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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太祖) 왕건(王建) (877~943) 재위 918~943

1. 개요[편집]

후삼국시대의 명장이자, 삼한을 통일한 통일 왕조 고려의 건국자.

고려의 초대 국왕. 묘호는 태조(太祖), 휘는 왕건(王建). 자는 약천(若天).

877 년, 송악(개성)에서 호족 왕륭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하였는데 양길을 격파하고 후백제의 해상 요충지였던 나주를 점령하는 등 매번 신출귀몰한 전략을
세워 후고구려의 영토를 대폭 넓히는 공로를 세웠다. 왕건은 그러한 공적으로 인하여 한창 젊은 나이에
후고구려의 2 인자 격인 시중 자리까지 오르는 등 궁예의 신임을 받았으나 궁예가 점차 포악해지고 학정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윽고 여러 장수들과 대신들이 왕건을 진정한 왕의 재목으로
보아 추대하기에 이른다. 그는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제거하고 제위에 올라 연호를 천수(天授),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이후 후삼국 세 나라 중에서도 영남으로 축소된 신라는 우호적으로 포용하고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는 거듭


대전하였고 왕건도 자못 패전하여 특히 공산 전투에서는 애신인 신숭겸을 잃으며 죽을 고생을 하기도
하였으나 신라가 그의 친화적 자세에 스스로 항복해오고 이후 후백제 왕 견훤이 장남 신검의 반란으로
쫓겨난 뒤 투항해오자 936 년, 마침내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와 결전하고 승리를 거두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신라 문무왕 이후로 2 번째로 통일 국가를 이룩한 지도자이다. 신라의 경우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
고구려를 쳤고, 결과적으로도 고구려의 고토는 대부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가절하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발해마저 없었다면... 신라가 북진했을지도?

그에 비하면 왕건은 특별한 외세 개입 없이 자력으로 통일을 이룬 인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


그가 이끄는 고려 왕조가 분열의 시대를 종식한 이래 한반도를 '단일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물론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민족·국가에 대한 개념이 확립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2. 생애[편집]

2.1. 성장기[편집]

개성 왕씨로, 왕건의 족보에 대해서는 의종 대에 김관의가 쓴 <편년통록>에 따르면, 그의 조상이 고구려


유민이라고 한다. 고려사 서문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외가 쪽 시조인 호경의 아들 강충의 아들 거사
보육의 막내딸 진의가 고려로 온 당숙종과 결혼해 작제건을 낳았고, 그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과
결혼했다고 한다. 물론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왕건이 크게 된 후 출신을 미화하기 위해 만든 설화일
것이다.

송악의 호족 왕건 가문은 대대로 돈이 많았다. 강충은 집에 천만 금을 쌓아 놓았을 정도였다.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은 상선을 타고 서해를 항해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것으로
보인다. 즉 왕건의 선대는 고구려 유민으로서 중국과의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지방 세력가였다.

왕건의 아버지는 송악 지방의 호족이었던 왕륭이며 나중에 후고구려의 궁예 왕이 초창기의 라이벌이었던


양길에 대항해 세력을 키우며 명성을 떨칠 적에 아버지와 함께 그의 휘하로 들어가 젊은 나이일 때부터
공을 세우며 벼슬도 한찬(해군 대장급)을 넘어 계속 올라갔다. 아버지인 왕륭이 송악의 큰 세력을 지닌
호족인 점도 작용했겠지만 왕건의 능력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왕륭의 송악 세력은 패서 일대 평주,
정주, 황주 등지의 다른 호족들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음에도 어느 틈엔가 왕건이 호족 세력의 수장격이
되었다는 것은 왕륭과 왕건의 능력과 지략을 보여주는 증거다.

특히, 후백제와 싸울 때에 견훤이 방심한 틈을 타서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중요 지역인 무진주의 바로


아래에 있는 해안가 금성 지역을 점령했던 일은 최고의 공적이었다. 이 금성이 바로 지금의 나주다. 훗날
견훤이 탈환하기는 하였지만, 나주를 통하여 백제의 도읍을 바로 등 뒤에서 공격할 수 있었으므로 오랜
세월 동안 후고구려와 고려가 백제를 압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는 왕건이 무역을 통해 세력을 기른
호족 집안 출신이기에 본래 해전에 능한 반면, 견훤은 제해권의 중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대처를
소홀히 했던 데에 있었다.

이후에도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수차례 승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정에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궁예로부터 왕에 다음 가는 지위인 파진찬 겸 시중 벼슬을 받았다.

그야말로 엄친아, 먼치킨급. 그러나 궁예의 막장 행보가 더더욱 거세지고, 심지어 궁예가 서서히
자신에게 의심을 가질 낌새를 보이기 시작하자 위험을 직감하고 '근래에 나주 쪽의 정국이 불안하니
자기가 가서 지키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시중 자리를 스스로 내놓은 후 나주로 가 궁예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2.2. 고려 건국[편집]

후에 궁예가 중앙 집권화를 위해 세력있는 호족들을 숙청하면서 뜬금없이 관심법으로 왕건의 마음을


꿰뚫어 역적 모의를 하고 있음을 알아냈다며 왕건을 압박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궁예의 옆에 있던 최응이
붓이 바닥에 떨어져 줍는 척 하면서 왕건에게 복종할 것을 넌지시 일러주었다. 이에 왕건은 스스로 역적
모의를 인정하고 죄를 빌자 궁예는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란 칭찬과 함께 처단한 역적들로부터
몰수한 금은보화 중 황금 안장과 황금 굴레를 하사하면서 용서하였다.

이러한 궁예의 행동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다. 대체적으로 궁예가 호족들을 압박하기 위해 당시 잘 나가던
왕건을 일부러 걸고 넘어져 무언의 경고를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궁예는 왕권 강화를 위해
심지어는 패서 호족들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었던 자신의 부인인 강비와 그 소생 왕자들까지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강비의 죽음으로 동요하는 패서 호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는 해석도 있긴 하다. 왕건도
역심을 실토했으니 너희들이라고 무사할 것 같으냐?라는 것. 궁예가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갑자기 시중
벼슬에 있는 인물을 증거도 없이 역적으로 몰리도 없고, 게다가 역적 모의를 시인했음에도 정직하다는
칭찬과 함께 금은보화를 하사했다는 점에서 왕건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궁예의 수작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저 다음의 궁예와 왕건의 대화는, 요약하자면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니가 주장한 해군 증강 계획


말인데, 니가 맡아서 해라" 쯤 된다. 사실상 새로이 증강된 해군은 왕건의 지휘 하에 들어가게 되므로
궁예는 그 전에 미리 왕건의 기를 꺾어놓으려고 했던 것.

그러나 이 일로 왕건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일단 그 자신이 시중 벼슬에 있으면서 호족들 가운데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의 세력가였으므로 자신도 궁예에게 숙청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러던 상황에 고려의 4 대 개국공신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찾아와 지금의 왕은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으니 시중이 왕위에 올라야 합니다라고 간청하였으나 왕건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부인인 신혜왕후 유씨가 갑옷을 내와 직접 입혀주면서 무언의 설득을 시도하였고 마침내 왕건도
결단을 내려 충성을 맹세한 4 명의 무장들과 함께 궐기하였으며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 :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형님 폐하! 918 년 6 월 15 일 고려를 건국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혹을 약간 넘긴 42 세였다. 이듬해 왕건은 도읍을 철원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옮겼다.

2.3. 견훤과의 대결[편집]

고려의 왕이 된 왕건은 초기에 큰 난관에 부딪혔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사실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이들을 잘 구슬려 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이 급선무였던 왕건은 후백제 왕 견훤과
화친을 맺고 충돌은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견훤이 신라의 요충지였던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자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후백제의 군대와
조물성에서 충돌한다. 그러나 양 측의 힘이 비등하여 승부를 내기가 힘들어지자 서로 간에 인질을
교환하여 다시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고려에 인질로 가 있던 견훤의 조카가 갑작스레 병사하자 견훤은
왕건을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고려와 후백제는 다시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견훤은 수많은 전투를 통해 다져진 노련한 전술과 만만치 않은 실력으로 왕건을 몰아 붙였다. 왕건은
견훤에게 수 차례 패하며 수세에 몰렸는데, 특히 공산 전투에서는 1 만 명, 연구에 따라 2 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고 개국 공신이었던 신숭겸마저 전사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왕건은 신숭겸의 도움으로
황급히 도망가면서 대구의 많은 지역의 이름을 붙여줬다. 이 도주 루트를 따라 대구시가 신숭겸 장군
유적지에서 안심역에 이르는 팔공산 왕건 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본래 공산 전투 당시에 왕건은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여 서라벌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를


구원한다는 명목 하에 기병 부대를 이끌고 급히 서라벌로 향하였다. 이때 견훤은 왕건의 군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즉시 군사를 물렸는데 왕건은 견훤의 군사가 수적으로 열세에 놓여 겁을 먹고 도주한 것으로
착각하고는 여세를 몰아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는 견훤의 계략으로 급히 추격해오던 왕건의 군대를
매복술로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던 것이다.

게다가 견훤이 여세를 몰아 부하 장수 상귀로 하여금 개경 앞바다를 공격해 왔을 때에는 처음으로


해전에서 패배하는 수모를 겪었다. 왕건이 비록 바닷가에서 태어나 물에 익어 해전에 능했다고는 하나
견훤도 나주를 빼앗긴 후에 절치부심하여 열심히 해군력을 길러 왔던 것이었다. 연이은 패배로 인하여
왕건은 일생 일대의 위기에 부딪혔다.

여기에 국내 상황 역시 왕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일단 궁예를 따르던 몇몇 성주들과 호족들이 고려에


귀순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후백제에 붙어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특히 삼년산성에서 왕건이 패배한
결정적인 원인은 호족들이 후백제로 투항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온화했던 성품의 왕건도 이 때만은 법을
굉장히 엄격하게 시행했다.

태조 왕건에서는 후백제로 투항한 호족과 장수들의 가족을 모조리 철퇴로 때려죽이고 시신은 까마귀 밥이
되게 하였다. 칼 대신 철퇴로 죽인 이유는 시신이 온전하게 보존되지 않는 처형법이기 때문...
정사에서도 왕건이 이렇게 혹독하게 법을 시행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적었다.

이렇게 연이은 패배 이후 왕건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후백제와 국운을 건 싸움을 수 차례 벌였다. 사실


공산 전투에서 왕건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후백제에게 패권을 내주다시피 했었지만 발해 유민의 합류로 그
전력을 다시 회복했다. 양측의 세력이 비슷하여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던 중,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8 천의 적군을 무찌르고 견훤의 여러 장수와 책사들을 사로잡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의 무대가 되었던 안동 지역의 세 호족 가문이 왕건을 지원해 주었던 것이 승리의 요인이었는데,
왕건 특유의 넓은 포용력과 친신라 정책이 토착 세력들의 호감을 끌었던 듯하다. 승리 후에 왕건은 안동의
호족들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이때 왕건에게 벼슬을 받았던 김선평, 권행, 장정필이 안동 김씨, 권씨,
장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안동 삼태사'라 부른다.

반면에 견훤은 서라벌을 공격하고 신라 왕을 자결케 한 사건 때문에 신라인들과 여러 호족들의 반감을


샀다. 견훤은 이 기점에서 크게 기가 꺾여 버렸는데 고창 전투로 입은 피해를 제대로 수습하기도 전에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 나라가 분열되면서 후백제는 서서히 세력을 잃어갔다.

결국 후계자 문제에 휘말려 아들이었던 신검에게 왕위를 강탈당하고 유폐되었던 견훤이 고려에 귀순하였다.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여 대인배의 면모를 드러내어 민심을 얻고 이를 후백제와의 결전에서도 잘 이용할
수 있음을 간파한다. 이후 후백제를 칠 때 견훤도 동행했는데 견훤이 있는 것을 본 후백제 장수 중 일부가
"어? 저기 우리 대왕님이 계시네?" 하고는 그대로 항복했다. 이는 후백제 내에서 인망은 신검보다 견훤이
한 수 위라는 사실.
왕건은 한때는 원수였던 견훤을 상보 어르신이라 부르며 극진히 대접하였다고 전해진다. 상보라는 호칭을
처음 쓴것은 인질을 교환해 화친을 한 후로, 이 때는 손위의 큰형님이나 작은 숙부 정도로 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헌데 귀순 후에는 표면적인 호칭을 상보라 했을 뿐, 진짜 적국의 전왕 + 신라인에게는 천하의
개쌍놈 + 빈털터리에 아무 힘도 없는 거지노인인 견훤에게 재산 짱짱하게 주고 궁을 집으로 삼아 살게
하는 등 숫제 태상황급 취급이었다.

상보란 한자로 尙父로 쓰며, 이때는 아비'부'가 아닌 어르신'보'로 새겨읽으므로 상부가 아닌 상보가
정확하다. 왕이 손위의 권신에게 사여하는 존칭으로서, "그대는 우리 아버지(즉 선왕)보다 못하지 않음"
정도의 뉘앙스. 그런데 왕건과 견훤은 10 살 차이. 이렇게 견훤마저도 왕건에게 큰 대접을 받자 견훤은
감화되었다고 전해진다.

왕건이 견훤마저도 거두어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후에 신라도 고려에 투항해왔고, 발해가 멸망한 후에
태자 대광현('왕계'라는 이름을 하사 받고 고려 왕족이 됨)이 유민들을 이끌고 망명하자 이 또한
받아들이니, 이 시점에서 고려의 국력은 이미 후백제를 훨씬 압도하였다.

2.4. 후삼국 통일과 말년[편집]

이 때에 신검은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몇 개월만에 간신히 내란을 평정하여 왕위에 올라 왕건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왕건이 발해계 세력과 북방의 이민족, 그리고 견훤을 비롯한 한반도
남부 일대의 세력을 아우른 10 만의 대군을 이끌고 내려오자 후백제는 망했어요... 마침내 후삼국시대를
50 년만에 종결시켜 삼국 통일을 이루는 대업을 이루었다.

후삼국의 통일 사업을 완수한 후에는 국가의 체계와 기틀을 잡는 한편 장남이었던 왕무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정치적 공작을 벌이기도 하였다. 왕무는 왕건이 왕위에 오르기 전, 궁예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하던
시기에 얻은 아내로부터 얻은 아들이었으나 그 외가 쪽 가문의 세력이 무척 한미하였기 때문에 다른
쟁쟁한 호족들로 부터 얻은 아들들이 왕위를 탐낼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왕건이 이렇게 장남을 후계자로 삼으려 노력한 것은 장남을 무시하였다가 결국 나라를 망국의 지경에
이르게 했던 일생의 라이벌 견훤의 선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하여간,
이 덕분에 본래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하였던 장남 왕무가 훗날에 왕건의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왕건은 최후에 자신이 무척 아꼈던 충복이었던 강직한 재상 박술희와 왕규를 불러들여 아들의
후견인 역할을 맡기고 그를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고려의 왕이라면 국가를 다스리는데
참고해야 할 훈요 10 조를 남기고 사망하였다. 다만 훈요 10 조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문서 참고.

2.5. 최후[편집]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왕건의 붕어를 매우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재위 26 년째인 서기 943 년 5 월


정유일, 재신(宰臣) 염상(廉相)과 왕규(王規), 박수문(朴守文) 등이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한문제(漢文帝)의 유조(遺詔)에, '대개 생명이 있는 천하 만물은 죽지 않는 것이 없다.
죽음은 천지의 이치며 만물의 자연이니 어찌 심히 슬퍼할 것이 있으랴.' 하였으니, 전고(前古)의 명철한
군주는 마음가짐이 이와 같았다. 내가 병에 걸린 지 이미 20 일이 지나 죽음을 제집으로 돌아가듯이
여기고 있으니, 무슨 근심이 있으랴. 한 문제의 말이 곧 나의 뜻이다. 오랫동안 처리하지 못한, 도성
안팎의 중요한 일은 경들이 태자 무(武)와 함께 재결한 후에 아뢰라." 하였다.

며칠 후인 병오일. 이 날 죽기 직전에 왕건은 신덕전에서 학사 김악에게 유조를 적게 했다. 유조에는


내외의 모든 관료들은 다 태자의 명령을 따르도록 할 것이며, 장례와 무덤의 제도는 한나라 문제와 위나라
문제의 고사에 의거하여 검소하게 지내라고 지시했다. 이 유조를 다 불러 주고는 갑자기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왕건이 세상을 뜬 줄 알고 큰 소리로 통곡을 했는데 말이 없던 왕건이 갑자기 신하들에게
"이게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다. 그래도 신하들은 오열을 멈추지 않고 "성상께서는 백성의 부모이신데
오늘 신하와 백성들을 버리려 하시니 신들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혼란스러웠던
후삼국을 통일하고 오백년 고려의 왕업을 다진 이 난세의 영웅은 다음과 같이 의미 있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웃더니 잠시 후 정말로 세상을 떠났다.

"뜬구름처럼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라."

사실 관련 기록이 여기서 완전 끝나는 건 아니고, 500 년 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왕씨 몰살을


했을때 왕건이 이성계 꿈에 나타나 화를 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은 뒤에는 현릉(顯陵)에 안장됐는데, 이후 고려가 여요전쟁, 여몽전쟁을 하면서 왕건의 유골도 적에게
능욕당함을 막기 위해 강화도 등지로 여기저기 이동해야 했다.

3. 능력[편집]

왕건은 군사적 특히 패서 호족이었던 만큼 수군을 잘 다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후백제의 후방인 나주


지방을 상륙전으로 빼앗은 것에서 잘 드러난다. 나주를 빼앗긴 견훤은 그야말로 언제 뒤쪽을 가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수십년 동안 시달렸다. 궁예 휘하에서 아직 어린 나이에 시중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전공들 덕이었다.

공산 전투에서는 견훤을 무리하게 추격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탈탈 털려서 신숭겸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죽을 뻔 했고, 장기인 해전에서도 비록 나중에 되찾았다고는 하나 나주를 빼앗기는 등, 나중에는 견훤이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 이후의 결정적 전투에서는 확실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왕건의 진정한 장점은 궁극의 화친 능력과 유화력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를 회유하여 상주 지방을 영향권에 들게 하고, 견훤이 세운 신라의 왕인 경순왕도 아군으로
끌어들여 신라를 자신의 편으로 붙게 했다. 또한 한창 수세에 몰려 있던 전세를 역전시킨 고창 전투에서의
승리도 토착 호족 세력의 마음을 빼앗은 덕분에 가능했었다. 놀라운 수준의 화친 능력으로 호족 세력을
계속 끌어모으니 결국 견훤은 궁지에 몰렸고, 마침내는 최대의 적이었던 견훤마저 아군으로 삼았다.

이런 결과는 물론 정략이나 용인술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 토대가 되는 왕건 자신의 인화력이


대단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족들, 심지어는 가족들 간에도 화애롭지 못하여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견훤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항우와 유방과 같은 모습이다.

4. 정치 스타일[편집]

고려의 통일 이후 왕건에게 가장 큰 문제는 호족들에 대한 처우 문제였다. 호족들은 후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그대로 방치할 경우 최소로는 왕권 위협, 최악으로는 독립해서 내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컸다. 왕건부터가 고려의 전신인 태봉의 건국공신 세력이자 호족 연맹체 국가에 가까웠던 태봉의
대표적인 호족 실세 중 한 명이었다. 태봉의 신하에서 역성혁명(관점에 따라선 군사 쿠데타)을 일으켜
궁예를 내쫓고 왕이 된 자신이라는 매우 휼륭한 선례가 자신인만큼 왕건 입장에서는 제 2, 제 3 의 자신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해야만 했다.

따라서 왕건은 회유책과 강경책을 병용해 호족들의 충성을 얻는 것과 동시에 조금씩 견제해 나갔다.

우선, 회유책으로는 정략결혼, 사성 정책, 역분전 정책이 있었다. 정략결혼은 이 항목에 들어올
위키러들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그 정략결혼이다. 그런데 호족들이 상당히 많은지라 왕비가 수십 명이었다.
왕후가 6 명에 부인이 23 명. 당연히 정략 결혼에는 한계가 있었고, 이를 보완하는 것이 사성정책이다.
사성(賜姓)이란 글자대로 '성을 주다'라는 뜻으로, 공이 있는 호족에게 왕씨 성을 내려 충성을 얻는
것이다. 또한 지방 호족들에게 땅을 지급하는 역분전 정책도 사용했다. 그리고 지방마다 일부러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아 호족들이 기존에 누리던 기득권을 인정해 주었다.

강경책으로는 기인 제도, 사심관 제도를 썼다. 상수리 제도를 기초로 삼는 기인 제도는 호족의 자식들을
개경에 머물게 하며 사실상 인질로 삼는 것이다. 피 같은 자식들의 목숨이 왕건 손에 있으니 호족들은
반기를 들 수 없었다. 기인 제도로 자살하는 호족의 자녀들도 있었다고 한다.

사심관 제도는 중앙 정부에서 지방마다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만큼,
자신의 지방에서 자치 (정확히는 지방에 준 행정, 치안상의 특권. 즉, 기득권)가 막장일 경우 곧,
반란이나 봉기가 일어나게 한다던가 아니면 지방민들에게 너무 가혹한 정치를 펼처서 중앙 정부의
귀에까지 그 소식이 들린다던가 하는 경우에 연대책임을 물게 하는 제도였다. 또한 삼국 통일 이후에
공신들에게 녹읍을 최대한 주지 않아 경제적 기반 확대를 막으려 했다.

숭불정책을 실시했으며, 이러한 친불교 성향은 신라 하대 지방 호족이라는 출신 성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이전엔 유교보다 불교가 더 선호되었다. 유교를 믿기 위해서는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어려운


한자를 일반 백성들이 익히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한글과 그림을 이용하여 인,
의, 예, 지, 신, 충, 효 와 같은 유교의 기본 덕목을 알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살기도 팍팍한
민중들에게는 차라리 내세에 대한 믿음이나 현세를 구원한다는 미륵신앙이 더 잘 먹혔다.

때문에 조선 시대에도 불교는 개인신앙으로써 큰 역할을 차지했다. 팔관회나 연등회같이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규모는 아니여도 흉년이 들거나 하면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국가 차원에서 여는 불교 행사도
있었고 국가 차원에서 건립한 사찰도 어느 정도 있었다.

고려 시대는 유교가 본격적으로 종교적 색채를 띄기 시작하는 성리학이 등장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유교는
학문으로서 받아들여지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종교로선 불교가 선택되고, 실제 통치 이념은
유교에서 기반한 경우가 많았다. 성리학이 등장하기 전의 고려에선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형태를 띄지만,
성리학 도입 이후인 공민왕 대에 들어서면 유학자들이 가차없이 불교를 비판하여 공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며 이후 조선이 건국되어 성리학을 국교로 삼음으로서 불교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새 왕조를 창업한 왕건으로서는 신라의 국교가 불교였던지라, 국민의 대다수인 불교 신자와 충돌하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훈요 10 조에서도 팔관회, 연등회를 거르지 말라고 할 정도의 엄청난 불교빠.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 불교 행사가 지나치게 화려해진 탓에 불교 행사들이 민중고를 일으켜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 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몇십년간 폐지시킨 적은 있다.

덤으로 훈요 10 조에 '차현 이남 공주강(금강) 밖은 배역의 땅이니 인재를 등용치 말라'는 말을 남겼다.


시대적 정황을 볼 때 고려 시대의 차현이 20 세기나 들어서야 등장한 지하에 위치한 지질학적 개념의
차령산맥을 뜻할 리도 없으며 공주강 밖은 공주강 이북을 뜻하니 계속 왕건의 골치를 썩인 청주의 친 궁예
반 왕건 세력을 일컫는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자세한 내용은 훈요 10 조 참조.

거란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표명했다. 왕건 이전의 궁예는 거란과 친교 노선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사 이외국기 고려편에 보면 915 년 10 월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보검을 진상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
때는 궁예가 집권하던 시기였다.

942 년 10 월 거란의 태종이 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고자 사신과 선물을 보내 통교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왕건은 거란이 동맹국인 발해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멸망시켰으니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신들을 모조리 섬으로 귀양보내고 선물로 왔던 낙타 56 마리를 개성에 있는 만부교 다리 밑에 묶은 뒤
굶겨 죽였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만부교 사건이다.

왕건이 이러한 반 거란 정책을 펼친 이유는 발해의 멸망과 관계가 있는데 발해가 과거 거란과 친하게
지내다가 거꾸로 멸망당했고,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많이 유입이 됐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유에서라도
거란을 적대시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고려의 상황은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발해 유민들은
왕건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존재였다. 멀리 보기 보단 가까이에 있는 이득을 취하는 왕건의 특성상 그에겐
최선의 선택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거란를 적대시 함으로서 길고 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도
자신의 책 성호사설에서 왕건의 선택을 비판하기도 했다.그런데 이건 어쩔수 없는것이 발해는 당시
고구려유민이 세운 국가였고 왕건역시 혈통으론 고구려유민이었기 때문에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그렇게
좋게볼리 만무했다.

5. 평가[편집]

"태조는 아랫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사람이 힘을 다하였고, 사람들에게 성심으로


대접하여 멀든 가깝든 모두가 그를 따랐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은 천성에서 나왔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정(至情,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한 정)에서 나온 것이다. 견훤이 부자간에 서로 해치자
토벌하여 취하였고, 신라는 군신이 와서 의탁하자 예를 갖추어 그들을 대우하였다. 강한 거란이 동맹국을
침략해 멸망시키자 국교를 단절하였고, 약한 발해가 나라를 잃고 돌아갈 데가 없자 이를 위무하여
받아들였다. 자주 서경에 행차한 것은 근본이 되는 땅으로 만들려는 까닭이었으며, 친히 북방의 변경을
순수한 것은 사나운 풍속을 합쳐 교화하려 함이었다. 왕업을 처음 창건하여 모든 것을 고쳐 시작하였으니
비록 예악은 미처 제정하지 못했으나, 그 큰 규모와 원대한 계책이며 깊은 인덕과 후한 은택은 진실로
이미 5 백 년의 국맥을 배양하였던 것이다." -고려사절요 1 권 태조 신성대왕 편 중에서

"어진 사람을 좋아하시고 착한 일 하기를 좋아하셨다. 자기 생각을 미루고 남의 생각을 존중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의를 지키셨다. 모두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민간에서 자라 어렵고 험한 일을
두루 겪으셨기에 사람들의 참모습과 거짓 모습을 모두 알아보셨고, 일의 성패도 내다보셨다. …(중략)…
재주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셨고, 아랫사람이 가진 힘을 모두 쏟을 수 있게 도우셨으며, 어진 사람을
취할 때와 간사한 사람을 쫓을 때에 주저함이 없으셨다." -최승로의 시무 28 조 중에서

왕건은 이념과 시대에 관계없이 평가가 매우 후하다.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 유민을 포용하여
이후 남, 북한 분단까지 천 년간 이어지는 단일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역사 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고려 - 조선 교체기처럼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고대를
청산하고 중세를 열었다는 점도 높이 평가받는다.

민족 포용책을 썼고, 적국에 대해 매우 관대한 면도 그렇고, 무신정권 시절 이런 가치를 내세운 반란


세력이 있긴 했지만 왕건 이후엔 지역에 기반을 둔 신라나 백제의 부흥 운동 같은 게 대부분 사라졌다는
점에서 단일한 민족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발해가 건국되어 남북국시대가 열렸으며 나당 연합군에 의한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이라는 그 태생적 한계 때문에 수백 년 후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다시 등장하였고, 이를 통일한 것이
고려이며, 국호부터 정책까지 고구려와 발해로 이어지는 영토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않았으며(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고려 태조 왕건을 지금의 한국을 있게 한 통일의 시조로
본다.

5.1. 비판[편집]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위기에 처한 발해 및 발해부흥운동을 돕지


않아 한국사에서 만주가 떨어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있다.

926 년 발해 본국의 붕괴는 아직 여유가 없었다지만, 후백제를 멸한 이후에도 정안국이나 흥료국 같은


발해 후속국들이 지원을 요청해오면 거리를 두는 정책을 펴고, 단지 귀순해오는 일부 유민만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이는 외교에 관한 일로 볼 수 있는데, 발해 부흥국들은 대놓고 거란의 적대 세력이었으므로
이들을 지원하게되면 당대 최강국 거란과의 전면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진취적인 건국
초기라지만 거란 역시 전성기였던 터라 그 아무리 전쟁으로 잔뼈가 굵은 왕건이라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거란이 고려에게 대놓고 시비 걸며 서경 이북을 내놓으라던 성종 시기 고려의
조정은 서희가 나서기 전까지 바짝 쫄아 서경 이북을 할양하기로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그러나 이건 바로
반박이 가능한게 당시고려는 건국초기였고 문물이나 중앙제도조차 정비가 안됐고 게다가 건국초기에는
왕건이 견훤에게 죽을수있을정도로 털리는등 도와줄 입장이 안됐다.후에 광종의 즉위후 호족들을 정리하고
나라가 좀안정돼자 흥료국에 지원군을 보내주거나 정안국 흥료국과 같이 요나라에 대한 군사공격을
감행하는등 도움을 줬다.

또한 왕건이 적극적인 혼인 동맹으로 호족들을 안정시켰다고는 하지만 확인된 부인만 29 명[4]으로, 이쯤


되면 혼인 동맹의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꼭 필요한 가문과 결혼한 것도 아니다. 혜종의 어머니 장화왕후
오씨의 부친 오다련은 나주 호족이긴 했으되 당시 행정 구역상으로만 나주인 목포에 있던 인물이었고
고려사에서는 대놓고 오씨를 원나잇 상대로 하려 했으나 오씨가 임신하려고 노력해 성공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결론은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으나 그가 건드렸다가 덜컥 임신한 사람들을 많이 들였다는게 된다.


서전원부인의 경우 그나마도 가문도 전해지지 않을 뿐더러 부친이 관직을 가지지도 않았다. 결혼동맹이
이렇게 막장이 되자 그 가치의 인플레를 막기 위해서 왕가와 결혼할 수 있는 가문을 정하기도 했고
근친혼이 성행하게 된다.

더불어 왕족들의 성씨를 정하는 제도도 설정하게 되는데 이것도 특이한 방식이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왕씨와 결혼한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왕씨 성을 따르지만 딸을 낳으면 할머니의 성을 따른다. 가령
드라마화로 인지도가 있는 천추태후의 경우 왕건의 친손녀이지만 성씨는 할머니에서 따 온 황보씨였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인 경종과 근친혼을 하게 된다.

즉, 왕족이 딸을 낳아도 그 딸은 할머니의 성씨를 따르게 되며 이리되면 왕건 대부터 시작한 유력한 호족


가문과 지속적으로 혼인동맹을 맺을 수 있고 지위의 인플레도 막을 수 있긴 하다. 문제는 이게 당대
가치관으로 봐도 정상적이지 않다는 거다.

뿐만 아니라 후계 구도를 엉성하게 잡아서 아들 혜종의 위치를 위태롭게 했다. 후견인이라고 붙여준 것이
박술희인데 박술희는 왕건이 아끼던 인물이긴 했으되 힘이 없었고 그렇다고 모계 쪽이 힘있는 호족도
아니었다. 상기했듯 오다련은 진짜 나주 호족도 아니고 세력을 가질만큼 강한 인물도 못됐다. 그렇다면
사돈 가문이라도 힘있는 가문을 들여야 했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당시가 건국 초이고 호족 세력이 강한만큼 황주 및 개경 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해주거나 그도 아니라면


충주나 청주, 광주, 경주 같은 패서지방이 아닌 타 지역에 기반을 둔 유력한 호족과 맺어주어 개경
세력을 견제하도록 해줬어야 했다. 결국 고려 초기의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어졌다.
[5]

후삼국 통일을 이룬 왕건의 업적과 이후 한국사의 흐름에 미친 영향은 분명 굉장히 크다고 볼 수 있으나
현대 한국인들에게 왕건의 인기는 한국사에서 가장 인기있는 몇몇 위인들(광개토대왕,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등)보다는 한 수 아래로 여겨지는 듯 하다.

문명 시리즈에서도 두 차례 한국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나왔지만 한국 유저들은 왕건이 좀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지 차라리 세종대왕이나 광개토대왕을 등장시키라는 반응이 많았고 결국 잘렸다. 그 외에 고액권
지폐 인물 선정 등 일종의 인기 투표가 있을 때도 1 위를 차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비록 드라마 태조
왕건 하나가 대히트했었지만 그 외에 왕건이 높은 비중으로 등장한 드라마도 하나도 없었고, 은근히
존재감이 부족하다. 더군다나 그 태조 왕건 드라마에서조차 진주인공은 궁예와 견훤이다... 고려 태조의
경우도 창업자고 고려 5 대 성군으로는 반드시 들어가긴하나 고려 문종이 진짜 성군이었다는 점을 볼때
다소 밀리는 감이 없지않아 있다.

6. 왕건 상[편집]

1993 년 북한 개성 태조 왕건의 능인 현릉의 봉분 외곽에서 출토된 왕건의 금동상. 조선왕조실록에서 세종


10 년 8 월 1 일에 고려 태조의 어진과 동상을 능 곁에 묻었다고 하는데 그 동상으로 보인다.

머리엔 통천관(通天冠)을 쓰고있으며 몸은 나체다. 연구에 따르면 고려 시대의 인물상은 나체로 동상을
만든 뒤 그 위에 실제 옷을 입혔는데 현재 옷은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있던 탓에 사라졌다. 청동상 발굴시
발 쪽에서 비단 조각이 나왔고 허리띠의 일부로 보이는 유물이 나오기도 했다. 기록에도 왕건 청동상에
입힐 비단 옷과 옥대(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봉헌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유물과 사료가 교차
검증이 된다.

위의 상에는 성기가 매우 작게 표현된 부분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마음장상'이라고 하며 성인으로서


성욕을 초탈. 모습을 표현한 불교적 표현이다.[6] 이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북한 국보
전시회에서는 중요 부분을 천으로 가려놓았다. 나체 상에 옷을 입히는 형태의 상은 토속신앙의 조각상의
양식이라고 한다.#

7. 아내와 자녀[편집]

부인이 많기로 유명하다.[7]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태조가 많은 부인을 가졌다는 사실 정도는 알
정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즉위 초 불안한 왕권과 낮은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유력 귀족들과 혼인을
통해 혈맹을 맺는 혼인정책을 펼쳤다. 사서 등 알려진 바에 따르면, 29 명[8]의 부인을 두고 있고 부인들
모두는 유력 지방 호족이거나 공신들의 딸이다. 이 혼인 정책은 태조가 살아있을 때는 그들의 딸을 인질로
삼아 반역을 억제하는 기능을 하였지만, 사후에는 유력 귀족을 외가로 둔 쟁쟁한 왕자들 덕분에 왕위
쟁탈전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8. 오늘날의 왕건[편집]

8.1. 드라마 태조 왕건[편집]

왕건(태조 왕건) 참조.

8.2. 그 외 한국의 사극들[편집]

재밌는 점은 태조 왕건이 왕건을 주인공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긴 하지만 왕건이 최초로 등장한 사극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초로 등장한 사극은 다름 아닌 용의 눈물.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산발하고 길게 수염을 늘어트린


모습으로 "네가 내 후손들을 죽였으니 네놈 역시 벌을 받으리라!"라며 칼을 들고 위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역전의 용사이자 맹장인 이성계가 두려움에 질린 모습으로 왕건 앞에 무릎을 꿇고 "폐하!"라고
쩔쩔매면서 어쩔 줄 몰라한다. 일회성 등장이지만 어쨌든 등장은 등장이다.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그를
위협한 이야기는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다. 이 때문에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할 결심을 세웠다고 한다.
사실 작중 이성계가 꿈에서 왕건을 만나게 된 계기는 나이와 몸을 생각하지 않고 천도를 서두르며
강행군을 한 여파 때문이다.

이 당시 배우는 성우 출신 탤런트인 김경응. 김경응은 또 회안대군 이방간의 아들인 이맹종 역할로


출연하였다. 즉 1 인 2 역. 그리고 훗날 정도전(드라마)에서는 최영의 조카이자 이성계 암살 사건을
주도한 김저 역할로 출연해서 역시 조선 건국 세력과는 대척점에 서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제일 백미는
태조 왕건에서는 박수문 역할로 나왔다.

이 야사는 용의 눈물과 비슷한 시대를 다룬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약간 반영이 되어 나온다. 다만 왕건


본인이 직접 등장한 것은 아니고, 조선을 건국한 직후 이성계가 옥좌에 앉아 있다가 '네 이놈!!'하고
꾸짖는 환청을 듣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 장면이 나오기 직전에 "목소리만이라도 최수종을 까메오
출연하는게 어떨까?"라는 농담성 제안이 넷 상에서 나돈 적이 있었다. 실제로는 최수종이 아니라 당시
음향 제작진 중 한 명이 목소리 연기를 했다고 한다. 대신 직접적으로 왕건이 묘사된 게 아니라서 이
야사를 잘 모르는 사람은 왕건의 목소리인지 잘 모를 듯하다. 용의 눈물 때와는 달리 여기서의 이성계는
호통 소리를 듣고도 "뭐? 뭐?"라며 태연하게 대꾸하는, 좀 더 역전의 용사다운 모습으로 나왔다.

사실 왕건 입장에서는 이성계에게 극도로 분노할 만한 게, 왕건 역시 쿠테타로 나라를 뒤엎고 자기가 왕이


된 뒤 두 나라를 항복시켜 통일을 이루기는 했지만 최소한 이성계처럼 자기가 무너뜨린 나라의 왕족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지는 않았다.

왕건이 직접 죽였다고 확실히 기록된 전 왕족은 후백제의 양검, 용검 정도인데 양검과 용검은 불효자 +
역적이라 사실 죽어 마땅한 짓을 한 인간들인 데다, 이들의 아버지인 견훤부터가 이들을 죽이라고
왕건에게 종용했다. 신검 또한 결국 왕건에게 죽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 인간도 불효자 + 역적 수괴
입장이라는 걸 감안하면 역시나 죽는 게 당연하다. [10] 이후 후백제의 견씨나 신라의 김씨, 박씨, 석씨
등을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기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11]

왕건과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비슷한데, 둘 다 지방 세력가에서 출발해서 아버지와 함께 자기가
뒤엎은 나라에 투항했고 거기서 무공을 세워 세력을 쌓은 뒤 왕위에 올랐다. 단 끝은 왕건이 더 좋았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

그런데 고려라는 왕조 자체가 호족 세력들의 연합 정권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왕건이 왕좌에 앉아 있다


해도 어느 가문을 찝어서 모조리 죽여버리거나 압박할 상황이 아니긴 했다.(대신 그의 아들이자 4 대 임금
광종이 이 일을 맡게 된다.)

조선의 왕씨 학살은 이후 태종 이방원이 "그것은아버지의 뜻은 아니었다" 발언을 시작으로 차츰 완화하기


시작하였고 문종 때 가면서 왕씨에 대한 탄압 정책이 완전히 폐지되었다. 왕씨 몰살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실 태조 이성계 본인에게 있었기에 언제 왕씨가 들고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가 작용했다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태조 왕건 이후 시간대인 제국의 아침에서는 말년 임종 직전 모습으로 나온다. 배우는 바뀌었으며, 작품


자체가 전형적인 정치드라마였기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종영됐다.

제국의 아침 이후 시간대를 다룬 천추태후(드라마)에도 왕건이 등장한다. 천추태후가 어릴 때 혼령으로


나타나는 장면이 있고, 태조 시절의 노신 최지몽이 나타나 회상하는 장면에서도 등장했다. 방영될 당시에
일부 시청자들이 최수종을 까메오로 쓸 것이지... 하는 아쉬움을 보였다. 사실 최수종이 까메오로
나오더라도 몸값이 워낙 적지 않은 거물이기는 하여 섭외하기 어려운 어른의 사정도 있겠지만.

이렇듯 사극에서 높은 빈도로 등장하고, 또 등장하는 극의 비중도 높은 역할로 등장하는 조선 태조


이성계에 비하면 한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고려 왕조의 창업군주 치고는 태조 왕건 때를 빼면
사극에서 주역으로 나온 적이 없다. 역사적 비중에 비하면 사극에서의 대접이 매우 박한 편. 제국의 아침,
천추태후나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 등장한 것처럼 '과거의 영웅'이라는 이미지나 극 주인공에게 영향을
주는 인물로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 2016 년 가을에 방송된 SBS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는
조민기가 맡았다. 여기서는 수많은 부인들과 아들들 사이에서 후계 구도를 놓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이
제법 비중있게 그려졌다.

또한 1970 년에도 왕건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태조 왕건>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왕건이 궁예의
폭정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궐기하여 고려를 세우는 과정을 영화화한 듯.

8.5. 김성한 작가의 소설 고려태조 왕건[편집]


7 년 전쟁으로 유명한 김성한 작가 소설. 이성계와 요하의 뒤를 이어 나온 3 번째 역사소설이다.

흔히 왕건 하면 떠오르는 전통적인 왕건의 이미지인 德을 강조한 소설. 1980 년대에 나온 소설이지만


궁예와 견훤을 재평가하는 시대를 앞서간 모습을 보여줬고 훗날 드라마 태조 왕건에 영향을 줬다. 김성한
작가는 세달사의 위치를 강원도 영월이 아닌 개성 부근으로 가정했고, 여기서 어린 선종과 왕건이 만난다.
사실상 왕건의 입장에서 보는 궁예와 견훤까지 조명한 후삼국시대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소설은
절판되었다가 최근 2016 년 2 월에 재출간되었다. 총 5 권.
8.6. KBS 의 인형극 쌍룡검[편집]

1978 년 KBS 에서 방영한 인형극 쌍룡검의 주인공이 왕건이다. 여기서는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의
설화부터 시작해서 신라 왕자 궁예가 애꾸가 되는 에피소드, 견훤의 아버지가 지렁이라는 설화 등도 다
나오는지라 정작 주인공 왕건의 등장 장면은 상당히 늦은 편이다. 어린이용 인형극이었지만 관련 설화들도
상세히 설명되고 내용도 드라마틱하고 캐릭터들의 개성도 뚜렸한 상당한 수작이었다. 이 인형극을
기억하는 세대는 드라마 왕건보다 오히려 더 나았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2 대 혜종 왕무 912 년 ~ 945 년 10 월 23 일 (34 세)

재위 기간 943 년 7 월 5 일 ~ 945 년 10 월 23 일 (2 년 3 개월)

1. 소개[편집]

惠宗仁德明孝宣顯義恭大王 諱武 字承乾 太祖長子 母曰莊和王后吳氏。後梁乾化二年壬申生 太祖四年 立爲正


胤 從討百濟 奮勇先登 功爲第一 二十六年 五月 丙午 太祖薨 奉遺命卽位。
혜종 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은 이름이 왕무(王武)이고 자가 승건(承乾)이며, 태조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다. 후량(後梁) 건화(乾化) 2 년 임신년(912 년)에 탄생하여 태조 4 년
(921 년) 정윤(正胤 : 태자)으로 책봉되고 종군하여 후백제를 토벌할 때 용맹을 떨치며 선봉에 섰으므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태조 26 년 5 월 병오일에 태조가 죽자 유명을 받들어 즉위했다.
《고려사》 혜종 총서

고려의 제 2 대 임금. 묘호는 혜종(惠宗), 휘는 무(武), 자는 승건(承乾). 나주 출신인 장화왕후 오씨의


소생으로 태조 왕건의 장남이다.

'무(武)'라는 이름대로 대단한 무골이었는지, 자신을 시해하려고 침소에 난입한 자객을 맨손으로
때려잡기도 했고 젊었을 시절에는 왕건을 따라 여러 전장을 누비며 후삼국 통일에 군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는 조선 정종과 닮은 점이기도 하다. 이렇듯 그는 아버지 왕건의 고려 창업에 전공을 세웠던 무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재위 기간이 짧았고 실권이 약했기 때문에 후대에 나약한 임금이었다는 오해를 샀다.
그러나 태조 왕건의 적통을 이어받아 왕위에 오른 혜종의 위상은 남다른 바가 있으니 고려사(高麗史)
태묘악장(太廟樂章)에서 혜종은 어느 왕들보다 칭송을 받게 된다.본인의 성품은 인자하고 부드러웠으며
지혜로웠다고 하지만 암살 시도 후 불안감이 절정에 달해 조울증 증세도 보였다고 한다.

2. 생애[편집]

2.1. 탄생 설화[편집]

조선 세종대왕 때에 서술된 고려사에 따르면, 어머니 오씨는 시냇가 빨래터 설화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왕건이 나주를 점령한 뒤 시냇가를 지나게 되었는데, 마침 오씨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는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우연히 보게 된 오씨가 맘에 든 왕건은, 그날 밤 그녀와
동침하였다. 오씨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그녀를 단순한 쾌락의 대상으로 여겼는지, 아니면 임신시킬
것을 두려워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왕건은 깔고 누운 돗자리에 질외사정을 하였다. 하지만 왕건의
됨됨이를 살핀 오씨는 그가 돗자리 위에 사정한 정액을 손으로 쓸어 모아 그것을 자신의 질에 넣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혜종이었다.

이는 야사가 아닌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정사 고려사에 존재하는 기록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일이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혜종의 정통성을 폄하하려는 목적으로 서술된 이야기로도 추측된다.
왕건과 오씨 부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보지 못했겠지만, 이러한 일화가 조선
세종대왕 시대에 활동하던 학자들이 고려사를 편찬할 때 저본으로 삼았던 사료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고려 시대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을 통해 주변에 널리 알려져 있던 이야기였던 싶다. 혹은
왕건이나 오씨 부인이 "아 그날 밤 그리하여 혜종이 태어난 것이지"라며 주변에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일이 정말로 태조와 오씨 부인이 동침했던 그날 밤에 일어났는지 아니면
일어나지 않았는지가 역사라기보다는, 민중들 사이에서 이러한 일이 회자되었다는 사실이 역사라는 점이다.
다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어났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첫째, 아무도 혜종의 혈통을 의심하지 않았다.
설화대로라면 오씨는 야욕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왕의 자식을 낳았는데 왕이 모른 척 하진 않을테니까.
이렇게 되면 설령 자식을 낳지 못했다면 엉뚱한 아이를 데리고 가서 왕건의 아이라고 우길 수도 있다.
왕건으로서는 의심되어도 뾰족한 수가 없는 정도지만, 왕건의 다른 왕비들은 "웬 듣보잡 계집이 왕을
우롱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이것은 왕건이 자식을 얻기 위해서 하룻밤을
같이 했다고 해야 맞아떨어진다. 그러니 오씨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생각해서, 아들이 더 있어도
혜종을 태자에 앉혔을 것이다. 둘째, 아무도 혜종을 이런 이유로 욕하지 않았다. 오씨의 행위는
수군거림의 대상으로는 충분하고, 그렇기에 아들인 혜종에 대해서도 "저런 엄마의 아들이 다르겠어?"
라고 두고두고 욕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이런 정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태몽이 용꿈이었기 때문에, 물을 좋아하는 용을 성격을 참조하여 수태기를 느낀 오씨 부인은 잠자리 곁에


한 바가지의 물을 떠 놓고 항상 손을 적신 채 잤다. 왕건이 돗자리에 사정한 정액을 오씨가 자신의 몸에
주워넣음으로써 그를 수태하였으므로, 혜종의 얼굴은 돗자리처럼 자글자글하게 주름살이 져서 주름살 대왕
혹은 주름살 폐하가 그의 별칭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혜종을 비하하기 위한 표현으로 여기는
견해가 있다.

2.2. 왕위에 오르기 까지[편집]

혜종이 태어나 일곱 살이 되었을 때 태조가 그를 후계자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그의 어머니 오씨(吳氏)가


미천한 가문 출신이어서 불가능할까 우려한 나머지, 오래된 상자에 자황포(柘黃袍)를 담아서 오씨에게
내려주었다. 오씨가 옷을 박술희에게 보이자 박술희가 태조의 의도를 짐작하고서 혜종을 세워 정윤(正胤)
으로 삼기를 주청하였으니, 정윤은 바로 태자이다.
《고려사》 권 92, 열전 5, 박술희

나이 일곱 살에 벌써 왕위를 이을만한 덕을 갖추었음을 태조가 알았으나, 그 모친의 가계가 미천해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자황포(柘黃袍)를 넣은 옷 상자를 왕후에게 내려주었다. 왕후가
그것을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이자 박술희가 태조의 속내를 짐작해 그를 태자로 세우자고
건의했다.
《고려사》 권 88, 열전 1 후비(后妃)1,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

왕무가 7 살이 되던 해에 왕건은 그에게 정윤(正胤)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그의 어머니인 오씨의 가문이


한미한 것을 두고 호족들의 반발이 있을 것으로 염려했다. 그래서 왕건은 한가지 꾀를 내어 자황포(柘黃
袍)[2]를 담은 상자를 오씨에게 전달하도록 했고, 오씨는 그것을 박술희에게 토스 주었는데 그 본 뜻을
알게된 박술희는 왕무가 정윤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술희의 이런 주장에 태조 왕건은 921 년(태조
4 년) 12 월 신유일에 왕무를 정윤(正胤)으로 임명했다.
태조 34 년이던 943 년 5 월 30 일,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2.3. 왕건의 실책[편집]

후삼국 통일의 최후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무공을 세울 정도로 혜종 자신은 녹록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문제는 그의 외가인 나주 오씨가 아버지 왕건의 다른 처가들보다 세력이 미약한 탓에 정적들의 위협에
시달리며 지내야 했다는 것.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혜종의 외가는 한때 나름 나주에서 한가닥 하는
집안이긴 했다. 왕건의 나주 상륙 작전 때도 나주의 호족들을 대표해 내응할 정도였고 이미 사실상 왕건의
장인이었던 정주의 대호족 유천궁이 내심 반발했을 텐데도 딸을 왕건의 첩도 아닌 둘째 정실부인으로
밀어넣을 수 있었다면 분명히 세력이 있긴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중에 견훤의 나주 탈환 작전으로 인해
가문의 기반을 몽땅 잃어버리는 바람에 사위인 왕건만 바라보고 사는 안습한 처지가 되었고, 그 와중에
왕건은 전국 최고의 호족들과 정략결혼을 계속 하다보니 영 비교가 되었던 것. 29 명의 부인들 가운데에는
신성왕후 김씨 같은 신라 왕족,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고의 혈통으로 치던 진골 귀족 출신도
있었다. 왕건은 경순왕에게 딸 낙랑공주를 시집 보내면서 동시에 경순왕의 딸을 아내로 맞으려 했는데
본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장인이자 사위, 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붓어머니인 동시에 의붓딸이 되는
막장 족보가 출현할 뻔..., 당시 경순왕에겐 시집보낼 만한 딸이 없어서 그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과
혼인했던 것.

결국 혜종의 권력은 그 태생적인 한계로 인하여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


자신은 능력있는 인물이었지만 뒷배경이 약했던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고려사 열전에 그의 모후인
장화왕후 오씨에 대해서 언급할 때 혜종을 참으로 용의 아들(당연히 용은 왕건.)이라고 찬양하면서 어머니
집안이 미천해서 다음 왕위에 오르지 못할까 염려했다고 한다. 이는 단적으로 혜종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다행히 재위 초기에는 왕건의 부탁을 받은 공신 박술희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나, 박술희는


군사적인 기반은 지녔었지만 정치적으로 실세를 쥐고 있던 권력자는 아니었다. 박술희는 드라마 태조
왕건에 등장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왕건의 친위무장 정도 되는 지위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결국 왕건의
후견인 선정이 완벽하지 못했던 셈으로, 결국 박술희는 혜종의 적으로부터 왕을 지켜내지 못했고 왕규(
혹은 정종)에 의해 살해당했다.

여러 모로 아버지인 왕건의 실책으로 인해 큰 피해를 겪은 인물이다. 상기했듯 호족 세력이 강했던


시기에서 왕무의 외가의 실세가 미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그를 위해 적절한 후견인을 지정해주지
않았다. 나름 혜종이 장자이기 때문인지 청주, 진천, 광주 일대 호족과 결혼시켰지만 아무래도 경순왕과
결혼한 낙랑공주의 영향력을 이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왕식렴으로 대표되는 서경 세력이나 개경 및 황주 등의 패서계 호족들 혹은 경주의 구 신라 왕가 세력이나


박영규로 대표되는 후백제 세력 등 마음만 먹으면 쟁쟁한 후견인을 얼마든지 설정해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박술희 한 명만 달랑 그에게 붙여줬을 뿐이었다. 또한 한반도 왕국 군주 통틀어서도 심한
29 번의 결혼도 혜종의 왕위 계승 가능성을 어떻게든 낮추는 꼴인셈. 왕건의 판단으로는 혜종 본인이
용맹한 무인이므로 제 앞가림은 충분히 할 것으로 믿었고, 동생 왕요만 혜종에게 충성하면 왕권이
안정될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왕무와 왕요의 청주 출신 부인들은 서로 자매지간이다.
아무래도 둘의 싸움을 막기 위한 왕권의 비책으로 보인다.

다만 왕건이 승하 직전 당시 옆에 있던 재상이었던 왕규, 염상, 박수문에게 안팎의 중요한 일들 중


오랫동안 결정짓지 못한 것은 경들이 태자(혜종)와 함께 처결한 후 보고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는 기록이
있는데, 만약 이들이 다른 이들의 입김이 아닌 왕건의 의도대로 재상에 임명된 것이라면, 거기에 이들이
박술희와 같은 고명대신이라면 당시로써는 나름 괜찮은 방법을 취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왕규는 혜종의
장인이자 왕씨 성을 받을 정도로 나름 능력있는 문신이었고, 광주의 호족으로써 지방의 호족이며, 염상은
축성 쪽으로 많은 활약을 한 무장 출신으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등 당시 거의 대부분 사망한 개국 1
등 공신들의 다음 서열인 2 등 공신이었고, 박수문은 패서 호족인 평주의 호족이자 아버지 박지윤과
동생인 박수경[3]과 더불어 왕건의 장인으로써 외척이었으니, 중앙의 패서 호족과 지방 호족은 물론 개국
공신이나 외척에 문무 신료까지 모두를 어느 정도 적절하게 아우르는, 위에 언급된 이들보다 좀
약해보일지는 몰라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찍 죽은 것인지 아니면 왕규의 난에 같이 휩쓸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위의 기록 이후로 행적을


알 수 없는 염상을 제외하더라도, 왕규는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혜종과 박술희와 갈등을 벌이다가 빈틈을
보임으로써 결국 혜종이 몰락할 계기를 제공하며 자신 역시도 정종과 왕식렴에 의해 살해당했고, 박수문은
혜종 혹은 왕규나 박술희 등에 대해 불만이 있어 반대편에 합류한 것인지 아니면 누이와 딸, 조카 등을
왕건의 부인으로 들일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던데다 왕식렴과 친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패서
호족 출신이어서 제거가 안 된 것인지는 몰라도 정종이 즉위한 후에도 동생인 박수경과 축성 작업을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음으로써 혜종 사후에도 생존해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니.... 내외적으로 어떠한
문제가 있었든 왕건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혜종의 부인 의화왕후 임씨도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이자 진주(晉州) 출신으로 나쁜 가문은


아니었지만 실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2.4. 사망 원인에 대한 의문[편집]

秋九月 王疾篤 群臣不得入見 憸小常侍側。


가을 9 월 왕의 병환이 위독했지만 신하들은 들어가 볼 수 없었고 간사한 아첨배들이 항상 곁에서 시중들고
있었다.

《고려사》 혜종 2 년의 기사

그는 늘상 주름살을 펼 겨를이 없었던 듯한데, 결국 그는 왕의 자리에 머무른지 2 년만에 승하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조선 문종의 경우처럼 매우 병약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그는
태조의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웠던 만큼 강인한 무골이었다. 동국통감에는 혜종을 두고 "용력이 강해서
쇠도 구부릴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그는 자신을 암살하러온 자객을 맨주먹으로 직접
때려잡기까지 하였다.

혜종의 장인인 왕규가 그를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는데, 자객은 왕의 처소에 구멍을 내어 침입하였고,
시위하고 있던 내시를 칼등으로 내리쳐 기절시켰다. 자객은 혜종이 덮고 있던 이불을 찔렀는데 그것은
지푸라기였다. 이러한 사태를 예상하였던 혜종은 이미 낌새를 차리고 피해있었는데, 목표를 놓치고
당황해 하던 자객에게 "무엇을 찾느냐(!)"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정신을 차린 자객은 칼을 들고 혜종을
시해하려 했으나, 혜종은 칼끝을 날렵하게 피하며 맨주먹으로 자객의 인중을 가격했다. 왕을 시해하려는
자객이었던 만큼 무예가 특출했을 터인데 혜종은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객을 맨손으로 제압한
것이다.

이렇듯 그는 선왕의 창업에 무공을 세웠고 자신을 시해하려던 자객까지 맨손으로 잡을 정도의 강인한
무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위 기간이 짧았고 실권이 약했기 때문에 후대에 들어 나약한 왕이었다는
오해를 샀다. 진정한 의미의 권왕

그러나 그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은채 덮어 두었는데, 이는 그의 왕권이 매우 미약하고


불안정했음을 방증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이 시해당할 뻔 했는데 이 중차대한 사건을 그냥 넘기는
왕국은 없을 것이다.이는 즉, 조사를 시작하면 혜종의 시해를 주도한 호족들이 불안해져 반란을 일으킬
공산이 컸고, 혜종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호족들의 반란을 제압할 힘을 지니지 못했던 탓에
덮어둘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 후에도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가 계속되자, 극히 불안해진
혜종은 조울증 증세까지 보였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그가 후백제와의 전투 중에 그만 정신을 놓아버렸고, 이로 인해 공황장애를 앓은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또한 후백제에 나주가 함락되면서 그의 외가의 힘이 더욱 약화되었다는 점도
혜종이 심적으로 엄청난 불안감을 느꼈던 원인으로 추측된다. 나주 오씨 집안은 탈출하여 멸문지화를
피했다는 기록이 있고 실제로 나주 오씨 가문은 아직까지 존속되고 있다. 교과서에 나오다시피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과 정략결혼을 하였는데, 외가가 몰락한 혜종은 상대적으로 동생들에 비하여 외척 세력이
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신체는 강건했지만 심성이 선하고 유약하며 권력 기반이 약했던 탓에 쉽사리 정적들을 제거하지
못하였으며,[4] 공신이자 자신의 장인인 왕규의 음모에 휘둘렸고, 동생들의 권력 다툼을 외면하고
방치한채 공포와 불안에 떨다가 승하하고 말았다. 하지만 앞서 설명하였듯, 그는 여러 번에 걸쳐 암살될
뻔한 전력이 있었으며 또한 건강하였던 그가 아무런 징후 없이 갑작스레 승하했기에 그의 죽음을 호족들에
의한 시해로 보기도 한다.[5]

사후 왕위는 이복 아우 정종과 광종에게 각각 돌아갔다. 그의 아들 흥화군은 정종의 아들인 경춘원군과


함께 광종 연간에 벌어진 숙청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고 딸 경화군 부인은 광종의 후궁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후손들은 모두 요절했는지 뚜렷한 기록이 없고 경화군 부인은 광종과의 사이에서 후손이 없는 관계로
혜종의 후대는 여기서 단절되었다.

3. 무덤과 피휘, 불천지주의 위세[편집]

파일:attachment/22_4.jpg

개성에 있는 혜종의 순릉(順陵). 2009 년의 모습으로 봉분이 깎여있었을 뿐더러 석물까지 사라졌다고
한다. 조선유물고적도보를 보면 일제 시기까지는 묘지 난간은 있었다. 고종 때 거란이 개경 인근까지
침입하였는데, 이때 순릉이 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재위 내내 불안한 왕위에 있었고, 사후 묘호로 썩 좋지 않은 '혜'를 받았던 혜종이지만, 그의 사후 왕위


계승이 몇 차례에 거듭된 격변을 거치면서 처지가 달라지게 되었다. 후사를 보지 못한 정종, 광종과
성종의 후계가 모두 끊기게 되었다. 왕위가 현종으로 양도되었던 것이다. 최승로는 시무 28 조 서두에서
고려 태조 이래 경종까지의 다섯 왕의 치적을 평가하면서 혜종을 "종족을 보존"한 공로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현종이 여요전쟁 당시 혜종의 외가 나주까지 도망가면서 그곳 호족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현종 문서도 참고하면 좋다.

이후 고려 왕계는 현종의 후손들이 잇게 되었는데, 혜종은 태조의 맏이, 즉 현종의 큰아버지 뻘로


취급되면서 무신정변까지는 혜종이 종묘의 불천지주에 있게 되었다. 이를 조선 왕조와 비교하면, 현종이
세종대왕이라면 혜종은 태종의 위치에 있게 된 셈이다. 현종의 친아버지 왕욱(王郁)은 안종으로
추숭되었으나, 정식 결혼이 아닌 사통으로 현종을 낳았다는 문제 때문에 종묘의 주요한 신주에 오르지
못했다. 그보다는 성종의 아버지 왕욱(王旭)이 대종으로 추숭되어 종묘에 올랐다. 이 대종의 문제로
인하여 덕종 사후, 정종(靖宗) 때 한국 역사상 첫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이 직계보는 고려 문종, 고려
숙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혜종의 휘인 무(武)는 고려 내내 피휘되었는데, 모든 무라는 글자는 범 호(虎)로 대체되었다. 즉, 고려


시대에 무신은 호신이라고 불렸다. 호신정변 호신정권 호인시대 호신 이런 면에서 혜종은 살아 생전에는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불안함에 가득 차 있었으나, 정작 사후에는 태조의 첫 계승자로서의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4.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편집]

파일:attachment/혜종/hyejong.jpg

태조 왕건에서는 안정훈이 맡았다. (안정훈은) 1969 년 생으로 극중 어머니인 염정아 (1972 년 생)보다
나이가 많아 다소 어울리지 않는 캐스팅이었다는 평이 있었다. 제국의 아침에서는 노영국이 역을 맡았다.
전작 <태조 왕건>에서 왕건 역 물망에 한때 거론되었으나 탁월한 연기력을 가졌음에도 많은 나이 때문에
캐스팅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노영국이 맡은 혜종은 캐릭터가 확 바뀌어 버린 사례로 꼽힌다.

안정훈이 맡은 태조 왕건에서는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울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한 정력적인 무인 스타일의


태자로 묘사된다. 조물성 전투에서 처음 친정을 나가 후백제군의 태자 용검에게 초전에서 패배해 왕건
시절부터 2 대에 걸쳐 왕건 부자를 보좌한 장수장을 잃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이후 그 실책을
만회하는 등, 전반적인 능력치는 후백제의 신검 삼형제를 합친 것 만큼이나 대등한 수준으로 그려지고
있다. 신검 형제들이 여러 번 실책을 범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첫 친정에서 처음 실수를 한 것 이외엔 크게
실책이 부각되지 않는다.

후계자 문제를 빨리 정하지 못해 내분이 일어났던 후백제와 달리 왕무는 왕건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찌감치
정윤에 봉해져 후계 구도가 튼튼했다는 것도 대조적인 부분. 특히 왕무는 나이 터울이 얼마 되지 않았던
신검 형제들과 달리 동생들과 나이 터울이 많았기에 동생들이 궁에서 한창 자랄 때 이미 전장에서
아버지를 보좌하면서 경험을 쌓음으로서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그랬는데 노영국이 혜종을 맡은 제국의 아침에는 통일이 되고 즉위한 몇 년 사이에 심신이 상하기라도 한
건지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 다만 제국의 아침에서는 이 이유로 백제와의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난전 도중 수많은 시체와 피로 인한 공포로 인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것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제국의
아침 시절에도 동생들인 정종, 광종보다도 왕으로서의 위엄을 보인다는 평가가 있는 것을 보면 꼭
나약하게만 묘사되진 않은 듯.

