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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라 문무왕 이후로 2 번째로 통일 국가를 이룩한 지도자이다. 신라의 경우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
고구려를 쳤고, 결과적으로도 고구려의 고토는 대부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가절하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발해마저 없었다면... 신라가 북진했을지도?
2. 생애[편집]
2.1. 성장기[편집]
이후에도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수차례 승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정에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궁예로부터 왕에 다음 가는 지위인 파진찬 겸 시중 벼슬을 받았다.
그야말로 엄친아, 먼치킨급. 그러나 궁예의 막장 행보가 더더욱 거세지고, 심지어 궁예가 서서히
자신에게 의심을 가질 낌새를 보이기 시작하자 위험을 직감하고 '근래에 나주 쪽의 정국이 불안하니
자기가 가서 지키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시중 자리를 스스로 내놓은 후 나주로 가 궁예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2.2. 고려 건국[편집]
이러한 궁예의 행동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다. 대체적으로 궁예가 호족들을 압박하기 위해 당시 잘 나가던
왕건을 일부러 걸고 넘어져 무언의 경고를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궁예는 왕권 강화를 위해
심지어는 패서 호족들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었던 자신의 부인인 강비와 그 소생 왕자들까지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강비의 죽음으로 동요하는 패서 호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는 해석도 있긴 하다. 왕건도
역심을 실토했으니 너희들이라고 무사할 것 같으냐?라는 것. 궁예가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갑자기 시중
벼슬에 있는 인물을 증거도 없이 역적으로 몰리도 없고, 게다가 역적 모의를 시인했음에도 정직하다는
칭찬과 함께 금은보화를 하사했다는 점에서 왕건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궁예의 수작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 일로 왕건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일단 그 자신이 시중 벼슬에 있으면서 호족들 가운데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의 세력가였으므로 자신도 궁예에게 숙청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러던 상황에 고려의 4 대 개국공신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찾아와 지금의 왕은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으니 시중이 왕위에 올라야 합니다라고 간청하였으나 왕건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부인인 신혜왕후 유씨가 갑옷을 내와 직접 입혀주면서 무언의 설득을 시도하였고 마침내 왕건도
결단을 내려 충성을 맹세한 4 명의 무장들과 함께 궐기하였으며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 :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형님 폐하! 918 년 6 월 15 일 고려를 건국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혹을 약간 넘긴 42 세였다. 이듬해 왕건은 도읍을 철원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옮겼다.
고려의 왕이 된 왕건은 초기에 큰 난관에 부딪혔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사실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이들을 잘 구슬려 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이 급선무였던 왕건은 후백제 왕 견훤과
화친을 맺고 충돌은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견훤이 신라의 요충지였던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자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후백제의 군대와
조물성에서 충돌한다. 그러나 양 측의 힘이 비등하여 승부를 내기가 힘들어지자 서로 간에 인질을
교환하여 다시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고려에 인질로 가 있던 견훤의 조카가 갑작스레 병사하자 견훤은
왕건을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고려와 후백제는 다시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견훤은 수많은 전투를 통해 다져진 노련한 전술과 만만치 않은 실력으로 왕건을 몰아 붙였다. 왕건은
견훤에게 수 차례 패하며 수세에 몰렸는데, 특히 공산 전투에서는 1 만 명, 연구에 따라 2 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고 개국 공신이었던 신숭겸마저 전사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왕건은 신숭겸의 도움으로
황급히 도망가면서 대구의 많은 지역의 이름을 붙여줬다. 이 도주 루트를 따라 대구시가 신숭겸 장군
유적지에서 안심역에 이르는 팔공산 왕건 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태조 왕건에서는 후백제로 투항한 호족과 장수들의 가족을 모조리 철퇴로 때려죽이고 시신은 까마귀 밥이
되게 하였다. 칼 대신 철퇴로 죽인 이유는 시신이 온전하게 보존되지 않는 처형법이기 때문...
정사에서도 왕건이 이렇게 혹독하게 법을 시행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적었다.
이 전투의 무대가 되었던 안동 지역의 세 호족 가문이 왕건을 지원해 주었던 것이 승리의 요인이었는데,
왕건 특유의 넓은 포용력과 친신라 정책이 토착 세력들의 호감을 끌었던 듯하다. 승리 후에 왕건은 안동의
호족들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이때 왕건에게 벼슬을 받았던 김선평, 권행, 장정필이 안동 김씨, 권씨,
장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안동 삼태사'라 부른다.
결국 후계자 문제에 휘말려 아들이었던 신검에게 왕위를 강탈당하고 유폐되었던 견훤이 고려에 귀순하였다.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여 대인배의 면모를 드러내어 민심을 얻고 이를 후백제와의 결전에서도 잘 이용할
수 있음을 간파한다. 이후 후백제를 칠 때 견훤도 동행했는데 견훤이 있는 것을 본 후백제 장수 중 일부가
"어? 저기 우리 대왕님이 계시네?" 하고는 그대로 항복했다. 이는 후백제 내에서 인망은 신검보다 견훤이
한 수 위라는 사실.
왕건은 한때는 원수였던 견훤을 상보 어르신이라 부르며 극진히 대접하였다고 전해진다. 상보라는 호칭을
처음 쓴것은 인질을 교환해 화친을 한 후로, 이 때는 손위의 큰형님이나 작은 숙부 정도로 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헌데 귀순 후에는 표면적인 호칭을 상보라 했을 뿐, 진짜 적국의 전왕 + 신라인에게는 천하의
개쌍놈 + 빈털터리에 아무 힘도 없는 거지노인인 견훤에게 재산 짱짱하게 주고 궁을 집으로 삼아 살게
하는 등 숫제 태상황급 취급이었다.
상보란 한자로 尙父로 쓰며, 이때는 아비'부'가 아닌 어르신'보'로 새겨읽으므로 상부가 아닌 상보가
정확하다. 왕이 손위의 권신에게 사여하는 존칭으로서, "그대는 우리 아버지(즉 선왕)보다 못하지 않음"
정도의 뉘앙스. 그런데 왕건과 견훤은 10 살 차이. 이렇게 견훤마저도 왕건에게 큰 대접을 받자 견훤은
감화되었다고 전해진다.
왕건이 견훤마저도 거두어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후에 신라도 고려에 투항해왔고, 발해가 멸망한 후에
태자 대광현('왕계'라는 이름을 하사 받고 고려 왕족이 됨)이 유민들을 이끌고 망명하자 이 또한
받아들이니, 이 시점에서 고려의 국력은 이미 후백제를 훨씬 압도하였다.
이 때에 신검은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몇 개월만에 간신히 내란을 평정하여 왕위에 올라 왕건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왕건이 발해계 세력과 북방의 이민족, 그리고 견훤을 비롯한 한반도
남부 일대의 세력을 아우른 10 만의 대군을 이끌고 내려오자 후백제는 망했어요... 마침내 후삼국시대를
50 년만에 종결시켜 삼국 통일을 이루는 대업을 이루었다.
후삼국의 통일 사업을 완수한 후에는 국가의 체계와 기틀을 잡는 한편 장남이었던 왕무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정치적 공작을 벌이기도 하였다. 왕무는 왕건이 왕위에 오르기 전, 궁예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하던
시기에 얻은 아내로부터 얻은 아들이었으나 그 외가 쪽 가문의 세력이 무척 한미하였기 때문에 다른
쟁쟁한 호족들로 부터 얻은 아들들이 왕위를 탐낼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왕건이 이렇게 장남을 후계자로 삼으려 노력한 것은 장남을 무시하였다가 결국 나라를 망국의 지경에
이르게 했던 일생의 라이벌 견훤의 선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하여간,
이 덕분에 본래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하였던 장남 왕무가 훗날에 왕건의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왕건은 최후에 자신이 무척 아꼈던 충복이었던 강직한 재상 박술희와 왕규를 불러들여 아들의
후견인 역할을 맡기고 그를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고려의 왕이라면 국가를 다스리는데
참고해야 할 훈요 10 조를 남기고 사망하였다. 다만 훈요 10 조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문서 참고.
2.5. 최후[편집]
그러자 신하들은 왕건이 세상을 뜬 줄 알고 큰 소리로 통곡을 했는데 말이 없던 왕건이 갑자기 신하들에게
"이게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다. 그래도 신하들은 오열을 멈추지 않고 "성상께서는 백성의 부모이신데
오늘 신하와 백성들을 버리려 하시니 신들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혼란스러웠던
후삼국을 통일하고 오백년 고려의 왕업을 다진 이 난세의 영웅은 다음과 같이 의미 있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웃더니 잠시 후 정말로 세상을 떠났다.
죽은 뒤에는 현릉(顯陵)에 안장됐는데, 이후 고려가 여요전쟁, 여몽전쟁을 하면서 왕건의 유골도 적에게
능욕당함을 막기 위해 강화도 등지로 여기저기 이동해야 했다.
3. 능력[편집]
공산 전투에서는 견훤을 무리하게 추격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탈탈 털려서 신숭겸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죽을 뻔 했고, 장기인 해전에서도 비록 나중에 되찾았다고는 하나 나주를 빼앗기는 등, 나중에는 견훤이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 이후의 결정적 전투에서는 확실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왕건의 진정한 장점은 궁극의 화친 능력과 유화력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를 회유하여 상주 지방을 영향권에 들게 하고, 견훤이 세운 신라의 왕인 경순왕도 아군으로
끌어들여 신라를 자신의 편으로 붙게 했다. 또한 한창 수세에 몰려 있던 전세를 역전시킨 고창 전투에서의
승리도 토착 호족 세력의 마음을 빼앗은 덕분에 가능했었다. 놀라운 수준의 화친 능력으로 호족 세력을
계속 끌어모으니 결국 견훤은 궁지에 몰렸고, 마침내는 최대의 적이었던 견훤마저 아군으로 삼았다.
4. 정치 스타일[편집]
따라서 왕건은 회유책과 강경책을 병용해 호족들의 충성을 얻는 것과 동시에 조금씩 견제해 나갔다.
우선, 회유책으로는 정략결혼, 사성 정책, 역분전 정책이 있었다. 정략결혼은 이 항목에 들어올
위키러들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그 정략결혼이다. 그런데 호족들이 상당히 많은지라 왕비가 수십 명이었다.
왕후가 6 명에 부인이 23 명. 당연히 정략 결혼에는 한계가 있었고, 이를 보완하는 것이 사성정책이다.
사성(賜姓)이란 글자대로 '성을 주다'라는 뜻으로, 공이 있는 호족에게 왕씨 성을 내려 충성을 얻는
것이다. 또한 지방 호족들에게 땅을 지급하는 역분전 정책도 사용했다. 그리고 지방마다 일부러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아 호족들이 기존에 누리던 기득권을 인정해 주었다.
강경책으로는 기인 제도, 사심관 제도를 썼다. 상수리 제도를 기초로 삼는 기인 제도는 호족의 자식들을
개경에 머물게 하며 사실상 인질로 삼는 것이다. 피 같은 자식들의 목숨이 왕건 손에 있으니 호족들은
반기를 들 수 없었다. 기인 제도로 자살하는 호족의 자녀들도 있었다고 한다.
사심관 제도는 중앙 정부에서 지방마다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만큼,
자신의 지방에서 자치 (정확히는 지방에 준 행정, 치안상의 특권. 즉, 기득권)가 막장일 경우 곧,
반란이나 봉기가 일어나게 한다던가 아니면 지방민들에게 너무 가혹한 정치를 펼처서 중앙 정부의
귀에까지 그 소식이 들린다던가 하는 경우에 연대책임을 물게 하는 제도였다. 또한 삼국 통일 이후에
공신들에게 녹읍을 최대한 주지 않아 경제적 기반 확대를 막으려 했다.
때문에 조선 시대에도 불교는 개인신앙으로써 큰 역할을 차지했다. 팔관회나 연등회같이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규모는 아니여도 흉년이 들거나 하면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국가 차원에서 여는 불교 행사도
있었고 국가 차원에서 건립한 사찰도 어느 정도 있었다.
고려 시대는 유교가 본격적으로 종교적 색채를 띄기 시작하는 성리학이 등장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유교는
학문으로서 받아들여지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종교로선 불교가 선택되고, 실제 통치 이념은
유교에서 기반한 경우가 많았다. 성리학이 등장하기 전의 고려에선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형태를 띄지만,
성리학 도입 이후인 공민왕 대에 들어서면 유학자들이 가차없이 불교를 비판하여 공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며 이후 조선이 건국되어 성리학을 국교로 삼음으로서 불교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새 왕조를 창업한 왕건으로서는 신라의 국교가 불교였던지라, 국민의 대다수인 불교 신자와 충돌하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훈요 10 조에서도 팔관회, 연등회를 거르지 말라고 할 정도의 엄청난 불교빠.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 불교 행사가 지나치게 화려해진 탓에 불교 행사들이 민중고를 일으켜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 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몇십년간 폐지시킨 적은 있다.
거란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표명했다. 왕건 이전의 궁예는 거란과 친교 노선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사 이외국기 고려편에 보면 915 년 10 월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보검을 진상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
때는 궁예가 집권하던 시기였다.
왕건이 이러한 반 거란 정책을 펼친 이유는 발해의 멸망과 관계가 있는데 발해가 과거 거란과 친하게
지내다가 거꾸로 멸망당했고,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많이 유입이 됐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유에서라도
거란을 적대시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고려의 상황은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발해 유민들은
왕건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존재였다. 멀리 보기 보단 가까이에 있는 이득을 취하는 왕건의 특성상 그에겐
최선의 선택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거란를 적대시 함으로서 길고 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도
자신의 책 성호사설에서 왕건의 선택을 비판하기도 했다.그런데 이건 어쩔수 없는것이 발해는 당시
고구려유민이 세운 국가였고 왕건역시 혈통으론 고구려유민이었기 때문에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그렇게
좋게볼리 만무했다.
5. 평가[편집]
왕건은 이념과 시대에 관계없이 평가가 매우 후하다.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 유민을 포용하여
이후 남, 북한 분단까지 천 년간 이어지는 단일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역사 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고려 - 조선 교체기처럼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고대를
청산하고 중세를 열었다는 점도 높이 평가받는다.
5.1. 비판[편집]
더불어 왕족들의 성씨를 정하는 제도도 설정하게 되는데 이것도 특이한 방식이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왕씨와 결혼한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왕씨 성을 따르지만 딸을 낳으면 할머니의 성을 따른다. 가령
드라마화로 인지도가 있는 천추태후의 경우 왕건의 친손녀이지만 성씨는 할머니에서 따 온 황보씨였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인 경종과 근친혼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후계 구도를 엉성하게 잡아서 아들 혜종의 위치를 위태롭게 했다. 후견인이라고 붙여준 것이
박술희인데 박술희는 왕건이 아끼던 인물이긴 했으되 힘이 없었고 그렇다고 모계 쪽이 힘있는 호족도
아니었다. 상기했듯 오다련은 진짜 나주 호족도 아니고 세력을 가질만큼 강한 인물도 못됐다. 그렇다면
사돈 가문이라도 힘있는 가문을 들여야 했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후삼국 통일을 이룬 왕건의 업적과 이후 한국사의 흐름에 미친 영향은 분명 굉장히 크다고 볼 수 있으나
현대 한국인들에게 왕건의 인기는 한국사에서 가장 인기있는 몇몇 위인들(광개토대왕,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등)보다는 한 수 아래로 여겨지는 듯 하다.
6. 왕건 상[편집]
머리엔 통천관(通天冠)을 쓰고있으며 몸은 나체다. 연구에 따르면 고려 시대의 인물상은 나체로 동상을
만든 뒤 그 위에 실제 옷을 입혔는데 현재 옷은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있던 탓에 사라졌다. 청동상 발굴시
발 쪽에서 비단 조각이 나왔고 허리띠의 일부로 보이는 유물이 나오기도 했다. 기록에도 왕건 청동상에
입힐 비단 옷과 옥대(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봉헌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유물과 사료가 교차
검증이 된다.
부인이 많기로 유명하다.[7]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태조가 많은 부인을 가졌다는 사실 정도는 알
정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즉위 초 불안한 왕권과 낮은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유력 귀족들과 혼인을
통해 혈맹을 맺는 혼인정책을 펼쳤다. 사서 등 알려진 바에 따르면, 29 명[8]의 부인을 두고 있고 부인들
모두는 유력 지방 호족이거나 공신들의 딸이다. 이 혼인 정책은 태조가 살아있을 때는 그들의 딸을 인질로
삼아 반역을 억제하는 기능을 하였지만, 사후에는 유력 귀족을 외가로 둔 쟁쟁한 왕자들 덕분에 왕위
쟁탈전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재밌는 점은 태조 왕건이 왕건을 주인공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긴 하지만 왕건이 최초로 등장한 사극은
아니라는 것이다.
왕건이 직접 죽였다고 확실히 기록된 전 왕족은 후백제의 양검, 용검 정도인데 양검과 용검은 불효자 +
역적이라 사실 죽어 마땅한 짓을 한 인간들인 데다, 이들의 아버지인 견훤부터가 이들을 죽이라고
왕건에게 종용했다. 신검 또한 결국 왕건에게 죽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 인간도 불효자 + 역적 수괴
입장이라는 걸 감안하면 역시나 죽는 게 당연하다. [10] 이후 후백제의 견씨나 신라의 김씨, 박씨, 석씨
등을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기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11]
왕건과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비슷한데, 둘 다 지방 세력가에서 출발해서 아버지와 함께 자기가
뒤엎은 나라에 투항했고 거기서 무공을 세워 세력을 쌓은 뒤 왕위에 올랐다. 단 끝은 왕건이 더 좋았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
또한 1970 년에도 왕건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태조 왕건>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왕건이 궁예의
폭정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궐기하여 고려를 세우는 과정을 영화화한 듯.
1978 년 KBS 에서 방영한 인형극 쌍룡검의 주인공이 왕건이다. 여기서는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의
설화부터 시작해서 신라 왕자 궁예가 애꾸가 되는 에피소드, 견훤의 아버지가 지렁이라는 설화 등도 다
나오는지라 정작 주인공 왕건의 등장 장면은 상당히 늦은 편이다. 어린이용 인형극이었지만 관련 설화들도
상세히 설명되고 내용도 드라마틱하고 캐릭터들의 개성도 뚜렸한 상당한 수작이었다. 이 인형극을
기억하는 세대는 드라마 왕건보다 오히려 더 나았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1. 소개[편집]
'무(武)'라는 이름대로 대단한 무골이었는지, 자신을 시해하려고 침소에 난입한 자객을 맨손으로
때려잡기도 했고 젊었을 시절에는 왕건을 따라 여러 전장을 누비며 후삼국 통일에 군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는 조선 정종과 닮은 점이기도 하다. 이렇듯 그는 아버지 왕건의 고려 창업에 전공을 세웠던 무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재위 기간이 짧았고 실권이 약했기 때문에 후대에 나약한 임금이었다는 오해를 샀다.
그러나 태조 왕건의 적통을 이어받아 왕위에 오른 혜종의 위상은 남다른 바가 있으니 고려사(高麗史)
태묘악장(太廟樂章)에서 혜종은 어느 왕들보다 칭송을 받게 된다.본인의 성품은 인자하고 부드러웠으며
지혜로웠다고 하지만 암살 시도 후 불안감이 절정에 달해 조울증 증세도 보였다고 한다.
2. 생애[편집]
2.1. 탄생 설화[편집]
조선 세종대왕 때에 서술된 고려사에 따르면, 어머니 오씨는 시냇가 빨래터 설화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왕건이 나주를 점령한 뒤 시냇가를 지나게 되었는데, 마침 오씨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는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우연히 보게 된 오씨가 맘에 든 왕건은, 그날 밤 그녀와
동침하였다. 오씨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그녀를 단순한 쾌락의 대상으로 여겼는지, 아니면 임신시킬
것을 두려워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왕건은 깔고 누운 돗자리에 질외사정을 하였다. 하지만 왕건의
됨됨이를 살핀 오씨는 그가 돗자리 위에 사정한 정액을 손으로 쓸어 모아 그것을 자신의 질에 넣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혜종이었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일이 정말로 태조와 오씨 부인이 동침했던 그날 밤에 일어났는지 아니면
일어나지 않았는지가 역사라기보다는, 민중들 사이에서 이러한 일이 회자되었다는 사실이 역사라는 점이다.
다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어났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첫째, 아무도 혜종의 혈통을 의심하지 않았다.
설화대로라면 오씨는 야욕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왕의 자식을 낳았는데 왕이 모른 척 하진 않을테니까.
이렇게 되면 설령 자식을 낳지 못했다면 엉뚱한 아이를 데리고 가서 왕건의 아이라고 우길 수도 있다.
왕건으로서는 의심되어도 뾰족한 수가 없는 정도지만, 왕건의 다른 왕비들은 "웬 듣보잡 계집이 왕을
우롱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이것은 왕건이 자식을 얻기 위해서 하룻밤을
같이 했다고 해야 맞아떨어진다. 그러니 오씨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생각해서, 아들이 더 있어도
혜종을 태자에 앉혔을 것이다. 둘째, 아무도 혜종을 이런 이유로 욕하지 않았다. 오씨의 행위는
수군거림의 대상으로는 충분하고, 그렇기에 아들인 혜종에 대해서도 "저런 엄마의 아들이 다르겠어?"
라고 두고두고 욕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이런 정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후삼국 통일의 최후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무공을 세울 정도로 혜종 자신은 녹록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문제는 그의 외가인 나주 오씨가 아버지 왕건의 다른 처가들보다 세력이 미약한 탓에 정적들의 위협에
시달리며 지내야 했다는 것.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혜종의 외가는 한때 나름 나주에서 한가닥 하는
집안이긴 했다. 왕건의 나주 상륙 작전 때도 나주의 호족들을 대표해 내응할 정도였고 이미 사실상 왕건의
장인이었던 정주의 대호족 유천궁이 내심 반발했을 텐데도 딸을 왕건의 첩도 아닌 둘째 정실부인으로
밀어넣을 수 있었다면 분명히 세력이 있긴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중에 견훤의 나주 탈환 작전으로 인해
가문의 기반을 몽땅 잃어버리는 바람에 사위인 왕건만 바라보고 사는 안습한 처지가 되었고, 그 와중에
왕건은 전국 최고의 호족들과 정략결혼을 계속 하다보니 영 비교가 되었던 것. 29 명의 부인들 가운데에는
신성왕후 김씨 같은 신라 왕족,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고의 혈통으로 치던 진골 귀족 출신도
있었다. 왕건은 경순왕에게 딸 낙랑공주를 시집 보내면서 동시에 경순왕의 딸을 아내로 맞으려 했는데
본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장인이자 사위, 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붓어머니인 동시에 의붓딸이 되는
막장 족보가 출현할 뻔..., 당시 경순왕에겐 시집보낼 만한 딸이 없어서 그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과
혼인했던 것.
《고려사》 혜종 2 년의 기사
혜종의 장인인 왕규가 그를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는데, 자객은 왕의 처소에 구멍을 내어 침입하였고,
시위하고 있던 내시를 칼등으로 내리쳐 기절시켰다. 자객은 혜종이 덮고 있던 이불을 찔렀는데 그것은
지푸라기였다. 이러한 사태를 예상하였던 혜종은 이미 낌새를 차리고 피해있었는데, 목표를 놓치고
당황해 하던 자객에게 "무엇을 찾느냐(!)"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정신을 차린 자객은 칼을 들고 혜종을
시해하려 했으나, 혜종은 칼끝을 날렵하게 피하며 맨주먹으로 자객의 인중을 가격했다. 왕을 시해하려는
자객이었던 만큼 무예가 특출했을 터인데 혜종은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객을 맨손으로 제압한
것이다.
이렇듯 그는 선왕의 창업에 무공을 세웠고 자신을 시해하려던 자객까지 맨손으로 잡을 정도의 강인한
무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위 기간이 짧았고 실권이 약했기 때문에 후대에 들어 나약한 왕이었다는
오해를 샀다. 진정한 의미의 권왕
그는 신체는 강건했지만 심성이 선하고 유약하며 권력 기반이 약했던 탓에 쉽사리 정적들을 제거하지
못하였으며,[4] 공신이자 자신의 장인인 왕규의 음모에 휘둘렸고, 동생들의 권력 다툼을 외면하고
방치한채 공포와 불안에 떨다가 승하하고 말았다. 하지만 앞서 설명하였듯, 그는 여러 번에 걸쳐 암살될
뻔한 전력이 있었으며 또한 건강하였던 그가 아무런 징후 없이 갑작스레 승하했기에 그의 죽음을 호족들에
의한 시해로 보기도 한다.[5]
파일:attachment/22_4.jpg
개성에 있는 혜종의 순릉(順陵). 2009 년의 모습으로 봉분이 깎여있었을 뿐더러 석물까지 사라졌다고
한다. 조선유물고적도보를 보면 일제 시기까지는 묘지 난간은 있었다. 고종 때 거란이 개경 인근까지
침입하였는데, 이때 순릉이 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파일:attachment/혜종/hyejong.jpg
태조 왕건에서는 안정훈이 맡았다. (안정훈은) 1969 년 생으로 극중 어머니인 염정아 (1972 년 생)보다
나이가 많아 다소 어울리지 않는 캐스팅이었다는 평이 있었다. 제국의 아침에서는 노영국이 역을 맡았다.
전작 <태조 왕건>에서 왕건 역 물망에 한때 거론되었으나 탁월한 연기력을 가졌음에도 많은 나이 때문에
캐스팅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노영국이 맡은 혜종은 캐릭터가 확 바뀌어 버린 사례로 꼽힌다.
후계자 문제를 빨리 정하지 못해 내분이 일어났던 후백제와 달리 왕무는 왕건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찌감치
정윤에 봉해져 후계 구도가 튼튼했다는 것도 대조적인 부분. 특히 왕무는 나이 터울이 얼마 되지 않았던
신검 형제들과 달리 동생들과 나이 터울이 많았기에 동생들이 궁에서 한창 자랄 때 이미 전장에서
아버지를 보좌하면서 경험을 쌓음으로서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그랬는데 노영국이 혜종을 맡은 제국의 아침에는 통일이 되고 즉위한 몇 년 사이에 심신이 상하기라도 한
건지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 다만 제국의 아침에서는 이 이유로 백제와의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난전 도중 수많은 시체와 피로 인한 공포로 인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것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제국의
아침 시절에도 동생들인 정종, 광종보다도 왕으로서의 위엄을 보인다는 평가가 있는 것을 보면 꼭
나약하게만 묘사되진 않은 듯.
