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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 of Copy of 다니엘 바렌보임
Copy of Copy of 다니엘 바렌보임
아버지는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철학적 관점에서 모든 행동이나 자세가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피아노 앞에 앉는 자세가 우리의 마음 가짐을 보여주며 건반에
힘을 모두 전달할 수 있을만큼 거리를 두고 자연스러운 자세로 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등을 곧게
세울 수 있도록 의자는 너무 낮아도 너무 높아도 안됐다 . 연주에 필요한 에너지는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어깨를 들어 올려서는 안됐따. 어깨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끊이지 않는 하나의 선을 갇게
됐다. 이것이 내가 받아들였던 원칙이며 나중에 수정해갔다. 그 다음 손목의 움직임을 조절하고
손가락을 꼿꼿히 펴서 연주할지 굽혀서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수직이 아니라 수평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점에서 손목은 현악기의 활에 비교할 수 있다.
많은 연주자들이 자신감을 높인다는 비음악적 이유 때문에 하루에 몇시간씩 연습을 한다. 하지만
자신감이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을 때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자신감을 쌓으려는 목적이라면 음악 연주는 그리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3.이스라엘
유대인들이 2 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국가를 다시 갖게 됐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방인들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써야 하는 해묵은 습관에서 벗어났고 비유대적 관습에 동화되어야
하는 필요성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유럽의 문화적 요소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고 나는
세파르디(서유럽 라틴 국가에 자리 잡은 유대인 )문화와도 그다지 많은 접촉이 없었다 . 나는
겉모습을 무척 중시하는 라틴 국가라는 전혀 다른 전통에서 자라왔다 . 아르헨티나에서는 사회적
우아함이 필수적이었지만 이스라엘에서는 겉치레일뿐 거부감이 강했다. 나는 신경쓰지 않겠다-는
식의 태도라기보다는 이상주의와 긍정적 사고에 대한 건강한 몰입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했다.
유럽에서의 광범위한 유입은 1948 년쯤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유대인 이상주의의 중심이었다. 우리는 유대인 국가에 모여 사는 한, 특별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것이라고 믿었다 . 이를테면 당시에는 유대인 경찰이라는 관념조차 낯설다 .
디아스포라 시절에 유대인들은 보통 의사, 변호사, 예술가, 작가와 은행원 같은 자유로운 전문직에
종사했다. 하지만 유대인 경찰, 군인, 도둑같은 개념은 정상적인 사회를 나타내는 징표이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새롭기만 했다. 당시에는 그 누구도 자기 집을 잠그지 않았다. 집 안 대문과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옆집 사람을 부를 때는 큰 소리로 외치기만 하면 됐다 . 골목은 상대적으로 좁았고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서로 쉽게 소통을 나눴다. 성서는 우리 역사이자 우리 유산의 일부로
학습됐으며 우리의 일상생활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 유월적과 같은 유대교 축일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사건에서 축제였다고 할 수 있다.
4.유럽 간주곡 2
나는 시간을 아끼는 지름길이 존재하지만 음악에서는 그렇지 않으며, 먼 길을 돌아가겠다는 각오
없이 지름길만 선택하는 건 위험하다고 믿는다 . 지름길에서는 종종 핵심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
마르케비치는 리듬의 정확성과 균형감각을 철저하게 요구했고 사운드와 리듬과 동작의
명확성성에 면밀히 주의를 기울였다. 지휘에서 그가 가르쳐 준 중요한 원칙은 불필요한 동작이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요란한 몸짓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 그는 오른손이 단지 박자를 젓는 역할
뿐 아니라 지휘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오케스트라에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5.아이에서 어른으로
제 1 빈악파-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 제 2 빈악파-쇠베르크, 알반 베르크, 베버른
스토코프스키가 대단한 쇼맨쉽을 지니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그는 오케스트라에 대해
상세한 기술적 지식을 지니고 있었고 소리나 음색에 대한 몰입도도 전혀 쇼맨쉽이 아니었다.
대사는 물론 악보 상의 모든 음표를 외우고 나서 리허설에 임하는 그의 모습은 경이적이었다 .
미니애폴리스의 음악 감독 시절에는 미국 신작을 세계 초연할 예정이었는데 , 단원용 악보는 첫
리허설 전날에야 도착했고 지휘자가 쓰는 총보는 오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단원용 악보를
집으로 가져가 마루에다 오케스트라 좌석 배치에 따라 악보를 펼쳐 놓고 밤새 작품을 다 외운 뒤
다음 날 아침에는 역시 암보 리허설을 했다고 한다. 그는 대단한 집중력과 성실성을 보여 준 순수한
음악인이었다.