사실 이건 배우빨도 큰게 노영국이 이렇게 입지가 약한 왕을 연기하면서도 연기 자체가 카리스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후일 대왕 세종에서 정종 역을 맡을 때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나약한 연기조차도 엄청난
프로 정신이 발휘된 예인데, 정말로 병약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녹화 전 밥을 굶고 매운 고추만을
먹으며 몸을 떨었다고 한다.#

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도 혜종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혜종은 왕관을 쓰는 장면만 몇 초 나오고 그
이후로는 나오지 않았다. 이 드라마에서 중심이 되는 시대는 정종 시대이기 때문에 혜종은 태조에서
정종으로 넘어가는 중간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혜종은 몇초만 나온 엑스트라이기 때문에
등장인물 설명에도 안 나온다. 조금만 파고들면 굉장히 복잡하다. 일단 혜종의 죽음이 굉장히 의문이
가득한데다 왕소는 혜종의 사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 표현하려면 원래 드라마의 이야기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종은 왕식렴에게 휘둘리지 않고 개경 일대를 피바다를 만든 사람이기에.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는 김산호가 맡았다. 힘없고 신분이 미천한 외가 때문에 출신의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인 태조 왕건이 아들 중 가장 그를 많이 사랑하였고 아꼈지만 왕이 되고
나서 불안정한 왕권과 대정으로 맡긴 동생 왕욱에게 그는 수은으로 점점 중독된 채 독이 퍼져 몸과 정신이
약해졌고.. 광종이 되는 왕소에게 딸을 시집 보내고 선위를 하고 의지해 자신과 가족들을 살리려는 계획을
하였지만.. 쿠데타가 일어나 정종이 되는 왕요에게 다미원에서 비참하게 피를 토하며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죽게 된다.

3 대 정종 왕요 (923~949) 재위 945~949

1. 개요[편집]

고려의 제 3 대 국왕. 묘호는 정종(定宗), 시호는 지덕장경정숙영인간경장원문명대왕(至德章敬正肅令仁簡


敬莊元文明大王). 휘는 요(堯). 자는 천의(天義).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

왕의 이름이므로 '요 임금 요(堯)' 자는 고려가 망할 때까지 피휘에 따라 사용이 금지되었다. 동아시아권


성군의 대명사이자 끝판왕의 이름을 피휘 걸어버리는 고려의 위엄 이 글자 대신 삼국유사 고조선
기사에서의 예와 같이 이 '높을 고(高)' 자를 사용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당대 강력한 호족이었던 충주 유긍달의 딸인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소생으로 탄탄한 권력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처가가 후백제의 왕실이었고, 동복 누이인 낙랑공주가 경순왕에게 시집을 가서
지지기반은 형인 혜종을 압도할 만큼 탄탄했다.

이복 형인 혜종이 요절하자 종실 세력의 거두였던 왕식렴 세력의 지지를 얻어 즉위하였다. 왕실


종친인데다 혜종의 어린 시절부터 그를 보았을 왕식렴이 혜종을 지지 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혜종의 지지
세력이 미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흥화궁군이라는 혜종의 맏아들이 있었음에도 왕요가 왕위에 오른
것은 그만큼 왕요의 세력이 막강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2.2. 왕권 강화 추진[편집]

후에 즉위하는 광종의 동복형으로, 다소 유약한 면이 있었던 이복 형 혜종과 달리 야심이 많고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혜종은 사실 쓸 수 있는 카드가 별로 없었다. 애당초 박술희, 왕규와 같은 친위 세력을 제외하고는


지지기반이 없던 혜종과 달리 어머니, 장인, 누이 그 뿐만 아니라 서경 왕식렴 등 막강한 지지세력을
구축한 왕요와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왕규가 초반의 무리하게 왕소와
왕요 제거를 하려 했다가 혜종의 반대에 부딪친다. 그 뿐만 아니라 박술희는 왕규와 첨예하게 대립하는 등
혜종의 세력이 하나로 뭉쳐도 될까 말까인데 분열을 거듭했다.

혜종은 외가인 나주 오씨 가문이 왕건의 다른 자제들의 가문에 비해 한미한 편인지라 지지기반이 미약한
상태에서 왕위에 올라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심지어 자신을 암살하려 한 자객을 체포하고도 취조하기는
커녕 책임조차 묻지 못했다.[2]

반면 정종은 이미 배후에 든든한 지지기반을 갖추고 즉위했던 만큼 자신감과 야망이 컸던 점에서


의욕적으로 왕권 강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종은 혜종이 즉위하던 시절에 왕규에게 역적이라고
찍히고도 무사할 정도로 그 기반과 세력이 강성하였다. 이때 이미 왕규와 혜종의 의견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왕규는 두 왕자를 제거하고자 했지만, 혜종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왕소에게 딸을 시집
보내는 등 왕규와 다른 행보를 보였다.[3]

정종은 즉위한 이래로 붕어할 때까지 정적들의 힘을 억누르고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의 정착을 위한 개혁에 힘썼으나 어째서인지 그 결과는 대개 안습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2.2.1. 피의 숙청[편집]

정종은 즉위 후 자신의 뜻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왕규 일파와의 대립 끝에 공신인 박술희를 살해한 죄와


반역을 꾀한 죄 등을 물어서 제거하는 등 자신에게 위협적인 정적들을 처리하는데에 주력하였다.

비록 왕규가 혜종 대에 반역을 꾀하고 박술희를 모함하여 죽게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를 곧이 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왕규와 박술희 모두 선왕인 태조의 유지를 받들어 혜종을 모시던 충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술희는 몰라도 왕규는 조금 애매한 경우다. 왕규는 혜종에게 왕요와 왕소를 죽이자고 했으나,
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왕소에게 딸을 시집 보내는 등 왕규의 뜻과 대치했다.
그리고 나중에 혜종이 병에 들자, 박술희와 왕규는 백여명에 호위병으로 대치하는 등 대립이 극의 달했다.
아무래도 왕소와 왕요 처리를 두고 대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혜종 다음으로 왕이 될 사람은 왕요 밖에 없었고, 왕요와 왕소를 제거하고자 했던 왕규로써는


왕요가 즉위하면 죽는 일 밖에 없었기에 충분히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문제는 왕식렴 기록과 최승로의
평가처럼 이 둘은 왕규의 공격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적 처리 과정에서 왕규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할 때 지나친 인명을 살상하여 개경 세력들과의


대립이 심해졌고, 무엇보다 개경 백성들의 불만을 사서 민심도 나빠졌다. 이 사건으로 연루되어 목숨을
잃은 자만 300 명이었다고 한다.

2.2.2. 서경 천도 시도[편집]

정종은 이미 민심이 떠나간 개경에서는 더이상 자신의 뜻을 펼치기가 힘들다고 여겼다. 때문에 아예
개경을 떠나기 위해 수도를 서경(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계획하였다. 천도를 계획할 당시에는 개경의
지기가 나빠져 나라의 도읍으로 삼기 힘들다는 점과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고구려의 고토 회복에
유리하다는 점을 핑계로 댔다.

또한 서경이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로 꼽힌다는 점도 서경 천도 계획의 이유가 되었는데, 이는 왕건도


훈요십조에서 "서경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고 대업을 만 대에 전할 땅이니..." 라고 이야기할 만큼
서경이 풍수지리적으로 매우 좋은 땅이라는 것으로, 이러한 풍수지리적 이점을 근거로 서경천도를
주장했다.

그러나 서경에 새 궁궐을 짓는 공사 과정에서 서경의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게 되자 서경 백성들조차도


왕에게 불만을 품게 된다. 결국 서경 천도 계획은 민심을 얻기는 커녕 왕에 대한 반대 세력과 불만을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불러오고 말았다. 그럼에도 정종이 죽을 때 까지 서경 천도가 진행 된 것을 보았을 때
당시 호족들과 신하들조차 왕요의 뜻을 꺾을 만한 힘은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2.3. 광군 편성[편집]

정종은 한편으로는 거란의 침공에 대비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30 만명의 광군을
조직하여 호족들로 하여금 이를 지휘하도록 하게 하였으나 이 역시 정종의 뜻대로 되지 못하고 점차
흐지부지해졌다. 개국 초의 고려는 30 만이나 되는 군대를 제대로 운용할 정도의 국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그냥 예비군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후진에 유학 차 머무르고 있다가 거란에 포로가 된 후 관리가
된 최광윤이 거란의 침략 의도를 눈치채고 글을 써서 알려왔다. 이에 조정에서 광군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2.3. 요절과 음모론[편집]

이런저런 개혁이 연이어서 실패하자 정종은 마음이 약해졌는지 즉위 과정에서 인명을 지나치게 살상한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말년에는 사찰에 곡식을 시주하고 직접 걸어가서
개국사에 불사리를 봉안하기도 하였는데 아마 개인적인 죄책감을 씻기 위한 행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혹은 서경 천도가 반대의 부딪치자 민심을 달래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서경 천도를 위해 주로 동원 될
백성들은 패서 일대 백성이고 송악도 예외는 아닐 것이 분명하기에.

그러던 중, 여진의 사신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내려친 천둥 소리에 놀라 쓰러진 후, 병을 얻더니
급기야는 병상에 눕게 되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든든한 후원자였던 왕식렴이 죽자 상심이 커져 병이 더욱
악화되었고 재위 4 년만인 949 년에 27 세의 나이로 붕어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 최후마저도 안습하기가 그지없어서 정종이 승하한 직후 서경 천도 계획이 취소되자 부역에 시달린


서경의 백성들이 기뻐하며 환호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한편 이런 죽음에 대해서는 후에 광종이 되는 친동생 왕소와의 대립 끝에 시해당했다는 설이 제기된다.


외가는 같았으나 후원 세력은 정종이 왕식렴 등 서경 세력, 광종이 처가인 황주 황보씨와 연계되어 갈등을
빚었다고 보는 설이다. 정확히는 아내의 외가, 광종의 아내 대목왕후 황보씨는 왕건과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의 딸로 외가의 성을 따랐다.

실제 후에 광종은 태조의 4 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 아우인 왕욱의 아들, 즉 자신의 조카인 성종을
사위로 삼기도 했다. 자신의 맏딸인 문덕왕후 유씨를 성종에게 재가시켰다. 문덕왕후 유씨는 이미 왕족
인물이었던 홍덕원군 왕규에게 시집을 가 딸 한명을 낳았으나 이후 성종과 재혼했다. 여담으로 문덕왕후
유씨가 낳은 딸은 후에 목종의 왕비가 된다.

아들 경춘원군(慶春院君)이 있었지만, 너무 어려서 훈요 10 조 3 번 조항에 따라 동생 왕소가 광종으로


대를 이었다. 경춘원군은 이후 전대 혜종의 아들 흥화군(興化君)과 함께 광종에 의해 숙청당한다.

경춘원군은 후백제왕 견훤의 외손녀 문성왕후의 아들이다. 정종의 부인은 모두 견훤의 딸인 국대부인과
박영규의 딸이다. 경춘원군이 왕위를 이었다면 대대로 견훤의 피가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무산됐다.
정종이 27 세에 요절했으니 경춘원군의 나이는 잘해봐야 10 세 전후일테니...설사 경춘원군이 왕위를
물려받았어도 고려 헌종처럼 숙부에게 눌려지내거나 심할 경우 폐위되버렸을지도... 물론 왕위에
오른다는 가정의 전제 하에서.

알려진 사서의 기록과는 달리 박술희를 살해한 것도 그이고 반란의 주동자로 알려졌던 왕규를 살해한 뒤
그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웠다는 가설도 존재한다.

왕규와 박술희는 태조로부터 혜종을 보필하도록 당부까지 받은 처지였던 이들이라 서로 불화를 일으킬
사이도 아니었다. 고려사 박술희 열전에 따르면 혜종이 병에 들자 백여명에 호위를 이끌고 왕규와
대립했다고 한다. 왕규는 왕소와 왕요를 제거하고자 했는데 박술희는 이에 대해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혜종도 마찬가지라서 왕소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사실상 왕규와 뜻을 달리 한 것 이다.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서로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해주는 정치적 동반자에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이다.
박술희는 후삼국 통일에 군공을 세울 정도로 녹록치 않은 인물이었지만 친위 무장의 성격이 강했기에
정치적 기반이 부족했고, 광주의 호족 출신인 왕규는 왕씨 성을 하사받고 대중 외교의 중책을 맡을 정도로
왕건이 총애했던 인물이지만 기본적으로 문신이었기에 군사적 기반이 없었다.

때문에 왕규가 굳이 박술희와 혜종에게 위해를 끼칠 일이 없었다는 설도 있다. 혜종 사후 박술희는 정종이


역모를 의심해 귀양 보내자 왕규는 왕명을 사칭해 박술희를 죽이고 곧바로 왕요를 쳤지만, 이미 기다리고
있던 왕식렴과 왕요에게 당한다. 이런 점에서 왕규는 박술희의 죽음을 왕요 탓으로 돌리고 그들의
군사력을 흡수해 공격하려는 무리수를 두다 망한 것으로 보인다. 애당초 왕소와 왕요를 제거하려 했기에
왕요의 즉위는 사실상 왕규에게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진실은 저 너머에. 또한 이전부터 혜종과는 왕위를 두고 대립하던 관계였던지라 혜종이 사실 병으로


승하한 것이 아니라 시해당했고 그 배후에 정종이 있다는 설까지 생겨나는 등 정종을 둘러싼 많은
음모론이 존재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결국 혜종 세력(박술희, 왕규)을 물리치며 왕이 되었으나 혜종과 똑같이 동생 때문에


환장하다가 허망하게 요절하고 말았다.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동생인 광종 왕소가 위협이 되었다.
제거하자니 기반이 만만치 않아 그도 쉽지 않았던 것. 게다가 왕규까지 반란을 일으키고 앉았으니. 결국
정종이 각종 반란을 때려잡고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박살내려고 온갖 짓을 다했으나, 허망하게
요절하면서 광종이 그 덕을 봤다. 정종의 후견인이던 왕식렴도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으니 광종은 참 덕을
잘본 듯하다.

그래서인지 광종에게 비판적이었던 최승로는 피의 숙청을 한 정종에게는 우호적이었다. 아래에는 정종의


대한 최승로의 평가다.
정종께서는 왕자였을 때부터 훌륭한 명성이 있었습니다. 혜종께서 병석에 누워 오래 동안 회복되지 않자
재신 왕규 등이 몰래 모의하여 왕실을 넘보았습니다. 정종께서 이를 먼저 알아차리시고 은밀히 서도(西
都)의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장군[4]과 함께 계책을 정하여 대비하셨습니다. 내란이 일어나려 하자
호위하는 군사가 많이 도착했으므로 간악한 계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흉악한 무리들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는 비록 천명에 따랐다고는 하나 사람의 계책도 있었으니 어찌 뛰어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태조로부터
지금까지 38 년 간 왕위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은 역시 정종의 힘이었습니다.

정종께서는 임금의 형제로 왕위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노력하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구하셨습니다.
때로는 촛불을 밝혀들고 조정의 선비를 접견하셨고, 또 어떤 때는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서 모든
정사를 듣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즉위한 초기에 사람들이 모두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참을 그릇되게 믿게 되자 도읍을 옮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게다가 천성이 굳세시어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고, 급박하게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니, 비록 임금의
생각이 옳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은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원망과 비방이 이로 인해 일어났고 재난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재빨리 응하여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지도 못하고 임금의 자리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고려 왕씨가 계속 왕위를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은 광종이 아니라 정종의 공이라고 평하고 있다. 비록


요절하고 무리한 서경 천도가 있기는 했지만 보통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대중 매체에서[편집]

KBS 제국의 아침에서는 최재성이 맡아 출연했고, MBC 빛나거나 미치거나 에서는 류승수가 이 인물을
맡았다. SBS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 정종 왕요를 맡은 배우는 홍종현.

보통 사극에서 왕소를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 찌질이나 폭군 혹은 악역을 맡는다. 최근에 왕규의


난이 새롭게 해석 되면서 더욱 악역 같지만, 후에 최승로의 평가처럼 반대파를 숙청해 고려를 일시적으로
안정적으로 만들었고 밤잠을 거르며 인재들을 만나 나랏일에 열중이었다는 평가, 비록 흐지부지됐지만
거란 침공 대비를 위한 30 만 광군 편성등 여러 모로 능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왕식렴에게 밀렸다고
하는데 실상 그랬다는 기록은 별로 없다. 최승로는 그가 미신을 믿어 무리수를 뒀다고 비판했다.

4 대 광종 왕소 (925~975) 재위 949~975

1. 개요[편집]

고려 초기의 개혁 군주
세조 같은 정치로 세종대왕 같은 업적을 남긴 피의 명군

고려의 제 4 대 국왕. 묘호는 광종(光宗), 시호는 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대왕(弘道宣烈平世肅憲懿


孝康惠大成大王).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태조의 넷째 아들로 신명순성왕후의 소생. 형들이
젊은 나이에 각각 급사하자 형들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초기 고려의 체제를 정비하고 조정의 기틀은 다잡은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개국 이래 2 대, 3 대 군주가


국가의 기틀을 다지듯, 고려는 4 대 임금인 광종이 그러한 기틀을 다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2. 즉위까지[편집]

본명은 왕소(王昭). 925 년,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위의 형들 중 이복 형이자 장형인


왕무(王武)는 태조 사후 즉위한 혜종이다. 광종에게는 모후에게서 난 동복 형이 둘 있었는데 이중 맏형이
왕태(王泰), 중형이 고려 3 대 왕인 정종 왕요(王堯)다. 왕태는 생몰년도가 불명하나 요절한 것으로
보인다. 밑으로는 문원대왕이란 시호를 받은 왕정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증통국사라는 동복 동생이 있었다.

태조의 또 다른 부인인 신주원부인이 자식을 잃자 그를 대신해 양자로 간 기록이 존재하기도 한다.

용모가 상당히 수려하였다고 하며 키가 매우 커 180cm 를 넘었다고 한다! 지금도 180cm 가 넘는다고 하면


정말 큰 키라고 쳐주는데 고려 시대 기준이라면 완전히 거인이었던 셈. 이후 나이가 차자 부왕의 족내혼
정책에 따라 이복 여동생인 황보씨(대목왕후)와 혼인하였다.

넷째인 탓에 본래라면 즉위 가능성이 없었으나 바로 위의 동복 형인 정종이 이복 형인 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지 4 년만에 요절(27 세)하며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949 년 3 월 13 일에 고려 4 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이때의 나이가 25 세이다.

3. 국가 기틀 확립[편집]

광종은 고려 초기 왕권 다툼의 혼란 속에 집권하여 왕권 강화를 꾀했으며 여러가지 정책을 통해 고려의


기반을 단단히 마련한 왕이다. 불교를 장려하고 민심 안정책을 시행하였으며, 당시의 지배층인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여러 가지 수단을 강구하였다.

한편으로는 천태종에 간접적으로 기여한 인물이기도 한데, 당시 중국은 천태종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회창법난(842 년 ~ 845 년 당나라 무종의 불교 말살 정책)으로 불교 전적들이 엄청난 손실을 입어 중국
본토에는 불교 전적들이 많이 부족했다. 그러나 광종이 중국의 요청으로 고려에 남아 있던 천태종 관련
서적들을 중국에 보내는 동시에 천태종 승려 제관을 중국으로 보냈고, 제관이 중국에서 살다 죽으면서
그가 남긴 유작 <천태사교의>는 한중일 삼국의 천태학 교과서가 되었다.

3.1. 노비안검법[편집]

자세한 부분은 노비안검법을 참고할 것

우선 광종은 호족들이 가지고 있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호족들에 의해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키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다. 노비안검법이란 양인이었다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하여
다시 양인이 될 수 있도록 조처한 법이다.

이때의 호족은 후삼국들 간의 전쟁 와중에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갚지 못한 까닭 등의 이유로 양인에서


노비가 된 사람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의 관념상 노비는 재산이었다. 또 단순히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소작농 겸 사병이었으므로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기도 했고 이는 왕권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왕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찍어누를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런 속마음을 대놓고 명분으로 삼을 수는 없었기에 광종은 '신라 - 고려의 왕조 교체기를 통하여


혼란했던 사회적 신분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를 통해 호족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동시에 약화시켜 그들의 세력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요, 양인 계층으로 포섭된 해방
노비들은 세금을 내면서 군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정책이었다고 하겠다.

3.2. 과거제 도입[편집]


충선왕이 “우리나라(고려)의 문물 수준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묻자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광종 이후 문교(文敎)를 닦아 서울에 국학(國學·국자감), 지방에
향교와 학당을 세워 학교에서 글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습니다. 문물이 중국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고려사』 권 110 이제현 열전

광종은 중국의 마지막 오대 왕조인 후주 출신의 쌍기를 등용한 후 그의 제안으로 958 년(광종 9 년)에
호족들의 직위 세습을 막고 이미 중국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과거제를 한반도에서 최초로 실시하였다.

중국에서 과거제가 최초로 정착된 수나라와 당나라가 그랬듯, 귀족적 관료제의 특성을 벗어나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과거제 실시는 그 의미가 상당히 크다. 고려 이전 신라 하대의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가
시행됐지만 하급 관리에 제한되어 실시하였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광종의 과거제 도입은 한반도에 중앙 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확립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958 년에
도입된 이 과거제는 이후 900 년 넘게 실시되다가 1894 년 조선의 갑오개혁 때 폐지된다.

3.3. 공복 제정[편집]

또한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는데, 그 전엔 그야말로 입고 싶은 걸 맘대로 입고 오는 지경이어서 패션쇼?


왕보다도 화려한 옷을 입고 오는 신하가 있을 정도였다. 패션왕 당연히 이런 모양은 조정의 기강을
산만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광종 치세에는 이후 당연한 것이 될 통일된 공복을 제정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일조하였다.

3.4. 외교[편집]

광덕(光德)이나 준풍(峻豊)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면서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는 등 자주 의식을


표방했다.[1]

하지만 뒤에 북송과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송의 연호인 건덕을 사용했다. 두 개의 연호 가운데,


광덕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어 이견이 없지만 청주 용두사 철당간과 일본의 조련사 동종에서 확인되는
준풍은 이게 독자적 연호인지 그 당시 송에서 쓰던 연호 건륭[2]의 피휘인지 논란이 분분하다.

이후 960 년에 문화적, 경제적 목적을 가진 고려와 군사적인 목적을 가진 북송과의 윈윈 통교를


시작했으며, 연호와 칭호는 송의 것을 따른다. 당연히 거란은 개무시.이는 여요전쟁의 한원인이 됀다.
광종은 아버지인 왕건과달리 외교에서 강경책을 썼는데 호족들을 평정하자 흥료국 정안국을 형제의나라로
칭하고 이들과 연합해 요나라에 대해 군사공격을 감행하는등 강경책을 썼고 후에 만부교사건과 더불어
후대왕인 성종 현종은 요나라와 길고긴 전쟁을 치뤄야했다.

4. 왕권 강화[편집]

4.1. 귀화인 우대 정책[편집]

개혁 과정에서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 세력을 우대해 호족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어 쌍기에게 주기도
했는데 이걸 두고 광종에게 '내 집도 바칠 테니 그냥 쌍기에게 주셈'하면서 비아냥이 담긴 직언을 한
서필이라는 신하가 있었다고 한다. 광종은 그의 말에 느낀 바가 있어 특별 대우를 줄였다고 전해진다. 이
서필의 아들이 훗날 요나라의 1 차 침공에서 외교 담판으로 고려를 구원한 서희이다. 또 서희의 아들은
서눌인데 서필, 서희, 서눌 3 대는 살아서는 재상의 지위에 올랐고, 죽어서는 3 대가 모두 배향공신에
봉해지는 등 큰 영광을 누렸다.
쌍기의 아버지 쌍철은 아들이 고려에서 귀빈 대우를 받자 본인도 고려 사람으로 귀화해 고관 자리에
올랐다. 호족들을 견제한 광종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다분히 의도적인 처우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이러한 처우는 국내 관료들의 불만을 사게 된 원인이 되어 광종 사후 최승로의 <5 조 정적평>, 이제현의 <
사략>에서 그를 비판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광종은 나라의 학자들 또한 기존 호족들과 연관이 있다 생각해서인지 국내 기반이 취약해 덜 위험한


귀화인들을 선호한 듯 하다. 고려 성종 때 활약한 최승로는 광종의 귀화인 우대 정책과 호족 숙청을
강하게 비판했지만, 국내 학자 출신 관료들이 득세하도록 길을 열어준 게 그 광종이라는 건 아이러니다.

4.2. 피의 군주[편집]

광종은 자신의 의욕적인 왕권 강화 정책 때문에 분노한 호족들의 반발과 암살 위협에 대응하여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호족이나 반대 세력들은 가차없이 제거하는 강경책을 추진했다.

호족 뿐 아니라 왕족들도 가차 없었는데 자신의 이복 동생인 효은태자를 처형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효은태자는 왕건과 고려 개국 공신 유금필의 딸인 동양원부인 사이의 아들. 그리고 형인 혜종과 정종의
아들들, 즉 광종의 조카들인 흥화군과 경춘원군도 이들이 역모를 꾀한다는 참소를 들은 광종에 의해 죽고
말았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도 의심하였다. 광종은 걸핏하면 아들을 협박하고 야단을 쳤는데 그
때문인지 경종은 훗날 왕이 된 후 광종이 추진했던 것과 정반대의 정책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의 숙종과 영조를 합친 케이스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광종과 대립각을 세우다가 숙청당한 호족 집단들은 이미 후삼국시대나 고려 초기 자신의 지역과 왕에


이합집산을 해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자들'이었다. 실제로 왕건이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것도 호족들의
무분별한 합종연횡과 이합집산을 멈추기 위함이었고, 혜종과 정종의 짧은 재위 기간이나 혜종 시절에
일어난 의문의 암살 미수 사건들과 그의 이해되지 않는 죽음만 봐도 호족들은 왕에게도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당장에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시행했을 때에도 반대했는데 공신이라고 떠드는 자들이
노비를 떳떳하게 모았는지 과거제에 붙을 만큼 검증되었는지도 의문이었다. 고려 역사상 가장 위선자 같은
귀족 세력이 고려의 호족 세력들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

이 당시 고려의 호족 세력들이 조선 초반 이방원이 숙청한 신하들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게 적어도


정도전은 노비 문제에 대해서 나름 떳떳하고 과거제를 통해 들어온 검증된 인재였으며 정도전의 최대
정적이었던 이방원도 위선보단 위악을 행한 인물이었다. 민무질, 민무구 두 형제도 저 호족들보단 낫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승로나 이제현 두 학자의 혹평은 간혹 유체이탈식으로 말을 막 던지는 경향이 종종


있어서 액면 그대로를 믿으면 곤란하다. 특히 이제현의 경우는 무신정권을 향해 왕을 누른다고 하면서,
정작 왕권을 가장 드높인 광종을 향해선 피의 군주라고 지탄을 했다.[3][4] 호족 연합체는 그 태생부터
일관성이고 나발이고 던진 집단들 중 하나였다. 적어도 이방원이 숙청한 정도전과 정도전이 숙청한 이숭인
같은 신진 사대부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더 믿을 수 없는 집단들이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후한 말기
군벌들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나마 후한 왕조는 400 년의 정통성이 있었지만, 고려는 호족 출신인
태조 왕건이 정통성 없는 후고구려를 찬탈한 뒤 후백제와 신라를 흡수한데다가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칫하다간 또다시 분열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고려 개국 초 수백에 이르던 호족들이 광종의 재위 기간 동안 대부분 숙청되어 불과


수십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만큼의 호족이 광종의 손에 사라졌는지는 고려를 다루는 역사
기록들 중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게 거의 없어서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고려 성종 때
최승로가 '태조를 모시던 구신이 40 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 발언을 한 대목을 보면(자연사한 이들도
있을 테지만) 숙청 과정에서 호족들이 상당히 큰 타격을 입었던 건 분명해 보인다.

한간에선 호족들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건 전제 군주제를 너무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이 있다.


실제로 서필이나 이전 유금필 같은 장수들도 본시 호족 가문이었고 붕당 비판론과 다를 것이 없다는
시각이 있다. 더욱이 과거제도 본시 호족들에게 유리할 수 밖에 없는게 계급이 낮은 향, 소, 부곡민과
양민과 천민과 달리 호족들은 그만한 경제력과 환경 여건이 되기에 유리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 시대
과거제를 통과한 문관들도 알고보면 조상들이 호족 출신들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도 호족 출신에
본인도 과거제가 아닌 승계를 통해 왕이 되었다. 이점을 볼때 호족 비판론도 본시 다시 생각해볼 대목이다.

4.3. 불교 통합[편집]

광종도 정작 호족들을 숙청한 후에는 뭔가 죄의식이라도 느꼈는지 절을 세우고 그들을 위한 제를 자주


지냈고 잦은 불사로 인해 이 당시 승려를 자처한 땡추들의 횡포가 극심했다고 전해졌었다. 우리나라
유학자건 중국 유학자건 원래 글쓰던 유학자들은 가리지 않고 불교가 조금이라도 득세한 듯 보이면 목숨
바쳐서 물어뜯곤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상은 최후의 최후까지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원들을 국가에서 지원하고 죄다 개경을 둘러싸는 형식으로 만들어 승려 세력들로 하여금 왕에게 충성을
다짐하게 만들었다. 이 사원들은 훗날 희종이 최충헌을 죽이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해 승려들이 전부 죽게
되고, 사원들도 죄다 철폐되면서 고려 불교의 성격 또한 교종 중심에서 선종 중심으로 바뀌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됐다.

사찰을 대규모로 건립한 부분도 알고 보면 무서운데, 이게 바로 대각국사 의천보다 이른 시기의 불교 통합


시도였다. 광종은 교종인 귀법사의 균여[5]를 중심으로 '화엄종'[6]을 통합하게 한 다음, 천태종을
후원하여 법상종(고려 초기 문벌 귀족들의 지원을 많이 받은 종파)까지 포함한 교종 통합을 하려 하였다.

여기에 또 중국에서 법안종[7]을 들여와서 선종을 통합하고, 이걸 다시 앞의 교종과 통합해 불교의


완전한 교선일치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광종이 죽으면서 법안이 쇠퇴하였고, 이 시도는 물 건너갔다.
제국의 아침에서는 이 과정을 좀 더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걸 그대로 따라한 인물이 바로
의천이었다. 의천의 선교양종 통합은 불교사에서만 주로 언급하지만, 고려 문종의 아들이었던 의천의
주요한 목적은 바로 왕권 강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5. 평가[편집]

건설적 숙청 군주의 모범적인 사례.


왕건에 이어 고려라는 국가의 기반을 확립한 군주.[8]

광종이 비판 받는 부분은 '지나치다고 여겨지는' 호족과의 대립, 숙청 부분인데 광종에 대한 비판적


평가들은 당연하게도 모두 그 숙청의 피해자인 공신들의 후손, 대호족이나 신권을 강조한 유학자들에
의해서 나왔다는 것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성종 때 최승로의 시무 28 조에선 태조와 함께 가장 자주 거론되는 왕이 광종인데 참소를 믿고


사람을 마구 죽였고, 궁실을 크게 만들고 사치스러웠으며 특정 집단을 편애했고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했고
(노비안검법으로) 귀천의 구분도 없어졌고, 궁궐에 호위병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뒀다는 등 온갖 이유를
들어 그가 거론될 때마다 비판을 했다. 시무 28 조에서 지적되는 고려 사회의 폐단은 곧 최승로가
개인적으로 광종의 폐단이라 본 것들과 모두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무책 앞에 있는 긍정적인
평가는 시무 28 조 앞에 실린 5 조 치적평 초반에 좀 있는 정도이고 나머진 전부 부정적인 내용이다.

건국자의 아들이라는 점, 장남이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왕위에 오른 뒤 정적들을 냉혹하게 숙청했다는


점에서 광종과 공통점이 있는 이방원과의 평면적 비교도 굉장히 시대착오적이다. 정몽주를 제외하면
이방원이 상대해야 했던 자들은 정도전 일파에서 심온 가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공신과 외척이라는
존재로서 후대의 왕실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었을 뿐 조선에 반기를 들거나 왕실을 우습게 여긴 것도
아니고 딱히 이방원과 추잡한 이권 다툼 따위로 죽을둥 살둥 대립했던 것도 아니며[9] 심지어 이방원에게
충성했거나 혹은 심온처럼 천성이 그런 욕심 자체가 없었던 자들이었다.[10]

반면에 광종은 전국 각지에 깔려있는 호족들, 자신의 동네에서는 왕 노릇하며 중앙의 왕실을 우습게
여기고 왕에게 반항하기를 예사로 하는 그 호족들, 항상 자신들 입맛에 맞는 왕으로 갈아치우려고
뒷공작질을 하고 제위에 오른 두명의 형들을 비명에 죽게 한 바로 그 호족들을 모조리 박살내고 왕권을
확립해야 했기 때문에 훨씬 더 과격한 방식으로 숙청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광종은 이방원보다는, 차라리 주군인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배신하고 눈을 뽑아
생매장해버린 토착 귀족(보야르)들을 때려잡은 복수귀 왈라키아 대공 블라드 체페쉬에 더 가깝다고 볼
수있다.

게다가 이미 사병 혁파 정책으로 군세를 거느리는 것만으로도 반역, 혹은 도발이라고 못 박았던


이방원과는 달리, 이 시기 고려의 호족들은 사병까지 거느리고 있었고 이러한 조건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딴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호족 연합 정권에 가까웠던 고려 초기의 이런 특수한 사정을 감안하면,
고려를 '정상적인' 왕권 국가로 만들기 위해선 한 나라의 기득권층을 또 한 번 뿌리째 들어내야 했기
때문에 광종은 이방원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피를 손에 묻힐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단적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후비는 29 명이나 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호족 집안의 딸이었다. 자연히 광종이
제거하거나 견제해야 할 외척들만 해도 이방원보다 훨씬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결코 믿을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 고려의 유학자들이나 조선 왕조 유학자들은 광종을 비난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학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장인 과거제의 첫 시행자가 광종이었다. 고려 왕조는 물론이고 후대 조선
왕조까지의 명백한 근간이 되는 제도를 처음으로 들여온 왕이라고 할 수 있다.

비판이라면 지나친 숙청으로 인해 아들 경종에게 심적인 부담이 지워졌다는 것인데 이는 명 태조 주원장과


비슷하다고 볼 수있겠다. 허나 숙청을 하지 않았다면 어차피 경종은 왕이 되기도 전에 살해당하거나
갈아치워질 수 있는 그런 불안한 정국이었던 터, 결국 광종의 숙청 덕분에 다음 대의 성종과 현종이 일을
제대로 할 수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들 마음 고생 시켰기로는 광종에게 뒤지지 않는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11]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다만 자신의 아들까지 죽이려고 했던 점은 확실히 지나쳤다. 경종이
유약해진 것의 절반은 광종 탓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다. 성종과 현종은 분명 광종의 덕을 봤지만[12]
정작 아들인 경종이 무고를 당한 자의 가족이 사사로이 복수를 할 수 있도록 한 법을 제정한 것은 광종
시기 지나친 숙청의 여파로 보는 견해가 많다. 물론 하도 정신나간 법이라 금방 철회되긴 했지만.

사실 광종이 숙청을 단행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근본적으로 왕건의 과실인 것은 맞다. 다만 상황이
많이 꼬인 것도 있지만. 왕건이 1 비 신혜왕후 유씨가 낳은 자식을 태자로 세울 수 있었다면 이 정도의
분란까지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신혜왕후가 자식도 없이 리타이어하는 바람에 위협거리도 안되는
집안 출신 세컨드의 아들이 적장자가 되어버린 상태에서 3 비와 4 비는 알짜배기 대호족 출신이고 5 비는
신라 진골 귀족 출신, 6 비는 1 비가 죽었다고 해서 장인인 유긍달의 가문에 다시 장가들어 얻은
왕후였으니... 아무리 동맹 정책이 중요하다고 해도 이건 대놓고 혜종은 걍 죽여버리고 나머지 아들
놈들끼리 싸우라고 분위기 조성한 것이나 다를 게 없다. 게다가 23 명의 후궁들 중 몇몇은 아예 박씨
가문에서 숙모 - 질녀 - 사촌 자매 관계인 여자들을 단체로 후궁으로 들이는가 하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충신인 유금필의 딸을 후궁으로 들였던 것으로 보아서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그냥 만만한 놈들 딸들을
성욕 해소 도구로 들여오는 목적이 있지 않았나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혜종 설화에 나오는
장화왕후에 대한 왕건의 난봉꾼 짓[13]이 설명되며, 이것이 후계에 분란거리를 던져놓은 셈이다.
결과적으로 혜종은 왕건의 실책으로 불안감 속에서 아무 것도 못하고 죽었으며 정종부터 본격적으로
숙청에 들어가 광종 대에 들어서야 마무리를 짓게 된다.그가 이렇게 숙청을 한덕분에 후대왕인 성종 현종
덕종 문종 숙종등의 군주들이 마음껏 정사를 펼쳤고 고려의 황금기 100 년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했다.단점도
있었는데 당시 대상을 가리고 숙청을 했던 태종과달리 그는 자신의 외가 와 친조카 동생들까지 모조리
숙청하는 바람에 왕을 지지해주는 근왕세력까지 숙청한것 게다가 아들까지 의심해 아들인 경종은 진시과를
시행하는등 꽤치적을 남겼지만 말년에 아버지에게 받은 학대때문에 고생을 했다. 게다가 요나라를
선제공격하는 바람에 후에 왕인 성종 현종등이 요와 대대적인 전쟁을 치뤄야했다.

6. 왕릉[편집]

광종의 능호는 헌릉(憲陵)이다. 공교롭게도 그와 많은 면에서 비슷한 조선 태종의 능호도 헌릉이다. 다만


한자는 다른데 광종의 헌릉은 법 헌(憲)자를 쓰고, 태종의 헌릉은 바칠 헌(獻)자를 쓴다.

2009 년에 북한에 남아 있는 고려 왕릉의 모습이 일부 공개되었는데 헌릉은 2009 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다. 북한의 고려 왕릉 보존 상태로 보아 저 사진보다 많이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7. 가족 관계[편집]

대목왕후는 태조 왕건과 왕건의 제 4 비 신정왕후 황보씨의 딸로, 광종과 대목왕후는 이복 남매다. 혜종과
정종은 왕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호족들과의 정략 혼인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광종과 다른
자식들에게서도 왕위 계승의 가능성을 생각한 왕건은 광종 이하의 자식들을 대부분 족내혼시켰다. 광종과
대목왕후의 혼인은 그 첫 케이스.

정비 대목왕후와의 사이에서 장남인 경종을 비롯한 2 남 3 녀를 보았다. 이 중에서 막내 딸이 성종의 1 비


문덕왕후 유씨(친할머니, 즉 광종의 어머니인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성을 따름)인데 성종은 대목왕후와
친남매인 대종의 아들이다. 즉, 대목왕후와 대종은 남매인 동시에 사돈이다.

후궁으로는 경화궁부인(慶和宮夫人) 임씨와 현비 김씨가 있지만 후궁 소생의 자식은 없다. 현비 김씨는


궁인 출신으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현종 20 년에 광종의 궁인을 현비로 추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경화궁부인은 혜종과 의화왕후 임씨의 딸로 광종의 조카인데, 혜종이 아직 왕위에 앉아 있었을 때


광종에게 시집을 갔다. 아마도 뒷배가 연약했던 혜종이 동생이자 든든한 뒷배가 있는 광종과 혼사을 맺어
자신의 약한 지지 기반을 강화하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그런데 경화군부인 입장에서는
서방님이 왕위에 오른 뒤 남매인 흥화군을 죽였으니 안습할 따름.(...) 고려 왕실의 풍습인 족내혼의
전통에 의해 어머니 의화왕후의 성을 따라 임씨로 칭하였다. 왕의 딸임에도 왕후에 이르지 못한 것은
혜종의 미약했던 왕권과 동복 남매였던 흥화군이 광종에 의해 숙청된 것이 이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8. 미디어믹스[편집]

미디어 매체에서 상대적으로 덜 다뤄지는 경향이 있는 고려 초기의 임금들 중에서는 미디어 매체에서 가장
많이 출연한 군주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의 미디어 매체에서는 고려의 창건자이자 아버지인 왕건보다도 더
많이 창작물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편.

8.1. 드라마[편집]

•KBS 1TV 에서 방영한, 부왕인 태조를 드라마화한 태조 왕건 이후 제작된 드라마 제국의 아침은 이
광종이 주인공이다. 부자가 연속으로 같은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사극 주인공이 된 사례. 배우는 김상중.
광종 그것이 알고 싶다, 고음 주의 태조 왕건과 달리 이 드라마는 별로 흥행하지 못했으나 김상중의 광종
연기는 매우 뛰어났기에 2003 년의 KBS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MBC 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는 장혁이 연기했다. 특히 '빛나거나 미치거나'라는 드라마 제목이
고려의 기틀을 완비한 빛나는(光) 군주임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을 미치광이처럼(狂) 죽인 군주라는
양면성을 가진 광종을 잘 빗댄 제목이라는 칭찬이 있었다. 다만 드라마에서는 왕소의 왕자 시절만 다룰 뿐,
광종으로 즉위한 뒤의 행보는 다루지 않는다.

•SBS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는 이준기가 연기했다. 마찬가지로 남주인공이며, 어린 시절


왕건에게 집착에 가까운 연정을 품고 있었던 어머니 신명왕후 유씨가 왕소에게 칼을 들이대고 새 후비를
들이려는 왕건에게 협박을 하다가 실수로 왕소의 얼굴 왼쪽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미(美)를 중시하는
고려의 사회 풍조 아래서 얼굴의 흉터는 치명적인 결함이었고, 왕소는 얼굴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 가면을
쓰고 버림 받은 왕자나 다름없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됐다는 내용의 설정이 있다.
8 화에서 가뭄을 해결할 기우제의 제사장으로 선택돼 제단에 올라 화장으로 자신의 흉터를 가려준 여주인공
해수를 돌아보며 미소 짓는 모습이 곧바로 훗날 광종이 된 왕소가 싸늘한 미소를 짓는 모습으로 바뀌는 
연출은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9. 기타[편집]

광종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애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책은 역시 명군으로 알려진 당나라의 2 대 황제


태종이 신하들과 나눈 대화를 엮은 책으로서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로 여겨지는 책이다. 이세민 역시
권력 때문에 자기 손에 형제들의 피를 묻혔지만 특유의 카리스마로 국초 기틀을 잡는 명군이었다는 평가
(정관지치, 貞觀之治)를 받는다. 역사적으로 광종이 자신과 비슷한 군주의 언행을 탐독했다는 게
흥미롭다.

위에서도 서술했지만 신주원부인의 양자로 간 기록이 존재한다. 이를 두고 광종에 대해 연구한 전문가들은


충주가 세력 확장을 위해 벌인 일이며, 이를 통해 신주와 가까이 있던 황주와 접촉할 수 있었고, 결국
대목왕후와 혼인할 수 있었으며, 패서 호족의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소설이나 사극 등
창작물에서는 모종의 이유로 충주에 쫓겨나 신주로 보내졌다는 설정을 그리고 이를 비극적 요소로 써먹고
있는 중이다.

5 대 경종 왕주 (955~981) 재위 975~981

1. 소개[편집]

고려의 제 5 대 국왕. 묘호는 경종(景宗), 시호는 지인성목명혜순희정효공의헌화대왕(至仁成穆明惠順熙靖


孝恭懿獻和大王). 휘는 주(伷),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대목왕후 황보씨인데,
사실 어머니는 태조와 태조의 4 비 신정왕후 황보씨의 딸이다.

2. 생애[편집]

아버지 광종의 호족 박멸 정책으로 인해 태자이면서도 불우한 삶을 보냈는데, 호족들이 태자를 등에 업고


난을 일으킬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광종은 항상 태자를 의심하고 경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목숨을 잃지는 않았는데, 이는 경종이 광종의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광종이
붕어함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였다.

선왕이 피를 너무 많이 묻혀서 그 공포정치에 환멸을 느꼈던 데에다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서 사회가


그야말로 원한이 판쳤던 탓인지 몰라도 경종이 왕이 되자마자 한 일은 사회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호족과의 화합 정책을 펼치는 것이었다.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효자 표창도 많이 하는 등
백성들에게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였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호족들에게 합법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터진다. 이 법안을 통과시킨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일단 경종은 효도를 강조했던 성향을 보건데 진짜 복수법이 옳다 생각하고 승인했을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광종 시절 득세했던 세력들이 모조리 버로우하게 되었던 것으로 볼 때 이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이를 악용하는 문제가 생겼고, 이 와중에 경종의 두 삼촌이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고려 태조의 왕자였던 천안부원낭군(천안낭군, 사후 효성태자로 추존)과 진천낭군(진주낭군, 사후


원녕태자로 추존). 최승로는 경종 시대에 복수법으로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후생(왕에 영합한 간신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광종 대에 등용된 신진 세력으로 해석되기도)들이라서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라고
하면서도 두 왕자에 대해서만은 "광종도 연좌시켜 처벌하지 않고 관용한 사람들"이었다며 살아있었다면
족히 왕실의 웃어른 노릇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다만 광종이 이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이들의 뒷배경이었던 천안시와 진천군이 광종의 외가였던 충주시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광종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출처 : 김창현 <광종의 제국>)
때문에 놀란 왕은 입안자를 처벌하고 복수법을 폐지시켰다. 이 부분을 두고 다음 왕인 성종 시대에 등장한
최승로가 쓴 시무 28 조에서 까이게 된다.

이후, 전시과를 실행하여 관료들의 급여 체제를 확립(시정전시과)시켰고 이는 조선 시대까지 쓰이게 될


정도로 합리적이었다. 광종 시절에 자리잡은 과거 제도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면서 무난한 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말년에는 여색과 바둑에만 몰두하였는데 이는 광종 시절의 공포정치와 그 이후로 끊임없이 반복된
호족들 사이의 정쟁, 그리고 복수법의 참상으로 인해 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똑같이 정치에 환멸을 느껴서 노는 소년이 된 만력제와 비슷하다.

王溫良仁惠, 不好遊戲. 末年, 厭倦萬機, 日事娛樂, 沈溺聲色. 且好圍碁, 昵近小人, 踈遠君子, 由是,
政敎衰替.
왕은 성품이 따뜻하고 어질었으며 놀이 따위는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말년에는 정치에 염증을 내어 매일
오락을 일삼고 주색에 탐닉했다. 또 바둑을 좋아하며 소인들을 가까이 하고 군자들을 멀리하니 이 때문에
정치와 교화가 점점 쇠퇴해졌다.

《고려사》

죽기 한달 전인 981 년 6 월에 병이 들었고 다음달인 7 월에 도학군자로 이름이 높았던 사촌 동생 성종에게


자신의 뒤를 이으라는 유지를 남기고 붕어한다.

3. 평가[편집]

분명 복수법이라는 명백한 병크를 저질렀고 말년엔 개판이었지만, 후대의 평가가 나쁘지만은 않은 왕이며
동정 여론도 많다. 전시과라는 훌륭한 제도도 성립시켰다는 점을 볼 때 나름 유능한 면모도 존재했다.
어떻게 보면 혜종, 광종으로 이어지는 개국 초창기의 혼란기이자 과도기 때 제 뜻을 제대로 펴 보지도
못하고 희생당한 비운의 암군으로 평가도 가능하다.

경종의 민심 수습 정책이 완전 삽질만은 아니었다는 것은 후대 왕 때에 고려가 본격적으로 태평성대가 온


것이 이를 증명한다.

4. 가족 관계[편집]

부인을 무려 다섯 두었지만 아들은 하나에 불과하다.

우선 제 1 비 헌숙왕후 김씨는 자신의 고모 낙랑공주와 신라 경순왕 사이의 딸로 추정된다.

제 2 비 헌의왕후 유씨는 자신의 삼촌 문원대왕과 태조 왕건과 제 6 비 정덕왕후 유씨 사이에서 태어난


문혜왕후 유씨의 딸이다.

제 3 비와 제 4 비는 자신의 외삼촌 되는 대종의 딸들이다. 제 3 비는 천추태후로 유명한 헌애왕후로 경종의


유일한 아들 목종을 낳았다. 제 4 비는 헌정왕후로 헌정왕후에 대해서는 현종 항목 참고하길 바란다.

대명궁부인 유씨는 역시 자신의 고모되는 흥방궁주와 태조 왕건과 제 6 비 정덕왕후 유씨 사이에서 태어난


원장태자의 딸이다.

한마디로 경종은 자신의 사촌, 외사촌, 고종사촌과 결혼한 셈이 된다. 그야말로 근친혼의 끝판왕이다.
5. 왕릉[편집]

황해북도 개성특급시(구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에 있는 고려 제 5 대 경종과 1 비 헌숙왕후 김씨가


안장된 왕릉. 북한 치하의 고려왕릉들 중에서는 보존 상태가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한다.[5]

6. 논란[편집]

고려 경종이 태평(太平)이란 연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근거는 금석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경기도


하남시 선법사에 있는 보물 981 호 마애약사여래불의 명문(銘文)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씌여져 있다.

太平二年丁丑七月九日古石佛在如賜乙重脩爲今上皇帝萬歲願。태 평 이 년 정 축 칠 월 구 일 고 석 불 재
여 사 을 중 수 위 금 상 황 제 만 세 원。

태평 2 년(977 년) 정축년 7 월 9 일 여사을에 계시는 옛 석불을 금상이신 황제를 위해 중수하오니


만세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지만 경종의 독자적인 연호인지의 여부에는 다소 논란이 있다. 당시에 고려는 송나라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고서 연호도 갖다 썼는데 당시 송나라 황제인 송태종의 연호가 태평흥국(太平興國)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6 대 성종 왕치 (960~997) 재위 981~997

1. 소개[편집]

고려 왕조의 기반을 완성한 명군.

고려의 제 6 대 국왕. 묘호는 성종(成宗), 시호는 강위장헌광효헌명양정문의대왕(康威章憲廣孝獻明襄定文


懿大王). 휘는 치(治)[1], 자는 온고(溫古). 왕건의 손자로, 왕이 되기 전부터 도학군자로 이름이 높아
주변의 선망을 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대대로 즉위한 이후에는 유교적인 정책을 펼쳐 왕권을
다지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는 등 많은 숱한 업적을 세운 명군이 되었다. 이 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고려는 지방관조차 없는 허수아비 호족 연합 국가에 불과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성종이 12
목을 설치한 것도 후일 조선의 지방관 체계와 비교하면 바둑의 포석이라고 봐주기도 애매할만큼 조잡한
것이었고 그만큼 성종 때 까지도 호족들의 힘이 강성했음을 의미한다.

2. 생애와 업적[편집]

태조와 제 4 비인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의 아들인 왕욱(성종 즉위 후 대종으로 추존)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복 동생으로는 선왕인 경종의 아내가 된 헌애왕후와 헌정왕후가 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할머니인 황보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이미 어릴적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학문에 능했다고 한다.

경종이 말년에 정사에 뜻을 잃고 향락에 빠져있던 중 병으로 쓰러졌는데, 당시 그의 아들이었던 개령군은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을 염려한 경종은 자신의 사촌 동생이고
누이(문덕왕후)[2]의 남편이며 아내들의 오빠로서 아들의 외삼촌(겸 고모부 겸 당숙)이 되는 성종에게
선위를 하고 붕어했다. 사실 성종에겐 후에 효덕 태자라고 불리게 되는 친형이 있었으니, 아마 광종의
사위라는 점이 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성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재위 후 학자 출신의 최승로를 등용, 그의 <시무 28 조>를 받아들여 대대적인 개혁에 힘썼다. 그런데
지금 남아있는 최승로의 주장을 크게 4 가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신하 우대, 불교 약화, 중앙
집권, 신분제 강화. 즉 개혁이라기보다는 고려에 문벌귀족이 등장하게 되는 단초를 열게 된 셈이다.
단적으로 여기서 노비환천법이 등장해서 광종이 평민으로 풀어준 사람들이 다시 노비로 돌아가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다만 이걸 잘못라고 볼 수 없는 것이 광종 사후 경종도 호족과 적당히 화합했다. 그리고 성종은 직계로 된


것이 아니라 경종이 자식이 없어 주위 세력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그리고 성종은 바보가 아니라, 노비
환속의 제약을 두었는데 특히 40 세 전후에는 노비환천법이 통하지 않게 했다. 광종이 법을 시행한 것이
956 년이고, 노비환천법이 987 년 즉 30 년 넘는 세월이 있다. 다만 노비가 너무 날뛰지 못하게 옛
주인에게 함부로 대하는 놈은 그냥 노비로 돌아오게 했다.

하지만 조선 왕조에 말끔히 정리한 향, 소, 부곡민 체제는 여전히 공고했으며 조선 왕조에서 깨끗히
정리한 장원 제도를 도입했던 것이라 매우 경솔했던 판단이었다. 참고로 노비안검법으로 향, 소, 부곡민
체제까지 깨지기 직전까지 갔는데 노비환천법을 도입하면서 역으로 향, 소, 부곡민 체제를 공고히하고
대토지제인 장원제도 도입을 했던 상황이라 매우 근시안적이었다.

성종은 또한 고려 시대 왕 중에서 상대적으로 숭유억불적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다. 물론 조선시대처럼


본격적인 국가 주도 숭유 억불은 아니다. 교과 과정에서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 정도로 이해한다. 성종은
유교에 입각한 정치를 지향해 불교의 폐단을 바로잡고, 당나라의 3 성 6 부제를 변형한 2 성 6 부제를
도입하는 한편 12 목(牧)을 설치해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을 강화시켰다. 또한 종묘, 원구단,
사직, 방택 등 유교식 건물, 제단도 설치해 고려에 유교적 제사를 도입하기도 했다.

한편 왕건의 훈요 10 조에서 포함시킨 '불교 숭상'에 따라 거행해 온 팔관회, 연등회를 즉위 직후


폐지했다. 일단 성종 개인이 유교적인 성향이 강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이들 두 행사가
전국적으로 치르는 거대한 종교 행사인 만큼 한번 지낼때마다 엄청난 국비가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 행사보다는 일단 고려의 기틀을 잡는 것을 더욱 우선시했던 것. 다만 팔관회와 연등회는 성종 이후에
금방 다시 부활해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했다.

한편, 재위 도중 거란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평양 이북을 넘겨줄 뻔 했으나, 명신 서희의 정확한 판단과
재치있는 담판으로 강동 6 주를 획득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놓았다. 사실 이 대목은 서희의 개인 활약이
컸다. 서희를 제외한 조정의 대세는 할지론(땅을 떼어주자는 것)과 항복론 뿐이었다. 이 때를 거란의 제
1 차 침입으로 치며, 자세한 것은 여요전쟁과 서희 항목 참고.

상기했듯 12 목을 설치함으로써 고려의 지방관 체계의 기틀을 잡았다. 그러나 고려 왕조 내내 지방관이


파견된 곳보다 아닌 곳이 많았던 만큼 조선 시대의 지방관 체계만큼 정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바둑에서
포석 깔듯 12 구역에 걸쳐 임시로 체계를 다진 것에 불과하다. 성종의 치세에도 여전히 호족 세력이
강대했기 때문으로 이 지방관들의 권한도 조선의 지방관들과는 비교하기 난처할 정도로 약했다.

조선 시대 지방관들은 해당 지역의 행정권, 사법권, 군령권을 모두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으나 고려의 지방관은 기껏 해야 외침이 있을 때 군령권 정도나 발휘하지 행정권이나 사법권은 여전히
지방 토호, 즉 호족들이 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니 제대로 된 징세나 징병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이후 고려가 전란을 겪으면서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징병이든 징세든 전국에 걸쳐 공정하게 골고루 시행하지 않고 되는 곳에서만 계속 뽑아먹은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지방 호족들의 불만을 억누르고 지방관 제도의 기반이라도 다졌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성종은 이렇게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과로한 탓인지 아쉽게도 38 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붕어하고
말았다. 붕어하기 직전 왕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대사면을 내리자는 말에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렸는데
그래 봤자 뭐하며 나를 계승할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새 은혜를 베풀 것이냐."며 거절하고 죽었다.
조선의 왕 성종과 사망한 나이가 같은데 우연치고는... 고려 초엔 정략 때문에 왕이 여러 부인을
맞아들였던 때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성종은 조선의 성종에 비하면 여성 편력이 화려하지 않다.

아들은 없었고 딸만 있었다. 후에 성종의 딸들은 현종과 혼인했다. 성종의 제 2 비 문화왕후의 딸은


현종의 제 1 비 원정왕후이고, 성종의 제 3 비 연창궁부인의 딸은 현종의 제 2 비 원화왕후가 되었다. 이
때문에 선왕의 아들이자 성종의 조카인 개령군이 목종으로 즉위했다.

3. 평가[편집]

태조가 고려 왕조를 건국했고, 광종이 고려 왕조라는 나라 자체의 기반을 단단히 마련했다면, 성종은
고려 왕조의 기반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성종 때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고려 왕조 관료제의 기반을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유교적인 사상과 정책을 바탕으로 한 체제 정비에 의해 중앙 집권 체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왕권이 향상되고 고려의 통치 체계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초반 약했던 고려의 왕권이 광종 대에서 정점을
찍은 다음에 경종 대의 반동 정치를 거친 결과물이었다. 이 부분도 어떤 점에서는 세조 - 예종으로
이어지는 성종과 유사하다.

이로 인하여 신분 제도의 질서로 확립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면에서는 고려의 특징인 중앙 문벌 귀족


정치가 확립되었다. 최승로의 시무 28 조는 유교적 중앙 귀족의 의도가 강했고, 성종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국가의 틀을 잡았다. 성종 정도 되는 인물은 이 시스템 속에서도 할 것 다했지만, 그렇지 못한 왕들은
귀족들에게 휘둘리기 시작하게 되는 단초가 된다. 여러모로 큰 업적을 남긴 왕.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여동생들이 유교 사상에 위배되는 일을 저질러 처벌해야 했다. 여동생들 모두 선왕


경종의 아내였지만, 경종 사후에 둘 다 다른 남자들과 정을 통했기 때문. 헌애왕후의 경우는 그녀를
한동안 유폐시킴과 동시에 내연남인 김치양을 장형으로 다스린 뒤 유배보냈고, 헌정왕후의 경우는
사생아를 낳은 후 사망했기에 그녀와 사통한 왕건의 8 번째 아들이자 자신의 숙부였던 왕욱을 유배보내는
걸로 그쳤다. 그래도 조카이기 때문인지 헌정왕후의 아들은 한동안 궁궐에서 성장했다. 게다가 첫째
아내도 재혼녀다.

세간에는 유교적인 정책을 펼쳤다 하여 불교를 탄압했다는 이미지도 있는 듯 하지만 오히려 유교와 불교의
조화를 꾀하기도 하였다. 비록 백성들에게 유교적 사상을 권장하기는 하였으나 조선 시대 마냥 노골적인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는 것은 피하는 편이었다. 이러한 성종의 성향은 아버지와 태조의 제사를 지낼 때에
유교적인 제사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시켜 불공을 드리게 했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불교가 이미
수백년이 넘도록 백성들 사이에서 신봉되었기 때문이다. 유교 교리가 통치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에도 많은
백성들이 전통적인 불교와 민속 무교를 신봉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 초기에는 조정이 노골적으로 불교를
배척하지 못했다.

위에서와 같이 조선 왕조에서는 평가가 가장 좋은 군주로 동국통감에선 고려 태조와 현종과 더불어 가장


최고 성군이 된다.

"성종(成宗)은 힘써 행하고 조심하며 두려워해서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적전(籍田)을 갈며, 학교를
설립하고 현재(賢才)를 권면하며, 절의를 숭상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휼하며, 모든 제도를 일신(一新)
하였으니, 가히 수성(守成)의 좋은 임금이었습니다."

국역 동국통감 고려 공양왕기 내용으로 좋은 평가를 내리지만 고려 성종을 띄운다는게 노비환천법과 공신


우대책으로 이후 부곡민 문제와 음서 문제의 빌미를 주게된다. 알다시피 초기 공신은 과거제를 가장
반대하였고 관직을 후세에 물려주는 경향이 컸고 노비안검법은 부곡민 체제를 한바탕 흔들기 좋았으나
오히려 고려 성종기에는 이를 틀어막은 경향이 크기 때문에 결국 고려 말 부곡민 체제는 노비 안검의
영향을 받아 없어지고 양인이나 실질적으로 대접은 노비와 크게 다를게 없어 거주 이전을 금지 혹은 제한
당해 각종 역에 동원된 부곡민들을 양인의 계급으로 만들게 된다. 고려 문무 신료들 중에 유배지는
부곡으로 결국 이런 것을 만드는 빌미가 된 고려 시대에 존재한 일종의 특수한 장원인 장도 고려 성종이
만들었다.

즉 조선 왕조가 없애버린 것을 만든게 고려 성종으로 이 장은 공음에도 영향을 끼친다. 초기 광종기에


없던 장이 고려 성종기 생긴 것이다. 결국 부곡민도 없고 공음보다 더 개혁적인 과전을 거쳐 직전이
시행되어 장이 없어진 조선 성종과 비교는 매우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고려 성종의 공신 우대는 과거제
출신이 아닌 공신과 그 후손 출신으로 이는 음서에 빌미가 된다.
일찍이 성종의 측근 최승로는 과거제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이로 인해 남북의 용인(庸人·어리석은
사람)이 다투듯이 몰려왔다. 지혜와 재능을 따지지 않고 특별한 대우를 했다. 그런 까닭에 ‘후생(後生)’
은 앞을 다투며 관리가 되었으나, ‘구덕(舊德·태조 이래 중용된 공신과 관료층)’은 점차 쇠락하였다."
고려사 기록으로 사실상 고려에 통할 그 시대에 크게 통할 왕일뿐이다. 고려 광종의 경우는 무과의 설치와
토지 제도의 개혁을 못하였으나 과거제와 노비안검법만 봐도 호족들의 반발이 너무나 극심해 대목왕후까지
막을 지경이었으나 가까스로 통과시킬 정도다.

사실상 시대에 최선을 다한 왕일 뿐 이후 고려를 망친 공음, 음서의 빌미가 된 왕이다. 과거제는


훼손되어 이후 이자겸의 전횡을 시작으로 무신정권 때는 추천으로 사람을 더 뽑고 과거제 출신 문신들은
어용화되어간다.

사실상 조선 왕조가 고려 광종을 안좋게 평가하고 고려 성종을 더 띄운다는게 공신 후손 우대와 같은


음서나 부곡민 체제와 장원 제도를 긍정하는 것과 똑같다.

더 앞뒤가 안맞는건 조선 왕조에선 성종과 관련해선 "유독 당(唐)나라 태종 때의 《정관정요(貞觀政要)》


를 상소 가운데의 제일의(第一義)로 삼으면서, 능히 삼대(三代) 이상의 명주(明主)들은 열거하지 않은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 "성종(成宗)의 정치가 성종으로만 그치게 하였으니, 어찌 깊이 애석하게 여길
일이 아니겠습니가?” 라고 동국통감에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성종의 역사가 성종으로 끝나고 중국의
당태종기 역사만 봤다고 비판해도 정작 성종의 평가가 저리도 평가가 좋다.

사실 성종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유독 당(唐)나라 태종 때의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상소 가운데의


제일의(第一義)로 삼으면서, 능히 삼대(三代) 이상의 명주(明主)들은 열거하지 않은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 "성종(成宗)의 정치가 성종으로만 그치게 하였으니, 어찌 깊이 애석하게 여길 일이
아니겠습니가?” 라는게 맞다.

당 태종기만 보는게 아나라 이전 수 문제기 이전 한 고조기와 광무제와 이후 당 태종 이후 측천무후기와


당 현종기 송 태조기 등등도 봐야 중국의 제도가 이전에는 어떻고 이후에는 어떻고를 사상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봐야 정상이고 당나라 태종기만 본 것도 고려가 고대 당나라도 아니고 당나라는 멸망했고
송나라가 들어선 와중에 당나라 태종 때 있던 제도나 사상만 찾는 것도 사실 웃기다.

