
없었다.

나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복도를 둘러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엘레나 교수의 사무실로 옮겼다.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은 104 호다.

똑- 똑- 똑-

"엘레나 교수님. 저 아이작입니다. 안에 계시나요?"

104 호와 문 중간에 걸린 팻말을 통해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노크를 하며 이름을


밝히자 문 너머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렀다.

팻말에 '재실'이라는 단어가 적힌 걸 보면 엘레나 교수가 직접 열어주는 듯했다.

끼이익-
"...누구세요?"

아니. 정정하겠다.

문이 열리니 그 뒤에서 웬 좀비 한 마리가 나를 맞이해줬다. 진짜 좀비는 아니지만 그에 견줄 정도로


몰골이 초췌한 사람이었다.

다크서클은 줄넘기를 할 것처럼 심하게 내려와 있고, 검은색 눈은 썩은 생선 눈깔마냥 죽어있었으며,


피부는 푸석푸석하기보다는 매우 창백했다. 탁한 금발을 똥머리로 묶고 눈꼬리도 아래로 쳐져 있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외양이다.

나는 그 사람과 마주하자마자 뒤로 살짝 주춤거렸다. 뒤로 물러나니 문을 열고 나를 맞이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엘프?'

문을 열며 나를 맞이해준 사람은 엘프였다. 그것도 엘레나 교수와 같은 여성 엘프.

좀비가 친구하자할 것 같은 외관으로 인해 미모가 퇴색되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본연의 아름다움을 감출 수


없었다. 오히려 퇴폐미를 비롯한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중이다.

"...저기요?"

내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 엘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불렀다. 그리고 느릿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기까지.

이에 나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 여기가 엘레나 교수님 연구실이 맞나요?"


"맞는데요오..."

늘어지는 말투와 대답에 재차 연구실을 팻말을 확인했다.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이 확실했다.

아무래도 내 앞의 엘프는 엘레나 교수의 조교인 것으로 추정된다.

"누구 왔니?"

때마침 시기적절하게 연구실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물음에 조교로 추정되는 엘프가
뒤를 돌아보며 피곤에 쩔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에... 아이작이라고 하는데..."


"아! 빨리 들여보내렴."
"들어오세요오..."
"...실례합니다."

왠지 모르게 꺼림칙했지만 일단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문을 열어준 엘프와 눈을


마주치는 건 잊지않았다.

흔히 동태 눈깔로 칭해지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이 약간 무서웠지만 그래도 참을만했다. 이윽고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자 오래 된 책 특유의 퀴퀴한 냄새와 더불어 다양한 서적과, 그리고 종이가 수북히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대부분 역사와 관련된 책들밖에 없었다.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실다운 모습이다.
"왔구나. 이리 앉으렴."

책상에 앉아있던 엘레나 교수가 방긋 웃는 표정으로 나를 반겨줬다. 나는 어색한 심정으로 그녀가 가르킨
응대용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내가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 엘레나 교수도 맞은편에 배치된 소파에 앉았다. 참고로 우리 둘 사이에는
테이블이 배치돼 있었다.

"여기 과자랑 차 있습니다아..."


"아, 감사합니다."

소파에 앉은지 얼마 되지 않아 조교가 먹거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감사 인사를 전하자 그녀는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려는지 몸을 빙글 돌렸다.

"어딜 가는 거니 신디? 내 옆에 앉아."


"저 쉬고 싶은데에..."
"논문 쓰느라 피곤한 건 알겠지만 너에게도 중요한 거야."
"네에..."

신디라는 이름의 엘프는 엘레나 교수의 지시에 흐물흐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하여 나의 맞은편에는
극과 극의 모습을 띄고 있는 두 엘프가 앉게 되었다.

"좀 당황스럽지?"

조금이 아니라 많이 당황스러운데요. 문을 열자마자 반송장이 반겨주니 그 누구라도 당황할 것이다.

그러나 위의 말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으니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엘레나 교수도 내 심정을 눈치챘는지
신디라는 엘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최근 얘가 논문 때문에 몇날며칠 동안 밤을 새웠거든. 지금 상태가 말이 아닐거야."


"알면 자게 해줘요오..."
"그 논문만 다 작성하면."
"불합리하다아..."

둘의 모습을 보니까... 전생의 교수와 대학원생이 생각난다. 내가 직접 대학원생이 된 적은 없지만


인터넷에 그런 밈이 많이 돌아다녔다.

그중 가장 눈에 띈 건 대학원생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걸까.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서 교수의 하인


노릇을 한다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사적인 심부름까지 시킨다고 얼핏 들은 것 같다.

그런 밈 때문인지 몰라도 나 또한 대학원생은 부려먹기 좋은 노예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설마 나도?'

내가 속으로 살짝 걱정하고 있을 즈음, 신디에게 핀잔을 주던 엘레나 교수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소개시켜주자면 얘 이름은 신디. 풀네임은 신디 스카이워커. 25 년 동안 함께 한 내 조교야."


"조교는 무슨 노예잖아요오..."
"입 좀 다물어 주겠니? 얘가 오해하잖아."
"오해가 아니라 진실인데에..."
"그럼 나가."
"죄송합니다아..."
교수와 조교의 관계라기보다는 사이가 좋은 자매 같았다. 엘레나가 정말로 신디를 노예처럼 부려먹었다면
저런 식으로 장난을 치진 않을테니까.

나는 묘하다는 눈길로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불현듯 궁금한 점이 떠올라 질문을 건냈다.

"25 년 동안 조교로 지냈다고요?"


"응. 인간도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특정 기간동안 조교로 일하면서 박사 학위를 따야하잖아? 문학에서
대부분의 조교가 그런 케이스고."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여기에는 석사나 박사 같은 학위 개념이 있는 거였나. 하긴 아카데미와 교수가


있는 마당에 없는 것이 더 이상할 수도 있다.

내가 떨떠름해하는 동안 엘레나 교수는 설명을 마저 이어나갔다.

"그건 우리 엘프도 마찬가지야. 교수 밑에서 조교로 일하면서 학위를 터득해야 하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엘프는 인간보다 배우는 속도가 현격히 느려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야."
"보통 평균적으로 몇 년 정도 걸리나요?"
"몇 년은 무슨,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30 년이야.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자면 약 3~4 년 정도가 되겠네.
게다가 박사, 그러니까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위그드라실' 내에서도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해.
박사논문을 제출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매우 까다롭지."

위그드라실은 엘프들의 나라, 알브헤임의 수도다. 보다시피 북유럽 신화에 나온 것과 명칭이 똑같다.

그나저나 위그드라실 내에서도 심사를 거쳐야 교수가 될 수 있다는 걸 보면 그 기준이 매우 빡센 모양이다.

"부럽다아... 인간은 길어도 5 년밖에 안 걸린다니..."


"넌 엘프 기준으로도 배움이 느려서 5 년으로는 택도 없단다. 어쨌던 간에 내가 널 부른 이유는 하나야."
"뭔데요?"

나는 살짝 긴장하며 엘레나 교수가 어떤 부탁을 꺼낼지 기다렸다. 얼토당토 않는 부탁이라면 당연히


거절할 거다. 당장 원고를 쓸 시간조차 벅찬데 다른 일에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동안 엘레나 교수는 과자를 우물거리는 신디의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입을 열었다.

"얘한테 글 쓰는 법 좀 가르쳐줘."
"네?"
"네에...?"

나는 물론, 가만히 있던 신디마저 당황스러운 눈길로 엘레나 교수를 쳐다봤다. 엘레나 교수는 어깨
올렸던 손으로 신디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얘는 다 좋은데 글을 엄청 못 쓰거든. 석사논문 하나 작성하는데도 최소 5 년이 걸리더라고. 심지어


그것마저도 내가 보기에는 영 아니었어."
"아파요오..."

신디가 웅얼거려도 엘레나 교수는 그녀의 볼을 꼬집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얘한테 작문법을 가르치긴 해야겠는데 나는 나대로 바쁘거든."


"다른 학생을 부르면 되지 않아요?"
"그러려고 했는데 때마침 눈에 띈 사람이 바로 너야. 사실 얘가 본격적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한지는 얼마
안 됐어."

그럼 20 년 동안 대체 뭘 한 거지? 엘프가 인간 기준으로 배움이 느리다지만 이렇게 보면 조금 심한 것


같기도하다.
물론 배우는 게 느린 거지, 기억력이 낮다는 건 절대 아니다. 마족보다 더 오랜 기간 사는 엘프인만큼 몇
십 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다 기억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 기억력은 좋지만 응용력은 떨어진다는
의미다. 물론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순간부터 달라지겠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천천히 곱씹다가 의문을 하나 둘 씩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다른 조교는 없어요? 애초에 조교가 한 명밖에 없는 건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요?"


"전부 다 졸업하고 지금은 교수가 됐지. 엘프 조교는 얘가 처음이야. 그리고 역사관에 있는 교수들
대부분이 내 제자인걸? 걔들한테 부탁하려니 차마 바쁜 시간을 뺏는 것 같아서 참았지."
"이제 막 입학한 저보다 작문 능력이 뛰어난 학생이 있을텐데?"
"내가 보기에는 네가 가장 뛰어났어. 100 년 동안 교수로 일하면서 봐온 학생이 몇 명인데 그것도
모르겠니?"

엘레나 교수는 내 의문에 하나하나 친절하게 대답했다. 대부분 합리적이고 납득이 갈만한 이유들이라
나로서는 할 말이 없어졌다. 특히 100 년 동안 본 학생들 중에 내 작문 능력이 제일 뛰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이가 없었다.

잠시 후, 엘레나 교수는 나에게서 더이상 질문이 오지 않자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올리더니 약간


실망스럽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싫다면 안 해도 돼. 나한테는 강제할 권한이 없으니까. 그럼 이건 어떨까?"

그녀는 잠깐 말을 흐리더니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마치 이것 보라는 듯이 과장스러운 행동이었다.

이에 내가 의문을 가졌을 때 즈음, 엘레나 교수가 팔을 펼친 채 자랑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는 서적과 논문 대부분이 내가 교수로 일하면서 모으거나 쓴 것들이야. 인간와 엘프의 관점으로
쓴 역사 뿐만 아니라 드워프, 수인, 심지어 마족도 있지."
"마, 마족이요? 마족은 어떻게...?"
"우연히 연이 닿은 마족이 있었어. 그 사람에게 최대한 뽑을대로 뽑았지. 지금은 아쉽게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말이야."

뒤이어 그녀는 상체를 살짝 내밀며 은근한 목소리로 재차 권유했다. 동그란 안경 너머 탐욕의 빛이 서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네가 신디를 도와준다면 여기 있는 책 모두 빌려줄 수 있어. 연구실도 마음대로 들락날락거리게


해주고."
"... ..."
"어떻게 할래? 참고로 네가 여유있을 때만 도와줘도 상관없어. 우리는 너희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시간의 개념이 매우 길거든. 한 달에 한 번 꼴이라도 상관없다 이 말이야."

더이상 말하면 뭐하겠나. 답은 정해져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엘프는 인간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배움의 속도가 지극히 떨어진다는 의미를.

"잘 부탁드립니다아..."

이 신디라는 엘프가 내 기준으로 얼마나 빡통대가리인지를.


"그럼 기념으로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까? 혹시 저녁은 먹었니?"
"아뇨. 아직 안 먹었습니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 19 화 >

엘레나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내 일상은 약간이마나 변화했다. 원래 모든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거나 대충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향했는데 요즘에는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에 방문했다.

그리고 오늘은 모든 수업이 종료되는 금요일. 나는 제논 일대기 8 권의 원고를 부모님에게 우편으로 부친


뒤에 곧바로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로 들어가기 전에 노크를 하는 건 잊지 않았다.

잠시 후, 문을 열고 연구실로 들어서니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나를 반겨줬다. 문을 열자마자 책상에 앉아


열심히 무언가를 쓰는 중인 신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신디."
"안녀엉..."

아무튼 연구실에 들어서면 엘레나 교수는 가끔씩 출장 때문에 자리를 비운 경우가 많지만, 신디는 아니다.
언제나 초췌한 주검 같은 모습을 나를 맞이해줬다. 나 또한 그녀의 외모에 익숙해져서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늘은 어떠세요? 아직도 피곤해요?"


"조금은 나아졌을지도오...? 잘 모르겠어..."

저 늘어지는 말투는 고칠래야 고칠 수 없는 모양이다. 하기야 몇 달도 아니고 거의 몇 년간 피곤에 찌들어


있다고 들었는데 고치기는 어렵겠지. 인간이었다면 당장 과로사로 사망했어야 정상인데 엘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는 모양이다.

나는 책상에 앉아 논문을 작성 중인 듯한 신디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옆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논문을


쓰는 방법은 모르지만 엘레나 교수는 그것보다는 작문 자체를 도와달라고 했다. 그러므로 얼마나 심각한지
한 번 지켜봤는데...

"...신디?"
"으응...?"
"잠깐 쓰는 거 멈추고 신디가 쓴 거 한 번 읽어볼래요?"
"왜에에?"

그만큼 심각해서 그렇습니다.

나는 위의 말을 꾹 억누르며 신디에게 재차 권유했다.

"한 번 읽어보세요. 여기 중반부부터."


"으응... 종족 전쟁 이후 발생한 인간들의 전쟁은 인간들의 어두운 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며 미네르바 제국이 현재까지 강대국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 원인이었고 현재까지도 많은 나라가
독립을 외치고 있는 이유였으며 미네르바 제국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메커튼 왕국은 주변 왕국과
동맹을 맺어..."
"그만."

대략 저렇다. 가독성이고 나발이고 개판 5 분 전인 수준이다.

'내 첫 작을 보는 것 같네...'
전생에서 필력 하나는 좋다고 칭찬받은 나지만 처음부터 좋았던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첫 작은 이게
무슨 스토리야?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가독성이 개판이었다. 현재 신디의 논문도 글을 처음 쓰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가독성을 위해 중간중간 문장을 끊지 않고 하나로 잇거나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실수. 초보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 중 하나다.

나는 본질적인 문제도 잘 알았겠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디와 마주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신디. 신디는 이게 무슨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요?"


"가는데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드러내는 그녀. 나는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신디의 상황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내가 이 세상의 소설이 수능 영어 문제 같다고 까내렸지만 논문은 예외다. 논문은 연구자가 본인이 연구한
걸 통해 작성한 일종의 기록이니 전문용어가 나와도 상관없다.

하지만 논문은 연구자가 다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명확하게 전달해야한다. 내가 논문을 쓰는


방법을 모르지, 논문이 어떤 목적을 갖고 쓰이는지는 명확하게 알고 있다. 최소한 신디처럼 마구잡이로
쓰면 절대 안 된다.

나는 어디서부터 갈피를 잡아야할지 고민하다가 혹시나 하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신디. 엘레나 교수님이나 다른 사람의 논문을 읽어본 적이 있어요?"


"많은데에..."
"그런데 이렇게 쓴다고요?"

엘레나 교수의 도움으로 그녀가 쓴 논문을 한 번 읽은 적이 있다. 중간중간 전문용어가 나와서 곤혹을
치뤘으나 여태까지 책을 많이 읽은 덕에 무리없이 정독할 수 있었다.

신디는 내 황당하다는 질문에 눈을 느릿느릿 깜빡였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게 쓰려고 해도오... 계속 쓰다보면 읽은 논문이랑 비슷해져서어..."


"나중에 평가를 받으면 비슷하다고 거부당한다?"
"응..."

기억력은 좋지만 응용력이 뒤떨어지는 편인건가. 인간인 내 기준으로 보면 멍청이에 불과하지만 엘프의
관점으로 보자면 신디는 지극히 정상적이다.

이전부터 말했듯이 인간은 다른 종족보다 태생적으로 힘과 능력이 부족하지만, 그걸 메꿀 수 있는 '


습득력'과 '적응력'이 존재한다. 종족 전체를 두고 비교하자면 엘프가 정상적이고 인간이 비정상적인
것이다.

일례로 마법이 있는데, 전에 말했듯이 마법은 본디 역사적으로 신에게 선택받은 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이라며 찬사받았다. 당장 500 년 전 종족 전쟁까지만 해도 마법은 오직 엘프나 마족, 그리고
극소수의 인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3000 년 전의 악마 전쟁? 그때 인간이 마법을 썼다는 기록은커녕 극소수의 엘프만이 사용했다는 말밖에
없다. 500 년 전 종족 전쟁이야 말로 본격적으로 인간에게 마법이 흘러들어간 시점이다.

아무튼 간에 인간은 500 년도 채 되지 않아 배경과 재능, 그리고 노력만 뒷받쳐준다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변모시켰다. 장수종인 엘프의 입장에서는 실로 무시무시한 발전 속도가 아닐 수 없다.

'갑자기 궁금해지네. 왜 인간은 배우는 게 빠른걸까?'

인간들만이 존재하는 세상, 그러니까 지구에 있을 때는 당연시 여겼던 부분이다. 창작물에서도 인간은
다른 종족보다 배움이 빠르다는 설정이 대부분 존재했다.

하지만 정작 이 세상에 환생하고나니까 막상 궁금해졌다. 인간은 어째서 다른 종족보다 무언가를 배우는


게 빠른걸까?

내가 머릿속으로 그 의문을 되풀이하고 있는 도중에 신디가 늘어지는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언제 가르쳐 줄 거야아...?"


"아, 네네. 엘레나 교수님이 가르쳐주라고 했으니 가르쳐드려야죠. 하나만 질문하고요."
"그게 뭔데에?"
"신디는 작문을 배운 적이 없으세요?"

이미 기본적인 지식부터 알려줘야하지만 혹시나 해서 물었다. 대충 배웠다고 하면 그나마 희망이


보일테니까.

신디는 내 질문에 눈을 느릿느릿 깜빡거리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작문을 가르쳐 준 사람은 몇 명 있었지이..."


"엥?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엘레나 교수님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건 도와준 사람이고, 돈 받고 가르쳐 준 사람은 몇 명 있었어..."

이어서 그녀는 전보다 착잡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귀까지 아래로 추욱
늘어졌다.

"전부 더이상 못 가르치겠다고 도망갔지마안..."


"... ..."
"내가 좀... 인간도 그렇고 엘프 기준으로도 둔한 편인가 봐아..."

왠지 제대로 낚였다는 기분이 든 건 결코 착각이 아닐 것이다.

*****

제논 일대기는 여태까지 늘 그랬지만 특히나 7 권은 발간되자마자 전보다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결정적인


순간에 저자가 이야기를 끊어버려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에 애태웠기 때문이다.

그 영향으로 미네르바의 황태자는 당장 저자를 잡아다가 황궁에 가둬버리겠다거나, 황녀는 다음 권을


신속히 발간하라고 압박하는 등. 여러모로 큰 소동이 벌어졌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서서히 멎어들어 다음
권을 기다리자는 말이 나왔다. 구독자들도 마음을 진정시키고 본업에 집중하여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로부터 제논 일대기 7 권이 나오고 약 한 달 뒤,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8 권이 출간된다는 소식이


신문에 기재되었다. 다만 약간 눈길이 끄는 문장이 하나 존재했다.

[귀족에게는 자칫 불쾌할 수도 있는 장면이 포함돼 있습니다.]

제일 먼저 원고를 검토한 출판사 쪽에서 위의 문구를 실은 것이다. 그 문구에 귀족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평민도 의문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장면이길래 평민도 아닌 귀족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는 문구가 있는 걸까.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제논 일대기 신작이 발간되고나서야 알 수 있었다.
[백성 위에 귀족이 있고, 귀족 위에 왕이 있으며, 왕은 국가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오. 하지만 그
국가를 지탱하는 건 엄연히 백성이지. 즉, 왕이건 귀족이건 백성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라오.
헌데 크로스트 백작. 그대는 그 국가의 근간을 단지 거슬린다는 이유로 모함하는 중이지. 정말이지 참된
귀족의 행실이구려. 그렇지 않소?]

소설 속 인물이, 그것도 같은 귀족층이 말했다지만 너무나 신랄한 비판이었다. 비록 허구의 이야기라


해도 그 이야기를 창작하는 건 오로지 작가의 몫이다.

여태까지 귀족의 만행을 풍자하거나 비판하는 책 또는 그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나 제논 일대기는


너무 직설적이었다. 제논 일대기의 파급력을 생각하면 이례적이지는 않아도 상당히 위험한 발언임은
틀림없었다.

-귀족층의 어두운 면을 단적으로 드러낸 장면.


-현실에서도 귀족이 평민을 겁박하는 사건은 많다. 아무도 모르게 은폐되었을 뿐.
-역사는 되풀이 되는 법. 이대로 가다간 '제이로스 혁명'과 같은 사건이 다시 한 번 벌어질 것이다.

실제로 이 세상에 지구의 '프랑스 혁명'과 흡사한 사건이 있다. 예로부터 미네르바 제국의 영원한
숙적이라 평가받는 테르스 왕국에서 발발한 '제이로스 혁명'이다. 제이로스라는 위인이 주도자였기에
편의상 제이로스 혁명이라 칭해지고 있다.

그 한 번의 혁명으로 인해 테르스 왕국이 휘청거렸으며 수많은 부패 귀족이 끌어내려졌다. 비록 혁명


자체는 성공하지 못 했으나 그 여파는 실로 무시무시하여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런 중대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이 평민을 깔보는 풍토는 여전했다. 오히려 더
악랄하게 은폐시켜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못 하도록 철저하게 막는 경우가 허다했다.

-귀족과 평민은 태생부터 다른 존재다. 아무리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도 이런 모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역시 소설일 뿐. 제논 같은 평민이라면 귀족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 작위를 받았을 것.

이탓에 몇몇 귀족들이 8 권의 초반부에 대해서 강도높은 비판을 꺼냈다. 다만 소수의 귀족만 비난에
가까운 질타를 쏟아붓는 중이고, 대부분의 귀족들은 씁쓸하다는 반응만 보이고 있다.

이러한 수많은 반응들에 한 평론가는 이리 평했다.

-이번 이야기를 정독하고 화를 내는 귀족들은 대부분 평민을 노예 취급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 수인은
대놓고 노예 취급하고 있지 않을까? 정말로 귀족다운 마인드라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묵직한 팩트 한 방에 비난과 질타를 쏟던 귀족들의 입이 꾹 닫히게 되었다. 진풍경도 이런 진풍경이


없었다.

어쨌거나 8 권의 초반부로 인해 귀족 계층이 존재하는 국가는 잠시 시끌해졌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주인공인 제논을 위기에 빠뜨렸던 귀족은 결국 모든 직위를 박탈당한 채
투옥당했고, 제논은 잠깐의 휴식을 위해 드워프들의 나라로 향했다.

제논 일대기로서는 인간의 나라가 아닌, 최초로 다른 종족의 나라로 향하는 것이었기에 많은 구독자들이
기대했다. 당연하지만 그중 드워프들이 제일 큰 기대와 걱정을 품고 있었다.

"으음..."
"어때요? 한 번 만들어 볼만하지 않아요? 여기 대략적인 설명이랑 그림도 있잖아요."

풍성한 회색 수염과 괴팍해 보이는 얼굴, 마지막으로 짜리몽땅한 키를 가진 드워프가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딱 얼굴만 뒤덮을 정도로 수염을 기른 젊은 드워프가 흥분한
표정으로 재촉하는 중이었다.
회색 수염의 드워프는 옆에서 재잘거리는 드워프의 재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에만 집중했다. 현재
그가 보고 있는 건 이번 달에 발간된 제논 일대기 8 권의 중후반부에서 등장한 그림이다. 중간에 읽다가
떨어지지 않게 접착제 비슷한 걸로 붙여져 있다가 뒤늦게 발견했다.

뒤이어 회색 수염의 드워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책에서 언급된 그림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 철덩어리의 이름이 증기 기관차라고?"


"네!"
"그런데 이 거대한 철덩어리가 특수한 기관을 통해 움직인다? '철로'라는 특수한 길 위에서만? 심지어
앞부분만 아니라 뒤에 마차처럼 여러 물자를 실어서?"
"네!"
"바퀴를 움직이는 원리가 주전자에 물을 넣고 끓일 때 뚜껑이 달그락거리는 현상을 극대화시킨거고?"
"네!"

회색 수염의 드워프가 질문할 때마다 해맑게 답하는 젊은 드워프. 이에 회색 수염의 드워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아들아? 말 같지도 않는 소리는 하지 마렴. 소설은 소설로 봐야지 현실에 대입하면 머리가
아프단다. 우리는 그냥 더 좋은 무기나 제작하면 돼."
"하지만 아버지. 현실성은 있잖아요.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아들의 물음에 회색 수염의 드워프는 손을 휘적거리며 가당치도 않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실성이고 나발이고 이 아비는 늙어서 이런 걸 만들 여력이 없다. 차라리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아서 다 함께 만들던가. 그리고 여기서는 석탄이라고 하던가? 그 돌덩이는 차고 넘치니 알아서 해 봐.
우리는 까만 돌덩이보다는 '마석'이 더 필요하니까."
"그럼 안 도와주실 거예요?"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는 없지만 돈이라면 지원해줄 수 있다. 인력은 너 같이 무모한 바보들이
널려있을텐데 찾는 건 쉽겠지."
"알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모으겠습니다!"

젊은 드워프는 활기차게 대답하며 대장간 밖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회색 수염의 드워프는 아들의 열정적인
모습에 너털웃음을 흘렸다가 다시 한 번 종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림의 퀄리티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외관은 명확했다. 거기다 책에는 설명까지
붙여져 있어서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알 수 있다.

'상상력 하나는 대단하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지?'

장인의 종족이자 창작의 대가라고 불리는 드워프, 더구나 그 드워프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회색 수염의
드워프조차 감탄할 수밖에 없는 발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법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라고 단정짓는
현 상황에서 이런 '기계'가 등장한다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특히 '인간'이 가장 큰 수혜를 입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태생적인 능력이 부족해도 습득력과 적응력이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니까. 어쩌면 증기 기관차가 발명되는 순간 마법 대신 기계로 노선을 틀
수도 있다.

'정말로 이 놈은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오기라도 한 건가?'

회색 수염의 드워프는 진심으로 그런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 20 화 >
제논 일대기 8 권이 출간된지 대략 보름이 흘렀을 때였다. 오늘도 여지없이 상쾌한 하루를 시작하기 전,
나는 숙소 문 앞에 놓여있던 신문을 가져왔다.

신문은 총 두 종류였는데 하나는 호이토르 신문사고, 다른 하나는 투틀리 신문사의 것이다. 호이토르의
신문사는 주로 인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투틀리 신문사는 종족 구별없이 광범위하게 소식을 알려준다는
차이점이 있다.

하나가 아니라 두 신문사의 신문을 구독하는지라 구독료가 조금 많이 나가긴해도 큰 문제는 없다.


부모님이 쓰라고 주신 생활비는 차고 넘쳤으니까.

"음..."

나는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끝낸 뒤 신문을 펼쳐 내가 원하는 소식을 찾기 시작했다. 모두 알겠지만 내가


원하는 소식은 이번에 출간된 제논 일대기 8 권에 대한 것이다.

우선적으로 인간쪽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호이토르 신문사부터 읽었는데, 신문을 펼치자마자 내가 바라는
소식이 첫 장부터 기재돼 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앞으로 내밀며 어떤 소식이 실렸는지 체크했다.

[수많은 구독자의 마음을 애태웠던 제논 일대기.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가지각색의 반응들이 나열돼 있었다. 이때다 싶어 직설적으로 비난을 하는 평론가도 있는
반면, 씁쓸한 현실을 정확히 바라보며 평가를 내린 평론가도 많았다. 귀족 비판은 이들에게 상당히
민감하고 매콤한 주제일테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래도 딱히 큰 문제는 없는 듯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걸 넣어도 될까? 싶었으나 레오르트의 이야기를
듣고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누군가 작정하고 나를 조지기 위해 찾는다면 곧바로 숨어버리거나 황실에
몸을 의탁하면 그만이다.

'뭐, 어두운 면만 적은 건 아니니까.'

제논을 함정에 빠뜨렸던 크로스트 백작이 귀족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인물이라면, 케이 백작은 그와
반대로 귀족의 밝은 면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케이 백작을 향한 평가도 꽤 많은 편이었다. 대부분 케이 백작의 모습이야말로 귀족이


지향해야할 덕목이라 칭찬하고 있다.

'제이로스 혁명이 없었다면 좀 위험했겠지.'

이 세상에서도 지구의 프랑스 혁명과 유사한 사건이 존재한다. 그때문인지 몰라도 귀족들이 '대놓고'
평민을 겁박하거나 차별하는 경우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귀족이 평민을 깔보는 악습은 여전하다지만
아직까지 그런 상황은 못 봤다.

하물며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는 말처럼, 개념이 착실하게 박혀있는 귀족들도 많다. 당장 멀리
가지 않아도 마리의 가문인 레킬리스 공작가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하고 있다. 황제 다음으로 높은
공작이 그런 모토로 살고 있는데 그 아래의 귀족들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나는 각국의 반응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페이지를 넘겼다. 호이토르 신문사는 미네르바 제국에 뿌리를
둔 회사였기에 다른 나라의 평가는 뒷부분에 있다.

"음..."

역시 예상대로 테르스 왕국이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중이다. 테르스 왕국은 제이로스 혁명이 발발한
나라이니 이런 이야기에는 더욱 예민하겠지.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거의 다 크로스트 백작을 신명나게 까고 있다는 거다. 평민은 물론이고 귀족과
심지어 왕족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전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크로스트 백작의 최후가 꼴 좋다고
즐거워하는 중이다.

'테르스 왕국은 평민이랑 귀족 사이의 차이가 별로 없다고 했지?'

테르스 왕국은 입헌군주제에 가까운 통치 방식을 실행 중이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 통치하지 마라는 의미에 가깝다. 한바탕 홍역을 치뤄서인지 귀족이 차별을 저지르면 엄벌에
처해진다.

나는 신문을 계속해서 넘기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강의 들으러 갈 시간이다. 현재 호이토르


신문만 다 읽고 투툴리 신문은 아직 페이지도 넘기지 않았다.

'그냥 수업이 다 끝나고 읽어야겠다."

나는 신문을 침대 위에 두고 강의실로 향할 준비를 갖췄다. 밖으로 나가기 전에 강의용 노트인지 확인하는


건 잊지 않았다. 그때처럼 치명적인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뒤이어 문 밖으로 나가자 상쾌한 아침 공기가 나를 맞이해줬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강의실로


나아갔다.

'그나저나 아카데미에서 제논 일대기는 어떻게 구매하지?'

제논 일대기가 발간된다는 소식이 나오자마자 서점 앞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인파가 몰려든 적이 있다.


그걸 보고 나서 경악보다는 황당해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 지금즈음이면 싹 쓸어갔지
않았을까.

부모님은 초판이 있으니 읽는데에 지장이 없을테고, 누나와 형이 문제다. 당장 작가 본인조차 초판을
제외하면 책을 구매할 수 없는 실정인데 그 두 명은 어떻게 구할지 의문이다.

'이때까지 어떻게 구매했는지 신기하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다양한
이야기가 귀에 속속 들어왔다.

"이번에 나온 8 권 봤어?"
"당연히 봤지. 조금 씁쓸하긴 해도 예상대로라더라."
"평민이 그런 업적을 세웠는데 견제를 안 할 귀족은 없겠지.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야. 너 이번에 나온 거 샀어? 샀으면 나 좀 빌려주라."
"싫어. 나도 아직 다 못 읽었단 말이야."

이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을 수 있는 대화 주제다. 하도 많이 듣다보니까 이제는 가볍게 넘긴다.


그보다는 지인들이 자리에 앉아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대충 빈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강의실을 두리번거렸다.

"세실리 님. 세실리 님은 이번에 나온 제논 일대기 8 권을 읽으셨나요?"


"아뇨. 아직 구매하지도 못 했어요."
"아. 그러시구나. 제가 빌려드릴 수 있는데 빌려드릴까요?"
"괜찮아요. 내용이 궁금하지만 참을 수는 있어요."

당장 눈에 들어온 얼굴은 세실리밖에 없었는데 그녀의 곁에는 수많은 여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세실리는 자신한테 붙은 여학생들의 질문 공세에 일일이 대답하면서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무래도
현재 상황이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나는 그녀의 곁에 리나가 없다는 것에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뒤늦게 따로 떨어져 앉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 리나가 앉아있는 곳을 쳐다보니 그녀의 곁에도 다수의 여학생이 몰려있었다.

"리나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너무 막 나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음... 글쎄요?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당당할 수 있죠. 저라면 제논 같은 영웅을 그대로
포섭하겠지만요. 실제로 그런 사례가 빈번하고."
"그럼 제논이 왜 귀족 작위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케이 백작도 자기 기사단에 들어오면 귀족이 될
수 있을 거라 권유했잖아요."
"제논 성격상 귀족보다는 자유로운 모험가의 신분이 낫다고 판단한 거겠죠."

리나는 쩔쩔매는 세실리와 달리 조곤조곤하면서 우아한 말투로 여학생들을 상대하는 중이다. 마치 어른이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모습이라 살짝 웃음이 새어나올 뻔했다.

'왜 따로 떨어져 앉은거지?'

세실리와 리나는 항상 같이 붙어다니는 편이다. 저 둘이 떨어져 있는 모습은 적어도 내 눈으로는 보지 못


했다.

하지만 지금은 따로 찢어져, 그것도 멀찍히 떨어져 있는 상태다. 평소 붙어다니던 둘의 모습만 보았던
나로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싸우기라도 한 건가?'

나는 여학생 무리를 상대하느라 힘을 빼고 있는 둘을 번갈아보다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당장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그런데 마리는 어디 갔...'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누군가 내 옆에 앉으며 밝게 인사했다.

"안녕!"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마리가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나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나 또한 손을 흔들며 대충 인사했다.

"...그래. 안녕."
"뭐야. 반응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원래 강의실에 일찍 오는 편인 그녀가 어째서 이 시간에 오는 건지 약간 의아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세실리와 리나가 따로 떨어져 앉아있는데다 그들의 주변에 여학생들이 우글우글 몰려있으니 내 옆에 앉은
것일 수도 있다.

그동안 마리는 특유의 활기찬 목소리로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주말동안 뭐 했어?"
"책 읽었어."
"무슨 책? 설마 제논 일대기 8 권?"
"아니. 역사책."
"엑. 역사책?"
내 대답을 들은 마리가 차마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마리는 역사라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한다.

그에 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재미없는 걸 왜 굳이 찾아서 읽어? 제논 일대기도 있는 마당에."


"난 재밌던데."

게다가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에는 여태까지 접하지 못 했던 역사책과 논문이 쌓여있다. 요즘에는 그것들을
읽는 낙으로 살고 있다.

신디에게 작문을 가르치는 건 암 걸릴 것 같았지만. 꼭꼭 씹어서 소화까지 시켜줘야 겨우겨우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신디의 이해력은 파멸적이다. 그래도 열정이 없는 건 아니라 차마 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법이니까. 그나저나..."

마리는 뒤를 살짝 돌아보며 말을 흐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세실리, 그리고 리나였다.

뒤이어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못 말린다는 뉘앙스로 입을 열었다.

"쟤들은 아직도 저러네."


"무슨 일 있었어?"
"아. 넌 모르겠구나. 쟤들 어제 카페에서 싸웠어."

역시 싸웠구나.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놀라운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전히 여학생들에게 둘러쌓여있는 리나와 세실리를 번갈아보다가 마리에게 물었다.

"왜? 뭐 때문에 싸웠어?"


"나도 몰라. 나도 우연히 지나가다가 본 거야."
"흠..."

저 둘이 싸울만한 주제가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무튼 너 이번에 발간된 제논 일대기 신권 읽었어?"

내가 골똘히 생각하는 도중에 마리가 살짝 들뜬 억양으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그녀와
마주했다.

그녀의 눈매는 살짝 접혀서 히죽거리는 인상이 되었는데, 왠지 모르게 재수없게 느껴졌다. 마치


우월감이라도 느끼는 것 같달까. 이에 내가 한 쪽 눈썹을 치켜뜨며 대답했다.

"아니. 너는?"
"후후후."

대답은 하지 않고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그녀. 나는 그 반응을 보자마자 마리가 8 권을 구매했다라는


걸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마리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내가 예상하던 대답이 나왔다.

"당연히 구했지. 그것도 이때까지 못 샀던 것까지. 아빠가 힘을 좀 써줬거든."


"그러냐. 불법을 저지른 건 아니지?"
"설마 그럴리가. 단지 인맥을 동원했을 뿐이야. 불법은 절대 아니라고?"
고작 책 몇 권 사겠다고 인맥을 동원할 필요가 있나. 그것도 황제 다음 가는 권력을 지닌 공작 가문이.

내가 속으로 어이없어하는 동안 마리가 약올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부럽지?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 네가 정말 원한다면 빌려줄 수도 있어."


"됐어.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중에 사면 돼."

무엇보다 내가 작가란다. 내가 손을 내저으며 퉁명스레 대답할 때였다.

마리는 내 대답을 듣고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그렇게 나오겠다면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야겠네."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래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을 갖는 동안 마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여나 다른 사람이 듣지 않을까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나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나는 무럭무럭 차오르는 의문을 가슴에 안고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었다. 그러자 마리가 순간적으로 당황하더니 조용히 소리쳤다.

"야, 야! 얼굴 말고 귀를 대라고. 귀!"


"아."

그제서야 얼굴을 돌려 귀를 보여줬다. 마리는 한숨을 내쉬더니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양손을 그러 모아


내 귀에 갖다 대었다.

"이거 듣고 놀라지 마. 실은 우리 아빠가 정말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알려줬거든."


"사실? 공작께서 편지라도 보내신 거야?"
"응. 그 편지에 뭐라고 적혀있었냐면..."

마리는 잠깐 말을 멈칫거리더니 다시 한 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어서 내 귀에다 소근거렸다.

"우리 아빠가 제논 일대기 저자를 찾았데."


"... ..."

그 말 하나로 심장이 아래로 덜컹 떨어지는 기분을.

"심지어 우리 집에 초대한다던데? 저자도 흔쾌히 수락했다고 했어."


"...뭐?"

바로 이어진 그녀의 설명에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서.

< 21 화 >

나는 마리가 알려준 정보를 듣고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제논 일대기의 작가가 바로 나인데 그녀가
어째서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잠깐이나마 블러핑 또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하면 블러핑일 가능성이 적은 게, 정말로 거짓말을 하려고 했다면 지금처럼 은밀히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마리는 정말로 중요한 정보라고 판단하여 나에게 귀를 빌려달라고 한 것이다.

'...뭐지?'
홍철 없는 홍철팀이라고, 전생에서 유명한 밈이 있다. 모든 건 완벽한데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진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팥없는 단팥빵이 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딱 그 꼴이다. 작가 본인은 바로 코앞에 있는데 이상한 사람을 초대했다고 하니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실수라도 하셨나?'

나는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가 마리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는 자신의 제안을 결코 거부할 수 없을거라
판단하고 있는지 씨익 웃으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일단 다른 의문을 제쳐두고 확인이 우선이다. 나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조용히 물었다.

"...진짜야?"
"응."
"진짜 제논 일대기의 작가라고?"
"그렇다니까. 나 못 믿어?"

믿지 못할 수밖에 없다. 바로 진짜 작가를 놔두고 엉뚱한 사람을 초대했으니까.

하지만 속내를 그대로 말할 수 없으니 최대한 어떻게 된 경위인지 파악하는 게 좋을 듯했다.

"당연하지. 너도 알다시피 제논 일대기가 나오고 1 년이 지났잖아. 그 1 년동안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온갖 추측만 난무할 뿐, 제대로 된 단서는 없었어. 황실에서도 작가를 찾아다녔지만 실마리도
못 잡았다고."
"응. 그렇지."
"그런데 찾았다고? 어떻게?"
"나도 자세한 건 몰라. 편지에는 저자를 찾았고, 우리 저택에 초대할 거라는 말만 적혀있었어. 아빠가
우연히 꼬리를 밟았다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내 원고가 출판사에 도달하는 과정을 떠올렸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버지는 사람을
시켜 원고를 출판사에게 전달한다고 말씀하셨다.

전직 네이비 기사단의 단장이었으니 알게 모르게 인맥도 많으실 터. 어쩌면 그 꼬리가 밟힌 것일 수도


있다. 더군다나 아카데미에 오기 전에 아버지도 지금까지는 잘 숨을 수 있었지만 언젠가는 들킬거라
언급하셨다.

나는 버릇처럼 펜혹을 살살 문지르다가 다른 질문을 꺼냈다.

"사칭일 가능성은 없어?"


"에이. 어떤 미친 놈이 귀족에게, 그것도 황제 다음 가는 공작 가문에게 사칭을 하겠어? 만약 정말
사칭이라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오다 못해 아예 없는거지."
"음... 그건 그래."

정말로 아버지가 실수라도 한 걸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어서 약간 걱정스럽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다고, 오히려 상식을 역이용한 것일 수도 있다. 마리의 말마따나 감히
공작에게 사기 칠 사람은 없을테지만, 가끔씩 한탕 벌기 위해 자기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하는 사람은
널려있다.

'일단 사칭일 가능성은 높은데...'

작가를 찾았다는 말만 했으면 모를까, 작가를 저택에 초대한다고 말했으니 사칭 쪽에 무게가 쏠린다.
그러므로 집에 편지를 발송하여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혹시 모를 최악의 수도 염두하는 것이 좋다.
나는 모든 생각을 정리한 후 콧숨을 길게 내쉬었다. 뒤이어 마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응?"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거야? 나한테 뭐 부탁할 거라도 있어?"

주제는 다시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왔다. 마리가 저런 극비 정보를 알려줄 정도라면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을 터.

마리는 내 질문에 순간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배시시 웃었다. 자신만만했던 표정은 어디 가고


쑥쓰러움만 남았다.

"...제안은? 받아줄 거야?"


"무슨 제안?"
"작가가 저택에 올 때 너도 데려가줄게. 너도 제논 일대기의 팬이잖아. 친필 사인이라도 받아놓으면
좋지."

친필 사인이라... 그러고 보니 전생에서도 내 고유의 사인은 없었다. 있어봤자 서명할 때 대충 휘갈기던


사인밖에 없다.

하지만 마리에게 들으니 진지하게 사인의 필요성을 느꼈다. 적어도 지금 같은 상황, 그러니까 사칭범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원고부터는 친필 사인을 넣는 게 좋을 듯싶다.

'고작 친필 사인 하나로 추적할 수는 없겠지.'

그건 뛰어난 과학 기술력을 갖춘 지구에서조차 힘든 일이다. 설령 마법이 있더라도 이런 사소한 일에


사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쨋거나 각설하고,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정했다. 사칭범인지 아닌지 확실치는 않지만
적어도 상판떼기는 보고 싶다.

"알았어. 원하는 게 뭐야?"

마리는 내 물음에 부끄럽다는 얼굴을 유지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한테 역사 좀 가르쳐 줄 수 있어?"


"역사?"
"응."
"갑자기 왜? 너 역사 싫어하잖아."
"그게 있지..."

마리가 꺼낸 상황은 대략 이렇다.

모두들 알다시피 다음 학년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특정 점수가 필요하다. 그래서 마리도 역사를 포함한
몇몇 전공을 제외시키고 본인이 관심있는 전공에 집중하는 중이다. 가문에서 배운 지식을 복습하는
개념이라 그녀에게는 나름대로 쉬운 편이라고.

허나 가문에서 편지가 온 이후로는 상황이 급변했다. 바로 마리의 아버지, 그러니까 레킬리스 공작이
그녀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역사 점수를 최소한 90 점 이상을 받으라는 조건. 그게 아니라면 앞으로 제논 일대기를 읽을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라고 하셨다.
다른 전공을 잘 하면 되는 것을 어째서 역사만 콕 집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다음에 이어진 마리의
설명을 듣고 납득할 수 있었다.

"우리 레킬리스 가문은 역사를 중요시 여기는 가문이야. 과거의 잘못에서 현재를 바로잡고, 미래의
주도권을 쥐어잡을 수 있다고 믿거든. 그때문에 옛날부터 역사 교육을 시키는 편이지."
"선대부터 이어진 이념이야?"
"응."
"흐음..."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개념이 알차게 박혀있는 건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레킬리스 가문은 그 이상으로
현명한 가문이다. 미네르바 제국이 건국된지 수 백년이 지났음에도 건재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대신 가정 교육은 썩... 좋은 평가를 내리긴 어려울 것 같다. 마리가 역사를 싫어하는 이유가 아마
반항심에서 발로한 것이 아닐까. 전생에서도 아이들이 공부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부모님의 강압
때문이다.

이에 나는 내 추측이 맞는지 마리에게 질문을 날렸다.

"네가 역사를 싫어하는 이유가 그때문이야? 가문에서 맨날 달달 볶아서?"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그런 게 있어."

마리가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보던지 말던지 나는 내 할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학생이 학생을 가르쳐도 돼? 나는 딱히 상관없거든. 복습 개념으로 하면 충분해서."


"아마 부정 행위가 아니라서 괜찮을 걸? 정 안 되면 몰래 몰래 하면 되지 뭐."
"뭘 몰래 한다는 거야?"

우리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낯익은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뭇 남성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뇌새적인 목소리다.

그에 나는 물론 마리도 목소리가 들린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뒤로 고개를 돌리니 언제 왔는지 모를


세실리가 뒷자리에 착석해있었다. 또한 눈매를 반쯤 접은 채 장난기가 가득 채워진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는 중이다.

나는 언제 왔는지도 모를 세실리에 떨떠름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전에. 너희 뒷자리가 비어있길래 바로 왔지."

세실리의 대답을 듣자마자 리나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리나의 주변에는 아까부터 재잘재잘
떠들던 여학생들이 주루룩 앉아있었다.

분명 세실리의 곁에도 꽤 많은 학생이 있던 걸로 아는데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의문이다.

"그나저나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줄래? 뭘 몰래 한다고?"


"어..."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마리의 눈치를 봤다. 마리는 불편하다는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중이었다.
리나라면 모를까, 평소 세실리와는 괜찮게 지냈던 그녀였기에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묘하게 바뀌 분위기로 인해 내가 쉬이 대답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 하고 있을 때, 마리가 턱을 괴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별 거 없어. 아이작이 내 역사 공부 도와주기로 했거든."
"역사? 마리는 역사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

세실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을 표했다. 그녀도 마리가 역사를 싫어하는 걸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 물음에 마리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살짝 낮아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가문에서 역사 점수 잘 받아놓으라고 하셨어. 90 점 이상 못 맞추면 제논 일대기는 앞으로 영영 못


읽을 거라고."
"아하. 그래서 아이작한테 부탁한거야? 아이작은 역사에 대해서 잘 아니까."

마리도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긍정을 확인한 세실리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요사스럽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흠칫거렸다.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수의 눈빛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무언가 불안했다.

"그럼 나도 껴도 돼?"

아니나 다를까, 내 불안감은 적중했다. 마리도 이 전개를 예상했는지 다 포기했다는 뉘앙스로 대답했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내가 아니라 아이작이 허락하는거니까."


"껴도 되지?"
"...네."

차마 후환이 두려워서 안 된다고는 못 하겠다. 세실리는 내가 허락하자 방긋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약간 부담스럽긴 해도 세실리처럼 아름다운 미녀가 웃어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달아오르기 시작한 얼굴을 간신히 추스리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화제를 전환시키기 위함이다.

"...세실리 님? 묻고 싶은 질문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리나와 싸운 이유?"
"어?"

어떻게 알았지? 정말로 독심술이라도 배운 건가?

내가 잠시나마 당황하자 세실리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넌 모르겠지만 아이작은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거든. 마리도 동의하지?"
"어느 정도는."
"...그렇게 티가 나?"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얼굴을 더듬거렸다. 나름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마리는 내가 얼굴을 더듬으며 얼떨떨해하자 피식 웃었다. 같잖다는 표정이다.

"저번에 나한테 실수로 그림 준 거 있지? 그때 네 얼굴색이 어땠는지 알아?"


"당연히 모르지."
"그 허여멀건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란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누가 봐도 나 당황했소, 라는 걸
보여주는데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그건... 하."

얼굴색이 변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제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도 얼굴색까지 자유자재로


바꿀 수는 없다.

"...일단 이건 넘어가고, 세실리 씨."


"응."
"세실리 씨는 왜 리나 씨랑 싸운 거예요?"
"별 거 아니야. 그리고 화해도 했어."
"그럼 대체 왜 싸우신 거예요?"

내 질문에 세실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친절히 대답해줬다.

"리나가 제논 일대기 8 권 내용을 거의 다 발설했거든."


"... ..."
"아무래도 리나는 내가 읽었을 거라 생각했나봐. 그것 때문에 내가 화를 좀 냈지. 화해는 했지만 따로
떨어져 앉은 이유도 이때문이고.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가 하나같이 8 권에 관한 이야기들밖에 없더라고."

납득이 가는 이유였다.

*****

시간이 흘러 인문학 강의가 종료되었을 시간.

아이작이 잠깐 화장실에 간 동안 백발의 미녀, 마리는 그림 한 장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필기를 모두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세실리가 마리에게 권유했다.

"마리는 화장실 갈 생각없어?"


"응? 난 딱히?"
"그래? 그런데 지금 뭘 보고 있어?"

세실리는 마리가 손에 쥔 그림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이에 마리는 세실리를 한 번 힐끔거렸다가 평온한


말투로 설명했다.

"제논 일대기 8 권에 첨부된 삽화야. 증기 기관차라고, 스토리에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건데 알려줄까?"
"아니. 절대 알려주지 마. 말하면 알지?"
"그럼 됐고."

그리하여 세실리도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마리는 세실리마저 밖으로 나가자 그림에 더욱 집중했다.

"흐음..."

제논 일대기 8 권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이 그림의 명칭은 증기 기관차. 스승의 유언을 이어받은 한 괴짜


드워프가 인생을 갈아넣어 발명한 희대의 역작이다.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이 초반부 귀족 비판에 관심을 쏟아붓고 있지만, 증기 기관차에 대한 관심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교통수단을 제작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람도 많았고, 발명되기만 한다면 문명을 몇
단계나 진보시킬거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다른 걸 다 제쳐두고 마리의 관심을 이끈 건 다름아닌 증기 기관차의 외관이다. 원통형 몸체에


아래에는 바퀴가 달려있고, 증기를 배출하는 기관이 머리 부분에 뿔처럼 달려있다.

그리고 마리는 이 그림과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다.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그녀는 애매함에 뺨을 긁적거렸다.


< 22 화 >

내가 아카데미에 오면서 가장 관심있는 전공이 역사라면, 그 다음으로 관심이 깊은 전공은 '인류학'이다.


이 세상의 인류학은 인간 뿐만이 아니라 엘프, 수인, 드워프, 마족 등등 다양한 종족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인류학 수업에서는 각 종족마다 어떤 특이점이 있는지, 또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는지 배우는
중이다.

다만 헤일로 아카데미는 인간을 중점으로 두면서 다른 종족과 비교하는 교육방식을 진행하고 있다.
아무래도 인간이 세운 교육기관인데다가 학생들 대부분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유학생, 그러니까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종족도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다. 세계는 넓고
다양한 종족이 있으나 언제나 사건의 중심이 되는 건 인간이었다는 걸 그들도 잘 알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숫자는 대략 16 억이며, 나머지 종족들은 전부 합쳐도 8 억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런 방대한 인구수와 끝을 모르는 발전 능력 덕분에 인간은 지금까지 우위를 점할 수
있던 것이죠. 그리고..."

두껍다 못해 두터운 회색 눈썹이 눈에 띄는 한 노신사가 강의실 앞에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그가 하는 강의를 모두 경청했다.

노신사의 이름은 로이 매그너스 교수. 보다시피 인류학을 담당하고 있는 교수다. 인문학 교수인 비루스
교수처럼 열정이 있기 때문에 한시라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물론 다른 종족도 고유의 장점이 있기 때문에 시시각각 인간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드워프는 무기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고, 엘프는 일반 전사 한 명 한 명이 기사단장급으로 강력하죠. 그건 수인도
마찬가지고요. 마지막으로 마족은 마법에 한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납니다. 반면 우리
인간은? 태생적으로 특출난 부분이 없죠. 이러한 장단점이 모두 드러난 사건이 바로 종족 전쟁입니다."

인류학은 특성상 '종족 전쟁'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 전쟁에 각 종족마다의 명과 암이 고스란히


드러난데다가 인간이 본격적으로 주도권을 쥐었으니까. 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따로 궁금한 점이 있다. 나는 로이 교수가 숨을 고르기 위해 중간에 설명을 끊자 팔을


슬며시 들었다. 내가 팔을 들자 로이 교수는 화색을 띄더니 나를 쳐다봤다.

"아, 그래. 아이작 학생. 오늘은 어떤 질문을 할텐가?"


"... ..."

나는 교수의 말을 듣고 쓴웃음을 흘렸다. 인류학은 역사 다음으로 내가 관심있던 전공이었는지라 첫


수업부터 이런 저런 질문을 날렸던 적이 있다. 이때문에 로이 교수도 나를 좋게 보는 편이다.

물론 그에 반비례하여 다른 학생들의 시선은 그닥 좋지 않았지만. 질문을 많이 한만큼 가산점도 받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간에 하고 싶은 질문은 해야겠지.

"아까 교수님이 인간의 숫자는 16 억이라고 하셨죠? 다른 종족은 전부 다 합쳐도 8 억이 되지 않고요."


"그렇지."
"일단 엘프만 콕 집어서 말할게요. 엘프의 출산률은 모든 종족을 통틀어서 가장 낮죠. 이때문에 중
인구수가 가장 적고요. 엘프의 인구수는 많게 잡아도 1 억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드워프가 2 억 5000 만, 수인이 3 억 5000 만, 마족이 1 억 정도지. 얼추 계산한다면 말이네."

로이 교수의 설명을 보듯이 엘프의 인구수는 전체 비율로 따졌을 때도 상당히 적은 편이다. 21 억 중 1


억이면 괜찮은 편이 아니냐? 라고 볼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생의 관점으로 본 경우다.
지구에는 오로지 '인간'만 존재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엘프의 종족 특징을 따지자면 심각할
정도로 적은 편이다.

"네. 거기다 엘프는 장수한다고 치면 약 1000 년을 살 수 있죠. 인간이 장수해도 겨우겨우 100 년을
넘기는 것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수치입니다. 대충 계산해도 무려 10 배가 넘어요. 하지만 이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엘프의 인구수가 적은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네의 말은 그 1000 년동안 수많은 인간이 사망하는데도 불구하고 엘프의 인구수가 적은 부분이
이상하다. 이 말이지?"

로이 교수가 내가 원하는 질문을 깔끔하게 정리해줬다. 이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내 옆에 앉아있는


세실리와 눈을 마주쳤다.

잠깐동안 그녀와 눈을 마주치던 로이 교수는 이내 시선을 떼어 다른 곳을 둘러봤다. 마족인 세실리를


제외하면 강의실에는 인간밖에 없었다.

"음... 꽤 흥미로운 질문이군. 우선 엘프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으니 엘프의 생물학적 특징 다음으로


문화적 특징에 대해서도 알려주지. 우선 아이작. 자네는 성(性)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네?"

난데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기습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른 질문이라면 모를까, 갑자기 성지식에


대해 물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질문을 했던 로이 교수도 강의실의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다급히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 모두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게. 이건 단편적인 성지식이 있어야 설명할 수 있거든. 어쨌거나
아이작 학생.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어... 알 건 다 알고 있습니다."

막상 대답은 했지만 얼굴이 실시간으로 빨개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부디 이런 대답을 할 가치가 있는


설명이길 바란다.

내가 그런 속마음을 가진 동안 로이 교수는 헛기침을 하며 설명을 하나 둘 씩 꺼냈다.

"크흠. 그럼 설명하겠네. 이건 생물학 전공에서도 배우겠지만 생물학을 듣지 않는 학생들도 있을테니


집중해서 들어주게나. 우선 인간, 그러니까 인간 여성은 한 달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 하지만 엘프는 그 주기가 매우 길어. 연구에 따르자면 평균적으로 1 년에 한
번이라네."
"와..."

나는 로이 교수의 설명을 듣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출산률이 극악 수준으로 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히려 생리 주기가 저렇게나 긴데도 불구하고 멸종하지 않는 점이 더 신기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엘프의 문화적 특징이 있지. 엘프는 인간과 달리 성관계를 성스러운 '의식'으로
여기는 편이야. 하물며 엘프 남성의 성욕도 인간에 비해서는 담백한 편이지. 아, 이럴 때는 인간의
성욕이 여타 종족보다 강하다고 설명하는 편이 어울리겠군."
"... ..."
"엘프의 인구수가 적은 이유는 이러한 부분들이 합쳐진 것이라네. 어때, 이해가 됐나?"

로이 교수의 물음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신비로운 종족답게 출산률이 낮은 이유도 신비로웠다.

무엇보다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전생에서 엘프를 설명할 때 출산률이 낮다고만 알려줬지, 그 이상은
없었다.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일종의 '상식' 같은 개념이라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허나 지금은 아니다. 이해가 가면서도 명쾌한 설명 덕에 새삼 내가 판타지 세계에 환생했다는 걸 다시금
실감시켜줬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에요."


"오히려 내가 감사하지. 이런 재미있는 질문을 하는 학생은 여태까지 보면서 잘 없었거든. 다음에도
지금처럼 재미있는 질문을 해줬으면 좋겠네."
"그럼 수인은요?"
"음?"

이건 내가 한 질문이 아니다. 내 옆에 앉은 세실리가 한 질문도 아니다. 이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니 고동색 머리카락을 가진 미녀가 손을 들고 있었다. 딱딱한 말투처럼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실려있지 않는 듯한 무표정이 포인트다.

그사이 고동색 머리카락의 여자는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되자 다시 한 번 원하는 질문을 꺼냈다.

"수인의 숫자가 적은 이유도 알고 싶습니다."


"이름이... 레오나. 레오나 학생이 맞는가?"
"네. 그렇습니다."
"자네는 무엇이 궁금하지?"
"수인도 인간처럼 성욕이 왕성하고, 또 생리 주기도 인간과 비슷합니다. 헌데 수인의 숫자는 고작 2
억밖에 되지 않죠. 이러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레오나의 질문도 일리가 있다. 수인은 인간과 동물을 반반씩 합친 듯한 외양을 가졌으며 과거에는
원시적인 생활을 고집했으나 약 300 년 전 본인들의 국가를 세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인간과 비교했을 때 이상하리만큼 숫자가 적은 편이다. 국가가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지만 그걸 염두해도 상당히 적다.

로이 교수는 레오나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 턱을 매만지다가 방금 전과 달리 약간 애매하다는


듯이 대답해줬다.

"그건 상당히 복잡한 문제일세. 수인의 문화적 특징도 있지만 종족 전쟁 당시 수인은 우리 인간에게
학살당하다시피 죽었거든. 적어도 수천만에 달하는 수인이 사라졌을걸세. 그로인해 여전히 우리 인간과
사이가 험악한 편이지."

로이 교수는 종족 전쟁 당시 인간이 저질렀던 최악의 전쟁 범죄를 말하고 있다. 신성교국 '세이비어'가


마족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전적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 국가에 한해서고, 저 사건은 '인간측
연합'이 저질렀던 범죄다.

인간측 연합은 본인들이 노예로 부렸던 수인들이 엘프에게 붙자 눈에 보이는 족족 살해했다. 내 눈에는 제
2 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유대인 학살 사건, '홀로코스트'보다 몇 배는 더 심각했다. 더
가관인 건 수인을 살해할시 포상금까지 지급했다는 것이다.

이 광기에 찬 사건으로 인해 수인의 인구수가 반토막나다 못해 4 분의 1 수준까지 하락했다. 인간이 얼마나


악랄해질 수 있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역사다.

"거기다 수인은 태어날 때부터 전투라면 열광하는 종족일세. 인간의 관점으로는 야만적이라 할 수 있고,
수인의 관점으로는 스스로를 명예로운 전사라 생각하는 것이지. 그 문화적 특징으로 인해 자연사보다는
전사하는 경우가 많아. 심지어 자연사하는 수인은 명예롭게 죽지 못 했다며 멸시하는 풍조가 있지."
"... ..."
"그래도 500 년 전과 비교했을 때 인구 증가율은 인간보다는 아니지만 뛰어난 편이야. 레오나 학생이
원하는 대답은 현재 진행 중이기에 명확한 대답을 해줄 수 없지. 그 부분은 염두해두게."
"알겠습니다.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오나는 특유의 무뚝뚝한 대답 이후로 자리에 착석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문득 인간과 수인의
사이가 어떤지 떠올랐다.

'상당히 위험한... 편이긴하지.'

인간과 수인의 관계는 딱 하나로 정의할 수 있다.

철전지 원수와 노예.

수인이 일방적으로 인간을 증오하고, 인간은 그런 수인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 특히 암시장에서 수인이
노예로 팔려나가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얼핏 들은 적이 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은 수인을 본인보다 하등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공공의 적이었던 마족이 있었기에 그
현상이 적어보이는 거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인을 향한 차별도 만만치 않다.

"아이작. 인간이랑 수인은 사이가 안 좋은 편이야?"

세실리도 그 부분이 궁금했던건지 나에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에 나는 로이 교수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네. 인간은 수인을 자신보다 하등한 존재로 여기고, 수인은 인간을 동족을 자비없이 학살한 악마로
취급하고 있어요. 아까 교수님이 말씀했듯이 종족 전쟁 당시 발생한 그 사건 이후부터 이어져 온
악순환이죠."
"우리 마족이 모든 종족에게 시한 폭탄 취급당했던 것처럼?"
"비슷하긴 해도 마족과 달리 수인은 인간만 노예 취급을 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태어나서부터 모진 차별을 받았던 마족이라 동질감을 느낀 걸까. 세실리는 미묘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잠깐 생각이라도 하는 건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혹시나 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제논 일대기에서 인간과 수인의 이야기가 나오면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마족의 인식조차
완전히 바꿀 정도인데 안 될 건 없잖아."
"글쎄요..."

나는 펜혹을 살살 문지르며 골똘히 생각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제논 일대기를 통해 마족의 인식이 바뀐 건


맞지만, 그건 나조차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

하물며 인간과 수인 사이는 '증오'라는 연쇄고리로 묶여있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다는 말처럼, 증오로
묶인 연쇄고리를 끊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설령 그것이 제논 일대기라 해도 말이다.

"과연 수인이 제논 일대기를 읽기는 할까요? 인간이 주인공이라 그런지 신문에서도 드워프나 엘프의
평가는 있지만 수인만큼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어요."
"혹시 모르지. 말만 안 할 뿐 사실은 재밌게 읽고 있을지도?"
"그러면 뭐..."

나는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입 밖으로 꺼낸 말과 달리 내 속내는 이러했다.

'진짜 읽고 있으면 어떡하지?'

세실리는 절대 모르겠지만 제논과 수인의 왕자가 서로 신뢰를 쌓고 친구로 발전하는 전개가 있다.

그 전개를 통해 인간이 수인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전하고, 악마와 대항하기 위해 연합을 꾸린다는
이야기다.

'현실성이 하나도 없...'

아니지. 현실성을 따지기에는 바로 앞에 산증인이 있다. 인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족에게 천대받았던


마족이.

세실리는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뇨. 아무것도."
"너 또 얼굴 빨개진 거 알지?"
"... ..."
"솔직히 말해봐. 나 예쁘다고 생각했어?"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 23 화 >

아카데미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세실리는 장난기가 많으면서 얄궂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나에게 존댓말을 사용할 때까지만 해도 예의바른 공주님의 표본이었으나 말을 놓은
이후부터는 줄곧 장난을 잘 쳤다.

"솔직히 말해도 돼. 나도 내가 예쁜 건 알고 있으니까. 아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 이유도 그때문이지?"


"...아니라니까요."
"그럼 얼굴은 왜 빨개졌어?"

인류학 강의가 끝나고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식당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세실리의 장난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반드시 내 입으로 대답을 듣기 위해 작정했는지 살랑거리는 목소리로 부추겼다.

나는 그녀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얼굴을 빨갛게 익어가는 걸 생생히 느끼면서도 최대한 부정했다.


괜히 긍정했다간 어떤 장난이 이어질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실리는 내가 끝까지 부정하자 도리어 본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는 누나라고 잘도 불렀으면서 지금은 왜 대답을 안 하는거야? 이해할 수가 없네."


"그때랑 지금이랑 다르니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내 말마따나 주위에서 숙덕거리는 학생들이 종종 눈에 띄였다. 과민반응이 아니라 살짝 둘러보기만 해도


많은 학생들의 시선이 정확히 우리 쪽을 향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나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세실리 때문이다. 그녀의 외모가 튀는 것도 있지만 세실리는 헬리움의
공주다. 입학식 때부터 화제의 인물이었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인물이 웬 듣도보도 못한 남학생과 친근하게 지낸다? 별의 별소문이 아카데미 내에 퍼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입학식 때부터 약 3 주가 지난데다가 문학생은 무학과 달리 수가 별로
없으니 이미 퍼질대로 퍼졌을 것이다.

'아직 딱히 큰 문제는 없지만...'

나도 귀가 있는지라 현재 내 평판이 어떤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교수들에게는 요주의 인물이고 같은


학생들에게는 재수없는 빨간머리. 전부 다 식당에서 우연히 들은 이야기다.

당장은 세실리와 리나 때문에 주시하고 있는 듯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른다.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학생은 정서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청소년들인데다가 콧대 높은 귀족가 자제들이 많다. 멀리 가지 않아도
잭슨이라는 놈이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중이다.

"...정말이네."

세실리도 내 말을 듣고나서야 분위기를 파악한 모양이다. 살짝 찌푸린 얼굴을 보아하니 별로 탐탁치 않는


듯했다. 그래도 세실리가 주위를 살펴봄으로써 수근거림은 잦아들었다.

나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세실리에게 권유했다.

"불편하시다면 제가 따로 떨어질게요."
"아냐. 이정도는 문제없어. 헬리움에서도 줄곧 있던 일이거든."
"헬리움은 왕을 제외하면 귀족이 없지 않아요?"
"꼭 귀족이 아니더라도 왕을 견제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세실리가 빙긋 웃으며 두루뭉실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내가 알아서 안 되는 부분인 듯했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이에 내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녀가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캐묻지 않아서 고맙다는
의미에 가까웠으나 잠시 후, 미소가 더욱 짙어지며 장난기가 듬뿍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아차싶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아까 전의 대답은? 언제 해줄거야?"


"... ..."
"계속 입 꾹 닫아버리면 이상한 짓 할 거다?"

결국 내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뒤덮으며 포기했다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네. 엄청 예쁩니다.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 세실리 씨가 제일 예뻐요."


"세실리 누나라고 불러야지?"
"...세실리 누나."
"후후. 고마워.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지만 아이작한테 들으니 새롭네."
"후우..."

이제는 아예 얼굴이 터질 것 같다. 나는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열을 어떻게든 밖으로 빼기 위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에도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아 곤혹스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실리는 소녀처럼 꺄르르 웃으며 내 귀를 간지럽혔다. 나를 놀리는 게 저렇게도


재미있는 걸까.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미안해. 반응이 워낙 재미있어서 관둘 수가 없네."


"...제 반응이 재미있다고요?"
"응."
"그럼 제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으면 재미없겠네요?"
"한 번 해봐."
"...죄송합니다."
역시 나에게 주도권 따위는 없었다. 세실리는 내가 꼬리를 내리자 미약한 웃음을 흘리고는 전과 달리
부드럽게 말했다.

"아이작."
"네."
"아이작은 마족에 대해 궁금한 점은 없어?"
"그건 왜요?"

내가 반대로 되묻자 세실리는 인류한 시간에 있었던 일을 입에 담았다.

"아까 전에 엘프의 인구가 적은 이유에 대해 물었잖아. 그럼 마족은 안 궁금한 건가 싶어서."


"아뇨. 궁금한 건 엄청 많죠."
"근데 왜 안 묻는거야?"

세실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가 안 된다는 뉘앙스로 묻는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마주하다가
조용히 답했다.

"제가 실수할까봐요."
"실수할까봐?"
"네."

자그마치 수 백년 넘게 종족 가리지 않고 핍박받았던 마족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실리에게는


마족과 관련된 질문을 하기가 약간 조심스러웠다. 괜스레 아픈 부분을 건드리게 되면 나도 그렇고
세실리도 어색해질 게 뻔하다.

용기가 없다고 할 수 있으나 내 기준으로는 일종의 배려다. 적어도 상대방의 상처는 후벼파지 않아야
원만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이때문에 세실리처럼 짖굳은 장난을 치지 않고 가만히 받아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 아이작은 배려가 넘치는 아이였지."

세실리도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해줬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어서 그녀는 선심썼다는 투로
나에게 말했다.

"괜찮아. 아무거나 물어봐도 돼."


"정말이에요?"
"응.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이작이니까. 악의도 전혀 없을거고."
"그렇다면야..."

나는 말을 흐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에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 바깥에 나가서 먹고 오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빈 그릇을 하나 집어들며 세실리에게 질문했다. 평소에도 궁금했던 부분인지라 살짝 기대가


되었다.

"그 뿔은 무슨 역할을 하는 거예요?"


"응? 뿔?"
"네."

세실리는 내 질문을 듣고 관자놀이에서부터 위로 솟아난 뿔을 만지작거렸다. 뿔은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붉은빛을 강하게 띄었다.

검은 마나와 더불어 뿔은 마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이다. 하지만 마족의 뿔은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별의 별 괴상한 소문만 무성했다.
가령 마족의 뿔에는 마나가 집결되어있다던지, 아니면 단순히 악마의 상징이라던지 등등. 이로인해 제논
일대기에서도 뿔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적지 못 했다.

"으음..."

세실리는 잠깐 생각을 정리하는건지 빈 그릇에다가 음식을 차곡차곡 담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대답을


해줄 때까지 기다리면서 음식을 하나하나 담아올렸다.

이윽고 비어있는 자리를 찾아 앉아았을 때 즈음, 내 맞은편에 앉게 된 세실리가 대답을 해줬다.

"생리 주기를 알려준달까?"


"...예?"

툭-

음식을 찍었던 포크를 놓칠만큼 당황스러운 대답이다. 순간적으로나마 진담인지 장난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내 심정과 달리 세실리는 평온한 얼굴 그대로였다.

이를통해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어도 세실리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마족은 악마의 후예야. 그리고 악마는 말그대로 '욕망'의 결정체지. 이때문에 우리
마족은 특정 주기마다 자신의 욕망을 컨트롤하기 힘든 시기가 있어. 이 현상을 '악주기(惡週期)'라고
칭하지만 남자들만 그렇게 말하고 여자들은 그냥 생리로 치는 편이야. 얄궂게도 월경이랑 시기가
겹치거든."
"... ..."

생리 주기라고 할만하다. 그덕분에 정지되었던 머리도 차차 진정되어 사고가 가능해졌다. 그대신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헛기침을 통해 머릿속에 든 상념이 전부 떨쳐버리고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럼 어떻게 참아요? 저는 인간 남자라 모르지만 여자들은 생리 때마다 배가 찢어질 듯이 아프다는데."


"보통은 명상을 통해 진정시키는 편이야. 그리고 최근에는 약도 발명되서 큰 문제는 없어."
"만약에 악주기 때 누가 건드리면요? 악마가 되는 거예요?"
"아니. 고작 악주기 때문에 악마가 되지는 않아. 마족이 악마가 되는 경우는 대부분 끔찍한 비극을
겪었을 때야. 사랑하는 연인을 눈 앞에서 잃거나, 아니면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거나."

세실리는 잘게 썬 고기를 포크로 집은 뒤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뭐, 네 말대로 악마 못지 않게 난폭해지기는 해. 특히 여자들이 그러는 편이지."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그래? 아까 들어보니까 인간은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를 한다며? 너무 힘들겠다. 마족은 6 개월에 한
번이거든."

장수하는 종족은 생리 주기가 긴 편인걸까. 엘프도 그렇고 마족도 그렇고 생리 주기가 어마어마 길었다.
아니면 인간과 수인이 비정상적으로 짧은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점점 불어나는 호기심에 서둘러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식사보다는 마족이 어떤 종족인지 더


중요했다.

"그러면 뿔이 자라면 자랄 수록 주기가 다가온다는 걸 의미하는 거예요?"


"아니. 뿔은 자라지 않고 이 빨간 부분이 뿔 전체를 뒤덮는거지."

세실리는 덧칠된 것처럼 붉게 물든 뿔의 윗부분을 툭- 툭- 건드렸다. 현재 약 4 분의 1 정도가 붉은색으로


덮혀있는 상태다.

'뿔이 전부 붉게 물든 상태면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겠다.'

괜히 건드렸다가 어떤 참상이 벌어질지 모른다. 나는 입 안에 든 음식을 우물거리다가 연이어 물었다.

"뿔이 잘려나가면 어떻게 돼요?"


"금방 원상복구 돼. 그리고 잘려나가도 아무런 감각도 없어."
"뿔 자체에 감각이 없는 건가요?"
"응."
"그럼 실례지만 한 번 만져봐도 돼요?"
"...에? 뿌, 뿔을 만진다고?"

내 질문에 세실리의 반응이 썩 이상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버버하더니 뺨에 미미한 홍조가 이는 것이


아닌가. 부끄럽다는 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나는 새삼스러운 그녀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민감한 주제라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저리


부끄러워할 정도면 분명 범상치 않는 의미가 담겨있을 터.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 미안. 마족에게 뿔을 만진다는 건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애정 행위거든. 네가 악마가 되어도


널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야."
"오... 로맨틱하네요."
"그, 그래? 로맨틱하다라... 마족이 아닌 인간에게는 처음 듣네."

세실리가 쑥쓰럽다는 듯이 볼을 긁적였다. 평소 나에게 장난을 치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던지라 새롭게


다가왔다.

'덕분에 하나 넣을 수 있게 됐네.'

제논 일대기에서 애틋한 러브 라인을 타고 있는 진과 릴리의 이야기에 뼈와 살을 붙일 수 있는 정보였다.

진은 릴리만을 위한 기사이니 그가 한 쪽 무릎을 꿇어 예의를 차릴 때 릴리가 그의 뿔을 쓰다듬어주는


것이다. 그 뒤에 진이 화들짝 놀라며 릴리를 올려다보는 거고. 이 세상에 마족과 성직자 간의 사랑만큼
슬픈 이야기도 없을거다.

물론 최후반부에서는 어김없이 진을 최종보스로 등장시킬 예정이다. 어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뿌려놓은


복선과 떡밥이 너무 많은 탓에 결말을 바꾸기가 힘들다. 정 힘들다면 외전을 하나 내놓을 계획이다.

나는 분위기가 어색하게 흘러가기 직전, 입 안에 든 음식물을 모두 목구멍 너머로 넘기면서 세실리에게


말했다.

"세실리 누나는 인간에 대해서 궁금한 점은 없어요?"


"으, 응? 인간에 대해 궁금한 점?"
"네. 저만 묻기는 좀 그래서요. 누나도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인간이라..."

다행히 어찌어찌 어색한 분위기는 물린 듯하다. 나는 세실리가 입을 열 때까지 얌전하게 음식을 입에


넣었다. 세실리도 생각을 정리하는 건지 식사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저벅-


그때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음식을 우물거리면서 시선을 옮기니 딱딱한 인상의 미녀,
레오나가 멀찍히 걸어가는 중이었다.

평소에는 관심이 없어서 모르고 있었는데 레오나는 다른 여학생과 달리 바지를 입고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과 달리 인상이 워낙 딱딱하고 날카로운지라 멀리서 보면 남학생처럼 보였다.

'쟤는 친구가 없나? 왜 저렇게 멀리 앉아있지?'

식당에 학생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는 레오나는 유독 멀찍히 떨어져 앉았다. 오히려 그녀의 주위에
아무도 없는 탓에 더욱 눈에 띄였다.

내가 턱을 괴며 우물거리고 있을 때,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지 자리에 앉은 레오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쫑긋-

뜬금없이 머리 부분에 무언가가 쫑긋하며 솟아났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아쉽게도 내 시력이 그닥 좋지 못한 탓에 정확한 판별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 위에 무언가가


솟아났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

레오나도 본인의 머리 위에 뭔가 솟아났다는 걸 깨달았는지 다급히 손을 얹었다. 딱딱했던 인상은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지고 당혹감만 남은 표정이 사뭇 볼만했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가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볐다. 눈을 비비고 다시 레오나 쪽을 쳐다보니


그녀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 평소대로 무표정으로 식사를 하는 중이다.

내가 레오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동안이었다. 그사이 세실리가 생각을 정리했는지 내 이름을 불렀다.

"아이작?"
"...아. 네네. 누나."
"잠깐 멍 때리고 있었나 보네. 질문할 거 생각났는데 해도 되지?"
"네. 질문해도 돼요."

내 허락하자 세실리는 정말 궁금하다는 어조로 질문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중심이 될 수 있던 이유요?"
"응. 강의에서도 들었지만 너의 의견이 궁금해서 그래."
"음..."

대답하기 꽤나 복잡한 질문이다. 인간밖에 없던 지구에서도 인간은 섣불리 단정지을 수 없는 종족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을 판단하는 것도 결국 같은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에 객관적인
설명이 가능했다.

그래도 이거는 확실하다. 인간은 더없이 선해질 수도 있으나 더없이 악랄해질 수도 있는 존재라는 걸.
성선설과 성악설이 치열하게 치고받았던 걸 생각하면 된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지구에서의 기준이고, 이 세상은 조금 다른 시야로 보아야 옳다.

나는 버릇대로 펜혹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세실리를 힐긋 바라봤다. 세실리는 내 대답이 나오기


전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는 중이다.
이에 펜혹을 문지르던 엄지 손가락을 뚝- 멈춘 후 조용히 말했다.

"미리 말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주관적인 생각이니 주의깊게 들을 필요는 없어요. 저보다 세상 경험


많은 교수님들이 많으니까요."
"괜찮아. 말해도 돼."
"네. 그..."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세실리의 뒷편을 쳐다봤다. 혼자 식사하고 있던 레오나의 시선이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다.

설마 이 거리에서도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건가 싶었으나 아니라고 단정지었다. 우리의 목소리가 큰 것도


아닌데다가 거리도 매우 멀었다. 이에 나는 개의치 않으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인간이 이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은 너무 멍청하고, 무모하며,


어리석기 때문이에요."

쫑긋-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레오나의 머리에서 이상한 것들이 다시 한 번 불쑥 튀어나왔다.

< 24 화 >

내가 답을 꺼내자마자 레오나의 머리 위에 또다시 무언가가 퐁- 하고 튀어나왔다. 한 번이라면 모를까 두


번이나 보게 되어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레오나는 인간이 아니라 이종족이라고. 다른 부분도 아니고 머리 위에 솟아오른 걸 보면 수인일 가능성이


크다.

'수인도 아카데미에 입학하던가?'

강의 때 들었겠지만 인간과 수인의 사이는 최악이다. 예로부터 사이가 껄그러웠던 엘프와 드워프보다도 더
좋지 않다. 이로 인해 수인이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렇다면 주말동안 번화가에서 가끔 봤던 수인은 뭐냐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학생이 아니라 경비원으로
고용된 입장이다. 수인은 선천적으로 뛰어난 오감 덕분에 경비원으로써의 능력이 출중하다.

무엇보다 사이가 최악인데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에서 일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다. 수인들의


국가는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아 개발도상국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래서 갖은 시선을 꿋꿋이 버텨내면서
일을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사정이 있겠지.'

하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그녀도 나름 이유가 있을 테니 정체를 숨기고 있는 걸테고. 그보다는


세실리의 의문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다.

"...인간이 멍청하니까 세계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네."
"아이작이 하는 말은 가끔 이해가 힘든 경우가 있어."

세실리는 그리 말하며 식기를 잠시 내려놓더니 미묘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빨려들어갈 듯한 붉은


시선에 나 또한 식사를 잠시 멈추었다.

이후로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가 손으로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줄래? 저번처럼 빙빙 꼬아서 할 필요는 없어."
"딱히 거창한 이유는 아니에요. 인류학 강의에서 교수님이 설명하던 것과 비슷한 요지의 말이라서."
"그래도 궁금해. 빨리 말해줘."

재촉하는 세실리 어깨 너머의 레오나를 힐긋거렸다. 그녀의 머리 위에 솟아났던 귀는 어느새 가라앉은


상태였으나 그럼에도 시선은 여전히 나를 직시하는 중이다.

나는 이 거리에서도 들리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애써 무시하며 설명을 꺼냈다.

"세실리 님도 알다시피 인간은 뛰어난 습득력을 제외한다면 잘난 게 하나도 없어요. 수명은 물론이고,
육체 능력과 마법, 그리고 지혜와 손재주까지 다른 종족에게 밀리죠. 심지어 마나를 잘 다루는 것도
아니에요. 수명은 짧은데 태생적인 장점이 하나도 없는 종족. 대충 감이 잡히지 않아요?"
"모르겠는데?"
"배움이 빠르다는 장점이 있지만 아예 0 에서부터 시작한 시절에서는? 배운 것도, 배울 수 있는 것도 없을
텐데 어떻게 하면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까요?"
"어? 그러네?"

세실리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그녀도 내 말을 듣고 의문을 품은 모습이다.

전생에서는 인간밖에 없어서 동족끼리 경쟁이 가능했지만, 이 세상은 다르다. 당장 인간보다 태생적은
능력이 월등한 종족이 주변에 널려있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이 경쟁할 수 있을까? 만약 인간이 똑똑했다면 경쟁하지 않고 요리조리 숨어다니거나


머리를 숙여 노예로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멍청한 건지 아니면 무모한 건지 몰라도 다른 종족과 경쟁하기를 선택했다. 아마 이종족이
보기에는 저 새끼 왜 저러지? 라며 어리둥절하지 않았을까. 당장 나 같아도 웬 원숭이 한 마리가 나와
경쟁한다면 코웃음칠 것이다.

"당연하지만 초기에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배운 게 하나도 없으니까. 하지만 인간은 포기하지 않고 다른


종족의 장점을 모방하기 시작했어요. 이때부터 '지식'이라는 게 쌓였지만 여전히 부족했죠. 결국 모방은
모방에 불과하니까요."
"그렇지."

세실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했다. 실제로 인간은 15 억이 넘는 인구수를 보유하고 있지만 그중


이 종족과 대항할 수 있는 실력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인간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한들 불세출의 천재가 아닌 이상 태생적인 한계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엘프 전사가 인간으로 치자면 기사단장급 무력을 갖춘 것부터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

"번식 능력이 여타 종족보다 뛰어난 이유도 이때문이라 생각해요. 초기에는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해야
그나마 생존이 가능할테니 무작정 수를 늘린거죠. 이종족이 보기에는 정말 단순무식하고 쓸데없는
발악이라 생각했을 거예요. 수인은 신체 능력이라도 좋지, 인간은 그것도 아니잖아요?"
"음... 그러고 보니 수인도 번식 능력이 좋지 않아? 종족 전쟁 당시 수인들이 인간에게 학살당했다지만
그 전에도 있었을 거 아니야?"
"그때는 인간의 습득력이 진가를 발휘해요. 역사적으도 '문명'을 최초로 건립한 건 엘프였지만,
그다음으로 문명을 이룩한 건 '인간'이에요. 엘프에게서 배운 지식과 능력을 토대로 문명을 세우고,
뿔뿔이 흩어졌던 동족을 모아 힘을 비축했죠. 부족 생활을 하는 종족과 문명과 사회를 만든 종족. 벌써
차이가 나지 않아요?"
"그렇구나. 수인은 겨우 300 년 전에 본인들의 나라를 건국했었지?"

전에도 언급했듯이 수인은 고작 300 년 전에 국가를 세웠다. 듣자 하니 종족 전쟁 당시 수많은 동족들이


인간에게 학살당하자 위기감을 느껴 세웠다고.

그러나 뿌리부터 탄탄했던 인간과 달리 급하게 세운 감이 없지 않아 있어 지금도 많이 불안불안했다. 수인


내부에서도 다양한 민족이 있는데다 야만적인 풍토가 유지되는 중이다.

"네. 어쨌거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죽기에는 멍청해요. 처음부터


똑똑했다면 옛날 옛적에 포기했을 걸요? 주변에 자기보다 잘난 놈들이 천지인데 절망하고 낙담했겠죠."
"역설적이네. 오히려 멍청해서 빨리 죽는 게 아니고?"
"아뇨. 다시 말하지만 멍청하고 무모한데다 어리석으니 장점이 거의 없는데도 경쟁을 택한 거예요."
"근성이라는 거구나?"

세실리가 정확히 요점을 짚었다. 비록 장황하게 설명했으나 인간이 현재까지 살아남고, 세계의 주도권을
쥘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포기를 모르는 '근성'이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은 부분을 꾸역꾸역 파고들어 가능하게 만든 종족도 인간이고, 3000 년 전
악마와의 전쟁 당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끝까지 대항하던 종족도 인간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인간의
근성만큼은 일종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현재 세계의 주도권을 쥘 수 있던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 더 존재한다.

"그것도 맞지만 인간은 하나가 되는 결집력이 다른 종족보다 훨씬 강해요. 평소에는 자기들끼리 싸우기
바쁘지만 위기가 찾아오면 하나가 되어 물리치는 거죠."
"종족 전쟁이랑 악마 전쟁처럼?"
"바로 그거에요. 포기를 모르는 근성과 위기의 순간 하나가 되는 결집력. 이 두 가지의 특징이 하나로
맞물려 인간이 주도권을 꽉 쥐게 된 거죠."

여기서 더 무서운 건 인간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는 점이다. 인간은 스스로 부족하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끊임없이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전생의 기억이 있기에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걱정되는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나는 포크로 음식을 쿡- 쿡- 찌르며 입을 열었다.

"물론 그게 꼭 장점이 되는 건 아니에요. 수인 대학살처럼 끔찍한 죄악으로 작용될 수도 있죠. 더 무서운


점은 앞으로도 그런 사건이 언젠가 재발할 겁니다. 이건 확신할 수 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해?"
"멀리 가지 않아도 당장 몇 천년 전에 마족들이 학살당했잖아요? 누나는 그 학살의 주도자가 누구라고
생각해요?"
"... ..."

내 질문에 세실리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비록 그녀에게는 직설적이겠지만 이만큼 좋은 예시는 없다.

"아무튼 간에 이해는 되셨나요?"


"...응. 덕분에. 인간은 참 복잡한 존재구나. 조금 더 공부해야겠어."
"인간에 대해 아는 건 좋지만 나쁜 부분은 배우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마족 학살과 수인 학살 사건을
보다시피 인간은 악마보다 더한 짓거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빈번하거든요."
"충고 고마워. 그래도 아직까지 내 주변에는 착한 사람들밖에 없어서 다행히야."

세실리가 개운하다는 듯이 말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의 미소에 따라 웃었다가 뒷편의
레오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식사를 하는 것도 잊은 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정말로 내가 하는 이야기를


전부 들은 듯했다.

"어디 보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식사는 다 하셨어요?"
"아니. 네 이야기 듣는다고 못 먹었어. 아이작은 이다음에 듣는 수업 있어?"
"전 없어요. 세실리 누나는요?"
"나는 수학 하나 있어."
"수학 엄청 어렵지 않아요?"
"별로? 나는 쉽던데?"

세실리가 모르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식사 자체는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식당에서 세실리와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가끔 모진 장난을 치기도 했으나 주변에 보는
사람도 딱히 없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레오나는 조금 신경 쓰였다. 특유의 무뚝뚝한 눈빛으로 쳐다보니 내가 다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먼저 일어날게."


"네."
"아이작은?"
"전 좀 더 먹다가 갈게요. 먼저 가보세요."
"알겠어. 다음에 봐~"

식사가 끝나자 세실리는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나 또한 손을 흔들어주면서 그녀를 살갑게


배웅해졌다.

그리하여 세실리까지 떠나자 원래부터 사람이 없었던 식당에는 나, 그리고 멀찍히 앉아있는 레오나만이
남게되었다.

"... ..."

나는 레오나를 빤히 쳐다봤고, 레오나도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중이었다.

이에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재미있는 방법이 떠올라 행동에 나섰다. 가장 먼저 주먹 쥔 손을 양쪽


관자놀이에 붙인 뒤, 꽉 말아쥐었던 손을 활짝 폈다.

레오나의 머리 위에 퐁- 하고 튀어나왔던 귀를 표현한 것이다.

"...!"

효과는 굉장했다. 내가 행동으로 표현하자마자 레오나가 눈을 화등잔만하게 뜨면서 몸을 빳빳하게 굳힌


것이 아닌가.

퐁-

덤으로 컨트롤할 수 없게 된 레오나의 귀가 튀어나왔다. 이후로 다급히 수습하려는 듯했지만 이미 다 들킨


마당에 의미가 없다.

벌떡-

내가 속으로 키득거리고 있을 즈음, 레오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에 따로 이야기라도 나눌


심산인가 싶어서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텁-

"어?"
"너 잠깐만 따라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내 멱살을 붙잡고 질질 끌고가기 전까지는. 아예 인지조차
하지 못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눈을 깜빡거렸다가 멱살을 붙잡은 레오나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시, 식기 정리해야하는...!"
"크르릉...!"
"... ..."

내가 대꾸하자마자 레오나가 사납게 짖었다.

< 25 화 >

후기를 읽어주세요!

*****

레오나가 내 멱살을 붙잡고 질질 끌고 가도 아무런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뭐라고 말을 걸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고, 힘으로 벗어나려고 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붙잡아 섣불리 반항하지
못 하도록 제지했다.

결국에는 옷이 뜯겨져나갈 것 같아 반쯤 포기하고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는 대로 따라갔다. 운이 좋은 건지


몰라도 복도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뚝-

마침내 인적이 드문 건물 가장자리에 도착하자 레오나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내 멱살을


붙잡았던 손의 악력도 서서히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내 멱살을 놓아주자 두어걸음 물러가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얼마나 강한 힘이었는지 목


부근이 전부 쭈글쭈글해졌다.

"...야."

한참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을 때 레오나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강의 때마다 들었던 딱딱한


어조가 아닌, 위협이 한가득 담겨있다. 그에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다 말고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뻣뻣해진 고개를 억지로 들어올리니 맹수 같은 금색 눈동자와 정확히 마주하게 되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푸른 눈동자였는데 지금은 나와 같은 금안이다.

레오나는 내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하자마자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봤지?"
"... ..."
"아니었으면 네가 그런 행동도 하지 않았을 거야. 솔직히 말해. 봤지?"

부정할 이유가 있겠나. 원래부터 확인을 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다. 그러나 레오나에게서 풍기는 압박감이
장난 아니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겨우겨우 대답을 꺼냈다. 하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봐, 봤어. 네 머리에서 뭔가가 튀어나오는 거..."


"... ..."
"...그거 귀야?"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레오나는 내가 조심스러운 물음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거렸다. 그리고 말
대신 행동으로 화답했다.

쫑긋-

레오나의 고동색 머리에서 세모꼴의 귀가 쫑긋하며 솟아났다. 누가 봐도 사람이 아니라 동물의 귀였다.

내 예상대로 레오나는 인간이 아니라 수인이다.

'그럼 바지를 입은 이유도 꼬리를 감추기 위해서인가?'

나름 그럴 듯한 가설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레오나는 머리 위에 솟아났던 귀를 도로


감추더니 시니컬하게 말했다.

"이제 궁금한 건 풀렸냐? 왜, 꼬리까지 보여줘?"


"어... 아니. 괜찮아."

역시나 익숙해지지 않는 말투다. 내가 알던 레오나는 무뚝뚝하고 감정 변화가 거의 없는 학생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불량 학생 즉, 일진 같다.

말투가 좀 험악하게 바뀌었다고 인상까지 180 도 달라져버리니 괴리감마저 들었다.

"후우..."

레오나는 머릿속이 복잡한 듯,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레오나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잠자코 기다려줬다.

그녀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으니 정체를 숨겼을텐데 내가 그 비밀을 알아버렸다. 그녀에게는 상황이


꼬일대로 꼬인 것이겠지.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모른 척 하고 넘어가는건데 호기심이 동하여 일을
저질렀다.

"어떻게 하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는 건 너무 위험하고... 협박이라도 해야 하나? 진짜 미치겠네..."


"... ..."

레오나의 중얼거림이 내 귀에 속속 들어왔다. 전부 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아서 더 무섭다.

이러다가 내 신변에 큰 문제가 발생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저기..."
"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

내가 부르자마자 레오나가 시니컬한 표정과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순간 흠칫거렸다가 하고픈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 정체 말 안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가 나라면 그 말을 쉽게 믿겠냐?"
"어... 모르지? 나는 네가 무슨 사정을 갖고 있는지 모르니까."

거짓말을 일체 섞지 않은 솔직담백한 대답.

레오나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하! 하며 헛바람을 토하더니 짓씹듯이 말했다.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 ..."
괜히 말했구나. 나는 단순한 위협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 듯한 기분에 침을 꿀꺽 삼켰다.

원래라면 최대한 침착을 유지했을터인데 왜인지 몰라도 지금은 정상적인 사고가 힘들다. 레오나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감 때문인걸까.

"후우... 아냐. 됐어. 아무튼 간에 내가 수인이라는 건 절대 발설하지 마. 알겠냐?"


"...말하면?"
"네 사지를 찢어버릴거야."

레오나가 아까 전처럼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정말로 그럴 것 같아 무서웠으나 한 가지 의문은 여전했다.

어째서 레오나는 본인의 정체를 감추면서까지 아카데미 생활을 하는 걸까? 이것까지 묻는다면 그녀가 또
신경질을 부리겠지만 질문할 가치는 충분하다.

나는 사정없이 떨리는 가슴을 최대한 진정시킨 뒤, 용기를 내어 레오나에게 질문을 꺼냈다.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돼?"


"넌 이 상황에서도 묻고 싶은 게 있어?"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니까."
"에휴. 묘족도 아니고 호기심이 왜 그리 많은건지. 그래. 선심 썼다. 물어봐."

레오나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팔짱을 끼자 교복 너머로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시선이 애써 엄한 곳으로 향하는 걸 최대한 막으며 입을 열었다.

"왜 굳이 정체를 숨기면서까지 아카데미에 입학한 거야?"


"내가 거기까지 대답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음... 알겠어. 지금까지 그 딱딱한 태도는 다 연기지?"
"그래야 수인이라고 의심받지 않을 테니까. 너희 인간은 우리 수인을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종족이라
생각하고 있잖아? 그걸 이용한 거지."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에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수인을 야만인 내지 원시인으로 취급하고 있다. 더 나아가 수인을 노예로
생각하는 인간도 꽤 많다.

또한 수인은 평소 호전적인 성질머리로 인해 사납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이 때문에 레오나처럼


이성적이고 딱딱한 성격을 가진 수인은 절대 없을거라 판단하는 중이다. 이건 레오나가 잘 이용한 게 맞다.

"앞으로도 쭉 그럴거야?"
"당연하지. 정체를 들키지 않고 무사히 졸업하기 위해서는 감내해야 하는 일이야."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수인은 다른 종족보다 '본능'이 특히나 강한 종족이다. 내면의 악과 치열하게 싸우는 마족과 달리 수인은
본능을 억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못 한다는 표현이 어울리겠지.

아무튼 수인에게 본능은 뗄래야 뗄 수 없다. 레오나가 아무리 절제력이 뛰어나다고한들 천부적인 본능은
억누를 수 없다. 멀리 가지 않아도 내가 도발하자마자 귀가 퐁! 하고 튀어나온 걸 보면 알 수 있다.

레오나도 그 부분은 유념하고 있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 전과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참는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여기 입학하지도 않았어."


"많이 힘들 텐데."
"물론 힘들... 아니, 야. 꼬치꼬치 캐묻지 말아줄래? 내가 언제까지 대답해줘야 하냐?"

아쉽다. 조금만 더 하면 됐는데.

그런 내 아쉬움이 표정에 다 드러났는지 레오나가 미간을 와락 좁혔다.

"뭐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죽고싶냐?"


"미안."
"후우... 어쨋든. 내가 수인이라는 거 아무데한테도 말하지 마. 알겠냐?"
"알았어. 아, 그리고 하나 더."
"또 뭐가 묻고 싶은데?"

이제는 아예 질린다는 표정으로 신경질을 부린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하고픈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좀 전에 식당에서 내가 했던 말 모두 들었어?"


"그래. 다 들었다. 그건 또 왜?"
"네 생각이 궁금해서."
"하?"

내 질문에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레오나. 표정에 이 새끼 뭐지? 라는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넌 수인이잖아. 당연히 인간을 좋게 볼리가 없지. 그래서 궁금해졌어. 내 이야기를 듣고 수인은 어떤
생각을 할까? 싶었거든."
"너는 진짜... 하. 묘족보다 더한 놈이네, 이거. 인간은 원래 다 이래?"
"내가 좀 호기심이 많아. 특히 이종족한테는."
"참나..."

결국 레오나는 끝을 모르는 내 호기심에 졌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포기했다는 기색이다.


그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최대한 표정을 관리했다.

이윽고 레오나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 또한 그녀의 입이 열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줬다. 그사이 마음을 다스렸는지 금색으로 빛나던 그녀의 눈동자가 푸른빛으로 되돌아왔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꾹 다물려 있던 레오나의 입술이 열리며 특유의 시니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알려줄건데?"
"네?"
"안 알려줄 거라고. 설마 내가 대답해줄 줄 알았냐?"

내가 당황하는 동안 레오나가 씨익 웃더니 나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는데 막상


가까이 다가오니 그녀의 키가 꽤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살짝 올려다봐야할 정도니 175cm 는 넘지
않을까.

아무튼, 레오나는 내 앞에 당당히 서더니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내 볼을 꽉 누르며 입술을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우부우? 무어하느은..."
"그나저나 우리 빨간 고양이는 궁금한 게 왜 이리 많을까나?"

내 머리카락 색이 빨간색이라 빨간 고양이라고 칭한 걸까. 하지만 지금은 내 입술을 붙잡은 레오나의


손길을 뿌리치는 게 우선이다.

물론 내가 아등바등거려도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수인의 기본적인 육체 능력은 전 종족을 통틀어 뛰어난


편인데 그런 레오나의 힘을 이기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리가 아니지, 불가능하다.

내가 저항하는 동안 레오나는 씨익 웃는 낯짝을 유지하며 재차 경고를 날렸다.

"다시 경고하는데, 내가 수인이라는 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네 혀를 뽑아버릴거야. 사지를 찢어버리는


건 나도 곤란하니까 봐줄게. 알겠냐?"
"뉘예..."

거기서 거기잖아. 하지만 무서워서 긍정할 수밖에 없다.

레오나는 내가 긍정하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볼을 놔주었다. 잠깐 잡고 있었는데


뺨이 얼얼하다.

"부디 네 입이 무겁길 바랄게. 그전에..."

스윽-

내가 얼얼한 뺨을 문지르는 동안 레오나가 고개를 쭈욱 내밀더이 내 목덜이에 가까이 대었다. 그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녀가 내 손목을 붙잡음으로써 무산되었다.

"킁. 킁킁. 킁."

그 후로 레오나는 내 목덜미에 코를 박으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미묘한 감각에 얼굴이 붉어짐을 느끼며
황급히 빠져나가려 시도했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레오나의 머리를 밀어내는 것 뿐.

하지만 미동도 하지 않아 결국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뭐긴 뭐야. 네 냄새를 기억하려는거지. 그런데 퀴퀴한 책 냄새가 진동을 하네."

레오나는 한참 동안 내 체취를 기억하려는 듯,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다가 얼굴을 떼어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붙잡았던 내 손목도 놓아주었다. 나는 그녀가 손목을 놓아주자 서둘러 확인했다.

손목을 살펴보니 새빨간 멍이 짙게 새겨져있다. 나는 아프다는 인상을 쓰며 손목을 어루만지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뉘앙스로 물었다.

"내 냄새 기억해서 뭐 하려고?"


"네가 쓸데없는 짓을 하나 안 하나 중간중간 살펴보려고. 내가 널 어떻게 믿어?"
"... ..."
"이제 볼 일은 끝났지? 난 이제 간다."

레오나는 내 머리를 툭- 툭- 치고는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손목을 어루만지면서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레오나의 이름을 외쳤다.

"레오나!"
"아, 진짜... 왜?"

그녀는 내가 부르자마자 머리를 벅벅 헤집더니 등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얼굴을 보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이다.

나는 괜히 불렀나 싶어 약간 후회했지만 마지막으로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내어 그녀에게 전달했다.

"너도 제논 일대기를 읽어?"


"뭐? 제논 일대기?"
"응."
"하."

내 질문을 들은 레오나가 헛바람을 내뱉었다. 그리고 손을 휘적거리더니 귀찮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몰라. 그런 거. 난 제논인가 뭔가 하는 거는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신경 꺼."


"...알았어."
"그럼 난 간다. 이제 네가 뭘 묻던 간에 다 씹어버릴테니 묻지 마. 알았냐?"

레오나는 그 말만 남기고 점점 내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붉게 멍이 든 손목을 붙잡은 채 망연히 바라보다가 문득 의아한 부분을 떠올렸다.

"...재미없다고? 읽긴 읽는다는 건가?"

내가 그리 중얼거렸을 때였다.

퐁-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몰라도 레오나의 머리 위로 한 쌍의 귀가 솟아났다.

< 26 화 >

'신(神)'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지구에서는 단지 '신앙' 하나만으로 신을 믿는 이들이 많고, 인간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종교의 자유가 존재하는만큼 신을 믿던지 말던지 개인의 자유였다. 참고로 나는
무신론자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신을 부정한다면 골치아픈 걸 넘어서 큰일난다. 왜냐하면 지구와 달리 여기는


명백하게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정신병자들이 신은 없다고 난동을 부렸다가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지는, '천벌'을 받는 전적이 여러 번 발생했다.

그 대신 의미 그대로의 '신'처럼 전지전능(全知全能)한 건 아니고, 이 세상을 굽어살피는 절대자 또는


초월자에 가깝다. 또한 신도의 신앙심을 양식으로 삼아 그들에게 힘을 나누어주거나 규칙에 위반되는
행위를 한다면 천벌을 내리는 등등. 이밖에도 본인의 '화신(化身)'을 통해 기적을 행사하거나 신탁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

한 마디로 신과 신도는 일종의 부모와 자식 같은 관계라 할 수 있고, 어쩌면 그보다 더 깊은 관계다.

'신이라...'

현재 나는 신학 강의를 들으면서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생에서는 신학을 학문으로 봐야 옳은가? 라며 수많은 갑론을박이 오고 갔지만 이 세상에는 매우 중요한


학문 중 하나다. 당장 신의 존재가 명확한데 신학이 발달되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하다.

그 이유로 현재 신학을 강의 중인 교수도 자그마치 대주교급 인사다. 귀족으로 따지면 백작 정도 되는


권력을 갖고 있는 걸로 안다.

"빛의 신 루미너스 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러나 항상 올바른


길을 가도록 정진하거라. 난 너희가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총 3 명의 신이 있다.
제일 먼저 교수가 언급한 빛의 신 '루미너스'. 루미너스는 주로 인간이 믿는 신이며, 신도수가
어마어마한지라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도 가히 무시무시한 수준이다.

그리고 루미너스를 상징하는 단어는 많지만 그중 대중적으로 알려진 건 '태양'과 '희망'이다. 이때문인지
목숨이 왔다 갔다하는 전쟁에 나서는 군인들 중에 루미너스의 신도가 많다. 내 아버지도 루미너스의
신자였던 걸로 안다.

두 번째는 어둠의 신 '모라'다. 모라는 독특하게도 마족이 믿는 신인데, 마족이 모라를 믿는 이유는
그녀가 어둠 즉, '달'과 '안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암울한 마족의 현실을 보면 그들이 어떤 안식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연의 신 '히르트'. 이 신은 주로 수인과 드워프가 믿는 신이다.

히르트를 상징하는 건 '자연' 그 자체이며, 야생에서 살던 수인들에게는 그 누구보다 히르트만큼 편안한


신은 없었을 것이다. 드워프도 본인들의 창작을 위한 '재료'가 자연에서 나온다는 걸 알고 있기에
히르트를 섬기고 있다.

그럼 여기서 엘프는 어떤 신을 믿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엘프는 3 명의 신 모두 섬기고 있다. 무려 '


천사'의 후예여서 그런지 신성력을 다른 종족보다 더 수월하게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새삼스레 엘프와 다른 종족간의 격차를 상기하다가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신들이라면 내가 왜 여기에 환생했는지 알고 있을까?'

하지만 그걸 묻기 위해 신전으로 갈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지금도 충분히 잘 살고 있는데 상황이


복잡하게 꼬이는 건 질색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신이니 내 존재를 진작에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도 신탁이 내려졌다거나
화신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전혀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는 중이다.

이에 기회가 된다면 신전에 방문할 생각이나 그전까지는 평범하게 지낼 것이다. 하물며 내가 만화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세상을 뒤바꾸는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닌데 그들이 신경 쓸...

'...내가 쓰는 소설도 포함되려나?'

아무튼 넘어가자. 지금은 다른 것보다 강의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머릿속에 든 상념을


뿌리쳤다.

상념을 모두 뿌리치고 앞을 바라보니 교수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강의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매우 큰 키와 빼빼 마른 체격이 특징인 교수의 이름은 홀라드. 루미너스 교단에서 대주교라는 거물급


위치를 갖고 있으며 실제로도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라 들었다.

나는 교수의 설명을 듣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신학은 역사만큼 지루한 수업이라 그런지 강의실에
앉아있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학생들은 자기가 섬기는 신의 신실한 신자일 확률이 농후하다.

어떻게 아냐고? 호기심에 참여했다가 상상조차 못한 지루함에 도망친 학생들이 많았거든. 나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꾸준히 강의를 듣는 편이다. 문제는...

꾸벅- 꾸벅-

현재 내 옆에 앉아있는 마리가 꾸벅 꾸벅 졸고 있다는 거다. 나는 눈꺼풀이 반 정도 감긴 채 꾸벅거리는


마리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그녀가 한 번 꾸벅거릴 대마다 손에 펜은 노트에다가 낙서를 그렸으며, 비단결 같은 그녀의 백색
머리카락이 점점 얼굴을 가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리의 눈꺼풀이 완전히 감기고 고개가 아래로 스르르 내려갔다. 졸음을 넘어 완전히 잠에 빠져든
것이다.

'분명 지난 주까지만 해도 잘 들었던 걸로 아는데...'

참고로 신학은 9 시 수업이다. 그럼 마리는 어젯 밤에 뭘 했길래 첫 강의부터 졸기 시작한 걸까.

조금 의문이 들었으나 일단 그녀를 깨우는 게 좋을 듯했다. 몸을 건드릴 수는 없으니 마리의 귀 앞에 손을


갖다 대었다.

딱!

"...으음?"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리는 몸을 흠칫거리더니 아래로 떨어뜨렸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고개를
들어올리자 커튼처럼 쳐졌던 머리카락도 약간 걷혔는데, 옆모습을 바라보니 어딘가 멍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가 잠이 덜 깼다는 것을 확신하며 입을 열었다.

"정신이 드냐?"
"...응?"

내 질문에 마리가 비몽사몽한 상태로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몽롱하면서도 색다른 매력을 풍기는 마리의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활기찬 모습만 보여주던 그녀였던지라 새롭게 다가왔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도 마리는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가 앞을 쳐다봤다.


교수가 강의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 상황 파악을 한 걸까, 그녀는 다시 나에게 시선을 옮기며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나 졸았어?"
"응. 꾸벅 꾸벅 잘 졸더라."
"끄응..."

내 대답에 마리가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침음성을 흘렸다. 나는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는 동안 속에 담았던
의문을 꺼냈다.

"어제 뭘 했길래 첫 수업부터 조는거야?


"...제논 일대기."
"뭐?"
"흐아아암..."

마리는 길게 하품을 하더니 잠긴 음성으로 대답했다.

"1 권부터 최신권까지 다시 읽느라 밤 샜어. 원래는 3 권까지만 읽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다
읽었더라고..."
"... ..."
"너도 알잖아. 비루스 교수가 조별 과제로 제논 일대기의 전개를 예상하랬던 거."

할 말이 없어졌다. 앞으로 일주일 후면 본격적인 조별 과제가 시작된다. 이러니 그녀 딴에는 열심히


조사하고 있던 거겠지.
하지만 수면 패턴을 망칠 정도로 의욕을 부리는 건 좋지 않다. 괜히 그랬다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적당히 해. 안 그러면 오늘처럼 강의에 집중하기 힘들테니까."


"하지만 너무 재미있는 걸 어떡해? 벌써 다음 권이 기다려진다고..."

나는 마리의 볼멘소리에 속으로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로서 기쁘긴 하나 다음 권은 적어도 2 달


뒤에 나올 것이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비축분이 있어서 8 권이 보다 일찍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원고를


작성하는 시간이 잘 없을 뿐 더러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그조차도 힘들다.

이뿐만 아니라 신디에게 작문을 가르치고, 마리와 세실리에게 역사까지 가르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아예
없는 수준이다. 공강 시간 때마다 숙소로 돌아가서 집필을 하고 있다지만 나도 여유가 필요한 몸이다.

'덕분에 설정을 꼼꼼이 정립할 수 있다는 거지만...'

연구실에 있는 논문과 서적은 나에게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다. 게다가 신디도 작문 능력이 떨어질 뿐이지
역사에 관해서는 박학다식한 편이라 내가 궁금했던 점들을 명쾌하게 설명해줬다.

이에 제논 일대기 9 권은 여러모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될 예정이다. 여태까지 알음알음 존재감을


드러냈던 악마측 간부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며, 이를 통해 많은 신선한 충격을 선사할 것이다.

왜냐하면 악마측 간부에는 인간과 수인, 마족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엘프까지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배경 설정은 전생의 서브컬쳐에서 흔히 활용되던 '칠죄종'이며 각각 특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내가 잠깐 머릿속으로 설정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 마리가 자신의 노트를 들여다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졸긴 졸았나보네. 이거 뭐라고 적은거야?"


"적었다기보다는 그냥 선을 그은 거지."
"칫. 미안한데 필기한 거 있어? 보여주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후우... 이번만이다?"
"감사~"

마리는 내가 필기한 부분을 보여주자 밝게 웃으며 옮겨적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음냐..."
"... ..."

본래 잠이라는 건 쉽게 달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필기를 옮겨 적다가 다시 꾸벅 꾸벅 조는 마리의 모습에 황당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럴 거면 왜


보여달라고 한 거야.

이에 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마리를 깨우려는 찰나였다.

"그냥 자게 놔둬. 마리는 잠이 많은 편이라 한 번 늦게 자면 계속 졸거든."

내 오른편에 앉아있던 리나였다. 그녀는 여전하다는 표정으로 꾸벅 꾸벅 조는 마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정말 괜찮냐는 듯이 물었다.


"정말 그래도 돼요? 이러다 벌점이라도 맞으면..."
"괜찮아. 마리도 배운 게 있어서 신학 점수는 괜찮게 받을 거거든. 황궁에서 같이 교육받았던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리나의 말을 듣자 하니 그녀와 마리는 전에 따로 심화 과정을 거친 듯했다. 하기야 황녀와 공작가


영애이니 다른 귀족과 전혀 다른 교육을 받았겠지.

나는 그녀의 말을 듣다가 속에 품어놨던 의문을 꺼내었다.

"저번부터 생각했던건데 리나 님이랑 마리는 언제부터 안면을 튼 거예요?"


"아마... 10 살 때 즈음? 그때부터 만났던 걸로 알아."
"그렇군요."
"그건 왜 물어?"
"그냥 궁금해서요."

평소 마리는 리나를 껄그러워하는 편이다. 마리가 리나를 바라볼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니 그 정도는
눈치챌 수 있다.

허나 그 이유를 당사자들한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으니 가슴 속에 묻어놓을 생각이다.

리나는 내 대답이 싱겁게 느껴졌는지 피식 웃었다가 이어서 내 이름을 불렀다.

"아이작."
"네."
"혹시 아이작은 모임에 관심있어?"
"모임이요?"
"응. 모임."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동안 리나는 빙긋 웃더니 나에게 말했다.

"곧 있으면 모임이 하나 있는데 모임이라고 해봤자 신입생밖에 없어. 대신 문학, 무학 가리지 않고
모여서 사람이 많을 거야."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난 오라버니가 미리 알려준 거거든. 그리고 조금 있으면 아카데미에서도 알려줄거야. 어때?"

리나는 내 눈과 똑바로 마주하더니 기대와 흥미가 담긴 얼굴로 재차 권유했다.

"아이작은 참석할 거야?"

말이 좋아 권유 또는 부탁이지.

"참석 여부는 개인 자유지만 난 개인적으로 아이작이 '꼭' 왔으면 좋겠거든."

나에게는 '황녀'의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서럽네.'

제논 일대기 9 권이 늦게 나오면 리나 책임이다.

< 27 화 >

리나가 언급한대로 아카데미 측에서 신입생 모임이 예정돼 있다고 공지를 기재해줬다. 복도 게시판에
대자보마냥 공지를 붙여놓았으니 모르는 학생들은 아무도 없을거라고 확신한다. 나도 게시판에 붙여진
공지문을 하나하나 읽으며 자세한 일정 및 개최 위치를 재빠르게 확인했다.
모임이 개최되는 시기는 다음 주 토요일이며 위치는 입학식이 진행되었던 대강당이다. 참석 여부는 개인
자유지만 나는 리나의 압박 때문에 참석하는 편이 이롭다.

"뭐? 신입생 모임에 참석할 것 같다고?"


"응."

시간이 흘러 다가온 주말.

나는 간단한 운동과 집필을 모두 끝낸 뒤, 연무장으로 향하여 니콜과 만남을 가졌다. 그녀도 방금 막


모든 대련이 끝났는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니콜은 내 말에 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다가 살짝 이해가 안 된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난 네가 그런 거 싫어할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참석하게 됐어."
"...어쩌다 보니?"

순간적으로 니콜의 음성이 약간 차가워졌다. 그와 동시에 얼굴을 뒤덮은 수건 사이로 드러난 금색


눈동자가 사나워졌다. 아무래도 막내 사랑이 지극한 누나이다보니 내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간파한
모양이다.

나는 섬뜩하게도 느껴질법한 니콜의 눈빛을 보자마자 다급히 입을 열었다. 친누나에게도 말 하나하나


조심해야 한다니 새삼 내 처지가 기구하게 느껴졌다.

"누, 누나가 걱정할만한 일은 없어. 나도 호기심에 참석하는 거야."

내 거짓말에 니콜은 썩 믿지 못 하겠지만 넘어간다는 뉘앙스로 답했다.

"...그럼 됐고. 날 찾아온 이유도 모임 때문이야? 물어보려고?"


"응."
"흐음... 모임이라..."

니콜은 얼굴의 땀을 대충 닦으면서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줬다.

"어이~"
"응?"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허스키하면서도 보이시한 톤이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멀리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니콜의 친구, 아델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도 이제
막 모든 대련이 끝났는지 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리는 중이다.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나도 좀 껴주라."


"엑."

이윽고 가까이 다가온 아델리아가 내 목을 한 팔로 감싸며 친근하게 대했다. 나는 갑작스럽게 행해진


스킨십에 당황을 넘어 당혹스러웠다.

그 이유에는 스킨십도 있으나 아델리아의 복장이 문제였다. 현재 아델리아는 소위 민소매라 불리는 옷을


입고 있다.

부드러운 맨살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질 뿐 더러 땀과 섞여 은은하게 풍기는 체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가족을 제외하고 이성과의 접촉이 전무했던 나로서는 실로 자극적이었다.
전생에서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충격 때문에 교류를 하지 않아 더더욱 곤혹스러웠다.

"야! 뭐 하는 짓이야? 내 동생한테서 당장 떨어져!"

니콜도 아델리아의 스킨십은 예상치 못 했는지 버럭 소리치며 황급히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덕분에 내
목은 아델리아의 팔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허나 아델리아는 니콜의 거센 행동에도 실실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네 동생한테 허튼 짓을 할까 봐 그러는 거야? 걱정 마. 네 동생이 귀엽긴 해도 내 스타일은


아니라서."
"시끄러. 내 눈에 너는 그냥 위험분자야. 설마 아이작한테 공을 던졌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운 건
아니겠지?"
"...그건 진짜 실수였어. 진짜 미안."

니콜이 2 주 전에 발생했던 사건을 입에 담자 아델리아도 딱히 할 말이 없었는지 곧바로 사과했다.

그리고 아델리아는 그 뒤로도 니콜이 표독스러운 시선으로 쏘아보자 약간 무안했는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무슨 얘기하고 있던 거야? 궁금해서 왔긴 했는데."


"...별거 없어. 아이작이 신입생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거든."
"신입생 모임?"

아델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하늘색 눈동자에는 진한 흥미로움이 담겨있었다.

"신입생 모임이라... 옛날 생각나네. 그때는 정말 재미있었는데."


"너는 몰라도 난 최악이었어."

니콜과 아델리아도 신입생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던 모양이다.

또한 아델리아는 꽤 재미있었는지 미소를 짓고 있는 반면, 니콜은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이었다. 정말로


극과 극의 반응이다.

"아무튼 신입생 모임은 사교회와 비슷한 점이 많지만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야. 신입생들이랑 선배들이
한데 모여서 웃고 떠들고 놀면 돼. 아이작이 생각하는 것보다 꽤 재미있을걸?"
"그거밖에 없어? 사교회나 무도회처럼 정치적인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하진 않아?"
"너 같은 애들이 무슨 정치를 알겠니? 단어 그대로 친분을 다지기 위한 모임이야."
"음..."

니콜은 과연 알고 있을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제국의 황녀, 리나가 나를
꼬드겼다는 걸. 하지만 괜한 걱정을 줄 것 같으니 입 밖으로 꺼내진 않을 것이다.

나는 니콜의 설명을 잠자코 듣다가 이것저것 궁금한 점들을 묻기 시작했다.

"참석자는 신입생밖에 없어?"


"선배 몇 명이랑 조교를 제외하면 신입생밖에 없을거야."
"옷은 뭘 입고 가야해? 공지에도 없어서."
"교복을 입고 가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말끔히 차려입는 게 더 낫지.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잖아?"
"우리 귀족은 그렇다 쳐도 평민들은?"
"여기 옷 가격이 꽤 싼 편이야. 그리고 헤일로 아카데미에서도 평민에게는 장학금을 지급해줘."

니콜은 내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해주다가 손뼉을 치며 마침 잘 됐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이 기회에 아이작 옷을 사면 되겠다. 때마침 대련도 끝났으니 타이밍도 좋네."
"나 집에서 갖고 온 거 있어."
"그걸 입으려고? 절대 안 되지. 이 누나가 모처럼 꾸며줄테니까 잠자코 따라와."

갑자기 전개가 쇼핑으로 바뀌는 기분이다. 그래도 썩 나쁘지 않은 것이, 나는 여지껏 집에서 틀어박혀
지냈던지라 패션은 니콜이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니콜은 쇼핑을 가기로 마음먹었는지 기대된다는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누나 씻고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빨리 갔다 올 게."


"응."
"아델. 너도 같이 갈래?"
"나는 패스. 지금은 자고 싶어."

그리하여 니콜과 아델리아는 씻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두 사람이 어두운 통로를 따라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서늘한 돌바닥의 감각이 엉덩이를 타고 전해졌다.

기다리는 와중에 머릿속으로 모임이 어떻게 진행될지 곰곰이 생각했다.

'신입생 환영회 같은 건가?'

신입생 환영회라도 전생의 대학교처럼 장기자랑을 하거나 그러진 않을 것이다. 여기는 놀이 문화가 그닥
발달되지 않은데다 어쩌면 천박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맨 처음 사회자가 진행을 하고 그 후부터는 자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까. 분위기를 돋구기 위해


음악가들을 초정하여 악기를 연주할 수도 있다.

리나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참석하게 된 모임이지만, 은근히 기대가 된다. 어쩌면 협소하디 협소한 내
대인 관계를 약간이나마 완화해주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지인이라 할만한 사람들이 죄다 여자네?'

세실리, 마리, 리나, 신디, 아델리아.

이 다섯 명은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나서 인연이 닿아 현재까지 완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내가 먼저 다가간 것도 아니고 그들이 먼저 다가온 것이다.

전생에서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나서 주변과 거의 단절되다시피 살았고, 환생하고도 그 점은 변하지


않았다. 현재의 부모님도 그런 내 성격을 걱정하셨으나 무리없이 잘 살고 있다.

'이렇게 보면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난 다수의 친구를 사귀기 보다는, 소수의 친구와 깊게 연을 맺는 편이다. 또한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고


상대방 쪽에서 먼저 다가오기를 바란다.

낯선 사람에게 먼저 다가갈 용기도 없고, 만난지 고작 몇 초만에 친구가 될 정도로 뛰어난 친화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솔직히 내게 선뜻 다가와준 이들이 고마웠다.

가끔 나를 곤란하게 만들긴 해도 그 정도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 제논 일대기와 관련이 된 것만


아니라면 말이지.

"아이작?"
"응?"
"왜 그리 멍 때리고 있어? 이제 출발하자."

상념에 잠겨있는 와중에 니콜이 환복까지 마치고 돌아왔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델 누나는 먼저 갔어?"


"응. 마음 같아서는 따라가고 싶은데 오늘은 피곤하다고 먼저 들어갔어. 그런데 언제부터 아델을 누나라
부르기 시작한 거야?"
"아델 누나가 그렇게 부르라고 해서. 누나가 잠깐 대련하러 나갔을 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거든."
"흠... 그래?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던?"
"딱히? 내 볼을 꼬집거나 이상형이 뭔지 묻는 것빼고는?"
"이 쌍년이..."

괜히 말했나. 나는 악귀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한 니콜의 표정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후우... 아니다. 이건 나중에 생각하고, 아이작은 생각해놓은 옷이라도 있어?"


"예복 정도?"
"예복이라..."

니콜은 예복이라는 대답에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충 감을 잡았다는 듯이


말했다.

"확실히 아이작은 말랐으니까 예복이 안성맞춤이겠다. 전체적으로 화려하지 않고 수수한 스타일?"


"응."
"흠... 그래도 스카프에는 문양이 박혀있는 게 좋겠네. 양복 색깔은 네 머리색이랑 비슷한 걸로
고르고."
"빨간색? 그럼 너무 눈에 띄지 않아?"

안 그래도 머리카락부터가 빨간색, 자세히 구분하자면 선홍색이라 멀리서도 눈에 띄는 편이다. 하물며


눈동자도 맹수처럼 빛나는 금안이라 한 번 만났다하면 결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하지만 거부가 담긴 내 질문에도 니콜은 검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이작이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네. 너는 옷이 아니더라도 빨간머리 하나만으로 어디서나 눈에 띈다는


점이야."
"... ..."
"당장 데이브도 실력으로 유명해지기 전에 빨간머리로 알려졌는걸? 데이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빨간머리는 알고 있을 정도였어."

그렇다면야, 할 말이 없어졌다. 전에도 생각한 거지만 이 세상에는 빨간머리가 드물다 못해 거의 없는


수준인 것같다.

"그러고 보니 형은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알아?"


"글쎄? 편지를 보내긴 했는데 지금도 훈련 중일걸?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누나도 네이비 기사단에 입단할 생각이야?"
"가능하면 그러고 싶지만 네이비 기사단이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쉽게 입단할 수는 없어. 경쟁률이 무려
1 대 100 인데다 너무 힘든 나머지 다른 곳으로 전출가는 사람들도 많아."

이렇게 들으니 아버지가 얼마나 강하신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평범한 기사단원이 아니라 무려
기사단장까지 꿰찬 몸이셨으니 미네르바 제국에서 전술병기급으로 다뤘을 것이다.

하물며 네이비 기사단은 인간보다는 이 종족과 싸우는 일이 더 많다. 최근에는 잠잠하다지만 과거에는
시도때도 없이 국경을 넘나드는 수인과 충돌을 빚었으며, 더 나아가 엘프와도 싸운 적이 있다.

나는 아버지야 말로 판타지 속 은둔 고수이지 않을까, 라는 시답잖은 생각하다가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누나도 신입생 모임에 참석했지?"
"응."
"혹시 드레스 입고 간 거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드레스를 입고 갔지."
"그때 무슨 일 없었어?"

친동생인 내가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친누나, 니콜은 어머니를 닮아 매우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다.


더군다나 옛날부터 아버지 밑에서 꾸준히 해온 단련 덕분에 건강미 넘치는 몸매를 갖고 있다.

이런 미녀가 드레스를 입고 모임에 참석했다? 온갖 시선을 받는 건 기본이고 특히 남자들에게 무수한


대쉬를 받았을 확률이 크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그닥 좋은 기억은 없어. 남자들이 하도 들러붙어서 제대로 즐기지도 못 했거든. 다음부터는 모임에
일절 나서지도 않았고."

니콜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목소리에는 귀찮음과 후회가 한가득 담겨있다.

"음. 역시. 그것 말고는 더 없어?"


"말해줄 생각없으니까 너나 신경 쓰세요."
"알았어."

더이상 깊게 파고들었다가 니콜의 심기를 건드리면 곤란하니 바로 관두었다. 게다가 니콜 같은 미녀의


고충은 남자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니콜은 내가 질문하기를 그만두자 장난기어린 미소를 짓더니 은근하게 물었다.

"왜? 아이작은 누나가 드레스 입은 모습 보고 싶어?"


"아니. 전혀. 눈만 버릴 것 같아."
"하하하. 우리 아이작은 농담도 잘하네?"
"악!"

결국 볼이 꼬집혔다. 그녀 딴에는 약하게 꼬집은 거겠지만 기본적인 악력이 무시무시한지라 엄청 아프게


느껴졌다.

아무튼 간에 남매의 다정한 이야기를 뒤로 하고, 우리 둘은 머지않아 옷가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헤일로
아카데미 번화가에 위치한 옷가게라 그런지 규모가 상당히 큰 편에 속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옷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원이 영업용 미소를 지어주며 우리를 환대해줬다. 나는 옷가게에 처음 온지라
살짝 주춤거린 반면 니콜은 능숙하게 받아쳤다.

"남성용 예복을 하나 맞추려고 하는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네. 남성용 예복 코너는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가자."
"응."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걷다보니 남성용 예복 코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성용 예복 코너라는
말에 어울리는 듯, 다양각색의 예복들이 나열돼 있었다.

약간 백화점 같은 느낌에 떨떠름해졌으나 판타지니까라며 넘어갔다. 전생의 상식을 대입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다.

"하아... 이것도 별로야. 이거 말고 다른 건 없어?"


"저... 손님. 죄송하지만 이 옷이 마지막입니다."
"뭐?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겨우 이거밖에 없다고?"

코너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선객이 있던 모양이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이상했다.

"우리 저택에는 이것보다 더 많은 옷이 있다고! 그런데 이것밖에 없다는 게 말이 돼?"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 가게에서는 이 옷들이 전부입니다."
"죄송하면 다야? 어떻게든 더 갖고 와야 할 거 아냐?!"

손님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잔뜩 진상을 부리고, 그에 여자가 어쩔 줄 몰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와 니콜은 무슨 상황인지 보러 가기 위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향했다. 어차피 정장을 맞추기 위해서는


종업원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윽고 소란의 근원지로 도착하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은...'

전신 거울 앞에 총 3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고함을 지른 남자와 그 옆의 어쩔 줄 몰라하는 여종업원,


마지막으로 멀찍히 떨어진 남자가 팔에 옷을 걸친 채 기립해있다.

또한 고함을 친 남자는 엄청나게 화려한 예복을 입었다. 이 세상 패션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엄청난
가격을 자랑할 듯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남자의 외모가 더 눈길을 끌었다. 나름 잘생긴 축에 속하지만, 그걸 전부 깎아먹을


정도로 표정이 험악해진 상태라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저택에 있는 거나 갖고 올 걸 그랬나? 헤일로 아카데미라 해서 괜찮은 줄만 알았더니 전혀


아니었어."
"... ..."
"...응?"

난처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던 남자가 나와 니콜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나와 시선을 마주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살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놈은..."
"... ..."

화려한 예복을 입은 남자의 이름은 잭슨. 첫 날부터 세실리와 리나에게 작업을 걸었다가 대차게 깨졌던
백작가 영식이다.

또한 내가 세실리와 리나의 관심을 받는다는 이유로 나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이기도하다. 같은 수업을


들을 때마다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보니 그정도는 알 수 있다.

정작 나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저 한 명에 신경을 쓰기에는 내가 너무 바쁘다.

아무튼 각설하고- 나는 순식간에 고요해진 상황 속에서 무슨 말을 꺼낼지 고민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녕."
"... ..."
내 무덤덤한 인사에 잭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 28 화 >

본래 사람의 첫 인상은 오래 가는 법이다.

첫 인상이 좋다면 특정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그 사람에게 호감을 품기 마련이고, 그 반대라면 아무리 그
사람이 선행을 펼쳐도 고까운 시선을 보내 거나 그럴 일 없다고 부정한다.

이른 바 '색안경'을 끼게 되는 건데, 이건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만큼 사람 관계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잭슨은 나에게 앙심을 품은지라 내가 뭘 하던 간에 싫어할 놈이다.

"아는 사람이야?"

기묘해진 분위기 속에서 니콜이 나에게 물었다. 그녀는 눈치가 빠른 편이니 잭슨이 나를 불편해한다는
것정도는 알아챘을 것이다.

애초에 질문부터가 '친구'가 아닌 '아는 사람'이었다. 일단은 '아는 사람'이 맞긴 하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같은 문학생이야."
"아~ 그렇구..."
"네 놈이랑 나를 같은 동급이라 생각하지마. 불쾌하기 짝이 없으니까."

니콜이 말을 하기도 전에 잭슨의 폭언이 귀를 파고들었다. 그에 니콜은 잘못 들었나 싶었는지 눈을


깜빡였다.

그동안 잭슨은 방금 전 폭언이 진심이라는 듯, 사뭇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선민사상에


찌들어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대놓고 말할 줄은 나도 몰랐다.

"괜히 기분만 잡쳤군. 이봐, 이거랑 저거는 얼마지?"


"네? 그... 총 합쳐서 27 골드 59 실버입니다만..."

1 골드는 대한민국 돈으로 환산하면 약 10 만원이다. 그리고 1 골드는 100 실버이니 대충 276 만원이라고
보면 된다.

잭슨은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도 못마땅한 기색을 보일 뿐, 가격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쯧. 디자인은 형편없는데 쓸데없이 비싸군. 렉스, 가격을 지불하고 따라와."


"알겠습니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되도록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지 의상을 대충 벗어던지고 렉스라는 시종에게
명령을 내렸다. 렉스는 잭슨이 바닥에다 내팽겨친 예복을 주섲주섬 주워들었다.

이어서 잭슨이 명령한대로 가격을 지불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자루를 꺼내더니 하나하나 셈을 하고 금화를
종업원에게 전달했다.

"여기 28 골드입니다. 잔금은 됐습니다."


"아. 가, 감사합니다."
"뭐해?! 빨리 안 와?!"
시종이 결코 느린 것도 아닌데 잭슨이 짜증 가득한 고성을 내질렀다. 종업원은 그 고성에 움찔한 반면
렉스는 늘 있던 일이었는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빨리 빨리 좀 다녀. 그리고..."

잭슨은 시종을 갈구고는 나를 쳐다봤다. 나는 매서운 눈빛에도 꿋꿋이 마주했다.

한동안 나를 지그시 노려보던 그는 내 옆에 서 있는 니콜을 한 번 힐끔거렸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설마하니 누이와 같이 예복 사러 온 건가? 설마 신입생 모임에 참석할 생각은 아니겠지?"


"맞는데."
"... ..."

다 필요없고 비아냥에는 무뚝뚝한 대답으로 응수하는 게 최고다. 잭슨은 내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받아치자 눈 밑을 꿈틀거렸다.

잠깐 표정이 깨졌던 잭슨이지만 이내 비웃음을 담으며 한심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래. 참석하면 알게 되겠지. 고작 네 까짓 게 들어올만한 자리가 아니라는걸."


"... ..."
"가자, 렉스."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 말을 끝으로 잭슨이 발걸음을 옮겨 멀어지기 시작했다. 렉스라는 시종은 떠나기 전, 고개를 뒤로 돌려


나와 마주했다.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초록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이후로 시종은 본인이 다 미안했는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죄했다. 주인과 달리 시종이 인성면에서 더
완벽하다.

"...저 새끼 뭐니?"

머지않아 잭슨과 시종이 완전히 떠나갔을 때 즈음, 니콜이 분노와 황당이 두루 섞은 목소리로 물었다.
욕까지 섞은 게 그녀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나는 그녀의 얼굴을 살펴봤다. 약간 과장해서 그녀는 당장 누구 하나 처죽일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솔직히 나 같아도 형제자매가 다른 사람에게 대놓고 모욕을 받으면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나는 잭슨이라는 놈을 어떻게 설명해줘야 니콜이 이해해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는대로 알려줬다.

"잭슨이라고, 나를 싫어하는 놈이야. 듣자 하니 어디 돈 많기로 유명한 백작가 출신이라던데?"


"돈 많은 백작가라면... 케리손?"
"어? 맞아. 어떻게 알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게 이상하지. 케리손은 부유함으로 따지자면 제국 내에서도 10 위 안에 들거든."

케리손 백작가가 유명하긴 유명한 모양이다.

"근데 왜 저 놈이 너한테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야? 무슨 일 있었어?"


"그게..."

나는 일단 니콜이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해줬다. 첫 수업부터 세실리와 리나에게 집적거렸던 잭슨을


시작으로 그 다음에 이어진 일들까지.
그 대신 세실리와 리나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고 '예쁜 여학생들'이라고 둘러댔다. 니콜도
그 두 명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테니 괜히 언급했다간 내가 골치아픈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할 공산이 크다.

아무튼 그 때문에 설명이 좀 길었지만 니콜은 전부 다 이해했는지 간단하게 요약해줬다.

"...그냥 저 놈 혼자 지랄하는 거네?"


"그런 셈이지."

니콜의 말처럼 잭슨은 혼자서 열폭하고 있는 거다. 본인이 호감을 품던 여자들이 나와 친하니 배알이 꼴릴
수밖에. 더군다나 그 여자들은 잭슨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는 수준이다.

물론 포기하지 않고 가끔 기회가 될 때마다 말을 걸지만 세실리도 그렇고 리나도 사무적으로 대한다. 특히


저번에 자리 배치 건으로 잭슨을 향한 호감도가 더 떨어졌지 않았을까.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는데 딱 잭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아이작. 만약 쟤가 너를 직접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하면 누나한테 말해. 누나가 어떻게든 해볼테니까.


알겠지?"

그사이 니콜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당부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과
마주했다.

걱정이 듬뿍 묻어나오는 표정이다.

"어..."

잭슨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면 리나가 먼저 손을 쓰지 않을까. 아니면 나와 친한 마리가 처리해줄 수도


있다. 마리는 잭슨과 달리 권위의식이 없을 뿐이지 무려 백작을 '따위'로 만들어버릴 공작가의 딸이니까.
그러나 내가 가르쳐주기 전까지 니콜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에 니콜은 내가 눈을 데록데록 굴리기만 하자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분노에 찬 얼굴은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져 있었으며 상냥한 미소만이 담겨있었다.

"설마 누나한테 문제가 생길까봐 대답을 못 하는 거야? 그런 거라면 걱정마. 누나도 인맥이 좀 있거든."
"...알았어."
"그럼 이제 옷을 사볼까? 저기요?"
"아,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니콜의 부름에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여종업원이 후다닥 달려왔다. 말끔한 피부와 더불어 어리숙해 보이는
인상이다.

"얘한테 입힐 옷이 필요해서 그런데 빨간색 정장이 있나요? 얘 머리색과 최대한 비슷한 색으로."
"음... 선홍빛 정장이라... 잠깐만요. 우선 치수부터 잴 게요."

사소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내 예복을 맞추는 일정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종업원이 줄자를 가져오자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그에 종업원은 흠칫하더니 내 눈치를 보다가 소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몸에 손을 대도 될까요?"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까 손님은 몸에 손대지 말라고 하셔서..."
"... ..."
이놈은 오기 전에도 진상을 부리고 갔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대답했다.

"...전 괜찮으니까 그냥 해도 돼요."

치졸한 계급 사회 같으니라고.

*****

주말이라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법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취미 생활을 즐기면서 심신의 피로를 달래기도한다.

그리고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는 주말을 리나와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고나서 처음으로 사귄 인간 친구였으며 취미도 맞으니 그녀에게 리나만큼 편안한 상대는
없었다.

비록 리나가 제논 일대기 8 권의 내용을 발설하여 다투기도 했지만, 리나가 먼저 사과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세실리도 리나와 거리가 멀어지는 건 한사코 사양했기에 리나의 사과를 받아줬다.

"자. 여기 있어."

고풍스러운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어느 카페 안.

리나는 동그란 탁자 위에 책 한 권을 올려놓으며 맞은편의 세실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책의 정체는 다름아닌 최근 출판된 제논 일대기 8 권이었다.

세실리는 탁자 위에 올라간 제논 일대기 8 권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으로 잡았다. 뒤이어 책


페이지를 넘기면서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확인했다.

잠시 후, 리나가 전달해준 책이 진짜라는 것까지 확인한 세실리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책을 덮었다.
리나는 그녀의 행동에 다소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날 못 믿어서 검사한 거야?"


"응. 책 커버만 바꾼 걸 수도 있잖아. 요즘에는 그런 사기 행위가 성행한다고 들었거든."
"그 말, 나한테 상처가 되는 거 알고 있지? 내가 누구인지 잊었어?"
"당연히 장난이야, 장난. 리나가 나에게 이상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약간 기분 나쁜 말이기도 했지만 리나는 꾹 참았다. 자신이 세실리에게 저질렀던 죄악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흥미진진한 전개가 이어지는 와중에 누군가 결말을 발설해버리면 분노하길
마련이다. 설령 실수로 말했다고한들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는 건 변함없다.

그런데도 리나는 제논을 함정에 빠뜨린 사람의 정체가 누구인지 세실리에게 알려줬다. 세실리가 당연히 8
권을 읽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참사였다.

이후로는 세실리가 드물게 화를 내고, 리나도 기분이 나빠져 언쟁까지 벌였다. 다행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화해를 했다만 그 뒤로 세실리는 리나의 옆자리에 앉지 않았다.

"후우... 알겠어. 그리고 당부하는데, 내가 8 권을 대신 구매해줬다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마. 알겠지?"


"물론이지. 이 비밀은 무덤까지 안고 갈게."

리나는 8 권을 꼭 껴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세실리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녀가 무덤에 들어갈 때
즈음이면 아마 자신의 후손도 같이 들어가지 않을까.
잠깐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됐지만 리나는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8 권이 아니라
그녀의 근황에 대해 묻는거다.

"아카데미 생활은 어때? 할만해?"


"아직은 문제없지. 리나가 도와주는 걸?"
"아무리 나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야. 혹시 신경쓰이거나 궁금한 점은 없어?"

세실리는 100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지만 인간 사회에서 생활하는 건 처음이다. 다행히 마족의 문화는
인간의 문화와 유사한 점이 많아 지금까지는 무리없이 지내고 있다.

하지만 가끔가다가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가장 큰 예시가 바로 마법을 이용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다. 헤일로 아카데미는 특정 구역을 제외하면 마법은 금지이기에 리나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궁금한 건 딱히 없고 신경 쓰이는 거라면... 모임?"

리나의 질문에 세실리는 검지 손가락으로 뺨을 툭- 툭- 두드리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리나는 한쪽 눈을 살짝 치켜떴다. 세실리도 리나를 따라 신입생 모임에 참석하기로 결정한


참이다.

"모임? 모임은 왜?"


"모임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지 궁금해서. 신입생 모임은 문학 뿐만 아니라 무학생들도 오잖아."
"맞아. 그래도 제논 일대기는 꼭 들어갈 걸? 이건 확신할 수 있어."
"확실히 네 말대로 제논 일대기가 빠지면 섭하지."

제논 일대기는 화제의 중심에 서있는 만큼 모임에 있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주제다. 하물며 최근에


신권도 발매되었으니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세실리는 모임 때 무슨 옷을 입고 갈 거야?"


"난 헬리움에서 갖고 온 드레스가 있어서 그거 입고 갈 생각이야."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줄 수 있어?"
"어떻게 생겼냐면..."

세실리는 리나의 질문에 책을 잠시 내려놓았다. 옷을 묘사하는 것 정도야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다 그림을


그리면 그만이다.

리나도 세실리가 탁자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주자 머릿속으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세실리가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리나의 얼굴은 놀람을 넘어 점점 멍해졌다.

더 나아가 종래에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해졌는데, 리나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려 중간에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은 정확하게 세실리의 가슴 쪽. 사복을 입은 지금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중이다.

리나는 그로부터 시선을 살짝 더 들어올려 세실리의 얼굴과 마주했다. 설명을 모두 마친 세실리는 태연한
표정 그대로였다.

"...정말로 그런 걸 입고 모임에 참석할 생각이야?"


"응. 문제있어?"
"아니. 문제는 없는데..."

리나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 했다. 세실리가 설명해준 드레스의 외관은 분명


단조롭다. 이건 확실하다.
하지만 너무 단조로워서 문제라 해야 할까. 리나는 우려가 담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너무 야하지 않을까?"

그에 세실리의 대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난 뭘 입던 간에 야할 걸?"
"... ..."

직설적인 대답에 리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녀의 말마따나 저 몸매라면 어떤 드레스를 입던 간에 야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세실리가 입고 나올


드레스는 파격적이라할 만큼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아무리 그래도 좀... 그렇지 않을까? 노출이 너무 심한데..."


"리나가 뭘 걱정하는지는 나도 알고 있어. 그래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거든. 무엇보다..."

세실리는 말을 잠깐 흐리더니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는 사람이 있어서."

< 29 화 >

시간이 상대적으로 빨리 흘러가는 경우는 몇이나 있을까. 사람마다 기준은 다 다르겠지만 구분하자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너무 즐겁거나 재미있는 일을 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겼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은


무언가에 집중할 때 시간이 쏜살처럼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 후로 아쉬움과 함께 부족한 시간을 탓한다.

두 번째는 하루 하루가 반복되는 일상이 이어질 때. 이 경우는 약간 다르다. 과정은 지루하기 그지


없지만 막상 돌이켜보면 시간이 엄청 빨리 지나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는 위의 두 가지 현상을 모두 겪고 있다. 내가 듣고 싶은 강의는 재미있게 들어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지루한 강의는 멍 때리다보니 빠르게 지나갔다.

결과적으로 누나랑 같이 예복을 구매한지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금요일이다. 나는 금요일 마지막 강의인
경제학을 듣지 않아서 3 시가 되면 모든 수업이 끝난다.

"오늘의 강의는 여기까지. 내일 있을 모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여러분."

머리를 짧게 깎인 교수가 공손하게 인사함과 동시에 강의실 내부는 박수 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나 또한


그의 명강의에 힘찬 박수로 화답했다.

방금 내가 들은 강의, '군사학'은 그저 점수를 따기 위한 강의에 지나지 않았지만 교수가 워낙 설명을


잘해주니 자연스레 관심이 간 케이스다. 전생의 역사 지식을 토대로 이것저것 묻는다면 교수도 내가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해줬다.

"그리고 아이작 학생?"


"네?"

박수 소리가 점점 잦아질 때 즈음, 교수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의 지목에 박수를 치다 말고


멈칫거렸다.
교수는 특유의 엄격한 표정을 유지하며 강조하는 듯한 뉘앙스로 말을 꺼냈다.

"아까도 말했지만 바다 위에서 이루어지는 해전(海戰)은 지상전과 양상이 전혀 다릅니다. 학생이 말한


대로 '화신(化身)'이 있다고한들 압도적인 체격 차이에서 나오는 힘은 이기지 못 하는 법이에요."
"아... 네."
"그래도 꽤 좋은 질문이였습니다. 눈에 띄는 무력을 갖춘 병력도 없고, 단지 지휘만을 이용해 불리한
전황을 뒤집는 방법. 하지만 현명한 지휘관이라면 애당초 그 전투에 나서지도 않았을 거라는 점을 유의해
두세요. 그럼."

군사학 교수는 간결하게 설명해주고는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가 강의실 밖으로 나가고 난 뒤에도
얼떨떨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명량해전은 어떻게 이긴거야?'

내가 강의 도중에 질문한 주제는 '명량해전'이다. 성웅, 이순신 장군이 이루어낸 업적이며 한국인이라면
결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역사적 진실.

물론 자세한 시대적 배경은 설명하지 않고, 내가 나름대로 이 세상에 걸맞게 대입시켰다. 명량해전에서도
조선 수군은 숫자가 부족할지언정 스펙 자체는 훌륭했으니 이것저것 덧붙이는 건 잊지 않았다. 이 하나를
위하여 2 주 동안 조용히 강의만 들었으며 오늘이 되어서야 질문했다.

하지만 군사학 교수는 딱 잘라 말했다. 상대방에도 큰 피해를 입히는 건 가능하겠지만 승리를 점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심지어 지휘관이 신의 선택을 받은 '화신'이라 할지어도 말이다.

'내가 비유를 너무 이상하게 했나? 그것도 아니라면...'

지구와 이 세상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이순신의 존재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건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심지어 내가 교수에게 말했던 수군의 상황보다 원역사의 상황이 더 최악이었다. 혹시나 해서 배경과
상황을 조금 더 좋게 만들었는데도 교수는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었다.

"뭘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니? 내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내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현실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고뇌하던 중, 옆에 앉은 마리가 피식거리며 나에게


말했다. 그에 나는 생각을 잠시 멈추며 그녀를 쳐다봤다.

마리는 한쪽 입꼬리를 삐죽 올린 채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고작 12 척을 배로 100 척이 넘는 병력을 어떻게 이기겠니? 나 같으면 그딴 전투를 감행할
지휘관의 목을 잘라버렸을걸? 차라리 그 병력을 보존해서 다른 병력과 합치는 게 낫지. 병사 입장에서
개죽음도 그런 개죽음이 없을거라고."

그런데도 이순신 장군은 이겼어. 심지어 왕에게 반쯤 버림받은데다 자기 손으로 일군 군사는 원균이 그
전에 다 말아먹었다고.

하지만 위의 말이 나올 일은 결코 없었다. 그저 바보같이 웃으며 그녀의 말에 동의할 뿐이었다.

"하하하... 역시 그렇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


"넌 가끔 가다가 괴짜 같은 면모가 있더라."

마리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또한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거니?"

우리 두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뒤에 앉아있던 리나가 부드러운 음색으로 물었다. 참고로 리나의 옆에는
세실리가 앉아있다.

원래 세실리는 제논 일대기 8 권을 다 읽기 전까지 리나와 따로 앉기로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8 권을 다 읽은 모양이다.

"너도 알잖아. 나랑 아이작은 경제학을 안 듣는 거. 그건 왜?"

그동안 마리가 까칠함이 묻어나오는 어조로 대답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마리가
리나를 불편해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이전까지는 알음알음 경계했다면 지금은 거의 대놓고 까칠하게
대했다.

허나 리나는 여유만만만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린 것이 마리의 행동에도 개의치


않다는 걸 단적으로 드러냈다.

"그냥 아쉬워서. 너희랑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거든."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지 말아줄래? 가자, 아이작."
"어... 응."
"둘 다 내일 모임에서 봐~"

내가 걸음을 옮기기 전에 세실리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나는 그녀의 인사에 홀린 듯이 손을


흔들어 주고는 서둘러 마리의 뒤를 따라갔다.

마리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리나에게 인사하는 건 잊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꾸벅이는 걸로 인사하자


리나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미소에 살짝 불안감이 들었지만 애써 떨쳐냈다.

"정말이지... 그 짜증나는 미소는 언제 봐도 싫어."

강의실 밖으로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중에 마리가 투덜거렸다. 투덜거렸다기보다는 거의 뒷담을 내뱉는


수준이었다.

나는 마리가 왜 리나를 싫어하는지 궁금했으나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본래 이런 건 본인이 직접 묻기


전까지 삼가하는 편이다.

그 대신 다른 주제로 분위기를 전환하는 게 좋다. 나는 마리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너도 내일 모임에 참석할거지?"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돼. 나는 레킬리스 공작의 딸이니까. 미리미리 인맥을 쌓아둬야지."

니콜은 모임을 신입생들이 웃고 떠들고 즐기는 행사라 말했지만, 마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건 또 아는
듯싶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귀족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연줄 즉, 인맥이다.

인맥이 없다면 위기의 상황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없을테고 무엇보다 귀족에게 있어서 정치는 빼놓을 수
없는 사안이다.

평민에게 신입생 모임은 그저 행사에 불과하지만, 귀족에게는 인맥을 쌓기 위한 공간이다. 간단히 말해


훗날을 대비한 예행 연습이라 보면 된다.
"너도 참석한다고 했지? 리나한테 들었어."

마리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언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맞는 이야기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긍정하자 마리의 고운 미간을 살짝 좁혀졌다. 불편히다는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진짜 사람 불편히게 만드는 재주는 있네. 설마 리나가 압박한 건 아니지? 솔직히 말해."
"절대 아니야. 내가 자발적으로 참여한 건데?"
"음..."

나의 부정에 마리가 푸른색 눈을 똑바로 뜨며 나를 직시했다. 전에 세실리가 언급했듯이, 나는 속내가


얼굴에 잘 드러나는 편이다.

비록 마리는 세실리처럼 독심술 수준으로 내 표정을 읽진 못 하나 얼굴색을 통해 어림짐작하는 편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켜 얼굴색이 변하지 않도록 제어하고 있다.

잠시 후,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마리가 애매하다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다행히 얼굴색이 변하진
않은 모양이다.

"정말로 자발적인거지? 리나가 참석했으면 좋겠다- 이런 뉘앙스로 말하진 않았고?"


"절대 아니야."

리나를 싫어하는만큼 리나를 잘 아는 마리다.

"그리고 예복까지 샀는 걸?"


"예복?"
"응."
"흐응..."

마리는 내가 예복을 샀다는 말에 나를 묘한 비음을 흘리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마치 품평을 하는


듯한 시선인지라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이윽고 마리는 모든 품평(?)을 끝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만족한다는 목소리였다.

"꽤 잘 어울리기는 하겠네. 누가 만든 걸로 샀어?"


"어... 몰라. 누나가 골라준 거라서."
"가격은?"
"7 골드 99 실버였나?"
"엥? 겨우 그거밖에 안 해?"

역시 공작가 딸내미 클라스라고 해야 하나. 8 골드, 즉 한화로 무려 80 만원이나 하는 예복을 '겨우'로


취급했다.

나는 새삼스레 그녀의 집안을 떠올렸다가 역으로 물었다.

"그럼 너는?"
"나는 가문에서 갖고 온 게 있어. 아빠가 생일 선물로 준 건데 무려 그 유명한 젤트가 나를 위해 제작해준
드레스야."

마리가 우쭐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나는 젤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아마 재봉과 관련된 장인이지
않을까.

이 세상은 트레이닝복이나 레깅스를 보듯이 옷을 만들기 위한 원단 자체는 잘 발달해 있다. 연금술이


화학을 대체할 수 있을 뿐 더러 레시피가 널리 퍼져있어서 어느 정도 양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옷을 제작하는 건 별개의 이야기다.

여기는 재봉틀조차 발명돼 있지 않아 손으로 직접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야 한다. 그래서 평민은 몰라도


귀족의 옷은 장인들이 제작하기에 가격이 무시무시하게 비싸다.

"엄청 비싸겠네."
"당연하지. 어림잡아도 100 골은 거뜬히 넘어갈걸? 뭐, 젤트가 제작한 것치고는 싼 편이지만."

고작 드레스 한 벌에 1000 만원이나 한다니, 역시 부자들의 세계는 이해할 수 없다.

마리는 이야기를 하다가 장난기가 돌았는지 악동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자신감을 듬뿍 담으며 나에게
선언하듯이 말했다.

"내가 드레스 입은 모습 보고 반하지나 마. 우리 오빠도 마지못해 예쁘다고 해줄 정도였으니까."

나는 그 장난에 딱 한 마디로 응수해줬다.

"지금도 예쁜데."
"...에?"
"지금도 충분히 예쁘다고."
"어... 어어..."

무뚝뚝하지만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린 걸까. 백설기 같은 그녀의 피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내 대답이
꽤나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마리가 아름다운 미녀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나는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했을 뿐이고.

"어... 저... 그게... 으으..."

그 뒤로 마리는 한참 동안 안절부절 못 하며 쉽게 말을 꺼내지 못 했다. 얼굴도 손가락으로 누르면 붉은


물이 뚝- 뚝- 흐를만큼 새빨개진 상태다.

그걸 보고 괜히 말했나 싶었지만 장난은 그녀가 먼저 쳤다. 솔직히 장난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진심을 담은거라 번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 그... 고마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 그 말을 들으니까 좀 당황스럽네."


"내가 어때서?"
"너는 그러니까... 무뚝뚝한데다가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다 티가 나잖아? 그러니까... 아무튼 그래."

마리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땅바닥만 쳐다보며 걷던 마리가 나를 향해 힐끔거렸다.

"...아이작."
"응."
"나 정말로 예뻐?"
"정 못 믿겠으면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 열에 열은 다 예쁘다고 하지."
"...히히."

그렇게도 좋은 건가.

마리는 내 무뚝뚝한 대답을 듣고 배시시 웃었다. 괄괄했던 첫 인상과 달리 사춘기 소녀다운 풋풋함이
묻어나오는 중이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나올만큼, 마리의 색다른 면모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아이작."
"응."
"방학 때 우리 저택에 꼭 올 거지?"

왠지 그 말이 이상한 방향으로 다가온 건 내 착각일까. 화기애애한 지금의 분위기도 그렇고 마리의 반응도
그렇고 묘하게 느껴졌다.

어쨌거나 적당한 이유도 있겠다, 거부할 생각은 없다.

"당연히 가야지. 제논 일대기 작가도 온다고 네가 말했잖아?"

마리에게서 그 사실을 듣고나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아버지는 꼬리가 밟힌 적은 전혀 없고,
사칭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답장을 보내주셨다.

덕분에 안심이 됐지만 사칭범의 정체가 더 궁금해졌다. 과연 어떤 간 큰 놈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공작에게 사기를 치려고 하는 걸까.

마리는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가 뒤늦게 깨달았다는 목소리로 알려줬다.

"아~ 그거? 내가 깜빡하고 말을 안 해줬구나. 아빠가 그 사람 사칭이래."


"뭐?"
"사칭이었다고. 여러모로 수상한 정황이 있어서 조사하니까 그 전부터 유명한 사기꾼이었데. 지금은 제논
일대기가 유명하니 작가로 사칭하려다 우리한테 걸린거고."

썩 당황스러우면서도 허무한 결과였으나 따지고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공작이라면 쉽게 믿지도


않을테니 사람을 시켜 꼼꼼이 조사했을 터.

사실상 사칭범이 제 무덤을 팠다고 봐야 옳다. 한탕 크게 벌어볼 생각이었겠지만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그리고 아빠가 한 번 만나봤는데 글을 오래 쓴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굳은살? 그런 것도 없어서 처음부터


의심했다고 들었어. 아이작도 갖고 있지 않아?"
"이거?"

나는 손을 들어 그녀가 설명한 '펜혹'을 보여줬다. 마리는 내 중지 손가락에 나있는 펜혹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응. 응. 그거 맞아. 우리 아빠도 서류 작업을 하면서 그쪽에 굳은살이 배겼거든. 근데 너는 우리


아빠보다 더 심한 것 같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이야."

이제 이 정도는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다. 마리는 내 대답을 듣고 어련하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이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우리 저택에 안 올 거야?"


"음..."

그녀의 질문에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마리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초대받은 작가가 사칭으로 들통난 이상
내가 그녀의 저택에 방문할 이유는 없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갈 필요도 없고...'

공작이 사람을 시켜 사칭을 잡았다지만 마리의 이야기를 들으면 원래부터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작과 대면하고 악수를 나누는 순간 내 펜혹의 존재를 알아차릴 가능성이 높다.

마리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공부를 많이 한 탓에 생긴거라고 답할 수는 있겠지만, 원래 의심이라는 건 한


번 받게 되는 순간부터 무럭무럭 자라는 법이다.

특히 공작은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둘테니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나이를 지긋하게 드신 현자로 생각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변태도 아니고 호랑이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머리를
들이밀 이유가 없다.

나는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를 힐긋거렸다가 조심스럽게 대답을 꺼냈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거부할 건 거부해야 옳다.

"...아마도?"
"에이씨... 그냥 말하지 말... 아니지."

마리는 실망을 담아 투덜거렸다가 번뜩이는 생각이라도 났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턱을 살살 매만지며


무언가 계획을 짜고있는지 표정도 힌없이 진지했다.

도대체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기에 저렇게 진지한 걸까. 저렇게 진지한 얼굴은 내가 그녀와 지내면서 처음
봤던지라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안 된다면 되게 해라... 안 온다고 하면 오게 해라..."


"... ..."
"...좋았어. 아이작?"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마리가 방긋 웃으며 나를 불렀다. 나는 불길함이 차올라 딱딱하게


대답했다.

"왜."
"내가 초대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아빠가 초대해도 거절할 거야?"
"...야."

이제는 아빠 빽을 이용해서 가불기를 시전하네.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해도 마리는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말은 안 했지만 우리 아빠도 너한테 관심이 있으시더라고. 얼마나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
학생이 역사를 가르쳐준다는 걸까, 라고 하셨어. 게다가 여기서 내가 역사 점수를 좋게 받으면 더더욱
관심을 주시겠지?"
"... ..."
"어떡할래? 내가 부탁할 때 올래, 아니면 우리 아빠가 부탁할 때 올래?"
"그래. 갈게. 가면 되잖아. 치사해서 진짜."
"좋았어!"

내가 포기했다는 뉘앙스로 대답하자 마리가 두 손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나는 기뻐하는 그녀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마 마리라서 마지못해 수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조건적 거절했다. 마리는 인지하지 못
했겠지만 방금 상황은 엄연히 '권력'을 이용한 거다. 그녀의 가문, 레킬리스의 이념으로부터 한참
동떨어진 행위다.
하지만 지금 그 사실을 알려줬다간 마리가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 일은 가슴 속에 묻어두는 편이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좋겠지.

거기다 마리가 방방거리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부정적인 마음조차 사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그럼 허락한 거다? 갑자기 안 된다고 하면 혼날 줄 알아."


"알았어. 그런 일은 절대 없을테니까 걱정 마."
"그래. 그럼 내일 모임에서 봐! 안녕~!"

마리는 손을 힘차게 흔들어주면서 여학생 전용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 또한 손을 흔들어주면서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교복을 대충 벗어던지고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푹신한 감각이 전신을 파고들어


이대로 쉬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들었다.

'공작가는 그렇다 쳐도 내일은 모임에서는...'

모임은 문학생만이 아니라 무학생까지 한데 모이는 행사다. 니콜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는 했으나 걱정이
되는 건 여전했다.

당장 잭슨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안달이 난 상태였으니까. 모임에서 어떤 모욕적인 언사를 받을지


궁금해졌다. 물론 나는 잭슨을 어른애 취급하고 있는지라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머리의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바락바락 소리질러봤자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는다. 선민사상에 찌든 것도


중 2 병처럼 느껴져서 썩 와닿지 않았다.

'그나저나 레오나는 참석하려나?'

문득 수인인 레오나가 떠올랐다. 과연 그녀는 내일 모임에 참석할까. 솔직히 그녀의 사정을 보면


참석하지 않을 확률이 크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옷걸이에 내일 내가 입고 나갈 예복이


걸려있다. 저 예복 하나만 해도 80 만원이 넘는다.

'그 값을 하기를 바래야지.'

그리 생각하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시간을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다. 이럴 때일 수록 원고를


작성하는 편이 이롭다.

이어서 책상에 앉아 강의용 노트가 아닌, 전개를 정리한 노트를 펼쳤다. 세심하게 정리된 전개 및
에피소드가 적혀있었으며 등장인물의 특징과 대략적인 설명 또한 기록되어있었다.

'칠죄종에서 분노는... 수인으로 하자. 인간에게 가족이 몰살당하고, 심지어 같은 수인에게도


배신당했다는 설정을 추가하면...'

나는 아버지가 선물해준 마법필을 앞주머니에서 꺼내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 30 화 >

정장을 입으면 자기자신이 몇 배나 더 멋져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전생에서도 정장을 입는


경우가 잘 없긴해도 입기만 한다면 나 자신이 좀 더 멋져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얼굴까지 잘생기고 몸매도 좋아 옷발이 엄청나게 잘 맞는다면?


만족을 넘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듯한 자신감이 넘쳐흐르게 된다. 전생의 어느 배우가 잘생긴 게
최고야! 라고 말했던 것처럼 외모의 중요성은 이루어 말할 필요가 없다.

"좋네."

나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정장, 그러니까 이곳 말로 예복을 입은 내 모습을 관찰했다. 거울에는 선홍빛


머리카락의 미남이 선홍색 예복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미소짓고 있다.

예복은 여느 귀족들이 본인의 부와 명성을 과시하기 위해 새기는 장식도 없고, 흔한 무늬마저 없는


평범하디 평범한 예복이다. 다른 귀족이 본다면 평범하다고 비웃을 수도 있지만 예복의 가격이 워낙
창렬적이라 비싼 옷을 사는 건 무리다. 전생에 입었던 정장과 비슷해서 스스로 흡족하기도 하고.

그리고 마냥 검소한 것도 아닌 것이, 목에는 흰색 스카프를 매고 있다. 스카프에는 미네르바 제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독수리 문양이 순금으로 새겨져 있다.

검소하지만 개성을 온전히 나타내는 패션. 안 그래도 눈에 띄는 내 붉은색 머리카락과 안성맞춤인


패션이다.

'스타일은... 이대로 가자. 딱히 건드릴 것도 없네.'

내가 메이크업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기껏 꾸며봤자 이상하게 될테니 처음부터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잘생겼는데 딱히 건드릴 부분도 없다.

그 대신 머리를 단정하게 관리하기 위해 조금 전에 미용실을 방문했다. 미용실에 방문하니 오늘 있을


모임을 위해 작정하고 꾸미는 학생들로 넘쳐났으며 그중에는 내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리나와 세실리, 마지막으로 마리까지. 이 세 사람은 다른 손님과 달리 종업원 4~5 명이 달라붙어 무슨


수술을 하는 것마냥 꾸미는 중이었다.

'황녀와 공작가 영애, 그리고 마족의 공주까지. 바쁘긴 바쁘겠네.'

나는 머리 스타일만 단정하게 가꾸면 그만이었기에 빨리 끝난 편이다. 원래는 모든 인력이 3 명에게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내 존재를 알아챈 리나가 배려해줘서 나부터 관리해줬다.

그래봤자 머리카락만 조금 자르면 그만이었기에 1 명이면 족했다. 미용실에서 떠나기 전, 과연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기대가 되는 건 덤이었다.

'모임 시작은 5 시 반부터니까...'

나는 거울에서 시선을 떼어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정확히 5 시.

이제 슬슬 대강당으로 출발하면 될 것 같다. 숙소에서부터 대강당까지의 거리는 10 분도 채 소요되지


않으니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자.

이어서 예복하면 필수적으로 신어야 하는 구두까지 완벽하게 신은 후, 바깥으로 나가 대강당으로 향했다.


바깥은 이제 슬슬 해가 저무는지 어둑어둑해지던 참이다.

'조금 긴장되네.'

전생에서도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지만, 지금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신입생 모임이다. 누구는 신나게 웃고
떠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누구는 인맥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자리일 것이다.

다행히 나는 전자에 가깝다는 점이지만 아쉽게도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 거기다 제일 큰


변수는 바로 잭슨이다.

그 놈이 나를 골탕먹이기 위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겠지만 단단히 대비하는 게 좋다.

'리나랑 마리도 있을 텐데 대놓고 모욕할 수도 없을거고...'

나는 대강당으로 향하는 길에 주위를 둘러봤다. 주말이라서 오가는 행인이 많은 건 자연스럽지만, 오늘은


곳곳에 멋드러진 정장이나 예쁜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누누이 말했지만 모임은 문학생 뿐만 아니라 무학생도 참석하는 행사다. 전공을 대표하는 선배나 조교도
참석할 수 있으니 인원이 꽤 많을 것이다.

'와... 저 사람은 진짜 멋지네.'

가끔가다가 내가 감탄할 만큼 멋진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훤칠한 키와 쭉 뻗은 기럭지하며 다부진 체격을


보아 필시 무학생일 것이리라.

자세한 외모는 내가 시력도 좋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멀리 있는데도 멋짐이라는 게 폭발하는 중이다.


확실히 무학생 중에 몸이 안 좋은 사람은 없을테니 뭘 입던 간에 멋져보이긴 할 것이다.

'나도 키 크고 싶다.'

아카데미에 오고 나서 키가 1cm 정도 크긴했다. 그래봤자 173 도 안 된다는 점이 슬프지만.

그나마 위안이라도 삼을 수 있는 건 아직 내가 성장기라는 거다. 전생에서도 키가 175cm 였으니


거기까지만 커도 나에겐 감지덕지다.

"아이작?"
"음?"

이제 슬슬 대강당 도착하기 직전,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뒤이어 고개를 옮기자마자 눈에 들어온
얼굴에 살짝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호랑이상의 미남이자 미네르바 제국의 황태자, 레오르트가 두 눈에 호기심을 품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레오르트도 예복을 입었다는 걸까.

나와 달리 레오르트는 황태자라는 위명에 걸맞은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흰색 바탕과


황금색이 조화를 이루었으며, 지난 주 우연히 만났던 잭슨이 산 예복보다 훨씬 멋져보였다.

나는 그의 외모를 발빠르게 훑어봤다가 의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레오르트 님?"
"역시 아이작이 맞군. 멀리서 붉은색이 보이길래 따라왔는데 진짜일줄이야."
"여기는 웬일이시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대충 알 것 같다. 아마 레오르트도 신입생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나선 것일테지.


레오르트도 정치학을 대표할만한 학생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리고 레오르트는 내 예상대로의 답변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 옷을 보면 자네도 짐작했을텐데? 당연히 모임에 참석하기 위함이지. 자네도 보아하니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강당으로 향하는 중인 것 같은데?"
"네."
"음..."
내 간단한 대답을 들은 레오르트가 턱을 살살 쓰다듬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거의 제복 수준으로
화려한 그의 예복과 비교했을 때 나의 것은 검소하다 못해 볼품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레오르트는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듣기 좋은 목소리로 내 모습을 칭찬해줬다.

"자네와 정말 잘 어울리는군. 붉은색이 어울리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레오르트 님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에요."
"아니. 내 눈에는 재력을 뿜내기 위해 쓸데없이 비싼 옷을 입는 귀족보다 훨씬 멋져보인다네."
"그...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 담겨있어서 더욱 민망해졌다. 레오르트는 내가 뺨을 긁적거리자 낮게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가도록 하지."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누가 뭐라고 하겠나? 만약 누군가 자네에게 겁박을 준다면 내가 친히 나서주겠네."
"그... 알겠습니다."

이이상 거부한다면 레오르트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다. 내가 마지못해 수락하자 레오르트가 먼저 두


다리를 움직였다.

나도 그가 앞으로 걸어가자 주변을 한 번 둘러보면서 뒤를 따라갔다. 나란히 걷는 건 그의 권위를 해칠


염려가 있다. 이건 집에서 배운 예절 중 하나다.

"아이작. 그러고 보니 자네는 이번에 출간된 제논 일대기 8 권을 읽었나?"

앞장서던 레오르트가 나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솔직히 이 질문이 왜 안 나오나 싶었다.

나는 미리 짐작하고 있던 질문이었기에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아뇨. 읽지는 않았지만 신문은 봤습니다. 8 권에 귀족을 비판하는 이야기와 증기 기관차라는 운송수단을
선보였다고 하더군요."
"그래. 귀족을 비판하는 건 그렇다 쳐도 증기 기관차는 나조차도 놀라웠지. 정말로 증기 기관차 같은
교통수단이 발명된다면 세상은 크게 변화하겠지."
"레오르트 님은 정말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증기 기관차는 전생에서 '산업혁명'을 대표하던 발명품 중 하나다. 또한 '산업혁명'은 아무런 연고도


없이 짜잔! 하고 나타난 게 아니라 예로부터 기술이 차근차근 적축되었다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러므로 산업혁명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특정 기준 이상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의미인데, 이 세상은 과학과
마법 사이에 미묘한 언밸런스함이 존재한다.

냉장고 같이 원리가 간단하다면 마법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증기 기관차처럼 복잡한 기계는 마법으로
대체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것조차 마법이지 공학이 아니다.

레오르트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는지 다소 부정적인 본인의 의견을 꺼냈다.

"글쎄... 안타깝지만 소설은 소설로만 봐야 옳겠지. 대략적인 원리를 소설에서 설명했다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해. 그 거대한 철덩어리를 마법도 없이 오직 자력으로만 움직여야하니까 그보다
더욱 복잡한 이론이 필요하겠지. 거기다 증기 기관차를 제작할 수 있는 기술력이라면 그 기술을 이용해
여러 가지 발명품도 만들 수 있을걸세."
"힘들다는 이야기군요."
"그렇지. 하지만 그런 발상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도대체 지식과 경험이 얼마나 풍부한 사람이면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 걸까? 나는 감조차 잡히질 않는다네."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게 아니라 다른 세상에서 살다 와서 그런 거다. 이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지식을 갖고 있으니 레오르트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래도 증기 기관차의 제작은 어렵다고 하니 다소 아쉬울 수밖에 없다. 신문에서도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할 바에야 마법 연구를 하는 것이 더 좋을 거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한 번 쯤은 그의 머리를 들여다 보고 싶다네. 가끔 그가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온 건지 의심스럽단 말이지.


제논 일대기도 그렇고 이 증기 기관차라는 것도 그렇고."
"... ..."

비록 흘러가듯이 얘기한 거지만 나에게는 실로 위험한 발언이었다. 천만다행히도 레오르트가 앞을 보고


있어서 망정이지, 지금 내 얼굴을 봤다간 큰일났을 거다.

나는 핏기가 싹 가신 기분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따로 거울로 확인하지 않아도 지금


쯤 내 얼굴은 새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변색돼 있을 테니까.

'이런 건 전혀 예상치 못한 건데...'

내가 초조한 심정으로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머지않아 대강당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하자 레오르트는
나에게 말했다.

"이제 여기서 헤어지는 것이 좋겠군.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말일세."


"알겠습니다."
"그럼 모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라겠네. 아 참. 혹시 니콜도 참석하나?"
"아뇨. 누나는 모임이라면 질색하는지라 불참합니다."
"음... 역시 아직도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나..."

레오르트는 내 대답을 듣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였지만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렀다.

아무래도 니콜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는 듯했다. 니콜보다 입학을 늦게 한 레오르트가


아는 사건이라면 아카데미 내에서도 유명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알겠네.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레오르트 님도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내가 집에서 배운 예법에 따라 인사하자 레오르트가 손을 흔들어주며 떠나갔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대강당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연무장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큰 규모였다. 입학식 이후로 한 번도 오지 않은 곳이었으나 막상


이렇게 보니 새삼스럽다.

'안쪽은 어떻게 꾸몄을려나?'

체육관을 두 개 이어붙인 것처럼 내부도 매우 넓었다. 나는 기대감을 안고 대강당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본격적인 행사가 5 시 30 분이지, 그전부터 대기하는 건 상관없었기에 입구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입구를 통과하여 대강당 내부에 진입했을 때였다.

"...대단하네."

나는 대강당 내부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자마자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천장에는 언제 달았는지도 모를 샹들리에가 설치되어 내부를 환하게 밝히는 중이었고, 그 아래에는 길게
늘어진 테이블들과 그 위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놓여있었다.

특히 중앙이 텅 비어있는 걸 보면 무도회처럼 춤을 추기 위한 공간으로 추측되었다. 모임 수준이 아니라


고위급 귀족이 초청한 파티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사람들은... 꽤 많네.'

문학생, 무학생 가리지 않고 참석하는 모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바글바글거렸다. 참석 여부는 분명히
자유였던 걸로 알고 있는데 정말 많은 학생들이 참석했다. 저중에는 신입생뿐만 아니라 전공을 대표하는
선배와 조교들도 포함돼 있을 것이리라.

나는 벌써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침을 꿀꺽 삼키며 두 다리를 옮겼다.

"호호호. 그래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감사합니다. 레이디께서 웃으시니 정말 아름답네요."
"정말요?"

단상으로 다가가면서 중간중간 대화 내용이 귀에 들어왔지만 그다지 신경 쓸 부분은 없었다. 지금은 아는


얼굴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물론 아는 얼굴이 있다고 무작정 다가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아는 그들이라면 분명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있을테니까.

괜스레 아는 척을 해서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갈 바에야 뻘쭘하게 있는 편이 훨씬 낫다.

'그냥 음식이나 먹을까? 마침 배도 고프니...'

내가 그 생각을 하며 슬그머니 테이블 쪽으로 가려던 찰나였다.

"아이작!"
"... ..."
"아이작! 여기야! 여기!"

이놈의 빌어먹을 빨간 머리 같으니라고.

나는 귀에 친숙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속으로 한탄했다. 목소리가 저렇게 멀리 들리는 걸 보면 분명 멀리


떨어져 있는 게 확실한데 정확히 나를 본 알아 본 모양이다.

하기야, 머리도 빨간색이고 양복도 빨간색인데 나를 못 볼 수가 없다. 저렇게 목청을 높히며 부를 줄은


몰랐지만.

그에 나는 반쯤 포기하며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머리카락과 악마의 상징인 뿔이 솟아나 있는 걸 보면 세실리였다. 아무래도 미용실에서


모든 메이크업을 끝내고 온 듯한...

"...어?"

그러나 내 생각은 거기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세실리가 가까이 다가오면 올 수록 그녀의 파격적인 의상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순간 잘못 본 건가 싶어 두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세실리의 드레스가 바뀔


일은 절대 없었다. 나는 입을 살짝 벌리며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눈에 담았다.

내 머리카락이 붉은색에서 좀 더 밝는 선홍빛이라면, 그녀의 드레스는 붉은색보다 어두운 체리색이었다.


그녀와 잘 어울리는 색상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드레스 자체가 문제다.

보통 노출이 심한 드레스라고 해봤자 등과 어깨가 완전히 드러나거나 가슴이 살짝 보이는 것밖에 되지


않는데, 세실리의 드레스는 그것보다 더 심하다.

허리 라인에서부터 옷줄기가 V 자로 갈라져 세실리의 가슴을 일부나마 가렸지만, 말만 가린 수준이지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가슴 때문에 거의 다 노출된 상태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올 때마다 가슴이 조금씩 흔들거려 음심을 자극시켰다.

"생각보다 늦게 왔네. 분명 우리보다 빨리 가지 않았어?"


"... ..."
"그러고 보니 아이작도 나처럼 붉은색 옷이잖아? 잘 어울린다, 얘."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세실리가 늘 그랬듯이 친근하게 대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반가운 인사에도
쉬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복장도 복장이지만 향수라도 뿌렸는지 장미향이 내 후각을 자극했으며, 은연히 풍기는 색기가 평소
묻어두었던 내 음습한 욕망을 수면 위로 끌어내려고 한다.

서큐버스와 대면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나는 시선을 얻다가 둬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 했다.

"난 어때? 잘 어울려? 다른 사람들은 어울린다고 칭찬해줬는데 아이작은?"

그러거나 말거나 세실리는 내 기분도 모르는지 드레스의 양끝을 잡아올리며 물었다. 목소리에는 기대와
특유의 장난기가 담겨있었다.

나는 그 질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한 번 세실리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꿀꺽-

말로 하는 대답 대신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이 되었던 걸까.

"풋."
"... ..."

세실리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요망하게 웃었다. 그리고나서 놀리듯이 말했다.

"아이작 얼굴 엄청 빨개졌어."
"... ..."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얼굴이 안 빨개지는 남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필시 고자거나 게이가 확실하다.

< 31 화 >

레킬리스 공작가의 영애이자 아카데미 문학 신입생, 마리는 현재 기분이 정말 좋았다.

원래 옛날부터 모임 같은 행사에 나가는 건 죽도록 싫어하는 그녀이지만, 언젠가 가문에게 도움을 되기


위해 항상 만반을 준비를 갖추는 편이다.

남들보다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어도 그걸 녹일 수 있는 경험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 가문에서 배운


이념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경험 하나하나가 큰 도움이 되었기에 마리도 마지못해 나섰다.

그래서 메이크업은 착실하게 할지언정 되도록 빨리 끝나기를 바랬지만, 오늘만큼은 어디 부족한 점이


없는지 꼼꼼하게 체크했다. 평균 1 시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던 메이크업 과정이 무려 3 시간을
넘겨버렸다.

그 대신 공을 들인 메이크업이 잘 먹혔고, 저택에서 갖고 온 드레스도 어디 모난 부분 없이 말끔했다.


마리도 스스로의 아름다운 모습에 만족하며 선뜻 모임에 나섰다.

"어머! 혹시 레킬리스 가문의 영애 아니신가요?"


"네. 마리 하우젠 레킬리스라고 해요."
"전 히르투 가문의 제니아 클턴 히르투라고 해요."
"히르투 가문이라면... 아! 혹시 매드 자작의?"
"네! 역시 아시는군요. 만나서 정말 영광에요, 마리 님."
"제니아 님은 무학이셨죠?"

모임에 나가는 길에 마리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나 그녀는 무난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공작 가문의
출신인만큼 14 살 때부터 '사교회'에 나선 덕에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다.

물론 그녀가 아는 누구처럼 '가면'을 써서 사람을 대하지는 않았다. 천성이 연기를 못 하는 것도 있지만,


이미 사교회 내에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지 오래다.

레킬리스 가문의 영애, 마리는 활발한 성격을 가졌다고.

나쁘게 말하면 말괄량이 같은 성격이지만 뒷배가 뒷배인지라 대놓고 험담을 내놓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속이 뻔히 보이는 달콤한 말로 아부를 떨기 바빴다.

마리는 그런 부류가 정말로 싫었다. 속에는 칼을 숨기고 겉으로는 알랑방귀를 뀌는 가식덩어리들이.


언젠가 본심을 드러내어 이득을 얻으려는 숭냥이들.

'또 이런 기분. 정말 싫어.'

비록 마리는 연기를 못 하지만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표정을 통해 간파할 수 있다.
관찰력이 뛰어난 리나와 다른 점이라면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치챈다는 점이랄까.

친근하게 대하는 제니아라는 학생에게도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떻게든 고위급 귀족과 연줄을
이으려는 계산적인 행동. 겉으로는 티내지 않았지만 마리는 지금 상황이 매우 불편했다.

'걔는 그런 기분이 한 번도 안 들었는데.'

마리는 제니아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속으로는 최근에 인연을 가진 붉은 머리의 남학생을 떠올렸다.
멀리서도 눈에 띌만한 선홍빛 머리카락과 맹수처럼 빛나는 금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

첫 만남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었지만, 같이 지내면 지낼 수록 그가 가식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먼


사람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설령 거짓말을 해도 얼굴에 모두 다 드러나는데다가 말투는 무뚝뚝하지만 대답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았다.

'가끔 뭔가를 숨기는 것 같지만...'

그건 개인적인 비밀이지, 마리가 싫어하는 가식은 절대 아니다. 누구처럼 남의 개인사를 이 잡듯이


뒤지는 그녀의 취미가 아니다.
어쨌거나 마리는 머릿속으로는 최근 관심이 간 남학생을, 겉으로는 제니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새인가 모임이 진행될 예정인 대강당 앞에 도착했다.

"벌써 도착했네요. 아쉬워요."


"안에 들어가서도 얘기하면 되죠."
"정말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대신 저도 따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여기는 헤어져야할 것 같네요."
"아..."

제니아가 진심으로 아쉬워하던 말던 마리는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어서 빨리 그의 옆에 가서


평소처럼 잡담을 떠들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

과연 그는 무슨 복장을 입고 모임에 나섰을까. 8 골드도 되지 않은 싸구려 예복을 샀다지만 왠지 그가


입으면 뭐든지 잘 어울릴 것 같다. 키가 평범한 대신 마른 체격 덕분에 옷발을 잘 받을테지.

이어서 마리는 아쉬워하는 제니아를 뒤로 하고 대강당에 발을 디뎠다. 수많은 사교회를 거친 그녀에게도


대강당 내부는 꽤나 잘 꾸민 편에 속했다. 눈이 높은 그녀에게도 나름대로 감탄할만한 수준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대강당보다 더욱 중요한 게 남아있었다.

'빨간 머리... 빨간 머리... 빨간 머리...'

마리는 대강당에 들어오자마자 다른 누구도 아닌 빨간 머리를 찾기 시작했다. 아직 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일단 찾는 게 우선이다.

이윽고 마리의 기민하게 움직이는 시선에 빨간 머리가 포착되었다. 빨간 머리 앞에 서 있는 검은 머리의


여인도.

'...세실리?

마리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헬리움의 공주이자, 아카데미에서 인연을 맺었던 여자.

그 여자는 현재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은 채, 붉은 머리의 남학생과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도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다정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

"... ..."

순간적으로 마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저렇게 두 사람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니 뭐랄까... 정말 불편했다.


당장이라도 둘 사이를 갈라놓고 싶을만큼.

이에 마리는 두 다리를 움직여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나온 이유는 평범한 여자도 화장으로 꾸미면 아름답게 변하는
경우가 흔하여 나오게 된 일종의 격언이다.

허나 남자들은 아무렴 상관없다고, 예쁘면 그만이지라며 웃어넘긴다. 실제로 여자친구의 쌩얼이 못


생겼다고 헤어지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대부분 헤어지자고 통보한 남자를 욕하는 편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여자가 화장으로 예뻐진 경우에 한해서고, 민낯조차 아름다운 여자는 오히려
화장이 미모를 덮는 일이 빈번하다.

더구나 지금의 세실리는 얼굴이 아니라 다른 곳에 더욱 눈길이 간다.

"아이작 얼굴 엄청 빨개졌어."
"... ..."

나는 장난기가 돈 목소리로 말한 세실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굴에 열이 너무 올라서 그런 걸까, 내


얼굴이 빨갛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 하겠다.

'진짜...'

결국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끙- 하며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러


나오는 욕망을 간신히 억제했다.

내가 고자도 아니고 세실리의 이런 모습을 보자니 남자로서의 본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라면 내 심정을 이해해줄 것이다.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아름다운 미녀가, 그것도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고 내 앞에서 야릇한 장난을 치는데 그 어떤 남자가 반응하지 않겠나.

지금으로써는 남자의 상징이 고개를 우뚝! 세우는 것만 필살적으로 막는 편이 좋다. 나는 달뜬 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후우... 누나...?"
"왜?"
"...옷이 조금... 과하지 않아요?"
"뭐가 과한데?"

몰라서 묻냐. 아니, 일부로 저러는 게 확실하다.

나는 장난기를 유지하며 묻는 세실리에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옷이 좀..."
"야하다고?"
"...네."

심장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나는 얼굴을 덮었던 손을 내렸다. 손을 내리자마자 세실리의 얼굴에


고정되었던 시선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간다.

내가 현자도 아니고 본능은 절대로 막을 수 없다.

그사이 세실리는 왔다 갔다거리는 내 시선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살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굳이 안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실례잖아요."
"이런 옷을 입었는데도 실례라고 말하면 오히려 그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닐까? 그리고 우리 마족은 대부분
사교회에서 이런 옷을 입는 편이야. 특히 남자들은 욕망에 솔직하잖아? 욕망을 얼마나 절제하는지
알아보는거지."

그거참... 바람직한 현상이구나. 나는 그녀의 알려준 설명에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이런 옷을 입는다면 험담을 내뱉겠지만, 확실히 세실리가 입으니까 다르게 느껴졌다. 색기와
더불어 본래부터 갖고 있던 품위가 기품으로 승화되어 그녀의 매력을 더 크게 발산시켰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눈을 쉽게 뗄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계속 그렇게 다니실 거예요?"


"응? 물론이지. 설마 아이작은 다른 사람이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볼까봐 걱정하는 거야?"
"... ..."
"말없이 얼굴만 붉어지는 걸 보니까 내 말이 맞나보네."

세실리가 요놈, 요놈하는 듯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혈압이 실시간으로 상승하는 기분이다.

나는 이러다가 코피라도 흘릴 듯하여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 아무튼! 방금까지 뭐 하고 있었어요?"


"처음 본 사람들이랑 얘기하다가 왔는데? 별로 유쾌하지는 않았어. 남자던 여자던 대부분 욕망에 젖은
시선을 보냈거든. 확실히 인간은 욕망에 솔직하더라."

평온한 말투와 달리 내용은 썩 불쾌했다. 나는 인상을 살짝 구기며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기분 나쁘지 않으세요? 아무리 마족의 생활상이라지만..."


"아이작. 인간의 잣대를 함부로 다른 종족에게 대입시키지 마. 우린 우리의 방식이 있고, 인간의 인간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 ..."
"우리 마족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길 원하지만, 남들이 강요하는 걸 받아들이면 그건 흉내에 지나지
않을거야. 네가 저번에 말한 것처럼 마족은 마족답게 살아가야지."

세실리의 따끔한 충고에 입이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말처럼 인간의 방식을 다른 종족에게 들이미는 행동은 한심하기 그지없는 짓이다. 어쩌면 이런 내
행동이 그녀를 기분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죄송해요. 제가 실언을 했네요."


"아니야. 이것도 네 배려심이 작용한 거겠지. 그 배려심이 느껴져서 기분은 좋네."

내 사과에 세실리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빙긋 웃었다. 나 또한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시선과
마주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응?"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사이를 파고들었다. 세실리는 물론이고 나 또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세실리 못지않게 아름다운 미녀가 팔짱을 낀 채 당당히 서 있었다. 뭐가 불만인지 몰라도
잔뜩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순간적으로 이 미녀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새하얀 백발과 더불어 영민하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을 통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설마 마리?"
"왜 불러?"

마리의 이름을 입에 담자 아리따운 미녀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나는 약간 멍해진 얼굴로 마리의 모습을
훑어봤다.
허리까지 길게 길렀던 흰색 머리카락은 포니테일로 묶어 사슴같은 목덜미를 드러냈고, 화장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어른스러운 자태를 뿜냈다.

은은한 푸른빛이 도는 흰색 드레스 또한 세실리처럼은 아니지만 나름 과감한 편이었다. 어깨를 완전히


드러내어 뇌새적인 쇄골 라인이 선명했으며 적당하게 큰 가슴도 일부나마 노출시켜 성적 매력을 뿜냈다.

마지막으로 공작가 영애에 걸맞게 비싸보이는 장신구를 착용했지만 그녀의 미모에 비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기가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학생으로써의 마리가 활발한 소녀다움을 풍겼다면, 현재의 마리는 세실리처럼 성숙미를 풍기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왜 그리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 내 모습이 이상해?"

내가 멍하니 자태를 살펴보는 동안 마리가 다시 한 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시선을 슬쩍 회피하고 뺨에 홍조가 이는 걸 보아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그에 나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본심부터 입 밖으로 꺼냈다.

"아니. 그... 너무 당황스러웠달까? 너무 예뻐져서 잠깐 못 알아봤거든."


"...예쁘다고?"

예쁘다는 말에 마리의 뚱했던 얼굴이 약간 풀어졌다. 그리고는 내 옆의 세실리를 위아래로 훑어봤다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나 얼마나 예뻐?"


"네가 저번에 호언장담했듯이 한눈에 반할 정도로?"
"...응?"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옆의 세실리가 의문을 드러냈다. 슬쩍 표정을 보아하니 한쪽 눈을 치켜 뜬


상태였는데 무언가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는 내 대답에 충분히 만족스러웠는지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뒤이어 그녀는 나와
정면으로 마주한 채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무뚝뚝하게 답했을 때는 언제고 의의로 입에 발린 말도 잘 하네? 그래봤자 떨어지는 콩고물은 없는 거


알지?"
"내가 언제 입에 발린 말을 한 적이 있나? 만약에 했다면 미의 여신이니 뭐니 하면서 온갖 미사여구를 다
붙였겠지."
"차라리 그렇게라도 했으면 뭐라도 있었을 텐데 아쉽네."
"그럼 지금이라도 할까?"
"됐어. 그나저나..."

나와 잡담을 나누던 마리는 말을 흐리며 내가 아닌 세실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빠르게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세실리는 그... 과감하네? 눈을 어디에다 둬야할지 모르겠어."

마리도 나와 비슷한 심정인 듯했다. 하기야 어떤 사람이던지 간에 세실리를 본다면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한편 세실리는 마리의 감평을 듣고 빙그레 웃더니 그 누구도 예상치 못 한 돌발행동을 선보였다.


"응. 마리의 생각도 그렇지?"

은근슬쩍 내 팔을 붙잡아 잡아당기더니 이내 가슴 쪽에 밀착시키는 것이 아닌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이어진 동작이라 뒤늦게 대응했다. 부드러우면서도 말랑말랑한 감촉이 팔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지자 기껏 내려앉았던 화기가 다시 올라왔다.

"뭐, 뭐 하는..."
"이 드레스를 입으면 아이작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궁금했거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세실리의 대답을 듣고 당황을 넘어 당혹스러웠다. 조금 전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다른 대답이다.

특유의 장난기가 깃든 말투를 보아 분명 장난을 치는 것인데 이마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마리도 세실리의 대답이 어이없던 모양이다. 한쪽 눈을 찡그린 채 그게 무슨 소리냐는 속마음을 여실히


표현했다.

그에 세실리는 붙잡았던 내 팔을 더욱 강하게 잡아당겼다. 아예 작정했는지 내가 어떻게든 빼내려고


시도해도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둥거릴 때마다 말랑거리는 감촉만 선명하게 전달될 뿐이다.

"들은 그대로야. 아이작의 반응이 궁금해서."


"아니. 세실리 누나? 아까는 분명..."
"...장난은 그쯤하지? 아이작이 곤란해하는 거 안 보여?"

내가 다급히 입을 열기도 전에 마리가 성큼 다가와 세실리가 붙잡은 내 팔을 덥썩 붙잡았다. 그러나


일반인에 가까운 마리가 세실리의 근력을 이길리가 만무했다.

그 결과, 두 여자가 내 팔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세실리는 삽시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도 장난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장난 아닌데? 그리고 이렇게 팔짱을 끼는 건 욕망을 이겨낸 상대에게 해주는 일종의 포상이야. 우리
헬리움의 오래된 문화지."
"그건 너희 마족에게 통용되는 이야기겠지. 우리 인간들은 지금 네 행동을 별로 좋게 보지 않을 걸? 지금
네가 아이작에게 하는 행동은 연인끼리나 하는 행위라고. 정조를 의심하게 만들 수도 있어."
"아까 아이작에게도 말했지만 인간의 기준을 다른 종족에게 대입시키는 건 좋지 않아. 그리고 우리 마족도
정조관념은 매우 보수적인 편이야."
"인간 세상에 왔으니 인간의 법도에 따라야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두 여자 사이에 한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공방이 오고 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리가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진 얼굴을 지은 반면, 세실리는 시종일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까.

그러나 상관없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를 흥미롭게 쳐다보는 시선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헬리움의 공주와 레킬리스의 영애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싸운다.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전개인가.

아마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집에 가고 싶다.'
현재 내 심정이 그렇다.

< 32 화 >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함부로 대하기 곤란한 상황이 수 분간 이어지고 있을 때 부드러운 여인의 음색이 끼어들었다. 목소리에
의아함과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 목소리에 나는 물론이고 내 팔을 붙잡은 두 여자도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옮긴 곳에는 금발의 여자가
한 손에 와인잔을 들며 의문에 찬 표정으로 우리를 보는 중이다.

웨이브 진 황금색 머리카락과 사파이어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 금색과 흰색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오프솔더 드레스로 하여금 우아하고 고고한 기품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또한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과시하는 듯이 몸에 착용된 비싼 장신구의 숫자도 많은 편이다.

분위기가 180 도 바뀐 마리처럼, 이전과 달리 학생의 모습이 아닌 일국의 '황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나타난 리나였다.

"치정 싸움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꽤 재밌네."

리나가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말하며 와인잔에 담긴 음료를 홀짝였다. 강 건너 불 구경하는 듯한


태도였으나 그녀의 말에는 뼈가 담겨있었다.

"...치정 싸움?"

마리는 리나의 말을 듣고 미간을 좁혔다가 나와 시선을 마주 쳤다. 나 또한 얼떨결에 마리와 얼굴을


마주했다.

"...아!"

그러다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내 팔을 붙잡은 손을 떼어내는 마리. 리나의 말을 듣고나서 남들에게 현재
이 상황이 어떻게 비추어질지 뒤늦게 깨닫은 모양이다.

그사이 세실리도 장난은 그만두려는지 붙잡았던 내 팔을 슬며시 놓아주었다. 가슴에 거의 파묻힌 것처럼
밀착돼 있던 내 팔이 드디어 자유로워지는 순간이었다.

약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세실리의 가슴은 솜털이 가득 들어 있는 베개처럼


푹신푹신했다. 팔을 떼어내니 그런 느낌을 더욱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누, 누, 누, 누가 치정 싸움을 한다는 거야? 오, 오해하지 마, 말아줄래?"

상황이 종료되고 마리가 리나에게 왁- 왁- 소리쳤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일어난 홍조하며, 말을
더듬는 걸 보면 누가 봐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다.

그에 리나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오해했으면 사과할게. 아무래도 세실리가 장난친 것 같은데 맞지?"

리나는 이다음으로 세실리에게 질문했다. 평온하지만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다.

"바로 눈치챘네? 역시 리나야."


세실리도 부정하지 않고 곧바로 인정했다.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라앉히며 세실리를 힐끔거렸다.

뒷짐을 지고 시선을 다른 곳에 두면서 여유로이 대답한 걸 보아 마리와 달리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째서 그녀가 이런 장난을 벌였는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장난이라고 해도 그
정도가 조금 과했으니까. 포상이니 뭐니 해도 서슴없이 팔을 붙잡는 건 누가 봐도 애정 표시에 가깝다.

'...그냥 놀리기 좋은 동생에게 장난을 치는 건가?'

세실리는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착각이 아니라 평소에 나를 대하는 태도나 장난을 본다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알게 되는 법이다.

다만 그것이 한 사람으로서의 호감인지, 아니면 이성으로서의 호감인지 이처럼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조금 전 그녀가 언급한 것처럼 포상 같은 개념이라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호감에 가까울 것이다.

'단순히 썸... 정도로 생각해야겠지.'

당장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다. 세실리가 나를 이성으로 좋아한다는 증거가 너무 빈약한데다가 설령


그렇다 해도 거리를 벌릴 생각이다.

일개 남작의 아들인 나와 헬리움의 공주인 세실리. 이것만 보아도 나와 그녀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물론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부터 상황이 역전되겠지만, 꽁꽁 숨기던 비밀을


밝힌다는 건 어느 누구에게나 꺼림칙한 일이니 예외로 두자.

이건 비단 세실리 뿐만이 아니라 마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아이작도 세실리처럼 예복이 붉은색이네? 머리색이랑 정말 잘 어울려."


"감사합니다. 리나 님도 푸른 하늘의 태양처럼 빛나는 것 같습니다."
"후후. 칭찬 고마워. 마리는 어쩐 일로 공을 들인다 했더니 전보다 더 예뻐진 것 같네?"
"너한테 그런 말 들어봤자 전혀 안 기뻐."

리나의 살가운 칭찬에도 마리는 매몰차게 대했다. 마리가 아무리 공작가 영애라지만 그보다 높은 황녀에게
무례한 태도를 연이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리나는 전혀 개의치 않은지 빙긋 웃기만 할 뿐, 별 다른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 그걸 본 마리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썩어가는 중이지만.

"...아무튼 이제부터 뭐 할 생각이야?"

마리는 못마땅하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리나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리나는 특유의 부드러운 음색으로
대답했다.

"아이작을 데리고 다니려 했지. 이참에 아이작에게도 내가 아는 친구를 소개시켜주면 어떨까 싶어서."
"꼭 아이작이 너랑 같이 있을 거라는 말투네? 아이작의 의견을 안 물어?"
"그럼 지금 물어보면 되겠네. 아이작의 생각은 어때?"

마리의 적의가 담긴 질문에도 리나는 능청스레 대답했다. 그녀는 마리의 얼굴이 구겨지던 말던 나를 보며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다시금 불편해진 상황 속에서 중지 손가락의 펜혹을 문질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당장 지금도 다양한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 여기서 리나를 따라다닌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눈초리로 볼지는 불 보듯 뻔하다.

차라리 리나가 실망을 느낄지언정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귀족들의 복잡한 정치 세계에 발을 디디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지난 번처럼 압박을 가해도 한사코 거절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리나 님에게 누를 끼칠 것 같아서 안 되겠네요."


"내가 부탁한다고 해도?"

내가 예의 바르게 거절의 의사를 표하자 리나가 예상했던 말을 꺼냈다. '부탁'이라고 했지만 엄연히
황녀가 내리는 명령에 가까웠다.

이에 나는 리나의 눈과 정확히 직시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내가 거절하지 못 할 거라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전부 틀렸다고 단언할 수 있다.

"죄송하지만 황녀 님. 저는 복잡한 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이순간만큼은 모임 그 자체를


즐기고 싶어요."

나는 힘이 실린 목소리로 리나에게 내 의사를 똑똑히 전달했다. 가슴에 손을 올려 내 단호한 마음을


피력했다.

직설적으로, 그것도 평소처럼 이름을 부르지 않고 황녀라는 명칭을 입에 담았기 때문일까. 리나의
눈동자가 살짝 크게 떠졌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몰랐다는 반응이다.

비록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겠지만, 여기서 딱 잘라 끊는 것이 앞으로의 내 신상에 이롭다.

"...알았어. 네 뜻이 그렇다면야. 싫다는 사람을 데리고 다닐 수도 없겠지."

리나도 내 마음을 알아줬는지 아쉽다는 투로 말할 뿐, 실망스럽다는 기색은 없었다. 그녀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더이상 나에게 할 말이 없었는지 옆의 세실리에게 말했다.

"그럼 세실리 너는?"


"난 리나의 친구가 누구인지 궁금해."
"알았어. 마리는..."
"내가 굳이 대답을 해야겠니?"

질문을 채 하기도 전에 까칠한 마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리나는 역시라는 듯,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리. 미리 말하지만 언제까지 그런 태도를 보일 거야? 내가 그렇게도 싫니?"


"난 가면을 쓴 사람이랑 가까워지긴 싫어. 네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그랬으면
안 됐어."

아무래도 과거에 마리가 리나에게 한 번 크게 데인 적이 있던 것 같다. 리나도 별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스스로도 본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마리의 대답을 끝으로 쥐 죽은 듯한 침묵이 가라앉은 것도 잠시, 리나가 입을 엶으로써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그 대신 목소리에는 전보다 힘이 빠져있었다.

"...우리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 세실리? 이제 가자."


"응."
"그럼 두 사람도 즐거운 시간 보내길 바랄게."

리나는 세실리를 데리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실리도 떠나기 전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살갑게 인사해줬다.
나는 왠지 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겪은 듯한 데쟈뷰에 손을 흔들어줬다. 옆의 마리는 세실리에게만 인사를
해줬지, 리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리나와 세실리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이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쯤, 마리가 나를 바라보며


제안했다.

