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essional Documents
Culture Documents
002-논리와 비판적 사고-텍스트
002-논리와 비판적 사고-텍스트
28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이다. 그 지식이 한 관직에 적절하고 그 행위는 한 고을
에 알맞으며, 그 덕은 한 임금의 신임을 얻을 만하고, 그 재능이 한 나라를 빛낼 정도인 그런 인물은
스스로를 보는 눈이 메추라기처럼 좁다. 송영자는 이런 인물을 싱긋이 비웃는다. 그리고 세상 모두가
칭찬한다고 더욱 애쓰는 일도 없고, 세상 모두가 헐뜯는다고 기가 죽지도 않는다. 다만 내심(內心)과
외물(外物)의 구분을 뚜렷이 하고 영예와 치욕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뿐이다. 그는 세상일을 쫓아 허둥
지둥하지 않는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가) 혜자(惠子)가 장자에게 말했다. 위왕이 큰 박씨를 주길래 그것을 심었더니 자라나 오석(五石)이나
들어갈 정도의 열매가 열렸다. 물을 담자니 무거워서 들을 수 없었고, 돌로 쪼개서 바가지로 쓰자니 납
작하고 얕아서 아무 것도 담을 수가 없었다. 크기는 컸지만 아무 쓸모가 없어 부숴버리고 말았다.
장자는 다음처럼 말했다. 당신은 큰 것을 쓰는 방법이 매우 서툴다. 송나라 때 손이 잘 안 트는 약을
만든 사람이 있었다. 그는 대대로 솜을 빠는 일을 가업으로 삼고 있었다. 한 나그네가 그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와 약 만드는 방법을 백금으로 사겠다고 했다. 솜 빠는 일을 대대로 해오고 있지만 우리 수입
은 얼마 안 된다. 이 기술을 팔면 단번에 백금이 생긴다. 이렇게 생각한 후에 그는 약 만드는 기술을
팔았다. 나그네는 그 기술을 갖고 오왕을 찾아가 설득했다. 월이 오에 쳐들어오자 오왕은 이 사람을 장
군으로 썼는데, 이 기술을 사용하여 겨울에 월군과 수전(水戰)을 하여 크게 이겼다. 오왕은 그 공적을
치하하여 많은 땅을 주었다. 손을 트게 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한쪽은 영주가 되고 다른 쪽은
솜 빠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당신은 오석이나 되는 박이 있다면, 어째서 그 속을 파내서 큰
술통의 배를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 즐기려고 하지 않고, 납작하여 아무 것도 닮을 수 없다고 불평
하는가? 역시 당신은 마음이 구부러져 있다.
(나)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내게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죽나무라고 한다. 줄기는 울퉁
불퉁하여 먹줄을 칠 수가 없고, 가지는 비비 꼬여서 자를 댈 수가 없다. 길에 세워 두면 목수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장자, 당신의 말은 크기만 했지 쓸모가 없어서 모두들 외면해 버린다. 그러자
장자는 말했다. 당신은 너구리나 살쾡이를 알지 않는가? 몸을 낮게 웅크리고 놀러 나오는 닭이나 쥐를
노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다가 결국 덫에 걸려거나 그물에 걸려 죽는다. 그
런데 검은 소는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아 큰 일은 하지만 쥐는 잡을 수 없다. 지금 당신은 큰
나무가 있는데 쓸모가 없어서 걱정하고 있지만, 어째서 아무 것도 없는 드넓은 벌판에 심고, 그 곁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한가로이 쉬고, 그 그늘에 유유히 누워 자 보지는 못하는 것인가? 도끼에 찍힐 일도
누가 해를 끼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쓸모가 없다고 괴로워한단 말인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29
부유 등. 이 속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욕(利慾)에 눈이 어두워 날뛰는 인간들의 희노애락(喜怒哀樂)
을 비웃으며 장자는 도(道)의 세계, 이러한 것들을 초월한 완전히 자유로운 세계, 즉 대자연의 커다란
품에 안길 때 사람은 비로소 참된 행복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한 소요유의 즐거움을 무한한 허공
을 힘차게 날아 올라가 미지(未知)의 북해(北海)로 날아가는 대붕(大鵬)에 비유해서 말한다. 상식에 젖
어 거기 얽매여 있는 사람들의 의표(意表)를 찔러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데에서 장자 특유의 우언(寓言)
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에 얽매인 현실을 초월하여 대자연의 무궁한 품속에서 자유로
이 노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 노장사상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극히 혁명적 이념이라는데 있다. 노장(老莊)은 우
리가 삶의 토대로 하고 있는 인생관을 완전히 버리고 그것과 반대되는 가치를 전제로 하는 인생관을
제시한다. .... 노장은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문화를 비평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
하며, 억척스럽게 자연을 정복해서 우리들의 욕망을 굴복시키며 물질적 안위를 채우는 대신 바람처럼
골짜기의 냇물처럼 자연을 따라 살아가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을 그들은 무위(無爲)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살아 가면서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서 겪는 모든 고충과 비극을 하나의 희극으로
하나의 소요로 보라고 일러준다. .... 노장은 우리가 살기 위해 흘려야 하는 땀을 꿀인 줄 알고, 우리가
참아야만 하는 병의 아픔을 멋있는 쾌감으로 알고, 우리들이 경험하는 모든 삶의 고행을 소요로 알라고
설교한다. 이와 같은 우리들의 관점의 180도 전환은 우리들이 소승적인 입장을 떠나서 대승적 입장으
로 바꿔 보고 우리들의 작은 욕망을 떠나서 우주적인 관점에 섬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 노장의
삶에 대한 혁신적인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할 때, 그들의 가르침은 쓸모없다. 그것은 너무
나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인, 즉 사실과 맞지 않은 인간관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노장사상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철저한 비평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는 데에서 시대
와 장소를 초월해서 오늘날까지 의미가 있다. .... 우리는 무엇 때문에 돈돈 하고 조바심해야 하며, 우
리는 무엇 때문에 긴 세월을 공부 공부 하고 학교를 다녀야 하며, 우리는 무엇 때문에 고급 자동차를
몰고 다니고자 하며, 우리는 무엇 때문에 높은 빌딩을 지어야 하며,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값비싼 도서
관, 미술관, 박물관을 지어야 하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들여 무기를 만들어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박이문, 노장사상)
문학은 써먹을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문학은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은 써먹
30
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
에 인간을 억압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
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
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
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그것을 향유하는 자에게 그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부끄러움을, 한
편의 침통한 시는 그것을 읽는 자에게 인간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킨
다. 소위 ‘감동’이라는 말로 우리가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심리적 반응이다. 감동이나 혼의 울림은 한
인간이 대상을 자기의 온 몸으로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행위이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것에서 얻는 감
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
는 것을 느낀다. 문학은 억압하지 않으므로 그 원초적 느낌의 단계는 감각적 쾌락을 동반한다. 그 쾌락
은 반성을 통해 인간의 총체적 파악에 이른다. 문학은 억압 없는 쾌락을 우리에게 느끼게 해준다. 그러
면서 그것은 그것을 읽는 자에게 반성을 강요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것과 싸울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이런 수모와 아픔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것을 안 당하도록 해야 한다고 느끼게 한다. 인간은 이
래야 행복하다. 그러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문학은 문학만을 위한 문학도 아니며, 인간만을 위한 문학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무지
와의 싸움을, 의미론적 차원에서 인간의 꿈이 갖고 있는 불가능성과의 싸움을 뜻한다. 문학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무지를 추문으로 만
든다. 아무런 반성 없이 9시에 회사 문에 들어서서 잡담하고 점심 먹고 5시에 퇴근하는 그런 일과가
계속되는 일상인의 무딘 의식에,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뒤를 보지 못하는 갇힌 의식에, 문학은 그것이
진실된 삶이 아니라 거짓된 삶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그것을 추문으로 만든다. 아니 더 나아가서 문학은
그것의 존재가 글을 못 읽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만
드는 어떤 것이다. 무지를 그러므로 우리는 폭넓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학이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는 것은, 문맹인이 있다는 것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 부끄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무디게
갇혀 있는 일상인의 의식이 하나의 코메디라는 것을 드러내게 한다.