퀠릭은 “물론 네 연주는 효과적이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만 때로는 기나긴 선율과 구조상의
아름다움을 위해 순간적 아름다움은 희생해야 한다”고 내게 말해줬다 . 어릴 적부터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에 아주 낯선 개념은 아니었지만 쿠벨릭은 너무나 분명하고 적절한 때에 명확하게
집어냈기 때문에 언제나 기억에 남아있었다. 나는 음악가나 인간으로서 그에게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몇 안되는 진정한 독립적 음악가 가운데 하나였다 . 그는 어떠한 예술적 타협
없이, 언제나 안이하고 손쉬운 노선이 아니라 힘든 길을 택했다.
피아노가 중립적이고 악기 자체의 흥미가 덜하다는 점 때문에 거꾸로 우리는 피아노에 다양한
색채를 입혀 나갈 수 있다. 무척 단순한 원리다. 피아노로는 단일 음표를 아름답게 만들 수가 없다 .
피아노 연주에서 가장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는 화가가 말하는 원근법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림을 들여다볼 때, 어떤 부분은 가깝게 보이지만 다른 부분은 아주 멀게 느껴진다 .
피아노의 경우도 비슷하다. 우리는 레가토라는 환상을 빚어낼 수 있는 것이다 . 마치 성악가가
포르타멘토를 들리게 하려면 하나의 음표에서 다른 음표로 끊어지지 않고 옮겨가야 한다 .
음반으로만 알 수 있지만, 부소니나 오이겐 달베르트 같은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은 어떤 형태로운
이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피아노로 연주하는 음표들은 어떤 음표가 귀에 조금 더 가깝게
들리도록 균형이 잡혀 있다 . 이는 두 손은 두 개의 단위가 아니라 하나 혹은 열 개의 단위를
의미한다고 말했던 이치와 같다 . 무엇보다 손가락의 독립성이 중요하며 이런 의미에서
피아니스트들은 끊임없이 바흐의 푸가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어떤 악기를 연주하든지 지휘하든 노래를 하든, 1 백분의 1 초라도 그 전에 미리 머릿속에서 소리를
그려놓을 때만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낼 수 있다. 이 점은 음악에서 가르쳐줄 수 없는 부분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손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 번 g 장조의 도입부
화음에서 두개의 D 음과 세개의 G 음, 다시 세개의 B 음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
어떤 음역에서 음표들이 커지는 경향이 있다든지, 엄지손가락은 새끼 손가락보다 더 많은 무게가
실린다든지 같은 사항은 얼마든지 가르쳐줄 수 있다 . 하지만 설령 내가 설명한 것과 다를지라도 ,
학생이 직접 연주하기 전에 머릿속으로 소리를 상상해낼 수 없다면 , 그는 결코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얻을 수 없다. 내적인 귀를 통해서 소리를 듣고 자신이 원하는 프레이즈를 구사하는 것은
가장 본질적인 능력 가운데 하나다.
음악을 향한 몰입이나 음악가와 음악의 관계 역시 말로는 가르칠 수가 없다 . 음악에는 설명할 수
있는 요소가 많으며, 직관에만 의존하지 않는 것도 많다. 하지만 몰입만큼은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음악가의 위대함은 실제 연주에서 보여주는 열정의 강조를 통해 측정할 수 있다. 실례로
스포르찬도를 연주하면서도 거칠게 들리지 않으려면 음표 자체에 의존해야 한다. 주어진 그 순간에
표현해 낼 수 없다면 거의 육체적 고통을 느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단지 “내가 의도했던 것보다
악센트가 너무 거칠었다”고 말하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음악인이 음악에 보여주는 몰입의
정도는 청중에게도 전달되어야 하며, 청중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연주는 잘한다는 것은 기술적 측면과 음악적 측면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문제다. 둘은 분리할 수
없으며 테크닉상의 모든 문제 해결은 음악적 표현에도 영향을 낳는다. 손가락의 빠르기와 관련된
기술적 문제를 해결한 뒤에 음악성, 프레이징이나 음악적 표현을 보태겠다고 하면 너무 늦다 . 이
때문에 나는 결코 기계적으로 연습하지 않는다 . 처음부터 일정한 통합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
기계적으로 공부하다보면 음악의 본질 자체를 변질시킬 위험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예술’을
창조적 상상력이 담긴 작품에 필요한 기술을 적용시키는 것으로 정의하다 보면 , 오늘날 종종
오해하듯이 ‘테크닉’을 기계적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순전히 기계적인 것으 기술로 간주할 수 없다.