리나를 대할 때와 다르게 환하기 짝이없는, 밝은 얼굴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도 다른데로 가볼까?"


"음..."

나는 너무나 자연스레 우리라고 칭한 마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곧바로 답하지 않은 이유는 생각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리나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정치적으로 얽히기 싫은 것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리나를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리나 세실리처럼 마음을 놓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마리는 경우가 약간 다르다. 나름대로 친하다고 생각하는데다가 그녀는 현재 나에게 모종의 호감을
품고 있다.

그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인지 사람으로서의 호감인지는 세실리처럼 분간이 가지 않지만, 적어도 불편한


관계는 절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나는 약간 걱정된다는 마음을 담으며 마리에게 물었다.

"내가 너랑 같이 있으면 리나 님의 제안을 거부한 이유가 없어지지 않아?"


"어..."

마리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말문이 막혔는지 곧바로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 푸른 눈동자가 데록데록
굴러가며 어떻게든 이유를 찾는 모습이다.

제아무리 권위의식과 거리가 먼 마리라지만, 그녀는 엄연히 레킬리스 공작가 출신이다. 피하고 싶어도
복잡한 일,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엮일 수밖에 없는 위치다.

하물며 그녀가 전에 비슷한 요지의 말을 꺼낸 적이 있다. 모임에 참여하기 싫어도 레킬리스 가문의
딸인만큼 인맥을 넓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여해야 한다고. 이건 빼도박도 못 하는 진실이다.

과연 마리는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나는 그녀의 생각이 모두 정리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줬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마리는 리나와 세실리가 있는 곳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생각을 모두 정리한 걸로 보였다.

"...지금 당장은 안 되겠네. 너도 알다시피 나도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마리가 살짝 음울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해야 할 일은 분명 인맥을 넓히는 일일 터.

나처럼 모임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면 함께 다닐만 했지만, 아쉽게도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알았어. 그럼 나중에 봐야겠네."


"응. 행사가 어느 정도 끝날 때 만나면 될 거야. 아, 그리고..."
마리는 말을 하다가 말고 내 얼굴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드러냈다.

뒤이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더니 얼굴을 살짝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아까보다
작아진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 아까 세실리가 쳤던 장난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너랑 나랑 무슨 사이냐고 물을 수도 있어.


그때는..."
"그때는?"
"... ..."

이제는 말을 흐린 수준이 아니라 말이 없어진 마리. 그와 동시에 얼굴이 점점 노을처럼 붉어지기 시작했다.

뭐, 대충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이 잡힌다. 아마 속으로 나와 어떤 사이인지 고민하고


있겠지. 나는 그녀의 입이 열릴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줬다.

이윽고 약간의 시간을 거쳐 고민하던 그녀는 나를 힐끔거렸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다소


착잡함이 실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냥 친구 사이라고 해. 알겠지? 세실리가 장난을 쳐서 걱정된 마음에 그런 상황이 발생한 거라


하고."
"응."
"...그래.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

내 무뚝뚝한 대답에 마리는 힘없이 화답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등을 돌리고 나서야 드레스의
등부분이 훤히 파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실리보다는 아니지만 마리의 드레스도 과감한 편이다.

나는 뒷모습만으로도 아름다운 자태를 내뿜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도 잠시, 상황이 일단락된
듯하자 등을 돌렸다.

"...응?"

그러다 문득 뒤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하지만 모두 착각이었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시선은 없었다.

오직 점점 멀어지는 마리의 뒷모습만이 시야에 들어올 뿐. 나는 그녀의 뒷모습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간단하게 와인이나 마셔볼까.'

테이블로 가는 도중에 아까 전 리나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이 생각났다. 여기는 17 세가 되면 성인으로


간주하니 술을 마셔도 상관없다.

음주는 그닥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과연 이 세계의 와인은 어떤 맛일까. 내 입맛이


어린애 입맛이라 그런지 몰라도 쓴맛보다는 단맛이 강했으면 좋겠다.

'근데 행사 시작은 언제 하는 거...'

내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테이블로 향하던 중이었다.

"이봐! 거기 빨간 머리!"
"응?"

빨간 머리는 나를 부르는 걸까. 귀에 속속 박히는 목소리도 그렇고 이름이 아니라 빨간 머리라 부르는
것도 그렇고 누구인지 대충 알 것 같다.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가까운 거리에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에 사람들로 둘러
쌓여있지만 재수없는 상판떼기만큼은 명확했다.

나는 재수없는 얼굴과 더불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혹시나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래도 역시
빨간 머리는 나 혼자밖에 없다.

이에 나는 검지 손가락으로 나 자신을 가리키며 의문을 드러냈다.

"나?"

그 의문이 전달되었을까.

재수없는 상판떼기, 그러니까 잭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너 아니면 누구겠냐? 라는


심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나는 그 반응에 속으로 낄낄 웃으면서 잭슨에게로 걸어갔다. 그러자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점점 모이기 시작했다.

다들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아마 무학생으로 추정된다. 남자들은 대부분 키가 크거나 어깨가 넓었으며,


몇몇 여자들은 드레스가 아닌 남성용 예복을 입었다.

이어서 잭슨의 앞에 선 나는 저번에도 그랬듯이, 무뚝뚝한 인사를 건넸다. 보는 사람이 많아도 개의치
않았다.

"안녕."
"... ..."

잭슨의 얼굴이 전보다 더욱 구겨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내 인사가 불만인 듯했다.

이후로 그는 화를 삭히는 것처럼 숨을 몰아쉬더니 조용히 말했다.

"네놈은...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군. 가문에서 자기보다 높은 작위를 가진 상대에게는 존댓말을 하라고
배우지 하지 않았나?"
"... ..."

나는 곧바로 답하지 않고 눈짓으로만 주위를 힐긋거렸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흥미를 품고 이 상황을


관망하는 중이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예의없는 놈으로 몰아넣으려는 것 같은데, 잭슨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작위를 '공식적으로' 이어받았을 때의 얘기지, 우리 같은 자식은 아닌 걸로 아는데?"


"...뭐?"

내가 그리 답하자마자 잭슨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마따나 작위에 따라 예의를 차리는 건


공식적으로 작위를 받았을 때다.

물론 예외는 있다. 가령 귀족 위에 있는 왕족이 그런 케이스다. 내가 리나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던


이유가 이때문이다. 세실리는 자기가 누나라 부르라고 했으니 예외로 두자.

그런데 잭슨은 어디서 잘못 배웠는지 몰라도 이상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잭슨처럼 남들을 깔보는
마인드를 가지지 않는 이상 보통 서로 존댓말을 하며 존중하는 편이다.
"아무리 그래도 서로에게 격식을 갖춰야 하지 않나?"
"반말은 저 빨간 머리가 먼저 했잖아."
"잭슨은 쟤를 불렀을 때부터 빨간 머리라고 했어."

아, 그렇다고 내가 잘한 건 아니다.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걸 보듯이 둘 다 예의없는 놈으로 찍힌


상황이다.

허나 잭슨은 현 상황이 썩 당혹스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몰라도 본인까지 예의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혔으니까.

나는 잭슨이 당황하는 동안 대화를 잇기 위해 입을 열었다. 우선은 그가 왜 나를 불렀는지가 중요하다.

"그나저나 할 말이라도 있어? 날 부른 이유가 있을 거 아냐?"


"...흠. 흠."

내 질문에 정신을 차렸는지 잭슨이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는 특유의 깔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별 일 아니야.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네 모습이 보였거든. 그전에 재밌는 상황도 있었고 말이야."
"... ..."
"레킬리스 공작가의 영애와 헬리움의 공주. 누가 뭐래도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분들이지. 누구랑은 사는
세상이 달라."
"그래서 본론이 뭔데? 구구절절 이상한 얘기할 거면 나 간다."
"자, 잠깐! 말 좀 들어!"

내가 정말로 가려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자 잭슨이 다급히 나를 멈춰세웠다. 그도 내가 이런 행동을 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 한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나는 소중한 시간을 빼앗겨 살짝 짜증이 난 상태다. 와인을 마시려고 했더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잭슨은 퉁명스러워진 내 표정을 보다가 여전히 깔보는 뉘앙스로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단해. 서로의 논리를 시험하는 거지."


"논리?"
"그래. 원래라면 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 했지만 네가 많은 교수님들의 관심을 받는 걸 보고 생각이
바뀌었어. 지식은 검증되었고, 논리가 얼마나 좋은지 궁금해졌거든."

음...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겠다는 건가? 자기가 나보다 머리가 더 좋을거라 단정
짓고?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길래 이런 제안을 한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 오히려 잭슨에게 악수가 될 수도 있다.

보아하니 나에게 망신을 줌과 동시에 본인의 두뇌를 뽐내고 싶어하는 모양인데, 만에 하나 그가 지게 되면


역풍이 몰아칠 게 뻔하다.

나는 한쪽 눈을 치켜뜨며 의문을 드러냈다. 제안은 고사하고 주제가 궁금했다.

"주제가 뭔데? 이상한 거면 거절할거야."


"제논 일대기."
"...뭐?"

갑자기 그게 왜 나오는거야.
내가 적잖이 당황하는 동안 잭슨은 두 팔을 펼쳐 주위를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제논 일대기의 팬이지. 방금 전만 해도 앞으로의 전개가 어떻게 될지 의논을


나누고 있었어. 각자 다양한 의견과 논리가 오고 갔지."
"... ..."
"그러다 마침 네 얼굴이 보이는 거야. 문학 신입생 중 교수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네가."
"그래서?"

내 물음에 잭슨은 코웃음치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제논 일대기에는 제논과 메리가 주연이지만, 진과 릴리의 비중도 만만치 않아. 거기다
마족인 진과 성직자인 릴리의 애처로운 사랑 이야기는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애태우는 중이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제를 그것으로 하여 의논을 나누었고."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리고 난 그 사랑 이야기를 아주 비극적으로 박살낼 예정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간에 떡밥과 복선은


수거해야 하지 않겠나.

근데 커플링 가지고 의논을 나누다니, 내가 보기에는 영 그랬다. 경제나 정치 이야기를 할 것 같았는데


니콜의 말대로 애들은 애들인 모양이다.

그동안 내 긍정에 잭슨은 탄력이라도 받았는지 줄줄이 설명을 늘어놨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라. 진과 릴리는 결코 이어질 수 없어. 이건 내가 확신할 수 있지."


"...어째서?"

이 새끼 설마 내가 꽁꽁 숨겼던 떡밥을 찾은 건가?

나는 평소 바닥을 기었던 잭슨에 대한 호감도가 수직상승하는 걸 느끼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작가


입장에서 독자가 추리를 통해 전개를 예상하는 것만큼 뿌듯한 일도 없다.

하물며 복선과 떡밥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추리하는 경우라면? 내 작품을 이렇게나 사랑하는구나, 라며
생각하여 더욱 열심히 쓰게 된다.

그래서 더더욱 잭슨에게 기대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이어질 거라 생각하고 있는 진과 릴리인데
혼자서 안 된다고 하니 무언가 있을 거라...

"왜냐하면 릴리는 결국 제논에게 갈테니까."


"... ..."
"마족과 성직자의 조합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신이 허락하지 않을 거야. 릴리도 그 점을 뒤늦게
깨닫겠지. 거기다가 종종 제논에게 호의를 베푸는 행동을 보면 그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야. 나는 그의 설명을 듣자마자 진심을 담아 쌍욕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씨발. 뭐?"

이 새끼가 멀쩡한 캐릭터를 쌍년으로 만들어버리네.

< 33 화 >

커플링 가지고 의논을 나누는 것까지는 껄껄 웃어넘길 수 있다. 아마 몇몇은 잭슨이 말한 논리 대결의
주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비교하자면 이런 거다.
국어 시간에 문학 소설 등장인물의 관계를 해석하는 것처럼, 제논 일대기도 비슷한 형식이다. 또한 제논
일대기는 이 세상의 여느 소설처럼 베베 꼬아서 설명하지 않고 눈에 확 들어오도록 썼으니 인물 관계도가
명확한 편이다.

당장 주인공 제논과 히로인 메리의 관계가 어떠한지, 진과 릴리의 관계가 어떠한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여기서 제논의 동료와 조력자까지 포함한다면 꽤나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다.

"씨발. 뭐?"

그런데 잭슨이 꺼낸 말은 어이가 털리다 못해 원작자인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원래


욕은 무의식적으로도 삼가하는 편인데 욕이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올 정도다.

잭슨도 내가 욕을 할 줄은 몰랐는지 살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는 이것 보라는


듯이 검지 손가락을 펴더니 특유의 오만한 표정으로 설명을 꺼냈다.

"욕을 하는 걸 보니 너도 감탄한 모양이군. 하긴 그 누구도 릴리가 제논에게로 갈 거라는 예상은 하지


않았을테지.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가?"
"뭐...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본질이 서로 다르니 어쩔 수 없겠지."

잭슨이 좌중에게 의견을 묻자 대체로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그 분위기를 읽고 어이가 손을 흔들며


가출하는 모습이 눈에 선명했다.

선동이라도 당한 걸까, 아니면 아직 꺼내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 걸까. 하지만 한두 명도 아니고 대부분이


동의하는 걸 보면 후자로 추정된다. 이 사람들이 바보도 아직 고작 그거 하나로 쉽게 설득되지는 않을테니.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잭슨에게 물었다. 당장이라도 소리 지르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것 뿐이야? 단지 릴리가 제논에게 호감을 보인다는 이유로?"


"물론 아니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닌, 제논 일대기 속 세상은 마족을 향한 차별이 여전히 존재해.
하물며 릴리는 빛의 교단 내에서도 장래가 기대되는 성직자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난 진의 출생이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
"출생?"

시원하게 냉수마찰을 한 것처럼,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열기가 급속도로 식어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슨 개소리냐는 심정으로 듣고 있었지만, 잭슨이 '언급'한 출생을 듣고나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도 그럴게 진의 출생은 앞으로의 전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떡밥 중 하나였으니까.

잭슨도 내 표정을 읽었는지 씨익 웃으며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서 꺼냈다.

"그래. 지나가듯이 언급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 했겠지만 악마 사냥꾼들의 수장, 사크란은
진에게 이리 말했지. '자네처럼 뿔이 크고 검은 마나의 농도가 짙은 마족은 지극히 드물다'라고. 또한
제논 일대기 속 마족은 세대를 거치면 거칠 수록 악마의 피가 조금씩 옅어진다는 특징이 있어."
"... ..."
"이 모든 걸 종합하자면 이래. 진은 마족과 마족 사이에 태어난 게 아닌, 진짜 악마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마족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 악마의 특징이 더욱 강하게 두드러질 수밖에 없을거야."
"와..."

짝- 짝- 짝- 짝-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박수를 쳐줬다. 첫 시작은 이상했지만 과정은 전부 내가 원했던 이야기에
부합한다.

실제로 진은 여타 마족과 달리 인간보다는 악마에 한없이 가까운 마족이다. 어머니가 악마에게 강간당하여
어쩔 수 없이 낳았으며 어린 시절 때부터 모진 학대를 받고 자라난 비운의 마족.

심지어 진의 어머니를 강간한 악마도 평범한 악마가 아니다. 앞으로 등장할 칠죄종 중 '식탐'을 맡고
있으며 그에 걸맞게 남의 힘을 강탈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 능력은 아들에게도 유전되어 먼 훗날, 진이 페이크 최종 보스이자 대악마, 디아블로의 힘을 흡수하기


위해 사용된다. 당연하지만 그 뒤로 힘에 잠식당해 제논의 손에 비극적으로 격퇴당하는 거고.

'그래도 아주 멍청하지는 않네.'

하는 행동은 싸가지 없고 재수없지만 머리까지 멍청한 건 아닌 모양이다. 오히려 제논 일대기를 누구보다


열심히 읽은 애독자에 가깝다.

허나 애독자라 해도 싸가지 없는 건 싸가지 없는 거다. 거기다 잭슨은 현재 행운과 불행을 동시에 가진


상황인데, 행운은 내가 제논 일대기의 원작자라는 거고 불행은 내가 제논 일대기의 원작자라는 것이다.

그동안 잭슨은 내가 박수까지 쳐주며 감탄하자 뿌듯했는지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우러러
보라는 자신감이 뿜어져나왔다.

"어때?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니까 네 말은 즉, 진의 출생 문제와 릴리의 입장이 겹치는 바람에 절대 이어지지 않는다는거지?"
"그래. 잘 들었..."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릴리가 눈을 돌리고 제논에게 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나는 잭슨의 말을 중간에 잘라버리며 내 의견을 드러냈다. 내가 단호하게 부정할 줄은 몰랐는지 잭슨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잭슨의 추리는 정말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원작자으로써 부정해야 할 건 부정해야 한다. 실제로 잭슨의
설명은 그럴 듯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창작한 캐릭터가 이상한 방향으로 평가되는 건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지?"

내가 반박하자 잭슨은 불쾌감을 담으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본인 딴에는 열정을 부었던 추리가
부정당하니 기분이 영 좋지 않은 모양이다.

물론 잭슨의 추리는 어느 정도 맞는 부분이 있기에 언급은 해주는 게 좋다.

"네 말대로 진의 출생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어쩌면 나중에 큰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지. 아니,
걸림돌이 되는 건 확실할 거야. 악마의 특징이 타인보다 짙다는 건 그만큼 인간보다 악마에 더 가깝다는
걸 의미하니까."
"... ..."
"그런데 릴리가 과연 그 사실을 모를까? 어릴 때부터 함께 한 그녀라면 그 사실을 알고도 곁에 있을걸?"

진과 릴리의 러브 라인이 애달픈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소꿉친구라는 관계다.


진은 친모에게조차 악마라고 학대를 받았으며, 더 나아가 마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진 고초를 겪었다.

만약 이대로 성장했다면 진짜로 '악마'가 되었겠지만, 우연히 릴리와 인연을 맺게 된 이후부터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흔히 구원받았다고 표현들한다.
릴리도 헌신의 끝을 보여주는 진의 모습에 사랑을 꽃피우지만, 각자의 입장과 사정으로 인해 선뜻
다가가지 못 하는 중이다.

"그리고 릴리가 제논에게 보여준 호의는 이성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의 호의에 가까워. 특히 제논은 진이
악마가 될 뻔한 적을 몇 번 막아줬잖아? 릴리 입장에서는 정말 고마운 사람이 아닐 수가 없겠지. 거기다
진과 릴리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어. 가끔가다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는 묘사라던가,
은근슬쩍 손을 잡았다는 묘사가 꽤 많지."
"... ..."
"무엇보다 릴리는 진에게 꽃을 몇 번 선물해준 적이 있어. 그게 무슨 꽃인지는 알아?"

잭슨은 내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미리 정답을 말하자면 릴리가 진에게
선물했던 꽃은 백합(릴리)이다.

백합의 꽃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대표적인 건 단연코 '순정'이다. 릴리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그녀는 진을 향한 사랑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중이다.

"...하얀 꽃, 백합이구나. 그리고 백합의 꽃말은 변함없는 사랑, 즉 순정이지."

약간의 시간이 지나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대답은 잭슨이 아닌, 우리의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한 명에게서 나왔다.

이에 나는 대답을 꺼낸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답을 한 사람은 갈색 머리카락을 깔끔히 뒤로 넘긴


미청년이었는데, 키가 크고 예복 겉으로 드러난 체격이 다부진 걸 보아 무학생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날카로운 눈매하며 턱 또한 베일 듯이 갸름했다. 전체적으로 차가운 냉미남 스타일이었다.

아무튼 할 말은 마저 해야겠지. 나는 갈색 머리의 남자로부터 다시 잭슨에게 시선을 옮겼다. 잭슨은


백합의 꽃말을 듣고나서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릴리는 진에게 백합을 선물해주면서까지 본인의 마음은 변치 않을거라 강조하고 있어. 진도 그 마음을
알기에 누구보다 더 헌신을 하는 거고. 그러니 두 사람이 이어지지는 못 해도 릴리가 제논에게 간다는 건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개연성과 릴리의 캐릭터성에 완벽하게 어긋나는 이야기지. 애당초 릴리라는
이름부터가 그 증거야."
"... ..."
"그래도 아까 전 감탄은 진심이었어. 남들이라면 쉬이 넘길만한 복선들을 캐치해서 진의 출생이 심상치
않다고 말했잖아. 솔직히 그건 나도 좀 놀라웠어."
"크윽...!"

내 딴에는 칭찬을 한 건데 잭슨에게는 아닌 모양이다. 나는 잭슨이 입술을 앙 다물고 얼굴을 붉히기


시작하자 순간 말을 잘못했나 싶었지만 곧내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금 전 '그건 나도 좀 놀라웠어'라는 발언은 원작자의 입장이 되어 말한 것이나 잭슨은 내가 원작자라는


걸 전혀 알지 못 한다. 그러니 위의 발언은 내가 본인보다 위에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

그런데 어쩌겠나. 이미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인데.

거기다 평소 잭슨이 나에게 시비를 걸었던 걸 상기하면 딱히 정정할 필요성도 못 느꼈다. 그냥 자기가
알아서 열폭하라지.

"그럼 당신도 진과 릴리가 이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잭슨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와중에 누군가 나에게 질문했다. 조금 전, 백합의 꽃말에 관한 대답을
꺼냈던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 그리고 잭슨과 달리 한껏 예의를 차린 그를 바라보며 잠깐 고민의 시간을
거쳤다. 앞으로의 전개를 곧이곧대로 말하자니 스포일러가 되는 것 같아 양심이 찔렸다.

더군다나 최악의 경우, 이 일을 빌미로 꼬리를 밟힐 수도 있다. 나는 한 번 만났다 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특색을 가졌으니까. 그런 경우는 한사코 사양이다.

이에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거친 후, 어디까지나 내 가설이라는 뉘앙스를 담아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건 작가만이 알고 있겠지만 저는 이어질 수 없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싶네요."


"어째서죠?"
"진은 릴리에게 헌신하는 기사 그 자체입니다. 릴리가 위험해지면 자기 목숨은 기꺼이 내줄 수 있다는
뜻이에요. 실제로 그런 묘사가 간간이 나오고요."
"아! 혹시 그건가요? 릴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악마가 될 수도 있다는 진의 독백이요."

이 인간은 거기까지 알고 있네. 나는 밝은 표정으로 대답한 갈색 머리의 남자의 모습에 움찔거렸다.

차갑고 감정 하나 표현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인데 지금 보니 뭐랄까...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걸 보니


특정 부분에서 열정이 넘쳐났다.

"어... 아마 그것도 일부겠죠? 어쨌거나 진은 릴리를 위해 본인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준비가 되어있어요.
설령 악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불쌍해라... 진짜 그렇게 될까?"
"그건 작가만이 알겠지. 그래도 나는 둘이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숙소로 돌아가면 하나하나 찾아봐야겠다.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들으니 정말 신기해."

내 말이 끝나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나는 상황이 어느 정도 일단락된


듯하자 잭슨을 쳐다봤다.

잭슨은 본인이 생각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자 분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글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것이 좀 추하게 느껴진다.

'그러게 누가 그딴 얼토당토않는 말을 하래?'

다시 말하지만 그의 유일한 불행은 내가 제논 일대기를 직접 쓴 원작자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의 논리에 설득됐을 가능성이 크다.

진과 릴리가 이어지지 못할 거라는 확신은 좋게 볼만하지만, 그렇다고 순정의 표본인 릴리가 제논에게 갈
거라는 건 도저히 가만 둘 수가 없었다.

나는 부들부들거리며 말조차 하지 못 하는 잭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더 할 말 있어? 난 아무거나 괜찮은데."


"...으득!"

이빨을 깨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고, 잭슨은 더이상 나와 마주치기도 싫다는 듯이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잭슨이 다른 곳으로 걸어가도 그를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걸 본 나도 슬슬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죄송하지만 붉은 머리 신사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갈색머리의 냉미남이 나를 불러세움으로써 무산되었다. 나는 살짝 당황하며 그를 쳐다봤다.


뒤이어 기대와 흥미가 담겨있는 듯한 얼굴이 내 눈에 잡혔다. 그걸 보고 귀찮은 일에 휘말렸구나라며
직감할 수 있었다.

"...아이작이라고 합니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듀커르... 마이샬?"
"마이샬이라면 붉은 사자의 성이지 않아?"
"그러고 보니 니콜 조교님도 마이샬이잖아."

역시 무학생들이라서 그럴까. 붉은 사자로 유명한 내 아버지의 성을 듣자마자 저마다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가끔 가다 니콜의 이름도 언급이 되었는데, 보아하니 신임생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것 같다. 하기야 그
얼굴에 그 실력인데 유명하지 않으면 이상한 거겠지.

"어쩐지... 붉은 머리카락하며 금색 눈동자를 보고 낯이 익다 했는데 붉은 사자의 아드님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시그너 백작 가문의 장남, 에딘 마비 시그너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에딘 님. 그나저나 저는 왜 불렀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스스로를 에딘이라 소개한 갈색 머리카락 남자는 내 질문에 별 일 아니라는 것처럼 대답했다.

"이렇게 된 거, 아이작 님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요. 아까 잭슨 님이 말했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제논 일대기라면 열광하는 팬들입니다. 아이작 님도 비슷한 것 같아서 함께 어울리면 즐거울 것
같아서요."
"... ..."

난 팬이 아니라 원작자인데요. 나는 에딘의 권유를 듣고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뭐, 잭슨과 달리 나에게 시비를 걸지도 않을테고 몇 가지 궁금한 점도 있었으네 거부할 생각은
없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겸사겸사 인맥도 늘리면 좋고.

"네. 그러죠, 뭐. 그전에 와인부터 마셔도 될까요? 목이 좀 말라서."


"아, 네. 와인이라면 저기 테이블 위에 있습니다."

나는 에딘이 가르킨 테이블로 다가갔다. 이어서 테이블로 다가가니 미리 대기하고 있던 웨이터가 직접


와인을 따라줘서 내가 직접 고를 필요도 없었다.

와인잔에 담긴 와인은 진한 보라색을 띄고 있었으며 향을 맡아보니 알싸한 포도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한 입 마셔볼까?'

돌아가기 전에 한 입 마셔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주위의 눈치를 보다가 홀짝이는 수준으로


와인을 마셨다.

"...오."

쓴맛은 전혀 나지 않고 알딸딸한 단맛이 입 안을 감돌았다. 어린애 입맛인 나에게 안성맞춤이다.

나는 와인의 맛에 만족감을 느끼며 아까의 자리로 돌아갔다. 잭슨이 떠나가도 무리가 해체되지 않는 걸
보아 정말 제논 일대기의 팬만 모은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무리에서 나오는 이야기 중 태반이 제논 일대기에 관한 이야기다. 듣는 내가 다 부끄러워질


정도로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아. 오셨군요. 때마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요?"
와인을 가지러 갔다 온 사이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간 모양이다. 내가 의문을 품으며 묻자 에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다들 메리의 출신을 두고 의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이작 님도 아시다시피 메리는 마법사잖아요?
하지만 마법은 평민이 배우기에는 매우 힘든 능력이죠. 그러니 대부분 메리가 귀족, 그것도 후작
이상이라는 부분에 가능성을 두고 있습니다."
"흐음... 그래요? 에딘 님의 생각은요?"
"저는 메리가 엘프와 연관돼 있지 않을까라며 추측하고 있어요. 제논 일대기는 외모 묘사를 꾸준히 하는
편인데 유독 메리는 풍성한 머리카락에 귀가 가려져 있다는 언급이 항상 나오거든요. 하물며 엘프는
마족처럼 마법의 대가이니 귀를 숨기는 것정도는 쉬울테죠."
"... ..."
"아이작 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새끼 뭐야. 그걸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지.

나는 하나하나 다 꿰차고 있는 듯한 에딘의 설명에 얼빠진 대답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애독자 앞에서 이런 말을 하자니 양심이 푹푹 찔렸다.

< 34 화 >

에딘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행사라고 해봤자 사회자가 단상에 올라서서 짧게 진행을 하고, 마음편히 즐기라는 멘트를 끝으로 악단이
나와 음악을 연주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행사 이후로 대강당 내부의 분위기는 한층 더 무르익어갔다. 행사 전까지는 웅성거리기만 해서


약간 난잡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악단이 음악을 연주한 이후부터 달라졌다.

하지만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과 그들이 사용하는 악기에 관심을 가진 것도 잠깐이었지, 나는 에딘과
신나게 떠들기 바빴다.

"아이작 씨도 책을 많이 읽으셨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아뇨. 에딘 씨가 더 대단하죠. 저는 문학이라 여유 시간이 많지만 에딘 씨는 아니잖아요."
"칭찬 감사합니다. 혹시 탐험가 알렉시스의 자서전도 읽어보셨어요?"
"물론 읽어봤죠. 특히 애벌레를 먹고 구토맛이 난다는 부분이 재미있었어요."
"오. 그 부분을 기억하시네요. 그러면..."

에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책벌레라는


것이다. 게다가 좋아하는 장르가 자서전, 그러니까 탐험가의 이야기여서 막힘없이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다보니 자연스레 와인도 몇 잔이나 마시게 되었다. 에딘이 한 잔을 다


마시는 동안 나는 대략 다섯 잔 정도 마신 것 같다.

"에딘 너는 몬스터랑 싸운 적이 있어?"


"옛날에 아버지를 따라서 사냥에 나간 적이 있어. 그때 오크가 갑자기 나타나서 조금 놀랐지. 그래도
그리 어렵진 않은 상대였어."
"오... 그럼 오우거는? 오우거가 정말 강하다고 들었는데?"
"글쎄? 난 딱 한 번 만난데다가 그때는 다른 기사 분들이랑 협동해서 토벌했거든."

이렇다 보니 시간이 흘러 어느새 말까지 놓게 되었다. 그는 잭슨과 달리 개념이 꽉 잡혀있는 데다가


성격도 시원시원한 편이어서 내가 편히 대할 수 있었다.

에딘도 서슴없이 다가온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차가운 인상이 무색하게 이따금씩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거 참... 아, 그렇지. 아이작? 하나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물어봐도 돼?"


"물어봐. 무슨 질문인데?"

와인을 좀 많이 마셔서 그럴까. 평소였다면 약간의 경계심을 담았겠지만 알딸딸한 기분이 머리를 지배하여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와인이 쓰지 않고 단맛이 더 강하여 너무 많이 마셨던 탓이다.

그사이 에딘은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어서 우리 근처에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속삭이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아까 레킬리스 영애랑 세실리 공주님이 널 두고 싸웠잖아."


"어..."
"그때 왜 싸웠는지 알려줄 수 있어?"

약간 몽롱했던 머릿속이 확- 트이는 기분이다. 나는 질문을 듣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가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악의라고는 하나도 묻지 않은,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표정이다. 얼굴 인상이 워낙


차가워서 표정을 분간하기 힘들지만 이정도는 알 수 있다.

이에 나는 콧등을 손가락을 꾹- 꾹- 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냥... 세실리 누나가 장난친 거야. 마리는 그걸 보고 손 떼라고 한 거고. 너도 알다시피 팔짱을 끼는
건 연인들끼리나 하는 행위잖아? 그런데 마족은 좀 다르더라고. 마리도 그걸 걱정해서 떼라고 한 거야."
"세실리 누나? 너 설마 세실리 공주님을 친근하게 누나라고 부르는 거야?"
"아..."

또 말실수했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묻는 에딘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나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나는 여전히 몽롱한 정신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응. 몇 번 얘기를 나눴다가 친해졌거든. 그래서인지 장난도 잘 치고 그래."


"흠... 그래? 그나저나 너 와인 몇 잔 정도 마셨어? 얼굴이 머리색이랑 똑같아졌는데."
"글쎄? 아마..."

에딘의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맨 처음에 한 번.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한 번. 그 후로는... 그냥 와인잔이 비어있을 때마다 마신 걸로


기억했다.

"모르겠는데?"
"모르겠다고?"
"응. 맛있어서 잔이 빌 때마다 마셨어."
"... ..."

내 대답에 에딘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현재 내가 얼마나 취했는지 살펴보는 듯한 시선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나는 멀쩡하다. 정신이 좀 몽롱하고 혀가 살짝 꼬이기는 해도 정상적인 사고는


가능했다.
어디까지나 내 주관으로는.

"...오늘은 거기까지만 마셔. 그러다가 나중에 실수하겠다."


"이렇게 맛있는 걸 그만 마시라고? 어림도 없지."
"아이작. 와인은 맛있어서 마시는 게 아니야. 입가심 용이라고."
"그럼 딱 한 잔만 마실게."
"한 잔 정도라면야..."

에딘은 내 마지막 제안을 듣고 마지못해 승낙했다. 그래도 영 못 믿음직스럽지 못 하다는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와인이 4 분의 1 정도 남아있던 와인을 모두 입에 털어넣었다. 처음에는 쓴맛이


느껴졌으나 이다음으로 단맛과 신맛이 두루섞인 오묘한 맛이 입 안을 지배했다.

전생에서는 맥주조차 쓰다며 잘 마시지 않던 나에게 정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이거라면 몇 병은 거뜬하게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후아! 역시 맛있네. 이 와인 이름이 뭐라고 했어?"


"알키오네.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 중 하나야. 몇 년을 숙성했는지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로 달라져.
내가 알기로는 모임에 지급된 와인은 10 년 정도 숙성했을 거야."
"엄청 비싸겠네."
"그렇게 비싸진 않아. 유명한만큼 제조하기 쉽거든. 그래서 평민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와인이야."

에딘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지만 지금 내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 마신 와인이 기점이 되었는지
전보다 머리가 더 헤롱헤롱거렸으니까.

제아무리 달다고 해도 역시 술은 술이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몽롱한 정신은


변함없었다.

에딘도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는지 염려하는 목소리로 나에게 권유했다.

"...제대로 취했나 보네. 이제 그만 마셔."


"딱 한 잔만 더 마실게."
"술에 취하면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세 잔이 되는 법이야. 이제 그만..."

에딘이 나를 제지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작?"

익숙한 목소리가 어지러운 정신을 뚫고 내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감미로운 여인의 목소리에 눈을


끔뻑거렸다가 고개를 돌렸다.

세실리, 그녀가 한 손에 와인잔을 든 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나의 곁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아무래도 대충 일이 끝난 모양이다.

그사이 에딘은 세실리가 등장하자 눈을 살짝 크게 뜨면서 조용히 물었다.

"...세실리 공주님?"
"아."

그제서야 세실리도 에딘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정식으로 인사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이라고 해요. 편히게 세실리라고 불러주세요 "
"시, 시그너 백작 가문의 장남, 에딘 마비 시그너라고 합니다. 헬리움의 후계자와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에딘은 그녀의 정중한 인사에 순간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예법에 따라 인사했다. 저거 분명 가슴
쪽으로 시선이 간 것이 틀림없다. 말까지 더듬거리는 걸 보면 확실하다.

역시 너도 남자였구나. 솔직히 지금 세실리의 모습을 본다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시선을 끌었을 것이다.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그나저나..."

서로 통성명을 나눈 세실리는 나에게 시선을 두더니 에딘에게 물었다.

"아이작이 왜 이렇게 됐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 그게... 와인 좀 많이 마셨습니다."
"나 별루 안 마셨다니까 그르네..."

발음이 살짝 꼬였다. 그래도 걱정 마라. 머리가 약간 어지러울 뿐이지 멀쩡하다.

아마도.

"흐응."

세실리는 내 상태를 체크하더니 미묘한 비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시야가 흐릿했지만 그녀의
장난기가 발동될 때마다 나오는 미소가 확실했다. 그 미소에 약간 불안해진 건 덤이고.

내가 그 미소를 보자마자 자동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을 때였다. 세실리는 내가 뒤로 물러나기도 전


잽싸게 손목을 붙잡더니 에딘에게 부탁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아이작을 좀 데려가도 될까요?"


"네?"
"괜찮죠?"

안 괜찮다고 해. 이놈아. 하지만 에딘은 그런 내 기대를 배반했다.

그는 나와 세실리를 번갈아 보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락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그 대신 더 이상 와인을 마시지 못하게 해주세요. 이러다가 큰일 날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가자, 아이작."
"으어우어..."

결국 세실리의 손길에 이끌려 발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실수로 와인잔을 놓칠까봐 남아있던 신경을
그쪽에 쏟아부었다.

물론 가기 전에 에딘에게 인사를 하는 건 잊지 않았다. 발음이 약간 뭉개졌지만 내 의사는 전달되었는지


에딘도 적당히 마시라며 걱정해줬다. 나 안 취했다니까 그러네.

이어서 세실리에게 이끌려 도착한 장소는 다양한 먹거리가 놓여있는 테이블이었다. 세실리는 테이블에
도착하자마자 와인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웨이터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탁했다.

"저희한테 와인을 더 줄 수 있겠어요?"


"물론이죠. 아름다운 레이디."
"그럼 아이작 너부터 받아."
"네에..."

세실리의 말에 따라 와인잔을 내미니 웨이터가 정갈한 자세로 와인을 따라줬다. 보라색이 아니라 진한
붉은색에 가까운 와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마셨던 와인과 다르다는 걸 알아채고 웨이터에게 물었다. 발음이 베베 꼬이다 못해


연체동물마냥 흐물거렸다.

"이건 무스은 와인이에여어?"


"레드칼리입니다. 알키오네와 달리 신맛이 더욱 강하죠."
"한 번 마셔봐. 맛있어. 그전에..."

세실리는 남아있던 와인을 한 입에 마시고는 웨이터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에 웨이터는 아무런 말도 없이


비어있는 잔에 와인을 부어줬다.

지금 보니까 와인의 색깔과 세실리가 입은 드레스의 색이 서로 비슷했다. 눈이 부실듯한 미인이 본인의


드레스색과 비슷한 와인을 한 손에 들고 있는 모습. 이렇게 보니 정말로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내가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감상하는 동안 세실리는 빙긋 웃더니 나에게 말했다. 고혹적인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인간 세상에서는 마시기 전에 서로 잔을 부딪히는 문화가 있다더라고. 건배라고 했나?"


"그거 원래에 드어프들이 먼저 한 거예여..."

전생에서는 어쩌다 보니 생겨난 문화이지만, 여기서는 인간이 드워프들을 따라해서 생겨난 문화다.
다양한 역사책을 읽다 보니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건배를 인간의 문화로 착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인간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을
뿐 더러 드워프들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난 전혀 모르고 있었네."


"마족은... 건배 문하가 있어여?"
"비슷한 게 있어. 잔을 위로 살짝 들어올리는 거지. 슬픈 운명을 맞이한 동족을 기리는 헌사 같은
개념이지. 그래서 이렇게 즐거운 날에는 잘 안 해."
"그렇군요오..."

나는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며 끄덕였다.

이처럼 세실리와 대화하다보면 책으로도 알 수 없던 마족의 특징을 알게 된다.

지난번에 마족의 뿔을 쓰다듬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도 알았고, 특정 주기마다 내면의 악이 더


심화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런 세세한 부분도...

"...저그면 좋겠지..."

술에 취해서 그럴까. 마음속으로 생각하던 것이 그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다행히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작게 웅얼거리는 식이어서 세실리가 들을 일은...

"적는다라... 아이작?"

없구나. 나는 당황도 잠시 고개를 들어올리며 그녀와 마주했다.

"...네에?"
"우리 건배할까?"
세실리가 싱긋 웃더니 와인잔을 내밀며 나에게 권유했다. 와인잔에 담긴 붉은 액체가 찰랑이는 모습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더이상 마시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지 몰라도 에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더 마시고 싶다.

땅-

서로 잔을 부딪히자 맑고 쾌청한 소리가 들렀다. 세실리는 건배를 하자마자 빙긋 웃더니 잔을 입에다 갖다


대었다.

나 또한 와인을 마시기 위해 입으로 갖다 대었다. 이어서 붉은빛을 띄는 액체가 점점 내 입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으으..."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웨이터의 설명대로 알키오네와 달리 단맛보다는 신맛이 강했다.

신맛이 덜한 레몬맛?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이작."

내가 입 안을 가득 채운 신맛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쯤, 세실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필름이 끊길 듯 말 듯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네에... 누나아..."
"내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물어봐도 되겠니?"
"그게 뭔데여어...?"

이제는 시야가 흐릿한 정도가 아니라 뿌옇게 변했다. 또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악단의 연주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메아리처럼 울렁거렸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세실리의 질문만큼은 귀에 생생하게 들어왔다.

"너 혹시 글 쓰는 거 좋아해?"

< 35 화 >

세상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서적, 제논 일대기.

겉보기에는 평범한 영웅의 일화이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이야기는 매우 심오하다. 평소 악마로 취급받던


마족을 불운한 존재들로 묘사하거나 귀족들의 명과 암을 단편적으로 드러내는 등등.

여태까지 소설이라함은 문장이 이리저리 꼬여있고, 단어마저 복잡하기 그지없는 서적밖에 없었으나 제논
일대기는 정반대의 노선을 타고 있다. 머릿속에 재생이 되는 듯한 문장력과 묘사, 그리고 여운을 남기는
명장면과 메시지들.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던 한 평민이 '기연'을 만나 재능을 개화하고, 더 나아가
세상을 구하는 영웅으로 성장하는 일대기. 거기다 매력적인 여주인공과 조연들.

이렇듯 평민들도 쉽게 읽고 재미있어하는만큼 제논 일대기는 대중적인 서적으로 자리잡았다. 남녀노소,


종족불문 않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
그리고 독자들은 제논 일대기의 다음 신권과 더불어 가장 궁금한 부분이 있다.

과연 제논 일대기의 저자는 누구일까? 누구이길래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것일까.

수많은 평론가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했으나 그중 제일 신빙성이 가는 가설은 바로 나이를 지긋하게


드신 현자라는 것. 특히 과거에 온 세상을 누비고 다녀 다양한 경험을 쌓은 탐험가라는 가설에 힘이
쏠렸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10 대, 그리고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한 20 대는 당연히 논외로 쳤다. 그도 그럴


것이 제논 일대기는 풍부한 경험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장면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오지 않는 이상.

"...그건 왜 물어여?"

눈이 반즈음 풀려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 아이작이 흐물거리는 목소리로 세실리에게 물었다. 호박처럼
빛나던 금색 눈동자는 빛을 잃어 탁해졌고, 무뚝뚝하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얼굴 또한 머리카락처럼 붉어진 것이, 누가 봐도 취했다는 걸 알 수 있는 모습.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귀엽네.'

세실리는 그 모습을 보며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평소 의심스러웠던 정황을 상기했다. 우선적으로 리나가


언급했던 중지 손가락의 굳은살 즉, 펜혹.

오랜 시간 검을 쥔 기사의 손바닥이 딱딱한 것처럼, 그의 중지 손가락에 박혀있는 굳은살도 오랜 시간


동안 펜을 쥐어야 가질 수 있는 증표다. 그것도 고작 한 두 달 정도가 아니라 최소 1 년의 넘어야 할
정도로 심한 굳은살이다.

물론 평소 노트에 기록하는 습관을 가진 아이작이니, 굳은살 정도야 충분히 가질 수 있다. 거기다 공부를
좋아한다고 직접 말했으니 여기까지는 넘길만하다.

두 번째는 평소 제논 일대기에 시큰둥했던 아이작의 태도. 분명 다른 사람들처럼 제논 일대기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열광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딱 취미로 읽는 정도랄까.

하지만 아까 전 몰래 들었던 잭슨과의 이야기도 그렇고, 여태까지의 태도를 종합했을 때 제논 일대기에


관한 이야기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스토리를 거의 다 꿰차고 있을 정도면 열정적이라는 의미인데 아이작은
이상하리만치 무심한 편이었다.

마지막으로 지난 번, 아이작이 언급했던 마족의 정체성이다.

'제논이 진에게 했던 말과 비슷해. 이게 정말로 우연일까?'

또 다른 주인공, 진은 사크란이 희생하는 모습을 보며 마족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그 고민을 제논이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장면이 존재한다. 인간을 포함한 다른 종족들은 그저 제논이 격려해주는 건가
싶겠지만 세실리에게는 쉬이 넘길 수 없는 문맥이다.

아이작은 마족을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인간이 되길 위해 간절히 소망하는, 가장


인간적 존재'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제논이 진에게 말했던 문장은 이렇다.

[걱정 마. 네가 걱정하는 것과 달리 마족은 악마가 되어도 인간처럼 죽을 수 있어. 사크란을 봐.


태생적인 부분은 신조차 어쩔 수 없지만 그렇기에 마족이 더욱 인간다운 거야.]
제논의 격언은 아이작이 그녀에게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정말로 아이작이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면? 놀라울만치 위의 증거들이 모두 부합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 한다.

무엇보다 아이작은 현재 17 살, 인간으로 치자면 이제 막 성인에 접한 상황이다. 지식이 풍부할지언정


경험은 결코 풍부할 수가 없다.

또한 아이작은 여태까지 집에서 생활하고 밖에 나갔던 적이 거의 없다고 본인이 스스로 밝혔다. 하물며
제논 일대기에는 경험이 많거나 그 경험을 직접 눈으로 봐야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가득 채워져 있다 .

이런 결정적인 증거 때문에 '아이작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다'라는 증명이 성립되지 않았다. 세실리는


아이작의 질문을 듣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궁금해서 물은거야. 아이작은 독서랑 무언가를 쓰는 걸 좋아하잖아? 어쩌면 너도 책을 쓰고 있지


않나, 싶었거든."
"...아니에여. 저 책 안써여어..."
"그러니?"

세실리는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안에 담긴 와인이 출렁이는 모습을 보다가 아이작에게 시선을 두었다.

술에 취해서 그럴까. 평소였다면 얼굴에 모든 생각이 드러나는 아이작이나 지금은 분간하기가 힘들다.

사람은 술에 취하게 되면 실수를 하길 마련인데 아이작은 오히려 더 꽁꽁 숨기는 중이다. 그래서 더


의심이 간다. 본래 한 번 피어난 의심을 싹은 꺾이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게 되는 법이니.

'마음 같아서는 마법이라도 쓰고 싶지만... 그러면 절대 안 되겠지.'

마법의 활용성은 무궁무진하다. 생활에 용이하게 쓸 수 있는 마법도 있고 정신을 조작해 본심을 토해내게
만드는 마법도 있다.

인간이었다면 손도 대지 못할 만큼 복잡한 마법이지만, 자신은 마법의 대가라고 불리는 마족. 약간의


수고를 들인다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마법은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특정 지역을 제외하면 사용이 불가능 할 뿐 더러 정신계 마법은 위험
요소와 후유증이 적지 않다. 괜히 확신을 가진답시고 호감이 있는 상대의 머릿속을 헤집을 수는 없는
법이다.

생판 모르는 남이었다면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겠지만 아이작이니까. 아이작은 그녀에게도 특별한


존재이니 소중하게 대해줘야 옳다.

'인간들은 수가 많아. 만에 하나, 정말로 우연히 겹치는 경우가 있겠지.'

제 나이에 맞지 않게 배려심과 생각이 깊다고한들, 그래봤자 17 살이다. 거기다 인간의 숫자는 다른


종족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많으니 아이작을 콕 집을 필요는 없다.

'그래도 의심은 유지할 필요가 있겠지.'

아이작이 작가일 확률은 현저히 적지만, 연관된 사람이라면 약간이나마 상승한다. 세실리는 그의 주변에
누가 있는지 곰곰이 파악하는 것도 잠시, 아이작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이작은 거의 인사불성이 되기 직전이었는데, 이러다가는 쓰러져 그대로 잠이 들 것 같다. 아무래도


의자에 앉히거나 조치를 해야 할 듯했다.
"아이작. 너 괜찮은 거 맞지?"
"...네에."
"전혀 안 괜찮아 보이네. 저기 앉아서 쉬고 있자."

세실리는 대강당 구석진 부분에 배치된 의자를 가리켰다. 벽도 있으니 기대어 휴식을 취하기는 딱 좋은
곳이다.

아이작도 그녀가 가르킨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이내 비척비척 발걸음을 옮겼다. 한 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있어 약간 웃긴 모양새였으나 그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혹시라도 넘어질까봐 같이 걷고 있다지만 그래도 영 불안하다. 갓 태어난 새끼 펭귄이 부모를 따라


아장아장 걷는 듯했다.

"술이... 좀... 맛있네여... 헤헤."

이제는 헤실헤실 웃기까지 한다. 세실리는 아이작의 웃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가끔 가다 장난을 쳐야 표정이 변하는 아이작이지만, 도통 웃는 경우는 잘 없었다.


웃어봤자 피식거리는 정도일 뿐, 지금처럼 바보같이 웃지는 않았다.

'웃으니까 더 귀엽네.'

보면 볼 수록 새끼 펭귄 같은 이미지다. 체구가 그렇게 작은 것도 아닌데 작게 느껴지고, 특색이 강한


외모도 귀엽게만 느껴졌다. 나이가 자신보다 한참 어려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앞으로 과도한 음주는 금지시켜야할 듯했다. 이런 모임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소문은 아이작에게도 좋지 않다. 주변에 무심한 그가 신경쓸지는 의문이지만 자신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술이 깰 때까지 여기서 좀 쉬고 있어. 알겠지?"


"네에..."
"그나저나 아이작. 정말로 글 쓰기가 취미인 건 아니지?"

은글슬쩍 취미라고 말을 바꾸며 질문한 세실리. 술에 취해 사고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아이작이니


최대한 증거를 토해내게 만들 심산이었다.

아이작은 질문을 듣고 세실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해맑게 대답했다.

"전 그런 거 몰라여어..."
"... ..."

세실리는 아이마냥 밝게 대답한 아이작을 보며 미약한 웃음을 흘렸다.

평소에는 어른스러운 면모가 강했는데 지금은 어린아이 같다. 술에 취하면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다던데
이게 아이작의 본성인 걸까. 참으로 바람직한 본성이다.

이에 세실리는 아이작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 특유의 장난기가 발동한


순간이었다.

"그래. 누나는 갈테니까 여기 얌전히 있어. 아이작은 착한 아이니 누나 말 잘 들을 거지?"


"네에..."
"그래. 그래. 아이작은 역시 착한 아이네."
머리 위에 얹은 손을 살살 쓰다듬어줬다. 따로 관리라도 했는지 몰라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동안 아이작은 세실리가 쓰다듬어주자 아까처럼 헤실거리며 웃었다. 기분이 좋다는 감정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그럼 이제 갈게. 누나 말대로 여기 꼭 있어야 해. 알겠지?"


"네!"

세실리는 아이작의 힘찬 대답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혹시하며 아이작을 확인하는
건 잊지 않았다.

아이작은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로 오뚜기 인형마냥 좌우로 왔다 갔다하는 중이다. 그걸 보고 살짝


불안해진 세실리였으나 괜찮겠지, 라며 넘어갔다.

그 후로 세실리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고 불과 3 분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쿠우..."

아이작의 눈이 서서히 감기더니 결국 골아떨어졌다.

< 36 화 >

"...나."
"... ..."
"어나...!"
"...어나!"
"으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귓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메아리 치듯이 울렸다.

나는 귓가에서 윙- 윙- 울리는 정체모를 소리에 신음했다. 머리는 어질어질하고 속은 불을 달군 것처럼


화끈거렸다.

이대로 눈을 감고 다시 잠에 들고 싶을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일어나!"
"으응...?"

그러나 이번에는 귀에 생생하게 들렀다. 누군가 나에게 일어나라고 외치는 소리가 맞다.

그 소리에 도통 떠질 생각을 하지 않던 눈꺼풀을 부르르 떨면서 간신히 열었다. 강렬한 빛무리가 눈을


찔러들어 익숙해질 때까지 몇 번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이윽고 침침해진 시야가 차차 밝아지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백색 머리카락과 파란색 눈동자.
그리고 어딘간 불만스러운 표정까지.

어질어질한 머리 때문에 판단이 살짝 늦었지만 마리, 그녀가 확실했다.

"이제 정신이 들어?"


"으으..."

마리의 불만 가득한 물음에도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자마자 두통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겨우겨우 입을 때었다. 물을 마신지 오래 되어 상당히 메마른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긴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대강당이지."

아, 그렇지 참. 필름이 끊기기 직전 세실리가 나를 이곳에다 데려놓은 것까지는 기억난다. 그 과정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모른다.

분명 중요한 말을 나눈 것 같은데 이상하리만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 취했으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이후로는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얌전히 잠에 들지 않았을까. 버릇은 쉽게 고칠 수 없다고,


나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골아떨어지는 편이다.

"그나저나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서 퍼질러 자고 있네. 도대체 와인을 몇 잔이나 마신거야?"

마리가 한심하다는 말투로 말하는 것이 귀에 쏙쏙 박혔다. 질책까지 섞여있어 그녀의 진심이 우러러
나왔다.

나는 콧등을 꾹-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갈라진 목소리였다.

"...몰라."
"그래. 모르겠지. 자."
"응?"

내가 콧등을 누르고 있을 때 마리가 나에게 무언가를 건내줬다. 와인잔과 달리 평범한 유리컵이었으며,


그 안에는 맑고 투명한 액체와 구(球) 형태의 얼음이 담겨있다.

와인만 마시다보니 유리컵이 있을 줄은 몰랐다. 물론 있어도 와인만 마셨을 것이다.

"평범한 냉수야. 이상한 거 안 넣었으니까 잔말말고 마시기나 해."

어질어질한 정신 때문에 한동안 멍하니 유리컵을 바라보고 있을 즈음, 마리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컵에
담긴 액체가 무엇인지 알려줬다.

나는 그제서야 아, 하며 유리컵을 조심스럽게 건내받았다. 얼음이 있어서 그런지 받자마자 시원한 냉기가
두 손을 타고 전해졌다.

이어서 얼음이 담긴 유리컵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혹여 놓칠새라 두 손으로 꽉 잡고 입에 갖다 대었다.

꿀꺽- 꿀꺽- 꿀꺽-

"후아!"

냉수를 반 정도 마시니 진심어린 탄성이 저절로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장작을 피운 것마냥 가슴이 뜨거웠는데 냉수 덕분에 살 것 같다. 사막처럼 메말랐던


목 또한 원래대로 되돌아온 느낌이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마리가 내 반응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어지러웠던 머리가 점차 호전되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덕분에. 이거 어디서 난 거야?"
"테이블 위에 있었지. 와인만 있는 게 아니라 칵테일도 있거든."

와인만 있던 게 아닌 모양이다. 하긴 와인이 너무 맛있어서 와인만 주구장창 마셨으니 모를만도 하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 살펴보니 단상 위에


올라가 연주를 하던 악단도 보이질 않았고, 강당 내부의 사람 숫자도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의자에 앉아 골아떨어져 있는 동안 시간이 많이 지난 듯했다. 나는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면서 마리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 혹시..."
"네가 언제부터 잤는지는 나도 몰라. 나도 이제 막 여유가 생긴 참이었거든. 일단 너랑 나랑
헤어지고나서 4 시간 정도 지났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마리가 먼저 선수쳤다. 팔짱을 끼며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은 건 덤이다.

하기야 그녀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바빴을텐데 이런 질문은 실례가 될 수도 있었다. 이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같이 다녀도 되겠네? 떨어지기 전에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어? 그, 그렇지. 그런데 너 괜찮겠어?"

내 물음에 마리는 당황하는 것도 잠깐이었지 곧바로 내 상태를 걱정해줬다. 골아떨어지기 전까지 거의


만취 수준이었으니 그녀가 걱정할만했다.

하지만 한 번 잠에 빠져들었다가 깨어나서 그런지 술기운이 어느 정도 달아났다. 더군다나 마리가 전해준


냉수가 일종의 해소제 역할을 해주어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했다.

물론 두통과 메스꺼움은 여전했다. 와인은 특히 숙취가 심하다고 얼핏 들은 적이 있는 것같다.

"움직일 정도는 돼. 그리고 아버지에게 들은 게 있어. 숙취가 있을 때마다 마나를 순환시키면 해소될
거라고."
"아, 그거? 나도 오빠한테 들은 적이 있어."
"읏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체내의 마나를 순환시켰다. 내가 아무리 무예에 재능이 없더라도 마나를
가동시키는 것까지는 가능하다.

이어서 정신을 약간 집중하자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던 체내의 마나가 세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나를 돌릴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이 시원하면서 청량한 느낌은 언제 봐도 생소했다.

'이걸 이용해 싸운다는 것도 신기하고...'

내가 그 생각을 하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마리는 마나를 순환시켜서 숙취를 해소한다는 내 방법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두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번쩍 떠오른 모양이다.

이윽고 그녀는 다급한 표정으로 내 팔을 붙잡더니 버럭 외쳤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묻어나오는 표정이
압권이다.

"야! 야! 당장 멈춰! 지금 마나 돌리면 안 돼!"


"응? 왜? 점점 나아지는..."

띠잉-

내 말이 모두 끝나기도 전이었다.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차마 형언할 수 없는 두통이


밀려들어왔다.

느닷없이 엄습한 그 두통에 비틀거리며 내가 앉았던 자리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냉수로 차분히 가라앉혔던 속이 뒤집혔는지 메스꺼움마저 느껴졌다.

"마나를 운용하면 숙취가 더 심해진단 말이야! 숙취가 느껴지는 시간을 줄이는 대신 그걸 전부 앞당기는
식이라고!"
"으으..."
"정말이지... 알고 있는 건 제대로 알고 있던가 이게 뭐 하는 짓이니?"

쓴소리가 연이어 이어져도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겨우 진정되었던 두통과 메스꺼움이 한꺼번에
몰아쳐서 정신이 없다.

"나참... 무슨 코미디도 아니고."

마리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투덜거리고 내 옆자리에 있던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내가 회복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니 그때까지 기다리려는 듯했다. 괜스레 미안해져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 이럴 줄은 전혀 몰랐네."
"시끄럽고 물이나 마시기나 해."

그러고 보니 반즈음 남아있던 냉수가 아직까지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남은 냉수를


한꺼번에 들이켰다.

얼음 덕분에 냉기는 여전하여 목구멍 너머로 시원한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뒤집혔던 속이 진정되는
듯하여 약간이나마 살만해졌다.

하지만 속이 울렁거리는 건 똑같았다. 마나를 순환시키자마자 바로 종료해서 망정이지, 그 이상


유지했다면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으으..."
"힘들면 내가 사람 불러서 숙소로 데려가게 해줄게. 보통 이런 행사에는 너처럼 술에 취한 사람들이
많아서 웨이터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거든."

내 상태가 보기보다 영 좋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마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권유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배려 속에 숨겨져 있던 실망감을 눈치챘다.

하긴 기껏 자유 시간을 얻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 누구라도 실망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상대방의 상태가 꽝이라 해도.

거기다 내가 퍼질러자는 동안 그녀는 조금이라도 가문에 도움이 되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녔을 것이며,


그에 따라 피로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런데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에게 온 것이다.

그러니 실망감을 주는 건 가급적 사양하고 싶다. 나는 애써 괜찮은 척 입을 열어 마리를 안심시켜줬다.

"괜찮아. 머리가 좀 어지러울 뿐이지 네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그래? 그럼 다행히고."
"그래도 움직이는 건 힘들겠네. 그냥 여기서 얘기할까?"
"여기서?"

속이 울렁거리는 와중에 마리를 힐긋 바라보니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기력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마리는 고양이 같은 눈을 깜빡거렸다가 이윽고 못 말린다는 미소를 지었다.

"너는 다 좋은데 가끔 가다 보면 어리버리해지더라."


"지금은 와인 때문에 그래."
"그거참 설득력 높은 변명이네."
"너는 안 마셨어?"
"마셨긴 해도 너처럼 많이 마시진 않았어. 그리고 레킬리스 가문의 특징이 잘 안 취한다는 거야."

외모도 그렇고 축복받은 유전자를 이어받았구나. 나는 속으로 부럽다고 생각하다가 앞을 쳐다봤다.

이제 슬슬 정리하려는 모양인지 웨이터들이 하나둘 씩 테이블을 깨끗하게 치우기 시작했다. 모임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숫자도 전보다 더욱 줄어든 모습이다.

그럼에도 유독 한 사람만큼은 눈에 띄였는데, 당연하게도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세실리다. 그녀는 늘


그렇듯이 리나와 사이좋게 다니는 중이었다.

아마 그녀에게 가장 친한 친구를 꼽으라고 단연코 리나를 고르지 않을까. 항상 보면 그녀의 옆에는


십중팔구 리나가 있었다.

"... ..."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리나와 이야기하던 세실리가 정확히 이쪽을 바라보더니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줬다.

비록 움직일 기력도 없었으나 저쪽에서 먼저 인사해줬으니 반응은 해줘야겠지. 내가 힘없이 손을


흔들어주자 세실리가 쿡- 쿡- 웃음을 흘렸다.

"쟤 너 보고 있는 거 맞지?"

옆에서 마리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힘빠진 목소리로 대충 대답했다.

"아마도. 그나저나 세실리 누나는 볼 때마다 리나 님이랑 같이 있는 것 같네."


"...끼리끼리 만나는 거겠지, 뭐."

헤어지기 전의 일을 마음에 담고 있었는지 세실리의 평가가 상당히 박해졌다. 나는 그걸 듣고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마리는 열심히 관리한 손톱을 바라보다가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작."
"응."
"문득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넌 이상형이 어떻게 돼?"
"이상형?"

나는 생뚱맞게 들릴 법한 마리의 질문을 듣고 그녀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녀는 내 시선에 한 번


힐긋거렸다가 애꿎은 손톱만 만지작거리며 확인시켜줬다.

"응. 이상형."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딴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처럼 답한 마리였으나 그녀의 귀가 미미하게 붉어져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마리의 머리색이 눈처럼 새하얀 탓에 더욱 눈에 띄였다.

나는 왠지 남일 같지 않은 그 반응에 얼떨떨한 것도 잠시, 그녀가 질문한 이상형에 대해 턱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이상형이라..."

솔직히 말하자면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전생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내 주위에 미녀가 발이 채이도록
널려있기 때문이다.

마리를 포함해서 리나, 세실리, 레오나, 아델리아, 마지막으로 미의 화신이라 일컫는 엘프, 신디까지.

취향에 따라 갈리겠지만 이들은 결코 못 생겼다고 할만한 사람들이 절대 아니다. 만약 못 생겼다고하면 그


사람이 이상한 거겠지.

어쨋던 간에 당장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굳이 있다면 눈이 크다는 것 정도?

나는 그 생각이 들자 턱을 쓰다듬는 걸 멈추면서 입을 열었다.

"글쎄...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어. 난 눈이 크면 다 좋다고 생각하거든."


"그럼 세실리나 리나처럼 가슴 큰 여자는?"

그거 너무 직설적인 질문인데. 내가 당황하던 말 건 마리는 정말로 진지했다. 나는 어느새 진지해진


그녀의 얼굴과 말없이 마주했다가 말없이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세실리처럼 파격적인 건 아니지만 마리의 드레스도 나름 과감한 편이라 가슴 부분이 약간이나마 노출돼
있다. 눈처럼 뽀얀 속살이 수많은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 같다.

아무튼 간에 마리의 가슴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었다. 세실리가 과할 정도로 큰 거지, 오히려 내


기준으로는 마리도 큰 편에 속했다.

'아니. 이게 아니지.'

술기운 때문에 이야기가 잠깐 샜으나 본론으로 돌아왔다. 나는 시선을 끌어올려 그녀의 얼굴과 재차
마주한 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크면 좋지.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남자도 비슷할거야. 본능이거든."


"그, 그래? 그렇구나..."

마리가 음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기 직전이었다. 나는 머릿속을 번쩍하며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급히
덧붙였다.

"아. 하나 있다. 취미가 같으면 좋겠네."


"취미?"
"응. 취미."

전생에서도 다른 걸 다 제쳐두고 취미가 맞다면 기본적으로 사이가 좋았다. 비록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나서


연락을 끊었다지만 한때 연애 직전까지 갔던 여사친도 있었다.

조금 전 에딘도 비슷한 케이스다. 와인을 마셔서 그런 걸 수도 있으나 취미가 같다는 걸 알자마자 봇물


터지듯이 말이 쏟아져나왔다. 심지어 초면인데도 말이다.

"취미가 같으면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들더라고. 무언가를 함께 알고, 함께 즐길 수 있다는 느낌? 난


그런 게 좋아."
"...의외로 평범하네?"
"그렇지. 너도 알다시피 내 취미가 독서잖아? 그런데 요즘에는 사람들이 제논 일대기밖에 안 읽더라고.
다른 책들도 좀 읽었으면 좋겠는데."

이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다양한 책을 읽었으나 제논 일대기가 나온 이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제논 일대기에 적응이 되어버린 나머지 다른 책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다. 약간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역사는?"
"응?"
"역사도 좋아하지 않아?"

마리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살짝 갸웃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하지. 왜?"
"생각나서 물어본 거야. 별 이유는 없어. 아, 그리고..."

마리는 말을 하다 말고 살짝 머뭇거렸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어쨌거나 이상형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


"응. 그럼 마리 너는?"
"나?"

내 역질문에 그녀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확인시켜줬다.

이어서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쭈욱 올렸다. 왠지 어디서 본 듯한, 장난기가


묻어나오는 미소였다.

"안 가르쳐 줄 건데?"


"뭐?"
"안 가르쳐 줄 거라고. 아이작은 의외로 순진하구나?"
"아니. 하..."

나는 탄식을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대답하지 않는 건데. 머리가 어지럽다보니 판단력이


흐려진 탓에 생긴 결과였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흘리고 있을 때, 마리가 흘러가듯이 중얼거렸다.

"언젠가..."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냐. 그나저나 머리는 이제 좀 괜찮아?"
"토할 거 같아."
"여기서 토하면 소문날... 아, 이미 나겠구나. 술에 잔뜩 취한 채 의자에서 퍼질러 잔 빨간 머리로.
정말 재밌겠다. 그지?"
"진심으로 한 대 때려도 되냐?"
"때리면 우리 아빠 부를거야."

상태가 나아지기까지는 약 30 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나와 마리는 대강당 밖으로 나와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눈 후, 늦은 밤이 되자 서로 헤어졌다.

그리고 헤어지기 직전, 마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아 참. 아이작. 깜빡하고 말 안 한 게 있어."


"그게 뭔데?"
"너 자는 모습 귀엽더라."
"... ..."
"그럼 다음 주에 봐. 안녕~"

나는 해맑게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마리를 보면서도 웃을 수 없었다.

'다음부터는 술 마시지 말아야겠다.'

이번 모임은 적어도 나에게는 흑역사 그 자체였다.

< 37 화 >

모임에서 현생 최초로 흑역사를 생성하긴 해도 내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다. 비록 주말 내내 숙취로


고생했지만 글을 쓰는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화장실을 좀 많이 들락날락했을 뿐이지. 와인은 다른 주류보다 숙취가 심하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사실을 처절하게 느꼈다.

아무튼 간에 다소 문제가 있긴해도 글은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차질없이 쓸 수 있었다. 신디에게


작문법을 가르쳐 주면서 배운 역사 지식과 세실리가 알려준 마족의 생태가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집에 있을 때보다 여유 시간이 반절 이상 줄어들어 진척도가 느린 건 어쩔 수 없다. 집에 있을


때는 하루 일과를 집필에만 집중했으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확실히... 다음 권은 빨라도 2 달은 걸리겠어.'

집에서는 빠르면 보름, 늦어도 한 달마다 원고를 제출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그러기가 매우 힘들었다. 사실 2 달도 잡은 것도 대단히 빠른 수준이다.

이렇다보니 가끔 타자기 같은 기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종종 생각한다. 신문이 나올만큼 제지


기술과 인쇄술이 발달된 세상인데 어째서 기계에는 한없이 약한 걸까.

'뭐 어쩌겠어. 시대가 아직 중세인데.'

이 세상은 산업 학명은커녕 '기계'라고 할만한 물건조차 제대로 등장하지 않아 '공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숙소의 냉장고, 온도 조절 기능, 마지막으로 내가 쓰는 마법필 모두 공학이 아니라 '마법학'이다.

아마 산업 혁명에 도달해도 전생처럼 완전한 기계가 아니라 약간의 마법이 포함돼 있지 않을까. 나는 8
권에 적었던 증기 기관차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거기까지는 내가 신경 쓸 게 아니지.'

나는 내 할 일이나 하면 그만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선물받은 마법필로 글을 쓰다가 우뚝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부터 조별 과제가 있던가?'

조별 과제하니 미간이 절로 좁혀진다. 전생에서는 조별 과제를 하면서 좋았던 기억이 하나도 없다.
무슨 종점의 기적도 아니고 조별 과제 기간에 부모님이 아프다시거나, 장례식에 가야한다거나, 휴대폰이
고장나 연락을 할 수 없다는 등등.

다양한 사유로 불참하는 일이 다반사요, 개중에는 아예 군대로 런한 새끼도 있었다.

그중 가장 빡쳤던 건 나 혼자 다 했는데 교수가 C 를 줬을 때다. 조장이 리더십을 발휘해서 조원을 이끌어


나가야하는데 왜 혼자서 했냐며 혼냈던 기억이 아직까지 뇌리에 남아있다.

다 좋으니까 부디 그런 현상만 없었으면 좋겠다. 못 하겠다고 하면 내가 다 해줄테니 그냥 참석만 잘


해주면 여한이 없다.

'내가 씨발 작가인데 그 정도도 못 하겠어?'

조별 과제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각나서 그런지 욕이 나와버렸다. 그만큼 조별 과제에 좋지 않은 감정밖에


없었다.

몇몇 사람은 여기는 아예 세상이니 다르지 않겠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간'의 본질은
어딜 가나 달라지지 않는 법이다. 더군다나 계급이 존재하니 더 심해질 수도 있다.

'근데 여기는 ppt 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그림이라도 그려야 하나?'

시각 효과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엄청 크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백 번 말해봤자 한 번 보는


것보다 못 하다는 법이다.

이건 나중에 교수에게 묻는 것이 현명할 듯했다. 가능하다면 그림을 대충 그려서라도 발표하고 싶다.


학점은 높게 받을 수록 좋은거니까.

'주제도 선정해야 하고... 생각보다 힘들긴 하겠네.'

물론 나에게는 아니지만. 나는 조별 과제에 관한 일은 뒤로 미루고 지금은 집필에 집중했다. 지금은


칠죄종에 관한 설정을 쓰는 것이 우선이다.

'색욕은 마족으로 하자. 그리고 외모는...'

나는 마법필을 놀리던 손을 우뚝 멈추었다. 색욕을 관장하는 마족이라하니 세실리가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그것도 모임에서 입었던 드레스 차림으로.

입학식 때 들은 소문에 따르자면 서큐버스의 후예라고 했던가. 하는 행동이나 고혹적인 분위기만 본다면
신빙성이 아주 높다.

'...이런 걸 적으면 의심받을테니까 다르게 묘사하자. 마족이었던 자신을 차별없이 대해줬던 인간


남자에게 배신당했다는 설정을 추가하면 되겠지. 마지막으로 이름은...'

당연하게도 릴리스다. 애당초 분노를 맡고 있는 수인의 이름이 사탄인데 뭐가 문제라고.

'수인의 이름이 사탄이라니. 그거참...'

나는 속으로 키득거리며 막힘없이 스토리를 써내려갔다.

****"

조별 과제에는 이런 속설이 있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본래라면 정확히 반대가 되어야 맞는 속담이지만 조별 과제는 아니다. 애초에 한 명이면 족할 일을 두 명,
세 명이 달라붙어서 하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일의 효율은 급감한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조별 과제를 하면서 꼭 나쁜 일만 발생하는 건 절대 아니다. 우연히 친해져서


인맥을 쌓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다.

난 조별 과제를 할 때마다 개똥거지 같은 팀원을 만나서 문제지만. 덕분에 인간을 혐오하게 되는 과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말이 길어졌는데, 조별 과제를 '약간이나마'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적은 인원을


배치해야 한다. 이건 무조건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산다는 속담처럼, 4 명까지는 괜찮지만 5 명이 되는 순간부터 문제가


발생하더라. 나 혼자 정도는 괜찮겠지~ 라며 나 몰라라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 새끼들은 교수한테 다 꼰지를 계획이다.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오늘은 임의로 조를 짠 뒤 과제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주제는 제논 일대기의
전개를 예측하는 것. 그 가설이 어째서 나왔는지, 그리고 그 가설을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있는지
설명해주시면 됩니다."

월요일이 다가오고, 인문학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교수가 조별 과제에 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늘


그렇듯이 앞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그의 말을 듣고나서 속으로 피식거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던 전생에서도 조별 과제는 인간 불신에 걸리기 딱 좋았는데 여기는 어떨지 정말
궁금해졌다.

그동안 교수는 강의실 내에 있는 학생의 수를 하나하나 세더니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재 제 강의를 듣는 학생의 수는 정확히 46 명. 4 명당 1 조씩 나누고 나머지 2 명은 무작위로 넣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종이를 나눠드릴테니 그곳에다 본인의 이름을 적어주시고 상자에 넣으시면
됩니다."

비루스 교수는 그 말을 끝으로 맨 앞의 학생에게 작은 종이 뭉치를 나누어줬다. 나는 그 종이 뭉치에서 한


장을 분류하고 나머지는 뒤로 전달했다.

"되도록이면 너랑 같은 조가 됐으면 좋겠네. 네가 그나마 가장 편하니까."

이름을 적은 종이를 네모반듯하게 접고 있을 때 옆에 앉은 마리가 입을 열었다. 그 마음은 나도 전적으로


동의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면이 없는 것보다야 혼자 할지언정 마음편히 아는 사람과 같은 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도 아이작이랑 같은 조가 됐으면 좋겠어. 아이작이라면 제논 일대기의 전개를 다 예상하고 있을 것


같거든."

마리의 말을 들었는지 뒤에 앉아있던 세실리가 특유의 장난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세실리가


꺼낸 말을 듣자마자 살짝 흠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저런 말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나에게 좋은 현상은 아니다. 거기다 왠지 모르게 뼈가


실려있는 말이기도 하고.
"세실리. 그 말은 아이작에게 도움만 받고 너는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거야?"

세실리의 옆에 착석해있던 리나가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세실리는 태연자약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글쎄? 리나 너는? 리나는 이 나라의 황녀니까 다른 사람이 알아서 다 해줄 것 같은데?"


"그러면 고맙겠지만 나도 양심은 있어. 도와주기는 해야지."

리나가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마리의 안색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마리는 뒤를 돌아보며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짓씹듯이 중얼거리며 불편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양심은 무슨. 마음에도 없는 말 하네."


"... ..."

나는 일부러 못 들은 척 해줬다. 마리가 리나에게 불쾌함을 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이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을 수 있다.

잠시 후, 비루스 교수가 이름이 적힌 종이를 하나하나 회수하여 박스에 넣었다. 그리고 종이가 골고루
섞이도록 만들기 위해 상자를 요란하게 흔들거나 안에 손을 넣어 휘저었다. 무슨 비빔밥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골고루 섞으신다.

"자. 그럼 뽑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뽑힌 사람은..."

교수가 곱게 접힌 종이를 펴자마자 눈에 이채가 서리며 정확히 나를 쳐다봤다. 네모반듯하게 접힌 종이를


보자마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진짜인 모양이다.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비루스 교수는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콧수염을 살살 잡아당기더니 이름을


호명했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학생. 그리고 이 다음은..."

제발 아는 사람이 나와라. 아, 물론 잭슨은 빼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있을 때 교수가 상자 안에서 종이를 빼냈다. 그리고 아까 전처럼 힘 있는


목소리로 이름을 호명했다.

"아이라 벤 마티우스."
"네!"

이름을 호명하자마자 뒷쪽에서 힘찬 외침이 들렀다. 이름도 그렇게 귀에 들어온 목소리로 보아하건데
여자인 듯했다.

이에 내 조원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갈색 머리카락에 귀여운 외모를 가진


여학생이 손을 들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얼굴도 익히지 않은 사람이다. 미들네임이 있는 걸 보면 귀족가 영애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다음으로는 벤자민 블랭크."


"네, 네!"

그닥 멀지 않은 곳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고개를 쭈욱 내밀어 소리가 들린 옆쪽을 쳐다봤다.


탁한 금발에다가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왜인지 모르지만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와 아이라라는 여학생과 달리 미들네임이 없는걸 보아 평민인 것 같다. 평민이 헤일로 아카데미에,


그것도 무학이 아닌 문학에 입학하려면 매우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으로 안다.

전생과 비교하자면 중학교 과정만 걸어온 학생이 정시로 서울대학교에 합격해야하는 수준이다. 머리가
천재 수준으로 뛰어나지 않는 이상 입학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단 말은 적어도 무능하지는 않다는 소리. 나는 그나마 다행히라 여겼다.

"마지막으로... 레오나 라이언즈."

잠깐만. 뭐라고?

나는 교수가 호명한 이름을 듣자마자 눈을 깜빡거렸다. 성은 처음 듣지만 이름이 정말로 익숙하다.

뒤이어 내가 아는 얼굴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가 한 여자와 딱 마주치게 되었다. 평소 무표정에


가까웠던 표정에 당황이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자기가 수인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들킨 수인 여성, 레오나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모르겠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레오나와 얼굴을 마주치게 된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고민하다가


손을 살살 흔들어줬다.

그에 레오나도 당황한 표정을 다급히 지우고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인사를 씹힌 것 같아 마음이
상했지만 그녀의 입장이 입장이니 이해해줬다.

"이렇게 4 명이서 한 조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잭슨 미렐 케리손."

조원이 정해지자 바로 다음으로 내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인물, 잭슨이 호명되었다. 어차피 잭슨이랑 같은


조원이 아니라 신경끄려던 참이었다.

"마리 하우젠 레킬리스."

놀랍게도 잭슨과 마리가 한 조가 되었다. 이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인 걸까.

나는 교수가 마리의 풀네임을 부르자마자 그녀의 반응을 확인했다.

"하필이면 그 놈이랑..."

마리는 인상을 와락 구긴 채 똥씹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기야 잭슨이 리나와 세실리에게 추파를
던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이런 반응을 지을만도 하다.

참고로 설명하자면 잭슨은 마리에게 한 번 집적대고 그 다음부터는 하지 않았다. 마리가 대놓고 꺼지라고
욕부터 박았으니 그럴만도하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리나 우르미 크리스틴."


"흐음?"
마리가 그토록 싫어하던 리나까지 한 조가 되었다. 슬쩍 뒤를 바라보니 리나도 예상치 못 했는지 한쪽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문제가 많은데 화룡점정은 이 바로 다음에 나타났다.

"... ..."

리나를 뽑을 때까지만 해도 덤덤했던 비루스 교수는 다음 번에 고른 종이를 확인하자마자 멈칫거렸다.


뒤이어 얼떨떨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걸 보며 속으로 설마하면서도 그의 입이 열리기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

극의 극 확률을 뚫고 대환장 파티가 결성되었다.

< 38 화 >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확률일까. 나는 마지막으로 호명된 세실리의 이름을 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이지 엄청난 확률이 아닐 수가 없다.

어떻게 된 확률이면 저 3 명과 잭슨이 한 조가 되는걸까. 로또가 괜히 있는 게 아닌 이상 아주 불가능한


현상이 아니어도 믿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나는 비루수 교수가 세실리의 이름을 호명하고 나서 순간 멍해졌다가 뒤를 바라봤다. 세실리, 그리고


리나가 서로 비슷한 표정인 걸 보아 그녀들도 많이 놀란 게 분명하다.

'진짜 조작이라도 한 걸까?'

이렇다 보니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한 명만 걸리면 모를까, 세 명이 같은 조이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이어서 비루스 교수가 다음 호명을 시작하자 잭슨을 찾기 전, 마리의 반응부터 확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잭슨, 리나, 세실리 이 세 사람과 한 조가 됐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일 것이라.

그리고 내 예상대로 마리는 입을 살짝 벌리며 믿을 수 없다는 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중이었다. 당장


나조차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놀라워 하는 중인데 그녀는 오죽할까.

다른 점이라면 나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입장이고, 그녀는 불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걸까.

'위로는... 안 하는 게 낫겠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현명하다. 잭슨과 같은 조가 됐다는 것부터가


그녀에게는 불운이었는데 사이가 최악이라고 할만한 리나까지 있으니까.

더군다나 모임 이후로 세실리를 향한 시선도 좋지 않은 편이다. 리나처럼 대놓고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경계하고 있었다.

'힘들긴 하겠다.'

힘든 수준이 아니라 헬 파티 수준이다. 마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중인 레킬리스 가문


출신이니 스스로 행동하는 편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글쎄? 라는 의문이 저절로 나왔다.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 헬리움의 공주, 그리고 돈 많은 백작가 아들까지.

위의 세 사람은 본인이 스스로 뭘 하기보다는 누군가를 시키는 일이 더 많았을 것이다. 특히 이들 중


리나가 그런 경향이 가장 강할 텐데 그녀는 '리더'라기보다는 '지도자'에 걸맞은 위치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직접 나서서 행동하는 것보다는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을 시켜 효율적으로 일을 끝내는 스타일.


하지만 바꿔 말하자면 조별 과제에서는 무임승차가 될 공산이 크다.

"...진짜 안 바꿔주시려나?"

시간이 지나 믿지 못할 현실과 타협했는지 마리가 해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의 심정에 십 분


공감할 수 있었으나 위로는 해 주지 않았다. 그저 딱하다는 눈길을 보낼 뿐이지.

마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지난번에 교수가 딱 잘라 강조했었다. 조원을 바꾸는 일은 절대 없고, 만약


그런 행위가 적발된다면 가차없이 엄벌을 내릴 거라고.

안 걸리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교수가 호락호락한 인물도 아니고 걸리게 되면


어마어마한 리스크가 따르게 된다. 학급 내에 소문이 퍼지는 건 당연지사고 어쩌면 최하 점수를 받을 수도
있다.

"이상으로 모든 배정을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전에도 강조했지만 조원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며 만약


적발될시 엄벌에 처할 테니 주의해 주십시오."
"...흐흐."

때마침 교수가 친절하게 확인 사살을 시켜줬다. 그에 마리가 지레 포기했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보고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헛기침을 토하는 것으로 무마했다. 마리가 저런 표정을
짓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발표 기간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 주 후에 실시할 예정이며, 그 기간 동안 수업은 조별간의 토론으로


대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발표를 잘하시거나 예리한 질문을 한 학생에게는 그 조 전체에 가산점을
부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논 일대기를 주제로 선정한 것까지는 이해할만 한데, 지금 보면 은근히 날로 먹는 걸 좋아하셨다.


그래도 학생들의 수업 일정이 매우 빡빡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휴식 차원에서 조별 간의 토론으로
대체하는 것 같다.

뒤이어 나는 비루스의 교수의 설명을 듣다가 손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하고 싶은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루스 교수도 내가 손을 들자마 화색을 띠며 나에게 선뜻 손을 내밀었다.

"네. 아이작 학생. 무엇이 궁금하죠"


"발표할 때 시각적인 자료를 이용해도 돼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 세상은 컴퓨터는커녕 기계조차 발달 되지 않았다. 전생에서 요긴 하게 사용했던 ppt 는 고사하고 빔


프로젝터도 없어서 커다란 종이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비루스 교수는 내 질문을 듣고 콧수염을 살살 잡아 당기면서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관없습니다. 시각 자료를 사용한다는 건 그만큼 투철한 준비를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이번 주제가 주제인 만큼 시각적인 자료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왜죠?"
"이번 조별 과제의 주제는 전개를 예측하는 것이지, 평가를 내리는 게 아니니까요.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칠판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행히고. 괜히 귀찮게 커다란 종이에 그림을 그리거나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대신에 자료 정리와 프레젠테이션 연습은 조금 빡빡하게 해야 할 것 같다. 칠판을 쓰면서 발표하는 건
생소한 일이었으니까.

'...잠깐. 왜 내가 자연스레 발표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래서 트라우마가 무섭다. 조별 과제를 할 때마다 여러 번 치이다 보니 자연스레 그쪽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물론 내가 제논 일대기 작가인 부분도 있다. 어쩌면 나 보다 발표를 잘하는 조원도 있을 테니 지켜는


봐야겠지.

'지켜보는 것도 재밌겠네.'

운이 좋으면 내가 예상치 못 한 전개를 제시해 주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모임에서 잭슨을 보듯이
세세한 복선이나 떡밥을 잘 캐치한 학생도 있을 테니까.

비록 결과는 이상했지만, 그걸 고려 하더라도 잭슨의 관찰력은 뛰어난 수준이다.

'...근데 걔가 잘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나는 교수가 조별 과제를 하면서 주의해야 할 점들을 설명해 주는 동안 뒤를 힐긋 쳐다봤다. 생각을 모두


정리하기라도 했는지 리나와 세실리는 개의치 않다는 표정들이다.

'알아서 잘하겠지.'

과연 대환장 파티 중 가장 고통받을 사람이 누구일까. 나는 마리나 잭슨 둘 중 하나로 예측하고 있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각 조원마다 얼굴을 익히면서 계획을


설립하시면 되겠습니다."

아직 수업 시간이 1 시간 넘게 남았는데 비루스 교수가 빠르게 수업을 종료했다. 그의 말처럼 남는 시간


동안 조원끼리 얼굴을 익히라는 의미에서 일찍 끝낸 듯싶었다.

마지막으로 비루스 교수가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을 끝으로 수업이 종료되었다. 나는 자리에 일어나기 전,
옆의 마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얼굴을 책상에 박아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쳐져 있는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드문드문 들려오는


중얼거림에 귀에 들어 왔다.

"끝났어... 인문학은 포기해야지..."


"... ..."
"그놈이 아니라 아이작이면 할만 한데 왜 하필이면..."
"... ..."
"루미네스님.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저 매일마다 기도 하는데..."

진짜 위로라도 해줘야 하는 걸까. 나는 바닥을 뚫고 내려갈 듯한 마리의 우울함에 살살 눈치를 봤다.

하지만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기름을 들어붓는다고, 뒤에 앉아 있던 리나가 태평한 목소리로 마리를 격려


해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로 열심히 하는 게 어떠니? 교수님이 조원을 바꾸지 말라고 하셨으니 단념하는 게
좋지 않을까?"
"...개년."
마리가 욕을 하는 건 처음 듣는다. 그만큼 화가 많이 났다는 의미겠지. 그나마 작게 말한 탓에 리나는
듣지 못했을 거다.

"그나저나 우리 조에 아이작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리나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정확히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의 시선에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 대답했다.

"잭슨도 괜찮을 거예요. 모임에서 느꼈는데, 다른 건 몰라도 관찰력이랑 분석력은 꽤 좋은


녀석이더라고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이지 않아?"

이번에는 리나가 아니라 세실리가 나에게 한 질문이다. 목소리에 확신이 가득 찬 걸 보아 리나도 그렇고
세실리도 나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나는 천재가 아니라 전생 덕분에 잡다 한 지식이 많을뿐이다. 더불어 이


세상은 정보의 접근성도 전생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편이다.

나는 세실리의 질문에 쓴웃음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전생의 이야기는 꺼낼 수 없으니 그럴싸한 변명을
거냈다.

"너무 과대평가하시네요. 전 단지 책을 많이 읽었을뿐이에요."


"내가 보기에는 아이작이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것 같은 데? 가끔 나오는 배려도 생각이 깊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거잖아."

세실리가 언급한 '배려'는 습관에 가까웠다. 모두 알다시피 내가 허당 기질이 조금 강한 바람에 생겨난


버릇이다. 무엇을 말 하거나 행동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을 거치는 습관.

물론 그런 습관이 있어도 천성은 바뀌지 않더라. 가끔씩 칠칠맞게 행동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음... 그건 버릇이라고 보면 돼요. 제가 좀 칠칠맞은 구석이 있어서 뭘 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하는 편이라."
"좋은 습관이네. 그런 습관은 들이기 힘들 텐데."

세실리가 아닌 리나의 말이었다. 나는 그녀를 한 번 힐긋거리고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하지만 간혹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장점이 뛰어난 사람에게는 그 장점에 가려지는
단점이 반드시 있는 법이죠. 나중에 장점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단점만 노출될 겁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당장 나조차 한 번 생각을 거치지 않으면 다양한 실수를 범한다. 지난번에 실수로
강의용 노트가 아닌 소재 노트를 가지고 갔다가 마리에게 들킨 뻔한 적이 있다.

리나는 내 말을 듣고 나서 무언가 떠올랐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게다가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는데


아무래도 안 좋은 일이 생각난 모양이다.

나는 분위기가 잠깐 고요해진 동안 서둘러 빠져나가기 위해 노트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업도


끝났겠다 비루스 교수가 말한 대로 조원의 얼굴을 익히러 가기 위함이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래요."


"아이작도 힘내. 우리는... 열심히 해볼게."

세실리는 리나, 그리고 마리를 각각 한 번 씩 쳐다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녀도 현재 조원의 밸런스가
극악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말끝이 흐려지는 걸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세실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만일 저들 중 누군가


나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면 단호하게 거절할 생각이다.

야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녀들에게도 이런 경험은 필요하지 않겠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레오나
쪽으로 향했을 때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아름다운 레이디들. 이렇게 같은 팀이 되어서 영광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도 반가워요."

내가 떠나자마자 어느새인가 모습을 드러낸 잭슨이 능글맞게 끼어 들어 인사했다. 나를 대할 때와 달라도


너무 다른 느끼한 목소리하며, 신사적인 말투였다.

그리고 세실리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는 마리와 상념에 잠긴 리나를 대신해 인사를 받아줬다. 그녀
특유의 장난기어린 표정은 온 데간데없이 사라져 있고 딱딱함만이 존재했다.

아마 잭슨은 이걸 기회라고 삼지 않을까.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세실리와 대화를 이어나가는


잭슨을 바라보다가 바로 등을 돌렸다. 지금은 조원을 만나는 게 우선이다.

'레오나랑 잘 할 수 있겠지?'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레오나는 나 보다 훨씬 무뚝뚝하고 모범생 같은 이미지다. 단둘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적어도 시크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터.

무엇보다 대환장 파티에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나는 레오나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한


남학생과 마주치게 되었다.

"어."
"아! 안녕하세요! 벤자민 블랭크라고 합니다!"

탁한 금발에다가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시골 청년처럼 순박한 얼굴까지.

조원 중 한 명인 벤자민 블랭크다. 나는 그의 힘찬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며 무뚝뚝하게 받아줬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그냥 반말해도 돼요."


"아... 그, 그래... 요? 하지만 귀족... 이잖아요..."

벤자민은 내 말에 허둥지둥거렸다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걸 보면 평소


그가 귀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놈의 계급 사회란.'

안타깝지만 이 세상에서는 벤자민 같은 반응이 정상적이다. 같은 귀족가 자식이라면 모를까, 평민과


귀족은 명백한 간격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벤자민이 나를 어려워 하는 건 이상하지 않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가 그에게 말했다.

"난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반말해. 내가 불편하니까."


"아... 그래? 알았어. 편하게 할게."
"그렇다고 바로 반말해버리네?"
"미, 미안합니다!"
"장난이야."

웬지 모르게 전생의 군대가 떠오르는 상황이다. 벤자민은 내가 장난이라고 덧붙이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면서 낄낄 웃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걸음을 옮기자 벤자민도 서둘러 따라왔다.

"지, 진짜 반말해도 돼는 거 맞지?"


"맞다니까 그러네."
"알았어. 진짜 말 놓는다?"
"지금도 말 놓고 있구만 뭐."

벤자민과의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레오나가 앉아 있는 책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레오나는 공책에
뭔가를 기록 하고 있다가 우리가 다가오자 조용히 덮었다. 뒤이어 고개를 들어 올려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역시나 그때처럼 시니컬한 표정이 아니라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이 딱딱한 표정이었다.


컨셉 하나는 잘 잡은 것 같다.

"레오나 라이언즈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소개했다. 본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태도에 약간
괴리감이 느껴졌으나 꾹 억눌렀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벤자민 블랭크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이렇게 세 명이 서로 서로 인사를 나눴을 때였다.

"어머. 벌써 모이셨네요?"

상큼하기 짝이 없는 소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 왔다. 나는 물론이고 다른 두 명도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선을 옮긴 쪽에는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를 지닌, 인형처럼 귀여운 외모를 지닌 여학생이


다가오고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지만 가까이서보니 체구가 꽤 작은 편이었다.

이어서 그녀는 우리 셋을 번갈아 보더니 가슴 중앙에 손을 얹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전 마티우스 후작 가문의 아이라 벤 마티우스라고 해요. 그리고..."

아이라라고 소개한 그녀는 내가 아닌 벤자민과 레오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잠시 후 모든 파악이 끝났는지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리는 모습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나는 그걸 보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 대놓고 말 하진 않겠...

"아이작 씨를 제외하면 전부 평민이지? 편하게 말 놓을게."


"... ..."
"아 참. 그러고 보니 아이작 씨는 마이샬 남작가 출신이시죠?"

굳이 성 뒤에 '남작'을 붙은 걸 보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조별 과제에 치이고 치인 경험을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평소에 눈 여겨 보고 있었어요."

계급을 이용해 무임승차를 노리는 년이 한 명 있구나.

< 39 화 >

조별 과제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빌런이 존재한다.


그쪽 방면에 지식이 아예 전무하여 뭘 하지도 못 하는 무능한 조원. 맨날 시간 약속이 잡혀있어 빨리
끝내달라고 징징거리는 땡깡러. 쓸데없이 고집만 강해서 팀워크를 망칠 뿐더러 더 나아가 심각한 불화까지
일으키는 망나니.

위의 예시를 보듯이 조별 과제에서 여러가지 빌런이 있으나 그중 대표라고 할만 한 빌런은 바로 '


무임승차'다.

그렇다면 무임승차의 뜻은 뭘까. 단어상으로는 돈을 내지 않고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범죄 행위'다. 조별


과제에서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저 다른 사람이 다 해 주길 바라는, 소위 양심을 판 사람들이다.

단, 무임승차의 뜻을 보듯이 제대로 된 가격만 지불한다면 범죄행위가 아니다. 조별 과제에서도 정말


피치못할 사정이 있거나 그쪽 방면에 지식이 전무하다면 직접 '물주'가 되어 여러 편의를 봐주는 경우도
더러 있다.

가령 스터디룸을 전액 대여해준다던가 아니면 토론에 참석할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사준다던가 등등.
이같은 경우는 무임승차가 아니라 정식으로 교통비를 내고 편한하게 버스를 타게 되는 상황이다.

물론 이걸 역으로 이용해 돈으로만 해결하는 건 좋지 않다. 적어도 전후 사정을 모두 이야기하고 나서


조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법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랄게요. 평소에 눈 여겨 보고 있었어요."

아기자기하면서도 단아한 외모. 그리고 160cm 도 채 안 될 것 같은 가녀린 체구까지.

흡사 걸어다니는 인형처럼 귀여운 분위기를 톡톡 띄고 있는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 아이라가 빙긋 웃으며


나에게 인사했다. 겉으로만 본다면 예의 바른 귀족가 딸내미의 인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인사하기 전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벤자민과 레오나를 훑어보던 그 시선을. 적어도
동등한 입장이 되어 보내는 시선은 절대 아니었다.

잭슨처럼 대놓고 깔보진 않지만 마음속에 칼을 품고 있다고 해야 할까. 내가 과민반응한 것일 수도 있으나


조별 과제를 할 때마다 스스로 호구를 자처한 적이 많아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조별 과제에 참석할 의욕이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무임승차를 할 사람인지를.

일단 아이라의 첫 인상은 후자에 가까웠다.

'그런데 마티우스 후작이라...'

후작은 모두 알다시피 공작 바로 아랫 계급이며 미네르바 제국에는 총 3 개의 후작 가문이 있다. 그중


마티우스 가문은 미네르바 제국의 국경을 담당하는 변경백이다.

또한 마티우스 가문에는 한 때 우리 아버지가 몸을 담았으며, 데이브가 현재 견습 기사로 훈련 중인


네이비 기사단이 소속돼 있는 걸로 안다. 네이비 기사단은 정규전보다는 특수전을 행하는 특수부대에
가까워 군사 가문인 마티우스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마티우스 가문의 영애셨군요. 만나서 영광입니다."

나는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중인 아이라에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첫 인상은 그닥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차차 지켜보면 되겠지.

아이라는 내 인사를 입꼬리를 더욱더 말아올리더니 이번에는 벤자민을 쳐다봤다. 벤자민은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자 몸을 흠칫거렸다가 황급히 인사했다.
"베, 벤자민 블랭크라고 합니다! 자, 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도 잘 부탁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오나에게로 시선을 돌린 아이라. 레오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특유의 무기질적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레오나 라이언즈라고 합니다."

호들갑을 떨었던 벤자민과 달리 레오나는 목석마냥 딱딱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인사했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성격이 유별나구나라며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라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레오나가 무뚝뚝하게 인사하자 그녀의 올라갔던 입꼬리가 약간
내려갔다.

"...그게 끝이야?"

그리고 나서 되묻기까지. 목소리 톤도 낮아진 것이 누가 들어도 빈정상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허나 레오나는 그 의미를 눈치채지 못 했는지 끝까지 고저 없는 음색으로 대꾸했다. 진짜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이 포인트다.

"전 인사했습니다만?"
"...아냐. 성격이 좀 독특하구나 싶어서."

다행히 어찌어찌 넘어가는 듯했다. 아이라의 얼굴에 일말의 불쾌감이 깃든 것이 포착되었지만 모른 척했다.
나는 그걸 보며 속으로 탄식했다.

세상이 바뀌어도 내 조별 과제 운은 명불허전 수준으로 좋지 않은 모양이다. 거기다가 첫 인상부터 대차게


말아먹은 것 같았으니 앞일을 예상하기 어려웠다. 물론 이건 레오나의 잘못이 아니라 순전히 아이라,
그녀의 권위의식 때문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귀족과 귀족은 몰라도 귀족과 평민 사이의 격차는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평민은 상대방이 아무리 낮은 신분의 귀족이라도 무조건 까라면 까야 한다.

내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다 와서 그렇지, 안타깝게도 이 세계에서 이러한 제도가 정상적이다. 만약


전생의 기억을 갖지 않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잭슨이나 아이라처럼 권위의식을 가지고 생활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인사는 끝났고, 이제 뭐 하면 될까?"

기묘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을 때 아이라가 본론부터 꺼냈다. 그녀도 이 상황이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나는 그 질문에 조금 전 비루스 교수가 설명해줬던 조별 과제 방법에 대해 떠올렸다. 사실 전생의 조별


과제와 큰 차이점은 없고 오히려 완전히 빼다박은 수준이다.

그러니 지금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정해야 한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하기 싫고 다른 사람이 해줬으면 하는 것.

"...조장할 사람?"

조원을 이끌어나가야 할 '조장'을 결정해야 한다.


내가 말을 꺼내며 주변 눈치를 보자마자 다른 사람들도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기 시작했다. 이로서 사람
사는 곳은 어딜 가나 변하지 않는 게 확실해졌다.

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리 조가 독특하다고 봐야 옳다. 평민인 벤자민은 귀족인 나와 아이라가 있으니


선뜻 나서기 망설일 테고, 레오나는 컨셉을 유지하고 있는 이상 활동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조장이 될만한 사람은 나와 아이라밖에 없다는 의미다.

'차라리 내가 해야겠다.'

나에게는 그게 더 마음이 편하다. 전생에서도 불편하게 눈치를 볼 바에야 내가 한다는 마인드로 나섰다.

이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기 직전이었다.

"딱히 할 사람이 없으면 내가 할게. 그 점이 너희한테도 마음 편하겠지?"

전혀 예상치 못 한 상황이 펼쳐졌다.

아이라가 허리에 손을 척 얹더니 당당한 태도로 자신이 조장을 맡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녀를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몰라도 조별 과제에서 가장 리스크가 큰 사람이 조장이다. 조원이 잘하면 문제


없지만 단 한 명의 빌런이라도 등장하는 순간부터 온갖 스트레스란 스트레스를 받는 역할.

과연 아이라가 조장의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 나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워져 우려를 표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쉽지 않을 텐데."


"걱정하지 마. 다 나한테 맡겨. 너희들은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돼. 알겠지?"
"... ..."

이런 스타일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는 데. 예로부터 의욕은 넘치지만 무능한 사람이 제일 위험하다.


일의 능률은 고사하고 아군마저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 아까 말했던 '물주'가 되어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이라는 모르고 있겠지만 나에게 이 과제는
혼자 전부 도맡아 할 수 있을 만큼 쉽다. 내가 제논 일대기 작가인데 그것도 못 하면 펜을 내려놓아야지.

아무튼 간에 부디 아이라가 독불장군이 아니라 리더 이길 간절하게 빌 수밖에 없다. 정말로 독불장군 같은


스타일이라면 앞날이 고단해진다.

거기다 무임승차까지 합쳐지면 시키기만 하지 본인은 아무것도 안 할 공산이 크다. 아까 그 눈빛을 봤을


때 가능성이 조금 높았다.

"우선 여기서 제논 일대기를 8 권까지 못 읽은 사람 있니? 참고로 난 다 읽었어. 숙소에 책도 있으니


원한다면 빌려줄 수도 있고."

조장이 되면서 마음가짐이 바뀌기기라도 한 걸까. 의외로 아이라는 의욕적이었다.

오죽하면 정말로 그녀가 무임승차가 맞을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나는 다시 봤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다 읽었습니다."

내가 입을 엶과 동시에 레오나도 나와 똑같이 말했다. 그에 우리 둘은 응? 하다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나 레오나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눈 밑을 꿈틀거릴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나는 살짝 떨떠름해졌다.

나야, 작가이니 그렇다 쳐도 레오나는 어떻게 구매한 걸까. 무려 레킬리스 공작 가문의 딸인 마리조차
구하기 힘들었다는 제논 일대기다.

이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아이라를 쳐다봤다. 그녀는 한 쪽 눈을 치켜뜬 채 의외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겠어.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용케도 구했구나."

반응을 보아하니 그녀는 나와 레오나가 제논 일대기를 구하지 못 했다고 짐작한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볼 점은 그녀가 상당히 아쉬워했다는 것이다.

제논 일대기는 발매되었다하면 곧바로 매진될 만큼 인기가 무시무시한 도서인데 오히려 다행히라 여겨야
정상적이다. 과제를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한 권이라도 더 읽어야 과정이 편할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몰라도 불편해 했다. 무언가 상황이 자기 마음대로 흘러 가지
않기라도 한 걸까.

"저, 저는 다 못 읽었습니다. 사실 6 권도 못 읽었어요..."


"그래?"

그런 내 의문을 반증하는 것처럼 벤자민이 조심스레 입을 열자마자 아이라가 화색을 띄었다. 그걸 보며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건 결코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어서 아이라는 자기 입술을 툭- 툭- 건드리더니 이내선심 썼다는 뉘앙스로 벤자민에게 말했다.

"내가 빌려줄 수도 있는데 빌려줄까? 난 8 권까지 모두 샀거든."


"저, 정말이요? 그러면 저야 좋으..."
"그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네?"

벤자민은 아이라가 도중에 말을 자르며 조건이 있다고 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혹스러워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나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혹시 몰라 슬쩍 레오나를 쳐다보니 그녀는 아까처럼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심 나와 비슷한 심정이지 않을까 추측했다.

그 사이 아이라는 입꼬리를 쭈욱 말아올리더니 당황하고 있는 벤자민에게 조건의 정체를 입 밖으로 꺼냈다.

"네가 나 대신 해야 할..."
"책이라면 제가 빌려줄 수 있습니다."

아이라가 미처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레오나가 먼저 선수쳤다. 예의 딱딱한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약간의


불편함이 내포돼 있었다.

그에 아이라는 레오나가 말을 끊자 덜컥- 정지했다. 뒤이어 입을 꾹 다물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레오나를


쳐다봤다.

"...너는 사람이 말을 하는 데 도중에 끊어도 된다고 배웠어?"


아이라의 서늘한 압박이 이어졌다. 인형처럼 단아한 외모와 작달만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하지만 레오나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있던지라 아이라를 올려다 보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굳이 아이라 님께서 빌려 주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말을 꺼낸 겁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고작 사과로 되겠어? 지금 내 기분 나빠졌는데?"
"... ..."

아이라의 연이은 압박 질문에 레오나는 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얼굴에는 '굳이
해야겠냐?'라는 속마음이 담겨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런 반응에 아이라를 쯧, 혀를 차더니 짐짓 엄한 목소리로 레오나에게 경고했다. 천만다행히도


넘어가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이건 경고야. 만약 다음에도 그런 언행을 보인다면 조에서 빼버리겠어. 나는 조장이니까 그럴 권한이


있다고. 알겠어?"
"알겠습니다. 그래도 벤자민 씨한테 책은 빌려 주도록 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가, 감사합니다. 레오나 씨."

벤자민은 레오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면서도 아이라의 눈치를 봤다.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니 조금 불쌍해
보였다.

나는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굳이 분열을 일으킬 필요는 없는데...'

차라리 아이라가 벤자민에게 책을 빌려 주고 대가를 받는 편이 좋았을 수도 있다. 벤자민은 평민이고,


아이라는 귀족이었으니까.

방금 전 레오나가 한 행동은 엄연히 귀족의 권위를 해치는 행동이다. 나는 권위의식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니 문제가 없지만 다른 귀족에게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게 분명하다.

아까도 말했지만 평민은 상대방이 공식적으로 작위를 이어받지 않은 영식 또는 영애라 할지어도 허리를
굽혀야 한다. 이건 일종의 '상식'같은 개념이다.

"흥. 평민들이... 이런 걸로 화낼 수도 없고..."


"... ..."
"너는 왜 그렇게 쳐다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니?"
"아뇨."

아이라의 스타일이 어떤 부류인지 대충 알 것 같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그녀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는 순간 이 조는 공중분해될 것이라고.

방금 전 조장이니 그럴 권한이 있다고했을 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계속 지켜봐야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는걸 싫어하는 것 같다.

'이러면 조금 피곤해지는데...'

어쩌면 무임승차를 넘어선 그이상의 무언가가 탄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아이라는 새침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 보다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이작."
"네. 말씀 하세요."
"너는 잘할 수 있지?"

언듯 나를 신뢰하는 질문처럼 들리겠지만 벤자민과 레오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아무래도 그녀는 평민보다 같은 귀족, 그것도 학급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내가 믿음직스러웠던 모양이다.

거기다 그녀는 절대 모르겠지만 나는 조별 과제의 주제, 제논 일대기의 원작자다.

잘하는 걸 넘어서 잘근잘근 씹어 먹을 수 있을 거라 단언할 수 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흐음. 그래? 좋아. 한 번 믿어볼게."

벌써부터 귀족과 평민으로 판가르기라도 하는 걸까. 아이라는 내 어깨를 툭- 툭- 두드려 주며 격려 했다.


그리고 오연한 눈빛으로 벤자민과 레오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런 아이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겉으로는 무뚝뚝한 표정을, 속으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 괜찮으니 제발 똥고집만 부리지 말렴.'

내가 다 할 수 있으니까 제발 너는 트롤짓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록 그녀가 능력이 있는지없는지 잘 모르지만 방금 전 레오나와의 갈등을 보듯이 권위의식이 있는 건


확실하다. 괜한 똥고집 때문에 조가 공중분해되는 건 피하고 싶다.

'혹시 모르니 최악의 수는 염두해 둬야겠다.'

시작부터 삐걱거리긴 해도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무엇보다...

'다시 보니 선녀같네.'

내가 누굴 보고 위의 생각을 했는지 모두들 알 거라 믿는다.

< 40 화 >

비록 첫 시작이 삐끗거렸지만 진행 자체는 무난했다. 조별 과제의 주제가 나에게 안성맞춤인 부분도 있고,
아이라와 갈등을 벌였던 레오나도 이후로는 군말없이 따라줬다.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질 뻔했던 벤자민는 레오나에게서 책을 받음으로서 과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토론은 금요일의 모든 수업이 끝난 저녁부터 진행되었다.

"아, 아이라 씨는 언제 올까?"


"나도 몰라. 언젠가는 오겠지."

금요일 당일이 되어 약속 장소로 잡았던 식당 앞.

나와 벤자민은 도통 모습을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는 아이라의 행방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의 서 있는


레오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나 원래부터 딱딱했던 표정이 더욱더 굳어졌다.
여기는 스마트폰은커녕 전화기조차 없으니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답답할 따름이었다.

"분명 군사학 강의에서 본인이 모이라고 말했는데..."

벤자민의 의문처럼 우리 조원은 전부 다 군사학 강의를 듣는다. 그래서 강의가 모두 끝난 뒤에 아이라가


우리 모두를 불러놓고 약속 시간까지 반드시 모이라고 강조했다.

심지어 약속 시각에 늦으면 경고를 하겠다고 언질까지 했는데 정작 본인이 약속 시간을 어겨버렸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이대로 안 오시면 어쩌지? 그러면 안 되는데..."

벤자민이 초조한 기색으로 중얼거리자 그를 힐끔 쳐다봤다. 아이라가 오지 않는 게 불안했는지 버릇처럼


손톱을 잘근잘근 깨무는 중이다.

아무래도 안심시켜줘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별일 아니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겠지. 만약 10 분이 지나도 아이라가 오지 않으면


우리끼리라도 토론하자."
"그, 그래도 될까?"
"왜 안 돼? 아이라 씨가 없다고 이대로 해산하기에는 너무 아깝잖아."
"하지만 아이라 님은 조장인데... 나중에 우리끼리 했다고 혼날 수도 있잖아."

벤자민의 대답에 순간 이게 무슨 개소리지? 라며 어리둥절했다. 마치 아이라를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벤자민은 평민이고 아이라는 후작의 딸이다.

신분 차이가 어마어마하니 벤자민은 자연스레 아이라를 높으신 분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신분 제도의
병폐인지라 무어라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었다.

괜스레 속마음을 꺼냈다가 되려 이상한 눈초리를 받을 수도 있다.

'이건 내가 이상한 거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 중인 레킬리스 가문의 마리조차도 평민에게 존댓말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녀와 말을 놓을 수 있던 것도 내가 일단은 귀족이기 때문이다.

또한 평민이 귀족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고 반말을 한다는 건 엄연히 '권위'를 해치는 일이다. 레킬리스
가문도 권력을 이용해 행패를 부리지 않을지언정 권위에 접근하는 건 칼같이 막고 있다.

대신 권위와 권위주의는 명백하게 구분해놓아야 한다. 권위가 단지 정당성을 가진 거라면 권위주의는 그


정당성을 이용하여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물론 한 때 권위주의가 심해져서 전생의 프랑스 혁명과 유사한 사건, 제이로스 혁명이 발발했다. 그
영향으로 나라를 불문하고 권위주의가 옅어졌으나 권위만큼은 건재했다.

'그렇다고 다시 존댓말을 하라고 할 수는 없지.'

벤자민이라면 묵묵히 따르겠지만 기분은 더러울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기분 나쁜 것이 줬다 뺐는


행위니까.

'그나저나 우리 작고 아담한 조장님은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본인이 시간까지 정했으면서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으니 점점 화가 나려고 한다. 이럴 거면 왜 조장을
하기로 자처했는지 이해 가 가지 않았다.

"나,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한동안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 하던 벤자민이 그리 말하고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배를 붙잡고


뛰는 모양새를 보아 튀는 게 아니고 정말로 배가 아픈 모양이다.

아무튼 벤자민이 자리를 비움으로서 나와 레오나만 덩그러니 식당 입구 쪽에 남게 되었다. 금요일이라


복도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직 고요한 침묵만이 가라앉아 어색함을 꽃피웠을뿐.

나는 삽시간에 어색하진 상황 속에서 레오나를 힐끔 쳐다봤다. 우연인지 레오나도 나를 곁눈질로 쳐다


보고 있었다.

"... ..."

우리 둘은 곁눈질로 서로를 보다가 아예 고개까지 돌려버렸다. 고개를 돌리니 레오나의 무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예상외로 레오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야. 펭귄."

컨셉을 유지할 때와 달라도 너무 다른 말투. 나는 시크한 그녀의 부름에 흠칫한 것도 잠시, 레오나가 입
밖으로 꺼낸 펭귄이라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펭귄이라 부르다니,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참고로 이 세상에도 펭귄이라는 동물이 있다. 남극이나 북극처럼 빙하가 생성될 정도로 추운 지역에서
살고 있으며 외형도 도감에 실린 걸 보자면 똑같았다.

하지만 여기는 판타지 세상답게 빙하 지대가 아닌 용암지대에서 살아가는 종이 있다. 그것들은 동물이
아니라 사람을 해치는 몬스터다.

어쨌거나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레오나에게 대답하는 것부터가 우선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나를


펭귄이라 지칭한 이유를 모르겠다.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왜 펭귄이라 부르는 거야?"


"그냥 넌 펭귄 닮았어."

주변에 사람이 없자 컨셉을 풀었는지 낄낄 웃으며 놀리는 레오나. 나는 순간 황당해졌다가 곧바로 반격을
날려줬다.

"넌 개 같아."
"...죽을래? 개가 아니라 사자거든?"

레오나가 인상을 팍 찌루피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욕보다는 개로 취급했다는 부분에서 화가 난


모양이다.

이에 나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다른 질문을 꺼냈다. 수인은 개 아니면 고양이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럼 고양이?"
"겨우 묘족 따위랑 비교하지 말아줄래? 나 같이 위대한 사족(獅族)에게는 매우 실례되는 말이거든."
"너는 인간보고 펭귄이라 했으면서."
"... ..."

그 점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는지 머리를 긁적거리는 레오나다. 이내 머쓱해져서 고개를 돌리더니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불렀어? 할 말이라도 있어?"


"너는 그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나 싶어서."

그 여자라고하면 아이라를 말 하는 건가. 분명 그럴 것이다.

나는 레오나의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조별 과제를 할 때마다 하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살다


보니 아이라 정도면 감지덕지다.

하물며 구관이 명관이라고, 대환장 파티를 떠올릴 때마다 그나마 낫지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만약
아이라가 아니라 잭슨이었다면 조별 과제는 그대로 개박살 났을 것이다.

"글쎄? 적극적이니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냥 자기 할 일만 했으면 좋겠는 스타일? 딱 그 정도야. 너는?"


"난 마음에 안 들어. 남들은 다 고생하고 있는데 자기 혼자 놀고먹으려 하잖아. 꼴에 귀족이라고.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년이."

첫 인상부터 박살 나서 그런지 혹평이 이어졌다. 맞는 말이라 부정할 수도 없다.

나는 그녀가 툴툴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그녀에게 물었다.

"애니머즈에는 귀족이 없어?"

애니머즈는 300 년 전에 세워진 수인들의 나라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수인들을 한데 모아 규합한 뒤,


그들만의 문명을 건설했다.

레오나는 내 질문을 듣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걸 보고 애니머즈에는 귀족이 없구나, 라고 생각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인간 세상처럼 후작이나 뭐니 하는 건 없지만 개인의 무력에 따라 행할 수 있는 권한이 달라져.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수인은 무력을 숭상하는 풍토가 짙게 깔려 있거든."
"그럼 계급이 따로 있는 거야?"
"당연히 있지. 알려줘?"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평소 수인의 생태에 대해 알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운이 좋았다.

레오나는 내가 끄덕거리자 피식 웃더니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잠깐 설명을 정리하는 듯했다.

"어디 보자. 우선은..."


"얘들아~!"

레오나가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 왔다. 발랄하면서 변성기가 채 오지 않은


소녀의 목소리다.

그에 레오나가 열었던 입을 다물었고, 나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모두가 예상한 대로 약속 시간에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우리의 조장, 아이라가 세상 밝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늦었으면서 저리 웃는 꼴을 보니 뻔뻔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뒤이어 아이라는 우리 앞에 서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벤자민이 없고 우리
둘밖에 없어서 그런 듯했다.

"응? 왜 두 명밖에 없어? 곱슬머리는?"

통성명까지 했는데 벤자민을 곱슬머리라고 칭한 아이라. 평민인 벤자민을 자기 아래로 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나는 그녀가 정확히 나를 직시하며 묻자 입을 열어 대답을 꺼냈다. 설마 화장실 간 것 가지고 뭐라


그러겠어. 본인이 늦었는데.

"벤자민은 잠깐 화장실에 갔어요. 곧 돌아올 겁니다."


"뭐? 화장실?"

화장실에 갔다는 내 대답에 아이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금 장난하냐는 심정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중이다.

뒤이어 그녀는 팔짱을 끼더니 혹시나하는 목소리로 나에게 확인을 구했다.

"도망친 건 아니지?"
"아니에요."
"화장실은 언제 갔어?"
"약 5 분 전쯤에 갔습니다."
"그런데 아직 안 온 걸 보면..."
"큰 걸 보러 간 거니까 의심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이라가 쓸데없는 의심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쳤다. 그녀가 조장이 되면서 권위주의적인 면모를


보인 적이 많았는데 지금도 그럴까 봐 염려 가 되었다.

본래 조장은 '책임자'에 가깝지만 이 세상은 신분 제도가 합쳐지니 권위로 변질되었다. 지난번에


아이라가 레오나에게 경고를 줬던 걸 보면 얼추 알 수 있다.

아이라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 보다가 이윽고 피식 웃었다. 같잖다는 표정이다.

뒤이어 그녀는 두 손을 허리에 척 얹더니 상쾌하기 그지없는 음색으로 말했다.

"우리가 굳이 그 애를 기다려줄 필요가 있어?"


"...네?"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일까. 내로남불을 넘어 양심이 터진 듯한 발언이다.

그 사이 아이라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척 얹으며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꺼냈다. 뭘 믿고 있는지 몰라도


얼굴에 철판을 깔아놓은 것 같다.

"나는 조장이라서 무조건 기다려야하지만 걔는 아니잖아? 거기다 내가 많이 늦은 것도 아니고 그 시간을


못 참은 그녀석이 잘못 한거지."
"... ..."
"그러니까 그 곱슬머리는 놔두고 우리끼리 가자. 나중에 어디 갔냐고 물어도 적당히 변명하면 될 거야."

진짜 양심을 어디에 두고 왔길래 저딴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충격을 받아 어안이 벙벙해져 있을 때


아이라가 은근슬쩍 내 팔을 붙잡고 살살 잡아 당겼다.

누가 봐도 나를 데려가려는 듯한 행동이다. 나는 그 느낌에 화들짝 놀라 잽싸게 팔을 빼내었다.


"...뭐 하는 거야?"

내가 팔을 빼내자 아이라의 목소리가 급속도로 낮아졌다. 얼굴 또한 구겨진 것이 내가 팔을 내빼자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의 기분이 나빠지던 말던 할 말은 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역정을 내고 싶었지만 후작가


영애니 한 번은 참아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아이라 씨. 대체 뭐 하는 거예요?"


"나는 그저 빨리 가고 싶었을뿐인데? 뭐가 문제야? 아! 설마 평민이 한 명 없다고 토론이 안 될까 봐
걱정하는 거야? 그건 걱정 마. 고작 평민 한 명이 빠졌다고 문제가 될 건 하나도 없으니까. 우리만
있어도 충분해."

우리에서 레오나는 포함되지 않는걸까. 아이라는 싱글싱글 웃으면서도 레오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아이라의 정신세계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귀족들의 마인드가 이런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각하다.

"아이라 님.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조원은 끝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 이로울 거라고요. 벤자민


씨를 두고 가신다면 조장이신 아이라 님에게 불이익이 갈 겁니다."

결국 듣다못 한 레오나가 아이라에게 충고했다. 컨셉대로 특유의 딱딱하디 딱딱한 말투였으나 그 속에는
미약한 분노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아이라는 귀족도 아닌 '평민'인 레오나가 충고를 해서일까. 아까 전보다 표정이 더욱더
험악해졌다.

인형처럼 단아한 외모임에도 살벌한 기운이 풀풀 풍겼다.

"지금 우리 둘이 얘기하고 있잖아. 왜 끼어드니?"


"전 단지 아이라 님에게 위해가 갈까 봐 걱정한 겁니다."
"고작 이런 걸로 위해가 간다고? 너무 순진한 거 아니니? 오라버니한테 들었는데 한 명 정도 빠졌다고
점수가 깎인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어. 오히려 비루스 교수님은 그 한 명에게 0 점을 줬지."

마음 같아서는 머리 뚜껑을 열어 뇌 속을 들여다 보고 싶다.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이런 마인드가


탑재돼 있는 건지 궁금하다.

아니면...

'...레오나를 쫓아보내기 위해서인가?'

아이라는 벤자민이 아니라 레오나를 쫓아내려 일부로 저런 말을 꺼낸 것일 수도 있다. 첫 대면에서


아이라는 레오나가 할 말은 하는 성격이라는 걸 어느 정도 알아챘으니까.

그러니 벤자민은 핑계고 단순히 트집을 잡으려고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내놓았겠지.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저희도 아이라 님을 기다려줬으니 벤자민도 기다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너는 실컷 기다려서 둘이서 오붓하게 토론이나 해. 나는 얘랑 둘이서 할 테니까."

레오나의 첨언에 아이라는 이때다 싶어서 내 팔을 붙잡아 자기 가슴 쪽으로 잡아당겼다. 푹신했던


세실리와 달리 평평한 느낌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아무튼 당황스럽다는 건 둘 다 똑같다. 난데없는 스킨십에 크게 놀라며 어떻게든 빼내려 시도했지만


그녀가 힘을 강하게 주고 있어서 무산되었다.

결국 아이라에게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거 빨리 놓으세요."


"싫은데? 너는 나랑 같이 갈 거지?"

미쳤다고 너랑 단 둘이 있겠냐. 하지만 내 속내와 달리 아이라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윽하면서도 탐욕에 젖어있는 눈빛하며 미묘하게 올라간 입꼬리. 결코 먹잇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끈적한
집착이 묻어나오는 표정이다.

'내가 뭘 했다고?'

평소 연고도 없던 그녀가 어째서 이런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나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라 씨."
"응."
"지금은 레오나 씨가 하는 말이 옳아요. 그러니 이거 놓아주세요."
"... ..."

내가 레오나 편을 들어주자 올라갔던 아이라의 입꼬리가 수직낙하했다. 질척거렸던 눈빛도 순식간에


싸늘해졌으며 내 팔에 주었던 힘도 슬며시 풀렸다.

이에 내가 천천히 팔을 빼내었을 쯤, 아이라의 내려갔던 입꼬리가 도로 올라갔다. 눈빛 또한 어딘가


위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네 성이 듀커르 마이샬이랬지?"


"...네. 그렇죠."

갑자기 가문의 이름은 왜 꺼내는 것일까. 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불길함에 바싹 긴장했다.

그동안 아이라는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베베 꼬더니 능청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마티우스 후작 가문에는 아주 유명한 기사단이 소속돼 있지. 바로 네이비


기사단이야."
"... ..."
"그리고 며칠 전 오라버니에게 들었어. 최근 전대 기사단장의 아들이 입단했다고. 이름이 아마...
데이브였던가?"

꿈틀-

나는 데이브의 이름이 아이라의 입에서 거론되자 눈 밑을 꿈틀거렸다. 가족의 이야기가 남의 입에서


나오자 저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런 내 반응을 눈치채지 못 했는지 아이라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만만함을 넘어


오만했다.

"네이비 기사단은 주로 국경을 수호하면서 제국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
겉보기에는 명예로워 보이지만 내 눈에는 위험한 일에 스스로 나서는 미련한 사람들로밖에 안 보여."

저게 귀족이, 그것도 군사 가문의 딸이 할 소리인가. 하물며 네이비 기사단은 부족 생활을 하는 수인, 더


나아가 종종 엘프 정찰대와 맞닥뜨려 전투를 벌인다.

말로만 국경인 곳이지, 사실상 전선이나 다름없다. 네이비 기사단의 순직률이 다른 기사단에 비해 3 배를
훌쩍 넘기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어림잡아 알 수 있다.

허나 아이라는 그런 기사들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있다. 자유를 포기하면서까지 나라를 수호하는


군인들에게 미련한 사람들이라니, 그녀는 적어도 군사 가문의 딸이 될 자격이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

아이라가 팔짱을 낀 채 턱을 살짝 젖혀들며 오연하게 말한다. 너는 절대 자신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다는,


일종의 협박에 가까운 메시지다.

그녀는 아마 내가 거절하는 순간 데이브를 어떻게 할 요령인 듯싶었다. 어쩌면 국경보다 더 심한 곳으로


보내버릴 수도 있겠지. 명망높은 군사 가문의 딸이니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러한 생각들에 나는 그녀의 협박성 질문을 듣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네. 잘 알겠네요."

이렇게 된 이상 하는 수 없다.

"쌍년아."

다 같이 뒤져보자.

< 41 화 >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 건드려서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가족이다.

어지간한 대인배도 가족을 건드리게 되면 화를 내는데 그럼에도 참는다? 그 사람은 대인배가 아니라 그냥
호구다.

거기다 나는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가 좀 강한 사람이다. 전생에서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셔서 순식간에


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도 없어서 가족 간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단절되었다.

물론 아이라가 내가 환생자라는 걸 알리는 없겠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최소한의 개념이 있다면 저딴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도 군사 가문의 딸이라는 사람이.

"...뭐, 뭐? 너 지금 뭐라고..."

내 입에서 터져나온 시원한 욕설 한 방에 아이라가 말을 더듬거렸다. 눈을 화등잔만하게 떠지고 입 또한


벌어진 것이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나는 아이라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가는 모습을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모두 알다시피 나는 웬만해서 욕을 잘 안 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이라는 내 입에서 걸쭉한 욕설일 나오게 만들었다. 모임 당시 잭슨은 어이가 없어서 황당한
마음에 나온 거라면 지금은 화가 나서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는 차이가 있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하는 아이라를 정확히 직시하며 하고픈 말을 꺼냈다.

"왜? 못 들었어? 쌍년이라고 다시 해줄까?"


"너, 너...! 감히 네 까짓 게...! 내가 좋게 봐주니까 만만해보여?!"
아이라는 나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격노했다. 얼굴이 실시간으로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걸 보아 그녀도 정말
화가 난 모양이다.

허나 그녀보다 더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다. 아이라는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을 건드렸다.

나는 활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삭히면서 입을 열었다.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려
했으나 목소리만큼은 낮게 깔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좋게 봐줬다고? 개소리도 작작해야 개소리지. 네가 하는 말은 그냥 지랄하는 것밖에 안 돼.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고, 그것도 안 되니까 가족을 들먹여? 그것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국경에서
일하는 군인을?"
"겨, 겨우 그런 걸로 심한 욕을 한 게 더 큰 잘못이지! 그리고 지휘관이 아닌 기사나 병사들은 단지 집
지키는 개에 불과하다고! 어째서 편한 일을 놔두고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군인이 되려는 건데?
오히려 그 부분이 더 이해가 안 되잖아?"
"와... 진짜..."

씨발. 감탄만 나오네. 대한민국에서 듣던 걸 환생한 이후에도 듣게 된다니.

도대체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군사 가문의 딸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정도면 분명히


심각한 수준일 게 뻔하다. 아니면 집은 멀쩡한데 본인 성격이 글러먹어서 이상하게 받아 들였다던가.

나는 씩씩거리는 아이라를 보면서 숨을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쉬었다.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너 진짜 마티우스 후작가 영애가 맞아? 국경을 담당하는 변경백의 딸?"


"내가 거짓말을 왜 하겠어? 귀족 사칭은 범죄인 거 몰라? 멍청하기는..."
"멍청한 건 군인을 모욕한 너를 말하는 거고, 군사 가문의 딸이 군인을 모욕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참
재미있겠다. 그치?"

전생으로 치자면 4 성 장군의 딸이 휘화 군인을 싸잡아 모욕한 격이다. 당연히 그 얘기가 군인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신뢰가 흔들리다 못해 박살 날 공산이 크다.

"그게 뭐 어때서? 어차피 다 내 밑에 있는 사람인데?"


"부모님이나 형제자매가 부하들을 아끼라고 알려주지 않던?"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밑의 사람들을 잘 통솔해야 한다고만 배웠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하..."

저러니까 인식이 씹창나지. 나는 그녀가 꺼낸 말을 듣고 답이 없음을 깨달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현재 아이라의 사고방식은 매우 심각했다.

후작 가문으로 태어나 자연스레 깔려 있는 선민사상과 그녀가 말했듯이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방법. 이 두


가지가 정말 아름다운 시너지를 이루었다.

여기에 더해서 17 살이라는 나이까지. 스스로 조장을 역할을 맡은 이유도 본인이 잘 컨트롤할 거라고 굳게
믿은 것으로 보였다.

"...내가 충고 하나 해줄게. 너 계속 그러다가 언젠가 더 심할 일을 당할거야."


"그딴 말을 믿으라고? 네가 뭐라고?"

내가 진심어린 충고를 해줘도 아이라는 불신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상관 살해'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다.

더군다나 전선이나 국경 같이 위험한 장소는 상관 살해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대부분 지휘관이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았다가 역으로 부하들에게 목이 따이는 경우다.

과연 아이라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목숨이 왔다 갔다하는 사지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저런


막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어떻게 하면 저 철없는 꼬맹이를 참교육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말로 하는 건 포기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 간에 아이라는 절대 듣지 않을 것이다.

"믿기 싫으면 안 믿어도 돼. 노파심에 묻는데 설마 나중에 군 지휘관이 될 생각은 아니지?"


"당연한 거 아니야? 나는 마티우스 후작의 딸이라고. 아카데미의 군사학을 모두 이수하고나면 지휘관으로
임관하게 될 거야."
"그래? 축하해. 그 때는 지금 내가 너한테 욕을 박는 것보다 몇 배는 심할 거야."

마음 같아서는 그보다 더 심한 일을 당할 거라고 빈정거리고 싶다. 하지만 그건 선을 넘는 행위였기에 꾹


인내했다.

비록 그녀가 가족을 건드렸다지만 괜스레 건덕지를 줬다가 또 어떤 지랄을 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너 진짜...! 뭘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넌 이제 끝났어. 지금 당장 우리 아빠한테 이를 거야!


알겠어?!"

아이라는 내 직설적인 말에 발끈했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그에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말하던가 말던가. 아무튼 과제에 참여할 생각은 없지?"


"누가 너 따위랑 같이 한데?! 교수들한테 관심 받는다고 스스로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건 널 말하는 게 아닐까? 네가 뭐라고 우리보고 이래라 저래라야? 그리고 후작의 딸? 내 주위에는
너보다 훨씬 높은 사람도 있어."

누구인지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랑 친하다고한들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익...!"

아이라는 내가 팩트로 후둘겨패주자 이를 악 깨물며 부들부들 거렸다. 열불이 나는지 얼굴도 눈에 띌


정도로 붉어졌다.

뒤이어 그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는지 버럭 소리쳤다. 그래봤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됐어!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으니까 다 필요 없어! 제논 일대기의 전개를 예상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조장은? 설마 혼자서 조장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네가 하던 평민 두 명이 하던 알아서 해! 짜증나 죽겠어 정말!"

아이라는 자기 혼자 역정을 내다가 등을 홱- 돌려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작디작은 주먹을 꽉 쥔 걸


보아 화가 단단히 난 것 같다.

이대로 상황이 끝난 건가 싶어 착잡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아이라가 제자리에 서서 나를 홱 돌아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악에 받친 소리로 외쳤다.

"너 진짜 큰일난 거 알지?! 우리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 '철혈'이라고 철혈!"


"모르니까 어서 가기나 해. 시끄러워 죽겠네."
"씨이...! 나쁜 놈...!"

내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적거리자 아이라가 도망치듯이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한바탕 폭풍이


스쳐지나간 듯한 기분에 뒷목을 매만졌다.

솔직히 가족을 건드린 건 예상치 못 했으나 어느 정도 예견된 상황이긴했다. 급발진을 했을뿐이지.

'교수님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부디 비루스 교수에게 융퉁성이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단순한 불화 정도면 모를까 이건 아이라가 선을
넘었기에 발발한 사태다.

'정말 다른 귀족들도 아이라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군인은 결코 천대받아서 안 되는 직업이다. 나라의 자유를 위해 본인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는


영웅들이다.

전생의 대한민국조차 군인에 대한 위상은 낮을지언정 아이라처럼 대놓고 모욕한다면 사회적으로 뭇매를
맞는다. 군인을 영웅 수준으로 대우받는 미국에서는 아예 매장당하는 수준이고.

게다가 미네르바 제국은 영토가 워낙 넓어서 타국보다 군인의 전사 비율이 높은 편이다. 그래서 군인에
대한 위상도 따라 높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저딴 말을 지껄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전쟁을 쉽게 보는 건가?'

전선에 나서는 군인들이 어떤 상황에 직면하는지 몰라서 저러는 것일 수도 있다. 본인은 직접 겪어본 적이
없으니 저리 말하는 거겠지.

실제로 종종 발생하는 현상이다. 1 차 세계대전 당시 '낭만'을 꿈꾸며 입대한 청년들이 참호전이라는


생지옥을 경험했다. 1900 년대가 그랬는데 중세는 어땠을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멀리 가지 않아도 '붉은 사자'라며 명성이 높았던 우리 아버지조차 한때 술을 마시지 못하면


잠을 못 이루셨다. 이건 지난번에 니콜이 알려줬던 이야기다.

'전쟁이라...'

제논 일대기에도 전쟁 파트가 있다. 본래는 제논의 영웅적인 활약을 보여주는 장면이 될 예정이었나
아이라를 보고 나서 약간 고민되었다.

내가 쓴 묘사 때문에 사람들이 전쟁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을까? 이런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제논 일대기는 사람이 아니라 악마가 주적이다. 악마와의 전쟁은 몰라도 같은 사람끼리의 전쟁은
없을 예정이다.

'...이건 차기작에 반드시 묘사해야겠다.'

제논 일대기가 의도치 않은 히트를 치면서 계획이 틀어졌긴 했지만, 본래 차기작은 따로 구상해놓았다.

판타지 세상에서 판타지물을 쓰면 평범한 소설이지만 현대물을 쓰면 판타지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나온


작품이다.

제논 일대기가 완결되기 직전부터 슬금슬금 집필할 예정이다. 대략 1 년 뒤부터 쓰지 않을까.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우리끼리라도 해?"

내가 잠깐 상념에 잠겨있는 동안 레오나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에 정신을 차리고 레오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팔짱을 끼며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나는 머쓱함에 뒷목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 솔직히 너도 좋지 않아?"


"좋긴 한데 좋은 점수를 받긴 힘들잖아. 그걸 덮기 위해서 어떻게든 발표를 잘해야 하는 데 자신 있어?"

레오나의 우려 섞인 질문에 나는 피식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물론이지."

내가 작가인데 그것도 못할까 봐.

레오나는 내 시원시원한 대답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길게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는 것 같다.

"자신만만하네? 어디 한 번 지켜보겠어."
"설마 너도 업히려고?"
"난 저 새끼처럼 양심을 팔아먹진 않아. 아, 그나저나..."

그녀는 능청스레 말하다 말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마치 관찰하는 듯한 시선에 고개를 갸우뚱거렸을


때 쯤, 레오나의 무겁게 닫혀있던 입이 열렸다.

"...너 성이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했었지?"


"응."
"혹시 아버지의 별칭이 '붉은 사자'야?"

우리 아버지가 꽤 유명하시긴 유명한 모양이다. 수인인 레오나가 알 정도면.

나는 그녀의 질문에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오나의 표정이 약간 묘해더니 들릴 듯 말


듯한 크기로 중얼거렸다.

"사자 밑에서 나온 펭귄이라... 호부견자라더니 세상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뭐라고?"
"아무 것도 아냐. 그런데 벤자민 이 녀석은 언제 오는 거야?"
"저 왔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레오나가 언급하자마자 벤자민이 돌아왔다. 팔을 붕붕 흔들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흡사 강아지 같았다.

이어서 벤자민은 화장실을 갔다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밖에 없는 걸 확인하고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이라 님은 아직 안 오셨어?"


"왔긴 왔는데, 다시 갔어. 앞으로 우리랑 같이 안 할 거야."
"뭐?!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일 있었어?"
"있었으니까 그렇지. 그래도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해줄게."

그 후로 조별과제는 무난하게 진행되었고.

"...해서 우리 3 명만 토론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군인을, 그것도 국경에서 근무하는
형제를 건드리니 저도 참을 수 없어서요."
"음... 알겠습니다. 원래라면 전원 다 감점을 시켜야 평등하겠지만 이번 일은 특수한 경우이니 아이라
학생만 감점을 매기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다음 주 월요일에 비루스 교수를 따로 찾아가 아이라에게 아주 큰 엿을 먹여줬다.

< 42 화 >

아이라가 조에서 탈주한 이후로 조별 과제는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만큼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원래 미꾸라지가 물을 흐리는 법이라고, 그 미꾸라지가 사라지니 흐려졌던 물 또한 자연스레 깨끗해졌다.

늘 말했지만 과제 자체는 나 혼자 해도 충분했으나 이건 엄연히 조별 과제였기에 열심히 임해줬다.


벤자민과 레오나가 그럴듯한 가설을 내놓는다면 내가 반박하거나 살을 붙여줬다.

덕분에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 물론 나는 그들이 정리한 가설에 살만 붙여줬기에 스스로


발표를 담당했다.

"근데 넌 제논 일대기 재미없다고 하지 않았어? 보니까 심도있게 읽은 것 같던데?"


"다, 닥쳐! 단지 다음 내용이 궁금했을 뿐이야!"

벤자민이 자리를 비웠을 때는 레오나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가 말만 저렇게 하지 제논


일대기를 즐겁게 읽는 독자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흥분할 때마다 머리 위에서 움찔거리는 귀가 약간 거슬리긴 했지만 레오나는 나랑 있을 때만 본모습을


보이니 큰 문제는 없었다.

"정말로 발표 잘할 수 있겠냐? 힘들다면 내가 해줄 수도 있는데."

잠깐 흥분을 가라앉힌 레오나가 특유의 시니컬한 음색으로 나에게 물었다. 팔짱을 끼며 새침하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 속에는 걱정과 우려가 섞여있었다.

나를 믿지 못 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발표까지 담당하게 되어서 미안한 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레오나 성격상 후자로 추정된다.

"잘할 수 있어. 한 번 믿어봐. 아니면 네가 해볼래?"


"됐어. 내일이 발표날인데 지금 뭘 하겠다고. 아무튼 난 간다. 내일 보자."
"그래. 내일 봐."

레오나가 손을 흔들며 떠나가자 나 또한 손을 흔들며 배웅해줬다. 방금 전까지 나와 레오나가 있던 곳은


인적이 드문 장소라서 원없이 대화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나는 레오나의 모습이 사라진 걸 보고 걸음을 옮겼다. 최종점검도 했겠다, 남는 시간에는 편히


쉬면서 글이나 쓸 예정이다.

'빨리 3 학년이 됐으면 좋겠네. 그때라면 시간도 널널할테니까."

숙소로 돌아오고 침대로 몸을 던지면서 미래를 생각한다. 첫 수업당시 비루스 교수가 설명했던 것처럼 2
학년까지는 특정 점수 이상을 받아야 다음 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다.

하지만 3 학년이 되어서는 자기가 집중하고 싶은 전공을 선택하고 그 전공만 집중적으로 파고들면 끝이다.
지난 주 월요일에 비루스 교수를 따로 찾아가 아이라의 실태를 고발했을 때 겸사겸사 알게 된 정보다.

2 학년까지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합쳤다면, 3 학년부터는 한 과목만 파는 대학생이다. 학점 그딴 거 다


필요없고 오로지 그 전공만 집중적으로 파서 좋은 점수를 얻는 방식.

'나는 뭐...'
당연히 역사학이 목표다. 이 세상에서 역사만큼 흥미가 가는 전공도 없다.

어서 빨리 3 학년이 되어 제논 일대기를 빠르게 집필하고 차기작도 쓰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는 판타지로


취급받을 현대물을.

그대신 비극적인 전쟁사를 다루는거라 제논 일대기처럼 영웅적인 행적은 없을 예정이다.

'아냐. 아냐. 차기작을 생각하기보다는 지금은 제논 일대기에 집중하자.'

괜히 한 번 손 대었다간은 자칫하다가 문어발이 될 수도 있다. 그랬다간 작품의 질도 떨어질 우려가


있으니 당장은 제논 일대기에 몰두하는 편이 이롭다.

물론 완결까지 2 권까지 남으면 천천히 설정을 정립할 계획이다. 그때라면 괜찮겠지.

'...이런 생각을 할 때 써야지.'

이렇게 빈둥빈둥거리는 시간조차 아깝다. 최근에는 아이라의 문제도 그렇고 신경써야할 부분들이 한 두
곳이 아니어서 조금 피곤했으나 참을만하다.

무엇보다 지금 눈을 붙였다간 내일 아침에 일어날 것 같다. 최소한 한 파트는 마무리하고 자는 게 좋지


않을까.

그에 노곤한 몸을 이끌며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숙소 밖으로 나가기 직전까지 집필하다 말았던
원고지가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그 사람들은 괜찮게 하고 있을까?'

마법필에 마나를 주입시키다가 문득 대환장 파티가 떠올랐다. 첫 날은 나름 좋아 보였으나 시간이 가면 갈


수록 균열이 일어나는 게 똑똑히 보였다.

언제나 여유만만한 표정을 짓던 리나는 무표정으로 변했고 나를 볼 때마다 밝았던 세실리의 표정 또한


급격히 어두워졌다. 마리야 뭐, 반쯤 포기했는지 가끔 가다 실소를 흘렸고.

무엇보다 그 중 가장 압권이었던 사람은 단연코 잭슨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든 연을 맺기 위해


질척거리던 잭슨이 점점 그들을 껄그러워하는 중이다.

더 나아가 간혹 나를 향해 부럽다는(!) 눈길을 보내더라. 대충 얼마나 심각한지 예측할 수 있다.

아무래도 조별 과제를 하면서 크게 데인 것이 아닐까. 애초에 물과 기름처럼 섞일래야 섞일 수 없는


조합이다.

'조금 불쌍하긴 하네. 우리는 한 명만...'

주륵-

생각을 하다 말고 코에서 액체가 흘렀다.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인중에 손을 갖자 대었다. 살짝 끈적한


느낌이 들었다.

이에 설마하는 심정으로 손을 떼니 새빨간 피가 손에 묻어나왔다. 코피였다.

오늘따라 노곤하다했더니 기어코 몸에서 경고를 보낸 듯했다.

뚝- 뚝-
손에 묻은 코피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때 원고지에 피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다급히
원고지를 치워버렸다.

다행히 중앙 부분이 아닌 가장자리에 묻어있어 원고를 다시 쓰는 대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그래도 어서


빨리 코를 막을 필요가 있다.

"휴, 휴지..."

아무래도 오늘 하루 집필은 쉬어야 할 듯했다.

*****

시간이 흘러 발표 당일날이 되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조별 과제의 끝이 다가왔다는 의미다.

"야. 너희 설마 다 준비했어?"
"다 했는데."
"흥. 그래? 알았어. 난 조장이니까 네가 사과한다면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
"좆까."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 아이라가 불쑥 찾아와 뻔뻔하게 굴었지만 다시 한 번 욕을 강하게 박아줬다.

내가 욕을 하자 옆에 앉은 마리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자기 혼자 밥상을 뒤엎은 주제에 어디서 남의 밥상에 숟가락을 올리려고. 아이라의 상상을 초월한
뻔뻔함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욕을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너...! 너 진짜 두고봐! 진짜 아빠한테 편지 보낼거니까!"


"마음대로 해."

아무튼 그 후로 아이라는 후회할 거라는 말만 남겨둔 채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짧은 두 다리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글러먹어야 저런 식으로 나올 수 있는 걸까. 다른 의미로 잭슨보다 더 대단한 여자다.

"너 쟤랑 싸웠어?"

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옆자리의 마리가 질문을 꺼냈다. 그 질문 속에 의문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이에 나는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뻔뻔함에 화가


치솟았다.

"싸웠지. 쟤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거든."


"뭘 어떻게 말했길래?"
"몇 주 전에 우리 형이 네이비 기사단에 입단했어. 그리고 쟤는 마티우스 후작가의 딸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대충 알 것 같네."

내가 거기까지 말해도 마리는 이해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기야 워낙 유명한 가문이니 마리가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다.

나는 그녀가 끄덕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혹시나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도 아이라처럼 군인을 천대하는
건지 걱정이 되었다.
"마리. 넌 군인을 어떻게 생각해?"
"응? 그건 왜?"
"내가 아이라랑 싸운 이유가 내 형제 문제도 있지만 군인을 집 지키는 개 정도로 취급했거든. 설마 모든
귀족이 그런 건가 싶어서."

물론 마리가 그런 마인드를 가졌을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리 개인이 아닌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렇게 생각할까봐 우려가 되었다.

당장 군사 가문의 딸이 저런 막말을 할 정도인데 다른 귀족들은 어떨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그리고 마리는 눈쌀을 와락 찌푸리며 진심이냐는 투로 얘기했다.

"...미쳤어? 그런 말을 했다간 강제로 입대시킬텐데?"


"강제로 입대시킨다고?"
"응. 우리 귀족들 사이에 유명한 벌들 중 하나야. 귀족의 자식이 군인을 모독하면 그 부모가 강제로
병사로 입대시켜. 한 달을 못 버티고 질질 짜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2 년 동안 의무적으로 복무해야하지.
법으로 규정된 거라 귀족이라 해도 의미가 없어."

그거 참 신박하면서도 효과적인 벌이네. 군필이라면 마리가 언급한 벌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집이라는 보금자리가 얼마나 따스한지, 가족과 사회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마지막으로 군대가 얼마나 좆
같은 곳인지 처절하게 알게 될테니까.

또한 이 세상은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도 없어서 부조리가 장난 아니게 많을 것이다. 온실 속 화초로 자란


귀족가 자식들에게는 이만큼 효율적인 벌도 없다.

"자식이 아니라 그 부모가 군인을 모욕한다면 어떻게 돼?"


"그런 경우는 거의 없기는한데 아마 좋은 꼴은 못 보겠지. 그리고 정말 마티우스 가문의 딸이 군인을
모욕했다면 그 파장이 어마어마할 거야. 일단 입대는 확정이고 최악의 경우 가문에서 쫒겨날 수도 있어."

입대라... 그거 참 재미있을 것 같다. 조만간 아이라도 훈련소 두 번째 날 심정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까.

나는 어서 빨리 그 순간이 오기를 좋겠다며 키득거렸다. 한 번 고생해봐야 정신차리겠지.

"아무튼 너네 조는 다 준비했어?"

내가 실실 웃는 동안 마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듣고 살살 눈치를 보는 마리에게 답했다.

"모두 끝냈지. 너희들은?"


"...굳이 대답할 필요를 못 느끼겠는데?"

허탈하다는 듯이 웃는 걸 보아 예상대로 시원하게 말아먹은 모양이다.

그래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했다.

"일단 참여는 했어?"


"참여만 했지, 실질적으로 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냥 모여서 수다만 떨다가 끝났거든. 그것도 딱 두
번이었고."
"그럼 자료 조사랑 발표는?"
"넌 누가 다 했을거라 생각해? 참고로 난 아무것도 안 했다?"
"... ..."

마리가 역으로 묻자 도리어 할 말이 없어졌다.

어쩐지 잭슨의 표정이 어둡더라니 그때문이었구나. 나는 왠지 공감되는지라 동정심이 일었다.

"사실 조 배정이 그딴 식으로 된 순간부터 포기했어. 점수가 좀 뼈아프긴 하겠지만 심하지는 않을테니까.
정 안 되면 다른 전공에 집중해야지."
"전공이라... 넌 3 학년이 되면 무슨 전공에 들 거야?"

갑자기 궁금해져서 묻게 되었다. 나는 역사학이라는 확실한 전공을 택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물론 1 학기조차 끝나지 않은 지금 묻기에는 조금 이르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염두에 둔 건 있지


않을까.

마리는 내 질문을 듣고 턱을 괴며 곰곰이 떠올리다가 조용히 말했다.

"전공이라... 글쎄? 마음 같아서는 정치학에 들어가고 싶지만 리나가 있을테니 패스. 지금으로서는 딱히
생각나는 건 없어. 난 졸업만 하면 그만이거든. 너는?"
"난 당연히 역사학."

내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하자 리나가 별 해괴한 걸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사가 그렇게도 재밌어? 이해할 수가 없네."


"넌 그러겠지만 난 아니야. 역사가 얼마나 재미있는데?"
"알았어. 알았어. 이러니까 역사에 빠삭한 거겠지. 아예 책을 쓰지 그래? 너 저번에 엘레나
교수님한테도 글 잘 쓴다고 칭찬받았잖아."
"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한 방에 잠깐 말이 멈추었다. 본인 딴에는 농담삼아 말한 거겠지만 당사자에게는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리는 내 얼굴을 관찰하다가 기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그 표정은? 진짜 쓰고 있어?"


"아니?"
"흐음..."

내가 부정하자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마리의 시선은 정확하게 펜혹이
자리잡혀있는 오른손을 향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손을 숨길 뻔했지만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간신히 억눌렀다. 마리도 이이상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인지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뭐... 네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겠지. 그래도 진짜로 책 쓰면 좀 보여주라. 궁금하긴하네."


"안 쓴다니까 그러네."
"누가 뭐래니? 아, 물론 내가 아빠한테 부탁해서 후원 정도는 해줄 수 있어."
"아. 좀."

내가 그만하라는 듯이 투덜거려도 마리는 키득키득 웃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진담이 아니라 장난으로
한 말인 듯했다.

하지만 간담이 서늘한 건 마찬가지였다.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훅 치고 들어오니 대응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언제까지 마음 졸이면서 생활해야하지?'

마음 같아서는 확 밝히고 싶지만 후폭풍이 무서웠다. 거기다 내 정체를 숨기기 위해 고생 중인 아버지를


봐서라도 인내해야한다.

아무튼 간에 수업이 시작되고 조별 과제의 꽃인 발표가 시작되었다. 내 예상대로 마리 조의 발표자는


잭슨이었으며 피곤에 쩔어든 모습으로 나타나 측은함을 불러일으켰다.

'너도 참 고생이다.'

아마 이후로 집적대는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나는 힘없이 자리로 돌아가는 그를 짠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런 내 시선이라도 느낀 걸까. 나와 시선이 마주친 잭슨도 헛웃음을 흘릴 뿐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여차저차 모든 발표가 끝나고 인문학 수업이 종료되었고, 다른 수업도 별 일없이 평범하게
진행되었다.

이후로 모든 수업이 끝난 후에는 조원들과 함께 식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음?"

숙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 바닥에 웬 편지 봉투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슬쩍 집어드니 집에서 온 편지였다. 최근 부모님에게 발송했던 우편이 없었는지라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시지?'

이에 나는 침대에 앉아 봉투를 뜯어내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그 편지의 정체는...

[꼬리가 밟혔다. 당분간 조심하거라.]

아버지의 필체로 쓰여진 경고문이었다.

"... ..."

나는 그 경고문을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 43 화 >

나는 아버지가 보내주신 편지를 읽고 잠깐 멍을 때릴 수밖에 없었다. 특유의 짧고 굵은 문체를 보아


아버지가 보낸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내용만 본다면 무슨 첩보물을 찍는 것도 아니고 비장함이 실려있다. 이탓에 이해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으나 머지않아 표정을 딱딱하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꼬리가 밟혔다고?'

내가 익명으로 출판사에 원고를 제출할 수 있던 이유가 아버지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아버지가
어떤 작업을 거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인맥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얼추 짐작하고 있다.

그 덕분에 제논 일대기가 대히트를 치고나서 모두가 나를 찾을 때도 끝까지 익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신 아버지도 황실과 귀족뿐만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나를 찾고 있다 하셨으니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강조하셨다.

그리고 오늘이 되어서야 꼬리가 밟힌 모양이다. 나는 턱을 매만지며 편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누구인지는 모르시나?'

주어가 깔끔히 생략돼 있어서 누가 꼬리를 밟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 성격상 짧게 쓰셔도 중요
부분은 다 적으셨을텐데 없는 걸 보니 누구인지 모를 확률이 크다.

하기야 꼬리를 밟은 쪽도 사람을 시켰을텐데 누구인지 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아무튼 간에 내가


조심해야한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일단 경각심은 가져야겠다.'

누가 꼬리를 밟았는지도 모르고, 꼬리가 밟혔다고 내 정체가 완전히 들통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만에
하나 아버지의 경고대로 따르는 것이 좋다.

솔직히 까고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현재로서는 아버지가 밟힌 꼬리를 자르기를 빌


수밖에 없다.

괜스레 신경이 쏠렸다간은 집필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평소처럼 행동하되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옳다.

'근데 편지가 한 장밖에 없나?'

보통 부모님은 함께 편지를 보내시니 아버지가 편지를 쓰셨다면 어머니의 편지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짧게 썼다지만 어머니는 내 안부를 묻을 겸 진척도를 확인하기 위해 장문의 편지를
쓰셨겠지.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대로 아까 전 찢은 편지 봉투 안에 또다른 편지가 가지런히 담겨있었다.

이에 편지를 꺼내 반듯하게 펴니 예쁘게 잘 쓰여진 글씨체가 눈에 확 들어왔다. 아버지와 달리 섬세하신


문체가 특징적인 어머니의 편지가 맞다.

[아이작. 네 아버지가 안부는 안 묻고 할 말만 적은 것 같아 엄마도 편지를 보낸단다. 지난 번에 네가


보낸 편지를 읽고 아카데미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 이 엄마는 안심이 되는구나. 다만 요즘
날씨가 부쩍 더워진 것 같은데 더위를 잘 타는 네가 고생하고 있을 것 같아 걱정이 된단다. 옛날에
아버지를 따라 훈련을 하다가 쓰러졌던 네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는구나. 엄마가 다음 권은
언제 나오냐고 장난스럽게 묻고 있지만 항상 중요한 건 건강이야. 아카데미 생활도 바쁠텐데 부디 건강
생각을 하면서...]

A4 용지 크기에 가득히 채워진 문장들을 읽고 가슴이 저절로 따스해지는 기분이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엄마라는 존재들은 자기보다 자식밖에 생각하지 않는 천사인 게 분명하다.

가끔씩 몇몇 귀족가 안주인들은 본인의 자식을 정치적 도구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으나 우리 어머니는
아니다. 그저 평범한 한 가정의 어머니에 불과했다.

나는 진심이 우러러 나오는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가 쓰신 편지를 천천히 읽어내렸다. 유려한 필기체로
하여금 눈이 저절로 즐거워졌다.

[네 아버지가 몸 조심하라고 편지를 썼긴 했다만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단다. 설령 들켜도 우리 가족은


너를 지켜줄테니까. 특히 너는 모르고 있겠지만 네 아버지는 왕년에 유명한 기사단의 단장이셨단다.
그러니 설령 들켜도 황실에서조차 우리를 쉬이 건드릴 수 없을테니 걱정하지 마렴. 여차하면 네 아버지가
직접 황실에 나설 거란다.]

황실에서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다니 도대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예측조차 되지 않았다. 하기야


백작의 작위를 마다하고 남작이 되었다고 리나가 알려줬으니 범상치 않은 인물인 건 확실하다.

소설에서나 나오는 은둔 고수의 표본이랄까. 그러나 스스로 낮은 작위를 받은 걸 보면 어두운 과거가 있는


건 확실하다. 상당히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고 말했으니 더더욱.

[...해서 우리 가족은 항상 너를 응원하고 있단다. 무리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걸 꾸준히 하렴.


사랑하는 엄마가.]

편지를 모두 읽고나서도 여운이 잠겼다. 어머니는 옛날에 글을 잘 쓰셨다고 하셨는데 편지를 보면 그 말이


절대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름답다고 할만큼 유려한 필기체하며, 감동을 선사하는 글귀까지. 무엇하나 빠질 게 없었다.

'...실망시켜드리지 말아야지.'

반 장난식으로 진과 릴리는 언제 이어지냐고 재촉하긴해도 어디까지나 장난에 불과했다. 오히려 어머니는


주위의 압박 때문에 스토리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걸 싫어하신다.

나는 어머니의 편지를 다시 한 번 읽어내린 뒤에 가지런히 접어 책상 서랍에 넣어뒀다. 첫 번째 서랍에는


원고지와 여분의 노트가, 두 번째 서랍에는 부모님이 보내주신 편지가 저장되어있다.

'우선은...'

오늘 할 일도 모두 끝났겠다, 의자에 앉아 제논 일대기가 아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에는 걱정이


한가득 담겨있었으니 그걸 안심시켜줘야하지 않겠나.

물론 사정상 제논 일대기의 다음 권은 최소 2 달 뒤에 나올거라는 말은 적는 게 좋을 듯했다.

'꼬리가 밟힌 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글이나 쓰자.'

나는 어머니의 편지를 통해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답장을 써내렸다.

******

미네르바 제국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강한 국가 중 하나다. 영토가 넓은 건 물론이고 군사력과 경제력도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막강하다.

이렇다보니 제국에서 내뱉는 발언 하나 하나가 전 세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며 다른 종족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런 미네르바 제국에게도 예로부터 영원한 숙적이라 평가받는 국가가 있었으니, 바로 테르스
왕국이다.

테르스 왕국은 미네르바 제국과 비교했을 때 군사력도 낮고 경제력도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지만, 다른


하나가 너무 압도적이다. 그건 바로 소프트파워 즉, '문화'다.

음악, 문학, 교육, 과학, 기술, 마법, 심지어 이종족의 문화까지. 이 세상의 모든 문화가 테르스
왕국에 포함돼 있다고 해도 무방할만큼 방대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미네르바 제국도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지 않고 테르스 왕국을 압박해 문화를 침탈한 경우가 적지
않다. 단적인 예로 세계 최고의 아카데미라 칭해지는 헤일로 아카데미가 있다.
미네르바 제국에서 아카데미를 설립할 당시 테르스 왕국에 속해있던 교수와 관련 장인들을 모두 포섭하여
생긴 결과다. 테르스 왕국 입장에서는 눈 뜨고 코 베인 격이라 거세게 항의했으며 이후로 법으로 철저하게
막기 시작했다.

아무튼 간에 미네르바 제국이 군사력이나 경제력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힘이 강하다면 테르스 왕국은
내실이 단단하다고 봐야했다. 별명조차 문화의 나라였으며 이건 엘프조차 인정할 정도다.

대신 부작용이 없진 않았다. 문화조직이 너무 탄탄한 나머지 '제이로스 혁명' 같은 대형사고도


발생했으니까. 하지만 그걸 발판삼아 더욱 성장했으니 테르스 왕국 입장에서도 마냥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그래서, 꼬리를 잡았지만 그 위까지 추적하기는 힘들다는 말이구나."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어느 집무실 안.

푸른 하늘을 연상시키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은 중년인이 맞은편에 서있는 한 남자에게 말했다.


온화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예리함이 감도는 하늘색 눈빛하며 말투 또한 심상치 않았다.

그에 맞은편에 기립해 있던 검은 제복의 남자가 허리를 깊숙히 숙였다. 송구하다는 본인의 마음을 여실히
표현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전부 제 능력 부족 때문입니다."


"아니. 됐다. 꼬리를 잡은 것만으로도 충분해. 꼬리에게 캐낼 수 있는 정보는 얼마나 있나?"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야합니다. 돈만 받고 의뢰를 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한데다가 의뢰인도 추적이 어렵습니다."
"으음..."

테르스 왕국을 통치하는 왕, 프리드리히 듀커드 폰 커쳐스는 턱에 주먹을 갖다 대며 고심했다.

정말로 우연히 기회가 닿아 꼬리를 밟게 되었으나 아쉽게도 도마뱀 꼬리에 불과했다. 잡히는 순간 알아서
잘려나가게 되는 그런 꼬리.

꼬리를 밟았을 때만 해도 수수께끼나 다름없던 제논 일대기의 작가를 찾기 위한 단서가 될 줄 알았더만


하등 쓸모없는 심부름꾼에 불과했다. 기대가 큰만큼 실망감도 클 수밖에 없다.

프리드리히는 아쉬움에 한숨을 토했다가 앞의 남자에게 물었다.

"다른 나라의 동향은? 우리가 꼬리를 잡았다는 소식을 그들도 알고 있을텐데."


"당장은 선듯 나서지 않을 겁니다. 꼬리를 잡아도 끝이 아니라는 걸 그들도 알고 잘 있을테지요."
"그렇군. 어찌 되었던 간에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하는데 말이지."

세계 각지에서 제논 일대기의 저자 즉, 아이작을 찾고 있지만 그 중 가장 열정적인 건 단연코 테르스


왕국이라 할 수 있다.

미네르바 제국에서도 황실을 포함해 고위급 귀족들이 인력을 동원하여 찾고 있는 상황이나 테르스
왕국만큼은 아니었다.

미네르바 제국 입장에서는 괜히 자극해봤자 도망가면 큰일이니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중이라면, 테르스
왕국은 그딴 거 없이 마구잡이로 단서를 모으는 중이다.

이처럼 테르스 왕국이 어째서 아이작을 찾는 거라면 간단하다.

"빨리 찾아서 미네르바 놈들한테 크게 한 방 먹이고 싶군요."


"동의하네. 여태까지 뺏긴 게 워낙 많아서 분통이 나는군."
헤일로 아카데미의 예시를 보듯이, 미네르바 제국에게 빼앗긴 문화자산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법으로 막아놓았다지만 예전부터 야금야금 문화를 훔쳐가서 손해를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도 결국에는 '돈'이 가장 중요한 법인데 미네르바 제국은 어마어마한 돈을 빌미로
수많은 장인과 예술가들을 데려갔다. 테르스 왕국에게는 복창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거기다 역사적으로 제논 일대기의 작가처럼 단순히 소설로만 세상을 바꿔놓은 경우는 없었다네.
전대미문이라고 봐야겠지."
"네. 마족의 공주가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도 놀라운데 곧 있으면 우리나라에 사절단을 보낸다니...
정말로 믿기 힘든 현실입니다."
"만약 그 작가가 우리나라를 비판하는 글을 쓰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할 거야. 그럴 일은 없겠지만."

무엇보다 아이작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무시무시한 수준이다. 당장 제논 일대기로 마족에 대한 인식을


180 도 바꾸었는데 여기서 특정 나라를 비판하는 글을 쓴다?

지구에서는 인터넷이 대중에게 보급화되어 그저 그런 책으로 넘길 수도 있지만 이 세상은 아니다. 말


그대로 세뇌를 위한 '무기'로 악용될 여지가 충분하다.

그리고 나라를 통치하는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외세의 침략이 아닌, 내부에서부터 무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기둥이 무너지게 되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특히 제이로스 혁명을 통해 큰 홍역을 치뤘던 테르스 왕국이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우선은 알겠네. 지원이란 지원은 모두 해줄테니 반드시 작가를 찾아주게나. 그대신 찾더라도 '정중하게'
모시고 올 수 있도록. 알아들었나?"
"명심하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좋은 소식을 갖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다른 소식은 없나?"
"아델 왕녀님에 관한 소식이..."

프리드리히는 보좌관의 입에서 특정 인물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인상을 콱 찌푸렸다. 이름조차 듣기


싫다는 반응이었다.

"됐어. 이미 내다버린 녀석인데 굳이 내가 알 필요가 이유가 있나?"


"하오나 전하. 아델 왕녀님은..."

보좌관이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더이상 말하지 말라는 것처럼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만. 내 자식이었으면 헤일로 아카데미가 아니라 테르스 아카데미에 입학시켰겠지. 내 자식은 4 명밖에
없어. 이건 명심하게."
"...알겠습니다."

단호하디 단호한 프리드리히의 말에 보좌관도 더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 것일까. 프리드리히는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보좌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뭐... 소식은 알려주는 게 좋겠군. 네가 좋아해마지 않던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곧 있으면 찾을 것


같다고."
"...굳이 알려주시는 이유가?"
"그래야만 그 녀석이 쉽게 목숨을 끊지 않을테니까. 희망은 줘야겠지."
"... ..."

악취미구나. 보좌관은 눈쌀을 찌푸릴 뻔한 것을 간신히 인내했다.


< 44 화 >

조별 과제라는 큰 시련을 무사히 넘길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학기가 모두 끝난 건 절대 아니다. 유급을 막기


위해 특정 점수를 얻어야한다는 소리는 그 점수를 얻기 위한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니까.

그게 시험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과제가 될 수도 있으며, 그것도 아니면 발표를 통해 얻는 점수일 수도


있다.

한마디로 더럽게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조별 과제라는 큰 산을 넘겨도 언덕이 엄청나게
많아 비지땀을 뻘뻘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시험'을 치는 과목은 별로 없었으나 그대신 과제가 미친듯이 많았다. 집필은커녕 과제를 하느라
시간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 살려줘..."

마리가 앓는 소리를 육성으로 내며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그러자 눈처럼 새하얀 그녀의 흰색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내려앉았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모든 기력을 완전히 소진한 모양이다.

"진짜... 무슨 과제가 이렇게 많은거야... 하나도 아니고 여러개니까 미치겠네."


"그래도 과제는 점수 받기 좋잖아?"
"그건 너만 그런거고. 차라리 시험을 치는 게 낫지. 주말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 하니까 미치겠어."

전생의 대학교는 강의가 많아봤자 8 개를 넘지 않지만, 헤일로 아카데미는 최소 10 개 이상을 들어야


유급을 면한다. 안 그래도 과제 하나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시간을 갈아넣어야하는 수준이다.

나는 투덜거리는 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역사는 괜찮은 거 같아? 나도 내가 잘 가르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건 전부


알려줬는데."

모두들 알다시피, 나는 마리에게 역사를 가르쳐주고 있다. 물론 마리 뿐만 아니라 세실리까지.

시간은 수요일 모든 수업이 끝난 뒤 저녁을 먹고 나서다. 이런저런 일로 바쁜 탓에 내가 쥐어짜낼 수 있는


시간이 그것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그들에게 역사를 가르쳐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세실리는 내가 가르쳐 줄 필요도 없이 박사


수준으로 역사를 꿰차고 있다. 100 년을 넘게 살면서 얻은 지식이 많은데다 인간 기준으로 살아있는
역사의 산증이다.

무엇보다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니 한 번 배운 건 절대 까먹지 않아 나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내가 역으로 모르는 부분을 물어볼 정도였으니 말다했지.

"후우..."

마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뒤이어 턱을 괴면서 착잡하다는 음색으로 내 질문에
대답해줬다.

"네가 알려준 건 다 외웠지. 네가 이해하기 쉬우라고 필기까지 해줬는데. 그래도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는 힘들 것 같아."

나는 반쯤 포기한 듯한 마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좋게 말해서 평범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중간중간 비어있는 지식이 많았다. 내가 특정 사건에
대해 알려주면 이름만 들었지 자세한 설명은 모르고 있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마리에게 역사를 가르쳐 주면서 열심히 노력했다. 나도 그렇게 남을 잘 가르쳐준다고 할 수 없어서
조금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마리도 열정적으로 임한데다가 기억력도 준수해서 수고를 덜었다는 점일까. 덕분에
막히는 부분없이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힘내. 솔직히 역사학만 파기에는 다른 전공도 너무 빡세긴 하지."


"동감. 그런데 너 이제 뭐 할 거야?"

내가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하자 마리가 기대를 담으며 나에게게 물었다. 눈빛 또한 초롱초롱햐진 걸


보아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길 원하는 것 같다.

나는 마리의 기대어린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방금 전 끝난 수업은 연금학이다. 화학을 대체하는 이 세계 고유의 학문.

그리고 연금학을 같이 듣는 학생 중 친한 사람은 마리밖에 없었다. 세실리와 리나는 연금학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수업을 듣지 않았고, 조별 과제 조원이었던 레오나와 벤자민이 있었지만 친하다고 말하기는
애매했다.

나는 슬슬 학생들이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다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마리에게 미안하지만


선약이 잡혀있었다.

"밥 먹어야지. 오늘 누나랑 같이 먹기로 약속했거든."


"아... 그래? 누나랑 먹는다고?"
"응."
"친누나지?"

그런 걸 왜 물어. 내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마리가 시선을 슬며시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자기가 말하고도 머쓱했던 모양이다.

뒤이어 그녀는 나를 힐끔거렸다가 검지 손가락을 펴며 당부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부끄러운지 미약한


홍조가 일어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오해하지 마. 네가 세실리 보고 누나라고 하니까 조금 헷갈린 거니까."


"...알겠어."
"어쨋거나 친누나랑만 같이 먹는거지?"

내가 마지못해 긍정해주자 마리가 이때다 싶어 다른 질문을 꺼냈다.

요즘들어 적극적으로 변한 듯한 그녀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린 것도 잠시, 일단 사실부터 알려줬다.

"아마... 누나 친구 분이랑 같이 먹을거야. 원래 주말에 같이 먹기로 했는데 신입생들 때문에 바쁘다고


했거든. 다음 주가 실습이라서 훈련량이 많아졌데."
"누나가 무학 조교랬지? 오빠가 말하는데 너희 누나 진짜 무섭다고 하더라."
"음..."

그녀가 꺼낸 이야기를 듣고 시선을 위로 올리며 골똘히 생각했다. 막내 사랑이 넘쳐나는 니콜은 나에게
다정한 누나의 표본이었다.
가끔 가다가 내가 잘못을 해도 따끔하게 충고를 하는 정도에 그치지, 언성을 높히거나 물리적인 폭력을
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주말마다 연무장에 찾아갔을 때는 그야말로 '사자'의 본능을 드러낸다. 대련 중 신입생이 룰이


어기거나 일부러 도발한다면 철저하게 박살내며, 그 이후로는 체벌로 엄격하게 군기를 다잡았다.

"뭐... 남이 보기는 무섭긴 하겠다. 그래도 사람은 좋다고 말할 수 있어."


"너희 남매는 진짜 특이하네. 나랑 오빠놈은 맨날 싸우기 바쁜데.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가?"
"사람마다 다른 거겠지. 너희 오빠도 성격은 좋지 않아?"
"엑. 오빠가?"

마리는 내 말에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표정까지 짓는 걸 보면 확실히


현실남매가 맞다.

하지만 그녀의 오빠가 성격이 좋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면서
알려줬다.

"우리가 처음으로 만났던 서점 있잖아. 그때 네가 제논 일대기가 안 나온다고 생떼를..."


"아아아~ 몰라. 몰라. 난 몰라요~"

내가 직접 언급하려던 찰나에 마리가 귀를 틀어막고 듣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그녀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거렸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네가 어떻게 생각하던 너희 오빠가 널 아끼는 확실해. 안 그랬으면 서점에 직접 데려오지도 않았겠지."
"...그렇겠지. 그래서 느낌이 더 이상해."
"어쨋거나 더 할 말은 없지? 6 시까지 약속이긴한데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음..."

마리는 내가 노트를 겨드랑이에 끼우며 묻자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그녀가 생각을 다 정리하는
동안 옆에서 기다려줬다.

이어서 그녀는 파란색 눈동자를 옮겨 내 쪽을 바라보더니 실로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너희 누나랑 한 번 만나봐도 될까? 같이 식사하는 건 아니고 그냥 인사 정도만


하려고."
"그정도는 상관없을거야."
"그래? 좋아. 그럼 빨리 가자."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마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은근히 신이 난 듯한 억양하며 기분 좋게 올라간


입꼬리가 그녀의 기분을 대변해줬다.

나는 잽싸게 짐 정리를 한 그녀를 쳐다보는 것도 잠히, 강의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뒤에 마리도


내 옆에 나란히 서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아이작. 네 기준으로 너희 누나는 예쁘다고 생각해?"


"객관적으로 봐도 예쁜 편이지. 내 얼굴이 그대로 여자로 변했다고 보면 돼. 대신 머리카락은 남색이야."
"그 말은 네 얼굴이 예쁘다고 인정하는거야?"
"딱히 부정할 수는 없네. 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닮아서.

약속 장소로까지 가는 도중에 이런저런 담화를 나누었다. 대부분 시덥잖은 이야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보다 마리와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 제일 편안했다. 리나는 대하기가 어렵고, 세실리는
언제나 짖굳은 장난을 깃들이니 대화를 이어가기가 힘들었으니까.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지금으로서 가장 가까운 사람은 단언컨데 마리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좁디 좁은 내


대인관계에 있어서 아직까지 그녀만큼 편한 상대는 없었다.

"아이작 너는 졸업하고 난 뒤에 계획이라도 있어?"

그러다 마리가 문득 졸업 후의 미래에 대해서 질문했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살짝 의아해진 것도 잠시,


곰곰이 생각했다.

'책만 쓰면서 지낼 수는 없으니까...'

제논 일대기가 의도치 않은 대히트를 쳤다지만 그거 하나만 붙잡을 수 없는 법이다. 하물며 기껏 판타지


세상에 환생했는데 책만 쓰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적어도 다양한 나라를 방문하여 문화를 즐길대로 즐겨야하지 않을까. 대신 여느 소설처럼 위험한
모험담보다는 소소한 일상을 만끽하고 싶다.

"아마... 세계 여행? 한 번 쯤 세계 여행을 해보고 싶어. 제국에서 벗어나서 여러 문화를 접하고


싶거든."
"세계 여행이라... 그것도 나쁘진 않겠네."
"너는?"
"안 가르쳐 줄 건데?"
"... ..."

상큼하게 웃으며 답한 마리를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당했구나.

나는 방긋 웃는 마리를 벙찐 얼굴로 쳐다보다가 이윽고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도 내 반응을 보고 키득거리더니 이내 들릴 듯 말 듯한 크기로 중얼거렸다.

"...가능하면... 싶네."
"뭐?"
"못 들었으면 됐어. 그런데 저기 저 사람 너희 누나 아니야?"

마리가 화제를 돌리자 나는 의문을 내려놓고 그녀가 가르킨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가르킨 방향은 광장 한가운데에 위치한 분수대였는데, 정말로 그 앞에 니콜이 서있었다.

멀리 있음에도 돋보이는 우월한 기럭지하며, 포니테일로 묶은 남색 머리카락을 보아 니콜이 확실하다.

"우와. 너희 누나 진짜 멋있으시다."

마리도 니콜을 보았는지 진심어린 감탄성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녀의 말마따나 현재 니콜의 모습은
웬만한 모델 저리가라 할 정도로 멋있었다.

각선미를 온전하게 드러내는 검은색 가죽 바지와 그 위의 검은색 셔츠. 단순히 이 두 가지 옷의


조합만으로 멋과 아름다움을 뿜내고 있었다.

그녀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왔을터인데 사복 차림인 걸 보면 조교라서 가능한 듯했다.

"음? 아! 아이작~!"
분수대 앞에서 서성거리던 니콜도 나를 발견했는지 팔을 들어올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팔을
들어줌으로서 화답했다.

내가 팔을 들자 니콜은 자기가 먼저 오겠다는 건지 길쭉한 다리를 힘차게 뻗으며 나한테 걸어왔다. 그리고
머지않아 코앞까지 다가왔다가 내 옆에 서있는 마리를 보고 의문어린 표정을 지었다.

"얘는 누구야?"
"아! 안녕하세요! 레킬리스 공작가의 마리 하우젠 레킬리스라고 합니다!"

니콜이 묻자마자 마리는 힘찬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왠지 그녀가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동안 니콜은 마리가 본인의 이름과 가문을 밝히자 금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더니 나를 쳐다봤다.
어째서 이런 사람이 네 옆에 있냐는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에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녀의 의문을 풀어줬다.

"내 친구야. 우연히 기회가 닿아서 친해졌거든."


"...안녕하세요, 레킬리스 영애. 아이작의 친누나인 니콜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내 대답에 듣고 니콜도 공손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인사를 하는 순간에도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지
않고 있었다.

"저, 저도 붉은 사자의 딸과 만나서 영광이에요. 그리고 말을 놓으셔도 돼요. 제가 불편하거든요.


레킬리스 가문 아시죠?"
"...잘 알지. 그럼 바로 말 놓을게."

니콜도 레킬리스 가문을 잘 알고 있는지 망설이지 않고 말을 놓았다. 뒤이어 그녀는 나와 마리를


번갈아보다가 의문을 담아 마리에게 질문했다.

"그나저나 우리 아이작과 친구라고?"

의문이 담긴 목소리에는 약간의 경계심 또한 내포돼 있었다.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마리를 경계하기에 충분했다.

마리도 니콜의 말 속에 미약한 경계가 담겨있다는 재빠르게 눈치챈 것인지 곧바로 대답을 꺼냈다.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

"네. 친구에요."
"흐음... 알겠어. 조금 의외긴하네."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니콜. 아마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위 귀족의 딸과 친구가 되었다는


게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다.

나 또한 마리와 친구가 되는 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때문에 위험천만한


상황이 자주 발생했지만 현재까지는 괜찮았다.

게다가 마리뿐만 아니라 리나와 세실리까지 친해졌다고 하면 니콜은 무슨 반응을 지을까.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해 가만히 있었다.

다만 이 사실을 전혀 알리가 없는 마리는 의외라는 니콜의 대답을 듣고 그녀에게 질문했다.

"의외라니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 네 이야기는 아니야. 우리 아이작이 무뚝뚝하고 자기 일에만 신경 써서 친구를 만들 수 있을까 조금
걱정됐거든. 그런데 막상 친구를 사귀고나니 공작의 딸일 줄은 몰랐지."

그건 나도 동감이었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마리와 친해질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그런데 왠지 내 험담을 하는 것 같은데 착각일까. 설마 아니겠지.

"후우..."

그사이 마리는 안심이 되었는지 몰라도 가슴에 손을 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그녀는
전보다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니콜 씨는 저랑 아이작이 친구로 지내도 상관없다는거죠?"


"응? 뭐... 그렇지. 오히려 괜찮을... 지도?"
"정말요?"

니콜의 긍정에 마리의 얼굴이 한없이 환해졌다. 도대체 왜 그렇게 기뻐하는거니.

하지만 기뻐하는 마리와 반비례로 니콜은 불안해진 모양이다. 그녀로서는 나와 마리가 가까워진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다.

마리가 공작 가문의 딸인 것도 있겠지만 가장 큰 부분은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와 가까워지면 질 수록 내 비밀이 은연 중에 드러날 가능성이 필연적으로 높아진다.

그리고 마리와 친구로 지낸다면 내 아카데미 생활이 편해질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밀을 들키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니콜의 입장에서 마리는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그녀는 나와 마리를 번갈아보면서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닌가?"
"아..."

그러자 마리의 얼굴이 급속도로 시무룩해졌다.

< 45 화 >

"아이작. 혹시 저 애한테 들킨 건 아니지?"

약속 시간인 6 시가 되자마자 마리가 숙소로 돌아가고 둘만 남게 된 상황에서 니콜이 나에게 질문했다.


시선을 그녀에게로 옮기니 걱정과 염려가 담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친근한 나와 마리의 사이를 보고 혹여 비밀이 들키지 않았을지 우려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 달리 몇몇 실수를 제외한다면 들킨 적은 없었다.

"걱정 마. 들키진 않았어. 아직까지는 그냥 친구야, 친구."


"...그래?"

니콜이 의문을 표하더니 퍽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낸다. 그걸 보고 살짝 황당해졌다.

누구를 진짜 친구없이 외톨이인 줄만 알고 있던 걸까. 나도 내 교우 관계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나


니콜이 저런 눈빛을 보이니 마음이 조금 상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그 눈빛은? 썩 못 믿겠다는 눈빛인데?"


"음... 모르면 됐어. 아무튼 걔는 네 비밀을 전혀 모른다는 거지?

왠지 급하게 화제를 돌리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건 결코 착각이 아닐 것이다. 나는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의심들을 접어두고 대답했다.

"실수를 한 적은 있는데 그정도는 괜찮을 거야."


"실수라면... 지난 번에 그림을 보여줬다는 거? 설마 쟤가 그 애였어?"

나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확인을 구하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실수로 다른 사람에게 그림을 보여줬다는 사실은 니콜도 알고 있다. 단, 그녀는 실수를 범한 대상이
마리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알려줘봤자 괜한 걱정을 살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마리와 안면을 텄으니 이정도는 알려줘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약간 들어서 말한
것이다.

"후우..."

내 예상과 약간 다른 반응이 나왔다. 니콜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로서는


조금 긴장이 들 수밖에 없는 반응이었다.

이어서 그녀는 잠깐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아이작. 너도 아버지에게 편지받았지?"


"꼬리가 밟혔다는 거?"

나의 되물음에 니콜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나처럼 부모님에게 편지를 전달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와 달리 그녀는 현재 상황을 꽤나 심각하게 받아들인 듯했는데, 표정을 자세히 확인하니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어쩌면 니콜에게는 다른 편지가 갔을테니 어쩌면 그것과 관련돼 있는 걸까.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린 것도
잠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어머니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하지 않았어?

나에게 부쳐진 어머니의 편지에는 걱정 말라며, 말 그대로 꼬리가 밟힌거라 큰 문제는 없을거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솔직히 그것만 제외한다면 평소 보냈던 안부 편지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평소처럼 행동하는 건 아니고 어느 정도 주의하는 중이었다. 오늘 마리가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온 질문 때문에 큰 사단이 날 뻔했지만 지금은 무사히 넘긴 상황이고.

니콜은 그런 내 반응을 보더니 더욱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듯한 부모님의
얼굴과 흡사해보였다.

"...아이작. 꼬리가 밟혔다는 뜻이 뭔지 알아?"

전보다 힘이 빠져있는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한 니콜. 나는 그 질문을 듣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눈치채며 말없이 끄덕였다.

이에 니콜은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잠시 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모양이다.

"...아니다. 이건 나중에 말할게. 지금은 식사나 하자."


"...응. 그나저나 아델 누나는?"
"갑자기 오늘 일이 생겨서 못 온다고 했어. 이유를 물으니 오늘 집에서 보낸 편지가 도착하는 날이라
하더라고. 거의 1 년만에 받는 편지라고 하더라."
"그래?"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그마치 1 년이나 집 상황을 듣지 못 했으니
그녀로서는 집에서 보내는 편지가 그리웠을 것이다.

나는 집 위치가 헤일로 아카데미와 상당히 가까워서 길어봐야 일주일밖에 소요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다. 대게 일주일은 기본으로 깔며 집이 멀리 떨어져 있다면 무려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곳도 있다.

특히 평민들이 더 심한 편인데 그 이유는 제국의 법 중에 귀족들의 우편을 우선시하라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나라의 공무를 맡는 경우가 많아서 우편 하나 하나가 중요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법으로 우편을 보낼 수는 없어서 마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렇다보니 편지를 발송하고
수신인이 받기까지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아델 누나는 도대체 어느 지역에 살길래 편지를 1 년만에 받는거야?"


"글쎄? 예전에 물어본 적이 있는데 좀 멀리 산다고 하더라. 일단 미네르바 제국이 아닌 건 확실해."
"흠. 혹시 신분을 숨긴 귀족이라던가 그런 건 아냐?"
"그 녀석이 얼굴이 귀족처럼 생겼긴하지. 나도 처음에는 귀족으로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니더라고.
평민인 건 확실해."

니콜이 저리 단언하니 더이상 뭘 물을 수도 없었다. 나는 평민이라기에는 믿지 못할 아델리아의 미모를


머릿속에 떠올리다가 곧바로 치워버렸다.

지금은 아델리아보다는 니콜과의 식사가 우선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니콜과 함께 하는 식사였으니


마음편히 저녁을 먹을 수...

"음?"
"...레오르트 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시기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기로 생각해뒀던 레스토랑의 정문


앞에서 레오르트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안녕? 우연이네."
"...그러게요."

심지어 레오르트의 곁에는 리나까지 있었다. 나는 리나가 반갑다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떨떠름한 마음으로 인사했다.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레오르트와 리나도 남매끼리 식사를 할 예정이었던 것 같다. 사복이
아니라 교복 차림인 걸 보면 미리 약속을 잡아놓은 듯했다.

하지만 앞의 남매와 같은 식당에, 그것도 같은 시각 레스토랑 정문 앞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나. 당최 말이 안 되는 확률이었다.

나는 속으로 상황이 꼬였다고 직감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니콜의 얼굴을 체크했다. 그녀도 두 사람과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네들도 저녁 식사를 하러 온 건가?"

미묘한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때 레오르트가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물었다. 그에 니콜이


정신을 차리며 다급히 대답했다.
"아, 네. 그렇습니다. 아이작과 식사를 하러 왔습니다."
"흠..."
"... ..."

니콜의 대답 이후로 레오르트는 우리 남매를 번갈아보더니 이윽고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나는 그 미소를


보고 불길함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

부디 불길함이 들어맞지 않기를 속으로 바라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하는 법.

이어서 레오르트는 손을 내밀더니 부드러운 음색으로 우리에게 제안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식사라도 하는 게 어떤가? 가격은 내가 모두 지불하겠네. 때마침 자네들에게


긴히 할 이야기도 있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말만 제안이지 사실상 반쯤 강요에 가까웠다. 그 누가 다음 대 황제로 유력한 황태자의 제안을


거절하겠는가.

니콜도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 마지못해 수락한 모양새다. 설령 거절한다고해도 레오르트가


뒤끝이 있는 사람도 아니라 괜찮을테지만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

무엇보다 레오르트의 제안에서 신경쓰이는 부분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들에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 것.

굳이 그런 말을 꺼낸 걸 보면 우리에게 좋던 안 좋던 중요한 사안이 될 가능성이 있다. 니콜도 거절할


명분도 없고 레오르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서 승낙했을 것이다.

"좋아. 아이작 자네는?"


"저도 상관없습니다."
"알겠네. 그럼 들어가도록 하지. 아까도 말했지만 돈은 전부 내가 지불할테니 부담없이 아무거나 시켜도
된다네."
"정말요?"
"아이작."

내가 진짜 그래도 되냐는 뉘앙스로 묻자 옆에서 니콜이 엄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나는 그제서야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아 급히 입을 다물었다.

허나 레오르트는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약한 웃음을 떠뜨리며 대답했다.

"하하하. 물론이지. 자네가 원하는 건 다 시켜도 된다네. 그게 스테이크든 아니면 와인이든."


"아이작. 설마 우리가 누구인지 잊은 건 아니지?"
"... ..."

레오르트의 대답 뒤로 리나가 살풋 웃으며 놀리듯이 물었다. 나는 리나의 놀림을 듣고나서 눈을


깜빡거렸다가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눈 앞의 남매가 어떤 사람들인가. 무려 미네르바 제국을 통치하는 황족들이다. 재력이라면 썩어넘칠


정도로 풍족할 터.

그러니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멍청한거다. 니콜도 그걸 알고 있어서 내 이름을 부른거고.

본래 나는 말을 하기 전 한 번 더 생각하는 편인데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그냥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하아..."
"... ..."

옆에서 니콜이 부끄럽다는 한숨을 내쉬어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리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조신하게 웃었다. 덕분에 더욱 창피해졌다.

"혹시 4 인실 중에서 방음이 잘 되는 곳이 있나? 돈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네."


"알겠습니다. 잠깐 따라오십시오."

약간의 해프닝이 발생한 뒤로 레오르트가 웨이터에게 방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레오르트가


원하는 방의 특징이 조금 이상했다.

평범한 4 인실도 아니고 방음이 되는 4 인실이라니.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굳이 방음이 되는 방을


고를리가 없다.

그때부터였을까.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불안과 걱정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건. 나는 무언가 쎄-한


느낌이 들어 니콜을 쳐다봤다.

니콜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감지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표정도 약간이나마
굳어있었다.

"직원을 호출하고 싶으면 여기 있는 종을 울리시면 됩니다."


"고맙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이윽고 레오르트가 종업원에게 부탁했던 4 인실, 그것도 방음이 되는 공간에 들어오게 되었다.

나는 웨이터가 문을 닫아주자 방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식사를 위한 공간치고는 상당히 넓은 편에 속했다.

디자인 또한 전반적으로 평범한 레스토랑과 다를 게 없었다. 단지 넓은 방 한가운데에 네모난 테이블이


놓여있을 뿐이다.

방음이 되는 공간이라길래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길 줄 알았는데 내 예상과 동떨어진 모습이다.

"자자. 어서들 앉게나. 리나 너는 내 옆에 앉고."


"알겠어요. 아이작도 어서 앉아."
"...네."

나는 리나의 지시를 고분고분하게 따라 의자에 착석했다. 당연히 내 옆은 니콜이 차지했다.

참고로 레오르트와 리나는 우리가 앉기 전에 먼저 앉아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리나와, 니콜은 레오르트와


마주보는 형식이 되었다.

"...아깐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못 드렸네요. 아이작의 누나이자 마이샬 가문의 장녀 니콜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제국의 태양이 되실 황녀님과 만나서 영광입니다."

어색한 기류가 내려앉기 직전 니콜이 먼저 스스로를 소개함으로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러고 보니


니콜은 레오르트와 안면이 있어도 리나는 처음 만났다.

이에 리나는 딱딱한 말투로 스스로를 소개한 니콜과 얼굴을 마주했다. 뒤이어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가슴 중앙에 손을 얹으며 제국의 예법대로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니콜. 아시겠지만 저는 미네르바 제국의 1 황녀, 리나 우르미 크리스틴이라고 해요.
편하게 황녀가 아닌 리나라고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니콜은 인사가 끝나자 리나와 레오르트를 서로 번갈아봤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봐 미소 또한 서로


비슷했다.

문제는 그 미소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걸까. 나조차도 그리 느끼고 있으니
니콜도 마찬가지일 것이리라.

그에 니콜은 조심스러우면서도 경계심이 가득 들어있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말하셨던 긴히 할 이야기라는 게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그전에 주문부터 하는 게 좋겠군. 그 이야기는 모든 식사가 끝난 뒤에 하게나."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식사를 모두 끝내고 할 생각인 것 같다. 니콜은 레오르트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니 아이작은 와인을 좋아했지? 지난 번 모임 때 엄청 잘 마시더라."


"...네?"

그러다 갑자기 내 맞은편의 리나가 흑역사를 친절하게 꺼내줬다. 워낙 갑작스러운 이야기여서 순간


당황했지만 그보다 니콜이 제일 문제다.

리나가 저 말을 꺼내자마자 고개를 홱- 돌리며 나를 쳐다봤으니까.

대체 모임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황녀인 리나가 저런 말을 꺼내는 건지 해명하라는 눈빛이다.

나는 무시무시한 그녀의 눈빛에 서둘러 두 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무슨 오해를 샀는지 몰라도 진짜
아무것도 안 했다.

"그, 그냥 와인만 마신 거야! 아무 일도 없었어! 진짜야!"


"...진짜로?"
"후훗. 진짜에요. 그대신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셔서 의자에서 잤긴 했지만요."
"아이작?"

왜 굳이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내가 원망에 가까운 시선으로 바라봐도 리나는 그저 재미있다는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혹시 그때 자신의 권유를 거절해서 앙심을 품기라도 한 걸까. 다른 사람과 달리 리나와는 친하지 않아서
그것조차 잘 모르겠다.

"그럼 와인도 주문하면 되겠군. 모임에서 마셨다고 했으니 알키오네?"


"...네."
"알겠네. 자네들은 뭘 먹고 싶나?"
"저는..."

의외로 식사 자체는 아무런 탈없이 진행되었다. 비록 내가 예상했던 가족끼리의 단란한 식사는 물 건너


갔지만 그건 나중을 기약할 수밖에.

더구나 레오르트가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준 덕분에 대화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리나도 중간중간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내어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줬다.

사실 이렇게 황족과 식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내 입장에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대 황제로 유력한 황태자와 식사를 한다는 건 그와 친분이 있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 정치적인
입지를 초장부터 탄탄하게 다져놓았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만약 우리 집안 중 누군가 정치계에 입문하게 되면 아주 훌륭한 인맥이 되어줄테지만 아시다시피 우리


집은 정치와 거리가 멀다. 나도 복잡한 정치계에 몸을 던지는 건 싫어하는 편이고.

그리하여 식사는 1 시간도 되지 않아 모두 끝맺을 수 있었다. 원래 자주 오는 레스토랑이었지만 비싼


스테이크라 그런지 전에 먹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대충 식사가 모두 끝난 것 같으니 자네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도록 하지."

내가 든든한 포만감에 만족스러워하고 있을 때 레오르트가 냅킨으로 입 주위를 닦으며 말했다. 나는


편안했던 분위기가 싹 달아나는 것을 몸소 느끼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정리를 하던 니콜도 레오르트가 말하자마자 흠칫하더니 그를 쳐다봤다.

우리 남매의 시선이 모두 레오르트 쪽으로 쏠리자 레오르트는 냅킨을 테이블 위에 살포시 올리며 입을
열었다.

나긋나긋하면서도 부드러운, 귀에 속속 박히는 말투하며 목소리였다.

"미리 말하지만 오늘 만나지 않았더라도 훗날 자네들을 따로 부를 생각이었네. 오늘 만난 건 그저


우연이었지."
"... ..."
"자네들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벌써부터 불길함이 엄습하는 질문이다. 그와 동시에 '꼬리가 밟혔다'라는 아버지의 편지가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떠올랐다.

분위기도 그렇고, 나중에 우리를 따로 부를 생각이었다는 말도 그렇고, 저런 질문을 한 것도 그렇고.

어느정도 예상은 했다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레오르트가 저런 말을 꺼내니 파급력이 상상 이상이다. 온


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고 심장도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모릅니다."

입조차 열기 힘든 나와 달리 니콜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현재 상황이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인지라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사이 니콜의 대답을 들은 레오르트가 피식거리더니 특유의 중저음으로 말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언젠간 밟히는 법이지. 그게 설령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고해도 말이야."


"... ..."
"원고를 출판사에 제출하는 사람은 단순한 심부름꾼에 불과했다네. 도마뱀 꼬리와 비슷해서 조사해봤자
나오는 건 하나도 없었지. 그래서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더니 누가 덥썩 물어갔다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헛수고라는 건 뒤늦게 알 거야.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약 열흘 전이었을 걸세."

편지는 오늘을 기준으로 정확히 이틀 전에 받았다. 아버지가 꼬리가 밟혔다는 소식을 듣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기까지의 시간과 얼추 맞아떨어졌다.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레오르트는 입꼬리를 말아올린 채 말을 이었다. 여유로움이 가득 묻어나오는


미소다.

"결국 보다못해 출판사를 압박해서 계약서를 보여달라고 했지만 그것도 큰 의미가 없었다네. 가명을 써서
계약을 하면 그만이니 말이야. 그래서 출판사를 압박하는 건 멈추려고 했다네. 우연히 그들의 납세서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납세라면... 세금 말입니까?"

니콜이 의문을 담아 묻자 레오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세금. 자네도 알다시피 세금이라는 건 생각보다 복잡한 걸세. 법에 따라 납세해야하는 금액이
천차만별로 바뀌니까. 그리고 출판사도 세율에 따라 세금을 냈다네. 사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
계약서에는 출판사에서 미리 세금을 내는 것으로 되어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여기서 한 번 더
세금을 내는 걸로 되어있다는 거지."
"...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평민은 소득을 얻었을시 세율에 따라 영주에게 납세를 한 번만 하면 되지만
영주는 아니야. 평민에게 받은 세금을 제국에게 일부 지급해야하고 본인 또한 특정 세율에 따라 세금을
납세해야한다네. 부를 쉽게 쌓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이지."

동서고금 막론하고 '부'란 곧 힘과 직결된다. 돈만 있으면 군사력을 키울 수 있고 아니면 전보다 복지를


늘려 영주민들의 생활을 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

게다가 이 세상은 '화폐'가 잘 발달돼 있다. 화폐가 잘 발달돼 있다는 뜻은 경제가 크게 진보했다는
의미이며 그만큼 나라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네르바 제국은 경제력과 달리 과학이 따라주지 못 하고 있다. 아까 레오르트가 말했던 세율도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계산해야하다보니 여러가지 차질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그 문제 때문에 꼬리가 밟힐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레오르트를 조용히 바라봤다. 두 주먹은 꽉 쥐어지고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전부 다 느껴졌다.

"납세를 두 번 한다는 건 평민이 아니라 즉, 귀족이라는 의미지. 이걸 어떻게 알았냐면 각각 세율이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라네. 거기다 따로따로 납세하지 않고 한 번으로 합친 탓에 눈치채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됐지. 납세는 사람의 손으로 계산해야하다보니 그 흔적이 묻어있었다네."
"... ..."
"어쨋거나 세금은 두 개로 분할되어 각기 다른 곳으로 향했다네. 하나는 출판사가 위치한 영지의
영주에게로. 또 하나는 영주를 거치지 않고 우리 제국에게로. 하지만 곧바로 오는 건 절대 아니야.
중간에 거쳐가는 곳이 하나 있었다네. 우리는 역으로 추적해서 누구를 거쳐가는지 파악했지."

레오르트는 말을 흐리더니 나와 니콜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에 내 심장은 터질 것처럼 요동쳤으며 꽉


쥐었던 주먹에 땀이 흥건해졌다.

니콜도 별 반 다를 게 없었다.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나처럼 주먹을 꽉 쥐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레오르트는 우리 남매에게는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다.

"호크 듀커르 마이샬."


"... ..."
"네이비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으며 붉은 사자로 맹위를 떨쳤던 기사."

솔직히 아버지의 이름이 레오르트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끝난 줄 알았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제논 일대기의 저자로 추정되는 사람이지."


"...?"
레오르트가 내가 아닌 아버지를 작가로 착각하기 전까지는.

< 46 화 >

레오르트는 잘 나가다가 생뚱맞게 내가 아닌 내 아버지, 호크를 제논 일대기의 저자로 지목했다.


목적지가 코앞인데 핸들을 급격히 꺾어버려 엉뚱한 지점에 도착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이에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면서 앞을 쳐다봤다. 레오르트는 확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우리


남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 앉아있는 리나는 여유로운 얼굴로 차를 우아하게 마시는 중이다.

방금 전까지 극도로 긴장했던 탓에 입이 열리진 않았지만, 마음 속에는 의문이 긴장을 뚫고 올라왔다.


대신 가슴의 두근거림과 주먹 쥔 손에 흥건히 배인 땀은 여전했다.

어째서 레오르트는 나를 놔두고 우리 아버지, 호크를 제논 일대기 저자로 단정지을 것일까. 상황이
상황인지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으나 니콜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니콜은 레오르트의 확신에 찬 말을 듣고 잠깐동안 침묵을 유지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바닥을 뚫을 정도로 가라앉은 상태였다.

"...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믿어주실 겁니까?"


"아니라고 한다면 자네 가문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어. 납세를 했다는 건 수익이 있다는 의미고, 그
수익을 어디서 얻었는지, 또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윗선에 보고해야하는 게 귀족의 의무지. 참고로 이건
협박이 아니라 법이 그렇게 지정돼 있는 거라네. 오직 내 아바마마만이 법을 제정할 수 있지."

레오르트가 언급한 아바마마라함은 분명 제국의 최고 권위자인 황제를 지칭한 것일터. 황제를 입에 담는


걸 보면 아예 작정한 것으로 보였다.

니콜도 내가 생각하는 것과 똑같이 생각했는지 안 그래도 굳어있던 얼굴이 더욱 딱딱해졌다.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주먹에도 힘이 바짝 들어간 게 보였다.

"너무 그런 표정 지을 필요는 없네. 아무튼 간에 자네의 아버지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건


확실한가보군."
"...어째서 그런 확신을 갖게 된 겁니까?"
"... ..."

나는 니콜의 질문을 듣고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한 곳으로 틀어졌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바로 옆에


진짜 작가인 내가 있는데도 주제를 이어나가는 걸 보면 레오트르가 착각한 지금을 기회라고 판단한 듯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내 마음은 시시각각 불편해졌다. 마치 아버지를 방패로 내세운 것 같지 않은가.