앞뒤가 같지 않으니 성종에 대한 평가는 "유독 당(唐)나라 태종 때의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상소


가운데의 제일의(第一義)로 삼으면서, 능히 삼대(三代) 이상의 명주(明主)들은 열거하지 않은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 "성종(成宗)의 정치가 성종으로만 그치게 하였으니, 어찌 깊이 애석하게 여길 일이
아니겠습니가?” 라고 하는게 옳다.

4. 조선 성종과의 유사점[편집]

여러모로 조선의 성종과 흡사한 면이 있다.

우선 아버지가 왕이 아니었으며, 위에 형을 둔 상태로 왕위에 올랐고, 사후에 받은 묘호도 같고,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정책을 펼쳐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는 공통점도 있으며, 심지어는 사망했을 당시의 나이도
같다 (38 세). 맹꽁이 서당에서도 이를 가리켜 신묘한 우연의 일치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덤으로, 사후에
나라 꼴이 막장이 되었다는 것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앙 귀족들의 권한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국가 체제를 완성했다고 하지만, 그


기반이 된 것이 다름 아닌 북송의 시스템이었다.

때문에 문치주의가 극도로 강해졌고, 거란의 1 차 침입에 할지론이 넘쳐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중앙
집권의 과정은 동시에 중앙 귀족의 경쟁 상대였던 지방 호족들을 향리로 굳혀버리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는데 이를 상징하는 것이 향직 개정이었다. 여기에 노비 환천법과 공신 자손 우대 등으로 중앙 귀족을
강화했으니 왕권이 약해지면 바로 귀족 정치가 열리게 되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조선 성종과 다른 것은 소위 장이라는 막장 대토지제인 공음을 가속화시켰고, 부곡민 체제를 허물지
않으면서 노비 환천법을 실행에 옮겼다는 거다. 참고로, 조선 성종은 조선을 건국하는데 일등 공신인
신진 사대부들에게 족쇄나 채우던 제도를 숱하게 남겼다. 고로 비교는 절대 불가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편집]

천추태후(드라마)에서는 김명수가 성종으로 연기했다. 경종 생전에는 그래도 여동생 천추태후와 함께


고난을 견디는 사이였으나, 신라계 유학파 신료들과 친해지면서 북방계 문신들과 친한 천추태후와
대립하게 된다. 천추태후가 주인공이며 선역인 탓에, 그의 거의 모든 업적이 드라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목종이 어린 시절, 그녀와 따로 지내게 만들면서 목종의 정신병이나 성격 이상 등도 정황상 성종 탓인
것처럼 묘사해 버린다. 모든 업적을 천추태후에게 빼앗겨 버린 목종보다는 나을지도 모르지만...
정리하자면 유학자 신료들의 감언이설 + 이간질에 동생과 적대하게 되는 안타까운 군주.

6. 능묘[편집]

북한 판문군 진봉리에 남아 있는 성종의 강릉(康陵). 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왕릉 맞다.


원래는 병풍석과 석축이 있었는데 농지 개발 과정에서 없어지거나 묻혀 버렸다고 한다.

7 대 목종 왕송 (980~1009) 재위 997~1009

1. 소개[편집]

고려의 제 7 대 국왕. 묘호는 목종(穆宗), 시호는 효사위혜극영정공선양대왕(孝思威惠克英定恭宣讓大王).


휘는 송(誦), 자는 효신(孝伸). 경종과 천추태후(헌애왕후)의 아들. 왕자 시절의 군호는 개령군(開寧
君)이다.

고려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신하에 의해 폐위, 시해된 군주이다.[1] 동성애 의혹 + 폐위 시해된


왕으로 신라 혜공왕과도 비슷한 의혹이 있다.

태조 왕건 사후, 고려 광종에게서 이어진 광종계 왕통의 마지막 국왕이다. 이후 고려 왕은 34 대


공양왕까지 전원 왕욱의 혈통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불과 태어난지 1 년만에 부왕 경종이 붕어하면서 재위는 당숙이자 외삼촌인 성종이 이었다.[2] 그러나
성종 역시 후사가 없었기에, 그 뒤를 이어 18 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즉위 후 어머니에게 '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는 존호를 올렸다. 다만 그녀는 별칭인 '천추태후'로 더
유명하다.

초기에는 제법 의욕적인 면모로 정치를 해 나갔는데, 아버지 경종이 제정한 전시과를 손보고(998 년)
학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줘 학문을 장려했으며, 지방을 순시하며 그 지방의 빈민 구제와 민생 안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서경을 '호경(鎬京)' 이라 이름을 바꾸고 여기에 자주 행차했다. 호경은
주나라의 수도로 종주(宗周)라 불렸고 낙읍은 성주(成周)로 불리었다. 또한 개칭과 동시에 서경의 관부도
태조 대의 낭관으로 환원시켰는데 이는 서경유수로 격하되었던 서경의 권위를 복구시키고 나아가 서경이
고려의 근원지라는 의식의 발호였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북방의 성들을 수축하고 군제를 개편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이 목종의 업적을
섭정하던 어머니 천추태후의 업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목종과 천추태후가 몰락하는 강조의
정변 때 처리를 보면 이 때 숙청된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파가 40 여명에 불과해 왕이 바뀐 정변치고는
숙청된 사람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또한 당시 하공진, 탁사정처럼 목종을 보위하는 무장들도 강조의
정변에 가담하기도 했다. 천추태후가 군제 개편을 해서 군부를 장악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때
목종을 보위한 무장들까지 강조에게 가담한 것을 보면 섭정을 했다고는 해도 천추태후에 대한 불만 세력이
많았으며, 정변 때 숙청된 사람 수를 보면 이는 그녀의 국정 장악력이 생각보다는 대단치 않았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치를 잘 해나가던 목종의 불행은 그의 어머니였던 천추태후가 초래했다. 천추태후는
권력욕에 불타 아들인 목종의 나이가 성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내세워
섭정하였다. 또한,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을 저지른 끝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은 후에
처벌받을 거라는 위기감과 목종에게 후사가 없는 것을 노려 이 아이로 하여금 다음 왕위를 잇게 할 음모를
꾸미게 된 것이다. 목종 역시 저 둘의 사이를 알고 있었지만 다름 아닌 자신의 어머니라서 처벌하지
못했다.

때문에 목종의 뒤를 이을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던 대량원군 왕순을 강제로 승려로 만들어 출가시킨 뒤
삼각산의 신혈사로 보내버렸다. 왕순은 출가한 이후 신혈소군이라 불리었다. 고려 시대엔 왕위 계승권이
미약한 왕자를 소군이라 하여 출사시켜 그 계승권을 박탈시켰는데, 그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말이
좋아서 승려로 만든 것이지, 사실상 왕위에 오를 길을 막아버리기 위해 궁에서 몰아내버린 것이다.
이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계속 대량원군을 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번번히 목종과
신혈사의 승려들이 방해하여 실패하였다.

한편 천추태후의 총애를 받던 김치양의 권세는 대단히 커져서 자신의 친족들을 제멋대로 요직에 앉혀
국정을 어지럽히는가 하면 재물을 긁어 모아서 초호화 저택을 짓는 등 그 사치와 낭비가 매우 극심했다.
이런 인물이 권세를 쥐고 있으니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2.2. 말년[편집]

이처럼 천추태후의 총애를 등에 업은 김치양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목종은 김치양을 견제하려 하였으나
천추태후의 잇달은 훼방으로 실패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목종의 재위 초기에 보였던 의욕이 넘치던
모습은 사라져버렸으며, 신하와의 접견을 거부하거나 향락에 빠지는 등 갑자기 무기력한 군주로 변모했다.
이 모습은 말년에 정치에 뜻을 잃고 항락에 빠져 소일했다는 부왕 경종과 비슷하다.

이 때에 유행간이라는 남자가 등장하여 목종의 동성 연인이 되었다. 유행간은 외모가 아름답고 신체가
뛰어나서 굉장한 미남이었다고 전한다. 이 덕분에 유행간은 목종의 총애를 받았고 별다른 공과 재주도
없이 벼슬과 재물을 얻었다. 이후로 유행간이 목종에게 발해 유민 출신인 유충정이라는 사내를
소개해주기도 했는데 그 역시 미모가 수려하여 목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 때문인지 뒷날의 공민왕과
더불어 남색 경험이 있는 고려 국왕이 되어 버렸다.[3] 단, 공민왕의 남색은 날조라는 설이 있다.

1009 년 봄에 왕실 기름창고에서 불이 나서 천추태후가 거처하던 천추전이 전소되었다. 이 화재 사건을


목종을 시해하기 위한 김치양의 소행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4] 고려사에는 이 때문에 왕이 근심이
심해져 병환이 나 정사를 돌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등쌀에 떠밀려
의욕을 상실한 목종은 병환까지 얻어 정사조차 돌볼 수 없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로 유행간과 유충정은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많은 궁인을 부리며 조정의 신료들을 업신여기는 등


갖은 행패를 부리면서도 병에 걸린 왕을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제멋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당시 목종이
유행간과 유충정을 제외하고는 아무하고도 만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들은 유행간과 유충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어명과 같이 여길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조정은 곧
천추태후의 세력을 등에 업은 김치양과 목종의 총애를 받는 유행간, 유충정 등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신세로 전락했다.

2.3. 강조의 정변과 폐위[편집]

그러나 아무리 만사에 무관심해진 목종이라도 김치양의 득세는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보다 못한 목종은
양위를 결심한 뒤 몰래 중추원부사 채충순을 불러 신혈사에 있던 대량원군을 불러 오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서북 지역을 지키던 도순검사 강조에게 밀사를 보내어 '김치양 일파를 처단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라'는 지령을 보낸다.

이 밀지를 받은 강조는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출발했는데, 도중에 거짓 왕명이라는 말에 속아 넘어가


돌아갔다. 그 후에 강조의 아버지가 빨리 개경으로 오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 내용 중에 '목종이
이미 죽었다'는, 당시 나라에 돌던 뜬소문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의 편지를 읽은 강조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해 목종의 명령에 따라 김치양 일파를 처단하고 목종의 후계자인 대량원군을 추대하기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수도로 왔다. 그런데 막상 수도에 오니 목종은 살아있어서 입장이 난처해졌고,
결국 수하들과 의논한 끝에 김치양 일파를 제거한 뒤 아예 목종을 폐위시켜 '나라를 양보한 공작'이라는
뜻의 존호(尊號)인 '양국공(讓國公)'으로 끌어내린 다음 대량원군을 즉위시켰다.

2.4. 비극적인 최후[편집]

졸지에 믿었던 신하에게 배신당한 목종은 몇몇 궁인들과 함께 어머니인 천추태후를 모시고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 궁인들은 폐위된 목종이 유배갈 때 같이 갔다는 말이 있는 걸로 보아, 불온 세력으로
간주되어 함께 썰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목종은 자신의 신세를 망쳐버린 어머니의 말고삐를 직접 잡아
끌었고, 어머니가 배고프다고 하면 음식을 나눠먹을 정도로 극진히 보살폈다.

그러나 후환이 두려웠던 강조는 부하인 김광보와 안패를 시켜 목종을 추격하게 하였다. 이들은 결국 후에
충주(忠州)로 향하던 목종을 뒤쫓아가서 임진강변의 적성(오늘날의 파주시 적성면 일대)에서 그를
시해하였다.[5] 이렇게 목종은 30 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아들의 죽음을 지켜본 천추태후는
훗날 자신의 세력기반이 있던 황주(黃州)로 가서 여생을 마쳤다.

목종을 시해한 후 강조는 현종에게 "목종이 자살했다"고 보고를 올렸다고 한다. 그후 강조는 민종(愍宗)
이라는 묘호와 공릉(恭陵)이라는 능호를 올렸으나 이후 현종에 의해 목종과 의릉[6]으로 고쳐졌다.[7]
현종은 목종의 시해 사건을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목종이 충주(忠州)로 유배가는 길에 적성현(積城縣)에서
시해당하였는데 훗날 그 곳에서 일단의 무리들로부터 현종이 공격당한 것만 봐도 현종 또한 목종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3. 평가[편집]

훗날 귀신이 되어 통주에서 요성종에게 대패하여 수세에 몰린 강조 앞에 나타나 "너도 이제 끝장이다!"


라며 일갈하기도 한다. 이 목종의 혼령을 본 강조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는 기록이 정사인 고려사에 나온다.
사실 후대의 각색임이 분명하지만,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목종 귀신 때문이 아니라 그도
장수였던만큼 자신의 패배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았기 때문에 목종을 떠올리고는 후회하며 털썩
주저앉았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여러 가지로 의욕이 넘치는 혈기왕성한 청년 군주였지만 어머니와 김치양 때문(그를 시해한 건 강조였지만
일이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이 둘이 제공했다)에 신세를 망쳐버린 불행한 군주. 어떤 의미에서는
본래 받은 묘호인 '민종'이 그에게 걸맞는 묘호라 하겠다. 또한 병에 걸려 정사를 포기했다는 기록
때문에 병약한 군주로 여겨지기도 쉽겠지만 목종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명궁이었으며 말타기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귀양길에도 자신과 번번히 충돌했던 어머니 천추태후를 극진히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니
개인적으로는 성품이 올바르고 효심도 상당했던 것 같다. 어쩌면 강조의 정변을 당한 이후로 초탈하여
성격에 변화가 왔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4. 동성애[편집]

한국사에서 명시적으로 처음으로 등장하는 게이 왕이다.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자에겐 관심이


없어서 아내도 선정왕후(宣正王后) 유씨 1 명[8] 뿐이고 그녀와의 사이에 자식도 없었으며 이 때문인지
젊은 나이에 후사를 걱정하는 듯한 말을 하기도 했었다. 더욱이 그는 왕으로 있는 동안 아름다운 용모의
사내들을 곁에 끼고 살다시피 했다.

『고려사』 열전의 유행간 편에서는 목종은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였던 유행간을 매우 아껴서 용양(龍陽)의
관계까지 맺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용양이란 것은 소위 말해 남색(男色), 즉 동성연애와 같은 의미이다.
이후 유행간은 목종의 측근이 되어 별다른 공이나 재주가 없으면서도 합문사인이라는 높은 벼슬에 올라
목종의 곁에서 정사를 좌지우지 했는데, 성품이 오만해서 신하들을 깔보며 고개와 눈짓으로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또한 유행간이 소개한 발해 유민 출신인 유충정 역시 별다른 이유 없이 목종의 총애를 받아서, 유행간과


더불어 목종의 곁에 붙어다니면서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는데, 그 또한 목종의 동성 연인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은 있지만 유행간과는 달리 목종과 유충정이 동성애를 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유행간은 강조의
정변 이후 처형당했으나 유충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불명. 목종이 죽고 20 여년 뒤인 1030 년 발해부흥운동
세력인 흥료국에서 고려에 지원을 부탁할 때 유충정의 이름이 다시 나오는데, 단순히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름이 한자까지 같고 발해계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목종의 실각 이후 발해 땅으로 가서
발해부흥운동에 몸담았을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꽤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인물. 가끔 유충정이 신체가
뛰어난 탓에 유행간의 소개를 받아 목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 돌아다니고 있으나 사실 사료적인 근거가
없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5.1. 드라마 천추태후[편집]

천추태후(드라마)에는 주인공의 아들인만큼 비중있게 등장. 배우는 불멸의 이순신에서 광해군을 연기했고,
이후 근초고왕에서 아직기를 추노에서 봉림대군역을 맡은 배우 이인. 그런데 이 극에서는 목종이 실제
이룩한 업적을 모두 천추태후에게 빼앗겨 버리고 본인은 대단히 의욕 없는 왕으로 전락해 버렸다.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많이 닮은 편인데다 성종이 아기 때부터 그를 천추태후와 떼어놔 사실상 성종의
아들로 성장했기에, 한 달에 한 번 볼까말까인데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주변 환경과 성향이 다른
친어머니를 어려워했다.

어쨌든 어머니를 싫어하지는 않으나 어머니 옆에 있는 김치양을 싫어해서, 그리고 왕의 자리가 싫어서
김치양과 왕위 관련해서는 어머니에게 매우 대든다. 사촌 동생인 대량원군과는 친한 편. 처음에는 마치
고자처럼 등장하더니 결국 유행간과의 동성 연애도 재현되었다. # 일단 부인이나 후반 갑툭튀한 김씨나
유행간과 할 수 있었던 걸로 봐서 고자는 아니니 다행. 그리고 김치양의 반란 즈음 해서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부인과 어머니를 극진히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지만...팬들 사이에선 다중인격이라는 이미지도 있다.
그야말로 안습.
8 대 현종 왕순 (992~1031) 재위 1009~1031

1. 개요[편집]

문치가 이루어졌으며, 조세와 부역을 경감해주고 뛰어난 인재를 등용했다...온 나라가 평안해지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현종의 치세야말로 주나라의 성왕(成王), 강왕(康王)[2]과 한나라의 문제, 경제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최충

최충의 말은 세상에서 천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임금이 천명만 믿고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법을 어기면 천명을 얻었을 지라도 곧 그것을 잃게 되는 법이다... "현종과 같은 임금은
공자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흠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이제현

한반도 유일의 사생아 출신 군주이자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성과를 이끌어낸 위대한 군주.

고려의 제 8 대 국왕. 묘호는 현종(顯宗), 시호는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휘는 순


(詢). 자는 안세(安世). 즉위 전 군호는 '대량원군(大良院君). 이 명칭이 오늘날 합천을 가리킨다고
한다.[3] 당시 고려 왕자들의 군호가 외가의 지역을 중심으로 부여된 점으로 미루어 이례적인데 이
군호는 부친인 안종 왕욱의 외가 쪽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4]

그리고 이 사람 이후의 고려 왕들은 마지막 왕인 공양왕까지 모두 그의 후손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고려


왕실의 중시조라 할 수 있는 임금. 성종의 딸이 현종의 부인인 원정왕후와 원화왕후지만 원정왕후 소생은
없고 원화왕후 소생으로 효정공주와 천수공주 밖에 없기 때문에 태조 왕건의 아들들 중 광종에서 시작된
직계 왕통은 사실 목종 대에서 끊어진 셈이다.

2. 생애[편집]

사생아로 태어난데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되었고, 목숨을 위협받았던 끝에 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난을
극복하여 고려의 태평성대를 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군주이다. 인생역전 테크를 탄 왕이라는 점에서
고구려의 미천왕과 이미지가 겹친다.

후에 안종으로 추존되는 왕건의 13 번째 아들 왕욱과 천추태후의 동생이자 경종의 미망인이었던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자 출신 군주는 자주 나왔으나 부모가 정식적인 혼례 절차 없이 사생아로 태어난
군주는 고려 현종이 유일하다. 그나마 부계, 모계 모두 왕족 출신이라서 망정이지, 사생아는 서자보다
훨씬 더 정통성에 위협을 받기 쉬운 위치다. 효공왕이나 우왕의 경우도 정황상 사생아에 가까운
위치였지만 이쪽은 각각 진성여왕과 공민왕이 직접 정통성을 인정해 주었고 현종처럼 빼도박도 못하는
사생아는 아니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혈통상으로는 오히려 그만큼 강력하고 유리한 사람도 드물었는데,
황주를 기반으로 하여 개성 및 그 인근 호족들을 대표하는 헌정왕후의 혈통과 경주를 비롯한 그 인근
지방의 신흥 귀족 세력의 지지를 받기 쉬운 과거 신라 왕실의 피를 받은 왕욱의 혈통을 받았으니 양측의
지지를 받기도 그만큼 쉬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만약 헌정왕후가 왕욱과 제대로 재혼을 한 뒤에 현종을
출산했다면 그의 배후 세력은 상당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현실적으로 보면 선왕의 비가 재혼한다는 것도 말도 안되고, 실제로 안종은 선왕의 비와 사통했다는
이유로 유배가서 유배지에서 죽었다. 결정적으로 즉위과정이 강조의 정변으로 인한 꼭두각시 왕이다.
때문에 실제로는 정통성은 물론이고, 배경도 약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지는 않게 해주는 정도?

2.1. 출생의 비밀[편집]

그의 아버지 왕욱은 왕건의 13 번째 아들이며 현종의 할머니이자 왕욱의 어머니는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 김씨다. 그래서 혈통으로 보면 현종은 고려 왕실의 혈통과 신라 왕실의 혈통을
모두 가진 인물인 셈이다.[5]

그런데 문제는 현종의 아버지 왕욱이 조카 딸이 되는 헌정왕후와 정식 혼인이 아니라 사통을 통해 태어난
아이가 바로 대량원군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왕족들은 정권 초기에 근친간의 결혼을 정치적인
이유로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한 고려 왕들은 과부를 후궁으로 들였고
재가 또한 자유로웠기에 재혼 또한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가 된 것은 선왕의 왕후이자 현 국왕의
여동생으로서 지체 높은 신분을 가진 여인이 정식적인 혼인을 하지 않은 채 외간남자와 사통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선왕의 왕후가 사생아를 낳은 게 문제였다.

덧붙여서 현종은 그 전까지 있었던 근친혼에다 친부모의 관계 때문에 친척 관계가 꽤 꼬인다. 모계만 보면
목종의 사촌 동생이지만, 부계만 보면 어머니와 같은 항렬이라서 목종의 당숙이 된다. 그러므로 사촌
누나이자 이모 천추태후의 남편 경종은 현종에게 사촌 형 겸 이모부이며, 의붓아버지는 생략하자. 생모
헌정왕후는 어머니 겸 사촌 누나가 된다. 막장 드라마 또한 외할아버지 대종은 그의 큰아버지이기도 하고.
그리고 할아버지인 왕건의 경우 현종의 외증조부이자 외외증조부(외할머니의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후일의 일이지만 사촌 형이자 외삼촌인 성종의 계후 문화왕후의 딸은 현종의 정실 원정왕후이고, 성종의
후궁 연창궁부인의 딸은 현종의 계후 원화왕후가 되었다. 따라서 성종은 현종의 장인이 되는 셈인데 이
때문에 현종이 태조의 손자 자격이 아닌, 성종의 양자 내지는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6]

현종은 출생 비화도 꽤 극적인데, 만삭의 헌정왕후가 안종 왕욱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집안


사람들이 뜰에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한창 맹렬하자 성종이 빨리 가서 물어 보도록 하여 그
까닭을 알아 보니 왕욱이 윤리를 어지럽힌 죄를 범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왕욱을 멀리 사수현(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으로 귀양보내 버렸다. 이 때 헌정왕후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에 이르자마자 진통이
와서 방에서 출산한 게 아니라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아이를 낳았고 결국 산욕으로 죽었다고
고려사 등에는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현화사비에는 헌정왕후는 이듬해 궁궐안 보화궁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당대의 1 차사료인 현화사비의 신빙성이 더 높다. 하지만 어느 쪽을 따르건 출생
후 1 년 정도만에 현종은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되었고, 성종이 보모로 하여금 아기를 기르게 했다.

보모는 아기였던 대량원군에게 "아빠"라는 단어를 종종 가르쳤다. 그 때문인지 2 년 후 성종이 대량원군을


불렀을 때 , 그가 성종을 보더니 "아빠"라고 불렀고, 또 성종의 무릎 위로 올라와 그의 옷을 붙잡고 한
번 더 "아빠"라 불렀다고 한다. 이에 성종은 아기의 처지가 너무 가엾어서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와
떨어진 아이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성종은 후에 대량원군이라는 작위를 주고 귀양지에서 지내던 왕욱에게
보살피도록 배려해주었다. 출생의 비밀 돋네. 그런데 위 내용을 고려하면, 헌정왕후가 사망하게 되고,
궁궐 내에 끈이 떨어진 대량원군이 궁궐 밖으로 내쳐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현종은 극적으로
부자 상봉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부자 상봉의 기쁨도 잠시였을 뿐, 왕욱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고
만다.

2.2. 생명의 위협 속에서[편집]

이후에 늘 현종을 보살펴주던 외삼촌인 성종도 병사하고 그 뒤를 이어 선왕 경종의 아들인 개령군이


목종으로 즉위하자 곧 험난한 시련에 부딪히게 되었다. 비록 사생아 출신이라고는 하나 그 역시 엄연한
왕족이며, 태조 왕건의 직계 후손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왕건의 손자인데 혈통으로 따지면
부모가 아닌데도 50%가 왕건의 피를 이어받았다. 개족보 그 때문에 목종이 즉위한 후로,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후사로 삼으려 했던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의 경계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을 하며 성년이 된 목종을 억누르고 섭정하는 등 나라의 실세 행세를 하던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하여금 다음 왕위를 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 천추태후에게
현종의 존재는 후사를 위협하는,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영특하다는
소문이 돌자 천추태후는 위협감을 느꼈는지 결국 현종을 강제로 머리를 깎게한 뒤 삼각산에 있는
신혈사라는 절에 승려로 보내버렸으며 신혈소군(神穴小君)[7]으로 부르게 하고 이후로도 수 차례 살해
시도를 하였다. 이때에 현종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보낸 궁녀들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을 것을
강요받거나 자객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등 그야말로 비참하고도 처절하게 생명줄을 이어나갔다. 왕순이
채충순에게 편지를 보내어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도 안타까움을 느낄 지경.

“간악한 무리들이 사람을 보내어 협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술과 음식을 보냈는데 신은 독약을 넣은
것으로 의심하여 먹지 않고 까마귀와 참새에게 주니 까마귀와 참새가 죽어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절박하니,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불쌍히 여겨 구원하여 주소서.”

《고려사》 권 93, 열전 6, 채충순

그러나 다행히도 목종이 번번히 천추태후의 음모를 눈치채고 훼방을 놓았으며, 신혈사의 승려 '진관(津
寬)'도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보호하였던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천추태후가 어찌나
집요하게 현종을 암살하려 했는지 진관이 현종이 머물던 방 아래에 굴을 파서 현종을 숨겨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태후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암살하려 했으며, 하루는 내인(內人)을 시켜 독약이 든 술과 떡을 보냈다.


내인이 절에 당도해 소군을 만나 몸소 먹이려 했는데, "절의 어떤 승려가 소군을 땅굴 속에 숨겨 놓고는,
소군이 산에 놀러 나갔으니 간 곳을 알 수 없노라"고 속임수를 썼다. 내인이 돌아간 뒤 떡을 뜰에
버렸더니, 까마귀와 참새가 주워 먹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고려사》 권 88, 열전 1 후비 1, 경종 후비, 헌애왕태후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시해당하고 천추태후가 실각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강조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참고로 고려사 세가의 현종 총서를 보면, 현종 역시 왕위에 야심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의 현종 총서에는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지었다는 두 수의 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를
읽어보면 꽤 의미심장하다.

一條流出白雲峯일 조 유 출 백 운 봉 한 가닥 물줄기 백운봉(白雲峰)서 솟아나와


萬里蒼溟去路通만 리 창 명 거 로 통 머나먼 큰 바다로 거침없이 흘러가네.
莫道潺湲巖下在영 도 잔 계 암 하 재 바위 아래 샘물이라 업신여기지 말아라
不多時日到龍宮불 다 시 일 도 용 궁 머지않아 용궁에 다다를 물이니까.

시냇물(溪水).

小小蛇兒遶藥欄소 소 사 아 요 약 란 뜰 난간에 또아리 튼 작은 뱀 한 마리


滿身紅錦自班斕만 신 홍 금 자 반 란 붉은 비단같은 무늬 온 몸에 아롱지네.
莫言長在花林下막 언 장 재 화 임 하 꽃덤불 아래서만 노닌다고 말하지 말라
一旦成龍也不難일 단 성 용 야 불 난 하루 아침에 용 되기 어렵지 않을 테니.

작은 뱀(小蛇).[8]
파일:external/img.ezmember.co.kr/2_1306210103.jpg

진관사. 현재는 대부분 근대에 재건축된 건물들이라서 고려 시절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여담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 현종이 있었던 '신혈사'는 바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위치한
북한산 진관사다. 진관은 위에 언급된 현종을 보호해 준 승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본래 신혈사는 큰
절이 아니라 진관이 혼자 수행하던 작은 암자였는데, 왕위에 오른 현종이 진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신혈사를 큰 절로 증축해 주었고 진관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도 진관사라고 붙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일대의 지명도 이 이름을 딴 진관동이다. (은평뉴타운이 바로 이곳이다).

2.3. 대량원군, 고려의 왕이 되다.[편집]

이리하여, 1009 년, 결국 우여곡절 끝에 현종은 왕위에 오른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내린 조치가
인상깊은데, 교방(敎坊)을 없애고 궁녀 백여 명을 돌려보냈으며, 낭원정(閬苑亭)을 헐어 진기한 날짐승과
길짐승 및 물고기들을 산과 못에 풀어주었다. 이때 현종이 비록 강조가 정변으로 옹립시킨 왕이지만
자신이 내세운 왕의 권위와 예우가 실추되기를 원하는 권신은 없을테니, 현종 스스로의 결정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강조 입장에서는 목종의 명을 받고 왔다가 카더라에 낚여 일을 저질렀으니 억울할
만도 한데다, 안정복은 아예 현종이 정변의 주체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그 후 문무관료를 재편하고
세금과 요역을 경감해 주었다. 또 거란에 사신을 보내고 군량을 비축하고, 현종 개인으로서도 성종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무난하게 정치를 해나가면서 즉위년 12 월에 하교를 내리는데 즉위 이전까지
겪었던 고난과 이후 현종의 치세를 생각하면 마음에 와 닿는 바가 있다.

“이제 짐이 외람되게 왕업을 이어받아 삼가 큰 사업을 계승하면서, 현도(玄菟)의 봉토를 통치하고 하늘이
돌보아 내린 명령을 받들게 되었다. 그동안 백성들을 자애롭게 기르느라 쉴 틈이 없으면서도 하나의 덕
(德)이라도 미덥지 못할까, 혹은 올바른 윤리가 무너질까 늘 염려했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여론을 듣고
단안을 내렸으니 이는 태평성대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얼마 전 가을철이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안개가 걷히지 않았으며 음양(陰陽)이 뒤죽박죽되어 기후가
불순했다. 이에 더욱 성의껏 정무를 돌보면서 스스로를 통절히 자책하느라, 정전(正殿)에 들지 않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며 부지런히 일하면서 마음과 입으로 빌었더니, 과연 하늘의 감응을 받아 날씨가
맑고 화창해졌다. 이로 보건대 성심을 다하기만 하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으며 재난을 복으로 바꿀 수
있음을 알겠다. 이제부터 가일층 성심을 다하고 두려워함으로써 위로 하늘의 뜻에 부응할 것이며, 더욱
나라를 열심히 돌보고 정사에 정력을 다 바칠 것이다. 그러나 나라의 온갖 일들을 혼자서 처리하기는
어려운 법이니 마땅히 신하의 도움을 받아 함께 성현께서 제시하신 도리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깊이 아로새겨야 할 바를 몇 가지 제시하노라.
재상의 직위는 실로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이니 정치에 있어 임금이 빠뜨리는 것을 보완[彌綸]하고
적절한 정책[謨明]을 건의할 것이며 치국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헤아려 왕업을 도우라. 인재를
가려내고 관리를 선발하는 직무를 맡은 사람들은 초야에 묻힌 현인을 잘 찾아내어 그가 버림받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인사에 공정을 기함으로써 아부하는 무리들의 말을 배격하라.
법령과 규율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죄상을 심리하고 판결을 내림에 있어 죄인을 불쌍히 생각해 가혹한
행위나 형벌을 내리지 말 것이며, 정상을 잘 참작함으로써 억울함이 없도록 하라. 국가 행정의 각 분야를
맡은 사람들은 각별히 서로 협조해 직무를 집행[官聯]하도록 할 것이며 자신이 맡은 업무에 성실히 임하라.
또한 청렴을 장려하고 혼탁한 행동을 방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을 것이며, 멸사봉공의 자세에
어긋나지나 않는지 늘 반성하라.
지방의 목민관들은 각자 애민 정신을 간직하고 만물을 아끼는 마음을 잊지 말라. 변방을 지키는
지휘관들은 부대를 잘 조련하여 용맹한 군사를 길러냄으로써 불의의 사태에 힘써 대비하고 군율의 해이를
경계하라. 아아, 너희들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은 밤낮으로 게으르지 말고 시종일관 충성을 변치 말지어다.
아아! 하늘이 가까이 감시하면서 이미 훈계를 내리셨으니 내 마음이 게으르지 않아 이미 하늘에 감응한
바 있도다. 이제 더욱 정성스럽게 나의 행동을 반성함으로써 나날이 새롭게 경사를 더해가기를 기대하노니
그대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려 미래를 보장받기를 원하노라.”

고려사 세가, 현종 원년(1010 년) 경술년

2.4. 거란의 침입과 내정 정비[편집]

2.4.1. 거란의 2 차 침입[편집]

그러나 왕위에 오른뒤 오래지나지 않아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현종 2 년, 요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략을 감행해 온것이다.[9] 결국 현종은 그의 치세에 자신의 목숨과 나라의 존망을 걸고 두
차례에 걸쳐 거란의 침입을 받아야만 했다. 자세한 것은 여요전쟁 항목 참조.

파일:현종의 피난길.png

2 차 때는 요 성종이 40 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오자 실권자 강조가 30 만 대군을 몰고 나가 이를 막으려


하였다. 초반엔 우세를 점했으나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요 성종의 군대에 패배한 강조는 거란군에
붙잡혀 처형당하고, 현종은 호남 지방인 나주까지 피난을 가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것도 피난 도중
지방 호족들의 갖은 행패를 당했다. 호종했던 지채문의 활약으로 딱히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다음 왕조인
조선의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의 진행 상황과 비교해볼만한 대목. 되려 깽판을 쳤으면 쳤지 당하진 않았다.
그래서 임해군과 순화군이 조선 백성의 손에 왜적에게 넘어갔지. 이 와중 끝까지 현종을 호종한 지채문과
채충순은 공신이 되었다. 다른 관료들은 다 도망쳤다고 한다. 그러나 거란의 병사들 역시 몇차례에 걸친
전면전으로 인하여 대단히 피로가 쌓인 상태였고, 양규, 김숙흥 등의 게릴라 전법에 말려들어 심각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더 난장판을 만들지 못하고 물러났다.

2.4.2. 거란의 3 차 침입[편집]

3 차 때는 본격적으로 왕권을 잡고 왕재로서의 재능이 개화, 앞서의 치욕을 잊지 않고 방비를 튼튼히 해서


잘 막아냈다. 거란군 주력이 개경 100 여리 밖까지 어택 땅접근해온 상황이라 위기를 맞았다. 당시 거란
장수 소배압이 이런 작전을 펼친 이유는 고려군 주력이 전부 북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목기병 특유의
기동력을 이용해 북방에 배치된 고려군 주력을 따돌리고 개경을 공격해서 현종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소배압의 의도였던 것.

그러나 강감찬이 동북면의 방어를 수행 중이던 기동대 3 천 3 백을 개경으로 급히 이동시켜 방비를


강화하고 김종현에게 1 만의 군사를 주어 소배압의 후방을 추격하게 하였다. 이때 고려는 극단적인
청야전술을 사용하여 민가 하나, 개 한 마리까지 소개시킨 상황이었고 현종 역시 개경의 성문을 굳게
잠그고 지켰던 데다가 소배압이 탐색전 삼아 3 백의 기병을 개경 주변 금교역으로 파견하자 현종은 1 백
기를 보내 야간 기습으로 거란군 정찰대를 전멸시킨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좀 섬뜩한 기록이다. 상식적으로 적을 상대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보내는


것이 최선이며, 개경의 병력이 충분하다는 것도 거란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다.
굳이 적보다 적은 병력을 내보낼 이유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만큼 당시 개경의 수비 병력이
부족했다는 의미다. 이 1 백 기가 오히려 거란군에게 당했다면 소배압도 결전을 택할 수도 있었다.
현종으로서도 엄청난 도박을 했던 셈이다. 따라서 저 1 백 기도 일반 병사들이 아니라 현종의 근위대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면 진짜 섬뜩해진다. 한편으로는 이런 거란군의 정황을 포착해 내고
기민하게 대처한 개경의 고려군 지휘부의 능력에 찬사를 보낼 만하며 당시 개경 고려군의 사실상의
총사령관이었던 현종의 군사적 능력과 대담함, 용기에도 고평가를 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북방에서 입은 타격도 컸던 데다가 개경의 방비도 만만치 않았고, 보급선이 단절되어 방위군과
추격군 사이에서 포위될 위험을 감지한 소배압은 퇴각을 결정한다. 당시 거란군이 퇴각하자 개경의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면서 개경의 수호신에게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개경에는 송악산의 산신이
밤에 수만 그루의 소나무로 변해 사람 소리를 내자 거란군이 개경의 병력이 많은 줄 알고 퇴각해 버렸다는
전설이 생겼다고 한다. 소배압으로서도 전멸을 피하기 위해 나름 필사적인 선택이었으나 마침내 귀주에서
고려군 주력을 만나게 되었고, 그 결과는 다름 아닌 귀주 대첩이었다(...). 귀주 대첩은 현종 10 년
(1019 년) 2 월 1 일에 있었고, 고려군의 승리를 이끈 강감찬의 개선 행렬은 2 월 5 일에 현종 본인의
영접을 받았다. 현종은 친히 강감찬의 머리에 금으로 된 8 가지의 꽃을 꽂아주었다. 이후 1 년여간 3 차
거란 침입에 대한 전후 복구 작업과 보훈 작업이 이어진다. 이후 현종 11 년(1020 년) 2 월에 현종은
이작인을 거란에 사신으로 보냈다. 거란에게 예전처럼 사대의 예를 다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그러나 사대라고해도 대승을 거둔 이후 상황이니 당연히 발언권에서 고려가 힘을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로서 거란과의 오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기나긴 전쟁을 극복하면서, 현종은 그 와중에 정치 세력들을 잘 다스리고, 쿠데타를 극복하고, 그리고
교과서에서 배우셨겠지만 고려 시대의 본격적인 지방 제도를 정비한 것이 현종입니다. 자기가 나가서 죽을
고생을 해봤잖아요. 왜 죽을 고비를 넘겼을까요? 제도가 정비가 안되어 있으니까요. 지방을 관리가 아닌
토호들이 세력을 키워 다스렸으니까요. 그래서 (현종은) 지방제도 정비하고, 관리들을 보내고,
정치세력을 수합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자기의 치세에, 그리고 전쟁 중에 해내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史 67 부 고려 vs 거란 전쟁 2 中[10]

이렇게 거란의 침입 와중에도 내치적으로도 많은 일을 하였는데, 우선 이 무렵까지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고려의 행정망을 제대로 정비하고 호족 세력을 억눌러 안정화 시킨 다음[11] 방비를 튼튼히
하였으며 동북쪽에서 소란을 피우던 여진족도 격퇴해가며 회유해 나갔다. 이런 조치가 효과가 있어 현종
말년에는 고려에 귀순하거나 우호 관계를 맺는 여진 부족이 늘어갔다.

또한 거란의 침입을 부처의 법력으로 이겨내려고 만든 것이 『대장경』(일명 초조대장경)이다. 당시


송에는 억불 정책이 지나쳐서 많은 불교 경전을 불태워버렸는데 나중에 송은 이를 만회하고자 고려에
불경을 얻으러 올 정도가 되었다. 이런 사정에는 대장경을 바탕으로 한 고려의 높은 문화 수준이 있었던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대반야경 6 백 권, 화엄경, 금광명경, 묘법연화경 등 6 천여 권을 포함하고 있었다.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에는 정교하고 뛰어난 판화가 수록되어 있어 당시 고려 회화의 수준과 경향을
알 수 있다. 본디 세계 최초의 한역 대장경인 북송의 관판대장경을 그대로 수용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실제로 비교해 보면 그 체제가 다르며, 오히려 북송판 보다 글씨가 좋고 정교하게 판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조대장경은 세계 두번째의 한역 대장경으로서 고려의 독자적인 판각으로 당시의 뛰어난
목판인쇄술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12] 그리고 광종 때 벼락을 맞아 무너졌던 경주의 황룡사 9 층
목탑을 현종 때 다시 세우기도 했는데 이 역시 불교의 진흥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하여간에 이로써 고려는 안보 위협도 해소하고 내정에도 집중할 기회를 맞이하여 모처럼 황금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위업을 이루는 과정에서 온갖 인간적이고 국가적인 역경과 고난을 극복한 현종의
나이는 고작 29 세였다. 과연 후세 사가들의 평가대로 왕재가 충만한 군주였다고 하겠다.

2.5. 전쟁 이후[편집]
현종은 이렇게 고난 끝에 왕이 되어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고 지방 행정 체제를 재정비 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으나 오랜 고생으로 인하여 심신이 지나치게 지쳐있던 탓인지 안타깝게도 재위 22 년만에 40
세의 나이로 일찍 승하했다.

3. 치세와 관련된 이야기[편집]

3.1. 현종은 신라계를 중용했나?[편집]

현종이 신라계를 외척으로 가진 아버지 왕욱을 가졌다는 이유로 신라계를 중용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오히려 목종 재위기에 중용된 인물들이 현종 재위기에도 중용되었다는 기록을 종종 발견할 수 있고 당장
현종 자신의 외가부터가 고구려계 해서 호족이다. 당장 이들과 대립했던 천추태후가 사촌 누나이자 이모다.
사촌 형이자 외삼촌인 아 대체 이놈의 족보. 성종의 공주들을 왕비로 들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오히려
현종은 이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또 목종은 서경을 옛 주나라의 수도인 호경이라 부르며 남달리
여겼는데 그 호경에 목종 폐위를 주도한 강조가 서북면(西北面) 도순검사(都巡檢使)로 군사를 이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키긴 했지만, 어쨌든 강조 역시 목종의 최측근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 마디로 목종 폐위와 현종 즉위는 목종 지지 세력과 현종 지지 세력이라는 2 개의 정치 세력이 충돌하여


빚어낸 결과가 아니라, 목종 지지 세력이라는 하나의 정치 집단이 자기들끼리 정치적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결과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종, 김치양, 유행간을 포함해서 7 명 ~ 8 명에 지나지 않았고 귀양을 간 사람도 30 여명 남짓한
정도다.[13] 목종도 김치양 일파가 득세하여 왕권을 위협하자 현종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 최우선으로
보호하려고 했고 현종 역시 김치양 일파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 서신을 보내 위급을 알리고 보호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목종이 충주(忠州)로 유배가던 도중 적성현(現 경기도 연천)에서 시해당한
사건에 대하여 현종은 몰랐었다고 주장했지만 훗날 현종이 적성현에서 공격당할만큼 목종의 죽음과 현종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있었고, 또한 목종의 죽음과 현종의 즉위는 거란(요나라) 2 차 침입의
명분이였으며, 강조는 고려사에서도 열전 반역편에 실린 인물이기 때문에 강조가 즉위시키고 강조가
섭정까지한 현종이 목종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현종은 여요전쟁 당시 나주 지역과 공주 지역으로 몽진하면서 이 지역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몽진 당시 전주의 조영겸의 반란을 겪은 현종은 나주에 머물다가[14] 바로 반란군이 있는 전주를
거쳐 공주로 이동하는데 현종은 전주에 머무르는 7 일 동안 무력으로 조용겸 일당을 진압하고 체포했을
가능성이 높다.[15] 그리고 그 진압 과정에는 몽진 과정에서 떨어져나간 현종 친위 세력보단 현종이
머물던 호남 일대의 군사력이 뒷받침되었을 것이다.

단적으로 현종의 비는 7 명의 왕비와 6 명의 후궁이라는 태조 이외의 왕으로서는 초월적 숫자를 자랑한다.


[16] 이는 현종의 왕권이 약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저 7 명의 왕비 중에서 2 명이 성종의 딸이고, 3
명은 성종이 피난갔던 공주 절도사 김은부의 딸이다. 위에서 언급된 경주 김씨와 호남 세력의 공집합이
바로 이 김은부이다.

당장 고려사에 나오는 태묘악장(太廟樂章)[17]에는 현종의 지역 기반이 된 나주를 외척으로 둔 고려 2 대


국왕 혜종의 업적을 칭송하고 3 대 정종부터 7 대 목종의 업적이 누락되었으며 이 시기 훈요십조의
재등장도 과거 후백제의 중심지였던 반란의 중심 전주의 견제 목적과 함께 나주계인 혜종에게 왕위를
전달하고자 한 태조의 심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전주는 고려 왕실에서 왕실과의
혼인을 허용하는 몇 안되는 가문들중 하나인 전주김씨 가문의 세력기반으로 전주를 견제한다는건
억지스럽다. 공주 지역의 경우엔 아예 이 지역 유지의 딸을 왕후로 삼아 이들로부터 후계자를 보았다.
하여간 이것도 20 세기 말에 나온 오래 묵은 떡밥에 불과하다. 현종은 집권과정이 순탄한 과정은 아니였던
탓에 신하들에게 많이 의지하였다. 삼국사기에 김부식이 '현종은 신라의 외손에서 나와 보위에 올랐으며
그 후의 왕통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니 어찌 음덕의 응보가 아니겠는가'라는 구절에서 신라계의
현종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3.2. 원조 무신의 난 - 김훈·최질의 난[편집]

3 차 침입을 대비하면서 일어났던 것이 바로 김훈·최질의 난. 현종 대의 최질과 김훈의 난은 정말 상식


밖의 상황에서 일어났다. 2 차 거란의 침입 이후 국토가 황폐해지고 거란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군대를
증강시키는 과정에서 국가에서 지급할 전시과에도 문제가 생겼다.

이걸 어떻게 해결했느냐면 중앙 군대인 경군의 영업전을 황보유의를 비롯한 문신들이 자기들 전시과(농봉)
로 돌려버렸다. 때문에 2 차 거란 침입을 맞섰던 무신들을 엿먹여버렸다. 주요 인물인 최질과 김훈이 2 차
거란 침입에서 공을 세워서 최고 관직인 상장군 까지 올라간 최상급 무신들이었다. 게다가 중앙 군대의
구성원들까지 손가락 빨게 만들어버렸다.

더구나 1012 년, 그러니까 반란 2 년 전에 요 성종은 강동 6 주를 무력으로 탈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뒤였으며 이 해는 이미 거란과 산발적인 전쟁 중이었다. 흔히 여요전쟁에 대해서 1 차는 993 년, 2
차는 1010 년 ~ 1011 년, 3 차는 1018 년 ~ 1019 년으로 묘사되지만 실상을 보면 1011 년에서 1017
년까지도 거란은 지속적으로 고려의 강동 6 주를 공격하고 있었다. 고려도 피해를 많이 입기는 했지만
강동 6 주의 방어선에 가로막혀 거란 또한 고려의 땅을 하나도 빼앗지 못했다.

그러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치졸한 병크가 따로 없다. 결국 월급이 안나와서 최질과 김훈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들은 현종에게 위협이 담긴 호소로 월급 뺏아간 문신들을 귀양보내고 무신정권을 세웠다.
또한 무신들은 영업전의 반환은 물론 6 품 이상의 모든 무관들에게 문관직을 겸하도록 요구했으며 현종은
이를 들어 주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현종이 이자림[18]의 계책으로 무신들을 왕궁에 초청해서 연회를
베푼 다음에 술에 취한 장군들 19 명을 모조리 잡아 죽이면서 싱겁게 끝이 났다. 실질적으로 최초의
무신정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비중이 작은 사건이다. 애초에 원인이 그 따위라서
언급하기도 뭐한 사건이지만.

또한 이런 실책을 저지르긴 했지만 현종은 뒷수습을 잘 했다. 19 명 이외에 가족은 하나도 처형하지
않았고 아들과 동복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영원히 등용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그러므로 이
사건 때문에 나라에 무신이 없어서 문신인 강감찬이 활약해야만 했다는 식의 해석은 옳지 않다. 애당초
고려나 조선이나 전쟁의 총사령관이나 주요 지휘관은 문관이었다.[19] 또한 이 일 이후 무관에 대한
예우도 격상시켜서 전몰자에 대한 예우를 높여주고 거란 전쟁 중 전사자에 대한 보상도 늘렸으며 군공자는
병사들까지 1 만여명 씩 포상을 줬다.

이게 별거 아닌 조치 혹은 당연한 조치 같지만 재정 문제나 관등의 인플레 등 여러 상황을 감안해야 하고


리스크도 꽤 큰 대대적 조치이다. 하지만 이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멀리 갈 것 없이 현종은 요와
전쟁을 벌였다. 애초에 전쟁중인 상황에서 군인들 월급 횡령하면 당장 칼과 창이 어느 방향을 향할지는
뻔한 일이다. 멀리 갈 것 없이 현종 스스로가 강조의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인물인데, 김훈과 최질의
난이 발생했다는 것 부터가 왕이 중앙 귀족들 통솔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질과 김훈의 난이
터진 상황에서도 계속 저 상황을 끌고 갈 수는 없다. 저 조치의 리스크가 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걸
안했을 경우 2 차 반란의 가능성 마저 생긴다. 밥 굶으면서 싸우는 병사는 없는 법이다. 이러니 현종도
저런 조치를 취하고, 기존 문신들도 이를 반대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교훈을
잊어서 터지는 것이 진짜 무신정변이다.

덧붙여 오늘날의 국가 기념일인 현충일은 거란 전쟁 전몰자에 대해 24 절기 중 하나인 망종에 제사를


지내던 전통을 감안한 것이다. 달력을 보면 현충일과 망종이 같이 써 있는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인 것.

4. 평가[편집]

일생 동안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었으나 이것을 모두 극복하고 고려 왕조의 전성기를 연 중흥의 군주로,


고려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을 자격이 충분한 인물이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거의 만화나
판타지 소설 속의 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삶을 산 인물. 당대 인물이었던 최충은 주나라의 성강지치와
한나라의 문경지치와 비교해도 꿀릴 게 없다고 평가했고, 고려 말 이제현은 나는 현종에게서 아무런 흠도
찾아볼 수 없다고까지 했다. 무엇보다 현종이 3 차 여요전쟁에서 적의 침공이 있음에도 꿋꿋하게 도성에
남아 수비에 임전했던 점은 한국 역사상 드문 일이다.

비판하는 쪽에서는 (결과적으로) 외교 실패로 인해 하지 않아도 되는 전쟁을 하게 만든 왕이라는 평가도


있고, 2 차 침입에서의 몽진이나 할 때의 안습한 모습이라든지 전후에 무장들을 죽인 일도 있어서 흠잡을
수 없는 왕 정도는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뿐만 아니라 둔전을 절간에 바쳐 문무왕만도 못했다는 평도
있다. 더욱이 동사강목에선 반란설까지 제기할만큼 왕이 죽자 어떠한 절차도 없이 왕에 올랐다. [20]

그러나 화려해보이는 전쟁보다는 겉멋은 떨어질지라도 전쟁을 딛고 국가를 발전시킨 공이 크다. 정치,
외교 면에서는 사실상 전왕인 목종과 천추태후의 실책을 떠맡았다는 점과 갑자기 왕위에 올라 정권 기반이
취약한 편이었다는 점에서 위에 대한 비판에 대해 충분히 옹호가 가능하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거란의 2
차 침입은 현종으로썬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현종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허수아비
왕이었고, 이 당시 실권은 강조에게 있었다. 거란의 침공도 강조의 변을 핑계로 감행된 것이었고, 몽진도
강조가 고려군 주력 부대를 데리고 나가 싸우다가 개발살 난 상태라 현종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2 차 침입 때 몽진을 가지고 현종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때 몽진을 주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강감찬이다. 다른 신하들은 항복을 주장했는데 강감찬만 홀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며 몽진을 주장했고
현종도 이를 따른 것이다.

일단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에서 해명을 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에 대해 우리가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있어요. 예를 들면 수도를 버리고 후퇴하는 건 서양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단, 이건 있어요. 봉건 영주가 적이 쳐들어 왔는데 도망가잖아요? 그러면 주변 모든 인물들에게
인망을 잃어 버려요. 왜? "내가 영주로써 군림하고 세금을 받는 것은 너희들을 지켜주기 위해서야!"(라는
것이 당시 사회 시스템이었으니까요). 산적이 쳐들어 왔는데 보안관이 도망을 쳤어. 그러면 보안관은
끝이죠. 하지만 왕은 보안관이 아니에요. 보안관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사람이지.
그러니까 왕이 전쟁을 포기하고 제 할 일을 안했느냐, 이 기준으로 왕의 잘못을 판단해야지, 피난 간
것이 비겁하다고 말할 순 없는 거예요.

현종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항복하고 거란군을 돌려 보내는 것이 나았을 거에요. 왜냐하면 왕 된지도 얼마
안 된 기반도 안된 현종이 거란 황제에게 "항복하겠다. 대신 당신이 나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면
현종의 입지는 (거란 황제의 도움을 받아) 더 단단해졌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후퇴했다는 건 끝까지
싸우겠다는 거 거든요? 그리고 이 후퇴 길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생각하듯 편안하게
도망간게 아니거든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史 67 부 고려 vs 거란 전쟁 2

별개로 강감찬은 이때 몽진을 수행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정황상 혼자 다른 곳으로 도망친 것으로
보인다. 후일 현종은 이런 식의 결례를 문제 삼지 않고, 강감찬을 크게 중용한다.# 김훈, 최질의
난이나 이런 강감찬에 대한 처우를 보면 의외로 뒤끝은 별로 없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고려의 국력 신장을 이끌어 태평성대의 기반을 닦은 명군이며 그의 아들 세 명이 왕이 되는 기염을


토하는데(덕종, 정종, 문종) 아들들도 명군이 되어 모두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갔다. 세 아들 간에는
형제상속으로 이어졌고 넷째인 평양공 기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다. 고려는 예종, 정치적인 면을
제외하면 인종 시대까지 태평성대를 누렸다. 문종의 세 아들(순종, 선종, 숙종)과 인종의 세 아들 (의종,
명종, 신종)도 줄줄이 왕이 되었으나 그다지 좋지 못한 경우이다. 앞서 태조 왕건의 세 아들인 혜종 -
정종 - 광종도 그리 모범이 될 만한 사례가 아니다. 비록 요절이 원인이었지만 고려에서는 현종의 세
아들들이 줄지어 형제 상속을 통해 왕위를 받아 성군이 된 유일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고려의 전성기를 연 임금. 또한 목종 대에서 사실상 끊길 뻔한 직계 왕통을 이어받고 후대


왕들의 맥을 이어줬다는 점에서 여러 의미로 고려 왕조에서 가장 중요한 군주 중 한 명임은 틀림없다. 말
그대로 만화 (나루토?) 내지 판타지 소설속에서나 등장할 만한 파란만장하고도 성공적인 생애를 살다 간
인물. 그러나 그가 가진 역사적 입지나 중요도에 비해 대중적으로는 그다지 잘 알려진 왕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극적인 생애를 살았던 것에 비해 이상하리만큼 대중 매체에서 다뤄진 적도 거의 없는 편이기도
하고.

삼국지 최후의 승자인 사마염과 자(字)가 같다. 둘 다 자가 안세(安世). 그러나 군주로서 현종 쪽이


비교가 미안해질 수준으로 넘사벽이다.

파일:attachment/6000198576_20090309.jpg

북한 개풍군 중서면에 있는 현종의 선릉(宣陵). 능역 앞은 옥수수 밭이다. 그래도 현종의 선릉은 고려


왕릉 중 그나마 보존이 잘 되어 있는 편에 속한다.

5. 사극[편집]

미천왕과 마찬가지로 별로 각색을 안 해도 사극화하기 안성맞춤인 서사구조를 가진 임금인데도 사극의


주인공이 된 적은 없는 임금. 출연한 드라마는 하나 있긴 했지만 주역도 아니었었고 드라마도 안습이었고.
그래서인지 천추태후 방영 후반에는 '차라리 현종을 주인공으로 했었으면 좋았겠다'는 소리도 많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현종의 일대기를 되짚어 보면 그의 인생은 RPG 형 사극. '성장형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사극에 딱 맞다. 게다가 사극에서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들을 고증에 맞춰서 넣는게 가능하다.

•1) 불륜 관계로 출생

◦허구헌날 막장 드라마에서 불륜 떡밥을 써서 비판을 받는데 현종은 진짜 불륜 관계에서 태어난 사생아다.

•2) 권력 다툼으로 궁에서도 쫒겨나고, 죽을 위기를 수차례 넘기며 고생함.

◦선덕여왕이나 근초고왕과 같이 실제로 있지도 않은 주인공의 고생담과 암살 떡밥을 넣는데 현종은 진짜로
궁에서 쫒겨나 개고생하고 죽을 위기를 실제로 수차례나 넘겼다.

•3) 복귀하여 고려 국왕으로 즉위

•4) 내우외환으로 인한 고난을 겪음. 그리고 모두 극복

◦강조의 정변으로 인해 국가 내부가 대단히 어지러운 상황에서 여요전쟁으로 인해 수도 개경을 포기하고


나주까지 험난한 피난을 해야 했고, 도중에 거란군과 수십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3 차 침입 때는 떳떳하게 개경을 지키며 강감찬의 귀주 대첩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5) 왕조의 태평성대를 연 명군으로 기록됨

어쨌든 천추태후에서의 현종 역을 맡은 배우는 성인 배역 김지훈. 특이하게도 현종 역으로 출연한 아역


배우는 3 명이었다. 현종의 아버지 안종(경주원군)은 김호진이었고 어머니인 헌정왕후는 신애가
출연했었다. 불륜 출생이나 초반의 고난은 묘사되긴 했었지만 아무래도 극의 주역이 천추태후다 보니 그리
비중이 크지는 않았다. 신혈사로 가게 된 것도 천추태후가 현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묘사되며 김치양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주지 스님이나 강감찬 등의 보호를 받는 것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결국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한다.

즉위 직후에도 거란의 침공으로 피난을 가면서 고생하는 것도 나왔고 돌아오면서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무릎을 꿇기도 했었다. 그 후 강감찬 등의 활약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천추태후와 함께 농사 짓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극의 마지막을 장식. 하지만 여요전쟁 자체가 상당히 간략화 되어버린 탓에 현종의
전쟁 대비나 업적 등은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다.

9 대 덕종 왕흠 (1016~1034) 재위 10031~1034

"효성스러웠고 명신들을 등용하여 조정을 잘 이끌었으며 백성들도 편안히 생활했으니 '덕(德)'이라는


이름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제현

"나면서부터 숙성하고 성품이 강직하며 과단성이 있었다. 장성해서는 벽돌을 밟기만 하면 깨어지니
사람들은 그의 덕이 무겁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려사》 세가, 덕종 3 년 9 월 계묘일

1. 소개[편집]

짧은 치세와 요절 때문에 과소평가를 받는 명군


고려판 조선 문종

고려의 제 9 대 국왕. 묘호는 덕종(德宗), 시호는 선효강명광장경강대왕(宣孝剛明廣莊敬康大王). 휘는 흠


(欽). 자는 원량(元良). 현종의 장남.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1016 년 5 월 2 일,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현종과 원성왕후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020 년에
연경군(延慶君)에 봉해졌고 1022 년에 태자에 책봉된 후 1031 년, 부왕 현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국란을 극복한 용기 있는 군주였던 부왕 현종의 기질을 이어받았는지 어린 시절부터 결단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부왕이 붕어하자 16 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선정을 펼쳤다.

2.2. 거란과의 갈등[편집]

1031 년, 거란은 성종이 죽고 흥종이 즉위했다. 성종의 장례식이 준비되던 기간 동안 거란은 압록강
유역에 부교와 여러 보루를 쌓아두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이를 파괴할 것과 거란과의 전쟁 때 포로가 된
고려인들을 송환할 것을 요구했는데 거란이 이를 거부하자 당대의 중신이었던 서눌(서희의 아들)과
왕가도는 "이놈들이 우리 말 쌩까니 정말 어이가 없네요. 그냥 사신 끊죠"라고 진언, 덕종은 이를
받아들여 거란으로의 사신 파견을 중단하고 흥종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전황 요성종의 연호인 '
태평(太平)'을 계속 사용했다. 거란 흥종이 사용한 연호는 경복(景福)과 중희(重熙)였는데 이 해의
연호는 경복이었다.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여 변방의 요새를 축성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당시 거란은 성종의 죽음 전후로 나라가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지도층은 분열하고 국력이 심하게 기울어
가던 상태였다. 결국 1032 년 3 월에는 거란의 정국 혼란으로 고선성, 고진성, 최운부, 이운형 등 20
명에 달하는 거란의 중앙관료 출신 귀족들이 대거 고려에 망명하였고, 4 월에는 고위관료 해가, 내을고 등
30 명이 귀순, 6 월에는 우응, 약기 등 50 여 명이 망명하였다. 덕종은 이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급기야 1033 년 10 월에 거란군이 정주에 침입하자 이를 격퇴하기도 했다. 고려 북계의 천리장성 수축이
시작된 것도 바로 덕종 시대.

命平章事柳韶, 創置北境關城.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를 시켜 북쪽 국경에 관성(關城)을 축조하도록 했다.

2.3. 내치[편집]

내치에도 힘써 처음으로 국자감시를 시행하여 폭넓은 인재 등용의 체계를 마련했다. 국자감시는


국자감에서 실시한 예부시의 예비 시험인데, 이게 왜 중요하냐면 이 시험을 시행하면서 처음으로 중앙의
국자감생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선발된 인재들에게도 응시 자격을 주었기 때문. 그만큼 인재 등용의 폭이
넓어진 셈이다.

또한 전시과를 개정하고 현종 때부터 복원하기 시작한 '7 대 실록'의 완성을 보는 등의 치적을 남겼다.

2.4. 최후[편집]

이렇듯 어린 나이에 아버지 현종의 뒤를 이어 고려의 태평성대를 잘 이끌어 나갔지만 불행하게도 몸이


병약했다. 그 때문인지 재위 3 년만인 1034 년 9 월에 병석에 누웠고 왕위를 동생 평양군 왕형(정종)에게
물려준 뒤 19 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이 탓인지 어린 나이와 짧은 치세에 비해 훌륭한 치적을 남겼는데도
거의 언급되지도 않고, 덕종이라는 군주가 고려에는 커녕 한국사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3. 기타[편집]

부인이 다섯인데 이 중 둘이 이복 여동생들이다(...). 고려 왕조 특유의 근친혼의 대표적인 사례.

덕종의 1 비 경성왕후는 1034 년(덕종 3 년) 음력 2 월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왕비에 책봉된 해에 남편


덕종이 사망하였으며, 경성왕후는 52 년을 더 살다가 1086 년(선종 3 년) 음력 7 월 23 일에 사망하였다.
효사왕후 역시 덕종의 누이로 현종과 현종의 제 4 비인 원혜왕후의 딸이며 후에 왕위에 오르게 되는
문종과는 동복 남매이다. 덕종의 모후인 원성왕후와 효사왕후의 모후인 원혜왕후는 모두 김은부의 딸로
친자매 사이(...)이며, 이에 따라 덕종과 효사왕후는 이종 사촌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두 왕후의
원래 성은 왕씨이나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김씨로 바꾸었다고 보인다.

2 비 경목현비는 3 비 효사왕후보다 서열이 높으나 품계가 그보다 낮은데 여기엔 조금 복잡한 이유가 있다.
사실 경목현비는 덕종의 1 비였지만 서열이 밀렸다. 1 비 경성왕후, 3 비 효사왕후와 달리 그녀의 아버지
왕가도는 귀족[1]이었고 후에 왕가도가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입지가 흔들렸기 때문에 품계가 더 올라가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덕종과 경목현비의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지만 요절해, 덕종에겐 후손이 없다.
10 대 정종 왕형 (1018~1046) 재위 1034~1046

1. 소개[편집]

고려의 제 10 대 국왕. 묘호는 정종(靖宗), 휘는 형(亨), 자는 신조(申照). 현종의 둘째 아들이자


덕종의 동생.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5 세가 된 1022 년에 내사령 평안군에 책봉되었고, 1027 년에는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겸 내사령이 되었다.