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도 혜종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혜종은 왕관을 쓰는 장면만 몇 초 나오고 그
이후로는 나오지 않았다. 이 드라마에서 중심이 되는 시대는 정종 시대이기 때문에 혜종은 태조에서
정종으로 넘어가는 중간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혜종은 몇초만 나온 엑스트라이기 때문에
등장인물 설명에도 안 나온다. 조금만 파고들면 굉장히 복잡하다. 일단 혜종의 죽음이 굉장히 의문이
가득한데다 왕소는 혜종의 사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 표현하려면 원래 드라마의 이야기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종은 왕식렴에게 휘둘리지 않고 개경 일대를 피바다를 만든 사람이기에.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는 김산호가 맡았다. 힘없고 신분이 미천한 외가 때문에 출신의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인 태조 왕건이 아들 중 가장 그를 많이 사랑하였고 아꼈지만 왕이 되고
나서 불안정한 왕권과 대정으로 맡긴 동생 왕욱에게 그는 수은으로 점점 중독된 채 독이 퍼져 몸과 정신이
약해졌고.. 광종이 되는 왕소에게 딸을 시집 보내고 선위를 하고 의지해 자신과 가족들을 살리려는 계획을
하였지만.. 쿠데타가 일어나 정종이 되는 왕요에게 다미원에서 비참하게 피를 토하며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죽게 된다.
3 대 정종 왕요 (923~949) 재위 945~949
1. 개요[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2.2. 왕권 강화 추진[편집]
혜종은 외가인 나주 오씨 가문이 왕건의 다른 자제들의 가문에 비해 한미한 편인지라 지지기반이 미약한
상태에서 왕위에 올라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심지어 자신을 암살하려 한 자객을 체포하고도 취조하기는
커녕 책임조차 묻지 못했다.[2]
정종은 즉위한 이래로 붕어할 때까지 정적들의 힘을 억누르고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의 정착을 위한 개혁에 힘썼으나 어째서인지 그 결과는 대개 안습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2.2.1. 피의 숙청[편집]
그런데 박술희는 몰라도 왕규는 조금 애매한 경우다. 왕규는 혜종에게 왕요와 왕소를 죽이자고 했으나,
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왕소에게 딸을 시집 보내는 등 왕규의 뜻과 대치했다.
그리고 나중에 혜종이 병에 들자, 박술희와 왕규는 백여명에 호위병으로 대치하는 등 대립이 극의 달했다.
아무래도 왕소와 왕요 처리를 두고 대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2.2.2. 서경 천도 시도[편집]
정종은 이미 민심이 떠나간 개경에서는 더이상 자신의 뜻을 펼치기가 힘들다고 여겼다. 때문에 아예
개경을 떠나기 위해 수도를 서경(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계획하였다. 천도를 계획할 당시에는 개경의
지기가 나빠져 나라의 도읍으로 삼기 힘들다는 점과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고구려의 고토 회복에
유리하다는 점을 핑계로 댔다.
2.2.3. 광군 편성[편집]
정종은 한편으로는 거란의 침공에 대비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30 만명의 광군을
조직하여 호족들로 하여금 이를 지휘하도록 하게 하였으나 이 역시 정종의 뜻대로 되지 못하고 점차
흐지부지해졌다. 개국 초의 고려는 30 만이나 되는 군대를 제대로 운용할 정도의 국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그냥 예비군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후진에 유학 차 머무르고 있다가 거란에 포로가 된 후 관리가
된 최광윤이 거란의 침략 의도를 눈치채고 글을 써서 알려왔다. 이에 조정에서 광군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런저런 개혁이 연이어서 실패하자 정종은 마음이 약해졌는지 즉위 과정에서 인명을 지나치게 살상한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말년에는 사찰에 곡식을 시주하고 직접 걸어가서
개국사에 불사리를 봉안하기도 하였는데 아마 개인적인 죄책감을 씻기 위한 행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혹은 서경 천도가 반대의 부딪치자 민심을 달래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서경 천도를 위해 주로 동원 될
백성들은 패서 일대 백성이고 송악도 예외는 아닐 것이 분명하기에.
그러던 중, 여진의 사신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내려친 천둥 소리에 놀라 쓰러진 후, 병을 얻더니
급기야는 병상에 눕게 되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든든한 후원자였던 왕식렴이 죽자 상심이 커져 병이 더욱
악화되었고 재위 4 년만인 949 년에 27 세의 나이로 붕어하는 비운을 맞았다.
실제 후에 광종은 태조의 4 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 아우인 왕욱의 아들, 즉 자신의 조카인 성종을
사위로 삼기도 했다. 자신의 맏딸인 문덕왕후 유씨를 성종에게 재가시켰다. 문덕왕후 유씨는 이미 왕족
인물이었던 홍덕원군 왕규에게 시집을 가 딸 한명을 낳았으나 이후 성종과 재혼했다. 여담으로 문덕왕후
유씨가 낳은 딸은 후에 목종의 왕비가 된다.
경춘원군은 후백제왕 견훤의 외손녀 문성왕후의 아들이다. 정종의 부인은 모두 견훤의 딸인 국대부인과
박영규의 딸이다. 경춘원군이 왕위를 이었다면 대대로 견훤의 피가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무산됐다.
정종이 27 세에 요절했으니 경춘원군의 나이는 잘해봐야 10 세 전후일테니...설사 경춘원군이 왕위를
물려받았어도 고려 헌종처럼 숙부에게 눌려지내거나 심할 경우 폐위되버렸을지도... 물론 왕위에
오른다는 가정의 전제 하에서.
알려진 사서의 기록과는 달리 박술희를 살해한 것도 그이고 반란의 주동자로 알려졌던 왕규를 살해한 뒤
그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웠다는 가설도 존재한다.
왕규와 박술희는 태조로부터 혜종을 보필하도록 당부까지 받은 처지였던 이들이라 서로 불화를 일으킬
사이도 아니었다. 고려사 박술희 열전에 따르면 혜종이 병에 들자 백여명에 호위를 이끌고 왕규와
대립했다고 한다. 왕규는 왕소와 왕요를 제거하고자 했는데 박술희는 이에 대해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혜종도 마찬가지라서 왕소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사실상 왕규와 뜻을 달리 한 것 이다.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서로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해주는 정치적 동반자에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이다.
박술희는 후삼국 통일에 군공을 세울 정도로 녹록치 않은 인물이었지만 친위 무장의 성격이 강했기에
정치적 기반이 부족했고, 광주의 호족 출신인 왕규는 왕씨 성을 하사받고 대중 외교의 중책을 맡을 정도로
왕건이 총애했던 인물이지만 기본적으로 문신이었기에 군사적 기반이 없었다.
정종께서는 임금의 형제로 왕위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노력하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구하셨습니다.
때로는 촛불을 밝혀들고 조정의 선비를 접견하셨고, 또 어떤 때는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서 모든
정사를 듣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즉위한 초기에 사람들이 모두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참을 그릇되게 믿게 되자 도읍을 옮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게다가 천성이 굳세시어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고, 급박하게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니, 비록 임금의
생각이 옳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은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원망과 비방이 이로 인해 일어났고 재난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재빨리 응하여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지도 못하고 임금의 자리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3. 대중 매체에서[편집]
KBS 제국의 아침에서는 최재성이 맡아 출연했고, MBC 빛나거나 미치거나 에서는 류승수가 이 인물을
맡았다. SBS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 정종 왕요를 맡은 배우는 홍종현.
4 대 광종 왕소 (925~975) 재위 949~975
1. 개요[편집]
고려 초기의 개혁 군주
세조 같은 정치로 세종대왕 같은 업적을 남긴 피의 명군
2. 즉위까지[편집]
3. 국가 기틀 확립[편집]
한편으로는 천태종에 간접적으로 기여한 인물이기도 한데, 당시 중국은 천태종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회창법난(842 년 ~ 845 년 당나라 무종의 불교 말살 정책)으로 불교 전적들이 엄청난 손실을 입어 중국
본토에는 불교 전적들이 많이 부족했다. 그러나 광종이 중국의 요청으로 고려에 남아 있던 천태종 관련
서적들을 중국에 보내는 동시에 천태종 승려 제관을 중국으로 보냈고, 제관이 중국에서 살다 죽으면서
그가 남긴 유작 <천태사교의>는 한중일 삼국의 천태학 교과서가 되었다.
3.1. 노비안검법[편집]
광종은 중국의 마지막 오대 왕조인 후주 출신의 쌍기를 등용한 후 그의 제안으로 958 년(광종 9 년)에
호족들의 직위 세습을 막고 이미 중국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과거제를 한반도에서 최초로 실시하였다.
중국에서 과거제가 최초로 정착된 수나라와 당나라가 그랬듯, 귀족적 관료제의 특성을 벗어나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과거제 실시는 그 의미가 상당히 크다. 고려 이전 신라 하대의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가
시행됐지만 하급 관리에 제한되어 실시하였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광종의 과거제 도입은 한반도에 중앙 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확립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958 년에
도입된 이 과거제는 이후 900 년 넘게 실시되다가 1894 년 조선의 갑오개혁 때 폐지된다.
3.3. 공복 제정[편집]
3.4. 외교[편집]
4. 왕권 강화[편집]
개혁 과정에서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 세력을 우대해 호족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어 쌍기에게 주기도
했는데 이걸 두고 광종에게 '내 집도 바칠 테니 그냥 쌍기에게 주셈'하면서 비아냥이 담긴 직언을 한
서필이라는 신하가 있었다고 한다. 광종은 그의 말에 느낀 바가 있어 특별 대우를 줄였다고 전해진다. 이
서필의 아들이 훗날 요나라의 1 차 침공에서 외교 담판으로 고려를 구원한 서희이다. 또 서희의 아들은
서눌인데 서필, 서희, 서눌 3 대는 살아서는 재상의 지위에 올랐고, 죽어서는 3 대가 모두 배향공신에
봉해지는 등 큰 영광을 누렸다.
쌍기의 아버지 쌍철은 아들이 고려에서 귀빈 대우를 받자 본인도 고려 사람으로 귀화해 고관 자리에
올랐다. 호족들을 견제한 광종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다분히 의도적인 처우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이러한 처우는 국내 관료들의 불만을 사게 된 원인이 되어 광종 사후 최승로의 <5 조 정적평>, 이제현의 <
사략>에서 그를 비판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4.2. 피의 군주[편집]
광종은 자신의 의욕적인 왕권 강화 정책 때문에 분노한 호족들의 반발과 암살 위협에 대응하여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호족이나 반대 세력들은 가차없이 제거하는 강경책을 추진했다.
4.3. 불교 통합[편집]
5. 평가[편집]
반면에 광종은 전국 각지에 깔려있는 호족들, 자신의 동네에서는 왕 노릇하며 중앙의 왕실을 우습게
여기고 왕에게 반항하기를 예사로 하는 그 호족들, 항상 자신들 입맛에 맞는 왕으로 갈아치우려고
뒷공작질을 하고 제위에 오른 두명의 형들을 비명에 죽게 한 바로 그 호족들을 모조리 박살내고 왕권을
확립해야 했기 때문에 훨씬 더 과격한 방식으로 숙청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광종은 이방원보다는, 차라리 주군인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배신하고 눈을 뽑아
생매장해버린 토착 귀족(보야르)들을 때려잡은 복수귀 왈라키아 대공 블라드 체페쉬에 더 가깝다고 볼
수있다.
단적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후비는 29 명이나 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호족 집안의 딸이었다. 자연히 광종이
제거하거나 견제해야 할 외척들만 해도 이방원보다 훨씬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결코 믿을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사실 광종이 숙청을 단행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근본적으로 왕건의 과실인 것은 맞다. 다만 상황이
많이 꼬인 것도 있지만. 왕건이 1 비 신혜왕후 유씨가 낳은 자식을 태자로 세울 수 있었다면 이 정도의
분란까지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신혜왕후가 자식도 없이 리타이어하는 바람에 위협거리도 안되는
집안 출신 세컨드의 아들이 적장자가 되어버린 상태에서 3 비와 4 비는 알짜배기 대호족 출신이고 5 비는
신라 진골 귀족 출신, 6 비는 1 비가 죽었다고 해서 장인인 유긍달의 가문에 다시 장가들어 얻은
왕후였으니... 아무리 동맹 정책이 중요하다고 해도 이건 대놓고 혜종은 걍 죽여버리고 나머지 아들
놈들끼리 싸우라고 분위기 조성한 것이나 다를 게 없다. 게다가 23 명의 후궁들 중 몇몇은 아예 박씨
가문에서 숙모 - 질녀 - 사촌 자매 관계인 여자들을 단체로 후궁으로 들이는가 하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충신인 유금필의 딸을 후궁으로 들였던 것으로 보아서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그냥 만만한 놈들 딸들을
성욕 해소 도구로 들여오는 목적이 있지 않았나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혜종 설화에 나오는
장화왕후에 대한 왕건의 난봉꾼 짓[13]이 설명되며, 이것이 후계에 분란거리를 던져놓은 셈이다.
결과적으로 혜종은 왕건의 실책으로 불안감 속에서 아무 것도 못하고 죽었으며 정종부터 본격적으로
숙청에 들어가 광종 대에 들어서야 마무리를 짓게 된다.그가 이렇게 숙청을 한덕분에 후대왕인 성종 현종
덕종 문종 숙종등의 군주들이 마음껏 정사를 펼쳤고 고려의 황금기 100 년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했다.단점도
있었는데 당시 대상을 가리고 숙청을 했던 태종과달리 그는 자신의 외가 와 친조카 동생들까지 모조리
숙청하는 바람에 왕을 지지해주는 근왕세력까지 숙청한것 게다가 아들까지 의심해 아들인 경종은 진시과를
시행하는등 꽤치적을 남겼지만 말년에 아버지에게 받은 학대때문에 고생을 했다. 게다가 요나라를
선제공격하는 바람에 후에 왕인 성종 현종등이 요와 대대적인 전쟁을 치뤄야했다.
6. 왕릉[편집]
7. 가족 관계[편집]
대목왕후는 태조 왕건과 왕건의 제 4 비 신정왕후 황보씨의 딸로, 광종과 대목왕후는 이복 남매다. 혜종과
정종은 왕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호족들과의 정략 혼인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광종과 다른
자식들에게서도 왕위 계승의 가능성을 생각한 왕건은 광종 이하의 자식들을 대부분 족내혼시켰다. 광종과
대목왕후의 혼인은 그 첫 케이스.
8. 미디어믹스[편집]
미디어 매체에서 상대적으로 덜 다뤄지는 경향이 있는 고려 초기의 임금들 중에서는 미디어 매체에서 가장
많이 출연한 군주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의 미디어 매체에서는 고려의 창건자이자 아버지인 왕건보다도 더
많이 창작물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편.
8.1. 드라마[편집]
•KBS 1TV 에서 방영한, 부왕인 태조를 드라마화한 태조 왕건 이후 제작된 드라마 제국의 아침은 이
광종이 주인공이다. 부자가 연속으로 같은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사극 주인공이 된 사례. 배우는 김상중.
광종 그것이 알고 싶다, 고음 주의 태조 왕건과 달리 이 드라마는 별로 흥행하지 못했으나 김상중의 광종
연기는 매우 뛰어났기에 2003 년의 KBS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MBC 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는 장혁이 연기했다. 특히 '빛나거나 미치거나'라는 드라마 제목이
고려의 기틀을 완비한 빛나는(光) 군주임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을 미치광이처럼(狂) 죽인 군주라는
양면성을 가진 광종을 잘 빗댄 제목이라는 칭찬이 있었다. 다만 드라마에서는 왕소의 왕자 시절만 다룰 뿐,
광종으로 즉위한 뒤의 행보는 다루지 않는다.
9. 기타[편집]
5 대 경종 왕주 (955~981) 재위 975~981
1. 소개[편집]
2. 생애[편집]
문제는 호족들에게 합법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터진다. 이 법안을 통과시킨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일단 경종은 효도를 강조했던 성향을 보건데 진짜 복수법이 옳다 생각하고 승인했을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광종 시절 득세했던 세력들이 모조리 버로우하게 되었던 것으로 볼 때 이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이를 악용하는 문제가 생겼고, 이 와중에 경종의 두 삼촌이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하지만 말년에는 여색과 바둑에만 몰두하였는데 이는 광종 시절의 공포정치와 그 이후로 끊임없이 반복된
호족들 사이의 정쟁, 그리고 복수법의 참상으로 인해 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똑같이 정치에 환멸을 느껴서 노는 소년이 된 만력제와 비슷하다.
王溫良仁惠, 不好遊戲. 末年, 厭倦萬機, 日事娛樂, 沈溺聲色. 且好圍碁, 昵近小人, 踈遠君子, 由是,
政敎衰替.
왕은 성품이 따뜻하고 어질었으며 놀이 따위는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말년에는 정치에 염증을 내어 매일
오락을 일삼고 주색에 탐닉했다. 또 바둑을 좋아하며 소인들을 가까이 하고 군자들을 멀리하니 이 때문에
정치와 교화가 점점 쇠퇴해졌다.
《고려사》
3. 평가[편집]
분명 복수법이라는 명백한 병크를 저질렀고 말년엔 개판이었지만, 후대의 평가가 나쁘지만은 않은 왕이며
동정 여론도 많다. 전시과라는 훌륭한 제도도 성립시켰다는 점을 볼 때 나름 유능한 면모도 존재했다.
어떻게 보면 혜종, 광종으로 이어지는 개국 초창기의 혼란기이자 과도기 때 제 뜻을 제대로 펴 보지도
못하고 희생당한 비운의 암군으로 평가도 가능하다.
4. 가족 관계[편집]
한마디로 경종은 자신의 사촌, 외사촌, 고종사촌과 결혼한 셈이 된다. 그야말로 근친혼의 끝판왕이다.
5. 왕릉[편집]
6. 논란[편집]
太平二年丁丑七月九日古石佛在如賜乙重脩爲今上皇帝萬歲願。태 평 이 년 정 축 칠 월 구 일 고 석 불 재
여 사 을 중 수 위 금 상 황 제 만 세 원。
하지만 경종의 독자적인 연호인지의 여부에는 다소 논란이 있다. 당시에 고려는 송나라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고서 연호도 갖다 썼는데 당시 송나라 황제인 송태종의 연호가 태평흥국(太平興國)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6 대 성종 왕치 (960~997) 재위 981~997
1. 소개[편집]
태조와 제 4 비인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의 아들인 왕욱(성종 즉위 후 대종으로 추존)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복 동생으로는 선왕인 경종의 아내가 된 헌애왕후와 헌정왕후가 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할머니인 황보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이미 어릴적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학문에 능했다고 한다.
재위 후 학자 출신의 최승로를 등용, 그의 <시무 28 조>를 받아들여 대대적인 개혁에 힘썼다. 그런데
지금 남아있는 최승로의 주장을 크게 4 가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신하 우대, 불교 약화, 중앙
집권, 신분제 강화. 즉 개혁이라기보다는 고려에 문벌귀족이 등장하게 되는 단초를 열게 된 셈이다.
단적으로 여기서 노비환천법이 등장해서 광종이 평민으로 풀어준 사람들이 다시 노비로 돌아가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하지만 조선 왕조에 말끔히 정리한 향, 소, 부곡민 체제는 여전히 공고했으며 조선 왕조에서 깨끗히
정리한 장원 제도를 도입했던 것이라 매우 경솔했던 판단이었다. 참고로 노비안검법으로 향, 소, 부곡민
체제까지 깨지기 직전까지 갔는데 노비환천법을 도입하면서 역으로 향, 소, 부곡민 체제를 공고히하고
대토지제인 장원제도 도입을 했던 상황이라 매우 근시안적이었다.
한편, 재위 도중 거란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평양 이북을 넘겨줄 뻔 했으나, 명신 서희의 정확한 판단과
재치있는 담판으로 강동 6 주를 획득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놓았다. 사실 이 대목은 서희의 개인 활약이
컸다. 서희를 제외한 조정의 대세는 할지론(땅을 떼어주자는 것)과 항복론 뿐이었다. 이 때를 거란의 제
1 차 침입으로 치며, 자세한 것은 여요전쟁과 서희 항목 참고.
이러니 제대로 된 징세나 징병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이후 고려가 전란을 겪으면서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징병이든 징세든 전국에 걸쳐 공정하게 골고루 시행하지 않고 되는 곳에서만 계속 뽑아먹은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지방 호족들의 불만을 억누르고 지방관 제도의 기반이라도 다졌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성종은 이렇게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과로한 탓인지 아쉽게도 38 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붕어하고
말았다. 붕어하기 직전 왕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대사면을 내리자는 말에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렸는데
그래 봤자 뭐하며 나를 계승할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새 은혜를 베풀 것이냐."며 거절하고 죽었다.
조선의 왕 성종과 사망한 나이가 같은데 우연치고는... 고려 초엔 정략 때문에 왕이 여러 부인을
맞아들였던 때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성종은 조선의 성종에 비하면 여성 편력이 화려하지 않다.
3. 평가[편집]
태조가 고려 왕조를 건국했고, 광종이 고려 왕조라는 나라 자체의 기반을 단단히 마련했다면, 성종은
고려 왕조의 기반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성종 때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고려 왕조 관료제의 기반을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간에는 유교적인 정책을 펼쳤다 하여 불교를 탄압했다는 이미지도 있는 듯 하지만 오히려 유교와 불교의
조화를 꾀하기도 하였다. 비록 백성들에게 유교적 사상을 권장하기는 하였으나 조선 시대 마냥 노골적인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는 것은 피하는 편이었다. 이러한 성종의 성향은 아버지와 태조의 제사를 지낼 때에
유교적인 제사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시켜 불공을 드리게 했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불교가 이미
수백년이 넘도록 백성들 사이에서 신봉되었기 때문이다. 유교 교리가 통치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에도 많은
백성들이 전통적인 불교와 민속 무교를 신봉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 초기에는 조정이 노골적으로 불교를
배척하지 못했다.
"성종(成宗)은 힘써 행하고 조심하며 두려워해서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적전(籍田)을 갈며, 학교를
설립하고 현재(賢才)를 권면하며, 절의를 숭상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휼하며, 모든 제도를 일신(一新)
하였으니, 가히 수성(守成)의 좋은 임금이었습니다."
때문에 문치주의가 극도로 강해졌고, 거란의 1 차 침입에 할지론이 넘쳐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중앙
집권의 과정은 동시에 중앙 귀족의 경쟁 상대였던 지방 호족들을 향리로 굳혀버리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는데 이를 상징하는 것이 향직 개정이었다. 여기에 노비 환천법과 공신 자손 우대 등으로 중앙 귀족을
강화했으니 왕권이 약해지면 바로 귀족 정치가 열리게 되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조선 성종과 다른 것은 소위 장이라는 막장 대토지제인 공음을 가속화시켰고, 부곡민 체제를 허물지
않으면서 노비 환천법을 실행에 옮겼다는 거다. 참고로, 조선 성종은 조선을 건국하는데 일등 공신인
신진 사대부들에게 족쇄나 채우던 제도를 숱하게 남겼다. 고로 비교는 절대 불가다.
6. 능묘[편집]
7 대 목종 왕송 (980~1009) 재위 997~1009
1. 소개[편집]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불과 태어난지 1 년만에 부왕 경종이 붕어하면서 재위는 당숙이자 외삼촌인 성종이 이었다.[2] 그러나
성종 역시 후사가 없었기에, 그 뒤를 이어 18 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즉위 후 어머니에게 '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는 존호를 올렸다. 다만 그녀는 별칭인 '천추태후'로 더
유명하다.
초기에는 제법 의욕적인 면모로 정치를 해 나갔는데, 아버지 경종이 제정한 전시과를 손보고(998 년)
학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줘 학문을 장려했으며, 지방을 순시하며 그 지방의 빈민 구제와 민생 안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서경을 '호경(鎬京)' 이라 이름을 바꾸고 여기에 자주 행차했다. 호경은
주나라의 수도로 종주(宗周)라 불렸고 낙읍은 성주(成周)로 불리었다. 또한 개칭과 동시에 서경의 관부도
태조 대의 낭관으로 환원시켰는데 이는 서경유수로 격하되었던 서경의 권위를 복구시키고 나아가 서경이
고려의 근원지라는 의식의 발호였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북방의 성들을 수축하고 군제를 개편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이 목종의 업적을
섭정하던 어머니 천추태후의 업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목종과 천추태후가 몰락하는 강조의
정변 때 처리를 보면 이 때 숙청된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파가 40 여명에 불과해 왕이 바뀐 정변치고는
숙청된 사람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또한 당시 하공진, 탁사정처럼 목종을 보위하는 무장들도 강조의
정변에 가담하기도 했다. 천추태후가 군제 개편을 해서 군부를 장악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때
목종을 보위한 무장들까지 강조에게 가담한 것을 보면 섭정을 했다고는 해도 천추태후에 대한 불만 세력이
많았으며, 정변 때 숙청된 사람 수를 보면 이는 그녀의 국정 장악력이 생각보다는 대단치 않았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치를 잘 해나가던 목종의 불행은 그의 어머니였던 천추태후가 초래했다. 천추태후는
권력욕에 불타 아들인 목종의 나이가 성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내세워
섭정하였다. 또한,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을 저지른 끝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은 후에
처벌받을 거라는 위기감과 목종에게 후사가 없는 것을 노려 이 아이로 하여금 다음 왕위를 잇게 할 음모를
꾸미게 된 것이다. 목종 역시 저 둘의 사이를 알고 있었지만 다름 아닌 자신의 어머니라서 처벌하지
못했다.
때문에 목종의 뒤를 이을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던 대량원군 왕순을 강제로 승려로 만들어 출가시킨 뒤
삼각산의 신혈사로 보내버렸다. 왕순은 출가한 이후 신혈소군이라 불리었다. 고려 시대엔 왕위 계승권이
미약한 왕자를 소군이라 하여 출사시켜 그 계승권을 박탈시켰는데, 그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말이
좋아서 승려로 만든 것이지, 사실상 왕위에 오를 길을 막아버리기 위해 궁에서 몰아내버린 것이다.
이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계속 대량원군을 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번번히 목종과
신혈사의 승려들이 방해하여 실패하였다.
한편 천추태후의 총애를 받던 김치양의 권세는 대단히 커져서 자신의 친족들을 제멋대로 요직에 앉혀
국정을 어지럽히는가 하면 재물을 긁어 모아서 초호화 저택을 짓는 등 그 사치와 낭비가 매우 극심했다.
이런 인물이 권세를 쥐고 있으니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2.2. 말년[편집]
이처럼 천추태후의 총애를 등에 업은 김치양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목종은 김치양을 견제하려 하였으나
천추태후의 잇달은 훼방으로 실패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목종의 재위 초기에 보였던 의욕이 넘치던
모습은 사라져버렸으며, 신하와의 접견을 거부하거나 향락에 빠지는 등 갑자기 무기력한 군주로 변모했다.
이 모습은 말년에 정치에 뜻을 잃고 항락에 빠져 소일했다는 부왕 경종과 비슷하다.
이 때에 유행간이라는 남자가 등장하여 목종의 동성 연인이 되었다. 유행간은 외모가 아름답고 신체가
뛰어나서 굉장한 미남이었다고 전한다. 이 덕분에 유행간은 목종의 총애를 받았고 별다른 공과 재주도
없이 벼슬과 재물을 얻었다. 이후로 유행간이 목종에게 발해 유민 출신인 유충정이라는 사내를
소개해주기도 했는데 그 역시 미모가 수려하여 목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 때문인지 뒷날의 공민왕과
더불어 남색 경험이 있는 고려 국왕이 되어 버렸다.[3] 단, 공민왕의 남색은 날조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만사에 무관심해진 목종이라도 김치양의 득세는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보다 못한 목종은
양위를 결심한 뒤 몰래 중추원부사 채충순을 불러 신혈사에 있던 대량원군을 불러 오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서북 지역을 지키던 도순검사 강조에게 밀사를 보내어 '김치양 일파를 처단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라'는 지령을 보낸다.