아버지는 나를 위해 헌신을 해준 사람인데 방패막이로 취급하는 건 내가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보다


못해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꽈악-

입을 열어 말을 꺼내기 직전, 니콜이 말없이 내 손을 덥썩 붙잡았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듯이 힘을 꽉 주었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무언의 압박에 당황한 것도 잠시, 니콜을 표정을 보자마자 말을 하려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니콜의 표정은 진중했다.
비록 아버지를 팔아넘기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했지만 그녀에게도 따로 생각이 있는 것 같았으니 믿을
수밖에 없다.

"다 이유가 있지."

그동안 레오르트는 니콜의 질문에 전보다 입꼬리를 더욱 말아올리더니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은연 중에


카리스마가 흘러나와 집중을 이끌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납세라는 건 매우 복잡한 것일세. 특히 우리 미네르바 제국은 세금과 관련된 부분은
매우 깐깐한 편이라 더욱 복잡하지. 하지만 복잡한만큼 확실한 효과가 나타나. 우리 미네르바 제국의
자본이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많은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네."
"... ..."
"허나 그마저도 완벽하지는 않다네. 지금 이순간에도 탈세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을 걸세. 특히 마이샬
경이 사용한 방법은 탈세로 악용될 여지가 충분히 있었어. 마음만 먹었다면 세금마저 내지 않고 완벽하게
정체를 숨겼을 수도 있었겠지. 다행히 기사 시절부터 이어져 온 굳은 심지 덕분에 그러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레오르트는 우리 아버지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확신한 모양이다. 이걸 좋아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도통 갈피를 잡기기 힘들었다.

그사이 나와 니콜이 레오르트에게 시선을 두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차나 마시고 있던 리나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특유의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을 꺼냈다.

"처음에는 마이샬 경이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믿기 힘들었죠. 하지만 그의 공적과 경험을 고려하자면


딱딱 들어맞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공적이요?"

드디어 내 입이 열렸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 몰랐으나 나의 아버지는 한때 드높은 위상을 지녔던
기사다.

그것도 인간측 괴물들만 득실거리는 네이비 기사단의 단장이었으며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못할 공적을
쌓았다.

이 공적이 얼마나 무시무시하냐면 본래 남작이 아닌 백작의 작위를 받았어야 정상이었다고. 평민이 귀족의
신분을 받는 것조차 놀라울 일인데 하물며 백작이었으니 아버지의 공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흐응..."

리나는 내 질문을 듣고 미묘한 비음을 흘리더니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뒤이어 빙긋 웃더니 상냥함만이
느껴지는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아이작은 제논 일대기 속에서 제논이 어떤 공적을 쌓았는지 알고 있지?"


"당연히... 알고 있죠."

모를리가 있겠나. 제논 일대기의 주인공, 제논은 실로 입이 떡 벌어질만큼의 위업을 쌓았다.

가장 큰 예로 동료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포악한 드래곤을 토벌했다던가, 악마의 위협에서 나라를


구해줬다던가, 소실된 것으로 생각했던 교단의 성유물을 탈환했다던가 등등.

업적 하나 하나가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여서 제논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이어서 리나는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버지가 쌓았던 공적을 하나 하나 알려주기 시작했다.
"마이샬 경은 그것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진 않았어. 30 년 전인가? 새끼를 잃어버려
흉폭해졌던 드래곤이 수도를 습격했던 적이 있었어."
"아. 그거 혹시..."

최근에 발간된 역사서적에서 본 적이 있다. 정확한 명칭은 '아스카날 사건'이며 제국 수도를 습격했던
드래곤의 명칭이 아스카날이었기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이 세상은 판타지인만큼 드래곤도 있는데, 그냥 단순한 몬스터에 불과하다. 폴리모프를 한다던가, 마법에
능통하다던가, 레어에 금은보화를 쌓아놓는다던가 하는 '종족'은 절대 아니다.

그냥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대 도마뱀이다.

어쨌거나 아스카날 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다름아닌 인간의 욕심 때문이다. 불법밀수를 하던 인간들이
해츨링을 발견하여 잔혹하게 죽인 후, 그대로 해체하다가 어미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당연히 어미는 격노하여 가장 가까웠던 인간들의 나라, 미네르바 제국을 습격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불법밀수를 저지르던 인간들은 미네르바 제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였다는 점.

미네르바 제국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미쳐버린 드래곤이 습격했으니 그야말로 난리도
이런 난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때는 군대가 허둥지둥 나서서 토벌했다고..."


"기록에는 그렇게 적혀있지. 하지만 군대는 백성들을 대피시키기 급급했고 실질적으로 토벌한 사람은 네
아버지, 마이샬 경이었어. 공교롭게도 휴가를 위해 잠시 수도에 있었거든."
"...드래곤을 토벌했다고요?"
"응."

나는 믿지 못할 리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세상은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명예로운


칭호가 있는데, 당연하지만 드래곤을 토벌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이러한 칭호가 있을만큼 드래곤은 토벌하기 위해 '군단'에 해당하는 전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전력이
있다고한들 그 누구도 얼마나 큰 피해를 입을지 가늠할 수 없다.

헌데 아버지는 군대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혼자서 토벌했다고한다. 내가 제논 일대기에 적어놓았던 제논의


위업과 놀라울만치 똑같았다.

"...그건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리나님."

니콜도 전혀 듣지 못 했던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리나는 그녀의 의심섞인 질문에 살짝 슬픈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요. 아스카날 사건 당시 마이샬의 경을 돕던 친우가 있었는데 드래곤의 브레스에 그만..."


"... ..."

리나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자 니콜의 표정도 약간이나마 풀어졌다. 나보다 아버지를 더 잘 알고 있는


누나이니 뭔가를 눈치챈 듯했다.

나도 아버지가 아스카날 사건을 꺼리는 걸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가 아무리 강해도 결국 사람이니 그
업적을 떠올릴 때마다 브레스에 산화된 본인의 친구가 생각날 것이다.

비극적인 사정이 알려지자 우리들 사이에는 침묵이 가라앉았다. 다행히 그 침묵은 리나가 서둘러 입을
엶으로서 사라졌다.

"제논 일대기에도 제논이 동료의 도움을 받아 드래곤을 토벌한 것도 그 일이 생각나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본인은 비극적이었지만 적어도 제논은 잃어버리는 동료가 없기를 빌면서."
"...그럼 다른 것도?"
"네. 악마화를 한 마족을 처치한 건 물론이고 국경을 침입한 수인과 엘프들을 여러 번 몰아냈어요.
그리고 '붉은 사자'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한 건 마이샬 경이 네이비 기사단에 입단했을 때부터였고요."

위인의 영웅담을 듣는 느낌이다. 그게 내 아버지라는 사실이 조금 신기하면서도 쉬이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도 그럴게 내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가정에 헌신하고 가족들을 사랑하는 평범한 가장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드래곤을 토벌했다니, 붉은 사자라니 하면서 명성이 높았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내가 약간의 혼란을 느끼고 있던 와중에 리나가 말을 멈추고 옆의 레오르트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레오르트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마이샬 경이 근무하기 전까지 국경지대는 하루가 멀다하고 부족 생활을 하던 수인들과의 전투로 전사자가
속출하던 곳이었네. 더구나 수인들도 네이비 기사단급 전력이 아닌 이상 막는 것조차 힘들었지. 하지만
마이샬 경이 오고나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네."
"달라졌다는 말씀은..."
"마이샬 경이 국경지대에 살던 수인 대부분을 처치했다네. 위기를 느낀 수인들도 세력을 합쳐 총공세에
나섰지만 오히려 그게 악수가 되었지. 만약 마이샬 경이 아니었더라면 국경이 아니라 영토를 빼앗겼을
수도 있었다네. 그만큼 수인들이 어마어마하게 강했거든."

그야말로 '영웅'이라 부르는 것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업적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수인들이 시시때때로 국경을 넘보는 이유는 아마 국경너머의 환경 때문일 것이다.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수인 입장에서는 빼앗는 게 더욱 편할테니까.

하물며 태생적으로 전투라면 열광하는 수인의 특성도 한몫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 제국은 인적, 물적 자원을 크게 아낄 수 있었어. 국경에 투자하던 군비가 실로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었지. 마이샬 경이 제국의 경제력을 크게 올렸다해도 과언이 아닐세. 내가 마이샬 경을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 확신한 이유도 이때문이고. 범인으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산전수전을 헤쳐왔으니
제논 일대기에 녹여낼 수 있던 거겠지. "
"...그렇군요. 네이비 기사단이 있어야 막을 수 있다고 했으니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니콜은 말을 흐리더니 레오르트를 빤히 응싱하다가 고개를 슬쩍 돌려 리나를 쳐다봤다. 레오르트도 그렇고


리나도 그렇고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다.

황실에서 포커페이스를 배우는 교육이라도 받기라도 하는 걸까.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니콜도 생각을 읽는 건 포기했는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를 어떻게 할 셈이죠?"


"이제 부정하지 않는군."
"이미 전부 들킨 마당에 부정하면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을테니까요."

니콜의 시원시원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레오르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뒤이어 상체를 천천히 앞으로 내밀어 깍지를 끼더니 턱을 받쳤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예상 외의 대답을
꺼냈다.

"자네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네. 우리 황실은 마이샬 경과 더불어 자네들을 터치할 생각은


전혀 없어. 지금 이 자리를 가진 것도 확인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걸 저희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결국 참다 못한 니콜이 언성을 높히며 씩씩거렸다. 나 또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장난하냐는 표정으로


레오르트를 노려봤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몰아넣고서는 건드릴 생각이 없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병신이라 할 수


있다. 정말로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면 아예 이 자리에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레오르트는 우리의 격한 반응을 보더니 손을 내저었다. 진정하라는 의미였기에 니콜도 표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자네들이 민감하게 반응할만도 해. 하지만 이 말만큼은 진실이야. 만약 우리 쪽에서 압박을 가하다가


마이샬 경이 연재를 중단한다면? 그것도 우리가 압박했기 때문이라며 출판사에 알린다면?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지 상상이 되나?"
"... ..."
"당연히 여러 방면으로 심각해질 거라네. 현재 제논 일대기가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은 무시무시하니까.
아무리 욕심이 많아도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아. 무엇보다 나와 리나도
제논 일대기에 열광하는 독자 중 한 명이라네. 방금도 말했지만 자네들과 이 자리를 가진 이유도 단순히
확인을 위한 것이지."

저걸 믿어야하나 말아야하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납득했을텐데 자그마치 정치와 깊은 연관이 있는


황족이다.

속에 능구렁이를 몇 마리나 키우고 있는지도 모르니 덥썩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

나와 니콜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자 곁에서 지켜보던 리나가 행동에 나섰다. 그녀는 니콜이 아니라
정확히 나를 바라보더니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작. 황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 마이샬 경과 네 가문, 그리고 네 가족에게는 결단코 피해가 가는
일이 없을거라고. 오히려 정체가 드러나는 걸 막아줄 수 있어."
"...그러면 두 분께 무슨 메리트가 있는거죠?"
"제논 일대기의 다음권이 더 빨리 나오겠지. 그것 뿐이야."

정말로 그것 뿐일까. 나는 빙긋 웃으며 답한 리나를 미심쩍게 쳐다봤다.

저 미소가 가짜라는 건 여태까지 많이 보았기에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에 내가 머뭇거리며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알겠습니다."
"...누나?"
"부디, 그 약속을 지켜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니콜이 엄숙하면서도 단호한 음성으로 그들을 받아들였다.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이에 내가 당혹스럽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을 쯤, 니콜의 대답을 들은 레오르트가 만족에 찬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맙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마이샬 경을 건드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알아주게나. 제논 일대기의


저자이기 전에 마이샬 경은 우리 황실에서도 함부로 다룰만한 인물이 아니거든."
"과찬이십니다."
"절대 과찬이 아닐세. 마이샬 경은 그럴만한 인물이니까."

얼마나 대단한 업적이었으면 황태자인 레오르트의 입에서 저런 말을 나오게 할 수 있는걸까. 어쨋거나


다행히 한시름 놓은 것 같다.

아버지를 방패로 삼는 건 여러모로 찝찝했지만 아버지도 이해해줄 거라고 위안을 삼는 게 좋을 듯했다.


당연하지만 숙소에 돌아가자마자 편지를 쓸 계획이다.

'뭐라고 써야하지? 우선은...'

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편지에 무슨 내용을 적어야할지 고민하는 와중이었다.

어느새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레오르트와 니콜과 달리, 앞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그에 고개를 들어올리니 리나가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묘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중이었다.

나는 장인이 한땀한땀 공들여 만든 듯한 그녀의 미모에 잠깐 넋이 나갈 뻔했지만 다행히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았다.

"... ..."

그녀는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도대체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시선이 내 오른손에 향하고 있다는 건 얼추 알 수 있었다.

뒤이어 리나는 아래로 내렸던 시선을 다시 올리더니 내 얼굴과 마주했다. 내가 그런 그녀의 이상 행동에
의문을 가질 쯤이었다.

리나는 나와 시선을 교환하자마자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더니...

[잘 부탁해.]

소리없이 입모양으로 의미심장한 인사를 보냈다.

< 47 화 >

마이샬 남매와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난 이후였다. 아이작과 니콜이 먼저 자리를 떠나도 황족 남매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신 자리 배치는 약간 달라졌는데 본래 레오르트의 옆에 앉아있던 리나였으나 지금은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다. 니콜이 앉았던 그 자리 말이다.

리나는 맞은편 자리에 한가롭게 차를 마시는 레오르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자리잡혀있어 한폭의 모델 같은 모습이었다.

"오라버니."
"응?"

레오르트는 리나의 부름을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한 쪽 눈썹을 치켜뜬 채 왜 불렀냐는
표정이다.

리나는 이 방에 아무도 없겠다, 포커페이스 따위는 저 멀리 던져버리며 못 마땅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잔뜩


투덜거렸다.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어째서 사실을 그대로 알려준 거예요? 솔직히 그냥 숨겼어도 됐잖아요."

그녀의 말마따나 남매에게 이 정보를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도리어 알려주지 않고 꽁꽁 숨기는 편이
서로에게 윈윈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오르트는 그러지 않았다. 확인성을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지만 되려 의심만 한가득 품게
만들어버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리나조차 레오르트의 꿍꿍이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어요? 권위를 이용해 겁박하는 사람들로 보이겠죠. 이러다가 마이샬 경이
화나서 연재를 중단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아. 그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니콜이랑 아이작은 몰라도 마이샬 경은 우리 황실을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라서."

리나의 걱정과 달리 레오르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에 리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붉은 사자라며 명성이 자자했던 호크에 대해서는 들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그래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으나 자세한 건 모르고 있다.

하지만 레오르트는 자신보다 호크를 더 잘 알고 있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다음 대 차기 황제가 될


재목이라서 더 많은 사실이라도 아는 걸까.

리나가 그런 의문을 지니고 있을 때 레오르트는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한 입을 열었다.

"너는 마이샬 경이 일찍 은퇴한 이유를 알고 있어?"


"대충은요. 후유증 때문에 일찍 은퇴했다 들었어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PTSD 라고, 죽음을 넘나드는 전선에 자주 나서는 군인들이 곧잘 겪는 후유증이다. 호크도 '대외적으로'는
그 후유증이 심각해진 탓에 일찍 은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아무리 드래곤을 때려잡았냐니, 국경을 침범하던 수인 세력을 모두 몰아내었느니 해도 결국 사람에


불과하다. 기사 생활을 하는동안 너무나도 많은 동료의 죽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데다가 본인의
손에 피도 묻혔으니 괴로워하는 게 정상이다.

하물며 너무 유명해졌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수많은 압박을 받았다. 때마침 평민 출신이겠다, 무례한
귀족들 몇몇이 호크를 압박하여 못 살게 굴기도했다.

황실에서도, 그리고 군부 내에서도 그의 은퇴를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호크는 한사코 거부했다. 실제로
증상이 완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한 번씩 신전에 방문했으니 그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다.

"너는 그렇게 알고 있겠지. 하지만 실상은 달라. 큰 사건이 하나 터졌었거든."


"사건이요?"
"그래. 마이샬 경이 국경지대에서 살던 수인을 모두 몰아냈다고 생각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지.
도망친 수인들 중에는 제국으로 스며들기도 했어."
"설마... 그 말은..."

레오르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챈 리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부디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결과가 아니기를 빌었다.

뒤이어 레오르트는 손을 살살 내저으며 리나의 불안을 잠재웠다.

"다행히 네가 우려하는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어. 미수에 그쳤거든. 어떤 한 수인이 마이샬 경의


부인을 급습했다가 도리어 역으로 당했어. 마이샬 경이 부탁해서 우리 황실측이 그녀의 곁에 호위기사를
붙였기 때문이지."
"그래서 은퇴한 거예요? 그때처럼 자신의 가족이 위험해질까봐?"
"맞아. 은퇴 당시 마이샬 경이 이렇게 말했어. 일신의 무력이 남들보다 강해도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내 예상이지만 아마 아스카날 당시 친우를 잃었을 때부터 회의감을 느낀 것
같아."
레오르트는 리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리나는 처음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후유증 때문에 본인의 공적을 알리는 걸 자제하는 줄 알았는데 저런 내막이 숨겨져 있다니. 두
남매가 호크의 업적을 잘 모르는 이유가 있었다.

자기가 너무 유명해지면 그 반대급부로 애꿎은 가족을 노리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날테니까. 실제로 그


일을 한 번 겪었으니 방지 차원에서 업적을 알리는 걸 꺼려했을 것이다.

아스카날 사건에서도 호크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건 아마 황실에서 조치를 취한 것일터. 귀족과 군부


내에서 호크는 그야말로 '영웅'의 이름이었으니 윗선에서도 기꺼이 부탁을 들어줬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윗쪽에서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가던 호크의 입지를 약간이나마 줄일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윈윈이었을 것이다.

"...잠깐만요."

리나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머지않아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호크가 그런 이유 때문에 모든 명예와 명성을 뿌리치고 은퇴한 것이라면, 더 하지 말았어야하지 않았나.

그의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도 있는데 레오르트가 남매에게 한 행동은 호크를 심기를 거슬리게 만드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거라면 더 하지 말았어야죠. 안 그래도 후유증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


"아까도 말했지만 마이샬 경은 우리 황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야. 본인은 그냥 생색낸다고
귀찮아할걸? 어쩌면 이야기나 좀 하자고 저택에 초청할 수도 있겠지."

공작이나 후작도 아니고 일개 남작가가 황족을 초대한다는 게 말이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호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평민이 귀족의 신분을 받는 것조차 100 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하는데 심지어 호크는 백작의 작위까지 받을
뻔했다. 신분만 낮지 위상은 결코 고위급 귀족에 뒤지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다.

리나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레오르트는 무언가 거슬리는 게 있는 듯, 턱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그래도 조금 미심쩍은 부분은 있어."


"그게 뭐죠?"
"잡아떼면 그만인데 니콜이 순순히 인정했다는 걸까? 뭔가 마이샬 경을 방패로 삼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내가 아는 그녀라면 절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거라서."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겠죠. 두 사람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의심할 걸요?"
"부정할 수 없다는 게 마음아프네."

레오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작과 니콜을 불러 자리를 마련한 것도 제 딴에는 확실한 확인을
위해서다.

그러나 위치가 위치이다보니 두 남매에게는 협박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황족이나 되는
사람들이 따로 부르면 이 놈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 거지? 라며 잔뜩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레오르트는 다소 아쉽다는 뉘앙스로 본인의 심정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근차근 접근하는 건데 조금 성급했나 싶어. 흥분을 좀처럼 자제할 수 없었다는 게
뼈아프네. 다른 것도 아니고 제논 일대기라서."
"그것도 있지만... 오라버니는 정말로 마이샬 경이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고 생각하시나요?"
레오르트가 아쉬운 소리를 하자 리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레오르트는
반신반의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한 쪽 눈을 치켜뜨며 되려 의문을 드러냈다.

"당연하지. 그가 아니면 대체 누구라고?"


"...아니에요."

확신하는 레오르트의 말에 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흠?"

레오르트는 그녀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황족 남매와 이야기가 끝나고 니콜과 함께 바깥으로 나온 뒤였다. 우리 남매는 후식을 먹을 겸 적당한


카페에 들어서서 방을 잡아 서로를 마주보며 앉았다.

혹시 몰라 방음이 확실하게 되는 방을 잡는 건 당연했다. 조금 비싸긴 해도 둘이서 단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연중할까?"
"... ..."

내가 꺼낸 한 마디에 니콜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황금색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진 것이 꽤나


놀란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이내 착잡하게 변했는데, 아무래도 나를 안쓰럽게 생각한 모양이다. 그동안 나는
주문한 커피를 티스푼으로 휘적거리며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아버지를 방패로 삼을 필요가 있나 싶어. 그냥 마음편히 밝히면 안 될까? 어차피 다 들통난 마당에
숨길 필요도 없잖아."
"아이작.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돼. 레오르트 님이 솔직하지 못 하셔서 그렇지, 황실에서도 딱히
터치하지 않을거야."

왠지 레오르트를 변호하는 듯한 말에 고개를 슬쩍 들어올렸다. 니콜은 여전히 안쓰럽다는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에 나는 어째서냐는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누나는 레오르트 님을 잘 알고 있어?"


"어느 정도는. 그 분은 자기 본심을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어. 나도 딱 한 번 봤고."
"언제?"
"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내 기습 질문에 니콜이 대답을 회피했다. 그 반응에 약간 의심이 들었으나 그녀의 말마따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 가볍게 넘겼다.

"아무튼 레오르트는 님은 정말로 확인을 위해 자리를 마련한 가능성이 커. 솔직하지 못 하신만큼 행동으로
드러내는 편이거든. 무엇보다 레오르트 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잖아? 자기들쪽에서 압박하다가 연재를
중지한다면 욕을 먹는 건 자기들이라고. 사실상 서로에게 무기가 있는거야."
"제논 일대기의 인기가 떨어지면 우리 쪽이 더 안 좋은 거 아니야?"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래도 아니야. 인기가 떨어진다면 우리에게 향하는 관심도 줄어들겠지. 정 못
믿겠으면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아버지도 기꺼이 너를 위해 도와줄 걸?"
너무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니콜은 내가
침울해할까봐 어떻게든 위로를 해주는 거라고.

덕분에 기운을 약간이나마 되찾을 수 있으나 마음이 싱숭생숭한 건 여전했다. 나 하나 잘 살겠다고 가족이
고생하는 게 과연 옳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귀족들은 자기가 손해를 보는 걸 정말로 싫어해. 특히 손해 하나 하나가 치명적인 고위급


귀족이라면 더더욱. 그러니 황실에서도 너를 직접적으로 터치하는 일은 없을거야. 이건 정말이야."
"...그래?"
"응. 어쩌면 황실에서 추적하기 힘들도록 도와줄 수도 있어. 너에게 든든한 뒷배가 생기는 셈이지."

니콜의 말을 듣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어 사정을 설명하는 건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나 저래나 오늘따라 기력이 쪽- 쪽- 빨리니 힘이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 집필은 생략해야할 듯싶다.

"...아이작."
"응."
"너무 힘들면 의무적으로 연재할 필요는 없어. 글은 네가 좋아서 쓰는거니까. 너는 잘 모르겠지만 취미가
의무로 변하는 순간 열정이 식어버리거든. 누나는 그 열정이 식을까봐 걱정 돼."

니콜이 진심이 담긴 이야기를 꺼내자 나는 고개를 슬며시 들어올렸다. 걱정과 우려가 한데 섞여있는 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뒤이어 그녀는 손을 천천히 뻗더니 내 오른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오랜 세월동안 검을 쥐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살결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 누나는 네가 처음으로 글을 보여줬을 때가 기억나. 이거 한 번 보라며, 자기가 쓴 글이라며


기대된다는 눈빛으로 원고를 줬었지. 내가 진짜 재미있다고 했을 때 네 표정이 어땠는지 아니? 세상을
전부 다 가진 듯한 표정이었어. 그때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 네 얼굴을 봤었지."
"... ..."
"그런데 지금은 그 웃음이 점점 없어지는 게 눈에 보이더라. 세상이 네 글을 사랑하면 사랑할 수록 네
어깨에 얹어지는 부담감이 너를 짓누르는 거겠지. 그리고 누나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들은 그 부담을
덜어주고 싶어해."

아카데미에 향하기 전, 아버지가 내 중지 손가락에 난 펜혹을 어루만져주시며 말했었다.

아빠는 네가 자랑스럽다고.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스스로 얻어낸 명예라며, 자부심을 가지라고.

니콜의 진심어린 위로는 그때와 비슷한 감정이 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원망할 필요는 없어. 정말로 안 되겠다 싶으면 네 말대로 한동안 휴식하면 돼.
너에게 소설이란 행복한 취미지, 고통스러운 의무가 절대 아니니까. 알겠니?"
"...알았어."

속이 조금나마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가족이라서 그럴까, 현재 내 느끼고 있는 심정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다.

덕분에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가족이라는 존재는 나에게 그 무엇보다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니콜의 말대로 소설을 의무적으로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에 더 쓰고 싶었다.
내가 명예와 명성을 위해서 글을 쓴 것도 아니고, 단지 취미로 쓴 것에 불과했다. 어느순간부터 인기가
미친듯이 치솟아져서 연재에 대한 부담감이 생겼을 뿐이지.

나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니콜을 바라봤다. 니콜도 내 표정을 보고 안심이 되었는지 전보다 표정이
풀어진 모습이었다.

"그럼 10 권까지만 빠르게 쓰고..."

확실히 여유가 사라지니까 무언가 쫒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한 니콜의 위로를 듣고 굳게 결심할 수
있었다.

"3 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휴재해야겠다."

나도 이제 슬슬 여유를 가져야겠다고. 부담감을 지울 겸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적당한 시간이다.

니콜은 내 결심을 듣자마자 몸을 흠칫거리더니 이윽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래. 네가 그렇다면 뭐..."

대답과 달리 아쉬움이 듬뿍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 48 화 >

폭풍이 몰아친 뒤의 하늘은 언제나 맑다. 실제로 모든 걸 쓸어버릴 것 같은 폭풍이 지나가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운 분위기만 그 현장에 남는다.

하지만 폭풍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것을 쓸어버릴 정도로 강력하다. 땅 속 깊이 뿌리를 둔 거목(巨木)의


줄기는 힘없이 반으로 부러지고, 사람들이 쌓아올렸던 문명 또한 속절없이 자연의 힘 앞에 파괴된다.

그러니 사람들은 한없이 쾌창한 푸른 하늘을 보기 위해 폭풍을 견뎌낸다. 그 폭풍이 단어 그대로의


폭풍이던, 아니면 다른 의미의 폭풍이던 간에.

나 또한 폭풍을 겪고 나무 줄기가 부러짓듯이 무너질 뻔했지만 니콜의 진심어린 위로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그 이후에는 구름 한 점없이 맑은 하늘만이 나를 비춰주어 상쾌함을 선사했다.

현재 제논 일대기는 9 권을 집필하는 중이고, 10 권까지 집필을 한다면 널널하게 잡아 1 년이 소요될


것이다. 그리고 3 학년까지 쉰다고 했으니 나의 휴식 기간은 최소한 1 년은 보장되어 있는 셈이다.

그 생각이 들어서인지 몰라도 원고도 수월하게 적을 수 있게 되었다. 한 번 잡았다 하면 끝까지 가는


무시무시한 집중력도 있으나 탄력이 붙은 이유는 또 하나 있다.

[아이작. 네 누나에게 소식은 들었다. 황태자와 황녀가 너희를 찾았다 하더구나. 다행히 두 분이 네가
아닌 나를 작가로 착각해서 다행이긴 하다만 그래도 네가 침울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카데미에 방문하고 싶지만 나도 여유가 되지 않는구나. 그러니...(중략). 우리 가족은 전적으로 너를
응원한단다. 네 글이 잘 되지 않아도 우리는 상관없어. 우리 가족은 네가 웃는 걸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다. 이 아비를 이용한다고 너무 상심하지 마렴. 나는 기꺼이 너의 방패가 되어줄테니까.
아버지는 자식들이 기꺼이 기댈 수 있는 존재란다.]

바로 며칠 후 집으로부터 도착한 한 장의 편지, 아버지의 진심이 담긴 편지였다.

평소에는 이해가 쉽게끔 간단한 말만 적어서 편지를 보내시는 편인데 이번에는 어머니 못지 않게 장문의
편지가 왔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편지를 보고 살짝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는 이런 든든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하고, 도리어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이깟 글이
대체 뭐라고 매달리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러나 이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기에 더더욱 노력해야한다. 그게 제논 일대기가 되었든, 신작이 되었든,
아니면 학업이 되었든. 나는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니까.

이런 다짐 덕분인지 당초 두 달로 예상되었던 9 권을 무려 한 달만에 작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너무


빠르게 적은 탓에 중간중간 실수가 없는지 꼼꼼이 체크하고 집으로 발송시켰다.

원고에 묻은 코피 자국에 대한 설명을 적은 건 덤이다. 자식 사랑이 넘쳐나는 부모님이 괜스레 오해를


사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간만큼 변한 것도 있는 법. 대학생에게 그 한 달간 과제와 시험이라는


무시무시한 난관이 기다리는 것처럼, 아카데미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시험은 괜찮았어요?"
"음... 조금 어렵더라. 역시 외우는 걸로는 한계가 있나 봐. 주제가 그럴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모두가 그토록 전전긍긍하던 역사 시험 당일날.

나와 세실리는 시험을 모두 끝내고 강의실 바깥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세실리는 생각보다 시험이 꽤 어려웠는지 살짝 아쉽다는 표정이었는데 그녀의 말처럼 역사 시험은 단순히
역사만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엘레나 교수는 역사 강의 시간 때 역사 지식은 기본으로 깔고 갔으며, 그 역사 속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배워야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말 그대로 역사 지식보다는 역사라는 과목 그
자체에 집중한 듯한 강의였다.

그리고 이번 역사 시험에 나온 주제는 이렇다.

[본인이 생각하는 역사를 서술하시오.]

겉으로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잔인하리만큼 어려운 서술형 시험이다.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끔
간단하게 적어야할지, 아니면 구구절절 설명을 적어내려야할지 고민해야되니까.

잠깐 투덜거린 세실리는 고개를 나에게 돌리더니 궁금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작은 어렵진 않았어? 보자마자 슥- 적고 시험지를 제출했잖아."


"그걸 보셨어요?"
"처음으로 나간 학생이 너니까 당연히 볼 수밖에 없었지. 뭐라고 적었어?"

전생에서 역사와 관련된 명언이라면 빠짐없이 거론되는 말이 하나 있다. 누가 제일 먼저 말했는지 잘


모르지만 사람들 머릿속에는 똑똑히 각인돼 있는 구절이다.

이에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특유의 무뚝뚝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역사는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다. 그거 하나만 달랑 적고 나왔어요. 세실리 누나는요?"


"당연히..."
"안 말해줄 거죠? 다 알고 있어요."

세실리가 장난을 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쳤다. 그러자 세실리는 순간 당황했다가 이윽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여태까지 세실리를 관찰한 결과, 나에게 장난을 치기 전에 입꼬리를 먼저 올리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도
그걸 보자마자 장난을 칠 거라는 걸 예감하고 미리 선수를 친 거고.

"...어떻게 알았어?"

역시 본인의 습관은 자각하지 못 하는 법이라고, 세실리가 놀람 반 당황 반의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 했다는 반응이다.

나는 드물게 당황한 세실리의 표정을 빤히 바라봤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 가르쳐줄 건데요?"


"...야."
"저만 당할 수는 없죠."
"칫."

내가 단호하게 대처하자 세실리가 혀를 차며 고개를 홱- 돌렸다. 온몸으로 나 삐쳤소, 라는 제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으나 그닥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저렇게 삐져봤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에게 장난을 칠 게 분명하니까. 장난기가 많다지만 세실리는


그정도가 심해 슬슬 지쳐가던 참이었다.

"누나."
"왜 부르니?"
"누나는 저한테만 이런 장난을 치는 편이에요,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도 치는 편이에요?"

그래서 물었다. 리나와 있을 때는 단란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던 세실리이지만 유독 나와 함께 있을 때는


곧잘 장난을 잘 쳤다.

하지만 장난도 상대방이 받아줘야 장난이라고, 어느 순간부터 과한 감이 없지 않아 있어서 슬슬 지쳐가던


참이었다.

나를 장난감으로 취급하는 건지, 아니면 사람 대 사람으로 대우하는 건지 슬슬 헷갈릴 정도였다.

세실리는 내 질문을 듣고 붉은 눈을 깜빡였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아니? 리나랑 다른 사람한테도 장난을 치는 편인데? 나는 친한 사람이 아니면 장난은 절대 안 쳐."


"음... 그래요?"
"...그건 왜 물어? 혹시 기분 나빴니?"

내가 미심쩍다는 반응을 보이자 세실리도 분위기가 이상해졌다는 걸 인지했는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불안해하는 세실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그녀의 나이를 상기했다. 그녀는 무려 100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마족이다.

그 세월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느꼈을텐데 세실리는 지금처럼 의외의 부분에 미숙한 경향이 있다.
그것이 인간 사회에 처음으로 발을 디뎌서인지 아니면 그녀가 자라온 환경 때문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기분 나쁜 건 아니고 약간은 자제해줬으면 해요. 방금처럼 장난보다는 재밌는 이야기도 서로 나누고
싶으니까."
"...알겠어. 미안해. 내가 너무 과했나 봐."

세실리가 내 부탁에 미안하다는 얼굴로 사과했다. 나는 분위기가 어두워질 기미가 보이자 서둘러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궁금한 게 있는데, 왕국에서 지낼 때는 장난을 친 사람이 없었어요?"


세실리는 헬리움의 공주다. 위치상으로는 리나와 엇비슷하다.

그러니 인맥을 쌓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사람과 만났을테고, 그 인연이 이어져 친구로 발전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세실리는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라는 의미다.

"아빠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어. 형제자매라 할 사람도 없는데다가 하나같이 내 힘만 보고 다가 온


사람들밖에 없었거든. 아무래도 내가 다음 대 마왕으로 예정돼 있다보니 장난도 쉽게 칠 수 없더라."
"그럼 시녀는요? 공주이니 시녀도 있을 거 아니에요?"
"옛날에 그랬지. 그런데 좀...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 적어도 헬리움에서는 장난을 칠 사람이 아빠를
빼면 없다고 해도 무방해."

아무래도 별로 좋지 못한 기억이 있는 모양이다. 하물며 세실리는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니 그때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을 것이다.

이에 나는 어색하게 웃는 세실리를 바라보면서 급히 사과했다. 괜히 분위기를 전환하겠다고 물은 것인데


오히려 상황이 더 이상하게 흘러갔다.

"죄송해요. 제가 안 좋은 기억을 건드린 모양이네요."


"아냐. 아냐. 그래도 덕분에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아무튼 다음부터 과도하게
장난치는 건 자제할게. 알겠지?"
"네."
"그나저나 아이작은 누구를 기다리는 거야?"

아까 내가 그랬듯이 세실리도 어색해진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나 또한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마리요. 시험을 잘 쳤나 궁금해서."


"그것 뿐?"

세실리가 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나와 마리 사이에 무언가 있는 걸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그런 관계는 절대 아니다.

내가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마리가 나에게 친구 이상의 호감을 갖고 있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많이 바쁜 관계로 마음을 받을 여력이 없다.

'비밀도 차근차근 알려줘야할테고...'

만약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로 만약에 마리와 정식으로 연애를 하게 된다면 그때는 아마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밝히고나서가 아닐까.

이전까지는 제아무리 친한 사람이어도 가족을 제외하면 비밀을 숨긴다는 마인드였지만, 가족들의 진심어린
위로를 받고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비밀은 여전히 숨기되, 내가 믿을만한 사람에게는 암암리에 단서를 흘리는 것으로.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알아도 단순히 그래? 라는 반응이 나오는 사람들 말이다.

마리는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녀의 가문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마리는
나를 이용할만한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비밀을 밝히면 많이 놀라긴 하겠다만은.

물론 이미 칠칠맞게 흘린 단서가 몇 개 있기는하나 그거는 넘어가자. 그건 어디까지나 순전히 내 실수다.


"정말 그것 뿐이에요. 그것 외에는 없어요."
"흐응. 그래?"

세실리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입술이 달싹거리는 걸 보아 장난을 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듯했다.

나는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가 강의실 문 쪽을 바라봤다. 시간이 흘러 학생 몇몇이 밖으로 나오고는


있으나 익숙한 흰색 머리카락은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싫어하던 역사였으니 조금 오래 걸리기라도 하는걸까. 아니면 나와 세실리가 너무 일찍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제논 일대기 9 권이 슬슬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하염없이 기다리다 지루하기라도 한 걸까. 세실리가 뜬금없이 제논 일대기 9 권에 관한 말을 꺼내더니


나를 힐긋거렸다.

나로서는 저절로 흠칫할만한 사항이지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세실리였기에 그나마 괜찮았다. 만약 리나가
저 말을 꺼냈다면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크게 당황했겠지.

이에 나는 숨을 한 번 몰아쉬고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며칠 전 원고를 집으로 보냈으니


9 권은 곧 있으면 나올 것이다.

"나오기야 하겠죠. 언제 나올지는 작가만 알겠지만."


"그렇겠지? 한 달에 한 권씩 냈으니 1 학년이 끝날 때 쯤이면 완결되지 않을까?"

그걸 왜 저를 보면서 묻는거죠. 나는 세실리가 잔뜩 기대가 된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떨떠름해질 수밖에


없었다.

모임 이후로 세실리는 제논 일대기를 언급할 때마다 나를 바라보는데, 나로서는 실로 당황스럽기 그지


없는 행동이다.

'...그때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이때문에 저런 의문까지 들었다. 안 그러면 세실리가 저런 행동을 취할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그녀는


나를 제논 일대기 저자로 의심하는 중이다.

나는 싱긋 웃는 세실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슬며시 강의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진정 나를


의심하는 거라면 말 한 마디 한 마디 조심할 필요성이 있다.

이미 엎지른 물이 좀 많긴하다만 지금부터 조심하면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글쎄요. 그건 작가 마음이겠죠."
"난 되도록이면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짧은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길더라고."

은근슬쩍 부추기는 듯한 뉘앙스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 싶은 것을 최대한 인내했다.

'죄송하지만 10 권까지 내고 1 년 넘게 휴재할 생각입니다.'

사실 9 권을 한 달만에 제출한 것조차 현재 시간이 없는 나에게 대단한 수준이다.

하지만 가족들의 응원에 힘입어 한 달만에 9 권을 낼 수 있던 것이지, 10 권은 최소한 2 개월이 소요될


뿐더러 그 이후에는 1 년 넘게 휴재를 할 계획이다.
정말로 세실리가 나를 저자로 의심하고 있다면, 휴재 공지를 낸 이후에 약간의 변화가 있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다. 어쩌면 나를 향해 직접적으로 제논 일대기의 저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

나는 그때를 대비하면 그만이다. 우선은...

'시험이 다 끝날 때까지만 쉬어야겠다...'

연이은 과제와 시험 폭탄으로 피로가 쌓인 몸을 풀 생각이다. 나는 몰려오는 피로감에 콧잔등을 꾹- 꾹-


지압했다.

마치 엔진을 너무 심하게 돌리다보니 과열된 듯한 느낌이랄까. 주말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다만 역시


집필과 학업을 병행하는 건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심지어 지난 번에는 코피까지 흘려서 원고에 묻지 않았던가. 피곤하면 곧잘 코피를 흘리는 체질이라
여러모로 신경쓰는 편이 좋다.

"많이 피곤해 보이네. 괜찮아?"

세실리도 내가 피곤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조금 피곤한 것 뿐이에요.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너무 무리는 하지 마. 아무리 성적이 중요하다지만 가장 중요한 건 네 건강이니까."
"당연히 알고 있죠. 그래도 해야하는 건 해야하지 않겠어요?"

내가 애써 웃으며 말해도 세실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세실리에게 있어서 나는 몇 안 되는


친구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래도 정말로 몸이 조금 피곤한 것 뿐이지, 그외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에 나는 걱정말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정말 괜찮다니깐요? 잠 좀 푹 자면 문제없어요."


"...알겠어. 괜히 딴 거 하지 말고 쉬어야해?"
"물론이죠."

이때까지만 해도 늘 그랬듯이 평범한 생활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사람의 죄악을 7 가지로 나눈 제논 일대기. 과연 교단의 반응은?]


[루미너스 교단. 칠죄종은 신학의 근원을 재정립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미 수많은 학자들이 학문
하나하나를 비교하면서 연구 중이며 놀랍도록 맞아떨어진다.]
[각각의 죄악을 담당하는 종족들이 모두 달라... 특히 '교만'을 맡고 있는 엘프는 실로 충격적이라 할 수
있어...]
[칠죄종 중 가장 강한 죄악은 무엇일까?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 알겠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교만'으로
예상...]

전생에서 요긴하게 쓰이던 칠죄종이 예상치 못한 파급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8 권과는 차원이 다른 반응에 나는 뒷목을 매만졌다.

"...이러다 신성모독으로 잡혀가진 않겠지?"

< 49 화 >
'신'은 신도들에게 있어서 그 누구보다 의지가 되는 영적인 존재다. 직접적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더라도
실존한다고 굳게 믿으며 신들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려 세상을 이롭게 만든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지구'의 이야기고, 이 세상은 정말로 신이 존재하기에 결코 신을 부정할 수


없다. 신을 정면으로 부정하게 되는 순간 천벌이 내려지며 '신성력'이라는 특수한 힘을 통해 본인들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신을 부정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신학'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학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족을 불문하고 매우 중요한 학문이니 성직자라면 반드시 배워야하는
것들 중 하나다.

하지만 신학이 발달되었다하더라도 여러모로 부족한 점은 있었다. 신이 내린 신탁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은지, 또한 역사에서 신이 신도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지에 대해 다루는 편이다.

중구난방이라고 할 수 있고, '틀'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학자 및 현자들이 이 '틀'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거의 다 포기했다.

신들이 사람과 함께 한 역사는 상상 그 이상으로 길었고, 그 역사동안 받은 가르침들이 워낙 많아서


정립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신학 또한 일종의 역사라고 볼 수 있지만 많은 성직자들은 언젠가 학문을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단순히 신이 사람들과 함께 한 역사가 아닌, 진정한 '신학'을 말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결실이 이제 막 맺으려는 중이다.

"단순히 이 죄악들을 갖고 있는 게 정말로 죄인건가? 나는 아니라고 보오. 실제로 루미너스 님께서도


한때 모라 님을 질투하신 적이 있었소. 하지만 직접적으로 죄를 저지르진 않았지."
"그 죄악을 가지고 행동을 저질러야 그 죄악이 성립한다는 것이오?"
"그렇소. 하지만 일시적인 건 괜찮으나 계속 그 죄악을 갖고 있다면 그것 또한 죄가 되겠지."

전체적으로 하얀 배경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열띈 토론을 나누는 중이었다.


대부분 흰머리가 성성하고 주름이 진 노인들이었으며, 그들의 입고 있는 옷에는 교단을 상징하는 문양이
금빛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큰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루미너스 교단의 신도들이었으나 단순한 신도가 아니다. 교단


내에서도 영향력이 강한 대주교들이었으며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이기도하다.

이들이 한 곳에 모여 토론을 하는 건 그닥 이상하지 않지만, 이전과 달리 열정을 갖고 의견을


주고받는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본래 일정 주기마다 한 곳에 모여 토론을 하는 대주교들이나 형식적인
절차만 오고 갈 뿐, 실제로 득이 되는 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전혀 달랐다. 꽉 막혀있던 댐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처럼 다양한 의견이 오고 갔으며
그에 따른 반박도 수도 없이 쏟아져나왔다.

"특히 교만의 죄는 눈 여겨 보아야 하오. 그대들도 아시다시피 예로부터 교만한 자들은 반드시 몰락했지.
멀리 가지 않아도 엘프를 보시면 될 것 같소. 이 작가도 그걸 알기에 교만을 담당하는 악마를 엘프로
넣었더군."
"교만이라... 다른 건 연구해봐야 알겠지만 교만의 죄는 부정할 수 없겠군. 루미너스 님께서도 오만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라는 가르침을 내리셨으니."
"교만은 그렇다치고 다른 죄악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 것 같소?"

대주교들이 한 곳에 모여서 토론을 나누는 이유는 다름아닌 이번에 언급된 제논 일대기 속 내용 때문이다.
최근에 발간된 제논 일대기 속에는 악마측 간부들이 등장했는데, 아이작은 이들을 '칠죄종'의 설정을
투입했다.
지구였다면 흔하디 흔한 설정 중 하나였기에 아무 생각없이 넘겼겠지만 이곳은 사뭇 달랐다. 칠죄종이라는
개념은 성직자들에게 큰 충격을 선사하기 충분했다.

죄악을 7 가지로 딱딱 나누는 것도 놀라운데 문제는 그 죄악들이 인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종족에게 통용되기 때문이다.

칠죄종이라는 개념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성직자들에게 일종의 틀, 즉 패러다임을 제시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여태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이 다양한 이론을 선보였으나 칠죄종만큼 모두가 납득할만한
개념은 없었다.

하물며 제논 일대기가 그저 그런 소설이었다면 모를까, 세상에 끼치는 파급력이 어마어마하다보니 이목이


끌릴 수밖에 없다.

"헌데 정말로 소설에 나온 이야기를 차용해도 될지 모르겠다만... 이 저자가 신학에 대해 얼마나 소양이
깊은지 알 수 없잖소?"

물론 긍정적인 의견만 있는 게 아니라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다. 소설에 등장한 개념을 그대로 학문에
적용시키는 것이 옳은가? 라는 정론이었다.

실제로 그들의 의견은 일리가 있었지만...

"그럼 한스 대주교는 칠죄종만큼 확실한 개념을 제시할 수 있겠소?"


"...그건 아니오."
"우리도 한스 대주교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소. 실제로 이 저자는 성직자가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심도있는 연구를 한 건 분명하오. 그게 아니라면 칠죄종을 선보이지도 않았겠지."

거의 다 반박당했다.

제논 일대기의 영향력이 강한 것도 있지만 개념 자체가 워낙 신선했기에 본인들이 착각해버린 것이다.


제논 일대기의 저자는 경험이 많은만큼 신학에도 능통하다고.

여기에 더해서 사람들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나이 많은 현자로 추정하고 있다. 아이작처럼 20 살도 되지


않은 새파란 애송이가 아니라.

아이작 입장에서는 전생에서 요긴하게 쓰이던 설정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나 이들에게는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설정이 신학을 뒤흔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칠죄종이라는 개념은 우리 루미너스 교단만 국한된 것이 아니오. 신학이라는 개념 자체에


적용시켜야 옳겠지."
"그럼 다른 교단과 합동 연구를 해야한다는 소리오?"

대주교 중 한 명이 얼굴을 찌푸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루미너스 교단은 세력이 가장 넓은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처럼 다른 교단을 싫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다른 교단과의 사이가 좋은 편이다. 루미너스 교단의 세력이 가장 큰 것이지, 다른


교단의 힘이 약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노인은 한 대주교가 불만을 표시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지금은 우리 교단에서만 연구하는 것이 좋겠소. 모라와 히르트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고
있으니."
"흠... 알겠소. 그러면 이 저자를 찾는 건 어떻게 할 생각이오?"
대주교는 제논 일대기의 작가, 아이작을 찾을거냐고 물었다. 그에 대주교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비록 착각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토록 제시하기 어려웠던 틀을 제시한 아이작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찾아서 칠죄종의 개념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된다. 신문에서 보았던 그의 건강 상태 때문이다.

"당장은 안 되오. 듣자하니 건강도 좋지 않다고 했으니 괜히 찾아갔다간 부담을 줄 수도 있소."


"아. 원고에 묻었다는 피 말이오? 단순히 코피라고 했잖소."

이번에 제시된 칠죄종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긴 했으나 사람들은 그보다 출판사가 알려준 아이작의 건강
상태를 걱정했다.

제출된 원고에는 피가 묻어있었는데 단순한 코피였으나 작가의 건강 상태가 우려된다고.

어찌 보면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제논 일대기의 작가이다보니 걱정할래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본디 예술가들은 자기 몸을 관리하지 않고 과로하는 게 일상이오. 사흘밤낮 그림을 그리거나 소설을


쓰다가 과로로 쓰러진 예술가들이 한 둘이 아니지."
"그렇소? 난 예술가가 아니라 잘 모르겠군."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자기 일에 몰두하다가 건강을 해치는 일이 허다하다. 밤낮이 바뀌는 건 물론이고


운동을 등한시하는 바람에 체력도 낮아진다.

아이작은 어디까지나 '취미'로 글을 쓰는 것이었기에 다소 자유로운 입장이었지만 최근에는 부담감 때문에


무리를 한 경향이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가족의 위로를 받아 나아진 편이다.

"아무튼 간에 칠죄종에 관한 이야기가 더 나오기 전까지는 학문을 재정립하는 것이 좋겠소. 작가와 직접


만나지 않는 이상 더 정확한 이론을 들을 수도 없을테니까."
"알겠소. 그런데 엘프의 반응은 어떤지 알고 있소? 교만의 죄가 엘프였으니 반응이 나올만도한데."

대주교의 물음에 토론을 지도하던 노인이 피식거리며 입을 열었다.

"당장 찾으려고 하겠지. 안 그래도 종족전쟁 당시 본인들의 교만 때문에 전쟁을 대차게 말아먹는데 그걸
콕 집었으니까."

*****

9 권이 세상에 등장하고 칠죄종이니 뭐니 하면서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신학의 연구 진척도를 더욱 높였다니, 이토록 상세하게 구분한 적이 없다니 등등.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전생에 자주 쓰였던 칠죄종을 그대로 가져온 건데 황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이없는 건 출판사에서 내 건강 상태를 걱정하는 기사를 올렸다는 거다. 원고에 묻었던
코피를 보고 내 건강 상태가 심히 걱정스럽다나 뭐라나.

거기다 예술가들은 자기 몸을 해치면서까지 작품을 완성하려는 경향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다양한 가설들이 오고 갔지만 그 중 압권이었던 건 바로 내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독자들은 나를 나이 지긋하게 드신 현자로 추측하는 중인데, 그것과 맞물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다.
앞날이 창창한 17 세를 시한부 인생으로 둔갑시킨 그들의 착각에 경탄할만한 했지만 지금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아이작.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왜 그래요? 저 정말 팔팔하다니까요."

나는 입 안에 든 음식을 목구멍 너머로 넘기면서 맞은편에 앉아있는 세실리를 바라봤다. 걱정과 불안이
한가득 담겨있는 세실리의 예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찌라시 아닌 찌라시가 나오고나서 세실리가 나를 걱정하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는 거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 때는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단 둘이 있게 된 지금은 아예 대놓고 물었다.

현재 우리 둘은 식당에서 학식을 먹는 중이었는데, 리나는 바쁘다는 이유로 먼저 떠났고 마리는 수업을


같이 듣지 않았다.

'진짜 의심하고 있나보네.'

지난 번에는 어디까지나 예상이었으나 현재 세실리의 반응을 보고나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제논 일대기의 저자로 추측하고 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 건강 상태를 우려하는 기사가 나오자마자 저런 질문을 하니 확신할 수밖에 없다.


나는 차마 걱정을 숨기지 못 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특유의 무뚝뚝한 음성으로 얘기했다.

"제 어디가 아파보인다는 거예요? 이렇게 멀쩡한데."


"그냥 혹시나 해서. 최근에 코피가 난 적이 있어?"
"없는데요."

아예 대놓고 묻지 그래. 나는 헛웃음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억눌렀다.

그래도 세실리처럼 아름다운 미녀가 손수 걱정해주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내 건강을
신경쓰고 있구나 생각해서 마음이 편해질 정도다.

다만 이 주제가 이어지는 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이에 나는 잠깐 식기를 내려놓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세실리 누나는 이번에 나온 9 권은 읽어보셨어요? 이번에는 아예 대량으로 풀어서 그나마


낫다는데."
"물론 읽었지. 서점에 한 권만 남아있던 걸 내가 샀는걸? 아이작은?"
"전 누나가 사준 걸 읽었어요."

원래 제논 일대기는 신권이 나올 때마다 하루도 안 되어 매진당한다. 특히 지난 번에는 반나절도 안 되어


매진당하는 신기록(?)을 경신했다.

그리고 출판사도 그 부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대량으로 풀어버렸다.


듣자하니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다는데 그게 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덕분에 제논 일대기 9 권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설령 그 날 모두 매진되었더라도 이틀 후에 다시


책들이 쌓이니 인내만 충분하다면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럼 칠죄종에 대한 것도 알겠네?"

세실리는 내 대답에 어두운 표정을 지우고 밝게 말했다. 역시 그녀는 밝은 표정이 잘 어울린다.

"당연히 알고 있죠."
"색욕을 담당하는 간부도 알고 있지?"
세실리가 붉은눈을 반짝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에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 행위 하나만으로도 은은한 색기가


흘러나와 분위기가 삽시간에 묘해졌다.

뒤이어 세실리는 매력적인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건강을 걱정해줬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그녀만의 고혹스러운 목소리였다.

"이름이 릴리스였지? 서큐버스의 후예이자 악마가 된 마족."


"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과 붉은 눈동자. 목소리에는 색기가 가득하다는 묘사가 있었지. 몸매도
육감적이고 말이야. 근데..."

세실리는 잠깐 말을 흐리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툭- 내뱉듯이 말했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 묘사를 볼 때마다 왠지 내가 떠오르더라?"

< 50 화 >

나는 할 말도 잊은 채 세실리를 쳐다봤다. 그녀는 턱을 괸 채 요망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는


중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숙한 미모를 지닌 세실리가 저런 포즈와 목소리로 말하니 뭐랄까. 파괴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비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섹시한 외모인데 포즈, 표정, 목소리 이 세 가지가 합일을 이루어 빠져들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면 정신을 못 차리고 그대로 빠져들었겠지. 다행히 평소 그녀와 함께 다니면서


어느정도 면역이 생긴 상태다. 물론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크흠... 큼..."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난데없이 훅


찔러들어오는 기습 질문 때문인 것도 있지만 세실리의 분위기가 너무 야릇해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그래도 어떻게든 가라앉힐 수는 있었다. 나는 한 쪽 눈을 힐끔 뜨며 세실리와 마주쳤다.

세실리는 내가 대답을 하기 전까지 그대로 있겠다는 듯, 아까와 모습 그대로다.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진정되었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진짜 서큐버스의 후예인가?'

어쨋거나 간에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눈치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네요."

실제로 색욕을 관장하는 간부, 릴리스의 외모는 세실리와 놀라울만치 흡사한 편이다. 릴리스는 악마로
타락한 마족으로 세실리처럼 흑발적안, 그리고 노출이 심한 복장 덕분에 농염한 몸매를 뿜낸다는 설정이다.

물론 세실리와 완전히 똑같다는 말은 아니다. 눈물점이 있어 매력을 더해준다거나, 머리 스타일이


다르다거나, 어깨에 한 쌍의 악마 날개가 있다거나, 마지막으로 노출이 심한 복장도 아니다.
지난 번 모임에서 봤던 드레스라면 모르겠지만.

아무튼 세실리를 참고한 건 맞지만 몇몇 부분은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변명하자면 세실리를 참고한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 든 릴리스가 내 앞에 존재하는 격이다.

'그나저나 왜 저런 말을 하는거지? 떠보는 건가?'

나는 한 쪽 눈만 뜨며 세실리의 얼굴을 확인했다. 뭐가 재미있는지 싱글벙글 웃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세실리는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반쯤 확신하는 중이다. 다만 완전한 확신이


아니니 저런 말을 꺼내어 내 반응을 확인하려는 게 아닐까.

내가 그 의문을 지닌 동안 세실리는 내 대답을 듣고 전보다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뭇 남성의 마음을


뒤들듯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래? 너무 똑같아서?"
"네."
"흐음..."

무뚝뚝한 내 대답에 세실리는 미소를 유지하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실로 부담스러운 눈빛에 시선을
스윽- 돌려버렸다.

왠지 모르겠지만 세실리의 붉은 눈과 마주하면 마주할 수록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녀의 미모는 반칙이라 해도 무방한 수준이다.

"알았어. 뭔가 기분이 좋네."

세실리는 방긋 웃더니 뭔가 후련한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반응을 보고 속으로 들켰나?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싶었다.

어쨋거나 그녀가 풍기던 매력적인 분위기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화끈거렸던 얼굴은 가라앉았고 눈치없이
두근거리던 심장도 점점 차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살짝 피곤해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건 왜 물은거예요?"
"그냥 물어본 거야.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싶었거든."
"아까도 말했지만 누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자의식 과잉이라고 했을 거예요."
"흐응."

내 대답에 세실리가 야릇한 비음을 흘리더니 눈매를 반쯤 접었다. 접힌 눈매 사이로 붉은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그에 살짝 불안한 마음을 지녔을 때 쯤, 세실리는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이더니 나에게 속삭였다.

"아이작이 생각하는 내 모습이 그렇다는 거지? 농염한 외모와 몸매를 지닌 서큐버스로?"


"... ..."

어떻게든 비밀이 밝혀지는 걸 피하려다가 되려 본심이 까발렸다. 나는 세실리의 그윽한 표정을 보고


헛웃음을 흘리는 걸 참지 못 했다.

이게 바로 100 년 이상 살아온 마족 공주의 연륜이라는 걸까. 대화를 진행하면 진행할 수록 수렁에


빠져들어갈 듯한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대답조차 못 하고 있을 때, 세실리는 내 헛웃음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상체를 물렸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식당에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파악하고는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얼굴의
미소는 여전했다.

"아이작. 혹시 입학할 당시에 그런 소문 들었어? 내가 서큐버스의 후예라는 소문."


"당연히 들었죠."

비밀이 아닌 본심이 나왔겠다, 긴장이 탁- 하며 풀려서 담담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비밀을 들킨 것보다
본심이 들킨 게 더 부끄러웠다.

세실리는 내 대답을 듣고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봤다. 혹시나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있는지


파악하기 위함인 것 같다.

뒤이어 그녀는 소리가 약간이라도 새어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한 손을 입 옆에 갖다대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약 그 소문이 진짜라면 믿을거야?"


"음..."

나는 세실리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싱글거리는 미소만 본다면 장난인 것 같으나 말투는 매우 진지했다. 이를보아 진실일 확률이 크다.

그런데 세실리가 정말로 서큐버스의 후예였다니. 내심 의심하고 있었지만 소문으로 듣는 건가 본인의


입으로 듣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이에 잠깐 놀랐지만 나는 그저 그렇구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마 믿을 거 같네요. 그런데 서큐버스의 후예라고 해도 바뀌는 건 없지 않아요?"

하지만 변하는 건 없다. 피를 진하게 이어받았더라고한들 세실리는 악마가 아니라 마족이다.

문헌 상에서 나오는 서큐버스는 전생과 비슷하게 남성의 정기를 흡수하며 힘을 키우지만, 여기는 진짜
악마답게 정기를 죽을 때까지 흡수한다.

한 마디로 정기를 빨리는 남자 입장에서는 복상사를 한다는 것이다.

아, 물론 좋다고 생각하는 건 금물이다. 역사에 기록된 바로는 성기에 피가 나와도 관계를 이어나간 걸
물론이고 고환을 잡아뜯었다는 기록도 있다. 정말로 끔찍하지.

"여러 가지가 있지. 예를 들어..."

세실리는 말을 흐렸다가 드물게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양볼에 홍조가 깃든 걸 보아 자기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사안인 듯했다.

과연 비밀이 무엇이길래 평소 야시시한 농담도 서슴치 않고 꺼내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일까. 나로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그녀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칠흑색 머리카락을 베- 베- 꼬더니 창피하다는 어조로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생리 때 성욕이 폭발한다던가?"
"... ..."
"서큐버스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유독 참기 힘든 편이야. 그래서... 여기까지만
말할게."

본인도 말해놓고 창피했던 건지 그녀의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졌다. 나 또한 어안이 벙벙해져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살아온 세월은 100 년이 넘으니 어쩌면 그 세월동안...

"호, 혹시나 오해할까봐 하는 말인데 나는 그런 경험은 전혀 없다? 욕구도 하루종일 명상만 한다면 참을
수 있어."

내가 딱 그쪽으로 생각이 가기 직전 세실리가 다급하게 오해를 풀었다. 아무래도 내 표정을 보고 생각을


읽은 것 같은데 오히려 이게 더 이상했다.

100 년이라는 세월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길다. 전생과 현생을 합친 내 나이가 40 살도 안 되는데
세실리는 무려 100 년을 넘게 살아왔다. 그 세월 동안 많은 일들이 발생했을텐데 연애 경험이 없다는 건
약간 믿기 어려웠다.

나는 드물게 당황한 세실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조심스러운 투로 질문했다.

"...100 년이 넘는 세월동안 남자 경험이 없었다고요? 그럴 수가 있나?"


"...전에도 말했지만 아빠를 제외한다면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 그리고 나는
헬리움의 공주이니 스캔들이 나면 정치적으로 곤란해지니까."
"음... 하긴 그렇겠네요."

세실리나 리나처럼 통치자의 자식이라면 몸가짐에 더욱 신경써야할 것이다. 전생에서도 정치인들의


아들딸에게 안 좋은 소문이 난다면 그 부모까지 싸잡아 욕을 먹는 일이 태반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세실리는 다음 대 차기 마왕으로 예정돼 있는 헬리움의 공주다. 작은 소문이라도 났다간


여러모로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일 것이다.

'그럼 나랑 같이 있는 건 괜찮은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번 모임 당시 팔짱을 끼는 건 일종의


포상이라고 했는데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니면 문화 차이에서 발생한 것일 수도 있고. 나는 그 의문이 떠오르자 세실리에게 궁금한 점에 대해서


물었다.

"지난 번 모임에서 팔짱을 끼는 것 정도는 괜찮은 거예요?"


"응? 아, 그거? 내가 그때 팔짱은 낀 건 포상 개념이라 상관없어. 대신 그 이상은 안 돼. 예를 들어
뿔을 만진다던가 아니면 서로 깍지를 낀다던가."

얼굴에 올라온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손부채질을 하던 세실리가 설명했다. 인간인 나에게는 팔짱을
낀다는 부분이 더 이상했지만 문화 차이라며 넘겨짚었다.

이후로 서로에게 오고 가는 대화가 없어 단절되려던 찰나, 세실리는 눈치를 살살 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는지 얼굴에는 미약한 붉은빛이 은은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이작은 이런 비밀 같은 거 없어?"
"비밀이요?"
"응. 남들에게는 차마 말하기 힘든 비밀. 사실 내가 연애 경험이 없는 이유도 서큐버스의 후예기
때문이거든. 너도 알다시피 서큐버스는 남자의 정기를 죽을 때까지 흡수하잖아? 헬리움의 남자들은 그
소문을 철썩같이 믿는 바람에 나를 꺼려하는 편이야. 독이 든 꽃이라고 생각하는거지."
"오..."

뭔가 신박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나는 입술을 동그랗게 말며 감탄했다.

나야, 세실리가 서큐버스든 서큐버스의 후예던 상관하지 않으나 마족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본인들이 악마의 후손인만큼 그런 부분에는 민감한 듯했다.

인간인 나조차도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비밀이라..."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후 작게 중얼거렸다. 맞은편의 세실리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든 것이 포착되었다.

그녀가 나에게 비밀을 알려준 걸 보면 신뢰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걸까. 세실리는 살살 떠볼지언정
리나와 달리 내 입으로 말하기 전까지는 추궁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나를 제논 일대기의 저자로 확신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니었으면 이런 상황을


만들지도 않았겠지. 본래 비밀은 자기 입으로 밝혀야 그 진정성이 있는 법이다.

'과연 믿을만한 사람일까?'

세실리와 인연을 맺은지 두 달이 흘렀으나 아직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것들이 많다. 비밀을 스스로
밝혔다고한들 그녀를 신뢰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하기 꺼려한다면? 오히려 그녀가 실망할 수도 있다. 자기는
비밀을 알려줄 정도로 믿고 있는데 나는 그렇지 않구나라면서.

나는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힐긋 시선을 위로 들어올렸다. 긴장한 낯빛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중인


세실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나."
"응. 아이작."
"누나는 입이 무거운 편이에요?"

세실리는 내 진중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표정이 매우 진지한 것이 장난을 칠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콧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최소한 조용한 공간에서 말해야
좋을 것 같다.

이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세실리에게 조용히 권유했다.

"일단 잠깐 조용한 곳으로 갈까요?"


"...응!"

내 권유를 들은 세실리의 얼굴에 미소가 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 51 화 >

"흐흐흥~ 흥~"
백발의 미소녀, 마리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길을 걷고 있었다. 항상 품위를 지켜야 하는 귀족의
모습과 한참 동떨어진 위풍당당한 걸음걸이였다.

또한 그녀는 품에 책 한 권을 소중히 감싸는 중이었는데 새로 발간된 제논 일대기 9 권이었다.

'진짜 운이 좋았어.'

제논 일대기는 신작이 나왔다하면 한 시간도 안 되어 품절되는 경이로운 인기를 자랑한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출판사에서 제논 일대기가 나온다는 소식을 뿌리면 그때부터 전쟁이라고.

사람을 고용해서 서점 앞에 하루종일 대기시키는 건 물론이고, 사재기와 더불어 사기까지 발생하는 등.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들이 속속 등장했다.

다행히 각각 나라에서 심각성을 알아차려 엄벌에 처하자 그런 해프닝은 사라졌지만 서점 앞에서 대기하는
사람들은 그대로였다. 이 부분은 불법도 아니었던지라 막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한 사람이 두 권 이상 구매하는 것도 철저하게 막았다. 그 하나를 막기 위해 신원 조회를 위한 마법


기술까지 발명됐다. 만약 이 사실을 아이작이 듣게 된다면 어이없어 하겠지만 현재 그는 아무런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제논 일대기는 속속 품절되기 일쑤였다. 레킬리스 가문의 딸, 마리조차 사람을 시키거나


가족에게 부탁하지 않는 이상 제논 일대기를 직접 구매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이번에는 아빠한테 부탁할 일도 없겠네.'

하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달랐다. 제논 일대기가 상상 그 이상으로 엄청난 판매량을 자랑하자 출판사
측에서 작정했기 때문이다.

원래도 모든 인쇄소를 갈아넣어 공장마냥 제논 일대기를 찍어냈지만 그것마저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아예
새로운 대형 인쇄소를 하나 신설하고 새로운 기술까지 도입시켰다.

그덕분에 귀족조차 구매하기 어려웠던 제논 일대기를 평민조차 쉽게 얻을 수 있었으며, 설령 당일날 모두


매진되었더라도 사흘 후면 다시 재고가 쌓여있었다.

'딱 한 권만 남았던 걸 구입하다니. 이런 행운도 없을거야.'

마리는 제논 일대기를 품에 꼭 껴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발매 첫 날에는 실수를 한 바람에


구매하지 못 했지만, 사흘 후 서점에 방문하니 딱 한 권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때는 너무 떨려서 하마터면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뻔했으나 간신히 선수쳐서 구매했다. 경쟁하던 대상이
분하다는 눈길을 보냈지만 마리는 개의치 않았다.

이후로 지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과제와 시험도
중요하지만 머리를 식히기 위해 제논 일대기부터 읽을 계획이다.

'아이작은 샀으려나?'

마리는 행복한 마음으로 길을 걷다가 문득 아이작이 생각났다. 요즘들어 아이작의 얼굴이 머릿속에 자주
떠오른다.

게다가 같이 수업을 들을 때도 그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경우가 늘어났다. 아이작이 그 시선을


눈치채서 고개를 돌린다면 시선을 회피하는 일이 다반사고.

본래는 단순히 호감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점점 더 명확해졌다. 마리는 품 속의 제논 일대기를 더욱 강하게 껴안으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 모임에서도 언급한 거지만, 아이작은 비밀을 숨길지언정 남을 대하는데 솔직하다. 그거 하나만으로


마리의 호감을 사기에는 충분했으며 점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친구 정도에 불과했으나 아이작과 대화하는 게 제일 편하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어떠한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고나서 아이작과 얘기하면 눈 녹듯이 사라졌으며, 그전에 아이작이 자신의
표정을 캐치해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물어본다.

'그런데 요즘 리나의 행동이 심상치 않던데...'

허나 그런 행복한 생각도 얼마 가지 않았다. 최근 리나가 아이작에게 선보이는 행동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리나에게 아이작은 흥미로운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나 세실리처럼 아이작에게 장난을
치거나 친근하게 대하는 경우는 여태까지 잘 없었다.

그러나 최근 한 달 간 아이작에게 접근하는 빈도가 잦아졌다. 마리로서는 신경 안 쓸래야 쓰이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리나의 태도였는데 리나는 흔히 '가면'을 쓰며 사람을 대하는 편이다. 황녀라는
직위상 어쩔 수 없다지만 한 번 크게 데인 적이 있는 마리로서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그 가면도 점점 없어지고 있어.'

헌데 그 가면을 벗으며 아이작을 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큰 문제다. 본래 리나는 세실리와 이야기할 때만


가면을 벗어던졌으나 최근 아이작과 대화할 때도 벗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릴 때부터 가면을 쓰고 지내던 그녀가 왜 갑자기 그런 행동을 보이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마리로서는


절대 달가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아이작은 여전히 리나를 꺼려하지만 사람 일은 그 누구도 모르는 법이다.

'갑자기 그 녀석이 왜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단 말이야. 내가 모르는 무언가라도 알고


있는건가?'

마리가 석연찮은 기분을 느끼며 숙소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불현듯 아주 익숙한 색상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시야에 잡혔다.

시간대 상으로 모든 수업이 끝나는 시간대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선홍색이라 눈에 확 띄였다.
마리는 그 색깔을 보자마자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붉은색 머리카락이라고함은 현재로서는 한 명밖에 없다.

"아이...!"

이에 그녀가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 붉은 머리카락의 학생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고 입을 급히


다물었다.

이 세상에서 검은 머리카락은 드문 편이 아니나 칠흑처럼 진한 색상은 드물다. 또한 검은색 머리카락만이


특징이 아니었다.

마족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머리의 양옆에 우뚝 솟아있는 뿔.


아이작의 곁에 있는 여자는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였다.

"... ..."

마리는 아이작과 세실리가 나란히 걷는 걸 보며 눈 밑을 꿈틀거렸다. 지난 번 모임에서도 느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이작이 세실리랑 단란히 붙어있는 걸 보면 심기가 급격히 불편해진다.

무엇보다 세실리는 아이작에게 짓궂은 장난을 곧잘 치는 편이라 고운 시선을 보낼 수 없었다.

'둘 다 어디로 가는거지?'

마리는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서둘러 파악했다.
마음 같아서는 불쑥 끼어들고 싶었지만 우선 뒤를 밟을 생각이다.

아이작의 선홍빛 머리카락처럼 자신의 흰색 머리카락도 꽤 눈에 띄는 편이니 조심조심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왠지 미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실제로 미행이 맞다. 마리는 혹여 그들에게 들킬까봐 매사에 신중을
기울였다.

이윽고 그들이 들어간 곳은 다름아닌...

'...카페?'

카페였다. 그것도 비밀스러운 담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카페.

마리는 아이작과 세실리가 들어간 카페를 멍하니 바라봤다. 자신도 오빠에게 가문의 상황을 주고받을 때나
방문하지, 그 외에는 이 카페 발을 디딜 일이 아예 없다.

조금 비싸긴 해도 방마다 방음이 될 뿐더러 보통 '연인'들이 방문하는 것으로 유명한 카페다.

'...아니겠지?'

마리의 푸른색 눈동자가 불안감으로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

카페에 들어선 나와 세실리는 우선적으로 방을 배정받았다. 카페 종업원이 세실리를 보고나서 살짝 흠칫한


해프닝이 있었으나 무난하게 넘어갔다.

잠시 후, 우리는 방음이 철저한 방으로 배정받아 안으로 들어왔다. 비좁지도 넓지도 않은 곳이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카페는 보통 연인들이 오는 곳이라던데."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인 세실리가 은근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처음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에요? 전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진짜로 몰랐다. 내가 이 카페를 아는 이유는 단순히 니콜이 한 번 데려와서다.

세실리는 내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몰랐어? 하긴, 몰랐으니까 여기로 온 거겠지. 그래도 이상한 소문은 안 날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연인이 자주 방문하는 곳이지 진짜 그런 곳은 아니니까."
"그런 곳이 대체 뭐예요?"
"음... 그런 게 있어. 어린애는 몰라도 돼."

내 물음에 세실리는 요망한 미소를 짓더니 검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덕분에 연인들이 이 카페에 와서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대충 알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

아무리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에 왔다지만 괜히 온 듯한 느낌이다. 나는 무안함에 뒷목을 매만졌다.

"...아니면 자리를 바꿀까요?"


"아냐. 괜찮아. 아이작이 나한테 이상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밀담이잖아?"
"제가 아니라 누나가 저한테 이상한 짓을 할 것 같은데요?"
"농담도 참."

세실리는 손을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도 농담으로 말한 거라 웃어넘기려고 했다.

"들켰나?"
"...네?"

그녀가 작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전까지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여서 진심인지 장난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세실리는 내가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묻자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못 들은 척 해줘. 내가 너한테 이상한 짓을 할 리가 없잖니?"


"어... 네. 그렇... 겠죠."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들었지만 착각이라 치부했다. 세실리가 무력적으로 나보다 훨씬 강한 건 맞지만


그녀의 성격상 그런 행동은 하지 않을테니까.

잠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갈 뻔했으나 다행히 직원이 주문을 요청하면서 풀어졌다. 세실리는
아메리카노를, 나는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뒤이어 직원이 물러나고 우리 둘만 남게 된 상황이 돌아왔다. 세실리는 직원이 돌아가자마자 두 손으로


턱을 받치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시선에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내 비밀을 밝히려 이곳에 왔으니 꿇릴 건 전혀 없었다.

"아이작."
"네. 누나."
"아이작은 글을 쓰는 걸 좋아해?"

직접적으로 묻기보다는 간접적으로 돌려서 묻는 세실리.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좋아해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세실리는 내 대답을 듣고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려는 모양이다.

어차피 모든 비밀을 알려줄 생각이었기에 긴장은 거의 하지 않았다.

"...아이작."
"네."
"혹시 2 달 전에 네가 나에게 해줬던 이야기를 기억해? 마족이 어떤 존재인지 네가 알려줬잖아."

기억나다마다. 그 후로 원고를 부랴부랴 수정했던 것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세실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때 있었던 일을 입 밖으로
하나하나 꺼냈다.

"그때 너는 우리 마족을 이렇게 표현했지.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 누구보다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존재라고."
"... ..."
"그 이야기는 평생동안 잊지 못할 거야. 그런데 제논 일대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지. 사크란이
사망하고나서 진이 고민하고 있을 때 제논이 말해줬던 거야. 알고 있니?"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세실리에게 해줬던 말을 제논 일대기에 적으려고 했지만 곧바로


수정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의미를 전달해야했기에 비슷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세실리는 그 부분을 보고


눈치를 챈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그 부분을 보자마자 네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르더라. 정말로 우연에 우연일 수도 있지만


여러모로 의심되는 정황이 많거든."
"예를 들면요?"
"우선 중지 손가락에 난 펜혹."

세실리는 손가락으로 내 펜혹을 가리켰다.

"그 펜혹은 오랜 시간동안 펜을 잡아야 나는 거라며?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증거가 안 되지. 아이작은
노트에 기록을 하는 습관이 있으니까."
"... ..."
"두 번째로는 제논 일대기에 시큰둥한 너의 태도. 지난 번 모임에서 잭슨과 주고받았던 이야기를 엿들었어.
시큰둥한 태도치고는 스토리를 거의 다 꿰차고 있더라고. 보통 그정도면 열정적이어야 정상인데 너는
제논 일대기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무심했어."

모임에서 잭슨과 나눴던 대화를 들은 건가. 그때 세실리는 멀리 떨어져 있던 걸로 아는데 어떻게 들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마력으로 청력을 키운 것일 수도 있겠지. 아카데미에서 마법은 금지이지만 감각을 키우는 것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세실리는 마지막 증거를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네가 나에게 말해줬던 마족의 정체성. 악마로 취급받던 우리 마족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비록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지극히 드물겠지. 아무리 제논 일대기를
읽었다하나 그런 생각을 가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과거에 우리 마족이 받았던 차별을 고려하면
더더욱."
"... ..."
"위의 세 가지만 종합해도 충분히 의심할만해. 거기다 방금 전에 네가 글을 쓰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지?
이 모든 단서를 종합하자면 한 가지 결론이 나와."

한 번도 쉬지 않고 다양한 말을 꺼낸 세실리는 내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나 또한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와 마주했다.

아무래도 여기서는 내가 먼저 입을 여는 게 좋을 듯했다. 나는 콧숨을 길게 내쉰 뒤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제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데 물어봐도 될까요?"
"괜찮아."
"누나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찾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여기가 갈림길이다. 만약 세실리가 솔직담백하게 대답해준다면 기꺼이 밝히고, 그렇지 않다고 다음으로
미룰 생각이다.

물론 미뤄봤자 비밀이 감춰지는 건 아니겠지만 확인해야하는 건 확인해야한다. 멀리 가지 않아도 리나의


예시가 있으니까.

세실리는 내 질문을 듣고 진한 미소를 짓더니 턱을 괴던 손을 아래로 내리며 서로 마주잡았다. 또한


부끄러웠던 건지 양볼에 홍조가 깃들었다.

내가 그 반응을 보고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을 때, 세실리는 요조숙녀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도 아시다시피 제논 일대기는 우리 마족의 숙원을 이루게 해준 은인이야. 내가 이곳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도 그 분 덕분이지."
"... ..."
"만약 그 분을 찾는다면... 기꺼이 내 모든 걸 바칠 거야. 그 사람이 남자던 여자던, 그리고 잘생기던
못 생기던, 나이가 많던 나이가 어리던 상관없어. 그분에게 입은 은혜에 비하면 이것조차 부족하지."

전혀 부족하지 않는데요. 나는 세실리의 대답을 듣고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헬리움에 초대하거나 보호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모든 걸 바친다니, 나로서는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답례다.

세실리가 누구인가. 헬리움의 공주이자 다음 대 차기 마왕으로 예정돼 있는 여인이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모든 걸 바치겠다고 하면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어..."

내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얽혀 아무런 생각조차 나지 않을 때였다. 세실리는 내 반응을 보고 빙긋 웃더니


내 손을 붙잡아 어디론가 천천히 이끌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끈 곳은...

물컹-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흉부 쪽, 즉 가슴이었다. 순간 손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감촉에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다.

아직 비밀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그녀가 이런 행동을 취하는 건지 혼란해하는 것도 잠시, 세실리가
색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어때?"
"... ..."
"더 만지고 싶지?"

두근- 두근- 두근-

가슴 너머로 느껴지는 세실리의 심장 소리와 내 심장이 동시에 요동쳤다. 나는 할 말도 잊은 채 세실리를


멀거니 쳐다봤다.
그녀도 이런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던 것인지 얼굴이 터질듯이 붉어져 있다. 그러나 나에
비하면 약과일 것이리라. 나는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았으니까.

그동안 세실리는 얼굴을 앞으로 쭈욱- 내밀며 내 얼굴에 가까이 접근했다. 뒤이어 귀를 살살 간지럽히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직접 비밀을 밝히고, 그 증거까지 보여주면 여기서 더 해줄 수도 있어. 나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거든."
"그..."
"설마 우리 아이작은 고자가 아니지?"

그럴리가 있나. 남성의 본능을 자극하는 목소리에 내 분신은 점점 힘을 충전하는 중이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힘을 주었다간 대참사가 일어날 것 같아 꾹- 억누르는 중이지, 이성의 끈이


조금이라도 끊어지는 순간 나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나조차도 모르겠다.

이에 내가 간신히 정신을 붙들어매면서 손을 회수하려던 찰나였다. 세실리는 내가 팔을 잡아당기자 오히려


힘을 더 강하게 주더니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냠..."

내 중지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뒤이어 정확히 내 펜혹이 자리잡혀있는 마디까지 입에 넣어버렸다. 실로


대담한 행동이지 않을 수 없다.

할짝-

여기까지라면 모를까, 세실리의 혀가 내 펜혹을 살살 건드리는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말랑거리는


혀의 감각이 손을 타고 전해져 뇌가 찌르르- 울렸다.

이로인해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이성이 완전히 끊겨버렸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에라이. 씹팔.'

여기서 물러난다면 남자라고 할 수 없다. 비밀을 밝히고 자시고 지금은 본능에 충실해야할 것 같다.

그에 눈을 질끈 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똑- 똑- 똑-

갑작스레 난입한 노크가 긴장된 분위기를 모조리 분산시켜버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문 쪽을 쳐다봤다.

그건 세실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멍한 눈초리로 문을 바라보더니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하필이면...!"

짓씹듯이 중얼거리는 세실리. 그 덕분에 끊겼던 이성이 복구되어 황급히 팔을 빼내었다. 세실리는 내가
팔을 빼내자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라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나는 민망해진 분위기 속에서 세실리를 한 번 힐긋거리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커피를 가지고 온
종업원으로 예상되었다.

만약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아마 사고를 치지 않았을까. 본능은 아쉽다고 소리치는 중이지만 이성은


다행이라 안도하는 중이다.

이윽고 커피를 가져온 종업원을 맞이하기 위해 문을 열고 난 후였다.

"...어?"

종업원이 아니라 아주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과 더불어 푸른색 눈동자.
그리고 아름다운 미모까지.

"...마리?"

마리가 불안과 분노가 한데 뒤섞인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 52 화 >

나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속에서 마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는 불안과 초조함, 그리고


분노가 한데 뒤섞인 표정이었다.

또한 그녀는 어떤 책 한 권을 소중하게 껴안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이번에 새로 나온 제논 일대기 9


권이었다. 나는 마리의 얼굴과 제논 일대기를 번갈아보다가 큰 혼란을 느꼈다.

마리가 찾아온 타이밍도 타이밍이지만, 그전에 여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가 더 의문이다. 우연히 이
카페에 있다가 우리를 발견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뒤를 쫒아온건지.

내가 혼란을 겪고 있는 동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마리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정확히 세실리가


앉아있는 쪽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세실리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푸른색 눈동자 속에는 강한
의심이 담겨있었다.

"...아이작."

스산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마리. 나는 그녀의 부름에 어어? 하면서 마리와 마주했다.

뒤이어 그녀는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입은 웃는 있는 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얼굴이 빨갛네?"
"... ..."

나는 마리의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 했다. 아니,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방금 전까지 하마터면 세실리와 사고를 칠 뻔했으니까. 만약 마리가 도중에 난입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진행되었을 확률이 높다. 이걸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상한 거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마리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 궁리하는 게 우선이다.

"그..."
"세실리가 또 장난친거지?"
내가 우물쭈물거리며 대답하기 망설이고 있을 때 마리가 훅- 치고 들어왔다. 아까도 말했지만 입은 웃고
있어도 눈은 웃고 있지 않으니 왠지 모르게 섬뜩해졌다.

마치 바람을 피다가 애인에게 딱 걸린 것 같은 기분이랄까. 추궁하는 듯한 마리의 말투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왠지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지?"
"... ..."

이제는 내가 아닌 뒤의 세실리를 보면서 확인을 구하는 마리. 동시에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으며 푸른색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이상 대답을 피했다간은 사단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거짓말이 아니라 마리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으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는 약간 안도하는 듯하더니 올렸던 입꼬리를 일자로 그렸다. 뒤이어 세실리에게
고정시켰던 시선을 다시 나에게 옮기며 서늘하게 말했다.

"...잠깐 세실리랑 둘이서 얘기해도 될까?"


"... ..."

나는 마리의 질문을 듣고 뒤의 세실리를 바라봤다. 나는 상관없지만 그녀가 허락해줄지 의문이었다.

세실리는 나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빙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락의


의미였다.

도대체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허락을 한 걸까. 내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동안 세실리는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만나야겠네. 나는 마리랑 얘기하다가 갈테니까 먼저 들어가."


"...알겠어요."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둘 사이에 끼여봤자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꼴밖에 나지 않을


뿐더러 모두에게 좋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하물며 현재 마리가 갖고 있는 '오해'도 막상 오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사실상 이게 제일 큰 문제라


마리는 내가 뭐라고 말하던지 쉽게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에 나는 아쉽다는 얼굴의 세실리를 바라보다가 마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꼬리를 올리며 빙긋 웃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무시무시한 표정이었던 것 같은데.

"이상한 얘기는 안 할 거지?"


"글쎄?"

불안감에 그리 물으니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본인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말한 걸 보면 화가


단단히 났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물론 현재 그녀는 나에게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상황이 좋게 변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살짝 머뭇거리다가 마리를 지나치며 문 밖으로 나섰다. 마리는 지나가도 나를 보지 않고 세실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음? 손님? 주문하신 건..."


"아. 제가 계산하고 갈게요. 안에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 그 사람들한테 주면 돼요."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에 종업원과 마주쳐서 계산을 하고 나왔다. 종업원이 순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봤으나 애써 무시했다.

이윽고 숨 막힐 듯한 분위기 속에서 빠져나오고 뒤를 돌아봤다. 이미 방 안으로 들어갔는지 마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진짜 이상한 말은 하지 않겠지?'

이런 상황은 전생에서도 겪지 않아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이게 최선인 건 확실하다. 저 상황에


끼어들었다가 이도저도 안 될 뿐더러 자칫하다가 기껏 이루었던 관계가 어긋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곧 있으면 선택을 해야할 날이 올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세실리가 내 비밀을 눈치챈
순간부터 나를 향한 시선이 180 도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정말로 그때 세실리가 언급했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는 말이 진심이라면... 그리고 만약


사고를 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후우..."

나는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며 뒷목을 매만졌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시험 공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오늘 세실리가 나에게 했던 말이 계속해서 아른거릴 것 같아 글은 쓰지 못할 것 같다.

'부디 아무 일 없기를...'

지금으로서는 그리 빌 수밖에 없었다.

*****

"주문하신 카푸치노와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 ..."

아이작이 떠나가고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좁은 방 내부.

주문한 커피가 테이블 위에 올라와도 두 여자는 서로만 바라본 채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종업원은 숨이
멎을 듯한 분위기 속에 서둘러 자리를 피신했다.

뒤이어 종업원이 자리를 비우고 황량한 침묵만이 감돌게 되어도 두 여자 사이에 오고 가는 말은 없었다.
차이점이라면 마리는 잔뜩 굳어있는 얼굴이었고 세실리는 여유가 있다는 걸까.

세실리는 맞은편에서 사나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마리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아메리카노가 시야에 잡혔다.

마리가 아니고 아이작이었다면 이 커피를 더 맛있게 마셨을텐데. 그 생각이 들자 기분이 살짝 나빠졌으나


구태여 티내지 않았다.

달그락-

세실리는 아메리카노간 든 커피잔을 들어 입에 가까이 대었다. 행동 하나 하나에 기품이 묻어나와 시선을


이끌었다.

그러나 마리는 그런 세실리의 모습이 고깝게 느껴졌다. 방금 전 아이작의 붉어진 얼굴 때문이만이


아니었다.
'분명히 바지가...'

세실리가 아이작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바지 중앙은 눈에 띄게 부풀어 있었으며 자세


또한 엉거주춤했다. 가문에서 철저하게 성교육을 받았던 마리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남자들은 본능에 충실해서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편이다. 하물며 세실리처럼 아름답고 농염한
외모를 가진 여자가 유혹한다면?

몸은 언제나 솔직한 법이라고, 아무리 철벽을 쳐도 남자는 본능을 이길 수 없다. 어째서 남자가 슬픈
동물이라고 하는지 여기서 기인한다.

그러니 아이작에게서 남자의 본능이 튀어나왔다는 건... 딱 한 가지밖에 없다.

으득-

그 생각을 들자마자 마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모임 당시 세실리가 팔짱을 껴도 얼굴만 붉힐


뿐,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던 아이작이다.

그만큼 아이작은 자신의 본능을 잘 억제하는 편이며 혈기왕성한 나이답지 않게 점잖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아니면 숙맥이라 할 수도 있고.

헌데 이번에는 전혀 달랐다. 남자의 본능이 튀어나왔다는 의미는 즉슨, 세실리가 정도를 넘었다는
뜻이었으니까.

거기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공간은 방음이 철저하다. 여기서 뭘 하던지간에 바깥에서는 전혀 안쪽 상황을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마리는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얼추 유추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 ..."

한편 세실리는 아메리카노를 음미하면서 마리의 표정을 관찰했다. 마리는 사나움을 넘어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다.

물론 세실리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단지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가 털을 곤두세우고 하악질을


하고 있는 것 같달까. 솔직히 조금 귀여웠다.

달그락-

이에 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임 당시에도 예감했으나 오늘로서 확신이
들었다.

눈 앞의 소녀, 마리는 아이작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고. 풋풋한 나이에 어울리는 마음이었으며 애정이다.

"뭐라도 말 좀 하지 그러니? 할 말이 있어서 아이작을 내보낸 거 아냐?"

방 내부를 가득 메웠던 고요함을 모두 물리게 만드는 세실리의 매력적인 음성. 그녀는 두 손으로 턱을
괴며 마리에게 물었다.

붉은빛 눈동자에는 여유가 한가득 담겨있었으며 입매 또한 호선을 그려져 자신이 위에 있다는 것을


어필했다.

마리 또한 어릴 떄부터 사교회를 다니면서 세실리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이에 그녀는 눈


밑을 꿈틀거렸다가 싸늘하게 말했다.

"...세실리."
"응."
"솔직하게 말해. 여기서 아이작이랑 뭐 했어?"

위의 질문을 아이작에게 묻는다면 얼버무릴 게 분명하니 세실리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단 둘이 있는


지금이 적기이기도하고.

그동안 세실리는 마리의 질문을 듣고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만의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글쎄? 남자랑 여자랑 좁은 방에서, 그것도 방음이 되는 곳에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미안하지만 난 장난칠 생각없어."

의외로 마리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이미 그정도는 알고 왔다는 뉘앙스가 물씬 풍겼다.

그에 세실리는 한 쪽 눈을 치켜뜨며 살짝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가 이내 피식거렸다. 몇몇 사람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면 도리어 이성적으로 변한다던데 마리도 그쪽 부류인 듯싶었다.

이어서 그녀는 자세를 똑바로 잡으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장난스러운 미소가


아닌, 한 나라의 공주답게 품위가 깃든 모습이었다.

"마리."
"말해."
"너는 아이작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니?"

마리는 그 질문을 듣고 눈쌀을 찌푸렸다. 그녀가 무슨 의도로 저런 질문을 한 건지 약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동안 세실리의 의도를 파악하던 마리는 일단 대답부터 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작에
대한 건 자신있다.

"최소한 너보다는 많이 알고 있지. 이건 장담할 수 있어."


"그럼 아이작의 비밀도?"
"...뭐?"

마리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녀도 아이작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 사이가 지금보다 가까워진다면 그 비밀을 말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세실리가 저런 말을 꺼내니 마리로서는 놀람을 넘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온 몸의 피가 싸늘히 식는 기분이다.

정말로 그녀는 아이작을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런 거라면 아이작은 자신보다 세실리와 더 가까운
관계인 걸까. 부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세실리는 마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승기를 잡았다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이작과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야. 심지어 내가 약점을 잡은 것도 아니고 아이작이 스스로 알려줬지.
반면에 너는? 그렇지 않잖아?"
"... ..."
"네가 아이작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그렇게 티를 내니 모르는 사람이 이상한
거겠지."

마리는 조곤조곤한 세실리의 말에 아무런 반박조차 하지 못 했다. 모두 다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보다는 아이작이 자신보다 세실리와 더 가깝다는 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더 가깝다는 사실만큼 절망적인 것도 없다.

세실리는 마리에게서 아무런 말조차 돌아오지 않자 너무 과했나 싶어 그녀의 표정을 살펴봤다. 눈동자는
정처없이 떨리고 몸이 빳빳하게 굳어있는 모습이었다.

너무나 애처롭고 불쌍해보이는지라 세실리로서는 약간 딱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분위기도 풀어줄 겸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그것 뿐?"
"응?"
"그것 뿐이라고 물었어."

어느새 침착을 되찾은 마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세실리에게 물었다. 세실리로서는 절로 의문이 들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마리의 설명으로 세실리의 얼굴에 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라... 그래. 좋지. 자기 입으로 비밀을 공유한다는 건 그만큼 상대방을
신뢰한다는 의미니까."
"... ..."
"하지만 나는 아이작이 그깟 비밀을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비밀을 공유해야 형성되는 신뢰라면 개나
줘버리라고 해. 그건 거래지, 진심이 아니야."

이번에는 세실리의 표정이 굳을 차례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마리는 아이작이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다. 심지어 짐작조차 못 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리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아닌, '아이작' 그 자체에게 호감을 품고 애정을 느끼는
중이다. 그것만큼 '진심'이 있을까.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당장 세실리 본인도 아이작에게 호감이 있을지언정 그 이상은 아니었다. 아이작이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아니었더라면 방금처럼 대놓고 유혹하지도 않았겠지.

마리는 세실리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확신을 가졌다. 아이작의 비밀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짓궂은 장난만 칠 뿐이었던 세실리가 아이작의 본능을 강제로 꺼내게 만들 정도면...

'...설마?'

'증기 기관차'의 삽화도 그렇고, 글 쓰는 걸 좋아한다는 아이작의 취미도 그렇고. '마족'인 세실리가
아이작을 유혹한 것도 그렇고.

머릿속에서 퍼즐이 딱딱 들어맞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겨우 이런 것들로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 한다.


무엇보다...

'어쩌라는 거야.'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아이작의 비밀이 정말로 그런 거라도 상관없다. 애시당초 그딴 거엔 연연하지


않았다.

매사에 가식없이 솔직하게 대해주는 그의 태도가 좋을 뿐이고, 배려가 깊은 그의 상냥함에 애정을 느낄


뿐이다. 마리에게는 다른 걸 다 제쳐두고 아이작이라는 사람만 필요할 뿐이다.
"만약 그런 걸로 사람을 좋아하는 거라면, 나는 무조건 반대할거야. 그건 단지 그 사람의 비밀을
좋아하는 거지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거든."
"... ..."
"할 말 없으면 난 이만 가볼게. 당장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나도 바쁜 몸이라서. 그럼-"

마리는 그 말만 남겨둔 채 자리에서 일어나 제논 일대기 9 권을 챙기고 문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전에


카푸치노를 한 입 마시는 건 잊지 않았다.

이윽고 방 안에 홀로 남게 된 세실리는 한참동안 멍한 얼굴이었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커피잔에


담겨있는 아메리카노에 자신의 얼굴이 거울처럼 비추어졌다.

마리가 남겼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르는 느낌이다.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았다고 해야할까.

남들이었다면 큰 충격으로 다가올 말이겠지만...

"...고마워라."

오히려 세실리는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잘 알았어."

잘은 모르지만, 정말 위험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무서운 미소였다.

그녀는 그 미소를 유지한 채 커피에 비춰진 자신을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네."

< 53 화 >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연달아 발생하여 혼란을 겪었으나 숙소로 돌아오고 잘 무마할 수 있었다.
침대에 몸을 던져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니 뜨거웠던 머리가 서서히 식은 덕분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머릿속이 뒤죽박죽 얽혀있는 건 여전했다. 오늘 세실리가 나에게 보인 행동도 그렇고,
마리가 우리를 뒤따라온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복잡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하루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 안일했나...'

추궁에 가까운 분위기를 형성했던 황족 남매와 달리 세실리는 내가 직접 비밀을 밝히기를 유도했다.


협박이 아니라 엄연히 내 입장을 존중해주는 태도다.

여기에 더해서 세실리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 즉 나에게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되어있다고 스스로 밝혔다.
장난이 아니라 결의와 진정성이 담겨있었으며 진심어린 본인의 의지였다.

다만 내 손을 억지로 이끌어 가슴을 만지게 하고, 더 나아가 내 손가락을 입에 문 행위는 여러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다. 세실리에게 직접 말을 들어봐야 알겠지만 다른 사람(특히 마리)에게는 자기
몸을 빌미로 유혹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다.

그때 당시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버려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안일했던 부분이 있다.
물론 세실리가 그런 의도로 유혹을 한 것인지는 파악할 수 없다. 이건 다음 날에 따로 만나서 확인을 구할
생각이다.

'확실히 머리를 많이 비우고 살긴 했어.'

나는 현실 감각이 뒤떨어진다고 할 수 있고,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전생에서는 대학교 생활을


하다가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셔서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지금은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집에서만 지냈다.

이로인해 물 흘러가듯이 인생을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변수에 확실한 대처를 못 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레오르트와 리나도 그렇고, 세실리도 그렇고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의 가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그게 어느 정도인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헬리움의


공주가 스스로 몸을 바칠거라 말할 정도이니 비범한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 건 확실하다.

'다행히 황족과 세실리라서 망정이지, 이러다가 나중에 진짜 큰 사단이 나버릴 거야. 아버지도 못 막을
수 있어.'

아버지라는 든든한 빽이 있다지만 그것조차도 '국가'라는 거대한 세력 앞에서는 힘없이 무너질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능력이 아닌 내 힘으로 타파할 능력을 키워야 옳다.

아버지와 더불어 가족들은 언제든지 나를 도와주겠다고 말했지만 매사에 기댈 수 없는 법이다. 이게


응석받이가 아니면 대체 뭐겠나.

그러니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 상황에 알맞게 대처하되,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가족의 힘을 빌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가족들도 이런 내 의견을 존중할테고.

이런 생각을 거치다보니 그동안 내가 너무 멍청했나 싶다. 생각없이 지내는 것보다는 타산적인 면모가
존재해야 앞날이 편해질 것 같다.

'그리고 마리는...'

오늘로서 확신을 내릴 수 있었다. 마리는 나에게 '썸'을 넘어선 연애 감정을 품고 있다.

나와 세실리의 뒤를 밟은데다가 직접 방문을 두드린 걸 보면 제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정도는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내 반응은...

'...우선 손부터 잡아야하나?'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진 것부터 시작되었다. 나 또한 평소 마리에게 사람 대 사람을 넘어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품고 있다.

첫 만남은 그리 좋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같이 지내면 지낼 수록 자연스레 그런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얼굴이 아름다운 것도 있지만 권위의식과 한참 동떨어진 성격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마리는 내가 제논 일대기 저자라는 걸 전혀 예상조차 못 하고 있다. 세실리와 달리 그녀는


나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한다고 봐야한다.

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그녀의 배경이다. 마리의 가문은 나처럼 일개 남작가도 아니고 무려 황실


다음 가는 권력을 지닌 레킬리스 공작이다.

황제와 공작의 사이는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좋은 편도 아니다. 서로 치열하게 경쟁과 견제를 하여
미네르바 제국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자칫 삐긋하기라도 한다면 제국이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다.
'마리는 딱히 신경쓰지 않겠지만...'

마리는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알아도 놀라기만 할 뿐, 그이상의 반응은 없을 것이다. 그녀와


붙어다닌 적이 많았기에 이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다는 거지, 그녀의 가문이 과연 나를 가만 놔둘지는 의문이다. 그러니 마리와 교제를
한다더라도 그녀가 눈치채기 전까지는 직접 말하기 애매하다.

'일단 내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해.'

신문에서는 소설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니, 마족의 숙원을 이루어준 은인이라니, 신학을 재정립했다니 등등.

다양한 평가들이 세간에 떠돌았으나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지피지기라고, 내 가치를 좀 더 똑바로


알아놓아야 참사가 발생하는 걸 막을 수 있다.

'진짜 글 하나로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냐...'

나는 속으로 갑갑한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현실 감각이 좀 부족한
편이다. 그러나 다양한 사건을 겪고나니 마음가짐을 바꿔먹을 필요성을 느꼈다.

그 생각을 하면서 책상에 앉아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서랍을 여니 두툼한 원고지가 한가득 쌓여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평범한 원고지는 아니다. 여태까지 내가 정성스레 쓴 원고들, 그러니까 제논 일대기의 초판본이다.

원래 출판사에서 초판을 맡기고 있었지만 제논 일대기가 예상을 한참 웃돈 히트를 쳐버리자 다시 돌려줬다.


출판사 입장에서도 이런 걸 계속 지니고 있다간 큰일날테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반송할 수밖에 없다.

'과연 이게 얼마나 큰 가치를 갖고 있을지...'

겉보기에는 볼품없는 원고지로만 보인다. 하지만 높으신 분들 눈에는 어떻게 비추어질지 궁금했다.

내 몸값도 몸값이겠지만 초판의 가치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특히 문화강국이라 불리는 테이로스


왕국에게는 그야말로 보물이지 않을까.

그러나 방금 전에도 말했듯이 내가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는지부터 아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물어보기에 적합한 사람은...

'레오르트와 리나, 그리고 마리... 정도인가?'

세실리는 마족의 입장을 대변했으니 패스하고, 관계가 제일 복잡한 건 역시 인간들이다. 제논 일대기의


주인공이 인간이다보니 가장 열광하고 있는 종족도 인간이었으며, 또 나를 찾으려고 벼르는 종족도
인간이다.

그러니 인간측의 높으신 분들은 초판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 나는 머릿속에서 세 사람을


떠올리다가 미간을 살짝 구겼다.

'역시 이중에는 마리가 가장 신뢰가 가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리만큼은 특정 목적을 품은 채 접근하는 건 좀 꺼림칙하다. 그녀와는 늘 그랬듯이


웃고 떠들고 평범한 생활을 즐기고 싶다.

일종의 안식처라고 해야할까. 내 안일함으로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적어도 그녀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는
편이 좋을 듯했다.

물론 마리는 내가 어떤 사람이던 간에 기쁜 마음으로 받아줄테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조심히 대해야한다.


이미 그녀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 알게 된 이상 해를 끼치고 싶진 않다.

'지금 당장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는 게 좋겠지. 내 마음가짐부터 아버지에게 피력한 후부터 행동에 나서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에 나는 초판본을 다시 서랍에 넣어두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스스로


행동하겠다하면 적잖이 당황하실테니 사정을 설명드려야겠지.

'더이상 아무 일도 없다고 생각하면 안 돼.'

이미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했고,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본디 비밀은 혼자만 알고 있어야 비밀인 법.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대비할 수 있도록 하자.'

나는 진지한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보낼 편지를 차근차근 써내리기 시작했다.

*****

빛 한 점조차 들어오지 않는 방 안.

붉은 눈의 마족, 세실리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는 중이었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색 눈동자와 침대 위에 흐뜨러진 검은색 머리카락으로 하여금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

그녀는 천장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수 십년간 단련하여 굳은살이 박힌 자신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 ..."

세실리는 손을 바라보면서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그와 동시에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골똘히 떠올렸다.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 일상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특별했다. 왜냐하면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제논


일대기의 저자이자 마족의 은인을 만나게 되었으니까.

물론 그가 정말로 제논 일대기의 저자인지는 증거가 나와야 알겠지만 세실리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붉은 머리의 소년, 아이작은 자기가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던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확실하다고.

그가 직접 비밀을 말할 때까지 살살 유도한 거지만 아이작이 정말로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고 하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노년의 현자라 추측하는
중이었으니까.

아이작처럼 20 살도 되지 않은 파릇파릇한 영계... 아니, 애송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작...'

세실리는 그동안 마족이 받아왔던 핍박을 떠올렸다. 100 년이라는 세월은 마족에게도 상당히 긴 시절이다.

그 시절동안 마족은 다른 종족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 했다. 아니, 그걸 넘어서 혐오와 경멸의


시선을 받았다.
자신은 헬리움의 공주였기에 다행히 그런 시선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지만, 다른 마족들은 아니다. 바깥
사회로 향한 마족들은 하나같이 좋지 못한 비극을 맞이했으니.

이로인해 헬리움은 외교적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갔으며 반강제적으로 폐쇄적인 입장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최근 헬리움이 테이로스 왕국과 외교를 시작했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업적이다.

'이 모든 게 다...'

붉은 머리의 소년, 아이작 덕분이다. 세실리는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천장으로 뻗었던 손을 가슴에
대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고장난 것처럼 거칠게 두근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잔뜩 흥분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요동치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진정하려고 노력했으나 쉽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인지하는 순간 심장이 더욱 크게 날뛰었다.

이 감정은 과연 사랑인 것일까, 아니면 존경인 것일까. 태어나면서 이런 감정은 생소했기에 세실리로서는
쉽게 감을 잡지 못 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은인...'

이 감정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 아이작을 향하는 중이라고.

"하아..."

세실리는 달뜬 숨소리를 내면서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리고 오늘 마리가 자신에게 해줬던 말을 기억했다.

마리는 아이작을 좋아하는 이유가 비밀 때문이 아니라고 발언했다. 그냥 단지 아이작이라는 존재 자체가


좋다고, 세실리와 달리 그깟 비밀 따위는 상관없다고.

이 말은 세실리에게 큰 충격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그녀 덕분에 본인의 실책을 좀 더 일찍


깨닫게 되었으니까.

'큰일날 뻔했어.'

하마터면 '은인'에게 엄청난 결례를 저지를 뻔했다. 자신은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다는 의미로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이나 지금 곰곰이 생각하니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과연 '은인'에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을까? 절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이런 생각들을 거치니 새삼 아이작을 다르게 볼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단지 귀여운 동생으로만 보였지만, 지금은 마족의 숙원을 이루어준 은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귀여운 동생과 마족의 은인. 그때 당시는 이 두 가지가 합쳐진 바람에 실수를 범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아아..."

정말로 감사하고, 또 정말로 사랑스러운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할까.


경모? 그래. 어쩌면 경모라고 할 수 있다.

그 생각을 들자 세실리는 두 손을 꼭 맞잡으며 몸을 베베 꼬았다. 당장 그에게 달려가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부터 올리고 싶고, 또 자신은 언제라도 준비가 되어있으니 말만 하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실수를 저질렀으니 지금은 조심스럽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의 옆에는 흰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으니.

겉으로는 평상시처럼 행동할 것이지만... 단 둘이 있을 때는 본심을 드러낼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은인이시여...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몸을 뒤틀면서 중얼거리던 그녀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으로 향해


의자에 앉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우선 편지부터... 그런데 남학생용 숙소로 어떻게 보내지? 혹시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세실리는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글을 써내리기 시작했다.

< 54 화 >

결의를 다지고 다음 날이 밝아왔다. 오늘 시험을 치는 전공은 없고 과제만 제출하면 그만인지라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충분하다.

원래는 아무 일도 없기를 빌었으나 여러가지 사건사고를 겪고나서 마음가짐을 바꿔먹었다. 아무 일도


없기를 비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발생할시 그에 따른 대처 능력을 키우자고.

가족에게 의지하는 것보단 나 스스로의 능력을 키우자고 말이다. 마음가짐을 이렇게 잡으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간에 세실리에게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묻는 게 우선이다. 그녀는 과연 어떤 의도로 나를


유혹한 것일까. 제대로 된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는데 그런 행동을 선보여서 당황을 넘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리에 대한 처우도 긴 시간 고민에 고민을 거쳐 결정을 바꿀 수 있었다. 정말로 그녀를 위한다면,


뒤늦게 비밀이 밝혀져 마리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자고.

적어도 나를 좋아하는 여자가 내 우유부단함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만큼은 막아야 할 것 같다. 비록 다른


사람과 달리 마리는 내가 제논 일대기 저자라는 걸 짐작조차 못 하고 있지만 잘못하면 배신감마저 들 수도
있다.

자기보다 다른 사람이 더 믿음직스럽냐고. 어째서 자기한테는 그 비밀을 알려줄 수 없던거냐고.

우연히 인연이 닿아 힘겹게 쌓아올렸던 관계인데 내 안일한 판단으로 한꺼번에 무너질까봐 걱정된다.
게다가 마리는 눈치가 상당히 빠른 편이라 어쩌면 낌새를 파악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나는 어제 일로 그녀에게 한 번 상처를 줘버렸다. 나 같아도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단


둘이 있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다.

'일단은 수업부터 듣자.'

나는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하며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첫 수업은 철학이며 마리, 세실리, 리나 이


세 명이 함께 듣는 강의다.

리나는 몰라도 어제 마리와 세실리는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분명히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과연
내가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으나 지금은 나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한동한 이러한 상황이 반복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상황은 상황대로 꼬이게 되고 나와
더불어 다른 사람도 난처해진다.

이에 속으로 재차 다짐을 하며 강의실에 거의 다 도착한 순간이었다.

"엇."
"어?"

공교롭게도 강의실 문 앞에서 세실리와 만나게 되었다. 내가 당황한 것처럼 세실리도 나와 만날 줄은


몰랐는지 눈이 동그랗게 떠진 상태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내가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쯤, 세실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나긋나긋한 어조로 인사했다.

"안녕. 좋은 아침이네."
"아... 네. 좋은 아침이네요."
"후훗."

내가 얼떨떨한 심정으로 인사하자 세실리는 살풋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미소를 보니 문득 어제 일이


떠올라 괜히 민망해졌다.

그에 내가 살짝 부끄러워하며 뒷목을 매만지고 있을 쯤, 세실리는 나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제 일은 정말 미안했어요."
"네?"
"당신에게만큼은 그랬으면 안 됐는데... 제 잘못이에요.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뜬금없는 사과와 존댓말에 당황을 숨길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세실리의 태도가
이리 바뀐걸까.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실리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꾸벅 숙이며 제 마음을
표현했다.

누가 보아도 정중한 태도요, 인사다.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의문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앞으로 둘만 있을 때는 이렇게 대할 거예요. 당신은 우리 마족의 은인이니 은인에 걸맞는 대우를
해줘야할테니까."
"... ..."
"그럼 안으로 들어갈까요?"

당최 무슨 시츄에이션인지 하나도 감이 잡히질 않는다. 나는 싱긋 웃으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간 세실리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그녀의 말마따나 현재 강의실 문 앞에는 우리 둘 밖에 없긴하다만... 존댓말은 조금 그랬다.


가까웠던 세실리와 나 사이의 거리가 미묘하게 벌어졌다는 느낌? 평소 나에게 줄곧 장난을 잘 치던
세실리여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은인이라...'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어제 세실리가 말하길 제논 일대기의 저자는 마족의 숙원을 이루어준


은인이라고 했으니까.

더군다나 은인을 만난다면 자신의 몸을 기끼어 바치겠다는 의지까지 피력했다. 나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바뀔만도하다.

원래대로였다면 그러지 말라고, 그냥 평소대로 반말을 하면서 장난쳐도 된다고 당황했겠지만...

'...뭐지?'

가슴 속이 묘하게 간질거렸다. 내 정체를 알고나서 깍듯이 대하는 마족의 공주라니. 이걸 무어라


설명해야 좋을까.

어제 일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았더라면 뻔뻔하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녀는 그 부분까지 사과했다.


그것도 고개를 꾸벅 숙임으로서.

나는 강의실 문 앞에 한동안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세실리보다는 당장 중요한 게


있었으니까.

'그래도 뭔가...'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미묘하다.

나는 그런 마음을 지닌 채 강의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리고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맨 앞자리에 앉은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무언가 불만인듯,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였다. 한 눈에 봐도 그녀의


기분이 저기압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간질거렸던 마음이 싹- 날아가며 긴장으로 대신 채워지기 시작했다. 마리가 저러는 건 필시


어제 일 때문일 것이리라.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나는 눈치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마리 쪽으로 다가갔다. 오늘은 내가 늦은 것도 있지만 마리가


상당히 빨리 온 터라 옆자리는 비워진 상태다.

뒤이어 내가 마리에게 천천히 다가갈 때 쯤, 기척이라도 느꼈는지 책상에 고정했던 그녀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졌다. 하지만 나는 어제 일 때문에 그녀가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

"...아이작!"

푸른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반갑게 맞이하기 전까지는. 심지어 팔까지 흔들며 격하게 반겨줬다.

나는 상심했을 것으로 추정되던 마리가 활발하게 대해주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피식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녀답다고 생각해서.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헤어리지도 못한 채 실수를 저질렀으니 사과를 하는 건 변함이 없다. 그래도
납덩이로 짓누르는 것 같던 마음은 약간이나마 가벼워졌다.
"안녕."
"응. 안녕."

내가 특유의 무뚝뚝함으로 인사하자 마리는 해맑게 웃으며 인사해줬다. 방실방실 웃는 얼굴이 정말


귀엽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내가 자리에 앉고 노트를 꺼낸 순간이었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

나는 마리의 질문을 듣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는 밝았으나 그 속에 뼈가 실려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결코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에 시선을 옮기니 뭐가 문제라는 듯, 방긋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참 예쁜 미소구나, 라고 생각하겠다만 나에게는 아니다.

마리는 인지하지 못 하고 있겠지만 입꼬리가 미약하게나마 떨리고 있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지은 미소라는 의미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하고 있지만 역시 마음에 담아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 한 번 두 번


생각을 거친 후에 입을 열었다.

"잘 들어갔지. 너는?"


"나야 뭐..."

그녀는 말을 흐리며 뒤를 힐끔거렸다. 마리의 시선이 향한 곳은 세실리가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현재


리나와 잡담을 하는 중이었다.

"...잘 들어갔지. 별 일 없었어."


"그래?"

거짓말이다. 세실리를 봤을 때 그녀의 눈빛은 잠시나마 낮게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나와의 관계가 어색해지는 것이 싫어서 이런 행동을 보이는 듯했다. 그러면 그럴 수록 마리에
대한 죄책감이 증가했다.

덕분에 결정을 내리기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이상 그녀가 상처받는 일은 없을테니까.

"아참. 아이작 너 혹시 이번에 나온 제논 일대기 9 권 봤어?"

내가 씁쓸함을 감추지 못 하고 있을 때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는지 마리가 그리 물었다. 미리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던지라 전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읽었지. 이번 신권부터는 출판사에서 신기술을 도입해서 물량이 계속 나오잖아? 너는 읽었어?"


"어제 읽었지롱. 칠죄종이라는 개념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제논 일대기를 읽으면 읽을 수록 이
사람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하다니까? 그리고..."

그 사람, 바로 네 앞에 있어. 나는 속마음을 삼킨 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재잘거리는 마리를 바라봤다.

이렇게 옆에서 바라보니 작고 귀여운 새가 지져귀는 것 같아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이다. 이런 소녀에게


상처를 입혔다니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나는 마리가 자기 혼자 신나게 떠드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리."
"응. 왜?"
"너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하고 있어?"

마리는 내 질문을 듣고 큼지막한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한
모습이다.

그동안 나는 턱을 괴며 그녀의 입이 열리기까지 진득하게 기다렸다. 이 질문은 기회가 된다면 리나와


레오르트에게도 질문할 생각이나 우선은 가장 편한 상대인 마리부터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상관없다. 점심 시간 혹은 모든 수업이 끝난다면


마리와 독단으로 만날 계획이었으니.

이윽고 머지않아 마리는 검지 손가락으로 뺨을 툭- 툭- 두드리더니 본인의 생각을 밖으로 꺼냈다.

"일단 '내'가 아닌 '레킬리스 가문'의 일원으로서 말하자면, 우리 가문은 물론 제국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거야. 저자가 세계에 끼친 영향력이 무시무시하거든."
"정말 그정도야?"
"당연하지. 특히 우리 제국과 테이로스 왕국이 저자를 포섭하려고 안달이 나있을 걸? 문화라면 서로
가지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중이니까. 국가의 내정을 다스리는데 문화만큼 효과가 뛰어난 것도 없지."
"문화라..."

문화라고 하니 쉽게 이해가 된다. 전생의 예를 들자면 중국이 있다.

중국은 과거에 문화강국이라 칭송받았지만, 역사적으로 엄청난 실수를 저질러 본인들이 그 문화를 다
말아먹었다. 그때문에 훗날 미국과 경쟁할 정도로 성장해도 문화가 발목을 잡았다.

물론 문화 발전을 저해시키던 중국 정부의 검열과 강압이 가장 큰 문제이긴 했지만, 애시당초 문화를 다


말아먹은 그 사건만 없었다면 중국은 정말로 그 누구도 막기 힘든 강대국이 되었을 것이다.

'...조금 무섭긴 하네.'

나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국가의 문화가 크게 발전된다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이란 말인가. 하물며
이 세상은 중세 시대를 표방하고 있어 문화를 더욱 중요시 여길 것이다.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마리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다른 의견을 꺼냈다.

"그리고 저자가 쓴 책이 무기가 될 수도 있어. 마족의 인식을 뒤바꾼 것처럼, 다른 종족의 인식도 바꾸는
건 일도 아니겠지. 물론 저자가 그런 의도를 담지 않겠지만 많이 위험할 거야."
"위험하다고?"
"응. 자칫하다간 안 좋은 사상이 멀리 퍼져나갈 수도 있으니까. 이때문에 국가에서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

하기야 여기는 스마트폰은커녕 인터넷조차 없다. 결국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한정돼 있다는 것인데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신문이다.

인맥이 협소한 나로서는 바깥 세상 소식을 알기 위해서는 신문밖에 없다. 그게 날조된 것인지, 아니면
진실인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자면 내가 쓴 책이 사상 전파용으로 쓰여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자연히 눈쌀이 찌푸려질 수밖에.

'난 그저 재미있는 책을 쓰고 싶을 뿐인데...'


나는 정치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이다. 전생에서는 대학교밖에 다니지 않던 사회초년생이었으며
그것마저 기한이 극도로 짧다. 복잡한 정치 세계에 입성하자니 속이 거북했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기왕 이렇게 된 거 매번 피하는 건 정답이 아니다. 최소한 대응책은 마련해야
내가 원하는 책을 쓸 수 있을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의 능력을 길러놓아야한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야?"

내가 속으로 다짐하고 있을 때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금증을 드러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리."
"응?"
"혹시... 오늘 시간 있어?"

뒤이어 나는 살짝 머뭇거렸다가 용기를 담아 그녀에게 권유했다.

"너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거든."

다소 오해의 요지가 충분한 말이어서 그럴까.

"...에?"

마리의 새하얀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졌다.

< 55 화 >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 리나의 아카데미 생활은 의외로 평범한 편이었다. 그녀는 입학 전까지만 해도
피곤한 일들만 있을거라 예상했다.

피곤한 일이라함은 자신의 오라버니이자 황태자, 레오르트가 줄곧 겪는 것처럼 파리가 꼬이는 것이다.
실제로 입학 당시 소피아라는 영애가 달라붙은 걸 시작으로 첫 강의 시작 전에 잭슨이 무모하게 접근한 걸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예상 외로 그런 상황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헬리움의 공주이자 입학 첫 날부터


새로 사귄 친구, 세실리 덕분이다.

입학식부터 비범한 행동을 선보여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고, 더 나아가 아름다운 외모와 더불어
고혹적인 분위기로 기품을 뿜내는 미인.

이미 세실리에 대한 이야기는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파다하게 퍼진지 오래다. 이때문에 세실리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찾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아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무산되었다.

리나의 옆에 세실리가 있듯이, 세실리의 옆에는 리나가 떡하니 있었으니까. 어지간한 용기가 아니라면
감히 이 둘에게 접근할 사람은 없었다.

그 덕분에 나름대로 평탄한 아카데미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새로 사귄 친구도 있겠다, 황궁에서는 못


다한 것들을 즐길 수 있어서 그녀에게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무엇보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 하나 있다. 세실리와 정답게 대화를 나누던 리나는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질문을 날렸다.
"세실리.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응? 물어봐. 리나의 질문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니까."

리나의 부탁에 세실리는 흔쾌히 허락했다. 이에 리나는 가면 따위는 벗어던진 채 그녀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세실리도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찾고 있지?"


"제논 일대기?"

세실리는 리나의 질문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이에 리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하고 싶은


질문을 이었다.

"응. 헬리움에서도 당연히 찾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거든."

이 질문을 한 이유는 간단하다. 직접적으로 말은 못 하지만 조금이라도 세실리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세실리와 가까워지면 질 수록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세실리만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마족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그야말로 은인을 넘어 구원자로 생각하는 중이다.

세계와 반강제적으로 단절되고 오직 어둠 속에 숨어서 살아야하는 마족들이었으니 구원자로 대우하는 건


당연한 일일 터. 그러니 마족들도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찾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리나, 자신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꿰뚫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공동 저자'라고 할
수 있겠지.

'붉은 사자가 해준 이야기를 아이작이 적은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중지 손가락에 굳은살이 심하게
박히지도 않을테고.'

황태자, 레오르트는 붉은 사자로 명성을 떨친 호크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로 확정지었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게 생각하는 중이다.

평생동안 무예만 단련한 기사에게 그만한 필력이 있다? 리나로서는 근거가 빈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호크가 스토리를 대략적으로 알려준다면 아이작이 대필하는 식으로 제논 일대기가 발간된다고
예상했다.

리나가 머릿속으로 그런 추측을 하는 동안 그녀의 말을 들은 세실리는 눈을 깜빡였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찾고는 있지. 그래도 난 신경쓰지 않으려고."


"응? 어째서?"

세실리의 대답에 리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신 같았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을텐데
세실리는 아니라고 답했다.

이에 세실리는 그윽하면서도 아련한 눈빛을 짓더니 조용히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 분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실례를 끼치는 것 같아서."


"실례?"
"응. 무엇보다 지금 당장은 학업에 집중하려고. 입학식 때 내가 한 연설을 들었지? 우리 마족도 인간처럼
살아가는 걸 보여주겠다고 말이야. 그 분도 분명 그러기를 원할거야. 그러니 그 분을 찾기보다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이루어야지. 찾는거야, 훗날 그 분이 스스로 정체를 밝힐 때 찾아가도 늦지
않을테고."
싱긋 웃으며 설명을 꺼낸 세실리에 리나는 살짝 멍한 표정을 지었다. 황실의 힘을 동원해서 찾은 자신과
레오르트와 달리 매우 어른스러운 결정이었다.

물론 세실리는 이미 '그 분'을 찾았기에 위의 말을 꺼낼 수 있었지만 관찰력이 뛰어난 리나는 저 말이


진심이라는 걸 곧장 눈치챘다. 그래서 약간 떨떠름해졌다.

"...그래? 알았어."

그래서 세실리에게 힌트를 주는 건 관두었다. 마음을 주고받는 친구끼리, 그리고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는
팬들끼리 이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다짐을 듣고 접어버렸다.

세실리는 리나의 반응을 듣고 빙긋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서 그녀에게 제안했다.

"잠깐 화장실 갔다 올래?"


"...응. 그러자."

리나는 그녀의 제안을 가볍게 수락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강의실 문 밖으로
나가기 직전, 그녀의 눈에 한 사람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책상에 엎드려 얼굴을 숨기고 있는 마리의 모습이. 평소와 달라도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귀가 왜 저렇게 빨갛지?'

은은한 푸른빛을 띄는 흰색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는 한 눈에 봐도 빨갛게 익어있었다. 옛날부터


마리를 보았던 리나에게는 다소 신기한 반응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궁금해서라도 그녀에게 다가갔으나 리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주 어릴 때 저지른


실수로 인해 마리가 자신에게 깊은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궁금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조금 걱정되긴하네.'

마지막으로 그녀는 이런 부분에서는 눈치가 '살짝' 부족했다. 리나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마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문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편 책상에 엎드려 누워있던 마리는...

'나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분명히 그랬어. 그럼... 아니다. 일단 옷은 뭘 입고 가야할까? 그냥


교복을 입고 오라고는 했는데...'

머릿속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

마리와 만나는 시간은 저녁 6 시로 잡았다. 숙소에서 준비물을 갖고 올 겸 겸사겸사 저녁을 해결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마리는 그냥 처음부터 같이 가면 안 되냐고 의문을 드러냈지만 내가 보여줄 게 있다고 하자


금방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물 때 얼굴이 붉어진 건 덤이다.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일종의 고백? 비슷한 걸 위해 따로 만나는 걸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일단 고백은


맞긴하다만 오해를 풀어줘야할지 말아야할지 약간 고민되었다.

'...설마 실망하지는 않겠지?'

그리고 현재로 돌아와, 나는 약속한 식당 앞에서 마리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다. 복장은 사복을
입기에 애매하여 교복을 입고 있었다.

식당은 지난 번 레오르트와 리나 남매와 함께 식사를 나누었던 그곳이다. 방음이 되는 식당은 내가 알기론


여기밖에 없었다.

'우선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이걸 보여주자.'

살짝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내 손에 들린 우편 봉투를 다시 체크했다. 우편 봉투 속에는 여태까지


내가 썼던 제논 일대기의 초판본이 들어있다.

마리와의 저녁 식사가 끝난 후, 그녀에게 이걸 건내주면서 모든 상황을 설명할 계획이다. 과연 그녀가


믿을지 말지 미지수이긴하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예정이다.

"아이작!"

내가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진득히 기다리는 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이에


고개를 돌리니 은은한 푸른빛을 띄는 백발의 소녀, 마리가 손을 붕- 붕- 흔들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화장이라도 한 걸까, 내가 당부한대로 교복을 입었지만 왠지 전보다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다. 나는


여태까지 본 것보다 더욱 생기넘치는 그녀의 모습에 살짝 멍해졌다.

확실히 다른 사람에게 묻혀서 그렇지, 마리도 예쁘긴 예쁜 편이다. 특히 오늘은 작정하고 만나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예쁜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돌아다녔다.

"내가 너무 늦진 않았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마리가 헤헤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행복 바이러스를 뿜내는 그녀의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냐. 나도 방금 왔어. 시간도 6 시가 아니고."


"그럼 다행이네.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

마리는 한시라도 빨리 나와 단 둘이 있고 싶었는지 재촉하는 뉘앙스로 말했다. 그걸 들으며 정말 나를


좋아하는구나, 라고 다시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저절로 잔잔한 미소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항상 말했지만 마리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다른 곳에 신경 쓸 필요가 하나도 없고 오로지 그녀에게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그녀에게 내 비밀을 고백하려는 결정은 결코 그릇된 선택이 아니다. 나는 초판이 든 우편을 왼쪽


겨드랑이에 끼운 뒤 오른손을 내밀며 능글맞게 제안했다.

"그럼 가실까요, 레이디?"


"... ..."

내가 그리 말하자마자 마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단순한 매너인데 저런 반응을 보이니 나로서는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왜 저러지? 부끄러운 건가?'


집에서 배웠던 예법 상으로 이 행동은 일종의 매너에 불과하다. 이건 어머니에게 배운 거다.

하지만 뒤늦게 어머니가 말해줬던 게 하나 더 떠올릴 수 있었다. 이 행동은 어디까지나 사교회나


무도회처럼 '공식적인 행사'에서만 매너로 작용하는 것이지, 평상시에서는 의미가 180 도 달라진다고.

만약 평상시에, 그것도 남성이 여성에게 이 행동을 선보인다는 건 '나는 당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품고
있어요'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것만으로도 나에게 기겁할만한 사유인데 문제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응."

꼬옥-

마리가 부끄러워하면서도 내 손을 살포시 붙잡았으니까. 붙잡은 손에 미약한 떨림과 절대 놓치기 싫다는


의지가 동시에 느껴졌다.

그 덕분에 이번에는 내 얼굴이 빨갛게 익을 차례였다. 남자가 내민 손을 여자가 잡아주는 행동?

'나 또한 당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품고 있다'라는 화답이다. 그게 아니라면 웃음만 흘리고 정중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내가 내민 손을 부드럽게 잡아줬다. 내 간접적인 고백을 받아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 ..."

우리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한 채, 손만 붙잡고 서로를 바라봤다.

나는 어떻게 할지 갈피를 잡지 못 하다가 어색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갈까?"
"...응."

마리가 고개를 푹 떨구며 개미가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56 화 >

식사는 당연하게도 방음과 보안이 철저한 방에서 이루어진다. 황족 남매와 식사하기 전까지 이런 공간이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지금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대신 가격이 상당히 비쌌는데 거의 보름치 생활비에 육박했다. 아무래도 방의 구조상 가격을 이리
책정한 것 같은데 약간 비싸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거디가 먹튀를 방지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가격 때문인지 몰라도 선불이었다. 이에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가격을 지불할 생각이었다.

"돈은 내가 대신 낼게."

식당에 들어오고나서도 붙잡았던 내 손을 놓지 않던 마리가 선듯 나섰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쳐다봤다.

"마리?"
"괜찮아. 내 가문이 어디인지 잊었어? 이정도는 간식거리도 안 돼."

자부심이 뚝- 뚝- 묻어나오는 말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내가 감동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마리는


더욱 으쓱거리며 붙잡은 손에 힘을 더 강하게 주었다.

뒤이어 마리가 가격을 지불하자 직원이 따라오라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손을 그대로 붙잡은 채
직원의 뒤를 따라갔다.

'부끄럽네...'

내가 여자 손도 잡아보지 못 한 숙맥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전생에서 여자친구를 사귀었던 적이 있다.


사귀는 도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서 자연스레 헤어졌지만.

그러나 환생하고나서는 두 번째다. 첫 번째는 당연히 세실리였으나 그녀는 반강제적으로 내 손을


잡았던지라 느낌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고된 단련으로 고생한 세실리의 딱딱한 손과 달리 마리의 손은 보들보들했다. 말랑말랑한 감촉이


손을 타고 전해지는 것이 장난을 치고 싶을 정도로.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주문을 원하신다면 여기 있는 종을 울려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직원은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예의바르게 문을 닫았다.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방 내부의 모습을 둘러봤다.

지난 번에는 4 인실이라 매우 넓은 편이었지만, 우리가 들어온 방은 2 인실이라 상대적으로 규모가 좁았다.

물론 상대적으로 규모가 적다는 거지, 2 인실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비싼 가격을 책정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나는 방을 둘러보다가 마리를 힐긋거렸다.

당당하게 가격을 지불했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고개를 내리깐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붙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았으니 귀여울 따름이다.

하지만 밥을 먹기 위해서는 이 손을 놓아야한다. 마음 같아서는 나란히 앉아 정답게 식사를 하고 싶었으나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았다.

이에 나는 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마리."
"...응."
"이제 손 놓고 자리에 앉자."

그 말과 동시에 아래로 내려갔던 마리의 고개가 올라가며 나를 직시했다.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눈동자에는
진한 아쉬움과 약간의 간절함이 담겨있었다.

뒤이어 그녀는 내 시선과 똑바로 마주하다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힘겹게 대답했다.

"...그냥 이렇게 있으면 안 될까?"


"... ..."

이거 너무 위험한데. 나는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른 마리의 모습에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활발하고 시원털털한 성격을 지닌 마리가 촉촉하게 젖은 눈빛으로,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애처롭게 말하니
뭐라고 해야할까.

반전매력? 아무튼 그리 느껴졌다.

나는 애교에 가까운 얼굴로 올려다보는 마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조용히 답했다.

"...그럼 주문한 게 올 때까지만 기다리자."


"응!"

내 대답에 마리가 환하게 웃으며 힘차게 답했다. 나는 그렇게도 좋은건가 싶어 못 말린다는 웃음을 흘렸다.

이어서 자리에 착석하기 전, 각자 주문을 고르고 직원이 언급한대로 문 쪽에 걸려있던 종을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방문을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주문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후로 각자 주문을 끝낸 뒤, 우리는 식사가 올 때까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서 있는 상태로 기다렸다.


서로 손을 잡은 채 말이다.

"... ..."

오만가지 생각이 드는 기분이다. 마리도 나와 비슷한 심정인 건지 몰라도 고개를 아래로 내리 깐 채


얼굴만 붉히는 중이다.

아까의 멘트는 실수를 한 것이지만, 눈치없이 그 이야기를 꺼냈다간 기껏 좋은 분위기가 모두 사라질 것


같다. 솔직히 나도 나쁘진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마리에게 호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전까지의 마리는 단순한 여사친에 불과했지만 그녀가
나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다르게 느껴졌다.

'...나도 마리를 좋아하는 걸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그녀의 손을 잡은 이후부터 내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는 건 확실하다.

나는 방 안에 가라앉은 미묘한 침묵에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다시 마리를 바라봤다.


공교롭게도 때마침 나를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 둘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는 의미다. 나는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그녀의 눈과 지그시 마주하다가


바보처럼 웃었다.

그러자 마리도 헤프게 웃으며 자신의 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했다.

"아이작."
"응."
"아이작. 아이작."
"응. 나 여기 있어."
"히히히."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부르는 마리. 나는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대답해줬다.

마리는 단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건지 새하얀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얘가 나를 좋아하긴 한 모양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미소녀가 나를 좋아한다고 티를 낸다면 그 어떤 남자가 싫어할까. 나는 해맑게 웃는
마리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마리."
"응."
"마리."
"왜에?"

이번에 내가 이름을 부르자 마리가 애교를 담아 대답했다. 그러면서 몸을 좌우로 살짝 흔들며 본인의
기분을 표현하기까지.

나는 살랑살랑거리는 그녀의 몸짓에 붙잡았던 손에 힘을 더 강하게 주었다. 그러자 마리의 얼굴이 좀 더


진하게 붉어지는 것이 내 눈에 잡혔다.

'이거 참...'

곤란하기 짝이 없다. 원래는 이런 의도로 만남을 가진 게 아닌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변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내 마음이다. 마리와 손을 잡고난 이후부터 그녀가 점점 더 예뻐보이고, 또 귀엽게


느껴진다.

그러나 모임 당시 마리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건 또 아니다. 마리는 여러모로 매력이 넘치는 여자가
확실하다.

'정말로 제논 일대기가 그렇게 큰 가치를 가진 거라면...'

내가 마리와 교제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을까? 물론 대외적인 시선으로는 공작의 딸과 남작의 아들이
서로 사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폄하는 물론이고 서로에게 좋지 못한 소문이 나올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밝히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리가 꺼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난 정말로 함부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몸값을 지닌 사람이다.


나라가 친히 모셔가려고 안달이 날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상을 지닌 작가.

불과 1 시간도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내 마음이 이렇게 바뀔 줄은 누가 알았을까. 나는 방실방실 웃는


마리와 얼굴을 마주하다가 겨드랑이에 끼웠던 초판본이 떠올랐다.

이렇게 손만 잡고 가만히 있는 건 좋았지만, 그래도 할 일은 해야하지 않겠나. 이에 나는 마리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리?"
"응. 아이작."
"이제 슬슬 앉을까?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이대로 말하면 안 될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아서."

그거 아니야. 나는 마리가 능글거리는 투로 얘기하자 헛웃음을 흘릴 뻔한 걸 간신히 인내했다.

"네가 생각하는 건 아니야. 어쩌면 더 큰 거일 수도 있어."


"...더 큰 거?"
"응. 참고로 그렇고 그런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그렇고 그런..."

마리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현했다가 눈을 크게 뜨더니 아예 고개를 반대로 돌려버렸다.


제 딴에는 창피한 심정을 감추려는 시도였겠지만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로 인해 의미없는 행동이었다.

뒤이어 내가 맞잡은 손에 힘을 천천히 풀자 마리도 스르르 힘을 풀어줬다. 다만 힘을 완전히 풀기 직전


다시 잡으려고 시도한 걸 보아 많이 아쉬운 듯했다.

"그럼 앉을까?"
"응..."

그리하여 한참동안 손만 잡던 우리 둘은 자리에 착석했다. 거의 20 분 가까이 손만 잡고 있던 것 같다.

이윽고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맞은편에 조신히 앉은 마리에게 시선을 두었다. 때마침 마리도 타이밍 좋게
나를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 ..."
"...히."

내가 물끄러미 보고만 있자 마리가 쑥쓰럽다는 듯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나는 피식거리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마리."
"응. 아이작."
"아카데미 생활은 할 만해?"

일단은 이 분위기부터 어떻게 해야할 것 같아 간단한 질문부터 꺼냈다. 계속 이 상황으로 갔다간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았으니까.

마리는 내 질문을 듣고 파란색 눈을 깜빡거렸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음... 처음에는 힘들겠구나 싶었는데..."

검지 손가락으로 뺨을 두드리며 말을 흐리던 그녀는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활짝 웃더니 진심이


우러러 묻어나오는 말을 꺼냈다.

"아이작을 만나서 좋아졌어."


"... ..."

이제 제 마음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기야 그렇게 티를 냈으니 반쯤 연인 관계라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간신히 진정시켰던 심장이 다시 한 번 날뛰려고하자 최대한 억눌렀다. 억누르지 못 한다면 보나마나


내 얼굴이 타오르듯이 붉어질테니까.

"크흠... 큼. 그래? 그거 다행이네. 불편한 점은 없고?"


"불편한 점이라... 지금은 딱히 없어. 너도 알다시피 문학생은 무학보다 수가 적은데다가 하루하루
수업에 따라가기 바쁘잖아. 뭐, 3 학년이 되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아이작 너는?"
"나도 불편한 점은 없어. 지난 번에 조별 과제했을 때를 빼면은."
"아, 조별 과제. 그때 진짜 힘들었었는데..."

다행히 이야기는 도중에 끊기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나갈 수 있었다. 중간에 식사가 들어와도 우리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가 단절되는 일은 없었다.

황족 남매와 함께 식사를 했을 때는 피가 말리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편하기 짝이 없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다는 느낌이 이런걸까.

나와 마리는 식사를 하면서도 신나게 웃고 떠들기 바빴다. 식사 예절에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아. 물론.

"... ..."

식사를 모두 끝내고 정리가 끝나자마자 한 마음 한 뜻이 된 것처럼 입을 다물게 되었지만.

아마 마리도 내심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식사가 모두 끝나는 순간부터가 본격적인 주제가 시작된다고.

나 또한 그럴 계획이었기에 무슨 말부터 꺼내야할지 속으로 고심했다. 일단 미사여구 다 집어치우고


말하는 것보다는 차근차근 빌드업을 해놓아야 좋겠지.

"...마리."
"...응."

내가 이름을 부르자 마리는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는지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동안
나는 허벅지 위에 있던 초판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마리는 테이블 위에 초판본이 올라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나를 쳐다봤다. 그도 그럴게 마리의
눈에는 단순히 우편물로밖에 보이지 않아 이게 뭐냐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마 그녀는 이게 제논 일대기의 초판본인 것을 꿈에도 모르겠지. 다른 사람과 달리 마리는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꿈에도 모르고 있을테니까.

"후우..."

하지만 막상 말하려고하니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긴장을 풀기 위해 한숨을 내쉬어도 식은땀이
날 것 같이 두근거렸다.

'괜찮을거야.'

암. 마리라면 괜찮고 말고.

그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작."

긴장을 추스리고 있는 도중에 마리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그에 내가 딱 눈을 떴을 때였다.

"...?"

눈을 뜨자마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본래 나와 마리의 거리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깝지만은 않은 거리였다.

헌데 지금은 마리의 얼굴이 바로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당황하고
있을 때, 뒤늦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기울였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까 네가 그렇고 그런 게 아니라고 했었지?"

내가 아무런 말조차 하지 못 하고 있는 와중에 마리가 나에게 말했다. 촉촉하게 젖어있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세실리와 다른 의미로 야릇한 목소리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대충 알겠지만... 아마 상관없을 거야."

그 말과 끝남과 동시에 마리는 서서히 내 얼굴에 접근하더니...

쪽-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었다가 쪽- 소리를 내며 곧바로 떼었다.

연인끼리 하는 진한 키스가 아닌, 단순히 가벼운 입맞춤.

그러나 내 입술에 전달된 느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가볍다지만 이 입맞춤은 일종의 선포나 다름없다.

깃발을 꽂아버리는 것처럼, 이성의 마음에 확신을 새겨넣는 행동.

덕분에 내 사고가 정지될 수밖에 없었다. 마리가 이런 과감한 행동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중간
과정을 모두 생략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으니까.

그사이 마리는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로 베시시 웃더니 따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단지 너를 좋아하는 것 뿐이니까."

< 57 화 >

"난 단지 너를 좋아하는 것 뿐이니까."

마리는 그 말을 하면서 서서히 상체를 뒤로 물리더니 자리에 조용히 착석했다. 그 뒤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빙긋 웃어주기까지. 아름답다는 단어가 부족할 정도로 예쁜 미소다.

그동안 나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약 5 초 간 눈을 깜빡였다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더듬거렸다. 아까


마리가 용기있게 펼친 그 행동이 내 착각이라면, 지금 내 입술에 느껴진 감촉은 모두 거짓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 감각은 절대 착각이 아니다. 찰나의 시간동안 입에 느껴졌던 말랑말랑한 감촉은 뇌리에 선명히
맴돌았다.

'그러니까... 마리가 방금...'

나에게 키스를 한 건가? 진한 딥키스가 아니라 흔히 버드 키스라 불리는 입맞춤을?

도통 믿기 어려운 현실에 아무런 말조차 하지 못 했다. 그러던 중, 마리는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쑥쓰럽다는 뉘앙스로 입을 열었다.

"어때?"
"... ..."
"네가 무슨 말을 하던 간에, 이게 내 대답이야."

아, 저 말을 하는 걸 보면 착각이 아니구나.

가볍게 입맞춤을 한 게 맞구나.

마리는 진심으로 나를 좋아하는구나.

...세상에 맙소사.

화악!
3 번의 이성적인 판단 이후에 소리없는 아우성이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내 얼굴은 1 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차마 마리와 눈을 마주치지 못 할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였다. 덕분에 나아지기... 기는 무슨,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얽혀졌다.

'진짜로? 리얼리? 실화야?'

위의 상념들만 떠돌아다녔다.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리 되새겨도 마리가 나에게 버드 키스를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키스는 단순한 이성
친구를 넘어 연인끼리나 할 법한 행위.

아직 정식적으로 교제를 시작한 것도 아닌데 저렇게 저돌적으로 나오니 나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웠다. 전생에서 여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지만 언제나 내가 리드했지, 여자 쪽에서 나서는 경우는
결단코 없었다.

'어질어질하다...'

머리 끝까지 오른 열기 때문일까.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가끔씩 고혈압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딱 이런 느낌일 것 같다. 차이점은
그들은 지병이고 나는 일시적인 거지만.

"후우. 후우. 후우."

나는 어떻게든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열을 가라앉히기 위해 열심히 심호흡을 했다. 한 번 숨을 내뱉을


때마다 얼굴에 차올랐던 열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세실리의 가슴을 만졌을 때보다 훨씬 심했다. 나도 마리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어서
그런 걸까. 하물며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음습한 '욕망'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에 가까웠다.

"후우..."

마지막으로 길게 숨을 내쉼으로서 정처없이 날뛰는 심장을 간신히 진징시킬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열이 완전히 가라앉은 건 아니지만 사고회로가 돌아갈 정도는 되었다.

뒤이어 고개를 천천히 들어 맞은편에 앉아있는 마리를 바라본다. 그녀는 본인이 무슨 행동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하는건지 방실거리기 바빴다.

"...마리."
"응. 응."

내가 이름을 부르자 애교가 듬뿍 묻어있는 음성으로 말하는 그녀. 흔히 '꽃받침'이라는 포즈를 취하며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하마터면 다시 한 번 심장에 무리가 올 뻔했으나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나는 숨을 몰아쉰 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네가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아?"


"알고 있으니까 한 건데?"
"... ..."
"한 번 더 해줄까?"
마리는 그리 말하더니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여차하면 한 번 더 하려는
모양새다.

그 행동에 나는 손을 뻗어 다급히 그녀를 제지시켰다. 부끄러운 것도 부끄러운 거지만 여기서 한 번 더


했다간은 '가볍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든다.

이건 마리를 믿지 못 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나를 못 믿었기 때문이다.

전에도 세실리의 가슴을 만진 부분까지는 참을 수 있었으나 손가락이 빨리니 본능이 튀어나왔으니까.

강조하지만 나는 절대 고자가 아닐 뿐더러 마리처럼 예쁜 미녀를 좋아하는 평범한 남자에 불과하다.

"하아..."
"히히히."

내가 난감하다는 듯이 한 손으로 머리를 헝클이던 말던 마리는 방실거리기 바빴다. 마음 같아서는 저


얄미운 볼을 잡아다 쭈욱 늘리고 싶었다.

오늘 내가 하려던 '고백'은 결코 이런 의미의 고백이 절대 아니었다. 단지 마리에게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알려주고, 그녀와의 관계는 이다음에 천천히 생각할 요령이었다.

헌데 지금은 순서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스노우볼이라고, 식당 입구에서 내가 마리에게 건냈던 멘트가


거대한 눈덩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렇다고 기분이 썩 나쁘냐? 절대 아니다.

오히려 마리가 용기있게 행동한 덕분에 마음을 망설임이 모두 사라졌다.

정말로 내가 마리의 곁에 있겠다면, 그녀의 곁이 어울리는 남자가 되자고.

그리고 나는 그런 남자가 될 수 있다. 아니, 이미 훨씬 전에 자격을 갖췄다.

"...마리."
"왜에~?"

마리는 꽃받침을 유지한 채 애교가득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행복 바이러스를 사방으로 퍼뜨리는 중인 그녀를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푸흐흐..."

그녀가 뿜내는 행복 바이러스에 감염이라도 된 걸까. 뜬금없이 헛웃음이 나왔다.

헛웃음도 평범한 헛웃음이 아니었다. 행복과 진심이 듬뿍 묻어있는 웃음이다.

환생하고나서 마음편히 웃은 적을 꼽자면 가족과 함께 있을 때였는데 지금 그런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만큼 지금 내 기분이 미친듯이 날아오르는 중이다.

"진짜 미치겠네. 푸흐흐..."


"왜 미치겠다는 거야?"
"묻지 마. 크흡..."

큰일났다. 말하긴 해야하는데 마리의 얼굴만 보면 자동반사적으로 바보같은 웃음이 나와버린다.


전생에서 첫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당시에도 이러진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다.

"후으..."

다행히 웃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정처없이 날뛰던 심장과 불처럼 타올랐던
얼굴이 대부분 다 가라앉았다.

뒤이어 나는 고개를 들어 마리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마리는 방실거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는 중이다.

이제는 정말로 말해야겠지. 그러나 전과 달리 긴장이 훨씬 덜해졌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마리. 내가 전에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지?"


"응."
"그걸 말하기 전에... 우선 이것부터 봐줄래?"

나는 초판이 든 우편봉투를 마리에게 전달했다. 그녀는 본인이 말한 것처럼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


미소를 유지하며 봉투를 받아 속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그걸 보며 살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긴장이 풀렸다고하나 비밀을 내 입으로 직접 밝히는 것만큼
긴장되는 건 없을테니까. 심지어 내가 밝히는 비밀은 마리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이다.

"... ..."

원고를 읽으면 읽을 수록 마리의 올라갔던 입꼬리가 점차 내려왔다. 그러면서 나를 곁눈질하는 것이


본인도 예상은 했지만 쉬이 믿지 못 하는 반응이다.

나는 마리가 초판을 대충 훑는동안 바싹 말라가는 입술에 혀를 낼름거렸다. 지금처럼 1 분 1 초가 매우


길게 느껴지던 때는 처음이다.

"하아..."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초판을 빠르게 훑어보던 마리가 원고지를 슬쩍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딘가 후련한 것 같기도 한, 묘한 한숨이었다.

이후로 그녀는 한동안 초판에 시선을 고정시키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녀의 푸른빛
눈동자에 약간의 의심이 서려있었다.

"어쩐지 세실리가 너한테 관심이 깊더라더니... 이거였구나?"


"...세실리 누나가?"
"응. 지난 번에 네가 가고 나서 나한테 말했거든. 자기는 너랑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라고. 그때부터
설마하면서 의심하긴 했는데..."

말을 흐린 그녀는 다시 한 번 원고에 시선을 두며 믿기 힘들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진짜일 줄은 몰랐네."
"...정말로 믿는거야?"
"솔직히 믿기 힘들어. 너도 알다시피 세간에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현자라고 추측하고 있잖아. 너처럼
20 살도 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너희 아버지가 붉은 사자로 유명한 사람이니 아마 전부 다 그쪽으로
생각할 걸?"

마리의 말대로다. 레오르트도 사람을 시켜 추적했을 당시 내가 아니라 내 아버지를 저자로 예측했었다.


그런데 마리는 정말로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고 확신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에 살짝 의문이 들었다.

그녀는 어째서 나를 제논 일대기 저자로 확정지은 것일까.

"너는 정말로 내가 작가라고 믿는거야?"


"이걸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믿기 힘들었겠지. 네 필기체랑 완전히 똑같은데다가 종이도 변색되기 직전인
걸 보면 꽤 오래 전에 썼다는 걸 알 수 있어."
"내가 변색된 원고지에다가 옮겨적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사칭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여기 잉크를 봐. 종이처럼 색이 변하기 직전이잖아. 잉크와 종이가 함께
더럽다면 모를까, 잉크만 깨끗하다면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금방 사칭이라는 걸 눈치채겠지."
"오..."

그럴 수도 있구나. 나조차도 몰랐던 사실에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마리는 내 감탄에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약간 붉혔다가 헛기침을 토했다. 그리고 원고지를 힐끔거렸다가
타박하는 듯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그나저나 관리 좀 잘하지 그러니? 이게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닌지는 알아?"


"음... 잘 몰라."
"그래. 모르니까 이렇게 막 관리하는 거겠지. 하나만으로도 나라에서 걸작을 넘어 국보로 지정될 정도야.
경매에 내놓는 순간 피바람을 넘어 나라 간의 쟁탈전이 벌어질 거라고."
"그정도야?"

끽 해봐야 돈이 썩어넘치는 부자들이 돈지라를 해댈 줄 알았는데 국가 단위로 변모한다니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내 몸값이 높은거지, 초판의 가치는 잘 모르고 있었으니까.

마리는 그런 내 반응에 '이 놈을 어떻게 해야하지?' 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다.

뒤이어 그녀는 재차 한숨을 푹- 내쉬더니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말했었지? 제논 일대기 저자, 그러니까 너는 나라에서 극진히 모셔갈 정도의 거물이라고.
아니지. 거물을 넘어 걸어다니는 문화라고 보면 돼. 원래 문화라는 건 그 나라만의 고유의 특징인데 너는
그 특징 자체가 되는거지. 우리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가진 국가다! 라고 세상에 알릴 수 있다는
거야."
"...위험한 건 아니지?"
"너 하기에 따라서 위험해질 수도 있어."

마리가 진지한 얼굴로 충고했다. 나는 역시나라며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
"...응."
"아까 내 대답을 들었겠지만 나는 네가 비밀을 밝히던 상관없어. 하지만 이건 조금 다른 문제야. 나는
네가 불순한 의도로 글을 쓸까봐 걱정 돼. 마족의 인식을 바꾸는 건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지만...
제논 일대기 8 권 초반부에 나온 이야기 있지? 귀족을 명과 암을 드러난 장면."

다소 논란이 되었던 장면이 마리의 입에서 언급되었다. 그녀도 귀족, 그것도 공작가 일원이니 염려스러울
수밖에 없는 문제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깨달아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마리의 걱정은 쓸데없는 부분이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마리."
"응. 말해."
"난 절대 그런 의도를 담아 글을 쓸 생각은 전혀 없어. 나는 단지 독자들이 내 글을 읽고 즐거워하면
그만이거든."

내가 여태까지 상황을 피한 이유가 여기서 기인한다. 늘 이야기했지만 나는 전생에서 평범한 웹소설


작가에 불과했다.

정치와는 거리가 먼 직업일 뿐더러 단지 사람들이 즐거워해서 글을 썼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즐거워하기에 꾸준히 글을 쓸 생각이다.

마리가 말한듯이 특정 의도를 담아 쓸 생각은 절대 없다. 마족의 인식이 모조리 뒤바뀐 건 나조차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며 인기가 나날이 증가하면 증가할 수록 중압감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그냥 글을 쓰고 싶을 뿐인데.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재미있어하는 반응이 좋을 뿐인데.

"만약 내가 쓴 글 때문에 세상에 해악을 끼친다면, 나는 절대 글을 쓰지 않을거야. 만약 누군가 악의를


담아 억지로 시킨다면 손을 잘라버릴거고."
"... ..."
"과연 이 말을 네가 믿을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진심이라는 것만큼은 알아줘. 나는 그냥 사람들이 내
글을 보면서 즐거워하면 그만이라는 걸."

마음 속에 있던 고민을 모두 털어놓으니 후련해지는 기분이다. 가족에게도 말한 거지만 가족이기에 말할


수 있던 것이지, 타인에게 말하는 건 처음이다.

비록 인지하고 못 했지만, 그만큼 내가 마리를 믿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조금 전 그 키스가


기폭제가 되어 신뢰로 변할 수 있던 걸지도.

"...그렇구나."

마리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그 말을 나에게 하는 걸 보니 나를 믿고 있나봐?"


"...아마도?"
"아마도는 무슨 아마도야? 그냥 맞다면 맞는거지. 넌 이런 부분에 솔직하지 못 하더라."
"하하."

나는 마리가 투덜거리자 민망하다는 웃음을 흘렸다. 뾰족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마리도 내 웃음에 기분이
풀렸는지 피식 웃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 가족 다음으로 믿는 사람이 나라는 거니까. 혹시 이 사실은 누가 더 알고 있어?


일단 세실리는 알고 있는 것 같고 혹시 리나까지?"
"아니. 리나는 내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를 작가로 생각하는 중이야. 레오르트 님도 마찬가지고."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어째서 리나가 아니라 둘 다 알고 있는거야?"
"그게 있지..."

나는 그때 있었던 일들을 마리에게 모두 설명해줬다. 안 그래도 리나에게 악감정이 있던 마리인데 더


나빠질지 않을까 약간 우려되었다.

그리고 그 우려되어 내 설명이 이어지면 이어질 수록 마리의 표정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 보는 내가


무섭다고 느껴질 지경이다.

"그 년이 진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그래도 일은 잘 풀렸으니 너무 그러진 마. 네 말대로라면 그 분들도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는
않을테니까."
"아마 그러겠지. 하지만 조심할 필요는 있어. 알겠지?"
"알았어."
"아. 그리고, 하나 부탁할 게 있는데..."
"부탁?"
"그게..."

부탁이라는 말에 내가 의아해하자 마리가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본인도 말하기 민망한 듯, 푸른빛이


감도는 흰색 머리카락을 베베 꼬더니 내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닌가.

얼굴도 미약하게 붉어진 걸 보아 입 밖으로 꺼내기 부끄러운 듯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 의문은 점차
증폭되었다.

마리는 다른 사람과 달리 이상한 부탁을 하지 않을테니 평범한 것일텐데 왜 저러는 걸까. 그 생각을 들 때
쯤 마리가 헛기침을 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크흠... 그... 사인 좀..."


"...뭐?"
"사인 좀... 가능할까? 일단 네가 제논 일대기 저자니까... 사인 하나 쯤은 괜찮을 것 같아서..."
"... ..."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눈만 깜빡이자 마리가 바보같이 웃었다.

"헤헤헤..."

귀엽다.

< 58 화 >

다양한 의미가 포함된 고백 타임이 끝난 이후에 별 다른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후식으로 간단한


간식거리를 주문하여 심심한 입을 달래는 건 잊지 않았다.

분위기도 원래부터 가벼운 편이었지만 현재는 그때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나는 더이상 마리에게 숨길 것이


하나도 없었고, 마리 또한 제 마음을 표현했다.

누군가가 말했던가. 서로의 비밀을 터놓은 사이만큼 가까운 관계도 없다고. 하물며 마리는 원래부터
부담스러운 상대가 아니었던지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아참. 궁금한 게 있는데 아이작은 어디서 그런 작문법을 배운거야? 누가 가르쳐 주기라도 한 거야?"
"배운 건 아니고 나 스스로가 터득한 거야. 솔직히 나도 취미로 쓴 제논 일대기가 이렇게 잘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오옹... 신기하네. 정말로 취미가 맞아? 취미인 것 치고는 다양한 이야기가 안에 녹아들어있던데?"

마리는 이 기회에 평소 궁금했던 점을 모두 나에게 물었다. 그녀의 두 눈에 강렬한 호기심이 담겨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책을 좀 많이 읽잖아. 탐험가나 모험가들이 쓴 자서전을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세상을


경험할 수 있거든. 아버지에게 자문을 구할 수도 있고."
"그렇구나. 그럼 마족에 관한 건? 사크란의 최후도 그렇고 꽤나 심도있게 다뤘잖아. 그 결과가 인식이
바뀌었고."
"음... 거기에 대해서는 딱히 설명할 길이 없어. 나는 단지 마족들이 차별받는 게 싫었을 뿐이고,
영향력이 이렇게 무시무시할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제논 일대기의 첫 장에는 항상 이런 문구가 있어.
이 모든 이야기는 모두 허구의 이야기라고."
"허구의 이야기인 것 치고는 너무 생생했는데?"
"다시 말하지만 나는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어디까지나 취미로 쓰던 글이라니까?"
"음..."
제논 일대기는 어디까지나 취미로 쓴 글이라 해도 마리는 쉽게 믿지 못 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녀는
내가 환생자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마땅한 변명거리도 떠오르지 않아 살짝 난감했다. 다행히 마리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믿어주는 모양새였다.

"알았어.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으니까. 그 천재 중 한 명이 너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안 그래?"


"조금... 부끄럽네."
"부끄럽기는. 그나저나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못 믿겠어. 내 남자... 친구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니."

'남자친구'라는 단어를 입에 담기 부끄러운 것인지, 아니면 내가 제대로 된 확인시켜주지 않아서인지


마리는 살짝 망설였다. 그러면서 나를 힐긋거리기까지.

아무래도 돌아가는 도중에 확인 도장이라도 찍어줘야할 것 같다. 지금은 분위기 상 도장을 찍어주기에는
어울리지 않으니 꾹 참을 수밖에.

그때까지는 분위기가 어색하게 돌아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찻잔을


들면서 미약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렇긴 해. 처음에는 내 가족도 정말 내가 쓴 거냐고 물었거든."


"역시... 가족 분들이 부럽다. 제논 일대기가 나오기 전에 미리 볼 수 있잖아."
"부모님은 몰라도 형제자매들은 원고를 못 봐. 아무래도 아카데미에 있다보니 원고를 보내기가
힘들거든."
"네 형제자매도 직접 구매해야 돼?"
"그건 아니야. 아버지가 출판사로부터 직접 도서를 받아 우편으로 보내는 식이지."

출판사에서 신기술을 도입하기 전까지는 항상 피 말리는 경쟁을 통해 도서를 구매할 수 있었다. 그건


귀족들도 별 반 다르지 않아서 마리조차 구하는데 애를 먹었을 정도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약간 다르다. 부모님은 내 원고를 통해 제논 일대기를 미리 읽고, 니콜과 데이브는


출판사에서 보내준 도서를 통해 접한다. 그래서 가족들조차 읽지 못 하는 대참사는 발생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다만 데이브는 현재 기사단 일로 바빠서 잘 모르겠다.

마리는 내 대답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개구쟁이 같은 미소다.

"그럼 지금도 쓰고 있다는 거지?"


"응."
"다 쓰면 나 좀 보여줄 수 있어? 조금만 볼게."
"안 돼."
"힝."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내가 단호하게 대처하자 마리는 아쉬운 소리를 내었다.

물론 그녀도 진심이 아니어서 나도 반쯤 장난을 친 거다.

만약 마리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기꺼이 보여줄 생각이다. 내 원고로 허튼 짓을 할 사람도 아닌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으니까.

"한 번만 보여주라~ 나 다음 편이 궁금해~"


"아직 다 쓰지도 않았어."
"다 쓰면 보여주는거야?"
"아니."
"뿌우..."

이제는 짱구처럼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불만을 표시하는 마리다. 그래봤자 내 눈에는 귀여운
앙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와 동시에 현재 시간이 몇 시인지


파악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는 말이 이런 걸까. 분명 식사를 시작했을 때가 6 시였는데 벌써 8 시가 다 되어간다.

'내일부터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늦지 않게 들어가기만 하면 되겠지. 부디 시간이 조금 더 느리게 지나가길 바랬다.

"아이작. 그럼 제논 일대기가 몇 권에 완결되는지 알려줄 수 있어?"

내가 시계를 바라보며 생각하는 동안 마리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나에게 질문했다. 그에 나는 찻잔을


슬며시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아마... 20 권 내외로 끝날거야. 아직 풀어나가야 할 이야기가 많거든."


"아직 많이 남았네. 스토리가 전부 머릿속에 들어있는거야?"
"들어있긴 해도 전개를 기록한 노트는 따로 있어.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번에 실수로 보여준 그림을
알아?"
"아, 그거? 증기 기관차 비슷한 그림?"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초등학생이 그린 것처럼 짜리몽땅하게 그렸는데도 마리는 눈치챈 모양이다.

"그 노트에 전개가 적혀있어. 그때는 실수로 갖고 온 거지만 앞으로 강의실에 가져올 일은 없을거야."
"흐응. 대단하네. 네 머릿속에 또다른 세상이 있는 거잖아? 정말로 나랑 같은 나이가 맞는지 의심스럽단
말이야."
"그런 낯간지러운 칭찬을 해도 떨어지는 콩고물은 없어."
"쳇. 너무 뻔했나?"

말은 저렇게 해도 내심 흠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가끔씩 마리는 내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듯한 말을


무의식적으로 꺼내는 편이다.

저번에는 장난식으로 나에게 책을 쓰냐고 묻기도 했고, 지금은 내가 환생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데도
저런 말을 꺼냈다. 하나같이 찔리게 만드는 질문들이다.

"뭐, 그래도 대단하다는 건 진심이야. 그럼 다음 권이 언제 나오는지는 말해줄 수 있어?"


"아마 한 달 뒤 쯤에 나오긴 할 텐데 10 권이 나오면 3 학년이 될 때까지 휴재할 생각이야."
"뭐?! 그게 무슨... 아, 아카데미 문제 때문에?"

마리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크게 소리치려다 말고 납득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도 3 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상당히 바쁘다는 걸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으니 이해한 모양이다.

"응. 3 학년이 되는 순간부터 시간적 여유가 늘어나니 그때부터 써야지. 조금 시끄럽긴 해도 학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음... 취미라 하더니 진짜였던 모양이구나? 그냥 작가로 쭉- 살아도 되지 않아?"
"그건 아카데미 졸업하고나서 생각해야지. 일단 역사 쪽으로 진로를 잡고 있긴 해."

제논 일대기가 대박나기 전까지 내 꿈은 역사학자였다. 그래서 제논 일대기가 좋지 못한 성적을 내어도


신경쓰지 않았을 확률이 크다.
마리는 내 대답을 듣고 묘한 표정으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대견하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작은 다 계획이 있구나? 부럽다. 나는 지금 진로도 못 잡았는데."


"내가 특이한 거야. 다른 사람도 너랑 다 비슷할 걸? 너는 강의 중에 뭐가 제일 좋아?"
"나는 노는 게 제일 좋은데?"

무슨 뽀로로냐. 나는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마리를 바라봤다.

마리는 내 표정을 보고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꺄르르 웃었다.

"장난이고, 원래는 연금학이 제일 재미있었지. 교수가 설명을 잘 해주잖아."


"그렇지."
"그런데 지금은..."

잠깐 말을 흐리던 그녀는 나를 힐끔거리더니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역사가 제일 좋은 거 같아."
"... ..."
"가문에서는 강압적으로 배우라해서 싫어했는데 지금은 아니야. 누구 덕분에."
"크흠. 큼..."

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면서 찻잔을 들었다.

*****

이가 썩을 정도로 달콤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가능하면 시간이 조금 더 느리게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지만 제아무리 전지전능한 신이라 할지어도 흘러가는 시간은 막지 못 하는 법.

우리 둘도 너무나 빠르게 흘러간 시간에 아쉬워하면서 숙소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알콩달콩한 시간이 완전하게 끝을 맺은 건 아니었다.

"... ..."

짙은 어둠이 가라앉고 미약한 등불만이 비추는 거리.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닫은데다가 지나가는
행인들조차 거의 없어서 한적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우리 둘은 그 거리에서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이 달콤한 시간이 늦게 가기를 빌면서. 조금이라도 숙소에 도착하는 시간을 늦추기 위해서.

나와 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떨군 채 손만 잡고 걷고 있었다.

"... ..."

나는 고개를 아래로 내린 채로 마리를 힐긋 바라봤다. 그녀도 나처럼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하염없이 걷고 있다.

식당에 나오고나서 내가 먼저 손을 잡았을 때 화들짝 놀라던 그녀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과감하게
키스를 했을 때와 달리 너무나도 귀여운 반응이었다.

'이 시간만큼은 영원했으면 좋겠네.'

과연 좋아하는 이성과 함께 있는 순간만큼 행복한 시간이 있을까. 나는 아래로 내렸던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어둠 속에 촘촘히 박혀있어 하나의 은하수를 이루고 있었다. 정말로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광경에
넋이 나갈 뻔했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보던 때가 언제였더라. 집에 있을 때는 할 일이 없어서 자주 보았으나


아카데미에 오고 나서는 하루하루 바쁜 나머지 밤하늘을 쳐다볼 여유도 없었다.

우뚝-

내가 멍하니 은하수를 바라보고 있을 때 쯤, 문득 마리가 자신의 두 다리를 우뚝 멈추었다. 자연스레 나


또한 그 자리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어째서 멈추었는지 확인하니 어느새 갈림길 앞에 도착한 상황이다. 각 숙소로 향하는 갈림길이다.

마음 같아서는 여학생용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카데미 규정상 그랬다간은 엄중한
경고를 받게 된다. 왜 이런 규정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따라야겠지.

아무튼 간에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는 의미이기도하다. 나는 갈림길에서 마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공교롭게도 마리도 나에게 이제 막 고개를 돌린 참이었다.

"... ..."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면서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떨어지기 싫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잘 가라고 배웅해줘야할까.

내가 입술만 달싹이며 속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마리는 촉촉하게 젖은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작."
"...응."
"그... 있잖아. 우리..."
"사귀는 거 맞냐고?"

마리가 우물쭈물거리며 망설이자 내가 먼저 선수쳤다. 그러자 마리는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가 이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내가 대신 말해줬다지만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인지 시선을 옆으로 돌려버리는 그녀다. 이에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줬다.

"솔직담백하게 말할게. 원래 오늘 너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제논 일대기밖에 없었어. 네가 나에게


보여준 행동은 예상 밖이었지"
"... ..."
"물론, 그렇다고 너에게 호감이 없던 건 아니야.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처음 사귄 친구도 너고, 너처럼
대하기 편한 상대는 없었거든. 너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던 건 맞아."

내 말에 마리가 얼굴을 천천히 들어 나와 똑바로 마주했다. 긴장하고 있는지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뒤이어 나는 맞잡은 손이 아닌 다른 손을 그녀의 얼굴에 갖다대었다. 약간 뜨거우면서도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마리는 내가 손을 얼굴에 대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하는 반응이었다. 얼굴 또한 아까보다 훨씬
붉어진 것이 눈에 띄였다.

스윽-

나는 지진처럼 떨리기 시작한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서서히 갖다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쪽-

식당에서 마리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내 입술과 마리의 입술이 서로 맞닿았다. 버드 키스라면 여기서
바로 떼어야겠지만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읍...!"

간단한 입맞춤이 아닌, 연인끼리나 할 법한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마리의 입술이 앙 다물려 있던 탓에


혀가 들어갈 공간이 없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건 전적으로 내 마음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으니.

더구나 입술이 꾹하고 다물린 건 아마 극도로 긴장했기 때문에 마리조차 자각하지 못 했을 확률이 크다.
마음 같아서 혀를 이용해 노크 하듯이 입술을 톡- 톡- 두드리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진도는
천천히 빼면 그만이다.

지금은 그저 입술만 진하게 부딪힌 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 되겠지. 마리도 이걸 원했을 것이다.

"후아!"
"... ..."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흐르고, 내가 입술을 떼내자 마리가 참았던 호흡을 터뜨렸다. 그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펑! 하고 터질 것처럼 빨개진 상태였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 또한 얼굴이 화끈거려서 손부채질을 하고 싶었다. 내 딴에는 용기있게 행동한 거지만 역시 창피한 건


변함이 없다.

이어서 나는 어쩔 줄 몰라하는 마리를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리는 건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마음이 바뀌었어."


"우으... 으..."

마리가 부끄러움에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 해도 상관없었다. 나는 마리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을


껴안았다.

그러자 마리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나는 마리의 어깨에 턱은 얹으며 결정타를 날려줬다.

"너를 좋아해. 마리."


"... ..."
"이거면 됐지?"

그러자 마리의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스르르 풀렸다. 뒤이어 그녀도 두 팔을 들어 나를 조심히 껴안아줬다.

"...응."

소심한 그녀의 대답이 이어지고, 우리 둘은 한참동안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

두 남녀가 은하수가 펼쳐진 밤하늘 아래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체온을 나누고 있을 쯤이었다.

너무 늦은 밤이라 주위에 지나가는 행인이 거의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건 아니다.

"... ..."

그리고 한 쌍의 붉은 눈동자가 애정 행각을 펼치는 중인 연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비록 어둠 속에 가려져 있어 모습은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붉은 눈동자만큼은 선명하게 빛났다.


그때문인지 더욱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복잡한 눈빛으로 연인의 달콤한 분위기를 지켜보던 사람은 이윽고 눈매를 반으로 좁혔다.

매우 불쾌하다는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왔으며,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나설 듯한 분위기다.

"...아냐."

하지만 곧내 눈을 완전히 감아 충동을 억제했다. 뒤이어 붉은 눈동자의 주인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적어도 지금은 아냐. 지금은..."

< 59 화 >

영원할 것 같던 시간은 언젠가 끝을 보는 법이다. 이건 신조차 어찌할 수 없는 진리이며 불변의 법칙이다.

나와 마리의 따스한 애정 행각 또한 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몇 시간 내내 포옹을 하고


싶었지만 우리 둘 모두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헤어질 때도 서로 아쉬움을 담아 가볍게 키스하는 건 잊지 않았다. 놀라운 건 내가 아니라 마리가 먼저


고개를 내밀었다는 걸까. 나는 그저 호응을 해준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충치가 날 정도로 달콤한 시간은 끝이 났지만 혀에 감도는 아릿함은 다음 날에도 쭈욱 이어졌다.

"히히히."
"이러다 누가 보면 어떡해?"
"보라고 해. 어차피 숨길 필요도 없는데."

강의 시간에 아무도 모르게 서로 손을 붙잡는다던가.

"오늘은 저기로 가자! 저기 티라미수가 그렇게 맛있데!"


"다른 건?"
"다른 것도 많아. 일단 뭐가 있냐면..."

수업이 끝나면 무조건적으로 붙어다니면서 아카데미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던가.

"아앙."
"악! 왜 깨물어?"
"그냥 깨물고 싶어서. 가끔 몇몇 사람들이 애인 얼굴 뜯어먹고 산다던데 왜 그러는지 알 거 같아."

뜬금없이 내 뺨을 살짝 깨문다던가 등등.


연애 초기라고 상상하지 못 할 정도로 진도가 상당히 빨랐다. 애시당초 첫 시작부터 손을 잡는 걸 넘어
키스까지 했으니 이정도야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가끔가다가 내 뺨을 깨무는 행위만큼은 지양했으면 좋겠다. 딴에는 장난 같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


정말 아프다.

"그럼 목을 물어야지. 앙!"


"으악!"

그래도 하루하루가 즐거운 건 변함이 없다. 숙소에서 원고를 작성할 때도 마리의 해맑은 미소가 생각나고,
길을 걷다가도 생각나고, 밥을 먹을 때도 생각난다.

전생에서 연애를 안 한 건 아니었으나 이런 기분은 나에게 활력소가 되어줬다. 그덕분인지 몰라도 원고를
작성하는 속도가 무시무시하게 빨라졌다.

주변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 조금 신경쓰이긴 해도 상관없었다. 마리는 우리 둘의 연애 사실을


들켜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고, 나 또한 꿇릴 게 전혀 없어서 당당한 태도를 고수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공작가 딸과 일개 남작가의 아들이 연애하는, 정말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자세한 내막을


들여다보면 180 도 다르니까. 만약 그런 시선을 보낸다면 우리 둘 모두 속으로 조소를 흘릴 것이다.

"...자악."
"... ..."
"아이자악?"
"네?"

나는 누군가의 부름에 다급히 정신을 차렸다. 마리에 대해 생각하느라 실수로 잠깐 상념에 빠져버렸다.

정신을 차려 앞을 바라보니 진한 다크서클에 동태처럼 썩은 눈을 가진 엘프, 신디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녀는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고 특유의 흐물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또 멍 때리는 거 같아서어... 무슨 생각해애?"


"아... 잠깐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요."
"이상한 거 아니지이?"
"어..."

나는 신디의 질문에 시선을 피하며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마리와 키스했던 기억이
떠올랐다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오늘은 마리가 본인의 오빠와 할 일이 있다면서 먼저 가버렸다. 이 기회에 최근 너무 바빠서 오지 못 했던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로 와서 신디에게 작문법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머릿속에서 마리가 떠올랐다. 이게 중증이라는 거겠지.

다른 사람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만큼 실례인 것도 없으니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상한 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으음..."

신디는 내 대답에 생기없는 눈동자로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린 쪽에는 노트
한 장이 놓여있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면 된다고오?"


"늘 말했지만 작문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을 전달하느냐에요. 특히 신디가 작성하려는 논문은 이 부분이
더 심화되는 편인데..."

엘레나 교수에게 제안을 받은지 거의 세 달이 지나가지만, 정작 연구실에 방문한 횟수는 현저히 적었다.
제안을 받고나서부터 다양한 사건사고가 덮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날로 먹는 것 같기도 하고, 시간적 여유가 나자 오늘은 연구실에 방문한 것이다. 또한 제논


일대기의 전개를 위해 신디에게 물어볼 정보도 있었다.

"우선 신디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같은 기본적인 건 괜찮아요. 문법이 엉망진창이라서 그렇지."


"미안해애."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문법은 가장 단순한만큼 파고들면 파고들 수록 복잡한 거라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일상에서의 대화를 떠올리면 편해요. 신디의 고향에는 아카데미 같은 교육기관이 없어요?"
"있지이... 애초에 아카데미라는 교육 기관이 우리 엘프가 최초로 세운 거니까아."

하기야 인간은 엘프가 이룩한 문명을 모방했으니 교육 기관도 따라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나에게는
새로운 지식이나 다름없어서 살짝 놀라운 건 마찬가지였다.

간혹 신디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엘프가 어째서 인간을 그대로 방치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들한테는 안 된다는 자신감 때문인걸까.

실제로 인간 기사가 떼거지로 덤벼도 엘프 전사 한 명을 이기기란 매우 힘들다. 기초적인 스펙부터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버리니 엘프도 신경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종족 전쟁 당시에도 밀렸다는 기록이 한 번도 없었고.'

종족 전쟁이 끝난 결정적 이유는 한 쪽이 패배한 게 아니라 엘프 쪽에 자멸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수뇌부 쪽에서 삽질을 쉬지 않고 반복했다.

어딜 가나 꼰대가 문제라고, 특히 꼰대가 높으신 분들이면 그 밑의 사람들이 고생하는 법이다. 이후로


세대 교체가 일어났다지만 그 영향력은 무시무시하다.

'확실히 인간은 세대 교체가 자주 일어나니까 물갈이가 빨리 되겠지.'

아무튼 각설하고-

"아니. 이거 또 이러시네. 제 설명이 어려운 건 아니죠? 신디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적으시면


된다니까요? 신디가 저랑 얘기 나눌 때를 생각해봐요."
"우음... 알았어어..."

신디의 배움은 실로 파멸적이라 할 수 있었다. 같은 설명을 여러번 반복해야 간신히 이해할 정도다.

입으로 잘게잘게 씹어서 억지로 넘겨줘야 받아들이는 수준이라고 해야할까. 인간에 비해서 다른 종족은
배움이 느리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하물며 엘레나 교수의 언급에 따르자면 신디는 다른
엘프보다 머리가 둔한 편이라 했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성질내서 죄송해요. 제가 좀 더 자주 왔어야 했는데..."


"아니야아... 너는 몰라도 나는 엘프라서 이것도 빨리 온 거야아..."

내가 마른세수를 하며 한탄하자 신디는 정말 미안하다는 기색으로 쩔쩔매었다. 나는 그걸 보며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직전이었던 화가 점차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본인이 아예 의지가 없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둔해서 저런 건데 화를 낸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자칫하면 괜히 그녀의 의지를 꺾어버릴 수도 있다.
'아직 시간은 많아. 3 학년이 되면 수시로 연구실에 방문할테니 그때까지 참으면 돼.'

엘프의 시간 관념은 절대 인간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엘프에게 1 년이라는 기간은 인간에게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나는 펜으로 노트에다가 글을 끄적이는 중인 신디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신디에게 작문을 가르치는 건 천천히 해도 된다.

"신디."
"으응?"
"지난 번에 제가 말했던 책은 읽어보셨어요?"
"제논 일대기이? 읽어봤지이... 엄청 재미있더라아...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됐어어..."

도움이 많이 된 게 이정도 수준이라... 재미있게 읽었다니 기분은 좋지만 왠지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쨌거나 내가 왜 제논 일대기를 언급했냐면, 앞으로 제논 일대기에 중요한 위치를 맡을 엘프에 관해서다.

또한 '칠죄종'에서 '교만'을 담당하는 중인 악마측 간부가 엘프다. 엘레나 교수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려니 시간이 나지 않아 신디에게 반응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전에 9 권까지 읽어봤는지 확인해야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한 신디에게 다음 질문을


했다.

"몇 권까지 읽으셨어요?"


"전부 다 읽었어어... 교수님에게 말씀드리니까 흔쾌히 빌려주시더라고오..."
"그럼 칠죄종 중에 엘프가 교만을 맡고 있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으음..."

내 질문에 신디는 노트에 끄적이던 펜을 멈추며 입술을 오므렸다. 아무래도 내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독특하게도 신디는 내가 질문하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착실히 대답해주는 편이다. 본인은 모르고 있겠지만
천성적으로 남들에게 무언가 설명하는 걸 좋아한다. 심지어 설명도 잘해준다.

비록 그 설명을 글로 옮겨적는 일이 매우 힘들다는 거지만. 만약 그것까지 완벽했다면 엘레나 교수가


탄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글쎄에... 고향을 떠난지 오래 되서 잘 모르겠지마안... 아마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을 거얼? 종족 전쟁


당시에도 우리 엘프는 외압이 아니라 교만 때문에 내부부터 무너졌으니까아... 마지못해
인정하겠지이..."
"그럼 반응이 없는 건..."
"반응이 없는 건 절대 아니야아... 세대 교체가 일어났더라도 내부적인 다툼은 여전해애... 다행히
여왕님이 온건한 편이셔서 아직까지는 문제는 없을 거야아..."

반대로 말하자면 엘프측에서도 나를 잡기 위해 벼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여왕의 성격이 온건하여
막고 있을 뿐, 만약 여기서 문제가 더 커진다면 말이 새어나오겠지.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앞으로의 전개를 상기했다. 9 권이 칠죄종의 등장이라면 10 권은 엘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룰 생각이다.

정확히는 엘프 여왕과 제논을 가르쳤던 '스승'의 이야기다. 본래라면 아무 생각없이 썼을테지만 마족과
칠죄종의 영향력을 떠올리자니 함부로 쓰기가 어려웠다.

"음... 신디."
"왜에?"
"신디는 엘프가 인간이랑 깊은 연을 맺는 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으응?"

신디가 내 질문을 듣고 나를 쳐다보다가 눈을 두어번 깜빡거렸다. 흐리멍텅한 표정 속에 의문이


자리잡혔다.

내가 어째서 이 얘기를 하는 거냐면, 엘프 여왕과 '스승'의 관계 때문이다. 장수종인 엘프와 단명종인


인간의 사랑 이야기. 이 얼마나 애절한 스토리란 말인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세상에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다른 로맨스 소설에서조차
엘프와 인간 사이의 러브 스토리는 전무했다.

엘프는 다른 종족과 사랑을 나누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따로 이유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다. 그래야만 훗날 발생할 수도 있는 사건을 방지할 수
있을테니까.

마족과 증기 기관차, 그리고 칠죄종까지 3 연타를 쳐버리니 나로서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것도 파급력이 심하다 싶으면 과감하게 배제할 생각이다.

"그건 갑자기 왜에? 나한테 관심이라도 있는거야아?"

나를 조용히 응시하던 신디가 불현듯 그런 의문을 드러냈다. 식겁해질 수도 있는 말이라 곧바로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아뇨. 아뇨. 그건 아니에요. 평소 궁금했던 부분인데다가 전 이미 여자친구도 있어요."


"그래애? 흐음..."

신디는 의심의 눈초리로 거두고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한참동안 머리를 굴리는 것 같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우리가 인간과 연을 맺는다는 거언...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아... 엘프에 비해서 인간의 수명은 극도로
짧거드은..."
"그럼 인간이 아니라 다른 종족도요?"
"그을쎄... 너도 알다시피 우리 엘프는 다른 종족을 경시하는 편이라아... 세대가 교체되면서 그런
시선이 줄었들었다지만 아직까지 남아있거드은... 자기가 인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같은 취급을 잘 안
해줘어..."

역시나 교만의 종족 다웠다. 하지만 그 교만의 뿌리가 어디인지 고려하자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신디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추가로 덧붙였다.

"설사 연을 맺는다고한들 엘프 쪽에서 거부할거야아... 평생동안 사랑했던 사람을 가슴에 묻어두면서


사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잖아?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 바에야 차라리 거부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거야아...
"음... 확실히 수명이 가장 큰 문제이긴 하겠네요.
"그런데 그건 왜에? 설마 여자친구가 엘프인 거야아?"
"아뇨. 그건 아니지만..."

나는 신디의 물음에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줬다.

"엘프처럼 예쁘긴 하죠."


"...으엑."
그러자 신디는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 60 화 >

나는 평소에 무뚝뚝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다. 그 부분에는 반쯤 동의한다. 최근 다양한 사건사고가


터져서 그렇지, 전생의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꽤 무던한 성격을 갖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행복이 가득 채워져서 그런지 싱글벙글 웃는 날이 부쩍 늘어났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고, 간혹 미친 사람마냥 실실 웃었다.

특히 마리와 함께 있으면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굴만 보면 실룩거리는 입을 감출


수 없었다.

"헤헤헤."
"왜 웃어?"
"그럼 아이작은 왜 웃어?"
"그냥 웃음이 나오는데?"
"나도. 나도."

마리도 제 마음을 숨기지 않고 방실거리기 바빴다. 나 또한 마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활짝 웃는


걸로 대답해줬다. 연애 첫 날에는 눈치를 보느라 애정 표현은 삼가했으나 시간이 지나니 그런 마음은 모두
사라졌다.

주변에서 수근거리던 말던. 세실리와 리나가 수상한 눈초리로 보던 말던. 남들이 복잡미묘하거나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말던.

우리 둘은 첫 연애의 달콤함을 만끽하느라 다른데에 신경 팔릴 틈이 없었다. 그때문에 간혹 강의에도


집중하지 못 해 교수님에게 질책을 받긴 했지만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어갔다.

아무튼 나와 마리가 서로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어느정도 시간이 흘렀을 시점이다. 모든 시험과 과제가
종료되고, 상대적으로 여유 시간이 많아져 우리 둘끼리 돌아다니는 빈도가 많아졌다.

이때문인지 사람들이 우리 둘을 보는 시선이 의심에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다른


사람의 눈에 '아, 쟤들이 연애를 하는구나'라는 예측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른 곳도 아닌, 주말에 방문한 연무장에서 나타났다. 주말은 각자 개인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마리와 협의를 본 참이다.

"야. 너 요즘 연애라도 하냐?"


"네?"

대련을 하고 잠깐 쉬기 위해 관람객으로 돌아온 아델리아가 대뜸 나에게 그리 물었다. 나는 썩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동안 아델리아는 영 답답했는지 상의를 훌렁 벗어던졌다. 안에 민소매를 입어서 괜찮긴 해도 방심했다가


시선이 엄한 곳으로 갈 뻔했다.

"후아. 덥다 더워. 그래서 대답은 언제 해줄 거야?"

아델리아가 민소매를 펄럭거리며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땀으로 푹 젖은 그녀의 미모가
눈에 들어왔다.

이에 나는 다급히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머릿속으로는 최대한 마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상한
생각이 날 뻔한 걸 최대한 억눌렀다.
"...어떻게 아셨어요?"
"우연히 네가 어떤 백발의 여자애랑 서로 껴안는 걸 봤거든. 아주 대놓고 우리 연애해요, 라고
광고하더라?"

그녀는 장난꾸러기처럼 킬킬거리더니 검지 손가락으로 내 뺨을 쿡- 쿡- 찔렀다. 그리고 나는 아델리아의


손가락을 손바닥으로 살포시 내밀었다.

"그래서요? 그것 뿐이에요?"
"그것 뿐이라니? 친한 친구 동생이 연애를 한다는데 궁금해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냐? 누가 먼저
고백했어? 아니지. 그 녀석 이름이 뭐야? 머리카락 색이 흰색인 걸 보면 대충 누구인지 알 것 같은데."

거 참 궁금한 것도 많으시네. 나는 하늘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연이어 질문한 아델리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대꾸했겠지만 아델리아는 괜찮다. 그녀는 세실리와 다른 의미로


장난기가 많고 호기심이 많을 뿐이지, 본성은 좋은 편이다.

만약 본성이 좋지 않았다면 니콜이 챙겨주지도 않았겠지. 게다가 아델리아의 장난은 왠지 관심을 갈구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음... 아마 저희 누나는 누구인지 알고 있을 거예요. 마리라고, 레킬리스 공작가 출신이에요."


"이야~ 우리 귀염둥이 능력도 좋네? 다른 곳도 아니고 레킬리스 공작가라니. 누가 먼저 고백했어?"
"마리가 먼저 고백 비슷한 걸 했긴 했는데, 그냥 서로 마음이 있어서 사귄거나 마찬가지에요."
"오올~"

그 뒤로 아델리아는 신난다는 기색으로 이것저것 질문했다. 어째서 남의 연애사에 이토록 관심이 많은


건지 모르겠지만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걸 보고 차마 대답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청춘이구만 청춘. 역시 10 대의 풋풋함만큼 따라잡을 수 있는 건 없겠지. 혹시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냐?"
"...너무 나가는 것 같은데요."

이 세상은 17 살이 되면 성인으로 간주하는만큼은 결혼도 그때부터 할 수 있다. 하지만 말만 17 살이지


아카데미로 인해 대부분 22 살 전후로 결혼하는 편이다.

그러나 전생의 영향 탓에 나에게 그 시기조차 엄청 빠른 편이었다. 다만 전생의 상식을 대입시킬 수는


없으니 애매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델리아도 본인이 말했놓고 약간 무안했는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긴 좀 그랬지? 미안해. 가끔씩 연애를 하다가 사고치는 애들을 많이 봤거든."


"사고를 친다는 게 아이를 가진다는 거죠? 단순히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잘 알고 있네."
"사고를 치면 어떻게 돼요?"

남녀사이에 아무 일도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는 말이다. 그건 나와 마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물론 나도 그렇고 마리도 몸조심을 하겠지만 앞날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한 방에 둘만 남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다가온다면 과연 내가 참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당장 세실리의 유혹도 못 이긴 내가


그런 상황을 견뎌낼 가능성은 0 에 수렴한다.
아니면 마리 쪽에서 먼저 도발할 수도 있고.

"으음~ 글쎄?"

아델리아는 질문을 듣고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씨익 말아올렸다. 능청스러움이 잔뜩


묻어나오는 미소다.

"과연 어떻게 될까? 난 미네르바 제국 출신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걸?"


"그럼 누나한테 물어볼게요."
"재미없기는. 귀족끼리라면 문제는 없어. 계급 차이가 나도 마지못해 결혼시키거든. 문제는 귀족과
평민이야. 만약 남자 쪽이 귀족이라면 여자를 첩으로 들이거나 내쫒을 수 있는데 그 반대라면 이야기가
달라. 가문에서 추방당하는 건 물론이고 그 후가 더 문제지."
"그 후가 더 문제라고요?"
"응. 너 같으면 여태까지 귀족으로 잘 살다가 평민으로 격하된 채 살 수 있겠어? 온실 촉 화초로 자란
영애들이?"

설명을 듣고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늘 말했지만 귀족과 평민 사이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존재한다. 그것이 권력이던 재력이던 간에.

조금 야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게 현실이다.

"물론 예외가 없는 건 아니야.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긴한데 남자 쪽에서 피 말리도록 노력한


경우거든. 그럴 때는 여자와 함께 부모님을 찾아가 허락을 맡는 식이야. 뭐, 현실은 녹록치 않겠지만."
"의외로 잘 알고 계시네요."
"알 수밖에 없지. 그런 경우를 직접 본 적이 많거든. 그러니까 너도 네 여자친구를 정말로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면 조심해."
"그건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요?"

만에 하나, 사고를 쳤다고해도 마리를 책임질 자신이 있다. 물론 그녀의 부모님이 곱지 못한 시선으로
보겠지만 내 정체를 밝히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달라진다.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단순한 문화 폭탄을 한참 넘어선 위상을 갖고 있다. 마리는 그런


부분에 연연하지는 않겠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다를 것이다.

"그런데 아델 누나는 남자친구 있어요?"

연애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그쪽으로 주제가 넘어갔다. 아델리아는 주구장창 내 연애사에 집중했지
본인과 관련된 건 일체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아델리아는 내 질문을 듣자마자 당황을 넘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로서는 의외의 반응이다.

"어... 너는 내가 연애를 해본 것처럼 보여?"


"네. 아델 누나는 객관적으로도 예쁜 편이잖아요. 무학 내에서도 실력이 출중한 편이고."

아델리아는 성격이 조금 독특하긴해도 매력은 뛰어나다. 여자친구가 있는 입장에서 말하기 좀 그랬지만


진짜인 걸 어떡하겠나.

오똑한 콧날, 쾌창한 하늘을 연상시키는 하늘색 눈동자과 긴 속눈썹. 마지막으로 갈색 단발머리까지.

전체적으로 잘생겼다는 이미지에 가깝지만 붉은 입술로 하여금 여성적인 매력도 함께 뿜내고 있다.

솔직히 이 얼굴이 평민이라는 걸 도저히 믿지 못할 정도로 아델리아의 미모는 상당한 편이다. 정체를
숨기고 들어온 사람이라던가 아니면 사생아가 아닌지 싶을 정도로.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도중에 아델리아는 머쓱했는지 뒷목을 살살 매만졌다. 뒤이어 피식거리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 주제에 무슨... 나보다는 네 누나한테 물어보는 게 나을 걸? 넌 모르겠지만 니콜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냐면..."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은글슬쩍 니콜의 연애사로 주제로 돌리려던 찰나에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땀으로 점칠된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다가오는 니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이제 막 대련이 끝난 듯싶었는데, 아델리아는 니콜이 돌아오자마자 화들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중간에 벗어던졌던 상의를 챙기는 건 잊지 않았다.

"그,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열심히 노력해라!"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은 이럴 때 쓰는 걸까. 아델리아는 니콜이 질문을 하기도 전에 후다닥


대련장으로 도망쳤다.

내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니콜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저러니? 쟤가 무슨 말이라도 했어?"


"어... 아니? 그냥 별 말 없었어."
"흠... 그래?"

그리 믿지 못 하는 눈초리다. 아델리아가 지은 죄가 워낙 많았던지라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다.

"후우. 덥다."

이어서 니콜은 방금 전 아델리아가 했던 것처럼 상의를 벗어던져 땀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녀도 안쪽에
민소매를 입었지만 친누나인지라 아델리아처럼 눈길은 가지 않았다.

그대신 곳곳에 박혀있는 잔근육들에게 시선이 뺴앗겼다. 여자는 태생적으로 근육을 다듬기 어렵다던데
니콜의 모습을 보자면 그 생각이 틀렸나 싶다.

"아참. 아이작. 그러고보니 너 그 애랑 사귄다고 했지? 지난 번에 봤던 흰색 머리카락 여자애. 마리라고


했나?"

민소매를 펄럭거리며 땀을 식히고 있던 니콜이 나에게 질문했다. 그녀에게는 지난 주에 모든 전후사정을


알려준 참이었다.

그러니 니콜은 마리가 내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굳이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으니까.

하지만 걱정을 받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마리가 좋은 사람이라고한들 니콜의 시선에서는 다 똑같을테니까.

"응. 그건 왜?"
"그냥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별 일은 없지?"
"잘 지내고 있지."
"그럼 다행이고. 읏차."

니콜은 그 말만 남기며 내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후회는 안 하지? 그 애한테 알려준 거."


"후회는 무슨. 아, 후회는 해. 왜 진작에 말하지 않았을까라는 것 정도?"
"너도 참 중증이구나. 그래. 한창 그럴 나이지."
내 대답에 니콜은 피식 웃으며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살짝
기대가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글은 잘 쓰고 있어?"
"응. 아마 보름이면 될 거야."
"빠르네. 하긴 시험도 끝났으니 여유 시간이 많아졌겠지. 10 권에 엘프 여왕과 제논의 스승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응."
"오~ 그거 기대되네. 엘프와 인간의 사랑이라, 또 한 번 히트치는 거 아니야? 그건 엘프 쪽에서도 말이
나오겠다."

니콜이 낄낄 웃으며 장난스레 굴었다. 나는 그걸 보며 속으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겉으로는 엘프와 인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스토리가 이어질 수록
사람들은 무언가 잘못 됐다고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엘프 여왕과 제논의 스승은 이어지지 못 할 것이니까. 둘 중 한 명이 다른 이성에게 시선을


둔다거나 그런 막장은 아니다.

두 명 모두 서로에게 확신을 갖고 있으나 엘프 여왕 쪽에서 수명 문제로 선듯 나서지 못 하고 있다.

'비극으로 끝나야 머리에 각인되겠지.'

훗날 제논의 스승은 죽는다. 그것도 한때 본인의 제자였던 '질투'에게.

그리고 엘프 여왕은 스승이 죽었다는 사실에 통곡하며 눈물을 펑펑 흘리게 된다. 본디 이 장면은 제논을
각성시키기 위한 장치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름 재미있을 것 같아 세세하게 적을 예정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채 기대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니콜을 힐끔거렸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응. 엄청 재미있을거야."

나에게만.

< 61 화 >

마리와 알콩달콩한 연애를 시작한지 어언 2 주일 가량이 흘렀다. 2 주일이는 시간이 흐른만큼 많은 것들이
변화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건 학생들이 나와 마리를 보는 시선이다.

그전까지는 긴가민가했다면 이제는 확신에 찬 눈초리다. 나와 마리가 사귀고 있구나라고. 공공연한


비밀도 아니라 이제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럽다는 눈길을 보냈지만 개중에는 불편한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특히 그


시선은 나보다 마리에게 집중되었는데 아무래도 마리는 레킬리스 공작가 출신이고 나는 일개 남작가의
아들이다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물론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저들이 뭐라 하던 간에 서로 좋아 죽는데다가 내가 마리에게 꿇릴 것도 없다.


오히려 마리는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걸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다만 부작용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가끔씩 여학생들이 마리에게 찾아가 나에 대한 걸 묻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짜증나 죽겠어! 대체 어디가 좋아서 사귀는 거라니, 혹시 약점 잡힌 게 없냐니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냥 잘생기고 귀여워서 사귀는 건데!"
"응? 마리?"

나는 마지막 말에 식사를 하다 말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마리를 쳐다봤다. 전부 상관없는데 뒷말이 왠지


거슬렸다.

한편 음식을 입에 담은 채 불만을 토로하던 마리는 내 부름을 듣고 아차하더니 베시시 웃었다. 소녀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라기보다는 능청스러움에 가깝다.

"앗. 미안. 나도 모르게 본심이 나와버렸네. 헤헷."


"... ..."
"꿀꺽.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거짓말은 아니잖아?"

내가 황당해하던 말던 마리는 입 안에 든 음식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진심인 듯한 그녀의 표정에 차마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수치사를 하고도 남을 법한 발언이었지만, 다행히 우리 둘만 단란히 식사를 하고


있다는 점이 위안이다. 참고로 지난 번 마리에게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와 같은 식당이다.

알고보니 우리가 직원에게 배정받았던 공간은 연인 전용 코스였다. 그걸 듣고나서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그 말은 즉슨, 지난 번에도 우리를 연인으로 착각하고 이 방으로 분류했다는 의미니까.

그때 당시는 아무것도 몰라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초장부터 어색했을 것이다. 물론 공식적으로


연인이 되고나서는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다.

"아이작은 나처럼 짜증나는 일은 없었어? 나는 공작가 영애라서 망정이지, 너는 나보다 더 심할 수도


있잖아. 특히 잭슨인가 뭔가 하는 놈이 너를 싫어하는 거 같은데?"
"음..."

나는 마리의 질문을 듣고 최근 있었던 일에 대해 떠올렸다. 마리와 연인이 되고나서 이렇다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제일 가까운 지인들인 리나와 세실리도 대놓고 묻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의 사이를 확신하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인지 마리가 내 곁을 떡하니 지키고 있는 이상 함부로 다가올 입장이 못 됐다.

특히 리나는 몰라도 세실리와 함께 있는 빈도가 꽤 많이 줄어들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마리가 짜잔!


하고 나타나서 나를 데려가버린다.

어제도 그랬다. 어제 마지막 강의는 원래 마리가 듣지 않는 강의였지만 수업이 끝나자마자 문 밖에서


기다리던 마리와 마주쳤다. 그리고 내 팔을 붙잡더니 같이 밥 먹자며 질질 끌고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걸 본 세실리가 팔을 뻗어 우리를 불렀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마리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은...


그래. 분명 질투에 휩싸인 여인의 눈빛이었다.

그것 외에는...

"딱히 없는데?"
"정말로?"
"응. 네 말한 잭슨도 뭐라고 하지는 않았어. 대신 뭐랄까... 측은지심?"
"엥? 측은지심?"

나는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시켜줬다. 거짓말이 아니라 요즘 잭슨이


나를 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이전까지는 흔히 벌레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면 지금은 위로를 해준다고 할까. 도대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조별과제 이후부터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확연히 변했다.

"응. 대신 시선 자체는 조별과제 이후부터 변했어. 도대체 조별과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 조금... 불쌍했지? 리나가 이것저것 다 시켰거든."
"너는?"
"난 미안해서라도 도와주긴 했는데...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내가 한소리하기 전까지 그 새끼가 계속
치근덕거렸잖아? 도와주긴해도 거기까지였어."

권위높은 백작가 아들을 '그 새끼'라 칭하는 우리 여친님이다.

나는 새삼스레 그녀가 황제 다음으로 권위가 드높은 공작가 출신이라는 걸 실감했다.

"앗. 방금 전에 들은 건 못 들은 척 해줘. 갑자기 짜증나는 기억이 떠올라서 그만."

그러다 마리는 손을 내저으며 조신한 말투로 나에게 부탁했다. 방금 전까지 털털했던 면모와 전혀 다른
행동이요, 말투다.

이에 나는 피식거릴 수밖에 없었다. 일부로 저러는 게 확실하다.

"그거 내숭떠는 거지?"


"안 어울려?"
"귀엽긴 해도 안 어울려."
"나쁜 놈. 그래도 귀엽다니까 봐줄게."

마리는 키득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나 또한 빙긋 웃어주는 걸로 화답해줬다.