음악에는 단순한 몇가지 원칙이 있다. 기계적으로 훈련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수동적으로
영감을 기다려서는 안되며 ,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방법과 실제 표현 사이의 연결고리를
의식적으로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다. 이성적, 감성적, 기술적, 그리고 음악적 요소처럼 겉보기에
상반되는 요소들은 사실 분리되지 않는다. 음악연주는 반드시 의식적인 과정이어야 한다. 영감이나
직관이라는 것은 기초 작업을 마친 뒤에 보다 쉽게 찾아오는 법이다.
나는 음악을 직업이라기보다는 삶의 방식으로 여긴다 . 몰입니다 완벽한 집중은 해석가나
연주자에게 일종의 필수조건이다. 듣는 이의 즐거움을 위해 의식적으로 음아을 전달하다보면 그
즉시 연주의 성격도 변화한다. 우리의 생각이 그냥 멋대로 굴러가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된다 .
관객들과 의사 소통을 나눌 수 있는 최선책을 우리 자신과 소통하고 우리가 연주하는 음악과
교감을 나누는 것이다.
모든 예술 작품은 ‘두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영원으로 향하고 다른 하나는 그 당대로
향한다. 특정 시기에는 그 시대의 고유한 관습이나 유행이 존재하며 어떤 작품들은 한 시대를
표현한다. 작품은 이러한 면모는 낡은 것이 되어, 미래 세대에는 더 이상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하지만 작품이 지닌 정신, 즉 본질은 여전히 남는다. 따라서 음악은 완벽하게 독립적이다.
음악은 존재하거나 이해를 받기 위해 과학이나 다른 예술의 도움을 받거나 그 가치를 입증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 음악 작품 그 자체로 ,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바라봐야 한다 . 음악은
아무리 긍정적이나 자선적이더라도 특정 목적을 위해 창작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
음악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유용한 목적을 위해 이용될 수는 있지만 음악 자체에는 그러한
성격을 내포하고 있지 안하. 음악은 다른 사물에 대한 묘사다 아니다. 음악으 자선적이지도
악의적이지도 않다. 피상적으로는 우리는 음악이 새나 바다의 파도 같은 소리를 흉내낼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건 사소한 사항일 뿐이다. 특정한 음악적 분위기를 통해 우리는 사랑의 장면이나 위엄
넘치는 장면을 연상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환기 작용은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하는 것이지 음악
자체에 내포된 것은 아니다. 나는 종종 같은 음악 작품을 놓고도 서로 다른 시기에 완전히 다른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가 슬플 때는 음악 작품이 비애를 북돋고 , 거꾸로 행복할 때는 같은
작품이 즐거움을 고취시키기도 한다고 하면 지나친 단순화일지 모르겠다.
스스로에게 정직한 예술가라면 우리가 제멋대로 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 음악
연주에서 다시 일 상생 활로 돌아가 기 란 무척 힘들다 . 음악을 할 때 필요한 품성이 반드시
일상에서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고유한 예술 분야에서는 결단력과 열정과
권위를 지녀야 하지만 자신의 삶에서는 그런 특별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다.