졸지에 믿었던 신하에게 배신당한 목종은 몇몇 궁인들과 함께 어머니인 천추태후를 모시고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 궁인들은 폐위된 목종이 유배갈 때 같이 갔다는 말이 있는 걸로 보아, 불온 세력으로
간주되어 함께 썰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목종은 자신의 신세를 망쳐버린 어머니의 말고삐를 직접 잡아
끌었고, 어머니가 배고프다고 하면 음식을 나눠먹을 정도로 극진히 보살폈다.
그러나 후환이 두려웠던 강조는 부하인 김광보와 안패를 시켜 목종을 추격하게 하였다. 이들은 결국 후에
충주(忠州)로 향하던 목종을 뒤쫓아가서 임진강변의 적성(오늘날의 파주시 적성면 일대)에서 그를
시해하였다.[5] 이렇게 목종은 30 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아들의 죽음을 지켜본 천추태후는
훗날 자신의 세력기반이 있던 황주(黃州)로 가서 여생을 마쳤다.
목종을 시해한 후 강조는 현종에게 "목종이 자살했다"고 보고를 올렸다고 한다. 그후 강조는 민종(愍宗)
이라는 묘호와 공릉(恭陵)이라는 능호를 올렸으나 이후 현종에 의해 목종과 의릉[6]으로 고쳐졌다.[7]
현종은 목종의 시해 사건을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목종이 충주(忠州)로 유배가는 길에 적성현(積城縣)에서
시해당하였는데 훗날 그 곳에서 일단의 무리들로부터 현종이 공격당한 것만 봐도 현종 또한 목종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3. 평가[편집]
여러 가지로 의욕이 넘치는 혈기왕성한 청년 군주였지만 어머니와 김치양 때문(그를 시해한 건 강조였지만
일이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이 둘이 제공했다)에 신세를 망쳐버린 불행한 군주. 어떤 의미에서는
본래 받은 묘호인 '민종'이 그에게 걸맞는 묘호라 하겠다. 또한 병에 걸려 정사를 포기했다는 기록
때문에 병약한 군주로 여겨지기도 쉽겠지만 목종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명궁이었으며 말타기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귀양길에도 자신과 번번히 충돌했던 어머니 천추태후를 극진히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니
개인적으로는 성품이 올바르고 효심도 상당했던 것 같다. 어쩌면 강조의 정변을 당한 이후로 초탈하여
성격에 변화가 왔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4. 동성애[편집]
『고려사』 열전의 유행간 편에서는 목종은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였던 유행간을 매우 아껴서 용양(龍陽)의
관계까지 맺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용양이란 것은 소위 말해 남색(男色), 즉 동성연애와 같은 의미이다.
이후 유행간은 목종의 측근이 되어 별다른 공이나 재주가 없으면서도 합문사인이라는 높은 벼슬에 올라
목종의 곁에서 정사를 좌지우지 했는데, 성품이 오만해서 신하들을 깔보며 고개와 눈짓으로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천추태후(드라마)에는 주인공의 아들인만큼 비중있게 등장. 배우는 불멸의 이순신에서 광해군을 연기했고,
이후 근초고왕에서 아직기를 추노에서 봉림대군역을 맡은 배우 이인. 그런데 이 극에서는 목종이 실제
이룩한 업적을 모두 천추태후에게 빼앗겨 버리고 본인은 대단히 의욕 없는 왕으로 전락해 버렸다.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많이 닮은 편인데다 성종이 아기 때부터 그를 천추태후와 떼어놔 사실상 성종의
아들로 성장했기에, 한 달에 한 번 볼까말까인데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주변 환경과 성향이 다른
친어머니를 어려워했다.
어쨌든 어머니를 싫어하지는 않으나 어머니 옆에 있는 김치양을 싫어해서, 그리고 왕의 자리가 싫어서
김치양과 왕위 관련해서는 어머니에게 매우 대든다. 사촌 동생인 대량원군과는 친한 편. 처음에는 마치
고자처럼 등장하더니 결국 유행간과의 동성 연애도 재현되었다. # 일단 부인이나 후반 갑툭튀한 김씨나
유행간과 할 수 있었던 걸로 봐서 고자는 아니니 다행. 그리고 김치양의 반란 즈음 해서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부인과 어머니를 극진히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지만...팬들 사이에선 다중인격이라는 이미지도 있다.
그야말로 안습.
8 대 현종 왕순 (992~1031) 재위 1009~1031
1. 개요[편집]
문치가 이루어졌으며, 조세와 부역을 경감해주고 뛰어난 인재를 등용했다...온 나라가 평안해지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현종의 치세야말로 주나라의 성왕(成王), 강왕(康王)[2]과 한나라의 문제, 경제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최충
이제현
한반도 유일의 사생아 출신 군주이자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성과를 이끌어낸 위대한 군주.
2. 생애[편집]
사생아로 태어난데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되었고, 목숨을 위협받았던 끝에 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난을
극복하여 고려의 태평성대를 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군주이다. 인생역전 테크를 탄 왕이라는 점에서
고구려의 미천왕과 이미지가 겹친다.
그의 아버지 왕욱은 왕건의 13 번째 아들이며 현종의 할머니이자 왕욱의 어머니는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 김씨다. 그래서 혈통으로 보면 현종은 고려 왕실의 혈통과 신라 왕실의 혈통을
모두 가진 인물인 셈이다.[5]
그런데 문제는 현종의 아버지 왕욱이 조카 딸이 되는 헌정왕후와 정식 혼인이 아니라 사통을 통해 태어난
아이가 바로 대량원군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왕족들은 정권 초기에 근친간의 결혼을 정치적인
이유로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한 고려 왕들은 과부를 후궁으로 들였고
재가 또한 자유로웠기에 재혼 또한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가 된 것은 선왕의 왕후이자 현 국왕의
여동생으로서 지체 높은 신분을 가진 여인이 정식적인 혼인을 하지 않은 채 외간남자와 사통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선왕의 왕후가 사생아를 낳은 게 문제였다.
덧붙여서 현종은 그 전까지 있었던 근친혼에다 친부모의 관계 때문에 친척 관계가 꽤 꼬인다. 모계만 보면
목종의 사촌 동생이지만, 부계만 보면 어머니와 같은 항렬이라서 목종의 당숙이 된다. 그러므로 사촌
누나이자 이모 천추태후의 남편 경종은 현종에게 사촌 형 겸 이모부이며, 의붓아버지는 생략하자. 생모
헌정왕후는 어머니 겸 사촌 누나가 된다. 막장 드라마 또한 외할아버지 대종은 그의 큰아버지이기도 하고.
그리고 할아버지인 왕건의 경우 현종의 외증조부이자 외외증조부(외할머니의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후일의 일이지만 사촌 형이자 외삼촌인 성종의 계후 문화왕후의 딸은 현종의 정실 원정왕후이고, 성종의
후궁 연창궁부인의 딸은 현종의 계후 원화왕후가 되었다. 따라서 성종은 현종의 장인이 되는 셈인데 이
때문에 현종이 태조의 손자 자격이 아닌, 성종의 양자 내지는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6]
당시에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을 하며 성년이 된 목종을 억누르고 섭정하는 등 나라의 실세 행세를 하던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하여금 다음 왕위를 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 천추태후에게
현종의 존재는 후사를 위협하는,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영특하다는
소문이 돌자 천추태후는 위협감을 느꼈는지 결국 현종을 강제로 머리를 깎게한 뒤 삼각산에 있는
신혈사라는 절에 승려로 보내버렸으며 신혈소군(神穴小君)[7]으로 부르게 하고 이후로도 수 차례 살해
시도를 하였다. 이때에 현종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보낸 궁녀들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을 것을
강요받거나 자객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등 그야말로 비참하고도 처절하게 생명줄을 이어나갔다. 왕순이
채충순에게 편지를 보내어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도 안타까움을 느낄 지경.
“간악한 무리들이 사람을 보내어 협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술과 음식을 보냈는데 신은 독약을 넣은
것으로 의심하여 먹지 않고 까마귀와 참새에게 주니 까마귀와 참새가 죽어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절박하니,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불쌍히 여겨 구원하여 주소서.”
그러나 다행히도 목종이 번번히 천추태후의 음모를 눈치채고 훼방을 놓았으며, 신혈사의 승려 '진관(津
寬)'도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보호하였던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천추태후가 어찌나
집요하게 현종을 암살하려 했는지 진관이 현종이 머물던 방 아래에 굴을 파서 현종을 숨겨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시해당하고 천추태후가 실각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강조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참고로 고려사 세가의 현종 총서를 보면, 현종 역시 왕위에 야심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의 현종 총서에는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지었다는 두 수의 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를
읽어보면 꽤 의미심장하다.
시냇물(溪水).
작은 뱀(小蛇).[8]
파일:external/img.ezmember.co.kr/2_1306210103.jpg
여담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 현종이 있었던 '신혈사'는 바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위치한
북한산 진관사다. 진관은 위에 언급된 현종을 보호해 준 승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본래 신혈사는 큰
절이 아니라 진관이 혼자 수행하던 작은 암자였는데, 왕위에 오른 현종이 진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신혈사를 큰 절로 증축해 주었고 진관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도 진관사라고 붙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일대의 지명도 이 이름을 딴 진관동이다. (은평뉴타운이 바로 이곳이다).
이리하여, 1009 년, 결국 우여곡절 끝에 현종은 왕위에 오른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내린 조치가
인상깊은데, 교방(敎坊)을 없애고 궁녀 백여 명을 돌려보냈으며, 낭원정(閬苑亭)을 헐어 진기한 날짐승과
길짐승 및 물고기들을 산과 못에 풀어주었다. 이때 현종이 비록 강조가 정변으로 옹립시킨 왕이지만
자신이 내세운 왕의 권위와 예우가 실추되기를 원하는 권신은 없을테니, 현종 스스로의 결정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강조 입장에서는 목종의 명을 받고 왔다가 카더라에 낚여 일을 저질렀으니 억울할
만도 한데다, 안정복은 아예 현종이 정변의 주체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그 후 문무관료를 재편하고
세금과 요역을 경감해 주었다. 또 거란에 사신을 보내고 군량을 비축하고, 현종 개인으로서도 성종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무난하게 정치를 해나가면서 즉위년 12 월에 하교를 내리는데 즉위 이전까지
겪었던 고난과 이후 현종의 치세를 생각하면 마음에 와 닿는 바가 있다.
“이제 짐이 외람되게 왕업을 이어받아 삼가 큰 사업을 계승하면서, 현도(玄菟)의 봉토를 통치하고 하늘이
돌보아 내린 명령을 받들게 되었다. 그동안 백성들을 자애롭게 기르느라 쉴 틈이 없으면서도 하나의 덕
(德)이라도 미덥지 못할까, 혹은 올바른 윤리가 무너질까 늘 염려했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여론을 듣고
단안을 내렸으니 이는 태평성대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얼마 전 가을철이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안개가 걷히지 않았으며 음양(陰陽)이 뒤죽박죽되어 기후가
불순했다. 이에 더욱 성의껏 정무를 돌보면서 스스로를 통절히 자책하느라, 정전(正殿)에 들지 않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며 부지런히 일하면서 마음과 입으로 빌었더니, 과연 하늘의 감응을 받아 날씨가
맑고 화창해졌다. 이로 보건대 성심을 다하기만 하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으며 재난을 복으로 바꿀 수
있음을 알겠다. 이제부터 가일층 성심을 다하고 두려워함으로써 위로 하늘의 뜻에 부응할 것이며, 더욱
나라를 열심히 돌보고 정사에 정력을 다 바칠 것이다. 그러나 나라의 온갖 일들을 혼자서 처리하기는
어려운 법이니 마땅히 신하의 도움을 받아 함께 성현께서 제시하신 도리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깊이 아로새겨야 할 바를 몇 가지 제시하노라.
재상의 직위는 실로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이니 정치에 있어 임금이 빠뜨리는 것을 보완[彌綸]하고
적절한 정책[謨明]을 건의할 것이며 치국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헤아려 왕업을 도우라. 인재를
가려내고 관리를 선발하는 직무를 맡은 사람들은 초야에 묻힌 현인을 잘 찾아내어 그가 버림받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인사에 공정을 기함으로써 아부하는 무리들의 말을 배격하라.
법령과 규율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죄상을 심리하고 판결을 내림에 있어 죄인을 불쌍히 생각해 가혹한
행위나 형벌을 내리지 말 것이며, 정상을 잘 참작함으로써 억울함이 없도록 하라. 국가 행정의 각 분야를
맡은 사람들은 각별히 서로 협조해 직무를 집행[官聯]하도록 할 것이며 자신이 맡은 업무에 성실히 임하라.
또한 청렴을 장려하고 혼탁한 행동을 방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을 것이며, 멸사봉공의 자세에
어긋나지나 않는지 늘 반성하라.
지방의 목민관들은 각자 애민 정신을 간직하고 만물을 아끼는 마음을 잊지 말라. 변방을 지키는
지휘관들은 부대를 잘 조련하여 용맹한 군사를 길러냄으로써 불의의 사태에 힘써 대비하고 군율의 해이를
경계하라. 아아, 너희들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은 밤낮으로 게으르지 말고 시종일관 충성을 변치 말지어다.
아아! 하늘이 가까이 감시하면서 이미 훈계를 내리셨으니 내 마음이 게으르지 않아 이미 하늘에 감응한
바 있도다. 이제 더욱 정성스럽게 나의 행동을 반성함으로써 나날이 새롭게 경사를 더해가기를 기대하노니
그대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려 미래를 보장받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왕위에 오른뒤 오래지나지 않아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현종 2 년, 요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략을 감행해 온것이다.[9] 결국 현종은 그의 치세에 자신의 목숨과 나라의 존망을 걸고 두
차례에 걸쳐 거란의 침입을 받아야만 했다. 자세한 것은 여요전쟁 항목 참조.
파일:현종의 피난길.png
어쨌든 북방에서 입은 타격도 컸던 데다가 개경의 방비도 만만치 않았고, 보급선이 단절되어 방위군과
추격군 사이에서 포위될 위험을 감지한 소배압은 퇴각을 결정한다. 당시 거란군이 퇴각하자 개경의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면서 개경의 수호신에게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개경에는 송악산의 산신이
밤에 수만 그루의 소나무로 변해 사람 소리를 내자 거란군이 개경의 병력이 많은 줄 알고 퇴각해 버렸다는
전설이 생겼다고 한다. 소배압으로서도 전멸을 피하기 위해 나름 필사적인 선택이었으나 마침내 귀주에서
고려군 주력을 만나게 되었고, 그 결과는 다름 아닌 귀주 대첩이었다(...). 귀주 대첩은 현종 10 년
(1019 년) 2 월 1 일에 있었고, 고려군의 승리를 이끈 강감찬의 개선 행렬은 2 월 5 일에 현종 본인의
영접을 받았다. 현종은 친히 강감찬의 머리에 금으로 된 8 가지의 꽃을 꽂아주었다. 이후 1 년여간 3 차
거란 침입에 대한 전후 복구 작업과 보훈 작업이 이어진다. 이후 현종 11 년(1020 년) 2 월에 현종은
이작인을 거란에 사신으로 보냈다. 거란에게 예전처럼 사대의 예를 다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그러나 사대라고해도 대승을 거둔 이후 상황이니 당연히 발언권에서 고려가 힘을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로서 거란과의 오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기나긴 전쟁을 극복하면서, 현종은 그 와중에 정치 세력들을 잘 다스리고, 쿠데타를 극복하고, 그리고
교과서에서 배우셨겠지만 고려 시대의 본격적인 지방 제도를 정비한 것이 현종입니다. 자기가 나가서 죽을
고생을 해봤잖아요. 왜 죽을 고비를 넘겼을까요? 제도가 정비가 안되어 있으니까요. 지방을 관리가 아닌
토호들이 세력을 키워 다스렸으니까요. 그래서 (현종은) 지방제도 정비하고, 관리들을 보내고,
정치세력을 수합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자기의 치세에, 그리고 전쟁 중에 해내요.
하여간에 이로써 고려는 안보 위협도 해소하고 내정에도 집중할 기회를 맞이하여 모처럼 황금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위업을 이루는 과정에서 온갖 인간적이고 국가적인 역경과 고난을 극복한 현종의
나이는 고작 29 세였다. 과연 후세 사가들의 평가대로 왕재가 충만한 군주였다고 하겠다.
2.5. 전쟁 이후[편집]
현종은 이렇게 고난 끝에 왕이 되어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고 지방 행정 체제를 재정비 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으나 오랜 고생으로 인하여 심신이 지나치게 지쳐있던 탓인지 안타깝게도 재위 22 년만에 40
세의 나이로 일찍 승하했다.
현종이 신라계를 외척으로 가진 아버지 왕욱을 가졌다는 이유로 신라계를 중용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오히려 목종 재위기에 중용된 인물들이 현종 재위기에도 중용되었다는 기록을 종종 발견할 수 있고 당장
현종 자신의 외가부터가 고구려계 해서 호족이다. 당장 이들과 대립했던 천추태후가 사촌 누나이자 이모다.
사촌 형이자 외삼촌인 아 대체 이놈의 족보. 성종의 공주들을 왕비로 들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오히려
현종은 이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또 목종은 서경을 옛 주나라의 수도인 호경이라 부르며 남달리
여겼는데 그 호경에 목종 폐위를 주도한 강조가 서북면(西北面) 도순검사(都巡檢使)로 군사를 이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키긴 했지만, 어쨌든 강조 역시 목종의 최측근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걸 어떻게 해결했느냐면 중앙 군대인 경군의 영업전을 황보유의를 비롯한 문신들이 자기들 전시과(농봉)
로 돌려버렸다. 때문에 2 차 거란 침입을 맞섰던 무신들을 엿먹여버렸다. 주요 인물인 최질과 김훈이 2 차
거란 침입에서 공을 세워서 최고 관직인 상장군 까지 올라간 최상급 무신들이었다. 게다가 중앙 군대의
구성원들까지 손가락 빨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치졸한 병크가 따로 없다. 결국 월급이 안나와서 최질과 김훈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들은 현종에게 위협이 담긴 호소로 월급 뺏아간 문신들을 귀양보내고 무신정권을 세웠다.
또한 무신들은 영업전의 반환은 물론 6 품 이상의 모든 무관들에게 문관직을 겸하도록 요구했으며 현종은
이를 들어 주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현종이 이자림[18]의 계책으로 무신들을 왕궁에 초청해서 연회를
베푼 다음에 술에 취한 장군들 19 명을 모조리 잡아 죽이면서 싱겁게 끝이 났다. 실질적으로 최초의
무신정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비중이 작은 사건이다. 애초에 원인이 그 따위라서
언급하기도 뭐한 사건이지만.
또한 이런 실책을 저지르긴 했지만 현종은 뒷수습을 잘 했다. 19 명 이외에 가족은 하나도 처형하지
않았고 아들과 동복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영원히 등용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그러므로 이
사건 때문에 나라에 무신이 없어서 문신인 강감찬이 활약해야만 했다는 식의 해석은 옳지 않다. 애당초
고려나 조선이나 전쟁의 총사령관이나 주요 지휘관은 문관이었다.[19] 또한 이 일 이후 무관에 대한
예우도 격상시켜서 전몰자에 대한 예우를 높여주고 거란 전쟁 중 전사자에 대한 보상도 늘렸으며 군공자는
병사들까지 1 만여명 씩 포상을 줬다.
4. 평가[편집]
그러나 화려해보이는 전쟁보다는 겉멋은 떨어질지라도 전쟁을 딛고 국가를 발전시킨 공이 크다. 정치,
외교 면에서는 사실상 전왕인 목종과 천추태후의 실책을 떠맡았다는 점과 갑자기 왕위에 올라 정권 기반이
취약한 편이었다는 점에서 위에 대한 비판에 대해 충분히 옹호가 가능하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거란의 2
차 침입은 현종으로썬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현종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허수아비
왕이었고, 이 당시 실권은 강조에게 있었다. 거란의 침공도 강조의 변을 핑계로 감행된 것이었고, 몽진도
강조가 고려군 주력 부대를 데리고 나가 싸우다가 개발살 난 상태라 현종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에서 해명을 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에 대해 우리가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있어요. 예를 들면 수도를 버리고 후퇴하는 건 서양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단, 이건 있어요. 봉건 영주가 적이 쳐들어 왔는데 도망가잖아요? 그러면 주변 모든 인물들에게
인망을 잃어 버려요. 왜? "내가 영주로써 군림하고 세금을 받는 것은 너희들을 지켜주기 위해서야!"(라는
것이 당시 사회 시스템이었으니까요). 산적이 쳐들어 왔는데 보안관이 도망을 쳤어. 그러면 보안관은
끝이죠. 하지만 왕은 보안관이 아니에요. 보안관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사람이지.
그러니까 왕이 전쟁을 포기하고 제 할 일을 안했느냐, 이 기준으로 왕의 잘못을 판단해야지, 피난 간
것이 비겁하다고 말할 순 없는 거예요.
현종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항복하고 거란군을 돌려 보내는 것이 나았을 거에요. 왜냐하면 왕 된지도 얼마
안 된 기반도 안된 현종이 거란 황제에게 "항복하겠다. 대신 당신이 나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면
현종의 입지는 (거란 황제의 도움을 받아) 더 단단해졌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후퇴했다는 건 끝까지
싸우겠다는 거 거든요? 그리고 이 후퇴 길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생각하듯 편안하게
도망간게 아니거든요.
별개로 강감찬은 이때 몽진을 수행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정황상 혼자 다른 곳으로 도망친 것으로
보인다. 후일 현종은 이런 식의 결례를 문제 삼지 않고, 강감찬을 크게 중용한다.# 김훈, 최질의
난이나 이런 강감찬에 대한 처우를 보면 의외로 뒤끝은 별로 없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파일:attachment/6000198576_20090309.jpg
5. 사극[편집]
•1) 불륜 관계로 출생
◦선덕여왕이나 근초고왕과 같이 실제로 있지도 않은 주인공의 고생담과 암살 떡밥을 넣는데 현종은 진짜로
궁에서 쫒겨나 개고생하고 죽을 위기를 실제로 수차례나 넘겼다.
즉위 직후에도 거란의 침공으로 피난을 가면서 고생하는 것도 나왔고 돌아오면서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무릎을 꿇기도 했었다. 그 후 강감찬 등의 활약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천추태후와 함께 농사 짓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극의 마지막을 장식. 하지만 여요전쟁 자체가 상당히 간략화 되어버린 탓에 현종의
전쟁 대비나 업적 등은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다.
9 대 덕종 왕흠 (1016~1034) 재위 10031~1034
"나면서부터 숙성하고 성품이 강직하며 과단성이 있었다. 장성해서는 벽돌을 밟기만 하면 깨어지니
사람들은 그의 덕이 무겁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려사》 세가, 덕종 3 년 9 월 계묘일
1. 소개[편집]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1016 년 5 월 2 일,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현종과 원성왕후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020 년에
연경군(延慶君)에 봉해졌고 1022 년에 태자에 책봉된 후 1031 년, 부왕 현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1031 년, 거란은 성종이 죽고 흥종이 즉위했다. 성종의 장례식이 준비되던 기간 동안 거란은 압록강
유역에 부교와 여러 보루를 쌓아두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이를 파괴할 것과 거란과의 전쟁 때 포로가 된
고려인들을 송환할 것을 요구했는데 거란이 이를 거부하자 당대의 중신이었던 서눌(서희의 아들)과
왕가도는 "이놈들이 우리 말 쌩까니 정말 어이가 없네요. 그냥 사신 끊죠"라고 진언, 덕종은 이를
받아들여 거란으로의 사신 파견을 중단하고 흥종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전황 요성종의 연호인 '
태평(太平)'을 계속 사용했다. 거란 흥종이 사용한 연호는 경복(景福)과 중희(重熙)였는데 이 해의
연호는 경복이었다.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여 변방의 요새를 축성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당시 거란은 성종의 죽음 전후로 나라가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지도층은 분열하고 국력이 심하게 기울어
가던 상태였다. 결국 1032 년 3 월에는 거란의 정국 혼란으로 고선성, 고진성, 최운부, 이운형 등 20
명에 달하는 거란의 중앙관료 출신 귀족들이 대거 고려에 망명하였고, 4 월에는 고위관료 해가, 내을고 등
30 명이 귀순, 6 월에는 우응, 약기 등 50 여 명이 망명하였다. 덕종은 이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급기야 1033 년 10 월에 거란군이 정주에 침입하자 이를 격퇴하기도 했다. 고려 북계의 천리장성 수축이
시작된 것도 바로 덕종 시대.
命平章事柳韶, 創置北境關城.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를 시켜 북쪽 국경에 관성(關城)을 축조하도록 했다.
2.3. 내치[편집]
또한 전시과를 개정하고 현종 때부터 복원하기 시작한 '7 대 실록'의 완성을 보는 등의 치적을 남겼다.
2.4. 최후[편집]
3. 기타[편집]
2 비 경목현비는 3 비 효사왕후보다 서열이 높으나 품계가 그보다 낮은데 여기엔 조금 복잡한 이유가 있다.
사실 경목현비는 덕종의 1 비였지만 서열이 밀렸다. 1 비 경성왕후, 3 비 효사왕후와 달리 그녀의 아버지
왕가도는 귀족[1]이었고 후에 왕가도가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입지가 흔들렸기 때문에 품계가 더 올라가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덕종과 경목현비의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지만 요절해, 덕종에겐 후손이 없다.
10 대 정종 왕형 (1018~1046) 재위 1034~1046
1. 소개[편집]
2. 생애[편집]
2.1. 업적[편집]
그와 더불어 거란의 침입을 대비해 그해 서북로에 장성을 쌓고 군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는 등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고 1037 년 10 년 거란이 해군을 동원해 압록강을 침범하여
공격하자 오히려 고려 정부는 자신감을 내비쳤고 결국 거란의 해군을 동원한 침입은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나게 되었다. 이후 거란 측에서 고려의 강경 대응에 억류했던 고려 사신 6 명을 모두 풀어주는 등
고려의 요구를 모두 수용, 정종도 거란과의 국교를 다시 정상화 한다.
그러나 국방을 강화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1044 년에는 천리장성을 완성시켰으며, 예성강의 병선
180 척으로 군수 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는 등 국방 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2.2. 붕어[편집]
•덕종과 정종의 할아버지이자 현종의 친아버지 왕욱(王郁)은 안종으로 추숭되었으나, 주요한 신주에
오르지 못했다. 그보다는 성종의 아버지 왕욱(王旭)이 대종으로 추숭되어 신주에 올랐다. 이후 덕종 사후
덕종을 신주에 올리느냐라는 문제에서 바로 한국 역사상 첫 예송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미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대종으로 5 묘가 가득찼기 때문이었다. 여하간 조용한 시대였다.