이렇듯 마리와 단 둘이 있다면 시시한 이야기조차 즐겁게 느껴진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한다는 시간 자체가 더욱 중요했다.

"아. 그러고보니 글은 어디까지 썼어? 저번에 거의 다 썼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 원고만 제출하면 그만이야. 시험이 끝나서인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써지더라고."
"제논의 스승과 엘프 여왕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했지?"

이미 마리에게도 제논 일대기 10 권의 대한 스토리는 조금이나마 알려준 참이다.

물론, 스승과 엘프 여왕의 비극적인 서사는 알려주지 않았다. 참고로 그 이야기는 10 권에 나오지 않고
빠르면 11 권, 늦어도 13 권에 나올 예정이다.

그때까지 스승과 엘프 여왕과의 관계는 직간접적으로 묘사하면서 독자들의 마음을 애태울 생각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스승이 데드 플래그를 똭! 하고 꽂아넣는거다.

예를 들어 '내가 돌아온다면...' 이라던지 '돌아오면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라던지 등등. 이 말을


통해 독자들의 마음 속에 불길함이라는 감정이 싹 틔울 것이며 훗날 그 불길함은 적중한다.

하필이면 오랜 시간 고뇌에 고뇌를 거쳤던 엘프 여왕도 마음을 다잡았던지라 그 애틋함과 비통함은 배가


될 것이다.

물론 슬픈 일만 발생하는 건 아니다. 그걸 지켜본 제논도 스승의 슬픔에 한층 더 성장하게 되며 메리와의


관계도 한층 더 진척되는 결과를 맞이한다.

지난 번 모임에서 에딘이 예측했던 것처럼, 메리의 정체는 엘프이며 인간인 제논에게 마음이 있다. 허나
본인이 엘프인 탓에 마음을 표현하고 못 하는 중이다.
'어쩌다 보니 로맨스 파트가 되버리겠네. 뭐, 상관없지.'

로맨스 파트라면 여성 독자들이 꽤 많이 좋아할 것이다. 거기다 사람들이 잘 다루지 않았던 엘프와 인간의
사랑이었으니 더욱 자극적일터.

엘프 쪽에서 말이 나와도 상관없다. 칠죄종 중 교만을 담당하는 악마측 간부가 엘프라는 설정을
추가했는데도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신디가 내부적으로 회의를 하고 있을거라고 했으나 그닥
신경쓰이진 않았다.

"엘프와 인간의 사랑이라. 솔직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제논 일대기니까 괜찮겠지. 이번에는 엘프


쪽에서 반응하는 거 아니야?"
"글쎄. 그건 모르겠지. 그리고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데, 진이랑 릴리의 예시를 보면 돼. 수명 차이를
극복한 케이스잖아."
"어? 듣고보니 그렇네? 진이 마족이라 이때까지 못 알아차렸구나."

실제로 사람들은 진이 마족이라는 사실 자체에 집중하고 있지, 인간보다 오래 사는 종족이라는 건


인지하지 못 하고 있다. 중간중간 수명에 관한 것도 진이 언급하긴했어도 독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지나쳤다.

하지만 엘프의 경우는 사람들 머릿속에 장수하는 종족이라는 인식이 꽉 박혀있다. 그와 반대로 인간은
수인과 더불어 수명이 짧다는 인식이 꽉 박혀있는 상태다.

"게다가 엘프는 마족보다 오래 사는데다가 고귀하고 오만한 종족이라고 알려져 있어. 신디한테 들으니
엘프 사이에는 다른 종족을 경시하는 풍습이 있다더라고."
"신디? 그 사람은 누구야?"
"응?"
"설마 여자야?"

마리가 눈초리를 매섭게 뜨며 노려보자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오는
게 상당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저번에 엘레나 교수님이 나 보고 말했잖아. 잠깐 연구실에 올 수 있냐고. 그때 가서 만난 엘프야."


"그것 뿐이지?"
"그럼 여기서 더 있을까봐? 넌 모르겠지만 신디를 본다면 그 생각이 송두리째 바뀔 걸?"

신디는 태생적으로 아름답긴 해도 진하게 내려온 다크서클과 관리는 하나도 하지 않은 외모로 인해 전혀


끌리지 않았다. 심지어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어린애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

그녀에게 수많은 지식을 받았지만 그것 뿐이지, 이성적인 호감은 전무한 수준이다. 그냥 동료다.

다만 마리는 여전히 믿지 못 하는 얼굴이다. 보아하니 신디가 엘프라서 약간 불안해하는 것 같은데,


적어도 내 눈에는 신디보다 마리가 훨씬 예쁘다.

"그리고 네가 훨씬 더 예뻐."
"읏..."

그래서 그 생각을 고스란히 꺼냈다. 그러자 마리의 얼굴이 삽시간에 노을처럼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재미가 없겠지. 나는 역공의 기회를 잡자마자 능글거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러고보니 너네 부모님의 얼굴도 궁금해지네. 어떻게 하면 엘프보다 더 예쁜 얼굴을 물려줄 수


있을..."
"그, 그만! 그만해! 더 말하지 마! 부끄러워 죽겠네, 진짜!"

내가 능청스럽게 굴자 마리가 빼액! 소리 질렀다. 그녀의 격한 반응에 낄낄거리는 웃음이 자동적으로


나왔다.

"왜 그렇게 싫어해? 엘프보다 예쁘다는 건 칭찬아닌가?"


"그, 그래도... 부끄럽단 말이야..."
"예쁜 건 맞잖아."
"하으으... 하지 마아아..."

마리는 연이은 공격에 버터내지 못 했는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나는 그녀가 이마를 테이블 위에 박자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뭐라고 말할까? 공주님?"


"... ..."
"우리 공주님. 거기 누워서 뭐 하세요? 식사는 안 하시고."

내가 하도 놀려대서 그럴까.

"아앙!"
"악! 미안! 미안! 다시는 안 그럴게! 미안!"

마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목을 꽉 깨물었다. 미안하다고 소리 질러도 앙심을 제대로 품었는지


한동안 놓지를 않았다.

"아이작."
"네?"
"목에 그거 뭐야? 맹수한테 물리기라도 했어?"
"... ..."

결국 다음 날, 내 옆자리에 앉은 세실리가 그리 물을 정도다. 하필이면 교복 와이셔츠로도 가려지지 않은


부위라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머쓱하게 웃으며 목을 쓰다듬었다. 지금은 마리가 없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세실리가 옆에 앉은 걸 보고 또다시 깨물었을지도 모른다.

"맹수는 아닌데, 그냥 강아지한테 물린거예요."


"강아지한테 물린 것치고는 치아 자국이 선명한데? 그거 마리가 문 거지?"
"...네."
"음... 그러고보니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어. 얼굴 뜯어먹고 산다고. 혹시 인간들은 가끔씩 애인의
살점을 뜯어먹는..."
"아뇨. 그건 절대 아니에요."

그랬으면 내가 진작에 마리의 얼굴을 뜯어먹고도 남았겠지. 세실리는 내 거센 부정에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너그럽게 넘어갔다.

"알았어. 난 또. 아이작이 잡아먹힐까봐 걱정했지."


"하하하... 마리가 자주 물기는 하죠."
"행복해?"

세실리는 노트를 정리하면서 툭- 내뱉듯이 나에게 질문했다. 왠지 날이 서 있는 듯한 질문이라 위화감이


들었다.

그에 나는 세실리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평소처럼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있어서


그녀의 속내를 예상하기 어려웠다.

"...네. 행복하죠."
"그렇구나. 하긴,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긴 하겠지. 마리가 조금 부럽긴하네."

그리고나서 세실리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더... 있는데..."


"...네?"
"아참. 아이작. 오늘 너한테 주고 싶은 게 있어."

내가 당황하던 말던 세실리는 노트 사이에 끼워져 있던 봉투를 나에게 전달했다. 가로폭이 좁고 세로가 긴


걸 보면 편지 봉투로 추정된다.

그 편지 봉투를 얼떨결에 받자 세실리가 방긋 웃었다. 붉은색의 눈동자가 요사스러운 빛을 발휘하여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무조건 숙소에 가서 혼자 읽어야 돼. 알겠지?"


"...이게 뭔데요?"
"별 거 아니야. 그냥..."

말을 흐리던 세실리는 진심어린 미소를 짓더니 얼굴이 가까이 대었다. 그에 내가 흠칫하고 있을 쯤,


그녀가 내 귓가에 입을 대며 소근거렸다.

"은인을 향한 내 진심 정도랄까?"
"... ..."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귀가 간지러웠다.

< 62 화 >

나는 모든 강의가 끝나자마자 다른 걸 전부 제쳐두고 숙소로 복귀했다. 오늘은 마리와 약속을 잡은 적도


없어서 숙소로 곧바로 직행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숙소로 돌아온 이후에는 침대 위에 드러누워 노트 사이에 꽁꽁 숨겨놓았던 편지 봉투를 꺼냈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오늘 강의 시간 때 세실리가 나에게 전달한 편지다.

세실리가 내 귓가에 속삭이면서 말하길, 은인을 향한 자신이 진심이 담겨있다고. 돌려 말했지만 사실상
나에게 주는 편지다.

'펜레터 같은 건가? 아니면 뭐지?'

나는 편지 봉투를 세밀하게 둘러봤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디 평범한 봉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내용물은 꽤 두툼했다. 최소
편지가 3 장 이상 들어있는 건 확실하다.

그녀는 은인을 향한 진심을 담았다고 했으니 팬레터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여태까지 내 신분을 꽁꽁
숨겨놓아서 팬레터를 직접 받은 적은 없다. 이탓에 기분이 더욱 묘해졌다.

과연 세실리는 이 편지에 무슨 내용을 적었을까. 나는 봉투를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침대에 누워있는 게 아니라 책상에 앉아 천천히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분명 세실리는 정성을 다해


썼을테니 나 또한 정성을 진심을 담아 읽어야하지 않겠나.

그리고 다 읽는다면 곧바로 답장을 써줄 생각이다. 어차피 10 권의 원고를 다 쓴 마당에 여유 시간이


월등히 늘어난 참이다.
찌이익-

책상에 앉아 모든 준비를 마치고 편지 봉투 윗부분을 조심스럽게 찢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내 예상대로


곱게 접혀있는 편지가 고이 잠들어있다.

나는 기대 반 걱정 반 심정으로 내용물을 꺼내 천천히 펼쳤다. 종이는 총 3 장이었으며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유려한 글씨체가 돋보였다.

[안녕하세요. 경모하는 아이작 작가님.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이라고 해요. 마족의 은인에게 제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영광을 안게 되어서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첫 줄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작가님이라는 호칭은 둘재치고 '경모'라는 글귀가 매우


신경쓰였다.

'경모'는 전생에서도 그렇고 이 세상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 단어이지만, 평소 책을 많이 읽어둔 덕에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깊이 존경하고 사모하거나, 마음을 기울여 사모하다.

그러니까 세실리는 나에게 이성적인 호감 즉, 연심을 품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약간 뜬금없게도


느껴져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세실리는 말을 놓은 이후부터 친근하게 대하며 짓궂은 장난까지 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친한 동생에게


하는 행동에 가깝다. 내가 잘 받아준 것도 있고 세실리의 고민을 일부나마 해소시켜줬으니 그정도는
납득할 수 있다.

나는 첫 문장을 한 번 두 번 꼼꼼하게 읽으며 정말로 내가 알던 단어가 맞는지 확인했다. 이 세상에는


공용어를 쓰지만 각 종족마다 의미가 다른 단어가 군데군데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첫 문장에 집중해봤자 나오는 건 없었다. 일단 의문은 접어두고 다음 내용을 천천히 읽어내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우선 제 마음을 표현하기에 앞서, 며칠 전 결례를 끼친 부분에 관해 사죄하고 싶습니다. 평소 흠모하던


은인과의 만남에 그만 흥분한 나머지 실수를 저질렀죠. 그때 은인이 어떤 감정을 품으셨던 간에 제가
무례했다는 건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사죄의 말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읽다보니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편지에서 보듯이 세실리는 상당히 저자세로 나오고 있다는 것.

그녀가 누구인가. 헬리움의 공주이자 다음 대 차기 마왕으로 예정돼 있는 마족이지 않은가.

세상에 끼치는 내 영향력이 막강하다지만 세실리가 고개를 숙이며 나올 필요는 없다. 하물며 헬리움은
현재 다른 국가와 외교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니 그녀의 입지는 무궁무진할 터.

나를 은인으로 대우하고 있으니 괜찮지 않나? 라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불편하다.

내가 아는 세실리는 장난기가 많고, 속에 아픔을 묻어두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마리처럼 평소와 같이


장난을 치거나 수다를 떨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슴 속에서 꾸물꾸물 기어올라오는 이 음습한 감정은 도대체 뭘까. 지난 번 세실리가 나에게 존댓말을
했을 때도 이같은 감정이 들었다.

희열에 가까우면서도 절대 잡아먹히면 안 될 듯한 느낌. 평소에는 모르고 있었지만 한 번 맛보고 난다면


헤어나올 수 없을 듯한 어두운 기분.

나는 머리를 세차게 털어내며 그 감정들을 모조리 떨쳐버렸다. 세실리가 아무리 저자세로 나온다고한들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리가 가장 크게 실망할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가 실망하는 건 절대 보고 싶지 않다.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갈무리한 뒤 편지에 시선을 두었다. 유려한 필기체와 더불어 세실리의
아름다운 문체가 눈을 즐겁게 만들어줬다.

[은인도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마족은 제논 일대기가 나오기 전까지 악마로 취급받았습니다. 반강제적으로


바깥 사회와 단절되고, 우리 마족들끼리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죠. 몇몇 용기있는 마족들이 밖으로 나와
우리는 악마가 아니라고 호소했으나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중에는 비난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비극을 겪어 악마가 된 마족도 있었지요. 그리고...]

[공주인 저조차 이루지 못한 동족의 숙원을 대신 맺게 해주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설령 의도를 담지


않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어둠밖에 없던 마족들에게 한 줄기 빛을 내려준 건 사실이니까요. 그 빛은
우리 마족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으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언제나 구름만이
드리웠던 헬리움의 하늘에는 태양이 내려쬐기 시작했죠. 헬리움의 백성들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펴졌으며
'자긍심'이라는 감정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어둠을 밝힌 이 한 줄기의 등불은 우리 마족의 미래를
밝혀줄 거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편지 내용에는 마족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상세하게 적혀있었으며 제논 일대기가 나온 이후에 어떻게


변했는지도 묘사돼 있다.

나는 편지 내용을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 귓가에 입을 대며 '진심'을 담았다고 했을 때는 약간 불안했지만 지금 그 마음은 모두 사라졌다.


세실리는 진정한 의미로 진심을 담아 편지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 진심은 나에게 여과없이 전달되는 중이다. 비록 의도치 않았다지만 그 결과가 긍정적이라면
어느 사람이라도 뿌듯해할 터.

'신문으로 보던 거랑 차이가 엄청나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족인 세실리가 이리 표현하니 더욱 깊게 와닿는다.

신문이나 소문을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심지어 세실리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도


이처럼 와닿지 않았다.

왜냐하면 세실리는 내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는 부분에 집중했지, 본인의 진심을 꺼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정성이 담긴 말을 한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편지를 읽고나니 그녀가 얼마나 힘든 인생을 보냈는지, 또 나에게 얼마나 큰 감사를
느끼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도 있다. 전생에서는 절대 느끼지 못 했던 감동이다.

'진짜 많이 힘들었겠네.'
100 년이라는 세월은 다른 종족이면 모를까, 인간에게는 터무니없이 길다. 세실리는 그 100 년이라는
세월동안 동족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셀 수도 없이 노력하는 중이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나


편지에 담긴 내용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 수준도 되지 않았다.

그 염원은 그녀의 손이 아닌 내 손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그 기쁨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전생으로


따지자면 피부가 까맣다는 이유로 끔찍한 차별을 받았던 흑인들이 해방된 셈이랄까.

나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생생하게 느끼며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무려 3 페이지나 달하는 내용이라
전부 읽는데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우리 마족들이 입은 상처는 헤아릴 수 없이 깊고, 차별적인 시선이 모두 해소된 건 아닙니다.


지금 은인께서 이 편지를 읽는 시간에도 누군가 마족을 차별하고 있을 것이며, 상처입은 마족이 악마로
타락해 피해를 끼치고 있을 겁니다. 안타깝지만 제논 일대기 덕분에 마족을 향한 시선이 달라졌다고한들
세상이 완전히 변한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헬리움의 공주로서 모든 마족을 대변해 세상에 알릴 겁니다. 우리 마족도


다른 종족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으며 결코 악마가 아닌 존재라고. 그래야 은인께서도 실망하지
않으시겠죠. 은인께서 내려주신 은총을 통해 우리 마족이 좀 더 밝은 빛을 찾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두 번째 페이지는 세실리가 어떤 포부를 갖고 있는지에 말하고 있다. 이덕분에 입학식 당시 그녀의 연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본인의 포부를 당당히 밝힐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라면 절대 못할 일이다.

세실리의 용기있는 행동은 마족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평소 나에게
장난을 치느라 깜빡했던 부분이다.

'비범하다는 말이 이럴 때 하는 거겠지?'

나는 페이지를 넘겨 마지막 장을 읽기 시작했다. 마지막 페이지라 그런지 3 분의 2 정도만 채워져 있다.

[은인께서 내려주신 은혜는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수 백년의 세월동안


이루지 못한 마족의 염원을 은인께서 이루어주셨죠. 은혜를 갚기 위해 제 몸과 마음을 바치고 싶지만
은인께서 원하지 않으시다면 그러지 않겠습니다. 현재 은인의 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더욱
힘들겠죠.]

[허나 이런 식으로 약소하게나마 제 진심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이 편지에 담긴 내용이 저의 진심이라는


것만 알아주신다면 저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또 행복할 것입니다.]

[마지막 인사말을 어떻게 전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은인께서는 부디 건강하고, 또 행복만이 가득하길


바라겠습니다. 은인의 행복이 곧 저의 행복이니까요.]

[그러면 전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헬리움의 공주가 아닌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는 한


마족으로부터.]

마지막 페이지는 나를 향한 세실리의 마음이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내가 원한다면 몸과 마음을 기꺼이 바치겠다. 그러나 지금은 내 곁에는 마리가 있으니 원하지 않는다면
그러지 않겠다.
한 명의 여자로서 모든 걸 바치겠다는 글에 정신이 혼미해지기보다는 난감해졌다. 지난 번에는 단지 나를
유혹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편지에는 진심이 우러러 묻어나왔다. 세실리는 정말로 내가 원한다면 꺼리낌없이 몸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는 모양이다.

"스읍..."

마리가 이걸 보면 노발대발하겠지? 세실리가 팬레터(?)를 보냈다는 사실은 철저하게 숨겨야할 듯하다.

물론 연기를 더럽게 못 하는 내가 숨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언젠가 들킨다는 마인드로 생활하는


편이 이로울 듯하다.

아무튼 간에 세실리가 정성껏 편지를 적어 보냈으니 나 또한 답장을 해줘야 예의일 터. 나는 보기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오는 팬레터를 다시 한 번 읽은 뒤에 책상 서랍을 열었다.

여태까지 부모님을 제외하면 편지를 보낼 대상이 없을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로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

'일단 인사말은... 그래. 이렇게 적으면 되겠다.'

나는 전과 달리 즐거운 마음으로 세실리에게 보내줄 답장을 천천히 써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팬레터라...'

세실리처럼 다른 사람들도 팬레터를 작성하지 않았을까? 편지를 쓰다말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논 일대기가 세계적인 히트를 쳤는데도 팬레터 한 장 없다는 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법했다. 어쩌면
아버지가 조금의 단서를 흘리지 않기 위해 철저히 막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이렇게 마당에 한 번 부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일단 팬레터가 있는지 확인부터 한


뒤에 부탁할 계획이다.

설령 추적 때문에 아버지가 힘들다고 해도 상관없다. 아버지 외에도 따로 부탁할 사람이 있었으니.

'조금 꺼림찍하지만 결과는 확실하겠지. 설마 이거 가지고 쫀쫀하게 요구를 하진 않을테고.'

팬레터를 읽고나서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전생에서 댓글을 읽는 느낌과 매우 비슷하다는 걸.


댓글만큼 작가에게 희노애락을 느끼게 만드는 건 없을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나는 팬레터가 있기를 빌면서 마법필을 유려하게 움직였다.

'혹시 마리가 쓴 것도 있으려나?'

왠지 기대가 된다.

*****

한편, 같은 시각 여학생 전용 숙소.

"푸엣췽! 엣..."

침대 위에서 여유롭게 빵을 먹던 마리는 전조도 없이 터져나온 재치기에 당황스러워했다. 덕분에 침대가


빵 부스러기로 더러워졌다.
"씨잉... 갑자기 왜 뜬금없이 재채기가 나오는 거야? 귀찮게."

투덜거리면서 특유의 날카로운 촉이 발동되는 건 덤이다.

< 63 화 >

제논 일대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가장 수혜를 입은 집단은 누구일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마족'을 선택할 것이다.

단순히 책 하나로 인해 종족 전체의 명운이 뒤바뀌었으며 마족이 본격적으로 활동하자 세계의 정세마저도
요동쳤다. 그동안 마족은 반강제적으로 폐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가 태동하기 시작했으니 다른 나라에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

마족은 개개인의 무력이 강할 뿐더러 엘프와 견줄만큼 마법 능력이 특출나니까. 대신 그 마법이라는 것이


'검은 마나'라는 불길한 기운으로 펼치는 것이라 엘프들은 마족과 엮이는 걸 매우 싫어하고 있다.

어쨋거나 마족은 제논 일대기를 통해 큰 수혜를 입은 건 사실이다. 지나가던 사람 중 한 명에게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이 나올 정도로 상식으로 변하는 중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깊게 파고들면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논 일대기를 통해 마족의 인식이 바뀐 건 맞지만, 근본적으로 제논 일대기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다시 말해 제논 일대기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한만큼, 그 수익은 하늘을 뚫을 정도로 무시무시하다는 의미다.

다만 제논 일대기는 전세계에 퍼져나가 유행을 하고 있는 탓에 제대로 된 집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논 일대기의 수익보다는 책 자체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그다지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수익은 제논 일대기와 판권 계약을 한 출판사에 고스란히 영향을 가게 되기 마련. 실제로 제논


일대기를 처음으로 발간한 출판사는 홍수처럼 범람한 수익을 통해 덩치를 부풀렸다.

"흠흠~ 흠흠흠~"

사무실과 흡사하면서도 다양한 사치품이 가득 채워져 있는 어느 방.

책상에 앉은 중년의 남자가 콧노래를 부르며 노트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현재 기분이 매우 좋은 것인지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비싼값을 지불하면서 기술을 도입하길 잘했어. 벌써 전부 다 갚았구만.'

현재 그가 펜촉으로 쓰고 있는 노트의 정체는 장부다. 그것도 단순한 장부가 아니라 남자가 관리하고 있는
상회와 큰 연관이 있는 장부.

평범한 장부였다면 남자가 아니라 다른 직원이 관리하고 있겠지만, 높은 직급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관리하고 있는만큼 장부의 용도는 특별했다.

귀족들이 선물해준 자금, 그러니까 흔히 뇌물이라 불릴 수도 있는 자금을 관리하고 있는 장부다. 평범한


상회였다면 모를까, 귀족에게 뇌물을 받는만큼 남자가 관리하는 회사는 매우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관리하고 있는 회사는 바로 출판사, 그것도 제논 일대기는 맨 처음으로 발간한


출판사였으니까.
귀족에게 뇌물을 받는 이유도 신권이 발간되면 자기한테 먼저 달라고 부탁하거나, 아니면 저자가 누구인지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한 것이다.

'황금 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수는 없지.'

의외로 남자는 제논 일대기의 정체를 알고 있다. 정확히는 아이작이 아니라 호크로 착각하는 중이다.

1 권의 원고를 본인이 직접 들고 출판사로 찾아왔으니 그리 착각할만도 하다. 하지만 제논 일대기가


예상을 한참 웃돈 히트를 처버리자 신분을 숨기고 심부름꾼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 별의 별 사람들이 출판사로 찾아와 저자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으며, 개중에는 협박까지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출판사 사장 입장으로서 상당히 곤란하기 짝이 없었으나 용기를 내 모두 씹어버렸다.

귀족들이 주는 뇌물이나 협박보다 제논 일대기가 벌어들이는 수익이 더욱 탐났으니까. 제논 일대기와


계약이 묶여있는 이상 돈이 복사되는 중이라 해도 무방하다.

'황실은 조금 무섭긴 했다만...'

물론 황실에서 직접 행차한 건 출판사 사장이어도 상당히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건진 건 없고


출판사에서 탈세를 했는지 조사한 것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장부를 꼼꼼하게 관리한 덕에 탈세도 걸린 적은 없다. 솔직히 제논 일대기가 너무 많은 수익을


벌어들이는 탓에 탈세를 해도 전혀 모를 것이다.

이러한 상황 끝에 사장의 기분은 하늘을 찌를 듯이 좋아졌다. 최근 비싼 투자를 하면서 신기술을 도입한


대가도 치루는 중이다.

'원금은 갚았고, 이제 유지비만 손 보면 돼. 어차피 시간이 갈 수록 유지비도 천천히 낮아질테고.'

신기술의 도입으로 인해 수익률이 2 배로 상승했다. 본래 출판사는 책과 계약만 하면 그만이지만 사장은


아예 인쇄소를 인수해버렸다.

그 결과 귀족조차 화들짝 놀랄 정도의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그러한 자금으로 다시 투자하니


회사의 규모도 상당히 커졌다.

사장으로서는 하루하루 바쁜 나날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만큼 행복했다.

똑- 똑- 똑-

이제 슬슬 장부를 다 쓸 때 쯤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사장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장부를 책상 서랍에다가 넣은 후 입을 열었다.

"누군가?"
"사장님. 저 매튜입니다."
"오. 매튜! 어서 들어오게."

사장은 문을 노크한 사람이 매튜라는 걸 알자마자 화색을 띄며 들어오라고 명했다. 다른 직원이라면


모를까, 매튜는 평소 자신이 아끼는 비서인데다가 늘 좋은 소식을 갖고 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논 일대기라던지, 제논 일대기라던지, 제논 일대기라던지.

매튜는 사장이 신뢰하고 있는만큼 제논 일대기의 편집 담당까지 맡는 중이다.

끼익-
사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매튜는 슬며시 문을 열었다. 갈색 곱슬머리에 흐리멍텅한 눈동자, 그리고
안경까지.

전체적으로 하루하루 피곤에 쩔어사는 듯한 직장인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소식을 가져왔나? 슬슬 제논 일대기의 원고가 올 시기이긴하다만."

사장은 매튜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소를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기대감에 두 손을 맞잡은 건 덤이다.

매튜는 사장의 질문을 듣고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의 품 안에는 웬 우편 봉투가 고이 안겨져


있었다.

"우선 세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 평범한 소식, 나쁜 소식. 뭐부터 알려드릴까요?"

매튜는 사장의 질문에 피곤에 쩔어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항상 저런 식으로 보고를 하는 편이다.

사장은 세 가지 소식 중에 나쁜 소식이 있다고하자 의문어린 표정을 지은 반면, 일단 보고부터 듣기로


정했다.

"평범한 소식부터 듣도록 하지."


"심부름꾼에게 전달받은 이야기입니다. 출판사로 온 팬레터를 전달해줄 수 있냐고 묻더군요."
"팬레터? 아, 편지 말인가?"
"네. 허구한 날 우리 회사에 쌓이는 편지요."

제논 일대기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만큼 열광하는 팬들도 엄청 많다. 심지어 그 팬들도


다양했는데 평민은 기본이고 고위급 귀족까지 있다.

더 나아가 마족이나 드워프, 심지어 간간이 엘프나 수인들이 보내는 편지도 있었다. 그 편지에 무슨
내용이 담겨있는지는 모르지만 국가와 종족 가리지 않고 인지도가 넓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사정상 작가에게 직접 보내지는 못 하고 출판사에게 보내는 중이다. 출판사조차 작가와 소통을
주고받기 힘들어 하염없이 쌓아두고만 있는 상황이었는데 때마침 잘 되었다.

"당연히 되지. 그런데 전달은 어떻게 하나?"


"심부름꾼을 시켜서 보내달라고 합니다. 적당한 값을 치를테니 보안에 신경써달라고 하더군요."
"알겠네. 마침 저걸 어떻게 처분해야하나 싶었거든."

사장이 엄지손가락으로 뒷쪽을 가리키자 자연스레 매튜의 시선도 따라갔다. 사장이 가르킨 곳에는
네모반듯한 상자가 놓여있었는데 그 상자에 팬레터가 가득 담겨있다.

상자의 크기도 만만치 않았는데 팬레터로 가득 채워진 걸 보면 얼마나 많은 양이 담겨있는지 유추할 수


있다.

"그럼 좋은 소식을 알려줄 수 있겠나?"


"좋은 소식은 제논 일대기 10 권의 원고가 이제 막 도착했다는 겁니다."

정말 좋은 소식이다. 사장은 당장이라도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제논 일대기는 새로운 책이 나왔다 하면 돈이 쏟아지는 수준이었으니 기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방심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나쁜 소식이 하나 있었으니까.

사장은 입꼬리를 쭈욱 말아올리며 매튜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나쁜 소식은?"
"이걸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원고가 든 우편물인데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매튜가 원고를 전달하자 사장은 의문을 가지면서도 아무런 의심없이 받았다. 이어서 이미 개봉된 우편
안에서 원고를 꺼내 매튜가 말한대로 마지막 페이지로 넘겼다.

마지막 페이지는 평소 작가가 적지 않았던 '작가의 말'이 실려있었다. 사장은 세상과 소통하려는 건가
싶어 놀라는 것도 잠시, 작가의 말을 읽고나서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이게 정말로...?"

사장은 행복했던 마음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끼며 매튜와 원고를 번갈아봤다. 떨리는 목소리와
두려움에 빠져있는 듯한 표정이 압권이다.

"후우... 보시는대로입니다."

이에 매튜는 생기없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고 착잡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본인도 믿을 수
없다는 뉘앙스로 입을 열었다.

"1 년 반에서 2 년 동안 휴재를 한답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사장은 한동안 혼이 나간 것처럼 우두커니 앉아있다가 다급히 고개를 세차게 털었다. 그동안 회사를
운영하면서 위기를 맞은 적이 한 번도 없던 건 아니다.

더군다나 이럴 때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사장인 자신이다. 이에 사장은


작가의 말에서 놓친 게 있는지 파악했다.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제논 일대기의 저자인 '제논'이라고 합니다. '제논'은 제 임시적인


필명이니 굳이 찾으려 할 필요는 없어요. 아무튼 제가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겉보기에는 평범한 인사말이다. 인사말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제논 일대기를 사랑해줘서 놀랍다니, 정말


감사하다니 등등. 본인의 심정을 드러내는 말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중간에 나타났다.

[제논 일대기는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시는 책이지만 그에 비례해 제 어깨에는 부담이라는 짐이


얹어졌습니다. 저는 단순히 취미로 쓰는 글이었는데 몸과 마음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어요. 저는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휴식을 결정했습니다.]

상당히 공손한 내용이지만 저자의 상황과 비교하자면 이야기가 다르다. 현재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찾기
위해 다양한 곳에서 추적하는 중이다.

그것이 귀족이든, 아니면 황실이든, 아니면 다른 종족이든. 모두 저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독자들의 눈에는 이렇게 보일 것이다.

[너네들이 나를 귀찮게 굴어서 당분간 쉴 거다. 쉬고 나서도 또 찾는다면 책 안 낼 거임.]

독자들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지는 걸 넘어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난의
화살이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이 뻔하다. 당연하게도 세상이 한동안 뒤숭숭해지겠지.
물론 아이작 입장에서는 학업에 집중하고 싶어서 이렇게 적은거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자를
현자로 추측하는 중이다. 한 술 더 떠서 지난 번에는 코피를 흘렸다고 건강을 우려하는 소식까지 신문에
실렸다.

이렇다보니 정말로 저자가 위험한 건 아닐까? 라는 불안감을 독자들에게 심어줄 가능성이 높다. 제논
일대기를 영영 못 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 ..."

사장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작가의 말을 재차 완독했다. 그리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빨리 소집해."
"네?"
"긴급회의 할테니까 당장 직원들을 소집하라고! 어서!"
"네, 네! 알겠습니다!"

매튜가 반문하자 사장은 전에 없던 노호성을 터뜨렸다. 이윽고 매튜가 문 밖으로 줄행랑을 치자 사장은
씩씩거린 것도 잠시, 곧바로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염병할 귀족 새끼들... 하여간 도움되는 건 돈밖에 없는 새끼들..."

사장과 더불어 출판사가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우리 아이작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히히힝."
"좋아?"
"응! 응!"
"그냥 껴안고 있는데도?"
"응!"

세상이 어떻게 돌아길지 전혀 상상조차 못 한 채 마리랑 행복한 데이트를 즐기는 중이었다.

< 64 화 >

원고와 내 편지가 담긴 우편물을 집으로 발송하고 열흘 정도가 흐르고 나서였다.

원래 편지를 보내면 일주일 정도가 지나야 답신이 돌아오는 편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는 살짝 늦었다.
거기다 우편물 또한 두터웠다.

'뭐가 들어있는거지?'

나는 전과 달리 두툼하게 채워진 우편물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윗부분을 뜯어 개봉했다.

개봉하고 나서 안을 들여다보니 꽤 많은 양의 편지들이 들어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정리했는지 중구난방으로 어지러있지 않고 책처럼 하나하나 반듯하게 정리돼 있다.

'이게 전부 다 팬레터인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차곡차곡 정돈있게 채워진 편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중


가장 눈에 띄는 편지를 집어들었다.

아무래도 이 편지만 유독 눈에 띄는 걸 보아 부모님의 편지인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리고 발신인을 확인하니 우리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이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꽉 닫혀있던 입구 부분을 뜯어 내용물을 꺼냈다.

[네가 부탁했던 팬레터 중 일부를 간추려서 보내마. 출판사에서도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보낼 수 없다고
하는구나. 나중에 차차 보내도록 하겠다.]

맨 처음에는 아버지의 편지였다. 역시나 할 말만 하는 아버지답게 요점만 정확히 짚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셨다.

[참고로 출판사에서 네 휴재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아마 우리와 소통이 힘드니 포기한 거겠지.
그대신에 파장이 꽤 클 거야. 대비하고 있거라.]

가족들에게는 모두 휴재 소식을 알린지 오래다. 게다가 이번 원고 마지막 페이지에 작가의 말을 넣었으니


출판사 측에서도 알아챘을 것이다.

단단이 대비하라는 말이 조금 신경쓰이긴 해도 문제될 건 없다. 설마 출판사 앞에서 책을 달라고 사람들이


우르르 모이기야 하겠어.

지금 나는 앞으로 학업에 집중하면 그만이다. 리나나 레오르트가 부디 한 권만 내달라고 해도 모조리


거절할 예정이다. 이때까지 빡세게 달려왔으니 주변을 둘러볼 겸 휴식이 필요하다.

'어머니 편지는... 여기 있네.'

어머니는 늘 그랬듯이 장문의 편지를 보내셨다. 대부분 시험은 잘 쳤냐니, 아카데미 생활은 할 만하니
등등. 대부분 내 안부를 묻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걱정하시는만큼 내 마음이 힐링되는 기분이다. 이런 장문의 편지를 한 달마다 보내는
것도 귀찮으실텐데 꼬박꼬박 정성을 담아 보내주신다.

이러니 내가 더욱 효도하고 싶지. 나는 어머니의 편지를 한 번 두 번 반복해서 읽고는 우편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팬레터들이 한가득 담겨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일부라고?'

그것도 간추려서 보낸 거라고 했으니 대체 얼마나 쌓여있는 걸까. 이거 전부 읽는데만 며칠이 소요될 것
같다.

나는 팬레터를 뭉텅이 채로 꺼내어 책상 위에다 올려놓았다. 가지각색의 편지 봉투가 널부러졌다.

그중 무엇을 고를까 고민하다가 대충 아무거나 하나 선택했다. 특이하게도 분홍빛 봉투에다가 꽃 문양이


금박으로 박혀있어서 눈에 띄었다.

[체리 블라썸 로즈베리]

미들네임까지 있는 걸 보면 귀족인 것 같지만 벛꽃향이 강하게 풍길 듯한 이름이다. 나는 로즈베리 가문이


누구인지 상기하다가 봉투부터 개방했다.

편지 봉투도 핑크색이었는데 편지조차 핑크색이다. 아무래도 이 색깔이 가문 고유의 색상인 듯싶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저는 로즈베리 후작가의 장녀, 체리 블라썸 로즈베리라고 해요!]

첫 인사부터 발랄하다는 인상이 강하게 느껴졌다. 마리와는 다른 의미의 활기참이라고 해야할까.


나는 페이지를 빼곡히 채운 팬레터를 꼼곰하게 읽어내렸다. 대부분 제논 일대기가 너무 재미있다니,
자신도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밖에 없었다.

[앞으로 2 년 후면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돼요! 작가님처럼 지식이 많다면 언젠가 제논 일대기 같은
글을 쓸 수 있겠죠?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작가님을 직접 만나서 글을 어떻게 쓰는지 배우고 싶어요.
하지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시니 참아야겠죠. 열심히 노력할게요!]

"음?"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말에 서둘러 발신 날짜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1 달 전에 보낸 편지다.

그러므로 내가 3 학년이 된다면 이 귀족 영애가 입학한다는 의미인데 인연이 닿으면 만날 수도 있겠다.


물론 만나봤자 내가 작가라는 건 입도 벙긋하지 않을테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네.'

누군가 나처럼 글을 쓰고 싶다는 말만큼 기분 좋은 말도 없다. 누군가 나를 존경하는 거니까.

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한 채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까지 정독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것과 나처럼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을 제외하면 딱히 거슬리는 건 없었다.

'이런 건 간직해야지.'

이런 식으로 내 작품을 칭찬해주거나 응원해주는 팬레터는 소장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힘들 때마다 이런


팬레터를 본다면 기운이 솟아날 것이다.

나는 팬레터를 어떻게 보관할지 고민하다가 편지 봉투에 넣는 것으로 해결했다. 일단 편지 봉투는 따로


분류할 생각이니 책상 옆에 올려놓았다.

'다음으로는...'

팬레터를 확인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평민이 보낸 거라면 밋밋하기 짝이 없었지만 귀족이 보낸


거라면 색과 더불어 고유의 문양이 박혀있다고.

게다가 귀족들이 보낸 팬레터보다 평민이 보내준 팬레터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본래 소설은 평민보다
귀족들이 즐겨있는 편이었지만 제논 일대기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읽기 좋은 소설이다.

또한 귀족의 숫자는 전체 인구로 따졌을 때 약 1%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다보니 평민이 보낸 팬레터의
수가 더 많을 수밖에.

[안녕하시오. 내 이름은 길드 테스 힐러트 자작이라 하오. 그대의 책을 보고서 깊은 감명을 받았소.


그래서 하나 제안하고 싶더군. 우리 가문에 방문하여...]

특히 귀족들 중에는 본인의 지위를 어필하면서 본인의 가문을 끌어들이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건 대충
읽고 말았다.

그래도 딴에는 자존심을 굽혀가면서 편지를 작성해줬으니 버리진 않을거다. 누가 보지 않아도 그게


최소한의 예의겠지.

아무튼 간에 평민이 보내준 팬레터는 나중에 읽는 편이 좋겠다. 다른 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오늘 다 읽는


건 절대 무리다.

[마리 하우젠 레킬리스]


"... ..."

그렇게 팬레터를 쭈욱 읽다보니 마리가 보내준 팬레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새하얀
편지 봉투를 바라보다가 이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과연 마리는 어떤 내용을 담아 편지를 보냈을까. 기대가 된다.

이윽고 편지를 펼쳐서 마리가 직접 손으로 적은 팬레터를 읽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존경하는 작가님. 저는 레킬리스 가문의 마리라고 해요. 작가님 작품은 정말 재미있게 읽고
있답니다.]

의외로 담백한 문체였다. 내용 또한 내 작품을 칭찬하는 것밖에 없었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진정한 목표는 따로 있었으니.

'이걸 그대로 갖고 가서 낭독하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읽지 마! 읽지 말라고 했다?!"


"악! 때리지 마! 알았어! 안 읽을게!"

등짝 맞았다.

*****

전에도 말했지만 몇몇 귀족들은 제논 일대기와 판권 계약을 맺은 출판사에게 뇌물을 주고 있다. 대부분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려달라거나 새로운 책이 나오면 몰래 달라는 부탁들이다.

물론 출판사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절대 알려주지 않고 최신에 발간된 것만 주는 편이다.


출판사 입장에서도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바에야 황금알을 미리 주는 편이 나았으니.

권위가 높은 귀족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불평을 할지언정 불만은 가지지 않았다. 괜히 들쑤셨다가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잠적해버리기라도 한다면 본인들에게 큰 피해가 간다.

그래서 제논 일대기 저자를 찾는 건 뒷전으로 미루고 최신화가 나올 때마다 미리 건네받았다. 덕분에


치열한 경쟁을 치루지 않고 제논 일대기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제논 일대기가 나온다는 소식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전에 말이다.

"흐응~ 흐흐흥~"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 리나는 본인의 숙소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어떤 우편물을 정성스레 개봉하고 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 그녀의 기분은 매우 좋았다. 평소 '가면'을 썼을 때와 달리


그녀의 미소는 진심이 뚝- 뚝- 묻어나왔으니.

그 이유는 바로 현재 그녀가 뜯고 있는 우편물에 담겨있다.

"짜잔~"

리나는 우편물 속에 든 책 한 권을 꺼내며 천장을 향해 번쩍 들었다. 숙소에 아무도 없었지만 보란듯이


과장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기분이 좋다는 걸 반증하고 있었으며 그럴만한 사유는 충분하다.

왜냐하면 리나가 번쩍 들고 있는 책의 정체는 제논 일대기 10 권이었으니까. 출판사에서는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도 않았다.

황실 측에서 출판사에게 로비를 하여 누구보다 빨리 받아낼 수 있던 것이다.

'이럴 땐 권력이 좋다니까. 후후.'

누가 본다면 참 쓸데없는 곳에 권력을 낭비하는 중이라고 까겠지만 리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정치계에 입문한 그녀에게 권력을 이용하는 건 일종의 상식 수준으로 박혀있다.

그녀는 제논 일대기 10 권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내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이작이 정말 천재이긴 하구나.'

제논 일대기를 바라보니 자연스레 아이작도 떠올랐다. 그녀는 여전히 호크가 스토리를 알려주고 아이작이
글로 옮기고 있다 착각하는 중이지만, 그럼에도 아이작의 글솜씨가 뛰어나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런 문장력을 갖출 수 있는지 리나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다. 아무리 봐도 제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는 능력이다.

'반드시 제국에 붙잡아야지. 그 전에...'

일단 스토리부터 읽자. 리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책을 펼쳤다.

이번에는 어떤 스토리가 펼쳐져서 자신을 즐겁게 만들지 잔뜩 기대가 되었다.

'우와. 인간과 엘프의 사랑? 이거 쉽지 않을텐데.'

그리고 그 기대를 배반하지 않은 스토리가 눈 앞에 펼쳐졌다. 인간과 엘프의 사랑 이야기라니. 이것 또한


세계적으로 파장을 일으킬만한 주제다. 특히 엘프 쪽에서 반응을 하지 않을까, 라는 예상이 자연스럽게
든다.

게다가 그림도 없이 글밖에 없는데 머릿속으로 상상이 되는 이 놀라운 가독성과 묘사는 언제 봐도


놀라웠다. 제논의 스승과 엘프 여왕 사이의 갈등과 고민이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것 뿐이랴. 스토리조차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방대하다. 흔히 '떡밥'이라 칭해지는 것들이 하나 하나


풀릴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 했다.

'아. 벌써 다 읽었네. 아쉬워라...'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보니 어느새 끝까지 다 읽게 되었다. 하필이면 스승이 악마측 간부가
관리하는 지역에 잠입했던지라 더욱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스승과 엘프 여왕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분명히 잘 되겠지?'

중간중간 스승이 불안한 말을 남기긴 했지만 꿈과 희망을 위해서라면 서로 이어지는 게 좋다. 둘 중 한


명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만큼 비극적인 일도 없을테니.

하물며 스승은 엘프 여왕 한 명만을 바라본 희대의 순정남이다. 제논에게 가르침을 선사할 때는 그저


괴팍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오늘을 계기로 인식이 바뀌었다.

심지어 그가 강해지려는 이유도 수명을 조금이나마 늘리기 위해서라는, 정말로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이야기다.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랑을 쟁취하려는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만하다.

'잘 될 거야. 암. 잘 되고말고.'

그런데 마음 속에 들어있는 이 불안감은 무엇일까. 왠지 스승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리나는 그 감정을 억지로 누르며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스토리는 모두 끝났지만 남은 게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버릇이다.

"응? 작가의 말?"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니 '작가의 말'이라는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 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을 표하다가 작가의 말에 실려있는 글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소개에 불과했다. 게다가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 것부터 리나에게는
예상 밖이었다. 필명을 알려준 것부터가 세상과 소통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어?'

얼마 지나지 않아 리나는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연중... 공지? 심적으로 힘들어?'

큰일났다는 걸.

'그것도 2 년이나...?'

머지않아 커다란 폭풍이 몰아친다는 것을.

"...어라?"

리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작가의 말을 멍하니 바라봤다.

< 65 화 >

[제논 일대기 10 권. 발매까지 앞으로 하루.]

출판사에서 제논 일대기의 발매일을 잡았다는 소식이 신문에 실렸다. 그것 외에는 이렇다 할 소식은
없었다.

아무래도 출판사는 제논 일대기가 발매되는 날에 내가 휴재를 할 거라는 소식을 알려줄 생각인 것 같다.
나야 상관없는 문제다.

사람은 모든 일을 끝낸다면 한결 여유로워지기 마련. 시험도 끝났겠다 하루하루 기쁜 마음으로 강의를


듣거나 그 후에는 마리와 단란한 데이트를 즐겼다.

뭐, 그렇다고 흥청망청 노는 건 아니다. 방학이 되기 전까지 약 한 달 정도가 남았고 그 안에 기말고사가


남아있다.

다행히 조별 과제는 별로 없는데다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나는 장학금을 딸 생각은 추호도 없고


유급만 면하면 그만이니.
무엇보다 헤일로 아카데미는 3 학년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점수를 아슬아슬하게 못 채워도
특정 교수에게 이쁨을 받는다면 올라갈 수 있다.

"너는 1 학년이 끝나자마자 나한테 찾아와. 내가 추천서 써줄게."

예를 들어 나를 마음에 쏙 들어하고 있는 엘레나 교수님처럼.

늘 그렇듯이 연구실에서 신디에게 작문법을 가르치다가 잠깐 쉬는 중에 엘레나가 저리 말했다.

이에 나는 신디가 직접 우려준 차를 홀짝이다가 눈을 깜빡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추천서요?"
"응. 추천서."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교수가 직접 손으로 쓰는 추천서의 가치는 실로 막강하다.

약간 과장을 보태서 2 학년까지 성적을 개판으로 쳐도 3 학년으로 진학할 수 있다.

단, 여기서 조건이 하나 있는데 추천서를 써준 교수가 담당하는 전공이어야만 하고 그 전공 하나만큼은


성적이 좋아야한다.

하지만 추천서는 교수가 직접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기에 절대 남용할 수 없다. 말 그대로 교수가
판단하기에 인재 중의 인재를 골라야 하는 것이다.

엘레나 교수도 위의 이유로 나에게 저런 말을 꺼냈을 가능성이 높다. 나에게는 조금 당황스러운 이야기다.

"저 아직 방학도 안 한 신입생인데요? 너무 급하신 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겠지. 그런데 최근들어 너처럼 역사에 열정적인 학생이 드물었거든. 참고로
인간 기준이 아니라 내 기준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엘프인 엘레나 교수가 저렇게 말하니까 무게감이 확 달라졌다. 도대체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 얼마나 적다는 거야.

아무튼 간에 엘레나 교수가 나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평소 역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기쁜 일이다.

이미 확고한 길을 잡은 상황에서 다른 전공을 공부하려니 죽을 맛이었는데 짐을 살짝 덜어낼 수 있게


되었다.

"저야 좋죠. 다른 전공도 아니고 역사인데."


"그거 다행이네. 참고로 내가 쓴 추천서는 꽤 다를거야. 내 동행 하에 알븐하임으로 데려갈 수 있거든."
"알븐하임이요?"

나는 엘레나 교수가 꺼낸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븐하임은 전에 말했듯이 엘프들의 국가이며, 최초의 문명이 세워진 곳이다.

수도, '위그드라실'에는 성지(聖地)인 세계수가 존재하고 있으며 최초의 문명이 세워진만큼 살아있는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응. 네가 알고 있는 알븐하임이 맞아. 네가 원한다면 방학 기간에 방문할 수도 있어."


"알븐하임은 입국 절차가 엄청 힘들지 않아요?"

알븐하임은 종족전쟁 이후 국교를 개방했지만 여전히 까다로운 출입 절차를 자랑한다.


오죽하면 일반인이 한 번 방문하려면 국가 차원에서 직접 인증까지 해야할 정도.

엘프 입장에서는 문명도 모자라 하나부터 열까지 모방하려는 인간을 좋게 볼 수 없으니 당연한 입장이다.
하물며 종족전쟁에서도 인간과 혈전을 치뤘으니 더더욱.

엘레나 교수는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처럼 신디가 우려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맞아. 네 말대로 인간이 알븐하임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귀찮은 절차가 필요하지. 하지만 나와 동행하면
이야기가 달라져. 우리 엘프는 자기가 인정한 사람에 한해서 자비롭거든. 본인이 인정할만큼 상대방이
고귀하다는 의미로서 자격을 부여하는거야."
"그거 좀..."
"그래. 실로 엘프다운 마인드지. 종족전쟁에서 된통 당했는데 여전하단 말이야."

본인이 엘프인데도 엘프를 신랄하게 까내리는 엘레나 교수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쓴웃음을 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튼, 내 추천서를 받게 되면 알븐하임에 방문할 수 있다는 것만 알아둬. 나중에 데려갈 생각이니까."


"전 그렇게 대단한 학생은 아닙니다만..."
"그래.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네가 대단한 학생은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역사를 향한 사랑은
진심이잖아? 그리고 생각도 깊고 말이야.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지?"

역사학 시험에서 내가 적었던 답안지를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낸 엘레나 교수. 나는 안경 너머로 빛나는
연두빛 눈동자와 마주했다.

전생에서 널리 퍼져있던 명언을 그대로 베껴적은 거라 양심이 찔리긴 했지만, 이런 말을 해봤자 큰 의미는
없을거다. 이때는 침묵만이 답이다.

엘레나 교수는 내 침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걸 보고 꽤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 실제로 네가 적은 답안처럼 역사가 반복된 적은 수도 없이 많아.


그러면 역사는 어째서 반복되는 걸까?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해?"
"글쎄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역사를 보면 항상 비슷한 패턴이 나와서요. 예를 들어 전쟁이
발발한 과정을 살펴보면 놀랍도록 비슷해요. 나라끼리 갈등을 벌이고, 그걸 해소하다가 이도저도 안 되면
전쟁으로 귀결되기 마련이죠."

실제로 역사적으로 나라 사이의 전쟁을 보자면 이유가 비슷한 경우가 많다. 세세히 파고들자면 여러가지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다.

누군가의 욕심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명분을 갖다 붙일 수 있고, 전국민이 분노할 대사건을 일으켜 전쟁이


발발될 수도 있다.

이처럼 전쟁은 쉽게 결정할 수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사회문명이 발달한 전생에서도 과거에는 툭 하면 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전쟁이라 해서 무력만 사용하는 건 아니에요. 미네르바 제국과 테이로스 왕국 사이에 발발한 문화
공방도 일종의 전쟁이라 볼 수 있죠. 그게 심화되면 무력으로 변질되는 거고."
"흠. 확실히 일리가 있네. 종족전쟁도 종족 간의 문화 차이에서 발생한 전쟁이었으니까."

엘레나 교수는 내 설명에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종족전쟁이 발발한 이유에는 여러가지
굵직한 사건들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문화 차이 때문에 발생했다.

엘프는 힘도 없으면서 욕심만 많은 인간을 탐탁치 않아했고, 인간은 겉으로 고결한 척 하지만 자신들을
깔보는 엘프의 면모를 싫어했으니까.
이런 이념 차이가 점점 크기를 부풀리다가 종족전쟁이 터져버렸다. 그 후로 각 측마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나서 전쟁이 끝났으나 후유증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그럼 네가 생각하기에 현재로서 발발하기 쉬운 전쟁은 뭐라고 생각하니?"


"음..."

나는 엘레나 교수의 질문에 시선을 위로 두며 곰곰이 생각했다. 현재 이 세상에는 다양한 나라가 존재하고
각각 고유의 문화와 특성이 있다.

이때문에 여러모로 갈등을 벌이고 있지만 상당히 평화로운 편이다. 이렇다 할 문제점도 없을 뿐더러
건덕지를 잡을만한 부분도 없다.

굳이 있다하면 미네르바 제국과 테이로스 왕국, 이 두 나라일까. 이 둘은 최근까지도 문화 때문에 서로


언쟁을 주고 받았다.

물론 이것 때문에 전쟁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본격적으로 문화를 침탈할 거면 별의별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만들테니까.

"저는 잘 모르겠네요. 엘레나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 있긴 있어. 이걸 전쟁이라 쳐야할지 모르겠지만, 그 중심에는 제논 일대기가 있겠지."
"네?"

전쟁 이야기를 하는데 왜 뜬금없이 제논 일대기가 언급되는 걸까.

내가 속으로 황당해하던 말던 엘레나 교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진지한 표정을 보아 진심인 듯했다.

"너도 알겠지만 제논 일대기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종족을 가리지 않고 전세계적으로 상한가를 달리고 있어.
여기서 문제는 특정 나라에서만 인기가 있다면 모를까, 국가를 가리지 않는다는 게 제일 큰 문제지."
"겨우 책 하나 때문에 전쟁이 발생한다고요?"

나도 내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다. 주위에서 그렇게 알려줬는데 모르면 이상하지.

하지만 전쟁은 조금 심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책이 아니라 책을 쓴 사람, 그러니까 작가를 말하는 거야. 지금 제논 일대기와 판권 계약을 맺은


출판사가 미네르바 제국에 있다지만 완전히 종속된 건 아니거든. 제논 일대기가 미네르바 제국 밖으로
유통이 되어도 관세를 매길 수가 없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하. 만약 작가가 특정 나라에 종속된다면, 경우에 따라 그 나라가 제논 일대기에 관세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말인가요?"

전쟁 중에서도 무력만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경제적으로 막심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게 무역 전쟁이다.

겨우 책 따위에 관세를 매기는 건 조금 웃기는 상황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국가가 나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정 물품에 관세를 매긴다는 건 경우에 따라서 아예 유통을 못 시키게 막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불 보듯 뻔하다.

"그렇지. 관세를 매기는 순간 그 나라는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게 될 거야. 외교에서의 이점은 말할


것도 없겠지."
"음..."
"개당 3 실버도 안 되는 물품에도 관세를 매기는 걸 생각해보렴. 관세라는 게 좀 복잡한 거야."
솔직히 쉽게 와닿지 않는다.

마리에게도 들었지만 내 가치는 제국조차 쉽게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실제로 미네르바


제국과 테이로스 왕국이 물밑에서 암투를 벌이는 중이라고 들었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제논 일대기가 상업적으로도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이는 건 사실이지만 수출품 중 일부에 지나지 않을테니까. 더구나 작가가 지금처럼 정체를
숨긴다면 아무런 일도 없을거고."
"... ..."
"너도 알겠지만 전쟁은 별의별 괴상한 이유 때문에 발생해. 서로 힘이 비슷하면 그 경우가 더
심해질거야."

하기야 전생에서는 축구 하나 때문에 전쟁이 발생한 적도 있었으며 반대로 축구 하나 덕분에 전쟁이 멈춘


경우도 있다.

크트디부아르가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을 당시, 드록바가 카메라 앞에서 무릎을 꿇어 전쟁을
멈춰달라 호소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나라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내전이 멈췄다. 축구선수조차 그정도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나라고 못 할 건 없다.

만약 정말로 전쟁이 발발한다면, 너무 불안해서 글을 못 쓰겠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무역 전쟁 정도라면


가만히 지켜보고 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할 시에만 그렇게 호소할 거다.

아니면 전쟁 관련 소설을 발간해서 전쟁의 참사를 알려줄 수도 있고. 내 인지도가 전세계급인 이상 나라


간의 사소한 다툼은 해소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휴재는 할 거야.'

나도 좀 쉬어야지. 겸사겸사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그렇게 마음편히 하루가 지났을 쯤이었다.

[제논 일대기 10 권 드디어 등장. 그런데...]


[충격! 제논 일대기 최소 1 년 반 동안 휴재! 경악을 금치 못하는 팬들.]
[현재 출판사 앞에 몰려들기 시작한 인파... 다급히 해명 촉구.]
[작가의 말에 적힌 의미심장한 글귀. 작가 '제논'에게 무슨 일이? 혹시 귀족의 소행인 것인가?]

고작 이틀도 지나지 않아 매서운 폭풍이 세상에 들이닥쳤다.

"와우."

이건 좀 예상을 벗어났는데.

< 66 화 >

제논 일대기가 국가를 가리지 않고 이 시대의 진정한 걸작으로 추앙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고 있으나 제논 일대기는 계급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구분없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지도 않았고, 빙빙 돌려서 말하지도 않는다.

간결하게, 하지만 명확하게 하나의 이야기를 책에 담아내어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그 상상력을 통해 또


하나의 세계를 머릿속에 펼쳐줬다.

이 특징 하나만으로도 제논 일대기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기 위한 조건이 충족된다. 여기에 더해서


흥미진진한 스토리까지 있으니 인기가 하늘을 찌를듯이 상승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심지어 제논 일대기를 읽기 위해 문맹이었던 사람들도 글을 배울 정도였으니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제논 일대기를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거나 문장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파악하여
스스로 깨닫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렇듯 인기가 하늘을 찌를듯이 높아진다면 자연스레 부작용도 있는 법.

제논 일대기를 제외한 다른 책이 거의 팔리지 않는 건 둘째치고, 책 속의 주인공이 되겠다며 설치다가


피를 본 경우가 부지기수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이 세상은 그런 경험을 겪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애초에 남녀노소, 계급, 종족 전부를 가리지 않고 유행을 탄 '문화'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 문화를 즐기기에 바빴지 부작용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지만, 제논 일대기 10 권이 세상에


등장하고나서 숨어있던 문제가 터져나왔다.

"빨리 문 열어! 너희들은 출판사잖아! 제논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있을 거잖아!"


"적어도 상황만이라도 알려주세요! 지난 번에 건강이 우려된다고 하셨잖아요!"
"갑자기 왜 휴재를 한다는 거야?! 심적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말은 또 뭐고? 당장 나와서 해명해!"

제논 일대기와 판권 계약은 것으로 유명한 출판사 입구 앞.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중이다.

평범해 보이는 자유민부터 시작해서 잔뼈가 굵은 것 같은 모험가, 이밖에도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까지.

이처럼 공통점없이 다양각색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물며 선동을
하는 사람조차 없는데 시위를 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아, 물론 공통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들 모두 제논 일대기라면 열광해 마지않는 속칭 '팬'들이었으며 제논 일대기 10 권을 읽고 이리 몰려든


것이다.

"저희도 모른다고요! 저희는 단지 원고를 받고 책을 찍어내는 일만 하고 있어요!"


"그래요! 이렇게 소리를 질러봤자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시위대를 힘겹게 막고 있는 직원들은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그들로서는 다소 억울한 것이,


본인들도 작가가 장기 휴재를 선언한 이유를 자세히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제논 일대기 10 권이 나오고 이틀이 지나자 해일처럼 몰려든 인파를 막기에 급급했다. 다행히
시위대가 과격하게 나오지 않아 당장은 막을 수 있다는 걸까.

하지만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자극되었다간 정말로 출판사가 점령당할지도 모른다. 그전에 어떻게든 진화
작업을 해야되는데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든 좀 해봐!'

시위대를 막고 있는 직원은 본인의 회사를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면서 소리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그렇다면 현재 출판사 내의 상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어떻게 안 되겠소? 당신은 분명 작가, 그러니까 제논과 연결고리가 있을 거잖소."


"부디 이 편지만이라도 보내주시오. 심적으로 고생하신다 하시니 내가 책임질 수 있소."

전국에서 몰려든 귀족들을 상대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사장은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에게


애걸복걸하는 귀족들을 허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예상은 했다지만 직접 맞닥뜨리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진풍경도 이런 진풍경이 없을 것이다.

자신은 단지 제논 일대기와 계약을 맺은 이후부터 어마어마한 수익을 벌어들인 졸부에 불과하다. 눈 앞의


귀족들처럼 권력이 강하다거나 절차 따위는 싸그리 씹어버릴 힘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한 명도 아니고 우르르 몰려들어 사장실을 점령하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나도 모른다고. 이 새끼들아.'

사장은 자신의 눈 앞에서 시위를 펼치는 귀족들을 보며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귀족도 지금 출판사 입구를 점령한 시위대와 별 반 다를 게 없다.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제논


일대기의 작가를 걱정하는 마음은 같았다.

몇몇 못 돼 먹은 귀족들처럼 작가를 찾기 위해 안달이 난 부류가 아닌, 진정으로 제논 일대기 그 자체를


좋아하는 팬이다.

그걸 반증하는 것처럼 현재 사장실에 모든 귀족들은 대부분 백작 이하다. 후작부터는 공무에 치여살다보니


출판사 같은 곳에 찾아올 여유가 되지 않는다.

설령 여유가 되더라도 자기들끼리 회의에 들어가지, 출판사 같은 곳에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저... 여러분? 죄송하지만 아무리 따지셔도 저도 잘 모릅니다. 작가님이 어떤 이유로 휴재를 한


건지..."
"그러니까 저희가 부탁하는 거잖아요! 작가님이 어떤 이유로 힘드신 건지, 그리고 어째서 2 년 가까이
휴재를 한다는 건지 알아주시라고요!"

사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귀부인 한 명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꾸하면서


무산되었다.

사장은 귀부인의 날이 선 목소리에 움찔거렸다가 소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여러분이 계속 이러신다면 작가님께서도 불편해하실 겁니다."


"그런 말이 지금 우리에게 통할 것 같나요? 우리가 원하는 건 작가님의 자세한 사정이지, 당신의 같잖은
추측이 아니에요. 우리를 납득시킬만한 이유를 설명하기 전까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겠어요."
"제발 편지라도 보내주시오. 작가님이 누구인지 몰라도 상관없소.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걱정되서 이러는
것이오. 최근 건강에도 문제가 있다 하셨잖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사장은 귀부인 다음으로 애처로운 귀족의 부탁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옴을 느꼈다.

'편지가 오고 가는데 하루 이틀인 줄 알고 있나?'

이미 편지를 보낸지 오래다. 비록 회의를 하느라 지난 번 팬레터를 보낼 때 같이 보내지는 못 했지만


지금쯤이면 저택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러니 대략 사흘 정도만 진득하게 참으면 답장이 돌아올 터. 사장은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틸 생각이었다.

물론, 사흘이라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제논(필명)이 호크라는 전제 하에 잡은 것이다. 실제로 답장이


돌아오기까지 며칠이 걸릴 것이라는 건 사장은 전혀 예측하지 못 하고 있다.

"안 되겠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직접...!"


"그렇게 되면 제논 님을 괴롭히던 사람들과 다를 게 뭐요? 지금 바깥의 시위대가 내는 목소리를 듣지 못
했소?"
"그게 우리가 한 건 아니잖아요! 왜 우리가 피해를 봐야하는 건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당장 지금도 불이 붙기 직전인데 거기에다가 마나석이라도 투여할 생각이오? 아주 시원하게 타오르겠군.
제이로스 혁명 같은 사태가 전세계적으로 발생하는 꼴을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시오."

잘 싸운다, 잘 싸워.

사장은 결국 본인들끼리 언쟁을 벌이기 시작한 귀족들의 모습을 보며 해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말마따나 지금 이 현상은 이들보다 더 윗쪽에게 불안한 징조로 보일 것이다. 심지어 제이로스 혁명
당시에 있었던 징조보다 더욱 과격했다.

만약 여기서 누군가 선동을 하거나 잘못된 소문이라도 퍼지게 된다?

제 2 의 혁명이 발생할 건 불 보듯이 뻔한 일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진화 작업을 해야하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도 아니다. 당장 땀과 눈물로 성장해낸 회사가 불타고 있는데 어떻게 구경을 할 수


있겠나.

'루미너스시여...'

사장은 속으로 신을 찾아 기도했다.

*****

시위는 제논 일대기와 계약한 출판사 앞에서만 이루어진 건 아니다. 제논 일대기가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친만큼 곳곳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광장에서 팻말을 들며 열심히 목소리를 높이는 시위대는 물론이고, 심지어 국가의 주요 시설 앞에서
시위를 펼치는 전대미문의 일까지 발발했다.

이들 모두 제논 일대기의 작가가 어떤 상황인지 알려달라며 제대로 된 해명을 촉구했고, 신문에 봤던


것처럼 정말로 몇몇 귀족이 귀찮게 굴어 이런 참사가 발생한 거냐며 항의했다.

제이로스 혁명처럼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없었지만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각 나라마다 높으신 분들은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골머리를 앓았지만 이내 한 묘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제논 일대기의 저자, 즉 제논은 없다. 애시당초 출판사도 미네르바 제국에 있다.]
[목소리를 높이는 시위대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에게 따져봤자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도 제논의 장기 휴재 소식에 당황스러우며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제논이 심적으로 힘들었다면 분명 국가 차원의 압박이 있었을 것. 문화라면 죽고 못 사는 나라라면 두
곳밖에 없다.]
그건 바로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에게 책임을 돌려버린 것이다.

실제로 두 나라는 문화라면 눈에 불을 켜도 달려드는 것으로 유명하며, 문화 전쟁 직전까지 갈 뻔한


전적도 있다.

여기에 더해서 미네르바 제국은 테르스 왕국의 문화를 침탈하는 것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이때문에 테르스
왕국에서 엄격한 규율을 새로 지정한 건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사실.

출판사는 미네르바 제국에 있고, 미네르바 제국은 문화라면 남의 것을 빼앗을만큼 탐욕스럽다.

위의 두 가지 가설이 딱딱 맞아떨어져서 비난의 화살이 모두 미네르바 제국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선동에 불과했지만 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려도 거센 화염으로 변질된만큼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테르스 왕국은 제이로스 혁명 같은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 전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런
사건까지 겪었는데 제논 일대기 저자를 압박한다는 미친짓은 저지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제국에도 제이로스 혁명 같은 사건이 벌어지면 어떡하지? 괜찮을까?"


"지금 바깥에 나가면 난리도 아니야. 황궁 앞에서 시위를 펼치는 시민들도 등장하기 시작했어."
"어떡해..."

그런 불안감은 수도에 위치한 헤일로 아카데미에도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강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미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강의실 내부를 둘러봤다.

제논 일대기 10 권이 출간된지 겨우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후폭풍이 실로 무시무시했다. 신문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펼쳐졌다는 기사가 실렸으며, 경비대로는 막지 못해 군대까지 동원했다는 말이
나왔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많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단지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 휴재 공지를 올렸을 뿐인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 시작했으니까.

심적으로 힘들다는 말은 진실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압박을 받고 있다는 걸로 왜곡되었다. 문제는 이것도


마냥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까.

일단 출판사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과연 진화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이상하게 흘러가는 사태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쯤, 내 옆에 앉은 마리가 시시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기분이 어때?"


"뭐가?"
"제국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몸소 느끼고 있잖아."

나는 마리의 질문을 듣고 무어라 대답할지 곤란하여 머리를 긁적였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겪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강의실 내부가 술렁이는 모습을 보자니 실감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 학생조차 불안한 기운을 감지할 정도이니 바깥 상황은 난리도 아닐 터. 나는 콧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마리를 슬쩍 바라봤다.

그녀는 아무런 걱정도 되지 않는지 특유의 방실거리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마리는 황제 다음 가는 권력을 지닌 레킬리스 가문 출신이다.

그러니 분명 마리의 가문에도 영향이 갔을 것이다. 걱정될 수밖에 없다.

"너는 걱정도 안 돼?"


"조금은? 그래도 머지않아 진정될 거야. 이건 확신할 수 있어."

자신만만한 대답에 절로 의문이 나온다. 내가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갸우뚱하자 마리가 피식거렸다.

뒤이어 그녀는 뒷쪽을 힐긋 바라보더니 나에게 손짓했다. 귀를 빌려달라는 듯한 제스쳐에 얼굴을 천천히
갖다 대었다.

"후우~"
"으핫!"

귓속을 파고드는 바람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팔딱거렸다. 내가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펄떡 뛰자 마리는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흘렸다.

"히히. 좋았어?"
"아, 진짜... 이런 장난 좀 하지 마."
"미안. 미안. 그리고 옆을 한 번 볼래?"
"또 뭐..."

또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지만 그녀의 말에 따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한 사람의 모습에 눈을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내려오고,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와 청초한 인상의 미녀가 내 옆에
서 있었다.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 리나였다.

나는 어째서 리나가 내 옆에 서있는지 의아한 것도 잠시, 리나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언제나 평온했던 얼굴이 아니라 수심에 잠겨있는 얼굴이다.

"...아이작."
"어... 네."

내 이름을 부른 그녀는 마리를 한 번 쳐다봤다. 그 시선에 마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마음대로 하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마리에게 허락도 받았겠다, 리나는 어딘가 결의를 다진 표정을 짓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그 부탁에 어안이 벙벙해졌을 때였다. 옆에 있던 마리가 빈정거리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게 부탁할 사람의 태도니?"


"... ..."
"정중하게 부탁해야지. 정.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끊어서 말하는 마리가 짜증났던 걸까. 리나가 약간 표독스러워진 얼굴로 마리를
쏘아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는 콧방귀를 뀌며 잔뜩 여유를 부렸다. 어디 한 번 해볼테면 해보라는 표정이다.

하지만 리나는 이렇게 소모전을 펼쳐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를 바라보며 부탁의 말을 꺼냈다.

"...부탁할게."
목소리에는 힘이 상당히 빠져있었다.

< 67 화 >

어째서 리나가 시간을 내달라는 건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분명 제논 일대기를 휴재하면서 몰아치기
시작한 폭풍을 잠재우기 위해서겠지.

헌데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봐야할 것이, 리나는 대변인을 통해 나를 부르지 않고 직접 찾아왔다. 지난


번에는 우연히 만났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따로 사람을 시켜 나를 불렀을 수도 있다.

즉, 리나가 재빨리 나를 찾아와 해결해야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의미. 신문에서도 그렇고 주변에서
들리는 말로는 제국 곳곳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중이라 들었다.

하기야 제국으로서는 당장 옆나라이자 라이벌인 테르스 왕국에서 '제이로스 혁명' 같은 대사건이


발생했으니 쉬이 넘길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유들로 인해 황녀인 리나가 저자세를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너는 꼭 있어야겠니?"
"네가 아이작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참고로 나와 리나만 있는 게 아니라 마리까지 합세했다. 위의 말처럼 마리는 리나가 나에게 이상한
말이라도 할까봐 걱정되어 따라왔다.

나야 뭐, 상관없는 일이지만 리나는 아니다. 리나로서는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오고 가야하는데 마리가


고집을 부리니 다소 짜증날 수밖에.

물론 마리가 내 비밀을 모르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다. 마리도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는지 리나를 힐긋
쳐다봤다.

리나는 특유의 포커 페이스가 완전히 부서지고 눈쌀을 찌푸린 채 쌀쌀맞은 표정이었다. 그에 마리는
같잖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더니 한 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나도 아이작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걸? 설마 너만 알고 있다 생각한 건 아니겠지?"


"뭐? 그게 무슨 소리..."

마리의 대답에 리나는 순간적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어서 마리와 번갈아보더니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납득했다는 반응이다. 그녀는 앞을 쳐다보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런 사이니 비밀 같은 건 알려줄 수도 있겠지."


"응. 맞아. 누구처럼 압박해서 비밀을 억지로 실토하게 만들지도 않았고."
"난 압박한 게 아니...!"

마리의 빈정거림에 울컥했는지 리나가 버럭 소리치려다가 간신히 억눌렀다. 그러면서 나를 힐끔 쳐다봤다.

아무래도 본인도 찔렸던 모양이다. 실제로 계급 차이에서 발생하는 간격은 실로 막대하며, 그것이 지도자
계층이라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더구나 리나는 어릴 때부터 정치계에 입문했을테니 그 사실을 모를리가 없다. 실제로 그 간격을 이용하여
나와 니콜을 압박하고, 조별과제 당시 잭슨을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머리가 비어있거나 정말로 바보 멍청이가 아닌 이상 리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본인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압박감을 줄 수 있다고.
그리고 리나는 내가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휴재를 결정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진짜 이유는 학업과
더불어 재충전을 위한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휴재를 결정한 거지만.

하지만 압박감이라는 이유도 없지 않아 있다. 만약 리나와 레오르트가 압박하지 않았더라면 이대로 쭈욱


집필했을 수도 있다.

"...우선 카페부터 가자. 되도록 빨리 해결했으면 하니까."

리나는 벌써부터 피곤해진 듯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재촉했다. 마리도 더이상 놀리지 않기로 결정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벌써부터 개판으로 가버릴 듯한 분위기 속에서 리나의 눈치를 보다가 마리와 눈을 마주쳤다. 마리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베시시 웃더니 슬며시 팔짱을 꼈다.

그러면서 은글슬쩍 자신의 가슴 쪽으로 잡아당겼는데, 나는 교복 너머 가슴 특유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져도 미소만 지었다.

이런 애정 행각은 이미 많이 했던지라 얼굴이 살짝 붉어질언정 더이상 부끄럽지는 않았다.

"...좋아보이네."

리나는 자기가 있어도 애정 행각을 펼치는 우리 둘을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에 나는 약간 민망한


웃음을 흘렸지만 마리는 이거 보라는 듯이 팔짱을 더 강하게 끼면서 입을 열었다.

"부럽지? 부럽지? 부럽다고 해도 아이작은 절대 안 넘겨줄 거야."


"나도 남의 남자친구를 뺏는 취미는 없어."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못 믿겠네."

역시나 리나를 강하게 불신하는 중인 마리다. 리나는 그저 쓴웃음만 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


했다.

이럴 때 보면 항상 드는 생각이 있다. 과연 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관계가 형성되었을까.

성격이 좋은 마리가 저리 불신할 정도면 리나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 확실하다. 물론 둘 사이에


오해가 있을 수도 있으니 훗날 입장을 들어보는 게 좋을 듯했다.

"그런데 레오르트 님도 있는거야? 아이작이랑 아이작 누나를 불렀을 때 레오르트 님도 있었다며."


"...오라버니는 현재 긴급 회의 때문에 황궁으로 돌아갔어. 아마 지금쯤 많이 혼나고 있을거야."
"황제 폐하에게?"

마리의 질문에 리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걸 듣고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황태자를 불러 문책할 정도면 사안이 심각하긴 심각한 모양이다. 아마 나중에 레오르트도 나와
니콜에게 사과를 하지 않을까싶다.

'잠깐만. 그러고보니 니콜은 안 부르나?'

사과를 하려면 니콜까지 불러야 정상이다. 하지만 리나는 나만 따로 부른 상황이다. 그 점은 약간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앞장 서서 걸어가는 리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리나도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뒤로 돌아 나와 눈을 마주쳤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니? 시선이 다 느껴지네."
"저희 누나는 안 부르나 싶어서요."
"니콜 씨는 오라버니가 만날거야."

아무래도 레오르트가 황궁으로 돌아가서 그런 모양이다. 납득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과는 한다니 일단
넘어갈 수는 있다.

이후로 리나가 데려간 카페에 도착하고, 방음과 보안이 확실한 방까지 잡았다. 카페는 지난 번 세실리와
독대했을 때 왔던 곳과 같은 장소다.

하마터면 세실리와 거하게 사고를 칠 뻔했던 곳이라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내 옆에
마리가 앉아있고 맞은편에는 리나가 앉아있다는 걸까.

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직원이 문을 열었다. 주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미리


음료를 준비한 모습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제가 부르기 전까지 찾아오지 마세요. 알겠죠?"


"알겠습니다."

보아하니 미리 예약을 한 듯한 모습이다. 리나는 내가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걸 미리 예상했던 모양이다.

물론 거절했더라도 리나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자그마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녀인데
일개 카페 따위가 감히 이의를 낼 수는 없을테니.

나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바라보더가 리나의 얼굴을 바라봤다. 리나는 마셔도 된다는 듯이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마셔도 돼. 이상한 건 타지 않았으니까 괜한 오해는 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나는 왜 안 줘?"

내 옆에 앉은 마리가 투덜거렸다. 실제로 마리의 앞에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아마 리나는 나만 부를 생각이었을테니 마리의 것은 미리 예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이작만 부를 계획이었거든. 네가 멋대로 난입한거고."


"아. 그러셔? 그래도 다행이네. 네가 허튼 짓을 하는 걸 막을 수 있으니까."
"마리.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영악하지 않아. 그때는 정말 어쩔 수 없던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너는 그러지 말았어야지. 그때..."

트라우마라도 자극되었는지 마리의 감정이 점점 고양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마리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질 기미가 보이자 그녀의 손을 말없이 잡아줬다.

마리는 내가 손을 잡아주자 몸을 크게 흠칫 떨더니 나를 바라봤다. 뒤이어 내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화가


가라앉았는지 콧김을 길게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

"...그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일단 알겠어."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아이작."
"네. 리나님."

나는 리나의 부름에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대답했다. 리나는 긴장 때문에 굳어진 얼굴로 나를
마주하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름에 잠겨있는 그녀의 모습이 썩 불쌍했지만 미안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이 잘못한 건
맞으니까.

이어서 리나는 내 얼굴과 똑바로 마주하더니 이윽고 결의를 다진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며 곧 큰 게


오겠구나 싶어 잠자코 기다렸다.

"...일단 이것부터 말할게. 우리 오라버니는 네 아버지, 그러니까 호크 경이 제논 일대기의 저자로


추측하고 있는 중이지. 하지만 나는 달라. 호크 경은 단순히 본인의 경험담을 알려주고, 진짜 작가는
너라고 생각하고 있어. 맞아?"
"네."
"역시... 그렇구나."

부정할 생각은 티클만큼도 없었기에 담담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리나는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연이어 말을 걸었다.

"그러면... 제논 일대기를 휴재한 것도 우리 때문이야?"


"... ..."
"고의가 아니었다는 변명은 하지 않을게. 나도 내 존재 자체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큰 압박이 될 수
있다는 건 분명히 알고 있거든. 그 상황 속에서 너에게 큰 압박이 되었겠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리나가 본론을 꺼내기 전까지는 입을 꾹 다물 생각이다.

"그래서 말인데..."

잠깐 말을 흐리던 그녀는 내 눈치를 보다가 자신감을 잃은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우리 때문에... 휴재를 결정한 거야?"


"... ..."
"정말로 우리가 너를 압박한 탓에 심적으로 괴로웠는지 묻고 싶어."

애처롭게도 들릴법한 그녀의 물음에 속으로 골똘히 생각했다. 아까 전에도 말했지만 휴재를 결정한 이유는
학업과 재충전을 위해서다.

하지만 리나와 레오르트가 압박을 가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겠지. 근본적인 원인이 이
둘에게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함이 감도는 리나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네요."
"... ..."

애매한 내 대답에 리나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 해 입술을 앙 다물었다. 보아하니 스스로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 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나는 입술을 앙 다문 리나에 의외라고 생각하다가 뒷목을 매만졌다. 지금은 내 마음을 진솔하게 꺼내야 할
듯했다.

"제가 휴재를 결정하게 된 이유는 아카데미 생활과 재충전, 그러니까 설정 정립을 위해서에요.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주위에서 보내는 압박감이 컸죠. 만약 두 분께서 부르지 않았더라면 휴재를 안 했을
거예요."
"... ..."
"미리 말하는데 저는 휴재를 번복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이미 한 번 결정을 내린 건 철회하지
않는 성격이거든요."

내가 딱 잘라 말하자 리나가 더욱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지금 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테이블 밑으로 감춘 두 손도 불안감에 꼼지락거리고 있지 않을까.

"...알았어."

한동안 고민하던 리나는 결의를 다진 표정을 짓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 옆에 앉은 마리는
신경쓰지도 않는 모습이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리나가 고개를 천천히 숙이며 나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황금을 실로 짠 듯한 머리카락이 서서히
내려앉으며 테이블 위에 살포시 얹어졌다.

나는 그녀의 사과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턱을 서서히 젖혀올렸다. 예상은 했다지만 자그마치 황제의
딸인 황녀가, 나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있다.

세실리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처럼, 가슴 속에서 이상한 감정이 다시 한 번 꾸물꾸물 기어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저희 때문에 작가님이 심적으로 괴로우셨다면, 다시 한 번 사죄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
"휴재를 번복해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현 사태를 보면 아시다시피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진압이 어려울 정도로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리나가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꺼낸 부탁을 듣고 한 가지 깨달을 수 있었다.

'...유명세라는 게 참 무섭구나."

정말로 내가 전세계 끼치는 영향력이 막강한 수준을 한참 웃돈 수준이라고.

'휴재도 함부로 못 하겠네.'

앞으로 휴재도 마음대로 못 할 것 같다고 말이다.

< 68 화 >

내가 새삼스레 나의 위상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에도 리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정면을


바라보니 황금색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듯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내 입이 열리기 전까지 고개를 들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비록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긴장하고 있지 않을까.

우선 리나의 사과는 받아줄 생각이다. 제국의 황녀가 고개까지 숙이며 사과했는데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과를 받지 않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 꾸물꾸물 기어오르는 이 감정이 그대로 표출될 것 같다.


여태까지 이 감정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 했지만, 리나가 사과함으로서 눈치챌 수 있었다.

권력(權力)

이 세상에 환생하면서 그토록 혐오하던 점이 부당한 권력 구조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내 가슴


속에서 꾸물꾸물 올라오는 중인 이 감정은 권력욕이었다.
전생에서는 그저 글 쓰는 걸 좋아하던 작가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하물며 마족의 공주와 제국의 황녀가 저자세를 취하며 나를 우대하고 있다.

과연 누가 이 욕심에 휘둘리지 않을까. 단언컨데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 본래 권력을 싫어하던 사람도
한 번 맛보게 되면 헤어나올 수 없는 힘이 권력이다.

그러니 여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내딛는다면, 그대로 권력에게 잡아먹히겠지. 하지만 권력은 언제나
사람을 파멸로 이끌게 되는 법이다.

'권력보다는...'

다른 것을 원하고 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내 대답을 기다리는 중인 리나에게 말했다.

"고개를 드세요. 리나 님."


"... ..."

내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자 리나는 아래로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려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사이 온갖 번민을 거쳤는지 아름다웠던 미모가 약간이나마 퇴색될 정도로 표정이 매우 어두웠다.

나는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 뒷목을 매만지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리나 님도 본인의 잘못을 알고 계시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은 없지만... 약간 늦은 감이


있어요."
"... ..."
"만약 사과를 하고 싶으셨다면 지금이 아니라, 저와 누나를 불렀을 때 사과하셨어야 했어요. 그랬다면
리나님의 사과가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게 느껴졌을 겁니다. 정 아니라면 제논 일대기 10 권이
발매되자마자 사과하시거나. 사태가 다 터진 뒤에야 사과하시면 아무리 저라도 좋게 볼 수는 없어요."

조곤조곤한 내 말에 리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내가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해하는 모양이다.

나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두 손을 맞잡으며 약간 고민의 시간을 거쳤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으니.

그렇게 약 1 분가량 정도가 흘렀을까. 나는 커피잔에 담겨있는 커피에 내 얼굴이 투영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도 사태가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저는 단지 학업을 위해


휴재를 선언했을 뿐이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의 말에서 보셨다시피 저는 제논 일대기를 단순히
취미로 쓰고 있었어요. 어떤 목적이나 사상을 가진 게 아니라."

이건 마리에게도 했던 말이다. 슬쩍 마리를 쳐다보니 그녀는 나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다.

그 얼굴에 하마터면 손이 갈 뻔했지만 분위기상 가까스로 억눌렀다. 싱숭생숭한 이 상황 속에서도


마리에게 손이 갈 뻔하다니 나도 참 중증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리나님과 레오르트님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에 휴재를 결정한 거예요. 저는 제
가족을 정말로 사랑하거든요. 만약 그때 저희 누나가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아예 펜을 놓았을 수도
있었어요."
"아..."

나의 진솔한 이야기에 리나의 반응은 사뭇 볼만했다.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인데 핏기가 가신 탓에


새파랗게 변해버렸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의 잘못과 욕심 탓에 지금보다 더한 사태가 발생할


뻔했으니까.

나는 입술까지 파르르 떠는 그녀를 보면서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리나의 입장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녀는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높은 위치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선민사상 또한 자연스레 깔려있을 것이다.

자신은 만인이 우러러 보는 황제의 딸이며, 그만큼 행동할 수 있는 범위가 남들보다 훨씬 넓다고. 그러니
제논 일대기의 작가에게 압박을 가해도 된다고.

나는 전생의 기억이 있기에 권위와 동떨어진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지, 리나는 아니다. 리나는 옛날부터
교육을 그렇게 받았을테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크다.

"음... 말이 좀 길어졌는데 저는 일단 사과를 받아줄 거예요. 리나님이 직접 사과하시는 걸 보면 사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이야기고, 저에게도 좋은 건 없으니까요. 특히 여론을 보니까 미네르바 제국을 향한
비난이 많더라고요. 맞죠?"
"맞아요. 그리고..."
"그 전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어쩌면 부탁일지도 모르겠네요."

리나가 미처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내가 싹뚝 잘라버렸다. 무례하다 못해 개념을 밥 말아먹은 행동이겠지만


주도권은 아직 나에게 있다.

리나도 그 점에 대해서 알고 있어서 아무런 말조차 못 한 채 입을 다물었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어두운 표정을 보면 일단 참는 모습이다.

"마리에게도 말했지만 저는 제논 일대기를 그저 취미로 쓰고 있어요. 아버지에게 경험담을 듣고, 그


경험담을 토대로 제가 원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는거죠. 아실지 모르겠지만 취미가 일이 되는 순간 정말로
하기 싫어져요. 그러니까 부디 간섭만큼은 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지난 번처럼 사람 마음대로 불러놓고
압박을 한 것처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나는 리나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숙이려 하자 급히 멈춰 세웠다. 황녀나 되는 사람이 두 번


씩이나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다. 내가 불편하기도 하고.

"두 번씩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한 번이면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말도 그냥 놓으세요. 그리고 제가 하고싶은 제안이 뭐냐면..."

내가 말을 흐리면서 눈치를 보자 리나가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앉은 마리는 과연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된다는 얼굴이다.

나는 정말로 이런 제안을 해도 될지 몰라 살짝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은 계급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에 따른 확고한 권위가 있다.

그러니 내가 앞으로 꺼낼 이 제안은 리나의 권위를 해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마음 속의 욕망이


작게 속삭였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는 것이 힘들다면, 반 정도만 내딛으면 되지 않냐고. 그것도 아니면 내딛자마자
바로 떼면 되지 않냐고.

그래서 리나에게 제안했다.


"제가 말을 놓을 수 있게 해주세요."
"...네?"

나는 리나가 이해하지 못 했다는 표정을 짓자 다시 한 번 더 알려줬다.

"제가 부를 때 리나님이 아니라, 리나라고 부르게 해주세요."

권력이 아니라 평등.

내 성격이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누군가를 하대하는 것보다 차라리 동등한 입장으로 대하는
것이 편하다. 반대로 누군가 나를 권력으로 대놓고 찍어누르는 걸 매우 싫어한다.

조별과제 당시의 아이라와 달리 리나는 대놓고 누르지 않아서 참을만했지만 상황이 급격히 반전되었다.

사태가 발발하자 그녀 쪽에서 먼저 잘못 인지했으며 고개까지 숙이는 입장이다. 엄연히 내가 갑이


되었다는 소리다.

허나 나는 불편한 관계가 싫다. 마리처럼 서로가 서로를 편하게 대하는 편이 나에게 훨씬 좋다.

누군가는 왜 그런 짓을 하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데, 사실 내가 꺼낸 제안도 상당히 위험한 것이다.


리나의 권위를 해칠 수도 있을 뿐더러 그녀가 기분 나빠할 수도 있었으니.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었다지만 그녀가 앙심을 품는다면 훗날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말을 놓는


걸로 타협을 본 것이다.

"... ..."

예상 밖의 제안이라서 그럴까. 리나는 내 제안을 듣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다. 그러면서 내 옆에


앉아있는 마리와 시선을 마주쳤다.

나 또한 자연스레 마리 쪽으로 향했는데, 그녀는 시큰둥한 얼굴이다. 왠지 모르지만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내 제안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그래도 불평을 하지 않는 걸 보니 나를 존중해주는 건


확실했다.

"...그것 뿐이에요?"

잠깐의 침묵 이후로 리나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나에게 물었다. 정말이냐는 표정을 보아 쉬이 납득이
가질 않는 듯했다.

이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했다. 아, 물론 여기서 한 마디 꺼내는 건 잊지 않았다.

"그리고 리나님도 존댓말을 하지 말고 말 놓으세요. 불편하니까요."


"그... 알겠어. 정말 그거 하나 뿐이야?"
"네."
"왜? 나와 말을 놓는 것이 너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거 참 말이 많으시네.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뉘앙스로 말하는 리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포커 페이스가 와르르 무너진 채 해답을 요구하는 얼굴이다. 이에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득이야 많죠. 제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 ..."
"다시 말하지만 저는 제논 일대기를 특정 목적을 두고 쓰는 게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취미에 불과하죠.
그러니 원하는 것도 딱히 없고 그저 독자들이 즐거워하면 그만이에요."

내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것일까.

"...이해할 수 없어."

리나는 어딘가 황망해진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

"그래서 받아줄 거예요, 말 거예요?"

그 날, 나는 황녀와 평등한 입장이 되었다.

"흥."

내 귀여운 여자친구는 불만인 것 같지만.

< 69 화 >

권력(權力)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무형의 힘이며 '사람'에게 있어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힘'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역사적으로도 언제나 힘을 갖고 있는 쪽이 권력도


강했으며, 반대로 힘이 약한 쪽은 고개를 숙이거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권력을 얻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주 간단한 방법은 상대방보다 힘이 강하면 된다.

힘이 강하다면 상대방 쪽에서 아무리 덤벼도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역으로 당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강한
자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자의던 타의던 따르게 되기 마련이다.

미네르바 제국의 1 황녀, 리나도 그런 케이스다. 그녀는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권력이
막강한 편에 속했다.

감히 그 누가 최강대국의 공주를 건드릴 배짱이 있을까. 자살을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없을거라 단언할 수 있다.

"... ..."

리나는 모든 일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었다. 불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침실인데도 불구하고 황금빛 머리카락이 빛을 대신했다.

평소였다면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겠으나 오늘은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리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최근
사흘동안 발생했던 사건들을 상기했다.

제논 일대기 10 권에서 휴재 공지가 나온 이후, 미네르바 제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전국 각지에서 해명을
요구하는 시위가 빗발쳤으며 수습을 하기 위해 윗쪽 사람들이 발빠르게 움직였다.

사실 시위 자체는 미네르바 제국 뿐만 아니라 국가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으나 미네르바 제국 쪽이 더


심했다.

다른 나라들은 출판사가 미네르바 제국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국에게 책임을 돌렸으며, 평소 문화를
침탈하는 악명이 자자한 제국이었기에 비난은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어떻게든 진정시키기 위해서 리나가 나선 것이다. 정말로 아이작이 휴재를 한 이유가 자신과
레오르트 때문이라면, 사과를 해야만 사태를 무마시킬 수 있을테니까.

그 과정에서 아이작이 무슨 제안을 하던 간에 받아들일 심산이었다. 자그마치 제국의 황녀가 자존심을


모두 굽히면서까지 고개를 숙이는데 이상한 제안이 나와도 모두 받아들이려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단지 말을 놓자는, 리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제안을 내걸었다. 하다못해 엎드려 절을


하라는 제안이었다면 이해라도 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어.'

리나는 태어나면서 황녀에 걸맞는 권력과 권위를 갖고 태어났다. 10 대 초반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정치계에 입문했으며 또래 중에는 누구보다 정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권력의 맛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맛 본 사람은 없다. 거기다 한 번 권력을 맛 본 사람은 더


큰 권력을 가지기 위해 안달이다.

황궁에서 지낼 때도 그런 사람은 수도 없이 봐왔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떨어지는 콩고물을 얻기 위해


알랑방귀를 뀌는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은근슬쩍 권력을 깎아내리려 시도했다.

그런 사람들은 리나가 직접 처리했다. 옛날부터 어머니에게서 받았던 교육이 빛을 발휘한데다가 리나만의


뛰어난 관찰력으로 미리미리 감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장 환경 때문에 '가면'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마리와 큰 갈등을 빚게 되었다.

그때 마리도 다른 사람처럼 권력을 탐하기 위해 접근한 거라 착각했지만, 마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가
되기 위해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그녀의 기대를 배신했다.

'아이작 그 애는... 신기해.'

리나는 붉은 머리가 특징적인 소년, 아이작을 떠올렸다. 붉은 사자로 명성을 떨쳤던 호크의 아들이면서
제논 일대기의 작가라는, 아주 독특한 특징을 가진 소년을.

언듯 보면 무뚝뚝하거나 과묵해 보일 법한 표정이 인상적이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관찰력이 뛰어난


리나는 그가 다채로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아이작은 이상하리만큼 권력을 껄그러워하는 중이다. 지난 번에 모임에서도 자신의 곁에만 있다면
위치를 공고히 알릴 수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평범하게 모임을 즐기고 싶다며, 그 부분(정치)과는 얽히기 싫다며 단호하게 의사를
피력했다. 부담스럽기보다는 정말로 평범하게 모임을 즐기고 싶어했다.

'정말로 권력을 싫어하는 걸까?'

지난 번 아이작과 니콜을 따로 부른 이유도 공생 또는 협력을 위해서다. 탈세까지 들먹이면서 압박을 한


건 잘못이지만 그걸 빌미로 아이작 또한 무기를 쥔 셈이었으니.

비록 정체를 밝히지 않아도 아이작은 문화계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가졌고, 자신은 신분상으로
압도적인 권위를 가진 상태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룬다면 그야말로 무엇이던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작은 그러지 않았다. 권위를 갖고 있어도 권력만큼은 행사하기 싫었는지 자기가 계획한대로
휴재를 때려버렸다. 덕분에 리나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아이작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구나. 그에게 괜히 덤벼들었다간 오히려 자기자신이
큰일나겠구나.

작가의 말에서 휴재 공지를 알렸을 뿐인데 세계가 들썩거리 못해 광분했다. 리나는 권력이 아닌 권위로도
어떻게 하지 못할 대사건에 처음으로 당황했고, 그 다음으로 아이작이 꺼낸 본심에 두 번째로 당황했다.

'목적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글을 쓴다라...'

아이작은 제논 일대기를 그저 취미 생활로 집필한다고 스스로 말했다. 그건 분명히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한 권력과 권위를 가진 사람이 목적없이 그저 취미 생활로 제논


일대기를...

'...아냐. 그래서 그런 권위를 가질 수 있던 거겠지.'

리나는 피식 웃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이작을 이해하는 건 지금으로서는 힘들다.

애초에 권위의식과 동떨어진 마리조차 이해할 수 없는데 아이작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둘이 서로 좋아


죽어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하고 싶었다. 어째서 아이작이 권력을 껄그러워하는지. 그리고 자신과 말을
놓는다는 제안을 한 것인지.

스스로 뽐내지 않았음에도 전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사람. 리나는 아이작이라는 사람이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접근한 거지만 오늘로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아이작의 능력과 배경이
아니라 사람 자체에 대해 알아보자고.

'사람을 보고 다가가는 건 처음인데... 가능하려나?'

여태까지 리나가 누군가에게 다가간 경우는 그 사람의 능력이나 잠재력을 보기 위해서다. 첫 강의 당시


아이작의 발표 이후 선듯 다가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고.

그러나 사람 자체를 보면서 접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비록 옆에 마리가 떡하니 버티고 있지만,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어 접근해야한다.

어쩌면 마리와 사이가 가까워져서 그때 일을 용서받을지도 모르지. 리나는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를
떠올리자 우울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곧바로 다짐했다.

'아이작에게 접근할 때만큼은 권력을 내려놓자.'

권력을 싫어하니 자신도 내려놓아야하지 않을까. 하물며 말까지 놓았으니 서로 간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우선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중인 시위가 끝나야겠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이작은 황궁에서 대변인을 내세우면 여러모로 문제가 많을테니 자기가 직접 출판사에 편지를 부치겠다고
말했다. 중립을 원하는 아이작이었기에 시간은 걸리겠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잘 끝나겠지?'

리나는 부디 아이작이 잘 해결하기를 바라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아이작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미안하니까 나중에 선물이라도 하나 줘야겠다.'

*****

제논 일대기 10 권이 발매된지 어언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던 시위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날이 가면 갈수록 과격해졌다.

출판사 앞에 몰려든 인파가 더 늘어난 건 물론이고, 하루하루 찾아오는 귀족들이 어떻게 해달라며
애원하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이런 일은 비단 출판사 뿐만이 아니다. 대도시의 광장이라던지, 아니면 사람들이 자주 지나가는


길목이라던지 등등.

시위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팻말을 든 채 해명을 촉구하고 있다. 지도자들은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골머리를 앓았으나 제이로스 혁명 같은 사태가 다시 한 번 발발할까봐 선듯 나서질 못
하고 있다.

권력을 갖고 있다지만, 지금 함부로 사용하는 순간 깡그리 박살나버릴 수도 있다. 이탓에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 ..."

출판사 사장은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두 눈에는 초점이 사라져
있었으며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이 일품이다.

그동안 엄청 고생했는지 토실토실했던 볼살도 초췌해진 상태였다.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빨리 말하라고!]


[편지라도 보내주면 안 되냐?! 너희들이 작가님을 숨기고 있는거지! 어?! 말해!!]

사장의 귓가에 거친 항의 소리가 스멀스멀 흘러들어왔다. 출판사 입구 앞에서 진을 진 채 시위하고 있는


시위대의 목소리다.

시위대는 지치지도 않는지 보름동안 고래고래 소리까지 지르고 있다. 사장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만 이제는 그럴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위대가 아니라 그보다 더 꼬장이 심한 귀족들을 상대해야했으니. 다행히 그들도


일을 해야하는지라 당장은 물러갔다만 내일 또 상대해야할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사장은 진저리가 나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그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신문을 힐긋 바라봤다.

[시민들의 목소리. 과연 작가에게 닿을 것인가?]


[출판사와 지도자들은 묵묵부답. 침묵만이 옳은 길이 아니다.]
[정말로 제논에게 이상이 발생한 건 아닐까 걱정이 한가득... 직접 찾아뵙겠다며 나섰다가 몰매를
맞아...]
[제이로스 혁명 같은 사태는 막아야... 미네르바 제국도 본인은 모르는 일이라 애원.]

개개인이 권력과 대항하기는 힘들지만 하나로 뭉쳐서 결집한다면 아무리 제국이라도 두손두발 들 수밖에
없었다. 사장은 제논 일대기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제이로스 혁명 같은 사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것도 조만간일 것이다. 이때문에 곳곳에서 군대를
주둔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혁명이 발생한다면... 출판사는 끝장이다. 당장 바깥에 있는 시위대가 우르르 몰려들텐데
용병을 고용한다고한들 의미가 없다.

"아으으... 진짜..."

사장은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했다. 편지를 보낸지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정말로 이대로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자취를 감추는 건가 싶어 두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짐을 꾸리고 야간


도주를 하고 싶었으나 이때까지 쌓아올린 회사가 아까워서 그러기도 어렵다.

'참자. 조금만 참으면 복이 올 거야.'

사장은 루미너스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이 상황이 어서 빨리 종결되기를. 그래야만 자신이 살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간절한 기도가 정말로 루미너스에게 닿기라도 한 것일까.

벌컥!

"사장님! 작가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뭐, 뭐?!"

비서이자 신뢰하고 있는 직원, 매튜가 노크도 없이 문을 다급히 열어젖히며 희소식을 전달했다.

평소였다면 크게 혼냈겠지만 상황이 상황인데다 그가 전해준 소식은 마른 하늘에 소나기나 다름없었다.

이에 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매튜에게 외쳤다.

"저, 정말인가? 정말 제논이 맞아?"


"네! 심부름꾼이 전달했으니 분명 맞습니다!"
"어서 빨리 주게나!"

사장이 손을 뻗으며 재촉하자 매튜는 지체없이 그에게 전달했다. 뒤이어 사장은 편지 봉투를 대충
확인하고 서둘러 내용물부터 꺼냈다.

그리고 편지에 써져있는 내용을 확인했다. 필체를 보아하니 진짜로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맞다.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제논 일대기의 저자, 제논이라고 합니다. 요즘 세상이 많이


시끄럽네요. 솔직히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좋았어!"

다 필요없다. 첫 문장 하나면 사태를 진정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 과연 시민들이 이 편지를 믿어줄까? 상황이 상황인만큼 거짓말이라 치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필체를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초고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아! 그리고 혹시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대비해서 작가님이 초고까지 보내주셨습니다! 1 권의


초고입니다!"
"...으흐흑!"

사장은 진심으로 감격했다.

< 70 화 >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시위는 아이작이 출판사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서 차차 식어가기 시작했다.

편지의 내용은 한 페이지를 꽉 채울 정도로 매우 길었지만, 대충 요약하자면 이런 식이었다.

[너무 시끄러워서 정말 불안하다. 이러다가 나까지 다치면 어쩌려고? 압박이나 협박 같은 건 받지


않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 그리고 나는 매우 건강하고 글을 취미로 쓰고 있으며 할 일이 많아서
잠깐 휴재하는 것 뿐이다. 그러니 괜한 오해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달라. 사랑해요. 독자 여러분들.]

한 페이지를 빼곡하게 채운 진심어린 부탁에 시위대도 물러가기는... 무슨 처음에는 거짓말 치지 말라고


반박했다.

그 편지가 정말로 아이작이 쓴 게 맞냐고, 화산이 폭발할 것 같으니까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하기 위해
거짓 편지를 쓴 게 아니냐고 외쳤다.

확실히 맞는 말이라 출판사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바로 제논 일대기 1 권의 원본이다.

문화계에 큰 족적을 남기기 시작한 걸작이며 현재 만인의 사랑을 받는 제논 일대기의 시작.

심지어 출판사에서 초고를 받아 쓴 필사본이 아니라, 아이작이 직접 펜으로 쓴 것이다. 당연하게도


대중은 깜짝 놀라다 못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믿으라는 거냐!"


"필사가 아니라 진짜 원본이라는 증거를 대!"
"저게 진짜라는 걸 증명해라!"

물론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시위대 입장에서는 편지도 그렇고 출판사가 초고라 발표했던 원고지가
진짜라는 걸 쉽게 믿지 못 할 수밖에 없다.

시위를 나온 사람들은 남녀노소 두루 섞여있었지만 그중 세상 경험 많은 사람도 상당히 속해있다. 다시


말해 윗쪽 세상이 얼마나 더럽고 치졸한 곳인지 잘 안다는 의미다.

이런 이유 탓에 출판사가 초고라고 애처롭게 말해도 신뢰를 받지 못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반전됐다.

"지, 진짜 초고인 거 같은데? 필사본이라 아니라 원본이 맞아."


"그거 진짜입니까?"
"무슨 이유에서죠? 원고지가 낡아서 그런가?"
"아니. 원고지가 낡은 건 이유조차 안 돼. 낡은 원고지에 썼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잉크는 아니야.
잉크의 색이 변색될 정도면 꽤 오래 전에 썼다는 의미지. 무엇보다 여기 무수히 찍혀있는 점이 보이나?
이건 고민의 흔적이라네. 작가들은 첫 도입부 부분에 많은 고민을 거치는 법이지."

소식을 듣고 온 수집가 겸 전문가가 초고를 확인함으로서 증명이 되었다.

평범한 수집가라면 모를까, 미네르바 제국 내에서도 알아주는 수집가들 중 한 명이었기에 신뢰도가 대폭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을 사용한 흔적 없습니까? 혹시 모르잖아요."


"이보게. 마법은 무궁무진한 능력이지만 시간만큼은 어쩌할 도리가 없지. 하지만 이 원고지에는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네. 그러니 이건 진품이라 믿을 수밖에 없어."
"저, 정말로...!"

아예 못까지 박는 증거가 나오자 출판사 대변인은 당장이라도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이었다. 허나


아직 사태가 완전히 종결된 것이 아니니 그 감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뒤이어 대변인은 수집가에게서 원본을 재빨리 가로챈 뒤, 자신에게 집중된 군중들을 향해 외쳤다.
출판사에서 목소리가 큰 사람을 따로 뽑았던거라 쩌렁쩌렁 울리는 듯한 크기였다.

"이제 증명은 충분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여기 이 원본과 편지의 필체는 완벽히 일치하는 바! 그러니 이
편지에 담긴 내용은 제논 작가님이 여러분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이런데도 시위를 하고 싶으십니까!
만에 하나, 이 시위가 더욱 격해져서 몸을 숨기고 계시는 작가님에게 피해가 가신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가 더이상 뭐라 할 말이 있겠어?"
"작가님이 그러시다면 가야겠지."
"돌아가자. 2 년은 길지만 어쩔 수 없겠어? 작가님이 쉬고 싶으시다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에잉... 2 년동안 일만 해야겠네."

그리하여 길고 길었던 시위대는 점차 해산되었다. 해산되는 와중에도 아쉬운 눈길로 출판사를 바라보는
이들이 간혹 있긴 했지만 그들도 머지 않아 발걸음을 돌렸다.

다만 끝까지 안 가고 버티는 이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초고에 시선이 향하는 중이다.

'제논 일대기 1 권의 초고...'


'저거 얼마나 할까?'
'저것만 있으면...'

자그마치 국보로 지정해야할 정도로 가치가 높은 물건이 눈 앞에 있는데 욕심이 들기 마련. 직원도 무언가
이상해진 분위기에 소름이 돋아 서둘러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복도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하는 사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장은 포고를 한 직원이 초고를 들고 돌아오자 서둘러 다급히 그에게 물었다.

"어, 어떻게 됐나? 시위대는? 저 놈들은 다 물러갔나?"


"물론이죠. 남아있는 사람들도 곧 있으면 돌아갈 겁니다."
"후우... 한시름 놓았군. 잘했네. 정말 잘했어."

직원의 대답에 사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수고했다는 듯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직원은 겉으로 웃음을 띄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은근 기대하고 있었다. 평소 출판사 사장은 실적이 좋을 때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지급하는 편이었으니.

직장 생활이 힘들어도 꾹 인내하고 버틸 수 있던 이유가 바로 사장의 후한 인심 덕분이다.

"정말 고생 많았어. 포상금을 두둑히 지급할테니 지금은 퇴근부터 해."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다 고맙지. 허허허."

사장이 너털웃음을 흘리자 직원도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보통 직장 생활은 상사 때문에 꼬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일개 출판사가 덩치를 부풀릴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제논 일대기가 맞지만, 쏟아져나오는 업무를


헤쳐나올 수 있던 이유가 바로 사장 덕분이다.

문제는 그래봤자 상사라는 거지만. 그래도 직원은 두둑한 포상금과 더불어 퇴근할 생각에 싱글벙글했다.

"아. 그리고 초고는 어서 이리 주게나. 빨리 후딱 처리해야할테니."


"알겠습니다. 이건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십니까?"
"다 생각이 있네. 어서 주게."

직원은 사장의 재촉에 아무런 의심없이 그에게 초고를 전달했다. 사장은 제논 일대기의 초고가 맞는지
여러번 확인하고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폭풍이 잦아들 기미가 보인다. 사장 입장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귀족들을
상대할 일이 더이상 없을 거라는 의미다.

최근들어 풍성했던 머리카락이 스트레스로 다 빠져나갔는데 천만다행이었다. 사장은 직원에게 어서 가라고


일러둔 후에 사장실로 돌아갔다.

"오셨습니까."

사장실로 돌아가니 사장이 신뢰하는 비서, 매튜가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와서 대기하라고 일러뒀기에
여기 있는 것이다.

이에 사장은 그의 얼굴을 한 번 마주보고는 책상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푹신한 가죽 느낌이 등을 타고


전해졌다.

"후우..."
"일은 원만하게 끝났습니까?"
"그래. 이제 더이상 저 시위대 놈들이 소리지르는 일도, 귀족년놈들이 찾아올 일도 없을거야."
"다행입니다."
"다행이고 말고. 하마터면 우리 소중한 회사가 불탈 뻔했는데."

그냥 불타버리지. 매튜는 반쯤 진심으로 아까워했다.

직장인의 꿈 중 하나가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불타는 일이다. 하물며 매튜는 사장의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라 더더욱 그런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마음 속으로만 그 생각을 하고 있지, 입 밖으로 꺼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좆 같은 직장 생활을


유지하는 이유가 바로 월급을 많이 주기 때문이다.

"아. 그러고보니 오늘 당직을 서는 직원이 누구였지?"


"엘리스입니다."
"그럼 오늘은 자네도 같이 서."
"...네?"

매튜는 눈을 깜빡거렸다. 갑작스러운 사장의 명령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사장은 초고를 매튜에게 보여주면서 제대로 된 설명을 꺼내기 시작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심부름꾼이 올 때까지 이 초고를 지켜야한다네. 늦어도 사흘 안에 온다고 했으니


그때까지 잘 지켜야해. 이게 없어지면 우리 회사는 끝장이야."
끝장났으면 좋겠다. 그래도 오늘은 목요일이니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매튜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속마음도 모르는지 사장은 진중한 얼굴로 초고를 들여다봤다. 오늘부로 이 초고가 진품이라는
소식이 각지에 퍼져나갈테니 서둘러 처리하는 게 급선무다.

다른 물건도 아니고 무려 제논 일대기 1 권의 초고다.

국보로 지정되어야하는 물품인지라 출판사 따위로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다. 어쩌면 당장 내일 소식을 들은


고위 귀족이 찾아와 상상조차 못할 거금을 대가로 초고를 넘겨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에도 말했다시피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작가는
일종의 증거품으로 초고를 제시한거지 소유권을 완전히 넘기지 않았다.

다시 말해 초고를 마음대로 하는 순간 인생이 끝난다. 사장은 초고를 소중히 쓸어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건 금고에 넣어야겠군.'

사장실에 있는 금고의 비밀번호는 사장만 알고 있다. 어차피 오늘 당직을 서는 매튜는 사장실에 위치한
금고만 지킬 예정이다.

도난당할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매튜는 그런 짓을 할 깜냥이 되지 못 할 뿐더러 비밀번호조차 모른다.

사장은 그나마 안심이 되는 기분에 콧김을 길게 내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누이 당부하지만 금고는 반드시 지켜야하네. 이게 사라지면 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 출판사 모가지가
날라간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알고 있습니다. 근데 어째서 회사 금고에 넣는 겁니까? 사장님이 직접 관리하지 않고."
"우리 집에는 마땅히 넣을 곳이 없어서 그렇다네. 무엇보다 회사 금고만큼 안전한 것도 없지. 저걸 봐."

사장이 한 쪽을 가리키며 매튜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벽과 일체로 이루어진 금고의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본래는 사장이 직접 관리하는 장부를 관리하는 곳이다. 겸사겸사 탈세와 뇌물을 통해 얻은 현금을
보관하는 곳이기도하고.

그러니 보안성 하나만큼은 믿을 수 있다. 비밀번호도 비밀번호지만 저런 걸 통째로 뜯어낼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매튜는 금고의 모습을 보자마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거라면 확실히 믿을 수 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희 둘만 있어도 될까요? 만약에 대비해서 모험가를 고용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걱정말게. 어차피 오늘 실행할 간 큰 놈은 없을테니까. 적어도 소식이 퍼지려면 최소 사흘은 있어야겠지.
그때라면 심부름꾼에게 초고를 넘겨줬을 시간이고."
"그렇군요."
"뭐, 이틀부터는 자네의 말대로 모험가를 고용하는 게 좋겠지. 오늘은 엘리스에게도 졸지 않도록
강조하게나."

그거야 문제없다. 매튜는 흔쾌히 사장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사장은 상황은 일단락된 듯하자 의자에 등을 기대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최근 며칠동안 한숨도 자지 못
하고 회사에서만 생활했더니 진이 다 빠져버렸다.
오늘만큼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이제 끝이구나...'

그래. 오늘이 정말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사장님! 큰일났습니다!"
"뭐? 갑자기 또 왜? 귀족이라도 찾아왔나?"
"아닙니다! 오늘 출근하니 매튜와 엘리스가 쓰러져 있고 무엇보다...!"

-금고를 도난 당했습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사장은 직원의 외침에 대략 5 초동안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가 싶어서.

그러나 이내 상황을 완전히 받아들인 뒤에는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허겁지겁 사장실로 달려갔다.
사장실로 다급히 뛰어가는 도중에 당직을 서던 매튜와 한 직원이 실려나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상황이 급박하다보니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사장은
자신의 사무실로 달려가는 중에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거쳤다.

'금고를 도난당했다고? 비밀번호를 뚫은 게 아니라?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지?'

초고를 넣은 금고는 들고 가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무거운 편이며 애시당초 벽과 일체형이다.

하물며 비싼값을 치루고 마법 처리까지 한 금고여서 파괴하는 것조차 어렵다. 설사 파괴를 했더라도
소음이 커서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다.

그러할진데...

"...허."

털썩-

사장은 벽을 통째로 뜯어낸 듯한 금고의 모습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난 끝났다.'

또다른 폭풍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 71 화 >

제논 일대기 1 권의 초고가 도난당했다. 이 소식 하나만으로도 세상이 발칵 뒤집어지기에는 충분했다.

출판사가 쓴 필사본이나 초판이면 그려러니 하고 넘어가겠다만, 무려 초고다. 아이작이 직접 손으로 써서


출판사로 보낸 원고지.

문화계에 큰 자취를 남기는 걸 넘어 역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문물인데 도난당했다는 건 매우 심각한


사안일 수밖에 없다.

[충격! 제논 일대기 1 권의 도난! 누구의 소행인가?]


[금고를 턴 게 아니라 금고 입구 자체를 뜯어버려... 평범한 조직의 소행은 절대 아니야.]
[사장은 현재 충격으로 의식을 잃은 상태. 초고를 소홀히 관리한 점에서 책임을 묻겠지만 참작의 여지는
충분하다.]
[누가 금고 채로 털어갈 줄 알았나?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가져간 것인가?]

소식은 불과 사흘도 되지 않아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라 신문사들도 특보라며 신문을


공장마냥 찍어냈다.

이로인해 다시 한 번 사람들이 모여 출판사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해산되었다.

심각성을 감지한 높으신 분들, 그것도 황궁에서 파견나온 조사단이 직접 금고를 조사하기 시작했으니까.
사람들은 괜히 불똥이 튈까봐 의심을 품으면서도 각자 할 일을 하러 돌아갔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공통된 걱정을 안고 있었다. 바로 아이작이 분노해서 혹여 휴재를 무기한으로 하지


않을까라는 걱정.

지금으로서는 부디 윗쪽에서 조사를 잘 해줄 수밖에 없었다.

[검은 마나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고로 마족의 소행은 절대 아닐 것.]


[떼어내기 쉽게 일부분은 마나로 커팅을 하고, 그 다음에는 강제로 뜯어낸 흔적이 보인다. 이를보아
범인은 마나를 능숙하게 다루는 강자일 것. 작업 시간이 불과 30 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으로 예상된다.]
[조사 결과 인간은 아닌 것으로 판단. 마법 처리가 된 금고를 마나로 벨 수 있는 인간은 극소수.
그러므로 태생적으로 신체 능력이 뛰어난 수인이거나 엘프일 가능성이 높다.]
[드워프 또한 아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금고를 통째로 뜯어내지 않고 금고 비밀번호를 알아냈을 것.]

조사 결과, 범인은 수인과 엘프로 점점 좁혀졌다.

인간이 저지른 일이라기에는 작업 시간이 너무 짧은데다가 효율적이었고, 드워프는 월등한 손재주로


금고를 털어버리지 이처럼 문짝을 떼어내지는 않는다.

마족도 특유의 검은 마나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정보가 나와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므로 남은 건 수인과 엘프였다. 이들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신체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더군다나 엘프는 마법으로는 따라올 종족이 없으니 더욱 무게가 실렸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범인은 무슨 목적으로 제논 일대기 초고본을 가져간 것일까? 초고를 가져간다고 해서 어떤 이득을 볼 수


있는걸까?

전문가들이 이 부분에서 막힌 탓에 진척이 되지 않았다. 당장은 초고의 행방을 찾을 수밖에 없다.

자그마치 국보로 지정될만큼 가치가 어마어마한 초고이니 암시장에 팔리거나 어두운 루트를 통해 경매로
흘러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황궁도 이 점을 알고 있기에 샅샅이 파악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제논의 마음. 초고가 사라졌으면 분명 심기가 불편할 터.]


[이러다 휴재가 아닌 절필을 선언해버리면? 모두가 슬퍼하다 못해 다시 한 번 분노할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아이작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기가 직접 손으로 쓴 초고가 사라졌으니


사람들은 불안해했다.

이러한 이유로 조사에 더욱 박차를 가했지만 안타깝게도 증거를 거의 남기지 않아서 실마리조차 잡기
어려웠다.

[알븐하임의 거센 반발. 우리는 그런 저급한 짓은 하지 않는다.]


[애니머스도 마찬가지로 반발해... 우리가 왜 인간이 주인공인 소설을 읽겠느냐? 당치도 않는 짓.]

이뿐만이 아니라 엘프의 나라, 알븐하임과 수인의 나라, 애니머스에서 반발했다. 그것도 개인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말이다.

두 나라 모두 그럴듯한 이유로 반박했던지라 사건은 더더욱 오리무중을 빠져들었다. 자연히 제논 일대기


애독자들의 마음은 시시각각 불안해졌다.

이러다가 아이작이 정말로 절필을 선언해버리기라도 한다면 어떡할까 싶어서. 사람들은 아이작이 공식적인
입장을 취하기 전까지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이렇듯 폭풍이 물러가도 또다른 폭풍이 몰아쳐 세상이 다시 한 번 뒤숭숭해져 있을 때, 현재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인 아이작은 어떨까?

현 사태에 분노하고 있을까, 슬퍼하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무던하게 넘기고 있을까?

그의 편지는 사건이 터지고나서 대략 일주일 후, 출판사에 도착했다.

늘 그렇듯이 장문의 편지였지만 대략 요약하자면 이렇다.

[부디 찾기만 해주세요. 제 보물입니다.]

다시 한 번 커다란 폭탄이 떨어졌다.

******

초고를 출판사에게 맡긴지 하루만에 도난당했다는 소식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난리가 날 것은 예상하고 있었는데 하루만에 도난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문을 보니 금고를 털어간 방식도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금고 비밀번호를 안 것도 아니고 아예


문짝을 뜯어버렸다고 하던가. 분노보다는 황당함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초고를 갖고 갔는지 모르겠으나,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짜증나."

짜증이 머리 끝까지 오르기 직전이라는 것을. 평소 무뚝뚝하다는 평가를 받는만큼 나는 감정을 밖으로 잘
표출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짓씹듯이 내 심정을 입 밖으로 꺼낸다는 건 그만큼 내가 화가 났다는 의미다. 솔직히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도 나와 비슷한 처지에 속해있으면 그 누구라도 화가 날 것이다.

제논 일대기는 컴퓨터에 저장되는 웹소설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손으로 쓴 소설이다. 당연하게도


애착이 갈 수밖에 없다.

또한 소중한 물건을 남에게 믿고 맡겼는데 도둑맞았다고 하면 누구라도 화가 날 것이다. 그래도


출판사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운 것이, 그들도 금고의 문짝을 떼어낼 줄은 상상조차 못 했을거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다. 어떤 미친 놈이 금고 문짝을 떼어내면서까지 내 초고를 훔쳐갔다 싶어서.

초고의 가치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높으니 어딘가에 팔아먹을 생각인 걸까.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적다.

조사된 것만 따져도 초고를 훔쳐간 범인은 일개 도둑 수준이 아니다. 어쩌면 높으신 분들도 건드리기 힘든
세력에서 꾸민 일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왜?'

범인은 무슨 목적으로 초고를 가져간 것일까. 들킨다면 국가 차원에서 비난 성명을 날리는 건 물론이고
여러모로 후유증이 심각할텐데.

나는 점점 알 수 없는 범인의 목적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환생하고나서 처음으로 쓴 원고인데 허무하게


사라지니 기분이 우울해졌다.

"저... 아이작? 괜찮아?"


"... ..."

내가 착잡함에 한숨만 내쉬고 있을 때 옆에 앉은 마리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진심어린 눈빛으로 걱정해주는 마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마리."
"응. 아이작."
"잠깐 이리로 와."

비록 강의실이었으나 아직 사람은 많이 없다. 더군다나 나와 마리의 사이를 모르는 사람도 없고.

마리는 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부르자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내 말에 고분고분 따라줬다.


뒤이어 내가 두 팔을 펼치자 마리도 의도를 눈치를 챘는지 베시시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포옥-

포옹은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해 가장 확실하면서도 간단한 방법이라고 하던가. 그녀와 포옹을 하자마자
꿀꿀했던 마음이 모두 씻겨져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나 마리와 포옹을 하게 되면 힐링이 된다. 나는 그녀를 껴안자마자 아이처럼 얼굴을 마구 비볐다.

이대로 쭉 있었으면 좋겠지만 주변에 보는 시선이 많으니 아쉬움을 뒤로 하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좀 괜찮아?"

포옹을 다 하고나서 마리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예약에도 없던 애정 행각에 조금 창피했던 건지


새하얀 뺨이 살짝 붉어져있었다.

이에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솔직히 키스까지 하고 싶었지만 강의실이라


가까스로 억눌렀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황궁에서 직접 발벗고 조사하고 있으니까 머지않아 범인을 밝혀낼 수 있을거야.
나도 도와주고 싶은데 황궁에서 직접 나선 이상 도와주기는 힘들거야."
"그냥 내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돼."
"우와... 빨리 안아줘."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마리가 팔을 활짝 벌리며 안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녀의 부탁을 흔쾌히 승낙하며
그녀와 다시 한 번 포옹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강의실에서만 두 번째로 서로 따뜻한 마음을 나누었다. 주위에서 수근거림이 느껴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약간 부끄럽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연인이라 광고하고 있네?"

이윽고 서로 몸이 떨어졌을 때 쯤, 뒷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시선을 옮기니 세실리가


턱을 괸 채 요염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듯 보기에는 잘 놀고 있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는 내 입장에서는 기묘함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부럽지? 부럽지? 부러워도 우리 아이작은 절대 안 넘겨줄 거야."

마리가 나를 강하게 잡아당긴 뒤 와락 껴안으며 세실리를 놀려댔다. 아마 그녀는 세실리가 부러움에 저런


질문을 한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에 세실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아무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가면서도 붉은빛이 감도는


눈동자는 여전히 나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그나저나 리나가 안 보이네.'

슬슬 강의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리나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초고 도난 사건


때문에 자체 공강을 했을 수도 있다.

하기야 시위가 진정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대사건이 벌어졌으니 그녀로서는 여러모로 바쁠


것이다. 학업에 집중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거고.

'어련히 잘 하겠지.'

아니. 잘해야지.

황궁에서도 무능함을 입증하기 싫다면 반드시 범인을 찾아야할 것이다. 거기다 리나의 입장에서는
파탄나기 직전이었던 나와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불철주야 고생해야할테고.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며칠마다 리나에게 상황을 묻는 것밖에 없다. 이 사건은 아버지도 해결할


수 없을테니 잠자코 기다려야지.

'그런데 진짜 어떤 미친놈이 초고를 가져간 거지?'

만약 찾는다면 범인의 얼굴을 한 번 쯤 보고 싶었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린 대가로 한 대 후려치게.

*****

"너 그 소식 들었어? 제논 일대기 초고가 도난당했다는 소식 말이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 초고가 발표됐지 않았어?"
"그렇지. 그런데 하루만에 도난당했다네?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금고 입구를 아예 뜯어버렸다더라."
"허. 미친놈일세. 난리도 아니겠구만."
"황궁에서 조사단을 직접 파견했다고 들었어.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지."

주점은 저녁이 된다면 항상 활기를 띄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발생했던 사건에 대해 떠들거나,


그게 아니라면 술을 진탕 마셔 인사불성이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리고 이러한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홀로 조용히 앉아있는 사람이 있었다. 로브를 뒤집어 써서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호리호리한 체형과 더불어 약간 드러난 얼굴은 선이 매우 고왔다.
이로서 여자라는 것을 얼추 예상할 수 있었으며 피부 또한 독특하게도 구릿빛이었다. 다른 사람과 달리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는 그녀는 맥주로 목을 축이면서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다행히 추적자는 없군.'

무슨 범죄라도 저지른 걸까. 그녀는 속으로 안심하면서 오른쪽 가슴 부분을 더듬거렸다.

오늘 다소 무리를 하면서까지 얻었던 '귀중품'이 고이 잠들어있다. 드워프가 직접 제작했는지 몰라도


마법 처리가 돼 있는데다 재질도 단단해서 작업하기 힘들었으나 그래봤자 자신에게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
했다.

비록 마지막에는 마나로 작업하기 힘들어서 무식하게 문짝을 뜯어냈지만. 그래도 결과가 좋으니 괜찮지
않은가.

'여왕님이 좋아하시겠지?'

그녀는 자신이 모시는 여왕의 미소를 볼 생각에 버릇적으로 길쭉한 귀를 만지작거렸다.

특이하게도 평범한 엘프와 달리 그녀의 귀는 반 정도 잘려있었다.

< 72 화 >

이 세상에 가장 완벽한 종족을 꼽자면, 그 누구라도 '엘프'를 꼽을 것이다.

아름답다는 표현조차 부족한 외모부터 시작해서 태생적으로 뛰어난 신체. 그리고 신의 축복을 받아 숨
쉬듯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 능력까지.

타종족보다 월등히 긴 수명을 통해 인원 한 명 한 명이 놀라운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전통'과 '


역사'를 다른 종족보다 중요시 여기다보니 머리에 든 지식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제아무리 완벽에 가까운 엘프라할지어도 여러 방면에서 큰 오점을 안고 있다. 전통과 역사를
중요시한다는 건, 바꿔 말해 변화를 싫어한다는 의미다.

더군다나 한 사람 한 사람이 500 년을 훌쩍 넘는 세월을 살다보니 본인만의 고집이 남들보다 강한 편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여태까지 이렇게 살아왔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 다른 종족도 아니고 엘프이다보니 자연스레
고착화된 사고 방식일 수밖에 없다.

['교만'에 가장 어울리는 종족.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교만에 가장 어울리는 능력을 갖고 있다.]


[자신을 신의 후손이라며 자화자찬하지만 결국 필멸자에 불과하다.]
[언젠가 그 오만함이 칼이 되어 본인들의 목을 찌를 것.]

이러한 이유들로 엘프는 다른 종족에게 그다지 좋은 평가는 못 받고 있다. 특히 이중에서 엘프에게 가장


박한 평가를 내리는 종족이 인간이고, 그리고 사이가 좋지 않은 종족도 인간이다.

많은 사람이 드워프가 엘프를 가장 싫어할 거라 생각하고 있겠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

드워프는 엘프를 말 많은 꼰대로 취급하는 중이며 엘프도 드워프를 시끄러운 종족이라 생각하고 있지,
적어도 '동급'이라 여기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다. 다른 종족도 인간을 특출난 장점이 없는 종족이라 보고 있다. 그런데 엘프는 유독
깔보는 경향이 강하다.
수인이 인간을 증오한다면 엘프는 인간을 원숭이 취급하고 있달까. 완벽에 가까운 엘프로서는 잘난 게
거의 없는 인간을 동급으로 여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하고 있다.

그러나 세간의 평가대로 오만함이 스스로를 옥죌 것이라고, '종족전쟁'이 터지고나서 엘프는 본인들이
틀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인간은 엘프를 절대 이해할 수 없고, 엘프 또한 인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 종족은


완벽하게 반대되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발전을 갈구하는 인간.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가졌기에 현실에 안주하는 엘프.
이처럼 평행선을 달리는 두 종족이 어떻게 같은 세상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

위의 평가처럼 종족전쟁 전쟁 당시 엘프는 막상 큰 위기가 터지자 내부적으로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고,


인간은 반대로 내부적으로 힘을 합쳐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물론 인간 측에서도 정치적으로 온갖 구설수가 오고 갔지만, 적어도 엘프처럼 자멸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실제로 엘프가 저지른 실책은 하나 하나 피해가 막심했다. 굳이 전력으로 상대할 필요가 없다며
방심하다가 전략적 요충지를 보기 좋게 점령당한 건 기본이다.

더불어 함정임을 눈치채도 본인들의 힘을 믿고 돌격하다가 큰 피해를 입는다던지, 굳이 싸워줄 이유가


없는데 상대가 인간이라고 맞받아친다던지 등등.

심지어 전쟁동안 혁혁한 전공을 쌓던 전사를 단지 '법률'에 위반되는 행위를 저질렀다며 감옥에
투옥시키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당연하게도 인간은 그 전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맹공을 펼쳤다.

덕분에 인간은 종전 당시에도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지만 엘프는 완전히 반대였다. 본인들이 평소
무시하던 인간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큰 혼란을 주기에 충분했다.

천만다행히도 그들 스스로도 잘못됨을 인지했다. 그리고 잘못을 인지했다면 바뀌는 건 당연히 행해져야
하는 일.

-낡은 법률은 이제 필요없다. 세상이 바뀌었다.


-신이 정해준 법률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법률을 만들어야한다.

종족전쟁 이후, 엘프가 가장 먼저 한 일을 바로 상층부를 모조리 뜯어고치는 일이었다. 세대 교체였다.

알븐하임은 '원로원'이라는 정치기관에서 각 민족마다 선출된 장로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고 나서는 방식이 변화했다.

바로 최고 통수권자인 '왕'을 그들의 위에 세운 것이다.

다만 왕이 원로원처럼 위기의 순간에 삽질하지 않도록 많은 제한을 두었으며, 법률을 고쳤을 뿐이지 법률
위에 왕이 군림하지 못 하도록 지정했다.

그렇다면 오래 전부터 알븐하임을 통치하던 원로원은 그대로 사라졌을까? 전혀 아니다.

비록 종족전쟁에서 패배 직전까지 갔으나 그들 덕분에 현재의 알븐하임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그들과 같은 기성 세대도 상당수 포진해있던터라 엄청난 반발이 이어졌다.

이로인해 분열이 극심해져서 하마터면 큰 사태로 번질 뻔했지만 다행히 잘 무마시킬 수 있었다. 이후로
왕을 만들되 원로원은 그대로 유지시키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결과적으로 알븐하임은 원로원과 왕이 서로 견제하면서 통치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알븐하임 위에


군림하게 된 왕이 개방적인 반면 원로원은 아직까지 낡아빠진 법률을 고집한다는 것.

그러므로 현재 알븐하임은 세대 차이의 끝판왕에 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명이 짧아 세대 교차가 자주 일어나는 인간과 비교했을 때 확실한 차이다.

수명이 길다는 건 어찌 보면 좋아보이지만, 엘프처럼 썩은물이 되다 못해 석유로 변할 수 있는 큰 단점을


안고 있다.

다행히 원로원도 본인의 실책을 깨달아 현재까지는 잡음만 발생했을 뿐, 큰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다.
종족전쟁 이후 알븐하임이 다른 국가와 활발할 교류를 하기 시작했을 때도 그들은 못마땅할지언정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종족전쟁으로부터 약 500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인간은 물론이고 엘프에게도 매우 긴


시간이라 종족전쟁에서 얻은 상처가 점차 나아지는 듯했다.

[등장할 때마다 큰 파장을 일으키던 제논 일대기. 이번에는 엘프 여왕과 인간의 사랑?]


[결코 불가능한 이야기이지만 소설이니까 궁금하다. 그러나 휴재 공지를...]
[특보! 제논 일대기 초고를 도난당하다! 조사 결과 엘프와 수인으로 용의자가 잡혀...]

알븐하임 내에서 또다른 균열을 만들기 시작한 어느 한 작품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

위그드라실.

최초로 '문명'이 세워진 도시이자 이 세상 모든 지식이 존재하는 알븐하임의 수도.

학자라면 죽기 전에 한 번은 방문해야하는 도시이며,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아주 귀중한 자원이


담겨있었다.

특히 신들이 직접 관리했다는 신목(神木), '세계수'는 가히 역사의 결정체가 담겨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세계수와 위그드라실은 뜻이 같으나 서로 구분하기 위해 말을 다르게 하고 있다.

아무튼 세계수는 최초의 문명이 시작될 수 있던 원동력이었으며 신화에 따르자면 신들이 엘프를 직접
교육했다고 알려져 있다. 엘프도 그 신화에 따라 위그드라실 안에 고등교육 기관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이밖에도 세계수는 사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신화에 기록된 걸 보자면 당연하디 당연하 현상이다.

그렇다면 정치 기관은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 감히 신들이 직접 기른 세계수 안에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세계수 바로 앞에 위치해있다.

알븐하임을 통치하기 위해 세워진 이 기관의 이름은 '엘로디아'.

세계수가 알븐하임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면, 엘로디아는 정치적으로 가장 지저분한 곳이다.

"여왕 폐하.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이런 모욕은 더이상 저희가 인내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한 엘프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누군가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 노화가 다른 종족보다 더딘
엘프이나 자글자글한 주름과 더불어 늙수레한 목소리로 보건데 상당히 고령의 엘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엘프의 옆에는 비슷한 나잇대의 엘프 남녀 2 명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그들은 고령의 엘프와 달리 젊은


축에 속했다. 노인에 가까운 엘프와 달리 중년 정도로 보였으며 본연의 아름다움이 퇴색되지 않은 상태다.

그나마 공통점이라면 3 명 모두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 그 불만은 모두 한 명에게


쏠려있었다.

"나는 괜찮다고 했느니라. 그런데 그대들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청아하면서도 자애로움이 깃든 목소리가 공간 내에 울려퍼진다. 그 목소리에 노년의 엘프는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높게 설치된 왕좌에 앉은 한 엘프가 고고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깨에 닿을 듯한 은회색 머리카락와 마찬가지로 은회색 눈동자로 하여금 신비로움을 풍겼으며,


상냥해보이면서도 심지가 굳어보이는 외모였다.

또한 백옥 같은 피부와 더불어 어려보이는 외모로 인해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여느 엘프보다 더욱 눈에 띄는 미모를 갖고 있는 그녀의 이름은 아르웬 엘리디아.

100 년 전부터 알븐하임을 통치하게 된 엘프들의 여왕이며 현재 '원로원'과 대립 중에 있다.

"하오나 여왕 폐하. 이건 비단 여왕 폐하 뿐만 아니라 우리 엘프를 향한 모독입니다. 어찌하여 우리


엘프가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하는 겁니까?"

수장으로 추정되는 노년의 엘프가 다시 한 번 거세게 항의했다. 그에게 동조라도 하는 것처럼 양옆에
기립해있던 엘프 남녀가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악마의 부하, 그것도 최고간부를 우리 엘프로 지정한 것도 모자라 '교만'이라는
모욕까지 선사했습니다."
"아무리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지만 이 책이 전세계에 퍼지고 있는만큼 우리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여왕님까지 건드리셨지 않습니까? 인간과 여왕님의 사랑이라니, 저는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아르웬에게 항의하고 있는 주제는 전세계를 강타한 소설, 제논 일대기에 관한 이야기다. 제논


일대기는 전세계에 널리 퍼져있는만큼 엘프도 자연스레 접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들도 재미있다며 즐겁게 읽고 있었다. 그러나 '칠죄종'의 등장 이후부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더니 이번에 나온 신권에서 말이 많아졌다.

엄밀히 따지자면 원로원을 포함한 기성 세대에서 격한 반응을 나타냈고, 이밖에는 그닥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역사를 철저하게 배운 신세대는 다양한 관점으로 흥미롭게 지켜봤다.

엘프가 '교만'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건 씁쓸함으로. 엘프 여왕과 인간의 사랑 이야기는 기대감과


불안으로.

허나 원로원은 아니다. 그들은 엘프라는 종족 자체를 능욕하고 있다며 가히 격노 수준으로 화를 표출했다.

"후우..."

아르웬이 깊은 한숨을 내쉬자 강하게 항의하던 원로원도 입을 꾹 다물었다. 몇 백년간 아르웬을 지켜보던
그들로서는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르웬이 한숨을 내쉬었다는 건, 그만큼 화가 났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실제로 고운 미간이 약간 찌푸려져서 언짢음을 드러내고 있다.

뒤이어 아르웬은 은회색 눈동자로 원로원을 하나 하나 살펴봤다. 여전히 불만에 찬 얼굴들이다.


"...정녕 책 하나 따위로 이렇게 화를 낼 일이더냐?"

아르웬이 스산함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원로원에게 대꾸했다. 자애로움은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지고


쌀쌀함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느냐? 그대들의 오만함으로 종족전쟁에서 치욕을 겪었지 않았더냐?
이런데도 역사를 부정하려 들다니 참으로 재미있는 짓이로구나."

그녀가 묵직한 팩트를 날리자 원로원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족전쟁은 치욕보다
더한 수준이다.

다시 말해 아르웬은 면전 앞에서 욕만 안 했지, 그보다 더 심한 욕을 한 거나 다름없다. 원로원


입장에서는 분노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원로원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여기서 화를 냈다간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건 맞습니다. 하오나 폐하. 현재 제논 일대기가 전세계에 뻗치는 영향력을 고려해주십시오.


마족의 인식을 바꾼 것 하나만으로도 절대 무시못할 일인데 이대로 가다간 우리 엘프를 향한 시선도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동의하는 바입니다. 만약 저자가 우리를 향해 안 좋은 묘사라도 하는 순간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차분함을 유지하며 조곤조곤 본인의 의사를 피력했다. 말은 저렇게 하고 있으나 본질은 이거
하나다.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찾는 걸 공식적으로 허락해달라. 그렇다면 자신들이 알아서 하겠다.

"... ..."

아르웬은 미간을 살작 좁힌 채로 원로원을 바라봤다. 너무 뻔한 속내에 화가 나다 못해 어이가 없다.

그들이 저자를 찾는다면 어떻게 될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다. 엘프에 대해 좋지 못한 묘사가 나오지
않도록 협박하거나 그 이상의 부정을 저지를 터.

스스로를 신의 선택한 종족이라 자부하는 엘프지만, 그중 원로원은 정도가 심한 편이다. 기본적으로


우월주의가 팽배해있다.

보통 같으면 화병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견제지만, 아르웬은 아니다. 그녀가 100 년 넘게 여왕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가 하나 있다.

"호오. 그대들은 고작 책 하나 따위를 무서워하는 것이냐? 정말 흥미롭구나. 신에게 선택받은 종족이라


자부하면서 한낱 인간따위가 쓴 책을 무서워하다니. 우스운 일이로다."
"... ..."
"정 무서우면 그대들도 책을 쓰면 되지 않겠느냐? 제논 일대기보다 재미있는 책을 쓰면 되는 것을 왜
나에게 항의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이처럼 상대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알븐하임의 왕들이 원로원의
견제에 버티지 못 했으나 아르웬은 이야기가 달랐다.

정치적으로 잔뼈가 굵은 원로원의 공격을 가볍게 흘려버리다 못해 반격까지 가할 수 있는 정치적 재능.


숱한 압박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는 정신력을 갖고 있다.

당연하게도 원로원 입장에서는 그런 아르웬이 껄그럽다 못해 눈엣가시로 보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빈틈을 만드려 시도하고 있으나 도무지 뚫어낼 기회가 보이지 않았다.
"우선 그대들은 생각은 잘 알겠다. 다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하는구나. 현재
저자가 휴식 중에 있으니 괜히 찾았다간 우리를 향한 시선이 더 안 좋아질 것이다."
"우리가 언제 그런 시선을 신경써야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신의 선택을 받은 엘프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종족전쟁 당시 큰 실책을 저질렀지만, 그건 우리의 실책이지 인간이 뛰어났던
건 결코 아닙니다."

도통 물러갈 생각이 없는 원로원. 아르웬은 그들의 호소를 듣고 눈쌀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종족전쟁에서도 본인들이 실수했다고 여겼지, 결코 인간이 자신들보다 뛰어나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있다.

물론 엘프가 자멸했기에 인간이 유리해질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인간을 평가절하해서는 절대


안 된다.

아르웬은 꼰대의 정석을 보여주는 원로원의 행태에 다시 한 번 한숨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막았다.
지금처럼 소모전을 하는 건 자신에게 좋지 않았다.

"그만! 언제까지 그딴 책으로 귀중한 시간을 할애할 생각이더냐? 그대들도 할 일이 많을텐데?"


"하오나..."
"되었다. 그만 물러가도록 하여라. 나도 그대들처럼 생각할 거리가 많으니."

여왕의 노호성이 터지자 원로원도 결국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밀어붙였다간 역효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에 대표격이었던 노년의 엘프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알겠습니다. 부디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시길."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 또한 신경끄고 있던 건 아니었으니."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길고 길었던 싸움이 끝나고, 원로원은 알현실 밖으로 움직였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까지 아르웬에게
매서운 눈빛을 쏘아보내는 건 잊지 않았다.

"후우..."

아르웬은 원로원이 모두 나가자 참았던 한숨을 토해냈다. 이어서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마법으로
확인한 후, 작게 투덜거렸다.

"좆 같은 꼰대 새끼들."

여왕의 입에서 나올만한 단어는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양아치에게나 어울릴 법한, 실로 걸쭉한 욕설이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어려보이는 외관으로 인해 무시못할 괴리감마저 선사했다. 만약 원로원이 이 모습을


본다면 경악하지 않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웬은 턱을 괴며 어린아이처럼 투덜거렸다.

"왜 저렇게 지랄을 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네."

따악!

아르웬이 무심하게 손가락을 튕기자 어느 한 책이 허공에서 생성되었다. 인간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르러야


시행할 수 있다는 공간 이동 마법이었다.
그녀는 마법을 숨 쉬듯이 사용할 수 있는 엘프였기에 영창도 없이 시행할 수 있었다.

이어서 아르웬은 허공에 생성된 책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붙잡았다. 표지에는 '제논 일대기'라는 제목이
떡하니 박혀있다.

"재미있기만 한데."

< 73 화 >

"재미있기만 한데."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은 두 손으로 소중히 붙잡은 제논 일대기 10 권을 바라봤다. 철부지 소녀처럼
입술이 댓발 튀어나와 속에 담겨있던 불만을 여실히 표현하는 중이다.

만약 원로원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여왕으로서 품위를 지켜야한다니, 시덥잖은 견제를 했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도청의 위험도 알현실이기에 전혀 없다.

"엘프는 고귀해야한다며 쫑알쫑알. 책에서 엘프가 교만을 담당하는 건 싫다며 궁시렁궁시렁. 엘프 인간의
로맨스는 말도 안 된다며 칭얼칭얼. 애새끼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인지."

아르웬은 주위에 보는 사람도 없겠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압박했던 원로원을 신랄하게 까내렸다.

근무 중 아무도 없는 이 시간이야말로 아르웬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마찬가지. 속에 꾹꾹 묵혀왔던 말을


꺼내기에 적합했다.

대외적으로는 자애롭고 다정한 여왕이라 칭송받는 아르웬이지만, 이렇듯 지극히 소녀다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

원로원이 잔소리처럼 여왕으로서 품위를 지켜야하기에 평상시에는 그런 면모를 드러내지 않을 뿐, 그녀는


고작 150 살밖에 되지 않았다.

인간이었다면 그것도 많은 나이라며 태클을 걸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이다. 엘프의 기준으로
따져도 사회의 한 일원이 되기에 충분하나 그럼에도 어린 편에 속한다.

그리고 아르웬은 50 대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지금까지 알븐하임을 다스렸다. 엘프에게 50 대는 모든


교육이 끝나고 사회로 진출하는 발판이 마련되나 여왕이라는 자리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허나 100 년이 넘는 시간동안 원로원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알븐하임을 다스린 걸 보면 그녀의 정치적


수완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원로원 같은 사람들 때문에 제논이 휴재에 들어간 거겠지. 인간들은 원로원보다 심한 곳이 있다던데 엄청
힘들겠다.'

아르웬은 두 손으로 잡은 제논 일대기를 동정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도 제논


일대기의 많고 많은 팬들 중 한 명이다.

제논 일대기가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
쉽다는 것 또한 인지하고 있다.

어쩌면 알븐하임의 여왕인 자신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까.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엘프조차 '
문화'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신분을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심적으로 고생 중이라 했으니 작가가 얼마나 큰
부담감을 안고 있는지 알 것 같다.

'그래도 스승과 여왕이 어떻게 되는지만 적고 가야할 거 아니냐. 이 나쁜 작가야.'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아르웬은 작품 속 스승과 엘프 여왕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비록 작품 속 엘프 여왕은 자신과 전혀 동떨어진 허구의 인물이지만, 왠지 모르게 몰입이 되었다. 특히


작품 속 엘프 여왕은 자신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은 수준으로 고생하는 중이다.

원로원에게 심한 견제를 받는 건 물론이고, 악마가 세계 곳곳에 출현해 알븐하임에도 큰 위기가 닥쳐올


징조가 간간이 묘사되는 중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사생활까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스승만이 엘프 여왕에게


심적으로 위로가 되어주니 더욱 애틋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제논 작가도 참 대단해. 어떻게 엘프의 신화를 세세하게 꿰뚫고 있는거지? 엘프와 관련된 신화와 역사는
인간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텐데. 알븐하임에서 교육받았던 학자인가?'

제논 일대기는 칠죄종이 등장하기 전까지 엘프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 했다. 종족전쟁 당시 큰 치욕을


안겨줬던 인간이 주인공인데다 칠죄종의 등장 전까지는 인간 사회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이다.

학자들도 연구용으로 심도있게 읽었을 뿐이지, 엘프들 사이에서는 읽는 사람만 읽는 책에 불과했다. 다만


재미없다는 말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독특하게도 아르웬은 1 권부터 꾸준히 읽은 애독자다. 옛날부터 책을 좋아하던지라 세계를 강타한
제논 일대기를 자연스레 접했으며 뛰어난 문장력과 흡입력에 매료되어 그대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칠죄종이 등장하고, 주인공 일행이 알븐하임에 들어오고나서는 상황이 반전되었다. 악마측 간부
중 한 명이 엘프, 그것도 '교만'을 담당하고 있다는 건 여러가지 구설수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원로원에서도 제논 일대기를 불쏘시개 취급하다가 막상 알븐하임이 등장하니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정말로 작가가 알븐하임의 실태와 문화에 대해 안다면 본인들에게도 큰 피해가 갈 수도 있었으니.

실제로 작품 속 원로원, 그러니까 '의회'라는 정치 기구에서 별 되도 않는 이유로 엘프 여왕을 압박하고


있다. 고증이라면 고증이었는지라 아르웬으로서는 내심 통쾌하면서 씁쓸했다.

'그나저나 '다크 엘프'는 다음에 나오는 건가?'

엘프는 타종족보다 몇 배에 달하는 수명을 가진만큼, 기록된 역사가 매우 방대하다. 인간이 최초로
기록한 역사가 5000 년 전 본인들의 문명을 세웠을 때부터인데 엘프는 그보다 약 2 배에 달하는 10000 년
전부터다.

그 만년의 세월동안 수많은 사건 사고가 존재했다. 태생적인 능력을 이용해 세상을 지배하려던 시기도
있고 동족끼리 내전을 벌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약 5000 년 전에 심각한 내전이 일어났다. 내전이 발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종교.

엘프는 루미너스, 모라, 하르트 이 3 명의 신들을 함께 모시고 있으나 그건 현재에 해당하는 이야기고
과거에는 서로 견제하고 싸우기 바빴다.

당연하게도 신들은 신탁까지 내리며 한사코 말렸으나 엘프는 듣지 않았다. 신의 목소리를 더 명확하게
듣기 위해 타종족보다 긴 귀를 가진 엘프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필요할 때 듣지 않은 것이다.

그중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교단이 바로 모라다. 모라는 갈등보다 타협을 원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때는


말보다 힘이 더 앞서나가는 시기였다.

더군다나 빛을 섬기는 루미너스 입장에서는 모라가 눈엣가시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르트와 힘을
합쳐서 그들을 추방시켰다. 추방시키는 과정에 무력으로 진압하는 건 당연했다.

여기서 추방된 자들은 대부분 갈색 피부를 가진 '다크 엘프'이며 알븐하임에서 생활하는 다크 엘프가 거의
전무한 이유이기도하다. 대부분의 다크 엘프가 모라를 섬기고 있었는데 싹 다 쫒겨났으니 남아있을리가
없다.

이로인해 다크 엘프는 스스로 엘프라는 것에 혐오감이 생겨 상징인 귀를 반으로 잘라냈다. 그 풍습이


현재까지 이어져서 다크 엘프를 보면 하나 같이 귀가 반으로 잘려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래도 인간의 눈에는 다 똑같이 보이겠지. 다만 역사를 잘 알고 있으니 언젠가 나오려나? 나오면
어떻게 나올까? 진짜 사람 궁금하게 만드네.'

그로부터 2000 년이 흘러 악마 전쟁 당시, 엘프는 위기에 빠지자 본인들이 추방시켰던 다크 엘프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2000 년 동안 쌓여있던 앙금이 쉽게 해소될리가 없다.

다행히 악마를 퇴치하기 위해 동족을 도와줬으나 그들은 알븐하임에 발을 디디지는 않았다. 2000 년간
쌓였던 서로 간의 불신 때문이었다.

특히 원로원이 다크 엘프를 싫어하는 편인데 종족우월주의에 빠져있는 그들로서는 종족의 이름을 버린


다크 엘프가 실로 못 마땅할 것이다. 다크 엘프도 고집불통인 원로원을 싫어하고.

'하여간 꼰대가 문제라니까. 그들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고.'

아르웬은 어딜 가도 안 끼는 곳이 없는 원로원을 재차 까내렸다. 그녀는 즉위하고나서부터 다크 엘프를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그들도 결국 한 뿌리에서 나온 동족이며 그들이 있어야만 '엘프'라는 종족이 하나로 완성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전통과 법률을 우선시 여기는 원로원만 다크 엘프를 싫어할 뿐이지 깨어있는 자들은
그들에게 미안함을 갖고 있다.

본인들의 조상이 저지른 만행 때문에 여태까지 고향에 발을 디디지 못 하고 있었으니. 그건 아르웬도


마찬가지였다.

"아아~ 이렇게 고민하면 뭐 하냐. 다음 권이 2 년 뒤에 나오는데!"

아르웬은 책을 품에 꼭 안고서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2 년이라는 기간은 엘프에게 짧디 짧은 시간이지만


왠지 엄청 길게 느껴졌다.

아마 제논 일대기를 기다리는 2 년은 세상에서 가장 긴 2 년이지 않을까. 그녀는 제발 2 년이라는 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빌었다.

샤아아아-

"응?"

왕자에 드러눕듯이 기대고 있을 때, 아르웬은 문득 마나의 흐름이 변했다는 걸 감지했다. 선천적으로


마나에 민감한 그녀로서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누군가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알현실은 왕을 제외한 나머지는 마법 사용 금지다.

이에 아르웬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누가 침입했는지 서둘러 확인했다. 원로원이 미쳤다고 알현실에 마법을
사용하지는 않을테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뒤이어 그녀는 탐지 마법을 발동시키자마자 안심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주 익숙한 기척이다.

"...이제 장난은 그만 치렴."

아르웬이 힘없이 입을 열자 아무도 없는 왕좌 앞에서 누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마법을


사용했는지 몰라도 주변 환경과 완벽하게 동화되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마법을 푼 상대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는데 로브를 뒤집어 써서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허나 아르웬은 이 신원미상의 침입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레인."
"안녕하세요. 여왕님!"

아르웬이 이름을 부르자 레인이라고 불린 침입자가 밝게 인사했다. 생기발랄한 목소리와 달리 꽤 낮은톤의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다.

스윽-

신원미상의 여인은 인사를 하고나서 로브를 뒤로 젖혔다. 은은한 붉은기가 도는 밀색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구릿빛 피부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제일 눈여겨 볼 점은 그녀의 귀다. 여느 엘프처럼 귀가 긴 것 같으나 중간이 잘려있었다.


이를보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웬의 눈 앞에 나타난 이 여자는 '다크 엘프'라는 것을.

"오늘도 노땅들이 귀찮게 굴었나 보네요? 왕좌에 드러누운 걸 보면."

레인은 방긋방굿 웃으면서 아르웬에게 물었다. 아르웬은 원로원을 대놓고 까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헛기침을 했다.

원로원을 욕하는 건 상관없지만 여왕의 품위를 지키지 않았다는 부분이 아르웬에게 더욱 신경쓰였다.
아무리 사적으로 친하다지만 지켜야할 건 지키고 싶다.

"흠. 흠. 그냥 좀 문제가 있었단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왔니?"


"제가 여왕님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어서 왔어요!"
"선물?"
"네!"

평소 레인은 아르웬에게 줄곧 선물을 잘 하는 편이다. 아르웬은 다크 엘프를 다시 받아들이기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었으며 레인은 다크 엘프였으니.

비단 레인 뿐만 아니라 다크 엘프 전체가 아르웬에게 우호적인 편이다. 그래서 다크 엘프 측에서도 레인을


보내어 친밀감을 형성시키는 거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레인을 보낸 것이나 아르웬은 레인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 천진난만한 소녀 같은
레인을 싫어할 이유도 없거니와 제논 일대기의 신권이 나올 때마다 항상 가져와주기 때문이다.

심부름꾼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레인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거라 아무런 문제도 없다. 오히려
아르웬이 그녀를 더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네가 주는 선물이라니, 그거 궁금하구나. 무슨 선물이니?"


"아마 여왕님께서 엄청 좋아하실 거에요. 제논 일대기랑 큰 연관이 있는 거거든요."
"제논 일대기랑? 그거 정말이니?"
"네!"

레인이 제논 일대기와 관계있는 선물이라 말하자 아르웬의 은회색 눈동자에 의문으로 채워졌다. 제논
일대기 10 권은 이미 레인이 선물해줬다.

게다가 제논 일대기는 2 년 동안 휴재를 한다고 선언했다. 도통 무슨 선물인지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짜잔!"

아르웬이 궁금해하는 동안 레인이 품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무언가를 꺼내 보여줬다. 그에 아르웬은


레인의 품 속에서 나온 선물에 시선을 집중했다.

겉보기에는 낡아빠진 종이뭉텅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의문이 더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요!"
"고맙구나."

레인이 종이뭉텅이를 건내주자 아르웬은 감사 인사를 전한 뒤에 선물의 정체를 확인했다. 단순한


종이뭉텅이가 아니라 원고지였으며 꽤 유려한 필체가 담겨있다.

'누가 쓴 거지? 그리고...

아르웬은 첫 문장을 읽자마자 눈을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기억력이 좋은 그녀로서는 첫 문장부터 매우


낯익었기 때문에.

전에도 말했지만, 아르웬은 제논 일대기를 1 권부터 읽은 애독자 중 한 명이다. 또한 애독자라면 1 권부터


최신권까지 정주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는 설마하면서 발빠르게 원고지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문장들 하나 하나가 아르웬의 뇌를
강타했다.

"...어라?"

이게 왜 여기에 있지? 도난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이거 하나 때문에 작가도 찾아달라며 애원하고 있는데?

순간적으로 아르웬이 사고가 정지되었을 쯤이다. 그런 그녀의 속마음도 모르는지 선물을 전달한 레인은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뿌듯하게 설명했다.

"무려 제논 일대기 1 권의 초고라고요! 우연히 출판사 앞에 방문했는데 초고를 공개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날 밤 몰래 갖고 왔죠."
"... ..."

그 설명을 들은 아르웬의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생각이 두둥실 떠올랐다.

"여왕님은 제논 일대기를 좋아하시니 분명 좋아할 거라 생각했어요. 이걸로 여왕님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죠?"

좆됐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그녀는 다시 한 번 더 생각했지만.

"이걸로 제논 일대기 작가와 만나시면 될 거 같아요. 초고를 빌미로 작가에게 말한다면 그 사람도 분명히
찾아올 수밖에 없겠죠."
"... ..."
"저 잘했죠? 헤헤."

정말로 좆됐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74 화 >

마족, 인간, 수인 이 세 종족은 20 대 초중반 쯤 '신체적으로' 모든 성장이 끝나지만, 엘프는 그보다


훨씬 더 긴 30 대가 되어서야 신체적 성장이 끝난다.

30 대에 이르러서 신체적인 성장이 끝난다는 의미는 청소년기가 매우 길다는 말과 같으며, 종족을


불문하고 청소년기에는 다른 나이대에 비해서 무언가를 배우는 게 빠르다.

하물며 엘프와 마족 같은 장수종은 기억력이 출중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 장점이


합쳐져서 엘프가 성인이 된다면 걸어다니는 도서관 수준으로 폭넓은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하지만 엘프의 30 대는 신체적으로 성인임을 인정받는 나이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나이대는


평균적으로 50 세 전후다.

그동안 본인이 가고 싶은 길을 찾고 그 길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특정 능력에 통달해야만 어엿한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엘프는 태생적으로 폭넓은 지식을 얻기에 유리하나 인간의 습득력에 비해서는 다소 빛바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대신 그들은 적어도 인간처럼 지식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없어서 유리한 건 똑같다.

"저 잘했죠? 헤헤."


"... ..."

엘프치고는 지극히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100 년간 알븐하임을 다스린 엘프 여왕, 아르웬은 레인이 해맑게
웃어도 입도 벙긋하지 못 했다. 도통 이게 무슨 일인지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그녀는 100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동안 다사다난한 사건사고를 겪었다.

어린애라며 자신을 깔보던 원로원에게 대항하기 위해 적지 않는 노력을 쏟아부었고, 가끔 주변 나라와


마찰을 빚을 때도 재능을 살려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다.

최근에는 제논 일대기 때문에 원로원이 지랄을 했으나 이제는 쉬이 넘겨버릴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풋내기 여왕으로 시작했던 시절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 수준.

'...좆됐다.'

하지만 아르웬은 100 년이 넘는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를 느꼈다. 단순히 국가 재난 정도로 큰일 난


거라면 어찌 어찌 대비할 수 있을테지만 그 정도를 한참 넘어섰다.

그 이유는 눈 앞의 다크 엘프 소녀, 레인 한 명 때문이다. 정작 본인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 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이고. 얘야...'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는 그녀이나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레인의 어깨를 붙잡고 한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현재 레인은 이제 막 10 살을 넘긴 매우 어린 나이이며, 보모 역할을 하는 중인 아르웬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자칫하다간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줄지도 모른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여기서 크게 혼냈다간 겉잡을 수 없이 폭발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지금은 조곤조곤 타이르고 나중에 따로 불러 따끔하게 혼내는 게 좋다.

아르웬은 새하얗게 변하기 직전인 머릿속을 간신히 떨쳐내며 진정했다.

지금 당장은 레인에게 상황 설명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레인? 지금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 알고 있니?"


"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지 알고 있냐고 물었단다."

사근사근한 말투로 물은 아르웬이나 그 속에는 깊은 빡침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어리디 어린 레인은


눈치채지 못 했다.

오로지 아르웬이 무슨 의도로 질문했는지 파악하기 위해 눈만 깜빡거리고 있을 뿐.

"하아..."

결국 아르웬은 참아왔던 한숨을 밖으로 꺼낼 수밖에 없었다. 악의라고는 하나도 없는 저 얼굴을 보자니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순전히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이 초고를 들고 온 것이다. 의도만 보면 칭찬할만하나 그 결과가


최악으로 다가왔다.

"...여왕님?"

레인도 아르웬의 반응을 보고 나서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는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올망졸망한


푸른색 눈동자에 염려와 걱정이 담겨있다.

이에 아르웬은 이를 꽉 깨물었다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레인. 아무리 나를 기쁘게 하고 싶었다지만 이건 잘못된 행동이란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건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니까. 만약 네가 다른 사람에게 소중한 물건을 도둑맞는다면 어떻겠니?"
"음... 저도 똑같이 할 거예요. 아니면 아예 싹 다 털어버리거나? 선생님들께 그렇게 배웠어요."

다크 엘프 특유의 사고 방식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대답이다.

그들은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보다 더한 걸로 복수하며, 반대로 은혜를 입었다면 어떻게든
배로 갚기 위해 노력한다.

그나마 다행인 부분은 적어도 도둑질이 나쁘다는 건 알고 있는 모양이다. 복수를 한다는 건 나쁜 짓을


당했다는 걸 인지한 것이니까.

허나 알고도 나쁜 짓을 저질렀다 점이 아르웬에게 뼈아프게 다가왔다.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그녀로서는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다.

"...혹시나 해서 묻는다만, 이 종이가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니?"


"어떤 물건이던 간에 처음 나온 물건이 가치가 뛰어나잖아요. 그래서 갖고 온 거예요. 여왕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도움이 되기는커녕 시한폭탄 그 자체다. 아르웬은 한숨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억누르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럼 이 종이가 인간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도?"


"당연히 알고 있죠. 그러니 이것만 잘 이용하면 우위에 서지 않겠어요? 설령 인간들이 뭐라고 소리쳐도
우리에게 덤빌 수는 없을 거예요. 우리는 강하니까요."

하나만 알고 열은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만방자한 생각이다.

엘프건 다크 엘프건 저 오만함은 종족 특징인 게 분명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나이, 그리고 종족 특유의 오만함이 한데 어우려져 이런 결과가 도출되었다.

'...미쳐버리겠네.'

아르웬은 울고 싶은 마음에 마른세수를 하며 속으로 웅얼거렸다.

가능하다면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리는 게 제일 좋겠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다. 레인이 출판사로


돌아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데다가 설령 돌려놓아도 초고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지금 출판사는 미네르바 제국의 황실에서 조사단을 파견한 상황이다. 제아무리 레인의 은신술이
뛰어나도 만에 하나, 들키는 순간 정치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모두 끝장이다.

알븐하임을 다스리는 아르웬으로서는 최악만큼은 무조건 피해야하기에 차라리 차악을 택하는 편이 낫다.
그러니 초고는 당분간 놔두는 게 이롭다.

"알았다. 일단 내가 갖고 있으마. 다만 지금은 생각할 거리가 있으니 잠깐 쉬고 있으렴."


"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따끔하게 혼날 준비도 하고. 징계 처분과 더불어 장로님에게도 이 사실을
말씀드려야겠구나."
"네... 에?"

상황이 좋게 좋게 흘러갈줄만 알았던 걸까. 레인은 아르웬의 서늘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에 아르웬은 눈쌀을 살짝 찌푸리며 레인을 노려봤다. 아무리 제 식구라 해도 혼내야하는 건


혼내야하는거다.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혼이 나는 건 당연한 거잖니? 나는 네 후견인이지만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단다.


잘못을 했으면 단호하게 혼을 내야지. 그리고 지금 네가 저지른 행동은 알븐하임에 큰 위기를 부를 수도
있어."
"저, 정말이에요? 어째서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은 훨씬 강하기 때문이란다. 우리보다 부족한 게 많지만 결코 무시해서는 안
돼. 그리고 인간 뿐만 아니라 마족도 난리를 칠 거야."
"마, 마족까지? 그, 그래도 저희는..."

레인이 우물쭈물하며 반박하려하자 아르웬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레인은 지금쯤 이리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신에게 선택받은 종족인 우리가 어째서 고개를 숙여야 하냐고. 종족 전쟁 당시에는 삽질을 했으나 지금은
다를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뭐든지 간에 적당한 게 좋은 법. 레인은 현재 자부심이 아니라 '자만심'을 품고 있다. 안 그래도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청소년기에 진입했으니 그 자만심은 더더욱 커질 터.

[인간은 자기보다 아래인데 굳이 동급으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잘못을 저질러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마 그릇된 짓임을 알고도 초고를 훔친 이유가 이때문일 확률이 높다.

아르웬 본인도 한때 그런 적이 있지만, 100 년이 넘는 기간동안 몇 가지 깨달은 바가 있다.

아무리 신의 선택을 받은 종족이라 해도 결국 희노애락이 존재하는 필멸자에 불과하며 자만심을 가지게


되는 순간 눈을 가리게 된다.

예전에 뭣도 모르고 호기롭게 나섰다가 인간 국가에게 외교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그때부터


인간은 절대 만만하게 보아서 안 되는 종족이라 마음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러니 저 자만심부터 어떻게 고쳐야지 않을까. 아르웬은 훗날 레인을 제대로 교육시키겠다 다짐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네 생각대로 우리는 신의 선택을 받았지. 하지만 그렇다고 잘못은 변하지 않는단다. 용서받지
못할 짓은 용서할 수 없어."
"그래도 저는..."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니? 마음 같아서는 호통 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거야. 지금은 머리가 아프니
잠깐 물러가 주겠니?"

아르웬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느꼈는지 레인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평소 나쁜 짓을 해도 아르웬이 크게 혼낸 적이 없었으나 오늘은 아닌 모양이다.

"...알겠어요. 모라가 그대에게 안식을 내려주시길."

레인은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다크 엘프 특유의 인삿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주변 환경과 하나로 동화되는
완벽한 은신술이다.

아르웬은 레인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자 곧바로 탐지 마법을 펼쳤다. 레인의 기척은 물론이고
알현실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후우..."

딱!

뒤이어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가 혹시 몰라 손가락을 튕겨 또다른 마법을 발현했다. 마법을


발현하자마자 그녀의 주위로 동그란 막 같은 것이 생겨났다.

이 마법의 정체는 다름아닌...

"끼아아아아아!!"

방음 마법이었다. 그녀는 은회색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으며 흡사 와이번 같은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원래라면 알현실 바깥까지 들릴 정도로 큰 비명이었지만, 방음 마법을 설치했기에 소리가 새어나가는 일은


없었다.

"루미너스시여!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나이까! 아아아악!"


쌓이고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계에 달해 기어코 터져버렸다. 아르웬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강하게 억눌렀다.

현재 사태는 최악이라 단언할 수 있다. 들키게 되면 최악 중의 최악이고, 설령 들키지 않아도 최악이다.

더군다나 원로원도 아니고 믿었던 사람에게 이런 외통수를 맞게 되니 그녀의 심정은 오죽할까. 마음


같아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후우... 후우... 후우..."

한동안 히스테리를 부리던 그녀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겨우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속에 있던 울분을
모두 토해내니 그나마 나아졌다.

하지만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독기에 찬 은회색 눈동자로 하여금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적립된 상황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최악의 위기를 맞이해버리니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작가를 어떻게든 찾아야 해.'

국가 차원에서 나서지 않고 엄연히 '개인적으로' 만나야한다. 만나서 어떻게 하느냐?

'일단 대가리부터 박고 시작하자.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여왕의 권위고 나발이고 머리부터 박을 생각이다. 레인을 막지 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거니와 작가의
비위를 어떻게든 맞춰야 알븐하임이 박살나지 않는다.

빈말이 아니라 제논 일대기의 영향력을 고려하자면 이 초고는 대량살상마법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자그마치 국보로 지정해야할 물건인데 선전포고를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게다가 알븐하임은 현재 초고 도난 사태에 대한 성명문을 낸 상태다. 뻔뻔하게 뒷공작을 벌여놓고


발뺌했다며 어마어마한 비난 세례를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또 찾다가 휴재라도 한다면? 이러면 또 책이 늦게 나올 수도 있잖아. 시위까지 벌어졌다는데


어떡하지?'

아르웬은 불안감에 버릇적으로 엄지 손톱을 깨물었다.

아무런 탈없이 초고를 돌려주기 위해서는 작가와 개인적으로 만나야한다. 헌데 지금 작가는 어떤


사유에서인지 신변을 숨기는 중이고, 본인을 드러내는 걸 극도로 꺼려하고 있다.

이때까지 원로원의 문제도 있고 다양한 이유 때문에 작가를 찾진 않았지만 오늘 상황이 달라졌다. 작가를
찾아서 어떻게든 사과하고 초고를 넘겨야만 자신과 알븐하임이 후폭풍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

"으으으으..."

딜레마도 이런 딜레마가 따로 없다. 최악을 면하기 위해서는 작가를 만나야하는데 작가를 찾게 되는 순간


절필의 위험성이 따른다.

아르웬은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지혜롭게 타파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순간적으로 원로원에게 뒤집어 씌울까?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원로원이 반격을 가하게 되면 자신은
끝장난다. 그들은 영악한 뱀들이니 역으로 이용할 능력은 충분하다.
'일단 다크 엘프 장로부터 만나야 해. 위험성이 따르더라도 작가를 찾을 수밖에 없어.'

확실히 최악보다는 차악이 훨씬 낫다. 아르웬은 굳게 다짐하면서도 초고를 힐끔거렸다.

문화계에 있어서 대량살상마법보다 더한 영향력을 지닌 초고가 자신의 손에 쥐어져있다.

'잠깐만. 이걸 역으로 이용한다면...?'

시간이 지나 '우연히' 초고가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고 하면 과연 믿어줄까? 많은 사람들의 의심을


사겠지만 이미 도난당했던 물건이었으니 뻔뻔하게 굴면 문제는 없다.

확실한 증거도 없을 뿐더러 알븐하임은 최강대국 중 하나다. 본래 외교에서는 말보다 국력이 앞서는
법이니 미네르바 제국조차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머지않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냐. 원로원이 또 지랄하겠지.'

어딜 가나 원로원이 문제다. 아르웬은 헛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이마의 은빛 서클렛을
매만졌다. 중앙에 푸른색 보석이 영롱하게 박혀있었으며 왕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이어서 아르웬은 이마에서 서클렛을 탈착한 후, 쓴웃음을 지으며 서클렛을 내려다봤다.

이 서클렛을 100 년동안 착용하고 있었지만, 오늘만큼 무겁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정말이지, 못 해먹을 짓이야."

폭풍은 완전히 물러갔지만, 그 여파는 참혹했다.

< 75 화 >

초고 도난 사건이 발생하고 어언 한 달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 시간동안 최대한 학업에


집중했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제논 일대기 1 권의 초고는 내가 이 세상에 환생하고나서 남긴 첫 기록물이며 그만큼 애정이 깊다.


컴퓨터가 아니라 손으로 썼기에 초고를 볼 때마다 뿌듯함이 일었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벌어지자 화가 나기보다는 황당했다. 솔직히 초고가 최초로 공개된지
하루만에 도난 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고, 또 금고 입구를 통째로 뜯어버릴 줄은 전혀 예상치 못 했다.

물론, 모험가를 고용하지 않고 안일하게 대처한 출판사와 너무 쉽게 초고를 넘겨준 내 책임도 없지 않아


있다. 그래도 억울한 건 변함이 없다.

그 후로 한 달이 지난 지금, 나는 초고가 과연 누구의 손에 넘어갔을지 매일 한 번 쯤 생각하면서 학업에


정진했다. 누군가의 손에 넘어갔다면 그나마 다행이나 불태우거나 소실되지만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안해. 우리도 열심히 조사했지만... 나오는 건 없었어."


"하나도 없었어?
"응. 단지 마나를 잘 다루는 실력자라는 것과 근력이 강하다는 것. 이 두 가지를 제외하면 누가 훔쳤는지
알 수 없어. 제국 최고의 마법사를 시켜 조사한 결과가 이 모양이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한 카페의 비밀방.

맞은편에 앉아있는 리나가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사과했다. 나는 미리 주문했던 커피를 마시며 그녀의
얼굴을 살펴봤다.

최근 한 달 동안 고생했는지 수심이 드리워진 표정은 물론이고, 컨디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 하여


미모가 팍 죽어버렸다. 리나는 레오르트처럼 황실로 복귀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꽤나 고생을 한
모양이다.

'황실 입장에서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긴 하겠지.'

나도 이미 입장문을 낸 상태다. 내 보물이니 부디 찾아달라고.

시위가 끝난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초고가 도난당했으니 황실 입장에서도 뒷목을 잡지 않았을까. 특히 한


번 호되게 혼난 황실 남매에게는 무조건 찾아야 한다는, 차마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단을 지휘하지 않고 강의만 듣는 리나에게도 적지 않은 압박감이 전해졌을 것이다.

"...반드시 찾을 수 있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입만 다물고 있자 불안해지기라도 한 걸까. 리나가 주눅 든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화가 나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걸로 생각한 모양이다. 하긴 전과가 있었으니 그리


생각할만도 하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딱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범인을 찾지 못 했다는 건 조금


실망스럽긴하나 어쩔 수 있겠나. 그냥 실망감만 느끼고 말지.

더이상 리나를 닥달해봤자 범인이 자수하는 것도 아니고 초고 문제는 넘기는 편이 정신 건강이 이롭다.
초고를 도난당했을 때는 화가 났으나 시간이 지나니 차차 진정된 것도 있다.

"알았어. 그런데 지금 출판사는 어때? 처벌이라도 내릴 거야?"


"고작 그거 가지고 처벌을 내리기에는 부족해. 비록 모험가를 고용하지 않고 직원들만 시켰다지만 금고의
성능이 뛰어났거든. 거기다 하루만에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테니 정상참작은 해줬어. 그대신 다른 걸로
붙잡혀갔지."
"다른 거?"
"탈세. 금고 안에는 초고뿐만 아니라 기밀 장부도 있었거든. 사장이 충격 때문에 미처 빼내지 못 했나
봐."
"그러면 어떻게 되는거야? 출판사가 없어지기라도 해?"

내 질문에 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아니.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제논 일대기가 그 출판사와 계약된 상태라서 힘들어. 대신 벌금을
좀 많이 물고 말 거야."
"벌금이라면 얼마 정도?"
"보통 탈세는 금액에 따라 200%에서 300%를 징수해가니까... 많이 나오긴 할 거야. 최소 단위가 100 만
골드일걸?"
"우와."

100 만 골드면 한화로 최소 100 억은 넘는 수치인데. 제논 일대기로 벌어들인 수익이 많은지라 탈세금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만약 내가 휴재를 하지 않았더라면 피눈물을 흘리며 벌금을 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휴재를 한 상태다.
벌금을 내는 순간 출판사가 부도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리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출판사의 미래에 관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부도가 날 일은 절대 없어. 제논 일대기는 지금도 꾸준히 팔리고 있으니까. 그리고 2 년 뒤에


네가 연재를 시작하면 다시 막대한 수익금을 벌어들일테고."
"돈을 많이 벌긴 했나 보네."
"사실 제논 일대기의 인기를 생각하면 이정도조차 적은 수치야. 지금 조사해서 망정이지, 나중에
조사했다면 우리 쪽에게도 뇌물을 먹일 수 있을 정도로 덩치가 커졌겠지."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에 오기 전, 부모님이 나에게 한 말씀이 있었다. 제논 일대기가 너무 잘 팔려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그때는 돈에 큰 관심이 없어서 그러려니 하며 넘어갔지만 지금은 아니다. 약간 욕심이 생겼다.

'앞으로 원고지를 좀 더 좋은 걸로 살까? 부모님에게 생활비를 좀 더 많이 보내달라 부탁하고.'

아주 사소하고도 귀여운 욕심이.

연재는 약 2 년 뒤부터 할 생각이지만 그동안 원고지 말고도 집필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알아봐야 할
듯했다.

물론 아버지가 선물해주신 마법필은 꾸준히 사용할 거다. 아버지가 거금을 이용해 나에게 선물해주신 거니
초고 다음으로 나에게 정말 소중한 보물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리나를 힐끔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건 나중에 마리한테 물어봐야겠다.'

내가 원하는 건 일종의 '지우개'다. 여태까지 원고를 쓸 때마다 한 번 삐끗하면 갈아치워야하니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마법필 같은 마법 아이템이 있다면, 지우개처럼 잉크를 지울 수 있는 아이템도 있지 않을까. 설령


없더라도 화이트 비슷한 것만 있어도 충분하다.

방학 동안 부모님에게 부탁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서 지우개가 존재하는지 확인해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생각해보니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현재 아카데미에 입학한지 벌써 4 개월이 훌쩍 넘어갔다. 곧 있으면 과제와 시험도 모두 끝나니 사실상 2


주 정도만 버티면 방학이다.

방학이라고 해봤자 고작 한 달밖에 되지 않았으나 나에게는 꿀맛 같은 휴식일 것이리라. 오랜만에


부모님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기대가 된다.

'마리네 저택도 방문할테고...'

그중 제일 기대가 되면서 걱정이 되는 건 바로 마리의 저택 방문이다. 마리네 부모님 입장에서는


금지옥엽처럼 키운 딸이 외간 남자를 데려온 격이니 따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을까.

비록 레킬리스 공작가가 권위주의와 동떨어져 있다지만 딸을 키우는 부모님은 또 다르다. 부디 좋게


봐주시길 빌 수밖에 없다.
나는 머릿속으로 방학 계획을 단편적으로 잡다가 리나를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입도 벙긋하지 않고 있다.

"리나."
"...으, 응?"

내가 부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대답하는 리나. 나는 의문을 품으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리 죽상이야? 아직도 도난 사건이 신경 쓰여?"


"...응."

역시나 내 예상대로였다. 하긴 나와 대화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녀에게는 부담감으로 느껴질 것이다.

나는 역전된 듯한 상황에 기묘한 느낌을 받은 것도 잠시, 우선 리나를 안심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제국의


황녀가 이리 저자세로 나올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내가 불편하다.

"너무 그리 신경쓰지 않아도 돼.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렇긴 해도... 후우..."

답답함에 한숨을 내쉰 리나는 나를 힐긋 바라보더니 속내를 털어놨다.

"자존심 상하잖아. 우리 황실이 직접 조사단까지 꾸렸는데 아무런 단서조차 잡지 못 하다니... 이건 분명


작정하고 훔친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단서가 하나도 안 나올 리가 없어."
"음...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만약 범인을 찾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일단 네 앞에 무릎을 꿇려서 사과시킬거야. 그리고 주모자를 찾아야지. 만약 대상이 국가라면
외교적으로..."

리나는 말을 하다가 멈칫거리더니 나를 쳐다봤다. 그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일이냐는 듯이 보자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냐. 아직 제논 일대기가 제국에 종속되지 않았으니 의미가 없겠지. 미안해. 요즘 정신이 없어서
흥분했나 봐."
"음... 만약 내가 제국에 종속된다면 어떻게 돼?"
"뭐?"

내가 그리 묻자 리나가 눈을 화등잔만하게 뜨며 나를 쳐다봤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입까지 벌린 상태다.

그에 나는 미약한 웃음을 흘렸다가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하지만 아직은 제국에 종속될 마음은 없다. 그냥
일종의 떠보기다.

"말 그대로야. 내가 제국에 종속된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내가 아니라 작가로서."


"그, 그러면 우리야 당연히 환영이지! 네가 원한다면 작위까지 줄 수 있어! 줄 수 있고 말고!"

리나가 한 달 동안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평소였다면 내가 떠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텐데 드물게


흥분까지 하면서 소리치고 있었으니.

지금 우리가 있는 방이 방음이 잘 되어있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바깥까지 소리가 새어나갈


정도로 큰 목소리다. 그만큼 내 가치가 어마어마하다는 뜻이다.

나는 기대감으로 부푼 리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 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작위에 관심이 없거든. 괜히 피곤해지기만 하고."


"그, 그럼 원하는 게 뭐야? 아바마마에게 부탁해서라도 선물해줄게."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나는 기겁하며 곧바로 사양했다.

아무리 황녀와 허물없이 말을 나눌 수 있다지만 황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다. 내가 제논 일대기의


작가여도 황제의 말 앞에서는 설설 기어야 하는 입장이다.

하물며 리나가 부탁하는 순간 황제마저도 의심할 가능성이 높다. 괜스레 황궁으로 불려가기는 싫다.

나는 리나에게 진정하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도 내 제스쳐에 흥분을 가라앉혔는지 한숨을


토해내고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미안해. 또 흥분해버렸네. 너도 떠보는 거였지?"


"응. 불쾌했다면 사과할게."
"사과할 필요는 없어. 나도 너와 너희 가족에게 잘못한 게 있으니 이정도는 넘겨야지."

확실히 말을 놓으니 대화하는 것도 편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커피잔을 들었다.

"... ..."

리나는 커피잔을 들자 내 손을 빤히 쳐다봤다. 손에 집중된 걸로 보아 중지 손가락에 난 펜혹을 보고 있는


듯했다.

"...좋았어. 그러면 되겠다."

또 무슨 꿍꿍이라도 꾸미는 걸까. 딴에는 작게 말한 거지만 피곤하다보니 목소리가 새어나와 내 귀에


똑똑히 들어왔다.

나는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고 한 쪽 눈을 살짝 치켜떴다. 다 들었다는 티를 낼지 말지 고민했지만 못 들은


척 넘어가줬다.

그래도 단단히 마음먹는 건 잊지 않았다.

'이상한 짓을 하기만 해봐.'

다시 한 번 연중의 힘을 보여줄테니까. 연중이라는 무기가 강력하다는 걸 알았으니 윗쪽에서 이상한 짓을


할 때마다 꺼내면 그만이다.

아무튼 간에 초고 도난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는 듯했고.

"그동안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비록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즐거운 휴식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와아아!!"

폭풍 뒤에 찾아온 꿀맛 같은 휴식이 찾아왔다.

< 76 화 >

방학은 학생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 값진 휴식 시간이다. 그동안 앞만 보고 가느라 지쳐있던 심신을


달래거나 미래를 설계하는데 아주 적합한 시간.

설령 그것이 한 달이라는 매우 짧은 시간이어도 충분하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언듯 보면 짧아 보이지만


조율을 잘 한다면 알차게 보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방학동안 마리네 저택을 갔다 오고 열심히 뒹굴뒹굴거릴 계획이다. 아카데미 생활이 너무


바쁜 것도 있으나 여러 사건들이 있어서 심신이 조금 피곤했다.
지금은 마음을 어느 정도 고쳐먹어서 그나마 편안한 생활이 가능했지만 내 가치를 명확하게 깨닫기 전까지
하루하루 노심초사하면서 지냈다.

"누나는 집에 안 올 거야?"
"아마 방학 중간에 돌아와서 일주일 정도 머물 생각이야. 아버지와 대련해야하거든."
"왜 일주일이야? 그냥 계속 있지. 나 심심한데."
"얘도 참. 정 그러면 너도 여자친구네 집에서 계속 지내지 그러니? 그리고 아카데미에 할 일이 많아서
그래. 나는 곧 있으면 졸업인데다가 근무지도 알아봐야 하거든."

참고로 방학 기간 동안 집이 아니라 아카데미 숙소에서 지내도 크게 상관은 없다. 헤일로 아카데미는 작은


도시나 다름없는데다가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어서 생활비도 마련할 수 있다.

특히 집이 너무 멀어서 왕복이 매우 힘든 사람들이 대부분 방학 동안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는 편이다. 2


학년까지는 방학이 한 달밖에 되지 않아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럼 아델 누나는? 아델 누나도 아카데미에 있어?"


"아마 그렇겠지? 아델은 집이 엄청 머니까. 그러고보니 걔는 방학동안 집으로 간 적이 없는 것 같네.
아무튼 간에 방학 잘 보내고, 여자친구네 집에서 가서 실례만 끼치지 마. 알겠지?"
"응."

본격적인 방학을 보내기 전 니콜과의 이야기를 모두 끝냈다. 그녀와 만나기 전에는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각자 방학 동안 할 일이 많아 보였다.

우선 리나는 초고 도난 사건의 범인을 끝까지 추격할 계획이라 말했고, 세실리는 따로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상냥하게 웃으며 비밀이라고 알려줄 뿐.

비밀이라고 하니 더이상 캐묻지 않았으나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 심상치 않았다. 틈틈이 기회를 노린다고
설명해야 할까. 순전히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으나 나와 깊은 연관이 있을 듯했다.

'뭐,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참고로 레오나에게도 물었다. 방학 동안 뭘 할 거냐고.

그리고 그녀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특유의 시니컬한 목소리로 대답해줬다.

"별 거 없어. 아카데미에서 지낼 거야.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귀찮고 여기서 사는 것도 나름 괜찮으니까."


"그래? 돈은?"
"돈은 아르바이트인가 뭔가를 해야지. 나름 괜찮은 경험인 것 같기도 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레오나의 모습이라... 뭔가 미묘하게 어울리면서도 안 어울린다.

내가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자 레오나는 인상을 살짝 구기더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내가 아르바이트를 한다니까 이상하게 보여?"


"아니. 그냥 무슨 알바를 할 건가 싶어서."
"네가 알아서 뭐 하려고? 왜, 한 번 찾아오게?"
"가능하면."

지인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 찾아가서 노는 것도 마냥 나쁘지 않은 경험이다.

레오나는 내 대답을 듣고 피식 웃더니 마음대로 하라며 손을 휘적거렸다.

"됐고, 어서 가기나 해. 지금 네 암컷이 기다리고 있지 않아?"


"응? 암컷? 어감이 조금 이상한데?"
"아, 미안. 아직 익숙치가 않아서."

아차하며 입을 만지적거리는 걸 보아 정말 실수가 맞긴 한 모양이다. 거기에 더해서 내 눈치를 보기까지.

나는 레오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종족이 다르니 이정도 말 실수는 용납해줄
수 있다. 레오나 본인도 미안해하는 중이고.

"어쨋거나 방학 잘 보내. 괜히 나처럼 이상한 방식으로 들키지는 말고."


"야. 그때는 정말 실수였어. 방심만 안 했다면 너에게 들킬 일도 없었다고."
"알았어. 그럼 난 간다. 안녕."
"그래. 잘 가. 빨간 펭귄."

쟤는 아직도 나를 펭귄이라 부르네.

레오나는 내가 째려보던 말던 킬킬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지금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망정이지,


정체를 숨기고 있기에 저런 식으로 웃는 모습은 매우 드물다.

'이걸로 인사는 다 끝냈고...'

이제 나도 본격적으로 방학을 보내야겠지.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라고 해봤자 아카데미 입구였지만 그곳에는 사랑스러운 내 여자친구, 마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애인을 기다리게 하는 사람만큼 매력적이지 못한 행동은 없으니 자연스레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아이작!"

아카데미 입구에 거의 도착하자마자 내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하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는 마리가 시야에
잡혔다. 사복이 아니라 여전히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리의 풋풋한 매력을 감출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과 달리 오히려 교복을 입고 있어 그녀의


매력이 더 늘어난 듯했다.

나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마리를 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마리는 내가 두 팔을


펼쳐주자 자연스레 안겨왔다.

"우웅... 왜 이리 늦었어?"

서로의 따스함을 느끼는 도중에 마리가 고개를 들어올리며 나에게 물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나는 그녀의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만져주면서 입을 열었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안해. 다른 사람들한테 인사하느라 늦었지. 언제부터 기다렸어?"


"사실 나도 방금 온 거야. 오빠랑 얘기하느라 늦었거든."
"그런데 왜 늦었냐고 물은거야?"
"1 분 1 초가 1 시간 같았는걸?"
비록 처음에는 얼렁뚱땅 넘어가는 듯이 사귀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내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마리는 예쁘다. 그것도 엄청.

내가 아무리 화가 나도 마리의 예쁜 얼굴을 보게 되는 순간 마음 속에 있던 화가 눈 녹듯이 사르르


사라진다. 일종의 힐링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만큼 나에게 있어서 마리의 존재는 점점 커져갔다. 주위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거나 수근거려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이제 슬슬 갈까?"
"응! 응!"

그리하여 나의 첫 방학은 귀여운 여자친구와 함께 시작되었다.

*****

아이작과 마리가 행복한 시간을 가지며 본격적인 방학을 시작했을 시간.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는 방학이 시작된지 1 시간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헬리움으로 복귀했다.

세실리는 마법에 한해서 엘프와 함께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마족일 뿐더러, 차기 마왕으로 예약돼 있는만큼
뛰어난 마법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니 공간의 제약을 모두 무시하는 텔레포트를 사용하는 것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왕성의 좌표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니 누구보다 빨리 왕성에 도착할 수 있던 것이다.

대신 아카데미 내부에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발동시켰다.

"저 왔어요. 아빠."


"어서오거라."

세실리는 헬리움의 왕성으로 돌아오자마자 헬리움의 왕, 데스칼부터 만났다. 이미 세실리가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은 데스칼은 세실리의 인사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며 반겨줬다.

일국의 공주인만큼 사람을 시켜 데려올 수도 있지만 세실리는 그런 부분에 연연하지 않는다. 자기 하나


때문에 밑의 사람이 고생하는 걸 싫어하는 편이다.

데스칼도 그런 세실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갑작스러운 복귀에도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곧 있으면
돌아올거라며 세실리가 편지를 보냈으니 미리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래. 아카데미 생활은 할만했니?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고?"

하지만 어딜 가나 자식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은 똑같다고. 데스칼은 걱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세실리에게 물었다.

비록 지금은 시선이 희석되었다지만 몇 년 전까지 악마로 핍박받았던 마족이다. 그러니 왕이기 전에 한


명의 아빠로서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세실리는 빙긋 웃으며 데스칼의 걱정을 덜어줬다.

"정말 만족스러웠어요.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요. 제논 일대기 덕분에 저를 악마가 아닌 인간으로


대우해주는 사람들밖에 없었어요."
"그거 다행이구나."
"아. 물론 제 얼굴이랑 몸을 보고 음심을 품은 사람도 있긴 했어요."
"어떤 새끼니?"

데스칼은 안심한 것도 잠시, 곧바로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세실리를 추궁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다.

하물며 그 딸이 다른 사람의 눈에도 아름답다 못해 그 이상이라면? 당연히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 놈을 찾아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다.

그에 세실리는 깔깔 웃더니 손을 흔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역시 시간이 지나도 자신의 아빠는 한결 같았다.

"장난이에요. 장난. 저 말고도 예쁜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시선은 별로 없었어요."

물론 딱 한 명 있긴 있었다. 잭슨이라고, 자신과 대화할 때마다 가슴 쪽으로 시선이 가던 백작가 아들.

하지만 조별 과제 이후로 잭슨은 자신을 피하기 시작했다. 조별 과제를 기회 삼아 여러번 골탕먹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잭슨을 제외하면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아름다운 꽃이라 해도 가시가 있다면
꺾는 걸 주저하기 마련이니.

"...알겠다. 그래도 그런 장난은 치지 마렴. 아비가 되어서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니까."


"네. 알겠어요. 놀라셨다면 죄송해요."
"뭐, 보아하니 아카데미 생활은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이구나. 정말 별 일 없는 거 맞지?"
"음..."

별 일이야 있긴 있다. 그것도 별 일이라 치부할 수 없는 사건이.

세실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년을 떠올렸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소년만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으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록 그의 옆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아무 문제가 없다. 외부를 공격할 수 없다면 내부부터


천천히 공략하면 그만이니.

편지를 주고 받는 것도 그 공략의 일환이다. 진심을 보여주는 것만큼 상대방의 마음을 열기에 효과적인
방법도 없다.

설사 시간이 오래 걸려도 세실리에게는 상관 없었다. 자신은 장수종 중 하나인 마족이며 어릴 때부터 '
절제'를 길렀기에 인내심이 매우 강하다.

'언젠가 기회가 올 거야.'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절대 없다. 이건 남녀 간의 사이도 마찬가지이며 활활 타오르던 장작이 점차 꺼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세실리는 그 순간이 언젠가 오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머릿속에는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의 모습이
여전히 재생되고 있었다.

"별 일은 없었어요. 솔직히 저에게는 아카데미 생활 자체가 별 일이잖아요?"


"흠. 그것도 그렇구나."
"그나저나 아빠. 조사는 잘 진행되고 있나요?"

세실리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데스칼이 특정 부분에 둔감하다지만 만에 하나 눈치를 채는 순간 의심을


받을지도 모른다.
의심을 받게 되면 자연스레 아이작에게로 시선이 갈테고, 아이작에게 시선이 가는 순간 사람을 시킬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실리는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다행히 그녀의 우려처럼 데스칼은 눈치를 못챈 모양이다. 데스칼은 세실리의 질문을 듣고 턱을 매만지다가
조용히 대답을 꺼냈다.

"초고 도난 사건이라면 잘 진행되고 있다. 미네르바 제국에서 서신을 보냈으니 얼마 뒤면 답신을 올


거야."
"그래요? 아빠는 누가 초고를 훔쳤다고 생각하세요?"
"제국이 조사한 바로는 아무런 단서조차 나오지 않아 곤혹을 겪고 있다 했지. 하지만 난 이게 단서라
생각하고 있단다. 제국측에서도 단서를 잡지 못 했다면 남은 건 하나밖에 없어."

뒤이어 데스칼은 진중한 목소리로 용의자를 추측했다.

"엘프. 그것도 어둠에 몸을 숨기는 능력이 고도로 특화된 다크 엘프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단서가 하나도 없으니까. 만약 범인이 조금이라도 깊게 생각했다면 단서를 조금
남겼을테지. 나는 오히려 단서가 하나도 나오지 않아서 더 다크 엘프 쪽에 힘이 실리는구나."

데스칼은 제국이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서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는 부분을 단서로 잡았다. 세실리는
그의 말을 듣고 납득이 되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족과 다크 엘프는 여태까지 큰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로서 접점이 생기게 되었다.

초고 도난 사건은 인간뿐만 아니라 마족의 분노를 키우기 충분했다. 제논 일대기는 마족의 염원을 이루게
해준 보물 중의 보물, 다시 말해 '성유물'이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

마족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초고를 찾아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띌 수밖에 없다.
실제로 헬리움의 결사단체 '리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희가 반드시 돌려드릴게요. 은인.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세실리는 초고를 돌려받은 아이작의 모습을 상상했다.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자신에게 고마워하는, 귀엽고도 사랑스러운 소년의 모습을.

상상만 했는데도 너무 행복하여 몸둘 바를 모를 것 같았다.

"하아..."
"...?"

그런 세실리의 속마음을 전혀 모르는 데스칼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 77 화 >

'공작'의 작위는 황제 또는 왕 다음 가는 권력을 지녔으며 수도 못지 않은 드넓은 영토, 막대한 부,


그리고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게다가 공작은 보통 혈통상 왕족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런 연관성으로 왕이 일찍 죽는다면 다음 후계자가


성장할 때까지 섭정이 되거나 직접 왕의 자리에 앉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나라가 흔들리는 건 변함이 없다. 후자의 경우는 당연히 암중모략을 펼쳤다는 의미고
전자는 어린 후계자를 바지사장 삼아 폭정을 저지르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탓에 많은 매체에서 공작의 지위를 지닌 사람들은 대부분 왕의 숙적으로 표현되는 편이다. 허나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상식이 똑바로 박혀있는 국왕이라면 공작에게 많은 사병과 거대한 부를 축적하게
가만히 놔둘 리가 있나?

설령 어찌어찌 힘을 쌓는다 하더라도 주변 세력에게 견제를 받을 게 뻔하다.

그건 미네르바 제국의 개국공신, 레킬리스 공작가도 마찬가지다. 레킬리스 가문은 개국 당시 광활한


영토와 막대한 자금, 그리고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주변에서 가해지는 압박이 심해지고, 더이상 존속이 위태로워질 듯하자
레킬리스 가문은 황제에게 모든 영토와 군사력을 반납했다.

당시에는 모두가 경악할만한 판단이었으나 시간이 흐르고 그 선택은 옳았다. 공작을 견제하던 세력들은 붕
떠버렸고 이내 분열되었으며 자연스레 없던 일이 되었다.

황실 또한 눈엣가시였던 공작이 모든 힘을 포기하여 큰 이득을 보았으나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황제는


더욱 강력한 집권을 위해 레킬리스 가문을 자기 옆에 붙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면 대통령 옆을 보좌하는 국무총리로 임명했다고 보면 편하다. 황제가 특정


명령을 내리면 레킬리스 공작가는 '행적적인' 분야를 모두 도맡아 처리하는 식이다.

사실상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그야말로 윈윈 전략이었다. 황제는 왕권을 강화할 수 있으니
이득이었고 레킬리스 가문은 힘이 없을지언정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레킬리스 가문이 반납한 영토는 현재 둘로 나뉘어 백작급 귀족 둘이서 통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 저택이 수도에 있는거야. 근무 때문에 황궁에 자주 방문해야 되거든."


"그렇구나."

레킬리스 가문의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 안.

나는 맞은편에 앉은 마리에게서 레킬리스 가문의 역사를 듣고 있었다. 역사에 빠삭한 나로서는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조용히 들었다.

여자친구가 자랑스럽게 자신의 가문에 대해 설명하는데 초를 칠 수 없는 법이다.

어쨌거나 위의 설명처럼 레킬리스 가문은 영지가 없고 수도에 있는 대저택만 소유하고 있다.

후작급 인사는 보통 야전 사령관을 맡고 있으니 대부분 국경지대에 포진돼 있다. 이런 기묘한 구조로 인해
실세라 할만한 귀족은 대부분 백작들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레킬리스 가문에게 힘이 없다는 건 아니다. 황실과 일종의 공생 관계를 맺고 있으니


황제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공작가의 힘도 자연스레 강해진다.

게다가 레킬리스 공작가는 제국민들에게 평판이 압도적으로 좋다. 만약 레킬리스 가문이 견제를 받아
위험해진다면 제국민이 먼저 발벗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둘이서 합심하고 폭정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은데 신기하네.'

고인물은 썩게 되기 마련이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징조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이를보아 두 곳 모두 인성 교육은 확실하다는 걸 얼추 예상할 수 있다.

특히 레킬리스 가문은 인성을 더욱 중요시 여기는 편인데 전에도 말했지만 망나니가 나오면 가차없이
추방시켜버린다.

그리고 레오르트와 리나 남매도 나를 압박했을지언정 나름 신사적으로(?) 대우했다고 봐야 한다.


인성파탄자였다면 내 의사 따위는 가볍게 씹어버리고 강제로 무릎 꿇렸겠지.

덕분에 미네르바 제국은 500 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 번의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원한 라이벌이자
문화강국인 테르스 왕국에서는 반란을 넘어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물론 미네르바 제국의 귀족이 순한맛이라면 혁명 전의 테르스 왕국의 귀족은 매운맛을 넘어선 수준인 것도
감안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테르스 왕국은 반란이 아니라 '혁명'이 발발했다.

다행히 혁명이 발발하고나서 입헌군주제와 비슷한 통치 방식을 취했다지만 불협화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아참. 아이작."
"응?"
"혹시 우리 저택에서 하룻밤 머물고 갈 생각은 없어?"

내가 머릿속으로 미네르바 제국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마리의 질문이 귀에 들어왔다. 그에 나는


상념에서 벗어나와 그녀와 마주했다.