문학은 동시에 불가능성에 대한 싸움이다. 삶 자체의 조건에 쫓기는 동물과 다르게 인간은 유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꿈꿀 수 있다. 인간만이 몽상 속에 잠겨들 수가 있다. 몽상은 억압하지 않는
다. 그것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몽상은 인간이 실제로 살고 있는 삶이 얼마나 억압된
삶인가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무리 불가능한 것이라 하더라도 꿈이 있을 때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거리를 취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반성할 수 있다. 꿈이 없을 때 인간은 자신에 대해 거리를
가질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 갇혀 버려 자신의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문학은 인간을 총
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 그것은 인간
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김현, 한국 문학의 위상)
5. <유용한 것은 우리를 억압한다. 따라서 무용한 것은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다.> 이 논증은 타당한
가?
31
6. 다음 구절에 대해서 논평해 보라.
32
하지 않는다. 기본 관점이 사적 이윤에 있기 때문에, 모든 재화를 동일하게 취급된다. 이것은 경제학의
방법론이 자연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무시하는 관점임을 보여준다. 달리 말해 경제학은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자와 판매자가 만나는 시장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구매자는 유리한 재
화를 찾아다니는 사냥꾼일 뿐, 재화의 산지나 생산 조건에 관심이 없다. 오직 자신의 돈으로 최상의 가
치를 확보하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시장은 사회의 껍데기일 뿐이다. 그것의 의미는 장소에 따라 존재하는 순간적인 상황과 연
결된다. 거기에는 사물 내부로 들어가 그 배후에 놓인 자연적, 사회적 사실을 탐구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시장은 개인주의와 무책임성의 제도화이다. 구매자나 판매자 모두 자신 이외의 것에 대해서
결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부유한 판매자가 가난한 고객에게 단지 그 고객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싸게
팔거나 부유한 구매자가 단지 공급자가 가난하다는 이유에서 비싸게 산다면, 이것은 ‘비경제적’이다.
마찬가지로 구매자가 수입품이 싼데도 국산품을 선호한다면, 그것은 ‘비경제적’이다. 그는 국가의 무역
수지에 책임을 지지 않으며, 그것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
자신에 대한 덧을 제외한 모든 책임이 면제되어 있다는 것은 사업이 굉장히 단순화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것은 매우 실용적이다. 그러나 놀랄 일은 이렇게 책임에서 면제되었다는 것을 최대
로 이용하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만일 어떤 구매자가 특정 제품의 저렴함이 착취나 비
열한 행위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의심 때문에 그 상품을 사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경제적’이다.
경제학이라는 종교에서 말하는 윤리적 강령은 생산하고 매매할 때 언제나 경제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이
다.
마찬가지로 시장 공간에서 개인과 사회에 대해 매우 중요한 질적 구별이 실용적 이유에서 억제된다.
시장에는 양이 위대한 승리를 누리면서 지배한다. 모든 것이 동질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동질적인 것으
로 취급한다는 것은 가격을 부여해서 교환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 사고방식이 시장에 의존하는 만큼, 생명으로부터 신성함은 사라진다. 가격을 갖는 것에는 신
성함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경제적 사고방식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되면, 아름다움, 건강, 깨끗함
따위의 비경제적인 가치조차 ‘경제적인 것’으로 입증되어 경우에만 살아남을 수 있다.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8. <그것은 비경제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이 논증을 평가해 보라.
33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대립을 그대로 제 3자에게 끌고 간다고 하면, 그 제 3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 역
시 그와 마찬가지로 분명하지 않은 것을 떠맡게 되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하면 누구에게 공정한 판정
을 부탁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에 너와 같은 견해의 사람에게 판정을 부탁한다고 하면, 이것은 너와
같은 견해이니 공정한 판정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나와 너와 견해를 달리 하는 사람에
게 판정을 하게 하면 어떨까.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벌써 나나 너와 견해가 다르니 바른 판정을 할 수
는 없다. 그러면 나나 너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 판정을 하게 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그러한 사
람은 나나 너와 견해를 같이하는 것이니 역시 바른 판정을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면 나와 너와, 또
다른 사람은 다 같이 누구 옳고 그른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면 또 누구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겠는
가. (장자, 「제물론」)
34
6 계몽이란 무엇인가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의 상태
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 미성년 상태의 책임을 마땅히
져야 하는 것은 그 미성년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에 있는 경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지
도 없이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결여되어 있을 경우이다. 그러므로 “과감히 알려고 하
라”,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는 것이 계몽의 표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부의 지도에서 해방된 뒤에도 일생 동안 미성년의 상태에 머물고, 다른 사람들
이 손쉽게 그의 후견인으로 들어서는 이유는 바로 게으름과 비겁함 때문이다. 미성년에 머무는 것은 매
우 편안하다. 만약 나에게 나를 대신해서 지성을 가지고 있는 책이 있고, 나를 대신하여 양심을 가지고
있는 목사가 있고, 나를 대신해서 음식을 준비하는 의사가 있다면, 나는 조금도 수고할 필요가 없을 것
이다. 내가 그것에 대해 보수를 지불할 능력만 있으면 나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들
이 나를 대신해서 골치 아픈 일을 모두 떠맡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년이 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대신에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에 대
한 감독을 기꺼이 떠맡고 있는 후견인들도 그러한 위험에 대해서 근심하고 있다. 후견인들은 그들의 가
축을 어리게 보고 그 온화한 동물들이 그들을 붙들어 매는 수레가 없이는 한 발자국도 걸으려 하지 않
는다고 확신한다. 그런 연후에 그들이 혼자 걸으려고 할 때 부딪치는 위험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이러
한 위험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종 넘어져 뒹굴 정도이고, 그것을 통해 드디어
걸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는 그들을 겁쟁이로 만들어 통상 그들로 하여금 더 시
도해 볼 용기를 잃게 한다.
그러므로 개인이 거의 천성이 되다시피 한 미성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는 이 상태를 좋아하게 되었고, 현재로서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아무
도 그에게 지성의 사용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령이나 형식들, 그의 천부적 재능을 합리적으로
사용하거나 혹은 잘못 사용하게 하는 이런 기계적 도구들이 영구히 계속되는 미성년 상태의 족쇄들이
다. 이 족쇄를 벗어던지는 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겨우 작은 도랑을 간신히 건너뛰는 정도이다.
그것은 그가 자유로운 운동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의 정신을 단련하여 미성
년 상태에서 벗어나 확실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
가」)
2.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이란 무엇인가? 그 구분에 대해서 평가해 보라.