처음에는 예술 작품을 순수하게 맞부딪혀야 한다. 그 다음의 복잡한 단계에서 분석과 관찰을 통해
배우고 작업하는 것이며 이상적으로 세 번째 단계에서는 예술 작품에 대한 이해가 늘어나 일종의
의식적인 순진성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철학적 개념에 대해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감정이
곧바로 감상적이라는 걸 뜻하지 않듯이, 천진난만하다가 유치하다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예술이나
음악 표현에서 아이 같은 천진난민함은 지극히 중요하다. 극소수의 예술가만 이 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데 피셔가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6.영국
내 생각에 모든 연주 행위의 근본은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것에서 나온다 . 한 예로 피아니스트처럼
단 한 명이 연주하고 있을 때에도 한 손이나 개별 손가락은 다른 손이나 손가락의 연주에 귀
기울여야 하고 개별적으로 연주해서는 안된다 . 두 명이 연주하면서부터는 음악적 표현의 기본은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일에서 출발한다 . 귀를 기울이다(listening)는 것은 듣는다 (hearing)는
것보다 훨씬 능동적인 과정이다. 단지 자신의 선율을 계속해 연주해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동시에 동료의 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무척 까다롭다.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와의 작업은 다른 여러 가지와 함께 악단의 추진력과 힘이 단원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줬다. 음악적으로 말해서 지휘자는 필연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조직 (organize)해야
하고, 자신의 사고와 개성을 악단에 불어넣어야 한다. 하지만 체임버 오케스트라에서는 이러한
관료적인 마음가짐으로 연주할 수가 없다. 단원들로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 점은
나중에 교향악단과 일하면서도 의식적으로 살려나가기 위해 노력한 대목이다. 잉글리쉬 체임버
단원들은 아 티큘레이션과 프레이징에 대해 각자 분 명한 관점을 지니고 있었고 나는 이를
표현하거나 힘을 유지할 때 더욱 폭 넓게 만들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7.지휘와 실내악에 대해
일류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질문을 던지면 그는 아마도 교향악단에 영향을 미치는 지휘자가 거의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단원들은 지휘자가 지정해준 박자와 그가 원하는 뉘앙스와 균형을 살려서
연주하겠지만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좋은 지휘자를 만나면 강한 음악적 교감이 일어나 지휘자의
손이나 손가락, 아주 작은 눈짓이나 몸짓에도 반응을 보인다 . 악단이 그런 지휘자와 함께 있으면
곧게 몸을 세우거나 앞이나 옆이나 뒤로 굽히는 것만으로도 다르게 연주한다 . 단원들은 모든
동작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더구나 지휘자의 업비트(upbeat, 지휘봉의 상향동작)는 처음 소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 그의 업비트에 권위가 실려 있지 않으면 단원들이 지휘자를 완전히
무시하고 연주하지 않는 한, 사운드는 죽게 된다. 단원들이 지휘자들을 위해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으면 즉 그가 자신들에게 전달해 줄 것이 없다고 여기면 예전에 수천 번은 했던 방식으로
베토벤의 교향곡을 그냥 연주할 것이다. 반대로 지휘자를 존경한다면 첫 지휘 동작부터 지휘자와
함께 할 것이다. 또한 딱딱하든 부드럽든 소리에 관계없이 첫 음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음을 지속하는 방식이나 어느 정도까지 울려야 하는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좋은 지휘자는 마디나 박자마다 지휘봉을 흔들지 않는다. 거꾸로 오케스트아와 청중이 아예 마디나
박자를 잊게끔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프레이즈는 특정한 수의 마디로 구성되어 있지만 모든
마디나 한마디 내의 박자마다 지휘봉을 흔들면, 음악을 가장 초보적인 수둔으로 떨어뜨리게 된다.
사전에 모든 동작을 계산에 넣는 식으로는 지휘를 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스스로 옭아맬 뿐이다.
모든 동작은 오케스트라 전체나 일부에게 하나의 신호가 되어야 한다. 악기나 노래는 직감으로 할
수 있다 해도, 지휘는 본능만으로는 할 수 없다. 오케스트라에 대한 지휘자의 영향력이나 소통은
반드시 이성적 바탕 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이 프레이즈는 네 마디로 구성되어 있고 저기에선
여덟 마디로 되어 있ㅇ며 어디가 절정인지도 알고 있어야 한다 .기악 독주자나 성악가라해도
전적으로 직감에 의존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로 직감을 많이 이용하게 된다.
피아노와 포르테 사이의 관계를 뜻하는 강약부터 예로 들어보자 . 얼마만큼의 데시벨이 피아노를
뜻하며 조금 더 크면 메조포르테가 된다는 식으로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박자
역시 절대적이지 않다. 균형감, 강세, 비브라토 등 다른 요소들이 적절할 때에만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다. 바이올리니스트는 무척 빠른 박자로 연주할 때 특절한 유형의 비브라토로 연주한다 .