기대감으로 한가득 채워져 있는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직시하는 중이다. 미소도 지은 걸 보면 내가


저택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를 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말 그대로 방문 차에 들리는 것 뿐이다. 마리네 저택에서 자는 건 내 계획에 없었다.

"아니. 오늘은 말 그대로 방문만 할 생각이었어. 이미 우리 가족에게도 말해 놓은 참이야."


"아... 그래? 아쉽다."

마리가 진심으로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만 곧바로 포기하는 반응을 보아 내가 거절할 걸 알면서도
권유한 것 같다.

그에 나는 못 말린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본래 이성의 집에서 하룻밤 머문다는 건 약혼을 한 사이에나


허용되는 일이다.

비록 내가 마리의 남자친구이지만 정식적으로 약혼한 사이가 아니니 하룻밤 머물렀다간 어떤 시선을 받게


될지 뻔하다. 마리네 부모님은 나를 무례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나저나 약혼이라...'

이 세상의 결혼적령기는 평균적으로 20 대 초반이다. 중세 시대를 표방하고 있어서 10 대 중후반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귀족은 의무적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해야 되기에 늦는 편이다.

물론 그 전부터 약혼을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특히 마리 같이 계급이 높은 귀족이라면 10 대 초반부터


온갖 혼담이 오고 갔을 터.

내 여자친구에게 혼담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까. 나는 불안 반 궁금함 반의 심정으로 마리에게


질문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결례일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마리여서 물어볼 수 있다.

"마리. 궁금해서 그런데 혹시 옛날에 혼담 이야기가 오고 가진 않았어?"


"응?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음... 많이 있었지? 아무래도 나는 공작가 출신이니까. 옛날에는 몇 명 만나본 적이 있어. 그중
레오르트 님도 있었고."
"...그래?"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입 안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마리의 출신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 내 씁쓸한 표정을 봤는지 마리가 약간 다급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전부 다 거절했어. 지금 연락 오는 사람도 거의 없고 레오르트 님도 인맥만 맺고 끝냈거든."


"전부 거절했다고? 어째서?"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나를 정치적 도구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거든.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의 심리를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어."

독심술 같은 건가. 전생에서도 유독 사람의 심리를 잘 읽는 사람이 있는데 마리도 부류인 듯했다.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마리는 빙긋 웃더니 나에게 말했다. 애교를 담은 건 덤이다.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도 이때문이야. 너는 가식은커녕 거짓말도 잘 못 하잖아? 난 그런 솔직한 점이


너무 좋아."
"...나도 거짓말 잘 하거든?"
"그래봤자 얼굴에 다 드러나는데 뭘. 그나저나 아이작은..."
"손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마리가 질문을 채 끝내기도 전에 마부가 저택에 도착했다고 알려줬다.

이에 마리는 마부가 앉아있는 쪽으로 돌아봤다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이건 나중에 물어볼게. 일단 내리자."


"응."

끼익-

내가 먼저 문을 열고 하차하자 안에 있던 마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뻗었다. 나는 빙긋 웃어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아래로 부드럽게 이끌었다.

이윽고 마리가 하차하자 손을 떼려고 힘을 풀었을 때였다. 마리는 내가 손을 떼려고 하자 어림도 없다는
듯이 확- 잡아챘다.

"어딜 은근슬쩍 빠지려고? 에스코트를 할 거면 끝까지 해야지?"


"하하."

귀여운 그녀의 장난에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나는 못 말린다는 듯이 웃음을 흘리고는 목적지인 저택을
바라봤다.

"우와..."

그리고 저택이 내뿜는 위용을 보자마자 탄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 높이 뻗어있는 대문은 고개를 끝까지 들어야만 끝을 볼 수 정도로 높았고, 그 뒤에 펼쳐진 풍경 또한


만만치 않았다.

대문에서부터 저택까지 이어져 있는 길과 양옆에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정원들. 길 끝에는 건축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듯한 대저택이 당당하게 세워져 있다.

한 시대를 앞서 간 듯한 장엄함과 웅장함을 선보이고 있다 해야 할까. 우리 가문의 저택도 나름 큰 편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리네 저택은 원근감을 무시할 정도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어때? 정말 대단하지? 우리 가문이 영토는 없지만 저택만큼은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있어. 드워프
장인에게 설계를 맡겼지."

옆에서 마리가 우쭐거리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나는 대문 너머에 위치한 저택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궁금한
점이 떠올라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서 몇 명이 사는거야?"
"한 100 명 정도 살고 있을 걸? 정원사만 해도 5 명이야."

다시 한 번 감탄이 나왔다. 지금 대문 뒤로 보이는 정원의 크기도 어마어마한데 그 안은 훨씬 넓은


모양이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안녕히 가세요~"

그사이 마부가 예의바르게 인사하며 떠나가자 마리는 활기찬 목소리로 배웅해줬다. 나 또한 떠나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뒤이어 마차가 점점 멀어졌을 때 쯤, 마리가 나에게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얼굴에 상큼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제 들어갈까?"
"응."

당연하지만 손은 다정하게 붙잡은 상태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힘을 꽉 준 것이 포인트.

나도 이에 질새라 손에 힘을 강하게 주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우리가 연인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응?"

이윽고 대문 앞에 거의 다 도착했을 쯤, 나는 대문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복이 아니라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검이 걸려 있다. 겉으로 보이는 무장 상태만
보아도 단순한 경비병 수준이 아니다.

전에 말했듯이 레킬리스 가문은 황실에게 모든 영지와 사병을 반납했다. 그런데 지금 대문 앞에는 단단히
무장을 한 병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대기하는 중이다.

"정지! 신원을 밝히...!"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소리치려는 찰나였다. 병사는 마리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의문을 드러냈다.

"시... 응? 마리 공녀님?"
"앗. 릭스 아저씨. 오랜만이네요."

마리도 경비병을 알아본 모양이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서로 구면인 것으로 보였다.


이어서 마리가 릭스라고 부른 병사는 뒤늦게 무언가 깨달았는지 아, 하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방학 기간이라고 하셨죠? 공작님에게 언질을 받았습니다."


"네. 이번 달은 골든 이글 기사단이 근무하는 모양이네요?"
"그렇죠. 그런데 옆의 분은..."

마리와 정답게 대화하던 병사의 시선을 나에게로 옮겼다. 이에 내가 당황하며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와락!

"제 남자친구에요!"

마리는 손을 잡는 것을 넘어서 팔짱을 끼며 힘차게 대답했다. 내가 당황하던 말던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며 싱글거리기 바빴다.

릭스도 그녀의 돌발행동에 살짝 당황했으나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남자친구 분이셨습니까? 이거 참. 제가 눈치가 없었군요."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알겠습니다. 지크. 이제 문 열어도 돼."
"네."

릭스가 같이 근무를 서던 병사에게 명령을 하자 그 병사는 대문 중앙으로 걸어갔다. 이어서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눌렀다.

끼이이익-

그러자 거대한 대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평소 관리를 말끔하게 해 놓았는지 문이 열릴 때를


제외하면 그 어떤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대문이 완전히 개방되고, 릭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우리를 진심으로 환영해줬다.

"레킬리스 가문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두 분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감사합니다. 릭스 아저씨도 수고하세요."
"고, 고생 많으십니다."

살갑게 인사한 마리와 달리 나는 다소 떨떠름하다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릭스는 그런 우리 둘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줬다.

"청춘이구나."
"... ..."

대문을 통과하는 도중에 릭스의 말이 귀를 파고들었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끼이이익-

뒤이어 완전히 개방되었던 대문이 도로 닫히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대문 앞에서 근무 중인


병사들을 바라봤다가 고개를 앞으로 옮겼다.

입구 밖에서도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던 저택이었는데 안으로 들어오니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단순한 저택이 아니라 거의 궁전 못지 않은 아름다움과 위압감을 자랑했다.

역시 공작은 공작이라 해야 하나.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감탄만 나오는 외양이다.


"어서 가자. 우리 저택을 소개하는 건 나중에 해줄게."
"...응. 그런데 아까 그 분들은 뭐야? 공작가는 사병이 없다 하지 않았어?"
"사병은 없어서 황실에서 파견을 보내. 권위를 지켜주기 위한 장치인 셈이지."
"그렇구나."

나는 마리와 팔짱을 낀 상태 그대로 저택으로 나아갔다. 저택은 길 끝에 있는지라 도달하는 시간만 해도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저벅- 저벅-

"... ..."

그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서 오고 가는 말은 없었다. 대화가 단절되니 자연스레 기묘한 분위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때문일까. 마리는 팔짱을 끼는 것을 넘어 내 어깨에 기대었고, 나는 처음에 주위를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꾸욱-

하지만 이내 마리가 팔짱을 더 강하게 끼면서 다시 그녀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아까는 인식하지 못 했지만
팔짱을 끼게 되니 말랑말랑한 가슴의 감촉이 교복 너머로 전달되었다.

비록 전생에서 연애를 해본 적이 있어도 이런 부분에서는 면역이 거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면역력이


다 떨어졌다고 봐야 옳겠지.

아무튼 간에 이런 상황은 나에게 너무 자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세실리도 그렇고 여자의 가슴은 남자의
마음을 들끓게 하기에 너무 효과적이었다.

더군다나 어느 순간부터 걸음걸이까지 느려져 기묘한 분위기까지 풍겼다. 만약 낮이 아니라 밤이었다면 이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겠지.

스윽-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우선 그녀의 머리에 내 뺨을 갖다 대었다. 내 키가 작은


편이지만 이정도는 할 수 있다.

"으으응..."

마리도 내가 얼굴을 슬며시 갖다 대자 기분 좋은 소리를 내었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것처럼 우리 둘은


한동안 서로 머리를 맞대었다.

"...아이작."
"응."
"아까 내가 묻다가 만 거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물어봐."

나의 무뚝뚝한 허락이 떨어지자 마리는 내 어깨에서 머리를 뗀 뒤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나 또한 자세를


풀고 그녀와 마주했다.

하얀 눈 같았던 그녀의 뺨은 노을처럼 붉게 물들었고, 푸른 바다처럼 청량한 눈동자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어 서로 간의 얼굴이 가까웠기에 더욱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우면서도 풋풋한 마리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을 때, 그녀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했다.

"아이작은 옛날에 혼담 같은 거 없었어?"


"음... 없었던 걸로 알고 있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없었다.

아버지는 평민에서 귀족으로 승급한 케이스라 인맥이 다소 좁은 편이셨고, 어머니도 아버지가 기사 시절


때 만나신 분이다.

거기다 혼담이 오고 간다는 건 본질적으로 정략결혼에 가깝다. 아버지가 과거, 붉은 사자라 명성을
떨쳤다고한들 그건 기사 시절이지 정치력은 입증되지 않은 상태다.

하물며 우리 부모님은 정략결혼보다 연애 결혼을 원하신다. 혼담이 왔을지라도 나도 모르는 사이 부모님


선에서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다행이네."

마리는 내 대답이 진실이라는 걸 독심술로 파악했는지 안심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내가 의아한 마음을 지녔을 때 마리가 훅 치고 들어왔다.

"그러면 혼담은 내가 처음일 수도 있겠네?"


"...뭐?"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갑작스러운 돌직구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는지 마리는 베시시 웃으며 장난스럽게 굴었다.

본인도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인지 실시간으로 얼굴이 빨갛게 익어가는 중이다.

"왜 그리 당황했어? 우리 나이에 혼담이 이루어지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잖아?"


"그..."

이게 중세 시대라는 건가. 전생이 기억이 박혀있기에 매우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고등학생이랑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는 셈이니 나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정작 그 고등학생이랑 연애를 하고 있지만 결혼은 빨라도 너무 빠르다. 시대 차이 때문에 발생한


괴리감이었다.

"혹시 우리 부모님이 거절하실까봐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부모님은 그리 모진 분들이 아니시거든.


가문을 이어받을 우리 오빠만 결혼을 잘 하면 끝이라 나는 딱히 상관없어."

마리는 내가 다른 의미로 당황하여 말을 꺼내지 못 하는 중이라고 착각했는지 살살 달래줬다.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속으로 고민하다가 숨을 길게 내쉬며 작게 대답했다.

"...그래도 당황스럽네.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그냥 네가 좋기도 하고, 나중에 책을 쓸 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책? 제논 일대기?"
"응. 상상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잖아? 그리고 원래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경험하는 게 훨씬
효과가 좋아. 그러니까..."
뒤이어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조금 도와줄 수 있어."


"... ..."

세실리 못지 않게 야릇하면서 앙큼한, 남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기 만들기에 충분한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나서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얼굴에 열이 얼마나 올랐는지 손이 다


뜨거웠다.

달달하디 달달했던 마리의 매운맛 버전을 몸소 겪으니 당장이라도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제논 일대기가 전체 이용가라서 다행이다.'

야설을 적었다면 어떤 추궁을 받게 되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것 봐. 얼굴에 다 드러나잖아?"


"...시끄러."
"어라? 우리 아이작 화났어요? 뽀뽀라도 해줄까?"
"... ..."

애가 점점 매워지기 시작했다.

< 78 화 >

혹시 못 보신 분들 있을까봐 팬아트란에 새로운 팬아트가 추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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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겪는 매운맛 마리 버전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저택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는지라 얼굴의 화끈거림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해도 마리의 말마따나 얼굴에 다 드러나서 큰 의미가 없었다.

"꾹. 꾹."
"하지 마."
"싫어. 더 할 거야."

마리는 그런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연신 장난을 쳤다.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그녀는 상큼하게


웃으며 무시했다.

이유를 물으니 붉은 물이 나오는지 궁금하데나 뭐래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결국 반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기분 나쁜 것도 아니고 마리만의 애정 표현이니 가만히 놔둘


생각이다.

우연히 누군가 지나가다가 우리 둘을 보더라도 상관없다. 마리라면 그 사람에게도 당당하게 연인 사이라며


공표할테니.

남자친구가 된 입장에서 조금 부끄럽긴 해도 자신감 넘치는 그녀가 좋다. 가끔씩 나보다 더 남자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하여 마리가 나에게 장난을 치면서 저택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어서 오십시오, 마리 아가씨. 가문으로 돌아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택 앞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한 노인이 예법에 따라 정중하게 인사하며 반겨줬다. 나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한 노인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전통적인 집사복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겼으며 콧수염은 한치의 흐뜨러짐 없이 말끔하게 정돈했다. 또한


집사복으로도 감추지 못 하는 듬직한 체구로 하여금 재련된 검을 방불케 했다.

그간 단련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강인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세바스찬 집사장 님. 오랜만이네요. 그간 평안하셨어요?"


"저야 늘 똑같습니다. 그런데 옆의 붉은 머리의 신사분은 누구이신지요?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인데..."

마리의 인사를 받은 노인이 숙였던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나를 바라봤다. 허리를 숙였을 때는 몰랐는데
혀를 펴고나니 그의 키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아버지의 키가 190cm 에 달하는데 앞의 집사장은 그와 비슷했다.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등을


반듯하게 펴는 걸 보면 실력자가 분명하다.

'보통 집사 캐릭터가 강하다고 들었는데...'

판타지 세계 답다고 해야겠지. 나는 예리하게 빛나는 집사장의 눈빛에도 전혀 물러서지 않으며 대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마이샬 가문의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흠. 역시 마이샬 가문이었군요. 어쩐지 붉은머리가 익숙하다 했습니다."

마리가 세바스찬이라 부른 집사장도 내 아버지의 명성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나는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무튼 간에 레킬리스 가문의 저택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굳이 두 분의 관계를 여쭈어 볼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세바스찬이 나긋나긋하지만 능청스럽게 이야기했다. 하기야 아직까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으니 눈치를
못 채면 그 사람이 이상한 거겠지.

그에 나는 쓴웃음을, 마리는 더욱 진하게 웃으며 우리의 관계를 과시하듯이 어깨에 기대었다. 세바스찬은
우리의 달달한 관계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세바스찬. 지금 안에 누가 있어요?"
"두 분 모두 안에 계십니다. 특히 주인님께서는 아가씨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일을 하루만에
처리했다고 들었습니다."

벌써부터 딸바보의 냄새가 스멀스멀 풍기는 것 같다. 솔직히 마리 같은 딸이 있다면 누구라도 딸바보가
되는 것이 정상이다.

물론 남자친구인 나로서는 거대한 장벽이 떡하니 세워진 거나 마찬가지지만. 순탄치 않은 길이 예상된다.

그런 내 심정도 모르는지 마리는 그저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아빠도 참. 못 말린다니까."
"우선 두 분 모두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영식께서는 잠깐 손님방에 머물러야 할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전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성심성의껏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세바스찬이 저택 쪽으로 손을 내밀자 우리 둘도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세바스찬도 앞서 나가며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이윽고 저택의 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정문부터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목재로 구성된 정문에는
레킬리스 가문을 상징하는 독수리가 조각돼 있었으며 당장이라도 하늘 위로 비상할 듯한 위엄을 풍겼다.

드워프가 심혈을 기울여서 설계했다는 마리의 말처럼 공을 들인 게 눈에 보였다.

끼이익-

내가 정문을 감상하는 도중에 세바스찬이 문을 대신 열어줬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이 안쪽을


향해 손으로 가리켰다.

이에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마리가 도통 풀지 않았던 팔짱을 풀었다. 절대 풀지 않을 것처럼 끼고


있었던지라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집에서는 예의를 차려야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의문에 찬 얼굴로 마리를 바라보니 그녀가 빙글거리며 말했다. 맞는 말이긴 해도 조금 아쉬웠다.

그런 내 마음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마리가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조금만 참아달라는 부탁은


덤이고.

"그럼 손님 방부터 가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막간을 틈타 마리가 나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동안 세바스찬이 안내를 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듬직한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뒤를 졸졸 따라갔다.

저택 내부는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으나 외부의 모습처럼 웅장함이 감돌았다. 단조로우면서도 서로


어울리는 색상들로 조화를 이루었고 내부 구조물 또한 필요한 것만 배치돼 있어 눈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특히 그중 가장 압권인 건 바로 천장이다. 전에 마리가 말해주길 레킬리스 가문은 역사를 중요시 여긴다고


들었는데 천장에는 500 년 전 '종족전쟁' 당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엘프와 수인 연합, 그리고 인간이 서로 충돌하는 그림이었으며 드워프는 연합이라기보다는 인간을


지원해주는 세력이라 멀리서 무기를 공수하는 중이다.

역사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들도 단번에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묘사가 잘 되어있었다.

'종족전쟁이 끝나고 미네르바 제국이 탄생했으니 천장에 그릴만도 하지.'

아무튼 화려함이 없다는 말은 취소다. '하늘'이나 마찬가지인 천장에 저런 그림을 그렸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다.

"미네르바 제국은 종족전쟁 당시 평범한 왕국에 지나지 않았죠. 하지만 초대 황제의 뛰어난 능력과
레킬리스의 정치력을 바탕으로 제국으로 다시 건국되었습니다. 종족전쟁 이후 있는 냉전 시기를 무사히
거쳐왔고 지금에 이를 수 있었죠."

내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을 때 세바스찬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니 세바스찬이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가 천장을 가리키며 그에 물었다.


"저거 종족전쟁을 묘사한 거 맞죠?"
"네. 그렇습니다."
"마족이 없는 게 좀 아쉽네요. 마족도 두 분파로 나뉘어 참전했는데."

종족전쟁 당시에 마족은 두 부류로 나뉘어서 각 연합에 참전했다. 인간을 증오하는 마족과, 그렇지 않은
자들.

하지만 지금 천장의 그림에는 마족의 모습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족은 시대 특정상 차별 때문에 큰
공로를 세우진 못 해도 나름 역할이 큰 편이었다.

세바스찬도 내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본인도 잘 알고 있는지 약간 곤란하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저도 안타깝습니다. 당시 저 그림을 그린 작가가 마족에게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들었거든요.


아마 그때문에 마족을 넣지 않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흐음..."
"그래도 지금은 다시 작업 중이라 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역사를 덕목으로 여기는 레킬리스여서 약간 의아하긴 해도 다시 작업 중이라니 쉽게 넘겼다. 뒤이어


세바스찬이 재차 안내를 해주기 시작하자 나와 마리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이윽고 손님방으로 따라가는 중, 길게 이어진 복도의 벽에 설치된 초상화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초상화 밑에는 이 세상에서 사용되는 연도와 더불어 간략한 설명이 덧붙여진 상태다.

'연도별 레킬리스 가주인 모양이네.'

가끔씩 마리처럼 머리가 흰색인 사람의 초상화도 있는 걸 보면 확실하다. 내가 초상화를 보면서 천천히
걸어가자 안내를 하던 세바스찬도 내 걸음걸이에 맞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옆에 있는 마리 또한 내가 구경을 다 할 때까지 가만히 있어줬다. 그녀에게는 질리도록 본 초상화여서


볼멘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나를 배려해줬다.

"...음?"

초상화 하나 하나를 관찰하면서 지나가다가 문득 특이한 초상화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설명이 붙여진 팻말은 보통 흰색이었는데 이건 검은색 바탕이다.

이에 의문을 지니며 설명란에 붙여진 설명을 바라보니 이내 납득할 수 있었다.

[레킬리스 가문 역사상 최악의 악인.]


[공작위에 오르기 위해 형제를 암살.]
[미네르바 제국의 부흥을 위해서라며 사병을 모집. 그리고 주변 귀족과 결탁.]
[이밖에도 평소 문란한 생활을 했으며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로 고용인을 겁박.]
[이로인해 태어난 사생아들은 전부 추방시킴.]

호부견자라고, 호랑이 밑에 언제나 호랑이가 태어나는 법은 아니다. 이처럼 인품이 출중한 인재를
배출하는 레킬리스 가문이라 할지어도 악인은 존재하는 법이다.

아무래도 유독 눈에 띄게 만든 걸 보면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의미인 것으로 추측된다. 원래 사람은 좋지


못한 역사에서 더 큰 깨달음을 얻는 법이니까.

"헤이즐 하우젠 레킬리스. 능력은 좋지만 그 능력을 좋지 못한 곳에 사용한데다가 인품마저 좋지 않았죠.


다행히 그의 아들이 반면교사 삼아 레킬리스 가문이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아까처럼 내가 초상화를 유심히 관찰하자 세바스찬이 부가 설명을 해줬다.

나는 턱을 매만지며 초상을 바라보다가 그의 설명을 듣고 궁금한 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주변 귀족과 결탁했다면 이거 반란의 징조가 아니었나요? 레킬리스 가문은 황실의 측근일텐데..."
"다행히 황실이 눈치채기 전에 다음 대 가주께서 막으셨습니다. 당연히 헤이즐 공작은 폐위되었고 그의
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았죠. 그 사람이 바로 인디스 하우젠 레킬리스이며 현 공작님의 조부님이십니다."
"음..."

역시 재미있다. 나에게 역사만큼 흥미를 이끄는 건 없다.

조금 더 둘러보고 싶었으나 이대로 시간을 지체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 발을 떼었다. 역사에 대한 건


나중에 차차 알아가면 그만이다.

"영식께서는 역사를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재밌잖아요."
"허허허. 레킬리스 가문에 잘 어울리시는군요."

세바스찬은 그리 말하면서 마리를 힐끔 바라봤다. 마리는 그의 시선에 담긴 뜻을 눈치챘는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였다.

릭스 때와 달리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정말 귀엽기 짝이 없었다. 하마터면 무심코 손을 잡아버릴


뻔했다.

"이곳이 손님방입니다. 곧 있으면 간단한 다과를 들고 올 겁니다. 혹시 하룻밤 머물고 갈 생각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아뇨. 아뇨. 그냥 방문 목적으로 온 겁니다. 곧 있으면 갈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아! 저쪽에 책이 있으니 심심하시다면 읽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편안한 시간 보내시길."

끼익-

나는 세바스찬이 직접 문을 열어주자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마리와 눈을 마주치는 건 잊지 않았다.

그녀는 짧은 시간이어도 나와 떨어지는 게 싫었는지 뾰루퉁한 표정을 짓기 있었다. 그에 나는 빙긋


웃어주며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기다릴게.'

내가 입모양으로 그리 알려주자마자 마리가 해맑게 웃어줬다. 뒤이어 그녀가 손을 흔들어주자 나 또한


손을 흔들어줬다.

덜컥-

세바스찬이 문을 닫아주자 손님방에는 정적이 가라앉았다. 비록 나 혼자 있다지만 순식간에 분위기가


고요해지니 기분이 묘해졌다.

우선 세바스찬이 말하길 나중에 간단한 다과를 들고 온다 했으니 자리에 앉아있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등을 빙글 돌려 손님방의 풍경을 바라봤다.
"...허."

이제는 감탄도 나오지 않는다. 손님방이라 해놓고 거의 작은 집 하나 수준으로 넓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재벌집 내부의 풍경이라는 걸까. 중앙에는 손님 응대용 테이블이 길게 설치돼 있었으며
바깥에는 테라스도 존재했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는 책장들이다. 분명 손님방일텐데 서재 수준으로


책장이 반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나는 다른 걸 다 제쳐두고 책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과연 책장에는 무슨 책이 있을까 싶어서.


가능하면 내가 읽지 않은 책이 있었으면 한다.

"어디 보자... 이건 읽었고, 이것도 읽었고, 이것도 읽었네."

뭐야. 다 읽은 거잖아.

레킬리스 가문 아니랄까봐 역사 관련 서적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으나 집에서 다 읽은 것들이다. 굳이


역사책이 아니더라도 집에서 한 번쯤은 봤던 책이다.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방이라서 그런지 대중적으로 유명한 책들을 골라 넣은 듯했다. 나는 아쉬움에


책장에서 발을 돌리려고 했다.

[제논 일대기]

"... ..."

새로이 설치됐는지 텅텅 비어있는 책장에 내 책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것도 1 권부터 최근에 나온 10


권까지 반듯하게.

다른 곳도 아니고 공작가 손님방에 제논 일대기가 있으니 뭐라고 해야 할까. 고등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에


판타지 소설이 실려있는 듯한 기분이다.

'근데 제논 일대기는 한 명당 한 권밖에 구매하지 못 한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속으로 의문을 품으면서 제논 일대기 1 권을 책장에서 꺼냈다. 꾸준히 관리했는지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았고 책 표지도 말끔했다.

심지어 책 특유의 눅눅함과 퀴퀴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최근에 구매했거나 습기마저 철저하게 관리한
거겠지.

샤락-

나는 책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책 표지를 넘겼다. 종이가 약간 변색되었으나 1 권이 발매된 시기를


고려하면 오히려 잘 관리한 수준이다.

'이건 다시 넣자. 다른 책이나 봐야지.'

내가 쓴 책이라 그런지 크게 흥미가 없었다. 나는 제논 일대기를 도로 책장에 넣고 다른 책이 있는지


확인했다.

"어? 이건 못 봤던 거네?"

책장 아래에 있어서 미처 발견하지 못 했던 책이 하나 있었다. 나는 기대를 담으며 그 책을 뽑았다.


정말 운이 좋게도 역사와 관련된 서적이었다. 심지어 그 복잡하다던 '종족전쟁'에 대한 탐구서여서
나에게 안성맞춤이다.

이에 희희낙락하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간 뒤 손님용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마리가 돌아올 때까지 이
책을 보면서 진득하게 시간을 보내면 될 듯했다.

'횡재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 페이지를 넘겼다. 아래쪽에 꽂혀있던 책이라해도 열심히 관리한 흔적이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다.

뒤이어 집중력을 발휘해 책이 전달해 주는 지식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책이었던지라 더욱 재밌게
감상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종족전쟁이 발발한 근본적인 원인을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구나. 이것도 흥미롭네.'

책이란 본래 사람이 쓰는 지식의 양성소. 당연하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책에서 전달되는 지식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종족전쟁이 터진 이유를 엘프와 인간 사이의 이념 차이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이 책은


다르다. 인간이 엘프에게 도전장을 내밀기 위해서 일종의 조작 사건을 일으켰다고 말하는 중이다.

실제로 종족전쟁 같은 대전쟁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명분'이 반드시 필요하다. 명분도 없이 주변


국가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순간 몰매를 맞을 것이 뻔하며 최악의 경우 세계 2 차 대전의 나치 독일처럼 될
수 있다.

물론, 국민이 전쟁을 반대할 수도 있으나 나치는 자국민을 세뇌시켜 눈과 귀를 가렸다. 그때는 인터넷도
보급되지 않았으니 세뇌하기는 더욱 쉬웠을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종족전쟁 당시 인간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싸웠을까? 궁금해지네.'

하나 하나 차근차근 역사를 되짚으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지는 법이다.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하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도 공감은 절대 못 하는 법이니.

나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책 속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가끔씩 누군가 내 앞을 왔다 갔다하는 기척이


느껴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번 몰입하면 극한의 집중력이 발휘되는 나만의 특성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흠."
"... ..."
"으흠!"

그러다 누군가 헛기침을 토하는 소리가 귓가에 박혀들었다. 동시에 단단했던 내 집중력이 한순간에
깨졌으며 지식의 바다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나는 집중력이 깨져 불쾌해진 것도 잠시, 이곳이 내 집이 아니라 레킬리스 저택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에 서둘러 고개를 들어올리며 헛기침을 한 주인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푸른빛이 감도는 흰색 머리카락이었다. 세바스찬처럼 나이가 들어 성성해진


머리카락이 아니라 원래부터 새하얀 머리카락.

얼굴 또한 엄격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매우 특이한 인상이었나 온화함이 깃든 푸른색 눈동자로 하여금


자비로움이 느껴졌다.

옷차림 또한 단촐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지는 흰색 양복이다. 나는 눈을 깜빡이면서 전조도 없이 내 앞에


등장한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윽고 남자의 시선과 내 시선이 서로 교차했을 때 쯤, 남자가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젊은 친구가 역사에 관심이 많군?"


"... ..."

그 말이 나오자마자 다급하게 그의 양옆을 둘러봤다. 속으로는 아니길 빌었다.

하지만 세상 일은 쉽지 않다고. 내 불길함대로 남자의 양옆에는 세바스찬과 마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책에 집중하다가 그들이 돌아온 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큰일났다.'

여자친구의 아버지에게 예의를 밥 말아먹은 놈으로 찍히게 생겼다.

< 79 화 >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나는 한 번 집중하면 자력으로 빠져나오기 어렵다. 부모님이 말씀하시길 옆에


폭발이 일어나도 꿋꿋이 집중할 정도만큼 뛰어나다고.

하지만 마냥 장점이 될 수 없으며 상황에 따라 단점이 될 수도 있는 특징이다. 예를 들어 식사 시간이


된지도 모르고 몰입했다가 끼니를 거른 경우가 적지 않아 있었으며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가급적 혼자만의 시간이 아닌 이상 집중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내가 손님방에서 독서에
집중하는 것도 나중에 세바스찬이 나를 부를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젊은 친구가 역사에 관심이 많군?"


"... ..."
"보통 제논 일대기를 읽는 편인데 말이지. 신기하군."

그리고 현재, 내 뛰어난 집중력은 장점이 아니라 단점으로 나타났다. 그것도 최악이 될 수도 있는
상황으로.

나는 코 앞에서 인자한 미소를 띈 채 나를 내려다 보는 중년인과 시선을 교환했다. 온화함과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인상과 푸른빛이 감도는 새하얀 머리카락까지.

'신사'의 이미지를 표현한다면 딱 눈 앞의 남자를 내세우지 않을까. 그만큼 말끔한 외모와 더불어 양복이
매우 잘 어울렸다.

'...어?'

칭찬인지 아니면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건지 모를 남자의 말도 잠시,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양 옆을


번갈아봤다.

정갈한 자세로 기립해 있는 세바스찬과 어딘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주인이자 마리의 아버지, 레킬리스 공작이 손님방에서 쉬고 있던 나를 직접 찾아왔다.


'뭐, 뭐야? 응접실은 놔두고 왜 직접?'

세바스찬이 나를 데리고 온 곳은 응접실이 아니라 손님방이다. 손님들이 보다 편히 쉬기 위해 집주인이


마련한 공간이며 다양한 즐길거리가 있는 일종의 휴게실.

만약 저택의 주인이 손님을 보고 싶다면 손님방에 직접 찾아오지 않고 고용인을 시켜 응접실로 초대해야


정상이다. 나 또한 그 부분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 놓고 책에 집중할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레킬리스 공작은 그러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응접실로 초대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행차했다.

물론 집주인이 직접 손님방으로 찾아온다고 무례를 저지른 건 아니다. 사정상 격식을 차릴 수 없다면


지금처럼 직접 찾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만 레킬리스 '공작'이 그럴 줄은 몰랐다는 것이 내 실수였을 뿐. 내 고유의 집중력이 단점으로 승화된


상황이다.

"독서에 집중하고 있던 것 같은데 방해했다면 내 사과하지."

실타래처럼 머릿속을 하나 둘 씩 정리하는 도중, 레킬리스 공작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딴에는 조곤조곤하게 말했겠지만, 울림통 자체가 큰 건지 몰라도 성량이 상당히 큰 편이었다.

그 덕분에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섥히던 머릿속이 말끔해졌다. 머릿속이 깔끔해지니 현재 상황을 더
정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

나는 얼어붙었던 몸을 곧바로 해동시키며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한 번 무례를 저질렀는데 두


번이나 저지를 수는 없는 법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그의 키가 세바스찬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마리의 키가 어디서 왔나


했는데 유전이었던 모양이다.

일단 쓸데없는 잡념은 뒤로 하고, 나는 쩔쩔매며 그에게 사과했다.

"아, 아닙니다. 공작님이 오셨는데도 눈치채지 못 한 제 잘못이 큽니다."


"그럼 사과를 받은 걸로 알겠네. 젊은 친구가 그만한 집중력을 가진 것도 신기하군."

딴에는 칭찬처럼 들리겠지만 적어도 내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가문의 어르신이 왔는데도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놈팽이라고. 실로 아찔함이 드는 순간이지 않을 수 없다.

본래 첫 인상이 오래 가는 법인데 첫 인상부터 말아먹게 생겼다. 나는 속으로 자책하며 다시 한 번 사죄의


말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하하하. 너무 그러지 않아도 된다네. 놀리는 게 아니라 칭찬이었으니까."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레킬리스 공작은 뒤이어 손을 슬며시 내밀었다.

흰색 장갑이 씌워져 있는 손에 시선이 갔을 때 쯤, 레킬리스 공작이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아까 전보다


한층 더 부드러워진 말투다.
"만나서 반갑네. 알고 있겠지만 레킬리스 공작가의 가주, 드미트리 하우젠 레킬리스라고 한다네. 마리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기도 하지. 우리 저택에 온 걸 환영하네."
"마, 만나서 영광입니다. 마이샬 가문의 차남,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흠. 마이샬 가문이라..."

내가 공손하게 악수를 받으며 자기소개를 하자 레킬리스 공작, 드미트리는 내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붉은 머리카락이 흔치 않은데다가 내 아버지인 호크를 떠올리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혹시 자네 아버지 성함이 호크인가?"


"네. 맞습니다."
"재미있군."

뭐가 재미있다는 거죠. 실시간으로 타들어가는 내 마음과 달리 드미트리는 싱긋 웃었다.

맞잡은 손에 힘을 강하게 주는 걸 보면 미묘한 압박감을 심어주려는 것일 수도.

내가 속으로 쓴웃음을 흘리자 드미트리는 손에 힘을 빼면서 악수를 풀었다. 나는 악수를 풀자마자


욱신거리는 손을 뒤로 숨기고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분명 나와 같은 문과일텐데 기본적인 악력이 장난 아니다. 원래 어른들이 힘이 세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아프다.

"우선 내가 왜 직접 손님방에 온 건지 궁금해 할 수도 있겠군. 사실 내 부인이 지금 응접실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렇다네. 다른 한 곳은 리모델링 중이라 사용할 수가 없고."
"그, 그렇군요."
"일단 자리에 앉도록 하지. 보아하니 독서에 몰두하느라 다과에는 손도 안 댄 것 같군."

실제로 내가 앞의 테이블 위에는 다양한 먹을거리가 놓여있었다. 네모반듯한 비스킷부터 시작하여


아직까지 김이 모락모락 풍기는 차까지.

아무래도 독서에 집중하는 동안 하녀가 잠시 왔다 간 모양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어색한 웃음을 흘리면서


속으로 바짝 긴장했다.

드미트리가 꺼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찌르는 기분이다. 안 그래도 여자친구의


아버지라 더욱 쫄릴 수밖에.

"세바스찬은 내가 부를 때까지 밖에서 대기하게. 그리고 마리는 옆에 앉고."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면 호출해주십시오."

드미트리의 지시에 세바스찬은 허리를 꾸벅 숙이며 방 밖으로 나갔고, 마리는 아무 말없이 발을 옮겨 내


옆자리에 앉았다.

슬쩍 마리를 힐끔거리니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까 내가 저지른 추태 때문에 저런 표정을 지은


것 같다.

괜스레 미안해져서 눈치만 보고 있을 때였다.

"일단 이거 하나만 바로 묻도록 하지. 내 딸과 무슨 관계인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훅 치고 들어왔다. 나는 무릎 위에 올렸던 주먹을 꽉 쥐었다.

원래부터 딸바보의 냄새가 풍기던 드미트리여서 이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니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런 질문하지 말랬잖아. 이미 집사장님한테 다 들었으면서."

내가 입을 떼지 못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마리가 투정을 부렸다. 그녀를 바라보니 한 쪽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팔짱을 끼는 중이다.

드미트리도 불만을 한가득 담은 딸의 질책에 너털웃음을 흘리고는 손을 앞으로 내저으며 본인이 먼저


사과했다.

"하하하. 이거 미안하군. 골리려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말이야. 내 딸의 말처럼 이미 집사장에게


이야기는 들었다네."
"아... 그러면..."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공작이라고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공작가는 권위주의와
많이 동떨어진 편이거든. 그러니 자네가 내 딸아이와 사귀는 건..."

부드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드미트리는 입을 꾹 다물더니 눈매를 좁혔다.

"...안 되겠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용납할 수 없는 문제야."


"아빠!"
"물론 농담이란다, 마리."

농담이 전혀 농담 같지가 않다. 나는 아빠와 딸의 기싸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허리만 꼿꼿하게 펴고


있을 뿐이다.

'나름대로 분위기를 편하게 만드려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귀족, 그것도 백작급 이상이었다면 딸이 남작가 영식과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노발대발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중간중간 농을 던지면서 분위기를 풀어보려 시도하는 중이다. 마리도 그가 장난을 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어서 저리 격하게 반응하는 것일테고.

배려를 하는 건 좋지만 배려를 받는 입장으로서는 다소 난감한 상황이다. 비록 선을 확실하게 긋긴 했지만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으니.

지금은 가급적 공작이 하는 질문에만 대답을 하는 게 현명한 선택지일 것 같다. 나는 주먹 쥔 손에 땀이


흥건해지는 걸 느끼며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혹시 우리 저택에서 하룻밤 머물고 갈 생각인가?"


"...아뇨. 오늘은 방문을 목적으로 온 겁니다."
"흠. 알겠네. 그런데 내가 알기론 마이샬 영지는 수도에서 마차로 10 시간 이상 걸리는 걸로 알고 있는데
괜찮겠나? 정 안 되면 하룻밤 머물러도 상관없네."
"호의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점심을 먹기 전에 출발할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런가? 그거 참 아쉽군."

아쉽다고? 오히려 다행이라 여겨야 하지 않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딸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뉘앙스를 풍기던 양반이 어째서 태도를


바꾸었는지 살짝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내 눈빛을 읽었는지 드미트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별 이유는 없다네. 최근에 내 딸아이가 저택에 초대한 사람이 거의 없어서 그렇거든. 그것도 남자를
말일세."
"...아빠."
이제는 마리의 목소리가 스산해졌다. 옆에 있는 내가 다 흠칫거릴 정도로 은은한 분노가 실려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드미트리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곧바로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딸아. 내가 너무 심했니? 화가 났다면 사과하마."


"앞으로 그런 말 좀 하지 마세요. 얘가 얼마나 긴장하겠어요? 어머. 이 땀 좀 봐."

마리는 나를 위로해주면서 무릎 위에 올렸던 내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땀도 땀이지만 그녀가 내 손을


잡자마자 드미트리의 눈 밑이 살짝 꿈틀거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걸 멕인다고 표현하는 걸까. 나는 마리의 부드러운 손을 잡으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상 애인


관계라고 간접적으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는지라 여러모로 곤란했다.

"...뭐,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네가 네 스스로 선택했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 아빠는 네 선택을


존중해주마."
"고마워요."
"단, 조건이 있다."

훈훈함이 흐르는 것도 잠시, 조건이 있다는 드미트리의 말에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나는


안도하려는 찰나 그의 말을 듣자마자 긴장의 끈을 다시 붙잡았다.

이어서 드미트리는 아직까지 붙잡고 있는 우리의 손을 바라보다가 내 얼굴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흥미로운 대상을 관찰하는 듯한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는 중이다.

순식간에 변한 분위기에 마리조차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하고 있을 쯤, 드미트리가 싱긋 웃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허나 울림통이 커서 조용히 말하는 것조차 크게 들렸다.

"전에 마리가 보내 준 편지를 본 적이 있다네. 마리가 그토록 싫어하던 역사를 가르쳐 준 장본인이
자네라더군. 내 말이 맞는가?"
"부족한 실력이지만 맞습니다."
"겸손을 유지할 필요는 없네. 오히려 마음에 드니까. 우리 레킬리스 가문은 역사를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거든. 역사는 과거와 대화하고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수단이니까 말일세."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드미트리가 꺼낸 말은 전생에 있던 명언과 놀라울만치 똑같았다.

그만큼 레킬리스 가문은 대대로 역사를 우선 순위로 두었다는 의미다. 레킬리스 가문에게 역사란
신념이면서 동시에 명예일 것이리라.

"남을 가르친다는 건 그만큼 폭넓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니 언제, 어디서, 누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건 묻지 않겠네. 이건 기초 중의 기초니까 말이야. 대신 다른 질문을 꺼내도록 하지."
"...네."
"보아하니 자네는 펜을 오래 잡은 것 같더군. 아닌가?"

드미트리는 그리 말하면서 턱짓으로 내 손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내 중지 손가락에 난 펜혹을 알아챈


듯했다.

이에 내가 버릇적으로 중지 손가락의 펜혹을 문지르고 있을 때, 드미트리가 나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똑같이 '펜을 잡는 사람'으로서 하나 묻도록 하지. 역사적으로 펜을 쥔 사람들은 칼을 쥔


사람들을 휘하에 놓았다네."
"...맞습니다. 반대로 칼이 강해지면 쿠데타가 발생해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워지죠."
"정확히 알고 있구만. 그러면 여기서 질문하겠네."

잠깐 말을 멈춘 드미트리는 나를 샅샅이 파헤치겠다는 듯, 예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는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포식자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있었다.

여기서 물러났다간 기세에 억눌려 말도 제대로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니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뒤이어 쥐 죽은 듯한 고요함 속에서, 한참동안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드미트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약 그 펜을 쥔 사람이 국가를 넘어 세상마저 바꿀 수 있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 ..."
"가만히 방관하고 있을건가, 아니면 막기 위해 대항할텐가?"

나는 그 질문에 한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둘 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지?"

여기서 드미트리가 모르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요."

나는 이 세상보다 사회적으로 진보된 문명에서 태어나 자란 환생자라는 것을.

"역사가 그걸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둥이를 털 시간이다.

< 80 화 >

펜은 칼보다 강하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명언이며 여기에는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드미트리가 나에게 말한 '펜을 잡은 사람'도 비슷하다. 은유적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펜으로 작품을 쓰는
문학 작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신문을 작성하는 기자일 수도 있다.

허나 우리는 여기서 드미트리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한다. 드미트리는 미네르바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높은 직위를 가진 공작이며, 자연스레 '정치'와 큰 관계에 놓여있다.

다시 말해 드미트리가 언급한 펜을 잡은 사람은 '정치인'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했으니 모두 해당된다고 보아야 옳겠지.

무엇보다 나는 드미트리가 어떤 의도를 담아 질문을 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문화계에 큰 영향을


끼치다 못해 서서히 일상 속에 녹아들기 시작한 책, 제논 일대기를 말하는 것일 터.

세계를 들었다 놓았다하는 책은 지금까지 전혀 없었으니 펜을 잡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경계해야 하는


대상임이 분명하다.

'주의할 수밖에 없겠지.'

만약 펜의 위력을 실감하고 싶다면 멀리 나가지 않아도 된다. 지구인이라면 절대 모를리 없는 이름이자 제


2 차 세계 대전의 주인공, 히틀러가 있다.

히틀러는 펜의 위력을 극대화시켜 독일 전체를 세뇌시켜 자기 멋대로 이용했고, 더 나아가 2 차 세계


대전을 발발시켰다. 그 전쟁 하나로 유럽 전역이 화마에 휩싸였으며 훗날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거인을
깨우는데 일조했다.

단순히 나라 하나만으로도 이런 참상이 발생하는데 만약 영향력이 세계 전체라면? 당연히 경계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 세상은 판타지 세상이다. 마나, 마법, 몬스터, 그리고 인간이 아닌 종족까지 존재하며 사회
문명이 중세에 지나지 않는 곳.

사회가 몇 단계 더 진보한 지구조차 선동 하나로 끔찍한 역사가 새겨졌는데 이곳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제논 일대기는 이미 '마족'이라는 날카로운 검을 자기 수중에 넣은지
오래다.

만일 제논 일대기의 저자, 그러니까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마족이라는 단련된 검으로 패악질을 부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미쳤다고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단, 이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지 드미트리처럼 타인에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제논


일대기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간 폭탄 그 자체이며 자칫 잘못하다간 공멸할 수 있는 위험 요소다.

게다가 드미트리는 레킬리스 소속이다. 과거와 대화하고 미래를 엿본다는 본인의 말처럼, 역사에
한해서는 그 누구보다 폭넓은 지식을 자랑하는 가문.

역사에서 얻은 바가 많을테니 펜을 쥔 자가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명확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부분을 고려하여 나에게 질문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그리고 그걸 역사가 그걸 증명해주고 있다?"


"네. 그렇습니다."
"내가 무슨 의미로 질문한 건지 알고 있나?"

드미트리는 질책이 아닌 흥미와 기대를 담아 묻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이 세계 전체에 영향을 끼쳐도, 역사 전체를 보면 불안 요소가 아니라 결국 시대의 한 흐름에


불과하다. 전생의 히틀러도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50 년이 지나도 그 영향은 끝까지 잔존했다.

게다가 이 세상에도 비슷한 역사가 존재한다. 바로 지금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종족전쟁'.

전생으로 치자면 2 차 세계 대전 버금가는 대전쟁이며 그 영향력은 500 년이 지난 현재도 남아있다.

"공작님이 말씀하신 펜을 쥔 자는 여러 의미를 말씀하시는 거겠죠. 말 그대로 소설 작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치인일 수도 있습니다. 둘 다 직접적인 '무력'을 쓰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강력하게 표현한다는
공통점이 있죠. 그게 직접적이던 간접적이던."
"잘 아는군."
"그리고 현재 세상을 바꾸는 펜은... 제 얄팍한 지식으로는 제논 일대기밖에 생각나지 않는군요.
문화계에 족적을 남기는 수준이 아닌, 또다른 문화를 창조하고 있는 소설을요."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 낯부끄러운 평가이지만 신문의 평론가들이 위처럼 평가해준 거다. 난 단지 그들의
말을 빌린 것밖에 되지 않는다.

드미트리는 내 설명을 듣고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인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설명을 이어서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제논 일대기가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펜을 쥔 사람들로서는 절대 무시하지 못할만큼 강력합니다.


마족의 인식을 바꾼 것도 모자라 칠죄종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여 신학을 다시 정론시켰죠. 앞으로
제논 일대기에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지에 따라 그 대상을 바꾸는 건 일도 아닐 겁니다."
"지난 번에는 귀족을 비판하는 이야기도 썼지. 다행히 귀족의 어두운 면뿐만 아니라 밝은 면을 함께
썼기에 큰 파장은 없었다네."
"네. 이처럼 제논 일대기는 세상을 천천히 바꾸는 중입니다. 마족의 인식이 달라지니 그들을 환영하는
국가도 많아졌고, 자연스레 교류로 이어져 외교적인 이익을 챙기는 국가가 많아졌죠."
"그리고 최근에는 헤일로 아카데미에 헬리움의 공주가 입학했다네. 5 년 전까지만 해도 도저히 꿈도 꾸지
못 했던 일들이 현실에 하나 둘 씩 나타나는 중일세."

뒤이어 드미트리는 상체를 서서히 앞으로 숙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는 독자 중의 한 명이지만,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어.


그러니 절대 무시하지 못 하지."
"... ..."
"세상이 한순간에 변화하면 어떤 참상이 벌어지는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드미트리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종족전쟁 관련 서적을 지목하며 나에게 물었다. 그의 말마따나 세상이
급변한다는 건 그 과정이 혼돈 그 자체라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굳이 2 차 세계대전처럼 대규모 전쟁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가장 큰 예로 '산업혁명'이 있으며 이건 말


그대로 세상을 급변시켰다.

'기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시간'이 늘어났으며 동시에 전세계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제국주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수많은 나라가 약탈당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세상이 급격하게 변화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릴 것이며 펜과 칼이 소리도 내지 못 한 채


간단히 부러지게 된다. 변화는 그만큼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니.

레킬리스 공작은 현재 진행 중인 제논 일대기도 그럴 거라 판단하는 중이다.

역사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잘 꿰뚫는 사람이니 제논 일대기를 단순한 문화가 아니라 강력한 펜대로
취급하는 중이다.

"세상이 변한다는 건 단순히 발전만 꾀한다는 게 아니야. 사회적으로도 좋던 싫던 큰 영향을 끼치게 되기


마련이지. 과거에는 왕과 귀족, 그리고 평민이라는 개념이 없었어. 우리도 처음에는 엘프를 모방하여
의회와 휘하의 대신들, 마지막으로 뿌리가 되어주는 백성들밖에 없었지."
"... ..."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종족전쟁이 발발하여 지금의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네. 왕과 귀족, 그리고 평민 이
세 계급으로 말일세. 하지만 이것조차 문제가 많아.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고 테르스
왕국에는 제이로스 혁명마저 발생했다네. 심지어 최근에는 제논 일대기가 휴재를 하자 시위대까지
결성했고. 자네는 정녕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나?"

그에 나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펜대를 잘못 눌리게 되는 순간 끔찍한 비극이 발생할텐데 이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라 치부할텐가? 나는 너무 낙관적이라 생각하네만."

왠지 모르지만 드미트리가 나에게 직접적인 경고를 날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만약 네가 펜대를 잘못


눌린다면 내가 직접 너를 조져버리겠다고.

하지만 그의 걱정과 우려와 달리 나는 순전히 취미로 제논 일대기를 쓰는 것 뿐이다. 세상을 바꾼다거나


그런 일은 결코 없을거라 장담할 수 있다.

단, 제논 일대기가 이미 세상을 변화하고 있는만큼 '책임'을 져야하는 건 변함이 없다. 드미트리는 그걸


다시 한 번 일깨워줬다.

'내가 저자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는건가?'

일단 이건 생각하지 않고 대답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중인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대답을 꺼냈다.
"낙관적인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이미 몇 번 발생했던 현상입니다. 사회가 변하면 '사람'도 자연스레
변화하게 되는 법이죠. 물론, 처음에는 잡음이 많이 발생할 것입니다. 상식으로 받아들이지 못 했던
지식들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며 미지를 탐험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변화를 맞이해야 발전할 수 있는 지적 생명체입니다."
"흠."
"공작님도 역사를 사랑하시니 잘 알고 계시겠죠. 종족전쟁 당시에 우리 인간이 엘프와 대항하기 위해
어떻게 싸웠는지. 또 어떤 과정을 통해 미네르바 제국이 건국되었는지. 당시 시대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변화겠지만 그건 엄연히 '과거'의 일입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미 지나간
일이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죠."

내가 역사에 흥미를 갖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그냥 대한민국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모두가 알다시피 대한민국은 불과 50 년 전만 해도 6.25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었다.


광복을 맞이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한 사람의 욕심으로 인해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으며
참혹한 인명 피해를 낳았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그런 전쟁이 터졌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대한민국은 강대국으로 발전했다. 곳곳에
전쟁이 흔적이 남아있긴 하나 서울의 모습을 보면 절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거'를 그때 당시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는지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

나는 내 이야기를 경청하는 중인 드미트리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마저 이었다.

"미래의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을 그저 과거에 있었던 일로만 생각할 겁니다. 당연하게도 받아들이는
과거로 말이죠."
"... ..."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매우 혼란스럽겠지만, 결국 기나간 역사의 흐름에 몸을 담고 있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미래의 사람들이 보면 그저 그렇구나라며 자연스럽게 넘기는 역사로."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거대한 변화 속에서 발생하는 일 모두 역사적인 관점을 보자면 전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거군. 그러니 가만히 방관하던 대항을 하던 전부 의미가 없다는 거고. 변화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건 엄연히 역사적인 관점이고 현실적으로는 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후대에게 보다 나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죠."
"흠."

내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드미트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동안 바싹


바른 입술을 축이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쥐어짜낸거라 당분이 부족해진 기분이다. 차를 마시니 달콤한 향기가 일품이었다.

"자네의 생각은 잘 알겠네.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져있던 드미트리가 잔잔한 미소를 띄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찻잔을 완전히
내려놓은 뒤에 대답했다.

"재미있게 들어주셨다면 감사합니다. 제 얄팍한 지식으로는 이게 한계입니다."


"아닐세. 덕분에 고민 하나가 해결된 기분이거든. 그럼 다른 질문을 하겠네. 사실 이게 본론이자 제일
중요한 부분이거든."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 언급해서일까. 나는 아까보다 더욱 바짝 긴장하며 그의 입이 떨어지기까지 기다렸다.

뒤이어 드미트리는 깍지를 낀 손을 얼굴에 대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딸이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사귀는 건가?"
"... ..."
"이건 솔직하게 대답해줬으면 좋겠군. 우리 딸이 고른 남자지만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라서 말이네."

공작으로서 면모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딸바보 아버지만이 존재했다. 나는 하마터면 헛웃음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막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혹시 몰라 옆에 앉은 마리를 힐긋거리니 그녀는 자기가 다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는 중이다. 두


손을 얼굴에 파묻은 걸 보아 어지간히도 창피했던 모양.

이에 나는 헛웃음을 참지 못해 피식 웃고는 솔직담백하게 대답했다.

"예뻐서요."
"야! 대답하지 마!"

대답하자 옆에서 마리가 빼액 소리쳤다. 이것만 해도 그녀에게 수치심을 주기에 충분할텐데 여기서
드미트리가 한 술 더 떴다.

"음... 솔직한 대답이군. 우리 딸이 엄마를 닮아 예쁘긴 하지."


"아빠! 좀! 제발!"

마리는 거의 울부짖는 지경에 이르렀다.

< 81 화 >

이후로 드미트리와 다양한 대화를 주고 받았으며 그중 가장 심도 깊게 파고들었던 분야는 단연코 역사였다.

드미트리는 레킬리스의 가주인만큼 폭넓은 지식을 자랑했으며 나 또한 교수 수준은 아니더라도 전혀


꿇리지 않는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덕분에 대화의 흐름이 끊길 일은 없었으며 오죽하면 마리가 지루함을 표출할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특히 드미트리는 타 국가의 문화에 대해 깊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문화가 생겨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 어떤 형태를 띄고 있는지 상세하게 알려줬다.

나는 예상치 못한 기회에 놓칠 수 없다는 듯이 평소 갖고 다니던 마법필과 수첩을 꺼내 열심히 기록했다.


아무리 또래에 비해서 많은 책을 읽은 나여도 타 국가의 문화를 세심하게 파악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자네는 평소에도 펜과 수첩을 들고 다니나?

내가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을 때 드미트리가 마법필을 보며 한 쪽 눈을 치켜떴다.

마법필을 보기보다는 평소 수첩에 기록하는 버릇을 지닌 내 습관에 흥미를 지닌 듯했다.

나는 잠깐 기록하는 것을 멈추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중요한 정보를 잊어버리지 않게 기록하는 습관을 갖고 있거든요."


"정말 훌륭한 습관을 들였군. 그런 점을 우리 딸도 배워야 하는데 말이야."
"흥. 전 그래도 한 번 들은 건 안 잊거든요?"

드미트르의 쓴소리에 마리가 고개를 홱 돌리며 불만을 표현했다.

재미없는 역사 이야기만 하면서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니 그녀로서는 불평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애가 나한테 노트를 빌려달라 했어?"
"야!!"

물론 내가 쓸데없는 설명을 하자 곧바로 고함을 쳤지만.

나는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 하고 얼굴을 잔뜩 붉은 채 씩씩거리고 있는 마리의 반응에 작게 웃었다.

뿐만 아니라 드미트리도 드물게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직 마리만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웃지
못 하고 있었다.

똑- 똑-

[주인님. 이제 곧 점심 시간입니다.]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을 때 문 밖에서 세바스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미트리는 물론 나 또한


손님방에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시간을 확인해보니 점심 시간이 다 되어간다.

세바스찬도 내가 점심을 먹지 않고 집으로 돌아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만에 하나 확인 차에 점심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준 것 같다.

드미트리는 슬슬 점심 시간이 다가오자 턱을 매만지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정말로 점심도 먹지 않고 돌아갈 셈인가?"


"네. 하루 빨리 가족을 만나고 싶거든요. 바깥에서 테이크 아웃을 하고 갈 생각입니다."
"굳이 돈 들일 필요 없이 우리 요리사가 해준 음식을 가지고 가게나. 내 따로 말하도록 하겠네."
"그래주시다면 저는 감사합니다."
"세바스찬."

내 승낙에 드미트리는 문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세바스찬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뒤이어 세바스찬이


안으로 들어오고 드미트리의 곁에 다가왔다.

드미트리는 정갈한 자세로 자신의 옆에 선 세바스찬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이 친구는 점심을 먹지 않고 집으로 복귀하니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어. 대신 요리사에게 테이크
아웃처럼 간단하게 먹을 걸 준비하라고 해둬. 보아하니 마차에서 먹을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내 집무실에 들려서 '리무버'를 가져다 주게나. 아마 서랍에 새 리무버가 있을걸세."
"예."

세바스찬은 드미트르의 지시를 받고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단정한 걸음걸이로 문 밖으로 나가는 세바스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드미트리에게 물었다.

"공작님. 리무버가 무슨 물건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자네가 좋아할만한 물건이라고 해두지."
"제가 좋아할만한 물건이요?"
"음... 확실히 네가 좋아하긴 하겠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옆에 앉은 마리가 거들어줬다. 이탓에 무슨 물건인지


감을 잡기가 더 어려웠다.
이윽고 또다시 약간의 시간이 흘러, 세바스찬이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흰색 바탕에 길쭉한 물건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어딘가 익숙한 물건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동안 드미트리는 세바스찬에게 물건을 전달받아
나에게 보여줬다.

"이게 리무버라는 물건일세. 자네의 마법필처럼 안쪽에 마법 술식이 담겨있는 물건이지."


"무슨 용도로 쓰는 겁니까?"
"아까 자네가 기록한 수첩 있지? 여기 있는 버튼을 누르면서 한 번 갖다 대보게."

드미트리는 설명보다 직접 쓰는 것이 더 좋을거라 판단했는지 나에게 물건을 전달했다. 나는 의문을


표하면서도 그가 전달한 물건을 받아들였다.

전체적으로 몽둥이처럼 생긴 물건이다. 두께가 엄청 두꺼운 연필처럼 생겼다고 묘사해야 할까.

나는 점점 솟아오르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물건을 펜처럼 쥐며 수첩에 갖다 대었다. 수첩에는 아까 전


드미트리가 알려줬던 지식이 기록돼 있다.

그리고 중간 부분에 위치해 있는 버튼을 누르자 놀라운 현상이 펼쳐졌다.

"어?"

사라졌다. 마법필로 기록돼 있던 검정색 글씨가.

정확히 끝부분에 갖다 댄 곳에만 글씨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마치 지우개 또는 화이트로 지운 것처럼


종이가 깔끔해졌다.

"리무버라는 마법 아이템일세. 5 분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펜으로 쓴 기록을 지울 수 있지."

내가 망연한 얼굴로 글씨가 사라진 수첩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앞쪽에서 드미트리가 설명해줬다. 이에


고개를 들어올리자 미소를 짓고 있는 드미트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의 얼굴과 마주하다가 서둘러 다른 글씨가 지워지는지 확인했다. 그의 말마따나 한참 전에 쓴


글씨는 지워지지 않았으나 방금 전에 썼던 기록은 모두 흔적도 없이 제거되었다.

이것만 해도 나에게는 말 그대로 보물 중의 보물이나 다름없다. 나는 화사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원래대로 되돌렸다.

마법필만 해도 무시무시한 가격을 자랑하는데 이 리무버라는 아이템도 그에 걸맞는 가격대를 자랑할터.


아무리 공작가라지만 이걸 선듯 선물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걸 왜 저에게 주신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래서 물었다. 나는 리무버를 손에 꽉 쥐면서 드미트리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어떻게든 리무버를 갖고 싶다는 내 의사를 간접적으로 드러냈으며 만약 그가 합당한 거래를 제안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는 있다.

드미트리도 내가 이걸 갖고 싶다는 걸 눈치챘는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가 미소를 짓자 살짝


긴장하며 부디 이상한 제안이 아니기를 빌었다.

"그냥 선물이라네. 별 이유는 없어."


이윽고 드미트리의 입이 열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뉘앙스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나는 덥썩 받아먹지 않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선물이라도 이건 저에게 너무 비싼 아이템입니다. 마법필은 마나를 잉크로 치환하면 그만이지만 리무버는


더 복잡할 것 같은데... 아닙니까?"
"자네의 말이 맞아. 마법필이 1 의 가치를 지녔다면 리무버는 10 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

역시 내 예상대로다. 이 리무버라는 아이템은 나로서는 감당하지 못한만큼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했다.

물론 제논 일대기로 벌어들인 수익을 생각하면 기꺼이 제 값을 주고 사겠지만, 선물은 아니다. 선물로


받기에는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싸다.

이에 내가 정중히 거절하기 위해 리무버를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드미트리는 내 행동을 보자마자


울림통이 큰 목소리로 제지했다.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자네가 마음에 들어서 선물해주는 것이니. 설마 거절하지는 않겠지?"
"...저에게 너무 비쌉니다."
"그래도 우리 레킬리스 공작에게는 푼돈이나 다름없지. 좋은 말로 할 때 받게나. 마리에게 역사 공부를
시켜줬으니 그에 맞는 대가를 치뤘다고 생각하게."
"...감사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레킬리스의 가주가 저렇게 나오는데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기쁨을 숨길 수가 없어


입꼬리가 자꾸 실룩거렸다.

이런 마법 아이템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횡재인데 심지어 선물까지 받았다. 한 번 잘못 쓰면 원고지


자체를 버려야했던 나로서는 행복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좋아?"

실룩거리는 내 입꼬리를 보았는지 마리가 한 마디 건냈다. 나는 리무버를 두 손으로 꽉 쥐며 행복함을


담아 대답했다.

"응."
"네가 애처럼 기뻐하는 건 또 처음 보네. 좋아하는 건 정말로 좋아하는 성격이구나."

마리의 분석처럼 나는 좋아하는 걸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아버지에게 마법필을 선물 받았을 때는 기쁨과 뭉클함이 섞여서 표출하지 않았을 뿐이지, 심정은 지금과
별 반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니 내가 다 기쁘군. 원한다면 다른 것도 줄 수 있네."


"아닙니다. 이것만으로도 저에게는 과분한 선물입니다."

내가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하자 드미트리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과분하다라... 재미있는 말이로군."

*****

어디까지나 방문이 목적이었다는 아이작의 말처럼, 그는 점심 시간이 되기 전에 레킬리스 저택을 떠났다.

떠나기 전, 마리가 아쉬움을 담아 하룻밤만 머물면 안 되냐고 부탁했으나 아이작은 단칼에 거절했다.
한시라도 빨리 부모님과 재회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예의에서 어긋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럼 키스해줘."
"기꺼이."

결국 드미트리가 마차를 부르기 위해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키스하는 걸로 아쉬움을 대체했다. 그렇게


길고도 짧은 키스 타임이 흘러가고, 아이작은 드미트리가 따로 불러준 마차를 타고 고대하던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로 마리는 아이작이 탑승한 마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저택의 정문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비록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작을 못 본다고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가씨. 이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알겠어요."

이윽고 마차가 공작가 대문을 지나가고,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마리는 세바스찬의 말에 따라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여전히 아쉬운지 그녀는 저택으로 들어가기 전 뒤를 돌아봤다.

단단하게 닫혀있는 대문 밖으로도 아이작이 탄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후우..."

마리는 벌써부터 닥쳐오는 듯한 그리움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키스 다음으로 그


말랑말랑한 볼을 깨무는 건데 시간이 없었다.

뒤이어 그녀가 우울한 표정으로 저택 안으로 들어왔을 쯤,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아쉬워하는 표정이구나."

드미트리였다. 그는 정문 앞에서 뒷짐을 진 채 마리와 세바스찬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공작으로서 체면이 있었기에 아이작을 직접적으로 배웅하지는 않았지만, 이렇듯 정문까지는 함께


데려다줬다.

그동안 마리는 드미트리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티났어?"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기분도 모르는 건 말이 안 되지."

드미트리가 능청스럽게 대답하자 마리가 피식 웃었다. 대외적으로 공작이니 뭐니 하면서 제국민의 존경을
받는 드미트리이지만 마리의 눈에는 그저 딸을 사랑하는 아빠에 지나지 않았다.

마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세바스찬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그 손짓에 세바스찬은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정문 앞에는 마리와 드미트리 부녀만이 남게 되었다. 마리는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는지 재차
확인하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드미트리에게 질문했다.

"아빠. 아빠도 아이작이 누구인지 대충 알고 있지?"

다시 말하지만 마리는 사람의 심리를 본능적으로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때문에
아이작과 드미트리의 대화 속에서 일종의 위화감을 느꼈고, 리무버를 선물해줬을 때는 확신을 가졌다.

드미트리는 아이작의 정체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구나라고. 다행히 티를 내지 않은 덕에 아이작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사이 드미트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마리. 너도 알겠지만 나는 황제 폐하의 곁을 보좌하는 레킬리스 공작이란다. 제국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나에게 전달되지. 그게 설령 황태자가 개인적으로 저지른 일이라 해도 말이야. 이전부터 따로 조사한
것도 있고."
"언제부터 알았어?"
"확신을 가진 건 최근이었지. 덕분에 편법을 부리지 않도록 법을 재정해야할 것 같더구나. 이건 탈세로도
악용될 여지가 충분하니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마리가 살짝 내려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비록 철없는 자신의 아빠지만 그는 레킬리스 공작이다.

아이작에게 질문을 했던 것처럼, '펜을 쥔 사람들' 중에 최고의 위치에 당당히 앉아있는 사람. 그러니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아이작이 마음에 들었다고한들 무슨 짓을 저지를지 전혀 모른다. 만약 쓸데없는 짓을 하면


자신이 어떻게든 막아보겠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마리가 머릿속으로 그 생각을 하며 불안해하고 있을 때, 디미트리가 묵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조치를 취할 생각이었단다. 개인은 몰라도 제논 일대기의 저자로서는 매우 위험하니까. 하지만


몇 번 대화를 하다보니 가만히 놔두어도 큰 상관은 없을 것 같더구나."
"왜?"
"그 애가 말한 것처럼 세상이 변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 억지로 막아봤자 우리에게만 큰 피해가
올 거야. 흐르는 강물을 억지로 막을 수는 있어도 언젠가 둑이 터지는 것처럼 말이지. 그래도 대비는
하는 게 좋을거야."

그리 말한 드미트리는 마리를 힐끔거리더니 이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네가 그 애의 여자친구이잖니? 공작으로서도 한 명의 아빠로서도 찬성이다만 만약 그


애가 이상한 짓을 하면 다 말하렴. 내가 역으로 조져버릴테니."
"...아빠."

마리는 드미트리의 질 낮은 농담에 불안함도 잠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쏘아봤다. 참고로 공작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저 경박한 말투는 전부 다 자신의 엄마에게 옮은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드미트리는 마리를 놀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혼인은 언제 하고 싶니? 원한다면..."


"지금 당장."
"... ..."
"당장 하고 싶으니까 아이작의 저택으로 혼담 신청서 보내줘."

마리가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을까.

'...다시 한 번 고려해봐야겠군.'

드미트리는 차마 대답조차 하지 못 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다. 그냥 편지나 보내야지. 아빠 정도면 하루만에 도착하게 만들 수 있지?"


"... ..."

마리의 방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82 화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무런 잡음없이 매우 순조롭게 흘러갔다.

드미트리가 비싼 가격을 지불하여 호출한 마차는 숙소 못지 않은 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안락함을


더해주었으며 가는 길에 먹으라고 손에 쥐어준 요리 또한 맛있었다.

레킬리스 저택의 요리사가 해준 음식은 일종의 케밥이었는데 채소도 채소지만 고기의 육질이 일품이라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가는 길에 꾸준히 먹으라고 3 개 정도 포장해준 덕분에 배고프지 않았다.

보통 케밥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먹기에는 부적절한 음식이지만, 마차 내부에는 충격 완화 마법이


깔려있어 식사를 하는데 큰 무리가 따르진 않았다. 오히려 발 뻗고 자도 될만큼 편안함을 제공해줬다.

나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드미트리가 선물해준 케밥 하나를 깔끔하게 해치운 후, 다가오는 식곤증을


물리치며 책을 읽었다. 참고로 책은 드미트리와 만나기 전까지 집중해서 읽었던 종족전쟁 관련 역사서다.

드미트리가 다 읽지 못 했으니 기꺼이 선물해준 것이다. 리무버까지 선물받아 조금 난색을 표했지만


드미트리는 자기는 괜찮다며, 나중에 사면 그만이라고 호의를 베풀었다.

과연 내가 마리의 남자친구라서 선물해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에 들어했을 수도 있고.

어쨋거나 드미트리가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건 확실하며 딸바보 같은 면모도 그리 심하지도 않았다.
드미트리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아버지다.

'어쩌면 내가 제논 일대기의 작가라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몰라.'

나는 케밥 하나를 우물거리며 마음 속으로 추측했다.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드미트리가 나에게


보여줬던 과도한 호의를 보자면 충분히 의심할만하다.

물론 리나나 레오르트처럼 압박을 가하지도 않았고 직접적으로 물어보지 않아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만 생각하자.'

나는 케밥을 모두 해치우고 남은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적당한 포만감이 느껴지자 시간을 체크하기
위해 창문 밖을 바라봤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서서히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이었다. 점심 시간 쯤에 출발하고 약
6 시간 정도가 흘렀다.

집에서 수도까지의 거리는 마차로 길면 10 시간이 소요되지만, 이 마차는 비싼 값을 하는만큼 그보다 더


적을 것이다. 아마 독서를 조금만 하다 보면 도착하지 싶다.

도착하자마자 부모님과 인사하고 저녁 식사까지 끝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갈 것이다. 나는 집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방학 동안 무엇을 할지 골똘히 계획했다.

'제논 일대기는 야금야금 쓸 거 같고...'

이미 휴재를 할 거라는 공지를 올렸지만 벌써부터 손이 근질거렸다. 여기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도 없이


방학동안 독서를 빼면은 할 게 없다.

간간이 아버지와 함께 운동을 하겠다만 그것마저도 부족하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언듯 짧아보이지만 그건


모두 흘러갔을 때의 이야기지 막상 보면 은근 긴 편이다.

나는 방학을 어떻게 보내야만 알차게 보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는 와중에, 머릿속에서 기발한 계획이
번뜩 스쳐지나갔다.

'외전이라도 쓸까?'

공지에서도 제논 일대기를 휴재한다고 했지, 다른 책을 내지 않을거라 하지는 않았다.

하물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던 과거사가 있다. 그건 바로 스승과 엘프 여왕의 이야기.

어떻게 해서 두 사람이 종족을 초월한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며, 스승이 무슨 이유로 늙을 때까지 엘프
여왕만 바라보게 되었냐는 궁금증.

제논 일대기 본편에서도 간간이 과거사를 묘사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수많은
독자들이 추측을 하는 중이지만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절대 모를 것이다.

'게다가 스승은 개그 캐릭터에 가까워서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웠지.'

스승이 제논에게 가르침을 내려줄 때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괴짜다. 또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경박한
말투까지 사용하니 엘프 여왕과의 관계가 드러났을 때 충격을 받은 독자들이 적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게 더 매력적이라며, 보통 저런 부류가 자기 사람에게 더욱 헌신한다며 스승을 높게


평가했다. 그때부터 스승의 인기가 급속도로 상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의 전개를 기대했다.

물론 가차없이 휴재를 때려버려서 분노로 승화되었지만 말이다.

'괜찮네. 어차피 외전이어서 짧게 내도 상관없을테고.'

나는 대충 길이 잡히자 수첩을 꺼내어 플롯을 하나 둘 씩 적기 시작했다. 스승과 엘프 여왕의 관계를


보여주는 외전이니 직접적인 전투는 거의 없을 예정이고 반쯤 로맨스에 가깝다.

약간 충동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어디까지나 제논 일대기는 취미에 지나지 않았으니 써도 큰 문제는


없다. 그래도 모든 독자들이 납득할 수 있겠끔 퀄리티 있게 적어야지.

외전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보다 집중적으로 드러내준다면 스승의 죽음이 더욱 임팩트 있게 다가올


수도 있다. 더군다나 이미 유언까지 정해놓았으니 둘의 첫 만남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집어넣으면 될 것
같다.

'어디 보자... 스승은 한때 이름을 날렸던 용병이었고 엘프 여왕은 이때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는 열심히 플롯을 정했고.

"아이작. 이것 보렴. 이 편지 모두 너에게 온 거란다."


"...이것들 전부가요?"
"그래. 우리 아들 참 인기도 많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상자에 수북히 쌓여있는 팬레터를 보며 황당함을 숨길 수 없었다.

부모님이 아카데미에 보내준 편지들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빈말이 아니라 쌓여있는 양을 보면
다 읽는데까지 며칠은 걸릴 것 같다.

"그리고 보기 전에 이것부터 볼 수 있겠니? 이 엄마가 고른 건데 네가 먼저 봤으면 하는 거란다."


내가 황당을 금치 못하며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팬레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어머니가 나에게 편지
몇 장을 전달했다.

이에 정신을 차리고 어머니가 나에게 전달한 편지들을 확인했다. 몇몇 편지는 화려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으며 편지 하나는 평범했다.

도대체 무슨 편지이길래 어머니가 골랐다는 걸까. 그런 의문을 지닌 채 편지 하나를 확인했다.

'리루스 악단?'

처음 듣는 악단의 이름이다. 나는 편지를 보낸 단체의 이름을 바라보다가 어머니를 힐끔 쳐다봤다.

어머니는 뭐가 좋은건지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계셨다. 표정을 보아하니 적어도 나쁜 건 아닌 것 같다.

나는 다시 편지 쪽으로 눈을 돌려 봉투를 뜯었다. 화려한 겉표면과 달리 내용물은 평범하디 평범한


편지였다.

[안녕하십니까, 작가님. 저는 테르스 왕국에서 리루스 악단을 운영하고 있는 지휘자 리루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작가님의 작품 제논 일대기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죠. 이 편지가 작가님에게 전달이 될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작은 바램이 있어서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작은 바램이 있다길래 이상한 제안인 걸로 예상했다. 하지만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내 표정은 점점 더
놀람으로 번질 수밖에 없었다.

[...하여 부족하지만 사크란의 일생을 저희가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의 최후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는 그 장면이 아련하게 재생되며 동시에 음악이 흘러나오더군요. 부디 부족한 실력이지만
작가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작곡을 하고 싶습니다. 이를 통해 발생하는 수익은 작가님이 원하는대로
결정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저희에게 이 천금 같은 기회를 주신다면 반드시 멋진 곡으로
보답해드리겠습니다. 이상 리루스 올림.]

소설의 명장면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다. 나로서는 깜짝 놀랄만한 제안이다.

그리고 이 시대 배경을 고려하자면 일종의 '팬아트'라고 봐도 무방하다. 단어 그대로 예술적인 의미의


팬아트.

나는 리루스 악단이라는 단체에서 보내준 편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급히 다른 편지도 확인했다.
어머니가 골라준 것이니 분명 이와 비슷한 곳에서 보내주었을 터.

아니나 다를까. 악단이나 극단 같은 단체부터 시작해 화가, 조각사, 마지막으로 공예 등등.

예술에 있어서 큰 축을 담당하는 분야가 하나 같이 비슷한 부탁을 제시했다. 수익은 일절 상관하지


않을테니 부디 제논 일대기 속 장면을 묘사하게 해달라고.

나는 비슷한 제안을 한 편지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올려 어머니와 마주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셨다.

"...어머니?"
"말하렴."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 편지를 보낸 사람들 전부..."

내가 말 끝을 흐려도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랑스러움을 담아 대답하셨다.

"네 생각이 맞단다. 그 분야에 있어서 최고라 자부할 수 있는 예술가들이지."


"... ..."
"이 엄마는 네가 정말로 자랑스럽구나. 앞으로 편지만큼은 집으로 보내달라고 출판사에게 부탁해야겠어.
어쩌면 다른 곳에서도 부탁을 할지도 모르니까."

그리하여 나의 방학은 문화계의 거장들의 편지를 받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

"에휴..."

제논 일대기가 휴재를 선언한지 보름이 흘러가고, 출판사 사장은 하루하루 깊어지는 시름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근 한 달 동안 사장에게 발생했던 일들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갑자기 제논 일대기가 휴재를 선언하여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지 않나, 초고를 공개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도난을 당하지 않나, 그 뒤로 탈세 조사를 받아 어마어마한 벌금을 받지 않나.

다행히 탈세 부분은 입을 잘 털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출판사가 압류될 정도로 위험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벌금 자체만으로도 사장에게는 뼈아픈 일이다.

'앞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으려나?'

제논 일대기가 휴재를 선언했다지만 그 인기가 식는 건 절대 아니다. 현재까지 제논 일대기는 불티나게


팔리는 중이며 인쇄소도 활발히 가동되고 있다.

그러나 최소 1 년 동안 휴재를 한다고 했으니 날이 가면 갈 수록 매출이 급격히 낙하할 것이다. 비록 빚은


없지만 이미 돈맛을 알아버린 사장으로서는 절망스러웠다.

어떻게든 제논 일대기 신간이 나올 때까지 버텨야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당장


돌아가는 인쇄소만 해도 유지비가 장난이 아닌데 제논 일대기의 수익만으로 견뎌내기는 어렵다.

'젠장. 어떤 미친 놈이 금고를 통째로 털어간 거야? 미치겠네...'

초고를 훔쳐간 범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제국이 파견한 조사단에서도 단서가 하나도 없다며
난색을 표했으며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야했다.

초고를 도난당한 것만으로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데 심지어 단서조차 못 잡고 있으니 사장에게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지나가면서 돌을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

불행 중 다행히도 정상참작은 되었지만 심적으로 괴로운 건 어쩔 수 없다. 사장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침음성을 흘렸다.

"으으으... 직원들 월급을 깎아야 하나... 아냐. 그러면 또 인력을 뽑아야 하잖아... 차라리 아끼고
아낄 수밖에 없어."

본래 사람의 위기의 순간에 제 실력이 발휘된다고 하던가. 인생 최대의 위기에 목도한 지금, 사장은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현명하게 타파할 수 있을지 최대한 궁리했다.

마음 같아서는 작가를 찾아가 바지가랑이라도 붙들어매며 한 권만 내어달라 부탁하고 싶지만 절대 안 되니


패스. 어차피 작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마당에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대로 가다간 한 달 내에 매출이 급감할 거야. 어떻게든 수를 써야하는데...'

사장이 머리를 싸매며 고뇌하고 있을 때였다.


덜컹!

"사장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사장이 아끼는 직원, 매튜가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세차게 열며 들어왔다. 초고 도난 당시 피해를 입은


그였으나 단순히 기절이었기에 현재는 무리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사장은 고민도 잠시 매튜의 기습적인 방문에 화들짝 놀라며 펄쩍 뛰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예의를 얻다 팔아먹었는지 몰라도 노크도 하지 않은 매튜를 싸늘하게 노려봤다.

"...자네도 이제 슬슬 미쳐가는 건가? 아무리 바쁘다지만 노크 정도는 해야..."


"그게 아니라 이것 좀 보십시오! 제논이 보내준 원고입니다!"
"뭐?!"

매튜가 우편물을 보여주며 알려준 소식에 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매튜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우편물 속에 든 건 그야말로 구원줄이나 다름없다.

뒤이어 사장은 자리에서 벗어나 매튜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뒤이어 말도 없이 매튜의 손에 들린


우편물을 낚아챘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우편물이었기에 사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매튜에게 물었다.

"저, 정말인가? 정말로 제논이 보내준 건가?"


"네! 평소처럼 심부름꾼을 고용하여 저에게 보내줬습니다. 분명히 맞아요!"
"하지만 분명히 휴재를 한다고..."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한 번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너무 급한 바람에 저도 아직 개봉하지
않았어요."

매튜의 말처럼 우편물은 상처없이 깨끗한 외양을 자랑했다. 사장은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깨닫고
허겁지겁 우편물을 개봉했다.

이어서 우편물 안에서는 원고가 저장되어 있었는데, 사장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으로 원고를 꺼냈다.
원고를 꺼내니 그 사이에 끼여있던 편지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에 사장은 원고를 매튜에게 전달하고 편지부터 체크했다. 어째서 마음을 바꾸었는지 모르겠지만 편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사장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곱게 접혀있는 편지를 확인했다. 익숙하디 익숙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제논입니다. 아마 휴재를 선언했는데 원고를 보냈다니 이상하게 여기겠죠. 하지만
저는 제논 일대기를 휴재한다고 했지, 외전을 내지 않을거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외, 외전!"

외전을 썼다는 편지의 내용에 사장의 얼굴에는 함박 웃음이 지어졌다.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를 넘어선
소나기 수준이다.

사장은 기쁨을 숨기지 못 한 채 다음 내용을 빠르게 읽어내렸다.

[외전의 이름은 '카이르 외전'이며, 제논의 스승의 이름입니다. 카이르가 어째서 엘프 여왕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해서 사랑을 꽃피웠는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독자분들이
즐거워할지는 모르겠지만 심심하실 것 같아 보내드립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사장에게는 구원이나 똑같았다. 그런데 내용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많은 예술가 분들이 저에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본인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로 제 작품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이죠. 사장님께서 저를 대신하여 그 분들에게 전달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익을
창출하던 말던 상관없으니 원하는대로 하셔도 된다고요. 대신 시각적인 예술품은 저에게 따로 보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제가 따로 만든 친필 사인도 적겠습니다. 이상 제논 올림.]

쿠웅!

모든 편지를 읽은 사장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사장이 무릎을 꿇자 원고를 읽던 매튜가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그를 불렀다.

"사, 사장님! 괜찮으세요? 대체 편지에 무슨 내용이..."


"오오! 루미너스시여! 정말로 감사합니다! 저를 아직 버리지 않으셨군요!!"

매튜가 걱정하던 말던, 사장은 편지에 입맞춤을 하며 신을 찾기 바빴다.

< 83 화 >

제논 일대기가 휴재를 선언하여 많은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지만,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카이르


외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르 외전은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카이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아냈으며, 많은 독자들은 기대와
의문을 가지며 책을 구입했다.

다른 사람의 책이었다면 금방 관심을 껐겠지만 자그마치 제논 일대기 작가의 작품이다. 그러니 외전이어도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본편은 아니나 기나긴 휴재 기간 동안 공허함을 달래줄 수 있다면 외전으로도 충분했다.

[마지막 장면에 카이르의 정체가 밝혀진다. 절대로 결말을 입에 담지 말 것.]


[외전이지만 제논 일대기 본편과 깊은 연관이 있는 책. 팬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
[외전이라고 했지만 단순한 외전이 아니다.]

그리고 외전을 정독한 독자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위의 평가처럼 단순한 외전 정도가 아니었으며 본편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구입해야 하는 책으로 탈바꿈되었다.

왜냐하면 '카이르'의 정체는 바로 제논의 스승이었으며, 외전에는 스승의 과거사를 다루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이 어떤 배경에서 태어나 성장했는지. 어떤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왔는지. 또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인연을 만났는지.

훗날 엘프 여왕이 될 여인과 어떤 이유로 만나게 되었는지,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여 그녀와 사랑을


꽃피웠는지.

결코 불가능할 거라 단정지었던 인간과 엘프 간의 사랑을 달콤하게 녹여냈으며 특히 카이르의 묵묵한


독백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기 충분했다.

-햇살 같은 그녀의 미소를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에 설명했지만 종족을 불문하고 마나를 수준급 이상으로 다룬다면 노화가 더디게 진행된다. 엘프와
마족이 장수하는 이유가 이때문이며 반대로 인간과 수인이 단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카이르도 이 점을 잘 알고 있기에 불에 달군 쇠를 망치로 두드리듯이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엘프에 비해서
짧디 짧은 수명을 악착같이 늘려 사랑하는 여인, 엘리샤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

이 과정 속에서 훗날 '질투'를 담당할 사람을 만나 가르침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제논'과 만나는 것으로
외전을 깔끔하게 끝냈다.

[현실적이어서 더욱 공감가는 이야기. 과연 그의 노력이 의미가 없었을까?]


[엘리샤도 카이르의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여태껏 적지 않은 독자들이 엘프와 인간의 사랑 이야기가 너무 허무맹랑하다며 비판했지만, 외전에서


카이르의 진심이 드러나자 평가는 180 도 뒤집어졌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에서 현실에서 몇 번
쯤은 있을법한 이야기로.

수명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를 보기 위해 스스로를 갈고 닦는다. 어지간한


각오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이야기였으며 그렇기에 더욱 애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본편에서 카이르와 엘리샤의 관계가 드러났을 때는 다소 뜬금없었지만 외전에서 모두 명확하게 해소시켰다.

[둘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진다. 과연 그들의 이야기는 행복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비극으로 끝날


것인가?]
[이미 불길한 징조는 여럿 보였다. 하지만 독자들은 행복을 원하는 중이다.]
[카이르가 죽는다면 엘리샤도 괴로워할 것.]

하지만 독자들은 외전이 등장하자 더욱 불안해졌다. 카이르와 엘리샤의 애절한 스토리가 끝에는 비극으로
치닫을까봐.

이미 본편에서 카이르가 떠나기 전, 엘리샤에게 남겼던 말로 하여금 독자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더 나아가 본편의 끝에 제자였던 '질투'와 맞닥뜨리기까지.

다음 본편이 나와야만 이 불안감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본편은 최소 1 년이 흘러야


한다. 독자들도 떼를 써봤자 나오는 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 잠자코 기다렸다.

출판사에서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전달하기 전까지는.

[메디아 출판사에서 대신 전달해드립니다. 제논 작가님께서 본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장면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해도 상관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음악으로 표현하든, 그림으로 표현하든, 조각으로
표현하든 말이죠. 수익을 창출하셔도 상관없다 하셨으니 예술가 분들은 마음 놓고 표현하셔도 됩니다.]

희대의 걸작, 제논 일대기를 또다른 예술로 표현한다. 이 소식 하나만으로도 예술계에 몸을 담고 있던


독자들을 흥분시켰다.

특히 테르스 왕국의 반응이 아주 격렬했는데 당연하게도 문화강국인 테르스 왕국에게 있어서 예술은 큰
폭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비록 미네르바 제국에서 다양한 술수를 동원해 많은 문화를 빼았겼지만 테르스 왕국에는 여전히 유명한
예술가들이 모여있다.

또한 제이로스 혁명이 터지고 나서 예술은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로 바뀌었다.
이러한 이유로 테르스 왕국으로서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절대 놓칠 수가 없었다.

[테르스 왕국. 제논 일대기를 표현하고 싶은 예술가들은 신인, 기성 구분하지 않고 국가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겠다. 우리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를 원한다.]

테르스 왕국의 귀족들이 미네르바 제국의 귀족에 비해서 맵다지만 문화에 한해서는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반대로 미네르바 제국은 예술을 귀족의 전유물로 인식하는 중이라 대다수의 예술가들이 테르스 왕국으로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제국에서 막대한 양의 자금을 지원해도 예술가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명예'라면
죽고 못 사는 이들이 널려있는 중세였으니까.

특히 예술가들에게 명예란 목숨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애시당초 돈보다 명예를 목적으로


예술계에 몸을 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예술가들이 배고픈 직업이라는 인식이 생긴 이유다.

그러니 귀족의 전유물이 될 바에야 모든 사람이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그런 예술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또한 이번에 발생한 '이벤트'는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제논 일대기 속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지, 그리고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에 따라 본인의 평가가 극명하게
나뉠테니까.

[리루스 악단의 지휘자 리루스.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사크란의 일생을 작곡할 거라 말해... 작품의
명성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화가 이마르 또한 사크란의 최후를... 인생에 있어서 가장 뜻깊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명장면은 단연코 사크란의 최후였다. 비참했던 마족의 인식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제논 일대기의 독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장면.

가장 유명한 장면인만큼 많은 사람들이 기대감을 가졌으며 헬리움의 관심 또한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또한 정말 기대가 된다는 말까지 남기며 시간이 되면 전시회에 방문하겠다고
언급했다.

물론, 사크란의 최후 외에도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있는 명장면들은 다양하다. 독자들은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렸으며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개성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예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으니, 바로 '수익 창출'이다.

아이작은 2 차 창작을 통한 수익 창출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말했다. 제아무리 예술가가 배고픈


직업이라지만 그건 신인이었을 때 이야기지,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리게 되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술가가 '돈'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건 맞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가치를 좀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건


바로 돈 즉, 몸값이다.

이탓에 사람들은 거장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의외의
상황이 펼쳐졌다.

[수익은 기부 형식으로 받겠다. 모두가 쉽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될 것.]


[제논 일대기는 남녀노소, 그리고 계급 상관없이 누구나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나 또한 그러겠다.]
[비싼 가격을 받으면서 전시하는 건 작품의 명성에 먹칠을 가하는 일. 용납할 수 없다.]

신인은 물론이고 이름을 날린 기성마저도 수익을 창출하지 않고 기부 형식으로 받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이유는 실로 간단했다. 제논 일대기는 단순한 소설 정도가 아니라 계급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제논 일대기가 세계적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바로 위의 이유 때문이었으니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순간 명성에 누를 끼치는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만약 지구였다면 원작자가 허락한 순간 너도 나도 좋다며 수익을 창출하겠지만, 여기는 명예가 목숨
이상으로 중요한 세상이어서 방향이 이상하게 흘러간 것이다.

[기부금 또한 문화계의 발전을 위해 사용될 것. 세상에는 미처 재능을 꽃피우지 못 한 채 사그라드는


인재들이 많다.]
[이번 일을 통해 아이들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리루스 악단과 화가 이마르의 협업. 이외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협업할 것이라 말해...]

나비효과라고, 2 차 창작 허가의 영향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예술가들은 어차피 제논 일대기를


표현할 거, 아예 공동 전시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거장들은 하나 같이 자존심이 강하지만 결국 제논 일대기의 팬에 지나지 않았으니 잠시 접어뒀다. 도리어


그들은 자기들끼리 싸워봤자 아이작이 싫어할 뿐이라며 협업을 시작했다.

아이작은 단지 '팬아트'를 받는다는 개념으로 2 차 창작을 기꺼이 허락한 거지만 그 파급력은 예상을 한참
웃돌았다.

특정 계층만 즐기는 문화가 아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가 탄생하기 시작했으며 발전을 앞당기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즐기지 못 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

"아니. 내가 작가인데 정작 내가 즐길 수가 없네."

그 사람은 바로 제논 일대기의 원작자이자 파란을 일으킨 아이작이었다.

*****

나는 신문을 통해 전달된 소식들을 보며 황당함을 금치 못 했다. 단지 팬아트를 받는다는 개념으로 2 차


창작을 허락한 건데 전시회 수준으로 규모가 커졌다.

심지어 전시회를 어디에서 개최할지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이 서로 피터지게 싸우는 중이다.

미네르바 제국은 출판사가 자기네 나라에 있으니 출판사 근처에 개최해야 한다며 소리쳤고, 테르스 왕국은
개소리 말라며 자신의 수도에서 개최할 거라 꿋꿋하게 버티는 중이다.

'시각적인 예술품도 못 보는 게 아쉽네.'

출판사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나는 이렇게 부탁했다.

다른 건 몰라도 눈으로 볼 수 있는 예술품은 나에게 따로 보내달라고. 그러나 출판사는 힘들다는 답변을


보냈다.

초고의 경우는 우편물로도 보낼 수 있어서 추적당할 염려는 없지만 예술품 같은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용량이 매우 커 우편물로 보낼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며 이탓에 추적을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아버지도 출판사의 설득이 일리있다며 아쉽지만 포기하는 게 좋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보고 싶은데..."

팬아트를 볼 수 없는 작가라니 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상황인가. 나는 턱을 괴며 자기들끼리 신나게


떠드는 신문을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개최하는 곳으로 달려가 구경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 시간이 없다.

지금 당장 어디에서 개최할지 치고 박고 싸우는 중인데 방학은 불과 보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니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한다는 뜻인데 3 학년이 되지 않는 이상 이것마저 힘들다.

"쓰읍... 나중을 기약해야겠네."

팬아트를 보지 못 하는 작가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상황일까.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며 신문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전시회보다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내 책상에 한가득 쌓여있는 팬레터들. 이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분홍빛 편지지였다.

[체리 블라썸 로즈베리]

편지를 집으니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1 년이 넘는 기간동안 꾸전히 팬레터를 보내준 독자의
이름이다.

단 한 번도 답신을 해주지 않았는데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아하니 절로 미소가 나왔다. 이런 사람이 진짜


팬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아카데미에 입학하겠네.'

1 년 전에 보낸 편지에서 2 년 후면 아카데미에 입학한다고 했으니 아마 내년에 입학할 터. 운이 좋으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따스한 미소를 유지하며 체리의 팬레터를 읽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로즈베리 가문의 체리에요. 최근 날씨가 부쩍 더워졌어요. 작가님도...]

언제 봐도 느끼는 거지만 필체가 아름답고 글솜씨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내 글이 담백하지만 가끔씩 매운맛이 있다면 체리는 가볍고 통통 튀는 맛이 있다고 해야할까. 무엇보다


여느 귀족처럼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아 글이 눈에 잘 들어왔다.

'이런 애가 소설을 써야하는데.'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체리의 팬레터를 끝까지 정독했다.

이리하여 내 방학은 짦고 가늘게 지나갈 것처럼 보였다.

[테르스 왕국. 전시회 개최 포기. 과연 그 이유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미네르바 제국.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높은 마이샬 영지에서 개최를 원해...]

이틀도 되지 않아 우리 제국의 높으신 분들이 트롤링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이건 또 뭐야."

설마 리나와 레오르트 남매가 추진한 건가.

물론 내 입장에서 트롤링이지 현재 제국민들은 찬양하기 바빴다.

무엇보다 방학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아 볼 수 있을지부터가...


"아이작! 소식 들었니? 아카데미에서도 방학 기간을 늘렸다고 하는구나!"
"... ..."
"리루스 악단의 음악을 듣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는데... 이 엄마는 정말 기쁘단다."

아무래도 내 방학은 그냥 굵게 지나갈 모양이다.

< 84 화 >

문학, 예술, 언어, 기술, 놀이, 종교, 관습, 생활상, 건축 등등.

이렇듯 문화(文化)에는 다양한 종류가 존재하며 문화가 지닌 힘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만큼 강력하다.

좋은 문화를 가졌다면 사람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효과가 발생한다. 깨끗한 물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문화가 가진 힘은 겉이 아닌 속에서부터 천천히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세뇌나 교육을 통해 얄팍하게 박힌 관념이 아니라 그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따르는 것이니
효과가 뛰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 가까운 이 세상에서, 영향력이 제일 큰 문화는 단연코 '예술'이다.

예술에는 전에 설명했다시피 음악, 그림, 조각, 공예 등이 속해있으며 각 분야에서 최고라 칭송받는


거장들은 세계에서 내노라 할 정도로 막강한 위상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예술계에는 인간 뿐만 아니라 문명의 시초를 닦았던 엘프, 장인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워프도
섞여있다.

수인은 전투 종족이라 예술에 큰 관심이 없었고, 마족은 예술보다는 인권 운동(?)에 집중하여 이렇다 할
자랑거리는 없었다.

문화의 나라, 테르스 왕국은 문화가 지닌 힘을 일찍감치 깨달아 문화력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으며 그
결과 미네르바 제국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미네르바 제국이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테르스 왕국을 압박할 수도 없는 것이, 이미 테르스
왕국에서 발생한 문화가 제국의 뿌리까지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강압적으로 정복 전쟁을 펼치고 싶지만 문화가 너무 강력하여 다른 나라는 물론 제국민조차 꺼려하고 있다.
이탓에 외부에서 압박하는 것보다 테르스 왕국의 문화를 침탈하여 균형을 유지하는 걸로 노선을 바꾸었다.

만약 미네르바 제국의 문화력이 테르스 왕국과 비슷해진다면 문화 강국이라는 타이틀조차 무색해지니


기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테르스 왕국도 이 부분을 유념하고 있어서 제국과 피 말리는 문화 전쟁을
펼치는 중이다.

"그건 알겠는데 어째서 수도도 아니고 우리 영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는 거냐고. 그것도 헤일로
아카데미의 개학을 늦추면서까지."

나는 약간의 불만과 황당을 담아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인을 향해 따졌다. 솔직히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도통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에 맞은편에 앉아있는 황금빛 머리카락의 여인, 리나는 전보다 더 고생한 듯한 얼굴로 쓰게 웃었다.
본인도 따로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알 건 알아야 적어도 이해는 할 수 있다. 리나도 그 점을 알고 있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우리도 제국에서 전시회를 개최할 생각은 없었어. 네가 아직 제국에 종속되지 않은데다가
명망있는 예술가들은 전부 테르스 왕국에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우리 제국이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
보여주려고 한 거야."
"그런데 테르스 왕국에서 갑자기 제국에게 전시회 개최를 넘겼다?"
"그런 거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리나는 그리 대답하고 본인도 현재 상황이 답답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얼탱이가 없었지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 우리 둘이 있는 곳은 마이샬 가문의 저택 응접실. 우리 영지에서 전시회의 개최가 결정나자마자


리나가 직접 찾아왔다.

사실 리나 뿐만 아니라 레오르트도 찾아왔는데 그는 우리 아버지를 먼저 찾아갔다. 아마 지금쯤 나와


리나가 있는 응접실이 아니라 다른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터.

'어머니에게 듣기로는 단순한 전시회가 아니던데...'

나는 하녀가 가져다 준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어머니가 알려준 정보를 상기했다.

어머니에게 듣기 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팬아트'에 가까운 개념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팬아트의 수준을 한참 웃돌았다.

전생으로 따지자면 리루스 악단 같은 경우는 베토벤이 작곡 및 연주하는 격이며, 화가 이마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본인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연극단은 할리우드급이라 볼 수 있다.

내가 손으로 쓴 작품, 제논 일대기 하나 때문에 전세계의 별들이 모이고 모여 은하수를 이룬 것이다.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문화라...'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문화 또한 수면 위로 등장하고 있다.

본래 이 세상의 예술은 중세 시대답게 매우 심오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제논 일대기가 등장하고나서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했다.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교양이 필요한 문화가 아니라, 누구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문화로.

전생의 용어를 빌리자면 '스낵 컬처'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군데군데 다른 부분들이 많다.

문학 스낵 컬처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생긴 문화이며 이건 하나의 작품이 세계적인 히트를 친


것이기에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제논 일대기가 끼치는 영향력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찻잔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달그락- 거리는
소음과 함께 리나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일단 테르스 왕국은 넘어가고, 왜 하필이면 우리 영지야? 제논 일대기의 작가가 여기에 살고 있다는 걸
대놓고 알려주기라도 하는 거야?"

내 날카로운 질문에 리나가 화들딱 놀라며 두 손을 내저었다. 평소 가면을 쓰며 나를 대하던 때와 달라도


너무 다른 반응이다.

그만큼 나를 동등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며 지난 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다는 거겠지. 내가 그리


생각하는 동안 리나가 다급히 해명했다.
"그, 그건 절대 아니야. 개최 장소가 마이샬 영지로 결정된 건 순전히 우연이야. 너에게 이런 말을
하기에는 미안하지만 마이샬 영지는 배분된지 얼마 되지 않은 영지라 특색이 거의 없거든. 하지만 국경을
지킨 영웅에게 하사한 영지이니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아."
"그러고 보니 3 년 후부터 영지의 개발이 시작된다고 들었는데..."

나는 리나의 해명을 듣고 기억을 천천히 되새겼다.

아카데미로 향하는 마차의 마부에게서 듣던 이야기였나. 아무튼 분명 어디서 들은 이야기다.

"맞아. 발전 가능성도 높고 수도와 거리도 멀지 않겠다, 자연스레 마이샬 영지가 채택된 거야. 더구나
호크 경도 정치에 관심이 없으니 힘을 실어줘도 상관없을테고."
"아버지 머리에 흰 머리가 늘어나실 거 같은데? 서로 합의는 했어?"
"지금 오라버니가 설득하고 계실거야. 물론 호크 경은 네 의견을 우선적으로 여기시겠지만..."

리나는 내 눈치를 보면서 말 끝을 흐렸다. 만약 전이었다면 빙긋 웃으며 할 수 있지? 라고 압박했을텐데


지금은 정중하게 부탁하고 있다.

나는 묘하게 역전된 듯한 관계 속에서 골똘히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곧바로 허락하고 싶다.

그러나 전시회의 규모를 고려하자면 쉽게 받아들이기에도 애매하다. 리나가 말했듯이 우리 영지에는


잠재력만 있을 뿐 특색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영지처럼 특산물이 있다던가, 아니면 먹거리가 다양하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귀중한 광물이
발견되었다던가 등등. 이런 특징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영주로서 내 아버지의 능력이 볼품없는 것도 아니다. 남작의 작위를 받은 건 불과 5 년 전이고,


영지를 정식으로 하사 받은 건 2 년 전이다.

저택 자체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영지를 받은 건 아버지가 은퇴하시고 난 후다.

"음..."

나는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냐, 아니면 거장들의 작품을 보는 것이냐.

내가 허락해도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고, 아버지가 된다고 하셔도 내가 싫다고 하면 안


된다.

마지막에는 아버지와 상의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나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중인 리나를 바라보며
내 생각을 꺼냈다.

"일단 아버지와 얘기할게. 내가 괜찮아도 현실적으로 힘든 부분이 많거든."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전시회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보름. 그 시간 동안 수도와 황궁에서
지원해줄 수 있어. 때마침 마이샬 영지와 수도 사이의 거리도 가까우니 사흘만에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드물게 의욕을 활활 불태우는 리나다. 절대로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푸른색 눈동자에 똑똑히
새겨져 있다.

하긴 전생으로 따지자면 올림픽에 버금가는 이벤트일텐데 포기하면 돈과 명성을 허공에 뿌리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기회는 자연스레 테르스 왕국으로 넘어가겠지.

어쩌면 테르스 왕국에서도 이 점을 노린 것일 수도 있다. 우리들은 이런데 너희는 뭐 하고 있냐? 라는


식으로.
겉으로는 제논 일대기의 팬을 위한 전시회지,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국제적인 축제에 지나지 않지만 정치인들에게는 복잡하디 복잡한 축제.

'나도 만일에 대비해야겠다.'

만에 하나 정체를 들키기라도 하는 순간 상황이 복잡해질 것이다.

물론 나에게는 희대의 사기 스킬, '연재 중단', 혹은 '절필'이 있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다고, 초고 도난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웬 미친놈이 나를 노릴 수도 있다.

여태까지 그 부분이 염려되어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건데 초고 도난 사건부터 확신을 갖게 됐다.

나는 속으로 생각을 거치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리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만약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쩔 수 없이 수도에서 개최해야지. 수도는 현재 포화 상태라 정상적인 개최는 힘들겠지만 무리를 한다면
가능해."
"우리 영지에서 개최하는 이유가 그때문이구나? 텅 비어있어서 만들기도 쉬울테니까."
"정확해."
"그럼 누가 오는지는 알고 있어?"

이런 대규모 이벤트에는 반드시 귀빈이 참석하기 마련이다.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의 관계를 고려하자면 각 나라의 통치자가 직접 오진 않고 대리인을 내세울터.

아니나 다를까. 리나의 입에서 나온 이름들은 내게 아주 익숙했다.

"우선 너도 예상하고 있다시피 나와 오라버니는 물론이고 레킬리스 공작가도 참여할 거야. 헬리움에서는
세실리가 찾아올 수도 있지. 테르스 왕국에서는 빅토르 문화대신이 방문할거고."

문화대신이라 하니 조금 웃기게 들리겠지만 테르스 왕국의 특성을 고려하자면 매우 높은 직급일 것이다.


아마 레킬리스 공작와 비견되는 위치겠지.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나로서는 어질어질한 라인업이다. 그래도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철저히


준비만 한다면 적어도 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거 말고 다른 나라는?"
"세이비어 교국에서는 주교가 찾아올 수도 있겠지. 벨루스 왕국은 잘 모르겠네. 벨루스 왕국은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라 자기들이 오고 싶어서 올테니까."

나는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는 듯하자 머릿속으로 계획을 구상했다. 황실 측에서 모두 해주겠으나 적어도


얼굴 담당은 하는 게 좋을 듯하다.

우리 아버지에게 명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도리어 붉은 사자의 칭호를 가지고 있으니 무시 당할 염려도


없다. 정 안 되면 관람하면 그만이고.

'치안을 좀 더 신경 써야겠네.'

우리 영지는 개발을 시작하지도 않은 영지라 범죄가 드물지만 혹시 모른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걱정하고 있는 건 따로 있다. 수도도 아니고 우리 영지에 전시회를 개최할테니 분명


의심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터.
2 권부터 10 권까지의 초고 모두 내 개인 책상 서랍에 있다. 자물쇠로 단단히 봉인했지만 초고 도난
사건을 상기하면 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

"리나. 하나 부탁할 게 있는데..."


"치안 유지에 신경 써달라고? 그건 걱정하지 마. 황궁에서 기사단을 파견시켜줄게."

내 주변 사람들은 어찌 된 게 내 생각을 이토록 잘 읽는 걸까. 신기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황궁에서 친히 기사단까지 파견해준다고 하니 감사히 받아야겠지.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 솔직히 말해서 나도 전시회를 보고 싶었거든. 전시회가 아무 탈없이 진행되면 꼭 보답할게."


"아냐. 이건 보답할 이유가 없는 문제야. 오히려 우리가 더 노력해야 제국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는
거거든. 너는 그냥 예술가들이 선보이는 작품들만 감상하면 돼."
"시간이 엄청 촉박할텐데 고생이 많네. 정말 보름 내로 준비를 끝낼 수 있겠어?"

올림픽보다는 규모가 훨씬 적고 어디까지나 팬심에 비롯하여 발생한 이벤트에 지나지 않지만, 리나 같은


지도자 계급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다.

무엇보다 당장 눈 앞에 원작자인 내가 있으니 심리적으로 더욱 부담감을 느끼고 있을 터.

리나는 내가 걱정해주자 쓰게 웃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못 해도 해야지. 우리 제국에게 넘쳐나는 건 돈이니까. 급조한 티가 나더라도 못 만들지는 않을거야."

뒤이어 그녀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하기도 하고."
"흠."

아무래도 우리 영지가 채택된 이유에는 여러 복잡한 사정이 있는 듯했다.

나는 어두운 표정의 리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위로의 말을 전했다.

"힘내."

난 준비만 하고 팝콘이나 뜯고 있어야지.

*****

이후로 세계 각 국의 주요 인사들이 전시회에 참석할 거라는 소식이 연달아 터져나올 쯤이었다.

전시회가 전시회처럼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우려가 점점 흘러나왔으며, 너무 많은 귀족들이 모이자


평민들도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전시회의 예술가들도 보는 눈이 너무 많아지자 차츰 부담감을 느꼈다. 본인들은 제논 일대기를 향한


존경과 팬심(?)으로 전시회를 개최한 것인데 바깥에서는 난리도 아니었으니.

이대로 가다간 본래의 목적이었던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의 의미가 퇴색될 가능성이 높았다.

전시회가 개최되기 일주일 전, 아이작이 남긴 말만 아니었다면.

[모두 펜을 잠깐 내려놓고 즐거운 마음으로 즐겨주세요. 모두에게 행복한 추억이 될 수 있도록.]


저 말이 나오자마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나라에서 누가 참석한다는 소식이 모두 사라졌으며 오직
전시회가 준비 중이라는 말만 나왔다.

덕분에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전시회가 아닌, 축제의 의미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예술가들도 더이상 부담을 느끼지 않아 본격적으로 힘을 쏟을 수 있다.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는 모두가 축제의 분위기에 행복한 미소를 띌 때 쯤, 혼자 웃지 못 하는 이가


있었으니...

"아. 씨발. 원로원 개새끼들. 타이밍 놓쳤어."

원로원과 드잡이질을 하느라 참석 타이밍을 놓쳐버린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이었다.

그녀는 레인이 전달해준 신문을 들여다 보다가 눈쌀을 찌푸렸다.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참석한다고 공식적으로 성명을 내면 그야말로 초를 치는 격이다.

원래는 사심도 채우고, 겸사겸사 작가의 정보를 찾기 위해 전시회에 참석하려 했으나 원로원이 거세게
반발했다.

고작 그런 곳에 자기들이 찾아갈 필요가 있냐고. 오히려 그들 쪽에서 알븐하임에 찾아와야 한다고 말이다.

아르웬은 신문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시선을 떼며 작게 중얼거렸다.

"...안 되겠어. 하루면 되겠지."

< 85 화 >

'축제'는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개념 중 하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대인에게 있어서 '농사'란 특히 더 중요한 수단이었기에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에
민감했다. 설령 농사를 짓지 못 하는 환경이라 해도 계절마다 환경이 바뀌는 법.

이런 절기마다 변하는 환경으로 인해 사람들은 분명 '신'들이 개입했을 거라 믿으며 그들에게 제물을


바쳤다. 이 제물을 바치면서 생겨난 관습이 바로 축제다.

세월이 흐르고 문명이 발달할 수록 축제는 다양한 형태로 띄기 시작했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행하는
축제는 여전히 했지만 역사가 쌓이고 쌓일수록 사람들은 특별한 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중 유명한 축제의 종류라함은 당연히 '건국제'와 새해 축제다. 건국제는 그 나라에 있어서 갖가지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왔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어서 가장 방대한 규모의 축제가 열린다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런 건국제조차 새해 축제에 비하면 역부족이다. 새해는 종족을 불문하고 모든 이들에게 다채로운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당연히 제일 클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축제'는 전에 말했듯이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며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최근 축제를 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신에게 바칠 성스러운 제물? 성대한 축제를 열게 해줄 자본? 다양한 볼 거리?

전부 다 아니다. 축제란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즐겨야만 진정한 의미로 변하는 것이다.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계획을 체계적으로 설정해도, 볼 거리가 많아도 결국 사람이 없다면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그리고 나는 그 상식을 고스란히 체감하는 중이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로.

"우와..."

나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믿지 못할 광경에 입을 헤- 벌리며 감탄했다. 이전까지는 고요함 속에서 나오는


평화가 우리 영지의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 활기를 띄고 있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 영지는 특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골 영지다. 발전 가능성이 높은 이유도 마을에


청년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다가 수도와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골 깡촌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언제나 한적한 편이었다. 청년들이 이곳에 남아있는 이유도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가 네이비 기사단장으로서 명성을 떨친 건 모르고 있겠지만, 귀족이 된 평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청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이때문에 매일 같이 저택 마당에는 곡소리가 들린 거고.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거의 비어있던 길거리에는 건물과 노점이 하나 둘 씩 건설되는 중이었으며,


축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공연장도 드넓은 평야에 짓고 있다.

또한 가끔씩 안면을 튼 적이 있던 마을 주민들도 축제 준비에 힘을 보태고 있다. 아무래도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계획한 축제가 아니라 제국에서 지원해주는 축제이다보니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얼굴에 불만이 새겨질 일은 없었다. 오히려 마을이 번창하여 행복감에 힘든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라.

"내가 이 영지를 하사 받은지 몇 년은 지났지만 오늘처럼 활기를 띄는 건 처음이구나."

게임처럼 건물이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상황을 보고 있을 때 옆에 서 있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나는


특유의 묵직함이 담긴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그렇듯 강직한 얼굴로 하여금 남자다움이 물씬 풍겼지만 오늘따라 퀭한 모습이셨다. 며칠동안 잠을
못 자서 피로가 겹겹이 쌓인 안색이라 해야 할까.

실제로 전시회가 마이샬 영지로 결정되고 아버지는 부쩍 바빠지셨다.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결제 서류를
처리하는 건 기본이고 다양한 사람들과 대면했다.

호기심을 가지고 영지에 방문한 상단과 계약을 한다던지, 건설 책임자와 상담한다던지, 레오르트와 함께
전시회 계획을 세밀하게 짠다던지.

갑작스럽게 폭등한 업무량으로 인해 하루가 멀다하고 야근을 하시니 피곤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요?"


"피곤해도 밖의 모습을 보면 피로가 다 풀리는 느낌이란다. 그리고 이정도는 현역 시절에서도 한 적이
많아.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렇지."

그러고 보니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기사단장이셨지. 평범한 기사단의 일원도 아니고 자그마치
단장이었으니 사무적인 업무도 하셨을 것이다.

더군다나 네이비 기사단은 국경을 담당하여 배분받은 예산을 알뜰하게 쓸 수밖에 없다. 돈이야, 다른
곳보다 많이 받겠지만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부족한 곳이 군대다.

심지어 네이비 기사단은 특수부대와 비슷하니 기사 한 명을 양성하는 것만 해도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된다. 아버지는 책임자로서 그 예산을 효율적으로 분배해야 할테니 자연스레 능력이 상승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힘드시겠지.'

듣자하니 어머니도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신다고 들었다. 아마 지금 쯤 어마어마하게 쌓인 서류 더미에


깔려 시름시름 앓고 계시겠지.

그에 미안함이 들어 내가 쓰게 웃자 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턱- 얹으셨다. 두터운


손바닥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묵직함이 느껴졌다.

"너무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상 이 축제는 오롯이 너를 위한 축제니까 말이야.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나조차도 못 하는 걸 네가 모두 하나 하나 이루고 있잖느냐."
"아버지가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힘들었을 거예요."
"내가 너에게 해준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만이라도 좋구나."

부모님의 심정이 뚝- 뚝- 묻어나오는 말이다. 자식은 부모의 사랑과 정성이 없다면 아무것도 못 하는데
정작 그 부모는 자식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고 말한다.

내가 찡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아버지는 말없이 내 머리를 헝클어주셨다. 부모님의 앞에만 있으면 철없는
아이처럼 굴고 싶어진다.

나는 베시시 웃었다가 작업 현장을 가리키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럼 저것들 전부 전시회가 시작되기 전에 완공되는 건가요?"


"아마 아슬아슬하게 완공되긴 하겠구나. 일단 계획은 복잡하게 전시회를 위한 건물을 따로 설립하는 게
아니라 우리 영지 전체를 이용하는 거거든. 듣자하니 연극의 스케일도 크다고 했으니 아무것도 없는 우리
영지에 적합하지."

아버지의 설명처럼 전시회는 우리 영지 전체를 이용하여 개최된다. 그러니까 박물관처럼 복잡하게 설계된
건물에서 진행되는 행사가 아니라 의미 그대로 축제에 가까운 형식이다.

물론, 악단과 극단이 오는 만큼 계획에 맞게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활발한 낮에는 미술품을 관람하고
고요한 저녁에는 극단과 연극에 집중할 것이다.

나는 저녁에 진행될 극단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다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악단은 지난 번 아카데미에


신입생 행사에서 본 적이 있다지만 극단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아버지. 아버지는 연극을 본 적이 있으세요?"


"옛날에 네 엄마랑 몇 번 본 적이 있다. 꽤 재미있을 거란다."
"그 연극도 지금처럼 저기 평야 전체를 사용했어요?"

연극은 원래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게 정상이지만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이번 연극은 넓은


평야에서 진행될 계획이다.

이때문에 공연장이 설립되는 곳도 평야였으며 관람석도 만만치 않게 넓었다. 심지어 반투명한 막까지
설치하고 있었는데 아카데미 대련장에서 보던 것과 흡사했다.

"음..."

아버지는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턱을 만지적거렸다. 그리고 본인도


신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가 네 엄마랑 본 연극은 무대 위에서 하던 연극이었어. 하지만 이번에 찾아오는 극단이 여러 의미로
유명하다더구나."
"어떤 의미로요? 이름이 매트릭스 극단이라는 것만 알고 있는데."
"가장 현실적인 표현으로 유명한 극단이지. 예를 들어 눈이 내리는 배경이라면 실제로 눈을 내리게 만들고,
비가 오면 비를 내리게 한다더구나. 게다가 폭발까지 일으켜 생동감이 다른 극단보다 몇 배는 뛰어나다고
들었어."

뭐야. 그정도는 거의 영화 수준 아닌가.

연출 기법만 보자면 전생의 유명했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과 매우 흡사하다. 하지만 그건 영화


감독인데다가 지금 이 세상의 과학으로는 그런 연출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버지는 내가 어리둥절한 눈빛을 짓자 피식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이 아빠도 자세한 건 모른다. 이런 건 네 엄마에게 묻는 편이 더 좋겠지. 그래도 마법을 쓴 거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야."
"겨우 연극에 마법을 사용하는 건 좀..."
"그래서 더 유명한 거지. 아마 일원 중에 엘프나 마족이 섞여있을 가능성이 커. 무엇보다 우리는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구경하면 그만이란다."

특수 효과를 사용하는 연극이라... 정말 기대가 된다.

아마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지 않을까. 비록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겠지만 그마저도 충분하다.

나는 점점 기대가 되는 전시회에 창문 밖으로 바라봤다. 잠깐 한 눈을 판 사이에 건물 몇 채가 금방


세워졌다.

보통 건물을 하나 짓는데만 해도 몇 개월이 소요되는 게 정상인데 대충 지은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나중에 한 번 찾아가야겠다.'

부실 공사라도 했다가 어떤 참상이 벌어질지 모른다. 전생에서도 부실 공사 때문에 건물이 무너진 경우가
매우 많았으니 각별히 주의하는 편이 좋다.

물론 황실에서 지원해주니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세상은 자기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아이작. 혹시 전시회에 참석할 거라는 편지는 보냈니?"

창문 바깥을 구경하는 도중에 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다. 이에 나는 창문에서 시선을 뗀 뒤에 아버지를


바라보며 의문을 드러냈다.

"편지요?"
"그래. 우리야, 네가 작가라는 걸 알고 있어서 너를 위한 축제라고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제논
일대기의 저자를 위한 축제잖니. 정작 그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과연 이 축제에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구나."

다시 말하지만 이 전시회는 전세계의 거장들이 제논 일대기를 읽고 감명받아 본인의 작품을 내놓은 축제다.

그러니 홍철 없는 홍철팀이라고, 정작 원작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재미도 반감될 뿐더러 축제에 참석한
예술가들도 크게 실망할 수도 있다.

나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여러모로 걸리는 점이 있었기에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러다 문제라도 생긴다면요?"


"그럴 일은 없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애당초 축제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많을테고 참석할 거라는
말만 하면 돼. 축제가 모두 끝나면 몇몇 예술가들을 언급하면서 정말 재미있었다는 편지를 보내고."
"음... 알겠어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니 잠자코 따르는 게 좋다. 아버지도 내가 기꺼이 수락하자 피식
웃으셨다.

"그럼 나는 잠깐 쉬러 가마. 몇 시간 후면 또 서류가 쌓일테니 지금 쉬는 편이 좋겠지."


"천천히 하세요. 그러다가 쓰러지시면 어떡하시려고."
"현역이었을 때랑 비교하면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제가 도와드릴 거라도..."
"아니. 너는 가만히 앉아서 축제를 즐기기만 하면 된단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축제는 너를 위한
것이니까 말이야."

아버지는 그 말씀을 남기며 본인의 방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가 나가신 문 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로지 제논 일대기의 팬들을 위한 축제. 한산했던 영지는 활기와 생동감으로 채워졌으며 얼굴에는
웃음꽃이 폈다.

나는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감상에 젖었다. 내가 쓴 작품이 또 하나의 문화가 되어 영지에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신문으로 소식을 듣는 것도 아니고 직접 눈으로 보니 체감이 전혀 달랐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도 비슷한 곳이 있었지.'

김광석 거리라고, 김광석의 출생지였던 지역에 문화거리를 조성하여 그 지역만의 특색으로 변화했다.

'우리 영지도 그렇게 된다면...'

순식간에 변화하는 영지의 모습을 보자니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 랜드마크가
되어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지금처럼 일정 주기마다 축제를 펼친다.

이 얼마나 뿌듯하단 말인가. 돈과 권력에 욕심이 없다지만 내 소설이 하나의 문화가 된다는 건 참기 힘든
묘한 매력이 있다.

이런 걸 명예라고 해야 할까. 어째서 수많은 사람들이 명예에 죽고 못 사는지 얼추 알 것 같았다.

'예술가들도 이곳 저곳 돌아다니는 것도 힘들테고...'

욕심이 나서 그런지 몰라도 점점 내면에서부터 합리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걸 인지하지 못 한 건


아니지만 참기가 어려웠다.

나는 점점 영지답게 변하는 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읆조렸다.

"나를 위한 축제라..."

과연 먼 미래에 이 영지는 어떤 형태로 발전해 있을까. 김광석 거리처럼 하나의 문화 도시로 성장할까,
아니면 그저 그런 영지로 남아있을까.

'출생지가 마이샬 영지라는 것만 알려줘도 되려나?'


늘 말했지만 사람들은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경험 많은 현자로 추정하는 중이다.

그러니 출생지만 마이샬 영지라는 것만 알고 있을테니 약간의 조사만 할 뿐, 그 이상은 없을 확률이 높다.
출생지가 마이샬 영지일 뿐이지 현재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으니까.

'이건 나 혼자 결정하면 안 되겠네. 아버지랑 리나에게도 물어봐야겠다.'

이후로도 한참동안 창문 밖을 구경했다.

< 86 화 >

나는 창문 밖의 광경을 구경하다가 다음 날이 되어서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상의했다. 이렇게 된 참에


마이샬 영지를 하나의 문화 도시로 지정하는 게 어떠냐고.

전생의 김광석 거리처럼, 유명 인사가 태어났다는 근거 하나만으로 아름답게 꾸민다면 분명 영지가 크게


발전할 거라고 의견을 드러냈다.

물론 그 후에 일어날 후폭풍을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출생지는 그대로 두되, 나의 진짜


거주지를 알려주지 않는 방향으로 계획을 잡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조사를 하더라도 뒤탈은 없을 것이며 설령 정체가 들켜도 입만 잘 털면 문제가 없을 거라


말했다.

평소 한적했던 영지가 눈에 띄게 발전되는 모습을 직접 목도한 탓에 욕심이 약간 섞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설득력이 있으니 문제가 없을 거라 판단했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의 반응은...

"흠..."
"취지는 좋긴 한데..."

애매하시다는 반응을 보이셨다. 아버지는 생각이 깊으시니 그렇다 쳐도 어머니까지 선듯 동의하지 않으신
건 의외였다.

이에 내가 정치적으로 문제가 많냐고 묻자 어머니는 말없이 아버지를 바라보셨다. 그리고 한동안 턱을


만지면서 고민을 하시던 아버지는 우묵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아이작."
"네. 아버지."
"네가 한 이야기는 분명 너에게도, 그리고 우리 영지에게도 정말 좋은 일이란다. 발전력을 보다 더 빨리
늘릴 수 있는데다가 관광 효과가 극대화되겠지. 어쩌면 전시회 장소가 아예 이곳으로 고정될 수도 있고
말이야."

사실 뒷부분이 제일 큰 목적이긴 하다. 괜히 이곳 저곳 돌아다닐 필요없이 주기마다 우리 영지에서


전시회를 보여줬으면 하니까.

대신 강압적으로 우리 영지에서만 해! 이런 건 아니고 전시회 전까지 본인들 마음대로 작품을 공개할 수


있다. 전시회는 어디까지나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예술가들이 한데 모여 공개하는데에 의의를 두는 것
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작품의 인기가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그럴
일은 희박하다.

아버지는 그럼 왜 회의적인 입장을 내놓으시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쓰게 웃으시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근시안적인 이야기지, 멀리 본다면 여러모로 불안 요소가 많단다."
"불안 요소요?"
"그래. 일단 내가 이 나라의 기사로 근무하면서 몇 가지 깨달았지. 일간 첫 번째로 우리 제국은 욕심이
많아도 너무 많아. 너도 알다시피 우리 제국은 호시탐탐 테르스 왕국을 노리는 중이란다."

아버지가 검지 손가락을 펴며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미네르바 제국의 문화 욕심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흡수한 문화를 바탕으로 테르스 왕국을 집어삼켜 세계의
패권을 단단히 잡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군사력과 경제력은 이미 끌어올릴대로 끌어올렸고 수 백년의 역사를 통해 내실도 탄탄하게 마련했겠다,


주변 나라에 눈을 돌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대신 신성 교국인 세이비어는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절대 건드릴 수 없고 상업 국가인 벨루아 왕국은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다른 곳은 이종족이 세워 함부로 대하기가 까다롭다.

그러니 같은 인간 종족이면서 종족전쟁 이후 숙적으로 지냈던 테르스 왕국을 우선 순위로 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이샬 영지를 문화 도시로 만드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제가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부탁하면 제국도 그만두지 않을까요?"


"당장은 그렇겠지만 100 년 뒤에도 과연 그럴거라 생각하니?"
"네?"
"네가 죽고 난 후에도 우리 제국이 가만히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단다."

나는 아버지의 반박을 듣고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멍청한 것인지 몰라도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아버지도 내 표정을 통해 생각을 읽으셨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꺼내셨다.

"아이작. 문화의 진정한 힘은 단기적이지 않고 후대까지 꾸준히 이어진다는 부분에 있단다. 네가 죽고


나서도 제논 일대기를 포함한 네 작품들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겠지. 그리고 네 정체가 밝혀진다면 우리
영지도 네가 말한 것처럼 될 수도 있고."
"그럼 지금이 적기가 아니라는 건가요?"
"그것도 그렇지만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고 해야겠구나. 얄궂게도 말이지."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다른 이유도 아니고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니.

내가 당황과 황당이 골고루 섞인 반응을 보이자 아버지는 쓰게 웃으셨다.

"네가 죽고 나면 네가 쓴 작품들은 자연히 가치가 상승하겠지. 그리고 제국은 이를 놓치지 않을거야.


침략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초고를 일부러 테르스 왕국에게 빼앗기게 만든다던가, 최악의 경우 전부
불태우고 누명을 씌울 수도 있단다."
"... ..."
"지금도 황실에서 초고 도난 사건의 범인을 찾는다면 3 대를 멸할 거라 벼르고 있는데 초고가 전부
사라지면? 당장 전쟁이 나도 이상하지 않아. 그만큼 네가 가진 문화적 가치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반증해주지."

여기서 나는 이 세상이 중세 시대라는 걸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전생의 상식은 거의 통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뒤떨어진 세상.

예를 들어 전생에서 어떤 나라가 J.K 롤링의 대표작, 해리포터 시리즈를 모욕하다 못해 초고를 싹


불태웠다고 치자. 영국인을 포함한 수많은 세계인들이 길길이 날뛰겠지만 각 나라의 정부들은 비난 성명만
내고 끝낼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것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아주 훌륭한 모범 답안(?)으로 중국이 있겠다. 중국이 아무리


개지랄을 떨어도 피해를 입은 나라는 비판 성명만 낼 수 있지 직접적인 전쟁 선포는 하지 않는다.

물론 이건 중국의 힘이 너무 강력한 것도 있지만 그 미국조차 함부로 무력을 사용하지 못 했다는 걸


상기하면 된다. 중국 또한 마찬가지로 정당한 사유가 없는 이상 무력을 사용할 수가 없다.

이처럼 고도로 발달한 사회 문명에서는 검을 빼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참 중세 시대 답네.'

허나 이곳은 중세 시대가 배경인 판타지.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지구인이 본다면 실로
야만적이라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곳.

사소한 명분으로 전쟁을 터뜨려도 이상하지 않다.

만약 내 초고가 어떤 나라에 의해 전부 불태워지는 순간 몰매를 맞다 못해 전쟁 선포를 받게 될 것이다.


그 이후로는 당연히 멸망하는 거고.

아버지의 설명처럼 내가 버젓이 살아있는 이상 전쟁이 터지진 않겠지만 문제는 내가 죽고 나서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나의 작품을 이용해 미친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다.

이 세상에 환생한지 17 년이 흘렀지만 상식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난해했다.

"...알겠어요.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보니 문제점이 많네요."


"아이작. 너무 실망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아빠의 말은 어디까지나 예측이지 확실한 건 아니니까.
언젠가 네가 원하는 때가 올 수도 있어."

내가 의기소침해지자 어머니는 나를 위로해주셨다. 상냥한 그녀의 위로를 듣고 그나마 괜찮아졌으나


그래도 아쉬운 건 여전했다.

드물게 의욕을 갖고 밝힌 계획인데 자칫하다가 나비효과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무섭게 다가왔다. 괜히


아버지가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는 말을 한 게 아니다.

아버지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시더니 조곤조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원래 가시적인 결과가 나타나면 너처럼 욕심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정상적인 반응이지. 하지만
지금은 약간 성급한 감이 없지 않아 있구나."
"...그렇죠."
"그렇다고 아예 하지 말라는 건 아니야. 나는 어디까지나 충고를 해준 것 뿐이지, 선택을 강요하는 건
아니야. 네가 책임질 자신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지원해줄 거란다.

하나 같이 맞는 말씀만 하시는 내 아버지다. 전선에서 활동하던 군인이셨으니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실 터.

무엇보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 자라신 분이다. 전생의 상식이 뿌리깊게 박혀있는 나와 생각이
여러 방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당장 시대가 발전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어떻게 하면 내 작품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걸 막을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내가 살아있으니 문제는


없겠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자기 자식에게 끔찍한 미래를 안겨주고 싶은 부모는 절대 없다. 나도 언젠가
결혼하고 아이도 낳을텐데 그런 미래를 물려줄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그 미래의 원인이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면? 상상만 해도 참혹하다.

'아직 시간은 많아. 천천히 생각하는 게 좋겠어.'

하마터면 욕심에 눈이 멀 뻔했다. 전생의 상식을 이 세상에 대입해서는 안 되는데 가장 기본적인 부분조차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 영지를 문화 도시로 발전시키는 건 나중으로 보류해야겠다 판단하며 부모님을 바라봤다. 두 분


모두 내 입이 떨어지기까지 잠자코 기다리시는 중이었다.

"...그래도 욕심을 버리기가 어렵네요."

민망하다는 듯이 웃으며 하는 내 말에 아버지도 동감하셨는지 피식 웃으셨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그정도 욕심은 갖고 태어나야지. 명예라는 건 돈으로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니까


말이야. 물론 그 명예보다 소중한 걸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 이이도 참."

아버지가 은근슬쩍 어머니의 손을 만지며 능글맞게 대하셨다. 어머니도 부끄러워하면서도 아버지의 듬직한
어깨에 머리를 기대셨다.

저 모습은 10 년이 넘도록 지켜봤지만 역시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지금도 활화산마냥 불타고


계셨으며 도통 꺼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군인 생활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어머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은퇴하신 건가?'

나는 두 분의 연애사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어쨋거나 욕심이 가득 들어간 내 계획은 보류되었으나 전시회 준비는 아무런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황실에서 지원이란 지원은 모두 해준 덕분에 하루가 멀다 하고 영지가 실시간으로 변화했다.

그렇다고 우리 가문의 생활이 바뀌는 건 없었다. 나는 출판사에게 편지를 보내고, 부모님은 밀려오는
결재 서류를 처리하느라 진땀을 빼셨다.

물론 변화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안녕! 우리 귀염둥이!"
"어? 아델 누나? 누나도 전시회에 가려고?"
"물론이지! 이런 일은 어떻게 참아?"

방학동안 아카데미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던 니콜이 아델리아와 함께 저택으로 들어왔다.

니콜은 가족이니까 그렇다 쳐도 아델리아까지 저택으로 초대할 줄은 생각치도 못 했다.

"사실 우리 귀염둥이 보려고 온 것도 있..."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네가 머물 방부터 보여줄게."
"아아~ 왜~ 난 우리 아이작이랑 좀 더 얘기하고 싶단 말이야."
"여자친구도 있는 애한테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거야? 잔말 말고 따라와."

그렇게 아델리아는 니콜에게 질질 끌려갔다. 끌려가면서도 나중에 보자며 해맑게 인사하는 걸 보면


여전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확실히 누나랑 많이 친한가보네.'

니콜은 지금까지 누구를 집에 초대한 적이 없다. 무학 조교로 일하면서 바쁜 것도 있겠지만 우리 영지가


볼품없는 것도 있겠지.

하지만 전시회가 개최되는 지금, 아델리아도 호기심에 찾아온 모양이다. 그리고 니콜에게 초대해달라고
부탁했겠지. 눈으로 직접 보진 않았지만 아델리아다 보니 상상이 간다.

'어떤 손님이 찾아올까?'

원래 세계 각국에서 누가 누가 참석했다는 소식은 있었지만 내가 한 마디 하는 순간부터 모두 사라졌다.


그래서 누가 참석하는지 자세히 모르고 있다.

'뭐, 몇 명은 알 것 같지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아이작~"

전시회가 시작되기 하루 전, 마리가 우리 저택을 찾아왔다. 기습적으로 찾아온 게 아니라 편지를


보냈기에 그녀의 방문을 환영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레킬리스 공작가의 안주인, 사라 하우젠 레킬리스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레킬리스 공작가의 장남 케이 하우젠 레킬리스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마리 뿐만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도 함께 방문했다. 오빠는 지난 번에 한 번 본 적이


있었으나 사라는 처음이다.

사라는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미녀였는데, 마리의 외모가 어디서 나왔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만큼 똑 빼닮으셨다. 우리 어머니처럼 단아하면서 수수한 분위기를 풍겨 품위가 느껴졌다.

'...근데 전시회는 내일 열리는데?'

나는 예법대로 인사하면서 그런 의문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시간을 착각한 게 아니라면...

"미안해. 아이작. 내가 날짜를 '착각'해서 하루 일찍 왔어."


"... ..."
"오늘 하루만 신세져도 될까?"

방실방실 웃는 마리를 바라보다가 뒷쪽을 쳐다봤다.

그녀의 어머니, 사라는 마리처럼 방실거리는 미소를 짓는 중이었고 케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얘가 점점 요망해지구나.'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나는 마지못해 수락한다는 것처럼 쓰게 웃었다.

"알았어."

전시회가 코 앞까지 다가왔다.

*****

한편 비슷한 시간 알븐하임에서는...
"알았지, 레인? 이번에는 절대 사고치면 안 된다."
"알겠어요. 여왕님. 사고 안 칠 게요."
"그래. 어서 가자구나. 원로원에게 들키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엘프 두 명이 텔레포트를 통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고.

"대체 뭘 입어야 하지? 이건 지난 번에 보여줬으니 다른 걸로 입어야 하는데... 이걸로 할까?"


"이것보다는 이게..."
"이거 말고 다른 거 없어?"

헬리움에서는 세실리가 드레스를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뭘 입어야 그 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까?'

마음 속으로는 아이작을 생각하면서.

< 87 화 >

전에도 말했지만 축제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로 축제로 변하는 법이다. 그걸 반증하듯 우리
영지에는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조용하다 못해 고요했던 우리 영지지만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려


어지간한 도시를 방불케했다. 아직 전시회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정도다.

그와 동시에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 영지에 관광객들로 붐비는 건 당장에는 좋겠지만 그 후가


문제였으니까.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 영지는 특색이 거의 없는 수준이다. 지금은 전시회를 개최하기 위해 황실에서


다양한 지원을 해주고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효과일 뿐이다.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끝나도 그 이후의 유지비도 그렇고, 관광객들이 과연 다시 찾아올지도 의문이니


여러모로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단들이 많이 찾아와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

내일 전시회가 시작되어 사람들이 전보다 더욱 몰려들었다. 심지어 인간 뿐만 아니라 여러 종족도 간간이


눈에 들어왔으며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경도 다수 투입되었다.

또한 영지의 모습은 전과 비교했을 때 천지차이로 달라진 상태다.

리나의 말로는 급조했다지만 원래부터 이런 식으로 미리 설계를 한 건지 아니면 감독관의 센스가 좋은


건지 급조한 티도 거의 나지 않았다.

본래 3 년 후부터 영지를 발전시킬 계획이었다고 했으니 아마 그걸 그대로 앞당긴 게 아닐까.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겠지.'

황실 쪽에서도 만에 하나, 사고가 나지 않기 위해 건물을 한 두 번 정도가 아니라 여러번 검사했다. 특히


귀족과 예술가들이 머무는 여관은 좀 더 세심하게 관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밖에도 상점을 비롯한 여러 가게도 많이 생겼다. 원래 우리 영지에는 기본적인 물품을 파는 상점과


옷가게, 그리고 대장간밖에 없었으나 상단과 계약한 이후 다양한 지점들이 속속 등장했다.

물론, 사람이 오가면 오갈 수록 다양한 문제도 속속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불법 노점.


우리 영지에 전시회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빠르게 영지를 찾아와 노점을 차려 이득을 취했다.

물론 아버지와 계약하여 정식적으로 노점을 차린 경우가 더 많지만 어디에나 파렴치한 족속들은 있는 법.

아버지는 전직 기사답게 불법 노점 신고가 들어오는 순간 조사 이후 칼 같이 영지 밖으로 추방시켰다.


덕분에 길 한복판에 노점을 세워 통행을 방해는 일은 없었다.

'근데 중세 시대에 노점이라...'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세상은 기묘하디 기묘한 곳이다. 나는 철거되는 불법 노점과 노발대발하는


노점상을 번갈아보다가 금방 시선을 돌렸다.

지금 노점상보다 중요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부모님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서류를 처리하느라
바쁘다면 나는 손님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첫 스타트는 마리의 가족이라 부담없이 진행할 수 있었지만, 이다음부터는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대면했다.

제국에 사는 귀족은 물론이고, 심지어 다른 나라의 귀빈까지 맞이하여 긴장감이 장난아니었다. 여기서
실수라도 했다간 나는 물론이고 우리 부모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다행히 하나 같이 전부 다 제논 일대기를 사랑해서 찾아온 사람들이라 별 탈없이 진행되었다.

게다가 이처럼 하루 일찍 찾아온 손님들은 대부분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방문한거라 하루 종일 여관에서


휴식했다.

단, 귀족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도 리허설을 위해 하루 일찍 찾아왔다.

"만나서 반갑소. 리루스 악단의 지휘자, 리루스 휴즈먼이라 하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고명하신 리루스 악단을 맞이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프링글스 아저씨다.

리루스 악단의 지휘자, 리루스와 만난 내 첫 감상평이다.

머리는 털 하나 없이 말끔하여 햇빛마저 반사되었지만 콧수염이 다소 독특했다. 유쾌할 것 같으면서도


전문적인 면모를 띄고 있다 해야할까.

아무튼 간에 첫 인상 하나만큼은 만점이라 해도 무방했다. 명망높은 예술가들은 대부분 깐깐하거나 거만한


편인데 리루스는 사뭇 달랐다.

편지에서 보았다시피 리루스는 상당히 점잖고 겸손한 편이었는데 그것조차 감출 수 없는 카리스마가 물씬


흘러나왔다.

'지휘자'라는 직업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으며 단정하게 차려입은 예복으로 하여금 정중함을 풍겼다.

"붉은 머리가 참으로 독특하구려. 맹수처럼 빛나는 눈도 마찬가지고."


"리루스 씨도 콧수염이 인상적이십니다. 관리하기 힘드실텐데."
"표정처럼 말투도 무뚝뚝하군. 그래도 고맙소. 이 콧수염의 진가를 알아보는 이가 적은데 그대는
알아주는군."

리루스는 독특한 콧수염을 살살 잡아당기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본인의 콧수염을 일종의
아이덴티티로 생각하는 것 같다.
겉모습처럼 성격도 독특하다고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한거라 따로 입을 열지 않았다.
실제로 저런 콧수염을 관리하려면 어지간한 노력과 정성이 아닌 이상 매우 힘들다.

나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는 프링글스 아저... 아니, 리루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무대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리루스 씨도 아시겠지만 급하게 만든거라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을


겁니다."
"전혀 아니라오. 오히려 급조한 티가 전혀 나지 않았소. 물론 테르스 왕국에 있는 무대와 차이가 나지만
그건 시간이 있었으니 가능했지. 만약 미네르바 제국에도 시간이 있었다면 이것보다 더 훌륭한 무대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오."

리루스의 말마따나 제국에게 시간만 충분했더라면 훨씬 멋진 무대를 건설했을 것이다. 테르스 왕국에서 엿
먹어보라는 심보로 전시회 개최를 떠넘겨서 문제지만.

그래도 마음에 든다고 하니 나에게도 제국에게도 다행인 부분이다. 하지만 불안 요소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럼 전시회를 축제처럼 개최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큰 문제가 아니오. 나 뿐만 아니라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는 이들이 한데 모이며 즐기는데 이게
축제가 아니면 뭐겠소? 그리고 일정을 보아하니 낮에는 그림이나 조각을 보여주고 저녁에는 우리들이
나서더군. 확실히 계획을 잘 조율한 것 같소."

낯간지러운 말을 연달아 하는 프링글스 아저... 아니 리루스다. 덕분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리루스 악단만 이런 것이지, 다른 예술가들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른다.

특히 매트릭스 극단은 화려한 연출력을 자랑하는만큼 프라이드가 높다고 들었다. 비단 매트릭스 극단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가들도 대체적으로 자존심이 높은 편이다.

"마음에 드셨다니 저희에게는 안심이 되는군요.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즉각적으로 조시하겠습니다."


"음... 불편하다기보다는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소."
"그게 뭐죠?"

내가 살짝 긴장을 담아 묻자 리루스는 아쉽다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제논 작가가 정말로 우리의 공연을 보러 오는지 모르겠소."


"... ..."
"비록 출판사에서 참석한다고 말했으나 확실한 건 아니잖소? 어쩌면 피치 못할 사정이 발생할 수도
있지."

프링글스 아저씨 눈 앞에 있는데요.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리루스의 말로 인해 쓴웃음은 의문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제논에게 보여주고 싶은 무대가 있소. 매트릭스 극단도 기꺼이 허락한 일이라 더 아쉽군."
"보여주고 싶은 무대요?"
"그렇소. 단언컨대, 제논 일대기 팬에 있어서 완벽한 무대가 될 것이오."

도대체 이 변태들... 아니, 이 사람들이 무슨 무대를 만들었길래 저리 자신만만한 걸까.

본디 예술가들이란 시대를 불문하고 변태적인 성정이 없지 않아 있었기에 궁금함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을 빛내며 리루스를 바라보다가 은근슬쩍 찔러보았다.

"저에게 언질 정도만 해줄 수 있습니까?"


"그건 안 되지. 미리 알면 재미가 없잖소? 대신 완벽한 무대를 위해 출발하기 전부터 매트릭스 극단과
리허설을 여러번 했다는 것만 알려주겠소."

일종의 콜라보레이션 같은 것으로 보인다.

자그마치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거장이 하나로 합쳐 만든 무대이니 기대가 되었다.

"알겠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드실텐데 편히 쉬시길 바라겠습니다."


"환대해주어서 고맙소. 기회가 된다면 이 영지를 아예 문화 도시로 바꾸었으면 좋겠구려. 괜히 귀찮게
여기저기 돌아다닐 필요가 없을테니까."
"한 번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저도 욕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허허허. 제논을 위한 거리라... 같은 예술가로서 질투가 나지만 팬으로서는 기대가 되는군."

이후로 리루스는 자신의 무대를 즐겁게 시청하기 바란다며 자리를 떠났다. 떠나기 직전까지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그에게 호감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그나저나 콜라보라...'

과연 예술가들이 어떤 무대를 보여줄까. 다른 곳도 아니고 연출력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매트릭스 극단과의


콜라보다.

비록 전생의 영화와 비교하는 건 다소 무리겠지만 저렇게 자신만만하니 살짝 기대가 된다.

나는 리루스가 귀족 및 예술가 전용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까지 배웅해주다가 다시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리루스 뿐만 아니라 맞이해야 할 사람이 아직 남아있다. 곧 있으면 매트릭스 극단이 도착할테니 미리 미리


준비해 놓을 생각이다.

'진짜 귀빈급은 내일 방문할테고...'

공작 이상의 귀빈들은 이미 수도의 황궁에 도착한 상황이다. 황실에서 머무르다가 시간이 되면 마차를
이용하려 우리 영지에 도달할 것이다.

지금쯤이면 레오르트와 리나가 상대하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세실리도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저택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아이작!"
"어?"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것도 나에게는 아주 반가운 목소리가.

이에 설마하며 고개를 돌리니 내가 통과한 대문에서부터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동자가 인상적이었으며 전체적으로 유쾌하기 생긴 미남자.

내 친형이자 몇 달 전 네이비 기사단에 입단하여 훈련 중이라 들었던 브리스다.

"브리스 형? 진짜 형이야?"
"이야. 이거 얼마만이니? 못 본 사이에 키가 큰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깜짝 놀라자 브리스는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나는 도무지 믿지 못할 상황에


어버버거리다가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외모만 놓고 봤을 때 변한 건 없지만 군인인지라 햇빛 아래에서 훈련한 탓에 피부가 많이 탄 상태였다.

또한 반팔 티셔츠를 입어 드러난 팔에도 잔상처가 자잘하게 새겨져 있었고, 전보다 체격이 살짝 커진


느낌이다.

"휴가라도 나온 거야? 훈련 중이라 하지 않았어?"


"원래 그렇긴 한데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부단장님이 나를 보내셨어. 아마 우리 영지에서 전시회가
열린다고 하니 보내준 것 같더라. 듣자하니 황실에서 지시가 떨어졌다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 ..."

대충 누구의 입김이 들어갔는지 알 것 같다. 그래도 브리스를 볼 수 있어서 좋긴 하다.

내심 브리스가 전시회를 볼 수 없어서 아쉬웠는데 시기적절하게도 이런 선물을 해주다니. 조만간 감사


인사라도 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훈련은 할만해?"
"말도 마. 덕분에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한 달 동안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내내 싸워본 적 있어?"
"그런 걸 인간이 어떻게 해? 엘프도 엄청 힘들어할텐데."
"내 말이. 그런데 악으로 깡으로 버티니까 되긴 하더라. 아버지는 지금 안에 계셔?"
"서류 더미에 파묻히고 계셔."
"아버지도 고생하시고 계시네. 아, 그렇지. 아이작. 너 혹시 헬리움의 공주와 친분이 있어?"
"응?"

나는 브리스의 질문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택에 오기 전에 세실리와 만난 적이라도 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브리스가 저런 질문을 할 이유가 없다.

브리스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을 표하자 방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저택에 오기 전에 누가 나를 보면서 네 이름을 부르더라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같은 붉은


머리는 흔하지 않잖아? 그래서 얼굴을 봤는데 헬리움의 공주인 거야."
"어디서 만난 거야?"
"영지 입구에서 봤지. 그런데 마차를 안 타고 두 발로 온 것 같더라. 자기 경호원이랑 함께."
"응? 어떻게?"
"마법이라도 썼겠지. 처음에 목소리를 들은 방향도 하늘 쪽이었어."

하긴 마법을 숨 쉬듯이 사용할 수 있는 마족인데 굳이 마차를 이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수도가
아니라 곧바로 우리 영지에 찾아왔다는 건 의외였다.

'조금 있다가 한 번 찾아가야겠네.'

아마 지금쯤 귀족 전용 여관에 머물고 있지 않을까. 내가 속으로 그 생각을 하고 있을 쯤이었다.

"아무튼 헬리움의 공주랑 무슨 사이야? 너를 부르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는데."


"그냥 친한 친구 사이야."
"흠... 단순히 친구라기에는 정말 반갑다는 기색이었는데..."

브리스가 작게 중얼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나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 속에 짙은 의구심이


깔려있었다.

도대체 세실리가 어떤 반응을 보여줬는지 모르지만, 브리스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아마 격하게


반겼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제 3 자의 입장에서는 의심할만하다.
'이러다가 바람둥이로 낙인찍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브리스도 저택에 들어서는 순간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

"그나저나 선임들은 다들 좋아? 듣자하니 네이비 기사단 같은 곳은 짓궂은 사람들이 많다는데."


"말도 마. 내가 견습이라고 틈만 나면 놀린다니까. 심지어 지난 번에는 검을 얻다 두고 왔냐니, 대장간에
가서 하나 사러 갔다 오라니 괴상한 말까지..."
"... ..."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레파토리다.

전생에서 입대를 했을 때 저런 부조리는 거의 없어진 편이었지만 인터넷에서 자주 본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컴퓨터는커녕 텔레비전도 없는 군대일테니 전생보다 훨씬 심한 부조리가 만연하고 있을 터.

뭐, 네이비 기사단 같은 경우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를 치루는 곳이라 부조리를 일으킬 시간도 없을거다.

부조리를 저지를 시간에 죽지 않도록 몸을 키우겠지

"그리고 최근에는 소속 가문의 아가씨가 망언을 했다는 소문까지 돌더라고. 이때문에 분위기가 좀 안
좋아."
"망언?"
"응. 군인은 집 지키는 짐승이라고 했다던데? 다행히 가문에서 추방까지는 안 시켰지만 지금쯤 엄청
고생하고 있을거야. 단순한 훈련소가 아니라 기사 양성소에 집어넣어더라고."

따로 조사하지 않아도 100%의 확률도 아이라다. 자업자득이라고, 나는 입 안까지 번지는 고소함에 속으로
키득거렸다.

평범한 병사를 훈련시키는 곳도 아니고 기사 양성소라니. 훈련 기간도 훨씬 길 뿐더러 훈련의 강도조차


괴랄한 걸로 유명하다.

본래는 일반 훈련소에서 재능있는 사람을 뽑아 기사 양성소로 투입시키지만 아이라의 가문에서 찔러넣은


모양이다.

더군다나 정신머리를 싹- 고쳐놓으라 지시까지 했을테니 그녀의 암울한 미래는 안 봐도 비디오다.

"그거 참 불쌍하네. 피해는 없었지?"


"우리는 피해고 나발이고 국경을 지키느라 정신이 없어. 다행히 엘프 정찰병이나 몬스터의 활동이 거의
전무한 수준이라 여유로워."
"휴가는 언제 끝나?"
"3 박 4 일. 선임들 말로는 3.4 초짜리 휴가라는데 설마 그정도겠어? 내일은 전시회라 시간이 빨리 가긴
하겠다만 즐길대로 즐길 수 있겠지."
"음... 기사단에 제논 일대기 있어?"
"당연히 있지.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더라."

나는 브리스와 그동안 풀지 못 했던 이야기 보따리를 원없이 풀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전시회를 보다 더 즐겁게 보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여기가 그의 저택이구나."
아이작과 브리스가 저택 안으로 들어간 직후였다. 푸른색으로 가득 채워진 하늘에서 그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였다.

인간이었다면 하늘에 당당히 서 있는 세실리를 보며 경악했겠지만 그녀는 마족. 엘프와 더불어 마법의
축복을 받았다는 종족이다.

마법을 이용해 하늘을 돌아다니는 건 기본이고, 공간과 공간 사이를 넘나드는 텔레포트까지 사용할 수
있으니 이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형제가 서로 닮은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르구나.'

높디 높은 창공에서 저택을 내려다 보고 있어도 세실리에게는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다 보였다. 마족이라


선천적으로 시력이 월등할 뿐더러 이것도 마법을 이용하면 쉽다.

'그때 그냥 같이 저택으로 갈 걸...'

세실리는 저택 안으로 들어간 형제를 보며 아쉬워했다. 영지 입구에서 붉은 머리만 보고 아이작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 브리스라는 걸 알아채고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다시 하늘로 도망쳤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브리스와 함께 저택으로 들어올 수 기회였는데 그걸 걷어찬 것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그녀로서는 아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브리스와 만났을 때 외출용 옷을 입었다는 거다. 만약 전시회에 입을 드레스였다면 이


안타까운 마음이 더 깊어졌겠지.

전시회에 입고 나올 드레스는 아이작이 가장 먼저 봤으면 하는 바램이다. 신입생 행사 때처럼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찌릿해진다.

"...공주님?"

세실리가 머릿속으로 아이작을 떠올리고 있을 때 그녀의 옆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세실리를 불렀다.
당연히 그도 마족이었으며 세실리가 위로 솟아나 있는 뿔을 갖고 있다면 그는 양의 뿔 같은 형상을 띄고
있었다.

외모 또한 마족 답게 칠흑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갖고 있었지만, 검은색 복면을 착용하고


있어 자세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겉으로 드러나는 외관만 따지자면 충분히 미남이다.

그의 이름은 가르츠 발락. 세실리의 경호원으로 발탁된 '리퍼'의 단원이다.

가르츠도 마족인만큼 마법에 통달하여 세실리처럼 하늘에 서 있는 게 가능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발락 경.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 ..."

가르츠는 세실리의 지시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내심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착각했다지만 붉은 머리의 사내를 보며 반갑게 달려간 것도 그렇고 지금 하늘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도 그렇고.

리퍼의 단원으로서 왕족의 개인사는 배제하는 게 기본 원칙이지만, 오늘 세실리가 보여준 행동만 해도


의구심을 품기에 충분했다.

평소 세실리는 남자에게 거의 관심이 없었는데 저 붉은 머리의 남자에게는 깊은 호기심과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리퍼의 단원이어도 궁금할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별 볼 일 없는 저택이긴 하다만...'

기본적인 방범 마법은 깔려있는 저택이지만, 가르츠에게는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결국 인간이 설정한


것에 불과하니 저정도는 가볍게 뚫고 갈 자신이 있다.

하지만 저택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사뭇 다르다. 갈무리 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
하나가 저택을 당당하게 수호하는 중이었으니.

가르츠가 무미건조하면서도 호기심이 새겨진 눈빛으로 저택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때, 세실리는 투시


마법으로 저택을 훤히 들여다봤다.

당연히 그녀의 시선은 아이작에게 고정돼 있었으나 이내 눈 밑을 꿈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리도 있구나.'

언제 왔는지 몰라도 마리가 이미 저택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전시회가 내일 시작되는데 귀족 전용 여관도


아니고 저택에 머무는 걸 보면 아예 기정사실로 만드려는 듯했다.

그 생각을 들자 세실리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 그에게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것도 자신이고, 그의


정체를 먼저 눈치챈 것도 자신이다.

하지만 제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 한 채 실수를 저질렀다. 만약 흥분하지 않고 천천히 다가갔다면...


미래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설령 아이작이 자신을 부담스러워 해도 상관없다. 제논 일대기의 작가가 아닌, 자기자신을 바라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도 상관없다.

제논 일대기의 작가가 아이작이고, 아이작이 제논 일대기의 작가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전부 의미없는


말들이다.

'시간을 그때로 되돌릴 수 있다면...'

세실리는 아이작과 마리가 남들 모르게 포옹까지 하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악주기'가 슬슬 찾아와서 그런지 마음 속에 음험한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조금만... 조금만 참자. 그리고 지금은...'

그녀는 욕망을 간신히 억누른 뒤에 투시 마법으로 저택 내부를 샅샅이 뒤져봤다. 단면도처럼 보는 건


불가능하지만 방의 구조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

이윽고 아이작의 방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째서 확신을 내릴 수 있냐면 다른 방보다
책장이 훨씬 많았으니까.

아이작이 책벌레라는 것 정도는 이미 꿰뚫고 있다. 그리고 역사를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는 것까지도.

'그리고 저곳에...'

1 권을 제외한 제논 일대기 초고들이 잠들어 있다. 마족에게 있어서 보물을 한참 넘어선 성유물이나
다름없는 초고들이.

허나 저택에 깔린 방범 마법의 수준이 너무 부족하다. 인간은 막을 수 있어도 엘프나 마족 같은


이종족이라면 손쉽게 침입할터.
더군다나 전시회가 마이샬 영지에서 시작되니 분명히 의심을 품고 일을 저지르는 불한당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제국 측에서 미리 방지하겠으나 그래도 불안하다.

만약 여기서 초고가 모두 다 도난당하게 된다면... 아이작이 낙담하는 걸 넘어서 절망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제논 일대기를 절필할 수도 있겠지.

그것만큼은 막아야한다. 세실리는 굳게 다짐하며 곁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가르츠를 불렀다.

"발락 경."
"네. 공주님.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투시 마법으로 2 층 오른쪽에 있는 방을 보세요. 다른 방보다 책장이 많이 있으니 구분하기 쉬울 겁니다.
확인하셨다면 고개를 끄덕이세요."
"확인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저택으로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저 방에 들어서는 순간 감지 마법을 설치하세요. 누가
침입하면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가르츠는 내심 왜 그래야 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내리눌렀다. 자신은 그저 왕족의 명령에 따르면 되는


검에 불과했으니.

세실리는 충성스러운 가르츠의 대답을 듣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인내심이 일반 마족보다 몇


배는 강한 리퍼답다.

"아. 그리고 그건 가지고 왔죠?"


"우리 마족의 역사가 담긴 책이라면 갖고 왔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세실리는 빙긋 웃더니 저택을 대문 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정식으로 방문할 준비를 하죠."


"예. 공주님."

손님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 88 화 >

아이작이 본인의 영지에서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을 때 황궁에서도 예우를 담아 귀빈들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수도를 거치지 않고 마이샬 영지에 직접 방문한 사람들은 대부분 평민이거나 예술가, 그리고 백작 이하의
귀족들이다.

그 이상의 계급은 대부분 국가에서 중요 관직을 맡고 있어서 방문할 나라에게 공식적으로 초청을 보내는
편이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방문할 수도 있지만 괜히 사고라도 난다면 외교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어서


지양하고 있다.

특히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은 견원지간이나 다름없는 사이인만큼 사소한 방문이라도 복잡한 절차를
거치고 있다.

그리고 현재, 테르스 왕국은 본래 자신의 수도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미네르바 제국에게
떠넘기듯이 권한을 양도했다.
미네르바 제국은 개최할 생각은 없고 그저 어필만 했으나 갑작스레 양도받으니 바쁘디 바쁜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보름을 살짝 넘어선 기간 안에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 높은 관직의 귀족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야근을 했으며 이건 황궁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황태자와 황녀와 같은 왕족들이 일을 안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두는 순간 나라가 몰락한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인지하고 있는


제국이다.

이로인해 황제로 즉위하지 않더라도 그 밑의 자식들은 특정 분야를 담당하여 정사를 돌본다.

500 년의 역사 속에서 황제가 다양한 실책을 저질러도 나라를 말아먹을 수준의 암군이 탄생하지 않은
이유다. 게다가 레킬리스 공작가가 옆에 착 달라붙어 지켜보고 있으니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덕분에 황태자 레오르트, 그리고 황녀 리나는 최근 밀려들어오는 업무량으로 인해 제대로 된 잠도 못 자고


귀빈을 맞이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최근 잠을 못 잔 건가?"

하늘처럼 푸른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 마지막으로 베일 듯한 콧날이 인상적인 미남자가 생글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왠지 모르게 시시때때로 장난을 잘 칠 것 같이 싱글벙글 웃는 그 미모가 짜증났던 것일까. 그와 마주하고


있는 레오르트도 싱긋 웃으며 한 마디 꺼냈다.

"누구 덕분에. 반대로 자네는 얼굴빛이 좋아보이는군."


"우리는 어디까지나 주최하는 쪽이 아니라 즐기는 쪽이니까. 기대를 한가득 담고 왔지."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미남자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레오르트의 눈 밑이 꿈틀거렸다. 그간


해일처럼 몰려오는 업무량으로 인해 그의 눈 밑에는 다크 서클이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황태자이니 관리를 엄중하게 받았을텐데도 불구하고 다크 서클이 새겨진 걸 보면 그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평소 예리함을 품던 파란색 눈동자에도 희미하게나마 빛을 잃을 정도로 피로에 젖은 상태다.

반면 푸른색 머리카락의 미공자이자 테르스 왕국의 왕태자, 라오스 듀커드 폰 커쳐스는 멀쩡했다. 오히려
멀쩡하다 못해 활기로 넘쳐났으며 여유까지 묻어나왔다.

대외적으로 라오스가 제국을 방문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전시회 관람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유이지 내적으로는 복잡한 정치가 얽혀있었다.

테르스 왕국으로서는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어도 그만, 실패하면 쌍수를 들만한 일이었기에 마음을
편하게 먹고 올 수 있었다.

솔직히 전시회가 성대하게 망했으면 좋겠으나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적다. 제국에서도 테르스 왕국의
의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만큼 촉박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을테니까.

라오스는 그저 축제를 즐기자는 마인드로 제국을 찾아온 것이다.

"근데 제국에서 무리를 해서라도 전시회를 빨리 개최할 이유가 있었나요? 저는 이해가 안 가는데."
라오스의 왼쪽에 앉아있던 귀여운 소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라오스처럼 푸른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녔으며 긴 생머리와 단정하게 자른 앞머리가 특징이었다.

또한 인형처럼 깜찍한 외모와 가녀린 체구로 하여금 보호 본능을 일으켰다.

이 소녀의 이름은 라라 듀커드 폰 커쳐스. 테르스 왕국의 제 3 왕녀이자 사남매 중 막내다.

큰 언니인 1 왕녀는 이미 결혼하여 공식적으로 참석한다는 성명을 내지 않고 마이샬 영지로 향했으며 작은


언니인 2 왕녀는...

"라라. 그런 질문은 실례이니 가급적이면 하지 말라고 했잖니?"

중앙에 앉은 라오스의 오른편에 앉아있었다. 여자치고는 중저음에 낮은 목소리가 특징이다.

외모 또한 그에 부합하듯이 딱딱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선천적인 아름다움은 감출 수 없었으며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성숙한 미모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가장 독특한 점은 바로 그녀의 옷차림. 보통 이런 공식적인 상석에서는 드레스를 입어야 되지만


그녀 혼자만 기사들이 입을법한 제복 차림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히리야 듀커드 폰 커쳐스.

배경을 모두 제외하고도 테르스 왕국에서 출중한 능력으로 유명한 기사다.

"하면 안 되는 질문이었어요?"
"그래. 우리는 어디까지나 전시회를 즐기러 온 거라고 몇 번을 말했잖니?"
"그럼 사과할게요. 죄송합니다."

히리야의 다그침을 듣고 라라가 앞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에 레오르트는 물론, 그의 옆에 조신하게 앉아있는 리나도 쓴웃음을 지었다.

현재 라라의 나이는 고작 12 살밖에 되지 않았으며, 궁금한 건 다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이다.

하지만 히라야의 말처럼 결례를 저지른 건 변하지 않았기에 라오스도 진중한 목소리로 사과를...

"아니. 라라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때마침 나도 궁금했던 부분이거든."

...하기는 무슨 그 반대였다. 히리야는 문제를 더 키우려는 라오스를 찌릿 노려보다가 팔짱을 끼며


묵묵히 눈을 감았다.

이런 복잡하고도 더러운 정치 세계는 그녀에게 질색이었지만 입장이 입장이다보니 억지로 참석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왕국에 잔류하여 남은 훈련에 매진하고 싶었다.

그사이 라오스는 이 기회에 제대로 압박할 생각이었는지 생글거리는 얼굴로 남매에게 물었다.

"전시회를 개최하는 건 시간이 오래 걸려도 상관없는 일이지. 그런데 지금처럼 급히 준비를 할 필요가
있나 싶어."
"다 사정이 있다네. 자네들이 알 필요는 없어. 어차피 즐기면 되지 않은가?"
"흠. 혹시 제논 일대기의 작가와 크게 관련된 일인가?"

예리한 라오스의 지적은 레오르트는 물론 괜찮은 척 커피를 마시던 리나마저도 흠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지극히 미미한 반응이어서 라오스는 눈치채지 못 했다.


뒤이어 레오르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대답을 꺼냈다.

"역시 눈치가 빠르군. 자네의 말이 맞아. 제논에게 하루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개최 일정을 앞당긴
거라네."
"거짓말도 잘 하는군."

블러핑이라고, 가끔 가다 진실이 거짓으로 들리는 경우가 적잖이 존재한다. 지금 레오르트가 꺼낸 진실도


라오스에게는 거짓으로 다가왔다.

테르스 왕국에서 이 잡듯이 찾고 있는 사람을 제국에서 먼저 찾는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겼기에. 심지어


지난 번에는 꼬리까지 밟아 곧 있으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자신감 덕분에 라오스는 레오르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판단했다. 레오르트로서는 실로 다행스러운


부분이었지만 마음이 요동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사실상 도박수에 가까운 말이었으니까. 여태까지 꺼낸 말은 거짓이 아니라 모두 진실이었다.

개최 일정을 어떻게든 앞당겨 아이작에게 보여준다. 그동안 레오르트와 리나가 그에게 저지른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무리를 감행한 것이다.

'많이 성급했지...'

넉넉잡아 1 년 후에 전시회를 개최해도 되지만, 그렇게 되면 테르스 왕국에게 기회를 빼앗길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작은 당연히 테르스 왕국에 방문할 가능성이 크지만 더 나아가 그곳의 문화에 심취할
수도 있다.

특히 리나의 말을 따르자면, 아이작은 역사를 사랑해 마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테르스 왕국을 찾아가 문화


연구를 할지도 모른다.

제국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눈 뜨고 코 베이는 식으로 빼앗길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역사학자로 제국에 종속되는 거지만 레오르트에게는 그게 그거다.

그런 레오르트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라오스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시종일관 여유롭게
대했다.

"어쨋거나 잘 알겠어. 너희 제국이 준비하는 거니 마음 놓고 구경해도 되겠지. 제논도 참석한다 했으니


운이 좋으면 찾을 수도 있고."
"제논을 찾는다면 어쩔 셈이죠?"

레오르트가 아닌 리나가 경계심이 들어있는 음성으로 물었다. 레오르트와 달리 그녀는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걸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이탓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라오스는 그녀의 질문에 한 눈을 치켜뜨며 의문을 드러낸 것도 잠시, 별 일 아니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당연히 우리 왕국으로 정중히 모셔가야지. 참고로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정중하게 데려갈 거야.
너희 제국에서 채가기 전에 말이지."
"제논은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본인의 마음을 드러냈어요. 그러다가 또 연재를 중단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우리 왕국이 언제 예술가들을 압박한 적이 있어? 리루스 악단에게 애국가를 작곡해달라고 했어, 아니면
매트릭스 극단에게 선전용 연극을 만들어달라고 했어? 심지어 제이로스 혁명을 연극으로 재현시켜도 우린
가만히 있었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위 전까지 아이작의 명성을 이용할 계획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제국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고한들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게 되는 순간 의미가 없어지니까.

안 그래도 수도 없이 인재를 빼앗던 제국이었으니 테르스 왕국으로서는 어떻게든 수를 써야만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제논의 명성을 이용한 선전이었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휴재 사태가 발생한 이후에 그 마음을 깔끔하게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제이로스 혁명
같은 사건이 다시 한 번 발생하는 것만큼은 막아야했다.

대신 노선을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책을 쓰는 건 자유롭게 놓아두되 제논을 어떻게든 왕국에


귀속시키도록 만들자.

그거 하나만으로도 미네르바 제국은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밖에 없다. 테르스 왕국은 제이로스 혁명으로
인해 흔들리던 내실을 더욱 탄탄하게 마련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그리고 그런 거물급 예술가를 묶어두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은...'

라오스는 팔짱을 끼며 묵묵히 앉아있는 히리야와 햄스터처럼 과자를 우물거리는 중인 라라를 번갈아봤다.
두 여자 모두 각자 개성에 맞는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으며 직위 또한 일국의 왕녀다.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제논에게 가장 적합한 여자들이다. 만약 평범한 예술가였다면 과분하다 못해


어림도 없는 이야기겠지만 제논이어서 가능했다.

허나 히리야는 이미 군인의 길을 선택하여 애매했고 라라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 정략결혼이라한들 최소한


성인이 되어야 가능하다.

무엇보다 제논은 현재 나이가 많은 현자로 추정되고 있는 바, 여자에 욕심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래도
이정도 정성을 보여준다면 제논도 마지못해 승낙해줄 터.

더군다나 굳이 히리야와 라라가 아니어도 된다. 비록 내다버린 자식이지만 '핏줄'이 이어진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까.

라오스는 헤일로 아카데미에 쫒겨나듯이 입학한 핏줄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 생활은 할만해?"


"어느 나라의 인재들이 우리 제국에 몸을 바친 덕분에 정말 편안하지. 문화와 복지 모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일세."
"하하하. 그야 그렇겠지."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건... 아. 혹시 아델리아 때문인가?"

레오르트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바가 있었는지 라오스에게 물었다. 리나도 그에게 들은 바가 있었는지


무덤덤한 표정이다.

이에 라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오르트의 생각이 맞다는 걸 알려줬다. 다만 얼굴에는 미미한 불쾌함이
실려있었다.

"자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을거야. 대신 그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군."


"흠... 굳이 버렸어야 했나? 히리야처럼 기사가 되어도 상관없을텐데. 현재 아카데미에서 무학 조교를
맡는 중이고."
"... ..."
히리야는 레오르트가 본인을 언급해도 눈을 지그시 감으며 가만히 있을 뿐,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 했다는 모습이다.

그런 히리야의 무례한 반응에도 레오르트는 개의치 않았다. 앞뒤가 꽉 막혀있는 히리야의 성정은 여태까지
많이 보았기에 어련히 넘길 수 있다.

"만약 성을 버리고 평범하게 살았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사생아 주제에 인정받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아바마마도 본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실수라 말씀하셨고."
"아카데미에서는 크로스라는 성을 갖고 있다만."
"아카데미로 보내기 전에 왕족의 성을 사용하지 말라고 협박했거든. 아마 크로스라는 성은 자기 어머니의
성일 거야. 천하디 천한 창녀의 성이지."
"... ..."

제이로스 혁명 이전의 매운맛이 잔존해 있는 대답이다. 레오르트는 테르스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의
개인사를 떠올렸다.

테르스 왕국민에게 프리드리히는 온화하면서도 왕답지 않게 한 여자만 사랑한 로맨티스트로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프리드리히 본인도 따로 첩을 두지 않고 오로지 왕비 한 명만 바라보며 사랑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터졌으니, 바로 프리드리히가 왕비를 만나기 전 욕정을 해소하기 위해 만났던
매춘부와의 관계다. 하필이면 그때 피임을 실패하여 아이가 생겼다고.

만약 매춘부가 조용히 있었다면 모를까.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던 탓에 욕심이 생겨 대뜸 프리드리히를


찾아갔다.

그 사건 하나 때문에 왕궁이 난리가 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프리드리히는 격하게 부정했지만 하늘을


닮은 아이의 푸른색 눈동자가 그의 자식이라는 걸 대변해줬다.

다행히 그 사건을 철저하게 은폐한 덕분에 바깥으로 새어나갈 일은 없었고, 아이는 받아들였지만 어머니는
쥐도 새도 없이 사라졌다고.

'니콜에게 장난을 자주 치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서 그랬던가.'

언제나 생기발랄하게 웃는 얼굴 속에는 지독한 외로움이 담겨있다. 물론 레오르트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끌만한 사항이 아니었던지라 대충 넘겨버렸지만.

"그나저나 그건 왜 묻지? 아델리아가 전시회에 참석하는지 묻고 싶은건가?"


"역시 너는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어."
"욕을 시원하게 박기 전에 장난은 그만두지."

저런 장난기는 유전임이 확실하다. 아델리아도 그렇고 라오스도 그렇고 틈만 나면 장난을 쳐댔으니까.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유쾌하게 장난을 치던 라오스는 레오르트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렸다가 본론으로


돌아왔다.

"일단 맞긴 해. 잘 살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아직까지 인정받고 싶은지 묻고 싶거든."


"만약 성을 버린다고 하면 어쩔텐가?"
"너희들이 알아서 해. 선전용으로 써던 말던 우리 왕국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거든. 그 천한 년은
어디까지나 아바마마의 '실수'에 불과하니까."

한 사람의 탄생과 인생을 단순히 '실수'라고 여기는 태도. 아이작이 듣는다면 눈쌀을 찌푸릴만한
태도였지만 이들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식이다.
군주가 정치적으로 실책을 저지르면 백성이 불만을 토하겠지만 사생활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그렇구나~ 라며 넘겨짚을 뿐, 개인적인 인성은 중요하지 않다.

이에 레오르트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알았네. 어디까지나 내 예상이지만 전시회에 참석할걸세."


"고마워. 그럼 이제 우리도 슬슬 준비할까? 내일 즐기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쉬는 게 좋을 것 같네."

이리하여 전시회 전 날 밤이 점점 다가왔고.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환영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저희가 공주님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죠. 그나저나 정말로 아름다우시네요."
"감사합니다. 아이작의 얼굴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했는데 남작 부인에게서 물려받은 모양이에요."
"어머. 그 말씀은 우리 아이작이 예쁘다는 건가요?"

아이작은 갑작스러운 세실리의 방문에 곤혹을 겪고 있었다.

그녀의 방문에 처음에는 모두가 당황했지만 세실리의 화려한 말재간을 통해 자연스레 녹아내릴 수 있었다.
심지어 아이작의 어머니와는 말이 잘 통했는지 벌써부터 이야기꽃을 피우는 중이다.

"그리고 아이작. 여기 네가 원했던 책."


"응? 무슨 책이에요?"
"마족의 역사가 담겨있는 책이야. 헬리움의 학자가 선별했으니 아마 너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오오...! 정말 감사합니다. 누나."
"감사는 무슨. 내가 더 감사하지."

무엇보다 아이작조차 세실리에게서 역사 서적을 선물받고 간단하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큰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마리다.

그녀는 아이작과 오순도순 지낼 생각에 가득 차 있었으나 세실리의 방문으로 모두 무산되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표출할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

결국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아이작을 으슥한 곳으로 불러낸 후, 그를 엄하게 다그쳤다.

"아이작."
"...응."
"너의 여자친구로서 미리 말할게. 전시회 동안에는 나랑 항상 붙어있기. 떨어지거나 다른 여자를
바라보면 손도 못 잡게 할 거야."
"그럼 키스는 해도 돼?"
"...넌 진짜 변태야."

마리의 아이작의 역공에 얼굴이 붉어짐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에 아이작은 능글거리는 말투로
연이어 물었다.

"그래서 대답은? 키스해도 될까?"


"...지금 말고 나중에. 세실리가 몰래 볼 수도 있잖아. 찾아온 걸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부끄러워?"
"됐어! 이 빨간 변태야! 내일 원없이 하면 되잖아!"
"빨간 변태는 또 뭐야?"

여러모로 다사다난한 전시회가 될 듯한 예감이 들었다.


< 89 화 >

고대하고 고대하던, 동시에 우려하던 전시회의 아침이 밝아왔다.

비록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부랴부랴 결정된 전시회지만 제국에서 수많은 자원과 인력을 투입한 덕택에
구실 정도는 마련했다.

게다가 전시회의 구성 자체가 조용한 건물에서 작품을 관람하는 형식이 아니라 축제에 가까운 형식이다.

텅 비어있는 영지에 작품을 전시할만한 공간을 따로 정하고 그 외에는 주민들끼리 즐겁게 놀면 끝이다.

또한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음악과 연극은 저녁에 계획돼 있으니 낮에는 영지 안을 돌아다니면서


전시된 작품을 감상하면 된다.

"어때? 잘 어울려?"

모든 준비를 갖춘 뒤 본격적으로 축제를 즐기기 전의 저택 내부.

나는 축제를 위해 드레스를 착용한 마리의 모습을 보며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예뻐도 너무 예뻤으니까.

어깨는 완전히 노출된 반면 가슴은 살짝 드러났으며 백색의 드레스라 그녀의 우유빛 피부를 더욱
강조시켰다.

전반적으로 화려한 문양이 거의 없는 수수한 외관이고 치맛단도 무릎에 간신히 닿을 정도다. 덕분에
유려하면서도 길쭉하게 뻗은 그녀의 맨다리가 온전히 드러나 시선을 빼앗았다.

지난 번 행사에서 입은 드레스가 마리를 성숙하게 만들었다면, 지금 입은 드레스는 그녀의 소녀스러움을


배로 증가시킨 모습이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하던가. 이런 변신이면 어느 남자던 간에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다.

'와. 진짜 이 사람이 내 여자친구라고?'

오죽하면 이렇게 예쁜 여자가 정말 내 여자친구가 맞는지 현실을 의심할 정도다. 그만큼 마리가
비정상적으로 예쁘다는 뜻이다.

게다가 아름다운 것도 아름다운 거지만 개성이 워낙 뛰어났다. 푸른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하얀


머리카락하며 우윳빛 피부, 그리고 보석처럼 빛나는 파란색 눈동자까지.

다른 사람이 절대 대체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웠으며 또한 사랑스러웠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마리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솔직한 감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예뻐."
"겨우 그걸로?"
"하늘에서 내리는 새하얀 눈을 닮았다는 여자를 표현할 때 너를 참고하면 될 것 같아."
"그게 뭐야? 정말 소설 작가다운 감상평이네."

마리는 내 칭찬이 낯간지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며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은 그녀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본 것도 잠시, 팔짱을 끼며


본격적으로 감상(?)을 시작했다.

그림이나 사진으로 남겨둘 수 없으니 기억으로라도 선명히 남기기 위해서다.


"...그렇게 쳐다보면 부끄러운데?"
"너무 예뻐서 어쩔 수 없어. 미안."
"됐어. 이제 밖에 나가기나 하자."

내 솔직담백한 고백에 마리는 얼굴을 붉힌 채 나에게로 종용했다. 나도 아쉬움을 뒤로 하고 감상 모드를


끝냈다.

어차피 마리는 오늘 하루 종일 이 드레스를 입고 돌아다닐테니 기억에 남기는 건 쉬울 것이다.

하이에나 같은 남자들이 마리에게 시선을 주는 게 좀 고깝긴 하겠지만. 물론 마리는 귀족이라는 티가 너무


나서 함부로 대하지는 못 할 것이다.

그리고 황궁에서 친히 경비경을 파견하여 치안에도 신경 썼으니 범죄가 발생할 확률은 극히 낮다.

"아. 두 사람 이제 나가는 거야?"


"응?"

슬슬 마리와 함께 저택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내 귀에 세실리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어왔다.

이에 고개를 돌려 우리를 부른 세실리를 바라봤지만 곧바로 헛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혹시 나도 같이 가도 될까?"

세실리가 빙긋 웃으며 우리에게 권유했지만 현재 내 귀에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세실리의 미모가 하늘을 찌를듯이 아름다웠으니까.

팔과 등은 드러낸 채 끈을 목 뒤로 고정시키는 홀터넥 드레스라고, 덕분에 그녀의 자랑거리라 할 수 있는


가슴이 더욱 부각되었다.

다른 여자였다면 섹시하다는 평만 나오겠으나 세실리의 가슴이 너무 크다보니 야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심지어 재질도 은근 달라붙는 재질이라 온전히 드러난 몸매 덕분에 시선을 빼앗아갔다.

'그런데 목걸이가...'

여기서 약간 의아한 점이 있다면, 바로 세실리가 착용하고 있는 목걸이다.

드레스는 겉보기에도 비싼 값을 자랑할 것 같지만 목걸이는 낡디 낡은 외관을 띄고 있었다.

심지어 보석 하나 박히지 않은 평범한 은목걸이라 세실리의 외모에 비교해서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와... 저건 반칙인데..."

내가 목걸이에 집중하고 있을 때 옆에서 마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 또한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공감했다.

같은 여자이자 세실리를 고깝게 바라보던 마리마저 감탄을 입 밖으로 내뱉을 정도이니 현재 세실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번 행사 때의 세실리가 입은 드레스가 파격적이라면, 지금은 본인의 강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옷차림 하나만으로도 야시시함을 풍기고 있는데다가 고혹적인 외모로 하여금 내 시선을 강탈하는 중이었다.

꽈악-
유혹당하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걸까. 나도 모르게 마리의 손을 붙잡아버렸다.

마리도 내가 손을 붙잡자 잠깐 움찔했지만 이내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세실리는 우리 둘이 손을 붙잡자 미묘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빙긋 웃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너희 둘의 데이트를 방해했다면 미안해. 사실 이 영지는 처음이라 나도 안내원이 필요하거든."


"아... 네."
"만약 너희가 거절한다면 나도 그냥 물러갈게."

나는 세실리의 부탁을 듣고 마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마리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피식 웃더니 다시 세실리에게 고개를 돌려 대답을 꺼냈다.

"알았어. 오늘만이다?"
"정말? 정말로 허락한 거지?"

마리가 허락할 줄은 생각치도 않았는지 세실리가 격한 반응을 보이며 반겼다. 붉은색 눈동자가 살짝 크게
떠지며 환희를 드러내더니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물론이고 마리조차 떨떠름한 반응을 지을 정도다. 게다가 이쪽을 향해 걸어올 때 살짝씩 흔들리던
세실리의 가슴에 시선이 빼았겨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다행히 옆에 마리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나서 서둘러 그녀의 반응을 체크했다. 정신을 차린 나와 달리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세실리의 흉부에 집중된 상태다.

푸른색 눈동자가 미약하게 떨리는 걸 보아 무시무시한 존재감에 압도된 모양이다. 심지어 이쪽을 향해
걸어올 때 조금씩 흔들렸으니 남녀를 불문하고 시선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을 것이다.

뒤이어 마리는 침을 꼴깍 삼키더니 시선을 떼어 얼떨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알았어. 그대신 너는 내 옆에 있어야 한다? 아이작 옆으로 절대 오지 마."


"괜찮아. 나도 어차피 전시회가 목적인걸? 정말 허락해주는 거 맞지?"
"맞으니까 더이상 캐묻지 않아도 돼. 나도 너랑 얘기 좀 하고 싶은 게 있거든."

자꾸만 시선이 아래쪽으로 가려는 걸 막으려는지 마리의 눈동자가 약간씩 흔들리는 게 포착되었다.

같은 여자인 마리가 저정도인데 남자인 나는 오죽할까. 결국 버틸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는 것으로


인내했다.

살결을 노출하는 것보다 살짝만 가린 게 더 야하게 느껴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세실리는 본인이


서큐버스의 후예라는 걸 만천하에 광고하는 중이다.

'그때 유혹당한 게 이상하지 않다니까...'

비밀을 밝혀냈을 때 그녀가 나에게 저지른 행동이 떠올랐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찔하다 못해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최대한 진정시켰다. 바로 옆에 여자친구가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다니


남자친구로서 실격...

'...은 무슨. 남자가 그냥 슬픈 동물이지.'


마리가 과연 이해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나 나중에 한 번 크게 혼나는 게 나을 것 같다.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며 앞을 바라봤다.

방긋방긋 웃는 세실리의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차마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아 애써 시선을 회피하며


헛기침을 토했다.

"아이작은 어때? 마리도 허락했는데."


"...저는 상관없어요. 그런데 경호원은 어디에 있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테니까."
"그렇다면야..."

듣자하니 헬리움에서도 능력이 뛰어난 기사라고 했던가. 마족의 기준으로도 능력이 출중하니 안심할 수
있다.

'그런데 세실리는 다음 대 마왕으로 예정돼 있다 하지 않았나?'

아카데미에서도 그렇고 굳이 경호원을 대동할 필요가 있나 싶다. 물론 구색을 맞추려는 것일 수도


있을테니 내가 왈가왈부할 일이 못 된다.

아무튼 간에 세실리도 합류했겠다, 나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저택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옆에 서 있는 마리와 마리의 옆에 선 세실리도 따라 움직였다. 저택 밖으로 나오나자마 화창한 날씨가


우리를 반겨주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비가 안 와서 천만다행이다.'

우리 영지는 전생의 대한민국처럼 뚜렷한 사계절이 특징이다. 그래서 지금쯤이면 비가 자주 와야


정상이지만 아직까지 그런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말끔하여 내 마음마저 뿌듯해졌다. 뒤이어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저택 정문에는 경비원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대문을 여는 중이다. 마리의 저택과 달리 간소하고 평범한
외양의 대문이었지만 불만은 없다.

반대로 이런 축제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근무하는 경비경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고생하시네요. 근무가 언제 끝나죠?"


"곧 있으면 황궁에서 파견한 기사단이 올 겁니다."
"그럼 조만간 축제를 즐길 수도 있겠네요."
"하하. 그렇죠. 도련님도 축제를 즐기시길 바라겠습니다."

경비경과 서로 덕담을 주고 받은 뒤 대문 밖으로 발을 디뎠다.

축제가 진행되고 있는 마을과 저택 사이의 거리는 약간 떨어져 있으니 조금만 걸으면 금방 도착할 것이다.

그때까지 뭘 하나면, 당연히 잡담이다. 때마침 마리가 세실리에게 먼저 말을 걺으로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세실리. 이런 질문 하기에는 좀 그럴 수도 있는데 해도 될까?"


"응? 뭔데?"
"어떻게 하면 가슴이 그렇게 커질 수가 있어?"

변화구 없는 돌직구가 그대로 세실리에게 꽂혀들어갔다. 당사자인 세실리는 물론이고 가만히 듣고 있던


나조차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듣는 사람이 우리밖에 없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못 들은 척 했을 것이다. 어쩌면 모르는
사람인 척 했을 수도 있고.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의 푸른색 눈동자에는 짙은 호기심과 미약한 열망(?)이 담겨있었다. 세실리도 그걸
눈치챘는지 본인의 가슴을 한 번 쳐다봤다가 마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민망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왜 묻는 거야?"
"아이작이 자꾸 쳐다봐서."
"야."
"왜 부정하려고 해? 내가 모를 줄 알고?"

내가 어이없어 하자 마리가 명료히 받아쳤다. 전부 사실이라 할 말이 없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는데 말할 수 없다는 기분이 이런걸까. 나는 어디 말할테면 말해보라는 표정의


마리와 눈싸움을 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항상 말하는 거지만, 남자는 슬픈 동물이다. 이에 마리는 의기양양해지더니 세실리에게 재차 말했다.

"나도 너처럼 커지면 아이작이 다른 곳에 눈을 안 돌릴 거 같아서 그래. 네가 이런 드레스를 입을 때마다


아이작이 너만 바라보잖아."
"마리. 너도 결코 작은 편이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세실리는 투정을 부리는 아이를 타이르는 것처럼 사근사근한 말투로 마리에게 말했다. 실제로 그녀의
말마따나 세실리가 압도적인거지 마리도 평균보다 큰 편이다.

귀족이기에 평민보다 잘 먹고 잘 자는 건 물론이고, 몸매 관리까지 받았을터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크면 여러모로 불편한 점도 많아. 너도 대충 알고 있지?"


"알고는 있지. 그래도 아이작이 좋아할 거 같아서."
"그런 이야기는 나 없을 때 하면 안 될까?"

듣는 사람이 부끄러워 미칠 것 같다. 내가 애원하는 수준으로 부탁하자 마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나를


놀려댔다.

"왜? 부끄러워?"
"당연히 부끄럽지.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잠깐 귀 좀 빌려줘."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마리가 귀를 빌려달라고 손짓했다. 나는 또 무슨 요망한 짓을 벌일까 싶어


흠칫거렸다가 잠자코 귀를 빌려주었다.

이어서 마리는 세실리를 한 번 힐긋거리더니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두 손을 동그랗게 말며 내 귀에다


대었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왜냐고?"

-어차피 나중에 다 볼텐데.

그 말 하나로 인해 잘 가고 있던 내 두 다리가 우뚝 멈추었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 한 채 마리를


쳐다봤다.
마리는 본인 입으로 말해놓고도 창피했는지 새하얀 뺨에 홍조가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싱글벙글 웃는
표정을 보아 미리미리 빌드업을 쌓아놓은 듯했다.

솔직히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여자는 사랑에 빠질 수록 요물이라도 되는 것인지 점점 영악해졌다.

"자~ 이제 장난은 그만할게. 이제 축제를 즐기러 가자."

내가 한동안 못 박힌 듯 서 있기만 하자 마리는 내 손을 잡아 이끌며 마을로 걸어갔다. 나는 정신을 못


차린 채로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갔다.

우리 둘이 앞서나가도 세실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마치 세계가 둘로 분리된 것처럼,


마리는 세실리가 제자리에 있던 말던 내 손을 잡아끌기 바빴다.

"...재밌네."

왠지 모르게 불길한 세실리의 읆조림을 끝으로, 전시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미친. 이게 뭐야?"
"조각상이네."
"조각상인 건 나도 알아. 그런데 이게 무슨... 왜 이렇게 커?"

마을에 입성하자마자 세상에 변태는 많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 90 화 >

전에도 언급했지만 예술가는 배고픈 직업이다. 본인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며, 그
도구의 가격조차 만만치 않다.

더군다나 예술가들은 본인만의 신념이나 철학 같은 부분이 확고하여 기껏 완성된 작품을 폐기하기 일쑤다.
이탓에 돈은 돈대로 나가고 작품은 작품대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런 구조로 인해 예술은 귀족들이나 즐기는 문화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귀족에게 돈이란 도박이나 사치를
심하게 부리지 않는 이상 썩어넘치는 것이니 예술계에 종사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예술가들을 훑어보면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귀족이거나 돈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상단이다. 때문에 예술은 한동안 귀족의 전유품이었으며 현재처럼 악단이나 극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테르스 왕국에서 제이로스 혁명이 발발한 이후 문화가 전국민적으로 퍼졌으며 평민이나
하층민임에도 불구하고 예술계에 몸을 던지는 이들이 증가했다.

물론, 어지간한 천재성을 보유하지 않는 이상 성공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했으며 대부분 돈을 탕진하여 손을


떼는 편이다.

예술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정작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는 이들이 있어야 돈을 벌 수 있는,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허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본인만의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이 있는 법이다. 애시당초 예술가는
돈보다 명예를 택한 부류가 많으니 손을 뗄래야 뗄 수 없다.

이때문에 평민이나 하층민 출신의 예술가들은 하나 같이 독기가 강하며 본인만의 신념이나 철학이
확고하다. 여기에 더해서 지칠 줄 모르는 인내심과 체력까지.

이런 부류들은 둘 중 하나다. 참다 참다 지쳐서 나가떨어지거나 기어코 성공하여 대중들에게 본인의


이름을 각인시키거나.

이 세상 사람들은 후자의 경우를 장인 정신이니 뭐니 하면서 추켜세우지만 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에게는


딱 이 한 마디로 정리가 가능했다.

'변태'라고.

"...이게 뭐야?"

그리고 나는 그런 변태들에게 시간과 돈, 그리고 영감만 있으면 어떤 결과물이 나타나는지 마을에


입성하자마자 여실히 체험할 수 있었다.

내가 마을 입구에서부터 당당히 자리를 차지한 무언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세실리가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조각상이네."
"조각상인 건 나도 알아. 그런데 이게 무슨... 왜 이렇게 커?"

세실리의 감상평에 마리가 대신 받아쳤다. 하지만 그녀도 나처럼 어마어마한 위용을 뿜내는 조각상에
정신을 빼앗긴 모습이다.

나는 한동안 못 박힌 듯이 자리에 서서 조각상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현재 내가 보고 있는 조각상의 외양을 설명하자면 젊어보이는 남자가 몽둥이를 든 중년인에게 두들겨 맞고


있다.

젊은이는 때리지 말라는 것처럼, 쭈글거리는 자세로 막기에 급급했고 중년인은 신난다는 표정으로
몽둥이를 휘두르는 중이다.

여기서 괄목할 점은 세심하게 묘사돼 있는 근육도 근육이지만 표정이 가장 인상적이다.

생동감이 넘쳐야 된다고 말해야할지, 아니면 진짜 사람의 표정을 본따서 조각했다고 할지.

무엇보다 이걸 다 '조각'을 한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퀄리티가 무시무시하다.

"여기 팻말도 있네. 내용은... 스승에게 훈련받는 제논이라는데?"

조각상을 감상하고 있는 도중에 팻말을 발견한 세실리가 우리에게 설명했다.

조각상을 보자마자 이미 직감한 거지만 1 권 초반부에 있던 장면을 고스란히 묘사할 줄은 생각치도 못 했다.

나는 쓸데없이 고퀄리티인 작품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많고 많은 장면 중에 왜 이걸..."
"그것도 여기 적혀있어. 스승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배우는 게 남일 같지 않아서 조각했다네."

친절한 설명 고맙습니다, 세실리 누나.

그래도 황당한 건 여전해서 쉽사리 헤어나올 수 없었다.

표정이 정말로 일품이라 얼굴에서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원작자로서 기분이 어때? 첫 도입부 내용을 그대로 갖고 온 거잖아."


"흐익!"
작품에 시선을 떼지 못 하는 사이 세실리가 내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농후한 그녀의 목소리가 귀
안쪽을 파고들었다.

안 그래도 섹시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인데 귓가에 대고 소근거리니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귀가


간지럽다 못해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까, 깜짝이야. 놀랐잖아요."


"후훗. 그래서 대답은?"

내가 놀라던 말던 세실리는 빙긋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그에 귀를 손으로 감싸며 다시 작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나는 그림에도 약간의 소질이 있어서 삽화를 추가하는 편이다.

덕분에 독자들도 등장인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그림 뿐만 아니라 이야기 속에도 외모 묘사 하나만큼은 열심히 한 편이다.

그래서일까. 조각상이 묘사한 제논과 스승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판박이다.

'이거 하나 조각하려고 몇 달이 걸렸을까...'

조각사에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건 단순히 팬심 정도가 아니라 존경을 보내는


수준이었으니까.

비록 나는 조각가가 아니지만 이정도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성을 쏟아부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특히 조각가는 스승의 도움이 없이는 성장이 거의 불가능하며 심지어 천부적인 재능에 결과물이
바뀐다.

"뿌듯하면서도 조각가에게 존경심이 드네요. 저는 글만 쓰면 되지만 이 사람은 조각을 했잖아요."


"너무 자신을 낮추는 거 아니야? 너는 글로 세상을 바꿨잖아."
"시선이 다를 뿐이죠. 어쨋거나 다른 것도 한 번 둘러보죠. 마리, 가자."
"응? 아아. 알았어. 가자."

조각상을 감상하느라 한동안 조용하던 마리를 부르고 다른 작품을 찾아 발걸음을 움직였다.

뒤이어 얼마 가지 않아 또다른 조각상을 찾을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거리 전체에 조각상이 전시된


모양이다.

"이건 진이랑 릴리인가?"


"뿔이 있는 걸 보면 확실하네."
"예쁘다."

거리에 지나다니는 행인들과 관광객이 많았지만 조각상들을 감상하는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가끔 가다가 세실리나 마리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작품을 관람하는데 집중했다.

"저 여자 마족 아니야?"
"그러게. 마족 중에 참석한다고 한 사람이 있었나?"
"보아하니 귀족들인 것 같은데 괜히 건드리지 말자."

하지만 역시 중세 시대라고, 가끔씩 내 귀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귀에 들어왔다.


특히 가장 거슬렸던 건 단연코 마리와 세실리를 향한 음담패설이다. 흘려듣고 싶어도 흘려들을 수가 없어
눈쌀이 찌푸려졌다.

물론 두 여자 모두 각자 개성에 맞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데다가 몸매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있어


자연스레 눈길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럴 때는 유독 밝은 내 귀가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들렸으면 좋겠...

딱!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세실리가 말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다소 시끌벅적했던 마을의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고 주변이 고요해지는 것이 아닌가. 마치 이 공간에


우리밖에 없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조용해졌다.

이에 눈을 깜빡거리다가 세실리를 쳐다보니 그녀가 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침묵 마법이야. 주변이 조금 시끄러워서 조치를 했지. 아이작 네가 불편해하길래."


"...혹시 이번에도 얼굴에 다 드러났나요?"
"응. 난 저런 이야기 많이 들어서 상관없지만 네가 불편해하니까 나도 기분이 나빠져서. 그리고 이게
훨씬 낫잖아?"

나는 세실리의 배려에 쓴웃음을 지었다. 겨우 나 하나 때문에 마법을 사용했으니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을


것이다.

마법을 숨 쉬듯이 사용하는 마족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다.

'그런데 자기도 기분이 나빠진다라...'

굳이 뒷말을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나는 상냥하게 웃는 세실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잠시 접어뒀다.

지금 중요한 건 전시회지 세실리의 마음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바로 옆에 여자친구도 있는 마당에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 자체가 실례다.

이에 세실리에게서 얼굴을 떼어 마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는 전시회 자체에 빠져들었는지 조각상을
뚫어져라 감상하는 중이었다.

"마리도 괜찮지?"
"응? 뭐가?"
"음... 아냐."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볼을 꼬집었다. 마리는 볼이 꼬집히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드러냈다.

"볼을 왜 꼬집어? 뽀뽀라도 해달라는 거야?"


"조금 있다가. 우선 다른 곳부터 둘러볼까?"
"알았어. 그나저나 갑자기 왜 주변이 조용해졌지?"
"조금 시끄러워서 세실리가 마법을 썼어."

이후로 마을 깊숙히 들어가 본격적으로 전시회를 빙자한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황궁에서 다양한 지원을
해준 덕분에 먹을거리는 물론이고 볼 거리도 풍부했다.

특히 눈 여겨 볼 점은 행인 중에 인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족이 오가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인간이 제일 많았지만 엘프와 드워프, 수인, 심지어 '마족'까지 전시회를 관람하고 있다.
마족은 세실리처럼 칠흑 같은 흑발에다가 붉은 눈, 마지막으로 악마의 상징인 뿔을 갖고 있으니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마족도 있네요."
"그러게... 나 혼자만 참석한 게 아니었구나. 꿈만 같아..."

세실리는 자신을 제외한 마족이 전시회를 즐기는 모습에 놀람도 잠시, 살짝 젖어있는 목소리로 본인의
심정을 꺼냈다.

제논 일대기가 출범하기 전까지만 해도 마족은 시한폭탄 취급을 받아 대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건


불가능했는데 지금은 축제를 즐기고 있다.

언제나 마족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그녀로서는 감동에 젖을 수밖에 없다.

나도 그녀처럼 놀란 건 마찬가지였으나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전시회를 즐기는 중인 사람들을


바라봤다.

전시회 하나만으로 모든 종족이 한데 모여 축제를 즐기고 있다. 제논 일대기가 나오기 전이었다면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으며 그만큼 세상이 변했다는 증거였다.

'점점 더 욕심이 나네.'

아버지는 이 전시회 자체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여지가 있다고 했지만, 막상 전시회를 두 눈으로 지켜보니
욕심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전시회처럼 모든 종족이 행복하게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종족간의 갈등의 골은 여전하겠으나 그건 차차 좁혀나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인파 속에 섞여 전시회를 구경 중인 마족들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옮겼다.

세실리는 자기가 보는 광경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듯,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모라시여... 저와 우리 마족에게 이런 축복을 내려주셔서..."