•강력한 지진 크리를 맞기도 했다. 1035 년 6 월에 개경에서 지진이 일어났고 8 월과 9 월에는 개경과 동경
(현 경주시) 지방의 19 개 주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다음해인 1036 년 6 월에는 서울, 동경, 상주,
광주에서 지진이 일어나 가옥들이 무너졌으며 이중 동경에서 일어난 지진은 3 일동안 지속되었다고.
•광종 이후 처음으로 왕실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왕이다. 용신왕후와 용의왕후는 자매로 한조의 딸들이고,
용목왕후는 공부시랑을 지낸 이품언의 딸이다.
11 대 문종 왕휘 (1019~1083) 재위 1046~1083
1. 개요[편집]
2. 즉위 이전[편집]
《고려사》 문종 총서
王幼聰哲 及長 好學善射。志略宏遠 寬仁容衆 凡所聽斷 不復遺忘。
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장성해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활을 잘 쏘았다. 품은 뜻이 웅대했고 사람들을
관대하게 포용했으며, 한 번 결재했던 일은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고려사》 문종 37 년
내사령(內史令), 낙랑군 왕휘는 짐이 사랑하는 동생으로서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공손하고 검약한 성품이
이웃 나라까지 알려졌으니 그에게 왕위를 전해 밝은 빛을 나타내게 하리라.
정종의 유언
3.1. 내치[편집]
《고려사》문종 정해년(원년)
28 살의 젊은 왕 문종은 즉위하자마자 선왕인 정종이 마련한 안정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고려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각 지역마다 강제적으로 열려 외리들의 사리욕을 챙기는 윤경회를
폐지한 것이다. 윤경회는 불교의 경전을 여러 사람이 서로 돌리는 의식으로 불교 의식 중 하나였으나 그
규모가 커지고 방대해져 필요한 돈이 많아지자 이로 인한 폐단이 생겼다. 문종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윤경회의 놀이화를 엄격하게 금했다.
또한 왕이 검소해야 나라가 검소해 진다며 금은으로 장식된 왕좌와 발디딤팔을 동과 철로 바꾸고 금실,
은실로 짜여진 이불과 요는 모두 견직으로 교체하였고 환관을 10 여명으로 축소시켰다.
문종 원년 6 월 기사
이처럼 문종은 억울한 죄수가 생기는 것을 염려해 최대한 벌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아래 나오는 거신의 난
때도 주도자인 거신을 제외하면 유배하는 선에서 그쳤다. 보통 반역죄에 해당하는 짓을 했을때 왕들은
해당 가문을 아작내는 데, 그에 비하면 정말 파격적인 판결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전 기록들에도 죄수들의
건강과 억울하게 수감된 죄수가 있는지 염려하거나 본인이 직접 재심사를 하는 기록들이 자주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불교의 발달은 사찰과 승려들이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고 술과 고기를 먹는 등 세속화 되는
모습들이 보여지게 되는데 1056 년에 문종이 "승려답지 못한 자에겐 엄히 벌을 내릴 것이다."라는 칙서를
내리기도 했다.
이처럼 불교가 부흥하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문종은 유교의 발전도 같이 꾀했다. 그는 직접 문묘에 배항된
설총과 최치원 등을 존숭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3.2. 외교[편집]
1056 년 10 월에 일본의 사신이 고려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개성에서 장사하는 이슬람 상인들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기도 했다.
송나라는 고려에 손을 뻗으며 고려와 연합해 요나라를 제압한다는 외교 전략을 수립한다. 그리고 고려
문종은 송나라의 이러한 계산을 파악, 송나라와 손을 잡게 된다.
또한 송나라(북송)와의 재수교는 고려의 국력 상승을 나타내는 모습이기도 하다. 문종은 요나라에 어떠한
긍정적인 제스쳐를 취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압록강 동쪽 영토를 거란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이를 청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1055 년 7 월, 압록강 동쪽에 요나라가 성을 쌓고
다리를 설치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요나라가 압록강 동쪽에 다리를 설치 -> 문종 曰 "니네 지난번에 우리 아부지랑
협의할 때 압록강 경계가 우리 영토라고 했는데? 좀 꺼지지?"
이러한 요구에도 요나라가 답변을 하지 않자 문종은 "저놈들 대답할 때까지 사신 보내."라고 했는데
그래서 요도종에게 축하 사절단을 보내는데 항의문도 같이 보냈다.(...) 그럼에도 요나라와의 관계는
나빠지지 않았는데 태자 책봉이나 사절단을 고려에 보내 토산물을 보내주는 등의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요나라가 고려의 이러한 강경한 반응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고려의 국력이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이다. 문종은 이러한 고려 국력을 바탕으로 1058 년 8 월 서해를 건너게할 큰 배를 만들도록 지시해
송나라와의 재수교를 명령했지만 신하들이 "송나라 가는거 요나라에게 걸리면 X 되는 겁니다."라고
반대해 실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1068 년, 송나라에서 상인 황신(黃愼)을 고려로 파견해 재수교를
강력하게 원했고, 문종도 송나라와의 관계 복구를 통해 송 - 거란 - 고려간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판단, 신하들의 반대에도 의지만 있다면 뭐든 할수 있다는 문종의 집념으로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했고
1071 년 3 월 신하들의 반대에도 송나라와의 재수교를 강행했다(송신종 5 년이기도 하다).
희령(煕寧) 3 년(1070 년) 군(郡), 현(縣)에서 고려의 사신을 접대했었던 사례가 없어서 백성들이
힘들어 했는데, 규정을 만들어 반포하고 비용은 모두 관(官)에서 지급하도록 조칙(詔勅)하였다. 또 고려
사신이 중국 말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으로 재물과 이익을 노리는 자들이 접근해 올까 염려해 고려 사신이
머무는 곳마다 (사람들의) 왕래를 금지시켰다. 휘(徽.고려 문종의 이름)가 이부(二府)에 물품을 보낸
것이 많자, 조칙을 내려 시장에 위임하여 되도록이면 (값이 비싼) 겸백(縑帛.비단)을 팔아서 보답하도록
했다. 휘(徽)가 또 표(表)를 올려 의약(醫藥. 의원과 약) 및 고려 사람을 가르칠 화공(畵工), 소공(塑
工) 등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니 아중(羅拯)에게 조칙을 내려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송신종과 고려 문종은 서로 친필 편지로 건강도 위문, 걱정할 만큼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종이 1078 년
(원풍 원년)에 중풍에 걸리니 의사 안도(安燾)와 진육(陳陸)을 고려에 파견하여 문종의 중풍병을 치료해
주었다. 같은해 다시 한림의관 (翰林醫官) 형개(邢愷, 혹은 형조), 주도능(朱道能), 심신(沈紳), 소화
(邵化)를 고려에 파견하여 대량의 우황과 용뇌와 주사와 사향과 행인 등 100 여 종의 귀중한 약재 등을
고려 문종에게 증여하였다. 2 년 뒤 고려에서는 호부상서(戶部尙書) 유홍(柳洪)으로 하여금 잣과 인삼
각각 1000 근을 답례로 보냈으며, 그해 7 월 계절풍을 타고 송나라에서는 의관(醫官) 마세안(馬世安)을
다시 고려에 파견하였다. 이런 송과 고려의 "의료 외교"는 양국의 친교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북송이
망하는 송휘종,송철종 때까지 이어진다.
문종은 근면과 검약을 실천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했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가능한 한 관대한 형벌을
부과했고, 학문을 숭상하며 노인을 공경했다. 자격 없는 자에게 관직(名器)을 맡기지 않았으며, 자신과
친한 사람이라고 실권을 주지 않았다. 아무리 가까운 인친일지라도 공로가 없으면 상을 주지 않았고,
측근의 아끼는 신하라도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내렸다. 환관과 급사의 수가 10 여 명에 불과하고 내시
(內侍)는 반드시 공로와 재능이 있는 자를 가려 임명했는데 이 또한 20 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쓸모없는 관리가 줄어 일이 간편해졌으며, 비용이 절약되어 나라가 부유해졌다. 나라의 창고에는 해마다
곡식이 계속 쌓이고 모든 백성들이 풍요를 누리니, 당시 사람들이 태평성대라고 찬양했다.
이렇듯 그의 재위 기간동안 고려는 국력은 강해지고 나라는 부유해지며 불교와 유학의 조화가 이루어 졌다.
이러한 태평성대 속에서도 한차례 쿠데타가 일어날 뻔 했었다. 《고려사》에 기록된 바는 이러하다.
거신이 문종의 동생인 왕기를 왕으로 임명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로
흐지부지되어서 결국 쿠데타는 취소된 상황에서 장선이라는 병사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문종에게
"저 자식들 저거 쿠데타 일으킬뻔했음요"라고 꼰질렀고, 거신을 처형하고 그와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유배보내는 사건이 일어났다.
4.2. 그늘[편집]
이자연을 키운 이유가 흥왕사 건립과 송과의 국교 재개 등에서 의견이 일치한 것을 생각하면 약간은
김조순과 안동 김씨 필도 나는 듯. 공음전시로 세습 가능한 토지를 물려주게 한 것도 음서와 함께
문벌귀족에 날개를 달아주게 된다. 다만 귀족이라고 해서 다 우왕굳, 하는 게 아니라 능력도 어느 정도
있어야 했다. 아, 그렇다고 해서 모든 귀족이 전부 능력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최상층은 당연히...
어쨌든 이러한 태평성대의 모습들 중에서도 곳곳에 문벌귀족들의 권력 강화의 움직임도 상당량 보이는데
대표적인 것이 재위 3 년째인 1049 년엔 5 품 이상의 고급 관료들에게 상속이 가능한 일정량의 토지를
지급해 양반 신분 유지에 필요한 재정을 지원하는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이 시행된 것과 남반직의
최고위가 이전의 "4 품위"에서 "7 품위"로 떨어져 계급이 낮아지기도 했는데 이는 남반이 천시되고
양반들의 신분 우월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5. 가족관계[편집]
•첫째 왕후 인평왕후는 아버지 현종과 원성왕후 김씨의 딸로 덕종, 정종과는 동복 남매, 남편 문종과는
이복 남매사이이다.
•의종, 명종, 신종은 그의 4 대손이면서 동시에 증손녀 사위(...)가 되는데, 문종과 3 비 인경현비
이씨의 아들로 추존왕이 된 양헌왕의 아들 강릉공 온(江陵公 溫)은 의종의 비인 장경왕후, 명종의 비인
광정왕후, 신종의 비인 선정왕후의 아버지다. 덧붙여 양헌왕의 동복동생 진한공 유(辰韓公 愉)는 문종의
손자인 예종의 3 비 문정왕후의 아버지다.
6. 기타[편집]
1. 소개[편집]
2. 생애[편집]
별다른 업적없이 붕어하여 그 동생 국원공 왕운(선종)이 엉겁결에 왕위에 오른다. 자식에게 물려준 것도
아니고 자식에 대한 기록도 없는 것으로 봐서 병약한 몸 때문에 후사도 낳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8 월
•겨울 10 월
•을미일. 친동생 국원공 왕운으로 하여금 국사를 임시로 맡아보게 하고서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
3. 가족관계[편집]
정의왕후 왕씨는 정간왕의 딸로 순종과 사촌지간으로, 보통 이렇게 가까운 친척이면 혼인할 때 외가의
성씨를 택하는데 그녀는 왕씨로 적혀있다.
선희왕후 김씨는 경주 출신 김양검의 딸이다. 순종의 사랑을 받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문종이 심하게
그녀를 싫어하여 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폐출되었다. 나중에 인종의 명에 의해 복권되고 이후 순종의
사당에 합사되었다
장경궁주 이씨는 이호의 딸이다. 이호는 이자겸의 아버지기도 하니 이자겸과 순종은 처남 매부지간이 되는
셈. 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후궁이 되었다. 하지만 곧 순종이 승하하는 바람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이후 외궁에 거처하였고 장경궁주에 봉해졌으나 자신의 노비와 간통하다가 발각되어 궁주의 자리에서
쫓겨났으며 그 이후 복권되지 않았다. 이 때 이자겸도 그녀의 오라비란 이유로 축출되었다.
13 대 선종 왕운 (1049~1094) 재위 1083~1094
1. 소개[편집]
2. 생애[편집]
이 시대의 특이한 점은 문종의 넷째 아들이자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이 활약하기 시작하여 불교 문화가
크게 발전했다는 점이다. 이미 국가 시스템은 선왕 때인 11 대 문종 시기에 거의 다 완성된 터라,
대각국사 의천을 중심으로 불교의 계파인 교종, 선종을 통합하는 종교통합사업 천태종 사업을 시행했다.
이는 제도가 완비된 조선 성종 시대 전국 곳곳에 유교 장려 정책을 펼친 것과 유사하다 볼 수 있다.
제도가 다 갖춰졌으니 사상 통일.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왕실이 화엄종&천태종을 밀어줬지만
지방세력들과 다른 승려들은 귀족 중심의 정치를 이루기 위해 법상종을 밀어줬기 때문. 더더군다나
천태종은 백성들을 끌어들이지 못한데다 이후 조계종이 갈라져 나가기까지 한다. 결정적으로 의천이 죽자
천태종이 쇠퇴해서 망했어요. 또한 그는 승과를 설치하고 사탑을 대규모로 건립하는 등 불교를 융성케
했다
《고려사》선종 9 년 3 월 병진일 기사
그러나 선종이 불교만 장려한 것은 아니다. 선종은 국학에 공자의 제자 안회(안자)를 비롯한 72 현의 상을
그린 벽화를 만들었으며, 72 현에 대하여 제사를 올렸다. 절차는 송나라의 국자감의 것을 본받고, 복장은
중국 십철을 본받았는데 이는 고려 유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것이다. 이로서 유학은 하나의
통치철학에서 불교와 같은 종교적 반열로 서로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의
치세에는 고려가 불교에만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통치 이념인 유교와 균형을 이루며 서로 발전해 갈 수
있었다.
《동사강목》선종 2 년
거란이 압록강에 시장을 설치하려 하자 서희 때의 담판을 근거로 무산시키고 사과의 답례품을 받아내기도
했다.
문종대에 송나라와 재수교한 후[3] 고려의 국력이 급격하게 상승해서 송나라와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대부분 송나라가 좀 안습한 에피소드다.(...)
《동란섭필(銅蘭涉筆)》
송나라가 보내준 선물이 의심스러워서 송나라 사신 앞에서 금은알을 모조리 다 깨버리는 짓을 저질렀는데
송나라에선 "고려 놈들이 거란과 내통하는 게 아니냐"며 끙끙 앓기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위의 얘기를 풀어보면, 고려의 사신이 송나라에 가서 "책을 포함해서 이것저것 살께요"라고했다. 그러자
송나라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시인이며 고려를 굉장히 싫어하던 소동파가 "고려 저 오랑캐 놈들이랑
교역하면 우리만 손해입니다. 저 무식한 놈들이 우리 것을 사가서 똑똑해지면 우리에게 얻는 이익이
뭡니까? 저 새퀴들 달라는 거 절대 주지 마세요."라는 이야기로 엄청나게 딴지를 걸었다. 하지만 당시
송나라는 요나라의 성장으로 압박이 심했고, 그 때문에 요나라가 (군사적인 압박이든 정치적인 압박이든)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고려와 손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3. 사후[편집]
五月 壬寅 王薨于延英殿內寢 卽日遷殯于宣德殿。壽四十六 在位十一年。 謚曰思孝 廟號宣宗 葬于城東 陵曰
仁陵 仁宗十八年 加謚寬仁 高宗四十年 加顯順。
5 월 임인일. 왕이 연영전의 침소에서 죽자 그 날로 시신을 선덕전(宣德殿)으로 옮겼다. 향년 46 세로 11
년 동안 재위했다. 시호를 사효(思孝)라 하고 묘호를 선종(宣宗)이라 했으며 성의 동쪽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인릉(仁陵)이라고 했다. 인종 18 년에는 관인(寬仁)을, 고종 40 년에는 현순(顯順)이라는
시호를 덧붙였다.
4. 기타[편집]
찬이슬에 가을 바람 불어오니(露冷風高秋)
이 맑은 밤 달은 밝구나.(夜淸月華明)
피향전(披香殿)은 이제 삼경이 되려는데(披香殿裏欲三更)
노래 소리 아직도 요란쿠나.(沸歌聲擾擾)
인생은 모두가 허깨비 같으니(人生都似幻)
부귀영화 탐내지 마라.(莫貪榮)
좋은 술 금잔에 가득부어(好將美醁滿金觥)
기쁨을 나누는 게 좋으리.(暢懽情)
『하성조사(賀聖朝詞)』
시를 쓰기 좋아한 왕인 듯하다. 위에 아픈 와중에도 부처님 찾은 시뿐 아니라 선종 6 년인 1089 년 9 월
정축일에 요나라 사신을 맞이한 잔치에서 지은 『하성조사(賀聖朝詞)』가 있다.
14 대 헌종 왕욱 (1084~1097) 재위 1094~1095
1. 소개[편집]
2. 생애[편집]
《고려사》헌종 총서
고려판 계유정난
이러한 상황에서 중신이자 외삼촌인 이자의가 자신의 누이동생인, 선종의 후궁 원신궁주의 아들로 헌종의
이복 동생이 되는 한산후 왕윤을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자의는 사숙왕후의 사촌으로 당시
인주 이씨 가문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었고, 중추원사에 왕숙이라는 지위로 왕도 어쩌지 못할 권력을
가졌으며, 사병을 양성할 정도로 재력도 막강했다. 그는 왕이 병들어 있는 틈을 타서 모반이 일어날 수
있으니 옥새는 왕윤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나중에 숙종이 되는 선종의 아우인 헌종의 삼촌
계림공 왕희의 야심을 지목한 것이었다.
조정은 종친대표 계림공과 외척대표 이자의의 구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병석에 누운 11 살짜리 왕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1095 년 이자의가 반란을 도모하자 계림공이 그를 척살하고 그의 일파를 제거했다. 조정은 계림공
일파가 장악하게 되었고, 섭정하던 사숙왕후와 헌종은 아무 실권도 가지지 못했다. 결국 3 개월 후
두려움에 떨던 헌종은 병을 이유로 하여 계림공에게 양위하였고, 계림공은 숙종으로 즉위한다. 그 후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된 그는 아버지 선종이 왕자 시절 거주하던 흥성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양위 조서가 참 눈물겹다.
이렇게 조서를 고치지도 않고 그냥 양위식에서 쓴 걸 보면 헌종은 정말로 껍데기 왕이었나 보다. 신하들
중에서 헌종 편에 선 인물은 아무도 없었던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친 신하라도 있었던 단종보다도 몇 배는
더 불쌍한 왕이었다.
2.3. 최후[편집]
《고려사》 헌종 세가
3. 평가[편집]
이제현은 이를 평하기를
"고대 중국의 하우씨(하나라의 우왕)가 왕위를 아들에게 전한 것(아들 계왕에게 왕위를 넘긴 부자상속)은
후세의 찬역을 염려한 조치였던 바 그 후 유복자를 임금으로 세워 곤룡포를 입혀놓아도 세상이 동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명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현종의 세 아들은 형제끼리 서로 왕위를 전해서
순종에게까지 미쳤으나, 순종이 거상 중에 너무 슬퍼하다가 일찍 죽고 아들이 없어서 선종에게 선위했으며,
선종이 죽은 다음 태자가 그 뒤를 이었는데 이가 헌종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여러 왕대에 저 형제끼리
왕위를 주고받은 데 익숙해져 있어서 선종은 아우가 다섯이나 있는데 어린 아들을 세운다고 하면서
이것만을 잘못으로 여기니 어찌 그렇게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익재집》
4. 가족 관계[편집]
병약하고 어려서 사망했기 때문에 혼인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진주 소씨의 족보에 따르면
소계령(蘇繼笭)의 딸인 회순왕후 소씨(懷純王后 蘇氏)와 혼인했다고 하는데, 이건 소씨 족보를 제외한
어떤 사서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조선 시대의 다른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가문의 끗발을 높여볼
목적으로 소씨 문중이 족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조작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은 편이다.
15 대 숙종 왕옹 (1054~1105) 재위 1095~1105
1. 소개[편집]
고려의 헌종이 조선의 단종의 대선배라면 이쪽은 바로 조선의 세조 수양대군의 대선배.[1] 따지고 보면
숙종과 세조 둘의 대선배는 바로 신라에 있다. 바로 신라 41 대 국왕인 헌덕왕. 그런데 신라의 헌덕왕은
애장왕을 제 손으로 직접 죽여 없앴는데 고려의 숙종과 조선의 세조는 조카를 쫓아내기만 했지 제 손으로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2]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2.2. 왕위 찬탈[편집]
형 순종과 선종이 연이어 일찍 승하하고 선종의 아들인 헌종이 10 살에 즉위한다. 숙종은 이 헌종을
퇴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 과정은 헌종 항목 참조.
실제로 숙종은 조선 세조와 달리 명분으로는 그다지 꿇리지 않았다. 고려 시대에는 왕건의 유훈이었던
훈요 10 조에 따라 형제 상속이 어느 정도 일반화 되어있었기에 왕이 후사가 없거나 뒤를 이을 태자가
너무 어리거나 허약하면 왕의 형제들을 다음 후계자로 삼는 일이 공공연했다.[3] 거기다 헌종은
총명했으나 어려서부터 소갈증에 시달리는 허약한 몸이었는지라 병치레가 심해서 과연 왕 노릇을 제대로
할지가 불투명했다. 실제로 헌종은 즉위한 지 1 년만에 왕위를 넘기고 얼마 안 가 병이 악화되어 붕어한다.
반면 계림공 희는 일찍이 아버지 문종이 아낄 정도로 재주가 출중하고 유능해서 신하들이나 종친들이나
모두 차기 왕위 계승자로 여기고 있었다. 계림공 자신도 능력이 되는 야심가여서 별 어렵지 않게 다음
왕이 되겠거니 하고 기대에 부풀었지만... 웬걸, 형인 선종이 자신을 제치고 병약한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줘버린 것이다. 어째 왕위 찬탈 과정은 수양대군과 비슷한데 당시 처지는 태종 이방원과
비슷하다? 계림공 본인으로서는 이래저래 실망이 크지 않을 수 없었고, 어차피 본인이 야심가인데다
조카인 헌종이 워낙 병약해서 왕위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쨌든 자신의 조카 한산후 왕윤을 왕으로 만들어 실권을 잡으려고 하는 외척대표 이자의와 대립하다가
1095 년 결국 그가 반란을 일으키자 선정문에서 살해하고 그 일당들을 제거한다. 결국 두려움에 떨던
헌종이 재위 1 년 만에 숙부인 계림공에게 양위하면서, 고려 15 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2.3. 업적[편집]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의 주장대로 주화도감을 만들어 화폐인 해동통보, 삼한통보를 생산하고 절도 많이
지어 불교를 융성케 했다.[5] 단, 숙종이 만든 해동통보는 고려 사회에서 많이 통용되지 않았다. 화폐가
통용된 건 18C. 시대를 앞서도 너무 앞서나갔다. 또 불교에 대해서는 의천을 통해서 교종을 통합하여
왕권 강화 시도를 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숙종 재위기에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7]으로 수도를 이전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기도 했다.
풍수가인 김위제가 국토를 저울로, 남경을 저울추에 비유하며 천도를 주장하였고, 1104 년에 궁궐이
준공되어 숙종이 직접 남경에 행차하기도 하였으나, 이 때 남경은 서경처럼 지역 세력이라든지 지역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크지 않아 정치적 논의만 거친 채 흐지부지 끝났다. ... 다만 당시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궁궐 터는 조성을 했는데, 그게 현재의 청와대 자리다(!). 300 여년 뒤
이성계가 이 터를 둘러보곤 그 남쪽에 궁을 지으니 ... . 이 때 찍어 놓은 땅이 고려 멸망 이후 한반도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진의 침공에 큰 코를 다치기도 했으며 이에 여진에 대한 정벌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윤관을
기용해 별무반을 양성하고 서경에 나아가 출정을 준비하려 동명왕 사당에 참배하던 중, 병을 얻어
개경으로 환궁하다가 왕성 서문인 장평문에 도착하기 직전에 수레 안에서 승하했다. 승하 당시 52
세였는데 수명 또한 대후배인 세조와 똑같다. 흠좀무. 여진 정벌은 자신의 뒤를 이은 예종이 이어받아
진행하게 된다.
3. 평가[편집]
조선의 세조처럼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강제로 왕위에 오른 것 때문에(아니, 이쪽이 먼저다!!) 도덕적인
면에서는 비난을 받아야 하지만, 능력 하나는 출중했던 왕.
16 대 예종 왕우 (1079~1122) 재위 1105~1122
1. 소개[편집]
2. 생애[편집]
이후 패전의 책임을 명분으로 윤관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결국 윤관은 파직되었다. 그러나 사망하기
직전(1110 년, 참고로 1111 년 사망)에 예종에 의해 복직되었다. 여진 정벌 중에 한국사 역사상 최강의
인간흉기 장수로 일컬어지는 척준경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그 활약은 인종 때까지도 이어진다.
2.1. 대내 업적[편집]
또한 학당을 많이 설치하는 등 유교적 통치를 강화하기도 했다. 이미 최충의 학당으로 대표되는 사교육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어서 숙종 대에는 폐지론까지 나온 국자감(공교육) 진흥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선
국왕이 바로 예종이다. 9 재 학당을 모방하여 국자감 7 재를 개설하였다. 7 재란 주역, 모시(시경), 주례
(3 례의 하나), 상서(商書, 서경의 일부), 대례(戴禮, 예기), 춘추(오경)와 무예[3]가 된다. 또
장학재단인 양현고를 국자감에 설치하였으며, 학문 연구 기관인 보문각과 청연각도 설치하는 등 고려 시대
중앙 교육 시설의 틀을 잡았다.
2.2. 외교 업적[편집]
송나라와의 관계는 문종, 선종 대를 거치며 상당히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당시 송나라에선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國信使)로 승격시켜 당시 자신들을 제외한 나라 중에 가장 높은 직위로 인정해 주었다.
정화(政和) 연간(1111 년 ~ 1117 년)에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로 승격시켜 예우가 서하국보다 위에
있었고, 요나라 사신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에 예속시켰으며, 인반관(引伴官)등도 고쳐 접관반(接館伴),
송관반(送館伴)이라 하였다. 《대성연악(大晟燕樂)》과 변두(籩豆), 보궤(簠簋), 존뢰(尊罍), 따위의
그릇도 하사하고, 심지어는 예모전안에서 고려 사신을 위해 연회까지 베풀었다.