지휘자는 박자를 조정해 달라고 요청할 경우에 아티큘레이션이나 음질에도 (sound quality)반드시
변화가 따라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변화는 보잉(bowing)에서 시작한다. 보잉의 속도가 그
방향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대인 국가의 존리을 위해서라도 그런 관용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관용을 베풀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 시절 오랫동안 겪었던 경험으로 인한 관점과
태도를 상당히 바꾸려는 의식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방인같은 비유대인에 대한 표현은 유대인이
소수였던 상황에서는 자기 방어의 의미로 심지어 금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9.가곡와 객원 지휘
디스카우와 작업하면서 나는 언어와 음악을 결합 시키는 방법 , 단어의 의미, 음악에 따른 음절의
소리까지 독일어에 대해 많은 걸 배웠다. 한 예로 그는 복수의 자음이 모음 앞에 있으면 그 다음은
반드시 음표 이전에 나와야 한다는 것과 같은 기포적인 사실부터 내게 일러줬다. 디스카우는 현대
음악에 활발한 관심을 보여 준 몇 안 되는 성악가 가운데 하나다. 치마로사의 오페라 ‘비밀결혼’도
그와 함께 녹음 했는데 그가 예술적 직감과 독일 특유의 완벽성을 통해 어떻게 이탈리어뿐만
아니라 유머 넘치는 인물의 특징까지 잡아내는지 보면서 매혹되고 말았다. 피아니스트가 가곡
레퍼토리를 알고 연주한다는 것은 무척 유익한 일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목소리는 가장 직접적인
악기다. 독일 가곡처럼 가사가 있는 음악을 연주하다보면 생생한 언어나 놀라운 생각이 노랫말에
나올 때 음악을 연주 하다보면 생생한 언어나 놀라운 생각이 노랫말에 나올 때 음악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실례로 죽음(tod)라는 말이 슈베르트의 가곡에서 나타나면
화성이나 리듬에도 뭔가 이례적인 변화가 생긴다 . 라틴계 언어들은 계속 진행하려는 경향이 있다 .
모든 단어의 끝에 악센트가 오는 프랑스어가 단적인 예다 . 반면 독일어는 밀어붙이는 대신, 오히려
뒤로 잡아두려고 한다. 언어의 실제 발성에서 비롯하는 것의로 모차르트가 아주 훌륭한 사례다.
기막힌 기술적 완성도, 무얼 주의깊게 들어야 할지, 정확한 음량의 크기와 아티큘레이션까지 꿰고
있고, 전설적인 투명한 질감을(texture)지니고 있었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클리블랜드에 가지 않은 건, 중요한 음악 직책에 필요한 경험이 부족했따는 점에서 내겐 불행 중
다행이었다. 재능에만 의존하는 것보다 나쁜건 없었다 . 재능과 경험, 음악적이고 인간적인
성숙까지 모두 겸비해야 한다. 이 오케스트라를 이끌기에는 내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
아니라, 객원 지휘자로 소중한 경험을 쌓으면서 피아노 연주도 계속해 나갈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상입 자리는 계속 주저하고 있었다.
강약의 체계를 결정짓는 것은 음악적 내용이라고 보아야 한다. 특정 악기나 악기군이 우위에 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악기가 다 들리게 하고 악기나 성부 간의 질서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악기나 성부 간의 올바른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절대적이다. 이 점은 주어진 박자에
영향을 미치는 완벽한 중량감을 부여한다 . 다시 말해, 운동 중인 물체의 무게가 그 움직임도
결정짓는 것이다.
11.오페라
무대에서 성악가들의 신체동작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 음악적으로나
성악적으로 지극히 까다로운 대목에서 바닥에 눕거나 무릎을 꿇기도 한다. 자세가 아니라 타이밍을
우선시할 필요가 있다. 호흡이라는 측면에서 성악가가 그에 맞는 적절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
시점은 언제인가, 성각가가 무대 위에서 필요한 동작을 해야 하는 때는 언제인가 ? 음악과 연기를
때로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부딪치기도 하지만 언제나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이럴 때에만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이상적인 경지에 이를 수 있다 .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다. 가끔은 연기와
음악이 나란히 갈 때 최대한의 표현을 빚어낼 수 있따 . 음악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고 음악이
빚어내는 시간이라는 요소를 이해하지 못하는 연출가와는 오페라를 제작할 수 없다 . 구어로 된
원문에서는 모든 음절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지만 오페라에서는 상당수는 음악의 길이에 의해
조절된다.
연출가와 지휘자 사이의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무척 밀도 있는 악보를 지니고 있지만
극적 집중력이 떨어진다든지, 연기 수준은 높지만 거꾸로 음악적 밀도가 낮다면 그 프로덕션은
제대로 됐다고 할 수 없다.