"... ..."

마족이 주로 모시는 신, 모라에게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자니 내 가슴이 다 뭉클해졌다. 본인은 공주의
신분이어서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다른 마족은 아니었을테니 더 감동스러웠겠지.

괜히 민망해져 뒷목을 매만지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마리와 딱 눈이 마주쳤다.

마리도 세실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봤는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나에게 속삭였다.

"우리 귀여운 작가님. 이제 작가님이 얼마나 대단하신지 알겠죠?"

장난스럽게 굴자 그냥 말없이 볼을 꼬집어주는 걸로 대신했다. 백설기처럼 새하얗고 말랑말랑한 볼을


꼬집을 때마다 중독성이 장난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주물주물거리고 싶었지만 보는 사람이 많아 그럴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나는 마리의 볼을 꼬집고는 세실리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이윽고 세실리가 천천히 눈을
뜨며 촉촉하게 젖은 붉은눈이 드러나자 그녀에게 제안했다.
"누나. 한 번 저 사람에게 가보는 건 어때요?"
"응?"

내가 권유하자 세실리가 의문에 찬 표정으로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왠지 모르지만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더욱 짙어진 느낌이 들었다.

"누나도 궁금하시잖아요. 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이곳으로 왔는지. 인간과 같이 있는 걸 보면 재미있는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한 번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으음..."

세실리는 내 설명을 듣고 인간의 무리와 섞여 작품을 관람하는 마족 쪽을 바라봤다.

만약 헬리움에서 온 귀족이었다면 예복을 입고 있겠지만, 현재 인간 무리와 섞여있는 마족은 독특하게도


장비를 착용하고 있다.

그러니 헬리움 밖으로 나와 세상을 떠돌고 있는 낭인이나 모험가일 확률이 높다는 것인데 제논 일대기는 1
년 전에 막 출범했으니 여태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윽고 세실리는 한 인간 여자와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마족을 지켜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알았어. 한 번 가보자."
"좋아요. 마리?"
"흥. 이번만 봐줄게."

봐주기는 뭘 봐준다는 걸까. 나는 마리가 새침하게 대하자 의아함도 잠시 발걸음을 옮겼다.

세실리도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전보다 환한 표정을 지으며 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마족을 향해 다가갔다.

"참자. 참아... 여기서 저지르면 안 돼..."

다가가는 도중에 세실리는 자신의 가슴을 약하게 두드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 91 화 >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응?"

나와 일행은 인간 여자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던 마족 남자에게 다가가 잠깐 그들을 불렀다.

마족은 내 부름에 연인으로 추정되는 인간 여자와 대화하는 것을 멈추며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가르츠가 양의 뿔 같은 형상이라면 이 남자의 뿔은 길고 구불구불하게 위로 뻗어있었다.

외모는 마족의 종족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흑발 적안이었으며 세실리의 호위기사, 가르츠와 달리 체격이


듬직한데다 호탕하고 열정적으로 생겼다.

연인으로 추측되는 인간 여자 또한 마리와 세실리에 비해서 떨어질 뿐이지, 단아하면서 아기자기한 미모를
드러내고 있다.

다만 둘 사이의 체격이 좀 크게 나는지라 여자 쪽이 거의 달라붙는 수준으로 남자의 팔을 꼭 붙잡고 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족은 처음에 경계심을 듬뿍 담으며 물었으나 세실리를 발견하고는 이내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아무래도 같은 마족이 곁에 있으니 적어도 불손한 의도로 접근한 게 아니라고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다만 연인으로 추측되는 여자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마족이 경계심을 약간


풀자마자 그의 팔에 더욱 찰싹 붙었다.

나는 매미마냥 마족의 팔에 달라붙어 있는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마족과 마주했다.

이윽고 세실리처럼 붉디 붉은 눈동자와 마주하며 궁금한 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묻고 싶은 거요?"
"네."
"음... 귀족분들께서 무엇이 궁금하신지 모르겠지만 성심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우리의 외모와 복장을 보고 단번에 귀족임을 꿰뚫어 본 듯했다.

대신 세실리가 헬리움의 공주인 건 전혀 모르는 듯했다. 헬리움에서도 인간 사회처럼 계급이 존재하니 이


남자가 평민이라면 세실리가 누구인지 모를만도 하다.

"라이..."

그사이 아직도 팔을 붙잡고 있던 여자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마족을 불렀다. 우리가 귀족이라는 걸
알자마자 더욱 불안해진 얼굴이다.

이에 라이라고 불린 마족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툭- 툭- 두드려줬다.

듬직한 남자친구의 위로에 힘을 받았는지 여자도 약간이나마 안심한 얼굴이다.

나는 돈독해 보이는 그들의 유대감에 더욱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우리 나쁜 사람 아니에요. 정말로 궁금한 게 있어서 접근한 거니까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라이 씨라고 하셨나요?"
"네. 라이 에스토르라고 합니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영지에 어떻게 오셨는지 궁금해서요."

내 질문에 라이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세실리를 한 번 힐긋거렸다. 그리고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제가 마족이라서 그런 것 같군요."


"정확합니다."
"흐음..."

여자가 매달린 팔이 아니라 다른 손으로 턱을 긁적거리는 라이. 나는 그의 입이 떨어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만약 세실리가 없었다면 내 질문을 듣고 약간의 의심을 품었겠지만 그런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라이도 어디까지나 인터뷰에 가깝다는 걸 눈치채지 않았을까.

그래도 마족인만큼 다사다난한 경험을 겪었을테니 마냥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당신의 영지에 방문한 이유는 다른 사람과 동일합니다. 우리 둘은 제논 일대기의 팬이니까요.


그외에는 없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러면 개인사에 가까운 질문인데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라이 씨도 아시다시피 마족은 제논 일대기의 출간 전까지 함부로 모습을 못 드러냈습니다. 정체를 숨겨도
들통나는 순간 모진 대우를 받기 일쑤죠."

내가 설명을 이으면 이을수록 라이는 무덤덤한 표정인 반면 여자의 표정에는 의심이 더욱 강해졌다.

보아하니 라이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데 그를 악마로 취급하는 게 불편했던 모양.

나는 여자 쪽을 한 번 힐긋거렸다가 본론에 들어섰다.

"그러나 제논 일대기가 출범되고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마족의 인식은 완전히 바뀌었고 악마로 취급받는
일은 대폭 하락했죠. 그러니 제 질문은 이겁니다. 라이 씨는 언제 헬리움 밖으로 나왔고, 또 어떤 인생을
살았으며 마지막으로 옆의 연인 분과 만났는지 궁금해서요."
"그런 거였습니까? 이거야 원. 의심한 제가 다 민망해지는군요. 하하하."

내 질문을 듣고 의심을 완전히 풀었는지 라이가 호방하게 웃었다. 덕분에 여인도 살짝 의심이 풀어진
모습이다.

뒤이어 라이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밝은 미소를 지으며 본인의 인생사를 하나 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당신 말처럼 저는 헬리움 출신입니다. 그리고 약 5 년 전에 인간 사회로 나왔죠. 정체를 숨기는 건


마법이 있으니 조심만 한다면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월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인연을 맺었죠. 물론 위기가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간혹 정체를 들켜 인연을 끊을 수밖에 없던 적도
많았죠."
"헬리움 밖으로 나온 이유는요?"
"별 거 없습니다. 헬리움에만 있으니 몸이 쑤셔서 가만히 있지를 못 하겠더군요.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온 겁니다."

라이에게는 천성적으로 모험가 기질이 있는 듯했다.

마족이 어떤 차별을 받는지 알면서도 모험을 떠난 걸 보면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모하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헬리움 밖으로 나선 마족들은 거의 좋지 못한 비극을 겪었어. 그럴만한 가치가 있던 거야?"

가만히 듣고 있던 세실리가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로 라이에게 물었다.

정중하게 경어를 사용한 나와 달리 세실리는 라이에게 말을 놓은 모습이다. 하기야 본인의 백성이니 굳이


존댓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라이는 질문을 한 세실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본능적으로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실로 남자다운 반응에
하마터면 피식 웃을 뻔한 걸 간신히 막았다.

뒤이어 그는 억지로 세실리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켜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눈동자가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 게 포인트다.

"크흠.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아니라 그럴만한 가치를 찾기 위해 나선 겁니다. 헬리움에서만 살기에는


우리 마족은 다른 종족보다 오래 사니까요. 비록 좋은 일도 겪고 힘든 일도 겪었지만 지금은 좋은 일을
겪고 있습니다."
"옆의 애인 분을 말씀하시는 거죠?"
"네. 제가 마족이라는 걸 알아도 제 곁에 있어준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제논 일대기가 나오기 전에
말이죠."

제논 일대기 속 릴리와 진의 이야기는 결코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 이들같은 존재가 있을거라 예상하고 있었다만 막상 직접 만나게 되니 기분이
묘해졌다.

나는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내뿜는 중인 두 남녀를 보다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로맨틱한 이야기네요. 제논 일대기 속에서나 보던 이야기를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하하. 안 그래도 지금까지 그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럼 지금처럼 정체를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던 건 언제부터였나요?"
"당연히 제논 일대기의 5 권 이후부터입니다. 그전까지는 정체를 숨길 수밖에 없었죠."

마족의 인식이 본격적으로 변한 건 5 권의 클라이막스이자 지금까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 사크란의


희생이다.

그 명장면 이후부터 마족을 향한 인식이 180 도 뒤바뀌었으니 그때부터 본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낸 걸로
추측된다.

"그래도 괜찮아? 제논 일대기로 우리 마족을 향한 시선이 달라졌다지만 그간 발생했던 갈등의 골은


해소되기 어려울텐데."

세실리의 질문이다. 그녀는 헬리움의 공주이니 차별적인 시선으로부터 어느정도 자유로웠으나 평민의
사정은 잘 모르고 있다.

이 걱정은 자연스러운 것이, 마족이 다른 종족들에게 핍박을 받은 기간은 무려 1000 년에 달한다. 1000
년이라는 시간동안 서로의 감정이 희석되기는커녕 유지되었다는 의미다.

더군다나 세이비어에서 마족을 악마로 단정지으며 학살한 역사도 있었으니 둘 사이의 갈등의 골은
협곡보다 깊을 터.

그러니 마족 측에서도 그들을 고깝게 바라보거나 경멸할 수도 있으며, 다른 종족도 여전히 그들을 악마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맞습니다. 제논 일대기 덕분에 생활은 편해졌지만 여러모로 차별적인 시선은 잔존해 있죠. 한 달 전에는
마족이라는 이유로 여관에 묵지 못 하거나 의뢰를 못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 ..."

라이의 이야기를 듣고 전생에 만연했던 인종차별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특정 나라를 제외하고 인종차별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종종 들려오는 소식이 바로


인종차별로 인한 범죄다.

이 세상은 그 인종차별보다 더한 종족차별이 존재할테니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린 아직 멀었구나."

세실리는 라이의 이야기를 듣고 쓸쓸하게 웃었다. 확실히 전보다 훨씬 나아졌을 뿐, 마족을 향한


선입견은 여전했다.

라이는 세실리의 쓸쓸한 미소를 보더니 걱정 말라는 투로 얘기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를 향한 좋지 못한 시선은 남아있지만, 더이상 우리
마족이 위축될 일은 없을테니까요. 공주님도 아시겠지만 제논 일대기는 우리 마족에게 자긍심을
품어줬습니다."
"...날 알고 있었구나?"
"물론입니다. 그 목걸이를 낄 수 있는 건 왕족밖에 없으니까요. 뒤늦게 알아뵈어서 죄송합니다."

나는 라이의 말을 듣고 오늘 세실리가 착용했던 목걸이를 확인했다.

겉보기에는 낡고 오래된 은목걸이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마족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행사에서도 저 목걸이를 꼈었나?'

이놈의 기억력이 좋지 않아 그때도 이 목걸이를 착용했는지 모르겠다. 그때 세실리의 드레스가 워낙


파격적이라 그것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야. 보아하니 애인이랑 잘 즐기고 있는 것 같았는데 괜히 내가 방해한 것 같네."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즐거운 이야기였죠."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 넌 우리 마족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어?"
"아까도 말했다시피, 제논 일대기에 알려준 내용대로 나아가면 충분합니다. 악마로 태어났으나 빛을 향해
나아가는 그 누구보다 인간다운 존재. 이거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라이는 만면에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충실히 대답했다. 확고한 신념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었으며 의심이라고는 하나도 묻어있지 않았다.

내가 책에 쓴 내용이 특정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다. 실로 뿌듯한 결과이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말이 맞아. 그게 우리 마족의 정체성이지. 아무튼 간에 대답해줘서 고마워."


"공주님도 부디 빛을 찾길 바라겠습니다."

라이는 세실리에게 덕담을 건내주면서 팔에 붙어있던 여자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보아하니 라이는 저 여자와 인연을 맺으면서 빛을 찾은 것 같다.

비록 수명 차이로 인한 헤어짐이 있겠지만,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리라.

이순간만큼은 그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줄테니.

"빛이라..."

세실리는 작게 중얼거리더니 나에게 천천히 고개를 옮겼다. 나 또한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이어서 한동안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는 생긋 웃더니 라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고마워. 덕분에 나에게 빛이 무엇인지 다시 깨달은 것 같아."


"도움이 됐다니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그럼 우리는 가볼게. 아참. 당신 이름이 어떻게 되죠?"
"...베로니카 에첸스라고 합니다."
"베로니카 씨도 라이의 곁에 꼭 붙어있으세요. 우리 같은 마족은 빛이 떠나가면 방황하기 일쑤니까."
"...네."

외모처럼 소심하디 소심한 대답이다. 세실리는 베로니카의 대답을 듣고 빙긋 웃더니 나에게 말했다.

"우리도 이제 가자."
"네. 마리?"
"...그래."

마리는 내 부름에도 나를 쳐다보지 않고 세실리에게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대답을 해도 뭐랄까... 왠지 모르게 경계를 하고 있다고 할까. 게다가 팔짱까지 끼며 자신의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덕분에 물컹한 감각이 느껴져서 당황했지만 마리의 표정을 보고 의문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마리의
푸른색 눈동자에는 짙은 경계심이 깔려있었으니.

아까 전 세실리와 라이가 나누던 대화를 듣고 무언가 느낀 바가 있던 모양이다. 내가 그리 생각하는 동안


마리는 세실리를 바라보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세실리."
"응? 왜?"
"너 혹시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불안함이 담긴 그녀의 물음에 세실리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싱긋 웃었다.

그리고 눈을 반쯤 뜨며 붉디 붉은 눈을 요사스럽게 빛내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답했다.

"글쎄? 난 네가 무슨 질문을 한 건지 모르겠어."


"너..."
"음... 마리? 이참에 우리끼리 잠깐 개인적인 대화를 나눠볼까?"

세실리는 그 말을 남기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을 끝마쳤다.

"너에게 중요한 말이 될 수도 있거든."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녀의 뿔에 붉은빛이 더욱 진해진 것 같았다.

< 92 화 >

나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겠다며 떠나간 세실리와 마리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도중에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겠냐고 물었는데 두 사람은 조금 오래 걸릴 거라며, 그때까지 전시된


작품을 관람하고 있으라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 상황을 유추하건데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대강 예상이 간다만 끼어들 여지가 없어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시된 작품들을 즐기고 있다 보면 돌아오겠으나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으음..."

3 명이서 출발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 홀로 남게 된 기분이 이러할까. 나는 마리와 세실리가 사라진


곳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쩌다 혼자 남게 되었지만 마을에 오가는 행인들은 여전히 많았다. 다들 전시회를 관람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며 축제를 즐기는데 여념이 없다.

내가 혼자 있다고 나에게 신경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일단 돌아다녀보자.'

조금 오래 걸릴거라고 세실리가 말했으니 가만히 있는 것보다 둘러보는 편이 나을거다. 나는 발걸음을


옮겨 미처 관람하지 못한 작품을 하나 둘 씩 감상하기 시작했다.

조각상이 건물처럼 길 양옆에 나열되어 있다면 미술품은 마을 곳곳에 전시되어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또한 예술품만 전시회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성 위에 귀족이 있고, 귀족 위에 왕이 있으며, 왕국은 국가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오. 하지만
그 국가를 지탱하는 건 엄연히 백성이지. 즉, 왕이건 귀족이건 백성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라오. 헌데 크로스트 백작 그대는 그 국가의 근간을 단지 거슬린다는 이유로 모함하는 중이지.
정말이지 참된 귀족의 행실이구려. 그렇지 않소?"
"그 입 닥치게나! 감히 나를 우롱하려 들어?!"
"우롱이라니. 난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 사람은 사실을 콕- 집으면 화를 낸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구려."

마을 중앙에 설치된 중앙 무대에서 공연하는 극단도 있다.

미리 말하지만 전시회에는 매트릭스 극단만 방문한 것이 아니며 꼭 극단이 아니더라도 취미 생활로 연극에
종사하는 배우도 간간히 존재한다.

공연장이 설치된 곳이 마을 광장이라 다른 곳보다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특수한 작업을 거쳤는지 배우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다.

거기다 매트릭스 극단처럼 스케일이 거대하지 않을 뿐이지 배우들의 연기력은 내 기준으로도 뛰어난
덕분에 몰입이 가능했다.

이러한 이유들 덕분에 연극을 감상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편이었다. 앞에 배치된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복장을 보아 대부분 귀족이고 뒤에 서서 관람 중인 사람들은 평민인 것으로 추측된다.

'귀족들은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하려나.'

현재 공연장에서 극단이 연기 중인 연극은 8 권 초반부이자 귀족의 명과 암을 대변해주는 장면이다.

본인의 기득권이 제논으로 인해 위협을 받자 그를 함정에 빠뜨렸으나 도리어 역으로 관광당하는 사이다
장면.

연극을 보는 사람들 대부분 평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적지 않은 수의 귀족들도 감상하는


중이었다. 불쾌한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연극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

솔직히 원작자로서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기우였던 모양이다. 실제로 귀족들도 8 권
초반부의 장면을 보고나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으니 그 일환인지도 모른다.

'난동을 부려도 경비경들이 제지할테니까 문제는 없겠지.'

나는 멀찍히 서서 연극을 구경하다가 다른 곳을 둘러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연극에만 몰두하기에는


전시된 작품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윽고 머지않아 내 눈길을 끈 작품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이걸 그린 사람도 있구나."

'헥토파스칼 킥'이라고, 대한민국에서 아주 유명한 밈이 있다.

여자애가 난리를 피우던 남자아이에게 드롭킥을 먹이는 장면으로, 장면도 장면이지만 헥토파스칼이라는
어감 자체가 막강하여 밈으로 승화되었다.

나는 그 장면을 제논 일대기에 상세히 묘사했다. 여주인공이자 히로인인 메리가 불량배들에게 드롭킥을


시원하게 날리면서 위풍당당하게 등장하는 것으로.

담백한 묘사가 대부분이었던 이 세계에서는 비범하기 짝이 없는 첫 등장이었기에 수많은 독자들 뇌리에


각인시켰다.

'진짜 잘 그렸다.'

아무래도 중세 시대인지라 화풍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걸 제외하면 내가 알던 헥토파스칼 킥과 100%


흡사했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깡패에게 드롭킥을 날리는 메리와 양팔을 교차하며 드롭킥에 가격당하는
깡패의 표정까지.

구도, 인물, 표정 모든 것이 완벽한, 헥토파스칼 킥 그 자체였다.

'혹시 나 말고도 환생자가 더 있는 건가?'

오죽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 나는 이 미술품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아까 본 조각상들처럼 설명이 쓰여있는 팻말이 달려있었다.

우선 이 화가의 이름은 칼스 즈바사. 테르스 왕국이 아닌 미네르바 제국 출신이다.

많고 많은 장면 중에 굳이 이 장면을 골라 그린 이유는 메리의 성격과 정체성을 단번에 드러내주기


때문이라고.

또한 다른 예술가와 달리 우스꽝스럽게 그려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칼스 즈바사... 이 사람도 기억해야겠다.'

나는 내 머릿속의 헥토파스칼 킥과 일치하게 그린 칼스의 작품을 머릿속에 저장하며 수첩과 펜을 꺼냈다.


혹시라도 이름을 잊어버릴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훗날 전시회가 끝나고 몇몇 예술가들의 이름을 언급해야 내가 참석했다는 걸 사람들이 알테니 필수라고 볼


수 있다.

"후우~"
"흐이익?!"

수첩에 이름을 적고 있을 때, 누군가 내 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간지럽다 못해 소름이 돋는 느낌에


해괴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간질거리는 귓구멍을 후벼파면서 누가 이딴 짓을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범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아델 누나?"
"하핫. 여기서 만나네?"

나보다 먼저 전시회를 관람하러 저택을 떠났던 아델리아였다. 나는 그녀가 특유의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반가워하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 아델리아는 주말에도 단출한 복장을 입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축제라서 그런지 옷에 힘을 강하게 준
듯했다.

목까지 기른 갈색 단발머리와 화장기 하나 없는 미모는 그대로였지만 옷이 날개라고, 흰색 셔츠 위에


덧입은 갈색 조끼와 각선미를 드러내는 가죽 바지로 하여금 본인만의 특색을 온전히 표출하고 있다.

아카데미에서 봤을 때와 복장만 다르지 그녀만의 유쾌하면서 활기찬 매력은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

"다른 애들은 어디 가고 너 혼자만 보고 돌아다니고 있어?"

아델리아는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직까지 간질거리는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후비적거리다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잠깐 일이 있어서요. 그러는 아델 누나는요? 저희 누나랑 같이 있던 거 아니었어요?"


"원래는 그랬지. 그런데 잠깐 한 눈 판 사이에 니콜이 사라졌지 뭐야."
"...설마 길을 잃을 거예요?"
"그건 아니지.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내가 니콜을 놓친 거야."

그걸 보고 길을 잃었다고 하는 겁니다. 나는 당당함을 넘어 뻔뻔한 아델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전시회가 개최되었다지만 우리 영지는 좁은 편인데 길을 잃어버렸다니 아카데미에서는 어땠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델은 내가 헛웃음을 흘리자 본인도 민망했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뺨을 긁적거렸다. 본인이 말해놓고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어쨋거나 니콜을 만날 때까지 잠깐 동행해줄래? 내가 워낙 길치여서 저택으로도 못 돌아가거든."


"동행 정도면 상관없어요. 그런데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도 못 한다니 정도가 조금 심한가봐요?"
"아카데미에서도 숙소를 못 찾아서 하루종일 배회한 적도 있어. 대단하지?"
"그건 전혀 자랑거리가 못 되는 거예요. 아무튼 전시회는 즐기고 있죠?"
"즐기고 있기는 한데..."

아델리아는 내 질문에 약간 망설이더니 이내 밝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미소에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억지로 짓고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달까. 방금 전 그녀의 진짜 미소를 보아서 더욱 강한 의문이


들었다.

"응. 문제없이 즐기고 있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흐음... 알겠어요."
"귀염둥이 너는 어때? 네 영지에서 개최된 전시회잖아. 기분이 좋지 않아?"

서둘러 화제를 돌리려는 그녀의 질문. 덕분에 사정이 있다는 걸 대충 간파했지만 모르는 척 하기로 정했다.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나는 보다 더 자세한 속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주제를 이어나갔다.

"당연히 좋죠. 우리 영지 역사상 오늘처럼 활기를 띄는 건 오늘이 처음이니까. 특히 종족을 불문하고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 가장 뿌듯해요."
"아. 그러고 보니까 수인 뿐만 아니라 마족도 가끔씩 보이더라. 난 정말 놀랐어. 마족은 보통 정체를
숨기기에 급급하거든."
"이게 다 제논 일대기 덕분이죠. 누나는 제논 일대기가 나오기 전에 마족을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나는 별 생각 없었는데? 마족이고 나발이고 나 혼자 먹고 살기 바빠서 남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거든."
본인은 흘러가듯이 이야기했지만 나로서는 결코 흘려들을 수 없었다. 아델리아의 과거를 단편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기에.

보아하니 그녀에게 생각보다 복잡한 과거가 얽혀있는 듯했다. 원래 웃음이 많은 사람들은 내면의 상처가
많다고 들었다.

어쩌면 아델리아도 그런 것이지 않을까. 나는 싱글벙글 웃는 아델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누나의 고향은 어디에요? 우리 누나에게 듣기론 엄청 멀리 있는 곳에서 산다고 들었는데."


"어... 그런 곳이 있어. 지역명도 없는 마을이라 알려주기도 애매하네. 애초에 아카데미에 들어간 것도
천운이었어."

내 질문에 아델리아는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면서 대답했다. 시선이 오른쪽으로 향하는 걸 보면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결코 평민이라 생각할 수 없는 미모도 그렇고 귀족과 큰 연관이 있는 건 확실하다.

나는 거짓말을 하는 그녀를 한 번 힐긋거렸다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쉽겠어요."
"뭐가?"
"지역이 멀어서 가족이랑 축제를 즐기지 못 한다는 거요."
"가족이라..."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린 아델리아는 킥- 웃더니 아련함을 담으며 작게 대답했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합쳐져 아련함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러게. 네 말대로 원래 이런 축제는 가족이랑 즐겨야 되는데."


"... ..."
"엄청 재미있을 거야. 동생들이랑 재미있게 수다도 떨고, 부모님이랑 같이 맛있는 것도 사먹고..."

평소 괄괄하던 아델리아와 전혀 다른 분위기며 목소리다. 평소 허스키했던 목소리가 낮아지니 미묘함을


풍겼으나 마음 속에 억눌려 있던 슬픔마저도 느껴진다.

혹시, 과거에 가족을 잃어버린 경험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불가능하다.

나도 전생에서 가족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경험이 있어서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 알고 있다. 딱


아델리아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며 추억을 회상한다.

옛날에는 일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가 어느 때보다 행복했던 시절. 누구보다 든든한 우군이었던
가족들.

나는 아델리아가 추억 속에 잠겨있는 동안에 잠자코 기다려줬다. 추억에서 억지로 끌어내는 건 지양할


생각이다.

"음..."

그런데 갑자기 왜 나를 쳐다보는 거죠. 아련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델리아가 상념에서
빠져나왔는지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봤다.
하늘색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아델리아에 의문을 품었을 쯤, 그녀가 씨익 웃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였다.

"너 같은 동생이 있다면 정말 좋을텐데. 매일매일 귀여워 해줄 것 같아."


"전 누나처럼 왈가닥인 사람은 좀..."
"에이. 너무 튕기지 마. 나도 동생들에게는 잘해준다고? 그리고 너처럼 귀여운 동생이 있으면 막
보호해주고 싶다니까? 니콜이 어째서 너를 아끼는지 알 것 같아."
"어허. 손 치우세요. 저 여자친구 있는 몸입니다."
"지금은 없잖아. 조금만 만지자. 응?"
"안 돼요."

나는 변태처럼 달라붙는 아델리아를 제지하며 완강히 거부했다. 아델리아도 어디까지나 장난이었던 건지


내 제지에 힘없이 밀려났다.

그래도 나 같은 동생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던 모양인지 내가 단호하게 거부하자 꽤나 아쉽다는


모습이다.

"칫.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너무하네."


"우리 사이가 뭔데요?"
"친구 동생이랑 누나 친구 사이?"
"그런 걸 남이라고 합니다."
"너무 야박한 거 아니야?"
"첫 만남부터 공을 집어던진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네요."
"...그거는 진짜 미안해."

아델리아와 재잘재잘 떠들면서 전시회를 구경하면서 중간중간 길거리 음식도 구매했다. 당연하지만
가격은 모두 내가 지불했다.

원래는 아델리아가 대신 돈을 내려고 했으나 영주의 아들로서 그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이때문에 아델리아가 고맙다며 은근슬쩍 내 볼살을 만지려고 했지만 내가 으름장을 놓자 아쉬워하며


물러났다.

"그나저나 네 여자친구랑 마족 공주님은 언제 돌아오냐?"


"글쎄요.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 했는... 응?"

한가롭게 닭꼬치를 먹으며 돌아다니던 도중이었다. 유독 한 곳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을


발견하여 나의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아델리아도 나와 비슷했는지 같은 방향에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난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죠. 한 번 가볼까요?"
"그러자. 때마침 심심했는데 잘 됐네. 하암."

아델리아는 꼬치에 남아있던 고기를 한꺼번에 다 해치우고는 뒤로 휙- 던졌다. 아무데나 무단 투기를 한


건 아니고 뒤에 쓰레기통이 있어서 그곳에 넣은 거다.

뒤도 보지 않고 정확히 쓰레기통에 꼬치를 던져버린 아델리아의 기술에 묘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나는


군중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이어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귀에 속속 들어왔다.

"테르스 왕국에서 왕족들이 찾아왔다고?"


"그래. 왕태자와 왕녀 2 명이라는데?"
"별 일이구만. 우리 제국에 테르스 왕족이 찾아오다니."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를 유추하건데 아무래도 테르스 왕국에서 귀빈들, 그것도 왕족들이 찾아온 모양이다.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여 고개를 쭈욱- 내밀었지만 사람들이 하도 많은 탓에 얼굴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결국 조금 있다가 기회가 되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포기했을 쯤, 나는 뒤늦게 아델리아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녀석들이... 여기에 왔다고...?"


"아델 누나?"

무언가 큰 충격이라도 받은 걸까. 아델리아의 안색이 급속도로 창백해지며 하늘색 눈동자가 정처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도, 심지어 팔을 잡아 흔들어도 아델리아는 제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을


뿐이었다.

"누나."
"... ..."
"누나. 정신차려."
"아? 아아."

결국 볼을 쭈욱 잡아당기며 강제로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아델리아는 볼이 꼬집히자 화들짝 놀라더니


하늘색 눈을 두어번 깜빡거렸다.

뒤이어 어딘가 멍해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숨을 길게 내쉬며 활짝 웃었다. 억지로 웃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 뿐더러 나사가 빠져있는, 정말 어색한 미소였다.

"미, 미안. 잠깐 멍 때렸나보네."


"어디 문제 있는 건 아니지?"
"전혀. 나는 건강 빼면 시체인 몸이야."

헛소리를 하는 걸 보면 문제가 있는 게 확실하다. 나는 옹기종기 모여있는 군중들 너머에 있을 테르스


왕족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아델리아는 그들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테르스 왕국에서 왕족들이 찾아왔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자마자 혼이 빠져나간 반응을 보였으니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네.'

서둘러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 나에게도, 무엇보다 아델리아에게도 신상에 좋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아델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손을 붙잡자 아델리아가 움찔 떠는 것이


느껴졌다.

"...귀염둥아?"
"여기 있지 말고 다른데나 가죠. 사람이 많아서 비집고 들어가기도 어렵겠네."
"그... 잠깐 여기 있으면 안 될까?"
"왜요?"
"화,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내 개인적인 일이니까 너 혼자 가."

아델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창백한 안색과 떨리는 눈동자, 그리고
뺨에서 흐르기 시작하는 식은땀까지.

그 짧은 사이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 것만 해도 무시할 수 없는데 아델리아는 입술까지 파르르 떨고


있다. 긴장을 넘어 불안 증세를 보이는 중이다.

이대로 가다간 아델리아에게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극도의 불안 상태에 놓이면 사람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법이니.

그녀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괜히 복잡한 일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 단호하게 거부했다.

"안 돼요. 지금 누나 상태가 어떤지나 알아요? 저쪽이랑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안정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 절대 아니야.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니까 어서 손 떼. 잠깐만, 잠깐만 확인하면 된다니까?"

아델리아는 다급해졌는지 이거 놓으라며 손을 찰싹 찰싹 때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잡아끌었다. 불안


증세가 심해져서 그런지 힘을 제대로 줄 수 없는 모양이다.

얼마나 불안해 하면 아카데미에서 무학 조교를 맡고 있는 그녀가 이리 유약해질까.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무시했겠지만 니콜의 소중한 친구여서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우선 심호흡을 하시고 마음부터 차분히 가라앉히세요. 손만 잡고 있는데 맥박이 요동치는 게


느껴지니까."
"그, 그래? 그정도로 심해?"
"가슴에 손을 올리고 생각하시는 게 어떨까요?"

내 권유에 아델리아가 본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본인의 상태를 파악했는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이에 아델리아의 손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아델 언니?"

낭랑하면서도 앳된 목소리가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어리디 어린 목소리에 나는 물론이고 아델리아도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내 눈에 들어온 건 아델리아처럼 하늘색 눈동자였다. 마리와 리나처럼 진한 파란색이 아닌, 아쿠아


마린과 같은 옅은 색채.

그 다음으로는 여자애 곁에 있는 두 명의 남녀들. 하나같이 하늘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미남미녀여서 독특한 개성을 뿜내고 있다.

빨간색 머리카락을 지닌 나와 확연히 대비되는 색깔이라 더욱 신비롭게 다가왔다.

"아델 언니다!"

잠깐 시간이 멈춘 듯한 상황 속에서 인형처럼 귀엽게 생긴 소녀가 눈을 반짝거리며 아델의 이름을 크게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아델리아가 몸을 흠칫 떨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이윽고 소녀가 아델리아에게 다가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기 직전,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제지시켰다.

어깨를 붙잡은 손의 주인은 옆에 서 있던 딱딱한 표정의 여인이었는데, 드레스가 아닌 기사가 입을 법한


제복을 입은 모습이다. 포니테일로 묶은 스타일과 합쳐져 성숙한 매력을 은연 중에 흩뿌리고 있다.
"안 돼."
"엥? 히리야 언니?"

제복의 여인이 중저음의 간결하고 무뚝뚝한 말투로 저지하자 소녀가 의문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소녀의 의문에도 히리야라 불린 여인의 시선은 오롯이 한 곳에 고정된 상태였다.

다른 건 몰라도 결코 호의적은 시선은 아니었다. 사실상 경멸에 가깝다고 무방한 수준이다.

나는 그 시선이 향한 곳을 향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 ..."

앞의 사람들과 똑같은 아델리아의 하늘색 눈동자가 정처없이 흔들렸고.

두근- 두근- 두근

손만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심장이 격하게 요동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 93 화 >

아이작과 아델이 테르스 왕족들과 미묘한 만남을 갖고 있을 때, 자리를 떠났던 마리와 세실리는 마을
외곽에 인적이 드문 장소에 도착했다.

황실의 막대한 지원의 도움을 받았다고한들 마이샬 영지 곳곳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장소가
드문드문 존재했다. 특히 마을 외곽 쪽으로 나갈 수록 그 현상이 두드러졌다.

마을과 외곽은 공간이 서로 분리된 것처럼 뚝- 하고 떨어져 있다. 덕분에 몰래 숨어들기 적합한 곳이
매우 많았다.

마리와 세실리 이 두 명 또한 마을 외곽에 서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수 십년간 대지의 양분을 먹고


자란 거목(巨木) 이 따가운 햇빛을 대부분 가려줬다.

"그래서 이런 곳까지 불러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마리는 팔짱을 낀 채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앞에 서 있는 세실리에게 따졌다. 그녀의 심기는 현재 매우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원래는 아이작과 단 둘이 오순도순 전시회를 즐기고 싶었으나 눈 앞의 여인 때문에 계획이 무산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지금은 아예 떨어진 상태다.

알콩달콩한 데이트를 생각하고 있던 마리로서는 불만을 넘어 짜증이 치솟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세실리의 말을 모두 무시하고 싶었으나 분위기상 그럴 수가 없었다.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조만간 따로 불러낼 것 같았으니까. 여자로서의 감이자 마리 특유의 날카로운


촉이 말해줬다.

귀찮은 일은 되도록 빨리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하여 순순히 세실리의 뒤를 따라온 것이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이 나무 밑이었고.

"미안해. 너와 반드시 해야할 이야기라서."

세실리는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마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경계심이 자연스레
풀릴 정도로 아름답고도 싱그러운 미소였다.

하지만 마리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눈매를 가느다랗게 뜬 것이 경계심만 한층 더 강해진 모습이다.
이어서 그녀는 세실리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보다가 콧김을 길게 내쉬더니 가슴에 손을 척- 얹으며
선언하듯이 말했다.

"미리 말하는데, 난 절대 아이작을 너에게 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어. 내가 먼저 아이작에게 고백했고,


아이작도 나를 좋아하니까. 알겠어?"

단호하면서도 선을 확실히 그어버리는 마리의 발언. 절대 양보하지 못 한다는 본인의 의지를 세실리에게
드러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마리의 기세에 움찔할만도 하지만 세실리에게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충분히 예상하고 있다는 듯,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네가 아이작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옆에서 지켜봤으니까. 가슴 이야기를 할 때 나를 이용하는


건 조금 놀라웠어. 오랜만에 한 방 먹었다는 기분이 들더라고."
"알면 됐어."
"하지만 마리. 혹시 일부다처제라는 제도를 알아?"
"...뭐?"

세실리의 입에서 일부다처제가 언급되자 마리는 눈을 뜨며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에 세실리는 마리가 들은 게 맞다는 듯, 작은 미소를 유지하며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가 들은 게 맞아. 남자 한 명이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리는 풍습이지. 너희 인간 사회 뿐만 아니라


헬리움은 물론, 애니머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형태야."
"야. 너..."

마리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지 붕어처럼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일국의 공주가, 그것도 다음 대 차기 마왕으로 예정돼 있는 세실리가 입에 담을만한 주제는 절대 아니었다.

세실리 정도 되는 위치라면 일부다처제가 아닌 데릴사위를 시행해야 정상이니까. 헬리움은 여지껏 외교를


못 했을 뿐이지, 국력 자체만 따지자면 알븐하임과 맞먹을 정도로 강력하다.

무엇보다 일부다처제는 로맨틱한 사랑보다 정치적인 이유가 얽혀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힘없는 약소국이
강대국과 끈끈한 연을 맺기 위해 왕녀를 시집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마리에게는 다른 걸 다 제쳐두고 세실리가 아이작을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한다는 부분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일부다처제고 나발이고 그런 건 절대 허락할 수 없다.

이에 그녀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며 세실리에게 쓴소리를 내뱉었다.

"하. 너는 리나랑 다를 줄 알았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설마 그런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있을


줄이야."
"... ..."
"과연 아이작이 받아줄 거라고 생각해? 정치를 그렇게나 싫어하는 애를?"

아이작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부하는 마리였다. 물론 그의 가족을 제외한다면.

어쨋거나 아이작은 소박하고, 남을 배려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으며 글쓰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청년이다.

제논 일대기를 쓴 이유도 어디까지나 취미에 불과했으며 그저 머릿속에 있던 또다른 세상을 끌어내어


책으로 담아낸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본인의 인기를 실감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뭐, 가끔씩 이상한 부분에 꽂히는 경향이 있지만 마리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무뚝뚝하던
아이작의 반응을 볼 수 있어서 훨씬 좋았다.

애초부터 정치적인 의도로 아이작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호의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발전한
관계다. 적어도 아이작을 향한 사랑은 누구보다 더 순수하다고 자신할 수 있다.

"음...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절대 아니야. 정치는 부가적인 요소일 뿐,


아이작을 향한 내 마음은 진심이거든."

세실리는 마리의 연이은 독설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여기에 더해서 생글생글 웃으며
얼굴을 살짝 붉히기까지.

사랑을 고백하면서 수줍어하는 여자의 반응이다.

이로인해 도리어 당황한 건 마리였다. 전에도 말했듯이 그녀는 사람이 말할 때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본능적으로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났다.

그리고 지금 세실리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꺼낸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가슴이 소리치고 있다.

정치적인 의도는 하나도 들어있지 않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 오고 가는, 매우 순수한 마음.

마리는 그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언제부터?"
"믿어주는 거야? 정말로?"

마리가 아무런 의심없이 믿어주자 세실리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두 손을 맞잡은 것이


감격했다는 반응이다.

그에 마리는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침묵으로 대응했다. 세실리의 마음이 진심이던 거짓이던 상관없다.
진심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었으니.

만약 그녀의 진심이 매우 불순하다면 칼 같이 거절할 생각이었으며 설령 깨끗하다 해도 마찬가지다.

마리는, 모처럼 한치의 가식 없이 진실된 아이작을 누군가와 공유할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다.

매일매일 얼굴을 보고 싶고, 그걸 넘어 하루종일 포옹을 하고 싶을 뿐더러 다양한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공유하게 되는 순간 그 시간마저 반으로 뚝 갈라지게 된다.

과거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던 그녀로서는 아이작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믿어준다니 정말 고마워. 그리고 언제부터였냐면... 약간 애매하네. 아이작에게 호감을 가졌을 때는


학기 초였고, 그게 사랑으로 변한 건 제논 일대기 9 권이 나오고 난 이후부터지. 정확히는 너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눴을 때야. 기억나지?"
"... ..."

알다마다. 그 이후에 약간 조급해져 아이작과 독대하여 이애기를 나누었고, 마리가 먼저 키스를 함으로서
교제를 시작했다.

비록 구렁이 담 넘듯이 과정이 이상했지만 결과가 좋았으니 문제는 없었다.

"그때 네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지. 비밀을 공유해야만 형성되는 신뢰라면 개나 줘버리라고. 그건 단지 그


사람의 비밀을 좋아하는 거지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말이야."
"...똑똑히 기억하고 있네."
"덕분에 똑똑히 깨닫게 됐어. 나는 아이작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걸."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마리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세실리의 설명에 눈 밑을 꿈틀거렸다.

세실리는 마리의 표정을 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가슴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아이작의 얼굴을 떠올려서일까. 평소보다 심장이 더 강하게 요동쳤다.

마족 특유의 인내심으로도 억누르지 못 할만큼 강하게 뛰었으며, 악주기가 다가와서 그런지 욕망이 강하게
이는 것도 느껴졌다.

'예정보다 더 빨리 찾아오겠어...'

본래 악주기는 일정 기한마다 찾아오지만 특수한 경우가 더 빨리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바로 마족에게


마약이나 다름없는 '욕망'이 차오를 때다.

욕망을 강하게 느끼면 느낄 수록 뿔의 붉은 기운이 더욱 강해지며 버틸 수 없으면 악주기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악주기마저도 참지 못 하면 악마가 되는 것이고.

세실리도 비슷한 경우다. 이전이었다면 그저 그렇구나하며 넘어갔겠지만 아이작을 향한 마음을


자각하고나서부터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욕망이 어떤 형식으로 발현될지 그녀 본인조차 모르고 있다. 여태까지는 생리 현상처럼 무심하게


다가왔다면 지금은 약을 한 것처럼 갑작스레 찾아왔으니.

다행히 악마가 될 일은 절대 없을 거라 단정할 수 있으나 인간 여자가 생리 때 난폭해지는 것처럼, 자신도


비슷한 현상을 겪을지도 모른다.

세실리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안정시킨 뒤, 다시 천천히 눈을 떠


마리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나도 헷갈렸어. 이 마음은 아이작 그 자체를 향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 마족의 구원자를 향한


것일까? 라고. 하지만 결론은 의외로 쉽게 나오더라."
"...무슨 결론인데?"
"두 개 다야."

아주 명쾌했지만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운 결론이었다. 허나 마리는 곧바로 이어진 세실리의 설명으로 인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아이작은 제논 일대기의 작가고, 제논 일대기의 작가는 아이작이지. 누구를 사랑하냐고? 둘 다 의미


없는 소리야. 어차피 동일인물인데 무엇에 더 가치를 두는 건 이상하지 않아? 우리 마족을 구원해준 건
제논 일대기를 집필한 작가, 즉 아이작이지. 아이작을 향한 마음은 진실이라는 건 이때문이야."

기적의 논법이 세실리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마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실제로 그녀의 말이 모두
맞다.

아무리 서로를 분리하려고 해도 결국 아이작이 제논 일대기의 작가라는 건 결코 변할 수 없는 사실이며


진리와도 같은 것. 그러니 세실리가 아이작을 향해 연심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다.

제논 일대기는 세실리 같은 마족에게 있어서 하늘이 내려준 구원이었으니까. 1000 년 동안 진행된 모진


핍박과 차별을 단번에 해소시켜준, 그야말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이다.

세실리는 마리가 입을 꾹 다물며 자신의 말을 경청하자 빙긋 웃더니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우리 마족을 구원해준 아이작에게 보답하고 싶어. 솔직히 내가 여자로서의 매력은 절대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도 인정하지?"
"...인정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마리는 세실리의 외모를 찬찬히 뜯어봤다.

비단처럼 내려오는 칠흑색 머리카락과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붉은색 눈동자. 전반적으로 성숙한
이미지를 풍기는 아름다운 외모였으며 앵두 같은 입술은 미묘한 색기를 뿜내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코 몸매라고 할 수 있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가슴은 말할 것도


없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허리와 골반 라인도 눈이 부실 정도의 매력을 발산하는 중이다.

자존심 상하지만 여자로서의 매력은 마리보다 세실리가 우위에 서 있다.

마리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울컥하여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난 절대 아이작을 다른 사람이랑 공유할 생각이 없어. 너에게 빼앗길 생각은 더 없고."
"미안하지만 네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 아이작의 의견이 중요하지."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

세실리의 도발적인 발언에 마리가 날을 잔뜩 세운 목소리로 그녀를 몰아넣었다. 자신의 의사 따위는


무시하는 세실리의 행태가 점점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에 세실리는 아까와 다른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음흉해 보이기도 한, 매우 음습한 미소였다.

뒤이어 그녀는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처럼 하악질을 하는 듯한 마리를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꼭 정실이라는 것처럼 얘기하네? 아직 연애 단계지, 정식으로 약혼이나 결혼을 한 것도 아니잖아?"


"이...!"
"그리고 난 정치적으로도 아이작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어. 아직 초반 단계이지만 우리 헬리움은 다른
국가와 교류를 맺기 시작했고, 우리 마족은 태생부터 강력한 힘을 갖고 있으니 외교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겠지."

비록 헬리움이 반강제적으로 폐쇄적인 입장을 취했다지만 세실리는 무려 한 나라의 공주다.

마리가 황제 다음 가는 권력을 지닌 레킬리스 공작의 딸이라지만, 아무래도 세실리에 비해서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한 명의 여자로서, 그리고 한 국가의 권력자로서.

두 가지 모두 세실리에 비해 한참 밀리는 입장이어서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절대 안 돼.'

이건 선전포고다. 아이작을 어떻게든 사수하겠다는 세실리의 선전포고.

그리고 마리, 자신은 아이작을 무조건 보호해하는 공성전을 치뤄야 된...

'...응? 잠깐만.'

마리는 머릿속에서 의문이 하나 두둥실 떠올랐다. 세실리가 매력이 뛰어난 건 맞지만 그녀는 마족이며
아이작은 인간이다.
기본적으로 수명 차이가 3 배 이상 나는데 세실리가 이 부분을 모를리가 절대 없다. 더군다나 마족은 참을
수 없는 분노나 슬픔을 느끼면 악마로 변하게 된다.

제논 일대기 속에 등장한 스승과 엘프 여왕처럼 애절한 스토리도 기대할 수 없다. 아이작은 스승처럼
마나를 다루는데 극에 달한 강자가 아닌, 그저 평범하디 평범한 인간이다.

장수해도 100 년인데 마족에게 있어서 100 년은 인간으로 따졌을 때 대략 20 년 정도가 된다. 게다가
아이작은 현재 17 살로, 장수를 해도 90 년이다.

아이작이 수명 문제로 죽고 나서, 혼자 남게 될 세실리는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마리에게는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세실리."
"응. 마리."
"너는 아이작과 함께 할 시간이 정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 아이작이 죽고 난 이후의 시간보다?"
"...드디어 눈치챘구나."

세실리는 마리가 본질을 꿰뚫는 질문을 하자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뒤이어 그녀는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나무로 가려져 있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푸르런 하늘이 밋밋하게 보였다. 따사로운 햇빛마저 가려주는
중이다.

그녀는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다시 고개를 내려 마리를 바라봤다. 마리는 세실리의 대답이 나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는 중이다.

"네 말이 맞아. 나는 마족이고 아이작은 인간이지.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고, 언젠가 나와 아이작은
헤어지게 될 거야."
"괴로울 거야."
"그래. 당연히 괴롭겠지. 그래서 네가 아니라 아이작의 의견이 중요하다 한 거야. 종족간의 수명 문제는
신조차 해결할 수 없을테니까."

살아있는 것들은 본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인간을 포함한 사람은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유산'을 남기려고 애를 쓰는 중이다. 그것은 '지식'이라는
형태로 스며들어 사람을 더욱 발전시킨다.

인간이 남들보다 발전 속도가 빠른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 엘프와 마족 같은 장수종은 수명이 너무 긴


바람에 느긋한 마음가짐이고, 인간은 그 반대였으니.

세실리는 마리에게서 시선을 옮겨 마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로 마나로 감지하지 않아도 시끌벅적한
기운이 여기까지 전달되었다.

"아까 그 마족을 보고 나서 하나 생각해 놓은 게 있어. 그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이야."
"... ..."
"설령 아이작이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난 그를 기억하기 위해 그의 영지에 지원을 해줄 거야.
아무리 비밀을 숨긴다고 해도 언젠가 아이작이 제논 일대기의 작가라는 걸 알게 되겠지. 그리고 그의
영지는 자연스레 문화 도시로 발전할테고."
"그럼 정치적으로 도와준다는 건..."
"맞아. 욕심많은 자가 그의 영지를 함부로 농락할 수 없도록, 내가 보호할 거야. 이건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마족도 마찬가지겠지."

그렇게 된다면 마이샬 영지는 최소한 200 년 가까이 안전하다.


미네르바 제국과 외교적인 거래를 한다면 헬리움의 전사들이 마이샬 영지에 배치되는 것도 문제가 없을
것이며 제국과 헬리움이라는 둔둔한 우군이 생기니 서로에게 이익인 셈이다.

마리는 머나먼 미래까지 넘보는 세실리의 혜안에 감탄한 것도 잠시, 왠지 모르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렇게까지 지극정성인데 수명이라는 매우 커다란 벽이 막고 있었으니.

물론 그 벽을 넘어선다고한들 아이작은 절대 못 준다. 마리는 속이 뻥 뚫린 듯한 기분에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당당함을 되찾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네 마음은 잘 알겠어. 그래도 아이작은 절대 못 주니까 그리 알아."


"흐응~"

세실리는 마리의 선언에 색기가 담긴 비음을 흘리더니 눈매를 반으로 접었다. 그에 마리가 불길함을
느꼈을 때 쯤, 세실리가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글쎄~ 어떻게 될까나?"


"무, 무슨 소리야? 아까는 분명..."
"마음은 주지 못 해도 몸은 줄 수 있잖아? 그러니까..."

이윽고 세실리는 마리를 지나치기 직전,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소근거렸다.

"내가 먼저 가져가 버릴 수도 있다?"

귓구멍을 파고드는 세실리의 야시시한 말. 그 말이 마리의 뇌를 강타했다.

"...!!"

마리의 몸이 크게 움찔거리며 푸른색 눈동자가 화등잔만하게 떠졌다. 입 또한 떡- 하고 벌어진 것이


세실리의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곧이어 백설기 같은 피부가 점점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귀까지 노을처럼 빨개졌다. 세실리가 무슨
뜻을 담고 이야기했는지 명확히 인지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실리가 그 말을 했기에 함부로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로 할 기세였으니까.

"그럼 난 이만 가볼게."
"... ..."

장난 아닌 장난을 친 세실리는 마리의 어깨를 손으로 톡- 치며 그녀를 지나쳤다. 세실리가 지나쳤음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못 박힌 듯이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그렇게 세실리가 멀찍히 떨어졌을 때 쯤, 마리는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세차게 돌렸다. 세실리는 이미
마을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좋아. 해보자는 거지?"

마리는 이것 보라는 듯이 씨익 웃더니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누가 빼앗길 줄 알고?"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에 기이한 열망이 화염처럼 타올랐다.

< 94 화 >
누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복잡한 관계를 묻는다면,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혈연(血緣)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혈연은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피로 이어져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보다 못 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

또한 패륜(悖倫)이라는 단어처럼 가족 사이에서도 지켜야 할 덕목과 책임이 있는 법이다. 그걸 어기는


순간 패륜아가 되는 것이며 사람으로서 큰 죄를 짓는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족 간의 책임을 저버리는 이들은 이 세상에 셀 수도 없이 많다. 게다가 계급


사회라는 특징과 인권이라는 개념이 희박한 중세에서는 그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사생아를 본인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팽겨치는 건 기본이고 작위를 이어받기 위해 가족끼리


골육상잔을 벌이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혈연끼리의 싸움은 가급적 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욕심에 눈이 멀게 되면


혈연이고 뭐고 없다.

이처럼 혈연은 남보다 못 한 걸 넘어 증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안타깝게도 이런 상황 속에서도


미련으로 남는 경우가 훨씬 많다.

'얼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나는 긴장을 넘어 불안해 하고 있는 아델리아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의 하늘색 눈동자는 물론,


입술마저 정처없이 떨리는 중이다.

식은땀까지 흐르는 걸 보아 누가 봐도 심각한 불안 증세를 겪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평소


털털했던 아델의 성격을 생각하자면 동일인물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이질적이다.

그리고 그녀가 이렇게나 떠는 이유는 바로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세 명의 남녀들. 전시회에 참석한 테르스
왕국의 왕족들 때문일 것이리라.

눈동자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마저 하늘색인, 마치 푸른 하늘을 연상시켰으며 왕족 특유의 기품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붉은 머리라... 마이샬 가문의 자식인가?"

미묘한 대치 상황이 이어져 선듯 말을 못 하고 있을 때, 남자가 먼저 중얼거렸다.

작게 말한 것도 어니고 내가 들리게끔 중얼거린 거라 덕분에 입을 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에 나는


붙잡았던 아델리아의 손을 슬며시 놓았다.

물론 손을 놓으면서도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는 건 잊지 않았다. 뭐라도 말하고 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는지 입이 열었다 닫았다를 연신 반복하고 있다.

이를 보아 그녀와 테르스 왕족들 사이에 복잡한 사정이 얽혀있다는 건 명백하다.

"잠깐 실례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개최한 마이샬 가문의 차남,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테르스 왕국의 하늘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흠. 테르스 왕국의 정당한 계승자, 라오스 듀커드 폰 커쳐스라고 한다."

내가 예법에 따라 정중하게 인사하자 남자는 고저없는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소개하는 도중에도 그의
시선은 정확히 아델리아를 향하고 있었다.
뒤이어 라오스의 옆에 있던 여인도 특유의 중저음의 목소리로 무뚝뚝하게 소개했다.

"히리야 듀커드 폰 커쳐스. 라라."

그러면서 자기가 어깨를 붙잡았던 소녀의 이름을 부르는 히리야.

소녀도 히리야의 부름에 눈을 땡그랗게 뜨더니 다급히 행동에 나섰다.

"앗. 응! 만나서 반갑습니다. 테르스 왕국의 3 왕녀, 라라 듀커드 폰 커쳐스라고 합니다."

인형처럼 깜찍한 외모를 지닌 소녀가 드레스의 양 끝을 살짝 잡아 올리며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낭랑한 목소리와 귀여운 외모가 합쳐져 심장에 무리가 올 것 같았으나 그보다는 그녀의 예법이 신경
쓰였다.

타국의 귀족이라고한들 라라는 엄연히 왕족이어서 공손하게 인사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라오스와
히리야처럼 대충 이름만 밝혀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히리야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눈 밑을 꿈틀거렸지만 이윽고 눈을 지그시 감는 걸로 대응했다. 보아하니


라라가 실수를 저지른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모양이다.

"아이작이라고 했나? 다급하게 개최한 전시회치고는 구조가 상당히 잘 짜여있던데?"

모든 인사가 끝나자 라오스는 내 앞으로 다가오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다가오면서도 옆의 아델리아에게


시선을 주는 건 여전했다.

나는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살짝 놀란 것도 잠시 살짝 얼떨떨해하며 대답했다.

반말을 사용하는 건 라오스가 왕족이었기에 그닥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왕족이 타국의 귀족에게 존댓말을
하는 건 어디까지나 공적인 자리에서다.

이번 전시회는 공적인 자리기보다는 축제에 가까운 개념이라 말을 놓아도 외교적으로 손실을 보는 건 없다.

"감사합니다. 사실 황궁에서 모두 지원해준 거라 우리 가문이 한 건 없지만요."


"솔직해서 좋네. 너도 반쯤 관광객이지?"
"반쯤이 아니라 그냥 관광객입니다."
"무뚝뚝한 말투와 달리 재치가 있구나."
"칭찬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하하하. 좋아. 좋아. 그런데..."

라오스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탕하게 웃었다가 슬그머니 아델리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제는 시선조차 마주치지 어려웠는지 아델은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고 있다.

단발로 자른 머리카락으로 인해 그녀의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는데, 아까와 별 다를 게 없었다.

망설임, 두려움, 고민, 긴장 등등.

온갖 복합적인 감정이 두루 섞여있어 함부로 정의할 수 없었으며 식은땀이 비오듯이 쏟아지고 있다.

보기만 해도 상태가 안 좋음을 넘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라오스는 아델리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가족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아델리아가 짓던 미소와 완벽하게 똑같았다.

"초면에 미안하지만 이 여자랑 무슨 사이야? 아까 사이좋게 손까지 잡고 있던데... 혹시?"


"아뇨. 그냥 친한 누나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다정하게 손까지 잡고 있던데?"
"저희 그런 사이는 아닙니다."

정말로 아니었기에 칼같이 선을 그을 수 있었다. 아델리아의 손을 잡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으니.

"흐음... 그래?"

라오스는 단호한 내 대답을 듣고 내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믿어주는 건지 아니면


넘어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오는 피해는 없는 것 같다.

"알았어.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거구나?"


"네. 그나저나 아델 누나랑 무슨 사이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

내가 그리 질문하자 아델리아가 놀랐는지 아래로 떨구었던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떨리는


눈동자로 나와 라오스를 번갈아보기 시작했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목구멍이 막혀버린 듯, 입술이 열렸다 닫았다 반복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도대체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아델리아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무슨 사이냐고?"

아델리아 뿐만 아니라 라오스에게도 그닥 좋은 질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묻자마자 라오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우며 바로 정색했으니까.

마치 그녀와 엮이는 것조차 싫다는, 매우 불쾌하다는 표정이었다. 순간 지뢰를 밟은 건가 싶을 정도로


표정이 매우 안 좋았다.

이에 속으로 잘못됐다고 예감하고 있을 때, 라오스는 불쾌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돌려 아델리아를


바라봤다. 때마침 아델리아도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참이라 시선이 딱 마주쳤다.

"... ..."

라오스와 정면으로 마주한 아델리아는 고양이 앞에 선 쥐마냥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뻐끔거리던 입조차 꾹
다물린 채 식은땀만 줄줄 흐르는 중이다.

저러다가 기절하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으로 하고 있을 때였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아델리아에게서 시선을 돌린 라오스가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불쾌했던 표정을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지고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라오스와 달리 아델리아의 표정은... 세상이 무너졌다는 표현조차 부족했다. 심장이 덜컹- 하며
떨어졌는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으며 눈의 초점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것만 해도 충분할 터인데 라오스의 잔인한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옆에 아델리아가


있는데도 능청스럽게 굴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물론이고 우리는 이런 여자 몰라. 애초에 오늘 처음 보는
걸?"
"... ..."
"보아하니 평민인 것 같은데 너도 적당히 데리고 놀아. 비록 제국의 귀족이지만 왠지 너는 마음에
들거든."
"...알겠습니다."

감히 왕족 앞에서 거절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 라오스는 내가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자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델리아를 바라봤다.

아델리아의 초점이 이미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지만, 라오스는 그녀에게 독설을 퍼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주제를 알아야지. 안 그래?"


"... ..."

덕분에 정신이 돌아온 것인지 아델리아의 초점이 다시 되돌아왔다.

하지만 이윽고 놀라운 일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끄윽... 윽..."

가슴 속에 묵혀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분출된듯, 그녀의 하늘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것이
아닌가.

입술마저 꽉 깨무는 걸 보면 억지로 참고 있는 듯했지만 이미 한계점을 넘어섰는지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하는 모습이다.

가족에게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만큼 충격적인 일은 이 세상에 없을 터. 그녀는 본인은 가족에게, 그것도
내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부정당했으니 그 충격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리라.

이에 나는 폭발하기 직전인 아델리아에게 손을 천천히 뻗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안정시켜야 된다는


마음에서 발로한 행동이었지만...

타닷!

"어? 아델 누나!"

내 손이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아델리아가 도망치는 것이 한 발 빨랐다. 나는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아델리아의 뒷모습을 향해 급히 불렀지만 그녀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변에 모여있는 인파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모두 통과하며 헤쳐나갔다. 이때문에 그녀의 모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게 되었다.

"이래서 평민들이란... 예의라는 걸 모르는군."


"... ..."
"분위기를 망쳤다면 사과할게. 요즘 평민들이 기어오르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거든. 아무리 제이로스
혁명이 발발했다지만 지켜야 할 건 지켜야지. 안 그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아델리아가 떠나갔던 방향을 복잡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을 뿐.

라오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닥 신경 쓰지 않았는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조언 아닌 조언을 건냈다.

"너도 가급적이면 그 애랑 얽히지 마. 그리고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하고. 그럼 이만."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나를 지나치는 라오스. 그가 내 곁을 지나치자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히리야와 라라도 따라갔다.

히리야는 무심하게 나를 지나친 반면, 라라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지나갔다. 이윽고 그들이
완전히 지나쳤을 때 뒤에서 라라의 낭랑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언니. 저 오빠 정말 예쁘다. 그치? 언니보다 예쁜 거 같아."


"조용히 해."
"나중에 저 오빠랑 같이 놀면 안 돼?"
"라라."
"히잉."

유독 철이 없어 보이는 라라의 행동거지를 보건데 막내라고 가족들에게 사랑을 듬뿍 먹고 자라난 모양이다.


방금 전 떠난 아델리아와 완전히 딴판이다.

나는 전시회를 구경하기 시작한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방금 전 아델리아가 도망갔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수소문을 하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갈색 머리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 전 잘 모르겠습니다."


"울면서 뛰어갔다고요? 아, 아까 저기로 간 건 봤는데..."
"저쪽 건물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아델리아의 외모가 워낙 뛰어나다보니 수소문을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 골목길 근처에 다다랐다.

골목길이라 그런지 인적이 드물었으며 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두컴컴한 느낌이 나는 곳이었다. 원래 우리


영지에는 이런 골목길조차 없었는데 아무래도 건물이 많이 세워졌다보니 생긴 모양이다.

그리고...

-끄으윽... 흐으윽...

누군가의 흐느낌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고요한 골목길 특징 덕분에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린 방향을 얼추 계산한 후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가면 갈 수록 흐느끼는 소리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골목길 깊숙한 곳에 도달했을 쯤, 나는 바닥에 쭈구려 앉은 채 울고


있는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꺼흑... 흐윽... 으어엉..."


"... ..."
"너무해... 너무하다고... 인사 정도는.... 끄윽... 할 수 있잖... 히끅..."

언제나 당당하고 매사에 열정적이었던 아델리아가 눈물을 터뜨리고 있다. 감정을 억지로 그러모았던 둑이
완전히 박살난 것처럼, 본인의 슬픔을 모조리 토해내는 중이다.

나는 통곡에 가까운 수준으로 오열하는 아델리아를 가만히 보다가 천천히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그녀는
내가 왔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 했는지 눈물을 쏟아내기 바빴다.

"그냥... 그냥... 한 번... 히끅! 꺼으윽... 흑..."


"... ..."
"흐어어엉..."
저러다 탈진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구슬프게 우는 아델리아. 눈물이 멈추지 않는지 계속해서 눈을
닦기 바빴다.

나는 조금은 진정시켜줘야겠다고 판단하여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손수건을 갖고 다니는 건


귀족의 기본적인 소양이다.

손수건은 특별한 문양 하나 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손수건이었지만 지금의 아델리아에는 충분히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누나."
"흐윽... 끄윽..."
"아델리아 누나."
"으윽... 어?"

묵혀놨던 감정을 약간이나마 쏟아냈는지 아델리아가 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통곡을
했으면 눈이 퉁퉁 부어있었으며 콧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나는 안쓰러움을 차마 숨기지 못 한 채 말없이 아델리아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아델리아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갈라진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아이작?"
"이게 필요할 거 같아서요."
"...날 따라온 거야?"

내가 내민 손수건을 받지 않고 자기 질문만 하기 바쁜 아델리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뒤이어 그녀는 약간 혼란스럽다는 눈빛으로 나와 손수건을 번갈아보더니 머뭇거리며 손을 뻗었다. 자신감


넘치던 평소와 달라도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방금 전 가족에게 존재를 부정당한 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나를 대하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중이다.

"그냥 받아요."
"으, 응..."

내가 그리 말하자 아델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손수건을 받았다. 그리고는 내 눈치를 살살 보더니 눈물콧물
범벅이었던 본인의 얼굴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패앵!"
"... ..."

그래도 성격은 어디 가지 않는다고, 아델리아는 손수건에 코까지 시원하게 풀었다. 나는 그걸 보면서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저 손수건은 가져가지 않고 버리는 게 좋을 듯했다. 어차피 집에 널리고 널려있는 것이


손수건이었으니.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아델리아는 조금이나마 진정되었는지 코를 훌쩍거렸다. 얼굴 상태는


깨끗해졌지만 눈은 퉁퉁 부어있고 코는 술에 취한 것마냥 빨개진 상태였다.

"...고마워. 못 볼 꼴을 보였네."
"아니에요. 그런데 아델 누나. 아까 그 테르스 사람들이랑은..."
"훌쩍. 맞아. 내 가족들이지. 그것도 피가 반만 섞여있는."

피가 반만 섞여있다. 이 말은 즉슨, 아델리아가 사생아라는 의미다.


계급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 사생아가 있는 건 별로 이상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왕의 사생아라니
조금 놀라웠다.

하지만 이처럼 각팍한 대우를 받는 것도 이상하고, 아델리아가 그들에게 미련을 가진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까 전 라오스가 아델리아를 없는 사람 취급한 걸 보았을 때 분명 좋지 않은 과거가 있을 터. 보통


사람이었다면 혈연을 끊어도 모자를텐데 아델리아의 경우는 약간 달랐다.

"...우리 어머니는 매춘부였어. 그리고 아버... 지는 혈기왕성한 시절에 어머니와 관계를 맺었지.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나고."
"테르스의 왕이면..."
"평소 로맨티스트이니 뭐니 하면서 유명한 그 사람 맞아."

테르스 왕국의 왕, 프리드리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첩을 둘만한데 오로지 왕비 한 명만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왕.

금슬이 얼마나 좋은지 첩을 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슬하에 자식이 4 명이나 두었다. 심지어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따르자면 자식을 더 낳으려고 했으나 왕비가 너무 힘들어하여 더 낳지 않았다고.

그런데 그런 왕에게 사생아가, 그것도 그 사생아가 아델리아라는 건 놀랍기 그지 없는 사실이었다.

"넌 모르겠지만 하층민의 삶은 매우 비참해. 만약 내가 어머니 밑에서 그대로 자랐다면 몸을 팔면서


살았겠지. 얼굴도 예쁘겠다, 꽤 고급지게 팔렸을거야."
"... ..."
"어머니도 그걸 알고 있어서 나를 아버지에게 데려갔어. 어떻게든 그런 삶은 피하기 위해서. 하지만
보다시피 뭐..."

아델리아는 더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라오스가 아델리아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한 것과, 히리야가 라라의 접근을 막았던 것. 이것만 해도
아델리아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대략 유추할 수 있다.

비록 창녀의 삶은 피했지만 가족에게 멸시와 경멸을 받는 생활을 했겠지. 어쩌면 학대까지 받았을지도
모른다.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사이 아델리아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중얼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자포자기한 듯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나이가 되자 쫒겨나듯이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거야. 그래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면
가족으로 인정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안 될 거라 직감한 거네요."
"맞아. 적어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인정해줄 거라... 고... 끄읍..."

말을 하는 도중에 감정이 복받쳤는지 아델리아가 입술을 앙 다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맑은 하늘을 닮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난 그냥... 평범한 가족처럼... 히끅. 놀고 싶었을 뿐인데..."


"... ..."
"누나나 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힘들어? 나쁜 새끼들..."

뚝- 뚝-
손수건으로 닦을 생각도 나지 않는지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차가운 바닥에 떨어졌다.

분노에 주먹까지 꽉 쥐는 걸 보아 비참한 자신의 삶이 고통스러운 모양이다.

이러다가 훗날 자살을 하는 게 아닐지 싶어 걱정된다. 나는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후 조용히


말했다.

"누나."
"흐윽... 왜에..."
"그 사람들에게 미련을 가진 이유가 어머니 때문이에요?"

아델리아는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흐느끼면서 속사정을 이야기했다.

"응... 어머니가... 히끅! 이렇게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라 하셔서..."


"... ..."
"심지어 지금 어머니가 끄윽! 어떻게 된지도 몰라... 왕녀가 된다면 당당하게... 흐극. 찾아가고
싶었는데..."

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일까. 귀족으로 태어나 모자란 것 하나 없이 성장한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른


아델리아의 인생이다.

어쩌면 니콜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던 이유도 그녀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입학
전까지만 해도 가족에게 육체적, 정서적 학대를 받았을터이니 니콜은 아델리아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만약 니콜마저 자신에게 관심을 끊는다면 몰려오는 외로움에 버티는 게 힘들겠지. 나는 아델리아가


흐느끼는 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그동안 노력했다는 말이 허투가 아닌 듯, 그녀의 손은 굳은살과 상처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 ..."
"더이상 자신이 없어졌어.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야 해. 그리고 또..."

얼마나 심한 학대를 받았는지 아델리아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뇌리에 각인된 공포와
두려움이 그녀를 차근차근 좀먹고 있다.

나는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판단하여 그녀의 손을 조심히 붙잡았다. 딱딱하면서 차갑기 그지 없는 감각이


내 손을 타고 전해졌다.

내가 손을 잡으면서 온기가 전달되어서인지 아델리아는 떨림을 멈추고 고개를 선선히 들었다.


엉망진창으로 변한 그녀의 얼굴은 의문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이작?"
"괜찮아요. 누나. 울지 마세요."

아델리아를 이해할 수는 있어도 공감할 수는 없다. 그러니 지금은 어떤 위로를 해줘도 그녀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있어주는 것 하나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전생에서 가족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경험이 있었기에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멍을 때리고


있던 나에게 다가온 친구들은 내가 삶을 붙잡게 해준 원동력이 되어줬다.
만약 그 친구들마저 없었더라면 난 진작에 자살하고도 남았다. 사람은 혼자일 때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지만 단 하나의 버팀목이라도 있다면 지독하리만큼 끈질기다.

나는 아델리아에게서 손수건을 가져오며 그녀의 눈을 살살 닦아줬다. 아델리아는 거부하지 않고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누나에게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건 알겠어요. 그리고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마땅히 없고요. 지금은


그저 위로를 해줄 밖에 없네요."
"... ..."
"무엇보다 누나는 자신만만하게 웃는 얼굴이 에뻐요.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비록 도와줄 수는 없어도
제가 옆에 있어줄테니까."

마지막으로 눈꼬리에 묻어있는 눈물까지 닦아준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며 말을 끝맺었다.

"알겠죠?"
"... ..."
"그러니까 오늘 있었던 일은 모두 눈물로 토해내고 내일부터는 제가 아는 아델 누나로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늘 그랬듯이 저를 귀염둥이라 불러주고요."

아델리아는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늘색 눈동자에 짙은 혼란스러움이 담겨있었다.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억지로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우는 건지 아니면
웃는 건지 모를 기괴한 미소였다.

"이, 이렇게?"
"...지금은 그냥 우는 게 낫겠네요."
"미, 미안..."

곧바로 시무룩해지는 아델리아. 나는 다채로운 표정 변화에 피식 웃었다가 손수건을 뒷주머니에 넣으려고


했다.

조금 있다가 쓰레기통에 넣을 생각이다.

"자, 잠깐만."
"네?"
"그 손수건... 내가 빨아서 줄게."

내가 뒷주머니에 넣기 직전 아델리아가 내 손목을 덥썩 붙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의문을 가지며


입을 열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거 같은데요? 손수건은 저택에 널려있어서."


"그래도 나 때문에 더러워진 거잖아. 적어도 내가 책임은 져야지. 안 그래?"
"그렇다면야..."

나는 수긍하면서 아델리아에게 손수건을 돌려줬다. 그러자 아델리아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더니 두


손으로 소중하게 붙잡았다.

"고마워. 꼭 나중에 돌려줄게."


"네."
"그리고... 아이작."
"네?"

아델리아는 내 이름을 부르더니 전처럼 특유의 활기찬 미소를 지었다. 눈은 부어있고 코 끝은 붉어져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그녀의 미소가 확실했다.

이에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쯤, 아델리아가 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힘이 나는 것 같네."


"고맙기는 무슨.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 배려심 덕분에 그 애가 너랑 사귀는 거구나. 이제 알겠어."

아무래도 마리를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누나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죠."

내 말에 아델리아가 확신하듯이 말했다.

"그런 게 맞아."

그녀는 여전히 손수건을 두 손으로 소중히 붙잡고 있었다.

< 95 화 >

팬아트 란에 새로운 팬아트 올렸습니다! 엄청난 퀄리티라 표지로도 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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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아델리아는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렸는지 진정될 수 있었다. 하지만 통곡 수준으로 눈물을
터뜨렸기 때문인지 가끔 가다가 히끅! 거리며 딸꾹질을 해댔다.

보아하니 속이 제대로 놀란 것 같아 근처 분수대에서 급히 물을 마셨으나 도통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눈은 눈대로 심하게 부어있고 코끝은 딸기마냥 빨개진 상태다.

전시회를 구경하고 싶어도 구경할 수 없는 상태일 뿐더러 자칫하다 테르스 왕족과 또 만나게 된다면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

"그냥 저녁이 될 때까지 저택에서 쉬는 게 낫겠다."


"그래도 괜찮겠어요? 아직 못 본 작품이 많을텐데."
"조금 아쉽긴 해도 어차피 하이라이트는 저녁부터 시작이잖아. 그때까지 명상이나 하면서 마음을 달래야지.
지금 이대로 갔다간 어떻게 될지 모르고."

결국 아델리아는 저택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내가 곁에 있어준다고 해도 그녀는 한사코 사양했다.

괜히 나까지 휘말리게 할 수 없는데다가 전시회 구경에 방해될 것 같다고. 아쉽지만 납득이 가는 말이어서
하는 수 없이 그녀를 저택에 데려가줬다.

데려가는 도중에 혹여 테르스 왕족과 다시 한 번 만날까봐 노심초사하는 건 당연했다. 아델리아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주변을 연신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확 그냥 책에다 써버릴까?'

이미 내 마음 속에서 테르스 왕국의 왕족들에 대한 호감은 바닥을 뚫기 직전이다. 아무리 사생아라지만


이런 식으로 모멸차게 대우하는 건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다.

설령 자기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아도 정서적인 학대만큼은 해서는 안 된다. 솔직히 아델리아가 올바르게
성장한 것도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제논 일대기에 사생아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싶었지만, 개연성이 부족할 뿐더러 테르스
왕족에게 들킬 가능성이 크다. 아델리아와 테르스 왕족 간의 관계는 비밀로 붙여져 있는만큼 용의자가
크게 좁혀진다.

그러니 아쉽긴 해도 차근차근 기회를 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지다. 욱한 나머지 내가 먼저 선빵을 쳤다간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가슴 속에 불안감을 가지며 저택을 향해 좀 더 빨리 나아갔다. 천만다행히도 도중에 테르스


왕족과 만날 일은 없었다.

"아델!"
"응?"

머지않아 저택에 도착하고 대문 앞에 니콜이 서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아델은 니콜을 발견하고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니콜과 함께 다니다가 길을 잃어버렸다고 했던가.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니콜은 이쪽으로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델리아를 혼내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 있던 거야! 한참 찾았... 뭐야? 너 눈이 왜 그래?"


"...사정이 있어."

니콜은 아델리아를 혼내려다 말고 퉁퉁 부어있는 그녀의 눈을 확인하고 의문을 드러냈다. 복잡한 사정이
있는 아델리아로서는 당연히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기에 얼버무렸다.

니콜도 아델리아가 말하기를 꺼려하자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옆에 있는 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혹시


네가 대신 설명해줄 수 있냐는 시선이다.

하지만 나 또한 말해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여서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대신했다. 내가 능청스레 넘어가자


니콜도 하는 수 없이 넘어가기로 정했다.

"뭐, 사정이 있겠지. 그런데 내가 얼마나 찾아다닌지는 알고 있어?"


"...미안."
"미안한 거 알면 됐어. 혹시 몰라서 저택으로 돌아왔는데 때마침 아이작이랑 같이 돌아오네. 이제 다시
가자."
"그... 괜찮으면 저택에 잠깐 쉬어도 될까? 조금 피곤해서 그런데..."
"뭐?"

아델리아의 조심스러운 부탁에 니콜의 황금색 눈에 의아함이 새겨졌다. 하기야 평소 아델리아가 보이던
태도와 달라도 너무 다르니 의문을 품을만도 하다.

뒤이어 니콜은 부어있는 아델리아의 눈과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모습에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니콜도
눈치가 빠른 편이니 아델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대강 예상하고 있을 터.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니콜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아델리아의 말을 들어주기로 정했다. 자세한
속사정을 묻지 않는 걸 보면 나름대로의 배려인 듯했다.

"알았어. 그럼 나랑 그때 같이 나가자."
"아, 아냐. 나만 쉬는 거고 너는 전시회 구경하면 돼."
"불안해서 그래. 불안해서. 나중에 또 싸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저택에만 있을 건데 길을 잃을리가 있어?"
"됐고, 잔말말고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작 너는?"

니콜이 나를 보면서 묻는다. 곧 있으면 세실리와 마리가 돌아올 것 같았기에 전시회를 관람할 생각이다.

"난 계속 전시회 구경하고 있을게. 아직 일행이 있어서."


"아, 그렇지 참. 그럼 나랑 아델은 저택에 있을테니까 저녁 먹을 때 쯤이면 돌아와."
"응."
"근데 아델 너 괜찮은 거 맞지?"
"괜찮아."

그리하여 니콜과 아델리아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나는 두 사람이 대문 너머로 이동할 때까지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아델리아가 뒤를 돌아보며 내 얼굴을 바라봤는데, 그녀는 고맙다는 듯이 잔잔하게 웃어주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평소 털털한 미소만 짓는 줄 알았는데.'

아무튼 간에 아델리아도 돌아갔겠다, 나는 다시 전시회를 구경하러 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슬슬 마리와 세실리도 돌아올 때까 되었으니 마을 광장으로 갈 생각이다. 그때까지 뭘 해야할지


고민이지만 우리 영지는 생각 외로 넓은 편이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괜찮을 것이다.

'아, 그렇지. 책이나 살까?'

아버지가 여러 상단과 계약을 맺었으니 다양한 물품이 반입되었고 그중에는 책 또한 있을 것이다. 우리


영지에는 원래 서점이 하나 있으니 그곳에 책이 반입됐을 터.

나는 새로운 책이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기쁜 마음으로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아까 보았던 조각상들과


노점들을 지나치며 상점 거리에 입성했다.

전에는 대장간과 간단한 의류품, 그리고 물건을 사는 상점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그보다 더 많아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 눈에는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자주 방문했던 서점이 눈에 들어왔다.

돈도 충분히 있겠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서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특유의 종이


냄새가 코를 찔러들어왔다.

"어서 오세... 어머. 도련님. 오랜만이네요."

서점에 들어오자마자 서점 주인 아줌마가 반갑게 인사하셨다. 이제 막 중년의 나이로 접어들었지만 과거에


한 미모했을 것 같은 얼굴의 소유자이며 인자한 미소가 특징이었다.

이 중년인의 이름은 루나. 아카데미 입학 전에 안면을 텄던 분이라 나름 친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그녀의 인사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루나 씨. 오늘 많이 바쁘신가요?"
"말도 마세요. 책이 어찌나 많이 들어오는지. 아마 도련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신간은 어디에 있어요?"
"저쪽 코너에 있어요."

그녀의 친절한 대우에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전하며 발길을 돌렸다. 뒤이어 책장과 아래의 전시대에
빼곡히 채워져 있는 책들을 보며 입을 헤- 벌릴 수밖에 없었다.

루나 아줌마의 말처럼 새로운 책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확실히 많은 상단이 오고 가긴 오고 간 모양이다.

'우와. 이 탐험가 신간이 나왔네? 역사 서적도 나왔고.'

포장 기술이 발달돼 있지 않아서 책은 바로바로 볼 수 있다. 물론 적발된다면 곧바로 쫒겨나지만 나는야


영주의 아들. 서서 읽기 정도는 루나 아줌마께서 눈 감아 주실 것이다.

그래도 양심이 찔리니 대충 앞부분만 훑어보고 고를 생각이다. 가급적이면 탐험 일지와 역사 서적을


기준을 고를 생각인데...

'...너무 많은데?'

역사 서적만 해도 최소한 10 권이 넘을 정도로 방대했다. 심지어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도 인간의 역사


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의 역사책 또한 존재했다.

인간은 몰라도 이종족의 역사 서적은 구하기 매우 힘들텐데 어디에서 구한 건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나는


무럭무럭 치솟는 호기심에 엘프와 관련된 역사 서적을 하나 뽑아들며 제목부터 읽었다.

'어디 보자... 엘프의 문화와 역사라...'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에서 엘프와 관련된 책은 원없이 읽고 있었지만 서점에 나온 건 조금 다르지 않을까.
솔직히 연구실에 있던 책은 연구용 서적에 가까워서 이해하기가 난감했다.

과연 이 책은 연구실의 서적보다 이해하기 쉬울지, 아니면 그저 불쏘시개에 불과한지 읽어보면 알 수 있을


터. 나는 최근에 나온 듯한 서적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페이지를 넘기려고 했다.

"큼. 큼큼."
"음?"

페이지를 넘기기 직전, 누군가 옆에서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마치 내가 들으라는 듯한 헛기침이어서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눈높이보다 더


아래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체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새하얀 후드를 써서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에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미안하지만 그대여. 그 책은 읽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세실리가 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라면, 이 소녀는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맑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 목소리에 정신이 팔린 것도 잠시,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소녀와 눈을 마주했다.


독특하게도 은색과 회색이 조화롭게 섞여있는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가졌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의 분위기를 띈다고 해야 할까. 인간이 아닌 듯한 신비로움을 풍겼다.

"...응?"
"겉보기에 허울 좋은 말들만 번지르르하게 있을 뿐, 실제로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는 책이니라."

말투에서부터 우러 나오는 귀족 특유의 고급스러운 언어 구사. 나는 이 후드를 쓴 소녀가 귀족가 자제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내가 귀족인 걸 모르는 것인지 하대하고 있지만 어쩌면 아까의 테르스 왕족들처럼 그에 준하는 작위를
갖고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초면부터 하대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 손에 들린 책을 보여주면서 물었다.

"이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니?"
후드를 쓴 걸 보아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굳이 존댓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까. 이걸 빌미로
외교적으로 뭐라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건 소녀 쪽이겠지.

소녀도 내가 말을 놓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는지 특유의 청아한 목소리로 책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읽었다. 하지만 읽어보면서 눈쌀을 찌푸리게 되었지. 우리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자가 엘프를
폄훼하기 위해 쓴 책이다."
"음... 그건 알겠는데 우리?"
"...앗."

내가 지적하자 소녀는 아차했는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주춤거렸다. 나는 그걸 보며 혹시나


하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얘. 너 혹시 엘프야?"
"아,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리고 애도 아니다!"
"그렇게 부정하면 더 의심이 가는데."

새가 날개짓을 하는 것처럼 두 팔을 파닥거리며 당황하는 소녀. 외모도 그렇고 행동거지도 그렇고 어른인
척 하는 아이 같다.

결국 소녀도 이미 엎지른 물이라 판단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끄응...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일단 그 책은 내려놓고 다른 책부터 찾아보거라."


"싫어."
"어, 어째서?"

소녀는 내가 한치의 고민도 없이 거절하자 재차 당황했다. 아무래도 본인의 말에 순순히 따를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 결코 책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다양한 역사'지 누군가의 '주관적인


의견'이 아니었으니까.

본래 역사와 관련된 기록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다. 역사는 승자가 기록한다는 격언이 있는 것처럼
신이 아닌 이상 역사는 결코 객관적으로 변할 수 없다.

그러니 많고 많은 책들을 접하고, 그 속에서 공통점을 찾아야만 역사는 진정한 의미로 역사가 되는 법이다.
더군다나 눈 앞의 소녀는 엘프로 추정되는 바, 결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원래 시선이라는 게 그래. 정말로 네가 엘프라면 이 책을 싫어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우리 인간에게는


정말 좋은 참고 자료가 될 수도 있거든. 아무래도 이종족에 관련된 역사 서적은 잘 없어서 말이야."
"인간들은 엘프를 걸어다니는 도서관이라고 말하지. 적어도 그대보다는 갖고 있는 지식이 많다고 자부할
수 있느니라."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결국 그 지식도 엘프의 관점으로 쓴 거잖아? 이 책에 담겨있는 내용과 네가
알고 있는 지식이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을거야. 그리고 엘프는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다보니 앞뒤로 콱
막혀있는 경우가 많거든. 변화가 잘 없다는 뜻이야."
"나, 나는 그렇지 않다."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건지 엘프 소녀가 소심하게 반박했다. 나는 작게 투덜거리 듯이 답한 소녀를 보며


미약하게 웃었다.

'알븐하임에서 몰래 나온 가문의 딸인가?'

알븐하임은 원로원과 여왕 이 둘이서 서로 견제하면서 통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신디에게 들은 바로는


서로 사이가 매우 나쁘며 기득권을 쥐기 위해 견제를 하는 중이라고.
원로원은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귀족들이 모든 작위를 헌납하고 하나로 뭉친 세력이라 보면 된다. 물론
원로원에만 유력 가문이 포진된 게 아니고 여왕을 도와주는 곳도 있다.

이 소녀도 그런 가문에서 몰래 빠져나왔지 않았을까. 말투를 보면 결코 평범한 엘프라 생각할 수 없다.

"그나저나 너도 전시회에 참여한 거니? 제논 일대기를 보려고?"


"물론이다. 제논 일대기를 위한 전시회가 열린다는데 어찌 넘어갈 수 있겠느냐?"

살짝 흥분하며 답한 소녀. 정말로 제논 일대기 팬인 모양이다.

나는 왠지 뿌듯함에 그녀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하는 것을 느끼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소녀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다.

소녀는 내가 눈높이를 맞추자 살짝 움찔거렸으나 이내 은회색 눈동자를 빛내며 나와 마주했다. 나는


신비로움을 풍기는 그녀의 눈과 마주하며 조용히 물었다.

"내 이름은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이번 전시회를 개최한 마이샬 가문의 차남이지. 꼬마 숙녀님의
이름은?"

내 소개에 엘프 소녀는 살짝 머뭇거리다가 특유의 고아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르웬. 아르웬이라 불러다오."

아르웬. 엘프에게 있어서 평범하디 평범한 이름이다.

너무 평범한 나머지 가명으로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

내가 속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아르웬이라 소개한 소녀가 투덜거리 듯이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애 아니다. 이래보여도 그대보다는 10 배 가까이 살았으니."


"알겠어요. 할머니."
"어허!!!"

호통치는 모습도 정말 어린애 같다.

오싹-

"응?"

그러다 문득 뒷목이 서늘해져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하지만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책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는 책장만 눈에 들어올 뿐.

나는 뭔가 얼얼한 기분에 뒷목을 매만지며 작게 중얼거렸다.

"뭐지...?"

< 96 화 >

잠깐 뒷목이 서늘해지는 착각이 들었지만 아르웬과의 대화가 끊기는 일은 없었다.

나는 어른인 척 하지만 중간중간 어린애처럼 구는 아르웬이 마음에 들었고 아르웬도 본인 나름대로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으니.

이후로 알게 된 사실은 아르웬도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책벌레라는 점. 그리고 오래 산 엘프답게 나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성인 엘프는 걸어다니는 도서관급이라는데 그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하는


질문들마다 꼬박꼬박 대답해주는 것도 모자라 부가 설명까지 해주어 나를 감탄케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녀는 나에게 엘프와 인간 사이에 간극이 얼마나 큰지 실감시켜줬다.

"음... 이 책이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구나. 발간된지 80 년은 된 책인데."


"8... 80 년? 그렇게나 오래 됐어?"
"우리 엘프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했던 책이니라. 우리 성지에도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보다 10 배는 가까이 살았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는지 아르웬은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단종되었던 서적들을 모두 읽었다. 심지어 세세하게 기억하여 나를 한 번 더 놀라게 만들었다.

원래 발간된지 20 년이 넘는 책은 출판은 물론이고 유통되는 것조차 매우 어렵다. 도서관을 방문해도


구석진 자리에 보관돼 있어 찾는 것도 힘들다.

이렇다보니 제논 일대기처럼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책이 아닌 이상 한 권이라도 구매하기 위해서는


난해한 과정이 요구된다.

그러나 아르웬은 발간되었던 당시에 그 책을 정독한 걸 넘어 모두 기억하고 있다. 덕분에 나는 새삼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아르웬을 바라보게 되었다.

소녀같은 행동거지 때문에 반말을 하고 있었으나 이제 슬슬 존댓말을 사용해야지 않을까, 라는 시덥잖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뭐, 그렇다고 나에게 말을 높일 필요는 없다. 그대도 이게 편하지 않겠느냐?"


"...편하긴 하지. 그래도 놀라운 건 변하지 않아."
"인간의 시선으로는 그렇겠지. 허나 우리 엘프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개개인이 걸어다니는
성지일 뿐더러 강력한 군단이나 마찬가지이지. 책의 이야기를 모두 기억하는 건 일도 아니리라."

역시 엘프 특유의 종족 특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고. 아르웬은 내가 진심으로 감탄하자 콧대를 추켜세우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래도 오만함이나 자만심은 아닌 것이, 이 둘은 남이나 자기자신에게 해악을 끼쳐야 진정한 의미로
탄생하는 법. 아르웬 같은 경우는 순수한 의미로 자부심에 가까웠다.

물론 소녀처럼 귀여운 외모를 가진지라 어린아이가 재롱을 부리는 것 같다. 분명 나이가 나보다 훨씬
많은데 행동거지는 영락없는 어린애다.

나는 어디 한 번 부러워해보라는 듯, 아직까지 우쭐거리고 있는 아르웬을 보다가 피식 웃으며 팩트를 툭-


찔렀다.

"그런 엘프들이 500 년 전 종족전쟁에서 큰 굴욕을 겪었지 아마?"


"... ..."

내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팩트를 때려버리자 아르웬의 미소가 유리마냥 와장창 깨져버렸다.

엘프는 역사를 중요시 하는 관습이 있어 그들에게 종족전쟁은 그야말로 굴욕 중의 굴욕일 터. 그러나


반드시 배워야 하는 역사다.

"...우리 선조가 어리석긴 했지."

아르웬은 고개를 반대쪽으로 스윽- 돌리고는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부정하지 않는 걸 보면 개념이
확실하게 박혀있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반응에 작게 웃었다가 곧바로 긍정적인 이야기를 꺼내어 기분을 풀어줬다. 엘프에 대해 나쁜
말만 했다간 아르웬이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걸 반면교사 삼아 엘프도 큰 발전을 이루었지. 중간에 다시다난한 사건사고가 터졌지만 지금은
주변 국가와 교류도 활발히 하고 말이야. 듣자하니 이번 대 엘프 여왕이 본격적으로 개방 정책을 펼쳤다고
했지?"

신디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과거의 엘프는 스스로를 신에게 선택받은 종족이라 굳게 믿으며 다른 종족과 거리를 두었다. 정확히는
다른 종족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본인들이 나서봤자 힘으로 억누르는 것밖에 되지 않았으며 굳이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 했으니까. 실제로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다른 종족의 문명이 엘프에 버금갈 정도로 발전하고, 종족전쟁이 터지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엘프는 스스로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필멸자임을 똑똑히 인지하고 주변과의 교류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 그렇다. 알븐하임은 불과 100 년 전까지만 해도 주변과 단절하다시피 국가를 운영했지. 하지만
여왕이 즉위하고나서는 완전히 바뀌었니라."

엘프 여왕이 이룩한 업적에 대해 언급하자 왠지 모르게 뿌듯해 하는 아르웬이다. 아무래도 신디처럼 엘프


여왕을 존경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우쭐거리는 아르웬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으니 어른스러운 건


당연한 건데 외모가 외모인지라 어른인 척 연기하는 아이 같다.

"아르웬은 엘프 여왕을 좋게 보고 있구나. 내가 아는 엘프도 그러던데."


"그 엘프는 분명 젊은데다가 제대로 된 시선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하긴, 이번 대 여왕이 통치를
잘하긴 했지."
"그런 것 치고는 80 년 전 쯤인가, 외교적으로 큰 패착을 지었다고 들었어. 관세를 잘못 매겨서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봤잖아."

아르웬의 말처럼 이번에 즉위한 엘프 여왕이 전반적으로 통치를 잘한 건 맞다. 그러나 엘프 치고는 지극히
어린 나이에 여왕이 된 탓인지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방금 전 내가 언급한 관세 사건이다. 미네르바 제국에서 관세 문제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알븐하임에게 돈을 뜯어내는 수준으로 외교를 맺었다.

만약 연륜이 깊거나 조금만 더 신중했다면 곧바로 사기에 가깝다는 걸 눈치챘겠지만 엘프 여왕은 그러지
못 했다. 이럴 때 나서야 하는 세력이 원로원인데 아마 일부러 엿을 먹은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여태까지 엘프의 왕들은 원로원의 압박을 이기지 못 하고 스스로 자리에 내려왔으니 그 일환이지 않을까
싶다.

"그, 그건 어쩔 수 없었느니라! 그래도 그 이후로는 아무 문제도 터지지 않았잖느냐..."

처음에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가 이윽고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아르웬. 로브 아래로


시무룩해진 표정을 보아하니 이제 장난은 그만쳐야할 듯싶었다.
그래도 반응은 보고 싶었다. 나는 그녀의 울적한 기분을 살살 달래주기 위해 긍정적인 면모를 알려줬다.

"뭐, 네 말이 맞아. 그 사건 이후로 엘프 여왕은 외교적으로 큰 손실을 본 적이 없지. 심지어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고 말이야. 본래 엘프는 현재에 안주하여 발전을 경시하는 편인데 이번 엘프 여왕은 좀
다르더라."
"어떤 게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내가 좋을 말을 꺼내려고 하자 아르웬은 시무룩한 표정을 언제 지었냐는 듯, 은회색 눈동자를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나를 바라봤다.

본인의 감정을 숨길 생각이 하나도 없는 이 순수한 아이가 정녕 100 살이 넘는 것일까. 인간은 나이를
먹는다는 걸 인지하면 성격이 점점 변하는 법인데 엘프는 그 과정이 느린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기대감에 차 있는 아르웬의 얼굴을 지그시 마주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의견을 입 밖으로 꺼냈다.

"발전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그러기 위해서 다른 나라와 연을 맺는거지. 당장 아카데미에서 근무하는


교수들 중 몇몇은 엘프야. 내가 알기로 엘프는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매우 고단한 과정을 거쳐야한다고
들었거든.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모셔가야할 인재인데 선듯 보내줬잖아."
"흠. 흠. 그리고?"

아르웬은 더 말하라는 듯이 헛기침을 하며 나를 종용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알고 지식으로서는


여기가 한계다.

"더 말하고 싶지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서는 여기까지밖에 말 못 해.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큰 위업인


건 확실하지."

엘프는 본인들이 다른 종족보다 우월하다 믿으며 밖으로 잘 나가려 하지 않았다. 가끔씩 몇몇 별종들이
밖으로 나가 세상을 경험하지만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많은 엘프 학자들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는 중이고, 그걸
토대로 알븐하임을 차근차근 발전시키는 중이다.

다만 장수종의 특징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느긋함' 때문에 그 속도가 더딘 편이다. 그래도 과거에


비해서는 놀라운 성과라 볼 수 있다.

"그대는 이번 엘프 여왕을 호의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냐?"


"사람으로서는 모르겠는데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는 좋게 보고 있지. 그 분이 펼친 정책에 수많은 반발이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사회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야. 멀리 가지 않아도 인간의 역사를 보면 이해할 수
있어. 위인으로 기록된 사람들이 펼친 정책을 보면 그 당시 말도 안 되는 거였거든."

'선견지명(先見之明)'이라고, 당시에는 이해는커녕 거센 반발이 일어났던 정책이 후에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다. 전생에서도 자주 봤던 현상이고.

그러나 사람은 결코 완벽할 수 없는 법. 선견지명에 가까운 정책을 펼쳤다고한들 부작용은 있는 법이다.


반발하는 사람들 또한 그 부작용을 우려하여 목소리를 높혔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 현명한 왕이라면 그 반발의 원인을 알고, 그 반발이 단지 자신을 정치적으로 끌어내리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나라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인지 파악해야 돼. 만약 후자라면 훗날 부작용이 없도록 신중하게
고려해야겠지. 전자라면 뭐... 난 정치를 몰라서 모르겠네. 두 개 다 섞인 경우도 많아서."
"... ..."

내 설명이 끝나도 아르웬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말똥말똥하게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에 나를 향한 흥미로움이 담겨있었다.
"...대단하구나. 약관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니."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거야."
"그건 지식이지 그대와 같은 시선은 아니다. 지식을 갖고 있는 것과 응용하는 건 천지차이니라."
"그래? 난 잘 모르겠네."

나는 아르웬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생의 영향으로 남들에 비해서 남들과 다른 시선을 갖고 있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나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들이 이 세상에서는 파격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니.

전생에서는 평범했던 내 문체가 이곳에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찬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너는 왜 서점에 들린 거야? 무슨 책을 사려고?"


"딱히 사고 싶은 책은 없다. 성지에는 이 세상 모든 책들이 보관돼 있다 해도 무방하니까. 단지 전시회가
개최되는 곳의 서점은 어떤지 궁금해서 방문한 것이니라."
"그래서 어때? 솔직히 제논 일대기의 명성에 비해서는 뛰어나지는 않지?"
"냉철히 평가를 내리자면 그렇다. 물론 성지로 인해 내 눈이 높아진 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책을
보관한다는 건 곧 지식을 보관한다는 거나 마찬가지. 규모는 작을지언정 그 의의는 결코 평가절하할 수
없노라."

아르웬은 우아한 목소리로 사근사근 본인의 생각을 꺼냈다. 종족 특유의 자부심과 그녀만의 신념이
깃들어있는, 아주 개성적인 대답이었다.

나는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둘러보는 그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럼 제논 일대기는?"
"응?"
"엘프인 네가 생각하기에 제논 일대기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이런 질문을 할지 몰랐던 걸까. 아르웬은 내가 제논 일대기에 대해 묻자 무언가 찔렸는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그녀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옆을 힐긋거렸다. 잠깐 시선을 피한 건가 싶어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아무도 없이 텅 비어있는 허공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내 시선을 피한 게 맞다.

이윽고 아르웬과 다시 한 번 얼굴을 마주쳤을 때 쯤,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있다."
"뭐?"
"정말 재미있다고 말했느니라."

그녀의 입에서 긍정적이 대답이 흘러나왔다. 다만 얼굴이 살짝 붉어진 걸 보면 약간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그래도 원작자의 입장에서 뿌뜻하기 그지 없는 일. 나는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아르웬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다.

아르웬은 나와 눈높이가 맞자 당황했지만, 나는 그녀의 은회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어떤 부분이 재미있었어? 엘프에게는 그닥 재미없을 것 같은데?"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비록 주인공이 인간이지만 또다른 세계가 창조된 거나 마찬가지이거늘. 그리고
카이르와 엘리샤의 애절한 이야기에 우리 엘프도 감동을 받았노라."
흥분까지 하며 열렬히 제논 일대기를 신봉하던 아르웬이 카이르와 엘리샤를 언급했다. 역시 사랑 이야기는
남녀를 불문하고, 그리고 종족을 불문하고 모두에게 통하는 모양이다.

나는 아무리 봐도 어린애 같은 그녀의 모습에 작게 웃어주었다가 넌지시 질문했다.

"그럼 너는 두 사람이 이어졌으면 좋겠어?"


"질문 같은 질문을 하여라. 당연히 이어져야 하지. 그래야만 우리와 인간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돈독해지지 않겠느냐?"
"흠... 그래?"

안타깝지만 얘야.

"그랬으면 좋겠네."

카이르는 죽어.

< 97 화 >

이후로 나는 다양한 서적을 구입한 후에 서점 밖으로 나왔다. 새로 출간된 책이 많아서 고르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으나 아르웬이 곁에서 설명을 해준 덕분에 약간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

대신 줄거리는 말하지 않고 이 책이 깊이가 있는지, 그리고 나처럼 지식이 많은 사람에게 적합한지에


대해서만 알려줬으며 본인의 주관적 평가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같이 역사와 관련된 서적이로구나. 역사를 좋아하는 것이냐?"

서점 밖으로 나오고나서 길을 걷던 도중에 아르웬이 나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내가 역사책만 고르자


의문을 품은 모양이다.

그에 나는 오른손에 쥔 봉투를 들어올리며 그녀에게 답했다. 봉투에는 내가 구매한 책들이 담겨있다.

"재밌잖아. 옛날에 이런 사건들이 존재했다는 신기하거든."


"하긴, 그대의 말처럼 과거라는 건 흥미를 유발하지. 나 또한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니.
그리고 그 과거가 현재와 미래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부분도 큰 관심을 이끌지."
"아르웬은 역사를 좋아해? 엘프의 역사가 아니라 다른 종족의 역사를 포함해서."

엘프는 약간 과할 정도로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들에게 국한된 이야기다. 종족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엘프는 다른 종족에게 관심이 거의 전무했다.

다만 예외가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마족이다. 천사의 후예인 엘프는 악마의 후예인 마족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으며 암암리에 충돌이 있었다고 책에 기록돼 있다.

하지만 둘의 힘이 비슷하다보니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둘 중 한 종족은


최소한 멸족당할테니 엘프로서는 방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물론이다. 특히 그대와 같은 인간에게 깊은 호기심을 갖고 있노라. 인간은 실로 짧은 수명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냈지. 심지어 마법은 종족 전쟁 당시에 선택받은 자만이 쓸 수 있는 것이었으나
지금은 상류층에 한해서 널리 퍼져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난다면 마법은 평민들조차 쉽게 사용하는
힘이 될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네."
"음..."

아르웬은 무뚝뚝한 내 대답을 듣더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뒤이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앞으로 돌리면서 본인의 생각을 꺼냈다.
"그대의 말마따나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허나 인간은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갖춘데다가 우리 엘프조차
함부로 예측할 수 없는 종족.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마법이 대중들에게 퍼질 수도 있다. 당장 제논
일대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마족의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대도 알고 있잖느냐."
"하긴, 이 세상은 예측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니까."

나는 아르웬의 설명을 듣고 피식 웃었다. 제논 일대기를 직접 집필한 나조차도 이리 될 줄 몰랐는데


세상은 오죽할까.

마법은 상류층에게나 허용된 특권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자연스레 고착화된 현상이다.

어릴 때부터 고등 교육을 받는 귀족과 달리 평민은 자력으로 힘을 터득할 수밖에 없으며, 마법에 접근하는
것조차 차이가 난다.

가끔씩 평민에게 마법사의 소질이 나타나지만 그건 정말로 희박한 확률이다. 또한 범상치 않은 재능을
보유한 것이기에 나라에서 집중적으로 케어한다.

다시 말해 마법은 접근성만 어떻게 해결한다면 평민들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이라는 뜻이다.

엘프나 마족이 마법에 조예가 있는 건 태생적인 부분이 가장 크겠지만 접근성 이 하나가 압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엘프는 인간을 한 수 아래로 본다는 게 맞아? 너도 그렇고 이때까지 만난 엘프는 그런 경향이
없는 것 같은데?"

마법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다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아르웬에게 질문했다.

신디도 그렇고, 엘레나도 그렇고 내가 만난 엘프가 독특한 건지 몰라도 결코 인간을 자기 아래로 두지


않았다.

오히려 엘레나는 나를 추천 학생으로 등록할만큼 고평가하는 중이며 그건 신디도 마찬가지다.

"그건 편견에 불과하노라. 인간마다 엘프를 다르게 보는 것처럼 우리도 인간을 다양한 시선으로 보고 있지.
다만 종족 전쟁을 겪은 엘프들 대부분은 여전히 인간을 경시하는 중이다."
"어째서? 그정도 굴욕을 겪었다면 생각이 달라질 법한데."
"이유는 간단하다. 종족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이유가 본인들이 잘못했기 때문이지 결코 인간이 뛰어난
거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 실로 우스운 일이로다."
"... ..."

엘프다운 발상에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다. 엘프는 유독 세대 간의 갈등이 심각하다고 얼핏


들었는데 그 이유를 대충 알 것 같다.

그래도 젊은 축에 속하는 엘프가 인간을 좋게 보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러니까 삽질로 우물을 파다 못해 호수를 만들었지...'

어딜가나 꼰대가 문제다. 아르웬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린 걸 보면 그들을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

나는 불쾌해하는 아르웬을 달래줄 겸 심심한 입을 해결하기 위해 길거리를 두리번거렸다. 축제 답게


다양한 노점이 배치되어있거 먹거리 또한 존재했다.

영주의 아들로서 우연히 만난 인연에게 음식도 못 사주면 체면이 서질 않는다.


"아르웬. 혹시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내가 사줄게."
"그, 그럴 필요는 없다. 오기 전에 이미 식사를 해결하고 왔으니."
"식사를 하는 거랑 심심한 입을 달래는 건 달라. 너는 사탕으로 배를 채우지는 않잖아?"
"정말 괜찮은데..."

나에게 실례를 끼치는 게 불편한지 아르웬이 나를 힐긋거리며 작게 답했다. 가끔씩 내가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을 두긴 했으나 그리 신경 쓸 건 아니았다.

"이렇게 만나는 것도 인연인데 먹거리 정도는 사줘야지. 그리고 영주의 아들로서 이정도는 기본이야."
"큼. 큼. 그렇다면야 거절하지는 않겠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는데..."
"무슨 조건?"
"그것이..."

자꾸만 내가 아닌 그 옆을 향해 힐끔거리는 아르웬. 나는 그녀의 은회색 눈동자가 향한 곳을 바라봤다.

하지만 텅 비어있는 허공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에 살짝 의문을 품었을
쯤이었다.

"...두 개를 사다오."
"뭐?"
"살 거면 두 개씩 사줬으면 하는구나. 하나는 바로 먹고 다른 하나는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고 싶으니."
"두 개 다 바로 먹지는 않고?"
"나, 나중에 생각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니라."

실로 독특한 발상에 내가 묻자 아르웬은 당황하면서 대답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지만 그걸 고려해도


희한했다.

나는 우물쭈물거리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르웬이 약간이나마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일행이라도 있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굳이 2 개를 살 필요가 없다. 보아하니 일행과 나중에 만나려는 게 아닐까 싶다.

뒤이어 나는 근처의 노점에서 딸기 사탕 3 개를 샀다. 원래의 이름은 탕후루라고, 과일을 꼬치에 꿰어


설탕과 물엿, 시럽 등으로 바른 뒤 바짝 얼리는 음식이다.

메우 달달한 맛이 일품이며 과일 본연의 맛도 섞여있다. 거기다 의외로 역사가 길며 축제하면 떠오르는


먹거리 중 하나다.

"여기 있습니다, 손님. 맛있게 드십시오."


"감사합니다."
"맛있어 보이는구나."

내가 딸기 사탕을 3 개를 받자 아르웬이 어린아이처럼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나는 노점상에게 돈을


지불하고는 딸기 사탕 2 개를 아르웬에게 전달했다.

아르웬은 한 손에 하나 씩 딸기 사탕을 쥐며 먹음직스럽다는 눈빛으로 번갈아봤다. 이런 걸 보면 영락없는


어린애 같았다.

"과일 사탕을 처음 먹어보는 건 아니지?"


"그, 그렇지 않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이니라."
"그럼 구경만 하지 말고 어서 먹어. 아, 그리고 너무 꽉 깨물지는 말고. 그러다 이 상하니까."
"...그대는 자꾸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는구나.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그대보다 10 배 가까이 살았다."
어린애 취급당하는 게 싫은지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투덜거리는 아르웬. 이러니까 더 어린애
취급받는 거지.

마음 같아서는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으나 간신히 인내했다. 단지 귀엽다는 듯이 웃어줄 뿐.

아르웬도 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포기했는지 흥-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왼손에 쥐었던 딸기 사탕 하나를 허공에 던지는 것이 아닌가.

내가 그 행동을 보며 화들짝 놀랐을 때 쯤, 내 눈을 의심케 할 만한 현상이 펼쳐졌다.

팟!

아르웬이 허공으로 던졌던 딸기 사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원래부터 없었다는 듯, 그 어떤


징조조차 없었다.

그 현상에 내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자 아르웬은 별 일 아니라는 투로 설명해줬다.

"보관 마법이니라. 공간이동을 통해 내가 직접 만든 공간에 넣은 것이지."


"보관 마법?"
"인간들은 이걸 아공간(亞空間)이라 칭하더구나."

아르웬은 판타지 마법하면 항상 등장하는 보관 마법의 결정체, 아공간을 언급했다.

그리 어렵지 않다는 투로 이야기한 아르웬이지만 그녀가 엘프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인간에게는 고난이도
마법 중 하나다.

아공간이 엘프에게 미리 준비된 도구로 바느질을 하여 주머니를 만드는 형식이라면 인간은 아예 0 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 그만큼 아공간은 효용성이 크지만 매우 어렵다.

나는 실제로 마법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호기심을 담아 그녀를 쳐다봤다. 역시 어려보여도 엘프는


엘프인 모양이다.

"그럼 다시 꺼낼 수 있어?"
"으, 응?"
"보관했으니까 다시 꺼낼 수 있잖아."
"그, 그것이..."

아르웬이 내 질문을 듣고 크게 당황했다. 아니, 당황을 넘어 당혹스러워하는 중이다.

그에 내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우물쭈물거리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답했다.

"자, 잠깐 시간이 필요하니라!"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래. 엘프가 마법에 조예가 있다고 한들 마구잡이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공간 마법은 특히
그렇지."

쿨타임 같은 건가. 마법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그냥 그렇구나하며 넘어갔다.

거기다 사정이 있는 듯하니 모르는 척 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알았어. 그래도 신기하네. 마법을 두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거든."


"그대가 원한다면 간단한 마법은 보여줄 수 있다."
"예를 들면?"
슈욱-

아르웬은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녀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더니 위에 새파란 물방울이


방울방울 떠올랐다.

나는 그녀의 희고 고운 손에서 물방울이 둥실둥실 떠오르자 감탄을 자아냈다. 마법은 들은 적만 있지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더욱 신기했다.

아르웬도 내가 입을 헤- 벌리며 집중하자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검지 손가락을 유려하게 움직였다.


물방울도 그녀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부드럽게 이동했다.

"아까부터 나를 어린애 취급하더니, 지금은 그대가 더 어린 아이 같구나."

물방울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그녀의 실력에 매료되었을 쯤, 아르웬이 물방울을 터뜨리며 놀리듯이
말했다. 여태까지 어린애 취급을 당했던 것에 대한 복수인 듯싶다.

그러나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생의 어린 시절에 커다란 비눗방울을 처음 본


기분이 이랬을까.

마법이란 건 남자에게 동심을 품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비록 재주 수준에 불과하겠지만 마법은 마법이다.

"이거 말고도 더 보여줄 수 있어?"


"물론이니라. 그러면..."
"아이작?"

아르웬이 다음 마법을 준비하던 와중에 고혹스러운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나에게는 매우 익숙한


목소리다.

이에 고개를 뒤로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개인적인 대화를 막 끝냈는지 세실리가 서 있었다. 마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 세실리 누나 왔어요? 마리는?"


"마리는 곧 있으면 올 거야. 그런데..."

처음에 나와 시선을 마주쳤던 세실리는 내 옆에 있던 아르웬을 바라봤다. 잠깐이지만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뒤이어 세실리는 방긋 미소를 짓더니 상냥함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 분들은 누구야?"


"... ..."

그 질문과 동시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오한이 내 몸을 잠식했다.

< 98 화 >

세실리가 싱긋 웃으며 묻자 오른팔에서부터 오소소 돋아난 오한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체내에 흐르는
피가 싸늘하게 식으며 몸이 꽁꽁 얼어붙는 느낌이다.

하마터면 입도 벙긋 못할 정도로 몸이 굳었지만, 그 기분을 억지로 털어내고 오한의 출처로 의심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르웬이 있는 쪽이었다.

그러나 아르웬은 세실리와 만나자마자 크게 당황스러워하고 있다.


표정도 그렇고 그녀의 반응만 본다면 이 오한의 범인은 결코 아르웬이 아니었다. 싱긋 웃는 세실리는 더욱
아니고.

'뭐지? 대체 누가...'

그렇다면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이 기분이 모두 착각이라는 것일까. 나는 오돌토돌 솟아난 닭살에 두


팔로 몸을 감쌌다가 문득 의아한 점이 생각났다.

세실리는 아르웬에게 이 분이 아니라 '이 분들'이라 칭했다. 하지만 내 곁에는 아르웬 한 명밖에 없다.

세실리의 곁을 지키는 호위 기사, 가르츠처럼 몸을 숨기며 따라다니는 경호원이라도 있는 것일까.


세실리는 다음 대 차기 마왕으로 예정돼 있는만큼 내가 못 보는 것들을 볼 수 있을 터.

나는 아르웬과 세실리를 번갈아보다가 방긋 웃는 세실리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모르는 척 할 생각이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누나? 아르웬은 혼자인데."


"흐응. 그래?"

내가 모르는 척 하자 세실리가 야릇한 비음을 흘리며 샐쭉 웃었다. 그러면서 아르웬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팔짱을 끼며 흥미롭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안 그래도 드레스 때문에 가슴이 부각되었는데 팔짱까지 끼니 더욱 도드라졌다. 나는 자꾸만 아래로 가는


시선을 힘겹게 올렸다.

그사이 세실리는 아르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생긋 웃어줬다. 치명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미안. 내가 잠깐 잘못 본 모양이네. 내가 한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알겠어요."
"그럼 이 분은 누구니? 맑은 기운을 보니 엘프인 것 같은데."

다시 돌고 돌아 세실리는 아르웬이 누구인지에 나에게 질문했다. 그에 아르웬을 슬쩍 쳐다봤다.

로브를 깊게 눌러써서 표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살짝 드러난 입은 꾹 다물려 있다.

아르웬은 오늘 처음 만났을 뿐더러 세실리는 그녀가 엘프임을 이미 눈치채고 있다. 나로서는 딱히 대답할
거리가 없었다.

"그냥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에요. 내가 책을 고르고 있을 때 옆에서 도와줬거든요."


"그것 뿐이야?"
"전시회도 구경할 겸 맛있는 것도 사줬어요. 여기 딸기 사탕 보이죠?"

내가 딸기 사탕을 언급하자 세실리는 아르웬의 손 쪽을 바라봤다. 아르웬의 손에는 딱 한 입 먹었던 딸기


사탕이 쥐어져 있다.

이어서 세실리는 약간 섭섭하다는 목소리로 나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안 사주고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는 사준 거니?"


"...죄송해요. 지금이라도 사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세실리는 그리 답하고는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가 다가오면 올 수록 내 오른편에서 싸늘한


기운이 점점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에 고개를 돌려 아르웬을 확인해도 그녀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지 아니면 착각에


불과한지 도통 모르겠다.

저벅-

마침내 세실리가 아르웬의 우리의 앞에 당당히 도달했다. 정확히는 아르웬의 앞에.

아르웬의 키는 나보다 작고, 세실리는 길쭉한 기럭지를 자랑하여 니콜처럼 키가 큰 편이다. 그런 신장


차이로 인해 세실리가 내려다보고 아르웬이 올려다보는 구도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기묘한 대치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세실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르웬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실리라고 합니다."

굳이 자기가 헬리움의 공주임을 드러낼 필요를 느끼지 못 했는지 간단하게 이름만 밝힌 세실리다.

그래도 은연 중에 흘러나오는 기품과 카리스마로 하여금 그녀의 신분이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웬은 세실리의 아름다운 외모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르웬이라 불러다오."

목소리는 작았다지만 전혀 위축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경계가 묻어나온다고 해야 할까.

존댓말을 한 세실리와 달리 아르웬은 하대하여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엘프와 마족의 관계를


고려하자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

과거를 기준으로 엘프는 인간을 하등종족으로 보았다면 마족은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보았으니까.

천사의 후예인 엘프와 악마의 후예인 마족. 이것만 봐도 사이가 어떤지 각이 나온다.

서로가 품고 있는 기운이 상극에 상극이다보니 가까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불쾌함을 느낀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다.

다행히 제논 일대기가 등장하고나서 엘프도 여느 종족처럼 마족을 향한 시선이 누그러졌지만, 태생적인


불편함은 감추기가 어려울 것이다.

"아르웬이라... 평범하지만 좋은 이름이네요. 악마 전쟁 시절 활약한 엘프 영웅의 이름이죠?"


"알고 있구나. 그리고 그대의 이름도 좋은 편이니라. 성스럽다는 뜻을 갖고 있으니."
"칭찬 고마워요."

일단 첫 인상은 서로 괜찮은 듯했다. 세실리도 아르웬이 하대하는 걸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하고.

하지만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 비록 마족을 가장 많이 핍박한 종족이 인간이지만, 엘프는 태생적으로


상극이라 무슨 말이 오고 갈지 모른다.

"여기에 계속 있지 말고 작품이라도 구경할까요?"

내가 긴장의 끈을 유지하고 있을 때 세실리가 온화한 목소리로 아르웬에게 제안했다. 하기야 여기에 계속


서 있는 것도 이상하다.
아르웬도 그 점에는 동의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딸기 사탕이 쥐어져
있다.

아무래도 저건 먹기 힘들 것 같...

"얌."
"... ..."

...지 않고 딸기 사탕 하나를 베어물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세실리에게 고정돼 있는 것이 참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세실리도 아르웬이 뜬금없이 딸기 사탕을 베어물자 눈을 동그랗게 뜬 것도 잠시, 이윽고 아가씨처럼


품위있게 웃음을 흘렸다.

약간 무례한 행동이긴 했지만 아르웬의 귀여운 외모가 그 부분을 가려주어 특유의 귀여움을 증폭시켰다.

"미안하구나. 달콤한 냄새가 나를 자극한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딸기 사탕을 우물거리던 아르웬은 입 안에 든 음식물을 꿀꺽- 삼키면서 대답했다.

뒤이어 나를 한 번 힐긋거리더니 세실리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안타깝지만 내가 끼어들면 안 될 것 같구나. 난 여기까지 있도록 하마."


"전 정말로 괜찮아요. 아이작 너도 그렇지?"

나는 세실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때까지 본 아르웬의 성격은 절대 나쁘지 않았으며 반대로
생각이 깨어있다.

그러니 세실리가 마족이어도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너희는 괜찮을지 몰라도 내가 불편할 것 같다. 둘이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불청객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법이지."
"... ..."
"하지만 그대가 나에게 보여준 호의는 잊지 않도록 하마. 정말 고맙구나."

아르웬은 가슴 중앙에 오른손을 올리며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우아하면서 자애로움이 묻어나오는
인사였다.

나는 그녀의 인사를 받고 아쉬워하는 것도 잠시, 나 또한 예법에 따라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미 그녀가


귀족인 건 대충 눈치채고 있었으니 이정도는 해줘야 예의일 것 같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마. 아참. 딸기 사탕이 정말 맛있으니 그대도 어서 먹어보거라. 얌."

아르웬은 나에게 농담을 하면서 딸기 사탕을 한 입 더 베어물었다. 나는 못 말린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어린 아이 취급하지 말라더니 하는 행동은 끝까지 한결 같았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딸기 사탕 하나 더 사줄까?"


"끝까지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구나.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느니라. 그때는 내가 그대에게 호의를
보여야겠지. 언제일지 나조차도 모르겠지만 조만간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대처럼 역사에
열정이 있는 자는 흔치 않으니 어쩌면 성지에서도 볼 수 있겠지."
"성지라..."

그러고 보니 엘레나 교수가 언급한 적이 있다. 추천 학생으로 역사학에 입문한다면 자신이 알븐하임의
성지로 데려갈 것이라고.

어쩌면 그때 다시 한 번 아르웬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2~3 년 내로 알븐하임에 방문할 수도 있어. 그때 인연이 닿는다면 만날 수 있겠지."


"그거 좋은 소식이로구나.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훗날 성지에 그대가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찾아가도록 하마. 그럼."

아르웬은 그 말만 남기며 뒤로 한 발짝 두 발짝 물러섰다가 등을 돌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이윽고 머지 않아 아르웬은 인파들 사이로


섞여들어 완전히 사라졌다.

나와 같은 독서광에다가 생각이 깨어있는 엘프여서 대화가 잘 통했는데 이대로 헤어지니 좀 많이 아쉬웠다.

"아쉬워?"

아르웬이 사라진 방향에 시선을 두고 있을 때 옆에서 세실리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듣고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세실리는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 아름다운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용히 답했다.

"...조금은요?"
"저 분이 마음에 들었나보네."
"취미도 비슷하고 엘프치고는 생각이 열려있었거든요. 그리고 마법도 보여줬..."

잠깐만. 나는 문득 생각난 점이 있어 세실리를 다시 한 번 쳐다봤다.

그에 세실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 누나도 마법 보여줄 수 있어요?"


"마법?"
"네. 아까 아르웬은 물방울을 만들더니 요리조리 움직였거든요. 누나도 할 수 있죠?"

세실리는 마족, 그것도 다음 대 마왕으로 예정되어있다. 그러니 마법에 관해서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을 터.

내가 눈을 반짝거리며 기대감을 품자 세실리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는 눈매까지 접으면서


웃더니 살살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아이작 님은 무슨 마법을 원하시려나?"


"일단 주변에 피해가 없고 잔재주 수준인 거?"
"잔재주 수준이라..."

스윽-

세실리는 말을 흐리더니 내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잘 관리하여 보들보들함이 아닌, 고된 훈련으로


딱딱해질대로 딱딱해진 굳은살이 느껴졌다.

그에 내가 의문을 품으며 세실리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
"대체 뭐를... 으헉!"
슈욱!

나는 몸의 균형이 위로 향해 급격히 쏠리자 새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이, 이게 뭐...! 빨리 내려주세요!!"


"왜? 나한테는 잔재주 수준인데?"
"저는 심장이 멎을 것 같으니까 빨리!!"

세실리가 마법으로 나를 하늘 위로 날려보냈으니까. 그녀도 마법을 통해 하늘을 유영하는 중이었다.

내가 푸른 하늘에서 팔다리를 파닥거리는 모습이 웃겼는지 세실리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아이작.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 아니?"


"알고 자시고 이렇게 빌게요!"
"싫은데? 귀여우니까 잠깐 이렇게 있자."
"누나!!"

결국 30 분 동안 하늘을 날아다녔다.

*****

아이작과 헤어진 아르웬은 그 이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작품을 관람했다. 그녀의 손에는 아이작이 대신
사줬던 딸기 사탕이 쥐어져 있었다.

이미 2 개를 먹어서 남은 건 3 개밖에 없었으나 아르웬에게는 충분했다. 그녀는 달달한과 상큼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사탕을 입 안에 넣으며 우물거렸다.

시럽 특유의 단맛과 딸기의 상큼함이 입 안에 퍼져 아르웬에게 행복이라는 감정을 선사했다.

"여왕님. 정말로 그대로 두실 건가요?"

아르웬이 딸기 사탕을 우물거리고 있을 때 그녀의 옆에서 누군가 불만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현재 은신 상태에 있어 그 누구도 볼 수 없었지만, 이번에 아르웬을 따라온 다크 엘프, 레인이다.

조금 전 세실리가 자신의 존재를 간파하자마자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어 아이작을 춥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우리가 나서서 할 수 있는 것이 있겠니? 우리는 관람을 하러 온 것이지, 싸우러 온 게 아니란다."


"하지만... 여왕님도 아시잖아요. 현재 그 마족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엄청 위험하다는 걸."
"... ..."

아르웬은 레인의 설명을 듣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으로 세실리를 떠올리고 있을 뿐.

레인의 말마따나 현재 세실리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지극히 위험했다. 원래 마족은 평상시에 인간과 별
반 다를 바 없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장 큰 예로 악마로 변하기 직전일 때다. 끔찍한 사건을 겪어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


한다면 마족에게 검은 마나의 농도가 짙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건 종족을 불문하고 느껴지는 것이고, 마족과 상극인 엘프는 보다 더 세밀하게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세실리에게서 풍기는 검은 마나의 농도는 악마보다는 아니지만 약간 위험한 수준이다. 경계할
필요는 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단다. 아마 악주기가 찾아온 것이겠지. 그래도 인내심은 강한 것 같으니 우리가


신경 쓸 건 아니란다."
"여왕님이 그렇다면야... 그러면 그 빨간 머리는요?"
"아이작은..."

아르웬은 아이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처럼 책을 좋아하고 호의를 보여줬던 인간 아이.

이 세상에 극히 드문 빨간 머리와 황금색 눈동자로 하여금 그 얼굴을 아른거리게 만들었다. 모처럼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없었던 그녀에게는 신선한 경험을 선사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마족의 공주와 인연을 가졌다라...'

세실리가 헬리움의 공주라는 건 아르웬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세실리도 자기가 누구인지 얼추 짐작한
것 같고.

아이작 때문에 그렇지, 괜히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어서 성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아르웬은 두 남녀의 관계가 어떻게 돼 있는지 고민하다가 레인을 힐끔거렸다. 레인은 여전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다.

"...아이작은 그저 평범한 인간인 것 같더구나. 나도 느꼈잖니? 마나를 다룰 수 있지만 그뿐이지,


평범하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 마족과 어울리는 걸 보면 절대 평범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굳이 우리가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단다. 지금은 전시회가 중요하니까. 그리고 너에게도 딸기 사탕을
사준 인간이잖니."
"...알겠어요."

레인은 아르웬의 타박을 듣자마자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그 모습에 아르웬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별 일 없어야 할텐데... 보험을 들어놓아서 다행이지.'

기묘한 만남은 여기서 끝났다.

< 99 화 >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멀미가 나버려서 토했다. 그것도 위장에 있던 모든 음식물이 바깥으로 나올


때까지.

갑작스레 중력이 사라진데다가 세실리가 장난이랍시고 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손가락을 요리조리 움직이니 놀이기구를 탄 것마냥 내 신형이 상하좌우 가리지 않고 요동쳤다.

세실리는 마법을 사용하여 익숙하다지만 나에게는 첫 경험이었기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우욱..."
"미안해. 그... 괜찮아?"

내가 새파래진 안색으로 헛구역질을 하자 세실리가 옆에서 걱정해줬다. 눈이 돌아갈만한 미녀가 나를


걱정해주어서 그나마 기분은 좋았지만 상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머리는 머리대로 어지러웠고 속은 속대로 뒤집어졌다. 저택에서 잠깐 쉰다면 나아지겠지만 하이라이트
전까지 전시회 구경은 포기해야 한다.

"...저택에서 쉬어야 할 것 같아요."


"거듭 사과할게. 마음 같아서는 회복 마법을 걸어주고 싶은데 내가 마족이라..."
"마족은 회복 마법을 못 써요?"
"사용할 수는 있는데 마족에 한해서야. 너도 알다시피 검은 마나는 악마들의 능력이거든. 마족이 아닌
다른 종족에게 사용했다간 엄청난 부작용이 따를 걸?"

그녀의 설명처럼 검은 마나는 악마의 전유물이다. 성직자들이 쓰는 신성력과 완벽히 대치되는 기운.

신성력이 마족을 제외한 모든 종족에게 이로운 효과를 준다면, 검은 마나는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악영향을
끼친다.

회복 마법도 별 반 다른 게 없었지만 방금 전 부유 마법은 어떻게 된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럼 아까 그 마법은..."
"레비테이션(Levitation)은 회복 마법처럼 체내에 마나를 흘려보내는 방식이 아니라서 그래."

역시 마법은 신비롭고 매력적인 능력이다. 마법에 대해 무지하다보니 제논 일대기에도 상세히 설명을 못


했는데 조만간 가능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실리처럼 마법에 조예가 깊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세실리는
마족이다보니 공식보다는 이런 이런 느낌이다~ 라는 식으로 설명해줄 것이다.

'일단 지금은 저택으로 돌아가자...'

물로 입 안을 헹궜다지만 여전히 찝찝하다. 특히 토했을 때 느껴지는 치아의 뽀득거림(?)이 매우


불쾌했다.

나는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시다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고개를 드니 걱정을 듬뿍 담은 채 나를


바라보는 세실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딴에는 재미있는 장난을 쳤다가 이렇게 됐으니 죄책감을 느낄 터. 나는 괜찮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억지 웃음을 지었다.

"...전 저택으로 먼저 돌아갈게요. 누나는요?"


"같이 가자. 적어도 책임은 져야..."
"누가 책임을 진다고?"

세실리가 말하는 도중에 앙칼진 미녀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에 우리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없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사랑스러운 나의 여자친구, 마리가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녀는 우리 둘을 번갈아보다가 파리하게 변한 내 안색을 확인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치켜올라간 눈매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걱정스러움이 담겼다.

"너 안색이 왜 그래? 어디 아파?"

마리는 세실리는 무시하듯이 지나치며 서둘러 나를 부축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부축을 받으며 슬쩍


세실리의 표정을 확인했다.

겉으로는 무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이탓에 생각을 읽기가 더 힘들었다.


그러나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곧바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리에게 사과했다.

"미안. 내가 장난을 쳤는데 종족 간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거든."


"무슨 장난을 쳤길래?"

세실리는 마리의 물음에 상세히 설명해줬다. 다만 아르웬과 만난 건 이야기하지 않았다.

"...토할만도 하네."

모든 전후사정을 듣고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중얼거린 마리. 그리고는 부드러운 손으로 내 뺨을


어루만졌다.

상냥하고 따뜻한 그녀의 손길 덕분인지 상태가 호전된 것 같았으나 어지러움은 미약하게 남아있었다.

이후로 마리는 한동안 나를 걱정하는 척 내 뺨을 만지작거렸다가 세실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책임을 진다는 게 그 말이었니? 아이작이랑 같이 저택으로 돌아가는 거?"


"응."
"그럼 같이 돌아가자. 어차피 볼 건 대충 다 봤으니 괜찮겠지. 게다가 하이라이트는 저녁부터
시작되니까."

마리의 말마따나 본래 축제의 진정한 시작은 해가 떨어지고 나서다. 지금도 시끌시끌하지만 저녁이 된다면
이 분위기는 한층 더 달아오르겠지.

전시된 작품도 저녁에 관람해도 상관없다. 하이라이트가 따로 있을 뿐 전시된 작품은 그대로 남아있어
소외되지 않는다.

"알았어. 겸사겸사 저녁 식사도 해결하면 되겠지. 일어설 수 있어?"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

살짝 어지럽긴 해도 저택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면 회복될 것이다. 그동안 이번에 새로 구매한 책을
읽어도 된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가까스로 참으며 발걸음을 떼었다. 혹여 내가 넘어질까봐 마리가 곁에서 부축해줬다.

그런데 얘가 모르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몰라도 내 팔을 가슴 쪽으로 잡아당긴다. 덕분에
찹쌀떡 같이 말랑말랑한 감촉이 생생히 전달되었다.

그래서 부끄럽냐고?

설마 그럴리가. 오히려 그 반대지.

이런 짓을 하도 당하다보니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즐길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세실리가 했다면 양심이 찔렸기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겠지만, 마리는 내 여자친구다. 이정도는


무던하게 넘어갈 수 있다.

그래도 예의상 말은 해야겠지. 나는 거의 가슴골 사이로 파묻히기 직전인 내 팔을 느끼면서 마리를 조용히
불렀다.

"마리?"
"응?"
"좀 많이 느껴지는데."
"남자들은 이런 거 좋아한다며?"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정말 슬프면서도 기쁘군. 내가 아이러니한 감정을 겪고 있을 때 마리가 특유의


방실거리는 미소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넌 변태라서 이런 거 더 좋아하잖아. 안 그래?"


"내가 왜 변태야?"
"입술이 실룩거리는데?"
"...아무튼 세실리 누나가 옆에 있는데 그런 이야기는 가급적이면 하지 마."
"그럼 나한테 딱 붙어 있어. 이렇게!"

마리는 내 팔을 붙잡은 채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자연히 내 신형이 마리 쪽으로 쏠려 찰싹 붙게 되었다.

실로 과감한 그녀의 행동에 놀란 것도 잠깐, 나는 세실리의 눈치를 보았다. 혹여 그녀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살짝 걱정했지만...

"흐응."

내 예상과 달리 세실리는 색기가 가득한 비음을 흘리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눈매 또한 장난기가 들어간 게
여러모로 불안감을 자극시켰다.

마리도 나와 비슷했는지 절대 주지 않겠다는 듯이 내 팔을 더 강하게 감싸안았다. 덕분에 내 팔은 마리의


가슴 사이에 완전히 파묻혔다.

이윽고 세실리는 우리 둘을 서로 번갈아보더니 손을 부드럽게 뻗어 그나마 자유로웠던 내 팔을 슬쩍


잡았다. 그리고 약간 달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 거야?"

뭉클-

마리가 했던 것처럼, 세실리도 내 팔을 본인의 가슴 사이에 파묻었다. 내 양팔이 아름다운 두 미녀의


가슴 사이에서 살려달라고(행복하다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나는 비슷하면서 서로 다른 감촉이 온전하게 느껴지자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신에게 기도했다. 부디


나에게 남자의 본능이 튀어나오는 걸 막아달라고.

하지만 실룩거리는 입꼬리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결국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야! 너 그 손 놓지 못 해?!"
"왜에? 나도 너처럼 장난치는 건데?"
"이건 연인끼리나 할 수 있는거야. 지난 번 행사에서도 인내심 테스트라면서 그러더니!"
"그때는 그런 거고 지금은 그냥 장난친 건데? 네가 자꾸 옆에서 그러니까 못 참겠잖아."
"이...!"

마리와 세실리 사이에 스파크가 튀기는 건 착각일까, 아니면 보는 그대로일까. 문제는 그 사이에 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실 끊긴 인형처럼 그들에게 끌려다니고 있을 때, 나는 아래로 내렸던 고개를 슬쩍 들어올려


세실리를 힐끔거렸다.

고개를 아래로 내린 탓에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더불어 질식하기 직전인 내
팔이 사이에 끼여있다.
이다음에 시선을 더욱 위로 올리니 세실리의 요망한 얼굴이 보였다. 점점 더 빨갛게 변해가는 두 개의
뿔까지.

'뭔가 점점 못 참겠다는 얼굴인데...'

오늘따라 짓궂은 장난을 많이 치는 듯한 세실리다. 나는 세실리에게서 시선을 떼어 반대편을 쳐다봤다.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처럼, 눈매를 날카롭게 뜬 채 세실리를 노려보는 마리의 예쁜 얼굴이 보인다.


마리가 저렇게 질투하는 모습을 보니 그녀가 더욱 귀여워졌다.

그래도 나중에 한 소리 들을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다시 아래로 떨구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진짜 호강하는구나...'

그리하여 저택에 도착하고나서야 내 팔이 자유로워졌고.

"아이작. 너 이리 따라와."
"왜?"
"...아니다. 그냥 여기서 깨물어야지. 앙!"
"악!"

마리에게 확인용 도장이랍시고 깨물깨물 당했다.

*****

마리에게 볼을 깨물리고, 이다음에 키스까지 하고 그녀의 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솔직히 나도 좋아서 30 분은 포옹한 것 같다. 역시 연인 간의 포옹만큼 달콤하고 효과가 뛰어난


치료제는 없는 듯하다.

아무튼, 나는 휴식을 위해 내 침실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도중에 아델리아와 니콜과 잠깐 만나고 오는 건


덤.

어지러움증은 저택으로 돌아오는 동안 호전되었지만 속이 뒤집어진 탓에 안정은 필수였다.

"후우."

나는 속을 달래기 위해 찬물을 마시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하늘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경험은 처음이었던
탓에 생각만 해도 어지럽다.

균형을 담당하는 기관이 망가진 것 같달까. 나에게는 새롭다 못해 스펙타클한 경험이었다.

'장난만 안 쳤어도 좋았는데.'

하늘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는 것만큼 진풍경은 또 없을 터. 나중에 부탁할까 생각했지만 세실리의


성격상 장난을 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무엇보다 요즘 세실리의 행태가 약간 이상하게 느껴져 부탁하기 껄그럽다. 뿔의 붉은빛이 강해지면


악주기가 다가왔다는 뜻인데 그녀의 뿔은 검은색보다 붉은색이 더 많이 차지했다.

악주기가 더 가까워지니 욕망에 더 충실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100 년이 넘는 시간동안 악주기를 무난하게


넘겨겠지만 걱정이 되는 어쩔 수 없었다.

"읏차."
이렇게 걱정해서 뭐 하겠나.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걸어갔다.

저녁 식사까지 개인 휴식 시간이니 그때동인 책이나 읽으면서 여가를 보내면 된다. 때마침 서점에서
구입한 도서가 있으니 그걸 읽으면 될 터.

마리도 화장을 고칠 겸 손님방에서 가족이랑 머문다고 했으니 여유를 즐겨도 좋을 것 같다.

똑- 똑- 똑-

"아이작. 나야. 들어가도 돼?"

이제 막 책상에 앉아 책을 읽기 직전이었다. 노크와 함께 문 너머로 세실리의 목소리가 방 안까지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저택에 들어오기 전 세실리는 잠깐 침실에 방문해도 되냐고 나에게 부탁한 적이 있다. 나는
딱히 상관없었기에 기꺼이 허락했고.

이에 나는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허가를 내렸다.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할게."

덜컥-

출입 허가가 떨어지자 세실리는 문을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호위 기사인 가르츠는 어디로 갔는지
몰라도 혼자였다.

나는 세실리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는 내 침실에 한 번 들어온 적이 있으나


세실리는 처음이다.

그러니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방 주인인 내가 직접 데리고 다니는 편이 좋다.

"아. 굳이 일어설 필요는 없어요. 제가 가면 되니까."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세실리가 손을 내밀며 나를 제지했다. 그전까지 반말을 사용했던 것과 달리


존댓말을 사용하면서.

그에 나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상태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에서 그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단 둘이 있을 때는 존경의 의미로 말을 높일 거라고. 최근 둘이 있어본 적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기가 은인께서 쉬시는 방이군요."

내가 엉거주춤한 자세를 풀고 똑바로 섰을 때 세실리가 침실을 둘러보며 감상평을 내렸다. 헬리움의


공주가 보기에는 평범하디 평범한 방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머쓱해져서 뒷못을 매만지고 있을 때, 주위를 둘러보던 세실리의 시선이 내 책상 쪽에 고정되었다.


책상 위에는 책 한 권과 더불어 사용하지 않은 원고지가 쌓여있었다.

"그리고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는 이곳에서 제논 일대기를 집필하셨고요. 그렇죠?"


"네."
"역시 그렇군요. 이곳이..."
세실리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책상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나는 그녀가 걸어오는 동안 보여줄 것이
생각나 허리를 숙였다.

허리를 숙이니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는 서랍이 보였는데, 나는 늘 갖고 다니는 열쇠를 이용해 가볍게
해제했다. 이어서 서랍을 개방하자 시간이 흘러 변색된 원고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충 눈치챘겠지만 1 권을 제외한 제논 일대기의 초고들이다. 세실리가 좋아할 것 같아 보여줄 생각이다.

"누나. 이거 한 번 보실래요?"
"이건..."
"제논 일대기 초고들이에요. 누나라면 좋아하실 것 같아서."
"아...!"

나는 그저 좋아할 거라 예상했는데 세실리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보물을 넘겨받았다는 표정이랄까.

그녀는 내 손에 쥐어진 초고들과 나를 번갈아보더니 떨리는 손으로 넘겨받았다. 이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며 초고의 상태를 확인했다.

"정말이네요... 제가 읽었던 것과 완벽하게 일치해요."


"이제 제가 제논 일대기 작가라는 걸 믿을 수 있죠?"

물론 세실리는 그전부터 내가 제논 일대기 작가임을 알고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확인사살용이다.

원래 아카데미에서 초고를 보여주려 했으나 기회가 닿지 않아서 지금 보여준 것이다.

"...네."

세실리는 내가 방긋 웃으며 말하자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초고와 나를 재차


번갈아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은인이시여.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무슨 부탁인데요?"
"이 초고를 헬리움에 보관해도 될지..."
"안 돼요."

안 되는 건 안 되는거다. 1 권의 초고를 도난당한 기억 때문인지 다른 초고만큼은 내가 관리하고 싶다.

만약 상황이 정말 여의치 않다면 국가에게 맡기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초고 하나만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마당에 누군가에게 맡기는 건 어불성설이다.

설령 그것이 세실리라 해도 말이다. 마족인 그녀가 초고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거라 생각은 안 하지만
시기가 일러도 너무 일렀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성급했네요."

세실리는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평소의 모습과 완전히 딴판이라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하지만 나는 여자친구가 있는 몸. 나는 머릿속으로 마리를 떠올리며 헛기침을 토했다.

"지금은 시기가 시기인지라 어쩔 수 없죠. 마족에게 이 초고의 가치가 어떤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여러모로 걸리는 점이 많거든요. 누나도 대충 알고 있죠?"
"네. 하지만 우리 마족은 결코 이 초고를 이용하지 않을 거예요. 제논 일대기는 우리들에게 신이
내려주신 구원과 같은 것. 그리고 이 초고는 신이 내려준 성물이나 다름없어요."
"크흠..."

얼굴에 금칠을 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토했다.

그동안 세실리는 아쉽다는 눈길로 초고를 살펴보다가 다시 나에게 반납했다. 반납된 초고는 서랍에 넣고
자물쇠로 단단히 봉인시켰다.

"정말 그것에 보관해도 괜찮겠어요? 하다못해 금고라도..."


"애초에 제가 제논 일대기 작가라는 건 소수를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고, 금고라면 더욱 눈에 띌 거예요."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이 있다. 괜히 금고에 보관했다간 시선이 갈 수도 있다.

더군다나 출판사에서도 초고를 성능이 좋은 금고에 보관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째로 털렸다고하지 않았나.
그정도 실력이면 어줍잖은 금고는 모두 의미가 없다.

"정말로, 정말로 만약이지만 제 정체가 세상에 드러나면 그때 생각해볼게요. 헬리움은 다른 나라와 달리


부담감이 적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누나만 봐도 답이 나오는데요?"

리나와 레오르트는 전과가 있어서 맡기기 껄그럽고, 테르스 왕국은... 정치는 몰라도 인성이 별로라서
싫다.

마리의 가문, 레킬리스에게 맡겨도 그 위에 황족이 있으니 분란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 레킬리스 가문도
그 점을 우려하여 초고를 다른 곳에 맡길테고.

그러므로 남은 건 헬리움밖에 없다. 세실리의 말마따나 이 초고를 성물급으로 취급한다면 다른 나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마족은 인간보다 수명이 훨씬 길다. 내가 죽고나서도 세실리가 보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헬리움이 중립에 위치해 있구나.'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세실리는 내 대답을 듣고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뭇 남성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아리따운 미소였다.

"은인은... 정말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신기해요. 이 초고를 썼을 당시에도 우리 마족을 좋게


보셨을텐데... 아닌가요?"
"그냥 사람으로 생각한 거죠. 마족이 악마로 변한다면, 이 세상에는 악마보다 더한 사람이 많으니까."

대표적으로 '인간'이 있다. 전생에서 유명했던 짤이 있는데, 악마가 신에게 이리 소리쳤다.

신은 악마라는 자신들을 만들었으면서 왜 인간을 만들었냐고.

그만큼 인간의 악랄함이 때로는 악마보다 더하다는 상징적인 짤이다. 실제로 천사와 악마는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다는 속설이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인터넷에서 악마보다 더 심한 사람들을 무수히 지켜봤다. 저게 정녕 사람이 할 짓인가?


라는 의문을 들만큼 심한 경우도 있었다.

"사람으로 생각했다라... 가끔 은인이 저보다 오래 산 사람으로 느껴지네요."


"하하. 재미있는 농담도 참."
약간 뜨끔거렸지만 웃음으로 무마시켰다. 내가 환생자라는 건 죽을 때까지 숨길 생각이다.

"수명도 많으셨으면 좋았을텐데..."


"네?"
"아니예요. 그런데 은인.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이번에 은인께서 발간한 카이르 외전을 보고 생각난
게 있거든요."
"그게 뭐예요?"

나는 세실리의 질문을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이 팔짱을 끼었다. 뒤이어 그녀는 우물쭈물거리며


망설이더니 내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어딘가 긴장한 것처럼 느껴지고, 또 기대감이 섞여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은인은 정말로... 엘프와 인간이 이어질 수 있을거라 생각하세요?"


"흠..."
"정확히는 수명 차이가 그토록 심한데 이어질 거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아무리 서로가 좋다고한들
신이 정해준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법이니까."

세실리는 종족과 종족 간의 사랑하는 본질적인 문제, '수명'을 언급했다.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생각에 빠졌다.

늘 언급했지만 수명은 신이 정해준 운명이나 다름없다. 인간은 100 년조차 오래 산 것이며 엘프는
기본적으로 300 년은 훌쩍 넘는 수명을 자랑한다.

그러니 이 둘이 서로 사랑한다고 한들 헤어짐은 피할 수 없다. 인간은 몰라도 엘프는 그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가야할 것이다.

'엘리샤도 그럴거고...'

제논의 스승, 카이르의 죽음 이후로 엘프 여왕 엘리샤는 큰 비탄에 빠진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나 표현을 하지 못 했다는 후회가 사무쳤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전생에서도 수명 차이로 인한 애절한 러브스토리는 많이 지켜봤다. 대부분 이어지지 못


한 채 '후회'했으며 심각한 경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여기서 항상 언급되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할 거면 차라리 선택을 하고 후회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나는 잠자코 대답을 기다리는 세실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 속에는 긴장과 염려가
담겨있었다.

이에 한동안 그녀와 마주하다가, 조용히 입을 엶으로서 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누나의 말대로 수명은 신이 정해준 거예요. 서로가 사랑해도 헤어지는 건 어쩔 수 없죠. 인간은 몰라도
엘프는 그 부분을 두려워할 거고요. 어찌 보면 인간이 이기적이라 할 수도 있죠."
"...그럼 포기해야하는 걸까요?"

내 대답에 세실리가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카이르와 엘리샤가 이어지지 못 한다는 게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카이르의 죽음 이후로 엘리샤가 비탄에 빠진 걸 본


여주인공, 메리가 각성하는 장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니까.
전에 행사에서 에딘이 예측한 것처럼, 메리는 엘프다. 그리고 생사고락을 함께 거친 제논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품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카이르와 엘리샤의 비극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며 고민하게 되지만, 이윽고 마음을 다잡으며
제논에게 다가간다.

제논도 아버지나 다름없던 카이르의 죽음에 슬퍼하던 와중에 메리의 고백을 듣게 된다.

"아뇨. 포기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간단해요."

나는 세실리와 똑바로 마주하다가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워하면 돼요."
"... ..."
"평생을 후회에 묻혀서 사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본래 추억은 만들 때 가장 행복하고 아름답지만, 그 추억이 추억으로 남게 되었을 때가 가장 슬픈 법이다.

만약 엘리샤가 카이르의 마음을 받았들였다면 그 추억은 후회가 아닌 그리움으로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움을 평생 안고 갈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곳에 묻어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도 있다.

"헤어짐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짧은 시간을 행복한 그리움으로 채울지, 아니면 슬픈 후회로 채울지 정하는
건 본인의 몫이에요. 그래도 저라면 그리움을 선택할 것 같네요."
"...은인다운 대답이네요."

세실리는 잔잔한 미소를 짓더니 나를 마주했다. 뒤이어 그녀는 두 손을 뻗어 내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정말 고마워요. 제 고민을 가볍게 털어내줘서."


"이정도로 뭘... 네?"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세실리의 감사 인사를 듣고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내가 당황하는 와중에 그녀는 붙잡았던 내 손을 풀어주더니 한 발짝 한 발짝 뒤로 조심조심 물러났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침대에게 시선을 한 번 주더니 나를 쳐다보면서 야릇하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침대가 넓네요. 둘이 누워도 문제없을 것 같아요."


"... ..."
"그럼 조금 있다가 식사 때 뵙도록 할게요."

끼익-

어느새 문까지 도달한 세실리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고정돼 있었다.

이에 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세실리는 방긋방긋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저의 사랑스러운 은인."

탁!

문이 굳게 닫혔다.
< 100 화 >

보통 축제는 낮에 시작되어 해가 떨어진 저녁 때 끝이 나지만, 간혹 특별한 경우에는 밤을 넘어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주로 건국제처럼 특별한 의미가 붙어있는 축제가 그러는 편이고 규모가 다른 축제에 비해서 월등히 큰
편이다.

그리고 밤까지 이어지는 축제는 다른 축제와 큰 차이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활기가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다.

낮에는 주위가 밝아 한 곳에 집중하기 어렵지만 밤은 정반대다. 주위가 어두컴컴한만큼 등불이 비추는


곳에 집중하기 쉽다.

활기가 강해지는 이유도 일종의 착각에 가깝다. 많은 사람들은 고된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밤에 숙면을
취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락한 보금자리는 물론, 안식에 빠져들 고요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밤은 조용하다'
라는 인식이 사람들 머릿속에 기본적으로 박혀있다.

하지만 이러한 밤 중에도 축제가 계속된다면? 고요하기는커녕 시끄럽다면? 오히려 낮보다 더 강렬하고
재미있는 공연이 펼쳐진다면?

사람들은 잠도 안 자고 축제를 즐기기에 바쁘니 더욱 시끌벅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두운 건 빛으로


밝히면 그만이니 축제에 집중하는데에 문제가 하나도 없다.

이렇듯 큰 규모의 축제의 진면목은 저녁이 되어서야 드러나고,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공연들도 밤부터
시작된다.

"아무리 봐도 낮보다 더 북적거리는 거 같은데? 자칫하다간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


"그러게. 낮에도 놀랐지만 우리 영지가 이렇게 활발한 건 처음 봐."
"... ..."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된 마을의 입구. 브리스와 니콜이 북적거리다 못해 사람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마을의 풍경에 하나 둘 씩 말을 주고 받았다.

"아버지. 아버지는 기분이 어떠세요?"


"으음... 그냥 일감이 늘어난 것 같다만..."
"이이도 참. 좋으면 좋다고 하세요."

여태까지 일을 하셨다가 이제 막 밖으로 나오신 부모님도 영지의 활발함에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셨다.


아버지는 약간 얼떨떨하다는 표정을, 어머니는 정말로 행복하다는 미소를 지으셨다.

나도 관광객들로 가득 채워진 마을을 보며 놀란 건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저녁 식사를 하기 전, 내 침실에 잠깐 들어왔다가 충격적인 발언을 하고 나간 세실리
때문이다.

세실리는 인간과 엘프 사이의 사랑이 진정 이루어질 수 있냐고 물었고, 나는 선택에 따라 후회가 될 수도


있고 그리움이 될 수도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눈치채지 못 했다. 그녀는 엘프와 인간의 사이가 아닌, 장수종과 단명종의
사랑에 대해 질문한 것이었으니.
이후로 그녀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침대가 넓다니 뭐니 하는 건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설마 진짜로?'

나는 실타래가 이리저리 얽힌 듯한 머릿속을 하나 하나 정리했다. 평소 짓궂은 장난을 곧 잘 치는


세실리이지만, 왠지 이번에는 장난이 아닌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악주기가 점점 다가오면서 욕망에 충실해지고, 그에 따라 본인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빈도가


늘어나는 중이다.

그러니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은 진실에 가깝다는 의미인데, 나로서는 당혹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다.

그녀도 나와 마리가 어떤 관계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을텐데 어째서 그런 말을 남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정말로 마리는 무시하고 일을 저지르는 건 아닐지 약간 두려워졌다.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단호하게 거절할 생각이다. 아직 마리와의 진도도 거기까지 가지 않았는데


세실리와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세실리가 나를 덮치거나, 내가 스스로 성욕을 억제하지 못해 세실리를 탐하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 단언할 수 있다.

"아이작."
"... ..."
"아이작?"
"...네?"
"무슨 생각을 하길래 표정이 굳어있니?"

내가 머리를 굴리는 동안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중이다. 보라색 눈동자 속에는 자식을 향한 걱정이 뚝-
뚝- 묻어나왔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쓴웃음을 흘렸다. 가족이 다 있는데도 딴 생각을
하다니, 나도 참 못난 자식이다.

"죄송해요. 아침에 봤던 것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아서 조금 놀랐거든요."


"그러니? 하긴, 이 엄마도 깜짝 놀랐는데 너라고 오죽하겠니? 그래서 기분이 어떠니?"
"기분이요?"
"그래. 이 모든 게 다 네 덕분이잖니."

어머니의 상냥한 말씀에 고개를 돌려 마을의 풍경을 둘러봤다. 낮에도 비슷한 질문을 들어본 것 같은데
저녁이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냥 뭐... 묘하네요. 앞으로 열심히 책을 써야겠어요."


"호호. 그래서 연중을 번복할 생각은 있니?"
"으음..."

나는 축제로 정신없는 마을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고민했다. 엘레나 교수에게 추천 학생으로 등록된 이상,
사실상 2 학년부터는 역사학에만 집중하면 끝이다.

그러니 2 학기가 끝나고 난 이후부터 시간이 널널하다는 의미인데, 그때부터 연재해도 큰 문제가 없다.
내가 연재를 중단한 이유는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으니까.
무엇보다 내가 쓴 제논 일대기를 위한 축제를 두 눈으로 직면하자니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엘프 측에서 멋진 인물이 등장할 예정이라서 집필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축제를 보고 감동받았다면서 연재를 재개하면 어떤 반응이 나오려나?'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환호하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전율이 일어나 짜릿해지는 기분이다.

전생에서는 누려본 적이 없던 인기를 몸소 실감하게 되니 내 마음이 살짝씩 흔들렸다.

"...생각해볼게요."
"정말이니?"
"정말로?"
"진짜?"

내가 그리 답하자 어머니 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도 화들짝 놀라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적잖이 당황하며
가족들의 표정을 하나 하나 훑어봤다.

하나 같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다. 각기 다른 눈동자 속에는 기대와 열망이


담겨있었다.

심지어 아버지조차 내색하지 않으셨을 뿐,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는 표정이셨다.

"어, 어디까지나 생각해보는 거예요. 아직 결정을 내린 것도 아니고."


"그럼 공연을 보고 생각을 굳힐 수도 있다는거니?"

왜 생각이 그쪽으로 가는 것입니까, 어머니.

어머니는 정말 기대된다는 듯이 두 손을 모으며 눈을 빛내셨다. 어지간히도 제논 일대기를 보고 싶으신


모양이다.

그에 나는 확실한 대답을 내리지 못 한 채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공연이 얼마나 뛰어난지 지금으로서는


모르겠지만, 전생의 화려한 문화를 접해본 나의 기대에 미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최고의 악단과 극단이라 했으니 약간은 기대해도 되겠지.'

심지어 두 집단 모두 약간의 변태끼가 있다 들었다. 특히 매트릭스 극단은 연출에 있어서 타의추종을


불허한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나는 기대감에 차 있는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을 하나 하나 얼굴을 마주했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한 번 보고 생각해볼게요. 공연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1 시간 정도 남았단다. 그때까지 전시된 작품을 관람하면 될 것 같구나."

아침에는 세실리와 마리, 이 셋이서 구경을 했다면 저녁에는 가족끼리 전시회를 즐기기로 계획했다.

마리도 가족끼리의 화목을 위해 잠깐 나와 떨어졌고, 세실리는 가르츠와 같이 관람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아델은... 니콜이 괜찮다고 그녀를 데려오려고 했으나 부담스럽다며 거절했다. 지금쯤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전시회를 즐기고 있겠지만 걱정이 되는 건 여전했다.

혹여, 그 쓸데없는 미련 때문에 테르스 왕족에게 접근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녀의 눈물을 곁에서 지켜본
나로서는 걱정이 안 될 래야 안 될 수가 없다.
"자자. 이제 얘기는 그만하고 축제나 즐깁시다. 아버지, 공연 예약은 하셨죠?"
"넌 이 아비를 뭐라고 생각하는게냐? 이래보여도 이 영지를 직접 관리하는 영주다. 맨 앞에서 볼 수
있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니콜. 저기로 한 번 가보자. 화장품을 파는 것 같은데?"
"엄마. 전 화장에 관심 없는데..."
"얘는. 여자는 언젠가 꾸며할 때가 오는 법이야. 지난 번 네가 드레스를 입었을 때 얼마나 예뻤는지는
알고 있니?"

이후로 우리 가족은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사람이 너무 많이 돌아다니는


바람에 간혹 흩어질 뻔했지만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아버지가 즉각 찾으셨다.

덕분에 아무런 걱정없이 아침에 보지 못 했던 작품을 구경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침에 보지 못 했던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어 우리 가족의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저택은 기사단이 잘 지키고 있을테고...'

현재 우리 저택은 황궁에서 파견나온 기사단이 엄중히 지키는 중이다. 물론 누군가 내 방을 콕- 집어서


털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보호해주니 안심은 된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황궁에서도 꽤나 실력이 뛰어난 기사단이라고. 아버지가 인정할 정도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이작. 저기 물풍선 던지기 있는데 한 번 해볼래? 가위바위보 해서 지는 사람이 맞는 걸로."


"싫어. 나 맨날 지잖아. 형의 동체 시력을 어떻게 따라잡으라는 거야?"
"대신 눈 감고 할게. 니콜 너도 할래?"
"난 됐어. 그리고 오빠도 양심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이제 눈 감고도 상대방이 무슨 행동을 할지 예상할
수 있잖아."
"그걸 왜 말하는 거야? 재미없게."
"난 하나도 재미없거든?"

휴가가 얼마 남지 않은 브리스는 이때까지 억눌렀던 욕망을 모두 해소시키겠다는 듯, 여기저기


싸돌아다녔다. 작품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축제 그 자체에만 집중했다.

다행히 망나니처럼 굴진 않고 스스로 절제하고 있다는 걸까. 군대에서 뼈가 깎이도록 고생했으니 여자에게
시선이 갈만도한데 희한하게도 일체 눈길을 주지 않았다.

'수도에서 따로 해결한 건가?'

아직 도로가 발달되지 않아 우리 영지로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도를 통과해야한다. 그러니 수도에 있는


사창에게서 성욕을 처리했을 수도 있다.

나는 군대에서 받은 월급으로 흥청망청 놀기 시작한 브리스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

그러다 문득 몇몇 사람들이 내 시야에 잡혔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어두운 밤중에 더욱 눈에 띄는


황금색 머리카락과 화려한 외모. 마지막으로 각자 개성에 맞게 차려입은 깔끔한 복장까지.

레오르트, 리나 남매였다. 아침에는 보이지 않더니 저녁이 되어서야 축제에 참가한 모양이다.

외모와 더불어 고귀한 분위기가 은은하게 흘러나오다보니 그들의 공간만 따로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그들의 곁에 호위 기사가 붙어있으니 마냥 비유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그런데 얼굴이 많이 피곤해보이네.'

지난 번 만났던 리나도 피곤에 쩔은 듯한 얼굴이었는데 오늘은 더 심해보인다. 심지어 멀리서 보고


있는데도 다 보일 정도다.

화장으로 어찌 어찌 가리고 있었으나 울적한 느낌이 드는 표정만큼은 감추지 못 한 모양이다.

'공연 때 만나겠네.'

지금은 그들끼리 작품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으니 괜히 끼어들지 말자. 미쳤다고 내가 먼저


끼어들리는 없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놀다보니 본격적인 축제의 시작이자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공연이 코 앞까지 다가왔다.
망나니처럼 노느라 정신없었던 브리스도 아버지에게 잡혀왔다.

이윽고 우리 가족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공연장에 도착했는데, 마을 중앙 광장에 배치된 작은


공연장이 아니었다. 드넓은 평야 전체를 하나의 무대로 삼아 임시로 제작한, 실로 친환경적인 무대다.

건물을 세우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어쩔 수 없었으나 그래도 공연을 치루는 사람들은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오히려 무대가 넓어서 마음에 했던가.

나는 리루스 악단의 지휘자, 리루스가 나에게 넌지시 언질했던 것이 기억났다. 매트릭스 극단과
콜라보레이션을 이루어 환상적인 무대를 선보이겠다고.

과연 그들의 전생의 문화로 한껏 높아진 내 눈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은근히 기대가 된다.

"아이작!"
"마리?"

VIP 석이라 할 수 있는 관람석 중앙에 앉아 대기하고 있을 때 마리가 불쑥 찾아왔다. 가족도 없이 혼자인


걸 보면 다른 좌석에 앉아있다가 나를 발견한 모양이다.

마리가 찾아오면서 내 양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가족들의 시선도 마리에게 향했다. 그녀는 가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어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아름답게 웃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그래. 축제는 충분히 즐겼니?'
"건국제만큼 정말 재미있는 축제였어요. 볼 거리도 엄청 많았고요."
"다행이구나. 가족들은?"
"저쪽에 앉아있어요."

마리는 바로 밑 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정말로 그녀의 가족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VIP, 다른 말로 귀족 전용 관람석은 무대를 좀 더 명확히 지켜볼 수 있도록 2 층 높이로 설계되었다.


건물을 못 만든다면 차라리 관람석이라도 만들겠다는 판단이었다.

드넓은 평야 주위에 관람석들로 둘러쌓여있는, 진귀한 무대라는 뜻이다. 모든 축제가 끝나고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겠으나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신경 껐다.

"정말 죄송하지만 아이작을 데리고 가도 될까요? 둘이 같이 관람하고 싶어서..."


"물론이지. 아이작?"
"네."
마리의 간절하게도 들릴법한 부탁에 나 대신 어머니가 수락을 내렸다. 나 또한 마리와 같이 앉고 싶은 건
마찬가지여서 군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리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푸른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는 마리를 바라봤다.

음... 역시 어두운 밤이어도 마리는 귀엽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 여자친구라서 그런 게


아니고 마리는 언제봐도 예쁘다.

"부럽다. 나도 여자친구랑 같이 앉고 싶은데."


"여자친구도 없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도 남자친구 없잖아."
"나는 안 만드는 거지, 못 만드는 게 아니야."
"난 아무 소리도 안 했는데?"

현실남매의 투닥거림은 뒤로 하자. 나는 마리의 손길에 이끌려 그녀가 미리 봐두었던 객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아까 앉았던 곳보다 더 높은 위치여서 무대가 훨씬 잘 보였다. 용케도 이런 자리를 알았구나.

"히힛."
"... ..."

마리는 자리에 앉자마자 내 팔을 감싸더니 얼굴을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고양이가 그루밍을 하는


듯한 행동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그녀도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더욱 찰싹 달라붙었다. 이렇게 애교 많고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를 두고 다른 여자를 생각한 내가 다 미안해진다.

"둘이 좋아보이네."
"?!"

서로 애정행각을 펼치고 있을 때 뒤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농염하지만 언듯 불만이


들어있는 듯한 목소리다.

그에 우리 둘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일부러 아무도 없는 관람석에 앉아있는데 누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도 모를 세실리가 방긋방긋 웃는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왠지 어디서 한 번 겪어본 듯한 상황인데.

"읏차."

세실리는 우리가 당황스러워하는 도중에 내 옆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나와 마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실리는 은근슬쩍 내 팔을 감싸더니 야릇한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공연이 끝나면... 알지?"


"... ..."
"기대해도 돼."

공연에 집중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 101 화 >

다행히 마리는 세실리의 속삭임을 듣지 못 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세실리는 이제
더이상 숨기지 않겠다는 듯이 내 팔을 감쌌으며 어깨에 머리까지 기대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훈훈하고 달달한 장면처럼 보이겠지만, 문제는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바로 옆에 앉아있다.

아무리 세실리에게 호감이 있다고 한들, 이건 단호하게 대처해야 옳다. 마리가 실망할 수 있을 뿐더러
최소한의 예의다.

"누나. 미안하지만 이거 좀 풀어주세요."


"싫다면?"
"누나가 싫어질 것 같은데요?"
"... ..."

세실리도 내 단호한 지적에 뒤늦게나마 본인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뒤이어 그녀는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내 옆에 앉은 마리에게 시선을 두었다.

마리는 어디 뺏어볼테면 뺏어보라는 듯이 내 팔을 꽉 껴안은 채 고양이처럼 그르릉거렸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고 언짢다는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는 중이다.

그녀에게는 호시탐탐 남자친구를 노리는 세실리가 요망한 여우처럼 보일 터. 더군다나 외모와 매력도
본인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뒤처지지 않아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의외로 뭐라 하지는 않네.'

전이었다면 세실리를 향해 당장 떨어지라니, 이게 무슨 짓이냐니 눈에 쌍심지를 켜며 소리쳤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잔뜩 경계만 하고 털만 바짝 세우고 있다.

아무래도 낮에 둘끼리 나누었던 대화로 심적 변화가 있던 것일까. 나는 세실리가 붙잡았던 팔을 놓아주자


곧바로 마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세실리가 아무리 유혹해도 나는 너의 남자친구라고, 결코 너를 실망시킬 일은 없을거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이번만은 봐줄게."

마리도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질투심에 삐죽 내밀어진 입술과 어두운 밤 중에도 약간 붉어진 그녀의 뺨이 눈에 들어왔다.

어쩜 질투하는 모습도 이리 사랑스러울 수도 있을까. 나는 수직상승하는 입꼬리를 차마 숨기지 못 한 채


마리만 들릴 수 있게끔 작게 소근거렸다.

"못 믿겠으면 뽀뽀라도 해줄까?"


"...진짜 변태. 넌 진짜 빨간 변태야."

빨간 변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내 머리카락 때문에 그런 거겠지. 나는 마리의 찹쌀떡


같은 볼을 한 번 꼬집어주고는 세실리의 반응을 확인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꼴볼견이라며 인상을 찌푸릴텐데 세실리는 호기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우리


둘을 관찰하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깊은 관심을 표하는 중이다.

대체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이쪽을 쳐다보는 세실리에게 물었다.


"누나?"
"응?"
"무슨 생각하세요?"

세실리는 내 질문을 듣고 두어번 눈을 깜빡거렸다가 마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현재 마리는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뺨을 진정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잠시 후, 세실리는 마리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를 직시하더니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마리가 겪고 있는 감정을 나도 느낄 수 있는지 궁금해졌거든."


"... ..."
"마리의 반응을 보면 분명 기분이 좋은 건 확실한데..."
"크흠."

역시 그녀다운 대답이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그사이 마리도 진정이 되었는지 손부채질을 하며 자세를 바로세웠다. 뺨에 은은한 붉은기가 감도는 건
여전했다.

"그... 공연 진행은 어떻게 되는지 알아?"

화제를 돌리기 위해 질문을 날린 마리. 나는 그녀와 눈을 한 번 마주쳤다가 공연장(을 빙자한 평야) 쪽에


시선을 두면서 대답했다.

"우선 리루스 악단이 연주를 할 거야. 그 다음에는 매트릭스 극단이 연극을 할 거고."
"공연 시간은?"
"총 합쳐서 약 3 시간. 리루스 악단이 30 분에서 40 분가량 연주하고, 매트릭스 극단이 남은 시간동안
연극을 하겠지."
"리허설도 없이 괜찮아?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이런 공연은 리허설이 필수라고 들었거든."

가만히 듣고 있던 세실리가 약간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그녀의 말처럼 이런 대규모 공연에 있어서


리허설은 필수다.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미리 알아야 조절할 수 있을 뿐더러 극단 같은 경우는 조명이 매우 중요하다.


등장인물을 밝게 비추어야 몸짓 하나하나 세심하게 볼 수 있으니 당연한 세팅이다.

하지만 전시회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개최가 결정나고, 악단과 극단 모두 개최 당일 전날에 도착했다.

제아무리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두 집단이라고 한들 리허설을 하지 못 한다면 여러모로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그렇긴 하죠. 그래도 리루스 악단에게 듣기로는 리허설을 충분히 했다고 말했으니 괜찮을 거예요."
"그럼 다행이긴 한데..."
"누나는 리루스 악단의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어요?"

나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세실리와 대화하다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그녀는 마족이고, 제논


일대기 발간 전까지 헬리움 바깥으로 나온 적이 거의 없다.

리루스 악단이나 매트릭스 극단 또한 헬리움에 입국했다는 소식은 현재까지 듣지 못 했다. 애당초


헬리움은 여태껏 입국 금지 국가로 지정되어 있었으니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간다.

그러니 세실리는 두 집단과의 접점이 없다는 뜻인데 말을 들어보면 예술에 조예가 깊어보였다.

"그건 아니야. 다만 헬리움 내에서도 악단이 있어서 어느 정도 상식은 가지고 있어. 리루스 악단이 세계
최고의 악단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그런데 왜 불안해하는 거예요?"
"만에 하나, 그들이 제 실력을 못 낼까봐 그래. 앞으로 리루스 악단이 연주할 음악은 사크란의
일생이잖아. 사크란의 일생은 우리 마족의 인생을 단편적으로 드러내줬지."

세실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것 같다. 리루스 악단이 연주할 음악의 내용은 사크란의 인생이다.

제논 일대기 속 사크란은 마족의 비극적이면서도 숭고한 운명을 단편적으로 보여줬으며, 마지막에는


악마가 아닌 인간으로 생을 마감하는 장엄함까지 독자들에게 각인시켰다.

한 마디로 마족의 인생을 대변하는 거라 해도 무방하다. 세실리는 리루스 악단이 그 내용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까봐 우려하고 있다.

"누나가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네요.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건 음악을 듣고 그 속에


담겨있는 뜻을 유추하는 게 아니라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음악을 듣는 거니까요."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어떻게 해?"
"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원래 음악이라는 게 내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잖아요? 들어보면 알겠죠."

웃긴 상황에 구슬픈 음악을 추가해 그 상황이 더 재미있게 만드는 것처럼, 슬픈 장면과 대비되게 흥을
돋구는 음악을 넣어 왠지 모를 비극성을 더 강조시키는 것처럼, 음악은 오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물론 리루스 악단이 미쳤다고 터키 행진곡 같은 음악을 선보이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세계 최고라고


명성이 자자한만큼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무대를 빙자한 평야 위에는 앞으로 리루스 악단이 연주할 악기들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자연과 하나로
동화되어 있는 느낌이 운치 있고 보기 좋다.

게다가 황궁 쪽에서 무슨 마법을 펼쳤는지 몰라도 바깥의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마을에 축제가
한창인데도 말이다.

시간을 거의 짜내는 식으로 부랴부랴 준비했지만, 레오르트와 리나가 미친듯이 고생한 덕에 무난히 진행될
것 같다. 특히 건물을 세우지 않고 평야 자체를 무대로 임의로 지정한 건 그들의 센스가 돋보이는
선택이었다.

"아이작. 저기 좀 봐."
"응?"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슬슬 몰려오고 있을 때, 마리가 내 팔을 툭- 툭- 건드리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에 마리가 손가락으로 가르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전에 봤던 리나와 레오르트, 그리고 테르스 왕족이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VIP 정도가 아니라 VVIP 급에 해당하는 인원들이니 우리보다 무대를 보기에 더 적합한 자리에
앉아있다.

가지각색의 매력을 뿜내는 그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리나가 이쪽을
쳐다봤다. 리나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눈에 살짝 크게 떴다.

나는 리나가 우리를 보자마자 말없이 손을 흔들어줬다. 리나도 옆에 앉아있는 레오르트와 테르스 왕족을
힐긋거렸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는 걸로 인사했다.

'마냥 쉬운 자리가 아니구나.'


황녀는 언뜻 보면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처럼 보이지만, 하나 하나 훑어보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권력을 손에 가지고 있으면 뭐하나. 제대로 다룰 수 있어야 진짜 힘이 되는 법인데. 무엇보다 저런


자리에서는 가면을 쓰고 행동해야 뒤탈이 없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가면을 써서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는 사람보다 처음부터 본심을 드러내는 사람이
훨씬 좋다. 그래서 내가 마리와 사귀는 거고.

"음..."

마리가 생각나서 그럴까. 나는 옆자리에 앉아있는 마리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내가 뚫어져라 바라보자 흠칫하더니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왜, 왜 그런 눈빛으로 쳐다봐?"


"마리."
"응?"
"그냥 불러봤어."
"...뭐야, 진짜."

마리는 실없는 내 말에 김샌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나는 작게 웃어주며 말없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마리도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보들보들한 손의 감촉이 전달되어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마리는 도대체 리나와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이가 이런 걸까?'

보아하니 리나가 마리를 배신한 정황이 있는데 괜한 트라우마를 자극할까봐 지금까지 안 묻고 있었다.
하지만 미래를 보았을 때 리나와 친분을 쌓는 건 나에게 좋으면 좋았지, 결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제논 일대기가 다시 연재가 된다면 지금보다 덩치가 훨씬 커질 것이며, 다양한 곳에서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때까지 정체를 숨기겠지만 원래 영원한 건 없다.

그러니 리나나 세실리 같은 권위자와 손을 잡아야하는 건 피할 수 없다. 마리의 가문이 레킬리스 공작이라
해도 나라 간의 다툼에 끼어들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나는 준비가 한창인 무대에 시선을 고정시킨 마리의 옆모습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마리."
"응?"
"축제가 끝나면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할 이야기가 있거든."

내 부탁에 마리는 푸른색 눈동자를 깜빡였다가 반대로 나에게 물었다.

"그건 상관없는데 어디로 갈거야? 혹시 또..."

음흉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다가 내 팔을 주먹으로 툭- 치는 마리. 나는 왠지 모를 창피함에 세실리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세실리는 악단이 준비되는 과정을 지켜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실제로 지금 무대에는 악기를
정비하기 위해 간단하게 연주 중이었으니 시선이 팔릴만도 하다.

이에 괜찮겠다 싶어 마리의 귓가에 입을 갖다 대며 작게 속삭였다.


"그게 아니라, 너랑 따로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중요한 거야."
"그래? 어디로 갈까?"

나는 그녀의 질문에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아무 생각없이 대답을 꺼냈다.

"내 침실에 올래? 잠깐 커피나 마시면서 이야기하면 될 것 같아."


"... ..."
"너랑 좀 깊게 관련된 거라서."
"... ..."

그리 말하자마자 마리의 반응이 좀 심상치 않았다. 처음에는 눈을 끔뻑거리면서 상황 파악이 덜 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얼굴이 목덜미부터 붉어지는 것이 아닌가.

멍한 얼굴 그대로인데 피부만 빨개지니 어딘가 고장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에게는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의문이었다.

내가 의문을 품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마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흰색 머리카락 사이로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귀는 붉어질 대로 붉어진 상태였다.

"정말이지... 사람 미치게 만드네..."


"마리?"
"저택 침실은 기본적으로 방음이 되는데...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밤 중에
커피까지... 지난 번 에스코트 때도 그렇고 진짜 모르는 것 같은데... 어떡하지?"

손으로 얼굴을 덮어서 웅얼거리는 탓에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하지만 내가 실수를 했다는 건 분명했다.

침실로 부른 이유도 어차피 부모님과 마리의 부모님이 계시니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실리도
그래서 침실로 부른 거고.

나는 마리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그녀를 연이어 불렀다. 허나 마리는 이거 놓으라는 듯이 어깨를 털며
마른세수를 하기 바빴다.

"신사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려셨습니다. 곧 있으면 리루스 악단의 공연이 시작될 예정이니 모두 자리에
착석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마리를 부르는 동안 준비가 모두 끝났는지 무대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내 귀를 자극시켰다. 마이크를


사용한 것처럼 쩌렁쩌렁한 음량이었다.

이에 고개를 앞으로 돌리니 말끔하게 정복을 차려입은 중년인이 무대 중앙에 당당히 서 있었다. 아침에
봤던 리루스 악단의 지휘자, 리루스다.

나는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연주가 시작되는가 싶어 무대 쪽으로 고개를 고정시켰다. 그동안에도


옆에서 마리가 작게 웅얼거렸다.

"...그냥 모르는 척 하고 가볼까?"


"마리."
"후우. 그래.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암. 어쩔 수 없고 말고."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아이작."
"응?"
"'초대'는 받아줄게. 알았지?"
내가 꺼냈던 말은 '라면 먹고 갈래?'에 정확히 부합한 권유였다.

하지만 나는 사교계에 참석한 적도 없고, 대인관계도 비교적 최근에 가진 터라 기본적인 상식이 부족한
상태.

심지어 밤 중에 커피를 마신다는 건 잠을 자지 않겠다는 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남녀가 침실에서 단 둘이, 그것도 잠을 자지 않는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알았어."

나는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102 화 >

마리가 두 손을 얼굴에 파묻으며 꿍얼거리는 동안 리루스 악단의 준비가 거의 끝나기 직전이었다.

예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단원들이 무대 위로 하나 둘 씩 올라와 준비를 갖추고, 관람석에도 사람들이


점점 몰려오면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잠시 후 귀족들만 특별히 허용되는 VIP 석은 물론 그 밑에 임시적으로 제작된 관람석 또한 관광객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함께 찾아온 아이들과 나이가 지긋하신 노부부, 그리고 모험가와 더불어 이종족들까지.

남녀노소, 종족불문하고 공연을 시청하기 위해 속속 모이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제논 일대기의 팬인


걸까, 아니면 리루스 악단의 공연을 보기 위해 찾아온 것일까.

어쩌면 둘 다 포함될 수도 있다. 나로서는 뿌듯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몰려온 것이, 평야 자체를 무대로 지정한 게 좋은 수로


먹혀들었다.

평야가 아닌 건물이었다면 공연을 보지 못 하는 사람들이 생겼을텐데 지금 보이는 바로는 그런 걱정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게 정말 팬아트 개념의 공연이라니...'

리루스 악단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는 막대한 가격을 지불해야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이들을 포함한
예술가들은 후원 형식으로 받는다고 미리 선언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전시회에서 받은 후원은 모두 문화계의 발전을 위해 기부할 거라는, 실로 대인배스러운


태도를 보이면서 많은 이들의 호감을 샀다.

'저 사람들은 돈보다는 명예가 더 중요할테니까.'

전생에서 본 적이 있다. 경제적으로 풍족해지면 사람은 자연스레 명예를 좀 더 갈구하게 된다고.

어차피 이번 연주도 팬아트 개념으로 작곡했겠다, 후원금을 문화계에 기부하면 그들에게 더 큰 명예를
안겨줄테니 좋은 선택이다.

"그냥 이대로 입고 가야할까?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옷도 챙겨가는건데... 아니. 얘는 바보라서 생각도


못 했을 거야."
뭐라는 거야.

나는 아직까지 꿍얼거리는 마리를 힐끔거렸다.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는 건지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있다.

당연히 그걸 보며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 전에 내가 했던 말에서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나


싶어서.

하지만 집에서 배웠던 예법을 아무리 뒤져봐도 오해를 살만한 발언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냥 침실에서
커피나 한 잔 마시며 이야기를 좀 나누자는 것밖에 되지 않는데 말이다.

'축제가 끝나면 알게 되겠지.'

지금은 공연에만 집중하자. 괜히 다른데에 신경이 팔렸다간 집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 후로 잠깐 생각을 하는 동안 공연 준비가 거의 끝난 것인지 연주자들 모두 다 자리에 착석해있다. 나는


곧 있으면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줄 리루스 악단의 모습을 세밀하게 살펴봤다.

역시 세계 최고라는 걸 증명하듯이, 전생에서 봤던 오케스트라와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은 규모다.


신입생 행사 때 왔던 악단과 전혀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신입생 행사 당시에서도 느낀 거지만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고, 악기 또한 전생에서 자주


봤던 것과 매우 유사했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라던지, 플루트와 같은 관악기, 마지막으로 타악기까지. 전생과


비교했을 때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두웅!

악기를 하나 하나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무대 뒤쪽에 배치돼 있던 연주자가 막대를 이용해 북을 강하게


내려쳤다. 무대 특정상 사방이 뚫려있는데도 불구하고 천둥 같은 울림이 무대 전체를 뒤흔들었다.

천둥 소리가 무대 전체를 감돌자 시끌벅적했던 관람석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덕분에 남아있는 건 여전히
잔존해 있는 북의 울림 뿐.

옆에서 혼자 중얼거리던 마리조차 고개를 퍼뜩 들어올릴 정도였다. 나는 북 하나로 천둥 소리를 낼 수


있구나라며 신기해하면서 앞을 바라봤다.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지면서 무대 중앙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등을 돌리며 관람객과 마주했다. 방금 전


우렁찬 목소리로 안내를 하던 지휘자, 리루스였다.

그는 한 손에 지휘봉을 쥔 채 좌중을 둘러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크게 외쳤다.

"신사숙녀 여러분! 저는 리루스 악단의 작곡가 겸 지휘자, 리루스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리루스는 방금 전에도 그러했듯이 우렁찬 음성으로 또박또박 외쳤다. 마나로 음량을 증폭시켰는지
목소리가 무대 전체에 퍼져나갔다.

그의 정중한 인사에 나는 물론, 모든 관람객들이 우뢰와 같은 박수로 리루스를 환영해줬다.

이윽고 박수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 때 쯤, 리루스는 세상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께 제 연주를 들려줄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앞으로 제가 보여줄
공연은 제논 일대기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이죠. 그저 제 공연을 보기 위해 와주신 분도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이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기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장황하게 이어지는 그의 설명. 나는 원래 공연 전에 항상 이러는 건가 싶어 잠자코 듣다가 양옆을
힐긋거렸다.

어느새 진정이 되었는지 마리는 공연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중이고, 세실리도 마찬가지였다. 헬리움에서만
지내던 세실리보다는 마리가 좀 더 리루스 악단에 대해 알고 있을테니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마리."
"으, 응?"

내가 부르자 마리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며 궁금했던 점에 대해


물었다.

"원래 공연하기 전에 저런 식으로 설명해줘? 나는 지금까지 공연을 본 적이 없어서."


"아, 아니. 원래는 그냥 바로 공연을 시작하는 편이지."
"그래?"
"그... 아이작?"
"응?"
"손 좀... 잡아도 돼?"

소심한 목소리로 나에게 부탁하는 그녀.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진 마리를 바라보다가 손을
붙잡아줬다.

이게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손만 잡는 건데 큰 문제는 없다. 마리는 내가 손을 잡아주자 베시시 웃더니


손에 힘을 주었다.

아무래도 공연이 이어지는 동안 손을 붙잡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나야, 좋으니 상관없지만.

"제가 여러분들께 보여드릴 곡의 이름은 '인생(人生)'. 제가 어떤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하고, 또


이런 명칭을 지었는지 잘 아실거라 믿습니다."
"인생..."

오른편에 앉은 세실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리루스의 설명에 흠뻑 빠져든 듯했다.

이전에 리루스는 사크란의 최후를 보고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니 그가 앞으로 보여줄
곡은 사크란의, 그리고 마족의 인생을 드러내줄 터.

예상이지만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가 특징이지 않을까 싶다. 마족에게 미안한 말일 수도 있지만 마족은
어둠이 잘 어울리는 종족이니까.

"마지막으로 공연을 시작하기 전, 여러분들께 알려드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 리루스 악단의


공연은 어디까지나 맛보기에 불과할 겁니다. 진짜 공연은 이다음에 있을 매트릭스 극단과 함께 보여드릴
예정이죠."
"응?"
"저게 무슨 소리야?"

공연의 분위기가 어떤지 예상하고 있을 쯤, 리루스가 관람객들로 하여금 혼란을 주기에 충분한 발언을
꺼냈다. 이로인해 관람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 또한 당황한 건 마찬가지다. 지금 보이는 악단의 규모만 해도 놀라운 수준인데 이게 맛보기에


불과하다니. 그럼 매트릭스 극단과의 콜라보는 얼마나 뛰어다는 걸까.

리루스는 관람석이 술렁이자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 물론 맛보기라 해서 공연 시간이 짧거나 그러진 않을 겁니다. 보여드릴 건 전부 보여드릴테니까요.
하하하."
"... ..."
"그럼 이제부터 공연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기나긴 설명이 끝나고,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려는 조짐이 보였다. 나는 마리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눈에
힘을 주고 귀를 열었다.

이 세상에는 마법이 아닌 이상 녹음 같은 기능이 없으니 듣는 건 이번 한 번이 끝일...

딱!

그러다 갑자기 세실리 쪽에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세실리를 바라봤다.

세실리도 내가 볼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미소지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뒤이어 그녀는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나에게 알려줬다.

"녹음 마법이야. 내가 원하는 음악을 언제 어디서든 들을 수 있지. 다만 내가 들은 걸 기준으로


녹음하는거라 나만 들을 수 있어."
"... ..."

역시 엘프와 더불어 개사기 종족답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무대 쪽을 바라봤다.

리루스는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한 번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있었다. 무대가 떠나갈 듯한 박수 소리가
이어지고, 리루스는 빙글 몸을 돌려 본인의 악단을 바라봤다.

내가 관람 모드에 들어가자마자 박수 소리도 점점 멎어들더니 머지않아 고요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특수


장치를 통해 관람석을 비추던 조명도 꺼져서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빛은 오직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악단만 비추고 있을 뿐. 나는 기대감이 한층 부풀어올라 붙잡았던


마리의 손에 힘을 더 강하게 주었다.

그리고...

우우웅-

첼로의 무겁고도 어둡게 느껴지는 선율을 필두로 '인생'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마족의 인생을 표현했다는 본인의 말처럼, 현악기 중심의 어둡고도 엄숙한 분위기의 곡이었다. 중간중간
울리는 북소리가 심금을 울렸으며 애잔함마저 느껴졌다.

이렇게 10 분가량 동안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곡이 이어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긴박감이 느껴지는


선율로 바뀌었다. 초반부가 마족의 어두운 태생을 드러냈다면 이 긴박감은 평생을 악마와 싸워야 하는
내면을 표현한 것이지 않을까.

방심하게 되는 순간 욕망에 잡아먹혀 그토록 거부하던 악마가 되어버린다. 절제를 통해 억누르고 있다


한들 내면의 악마와 매일매일 싸워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다.

마족은 삶 그 자체가 투쟁인 수인처럼, 자기자신과 평생을 싸워야 하는, 그런 숙명을 지니며 태어났다.

'노, 녹음이 필요해...'

곡을 들으면 들을수록 녹음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무럭무럭 차올랐다. 곡이 내 취향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도 있지만, 제논 일대기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는 부분이 가장 컸다.
전생에서도 마음에 드는 bgm 이나 ost 를 휴대폰에 저장하고 다녔는데 리루스 악단의 연주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다.

결국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하나는 잊지 않도록 기억하는 것과, 다음에도 리루스 악단을 우리 영지로
부르는 것.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자주 잊어버리는 내 기억력 한계상 전자는 거의 불가능하고, 남아있는 건 사실상
후자밖에 없다.

'이거 말고 다른 곡도 만들어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연주는 클라이막스에 돌입했다. 긴박했던 음악이 서서히 꺼지는


듯하더니 초반부처럼 현악기 중심의 우울한 분위기로 되돌아왔다.

초반부와 별 반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오히려 이게 더 알맞다고 생각했다.

마족은 어둠과 가장 가깝지만 역설적이게도 빛을 갈구해 누구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 허나 그들의


인생에는 차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비극이 담겨있다.

그리고 비극적인 운명으로 태어난 것처럼, 대부분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하는 게 대부분이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며 전반적으로 곡 전체의 분위기가 음울한 이유도 이때문일 것이다.

만약 마족이 아니라 다른 종족, 특히 인간의 삶이었다면 음악으로 표현하지도 못 했을 터. 그리고 리루스


악단이 아니었다면 마족의 인생을 작곡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실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인간이어서 그저 그렇구나라며 감상하고 있지만 마족인 세실리는 더욱 감명깊게 다가올 곡이다. 이에


고개를 옆으로 돌려 세실리의 표정을 확인했다.

"...훌쩍."
"... ..."
"훌쩍... 흐윽..."

붉디 붉은 눈동자에 물기가 채워지고, 그 물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려 자국을 만든다. 손으로 계속 닦고


있지만 눈물은 기세를 멈추지 않고 뚝- 뚝-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세실리가 울고 있다.

평소 장난기 많던 모습과 달라도 너무나 다른, 처음 보는 모습이다.

다행히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아 몰골이 꼴사납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충격을 선사하기에는
충분했다.

'뭐... 뭐지...'

설마하며 마리에게 고개를 돌렸으나 그녀도 세실리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을 뿐이지, 울먹이면서 연주를
감상하는 중이었다. 이밖에도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니 하나 같이 눈이 촉촉해졌거나 훌쩍이며 코를 먹고
있다.

오직 나 혼자만 태연하게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는 뜻이다. 중세 시대의 감성인지 아니면 나만 감수성이
메마른 것인지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곡은 분명히 좋은데... 이게 울만한 일인가?'

아무래도 전생의 영향이 가장 큰 것 같다. 나는 어떻게 반응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감상 모드에 들어갔다.

여기서 억지로 눈물을 짜내봤자 그게 더 이상할 것 같다.

끼이이익...

그리하여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바이올린의 높게 치솟는 음을 끝으로 공연이 종료되었다.

맛보기라는 말처럼, 그 뒤에 분명히 뭔가가 있는데 일부러 끊은 듯했다. 그 이유는 음도 음이지만 악단의
곁에 있는 '성악대'의 존재다.

성악대는 공연 시작부터 끝까지 입 하나 벙긋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리루스 악단이 그들을 괜히
앉혀놓지 않았을테니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짝짝짝짝짝!!

하지만 그리 생각한 것도 잠시, 공연이 모두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조명이 밝아지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순간 화들짝 놀랄만큼 어마어마한 박수였다.

마리는 나와 손을 잡고 있느라 박수를 치진 않았지만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았으며, 세실리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대충 닦아주며 열심히 박수로 맞이했다.

나는 자국이 생기기 시작한 세실리의 옆모습을 응시하다가 주머니를 뒤적거려 손수건을 꺼냈다.
당연하지만 아델리아에게 줬던 손수건이 아닌 새로운 손수건이다.

"누나. 여기요."
"훌쩍... 응?"

내가 부르자 세실리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물로 촉촉하게 젖어 더욱 농염하게 변한 붉은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에 나는 말없이 그녀에게 손수건을 전달해줬다. 마리도 눈물을 훔치고 있었지만 세실리는 아예 줄줄


흐르는 중이었으니 그녀에게 더 필요할 것 같다.

"아... 고, 고마워..."

세실리는 내가 손수건을 보여주자 창피하다는 듯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내 손에서부터 손수건을 가져간
뒤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꽤 많이 흘린 탓에 자국이 남아있었지만 보아하니 금방 없어질 듯했다.

"감명깊게 들었나 보네요."


"아무래도 나는 마족이다보니까... 어두운 분위기도 그렇고 너무 슬픈 연주였어. 훌쩍."

세실리에게 이런 면모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한 그녀를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역시 사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델리아도 그렇고 세실리도 그렇고 눈물과 거리가 멀 것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눈물이 더 많았다.

"아이작은? 아이작은 어때?"


"그냥... 좋은 곡이었어요. 마음 같아서는 평생 기억하고 싶을 정도..."
쿠웅!!

내가 미처 대답을 끝내기도 전, 커다란 진동이 앞에서부터 울려퍼졌다. 관람석 뿐만 아니라 평야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거대한 진동이다.

그 진동에 무대를 가득 메웠던 박수 소리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진동의


근원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리루스 악단의 뒷편, 그러니까 평야의 중앙 쪽에서 새까만 무언가가 발견되었다. 적절하게도
조명이 그쪽을 비추었던 터라 더욱 상세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사람이었다. 바닥에 엎드려서 꿈틀거리고 있는 사람.

무대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난입했다.

"끄... 끄아아악..."

바닥에 엎드려 꿈틀거리던 사람이 괴로워하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도통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
눈만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비단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관람객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에 선뜻 나서지 못


하는 중이었다.

'뭐, 뭔데.'

꾸득! 꽈득!

모든 사람이 당황하여 몸을 함부로 움직이지 못 하고 있을 때, 그 사람에게서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듣기 거북한 소리와 함께 등 뒤로 날개가 점점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날개는 일반적인 새가 아닌, 박쥐처럼 털 하나 없이 피막만 존재했다. 그러니까 문헌에서만 보던 '


악마'의 날개에 가까웠다.

"으아아아악!!!"
"씨발. 뭐야, 저건."

괴인이 등 뒤로 악마의 날개를 드러내면서 괴성을 지르자 결국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제지하는 손길이 있었으니, 바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던 세실리였다. 그녀는 내


손목을 붙잡고는 걱정말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별 거 아니야."


"벼, 별 거 아니라고요?! 저건...!"
"저 사람 마족 아니야."
"악... 네?"

세실리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악마로 변하던 남자에게서 모종의 변화가 발생했다.

촤악!

"아아아악..! 커윽!"
그를 비추는 조명 뒤의 어둠에서, 커다란 낫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그의 목을 낚아채듯이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자연히 악마로 변하던 남자의 신형은 조명 뒤로 사라졌으며 조명이 비추는 원 안에는 그 누구도 서 있지
않았다. 오직 그 곁에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있을 뿐.

내가 눈을 깜빡이며 멍한 정신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늙수레한 목소리 하나가 무대 전체를 울렸다.

-모르페시여... 이 불쌍한 자에게 안식을 선사해주소서...

모르페는 제논 일대기 속에 등장하는 신들 중 하나다. 이 세상에서 실존하는 신, 모라를 기반으로 했으며


제논 일대기 속 마족들이 맹신하는 신.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악마로 변하는 남자의 등장도, 그의 목을 낚아챈 거대한 낫의 등장도.

거대한 낫은 제논 일대기 최고의 씬스틸러, '사크란'의 주무기다.

'...저게 다 연출이라고?'

예고편 하나 굉장하다.

< 103 화 >

전생을 포함하여 현생까지 내가 생각한 중세 시대의 '연극'은 오페라나 뮤지컬 같은 가극이다. 무대 위에


배우들이 등장하여 본인의 연기력을 보여주다가 중간중간 노래를 섞는 그런 유형.

하지만 방금 전 예고편 형식으로 보여준 무대는 결코 가극이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조차도 10
점 만점의 10 점을 줄 수 있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연출력이었다.

평야 중앙에 난입한 남자가 괴성을 지르더니 점점 악마의 형상으로 변하고, 머지않아 날개가 완전히
돋아났을 때 어둠 속에서 거대한 낫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그의 목을 낚아챘다.

마지막으로 특정 인물의 등장을 암시하는 기도문까지. 아무리 판타지라지만 연출 하나는 전생과 비교했을
때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뛰어나다고 봐야 옳다.

이건 CG 를 사용하는 '영화'가 아닌, 어디까지 무대 위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연극'이었으니까.

덕분에 기대감이 부풀어오르는 건 물론이고, 본격적인 공연이 언제 시작될지 기다리게 되었다.

[아. 아아. 관람석에서 기다리는 분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매트릭스 극단의 공연은 20 분 후에


시작될 예정이오니 그때까지 휴식을 취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저희...]

공연이 언제 시작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알림 방송이 크게 울려퍼졌다. 방금 전 배우가


읆조린 기도문도 그렇고 매트릭스 극단에서 수를 쓴 모양이다.

어쩌면 극단에게 마이크 같은 장비가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아카데미 입학식에서도 단상에 마이크가
배치되어 있었으니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

'무슨 장비를 사용하는 거지? 설마 마법을 사용하는 건가?'

매트릭스 극단의 뛰어난 연출력은 비밀에 부쳐져 있다. 게다가 극단 감독의 정체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대리인을 내세우는 편이다.
실제로 우리 저택에 방문했던 사람도 대리인이었지 리루스처럼 책임자는 아니었다. 책임자는 어디 있냐고
물으니 감독님은 사람과 만나는 걸 꺼려한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이러한 신비주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중이었다. 당장
나조차도 시대를 한참이나 앞서나간 연출력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한 마당에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나는 쉬는 시간도 되었겠다, 잠깐 화장실을 갔다 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양옆에 앉아있던 두 여인이 차례차례 물었다.

"어디 가?"
"어디 가니?"

이럴 때는 누구를 바라보며 대답해야 할까. 잠깐 곤혹스러웠으나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척, 무대에 시선을


두며 대답했다.

"잠깐 화장실. 겸사겸사 마실 것도 사려고."


"앗. 나도 같이 가자."
"세실리 누나는요?"
"난 여기에 있을게.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

그러고 보니 눈꼬리에 눈물이 살짝 맺혀있었다. 리루스 악단의 곡, '인생'이 그녀에게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나는 세실리를 바라보다가 아직까지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손수건을 바라봤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손수건이 축축하게 젖어있다.

"알겠어요. 어차피 화장실이랑 노점이 근처에 있으니 금방 올 거예요."


"천천히 갔다 와. 어디 가지 않을테니까."
"네. 마리?"
"응."

내가 손을 건네자 마리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10 분도 아닌 20 분 후에 공연이 시작하기 때문인지 잠깐 자리를 비운 사람이 많았다. VIP 석 뿐만이


아니라 평민들이 앉는 관람석에도 빈 자리가 곳곳에 보였다.

나는 혹여 자리를 뺏길 수도 있으니 빨리 돌아와야겠다고 마음먹은 후 마리와 함께 밖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지나칠 때 실례한다는 말은 기본이다.

이윽고 관람석에서 빠져나온 뒤에 마리를 보면서 물었다.

"근데 마리 너도 화장실 가려고?"


"그냥 너 따라온 건데?"

어쩜 이리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 걸까. 하마터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껴안을 뻔했지만 겨우겨우 참았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아름다운 내 여자친구가 방실방실 웃으며 애교를 부리는 걸 본다면 그 누구라도 참기
힘들겠지만, 난 그 어려운 걸 해냈다.

뒤이어 화장실을 빠르게 갔다 와서 볼일을 해결한 후에는 마리와 함께 공연동안 마실 음료수를 고르기
시작했다. 음료수를 고르는 동안 매트릭스 극단에 대해 묻는 건 잊지 않았다.

"마리 넌 매트릭스 극단의 공연을 본 적이 있어? 원래 저런 식으로 연출을 하는 편이야?"


"나도 딱 한 번밖에 못 봤어. 그리고 저런 식의 연출 방식은 그때랑 똑같았거든. 예고편이라고 해야되나?
아무튼 저런 식으로 시작을 알리는 편이지. 이때문에 매트릭스 극단이 어떤 예고편을 보여줄지 기대하는
사람도 많아."

오늘이 특이한 게 아니라 늘 특이했던 모양이다. 나는 새삼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의 정체가 더 궁금해졌다.

"너도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이 누구인지는 모르지?"


"당연히 모르지. 어쩌면 너랑 비슷한 사람이지 않을까? 네가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해 정체를 숨기는
것처럼, 매트릭스 감독도 자기가 원하는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정체를 숨기는거지."
"음... 일리가 있네."

매트릭스 극단이 유명세를 탄지 벌써 10 년이 넘어간다. 그런데 감독은 그 10 년 동안 단 한 번도 정체가


들통나지 않고 여태까지 숨겨왔다.