심지어 송나라에선 고려 사신들이 행패를 부리는데 아무런 제재를 하지 못하자 이를 보고 한탄하는 기록도
남아있다. 참고로 이 시기 고려 사신의 위상은 엄청났는데 각국의 사신들이 송 황제와 대면하기 전 고려
사신을 먼저 접견해서 문제라는 기록도 남아있다. 사실 송사 고려전에서 문종 - 예종 사이의 기록들은
송나라에서 "와 고려 저 새퀴들 진짜 너무 깝치는데 우리가 손쓸 방법은 없고 어휴..." 같은 한탄이
굉장히 늘어난다(...).
또한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여 거란과 여진과의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 전략을 펼치기도 했다.
의주가 우리 땅이 된 것도 바로 예종의 치세. 당시 거란은 발해 유민 출신인 고영창이 반란을 일으켜
대발해를 세운 탓에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거란의 지원 요청을 묵살하고(1115 년)
오히려 지원을 빌미로 거란의 내원성과 포주성을 도로 받아(1116 년 ~ 1117 년)낸 것이 바로 지금의 의주
(당시 의주 방어사)이다.
2.4. 말년[편집]
3. 평가[편집]
4. 가족 관계[편집]
심지어 예종이 혼당으로 가자 간관들이 강력히 만류하였다. 이에 예종은 "조제의 예식은 송나라 임금도 한
적 있거든? 나는 그 일을 본받은 것 뿐이라니깐! 그리고 혼당 한번 간다고 무슨 큰일이라도 나나염?"
그리고는 기어코 하고 싶은대로 했다고 한다. 이점도 왕권 강화의 상징. 다만 이런 점에서 왕권은 강화해
놓고 후대가 약하면 외척 정치가 시행되는데, 이점에서는 조선 정조와 이미지가 유사해진다.
순덕왕후 이씨 뒤에는 종친인 문정왕후 왕씨와 혼인했다. 왕씨의 아버지 진한후 왕유는 그녀의 시아버지인
숙종의 이복 동생으로 문종과 인경현비의 아들이다. 또 남편 예종의 친조모는 이자연의 딸인 인예왕후이며,
그녀의 할머니 인경현비도 역시 이자연의 딸이다. 이로써 예종과 문정왕후의 혼인은 친가로는 4 촌간,
외가로는 6 촌간의 혼인인 근친혼이다. 전왕 숙종이 6 촌 이상 근친금지령을 내려봐야 왕실에서도 안
지키고 있었으니 이건 뭐 말짱 황(...). 인종은 순덕왕후 이씨 소생으로, 자신의 이모들과 결혼하게
된다.
17 대 인종 왕해 (1109~1146) 재위 1122~1146
1. 소개[편집]
그의 치세는 한마디로 수난과 안습의 점철이며,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같은 굵직한 사건이 연달아 터져
나오는 등 정치적인 혼란이 가득했던 치세였다. 현종 이후 100 여년간 지속되었던 고려의 전성기가 이
대에서 사실상 끝났으며, 그동안 문벌 귀족 사회에서 누적되가던 모순도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즉,
인종 시대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고려 전기 사회의 붕괴 조짐이 드러난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는 다시는 태평성대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5]
2. 생애[편집]
2.1. 재위 초기[편집]
하지만 왕이 어린데다 외척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니 외척이 발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종의
외조부였던 이자겸은 왕을 대신하여 정권을 한 손에 움켜 쥐었으며,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횡포를
부린다. 게다가 이자겸은 자신의 두 딸을 강제로 인종과 혼인시켰다. 본래 고려 왕실에 근친혼이
성행하고 있었지만, 이자겸의 두 딸은 인종에게는 이모가 되는지라 당시의 예법으로도 인종과는 결혼할 수
없는 사이었다.
1125 년 금 태종은 고려에서 온 국서를 접수하기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국서의 서식이 표(表)가
아니고 또 고려 왕이 신(臣)을 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나라는 고려에 대해 요나라를 섬겼던 것처럼
금나라를 섬기라고 해 칭신사대(稱臣事大)의 관계를 요구했는데, 이것을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이었다.
고려는 이에 대해 한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듬해 1126 년 조정 회의에서 금나라와의
관계 설정 문제를 협의했다. 대다수는 여진족이 오랑캐이므로 상대할 수 없다고 했으나 실권자 이자겸과
여진 정벌에 참여했던 척준경 등이 "금나라가 예전에는 작은 나라로써 고려와 요나라를 섬겼으나 지금은
강대해져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켜 정치적, 군사적 강국이 되었고, 우리와 접경해 제반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예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했고 인종은 이 주장을 채택했다. 이어 4 월 인종은 정응문 등을 금나라에 보내
자신을 신(臣)이라 해 사대의 예로 국교를 맺게 되었다.
척준경은 궁궐 내에서 소란을 피우는 역적들을 무찌른다는 명분으로 왕궁에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는데,
함부로 왕궁을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얼마동안 대치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궐내에서 이자겸의
수하들이 제거당하는 소란 통에 척준경의 아들 척순과 동생 척준신이 살해당하는데, 궁밖에 내던져진
시체들을 척준경의 부하들이 발견한다.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척준경이 공격을 명하자 궁궐은 불타버리고
지낼 곳이 없어진 왕은 이자겸의 집에 머무른다. 이것도 끌려간게 아니라 왕이 스스로 호위병도 없이
걸어서 갔다. 이 사건이 바로 '이자겸의 난'이다.
한편, 인종은 척준경의 성품이 강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몰래 척준경에게 선물을 하사하는
한편 친서를 내려서 회유하는데 성공한다.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척준경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선
덕분에 결국 이자겸은 축출되어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되었고, 이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 후에 인종은 척준경의 공적을 치하하여 문하시중 (종 1 품),즉 최고의 관직에 제수하려고 하였으나
이는 척준경이 거절하였고, 그래서 인종은 대신 공신각에 그의 초상화를 걸어놓아 명예를 세워주었다.
그러나 이후 신하들(특히, 후에 묘청의 난에 가담하는 정지상)이 탄핵하여 할 수 없이 유배를 보냈는데
그래도 이 유배지가 척준경의 고향이었다.[7]
2.3. 묘청의 난 (1135 년 ~ 1136 년)
2.4. 최후[편집]
어렸을 적부터 고난을 겪었던 탓인지 결국 38 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승하했다. 일설에는
멀쩡하던 왕이 갑자기 병이 들어 의원의 치료에도 소용이 없어 점쟁이를 불러 점을 쳤는데, 이자겸과
척준경, 묘청 등의 귀신이 왕에 몸에 씌여 병이 생겼다고 한다. 결국 왕실에서는 용한 무당을 불러 굿을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어 인종은 끙끙 앓다가 승하했다고 한다. 다만 이것은 정사의 기록이 아닌 야사에
불과하다.
3. 평가[편집]
인종이 이자겸의 세력을 제거했을 때에 반역을 했던 이자겸과 그 일족을 주살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인종은 이자겸이 한때나마 자신의 장인이었으며 또한 외할아버지였으므로 함부로 죽일 수 없다 하여
유배형을 내리는데에 그쳤고, 이자겸의 가족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당대의 사람들을 이를 두고
인종을 자비있고 덕있는 왕이라 칭송하였다. 그래서 "인종"인가보다.
그 외에 역시 공이 있다고는 하나 궁궐에 불을 질렀으니 당장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척준경을 끝까지
옹호해주며 유배를 보내고서도 편히 지내도록 배려해 주었다거나, 이자겸의 음모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었던 이자겸의 딸들을 잘 보살펴주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볼때 능력과는 상관없이 인성은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반역자들과 그 일족에 대한 처벌이 너무 미약하다며 인종을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고 한다.
송나라의 관료였던 서긍이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간 후에 지은 『고려도경』에서도 인종의 외모와 인품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서긍이 고려에 갔을 때에 인종은 아직 14 세의 소년이었는데, 서긍은 그 외모에
대하여 "몸집은 작았으나 용모가 아름다고 풍만했다"고 하였으며,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성품이 자비롭고
배운 것이 많았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엄격하고도 명백히 하였고, 또한 그 몸가짐이 단장하면서도
성인의 기풍이 있어서 과연 고려의 왕이 될만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4. 가족[편집]
대령후 왕경은 도량이 넓었으며, 공예태후가 가장 좋아하는 자식이었다. 그러나 결국 인종의 의지대로
의종이 왕위에 올랐고, 여러 역모설 속에도 무고하여 의종이 처벌은 하지 않았으나 결국엔 의종 11 년에
귀양을 가게 된다. 의종이 탄 수레에 화살이 떨어진 변고가 생겼었는데, 의종은 적당을 색출하지
못했다하여 재상들을 책망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연달아 체포되었는데,
대령후 집안의 종인 나언(羅彦)·유성(有成)·황익(黃益) 등이 의심을 받고 혹독한 문초를 당하게 되자
거짓 자백을 하였던 것이다. 왕경의 죽음은 알 수 없는데,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이의방이 의종 대신
그를 세우려다가 대령후가 승계되면 그가 바른 정치를 할까 두려운 이들이 대령후를 살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마 그 이전에 죽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5. 그 외에[편집]
18 대 의종 왕현 (1127~1173)
재위 1146~1170
1. 소개[편집]
2. 생애[편집]
2.1. 태자 시절[편집]
어릴 때부터 놀기를 좋아하여 부모가 걱정했다. 의종의 모후 공예왕후 임씨는 차남 대령후 왕경을
총애하여 인종에게 태자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인종은 반대했으나, 태자를 바꾸려고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당대에 강직한 신하로 이름이 높았던 정습명[2]의 만류로 그대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양녕대군 왕위 계승 성공판 그러나 왕위에 오르고도 정습명은 의종이 풍류를 즐기는 것을 간언하다가
의종의 미움을 사고 결국 1151 년, 향년 57 세로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 혹은 홧병으로 죽고 말았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의종의 미움을 사 버림을 받고 죽었다는 것은 다르지 않다.(...)
이것에 반론을 하자면 공예왕후도 정상적인 왕비가 아닌 게, 애초부터 해몽으로 뽑힌 왕비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대령후를 밀어 후사 문제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정작 무신 정권이 터지자
대령후보단 이후 명종을 찾았고 의종 때도 의종이 크게 울어재끼니 그제서야 대령후를 찾지 않고 의종을
찾았다. 그의 외척 임원후는 왕 가까이에 올라가 일방적 신임을 받고 각종 특혜를 받자 이에 문신들의
엄청난 비난이 쏟았졌다. 실제로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임원후는 빠질 정도로 김부식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헌애왕후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이자겸의 횡포를 보고도 여전히 외척과 왕비의 권력도 드높았다.
젊은 시절부터 놀자판의 기질이 있다고 고려사에 기록은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사람 자체만 보면 대단한
엄친아로 암군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백하팔인급의 인물은 아니다. 의종은 힘이 세서 강궁을 잘
다루었고 방 안에 촛불을 켜 놓고 활 시위를 당겨 촛불을 꺼버리는 묘기를 선보인 기록도 남아있다. 또한
기마술과 격구에도 두루 능했던 무인형 군주였으며 수박희라는 일종의 격투기를 좋아하여 무인들의 수박희
경기를 자주 즐겨 감상했다. 그리고 풍류를 즐긴 군주답게 음악과 시문 등 예술적 감각도 뛰어났다.
비슷한 예술가 타입 군주였던 공민왕이 무예에는 그다지 소질을 보이지 못했고, 오히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에게 말 타는 법을 배우기 이전에는 말을 탈 줄 몰랐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듯 의종은
무예에도 뛰어났다. 연산군 순한 맛 이 사람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러한 의종의 시도는 실세 권력을 잡고 있던 김부식 일파를 중심으로 한 당대의 세력가였던 문벌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종전대로 문신 우대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무신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또한 이들과 문신들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인종 시대에 잔치 중 용춤을 추던 정중부의
수염을 김부식의 아들인 김돈중이 태워먹었다는 일화가 유명한데, 이 장면도 이러한 당시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결국 말년에는 문신들 및 환관들과 어울려 항락과 사치를 즐겨 백성들이 왕을 원망하기도 했다. 머리카락
잘라 팔아서 공사판에서 일하는 남편과 동료들의 점심을 마련한 여인 이야기의 배경이 바로 의종 시대다.
이 이야기 또한 당시 백성들의 삶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건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의종 21 년
3 월조에 나와 있는 이야기로 중미정이라는 정자를 지을 때 실린 이야기다. 잦은 연회로 국고가 탕진되어
인종 때까지 그럭저럭 유지되던 고려의 태평성대가 무너지게 되었다.
그리고 무신들은 개경에 입성한다. 무신들은 입성 후 바로 의종을 폐위시키진 않는다. 그러나 [4] 정변
시작 3 일 후 왕광취를 비롯한 환관 세력들이 반 무신 정변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를 제압하고, 이 배후에
의종이 있다 생각해 의종을 폐위시키고 동생 명종을 옹립하여 고려의 정국을 장악했다. 이것이 바로
무신정권의 시작으로 무신 집권기는 1270 년 마지막 실권자 임유무가 살해되기까지 정확히 100 년간
지속되었다.
쫓겨난 의종은 거제도에 유폐되었다. 1173 년, 무인 정권에 반발하며 의종의 복위를 꾀한 김보당의 난이
일어났으나 이의민에게 진압되고, 이 때문에 계림[5]으로 또다시 옮겨져 유폐되었다. 원래 의종은 거제에
유폐되어 있었는데 김보당의 난 동안 경주로 옮겨온 거다. 즉, 직접 가담. 김보당의 난이 실패하자
동경은 경주로 격하되었고, 의종은 그대로 유폐되었다. 그 뒤 곧 찾아온 이의민에게 글자 그대로 끔살
페이탈리티 당했다. 향년 47 세. 얼마나 끔찍하게 죽었는지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이러하다.
"전왕을 끌어내서 곤원사의 북쪽 못가에 이르러 술 두어 잔을 드리고, 의민이 등뼈를 부러뜨리니 손대는
대로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의민이 큰 소리로 웃었다. 박존위[6]가 담요로 싸고 2 개의 가마솥을 마주
합하여 그 속에 넣어 못 속에 던졌다.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 티끌과 모래가 날아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부르짖고 떠들며 흩어졌다. 절의 중 가운데 헤엄 잘 치는 자가 있어서 가마솥은 가져가고
시체는 버렸다."
3. 평가[편집]
의종은 환관 무리와 놀러 다니는 일로 날을 보내어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국정은 어지럽고 기강은 땅에
떨어졌다. 문신들과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고, 무신을 혹사하고 천대한 결과
마침내 무신의 대란(大亂)을 도발케 했다.
- 김상기, 『고려시대사』
흔히 이렇듯 항락에만 몰두하다가 자신도 비참한 운명을 맞았고 무신 정변으로 고려의 혼란을 초래한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다가 험한 난관에
부딪혀 좌절하고 만 비운의 군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사실 문종 이후의 왕들이 괜찮은 주변 여건에다
내부적으로 안정기라서 대체로 명군 소리까지 듣는 것에 비해서, 의종은 무신 정권의 시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역사와 당시 상황을 기록하는 문신들에게 최악의 평가를 받은 측면도 있다.
4. 트라비아[편집]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김규철이 배역을 맡아, 똘기 어리면서도 한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정신이 붕괴하는 의종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무신 정변이 발생하는 첫 화에선 그저 흥청망청 노는 것만 좋아하는 암군으로 등장한다. 무비의 언급에
의하면 처음의 의종은 성군이 되고자 했으나, 그가 등용한 문신들이 의종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면서 결국
의종이 타락해버렸다고 한다. 차별 등으로 인해 분노가 극에 달해있던 무인들은 미리 정변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정중부는 소장파 무신들에게 만약 의종이 황궁으로 돌아간다면 정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웠고, 수상함을 느낀 김돈중이 황궁으로 돌아갈 것을 건의하나 의종은 이를 무시하고 보현원에
놀러가버린다. 이후 역사대로 무신 정변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의종이 총애하던 한뢰는 의종 앞에서
이의방의 철퇴에 참교육을 당하고 만다.
2 화에서 의종은 환관들에게 무신들을 척결하라는 혈서를 내리는데, 이의방 일파는 밀고자 덕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황궁에 들어선다. 희대의 무력 굇수들에게 환관들은 일방적으로
박살나버리고, 주동자인 왕광취는 이의방의 철퇴에 참교육을 당하고 만다. 왕광취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절명한 직후, 이의방은 의종 앞에 대놓고 왕광취의 머리통을 내던지고(이 때 의종은 비명을 제대로
질렀다.) "황제는 폐위되셨소이다!"를 외친다.
이의방에게 삿대질을 당한 뒤, 궁에 유폐되는데, 이의방 일파가 대놓고 궁전 앞에서 환관들을 고문했고,
그 비명 소리가 내부에 까지 들려오자 멘탈이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폐위가 결정된 후엔 군기감에
유폐되는데, 거기선 이광정 따위에게도 멸시당하고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궁궐 밖으로 끌려나갈 때
의종은 대신들과 장군들을 향해 "짐은 반드시 황도로 돌아올 것이다. 짐이 돌아와서 다시 용상에 앉는 날
여기 있는 네놈들의 간을 내어 씹어먹을 것이다. 네놈들의 목을 자르고 불에 태워버릴 것이다!"하는
살벌한 대사를 퍼부으며 재기를 다짐했다. 그러나 형벌이 결정되고 무비와 함께 거제현으로 유배를
떠나는데, 백성들 사이에서도 별로 평판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유배 도중 백성들에게 돌을 맞기까지 한다.
이때 두경승이 찾아와 의종에게 절을 올렸고, 당시 의종을 호송하던 이의민은 두경승의 인물됨을
눈여겨본다. 거제현에선 와신상담을 하듯이 생선 내장을 생으로 씹어먹는 충공깽스런 모습도 보이며,
황궁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린다. 그 와중에 김보당 일파가 찾아와 의종을 보위에 올릴 것을 약속한다.
얼마 후, 의종 폐위와 관련하여 금나라와 외교 분쟁이 벌어지자, 혼란을 이용해 왕조를 갈아치우고자
했던 이고 일파는 의종을 살해하고자 결사대를 파견했고, 때마침 무비를 걱정하던 이의방도 이의민을 몰래
거제현으로 보낸다. 이고의 부하들이 거제현에 도착할때 쯤 악몽을 꾼 무비는 그 날 밤 의종을 데리고
산속으로 도주하였고, 덕분에 이고의 부하들은 의종을 찾지 못하고 때마침 도착한 이의민에게 끔살당하고
만다. 무비는 의종을 버리고 이의민과 함께 거제현을 떠나는데, 뒤늦게 무비를 발견한 의종은 무비를
애타게 외치지만, 무비는 의종에게 자신을 잊으라고 말하며 떠난다. 이 때쯤 의종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의종은 어머니인 공예 태후에게 버림받고, 수많은 신하들에게 폐위당한지라 멘탈에 금이 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무비가 의종과 함께 한 지라 무비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런 무비마저도 의종을
져버리자 의종은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야 만다. 한참 후 송유인이 병사들을 이끌고 거제현에 찾아왔을때,
의종은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선 무비를 부르짖으며 온 곳을 쏘아다니는 안습한 모습을 보인다.
이후 섬을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소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사실 섬의 지도를 그리기 위한 것이었다.
의종은 김보당 일파에게 지도를 전달했고, 반란군은 이를 이용해 손쉽게 주둔군을 박살내 의종을 데려간다.
김보당의 난 때 경주 호족들과 야합하여 김보당과 개경을 협공하고자 하였으나 김보당은 붙잡혀 참수되고
이의민에게 경주를 장악당하며, 이의민이 거제현으로 다시 데려가겠다고 하자 한때 자신의 은덕으로
천민에서 벗어난 그에게 이별주를 청하며 부월무를 보여달라고 한다. 이 때 이의민이 추는 부월무가 압권.
그 후에 계곡을 바라보며 "떠날 때가 됐구나"[10]라고 말하며, 그 직후 역사대로 이의방의 밀명을 받은
이의민에게 등뼈가 으스러져 죽는다. 그리고 의종은 훗날 환생하여 자신을 죽인 이의민의 개가 된다
카더라.
금강야차로 악명 높은 이의민에게도 의종 시해는 엄청난 일이어서 그런지, 이의민은 한동안 악몽을 꾼다.
책사인 두두을 말로는 의종의 원혼이 성불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아서 그런거라고. 한편 김보당의 난
당시에는 어떻게 형님을 죽일 수 있겠느냐고 울먹이던 명종은, 먼 훗날 이의민 정권 때에 이르러서는 의종
시해를 '어쨌든 국가과 황실을 위해서 할 수 밖에 없었던 필요 악'으로 인정한다. 의종이 시해 당하면서
황실이 안정 되고, 명종의 정통성이 확립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 대 명종 왕호 (1131-1202)
재위 1170~1197
1. 소개[편집]
2. 생애[편집]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살육하고 의종과 태자를 몰아낸 다음 유약한
성격인 그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약간은 조선 중종과 비슷하지만 쿠데타 세력의
성격이 매우 달랐다.
또한 유약한 성격은 물론이고 심각한 애처가에 딸바보적인 성향도 있었다. 애첩인 순주가 죽고 거의 반년
후인 1180 년에 명춘마저 죽어버리자 우울증에 시달려 어머니 공예왕후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다
들을 정도로 울어댔다고 한다. 그리고 심지어 후궁들 중에서 마음을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며 이미 시집간
둘째 딸인 수안궁주를 측근으로 삼아 자신에게서 밤낮으로 떨어지지 못하게 한다음 밤에는 품에 끼고 잠을
자기도 했고 이 기간은 무려 5 달 가까이 되었다. 자기 마음을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며 시집 간 딸을
불러들여서 하루종일 자신의 옆에만 있게 하고 잘 때는 끼고 잔 것이다.
그러다보니 결혼한지 1 년만에 독수공방을 하게 된 사위가 분통을 터트리며 파혼을 요청하기에 이르었고,
그렇기에 명종은 결국 사위를 수창궁(壽昌宮)의 동쪽 태후(太后) 행궁(行宮)에 거처(居處)하게 하고,
공주를 보내 남편을 위로하게 했고 결국 5 달만에 딸을 집으로 돌려보내주었다.
그리고 순주와 명춘 및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궁내에 불러들여서 화려한 오색 옷들을
입히고 놀기 바쁘다보니 궁 내가 하도 시끄러워서 자연히 군주로서의 권위는 저 너머로 떨어졌고, 경대승
정권 당시임에도 무관들이 전부 마음 속으로 명종을 비난하고, 수군거리며 탄식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후사는 그에게 이어졌으니, 신종의 뒤를 이은 신종의 아들 희종이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폐위되자 명종의 아들 강종이 왕이 됐고 그 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그의 자손이 왕이
되었다. 덧붙여서 공양왕의 경우 부계로는 신종의 7 대손이지만, 모계 쪽으로는 그의 후손이 된다.그의
신하였던 경대승덕분에 까이는 인물이다.허수아비 임금이라고 생각하기쉽지만 그건 정중부때의 일이다.
정중부의경우 명종이 무엇을 하던 제동을 걸정도로 명종을 압박했지만 정중부를 제거한 경대승의 경우
왕인 명종을 상당히 존중하고 심지어 어려워했다.위의 항목처럼 명종이 놀자판이면 정중부는 명종이
못놀게 막았지만 집권자인 경대승이 자신을 위협하지않고 오히려 복고주의자였기 때문에 왕께서 무엇을
하시는데 신하인 자신이 어떻게 하냐는 주의였기때문 그러면 정신을 차리고 정사를 펼쳐야 하나 오히려
자신을 속박하는 사람이 없자 그냥놀았다. 게다가 정치적이념에서 늘 경대승과 갈등을 빚었는데
명종자신의경우 무인들에게 추대됐기 때문에 무인들에 대해서는 호감이었지만 경대승의경우 무인들을
극혐하고 문신들을 존중하는 무신이지만 문치주의자였던것 물론 경대승의 깨방정도 있지만 경대승을
두려워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경대승자체가 왕인 명종을 상당히 존중했기때문에 늘 경대승을 의심하고
심심하면 불러서 늘 갈궈됐다.정중부의경우 이러면 그냥 왕을 갈아치워면 그만이나 왕을존중했던 경대승은
늘 명종에게 자신의충성심을 변호해야했다.어떤의견으로는 그가 30 살에 요절한것도 암살위협도있지만
왕인 명종이 그를 늘의심해 심하게 갈구다보니 그로인한 스트레스로 인해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무인시대에서는 그의어머니가 황상은 경대승같은 용마를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사용을 못하냐며 깐다.
결과론적으로 페위됐을때 무신집권자중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성했던이는 돌아보니 경대승 뿐이었다.
3. 기타 창작물[편집]
징기스칸 4 일러스트
3.2. 무인시대[편집]
무신정변 당시엔 갈등의 원인 중 하나로 등장한다. 이의방을 비롯한 소장파 측에선 대령후를 옹립하고자
했으나, 정중부 측은 익양후(명종)을 옹립하고자 했고, 때문에 이고 측에서 익양후를 인질로 잡는 등
유혈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나 대령후가 아무도 몰래 정균에게 공구리 당한 관계로 결국 익양후가 황제로
즉위한다. 접전이 벌어질 당시, 익양후는 장독에 숨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의방 정권이 몰락하고 정중부 정권이 들어설 때 쯤엔 은근히 자기고집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의방의 딸인 태자비를 폐위할 때부터 태후에게 반항하기 시작하며 자신을 황제로 세워준 것은
감사하지만 황제는 자신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아무리 허수아비라지만 권력자들은 겉으로나마 명종을
최고 권력자로 대우하는데, 공예태후가 자신이 명종을 즉위시켰다며 영향력을 행사할려고 하니,
명종으로서는 어머니가 못마땅해보이는 것. 또한 정중부가 몰락하자 정중부에게 없는 죄까지 뒤집어씌워서
조리돌림 후 처형시키는 잔혹한 면모까지 보인다. 정중부 일가를 도모한 경대승조차도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냐며 경악한다. 사실 정중부는 권력을 탐하고 권신으로서 지위를 노렸을 뿐 황제의 자리를
탐하지는 않았다. 정균의 경우도 죽기 직전에 가서야 자신이 황제가 되겠다고 생각했을 뿐 그 이전에는
그저 임씨 부인의 일로 흑화한 광기에 찬 권신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명종은 자결을 하겠다고 하는
정중부를 잔혹하게 죄를 뒤집어씌워 조리돌림까지 시켰다. 이에 경대승 마저도 자신도 이렇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충격을 받는다.