35
“따지지 말라”는 소리가 들린다. 장교는 “따지지 말고 그저 훈련하라”고 말하고, 세무원은 “따지지 말
고 그저 세금을 납부하라”고 하며, 성직자는 “따지지 말고 그저 믿기만 하라”고 외친다. 도처에 자유에
대한 제한이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제한이 계몽에 장애가 되는 것인가? 어떤 것이 계몽에
방해가 되지 않고 그것을 촉진시키는가? 이 물음에 나는 다음처럼 대답하고자 한다. 이성의 공적 사용
은 언제나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이성의 공적 사용만이 인류에게 계몽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의 사적 사용은 매우 좁게 제한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계몽의 진행이 특별히 방해 받지
는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이성의 공적 사용이란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독자 대중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이다. 반면에 이성의 사적 사용은 그에게 맡겨진 어떤 시민적 지위나 공직
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공동체의 이해가 걸려 있는 많은 일들은 어떤 기계적 장치를
필요로 하는데,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이 장치에 의해 단지 수동적으로 정부의 명령대로 그 일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정부는 그들에게 공동의 목적을 지시하고, 혹은 적어도 그들로 하여금 공공의 목
적을 파괴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어떤 논의가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복종하지 않으
면 안 된다.
그러나 그 기계 장치의 한 부분이 자신을 전체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혹은 세계 시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간주하는 한에서, 그리고 저작을 통해 대중에게 이야기하는 지식인의 자격으로서 그는 확실
히 논의할 수 있다. 이것 때문에 그가 수동적으로 수행해야 되는 일들이 방해 받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근무 중의 장교가 상관으로부터 어떤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이 적합한지 혹은 유용한지 논의한다면, 그것
은 매우 쓸데없는 짓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병역의 의무가 안고 있는 결점
을 비판하고 이것을 대중의 판단에 호소하는 것을 정당하게 금지할 수가 없다.
지식인으로서 저술에 의해서 대중 앞에, 전 세계에 널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경우, 즉 성직자가 이
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경우에 그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며, 그 자신의 인격으로 말할 수 있는 무제
한의 자유를 향유한다. 왜냐하면 국민의 후견인도 미성년이라는 것은 불합리하며, 그렇게 되면 불합리
를 영구화시키는 짓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3. 다음 글을 평가해 보라.
36
내가 계몽, 즉 사람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미성년 상태에서 탈출하는 일의 중점을 특히 종교적인
일에 초점을 맞추어 말하는 이유는 지배자들이 예술이나 학문에 관해서는 국민을 감독하려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며, 또한 종교상의 미성년은 가장 해로울 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불명예스
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 계몽을 장려하는 국가 지도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의 입법
에 관해서까지 국민이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여 현행 법률의 개선에 관한 의견이나 심지어는
기존의 법률에 관한 공명정대한 비판까지도 널리 발표하도록 허락해도 어떠한 위험이 없다는 것을 통
찰하고 있다.>
37
그 의견이 옳다면, 그러한 행위는 잘못을 드러내고 진리를 찾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설령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것은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대비시킴으로써 진리를 더 생생하
고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대단히 소중한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낳는다. (자유론)
8.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칸트 주장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그것에 대해 평가해 보라.
38
며, 적어도 정부 측에서 인류를 미성년에서 해방하여 양심에 관한 모든 사항에서 각자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것을 허락한 최초의 사람으로서, 은혜를 아는 당대와 후대 사람들에게 찬양 받아 마땅한 사람이
다. 그러한 군주 치하에서는 존경 받을 만한 성직자들에게 학자의 자격으로서 자신의 직무상의 의무를
침해함이 없이 기존의 교의와는 다른 자신의 판단이나 견해를 자유롭게 대중 앞에 발표할 자유가 허용
된다.>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은 스스로 계몽된 군주만이, 동시에 공공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잘 훈련된
수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는 군주만이 어떤 공화국도 감히 말할 수 없었던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너희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관해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따져보라. 그러나 복종하라.” ... 시민적
자유를 한층 크게 하는 것은 국민의 정신의 자유에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신의 자유에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이 ‘기계 속의 나사’ 역할을 할 때,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말하자
면, 사회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맡고 특정한 일을 하는 경우이다. 군인이거나 세금을 낼 경우, 성직에
있거나 공무원인 이 모든 경우에 인간은 사회의 특정한 부품으로 기능하며, 특수한 규칙을 적용하고 특
정한 목표를 추구하는 제한된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 물론 여기서 사람들이 우둔하고 맹종적으로 명령
에 따라야 한다고 칸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규정된 상황에 이성의 사용법을 적응시켜야 하
기 때문에, 특정한 목표에 이성이 복속되어야 함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이 영역에서 이성의 자유로
운 사용이 불가능하다.
반대로 이성 자체의 목적을 위해 사유할 때, 기계 안의 부품으로서가 아니라, 이성적 존재자로서 사
유할 때, 그리고 이성적 인류의 일원으로서 사고할 때, 이성의 사용은 자유롭고 공적이다. 따라서 개인
적인 생각의 자유가 보장되는 과정만이 계몽의 전부는 아니다. 보편적이고 자유로우며 공적인 이성의
사용이 서로 서로에게 가능할 때 계몽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칸트의 글에 대한 네 번
째 질문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사적인 목적으로부터 독립된, 이성의 보편적 이용은 개인으로서의 주체
자신의 관심사이다. 부정적 방식으로 이야기한다면, 공적 이용에 대한 도전이 없을 때, 이성의 자유로
운 사용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의 공적 사용이 어떻게 하면 적극적인 방식으로 확보될
수 있겠는가?
계몽은 모든 인류에 영향을 미치는 일반 과정으로 단순히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계몽을
개인들에게 과해진 의무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계몽은 정치적 문제인 것이다. 이성의 사용이 어떻게
공적인 형태를 취할 수 있겠는가? 또 앎에의 용감한 의지가 어떻게 환한 대낮에 실천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관건이다. 칸트는 상당히 단호한 어조로 프레드릭 2세에게 자유로운 이성을 동반하는 합
리적 전제정치라고 불릴 수 있을, 일종의 계약을 전제하고 있다. 자율적 이성이 자유롭고 공적으로 행
사될 수 있게 허여하는 것이 충성을 보장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있다. 복종되어야 하는 정치 원리 자체가 보편적 이성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푸코, 「계몽이란
무엇인가」)
39
10.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40
7 현대 논리학의 몇 가지 기본 개념
논리적 원리를 보다 궁극적인 어떤 것 위에 두려는 시도는 그것이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필요한 규
칙들에 관한 우리의 체계이든 아니든 간에, 자멸의 길일 수밖에 없다. 전제들로부터 결론을 추론해 내
려는 시도에 있어서나 혹은 연역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논리적 법칙의 타당성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논리적 법칙, 혹은 논리의 기본적 법칙이 동일률, 무모순율(혹은 모순율), 배중률이다. 이것
을 “사고의 법칙” 혹은 “사고의 논리적 토대”라고 한다. 동일률은 “A는 A이다.” 무모순율은 “어떤 것
도 A이면서 동시에 A 아닌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배중률은 “어떤 것이든 A이거나 A 아닌 것이다.”