물론 극소수의 인물들은 감독이 누구인지 알고 있겠지만, 아무래도 거장 중의 거장이다보니 함부로


건드리지 못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왜? 한 번 만나보고 싶어?"


"응. 등 뒤로 악마의 날개가 돋아났을 때 진짜로 악마가 나타난 줄만 알았거든. 너는 안 놀랐어?"
"처음에는 놀랐는데 악단의 반응이 조용한 걸 보고 연극이라는 걸 알아챘지. 아, 그리고 네가 욕하는 거
생생하게 들었어. 어지간히 놀랐나봐?"
"큼. 큼."

나는 마리가 능글거리는 말투로 묻자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그때는 너무 깜짝 놀라서


자동반사적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솔직히 그런 연출이라면 그 어느 누가 깜짝 놀라지 않을까.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족이


악마로 변하고 있었으니 격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빨리 돌아가자. 마리 너는 뭐 먹고 싶어?"


"말 돌리기는. 난 레몬 주스."
"그럼 나는 포도 주스."

그렇게 각자 마시고 싶은 음료수를 구매하고 무대로 돌아갈 때 쯤이었다. 돌아가면서 포도 주스를 한 모금


마시는 동안 문득 한 사람이 내 시야에 포착되었다.

로브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작은 키와 더불어 로브 아래로 빠져나온 은회색


머리카락이 특징적이었다. 키도 그렇고 머리카락 색깔도 그렇고 그녀가 아르웬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현재 그녀는 벤치에 앉아있었는데, 무언가 고민이 되는지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고심하는 중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작?"
"잠깐만."

나는 마리의 부름을 뒤로 하고 아르웬 쪽으로 다가갔다. 비록 스쳐지나가는 인연밖에 더 되지 않겠으나


아르웬은 책을 고르는데 도움을 줬으니 무심하게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오지랖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호의를 보여준 사람을 무시하고 지나칠 정도로 매정하지는 않았다.

"아르웬?"
"...응?"

내가 혹시나 하며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던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은회색 눈동자와
소녀처럼 앳된 얼굴을 보아하니 아르웬이 확실하다.

아르웬은 나를 보자마자 은회색 눈을 두어번 깜빡이더니 이내 휘둥그레 뜨며 놀라움을 드러냈다.

"아이작? 그대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이냐?"


"우연히 지나가다가 네가 여기 있길래 왔지. 고민이 있는 것 같아서."
"고민?"

내 질문에 아르웬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다시 한 번 눈을 끔뻑였다. 나는 그 반응을 보고 속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착각했던 거구나, 라고. 괜히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님 말고. 고개를 내리고 있길래 무슨 고민이 있는 줄 알았지."


"아... 그건 아니다. 잠깐 생각할 거리가 있었다. 그대가 걱정할만큼의 문제도 아니고."
"그러면 다행이네. 그나저나 공연은 잘 들었어?"
"정말 멋진 공연이었다. 그리고 공연도 공연이지만 나처럼 키가 작은 사람들을 배려한 관람석의 구조가
제일 마음에 들었지. 임시로 제작한거라고 들었는데 두 눈으로 똑똑히 공연을 지켜볼 수 있었다."

실제로 아르웬의 키는 많이 작은 편이다. 150cm 를 겨우겨우 넘는 수준일까.

그래도 관람석의 구조가 평평하지 않고 위로 점점 올라가는 식이라 아르웬처럼 단신의 사람들도 공연을
무리없이 시청할 수 있다. 처음에는 평평하게 지을 뻔했다가 설계자의 센스 덕분에 참사를 방지할 수
있었다.

"그럼 문제는 없는거지?"


"전에도 말했지만 나를 애 취급 할 필요는 없느니라. 이래보여도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아르웬이 툴툴거리며 대꾸하자 나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내가 걱정했던 것과 별개로 문제는 없는


모양이다.

"알았어. 그럼 난 가볼게. 공연 잘 즐기다가 가."


"그대도 충분히 즐겼으면 하는구나. 매트릭스 극단의 공연은 나조차도 쉽게 못 보는 것이니까."

'나조차도'라는 말을 들어보면 그녀의 범상치 않은 신분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나는 내색하지


않고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마리에게 돌아갔다.

이윽고 마리에게로 돌아가자 어딘가 불만으로 가득찬 그녀와 만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아르웬과
대화를 나눴던 것이 불만인 모양이다.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말없이 레몬 주스만 마시던 그녀는 나를 표독스레 쳐다봤다가 못마땅하다는 투로


질문했다.

"저 여자애는 또 누구야?"


"그냥 우연히 서점에서 만났던 엘프."
"정말 그것 뿐이야?"
"그럼 뭐가 더 있어?"
"음..."

마리는 내 물음에 여전히 벤치에 앉아있는 아르웬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매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로브를 뒤집어 쓴 걸 보면 분명 평범한 신분은 아닐텐데... 설령 그렇다고 해도 호위 기사 없이 혼자


나오는 것도 이상하고..."
"호위 기사는 반드시 대동해야하는 거야?"
"물론이지. 당장 세실리를 봐. 혼자서 산 하나를 파괴할 수 있는 무력을 갖고 있는데 가르츠 씨를
대동하고 방문했잖아?"

하가야 세실리도 참가 의사를 밝히지 않고 가르츠와 함께 우리 영지를 방문했다. 아르웬도 그녀와 비슷한
상황일지도 모르지.

나는 마리의 설명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다 전에 세실리가 아르웬을 만나자마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분들은 누구냐고 했었지?'

내가 보지 못한 것을 세실리는 명확히 본 거겠지. 나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기억했다가 쉬이 넘겼다.

아르웬이 불순한 목적으로 이곳을 찾아왔을리는 없을테고, 설령 그렇다 해도 우리 저택은 기사단이


엄중하게 지키는 중이다.

자그마치 황궁에서 파견나온 기사단인만큼 믿고 맡길 수 있다.

"네 말이 맞을 수도 있지. 그래도 각자 사정이 있는 거잖아? 어차피 내가 제논인 건 절대 모를테고."


"그렇긴 해. 그래도 쟤한테는 절대 시선 주지 마. 알겠어?"

마리가 손가락으로 내 볼을 꾹- 꾹- 누르면서 엄중히 경고했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잡아채며


능글맞게 이야기했다.

"설마 질투하는 거야?"


"그런 거라면 어쩔래?"
"키스해줄까?"
"...우리 잠깐 저기로 가자."

솔직하기는. 나는 피식 웃었다가 마리의 손길에 이끌려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뭘 할지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눈꼴 시려운 애정 행각을 펼쳤을 뿐.

이후로 VIP 석으로 돌아오고,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콜라보레이션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리루스 악단은 여전히 무대에 올라가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위치가 살짝 아래로 내려와 관람석과 가까이 붙었다는 걸까. 그와 더불어 잠깐 휴식을 하는
동안 무대를 정비했는지 반투명한 막 같은 것이 무대와 관람석을 갈라놓았다.

나는 저 막을 무슨 의도로 설치했는가 싶어 의문이 든 것도 잠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연무장에 있던 거랑 같은 건가?'

저 막의 정체는 충격완화를 위해 특수 처리를 한 보호막.

그리고 매트릭스 극단의 연출력은 극한의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부서졌다.

콰앙!
"... ..."

왜냐하면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배우들의 화려한 전투가 눈 앞에 펼쳐졌으니까.

심지어 마력을 사용하는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땅바닥이 파이는 건 물론이고, 무기와 무기가 서로
부딪히자 큰 폭음과 함께 커다란 푸른빛 폭발이 일어났다.

다행히 보호막 덕분에 관람석까지 영향이 끼치지는 않았지만, 정말이지 극한의 리얼리티를 추구하고 있다.

'쩌... 쩐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팝콘이라도 들고 올 걸.

*****

한편 그 시간 VIP 석이 아닌, 평범한 관람석.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은 조금 전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 착석하여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공연도 공연이지만, 평소 그녀가 좋아해 마지 않던 제논 일대기를 토대로 한 공연이어서 더욱 기대가


되었다.

이 날을 위해 여왕으로서의 모든 업무를 내팽겨치고 이 머나먼 영지에 발을 디디지 않았던가. 아르웬은


양손 가득히 먹을거리를 쥐면서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물론 한 손은 본인을 따라온 다크 엘프, 레인을 위한 것이다. 단 걸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그녀여도


이정도로 많이 먹지는 않는다.

그런데...

[여왕님. 저 잠깐 확인할 게 있는데 어디 갔다 와도 될까요?]

머릿속으로 울려퍼지는 레인의 목소리. 마법에 통달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텔레파시였다.

레인은 종족 특정상 몸을 숨겨야 하기에 텔레파시로만 이야기하는 편이다. 두 사람 다 엘프여서 큰 무리도


따르지 않는다.

[확인할 게 있다니?]

아르웬은 레인의 부탁에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전시회를 제외하면 볼 것도 없는 이 영지에


확인할 게 있다니, 도대체 무엇을 발견한 걸까.

그녀가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레인은 어딘가 들떠있는 듯한 억양으로 아르웬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어쩌면 여왕님이 좋아하실 수도 있는 거예요. 정말 확인만 하고 올게요.]


[...알겠다. 대신 위험한 짓은 하지 말거라.]
[여왕님도 참. 저 못 믿으시는 거예요?]

못 믿으니까 그러지. 아르웬은 속으로 미심쩍어하면서도 레인의 부탁을 들어줬다.

'보험은 들어놨으니까...'

< 104 화 >


매트릭스 극단의 공연은 예고편에서 보여준 것처럼 화려하면서도 뛰어난 연출을 자랑하여 눈과 귀를
즐겁게 만들어줬다.

우선 기본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력이 출중했다. 연극은 관람객들이 직접 보는만큼 현장감이 생생하여


연기력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데, 배우들의 연기력은 흠잡을 곳 없이 훌륭했다.

두 번째는 바로 준비성. 전에 말했지만 나는 제논 일대기를 보다 쉽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몇몇 삽화를


추가했다. 삽화라고 해봤자 등장인물의 외양이나 지도, 그리고 증기 기관차밖에 없었으나 매트릭스
극단은 매우 잘 이용했다.

제논을 연기하는 배우도, 메리를 연기하는 배우도, 그리고 진과 릴리도.

어떻게 분장을 했는지 몰라도 내가 삽화로 추가했던 모습과 완벽히 일치했다. 특히 진은 진짜 마족이라도
섭외했는지 눈동자의 색이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렌즈 같은 게 있나 싶을 정도다.

마지막으로, 매트릭스 극단의 근본이자 아이덴티티 자체인 연출력. 연기력과 분장은 다른 극단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연출력만큼은 어찌하지 못 했다.

채앵! 챙!

"우와..."

연무장에서 봤던 대련처럼, 보호막 너머로 제논을 연기하는 배우와 사크란을 연기하는 배우가 서로
치열하게 전투를 치루고 있다.

제논의 검이 화려하게 움직여 사크란을 압박하고 있다면, 반대로 사크란의 거대한 낫은 간결하지만 한 방
한 방이 위협적이었다.

실제 전투 상황을 방불케하는 모습이 펼쳐지자 나는 저들이 얼마나 준비를 열심히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저 합을 하나 하나 맞추기 위하여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못할 연습을 했겠지.

만약 진짜로 싸우는 거면 그건 그것대로 변태적인 거고.

"인간인데도 이정도 실력이라니, 대단하구나. 누가 가르쳐준 거지?"


"그런 사람이 있어. 본인 이름도 안 가르쳐주고 떠난 스승놈이."

짧고도 길게 느껴지는 전투 이후에는 제논 일대기 속에 등장했던 장면이 이어졌다. 제논은 밝고 가볍지만


듣기 좋은 미성인 반면, 사크란은 노환으로 인해 가래가 낀 듯한, 늙수레한 목소리다.

원작에서도 사크란은 어딘가 꺼림칙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설정이 있다. 그걸 고스란히 투영시킨 극단의
정성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우우웅-

하지만 이뿐만이 아니다. 이 무대는 리루스 악단과 매트릭스 극단의 콜라보라는 걸 증명하듯, 주요
장면마다 리루스 악단이 음악을 연주했다.

방금 전의 전투 당시에도 리루스 악단이 긴박한 음악을 연주했는데 엄청 잘 어울려서 생각보다 놀랐다.


게다가 어쩌 보면 밋밋할 뻔했던 장면에 음악을 추가하니 몰입감이 장난 아니었다.

세계적인 거장 둘이서 하나의 작품을 위한 공연을 펼치면 어찌 되는지, 현재 이들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 원작자인 내 입장에서는... 정말 행복하기 그지없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가 영화화됐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앞으로 다양한 장면들이 쏟아져 나올텐데 과연 그것도 재현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사크란 씨가 어디로 갔다고 하셨습니까?"


"저쪽으로 가셨습니다! 짙은 악마의 기운이 느껴진다면서...!"
"제길! 어서 가자!"

이제 공연은 점점 하이라이트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악마측 세력의 계략으로 마족의 나라, 데빌즈
전체가 어둠에 먹힐 뻔한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이다.

그곳에서 사크란은 그간 쌓아놓았던 경험과 혜안을 통해 어둠이 발생하는 지역에 먼저 도달하고, 그곳에서
개떼처럼 쏟아져나오는 악마들과 사투를 벌인다.

제논 일행도 마찬가지로 사크란과 악마 사냥꾼을 돕지만, 어둠은 걷잡을 수없이 커져가고 결국 사크란이
큰 결단을 내리게 되는 식인데...

"...저거 진짜 마법 아니야?"
"그런 거 같은데?"

개떼처럼 몰려오는 악마를 어떻게 묘사할지 기대를 했는데 정말로 그대로 구현했다. 평야 뒤쪽 전체가
구멍 뚫린 것처럼, 거대한 검은색 소용돌이가 발생하더니 그곳에서 문헌에서만 보던 악마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다만 한계 때문인지 소설처럼 '하늘을 가득 메웠다'라 묘사만큼 많지는 않았고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 소용돌이 하나만으로도 무대 전체를 집어삼킬만큼 거대했다.

"저거 진짜 마법이잖아?"

나와 마리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옆에 앉은 세실리는 다른 의미로 놀란 듯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의문을 드러냈다.

"저게 진짜 마법이라고요?"
"응. 일종의 환영 마법이야. 대상자가 원하는 환영을 만들어내 실체처럼 움직이는거지. 하지만
환영이다보니 일정량의 충격을 받으면 소멸돼. 지금처럼."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대 위의 배우가 메뚜기떼처럼 몰려오는


악마들에게 무기를 꽂아넣을 때마다 새까만 연기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아무래도 환영 마법을 일종의 CG 처럼 구현한 듯싶었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연극에 마법사를,


그것도 저렇게 고퀄리티로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세상은 넓고 이상한 사람은 많다지만 저 마법을 발현한 마법사는 분명 여러모로 독특한 사람인게 분명하다.

"그런데 환영이 소멸되자 검은색 연기로 변한다라..."

옆에서 세실리가 작게 중얼거리며 심상치 않음을 표했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니 무언가 감이
잡힌다는 듯, 손가락으로 볼을 툭- 툭- 두르리고 있다.

이에 무언가 감이 잡히는 게 있냐고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끄으으윽... 흐아아아악!"

거칠디 거친 노인의 괴로운 비명 소리가 내 귀에 박혀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공간이


뚫린 것처럼 거대한 소용돌이 앞에 사크란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저 장면은 분명... 그래. 소용돌이의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지자 사크란이 그걸 흡수하는


장면이다. 원작에서는 마법을 통해 하늘로 날아가 모든 어둠을 빨아들였다.

둥! 둥! 둥!

사크란이 소용돌이를 흡수하기 시작하자 긴장함을 추가하듯, 커다한 북소리가 울려퍼졌다. 원작자인
나조차도 긴장되는 순간인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평생 마족을 위해 헌신한 사크란이지만, 결국 어둠을 이기지 못 하며 악마로 변하는 것이다.

털썩-

"사크란 씨!"
"사크란! 자네 괜찮은겐가!"

소용돌이의 모든 기운을 흡수한 사크란이 무릎을 꿇었다. 악마들과 혈투를 펼치던 다른 일행들은 사크란이
쓰러지자 서둘러 그에게 달려갔지만...

"오지 말거라!"

세상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사크란이 그들에게 크게 외쳤다. 평소 늙수레하고 가래가 낀 듯한


목소리가 아닌, 변조가 된 것처럼 노이즈가 끼어있었다.

아무래도 매트릭스 극단의 단원들은 목소리조차 실시간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정말이지 대단함과 변태 같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그래도 몰입감 하나는 굉장하니 내색하지 않았다. 솔직히 재미있다.

"사냥꾼들이여... 내가 너희들에게 항상 말했었지. 어둠을 받아들이되, 결코 지배당하지 말라고. 만일


지배당한다면 항상 그 어둠을 향해 칼을 겨누라고."

무릎을 꿇었던 사크란이 천천히 일어서며 뒤의 사람들에게 읆조리듯이 말을 건낸다. 변조가 된 듯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몸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한 어두운 기운.

무엇보다... 그의 등에서부터 서서히 형상을 띄기 시작한 악마의 날개.

결국 어둠을 이기지 못 하여 사크란이 악마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악마 사냥꾼 초대 수장으로, 매우


강력한 힘을 지닌 사크란이.

모두가 숨을 죽이며 사크란이 서서히 악마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던
사크란이 서서히 등을 돌렸다.

머리 위에 솟아난 뿔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할 정도로 커지고 붉디 붉은 눈은 피처럼 형형하게 빛나


위압감을 선사했다. 그야말로 진정한 악마의 모습.

"무엇을 망설이는가? 사냥꾼들이여. 너희 앞에 어둠이 있다."


"... ..."
"어서 빨리 무기를 겨누어라! 이게 내 마지막 명령이다!"

마지막 명령이라는 말에 마음을 굳게 다잡았는지 무기를 꽉- 말아쥐는 제논과 사냥꾼들. 그들의 표정에는
긴장과 결의, 그리고 안타까움과 비통함이 골고루 섞여있다.
한때 스승이었던 자를, 동료였던 자를, 그리고 마족을 위한 일생을 바쳤던 자를.

그들은 제 손으로 죽여야한다.

"모르페시여..."

마지막으로 사크란의 기도문과 함께.

"우리를 구원해주소서."

또다른 비극이 탄생했다.

사크란은 기도문 다음으로 일행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조금이라도 싸움을 늦추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아직까지 내면의 어둠과 투쟁을 벌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으나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비장함이 감돌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오직 분노와 증오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이대로 망설이다간은 구원은커녕 사람들이 모두 몰살될 것이라고 말이다.

"으아아아아!"
"안 돼! 크로트!"

사크란이 악마가 되었다는 걸 부정하고 싶었을까. 머뭇거리던 사냥꾼 한 명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사크란에게 무작정 돌격한다.

뒤에서 동료가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이미 사냥꾼은 사크란의 심장을 향해 정확히 검을 찔러넣었다.

아니. 찔러넣으려 했다.

푸악!

눈 깜짝할 사이에 사크란의 팔 하나가 사냥꾼의 몸통을 관통하기 전까지는.

새빨간 피가 사방으로 흩날리고, 꼬챙이에 꿰어진 것처럼 사냥꾼은 몸을 바둥거렸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따로 확인할 것도 없이 즉사였다.

휘익- 쿠당!

사크란은 쓰레기를 버리는 것처럼 팔을 휘둘러 사냥꾼을 내팽겨쳤다. 사크란의 팔에 꿰뚫렸던 사냥꾼의
시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단원 하나가 순식간에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버리자 사냥꾼들이 뒤로 주춤거렸다. 망설임도 망설임이었으나


그들을 압도하던 건 단연코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크란의 무력을 곁에서 지켜보던 그들로서는, 절대로 사크란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악마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도 사크란이며, 사명감을 심어준 것도 사크란이었으니.

이 복합적인 감정이 얽히고 섥혀 사크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선뜻 나설 수 없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제논은 아니다. 그는 딱딱해진 표정으로 사크란을 바라보다가 발을 떼었다.

"제논..."
"... ..."
보라색 머리의 여인, 메리가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지만 제논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벅- 저벅- 걸어갔다.

누구보다 인간적이었던 사크란에게 안식을 전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눈 앞의 강력한 악마를 막기 위해서.

우리의 주인공이 나서는 것이다.

"모르페시여..."

이윽고 검을 빼어든 제논이 작게 읊조리는 것을 시작으로.

"이 자에게 안식을 내려주소서."

5 권의 하이라이트이자 제논 일대기 최고의 명장면이 우리의 눈 앞에 펼쳐졌다.

우우웅-

그와 동시에 연주되는 리루스 악단의 음악. 놀랍게도 리루스 악단이 선보였던 '인생'의 도입부이자
마지막 부분이다.

현악기의 구슬픈 음이, 사크란과 더불어 마족이라는 종족 전체에 대입되어 엄숙하면서도 애잔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족의 비극성을 더욱 강조시키며 짜릿한 전율을 일으켰다.

최고의 극단과 최고의 악단이 하모니를 이루어 차마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보통 전투는 급박하거나 정신없기 마련인데 사크란과 제논 간의 전투는 왠지 모르게 슬퍼보였다. 사실


전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제논은 사크란에게 안식을 주고 싶을 뿐 죽이려는 마음은 없었으니까.

사크란의 무기가 다른 것도 아닌 거대한 '낫'인 이유도 제논의 마음과 비슷했다. 사크란은 악마로 변한
마족을 악마가 아니라 인간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그들을 죽이는 건 살인이나 마찬가지이며, 일종의 장례식을 치뤄주는 것이다.

'...하 씨. 우는 건 좀 부끄러운데.'

영화를 방불케하는 장면들이 속속 이어지다보니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걸까. 리루스 악단의 인생,
그리고 사크란과 제논의 전투가 눈 앞에 펼쳐지자 울컥했다.

실제로 연주에 묻혔지만 곳곳에 흐느낌이 들리는 중이다. 나는 콧잔등을 꾹- 눌렀다가 세실리의 반응을
확인했다. 음악만 들었는데도 눈물을 흘리던 그녀다.

그러니...

"끄흑흑흑... 흐엉..."
"... ..."
"너무... 너무 슬프잖아... 끄흑..."

아예 통곡 수준으로 울고 있구나.

심지어 아까 전에 내가 줬던 손수건을 입으로 꽉 깨물고 있다.

'...그냥 놔두자.'

나는 다시 공연에 집중했다.

*****
모두가 사크란의 비애에 흐느끼거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무대의 관람석이 아닌 무대 위에서 연극을 관람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가르츠,


세실리의 호위기사이자 리퍼의 단원 중 한 명이다.

마음 같아서는 세실리의 옆자리에 앉아 구경하고 싶었으나 리퍼는 언제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지켜야하는 법. 그래서 관람석이 아닌 마법을 통해 하늘에 둥둥 떠다니면서 공연을 관람하는 중이었다.

"...슬프군."

감정이 메말라 보이는 사람이어도 결국 그도 마족. 가르츠는 사크란과 제논의 전투, 그리고 구슬픈
연주가 이어지자 눈꼬리에 맺혀있던 눈물을 훔쳤다.

악마 사냥꾼의 모티브라 할 수 있는 리퍼의 단원이었던 그로서는 남들보다 훨씬 더 몰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망정이지, 평소 그의 무뚝뚝함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깜짝 놀랐을 것이리라.

하지만 마족뿐만 아니라 공연을 지켜보는 사람들 대부분이 흐느끼거나 슬퍼하고 있다. 그만큼 공연의
연출력과 전달력이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대로 공연을 끝난다면 좋겠지만...

"...음?"

가르츠는 저택에 설치했던 방범 마법에 누군가 포착되자 표정을 싹- 굳혔다. 감지된 것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누군가 침입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만약 아이작의 가족이라면 그냥 쉬이 넘길만했지만, 현재 그의 가족들은 전부 공연을 관람하는 중이다.


그러니 낯선 사람이 무단으로 침입했다는 뜻일 터.

황궁에서 파견나온 기사단조차 개인 침실에 들어가는 건 엄격히 금지했으니 침입자가 아니고서야 방범


마법에 감지될리가 없다.

"...개 같은 새끼."

가르츠는 진심어린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저택을 향해 날아갔다.

이제 곧 있으면 하이라이트인데 이 순간을 방해한 놈이 누군지 정말 궁금해졌다.

< 105 화 >

한편 공연이 이제 막 시작되었을 시간, 마이샬 저택.

마이샬 저택에는 황궁에서 파견나온 기사단이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며 경계하는 중이다. 전시회가
마이샬 영지에 개최되는만큼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기사단의 배치는 대략 이렇다. 우선 각 가족 구성원의 침실 문 앞에 두 명의 기사들이 근무를 서는 중이고,


중요한 문서나 물건이 보관돼 있는 사무실이나 지하실 입구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소수의 인원이 저택을 지키고 있으나 그들은 레오르트, 리나 남매가 직접 지목하여 파견을 보낸
기사단.

한때 드래곤조차 때려잡았다던 호크도 훌륭하다며 치켜세울 정도이니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아. 나도 축제 가고 싶은데. 나도 누구보다 잘 놀 수 있는 자신이 있는데."
"어쩔 수 있겠습니까. 그냥 까라면 까야죠."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었던지라 축제에 참여하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군인은 상명하복이 원칙이지만


가끔 명령을 거부하고 싶었다.

특히 코 앞에서 축제가 벌어지는데 본인들은 저택을 수호해야하니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저희 임무 교대는 언제입니까?"


"근무 투입된지 10 분밖에 안 지났다."
"아. 젠장."

후임 기사는 선임의 대답에 탄식했다. 이 문을 지킨지 30 분은 지난 것 같은데 시간 참 더럽게 안 간다.

"근데 저택에 뭐가 있다고 저희가 경계를 서야하는 겁니까?"


"글쎄. 전시회가 이 지역에서 열리니 뭐가 있다 생각하는 놈들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걸 방지하는
거겠지.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난 차라리 호크 경이나 한 번 보고 싶네."
"호크 경이 그렇게나 강합니까?"

후임의 질문에 선임 기사는 팔짱을 끼며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넌 젊으니까 모를 수도 있겠네. 넌 혼자서 드래곤을 때려잡은 사람을 본 적 있냐? 네가 그 모습을 직접


봤어야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나처럼 기사가 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리고 후회했죠?"
"조금은."

사람 사는 곳은 어딜 가도 비슷하다고, 아이작이 이 광경을 보면 익숙함이 느껴졌을 것이다. 어떻게든


시간이 빨리 지나가도록 만들기 위해 선임과 후임이 서로 잡담을 떠들며 근무를 서는 모습.

물론 그렇다고 근무 태만이 아닌 것이, 그들은 대화를 하면서도 탐지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특정 범위


내에 낯선 사람이 침입하면 곧바로 그들의 감각에 감지될테니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에서지, 다른 종족 특히 마족이나 엘프이라면 이야이가 달라진다.


마법을 사용한다면 그들의 감각을 속이는 건 물론이고 공간과 공간 사이를 이동하여 벽을 통과할 수도
있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닌데..."

마이샬 가문의 가주, 호크가 일처리를 하는 사무실 안.

오직 달빛만이 비추는 방에서, 한 인영이 책상을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있었다.

사무실 입구에 기사 두 명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안쪽에 침입자가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 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침입자는 인간이 아니라 이종족, 그것도 대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다크


엘프였으니까. 엘프는 태생적으로 마법에 특화되어 있지만 다크 엘프는 은신 능력이 몇 배나 뛰어나다.

평범한 도둑이 몸을 숨긴다면 적어도 탐지 기술 혹은 마법에 적발되겠지만, 다크 엘프는의 은신술은 궤를


달리하는 수준이다.

몸을 숨기는 것 정도가 아니라 공간과 하나로 동화되어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숙련된 다크
엘프의 은신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인간 기준으로 최소한 기사단장급 능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것조차 '감지'하는 거지, 다크 엘프는 한 명 한 명이 산전수전 거친 노련한 전사들이라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이곳도 아닌가?"

이번 아르웬의 호위로 나오게 된 다크 엘프, 레인은 자기가 조사했던 서류를 모두 원래대로 되돌리면서
의문을 표했다.

현재 그녀가 찾고 있는 건 놀랍게도 제논 일대기의 초고.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아르웬에게 접근했던 빨간 머리의 남자가 했던 말이 뇌리에 맴돌았다.

'제논은 제논 일대기를 쓴 작가의 필명이야. 그리고 그 빨간머리는 자기가 제논이라고 말했고.'

아이작과 마리가 서로 대화를 나눴을 때다. 아이작 딴에는 속삭이듯이 말했으나 기본적으로 감각이 뛰어난
다크 엘프에게는 생생하게 들렸다.

처음에는 불순한 의도로 아르웬에게 접근한 건가 싶어 경계했으나 의도치 않은 소득을 얻었다.

'역시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어.'

인간치고는 준수한 외모와 뛰어난 지식을 자랑했지만 아르웬에게 비빌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작과 친분이
있던 것으로 추측되는 마족이 가장 신경 쓰였다.

과연 저 인간에게 무엇이 있길래 저만한 강자가, 그것도 제논 일대기 출간 전까지 악마로 차별받던 마족이
붙어있는 것일까.

겉으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으니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제논 일대기의 저자라면 모든 게


달라진다. 정말로 그가 제논이라면, 그 마족이 호감을 가진 것도 설명이 된다.

그렇다는 뜻은 그 여마족도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 터. 이것마저도 추측이지만


퍼즐이 딱- 딱- 들어맞는 기분이라 점점 확신에 가까워지는 중이다.

'증거가 필요해. 증거가.'

그러므로 레인은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이 저택에 침입했다.

만약 이 저택에서 초고를 찾는다면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그 후로 아르웬에게 보고를


올리면 된다.

지난 번에는 뭣도 모르고 초고를 훔쳤다가 아르웬에게 크게 혼나고, 더 나아가 장로에게도 쓴소리를


받았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아르웬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일을 벌렸는데 그 결과가 좋지 못한 방향으로
작용했다.

그러니 레인으로서는 반성의 의미로 어떻게든 증거를 찾아야한다. 증거를 찾게 된다면 몰래 훔친 초고를
돌려줄 수도 있을 뿐더러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지니까.

물론, 초고는 확인만 하고 훔치지는 않을 것이다. 호되게 혼난만큼 제논 일대기의 초고가 어떤 파급력을
지니고 있는지 몸소 실감했기에 어리석은 선택은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

'생각 외로 방비도 허술해서 다행이다.'

다행히 저택의 경계는 레인의 기준에서 허술한 편이었다. 방범 마법이 깔려있었지만 다크 엘프의 힘을
이용하면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대신 벽을 통과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할 때는 조심스러웠다. 혹시나 감각이 뛰어난 인간이 감지할 수도


있다.

'여기는 전부 뒤졌고... 방이 많아서 헷갈리네.'

레인은 난감함에 머리를 벅- 벅- 긁적였다.

아르웬의 후원 덕분에 차차 경험을 늘려가고는 있지만 인간 저택에 침입한 건 처음이었기에 구조를 아예


모르고 있었다.

방 하나 하나 세세하게 조사해도 계속해서 허탕만 치다보니 점점 답답해졌다.

'이다음은...'

그녀는 문이 아니라 벽 쪽을 바라봤다. 벽 따위야 통과하면 그만이니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이윽고 레인은 재차 서류를 조사하다가 제논 일대기와 관련된 건 없다고 확신. 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벽에 막혀 지나갈 수 없겠지만, 그녀는 다크 엘프. 벽 따위야 간단한 마법으로


아무런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다.

파앗!

텔레포트나 워프처럼 장거리 이동이 아닌, 짧은 공간을 이동하는 마법 블링크(Blink).

단 한 번의 깜빡임을 통해 벽 너머로 이동한 레인은 방의 전체적인 모습을 둘러봤다. 방금 전이


사무실이었다면, 지금은 손님들이 머무는 휴식실인 모양이다.

'여기에는 없을 것 같네.'

그녀는 대충 눈으로 훑어보고는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계속해서 방을 옮겨다니다보니 마침내


누군가의 침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부부가 아닌 한 사람이 머무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간소한 외양이 특징적이었다. 게다가 은은하게
남아있는 퀴퀴한 책 냄새와 남자 특유의 체향이 코를 찔렀다.

'그 빨간 머리의 방이다!'

여자의 방은 기분 좋은 향기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곳은 그런 향이 전혀 나지 않았다.

레인은 아이작만 만났지 그의 형제 브리스는 만나지 않았지만 책 냄새가 진동하는 걸 느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특히 이건 아르웬에게서 나던 체향이었으니 분명하다.

이어서 그녀는 흥분된 마음으로 방 내부를 둘러봤다. 침대와 화장대, 그리고 책상은 작은 편이었으나
책장이 무수히 많았다.

자연히 책들도 다른 방들에 비해서 무수히 많았다. 레인은 아이작이 아르웬처럼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빨간 머리의 방이 맞아.'

레인은 책상 위에 놓여있는 책을 발견하고 재차 확신을 가졌다. 이 책은 서점에서 아르웬이 추천해줬던


서적이었으니.
이제 남은 건 책상을 조사해서 초고를 찾는 일 뿐. 그녀는 본인이 어떤 마법에 포착된지 전혀 인지하지도
못 한 채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무방비로 노출된 서랍부터 살펴봤으나 당연히 나오는 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뭘 넣지도


않았는지 텅 비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 남은 건...'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는 서랍 뿐. 레인은 설마하는 눈초리로 서랍을 지그시 응시했다.

사람들에게, 특히 마족에게는 국보로 지정되다 못해 성물로 취급될 초고가 이 안에 잠들어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허술해도 너무 허술하다.

그래서 정말 이곳에 있는지 의심이 갔지만, 차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자물쇠로 봉인되어
있어서 해제하기도 쉽다.

이에 레인은 쪼그려앉아 자물쇠를 손으로 잡았다. 열쇠나 마법 같은 건 필요없다. 마나를 통해 잠금을


해제하면 끝인 수준으로 얄팍한 자물쇠다.

딸깍-

10 초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서랍을 봉인하던 자물쇠가 풀렸다. 레인은 혹여 다른 장치가 있을까봐


여러번 확인한 후 조심스레 자물쇠를 빼냈다.

이제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 서랍장.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가 서랍장을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한가득 쌓여있는 원고지를 발견하자 레인의 만면에 미소가 새겨졌다. 설마설마했는데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진짜지? 진짜 초고가 맞지?'

레인이 잔뜩 흥분한 심정으로 맨 위에 있는 초고를 꺼냈다. 최근에 발간된 카이르 외전의 도입부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로서 아이작이 제논 일대기의 작가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1 권의 초고의 필체와 똑같아서 따로 확인할


필요도 없다.

'다행이다. 이걸로 여왕님이 안심할 수도 있겠어.'

도둑도 아니고 남의 저택에 멋대로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면 또 혼나겠지만, 그래도 묵혀놓았던 짐은


덜어줄 수 있을 것이리라.

이에 레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초고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려던 찰나였다.

콱!

"케흑!"

부지불식간 누군가 그녀의 뒷덜미를 낫처럼 낚아채 바닥에 꽂아버렸다. 레인은 미처 인지하지도 못한 채
단말마를 지르며 땅바닥과 키스할 수밖에 없었다.

화들짝 놀란 레인이 아둥바둥거리며 빠져나오려고 시도했지만, 이상하게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목을 붙잡힌 순간부터 이미 몸 전체가 제압당한 것이다.
본래 목이란 뇌와 몸통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누구인지 몰라도 마나를 통해 목을 마비시킨 것이 틀림없다.

'마, 말도 안 돼. 대체 누가...'

이정도 능력이면 다크 엘프 내에서도 숙련된 전사만이 할 수 있다. 세상 경험이 거의 없던 레인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어떻게든 자신을 제압한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레인을 제압했던
사람이 작게 읊조렸다.

"그 엘프 곁에 있던 녀석이었군."
"크으으..."
"네놈들은 남의 저택을 터는 취미라도 있는건가?"

세실리의 호위 기사, 가르츠였다.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는 현재 매우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우선 세실리가 지정했던 곳에 침입자가 들어와서 1 차적으로 화가 났고, 레인 하나 때문에 하이라이트를


눈 앞에서 놓쳐서 2 차적으로 화가 났다.

복면으로 입 부근을 가리고 있었으나 잔뜩 찡그린 미간으로 하여금 그가 얼마나 불쾌해하고 있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공주님. 저택에 침입자가 있는데 다크 엘프입니다.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기습을 통해 레인을 손쉽게 제압한 가르츠는 텔레파시를 통해 세실리에게 전언을 보냈다. 세실리는
침입자가 나타났을지 마음대로 처리해도 된다 지시했으나 다크 엘프는 이야기가 달랐다.

마족과 다크 엘프 사이는 좋다고 말할 수도,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었으니. 하지만 다크 엘프를 건드리게


되는 순간 귀찮아지는 건 변함이 없다.

다크 엘프의 전사들은 리퍼만큼 한 명 한 명이 강한 존재들이며, 외교와 더불어 내실을 다져야하는 헬리움


입장에서는 상당히 껄그러운 입장이었다.

비록 다크 엘프가 알븐하임에서 떨어져 나온 추방자들이라지만, 아르웬이라는 엘프 곁에 있는 걸 보면


심상치 않았다.

[...그 엘프 여왕 곁에 있던 아이죠?]

가르츠의 보고에 공연에 집중하고 있던 세실리가 답변을 보냈다. 그녀도 아르웬이 알븐하임의 여왕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이에 가르츠는 어떻게든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레인의 목을 더욱 강하게 쥐면서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왜 그 저택에 침입했는지,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들어왔는지만 캐내고 발락 경이 알아서 처리하세요.
이건 엄연히 그쪽에서 잘못한 것이니 아무 말도 못 할테니까.]
[알겠습니다.]
[아. 대신 저택에서 처리하지는 말고 밖에서 처리해주세요. 괜히 피가 튀면 그 분께서 의심을 품을지도
모르니까.]

세실리는 전적으로 가르츠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간단한 지시만 내리고 다시 공연에 집중했다. 곧
있으면 하이라이트가 펼쳐지기에 정말 급한 일이 아닌 이상 저택으로 갈 일이 없었다.
가르츠도 세실리와의 연락이 끊기자마자 레인을 내려다봤다. 현재 그녀는 힘이 모두 빠져서 저항을 멈춘
상태였으며,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어린 아이가 처연하는 떠는 모습은 동정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했지만, 가르츠에게는 의미가 없다. 마족과
더불어 다크 엘프처럼 주변에게 배척받는 존재들은 어릴 때부터 살생을 저지르는 일이 태반이다.

그러니 레인을 어린 아이로 볼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전사라 보아야 옳다. 아쉽게도 경험이 뼈저리게
부족한 탓에 이 꼴이 났지만 말이다.

"묻겠다. 어째서 이 곳에 침입한 거지?"


"... ..."

가르츠의 무미건조한 질문에 레인은 덜덜 떨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죽음의 두려움이 그녀를 육체를 지배했기 때문에.

하지만 가르츠는 개의치 않고 더욱 강하게 압박하면서 살기어린 목소리로 위협했다.

"앞으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네 손가락 하나 하나 자르겠다."


"차, 찾는 게 있어서..."
"찾는 거?"
"초고..."

초고라... 가르츠는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원고지에 시선을 옮겼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원고지였지만, 모험을 하면서도 저택에 들어온 걸 보면 필시 무언가가 있을 터.


이에 가르츠는 한 손으로 목을 강하게 짓누르면서 초고를 가져왔다.

뒤이어 초고를 한 줄 한 줄 읽은 가르츠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발간된 카이르 외전도
읽었기에 이것이 어떤 초고인지 눈치챈 것이다.

'...공주님이 그 인간에게 호감을 가진 이유를 알겠군.'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제논 일대기의 팬이라지만 현재는 임무 중이다.

그래도 마족에게 소중한 보물인 건 변하지 않아 초고를 가지런히 바닥에 놓았다. 이 검은 귀쟁이 놈을
처리한 뒤에 다시 돌아와 정중하게 돌려놓을 계획이다.

"이 초고를 통해 무엇을 할 생각이었지?"


"그게..."

이것만큼은 대답하기 싫었는지 망설이는 레인. 그와 동시에 가르츠의 눈매가 사나워지며 허리춤에
걸려있던 단검을 꺼내들었다.

레인은 단검이 달빛에 반사되어 눈을 찌르자 기겁하며 모조리 실토하기 시작했다. 옛날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았던 그녀지만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는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제, 제가 훔친 초고를 돌려드리려 했어요! 저, 정말이에요!"


"...역시 네놈들이 훔친 거였구나."

역효과만 발생했다. 다크 엘프가 초고를 훔쳤다는 건 어디까지나 심증이었지 물증은 없었다.

하지만 레인의 증언을 통해 확실해졌다. 비록 독단으로 벌인 일인지, 아니면 알븐하임에서 벌인 건지


모르겠지만 초고를 도난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이런 덜 떨어진 애새끼가 호위라니... 보아하니 여왕이랑 친한 것 같은데...'

공식적으로 성명을 내지 않고 몰래 왔다고한들 여러모로 자격이 부족했다. 지켜야하는 군주는 내팽겨치고


독단적으로 일을 벌렸으니 호위 기사로서 모두 탈락이다.

가르츠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두려움에 떠는 레인을 바라보다가 단검을 허리춤에 꽂았다. 일단 저택에서
빠져나와 으슥한 곳으로 이동한 뒤 처리할 계획이다.

이윽고 그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잠깐' 방심했을 찰나였다.

시잉-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가르츠의 목덜미에 은빛 단검이 겨누어졌다. 검면이 달빛에 반사되어 찬란한 빛을
발했다.

과연 누구이길래 가르츠의 방범 마법에, 그리고 감각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가르츠는 자기


목덜미에 가까이 접근한 단검을 보다가 묵묵히 읊조렸다.

"그래..."

그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도 가르츠의 목에 겨눈 단검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머지않아 가르츠는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자신처럼 복면으로 입을
가렸지만, 화려한 미색을 띄는 미녀라는 건 확신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구릿빛 피부와 더불어 흰색 머리카락, 반쯤 잘린 귀.


마지막으로 레인과 달리 어른이라는 걸 보여주듯 성숙한 자태를 뿜내는 몸매까지.

아르웬이 레인을 데려오면서 안심할 수 있던 이유이자 보험.

"여왕이 미쳤다고 애새끼를 호위로 데려오진 않았겠지."

가르츠는 또다른 다크 엘프의 등장에 피식 웃었다.

< 106 화 >

비록 달빛 하나만이 비추는 침실 안이었지만, 가르츠는 전조도 없이 등장한 다크 엘프의 외모를 재빠르게


훑어봤다.

마족들은 기본적으로 어둠을 파훼하는 능력을 갖고 있어 이런 암흑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리디 어린 레인과 달리 성숙한 몸매를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으며, 구릿빛 피부와 대비되는 흰색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가 눈에 띄었다.

마지막으로 반쯤 잘려나간 듯한 그녀의 귀에는 귀걸이가 걸려있었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자면 다크 엘프는 특정 나이를 먹을 때마다 귀걸이를 차는 풍습이 있다고 들었다.
레인의 귀에는 아무것도 없는 반면 눈 앞의 여인은 정확히 3 개의 귀걸이를 차고 있다.

적어도 레인과 달리 단련된 전사일 확률이 높다는 의미. 마법과 감각을 모두 속이고 남몰래 접근한 걸
보면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그 손 놓는 것이 좋을거다."
한동안 피가 말리는 대치 상황이 이어지고 있을 때 여자가 단검을 더욱 가까이 대며 싸늘하게 말했다.
허스키하면서도 낮은 톤의 목소리로 하여금 성인으로서의 완숙미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이와 더불어 형형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에는 짙은 적의가 담겨있다. 아이작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라면, 시리스의 눈은 맹수처럼 위협적으로 빛나고 있다.

하지만 가르츠는 목에 단검이 더 가까이 다가와도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피식거리며 도리어
어이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너희 다크 엘프라는 족속은 하나 같이 이상한 취미가 있군. 한 놈은 물건을 훔치고, 또 한 놈은 가만히


지켜보기나 하고."
"... ..."
"이, 이 목소리는... 시리스? 시리스 언니?"

여전히 가르츠에게 목이 짓눌리고 있던 레인이 꿈틀거리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무래도 새로 나타난 다크


엘프의 이름이 시리스인 모양이다.

또한 레인이 아는체를 하는 걸 보면 분명 안면을 튼 사이일 터. 가르츠는 둘의 사이를 예측하다가 지금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갔다.

지금 중요한 건 레인에 대한 처우, 그리고 만일에 대비하는 것이다. 우선 시리스라는 다크 엘프가 등장한
이상 가급적 전투를 피할 생각이다.

'초고가 손상되면 안 된다.'

이미 제논 일대기의 초고라는 걸 확신한 이상 자그마한 손상조차 가해지면 절대 안 된다. 마족에게 있어서


국보로 지정되다 못해 세대와 세대를 거쳐 보호해야하는 물건이었으니.

그러기 위해서는 시리스의 목적을 파악하고, 레인에 대한 처우를 결정지어야 한다. 이에 가르츠는 레인의
목을 더욱 강하게 짓눌렀다.

"악...!"
"...당장 그 손을 놓지 않으면 좋은 꼴은 못 볼 거다."

보아하니 시리스라는 다크 엘프는 레인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가르츠가 더 강하게
압박하자마자 시리스가 살기가 스멀스멀 풍겨나왔으니.

가르츠는 적의를 넘어선 무시무시한 살기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움을 유지했다. 겉으로 보면 자신이 불리해
보여도, 주도권은 엄연히 자신에게 있다.

무엇보다 목이 베어지는 순간 레인의 가녀린 목은 힘없이 부러질 것이다. 목숨을 교환하는 것이나 이미
세실리가 모든 정황을 속속 파악하고 있으니 뒷일을 맡기면 그만이다.

비록 다크 엘프와 마족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지겠지만 자신은 헬리움을 수호하는 리퍼. 목숨 따위는


기꺼이 내어줄 용의가 있다.

"지금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군. 네가 내 목에 겨눈 검부터 떼면 놓아줄 생각은 있다."


"... ..."
"그리고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이건 순전히 이 애새끼가 잘못을 저질렀고, 나는 그걸 막기 위해
제압한거다. 정당방위라고 보는데?"

가르츠가 조목조목 팩트를 집어내자 시리스가 미간을 좁혔다. 하나 같이 죄다 맞는 말이라 무어라 반박할
수가 없다.
이건 엄연히 레인이 무단으로 남의 저택에 침범하여 벌어진 일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지만 이건
시리스조차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 애새끼가 훔치려던 게 뭔지는 알고 있나? 설마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 ..."
"침묵은 긍정으로 받아들이겠다. 너도 알다시피 이건 우리 마족에게 있어서 신이 내려주신 은총이나
다름없는 물건. 그걸 훔치려고 한 죄는 목숨으로 받아야 마땅하다."
"후, 훔칠 생각은 없었어요! 전 정말로 확인만 하려고...! 악!"

레인이 억울함을 담아 항소했으나 가르츠는 그녀의 목을 누르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서늘한 눈빛으로 레인을 내려다 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 헛소리로 받아들이는 법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네가 한 행위는 절대 용납받지 못


해. 네가 저지르던 행위는 우리 헬리움에게 선전 포고나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게다가 전에는 1 권의
초고도 훔쳐서 좋은 명분도 있지."
"그, 그건... 여왕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애새끼 아니랄까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다크 엘프의 교육이 어떤지 안 봐도 뻔해."
"... ..."

연이은 팩트 폭격에도 시리스는 아무런 반박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하지 못 했다.

레인은 순전히 좋은 의도로 초고를 훔치고, 그 후로 상황이 꼬여버리자 초고를 되돌리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그때까지는 시리스도 제지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봤다. 방식이 잘못되었지만 어쨌거나 '책임'을 지려는
모습은 나름대로 괜찮았으니.

그리고 만약 레인이 초고를 훔치려 했다면 곧바로 제지할 생각이었다. 지난 번에는 가벼운 징계로
끝났으나 이번에도 잘못을 저질렀다면 '엄벌'에 처해졌을 것이리라.

다행히 초고를 훔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지만 상황이 꼬일대로 꼬인 바람에 이 사단까지 와버렸다. 유독
이 방에만 고도로 설정된 방범 마법이 설치돼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의심스러웠는데 너무 늦어버렸다.

그렇다면 현재 시리스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다. 그녀는 바닥에 꽂혀있는 레인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단검을 서서히 물렸다.

"...원하는 게 뭐지?"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이제 주도권은 완벽히 넘어왔다. 가르츠는 복면 속에 감추어진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뒤이어 그는 레인의 목을 압박하던 손에 힘을 슬며시 풀고는 시리스를 향해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덜 떨어진 애새끼의 목숨을 가져가고 싶지만..."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그래. 그렇게 나오겠지."

이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가르츠는 무던하게 넘겼다. 그럴수록 불안해지는 건 시리스였다.

레인은 엘프 여왕, 아르웬과의 연결 고리다. 아르웬은 여태까지 배척받던 다크 엘프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 첫 번째 단계가 레인의 후견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면 벌써부터 그 단계가 삐걱거리고 있다. 그것도 아르웬이 아닌 레인의 잘못 때문에.
비록 고향은 자신들을 버렸지만 다크 엘프는 여전히 고향을 향한 마음이 남아있다. 만일 아르웬의 집권
동안 알븐하임으로 돌아가지 못 한다면 다음 세대까지 기다려야 할 가능성이 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공주님.]


[흠...]

시리스가 속으로 불안해하는 동안, 가르츠는 세실리에게 텔레파시로 현재 상황을 모두 전달했다.


시리스와 대화하는 동안 세실리에게 속속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세실리도 공연에 집중한 것도 잠시,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 같자 진지한 마음으로 임했다. 곧 있으면
하이라이트 중의 하이라이트지만 다크 엘프의 처우가 더 중요하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잘못은 잘못이지. 애한테 책임을 묻기 싫으면 어른에게 돌려주면 되잖아?]
[하지만 이 년들은 다크 엘프입니다. 마음 속으로 칼을 갈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칼이 누구를 겨누느냐에 따라 우리의 반응도 달라지겠지. 은인에게 겨누어지면 숨기는 거고 뭐고 다
퍼뜨릴 거야. 그러면 뭐... 알지?]

세실리는 뒤를 말하지 않았지만 가르츠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현재 제논 일대기는 완결조차 나지 않았는데 전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휴재를 한


것만으로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할 정도인데 여기서 초고의 범인이 들통난다면?

알븐하임에게 외교적으로 무시무시한 압박이 가해지는 건 물론, 오늘 있었던 일까지 밝혀지는 순간


전쟁까지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아이작이 전쟁을 멈춰달라고 하면 곧바로 멈추겠지만 그만큼 사안이
심각하다는 의미다.

가르츠는 세실리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시리스를 노려봤다. 시리스도 여전히 싸늘한 표정이었으나 황금빛
눈동자 속에 일말의 불안감이 심어져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간단하다. 너희가 이 년의 목숨을 바치기 싫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보여주면
된다. 설마 잘못을 저질러놓고 뻔뻔하게 굴지는 않겠지?
"... ..."
"여왕에게 전달해라. 모든 공연이 끝나고 우리가 헬리움으로 복귀했을 때, 이 꼬마랑 함께 헬리움에
찾아오라고. 여왕이 하는 사과는 받지 않겠다. 사과는 우리가 아닌 은인에게 해야하는 것이니. 너희는
책임을 지면 그만이다."

실제로 아르웬이 세실리에게 무릎을 꿇으며 사과해도 큰 의미가 없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초고를 보호하는
것이지, 실제로 피해를 볼 뻔한 건 아이작이다.

그러므로 이건 일종의 협박성 거래나 똑같다. 아르웬과 다크 엘프 쪽에서 레인에게 엄벌을 내린다면 아무
일없이 넘어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이작에게 모두 말할 거라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결과가 어떨지 안 봐도 뻔하다. 전쟁 직전까지 가버리다가 알븐하임이 외교적으로


큰 피해를 보고, 더 나아가 다크 엘프와의 관계 또한 파탄날 터.

시리스로서는 그것만큼 막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면 레인을...'

알븐하임에서도 법률이 존재하는 것처럼, 다크 엘프 내에서도 '규율'이 존재한다. 사소한 문제라면


며칠동안 금식을 시키거나 벌을 받겠지만, 이건 무려 종족의 명운이 걸린 사태다.

그리고 레인 뿐만 아니라 아르웬에게도 큰 피해가 갈 것이다. 평소 아르웬은 다크 엘프와 규합해야한다는


사명감으로 레인에게 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최악의 상황이 터져버렸다.

다크 엘프 내에서는 최소 몇 백년간 감옥에 썩어야 하고, 아르웬으로서는 레인을 추방시켜야 죄를 씻을 수


있다.

[제안을 받아들이거라.]
"?!"

시리스가 복면 아래로 숨겨진 입술을 꽉 깨물고 고뇌하고 있을 때, 뒤늦게나마 마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르웬이 그녀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시리스는 갑작스러운 아르웬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것도 잠시, 피곤에 찌들어 있는 듯한 그녀의 허락에 두


번 놀랐다.

[여, 여왕님? 언제부터...]


[너와 레인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마법으로 파악했거늘... 설마 정말로 이 영지에 초고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구나. 내 불찰이다.]

아르웬으로서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아이작이라는 부분에 충격을 받고, 두 번째로
레인이 그 초고를 확인하기 위해 잠입했다는 사실에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끼어들긴 했으나 후에 있을 폭풍이 무시무시하게 닥쳐올 터. 재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자리를 뜨는 편이 이로웠다.

[하, 하지만...]
[아니. 이건 나와 레인이 잘못한 일이다. 곧바로 알븐하임으로 복귀할 준비를 할테니 한시라도 빨리
레인을 데리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아르웬이 결정을 내린 듯했다. 시리스는 단검을 완전히 거두고는 가르츠를 바라봤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현명한 결정이군."

꾹-

시리스가 결정을 내리자 가르츠는 레인의 목을 압박하던 손에 힘을 완전히 풀었다. 물론 풀면서 그녀의
뒷목을 엄지 손가락으로 누르는 건 잊지 않았다.

도청 마법이 아닌, 훗날 있을 접선을 위한 헬리움의 좌표였다. 그러므로 아르웬이 헬리움이 오기


위해서는 레인까지 대동해야한다.

"어, 언니..."

레인은 몸이 자유로워지자 울먹이면서 시리스에게 오도도 달려가 그녀의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시리스는


두려움에 먹혀 올망졸망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을 착잡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과연 그녀는 앞으로 얻게 될 고통을 알고는 있을까. 어린 아이라 해도 대량살상마법을 발동시키는


아이템을 발동시킨거나 다름없었으니 그 죄를 속죄하기 위한 규율이 레인을 기다리고 있다.

시리스는 레인의 밀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다가 가르츠를 바라보며 특유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약속은 지키겠다. 시기는?"


"공주님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후라고 말씀하셨다. 그때까지 그 애새끼에게 처벌을 내려주고,
우리에게 알려줬으면 하는군."
"...알겠다."
"그럼 어서 썩 꺼져라.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은 게 좋을 것이다. 그때는 곧바로 목숨을
끊을테니."

저벅- 저벅- 저벅-

가르츠의 축객령에 시리스는 레인을 데리고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이윽고 달빛조차 비추지 않은 어둠
속에 완벽히 스며들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레인과 달리 탐지 마법에서조차 감지 되지 않은 완벽한 은신술. 가르츠는 실로 무시무시한 다크 엘프의


능력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후우... 모두 끝났습니다.]
[수고했어. 이제 정리하고 돌아와.]

마지막으로 세실리에게 보고를 한 가르츠. 그는 세실리의 격려를 듣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그녀에게 물었다.

[그... 외람된 말씀이지만 현재 공연은 어떻게 됐습니까?]


[응? 이미 다 끝났는데?]
[... ...]
[네가 봤어야 했는데 너무 아쉬웠어. 마지막에 성악대가 합창을 불렀는데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났다니까?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을 정도야.]

그 검은 귀쟁이 새끼들 죽일 걸 그랬나. 가르츠는 이를 악 깨물며 분노를 삼켰다.

하지만 갈고 닦은 절제를 통해 분노를 다스렸다. 뒤이어 그는 바닥에 어지러진 초고를 정리하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다행히 구겨지지는 않았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복원 마법을 사용해야겠...'

가르츠는 초고를 정리하려다 말고 멈칫거렸다. 정말로 이곳이 제논 일대기가 집필되는 곳이라면, 아직


발간되지 않은 원고도 있지 않을까?

비록 아이작이 휴재를 결정했다고 했지만 외전이 따로 나온 것처럼 다른 책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안 돼. 참아야 한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새를 못 참고 원고를 찾았겠지만 가르츠는 마족, 그것도 인내심 하나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리퍼의 단원이다. 그는 원고를 찾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억누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은 엉망이 될 뻔한 초고를 소중히 책상 서랍에 넣는 것부터 우선이다. 어차피 신간은 몇 년 내로


나올테니 그때까지 진득히 기다리면 끝이다.

'아무리 그래도 자물쇠로만 보관하는 건 좀 아닌데... 공주님께 건의해야겠어.'

오늘 같은 사태가 다시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무엇보다 아이작의 정체를 파악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속속 등장하는 중이다.

그 일을 정면으로 맞이한 가르츠로서는 살짝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초고의 위치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자물쇠까지 단단히 봉인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쾅!

"악!"

급하게 일어나려던 탓일까. 가르츠는 책상 모서리에 머리가 찍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마족이라 해도 책상 모서리에 찍힌 것만큼은 어쩌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히 방음 마법을 진작에 펼치고 있던터라 바깥의 기사들에게 들키진 않았지만, 얼얼한 고통에
한동안 침음성을 흘렸다.

"끄으으... 짜증나는군..."

오늘따라 재수가 없는 가르츠였다.

< 107 화 >

긴박한 전투가 이루어지는 무대는 점점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다. 사크란은 점점 지쳐가는지 있는 힘


없는 힘 모두 짜내어 제논을 압박하는 중이고, 제논도 어떻게든 사크란에게 안식을 선사해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중간에 제논이 밀리는 듯하자 진으로 추정되는 마족 한 명이 뒤늦게 난입하여 합을 이루기도 했다. 5
권부터 제논과 진 듀오가 하나가 되어 싸우기 시작했으니 적절한 타이밍이다.

"흐아아아아!"

결국 억누르고 억눌렀던 악마의 힘을 모두 표출시키기 시작한 사크란. 얼마나 많은 힘을 절제하고


있었는지 그에게서 새까만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제논과 진도 작정했는지 모든 힘을 개방하여 혈전에 대비했다. 이윽고 악마화가 모두 끝난


사크란이 그 둘에게 달려갔을 때 쯤, 리루스 악단이 또다른 연주를 선보였다.

바이올린의 높게 올라가는 음색으로 끝을 맺는 건 똑같았지만, 그 후에 새로운 곡이 이어졌다.

-아아. 마족이여. 어둠 속에서 태어나 빛을 갈구하는 자들이여.

여태까지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성악대의 장엄하고도 서글픈 코러스. 그와 동시에 최후의 전투가
이어지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나는 인생과 성악대의 합창에, 그리고 리루스 악단의 준비성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리루스가 어째서
맛보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도대체 이들은 이 콜라보레이션을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 것일까. 글만 쓰는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못 정도다.

-비극의 파도를 헤쳐나가 뜻을 함께할지어니.


-어둠에 저항해 빛을 향해 나아가리라.
-신이시여. 우리에게 희망을 내려주소서.
-신이시여. 우리에게 안식을 내려주소서.
-부디 인간으로 죽을 수 있기를 소망하리라.
-아아아아아.

합창은 빠르지 않고 느릿느릿하게 이어졌으며 마지막은 절규에 가까운 합창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대 위의 전투를 끝나지 않았는데 리루스 악단은 한 번 더 합창을 반복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보통 전투는 긴박감과 긴장으로 인해 눈을 뗄 수 없지만, 이 무대는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하여 한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몰입감이 무시무시함을 넘어서 어째서 이들이 세계
최고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

이 엄청난 무대를 일궈낸 두 집단이 정말로 중세 시대에 어울리는 인재들인지 의심스러웠다. 이정도
실력이라면 전생의 문화계에서도 전혀 꿇리지 않았다.

촤악!

"끄헉! 끄으으으..."

손에 땀이 흥건해지는 비극적인 전투가 드디어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진의 노력 덕분에 빈틈을


발견한 제논이 사크란의 상체를 사선으로 깊게 베어낸 것이다.

그동안 누적된 데미지 때문인지, 악마의 회복력으로도 사크란의 상체에 길게 베어진 자상은 복구되지
않았다. 그리고 제논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두 손으로 검을 꽉 말아쥔 이후, 비틀거리는 사크란의 심장을 향해 정확히 검을 찔러넣었다.

푸욱!

"...쿨럭!"

심장에 검을 꽂히자 새까만 피를 토해내는 사크란. 그는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심장에 꽂혀있는 검을


바라보다가 선선히 고개를 들었다.

제논은 사크란이 고개를 듦으로서 시선을 마주치자 딱딱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심장에 찔렀던 검을
세차게 빼냈다. 검을 빼자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 피가 튀겼다.

털썩!

"사크란 님!"
"사크란!"

악마가 되었더라도 사크란은 마족을 수호했던 스승이자 영웅.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마족들은 사크란이
무릎을 꿇자 서둘러 그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심장에 검이 관통당한 이상 사크란에게 더이상 가망이 없다는 것을.
결국 악마로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 사실을 누구보다 알고 있는 건 사크란 본인이다. 그는 연신 기침을 하면서 검은 피를 토하다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일생을 바치고, 본인이 악마가 되면서까지 끝내 지킨 사람들. 사크란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섞여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다가 읊조리듯이 입을 열었다.

"사냥꾼들이여... 이 말은 명심하거라..."
"... ..."
"소중한 이들을 위해... 스스로 악마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사람이 눈 앞에 있다. 사크란은 최후의 최후의 순간까지
동족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숭고하고 거룩한 운명인 걸까. 내가 만든 캐릭터라지만 사크란만큼 헌신적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와 손등으로 눈꼬리를 비비는 동안, 사크란은 헐떡이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용기이며 희생일지어니... 나는 악마가 아닌 인간으로 죽는 것이다."

사크란의 희생 파트는 주인공 일행, 특히 진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최후반부, 대악마의
영혼을 흡수해야 완전히 소멸하는데 진은 기꺼이 자기자신을 희생시켰다.

사실상 사크란의 비극을 통해 진의 운명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일종의 복선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진은 스토리가 진행되면 진행될 수록 사크란을 생각하는 경우가 빈번해지니.

아무튼 사크란의 희생 파트는 여기가 끝이다. 뒤이어 사크란이 밝은 입자가 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인생의
종착점에 다가가지만...

"젊은 인간이여... 하나만 묻겠다."

각색이라도 한 것인지, 사크란은 자신의 몸이 밝은 입자가 되어가면서 제논에게 질문했다.

원작에는 저런 대화없이 그저 소멸되었기에 원작자인 나로서는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런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그동안 사크란의 몸 반쪽이 빛이 되어 사라져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는 기지를 발휘하여


제논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내가... 악마로 보이나?"


"...아뇨."

제논은 사크란의 질문에 놀란 것도 잠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뒤이어 그는 점점 사라져가는 사크란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그에게 아름다운 말을


전달했다.

"누구보다 인간답습니다. 사크란 씨."


"...하하하."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듯한 사크란의 웃음소리. 원작에서 사크란은 웃은 적이 절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웃으니까 뭐랄까.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 전해졌다. 원작자인 나조차도


놀라운 캐릭터 해석이다.

"그거 다행이군..."

마지막으로 사크란은 고개를 천천히 하늘 위로 올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더니...

"정말로... 다행이야..."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빛의 입자가 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샤아아아아-

"...어?"
원작을 초월해도 한참 초월한 결말에 멍한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을 때,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져내렸다. 그에 나는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빛이 눈처럼 송글송글 내려오고 있다. 무슨 비유적 표현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빛이 하늘에서 눈처럼


떨어지는 중이었다.

마치 사크란이 소멸되면서 발생한 빛의 입자가 떨어지는 것처럼, 관람석에서 빛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아..."
"우와..."

아름다운 연출에 나뿐만 아니라 양 옆에 앉은 여인들도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마리는 눈을 깜빡거렸다가 빛을 향해 손을 살짝 뻗었고, 세실리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빛이 손 위에


안착하도록 만들었다.

나 또한 빛이 내 손바닥 위로 내려앉도록 만들었는데 그 빛은 이내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빛이


사라지자 고개를 들어올려 아름다운 광경을 다시 한 번 마주했다.

"예쁘다..."

대체 감독이 뭐 하는 사람이길래 마지막까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일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으면 과학이 부족한 중세 시대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연출을 준비한 것일까.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시대를 앞선 천재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짝- 짝- 짝-

모두가 넋이 나가 아무런 반응도 못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박수를 쳤다. 뒤이어 그 박수 소리에 홀린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씩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짝-

처음에는 작게 들리던 박수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짝짝짝짝!

"우아아아!"
"멋지다!"
"최고다! 최고!"

잠시 후, 천둥 소리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크기로 변했다. 단순한 박수가 아니라 모든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난 기립박수였으며 환호까지 더해져 열광적인 분위기를 띄었다.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느릿하지만 어딘가 혼이 나간 심정으로 천천히 박수를 쳤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이 지구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만큼 훌륭한 연출이었다.


영화도 아닌 연극으로 이런 공연을 펼치다니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하면 이런 무대를 만들 수 있지?"


"흐윽... 정말 멋져..."
마리와 세실리도 박수를 치면서 저마다 평가를 내렸다. 마리는 감탄에 끝난 반면 세실리는 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연신 닦으면서 오열에 가까울 정도로 흐느껴졌다.

'진짜 나처럼 환생자나 그런 건가?'

물론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스티븐 스필버그가 환생했더라도 이런 공연을 감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세실리가 언급했듯이 악마가 쏟아져 나오는 장면은 마법을 이용했다.

그러므로 마법에 능통한 단원이 있다는 의미인데 그런 마법사가 뭐하러 연극일에 동참하는 것인지도
의아했다. 말빨로 구워삶았는지 아니면 마법사가 감독인지 모르겠지만 능력이 출중하다는 건 변함이 없다.

짝짝짝짝...

절대 멈추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던 박수 소리는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점점 잦아들었다. 하늘에서 내리던


빛의 눈도 이제 거의 그친 상황이다.

잠시 후, 박수 소리가 거의 다 멈췄을 때 쯤, 인생을 끝까지 지휘하던 리루스가 등을 돌리더니 관객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 즐거운 공연이 되셨나요? 제가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분명 감동스러운 무대였을거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저도 합작을 할 때 매트릭스 극단의 연극을 보고 감탄했거든요."

리루스는 겸손하게 이 모든 감동을 매트릭스 극단에게 전했지만, 사실 리루스 악단의 연주도 굉장하면
굉장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요리로 치자면 매트릭스 극단의 공연은 메인 디쉬고, 리루스 악단의 연주는 맛을 내기 위한 설탕이나 소금,
그리고 각종 향신료다. 만약 인생이 연주되지 않은 채 연극이 이어졌다면 어딘가 밋밋함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여러분들께 이 공연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정말로 영광이었습니다. 저는 리루스 악단의 지휘자,


리루스였으며 앞으로도 멋진 연주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끝낸 리루스는 신사답게 허리를 살짝 굽히며 인사했다. 당연하게도 그가


인사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제 리루스가 인사를 했으니 매트릭스 극단도 나와야 할 터. 내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악단의 뒤로


배우들이 속속 등장...

뚜벅- 뚜벅- 뚜벅-

...하지 않고 사람 한 명이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걸어왔다. 나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그 사람의 외모를


훑어봤다.

로브를 뒤집어 써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듬직한 체구를 보아하니 남자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결코 배우라고 볼 수 없는 음침함이며 분위기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게 아니었는지 주변의 관객들이 낯선 남자의 등장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누구냐는 의문을 시작으로 또다른 연극이 펼쳐지는 게 아니냐는 기대까지.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기에 과연 무슨 일이 펼쳐질까 살짝 기대했다.

"...크흠."

그사이 무대 중앙에 도착한 남자는 헛기침을 통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연스레 관객들의 웅성거림도
멈추었다.

뒤이어 그는 좌중을 둘러보더니 다시 한 번 더 헛기침을 한 후, 나긋나긋하면서도 중저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 스칼이라고 합니다."


"뭐?"
"감독이라고?"
"그게 정말이야?"

충격적인 선언에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전보다 훨씬 커졌다. 비단 관객들 뿐만 아니라 나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여태까지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은 정체를 밝힌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베일이 감추어진 존재였다. 그런


신비주의와 더불어 화려한 연출력이 시너지를 이룬 덕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집단과 계약을 맺을 때도 대리인을 내세웠다. 며칠 전 매트릭스 극단이 우리 저택으로


찾아왔을 때도 감독이 아니라 대리인을 통해 의사를 주고받았다.

그러할지언데 오늘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의도조차 알


수 없었다.

"아마 모두들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여태까지 정체를 꽁꽁 숨기던 감독이 어째서 이곳에 나타났는지
의문이 들었을테니까요. 참고로 사칭이 아니라 진짜 감독이 맞으니 의심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 ..."
"오늘 여러분들에게 제 모습을 보여준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연이 정말로 즐거우셨는지 묻고 싶었거든요.
어때요. 공연은 즐겁게 시청하셨나요?"
"""네!!""

우렁찬 대답은 VIP 석이 아니라 평민들이 앉는 자리에서 터져나왔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 VIP 들은 말없이
박수로 대답을 대신했다.

감독은 관객들의 반응에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즐겁게 보셨다니 저로서는 정말 다행이네요. 사실 원작을 살짝 각색한 거라 마음에 드셨는지


조마조마했거든요. 여기 있는 분들 대부분이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시는 분들일테니 제가 어디를 고쳤는지
알고 계실 거예요."

사크란의 유언에 대해 언급한 감독이다. 사실 그건 원작을 초월했다고 무방할 정도로 캐릭터 해석이
훌륭했다.

"이 자리에 계실지 모르겠지만 제논 님이 계신다면 감사의 말씀과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소설을 써주셨는데 겨우 이것밖에 표현하지 못 했으니까요. 심지어 제 마음대로 해석까지 했죠."
"... ..."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내가 그의 앞에 가서 엎드려 절하고 싶을 정도다.

고작 글로만 채워져 있는 소설을 이처럼 화려하게 탈바꿈시킬 수 있는 능력자는 저 감독밖에 없을 것이다.

"여태까지 제 연극은 돈이 많은 사람이나, 아니면 귀족 분들만이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관객석을 보니 뭐라고 할까...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이런 건가 싶었습니다. 리루스 악단과의
합작도 제게 좋은 경험이었고요."
"... ..."
"그... 아무튼 주절주절 서론이 길었는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스윽-

감독은 그리 말하더니 얼굴을 꽁꽁 숨기고 있던 로브를 훌러덩 벗어던졌다. 그에게 집중하고 있던 나는


그가 로브를 벗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뿌, 뿔? 설마..."
"마족이었어?"
"세상에..."

칠흑색 머리카락과 더불어 머리에 솟아난 악마의 뿔. 그리고 피처럼 새빨갛게 빛나는 눈동자까지.

중저음의 목소리와 달리 순둥순둥한 미모를 가진 감독은, 다름아닌 마족이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극단의 감독이 마족이라는 사실에 관객석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시끌시끌해졌다. 감독은 이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빙긋 웃더니 특유의 나긋나긋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모두들 보시다시피 저는 마족입니다. 제논 일대기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까지 핍박을 받던 마족."


"... ..."
"하지만 여러분들. 제 공연을 보셨을 때 어떤 느낌이셨나요? 이런 무대를 설계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궁금했겠지만, 아마 절대 마족이라고 생각하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특유의 나긋나긋한 말투에는 미묘한 힘이 실려있었다. 시끌거렸던 관객석도 감독이 말을 하자 삽시간에


조용해졌으며 그의 이야기에 경청했다.

나는 감독이 마족이라는 부분에 놀란 것도 잠시, 세실리를 힐긋 바라봤다. 그녀는 마법을 사용했다는


부분에서 대충 짐작했는지 그리 놀랍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훌쩍."

그냥 울기에 바빴거든. 나는 어느새 흥건히 젖어있는 손수건을 바라봤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옮겼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마족은 어떤 종족인가요? 제논 일대기가 발간되기 전까지는 악마, 그리고


시한폭탄과 다름없는 존재였겠죠.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마족은 항상 내면의 악과 싸워야
하는, 그런 비극적인 숙명을 지니고 태어난 종족이거든요."
"... ..."
"하지만 제논 일대기가 등장한 이후부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논 일대기는 우리 마족에게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물해줬죠.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고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용기도 선물해줬습니다."

얼굴에 아주 금칠을 해주시는구나. 너무 부끄러워서 몸을 베베 꼬고 싶은 욕구가 무럭무럭 차올랐다.

창피함에 몸을 꿈틀거리고 있을 때, 감독은 다시 한 번 좌중을 둘러보더니 조용히 본인의 말을 이어갔다.

"저 또한 그에 용기를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족이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평범한


예술가에 지나지 않죠. 부디 우리 마족을 악마로 보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이며, 만약 이곳에 제논 님이 계시다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상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 스칼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짝짝!!!
스칼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하자 귀가 멀 듯이 박수 소리가 다시 한 번 더 터져나왔다.
이윽고 스칼의 곁에 몇몇 사람이 다가왔는데 아무래도 극단의 배우들인 듯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마족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었다. 매트릭스 극단은 제논 일대기가 발간되기 한참 전부터
유명했는데 이때까지 함께 한 걸 보면 그들도 생각이 깨어있는 사람들인 모양이다.

그리하여 여러모로 여운이 남는 공연이 끝이 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했다.
여운을 즐기느라 감상에 젖어버린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공연을 통해 받은 감상이 쉽게 떠나지를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아


여러번 상상하게 만들었다.

'...이건 고마워서라도 써야된다.'

둘의 공연은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솔직히 이정도 퀄리티를 보여줬으면 그


보답으로 휴재 따위는 때려쳐야한다.

비록 학업 때문에 최소 2 개월에 한 권 정도 발간되겠지만, 그런 노력을 보여줘야되지 않겠는가. 나는


눈을 감으며 앞으로의 전개를 상상했다.

"정말 굉장한 무대였어. 그렇지?"


"...응."
"너는 언제 갈 거야?"

옆에서 마리의 나에게 질문했다. 나는 힘없이 팔을 내저으며 대충 답했다.

"너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 난 잠깐 여기에 있을게."


"풉. 얼마나 좋으면 힘이 다 빠져있니. 귀엽게."

마리는 내 대답을 듣고 살풋 웃더니 볼을 살짝 꼬집었다. 반응도 할 기운이 없어서 그녀가 원하는대로


해줬다.

"그리고... 아이작."
"응."
"침실에는 언제 가면 돼?"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구나.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적당한 시기를 알려줬다.

"9 시 쯤이면 괜찮겠지."


"9 시라... 알았어. 기대해도 되지?"

뭐를 기대한다는 거야. 나는 의문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마리를 바라봤다.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어딘가 부끄러운지 양볼을 붉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더더욱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뭐를?"
"음... 아무것도 아냐. 난 이만 가볼게."

그러면서 후다닥 도망치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지는 마리.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대체 뭐지?"
내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옆에서 세실리가 나에게 물었다.

"흐극... 아이작..."
"네?"
"나랑 훌쩍... 잠깐 얘기 좀 할래? 크읍..."

나는 아직까지도 눈물을 흘리는 세실리를 황당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봤다. 공연 내내 울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미모는 상대적으로 멀쩡했다.

아, 물론.

'...저러다 탈수가 오는 건 아니겠지?'

흠뻑 젖어있는 손수건으로 하여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훌쩍거리는 세실리와 손수건을 번갈아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알았어요."
"흑... 고마워..."

세실리는 그리 대답한 후 내 손을 조심히 붙잡더니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너에게 진짜로 하고 싶은... 히끅. 말이 있어서..."

< 108 화 >

시대를 초월한 명작 그 자체였던 공연이 모두 종료되고, 나는 세실리의 부탁에 그녀를 따라갔다. 무대가
종료되었음에도 마을의 축제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여전히 후끈거렸다.

공연이 시작된 시간이 6 시인데 현재 시간은 정확히 8 시이다. 체감상 1 시간도 안 된 것 같았는데 시간이
그냥 녹아버렸다. 그만큼 공연이 재미있었다는 의미겠지.

아무튼 간에 마리와의 약속은 9 시로 잡았으니 그전까지 세실리와 이야기를 나누면 그만이다. 세실리도
나와 마리의 대화를 들었을테니 적당히 시간을 끊을 것이다.

"훌쩍..."
"이제 좀 진정이 돼요?"

다만 예상 외로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세실리는 여전히 감동에서 헤어나오지 못 한 채 이따금씩 눈물을


흘렸으니까.

리루스 악단의 연주만 들었을 때도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던 그녀다. 매트릭스 극단의 공연에서는
아예 통곡 수준으로 서글프게 울었으니 심신이 지쳐있을 터.

결국 10 분 동안은 세실리를 달래느라 약간의 시간을 잡아먹었다. 다행히 세실리는 내 위로 덕분에 아까


전보다 상태가 나아졌다.

현재 우리는 커다란 나무 밑에 나란히 앉아있었는데, 마을 중심부와 달리 유동 인구가 많지 않은 장소라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은 없었다.

괜히 사람 많은 곳에 갔다가 수상한 눈초리로 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축제라도 밤은 언제나 조심해야하는


법이다. 황궁에서 파견한 기사단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 가깝다. 세실리는 차기 마왕으로 예정돼 있으니 본신의 무력이 강할테고,
그녀의 호위기사 가르츠가 주변을 지키고 있을테니.

단지 우리 둘끼리 이야기를 나눌만한 공간이 필요했기에 이런 인적이 드문 장소로 온 것이다.

"...죄송해요. 은인에게 꼴나사운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도통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세실리의 눈물이 드디어 멈추었다.

그녀는 축축하게 젖은 손수건으로 눈꼬리를 닦더니 민망함과 울먹임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또한 우리


둘밖에 없어 존댓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손수건이 다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린 그녀가 살짝 걱정되었다. 저정도면 탈수 증상이 와도 이상하지


않는 수준이었으니.

그래서 시중에서 산 음료수를 줬지만 세실리는 손을 내밀며 거절했다. 괜히 무안해져 내가 음료수를


마시고 있을 때, 세실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더니 앞을 멍하니 바라봤다.

"...정말 감동스러운 무대였어요. 그쵸?"


"네."
"그리고 감독이 마족이었다는 사실도 놀라웠고."
"저도 깜짝 놀랐어요."

연출을 위해 마법을 사용했다는 부분은 세실리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마족일 줄은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선입견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족은 예술과 멀어도 한참 멀고 전투에 특화된 종족이었으니까.

이전까지 마족이 핍박받았던 것도 있지만 역사적으로도 이들이 전투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활약한 펼친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마족을 향한 시선은 완전히 달라졌으며 마족을 악마가 아닌 사람으로
대우해주기 시작했다.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 스칼도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인식이 달라지니 용기를 내어 본인의 정체를 밝혔을
것이다. 인식이 바뀌었다고 한들 선입견까지 바뀌는 건 아니었으니.

아마 스칼이 원하던 메세지는 부디 마족을 향한 선입견을 멈춰달라는 거겠지. 마족은 전투나 마법 뿐만


아니라 예술 같은 문화에도 뛰어난 자질을 품고 있다고 말이다.

"누나는 그 사람이 자기가 마족이라는 걸 밝혔을 때 어떤 기분이셨어요?"


"대단하다고, 그리고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그런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을텐데...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겠죠. 누누이 말했지만 마족을 향한 차별적인 시선은 여전하거든요."

그녀의 설명처럼 마족을 악마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

현재는 거의 인종차별급으로 간주되어 차별을 한 대상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일이 대부분이나


마족들이 상처를 받는 건 똑같다.

그러므로 앞으로 스칼 또한 다양한 시선을 받을 것이며, 그중에는 차별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용기를 얻을 수 있던 이유도 결국 당신 덕분이죠. 당신이 쓴 책이 아니었더라면 그


사람도 평생동안 정체를 숨겼을 거예요."

세실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촉촉하게 젖어 은은하게 빛나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정말 아름다웠다.

나는 그녀의 얼굴과 한참을 마주하다가 부끄러움에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은근슬쩍 내 손을 붙잡았다.

마리처럼 말랑말랑함이나 부드러움이 아닌, 수 십년간 단련하여 거칠거칠한 느낌이 전해졌다. 니콜이나
아델리아 같은 손이다.

"은인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거나 그런 감평은 없는건가요?"


"...물론 있죠."

대답은 했지만 세실리와 눈은 마주치지 못할 것 같다. 마주치게 된다면 홀린듯이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

사실 세실리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지금까지의 행동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모르고
있다면 둔탱이를 넘어 아예 모르는 척 하는 거겠지. 그러나 나는 한사코 거부할 생각이다.

이 세상이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권력이 높은 남자들이 많은 여자를 거느린다고 하지만 난 그런 자신이


없다. 책임을 질 수 없으면 아예 처음부터 책임을 질만한 일을 벌리지 않으면 된다.

무엇보다 마리에게 큰 상처가 될 게 뻔하며 나에게는 전생의 사고방식이 뿌리깊게 박혀있다. 천성이
모질지 못한 나로서는 거부감이 자연스레 들 수밖에 없었다.

이에 나는 세실리가 붙잡은 손을 슬금슬금 빼려고 시도하려던 찰나였다. 세실리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힘을 꽉- 주면서 빠져나가지 못 하도록 만들었다.

"...이러려고 부른 거군요."
"이제 눈치채셨나요?"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묻자 세실리가 미약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때 여운에 빠져있을 뿐더러
세실리가 울고 있어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끈끈이주걱에 잡혀들어간 파리의 느낌이 이러할까. 나는 손을 빼는 건 포기하고 하늘을 올려다 봤다.

전생에서는 별 하나 보기 힘들었는데 이곳은 공기가 맑아서인지 별들이 강을 이루어 은하수가 펼쳐져 있다.
육안으로도 이런 광경이라 내가 정말로 다른 세상에 왔다는 걸 실감시켜줬다.

뒤이어 한동안 은하수로 가득 채워져 있는 하늘을 올려다 보고,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선 연재를 다시 시작하려고요. 이런 무대까지 보여줬는데 연재를 하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실례겠죠."
"정말이에요?"
"네. 하지만 학업 때문에 연재 주기가 많이 길어질 거예요. 최소 2~3 달에 한 권이 나오겠죠."
"그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연재를 재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제논 일대기가 연재된다는 게 기뻤는지 세실리가 약간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에 내가 부끄러워져


뒷목을 매만지고 있을 쯤, 그녀가 불쑥 물었다.

"그럼 카이르와 엘리샤의 이야기도 나오겠네요?"


"어... 그렇죠."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거든요."

비극으로 끝납니다만. 나는 차마 말할 수 없어 어색하게 웃었다.


괜히 연기했다간은 다 들통날 수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꽉!

그사이 세실리가 붙잡았던 손에 힘이 더 가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움찔해서 고개를 돌리니 아뿔싸.

새빨간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세실리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하아아아..."

내가 주춤거리고 있을 때 달뜬 숨소리를 내쉬는 세실리. 슬쩍 위를 쳐다보니 그녀의 뿔은 이미 붉은색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였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마족들은 특정 기간마다 악주기라는 생리와 비슷한 현상이 찾아오는데, 욕망이 가득
차오르는 시점이라 보통 하루동안 명상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지금은 명상을 할 시간도 없는데다가 이미 그녀의 눈이 풀려있는 상태다. 나는 그녀에게 여러


의미로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히 세실리를 불렀다.

"누, 누나? 괜찮으세요?"


"네... 아직까지는 참을만해요."

다행히 선은 넘지 않은 모양...

"그런데 곧 있으면 못 참을 것 같아요."

이다... 가 아니라 한계에 봉착했다. 그와 동시에 미묘한 체향이 그녀에게서 점점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남자의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시키는, 일종의 페로몬 같은 것일까. 나는 점점 색기로 가득해지는 세실리에
가슴이 두근거린 것도 잠시,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이러다간 지난 번처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질 수 있다. 저번에는 마리가 난입해서 망정이지, 지금


이곳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불빛 하나 없어 깜깜하여 누군가 지나가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여기까지 온 것도


세실리가 마법을 통해 길을 밝혀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정신 차리세요. 누나는 헬리움의 공주잖아요? 참을 수 있어요."


"...그래. 참아야죠. 참아야 하는데..."

세실리는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했으나 가슴을 퍽-
퍽- 치는 걸 보니 곧 있으면 폭발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에 내가 어쩔 줄 몰라하며 허둥지둥거리고 있을 때, 세실리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고마운데... 어떻게 버티라는 거야..."


"누나?"
"안 되겠어. 더이상은... 안 돼."

퍽!

세실리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올리더니 나를 강하게 밀쳐버렸다. 당연히 내 몸은 힘없이 땅


위로 넘어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을 쯤, 내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덮쳐왔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도 붉디 붉은 세실리의 눈동자만큼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누나?"
"죄송해요. 정말로 죄송해요."
"누나!"
"욕망에 진 저를... 용서해주세요."

이이상은 안 된다. 나는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바둥거렸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세실리가 한 손으로 내 두 손을 묶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만큼 나와 세실리 사이에 무력이 하늘과 땅 차이로 난다는 증거.

지난 번에는 마리가 난입하여 사고를 막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이러다가 정말로 야외에서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

스윽-

내 위로 올라탄 세실리는 내 뺨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야릇하게 말했다.

"하아... 이 부드러운 뺨. 이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 전부 가지고 싶어..."


"... ..."
"이 여린 몸에 쾌락을 선사해서... 내 걸로 만들고 싶어...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부..."

서큐버스의 후예라는 말이 진실인 듯, 그녀는 야시시하면서도 위험한 말들을 꺼내면서 나를 자극시켰다.


색기까지 내뿜어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이로인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하반신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으나 최대한 마리를 떠올리면서 거부
의사를 나타냈다.

"누나! 제발 정신 차리세요! 이건 우리 둘에게 좋지 않은..."


"아니. 분명 너도 좋아할 거야. 왜냐고? 내가 그렇게 만들거거든."
"... ..."

안 되겠어, 이 여자. 어떻게 하지 않으면...!

내가 더이상 안 되겠다 싶어 박치기라도 하려던 찰나, 그녀는 내 빰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얼굴을


고정시켰다. 어마어마한 힘에 고개조차 바둥거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호위기사라던 가르츠는 어디로 갔는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

마침내 세실리가 혀로 입술을 할짝이며 조용히 읊조리더니...

"잘 먹겠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아래로 천천히 내리며 입을 살짝 벌렸다.

그에 내가 속으로 마리에게 사죄하며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번쩍!
암흑으로 채워진 주변을 일순간 밝게 비출 정도의 세기라 눈이 부실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이 멀 듯한
밝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후로 몇 초가 흘렀을까, 빛은 점점 사라지더니 이내 완전히 꺼졌다. 빛이 사라지면서 나 또한 눈을


천천히 떴다.

갑작스레 빛이 터져나온 탓에 시야에 희뿌연 무언가가 걸렸지만, 물건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큰일날 뻔했네요."

어느새 내 위에서 떨어진 그녀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얼굴에는 안도와 민망함이
섞여있었다. 나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이어서 그녀는 나를 바라보더니 쓰게 웃으며 목걸이에 담겨있는 능력에 대해 설명해줬다.

"이 목걸이는 우리 헬리움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 중 하나에요. 악주기가 찾아왔을 때, 혹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할 때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능력을 갖고 있죠."
"그럼 방금은..."
"네. 하마터면 은인에게 몹쓸 짓을 할 뻔했죠. 정말 죄송합니다."

세실리가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슬쩍
뿔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까 전만 해도 붉은색으로 가득 채워졌지만, 지금은 끄트머리가 검은색이었다. 욕망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어도 다행히 임시방편 정도는 된 듯하다.

'와... 그럼 진짜 좆될 뻔했네?'

첫 경험을 야외에서 할 뻔했다. 그것도 여자친구가 아닌 다른 나라의 공주님이랑.

그동안 세실리는 나를 보며 우물쭈물거리더니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날렸다. 얼굴은 방금 전


일 때문에 붉어질대로 붉어진 상태였다.

"저... 은인."
"...아, 네. 말씀하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지난 번에도 그랬지만 욕망에 이기지 못해 이번에도 은인에게 큰
실례를 끼쳐드렸네요..."

스스로도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알고 있는지 머리까지 숙이며 사죄하는 세실리. 나는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세실리의 색기가 내 몸에 침투된 것처럼, 내 몸이 다 화끈거렸다. 도중에 끊은 듯한 애매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나는 손부채질을 통해 얼굴을 식히면서 대답했다. 그럼에도 열기는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괜찮아요. 그런데 악주기가 내제된 욕심이 튀어나온 거라고 했으니 아까 전에는..."
"...네. 부끄럽지만 제 진심이죠."
"어우..."

세실리가 부끄러움에 이기지 못 했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나 또한 민망해져서 감탄


아닌 감탄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평소 나를 덮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다는 의미인데, 그만큼 세실리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의미했다.

나는 순식간에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무어라 말을 꺼낼지 고민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누나의 마음은 잘 알겠어요. 누나도 저를... 좋아한다는 거죠?"


"...네. 부끄럽지만 은인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 ..."

세실리는 전처럼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돌직구를 날려버렸다. 창피함에 고개를 숙이며 고백하는 모습을
보자니 정말로 귀엽고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최대한 이성을 유지해야한다. 비록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세상이라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한 둘이 아니다.

수명 문제야, 이미 그녀에게 대안책을 제시해줬으니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마리다.

"...누나. 솔직히 말해서 저도 누나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책임질 자신이 없어요.
당장 마리도 신경 써야 하는데 둘이라니... 여러모로 많은 문제를 낳겠죠."
"알고 있어요."
"상황에 따라서 누나에게 사랑을 주지 못 할 수도 있어요."
"전 괜찮아요."
"제가 그렇게 좋은 건가요?"

내가 뭐라고 일국의 공주인 세실리가 이토록 나를 원하는 것일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세실리라면 나보다 훨씬 더 좋은 남자와 만날 수 있을텐데. 내가 제논 일대기의 작가라지만 굳이 나를


선택해야하나 싶었다.

그런 의문을 가지며 세실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는 아래로 내렸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리며 나와
똑바로 마주했다.

이미 마음을 굳게 다짐했다는 의지와, 동시에 애처로움이 깃들어 있는 표정이었다.

"네.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우리 마족을 구원해준 신의 은총이자, 배려가 깊은 당신이."


"... ..."
"설령 당신이 거부한다고 해도 저는 당신의 유산을 지킬 거예요. 당신이 태어난 이 영지와, 앞으로
태어날 당신의 후손 모두. 이게 헬리움의 공주로서,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보답이니까요."

받아주지 않아도 끝까지 마음을 유지하겠다. 나는 세실리의 결연한 다짐을 듣고나서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저렇게까지 나를 좋아하는데, 약간은 받아줘도 되지 않을까?

감정은 받아들이라고 소리쳤지만, 이성은 마리와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외치고 있다. 나는 이성과 감정
사이에 갈팡질팡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결정을 내렸다.

"...아무래도 마리와 상의는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대신 아까 전처럼 절 덮친다면 곧바로 칼 같이 잘라낼 겁니다. 적어도 첫 경험은 마리와 하고
싶으니까요."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마리는 제논이 아니라 아이작이라는 인물 자체만을 보고 사랑해준


여인이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세실리는 이걸 듣고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나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만드는 발언을 꺼냈다.

"마리와 성관계를 맺는다면 그 다음에는 저라는 소리인가요?"


"...네?"
"그럼 최대한 빨리 은인께서 마리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네요. 그러면 저도..."
"... ..."

할 말을 잃어버렸다.

< 109 화 >

나는 사고 방식 자체가 차원이 다른 세실리의 말을 듣고 어지러움을 느껴 머리를 붙잡았다. 내가 들은 게


정말인지 곰곰히 되새겨도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마족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세실리가 독특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 세상의 문화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마리 다음으로는 자신의 차례라니, 나로서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생각이었다.

"그... 누나?"
"네? 무슨 일이시죠?"
"제가 멍청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마리 다음으로는 누나라는 게 무슨 소리에요?"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질문했다. 혹여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봐.

이에 세실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뭐가 잘못 되었냐는 듯, 순진한 얼굴로 도리어 본인이 의문을


드러냈다.

"말 그대로에요. 마리는 은인과 가장 먼저 연인이 된 여자이니 이정도는 양보해야되지 않겠어요?"


"아니.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하, 씨. 이걸 뭐라고 해야하지..."

너무 당황하는 바람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세실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나와 몸을 섞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그녀를 받아들인 마당에 아예 그쪽으로 생각이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좀 갑작스럽다. 중간 과정을


스킵하고 엔딩을 보는 느낌이랄까.

내가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최대한 회전시키고 있을 때, 가만히 지켜보던 세실리가 불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은인께서는 저와 몸을 섞으시는 게 싫으신 건가요?"

아무래도 내 반응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들으면 기겁할만 이야기에 그녀를
쳐다봤다. 세실리는 현재 애처롭기 그지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중이다.

얼굴은 설명해봤자 입만 아프니 생략하고 몸매는... 이것도 넘어가자. 천상의 아름다움을 모조리 갖다
박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마리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여성으로서의 매력은 세실리가 훨씬 뛰어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녀의 외모라던지, 몸매라던지 아니다. 모든 과정을 스킵하고 몸부터 섞으려는
세실리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 뿐이다.

나는 그 생각이 든 것도 잠시, 우선 고개를 세차게 저음으로서 그녀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줬다.

"아니. 아니. 설마 그럴리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래요. 누나도 생각하기에 다짜고짜 몸부터 섞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마리처럼 알콩달콩 연애를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은인께서 저를 받아주신다면야 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그 부분이 더 행복할 수도 있겠네요."
"그쵸?"
"네. 지금까지 마리랑 함께 보여줬던 걸 생각하자면... 하아..."

깨가 쏟아지던 나와 마리의 연애가 떠올랐는지 야릇한 숨소리를 내쉬는 세실리.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는 것이 스위치를 누른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다행히 그녀의 뿔이 붉은색으로 잠식될 일은 없었으나 붉어진 뺨만큼은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건지 구태여 묻고 싶지는 않다.

"아, 아무튼 누나의 생각은 잘 알겠어요. 정말로 후회하지 않으시죠?"


"혹시 제가 은인에게 처음으로 보냈던 편지를 기억하시나요?"
"편지라면..."

나는 그녀의 물음을 듣고 골똘히 기억을 되새겼다. 아카데미에 있을 당시 세실리가 사과의 의미로 나에게
부쳤던 팬레터가 있다.

"그 편지에 제 진심이 온전히 담겨있어요. 은혜를 갚기 위해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겠다는 진심이."


"...아."

그러고 보니 팬레터에 그런 내용이 담겨있긴 했다. 몸과 마음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각오가 듬뿍 담겨있던
팬레터.

세실리는 그 내용에 따라 본인의 몸과 마음을 나에게 바치려 노력하고 있다. 언뜻 추종자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제논 일대기가 마족에게 끼친 영향을 고려하자면 마냥 이상한 것도 아니다.

자그마치 몇 백 년 동안 핍박받았던 삶에서 해방시켜줬는데 추종자가 안 되는 게 이상하다. 헬리움의


공주라는, 스케일이 어마어마할 뿐이지 추종자라는 건 변함이 없다.

"전 마족으로서, 우리 마족 전체를 구원한 은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저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남들과 비교했을 때 매우 뛰어나죠. 그리고 몸 뿐만 아니라
제 마음도 은인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네. 알겠어요. 이제 그만해요."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는 듯한 기분에 서둘러 손을 내밀머 제지시켰다. 이대로 가만히 방치해뒀다간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어쨌거나 그녀의 진심만큼은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빈말이 아니라 현재 세실리는 나만을 바라보는
추종자나 다름없는 상태다. 몸을 바치라 명령하면 기꺼이 바치는 추종자.

왠지 그녀가 노예가 된 듯한 기분인지라 살짝 꺼림칙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착잡하다는 표정으로


세실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저는 수직적인 관계보다는 수평적인 관계를 좋아하거든요. 굳이


저에게 모든 걸 바칠 건..."
"어차피 은인은 100 년 후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텐데 이정도는 해야되지 않을까요?"
"... ..."

이러면 할 말이 없어지는데. 나는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세실리의 반박에 입을 벌린 상태로 굳어버렸다.


아까도 느낀 거지만 사고 방식 자체가 판이하게 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실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내가 말을 할 때까지 조신하게 기다리고 있다. 이에


떠나가려는 영혼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렇게까지 말씀한다면 할 말이 없어지네요. 누나 마음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저는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 ..."

그녀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답하자마자 가슴 속에 묵혀있던 음습한 감정이 불쑥 치고 올라왔다. 리나와


말을 놓았을 때에도 느꼈던 감정이다.

심지어 방금 전까지 세실리와 대형 사고를 칠 뻔했던지라 차마 해서는 안 될 상상까지 들었다.

'...아까 전 그 색기 때문이겠지.'

평소였다면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까 세실리가 뿜어냈던 색기가 내 오감을


자극시키는 바람에 욕망을, 그러니까 성욕을 자극시켰다.

환생하고나서 여태까지 해소하기 난감했던 욕구 중 하나가 성욕이었는데 그걸 트리거처럼 건드렸으니


사고가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나는 콧잔등을 꾹- 꾹- 누르면서 어떻게든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다행히 평소 체력 훈련을


통해 인내심이 남들보다 향상되어 추스릴 수 있었다.

"...제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제가 누나에게 말을 놓는 대신, 누나도 저에게 말을 놓아주세요. 다른


사람이 있을 때나, 저와 단 둘이 있을 때나 상관없이. 이정도는 충분하죠?"
"음... 알았어. 말 놓으면 되지?"

말을 놓으니 추종자가 아니라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세실리다. 역시 말을 놓는다는 건 단순히 친근감을
표시가 아니라 서로 간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효과가 있다.

나는 세실리가 나에게 말을 놓자마자 어딘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은인으로 대우한다니 뭐니 해서


부담스러웠는데 그 부담감이 모두 사라졌다.

"충분해. 그럼 나도 누나한테 말 놓는다?"


"응. 그런데 누나라는 말은 계속 쓸 거야?"
"누나가 싫으면 안 쓸게."
"아냐. 너 마음대로 해. 누나가 아니라 세실리라고 불러도 되고. 정말로 이걸로 되겠어?"
"그럼 뭐가 더 있는데?"
"예를 들면..."

세실리는 말을 흐리며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부끄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 만지게 해달라거나?"


"... ..."
"계속 언급했지만 내 몸과 마음은 전부 네거야. 네 마음대로 다뤄도 돼."
"...사양할게."

정말이지, 자꾸만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세실리다. 마리와 만나지 않았다면 진작에 일을 저질렀지
않았을까.

그만큼 세실리는 남자로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여자이며 나에게 너무 과분했다. 그래도 본인이
좋다니 넘어가겠지만.

하지만 내가 받아들였다고 한들, 마지막 관문이 하나 남아있다. 나는 다시 한 번 콧잔등을 누르면서


염려하던 부분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런데 누나. 마리에게 허락은 받을 수 있겠어? 나야 괜찮지만 마리가 받아줄지 의문인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 누나에게 다~ 방법이 있으니까. 그리고 너의 가치가 점점 커지는만큼
정치적으로 보호해줄 사람이 반드시 필요해. 제아무리 마리의 가문이 제국에서 황제 다음 가는 권력을
지닌 공작이라고 해도 국가가 지켜주는 건 아니거든."
"그러면 나야 다행이지만..."

비록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세상이라지만 전생의 영향 때문인지 바람 피는 기분이다. 전생에서


일부다처제는 이슬람 문화권에서만 이루어지던 풍습이었으니.

물론 서양 쪽에서는 아내가 있음에도 원만한 합의를 이루면 애인을 따로 두는 경우가 간혹 있다. 허나


이것조차 아내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헬리움의 공주인 세실리가 더욱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공작의 딸을 여자친구로
두고, 헬리움의 공주를 또다른 애인으로 두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경우일까.

그만큼 내 가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나 복잡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 너는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끝이거든. 내 몸과 마음은 오로지 너만을 위한


것이니까. 한 번 관계를 맺고 헌신짝 버리듯이 버려도 난 모두 받아들일거야."
"난 그딴 쓰레기처럼 살고 싶진 않아."

소중한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던 아델리아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세실리가 그녀처럼 펑펑 운다고 상상만
해도 마음이 불편하다 못해 찢어지는 기분이다.

세실리는 내가 안색을 굳히며 단호하게 답하자 기분 좋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 비록 나에게는 짧게 느껴질 순간이겠지만, 그 행복은 영원히 이어질 거라는 점. 부디


알아줬으면 해.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면서 사는 게 아닌, 그리워하면서 살 수 있도록."
"나도 누나가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할게. 누나가 원하는 걸 말해봐. 난 받기만 하는 건 별로라서."
"그럼 안아줄 수 있니?"

세실리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부탁한다. 두 팔을 벌리게 됨으로서 그녀의 큰 가슴이 더욱 부각되어 내


눈길을 이끌었다.

포옹을 하게 되는 순간 그녀와의 관계는 빼도박도 못하게 된다. 확실하게 책임을 져야된다는 소리.

하지만 이미 마음은 결정을 내린 참이다. 나를 위해 무한한 헌신과 사랑을 보내는 세실리에게 이정도
보답은 해야하지 않겠나.

이에 살짝 머뭇거린 것도 잠시, 나 또한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세실리에게 다가갔다. 세실리는 내가


다가가기도 전에 폴짝 뛰어들어 나를 꽉 껴안았다.

"으응... 이게 은인의, 아니 아이작의 몸...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나..."


"... ..."

세실리가 내 품에서 귀여운 소리를 내어도 아무런 말조차 할 수 없었다. 포옹을 하게 되면서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자랑하던 가슴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달되었으니까.

숨이 막힐 정도로 짓눌리는 것이, 남자의 원초적 본능을 살살 건드리다 못해 머리채를 붙잡아 끄집어내는
느낌이다. 마리와 포옹을 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마리는 사랑이 성욕을 가볍게 눌러버린다면, 세실리는 성욕이 사랑을 강제로 짓밟아버린다. 체취 또한
활활 불타기 시작한 장작에 기름을 들이부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참자. 참아... 이때까지 잘 버텼잖아...'

여태까지 잘 참아왔던 성욕이다. 여기서 빵! 하고 터뜨릴 수는 없는 노릇. 어떻게든 인내심을


발휘해야한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세실리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나를 안다가 잠시 후 팔에 힘을 풀었다.

"하아... 너무 좋았어. 내 안의 욕망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느낌이야. 진작에 이럴 걸 그랬네."

달뜬 숨소리를 내쉬더니 나를 똑바로 마주하며 말하는 그녀. 나는 차마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아


시선을 회피한 후에 볼을 긁적였다.

누나는 욕망을 해소하고, 누구는 욕망이 한가득 쌓이다니 이 얼마나 불합리한 구조일까. 어쩌면 그녀의
욕망이 나에게로 전달된 것일 수도 있다.

"그... 조금 부끄럽네."
"마리랑 비교하면 어때? 묵직함이 느껴지지?"
"... ..."
"아이작 얼굴 또 빨개졌다."

앞에서 세실리가 키득거려도 입도 벙긋하지 못 했다. 지금은 피가 쏠린 하반신을 어떻게든 진정시켜야


한다.

이미 포옹을 했을 때부터 불끈거렸으나 세실리도 얼핏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반신은 뒤로 물리고 상체만


앞으로 쏠리는, 매우 엉거주춤한 자세였으니 느끼진 않아도 분명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정말이지 걸어다니는 음란물 수준이다. 이러다가 나중에 얼굴을 보기만 해도
흥분할까봐 두려웠다.

"...이제 슬슬 저택으로 돌아가자. 누나도 알고 있겠지만 마리랑 선약을 잡아놨거든."


"응. 알았어. 아, 그전에 아이작. 너에게 하나 알려주고 싶은 사실이 있거든."
"뭔데?"

내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달래고 있을 때 세실리는 웃는 얼굴이 아닌, 살짝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아이작은 혹시 다크 엘프에 대해서 알고 있어?"


"다크 엘프?"
"응. 과거 내전 때문에 동족으로부터 추방당한 부족이야. 우리 마족처럼 주로 어둠의 신 모라를 믿고
있지."
"어느 정도 알고는 있어."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에서 찾은 서적 중에서 본 적이 있다. 다크 엘프는 세상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은밀히 움직이는 탓에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내가 알고 다크 엘프는 구릿빛 피부를 가졌으며, 기본적으로 은신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밖에


모른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아 내 흥미를 이끌었다.

"그럼 다크 엘프들의 은신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도 알고 있어?"


"응. 그런데 다크 엘프는 왜?"
"네 초고를 훔친 범인이 다크 엘프거든."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나는 세실리가 알려준 충격적인 진실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다크 엘프가 초고를 훔친 건 그렇다 쳐도, 무슨 이유로 그들이 초고를 훔친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
초고의 가치가 어마어마하다 한들 과연 그들이 어떻게 사용할지 의문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다크 엘프는 인간 사회에 관심이 거의 없으며, 동족과의 교류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도난 사건 이후 우리 헬리움이 따로 조사하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이야. 아마 지금쯤이면 미네르바 제국


수뇌부에게도 이 소식이 전달되었겠지."
"다크 엘프가 내 초고를 훔쳐서 무슨 이득이 있는데?"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지. 하지만 본인들의 욕심을 위해서 훔쳤을 가능성이 높아."
"흠..."

조금 당황스럽다. 동시에 신문에서 알븐하임이 보였던 성명문이 생각났다.

자기들은 이런 저급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물론 알븐하임에서 추방당한 다크 엘프였으니 동족으로


취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우리는 기회를 통해 그 범인을 색출해냈어.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후에 헬리움을 방문할 거야.
그때 너도 같이 왔으면 해서."
"알았어. 범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긴 하네."
"어린 아이라면 용서해줄 거야?"

세실리가 약간의 걱정을 담아 묻는다. 저 질문을 한 것을 보아 아무래도 범인의 나이가 어린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걱정이 기우라는 듯,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아니. 내가 왜? 자기 힘을 이용해서 내 초고를 훔쳤는데 어찌 보면 죄질이 더 나쁘지."


"생각 외로 단호하네."
"어린애들은 자기 힘을 자각하는 순간 더 영악해지는 법이라."

전생에서 촉법소년이라니 뭐니 하는 것들을 수없이 목격했다. 특히 어린애들은 나이가 어릴수록 어리다는


걸 영악하게 이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뭐, 머리까지 박으면서 용서해달라고 하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겠지. 따끔하게 혼을 내는 건 변함이


없지만."
"만약 네 초고를 또 훔치려고 했다면?"
"음... 그러면..."

나는 시선을 위로 두면서 고민하다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마 부모님이 홀수냐고 물었을 것 같은데?"


"푸흡!"

신랄하기 짝이 없는 내 패드립에 세실리가 빵!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간 통쾌해 보이기까지 한,


보는 나조차도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이다.

"푸하하하. 정말 재치있는 질문이네. 그런 질문은 어떻게 생각한 거야?"


"그냥 생각한 거지."
"푸흐흐흐... 아, 정말이지. 아이작은 정말 사랑스럽네."
"크흠."

이제는 내가 부끄러워질 차례다. 세실리가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하자 나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아무튼, 일주일 뒤에 헬리움으로 가면 된다고?"
"그때는 내가 발락 경을 시켜서 네 저택으로 보낼거야. 너는 그냥 준비만 하고 있으면 돼."
"알겠어."
"아. 혹시 이것 때문에 제논 일대기에다가 나쁜 말을 적을거야?"

나는 세실리의 질문을 듣고 곰곰히 생각했다. 마족을 구원했던 것처럼, 다크 엘프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적는다면 분명 그들에게도 큰 악영향이 끼칠 거다.

그러나 공과 사는 구분해야한다고, 괜히 그랬다간 스토리가 꼬일지도 모른다. 엘프가 오만한 건 맞지만


앞으로 내가 제논 일대기에 쓸 엘프들은 오만함을 깨우치고 진정한 하나로 거듭나는 종족이니까.

다크 엘프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을 추방했던 동족과 하나가 되어 악마들을 무찌른다는, 어찌 보면


평범하디 평범해 보이는 스토리다.

하지만...

"나쁜 말은 안 적을 건데, 조금 문제가 있겠지. 다크 엘프 뿐만 아니라 엘프 전체에."


"그게 뭐야?"

이에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스포일러라서 말 못 해줘."

소설 속 알븐하임은 엘프들의 오만함으로 악마들에게 무너지게 된다.

< 110 화 >

이후로 우리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도중에도 마을은 축제의 열기로 후끈거렸으며 멈출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맛있어 보이는 먹거리가 있어 사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시간이다보니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갔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중에 세실리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는 건 덤이다.

팔짱을 끼게 되니 가슴의 촉감이 그대로 전달된다. 나는 차곡차곡 쌓여가는 성욕을 느끼면서 인내심을
발휘했다.

'잘 해결할 수 있을까...'

막상 저택으로 돌아가서 마리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자니 약간 심란했다. 일부다처제가 용인되는


세상이라지만 각자의 생각이 있는 법이다.

특히 마리는 나에게 먼저 고백을 했고, 내가 그 고백을 받아들였으니 배신감도 상당할 터. 부디 상황이


무던하게 흘러갔으면 좋겠다.

"긴장되니? 마리에게 사실을 말하려는 게?"


"당연하지. 누나도 알잖아. 마리랑 내 관계가 얼마나 좋은지."
"흐응. 하긴, 보는 사람이 질투날 정도로 좋아보였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 네가 우려하는 사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테니까."

세실리는 마리를 설득시킬 수 있을거라 확신하는지 자신만만한 모습이다. 나는 미심쩍어 했으나 저리


자신있으니 일단 믿어볼 계획이다.

비록 마리가 상처를 받겠지만, 그 상처가 아물 수 있도록 내가 어르고 달래주면 된다. 그리고 이전에
세실리와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으니 설득은 쉬울 것이다.
그리하여 불빛이 켜진 저택으로 돌아오고, 세실리는 우리 가족보다는 마리부터 찾아갔다. 나도 뒤를
따라가 마리와 만나고 싶었으나 세실리가 나를 제지했다.

그에 의문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니 세실리가 방긋 웃는 표정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을 꺼냈다.

"너는 일단 깨끗이 목욕이나 해. 마리에게는 내가 언질을 할테니까."


"언질을 한다고?"
"응. 어차피 9 시가 되면 너희끼리 이야기를 나눌 거잖아? 그것도 '침실'에서 단 둘이."

유독 침실을 강조한 세실리다. 반쯤 접힌 눈매와 고혹적인 목소리로 말하니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 상상이
간다.

내가 마리를 침실로 부르는 이유는 그저 단 둘이 있기 위해서지,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는 게 아니다.


마리도 그쪽으로 생각하지 않을테고.

물론 세실리가 끌어올릴대로 끌어올린 이 성욕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세실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상황이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

"알았어. 그럼 부모님에게 인사는 하고 갈 거지?"


"응. 인사드리고 나서 헬리움으로 복귀해야지. 아, 그리고 너희 부모님에게도 말씀드려. 내가 초대해서
일주일 후에 헬리움을 방문할거라고. 그럼 난 갈게."
"안녕."
"아. 그 전에..."

쪽-

세실리는 떠나기 전, 고개를 불쑥 내밀더니 내 뺨에다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공격(?)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뺨에다가 손을 대었다.

촉촉한 느낌과 더불어 이 따스한 감각을 보자면 확실히 그녀가 나에게 볼 뽀뽀를 한 게 맞다. 세실리도
장난이라는 듯 싱글벙긋 웃고 있으나 얼굴이 미약하게 붉어져 있다.

"이건 감사의 표시. 키스는 마리에게 허락받고나서 할게."


"... ..."
"100 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오늘만큼 행복한 날은 없었어. 평생동안 잊지 못 할 거야. 그럼-"

세실리는 가슴 중앙에 손을 얹으며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그리고 나에게 빙긋 웃어주더니
등을 돌려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나는 그녀가 등을 돌리며 떠나가는 순간에도 쉽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멍해져 있을 뿐.

그러나 이윽고 피식 웃게 되었다. 장난스러운 면모는 역시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했다.

'오늘만큼 행복한 날...'

여러 생각이 드는 말이다. 그만큼 세실리가 나를 특별히 여기고 있다는 의미겠지.

나는 그녀가 뽀뽀를 했던 뺨을 문지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세실리의 조언대로 몸을 깨끗하게 씻을


참이다.

'아. 그러고 보니 손수건을 못 받았네.'


헬리움에 도착하고 나서 돌려받으면 되겠지. 나는 씻으러 가기 전, 지나가던 하녀에게 커피와 다과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

하녀는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이며 알겠다고 답했고, 나 또한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 후로 침실에서 책을 읽으며 여유롭게 마리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똑- 똑- 똑-

"아이작? 안에 있니?"
"응?"

노크와 동시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마리가 오려면 시간이 남았고, 하녀인 줄만
알았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니 고개를 퍼뜩 들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른 사람도 아닌 어머니가 찾아오셔서 의아해했지만 일단 책을 내려놓고 출입을 허가했다.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할게."

끼익-

어머니가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오셨다. 밤이라서 나풀거리는 잠옷용 드레스를 입고 계셨으나 내 눈에 띈


건 드레스가 아닌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이었다.

분명 하녀에게 지시했던 다과 세트를 어머니가 직접 들고 오셨다. 나는 깜짝 놀라 의문도 채 느낄 새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니는 어딘가 흐뭇해 보이는 표정을 유지한 채 나에게 물었다.

"다과는 이곳에다가 놓으면 되니?"


"이, 일단 그렇긴 한데 어째서 어머니가...?"

내가 그리 묻자 어머니는 테이블에 다과 세트를 놓으면서 알 수 없는 대답을 꺼내셨다.

"우리 아이작도 이제 다 컸구나. 마냥 어린애인 줄만 알았는데."


"네?"
"혹시 모르니 이 약은 꼭 먹으렴. 만일이라는 게 있으니까."

어머니는 내가 어리둥절하는 동안 테이블 위에 약 한 알을 올리셨다. 동글동글한 구슬처럼 생겼으며


새하얀 약이다.

나는 동그란 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약이냐는 의미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싱글벙글한 표정을 유지한 채 손을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빠 아들 아니랄까봐 눈치가 없구나. 이것도 유전이겠지. 마리 그 애도 고생하겠네."


"어머니?"
"효과는 30 분 후에 나타나니까 지금 먹으렴. 어서."

어머니가 약을 먹으라고 재촉하자 나는 떨떠름한 심정으로 약을 집었다. 동그랗고 크기도 작아 물이랑


마실 필요는 없을 듯했다.

나는 동그란 알약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다시 한 번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는 내가 약을 먹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다.

"...이상한 거 아니죠?"
"얘는. 엄마가 우리 아들에게 이상한 걸 먹이겠니?"
"그건 그렇죠."

꿀꺽-

약간 의심이 가긴 했으나 어머니가 준 것이니 안심하고 약을 먹었다. 어머니는 내가 약을 먹자마자 미소를


더욱 진하게 지으시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아이작은 참 능력도 좋아. 어디서 그런 애를 데려온 거니?"


"그냥 우연히 만난거죠. 어머니도 마리가 마음에 드세요?"
"물론. 공작가인 건 둘째치고 됨됨이가 훌륭하더구나. 신붓감으로 딱이야."

저런 말씀까지 하시는 걸 보면 마리가 마음에 쏙 든 모양이다. 하긴 마리는 모난 곳 하나 없는데다가 우리


가문처럼 권위의식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어머니가 좋아할만도 하다.

공작의 직위도 아무런 문제도 없다. 내가 제논 작가라는 걸 밝히게 되는 순간부터 입장이 뒤바뀌는 셈이니.

물론 그걸 밝히지 않아도 레킬리스 가문 특성상 나를 받아들일 것이다. 애당초 가족과 함께 귀족 전용


여관이 아닌 우리 저택에 방문한 것부터가 이미 도장을 찍은 거나 다름없다.

'신붓감이라...'

나는 어머니가 언급했던 신붓감이라는 소리에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마리와
결혼하고, 알콩달콩 신혼을 보내다가 뜨거운 밤을...

'...미친.'

아까부터 생각이 왜 자꾸 그런 쪽으로 가는지 모르겠다. 아마 세실리의 요망한 행동으로 인해 성욕이


불끈불끈 달아올랐기 때문이겠지.

나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헛기침을 토했다. 여지껏 잘 참아왔던 욕구를 자극시켰기에 참는


것조차 힘들었다. 마리와 대화가 끝나면 따로 해소해야할 듯싶다.

어머니는 그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셨는지 나를 놀리셨다.

"어머. 부끄러운 거니?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나이대에 약혼은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저희 연애한지 겨우 1 개월밖에 안 됐어요."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해. 정략결혼이라는 게 왜 있겠니? 애당초 귀족들 사이에 연애는 흔치
않은 일이란다. 보통 가문끼리 합의를 통해 약혼을 맺는 일이 다반사지."

안 되겠다. 이미 어머니는 마리를 신붓감으로 점찍으신 모양이다. 저렇게 떠드시는 걸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던 간에 듣지 않으실 터.

나는 어머니가 상상의 나래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귀담아들으실


것 같지가 않다.

똑- 똑- 똑-

"아이작. 나야. 들어가도 돼?"

벌써 9 시가 다 된 모양이다. 문 너머로 마리가 노크를 하며 출입을 부탁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어머니는 정신을 차리고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셨다가 다시 나에게 돌리며 응원의 말을 건내셨다.

"아무튼 힘내렴.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야.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돼. 알겠지?"


"...네."

내 대답에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시고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문을 열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리와 딱 마주쳤다.

"앗. 안녕하세요. 안에 계셨군요."


"그래. 너도 준비는... 다 한 것 같네?"
"물론이죠. 어머니에게도 허락을 맡았어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둘끼리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모르겠다. 마리의 모습도 어머니에게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아이작은요? 설마 아직도 모르고 있나요?"


"아마 그런 것 같네. 눈치 없는 건 지 아빠를 닮아서..."
"괜찮아요. 그럼 전 이만 들어가볼게요."
"좋은 밤 보내렴."

머지않아 어머니가 문 밖으로 나가고, 마리가 어머니에게 공손히 인사하셨다. 나는 문 너머로 보이는
마리의 모습을 보고 감탄을 자아냈다.

축제 동안 입었던 드레스가 그녀의 몸매를 부각시키는 드레스였다면, 지금은 흰색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있다. 허나 그 드레스조차 남자의 본능을 자극시키는 패션이다.

이브닝 드레스답게 어깨와 팔, 그리고 가슴을 모두 노출시켰으나 특히 가슴 부분이 노골적이었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가린 탓에 가슴골이 훤히 드러날 정도.

마리는 섹시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저 모습을 보고나서 완전히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세실리가
대놓고 섹시미를 강조한다면 마리는 평소와 달라도 전혀 다른, 이른바 반전 매력을 선사했다.

'와... 진짜...'

예뻐도 너무 예쁜 게 아닐까. 나는 마리가 점점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떼지 못 했다.

전이었다면 부끄러움에 시선을 돌렸을텐데 지금은 시선을 돌릴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아름답다는 말조차
부족한 그녀의 자태를 두 눈으로 똑똑히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사이, 마리는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뒷짐을 진 채 특유의 방실거리는 미소를 띄며 입을 열었다.

"나 왔어. 그런데..."

잠깐 말을 흐린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나랑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커피까지 준비한 거야?"

은글슬쩍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깊게 파인 그녀의 가슴골을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세실리 때문에 욕구가 차곡차곡 쌓여가던 시점이었는데 이런 자극은 맵다 못해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망했다.'

하반신 중심부에 점점 피가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란 참으로 슬픈 동물이지만, 그 어떤 남자라도 여자친구의 이런 섹시한 모습을 본다면 참을 수 없을


것이리라.

나는 한동안 마리의 얼굴과 가슴을 번갈아보다가 손으로 얼굴을 덮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마리."
"왜?"
"...아냐."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가 나에게 준 약의 정체도.

전생에서는 보통 여자가 먹는 약이지만...

"...일단 앉을까?"

이 세상에는 남자가 먹는 피임약도 있다.

< 111 화 >

눈치 채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눈치를 챈 이상 마리와의 대화가 서먹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내가 예상하고 있는 게 맞다면 어머니가 약을 주지도 않았을테고, 마리가 이런 옷을 입고 오지도 않았겠지.

이전까지만 해도 그런 상황이 올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또 예상치 못하게 그런 상황이 발생하고 잘


넘어갈 수 있을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문제는 세실리가 작업(?)을 통해 상승시킨 내 욕구다.

정말로 세실리가 작정한 건지, 아니면 본의 아니게 색기를 흩뿌린 건지 모르겠으나 점점 버티기가
어려워졌다. 환생하고나서 처리하기 어려웠던 성욕인데 오늘로서 한계를 맞이하기 직전이다.

'다행히 지금은 참을 수 있어.'

나는 아래로 내렸던 고개를 슬금슬금 들어올려 마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가슴 면적 대부분을 거의 드러낸,
노출이 심한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내 앞에 앉아있다.

심지어 아까는 멀리 있어서 확인하지 못 했으나 가까이서 바라보니 더욱 파격적이다. 왜냐하면 드레스가
시스루 같은 재질인지 새하얀 속살이 은연히 비치는 중이었으니까.

남자는 완전히 벗은 여자보다 이처럼 은밀하게 속살을 보이는 여자에게 더욱 강한 욕구를 느낀다는데 그
말을 실시간으로 체감하고 있다.

다른 여자도 아닌 마리가 이런 옷차림으로 내 앞에 나타나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나와 몸을 섞겠다는


의지를 드레스만으로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아이작. 나를 왜 불렀는지 알려줄 수 있어? 그리고 이것 말고도 할 얘기가 많지 않아?"

내가 최대한 인내를 발휘하며 욕구를 간신히 억제하고 있을 때 마리가 말을 걸었다. 마리 특유의 상큼한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다보니 목소리마저 야하게 들렸다.

이에 나는 얼굴에 덮었던 두 손을 떼어내며 마리와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도 나처럼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미묘하게 붉어져 있었으며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다행히 긴장하고 있는 건 나 혼자가 아니었던 모양. 덕분에 자신감을 얻어 겨우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래. 할 얘기가 있어서 불렀지. 그런데 그 옷은..."


"옷이 왜?"
"...아냐. 이건 나중에 얘기하자. 시간 아니, 밤은 아직 기니까."
"... ..."

시간이 길다고 말한 게 아닌, '밤'은 길다. 언뜻 보기에 사소한 차이여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완전히
다른 의미다.

사실상 마리의 바람을 들어주겠다는, 나의 간접적인 허가나 다름없었으니. 마리도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백설기 같은 뺨이 더 붉어졌으며 방실거리던 얼굴도 점차 깨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색한 상황이 내려앉아 침묵만이 가라앉기 직전, 본론부터 들어서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마리를
침실로 불러들인 이유는 모두 알겠지만 리나와의 관계 때문이다.

비록 리나와 레오르트가 나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들은 미네르바 제국의 황족이다. 적으로
만들어봤자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고 이번 전시회처럼 든든한 우군으로 만들어 놓아야된다.

세실리가 나를 보호하겠다고 선언했으나 마족의 입지는 현재 확실하지도 않는 상황. 그러니 리나를 확실한
내 편으로 만들어야 앞날이 편해진다.

'정치를 그토록 꺼려했는데 인생 참 신기해.'

역시 사람의 앞날은 아무도 모른다. 정치를 싫어하던 내가 리나를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마리를
설득시키려 하다니.

그래도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고 미리미리 대비하는 편히 이롭다. 앞으로 연재를 재개하게 되면 내


가치가 지금보다 커질 것이며 원하지 않아도 정치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리라.

"마리."
"응."
"이 이야기는 너에게 민감할 수도 있어. 리나와 관련된 거라서."

움찔-

악연을 넘어 경멸의 대상이었던 리나가 내 입에서 언급되었기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마리의 몸이 크게


움찔거리며 올라갔던 입꼬리가 급격히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불탈 것처럼 무르익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추락하는 느낌. 괜히 말했나 싶었지만 이건 언젠가
해결해야하는 난제 중 하나다.

매도 먼지 맞는 게 낫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계속 미루고 미루다가 사단이 나서야 수습하는 건


그만하고 싶다.

"...리나는 왜?"

좋았던 분위기에 초를 친 게 조금 기분 나빴는지 마리가 고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나에게 질문했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하며 말투였다.

이에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려던 시선을 최대한 그녀의 얼굴에다 고정시켰다. 여기서부터 입을 잘 털어야
마리도 더이상 기분 나빠하지 않고, 가라앉았던 분위기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터.

나는 인상을 써도 예쁜 마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평소 궁금하기도 했고, 앞으로 리나, 그리고 레오르트 님과 가까이 지낼 생각이거든. 너도 알다시피
제논 일대기는 신간이 발매될 때마다 덩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어. 완결이 될 쯤에는 아마 국가조차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
"...리나를 아군으로 만드려는 거구나? 훗날 잘못되었을 때 너와 가문, 그리고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정확해."

레킬리스 공작가 출신답게 마리는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냈다. 다만 불만스러운 얼굴은 여전했다.

아마 그녀로서는 자존심이 상할만한 이야기일 것이다. 레킬리스 가문 출신인 자신이 있는데 어째서 황족을
끌어들이는 거냐고.

하지만 내 정체가 탄로났을 때, 수많은 시선들이 나에게로 집중될 것이며 어두운 손길 또한 뻗쳐올 것이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아군을 많이 두어야 된다.

"세실리로는 부족해? 걔도 너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고 했잖아."

충분히 예상했던 질문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부족하지는 않지. 하지만 그렇다고 충분하지도 않아. 지난 번 초고 도난 사건처럼, 이 세상에는 전부


불확실한 것 투성이야. 최악의 경우 내가 납치당할 수도 있지."
"... ..."
"그리고 가장 두려운 건... 나 때문에 너와 내 가족들이 다치는 거야."

내가 무슨 짓을 당하는 건 상관없다. 나 혼자 피해만 입으면 그만이었으니.

하지만 가족은 아니다. 지금까지 가족들이 나에게 보여준 사랑과 헌신을 고려했을 때 그들은 나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가족들이 나로 인해 해를 입는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전생에서 가족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사고로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미연에 방지하고 싶다.

"특히 너만큼은 무슨 짓을 해서든 지켜주고 싶어. 너는 내가 제논이라는 걸 알기도 전에 나를 먼저


좋아했고, 고백까지 했으니까. 너는 나에게 둘도 없는 보물이자 소중한 여자야. 그런 네가 다친다고
상상만 하면... 평생동안 괴로움에 몸부림치겠지. 내가 제논이라는 걸 밝히기 전까지는 네가 날
보호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내가 널 지켜줄 차례야."
"... ..."
"부디 이런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해. 이기적이라 해도 괜찮아. 너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테니까."
"...정말이지, 너 다운 생각이구나."

속에 담아놓았던 심정들을 모두 꺼내자 마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 고개를 들어올리니 이게 왠 걸.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와 딱 마주쳤다. 푸른색 눈동자에는


진득한 감정이 담겨있었으며 촉촉하게 젖어있다.

뒤이어 그녀는 눈을 천천히 감으며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눈을 열어 나와 똑바로 마주했다.

"사람 마음을 갖고 노는 말을 하네? 그 말, 정말로 책임질 수 있지? 나를 지켜준다는 거."


"두 손을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줄 거야."
"그렇게까지 말하면 안 받아들일 수가 없겠네. 좋아. 난 받아들일게."
다행히 설득시킨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 것도 잠시, 긴장의 끈을 단단히 붙잡으며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리나를 아군으로 만들었다고 한들, 마리와 껄그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이상 진척이 더딜 게 분명하다.
어떻게든 이 둘의 사이를 풀어주어야 앞날이 편할 것이다.

"아군으로 두는 걸로는 부족해. 난 너와 리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거든."


"...그건 또 왜? 아군으로 두면 그만인 거 아니었어?"

트라우마를 건드렸는지 눈쌀을 찌푸리며 대놓고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내는 그녀였다. 전과는 달라도
확연히 다른 반응.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할 말을 이어나갔다. 평소 궁금했던 부분이자 어떻게든 개선해나가야


할 문제 중 하나다.

오지랖이 넓다고 할 수 있지만, 아군이 될 사람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는 건 옳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내가 총대를 매는 거고.

"아군으로 두어도 사람 사이의 묵힌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키기 마련이야. 무엇보다 리나도 너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는 것 같거든.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만일에 대비하고 싶어."
"... ..."
"너를 믿지 못 하는 건 아니야. 황족과 척을 지는 건 지금은 몰라도 언젠가 부메랑처럼 돌아올 거야.
혹여 리나가 나쁜 마음을 먹게 된다면 우리에게 최악의 적이 나타나는거지."
"후우..."

내 설득으로 머리가 냉정하게 식었는지 마리가 눈을 감으며 재차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히 먹혀들어간
모양이다.

이어서 마리는 턱을 괸 자세를 유지하며 시선을 다른데로 돌리고는 손가락으로 볼을 툭- 툭- 건드렸다.


잠시 후, 생각을 정리했는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언젠가 해결해야하는 문제겠지. 어찌 보면 나도 쪼잔했던 구석이 있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냥... 너도 알다시피 나와 리나는 어릴 때 친구였어. 레킬리스 가문은 황제의 측근 중 한 명이었으니
자연스레 가까워졌지. 나이도 똑같겠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황궁으로 보내셨어. 예절 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은 황궁에서 받았지. 그때까지는 괜찮았는데... 문제는 사교회였어. 내가 12 살 때의
일이었지."
"사교회라..."

일개 시골 깡촌을 다스리는 우리 가문과 달리 고위급 가문은 어린 나이 때부터 사교회에 데뷔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때부터 인맥과 서서히 넓혀 훗날 미래를 도모하는 것이다.

특히 마리와 리나는 엄청난 관심을 받았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무려 황녀와 공작 영애였으니. 관심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다.

"너도 알고 있지만 나는 사람의 진심을 본능적으로 꿰뚫어볼 수 있어. 지금은 괜찮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서 표정 관리를 하나도 못 했지. 반면 리나는 완전히 달랐어. 표정 관리가 완벽한 건 물론 화려한
말재간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지."
"설마 질투한거야?"
"에이. 나를 뭘로 보고. 그냥 대단하구나~ 라고 생각했지."

내 추측에 마리가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질투를 느낄만도 한데 너무 순수했던


나머지 질투를 느낄 새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리나도, 나도 아닌 다른 곳에서 나타났어. 황녀인 리나와 공작가 영애인 나. 이것만
본다면 완벽했겠지만... 네 말처럼 질투를 느끼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야."
"누가 험담을 하거나 이간질이라도 한 거야?"
"맞아. 15 살 때부터 백작가 영애가 우리 둘을 미묘하게 갈라놓기 시작했지. 나는 물론이고 리나도 전혀
모르는 사이에 말이야."

본격적인 정치질을 시작이었다. 나는 심각한 이야기가 나올 듯한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경청했다.

마리는 그런 나를 힐끔거리더니 피식 웃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나는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이 간혈적으로 떨리기 시작한 것을. 트라우마가 가슴 속 깊이


박혀들어간 듯했다.

"보통 귀족들의 실세는 공작도, 후작도 아닌 백작급인 건 너도 알고 있지? 그 영애의 가문도 실세 중


하나였어. 하지만 그만큼 욕심이 많았지. 위로 올라가려는 욕심이 말이야."
"... ..."
"그 애는 나를 철저하게 고립시키기 시작했어. 내가 리나에게 접근할 때마다 되도 않는 이유로 떨어뜨리고,
또 리나에게는 안 좋은 말을 남겼지. 당연히 리나는 믿지 않았지만 그게 쌓이고 쌓이니까... 리나도
나를..."
"그만. 됐어."

이쯤이면 그만 말해도 될 것 같다. 나는 서둘러 마리의 손을 붙잡으며 단호하게 말을 잘라냈다.

두 손을 떠는 건 물론이고, 목소리까지 떨면서 말하던 마리는 내가 손을 잡자마자 고개를 서서히


들어올렸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 했지만 어느새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다.

나는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마리를 바라봤다. 언제나 당당하고 활기차던 모습은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져
있으며 친구에게 배신당한 사람만이 남아있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것만큼 끔찍하고 괴로운 기억은 거의 없다. 특히 어린 나이에 그런 경험을
겪었으니 상처는 더욱 깊게 새겨졌겠지.

다행히 오해를 풀고, 일도 잘 처리한 듯싶었지만 마리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토록 리나를 혐오하고 경멸하던 이유를 대강 알 것 같았다.

"내가 괜히 물은 것 같네. 정말 미안해. 그런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아, 아냐. 그 후로 오해도 풀었고, 그 백작 영애는 가문에서 추방당했거든. 사실 리나도 나에게
허리까지 숙이며 사과했어. 내가 사과를 받지 않았을 뿐이야."
"사과를 안 받은 게 아니라 못 받은 거겠지."

사람 사이의 신뢰는 한 번 깨지면 복구하기가 극히 어렵다. 평생동안 고쳐나가려 애를 써도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벽에 박힌 못을 빼내도 그 구멍이 남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에 뚫린 구멍은 결코 고칠 수 없다.

"...너는 그러지 않을 거지?"

마리는 손등으로 눈물을 대충 훔치고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아주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너에게 진실만을 말할거야."


"그런 애가 세실리랑 바람났니?"
"... ..."
이러면 할 말이 없어지는데. 마리는 내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자 장난이라는 듯,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내 볼을 꼬집으면서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를 두고 다른 여자를 만들기나 하고 말이야. 심지어 그 여자가 더 예쁘네?


괘씸해서 안 되겠어. 오늘 밤새도록 괴롭혀야지."
"...세실리랑 잘 얘기했어?"
"응. 세실리는 내가 특별히 허락할게."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몰라도 불편하다는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후련함에 가까운 느낌.

게다가 세실리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뉘앙스를 보아 선택권은 마리가 꽉 쥔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다행이라 여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내 볼을 꼬집은 마리의 손목을 슬며시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마리도 내 손길에 따라 아무런 저항없이 팔을


움직였다.

"... ..."

그렇게 우리 둘은 아무런 말없이, 그저 손만 잡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었다.

나는 마리의 얼굴부터 시작해서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가녀린 목덜미부터 시작하여 면적 대부분이 노출돼 존재감을 자랑하는 가슴, 그리고 이브닝 드레스 너머로
은은하게 비춰지는 속살까지.

한 폭의 그림 같은 자태에 눈을 뗄 수가 없었으며 동시에 내 욕구를 바늘로 찌르듯이 자극시켰다.

이제 꺼릴 게 없다는 듯, 대놓고 욕정어린 시선으로 마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이작."

마리가 부끄러워하는 기색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이에 나는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회피하더니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리고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말한다.

"그... 공연 중에 네가 말했잖아. 침실에서 커피나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응."
"그게 무슨 뜻을 가졌는지 알고 있어?"

자세한 의미는 모르지만, 그 유명한 라면 먹고 갈래? 와 비슷하지 않을까.

정작 떠드느라 커피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 했지만, 그 의미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미 나도 단단히 마음을


먹은 상태였으니.

나는 얼굴을 잔뜩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마리의 손을 더 강하게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아."


"... ..."
"...마실거야?"

내 간접적인 질문에 마리는...

"...응."

직접적인 대답을 함으로서 허락했다.

나는 대답을 듣고 턱을 서서히 젖혀들었다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녀에게


물었다.

"후회하지 않아?"
"너니까 후회하지 않아."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고 때에 따라서 답답할 수도 있어."
"나는 왈가닥인데다가 고집이 세."

마리는 내 우려 섞인 질문들을 하나하나 명료히 받아쳤다. 그러면 그럴수록 용기를 얻었는지 이윽고 나와
정면으로 마주해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결의와 긴장, 그리고 기대와 애정이 골고루 섞여있는 마리의 눈동자를 직시하다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도 내가 에스코트하듯이 손을 붙잡은 채 일어서자 따라 일어났다.

"...아이작."
"응. 마리."
"사랑해."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미소를 머금으며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마리.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귀엽고, 또 섹시해서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얼굴을 서서히 가까이 접근시키다가 마리의 코앞에 멈춰세웠다. 마리는 내 얼굴이 코 앞까지
다가와도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도."

스윽-

마주잡았던 손을 풀어 서서히, 부드럽게 올라가다가 등 뒤로 향한다. 비어있는 다른 한 손도 그녀의 얇은


허리를 스쳐지나가 등으로 옮겨졌다.

내 두 손이 몸을 뱀처럼 스멀스멀 움직일 때마다 마리의 가녀린 몸이 움찔거렸다. 그사이, 나는 마침내


마리를 껴안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정면만 보고 있어서 몰랐지만, 등까지 시원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등의 감촉이
내 손을 타고 그대로 전달된다.

"하아..."

포옹을 하니 마리가 뜨거운 숨소리를 내쉬었다. 뒤이어 내 몸을 더듬거리면서 조심히, 그리고 강하게
나를 껴안았다.

이때까지 했던 포옹과 달리, 그녀의 살결과 심장 소리가 온전히 느껴졌다. 이브닝 드레스 너머로 커다란
가슴이 나를 짓누른다.

마시멜로우처럼 말랑말랑하여 작은 압박에도 형태가 자유자재로 변하는 마리의 가슴. 이걸 내 손으로


만지면 어떤 기분일까.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마리는 나에게 달콤한 첫 날 밤을 선물해주는 여자이니 유리 공예품처럼


소중하게 다루어야 된다.

"...아이작. 아래에 뭔가..."


"네가 이리 만든거야."
"... ..."

마리도 이미 불끈거리기 시작한 내 남성을 느낀 모양이다. 그녀는 부풀어오를 대로 부푼 내 아랫도리를


계속해서 아래를 힐끔거렸다.

이에 나는 어딜 한 눈 파냐는 듯, 등에 갖다 대었던 두 손을 아래로 쓸어내렸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녀가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흥악!"

갑작스러운 자극에 몸을 부르르 떨며 괴상한 소리를 내뱉는 마리. 깜짝 놀란 나머지 나를 감싼 두 팔에


힘이 더 가해졌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등이 파였다는 뜻은 내 손이 그 아래까지 침범할 수 있다는 의미. 나는 그녀의 등을 소중히 보듬어주다가


어느 순간부터 허리 밑까지 쓸어내렸다.

은밀한 비처까지는 아니지만, 엉덩이와 넓은 골반을 도자기 다루듯이 쓸어줌으로서 그녀의 애를 태우기
시작했다.

"흐응... 하앙..."

마리는 신선한 자극이 연거푸 이어지자 몸을 부르르 떨면서 신음을 흘렸다. 나는 그녀가 차마 나를
바라보지 못 하고 고개를 떨구자 한 손으로 턱을 붙잡아 억지로 들어올렸다.

"으응...? 읍!"

그리고 이어지는 기습적인 키스. 마리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몸을 뻣뻣하게 굳혔으나 이윽고 힘을 빼며
받아들였다.

이에 한 손은 뒷머리를, 한 손은 그녀의 등을 붙잡아 마음껏 탐닉했다.

츕! 츄웁! 츕!

단순히 입술을 맞추는 키스가 아닌, 서로를 탐하는 것처럼 격렬한 딥키스. 내가 마리의 머리를 단단하게
고정시킨 것처럼, 마리도 내 목을 껴안으며 호응했다.

입술을 핥거나 살짝 깨물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어 제 짝을 찾아 주위를 더듬거린다.

마침내 서로의 혀가 얽히고 섥히며 타액을 교환하고, 서로의 사랑을 갈구한다.

"후아..."
"... ..."

그렇게 탐닉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 둘은 사전에 합을 맞춘 것처럼 입술을 떼었다.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은색 실선이 길게 이어졌다가 뚝- 하고 끊어졌다.

나는 입 안에 달콤한 맛이 풍기는 것도 잠깐, 마리의 얼굴을 바라봤다.


혀를 길게 내밀고 눈이 풀려있어 황홀하다는 감정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다. 우아함보다는 천박함이
어울리는 표정.

그리고 방금 전 격렬한 입맞춤으로 인해 드레스의 끈 하나가 흘러내려 그녀의 한 쪽 가슴이 완전히


노출되었다.

"...마리."
"하아... 하아..."

이미 흥분할대로 흥분했는지 대답조차 제대로 못 하며 숨을 헐떡이는 그녀. 나는 얼굴을 서서히 갖다


대면서 그녀의 귀에다 속삭이듯이 말했다.

"사랑해."
"나, 나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마자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그녀의 얼굴을 상냥하게 쓰다듬어주다가 고개를
아래로 내려 가늘고 긴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혀로 상냥하게 핥으면서 살내음을 마음껏 음미했다. 씻고 와서 달달한 비누향이 오감을 자극시켰다.

"흐응..."

그녀도 만족스러운지 야릇한 비음을 흘리며 몸을 흠칫흠칫 떨었다. 나는 그녀를 천천히 침대 쪽으로
이끌었고...

"하앙!"

이미 드러난 그녀의 한 쪽 가슴을 붙잡음으로서, 저택의 깊은 밤이 시작되었다.

< 112 화[19] >

"하앙!"

마리는 아이작이 자신의 가슴을 우악스레 붙잡자 순간적으로 교성을 내질렀다. 이 행동만으로도 그녀는
하복부가 욱신거렸으며 몸을 크게 뒤틀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아이작도 생전 처음 만져본 여성의 맨 가슴에 속으로 감탄했다. 한 손으로도 다 잡히지 않은


크기하며 감촉 또한 마쉬멜로우처럼 말랑말랑하다.

게다가 강하게 쥐면 그 사이로 새하얀 살이 빠져나오니 이토록 야할 수가 없다. 이와 더불어 흥분하여


바짝 서버린 분홍빛 유두까지.

자기가 정말 이 여자를 탐하려는 거구나. 아이작은 마리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그녀의 새하얀 목을
핥기 시작했다. 동시에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열심히 희롱한다.

"흐으응...!"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이런 걸까. 마리는 빠져나오려는 신음을 막기 위해 애를 썼으나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미 몸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상태였으니.

그녀도 가문에서 배운만큼 '성(性)'에 대한 관심도 많았으며 가끔씩 스스로를 달랠 때가 있다.

하지만 자신이 아닌 남이, 그것도 사랑하는 남자가 몸을 희롱하는 건 그 궤를 달리했다. 그의 손길


하나하나가 큰 자극으로 돌아와 아랫배가 찌릿했으며 머리에는 번개가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자신의 몸이 이리 민감한 것인지, 아니면 아이작이 처음 치고는 애무에 능숙한 것인지.

그게 무엇이던 간에 마리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쾌락을 실시간으로 체험하고 있다.

스윽-

한동안 마리의 목덜미와 가슴을 자극시키던 아이작이 서서히 뒤로 물러난다. 마리는 점점 익숙해지던
쾌락이 순간적으로 사라지자 의문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이작도 침대에 누워있는 마리를 내려다봤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산발처럼 흩어져 있고, 한 쪽만 드러난
가슴은 중력에 의해 물방울처럼 살짝 처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그녀의 표정. 눈이 풀리기 직전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의 얼굴은 아이작에게 또다른 흥분을
선사했다.

그는 이미 단단해질대로 단단해진 자신의 물건을 느끼면서 조용히 마리에게 물었다.

"...마리."
"...응."
"벗겨도 돼?"

아이작의 질문에 달뜬 숨을 몰아쉬던 마리는 고개를 스윽- 돌렸다. 뒤이어 그를 한 번 힐긋거리더니


개미가 지나가는 듯한 크기로 대답했다.

"...벗겨도 돼."

정말로 작은 대답이었으나 아이작의 귀에는 똑똑히 들어왔다. 이에 아이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손을


천천히 뻗었다.

손은 이미 흘러내린 드레스 끈이 아닌, 아직까지 마리의 어깨에 걸려있는 끈 쪽으로. 끈을 붙잡은 후에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 그녀의 전라가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으응..."

마리는 드레스가 벗겨짐으로서 자신의 가슴이 완전히 드러나자 창피했는지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나
드레스가 완전히 벗겨지니 한 팔로는 가슴을, 한 손으로는 은밀한 비처를 조심히 가렸다.

마침내 이브닝 드레스를 모두 벗겨낸 아이작은 실오라기 하나 거치지 않은 마리의 자태를 감상했다.

매끄럽고 눈처럼 새하얀 피부. 한 팔로 가렸음에도 살이 빠져나오는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 아래로
매력적인 굴곡을 이루는 골반까지.

마리의 나신은, 그야말로 백색의 여신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성스럽게 느껴졌다.

'...속옷도 안 입고 있었네.'

보통 이브닝 드레스를 입어도 속옷은 입는 편이다. 하지만 마리는 이브닝 드레스 안으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 상태였다.

아이작은 마리의 요망함에 콧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쉰 것도 잠시, 부끄러워하는 마리를 내려다보다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뻐."
"... ..."
"정말로 예뻐. 마리. 세상에서 제일. 그러니까..."

아이작은 뒷말을 삼켰지만 마리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분명 가슴과 아래를
가리던 팔을 치워달라는 부탁일 터.

이대로 팔을 모두 치운다면, 자신은 아이작에게 숨기는 것 하나없이 모두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로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여성으로서 모든 것을 내주게 되겠지.

마리는 그 생각에 약간 머뭇거렸으나 이내 가슴과 밑을 가리던 팔들을 스르르 치우기 시작했다.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 했으며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윽고... 분홍색 유두가 첨예하게 선 가슴과 더불어 은밀한 공간이 전부 드러났다. 새하얀 머리카락처럼,
마리의 비부는 흰색 수풀로 에워쌓여진 상태다.

이에 아이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상체를 천천히 내렸다. 이어서 마리의 뺨을 부드럽게 붙잡아 정면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하음..."

츕- 츄웁-

다시 한 번 길게 이어지는 열정적인 딥키스. 마리는 누워있는 채로 아이작의 자신의 입 안을 유린하는


것도 허용했다.

아이작은 마리의 혀 뿐만 아니라 입술, 치아, 그리고 그 안까지 전부 게걸스럽게 탐했다. 마리는 그가
혀를 놀릴 때마다, 자신의 입 안을 침범할 때마다 다리를 움찔거렸다.

"츄릅... 흐읍!"

눈을 감으며 아이작의 키스를 받아들이던 마리가 얕은 신음을 흘렸다. 아이작의 손이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녀린 목을 타고 내려가던 손 하나는 이내 가슴에서 멈추며 조심스레 붙잡았고, 다른 한 손은 허리


라인과 골반을 넘어 허벅지를 쓰다듬는다.

가끔씩 엉덩이를 만질 때마다 미묘한 흥분감이 그녀를 고양시켰다.

"흐응! 츄읍! 하앙! 흐앙...! 춥...!"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행해지는 쾌락에 마리는 아이작의 입에서 벗어나 뜨거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아이작이 곧바로 입을 덮어 혀를 놀림으로서 그녀는 혀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이작은 마리의 몸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으나 일부러 비부까지는 손을 접근시키지 않았다. 대신


그 부위를 제외한 모든 곳을 손으로 쓰다듬어 조용히 불씨만 키웠다.

첫 경험인데도 능숙하게 애무를 할 수 있던 이유는, 아이작에게 있어서 마리가 첫 여자이기 때문이다.


부디 그녀가 먼저 쾌락과 절정을 느낄 수 있도록, 일종의 배려이자 봉사다.

"푸하! 우음!!"

마리도 한계에 다다랐는지 두 손으로 아이작을 감싸 안아 얼굴을 바싹 붙였다.

이전까지 아이작이 혀를 놀리면 그녀가 호응을 하는 식이었지만, 이제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아이작의 입
안에 혀를 집어넣어 마음껏 음미한다.

쾌락이 젖어 이성이 거의 마비되기 직전이라는 의미. 아이작은 그녀의 혀놀림을 말없이 받아주다가
허벅지와 하복부를 쓰다듬던 손길을 서서히 아래로 움직였다.

더욱 깊게, 그녀의 하얀 수풀을 지나쳐 비부를 향해 손을 뻗는다. 다른 한 손으로는 유두를 빙글빙글


돌려 그녀가 미처 신경쓰지 못 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마리의 음부에 손가락이 쑤욱- 침범하여 질내로 들어가는 순간.

"흐으으읏?!!"

마리의 두 눈이 부릅 떠지며 몸이 크게 들썩거렸다. 그녀의 허벅지가 오므라져 아이작의 팔을 강하게


조였으며 두 팔 또한 그를 감싸기에 이른다.

작은 불씨에 기름을 들이부운 것처럼, 불꽃이 화려하게 타올랐다.

찌걱! 찌걱! 찌걱!!

그러나 이제 시작이라는 듯, 아이작은 허벅지가 팔을 압박하는 순간에도 그녀의 질을 마음껏 휘저어


농락했다.

"흐앙! 하앙! 아, 아이작! 아앙! 아아앙!!"

마리가 짐승 같이 울부짖으며 날뛰어도 아이작은 비어있는 한 손으로 어떻게든 고정시키며 질내를 쑤시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절정을 멈추지 않도록, 쾌락에 미쳐날뛰도록.

불꽃에 마른 장작을 추가하여 더 강한 불꽃이 일어날 때까지,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 마리의 보지를 쑤셨다.

찌걱! 찌걱! 찌거억!

"흐앗! 하앙! 하악. 아으아앙!!"

마리는 한참동안 쾌락의 파도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몸부림쳤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며 이따끔씩 눈 앞이 번쩍거리는 현상도 일어났다.

스스로를 달래는 위로가 아닌, 사랑하는 사내가 전해주는 첫 번째 절정. 그 절정은 마리에게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마약에 가까웠다.

"끄으으윽...!"

털썩-

마리의 몸이 침대 위로 힘없이 허물어진다. 부르르 떨던 허벅지에도 힘이 풀려 보지를 쑤시던 아이작의


팔도 자유로워졌다.

"후우..."

아이작은 숨을 내쉬며 절정으로 제대로 가버린 마리를 바라봤다.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 흰자위가 차지하는
부분이 더 많아졌으며, 몸은 간혈적으로 부들부들거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음부에서 흘러나오는 애액이 홍수가 난 것마냥 흘러내려 침대보가 흥건히 젖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음부를 쑤셨던 그의 손 또한 마찬가지로 마리의 애액으로 흠뻑 젖은 상태다.

본방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절정으로 가버린 천박한 모습. 아이작은 애액으로 뒤덮힌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 안에 넣었다.

약간 시큼한 듯하면서도 비누향이 나는, 남자의 욕정을 자극하는 맛과 향이다.

"헤엑... 헤엑..."

한편 호흡조차 제대로 갈무리 하지 못 하고 있던 마리는 쉬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뇌까지 녹아버릴


듯한 쾌감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다 선명해졌다를 반복한다.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렬하고, 짜릿한 쾌락.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처음은 힘들더라도 한
번 쾌락을 맛보게 되면 절대 헤어나올 수 없을거라 하셨다.

헌데 처음조차 이정도다. 그렇다면 이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로 죽는 게 아닐까.

마리는 반쯤 풀린 눈을 겨우겨우 옮기며 앞쪽을 바라봤다.

주섬- 주섬-

슬슬 본방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겠다는 듯, 아이작이 잠옷을 한꺼풀 한꺼풀 벗고 있었다. 마리는 최대한
호흡을 다스리며 아이작의 몸을 바라봤다.

아이작의 몸은 의외로 잔근육이 탄탄하게 박혀있어 뭇 여성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과거에는 호크가
아이작을 기사로 키우기 위해 단련시킨 적이 있으며 최근에도 꾸준히 운동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허나 지금 마리에게 중요한 건 아이작의 상체가 아니다. 바로 그 밑이었으니.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이어지기 위해, 남자에게만 특별히 허락한 신체 부위.

'분명... 단검만한 크기라고...'

가문에서 성교육을 받았을 때, 남자의 성기는 발기가 충분히 된다면 단검 정도 되는 길이라고 교육받았다.
그것만으로도 비좁디 비좁은 자신의 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 걱정했다.

마리가 머릿속으로 단검만한 길이를 생각하고 있을 쯤, 아이작은 갑갑했던 바지와 속옷을 그대로 멀리
벗어던졌다. 그와 동시에 마리의 탁해진 눈동자에 아이작의 물건이 거울처럼 비춰졌다.

"...아?"

크다. 그것도 엄청.

단검이 아니라 근력이 뛰어난 기사들이 들고 다니는 클레이모어 수준으로 아이작의 물건은 마리가
보기에도 매우 컸다.

심지어 단순히 큰 것에만 끝나지 않았다. 흥분할대로 잔뜩 흥분한 아이작의 심정을 대변하듯, 꼿꼿하게
선 그의 물건에는 핏줄이 오돌토돌 돋아나 있었으니.

어지간한 미녀보다 예쁜 외모와 달리 아이작의 남성성을 전부 때려박은 것처럼 흉악했다.

"아, 아이작. 그거는..."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마리가 두려움에 먹힌 표정으로 아이작을 부른다. 그에 아이작은 부드러이 웃으며 그녀의 음부에 손을
갖다 대었다.

찔꺽-

"흐응?!"

아이작은 아까 전처럼 마리의 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이것만으로도 살짝 절정에 오른 마리였지만,


아이작의 손가락은 그녀의 안을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안쪽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마리는 다급히 아이작을 쳐다봤다. 이에 아이작은 빙긋 웃기만 할 뿐,


손가락을 위아래로 천천히 왕복시키기 시작했다.

찌걱- 찌걱-

"흐앙! 잠까안...!"
"마리도 궁금하지 않아? 손가락은 여기까지밖에 못 오는데 내 건 그 너머까지 들어갈 수 있어."
"으응! 아앙!"

마리는 아이작의 말을 듣고나서 더욱 흥분했다. 질 안을 쑤시는 손가락도 어마어마한 쾌락을 전달하는데,


그의 물건은 더욱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까보다 훨씬 좋을까, 아니면 고통만 느껴질까.

그녀의 머리가 일순간 복잡해졌지만, 머지않아 하나의 결론이 도출되었다.

아이작의 물건을 받아들이자고. 그리고 저 커다란 물건을 수월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쩌억-

"아, 아이작..."
"... ..."
"어서 빨리... 넣어줘..."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지. 마리는 떨리는 두 손으로 보지를 벌리며 아이작을 재촉했다.

본인 딴에는 도와주기 위해서 벌인 거라지만, 아이작에게는 실로 음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남자의 자지를 받기 위해 양손으로 보지를 벌리는 천박하고도 창녀 같은 행위. 지금 눈 앞에서 마리가


하고 있다.

이에 아이작은 마리의 질내를 쑤시던 손가락을 빼며 자신의 물건을 어루만졌다. 전생과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크기가 컸으며 강직도도 무시무시하다.

뒤이어 보지를 벌리며 애태우고 있는 마리의 아랫배에 물건을 턱- 하고 얹었다.

"히익...!"

거의 배꼽까지 닿는 길이에 놀랐던 것일까.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겁했다.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미약한 기대감이 담겨있다. 저것이 안으로 들어오면 얼마나 큰 쾌락을 얻게 될까.

보통 같으면 처녀를 잃는다는 부분에 신경이 쏠려야 정상이지만, 방금 전 남자가 전해주는 절정의 맛을
알아버린 상태.
현재 그녀는 아이작과의 섹스를 통해 쾌락을 탐하는, 원초적인 본능을 더욱 갈구하는 중이다.

스윽-

아랫배에 올라가 있던 자지가 아래로 내려왔다. 마리가 보지를 벌린 덕분에 질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이작은 자지를 곧바로 넣지 않고 미끌린 척, 귀두로 보지 전체를 쓸어올렸다.

좀 더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기름을 칠하는 것처럼 마리의 애액으로 물건을 적셨다.

"하윽!"

커다란 귀두가 미끌리듯이 올라가자 마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서 빨리 넣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아이작은 짓궂었다.

귀두를 이용해 보지를 살살 문질러 자극만 시키고, 그때마다 애액이 졸졸졸 흘러나와 침대보를 적신다.

그에 마리가 머릿속이 재차 새하얘지기 직전, 아이작은 비좁은 질구에 귀두를 집어넣었다.

쯔읍-

"흐극...!"

손가락과는 비교도 안 되는 느낌에 마리는 이를 악 깨물었다. 애액으로 붐비는 보지였지만 역시 크기가


크기다보니 고통이 따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이작도 난감한 건 마찬가지였다. 아직 귀두밖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마리가 엄청 괴로워한다.

여기서 선택을 해야된다. 천천히 넣어 머리가 고통에 익숙해지기까지 기다리는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깊게 박아 한 번에 처리할지.

하지만 이미 사전 작업을 거친데다가 애액이 쏟아져나오는 걸 보면, 후자가 좋은 방법일 것 같다. 이에


아이작은 허리에 힘을 주며 물건을 안으로 밀어넣었다.

쩌억! 쿵-

"!!!"

보지 안에 아이작이 물건이 빠른 속도로 침범하고, 귀두의 끝이 무언가와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히 들린다.
마리는 배 안이 가득찬 느낌에 눈을 부릅 뜨며 입을 꽉 깨물었다.

"흐으으윽!!"

하마터면 또다시 절정으로 가버릴 뻔했지만, 지금은 쾌락과 고통이 뒤섞인 탓에 겨우겨우 버틸 수 있었다.
그녀는 입을 벌렸다 닫았다를 반복하다가 떨리는 눈으로 아래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이작의 물건이 보지에 삽입되어 이어져있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진정한 의미로 하나가 된
것이다.

"으으으..."

아이작의 물건은 흉악했던 겉모습처럼 뜨겁고, 단단했다. 빈말이 아니라 불방망이를 질 안에 삽입한 것
같다.

아이작도 자신의 물건을 감싸는 마리의 질벽에 침을 꼴깍 삼켰다. 크기가 큰 것도 있으나 처녀인만큼
상당히 비좁고 또 압박감이 굉장했다.

무엇보다 질 내부까지 애액으로 흠뻑 적셔있어서 당장이라도 쌀 것 같았다.

"마리."
"응? 우웁! 츄읍..."

아이작은 움직일까 말까 고민하다가 우선 그녀에게 키스부터 해줬다. 그녀가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줄
셈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 간의 키스가 1 분가량 지속되었을 때 쯤, 아이작은 마리의 몸에 힘이 살짝 빠져나감을


느낄 수 있었다.

몸에 힘이 풀어졌다는 건 그만큼 긴장이 완화되었다는 소리. 아이작은 마리의 입술에서 얼굴을 떼었다.

마리는 파과의 고통에 눈물을 질끔 흘리고 있었다.

"움직일게."
"...응."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작은 허리를 서서히 뒤로 물렸다. 그러자 마리의 안을 가득 채웠던 물건 또한 질벽을
살살 긁으면서 물러났다.

"아앙..."

질벽이 긁히는 느낌에 마리가 약한 신음을 흘린다. 물건이 커서 그런지 뒤로 물러나는 시간도 오래 걸렸다.

뒤이어 기둥이 거의 다 빠져나오고 귀두만이 보지에 들어갔을 때 쯤, 아이작은 부지불식간 물건을


밀어넣었다.

쩌억!

"하앙!"

쾌락에 젖은 마리의 신음 소리. 아이작은 그녀의 반응에 더욱 감정이 더욱 고조되어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쯔북! 쯔북! 찌걱!

"흐앗! 핫! 으앙! 자, 잠. 아아앙!!"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아이작이라지만, 결국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마리가 뭐라고 하던 간에


허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보지에 물건이 들락날락거릴 때마다 물 튀기는 소리가 나면서 애액 또한 댐이 터진 것처럼 흘러내린다.


마리는 손으로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아이작의 물건이 안을 범할 때마다 뇌속을 헤집는 쾌락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미 반쯤 정신을 놓았던 탓에 그녀는 자신이 비명을 지르는 건지, 아니면 울고 있는 건지 자각할 수


없었다.

쭈걱! 쭈걱! 쭈걱!


"흐앙! 아이작! 아이... 츄읍!!"

아이작이 보지를 제 마음대로 농락할 때도 마리는 그가 키스를 하면 열렬히 호응해줬다. 위와 아래가


동시에 범해지니 당장이라도 절정에 오를 것 같았다.

"응극! 으윽! 하윽!!"

거의 절정에 다다르기 시작한 것일까. 마리는 머리에 뭔가가 차오르는 느낌에 이를 악 깨물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진행하면 큰 게 올 것 같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다가 한계치를 돌파해 펑-


퍼지는 것처럼, 마리는 아이작이 좀 더 강하게 나가길 원했다.

아이작도 그 징조를 알 수 있었다. 더 강하게 박아주길 원하는 것처럼, 마리의 두 다리가 자신의 허리를
감쌌으니까.

정말이지, 처녀라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음란하고 천박한 몸뚱아리다. 아이작은 상체를 숙여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나서 더욱 박차를 가했다.

쩌억! 쩌억! 쩌억!

"하아! 하앙! 하아!"

아이작이 보지를 유린하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자 마리의 입에서 쾌락에 젖은 신음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조금 전 보다 더욱 깊은 곳을 찌르고, 속도도 더 빨라졌다. 마리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안에 씨앗을 뿌리려 한다고. 마리는 점점 더 고조되는 쾌감에 아이작을 감싸던 팔과 다리에
힘을 주었다.

쑤걱 쑤걱 쑤걱

"흐아앙! 아앙! 흐앗!"


"흐읏!"

마리의 보지를 쑤시던 아이작도 옅은 신음을 흘리며 그녀를 강하게 껴안았다. 그리고 처음 삽입했던
것처럼, 허리를 밀착시켜 자궁구에 귀두를 부딪혔다.

큐웅-

"꺄아아아앙!!!"

자궁구에 귀두가 충돌하는 느낌에 마리가 울부짖었다. 아이작의 허리를 감싸던 두 다리가 일직선으로
펴지며 부르르 떨렸고, 발가락은 오므렸다 퍼졌다를 반복한다.

팔 또한 허공을 휘젓다가 이내 손톱으로 등을 긁기 시작했다. 눈 앞에 섬광이 번쩍거리며 머리를 전기로


지지는 듯했다.

꿀럭- 꿀럭- 꿀럭-

그사이 아이작도 마리를 안은 채로 그간 쌓여있던 정액을 모두 토해냈다. 오랫동안 묵혀있던 탓에 몇


번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씨를 뱉어낸다.

마리는 자궁에 씨앗이 토해지면서 아랫배가 뜨거워짐을 느꼈지만, 그것보다는 절정에 허우적거리기 바빴다.
눈은 흰자위가 차지하는 부분이 더 많아졌으며 눈물샘이 고장난 것처럼 눈물이 흘러나왔다.

푸슉! 푸슉!

뿐만 아니라 결합된 보지에도 애액이 흩뿌리듯이 흘러나왔다. 아이작은 마리의 애액으로 배가 축축해짐을
느끼면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절정으로 인해 가버려도 제대로 가버린 모습. 눈은 눈대로 풀려있고 혀까지 삐져나와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거기다 몸을 간혈적으로 떠는 걸 보아 쾌감이 무시무시하다는 걸 얼추 알 수 있었다.

쯔극!

"흐앙..."

아이작이 보지에서 물건을 빼자 마리가 흠칫하며 신음을 흘렸다. 이미 몸에 힘이란 힘은 모두 빠져나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도 없다.

아이작은 보지에서 꺼낸 물건을 확인했다. 정액과 애액으로 번들거였으나 아직 한참 부족하다는 듯,


꼿꼿하게 세워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이에 그는 마리의 얼굴을 쪽으로 다가가 슬그머니 물건을 갖다 대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입 쪽으로 가까이
대었다.

이미 쾌락으로 인사불성이 된 마리라면, 혹시 빨아주지 않을까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섹스를 하면서


마리는 천성적으로 음란한 몸을 지녔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그리고 그 직감이 맞아떨어졌을까.

"...할짝."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지의 짙은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자 마리는 혀를 내밀어 기둥을 핥았다. 아이작은
쾌감에 몸을 떨었다가 자지를 더욱 가까이 대었다.

"우움... 츄릅. 츄웁. 쭈웁..."


"하아..."

마리는 정액과 애액으로 지저분해진 자지를 혀와 입을 이용해 정성스레 청소해주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그녀의 혀놀림에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가 자지를 밀착시켰다.

"우욱. 우움..."

살짝 벌어진 입 안에 자지가 침범해도 마리는 사탕처럼 빨기만 할 뿐,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본능적으로 혀를 빙글빙글 굴려 아이작에게 쾌락을 선물해줬다.

아이작은 그녀가 쉽게 청소를 끝낼 수 있도록 자지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리도 혀와 입을 이용하여 기둥


전체를 청결히 만들었다.

"좋았어?"
"우웅. 쭈웁. 쭙. 쭈움. 후아... 쭈우웁..."

아이작의 물음에도 마리는 자지를 빠는 걸로 답했다. 여태까지 이런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니, 아이작은
물건에 불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를 옮겼다.
눈 앞에서 자지가 사라지자 마리의 혀가 허공을 놀았지만, 그녀는 아쉬울 할 틈도 없었다. 아이작이
그녀의 몸을 빙글 돌리더니 엉덩이만 올라가도록 만들었으니.

덕분에 슬슬 정신이 들려는 찰나, 아이작은 탐스러운 마리의 엉덩이를 쓰다듬다가 다시 한 번 보지에
물건을 삽입했다.

푸욱!

"하앙..."

조금 전 극한의 쾌락 때문인지 신음 소리는 작았지만, 마리는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자세가 바뀌어서


아이작의 물건이 다르게 느껴졌으니까.

비록 자신의 몸을 자위 도구로 사용하는거나 다름없으나 마리는 만족했다. 그저 아이작이 선물해줄 절정만


기다리면 될 뿐이다.

쩌억! 쩌억! 찌걱!

"하아앙! 하앙. 앙. 앙."

그리하여 저택의 깊은 밤은 길게 이어지고, 마리는 엉덩이만 들어올린 채 쾌락을 원없이 탐닉했다.

< 113 화[19] >

본래 시간은 한정돼 있지만 열락의 밤은 길게 이어졌다. 늦은 밤부터 시작된 두 남녀의 정사는 새벽이
지나서도 꾸준히 유지되었다.

아이작은 그간 쌓여있던 욕정을 모두 풀겠다는 것처럼 마리의 몸을 제 마음대로 탐했고, 마리도 아이작의
물건이 안을 휘저을 때마다 해일처럼 몰려오는 쾌락에 허우적거리기 바빴다.

처음에는 사랑으로 시작했어도, 일정 이상의 쾌락이 몰려오니 두 남녀 모두 원초적인 욕구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아이작은 혹여 자신의 물건으로 인해 마리의 안이 상처를 입을까봐 조심했지만, 마리는 그딴
거 상관하지 않고 허리를 움직였다.

물론 마리가 아이작의 물건을 모두 집어삼키려 노력해도 크기가 평균보다 한참 웃도는 바람에 밑동이 살짝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마리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쾌감에 몸부림치기 바빴다.

"사랑해. 아이작."
"나도."

서로의 육체를 탐해도 키스는 잊지 않았다.

아이작의 위에 올라탄 마리는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아이작에게 키스를 요구했다.
아이작도 그에 따라 열렬히 환영해줬다.

쭈웁- 쭙- 쭈웁-

혀와 타액이 뒤섞이는 키스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그들은 서로 결합된 상태였다. 수없이 반복된 절정으로
지칠대로 지친 마리였지만, 그녀는 내재돼 있던 음탕함을 가식없이 전부 표출했다.

아이작도 밤부터 시작된 거사가 새벽까지 진행되어도 체력적으로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그는 옛날부터
꾸준히 운동을 했지만 마리는 아니다.
현재 그녀는 체력이 모두 바닥난 상황이고, 체력이 아닌 기력을 소모하고 있었기에 머지않아 기절할
것으로 보였다.

쯔걱!

"흐읍! 쭈웁! 츄릅."

아이작은 마리의 혀가 자신의 입 안을 탐하고 있을 때, 기습적으로 허리를 치켜올렸다. 순간적으로


마리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자극에도 마리는 놀라기만 할 뿐, 아이작의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단단히 고정시켜 어떻게든 유지했다.

이에 아이작은 눈을 감아 잠자코 그녀의 혀를 받아들인 것도 잠시, 가느다란 허리를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앞뒤로 흔들었다.

마리의 질 안 쪽을 가득 메운 자지가 질벽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느릿느릿하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흐응. 츄릅. 츄읍. 하앙..."

아이작의 불기둥이 안쪽에서 왕복하자 결국 키스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절정으로 온 몸이


성감대나 다름없어진 그녀였기에 이런 사소한 자극에도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수준이었다.

아이작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서 허리를 잡았던 손을 내려 그녀의 엉덩이를 붙잡았다. 살이 적당하게 올라


만지기 딱 좋은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천천히 움직이던 허리를 점점 더 빠르게 놀리기 시작했다.

"흐앙! 하앙! 아아앙! 앙!"

철퍽! 철퍽! 철퍽! 쯔퍽!

아이작의 기둥이 마리의 보지 안 쪽을 왕복하자 물이 튀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안은 이미 정액과


애액으로 인해 범벅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물건이 쉽게 드나들 수 있었으며 아이작은 마리가 스스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하자 그녀의 리듬에
맞췄다. 그녀가 허리를 위로 올리면 자신은 자지를 살짝 빼내고, 마리가 내리는 순간 강하게 삽입한다.

여체의 신비라고 해야할지 그나마 남아있던 밑동마저 삼켜버린 마리는 다시 한 번 쾌락에 울부짖었다.

"꺄앙~! 아앙! 흐앗!"

몸을 흔들릴 때마다 풍만한 가슴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었다. 딱딱하게 선 핑크빛 유두
또한 탐스럽게 익은 과실 같아 먹음직스러웠다.

"좋아?"

아이작은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 음란하게 몸을 흔드는 마리에게 조용히 물었다. 체력은 마리보다 훨씬
뛰어난 그였기에 목소리에는 여유가 담겨있었다.

반면 이미 기력을 모두 소진하기 직전이었던 마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허리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행동을
잠깐 멈추고 힘겹게 답했다.

"좋아..."
"얼마나 좋아?"
"그냥 조아... 하응."

반쯤 풀린 눈과 어눌해진 발음으로 대답하면서 엉덩이를 움직이는 건 멈추지 않는다. 첫 경험인데도


불구하고 이 얼마나 음탕한 여자인가.

아이작은 혀까지 내밀며 기절하기 직전인 마리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남자로서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듯이 상승하는 건 물론이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절정을 선사했다는 건 매우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슬슬 지치기도 하고 이대로 섹스에 열중했다간 내일 하루종일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에 아이작은 마리의 몸을 와락 껴안은 채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뒤이어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파묻어 바짝 솟아난 유두를 혀로 살살 굴렸다. 그리고 쓸어올리듯이 혀를
움직여 목덜미에 입술을 맞췄다.

쪽-

"흐윽..."
"마리."
"헤에..."

이윽고 그는 마리의 얼굴과 똑바로 마주하며 빙긋 웃었다. 마리는 아이작이 웃어주자 망가질대로 망가진
표정으로 베시시 웃었다.

눈은 눈대로 풀린데다가 수도꼭지마냥 눈물이 줄줄 흐르고, 억지로 올라간 입꼬리는 남자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욕망을 주입시켰다.

아이작은 마리의 안쪽을 파고든 물건을 불끈거림을 느끼면서 조용히 말했다.

"이제 슬슬 끝낼게."
"안 대에... 조금만... 히익?!"

푸욱!

마리는 안을 가득 채웠던 물건이 서서히 빠져나가려 하자 앙탈을 부렸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물건이
다 바깥으로 나오려고 할 때 아이작이 기습적으로 찔러넣었으니까.

1 초도 안 되는 시간에 덮쳐온 쾌감에 마리는 가느다란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뻗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뇌수를 휘젓는 쾌락에 고개가 절로 뒤로 넘어갔으며 크게 벌어진 입에는 혀가 빠져나왔다.

퍽! 퍽! 퍼억!

"꺼윽! 악! 하악!"

남녀가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하는 대면좌위. 아이작은 마리의 엉덩이를 움켜잡은 채 보지를 휘저었다.

마리는 아이작이 기습적으로 물건을 쑤셔넣은 순간부터 정신이 혼미해졌으나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쾌락에
몸에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흐익! 헥! 으히! 헤응!"

결국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려 실성해버린 마리. 그녀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면서 흰자위가 더욱 많이


드러났다. 그러면서도 입은 웃고 있는 것이 무섭게도 느껴질 법한 표정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런 거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탐닉에만 집중했다. 마리의 질벽이 조여졌다 풀어졌다
반복하는 걸 보면 기력조차 모두 써버린 상태.

이에 그는 마지막으로 허리를 끝까지 지켜올렸다. 비록 밑동까지는 넣을 수 없었지만, 이미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몸에는 이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큐웅!

"흐기이이익!!"

자궁구가 강렬하게 부딪힘과 동시에 마리가 짐승 같이 울부짖으며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아이작도


마찬가지로 마리의 질 안에다 마지막으로 정액을 토해냈다.

꿀럭- 꿀럭- 꿀럭-

처음과 달리 적게 나왔으나 그럼에도 상당히 많은 양이 나왔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아이작은 숨을


몰아쉬었다가 마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헤에... 에헤헤... 헤헤..."


"... ..."

간혈적으로 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지만, 이미 힘이 빠져 인형처럼 허물어지기 직전이다. 아이작은 마리를


침대 위에 조심히 내려놓은 뒤 보지 깊숙히 박아넣었던 물건을 천천히 빼냈다.

포옹!

물건을 빼내자 코르크 마개를 따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아이작의 물건이 비좁은 공간에서
빠져나오자 그 안에 묵혀있던 정액이 줄줄 흘러내린다.

얼마나 쌌는지 모르겠지만 마리의 아랫배가 살짝 부풀어 오른 걸 보면 상정 외로 배출했다는 건 알 수


있다. 미리 피임약을 먹지 않았다면 임신이 확정일 정도.

푸쉬이이이-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던 탓일까. 그순간 마리의 보지에서 새하얀 액체가 분수처럼 터져나와
침대를 흥건하게 적셨다.

오줌인지 애액인지 모르겠으나 아이작에게는 신비로운 현상이나 다름없었다. 전생의 야동에서만 보았던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구경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이작은 음부에서 더이상 액체가 나오지 않자 개구리처럼
허벅지를 벌린 채 누워있는 마리에게 다가갔다.

"마리?"
"... ..."

몸은 간혈적으로 떨고 있지만 눈이 반쯤 뒤집혀 있는 걸 보면 기절한 모양이다. 체력 뿐만 아니라


기력까지 사용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작은 마리가 기절할 때까지 섹스를 한 것에 뿌듯해한 것도 잠시, 우선적으로 마리부터 신경 썼다.
지금은 하녀를 부를 수 없으니 지금은 젖을대로 젖은 이불로 그녀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생각이다.

아니면 내가 몸을 겹쳐서 온기를 전해주던가. 이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펄럭-
다행히 침대보만 젖었지 이불은 멀리 치워둔 덕분에 상대적으로 멀쩡한 편이었다. 이에 아이작은
어느새인가 새근새근 잠을 청하기 시작한 마리의 위에 이불을 덮어줬다.

만에 하나, 일어났을 때 목이 아픈 것을 대비하여 푹신한 베개를 넣어주는 건 잊지 않았다. 원래


하나밖에 없는 베개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이윽고 잠을 자기 위한 모든 일을 마쳤을 때, 아이작은 그녀의 몸과 자신의 몸을 겹쳤다.

"마리. 자?"
"흐응..."
"자는구나."

아이작은 어두운 침실을 비추는 등불을 끄기 전, 마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눈물 자국으로


엉망진창이 되었으나 그녀의 미모는 절대 퇴색되지 않았다.

도리어 색다른 매력을 풍기는 것이, 아이작으로서는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드러운
웃으며 마리의 귓가에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마리."
"새근..."

아이작의 사랑 고백을 끝으로.

"그럼 잘 자."

길고 길었던 저택의 깊은 밤은 끝났다.

*****

쾌락으로 가득했던 깊은 밤이 지나가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이미 해가 중천에 떠있었으나 아이작과


마리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일어나지 못 했다. 마리는 체력과 기력을 모두 소모하면서까지 섹스에 매진했으니까. 더군다나
태어나서 처음 겪는 쾌락이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어 강제적으로 수면에 취하도록 만들었다.

"흐아아암..."

사정이 그나마 나았던 아이작은 기절한 마리와 달리 조금 더 일찍 일어날 수 있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하품을 한 뒤 한동안 멍한 눈초리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면서 어깨를 긁적거렸다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옆을 바라봤다.

옆에는 마리가 베개를 벤 채 새근새근 자는 중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거치지 않은 알몸으로.

"... ..."

그제서야 아이작은 어젯밤과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떠올릴 수 있었다. 어제 자신은 마리와
성관계를 맺었고, 짐슴마냥 그녀를 범했다는 것을.

처음에는 배려를 해주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쾌락과 욕망이 정신을 지배하여
배려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마리도 절정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어서 망정이지, 멀쩡했다면
오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리라.

아이작은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있는 마리를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그녀의 볼을 손으로


쓸어줬다.

"으응..."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가 뺨을 타고 전해져서인지 마리가 침음성을 흘렸다가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길게 자란 속눈썹과 더불어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일어났어?"
"... ..."

겨우겨우 눈을 뜬 마리는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고개를 스윽- 돌렸다. 지금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길의 주인과 동일인물일 터.

아니나 다를까. 마리는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는 아이작의 황금색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그녀는 흐릿해진 시야를 복구하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빡였다가 이윽고 해맑게 웃었다.

"아이작..."
"응. 마리."
"헤헤헤."

마리는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아이작과 바짝 밀착시켰다. 아이작은 마리가 알몸으로 가까이 붙자 물건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오늘 새벽에 전부 토해냈다고 생각했건만, 역시 남자라는 동물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하물며


아침이라서 피가 쏠리는 건 당연한 생리 현상이다.

그는 혹여 마리가 보기라도 할까봐 서둘러 얼굴을 들이대었다.

쪽- 츄릅-

가볍지도, 진하지도 않은 키스.

혀와 혀를 섞고 있으며 온정을 나누는 농후한 키스.

아이작은 키스로 인해 자신의 하반신이 뜨거워짐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마리는 어젯밤 정사로
인해 일어서지도 못 할테니까.

하지만 그건 아이작이 마리의 음란함을 눈치채지 못 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녀는 아이작과의 농후한


키스를 하는 도중에 시선을 다른 쪽으로 옮겼다.

어떻게든 숨기기 위해 이불로 덮고 있었지만, 우뚝 솟아난 텐트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마리는 아이작의 솟아난 물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술을 떼며 그에게 물었다.

"또 섰어?"

보통 같으면 어젯 밤 일로 부끄러워 해야 정상이나 마리는 섹스의 맛을 알아버린 상태. 첫 경험이고


나발이고 부끄러워 할 것 없이 아이작의 우뚝 솟아난 물건에 집중했다.

또한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창피함보다 호기심에 더 치중된 상황이다. 무엇보다 아랫배가 욱신거려


당장 섹스를 할 생각은 없었다.

"아, 이건... 그러니까 생리 현상 같은거라..."


그에 당황한 건 아이작이었다. 앞으로 할 일이 남아있는데 또다시 마리의 몸을 탐했다간 시간이 너무
늦어진다.

하지만 마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손을 움직여 그의 기둥을 붙잡았다.

"흐윽!"

마리가 갑작스럽게 자지 기둥을 붙잡자 아이작이 이를 악 물며 신음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손은


그에게 색다른 쾌감으로 다가왔다.

"우와..."

그사이 마리는 탄성을 내질렀다.

한 손으로 붙잡히지 않는 굵기도 놀라운데 강철처럼 단단하다. 거기다 손에 전해지는 뜨거움와 이불


너머로도 보이는 무시무시한 길이까지.

'정말로 이 흉악한 게 내 안을 왔다 갔다 했구나.'

마리는 속으로 그리 생각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자지를 가리던 이불을 걷어버렸다. 그러자 우람한 자태를
내뿜는 아이작의 남성이 온전히 노출되었다.

어제는 등불 하나로 의존하하여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두 눈으로 보니 그야말로 흉악하기


그지 없다.

그녀는 아이작의 남성기를 만지작거리다가 아이작을 쳐다봤다. 아이작은 마리가 손으로 기둥을 붙잡은
이후부터 뜨거운 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하아..."
"... ..."

마리는 눈에 띄게 붉어진 아이작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아이작이 침음성을 흘렸다.

역시 남자는 여기를 만져주면 좋아하는구나. 마리는 천천히 왕복하던 손놀림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스윽- 스윽- 스윽-

"하아. 하아. 마리..."


"기분 좋아?"
"응..."

아이작은 마리가 아침부터 대딸을 쳐주기 시작하자 침대에 도로 몸을 뉘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금방이라도 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기둥을 위아래로 애무하던 마리는 남은 한 손으로도 아이작의 물건을 희롱했다. 길이가
길이인지라 두 손으로 감쌌음에도 불구하고 수월히 왕복할 수 있었다.

"하움."
"윽!"

이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는데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마리는 양 손 뿐만 아니라 입까지 사용하며


아이작의 물건을 마음껏 농락했다.
어젯밤 아이작이 그녀를 괴롭혔던 것처럼, 마리도 본인의 욕심에 따라 물건을 장난처럼 다뤘다.

"쯉. 쭙. 쭈웁. 우움."

탁- 탁- 탁- 탁-

입으로는 넣을 수 있는 곳까지 물건을 집어넣고, 혀로는 가끔씩 기둥을 핥거나 귀두를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한 손은 기둥을 빠르게 훑으며 또 한 손은 그 밑의 고환을 만지작거렸다.

남자의 고환은 약간의 타격에도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고 들었으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루는 중이다.
이것 모두 가문에서 기본적으로 알려준 성지식 중 하나여서 응용할 수 있었다.

비록 응용을 이상한 곳에서 하고 있지만, 아이작에게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베에- 추웁! 쮸웁! 흐읍!"

마리는 약간 뻑뻑한 느낌이 들자 침을 이용해 자지 전체를 촉촉하게 적시고 애무를 이어나갔다. 누가 따로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음탕하기 그지 없는 기술.

그러면 그럴 수록 아이작은 사정감이 몰려오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그리하여 마리가 아이작의


기둥을 희롱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마, 마리!"

푸슛! 퓨웃!

아이작이 마리의 이름을 부르짖음과 동시에 정액이 배출되었다. 어제 그만큼 쌌는데도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쮸읍? 꺄악!"

마리는 아이작의 물건이 전보다 더욱 팽창함이 느끼자마자 서둘러 귀두에서 입을 떼었다. 그와 동시에
마리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정액이 덕지덕지 묻게 되었다.

이어서 그녀는 얼굴에 발라진 정액을 손으로 대충 쓸었다. 아이작의 정액은... 매우 끈적했다. 그리고
은근히 기분 좋은 향기까지 난다.

"할짝."

마리는 손으로 닦은 정액을 입에 넣으며 맛을 음미했다. 쓰면서도 은근히 중독성이 강한 맛이었다.

"괘, 괜찮아? 더러울텐데..."

한편 마리의 손길로 인해 아침부터 시원하게 싸지른 아이작은 누워있는 채로 마리에게 물었다. 아침부터
사정을 하는 바람에 몸이 바람빠진 풍선처럼 빠져버렸다.

그에 마리는 얼굴에 묻은 정액을 이불로 대충 닦아내면서 대답했다. 조금 찝찝하긴 해도 어차피 씻을테니


개의치 않았다.

"더럽긴 왜 더러워? 네가 싼 건데."


"...그래?"
"응."

마지막으로,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본인이 원하는 바를 꺼냈다.


"앞으로도 쭉- 부탁할게."
"... ..."
"이렇게 기분 좋은 거였다면 진작부터 하는건데."

아이작은 피식 웃었다.

< 114 화 >

밤부터 시작하여 새벽 늦게까지 이어진 쾌락은 끝이 나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리가 엉큼한 짓을 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또다시 쾌락으로 빠져들 뻔했다.

하지만 덕분에 약간이나마 쌓여있던 욕구를 배출시켜 몸을 섞지는 않았다. 마리도 호기심에 내 아랫도리를
건드렸을 뿐이지 이미 지칠대로 지친 탓에 하는 건 무리였다.

이후로 나는 남아있는 일과를 처리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잠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옷을 입으면서 어젯 밤 나와 마리가 정사를 치루며 남긴 흔적을 확인한다.

일단 당장 버려야 할만큼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듬뿍 묻어있는 건 물론이고, 딱딱하게 굳어있는 새하얀


고체도 간간이 보였다. 무엇보다 마리에게서 나온 피가 묻어있어서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온갖 액체란 액체로 범벅이 된 침대는 하녀에게 부탁하면 알아서 처리해줄테니 문제가 없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후암..."
"일어나. 마리. 하녀가 치워야 돼."
"나 좀 더 잘래..."

마리는 내 손길에 잠깐 일어났을 뿐, 몸은 천근만근으로 피곤하여 침대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부를 때마다 그녀는 졸음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대꾸하기 일쑤였다.

가끔씩 배가 아프다며, 어제 그렇게 큰 게 들어갔는데 좀 쉬면 안 되겠냐고 칭얼거려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대로 침대를 놔두기에는 너무 지저분했으니까.

게다가 마리의 몸은 이미 더러워질대로 더러워진 상태이며 그녀의 안도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씻겨서 몸을


청결히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다행히 침실에는 개인 욕실이 따로 있었으니 내가 씻고 나오면 그때 마리가 씻으면 될 것 같다.

"그럼 나 먼저 씻고 있을게. 내가 씻으면 네가..."


"안 돼."
"응?"
"다리가 안 움직여."
"... ..."
"아이작이 씻겨줘."

저렇게 방실방실 웃으여 부탁하면 누가 거절하겠어. 나는 못 말린다는 듯이 웃어주고 침대에 누워있는


마리를 번쩍 안아들었다.

업히는 게 아니고 안은지라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이탓에 내 아랫도리가 또다시
불끈거리는 건 물론이고, 마리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마리는 나에게 매미처럼 매달린 채로 키득거리더니 짓궂은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아이작은 정말 변태네. 아까 내가 손으로 빼줬는데."
"...네가 너무 야해서 그래."
"씻으면서 할까?"
"미안하지만 이미 하녀를 불렀어. 그리고 욕실은 방음이 안 돼."
"쩝... 알았어."

마리가 아쉬움에 혀를 찼다. 나를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체력은 물론, 기력까지 소비하면서 하는 바람에 이 모양 이 꼴이 됐는데 더 하고 싶다니, 성에 눈을


떠버린 마리의 성욕은 무시무시했다.

물론 내가 그렇게 만들어서 딱히 할 말은 없다. 첫 날 밤부터 그렇게 몰아세웠으니 중독될만도 하다.

"그런데 아이작. 너 정말로 처음 하는 거 맞아? 그런 거 어디서 배운거야?"


"책에서 본대로 했을 뿐이야."
"책에서 보는 거랑 직접 하는 건 다르잖아.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이미 했던 건 아니지?"
"너 말고 누가 있겠어?"
"세실리?"
"... ..."

할 말이 없어지게 만드는 대답이 마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빈말이 아니라 마리와 사귀지 않았다면
세실리와 먼저 거사를 치렀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물론 그건 이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마리는 나에게 첫 경험을 선물한 여자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마리를 쳐다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절대 아냐. 네가 진짜로 처음이야."


"히히."

첫 여자라는 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나에게 매달린 상태로 더욱 강하게 껴안는 마리. 그러면서
은근슬쩍 몸을 비비는 것이 그녀의 숨겨져 있던 음란함을 자랑했다.

침대에 피가 묻어있는 걸 보면 처녀가 분명한데 어쩜 이리 야한 것일까. 나는 욕실에 배치된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으면서 마리를 땅에 내려놓았다.

마리는 정말로 걸을 수조차 없었는지 바닥에 앉은 채 멀뚱멀뚱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남아있는


가운이 몇 개가 있는지 파악했다.

'마리에게는 좀 크겠지만 괜찮겠지.'

아침부터 이브닝 드레스를 입을 수 없는 노릇이니 일단 가운으로 대체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이리하여


욕조에 들어가기 전, 나는 마리의 몸을 구석구석 씻겨줬다.

마리도 잔말하지 않고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중간중간 야릇한 신음소리를 내는 바람에 위험할 뻔했으나
가까스로 욕정을 억눌렀다.

"여기도 씻겨줘."
"...거긴 네가 하면 안 될까?"
"우우웅. 빨리."

심지어 아랫부분까지 대신 씻겨달라고 부탁하여 곤란해졌다. 원래는 거절하려 했으나 마리가 볼까지
부풀리며 투정을 부린 탓에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리고 뭐... 결국 참지 못 하는 바람에 그녀를 다시 씻겨줄 수밖에 없었다. 부디 바깥에 하녀가 없기를
바래야지.

첨벙-

"후아..."
"물 온도는 딱 맞아?"
"으응..."

이후로 욕조에 몸을 한동안 푹 담궈 피로를 해소한 뒤, 우리 둘은 목욕 가운을 입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물론 마리는 일어서는 것조차 불가능했기에 나한테 안겼다.

욕실 밖으로 나오니 그 짧은 시간에 하녀가 전부 정리했는지 침대는 깔끔해진 상태였다. 나는 속으로


대단하다 여기면서 마리를 침대 위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배고파..."
"조금 있으면 식사가 도착할거야. 손은 움직일 수 있지?"
"아마도."

그냥 내가 먹여주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현재 마리는 움직이는 것 자체부터가 고역일테니 오늘만큼은 내가


그녀의 하인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본래라면 하녀를 시키면 되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제 그만큼 나를 받아들였는데 이정도는
기본적인 매너라고 생각한다.

"늘 느낀 거지만 아이작은 배려가 깊네. 원래 이런 건 하녀에게 다 지시하는 편인데."

물론 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이마저도 차고 넘치는 배려였던 모양이다. 나는 마리가 감동받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머쓱하게 웃었다.

가끔가다가 내가 환생자라는 사실을 잊고 지내지만, 이런 세심한 부분들로 하여금 다시금 자각시켜줬다.

"남자가 되어서 이정도는 해줘야지. 안 그래?"


"너 같은 남자는 별로 없어. 우리가 연애를 하고 있다지만 남자가 여자에게 맞추는 일도 거의 없고."
"그래? 그거 참 나쁜 놈들이네."
"네가 이상한거야. 그래도 난 네가 좋아."

이 얼마나 사랑스럽고도 귀여운 여자란 말인가. 어제는 요부와 같은 음탕함을 보였다면 지금은 풋풋한
소녀의 사랑스러움을 드러낸다.

나는 마리의 사랑 고백에 따스한 미소로 맞이해줬다. 마리도 내 미소에 얼굴을 살짝 붉히며 해맑게
웃어줬다.

똑- 똑- 똑-

"아이작? 들어가도 되겠니?"

우리 둘이 서로를 마주보며 사랑을 꽃피우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밖으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깜짝 놀라 허락을 내리기 전, 침대에 누워있는 마리를 침대 등받이에다 옮기며 간신히 앉혔다.


아무리 그래도 누운 채로 맞이하는 건 엄연히 실례다.
나는 마리를 앉히고는 이불을 덮어줬다. 그리고 가볍게 키스를 한 뒤에 문을 향해 소리쳤다.

"네!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할게."

덜컥-

문이 열림과 동시에 식사가 올려진 트레이가 먼저 안으로 들어왔다. 놀랍게도 트레이를 끄는 사람은
하녀가 아니라 어머니다.

그에 당황하여 황급히 걸음을 옮긴 것도 잠시, 어머니는 필요없다며 능청스레 손을 내저으셨다. 뒤이어


그녀는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있는 마리에게 시선을 두더니 눈매를 부드럽게 좁히셨다.

"좋은 밤 보냈니?"

어머니는 마리에게 존댓말이 아닌, 반말을 사용했다. 이미 그녀를 예비 며느리로 확정지은 듯했다.

그동안 마리는 어머니의 질문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조용히 대답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 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정말로 귀여웠다.

"...네."
"아프지는 않았고?"
"아프기 보다는... 엄청 좋았어요."
"어머. 그거 정말이니? 다행이구나."
"저..."

어머니가 직접 트레이를 끌고 왔을 때 마리가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이에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이 바라보셨다.

뒤이어 마리는 나를 한 번 힐끔거렸다가 창피함을 억누르는 듯한 어조로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그... 남자들은 전부 다 아이작처럼 큰가요? 가문에서 배웠을 때는 단검만하다고 배웠는데..."


"마리?"
"얼마나 컸니?"

본인이 버젓이 옆에 있는데 저런 외설스러운 질문을 하다니, 심히 당혹스러웠다. 마리도 마리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고 되묻는 어머니도 범상치 않으셨다.

"아마 이정도였나? 잠깐만요."

마리는 내가 당혹스러워 하든 말든 두 손으로 대충 길이를 표현하다가 애매했는지 이불 아래에 숨겨진


하반신 쪽으로 갖다 댔다. 이윽고 작게 중얼거리더니 대충 맞다는 듯, 아까보다 사이가 더 벌어진 두
손을 어머니에게 보여줬다.

너무나 정직하디 정직한 그녀의 표현에 내가 다 수치스러웠으며 얼굴을 두 손으로 덮을 수밖에 없었다.

"이정도였어요. 남자들은 다 이래요?"


"아니. 평균보다 훨씬 큰 거란다. 아이작 얘는 이 엄마를 똑닮았으면서 아래는 아빠의 육체를
물려받았구나? 호호호."
"... ..."

그만해주세요. 제발.

내가 소리없는 아우성을 치든 말든 두 여자는 서로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바빴다.


"그나저나 엄청 아팠을텐데 괜찮은거니? 정 힘들다면 포션이라도 갖고 오마."
"괜찮아요. 아래가 조금 욱신거리기는 한데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래서 기분은 어땠니?"
"그게...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라 해야하나? 눈 앞이 번쩍번쩍거리고 머리가 하얗게 녹아버리는
느낌이었어요."
"첫 경험이었는데 그정도였다고?"
"네."

제발 그 얘기는 나 없는 곳에서 해줘. 여기 여자들은 원래 다 이런 건가.

"아무튼 좋았다니 안심이구나. 나는 아이작이 배려도 없이 험하게 대했을까봐 걱정했거든."


"처음 치고는 능숙하던데요? 어머니, 제가 아이작의 첫 여자 맞죠?"
"우리 아이작이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만난 여자는 나와 자기 누이밖에 없단다. 너와 연애를 시작한다고
들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어머니."
"호호. 내가 너무 짓궂었나?"

내가 그만하라는 듯이 부르자 어머니는 입에 손을 갖다 대며 우아하게 웃으셨다.

그리고 나와 마리를 번갈아보다가 조용히 격려의 말을 남기셨다.

"그럼 앞으로도 우리 아이작을 잘 부탁한다. 아이작 너도 마리를 소중하게 다뤄주고. 여자의 몸은 은근히
튼튼할지 몰라도 마음은 유리처럼 섬세한 법이니까."
"명심할게요."
"네."
"배가 많이 고플테니 식사는 여기 두고 가마. 아참. 아이작?"
"네?"

어머니는 식사 트레이를 놓고 떠나기 직전 나를 불렀다. 이에 내가 그녀를 쳐다보자 어머니는 빙긋 웃는


미소를 유지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에 가서도 약은 항상 챙겨놓으렴. 언제 어디서 할지 모르니까."


"... ..."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청결이란다. 자칫해서 성병이라도 걸리면 두 사람에게도 위험해. 알겠지?"
"...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나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셨다.

"제논 일대기에도 너의 경험을 담았으면 좋겠구나."


"... ..."
"이 엄마는 제논과 메리보다는 진과 릴리가 이어지는 모습이 보고 싶단다."

진이 최종보스라니까요, 어머니. 물론 최후의 결전 전에 진과 릴리가 이어지는 묘사는 할테지만 그만큼


내상이 심할 것이다.

그런 내 생각을 전혀 모르는 어머니는 우리에게 인사를 하시고는 침실에서 나가셨다. 나는 한바탕 폭풍이
스쳐지간 듯한 기분에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그... 아이작?"
"응?"
"정말로 제논 일대기에 쓸 거야?"
"... ..."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리고 마리에게 되물었다.

"왜. 써줬으면 좋겠어?"

그 물음에 마리는 수줍하더니 조심스레 대답했다.

"응..."
"... ..."
"안 될까?"
"...일단 식사나 하고 생각하자."

그렇게 같으면서 달라진 하루가 시작되었다.

< 115 화 >

다양한 의미로 화려하고, 또 화끈했던 전시회가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전시회에 예술품들은 관광객들에게
수많은 관심을 이끌기 충분했고 특히 리루스 악단과 매트릭스 극단의 합작 공연은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훌륭했다.

또한 여태까지 베일에 감싸져 있던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이 마족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세상의 주목을
이끌었다. 그러나 감독이 말했던 것처럼 그는 예술가에 불과했으며 마족이라고 차별하는 시선은 거의
없었다.

대신 어째서 그런 화려한 연출이 가능했던 건지 모든 의문이 풀렸기에 매트릭스 극단을 향한 관심도가


더욱 강해지는 효과를 낳았다. 또한 리루스 악단이 선보였던 '인생'이라는 명곡으로 하여금 본인들이
어째서 세계 정상에 우뚝 선 거장들인지 증명했다.

이렇듯 여운이 반드시 남을 법한 축제가 모두 끝나고, 사람들은 미네르바 제국과 마이샬 영지에 대한
호평을 내렸다. 준비 기간이 촉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이 얼마나 기술적으로 뛰어난지 보여줬으니.

특히 미네르바 제국으로서는 본전이 아닌, 거의 흑자 수준으로 이익을 보게 되었다. 기술은 충분히


있었으나 문화적으로는 테르스 왕국에 비해서 뒤떨어졌으나 이번 축제를 통해 또다른 문화를 제시했으니까.

특정 계층만 즐기는 문화가 아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 이것만으로도 미네르바 제국의


입장으로서는 행복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물론 테르스 왕국이 가만히 지켜볼리가 만무하다. 테르스 왕국은 다음 전시회는 무조건 자신의 수도에서
개최할 거라 엄포를 놓았으며, 미네르바 제국도 아쉬워할지언정 바톤을 넘겨줬다.

그리하여 축제의 열띈 분위기가 점점 가라앉고 있을 때 쯤이었다.

"후우..."

제논 일대기와 계약을 맺은 출판사의 사장실 안.

사장은 사무용 책상에 앉아 이번 달 매출이 기록된 서류를 보며 복잡하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서류에는
전시회 개최 전과 그 이후의 기록이 적혀있다.