12.시카고
몇 세대를 거쳐 형성된 이 오케스트라의 전형적인 특성만큼은 간식하고 싶었다 . 명확한
아티큘레이션, 투명한 리듬, 깨끗한 음정, 아무런 치장 없이 극도로 명징한 프레이징을 찾아내서
이를 보존하려고 애썼다. 솔티는 언제나 메트로놈으로 박자를 체크한 뒤에 그 박자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박자를 결정하는 것이 언제나 우선이었고 그 박자에
어떤 내용물을 집어넣을 수 있을지 생각한다 . 내 접근 방식은 정반대다. 나는 박자를 예감하면서
출발한다. 우리는 박자가 아니라 음표나 음악을 듣는것이다 . 박자는 음악에 긴장을 불어넣는데
필요한 투명성과 명확성, 음량 등 모든 것이 들리도록 하는데 필요한 속도를 뜻한다. 이는 음악을
준비하거나 생각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박자는 가방에 해당하고 음악은 내용물인 것이다 . 박자는 음악의 내용에 필요한 정확한 속도를
제공하므로 마지막에 결정하는 것이다 . 객원 지휘자는 리허설할 때 연주회 프로그램을 가능한
최상의 수준으로 지휘하기 위해 준비하려고 애썼다 . 하지만 음악 감독이 된 뒤에는 리허설에서
소리, 프레이징, 아티큘레이션과 음정에 대해 오케스트라와 생각을 공유하고발전 시키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음악 감독일 때에만 용납될 수 있는 전혀 다른 접근법인 것이다 . 음악 연주에서
통일성을 빚어내는 것은 음악 감독의 권리이자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지휘자는 단원들을 가르칠
수 있고 이전보다 좋은 연주를 할 수 있게 독려할 수 있다.
나는 소리와 침묵의 관계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써왔다 . 하지만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에게는 이 점이 천성처럼 자연스럽지 않았다. 나는 첫번째 음을 시작하기 전이 아니라 시작한
뒤에야 음악에 대해 생각한다는 느낌을 빈번하게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소리의 시작(attack)도
내가 원해던 것보다 날카로워지곤 했다. 소리, 프레이징,박자의 유연성은 많은 단원들에게는 낯선
개념들이었고 특히 오랫동안 오케스트라에 재직했던 단원들에게는 더욱더 그랬다. 매 번 원점에서
새롭게 시작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해 단순히 작품을 잘 준비해서 가능한 한 자주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매번 연주회를 완벽하게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매번 연주회를 완벽하게 반복할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다보면 단원들의
삶은 좀 더 편안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 이처럼 틀에 박힌 것은 음악 연주의 적이다 . 나는
단원들이 매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려고 애썼다 . 전날 연주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사운드는 새롭게 만들어내야 했다. 때문에 매번 리허설에서 중요한 지점이 어디이고 어느 곳이 덜
중요한지, 강조점을 분명하게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시멘트처럼 고정 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소리가 세상에 나오는 바로 그 순간에 생겨나도록 해야 한다. 이는 무대 위의
모든 단원들에게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 한 걸음 물러나 앉아서 예전에 해 왔던
식으로 반복하는 편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서로 듣는
것이다. 단지 서로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악기 간에 끊임없이 상호 교감을 빚어내는 것이다. 개인
실력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최소한 동등할 정도로 중요하다. 개인 실력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최소한 동등할 정도로 중요하다. 나는 초반부터 이를 이뤄내려는 욕심에
사로 잡혔다. 단원 개인의 유연성과 창조성을 용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요구하기도
하면서 나는 초기부터 오케스트라에서 ‘안전함’을 치워버리려고 했다. 예를 들어 소리가 갈라질
수도 있기 때문에 금관 섹션에서 지나치게 작게 연주하는 것은 위험하다 . 반대로 마디의 매
박자마다 강세를 주면 현악기들이 함께 연주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 많은 단원들이 서로 안
맞을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이렇게 연주하려고 하겠지만 내게는 너무 낯설기만 하다 .
음악은 그저 안전하게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음악은 용기이며, 용기는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작품에서는 노력이라는 요소 자체가 음악의 내적 본질을 이 룬다 . 편안하게
흘러가는 듯 베토벤을 연주하는 건 그의 음악이 지닌 본질과 어긋나는 것이다 . 수비토 피아노(
갑자기 여리게)직전에 크레센도를 최대한으로 끌고 가고 바로 피아노 앞에서 급격하게 크기를
떨어뜨리는 건 대단한 에너지와 수고를 필요로 하며 음악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반대로 더욱
어려운 기교의 음악에서는 힘을 들이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시카고 심포니처럼 아무런 제약 없는 기술적 능력을 지닌 오케스트라가 갑자기 어떤 대목에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관점과 맞부딪치자 상당히 힘들어 했다.