과연 경대승 집권기에는 경대승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이는 한편, 경대승을 비호하던 태자와의 반목 때도
술을 마시면서 "태자, 짐은 결코 네게 용상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하며 분노한 모습은 허수아비일
뿐이기는 하지만 황제의 자리에 올라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름에 따라 그 권력에 취하여 이쪽도 흑화했음을
보여주는 부분. 드라마의 연출 상 명종이 경대승의 집권으로 태평성대를 이룰 호기를 맞았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내쳐 버렸다는 식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건 경대승을 너무 띄워주다 보니 다른 면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판에 가깝다. 극중에서도 몇 차례 묘사된 바와 같이, 고려를 무신 정변 이전으로
되돌리겠다는 경대승의 생각은 그 무신 정변으로 옹립된 명종의 정통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었기
때문. 이에, 아예 학계 일각에서는 의종이 이의민에게 시해당하지 않았더라면 경대승에 의해 의종이
복위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즉 경대승의 집권으로 (명종의) 황권은 약화되면
약화되었을지언정 결코 강해질 수 없었고, 명종으로서는 경대승을 믿지 못하고 경계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하여간 작중 경대승과 명종을 대비시키기 위해서 그런지, 이 시점에서 명종은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인다.
경대승의 죽음 이후, 정신을 못차리고 경대승의 죽음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푸는 작태를 보이자,
보다못한 태후가 연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들다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자, 어머니를 걱정하면서도 결국 그
일을 빌미삼아 태후전에는 가보지도 않는 찌질함을 보인다. 하지만 곧 손석과의 거래, 김자격의 낚시
등으로 청주 가문이 반역을 저지르지 않은 것으로 사건을 무마시키기로 마음먹은 조원정이 대전에서
황명을 대놓고 무시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병상에 있던 태후가
"황실의 권위를 찾고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꿈은 버리고, 황실을 지켜내는 것만을 생각해야할 것이다"
라는 팩트 폭력 말과 함께 이의민을 불러올리라는 조언을 주고, 명종 역시 이 조언을 받아들여 두경승을
통해 이의민을 불러올린다.
이의민 집권기에는 결국 태후마저 세상을 뜨고, 홀로 황실을 지키며 문극겸과 두경승에게 의지하여 정국을
운영한다. 이 즈음부터는 허수아비 황제로나마 오랜 기간 제위에 있으면서 드디어 무언가를 깨달은 것인지,
이의민의 장남 이지순이 황실을 떠받들 재목이라 평하는 태자에게 "허수아비 황제로 무부들에게 흔들리는
것은 자신의 대에서 끝나야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모습은 조원정의 난 때부터 볼 수 있는데,
도성 내에 반란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자리를 지키다가 반란군 수괴가 들어오면 대면하겠다'
라는 판단을 내린다. 극 초반에는 장독에 숨어들 정도로 유약했고, 경대승의 거병 때만 해도 정중부의
사가로 도주할려고 했던 것과 비교하면 성장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의민 집권기 때는 두경승을 이용해 이의민을 견제하는데, 그렇치만 이의민의 존재 의미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자신은 무신 정변으로 옹립된 황제이니, 무신들을 부정하는건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걸 깨달은 것. 때문에 극 초반부 때와는 달리, 의종 시해건에 대해선 황실을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해야하는 일이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타락한 이의민과 이지영이 횡포를 부리자 점차
이의민을 제거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으며, 이지영이 궁녀도 아니고 후궁을 겁간하는 일이 벌어지자[4],
뒷목을 잡은 명종은 두경승과 최충헌을 이용해 이의민 일파를 제거한다.
최충헌은 유약한 황제라고 무시하는 최충수와 주변 부하들에게 "명종은 유약하게 권력자들에게
흔들리다가도 그들의 권세가 기울면 가차없이 내쳐버리는 무서운 황제"라고 평가하며 그를 경계하는데,
과연 명종은 최충헌이 중방을 도륙내는 모습을 보며 느낀 것이 있는지 두경승에게 그를 도모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하지만 두경승이 최충헌의 고육지책에 휘말려 그에게 패하고, 명종은 대전의 용상에 앉아 최충헌,
최충수 형제의 병장기와 마주하게 된다.[5] 결국 명종 자신 역시 최충헌에 의해 폐위당하여 굵은 빗줄기
속에서 비참하게 대전에서 끌려나오며 형인 의종의 전철을 밟게 되며, 유폐된 곳에서 노환으로 최후를
맞이한다.
20 대 신종 왕탁 (1144~1204) 재위 1197~1204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1154 년, 평양후에 책봉되었다. 1197 년, 정변으로 집권한 최충헌이 형 명종을 폐위시킨 후 그 자리에
즉위시켰다. 이 때 나이가 54 세였다.
그의 치세는 최충헌의 독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다. 신종은 왕위에 있었지만 실권은 없었던
허수아비 국왕이었다. 또한 최충헌 정권에 반발한 민란이 각지에서 일어나 고려는 큰 혼란에 빠진
상황이었으며, 특히 그 유명한 '만적의 난'이 일어난 것도 바로 신종 시대. 이 상황에서 신종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3. 기타[편집]
충렬왕은 태자 시절이던 1260 년 신종의 증손녀 정화궁주 왕씨를 태자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원나라와의
오랜 전쟁이 끝나고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충렬왕은 결혼한 지 14 년이나 된 정화궁주를
두고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의 딸 제국대장공주를 왕비로 맞이해야 했다. 정화궁주는 제 2 비로 밀려나
갖은 수모를 당하며 살았다.
4. 대중 매체에서[편집]
코에이의 게임 징기스칸 세계편에서는 고려의 군주로 등장한다. 하지만 세계편 시작연도가 1206 년이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신종은 죽고 희종이 왕으로 있어야 한다.
1. 소개[편집]
2. 생애[편집]
2.1. 즉위 초기[편집]
결국 1211 년 내시낭중 왕준명 등 측근들과 함께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최충헌을 궁으로 불러들여
환관을 시켜 최충헌에게 "왕께서 공에게 술과 음식을 주신답니다"란 말로 그를 궁 깊숙한 곳까지 유인했다.
이 말을 믿고 들어온 최충헌에게 왕준명 쪽의 무사와 승려들이 달려들어 수행하던 사람들을 죽이고 그를
살해하려 하자 놀란 최충헌은 희종이 있는 대전의 문을 계속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외쳤으나 희종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사실 열어주고 무사와 승려들도 입장시켰으면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 이
때서야 희종이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파악한 최충헌은 간신히 도망쳐 지주사 방의 장지에 숨어
화를 면했고 수상하게 여긴 상장군 김약진을 비롯한 최충헌 측근들의 대응으로 결국 최충헌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다.
당연히 빡친 최충헌은 반란의 주동자인 내시낭중 왕준명 등 희종의 측근들을 숙청한 뒤 바로 희종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유배 보내버렸다. 여기서 최충헌의 정치 감각을 알 수 있는데, 기존의 무신집권자들은
흔히 왕이 자신을 없애려하다 실패했을 경우, 왕을 죽이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이런 행동은 주위의
반발을 사게된다. 최충헌은 기존 무신 집권자들과는 다르게 이런 행동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이후 영종도, 교동도 등으로 옮겨다니다가 1219 년 개경으로 불려가게 된다. 그 이유는 셋째딸
덕창궁주가 최충헌의 아들 최성[1]과 혼인을 하게 되었기 때문.[2] 그렇게 최충헌의 사돈이 된 그는 8
년간 개경에서 잘 먹고 잘 산다.[3] 그러다가 1227 년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교동도로 옮겨지고 그
곳에서 쭉 유배생활을 하다가 1237 년 법천정사에서 승하했다. 유배다닌 기간은 (중간에 개경에서 지낸
기간을 빼면) 18 년[4]이었고 향년 57 세였다. 최씨 정권기에 집권한 고려 왕들 중 그나마 최충헌에게
정면 승부를 걸었던 왕이었으나 무참히 실패하고 꽤나 고단한 삶을 산 안습의 군주. 결국 사후에도 개경에
돌아오지 못하고 강화도에 묻혔다.
참고로 큰딸은 고종과 혼인했다. 둘째딸 영창궁주는 정간왕의 후손인 승화후와 영녕공(永寧公)의
어머니이고, 넷째딸 가순궁주의 딸은 원종의 2 비 경창궁주다.
여담으로, 남한 땅에 묻힌 3 명의 고려 왕 중 한 명이다.[5] 능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의 석릉.
최근 연구에 의하면 성평왕후 임씨도 강화천도 시기에 사망했기에 그녀의 능인 소릉(紹陵)도 희종의 석릉
근처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능묘의 석수, 부장품, 무덤 구조로 보아 정순왕후의 릉인 가릉이
성평왕후의 소릉이고, 바로 위쪽의 능내리 석실 고분군을 가릉으로 비정한 결과도 있다. #
2.4. 평가[편집]
3. 대중 매체에서[편집]
22 대 강종 왕오 (1152~1213) 재위 1211~1213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고려 명종의 장남으로 무신정변으로 의종이 무신들에게 폐위되고 아버지 명종이 즉위하자 태자가 되었다.
태자 관례식 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정변을 일으키려던 이고가 역으로 이의방에게 죽임을 당하고
이의방이 권력 실세가 되자 그 딸과 정략 혼인을 하게된다.
그러다 서경유수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키고, 진압하러 출정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오던 이의방이 정중부의
아들 정균과 승려 종참에게 암살당하자 혼인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태자비는 폐출되었다. 강제로 이루어진
혼인이었으나 관계는 좋았는지 짧은 기간 슬하에 수령궁주라는 딸을 한 명 두었고 훗날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녀를 찾아 다시 들이려하나 실패. 사후 사평 왕후로 추존한다.
어차피 노령의 인물이었고, 무신들이 집권하던 시기라 별다른 치적없이 즉위한 지 1 년 8 개월만에 긴 유배
생활 끝에 얻은 지병으로 병져 눕더니 이내 승하하였다. 사신 또한 “강종이 임금으로 있으면서 모든
정무는 권신의 견제를 받았고 갑자기 병들어 나라를 다스린 햇수도 짧았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라며
평을 내릴 정도로 그야말로 왕으로 한 업적이 없다. 사실 즉위할 때 이미 늙고 병든 상태였고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 되어 죽었던데다가, 결정적으로 그 당시에는 이미 최충헌이 전권을 쥐고 흔들었던 만큼
이미 뭘 해보려 해도 할 수 없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맞겠지만. 그래도 그의 아들인 고종의 가계가 고려가
망할 때까지 왕위를 계승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일지도 모른다.
왕릉인 후릉은 강화도에 위치했다고 하나, 확실하게 그 위치가 확인된 전임자의 석릉이나 자기 아들의
홍릉, 부인인 원덕왕후 유씨의 능인 곤릉, 손녀며느리인 정순왕후 김씨의 가릉 등과 달리 그 위치가
아직도 불명이다.
23 대 고종 왕철 (1192~1259) 재위 1213~1259
1. 소개[편집]
2. 재위[편집]
3. 여몽전쟁[편집]
고종 4 년인 1216 년부터 몽골의 고려 침입이 시작되었다. 유일한 업적이 있다면, 이 시기에 고려대장경
(일명 팔만대장경)을 조판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비용은 최우가 댔다. 사실 뭘 하려고 했어도 최씨
정권이 정권을 잡고 있어서 할 수 있는게 없긴 했다. 막판의 낭비도 얼마 누리지도 못했고.
4. 사망[편집]
5. 평가[편집]
6. 기타[편집]
부인인 안혜왕후는 폐위된 희종의 딸로, 고종과는 6 촌이 된다.베트남 리 왕조의 마지막 후예 중 하나인
이용상 왕자를 받아줘서 잘 대우한 군주이기도 하다.다음 왕조에서 같은 묘호를 받은 임금과 능호까지
한자로도 똑같다(홍릉, 洪陵). 또한 둘 다 재위 기간이 40 년을 넘었으며(고려 고종 46 년, 조선 -
대한제국 고종 43 년), 재위 내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는[9] 절묘한 공통점이 있다.
1. 소개[편집]
고려의 제 24 대 왕. 묘호는 원종(元宗), 시호는 순효대왕(順孝大王)으로 원나라가 준 시호는 충경왕(忠
敬王). 원나라의 시호와 고려의 시호를 합쳐서 충경순효대왕(忠敬順孝大王)으로 불린다. 고려 왕사에서
종(宗)의 묘호를 받은 마지막 임금이다. 휘는 정(禎). 본래 휘는 전(倎)인데, 원종의 휘에 대해선
고구려의 고국원왕과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원종이 백승현(白勝賢)의 주청대로 자신의 휘를
고대 주나라의 성군 강왕(康王)의 이름자랑 같게 바꾸려다 하필 그 이름이 제 명에 못 죽은[3]
고국원왕의 휘와 같다는[4] 걸 알고 기겁해서 그냥 옛날 이름 그대로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자는
일신(日新). 고종의 장남이다.
2. 태자 시절[편집]
쿠빌라이는 태자를 크게 환대하고 강화를 논의했으며 때마침 고종이 사망해 고려 국왕도 공석이 되자
쿠빌라이는 원종을 국왕으로 책봉해 고려로 보냈다. 그리고 향후 고려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한
가지 약속을 하게 된다. 바로 불개토풍(不改土風).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 되더라도 고유한 풍습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이었다. 이 약속은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도 불리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쿠빌라이
(세조)의 유훈이라서 후대의 칸들도 건드릴 수 없었다. 동양 왕조, 특히 유교 문화권에서는 선대 군주의
제도나 유훈은 함부로 거스를 수 없었다. 특히 태조나 세조처럼 왕조에서 중요한 임금들의 유훈은 거의
불문법 역할을 했다.
덕분에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한편으로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긍정적으로만
사용된 건 아닌데 권문세족의 기득권 유지 명분으로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원나라 간섭기에는
모수사패와 압량위천을 통한 농장의 확대와 양인 수 감소가 심각했는데 노비제 개혁을 통해 이를 개선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환리길사라는 관료를 파견했을 때 권문세족이 노비제 개혁을 저지시킨 명분이 바로 이
세조구제였다. 노비제는 동국(고려)의 고유한 습속이니 세조의 유훈에 따라 바꿀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결국 제대로 된 개혁 목소리가 나온 건 공민왕 시기였다. 참조
3. 재위 기간[편집]
원종이 즉위할 무렵은 그 기나긴 무신 집권기가 끝나던 시기로 최씨 정권의 마지막 수장 최의가 살해되고
새로운 실권자인 김준이 집권하던 시절이다. 사실 원종이 몽골에 입조하고 있을 때 고종이 죽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 있어서 위험할 뻔했다. 바로 김준이 원종의 동생인 안경공 창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종의 유언에 의해 고려에 남아 있던 태손 심[8]이 왕위를 대신하게 만들었고, 결국 이듬해에
몽골과 강화를 맺고 돌아와서 정식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5. 평가[편집]
동국통감에선 원나라와의 화친은 그런대로 높이 샀으나 문제는 나라를 위협하는 권신을 자신이 자발적으로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고려 고종의 경우는 무오정변을 통해 원나라의 입김과 상관없이 여러 문무
신료들이 척살하여 권신 최의를 제거하고 최의에 붙어있는 간신배들을 숱하게 소탕했다. 이점에서 원종은
아버지 고종과 달리 동국통감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무오정변이 터지고 난 이후에 남아있는 무신정권
잔당들을 삼별초의 난 이전에 없애지 못하였고 원나라의 편에 기대어 제거했기에 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외정에서는 높은 평을 받으나 내정 면에서는 고려 고종보다 못 미친다는 평이다. 소현세자도 외정에
능했고 이점에선 학계에서 높은 평을 받으나 정작 소현세자도 원종처럼 내정면에서 크게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소현세자에 대한 거품이 끼었다고 비판하는 학자들은 소현세자가 외정에선 훌륭하나 내정 문제에
비판을 가한 것처럼 원종도 마찬가지였다. 실은 원종도 소현세자처럼 왕이 못되고 죽을판국이었는데
김방경, 유천우 등의 충신들 덕택에 가까스로 왕에 올랐다. 안경공의 경우는 조선으로 치면 효종이 될
봉림대군과 비교된다. 안경공이 원종 대신에 왕이 될 경우 오히려 효종같은 왕이 될 확률이 높았으나 결국
원종이 왕위를 다시 찾았다. 고려 입장에선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었단 왕이었다. 태자 시절은 소현세자와
같았으나 집권할때는 조선의 현종과 비슷했다. 다사다난한 치세를 보내어 위기를 극복해 귀주대첩이라는
승리를 얻어낸 고려의 현종과 달리 원종은 조선의 현종과 비슷했고 실상 조선의 현종보다 더 다사다난하기
그지없었다.
6. 대중 매체에서[편집]
임시국왕 영종 왕창
1. 개요[편집]
고려의 임시 국왕. 고종의 아들이자 원종의 동생. 본명은 왕창(王淐), 작위는 안경공(安慶公). 그
때문에 안경공 창(淐)이라고 자주 불린다. 권신 임연의 압력으로 강제 퇴위당한 원종이 양위하여 잠시
왕을 했다. 굳이 재위 기간을 따지자면 1269 년 6 월 ~ 11 월. 일반적으론 역대 고려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2. 생애[편집]
1253 년, 몽골의 인질로 갔던 영녕공 왕준(永寧公 王綧)이 "태자나 안경공이 입조하면 군사를
물린다더라"고 전했다. 최항은 반대했으나 결국 피해가 커지자 그 해 12 월 사신으로 보내졌다.
이후 공양왕 3 년(1391 년)에 안경공의 기일을 맞아 공양왕이 안경공을 영종으로 추존해 정식 왕으로
추봉하려 시도했지만, 안경공은 형의 자리를 잠깐 빼앗았던 찬탈자일 뿐이라는 예조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하게 되었고, 왕의 신분으로 복권되지 못한 채 고려가 다음해 망하고 만다. 이 문서에 나오는
안경공이 사후에 받은 호칭인 영종은 종(宗)이지만 고려사에 의하면 묘호가 아니라 시호다. 안경공의
시호인 '영종'은 공양왕이 올리려던 시호로 추봉 시도가 무산되었기에 정식 시호가 되지 못했다.
3. 여담[편집]
재위가 하도 짧아서 특별한 일은 없지만, 최탄이 몽골에 투항해 서경(평양)을 포함한 고려의 60 여성을
바치고 동녕부가 설치된 때가 이 때.이 사람의 후손은 조선의 개성 왕씨 숙청 과정에서도 어찌어찌
살아남아서 안경공파를 이루고 있다.
1. 소개[편집]
1260 년, 아버지 원종이 즉위한 이듬해 태자에 책봉되었고 1271 년 원나라에 갔으며 세조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했고 1274 년, 원종이 죽자 고려에 돌아와서 즉위했다. 귀국할 때 몽골식으로
머리를 변발하고 옷도 몽골식으로 입고 있어서 거리에서 보고 통곡하다가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부왕 시절 원나라에 굴복한 데다가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원나라의 간섭이 심해졌지만, 세조구제 이후로 다루가치를 내보내고 몽골군을 철수시키며, 고려의 복식을
지키는 등 독립성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또한 황제의 부마라는 위치는 상당한 것이라 쿠릴타이에 참석할
권한도 있으며, 원의 사신과 다루가치도 술잔을 받을 때는 절을 하고 받아야 할 정도로 함부도 굴지
못했다.
다만 원나라 역시 고려가 망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물자에 대한 지불은 확실히 했으며, 1291
년엔 고려에 기근이 들자 쌀 10 만 석을 공짜로 주기도 했다.
측근 세력들을 활용하여 왕권이 강화된 후에는 긴장감이 풀어졌는지 잔치와 매사냥을 즐기다가, 이러던 중
1297 년 몽골에서 세자의 혼인을 마치고 돌아온 후 왕비 제국대장공주가 죽자 정치에 염증을 느꼈는지
1298 년 아들 장(충선왕)에게 선위할 뜻을 밝히고 결국 양위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충선왕의 개혁 정책에
대한 반발과 왕실의 치정 문제(자세한 것은 아래 항목 참고)와 두 부자의 사이를 모략하는 무리가 생기는
등 여러 문제가 겹쳐 결국 7 개월 만에 다시 복위했다. 충선왕은 다시 원나라로 돌아가서 충렬왕이 죽은
10 년 후에야 고려에 돌아온다.
4. 원 간섭기[편집]
충렬왕 치세는 원 간섭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로, 이 치세에 원의 문물과 풍습이 많이 들어왔다.
충렬왕 또한 원나라에 자주 들락거리며[6] 원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다. 관복은 몽골식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백성들에게는 강요하지 않았다.그러나 원의 부마국이 되면서 내정 간섭을 많이 받았고,
관직명도 원의 속방에 위치에 있는 만큼 격하해야만 했으며, 원에 빌붙은 권문세족들이 토지를 많이
소유하면서 농민들의 삶은 곤궁해졌다.
의복을 몽골식으로 바꾸게 했는데 충렬왕 8 년에 고려의 사신 강수형(康守衡)에게 쿠빌라이 칸이 "고려의
복색은 요즘 어떠냐??"고 묻자 “달단의[7] 의복과 모자를 입었고 조서를 맞이하든지 절일을 하례할
때에는 고려 의복을 입고 일을 봅니다."라고 대답했고, 쿠빌라이 칸은 “내가 고려 풍속은 그대로
놔두겠다고 했고, 이제껏 바꾸라고 내가 뭐라고 한 적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갑자기 바꿨다냐?"라고
의아해했다.
고려사에서는 충렬왕을 "태자 때는 학문에 충실하고 성격도 좋아서 잘 나가다가 막판에 참소하는 말이나
듣고 아들하고 싸우며 항락에 빠지는 등 완전히 시ㅋ망ㅋ한 왕"이란 식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충렬왕으로써도 재위 초기에는 고려를 지키기 위해 힘썼지만, 왕권이 강화된 이후로는 향락에 빠지는 등
왕으로써 무책임했던 군주였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듯 하다.
5. 제국대장공주[편집]
오히려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의 상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1274 년 15 세에 충렬왕과 결혼했고,
자신의 상인을 데려와서 고려의 인삼, 종이, 모시 따위를 원나라가 장악한 실크로드를 통해 러시아와
아랍에까지 팔아먹었다. 이 때부터 고려의 물건이 세계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특히 결혼한 지
8 년 뒤, 원나라가 남송을 점령하고 중국을 집어삼킨 뒤론 인삼 교역에 날개가 달렸다. 또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거나, 사냥을 멈추고 정사에 힘을 쓸 것을 왕에게 간하기도 하는 등, 정작 고려인인 왕보다
훨씬 더 개념찬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충렬왕 11 년(1285 년)에는 환관 김자정(金子廷)을 동경 부사(東
京副使)로 삼았는데, 다음은 이때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 오간 대화.
6. 업적[편집]
원나라의 호구조사 요구를 거부하고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하기로 했으며, 고려의 독자적인 조세징수
권한을 확답받은 것도 이 사람의 업적. 덕분에 고려의 백성들은 직접적으로 원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원나라에서는 공출이라며 고려 조정에서 요청해 뜯어가긴 하지만, 적어도 백성들이
직접 매년 매년 세금을 내는 것보다는 훨씬 다행한 일이었다.
또한, 원종 때 잃어버린 땅을 돌려받은 것도 충렬왕 시기의 일이다. 1290 년에 자비령 이북의 땅을,
1301 년에 탐라 총관부를 원나라로부터 돌려받았다. 다만 고종 때 빼앗긴 쌍성 총관부는 돌려받지
못했는데 이것은 훗날 공민왕이 무력을 써서 탈환한다.
유학과 관련해서는 국학을 개칭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성균관의 전신인 성균감이다. 그리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문묘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안향의 건의로 장학재단인 섬학전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원래
고려에는 예종이 설립한 장학재단 양현고가 존재하였지만, 이 시기에는 이미 너무 부실해져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서 섬학전을 설치한 것이다. 고려 시대의 국학 부흥책은 거의 전시기에 걸쳐있엇지만
전시기에 걸쳐서 실패했다. 이것은 조선 시대 역시 마찬가지. 어느 시기건 국초에 아주 잠깐 관학이
일어났다가 바로 사교육에 휩쓸리고는 했다. 현대의 사교육 열풍은 짧게 잡아도 최충까지는 거슬러
올라간다. 안향에서 감 잡은 사람도 있겠지만, 성리학이 한반도에 최초 전래된 시기도 충렬왕 대이다.
다만 이 모두가 그렇게까지 효과를 보지는 못했고 이미지도 약하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업적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공민왕 이전의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은 나름대로 개혁을 시도는 하지만 모두 좌절하고 개혁을
염증을 느끼는 전개를 탔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민왕 역시 마찬가지. 그나마 이것은 원 성종기의
문치적인 정책이 영향을 준 것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실제 충선왕 때의 서적 입고 및 성리학 보급은 원의
문치적 정책으로 충선왕과 만권당이 힘을 얻은 바가 컸다.
그리고 충렬왕파 신하였던 송균, 송린, 왕유소, 송방연 등은 모두 처형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아난다를
지지했다는 이유였지만.. 참고로 왕전도 처형되었다. 충선왕이 말렸다지만 소용없었다.
9. 기타[편집]
1. 소개[편집]
아래 구체적인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고려의 왕인데도 원나라에서 살았던 기간이 고려에서 살았던
기간보다 훨씬 길고, 특히 두 차례에 걸친 재위 기간 동안에는 겨우 1 년 정도만 고려에 있었다. 어머니가
원나라 공주라 원나라의 언어나 문화에 익숙한 상태로 자랐을 것이고 16 세부터는 거의 원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에 고려에 대한 애착이 깊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원나라 황실에서 고려로 귀국해서 통치하라고
압력을 넣었음에도 끝까지 원나라 대도에 남으려 했고,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이후 대도에서 죽었기에
직설적으로 적자면 몽골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겐 고려왕보다 원 황실의 인척이라는 지위가 훨씬
중요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2] 일생의 대부분을 몽골에서 보냈기에 현대의 해외 교포들처럼 아마
우리말도 상당히 서툴렀고 오히려 몽골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충선왕을 시작으로 충자 돌림 왕들의 대부분이 고려인과 몽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 되었다.
2. 생애[편집]
1277 년 세자로 책봉되고 이듬해 원나라에 갔으며, 1296 년 쿠빌라이 칸의 증손녀 계국대장공주를 1 비로
맞았다.[3] 사실 충선왕은 이 혼인 이전에 왕영의 딸[4], 홍문계의 딸, 조인규의 딸을 이미 아내로 맞은
상태였다. 그리고 충숙왕의 생모인 의비와 혼인한 시기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한 시기보다 더 이전이라는
추측도 있다. 어쨌든 일찍이 충선왕과 결혼한 고려인 3 명은, 몽골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계국대장공주와
의비보다 서열이 뒤로 밀렸다.
카다안의 침입 당시에는 쿠빌라이 칸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1297 년 돌아왔는데 학문을
좋아했는지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책을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충선왕이 돌아온
이유는,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충선왕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유를
당시 충렬왕의 후궁으로 총애를 받으며 날뛰던 무비(無比)[5]의 소행이라 생각하여, 무비 및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실제 아버지 충렬왕은 무비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백성은 굶고 있는데 시도 때도 없이 큰 돈을 들여
사냥과 연회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1 비인 제국대장공주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제국대장공주의
눈을 피해 무비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더욱 자주 사냥을 나갔다. 부자 간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정치에 뜻을 잃은 부왕 충렬왕이 양위 의사를 밝히자 1298 년 즉위했다.