제논 일대기의 휴재가 시작되면서 매출이 급락한 건 물론이고, 심지어 초고가 도난까지 당했을 때는
매출이 바닥을 찍을 뻔했다. 바닥을 찍어도 회사의 규모가 규모인만큼 큰 편에 속했으나 유지비를
고려하면 심각한 적자다.

게다가 도난 사건을 조사하면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탈세가 적발되면서 어마어마한 벌금까지 물게


되었다. 천만다행으로 제논 일대기와 계약을 맺었다는 부분 하나 덕분에 옥살이는 면했지만 그래도 뼈아픈
손실인 건 변함이 없다.

이렇게만 본다면 출판사가 휘청이는 건 당연지사. 그러나 정말로 신이 축복을 내려주시는 건지 몰라도
전시회가 개최한 이후에 다시 한 번 매출이 상승했다.

전시회에 참석한 관광객들 대부분은 제논 일대기의 팬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공연에 감동을 받아 원작을 보기 위해 제논 일대기를 구매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무엇보다 아이작이 카이르 외전을 발매해준 덕분에 매출이 꾸준히 상승하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는, 사장으로서는 불안하기 그지 없는 현실이다.

'앞으로 휴재 기간동안 꾸준히 하락세를 유지할 거야. 어떻게든 관리해야 하는데...'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암흑기가 다가왔을 때다.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닌, 앞으로 찾아올 암흑기.

그리고 사장은 그 암흑기를 눈 앞에 목도하는 중이다. 탈세가 적발되어 어마어마한 벌금이 물린 건


둘째치고 직원들 월급과 인쇄소의 유지비를 고려해야 한다.

이중 하나라도 삐끗했다간 회사가 걷잡을 수도 없이 허망하게 무너질지도 모른다. 다행히 제논 일대기와


독점 계약을 맺은 덕분에 나라에서 지원을 해주겠지만, 이것마저도 불안하다.

'그 씨발 도둑 새끼는 왜 초고를 훔쳐가지고... 아으. 미치겠네.'

초고 도난 사건 이후로 금고는 새로운 걸 구매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게다가 범인은 벽 채로 뜯어갔으니 당분간 초고를 출판사가 맡을 일은 절대 없을 것이고, 아이작도 신간이


아닌 이상 초고를 보낼 일이 절대 없다.

'앞으로 2 년. 2 년만 버티면 돼. 제논 일대기가 새로 나오기 전까지는 인쇄소를 가동


중지시켜서라도..."

사장이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는 와중이었다.

쿵! 쿵! 쿵! 덜컹!

"사장님! 속보입니다!"
"으악!"

문 밖으로 누군가 급히 달려오더니 문이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열어젖혔다. 그에 깊이 생각하고 있던


사장은 깜짝 놀라 까무러칠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연 사람은 매튜였는데, 그는 지난 번 초고 도난 사건 이후로도 꾸준히 근무 중이었다. 사장도 그런


일을 겪어 퇴직하지 않으려나 걱정했으나 매튜는 묵묵히 출근했다.

물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사장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다가 노크도 없이 안으로 들어온 매튜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이게 대체 무슨 무례인가! 아무리 자네라도...!"


"그건 됐고 이것부터 읽어보세요! 제논이 보낸 편지입니다!"
"이런 건... 뭐?"

사장은 호통을 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매튜가 팔랑거리고 있는 손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의 손에는 평범한 편지 한 통이 쥐어져 있었다. 다급하게 오는 바람에 약간 구겨진 상태였으나 사장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제논이 보낸 편지다. 이거 하나만으로 사장은 격양된 목소리로 매튜에게 지시했다.

"그, 그거 당장 이리 내놓게! 정말로 제논인가?"


"예! 여기 친필 사인 보십쇼! 이 알 수 없는 문자는 제논의 친필 사인이 맞습니다!"

사장은 떨리는 손으로 매튜에게서 편지를 전달받았다. 뒤이어 두 눈을 빠르게 굴려 친필 사인을 체크했다.

친필 사인이라 함은 아이작이 '한글'로 자기 이름을 쓴 것이다. 전생의 이름이 아닌 이 세상에서


환생하고난 이름.

제논 특유의 사인이 맞다는 걸 직감한 사장은 허겁지겁 편지 봉투를 뜯었다. 매튜는 편지를 보자마자
곧바로 사장실에 직행했는지 뜯은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마침내 편지의 내용물이 공개되고, 사장은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편지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이 편지에 무슨 내용이 담겨있는지에 따라 출판사의 명운이 갈릴 수도 있다.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제논 일대기의 작가, 제논이라고 합니다. 최근 제가 태어난


고향에서 제논 일대기를 위한 전시회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단지 예술가
분들에게 제 작품을 위한 예술품을 마음대로 취급해도 된다고 했지, 전시회까지 열 줄은 몰랐으니까요.]

처음에는 전시회가 개최되어서 놀랍다는 반응이 적혀있다. 허나 여기서 괄목할 점은 '태어난 지역'이다.

여태까지 추측만 무성했지 밝혀진 거라고는 하나도 없던 제논이었지만, 이 편지에 적힌 내용을 통해


하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미네르바 제국 출신이며 어쩌면 마이샬 영지에서 태어났을지고 모른다고.

사장은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어 흥분한 것도 잠깐, 집중력을 끝까지 유지하며 내용을 읽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고향에 방문할 겸, 전시회가 어떻게 개최될지 궁금하여 마이샬 영지에 방문했습니다.
수 십년 전에는 이름도 없는 고향이었는데 마이샬 영지라는 지역명이 붙어있어 새로웠습니다.]

사장의 예측은 적중했다. 제논(아이작)은 미네르바 제국, 그것도 마이샬 영지 출신이다.

미네르바 제국은 마이샬 영지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이유를 수도가 포화 상태이기 때문이라 설명했지만,
막상 제논이 마이샬 영지 출신이라고 하니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우연에 우연일 수도 있었기에 속단은 금물이다. 사장은 전시회가 개최된 마이샬 영지에
대해 곰곰히 떠올리다가 매튜에게 물었다.

"매튜. 마이샬 영지가 언제부터 영주가 직접 관리하게 됐지?"


"네? 그... 그리 오래 되진 않았습니다. 아마 10 년도 넘지 않은 걸로 아는데..."
"10 년이라..."

이 편지에는 수 십 년 전에 고향을 떠났다고 언급돼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논을 고령의 현자로
추정하고 있는 바, 설득력이 매우 깊었다.

단, 이건 모두 아이작의 페이크라는 걸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 아이작은 사람들이 자신을 현자로


추정하고 있으니 대충 떡밥을 던져준 셈이나 다름없다.
이미 마음 속으로 마이샬 영지를 문화 거리로 만들겠다고 다짐했고, 부모님에게도 미리 동의를 구했기에
출신지를 언급할 수 있던 것이다. 때마침 휴재를 번복하여 크기를 더 키울 수도 있을테니 너무 빨리
들키지 않는 이상 문제는 없다.

'미네르바 제국은 운도 좋군.'

물론 사장은 속지 않았다. 1 권의 초고를 가지고 왔을 때, 호크가 직접 출판사를 찾아와 사장과 개인적인


면담을 했으니까. 이미 서로가 서로의 동업자여서 그닥 놀라지 않았다.

단지 이런 떡밥을 던진 이유에 의문을 품었을 뿐.

사장은 무슨 이유로 이런 사실을 밝혔는지 의문을 품은 것도 잠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제논이 떡밥을
뿌리든 말든 사장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정작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이샬 영지에 도착하니 여러 작품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림은 물론이고 조각상과 연극, 그리고
음악까지... 그림 중에는 '칼스 즈바사'의 헥토파스칼 킥이 제일 마음에 들더군요. 제 머릿속에 있던
장면과 놀라울만치 똑같았습니다. 여태까지 심오한 주제를 드러내는 예술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칼스 씨의
작품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임팩트가 강한,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제논 일대기를 쓰는 이유가
독자 분들에게 '재미'를 선물해주기 위해서였는데 제 마음에 쏙 들더군요.]

이밖에도 편지에는 리루스 악단의 연주를 통해 귀가 정화되었다니, 매트릭스 극단의 연극은 생애 최고의
공연이었다니 등등.

본인의 전시회에 참석했다는 증거를 하나하나 드러내면서 예술가들을 칭찬했다. 이에 사장은 기분이 점점
고조됨을 느끼면서 눈에 힘을 주었다.

이것만 해도 본인의 출판사가 제논의 대변인이 되기에는 충분하다. 이미 제논이 원하는 바를 대신


말해줌으로서 대변인이 되었으나 초고 도난 사태 이후로 사람들이 꺼림칙해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편지 하나만으로 그 부분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본인의 회사는 가치가 수직상승하겠지.

사장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장미빛 미래를 그려가고 있을 때, 거의 다 말라가는 강에 물을 들이붓는


내용이 편지에 나왔다.

[전시회를 통해 여러분들이 제 작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제 작품이 얼마나 사랑받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원래라면 휴식을 위해 휴재를 결정했지만, 이번 전시회를 통해 마음 속에
묵혀있던 감정들이 모두 해소되는 기분이었어요. 덕분에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2 년 동안 하기로 한
휴재를 번복하도록 하겠습니다.]

휴재를 번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문장 하나가 사장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동앗줄이나 똑같았다.

게다가 사장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독자들이 가장 원하는, 제논 일대기 연재 재개 공지였다.

"아아...!"

사장은 감격에 젖은 표정으로 편지를 바라봤다. 개인 사정상 신간이 발매되는 기간이 길어질거라니, 이번
1 년동안은 길면 3 개월에 한 번 나올거라는 부가 설명이 들어있었으나 사장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에게는 휴재를 번복하고 연재를 재개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했으니까. 그는 떨리는


손으로 인해 어느덧 꾸깃꾸깃해진 편지를 응시하다가 마지막 내용을 읽었다.
[여러분. 문화는 분명 아름답지만 그 문화에 대해 알지 못 하면 그저 잘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제논 일대기를 남녀노소, 그리고 계급을 불문하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그런 문화로 남았으면 합니다.
전시회에 참석한 사람들도 모르는 것 없이 축제를 즐기기에 바빴죠. 개인 사정상 제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또 누구인지 알려드릴 수 없지만 전시회가 개최될 때마다 그곳으로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독자분들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빌며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나긴 장문의 편지가 드디어 끝이 났다. 하지만 사장은 편지를 모두 읽었음에도 망부석처럼 꼿꼿하게 서
있을 뿐, 작은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그에 걱정되는 건 당연히 옆에 서 있던 매튜였다. 그는 사장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 사장님?"
"...매튜."
"예?"
"당장 신문사 기자 불러."

편지에서 눈을 뗀 사장의 표정은.

"그리고 이번 달 월급에서 특별히 보너스를 주도록 하겠네."

성인(聖人)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온화했다.

*****

제논 일대기가 휴재를 취소하고 연재를 시작한다. 이 소식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 모든 제논 일대기 팬들이


열광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제논의 출신이 미네르바 제국, 그것도 마이샬 영지라는 부분을 주목했지만
연재 재개보다는 관심이 덜했다. 이 부분은 팬들보다는 나라의 수뇌부가 더욱 관심을 끌었다.

미네르바 제국은 이게 왠 떡이냐면서 제논의 출신지에 대해 언급하며 기분이 좋다는 성명문을 보냈고,
반대로 똥줄이 탄 테르스 왕국은 미네르바 제국이 헛짓거리를 한 게 아니냐며 반박했다.

그러나 제논(아이작) 특유의 친필 사인이 드러나면서 상황은 미네르바 제국에게 유리하게 작용되었다.
벌써부터 마이샬 영지를 문화 거리로 만들겠다는 등, 문화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도약 단계에 나섰다.

이렇듯 제논, 그러니까 아이작이 보낸 편지 하나로 세상이 다시 한 번 떠들석해지고 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이익을 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자네가 제논이 언급한 그 화가인가? 한 번 자네의 작품을 볼 수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왔네만."


"아, 그게 저..."
"혹시 다른 작품도 있으신가요? 제논이 재밌다고 했으니 저희에게도 보여주세요."
"잠깐만요."

예술가 특유의 붉은색 빵모자와 물감을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앞치마. 독특하게 기른 콧수염과 땡그란
푸른색 눈동자. 아이작이 보았다면 '마리오'를 닮았다고 말했을 것 같이 생긴 인물.

무명의 예술가이자 헥토파스칼 킥을 그려낸 화가, 칼스 즈바사였다. 아이작의 편지에 칼스의 작품이
언급됐을 뿐만 아니라 재미있다고 표현했으니 자연스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칼스는 지금까지 흔하디 흔한, 무명의 예술가였으나 제논의 언급 하나로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덕분에 느닷없이 본인의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보며 크게 당황했다.
사람들에게 재미와 웃음을 선사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예술계에 몸을 던졌으나 여태껏 소득을 본 경우는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본인의 귀족도, 부자도 아닌 평민이었던지라 하루하루 굶주리며 그림에 매진했다.

하지만 제논 일대기를 향한 팬심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크란의 최후를 표현할 때


가끔 가다가 빵빵 터졌던 장면들 위주로 삼았다.

그 결과물이 헥토파스칼 킥이었으며, 우스꽝스럽다고할지언정 칼스에게는 만족스러웠기에 전시회에


개시했다. 물론 무명이어서 큰 주목을 이끌진 못 했다.

"저... 여러분? 죄송하지만 잠시 후 찾아오실 수 있나요? 제가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서..."


"흠. 이거 실례했군. 여기 우리 가문의 증표가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게토 자작가에 찾아오게나."
"우리 저택에도 방문해주세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찾아오기에도 편하실 거예요."
"저희도..."

칼스는 쏟아져 나오는 방문 요청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증표를 하나하나 받아냈다. 무명에다가 가난한
예술가였던 그에게는 이런 대접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윽고 방문 허가증을 무더기로 받은 칼스는 집에 들어오고 나서도 한동안 떨떠름히 멍하니 서 있었다.
이게 정말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집에 들어오고나서 물감 특유의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제논 일대기의
한 장면을 그렸을 뿐인데 단기간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는 것을.

특정 계층만 느낄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 아닌, 모두에게 재미와 웃음을 선물하는 본인의 예술품이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논이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 ..."

칼스는 방금까지 그리다가 말았던 캔버스를 바라봤다. 본인의 이름이 제논의 편지에 언급되어 기쁜 나머지
또다른 장면을 그리는 중이었다.

자기는 그저 팬아트 개념으로 그렸을 뿐인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칼스는 눈을


끔뻑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 이게 머선 일이고..."

한편, 본인의 편지 하나로 예술계의 또다른 거장을 탄생시킨 것도 모르는 아이작은...

"마리."
"왜?"
"언제까지 우리 저택에 있을거야?"
"평생동안 있고 싶은데?"

마리와 간접적인 부부 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 116 화 >

모두들 알다시피 나는 세실리와 약속을 잡아놓은 상태다. 헬리움을 소개시켜줄 겸 내 초고를 도난한 다크
엘프에 대한 처벌이다.

세실리는 공연이 끝나고 일주일 후에 가르츠를 시켜 나를 데려오겠다고 말했지만, 여기서 약간 곤란한


점이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리다.
그녀는 나와의 첫 날 밤을 치른 이후로 매일매일 관계를 요구했는데, 첫 날은 몸이 아파서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있었으나 이 후부터는 시도때도 없이 달라붙었다.

내가 글을 쓸 때도 침대에 누워 빤히 바라보거나, 함께 식사를 할 때도 은근슬쩍 몸을 비비적거리거나,


운동을 할 때도 창문에서 빤히 쳐다보거나 등등.

한시라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건 물론, 그쪽에 눈을 뜨기라도 했는지 낮밤을 가리지 않고 관계를
요구했다. 나 또한 한창 욕정이 끓어오르는 나이인지라 가뿐하게 받아줄 수 있었다.

그러나 영원한 건 이 세상에 없는 법. 정식적으로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마리가 계속해서 우리 저택에


지내는 건 엄연히 실례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될까요?"


"안 돼. 이제 아카데미 개학도 슬슬 다가오니 준비를 해야지."
"하루만 더..."
"안 돼."
"힝."

마리도 처음에는 그녀의 어머니, 그러니까 앞으로 장모님이 될 분에게 부탁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장모님의 말마따나 우리 저택에서 지낸지 벌써 수 일이 지났으니까.

이에 마리는 크게 아쉬워 할 뿐, 성욕이 개념까지 지배한 건 아니어서 잠자코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아쉬웠지만 영원히 헤어지는 건 아니니 아카데미에서 만날 때를 기약했다.

그리하여 마리가 발을 옮기려던 찰나, 그녀는 나를 한 번 힐끔거렸다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그럼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얼마나?"
"씻어야 하니까 2 시간 정도...?"
"그럴 줄 알고 마차를 나중에 예약했단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장모님도 만만치 않으신 분이구나. 마리는 장모님에게 허락을 받자마자 내 손을 재빠르게 잡아채더니
침실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뭐... 딱히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아무튼 마리는 내가 헬리움으로 떠나기 하루 전에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카데미에서 보자. 그때까지 바람 피면 죽는다?"


"내가 바람을 왜 펴?"
"세실리가 있잖아."
"... ..."
"장난이야. 키스나 해줘."

솔직히 가슴이 뜨끔거렸기에 서둘러 키스로 무마시켰다. 마리는 나와 가볍게 입술을 부딪힌 뒤에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탑승한 마차가 앞으로 서서히 움직인다.

나 또한 뒤로 천천히 물러나며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아카데미 개학까지는


정확히 닷새 정도가 남았으니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을거다.

과연 그때까지 마리가 꾹 참을 수 있을까. 아카데미에 가자마자 발정난 짐승처럼 달려들지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빈말이 아니라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한시라도 나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듯, 체력이 충전될 때마다 나를
덮쳤으니까. 그야말로 한 마리의 암사자나 다름없었다.

"많이 아쉽겠구나. 여자친구가 떠나가서."

내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같이 마중을 나온 어머니가 상냥하게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으셨는데 지금쯤이면 브리스, 니콜, 아델리아 이 셋 중 한 명과 대련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한 어머니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근 며칠동안 어머니는 회춘이라도 하셨는지


피부에는 윤기가 흐르고 20 대 못지 않은 아름다움을 뿜내는 중이셨다.

반면 아버지는 강철 체력인데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을 보이셨다. 아무래도 나와 마리가 불타는 밤을


보내는 동안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물론 우리 부모님은 평소에도 금슬이 좋다 못해 깨가 쏟아질 정도의 애정을 과시했으니 나에게는 평범한


일상에 불과했다.

"아쉽긴 해도 곧 있으면 만날 수 있으니 그때까지 참아야죠."


"그래도 저 아이에게는 하루하루가 1 년 같을 거란다. 이 엄마도 너희 아버지가 기사 일로 집을 비울
때마다 얼마나 외로웠는지 아니?"
"그래서 어떻게 버티셨어요?"
"면회를 가는 척 하면서... 호호. 여기까지만 말하마. 나름 짜릿했던 경험이라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구나."
"... ..."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도 충분히 불타고 계시는데 과거에는 거의 화재


수준으로 열정적인 사랑을 하신 모양이다.

단언컨데, 우리 부모님처럼 천생연분은 이 세상에 없을 거라 확신한다. 자식이 셋인 것부터가 그 증거다.

"막내가 안 생기는 게 정말 신기하네요."


"조만간 생길지도 모르겠구나. 너에게 준 약이 끝이었거든."
"... ..."

지금 생긴다면 거의 손주이지 않나. 형과 누나가 기사직에 종사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결혼하고 자식도 갖는 나이다.

나는 막내가 생긴다면 이름을 뭘로 짓냐니, 얼마나 귀여울까 행복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 어머니를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피임약을 꾸준히 드셔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자식을 5 명 이상 낳았지
않을까 예상한다.

"아참. 그러고 보니 내일 헬리움으로 간다고 했니?"


"네. 그쪽에서 인원을 보낸다고 했어요. 텔레포트를 이용한다고 했으니 늦어도 이틀 안엔 돌아올
거예요."
"헬리움이라... 이 엄마도 듣기만 해서 어떤 곳인지 잘 모르겠구나."

헬리움은 여태까지 반강제적으로 폐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던지라 어떤 곳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다행히 곡창지대도 넓고 다양한 자원이 많아 자급자족이 가능했지만 그걸 제외하고 밝혀진 바는 거의 없는


수준이다.

하늘이 붉은색을 띄어 불길하다거나 악마가 습격을 하고, 사람의 신체 부위를 사고 판다는 등등. 별의 별
괴상한 소문만 무성할 뿐 제대로 밝혀진 바는 없다.
하지만 나는 마족이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그닥 걱정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세실리나 가르츠가 나를 지켜줄테니 문제도 없을거고.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을텐데 이상한 거라도 있겠어요? 소문은 그닥 믿을 게 못 돼요."


"그건 그렇지. 아무튼 준비는 하고 있니?"
"준비라고 해봤자 옷만 잘 챙겨입으면 끝이에요."

어머니는 나와 대화를 나누다가 저택으로 들어섰다. 나도 곧 있으면 저택으로 들어서서 글을 쓸


생각이어서 함께 돌아갔다.

곁에 마리가 없으니 뭔가 허전한 기분이었지만 아카데미에서 만날테니 그때까지 참을 수 있다. 그렇게 내


침실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왁!"
"흐악!"

모퉁이를 딱 지나치자마자 누군가 갑자기 튀어나와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아무 생각없이 걷고 있었기에


놀란 걸 넘어 심장이 마비될 정도였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모퉁이에서 나온 사람을 확인했다. 아버지와 대련을 하고 있을거라


생각했던 아델리아였다.

그녀는 내 반응을 보고 마음에 쏙 들었는지 시원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매력적인 보이스다.

"우리 귀염둥이. 깜짝 놀랐어? 놀란 모습도 귀엽네."


"...아델 누나."
"하하하."

아델리아는 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어도 뻔뻔하게 웃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버지랑 대련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이미 다 끝나고 씻고 온 참이지. 그리고 슬슬 아카데미로 복귀해야하니 준비도 하고."

그러고 보니 아델리아의 갈색 머리카락이 물기로 축축하게 젖어있다. 얼굴도 뽀송뽀송한 것이 이제 막


씻고 나온 모양이다.

옷은 셔츠 차림이라 그녀의 몸매가 돋보였는데, 대충 닦고 입었는지 그녀의 몸매가 거의 다 드러나기


직전이다. 덕분에 전시회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녀의 흉부도 마리 못지 않게 크다는 걸 깨달았다.

비록 가족에게서 버림받고 모진 취급을 받았다 할지라도 잘 먹고 잘 잤을테니 발육이 좋은 건 당연한...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서둘러 머리를 좌우로 털었다. 마리가 저택으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한 판 했는데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마리도 마리지만, 나 또한 불타오른 건 마찬가지였던 듯했다.

"아카데미로 언제 복귀하는 거예요?"


"늦어도 사흘 내에는 복귀하겠지. 나랑 니콜은 조교이다보니 개인 정비도 해야되거든. 그런데 네
여자친구는 어디 갔어?"
"방금 전 저택으로 돌아갔어요."
"그래? 많이 아쉽겠네."

진담인지 아니면 그냥 해본 말인지 아델리아는 실실 웃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손수건이 떠올라 아델리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델 누나. 제 손수건은 언제 돌려줄 거예요?"


"으, 응? 소, 손수건?"
"네."

손수건을 언급하자 웃는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크게 당황하는 아델리아. 나는 그걸 보며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아델리아가 손수건을 잃어버렸거나, 그게 아니면 땀을 닦는데 사용했다고. 니콜에게 듣기로 아델리아는


내 물건 남의 물건 신경 쓰지 않고 막 쓰는 타입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아델리아는 우물쭈물거리며 대답하기 망설이다가 내 눈치를 보더니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나중에 주면 안 될까? 아까 실수로 땀 닦는데 써버려서..."


"괜찮아요. 그 손수건은 계속 써도 괜찮으니 잃어버리지나 마세요."
"정말? 정말 계속 써도 되는거야?"

내가 개의치 않다는 듯이 얘기하자 아델리아가 드물게 흥분까지 하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다. 잘생긴 것
같으면서도 예쁜 얼굴이 코 앞까지 다가오니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나는 기대감으로 부풀려진 하늘빛 눈동자를 떨떠름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손수건은 널려있으니 아델리아에게 하나 선물하는 셈 치고 줘도 큰 상관이 없다.

"네. 손수건은 많으니까요."


"고마워! 평생 간직하고 있을게!"
"평생 간직하고 있을 것 까지는..."
"요 깜찍하고 귀여운 것! 여자친구만 없었어도 내가 먼저 사귀는건데!"

그렇게도 기쁜가. 아델리아는 기습적으로 나를 꽉 껴안더니 몸을 흔들며 기쁨을 표출했다. 방금 전까지


몸을 씻고 나와서 그런지 비누향이 내 후각을 자극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셔츠 너머로 특유의 부드러운 촉감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내 욕정을 자극시켰다. 하지만
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아델리아를 천천히 밀어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델리아이다보니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다. 그녀의 비참한 과거를 알게 된 순간


모질게 대하기도 미안하다.

아델리아는 겉보기에는 화끈하고 괄괄해보이는 여인이어도 마음의 상처가 심한 편이다. 그러니 언행 하나


하나가 조심스러웠다.

니콜의 관심을 끌기 위해 나에게 공을 던진 사건도, 가끔씩 장난을 치거나 스킨십을 하는 것도 일종의


애정결핍이라 생각하니 딱하다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아델 누나? 좀 떨어져 줄 수 있어요? 여자친구도 있는 남자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첩으로 들어갈테니까 계속 안으면 안 될까? 첩이 안 되면 호위 기사로 들어갈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시네."

천만다행히도 마리가 없어서 망정이지, 그녀가 봤다면 불륜 현장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아델리아는 내가
가당치도 않다는 것처럼 말하자 나를 껴안은 팔에 힘을 풀었다.

이윽고 뒤로 물러난 그녀의 표정은 해맑기 그지 없었다. 역시 아델리아는 이런 밝은 미소가 어울린다.

"아무튼 손수건은 나중에 돌려주셔도 돼요. 전 이만 가볼게요."


"알았어. 아참. 그리고..."
"네?"

내가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아델리아는 나를 잠깐 멈춰세웠다. 이에 무슨 할 말이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아델리아는 아까 전처럼 망설이기만 할 뿐, 제대로 말을 하지 못 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가


말을 꺼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줬다.

"...아냐. 내 주제에 무슨..."


"네?"
"미안. 할 말을 까먹었어."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아델리아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의문을 가졌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길래 망설였던 것일까. 억지로 웃는 걸 보면 슬픈 이야기인 것 같아


괜히 신경 쓰였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앞으로도 주말마다 대련장에 찾아올 거지?"


"네."
"아카데미에서 힘을 쓸 일이 있으면 나한테 부탁해. 니콜은 힘들 수도 있지만 나는 들어줄테니까.
알았지?"
"아카데미에서 힘을 쓸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어요."
"그래. 그... 안녕! 난 이만 가볼게!"

아델리아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더니 그대로 도망치듯이 뛰어가버렸다. 갈색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리면서 바람이 쌩- 하고 불어왔다.

나는 약간 당황하여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손을 뻗기도 전에


아델리아가 사라지는 일이 먼저였다.

"...뭐지?"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내 일과가 변하는 건 없었다. 아델리아가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차차


해결하면 그만이고.

그리하여 별 일 없었던 하루가 흘러가고.

"또 다시 뵙습니다. 세실리 공주님의 호위 기사, 가르츠입니다."


"안녕하세요. 가르츠 씨. 또 뵙네요."

가르츠가 우리 저택을 정식적으로 방문함으로서, 헬리움으로 갈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이것만 해도 문제는 없지만...

"그런데 이건..."
"제가 직접 제작한 마법 금고입니다. 이걸로 은인의 귀중품을 소중하게 보관할 수 있을 겁니다. 이틀테면
제논 일대기의 초고 같은 물건을 말이죠."
"...가르츠 씨도 알고 계셨어요?"
"사정이 있었습니다."

가르츠는 선물이랍시고 비싸보이는 은색 금고를 들고 왔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저리 말하니 약간 어이가


없었다.

"여기에 은인의 손바닥을 대시면 마법이 자동적으로 스캔할 겁니다. 은인의 손이 비밀번호이자 열쇠나
다름없는 거죠."
"...이걸 헬리움에서 만들었다고요? 드워프가 아니라?"
"금고는 대장장이가 제작했고 마법은 제가 넣은 겁니다. 별로 어렵진 않았습니다."
"... ..."

역시 십사기 종족답다.

< 117 화 >

엘프의 나라 알븐하임, 드워프의 나라 마키나, 수인의 나라 애니머스 등등. 이 세상에는 다양한 종족이
존재하는만큼 각 종족을 대표하는 나라가 다수 존재하고 있다.

인간은 인구가 인구이다보니 미네르바 제국, 테르스 왕국, 벨루아 공국, 세이비어 교국 등등 다양한
나라가 있으나 다른 종족은 대부분 나라가 하나밖에 없다. 인간들도 그러하듯 사람은 같은 종족끼리
규합하려는 특징 때문이다.

다만 헬리움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고 보아야 옳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마족은 다른 종족과 달리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고 악마 전쟁 이후부터 새로이 등장한 종족이다.

악마에게 짙은 영향을 받은데다 악마에 가까웠던 탓에 모진 차별을 받고, 심지어 인간들에게 학살까지
당한 비극적인 역사를 갖고 있다. 이탓에 헬리움이 건국되기 전까지는 도망자 신세였으며 기반조차 제대로
닦지 못 했다.

허나 참으면 기회는 언제나 찾아온다고, 마족들은 다른 종족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을 때 적당한 땅을


찾아 헬리움을 건국했다. 그들은 척박한 땅조차 마법을 통해 곡창지대로 탈바꿈시켰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다.

그 결과, 마족들이 도망친 땅에서 '헬리움'이 건국되었다. 사실 초대 헬리움의 국왕은 본인들의 안전을
위하여 헬리움을 세웠으며 만약 다른 종족이 받아준다면 기꺼이 땅을 내줄 포부가 있었다.

물론 마족을 향한 혐오감이 장난 아니었기에 시간이 흐르다보니 어느새 강대국이 되었을 뿐. 심지어 종족


전쟁 당시에도 그리 언질을 했으나 악마들이 달콤한 말로 속이려 든다며 무시당했다.

이로인해 헬리움의 건국 이념은 다른 종족과 달리 조금 특이한 편이었다. 좀 더 훌륭한 발전을 위해서가


아닌, 도망자들을 위한 요람으로.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제논 일대기가 발간된 이후부터는 180 도 달라졌다. 헬리움은 진정한 의미로 국가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 헬리움은 도망자들의 요람이 아닌, 하나의 종족으로서 나아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언어로 '외교'를 시작한 것이죠. 며칠 전 테르스 왕국으로 헬리움의 사절단이 방문하여 특산품을
선물했습니다."
"특산품이 뭐에요?"
"마법으로 짠 비단입니다. 우리 헬리움은 도망자들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마법을 연마한 바, 마법과
관련된 물품을 제작하는 건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드워프보다요?"
"드워프가 제작 그 자체에 능력이 치중되어 있다면 저희는 마법 물품에만 집중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드워프는 기본적인 검마저도 명검으로 만든다면, 우리 마족은 자체적인 제작 능력은 부족할지언정
마법으로 충당해 명검을 제작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마법에 인챈트를 걸어 절삭력이나 내구성을 높이는
거죠."

듣기만 해서는 역시 개사기 종족답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설명을 한 가르츠를
바라봤다.

"그럼 드워프제보다 훨씬 좋은 거 아니에요?"


"그건 아닙니다. 드워프가 만든 검은 자체적인 절삭력이나 내구성이 뛰어나다면, 저희는 마나를 주입해야
그 효과가 발동되는 식이죠. 더군다나 무기 제작은 드워프를 따라갈 종족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도 뛰어난 건 마찬가지잖아요. 이때까지 외교를 하지 못해서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건가?"
"네. 사절단과 선물을 보냈으니 조만간 눈치챌 것입니다. 그리고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이 마족이라는
사실도 밝혀졌으니 예술에도 조예가 깊다는 걸 알 수 있을테죠."

나는 가르츠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주변을 둘러보는 건 잊지 않았다.

가르츠가 우리 저택을 방문하고 하루가 지나고, 현재 나는 헬리움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중이다. 인간이
엘프의 문명을 모방한 것처럼, 마족도 인간의 생활상을 모방하여 내가 알던 거리와 매우 유사했다.

마차가 지나다니는 도로와 그 옆에는 다양각색의 건물이 세워져 있고, 건물의 형식 또한 미네르바 제국의
수도에서 본 것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라고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머리의 뿔 또한 비슷하지 않고 약간씩 다르다.

그래도 '사람'이 사는 곳인지라 거리는 활기를 띄었고,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뛰어다니는 모습은 나로
하여금 안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진짜 다른 게 하나도 없네. 저게 무슨 악마야?'

내가 이토록 빨리 헬리움에 도착할 수 있던 이유는 당연히 가르츠의 마법 덕분이다. 그는 모든 준비가


끝나자 우리 부모님에게 인사를 한 후, 텔레포트를 통해 헬리움의 국경에 도착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기본적인 입국 절차를 밟고 안으로 들어섰다.

입국 절차를 밟을 때 내가 인간이라는 걸 알고 군인(전사)들이 깜짝 놀랐지만, 가르츠가 관광객이라고


적당히 둘러대니 의외로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대신 몇 가지 당부하는 건 잊지 않았다.

첫 번째. 만약 헬리움에서 마족을 향한 차별적인 언행을 '고의적으로' 한 것이 발각된다면 외국인이라


해도 처벌을 받게 된다. 사실 인종차별 같은 거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두 번째. 가급적이면 밤이나 새벽에 돌아다니지 말 것. 그 이유를 물어보자니 악주기를 버티지 못 하여


밤에 돌아다니는 마족들이 상당히 많다고.

같은 마족이라면 그들을 발견할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외국인은 자칫하다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엄청난 근력으로 나를 밀어붙였던 세실리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특별히 허가받지 않는 이상 헬리움의 왕성 근처에는 접근도 하지 말 것. 기본적으로 강한


결계가 발동되어 있어 마족이 아닌 인간이 접근하면 위험하다고 알려줬다.

텔레포트도 사용할 수 있는 마당에 왜 입국 절차를 하는지 궁금해 할 수도 있는데, 헬리움의 외벽은


기본적으로 텔레포트가 불가능하도록 커다란 막이 형성되어있다. 정확한 좌표가 입력된 게 아닌 이상
워프나 텔레포트를 통해 침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가르츠에게 어떤 원리라고 물으니 마나의 흐름을 불규칙적으로 꼬아버려 실패 확률을 높히는 거라고. 물론
마족들에게조차 복잡한 마법이라 내가 들어서 알아들을리가 만무하다.
"엄마! 엄마! 저거 봐! 저 빨간 머리 남자 인간이지?"
"쉿! 이리 오렴. 그러면 못 써!"

그러다 귓가를 파고드는 아이의 철없는 외침이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엄마로 추정되는 젊은 여인이
자그만한 아이를 급하게 말리는 모습에 내 눈에 잡혔다.

로브조차 쓰지 않고 당당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기 때문일까. 가끔 가다가 몇몇 사람이 나를 힐긋거리는 건


물론이고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대놓고 소리쳤다.

아무래도 내가 인간인데다 이 세상에 흔치 않은 빨간 머리라 더욱 눈에 띌 것이다. 하물며 마족들은 하나


같이 흑발적안의 특색을 갖고 있으니 유달리 튀는 것도 한몫한다.

'역시 마족이라 젊네.'

아이를 말리는 여인도 누가 보면 누나라고 착각할만큼 젊다. 역시 엘프와 더불어 오래 사는 종족답게


노화가 더디기 때문이겠지.

나는 문득 마족의 나이는 어떻게 구별하는지 궁금해졌다. 엘프는 신에게 선택받은 종족인만큼 상대방을
보면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만 마족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가르츠 씨. 마족은 서로의 나이를 엘프처럼 본능적으로 구별할 수 있어요?"


"본능적으로 구별하기는 힘들어도 주로 뿔의 색을 보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젊은 마족은 대부분
검은색이지만 고령의 마족은 옅은 회색을 띄고 있죠. 그리고 나이가 들면 들 수록 악주기가 찾아오는
주기가 길어질 뿐더러 욕망 또한 적은 편입니다."
"그래도 구분하기가 어렵겠네요."
"그래서 뿔에 표시를 하거나 문신을 통해 나이를 새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가 많다는 건 오랜
시간동안 내면의 악과 싸워 승리했다는 의미이니 많은 마족들에게 존경을 받는 편이죠."

하긴 마족들은 자연사로 죽는 경우보다 악마가 되어 죽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 나이가 많은 마족들이


존경을 받는 건 당연하디 당연한 문화일 것이다.

이후로도 나는 가르츠에게서 마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헬리움에 도착해서 그런지 몰라도


마족에 대한 궁금증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세실리와 함께 있을 때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바빴지만 지금은 오로지 마족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서


이것저것 묻게 되었다.

"검은 마나를 사용할 때마다 힘든 점은 없나요? 지나치게 사용하면 내면의 악이 폭주한다던가."


"먼 과거, 그러니까 1 세대 마족들은 그랬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만일에 대비하고
있는 편입니다."
"1 세대 마족은 거의 없죠?"
"지금으로서는 사실상 없는 편입니다. 악마 전쟁처럼 다른 차원에서 악마가 건너와 씨를 뿌리는 게 아닌
이상 1 세대 마족이 탄생하는 일은 없겠죠. 그런데 은인. 하나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열심히 대답을 하고 있던 가르츠가 질문을 구하자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허락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무심하기 짝이 없어 생각을 읽기가 어려웠다.

뒤이어 가르츠는 입을 벌렸다 닫았다를 반복하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나에게 물었다.

"은인이 보시기에 헬리움은 어떤 곳으로 보입니까?"


"헬리움이요?"
"예."
"흠..."

나는 그의 질문을 듣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족들이 살고 있는 헬리움은 초창기에 도망자들의


보금자리나 다름없는 곳이었지만, 수 세기가 지난 이래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강대국으로 진화했다.

물론 외교적으로는 우물 안의 개구리나 마찬기지이지만 조만간 우위에 설 확률이 높다. 그러니 헬리움은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발언권이 강력한 나라로 발돋음 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헬리움의 국력을 보았을 때고, 그 안은... 인간들의 나라도 다를 게 하나도 없다.
하늘은 푸르기 그지 없었으며 그 아래에 사람들은 각자 할 일을 하러 가기 위해 바쁘다.

몇몇 사람들은 헬리움에 오지도 않고 언제나 붉은 하늘이 불길하다니, 악마들이 살고 있어 하루가 멀다


하고 살인이 일어난다니 등등. 별의 별 괴상한 소문이 떠돌았지만 정작 발을 디디고 나서는 글쎄? 라는
의문이 든다.

헬리움은, 그 누구보다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는 곳이다.

"별 생각 없는데요?"
"별 생각이 없다는 말씀은..."
"제가 지금까지 봤던 거랑 똑같아요. 나라가 세워지고, 그 나라를 왕과 귀족이 다르리고, 백성들은
통치에 맞게 행동하면서 생활을 즐긴다. 끝."
"... ..."
"저에게서 무슨 대답을 원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사람 냄새를 풍기는 곳이네요."
"...하하."

내 대답에 가르츠가 약간 허탈하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이라고는 일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웃다니 나로서는 놀라웠다.

그동안 가르츠는 어딘가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짓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실례를 끼쳤군요. 은인에게 너무 뻔한 대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네. 사람 냄새 풍기는 곳이라... 가슴에 크게 와닿는 말입니다."

그냥 대충 던져준 말인데 가르츠에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나는 무언가 생각을 하는 듯,


여운에 잠긴 듯한 가르츠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긴 그는 군인, 그것도 세실리의 호위 기사로 나올만큼 강하다. 강한만큼 헬리움의 위협이 되는


임무들을 여태까지 줄곧 처리해 왔을 터.

현재 그는 악마가 아닌 사람들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어째서 공주님이 은인에게 깊은 관심을 표했는지 알 것 같군요. 은인은 작가가 아니더라도 한 명의


사람으로서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제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네요. 아까도 말했지만 전 별 생각이 없습니다."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의식하지 않고도 저희 마족을 여태껏 사람으로 봤다는 의미니까."

그게 그렇게 되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갖는 동안, 가르츠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한 권의 책이 쥐어졌다.

아무래도 마법인 것 같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가르츠는 나에게 그 책을 내밀면서


조심스레 부탁했다.

"그 말을 듣고나니 더욱 참기가 어렵네요. 한 번만 부탁하겠습니다."


"이게 뭔데요?"
"제논 일대기 5 권입니다. 사크란의 최후가 묘사되어있는, 우리 마족의 인식이 본격적으로 변하게 된
책이죠."
"이건 왜..."

내가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가르츠는 특유의 무뚝뚝하면서도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인 부탁드립니다."
"... ..."
"원래 공주님이 받고 나서 받으려 했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못 받을 것 같습니다."

너무 진심이라서 그냥 해줬다.

아무튼 간에 가르츠에게 사인을 해주고는 세실리와 약속을 잡았던 별장으로 이동했다. 왕성으로는
들어가지 못 하니 세실리의 개인 별장으로 약속을 잡은 것이다.

그녀의 별장은 헬리움의 안에 위치해 있었는데 놀랍게도 도시 안에 울창한 숲이 버젓이 존재했다.


가르츠에게 듣자하니 안식의 숲이라고, 헬리움의 왕족만이 드나들 수 있는 일종의 성지라고 설명해줬으며
그 안에 별장이 따로 존재한다고 들었다.

이곳에서 마법을 수련하거나 명상을 통해 마음을 진정시키는 등.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방어


결계도 쳐져 있어서 사고가 터질 일은 없다고.

그런 성지에 마음대로 들어와도 되는지 걱정되었지만 가르츠는 세실리가 허락한 이상 괜찮다고 답했다.
덕분에 아무런 걱정없이 숲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아이작!"

숲 입구에는 세실리가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녀는 축제 때 처럼 붉은 드레스가 아닌, 어깨와 쇄골이 전부


드러나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세실리가 드레스 자락을 잡으며 달려오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미 마음을 먹었던지라 두 팔을 벌려


환영해줬다. 세실리도 내가 환영해주자 활짝 핀 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안겨들었다.

푸욱-

"우우움... 이제 정말로 받아주는구나?"


"마리에게도 허락받은 마당에 꺼릴 게 뭐가 있다고."
"좋아해. 정말로..."

세실리와 안게 되면서 가슴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달되었지만, 나는 끝까지 인내했다. 둘밖에 없었다면 못
참았겠지만 지금 곁에는 가르츠가 있다.

그가 아무리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지켜야할 대상인 세실리와 비교도 안 될 것이다. 기껏


쌓아올린 호감을 무너뜨릴 수 없는 법.

이에 나는 세실리와 진한 포옹을 나눈 뒤, 서서히 떨어지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애정과 사랑으로


점칠된 그녀의 붉은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스스로 생각하는 거지만, 참 복 받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마리 뿐만 아니라 세실리처럼


각자 매력이 뛰어난 여자들을 두었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나 재회의 감동에 젖어들 수 없다. 내가 헬리움에 온 본질적인 이유가 따로 있다.
"누나. 도둑은 어디에 있어? 가능하면 빨리 처리하고 헬리움을 돌아다니고 싶거든."
"그 사람들은 미리 도착해 있어. 어서 가자."
"응."

세실리도 어서 빨리 처우를 결정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내 말고 동시에 나와 팔짱을 끼더니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르츠는 그런 우리의 뒤를 따라왔다.

자연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숲의 풍경에 감탄한 것도 잠시, 세실리가 입을 열었다.

"아참. 그들 내부끼리 이미 어떤 처벌을 내릴지 정해놓았어. 아이작 네가 최종 판결을 내리면 될 거야."


"그래? 어떤 처벌인데?"

솔직히 제 식구 감싸기라고, 그닥 큰 처벌을 내리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엘프 대 엘프가 아닌 엘프 대


인간의 문제였으니까.

겨우 초고 도난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이런 마인드를 가졌을 확률이 농후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세실리가 입 밖으로 꺼낸 처벌의 강도는 내 예상을 한참 웃돌았다.

"500 년 형."
"뭐?"
"감옥에서 500 년 동안 투옥되는 거래.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다보니 다크 엘프 내에서도 중형을 내린
모양이야."
"... ..."

그거 참 화끈한 종족이구만.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타인이었기에 상관없었지만, 일단 반성하는 태도를 보고 처우를 결정할 생각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약속 장소에 도달했고...

"...아르웬?"
"... ..."
"네가 왜 여기 있어?"

나는 생각치도 못한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꼬마 엘프 숙녀, 아르웬은 나를 보자마자 쓴웃음을 짓더니 피곤에 절어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

< 118 화 >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힘없이 말하는 아르웬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지난 번처럼 로브를 입고 있었으나
후드를 완전히 벗어 그녀의 외모가 완전히 드러난 상태다.

은하수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은회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리고 다소 어려보이는 외관까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아르웬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르웬이 이곳에 있는 것일까. 내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으며 곧바로
그녀의 옆을 바라봤다.

'이 사람들이...'
새하얀 피부의 아르웬과 달리 구릿빛 피부가 유독 눈에 띄는 두 여자가 곁에 서 있었다. 중앙에는
붉은기가 약간 도는 밀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의 소녀가, 그 옆에는 흰색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었다.

두 여자 모두 복면을 쓰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화려한 미모는 숨길 수 없었으며 아르웬과 달리 귀의 길이가


상당히 짧았다. 자연적으로 짧은 건 절대 아니고 인위적으로 자른 게 확실하다.

특히 이중에서도 성숙한 매력을 뿜내는 여인에게 눈길이 간다. 아르웬과 소녀 모두 로브를 쓰고 있었지만
여인 혼자만 방어력이 절륜할 것 같은 방어구를 착용 중이다.

탄탄할 것 같은 허벅지는 물론이고, 앙증맞은 배꼽과 더불어 11 자로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으로 하여금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 방어구라 하기에도 민망하고 사실상 속옷만 입고 있다 해도 무방할만큼 노출이 심했다. 덕분에


음심보다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저러면 안 춥나?'

나는 여인에게서 시선을 떼어 앞의 세 명을 둘러봤다. 이렇게 보니 차이가 더욱 눈에 띄었다.

이 모든 특징을 종합했을 때, 이 사람들이 말로만 듣던 다크 엘프일 터. 실물로 보니 엘프와 비슷한 점이


많지만 차이점도 상당히 많다.

하긴 인간들도 민족마다 큰 차이가 있는데 엘프라고 다를 건 없을테지. 이후로 두 명의 다크 엘프를


번갈아보다가 대충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똑같은 황금색 눈동자로 이쪽을 노려보는 다크 엘프는 몰라도, 중앙의 소녀는 죄인처럼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있다. 위치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분명 저 소녀가 내 초고를 훔친 범인일 터.

전에 세실리가 넌지시 언질을 했던 것처럼, 전생으로 따지자면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할 것 같이 어리디


어린 소녀였다.

"...저 애야?"

나는 중앙에 선 소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옆의 세실리에게 물었다. 입꼬리를 말아올린 채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세실리는 곧바로 긍정의 대답을 꺼냈다.

"맞아. 저기 중앙에 있는 애가 네 초고를 훔친 범인이야. 떡잎부터 못 돼먹은 아이지."


"흐음..."

세실리의 대답을 듣고 중앙의 소녀에게 시서을 고정시킨다. 청소년 쯤 되는 어린 아이인 건 둘째치고,


어째서 그녀가 내 초고를 훔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초고의 가치는 두 말 할 것없이 굉장한 수준을 넘어 문화계의 보물이나 다름없다. 특히 마족들에게는 거진


성유물 취급을 받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다크 엘프 소녀가 초고를 훔친 이유가 설명되지는 않는다.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리라.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다크 엘프 소녀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아르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르웬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아르웬도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겠지.'

그게 아니라면 아르웬이 이곳에 올 이유가 없다. 다크 엘프는 오래 전 알븐하임에서 추방되었다던데


어떻게 하여 친분을 다졌는지도 궁금하다.

여러모로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걸로 추정되는 바, 나는 우선적으로 아르웬의 이름을 불렀다.

"아르웬."
"말해라."

여전히 우아하면서도 근엄한 말투를 사용하는 아르웬. 아무래도 외모가 외모인지라 미묘한 간극이
느껴진다.

나는 피곤한 듯해 보이는 아르웬과 그 옆의 다크 엘프 소녀를 번갈아보다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정이 복잡해 보이는데 설명을 좀 해줄 수 있겠어? 너와 이 다크 엘프가 어떤 사이인지, 그리고 이


애가 어째서 초고를 훔쳤는지에 대해서."
"...알겠다."

아르웬은 내 질문에 다크 엘프 소녀를 힐긋거리더니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가슴 중앙에 손을


올리며 예법에 맞게 인사했다.

"정식으로 소개하도록 하마. 내 이름은 아르웬 엘리디아. 신의 축복을 받은 나라, 알븐하임의


여왕이니라."
"여왕?"

나는 그녀의 정식 인사를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근엄한 말투로 보나, 은연히 흘러나오는 기품으로 보나 높으신 분인 건 예측하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여왕일 줄은 생각치도 못 했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설마 알븐하임의 여왕일 줄은 상상도 못 했군요."


"괜찮다. 그리고 말을 놓아도 상관없느니라. 그대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으니. 어차피 이런 상황에 말을
놓아도 큰 의미도 없고."

내가 정중하게 사과하며 존댓말을 사용하자 아르웬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과인'이나 '짐'처럼 스스로를 낮추는 특유의 문체를 사용하지 않는데다 축제 당시의 행적을 고려하자면
격식을 따지지 않는 성격인것 같다.

하대하는 듯한 말투도 무언가 어색함이 느껴진 걸 보면 아마 이때문인 듯싶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르웬 쪽에서 말을 높여라 명령하면 저쪽만 불리하다.

"알겠어. 그럼 인사는 넘어가고, 아까도 물었지만 이게 도통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질 않거든. 자세히


설명해줄래?"
"그래. 레인."
"... ..."

아르웬은 내 부탁에 다크 엘프 소녀으로 추정되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다크 엘프 소녀의 몸이


흠칫거리더니 슬쩍 아르웬을 바라봤다.

뒤이어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와 정면으로 바라봤다. 두려움에 제대로 잡아먹힌 듯한, 두 눈이
덜덜 떨리고 연신 입술을 축이고 있다.

아무래도 500 년 형이라는, 엘프에게도 엄청난 형량이 떨어졌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나 같아도 징역 50 년
형을 받으면 정신이 아득할텐데 저 소녀에게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 불쌍하긴 하네.'

이에 마음이 약해지려는 찰나, 내 표정을 보았는지 세실리가 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이작. 미리 말하는데 공연을 하고 있을 때 저 애가 네 저택에 침입했어. 그리고 또다시 초고를


훔치려고 했지.]

그 속삭임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세실리를 쳐다봤다. 한 번이면 그러려니 하는데 두 번은 봐줄


수 없다.

세실리는 내 표정을 보고 싱긋 웃더니 귀를 빌려달라고 손짓했다. 나는 의문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에게 귀를 빌려줬다.

[저 꼬마 말로는 그저 네가 제논인지 확인하기 위해 침입했다는데 그 말을 누가 믿어주겠니? 다행히 발락


경이 막아서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어. 물론 정말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침입한 것 자체만으로도 문제가
있지. 부디 현명하게 대처해주기를 바랄게.]

그때부터 저 다크 엘프 소녀가 내 초고를 훔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구나. 나는 세실리의 속삭임을 듣고


다크 엘프 소녀를 바라봤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라면 문제가 많다. 괜히 다크 엘프 쪽에서 징역 500 년 형을 내린 게 아니다.

그사이 다크 엘프 소녀는 침을 꼴깍 삼키더니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연다.

"아, 안녕하세요. 레, 레인이라고 합니다. 현재 여왕님을 후견인으로 두고 있습니다."


"후견인이라..."

후견인은 뒤를 봐주는 사람으로, 사무처리능력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사람을 대신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건 전생의 이야기고, 이 세상은 보통 스승 또는 부모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엘프와 다크 엘프 사이는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크 엘프인 레인이


아르웬을 후견인으로 둔 건 보면 대충 어떤 그림이 나오는지 알 수 있다.

그간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던 다크 엘프를 알븐하임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초석을 다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 초석이 바로 아르웬과 레인의 관계이고.

나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레인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고저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대충 너랑 아르웬이 어떤 관계인지 알 것 같네. 자질구레한 말은 집어치우고 본론부터 들어갈게.


내 초고는 왜 훔쳤니?"
"... ..."
"다크 엘프는 남의 물건을 멋대로 훔치고, 그것도 모자라 저택에 함부로 침입해도 된다고 배워?"
"...아니에요."

내가 따끔하게 혼내자 레인은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보아하니 자기 잘못을 알고 있는


듯했지만 그래서 더 괘씸하다.

잘못된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 하면 안 된다. 이건 기본적인 상식이다.

비록 이 세계가 중세를 표방하는 판타지 세계이지만, 남의 물건을 훔치면 안 된다는 건 사람의 기본적의
양심이다. 그런 양심을 팔아버릴만큼 내 초고를 훔치게 된 경위가 대체 무엇일까.
"그럼 왜 훔쳤니? 그리고 어째서 저택에 몰래 침입해서 내가 제논이라는 걸 알고 싶어한 거야?"
"그건..."
"레인은 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그대의 초고를 훔친 것이다."

레인이 입을 열기 직전이었다.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르웬이 앞으로 나서며 레인을


변호해줬지만...

"아르웬. 미안하지만 지금 네가 끼어들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아. 저 애가 스스로 말하게 해야지."


"... ..."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내 대꾸에 입을 꾹 다물었다. 다만 어떻게든 레인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얼굴에


속속 드러나는 중이었다.

나는 아르웬도 입을 다물었겠다, 레인이 스스로 말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줬다. 레인은 아르웬이 본인의
편이라는 걸 알게 되어 긴장이 살짝 풀렸는지 아까보다 좀 더 커진 목소리로 답했다.

"여왕님의 말씀대로... 여왕님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훔쳤어요..."


"아르웬을 기쁘게 해주려고?"
"네. 여왕님도 당신의 책을 좋아하니까..."

레인의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아르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르웬은 여왕으로서의 집무를


내팽겨치고 전시회에 참가했다.

원래라면 공식적으로 참석하겠다고 성명문을 내겠지만, 내부적으로 말이 많았는지 그러지 않고 정체를


숨긴 채 공연을 즐기기 바빴다.

'어린 아이다운 생각이네.'

아마 레인은 어린 아이 특유의 짧은 생각으로 내 초고를 훔쳐 아르웬을 기쁘게 만들려 했겠지만, 그


결과는 최악으로 돌아왔다. 아르웬의 부족한 교육을 책망해야할지, 아니면 레인의 도덕심을 탓해야할지
애매하다.

그러나 레인은 이미 범죄를 저질렀고, 더 나아가 저택에 침입했다. 이것만으로도 문제가 많다.

나는 복잡한 상황에 뒷목을 매만지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낮게 깔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르웬."
"...말해도 좋다."
"너도 잘못된 건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
"그럼 왜 초고를 바로 돌려주지 않은거야? 출판사에 돌려놓기만 해도 괜찮잖아."

솔직히 레인이 일을 저질렀어도 아르웬이 잘 수습만 한다면 문제가 없다. 말이 좀 많겠지만 초고를
출판사에 돌려놓기만 해도 상관없었으니까.

그러나 아르웬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 사단이 나버렸고.

아르웬은 내 질문을 듣고 약간 망설이더니 정말 미안하다는 기색으로 사과했다.

"...그 부분은 내가 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인간들은 의심이 많으니 바로 돌려놓아도 진짜라는 걸 믿지
않을거라 생각했지."
"쩝..."

할 말이 없어진다. 종족 특유의 관점과 남들보다 깊은 생각이 스스로 함정을 파놓은 꼴이었으니까.


그것도 삽질을 좀 심하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교육 방식은 매우 잘못되었다. 도덕심이 부족한 어린애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따끔하게 혼을
내야지, 오냐오냐하니까 이리 된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레인이 우리 저택에 침범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르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는 후견인으로서의 자격이 매우 부족했다.

"아르웬. 인간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의심이 많지는 않아. 오히려 의심이 많은 건 너희 엘프겠지.
다른 종족보다 심지가 굵고 신념이 확실한만큼, 무언가를 배척하는 경향이 강할테니까."
"... ..."
"어쨌거나 아르웬 너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건 알겠어. 그러면 두 번째. 우리 저택에 침입해서 초고를
훔치려 한 건..."
"그, 그건 절대 아니에요! 전 정말로 확인만 하려 했다고요!"

레인은 내가 말을 하다가 말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억울한 표정을 보아 정말로 초고를 훔치지 않고 확인만
하려고 한 듯했다.

하지만 저택의 침입한 것도 많은 문제를 낳는다. 그때 당시 저택에는 황궁에서 파견한 기사가 경계 근무를
서는 중이었는데 그 삼엄한 경계를 뚫고 내 침실에 들어왔다는 의미이니.

바꿔말하자면, 나와 우리 가족이 위협받았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천만다행히도 공연을 관람하고


있던지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 평소였다면 어쩌 되었을지 아무도 모른다.

"정말로 네가 그렇다 해도 저택에 침입한 것 자체부터가 용서할 수 없어. 네가 나쁜 마음을 먹고 우리


가족을 빌미로 협박을 할 수도 있잖아? 언제 어디서든 우리 가족을 위협할 수도 있으니 초고를 훔친 건
용서해달라면서."
"아, 아니에요. 저는..."
"레인."

레인이 항의하려는 찰나, 그 옆에서 묵묵히 서 있었던 다크 엘프 여인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에 레인은 황금처럼 빛나는 여인의 눈과 마주했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대로 변명을 해봤자 불리해지는 건 본인이라는 걸 깨닫은 모양이다. 나는 문득 저 다크 엘프 여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져 아르웬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시리스 루나틱. 다크 엘프 쪽에서 내 호위로 붙여준 인물이지."
"시리스 루나틱이라고 한다."

허스키하면서도 낮은 톤의 매력적인 목소리다. 아델리아와 비슷하지만 시리스라는 여인의 목소리가 훨씬


낮고 중후하다.

나는 시리스라고 소개한 다크 엘프를 바라보다가 다시 레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레인은 내가 처벌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는 모습이다.

다크 엘프 자체적으로도 처벌을 내렸다지만, 최종 권한은 나에게 있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처벌의 강도가 이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고 약해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저들의 입장을 들어보아야겠지. 나는 레인이 아닌 아르웬을 바라보며 질문을 꺼냈다.

"아르웬. 아까 보니까 네가 레인을 감싸려는 이유가 혹시 다크 엘프와의 협력 때문이야? 레인의


후견인으로 있다고 했잖아."
"그대의 말이 맞다. 나는 오랫동안 고향에서 떨어져 있던 다크 엘프를 알븐하임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하지만 서로 간의 앙금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바, 내가 레인의 후견인으로서 잘 융화될
수 있는지 보려는 것이다."
"만약 이대로 내가 형을 집행하라고 한다면?"

솔직히 엘프와 다크 엘프가 어찌 되었던 간에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거다.

이에 아르웬은 몸을 흠칫 떨더니 침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아마 무산될 확률이 높을 것이다. 레인에게도 잘못이 있지만 내가 후견인으로서 부족한 점이 많으니
다크 엘프도 나를 믿기 힘들겠지."
"흠..."
"그대가 이대로 형을 집행하라고 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그대에게 전하고 싶구나."

저벅- 저벅-

아르웬은 내려깔았던 눈을 천천히 올리더니 나와 시선을 교환했다. 뒤이어 발을 천천히 떼어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자 곁에 있던 세실리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지만, 나는 팔을 들어 제지시켰다.


딱히 아르웬이 나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을테고 대충 무슨 행동을 할지 예상이 갔기 때문이다.

저벅-

이윽고 아르웬이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왔다. 약 5m 정도 떨어진 채로 우리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직시하고, 나 또한 그녀를 마주했다.

이어서 그녀는 약간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있다가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내쉬더니 두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두 손이 움직인 곳은 다름아닌 로브의 앞섬.

로브를 묶던 단추를 푸려는 듯, 앞섬을 주섬주섬거리던 아르웬은 로브를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몸을


가리던 로브를 벗자 은회색의 드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드레스라기 보다는 타이트한 원피스에 가까워서 그녀의 몸매가 부각되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외모와
달리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아름다운 몸.

특히 가느다란 허리에서부터 아래로 이어지는 골반 라인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워낙 타이트한


드레스이다보니 라인이 돋보였다.

투욱-

내가 아름다운 골반 라인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을 때, 아르웬은 로브를 땅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그녀가


로브를 내려놓음으로서 겨우겨우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결의를 내린 표정을 짓더니 서서히,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굽히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당황한 레인이 다급하게 아르웬을 불렀으나 시리스가 곧바로 제지시켰다.

이윽고 두 무릎을 땅바닥에 붙인 아르웬은 상체마저 숙이더니...

"죄송합니다."
"... ..."
"제가 후견인으로서 부족한 탓에 레인이 잘못을 저지르고, 더 나아가 사태를 수습하지 못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못 드리겠습니다."

땅 위에 바싹 엎드려 나에게 사죄했다.


< 119 화 >

나는 무릎을 꿇고 머리까지 박으며 용서를 구하는 아르웬을 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왕으로서는 물론,
한 사람으로서 매우 굴욕적인 자세다.

솔직히 말해 허리만 숙여도 그녀의 진심이 나에게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약간 과할 정도로
사과를 구하는 걸 보면 그녀에게 있어서 레인이 얼마나 큰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선처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엘프, 그리고 다크 엘프라는 종족이 모두 이러진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

그동안 아르웬이 납작 엎드린 상태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은회색 머리카락이 땅 위에
흩뿌려진 상태이며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방금 전 분위기를 보나 목소리로 보나 본인의 죄를 뉘우치고 있다는 확실하다. 문제는 아르웬이 허리까지


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르웬에게 책임자로서 죄가 있다지만, 본질적으로는 레인이 죄를 저지른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아르웬이


아니라 레인이 바짝 엎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로 아르웬의 뒷통수에서 눈을 떼어 레인을 쳐다봤다. 레인은 꽤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떨리는


눈동자로 아르웬을 바라보는 중이다.

아마 레인은 본인이 잘못했는데 부모님이 대신 사과한 것과 비슷한 감정을 겪고 있지 않을까. 잘못을


저지른 어린 아이가 본인의 잘못을 명확히 깨닫기 위해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아르웬에게서 후견을 받는 레인도 크나큰 영향이 있을 터. 나는 이다음에 레인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조용히 기다렸다.

"여, 여왕님..."
"... ..."
"끄윽... 흑..."

아르웬을 망연히 바라보던 레인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의 곁에 있는 시리스는
차마 이 광경을 못 보겠는지 눈을 감는 중이다.

과연 이다음에 레인은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나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칠까, 아니면 아르웬처럼 용서를


구할까.

어느 것이 되었던 간에 레인이 벌을 받는 건 절대 변하지 않는다. 이미 쓴맛을 제대로 보았으니


괜찮겠지만, 여기서 확실한 처벌이 들어간다면 그 효과는 배가 된다.

내가 속으로 레인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적당할지 고민하고 있을 쯤, 레인은 눈을 질끈 감더니 아르웬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1 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아르웬처럼 바짝 엎드린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 ..."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나는 바닥에 엎드린 엘프 두 명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슬쩍 시리스를 쳐다봤다. 왠지 상황이 기묘하게


바뀌어 눈치를 보는 것이었으나 그녀는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잠깐 눈을 떴을 때 나와 눈을 마주친 그녀는 지그시 감더니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이윽고
아르웬의 곁에 서더니 부드러우면서도 절도있는 동작으로 천천히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 ..."
"레인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막지 않고 방관한 점.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니. 당신까지 이러시면 어떡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왜 또 엎드리는 거야. 이 사람도 무슨 잘못을 한
건가.

무슨 연쇄작용도 아니고 시리스까지 이러니까 난감하기 그지 없다. 게다가 그림이 이상하다 못해 기묘하다.

세 사람 모두 미모가 출중한 엘프일 뿐더러 심지어 아르웬은 한 나라의 여왕이다. 이로 인해 지난 번처럼


가슴이 간질거렸지만 애써 인내했다.

"후우.."

나는 엎드려서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세 명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러고 있는


것보다 일으켜 세우는 것이 좋을 듯했다.

"...일단 세 분 모두 일어나세요. 솔직히 레인이면 몰라도 다른 두 명까지 이럴 필요는 없는데 조금


당황스럽네요."
"...나는 내 진심을 그대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아르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울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바닥에 엎드려서 그런지 그녀의 무릎이 흙으로
지저분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흰색에 가까운 드레스라 자국이 더 눈에 띄었다.

그녀가 일어나자 레인과 시리스도 연달아 일어났다. 레인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히끅거리는 중이었고,
시리스는 무표정이었으나 어딘가 슬퍼보이는 눈빛이다.

나는 뒷목을 매만지며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옆의 세실리를 힐긋거렸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제 3 자의 입장을 고수하려는지 관망하는 표정이다.

아무래도 최종 결정 권한을 나에게 맡기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해결하는 편이


이롭겠지.

이에 앞의 세 사람을 바라보며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아까 세실리 누나에게 들었어. 다크 엘프 자체적으로 레인의 형량을 결정했다고. 500 년 동안 감옥에
있는 거라고?"
"그렇다."
"500 년이라... 분명 엘프에게도 적지 않은 기간이야. 그렇지? 자그마치 인생의 반을 감옥에서만 있어야
하는 거니까."

10 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500 년이면 세상은 설명조차 부족할 정도로 변화되어 있다. 오랫동안 옥살이를
한 사람들이 후에 석방되어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 하는 이유가 바로 너무나 크게 바뀐 세상과 사회
때문이다.

그러니 레인이 500 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다 석방되어도 적응을 아예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제 막 인격이
형성되려는 어린 아이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단, 초고를 훔친 건 명백한 잘못이며 더군다나 내 저택에 침입까지 했다. 아무리 미성숙한 아이여도
용서받지 못할 일은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생으로 감옥에 집어넣는 것도 문제가 있는데...'

당장 500 년 동안은 괜찮을 것이다. 내가 천수를 누려 사망해도 세실리에게 미래를 맡기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이것만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500 년 뒤에 감옥에서 나왔을 때 어떤 괴물이


탄생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최악의 경우, 세실리의 눈을 피해 내 후손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악감정이란


악감정은 모두 품고 나올테니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레인에게 과하지 않고 적당하면서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그런 벌을 내려야한다.

아, 물론 레인 뿐만 아니라 아르웬과 시리스도 마찬가지고. 이 둘은 직접적인 처벌보다는 책임을


져야하는 입장이니 벌이라기에도 민망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최대한 생각을 정리한 후, 문득 좋은 생각이 번뜩 떠올라 세실리를 바라봤다. 세실리는


내가 바라보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나."
"응. 말해."
"누나는 나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지?"
"맞아. 그런데 그건 왜? 이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거니?"

역시 눈치가 빠르다. 나는 대답 대신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세실리는 내 미소를 보고 못 말린다는 듯이 피식거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았어. 그래서 무슨 벌을 내리려고?"


"집행유예."
"집행유예?"
"응."

처음 들어본 말인지 세실리가 의문에 찬 표정으로 지었다. 비단 그녀 뿐만 아니라 앞의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이 세상은 집행유예는커녕 징역이라는 단어조차 없다. 단지 누군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몇 년 형을


선고한다는 말만 있을 뿐, 법조차 체계적으로 짜여있지 않다.

나는 집행유예가 어떤 형식으로 구성돼 있는지 곰곰히 생각하다가 하나 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두 알다시피 나는 인간이야. 마족이나 엘프에 비해서 짧디 짧은 수명을 가진 인간이지. 500 년은커녕
100 년조차 버티지 못 하는 건 당연해."
"... ..."
"그러니 레인에 대한 관리는 전적으로 세실리에게 맡길 거야. 단, 레인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데다가
어린 나이라는 걸 감안하고 어느 정도 감형을 시켜줄거고. 500 년이 아니라 300 년 정도?"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 입에서 감형이라는 소리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 레인이 감격해하며 다시 한 번 바짝 엎드렸다.


아르웬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듯, 입을 살짝 벌리며 혼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이다.

그러나 이들을 생각과 달리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집행유예의 진정한 대목은 지금부터 나온다.
"아직 내 설명 안 끝났어. 여기서 조건이 붙어."
"조건이라함은..."
"이미 다크 엘프 내부에서 500 년 형을 확정지었으니 이건 바꾸지 않을거야. 300 년이라는 소리는
집행유예, 그러니까 일종의 감시라고 해야되나? 아무튼 레인이 300 년 동안 특별한 사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대로 500 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는거지. 또한 범죄의 강도에 따라 500 년
형에서 더 추가시킬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500 년 동안 레인을 우리 가문에 종속시켜 수호자 또는 메이드로 삼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썩


내키지가 않는다. 당장 세실리가 우리 가문을 수호할 것이라 선언했는데 굳이 레인까지 끼어들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레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되, 또다시 비슷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면 가차없이 500 년 동안
감옥에서 썩히게 만드는 것이다.

언뜻 보면 집행유예가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300 년 동안 철저하게 감시를 받게 되는 셈이니


행동에 제약이 붙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 레인이 특별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300 년 동안 얌전히 지내면 무죄라는 겁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시리스가 특유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비단 그녀 뿐만 아니라 다른


두 엘프의 표정을 보건데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되는 것 같다.

하기야 집행유예는 이 세상으로서는 생소하다 못해 새로운 처벌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절대 아니야. 착각하면 안 돼. 레인은 이미 마땅한 처벌이 내려졌고, 이건 절대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지.


내가 선처하여 한 번 더 기회를 주지만, 그렇다고 무죄가 되는 건 절대 아니야. 너 같으면 300 년 동안
감시받고 싶겠어? 심지어 그사이 범죄를 저지르면 변명도 하지 못 하고 500 년 동안 감옥에서
썩어야하는데?"
"...몸만 묶이지 않았지, 완전한 자유가 아니라는 거구나."
"맞아. 생소한 개념이라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명심할 것은, 레인이 무죄가 아니라 유죄라는 것이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세실리에게 맡긴 이유도
이때문이다.

"이 시간 이후로 평소처럼 행동해도 상관없지만, 레인은 앞으로 세실리의 감시를 받게 될 거야. 아르웬이
그러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계약이나 각서라도 쓰는 게 좋겠지. 혹시 마법으로도 가능해?"
"가능해. '맹약'이라고, 억지로 부수는 건 거의 불가능한 마법이지. 보통 주종 관계에서나 쓰는
거지만..."
"... ..."

세실리가 말을 흐리며 아르웬을 바라보자 아르웬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악마의 후예인 마족과 신의
선택받은 엘프와의 맹약.

그것도 엘프가 을의 입장이니 기묘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마. 사실상 우리에게 선처를 해준거나 다름없는 형식의 형벌이니."
"아르웬도 명심해. 이건 무죄가 아니라 유죄를 선고한 거야. 만약 레인이 이와 비슷한 일을 저지른다면
그때는 선처고 뭐고 없어. 무조건 500 년 형이야."
"명심하도록 하마. 이는 레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저, 절대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진짜로요!"

레인이 명심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강렬하게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에게는 지옥문에 한
발짝 내딛었다 겨우겨우 빠져나온 격이니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뭐, 이렇게 해도 아르웬이 후견인으로서 자격이 박탈당하는 건 어쩔 수 없을거다. 그러나 이건 그들의
사정이고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레인의 처우만 결정한 것이지 아르웬과 시리스가 남아있다. 나는 레인에게서 고개를
돌려 아르웬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르웬 너도 책임을 져야지. 시리스 당신도."


"... ..."

본인들의 차례가 와서 그럴까. 두 엘프 모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는 그동안 골똘히 고민했다.

두 사람은 공범이 아니라 방관자였으니 강도는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처벌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음... 이걸로 해야겠다.'

사리사욕도 채울 겸, 다양한 지식도 얻을 겸 겸사겸사 좋은 방안이 떠올랐다. 이에 가장 먼저 시리스에게


말했다.

"시리스. 당신은 저와 아르웬 사이의 심부름꾼 역할을 해주세요. 제가 아르웬에게 할 말이나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연락을 할 수 있도록."
"심부름꾼이라... 알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곁에 계속 있어야 하는 겁니까?"
"음... 혹시 제가 필요할 때마다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있나요? 아니면 소환을 한다던가."

과학이 발달하지 않아 전화기도 없고 통신할 수 있는 수단이 편지밖에 없는 세상이다.

그러니 마법으로 때우는 게 가능한지 궁금해 했는데, 때마침 세실리가 적당한 방법 하나를 가르쳐줬다.

"소환 스크롤이라는 게 있어. 대상의 머리카락이나 피를 묻힌 채 스크롤을 찢으면 언제 어디서든 소환할


수 있지. 대신 대상자가 특정 시간 안에 응해야 돼."
"그럼 연락을 씹을 수도 있다는 의미야?"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죄를 갚을 수 있다면 언제 어디서던지 요구에 응하겠습니다."

시리스는 단호하면서도 책임감이 강한 말을 꺼냈다. 워낙 눈매가 사나운 바람에 아까부터 노려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줬지만 그냥 표정이 그런 모양이다.

아무튼 시리스의 처우도 결정되었겠다, 마지막으로 아르웬을 쳐다봤다. 아르웬은 나와 눈을 마주치자


긴장한 낯빛이었다.

레인의 후견인인만큼 그녀에게도 큰 책임이 있지만, 이미 머리까지 박은 마당에 크게 처벌하기는 어렵다.

나는 이걸로 괜찮을지 고민하다가 일단 말하기로 정했다. 곤란하다고 하면 강행할 계획이고 절대 안 된다


하면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다.

"아르웬. 너는 여왕이니까 '성지'에 마음대로 오갈 수 있지?"


"그렇다."
"그럼 거기에 있는 책도 좀 빼올 수 있어?"

알븐하임의 성지는 최초로 건설된 도서관이자 역사 그 자체다. 이 세상 모든 역사가 담겨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여러가지 지식이 보관되어 있다.

심지어 엘프에 관한 비판적인 서적도 존재하는데, 엘프는 이상한 부분에서 고집이 강했기에 폐기하지 않고
온전히 보관하는 중이다.
"그, 그걸로 되겠느냐? 그정도라면 시리스에게 지시하지 않고도 내가 공간 이동 마법으로 그대에게
전달할 수 있다."

아르웬은 내 부탁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살짝 놀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래도 여왕인


그녀에게는 쉬운 부탁인 모양이다.

"그럼 그렇게 해줘. 난 상관없으니까. 가능하면 역사책으로 부탁할게."


"알겠다. 그런데 정녕 그거면 되겠느냐? 여왕인 나에게는 매우 손쉬운 일이라..."

도저히 못 믿겠는지 재차 묻는 아르웬. 그녀는 여왕이니 당연히 쉽겠으나 인간인 나에게는 아니다.

엘레나 교수가 알려줬듯이, 성지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깐깐하면서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한다. 알븐하임에
들어서는 것조차 엄격한 심사가 이루어지는데 성지는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이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가 펜으로 글을 쓰는 시늉을 하면서 대답했다.

"내 직업 잊었어? 그 책을 보고 과연 내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 ..."
"전에도 말했지만, 네가 재미있게 읽은 책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책을 부탁하는거야. 자그마치 성지인데
내가 원하는 책은 있겠지. 만약 없다고 거짓말을 하면... 알지?"
"아, 알겠다. 유의하도록 하마."

아르웬은 혹여 내가 엘프에 안 좋은 이야기를 제논 일대기에 쓸 까봐 무서웠는지 안색이 약간 파리해졌다.


마족의 인식을 악마에서 사람으로 끌어올렸는데 엘프를 끌어내리는 것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라 생각할 터.

물론, 이미 정해진 스토리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 순전히 그녀의 착각에 가깝다. 책 속의 알븐하임이


무너지는 건 이미 결정된 사안이고, 엘프와 다크 엘프가 융화되어 다시 수복하는 스토리는 여전하다.

이들이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마족도 그랬는데 이제와서 무슨
의미를 부여한다고.

"자. 이제 이걸로 처벌은 끝났고... 레인."


"네, 네!"

레인은 내가 부르자 부동 자세를 취하며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아마 그녀는 내가 생사여탈권을 쥐었다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실제로 권한은 나에게 있으니 수틀리면 그녀는 500 년 확정이다. 덕분에 철이 좀 든 것 같지만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줄 필요가 없다.

"누누이 말하지만 너는 무죄가 아니라 유죄야. 300 년 동안 세실리의 감시 아래에 살아야하는 건 물론,
그 사이에 범죄를 저지르면 500 년에다 더 심한 형벌까지 받을 수도 있어. 알겠지?"
"며, 명심할게요! 당신이 죽은 후에도 반드시 가슴에 담을게요!"
"뭔가 어감이 좀 이상한데... 어쨌던 알겠어."
"...혹시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상황이 종료되려는 찰나, 시리스가 낮게 깔긴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했다. 그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


쪽으로 향했다.

시리스는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도 특유의 날카로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질문을
하려는지 궁금해하여 턱을 까닥였다.

"말하세요."
"심부름꾼의 기간은 언제까집니까?"
"아, 그걸 생각 안 하고 있었네. 제가 죽을 때까지 할래요? 어차피 전 인간이라 당신에게는 짧은
기간일텐데."

어디까지나 분위기를 살짝 완화하기 위한 농담이었다. 하지만 역시 엘프라고 해야할까.

"그럼 대략 80 년 정도... 알겠습니다.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받아들일 거예요?"
"그정도 기간이면 알맞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리스는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얼굴을 보니 알아서 납득한 모양새라 도리어


내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보니 평생동안 노예 한 명이 생긴 것 같달까. 나는 머쓱함과 황당함에 머리를 긁적였다가 아르웬을


슬쩍 바라봤다.

"나, 나도 그대가 신들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마. 어차피 성지에 있는 책들은
나조차도 전부 읽지 못 했으니 80 년의 기간이 매우 짧게 느껴질 것이니라."
"... ..."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이건 이득이지 결코 손해는 아니다. 부담스러워도 그들이 무리없이 받아들였으니


나도 받아들일 생각이고.

아무튼 간에 이후로 레인에게 초고를 돌려받음으로서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고, 초고가 진품인지, 그리고
훼손된 부분이 없는지 체크했다.

다행히 지금까지 보관을 잘 하고 있었는지 훼손된 부분은 한 곳도 없었다.

나는 깨끗한 초고를 훑어보다가 문득 궁금한 게 떠올라 앞의 세 명을 바라보며 질문을 꺼냈다.

"흠... 아참.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저택에는 어떻게 침입한 거야? 분명 황궁에서 파견한 기사단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조금 이상해서. 다크 엘프가 그정도로 강해?"
"강하기 보다는 그들의 능력이 이질적인 것이니라. 마법사가 없는 이상 그들을 감지하는 건 매우
어렵지."

대답은 아르웬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시선을 두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황궁에서 파견나온 기사단은 엄청 강하다고 하셨는데 기사로는 어림도 없어?"


"실루엣 정도는 보이겠지만 은밀한 작업을 파악하는 건 어려울 것이니라. 이 탓에 인간 기준으로 백작급
이상 저택에는 강화형 탐지 마법이 설치되어 있지. 그 밑으로는 잡범들만 막는 탐지 마법이 설치돼
있고."

풀업 영웅 질럿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다크 템플러 한 명 못 이긴다는 건가. 옵저버(마법사)가 무조건


있어야겠네.

설명을 들으니 다크 엘프는 전생의 여러 매체에서도 나온 것처럼, '은신'에 특화된 종족인 듯했다.
직업적으로 도적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다.

'만약 종족 전쟁에 다크 엘프마저 참전했다면...'

안 보이는 곳에서 인간 지도자의 목을 썩둑 썩둑 썰고 다녔을테니 100% 확률로 패배했을 것이다. 엘프는


뒷공작(암살)보다는 언제나 전면전을 선호했으니까.

하지만 전황이 불리해지자 어떤 엘프 전사는 어떻게든 승기를 잡기 위해 뒷공작을 벌였다가 엘프의 명예를
실추했다며 구속당했다.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방법을 그 전사가 가장 먼저 깨닫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만약 엘프들이 조금만 그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면 그 엘프 전사는 영웅으로 추앙받지 않았을까. 나는 그


엘프 전사에 대해 떠올리다가 때마침 앞에 아르웬도 있겠다, 그 사람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질문하기로 정했다.

책에서는 감옥에 투옥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전쟁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아르웬.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 종족 전쟁 당시 법을 어겼다고 투옥당한 엘프 전사에 대한 건데."


"그 전사는 현재 석방되어 본인의 저택에서 칩거 중이다. 아마 알븐하임으로부터 배신당했다는 아픔
때문이겠지."
"... ..."
"알븐하임으로서는 애국자와 뛰어난 전사를 잃은 셈이니 매우 큰 손실이니라. 나조차도 복귀해달라
요청했지만 가볍게 묵살당했지."

확실히 조국에서 배신당한 군인의 아픔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본인의 선택이 정답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면 원망이 더더욱 깊어졌겠지.

실제로 제논 일대기에서 '교만'을 담당하고 있던 엘프도 이와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다. 그는 알븐하임의


추악한 현실에 분노하여 스스로 악마로 전향했다.

'그래도 덕분에 좋은 스토리를 짤 수 있겠다.'

알븐하임이 악마들의 손에 멸망하는 건 정해진 수순이지만, 그 이후의 과정에서 영웅이 등장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대충 스토리를 짜는 것도 잠시, 앞의 세 사람을 하나하나 둘러봤다. 그들은 여전히


긴장한 표정으로 내 입이 떨어지기까지 기다리는 중이다.

이에 피식거리며 능청스레 입을 열었다.

"이제 다 끝났는데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나도 딱히 할 말은 없고."


"저, 정말 끝이에요?"

레인이 불안에 떠는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털썩!

긴장이 풀리기라도 한 것일까. 레인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옆에서 시리스가 다급하게 부축해준 덕에 겨우겨우 일어설 수는 있었지만, 갓 태어난 산양처럼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다크 엘프 두 명을 쳐다보는 것도 잠시, 아르웬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은회색 눈동자에는 미묘한


감정이 섞여있었다.

감사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자비를 베풀어줘서 고맙다는 건지. 어쨌거나 호의적인 감정인 건 확실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지저분해진 그녀의 무릎이 신경 쓰였다. 그녀가 엎드려 사과한 것도 영 그랬는데
더러워진 무릎을 보니 내가 다 불편하다.
"잠깐 실례할게."
"그, 그대여? 지금 무슨..."

툭- 툭-

나는 아르웬이 당황하건 말건 허리를 살짝 굽히며 그녀의 더러워진 무릎을 손으로 털어줬다. 순백에
가까운 은회색 드레스라 세탁을 해야겠지만 일단 흙먼지나 털어주는 식이다.

다행히 마법 처리라도 한 건지 아니면 재질이 좋은 것인지 손으로 턴 것만 해도 전보다 훨씬 깨끗해졌다.


얼룩이 묻어있지만 물로 빨아도 충분할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알븐하임의 여왕이 엎드리는 건 좀 과했어. 너는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좀


불편하더라."
"... ..."
"비록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사이가 조금은 어색해지겠지만 가능하면 축제 때처럼 지내자. 알겠지?"

아르웬의 무릎을 다 털어준 뒤에 굽혔던 허리를 서서히 폈다. 아르웬은 내 말을 듣고 뺨을 살짝 붉혔다가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작게 대답했다.

"...알겠다."
"그럼 이제 다 끝났으니까..."

길고 길었던 초고 도난 사건의 결과는.

"우리는 이만 가볼게."

레인에게 집행유예를 떨어뜨림으로서 끝이 났다.

< 120 화 >

상황이 모두 정리되었겠다, 이후의 일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우선 세실리와 아르웬이 맹약을 맺는 것을 시작으로, 소환을 위하여 시리스에게 머리카락까지 받았다.


마리처럼 흰색 머리카락이었지만 시리스는 붉은기가 은은하게 돌고 있었다.

세실리와 아르웬 사이의 맹약도 마법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마법에 문외한인지라 둘이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세실리가 종이를 허공에 소환시키더니 손가락으로 유려하게 움직인 후, 그곳에 아르웬이
사인하듯이 이루어졌으니.

어쨌거나 맹약도 끝났겠다, 나는 아르웬 일행이 떠나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말라는 듯이 말했다.

"이런 말 하기에는 그렇겠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난 뒤끝이 있는 성격은 아니니까."


"...배려해줘서 고맙구나. 그대의 자비는 내 평생 잊지 않겠다."
"평생까지야. 어차피 난 인간이라 100 년도 못 살아. 차라리 잊고 사는 편이 낫겠지."
"... ..."

내 말에 아르웬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은회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뒤이어 그녀는 피식거리며 씁쓸한 웃음을 짓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인간과 엘프의 사랑 이야기를 적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까 이상한 기분이 드는구나."


"종족마다 정해진 수명은 신조차 바꿀 수 없는 문제니까. 뭐, 소설 속의 이야기가 현실에서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건 절대 아냐."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세실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세실리는 나와 얼굴을 마주하자 빙긋 웃으며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답했다.

새하얀 그녀의 뺨에 홍조가 약간 깃든 걸 보아 내 말이 무슨 의미를 담았는지 눈치챈 모양이다. 그녀는


내가 말했듯이 후회하며 사는 것보다 그리워하며 살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물론 이게 정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후회하는 삶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그대는 보면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구나. 책으로 얻는 지식은 한계가 있을텐데 또다른 세상을 창조할
능력을 갖고 있다니. 심지어 약관도 되지 않아 보이는데."

그건 내가 지구에서 건너온 환생자라 그래.

다만 위의 말 대신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구에서는 아르웬의 상식을 모두 박살낼만큼 다양한 문화와


볼거리가 존재한다.

나는 그저 지구의 문화를 받아들인 환생자에 불과하며, 여기서는 세상을 뒤흔드는 대문호일지는 몰라도
지구에서는 평범하디 평범한 웹소설 작가였다.

이렇다 보니 제논 일대기는 특정 목적을 넣지 않고 순전히 취미로 즐길 수 있었다.

"여왕님."
"말이 길어졌구나. 우린 이만 가보겠다."

시리스의 부름에 아르웬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나와 세실리 또한 각자 예법을 갖추며
떠나가는 엘프 일행을 배웅했다.

이윽고 약간의 빛무리와 함께 마법이 발동되는 듯싶더니 세 사람 모두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고위급


마법 중 하나인 텔레포트를 매우 손쉽게 쓰는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인간들은 언제쯤 저런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까. 인간들이 마법을 본격적으로 사용할 수 있던
시기가 종족 전쟁 이후부터였으니 100 년 정도 지나면 되는 것일까.

나는 아르웬 일행이 사라진 장소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옆으로 옮겼다. 세실리가 빙글빙글 웃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아이작."
"응. 누나."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세실리가 먼저 나를 불렀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응해줬다.

이윽고 세실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로 하여금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혹시 마리랑 했어?"


"...응?"
"내가 저택을 떠나고 난 뒤에 마리랑 했냐고 물었어. 지난 번에 마리에게 빨리 안 하면 내가 먼저 해버릴
거라고 언질을 해놓았거든."

그때 저택에서 마리한테 그런 말을 한 거였나. 마리에게 위기감을 형성시켜 일을 치루도록 만들다니,


소름이 돋으면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도 나와 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세실리의 질문을 듣고 활활 타올랐던 저택의 깊은 밤을 상기했다.

이로 인해 얼굴이 살짝 붉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세실리도 내 반응을 보고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했구나?"
"...했지."
"흐응."

내가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담긴 목소리로 답하자 세실리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야릇한 비음까지
흘리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으며 긴장의 끈이 붙잡게 되었다.

이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마리와 몸을 섞었으니 이제는 자신이라고 말하려는 걸까. 가르츠도 있는데 그런
말을 했다간...

'...이 사람은 또 어디 갔어?'

세실리를 피해 뒤를 본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방금 전만 해도 가르츠가 뒤에 있었는데 지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눈치가 쓸데없이 빠르다고 해야할지. 남몰래 자리를 비켜준 그의 약삭빠른 행동에 살짝 어이가 없어졌다.

스윽-

그사이 세실리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나에게로 서서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와 세실리 사이의 거리는 숨소리가 느껴질만큼 가까워졌으며 아름다운 그녀의 미모가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나는 뒤로 한 발짝 움직였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마리와는 완전히 색다른 미녀가 얼굴을 들이대니 심장이


강하게 두근거렸다.

더군다나 이미 세실리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은 바, 지금 내 심정을 부정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였다.

"...좋았어?"

그렇게 우리 둘이 서로를 한참동안 시선을 교환하고 있을 때, 세실리가 살랑거리는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이에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하려는 찰나, 나는 그녀의 뺨이 붉어졌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본인이 질문해놓고 본인이 부끄러워하는, 무언가 미묘한 모양새다.

이에 왠지 모를 자신감을 얻어 세실리의 어깨를 조심히 밀어냈다. 그러자 세실리도 힘을 주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천천히 물러났다.

마침내 우리 둘의 사이는 살짝 벌어졌고, 이렇게 보니 그녀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져 있다는 걸 확실하게
체크할 수 있었다.

'...남자 경험이 전혀 없다고 했었지?'

세실리는 평소 야한 장난을 하던 것과 달리 남자 경험이 하나도 없는 여자다. 무려 100 년 이상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직위가 직위이다보니 함부로 접근하는 남자가 거의 없었다고.

게다가 장난기가 많은 그녀의 성격상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남자가 사실상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은 즉슨, 방금 전 그 행동도 나름대로 용기를 낸 것일 터.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채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엄청 좋았어."
"그, 그렇구나..."

내 시선을 피하며 쑥쓰러워하던 세실리는 입을 오물거리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다른 질문을 건냈다.

"마리는? 마리는 뭐래?"


"그건 당사자에게 직접 묻는 편이 좋지 않을까?"
"여, 역시 그게 낫겠지? 알았어."

역시라는 말을 보면 그녀도 마리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던 듯하다. 그녀는 어깨를 붙잡은 내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아 천천히 내렸다.

이어서 길고 가느다란 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어색한 웃음을 띄며 말했다.

"그... 나는 마리한테 이야기를 듣고나서 해도 될까? 막상 하려니 좀 부끄러워서... 그리고 너도


당분간은 마리랑 하는 게 좋을테고..."
"난 상관없어. 누나가 편한대로 해."
"저, 정말로? 나랑 할 생각이 있는거야?"
"누나 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부탁하는데 그 어느 남자가 거부할 수 있을까?"

내가 말한 거지만 약간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정중하게 거부했을텐데 현지화가 제대로


되었는지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이작...!"

그러나 세실리는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가 그대로 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살짝 놀란 것도 잠시, 나에게 매달린 채 격하게 기뻐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세실리의 칠흑색 머리카락은 비단결 같은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꼭 기쁘게 해줄게! 그때까지만 열심히 마리랑 하고 있어. 알겠지? 나도 마리한테 들으면서
노력할테니까."
"언제는 내가 원할 때마다 해준다고 하지 않았어?"
"원래는 그랬지만 어머니에게 들었어. 남자든 여자든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상대방에게 더욱 큰 쾌락을
선물해줄 수 있다고. 난 네가 과일처럼 농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먹을거야."

따먹는다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그래도 생각보다 괜찮은 방법이긴하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비록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니지만 효과는 있을 것이다.

마리도 첫 날 밤 내 아랫도리에 달린 기둥을 보고 경악했으니까. 다행히 마리가 잘 받아줘서 망정이지


다른 여자였다면 시도조차 못 했다.

"따먹는 건 누나가 아니라 나이지 않을까? 참고로 마리는 하다가 기절했어."


"그, 그래? 첫 날에 그정도는 아니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는데..."

부끄러워하는 세실리를 보니 내 마음 속의 음흉함이 꿈틀거렸다.

하마터면 '여기서 확인해도 돼'라는 말을 꺼낼 뻔했지만, 가르츠가 어디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가까스로 억누를 수 있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는 세실리를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천천히 껴안았다.

세실리도 순간 움찔거렸으나 이내 손을 더듬거리며 내 등을 감싸안았다.


풍만한 가슴의 감촉과 함께 은은한 향기가 내 오감을 자극시켰다. 이대로 일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아름다운 체향이다.

"...아이작."
"응."
"키스는... 지금 해도 될까?"

그 물음에 품 안의 세실리를 슬며시 떼어냈다. 곧이어 기대감과 긴장으로 채워진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올망졸망한 눈빛으로 애원하는 듯한 세실리를 바라보다가 싱긋 웃어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공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 ..."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던 것일까. 세실리는 본인의 욕망에 휩쓸린 듯, 내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입술을 갖다 대었다.

나는 세실리가 부드러운 입술을 갖다 대며 키스를 시도하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역시 남자 경험이 없다는


게 맞는지 입술을 대는 것조차 서툴렀다.

그러나 서큐버스의 피가 이어져 있다고,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혀가 내 입 안을 파고들기 위해 살살


움직이는 중이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톡-

세실리의 혀 끝이 내 혀 끝과 살짝 부딪혔다. 그러자 세실리의 몸이 찌르르- 하며 떨렸다.

혀와 혀가 섞이진 않고 끝만 서로 부딪히면서 몇 분을 있었을까, 세실리가 입술을 조심히 떼었다.


탐욕스럽게 서로를 탐하는 딥키스가 아니어서 입술 사이로 은색 실선은 이어지지 않았다.

"하아..."

세실리는 달콤한 숨소리를 내뱉으며 나를 쳐다봤다. 몽롱하게 풀려있는 붉은색 눈동자와 눈에 띄게 올라온
홍조.

나는 평소와 달리 첫 키스로 인해 정신없어 하는 그녀가 너무 귀여워서 뺨을 살포시 붙잡았다. 세실리는


내가 뺨을 잡아주자 두 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떼어내려는 게 아닌, 그저 붙잡기 위함이었는지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세실리에게 물었다.

"어때? 첫 키스의 느낌은."


"...미칠 것 같아."

세실리는 몽롱한 표정 그대로 작게 대답했다. 간간이 뜨거운 숨이 흘러나오는 걸 보아 키스만으로 잔뜩


흥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진행했다간 고속도로가 뚫릴 위험이 있어서 그만두는 편이 좋을 듯하다. 내가 뺨에서 손을 떼자


그녀도 내 손을 놓아줬다.

"남은 건 훗날을 기약하자. 알았지?"


"...응. 나도 참을게."
"그럼..."

나는 부끄러워하는 세실리를 바라보다가 싱긋 웃으며 한 가지 부탁했다.

"헬리움을 좀 소개시켜줄 수 있어?"

그리하여 세실리의 도움을 받아 하루종일 헬리움을 돌아다니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바로 이틀 뒤가 아카데미 개학이라 서둘러 채비를 마친 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재회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이후로 전시회로 늦어진 아카데미 개학이 진행되고...

"아이작! 빨리 저기로 가자! 저기가 깔끔하고 좋다고 들었어!"


"...오자마자 하려고?"
"내가 며칠동안 참았는지 알아? 엄마한테 배운 기술도 있으니까 긴장해! 오늘은 내가 이길테니까!"
"하하하..."

개학을 하자마자 성욕의 화신이 되어버린 마리와 정을 나누느라 시간을 전부 소모했다.

아무래도 세실리의 차례가 오려면 조금 오랜 시간이 걸릴 듯했다.

'설마 글 쓸 시간도 없는 건 아니겠지?'

나는 마리에게 모텔처럼 생긴 건물로 질질 끌려가며 속으로 되뇌었다. 정말로 수업을 끝날 때마다 마리랑
몸을 섞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아, 참고로 이긴다고 호기롭게 선언했던 마리는 반대로 호되게 당해버렸다.

소프트웨어(기술)가 아무리 발달해도 하드웨어(신체 및 체력)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

"...나도 운동이나 할까?"


"주말에 같이 할래?"
"운동은 싫은데..."
"스트레칭이라도 해. 유연성이라도 길러야지."

행복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

제논 일대기가 휴재를 번복하고 어언 2 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꽤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세상의 모든


독자들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아이작이 개인 사정으로 인해 연재가 길어질 거라 미리 말해놓았고, 무려 1 년 이상 휴재할 뻔했던 제논


일대기였기에 독자들은 감지덕지했다.

그동안 전시회가 열렸던 마이샬 영지에 방문하거나 다양한 팬아트를 만드는 등. 이 세상에 별로 없는
유희거리를 즐기면서 시간을 소비했다.

그렇게 인내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특보! 제논 일대기 11 권의 원고가 출판사에 도착하다!]

모두가 기다리던 소식이 신문에 실리면서 환호를 이끌어 내었다. 드디어 기다림의 끝이 왔다며, 또다시
제논 일대기에 빠져들 시간이 도래했다면서 가히 신앙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출판사도 그간 멈췄던 인쇄소를 풀 가동시켜 제논 일대기 11 권을 찍어냈다. 신기술을 접목한 덕분에 제논


일대기 11 권은 공장에 찍어내듯이 생성되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제논 일대기 11 권을 마음껏 사들였고, 서점은 물 밀듯이 쏟아져오는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혼이 빠져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충격! 제논의 스승, 카이르의 죽음. 과거, 자신의 제자였던 '질투'에게 전사해...]
[카이르 외전이 나온 이유가 여기 있었다. 더 큰 슬픔과 비극을 선사하기 위한 초석.]
[별이 떨어진다는 묘사를 통해 카이르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 엘프 여왕, 엘리샤. 과연 그녀의
반응은?]

설마 설마했던 일이 벌어지면서 독자들에게 매우 큰 충격을 안겨줬다. 여태까지 불안한 말(플래그)들을


내놓았던 카이르였기에 독자들은 불길함을 느꼈는데 그 불길함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심지어 카이르와 엘리샤의 애처로운 사랑 이야기는 많은 독자들에게 애틋함을 선사했기에 그 충격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최후의 순간, 카이르의 독백은 독자들의 눈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단 한 번만... 단 한 번만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다면...

죽음의 순간에도 사랑하는 여자의 미소를 보고 싶어하는 카이르. 이 독백 하나만으로도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평생을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결과는 비극으로 치달았다. 만약 인간 대


인간이었다면 진작에 이어졌겠지만 하필이면 엘프 여왕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수많은 독자들이 카이르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오열한 나머지 탈진 증상을...]
[정녕 수명을 초월한 사랑은 이루어 질 수 없단 말인가? 소식을 듣게 될 엘리샤와 제논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제논이 질투를 죽이는 건 정해진 수순. 하지만 스승마저 이긴 질투에게 어떤 방식으로 승리를 점할
것인가?]

사크란의 희생에서도 보았듯이, 카이르의 죽음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절대 다수의 독자들이 카이르의
죽음에 슬퍼하며 진심으로 애도했다.

그리고 그 현상은 신문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매튜."
"네. 사장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뭐지?"
"추모 행렬입니다. 카이르의 죽음으로 인해 독자들이 우리 출판사 앞에 꽃을 놓고 가더군요."
"아니. 마이샬 영지도 아니고 왜 우리 출판사에?"
"마이샬 영지에도 행렬이 이어지는 중이랍니다. 특히 카이르와 관련된 예술품 앞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꽃이 놓여져 있다고 들었어요."
"... ..."

사람들이 출판사 뿐만 아니라 마이샬 영지에 전시된 예술품에 애도의 의미로 꽃을 선물했다. 비록 상상
속의 인물이라지만, 워낙 임팩트가 강렬하고 캐릭터 자체가 매력적이어서 사람들이 스스로 행동에 옮긴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크란의 희생 당시에는 이런 일이 없었나?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그때는 전시회도 개최되지
않았고 마족들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제논 일대기가 문화 그 자체로 승격된 지금은 아니다. 캐릭터가 죽는다는 건 앞으로 제논


일대기에서 그 캐릭터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하물며 카이르는 제논의 스승으로서 꾸준히 인기를 끌었고, 외전을 통해 인기가 수직상승한 케이스다.
흔히 '덕질'을 하려는 사람이 막 생기려는 찰나에 캐릭터가 죽어버린 것이다.

아무튼 카이르의 죽음은 아이작이 예상하지 못 했으나 또다른 문화를 낳았고, 마이샬 영지는 때아닌
관광객 방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건 또 뭔데?"

엘레나 교수에게 추천 학생으로 등록되어 시간이 널널해진 아이작은 신문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이러다 진이 죽으면 폭동이 일어나겠네...?"

그는 속으로 큰일났음을 직감했다.

< 121 화 >

레킬리스 공작가의 딸, 마리 하우젠 레킬리스는 최근 행복한 나날을 즐기는 중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아카데미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건 물론이고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거의 없었다.

올해만 해도 다양한 사건사고를 겪었지만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악연이라 할 수 있는


리나와의 관계가 전보다 훨씬 진척되었다.

아이작의 조언을 받아 둘이서 담판을 지었고 리나가 그때는 정말 미안하다며, 허리를 굽혀 사과하는
것으로 둘의 관계는 조금이나마 가까워졌다. 물론 마리도 스스로가 너무 쪼잔했다며 리나에게 사과하는 건
잊지 않았다.

이처럼 실타래처럼 얽히고 섥혔던 리나와의 악연을 청산하니 남은 건 단 하나. 남자친구 아이작과의
관계다.

아이작이 누구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정체를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난 제논 일대기의 저자, 제논이다.

물론 주변의 지인들이 아이작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나 그가 남자친구라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그것도


평범한 사이가 아닌, 밤일까지 치른 남자친구.

첫 날 밤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성에 눈을 뜬 바람에 하루가 멀다 하고 관계를 치르는 중이다. 때마침


아이작도 엘레나 교수에게 추천 학생으로 임명받아 시간이 널널해진 참이었다.

마리가 학업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이작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케어해주니 불행할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너무 행복한 바람에 가끔씩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무엇보다, 마리에게는 최근 아이작에게 생긴 변화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길을 걷는 도중에


나란히 서 있는 아이작을 불렀다.

"아이작."
"응?"

마리의 부름에 아이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그동안 마리는 최근 3 개월 동안 바뀌어도 너무


바뀐 아이작의 외모를 천천히 뜯어봤다.

그전까지는 갓 태어난 새끼 펭귄마냥 귀엽고 순수한 미모를 지녀 보호 욕구를 일으켰는데, 지금은 눈매가
날카로워지고 젖살도 눈에 띄게 빠져 전보다 늠름해졌다.

이뿐만일까. 남자는 여자보다 늦게 성장한다는 속설을 증명하듯, 최근 몇 달간 키가 훌쩍 커버린


모습이다.

원래는 170cm 를 겨우겨우 넘던 그가 현재 180cm 를 가뿐히 넘는 장신이 된 건 물론, 아버지의 유전자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여 어깨도 벌어졌다. 듣자하니 너무 갑작스레 성장한 바람에 교복을 2 주일에 한 번씩
바꿨다고.

하지만 마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불렀어?"
"흐으."

마리는 아이작이 입을 열자마자 귓가를 속삭이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에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에
띄게 커져버린 몸도 몸이지만 그녀가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바로 목소리다.

전에는 소년처럼 가녀린 목소리를 지닌 것에 반해, 지금은 어엿한 성인으로서 중저음에 꿀이 뚝- 뚝-


떨어질 듯했다. 귓가에 잘 자라고 속삭이면 그대로 기절할 것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

남자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여자에게 큰 호감을 주기에 충분한데, 아이작은 목소리 뿐만 아니라 개성적인
미모까지 보유하고 있다.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대문호에다가 외모도 흠잡을 곳 하나 없으며, 목소리까지 완벽하다. 과연 이런


남자가 세상에 존재하는지 의문이었지만, 그게 자신의 남자친구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에 마리는 짜릿한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며 아이작의 팔을 꽉 붙잡았다. 성장하기 전에는 달라붙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신장 차이로 인해 매달리는 수준이었다.

"아이작. 아이작."
"응. 마리."
"헤헤."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이런 완벽한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일까. 그녀는 베시시 웃으며 아이작의 팔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아이작도 그녀의 애교에 황금색 눈동자를 깜빡였다가 피식 웃으며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에
마리는 더욱 쓰다듬어달라는 듯이 고양이처럼 고롱고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으응~"
"내가 그렇게도 좋아?"
"응."
"나도 좋아."

남자다우면서도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가 마리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녀는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아이작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러면서 은글슬쩍 전보다 살짝 커진 가슴 사이에 끼우는 건 잊지 않았다. 아이작이 성장한 것처럼 그녀도
다양한 의미로 성장한 덕분에 성숙한 매력을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작은 팔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못 말린다는 듯이 웃기만 할 뿐, 전처럼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하지는 않았다. 이미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에 이정도는 애교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마리 쪽에서 장난을 쳤으니 자신 쪽에서도 장난을 칠 생각이다. 그는 얼굴을 천천히 내밀어 마리의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지금 나 유혹하는 거야? 언제든지 말만 해."


"헤으으..."

결국 사르르 녹아버린 마리였다.

*****

나는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녹아버린 마리의 표정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내 팔을 붙잡은


힘은 풀지 않았다.

전시회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이래, 내가 급격히 변화한 것처럼 마리도 비슷했다. 우선 키가 약간


커졌으며 외모 또한 소녀가 아닌, 한 명의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지금 내 팔에 느껴지듯이, 안 그래도 큰 가슴이 더욱 커진 상태다. 물론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세실리보다는 아니지만 첫날밤보다 확실히 커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따르자면 가슴은 누군가 만져주면 크기가 커진다는데 아마 그 영향도 있지 않을까.
속옷을 새로 맞춰야한다며 투덜거리던 마리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예쁘고 몸매도 훌륭한 여자가 내 여자친구라는 게 가끔씩 믿기가 어려웠지만, 그래서인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오늘은 안 돼. 내일 시험이라 공부해야 되서."

내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정신을 차렸는지 마리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겨우겨우 대답했다. 손가락으로
볼을 누르면 붉은 물이 뚝- 뚝- 흘러나올 것 같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아쉬워하는 것도 잠시, 시험 기간이라는 소리에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무슨 시험이야?"
"수학 시험. 아이작은 부럽다. 역사학만 시험을 보면 되잖아."

마리가 부러워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나는 엘레나 교수에게 추천 학생으로 임명받아 다른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역사학에만 집중하면 그만이고 2 학년부터는 엘레나 교수의 조수로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이 세상의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 다른 강의에 참관하기도 한다. 대신 시험은
거의 치지 않고 정말로 참관만 하는 식이어서 교수들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역사학 시험을 잘 봐야지. 기껏 추천 학생으로 임명되었는데 탱자탱자 놀았다가 취소되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져."
"그래도 부러워. 너만큼 역사를 좋아해야 교수님이 추천해주시겠지?"
"그냥 운이 좋았지."

내가 노트를 정리하는 동안 엘레나 교수가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다. 이후로 연구실에 방문하고 신디에게
작문법을 가르쳐주는 대가로 서적과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마리는 나에게 부럽다는 눈빛을 보내다가 팔을 붙잡은 채로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투덜거렸다.


"아~ 진짜 부럽다. 나도 빨리 3 학년이 되고 싶어. 3 학년부터는 그 과목에만 집중하면 되잖아."
"너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면 엘레나 교수님에게 부탁해. 너도 역사학에 들어올 거잖아."
"옛날이라면 그럴 생각이었는데, 생각을 바꾸려고. 난 정치학에 들어갈 거야."
"언제는 나랑 같이 있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원래는 그랬지만 마음이 바뀌었어. 너에게 도움이 되려면 정치를 배우는 게 좋겠지. 리나랑 화해도
했겠다, 이게 더 좋지 않겠어?"

어쩜 이리 기특하고 깜찍한 말만 골라서 하는 걸까.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만큼 사랑스럽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일을 저지르고 싶었지만 내일이 시험이다보니 겨우겨우
인내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나중을 기약하면 된다.

"그나저나 너는 괜찮아?"
"뭐가?"
"지금 11 권 때문에 난리도 아니잖아. 너희 영지에는 조문을 오는 사람들까지 있다며?"
"... ..."

나는 마리의 질문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현재는 11 권이 나오고 약 사흘이 지난 시점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카이르의 죽음, 더 나아가 인간과 엘프 간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났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실제로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카이르를 위한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고.

솔직히 말해 격한 반응이 나오는 건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때마침 카이르 외전이 나왔던지라


그의 평가가 상승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욕만 좀 얻어먹고 끝날 줄 알았던 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출판사는 물론, 영지에 조문을


왔다는 사람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으니.

어머니의 편지에 적힌 내용에 따르자면, 하나같이 엄숙한 표정으로 카이르와 관련된 예술품 앞에 흰색
국화꽃을 놓고 간다고. 참고로 전시회 당시에 배치되었던 예술품은 그대로 놔둔 상태다.

'이럴 줄 알았으면 12 권까지 함께 발매하는 건데...'

11 권에는 카이르의 죽음이 하이라이트고, 12 권은 제논과 메리의 관계가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메리가
스스로 엘프임을 밝힘과 동시에 제논에게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세실리에게 해줬던 대사가 등장한다. 누구처럼 후회하며 살 바에야 차라리 그리워하며
사는 편이 낫다고. 그러니 너를 사랑하겠다고 말이다.

덕분에 제논도 충격으로부터 빠져나와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며 질투에게 복수하기 위해


단련에 단련을 거듭하게 된다.

물론 이는 모두 12 권에 나올 장면들이고 현재는 11 권이 더 중요하다.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난감하여 버릇적처럼 뒷목을 매만졌다.

"...나도 이정도일 줄은 몰랐지.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과장인 줄만 알았어."


"그러게 누가 그렇게 애절한 스토리를 만들어놓고 함부로 죽이래? 독자들의 환상을 보기 좋게 박살내니
이렇게 되는거야."
"조용히 말해. 누가 들을라."

다행히 지금 주변에 돌아다니는 행인이 없어서 망정이지, 마리의 발언은 꽤 위험한 편이었다. 마리도 그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는지 헙! 하며 손바닥으로 다급히 입을 막았다.

이어서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등장인물을 죽이는 건 좀 위험할 거 같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카이르가 부활하거나
그러진 않아?"
"음... 안 할 걸?"
"안 할 걸은 또 뭐야? 고민하고 있다는 거야?"
"등장해도 결말부에 등장할 거야. 애초에 확정된 것도 아니고."

원래는 카이르는 등장이 전혀 없을 예정이었지만, 독자들의 성토가 심하게 이어지다보니 마음이 조금씩
바뀌는 추세다. 단, 스토리가 꼬일 것을 염려하여 등장해도 에필로그에 등장할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 등장하냐면, 내가 이 세상에 환생한 것처럼 카이르와 똑같은 영혼이 환생하는 식이다.
엘리샤와 만나는 순간 전생을 모두 기억해내 다시 한 번 이어진다는, 그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

'근데 그 전에 진 때문에 좆 될 거 같은데...'

카이르가 이정도인데 진이 죽을 때면 이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을 터. 이때문에 스토리를


변경해야 할지 고민될 정도다.

스토리를 변경하면 여태까지 뿌려놓은 떡밥과 복선을 회수하지 못 하는 꼴이라 졸작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고 그대로 진행하면 독자들에게 욕을 무진장 얻어먹을 것이다.

하물며 어머니조차 진과 릴리가 이어지길 바라는 독자 중 한 명이니 어쩌면 호되게 혼날 수도 있다.


나로서는 착잡하기 그지 없는 상황일 수밖에 없다.

"뭐, 네가 따로 생각해 놓은 게 있겠지. 난 어차피 제논이랑 메리가 이어지면 그만이니까. 설마 그


둘도..."
"아무리 그래도 주인공과 여주인공은 이어지게 해줘야지."
"잘 생각했어. 암. 명색이 주인공인데 자식은 봐야지. 진이랑 릴리도 마찬가지겠지? 참고로 우리
어머니가 기대하고 계셔."
"... ..."

설마 파혼당하는 건 아니겠지?

< 122 화 >

엘레나 교수에게 추천 학생으로 임명되면서 나의 개인 시간은 매우 널널해졌다. 점수에 집착할 필요없이


원하는 강의만 들으면 그만이니 집필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다.

물론 엘레나 교수가 부른다면 재깍재깍 연구실로 달려가야 된다. 그녀가 나를 추천 학생으로 임명했으니
사실상 그녀의 조수나 다름없다. 물론 파릇파릇한 신입생이라 신디처럼 막 굴리지는 않는다.

이렇다 보니 글을 쓰다가 쉬고 싶으면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에 방문하는 편이다. 마리나 세실리는 수업이
전부 끝나고 만나는 편이니 그때까지만 있으면 상관없다.

연구실에서 신디에게 작문법을 가르쳐 주는 건 일상이니 넘어가고, 엘레나 교수가 나에게 의견을 묻거나
아니면 내가 그녀에게 질문을 하여 서로 토론을 하는 등.

마지막으로 내가 보기와 달리 뛰어난 지식량와 독특한 관점을 자랑하니까 이런 저런 논문과 서적을 주면서
나를 대학원생으로 키우려는 조짐까지 보였다.

애당초 말만 토론이지 몇 백년 간 지식을 쌓았던 엘레나에게 비비기에는 무리이니 그녀는 주로 나의


독특한 관점에 집중하고 있다.

"근데 저는 추천 학생이니 그렇다 쳐도 다른 학생들은 3 학년이 되면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거예요?


아무리 봐도 숫자가 너무 적은데."
"간단해. 너처럼 조수가 되어 교수들에게 지식을 받는 거지. 교수들도 여러 학생을 상대하는 것보다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할 수 있어서 효율도 은근히 좋아."
"그럼 회관에 있는 교수들에게 강의를 받는 건가요?"
"응. 네가 원한다면 내가 애들한테 부탁할게. 여기 교수들이 전부 내 제자라 기꺼이 들어줄거야."
"...괜찮아요."

역사회관의 교수가 모두 자신의 제자라는 엘레나의 대답에 할 말이 없어졌다. 하긴 장수종의 대표격인


엘프이니 그럴만도 하다.

이후로 나는 좀 더 훌륭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서적을 살펴보다가 문득 궁금한 점 하나가 떠올랐다.


엘레나도 엘프이다 보니 자연스레 떠오른 의문이었다.

"교수님. 실례지만 교수님 나이가 몇이라고 하셨죠?"


"응? 나 아직 300 년도 안 살았는데. 그건 왜?"

엘레나가 내 질문에 책을 읽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초록빛 눈동자가 의문을 발했다.

나는 종족 전쟁이 발발했던 시점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다가 궁금했던 부분을 입 밖으로 꺼냈다.

"신디에게 듣자하니 엘프는 종족 전쟁을 치른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의 갈등이 심하다고 들었거든요.
실제로도 그런가요?"
"음..."

그녀는 내 질문을 듣고 의자에 등을 기대어 곰곰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선을 천장에 두며 한동안 고민하던 엘레나는 이윽고 대답을 하나 하나 꺼냈다.

"일단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할 수 있어. 종족 전쟁은 엘프가 종족우월주의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였거든.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고착화된 사고방식은 바꾸기가 매우 어려워. 특히 엘프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만큼 그런 점이 두드러지지. 게다가 종족 전쟁은 인간 연합이 잘했다기보다는 엘프가 자멸한 거라
더욱 그래."
"그럼 신세대에도 종족우월주의자가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긴 한데 사실상 신세대들 사이에서는 못 배운 족속들로 취급하는 편이야. 반대로 구세대들
사이에서는 박애주의자를 혐오하고. 쉽게 말해 이념 싸움이야."
"사회 현상이 인간들만큼 복잡하네요."
"사람 사는 곳이 거기서 거기란 말이 괜히 나왔겠니? 세대 사이의 갈등은 비단 엘프 뿐만 아니라 전
종족이 통틀어 나오고 있어."

전생에서 아주 유명한 구절(?)이 하나 있다.

요즘 애들은 버릇없다.

이 유명한 구절은 21 세기 뿐만 아니라 멀고 먼 기원전에서조차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버릇없는 애들이 성장하여 세상을 뒤바꾸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건 왜 묻니? 세대 간의 갈등은 너희 인간들도 흔하게 볼 수 있잖아."


"그렇긴 한데 엘프는 인간과 달리 유독 규합이 잘 안 되는 성향이 강해서요. 교수님도 아이케르 전사장이
전쟁 도중에 구속된 사건 아시죠?"
"당연히 알지. 아이케르가 그나마 인간의 전투 방식을 잘 이해한 엘프였는데 법률에 어긋났다고 원로원이
구속시켰지. 같은 엘프인 내가 봐도 이해가 안 가더라고."

여태까지 몇 번 정도 언급했지만, 엘프는 종족 전쟁 당시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규합이 잘 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인간 연합으로부터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야기일 뿐 아이케르 전사장 구속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더군다나 다크 엘프 측에서 지원을 보내려고 했으나 원로원 쪽에서 칼같이 거절했다고 아르웬이 알려줬다.
인간 연합에게 밀리는 와중에도 다크 엘프가 추방자라는 이유때문에 거부한 것이다.

반대로 인간들은 어떻게든 승리를 점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암살자를 보내는 건
기본이고, 많은 희생이 있을지라도 보급로를 차단시켰다.

다만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섞여있다 보니 종족 전쟁 이후 발생한 후폭풍이 무시무시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현재까지 이어진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 간의 갈등이다.

나는 엘레나의 설명을 듣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구했다.

"정녕 엘프가 하나로 규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종족 전쟁 같은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을
때 법률이니 뭐니 하면서 따질 것 같긴 한데."
"여왕님은 그러지 않겠지만 아마 원로원 쪽에서 말이 나오겠지. 이빨 빠진 호랑이라 해도 다리가 없어진
건 아니거든. 지난 번 네가 시험지에 적었던 말처럼,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야."
"많이 힘들다는 거군요."
"그렇지. 무엇보다 신세대라 해서 구세대랑 다른 건 크게 없어. 종족 특징인지 모르겠지만 엘프는 본인이
옳다고 믿는 걸 굳게 믿는 편이거든. 이때문에 아이케르 전사장 같은 위인이 더욱 눈에 띄었던 거고."

역시 소설은 소설로 써야할 듯했다. 객관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엘레나가 저리 말할 정도로 엘프라는


종족은 그만큼 융통성이 더럽게 없는 모양이다.

아르웬도 신세대 엘프답게 여러모로 파격적인 정책을 고루 펼치고 있지만, 간혹 가다가 융통성이 없는
면모를 보면 확실하다. 현재 내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있는 시리스도 마찬가지고.

지난 번에 한 번 소환을 했다가 목욕 중인 상태로 온 걸 보면 분명하다. 그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대로


다시 돌려보냈던 기억이 있다.

"그럼 엘프와 다크 엘프 간의 융화는 더더욱 불가능하겠네요?"


"그건 확답을 내려줄 수가 없네. 나는 다크 엘프가 어떤 목적을 지닌 민족인지 거의 모르거든.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200 년을 넘게 살면서 친분이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현재 내 주요 연구
리스트 중 하나야."

실제로 다크 엘프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미지의 종족 중 하나다. 가끔 가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기는 하나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나는 시리스라는 아주 유용한 심부름꾼이 있기에 남들과 다른 편이다. 그들은 숲이나 산 깊숙한


곳에서 부족 생활을 영위하며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고 어엿한 전사로 성장한다.

간혹 가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정보 수집 겸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돈을 버는 거라고.


다크 엘프 전사 한 명 한 명이 일당백 수준을 넘으니 용병일을 조금만 하면 된다고 들었다.

이처럼 불편한 생활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이유는 알븐하임에서 본인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는 거라고
시리스가 설명해줬다.

'애향심이 강할 수밖에 없긴 하지.'

다크 엘프는 다른 엘프보다 융통성이 있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더라도 결국 같은 엘프다.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으며 그만큼 강하다.

그리고 알븐하임은 신의 뜻을 따라 엘프가 세운 최초의 문명이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최초'라고


불릴만한 것들은 거의 다 알븐하임에 있으니 애향심이 강한 건 당연하다.

'근데 그런 알븐하임을 박살낸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나는 천장을 올려다 보면서 12 권의 전개를 생각했다. 12 권은 메리가 제논에게 고백하는 게 주된


내용이지만, 종반부에는 악마가 알븐하임을 기습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알븐하임의 본격적인 침공은 13 권에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하필 그때 당시 엘프 여왕 엘리샤는


카이르의 죽음 이후로 정신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상태라 제대로 대비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뿐만이 아니라 제논 일행도 악마들의 계속된 위협에 엘프 전사장과 함께 정찰을 나갔으며, 그때부터
의회의 트롤링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르웬의 반응이 궁금하네.'

이번 11 권이 나왔을 때도 아르웬은 시리스를 통해 본인의 마음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혹시 카이르와


엘리샤가 떨어진 이유가 자신 때문이냐는,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귀엽게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미 정해놓았던 스토리라 그녀의 오해가 풀리게끔 잘 설명하는 건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르웬은


영 불안했는지 필요한 게 있다면 시리스를 통해 말하라고 부탁했다.

똑- 똑- 똑-

내가 머릿속으로 열심히 스토리를 구상하는 동안 누군가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이에 문 쪽으로 고개를


들린 순간, 문 뒤로부터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에요오... 들어갈게요오..."

피곤에 쩔어있고 흐물거리는 말투가 인상적인 엘프 여인, 신디의 목소리였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그녀의 얼굴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짙게 깔린 다크 서클과 반쯤 감긴 듯한 눈매, 그리고 하나로 대충 묶은 머리는 여전했으나 엘프답게


미모는 출중했다. 오히려 퇴폐미가 느껴지니 내가 아는 엘프와 달리 미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평소보다 왠지 기뻐보이는 표정이다. 눈은 피로에 젖어있었지만 입꼬리는 살짝 올라간


상태였으니.

'그러고 보니 논문을 제출하려고 위그드라실로 갔었지?'

나는 그녀가 논문을 제출하기 위해 알븐하임의 성지 중 하나, 위그드라실로 향했다는 걸 기억했다.


그동안 내가 억지로 떠먹여 주는 수준으로 가르쳐 준 덕분에 신디의 작문법은 일취월장한 상황이었다.

엘레나에게 먼저 검수를 받았을 때도 이정도면 충분하다며, 어서 빨리 위그드라실로 가라고 했을 정도이니


괜찮지 않을까.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엘레나는 신디를 보더니 기대가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 잘 됐어?"
"네에... 무사히 통과되었어요오... 이제 편히 잘 수 있겠다아... 헤헤헤..."

신디는 베시시 웃으며 후련하다는 얼굴이었다. 전에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을텐데 엘프는 걸어다니는
도서관이라 불리는만큼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된다.

그 전공에 한해서는 거의 만물박사에 준하는 지식을 갖고 있어야 되며, 위그드라실에 제출해야 되는


논문조차 말이 안 되는 수준으로 어렵다.

사실 당연한 것이, 엘프는 장수하는만큼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데다가 그간 쌓여있는


논문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주제를 선정해도 비슷한 것들이 수두룩하게 넘쳐나니 통과가 극히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신디의 논문이 통과되었다는 건 축하해줘야 하는 일이다.

"축하해요. 이제 신디도 박사 학위를 딴 건가요?"


"으응..."

신디는 흐느적거리는 말투로 대답하더니 나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이윽고 내 앞에 다가와서는 나의 손을


조심히 붙잡았다.

그에 살짝 당황했지만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은 신디를 보며 가만히 있어줬다. 뒤이어 그녀는


흐느적거려도 진심어린 목소리로 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네 덕분이야아... 정말 고마워어..."


"제가 뭘 했다고. 전 글 쓰는 법만 알려준 거예요. 연구는 오로지 신디가 한 거고."

사실이다. 나는 신디에게 작문법만 알려줬지 연구는 신디가 스스로 주도한 일이다.

하지만 신디는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맑게 웃었다.

"네가 도와준 건 사실이야아... 아이작 네가 없었다면 분명 몇 십 년은 걸렸을 거얼..."


"신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아무튼 이제 뭐 하실 거예요? 박사 학위까지 땄으니 엘레나 교수님 밑에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이제 신디도 마음만 먹으면 교수 혹은 학자가 될 수 있다. 엘레나 교수의 조수 노릇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신디도 그걸 알았는지 내 손을 풀어주고 곰곰히 생각했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에... 당분간은 여기 있겠지이... 아직 못 읽은 논문이랑 책도 많고오..."


"그래요?"
"으응... 그러니까 너도 자주 찾아와줘어...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도 되고오... 내가 되는대로
도와줄게에..."
"그러면..."

나는 무슨 질문을 할지 고민하는 것도 잠시, 방금 전 엘레나에게도 했던 질문을 신디에게 묻기로 정했다.


참고도 신디는 내 손을 여전히 붙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신디는 엘프가 진정 하나로 규합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비단 엘프 뿐만 아니라 다크 엘프까지


포함해서."
"...그런 건 소설에서나 나오지 않을까아...? 그리고 난 다크 엘프가 뭐하는 사람들인지 몰라아..."

음. 역시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로 취급하는구나. 나는 신디의 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오늘 위그드라실에서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는데에..."


"무슨 소식이요?"
"이번에 나온 제논 일대기 있잖아... 거기에서 카이르랑 엘리샤가 헤어진 거..."
"아. 그거요. 그건 왜요?"
신디는 자각하지 못 했는지 내 손을 꼭 붙잡은 채로 대답을 꺼냈다.

"그거 때문에 말이 좀 많더라아... 학자들끼리 싸우던데에..."


"...그런 걸로 왜 싸워요?"
"너무 현실적이라서어... 실제로 엘프 쪽에서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탓에 인간이 마음을 돌리거나 먼저
죽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거드은...."
"... ..."
"현재 전국적으로 설문하고 난리도 아니야아... 조만간 논문도 나오지 않을까아...?"

12 권의 반응이 참 기대되는구나.

< 122 화 >

엘레나 교수에게 추천 학생으로 임명되면서 나의 개인 시간은 매우 널널해졌다. 점수에 집착할 필요없이


원하는 강의만 들으면 그만이니 집필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다.

물론 엘레나 교수가 부른다면 재깍재깍 연구실로 달려가야 된다. 그녀가 나를 추천 학생으로 임명했으니
사실상 그녀의 조수나 다름없다. 물론 파릇파릇한 신입생이라 신디처럼 막 굴리지는 않는다.

이렇다 보니 글을 쓰다가 쉬고 싶으면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에 방문하는 편이다. 마리나 세실리는 수업이
전부 끝나고 만나는 편이니 그때까지만 있으면 상관없다.

연구실에서 신디에게 작문법을 가르쳐 주는 건 일상이니 넘어가고, 엘레나 교수가 나에게 의견을 묻거나
아니면 내가 그녀에게 질문을 하여 서로 토론을 하는 등.

마지막으로 내가 보기와 달리 뛰어난 지식량와 독특한 관점을 자랑하니까 이런 저런 논문과 서적을 주면서
나를 대학원생으로 키우려는 조짐까지 보였다.

애당초 말만 토론이지 몇 백년 간 지식을 쌓았던 엘레나에게 비비기에는 무리이니 그녀는 주로 나의


독특한 관점에 집중하고 있다.

"근데 저는 추천 학생이니 그렇다 쳐도 다른 학생들은 3 학년이 되면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거예요?


아무리 봐도 숫자가 너무 적은데."
"간단해. 너처럼 조수가 되어 교수들에게 지식을 받는 거지. 교수들도 여러 학생을 상대하는 것보다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할 수 있어서 효율도 은근히 좋아."
"그럼 회관에 있는 교수들에게 강의를 받는 건가요?"
"응. 네가 원한다면 내가 애들한테 부탁할게. 여기 교수들이 전부 내 제자라 기꺼이 들어줄거야."
"...괜찮아요."

역사회관의 교수가 모두 자신의 제자라는 엘레나의 대답에 할 말이 없어졌다. 하긴 장수종의 대표격인


엘프이니 그럴만도 하다.

이후로 나는 좀 더 훌륭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서적을 살펴보다가 문득 궁금한 점 하나가 떠올랐다.


엘레나도 엘프이다 보니 자연스레 떠오른 의문이었다.

"교수님. 실례지만 교수님 나이가 몇이라고 하셨죠?"


"응? 나 아직 300 년도 안 살았는데. 그건 왜?"

엘레나가 내 질문에 책을 읽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초록빛 눈동자가 의문을 발했다.

나는 종족 전쟁이 발발했던 시점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다가 궁금했던 부분을 입 밖으로 꺼냈다.

"신디에게 듣자하니 엘프는 종족 전쟁을 치른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의 갈등이 심하다고 들었거든요.
실제로도 그런가요?"
"음..."

그녀는 내 질문을 듣고 의자에 등을 기대어 곰곰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선을 천장에 두며 한동안 고민하던 엘레나는 이윽고 대답을 하나 하나 꺼냈다.

"일단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할 수 있어. 종족 전쟁은 엘프가 종족우월주의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였거든.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고착화된 사고방식은 바꾸기가 매우 어려워. 특히 엘프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만큼 그런 점이 두드러지지. 게다가 종족 전쟁은 인간 연합이 잘했다기보다는 엘프가 자멸한 거라
더욱 그래."
"그럼 신세대에도 종족우월주의자가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긴 한데 사실상 신세대들 사이에서는 못 배운 족속들로 취급하는 편이야. 반대로 구세대들
사이에서는 박애주의자를 혐오하고. 쉽게 말해 이념 싸움이야."
"사회 현상이 인간들만큼 복잡하네요."
"사람 사는 곳이 거기서 거기란 말이 괜히 나왔겠니? 세대 사이의 갈등은 비단 엘프 뿐만 아니라 전
종족이 통틀어 나오고 있어."

전생에서 아주 유명한 구절(?)이 하나 있다.

요즘 애들은 버릇없다.

이 유명한 구절은 21 세기 뿐만 아니라 멀고 먼 기원전에서조차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버릇없는 애들이 성장하여 세상을 뒤바꾸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건 왜 묻니? 세대 간의 갈등은 너희 인간들도 흔하게 볼 수 있잖아."


"그렇긴 한데 엘프는 인간과 달리 유독 규합이 잘 안 되는 성향이 강해서요. 교수님도 아이케르 전사장이
전쟁 도중에 구속된 사건 아시죠?"
"당연히 알지. 아이케르가 그나마 인간의 전투 방식을 잘 이해한 엘프였는데 법률에 어긋났다고 원로원이
구속시켰지. 같은 엘프인 내가 봐도 이해가 안 가더라고."

여태까지 몇 번 정도 언급했지만, 엘프는 종족 전쟁 당시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규합이 잘 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인간 연합으로부터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야기일 뿐 아이케르 전사장 구속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더군다나 다크 엘프 측에서 지원을 보내려고 했으나 원로원 쪽에서 칼같이 거절했다고 아르웬이 알려줬다.
인간 연합에게 밀리는 와중에도 다크 엘프가 추방자라는 이유때문에 거부한 것이다.

반대로 인간들은 어떻게든 승리를 점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암살자를 보내는 건
기본이고, 많은 희생이 있을지라도 보급로를 차단시켰다.

다만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섞여있다 보니 종족 전쟁 이후 발생한 후폭풍이 무시무시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현재까지 이어진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 간의 갈등이다.

나는 엘레나의 설명을 듣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구했다.

"정녕 엘프가 하나로 규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종족 전쟁 같은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을
때 법률이니 뭐니 하면서 따질 것 같긴 한데."
"여왕님은 그러지 않겠지만 아마 원로원 쪽에서 말이 나오겠지. 이빨 빠진 호랑이라 해도 다리가 없어진
건 아니거든. 지난 번 네가 시험지에 적었던 말처럼,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야."
"많이 힘들다는 거군요."
"그렇지. 무엇보다 신세대라 해서 구세대랑 다른 건 크게 없어. 종족 특징인지 모르겠지만 엘프는 본인이
옳다고 믿는 걸 굳게 믿는 편이거든. 이때문에 아이케르 전사장 같은 위인이 더욱 눈에 띄었던 거고."
역시 소설은 소설로 써야할 듯했다. 객관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엘레나가 저리 말할 정도로 엘프라는
종족은 그만큼 융통성이 더럽게 없는 모양이다.

아르웬도 신세대 엘프답게 여러모로 파격적인 정책을 고루 펼치고 있지만, 간혹 가다가 융통성이 없는
면모를 보면 확실하다. 현재 내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있는 시리스도 마찬가지고.

지난 번에 한 번 소환을 했다가 목욕 중인 상태로 온 걸 보면 분명하다. 그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대로


다시 돌려보냈던 기억이 있다.

"그럼 엘프와 다크 엘프 간의 융화는 더더욱 불가능하겠네요?"


"그건 확답을 내려줄 수가 없네. 나는 다크 엘프가 어떤 목적을 지닌 민족인지 거의 모르거든.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200 년을 넘게 살면서 친분이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현재 내 주요 연구
리스트 중 하나야."

실제로 다크 엘프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미지의 종족 중 하나다. 가끔 가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기는 하나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나는 시리스라는 아주 유용한 심부름꾼이 있기에 남들과 다른 편이다. 그들은 숲이나 산 깊숙한


곳에서 부족 생활을 영위하며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고 어엿한 전사로 성장한다.

간혹 가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정보 수집 겸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돈을 버는 거라고.


다크 엘프 전사 한 명 한 명이 일당백 수준을 넘으니 용병일을 조금만 하면 된다고 들었다.

이처럼 불편한 생활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이유는 알븐하임에서 본인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는 거라고
시리스가 설명해줬다.

'애향심이 강할 수밖에 없긴 하지.'

다크 엘프는 다른 엘프보다 융통성이 있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더라도 결국 같은 엘프다.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으며 그만큼 강하다.

그리고 알븐하임은 신의 뜻을 따라 엘프가 세운 최초의 문명이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최초'라고


불릴만한 것들은 거의 다 알븐하임에 있으니 애향심이 강한 건 당연하다.

'근데 그런 알븐하임을 박살낸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나는 천장을 올려다 보면서 12 권의 전개를 생각했다. 12 권은 메리가 제논에게 고백하는 게 주된


내용이지만, 종반부에는 악마가 알븐하임을 기습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알븐하임의 본격적인 침공은 13 권에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하필 그때 당시 엘프 여왕 엘리샤는


카이르의 죽음 이후로 정신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상태라 제대로 대비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뿐만이 아니라 제논 일행도 악마들의 계속된 위협에 엘프 전사장과 함께 정찰을 나갔으며, 그때부터
의회의 트롤링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르웬의 반응이 궁금하네.'

이번 11 권이 나왔을 때도 아르웬은 시리스를 통해 본인의 마음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혹시 카이르와


엘리샤가 떨어진 이유가 자신 때문이냐는,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귀엽게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미 정해놓았던 스토리라 그녀의 오해가 풀리게끔 잘 설명하는 건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르웬은


영 불안했는지 필요한 게 있다면 시리스를 통해 말하라고 부탁했다.

똑- 똑- 똑-
내가 머릿속으로 열심히 스토리를 구상하는 동안 누군가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이에 문 쪽으로 고개를
들린 순간, 문 뒤로부터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에요오... 들어갈게요오..."

피곤에 쩔어있고 흐물거리는 말투가 인상적인 엘프 여인, 신디의 목소리였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그녀의 얼굴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짙게 깔린 다크 서클과 반쯤 감긴 듯한 눈매, 그리고 하나로 대충 묶은 머리는 여전했으나 엘프답게


미모는 출중했다. 오히려 퇴폐미가 느껴지니 내가 아는 엘프와 달리 미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평소보다 왠지 기뻐보이는 표정이다. 눈은 피로에 젖어있었지만 입꼬리는 살짝 올라간


상태였으니.

'그러고 보니 논문을 제출하려고 위그드라실로 갔었지?'

나는 그녀가 논문을 제출하기 위해 알븐하임의 성지 중 하나, 위그드라실로 향했다는 걸 기억했다.


그동안 내가 억지로 떠먹여 주는 수준으로 가르쳐 준 덕분에 신디의 작문법은 일취월장한 상황이었다.

엘레나에게 먼저 검수를 받았을 때도 이정도면 충분하다며, 어서 빨리 위그드라실로 가라고 했을 정도이니


괜찮지 않을까.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엘레나는 신디를 보더니 기대가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 잘 됐어?"
"네에... 무사히 통과되었어요오... 이제 편히 잘 수 있겠다아... 헤헤헤..."

신디는 베시시 웃으며 후련하다는 얼굴이었다. 전에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을텐데 엘프는 걸어다니는
도서관이라 불리는만큼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된다.

그 전공에 한해서는 거의 만물박사에 준하는 지식을 갖고 있어야 되며, 위그드라실에 제출해야 되는


논문조차 말이 안 되는 수준으로 어렵다.

사실 당연한 것이, 엘프는 장수하는만큼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데다가 그간 쌓여있는


논문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주제를 선정해도 비슷한 것들이 수두룩하게 넘쳐나니 통과가 극히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신디의 논문이 통과되었다는 건 축하해줘야 하는 일이다.

"축하해요. 이제 신디도 박사 학위를 딴 건가요?"


"으응..."

신디는 흐느적거리는 말투로 대답하더니 나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이윽고 내 앞에 다가와서는 나의 손을


조심히 붙잡았다.

그에 살짝 당황했지만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은 신디를 보며 가만히 있어줬다. 뒤이어 그녀는


흐느적거려도 진심어린 목소리로 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네 덕분이야아... 정말 고마워어..."


"제가 뭘 했다고. 전 글 쓰는 법만 알려준 거예요. 연구는 오로지 신디가 한 거고."

사실이다. 나는 신디에게 작문법만 알려줬지 연구는 신디가 스스로 주도한 일이다.


하지만 신디는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맑게 웃었다.

"네가 도와준 건 사실이야아... 아이작 네가 없었다면 분명 몇 십 년은 걸렸을 거얼..."


"신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아무튼 이제 뭐 하실 거예요? 박사 학위까지 땄으니 엘레나 교수님 밑에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이제 신디도 마음만 먹으면 교수 혹은 학자가 될 수 있다. 엘레나 교수의 조수 노릇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신디도 그걸 알았는지 내 손을 풀어주고 곰곰히 생각했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에... 당분간은 여기 있겠지이... 아직 못 읽은 논문이랑 책도 많고오..."


"그래요?"
"으응... 그러니까 너도 자주 찾아와줘어...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도 되고오... 내가 되는대로
도와줄게에..."
"그러면..."

나는 무슨 질문을 할지 고민하는 것도 잠시, 방금 전 엘레나에게도 했던 질문을 신디에게 묻기로 정했다.


참고도 신디는 내 손을 여전히 붙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신디는 엘프가 진정 하나로 규합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비단 엘프 뿐만 아니라 다크 엘프까지


포함해서."
"...그런 건 소설에서나 나오지 않을까아...? 그리고 난 다크 엘프가 뭐하는 사람들인지 몰라아..."

음. 역시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로 취급하는구나. 나는 신디의 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오늘 위그드라실에서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는데에..."


"무슨 소식이요?"
"이번에 나온 제논 일대기 있잖아... 거기에서 카이르랑 엘리샤가 헤어진 거..."
"아. 그거요. 그건 왜요?"

신디는 자각하지 못 했는지 내 손을 꼭 붙잡은 채로 대답을 꺼냈다.

"그거 때문에 말이 좀 많더라아... 학자들끼리 싸우던데에..."


"...그런 걸로 왜 싸워요?"
"너무 현실적이라서어... 실제로 엘프 쪽에서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탓에 인간이 마음을 돌리거나 먼저
죽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거드은...."
"... ..."
"현재 전국적으로 설문하고 난리도 아니야아... 조만간 논문도 나오지 않을까아...?"

12 권의 반응이 참 기대되는구나.

< 123 화 >

이전에 내가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제논 일대기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일 뿐, 실제


일어났던 일은 절대 아니다.

마족이 사람들에게 차별을 받고 있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지 집필 당시에는


전혀 몰랐으며, 카이르와 엘리샤의 로맨스도 얼핏 들었던 이야기일 뿐 내가 직접 보거나 겪은 건 아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내가 위의 일들을 모두 경험했다고 착각하는 중이다. 사크란의 희생 같은 경우는 한때


마족에게 은혜를 받은 것이고, 카이르와 엘리샤는 아예 경험담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만약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면 그냥 저냥 넘어갔을 수도 있겠지만, 제논 일대기는 정말로 '있을법한'
이야기들로 구성돼 있는 탓에 독자들이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여태까지 본 적이 없던 문장력과 가독성까지 겸비했으니 사람들이 소설에 빠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위의 조건들을 고려하여 사람들은 나를 수 십년간 홀로 세상을 경험한 현자로 추측하는 중이며,
동시에 알븐하임의 성지까지 방문한 이력이 있는 학자라 생각하는 중이다.

만약 전생에서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썼다면 흔히 말하는 '고증'을 지적했겠지만 여기는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판타지 세상.

오히려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전투와 마법이 난사되는 게 지극히 정상이고, 반대로 '증기 기관차'가
고증으로 지적될 정도로 상식이 뒤바뀐 곳이다.

실제로 드워프의 나라, 마키나에서 증기 기관차를 발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워낙 복잡하다 보니


독종을 제외하면 전부 나가떨어졌다는 소식이 내 귀에 들어왔다.

아무튼 간에 나로서는 고증을 세세하게 따질 필요가 없어 좋았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영 마찬가지였다.


밑천이 드러나는 순간 내 정체가 발각되는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는 의미였으니.

하물며 스토리가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종족을 비추기 시작했다. 인간, 마족, 엘프, 드워프, 수인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할 예정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자문을 받아야 할 사람이 필요한데, 마족은 세실리가 있으니 괜찮고 엘프는 아르웬과
시리스가 있다. 드워프는 책으로도 알려진 지식이 많을 뿐더러 비중이 크지 않아 문제는 없다.

남은 건 단 하나, 현재까지도 인간과 사이가 좋지 않은 수인 뿐이다. 게다가 수인의 나라, 애니머스는


건국된지도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거의 모른다.

'레오나가 있긴 한데... 걔는 좀 껄그럽단 말이야.'

그나마 친분이 있는 수인이 레오나 뿐이지만 그녀와의 관계는 좋다고 할 수도,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냥 가끔 가다가 안면을 비추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비록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되었지만 그렇다 해서 일상이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역사학
강의만 듣고 있어서 그녀와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다.

'우선 엘프와 다크 엘프 간의 이야기부터 집중하자. 수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려면 시간이 걸릴테니까.'

나는 수인을 어떻게 묘사해야할지에 대한 고민을 떨쳐내고 집필에 전념했다. 제논 일대기 속 수인의


나라는 폐쇄 정책을 펼치고 있어 뒤늦게 나타난다.

무엇보다 지금은 수인보다 엘프가 급선무다. 알븐하임 침공만 해도 무려 2 권에 달하는 분량을 할애할
예정이다.

그러므로 수인보다는 알븐하임의 구조부터 정리하는 일이 우선이다. 다행히 아르웬으로부터 자문을


받았기에 무리는 없었다.

'일단 의회가 제일 높은 집단이고 그 밑이 전사장, 그리고...'

엘프의 군대는 인구가 많은 인간과 달리 소수정예로 활동하는 편인데, 엘프 전사 한 명 한 명이 일당백인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민간인조차 매우 강력한 힘을 소지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기본적인 무술과
마법을 전수받는 건 물론, 최초의 아카데미라 불리는 '르케론'에서도 단련을 받는다.

그리고 보통 전사하면 검과 방패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을 떠올리겠지만, 엘프는 마법사까지 포함한다.
대신 마법에 특화된 전사들은 '마도사'라고 부르는 편이다.

아무튼 간에 '전사장'이라는 직위는 위의 모든 집단을 통솔하는 사령관이다. 사령관인만큼 개인의 무력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 파멸적이며 직접 나서는 경우는 잘 없다.

이 탓에 종족 전쟁 당시에도 굳이 인간들을 상대하는데 전사장까지 나서야 되나? 라며 출전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사실 사령관이라는 직급을 고려하자면 당연한 일이지만 저 오만한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것이다.

단 한 명. 인간의 진면목을 알아 본 아이케르를 제외하고.

그는 인간 연합이 기상천외한 전략전술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자 위기를 느끼고 본인이 직접


출전했지만, 안타깝게도 알다시피 원로원에게 꼬투리를 잡혀 체포되었다.

'알븐하임에는 4 명의 전사장이 있어. 엘프 전사는 죽을 때까지 군에 몸을 담는다고 했으니 은둔 고수


같은 건 절대 없을거야.'

고집스러운 면모가 강한 엘프는 그 특유의 성격 때문에 본인이 몸을 담은 직업에 일생을 전부 바치는


편이다. 정년퇴직 같은 건 없고 설령 부상을 당해도 고문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알븐하임이 침공 당해도 꿋꿋이 버티겠지만, 악마측 간부와 전투를 벌이면서 전력이 야금야금
깎여나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엘프는 왜 마법사를 공군처럼 활용하지 않는 거지?'

지난 번 세실리가 나를 공중에 띄웠던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엘프도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수 있다.

마법사를 공군처럼 활용한다는 말이 조금 웃길 수도 있겠지만 엘프나 마족은 실제로 가능하기에 드는


의문이다. 정찰기나 폭격기처럼 활용한다면 인간들은 손도 못 쓰고 당할 것이다.

물론 편협하고 고지식한 엘프들은 정면승부를 당당하게 고집하니 이것조차 비겁한 술수라며 무시할 확률이
높겠지만. 이건 제논 일대기에 전사장 한 명을 더 추가하면서 설정을 넣는 게 좋을 듯하다.

'이걸로 생각이 바뀐다면 뭐...'

애당초 '공군'이라는 개념이 이 세상에는 없으니 허허 웃으며 넘어갈 수도 있다. 증기 기관차처럼 웃기는
소리로 치부하겠지.

나는 이후로도 스토리를 쭈욱 써내려가다가 도중에 펜을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엘프에 관한 지식은


많이 알고 있어도, 정작 그들의 전투 방식은 전혀 모르고 있다.

정면승부를 고집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들이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지, 그리고 마법을 병행하면서
싸우는지, 마지막으로 편제가 어떻게 돼 있는지 등등.

딱히 기밀이라 할 건 아니지만 가장 기초적인 부분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자 시리스를 소환하기로 마음먹었다.

'겸사겸사 다크 엘프의 자세한 생활상도 물어봐야겠다.'


알븐하임이 악마들에게 침략당하고, 결국 세계수마저 불태워지면서 엘프들은 본인들의 고향을 떠나게 된다.
그 피신지 중 하나가 다크 엘프가 몸을 숨기고 있던 숲이다.

실제로도 다크 엘프는 인적이 드문 깊은 숲에서 부족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데다가 말만 부족 생활이지,


사실상 도시나 다름없다.

다크 엘프는 마족처럼 각박한 생활을 보낸만큼 손재주가 상당히 좋다고 시리스가 언급한 적이 있다.

'그래도 묻는 편이 훨씬 좋겠지.'

나는 펜을 잠시 내려놓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러자 돌돌 말려진 롤링 페이퍼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장이 아닌 거의 수 십장에 달하는 용량이어서 매우 두꺼웠는데 모두들 눈치챘겠지만 시리스를 소환하기


위한 마법지다. 이 종이를 찢으면 시리스에게 연락이 갈테고 그녀는 내 소환에 응하거나 거절할 수 있다.

'이번에는 목욕하다가 오지는 않겠지.'

지난 번에 한 번 불렀다가 알몸 차림으로 온 적이 있다. 당황한 상태로 물어보니 목욕 중이었다고...

결국 소환에 응할 때는 적어도 옷은 입으라고 말하며 돌려보냈다. 이후에는 딱히 부를 일이 없어서 한


번도 소환하지 않았지만 과연 이번에도 그러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다크 엘프는 평범한 엘프보다 융통성이 있다지만 시리스는 딱딱한 편이다. 다행히 숙소에만 소환을 하여
걸릴 일은 없다지만 왠지 긴장된다.

스윽-

잘 말려진 두루마리에서 한 장을 빼내자 알 수 없는 문자들로 가득 채워진 마법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


마법지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시리스의 머리카락 한 가닥이 필요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넓은 곳으로 걸어갔다. 뒤이어 거침없이 종이를 찢었다.

쫘악!

종이는 정확히 두 갈래로 찢기자마자 푸른 입자로 변하여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제 시리스에게 연락이
갔을테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런 사소한 일에 부르는 건 좀 미안하긴 해도 그녀는 불만없이 따라주고 있다. 사실 말만 심부름꾼이지


반쯤 노예나 다름없다. 물론 실제로 노예처럼 대하지는 않는다.

'오늘은 조금 늦네.'

지난 번 소환까지는 내가 종이를 찢으면 시리스가 곧바로 응하여 소환되었다. 다만 오늘은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소환이 약간 늦는 편이다.

차마 거절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면 소환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고 언질을 해뒀으니 아마 그때문이지
않을까. 시리스는 아르웬의 호위도 겸하고 있으니 다방면으로 바쁠 수밖에 없다.

이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책상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부르셨습니까?"
"응?"

허스키하면서도 낮고 중후한 여인의 목소리. 이처럼 독특한 목소리의 주인은 딱 하나밖에 없다.
이에 나는 반쯤 돌렸던 등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시리스의 모습을 보고 기함했다.

저번처럼 목욕을 하다가 알몸 상태로 온 건 아니나 속옷만 입고 온지라 거기서 거기였다. 심지어 구릿빛
피부와 어울리는 검은색 속옷이라 시선이 엄한 곳으로 향했다.

11 자로 갈라진 복근은 물론이고, 풍만한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속옷이 선정적으로 다가왔다.
평상시의 옷차림도 노출이 많은 편이었는데 지금은 속옷만 달랑 입고 와서 내 남심을 자극시켰다.

나는 당황한 눈길로 시리스를 위아래로 빠르게 쳐다보다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왜, 왜 그런 옷차림이에요? 옷은 얻다 두고?"


"숙면을 취하는 도중에 왔습니다."
"... ..."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오후 1 시 30 분.

다크 엘프가 야행성인지 아니면 그냥 낮잠을 자다 온 것인지 모르겠으나 속옷 차림으로 자는 건 시리스의


잠버릇일 확률이 크다.

그동안 시리스는 내가 어지러워하는 듯하자 지난 번 알몸 사태가 떠올랐는지 특유의 허스키한 보이스로


입을 열었다.

"속옷이어도 알몸은 아니니 괜찮을 거라 판단 하에 소환에 응했습니다."


"아뇨. 제가 안 괜찮아요."

융통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리스의 행동에 머리가 아파왔다. 호위로서는 적격일지는 몰라도 일상은 영
젬병인 모양이다.

문제는 시리스 그녀는 뭐가 문제라는 걸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는 거다. 덕분에 다크 엘프의
성문화를 심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반쯤 노예인 심부름꾼이라지만 목욕을 하다가 온 것도 그렇고, 자다가 속옷 차림새로 온 것도


그렇고 정조가 있는 건지 아니면 없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다가 시리스를 힐끔 바라봤다. 구릿빛 피부와 더불어 여전사 특유의 탄탄한 몸매까지
합쳐지니 그 파괴력이 가히 무시무시했다.

"그... 다크 엘프는 정조라던가 그런 건 없어요? 아르웬에게 듣기로 엘프는 반려가 아닌 타인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정조가 더럽혀진다는데..."
"그건 엘프의 관습입니다. 저희는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가기에 성에 있어서 관대한 편이죠. 반려가
사고나 병으로 죽어도 마음이 맞는다면 또다른 반려를 들일 수 있습니다. 물론 불륜이나 강간은
규율에서조차 크게 엇나가는 행위이기에 엄격한 처벌이 내려지게 됩니다."
"무슨 처벌이요?"
"남자는 성기를 잘라내고 여자는 불에 달군 꼬챙이로 안쪽을 지져서 불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히익..."

덕분에 다크 엘프의 무시무시한 풍습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무튼 이건 둘째치고-

"...일단 깨운 건 정말 죄송해요. 시리스 씨가 원하신다면 돌아가서 자도 됩니다."


"그럼 여기서 잠깐 숙면을 취해도 되겠습니까? 방금 전까지 훈련을 하다가 온 탓에 텔레포트를 시전할
마나조차 없습니다."

시리스는 정말 피곤한 건지 딱딱한 말투와 달리 황금색 눈동자가 점점 감기고 있었다. 억지로 눈을 뜨고


있었지만 끔뻑끔뻑거리는 걸 보아 한계에 도달한 듯했다.
다크 엘프는 몇날며칠 동안 밤을 지새우는 훈련을 받는다는데 저리 피곤해할 정도면 얼마나 피곤한 걸까.
나는 그녀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허락을 내렸다.

본래 숙소는 타인의 침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반대로 몰래 들여보내면 아무도 모른다. 시리스가 여기서
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마음대로 하세요. 이불도 있으니 따뜻하게 주무시고요."


"감사합니다. 그럼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시리스는 소환되자마자 내가 자는 침대에 비척비척 들어가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피로해 보이던
얼굴처럼 푹신한 침대에 눕자마자 잠을 청하...

"침대에서 좋은 향기가 납니다."


"...그냥 잠이나 자세요."

아무래도 자문은 시리스가 자고 나서 구해야할 듯했다.

< 124 화 >

낮잠을 잔다고 했지만 시리스는 약 1 시간 동안 미동도 없이 숙면을 청했다. 혹시 죽은 게 아닐까 싶어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대도 그녀는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다행히 일정하게 내쉬는 호흡을 확인한 후에는 안심할 수 있었지만, 엘프의 신체 능력을 고려하자면
그녀가 얼마나 피로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이틀 이상 잠을 못 자면 몸에 이상이 오는 인간과 달리 엘프는 일주일도 거뜬한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 가지 않아도 신디가 있다.

일반인에 가까운 신디도 며칠동안 밤을 지새워도 흐물거리기만 하지, 일상 생활에는 무리가 없다. 다크
서클은 어쩔 수 없으나 수면의 중요성을 상기하면 이것도 가뿐한 편이다.

'그런데 시리스가 기척조차 못 느끼고 있다라...'

호위 기사는 자그만한 기척조차 감지해야 될만큼 예민한 감각을 갖고있어야 된다. 하물며 그게 엘프,
그것도 어둠과 익숙한 다크 엘프라면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헌데 시리스는 내가 접근하여 호흡을 확인했는데도 불구하고 꿀잠을 청하고 있다. 약간 과장을 보태어
내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였다.

아르웬을 호위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걸 보면 휴가이거나 비번인 듯한데 괜히 불렀나 싶어 미안해진다.

'일단 시간은 많으니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자.'

마리, 그리고 세실리와의 데이트도 시험 기간의 특징상 나중으로 미룬 참이라 시간적 여유는 많다.
시험은 이번 주 금요일에 모두 끝나니 그때 지인들과 만나지 않을까.

그리고 마리와는 불타는 금요일을 보내겠지. 나는 본격적으로 성에 눈을 뜬 마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최근에는 약간 줄어든 것 같았지만 장작을 계속 추가하는 건지 그녀의 성욕은 떨어지지 않고 꾸준한


편이다. 더구나 스트레스를 전부 그런 쪽으로 해소시켜서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항상 나를 여관으로
데려갔다.

아마 지금도 시험 때문에 차곡차곡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벼르고 있지 않을까. 나는 내 정욕을


빨아먹어 한층 더 성숙해진 듯한 마리의 미모를 떠올렸다가 서둘러 떨쳐내고 시리스를 바라봤다.

시리스는 이불을 목까지 덮은 채 새근새근 자는 중이다. 어차피 누가 올 리도 없거니와 억지로 깨우는


것도 미안하니 글이나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에 책상 의자에 앉아 마법필을 잡았다. 마리의 아버지, 드미트리에게 받았던 리무버는 원고지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사각- 사각- 스윽-

내가 머무는 숙소에는 마법필로 문자를 적는 소리와 리무버로 글을 지우는 소리가 가득 채워졌다. 나는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하여 제논 일대기를 작성했다.

환경도 환경이지만, 리무버의 존재 덕분에 글쓰기의 효율이 배로 늘어났다. 가끔 가다가 뒤늦게 오탈자를
발견하여 대대적인 수정을 거쳐야 됐는데 이제는 그럴 일도 없다.

다만 글이 마음에 안 들어서 싹 다 뜯어고치는 습관은 여전하다. 지금도 쓰레기통에는 갈기갈기 찢겨진


원고지가 담겨있으며 조금 있다가 전부 불태울 생각이다.

'일단 제논 일행을 가로막는 악마를... 사탄(분노)으로 할지 아니면 릴리스(색욕)로 할지 고민되네.'

알븐하임이 침공당함과 동시에 제논 일행이 서둘러 복귀하는 걸 가로막는 악마측 간부가 있다.

제논은 카이르의 죽음과 메리의 고백 이후로 각성했기에 전보다 훨씬 강해진 상태였으며 악마들도
경시하지 못하는 실력자로 성장한다.

게다가 일행에는 엘프 마법사 메리, 1 세대 마족 진, 그리고 차기 성녀로 지목되는 릴리까지 있어서 파티


자체의 전력만 따진다면 매우 강한 편이다.

'수인은 전투 방식을 모르니까 애매하니 패스. 결국 남는 건 릴리스밖에 없네.'

칠죄종의 전력은 대악마, 디아볼스에게 힘을 부여받은만큼 개개인의 무력이 막강하다. 전략적으로 활용


가치가 높은 '나태'를 제외한 나머지 죄악들은 개개인이 군대와 맞붙을 정도다.

그리고 색욕을 관장하는 악마, 릴리스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 매료시킬 정도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으며 태생이 마족인만큼 마법도 병행한다.

허나 첫 조우 당시에는 시간을 버는 게 목적이었기에 대충 상대하고 떠난다. 하지만 그 잠깐의 전투마저


제논 일행을 농락하여 칠죄종의 강함을 뼛속까지 각인시킨다.

'릴리스의 전투 방식은 역시...'

세실리를 참고해야겠지. 그녀는 다음 대 차기 마왕이 되는만큼 일신의 무력이 매우 강력한 것으로 알고


있다.

농담삼아 한 말이겠지만 본인이 손가락으로 산 중턱을 슥- 훑으면 그대로 갈라진다고. 검술까지 배워


근접전에서도 절대 밀리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근데 직접 본 적이 없네. 나중에 한 번 부탁해야겠다.'

시험이 끝난 주말에 부탁해볼 생각이다. 그때 만나서 이야기도 나눌 겸 겸사겸사 물어보면 되겠지.

나는 전개를 정리한 노트를 잠깐 덮고는 원고지에 마법필을 갖다 대었다. 11 권이 출시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반정도 되는 분량을 적었다.
시간적 여유도 많아지고, 리무버의 존재와 지인의 자문이 있으니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다. 어쩌면 이번 달에만 2 권을 연속으로 출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
"...응?"

집필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을까. 나는 굳어진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펴다가 문득 뒷쪽에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언제 깨어났는지도 모를 시리스가 이불을 반쯤 덮은 채 이쪽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중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시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방금 막 일어나서 그럴까, 날카로웠던 눈매가 약간 순해졌으며 살짝 드러난 어깨와 가슴으로 하여금


매혹적인 분위기를 내뿜었다. 이불을 완전히 덮거나 벗은 것도 아닌, 반쯤 걸친 식이라 은밀함이
느껴진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정확히 5 분 전에 일어났습니다."

대답을 듣고 시계를 확인한다. 현재 시간은 약 5 시. 시리스가 소환된 시간이 1 시 쯤이었으니 약 4


시간동안 숙면을 취했다는 의미다.

나는 머리를 매만지다가 시리스를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몽롱한 건지 귀엽게 하품을 하는 중이었다.
아르웬의 호위 기사로 있을 때는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 같았는데 지금은 상당히 풀어진 모습이다.

뭐, 대부분의 호위 기사가 그렇긴 하다. 언제 어디서든 주인을 지켜야 하기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고,
휴식 때만큼은 풀어놓아야 다음이 편해진다.

그러니 시리스가 저렇게 풀어진 모습을 보여주는 건 별로 이상한 게 아니다. 특히 그녀는 엘프 여왕,
아르웬을 비밀리에 호위하고 있으니 업무 난이도가 극악일 것이다.

"피곤하시면 더 자도 돼요."
"아닙니다. 잠은 모두 깼습니다."

초롱초롱한 황금색 눈동자와 점점 예기가 실리는 눈매를 보아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이에 자문을 구해도
되겠다 싶어 말을 하기 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시리스는 내가 가까이 접근해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하긴 내가 이상한 짓을 하게


되는 순간 손목부터 붙잡히겠지.

이윽고 그녀의 앞에 도착한 나는 흘러내린 이불 자락을 끌어올려 약간이나마 노출된 구릿빛 살결을
감추었다. 덕분에 얼굴 빼고 그 밑은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은...

펄럭-

시리스는 내가 목까지 이불을 끌어올리자마자 팔을 휘둘러 무위로 만들었다. 심지어 아까보다 이불이 더
내려가서 속옷이 다 보였다.

이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도 잠시, 당황한 나는 당황과 황당이 뒤섞인 목소리로 시리스에게 물었다.

"아니. 왜 벗어요?"
"덥습니다."
"이것도 못 참아요?"
"네."
"... ..."

딱딱한 말투로 대답하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녀는 심부름꾼이지 완전한 노예가 아니었기에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나는 이불을 완전히 벗어던져 속옷 차림으로 있게 된 시리스와 마주하게 되었다. 본인은 다크 엘프라


정조에 관대하지만 남자인 나에게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

자문을 구하는 것조차 이렇게 힘든 일인 걸까. 그래도 겨우 이불만 덮었는데 답답하다고 내팽개치는 건
약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크 엘프는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인가요, 아니면 시리스 씨가 유별난 건가요? 평소 복장도 노출이
심하던데."
"의상은 다크 엘프 특유의 전투 방식과 깊게 연관이 있습니다. 저희 다크 엘프는 일반 엘프보다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마나에 민감하고, 더 나아가 주변과 동화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로
노출되는 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동화율이 상승하죠. 간혹 은신한 다크 엘프가 있던 자리에 일렁임이
발생하는 건 모두 의상 때문입니다."
"그럼 덥다는 거는요?"
"다크 엘프는 언제 어디서든 어둠에 몸을 숨길 수 있도록 평상시에 마나를 순환시키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체온이 높은 겁니다."
"그럼 마나 소모가 심하지 않아요? 아무리 다크 엘프여도 연소가 장난 아닐텐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크 엘프는 피부로도 공기 중의 마나를 흡수할 수 있는, 일종의 전승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죠."
"오..."

그래. 이런 게 바로 자문이지.

나는 얼떨결에 중요한 정보를 듣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노트에 필기했다. 비록 첫 시작은 이상했으나


아주 좋은 정보들이 속속 나오니 흥미로웠다.

덕분에 시리스의 야시시한 몸매에 눈길이 가지 않고 오로지 조언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시리스 본인도
딱히 신경 쓰고 있지 않아 큰 무리는 없었다.

"다크 엘프가 머무는 마을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나요? 그러니까 알븐하임에는 여왕과 원로원,
그리고 전사장이 있듯이 다크 엘프는 어떤 구조인지 궁금해요."
"우선 다크 엘프마다 각각의 부족이 있습니다. 총 3 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라트나, 쿠미르,
드론으로 칭해지고 있죠. 각각의 장로들이 마을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시리스 씨는 어디 부족 출신이에요?"
"저는 라트나입니다. 주로 전사들을 배출하는 곳으로, 쿠미르는 마법사, 드론은 기술자를 배출하는 걸로
유명합니다."
"단순한 마을 정도가 아니라 도시 수준인 것 같은데?"
"맞습니다. 숲에서만 지내고 있을 뿐, 생활 수준을 본다면 여느 도시나 다름없습니다. 단지 인적이 드문
숲에서 생활하고 있을 뿐이죠."

신기하다. 다크 엘프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신비로움을 풍겼다.

나는 시리스가 알려준대로 노트에 열심히 적으면서 앞으로의 스토리를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적어도
고증만큼은 철저히 지키고 싶었기에 오늘 제대로 뽕을 뽑을 작정이다.

"시리스의 계급은 뭐예요? 엘프에게 전사장이 있고 인간에게 기사단장이 있는 것처럼, 다크 엘프의 계급


체계는 잘 몰라서요."
"일단 저희는 장로를 제외하면 딱히 계급이란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막중한 사건이 터지면 명성이 높은
전사를 불러 직급을 부여하는 식이죠."
"직급이라 함은?"
"정찰대장, 아니면 돌격대장 이런 식입니다. 아무래도 저희는 정면 승부와 어울리지 않은 전투 방식을
고수하고 있기에 표면적으로는 군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분명 같은 뿌리에서 나왔을텐데 방식이 이렇게나 다를 줄이야. 정면승부를 고집하는 엘프와 달리 다크


엘프는 암살이나 잠입처럼 뒷공작에 특화되어 있다.

아마 이런 이념 차이로 인해 머나먼 과거에 서로 싸웠던 거겠지. 다크 엘프는 다른 엘프와 달리 유달리


튀는 성격을 갖고 있어서 배척받기에도 알맞았다.

"다크 엘프 내에서 알븐하임의 엘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 참고로 시리스의 의견이 아니라
다크 엘프 전체의 의견이요. 아르웬이 융화 정책을 펼쳤다지만 그간의 앙금이 해소되진 않았을텐데."
"음... 종족전쟁을 겪었던 세대는 호의적으로 보고 있지만 그 이후의 세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세대는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도움조차 거절한 알븐하임에 왜 들어가야 되냐고 항의 중이고, 반대로 구세대는
종족 전쟁을 통해 쓴맛을 겪었으니 이제 유해졌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와..."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까지 정확히 반대일 줄이야.

그러다 문득 든 생각 한 가지. 신세대로 추정되는 시리스는 과연 몇 살일까?

겉보기에는 20 대 초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엘프를 호의적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있는데도 형벌이라며 불평불만 가지지 않았다.

그에 나는 노트에 펜을 눌리는 걸 잠시 멈췄다가 시리스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속옷 차림으로 황금색


눈동자를 깜빡이는 중이다.

"저... 실례하지만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그게 무엇입니까?"
"시리스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음... 이거 보이십니까?"

시리스는 내 질문을 듣고 반 정도 잘린 귀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금색


귀걸이가 걸려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왼쪽 귀는 아무것도 없는 반면 오른쪽 귀에만 2 개 정도 걸려있다. 이에 의문이 들자마자 시리스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100 년을 넘길 때마다 귀걸이를 하나씩 차는 관습이 있습니다. 제 나이가 정확히 241 살이니 2
개가 걸려있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역시 인간이 느끼기에는 까마득한 나이네요."
"100 년조차 힘든 인간이 보기에는 그렇겠죠."

시리스는 특유의 무표정을 유지한 채 대답했다. 세실리도 그렇고, 아르웬도 그렇고 100 년 이상 살았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는 이후로도 여러 질문을 하면서 내가 필요한 정보를 하나 하나 터득했다. 시리스도 군말없이 내가 하는


질문마다 충실히 답해줬다.

그리하여 약 1 시간 정도의 질문 타임이 끝난 후, 나는 이제는 되었다 싶어 노트를 덮었다. 슬슬 밥도


먹어야 할 시간이라 나중에 또 부르면 되겠지.

"고마워요.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네요."


"아닙니다. 그런데 혹시 저희에 대한 이야기도 책에 쓰실 겁니까?"

시리스가 호기심을 담은 눈빛으로 노트를 바라본다. 나는 노트를 책상 위에 던지면서 입을 열었다.

"네. 안 좋은 이야기는 안 넣을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럼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세요."
"혹시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삼은 건지 궁금합니다."

나는 시리스의 질문을 듣고 책상 위에 올려진 원고지에 고개를 돌렸다. 현실을 바탕으로 둔 이야기지만


대부분의 인물이 내 상상 속에서 나왔다.

다만 앞으로 등장할 인물 몇몇은 실제 인물을 참고할 예정이다. 릴리스는 세실리를, 엘프 측 영웅은


비운의 전사장 아이케르로.

아무튼 모티브로 삼은 건 맞기에 긍정적인 대답을 꺼냈다.

"아마 몇몇 사람은 그럴 것 같네요. 지금 제가 시리스에게 질문을 한 것처럼, 전 이종족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자문을 구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건 왜요? 시리스도 넣어줄까요?"

전생에서 내가 웹소설 작가로 활동하던 당시, 가끔씩 친구들이 장난으로 하던 말이 있다.

소설 속에 나도 넣어달라. 물론 농담으로 한 말이었으나 나는 알게 모르게 등장시켰다. 어차피 그 놈들은


내 소설을 보지도 않았으니.

솔직히 현실의 친구만큼 개성적인 인물도 없다. 친구의 성격을 약간만 수정해서 책에 등장시키면
놀라울만큼의 개성을 가진 등장인물이 나타난다.

그래서 장난식으로 시리스에게 물은 거고, 당연히 농담으로 치부할 줄 알았다.

"정말입니까?"
"네?"

헌데 시리스는 드물게 눈을 빛내더니.

"그래주신다면 영광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짧게 잘린 귀까지 토끼처럼 쫑긋- 세우면서 기대감을 표현했다.

훗날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다크 엘프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더라.

"... ..."

나는 기대감을 드러내는 그녀에 쓴웃음을 지었다.

< 125 화 >

시리스에게 받은 자문은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다크 엘프의 전반적인 생활상을 모두 알게 되었을


뿐더러 그들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지 등등.

다크 엘프는 일반 엘프처럼 전통과 역사를 중시하는 반면, 큰일이 터지지 않는 이상 꽉 막혀있는


알븐하임의 엘프와 달리 생각이 깨어있는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다만 세대 간의 갈등은 엘프와 다를 바가 없었는데, 알븐하임과 융화되었을시 본인들의 전통과 문화가


사라질까봐 걱정하는 모양이다.

이건 독특하게도 구세대가 아닌 신세대의 다크 엘프에게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분위기였다.

하물며 알븐하임은 머나먼 과거, 다크 엘프를 내친 적이 있어서 갈등의 골은 여전히 좁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는 아르웬이 규합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레인의 하드 트롤링으로 인해 이것마저


무산되었다.

이로 인해 현재 엘프와 다크 엘프는 가깝고도 먼 사이라 할 수 있다. 같은 뿌리에서 나왔으나 불화로 인해


떨어질 수밖에 없던 관계.

'게다가 지금도 서로 간의 사이는 좋다 할 수 없고...'

엘프의 기다란 귀는 신의 목소리를 보다 더 신중히 듣기 위해 길어진 거라는 문헌이 있다. 엘프도 그


문헌에 따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귀만큼은 소중히 관리하고 있으며 손상을 입을 시 어떻게든 복구하기 위해
애를 쓴다.

반면 다크 엘프는 오만함에 사로잡혀 자신들을 학살하고, 더 나아가 추방까지 시킨 알븐하임을 경멸한다는


의미로 귀를 반으로 자르는 관습을 가졌다. 이뿐만이 아니라 귀걸이까지 착용하여 나이를 체크한다.

만약 알븐하임의 엘프가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전수받았다면 모를까, 너무나 추악한 진실을 알리기 싫었던
원로원은 과거를 꽁꽁 숨겼고 더 나아가 다크 엘프를 '이단자'로 취급하는 중이다.

원로원 뿐만 아니라 알븐하임의 엘프들도 본인들의 귀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옛날부터 교육을 받기에
다크 엘프를 본다면 혐오어린 시선으로 본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구세대, 신세대 가리지 않고 다크 엘프를 향한 시선은 매우 좋지 않다.

내가 어째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냐면, 아르웬을 통해 듣게 된 진실이다. 성지에서조차 꽁꽁 숨겨놓았던


역사서적을 우연히 발견하여 그 덕분에 추악한 역사적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다른 엘프와 달리 아르웬이 유독 깨어있는 사고를 가진 이유가 바로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정말 좋은 소재감이지.'

제논 일대기에는 엘프를 이끄는 영웅과 다크 엘프를 이끄는 영웅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한다.

다행히 역사적 진실을 알게 된 엘프측 영웅이 다크 엘프를 무난히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침공당한
알븐하임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된다.

과연 이걸로 엘프와 다크 엘프 간의 사이가 풀어질지는 의문이지만 아마 적지 않은 영향이 가지 않을까.


당장 마족조차 인식이 180 도 바뀌었는데 엘프라고 다를 건 없을 것 같다.

아무튼 시리스에게 매우 우수한 자문을 받고 난 후에 그대로 돌려보냈다. 돌려보내기 직전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제논 일대기에 출연시킬거냐고 묻는 바람에 난감해진 건 덤.

사실 시리스 같은 캐릭터가 등장해도 스토리에는 차질이 없어서 몇 번 모습을 비출 예정이다. 영웅은


아니지만 그 영웅의 후계자라던가 그런 식으로.

이리하여 나는 제논 일대기를 작성하며 다음 권을 준비했고, 시간이 흘러 시험이 끝나는 금요일이


다가왔다.

"아~ 정말로 짜증나. 교수는 문제를 왜 이리 어렵게 내는거야."


"시험이니까 그렇겠지. 그래서 잘 친 거 같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도 출석은 꼬박꼬박 했으니 평균은 받겠지."

시험이 생각보다 어려웠는지 내 옆자리에 앉은 마리가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스테이크를 잘게 썰어 입에


넣는 것이 배고픈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살풋 웃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리는 똑똑하니까 점수를 잘 받을 수 있을거야. 내가 확신할 수 있어."


"아이작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마리가 아닌 맞은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옮겼다.

언제나 그랬듯이, 한 송이의 검은 장미처럼 아름다우면서도 고혹적인 미모를 띄는 세실리가 앉아있었다.


그녀만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세실리의 옆에는 의외의 인물도 함께 있었다.

"그러게.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약간 기만하는 것처럼 들려."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 리나였다. 전시회 개최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몇 개월이 지난 현재, 그녀의 미모는
한층 더 물이 오른 상황이었다.

강아지처럼 귀여운 이목구비도 여전했으며 다른 사람에 비해서 유독 큰 눈은 사파이어처럼 반짝거렸다.


여기에 더해서 교복으로도 감출 수 없는 가슴까지.

비록 껄끄러운 관계로 시작했으나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후에는 살갑게 대하고 있다. 특히 마리와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손꼽혔다.

전이었다면 리나도 눈치가 보여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 했겠지만, 마리와의 사이가 가까워진 지금은
평범한 친구처럼 대하는 중이다. 내가 직접 총대를 메고 둘의 관계를 회복시켜준 보람이 있다.

"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리 똑똑한 사람은 아니야. 그냥 관점이 다른 거라고


생각해줘."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아이작은 우리처럼 고등 교육을 받은 귀족도 아니잖아?"

리나가 방긋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건 비꼬는 게 아니라 실제로 나를 제외하면 하나 같이 높은 계급을


지닌 여자들이다.

그러니 가문에서 받은 교육의 질조차 다를 수밖에 없으며 리나가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환생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리나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가 능청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황녀님께서 좋게 봐주신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하지 마. 이제는 어색해 죽을 것 같아."

내가 장난식으로 말하자 리나는 인상을 지으며 치가 떨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든 권력과 권위를
내려놓고 친근하게 대한지 몇 개월이 지나서 그런지 격식을 차리면 진저리를 치는 편이다.

리나도 나에게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크게 반성하는 중이었고, 나 또한 황녀 치고는 개념이 착실하게 박힌


리나가 마음에 들어 가끔씩 이런 장난을 치고 있다.
멀리 가지 않아도 테르스 왕족들이 아델리아에게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생각하자. 리나는 적어도 그들처럼
매몰차게 대하지는 않는다.

'사생아가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미네르바도 대외적으로 알려진 황족은 레오르트와 리나밖에 없다. 그러나 테르스 왕국을 보듯이,
아델리아처럼 숨겨진 자식이 아예 없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게다가 중세 시대 답게 남편의 외도는 허용되고 아내의 외도는 법률적으로 엄격히 금지하다 보니 따로


애인을 두는 남자가 많다. 특히 높은 계급을 가졌을 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들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배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스테이크를 먹는 마리와 맞은편에 앉은 세실리를 번갈아봤다. 두 사람 모두


나의 애인이자 인생의 동반자다.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져서 망정이지,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서로 머리채를 잡고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작. 12 권은 언제쯤 나와?"

그러다 불현듯 스테이크를 썰고 있던 마리가 나에게 불쑥 질문했다. 그와 동시에 리나와 세실리의 시선도
내 쪽으로 향했다.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 것이, 방을 따로 잡아놓았기에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

아무튼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머릿속으로 골똘히 생각했다. 11 권이 발매된지 불과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12 권도 거의 다 완료되기 직전이다.

아무래도 이미 구성과 전개를 탄탄하게 마련해놓은 데다가 시리스에게 자문까지 받았으니 집필에 막힘이
없었다. 게다가 신경써야 할 일도 거의 없어서 오로지 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12 권은 쉬어가는 회차고, 본격적인 스토리는 13 권부터 시작된다.

"아마 곧 있으면 나올 거야. 약간 쉬어가는 회차라서."


"정말? 엄청 빨리 나온다. 11 권이 언제 나왔더라?"
"정확히 보름 전에 나왔어. 그나저나 신기하다. 글을 그렇게 빨리 쓸 수 있는거야? 머릿속에 있는 상상을
글로 쓰는 게 쉽지 않을텐데."

12 권이 빨리 나온다는 소식에 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듣고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했다.

사실 내 기준으로는 그리 어렵진 않다. 전생에서는 다양한 책을 읽어 눈을 높였으며 필력은 필사를 통해


길렀다.

그러니 적당히 좋은 소재만 있으면 글을 쓰는데 무리가 없다. 굳이 문제를 꼽자면 첫 문단을 쓰는 거겠지.

첫 문단에 따라 그 이후의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경우가 많으니 나로서는 고심에 고심을 거칠 수밖에
없다.

"글쎄? 대답하기가 애매하네. 맞춤법이나 단어만 잘 선정하면 글 쓰는 건 힘들지 않아."


"...왠지 재수없게 들리는 말이네."
"그러게."
"천재가 다 그런거지 뭐."

나를 향해 재수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세 사람. 나는 살짝 어이가 없어졌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환생자라서 가능한 일이라는 걸 밝힐 수도 없으니 그냥 재수없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 듯했다. 언젠가
이 사실을 말하는 날이 올지가 의문이겠지만.

이후로 남아있는 스테이크를 잘게 썰어 입에 넣으려던 찰나, 깜빡하고 있던 게 떠올랐다. 이에 입 안에


있던 스테이크를 꿀꺽 삼키며 맞은편의 세실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 맞다. 세실리 누나."


"응?"

내가 부르자 붉은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세실리. 포크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이번에 누나 도움이 필요한 게 있는데 도와줄 수 있어?"


"무슨 도움?"
"누나도 알고 있겠지만 릴리스가 누나를 모델로 삼은 캐릭터거든. 외모 뿐만 아니라 전투 방식이나 그런
것도 참고하고 싶어서 그래."
"전투 방식? 아니, 잠깐만. 그럼 지난 번에 말한 게 진짜였어? 나를 보면서 릴리스를 창조했다는 게?"

아무래도 칠죄종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당시를 말하는 것 같다. 그때는 어디까지나 떠보기 식으로 물은
거라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듯하다.

나는 기대감에 한껏 부푼 세실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스는 어디까지나


세실리를 모티브로 삼은 거라 부정할 생각도 없다.

"응."
"와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세실리의 표정이 태양처럼 밝아졌다. 붉은빛을 띄는 눈동자도 한없이
초롱초롱해지며 감동받았다는 표정이다.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다른 격한 반응이라 의문을 가졌지만, 그 옆을 힐끔거리니 부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리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사이 세실리는 약간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럼 나야 영광이지! 제논 일대기의 등장인물의 원조가 나라니... 우리 마족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소원일 거야."
"악역인데 괜찮아?"
"네가 만든 악역이라면 그것조차 매력적이지 않을까? 내가 무조건 도와줄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 거야?"

자기가 책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기뻤던 것일까. 세실리는 드물게 열정을 보이면서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그에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던 나였지만, 본래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누나의 전투 방식을 참고하고 싶어. 릴리스는 악마가 된 마족이거든. 그러니 마법도
사용해서 누나를 참고하면 안성맞춤일 거야."
"전투 방식이라... 혹시 릴리스가 검술도 사용하니?"
"응. 근데 현란하진 않고 마법이나 기술을 사용하기 위한 매개체밖에 안 될 거야."
"내가 배운 검술도 그래. 인간은 부족한 힘을 채우기 위해 기술을 연마하지만, 우리 마족은 힘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기술을 연마하거든. 음..."

잠깐 고민하던 세실리는 손가락으로 볼을 툭 툭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에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 방학 때 헬리움을 찾아오면 되겠다. 그때 내가 어떻게 싸우는지


보여줄게."
"고마워. 근데 대련이라도 할 거야?"
"응. 아마 발락 경을 부르면 될 거야."

역시 만만한 게 가르츠다. 다만 가르츠도 나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그만큼 적당한 인원도 없을 것이리라.

"부럽다. 정작 여자친구는 등장도 안 시켜주고. 이게 맞는 거야?"

세실리가 제논 일대기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영 불만이었던 것일까. 마리가 볼멘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

뚱해진 얼굴과 더불어 복어처럼 한 쪽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모습이 정말 깜찍했다. 이에 나는 우리


여자친구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천천히 얼굴을 내밀었다.

뒤이어 그녀의 귓가에다 작게 속삭였다.

'질투할 필요는 없어. 너도 알잖아? 우리의 이야기에 대해 적을 거라고. 그게 낮이든 아니면...


밤이든.'
'... ...'
'기대해도 돼.'

그러자 순식간에 붉어지는 마리의 얼굴. 나는 미소를 띄며 천천히 얼굴을 뒤로 물렸다.

옛날이었다면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겠지만...

더듬- 더듬-

그녀는 사냥감을 찾는 맹수처럼, 내 허벅지를 더듬거리더니 점점 중앙 쪽으로 움직였다.

다행히 앞에 사람이 있던지라 응큼한 짓은 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흥분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윽고 마리의 부드러운 손이 그 위에 안착하는 순간, 나는 그녀의 손목을 조심히 붙잡았다. 아직은
참아달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아이작."
"응."
"식사가 다 끝나면... 알지?"

마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이에 나는 표정을 최대한 관리하며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 잠깐 숙소 좀 갔다 와도 될까? 좀 급한 일이 있어서."


"응? 갑자기? 무슨 일이야?"

확실히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을 드러냈다. 반면 이미 나와 마리의


관계를 알고 있는 세실리는 얼핏 눈치챈 표정이다.

나는 어리둥절해 하는 리나를 바라보다가 빙긋 웃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잠깐 필요한 약이 있어서. 금방 갔다 올 거야."


"약?"

리나는 감을 잡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아까보다 더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어디 아픈데 있어? 만약 아픈 거면..."


"아픈 건 아니고, 그냥 예방약이라고 보면 돼."
"...예방약?"
"응."

아무래도 리나는 이런 부분에 눈치가 없는 듯했다.

< 126 화 >

아이작이 약을 가져오기 위하여 잠깐 숙소로 떠났을 때였다. 리나는 아이작이 떠나자마자 맞은편에
앉아있는 마리를 불렀다.

"마리."
"응?"

이에 마리는 스테이크를 천천히 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 아이작이 했던 말 때문에 백설기 같은


피부가 은은하게 붉어진 상태였다.

머리카락도 새하얀 백발이라 홍조가 더욱 눈에 띄었으나 리나에게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아이작이 말했던 '약'의 정체다.

"아이작이 먹는 약이 뭔지 알아?"
"그건 왜?"
"너라면 알 것 같아서. 이때까지 아이작이 약을 먹는 건 본 적이 없거든."

리나는 마리나 세실리에 비해서 아이작과 함께 있던 적이 적은 편이다. 전시회 정리로 인해 바쁜데다가


아카데미의 학업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하여 공부에만 정진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험 기간이 끝난 덕분에 여유가 생겼지만 아이작이 약을 먹는다는 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래서 그에게 지원도 해줄 겸 과거의 잘못을 조금이나 씻어내기 위해 도와줄 계획이었다.

"설마 지병 같은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냐. 그냥... 응. 정말로 예방약이야."
"예방약?"

도대체 뭘 예방한다는 걸까. 그리고 마리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붉어지는 걸까.

리나는 마리와 함께 황궁에서 성교육을 받은 적이 있지만 말 그대로 받기만 했다. 남녀 사이에 오가는
은밀한 분위기나 은어 같은 건 하나도 모르고 있다.

이게 바로 리나가 어리둥절하는 이유이며, 마리가 선뜻 알려주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대놓고 섹스하기


위해 피임약을 가지러 간 거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나.

"비싼 거야? 비싼 거면 내가..."


"아냐. 그렇게 비싼 건 아냐. 시중에서도 구할 수 있는 거라 도와줄 필요는 없어."
"영양제 같은 거니?"
"음..."

마리가 어떻게 하면 리나가 알아들을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세실리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앞으로 마리는 아이작한테 몽둥이로 혼나겠네?"


"몽둥이?"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리나는 별 해괴한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세실리를 바라봤다.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이다.
그러나 세실리는 특유의 요염한 표정을 지으며 마리에게 시선을 고정시킬 뿐이었다. 그녀의 장난기가
발동된 순간이다.

"몽둥이로 혼난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설마 아이작이 마리를 때리기라도 해?"


"때, 때리는 건 절대 아냐. 그냥... 놀이야, 놀이. 나랑 아이작끼리 하는 놀이."
"놀이인데 약이 필요하고 너는 아이작의 몽둥이로 혼난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하나도 이해가 안
가는..."

리나는 말을 하다 말고 멈칫거렸다. 붉은 노을처럼 새빨갛게 익은 마리의 얼굴을 보고 무언가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지만 마리는 상대방이 진심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반면, 리나의
경우는 관찰력이 뛰어나다. 관찰력이 뛰어나다는 건 그에 따라 추리하는 능력도 준수하는 의미.

마리가 부끄러워하는 것과 아이작의 방망이로 혼난다는 세실리의 장난기 어린 말. '예방'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약.

마지막으로 둘이서,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끼리 하는 놀이.

위의 모든 것이 합쳐지니 리나의 머릿속에 단 하나의 문화가 두둥실 떠올랐다.

"... ..."

그 행위가 연상되자 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재미있는 점은 굳어있는 채로 얼굴만 서서히
붉어졌다는 점.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서둘러 정신을 차렸지만, 아무래도 남녀의 사생활과 깊게 연관돼 있다보니 리나조차
어버버거릴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황녀라 해도, 그녀도 결국 남자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처녀다. 과거에는 정략혼을 위해 몇몇


남자와 만남을 가졌지만 그것 뿐이었던 여자.

모든 상황이 정리되자 리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마리에게 질문했다. 마리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턱을 괴는 중이었다.

"...마리?"
"...왜."
"너 설마... 아이작이랑..."
"했어. 네가 생각하는 그거."
"언제부터?"

꿀이 뚝뚝 떨어질 듯한 데이트를 하는 건 수도 없이 목격했다. 하지만 설마 갈 데까지 간 건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이에 마리는 목이 타는지 턱을 괸 채로 차를 한 입 마셨다가 리나가 아닌 세실리를 힐끔거렸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실리는 현재 상황을 흥미롭게 관망하는 중이다. 특유의 장난기 어린 표정은 덤이고.

마리는 저 요망한 얼굴에 스크래치를 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시회가 끝나고."
"그럼 그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맨날 했어. 시험 기간 때는 바빠서 못 했고. 이제 하러 갈 거야."
"어머..."

이제는 입까지 틀어막으며 어쩔 줄 몰라하는 리나였다. '가면'이 홀라당 벗겨진 채 당황하는 리나의
반응은 새롭기 그지 없었다.

마리도 의외라는 눈빛을 지었으나 지금은 이 분위기부터 풀어나가는 것이 우선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이작이 오고 나서도 이 분위기일 것 같았으니. 대신 세실리를 질책하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세실리. 굳이 그 말을 했어야 됐어? 그리고 몽둥이가 뭐야, 몽둥이가."


"몽둥이 맞잖아? 이만한 게 몽둥이겠지, 아니면 뭐겠어?"

세실리는 두 손을 일정한 간격으로 벌리며 반문했다.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이었으며 그녀다운 방식이었다.

그리고 리나는 세실리가 표현한 몽둥이의 길이를 보며 놀람을 넘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황궁에서 배운
것보다 한참을 웃돈 길이였으니.

하지만 마리는 거기서 한 술 더 떴다.

"이제 그것보다 더 커."


"뭐? 그게 정말이야?"
"응. 키가 크면서 같이 커졌나 봐."

성장하면서 길이가 더 길어졌다는 증언(?)에 이번에는 세실리가 놀랄 차례였다. 그녀는 아이작의 여인이
되고 난 이후, 틈틈이 마리에게 '조언'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해 아이작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어떤 행위를 좋아하는지 모두 습득했으나 정작 본방은


들어가지 못 하는 중이다.

그 이유는 마리가 아직까지 아이작을 독점하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악주기'가 슬슬 다가오는 중이다.

악주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전에 설명했다시피 명상을 통해 욕망을 절제하거나 모두 해소시켜야 된다.

최근에는 약이 발명된 덕분에 악주기로 고생하는 마족이 줄어들었지만, 세실리는 악주기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악주기가 된다면 고통보다 쾌락이 먼저 앞설테니까. 마리는 아이작 덕분에 첫날밤부터 즐거웠다지만 본래
사람마다 궁합이 다른 법이다.

"저... 세실리?"
"응?"
"설마 세실리 너도..."

리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세실리에게 물었다. 그녀는 현재 빨갛게 익어버린 얼굴을 조금이라도
식히려는 건지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강아지처럼 귀여운 외모가 합쳐지니 야한 이야기에 창피해 하는 처녀의 매력을 풀풀 풍겼으며 황녀로서
근엄함과 카리스마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평소와 달리 숙맥 같은 반응을 보이는 리나가 새로웠을까. 세실리는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빙긋


웃더니 요망한 말투로 대답했다.

"글쎄~ 했을까? 안 했을까? 우리 리나는 어떻게 생각해?"


"너, 너도 할 거야? 아, 아이작이랑?"
"응. 곧 있으면 할 것 같은데?"
"마, 마리가 있잖아. 그런데 그런 말을 막 해도 돼?"

리나는 마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그녀답지 않게 말을 버벅거렸다.

반대로 세실리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깜빡한 게 있다는 듯, 아 하더니 리나에게 깜짝 놀랄


사실을 하나 전달했다.

"내가 깜빡하고 말을 안 했구나. 나도 아이작이랑 사귀고 있어."


"뭐, 뭐? 그, 그럼..."
"네가 생각하는 거 맞아. 일부다처제. 보다시피 나는 마족이고, 아이작은 제논이지. 이것만으로도
설명이 될 거라고 생각해."
"... ..."

납득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세실리는 헬리움의 공주이니 정치적으로도 아이작에게 큰 도움이
되어줄 터.

하지만 리나는 외설스러운 말들로 인해 머리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녀는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렸다가 고개를 마리 쪽으로 천천히 돌렸다.

이윽고 마리의 퉁명스러운 시선과 마주치고, 리나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저게 사실이야?"
"응. 참고로 내가 정실이야. 이건 세실리도 인정한 거고. 그렇지?"
"사실 결혼을 안 했으면 정실의 자리는 공석이라 생각해."
"야이씨... 안 되겠어. 너 나가. 아이작한테 떨어져."
"싫은데~"

마리와 세실리가 서로 장난 아닌 장난을 쳐도 리나는 여전히 마음을 추스릴 수 없었다.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갖 상상이 맴돌았다.

'마리랑 세실리가 아이작이랑 그렇고 그런 짓을... 아냐. 세실리는 아직 안 한 거 같은데... 으으...'

머리가 과열되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방금 전 세실리가 두 손으로 펼치면서 보여줬던


간격의 너비가 생각났다.

리나는 마리와 세실리가 서로 자기가 정실이니 뭐니 하면서 투닥거리는 동안 슬며시 자기 아래를 바라봤다.
아이작이랑 사귀는 건 절대 아니나 그녀도 한참 성에 관심이 많을 나이.

뒤이어 둘의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비교했다. 무엇을 비교하는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으니
말하지 않겠다. 그리고...

'배, 배꼽을 넘기는데? 정말로 가능한 거야?'

또다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 다 받아들인 마리가 대단하기도 하고, 새삼 인체의 신비를 느끼게
되었다.

이에 리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가 고개를 들어 마리를 쳐다봤다. 세실리와의 정실 싸움에서 승리라도


했는지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저... 마리?"
"응?"
"정말 그게... 다 들어가? 아프진 않아?"
마리는 눈을 깜빡이며 질문을 한 리나와 마주했다. 얼굴은 타들어가듯이 붉어졌으며 푸른색 눈에는
호기심이 담겨있다.

자기가 알던 리나의 모습은 전부 사라졌으며 성에 관심이 보이는 소녀만이 존재했다. 황녀가 아닌, 제
나이대에 어울리는 귀엽고 깜찍한 소녀.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을까. 마리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왠지 리나의 약점을 잡은 듯해서 기분이 좋아졌으며 앞으로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을 듯했다.

"리나."
"으, 응?"
"첫날밤에 있었던 일을 전부 설명해줄까, 아니면 네가 질문한 것만 대답해줄까? 네가 골라봐."
"으으..."

마리가 야릇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묻자 이제는 아예 증기가 날 정도로 얼굴이 뜨거워진 리나.
그러면서도 대답은 듣고 싶은 것인지 시선은 마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 개 다 인 것 같아 마리는 전시회가 끝나고 아이작과 치렀던 첫날밤을 기억했다. 그때만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되었지만 다 지나간 추억이다.

현재는 서큐버스 못지 않게 성에 눈을 떠버린 한 명의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서로 주도권을 넘겨주면서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탐닉할 뿐.

"그럼 어떻게 해서 나랑 아이작이 밤일을 치렀는지부터 설명해줄게. 처음에는 아이작의 말실수였어."


"말실수?"
"응. 아이작이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고 자기 침실에 나를 초대했거든. 그것도 커피까지 시키면서."
"그, 그건..."
"맞아. 아이작 딴에는 정말로 나랑 얘기하고 싶어서 부른 거겠지만 나는 아니었거든. 그리고 세실리가
나에게 쓸데없는 말까지 하는 바람에 급한 것도 있었고."
"쓸데없는 말?"

세실리가 언급되자 리나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세실리는 이목이 자기에게로 쏠리자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스레 대답했다.

"난 먼저 안 하면 내가 먼저 가로챈다고 말했을 뿐이야. 설마 당일에 바로 일을 치를 줄은 누가


알았겠니?"
"으으..."

역시 이런 이야기에 약한 것일까. 리나는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이성은 그만해야 된다고 소리치고 있지만, 마음은 더 들어도 된다며 유혹하는 중이었다.

황궁에서 배운 성교육과 달라도 너무 다른 친구의 실제 경험담은 리나에게 새로운 자극을 선사했다.

"아이작이 내 몸 전체를 쓰다듬는거야. 마치 깨지기 쉬운 공예품을 다루는 것처럼. 너도 아이작의 손이


얼마나 크고 예쁜지 알고 있잖아? 그런 손으로 내 맨살을 어루만진다고 생각해봐."
"그, 그리고?"
"그리고..."

마리의 첫날밤 이야기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리나는 더욱 흥분했다. 이따금씩 달뜬 숨소리를 내쉬는 걸
보아 완전히 빠져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윽고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부분에 돌입했을 때는...


"...꿀꺽."

침까지 삼키면서 결코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마리는 공작가 출신답지 않게 적나라한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이어나갔다.

그런 리나와 다르게 세실리는 이미 여러번 들었던지라 아무렇지 않았지만, 아이작과 깊게 관련된 이야기라
가만히 경청했다.

"새, 새벽까지? 힘들지 않아?"


"다음날 일어나보니 해가 중천에 떠있긴 했지. 나도 그땐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 지금은 30 분만 해도
녹초가 되는데."
"아, 아이작이 의외로 체력이 강하구나..."
"듣자하니 어릴 때는 기사 훈련까지 받았대. 강할 수밖에 없지."
"꿀꺽. 그, 그 다음에는? 아침에는 별 일 없었어?"
"있긴 있었지. 어떤 상황이었냐면..."

놀람의 연속이었다. 리나의 머릿속에서 연약하기 그지 없었던 아이작의 이미지가 한 명의 '남자'로


바뀌는 순간이다.

최근 마리의 얼굴이 밝아지고 묘하게 예뻐진 듯한 느낌이 있었는데 전부 아이작과의 동침 때문인 것일까.
리나는 마지막까지 화려했던 그들의 첫날밤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우리의 첫날밤은 여기가 끝이야. 그 이후에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해버려서 뭐라 말해줄 게 없네."
"그럼 감상평을 말해볼래?"
"... ..."

감상평이고 나발이고 리나는 용량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면 상상할 수록


아래가 점점 찌릿해지는 느낌이다.

단순히 듣기만 해도 이정도인데 실제로 한다면 어떨지 가늠이 잡히질 않는다. 아이작과 사귀는 건
아니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는 기준으로 잡혀버렸다.

최근 만나고 있는 남자가 아이작밖에 없을 뿐더러, 과거에는 잭슨이 달라붙었으나 조별 과제 이후 알아서


떨어져나갔다. 레오르트가 있으나 그는 친오빠이니 별개로 치부했다.

똑- 똑- 똑-

"나 왔어. 들어갈게."

리나가 우물쭈물하는 동안 아이작이 약을 챙기고 돌아왔다. 그에 리나는 살짝 숙였던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이윽고 아이작이 문을 엶과 동시에 그녀의 시선이 엄한 곳으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 마리가 유달리
강조했던 부분으로.

그러나 아이작은 그런 사실도 전혀 모른 채 태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식사 끝났어? 계산할까?"


"응. 그러자. 바로 갈 거지?"
"그렇게 하고 싶어?"
"며칠동안 쌓였단 말이야. 혼자서는 해소가 안 돼."

만약 마리에게 이야기를 듣지 못 했다면 저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리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자마자 앞으로 그들이 무엇을 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에는 손님을 위한 여관이 마련되어 있지만, 꼭 손님만 머무는 건 아니다. 귀족들을 위해 방음이
철저한 방 또한 존재했다.

그러니 아이작과 마리는 그곳에서...

"...꿀꺽."

리나는 다시 한 번 입에 고였던 침을 꿀꺽- 삼켰다. 상상만 했는데도 가슴이 떨리고 긴장되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건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으나 막상 이야기를 듣고나니 남몰래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어쩌면 먼 훗날에 있을 자신의 첫날밤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자신은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이니
남자와 결혼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으니까.

물론 이건 이성이 말하는 거고 본능은 그저 성적 호기심이 당겼을 뿐이다. 17 세라는, 이제 막 성에 눈을


뜰 나이.

황녀로서의 체면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한 명의 사람으로서 욕심에 따라 움직일 것인지.

리나가 공적인 일이 아닌 사적으로 일생일대의 고민에 빠져든 순간이었다.

"흐응?"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세실리가 묘한 비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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