13.베를린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예술 감독의 직책을 맡는다는 것은 오랜 전통과 새로운 출발을 결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 나는 악단의 수준이 무척 높다는 걸 알고 먼지를
떨어내기 시작했다. 순전히 음악적 의미에서 나는 음정 , 통일된 소리의 시작과 통합된 목표를
지니는 앙상블 연주를 드러냈다 . 그리고 조금씩 오케스트라의 높은 수준에 대한 내 짐작이
옳았으며 , 모든 것이 빠르게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고 느 꼈다 . 전반적인 태도만이 아니라
프레이징과 사운드에 대한 탐구, 타고난 음악적 정합성 같은 올바른 주제에 대한 몰입이라는
점에서도 오케스트라의 실력은 무척 대단했다. 하지만 일일 위생(daily hygiene)은 실시해야 했다.
나는 전체주의국가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들과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단원들은 오랫동안
자유나 바깥 세계와의 접촉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에서도 여러모로 불안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부딪치는 가장 어려운 점은 어떤 일이 금지 됐다는 사실이 아니라
두려움이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감정이 된다는 점이다 . 동료나 가족과의 소통을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기를 겁내는 것이다. 몇몇 단원들은 오페라 하우스에 올 때면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다고 했지만 미래에 대한 우려와 불안감이 강했고, 그런 감정이 사라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전통에 대한 단원들의 감정은 보존되어 있었따 . 그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환경을 고려하면 놀랄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서방으로 불리는 외부세계과의 접촉은 거의 없었고, 덕분에 전통을
파괴할만한 요소가 유입되는 일도 적었다.
음악가들이 성장하기 위한 의욕과 적절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으면 이미 한계에 다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결과를 이뤄낼 수 있다. 어떤 성각가가 오디션에서 잠재력의 최대치를 냈다는 걸
았았다면 그 최대치는 반드시 대단히 높아야만 했다.
15.오늘날의 이스라엘
1989 년 11 월의 베를린 장벽 붕괴는 이스라엘을 포함해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심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 내게도 장벽은 단순한 물리적 경계만은 아니었다 . 선과 악, 진보와
퇴보라는 두 세계가 존재한다는 상징이기도 했다 . 각자 서로 다른 편을 반대편을 불러왔다. 서방
세계는 소련의 영향권에 있는 세계를 악의 제국으로 불렀고 반대 편도 마찬가지였다. 장벽이
붕괴되자 더 이상 국경도 없고, 금지된 영역도 없고, 금지된 사상도 없을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거대한 낙관주의가 만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벽 붕괴로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불확실성한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추종해야 할 이데올로기가 사라졌고 자의든 타의든
각자의 편에서 해답을 주는 것처럼 보였던 시스템 역시 없었다 .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 무엇을
보존해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진정으로 알지 못한 채, 그저 예전 문제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1989 년 11 월의 사건에 따른 결과들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었다. 더 많은 자유를 가질수록 더 많은 의무가 따르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이제 어떠한 반대도
없는 자유, 순전히 낙관적인 생각과 행동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경험하고 있다. 상대를 헐뜯고
공격하는데 써야 했던 모든 시간과 정력은 갑자기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활용할 수 있게 됐다 . 실제
그렇게 되었는지는 의문스 럽지만 말이다 . 이같은 상황을 보면서 1967 년 초를 떠올렸다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협상에서 주요 이슈는 팔레스타인 주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었다.하지만 1967 년의 상처와 뒤이은 결과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와 비슷했다. 두 상황
모두 행복감에 만연했다. 이스라엘의 경우 군사적 승리 이후에 평화적 해결책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상대편의 요구에 대해선 그 무엇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행복감 이후 종종 깊은
우울증이 찾아오는데 이스라엘와 독일의 두 경우 모두 정확히 해당하는 말이었다. 중동 평화
협상은 1991 년 시작됐다. 내 생각에 이스라엘 국가는 확실히 두 개의 시기로 구분 되는 것 같다.
하나는 1967 년에 지속된 시기이며 다른 하나는 1967 년부터 시작하는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