2. 생애[편집]

2.1. 업적[편집]

고려의 최고 전성기이자 황금기인 문종 시기를 완성하는 주요 정책들이 만들어지고 준비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재위 기간이 짧지는 않은데 이미지는 가장 희미하다. 고려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태평성대의 시기인데, 안정된 시기여서 그런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현행 교과 과정이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같은 것에서도 광종과 성종, 거란의 침입을 거쳐 여진 정벌로


넘어간다(물론 천리장성 축조 등과 같은 부분적인 요소들을 다루기는 한다). 더불어 역사저널 그날에서도
거란의 침입 다음 곧바로 여진정벌을 다루었다.

왕위에 오른 정종은 선대 왕인 덕종의 외교 방침을 계승했다.1035 년 5 월에 거란에서 "너네 형 때 싸우고


나서 너네랑 우리 사이 안좋은거 알지? 근데 넌 너네 형보다 더 적대적이다? 자꾸 이런식으로 나오면
너네 x 되는 수가 있어"라는 일방적인 화친 요구를 해오자 정종은 "너네가 똑바로 하면 사이가 좋을 텐데?
왜 자꾸 딴소리를 하시나?"라며 되돌려 받지 못한 고려 사신 6 명의 송환과 압록강에 건설한 다리를
철거하라는 덕종의 요구를 재차 강조했다.

그와 더불어 거란의 침입을 대비해 그해 서북로에 장성을 쌓고 군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는 등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고 1037 년 10 년 거란이 해군을 동원해 압록강을 침범하여
공격하자 오히려 고려 정부는 자신감을 내비쳤고 결국 거란의 해군을 동원한 침입은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나게 되었다. 이후 거란 측에서 고려의 강경 대응에 억류했던 고려 사신 6 명을 모두 풀어주는 등
고려의 요구를 모두 수용, 정종도 거란과의 국교를 다시 정상화 한다.

그러나 국방을 강화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1044 년에는 천리장성을 완성시켰으며, 예성강의 병선
180 척으로 군수 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는 등 국방 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외교 문제를 정리한 뒤 내정에 힘을 쏟은 그는 노비종모법을 제정했다. 바로 "노비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야 한다."라는 내용. 사실 이건 악습이라고 볼 수 있는데 대부분 남성 양민이 여성 노비와 관계를
맺고(대부분이 강제였을 것이다) 아이를 낳았기 때문. 이후 조선조 태종이 노비 종부법으로 개정해
아비의 성과 신분을 유지토록 하려 했으나 그의 아들 세종 (훈민정음을 만든 분 맞다.)이 다시
노비종모법을 유지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꿨으며 세조 때 이르러서야 일천즉천의 법칙이 적용된다.

1046 년에는 장자 상속과 적서의 구별을 법으로 정하기도 했다.

2.2. 붕어[편집]

재위 기간 동안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나라를 이끄는 것이 부담이 되었는지 재위 12 년만에


29 살의 나이로 붕어했다. 이전에 정종은 자신이 붕어할 것을 예상하고 낙랑군 휘를 불러 왕위를 물려준
후 그 다음날인 5 월 18 일에 붕어했다.
3. 기타[편집]

•덕종과 정종의 할아버지이자 현종의 친아버지 왕욱(王郁)은 안종으로 추숭되었으나, 주요한 신주에
오르지 못했다. 그보다는 성종의 아버지 왕욱(王旭)이 대종으로 추숭되어 신주에 올랐다. 이후 덕종 사후
덕종을 신주에 올리느냐라는 문제에서 바로 한국 역사상 첫 예송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미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대종으로 5 묘가 가득찼기 때문이었다. 여하간 조용한 시대였다.

•강력한 지진 크리를 맞기도 했다. 1035 년 6 월에 개경에서 지진이 일어났고 8 월과 9 월에는 개경과 동경
(현 경주시) 지방의 19 개 주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다음해인 1036 년 6 월에는 서울, 동경, 상주,
광주에서 지진이 일어나 가옥들이 무너졌으며 이중 동경에서 일어난 지진은 3 일동안 지속되었다고.

그리고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비가 제때 내리지 않아 죄수를 사면하거나 본인의 반찬수를 줄이는 등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만만치 않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참고로 자연재해는 기록이 부족하거나, 의외로
왕들이 정치를 잘했을 때 자주 나온다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사관들은 정치가 시끄러우면 자연재해보다
그 것에 중점을 둬서 기록하기 때문.

•광종 이후 처음으로 왕실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왕이다. 용신왕후와 용의왕후는 자매로 한조의 딸들이고,
용목왕후는 공부시랑을 지낸 이품언의 딸이다.

11 대 문종 왕휘 (1019~1083) 재위 1046~1083

1. 개요[편집]

고려의 체제를 완성시킨 성군.

고려의 제 11 대 임금. 묘호는 문종(文宗), 시호는 강정명대장성인효대왕(剛定明大章聖仁孝大王).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현종의 아들.

현종 시대부터 이어져오던 고려 역사의 황금기를 꽃피웠고, 동시에 고려 문벌 귀족 정치를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왕이다.[1] 세종대왕의 명으로 편찬된 고려사에도 "문종 시절에는 백성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다."라고 평했다. 이런 평가를 받을 만큼 문종의 치세 37 년 동안 고려는 사회, 외교, 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발전을 이룬다.

2. 즉위 이전[편집]

文宗章聖仁孝大王 諱徽 字燭幽 古諱緖。顯宗第三子 母曰元惠太后金氏。顯宗十年己未十二月癸未生 十三年


封樂浪君 靖宗三年 冊爲內史令。十二年五月丁酉 靖宗薨 卽位于柩前 百官奉國璽 詣重光殿朝賀。
문종 장성인효대왕의 이름은 휘(王徽)이고 자는 촉유(燭幽)이며 원래 이름은 서(緖)이다. 현종의 셋째
아들로 모친은 원혜태후(元惠太后) 김씨(金氏)이다. 현종 10 년 기미년 12 월 계미일에 태어나 같은 왕
13 년 낙랑군(樂浪君)에 책봉되고 정종(靖宗) 3 년에는 내사령(內史令)으로 임명되었다. 정종 12 년 5 월
정유일, 정종이 죽자 그 영구 앞에서 즉위하니 백관들이 옥새를 받들고 중광전(重光殿)에 나아가
하례했다. -

《고려사》 문종 총서
王幼聰哲 及長 好學善射。志略宏遠 寬仁容衆 凡所聽斷 不復遺忘。
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장성해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활을 잘 쏘았다. 품은 뜻이 웅대했고 사람들을
관대하게 포용했으며, 한 번 결재했던 일은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고려사》 문종 37 년

부왕은 여요전쟁을 치른 고려 현종. 모후는 원혜왕후 김씨다. 어릴 때부터 활을 잘 쏘았고 학문을


좋아했다고 한다. 1037 년에 황실의 출납을 담당하는 내사성(內史省)의 수장인 내사령(內史令)에 올라
정종을 돕다 1046 년 정종이 붕어하자 유언에 따라 왕이 되었다. 정종이 아들이 있음에도 문종에게 선위한
이유는 태조 왕건의 훈요 10 조 제 3 조에 따른 것으로 보여진다.

내사령(內史令), 낙랑군 왕휘는 짐이 사랑하는 동생으로서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공손하고 검약한 성품이
이웃 나라까지 알려졌으니 그에게 왕위를 전해 밝은 빛을 나타내게 하리라.

정종의 유언

3. 고려의 전성기를 이룩하다[편집]

3.1. 내치[편집]

즉위하자마자 문하시중 최충에게 명하여 율령(律令), 서산(書算)을 정리하도록 명하였으며, 불교를


증흥시키고 치세 기간 중 측신인 이자연과 최충을 통해 문치 정책을 펼쳤다.

3.1.1. 쓸데없는 낭비를 줄이도록 하라[편집]

制曰 諸州府郡縣 逐年盛設輪經會 慮外吏憑此聚斂以成勞弊。今後醉飽娛樂之事 並宜禁斷。

(2 월) 정유일. 왕이, "모든 주(州)·부(府)·군(郡)·현(縣)에서는 해마다 성대하게 윤경회(輪經會)를


여는데, 외리(外吏)들이 이를 핑계로 재물을 거두어 백성들을 괴롭히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된다.
금후로는 거창하게 술자리를 벌이거나 풍악을 울리는 일을 모두 엄금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고려사》문종 정해년(원년)

28 살의 젊은 왕 문종은 즉위하자마자 선왕인 정종이 마련한 안정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고려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각 지역마다 강제적으로 열려 외리들의 사리욕을 챙기는 윤경회를
폐지한 것이다. 윤경회는 불교의 경전을 여러 사람이 서로 돌리는 의식으로 불교 의식 중 하나였으나 그
규모가 커지고 방대해져 필요한 돈이 많아지자 이로 인한 폐단이 생겼다. 문종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윤경회의 놀이화를 엄격하게 금했다.

또한 왕이 검소해야 나라가 검소해 진다며 금은으로 장식된 왕좌와 발디딤팔을 동과 철로 바꾸고 금실,
은실로 짜여진 이불과 요는 모두 견직으로 교체하였고 환관을 10 여명으로 축소시켰다.

3.1.2. 억울한 사람이 옥살이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편집]

戊申 制曰 法律刑罰之斷例也 明則刑無枉濫 不明則罪失輕重。今所行律令 或多訛舛 良用軫懷 其令侍中崔冲


集諸律官 重加詳校 務從允當。 書算業 亦令考正。
(6 월) 무신일 왕이 말하길, "법률은 형벌을 부과하는 기준이니, 그것이 명백하면 억울하거나 지나친
형벌이 없게 되고 명백하지 못하면 형벌이 공평성을 잃게 된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율령 가운데 어떤
것은 오류가 많아 매우 우려되는 바가 있으니, 시중(侍中) 최충으로 하여금 율관(律官)들을 모아 다시
세밀하게 검토한 후 적합하게 고치도록 하라. 서업(書業)과 산업(算業)도 역시 잘 검토해 바로잡도록
하라."

문종 원년 6 월 기사

문종은 범죄자들이 억울하게 옥살이 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신경을 썼다. 원년에도 위와 같이 최충에게


법을 개정토록 하였고 이어 1047 년 8 월에는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하여 한번 죽은 자는 다시 살릴 수
없다. 짐(朕)은 사형수를 판결할 때마다 반드시 세 번 심사를 하고도 오히려 실정에 어긋나지 않았을까
염려해 왔다. 그럼에도 억울함을 하소연할 길이 없어 한(恨)을 품게 되면 가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으니, 법관들은 부디 잘 살피고 조심하라."라며 삼복제(三覆制)를 시행토록 했으며 1061 년인 문종 15
년에 "지금부터는 형조의 관리들을 정선해 일을 맡김으로써 억울한 형벌을 당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리는등 억울한 백성이 발생하는 것에 안타깝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는데 다음해인 1062 년에 죄수
심문에는 반드시 형관 3 명 이상을 입회해하여 최대한 공정한 조사가 이루어 지도록 하는 삼원신수법(三員
訊囚法)을 마련해 불의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처럼 문종은 억울한 죄수가 생기는 것을 염려해 최대한 벌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아래 나오는 거신의 난
때도 주도자인 거신을 제외하면 유배하는 선에서 그쳤다. 보통 반역죄에 해당하는 짓을 했을때 왕들은
해당 가문을 아작내는 데, 그에 비하면 정말 파격적인 판결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전 기록들에도 죄수들의
건강과 억울하게 수감된 죄수가 있는지 염려하거나 본인이 직접 재심사를 하는 기록들이 자주 나온다.

3.1.3. 중앙 집권의 강화[편집]

이전까지 고려는 중앙 집권을 위해 지방의 호족과 향리들의 힘을 빼기위해 노력했었다. 성종 대에


처음으로 관리를 지방에 파견했고 이후 현종, 덕종 조를 거치며 지방에 대한 직접 통치를 강화해 나갔는데
이를 문종이 대대적으로 손을 봤다. 기존 12 주에 절도사를 배치했던 제도를 폐지하고 5 도호부 75 도로
나누어 안무사를 배치했다. 그후 4 도호부 / 8 목 / 56 지주 / 56 군사 / 18 진장 / 20 현령으로 다시
개편했다. 그리고 한양부를 남경(南京)으로 승격시켰다. 이는 개경과 서경, 동경의 기존 기득권 세력을
견제한다는 의미를 두고 있는데, 훗날 숙종은 남경개창도감을 두어 이궁까지 지었다.

그 뒤에도 1077 년엔 향리의 자제를 개경에 머물도록 해 지방 호족들의 힘을 빼놓는 선상기인법(選上其人


法)이 제정되었다.

3.1.4. 고려의 조세 제도를 완성시키다[편집]

재위 3 년째인 1049 년에 현직 귀족들에게만 토지를 내렸고 공음전을 지급하는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이


시행되었다. 이 법은 5 품 이상의 고급 관료들에게 상속이 가능한 일정량의 토지를 지급해 양반 신분
유지에 필요한 재정을 지원하는 법. 공음전시법은 상속과 매매가 가능한 공음전시를 내리는 별도의 법률로
이걸 1049 년 시행해서 고위 귀족들에게는 피해가 없게 만든 다음에, 퇴직 관리에게는 전지를 주지 않는
경정전시과가 1076 년 시행되는 것이다. 사실상 고위 관직에 대한 땅 몰아주기에 가깝다는 평도 있다.
또한 이 공음전이란 게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거라 말도 많았다.

이는 경종이 976 년에 시행한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라는 토지 제도를 실시한 것을 목종과 덕종이 개정을


했고 이것을 다시 문종이 공음전시법으로 개정한 것이다. 원래 이 공음전시법은 관리들의 생활을 안정화
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고위 관리들이 백성들에게 수탈하는 것을 방지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좀더
안정적으로 바뀔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문종이 시행한 것이었다.[2]

이듬해인 1050 년엔 기상 이변 등의 천재지변으로 피해를 입은 농민들에게 피해액에 따라 세금을 면해주는


재면법(災免法)과 현지 수확 상황을 지방관이 조사한 후 농작의 피해 정도에 따라 세금을 줄여주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제정하였다.

1054 년에 전품제(田品制)를 도입하였는데, 이는 해마다 경작할 수 있는 땅을 상전, 1 년 경작하고 1 년


쉬어야 하는 땅을 중전, 1 년 경작하고 2 년 쉬어야 하는 땅을 하전으로 하여 등급별로 나눈 땅에 세금을
다르게 매기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의 세금 부담이 크게 줄어들게 만들었으며 1076 년 12 월에
기존의 전시과 제도를 약간 손을 본 갱(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를 시행했는데 이 제도는 고려가 망할
때까지 토지 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이때 왕건이 부분적으로 시행한 이래 간간히 유지되던 녹봉제(
현물이나 쌀을 월급으로 지급하는 제도)를 실시했다. 또한 직책만 있고 빈둥빈둥 놀던 월급도둑. 별다른
업무를 하지 않는 관리들에게도 지급되던 토지를 더이상 지급 하지 않기 시작한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현안은 토지 지급 대상자인 공신과 관리들 수가 늘어나 토지가 크게 부족했기 때문에 시행한 것이다.

3.1.5.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꾀하다[편집]

문종은 자신의 넷째 아들 의천을 포함한 총 3 명의 왕자를 출가시키고, 성종 때 폐지된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부활시켰는데 이를 통해 고려의 국교인 불교가 다시 융성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승과(僧科), 왕사
(王師), 국사(國師) 제도를 완성시켜 승려들에게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반면 이러한 승려들의
우대를 이용해 신분 상승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1059 년 8 월, 아들이 3 명 이상인 집에 한해 15 살
이상인 아들 1 명만 출가가 가능하도록 제한하는 칙서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불교의 발달은 사찰과 승려들이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고 술과 고기를 먹는 등 세속화 되는
모습들이 보여지게 되는데 1056 년에 문종이 "승려답지 못한 자에겐 엄히 벌을 내릴 것이다."라는 칙서를
내리기도 했다.

이처럼 불교가 부흥하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문종은 유교의 발전도 같이 꾀했다. 그는 직접 문묘에 배항된
설총과 최치원 등을 존숭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3.1.6. 흥왕사 창건[편집]

1067 년에 전무후무한 규모의 흥왕사를 창건한 것으로 유명한데 어느 정도냐 하면 완공에 13 년이


걸렸으며 총 2 천 8 백 간으로 규모가 궁궐에 아슬아슬하게 못미쳤다고한다. 문종은 또 여기에다 금 144 근,
은 427 근을 들여 금탑을 조성하였으며, 절 주변 성벽까지 둘러쳤다. 여기 거주하는 승려만 수천명 규모.
각종 불교 행사를 주최해서 하루 걸러 하루씩 불교 행사를 빙자한 풍악 소리가 끝이지 않았고, 도성
백성들은 먹고 마시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비대해진 대신 세력을 견제하고 전란으로 지친
백성들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실제로 이후 의천이 주지가 되는 흥왕사는 왕권 강화를 위한 중심
사찰이 된다.)

이 시기 교종 파벌들은 모두 문벌 귀족과 연결되어 있었고, 왕실은 광종의 불교 통합 운동이 실패한 이후


가끔 사찰이나 세우면서 한축만 챙기고 있었던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교종을 왕권 강화 차원에서
통합하려고 한 것이 의천이었다.

참고로 훗날 유학자였던 이제현은 "문종께서는 고려 역사상 채고의 왕이시다."라고 하면서도 "근데


궁궐보다 사치스러운 절 만든건 나라 말아먹은 양무제의 뻘짓과 동급이여서 까야댐."[3]이라며
디스하기도 했다.

3.1.7. 무관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다[편집]

문관의 힘이 강력했던 고려 초중기에 무관에 대해 혜택을 주었던 것도 바로 문종이다. 무반이었던 상장군


(上將軍)을 6 부의 상서보다 높은 단계인 제 3 과에 배분하는 당시로썬 파격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했는데
고려 현종 당시 외세의 침략을 겪은 것을 반영해 나라를 이끄는 것 만큼이나 나라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판단, 이와 같은 정책을 펼쳤다.

3.2. 외교[편집]

고려 전성기답게 국력이 증가해 비록 요나라(거란)와 송나라의 연호를 쓰고 그들을 상국으로 대하긴


했지만, 고려는 그들 나름대로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었고 요와 송도 고려를 함부로 대하진 못했다.

대표적인 예로 최종필의 이름 강제 개명 사건이 있는데, 사건 내막은 이렇다.

1055 년 10 월, 거란(요나라)의 예부(禮部)에 갔던 호부시랑(戶部侍郞) 최종필(崔宗弼)이 돌아와서 "


거란 놈들이 제 이름에 지네 황제 이름[4]이 들어가있다고 지들 마음대로 바꿨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최종필의 말을 들은 신하들이 "최종필 멍청아. 국가간의 서신에 거란 놈들이 니 이름에 들어가는
"단어"가 지네 왕 이름과 같다고 니 이름을 바꿔 넣으면 우리 왕은 뭐가 되냐. 당연히 바꾸기 전에 우리
왕의 의사를 물어보겠다고 대답했어야지. 호구 인증하고 자빠졌네. 폐하, 저 놈을 정신차리게 벌을 줘야
합니다!"[5]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하지만 문종은 "그럴수도 있지 뭐" 라고 쿨하게 넘어가 줬다.

1056 년 10 월에 일본의 사신이 고려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개성에서 장사하는 이슬람 상인들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기도 했다.

또 단교 후 84 년만인 1078 년 거란의 묵인 아래 북송의 신종과 재수교했다. 거란과의 수교는 현종 때인


1019 년 혹은 1020 년이지만 송과 국교를 끊은 것은 성종 때인 994 년이다. 여요전쟁 1 차 침공 때 송이
원병을 거절했기 때문. 송과 재수교 할 때 문종이 풍비증에 걸려 송의 형조라는 의사가 신종의 명을 받고
건너오기도 했다.

재위 기간 동안 총 5 차례의 동여진족의 침략이 있었으나 모두 격퇴하였고, 이후 여진족은 토산물을


바치는 등의 낮은 자세를 보여주기도 했다.

3.2.1. 연려제요(聯麗制遼) [편집]

1004 년 거란과의 영토 전쟁에서 패해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치욕을 당해 온 송나라는 신종(神宗 :


1068 년 ~ 1085 년 재위) 때 신법당(新法党 : 신종의 후원 아래 부국 강병을 추구하는 ‘신법(新法)’
으로 혁신 정치를 편 왕안석을 지지한 정파)이 집권한다. 신법당은 거란을 제압하기 위해 그 배후의
고려와 연합한다는 이른바 ‘연려제요(聯麗制遼)’의 외교 전략을 수립한다. 고려는 송나라의 이런 의도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외교 관계를 재개한 두 나라는 이후 유례가 없을 정도로 활발하게 교류한다. 송나라와
거란의 대립을 적절하게 이용해 영토 분쟁을 유리하게 이끈 고려식 등거리 실리 외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박종기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송나라는 고려에 손을 뻗으며 고려와 연합해 요나라를 제압한다는 외교 전략을 수립한다. 그리고 고려
문종은 송나라의 이러한 계산을 파악, 송나라와 손을 잡게 된다.

또한 송나라(북송)와의 재수교는 고려의 국력 상승을 나타내는 모습이기도 하다. 문종은 요나라에 어떠한
긍정적인 제스쳐를 취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압록강 동쪽 영토를 거란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이를 청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1055 년 7 월, 압록강 동쪽에 요나라가 성을 쌓고
다리를 설치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가을 7 월 초하루 정사일.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거란의 전 태후와 황제는


조서를 내려 압록강(鴨綠江) 동쪽 지역을 우리의 영토로 인정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거란이 성과
교량을 가설하거나 전투용 방책과 사격용 궁구를 설치하면서 점차 국경선을 넘어오니 이는 욕심이 지나친
것입니다. 이제 또 우정(郵亭)까지 새로 만들어 우리 영토를 잠식하고 있으니 『춘추』에서 지적한 '
제멋대로 뻗어나가게 방치하지 말리니 더 이상 방치하면 제어하기 어렵다.'는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거란의 동경유수(東京留守)에게 국서를 보내 더 이상의 군사 행동을 중지하도록 경고하되, 그들이
거부하면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 건의에 따라 거란의
동경유수에게 다음과 같은 국서를 보냈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나라를 계승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국경으로 삼아왔습니다. 하물며 전 태후와 황제께서도 책문을 보내 은혜를 베풀면서 영토를 분봉할 때에도
또한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상국에서는 우리 영토 안으로 들어와 교량과 보루를 다수
설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부지런히 조공을 바치고 사신을 보내 입조해왔으며, 또한 조정에 글을
올려 옛 땅을 돌려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아직까지 허락을 얻지 못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또
최근에는 내원성(來遠城.지금의 압록강 검동도)의 군사들이 우리 성 바로 근처까지 사격용 궁구(弓口)를
이설했으며, 망루를 만들려고 건축 자재까지 쌓아 놓음으로써 변경의 주민들을 놀라게 하고 있으니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동경유수께서는 이웃나라와의 친선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실정을 잘 헤아려 황제께 잘 보고해 주셔서 우리 땅을 돌려받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임의로 설치한 성과
교량, 전투용 방책과 궁구 및 망루는 모두 철거하도록 해주십시오."

 
간단히 요약하자면 요나라가 압록강 동쪽에 다리를 설치 -> 문종 曰 "니네 지난번에 우리 아부지랑
협의할 때 압록강 경계가 우리 영토라고 했는데? 좀 꺼지지?"

이러한 요구에도 요나라가 답변을 하지 않자 문종은 "저놈들 대답할 때까지 사신 보내."라고 했는데
그래서 요도종에게 축하 사절단을 보내는데 항의문도 같이 보냈다.(...) 그럼에도 요나라와의 관계는
나빠지지 않았는데 태자 책봉이나 사절단을 고려에 보내 토산물을 보내주는 등의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요나라가 고려의 이러한 강경한 반응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고려의 국력이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이다. 문종은 이러한 고려 국력을 바탕으로 1058 년 8 월 서해를 건너게할 큰 배를 만들도록 지시해
송나라와의 재수교를 명령했지만 신하들이 "송나라 가는거 요나라에게 걸리면 X 되는 겁니다."라고
반대해 실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1068 년, 송나라에서 상인 황신(黃愼)을 고려로 파견해 재수교를
강력하게 원했고, 문종도 송나라와의 관계 복구를 통해 송 - 거란 - 고려간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판단, 신하들의 반대에도 의지만 있다면 뭐든 할수 있다는 문종의 집념으로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했고
1071 년 3 월 신하들의 반대에도 송나라와의 재수교를 강행했다(송신종 5 년이기도 하다).

희령(煕寧) 3 년(1070 년) 군(郡), 현(縣)에서 고려의 사신을 접대했었던 사례가 없어서 백성들이
힘들어 했는데, 규정을 만들어 반포하고 비용은 모두 관(官)에서 지급하도록 조칙(詔勅)하였다. 또 고려
사신이 중국 말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으로 재물과 이익을 노리는 자들이 접근해 올까 염려해 고려 사신이
머무는 곳마다 (사람들의) 왕래를 금지시켰다. 휘(徽.고려 문종의 이름)가 이부(二府)에 물품을 보낸
것이 많자, 조칙을 내려 시장에 위임하여 되도록이면 (값이 비싼) 겸백(縑帛.비단)을 팔아서 보답하도록
했다. 휘(徽)가 또 표(表)를 올려 의약(醫藥. 의원과 약) 및 고려 사람을 가르칠 화공(畵工), 소공(塑
工) 등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니 아중(羅拯)에게 조칙을 내려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희령 9 년(1076 년)에 고려가 또 최사훈(崔思訓)을 보내 오자 중귀인(中貴人)에게 명해 도정서역(都亭西


驛)의 예에 따라 고려 사신들이 묵는 객관을 수리하여 매우 후하게 대우하게 하였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송나라에게는 고려와의 외교 라인 개설이 단비와 같은 일이었으며, 이 때문에 당시 고려 사신은 지나가는


곳에 사람을 못다니게 할 정도로 굉장히 후한 대접을 받는다. 이후 고려 사신들에 대한 대우도 좋아져
예종 대에 국신사로 승격받아 서하보다 높고 요나라와 동등한 대접을 받기에 이른다.

송신종과 고려 문종은 서로 친필 편지로 건강도 위문, 걱정할 만큼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종이 1078 년
(원풍 원년)에 중풍에 걸리니 의사 안도(安燾)와 진육(陳陸)을 고려에 파견하여 문종의 중풍병을 치료해
주었다. 같은해 다시 한림의관 (翰林醫官) 형개(邢愷, 혹은 형조), 주도능(朱道能), 심신(沈紳), 소화
(邵化)를 고려에 파견하여 대량의 우황과 용뇌와 주사와 사향과 행인 등 100 여 종의 귀중한 약재 등을
고려 문종에게 증여하였다. 2 년 뒤 고려에서는 호부상서(戶部尙書) 유홍(柳洪)으로 하여금 잣과 인삼
각각 1000 근을 답례로 보냈으며, 그해 7 월 계절풍을 타고 송나라에서는 의관(醫官) 마세안(馬世安)을
다시 고려에 파견하였다. 이런 송과 고려의 "의료 외교"는 양국의 친교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북송이
망하는 송휘종,송철종 때까지 이어진다.

송나라는 또 괄지지, 여지지, 고려풍속기, 고려지 등의 지도지리서를 도서관에 채우기 위해 고려에


청하기도 했었다. 심지어 외국의 지도를 주문받아 만들어 준 적도 있어 단순한 교환이 아닌 고려의 지도
자체가 수출 대상이었다는 사례가 된다.

4. 지속되는 태평성대[편집]

문종은 근면과 검약을 실천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했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가능한 한 관대한 형벌을
부과했고, 학문을 숭상하며 노인을 공경했다. 자격 없는 자에게 관직(名器)을 맡기지 않았으며, 자신과
친한 사람이라고 실권을 주지 않았다. 아무리 가까운 인친일지라도 공로가 없으면 상을 주지 않았고,
측근의 아끼는 신하라도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내렸다. 환관과 급사의 수가 10 여 명에 불과하고 내시
(內侍)는 반드시 공로와 재능이 있는 자를 가려 임명했는데 이 또한 20 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쓸모없는 관리가 줄어 일이 간편해졌으며, 비용이 절약되어 나라가 부유해졌다. 나라의 창고에는 해마다
곡식이 계속 쌓이고 모든 백성들이 풍요를 누리니, 당시 사람들이 태평성대라고 찬양했다.

이제현의 논평. ##

현종(顯宗)이 중흥의 공을 이룬 덕분에 종묘와 사직이 안정을 되찾았으며 문종(文宗)이 태평성대의


통치를 펼치니 백성과 만물이 모두 화락하게 되었습니다.
정인지. 《고려사》 전문 中

이렇듯 그의 재위 기간동안 고려는 국력은 강해지고 나라는 부유해지며 불교와 유학의 조화가 이루어 졌다.

그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은 송에 밀항 유학 뒤 천태종을 도입해 고려 불교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다. 해동공자 최충도 이 시기의 인물로, 이에 따라 유학 또한 흥하게 된다. 이렇듯 나라는
안정되고 일본, 요, 송과의 관계 또한 중심을 잘 잡아 외침 또한 없으니 이 시기 문화적으로 다양한
발전을 이루었다.

이처럼 한국사에서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만들어버린 탓에 일반적인 인지도는 그 업적에 비해 대단히 낮은


편. 심지어는 사극 드라마 나올 거리도 없다. 안습. 보통 명군의 경우에 재위 기간이 길수록 재위
후반부에 혼란이 일기 쉽다. 실제로 명군이라 불리는 군주들의 평균 수명은 40 대 ~ 50 대고 재위 기간은
20 년 전후가 대부분이다. 문종은 재위 후반부로 접어들어도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데다 나라에 일이 생긴 것은 기껏해야 여진족 침입을 막아냈다 정도뿐. 재위도 37 년으로 조선의
세종보다도 길 뿐만 아니라. 고려에서는 고종(46 년) 다음으로 긴 재위기간을 자랑하는데....하기야
갈등도 위기도 없는데 무슨 놈의 드라마를 만드냐.

교과서에서도 고려의 태평성대는 거란의 침공(여요전쟁)과 윤관의 여진정벌(동북 9 성) 사이에서 생략되며,


바로 문벌 귀족의 폐해를 설명하고 무신정권으로 넘어가는 등 소외받은 시기다. 안습 또 안습.

4.1. 거신의 난[편집]

이러한 태평성대 속에서도 한차례 쿠데타가 일어날 뻔 했었다. 《고려사》에 기록된 바는 이러하다.

(중략) 처음에는 교위(校尉) 거신(巨身)이 왕을 폐하고 왕기를 세울 것을 꾀했다. 문종 26 년에 병사(兵


士) 장선(張善)이 고변을 올리므로 명하여 거신을 죽이고 그 족속들을 주멸(誅滅)하였다. 왕기는 이미
죽은지라 이에 왕진(王璡)을 남해에 유배하고 왕영(王瑛)은 어렸으므로 면하였다. 또 평장(平章) 왕무숭
(王懋崇), 장녕궁주(長寧宮主) 이씨(李氏), 수안택주(遂安宅主) 이씨(李氏)가 그 음모에
참여하였으므로 이에 왕무숭 및 그의 아들 왕정(王靖)을 안동에 내치고 장녕공주와 수안택주는 곡주에
내쳤다. 장선을 발탁하여 장군으로 삼고 자손에게도 각각 직 1 급을 사하였다.
《고려사》

병오일. 교위(校尉) 거신(巨身)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당했다.


《고려사》 문종 26 년 7 월 기사.

거신이 문종의 동생인 왕기를 왕으로 임명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로
흐지부지되어서 결국 쿠데타는 취소된 상황에서 장선이라는 병사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문종에게
"저 자식들 저거 쿠데타 일으킬뻔했음요"라고 꼰질렀고, 거신을 처형하고 그와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유배보내는 사건이 일어났다.

웃긴 건 쿠데타를 들킨 게 쿠데타의 가장 큰 혜택을 보는 왕기의 사망 2 년 후였다는 거다. 쿠데타 모의가


일어난 건 장선이 왕에게 말하기 수년 전에 흐지부지된 일이었다는 것.애초에 이시기 백성들이 잘먹고
잘사는데 쿠데타 일어나면 좋게 봐줄리가.

이 반역에 대한 것들은 자료 부족으로 의견이 분분하다.[6] 역모에 가담한 왕무숭[7]의 직책이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였던 점을 들어 병권에 대한 정치적인 싸움이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다만
정국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 쿠데타 모의였음은 분명하다. 실제로 문종 세가에선 저 단 한 줄이
쿠데타에 대한 설명의 전부다.

4.2. 그늘[편집]

4.2.1. 문벌 귀족의 세력 강화[편집]

사실 태평성대를 꽃 피웠지만 그것이 문종의 역할인지, 또 문벌귀족들의 성장을 촉진했던 시기인지에


대해선 아직까진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시기는 문벌귀족 출신 재상인 이자연과 최충이 중심이 되어서 통치한 문벌 귀족


정치기였다. 실제로 문종의 행적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스스로 움치고 뛸 수 있는
여건을 태종으로부터 받은 세종과 거물급 재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조선 문종과는 상황도 다르고
주도력이 다르다고 볼 수 있을지도. 예를 들면, 이 시기 고려 문벌 귀족들은 스스로의 특권을 늘려가고
있었는데, 문종이 이에 대한 저항을 한 것이 흥왕사를 만든 것뿐으로 볼 수 있을지도?

하지만 인주 이씨 등 문벌 귀족 세력의 대두에는 어느 정도 문종 본인의 책임이 있는데 이는 문종이


이자연의 세 자매와 결혼한 이후로 본격적으로 경원 이씨 세력이 외척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자연의 맏딸 인예왕후는 순종, 선종, 숙종 등을 낳았다. 이러한 일은 이자연의 고모부가 되는
김은부가 먼저 행한 바가 있다. 어쨌든 두 집안 모두 3 대에 이르기까지 세도를 누렸다. 그러나 이자연의
경우 마지막 주자가...

이자연을 키운 이유가 흥왕사 건립과 송과의 국교 재개 등에서 의견이 일치한 것을 생각하면 약간은
김조순과 안동 김씨 필도 나는 듯. 공음전시로 세습 가능한 토지를 물려주게 한 것도 음서와 함께
문벌귀족에 날개를 달아주게 된다. 다만 귀족이라고 해서 다 우왕굳, 하는 게 아니라 능력도 어느 정도
있어야 했다. 아, 그렇다고 해서 모든 귀족이 전부 능력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최상층은 당연히...

어쨌든 이러한 태평성대의 모습들 중에서도 곳곳에 문벌귀족들의 권력 강화의 움직임도 상당량 보이는데
대표적인 것이 재위 3 년째인 1049 년엔 5 품 이상의 고급 관료들에게 상속이 가능한 일정량의 토지를
지급해 양반 신분 유지에 필요한 재정을 지원하는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이 시행된 것과 남반직의
최고위가 이전의 "4 품위"에서 "7 품위"로 떨어져 계급이 낮아지기도 했는데 이는 남반이 천시되고
양반들의 신분 우월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4.2.2. 사학의 창궐[편집]

국자 제생(國子諸生)의 효교법이 실시되었고, 또한 최충의 9 재 학당을 포함하여 사학 12 도가 이뤄지는


등 귀족 문화의 절정을 이루었다. 다만 이게 문제인 것이 국자감이 이후 지리멸렬해졌기 때문이다.
애초에 문음이 중시되던 고려에서 과거 제도마저 문벌귀족의 손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 바로 사학의
창궐이다. 더구나 이걸 좌주 문생 관계라고 하여 지공거 시스템이 더해지면서[8]문벌귀족들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지게 된다. 이후 고려 국왕들은 국학인 국자감의 부활을 위해서 개고생하게 된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사립 학원과 학벌이 쩔게 되었다.

5. 가족관계[편집]

•첫째 왕후 인평왕후는 아버지 현종과 원성왕후 김씨의 딸로 덕종, 정종과는 동복 남매, 남편 문종과는
이복 남매사이이다.

•순종, 선종, 숙종, 아들 의천을 낳는 인예왕후를 비롯, 인경현비 이씨, 인절현비 이씨 등 3 명이 모두


이자연의 딸로 자매들이다.

•아들 셋이 모두 왕이 되는 기염을 토한다.[9] 순종, 선종, 숙종. 문제는... 숙종 참조.

•넷째 아들은 고려의 불교를 대표하는 의천국사.

•의종, 명종, 신종은 그의 4 대손이면서 동시에 증손녀 사위(...)가 되는데, 문종과 3 비 인경현비
이씨의 아들로 추존왕이 된 양헌왕의 아들 강릉공 온(江陵公 溫)은 의종의 비인 장경왕후, 명종의 비인
광정왕후, 신종의 비인 선정왕후의 아버지다. 덧붙여 양헌왕의 동복동생 진한공 유(辰韓公 愉)는 문종의
손자인 예종의 3 비 문정왕후의 아버지다.

6. 기타[편집]

금관가야의 몇안되는 기록서인 가락국기가 이 시기에 쓰여졌다.

참고로 세종대왕처럼 한번 기용한 신하들은 죽을 때까지 부려먹었다.(...) 


12 대 순종 왕훈 (1047~1083) 재위 1083~1083

1. 소개[편집]

고려의 제 12 대 임금. 묘호는 순종(順宗), 시호는 영명정헌선혜대왕(英明靖憲宣惠大王). 휘는 훈(勳),


자는 의공(義恭). 문종의 장남.

2. 생애[편집]

언제 태자가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그가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른 걸로 봐서 오랜 기간


동안 태자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태자 시절부터 몸이 약했던지라 이래저래 부왕과
신하들의 걱정을 많이 산 듯. 아니나다를까 문종이 죽자 너무 슬퍼한 것이 탈이 되어 안 그래도 원래
병약한 몸이 더 악화되어 4 개월만에 결국 부왕의 뒤를 따라간다. 딱 조선의 인종 필이다.

별다른 업적없이 붕어하여 그 동생 국원공 왕운(선종)이 엉겁결에 왕위에 오른다. 자식에게 물려준 것도
아니고 자식에 대한 기록도 없는 것으로 봐서 병약한 몸 때문에 후사도 낳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 남아있는 기록도 엄청 짧다.

•8 월

◦갑신일. 문종을 경루에서 장사지냈다.

◦경자일. 왕이 신봉루로 가서 사면령을 선포했다.

•겨울 10 월

◦초하루 계유일. 회경전에서 사흘동안 도량을 열고 승려 3 만 명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갑신일. 왕이 자신의 동생인 왕운을 수태사 겸 정서령으로 올려주고 식실봉 1 천 호를 덧붙여주라고


지시했다.
○ 왕은 젊어서 지병이 있었는데 선왕의 장례를 치르면서 너무 애통해한 나머지 병이 더욱 심해졌다.(王小
有疾 居廬哀毁 疾益篤)

•을미일. 친동생 국원공 왕운으로 하여금 국사를 임시로 맡아보게 하고서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

3. 가족관계[편집]

부인으로 정의왕후 왕씨, 선희왕후 김씨와 장경궁주 이씨가 있다.

정의왕후 왕씨는 정간왕의 딸로 순종과 사촌지간으로, 보통 이렇게 가까운 친척이면 혼인할 때 외가의
성씨를 택하는데 그녀는 왕씨로 적혀있다.

선희왕후 김씨는 경주 출신 김양검의 딸이다. 순종의 사랑을 받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문종이 심하게
그녀를 싫어하여 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폐출되었다. 나중에 인종의 명에 의해 복권되고 이후 순종의
사당에 합사되었다

장경궁주 이씨는 이호의 딸이다. 이호는 이자겸의 아버지기도 하니 이자겸과 순종은 처남 매부지간이 되는
셈. 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후궁이 되었다. 하지만 곧 순종이 승하하는 바람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이후 외궁에 거처하였고 장경궁주에 봉해졌으나 자신의 노비와 간통하다가 발각되어 궁주의 자리에서
쫓겨났으며 그 이후 복권되지 않았다. 이 때 이자겸도 그녀의 오라비란 이유로 축출되었다.

13 대 선종 왕운 (1049~1094) 재위 1083~1094

1. 소개[편집]

고려의 제 13 대 국왕. 묘호는 선종(宣宗), 시호는 관인현순안성사효대왕(寬仁顯順安成思孝大王). 휘는


운(運), 자는 계천(繼天). 고려의 황금기를 연 명군 문종의 둘째 아들이다.

2. 생애[편집]

형 순종이 1083 년에 왕위에 오른지 3 개월 만에 붕어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사실 즉위하기 전에 아버지와


형님까지 줄초상[1] 치르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어찌보면 다소 얼떨떨한 상황에서 보위에 올랐다(
그것도 한국사 전체의 왕으로서도 유일). 이름도 운이잖어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재위 기간 내내
무난하게 왕위를 다스린 걸 보면 능력은 출중했던 듯 싶다.

2.1. 황금기의 지속[편집]

이 시대는 큰 변화보다는 기존의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보는 게 좋은데 전임 군주들인 현종에서


부왕 문종에 이르기까지 명군들이 줄줄이 왕위를 계승해 가며 워낙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갔기 때문에 굳이
새로운 일을 벌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탓인지 선종의 재위 기간도 별 큰 사건 없이 태평성대가
계속되었다. 다만 재위 초반엔 가뭄이, 중간에 한파와 같은 기상이변이 문제가 됐는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기상이변 말고 문제가 될 게 없었다는 것.

2.2. 유교와 불교의 발전[편집]

이 시대의 특이한 점은 문종의 넷째 아들이자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이 활약하기 시작하여 불교 문화가
크게 발전했다는 점이다. 이미 국가 시스템은 선왕 때인 11 대 문종 시기에 거의 다 완성된 터라,
대각국사 의천을 중심으로 불교의 계파인 교종, 선종을 통합하는 종교통합사업 천태종 사업을 시행했다.
이는 제도가 완비된 조선 성종 시대 전국 곳곳에 유교 장려 정책을 펼친 것과 유사하다 볼 수 있다.
제도가 다 갖춰졌으니 사상 통일.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왕실이 화엄종&천태종을 밀어줬지만
지방세력들과 다른 승려들은 귀족 중심의 정치를 이루기 위해 법상종을 밀어줬기 때문. 더더군다나
천태종은 백성들을 끌어들이지 못한데다 이후 조계종이 갈라져 나가기까지 한다. 결정적으로 의천이 죽자
천태종이 쇠퇴해서 망했어요. 또한 그는 승과를 설치하고 사탑을 대규모로 건립하는 등 불교를 융성케
했다

선종 본인 또한 불교에 심취해 있었는데, 본인이 아픈 와중에 부처님 곁으로 가고 싶다는 시를 쓰기도


했다.

是月 王憂勞萬機 頗覺不豫 移御文德殿 命內醫進養性方藥。忽有感 作古風長篇 其末云 藥效得否何敢慮 浮生


有始豈無終 唯應愿切修諸善 淨域超昇禮梵雄。王春秋鼎盛 而有此作 見者驚恠。
○ 이 달에 왕이 정무로 인한 과로로 몸의 이상을 느끼고 문덕전으로 처소를 옮긴 다음 내의를 시켜
양성방약(養性方藥)을 바치게 했다. 이때 왕 자신의 소회를 장편 고시로 읊었는데 그 뒷 연은 이러했다.

“약효야 있든 없든 무엇을 걱정하리(藥效得否何敢慮)


뜬 구름 같은 삶, 태어남이 있으니 어찌 죽음이 없으리.(浮生有始豈無終)
다만 간절히 바라노니 많은 선근 쌓아서(唯應愿切修諸善)
서방 정토로 올라가 부처님 뵈오리.(淨域超昇禮梵雄)”

왕의 나이가 한창인데도 이런 시를 지으니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고려사》선종 9 년 3 월 병진일 기사

그러나 선종이 불교만 장려한 것은 아니다. 선종은 국학에 공자의 제자 안회(안자)를 비롯한 72 현의 상을
그린 벽화를 만들었으며, 72 현에 대하여 제사를 올렸다. 절차는 송나라의 국자감의 것을 본받고, 복장은
중국 십철을 본받았는데 이는 고려 유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것이다. 이로서 유학은 하나의
통치철학에서 불교와 같은 종교적 반열로 서로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의
치세에는 고려가 불교에만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통치 이념인 유교와 균형을 이루며 서로 발전해 갈 수
있었다.

2.3. 동아시아 강국으로의 성장[편집]

2.3.1. 거란과의 관계[편집]

문화 뿐 아니라 주변 국가들인 거란, 송, 여진족, 일본과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국가의 재정도


튼실해졌다. 그만큼 국력도 강해져 거란에 대해서도 외교 면에서 당당한 자세를 견지했다. 그 증거라 할
만한 사례로 선종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다가 생일날에 도착하지 못하고 늦게 온 거란 사신을 대놓고
놀리는 장면도 있다. #.

10 일. 왕이 친히 순종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요나라에서 어사중승(御史中丞) 이가급(李可及)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게 했는데,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하자 사람들이, "사신의 이름은 가급(可及. 가히 이를 만함)인데 어찌하여 불급(不及.
이르지 못함)이 되었는가?"라고 조롱했다.
《고려사》 선종 2 년(1085 년) 9 월 10 일 기사

9 월 요가 사신을 보내와 생일을 하례하였다. 사신 이가급(李可及)이 왔으나 기일에 닿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조롱하기를, "사신의 이름은 가급(可及)인데 어찌 불급(不及)했는가?" 하였다.

《동사강목》선종 2 년

거란이 압록강에 시장을 설치하려 하자 서희 때의 담판을 근거로 무산시키고 사과의 답례품을 받아내기도
했다.

2.3.2. 송과의 관계[편집]

문종대에 송나라와 재수교한 후[3] 고려의 국력이 급격하게 상승해서 송나라와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대부분 송나라가 좀 안습한 에피소드다.(...)

원우(元祐)[4] 5 년 2 월 17 일에 왕백호(王伯虎) 병(炳)을 만났더니 그는 말하기를, “옛날에 추밀원(樞


密院) 예방(禮房) 검상문자(檢詳文字)로 있을 때 비로소 고려 공안(高麗公案)을 보았는데, 처음에
장성일(張誠一)이 거란 이야기를 하면서 거란의 군막 속에 고려 사람이 있어 자기 나라 임금이 중국을
사모하고 있다는 뜻을 말하더라고 하는 말을 듣고 돌아와 이를 황제[5]에게 아뢰었더니,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비로소 고려 사신을 불러볼 뜻을 갖게 되었다. 추밀사(樞密使) 이공필(李公弼)이 뜻에 맞추어
친필로 문서를 황제에게 올려 고려 사신을 부르자고 청하여, 드디어 발운사(發運使) 최극(崔極)에게
명령하여 상인을 보내어 부르게 했다. 세상에서는 최극의 그른 것을 알면서도 공필의 잘못은 모르고
있으며 장성일 같은 자는 족히 이야기할 것도 없겠다.” 하였다.
“회동제거(淮東提擧) 황실(黃實)의 말로는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의 이야기로서, 보낸 선물 중에는
가짜 금은(金銀) 알이 있었는데, 고려인들은 모조리 깨뜨려 알맹이까지 쪼개보니 사신들은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때 고려 사람들은, ‘감히 우리가 오만한 것이 아니라, 혹시 거란 사람들이 보고 진짜로 여길까봐
걱정스러워서 그러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고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보낸 선물을
거란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이 일을 상세히 알지 못하고는 말하기를, 거란이
고려가 우리에게 내통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고, 더러는 다른 기회에 고려로써 거란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니, 이 어찌 틀린 것이 아니랴.” 하였다.

《동란섭필(銅蘭涉筆)》

송나라가 보내준 선물이 의심스러워서 송나라 사신 앞에서 금은알을 모조리 다 깨버리는 짓을 저질렀는데
송나라에선 "고려 놈들이 거란과 내통하는 게 아니냐"며 끙끙 앓기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원우(元祐) 7 년(1092 년)에 (고려가) 황종각(黃宗慤)을 보내와 《황제침경(黃帝鍼經)》을 바치면서


구입해 가겠다는 서적이 매우 많았다. 예부상서 소식이 "맥적(貊狄)[6]이 들어와 조공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송나라에)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만 있습니다. (첫째 돈이 너무 많이 들며, 둘째
백성이 힘들며, 셋째 고려가 받아간 문물들을 거란에 넘기고, 넷째 고려가 예의는 고사하고 실리만
챙겨가는데다 송의 허점을 탐구하며, 다섯째 고려와의 관계가 거란이 트집잡을 거리가 된다.) 지금
요청한 서책과 수매해 가는 금박(金箔) 등은 모두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아뢰니, 조칙을 내려
금박만을 사서 (고려로) 가져가도록 했다. 그러나 끝내 《책부원귀(冊府元龜)》[7]도 구입하여 귀국했다.

《송서》 외국열전 고려전

위의 얘기를 풀어보면, 고려의 사신이 송나라에 가서 "책을 포함해서 이것저것 살께요"라고했다. 그러자
송나라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시인이며 고려를 굉장히 싫어하던 소동파가 "고려 저 오랑캐 놈들이랑
교역하면 우리만 손해입니다. 저 무식한 놈들이 우리 것을 사가서 똑똑해지면 우리에게 얻는 이익이
뭡니까? 저 새퀴들 달라는 거 절대 주지 마세요."라는 이야기로 엄청나게 딴지를 걸었다. 하지만 당시
송나라는 요나라의 성장으로 압박이 심했고, 그 때문에 요나라가 (군사적인 압박이든 정치적인 압박이든)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고려와 손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송나라는 고려의 요구를 웬만하면 다 받아주는 상황이었고, 위의 사건 때 제대로 대처


못한 것 뿐 아니라 후에 의천대사가 불교를 배우기 위해 송나라를 방문했을 때 고려를 싫어했던 소동파는
고려의 왕족이자 스님인 의천대사의 개인 가이드 노릇까지 해야 했다.(...)

2.3.3. 일본과의 관계[편집]

일본과의 교역은 1084 년 이후에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084 년 - 일본 축전주 상인 노부미치가 내항하였다.

•1087 년 - 일본 상인 시게모토와 치카무네가 내항하였다. 대마도의 모토히라가 내항하였다.

3. 사후[편집]
五月 壬寅 王薨于延英殿內寢 卽日遷殯于宣德殿。壽四十六 在位十一年。 謚曰思孝 廟號宣宗 葬于城東 陵曰
仁陵 仁宗十八年 加謚寬仁 高宗四十年 加顯順。
5 월 임인일. 왕이 연영전의 침소에서 죽자 그 날로 시신을 선덕전(宣德殿)으로 옮겼다. 향년 46 세로 11
년 동안 재위했다. 시호를 사효(思孝)라 하고 묘호를 선종(宣宗)이라 했으며 성의 동쪽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인릉(仁陵)이라고 했다. 인종 18 년에는 관인(寬仁)을, 고종 40 년에는 현순(顯順)이라는
시호를 덧붙였다.

번영한 나라를 큰 사변 없이 잘 이끌어 나가다가 1094 년 5 월에 승하. 향년 46 세였다. 그런데 그가


승하한 뒤 고려 왕실에는 한 차례 피바람이 불게 된다. (헌종, 숙종 항목 참조.) 하지만 그도 책임이
부분적으론 있는 게, 후궁 원신궁주의 오빠 이자의[8]가 원신궁주의 아들 한산후 왕윤을 밀면서 숙종(
당시 수태보 왕희(왕옹))과 대립했기 때문.

4. 기타[편집]

찬이슬에 가을 바람 불어오니(露冷風高秋)
이 맑은 밤 달은 밝구나.(夜淸月華明)
피향전(披香殿)은 이제 삼경이 되려는데(披香殿裏欲三更)
노래 소리 아직도 요란쿠나.(沸歌聲擾擾)
인생은 모두가 허깨비 같으니(人生都似幻)
부귀영화 탐내지 마라.(莫貪榮)
좋은 술 금잔에 가득부어(好將美醁滿金觥)
기쁨을 나누는 게 좋으리.(暢懽情)
『하성조사(賀聖朝詞)』

 
시를 쓰기 좋아한 왕인 듯하다. 위에 아픈 와중에도 부처님 찾은 시뿐 아니라 선종 6 년인 1089 년 9 월
정축일에 요나라 사신을 맞이한 잔치에서 지은 『하성조사(賀聖朝詞)』가 있다.

14 대 헌종 왕욱 (1084~1097) 재위 1094~1095

1. 소개[편집]

고려의 제 14 대 국왕. 묘호는 헌종(獻宗), 시호는 공상정비회효대왕(恭殤定比懷孝大王). 휘는 욱(昱).

조선 단종의 대선배. 살면서 겪은 사건도 단종과 80% 이상 같다. 이 둘의 대선배로는 신라 제 40 대


국왕인 애장왕이 있다. 헌데, 애장왕은 헌종, 단종 등보다다 더 안습인데, 이유는 쿠데타를 일으킨 숙부
김언승에게 왕궁에서 대놓고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애장왕의 경우에는 단종(15 세 - 폐위
기준)이나 헌종(12 세 - 폐위 기준)과는 달리 성년(22 세)까지 왕위에 있었다. 사실상 고려 시대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운의 국왕이다.

2. 생애[편집]

性聰慧 九歲好書畫 凡所見聞 未嘗遺忘。


성품이 총명해 아홉 살 때부터 글과 그림을 좋아했으며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고려사》헌종 총서

위에 나온 고려사 헌종 총서에 따르자면 그는 무척 영특했지만 몸이 약한게 흠이었다. 어려서 소갈이라는


병에 걸린 상태였기 때문에 병석 생활이 잦았다. 증세가 무척 심각해서 어머니가 대신 섭정을 해야 했다고
한다. 때문에 그가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라 기대하는 신하나 종친들은 별로 없었다. 고려에서 형제
상속은 일반적인 일이었기에 신하들이나 종친들이나 모두 선종이 병약하고 어린 그의 아들 욱 대신에
동생들 중에서 후계자를 지명할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2.1. 잘못 끼워진 단추[편집]

하지만 이게 웬일, 선종은 병약한 아들인 욱을 후계자로 삼았고 결국 그가 11 세의 나이에 즉위한다. 명군


소리 듣는 선종이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결국 병석에 누운 11 살의 헌종 대신에 모후인
사숙왕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그녀는 자신이 거처하던 연화궁을 중화전으로 개칭하고 그곳에 영녕부를
설치하여 행정 및 군사를 포함한 일체의 정사를 보았다.

하지만 병세가 좋아지기는커녕 증세는 심각해져 날로 쇠약해졌고, 이런 판국이니 나라가 조용할 리가


없었다.

2.2. 쿠데타와 양위[편집]

고려판 계유정난

이러한 상황에서 중신이자 외삼촌인 이자의가 자신의 누이동생인, 선종의 후궁 원신궁주의 아들로 헌종의
이복 동생이 되는 한산후 왕윤을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자의는 사숙왕후의 사촌으로 당시
인주 이씨 가문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었고, 중추원사에 왕숙이라는 지위로 왕도 어쩌지 못할 권력을
가졌으며, 사병을 양성할 정도로 재력도 막강했다. 그는 왕이 병들어 있는 틈을 타서 모반이 일어날 수
있으니 옥새는 왕윤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나중에 숙종이 되는 선종의 아우인 헌종의 삼촌
계림공 왕희의 야심을 지목한 것이었다.

조정은 종친대표 계림공과 외척대표 이자의의 구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병석에 누운 11 살짜리 왕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1095 년 이자의가 반란을 도모하자 계림공이 그를 척살하고 그의 일파를 제거했다. 조정은 계림공
일파가 장악하게 되었고, 섭정하던 사숙왕후와 헌종은 아무 실권도 가지지 못했다. 결국 3 개월 후
두려움에 떨던 헌종은 병을 이유로 하여 계림공에게 양위하였고, 계림공은 숙종으로 즉위한다. 그 후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된 그는 아버지 선종이 왕자 시절 거주하던 흥성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양위 조서가 참 눈물겹다.

朕承先考遺業 謬卽大位 年當幼冲 體亦病羸 不能撫邦國之權 塞士民之望。 陰謀橫議 交起於權門 逆賊亂臣 屢


干于內寢。 斯皆凉德所致 常念爲君之難。竊見大叔鷄林公 曆數在躬 神人假手 咨爾有衆 奉纂丕圖。 朕當退居
後宮, 獲全殘命。
짐이 부왕의 유업을 받들어 외람되게도 보위에 올랐더니 나이가 어리고 몸도 허약하여 나라의 권신들을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고 인민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음모와 책동이 권력가들에게
걷잡을 수 없게 일어나며 역적 난신들이 대궐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는 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들이 모두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니 너희 대중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짐은 뒷궁궐에 물러앉아 남은 생명이나 유지하겠다.
《고려사》 헌종 세가에 실린 양위 조서.

이렇게 조서를 고치지도 않고 그냥 양위식에서 쓴 걸 보면 헌종은 정말로 껍데기 왕이었나 보다. 신하들
중에서 헌종 편에 선 인물은 아무도 없었던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친 신하라도 있었던 단종보다도 몇 배는
더 불쌍한 왕이었다.
2.3. 최후[편집]

肅宗 二年 閏二月 甲辰 薨于興盛宮 壽十四 在位一年。


숙종 2 년 윤 2 월 갑진일에 흥성궁(興盛宮)에서 죽으니 향년 14 세이고 1 년 동안 재위했다.

《고려사》 헌종 세가

그는 상왕이 된지 얼마 후 1097 년 11 월 6 일에 14 세의 어린 나이로 붕어했다. 소갈증으로 인한


소아당뇨 합병증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병석에 누워있었으니 숙종의 입장에선 나중의 단종의 사례처럼
직접 조카의 목숨을 거두는 수고를 덜 수 있었던 셈이었다. 물론 일부에선 숙종이 헌종을 사사했을 것이란
주장도 하지만 일단 공식적인 사인은 병사였다.

묘호인 '헌(獻)'은 시법상으로는 '聰明叡哲 通知之聰 知質有聖 有所通而無蔽'라 하여 총명하며 성인의


자질이 있어 통하는 바가 있고 폐단이 없었던 왕이라는 뜻이지만, 글자가 "바치다"라는 뜻을 지닌 데다가
이 시호나 묘호를 받은 사람들이 대개 후한 헌제나 서하 헌종[1]처럼 재위의 끝이 좋지 않은 이들 뿐이라
대부분 안습하게 취급해서 시호로는 많이 쓰이지도 않는 글자다.

3. 평가[편집]

이제현은 이를 평하기를

"고대 중국의 하우씨(하나라의 우왕)가 왕위를 아들에게 전한 것(아들 계왕에게 왕위를 넘긴 부자상속)은
후세의 찬역을 염려한 조치였던 바 그 후 유복자를 임금으로 세워 곤룡포를 입혀놓아도 세상이 동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명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현종의 세 아들은 형제끼리 서로 왕위를 전해서
순종에게까지 미쳤으나, 순종이 거상 중에 너무 슬퍼하다가 일찍 죽고 아들이 없어서 선종에게 선위했으며,
선종이 죽은 다음 태자가 그 뒤를 이었는데 이가 헌종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여러 왕대에 저 형제끼리
왕위를 주고받은 데 익숙해져 있어서 선종은 아우가 다섯이나 있는데 어린 아들을 세운다고 하면서
이것만을 잘못으로 여기니 어찌 그렇게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익재집》

평을 한 '이제현'은 고려말 고려가 원나라 부마국 시대일 때 당대 고려 제일의 유학자로 손꼽히던


사람이다. 당시 중국의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교(성리학)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강해지는데, [2] 본문을 보더라도 고려 중기에는 유교가 그리 절대시 되지 않았는지, 당시에는
부자상속이더라도 어린 임금의 제위 등극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고려 말은 유교를 더
숭상하는 분위기여선지 이제현은 이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숙종의 (사실상) 찬탈에
대한 반발이 크게 없던 반면,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반발이 적지 않았음은 고려와 조선의 차이를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근친 중에 주공과 같은 이가 없고 신하들 가운데 곽광과 같은 사람이 없어서 나랏일을


맡아 정치를 보좌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운이 위태롭고 정치가 어지럽게 되는 것은 볼을
보듯 뻔한 일이 아떤가. 후세에 만일 불행한 일이 있어서 강보에 싸인 유아에게 중대하고 어려운 사업을
맡기게 될 래에는 이것으로써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

주공은 하도 오래전 인물이라 그가 진짜 '사기'의 기록대로 섭정하고 순순히 정말 물러났는지도 확실치


않으며, 또 당시는 봉건제라 주공은 섭정에서 물러나도 자기 영지에서 따로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이는 유교에서 '주공', '주공'을 그리 외쳤건만 정작 지킨 이들이 적은 이유다.[4]

4. 가족 관계[편집]
병약하고 어려서 사망했기 때문에 혼인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진주 소씨의 족보에 따르면
소계령(蘇繼笭)의 딸인 회순왕후 소씨(懷純王后 蘇氏)와 혼인했다고 하는데, 이건 소씨 족보를 제외한
어떤 사서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조선 시대의 다른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가문의 끗발을 높여볼
목적으로 소씨 문중이 족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조작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은 편이다.

15 대 숙종 왕옹 (1054~1105) 재위 1095~1105

1. 소개[편집]

고려의 제 15 대 국왕. 묘호는 숙종(肅宗), 시호는 문혜강정명효대왕(文惠康正明孝大王). 휘는 옹(顒).


자는 천상(天常). 문종의 셋째 아들.

고려의 헌종이 조선의 단종의 대선배라면 이쪽은 바로 조선의 세조 수양대군의 대선배.[1] 따지고 보면
숙종과 세조 둘의 대선배는 바로 신라에 있다. 바로 신라 41 대 국왕인 헌덕왕. 그런데 신라의 헌덕왕은
애장왕을 제 손으로 직접 죽여 없앴는데 고려의 숙종과 조선의 세조는 조카를 쫓아내기만 했지 제 손으로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2]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幼而聰慧 及長 孝敬勤儉 雄毅果斷。五經子史 無不該覽 文宗愛之 嘗曰 後之復興王室者 其在爾乎。


어려서 총명했고, 자라서는 효성스럽고 근검했으며 성격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었다. 오경(五經)과
제자백가서 및 사서를 빠짐없이 두루 공부해 문종이 “장차 왕실을 부흥시킬 사람은 바로 너다.”라며 무척
아꼈다.
《고려사》 숙종 총평

1054 년 9 월 2 일, 문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065 년, 계림공에 봉해졌다. 원래 이름은 희(熙)


였으나, 요나라의 제 9 대 황제 천조제의 이름과 발음이 같다 하여 천조제 즉위년에 개명하였다.

2.2. 왕위 찬탈[편집]

형 순종과 선종이 연이어 일찍 승하하고 선종의 아들인 헌종이 10 살에 즉위한다. 숙종은 이 헌종을
퇴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 과정은 헌종 항목 참조.