다시 왕이 되어서 일시적으로 즉위했을 때처럼 개혁 정책을 펼쳤으나, 그다지 적극적으로 정치를 펼치지는
않았고[7] 자형(姉兄)이 되는 제안대군 왕숙에게 정치를 대행하게 하고 자신은 원나라로 가서 일종의
원격 통치를 했다. 이 와중에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도 있었는데, 바로 각염법을 시행해서 권문세가와
사원의 소금의 전매 독점을 금지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으면서 재정을 강화한 것. 신진사대부가 이
사람을 통해 성장했다는 주장도 있다.[8] 충선왕이 해마다 많은 물품을 원나라로 가져가고 계속 원나라에
머물길 원하자 왕의 귀국 운동이 있었으나, 충선왕은 번번히 거절하였다. 나라 밖에서 국왕이 머물며
통치함이 부당하다는 이야기가 계속 들리자 왕위를 차남 강릉대군 왕도에게 넘겨주면서까지 귀국을
싫어했다.
3. 평가[편집]
고려국을 폐하고 원나라의 직할령으로 편입해 달라는 입성책동이 불거진 요인을 제공한 것이 충선왕이기도
하다. 첫째로 권문세족과 척을 지면서도 누르지 못했고, 둘째로 고려 밖에서 원격 통치를 했고, 셋째로
심왕 작위를 고려왕이 아닌 조카에게 물려줘서 적절히 훗날 입성책동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4. 책벌레[편집]
5. 자녀[편집]
6. 매체[편집]
로맨스 소설로는 충선왕을 주인공 중 한 명으로 한 '왕은 사랑한다'가 있는데, 고려의 개혁을 꿈꾸는
세자로 아버지 충렬왕 및 충렬왕의 측근인 환관과 권문세족 등의 기득권 세력과 갈등한다. 고려 제일의
거부 종실 제후 영인백의 외동딸인 왕산을 사랑하게 되나, 종친이자 자신의 절친인 왕린이 그녀와
가까워지자 둘 모두에 대한 애정이 배신감으로 변해 점차 얀데레화 되어 간다. 로맨스소설이나 정치 상황
묘사도 실제 역사를 따라 사실적으로 쓰여진 편이다. 충렬왕과 충선왕의 갈등과 충선왕의 개혁 시도
등에도 비중을 두어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책을 찾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법하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2017 년 7 월 ~ 9 월에 MBC 에서 방영되었다. 충선왕을 맡은 배우는 임시완.
7. 기타[편집]
1. 개요[편집]
2. 첫 번째 재위[편집]
하지만 이 책임감 없고 이상한 아버지 충선왕은 평생 아들의 발목을 잡게 되는 결정을 남겼다. 안 그래도
충선왕이 상왕으로 건재해서 충숙왕의 왕권이 약한 상황에서, 상왕인 충선왕이 1316 년 자신의 원나라
작위인 심양왕 자리를 이복형 강양공의 차남인 연안군 왕고에게 물려준 것이다. 물론 온전한 자의가 아닌
정치적으로 압력을 받은 탓에 조카에게 물려준 듯 하나, 이는 충숙왕에게 위협이 되고 나아가 고려 조정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또한 명목상의 만주를 포괄하는 거대한 영토 역시 사라졌다.
왕고는 고려 왕 자리에 욕심을 품고 지속적으로 사촌인 충숙왕을 모함했다. 결국 왕이 주색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한다는 이유로 원나라에 소환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다.심지어 왕고는 1321 년 원 영종의
명령으로 충숙왕이 압송되자 2 년 간 고려 국왕을 자칭하기까지 했다.
4. 복위 후 2 번째 재위[편집]
5. 평가[편집]
왕 개인적으로는 글씨와 문장에 두루 능했으며 성품은 침착, 총명하고 결단력이 있었다고 고려사는
전하지만 그 평가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애초에 원나라 간섭기의 모든 군주들이 그렇듯 뭘
해 보고 싶어도 할 수 없던 것이 현실이었지만. 신진사대부를 발탁시킨 충선왕과 충목왕 사이에서
충숙왕은 재위가 길었음에도 이런 친위 세력을 기르려던 흔적을 보이지 못한다. 거기에 아들 충혜왕의
막장 짓 때문에 아들을 자주 혼냈다고 전하는데, 아들에 대한 스트레스도 그의 단명을 앞당겼을지도.
최영은 우왕의 난봉짓을 보다 못해 "충숙왕도 놀기를 좋아하셨지만 그래도 농번기를 피해 놀아서 백성들
원망을 듣지는 않으셨는데 지금 전하는 시도 때도 없이 놀아제끼니 백성들이 원망한다"고 간언했다.
6. 이야깃거리[편집]
1. 개요[편집]
연산군은 세자 시절에는 '비교적' 평범했을 뿐더러[3] 즉위 초에는 '나름대로' 괜찮은 왕이었던 편이다.
그 이후의 악행에 대하여서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어머니 때문에 비뚤어졌거나[4] 정신이상을 겪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다. 마지막으로, 최소한 연산군도 양어머니(성종의 정비 정현왕후 윤씨 등.)를
강간하진 않았다.[5]
'충혜왕'이란 시호가 어째서 붙었냐면, 우선 '충'은 원 간섭기에 재위했던 왕들한테 '니네는 부하니까
우리한테 충성해라'는 의도로 몽골이 내린 글자이고[6], 뒤의 혜 자는 이 왕의 행실상 좋은 시호를 줄
수는 없으니 마지못한 기분으로 은혜 혜(惠) 자를 썼다고 한다. 죽어준 걸 은혜로 여겨서 이렇게
지었을지도. 굳이 충혜왕 뿐만 아니라, 한국이든 중국이든 시호에 '은혜 혜' 자가 들어간 군주는
심각하게 무능했거나 싸이코패스였거나 적어도 둘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7] 혜공왕이라든가...
진혜제라든가...사실 충혜왕이 저지른 막장 짓을 보면 해릉양왕을 연상시키는데 대체 왜 시호에 양(煬)이
안 들어갔나 싶을 지경이다(들어갔다면 충양왕이었을듯.).
3. 생애[편집]
3.1. 막장 행보[편집]
고려의 충혜왕의 막장 행각은 훗날 등장하는 조선의 유명한 폭군인 연산군조차 한수 접어야 할 정도로
비교 불가.
연산군처럼 여자는 신하의 아내든 뭐든 이쁘면 다라는 식으로 마구 겁탈을 했다. 이 막장 행각이 절정에
달한 때는 장인의 후처와 부왕의 후처(즉, 장모와 새어머니)들을 강간했다.
결국 원나라로 압송되는 도중에도, 지방 수령에게[14] 추워서 이불을 달라고 했는데 그 관리는 "네가
잘못해서 못 주겠다!!"라는 식으로 거절당하는 등 굴욕을 겪는다. 물론 뒤에 그 관리는 처벌을 받게
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 관리를 처벌한 사람이, 원에서 충혜왕을 잡아오라는 명을 받고 고려에 와서
충혜왕을 직접 구타하기까지 했던 타치(朶赤)라는 몽골인이었다. 안균이 그에게 와서 '왕이 폐위된
주제에 자기 잘못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내 이불을 빼앗으려(...) 한다'고 일러바치자, 타치는 "너한테
여기를 다스리게 해준 사람이 누구더냐? 네가 모시는 왕이 추위를 못 견뎌서 이불을 찾는데 네가 주지
않는 게 신하의 도리냐?"라며 쇠자로 초죽음이 되도록 때렸다. 충혜왕 입장에서는 물론 병 주고 약
주고다.
그의 유해는 먼 타국 땅이 아닌 고려 땅에 묻혔다. 공교롭게도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그 달에
경화공주가 한 많은 삶을 마쳤다.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날을 정확히 알기 어려워 경화공주가
원수가 죽은 꼴은 보고 저승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王性游俠 好酒色 耽于遊畋 荒淫無度 聞人妻妾之美 無親貴賤 皆納之後宮 幾百餘。於財利 分析絲毫 常事經營
群小爭進計畫 奪人土田奴婢 盡屬寶興庫 良馬以充內廐。給布回回家 取其利 令椎牛進肉 日十五斤。新宮之役
張旗設鼓 親登墻督之。宮成 徵漆諸道 丹雘之輸 後期者 徵布倍蓰。吏緣爲姦 百姓愁怨。群小得志 忠直見斥
一有直言者 必加誅戮 人人畏罪 莫敢言者。
왕은 성품이 호협하고 주색을 좋아했으며, 놀이와 사냥에 탐닉해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남의 처나 첩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으면 친소와 귀천에 관계없이 모조리 후궁으로 들이는 바람에 그 수가 100 명이
넘었다. 또한 재물에 관계되는 것이면 아무리 자잘한 것이라도 따져 항상 이익을 올리려 하니,
군소배들이 다투어 계략을 올려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모두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켰으며 궁중의
마굿간을 준마로 채웠다. 또 회회(回回) 사람[17]들에게 베를 주고 그에 대한 이자[18]를 챙겼으며 소를
도축[19]해 그 고기를 날마다 15 근씩 바치게 했다. 새 궁궐을 지을 때에는 깃발을 벌여 놓고 북을
설치한 다음 친히 담에 올라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독려했다. 궁궐이 완성되자 각 도에서 옻칠을
거두어 들였으며, 단청을 올릴 물감을 기한보다 늦게 가져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보다 몇 배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했다. 관리들은 이를 기회로 백성들을 가렴주구했으며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싸였다.
군소배들은 출세하고 충직한 사람들은 쫓겨났으며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면 반드시 사형해버리니, 사람들이
처형당할까 두려워 감히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고려사》 충혜왕 세가 총서
4. 업적[편집]
한국사 최고의 막장 군주지만 유일한 장점(?)이 있었는데 장사에 매우 밝아서 고려에서 난 물품의
유통망을 장악하고 실크로드를 통해 온갖 상인들과 거래해서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 장사 밑천은 모두
백성들을 수탈해서 나온 물자들이고, 그렇게 번 돈은 원나라 권력층에 뇌물을 뿌려서 자신의 입지를
지탱하고 여자를 찾아다니는 데 썼으며, 후궁도 무려 100 명이 넘었다고 한다. 왕부터가 간신. 의자왕의
3 천 궁녀가 뻥이라는 것이 여기서 나타난다.
5. 재평가?[편집]
일반적으로 충혜왕에 대해서는 왕이 음행을 일삼았다는 사실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 운영과 정책 시행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 왕은 상업 활동의 진흥과 유통 구조의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했고, 사급전의 혁파 등 토지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21] 더불어 각종
세목을 신설해 권력층을 견제하였다.[22] 원의 간섭으로 폐위당한 경험이 있어 악소배를 비롯한 측근
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여[23] 왕권 강화를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원 세력인 기철, 고용보와
대립하게 되었다.
6. 사냥왕[편집]
•1 비 덕녕공주(? ~ 1375 년)
•코에이의 원조비사 정발판 시나리오 3 에서 충숙왕 자식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정발판 자체가 시대가
뒤틀려서 크게 상관은 없다.(...) 능력치는 방탕하고 무능한 군주였던 것을 반영한 것인지 정치력이 D
이고 전반적으로 별로이지만 그래도 왕자라 나중에 충숙왕을 죽이고(...) 동생인 공민왕을 군주로 하는
플레이를 할 때 정복지의 군주로 잘 써먹을 수 있다.
9. 기타[편집]
•기황후 속에서 복위 횟수며, 사망 시기며 전부 왕유와 충혜왕이 비슷하여 충혜왕을 기반으로 왕유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왕이 되었지만 나이가 어려서 어머니 덕녕공주의 섭정을 받았다. 어머니의 섭정 아래서 나름 치적을
쌓았는데, 충혜왕 대의 정치 폐단을 수정하는 데 힘썼고 정치도감을 설치하여 주로 권문세족들의 토지
제도를 개혁하는 데 노력했다. 또한 이들이 독점하던 녹과전의 폐단을 시정하여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줬으며, 양전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나라에 기근이 들자 이를 구제하기도 했다. 그리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3 대 실록의 편찬을 시작했으며 서연을 열어 학문 진흥에도 힘을 기울였다.
2.3. 최후[편집]
이렇듯 어머니의 섭정 속에서도 착실히 치적을 쌓아갔으나 9 대 임금 덕종처럼 수명은 짧았다. 아니, 그
이상으로 짧았다. 재위 4 년만인 1348 년 10 월에 병이 들었고 12 월에 김영돈이란 사람의 집에서
승하했는데, 이 때 나이가 12 세였다.[1] 수명이 조금 길었으면 선정을 베푼 기록으로 미뤄 보건대 명군,
나아가 성군이 될 기질도 보였지만 워낙 어린 나이에 승하하여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설령 오래
살았더라도 제 뜻대로 정치를 펼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 실제로 왕권이 약해서 재위 말엽에는 외척과
환관의 전횡이 심해졌다.
드라마 신돈에서도 초기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병약한 설정으로 나와서 자주 골골대며 쓰러지다가 죽음을
맞는다. 어린 나이에도 영특해서 자신이 죽으면 어머니인 덕녕공주(배우는 김여진)가 정치적으로 몰락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어머니에게 당부한다.
4. 기타[편집]
충목왕의 휘가 昕(아침 밝을 흔)이었기 때문에 해당 성씨였던 사람들은 송두리째 성씨를 바꾸게 되었다.
예천 권씨 전부와 안동 권씨 일부의 본관이 바로 이 흔씨이다. 아래가 그 내용이다.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선왕이었던 충목왕이 영리했다고는 하나 연달아 어린 왕이 즉위한 나머지 충목왕 말엽부터 환관과 외척의
전횡이 심했고[2] 특히 기황후의 오빠 기철 일파의 전횡이 매우 심각했다. 문제는 안으로만 난잡한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도 어지러웠다는 것.
이렇듯 고려가 내우외환에 시달리자 고려 내부에서는 어린 국왕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 할 것이니 국왕을
교체하여 국면의 전환을 노려보고자 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충목왕이 승하했을 때 충정왕과 함께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로 꼽혔으며 충정왕과는 다르게 이미 장성한 나이였던 강릉대군 왕기(충정왕의
숙부이자 충혜왕의 동생이며 훗날의 공민왕)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결국 해윤택, 이승로를 중심으로
하여 도당에서 정식으로 원나라에 요청하여 고려 국왕 교체가 결정되었고, 폐위된 충정왕은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향년 16 세로 공민왕의 명령으로 독살당했다.
3. 평가[편집]
시호는 원나라에서 내려준 '충정'만이 존재하고 폐위된 군주라 고려 조정에서 시호를 내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충정왕이라 부르지 않는 경우에는 '폐왕 저', 혹은 '저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래저래 안습의
왕.
솔직히 아버지를 교훈 삼아 제대로 행동할 줄 아는 정도의 양식만 보였어도 원나라 황실에서 굳이 정통성
높은 선왕의 아들을 폐위하고 선왕의 동생을 왕으로 세우는 정치적으로 부담가는 행위를 했을 리가 없다.
자기 아버지가 무슨 짓하다 쫓겨났는지 뻔히 봐놓고도 하는 행동이 싹수가 노랗게 보이니까 폐위시켜 버린
게 정답일 것이다.
4. 그 외[편집]
드라마 신돈에서는 평범한 어린 아이로 나오다가 역사대로 폐위. 기황후 측의 모략으로 독살당한다.
신의에서는 그나마 좀 긍정적으로 나온다. 최영과 막역한 사이로 공민왕을 보호했으나 기철에게 살해.
사실 나이 차가 20 살 나지만 무시하자.
1. 개요[편집]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반원 정책을 펼친 고려의 마지막 불꽃, 그러나 아내의 죽음 이후에는 고려의
멸망을 가속화시킨 암군.
당대의 신진사대부의 대표 인물은 이색, 이숭인, 정몽주, 정도전 등으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조선 왕조의
개국에도 크게 일조했다. 단 이들 중에서도 조선의 개국에 일조한 이들은 정도전 등의 급진적인 신진
사대부들로, 이들 가운데서도 정치적인 스펙트럼의 차이는 존재했다. 또한 정몽주는 당시에도 명사였긴
했으나 정몽주와 정도전은 젊은 세대로서 공민왕 말기까지는 소장관원, 간관으로서 존재했을 뿐
정치적으로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공민왕은 대외 정책에 있어서도 꽤 괜찮은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원혜종의 요청을 받고 홍건적 토벌을
위해 최영을 중국에 파견하기도 했는데, 최영을 통해서도 원의 어지러운 사정을 파악했다.
제 1 차 요동 정벌은 발해가 멸망한 지 445 년 만에 고려가 처음으로 요동성 점령에 성공한 사건이자
한반도 국가가 마지막으로 요동을 공략하고 실제로 점유했던 시기이다. 이성계가 처음 큰 전공을 세운
전쟁이기도 하며, 따라서 용비어천가와 고려사에도 상세히 기록되었다. 공민왕은 명나라를 경계하여 기씨
일파와 원 군대 토벌을 명분으로 요동으로 군대를 진출시켰다. 총사령관은 이인임이었으며 이성계,
지용수, 양백안, 임견미가 함께 군대를 이끌었다. 다만 당시 지용수가 해안선을 따라 움직이는 일로 부대
내 불만이 커졌으며, 성내의 군량고에 불이나 군량이 타버린 와중 무리한 영전공사 등으로 본국의 군량
보급이 제대로 오지 않은 일로 인해 결국 전투 후반에 전사자보다 굶주림과 추위에 죽은 병사들이 더 많은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시도에 반발한 명이 고려에 외교적 압력을 가하고, 한편으로 요동 무장들을
투항시키면서 요동 정벌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일시적으로나마 요동을 정벌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 뒤로 한반도의 영향력이 요동에 미치는 일은 영원히 없었다.
왜구를 근절하기 위한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이 남북조 시대의
내전 상태라 규슈 일대의 통제는 고사하고, 규슈 일대의 호족과 도적들이 뭉쳐진 왜구들이 수도 교토
인근인 키나이(畿内)까지 약탈하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왜구는 중앙 정부 자체가 없어져버려
고삐가 풀려버린 지방 세력들 그 자체였고, 왜구의 준동은 우왕 때까지 이어졌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참조.
공민왕의 시대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난세였다. 이럴 때 군주가 굳건한 태도로 일관되게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공민왕의 예술가적인 예민한 기질은 이렇듯 급박하고도 강한 압박이 가해지는
국제 정세와 국내 상황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바로 기근과 홍건적·왜구의 대규모 침입이 벌어졌다. 왜구는 고려 수군을 궤멸시키고 개경
인근까지 북상하여 대살육을 벌였고, 홍건적은 2 차 침입 때 개경을 함락시킨 뒤 궁을 불사르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으며, 공민왕은 안동까지 몽진해야 했다. 정세운의 활약으로 간신히 개경을 수복하기는
했으나 간신 김용의 모략으로 살해되었다. 군사권이 장군들의 손에 놓였던 상황에서 심복으로 믿고 있던
김용의 반란은 공민왕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공민왕은 김용을 어찌나 신임했는지 왕을 해치려 했던
반역자인데도 말년까지 한 번씩 그리워했다고 한다.
신돈에게 모든 국사를 넘겨버린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으나 가장 큰 의견은 공민왕 자신이
기존 정치 세력들에게 염증을 느낀 나머지 정치계에서나 불교계에서나 완전한 비주류였던 신돈을 등용하여
이들을 견제하고자 했다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또한 전란을 진압하면서 많은 토지를 하사받아
전제 개혁의 장애가 되고, 사병을 거느려 위협적이었던 무장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11]
개혁을 위해 임용되어 국왕의 스승격 지위를 가지고 군림하게 된 신돈은 기존 정치 세력인 권문세족에
대한 견제 차원을 넘어서서 이들에 대한 공격을 가했고 기존의 정치 세력인 권문세족들은 신돈에 대해
태업으로 맞섬으로써 오히려 나라가 더 어지러워지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이는 전제 개혁을 위해 기성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권문세족들을 약화시키려는 것으로 해석되나, 한편으로는 천민 승려 출신인 신돈이
기존 세력 위에 군림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권력을 하루 아침에 천민 출신의 이름
없는 승려에 의하여 빼앗기고 소유하고 있던 토지마저 농민과 천민에게 강압적으로 내주게 된
권문세족들은 신돈에게 무서운 반감을 품기 시작하였다. 신돈에 의해 밀려난 세력 중에는 탐욕스러운
대농장주와 부원배들도 있었으나, 양식 있는 귀족들이나 소장 세력도 있었다. 심지어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던 최영조차도 그를 싫어할 정도였다.[13]
그러나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토지 개혁을 시도하였고, 이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긴 했다.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어 있다는 십실구공(十室九空)이라는 말이 있던 시대였다. 신돈은 이틀에 한 번씩
도감에 나가 일을 처리하였고 실무 책임자는 이인임과 이춘부[14]였는데 이춘부는 홍건적을 몰아낸 전쟁
영웅 출신이었고 이인임은 당시 권문세족 중 가장 명신이던 이인복[15]의 동생이었으므로 신돈의
포고령은 왕권의 철저한 비호 아래 실효를 거둔다. 이는 백성들이 신돈에게 강력한 지지를 보내는 바탕이
된다. 또한 신돈은 성균관을 지원하여 미래의 신진사대부 개혁층을 육성하는 데 힘이 되었다. 정몽주,
정도전, 윤소종 등 조선 건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신진 문신 세력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반 폐인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모든 육체적, 정신적 동력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다급해진 것은 후사의
문제였다. 하지만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한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아서인지 다른 후궁들의
몸에서 공민왕의 후사가 나올 가능성은 매우 낮은 상황이었다. 공민왕은 스스로의 수명을 길게 보지
않았고, 애써 살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후 공민왕은 성적 측면에서도 방종해져 공민왕 스스로 여장을 하기도 하고, '자제위'라는 미소년
집단을 뽑아 자신을시중을 들게 하고 이들로 하여금 후궁들을 범하게 해놓고 NTR? 자신은 이것을 지도,
감독(!)하거나 감상하고 있었다 한다. 이러한 기록들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고려 말기의 기록은 대부분 조선의 건국을 미화하기 위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17] 자제위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고립된 공민왕이 젊은 귀족을 모아 친위세력으로 키우려 했다는
견해도 있고, 권문세족들을 믿지 못했던 공민왕이 그들의 자제들을 궁궐에 인질로 잡아두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어쩌면 반반일지도… 어쨌거나 자제위 소속 젊은이들은 궁에 갇혀 국왕의 상대를 해야
했기에, 대가로서 많은 재물과 권세를 누렸으며 궁녀들과도 문란하게 행동하여 지탄을 받았다. 후에
공민왕을 살해하는 홍륜의 경우에도, 외척이던 남양 홍씨의 자손[18]으로 집안에서는 홍륜의 사람됨을
우려하기도 했으며, 결국 시해를 저지른 후 역모죄로 거열형에 처해졌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자신이 모셨던 왕인 공민왕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21] 종묘
내부에 공민왕 신당을 세울 것을 명하였다. 공민왕 신당은 지금까지 현존하고 있고, 덕분에 우리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은 물론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준마도도 감상할 수 있다.
5.1. 공민왕 시해에 관한 의혹[편집]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궁녀를 겁탈했다는 홍륜은 이미 아내가 있었다. 아내 있는 거하고 상관
없는 거 같은데. 둘째, 공민왕은 이런 문란한 사생활에 대한 서술과 달리 정사를 보는 데 별 탈이 없었다.
셋째, 이인임이 권력을 잡은 후에 북원의 사신의 말에서 "왕을 죽인 죄를 용서한다"란 말이 있으며,
명나라에 왕의 시해 사실이 새어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인임이 시해의 배후였기에 이를 두려워할 했을 것이며, 배후가 아니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만 이인임과 공민왕 시해의 관련성은 고려국사나 고려사 어느 부분에도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설을 받아들이자면 이와 같은 사실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한데, 그 부분은 이인임 실각 4 개월 후 위화도 회군이 발생하면서 집권을 위해 우왕의 혈통과
공민왕의 총명함을 깎아 내릴 필요가 있었던 이성계 등이 자제위의 홍륜 이야기만을 남겼다는 것으로
설명하는 모양.
어쨌거나 홍륜의 공민왕 시해 이후로 신돈의 개혁 운동에 반대하던 자제위의 집안들은 약화되었으며,
이인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익비 등 우왕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를 차근차근 정리하여 자신의 정치
기반을 공고히 했다.
이런 배경들에 착안하여 정도전(드라마)는 이인임이 자제위를 충동질해 공민왕을 차도살인 했다는 과감한
각색을 보이고 있다. 또한 그 전의 드라마인 대풍수에서도 비슷한 각색을 하였는데 이쪽은 이인임의
내연녀인 가상의 고려 최고 무당이 음모를 꾸며 공민왕을 시해했다는 내용이다(…)
성격 역시 우유부단하여 개혁을 시도한다고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 우물쭈물하는 경향이 있기도 했는데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는 이런 점들을 공민왕의 단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여러 가지로 한계나
단점도 많았던 군주로 고려 멸망에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조선 시대에
편찬되었고 공민왕 본인이 조선 건국 주역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위치에 있는 만큼 그에 관한 기록과
평가는 주의해가며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고려의 국력과 군사력의 회복, 영토 확장, 권문세족의
세력 약화, 신진 사대부의 성장 등의 긍정적인 측면 역시 존재하였다. 하지만 신흥 무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유탁을 비롯해 신진 사대부들에게 존경을 받은 유숙까지 숙청을 해버린 바람에 고려사,고려사절요에
공민왕의 평이 떨어졌는데, 실제로 조선 왕조에서도 이 두 사서에 대해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도 도저히
공민왕을 옹호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오히려 공민왕은 교차 검증을 하면 할수록 비판받을 점이 더
쏟아지는 판국이다. 참고로 유탁의 경우는 안우의 전우이자 이성계의 선배 무장이고 이성계조차도 최영과
더불어서 가장 존경했던 무인이다. 실제로 그의 아들인 유습은 대마도 정벌에 참여했다. 특히 이성계의
꿈 이야기에서 유탁의 이야기가 나온 것을 보면[27] 신흥 무인들의 중심이 본시 유탁 장군이었던 것이다.
정도전의 경우는 본시 이색을 존경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정작 그의 스승은 유숙이었다. 실질적으로 개국
공신들의 스승이자 상관들인 인당, 정세운, 안우, 이방실, 유숙, 유탁, 홍언박, 김득배 등등 여러 문무
신료들이었고 그들은 다 그의 손에 죽었다. 그래서 말기의 평이 조선 왕조의 손을 떠나서 좋은 평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실제로 실제로 공민왕에 대해 경효대왕이라고 해준 것은 그가 시해를 당했고, 또한
종계변무 문제 때문에 추모한 것이고 그 공민이라는 호조차도 실은 명나라가 내린 것이었다.
신하들을 복종시킬 개인적 리더십도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나중에 고려로 쳐들어오는 최유도
한때는 공민왕을 따랐었고, 호종공신이던 조일신을 제어하지 못했던 것을 보더라도 그런 면의 카리스마는
부족했던 것 같다.