도대체 인간의 마음과 몸은 어떤 존재일까? 이러한 철학적 물음에 대하여, 인간의 마음은 몸이라는
41
존재자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존재자라고 대답하는 전통적 입장을 심신 이원론이라고 한다. 근대 이전
까지 심신 이원론은 매우 상식적인 견해로 인정되어, 그 이론을 거부하는 것은 상식적인 직관을 거부하
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마음과 몸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라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서, 전통적인 심신 이원론은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론이 되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인간의 마음과 뇌 현상은 동일한 것이라는 동일론이 등장하였는데, 전통적인 심
신 이원론을 포기하고 동일론을 받아들이는 철학자들은 인간의 모든 정신 상태를 뇌의 물리적 현상으
로 환원할 수 있다는 환원주의를 받아들인다. 우리가 환원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정신 현상을 기계론적
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고, 또한 인간의 정신을 기계적으로 실현하는 문제를 연구하는
인공지능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원주의를 받아들이면 인간 정신의 자율
성을 부인하게 되고, 나아가서 인간 정신의 자율성을 부인하게 되면 인간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없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보기>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가, 나, 라 ⑤ 가, 다, 라
5. <동일론을 받아들인다면, 인공지능에 대해서 낙관적 기대를 한다.> 그런데 이 명제로부터 <동일론
을 거부하면 인공지능에 대해 낙관적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도출되는가?
6. <근대 이전에는 상식적인 직관을 거부하는 사람만이 심신 이원론을 거부했다.> 즉 <심신 이원론을
거부한 모든 사람은 근대 이전에는 상식적 직관을 거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명제는 <근대 이전까지
심신 이원론은 매우 상식적인 견해로 인정되어, 그 이론을 거부하는 것은 상식적인 직관을 거부하는 것
으로 받아들여졌다>에서 도출되는가?
7. <인간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없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철학자는 동일론을 거부한
다.> 이 명제는 다음 명제들로부터 도출되는가? 즉 <동일론을 받아들이는 철학자는 환원주의를 받아들
인다. 그런데 환원주의를 받아들이는 철학자는 인간 정신의 자율성을 부정한다. 인간 정신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철학자는 인간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따라서 <동일론을
받아들이는 철학자는 인간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42
부정한다.> 이 논증은 타당한가?
R→M
R→~A / ∴ M→~A
질료적 함축 질료적 동치
연언 선언 부정
material material
P Q conjunction disjnction negation
implication equivalence
P∙Q P∨Q -P
P→Q P≡Q
1 T T T T F T T
2 T F F T F F F
3 F T F T T T F
4 F F F F T T T
12. 타당하지 않은 논증, 즉 부당한 논증은 전제들이 참인데, 결론이 거짓인 논증이다. 따라서 만약 결
론을 거짓으로 그리고 전제들을 참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 논증의 부당성을 증명할 수 있다. 반면에
결론을 거짓으로 가정했는데도, 전제들을 참으로 만들 수 없다면, 그 논증은 타당한 논증이 된다.
R→M
R→~A / ∴ M→~A
이 논증에서 결론이 거짓이 되기 위해서는 M이 참이고, ~A가 거짓이면 된다. 즉 A가 참이면 된다. ~A
가 거짓이므로 R→~A가 참이기 위해 R은 거짓이어야 한다. R이 거짓이므로 R→M은 M에 상관없이 참
이 된다. 따라서 결론을 거짓으로, 그리고 전제들을 모두 참으로 만들 수 있으므로 이 논증은 부당한
논증이다. 이러한 증명을 <부당성의 증명>이라고 한다.
13. <A이면 B이다. A가 아니다. 따라서 B가 아니다.> 이 논증의 부당성을 증명해 보라.
(가) P∙Q / ∴ P
(나) P / ∴ P∨Q
43
(다) P∨Q
-P / ∴ Q
(라) P∨Q
P / ∴ -Q
(마) P→Q
Q / ∴ P
15. (가)를 ‘단순화’라고 한다. 언제나 타당한 연역식이다. (나)를 ‘첨가’라고 한다. (다)는 ‘선언적 삼단
논증’이다. (라)와 (마)는 오류이다.
17. <전제들의 집합이 논리적 일관성이 없는 집합이면 그 논증은 타당한 논증이다.> 이 주장을 설명해
보라.
18. <길동이는 남자이다. 길동이는 남자가 아니다. 따라서 지구는 둥글다.> 이 논증은 타당한가? 이 논
증이 타당한지, 혹은 부당한지 그 이유를 설명해 보라. 그리고 만약 이 논증이 타당하다면, 그 타당성
을 증명해 보라.
19. 전제들이 서로 모순이다. 즉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없다. 이런 전제들을 가지고 있는 논증은 언제나
타당한 논증이다. 기호 논리학의 장치를 이용하면 이 논증은 다음처럼 증명할 수 있다.
1 A∙-A / ∴ B
2 A (1 단순화)
44
3 A∨B (2 첨가)
4 -A (1 단순화)
5 B (3, 4 선언적 삼단논증)
21. 그러나 형식적으로 타당한 이 논증은 ‘비정합성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어떻게 타당한 논증이 오
류가 되는가?
<비정합성의 오류를 범하는 논증은 어쨌든 타당한 논증이 되는 장점을 가진다. 그러나 이것은 그 논증
을 좋은 논증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석이의 논증> 수학에 천재적인 능력을 보인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기이한 습관이 있어. 물리학자 중
에는 수학에 천재적인 능력을 보인 사람이 있지. 그러니까 물리학자 중에는 기이한 습관이 있는 사람이
있어.
명석 : 어떤 정수는 음수이고, 양수인 정수도 있으니까. 양수인 음수가 있다는 논증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석이의 논증도 받아들일 수 없는 논증이다.
① 순진 ② 보람 ③ 명석 ④ 현명 ⑤ 희망
45
23. 다음 글을 통해 ‘계보학’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평가해 보라.
<광기와 문명, 임상의학의 탄생, 사물의 질서, 지식의 고고학과 같은 서적에서, 푸코는 인간
의 낱말과 개념이 어떻게 사고와 행위의 역사층에 부합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사고와 행위의 역사층을
‘추론적 담화 형성방식’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인간의 삶과 사고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규정한다. 그런
데 우리가 삶과 사고의 구조를 의식적으로 규정하고 조정한다고 믿는 사람은 푸코 주장에 반대하는 것
이다. 간단히 말해, 푸코의 주장은 개인, 즉 인간 행위자와 그 자아의 중요성, 그 존재까지 감소시킨다.
(이것은 ‘주체는 죽었다’는 주장의 의미이다.)
권력의 행사는 이런 다양한 추론적 담화 형성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17세기 ‘이성’이라는 사회적
형성방식은 ‘광기’ 개념을 통해 이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고 간주한 사람들을 배제해 왔다. 19세기에
도 ‘광기’ 개념은 부르주아 표준 도덕을 고수하지 않는 사람, 가령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들을 적대시하
기 위해 사용되었다. 가족, 여성, 순결, 학교, 미, 덕, 진리 등과 같은 개념과 실행 기관이 어떻게 사회
적 질서와 통제의 수단 역할을 할 수 있었는가? 그것들이 억압하고 배제하고 권력을 감소시키고자 했
던 것은 누구인가?