실제로 숙종은 조선 세조와 달리 명분으로는 그다지 꿇리지 않았다. 고려 시대에는 왕건의 유훈이었던
훈요 10 조에 따라 형제 상속이 어느 정도 일반화 되어있었기에 왕이 후사가 없거나 뒤를 이을 태자가
너무 어리거나 허약하면 왕의 형제들을 다음 후계자로 삼는 일이 공공연했다.[3] 거기다 헌종은
총명했으나 어려서부터 소갈증에 시달리는 허약한 몸이었는지라 병치레가 심해서 과연 왕 노릇을 제대로
할지가 불투명했다. 실제로 헌종은 즉위한 지 1 년만에 왕위를 넘기고 얼마 안 가 병이 악화되어 붕어한다.
반면 계림공 희는 일찍이 아버지 문종이 아낄 정도로 재주가 출중하고 유능해서 신하들이나 종친들이나
모두 차기 왕위 계승자로 여기고 있었다. 계림공 자신도 능력이 되는 야심가여서 별 어렵지 않게 다음
왕이 되겠거니 하고 기대에 부풀었지만... 웬걸, 형인 선종이 자신을 제치고 병약한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줘버린 것이다. 어째 왕위 찬탈 과정은 수양대군과 비슷한데 당시 처지는 태종 이방원과
비슷하다? 계림공 본인으로서는 이래저래 실망이 크지 않을 수 없었고, 어차피 본인이 야심가인데다
조카인 헌종이 워낙 병약해서 왕위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쨌든 자신의 조카 한산후 왕윤을 왕으로 만들어 실권을 잡으려고 하는 외척대표 이자의와 대립하다가
1095 년 결국 그가 반란을 일으키자 선정문에서 살해하고 그 일당들을 제거한다. 결국 두려움에 떨던
헌종이 재위 1 년 만에 숙부인 계림공에게 양위하면서, 고려 15 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다만 세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상왕이 된 헌종을 살해하지 않았다는 것. 그럴 필요도 없었던 까닭은


헌종이 상왕이 되면서 병이 더욱 악화되어 얼마 가지 않아 붕어했기 때문이다.[4] 따라서 사육신의 복위
운동 이후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서 유배 보내고 결국 사사까지 시킨 세조와는 달리 숙종은 굳이
조카를 죽이는 수고를 하지 않고 자연스레 왕권을 확립시켰으니 그나마 나았다고 해야 하나.

거기다가 고려 숙종은 조선 세조와는 다른 방식으로 집권했는데 조선 세조는 반대 세력인 김종서와


황보인의 세력이 가만히 있었는데도 역모로 몰아서 제거한 뒤 집권한 반면 고려 숙종은 반대 세력인
이자의의 세력이 역모를 꾀하자 이를 기회삼아서 이자의의 세력을 제거한 후 집권하였다.

2.3. 업적[편집]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의 주장대로 주화도감을 만들어 화폐인 해동통보, 삼한통보를 생산하고 절도 많이
지어 불교를 융성케 했다.[5] 단, 숙종이 만든 해동통보는 고려 사회에서 많이 통용되지 않았다. 화폐가
통용된 건 18C. 시대를 앞서도 너무 앞서나갔다. 또 불교에 대해서는 의천을 통해서 교종을 통합하여
왕권 강화 시도를 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1096 년 유학자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숙종은 6 촌 이내 근친혼을 금지하는 명을 내렸다. 근친혼을 막은


가장 큰 이유는 문벌 귀족들의 혼맥의 난맥상을 막기 위한 의도가 강했다. 유교적인 것은 나중 문제.
당시 신료들이나 백성들의 반응도 '중국 풍속 꺼져!'에 가까웠고... 그러니 시행되자 마자 개무시 당한다.
당시 왕이건 신하건 백성이건 "그 딴 중국 풍습을 왜 우리한테 강요하나요??"하면서 무시하는 바람에
사문화되었다. 본인의 자식들만 해도 아들 예종은 두 명의 사촌을 왕비로 들였으며, 4 명의 딸들은 모조리
6 촌 이내의 종친과 근친혼을 했다. 그렇지만 근친혼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는 현재의 관념은 통상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특이한 것은 그의 동생 부여후 왕수(안평대군?)가 세력을 키운다는 둥, 다음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는


둥의 소문이 무성하자 그를 역모죄로 잡아 들였다는 것이다.[6] 숙종 자신은 조카를 몰아내고 형의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다음 왕위는 자기의 큰아들 왕우에게 물려주고 싶어했다. 사실 이 때까지도
고려에서는 형제 상속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던 듯 하다. 이 때 형제 상속이 자연스럽게 보인데에는 고려
전기의 왕들의 수명이 대체로 짧았다는 점이 컸다. 40 을 넘긴 왕들이 많치 않다. 그러다 보니 사후
자식의 나이가 제위를 잇기에 충분치 못한 경우가 많았던 것. 그래도 선종이나 숙종, 더 나아가 예종의
경우를 보면 정작 왕 자신은 형제 상속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형제보단 지 핏줄이다인 셈.
자세한 경위는 기록에 없지만 왕수가 형제 상속을 염두에 두고 나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서적 간행의 활성화를 위해 국자감에 서적포를 설치하였다. 평양에 기자 사당을 건립하고 기자에 대한


숭배를 강화하였다.

숙종 재위기에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7]으로 수도를 이전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기도 했다.
풍수가인 김위제가 국토를 저울로, 남경을 저울추에 비유하며 천도를 주장하였고, 1104 년에 궁궐이
준공되어 숙종이 직접 남경에 행차하기도 하였으나, 이 때 남경은 서경처럼 지역 세력이라든지 지역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크지 않아 정치적 논의만 거친 채 흐지부지 끝났다. ... 다만 당시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궁궐 터는 조성을 했는데, 그게 현재의 청와대 자리다(!). 300 여년 뒤
이성계가 이 터를 둘러보곤 그 남쪽에 궁을 지으니 ... . 이 때 찍어 놓은 땅이 고려 멸망 이후 한반도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년에 고문개, 장홍점, 이궁제, 김자진의 난을 겪기도 한다. 또한 재위 기간 중에 유독 우박이 많이


내렸고 송충이가 들끓어 개경의 소나무가 많이 피해를 봤다고 한다. 당시의 유학자들은 이를 두고 왕위
찬탈에 대한 천벌이라고 했대나 뭐래나.

여진의 침공에 큰 코를 다치기도 했으며 이에 여진에 대한 정벌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윤관을
기용해 별무반을 양성하고 서경에 나아가 출정을 준비하려 동명왕 사당에 참배하던 중, 병을 얻어
개경으로 환궁하다가 왕성 서문인 장평문에 도착하기 직전에 수레 안에서 승하했다. 승하 당시 52
세였는데 수명 또한 대후배인 세조와 똑같다. 흠좀무. 여진 정벌은 자신의 뒤를 이은 예종이 이어받아
진행하게 된다.

1105 년, 탐라국을 탐라군으로 개칭하여 제주도를 중앙 행정 조직으로 편입시켰다.

3. 평가[편집]

조선의 세조처럼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강제로 왕위에 오른 것 때문에(아니, 이쪽이 먼저다!!) 도덕적인
면에서는 비난을 받아야 하지만, 능력 하나는 출중했던 왕.

조선 태종과 세조를 비교하면 세조가 훨씬 못하다고 평가받듯이 고려사를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고려


광종이랑 비교당하기도 한다. 비유하자면 역시 대후배 세조처럼(…) 광종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만하다는 것. 광종은 피의 개혁을 통해 고려라는 국가의 포석을 쌓았던 반면, 숙종은 측근 정치를
행하여 외척이나 권신들의 권한이 커지게 만들었으며 남경 건설 및 여진 정벌로 백성들을 고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려사에는 이 때에 '열 집 중 아홉 집이 비었다'라고 기록했는데, 전부 부역에
동원되거나 심지어는 부역과 징병을 피해 도망친 경우였다. 여기에다 20 세기 후반의 고려사 연구자
중에서는 숙종이 시작한 여진 정벌마저 '국내 정치의 난맥을 수습하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한 엄청난
삽질'로 혹평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이건 열도에서 많이 본 사례인데? 실제로 고려 공민왕도 이것을
흉내냈는지 영전공사를 짓는 과정에 동녕부 정벌을 감행했는데 이쪽은 서북 위쪽을 친 것이다. 하지만
동북 9 성 탈환과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애초부터 북벌을 시작한 것이나 혹은 실패한
과정 모두 비판을 받고 동북 9 성 탈환 때보다 훨씬 혹독했다. 더욱이 왜구의 침입과 이전 홍건적의
침입과 영전공사 등으로 나라 재정이 파탄남에도 시행한 것이다.실제로 아후 철령위 관련된 문제와 위화도
회군의 문제 또한 본시 동녕부 정벌의 시도와 실패로 돌아갔기에 벌어진 것이다. 동북 9 성도 동북 9
성이지만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니고 4 원수 모살 사건 등으로 무인들에 대한 대우가 더 바닥으로 떨어지고,
흥왕사의 난을 통해 명망 높은 학자인 홍언박이 죽는 과정에 했던 것이다.

실제로 숙종 다음대 예종 시기부터, 인천 이씨들이 득세하며 문치주의가 팽배해졌으며 그의 손자인 인종


대에 여러가지 혼란이 찾아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숙종이 제위를 찬탈할 때 헌종의 후견인인
이자의와 그 세력들을 제거했다. 이자의는 유명한 이자겸의 사촌으로 경원(인천) 이씨 가문. 당연히 숙종
대에는 이 인천 이씨의 득세가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숙종 사후 3 년 뒤 예종이 자신의 두번째 비로
이자겸의 딸을 들이면서 경원 이씨의 전횡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된다. 그런데 정작 예종은 또 강성
군주라서 이런 전횡이 거의 없었다는 거.

하지만 이런 사실은 부왕 문종 대부터 있어왔던 경향이고 여진족의 팽창(여진족이 고려의 변경을 먼저 침)


으로 고려의 변경이 위험해 졌으므로 숙종의 탓으로만 볼 수 없다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숙종은 일단
집권할 때 이자의와 그 세력들을 제거해서 인천 이씨의 득세에 제동을 걸었으며 집권한 후 왕권을
강화하는데 있어서도 화폐를 도입하거나 6 촌 이내 근친혼을 금지시키거나 동생 의천을 통해 불교를
통합하는 등 왕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다음 왕인 예종은 숙종을 능가할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다. 앞서 경원 이씨들이 난립했다고 하는 부분도, 정작 예종 대에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정작 백관들이 경원 이씨가 외척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는데, 이걸 무시하고 강행
처리할 정도로 예종의 권력은 강했다.

반면 다음 왕조의 왕인 조선 세조는 고려 숙종보다 왕권 강화에 컨트롤을 제대로 못하였고, 이후 세조


다음의 왕들이 정치적 불안에 시달리는 왕들로 전락했다. 더욱이 고려 숙종은 위협이 될만한 일부
척신들만 제거했을 뿐 신하들을 그렇게 도륙내진 않았던 반면 조선 세조는 집현전 출신 사대부들이 단종
복위 운동에 많이 가담했다는 이유로 집현전을 날려 버리는 실책을 저질렀다.[8]

4. 북한의 왕릉 발굴[편집]

2017 년 8 월, 북한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개성시 선적리에서 숙종의 왕릉을 찾아냈다고 발표했다. 5


월 - 6 월에 20 여일에 걸친 작업으로 발굴된 유물의 연대, 묘지 양식, 문헌 기록의 대조를 통해 확정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16 대 예종 왕우 (1079~1122) 재위 1105~1122

1. 소개[편집]

고려 현종 때 부터 100 여년간 이어진 태평성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명군

고려의 제 16 대 국왕. 묘호는 예종(睿宗), 시호는 명렬제순문효대왕(明烈齊順文孝大王). 휘는 우(俁).


자는 세민(世民). 어린 조카인 헌종을 퇴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된 숙종의 맏아들.

2. 생애[편집]

부왕 숙종이 여진 정벌을 앞두고 급작스럽게 붕어하자, 그 유지를 이어 윤관(尹瓘)에게 여진족 정벌을


명해 동북 9 성을 쌓는 등 큰 수확을 보았지만(1107 년) 그만큼 손해도 많았고 여진의 세력이 강성함을
경계해서 결국 9 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결국 이 같은 여진족의 끈질긴 게릴라 전술에 그 지역을
지키던 고려군의 피해가 누적되자 예종이 동북 9 성을 여진에게 양도함으로서 아이러니 하게도 여진 중흥의
발판이 되었다.

이후 패전의 책임을 명분으로 윤관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결국 윤관은 파직되었다. 그러나 사망하기
직전(1110 년, 참고로 1111 년 사망)에 예종에 의해 복직되었다. 여진 정벌 중에 한국사 역사상 최강의
인간흉기 장수로 일컬어지는 척준경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그 활약은 인종 때까지도 이어진다.

2.1. 대내 업적[편집]

예술에 조예가 깊어 1120 년, 팔관회를 열고 향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나름 문학적 소양을


나타냈다.[2] 예종은 또 현재 아악(雅樂)의 근본인 북송의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와 이를 정비했으며, 9
성 개척으로 인한 국력 소모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는 등 민생에도 신경을
썼다.

또한 학당을 많이 설치하는 등 유교적 통치를 강화하기도 했다. 이미 최충의 학당으로 대표되는 사교육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어서 숙종 대에는 폐지론까지 나온 국자감(공교육) 진흥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선
국왕이 바로 예종이다. 9 재 학당을 모방하여 국자감 7 재를 개설하였다. 7 재란 주역, 모시(시경), 주례
(3 례의 하나), 상서(商書, 서경의 일부), 대례(戴禮, 예기), 춘추(오경)와 무예[3]가 된다. 또
장학재단인 양현고를 국자감에 설치하였으며, 학문 연구 기관인 보문각과 청연각도 설치하는 등 고려 시대
중앙 교육 시설의 틀을 잡았다.

2.2. 외교 업적[편집]

송나라와의 관계는 문종, 선종 대를 거치며 상당히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당시 송나라에선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國信使)로 승격시켜 당시 자신들을 제외한 나라 중에 가장 높은 직위로 인정해 주었다.

정화(政和) 연간(1111 년 ~ 1117 년)에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로 승격시켜 예우가 서하국보다 위에
있었고, 요나라 사신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에 예속시켰으며, 인반관(引伴官)등도 고쳐 접관반(接館伴),
송관반(送館伴)이라 하였다. 《대성연악(大晟燕樂)》과 변두(籩豆), 보궤(簠簋), 존뢰(尊罍), 따위의
그릇도 하사하고, 심지어는 예모전안에서 고려 사신을 위해 연회까지 베풀었다.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고려의) 축하 사신이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 어사(御事) 호순척(胡舜陟)이


“고려가 50 년 동안이나 국가(國家)를 미폐(靡敝)케 하였으니(재정을 궁핍하게 하고 민생을 피페하게
했으니) 정화(政和) 이후로는 사신이 해마다 와 회(淮)· 절(浙) 등지에서는 (고려 사신이 오는)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고려가 과거에 거란(契丹)을 섬겼으므로 지금에는 반드시 금(金)나라를 섬길
터인데, 그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정탐하여 (금(金)나라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고려의 사행(使行)을) 중지시켜 오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아뢰었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명주(明州) 객관(客館)에 머물면서 그 예물(禮物)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듬해 그들은
비로소 귀국하였다. 왕휘(王徽) 이후부터 사신이 끊이지는 않았으나 거란(契丹)의 책봉(册封)을 받고
거란(契丹)의 정삭(正朔)을 사용하여 (송(宋)나라) 조정에 올린 글이나 기타 문서에 대부분 간지(干支)
를 사용하였다.
고려가 거란(契丹)에 대해 한 해에 조공(朝貢)을 여섯 번이나 하였지만 (고려 사신들의) 가렴주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란에서는) 항상, “고려는 바로 우리의 노예(奴隷)인데 남조(南朝)는 무엇 때문에
고려를 후하게 대우하는가?” 라고 하였다. 송(宋)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여 와서 정탐하고 하사한 물건들을 나누어 가져갔다. (거란이) 한번은 고려가 서쪽으로
(송(宋)나라에) 조공(朝貢)한 일에 대하여 힐책(詰責)하자, 고려는 표(表)를 올려 사과하였다. 그 표
(表)의 대략 내용이, “중국에서는 3 갑자(甲子)만에 한번씩 조공(朝貢)하고 대방(大邦)에게는 1 년마다
여섯 번씩 조공(朝貢)합니다.” 하니, 거란이 깨달아 (고려가)마침내 화(禍)를 모면하였다. 고종(高宗)
이 즉위하여서는 금(金)나라 사람들이 고려와 내통할까 염려하여, 적공랑(迪功郞) 호려(胡蠡)를
가종정소경(假宗正少卿)으로 삼아 고려국(高麗國)의 사신으로 임명하여 정탐하도록 하였다. 호려(胡蠡)의
귀국에 대해서는 사관(史官)이 기록을 빠뜨려 버렸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심지어 송나라에선 고려 사신들이 행패를 부리는데 아무런 제재를 하지 못하자 이를 보고 한탄하는 기록도
남아있다. 참고로 이 시기 고려 사신의 위상은 엄청났는데 각국의 사신들이 송 황제와 대면하기 전 고려
사신을 먼저 접견해서 문제라는 기록도 남아있다. 사실 송사 고려전에서 문종 - 예종 사이의 기록들은
송나라에서 "와 고려 저 새퀴들 진짜 너무 깝치는데 우리가 손쓸 방법은 없고 어휴..." 같은 한탄이
굉장히 늘어난다(...).

또한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여 거란과 여진과의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 전략을 펼치기도 했다.
의주가 우리 땅이 된 것도 바로 예종의 치세. 당시 거란은 발해 유민 출신인 고영창이 반란을 일으켜
대발해를 세운 탓에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거란의 지원 요청을 묵살하고(1115 년)
오히려 지원을 빌미로 거란의 내원성과 포주성을 도로 받아(1116 년 ~ 1117 년)낸 것이 바로 지금의 의주
(당시 의주 방어사)이다.

그렇다고 여진족에게도 저자세로 나간 것도 아니었다. '형제국이 되자(물론 금이 형)',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글을 보낸다."며 아골타 (후의
금태조)가 제의해온 것 역시 짐짓 무시하였다(1117 년). 또 같은 해 여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천리장성의 높이를 석 자나 더 높였다. 이 공사를 여진은 방해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천리장성 방비를
강화해 나갔다. 다만 국사 교과서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천리장성은 당시 고려가 진출한 북방 경계에
비하면 한참 후방이었다.

2.3. 무과의 부활, 군사력 강화[편집]

또한 1109 년(예종 4 년), 앞서 언급한 국자감 7 재 중에 무관 양성을 위한 '무학재'라 불린 강예제를


엄청난 반발에도 불구하고 설치하였고, 후기에는 무학재에 인원을 상대적으로 더 늘리기까지 하는 등
여러모로 군사 분야에 신경을 많이 쓴 보기 드문 국왕이었다. 고려 시대에 유일하게 시행된 무과 역시
예종 대에 실시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문벌 귀족 사회였던 고려는 이후의 조선 시대보다 훨씬 무과에 대한 천대가 심해서 강예제


설치에는 엄청난 반발이 따랐다. 그런 반발에도 예종은 본래 유학재 70 명, 무학재 8 명으로 시작한 관학
7 재를 10 년 뒤에는 60 명과 17 명으로 조절해버렸다. 이걸 보면 유학이 3 배 이상 많은 것 같지만.
유학재는 6 재가 모인 것으로 각 재당 10 명이었던 반면에 무학재는 17 명으로 오히려 1.7 배가 된다.
애초에 윤관의 별기군도 그렇고 예종으로서는 독한 맘을 먹고 군사력 강화를 진행한 것이다. # 문종과
더불어 무관에 대한 대접을 잘받았던 군주고 전쟁에 나가 싸운 문무신료들의 죄는 그동안 공을 생각해서
묻지 않았다. 이유는 숙종이 동북 9 성을 추진했고 당시 참여했던 문무신료들은 숙종의 뜻에 따라
움직였으니 참작이 가능했다. 이는 세종대왕조차도 이점을 인정하여 예종의 장점을 흡수해 4 군 6 진때
참여한 문무신료들에 대한 견제를 하지않고, 오히려 우대했다.

그러나 무과는 결국 예종 다음 국왕인 인종 11 년(1133 년, 24 년만)에 바로 폐지되어 경사 6 학으로


재편되었다. 무과가 시험이 간단하고 상대적인 응시자가 적어(앞서 말한 뽑는 인원이 많았기 때문),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문과의 세가 약해진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려 시대의 무과는 사실상 없는 것과 같다고 해석되다가, 최근에 예종 때 아주 잠깐 했었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추가되었다. 학생들은 더 머리가 아파지겠지. 공양왕 2 년에도 무과가 257 년 만에
부활되었으나, 사실상 멸망 직전이라 의미 없는 부활이었다.

2.4. 말년[편집]

그러나 말년에 지나친 음주가무와 연이은 연회 파티 로 인해 종기가 발병, 발병 후 한 달만에 붕어하고


만다. 향년 44 세.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裕陵)이다. 이제까지 쌓은 실적을 만들었으나 그동안 치척을
쌓느라 정신적 부담이 작용하여 술에 눈먼것이었다. 결국 재위기간이 급격히 줄었다. 만악의 근원인 술로
인해 그동안 치세가 말년에는 이렇게 끝났다. 초기에 보여준 총명하고 인자했던 모습이 지나친 음주로
저리된것이다.

3. 평가[편집]

43 세 ~ 44 세인 고려 왕의 평균 수명까지 살았던 국왕이다. 재위 기간도 17 년으로 평균인 14 년과


흡사하다. 더구나 폐위나 비명횡사한 케이스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현종 이후의 고려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끈 마지막 군주로, 더 나아가 고려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성공을 거둔 현군이라 할만하다.
수백년 뒤의 어떤 왕과 비슷하다. 인종 이후의 왕들은 모두 시궁창.

고려 중기 최대의 문제 인물중 하나인 이자겸은 예종 시기 전에도 이미 외척으로 존재하였지만, 예종


대에는 꼼짝도 못하고 그냥 일반 외척으로 머물렀다는 것만 봐도 예종 이후와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자겸을 견제하기 위해 예종이 일부러 한안인(韓安仁)을 측근 세력으로 양성했다. 다만
예종이 죽을 시 그의 후계자 인종의 나이가 어렸기에, 인종의 안전한 제위 보장을 위해 이자겸에게 힘을
실어주게 된다. 그리고 이는 수백년 뒤에도 반복된다.

선대의 왕들이 받아먹었다라고 해야 할 정도로 대내외적으로 시기를 잘 타고나기도 했고, 문벌 귀족들에게


휘둘린 감도 없지 않지만, 예종은 숙종시기 어느 정도 확보된 왕권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활약했다.
이후 이자겸의 난과 함께 고려 왕조는 내리막을 걷는다. 이 막장의 후반기 300 년은 설사 왕이 능력이
있어도 무인정권처럼 실권이 없거나 원의 내정간섭을 극복 못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4. 가족 관계[편집]

그의 아들이 두 이모하고 결혼해 몸소 근친 + 자매덮밥을 실천한 인종(仁宗)이다.

첫 왕비 경화왕후는 선종의 딸로 1079 년에 선종과 정신현비의 딸로 태어났으며, 성씨는 외가의 성을 따라


이(李)씨로 하였다. 남편인 예종과는 친사촌이 된다. 1109 년(예종 5 년)에 사망한 후에 경원 이씨
집안의 딸을 맞아들였는데 이가 순덕왕후 이씨이다. 기록에 의하면 경원 이씨 집안 여자들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이 분도 그러했다. 그녀가 죽자 예종은 신하들이 말라고 간관들이 나서서 안된다고
하는데도 대궐 밖까지 나가서 손수 조제를 올리고 영구 행렬을 보냈다.

심지어 예종이 혼당으로 가자 간관들이 강력히 만류하였다. 이에 예종은 "조제의 예식은 송나라 임금도 한
적 있거든? 나는 그 일을 본받은 것 뿐이라니깐! 그리고 혼당 한번 간다고 무슨 큰일이라도 나나염?"
그리고는 기어코 하고 싶은대로 했다고 한다. 이점도 왕권 강화의 상징. 다만 이런 점에서 왕권은 강화해
놓고 후대가 약하면 외척 정치가 시행되는데, 이점에서는 조선 정조와 이미지가 유사해진다.

순덕왕후 이씨 뒤에는 종친인 문정왕후 왕씨와 혼인했다. 왕씨의 아버지 진한후 왕유는 그녀의 시아버지인
숙종의 이복 동생으로 문종과 인경현비의 아들이다. 또 남편 예종의 친조모는 이자연의 딸인 인예왕후이며,
그녀의 할머니 인경현비도 역시 이자연의 딸이다. 이로써 예종과 문정왕후의 혼인은 친가로는 4 촌간,
외가로는 6 촌간의 혼인인 근친혼이다. 전왕 숙종이 6 촌 이상 근친금지령을 내려봐야 왕실에서도 안
지키고 있었으니 이건 뭐 말짱 황(...). 인종은 순덕왕후 이씨 소생으로, 자신의 이모들과 결혼하게
된다.

17 대 인종 왕해 (1109~1146) 재위 1122~1146

1. 소개[편집]

고려판 세도정치의 시작을 알린 임금.

고려의 제 17 대 임금. 묘호는 인종(仁宗), 시호는 극안공효대왕(克安恭孝大王). 휘는 해(楷).

그의 치세는 한마디로 수난과 안습의 점철이며,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같은 굵직한 사건이 연달아 터져
나오는 등 정치적인 혼란이 가득했던 치세였다. 현종 이후 100 여년간 지속되었던 고려의 전성기가 이
대에서 사실상 끝났으며, 그동안 문벌 귀족 사회에서 누적되가던 모순도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즉,
인종 시대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고려 전기 사회의 붕괴 조짐이 드러난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는 다시는 태평성대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5]

2. 생애[편집]

2.1. 재위 초기[편집]

1122 년, 부왕 예종의 갑작스러운 붕어로 인해 14 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고려사》에 "예종 17 년(1122 년) 4 월 병신일에 예종이
죽자, 예종의 여러 동생들[6] (삼촌들)은 그가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탐내기도 했으나 평장사(平章事)
이자겸이 그를 받들어 중광전(重光殿)에서 즉위시켰다."라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외조부 이자겸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른듯 보인다.

하지만 왕이 어린데다 외척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니 외척이 발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종의
외조부였던 이자겸은 왕을 대신하여 정권을 한 손에 움켜 쥐었으며,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횡포를
부린다. 게다가 이자겸은 자신의 두 딸을 강제로 인종과 혼인시켰다. 본래 고려 왕실에 근친혼이
성행하고 있었지만, 이자겸의 두 딸은 인종에게는 이모가 되는지라 당시의 예법으로도 인종과는 결혼할 수
없는 사이었다.

인종이 즉위한 지 1 년 후인 1123 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서는 금태조 아골타가 붕어하고 금태종이


즉위했다. 이 시기에 금나라와 송나라는 번갈아가며 고려에 사신을 보내며 동맹을 청했다. 7 월에는
합문지후 후장이 이끄는 60 여 명에 이르는 송나라 사신단이 금나라를 공격해 달라는 내용의 국서를
가지고 고려에 왔다. 그리고 8 월에는 금나라 사신 고백숙 등이 고려에 와서 전란을 피해 고려로 망명한
주민들의 송환을 요구하는 금 태종의 의사를 전달했다. 인구가 과소했던 고려는 국초부터 전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고려에 오는 북방 족속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고려는 끝내 이들을 송환하지 않았다. 또한
금 태종은 인종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거란 천조가 서하로 도주한 사실을 알리려고 사신을 보냈는데
국경에서 접대를 불손히 해 고려에 이르지 못했다. 고려가 거란을 섬기는 예로써 앞으로 금나라를 섬겨야
할 것이다. 태조의 서거로 거란 천조를 잡지 못했다"고 하였다. 요나라 황제도 도주했으니 이제는 고려가
금나라에 사대하라는 것과 자신의 황제 등극을 통보하는 내용이었다. 금 태종은 1125 년 무주에서
요나라의 황제인 천조제를 사로잡았고 결국 요나라는 야율아보기의 건국 후 9 대 219 년 만에 멸망했다.

1125 년 금 태종은 고려에서 온 국서를 접수하기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국서의 서식이 표(表)가
아니고 또 고려 왕이 신(臣)을 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나라는 고려에 대해 요나라를 섬겼던 것처럼
금나라를 섬기라고 해 칭신사대(稱臣事大)의 관계를 요구했는데, 이것을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이었다.
고려는 이에 대해 한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듬해 1126 년 조정 회의에서 금나라와의
관계 설정 문제를 협의했다. 대다수는 여진족이 오랑캐이므로 상대할 수 없다고 했으나 실권자 이자겸과
여진 정벌에 참여했던 척준경 등이 "금나라가 예전에는 작은 나라로써 고려와 요나라를 섬겼으나 지금은
강대해져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켜 정치적, 군사적 강국이 되었고, 우리와 접경해 제반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예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했고 인종은 이 주장을 채택했다. 이어 4 월 인종은 정응문 등을 금나라에 보내
자신을 신(臣)이라 해 사대의 예로 국교를 맺게 되었다.

2.2. 이자겸의 난 (1126 년)

결국 인종은 18 세가 되던 해에 이자겸의 횡포를 보다 못해 몰래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이자겸을


제거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최탁, 오탁, 권수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 내에 있던 이자겸의
끄나풀들을 제거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이자겸은 자기 집으로 신하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가졌으며, 자신과는 사돈지간이었던 척준경에게 군사를 주어 궁궐로 보내었다.

척준경은 궁궐 내에서 소란을 피우는 역적들을 무찌른다는 명분으로 왕궁에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는데,
함부로 왕궁을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얼마동안 대치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궐내에서 이자겸의
수하들이 제거당하는 소란 통에 척준경의 아들 척순과 동생 척준신이 살해당하는데, 궁밖에 내던져진
시체들을 척준경의 부하들이 발견한다.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척준경이 공격을 명하자 궁궐은 불타버리고
지낼 곳이 없어진 왕은 이자겸의 집에 머무른다. 이것도 끌려간게 아니라 왕이 스스로 호위병도 없이
걸어서 갔다. 이 사건이 바로 '이자겸의 난'이다.

이자겸은 이제 본격적으로 왕이 되기 위한 야심을 드러내어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이라는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는 한편, 인종을 독살하여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었다. 그러나, 인종의 왕비였던
두 딸이 독이 든 탕약을 실수로 떨어트린 척하고 아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깨먹는 등 방해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이 두 왕비는 이자겸이 축출당한 후 궁에서 쫓겨났지만, 인종을 헌신적으로 보살핀
보답인지 반역자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노비나 가택을 하사 받는 등 꽤 대접을 잘 받았다고 한다. 이후
이자겸 처벌을 귀양 조치만으로 끝내고, 사후 관작까지 돌려준다. 그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자겸이 국정을
농단은 했지만 정말 찬역을 품었는가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한편, 인종은 척준경의 성품이 강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몰래 척준경에게 선물을 하사하는
한편 친서를 내려서 회유하는데 성공한다.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척준경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선
덕분에 결국 이자겸은 축출되어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되었고, 이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 후에 인종은 척준경의 공적을 치하하여 문하시중 (종 1 품),즉 최고의 관직에 제수하려고 하였으나
이는 척준경이 거절하였고, 그래서 인종은 대신 공신각에 그의 초상화를 걸어놓아 명예를 세워주었다.
그러나 이후 신하들(특히, 후에 묘청의 난에 가담하는 정지상)이 탄핵하여 할 수 없이 유배를 보냈는데
그래도 이 유배지가 척준경의 고향이었다.[7]
2.3. 묘청의 난 (1135 년 ~ 1136 년)

이자겸 축출 뒤,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는데에 몰두하던 인종은 마침 풍수설에 심취하던 중에 한 인물을


총애하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땡초 묘청이다. 묘청은 서경 (평양)으로 천도하기 위해 온갖 술수로
인종을 현혹했는데, 예를 들면 대동강 물에 기름진 떡을 넣어서 강이 오색 영롱하게 빛나 보이게 했다는
둥, 서경의 궁궐로 들어가니까 노랫 소리가 들렸다는 둥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신채호 선생을 필두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남용하다 보니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왜곡된 기록이라고 보는 시각도 간혹 있지만,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묘지명에도 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왜곡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서경 천도 주장은 인종의 부왕인
예종도 써먹은 적이 있었고 인종도 이것으로 서경 사람들을 꼬셨기 때문에 소위 묘청의 난이라 불린
사건은 묘청이나 정지상 등의 서경파가 주도했다기보다는 왕이 자초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어쨌든 서경 천도 문제로 인해 조정에서 이와 관련한 논쟁이 있엇지만 개경파 유학자의 선두 주자였던


김부식의 방해로 실패, 게다가 평양에 짓기 시작한 궁궐에서 연이은 불길한 징조로 곤란해진 묘청은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과 그 세력은 나라 이름을 '대위'라고 짓고 서경 이북 지역을 장악해 나갔으나
총사령관 김부식의 재빠른 조처로 곧 서경에 고립되었고 김부식의 조이기 전략 중 내분으로 묘청은 부장
조광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이 후 서경의 민심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서경 사람들이 다시
저항을 하게 되었고 완전히 이를 진압하는 데는 1 년이 더 걸렸다.

2.4. 최후[편집]

어렸을 적부터 고난을 겪었던 탓인지 결국 38 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승하했다. 일설에는
멀쩡하던 왕이 갑자기 병이 들어 의원의 치료에도 소용이 없어 점쟁이를 불러 점을 쳤는데, 이자겸과
척준경, 묘청 등의 귀신이 왕에 몸에 씌여 병이 생겼다고 한다. 결국 왕실에서는 용한 무당을 불러 굿을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어 인종은 끙끙 앓다가 승하했다고 한다. 다만 이것은 정사의 기록이 아닌 야사에
불과하다.

3. 평가[편집]

결국 인종의 치세는 거듭되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에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의


역대급 사건 사고가 터지는 등 그야말로 바람잘 날이 없었다.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을 당시에는 궁궐이
불에 타 전소되는 화를 입었으며, 묘청의 난 당시에는 묘청이 서경의 주민들을 선동하는 바람에 거진 내란
상태에 이르렀다.

이처럼 인종 대에는 기존 문벌귀족 사회의 모순이 축적되면서 지배층간의 분열이 심화되었는데 결국 그


아들인 의종(고려) 대에는 무신정변이 일어나 고려사의 전개가 완전히 비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에 왕위에 오르면서 일생을 권력 다툼에 시달려야 했고, 그의 사후에도 정변이 일어났으니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불행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비운의 군주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묘청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키워보기도 했으나, 개경파 김부식을 비롯한 기존 집권층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 데다가, 묘청 또한 난을 일으킨 뒤 제거되면서 그야말로 씻을 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권력 다툼과 반란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일생 동안 왕위를 지키기에 급급했기


때문인지 별다른 치적을 남길 새도 없었다. 인종이 후세에 남긴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업적은 김부식으로
하여금 삼국사기를 편찬했다는 점 정도였다. 그러니 당시에 김부식 같은 대학자가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를 일이다(...).

인종이 이자겸의 세력을 제거했을 때에 반역을 했던 이자겸과 그 일족을 주살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인종은 이자겸이 한때나마 자신의 장인이었으며 또한 외할아버지였으므로 함부로 죽일 수 없다 하여
유배형을 내리는데에 그쳤고, 이자겸의 가족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당대의 사람들을 이를 두고
인종을 자비있고 덕있는 왕이라 칭송하였다. 그래서 "인종"인가보다.
그 외에 역시 공이 있다고는 하나 궁궐에 불을 질렀으니 당장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척준경을 끝까지
옹호해주며 유배를 보내고서도 편히 지내도록 배려해 주었다거나, 이자겸의 음모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었던 이자겸의 딸들을 잘 보살펴주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볼때 능력과는 상관없이 인성은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반역자들과 그 일족에 대한 처벌이 너무 미약하다며 인종을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고 한다.

송나라의 관료였던 서긍이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간 후에 지은 『고려도경』에서도 인종의 외모와 인품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서긍이 고려에 갔을 때에 인종은 아직 14 세의 소년이었는데, 서긍은 그 외모에
대하여 "몸집은 작았으나 용모가 아름다고 풍만했다"고 하였으며,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성품이 자비롭고
배운 것이 많았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엄격하고도 명백히 하였고, 또한 그 몸가짐이 단장하면서도
성인의 기풍이 있어서 과연 고려의 왕이 될만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4. 가족[편집]

후궁과 폐비(이자겸의 두 딸들)도 있었지만 공예왕후(恭睿王后) 임씨(任氏)에게서만 5 남 4 녀를 보았다.


5 남은 차례로 태자 왕현(의종), 대령후 왕경, 왕호(명종), 왕충희(출가 - 원경국사), 왕탁(신종)
이었으니 5 명 중 3 명이 왕위를 승계한 셈이다. 다만 이건 모두 무신정권 때문이다.(...) 의종, 명종은
폐위되었고 신종 역시 7 년만에 승하했으며, 그 아들 희종은 명종처럼 최충헌에게 역시 끌어내려졌다.
안습. 결국 다시 명종의 태자였던 강종이 즉위하고 2 년 뒤 손자(인종에게는 증손자)인 고종으로 이어지게
된다.

대령후 왕경은 도량이 넓었으며, 공예태후가 가장 좋아하는 자식이었다. 그러나 결국 인종의 의지대로
의종이 왕위에 올랐고, 여러 역모설 속에도 무고하여 의종이 처벌은 하지 않았으나 결국엔 의종 11 년에
귀양을 가게 된다. 의종이 탄 수레에 화살이 떨어진 변고가 생겼었는데, 의종은 적당을 색출하지
못했다하여 재상들을 책망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연달아 체포되었는데,
대령후 집안의 종인 나언(羅彦)·유성(有成)·황익(黃益) 등이 의심을 받고 혹독한 문초를 당하게 되자
거짓 자백을 하였던 것이다. 왕경의 죽음은 알 수 없는데,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이의방이 의종 대신
그를 세우려다가 대령후가 승계되면 그가 바른 정치를 할까 두려운 이들이 대령후를 살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마 그 이전에 죽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공예왕후 임씨는 의종 때 태후가 되었으나 명종 때까지 살아서 가슴 졸이다가 4 남 원경국사가 죽자 다음해


(1183 년 - 명종 13 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원경국사 이 양반도 막장인게 명종 10 년에 어머니의 병
(유종)을 치료하려 궁에 들어와서는 궁녀, 공주와 문란한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명종이
보호해줘서 살았다고.

5. 그 외에[편집]

참고로 인종은 현재 북한의 영토인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에 있는 장릉에 안장되었는데, 다른 고려


왕릉들처럼 이미 구한 말 혹은 일제 시대 때 도굴 당했다. 위 사진은 국보 94 호인 '청자참외문양꽃병'
으로 인종의 장릉에서 출토된 부장품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물론 정식 학술 발굴에 의한 출토품이 아니고
1916 년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일본인 골동상에게 구입하면서 유물 대장에 인종의 옥돌 시책과 함께 장릉
출토라고 기록해 놓아 신빙성이 아주 높다. 또 이것 외에 알려진 부장품으로 질이 우수한 청자 접시 5 점
1 세트, 청자합, 청자 받침대, 뚜껑 있는 청자잔, 숟가락과 젓가락, 청동내 합과 옥돌 외합, 청동 인장
등도 있다. 그러나 정작 도굴꾼이 파냈다는 장릉의 위치는 당시에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기록대로 개성 서쪽 벽곶동으로만 추정하였다. 또 해방 이후 북한에서 이에
대해 조사했다는 보고는 아직 없다.

송사에 의하면 태자 시절 금나라가 발흥할 때 송나라의 외교 정책에 대해 조언했다고 한다. 그것도 11 살


때 일이었다. 정확히는 1118 년 고려가 송나라에 의관을 파견할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의관에게 당시
태자였던 인종이 "송나라가 금나라와 손잡고 요나라를 정벌할 것이라고 하는데 요나라는 금나라를 막을수
있는 방패가 될 수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의관은 1119 년에 송나라로 귀국했고 이 의견을 전달했지만 송
황제 휘종이 의관이 정치에 관여한다고 꾸짖었다고 한다. 그리고 송나라는 금나라의 도움으로 요나라를
멸망시켰고 그 결과... 사실 이 조언은 11 살인 인종의 개인적인 의견이라기보다는 태자 교육의 결과로
보인다.

18 대 의종 왕현 (1127~1173)
재위 1146~1170

1. 소개[편집]

고려가 본격적으로 막장화된 계기를 만든 암군 중의 암군.


고려의 제 18 대 국왕. 묘호는 의종(毅宗), 시호는 강과장효대왕(剛果莊孝大王). 휘는 현(晛). 자는
일승(日升). 인종의 장남이다.

2. 생애[편집]

2.1. 태자 시절[편집]

의종이 태자로 있을 때 국왕(인종)은 태자가 장차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왕후


임씨도 둘째 아들 왕경(王暻)을 사랑해 그를 태자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태자(훗날 의종)의 스승 정습명
(鄭襲明)이 충성으로 태자를 가르치고 보호해 폐위되지 않았다.
- 『고려사』 권 96 정습명 열전

어릴 때부터 놀기를 좋아하여 부모가 걱정했다. 의종의 모후 공예왕후 임씨는 차남 대령후 왕경을
총애하여 인종에게 태자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인종은 반대했으나, 태자를 바꾸려고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당대에 강직한 신하로 이름이 높았던 정습명[2]의 만류로 그대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양녕대군 왕위 계승 성공판 그러나 왕위에 오르고도 정습명은 의종이 풍류를 즐기는 것을 간언하다가
의종의 미움을 사고 결국 1151 년, 향년 57 세로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 혹은 홧병으로 죽고 말았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의종의 미움을 사 버림을 받고 죽었다는 것은 다르지 않다.(...)

이것에 반론을 하자면 공예왕후도 정상적인 왕비가 아닌 게, 애초부터 해몽으로 뽑힌 왕비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대령후를 밀어 후사 문제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정작 무신 정권이 터지자
대령후보단 이후 명종을 찾았고 의종 때도 의종이 크게 울어재끼니 그제서야 대령후를 찾지 않고 의종을
찾았다. 그의 외척 임원후는 왕 가까이에 올라가 일방적 신임을 받고 각종 특혜를 받자 이에 문신들의
엄청난 비난이 쏟았졌다. 실제로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임원후는 빠질 정도로 김부식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헌애왕후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이자겸의 횡포를 보고도 여전히 외척과 왕비의 권력도 드높았다.

젊은 시절부터 놀자판의 기질이 있다고 고려사에 기록은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사람 자체만 보면 대단한
엄친아로 암군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백하팔인급의 인물은 아니다. 의종은 힘이 세서 강궁을 잘
다루었고 방 안에 촛불을 켜 놓고 활 시위를 당겨 촛불을 꺼버리는 묘기를 선보인 기록도 남아있다. 또한
기마술과 격구에도 두루 능했던 무인형 군주였으며 수박희라는 일종의 격투기를 좋아하여 무인들의 수박희
경기를 자주 즐겨 감상했다. 그리고 풍류를 즐긴 군주답게 음악과 시문 등 예술적 감각도 뛰어났다.
비슷한 예술가 타입 군주였던 공민왕이 무예에는 그다지 소질을 보이지 못했고, 오히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에게 말 타는 법을 배우기 이전에는 말을 탈 줄 몰랐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듯 의종은
무예에도 뛰어났다. 연산군 순한 맛 이 사람이 생각난다.

2.2. 실패한 개혁가?[편집]

즉위 초 의종은 인종 시대의 잦은 내란으로 인해 실추된 왕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특히나 재위 첫해는


승보시가 도입되고 백성들을 생각하는등 나름 초기에는 괜찮은 모습을 보였고, 권력을 휘두르는
문벌귀족들의 견제를 위해 환관과 측근 세력을 양성했으며 특히 무신들을 중용하여 이 때 무신정변의
주역들로 유명한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같은 이들이 발탁되었다. 재위 직후 불교·음양설·선풍(仙風)을
중요시하고 유교에 대해 거론하지 않는, 전형적인 반관료 암군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1154 년 창건한
중흥사, 1158 년 연백주(백주)에 창건한 중흥궁은 고려 왕실을 중흥(重興)하겠다는 의종의 의지가
드러난다는 평가도 있으나 이 역시 왕실의 재력을 바탕으로 추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러한 의종의 시도는 실세 권력을 잡고 있던 김부식 일파를 중심으로 한 당대의 세력가였던 문벌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종전대로 문신 우대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무신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또한 이들과 문신들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인종 시대에 잔치 중 용춤을 추던 정중부의
수염을 김부식의 아들인 김돈중이 태워먹었다는 일화가 유명한데, 이 장면도 이러한 당시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가기 위해 오문(五門) 앞에 도착했다.… 왕은 무신들이 실망하지 않게 위로하기


위해 수박희(手搏戱)를 하게 했다. 내시 한뢰(韓賴)는 (왕을 호위하는) 무신들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했다. 마침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희를 하다 힘이 부쳐 달아나자, 그의 뺨을 치고 비웃었다. 내시
임종식·이복기 등도 이소응을 모욕했다. 정중부 등은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나 벼슬이 3 품인데 어찌
이렇게 욕을 보이는가?’하고 소리를 질렀다. 왕이 정중부를 달랬다.

- 『고려사』 권 128 정중부 열전

또한 무신 정변 당일에는 종 5 품의 젊은 문신이었던 기거주 한뢰가 종 3 품이 되는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일이 있었을 정도. 종 3 품이면 고려 시대 무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이니, 현대로 치자면 웬
중앙 정부 외청 산하 인재 개발원 과장 나부랭이가 공식 석상에서 합참 수뇌부 인사의 싸대기를 날렸는데,
주변 공무원들 모두가 별 대수롭지 않은 일마냥 웃고 넘기려는 상황을 생각하면 비슷한 분위기가 된다.
이는 그 당시 무신들이 문신들에 비해 얼마나 홀대받고 있었는지를 나타낸다. 흔히 이 사건이 무신 정변의
원인이라고들 하는데, 이 사건과 정변은 같은 날에 일어났으므로 원인이 될 수 없다. 정변 자체는 이
일과 상관없이 사전에 왕이 보현원에 가면 결행하기로 모의된 것으로 이 일이 없었어도 일어났을 일이다.
다만 정변 후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던 한뢰가 처참하게 살해당한 것은 이 일이 원인으로 보인다.

결국 말년에는 문신들 및 환관들과 어울려 항락과 사치를 즐겨 백성들이 왕을 원망하기도 했다. 머리카락
잘라 팔아서 공사판에서 일하는 남편과 동료들의 점심을 마련한 여인 이야기의 배경이 바로 의종 시대다.
이 이야기 또한 당시 백성들의 삶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건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의종 21 년
3 월조에 나와 있는 이야기로 중미정이라는 정자를 지을 때 실린 이야기다. 잦은 연회로 국고가 탕진되어
인종 때까지 그럭저럭 유지되던 고려의 태평성대가 무너지게 되었다.

2.3. 비참한 최후[편집]

밤이 되어 왕의 수레가 보현원에 도착했다. 이고·이의방은 왕의 명령을 가짜로 만들어 (친위 군사인)


순검군을 집합시켰다. 왕이 숙소에 들어가자, 이들은 임종식·이복기·한뢰 등을 죽였다. 왕을 호위한
관료들과 환관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정중부는 왕을 개경으로 돌려보냈다.
- 『고려사』 권 19 의종 24 년(1170 년) 8 월

결국 이러던 중 마침내 1170 년 음력 8 월, 의종은 보현원에 행차했는데, 이때 그 동안 문신 우대 정책에


불만을 품은 무인 이고, 이의방, 정중부 등은 문신들을 싸그리 몰살시켰다. 이 때 제거된 문신의 수는
대략 50 여명이었다고 한다. 한편 무신들이 문신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는 동안 우리의 왕 의종은 뭘
하고 있었느냐면, 그 살육의 현장에서 정작 의종 본인은 태연하게 평소처럼 술에 취해서 악사들의 음악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고 한다.[3]

그리고 무신들은 개경에 입성한다. 무신들은 입성 후 바로 의종을 폐위시키진 않는다. 그러나 [4] 정변
시작 3 일 후 왕광취를 비롯한 환관 세력들이 반 무신 정변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를 제압하고, 이 배후에
의종이 있다 생각해 의종을 폐위시키고 동생 명종을 옹립하여 고려의 정국을 장악했다. 이것이 바로
무신정권의 시작으로 무신 집권기는 1270 년 마지막 실권자 임유무가 살해되기까지 정확히 100 년간
지속되었다.
쫓겨난 의종은 거제도에 유폐되었다. 1173 년, 무인 정권에 반발하며 의종의 복위를 꾀한 김보당의 난이
일어났으나 이의민에게 진압되고, 이 때문에 계림[5]으로 또다시 옮겨져 유폐되었다. 원래 의종은 거제에
유폐되어 있었는데 김보당의 난 동안 경주로 옮겨온 거다. 즉, 직접 가담. 김보당의 난이 실패하자
동경은 경주로 격하되었고, 의종은 그대로 유폐되었다. 그 뒤 곧 찾아온 이의민에게 글자 그대로 끔살
페이탈리티 당했다. 향년 47 세. 얼마나 끔찍하게 죽었는지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이러하다.

"전왕을 끌어내서 곤원사의 북쪽 못가에 이르러 술 두어 잔을 드리고, 의민이 등뼈를 부러뜨리니 손대는
대로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의민이 큰 소리로 웃었다. 박존위[6]가 담요로 싸고 2 개의 가마솥을 마주
합하여 그 속에 넣어 못 속에 던졌다.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 티끌과 모래가 날아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부르짖고 떠들며 흩어졌다. 절의 중 가운데 헤엄 잘 치는 자가 있어서 가마솥은 가져가고
시체는 버렸다."

아마 기록으로만 미뤄 보면 고려사 아니 한국사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7] 영류왕, 공민왕과 더불어


가장 참혹하게 살해당한 임금 중 한 명일 것이다. 이의민의 등뼈 꺾기에 온몸의 뼈가 부러져 죽었고, 그
시체를 담요로 감싸고 가마솥 2 개를 합쳐서 연못 속으로 시체는 걍 버렸다는 소리. 후덜덜…
스님에게까지 외면받는 불쌍한 클라스 하고는 반대로 말하자면 상당한 용력을 가지고 있던 무장급 의종을
접어서 죽인 이의민이 어느 정도의 인간 흉기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천민 출신인
이의민을 무신으로 발탁하여 출세시킨 것은 바로 의종 자신이었다. 그나마 전 부호장(副戶長) 필인(弼仁)
이라는 사람이 시신을 수습해 관을 짜서 물가에 묻어 주었고, 친동생인 명종이 그를 희릉(禧陵)에
안장하였다.

의종에게는 1 남 3 녀가 있었다. 외아들이자 태자였던 효령 태자 왕홍[8]은 유배되었다가 의종 시해 후에


어떻게 됐는지 기록이 없는데, 정황상 피살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절요에는 금나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 사신이 김돈중의 관상을 봐 주었다는 말을 듣고 의종이 자신의


관상도 봐 달라고 하면서 수명을 물었는데, 사신은 "왕께서는 수명이 셀 수 없을만큼 길고 기셔서,
조정의 노소 신료들이 다 죽고 난 뒤에야 임천지환[任川之患]이 생길 듯 합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결국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가 되어버렸다.

3. 평가[편집]

의종은 환관 무리와 놀러 다니는 일로 날을 보내어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국정은 어지럽고 기강은 땅에
떨어졌다. 문신들과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고, 무신을 혹사하고 천대한 결과
마침내 무신의 대란(大亂)을 도발케 했다.
- 김상기, 『고려시대사』

사신(史臣) 유승단(兪升旦)이 말한다. "불행하게도 의종은 아첨하고 경박한 무리들을 좌우에 두고 재를


올리고 기도하는데 재물을 기울여 탕진했다. 정치에 쏟아야 할 시간과 정력을 주색(酒色)에 빠져, 풍월을
읊는 것으로 정치를 대신했다. 이로써 점차 무신의 노여움이 쌓여 화(禍 : 정변)가 일어났다."
- 『고려사절요』 권 11 의종 24 년 8 월 사평(史評)

흔히 이렇듯 항락에만 몰두하다가 자신도 비참한 운명을 맞았고 무신 정변으로 고려의 혼란을 초래한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다가 험한 난관에
부딪혀 좌절하고 만 비운의 군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사실 문종 이후의 왕들이 괜찮은 주변 여건에다
내부적으로 안정기라서 대체로 명군 소리까지 듣는 것에 비해서, 의종은 무신 정권의 시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역사와 당시 상황을 기록하는 문신들에게 최악의 평가를 받은 측면도 있다.

사실 비운의 군주 소리를 듣기엔 25 년이란 재위 기간은 결코 짧은 것도 아니다. 고려 왕조의 평균 재위


기간이 유독 짧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의종은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보다 훨씬 오래 살았고
또 오래 재위했다. 되려 이런 자기 정치 길게 한 임금이 정변에 그렇게 무방비 했다니. 그렇기에 그 긴
재위 기간은 분명히 재평가받을 여지는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무신 집권과 고려의 국정 혼란을 초래한
책임은 피할 수 없는 인물로, 특히 무신 집권기 이후 몽골의 침입 때까지 고려가 개판으로 돌아가는데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해 버렸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는 힘들다.

4. 트라비아[편집]

초하루 임자일. 왕이 대관전(大觀殿)에서 신년 하례를 받고는 친히 신료가 올리는 하례의 표문을 지어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해 정월이 돌아오니 만물이 새로우며 궁전에 봄이 돌아오니 용안에는 기쁨이 가득하나이다. 우주의
이치를 체득하시어 은혜를 널리 펴시고 모든 복록을 한 몸에 모으사 조화를 크게 만드시니 이야말로
성인의 도가 길이 이어나갈 시초이자 만물을 생장하게 하는 기운이 퍼지는 처음이로소이다.
공손히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요(堯) 임금의 성스러운 밝음과 순(舜) 임금의 지혜로운 총명을 한 몸에
지니셨으니, 온갖 복록이 모여들어 쉼 없이 나날이 새로워지며, 다달이 끊임없이 무궁한 천수를
누리시리이다. 어진 덕이 가득하시니 만물이 제 자리를 찾고, 전쟁을 끝내고 문교(文敎)를 펴시니
이야말로 무궁한 경사로소이다. 이제 태평성대를 맞이하여 닥쳐올 경사가 더욱 융성하리니, 님 계신
대궐에서 신령스런 상서를 옹위하고 남산 같이 창성한 국운을 보위하리이다.
천하의 나라들이 분주히 달려와 옥과 비단을 다투어 바치옵고, 사방의 신민들이 뒤질세라 산넘고 물건너
모여드옵니다. 이 좋은 날에 하례를 받으시니 복을 더욱 크게 받으시리이다. 하물며 요즘 바쁜 정무의
여가에 부지런히 신하들을 접견하시고 글하는 신하들과 더불어 즐겨 문장과 사육변려문을 훌륭히
지어내시며, 신하들의 자리에 오셔서 시(詩)·서(書)·경(經)·사(史)의 오묘한 글들을 강론하시나이다.
북쪽 금나라 사신은 술잔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동쪽 일본국[日域] 사절은 보물을 바치며
황제라 부르나이다.
하늘 신령께서 늘 몰래 도우시니 복록과 경사가 강물처럼 불어나고, 세상에 다시없는 새로운 상서가
열리니 군왕께서 통일을 이루심을 보겠나이다. 신하들은 찬미를 바치옵고 그 위업은 청사에 빛나리니,
인민이 생겨난 이래로 오늘 같이 성대한 날은 다시 없으리이다. 저희들은 이 성대를 만나 밝은 임금의
은택을 흠뻑 받으니 천자[萬乘]와 같은 위엄을 우러러 보며 대궐로 달려 왔사옵니다. 여섯 왕조의 음악
[六樂]과 아홉 곡의 연주[九奏]는 모두 간자(簡子)가 들었던 천상의 음악에 견줄만 하나, 또한 만세를 세
번 불러 한나라 무제가 들었던 것과 같은 축수를 아니 바칠 수 있겠나이까?”
이 글을 두고 백관이 하례하는 표문을 올렸다.. -의종 24 년 1 월 1 일

간단히 요약하면, 의종이 직접 "하례는 이렇게 쓰는거야!"라고 예시문을 썼는데 이를


1. 님은 레전드 OF 레전드 클라스가 다름요, 순 임금 합친 레벨임. 2. 세상의 모든 나라와 신민이 님
앞에서 조공함. 3. 님은 존나 똑똑함. 4. 금나라도 님한테 만수무강하라고 빔. 5. 일본은 님을 황제라
부름. 6. 님같은 성군을 만난 우리는 겁나 축복받은거임. 7. 폐하 만세!!
..로 요약할 수 있다.
한편 의종은 이런 자뻑짓을 한 후 반년도 안되어 폐위를 당하고, 이를 후대 조선에선 "임금이란 작자가
자뻑만 하고 살았으니 망할 만 했다"라며 대차게 깠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김규철이 배역을 맡아, 똘기 어리면서도 한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정신이 붕괴하는 의종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무신 정변이 발생하는 첫 화에선 그저 흥청망청 노는 것만 좋아하는 암군으로 등장한다. 무비의 언급에
의하면 처음의 의종은 성군이 되고자 했으나, 그가 등용한 문신들이 의종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면서 결국
의종이 타락해버렸다고 한다. 차별 등으로 인해 분노가 극에 달해있던 무인들은 미리 정변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정중부는 소장파 무신들에게 만약 의종이 황궁으로 돌아간다면 정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웠고, 수상함을 느낀 김돈중이 황궁으로 돌아갈 것을 건의하나 의종은 이를 무시하고 보현원에
놀러가버린다. 이후 역사대로 무신 정변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의종이 총애하던 한뢰는 의종 앞에서
이의방의 철퇴에 참교육을 당하고 만다.
2 화에서 의종은 환관들에게 무신들을 척결하라는 혈서를 내리는데, 이의방 일파는 밀고자 덕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황궁에 들어선다. 희대의 무력 굇수들에게 환관들은 일방적으로
박살나버리고, 주동자인 왕광취는 이의방의 철퇴에 참교육을 당하고 만다. 왕광취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절명한 직후, 이의방은 의종 앞에 대놓고 왕광취의 머리통을 내던지고(이 때 의종은 비명을 제대로
질렀다.) "황제는 폐위되셨소이다!"를 외친다.
이의방에게 삿대질을 당한 뒤, 궁에 유폐되는데, 이의방 일파가 대놓고 궁전 앞에서 환관들을 고문했고,
그 비명 소리가 내부에 까지 들려오자 멘탈이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폐위가 결정된 후엔 군기감에
유폐되는데, 거기선 이광정 따위에게도 멸시당하고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궁궐 밖으로 끌려나갈 때
의종은 대신들과 장군들을 향해 "짐은 반드시 황도로 돌아올 것이다. 짐이 돌아와서 다시 용상에 앉는 날
여기 있는 네놈들의 간을 내어 씹어먹을 것이다. 네놈들의 목을 자르고 불에 태워버릴 것이다!"하는
살벌한 대사를 퍼부으며 재기를 다짐했다. 그러나 형벌이 결정되고 무비와 함께 거제현으로 유배를
떠나는데, 백성들 사이에서도 별로 평판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유배 도중 백성들에게 돌을 맞기까지 한다.
이때 두경승이 찾아와 의종에게 절을 올렸고, 당시 의종을 호송하던 이의민은 두경승의 인물됨을
눈여겨본다. 거제현에선 와신상담을 하듯이 생선 내장을 생으로 씹어먹는 충공깽스런 모습도 보이며,
황궁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린다. 그 와중에 김보당 일파가 찾아와 의종을 보위에 올릴 것을 약속한다.
얼마 후, 의종 폐위와 관련하여 금나라와 외교 분쟁이 벌어지자, 혼란을 이용해 왕조를 갈아치우고자
했던 이고 일파는 의종을 살해하고자 결사대를 파견했고, 때마침 무비를 걱정하던 이의방도 이의민을 몰래
거제현으로 보낸다. 이고의 부하들이 거제현에 도착할때 쯤 악몽을 꾼 무비는 그 날 밤 의종을 데리고
산속으로 도주하였고, 덕분에 이고의 부하들은 의종을 찾지 못하고 때마침 도착한 이의민에게 끔살당하고
만다. 무비는 의종을 버리고 이의민과 함께 거제현을 떠나는데, 뒤늦게 무비를 발견한 의종은 무비를
애타게 외치지만, 무비는 의종에게 자신을 잊으라고 말하며 떠난다. 이 때쯤 의종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의종은 어머니인 공예 태후에게 버림받고, 수많은 신하들에게 폐위당한지라 멘탈에 금이 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무비가 의종과 함께 한 지라 무비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런 무비마저도 의종을
져버리자 의종은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야 만다. 한참 후 송유인이 병사들을 이끌고 거제현에 찾아왔을때,
의종은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선 무비를 부르짖으며 온 곳을 쏘아다니는 안습한 모습을 보인다.
이후 섬을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소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사실 섬의 지도를 그리기 위한 것이었다.
의종은 김보당 일파에게 지도를 전달했고, 반란군은 이를 이용해 손쉽게 주둔군을 박살내 의종을 데려간다.

김보당의 난 때 경주 호족들과 야합하여 김보당과 개경을 협공하고자 하였으나 김보당은 붙잡혀 참수되고
이의민에게 경주를 장악당하며, 이의민이 거제현으로 다시 데려가겠다고 하자 한때 자신의 은덕으로
천민에서 벗어난 그에게 이별주를 청하며 부월무를 보여달라고 한다. 이 때 이의민이 추는 부월무가 압권.
그 후에 계곡을 바라보며 "떠날 때가 됐구나"[10]라고 말하며, 그 직후 역사대로 이의방의 밀명을 받은
이의민에게 등뼈가 으스러져 죽는다. 그리고 의종은 훗날 환생하여 자신을 죽인 이의민의 개가 된다
카더라.
금강야차로 악명 높은 이의민에게도 의종 시해는 엄청난 일이어서 그런지, 이의민은 한동안 악몽을 꾼다.
책사인 두두을 말로는 의종의 원혼이 성불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아서 그런거라고. 한편 김보당의 난
당시에는 어떻게 형님을 죽일 수 있겠느냐고 울먹이던 명종은, 먼 훗날 이의민 정권 때에 이르러서는 의종
시해를 '어쨌든 국가과 황실을 위해서 할 수 밖에 없었던 필요 악'으로 인정한다. 의종이 시해 당하면서
황실이 안정 되고, 명종의 정통성이 확립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KBS 1TV <역사저널 그날> 2015 년 3 월 29 일 67 회에 <드라마 속 역사 인물 시리즈 제 4 탄 천민


이의민 왕을 꿈꾸다>라는 제목으로 이의민을 다뤘다. 정중부에게 오늘 일을 잊으라며 술을 따라준 장면이
나왔는데, 정중부는 의종이 자리를 비웠을 때 그 술을 쏟아버렸다.

19 대 명종 왕호 (1131-1202)
재위 1170~1197

1. 소개[편집]

무신 정권을 대표하는 허수아비 군주.


고려의 제 19 대 왕. 묘호는 명종(明宗), 시호는 황명광효대왕(皇明光孝大王), 휘는 호(晧), 자는 지단
(之旦). 인종의 아들이자, 제 18 대 왕 의종의 동생이다. 의종에게 아들들이 있었고, 의종 다음으로도
대령후 왕경(大寧侯 王暻)이 있었기에 순번상 왕위 계승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2. 생애[편집]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살육하고 의종과 태자를 몰아낸 다음 유약한
성격인 그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약간은 조선 중종과 비슷하지만 쿠데타 세력의
성격이 매우 달랐다.

사실상 무신정권의 허수아비 임금이었다. 게다가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키면서 문신들을 죄다


족쳐버린데다가 그 무신들도 결국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이고를 이의방이 죽이고 이의방을 정중부가
죽이고 그 정중부는 경대승이 죽이지만 계속 권력자가 교체되었으며 여기에 민중봉기도 자주 터지는 등
이래저래 사회가 막장이었다.