거기다가 공민왕 본인부터가 직접적으로 무엇을 하기보다는 소수의 측근에 의존하고 ,편 가르기, 숙청,
암살, 배신이라는 방법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결국 이 일련의 잔혹한 숙청과정을 통해 정치적인
장애물들은 없어졌지만 신임할 수 있는 신하들도 없어진 셈이다. 신돈을 기용했을 때도 이런 모습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는데 권문세가들과 신진세가들이 하나같이 썩어 문드러졌다고 비판해 타락한 고려의
현실에 대해 개탄하지만, 통치자의 역할이 누구나 다 말할 수 있는 현실을 말하기보단 그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지에 대한 대책을 내놓는 것이기 때문에 공민왕 본인의 이 발언은 어찌 보면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연고 없는 신돈이라는 외부인사를 기용해 개혁을 다시
시도했지만 신돈마저 서서히 타락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도 숙청한 후엔 아예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관과
자제위들로 하여금 자신의 주변을 두르고 엽색적인 행각을 보였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했고 공민왕도 실패한 군주로 남았지만, 그의 개혁 시도는 신진 사대부들
중에서도 급진파였던 정도전 등과 신흥 무인 세력이었던 이성계에게 많은 힘을 부여해주었고 결국 조선
건국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막장이던 고려의 국세도 많이 회복하여 공양왕 대로 가면 조선 후기보다
국가에 등록된 전답의 수가 많아지기도 한다. 다만 그렇다고 이 시기 고려가 조선보다 농업이 발전했다는
뜻은 아니다. 농업은 당연히 조선이 훨씬 앞섰으며 고려가 회복돼갔다 해도 왜구들 때문에 여전히 나라는
개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에 끊임없이 망가져 가던 고려의 국세를 어느 정도 되돌렸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조선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도 공민왕 사당이 건립되기도 했고 곳곳에 공민왕을 신으로 모시는 사당[28]도
많이 세워졌다. 일본인들은 절대로 가면 안 되는 곳. 이는 이성계에 의해서인데 이성계가 출세하여
조선을 건국하게 된 것이 공민왕 때 벼슬을 받아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마움 때문에 종묘에도
공민왕을 모시게 된 것이다. 영정을 보면 노국공주와 함께 그려지고는 했는데 거의 공인 커플로 인정받은
셈이다.
정세운, 김득배, 안우, 이방실, 인당, 홍언박, 유숙과 유탁이 대표적으로 숙청 된 인물들이다.
조선조 들어서도 태조를 처음 등용했다는 이유로 전 왕조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사당까지 지어줄 정도로
공민왕을 우대했던 조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천성을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면 알 만하다.
지독하게 잔인한 왕이었으니 기철 같이 원나라 빽덕에 입지가 두터운 신하도 숙청을 면치 못했던 거겠지.
더군다나 저 고려사는 세종대왕이 불공정한 평가를 내릴 필요가 없다고 하여 몇 번이나 고친 것이다.[29]
군왕으로서 적절한 인선과 리더십이 얼마나 필요한지 잘 알려주는 부분.
7. 현대 매체 속의 공민왕[편집]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지녔던 군주이며, 특히 그림에 뛰어나서 대표작으로 천산대렵도가 유명하고 아끼는
신하 염제신의 초상화도 직접 그려줬다고 한다. 또한 직접 거문고를 다루기도 했다는데, 이 공민왕이
다룬 것으로 전해지는 거문고가 수덕사에 있다. 공민왕 사후 길재를 통해서 조선 왕실에서 거문고를
소장해오다가, 일제 강점기 때 의친왕 이강이 당시 수덕사의 승려인 만공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표적으로 개국에서 공민왕을 연기한 임혁과 신돈에서 공민왕을 연기한 정보석이 열연한바 있다. 특히
신돈의 공민왕은 공민왕의 광기어린 모습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32 대 우왕 왕우 (1365~1389) 재위 1374~1388
1. 개요[편집]
고려의 제 32 대 왕. 폐위가 되어서 묘호와 시호는 없다. 휘는 우(禑). 공민왕이 반야와 관계하여
낳았다고 전해지는 아들이다.
하지만 하단에 설명되어있듯 신돈에게 그녀를 상납받기 전 신돈이 먼저 반야와 관계하였고, 그래서 우왕은
공민왕의 핏줄이 아닌 신돈의 핏줄이라는 소문으로까지 이어졌다. 또한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
일파와 조선 개국의 주역인 이성계등은 폐가입진[6]의 명분을 얻기 위와 같은 우창비왕설[7]을 주장했고,
이는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얻는 사안으로까지 이어진다.
초기에는 나름대로 국왕 수업에 힘썼고 왕실의 큰 어른으로 남아 있던 할머니 명덕태후의 훈계를 명심하여
좋은 왕이 되리라 노력하는 듯 보였다. 총명하고 의욕이 강했던 우왕은 어머니인 반야가 입막음을 위해
살해된 후로도 평정을 유지하였으나, 이인임의 독주와 탐욕에 반발해 권신 중 이인임과 반목하던 지윤,
지윤과 통정하던 유모 장씨 등을 통해 최영을 포섭하고자 했다. 최영의 군권을 이용해 이인임 일당을
숙청하고 친정을 하고자 했던 듯하다. 그러나 노회한 이인임은 궁궐 내 정보망을 통해 이를 포착한 뒤
지윤을 숙청했으며 국왕의 최영 포섭을 저지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신하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우왕은 유모 장씨마저 살해되는 것을 묵과해야 했을 뿐더러 혈통의
문제까지 겹쳐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사실 당시 나이 어린 국왕이 이인임을 대신하리라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인임의 노련한 정치력에 의해 최영은 훗날에도 이인임을 죽이지 못할 정도로 그를 믿고
어쩌지 못했었고, 우왕의 친위 세력도 부패 세력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소장파 유림과 양심적인
신료들은 물론 이인임과 대립하던 명덕태후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나마도 명덕태후 사후 명덕태후의
외척 세력[9]과 경복흥마저 숙청되어 이인임 일파가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3. 혈통 문제[편집]
이후 이성계 일파는 흥국사에서 창왕을 폐위할 명분으로 '우왕은 공민왕의 자녀가 아닌 신돈의 자녀이니
신우와 신창 같은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씨를 고려의 왕으로 앉히자' 는 폐가입진의 명분을 내새워
창왕을 폐한다. 이후 공양왕과 이성계의 조선은 폐가입진을 주요 명분으로 조선을 즉위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공인되어 버린다. 이후 이 시기를 기록한 태조(이성계)실록이나 《고려사》(高麗史)에도
우왕을 왕우가 아닌 신우로 기록하고, 특히 고려사는 우왕과 창왕을 왕의 기록을 수록하는 세가(世家)
편에 넣지 않고 인물의 기록을 수록하는 열전(列傳)편 그중에서도 반역열전에 기록하는 등 조선 정부는
철저하게 우왕을 신돈의 혈통으로 주장했고 현대까지 이어졌다.
소문과 별개로 공민왕은 우왕이 자신의 아들이라 믿은 것은 분명하다. 신돈이 처형당한 후에는 우왕을
궁궐로 들여서 보호했고, (비록 목격자가 이인임 밖에 없기는 하지만) 공민왕도 직접 "이 아이는 내가
신돈네 집 여종을 가까이 해 낳은 내 아들이다."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무리수를 두면서 자신의 후궁
(한씨)의 양자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거기에 공민왕이 죽기 얼마 전에는 후계자 교육을
공식적으로 실시하려하는 등 공민왕은 우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12] 결국
이성계는 자신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왕신씨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는
우왕신씨설은 정설처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가령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도 겨드랑이 용의 비늘 이야기를
통해 사실은 왕씨 핏줄이 맞는데 신돈의 아들로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것으로 연출했다. 고려사원문
일반적으로 반야가 어머니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사에선 반야가 만삭일 때 신돈이 친구인 승려 능우(能
禑)의 모친의 집으로 보냈고 반야는 그 집에서 아이를 낳았으나 돌이 되기 전 아이가 죽어, 능우가 죽은
아이와 닮은 아이를 몰래 데려와 기르다가 신돈에게 보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참고로 현대의 사학계엔
우왕의 생모가 반야라는 것도 거짓이고 실제 생모는 순정왕후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도 있는데 그 근거 중
하나가, 이 이야기에 나오는 능우라는 인물이 순정왕후의 친척이라는 기록이 있다는 것. 우왕이 반야의
아들도 공민왕의 아들도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고 학계에서도 반야의 아들도
공민왕의 아들도 아니라는 것 자체는 사실로 보고 있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우왕은 순정왕후와 연결되는
부분이 없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저 이야기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막장 행보[편집]
결국 국왕은 정치에 흥미를 잃고 사냥, 음주가무, 엽색으로 소일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질풍 노도의
치세. 특히 사냥도 사냥터에서 안 하고 민가에서 아예 말 달리며 사냥을 했을 정도며 그렇게 말을
달리다가 맘에 드는 이쁜 여자가 있으면 즉석에서 그 여자 집으로 들어가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런 비행을 보다 못한 신하들이 간언을 하기도 했으나 우왕은 듣지 않았다. 하는 짓이 완전히
할아버지 충숙왕과 큰아버지 충혜왕 뺨친다. 실제로 최영이 이걸 가지고 충언을 하자 충혜왕과 충숙왕
얘기를 했는데 이때 최영은 "충혜왕께서 색을 좋아하신 건 사실이나 남들이 안보는데서 했고 충숙왕께서는
놀기를 좋아해도 때를 골라서 하셨는데 전하께선 법도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출처 : 고려사 최영
열전)
어쨌든 정치가 권신들에게 왜곡되어 공공성이 파탄난 상황에서 군부 역시 재정난과 몽고식 부호제의
영향으로 사병 집단화 되어 있었고, 장수들 역시 부패하고 무능한 자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내륙 지방까지 학살과 약탈, 납치가 자행되었으며
수도 개경까지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최영이 재건해낸 수군이 격파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왜구의
침입 격퇴에서 최영과 이성계, 최무선의 화포가 맹활약을 펼쳤다. 특히 이성계는 왜구 격퇴 과정에서
최영에 버금가는 무장으로서의 입지와 명성을 굳히게 된다.
어쨌든 준비가 다 끝나고 출정 준비가 되자 최영도 총사령관 자격으로 출진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믿을
사람이 최영밖에 없었던지 가지 마라며 청했고[15] 마지못해 최영은 우왕과 함께 고려에 남아 이성계와
조민수 등만이 북방으로 출정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우왕에게 결정적 패착이 되고 말았다.
이때 위에서 언급된 최영의 서녀, 영비 최씨가 우왕의 유배지까지 따라갔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우왕이
처형된 후 밤낮으로 곡을 하다가 우왕의 시체를 끌어안고 자고 시체에 밥을 지어 올리고 하며 시체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야사에는 사망할 당시 자신을 죽이러 온 사람에게 "왕씨 일족에게는 겨드랑이에 용의 비늘이 있다!"고
외치며 웃통을 벗어 그 용 비늘을 보여줬다고 한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우왕의 최후 장면에서 이
이야기를 채용했다. 정도전에서는 조금 더 현실적으로 각색되어 우왕이 직접 자기 몸에 인두를 대어
상처를 낸 후 이를 용의 비늘로 주장하다가 참수되는 모습이 나왔다.
다만 후대로 내려갈수록 왜곡이 심해진 왕이었을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그렇게 유능했던 군주라고는 보기
어렵다. 소년기의 막장 행각을 뒤로 하고 청년기에는 나름대로 정치적인 모습도 보여 줬지만 결국
충동적이고 혈기를 누르지 못해 폐위되어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일단 홍륜을 죽인답치고
홍사우 같은 고려 말에 손꼽히던 무장을 죽이는데 집행에 앞장선 최인철을 아꼈는데, 최인철은 왜구를
무찌르지도 않았는데 거짓말을 해버린 바람에 사헌부에서 탄핵을 하자 태형을 맞고 이후 죽게 된다. 사실
홍사우를 죽인 것은 어린 우왕이 아니라 우왕이 휘둘렸던 권문세도가들이었는데, 이루 인해 신흥 무인들의
분노가 이때부터 하늘을 찔러버린 원흉을 제공했고, 되려 이를 아낀게 우왕이었다.더욱이 홍건적을 격퇴한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와 같은 무인들이 숙청되었는데 이때까지도 그들을 복권을 안시켰다. 결국
공양왕 때에서야 이들을 복권을 시키고 조선 왕조 시절에서 이들을 열전록에 올리고 특히 안우, 이방실,
김득배는 고려 왕조보다 조선 왕조에서 오히려 추모를 했다. 주색이나 놀기에 급급한 왕과 동시에 이러한
것조차도 하지 않았다. 경순왕이나 순종이 찬탈자에 순응해서 결국 왕위는 잃었어도 평생 잘 먹고 잘 산
것과는 대조된다. 그리고 그렇게 비참한 왕의 운명과 함께 고려 왕조의 운명도 기울어졌다.
•용의 눈물에서는 위화도 회군으로 당황하는 모습과 이성계를 죽이려는 시도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특히 위화도 회군신에서는 정도전(드라마)의 우왕보다는 배짱이 없는데, 1 화에서 이성계가 최영의 처벌을
요구하자 "최 시중을 보내주면 과인을 살려준다더냐? 그래라, 보낸다고 하여라!"라며 흔쾌히 말한다.
그러나 대비에게 제정신이냐는 돌직구를 맞자 바로 철회한다. 이는 왕실의 어르신으로서 정비 안씨의
위엄과 우왕의 무능함을 드러낸 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죽기 직전에는 매우 당당한 편. 죽기
직전에도 창왕의 죽음을 묻더니 이성계의 폐가입진 논리를 듣고는 허탈해 한 뒤, 야사 내용대로 "
왕씨에게는 겨드랑이에 용의 비늘이 있다!"며 그것을 보여주고는, 이성계를 역적이라고 외치며
열성조에게 사죄하며 당당하게 최후를 맞는다.
•대풍수에서는 우왕의 저런 난행들이 이인임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암군의 행동을 벌이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더욱이 생모인 반야도 살아남았다. 결국 이인임을 숙청하는 데는 성공해서 왕다운 정치를
펼치려고 한다.
33 대 창왕 왕창 (1380~1389) 재위 1388~1389
1.1. 개요[편집]
고려의 제 33 대 국왕. 폐위가 되면서 묘호와 시호는 없다. 휘는 창(昌). 우왕과 우왕의 1 비 근비 이씨의
아들. 아버지 우왕이 위화도 회군으로 대권을 손에 넣은 이성계 암살 시도 등으로 폐위되자 8 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사실 우왕이 폐위 된 이상 즉위 가능성은 없었으나, 이성계의 정적이었던 조민수와
이색이 옹립한 것. 그러나 나이가 어리고 이미 이성계 일파에 의해 정국이 장악된 시대이니만큼
실권이라고는 없었던 허수아비 왕이었다.
1.2. 상세[편집]
창왕 본인은 그 나이치고 상당히 똘똘하고 영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단종이나 영창대군과 달리
이쪽은 이상하게 동정을 별로 못 받는다. 단종은 숙종 대에 이르러, 영창대군은 인조반정을 통해 신원이
된데 비해서 창왕은 그런 거 없다. 왜냐하면 단종과 영창대군은 조선 시대 왕과 왕족인 것은 둘째치고,
각각 문종과 선조의 적통이었다는 정통성이 있었던 반면 창왕은 조선 왕조 개창 세력 입장에서는
반동세력인 이색과 조민수 같은 이들에 의해 옹립되었고, 신돈의 손자, 즉 가짜 왕씨일 수 있다는 이유로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고려의 왕이라서 고려를 멸한 조선 때에 당연히 복권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조선의 시조 이성계를 위시로 한 역성혁명파가 완전히 승리하여 고려를 멸했고 조선의 건국은
표면적으로 신씨의 씨앗에게 장악되고 힘없는 왕씨 왕조를 대신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이 망하고 한참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제대로 조명 못 받는다.지못미 아마 그가 우왕의 자식인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었고, 살아나도 고려는 국가 막장 테크를 고스란히 밟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최종 단계로.
1.3. 매체에서[편집]
사극에서는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에서 등장할 가능성이 높은데, 대표적으로 KBS 용의 눈물과 KBS 정도전,
SBS 육룡이 나르샤 등이 있다. 물론 실제 인물의 당시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역배우들이 이 배역을
소화한다. 용의 눈물에서는 4 회에 폐위되어 사사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죽음의 공포 앞에 떠는 어린
폐주의 입을 강제로 벌려 사약을 들이붓는 장면이 나온다.
1. 소개[편집]
신종의 7 대손으로 아버지는 정원부원군 왕균이고, 어머니는 연덕부원대군 왕훈의 딸이다. 부계로는
충선왕의 3 비 정비의 아버지 왕영의 고손자,[3] 모계로는 충렬왕과 정화궁주의 고손자가 된다. 덧붙여서
왕영과 정화궁주는 남매다.
당시 정국은 이성계 일파가 잡고 있어서 실권은 없었지만, 왕은 이성계 일파에 대한 대항마로 이색과
정몽주 같은 반 이성계파 인사들에게 주목했고 그들을 이용하여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여 고려 왕조를
지키고자 했다. 치부에 힘쓴 배경 탓인지 우왕과 창왕 시절 토지 개혁을 추진했던 조준과 정도전을 즉위
전부터 미워했던 탓도 있다.
망국의 군주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그저 멍 때리고 있다가 이성계에게 왕 자리를 뺏기고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인상이 있지만, 실상 기록을 보면 없는 힘이라도 쥐어짜서 이성계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곤 했다. 대표적인 예가 우왕과 창왕의 처리. 기록상으로는 당초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의 처단에
대해 조금 더 미루자는 입장이었으나 왕의 결단으로 이 둘은 신속히 제거되었다.
특히 반 이성계파의 정점으로 유능한 관료이자 유력한 정치인이기도 한, 그리고 공양왕에게 있어서 마지막
희망이기도 한 정몽주와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정몽주는 공양왕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성계 일파를 계속
공격했고 급기야 1392 년 이성계가 아들을 마중나가면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부상당했을 때에는
이성계의 부재를 틈타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 일파의 핵심 인사들을 모두 탄핵하여 귀양을 보내 이성계의
수족을 잘라 버렸다.
급기야 신하인 이성계에게 동맹을 맺자는 제안을 할 정도로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사실 동맹이란 것은 나라와 나라 또는 세력과 세력 간이 맺는 것이지 군주와 신하가 맺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고려의 역사에는 무신정권이라는 전례가 있었으니 그를 모범으로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실제로 과거
최씨 무신정권이 장기 집권한 사례도 있으니, 무신정권 시대의 전례를 따라 이를 반복하여 이성계의
실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고 고려 왕조는 그저 허울만 남는 한이 있어도 왕씨 왕조는 지키겠다는 처절한
시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성계는 단순한 권신이 아니라 동북면(함경남도) 지역을 통째로 사실상 독립 왕국으로 경영하면서
만주 지역에까지 자신을 섬기는 부족들을 수두룩하게 거느린, 고려 역사상 최강의 권신이요 군벌이었다.
이미 일개 신하로 볼 수준을 넘어서버린 것이었다. 이성계가 조선의 건국자라서 묻히는 감이 있지만
동북면에서의 이성계의 입지는 이미 왕이나 다름없었고 우왕이 즉위하던 시점에서 이성계를 건드릴 사람이
없었으며 위화도 회군을 하기 전에 사병 군사력이 이미 고려 전체를 뛰어넘었다.
그러나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 1392 년 7 월, 왕대비 안씨의 이름으로 왕은 폐위되고 원주로 유배되었다.
7 월 16 일 대비로부터 옥새가 전해지고, 7 월 17 일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7] 이로써 고려 왕조는 34 대 475 년만에 멸망했다. 정몽주가 죽은 지 4 개월만이었다.
백관들이 왕대비 안씨의 옥새를 받들어 이성계의 집을 찾았을 때 이성계는 사양의 뜻으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며 백관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몇 번의 사양 끝에 옥새를 받들었으며,
즉위식에서 또한 자신의 몸이 성하지 못해 도망가지 못했다며 최대한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4. 최후[편집]
유배된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되었고 강원도 원주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고려 왕실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끊이질 않고 왕씨 왕족들이 역모를 일으킨다는 말도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불안감탓에 결국
조선 개국 후 대대적인 왕씨 몰살극이 벌어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강의 반란 모의 이후로 거제도와
강화도에 귀양가 있던 왕씨들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되어 있다.[8]
5. 평가[편집]
고려의 마지막 임금으로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앞에 언급한 것처럼 그저 무능한 군주는
아니었고 나름대로 없는 힘이라도 쥐어짜서 고려왕조를 지키고자 했던 왕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서
망설인 것이 결국 자신의 나라와 목숨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적어도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같지만
실은 조선 태종 이방원이 내린 시호인 '공양(恭讓 : 공손할 공에 양보할 양)'이라는 이름에 꼭 걸맞는
왕은 아니었던 셈.[14]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냥 부유하게 살다가 갔을지도 모르는 인물. 애초에 이성계가 자신을 왕위에 올린
이유도 알고 있었을 테니 그냥 이성계가 하자는 대로 해서 끝까지 목숨을 보전하자는 생각도 했겠지만,
어떤 길을 택하든 이성계가 자신을 살려두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나름의 저항을 시도했던 듯하다.[15]
어쨌든 모든 망국의 왕들이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잔혹한 숙청을 당한 안습의 군주.
한편으론 시대를 너무 잘못 타고난 왕으로 권력욕이 그렇게 강하지 않는 대신 신하들의 상소에 도장을
찍고, 무과를 받아들일만큼 덕망도 있고 우왕과 창왕을 치는데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고, 공양왕은 문종,
예종과 같이 성군이 되기론 꽤 충분했으나 참고로 공양왕 같은 왕들은 앞전 왕들이 잘해야 성군이 되는 왕
중 하나이다. 앞전에 왕이 너무나도 무능하여 비극을 당한 왕이기도 했다. 즉 본인이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도저히 수습이 불가였다. 실제로 고려사 공양왕기를 보게되면 상소들이 숱하게 올라오고 그 내용도
매우 긴데, 대체적으로 공양왕 개인의 실정보단 전왕의 실정이 주류를 이루어 공양왕은 이러지 말라는
것을 아예 엄청난 장문으로 적은 상소들이었다. 왕이 이런 상소들을 다 보고 다 찍는 것도 어지간한
성군조차도 하기가 힘들고, 도장을 다 찍기란 상소의 오류도 시정해야하고, 또 상소글들이 줄기차게
올라왔다는 것은 상소문들이 생각보다 엄청났다는 것인데 우스갯소리로 소위 상소가 산을 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왕을 비롯해 심지어 당대의 학자이자 문하시중인 정몽주조차도 이걸 다 하기 어려울
실정이고, 실제로 고려사 공양왕기의 상소는 어지간한 사학자들조차도 다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
실제로 앞전의 왕은 공민왕은 자기가 마음에 안들거나 문제를 지적한다거나 귀찮다 싶은 상소들은
본보기로 불을 태우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이존오의 상소가 그러했다. 심지어는 빌미잡아 숙청까지 했기에
상소문들이 공양왕보다 더 적었다. 그래서인지 공민왕 시절에 신하들의 상소 기록이 공양왕 때보다 훨씬
적다.(....)
한국 역사의 다른 마지막 임금의 최후에 비교해 보더라도 훨씬 비참한 편이다. 고조선 준왕은 그래도
목숨과 어느 정도 세력을 부지한 채 달아나 재기할 수 있었고, 금관가야의 구형왕은 그래도 신라의 지배
계층인 진골로 편입되었고[16], 경순왕과 자견왕은 신라, 탐라 멸망 이후 고려 왕조의 지배층이 되어
높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17] 보장왕과 의자왕, 풍왕[18], 대인선은 모국들이 패망한 후 당나라,
요나라로 끌려가 그 곳에서 생을 마쳤고[19], 순종황제의 경우에는 일제가 내린 '창덕궁 이왕'직을
순순히 받고 당구나 치면서 놀면서 살다가 편안히 갔고 일족도 일제가 망할 때까지는 일본 귀족 대우를
받았다. 반면 공양왕은 폐위 후 본인도 유배사사당하는
것 배ᆞ
은 물론 왕씨 일족들까지 대부분 조선 조정에
의해 일족 청소를 당했으니...
이성계는 주성왕이 제신의 이복형 미자계를 송에 봉해 상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을 본받아 공양왕의
형이자 자신의 사돈인 정양군 왕우를 귀의군으로 봉해 고려 임금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왕우가
이성계의 사돈이었기 때문에 그와 두 아들 왕관, 왕조는 왕씨 숙청 때도 무사할 수 있었으나, 왕우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 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자 왕관과 왕조가 비명에 가 귀의군의 직계가
단절되었다.
6. 사극에서[편집]
공양왕이 나오는 드라마로는 KBS 용의 눈물, SBS 대풍수, KBS 정도전, SBS 육룡이 나르샤 등이 있다.
그러면서 나인들과 놀기에만 바쁜 한심한 임금으로 그려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일부러 이성계 일파의
눈에 나서 방심하게 하여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암군인 척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몽주에게 "왕씨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과인은 바보가 될 것이오. 지키는 것은 그대가 하시오."라는
말을 남긴다. 물론 이성계에게 그 수를 간파당하지만, 요즘 이루어지고 있는 공양왕에 대한 재평가를
반영한 모습. 그리고 실제로 그가 결코 허수아비 임금만은 아니었다는 것은 지나치게 심한 간언을 하는
윤소종을 하옥하는 것에서도 드러났다. 특히, 이성계가 낙마할 당시 아예 정몽주에게 살수를 보내
암살하자는 제안까지 하는 장면도 있다. 이 장면은 용의 눈물 초반 장면에서 완전히 뒤집한 신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는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를 참형에 처하라 했고, 공양왕은 다소 우유부단한 포지션에 있었다.
그 외에도 힘없고 의욕없는 무능한 인물인 척 하면서 이성계 일파의 요청을 거부하는 등, 은근히 이성계
측을 방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정몽주가 처참하게 살해당한 후 이성계 일파가 조정을 장악한 뒤에는 완전히 허수아비 임금으로
전락했고, 마지막 최후의 수단으로 이성계와 동맹을 맺기 위해 이성계 집 앞에 가지만, 그 자리에서 대비
안씨가 내린 폐위의 교지를 받고 끌려나간 뒤 유배되어 사사되었다는 나레이션을 끝으로 극에서 퇴장했다.
이때 공양왕이 남긴 마지막 말이 참으로 처량한데,
"결국은 이렇게 되고야 말았구나! 500 년 왕씨의 사직이 이 왕요의 대에서 결단이 나다니. 내 이래서
왕이 되지 않으려고 하였거늘, 내 이 죄를 어찌 갚을 것인고. 죽어서 열성조들의 용안을 또 어찌
뵙는다는 말인가! 이놈의 팔자 한번 고약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