한 개념의 역사, 변동, 배후의 목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푸코는 니체가 ‘계보학’이라고 부른 방법을
발전시켰다. 니체는 그리스도교 도덕의 개념과 실제를 탐색하는데 이 방법을 사용했다. 이 방법은 단순
히 역사적 방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는 전복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탐구 대상의 목적이나 결과
가 사소하고 대단치 않고 임의롭고 때로는 불쾌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폭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이 형사법 체계상의 변화를 보다 인간다워지기 위한 노력으로 보고자 했던 데 비하여
푸코는 이 변화가 보다 정교하며 효과적인 사회 통제의 기법에 초점을 두고 조직화되었다고 논증한다.
(이것이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겉보기에 순진무구해 보이는 개념,
기관, 실제의 기원과 발전을 결정하는 동기, 목적, 투쟁을 역사에 비추어 검토한다면, 통제, 조작, 탄압
을 위한 혐오스러운 장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다른 형태의 사회비판, 가령 마르크스주의나 정신분석과 달리 푸코는 자본주의와 같은 사회통제의
포괄적 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상이한 권력 체계가 교체되어 동시에 작동하고 있
다. 따라서 사회적이고 개념적인 역학에 대한 단일하며 완벽한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작업을 ‘권력의 미시 물리학’이라고 부른다.
푸코는 벤담의 원형 감옥, ‘파놉티콘’에 주목한다. 그 감옥은 철장이 있는 방이 없다. 대신에 죄수 자
신이 항상 감수의 감시 하에 있다고 믿도록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죄수는 스스로 교도하게 된다. 우리
는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원형 감옥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신용카드, 정부와 회사의 기록, 방법 카
메라, 단속 기술 등이 어떻게 우리를 지속적으로 감시 하에 두는가? 또는 지속적인 감시의 공포 속에
두는가? 이 감시와 감시의 공포가 우리가 사고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푸코가 사용하는 강력한 비판 도구는 ‘정상화 분석’이다. 권력의 질서가 여러 방식으로 일정한 신념
이나 실행을 ‘정상’이라고 우대함으로써 인류의 가능성의 영역을 축소하고 있다. 따라서 ‘정상’과 상이
한 성행동, 가족 구조, 종교, 담화나 행동 방식은 ‘일탈’이라고 불리며, 그래서 다양한 압박 기법이 동
원되어 억압당하는데, 결국 개인은 산업사회에 기여하는 ‘유순한 고깃덩어리’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
때문에 푸코는 강력한 비판 도구를 제공한다. 어떤 이론, 관념, 실행을 평가할 때, 거기에 어떤 권력 게
46
임이 잠복해 있는지 자문해 보라. 권력은 그만큼 미묘하다. 어떤 단일한 체계에도 기대지 말아야 한다.
권력이란 많은 기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만큼 다양하며 상이한 외양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지니,
철학자의 연장통)
47
8 언어의 의미
(가) 플라톤에 의하면 지식은 윤리와 관련을 맺고 있다. 진(眞), 선(善), 미(美)는 그것이 일치를 이룰
때 올바른 진리가 되고, 완전한 선이 되며, 참다운 아름다움이 된다. 인간은 이러한 진선미를 인식할
때 참으로 행복할 수 있으며, 이 같은 인간의 지식이 바로 윤리적 선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가 올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고 오류와 거짓, 무지에 빠져 있을 때 플라톤은 그것을 악이라고 말한다. 진선미의 일
치가 결여된 상태가 악이고, 그로부터 윤리적 죄가 생겨난다. 따라서 참다운 앎에 이르지 못한 것은 선
일 수 없으며, 윤리적으로 죄가 된다.
(나) 선악을 판단하는 데 있어 윤리학에서의 일반적 원칙에 따르면, 의도하지 않았거나 모르고 행한 일
의 결과에 대하여 그 행위자는 윤리적으로 죄가 없다고 한다. 윤리적 선악 판단의 최종적 기준은 행위
의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그 의도와 목적이 어떠했는가에 있다. 그러므로 무지
는 윤리적으로 죄가 될 수 없다.
(다) 어떤 독재자가 국민을 기만하는 정책과 구호를 남발할 때, 그 기만성의 전체를 정확히 알려는 노
력을 포기하고 단순히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때 평범한 국민들은 윤리적으로 죄를 저지른 것일까?
히틀러 시대의 평범한 독일 시민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이웃의 유태인을 독일 경찰로부터 몸을 피하
도록 도와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히틀러 정권의 실체를 올바로 알지 못하고 그 정권을 지지하였다.
48
③ 내가 산 로또 복권이 당첨되는 일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의미에서 자연적이지 않다.
④ 벼락을 두 번이나 맞고도 살아남은 사건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의미에서 자연적이다.
⑤ 개가 낯선 사람을 보고 짖는 것은 두 번째 의미에서는 자연적이지 않지만, 세 번째 의미에서는 자
연적이다.
(가) 시는 나에게 있어서 그 생존의 소멸, 그 멸망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으며, 그 위안, 순
수고독과 순수허무로써 일신을 포기할 수 있는 그 해방과 희열, 그 힘을 길러주던 유일한 성체였다. 실
로 나에게 있어서 시는 내 존재의 숙소, 그 등불, 그 휴식 또한 보이지 않는 먼 내일에의 여행, 그 저
린 뜨거운 눈물, 그 손짓, 그 힘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살라온 경험의 흔적, 그 총체였다. (조병화, 「
너와 나의 시간에」)
(나) 아름다움 속으로 빠져들면 지성은 허무를 씹는다. 그 거대함이 목을 조르는 이들 풍경을 눈앞에
두고 사상은 그 어느 것이나 인간에 대한 하나의 말살이 된다. 이리하여 그렇게 된 압도적인 확신에 의
해서 부정되고 은폐되고 흐려져서 인간은 이 세계 앞에서 빛깔이고 태양이고 간에 수동적인 진실 이외
엔 모르는 저 형태 없는 오점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카뮈, 「결혼」)
49
‘부정의 반비례 법칙’은 무엇인가? 부정할수록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법칙이다. 멍청이라는 말에 펄
쩍 뛰는 아이는 멍청이일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증오는 곧 두려움의 발로이다. 무엇인가를 싫어하
고 증오를 보이는 것은 그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자신감이 과하다도 못해 오만한 사람은 실제 그
것으로 불안감을 덮으려 하기 때문이다. (바지니, 가짜 논리)
③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면, 만물이 언젠가는 소멸한다는 자연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느 누구라도 늙지 않을 수 없고 결국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점만 보아도 그렇다. 결국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7. (가)와 (나)의 논지의 차이점이 드러나게 (전제와 결론,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논증으로 요약하라.
(LEET)
(가) ‘놀라운 가설’에 따르면 당신, 즉 당신의 기쁨과 슬픔, 당신의 기억과 야망, 당신의 자유 의지는 신
경 세포, 신경 세포들을 연결시키는 분자들 그리고 그 모두의 집합물의 행동에 불과하다. 이상한 나라
의 앨리스의 앨리스라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너는 뉴런들의 꾸러미에 지나지 않아.” 이 가설
50
은 일반적인 통념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진정 놀라운 것이라 볼 수 있다.