또한 유약한 성격은 물론이고 심각한 애처가에 딸바보적인 성향도 있었다. 애첩인 순주가 죽고 거의 반년
후인 1180 년에 명춘마저 죽어버리자 우울증에 시달려 어머니 공예왕후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다
들을 정도로 울어댔다고 한다. 그리고 심지어 후궁들 중에서 마음을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며 이미 시집간
둘째 딸인 수안궁주를 측근으로 삼아 자신에게서 밤낮으로 떨어지지 못하게 한다음 밤에는 품에 끼고 잠을
자기도 했고 이 기간은 무려 5 달 가까이 되었다. 자기 마음을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며 시집 간 딸을
불러들여서 하루종일 자신의 옆에만 있게 하고 잘 때는 끼고 잔 것이다.

그러다보니 결혼한지 1 년만에 독수공방을 하게 된 사위가 분통을 터트리며 파혼을 요청하기에 이르었고,
그렇기에 명종은 결국 사위를 수창궁(壽昌宮)의 동쪽 태후(太后) 행궁(行宮)에 거처(居處)하게 하고,
공주를 보내 남편을 위로하게 했고 결국 5 달만에 딸을 집으로 돌려보내주었다.

그리고 순주와 명춘 및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궁내에 불러들여서 화려한 오색 옷들을
입히고 놀기 바쁘다보니 궁 내가 하도 시끄러워서 자연히 군주로서의 권위는 저 너머로 떨어졌고, 경대승
정권 당시임에도 무관들이 전부 마음 속으로 명종을 비난하고, 수군거리며 탄식했다고 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경대승 정권 이전의 정중부 정권 당시에는 음악이나 여색 등에 빠지는 것을 정중부


정권에서 제재했기 때문에 의종처럼 마음대로 노는 것도 못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중부 일가가
경대승에게 몰살당한 후에는 자유로워진 명종은 이런 방탕한 행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과연 의종의
동생이다.

그리고 경대승이 죽은 후 아주 잠시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당시 경주로 낙향했던


이의민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였다. 이의민은 경대승이 두려워 경주로 도망갔었다. 이에 대해서는 수도의
군부 세력을 제어하고자 하였다 보는 시각이나, 경대승 잔당에 대한 문제 등이 추측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이의민은 선왕을 시해한 자인데다 천민 출신으로 그나마 만만한 상대이기도 했기에. 때문에 명종은
임금 스스로 이의민을 불러서 관직을 제수함으로써 기회를 차버렸다. 그 때문에 고려의 무신 정권 기간이
길어지게 만든 인물이라서 심하게 까이기도 하는 왕이다.

그가 이의민에게 권력을 넘겨준 것도 무신정변이라는 비정상적인 쿠데타에 의해 옹립된 왕이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군부(정중부)에 의해 옹립된 왕이기 때문에 문벌 귀족들 보다는 군부 세력이
자신을 옹호할 세력이라고 판단하였고 이의민을 불러올린 것이다.

정중부 일당이 세운 왕이었기 때문에 결국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었고 최충헌은 그의 아우


평량공 왕민을 왕으로 세웠다. 명종은 그 후 이질에 걸렸지만 의원의 치료를 거부해 승하했다. 그 때 한
말이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폐위도 당했다." 였다. 실제로 승하할 당시의 나이가 72 세로 당시의
기준으로는 결코 단명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후사는 그에게 이어졌으니, 신종의 뒤를 이은 신종의 아들 희종이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폐위되자 명종의 아들 강종이 왕이 됐고 그 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그의 자손이 왕이
되었다. 덧붙여서 공양왕의 경우 부계로는 신종의 7 대손이지만, 모계 쪽으로는 그의 후손이 된다.그의
신하였던 경대승덕분에 까이는 인물이다.허수아비 임금이라고 생각하기쉽지만 그건 정중부때의 일이다.
정중부의경우 명종이 무엇을 하던 제동을 걸정도로 명종을 압박했지만 정중부를 제거한 경대승의 경우
왕인 명종을 상당히 존중하고 심지어 어려워했다.위의 항목처럼 명종이 놀자판이면 정중부는 명종이
못놀게 막았지만 집권자인 경대승이 자신을 위협하지않고 오히려 복고주의자였기 때문에 왕께서 무엇을
하시는데 신하인 자신이 어떻게 하냐는 주의였기때문 그러면 정신을 차리고 정사를 펼쳐야 하나 오히려
자신을 속박하는 사람이 없자 그냥놀았다. 게다가 정치적이념에서 늘 경대승과 갈등을 빚었는데
명종자신의경우 무인들에게 추대됐기 때문에 무인들에 대해서는 호감이었지만 경대승의경우 무인들을
극혐하고 문신들을 존중하는 무신이지만 문치주의자였던것 물론 경대승의 깨방정도 있지만 경대승을
두려워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경대승자체가 왕인 명종을 상당히 존중했기때문에 늘 경대승을 의심하고
심심하면 불러서 늘 갈궈됐다.정중부의경우 이러면 그냥 왕을 갈아치워면 그만이나 왕을존중했던 경대승은
늘 명종에게 자신의충성심을 변호해야했다.어떤의견으로는 그가 30 살에 요절한것도 암살위협도있지만
왕인 명종이 그를 늘의심해 심하게 갈구다보니 그로인한 스트레스로 인해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무인시대에서는 그의어머니가 황상은 경대승같은 용마를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사용을 못하냐며 깐다.
결과론적으로 페위됐을때 무신집권자중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성했던이는 돌아보니 경대승 뿐이었다.

3. 기타 창작물[편집]

3.1. 징기스칸 4[편집]

징기스칸 4 일러스트

코에이의 징기스칸 4 에서 시나리오 1 의 고려 국왕으로 등장하고[1][2]마치 무인 정변을 주도하여 등극한


인물인양 설정되어 있으나, 능력치나 수명은 안습이다. 무장들을 규합하여 쿠데타로 정권 잡았다며..
이게 뭐야;; 고려 왕 중 두 번째로 장수한 임금인데도(1 위는 25 대 충렬왕으로 73 세) 십중팔구 얼마 못
가 병사해 버려[3] 컴퓨터가 플레이시 거의 수하 장수로 있는 최충헌이 후계자가 되어 "최씨 고려"가
되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래서 시작하자마자 연회를 해서 빨리 자손을 만들어야 한다. 거기에
정발판에서는 얼굴이 그나마 한국사 왕 답지만 일본판에서는 무슨 왕서방으로 등장, 지못미. 그래도 사실
역사적 행적으로 봐도 그다지 좋은 능력치를 받기는 어려울 테니, "등장했다"는 데 의의를 둬야 할지도.

3.2. 무인시대[편집]

무인시대에서는 김병세가 배역을 맡았다. 1 회에 등장하여 최충헌 정권 초반부인 133 회에 퇴장했으니


드라마 진주인공인 이의민보다도 더 오래 등장한 셈. 조연 중에서는 두경승과 더불어 가장 비중이 높은
캐릭터인데, 두경승은 전형적인 고결한 영웅 캐릭터인걸 감안하면, 이 쪽이야 말로 주제면에서 준
주인공급이라고 할 수 있다.

작중 위치는 권력없는 나약한 허수아비이긴 한데, 오랜기간 온갖 몹쓸 일을 당하는데다 권력의 단맛과


책임감을 느끼면서 명종 역시 점차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처음 즉위할 때만 해도 뭔 일이
벌어지면 눈 튀어나올 듯이 놀란 표정을 짓는데다, 극 초반부 금나라와의 외교 분쟁이 발생하자 태후
앞에서 울먹거릴 정도로 그저 무기력하고 나약한 모습만 보인다. 그러나 정중부 정권 시점에선 은근히
자기 고집이 생기더니, 후반부에 이르러선 초반에 비해선 강단있고 편집증적인 성격으로 흑화해버린다.
인물 묘사의 변화 및 배우의 열연으로 인해, 후반부엔 얼굴서부터 대놓고 명종이 흑화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권력에는 부모자식도 없다는걸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초반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데다


나약한 인물이다보니 태후에 무작정 기대는 모습을 보이더니 정중부 정권쯤부터는 은근히 태후(공예왕후)
와 대립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보당의 난 때는 태후가 의종을 처단해야한다고 말하자, 명종은 울먹거리며
어찌 형님을 시해할 수 있다며 이를 거부한다. 그러나 경대승 정권쯤에 와서는 태자의 입지가 커지자
태자를 정치적인 적으로 여기고선 정말로 태자를 제거할 생각까지 한다.

무신정변 당시엔 갈등의 원인 중 하나로 등장한다. 이의방을 비롯한 소장파 측에선 대령후를 옹립하고자
했으나, 정중부 측은 익양후(명종)을 옹립하고자 했고, 때문에 이고 측에서 익양후를 인질로 잡는 등
유혈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나 대령후가 아무도 몰래 정균에게 공구리 당한 관계로 결국 익양후가 황제로
즉위한다. 접전이 벌어질 당시, 익양후는 장독에 숨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원래 황제의 자리에 오를 위치가 아닌데다가 유약하다보니, 용상에 오르고도 어머니인 공예왕후(태후)


에게 의존하는 등 심약한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태후도 대놓고 명종에게 "황상을 황제로 고른 것은 이
어미요!"라고 말할 정도. 금나라가 시비를 걸자 태후에게 울먹거리기까지 한다. 김보당의 난 때 의종
시해건에 대해서도 태후에게 울먹거리며 어찌 형님을 시해할 수 있냐며 거부했으며, 결국 이의민이 의종을
시해하자 충격을 받으며, 한편으로 어머니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의방 정권이 몰락하고 정중부 정권이 들어설 때 쯤엔 은근히 자기고집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의방의 딸인 태자비를 폐위할 때부터 태후에게 반항하기 시작하며 자신을 황제로 세워준 것은
감사하지만 황제는 자신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아무리 허수아비라지만 권력자들은 겉으로나마 명종을
최고 권력자로 대우하는데, 공예태후가 자신이 명종을 즉위시켰다며 영향력을 행사할려고 하니,
명종으로서는 어머니가 못마땅해보이는 것. 또한 정중부가 몰락하자 정중부에게 없는 죄까지 뒤집어씌워서
조리돌림 후 처형시키는 잔혹한 면모까지 보인다. 정중부 일가를 도모한 경대승조차도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냐며 경악한다. 사실 정중부는 권력을 탐하고 권신으로서 지위를 노렸을 뿐 황제의 자리를
탐하지는 않았다. 정균의 경우도 죽기 직전에 가서야 자신이 황제가 되겠다고 생각했을 뿐 그 이전에는
그저 임씨 부인의 일로 흑화한 광기에 찬 권신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명종은 자결을 하겠다고 하는
정중부를 잔혹하게 죄를 뒤집어씌워 조리돌림까지 시켰다. 이에 경대승 마저도 자신도 이렇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충격을 받는다.

과연 경대승 집권기에는 경대승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이는 한편, 경대승을 비호하던 태자와의 반목 때도
술을 마시면서 "태자, 짐은 결코 네게 용상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하며 분노한 모습은 허수아비일
뿐이기는 하지만 황제의 자리에 올라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름에 따라 그 권력에 취하여 이쪽도 흑화했음을
보여주는 부분. 드라마의 연출 상 명종이 경대승의 집권으로 태평성대를 이룰 호기를 맞았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내쳐 버렸다는 식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건 경대승을 너무 띄워주다 보니 다른 면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판에 가깝다. 극중에서도 몇 차례 묘사된 바와 같이, 고려를 무신 정변 이전으로
되돌리겠다는 경대승의 생각은 그 무신 정변으로 옹립된 명종의 정통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었기
때문. 이에, 아예 학계 일각에서는 의종이 이의민에게 시해당하지 않았더라면 경대승에 의해 의종이
복위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즉 경대승의 집권으로 (명종의) 황권은 약화되면
약화되었을지언정 결코 강해질 수 없었고, 명종으로서는 경대승을 믿지 못하고 경계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하여간 작중 경대승과 명종을 대비시키기 위해서 그런지, 이 시점에서 명종은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인다.

경대승의 죽음 이후, 정신을 못차리고 경대승의 죽음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푸는 작태를 보이자,
보다못한 태후가 연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들다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자, 어머니를 걱정하면서도 결국 그
일을 빌미삼아 태후전에는 가보지도 않는 찌질함을 보인다. 하지만 곧 손석과의 거래, 김자격의 낚시
등으로 청주 가문이 반역을 저지르지 않은 것으로 사건을 무마시키기로 마음먹은 조원정이 대전에서
황명을 대놓고 무시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병상에 있던 태후가
"황실의 권위를 찾고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꿈은 버리고, 황실을 지켜내는 것만을 생각해야할 것이다"
라는 팩트 폭력 말과 함께 이의민을 불러올리라는 조언을 주고, 명종 역시 이 조언을 받아들여 두경승을
통해 이의민을 불러올린다.

이의민 집권기에는 결국 태후마저 세상을 뜨고, 홀로 황실을 지키며 문극겸과 두경승에게 의지하여 정국을
운영한다. 이 즈음부터는 허수아비 황제로나마 오랜 기간 제위에 있으면서 드디어 무언가를 깨달은 것인지,
이의민의 장남 이지순이 황실을 떠받들 재목이라 평하는 태자에게 "허수아비 황제로 무부들에게 흔들리는
것은 자신의 대에서 끝나야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모습은 조원정의 난 때부터 볼 수 있는데,
도성 내에 반란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자리를 지키다가 반란군 수괴가 들어오면 대면하겠다'
라는 판단을 내린다. 극 초반에는 장독에 숨어들 정도로 유약했고, 경대승의 거병 때만 해도 정중부의
사가로 도주할려고 했던 것과 비교하면 성장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의민 집권기 때는 두경승을 이용해 이의민을 견제하는데, 그렇치만 이의민의 존재 의미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자신은 무신 정변으로 옹립된 황제이니, 무신들을 부정하는건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걸 깨달은 것. 때문에 극 초반부 때와는 달리, 의종 시해건에 대해선 황실을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해야하는 일이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타락한 이의민과 이지영이 횡포를 부리자 점차
이의민을 제거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으며, 이지영이 궁녀도 아니고 후궁을 겁간하는 일이 벌어지자[4],
뒷목을 잡은 명종은 두경승과 최충헌을 이용해 이의민 일파를 제거한다.
최충헌은 유약한 황제라고 무시하는 최충수와 주변 부하들에게 "명종은 유약하게 권력자들에게
흔들리다가도 그들의 권세가 기울면 가차없이 내쳐버리는 무서운 황제"라고 평가하며 그를 경계하는데,
과연 명종은 최충헌이 중방을 도륙내는 모습을 보며 느낀 것이 있는지 두경승에게 그를 도모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하지만 두경승이 최충헌의 고육지책에 휘말려 그에게 패하고, 명종은 대전의 용상에 앉아 최충헌,
최충수 형제의 병장기와 마주하게 된다.[5] 결국 명종 자신 역시 최충헌에 의해 폐위당하여 굵은 빗줄기
속에서 비참하게 대전에서 끌려나오며 형인 의종의 전철을 밟게 되며, 유폐된 곳에서 노환으로 최후를
맞이한다.

20 대 신종 왕탁 (1144~1204) 재위 1197~1204

1. 개요[편집]

황해북도 개풍군에 남아 있는 신종의 양릉(陽陵).


고려의 제 20 대 국왕. 묘호는 신종(神宗), 시호는 경공정효대왕(敬恭靖孝大王), 휘는 민(旼), 탁(晫).
인종의 5 남이자 명종의 동생이다.

2. 생애[편집]

1154 년, 평양후에 책봉되었다. 1197 년, 정변으로 집권한 최충헌이 형 명종을 폐위시킨 후 그 자리에
즉위시켰다. 이 때 나이가 54 세였다.

그의 치세는 최충헌의 독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다. 신종은 왕위에 있었지만 실권은 없었던
허수아비 국왕이었다. 또한 최충헌 정권에 반발한 민란이 각지에서 일어나 고려는 큰 혼란에 빠진
상황이었으며, 특히 그 유명한 '만적의 난'이 일어난 것도 바로 신종 시대. 이 상황에서 신종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듯 무력하게 7 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1204 년, 병이 심해져 왕위를 태자 왕영(희종)에게 물려주고 곧


승하하여 양릉에 안장되니, 향년 61 세였다. 형인 명종처럼 그 역시 무신정권 때문에 한 많은 삶을 산
군주였다.

3. 기타[편집]

충렬왕은 태자 시절이던 1260 년 신종의 증손녀 정화궁주 왕씨를 태자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원나라와의
오랜 전쟁이 끝나고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충렬왕은 결혼한 지 14 년이나 된 정화궁주를
두고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의 딸 제국대장공주를 왕비로 맞이해야 했다. 정화궁주는 제 2 비로 밀려나
갖은 수모를 당하며 살았다.

신종의 7 대 후손이 바로 고려 최후의 국왕인 공양왕이다.

4. 대중 매체에서[편집]

코에이의 게임 징기스칸 세계편에서는 고려의 군주로 등장한다. 하지만 세계편 시작연도가 1206 년이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신종은 죽고 희종이 왕으로 있어야 한다.

KBS 대하사극 무인시대에서는 배우 이우석이 맡았다.


21 대 희종 왕영 (1181~1237) 재위 1204~1211

1. 소개[편집]

고려의 제 21 대 국왕. 묘호는 희종(熙宗), 시호는 인목성효대왕(仁穆誠孝大王). 휘는 영(韺). 자는


불피(不陂). 신종의 큰아들이다.

2. 생애[편집]

2.1. 즉위 초기[편집]

아버지 신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그 역시 최충헌의 전횡 때문에 왕 노릇을 하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일단 희종은 최충헌을 진강군개국후에 봉하는 등 최충헌의 존숭에 열을 올렸는데, 그 길기로 유명한
최충헌의 관직명인 '
벽상삼한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장군상주국병부어사대판사태자태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바로 희종이 즉위한 직후다. 또한 최충헌이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들어주었다.
사실 권력이 없었으니 최충헌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지만...

2.2. 최충헌 제거 실패[편집]

어쨌든 재위 초반에는 이렇듯 최충헌의 말을 잘 듣는 군주로 보였으나 속으로는 최충헌의 전횡을


고까워하고 있었다.

결국 1211 년 내시낭중 왕준명 등 측근들과 함께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최충헌을 궁으로 불러들여
환관을 시켜 최충헌에게 "왕께서 공에게 술과 음식을 주신답니다"란 말로 그를 궁 깊숙한 곳까지 유인했다.
이 말을 믿고 들어온 최충헌에게 왕준명 쪽의 무사와 승려들이 달려들어 수행하던 사람들을 죽이고 그를
살해하려 하자 놀란 최충헌은 희종이 있는 대전의 문을 계속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외쳤으나 희종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사실 열어주고 무사와 승려들도 입장시켰으면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 이
때서야 희종이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파악한 최충헌은 간신히 도망쳐 지주사 방의 장지에 숨어
화를 면했고 수상하게 여긴 상장군 김약진을 비롯한 최충헌 측근들의 대응으로 결국 최충헌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다.

2.3. 폐위와 후일담[편집]

당연히 빡친 최충헌은 반란의 주동자인 내시낭중 왕준명 등 희종의 측근들을 숙청한 뒤 바로 희종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유배 보내버렸다. 여기서 최충헌의 정치 감각을 알 수 있는데, 기존의 무신집권자들은
흔히 왕이 자신을 없애려하다 실패했을 경우, 왕을 죽이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이런 행동은 주위의
반발을 사게된다. 최충헌은 기존 무신 집권자들과는 다르게 이런 행동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이후 영종도, 교동도 등으로 옮겨다니다가 1219 년 개경으로 불려가게 된다. 그 이유는 셋째딸
덕창궁주가 최충헌의 아들 최성[1]과 혼인을 하게 되었기 때문.[2] 그렇게 최충헌의 사돈이 된 그는 8
년간 개경에서 잘 먹고 잘 산다.[3] 그러다가 1227 년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교동도로 옮겨지고 그
곳에서 쭉 유배생활을 하다가 1237 년 법천정사에서 승하했다. 유배다닌 기간은 (중간에 개경에서 지낸
기간을 빼면) 18 년[4]이었고 향년 57 세였다. 최씨 정권기에 집권한 고려 왕들 중 그나마 최충헌에게
정면 승부를 걸었던 왕이었으나 무참히 실패하고 꽤나 고단한 삶을 산 안습의 군주. 결국 사후에도 개경에
돌아오지 못하고 강화도에 묻혔다.

참고로 큰딸은 고종과 혼인했다. 둘째딸 영창궁주는 정간왕의 후손인 승화후와 영녕공(永寧公)의
어머니이고, 넷째딸 가순궁주의 딸은 원종의 2 비 경창궁주다.
여담으로, 남한 땅에 묻힌 3 명의 고려 왕 중 한 명이다.[5] 능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의 석릉.

최근 연구에 의하면 성평왕후 임씨도 강화천도 시기에 사망했기에 그녀의 능인 소릉(紹陵)도 희종의 석릉
근처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능묘의 석수, 부장품, 무덤 구조로 보아 정순왕후의 릉인 가릉이
성평왕후의 소릉이고, 바로 위쪽의 능내리 석실 고분군을 가릉으로 비정한 결과도 있다. #

2.4. 평가[편집]

고려사나 동국통감 등에선 고려 희종은 흉적들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은 가상하나 한치의 실수로 일을


그르쳤다고 안타까워 했다. 한편으론 왕실측의 인사들 중 몇명이 최충헌같은 권신을 제거하는데 흥분한
감이 없지않아 있었고, 그 속에서 잡음이 생겨 일을 그르친 감도 없지 않아 있다. 이는 신무왕이
진골귀족들과 정면으로 대결하기 위해 장보고와 손을 잡고 기득권들을 정리하려고 했으나 실패해 자신이
요절하고, 장보고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보면 은근히 공통점이 크고, 조선의 인종 역시 조광조가
추진했던 개혁을 상당부분 추진하려 했으나 요절로 끝났다는 점에서 보면 대체로 그런 왕들과 비슷했다.
(..) 개혁을 추진하려고 의욕적으로 움직인 것은 좋았으나 단 그뿐이었다(...) 대체로 왕의 명분이
아무리 좋아도 명분에 너무 집착해 실리를 놓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왕이었다는 점에서는
한계점을 드러냈다.

3. 대중 매체에서[편집]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정태우가 희종 역으로 출연했다. 여기선 태자 시절부터 최충헌에게


불만을 품다가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고 원래 있던 태자비를 폐하자 반발하다가, 오히려
이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고 최충수를 몰래 불러 장인이라고 부르고, 신종의 밀지를 조작하여 보내는 등
최충헌, 최충수 형제의 충돌을 유도한다. 나중에 최충헌에게 밀지가 들통나서 그에 무릎까지 꿇고는
위기를 넘기고, 즉위 후에도 최충헌을 한없이 후대하다가 기회를 엿보고 결국 암살을 꾀하지만 결과는
역사대로.

또 웹툰 와탕카 중 최충헌의 엄청나게 긴 관직명을 소재로 한 이야기에서 잠깐 등장하기도 했다. 폐하...


쫌전에 걥니다

코에이 게임 원조비사 원판의 시나리오 2 에서 고려 국왕으로 등장한다. 모든 능력이 C 로, 그냥저냥


평범한 수준. 한글판에서는 엉뚱하게도 희종 다다음으로 왕위에 오르는 고종으로 교체되었다.

22 대 강종 왕오 (1152~1213) 재위 1211~1213

1. 개요[편집]

고려의 제 22 대 국왕. 묘호는 강종(康宗), 시호는 준철문열단총명헌이모목청원효대왕(濬哲文烈亶聰明憲貽


謀穆淸元孝大王). 휘는 오(祦). 자는 대화(大華). 여러모로 안습한 임금. 대신 고려 왕실에서 왕위를
승계시킬 때 본격적으로 아들에게 물려준 케이스이기도 하다.[1]

2. 생애[편집]

고려 명종의 장남으로 무신정변으로 의종이 무신들에게 폐위되고 아버지 명종이 즉위하자 태자가 되었다.
태자 관례식 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정변을 일으키려던 이고가 역으로 이의방에게 죽임을 당하고
이의방이 권력 실세가 되자 그 딸과 정략 혼인을 하게된다.

그러다 서경유수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키고, 진압하러 출정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오던 이의방이 정중부의
아들 정균과 승려 종참에게 암살당하자 혼인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태자비는 폐출되었다. 강제로 이루어진
혼인이었으나 관계는 좋았는지 짧은 기간 슬하에 수령궁주라는 딸을 한 명 두었고 훗날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녀를 찾아 다시 들이려하나 실패. 사후 사평 왕후로 추존한다.

1197 년, 최충헌이 명종을 폐위시킬 때 강화도로 유배당했으며 이때 받은 이름 뿐인 작위는 한남공이다.


이후 강화도에서 14 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1210 년, 개경으로 돌아왔으며, 1211 년, 최충헌이 희종을 폐위시키면서 그를 왕으로 옹립시켰다. 이


때가 그의 나이 60 세. 고려 왕 중에선 최고령 즉위였다.

어차피 노령의 인물이었고, 무신들이 집권하던 시기라 별다른 치적없이 즉위한 지 1 년 8 개월만에 긴 유배
생활 끝에 얻은 지병으로 병져 눕더니 이내 승하하였다. 사신 또한 “강종이 임금으로 있으면서 모든
정무는 권신의 견제를 받았고 갑자기 병들어 나라를 다스린 햇수도 짧았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라며
평을 내릴 정도로 그야말로 왕으로 한 업적이 없다. 사실 즉위할 때 이미 늙고 병든 상태였고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 되어 죽었던데다가, 결정적으로 그 당시에는 이미 최충헌이 전권을 쥐고 흔들었던 만큼
이미 뭘 해보려 해도 할 수 없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맞겠지만. 그래도 그의 아들인 고종의 가계가 고려가
망할 때까지 왕위를 계승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일지도 모른다.

왕릉인 후릉은 강화도에 위치했다고 하나, 확실하게 그 위치가 확인된 전임자의 석릉이나 자기 아들의
홍릉, 부인인 원덕왕후 유씨의 능인 곤릉, 손녀며느리인 정순왕후 김씨의 가릉 등과 달리 그 위치가
아직도 불명이다.

23 대 고종 왕철 (1192~1259) 재위 1213~1259

1. 소개[편집]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고종(高宗)의 시대에는 안으로는 권신(權愼)들이 서로 이어가며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하였고, 밖으로는 여진(女眞)과 몽고(蒙古)가 군대를 보내어 해마다 침입하였으므로 당시
나라의 형세는 매우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법을 지키고 모욕과 치욕을 참아냈기에
왕위[寶位]를 보전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정권이 다시 왕실로 복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적이 오면
성을 굳게 지켰고, 적이 물러가면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다. 심지어 태자를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친조(親朝)하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사직(社稷)이 훼손되지 않았고 왕업을 오래도록 전해줄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 고려사 세가 권제 24.

고려의 제 23 대 국왕.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고려에서는 안효대왕(安孝大王)으로 원나라가 내려준


시호는 충헌왕(忠憲王)이다.[3] 원나라의 시호와 고려의 시호를 합쳐서 충헌안효대왕(忠憲安孝大王)으로
불린다. 휘는 철(㬚). 자는 일신(日新). 강종의 아들. 최충헌의 적(嫡)매형이자 사돈 간이기도 하다.
최충헌은 부왕 강종의 서녀와 재혼하였는데, 아들 원종의 장인이었던 김약선은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의
사위였다.

2. 재위[편집]

고려 왕 중 가장 재위기간이 길었다. 자그마치 46 년.[4] 하지만 그 기간 내내 권력을 최충헌을 비롯한


최씨 정권에게 빼앗기고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강도)로 옮기며 7 번에 벌어진 몽골 침략에 시달리는 등
안습 크리를 자랑했던 왕.[5] 그래도 최충헌 집권 때 5 살로, 최씨 정권의 흥망(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4 대)을 모두 지켜본, 풍운의 왕.[6]

강화도에 들어와서 나오지 못한 채로 죽었다. 재위 기간 후반부 대부분을 몽골과의 전쟁으로 보낸 인물.


최씨 정권이 망하자 심한 낭비로 관리들의 상소가 좀 있었다고 한다.[7]
그런데, 고종의 업적 중 저평가 받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아들인 태자를 몽골에 입조토록 한
점이다. 고종은 9 차에 걸친 몽골의 침입을 몸소 겪으면서 더이상의 전란을 막기 위해 화약을 맺도록 한
것이다. 본인이 나이가 많아 직접 입조할 수 없어 태자 왕정(훗날 원종)를 입조토록 했고, 이 부분은
몽골도 이해를 해줬다. 무인들의 반발을 누르고 오랜 전란의 시대를 마감케 하였지만, 그것이 항복으로
평가되기에 저평가되지 않았나 싶다. 무엇보다 고려 고종은 오랜 기간을 버티었고 그 재위동안에 경험을
살려서인지 외세의 도움없이 무오정변 때 간접적으로나마 개입하여 자체적으로 최씨무신정권을 종식시킨
인물이 되었다. 하필 상대는 여기에 가담한 김준이었으니 문제였다.

3. 여몽전쟁[편집]

고종 4 년인 1216 년부터 몽골의 고려 침입이 시작되었다. 유일한 업적이 있다면, 이 시기에 고려대장경
(일명 팔만대장경)을 조판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비용은 최우가 댔다. 사실 뭘 하려고 했어도 최씨
정권이 정권을 잡고 있어서 할 수 있는게 없긴 했다. 막판의 낭비도 얼마 누리지도 못했고.

4. 사망[편집]

태자 왕전이 원나라에 입조하려 간 사이 몸이 좋지 않아서 유경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가 결국 죽게


되었다. 당시의 집권자였던 김준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안경공 창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으나 고종이 죽기
직전 남긴 유언에 의해 태손 왕심이 임시로 나랏일을 맡게 되었고, 태자는 그 이듬해인 1260 년에
귀국해서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5. 평가[편집]

동국통감에서는 그야말로 붙어사는 왕으로 취급받으나 분수를 지켜 장기간의 재위를 했다는 점을 빌려


사직을 지킨 마지막 왕이 되었고 그로 인해 권신들을 자체적으로 제거한 것은 좋았으나 문제는 장기간의
재위동안 권신들의 연이은 권력 독점에 손놓고 있었다고 평한다. 최우가 죽기 일보 직전에도 최항이
연이에 집권하기 직전에 손도 못썼다. 또한 고려 원종에 대한 견제를 다 놓아 안경공이 원종과 사이가
매우 안좋았고, 결국 안경공이 왕에 올랐으나 폐위되어 원종이 왕에 올라 안경공이 제거되는 상황을
만들고 그 사이 숱한 역모와 반란이 터지는 등 후사 문제를 말끔히 짓지 못했다. 조선 인조와는 상반되는
길을 걸었으나 오히려 고종은 그 반대로 나간 덕택에 고종 나름대로 독이 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듯. 오랜 재위를 바탕으로 무오정변을 이룩하는데 간접적 영향을 주며 내정면에선 원종보다
그나마 나았으나 권신들이 대를 이어 나라를 파탄내도 지켜만 보았고 무오정변 이후 왕권을 공고히 할
기회를 놓쳤다는 점에서 큰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대신 외교에선 괄목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점에서
보면 조선의 중종과 꽤 비슷했다. 외치에서 성과를 거두고 권신들의 농락 속에서 재위를 오랜 기간 버틴
것은 높은 평을 받으나 단지 그뿐이었고 고려에선 재위기간을 놓고 볼때는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평범한
군주였고 그래서 평타만 치던 왕이었다. 이점은 고려 인종과 비슷했다. 무엇보다 하필 이 시기가
무신정권이었고, 여몽전쟁이 터진 시점에서 본다면 꽤 안습의 군주였다.[8]

6. 기타[편집]

부인인 안혜왕후는 폐위된 희종의 딸로, 고종과는 6 촌이 된다.베트남 리 왕조의 마지막 후예 중 하나인
이용상 왕자를 받아줘서 잘 대우한 군주이기도 하다.다음 왕조에서 같은 묘호를 받은 임금과 능호까지
한자로도 똑같다(홍릉, 洪陵). 또한 둘 다 재위 기간이 40 년을 넘었으며(고려 고종 46 년, 조선 -
대한제국 고종 43 년), 재위 내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는[9] 절묘한 공통점이 있다.

24 대 원종 충경왕 왕정 (1219~1274) 재위 1259~1274

1. 소개[편집]
고려의 제 24 대 왕. 묘호는 원종(元宗), 시호는 순효대왕(順孝大王)으로 원나라가 준 시호는 충경왕(忠
敬王). 원나라의 시호와 고려의 시호를 합쳐서 충경순효대왕(忠敬順孝大王)으로 불린다. 고려 왕사에서
종(宗)의 묘호를 받은 마지막 임금이다. 휘는 정(禎). 본래 휘는 전(倎)인데, 원종의 휘에 대해선
고구려의 고국원왕과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원종이 백승현(白勝賢)의 주청대로 자신의 휘를
고대 주나라의 성군 강왕(康王)의 이름자랑 같게 바꾸려다 하필 그 이름이 제 명에 못 죽은[3]
고국원왕의 휘와 같다는[4] 걸 알고 기겁해서 그냥 옛날 이름 그대로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자는
일신(日新). 고종의 장남이다.

2. 태자 시절[편집]

몽골 제국과의 전쟁 중이던 1235 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1259 년 기나긴 몽골과의 전쟁 끝에 강화를 맺기


위해 태자 신분으로 몽골에 가, 당시 몽골의 실력자이자 화북 지방의 총독이었던 쿠빌라이 칸을 만났다.
본래는 사천성 방면에서 원정 중이던 몽케 칸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는데, 몽케가 전쟁에서 급사하는
바람에 칸위가 공백이 되었다. 중국 화북에 있던 쿠빌라이와 몽골 초원 카라코룸을 지키던 아리크부카
사이에 칸위 계승 분쟁이 벌어졌고 고려 태자 일행은 둘 중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처했다.
어찌보면 한민족의 운명을 갈랐다고 할 수 있는 이 선택에서 태자는 쿠빌라이를 택한다. 신의 한 수

쿠빌라이는 기뻐하며 "고려는 머나먼 나라로 그 옛날 당태종이 쳐도 굴복시킬 수 없었던 나라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태자가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말했다 한다.[6] 또한 얼마나 기뻐했는지 자신의
막내딸을 고려 충렬왕에게 시집을 보내기도 한다.

충렬왕하고 사돈을 맺는데, 이게 놀라운 것이 그때 충렬왕의 부인이 되는 사람이 제국대장공주잖아요.


제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의 막내딸이에요. 몽골 황족은 황금씨족이라고 해서 자기들 끼리 결혼을 하는
부족이 정해져 있었어요. 몽골 내에서도 징기스칸과 특별한 관계, 정말 의리로 뭉친 그런 몇 안되는
가문들과 통혼하지 절대 외부랑 통혼을 안하는데 황금 씨족 딸을 충렬왕하고 결혼 시킨거에요. (중략)
제국 대장 공주가 죽은 후에 원나라 사람들이 와서 제문을 쓰는데 이런 말을 써요. "막내딸이다.
황제에게 자식이 수도 없이 많지만 그래도 막내딸은 특별히 귀여운 법이다. 이 딸을 고려 왕과 결혼시켰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리고 그 후로 고려가 계속 몽골 황실과 결혼하지만 황금 씨족과는
결혼하지 않아요. 그만큼 쿠빌라이가 (원종의 제안에) 흥분했다는 거에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고려 vs 몽골전쟁 2 中

쿠빌라이는 태자를 크게 환대하고 강화를 논의했으며 때마침 고종이 사망해 고려 국왕도 공석이 되자
쿠빌라이는 원종을 국왕으로 책봉해 고려로 보냈다. 그리고 향후 고려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한
가지 약속을 하게 된다. 바로 불개토풍(不改土風).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 되더라도 고유한 풍습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이었다. 이 약속은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도 불리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쿠빌라이
(세조)의 유훈이라서 후대의 칸들도 건드릴 수 없었다. 동양 왕조, 특히 유교 문화권에서는 선대 군주의
제도나 유훈은 함부로 거스를 수 없었다. 특히 태조나 세조처럼 왕조에서 중요한 임금들의 유훈은 거의
불문법 역할을 했다.

덕분에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한편으로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긍정적으로만
사용된 건 아닌데 권문세족의 기득권 유지 명분으로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원나라 간섭기에는
모수사패와 압량위천을 통한 농장의 확대와 양인 수 감소가 심각했는데 노비제 개혁을 통해 이를 개선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환리길사라는 관료를 파견했을 때 권문세족이 노비제 개혁을 저지시킨 명분이 바로 이
세조구제였다. 노비제는 동국(고려)의 고유한 습속이니 세조의 유훈에 따라 바꿀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결국 제대로 된 개혁 목소리가 나온 건 공민왕 시기였다. 참조

3. 재위 기간[편집]
원종이 즉위할 무렵은 그 기나긴 무신 집권기가 끝나던 시기로 최씨 정권의 마지막 수장 최의가 살해되고
새로운 실권자인 김준이 집권하던 시절이다. 사실 원종이 몽골에 입조하고 있을 때 고종이 죽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 있어서 위험할 뻔했다. 바로 김준이 원종의 동생인 안경공 창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종의 유언에 의해 고려에 남아 있던 태손 심[8]이 왕위를 대신하게 만들었고, 결국 이듬해에
몽골과 강화를 맺고 돌아와서 정식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1269 년 태자 심을 몽골로 보내 친몽 정책과 개경 환도를 시도하다가 김준을 죽이고 무인 집정자가 된


임연에 의해 일시적으로 폐위되었다. 이때 잠시 즉위한 것이 이전에도 왕위에 거론이 되었던 안경공 왕창.
영종 항목 참조. 그러나 마침 귀국 중이었던 태자 심이 이 소식을 듣고 몽골로 다시 돌아가 쿠빌라이에게
이 소식을 알리게 되었고, 결국 다시 복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몽골로 가서 직접 쿠빌라이와 만나서 일의
자초지종을 알리게 되고 동시에 몽골의 황족과 세자 심과의 혼인을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개경 환도를
시도하게 되는데, 때마침 임연이 병으로 죽고 새롭게 집정자가 된 임연의 아들 임유무를 그의 측근인
홍문계, 송송례를 회유하여 결국 죽이게 하는데 성공하고 무신 정권을 무너뜨린다. 그 후 귀국과 동시에
개경 환도를 하게 된다.

하지만 서경(평양)에서는 최탄 등이 1269 년에 반란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의 54 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의 6 성을 들어 원나라(쿠빌라이가 원나라라는 국호를 쓴 것은 1270 년)에 투항하고 말았는데, 이때
원은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직할 통치하기에 이른다. 원종은 이를 돌려달라고 계속
쿠빌라이에게 요구했으나 쿠빌라이는 이를 듣지 않아 결국 원종이 죽을 때까지 이 영토를 돌려받지 못한다.
이 지역은 1290 년 충렬왕 시대에 돌려받는다.

어쨌든 개경으로 환도했으나 근본적으로 무신 정권의 친위대였던 삼별초가 고려 정부의 친원 정책에


반발하여 결국 배중손을 중심으로 강화도에서 봉기하여 진도와 제주도를 전전하며 원나라와 고려에
저항했다. 이들은 왕족 승화후 왕온을 즉위시키고 서해, 남해안을 전전하며 막강한 해상세력을 구축했다.
또한 고려를 거점으로 한 일본 원정에 쓰일 함선을 파괴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 함선들이 자신들을 토벌할
때에 쓰일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원나라의 흔도와 고려의 김방경을 위시한 여몽연합군에게
토벌되었다.

이 외에도 일본 공격 방침을 세운 쿠빌라이의 요구로 고려는 일본 원정을 위한 함대를 만드는 데 국력을


쏟아부었으며 또 '결혼도감'을 설치에 원나라로 가는 공녀를 모집하기 시작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한탄이
극에 달했다.

실로 안습으로 향하던 시기로 이를 지켜보다가 1274 년 향년 56 세로 승하했다. 고려의 정식 묘호인


'종'을 쓴 마지막 군주가 되었으며 이후의 왕들은 30 대 충정왕까지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모두 '충
(忠)'자를 붙이게 되었다. 원종 생전에 충경왕(忠敬王)'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그의 아버지 고종은
충헌왕(忠憲王) 시호로 다시 올렸다.

또 '태자'가 '세자'로, '짐(朕)'이 '고(孤)'[9]로, '폐하'가 '전하'로 바뀐 것도 원종 때가 시작으로,


왕실의 칭호가 모두 격하된 시대가 바로 이 때다. 이렇게 제후국으로 격하된 칭호들은 이후 500 년이
지난 1894 년(조선 고종 31 년) 갑오개혁 때에 와서야 되돌려진다. 왕실의 칭호 뿐만 아니라 귀족의
작위도 오등작을 썼었고, 관직명, 국가 기관 명칭등 내정제도 전반을 황제국급으로 썼었지만 원종 이후로
전부 왕국급 혹은 그 이하로 격하된다. [10]

4. 원 간섭기의 시작[편집]

원종 치세는 한국사의 한 '치욕'으로 남아 있는 '원 간섭기'를 연 시대이다.


그런데 정작 이후 고려 말이나 조선 사대부들의 평가를 보면 원종에 대해서는 동정적이다 못해 상당히
호의적이다. 무신 정권을 수습한 군주이고, 당시 몽골의 세력이 강했는데 원종은 치욕을 감수하고 나라의
보전을 꾀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냐라는 식의 평가가 대부분. 사실 악평이고 호평이고 뭐고 전부
무신정권 종료와 연결되어 있다. 사대부들은 위로는 고려초기 문벌귀족, 뒤로는 권문세족과도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에 무신정권 시기에 대한 평가는 혹독하고 이를 무너뜨린 왕들은 모두 고평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아래 나오는 혹평도 자력으로 무신정권 막내리지 못하고 몽골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 문제라는 식이 된다.
몽골에 항복한 부분이 커버되는 것도 이게 결국 무신정권 붕괴의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다소 의외인 대목일 수도 있지만 당대 세계 최강국인 몽골과 장기전을 벌였음에도 직할 통치를 면한 점


자체는 나름 인정해 줘야 할 부분이다. 쿠빌라이 칸이 약속한 '불개토풍(不改土風)'으로 고려는 고유
풍속을 유지하고, 자치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 세조의 유지를 이후의 몽골
칸들도 바꾸지 못하였다[11]. 원종 또한 치욕임을 알았으면서도 더 이상의 전란으로 백성들을 더
고단하게 하기보다는 몽골에 복속하는 것을 선택한 점은 나름대로 백성을 생각했을지도 모르며 이 때문에
고뇌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사실 무신정권 주도 하에 벌어진 대몽항쟁은 말이 좋아 대몽항쟁이라고 불러줄 뿐이지 그 실상은


무신정권은 안전한 강화도에 앉아서 조세나 강탈해가고 본토의 백성들은 조세는 조세대로 뜯기고 몽골이
쳐들어오면 약탈당하고 학살당하는 게 일이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강화를 맺는 게 확실히 현명한 선택이긴
했다. 하다못해 쿠빌라이 칸 대신 다른 계승자를 지지했다면 작게는 고려 왕실, 크게는 한민족 전체의
존망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운이 따라준 감은 있지만 그의 이런 줄서기는 결코 그냥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5. 평가[편집]

태자 시절은 고려판 소현세자였고 왕에 오를때는 고려판 현종[12]이었다. 왕이 되지 못한 소현세자와


달리 이쪽은 왕이 되어 가까스로 재위를 마쳤다. 동국통감에선 평 좋지않은게 원나라와 관계를 맺은
것보단 내부에 정적들은 원할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원나라가 개입하기 전에 자체적으로 정적을 처리하지
못해 그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조선으로 치면 소현세자와 비슷한 케이스로 왕이 못된 소현세자와 달리 왕정은 왕이 된 케이스였다. 행보


역시 똑같았으나 결말은 달랐다. 이유는 고려 고종은 조선 인조와 달리 원종을 아꼈다는 점과 아버지인
고려 고종은 애초에 주화파였기 때문에 왕이 될수가 있었다.

동국통감에선 원나라와의 화친은 그런대로 높이 샀으나 문제는 나라를 위협하는 권신을 자신이 자발적으로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고려 고종의 경우는 무오정변을 통해 원나라의 입김과 상관없이 여러 문무
신료들이 척살하여 권신 최의를 제거하고 최의에 붙어있는 간신배들을 숱하게 소탕했다. 이점에서 원종은
아버지 고종과 달리 동국통감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무오정변이 터지고 난 이후에 남아있는 무신정권
잔당들을 삼별초의 난 이전에 없애지 못하였고 원나라의 편에 기대어 제거했기에 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외정에서는 높은 평을 받으나 내정 면에서는 고려 고종보다 못 미친다는 평이다. 소현세자도 외정에
능했고 이점에선 학계에서 높은 평을 받으나 정작 소현세자도 원종처럼 내정면에서 크게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소현세자에 대한 거품이 끼었다고 비판하는 학자들은 소현세자가 외정에선 훌륭하나 내정 문제에
비판을 가한 것처럼 원종도 마찬가지였다. 실은 원종도 소현세자처럼 왕이 못되고 죽을판국이었는데
김방경, 유천우 등의 충신들 덕택에 가까스로 왕에 올랐다. 안경공의 경우는 조선으로 치면 효종이 될
봉림대군과 비교된다. 안경공이 원종 대신에 왕이 될 경우 오히려 효종같은 왕이 될 확률이 높았으나 결국
원종이 왕위를 다시 찾았다. 고려 입장에선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었단 왕이었다. 태자 시절은 소현세자와
같았으나 집권할때는 조선의 현종과 비슷했다. 다사다난한 치세를 보내어 위기를 극복해 귀주대첩이라는
승리를 얻어낸 고려의 현종과 달리 원종은 조선의 현종과 비슷했고 실상 조선의 현종보다 더 다사다난하기
그지없었다.

6. 대중 매체에서[편집]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서 등장한다. 능력치는 시대가 시대인지라 안습하다. 정치력, 외교력 좀


높여줘야하는 것 아닌가.부하로는 김통정, 김방경만 있을 뿐. 단 국내 정발판에서는 정안이라는 인물이
추가되었다.무신에서는 처음에는 왕실을 되찾기 위해 사직을 위해 열일하는 인물로 나오나 김준이
집권했을때는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몽골에 붙어 고려를 무기력하게 만든 인물로 표현된다(...)
이게 다 김준 때문이다.

임시국왕 영종 왕창

1. 개요[편집]
고려의 임시 국왕. 고종의 아들이자 원종의 동생. 본명은 왕창(王淐), 작위는 안경공(安慶公). 그
때문에 안경공 창(淐)이라고 자주 불린다. 권신 임연의 압력으로 강제 퇴위당한 원종이 양위하여 잠시
왕을 했다. 굳이 재위 기간을 따지자면 1269 년 6 월 ~ 11 월. 일반적으론 역대 고려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2. 생애[편집]

1253 년, 몽골의 인질로 갔던 영녕공 왕준(永寧公 王綧)이 "태자나 안경공이 입조하면 군사를
물린다더라"고 전했다. 최항은 반대했으나 결국 피해가 커지자 그 해 12 월 사신으로 보내졌다.

1254 년 1 월 몽골 장수 아모간(阿母侃)의 군사를 접대하여 군사를 물리게 하고 몽골로 가서 몽케를 만난


후 8 월에 귀국하였다. 이때 오랑캐 풍습이 물들었다면서 굳이 하룻밤을 육지에서 머무르고 입었던 옷을
태운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고 강화도로 들어왔다. 이후 1257 년, 1259 년, 1265 년에도 몽골과
교섭하였다.

권신 임연이 교정별감 김준을 살해한 뒤, 원종마저 노리려고 하자 원종이 급히 양위를 해 왕이 되었다.


원종은 상왕이 되었고, 동시에 임연은 교정별감이 되었다. 그리고는 몽골에는 원종이 위중하여
양위했다고 알렸다. 하지만 당시 몽골에 갔다가 귀국하던 세자 충렬왕이 이 사실을 알고 급히 몽골로
돌아가 몽골에 알렸기 때문에, 임연은 다시 원종을 복위시키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 후 충렬왕이
몽골군과 함께 귀국하게 되자 겁을 먹은 임연은 근심과 울분 속에 등창으로 병사했다. 아들 임유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집권해서 환도를 반대했으나 몇 달 못가고 원종의 밀명을 받은 이들에게 암살당하고,
결국 조정이 개경으로 출륙 환도하면서 무신정권은 막을 내리지만 동시에 고려 왕실이 얼마나
허약했는지를 반증하는 사례이다. 이후 영종은 다시 왕족의 삶을 누렸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공양왕 3 년(1391 년)에 안경공의 기일을 맞아 공양왕이 안경공을 영종으로 추존해 정식 왕으로
추봉하려 시도했지만, 안경공은 형의 자리를 잠깐 빼앗았던 찬탈자일 뿐이라는 예조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하게 되었고, 왕의 신분으로 복권되지 못한 채 고려가 다음해 망하고 만다. 이 문서에 나오는
안경공이 사후에 받은 호칭인 영종은 종(宗)이지만 고려사에 의하면 묘호가 아니라 시호다. 안경공의
시호인 '영종'은 공양왕이 올리려던 시호로 추봉 시도가 무산되었기에 정식 시호가 되지 못했다.

3. 여담[편집]

재위가 하도 짧아서 특별한 일은 없지만, 최탄이 몽골에 투항해 서경(평양)을 포함한 고려의 60 여성을
바치고 동녕부가 설치된 때가 이 때.이 사람의 후손은 조선의 개성 왕씨 숙청 과정에서도 어찌어찌
살아남아서 안경공파를 이루고 있다.

25 대 충렬왕 왕거 (1236~1308) 재위 1274~1298 1298~1308

1. 소개[편집]

쿠빌라이 칸의 유일한 이방인 사위


하지만 본격 '충'자 돌림이라는 굴욕의 시작

고려의 제 25 대 국왕.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렬광문선덕경효대왕(忠烈光文宣德景孝大王). 원래 이름은


심(諶)이었는데, 왕으로 즉위한 후에 거(昛)로 개명. 원종의 맏아들. 어머니는 정순왕후. 참고로
할아버지 고종이 승하했을 때 원종은 몽골에 가있었기 때문에 부왕이 돌아오기 전까지 잠깐 섭정을 했다.
2. 재위[편집]

1260 년, 아버지 원종이 즉위한 이듬해 태자에 책봉되었고 1271 년 원나라에 갔으며 세조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했고 1274 년, 원종이 죽자 고려에 돌아와서 즉위했다. 귀국할 때 몽골식으로
머리를 변발하고 옷도 몽골식으로 입고 있어서 거리에서 보고 통곡하다가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부왕 시절 원나라에 굴복한 데다가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원나라의 간섭이 심해졌지만, 세조구제 이후로 다루가치를 내보내고 몽골군을 철수시키며, 고려의 복식을
지키는 등 독립성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또한 황제의 부마라는 위치는 상당한 것이라 쿠릴타이에 참석할
권한도 있으며, 원의 사신과 다루가치도 술잔을 받을 때는 절을 하고 받아야 할 정도로 함부도 굴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원종 시절부터 일본을 공격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일본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결국


즉위하자마자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실시하여 흔도를 사령관으로 일본에 파견했고, 충렬왕 즉위 원년
(1274 년) 고려도 김방경을 사령관으로 한 일본 원정군을 파견했다. 고려군은 나름대로 선전했지만 잘
알려진 태풍때문에 일본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1281 년에도 재차 침공했지만 이 역시 태풍으로
실패했다. 근데 이 두 원정은 모두 여름에 행해졌다. 굳이 왜 매년 태풍이 몰려오는 여름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각에서는 사실은 원나라 엿먹이기 위한 고려의 술책이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 흠좀무. 이
원정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항목을 참고할 것.

어쨌든 이 원정 준비 때문에 고려는 재정적으로 큰 손해를 입었으며 전쟁 물자 징발로 백성들의 삶은 더


피폐해졌다. 특히 제주도에 군마를 키우기 위한 목마장을 설치했는데, 이 때문에 제주도에 말이
많아졌다고 한다. 또한 1290 년에는 원나라의 반란 세력이 고려를 공격하는 카다안의 침입이 일어났다.
이때 충렬왕의 태도는 가히 가관인데, 자세한 부분은 항목 참조. 몽골의 침입은 끝났지만 아주 수난이
많은 시기였다.

다만 원나라 역시 고려가 망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물자에 대한 지불은 확실히 했으며, 1291
년엔 고려에 기근이 들자 쌀 10 만 석을 공짜로 주기도 했다.

3. 양위, 그리고 복위[편집]

측근 세력들을 활용하여 왕권이 강화된 후에는 긴장감이 풀어졌는지 잔치와 매사냥을 즐기다가, 이러던 중
1297 년 몽골에서 세자의 혼인을 마치고 돌아온 후 왕비 제국대장공주가 죽자 정치에 염증을 느꼈는지
1298 년 아들 장(충선왕)에게 선위할 뜻을 밝히고 결국 양위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충선왕의 개혁 정책에
대한 반발과 왕실의 치정 문제(자세한 것은 아래 항목 참고)와 두 부자의 사이를 모략하는 무리가 생기는
등 여러 문제가 겹쳐 결국 7 개월 만에 다시 복위했다. 충선왕은 다시 원나라로 돌아가서 충렬왕이 죽은
10 년 후에야 고려에 돌아온다.

복위 후에도 충렬왕은 정치에 뜻을 잃고 사냥과 음주가무 등으로 소일하다가 복위 10 년 째인 1308 년 7 월,


신효사에서 죽었다. 향년 73 세로 고려의 역대 국왕 중 제일 장수했다. 시호는 충렬광문선덕경효대왕(忠
烈光文宣德景孝大王)으로 '충렬'이 원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라서 고려에서 붙인 시호인 경효왕(景孝王)
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31 대 공민왕(명에서 내려준 시호)의 고려 측 시호인 경효왕(敬孝王)과 글자가
같아서인지 많이 쓰이지는 않는다. 뭔가 경자 돌림이 신라 느낌이 나기도 하다.

4. 원 간섭기[편집]

충렬왕 치세는 원 간섭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로, 이 치세에 원의 문물과 풍습이 많이 들어왔다.
충렬왕 또한 원나라에 자주 들락거리며[6] 원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다. 관복은 몽골식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백성들에게는 강요하지 않았다.그러나 원의 부마국이 되면서 내정 간섭을 많이 받았고,
관직명도 원의 속방에 위치에 있는 만큼 격하해야만 했으며, 원에 빌붙은 권문세족들이 토지를 많이
소유하면서 농민들의 삶은 곤궁해졌다.
의복을 몽골식으로 바꾸게 했는데 충렬왕 8 년에 고려의 사신 강수형(康守衡)에게 쿠빌라이 칸이 "고려의
복색은 요즘 어떠냐??"고 묻자 “달단의[7] 의복과 모자를 입었고 조서를 맞이하든지 절일을 하례할
때에는 고려 의복을 입고 일을 봅니다."라고 대답했고, 쿠빌라이 칸은 “내가 고려 풍속은 그대로
놔두겠다고 했고, 이제껏 바꾸라고 내가 뭐라고 한 적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갑자기 바꿨다냐?"라고
의아해했다.

문화적인 면으로는 제법 볼만한데 일연의 <삼국유사>가 완성된 시대이며,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간행되는 등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서적들이 많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유명한 고려 가요 <쌍화점>이 나온
시기도 충렬왕 치세로 알려져 있다. 충렬왕 개인적으로 음악을 즐겼기에 당대에 신하들에게 노래를 자주
작곡하게 했는데 그 중 하나였다고 한다.

고려사에서는 충렬왕을 "태자 때는 학문에 충실하고 성격도 좋아서 잘 나가다가 막판에 참소하는 말이나
듣고 아들하고 싸우며 항락에 빠지는 등 완전히 시ㅋ망ㅋ한 왕"이란 식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충렬왕으로써도 재위 초기에는 고려를 지키기 위해 힘썼지만, 왕권이 강화된 이후로는 향락에 빠지는 등
왕으로써 무책임했던 군주였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듯 하다.

5. 제국대장공주[편집]

오히려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의 상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1274 년 15 세에 충렬왕과 결혼했고,
자신의 상인을 데려와서 고려의 인삼, 종이, 모시 따위를 원나라가 장악한 실크로드를 통해 러시아와
아랍에까지 팔아먹었다. 이 때부터 고려의 물건이 세계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특히 결혼한 지
8 년 뒤, 원나라가 남송을 점령하고 중국을 집어삼킨 뒤론 인삼 교역에 날개가 달렸다. 또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거나, 사냥을 멈추고 정사에 힘을 쓸 것을 왕에게 간하기도 하는 등, 정작 고려인인 왕보다
훨씬 더 개념찬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충렬왕 11 년(1285 년)에는 환관 김자정(金子廷)을 동경 부사(東
京副使)로 삼았는데, 다음은 이때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 오간 대화.

공주 : 저는 동경이 대왕의 외가 고을이라 들었는데 맞나요?


충렬왕 : 그렇소.
공주가 : 그러면 그런 중요한 고을 수령에 집안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사람을 임명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언제부터 고려에서 남반(南班) 출신이 그런 요직을 맡게 된 거죠?
충렬왕 : 충경왕 때부터요.
공주 :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군. 대왕께서는 역시 선왕의 아드님이시네요.

하지만 결혼 생활은 정략결혼인 만큼 행복하지 못했다. 부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또 이


여자가 좀 한 성격 하는 여자이기도 했다. 아빠가 쿠빌라이칸이고 증조부가 징기즈칸이니까... 아들(
충선왕)이 태어난 것을 하례하는 연회에서 미리 설치된 높은 자리에 앉았는데, 그 연회에 마침 정화궁주
왕씨도 참석해 있었다. 충렬왕이 연회 중에 제국대장공주를 한 번 쳐다봤는데 그걸 "왜 쳐다봐요? 내가
정화궁주한테 막 대한다고 뭐, 지금 따지는 거임?" 하고는 "연회상이고 뭐고 갈아엎고, 나 내 아들 있는
데로 갈 거니까, 당장 가마 가져오라."고 생떼를 부렸다. 그녀는 과거 충렬왕의 정비였던 정화궁주
왕씨의 서열이나, 그녀와 자신의 시종 수에 관해 질투하기도 했다.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 23 년(1297 년)에 39 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23 세의 충선왕은 어머니가 죽은


이유가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후궁 무비(無比) 탓이라고 생각하여 주변 사람들을 잡아 죽이거나
귀양보냈고, 당시 63 세이던 충렬왕은 이에 환멸을 느껴 잠시 왕위를 양위했으나 곧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6. 업적[편집]

매사냥과 여색에 너무 빠져 있어 백성들의 고충이 심해 제국대장공주가 말릴 정도였으니 왕으로서는 결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확실한 업적이 있다. 20 년 전 원종이 쿠빌라이 칸에게 받은 ‘
불개토풍’의 약속과 고려의 존속을 확실히 도장 찍고 구체적으로 확약받고 왔다는 점이다.
충렬왕은 1278 년 다시 원나라로 찾아가서 20 년 전 약속을 빌미로 원나라 주둔군을 고려에서 철수시키고,
다루가치를 내쫓았으며 이후 원나라의 군대나 관리가 고려에 주둔하지 않게 된다.

원나라의 호구조사 요구를 거부하고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하기로 했으며, 고려의 독자적인 조세징수
권한을 확답받은 것도 이 사람의 업적. 덕분에 고려의 백성들은 직접적으로 원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원나라에서는 공출이라며 고려 조정에서 요청해 뜯어가긴 하지만, 적어도 백성들이
직접 매년 매년 세금을 내는 것보다는 훨씬 다행한 일이었다.

또한, 원종 때 잃어버린 땅을 돌려받은 것도 충렬왕 시기의 일이다. 1290 년에 자비령 이북의 땅을,
1301 년에 탐라 총관부를 원나라로부터 돌려받았다. 다만 고종 때 빼앗긴 쌍성 총관부는 돌려받지
못했는데 이것은 훗날 공민왕이 무력을 써서 탈환한다.

이후 고려의 여몽 관계가 확립된 것은 충렬왕의 업적이니 협상력 하나는 인정해야 할 듯하다.

사실 완전히 개혁과 무관했던 것은 아니다. 홍자번의 편민 18 사가 이때 나왔고, 이후 고려 왕들이 개혁


조치를 위해서 설치하는 전민변정도감을 재설한 것도(최초는 원종) 충렬왕이다. 몽골은 몽골과
중국식으로 노비양천제를 실시하려고 했는데 일천제를 통해 노비를 불려나가던 권세가들 및 국왕은 이를
맹렬히 반대하여 무위로 돌렸다. 몽골 역시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아 결국 무위로 돌아갔는데
전민변정도감은 한때 해방된 노비들을 다시 노비로 되돌리는 작업을 수행했다.(...) 권문세족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지긴 했으나 이 또한 국왕이 귀족들을 믿지 못하여 천출 측근들을 띄우면서 이뤄진 일로 그
측근들도 권문세족화하여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편민 18 사를 내놓은 홍자번도 권문세족이라, 편민 18
사도 수취체제 중심의 온건한 개혁이었을 뿐 아니라, 관료 부패를 지적한 부분은 대부분 지방관 등 다른
세력에게 돌리고 권문세족 관련은 사소한 부분만 언급하고 있다. 고려가 시궁창이 된 원인 중 하나는
충렬왕의 측근 정치와 무능, 부패라 해도 좋을 정도.

유학과 관련해서는 국학을 개칭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성균관의 전신인 성균감이다. 그리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문묘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안향의 건의로 장학재단인 섬학전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원래
고려에는 예종이 설립한 장학재단 양현고가 존재하였지만, 이 시기에는 이미 너무 부실해져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서 섬학전을 설치한 것이다. 고려 시대의 국학 부흥책은 거의 전시기에 걸쳐있엇지만
전시기에 걸쳐서 실패했다. 이것은 조선 시대 역시 마찬가지. 어느 시기건 국초에 아주 잠깐 관학이
일어났다가 바로 사교육에 휩쓸리고는 했다. 현대의 사교육 열풍은 짧게 잡아도 최충까지는 거슬러
올라간다. 안향에서 감 잡은 사람도 있겠지만, 성리학이 한반도에 최초 전래된 시기도 충렬왕 대이다.

다만 이 모두가 그렇게까지 효과를 보지는 못했고 이미지도 약하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업적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공민왕 이전의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은 나름대로 개혁을 시도는 하지만 모두 좌절하고 개혁을
염증을 느끼는 전개를 탔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민왕 역시 마찬가지. 그나마 이것은 원 성종기의
문치적인 정책이 영향을 준 것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실제 충선왕 때의 서적 입고 및 성리학 보급은 원의
문치적 정책으로 충선왕과 만권당이 힘을 얻은 바가 컸다.

7. 아들과의 대립[편집]

충렬왕-충선왕 부자의 악연은 이미 일찌감찌 조짐이 보였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충선왕은 부왕의 잦은


사냥에 비판적이었고, 이러한 세자를 왕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제국대장공주의 죽음이었다.

그 때 당시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무비(無比)라는 후궁이 있었는데, 왕은 그녀를 대단히 아껴서 사냥하러


갈 때도 항상 대동하고 다닐 정도였다. 당연히 제국대장공주에게 질투 및 핍박의 대상이었고, 그러던 중
제국대장공주가 죽자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은 원나라에서 급히 귀국하였다. 평소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충선왕은 어머니의 죽음을 평소에 미움받던 무비 등이 꾸민 소행이라 보고, 무비와 그녀의 측근
40 여 명을 죽인다. 하지만 이게 실질적으로는 충렬왕의 수족을 잘라버린 것과 다름없던 것이었다. 마침
원나라 황실의 부마라는 끈도 떨어졌고 수족마저 잘린 상황에서 충렬왕은 결국 양위를 결심하고, 1298 년
1 월 세자에게 양위하였다. 그리고 충선왕은 고려 26 대 왕위에 오른다.

즉위와 함께 충선왕은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발표한다. 당장 그의 즉위 교서에만 봐도 잘 드러난다.


앞으로의 개혁 방안부터 시작해 구체적인 사항까지 세세히 열거하였다. 그러한 개혁 정책 중 하나가
원나라의 간섭으로 격하된 기존 관제 복구였는데, 이것은 충분히 반원 정책으로 보일 수 있는 조치였다.
[15] 결국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충선왕은 즉위한 지 불과 7 개월 만에 왕위를 빼앗긴 후 원나라로
끌려가고, 충렬왕이 다시 복위하게 되었다.

조선의 인조와 소현세자와의 관계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부자 간의 알력이 그렇게


크게 불거지지 않지만 결국 폭발하게 되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

8. 며느리 계국대장공주 개가 책동[편집]

충렬왕-제국대장공주의 금슬이 별로 좋지 않았듯이, 충선왕-계국대장공주의 금슬도 좋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부왕보다 더 심한 편이었다.[17] 그리고 이것을 충렬왕파 신하였던 송균, 송린, 왕유소, 송방영
등이 부자간을 이간질하는데 이용하게 된다. 바로 계국대장공주를 충선왕과 이혼시키고 다른 왕족과
재혼하게끔 하여 충선왕의 즉위를 막는 것이었다. 언뜻 봐서는 무슨 상관이 있나 싶겠지만, 당시 원나라
공주의 영향력은 고려의 왕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컸다. 당장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 사후 양위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계국대장공주를 개가시킬 왕족으로 서흥후 왕전(王琠)이 결정되었다. 그는 본래 정화궁주의


조카로 신종의 후손이었지만, 충렬왕의 이복동생으로 요절한 시양후 태(珆)의 양자로 들어가게 됨으로서
형식적으로는 충렬왕의 조카가 되었기 때문에...... 는 페이크고 사실은 잘생겨서 그런 거다. 그가 이
계획을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계국대장공주가 있는 원나라로 가게 되었고, 결국
계국대장공주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흠좀무

거기다 이 일은 당시 원나라에서 원성종 테무르 칸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결정하는 문제에 얽히면서, 양측


모두 사생결단으로 진행된다.

당시 테무르 칸은 후계자가 없는 상태인데다 오늘 내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황후


브루간을 위시한 온기라트 부족[18]은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옹립하려 했고, 반황후파는 황제의
조카였던 카이샨을 지지하고 있던 상황.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충선왕이 카이샨과 그 동생인
아유르바르와다와 절친이었다는 것. 자연 충선왕 일파는 카이샨 형제를 지지했고 그에 반하는 충렬왕
세력은 아난다를 밀게 됨으로서, 상황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흘러간다. 결국 신하들이 선수를 쳐서
카이샨(무종)을 옹립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충렬왕파 신하였던 송균, 송린, 왕유소, 송방연 등은 모두 처형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아난다를
지지했다는 이유였지만.. 참고로 왕전도 처형되었다. 충선왕이 말렸다지만 소용없었다.

또한 계국대장공주의 개가도 당근 실패했고, 충렬왕은 모든 권한을 빼앗긴 채 쓸쓸히 고려로 귀국[19]


하고 1 년 후 세상을 떠난다.

9. 기타[편집]

이후의 고려의 국왕들은 모두 그의 후손이다. 창왕까지는 충선왕의 후손이며, 공양왕은 모계 쪽으로


충렬왕의 현손자가 된다.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이 두려워서 제국대장공주와 크게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제 1 호 공처가이다.외할머니 최씨가 최우의 장녀다. 즉 최충헌의 먼 후손인 셈.
친고손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고손이다. 충렬왕의 외할머니의 할아버지가 최충헌이므로.
26 대 충선왕 왕장 (1275~1325) 재위 1298, 1308~1313

1. 소개[편집]

고려의 제 26 대 국왕.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선헌효대왕(忠宣憲孝大王). 왕위에 오르기 전 이름은 원


(謜)이었으며, 왕으로 즉위한 후에 장(璋)으로 고쳤다. 쿠빌라이 칸의 태자 칭김(眞金)의 아내 발리안
예케치에게서 이질부카(益智禮普化, Ijil-buqa)라는 몽골 이름도 받았다. 자는 중앙(仲昻).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맏아들이며,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다. 원나라의 첫 심왕이기도 하다. 고려왕과
심왕이라는 두 왕작을 동시에 가졌기 때문에 고려심왕(高麗瀋王)이라고 불린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니까,
명목상 한반도와 요동의 동시 통치자였다.

아래 구체적인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고려의 왕인데도 원나라에서 살았던 기간이 고려에서 살았던
기간보다 훨씬 길고, 특히 두 차례에 걸친 재위 기간 동안에는 겨우 1 년 정도만 고려에 있었다. 어머니가
원나라 공주라 원나라의 언어나 문화에 익숙한 상태로 자랐을 것이고 16 세부터는 거의 원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에 고려에 대한 애착이 깊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원나라 황실에서 고려로 귀국해서 통치하라고
압력을 넣었음에도 끝까지 원나라 대도에 남으려 했고,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이후 대도에서 죽었기에
직설적으로 적자면 몽골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겐 고려왕보다 원 황실의 인척이라는 지위가 훨씬
중요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2] 일생의 대부분을 몽골에서 보냈기에 현대의 해외 교포들처럼 아마
우리말도 상당히 서툴렀고 오히려 몽골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충선왕을 시작으로 충자 돌림 왕들의 대부분이 고려인과 몽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 되었다.

2. 생애[편집]

2.1. 즉위하기 전[편집]

1277 년 세자로 책봉되고 이듬해 원나라에 갔으며, 1296 년 쿠빌라이 칸의 증손녀 계국대장공주를 1 비로
맞았다.[3] 사실 충선왕은 이 혼인 이전에 왕영의 딸[4], 홍문계의 딸, 조인규의 딸을 이미 아내로 맞은
상태였다. 그리고 충숙왕의 생모인 의비와 혼인한 시기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한 시기보다 더 이전이라는
추측도 있다. 어쨌든 일찍이 충선왕과 결혼한 고려인 3 명은, 몽골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계국대장공주와
의비보다 서열이 뒤로 밀렸다.

카다안의 침입 당시에는 쿠빌라이 칸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1297 년 돌아왔는데 학문을
좋아했는지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책을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충선왕이 돌아온
이유는,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충선왕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유를
당시 충렬왕의 후궁으로 총애를 받으며 날뛰던 무비(無比)[5]의 소행이라 생각하여, 무비 및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실제 아버지 충렬왕은 무비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백성은 굶고 있는데 시도 때도 없이 큰 돈을 들여
사냥과 연회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1 비인 제국대장공주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제국대장공주의
눈을 피해 무비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더욱 자주 사냥을 나갔다. 부자 간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정치에 뜻을 잃은 부왕 충렬왕이 양위 의사를 밝히자 1298 년 즉위했다.

2.2. 개혁을 추진하다[편집]

즉위 직후 혈기 넘치는 젊은 국왕은 원나라 간섭의 영향으로 인한 폐단을 철폐하고 사림원(詞林院) 설치,


관제를 개혁 하였으며, 무엇보다 권세를 누리던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주목할 만한 정책을 의욕적으로 실시해 나갔다. 그러나 권문세가의 힘은 막강해서 일련의 개혁 정책은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가 심했고, 그 내용을 원나라 황실에 편지로
보내기도 했다. 이는 충선왕이 세자 시절에 맞아들인 고려 여인 조씨를 총애하자 계국대장공주가 조비를
질투해서 벌인 일로 이른바 '조비무고사건'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권문세가의 모략으로 인해, 결국
충선왕은 즉위 7 개월 만에 원에 의해 폐위당하고 원나라로 소환되었다. 이후에도 충선왕에게 원한을 품은
왕유소 등은 충선왕을 계속 모함하여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父子) 사이를 이간질했으며, 충선왕을 아주
폐하려 했다.

1307 년 원성종 테무르 칸이 죽고 황제 자리를 둔 정쟁이 발생했는데 충선왕은 여기에 적극 개입했다.


그는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라 열손가락 안에 드는 황족의 가까운 인척이었기에[6] 황위 분쟁에서 상당한
발언력을 가질 수 있었다. 카이샨(훗날의 원무종)과 그 동생인 아유르바르와다(훗날의 원인종)를
지지하여 그의 즉위에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원나라 황실과 친분을 맺게 되었고 자신을 모략한 왕유소
일당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듬해(1308) 심양왕에 봉해졌다. 그 뒤 같은 해 아버지 충렬왕이
승하하자 고려로 돌아와서 다시 한번 고려의 국왕이 되었다. 충선왕이 고려 왕으로 복위한지 1 년 후인
1310 년, 심양왕은 심왕(瀋王)으로 격상되었다.

다시 왕이 되어서 일시적으로 즉위했을 때처럼 개혁 정책을 펼쳤으나, 그다지 적극적으로 정치를 펼치지는
않았고[7] 자형(姉兄)이 되는 제안대군 왕숙에게 정치를 대행하게 하고 자신은 원나라로 가서 일종의
원격 통치를 했다. 이 와중에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도 있었는데, 바로 각염법을 시행해서 권문세가와
사원의 소금의 전매 독점을 금지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으면서 재정을 강화한 것. 신진사대부가 이
사람을 통해 성장했다는 주장도 있다.[8] 충선왕이 해마다 많은 물품을 원나라로 가져가고 계속 원나라에
머물길 원하자 왕의 귀국 운동이 있었으나, 충선왕은 번번히 거절하였다. 나라 밖에서 국왕이 머물며
통치함이 부당하다는 이야기가 계속 들리자 왕위를 차남 강릉대군 왕도에게 넘겨주면서까지 귀국을
싫어했다.

2.3. 양위와 그 이후[편집]

결국 1313 년, 재위 5 년 만에 아들 충숙왕[9]에게 고려 국왕 자리를 양위하고, 심왕 자리를 자신의


조카이자 이복형 강양공[10]의 차남 연안군 왕고에게 물려주었고(1316 년)[11] 자신은 연경으로 가서
'만권당'을 설립하여 고려와 원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학술을 교류하고 고전 연구에 힘썼다.

그렇게 평화롭게 사나 싶었지만 이 왕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1320 년 원나라의 원인종


아유르바르와다가 사망하자 환관 임백안과 틈이 생겨 그의 참소로 토번까지 유배를 갔다가 이제현의
간절한 상소가 먹혀 3 년 후에 돌아왔다. 그 후 원나라 수도 대도에서 소일하다 1325 년 5 월에 사망했다.
향년 51 세. 정식 시호는 충선헌효대왕(忠宣憲孝大王)으로 원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를 불러주기 싫어하는
쪽은 '헌효왕' 혹은 '헌왕'이라고 부른다.

3. 평가[편집]

충선왕은 성품이 현인을 좋아하고 악인을 미워했으며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한 번 보고 들은 일은


끝까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늘 선비들을 데려다가 역사상 국가들의 흥망과 군신의 잘잘못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토론했다. 특히 송나라 시대의 옛 일들에 큰 흥미를 가진 나머지, 자신의 막료를
시켜 『동도사략(東都事略)』을 읽게 하면서 왕단(王旦), 이항(李沆), 부필(富弼), 한기(韓琦), 범중엄
(范仲淹), 구양수(歐陽脩), 사마광(司馬光) 등 명신들의 전기에 이르면 반드시 손을 들어 이마에
댐으로써 존경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정위(丁謂), 채경(蔡京),장돈(章惇) 등 간신의 전기를 들을 때면
반드시 이를 갈면서 통분해 하곤 했다.
《고려사》 충선왕 총서

사신(史臣)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충선왕은 세자 시절 원나라 조정에 입시해 요수(姚燧)·조맹부(趙孟頫) 같은 명유들과 교유했으며 간혹


그 나라 정치에 관여해 썩 훌륭한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후 상국의 관직 제도와 겹치는 것을
피해 관직 명칭을 바꾼 것은 제후로서의 법도에 충실한 조치였으며, 전부(田賦)를 올바르게 고치고 염법
(鹽法)을 제정한 것은 정치의 요체를 안 행동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자리는 온 백성들이 우러르며 모든 정무가 집중되는 자리라 단 하루라도 비워서는 안 되는
것인데도, 왕은 황제의 분부로 복위한 뒤 부녀자들과 내시들의 꾐에 빠져 다섯 해나 연경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필요한 물자를 대느라 고통을 겪었고 시종하는 신하들은 오랜 객지
생활에 지친 나머지 귀국할 생각만 하면서 마침내 서로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원나라도 또한 그에게 염증을 느껴 2 차례나 귀국을 종용해오자, 왕은 회피할 구실이 없어 아들 왕도(王
燾)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또 조카 왕고(王暠)를 세자(世子)로 삼았다. 때문에 부자와 형제 사이에 온갖
시기 질투가 일어나 결국 그 화(禍)가 여러 대에 이르기까지 그치지 않았다. 장래에 대한 계획이 이처럼
불성실했으니 그가 토번(吐蕃)에 유배간 것도 기실 우연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도 이들 중 가장 능력 있던 군주였고 나름대로 개혁 정책을 펼쳐서 약간의 성과를 거둔 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 대상이었던 권문세도가의 힘이 여전히 막강했고, 더더욱 그 배후인 원나라의 영향력
또한 굳건했기에 그의 개혁은 의지 실종과 함께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개혁의 좌절은 후계자 충숙왕의
앞날을 가로막으며 훗날 공민왕이 원명 교체기를 이용해 독립 운동을 펼칠 때까지 개혁이 이루어지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이 시기 충자 돌림 왕들이 꼭두각시 노릇이 싫어 정치를 내팽개친 것 때문에 멀리서나마


문서로 형식적으로 정무를 본 충선왕이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받는 것이지,[13] 그의 정치 역시 따져보면
문제투성이었다. 스마트폰 등 통신수단이 매우 발달한 현대에서도 문서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
대통령과 장관이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회의하며 결정을 내리는데, 통신이 불편했던 전근대에서 멀리서
'문서만으로 통치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이었으며 이는 수많은 문제점을 불러왔다.

당장 고려사를 편찬했던 사신의 평가만 봐도 위와 같이 '이 사람 능력이 있었던 건 확실한데 통치가 어찌


이러한가? 원격 통치한답시고 대도에 눌러앉은 덕분에 물자 낭비에 신하들 관리가 안 되는 등 정무가
불량하며, 원나라에서도 보다 못해 가서 통치하라고 했더니 가기 싫어 자기 아들에게 왕 자리를
떠넘겼으니 책임감도 없고.... 티베트로 귀양간 것이 자업자득이다'라는 식으로 혹평을 하고 있다.

또한 심왕 문제로 훗날 심왕에 임명된 자들은 고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고 이 때문에 분란이 생겨 정치


문제로 비화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거기다가 1310 년 원나라에서 자신을 폐하고 세자 왕감을
고려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움직임이 있어 측근들이 이를 포착하자 자신의 장남을 죽여버리는 비정한
면모도 있었다. 자신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3 대가 부자 간의 악연으로
얽혀버린 막장 드라마를 리얼로 찍은 셈.

고려국을 폐하고 원나라의 직할령으로 편입해 달라는 입성책동이 불거진 요인을 제공한 것이 충선왕이기도
하다. 첫째로 권문세족과 척을 지면서도 누르지 못했고, 둘째로 고려 밖에서 원격 통치를 했고, 셋째로
심왕 작위를 고려왕이 아닌 조카에게 물려줘서 적절히 훗날 입성책동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4. 책벌레[편집]

왕 개인적으로는 학문을 좋아해서 책벌레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고[16] 예술 감각도 뛰어나서 특히


그림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군주답게 여성 관계도 제법 복잡한 편이었는지
정사인 고려사도 그렇고 야사에도 여성들과 얽힌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하여튼 여러 가지로 정말
드라마틱한 삶을 산 임금.

5. 자녀[편집]

제 1 비인 계국대장공주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 대신 제 2 비인 의비에게서 두 아들을 낳았다. 의비는


원나라 출신이지만 황족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러나 몽골인이라는 이유로 먼저 시집 온 정비, 조비,
순화원비[17]를 제치고 제 2 비가 되었다.

의비가 낳은 장남 광릉군(廣陵君) 왕감(王鑑)은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불행히도 아버지 충선왕에 의해


살해되었다. 원나라 황실과 조정이 충선왕을 고려로 돌아가도록 압력을 넣자, 충선왕은 귀국을 피하고
원나라에 남을 의도로 고려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줄 움직임을 보이다가 결국 취소했다. 그 과정에서
충선왕과 세자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의비가 낳은 차남은 강릉군(江陵君) 왕도(王燾)인데 형의 죽음으로 아버지 충선왕의 뒤를 이어 고려의 27


대 국왕 충숙왕이 되었다.
그 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궁인에게서 본 아들인 덕흥군 왕혜(王譓)가 있다. 훗날 고려 공민왕이
자주 정책을 추진하며 원나라를 배척하자, 원나라에서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삼으려했다. 그러자 고려에서는 덕흥군이 충선왕의 친자식이 아니라 고려 왕족도 아니고 따라서 고려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18] 덕흥군은 고려인 최유 등과 함께 기황후의 지원을 받아 1 만명의 군대로
고려를 공격했다가 최영과 이성계 등이 이끄는 고려군에 패배했다.

6. 매체[편집]

여성 편력이나 부자 갈등, 개인적 기질과 개혁 군주의 이미지 등을 생각하면 이 왕도 나름대로 사극의


소재거리로는 충분한 요소를 꽤 가지고 있는데 묘하게도 사극에 등장한 적은 거의 없다.

로맨스 소설로는 충선왕을 주인공 중 한 명으로 한 '왕은 사랑한다'가 있는데, 고려의 개혁을 꿈꾸는
세자로 아버지 충렬왕 및 충렬왕의 측근인 환관과 권문세족 등의 기득권 세력과 갈등한다. 고려 제일의
거부 종실 제후 영인백의 외동딸인 왕산을 사랑하게 되나, 종친이자 자신의 절친인 왕린이 그녀와
가까워지자 둘 모두에 대한 애정이 배신감으로 변해 점차 얀데레화 되어 간다. 로맨스소설이나 정치 상황
묘사도 실제 역사를 따라 사실적으로 쓰여진 편이다. 충렬왕과 충선왕의 갈등과 충선왕의 개혁 시도
등에도 비중을 두어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책을 찾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법하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2017 년 7 월 ~ 9 월에 MBC 에서 방영되었다. 충선왕을 맡은 배우는 임시완.

7. 기타[편집]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충선왕은 목종이나 공민왕 등과 마찬가지로 동성연애를 했던 기록이 남아있는


고려의 국왕 중 한 사람이다. 충선왕의 여성 편력이 상당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꽤 재미있는 사실이다.
충선왕의 동성연인은 원충(元忠)이라는 사람이었는데, 18 세가 되던 해에 원나라 수도에 머물고 있던
충선왕을 모시기 위해 파견되었고 이후 그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충선왕은
원충을 남색으로 총애하여 그가 채 20 세가 되기도 전에 왕씨 성을 내려주고 벼슬도 높여주었는데, 성격이
강직했던 원충은 이를 부담스러워하며 사양했다. 그러자 충선왕은 단단히 삐쳤는지(…) 그에게 내려주었던
왕씨 성을 거두어가고 벼슬도 강등시켜 버렸다. 그러나 후에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에 압록강까지
자신을 마중나온 원충을 보고는 화가 풀렸는지 그를 다시 특별히 우대하고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원충은
이후 충선왕의 아들인 충숙왕까지 섬기다가 죽었다. 본래 왕의 동성연인이 뒷배경을 믿고 오만방자한 짓을
일삼는 것은 역사상에서 꽤 자주 있었던 일인데, 원충은 예외적으로 바른 생활 사나이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별 상관없지만 조선의 17 대 국왕인 효종도 청나라로부터 '충선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한자까지 고려의 충선왕과 같다. 다만 조선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멸시해서, 청나라에 보내는 국서
등에만 이걸 쓰고 내부적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효종이라는 묘호는 중국 몰래 쓴 것이다.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이 왕의 이름을 딴 도로인 충선로가 있다. 부평이란 지명이 정해진 게 충선왕 때라는
걸 감안한 듯. 부평의 본래 지명은 길주목이었으나, 충선왕 2 년(1310 년)에 부평부로 바꾸었던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한편 인천이라는 지명은 조선의 태종 13 년(1413 년)부터 사용되었다.

어진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왕이다. 공민왕 대에 왜구에 의해서 흥천사에 소장된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영정이 탈취되었기 때문이다. 왜구들 입장에서는 어진은 상당히 고가품으로 거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남아있다면 고려 시대 유물이 많은 일본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전설에 따르면 귀양갔을 때 어느 궁녀가 가야금을 타면서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본 꿈을 꿨는데 하도
이상해서 그 궁녀를 찾았더니 고려에서 살았던 소녀로 봉선화 물을 들이면서 고국으로 돌아올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런 다음 궁녀는 가야금 음악으로 그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 뒤 그는 그 궁녀를 생각하면서
조국으로 돌아오려는 간절한 꿈을 키운 결과, 무종이 왕위에 오를 때 크게 공을 세운 덕분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다음 궁녀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불러오려고 했으나 이미 궁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은 소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궁에 봉선화를 많이 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27 대 충숙왕 왕만 (1294~1339) 재위 1313~1330 1332~1339

1. 개요[편집]

고려의 제 27 대 국왕.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숙의효대왕(忠肅懿孝大王). 원래 이름은 도(燾)였으나,


왕으로 즉위한 후에 만(卍)으로 개명. 자는 의효(宜孝). 충선왕의 차남이자, 고려 후기 개혁 군주인
공민왕의 아버지. 그리고 충숙왕의 어머니는 충선왕의 2 비인 의비(懿妃). 그래서 고려의 왕 중에서도
가장 고려 핏줄이 희미한 사람이다. 그러나 고려 말을 못했을 가능성이 높아 원나라에 살던 아버지
충선왕과 달리 고려에서 나름 통치를 했고, 몽골 옷을 입은 아들 충혜왕을 고려인답지 못하다며 꾸짖은
얘기로 보아 최소 고려인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2. 첫 번째 재위[편집]

1299 년, 강릉군에 봉해졌고 이후 강릉대군(江陵大君)으로 봉해진다. 그의 친형인 세자 왕감이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1310 년 부왕 충선왕에 의해 살해당한 뒤에 충선왕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1313 년 원나라의
심양왕 자리를 지키던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하지만 이 책임감 없고 이상한 아버지 충선왕은 평생 아들의 발목을 잡게 되는 결정을 남겼다. 안 그래도
충선왕이 상왕으로 건재해서 충숙왕의 왕권이 약한 상황에서, 상왕인 충선왕이 1316 년 자신의 원나라
작위인 심양왕 자리를 이복형 강양공의 차남인 연안군 왕고에게 물려준 것이다. 물론 온전한 자의가 아닌
정치적으로 압력을 받은 탓에 조카에게 물려준 듯 하나, 이는 충숙왕에게 위협이 되고 나아가 고려 조정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또한 명목상의 만주를 포괄하는 거대한 영토 역시 사라졌다.
왕고는 고려 왕 자리에 욕심을 품고 지속적으로 사촌인 충숙왕을 모함했다. 결국 왕이 주색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한다는 이유로 원나라에 소환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다.심지어 왕고는 1321 년 원 영종의
명령으로 충숙왕이 압송되자 2 년 간 고려 국왕을 자칭하기까지 했다.

3. 아들에게 양위[편집]

이런 현실 속에서 왕이 잘 해보겠다는 의욕을 상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결국 싫증이 난 왕은 "왕


노릇 못해 먹겠다"며 자신을 위협하던 심양왕 고에게 양위할 뜻을 내비쳤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심양왕 왕고는 지속해서 충숙왕을 모함했으며, 심지어는 원나라 황제에게 "아예 그냥
고려를 성(省)으로 만들고 원나라가 직접 통치하죠."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를 입성책동이라고 하며,
이는 원 내부의 반대 의견과 이제현의 노력 등으로 무산되었다. 그런데도 왕고와의 알력이 끊이지 않자
1330 년 아들 정에게 양위하고 원나라로 갔다. 그 아들이 바로 한국사 막장 군주 중 탑을 달리는
충혜왕이다.

4. 복위 후 2 번째 재위[편집]

충혜왕의 막장 짓을 보다 못한 원나라는 결국 2 년 만에 충혜왕을 폐위시키고 다시 충숙왕을 복위시켰으나,


정치에 뜻을 잃을대로 잃은 왕은 신하도 만나지 않고 사냥과 음주가무로 소일하다가 8 년만에 1339 년 3
월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46 세. 시호는 충숙의효대왕(忠肅懿孝大王)으로 원의 시호를 쓰지 않는
경우에는 '의효왕'이나 '의왕(懿王)'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의종과는 한자가 다르다.
그나마 이 사람에게 다행한 일은, 충정왕이 폐위된 후에 차남인 공민왕이 즉위했다는 점.

5. 평가[편집]

아버지 충선왕의 이해 못할 병크로 뭘 해 보고 싶어도 해 보지 못하고 의욕 없이 왕위에 있었으며,


원나라에 자주 끌려다니며 귀찮은 재위 기간을 보낸 임금.
하지만 업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1318 년의 업적이 특히 많다. 원나라에 보내는 무리한 세공을
삭감하는 데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기도 했으며, 당시 백성들의 큰 고통이었던 공녀나 환관들을 원으로
보내는 것을 줄여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제주도의 사용(使用, 또는 士用)·김성(金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검교평리(檢校評理) 송영(宋英)을


보내어 안무(按撫)하게 하였다.

같은 해 폐단이 많았던 사심관(事審官)을 폐지하였으며, 제폐사목소(除弊事目所)를 설치하였다가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으로 고쳐 권문세족이 점령한 땅을 색출하여 그것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또, 채무에 있어서 고리대금업을 막아, 그 이자가 원금에 상당할 때에는 그를 정지시키는 등
단속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안향을 문묘에 배향하였으며, 화자거 집전민추고도감(火者據 執田民推考都
監)을 설치하였다. 최소한 아예 고려 왕이라는 책임감이 부족해 아예 대도에서 원격 통치를 하며 자신의
학문 사업과 원 제국의 정치 싸움에만 몰두하던 충선왕보다는 충숙왕의 치세는 그나마 나았다. 또 여러
혼란이 많았지만 재위 기간이 25 년으로 원나라에 끌려간 기간을 빼면 20 년, 충혜왕에게 물려준 기간을
더하면 22 년 ~ 27 년으로 길다는 것도 특기할 만은 하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아버지보다 단명했지만
말이다.

왕 개인적으로는 글씨와 문장에 두루 능했으며 성품은 침착, 총명하고 결단력이 있었다고 고려사는
전하지만 그 평가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애초에 원나라 간섭기의 모든 군주들이 그렇듯 뭘
해 보고 싶어도 할 수 없던 것이 현실이었지만. 신진사대부를 발탁시킨 충선왕과 충목왕 사이에서
충숙왕은 재위가 길었음에도 이런 친위 세력을 기르려던 흔적을 보이지 못한다. 거기에 아들 충혜왕의
막장 짓 때문에 아들을 자주 혼냈다고 전하는데, 아들에 대한 스트레스도 그의 단명을 앞당겼을지도.

최영은 우왕의 난봉짓을 보다 못해 "충숙왕도 놀기를 좋아하셨지만 그래도 농번기를 피해 놀아서 백성들
원망을 듣지는 않으셨는데 지금 전하는 시도 때도 없이 놀아제끼니 백성들이 원망한다"고 간언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충숙왕이 예천군 권한공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을 '거사'라고 칭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가 이 고사를 본따 당시 북쪽 변방에 나가 있던 정도전에게 태조 자신의 호인 '
송헌거사'라는 발신자명으로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이성계의 정도전에 대한 두터운 신임이나
임금과 신하가 사적으로도 이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더라 하는 보기 좋은 미담으로 소개되어 있기는
한데, 정작 그 고사에 나오는 권한공은 채홍철, 유청신 등과 함께 심왕 고에게 붙어서 충숙왕에게 고려의
왕위를 심왕 고에게 넘겨주라고 권하거나 고려를 원의 일개 성으로 편입시키는 문제에 찬성했고 충숙왕에
의해 유배까지 갔던 인물이다.

6. 이야깃거리[편집]

6.1. 교황 요한 22 세가 충숙왕에게 보낸 편지?[편집]

2016 년 바티칸 비밀문서고에서 1333 년에 당시 교황 요한 22 세가 충숙왕에게 보낸 서한의 필사본이


발견되었다. 이 서한이 충숙왕에게 도착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왕께서 그 곳(고려)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대해주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라는 구절이 있기에 당시 고려에
소수이든 다수이든간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있었다는 게 확인되었다.

또한 영상에서 라틴어 번역자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려 왕 당신은 하느님의 좋은 종(Good


Servent)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낸 신자들을 환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편지 내용을
요약해주는데, 만약 '우리가 보낸'이라는 게 번역자가 임의로 붙인 내용이 아니라면, 당시 동아시아에
존재하던 네스토리우스파 신자가 아니라 가톨릭 신자가 고려 땅을 밟은 셈이 된다.[11] 다만 임의로 붙인
내용이라면, 고려 왕실은 몽골 황실과 연결되어 있었고 몽골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가 황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므로 아마도 고려에 거주하던 네스토리우스파 신자들을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가톨릭이 아니라 네스토리우스파라고 하더라도, 그건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다만 해당 기사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무슨 서유럽과 고려 간에 교류가 있어서 고려의 금속활자가 서유럽의
금속활자에 영향을 줬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신빙성이 낮으며 서유럽의 금속활자는 동양의 금속활자와는
다른 독자적인 체제를 통해 만들어 졌기에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해당 문건은 고려 시대 당시 한반도 내
크리스천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로만 봐야 한다.해당 기사 오류 지적[12]

하지만 "위의 편지가 고려 충숙왕에게 보낸 것이라는 주장은, 라틴어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는 반박


주장이 나왔다. 편지를 받는 Regi Corum 의 Corum 을 고려인의 복수로 보는 건 라틴어를 잘못 해석한
것으로 편지를 받는 당사자는 라틴어 문법으로 보든 당시 정황으로 보든 고려 충숙왕일 수 없다는 것이다.
교황이 고려 왕에게 편지? 잘못된 해석

해당 논문으로 들어가보면 "Corum 의 문법적인 형태를 고려해 볼 때, Corum 은 Ci 이고 이는 Khitan 에


더 근접해 있으며, Khitan 은 그런데 Chigista 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Sece
de Chigista 를 Seecede Chingista 로 읽을 수 있다. 이 경우도 고려와는 무관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편지를 받는 Regi Corum 은 고려 충숙왕이 아니라 원나라 황제이거나 서방 칸국의 칸들 중
하나로 보인다.

28 대 충혜왕 왕정 (1315~1344) 재위 1330~1332 1339~1343

1. 개요[편집]

연산군을 뛰어넘는 한국사 최악의 폭군.

고려의 제 28 대 국왕.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혜헌효대왕(忠惠獻孝大王). 휘는 정(禎). 몽골식 이름은


부다시리(寶塔失里)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장남으로, 공민왕의 형이다.

연산군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면이 있지만 막장성이 그 유명한 연산군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1.1. 연산군과의 비교[편집]

연산군은 세자 시절에는 '비교적' 평범했을 뿐더러[3] 즉위 초에는 '나름대로' 괜찮은 왕이었던 편이다.
그 이후의 악행에 대하여서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어머니 때문에 비뚤어졌거나[4] 정신이상을 겪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다. 마지막으로, 최소한 연산군도 양어머니(성종의 정비 정현왕후 윤씨 등.)를
강간하진 않았다.[5]

충혜왕은 꼬꼬마 세자 시절부터 막장. 정말이지 답이 없다. 그야말로 막장 원탑. 가히 반도의


귀축왕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2. 시호의 의미[편집]

일단 이 시호는 원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다.

'충혜왕'이란 시호가 어째서 붙었냐면, 우선 '충'은 원 간섭기에 재위했던 왕들한테 '니네는 부하니까
우리한테 충성해라'는 의도로 몽골이 내린 글자이고[6], 뒤의 혜 자는 이 왕의 행실상 좋은 시호를 줄
수는 없으니 마지못한 기분으로 은혜 혜(惠) 자를 썼다고 한다. 죽어준 걸 은혜로 여겨서 이렇게
지었을지도. 굳이 충혜왕 뿐만 아니라, 한국이든 중국이든 시호에 '은혜 혜' 자가 들어간 군주는
심각하게 무능했거나 싸이코패스였거나 적어도 둘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7] 혜공왕이라든가...
진혜제라든가...사실 충혜왕이 저지른 막장 짓을 보면 해릉양왕을 연상시키는데 대체 왜 시호에 양(煬)이
안 들어갔나 싶을 지경이다(들어갔다면 충양왕이었을듯.).
3. 생애[편집]

3.1. 막장 행보[편집]

고려의 충혜왕의 막장 행각은 훗날 등장하는 조선의 유명한 폭군인 연산군조차 한수 접어야 할 정도로
비교 불가.

성에 관련된 욕구를 주체 못하는 인물이었지만, 사람을 마구 죽이는 유욱 같은 사이코패스 살인마 왕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것 빼곤 좋게 봐줄 점이 하나도 없는 귀축의 화신이다.

세자 시절부터 막장끼가 보여 절 지붕 위의 새를 잡는답시고 절을 불지르고 튀었다거나 초가삼간[8]


불량배들과 어울려 걸핏하면 여자를 겁탈하거나 술을 즐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부왕인 충숙왕으로부터 "
예끼 이놈! 너는 왜 망나니 같은 행실만 하느냐!"라고 욕까지 들은 적이 있다. 이후 즉위식을 치르러
고려로 오다가 마침 원나라로 가던 부왕과 황주에서 마주쳤는데, 화려한 옷차림으로 길 위에서 호례(胡
禮), 즉 몽골에서 하던 대로 인사하는 아들에게 "네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고려 사람인데 어디서 나한테
호례를 행하느냐? 그리고 옷은 또 뭐가 그렇게 사치스러우냐?"라고 꾸짖는 충숙왕의 서슬에 놀라서 울며
물러났다고.

아버지 충숙왕도 막장이라 신하의 아내를 뺏고 하는 등의 일로 폐위되었다가 복위된 것과는 달리,[9]


충혜왕은 진짜 정치를 못한다는 이유로 왕 자리에서 잠깐 쫓겨났다가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왕위에
복위된 경우다. 충혜왕은 왕이 되자마자 여색을 지나치게 즐겼고 정사에는 관심없고 내시들과 씨름이나
즐겼으며, 심지어 그가 궁궐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주춧돌 밑에 아이를 묻는다"는 소문이 돌아 민심이
크게 흉흉해졌다.[10]

연산군처럼 여자는 신하의 아내든 뭐든 이쁘면 다라는 식으로 마구 겁탈을 했다. 이 막장 행각이 절정에
달한 때는 장인의 후처와 부왕의 후처(즉, 장모와 새어머니)들을 강간했다.

5 월 병인일, 왕이 그 장인인 삼사좌사 홍융의 계실 황씨(黃氏)를 간음했다.


5 월 경오일, 왕이 서모인 수비 권씨(權氏)와 정을 통했다.
5 월 환관 유성의 처 인씨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왕이 구천우, 강윤충을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유성더러 술을 올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유성이 왕에게 "전하께오서는 곧 복위하실 것이니 백성들을 잘
다독거리고 아낌없이 상을 내리소서."라고 진언했다. 왕의 속내가 그 처를 꾀어내는데 있는 것도 모르고,
유성은 왕이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준다고 착각하여 행동거지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니 주위 사람들이 몰래
비웃었다.
8 월 갑오일, 경화공주(慶華公主)가 왕을 초대해 잔치를 열었는데 술자리가 파했으나 왕이 취한 체하며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날이 저물자 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정을 통했다.

역사서니까 차마 노골적으로 못 쓰고 정을 통했다고 돌려서 얘기한 거지, 실제로는...

이 인간이 겁탈한 충숙왕의 아내는 2 명으로 한 명은 수비 권씨(壽妃權氏), 다른 한 명은 당시 충숙왕의


정비(正妃)격인 위치에 있었던 경화공주(慶華公主)[11]였는데 경화공주를 범할 때 모양이 진짜 막장이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주를 위해 향연을 베풀었고 공주도 그 답례로
연회를 베풀었는데, 연회가 끝나자 충혜왕은 경화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저항하는 경화공주를 송명리[12]
등의 아랫사람들을 시켜 사지를 묶고 범했다. 완전 귀축이 따로 없다.

또 경화공주가 원통하여 참지 못하고 원나라로 돌아가려고 말을 사려 했는데, 충혜왕이 말 시장을 못 열게


하여 말을 팔지 못하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어 사신을 보내 원나라에 뇌물을 바치고 국새의 반환을 요청했는데 그때 그에게 욕을 본 경화공주의


밀고로 조적 등 심양왕 일파가 국새를 영안궁에 감춘 뒤 군사 1,000 명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충혜왕은 이를 평정했다(!). 그 뒤 경화공주를 부패로 악명이 높았던 만호 임숙의 집에 유폐시킨다. 이
개막장짓이 발각된 것은 얼마 후의 일로, 원나라에서 국새를 가지고 온 사신 두린이 경화공주를 알현할
때였다. 두린은 황제가 하사한 술을 경화공주에게 바쳤는데, 경화공주는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수치심에
울기만 했다. 이에 다른 수하들을 모두 물리고 난 후에야 경화공주는 자신이 당한 수치를 두린에게 말하게
되고 두린 일행은 충혜왕을 원으로 압송한다. 충혜왕은 원으로 끌려가 투옥되었다가 자신을 고발한 환관이
실각하자 다시 복위했는데 그의 입지가 원나라에서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배짱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이것 외의 기록들은 링크를 참고하자.#

3.2. 폐위와 최후[편집]

결국 이를 보다 못한 환관 고용보와 기황후의 오빠이자 부원배 노릇을 하던 기철이 원나라 황제에 청을


넣어, 원나라가 사신을 파견해 충혜왕을 호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둘이 한국사 탑클래스를 달리는
유명한 간신배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충혜왕의 막장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 천하의 간신배를 충신으로 만드는 충혜왕의 위엄. 사실 간신배라고 해도 어쨌든 국가
통치의 임무를 맡은 만큼,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려면 왕이 그냥 무능하기만 해야지 사람이기를 완전히
포기해서는(...) 곤란했기 때문. 그러나 의외로 눈치는 빠른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계속 출두를 거부,
결국 원나라 사신은 충혜왕을 속여 그를 정동행성 내로 유인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처음부터 폐위시킬 생각으로 유인한 거니 보자마자 원나라 사신은 그를 무엄하게도(?) 발길질에


환관 고용보는 그를 본체만체, 원나라 사신의 호위병들은 압송이란 이유로 주위에 칼부림까지 해 사상자가
속출했다.[13] 이날이 1343 년 11 월 22 일(음력) 갑신(甲申)일, 1343 년 12 월 9 일(양력)이었다. 
이에 따라 직무 수행이 불가능하게 되어 왕권이 정지되었다. 시종을 드는 사람이 없어 왕이 직접 짐을
들고 압송되었다.

결국 원나라로 압송되는 도중에도, 지방 수령에게[14] 추워서 이불을 달라고 했는데 그 관리는 "네가
잘못해서 못 주겠다!!"라는 식으로 거절당하는 등 굴욕을 겪는다. 물론 뒤에 그 관리는 처벌을 받게
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 관리를 처벌한 사람이, 원에서 충혜왕을 잡아오라는 명을 받고 고려에 와서
충혜왕을 직접 구타하기까지 했던 타치(朶赤)라는 몽골인이었다. 안균이 그에게 와서 '왕이 폐위된
주제에 자기 잘못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내 이불을 빼앗으려(...) 한다'고 일러바치자, 타치는 "너한테
여기를 다스리게 해준 사람이 누구더냐? 네가 모시는 왕이 추위를 못 견뎌서 이불을 찾는데 네가 주지
않는 게 신하의 도리냐?"라며 쇠자로 초죽음이 되도록 때렸다. 충혜왕 입장에서는 물론 병 주고 약
주고다.

순제는 충혜왕에게 '그대의 죄는 너무나 커서 그대의 피를 천하의 모든 개들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하지만(雖以爾血,啖天下之狗,猶爲不足), 짐은 관대해서 살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귀양을
보낸다'는 식으로 말해서 주눅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즉 시체를 갈갈이 찢어서 온 사방에 흩뿌려도 모자랄
정도로 엄청난 죄인이라는 뜻이다. 보통 이런 류의 발언은 역성혁명을 하려다 실패한 인물에게나 하는
것인데다, 당시 몽골인들이 땅에 피를 흘리는 처형 방식을 극도로 금기시한 것을 감안한다면 충혜왕의
행동들에 대해 원나라 조정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충혜왕은 티베트로 귀양간 할아버지 충선왕처럼 원나라에 의해 귀양을 간 2 번째 고려 왕이 되었다.


그러나 원나라 내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유배된 거였고 나중에라도 이용 가치가 있었던 충선왕과 달리,
충혜왕은 막장이라서 유배된 거였기에 그는 빨리 죽어줄수록 고려와 원나라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이었다. 그 때문인지 게양현(揭陽縣)[15]으로 귀양가는 도중 악양현(岳陽縣)[16]에서 30 세의 젊은
나이로 비명횡사하였다. 항간에는 귤을 잘못 먹고 체해 급사했다는 설이 있었으며 일설에는 원나라에 의해
독을 탄 술을 마시고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었다. 갑자기 사망한 걸 보면 원나라에서 손을 쓴 게 확실해
보이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백성들이 기쁨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고.

王傳車疾驅 艱楚萬狀 未至揭陽 薨于岳陽縣。或云遇鴆。或云食橘而殂。國人聞之 莫有悲之者 小民至有欣躍


以爲復見更生之日。初 宮中及道路 歌曰 阿也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至是 人解之曰 岳陽亡故之難 今日去 何
時還。
유배지로 데려가는 함거(檻車)가 너무 빨리 달리는 통에 왕은 온갖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게양까지
가지 못하고 병자일에 악양현에서 죽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짐독(鴆毒)으로 독살되었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귤을 먹고 죽었다고도 말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지체 낮은 백성들 가운데는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고 기뻐 날뛰는 자까지 있었다. 그에 앞서
민간에 "아야마고지나(阿也麻古之那) 이제 가면 언제 오냐?"라는 참요가 유행했는데, 이 일이 있은 후
어떤 사람이 이 노래의 앞구절을 "악양망고지난(岳陽亡故之難)"으로 풀이해 "악양에서 죽을 재난을
만났으니 오늘 가면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고려사절요》 권 25 충혜왕 갑신 5 년(1344 년)

 
그의 유해는 먼 타국 땅이 아닌 고려 땅에 묻혔다. 공교롭게도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그 달에
경화공주가 한 많은 삶을 마쳤다.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날을 정확히 알기 어려워 경화공주가
원수가 죽은 꼴은 보고 저승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어린 두 아들이 각각 충목왕과 충정왕으로 즉위하는데, 둘 다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그것이 고려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다.

여러모로 진정한 막장 군주. 마지막으로 《고려사》에 기록된 사관의 글을 보자.

王性游俠 好酒色 耽于遊畋 荒淫無度 聞人妻妾之美 無親貴賤 皆納之後宮 幾百餘。於財利 分析絲毫 常事經營
群小爭進計畫 奪人土田奴婢 盡屬寶興庫 良馬以充內廐。給布回回家 取其利 令椎牛進肉 日十五斤。新宮之役
張旗設鼓 親登墻督之。宮成 徵漆諸道 丹雘之輸 後期者 徵布倍蓰。吏緣爲姦 百姓愁怨。群小得志 忠直見斥
一有直言者 必加誅戮 人人畏罪 莫敢言者。
왕은 성품이 호협하고 주색을 좋아했으며, 놀이와 사냥에 탐닉해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남의 처나 첩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으면 친소와 귀천에 관계없이 모조리 후궁으로 들이는 바람에 그 수가 100 명이
넘었다. 또한 재물에 관계되는 것이면 아무리 자잘한 것이라도 따져 항상 이익을 올리려 하니,
군소배들이 다투어 계략을 올려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모두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켰으며 궁중의
마굿간을 준마로 채웠다. 또 회회(回回) 사람[17]들에게 베를 주고 그에 대한 이자[18]를 챙겼으며 소를
도축[19]해 그 고기를 날마다 15 근씩 바치게 했다. 새 궁궐을 지을 때에는 깃발을 벌여 놓고 북을
설치한 다음 친히 담에 올라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독려했다. 궁궐이 완성되자 각 도에서 옻칠을
거두어 들였으며, 단청을 올릴 물감을 기한보다 늦게 가져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보다 몇 배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했다. 관리들은 이를 기회로 백성들을 가렴주구했으며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싸였다.
군소배들은 출세하고 충직한 사람들은 쫓겨났으며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면 반드시 사형해버리니, 사람들이
처형당할까 두려워 감히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고려사》 충혜왕 세가 총서

4. 업적[편집]

한국사 최고의 막장 군주지만 유일한 장점(?)이 있었는데 장사에 매우 밝아서 고려에서 난 물품의
유통망을 장악하고 실크로드를 통해 온갖 상인들과 거래해서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 장사 밑천은 모두
백성들을 수탈해서 나온 물자들이고, 그렇게 번 돈은 원나라 권력층에 뇌물을 뿌려서 자신의 입지를
지탱하고 여자를 찾아다니는 데 썼으며, 후궁도 무려 100 명이 넘었다고 한다. 왕부터가 간신. 의자왕의
3 천 궁녀가 뻥이라는 것이 여기서 나타난다.

5. 재평가?[편집]

최근 정치 운영과 개혁 정책을 분석한 결과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하는 53


권짜리 한국사 중 『제 19 권 고려후기 정치경제편』에 역대 충자 돌림 왕들의 개혁 정치 항목을 보면
충혜왕의 경우 정치 운영과 개혁 정책 내용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충혜왕에 대해서는 왕이 음행을 일삼았다는 사실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 운영과 정책 시행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 왕은 상업 활동의 진흥과 유통 구조의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했고, 사급전의 혁파 등 토지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21] 더불어 각종
세목을 신설해 권력층을 견제하였다.[22] 원의 간섭으로 폐위당한 경험이 있어 악소배를 비롯한 측근
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여[23] 왕권 강화를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원 세력인 기철, 고용보와
대립하게 되었다.

즉 충혜왕의 개혁 시도는 전방위적으로 친원파들을 압박하는 것[24]이었고 고려 정국은 충혜왕파 대


친원파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같은 정치 상황 속에서 충혜왕은 고용보 등에 의해 체포당하여 원에 압송되었고 곧 악양현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했다. 기철 등 부원 세력은 충혜왕의 왕권 강화로 위축당하자 왕을 체포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위기 국면을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원으로서도 충혜왕의 개혁 정치가 원나라의 고려
종속 정책에서 일정한 수준 벗어난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즉 충혜왕의 폐위에는 원의 고려에 대한
종속 정책과 부원 세력의 정치적 이해 관계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원은 충목왕 즉위 후 충혜왕
대의 정치를 전면 부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왕의 폐위에 대한 고려 정치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표방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사 제 19 권 고려후기 정치경제편』

그가 이런 권력을 개인의 폭정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좀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용했으면 고려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저렇게 권문세족을 짓누르고 획득한 재정이나
권력을 백성을 위해서 썼다면 지지가 높았겠지만, 왕과 신흥 세력인 악소배들이 깽판치는데 사용해
버렸으니 백성들 입장에선 왕이나 권문세족이나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25] 그가
폐위된 것도 결국 자신의 행실로 인한 빌미를 제공한 탓이라고 본다면 굉장히 아쉬운 부분이다. 역시
연산군의 선배인가

그의 이런 성향은 어찌보면 증조할아버지인 충렬왕이나 아버지 충숙왕 같이 시대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충렬왕이나 충숙왕의 경우에도 원나라의 압박이나 권문세족의 견제로 제대로
왕권을 휘두르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고 이 왕들의 경우에도 정사를 멀리하고 사냥이나 여색에 빠져드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충혜왕은 어린 시절부터 원에 있으면서 그곳의 퇴폐한 풍속에 빠져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제왕학이나 정치적 자제력을 그에게 교육시켜 줄 만한 여건도
아니었다는 것. 후대의 왕인 우왕도 어렸을 때부터 권신의 압박 때문에 이런 루트에 빠지는데 그때
큰아버지 충혜왕과 비교되는 건 의미심장한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나 과한 행적이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사에 실린 충혜왕에 대한 사신의 논평도 이와 비슷한 논지다.

충혜왕은 영리한 재능을 나쁜 데에 썼으니, 악소배들을 가까이하고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결국 안으로는 부왕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고 위로는 천자로부터 벌을 받아 죄수의 몸으로 유배가는 도중
객사한 것도 마땅한 일이었다.
오직 늙은 신하 이조년[26]만이 간곡히 충언을 올렸으나 그 말마저 듣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는가?

6. 사냥왕[편집]

참고로 사냥이라고 해서 그냥 활 하나 쥐어잡고 아무 산이나 가서 짐승 쏴잡는 수준을 생각하며, 그 정도


취미 생활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평민이나 지배 계층이라도 어지간한 집안의 사람이라면
그렇겠지만, 국왕이 사냥을 나가며 경호를 담당할 많은 호위병, 국왕과 신하들과 병사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여러 요리사, 식재료와 사냥 도구 및 기타 비품을 운반할 짐꾼, 사냥터에 허가받지 않은 사람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경계를 설 경비병, 사냥감을 찾거나 몰아야 하는 몰이꾼 등 최소 수백명의 수행원이
필요하다. 그 많은 인원이 움직이고 숙식하려면 당연히 급료, 물품 등의 경비가 장난아니게 든다. 조선
시대에 그려진 사냥 풍속도를 보면 알겠지만 사냥이란건 사실상 당시의 워크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말인즉 왕이 사냥을 자주 갔다는 것은 그만큼 낭비가 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나마 이 중간에 왕 노릇 한 거라곤 4 월 경인일에 끌려간 고려 국민들을 돌려달라는 글을 써서 보내기는


했다. 이마저도 돌아와서는 사냥 다닌 기록보다 궁 내에 강간, 살인 등의 기록이 늘어났다. 이건 뭐...
7. 가계도[편집]

•1 비 덕녕공주(? ~ 1375 년)

◦1 남 충목왕 왕흔(1337 년 ~ 1348 년) (재위 1344 년 ~ 1348 년)

◦1 녀 장녕공주(長寧公主, ? ~ ?) : 원나라 황족에게 시집갔다가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가 명나라에게


점령되는 혼란의 와중에 실종되었다. 그러자 숙부인 공민왕은 신하들을 시켜 장녕공주를 찾게 했다. 그
후 명나라 태조 홍무제(주원장)가 장녕공주를 찾아 고려로 돌려보냈고, 공민왕은 장녕공주를 그 어머니인
덕녕공주와 살게 했다.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덕녕공주와 살다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2 비 희비 윤씨(禧妃尹氏, ? ~ ?) : 아버지는 윤계종(尹繼宗), 어머니는 여흥 민씨이다. 외사촌동생


민제는 조선 태종의 왕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아버지이다.

◦2 남 충정왕 왕저 (1338 년 ~ 1352 년) (재위 1349 년 ~ 1352 년)

•후궁 은천옹주 임씨(銀川翁主林氏, ? ~ ?) : 충혜왕과 비슷한 성품으로, 충혜왕의 비위를 잘 맞추어


총애를 받았다(마치 연산군과 장녹수의 관계처럼). 사치가 심했다고 한다. 본래 상인의 딸로 태어나서
충혜왕을 만나기 전에는 사기 그릇을 파는 일을 했기때문에, 사람들이 사기옹주(沙器翁主)라고 비꼬아
불렀다. 충혜왕이 폐위되어 원나라로 끌려간 후 은천옹주도 궁에서 쫓겨났다.

◦3 남 석기(? ~ 1375 년) : 부모가 몰락하고 이복형 충정왕이 즉위한 후에 승려가 되라는 명을 받고


여러 절을 떠돌았다. 나중에 숙부 공민왕이 즉위하자 역모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는 과정에서
공민왕의 명령으로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는데...놀랍게도 살아남아 결혼까지 하여 아들을 하나 낳고 숨어
살았다. 하지만 다시 조카인 우왕이 즉위한 후에 석기와 그의 아들의 존재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코에이의 원조비사 정발판 시나리오 3 에서 충숙왕 자식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정발판 자체가 시대가
뒤틀려서 크게 상관은 없다.(...) 능력치는 방탕하고 무능한 군주였던 것을 반영한 것인지 정치력이 D
이고 전반적으로 별로이지만 그래도 왕자라 나중에 충숙왕을 죽이고(...) 동생인 공민왕을 군주로 하는
플레이를 할 때 정복지의 군주로 잘 써먹을 수 있다.

•SBS 드라마 신의에서 잠시 등장한다. 다만 이 드라마는 퓨전 드라마이고 공민왕 시절이 배경인지라 크게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적이 짧고 굵게 표현된다. 대낮부터 기녀들을 끼고 술판과 춤판을 벌이던
충혜왕은 고려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최전방에서 싸워온 적월대 부대의 유일한 여인인 단백을 발견하고
“어명이니 옷을 남김없이 벗어보라”며 추태를 부렸다. 이를 대장 문치우가 막아서자 충혜왕은 드디어
본심을 드러낸다. “너희들도 똑똑히 봤지? 저것들이 저렇게 방자하다. 백성들이 임금인 나보다 저것들을
더 믿는다 했어!” 외치며 마지막 속옷을 벗지 않는 단백을 향해 칼을 겨눴지만, 문치우가 단백 대신 왕의
칼을 맞았다. 이 일로 문치우는 죽고 단백은 충격으로 자살하며, 문치우의 제자이자 단백의 연인이었던
최영은 삶의 의욕을 잃게 된다.

•인터넷에 떠도는 것 중 고려 왕들의 어진을 상상해서 그린 작품들이 있다. 이 중 누가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충혜왕 영정이라고 그려진 그림이 있는데, 왠지 모 야겜의 남자 주인공과 닮았다.(...)
그런데 30 살에 죽었는데 심히 늙어보이는 얼굴이다.

9. 기타[편집]

•아무래도 막장 이미지가 연산군하고 비슷했는지 이런저런 가상 대담도 존재한다. 그리고 소드마스터


척준경과 함께 온라인에서 화제거리가 되어 유명해진 고려인이다.
•대부분의 한국사 교재에서 충혜왕 부분은 거의 나오지 않으며, 한두 교재에서 간단히 '폭정을 한 왕'
이라고 나오는 정도. 앞의 충렬왕, 충선왕이나 더 이후의 왕인 공민왕이 많이 나온다. 굳이 충혜왕의
업적을 찾는다면 편민조례추변도감을 설치해 개혁을 시도했다 딱 이 정도 나온다. 이것도 상급자용.

•충혜왕 때와 관련된 <고려사>의 기록 중에 우리나라에 만두가 고려 시대에 전래되었음을 알려주는 사료가


있는데, 문제는 이 기록이란 게 어떤 사람이 만두가 먹고 싶어 궁중 주방에 침투해 만두를 먹다 걸려
처벌받았다는 기록.(...) 아니 어떻게 들어온 거냐. 다만 이 때의 만두는 상화라는 것으로, 고기나
야채로 된 속이 들어가는 쟈오쯔(교자)가 아니라 만터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제수인 노국대장공주와는 몽골식 이름이 같다.

•'역대 <충>자 돌림 왕 시리즈' 중에선 그나마 그 네임드라던가 일대기 그리고 외모 등의 인지도나


임팩트가 가히 여전히 전체를 통틀어 진 주인공 격이다.

•기황후 속에서 복위 횟수며, 사망 시기며 전부 왕유와 충혜왕이 비슷하여 충혜왕을 기반으로 왕유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29 대 충목왕 왕흔 (1337~1348) 재위 1344~1348

1. 개요[편집]

고려의 제 29 대 국왕.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목현효대왕(忠穆顯孝大王). 휘는 흔(昕). 충혜왕의 아들로,


어머니는 덕녕공주다. 정식 시호는 충목현효대왕(忠穆顯孝大王)으로 원에서 내려준 시호 '충목'을 빼고
'현효왕' 혹은 '현왕'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제 명에 죽은 고려의 마지막 왕이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어린 시절은 원나라에서 보내다가 아버지 충혜왕이 숱한 막장 행각 끝에 폐위되자 고려로 돌아가 8 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왕이 되기 직전에 당시 황제였던 순제 토곤 테무르를 만났는데, 그가 "그대는
아버지를 닮겠는가, 아니면 어머니를 닮겠는가?"라고 물었다. 왕은 고자되기 "어머니를 더 닮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이 대답을 들은 토곤 테무르는 "그대는 그대의 어미를 닮아 영특하고
선하군."이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사실 어린아이의 대답이라곤 하지만 아버지의 막장 짓을 너무 잘
알았는지도 모르는 대목이다.

2.2. 즉위와 섭정[편집]

왕이 되었지만 나이가 어려서 어머니 덕녕공주의 섭정을 받았다. 어머니의 섭정 아래서 나름 치적을
쌓았는데, 충혜왕 대의 정치 폐단을 수정하는 데 힘썼고 정치도감을 설치하여 주로 권문세족들의 토지
제도를 개혁하는 데 노력했다. 또한 이들이 독점하던 녹과전의 폐단을 시정하여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줬으며, 양전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나라에 기근이 들자 이를 구제하기도 했다. 그리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3 대 실록의 편찬을 시작했으며 서연을 열어 학문 진흥에도 힘을 기울였다.

2.3. 최후[편집]

이렇듯 어머니의 섭정 속에서도 착실히 치적을 쌓아갔으나 9 대 임금 덕종처럼 수명은 짧았다. 아니, 그
이상으로 짧았다. 재위 4 년만인 1348 년 10 월에 병이 들었고 12 월에 김영돈이란 사람의 집에서
승하했는데, 이 때 나이가 12 세였다.[1] 수명이 조금 길었으면 선정을 베푼 기록으로 미뤄 보건대 명군,
나아가 성군이 될 기질도 보였지만 워낙 어린 나이에 승하하여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설령 오래
살았더라도 제 뜻대로 정치를 펼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 실제로 왕권이 약해서 재위 말엽에는 외척과
환관의 전횡이 심해졌다.

2.4. 치적에 대한 평가[편집]

사실 8 세에 즉위한 아이가 선정이고 뭐고 베풀 여지라도 있었을까. 그의 치세 속 일련의 정책들은 충목왕


본인의 업적이라기보단 섭정하고 있던 덕녕공주를 중심으로 대신들이 주도했다고 보는 편이 설득력을
가진다.

3.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편집]

드라마 신돈에서도 초기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병약한 설정으로 나와서 자주 골골대며 쓰러지다가 죽음을
맞는다. 어린 나이에도 영특해서 자신이 죽으면 어머니인 덕녕공주(배우는 김여진)가 정치적으로 몰락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어머니에게 당부한다.

4. 기타[편집]

충목왕의 휘가 昕(아침 밝을 흔)이었기 때문에 해당 성씨였던 사람들은 송두리째 성씨를 바꾸게 되었다.
예천 권씨 전부와 안동 권씨 일부의 본관이 바로 이 흔씨이다. 아래가 그 내용이다.

예천 권씨 시조 흔적신(昕迪臣)은 고려 중엽 보승별장을 지냈다. 예천 권씨는 본래 흔(昕)씨였는데 고려


명종 때 '흔승단'이 안동 권씨 '권백서'(權伯諝) 집안에 장가을 갔고, 그의 아들이 어머니 성을 따라
'권섬'(權暹)이 되어 예천 권씨 득성조라고 한다. 안동 권씨 족보에는 '권백서'(權伯諝)가 아닌 '
권백시'(權伯時)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신종 원년에 고려 명종이 예천의 흔씨(昕
氏)에게 권성(權姓)을 내렸다고 내용이 있다. 또는, 예천 권씨 무진보(戊辰譜)에 따르면 예천 권씨는
'충목왕'(忠穆王)의 휘 "흔"(昕)을 피하여 외가 였던 '권'(權)씨로 개성했다고 한다. 안동, 예천
권씨는 고려 초기 내외손 관계를 시작하여 조선, 현재까지 통혼을 하고 있다. 예천 권씨는 안동 권씨와
같이 고려 초기에 시작되어 매우 오래된 한국 토본이다. 흔씨는 고려 초기에 시작된 성본인데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30 대 충정왕 왕저(1338~1352) 재위 1348~1351

1. 개요[편집]

고려의 제 30 대 국왕.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정왕(忠定王). 휘는 저(胝). 충혜왕의 2 남. 즉위하기


전에는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으로 불렸다. 충혜왕의 2 비인 희비 윤씨 소생.

2. 생애[편집]

2.1. 덕녕공주의 섭정[편집]

충목왕이 어린 나이에 죽자 그 뒤를 이어 고려의 국왕이 되었다. 이 때 섭정 자리를 놓고 충혜왕의 1 비


덕녕공주와 희비 윤씨 사이에 세력 다툼이 벌어졌는데, 덕녕공주는 고려의 다른 왕들과 달리 충혜왕이 첫
혼인으로 맞은 부인[1]이기까지 했으므로 자연스레 섭정은 덕녕공주가 하게 되었다.
2.2. 외척의 전횡[편집]

선왕이었던 충목왕이 영리했다고는 하나 연달아 어린 왕이 즉위한 나머지 충목왕 말엽부터 환관과 외척의
전횡이 심했고[2] 특히 기황후의 오빠 기철 일파의 전횡이 매우 심각했다. 문제는 안으로만 난잡한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도 어지러웠다는 것.

2.3. 잦은 왜구의 침입[편집]

밖으로는 원나라마저도 혼란해지기 시작한 무렵이고, 특히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두 명의


덴노가 대립하는 남북조시대의 혼란기가 와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거의 상실되자 이 틈을 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대단히 심해졌다. 특히 1350 년 무렵에 이들은 규모가 백여 회가 넘을 정도로 정말
폭발적인 활동(이라고 쓰고 침략과 약탈이라 읽는다)을 벌였는데, 아예 이 때의 왜구를 그 해의 간지를
따서 '경인왜구(庚寅倭寇)'라고 부를 정도.

2.4. 폐위와 최후[편집]

이렇듯 고려가 내우외환에 시달리자 고려 내부에서는 어린 국왕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 할 것이니 국왕을
교체하여 국면의 전환을 노려보고자 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충목왕이 승하했을 때 충정왕과 함께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로 꼽혔으며 충정왕과는 다르게 이미 장성한 나이였던 강릉대군 왕기(충정왕의
숙부이자 충혜왕의 동생이며 훗날의 공민왕)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결국 해윤택, 이승로를 중심으로
하여 도당에서 정식으로 원나라에 요청하여 고려 국왕 교체가 결정되었고, 폐위된 충정왕은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향년 16 세로 공민왕의 명령으로 독살당했다.

한편 이 사건은 당시 고려 국왕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유명무실한 자리인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통치력을 발휘 못하는 국왕이라 하더라도, 국왕 교체처럼 무력을
동원하는 것도 아니고 정부 기관에서 국왕의 폐위를 의결하여 상국의 재가를 받아 집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고려 국왕이라는 자리가 무신정권 시기의 고려 국왕보다도 더 한 허수아비 자리임을 증명한다.

3. 평가[편집]

시호는 원나라에서 내려준 '충정'만이 존재하고 폐위된 군주라 고려 조정에서 시호를 내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충정왕이라 부르지 않는 경우에는 '폐왕 저', 혹은 '저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래저래 안습의
왕.

고려사에 의하면 포악한 왕이었다고 한다.