‘놀라운 가설’이 이상해 보이는 한 가지 이유는 의식의 본성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특히 감각질(感覺
質)의 문제 ― 가령 붉은색의 붉은 느낌 또는 통증의 아픈 느낌과 같은 주관적 경험을 객관적으로 설명
할 수 있는지 ― 에 대해 고민해 왔다. 이것은 매우 난감한 문제이다. 문제는 내가 아주 생생하게 지각
하는 붉은색의 붉은 느낌이 다른 사람의 그것과 완벽하게 같은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발생한
다. 그렇다면 의식을 환원주의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난관에 봉착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붉은색을 보는 것과 상관된 신경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 미래에도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바꾸어 말
해 만약 당신의 머릿속에서 특정 뉴런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당신
이 붉은색을 지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붉은색의 붉은 느낌이 설명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된다고 해도 당신이 내가 보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붉은색을 본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 붉은색과 상관된 신경 상
태가 당신의 뇌에서나 나의 뇌에서나 정확하게 같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당신도 내가 보는 것처럼 붉은
색을 본다고 추론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그럴 듯할 것이다. 따라서 의식의 다양한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
서는 먼저 그와 상관된 신경 상태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나) 의식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에는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를 구분하는 것이 유익하다. ‘쉬운 문
제’란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다. 인간이 어떻게 감각 자극들을 구별해 내고 그에 대해 적절하게 반응하
는가? 두뇌가 어떻게 서로 다른 많은 자극들로부터 정보를 통합해 내고 그 정보를 행동을 통제하는 데
사용하는가?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내적 상태를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이 물음들은 의식과 관련되어
있지만 모두 인지 체계의 객관적 메커니즘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인지 심리학과 신경 과학의 지속적인
연구가 이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어려운 문제’는 두뇌의 물리적 과정이 어떻게 주관적 경험을 갖게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다. 이것은 사고와 지각의 내적 측면 ― 어떤 것들이 주체에게 느껴지는 방식 ― 과 관련된 문제이다.
예를 들어 하늘을 볼 때 우리는 생생한 푸름과 같은 시각적 감각을 경험한다. 또는 말로 표현할 수 없
는 오보에 소리, 극심한 고통,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의식 현상들이야말로 마
음에 관한 진정한 미스터리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최근 신경 과학과 심리학의 분야에서 의식과 관련된 연구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 현상을 감안
하면 그러한 미스터리가 풀리기 시작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날의 거의
모든 연구가 의식에 대한 ‘쉬운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환원주의자들의 자신감은 ‘쉬운 문
제’와 관련된 연구가 이룩한 성과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어려운 문제’와 관련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쉬운 문제’는 인지 기능 혹은 행동 기능이 어떻게 수행되는가와 관계된다. 일단 신경 생물학이 신경
메커니즘을 적절하게 구체화하면서 어떻게 기능들이 수행되는지를 보여주면, ‘쉬운 문제’는 풀린다. 반
면에 ‘어려운 문제’는 기능 수행 메커니즘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설사 의식과 관계된 모든 행동 기능과
인지 기능이 설명된다고 해도 그 이상의 ‘어려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다. 그
미해결의 문제는 이러한 기능의 수행이 왜 주관적 의식 경험을 수반하는가라는 것이다.
51
8. 다음 글을 두 문장으로 된 논증으로 요약하고, 평가해 보라.
소비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상품의 논리가 일반화되어 노동과정이나 물질적 생산품뿐만 아니라 문화,
섹슈얼리티, 인간관계, 심지어 환상과 개인적 욕망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모든 것이 이 논리에 종속되
어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모든 기능과 욕구가 이윤에 의해 대상화되고 조작된다고 하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진열되어 구경거리가 된다는, 즉 이미지, 기호, 소비 가능한 모델로 환기되고 유발되
고 편성된다는 보다 깊은 의미에서이다.
소비과정은 기호를 흡수하고 기호에 의해 흡수되는 과정이다. 기호의 발신과 수신만이 있을 뿐이며
개인으로서의 존재는 기호의 조작과 계산속에서 소멸한다. 소비시대의 인간은 자기 노동의 생산물뿐만
아니라 자기 욕구조차도 직시하는 일이 없으며 자신의 모습과 마주 대하는 일도 없다. 그는 자신이 늘
어놓은 기호들 속에 내재할 뿐이다. 초월성도 궁극성도 목적성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이 사회의
특징은 ‘반성’의 부재, 자신에 대한 시각의 부재이다. 현대의 질서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
는 장소였던 거울은 사라지고, 대신 쇼 윈도우만이 존재한다. 거기에서 개인은 자신을 비춰보는 것이
아니라 대량의 기호화된 사물을 응시할 따름이며, 사회적 지위 등을 의미하는 기호의 질서 속으로 흡수
되어 버린다. 소비의 주체는 기호의 질서이다.
소비의 가장 아름다운 대상은 육체이다. 오늘날 육체는 광고, 패션, 대중문화 등 모든 곳에 범람하고
있다. 육체를 둘러싼 위생, 영양, 의료와 관련한 숭배의식, 젊음, 우아함, 남자다움 혹은 여자다움에 대
한 강박관념, 미용, 건강, 날씬함을 위한 식이요법, 이것들 모두는 육체가 구원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
을 증명한다. 육체는 영혼이 담당했던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문자 그대로 넘겨받았다. 오늘날
육체는 주체의 자율적인 목적에 따라서가 아니라, 소비사회의 규범인 향락과 쾌락주의적 이윤창출의 원
리에 따라서 다시금 만들어진다. 이제 육체는 관리의 대상이 된다. 육체는 투자를 위한 자산처럼 다루
어지고,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여러 기호 중의 하나로서 조작된다.
다르다는 것, 차이라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공통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서로 의사소
통을 할 수 있는 걸까? 얼핏 보면 지극히 당연한 듯한 사실을 끈덕지게 물어 늘어지면서 차이의 중요
성을 역설한 사람이 바로 구조주의 언어학을 창립한 소쉬르이다.
말하는 사람의 일회적 발언이 파롤(parole)이다. 이러한 다양한 파롤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랑그
(langue)이다. 파롤은 발언이고, 랑그는 언어라고 할 수도 있다. 랑그는 발언할 때 말하는 사람이 따라
야만 하는 규칙이다. 랑그는 문법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언어 사용에 관해서 무의식으로 합의하고 약속
한 규칙들의 체계 전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랑그가 없으면 파롤은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랑그
는 파롤을 가능하게 해주는 불변의 공통 요소, 바로 파롤 밑에 있는 ‘구조’이다.
언어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나눌 수 있다. 기표는 ‘표시하는 것’이며, 기의는 ‘표시되는 것’이다. 기
표가 언어 기호라고 한다면, 기의는 언어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기표는 당연히 기의와 일치한다는 것
이 전통적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쉬르에 의하면, 기표와 기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개”라는 기호가
실제 개를 지시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 관계이다. 오히려 “개”의 의
52
미는 그것이 소나 말을 지시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다.
이런 소쉬르의 주장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전통 철학은 확실성의 철학이며, 동일성의 철학이
고, 실제의 철학이었다. 하지만 소쉬르의 언어학적 성과를 반영해 보면,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동일성보다는 차이가, 실체보다는 관계가 훨씬 중요해진다. 언어 기호의 가치와 의미는 각각의 언어 기
호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차이라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 뿐이다. 예컨대 플러스
와 마이너스라는 말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실체의 개념이 아니라 서로 대립되는 전기적 속성을 나타내
는 관계의 개념일 뿐이다. 실체라면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플러스와 마이너스는 관계
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있을 수 없다.
언어라는 랑그도 역시 독립적 실체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의와 무관한 기표로 이루어진 그물
일 따름이다. 파롤은 발언자 개인이 주체가 되지만 랑그는 그렇지 않다. 랑그는 사회적으로 약속된 언
어의 규칙 체계이므로, 각 개인은 그 규칙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군다나 기표가 기의와 무관하므
로 각 개인은 실제 사물을 통해서 랑그를 하나하나 배워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랑그와의 관계
에서 수동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인간과 언어의 전통적 관계는 역전된다. 인간 개인은 다만 랑그를 이용하여 파롤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랑그는 인간의 소유가 아니고 마치 독자적인 생명을 지닌 존재처럼 행동한다. 인간이
언어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인간의 주인이다. 모든 판단과 사고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구조 속에 내재해 있다. (남경태, 현대철학)
53
산은 산이고 골짜기는 골짜기로 여기는 사고방식으로서, 산과 골짜기가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님)로 상호 이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것을 보지 않는다. 명사적 사유는 개념적 사유로
이어지면서, 인간지성이 개념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파악하려는 소유의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서구의 기독교 신학도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사유와 만나서 신학을 합리적
논리학과 어긋나지 않게 정립하게 되었다. 이런 정립의 금자탑이 바로 토머스 아퀴나스에게서 시발된
토미즘(Thomism)이라 하겠다. (김형효, 마음혁명)
54
9 몇 가지 논리적 개념 연습
3. 전칭명제와 특칭명제 사이에서 전칭명제가 참이라면, 반드시 특칭명제도 참이어야 한다. 그러나 특
칭명제가 참이라고 해도 전칭명제가 참이라는 것이 추론되지 않는다. 반면에 특칭명제가 거짓이라면,
전칭명제는 반드시 거짓이다. 그러나 전칭명제가 거짓이라고 해도, 특칭명제가 거짓이라는 것은 추론되
지 않는다. 특칭 명제는 거짓일 수도 있고, 참일 수도 있다. 이것을 ‘대소관계’ 또는 ‘함축관계’라고 한
다.
5. 전칭긍정 명제와 특칭부정 명제 사이에는 모순관계가 성립한다. 따라서 전칭긍정 명제가 참이라면,
특칭부정 명제는 거짓이다. 마찬가지로 전칭긍정 명제가 거짓이라면, 특칭부정 명제는 참이 된다. 가령
“모든 인간이 죽는 것이다”가 참이라면, 그것은 “인간에 속하는 모든 것이 죽는 것이다”, 즉 “인간에
속하면서 죽는 것에 속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명제가 참이라면, “약간의
인간은 죽는 것이 아니다”는 명제, 즉 “인간에 속하는 어떤 것은 죽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명제와
모순이 된다. 전칭부정 명제와 특칭긍정 명제 사이에도 모순관계가 성립한다.
6. 대소관계와 모순관계가 성립된다면, 전칭긍정 명제와 전칭부정 명제, 특칭긍정 명제와 특칭부정 명
55
제 사이에 ‘반대관계’가 성립한다. 전칭긍정 명제와 전칭부정 명제는 동시에 참일 수 없다. 그러나 동시
에 거짓일 수는 있다. 특칭긍정 명제와 특칭부정 명제는 동시에 거짓일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참일
수는 있다.
8. 다음 논증은 타당한가?
10. 애매한 단어는 문맥에 따라 분명하게 표현해 주면 된다. 이것이 ‘문맥적 정의’이다. 반면에 모호한
단어는 그 뜻을 규정해 주면 된다. 따라서 ‘규약적 정의’에 의해 모호성을 분명하게 한다.
(가) : 만약 당신이 부자라면 당신은 스위스에서 스키를 타면서 휴가를 보낼만한 여유가 있을 것이오.
그러나 당신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소. 그러므로 당신은 부자가 아니오.
56
결론이 도출된다고 생각되는 그러한 것이다. 논증에 대한 이러한 서술은 우리에게 진술이 무엇인지, 그
리고 하나의 진술이 다른 진술로부터 도출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보게 한다. 진술은 지시
적 문장으로서 참이거나 거짓이다. 의문문, 명령문 그리고 감탄문은 진술이 아닌 문장들이다.>
14. 논리와 비판적 사고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에서 논증을 구성하는 것이다. 텍스트의 주장을 한 문
장으로 간결하게 요약해야 한다. 그리고 텍스트의 전체적 맥락을 살펴 그 주장에 대한 근거를 찾아 구
성해야 한다. 특히 텍스트의 결론과 전제를 구성할 때, 자기가 이해한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15. <만약 A라면 B이다. 따라서 만약 B가 아니라면, A가 아니다.> 이 논증은 타당하다. 증명해 보라.
17. <모든 A는 B이다>라는 문장에서 주어와 술어의 위치를 바꾸는 것을 <환위법>이라고 한다. 이 경
우에는 이미 우리가 본 것처럼, 부주연된 것이 주연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성립한다. 가령 <모든 A는
B이다>로부터 <모든 B는 A이다>가 도출되는가?
대우 (A→B)≡(~B→~A)
질료적 함축 (A→B)≡~(A∙~B)≡(~A∨B)
질료적 동치 (A≡B)≡(A→B)∙(B→A)≡(A∙B)∨(~A∙~B)
드 모르간 ~(A∙B)≡(~A∨~B) ~(A∨B)≡(~A∙~B)
분배 [(A∙B)∨C]≡[(A∨C)∙(B∨C)] [(A∨B)∙C]≡[(A∙C)∨(B∙C)]
수출 [(A∙B)→C]≡[A→(B→C)]
첨가 P / ∴ P∨Q
선언적 삼단논번 P∨Q, ~P / ∴ Q
57
조절된다. 그러나 물가가 상승한다면, 부동산 수요가 조절되지 않고 서민들의 삶도 개선되지 않는다.
물론 물가가 상승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① 서민들의 삶이 개선된다.
② 부동산 공급이 조절된다.
③ A 정책이 효과적이라면, 물가가 상승하지 않는다.
④ A 정책이 효과적이라면, 부동산 수요가 조절된다.
⑤ A 정책이 효과적이라도, 부동산 가격은 적정 수준에서 조절되지 않는다.
(가1) 자유권, 재산권 등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제한하고 침해하는 행정에 대해서만큼은 행정의 자율
에 맡겨둘 수 없고 법에 근거를 두어야 하지만, 기본적 권리를 제한하지 않고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행
정은 법적 근거가 없어도 행정부에서 자유롭게 시행할 수 있다.
(나2) 구호품 지급에 관한 사항이 국민에게 이익이 되더라도, 법에 그 내용이 규정되어 있지 않으면 행
정부는 재난 시 이재민에게 구호품을 지급할 수 없다.
(가3) “국가의 행정은 법적 근거를 갖고서 이루어져야 한다”라는 원칙을 모든 행정 영역에 무조건 적용
하기보다 개인과 공공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행정의 영역에서만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개인과
공공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입법자가 사전에 그 근거를 법으로 정해야 한다.
(나3) 초등학교 무상급식 정책이 개인과 공공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항일 경우, 이 정책은 권리를
제한하지 않는 행정이어도 그 시행에 있어 사전에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
하나의 예술 작품이 어떤 대상을 표상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 표상론이 성립된다. 다빈치의 <모나
리자>라는 작품은 모나리자라는 여인을 표상한 한에서 예술 작품이며,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반파시
즘 사상을,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은 운명을 극복하여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베토벤의 인생관을 각
각 표상하는 한에서, 즉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한에서의 예술 작품이 된다. 이 표상론은
58
전통적 예술론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끈질긴 이론이다. 표상론은 플라톤의 유명
한 모방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서 다시 반복되고, 하이데거의 예술 철학이나 수잔 랭거의
이론, <도상과 사상>의 저자인 허버트 리드의 예술관, 낭만주의 시학 등으로 이어지면서 대부분 예술가
의 생각 속에 뿌리박고 있다. 최근에는 굿맨의 예술의 언어에서 새로운 이론적 뒷받침을 받고 나타난
다.
표상론의 핵심은 각 예술 작품이 표상적 속성소를 갖고 있다는 것이며, 이 속성소가 한 사물 현상으
로서의 예술 작품을 예술로 만든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 표상소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첫째, 그 언
어는 인식적 기능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예술 작품은 세상에서 발견될 수 있는 사물, 사건, 혹
은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느낌, 사상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되며, 예술 감상자들은 예술 작
품을 통해서 그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 새로운 진리를 배우게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흔
히 생각하는 바와 달리 과학적 기능과 예술적 기능은 근본적으로 질적 차이가 없어진다. 그래서 굿맨은
“비록 과학의 궁극적 산물이 예술의 산물과는 달리 언어적이거나 수학적 혹은 지칭적 이론일지라도, 과
학과 예술은 그들이 탐구하며 조성하는데 있어서는 대개 동일한 절차를 밟는다”고 주장하면서 과학과
예술의 연속적 관계를 연설한다.
이와 같이 예술 작품의 인식적 기능을 전제하고 보면 플라톤이 자신의 이상적 공화국에서 시인들을
추방하고자 했던 사실, 하이데거가 오로지 시를 통해서만 절대적 진리에 보다 가까워 질 수 있다고 주
장했던 사실들이 납득된다. 그리고 이러한 테두리에서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목적은 진리, 즉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드러내 보이는데 있다고 믿고 있는 사실이 어느 정도 수긍된다.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은 피리부는 소년을,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채털리 부인이 체험한 불륜의
애정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에 잠긴 채 구부리고 앉은 사나이를, 김홍도의 풍속화는 조선
시대 한국의 한 풍속을 표상한다.
예술 작품이 무엇인가를 표상한다는 생각, 따라서 무엇에 대한 진리를 나타낸다는 믿음은 다음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추측된다. 첫째, 예술 작품은 우연적인 자연 현상이 결코 아니며, 언제나
어떤 주체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계획되고 만들어지며, 예술 작품의 제작 의도는 항상 어떤 객관적인 대
상이나 아니면 어떤 생각, 느낌이라는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예술가이든 간에
그는 반드시 무엇인가를 보이려고 혹은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술가의 입장에서 보
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무엇인가를 표상하지 않고 제작된 예술 작품, 즉 우연히 꾸며진
예술 작품이란 자가당착적 개념이라고 하겠다. 둘째, 지금까지 예술 작품이라고 분류되어 온 거의 대부
분의 것들에 있어서 미술은 무엇인가를 구상(具象)한 것이며, 문학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그리고 비록 비구상 예술로서의 음악이나 무용이라고 할지라도 그것 역시 사랑을, 슬픔을, 그리움을 또
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말해 주는 것으로 우리가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이문, 예술철학)
59
(나) <“지나친 겸손은 절반의 교만함이다”, “적보다는 친구를 조심하라” 등의 속담들은 누가 봐도 명백
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겸손함은 원래 교만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친구들은 조심해야 할 필요가 없
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빵 반쪽이라도 있는 것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 “다수에 대항하는 소수는
반드시 패한다” 등에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사회심리학자 펑카이핑과 나는 첫 번째 유형의 속
담이 미국에서보다 중국에서 더 흔하게 발견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우리는 미시간대학과 베이징대학
의 학생들에게 그와 같은 일련의 속담을 제시해주고 각 속담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평가하게 했다.
그 결과 미국 학생들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 속담들을 더 선호한 반면, 중국 학생들은 모순을 포
함하고 있는 속담들을 더 선호했다.
‘모순에 대한 선호’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동서양의 차이는 매우 뿌리 깊은 근원을 가지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변증법적 사고라고 부를 만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장 큰 특징은 모순이 되는
주장들을 타협을 통해 수용하는 것이었다. 즉 모순되는 두 주장에서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 그
사고방식의 핵심이다.
고대 중국인의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의 특징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1) 변화의 원리 –
동양의 사고에서 우주는 정적인 곳이 아닌 역동적이고 변화 가능한 곳이다. 어떤 사건이 현재 특정 상
태에 놓여 있다는 것은 그 상태가 곧 변화할 것이라는 징후로 간주된다. 현실은 끊임없이 변동하기 때
문에 현실을 반영하는 개념들 역시 고정적이고 객관적이기 보다는 유동적이고 주관적이어야 한다.
(2) 모순의 원리 –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대립, 역설, 변칙이 늘 발생하며 신/구, 선/악,
강/약이 모든 사물 안에 동시에 존재한다. 대립은 사실상 서로를 완성시키고 보완하는 기능을 한다. 도
교에서는 모순 관계에 있는 두 주장들이 역동적인 조화의 상태로 존재하며, 서로 대립적인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상호 통제한다고 생각한다. 도(道)는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된다. 도교
의 창설자인 노자(老子)는 “사람들이 미를 미로서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추함에 대한 인식이 생겨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선을 선으로서 인정해야 마침내 사악함에 대한 인식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존재와
부재는 상생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자신을 정치가, 군인, 철학자, 시인으로 명명했던 중국의 마오쩌
둥도 “대립은 서로 맞서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연결, 상호 침투, 상호 관통, 상호 의존을
뜻한다”라고 기술하였다.
(3) 연관성 혹은 종합성의 원리 – 변화와 대립에 대한 그러한 견해는 자연스레 어떤 사물도 다른 것
들과 고립된 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다른 무수한 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
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어느 하나를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연관되어 있는 다른 모든 것을 알
아야 한다. ... 서양 사고의 기본 원리 중 하나인 ‘동일률’은 상황이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일관성을 강
조한다. 즉 A는 맥락에 관계없이 A이다. 또한 비모순율은 한 명제와 그 명제의 부정이 동시에 참일 수
없음을 강조한다. 즉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닌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동양의 ‘종합론 원리’는 맥
락이 달라지면 어떤 사물이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변화의 원리’는 삶이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끊임없는 변화과정이며,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현대 동양인들이 서양인들의 논리학 원리를 모
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순전히 형식 논리상 모순된다는 이유로 결론을 부정하는 것
은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개념이란 단지 사물의 반영에 불과하기 때문
60
에, 반대인 것처럼 보이는 두 개념을 동시에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리처드
니스벳, 생각의 지도)
A: 사람들은 다 이기적이야.
B: 존도 그렇다고 생각해? 존이 자기 아이들에게 얼마나 헌신적인지 생각해봐.
A: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거야. 그 역시 이기적인 거지.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