嘗夜 王與近侍 相戲謔達曙 或以墨 灑侍學官衣。或有近女而行者 便生妬心 雖宰相 至見撞擊 往往以鐵椎 擊人


幾死 或於冬月 取冰雪水 和凍飯食人 狂悖類此。
밤에 왕이 근시(近侍)와 함께 새벽까지 장난질을 친 일도 있으며 때로는 시학관(侍學官)의 옷에다 먹물을
뿌리기도 했다. 여자와 함께 길을 가는 사람을 보면 질투심을 일으켜 그가 비록 재상이라도 마구 때렸으며
쇠몽둥이로 사람을 쳐서 거의 죽게 만드는 일도 있었고 때로는 한 겨울에 얼어붙은 밥에 얼음물을 부어
사람에게 먹이는 등 광패한 행동을 일삼았다.
《고려사》 충정왕 3 년

충정왕 본인이 부왕 충혜왕이 막장 짓을 일삼다가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몰랐을 리 없기 때문에 이는


승자인 공민왕 측에서 폐위의 정당성을 위해 조작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지만 고려사를
공민왕이 만든 것도 아니고 조선 시대의 고려사 편자들이 굳이 이런 부분에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가며
공민왕 편을 들어줘야 할 이유가 없다. 조선 건국 시점에도 이 시절을 겪었던 사람들이 많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정치적 정당성을 만들어내야만 했던 우왕 시절이면 몰라도 이 시절 이야기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왜곡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고려사와 달리 동국통감에선 동정론이 부는 왕인데 총평은 "충정왕(忠定王)은 자기 수명을 마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했다. 기본적으로 2 년동안 저런 폭군 행동은 할리는 없고, 오히려 동국통감에선
충정왕에 동정론을 붙이며 공민왕을 더 비판했다.

솔직히 아버지를 교훈 삼아 제대로 행동할 줄 아는 정도의 양식만 보였어도 원나라 황실에서 굳이 정통성
높은 선왕의 아들을 폐위하고 선왕의 동생을 왕으로 세우는 정치적으로 부담가는 행위를 했을 리가 없다.
자기 아버지가 무슨 짓하다 쫓겨났는지 뻔히 봐놓고도 하는 행동이 싹수가 노랗게 보이니까 폐위시켜 버린
게 정답일 것이다.

4. 그 외[편집]

충정왕 시기 이암이 원의 농서인 농상집요를 소개하였다.

개성 왕씨 족보에 의하면 시중공 왕제(王濟)라는 서자가 있었다고 하며 실제로 개성 왕씨 집안에 왕제의


후손을 자처하는 시중공파가 있다. 하지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같은 정사에는 그런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오직 개성 왕씨 족보에서만 보인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는 조선 시대 때 편찬된 사서라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3] 기록하지 않았거나 아예 고려실록에서부터 누락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원래 족보 자체가 위조나 과장이 많아서 그대로 믿기 곤란하고, 또한 왕제가 실존인물이라고 해도 생모에
대한 기록도 불분명할 정도로 출신이 미약한 서자이기 때문에(예를 들면 생모가 정식으로 후궁이 되지
못한 이름없는 궁녀 소생일 수도 있음.) 별 문제 없었을 것이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드라마 신돈에서는 평범한 어린 아이로 나오다가 역사대로 폐위. 기황후 측의 모략으로 독살당한다.
신의에서는 그나마 좀 긍정적으로 나온다. 최영과 막역한 사이로 공민왕을 보호했으나 기철에게 살해.
사실 나이 차가 20 살 나지만 무시하자.

31 대 공민왕 왕전 (1330~1374) 재위 1351~1374

1. 개요[편집]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반원 정책을 펼친 고려의 마지막 불꽃, 그러나 아내의 죽음 이후에는 고려의
멸망을 가속화시킨 암군.

고려의 제 31 대 임금. 우왕 / 창왕 / 공양왕은 폐위되었으므로 사실상 고려의 마지막 군주. 고려


왕조에서 실질적으로 제대로 왕 노릇을 했던 마지막 군주라고 봐도 좋을 정도. 묘호는 없고, 시호는
공민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恭愍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인데 '공민'은 명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라서
고려에서 올린 시호의 '경효대왕(敬孝大王)'을 따서 '경효왕'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단, 25 대
충렬왕의 고려 측 시호도 경효왕(景孝王)이라 혼동될 수 있어서 실제로 그렇게 많이 쓰이지 않는다. 휘는
전(顓), 몽골식 이름은 바얀 테무르(Bayan Temür).

아들인 우왕은 이인임에게 농락당하다가 권력을 찾은 지 얼마 안 되어 위화도 회군을 당했고, 손자 창왕은


즉위 당시 병풍 신세의 허수아비 왕인 데다, 공양왕은 그나마 발버둥치기라도 했지만, 오죽하면 우왕과
창왕은 왕이었던 사실이 취소당해 시호가 없어서 모두 본명들로만 불릴 정도[4]. 애초에 호니 자니
피휘니 하는 관습 자체가 한자 문화권에선 사람 본명을 직접 부르는 습관이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생긴
습관인 걸 생각하고, 특히 왕의 본명을 직접 부르는 것 자체가 사약 한 뚝배기 하실래예라고 외치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걸 생각하면…
2. 고려의 재흥을 꾀하다[편집]

근세의 비루한 것을 배척하고 장차 태조의 옛 일을 회복시키려고 하였다.


- 목은 이색, <목은문고>(牧隱文藁) 賜龜谷書畵讚

충숙왕의 3 남[5]으로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다.[6] 원 간섭기의 왕족들이 거의 그렇듯 공민왕도


원나라에서 볼모 생활[7]을 한다. 그 기간 동안 공민왕은 원나라가 점점 쇠퇴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이때
평생의 반려자 노국대장공주를 만나 결혼하여 원나라에서 생활하다가 충정왕이 원에 의해 폐위되자 고려로
돌아와 왕이 되었다.

당시 고려는 새로운 왕을 원했다. 당시 강릉대군을 왕위에 올려 달라고 원나라에 요구했고 이 의견이


수용되어 왕위에 오를 수가 있게 되었다. 그 이후 폐위 된 충정왕은 공민왕 2 년(1352 년)에 원나라에
의해 독살 당한다.

왕이 되자마자 그는 원나라 생활을 할 때 파악한 원의 쇠퇴를 믿고 본격적인 반원 정책을 펼쳤다. 그 첫


신호탄으로 1356 년에 병신정변을 일으킨다. 먼저 원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했고 원의 풍속인 변발과
호복을 금지시켰다. 또한 기황후의 인척임과 동시에 고려 내에서 가장 세력이 큰 친원파 무리들 중
하나이자 갖은 전횡을 일삼던 기철 일당을 중심으로 한 부원배 세력의 숙청에 나섰고, 기철의 동생들을
빼곤 아내와 어린 자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였다. 전민변정도감까지 세워 기철 일당이 점탈했던 인구와
토지를 재빠르게 정리했으며,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지식인 계층을 등용 및 육성하면서
의욕적인 개혁 정책을 펼쳐 나갔다. 성적 면에서도 스스로를 절제했으며, 신하들에게도 예우를 갖추었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다는 평가도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부원배를 처단하면서 공민왕이 들었던 명분
중에서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정한 원칙을 기철 일파가 어겼다'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즉
쿠빌라이가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아 직접 통치를 하지 않고 독자적인 내정 운영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것을 근거로 삼아, 고려를 원에 들어다 바치려는 책동을 하던 부원배들을 다름 아닌 원나라
황제의 이름으로 제거해 버린 것이다.

당대의 신진사대부의 대표 인물은 이색, 이숭인, 정몽주, 정도전 등으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조선 왕조의
개국에도 크게 일조했다. 단 이들 중에서도 조선의 개국에 일조한 이들은 정도전 등의 급진적인 신진
사대부들로, 이들 가운데서도 정치적인 스펙트럼의 차이는 존재했다. 또한 정몽주는 당시에도 명사였긴
했으나 정몽주와 정도전은 젊은 세대로서 공민왕 말기까지는 소장관원, 간관으로서 존재했을 뿐
정치적으로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국왕이 중책을 맡겼던 것은 이제현과 그의 제자 이색, 그리고 이인임의 형인 이인복과 같은 원나라 과거


급제 출신 재상들이었으며, 이들은 양심적이고 성실했으며 학문의 성취가 높았으나, 이후의 세대보다
보수적이었고 기득권과도 얽혀 있었다. 그 밖의 요직은 자신의 측근들(연저수종공신)과 어머니
명덕태후의 가문인 남양 홍씨 집안의 홍언박(공민왕의 외사촌 형이자 홍륜의 조부), 인척인 경복흥 같은
사람들을 기용했다.

2.1. 외침의 위기[편집]

공민왕은 대외 정책에 있어서도 꽤 괜찮은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원혜종의 요청을 받고 홍건적 토벌을
위해 최영을 중국에 파견하기도 했는데, 최영을 통해서도 원의 어지러운 사정을 파악했다.

당시 원 제국은 행정 체계의 미비와 떨어지는 지방 및 하부 세력 통제력으로 인해 전력을 동원하기 힘들고


내부 분열이 잦았다. 교초남발과 중과세와 한인들에 대한 차별로 인해 한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경제
중심지인 강남 일대가 원의 장악에서 벗어난 것도 치명타였다. 이에 공민왕은 차츰 원에서의 독립을
추진하였으며, 독립과 칭신을 반복하면서도 세를 잘 봐서 결국 부원배를 주살하고 동북면의 쌍성총관부(
지금의 함경남도 등)를 쳐서 원에 굴복한 이후 상실한 동북 지역의 영토를 수복했는데 이때 이성계가
고려에 귀순했다. 그리고 이름만 남아 있던 정동행중서성[8]도 폐지했다.

당시는 중국은 새 질서가 수립되는 원 - 명 교체기, 일본은 남북조시대의 혼란을 겪고 있어 동아시아


전체가 전란에 휩싸여 있었다.[9]

그 탓으로 북쪽에서는 요동 지역의 원나라 장군 나하추의 침입과 오빠 기철을 죽인 데 앙심을 품은


기황후가 원혜종을 설득하여 덕흥군을 즉위시키기 위해 침입한 최유의 고려 침공이 있었다. 남쪽에서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다.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아수라장. 특히 굶주림에 지친 홍건적들이 떼거지로
고려에 침입했을 때는 개경까지 함락되어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을 가기도 했다.[10]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시기였으나 최영, 이성계, 정세운 등 많은 명장들의 활약으로 이를 간신히 격퇴할 수 있었다.

또한 지난 날 원종이 내전 중이던 쿠빌라이 칸에게 칭신해 나라를 유지했듯이, 공민왕도 막 원을 몰아내고


불안한 처지이던 명나라에 곧 칭신하여 명 태조(주원장)의 호감을 샀다. 공민왕은 사신을 보내가며
명나라에 저자세를 취하고 곧장 제후왕으로 책봉될 정도로 관계를 좋게 하는데, 이는 요동 정벌을 위한
준비였다. 이미 기씨 일파의 숙청으로 관계가 나빠진 북원과는 국교를 단절하였고, 아직 명나라는 요동에
신경을 쓰지 못할 시기, 공민왕은 요동을 공격하는데 이것이 제 1 차 요동정벌(동녕부 정벌)이다.

제 1 차 요동 정벌은 발해가 멸망한 지 445 년 만에 고려가 처음으로 요동성 점령에 성공한 사건이자
한반도 국가가 마지막으로 요동을 공략하고 실제로 점유했던 시기이다. 이성계가 처음 큰 전공을 세운
전쟁이기도 하며, 따라서 용비어천가와 고려사에도 상세히 기록되었다. 공민왕은 명나라를 경계하여 기씨
일파와 원 군대 토벌을 명분으로 요동으로 군대를 진출시켰다. 총사령관은 이인임이었으며 이성계,
지용수, 양백안, 임견미가 함께 군대를 이끌었다. 다만 당시 지용수가 해안선을 따라 움직이는 일로 부대
내 불만이 커졌으며, 성내의 군량고에 불이나 군량이 타버린 와중 무리한 영전공사 등으로 본국의 군량
보급이 제대로 오지 않은 일로 인해 결국 전투 후반에 전사자보다 굶주림과 추위에 죽은 병사들이 더 많은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시도에 반발한 명이 고려에 외교적 압력을 가하고, 한편으로 요동 무장들을
투항시키면서 요동 정벌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일시적으로나마 요동을 정벌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 뒤로 한반도의 영향력이 요동에 미치는 일은 영원히 없었다.

왜구를 근절하기 위한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이 남북조 시대의
내전 상태라 규슈 일대의 통제는 고사하고, 규슈 일대의 호족과 도적들이 뭉쳐진 왜구들이 수도 교토
인근인 키나이(畿内)까지 약탈하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왜구는 중앙 정부 자체가 없어져버려
고삐가 풀려버린 지방 세력들 그 자체였고, 왜구의 준동은 우왕 때까지 이어졌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참조.

3.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편집]

공민왕의 시대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난세였다. 이럴 때 군주가 굳건한 태도로 일관되게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공민왕의 예술가적인 예민한 기질은 이렇듯 급박하고도 강한 압박이 가해지는
국제 정세와 국내 상황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원 - 명 교체기를 틈타 몇가지 제도를 개혁하긴 하였으나 원이 제동을 걸면 곧바로 다시 원위치되거나


하는 등 수도 없이 난항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기득권 세력이었던 권문세족들의 반발은 엄청난
것이어서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이나, 딸들을 원 고관에 바치고 권세를 누리던 부원배 일당들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이들은 충목왕과 충정왕 때 시도되었던 개혁을 무산시켰던 장본인들이었으며, 막대한
토지와 노비,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결국 왕은 원이 혼란스러운 틈에 기습적으로 이들을 주살 및
토벌하여 간신히 숙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기근과 홍건적·왜구의 대규모 침입이 벌어졌다. 왜구는 고려 수군을 궤멸시키고 개경
인근까지 북상하여 대살육을 벌였고, 홍건적은 2 차 침입 때 개경을 함락시킨 뒤 궁을 불사르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으며, 공민왕은 안동까지 몽진해야 했다. 정세운의 활약으로 간신히 개경을 수복하기는
했으나 간신 김용의 모략으로 살해되었다. 군사권이 장군들의 손에 놓였던 상황에서 심복으로 믿고 있던
김용의 반란은 공민왕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공민왕은 김용을 어찌나 신임했는지 왕을 해치려 했던
반역자인데도 말년까지 한 번씩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 흥왕사의 난 때 국왕을 지켰던 노국공주가 자신의 아이를 출산하다가 아이와 함께 사망하게 되자


공민왕은 완전히 무너졌다. 흥왕사의 변 외에도, 노국공주가 살아있을 적에도 자객으로 추정되는 불온한
무리들이 공민왕의 침소에 간간이 나타났는데 공주가 온몸을 다해서 그들을 물리쳤다는 얘기가 전할
정도로 공민왕을 적극적으로 보호했다.

또한 공민왕은 노국공주 외에는 다른 여자를 상대하지 않고 후궁도 들이지 않았는데, 후일 오랫동안


왕손이 태어나지 않자 후사가 끊길 것을 염려한 어머니 공원왕후와 신하들의 간청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1359 년 혼인한 지 10 년 만에 이제현의 딸을 혜비로 맞이하고 공주의 사후(死後)에는 익비 등
3 명을 더 간택하지만 이는 형식상의 혼인이었을 뿐, 여자들에게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반야에게서
우왕을 볼 수 있었던 것도 반야가 노국공주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란 이야기까지 전한다.

4. 신돈의 개혁 정책과 좌절[편집]

신돈에게 모든 국사를 넘겨버린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으나 가장 큰 의견은 공민왕 자신이
기존 정치 세력들에게 염증을 느낀 나머지 정치계에서나 불교계에서나 완전한 비주류였던 신돈을 등용하여
이들을 견제하고자 했다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또한 전란을 진압하면서 많은 토지를 하사받아
전제 개혁의 장애가 되고, 사병을 거느려 위협적이었던 무장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11]

이러한 변모의 내적 요인은, 사적 개인으로서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의 사망으로 인해 정치에 뜻을 잃은


채 실의에 빠졌고, 삶의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 있다. 현실세계에서 공민왕의 실존은 이미
사라진 채 슬픔에 대한 탐닉과 죽음에의 갈망, 그 사이를 메우는 쾌락만이 남았다.[12] 그래도 신돈을
앞세워 개혁 정책을 맡긴 것으로만 봐도 아직까지는 개혁에 대한 의지만큼은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개혁을 위해 임용되어 국왕의 스승격 지위를 가지고 군림하게 된 신돈은 기존 정치 세력인 권문세족에
대한 견제 차원을 넘어서서 이들에 대한 공격을 가했고 기존의 정치 세력인 권문세족들은 신돈에 대해
태업으로 맞섬으로써 오히려 나라가 더 어지러워지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이는 전제 개혁을 위해 기성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권문세족들을 약화시키려는 것으로 해석되나, 한편으로는 천민 승려 출신인 신돈이
기존 세력 위에 군림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권력을 하루 아침에 천민 출신의 이름
없는 승려에 의하여 빼앗기고 소유하고 있던 토지마저 농민과 천민에게 강압적으로 내주게 된
권문세족들은 신돈에게 무서운 반감을 품기 시작하였다. 신돈에 의해 밀려난 세력 중에는 탐욕스러운
대농장주와 부원배들도 있었으나, 양식 있는 귀족들이나 소장 세력도 있었다. 심지어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던 최영조차도 그를 싫어할 정도였다.[13]

그러나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토지 개혁을 시도하였고, 이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긴 했다.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어 있다는 십실구공(十室九空)이라는 말이 있던 시대였다. 신돈은 이틀에 한 번씩
도감에 나가 일을 처리하였고 실무 책임자는 이인임과 이춘부[14]였는데 이춘부는 홍건적을 몰아낸 전쟁
영웅 출신이었고 이인임은 당시 권문세족 중 가장 명신이던 이인복[15]의 동생이었으므로 신돈의
포고령은 왕권의 철저한 비호 아래 실효를 거둔다. 이는 백성들이 신돈에게 강력한 지지를 보내는 바탕이
된다. 또한 신돈은 성균관을 지원하여 미래의 신진사대부 개혁층을 육성하는 데 힘이 되었다. 정몽주,
정도전, 윤소종 등 조선 건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신진 문신 세력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유교적 사대부층은 기존 사대부들보다 불교에 적대적이었고, 불교계 내에서도 왕사 보우는


신돈과 갈등을 빚었다. 신돈 세력 내에서도 외척인 경천흥(경복흥)이 신돈과 갈라져 살해당할 뻔했으며,
왕의 측근이었던 유숙도 참소로 죽임을 당했다. 또한 신돈은 사심관 제도를 부활시켜 자신의 세력을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다.

결국 더 이상 좌시했다간 자신의 자리마저 위태로워 질 것이라는 예상을 한 공민왕은, 역모죄로 신돈과 그


일파를 모조리 처형하여 다시 자신이 정치 일선에 나서게 된다. 이는 신돈이 막대한 재정과 인력을
소모하고, 사망자까지 늘어나던 노국대장공주 영전 공사에 결국 반대를 표명하면서 불거지게 되고,
신하들을 믿지 못하던 공민왕은 의심을 더욱 굳히게 되어 결국 친정을 선포하고 최영을 불러들여 신돈을
숙청하게 된다.
5. 방종, 그리고 비극적인 최후[편집]

하지만 이미 공민왕은 거진 반 폐인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는 공적 기구인 국왕으로서의 정치와


행정에 대한 전권은 신돈에게 맡긴 채, 노국대장공주 영전 건설에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동원했고 이는
결국 국가 재정 악화와 인부의 사망자 증가를 불러왔다. 그리고 언제나 슬퍼하면서 불공이나 탄식으로
날을 지새웠다. 민심도 당연히 악화되었으나 말리는 신하들의 간언 자체를 파면이나 처형 등의 처벌로
틀어 막아버렸다. 신돈이 키워놓고 새로운 정치 원동력으로 삼으려고 했던 사대부들조차 공민왕의
영전공사 강행과, 여러 난행들에 실망해 있었고 공민왕 역시 신하들을 믿지 못한 채 흥왕사의 난에서
자신을 보호했던 환관들만을 믿고 의지했으며, 영전공사에 찬성한 일부 신하들만을 비호하였다.

반 폐인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모든 육체적, 정신적 동력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다급해진 것은 후사의
문제였다. 하지만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한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아서인지 다른 후궁들의
몸에서 공민왕의 후사가 나올 가능성은 매우 낮은 상황이었다. 공민왕은 스스로의 수명을 길게 보지
않았고, 애써 살려고 하지도 않았다.

충정왕은 16 살의 어린 나이로 원나라에 의해 독살당했고, 덕흥군은 역적이 되었던 데다 그 왕씨 혈통을


부정했던 바 있어서, 당시 살아 있는 왕손들은 대부분 공민왕과 촌수가 멀었다.[16] 이래서 공민왕의
후계자 문제는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신돈의 여종이었던 반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왕우는 공민왕의
아들이 맞는지에 대한 혈통 문제가 있어서, 공민왕은 "왕우의 생모는 반야가 아니라 죽은 궁녀 한씨"라고
선포해 출신이나 혈통 문제를 덮으려고 했다. 하지만 멀쩡한 생모를 두고 다른 여자를 생모로 선포한 것은
오히려 왕우의 혈통을 더욱 의심스럽게 하는 결과만 낳았고,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마저 왕우가
자신의 손자인지 의심해 다른 왕족을 공민왕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다. 명덕태후는 공민왕의 사후에도 이
문제 때문에 우왕의 즉위를 반대한 적이 있다. 이 반야와 우왕 이야기 때문에, 아예 "공민왕 본인이
일종의 무정자증이어서 처음부터 후손을 남기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는 루머가 있는데, 노국공주가 임신한
것을 볼 때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공민왕은 성적 측면에서도 방종해져 공민왕 스스로 여장을 하기도 하고, '자제위'라는 미소년
집단을 뽑아 자신을시중을 들게 하고 이들로 하여금 후궁들을 범하게 해놓고 NTR? 자신은 이것을 지도,
감독(!)하거나 감상하고 있었다 한다. 이러한 기록들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고려 말기의 기록은 대부분 조선의 건국을 미화하기 위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17] 자제위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고립된 공민왕이 젊은 귀족을 모아 친위세력으로 키우려 했다는
견해도 있고, 권문세족들을 믿지 못했던 공민왕이 그들의 자제들을 궁궐에 인질로 잡아두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어쩌면 반반일지도… 어쨌거나 자제위 소속 젊은이들은 궁에 갇혀 국왕의 상대를 해야
했기에, 대가로서 많은 재물과 권세를 누렸으며 궁녀들과도 문란하게 행동하여 지탄을 받았다. 후에
공민왕을 살해하는 홍륜의 경우에도, 외척이던 남양 홍씨의 자손[18]으로 집안에서는 홍륜의 사람됨을
우려하기도 했으며, 결국 시해를 저지른 후 역모죄로 거열형에 처해졌다.

결국 공민왕은 이 자제위 중 하나인 홍륜이 3 비 익비 한씨[19]를 임신시키자, 공민왕은 그것을 은폐할


의도로 홍륜과 내시 최만생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것을 눈치챈 그들에게 역으로 시해당했다.
고려사에서는 공민왕이 변소에[20] 행차하자 내시 최만생이 쪼르르 달려가 "홍륜이 익비를
임신시켰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민왕은 "홍륜을 죽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사실을 고한
최만생에게 "너도 비밀을 아니 같이 죽어 줘야겠어."라고 말한다. 이에 놀란 최만생이 당사자인 홍륜
등과 모의하여 잠을 자고 있던 공민왕의 처소로 난입해 그를 시해했다는 것이다. 향년 45 세였다. 어찌나
난도질을 당했는지 뇌수가 병풍에 튀었을 정도로 시신은 참혹한 상태였다고 한다. 왕릉인 현정릉은 지금도
개성시에 있으며, 북한 정부가 다른 고려왕릉들에 비해 더 신경을 쓰는 듯하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자신이 모셨던 왕인 공민왕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21] 종묘
내부에 공민왕 신당을 세울 것을 명하였다. 공민왕 신당은 지금까지 현존하고 있고, 덕분에 우리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은 물론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준마도도 감상할 수 있다.
5.1. 공민왕 시해에 관한 의혹[편집]

중국의 정사인 명사 조선열전에서는 "이인인(李仁人)[22]이 공민왕을 시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공민왕의 시해 사건 배후에는 신돈파(?)였던 이인임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궁녀를 겁탈했다는 홍륜은 이미 아내가 있었다. 아내 있는 거하고 상관
없는 거 같은데. 둘째, 공민왕은 이런 문란한 사생활에 대한 서술과 달리 정사를 보는 데 별 탈이 없었다.
셋째, 이인임이 권력을 잡은 후에 북원의 사신의 말에서 "왕을 죽인 죄를 용서한다"란 말이 있으며,
명나라에 왕의 시해 사실이 새어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인임이 시해의 배후였기에 이를 두려워할 했을 것이며, 배후가 아니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만 이인임과 공민왕 시해의 관련성은 고려국사나 고려사 어느 부분에도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설을 받아들이자면 이와 같은 사실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한데, 그 부분은 이인임 실각 4 개월 후 위화도 회군이 발생하면서 집권을 위해 우왕의 혈통과
공민왕의 총명함을 깎아 내릴 필요가 있었던 이성계 등이 자제위의 홍륜 이야기만을 남겼다는 것으로
설명하는 모양.

그러나 이는 사실상 명백한 루머로, 우선 이인임이 혼자 일을 도모하고도 그때까지의 지위를 누리기엔


우선 당시 고려 조정엔 그를 견제할 만한 쟁쟁한 명사와 충신이 너무도 많았다. 또한 익비의 아이가
홍륜의 아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당시 멀쩡히 정사를 볼 정도로 판단력이 있었던 공민왕이 황급히
홍륜을 살해하려 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북원 사신의 발언도 정확히는 "백안첩목아왕(공민왕)이
우리를 배반하고 명나라에 귀부하였으므로 죽인 것을 인정한다"는 것으로, 정확히는 우왕 원년, 우왕의
즉위 과정을 정당화하는 발언이었다. 이전까지 우왕을 인정하지 않고 심양왕의 손자인 터터부카를 강제로
왕으로 세우려던 북원이 이인임의 화전 양면책을 받아들여 고려의 후계 승계에 대해 한 발 양보 발언을
보내온 것이다.

또한 이인임이 신돈파여서 공민왕에게 앙심을 품었으리라는 설은 아예 앞뒤가 다른 것으로, 이인임을


전민변정도감에 넣은 사람은 신돈이 아니라 공민왕 자신이었다. 그 증거로서 당시 신돈의 측근이던 이춘부
등이 신돈 실각과 함께 모조리 사형당한 것과 달리 이인임은 그대로 다시 공민왕의 곁에 돌아왔다. 즉
그는 신돈 일파였다기보다는 공민왕의 수족이었다. 따라서 신돈파(?)였던 이인임이 앙심을 품고
시해했다는 주장은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고려사 이인임 열전의 원전이 된
고려국사는 정도전이 직접 나서서 편찬한 책으로 이인임에 대한 비난은 티끌만한 것도 빼지 않았다.
공민왕을 약간 깎아내리기 위해 이인임의 가장 큰 악행을 홍륜에게 옮기고 없던 일로 만들어가며 축소
기록하는 일은 사실상 정도전과 태조의 인격이 뒤바뀌지 않는 한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인인(李仁人)이 공민왕을 시해하였다는 중국발 조선열전의 정확한 내용은 사실 이인인과


그 아들 이성계[23]가 고려 사왕(四王,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을 함께 시해하였다는 오기록이다.

어쨌거나 홍륜의 공민왕 시해 이후로 신돈의 개혁 운동에 반대하던 자제위의 집안들은 약화되었으며,
이인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익비 등 우왕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를 차근차근 정리하여 자신의 정치
기반을 공고히 했다.

이런 배경들에 착안하여 정도전(드라마)는 이인임이 자제위를 충동질해 공민왕을 차도살인 했다는 과감한
각색을 보이고 있다. 또한 그 전의 드라마인 대풍수에서도 비슷한 각색을 하였는데 이쪽은 이인임의
내연녀인 가상의 고려 최고 무당이 음모를 꾸며 공민왕을 시해했다는 내용이다(…)

6. '개혁 군주'의 한계 - 평가[편집]

史臣贊曰 王之未立也, 聰明仁厚 民望咸歸焉 及卽位 勵精圖治 中外大悅想望大平。自魯國薨逝 過哀喪志 委政


辛旽 逐殺勛賢 大興土木 以斂民怨。狎昵頑童 以逞淫穢 使酒無時 歐擊左右。又患無嗣 旣取他人子 爲大君 而
慮外人不信 密令嬖臣 汚辱後宮 及其有身 欲殺其人 以滅其口。悖亂如此 欲免得乎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왕이 즉위하기 이전에는 총명하고 어질고 후덕하여 백성들의 기대를
모았고, 즉위한 후에는 온갖 힘을 다해 올바른 정치를 이루었으므로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면서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죽은 후 슬픔이 지나쳐 모든 일에 뜻을 잃고 정치를 승려
신돈에게 맡기는 바람에 공신과 현신이 참살되거나 내쫓겼으며 노국공주의 영전 건설 같은 무리한 건축
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샀다. 완악한 무뢰배들을 가까이 해 음탕하고 더러운 짓을 함부로 하였고
수시로 술주정을 부리며 좌우의 신하들을 마구 때리기도 했다. 또 후사를 두지 못한 것을 근심한 나머지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대군으로 삼고서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해 몰래 폐신을 시켜 후궁을
강간하게 한 다음 임신하게 되면 그 자를 죽여 입을 막아버리려 했다. 패륜적 행동이 이와 같았으니
죽음을 면하려고 한들 어찌 피할 수 있었겠는가?"
《고려사》 공민왕 - 논평[24]

조선의 광해군과 비슷한 점이 있다.


의심이 많아 신하를 함부로 죽이기도 했는데, 그 예시로 들 만한 사건이 당시 '삼원수'라 불리며
홍건적의 침입으로부터 고려를 구한 당대의 명장인 안우, 이방실, 김득배와 정세운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들은 권력을 탐했던 간신 김용의 모략 때문에 살해된 인물들인데 (공민왕이 김용을 비호 내지는
흑막이라는 의견도 있다) 후에 김용마저도 흥왕사의 변 이후 최영을 시켜 제거했다. 또한 최영과 이성계
이전에 고려의 명장으로 손꼽히던 인당이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인당은 원의 반란군 토벌 지원병으로 갔던
중국에서도 용명을 떨쳤고 영토 수복 전쟁에서도 활약했다. 인당은 압록강변 수복에서도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공민왕이 보낸 심복 장수였던 강중경을 군법 위반으로 처형하면서 국왕의 의심을 샀고, 결국
공민왕은 원의 반발을 무마하고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희생물로서 인당을 처형하였다.[26]

이런 장군들의 숙청은, 임진왜란 시의 선조와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전란 속에서 공을 세워 세력을 키운


무인 세력들로부터 왕권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고 봐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고려 전체를
뒤흔들며 혼란하게 만들었던 무신정권이 끝난 지 채 100 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김득배 등의
자식들을 공민왕이 위로하였던 것은 이런 불가피한 숙청 이후의 나름의 속죄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도
공민왕 사후 무신들의 힘은 더욱 강해지고, 이인임마저 몰락한 이후 권력은 최영과 이성계 등으로
넘어갔으며, 결국 이성계가 역성 혁명으로 조선 왕조를 일으킨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은 신하들의
불안감을 촉발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이후에 홍륜이 공민왕을 시해한 이유로 보기도 한다.

성격 역시 우유부단하여 개혁을 시도한다고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 우물쭈물하는 경향이 있기도 했는데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는 이런 점들을 공민왕의 단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여러 가지로 한계나
단점도 많았던 군주로 고려 멸망에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조선 시대에
편찬되었고 공민왕 본인이 조선 건국 주역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위치에 있는 만큼 그에 관한 기록과
평가는 주의해가며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고려의 국력과 군사력의 회복, 영토 확장, 권문세족의
세력 약화, 신진 사대부의 성장 등의 긍정적인 측면 역시 존재하였다. 하지만 신흥 무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유탁을 비롯해 신진 사대부들에게 존경을 받은 유숙까지 숙청을 해버린 바람에 고려사,고려사절요에
공민왕의 평이 떨어졌는데, 실제로 조선 왕조에서도 이 두 사서에 대해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도 도저히
공민왕을 옹호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오히려 공민왕은 교차 검증을 하면 할수록 비판받을 점이 더
쏟아지는 판국이다. 참고로 유탁의 경우는 안우의 전우이자 이성계의 선배 무장이고 이성계조차도 최영과
더불어서 가장 존경했던 무인이다. 실제로 그의 아들인 유습은 대마도 정벌에 참여했다. 특히 이성계의
꿈 이야기에서 유탁의 이야기가 나온 것을 보면[27] 신흥 무인들의 중심이 본시 유탁 장군이었던 것이다.
정도전의 경우는 본시 이색을 존경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정작 그의 스승은 유숙이었다. 실질적으로 개국
공신들의 스승이자 상관들인 인당, 정세운, 안우, 이방실, 유숙, 유탁, 홍언박, 김득배 등등 여러 문무
신료들이었고 그들은 다 그의 손에 죽었다. 그래서 말기의 평이 조선 왕조의 손을 떠나서 좋은 평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실제로 실제로 공민왕에 대해 경효대왕이라고 해준 것은 그가 시해를 당했고, 또한
종계변무 문제 때문에 추모한 것이고 그 공민이라는 호조차도 실은 명나라가 내린 것이었다.

신하들을 복종시킬 개인적 리더십도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나중에 고려로 쳐들어오는 최유도
한때는 공민왕을 따랐었고, 호종공신이던 조일신을 제어하지 못했던 것을 보더라도 그런 면의 카리스마는
부족했던 것 같다.

근본적으로 공민왕의 측근 세력이 미래의 출세를 위해 공민왕에게 의탁했던 호종공신이나 자신의 외척


등으로 좁았고, 신진 사대부들의 육성이 당시까지는 미비 했었을 뿐만 아니라, 공민왕이 이들을 완전히
포섭하지 못한 것이 한계라 할 것이다. 공민왕 자신의 사상에서도 성리학을 깊게 이해하고 수용하기보다
기존의 한당유학의 전통과 불교에 심취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런 공민왕과 비슷한 사상 체계를
보였던 기성 유학자들은 기존 권문세족과 일정 부분 유착 관계에 있어 개혁에 힘을 실어주기 어려웠다.
그리고 정도전, 윤소종, 정몽주, 권근, 조준과 같은 소장 성리학파 세력들은 공민왕 대까지는 젊어서
중책을 맡기기 어려웠고, 왕 말기에는 국왕이 실의에 빠진 채 신하들을 불신해 개혁을 추진하지도
못하였다. 더불어 원과 홍건적,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무장들의 토지를 몰수하기 어려웠고, 오히려 공에
따라 토지를 분배해야 했으며, 이는 재정 악화로 이어져 군비 조달이 어려워졌다. 그 결과 원의 제도
하에서 사병 집단을 거느리던 장수들을 통제하거나 사병을 혁파하기도 어려워져 개혁을 추진하기가
어려웠다. 공민왕은 계속 현실적 권력 유지를 위한 기성 세력 유지와, 개혁을 위한 기성 세력 제거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으며 현실적 힘도 제약되었다. 본격적이고 근본적인 전제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이성계가 군권을 거의 장악했던 공양왕 대였으며, 그때조차도 기성 세력의 무수한 반발이 있었다.

거기다가 공민왕 본인부터가 직접적으로 무엇을 하기보다는 소수의 측근에 의존하고 ,편 가르기, 숙청,
암살, 배신이라는 방법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결국 이 일련의 잔혹한 숙청과정을 통해 정치적인
장애물들은 없어졌지만 신임할 수 있는 신하들도 없어진 셈이다. 신돈을 기용했을 때도 이런 모습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는데 권문세가들과 신진세가들이 하나같이 썩어 문드러졌다고 비판해 타락한 고려의
현실에 대해 개탄하지만, 통치자의 역할이 누구나 다 말할 수 있는 현실을 말하기보단 그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지에 대한 대책을 내놓는 것이기 때문에 공민왕 본인의 이 발언은 어찌 보면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연고 없는 신돈이라는 외부인사를 기용해 개혁을 다시
시도했지만 신돈마저 서서히 타락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도 숙청한 후엔 아예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관과
자제위들로 하여금 자신의 주변을 두르고 엽색적인 행각을 보였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했고 공민왕도 실패한 군주로 남았지만, 그의 개혁 시도는 신진 사대부들
중에서도 급진파였던 정도전 등과 신흥 무인 세력이었던 이성계에게 많은 힘을 부여해주었고 결국 조선
건국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막장이던 고려의 국세도 많이 회복하여 공양왕 대로 가면 조선 후기보다
국가에 등록된 전답의 수가 많아지기도 한다. 다만 그렇다고 이 시기 고려가 조선보다 농업이 발전했다는
뜻은 아니다. 농업은 당연히 조선이 훨씬 앞섰으며 고려가 회복돼갔다 해도 왜구들 때문에 여전히 나라는
개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에 끊임없이 망가져 가던 고려의 국세를 어느 정도 되돌렸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조선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도 공민왕 사당이 건립되기도 했고 곳곳에 공민왕을 신으로 모시는 사당[28]도
많이 세워졌다. 일본인들은 절대로 가면 안 되는 곳. 이는 이성계에 의해서인데 이성계가 출세하여
조선을 건국하게 된 것이 공민왕 때 벼슬을 받아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마움 때문에 종묘에도
공민왕을 모시게 된 것이다. 영정을 보면 노국공주와 함께 그려지고는 했는데 거의 공인 커플로 인정받은
셈이다.

여담이지만 야사에 의하면 훗날 연산군은 자기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노국공주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국의 노국공주 초상화를 수집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공민왕의 영정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는데 이걸 복원한게 광해군이다!

6.1. 의심많고 잔인한 성격[편집]

천성이 의심이 많고 잔인해서 심복대신이라도 권세가 커지면 의심해서 죽였다. 《고려사》

정세운, 김득배, 안우, 이방실, 인당, 홍언박, 유숙과 유탁이 대표적으로 숙청 된 인물들이다.

조선조 들어서도 태조를 처음 등용했다는 이유로 전 왕조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사당까지 지어줄 정도로
공민왕을 우대했던 조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천성을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면 알 만하다.
지독하게 잔인한 왕이었으니 기철 같이 원나라 빽덕에 입지가 두터운 신하도 숙청을 면치 못했던 거겠지.
더군다나 저 고려사는 세종대왕이 불공정한 평가를 내릴 필요가 없다고 하여 몇 번이나 고친 것이다.[29]
군왕으로서 적절한 인선과 리더십이 얼마나 필요한지 잘 알려주는 부분.

김득배, 안우, 이방실은 신흥 무인과 신진 사대부였고 특히 김득배의 제자이자 문생은 조선 태종 이후


재평가받은 정몽주였다. 일찍이 그는 김득배의 문생이어서 이 일을 한없이 한탄했다고 한다. 특히 후대로
가면서 공민왕의 아내 노국 대장 공주가 몽골 출신이라는 것에 더해, 윤이이초 사건과 그 뒤를 이은
표전문 사건이 무인정사로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등 정치 외교적으로 안정된 되면서 본격적인 혹평이
쏟아진 것이다.

조선 왕조 성종 때가 되면 공민왕은 수양제(!) 급으로 묘사되고, 영조 대에는 영조실록의 내용으로 보아


절대로 본받아선 안되는 왕이 되었다. 실제로 광해군을 공민왕과 맨 처음 비교한 것은 조선 왕조였다.

7. 현대 매체 속의 공민왕[편집]

"공민왕은 영웅의 모습을 갖춘 왕인 동시에 로맨티스트이자 최고의 예술가였다. 모든 것을 지닌


사람이여서 매력을 느꼈다."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지녔던 군주이며, 특히 그림에 뛰어나서 대표작으로 천산대렵도가 유명하고 아끼는
신하 염제신의 초상화도 직접 그려줬다고 한다. 또한 직접 거문고를 다루기도 했다는데, 이 공민왕이
다룬 것으로 전해지는 거문고가 수덕사에 있다. 공민왕 사후 길재를 통해서 조선 왕실에서 거문고를
소장해오다가, 일제 강점기 때 의친왕 이강이 당시 수덕사의 승려인 만공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예술적 감각과 반원 정책으로 대표되는 개혁 군주라는 이미지와 노국공주와의 로맨스, 극적인 삶 등


여러 매력적인 요소 때문인지 한국사에서 인기가 많은 왕 중 한 사람이다. 그 인기를 반영하듯 사극에서도
몇 번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개국에서 공민왕을 연기한 임혁과 신돈에서 공민왕을 연기한 정보석이 열연한바 있다. 특히
신돈의 공민왕은 공민왕의 광기어린 모습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 <쌍화점>의 고려 왕(주진모)도 공민왕이 모티브가 된 캐릭터다.[30]

•신의에서는 류덕환이 재위 초기의 공민왕을 맡았다. 이 드라마에서의 모습은 공민왕(신의)를 참고할 것.


비슷한 시기에 방영한 대풍수에서는 류태준이 공민왕을 연기하였는데, 고려사의 기록대로 노국공주가
사망한 후에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며 삐뚤어지다가 급기야 자제위의 홍륜을 상대로 남색을 하게 된다.
그런데 노는 모습이 상당히 변태스럽다는 평이 있다(…)[31] 그러나 결국 이인임의 사주를 받은 홍륜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김명수가 역을 맡았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하들의 정쟁에 모든 의욕을 잃고


공주의 영전 건설에만 몰두하는 폐인으로 등장. 신하들 가운데 믿을 사람이 없어 자제위를 친위 세력으로
두었고 의심증이 있어 믿었던 신하들을 도륙했던 것은 역사와 같다. 그러나 난행을 일삼다가 살해당한
정사와 달리 태후와 정도전의 일갈에 다시 한 번 희망을 품어 이인임을 내치고, 정도전에게 자신의 뜻을
담은 그림을 하사하며 대궐로 다시 들어가는 것을 모니노와 약속하는 등 정사를 바로 잡을 의지를
다졌으나, 내쫓길 위기에 처한 이인임의 모략으로 홍륜에게 살해되었다. 드라마에서 홍륜에게 살해당하기
전에 노국공주의 환청 혹은 영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공민왕은 이 목소리를 듣고 공주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음에 홍륜이 들어와 칼을 겨누자 분노하여 크게 소리치나 결국 살해당한다. 드라마 1 화, 2 화는
공민왕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만큼, 사실상 1 화, 2 화의 진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코에이의 징기스칸 4 에서 파워 업키트 추가 시나리오 4 번(1370 년)에서 고려 국왕으로 등장하는데


공민왕 말년이라 그런지 능력치는 다소 수수한 편이다. 아마 게임 제작 시 공민왕 말년의 난행을 감안하여
수수한 능력치를 준 듯하다. 다만 생몰연도 정도는 고증해 주지… 수하 장수로 이성계와 최무선이 있는데
이성계 때문에 그럭저럭 게임을 이끌어 갈 수 있지만, 어쩐 일인지 화포병을 편성할 수도 없고[32] 기본
병과인 경보병, 단궁병으로만 초반을 이끌어야 하는 데다가, 주변의 명과 무로마치 막부도 강적인지라
쉽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노국공주는 1365 년에 이미 사망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여기서는 노국공주가
생존해 있다! 하지만 출신이 고려 출신으로 되어 있다.[33] 파워 업키드에서 해당 시나리오를 플레이하면
명과 무로마치 막부의 파상공세가 펼쳐져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의 막장 상황을 간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먼저 명과 동맹을 맺고 무로마치 막부에 전력을 집중하는 게 정석적인 공략법
[34]. 더욱이 명의 북경이 문화도가 높아서 교역을 통해 고려의 문화도를 올리기 쉽고, 명이 치라는
북원은 안 치고. 남경에서 다자이후를 계속 공격해 대기 때문에 다자이후의 방어도가 약해진 틈을 타
어부지리로 점령할 가능성도 있어서 더욱 이득이다. 후계자는 고려의 문화치와 공민왕의 능력으로는 좋은
왕자를 생산하기가 어려우므로 그냥 공주를 이성계에게 시집 보내 사위 무장으로 삼는 게 무난하다.

32 대 우왕 왕우 (1365~1389) 재위 1374~1388

1. 개요[편집]

고려의 제 32 대 왕. 폐위가 되어서 묘호와 시호는 없다. 휘는 우(禑). 공민왕이 반야와 관계하여
낳았다고 전해지는 아들이다.

하지만 하단에 설명되어있듯 신돈에게 그녀를 상납받기 전 신돈이 먼저 반야와 관계하였고, 그래서 우왕은
공민왕의 핏줄이 아닌 신돈의 핏줄이라는 소문으로까지 이어졌다. 또한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
일파와 조선 개국의 주역인 이성계등은 폐가입진[6]의 명분을 얻기 위와 같은 우창비왕설[7]을 주장했고,
이는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얻는 사안으로까지 이어진다.

조선 초기 <고려사>와 <동국통감> 등을 편찬한 조선의 사관들이 우왕을 그저 "반역조(반역자)" 항목에


'신우(辛禑)'라고 기록한 것 역시, 태조 이성계의 손에 의해 요절한 우왕과 창왕이 정당한 왕이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왕은 왕씨가 아니라고 음해당하여 강제로 폐위당했고, 복위마저
물건너갔기 때문에 물론 시호마저도 받지 못했다. 우왕이라고 불리우는 건 그냥 이름이 '우'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연산군과 광해군도 최소한 왕이었던 적이 있다는 건 인정받았고, 군호로 불린 것에
비하면, 우왕은 죽어서도 굴욕적인 대우를 받은 것이다. 이 점은 창왕도 마찬가지.

아명인 모니노(牟尼奴)에서 '모니'는 석가모니의 모니, '노'는 노비 노(奴)이다. 즉 모니노는


석가모니의 종이라는 뜻. 비슷한 사례로 요성종의 아명은 문수노(文殊奴), 즉 문수보살의 종이라는
뜻이며, 당 태종의 황후 장손씨의 아명은 관음비(觀音婢), 즉 관음보살의 종이라는 뜻이다. 당시에는
불교의 영향이 강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지을 수 있었던 것.

2. 권력 쟁투에 따른 즉위[편집]

반야가 우를 낳은 이후에 신돈의 집에서 살다가 신돈이 처형된 후 1371 년에 7 세에 궁에 들어갔으며


신돈의 노비였던 반야가 단 하나 뿐인 왕자의 어머니라고 할 경우 혈통에 의혹이 일어날 위험이 있어서
후궁인 궁인 한씨의 소생으로 발표되었다. 이 때문에 우왕은 즉위한 후 궁인 한씨를 순정왕후(順靜王后)
로 추존했다.[8]

1373 년(공민왕 22 년)에는 우(禑)라는 정식 이름을 받고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이듬


해 부왕 공민왕이 시해당하자 이인임 등의 비호를 받아 10 세로 왕이 될 수 있었다.

초기에는 나름대로 국왕 수업에 힘썼고 왕실의 큰 어른으로 남아 있던 할머니 명덕태후의 훈계를 명심하여
좋은 왕이 되리라 노력하는 듯 보였다. 총명하고 의욕이 강했던 우왕은 어머니인 반야가 입막음을 위해
살해된 후로도 평정을 유지하였으나, 이인임의 독주와 탐욕에 반발해 권신 중 이인임과 반목하던 지윤,
지윤과 통정하던 유모 장씨 등을 통해 최영을 포섭하고자 했다. 최영의 군권을 이용해 이인임 일당을
숙청하고 친정을 하고자 했던 듯하다. 그러나 노회한 이인임은 궁궐 내 정보망을 통해 이를 포착한 뒤
지윤을 숙청했으며 국왕의 최영 포섭을 저지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신하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우왕은 유모 장씨마저 살해되는 것을 묵과해야 했을 뿐더러 혈통의
문제까지 겹쳐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사실 당시 나이 어린 국왕이 이인임을 대신하리라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인임의 노련한 정치력에 의해 최영은 훗날에도 이인임을 죽이지 못할 정도로 그를 믿고
어쩌지 못했었고, 우왕의 친위 세력도 부패 세력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소장파 유림과 양심적인
신료들은 물론 이인임과 대립하던 명덕태후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나마도 명덕태후 사후 명덕태후의
외척 세력[9]과 경복흥마저 숙청되어 이인임 일파가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3. 혈통 문제[편집]

우왕을 둘러싼 가장 큰 논쟁거리는 우왕의 혈통 문제로, '우왕이 진짜 공민왕의 아들이 맞는가?(혹은


신돈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문제다. 우왕이 즉위할 때부터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명덕태후부터 공민왕 시해라는 위급 상황에서 공민왕이 자기 자녀라
인정하던 모니노 대신 다른 왕씨 종친을 추대하려고 했고, 훗날 이성계 일파도 우왕과 창왕을 폐위할 때도
우왕은 적어도 최영도 인정할 만큼 실정을 벌였으니 의종처럼 그냥 폐위하면 될 일이었는데, 굳이 후술할
폐가입진이라는 잘못하면 무리수에 가까운 명분을 가져다 쓴 것도 당시 고려 사람들 사이에서 우왕의
혈통을 의심하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허나, 명덕태후가 우왕 대신 다른 종친을 보위에 앉히려 한 이유는 우왕의 혈통보다는 그의 모계가


천출이라는 것이 큰 이유였다는 게 중론이다. 조선은 정비 소생의 적장자가 없을 적차자나 후궁 소생,
중인 출신(경종) 하다못해 천민인 무수리가 모친(영조)이라 해도 왕의 아들이면 후계 계승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고려는 부계 뿐만 아니라 모계 또한 중요했다. 게다가 고려 왕조는 훈요십조만 봐도 알겠지만
능력(?)이 있거나 명분이 있다면 부자 계승보다 형제 계승에도 정당성이 부여되었고 실제로도 장남을
놔두고 형제 계승한 사례가 많다. 건국 초기부터 괜히 유력 호족이나 왕족 내 종친과 족내혼을 한 게
아니다. 우왕의 경우 부친은 공민왕이나 모친이 천민 출신이라 명덕태후는 왕실의 큰어른으로 당연히 모계
혈통도 감안했어야 했기에 우왕의 즉위를 반대한 것이다.

이후 이성계 일파는 흥국사에서 창왕을 폐위할 명분으로 '우왕은 공민왕의 자녀가 아닌 신돈의 자녀이니
신우와 신창 같은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씨를 고려의 왕으로 앉히자' 는 폐가입진의 명분을 내새워
창왕을 폐한다. 이후 공양왕과 이성계의 조선은 폐가입진을 주요 명분으로 조선을 즉위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공인되어 버린다. 이후 이 시기를 기록한 태조(이성계)실록이나 《고려사》(高麗史)에도
우왕을 왕우가 아닌 신우로 기록하고, 특히 고려사는 우왕과 창왕을 왕의 기록을 수록하는 세가(世家)
편에 넣지 않고 인물의 기록을 수록하는 열전(列傳)편 그중에서도 반역열전에 기록하는 등 조선 정부는
철저하게 우왕을 신돈의 혈통으로 주장했고 현대까지 이어졌다.

일단 우창비왕설의 주요 근거는 고려사와 태조 기록에서는 우왕이 신돈의 아들인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자세하게 들어가 있지만, 일단 그 이야기를 언급하기에 앞서 '누군가가 말하기를(或云)'이란 토를
달아놓았다. 그리고 해당 기록들은 조선 시대 즉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주장했던 이성계 일파와 그
후손들이 쓴 기록임으로 창왕을 폐하기 위해 공론화 시킨 것은 어느 정도 확실하고. 따라서 크게 자기
조상들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주장이다.[10] 그리고 고려사
우왕편에서도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근거는 없고 누가 그렇다 카더라라는 식으로 소문만
제시하고 있다. 결국 당시에도 확실한 신돈의 아들이란 물증 자체는 없었다. 물론 요즘처럼 DNA 검사라도
하지 않고서야 당대에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완벽한 입증 / 반박이 불가능했다.[11] 나폴레옹 3 세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혈연 관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나 혈통상 의심의 여지 없이 직계라고 믿었던
리처드 3 세와 그 후손들이 유전적으로 완전히 남남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오늘날의 과학 기술이 있기
때문에 밝혀진 것이다. 우왕의 유골을 찾을 수도 없는 마당에 이젠 영영 밝힐 방법도 없다.

소문과 별개로 공민왕은 우왕이 자신의 아들이라 믿은 것은 분명하다. 신돈이 처형당한 후에는 우왕을
궁궐로 들여서 보호했고, (비록 목격자가 이인임 밖에 없기는 하지만) 공민왕도 직접 "이 아이는 내가
신돈네 집 여종을 가까이 해 낳은 내 아들이다."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무리수를 두면서 자신의 후궁
(한씨)의 양자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거기에 공민왕이 죽기 얼마 전에는 후계자 교육을
공식적으로 실시하려하는 등 공민왕은 우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12] 결국
이성계는 자신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왕신씨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는
우왕신씨설은 정설처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가령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도 겨드랑이 용의 비늘 이야기를
통해 사실은 왕씨 핏줄이 맞는데 신돈의 아들로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것으로 연출했다. 고려사원문

일반적으로 반야가 어머니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사에선 반야가 만삭일 때 신돈이 친구인 승려 능우(能
禑)의 모친의 집으로 보냈고 반야는 그 집에서 아이를 낳았으나 돌이 되기 전 아이가 죽어, 능우가 죽은
아이와 닮은 아이를 몰래 데려와 기르다가 신돈에게 보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참고로 현대의 사학계엔
우왕의 생모가 반야라는 것도 거짓이고 실제 생모는 순정왕후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도 있는데 그 근거 중
하나가, 이 이야기에 나오는 능우라는 인물이 순정왕후의 친척이라는 기록이 있다는 것. 우왕이 반야의
아들도 공민왕의 아들도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고 학계에서도 반야의 아들도
공민왕의 아들도 아니라는 것 자체는 사실로 보고 있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우왕은 순정왕후와 연결되는
부분이 없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저 이야기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막장 행보[편집]

결국 국왕은 정치에 흥미를 잃고 사냥, 음주가무, 엽색으로 소일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질풍 노도의
치세. 특히 사냥도 사냥터에서 안 하고 민가에서 아예 말 달리며 사냥을 했을 정도며 그렇게 말을
달리다가 맘에 드는 이쁜 여자가 있으면 즉석에서 그 여자 집으로 들어가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런 비행을 보다 못한 신하들이 간언을 하기도 했으나 우왕은 듣지 않았다. 하는 짓이 완전히
할아버지 충숙왕과 큰아버지 충혜왕 뺨친다. 실제로 최영이 이걸 가지고 충언을 하자 충혜왕과 충숙왕
얘기를 했는데 이때 최영은 "충혜왕께서 색을 좋아하신 건 사실이나 남들이 안보는데서 했고 충숙왕께서는
놀기를 좋아해도 때를 골라서 하셨는데 전하께선 법도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출처 : 고려사 최영
열전)

우왕의 부인들은 9 비 3 옹주(九妃三翁主)라고 불리며 유명했는데, 그 중 3 명의 비와 한 명의 옹주 외엔


우왕이 위화도 회군으로 축출된 후에 폐출되었다. 폐출된 비들은 의비(毅妃), 숙비(淑妃), 안비(安妃),
정비(正妃), 덕비(德妃), 선비(善妃)다. 3 옹주는 명순옹주(明順翁主), 화순옹주(和順翁主), 영선옹주
(寧善翁主)를 말하는데 이 중 명순옹주만 폐출되지 않았다.

특히, 우왕이 즉위했을 때 자기 아버지 공민왕의 제 4 비 정비 안씨가 젊고 아름다웠으므로 정비를 두고


"나의 후궁들은 어찌 모씨(母氏)와 같은 이가 없는가?"라 하며 늘 희롱하였다고 한다. 자주 정비 안씨의
처소에 들렀는데 혹은 하루에 두 세 차례 가기도 하고 혹은 밤에 가기도 하였으며, 혹은 들렀다가
들어가지 못하니 추한 소문이 외부에 파다했다고. 우왕이 어느 날 정비의 처소에 갔으나 비가 병이 들어
머리를 빗지 않았으므로 만나지 않았는데 정비가 동생인 판서 안숙로(安淑老)의 딸을 우왕에게 보이자
우왕이 맞아들여 현비(賢妃)로 삼으니 사람들은 "정비가 남의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감추려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출처 : 고려사 우왕 열전)

그러나 실제로 우왕이 이런 행동들을 보였다고 해도 고려사가 우왕을 지나치게 비하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정비 안씨의 일화도 후대 연산군과 월산대군 부인 일화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우왕은 어릴 때 어머니와 유모를 잃었고, 할머니 명덕태후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으므로 의붓 어머니가 되는 그녀에게 모성애를 갈구했을수도 있는 일이고, 생각해보면
우왕이 즉위했을 때의 나이는 겨우 10 여세였다. 다만 우왕이 성인이 된 재위 13 년까지도 자주 정비
안씨의 처소에 들락거렸다는 부분은 좀 석연치 않긴 하다.

어쨌든 정치가 권신들에게 왜곡되어 공공성이 파탄난 상황에서 군부 역시 재정난과 몽고식 부호제의
영향으로 사병 집단화 되어 있었고, 장수들 역시 부패하고 무능한 자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내륙 지방까지 학살과 약탈, 납치가 자행되었으며
수도 개경까지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최영이 재건해낸 수군이 격파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왜구의
침입 격퇴에서 최영과 이성계, 최무선의 화포가 맹활약을 펼쳤다. 특히 이성계는 왜구 격퇴 과정에서
최영에 버금가는 무장으로서의 입지와 명성을 굳히게 된다.

5. 이인임 일파의 숙청[편집]

그러나 조금 성장하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원나라가 완전히 북방으로 물러가자 왕은 이인임의


전횡을 보다 못해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싶어졌다. 이인임이 사직한 후로도 그 일당인 염흥방과 임견미
등은 온갖 불법적 방법으로 막대한 토지를 약탈하고 있었고, 국고는 텅 비었으며, 최영은 이를 탄식할
뿐이었다. 또한 이런 상황은 우왕의 사치 비용을 충당하는 것을 방해했다.

마침 염흥방 등의 난행으로 인한 조반의 옥사 사건이 일어나면서 군부의 실력자로 인망이 높던 최영이


현상 타파를 결심하게 되었고, 우왕은 그런 최영의 손을 잡고 이인임 일당의 제거를 획책했다. 최영은
친밀한 후배 무장 이성계를 끌어들였고 이 둘의 힘으로 결국 이인임을 필두로 한 권문세가 일당들을
숙청하는 데 성공했다.

1388 년 1 월 이 공으로 최영과 이성계는 재상이 되어 고려 정계의 핵심으로 급부상하게 되었고 특히


최영은 정계의 실세가 된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우왕은 최영을 자신의 돈독한 정치적 후견인으로
삼기 위해 그의 딸을 아내로 맞기도 했는데 이때 맞이한 비가 최영의 딸인 영비 최씨(寧妃 崔氏)였다.

6. 위화도 회군[편집]

이 무렵 원을 몰아내고 새로운 대륙의 승자가 된 명나라와는 외교 관계가 좋지 않았다. 재위 초 친원


정책을 취하던 실권자 이인임 등 권문세족들이 명나라 사신을 살해해 버린 일도 있었으며, 금과 말, 포
등의 막대한 세공을 강제하여 고려에 큰 부담을 주기도 했다. 더군다나 사신단이 세공을 위해 가져가던
말들을 비루먹은 말로 바꾼 뒤 차익을 이인임 일당에게 뇌물로 바치는 케이스도 많았다.

우왕 시대는 원과 명 사이의 일종의 양팔외교기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이인임의 영향으로, 이미


원나라는 공민왕 말기에 대도(베이징)을 상실한 뒤였다. 그리고 이인임의 친원 외교도 일시적인 것으로,
점점 친명 쪽으로 기우는 것은 분명했다. 이인임이 쫓겨나기 직전인 1387 년에 명의 관복, 즉 익선관과
곤룡포 등을 습용하기로 승인 받은게 그 예.[13] 그 이전엔 공민왕 어진에서 보듯 송의 관복을
재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인임 일당이 숙청된지 2 개월만인 3 월, 명 태조 주원장은 "철령 이북은 우리 땅. 그러니 내놓으셈"


이라며 강짜를 놓았다(철령위 문제). 공민왕 때에야 어렵게 되찾은 이 땅을 내놓으라는 명에 반발한 재상
최영은 대대적인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우왕도 이를 승인하여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반대하는 신하까지
죽여가며 강행했음에도 이성계는 그 유명한 '4 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지만 우왕과 최영은 듣지 않고 요동
정벌 계획을 실현해 나갔다. 아직 왜구가 약탈을 지속하고 있던 농번기에 이는 백성들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또한 가망 없는 원정에 자신의 주 세력을 대거 참여시킨 이성계에게도 큰 타격이 될 터였다.[14]
이때부터 이성계는 우왕와 최영에게 본격적으로 불만을 품고 일을 벌일 시기를 노렸을걸로 보인다.

어쨌든 준비가 다 끝나고 출정 준비가 되자 최영도 총사령관 자격으로 출진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믿을
사람이 최영밖에 없었던지 가지 마라며 청했고[15] 마지못해 최영은 우왕과 함께 고려에 남아 이성계와
조민수 등만이 북방으로 출정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우왕에게 결정적 패착이 되고 말았다.

우왕은 사실 요동 정벌 때 서경(평양)까지 나아가 동향을 지켜보았고, 최영도 함께 서경에 있었다.


하지만 회군이 시작되자 빠르게 개경으로 후퇴해야했다. 도중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이로서 대응 시간은
더욱 늦어졌다.

7. 폐위, 그리고 비참했던 최후[편집]

4 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음에도 출전했던 이성계는 조민수 등과 함께 군대를 돌려(위화도 회군) 개경을


포위 / 함락하고, 최영을 제압한 뒤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결국 우왕도 다시 꼭두각시 군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그런데 우왕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기가 남아 있었는지 친히 무장을 하고 환관 80 여 명을


무장시켜서 이성계를 참살하러 이성계와 조민수의 집을 찾아갔으나, 이성계와 조민수는 당시 집에 없고
군영에 그대로 남아있던 터라 망했어요.

우왕 14 년(1388 년) 6 월 병오일. 이날 밤에 우왕이 환수(宦竪) 80 여 명과 함께 무장한 채 태조와


조민수(曹敏修), 변안열(邊安烈)의 집으로 쳐들어갔지만 모두 집에서 나와 사대문 밖 군영에 있었으므로
해를 입히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고려사》 권 137, 열전 50 우왕 5
혹자는 이성계가 군영이 아닌, 집에 머물렀다면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만일
이성계가 집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거사를 앞두고 이성계가 아무런 경계 태세 없이 편히 집에 머물러
있었을 리 만무한 데다가, 이성계라는 인물 자체가 무공으로 치면 한국 역사에서 손꼽을 수준의 인물이기
때문에, 무장한 환관 80 명은 어떻게 생각해도 우왕의 무리수라고밖엔 볼 수가 없다.[16]

결국 이 때문에 분노한 이성계 일파한테 폐위된 뒤 강화도로 쫓겨났다. 이인임을 몰아낸지 고작 4


개월만의 일이었다. 이후 이성계는 사돈의 형인 정창군(공양왕)을 옹립하려 했으나, 학계의 거두였던
이색과 조민수의 반대로 인해 우왕의 아들 창왕이 옹립되었다. 또한 이들은 귀양간 이인임을 복권시키려
했으나 이인임이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강릉으로 옮겨졌는데 아들 창왕 때 우왕을 복위하려 한다는
모략 사건에 연루되어 아들 창왕도 폐위되었고 결국 공양왕 때 이성계 일파가 내세운 폐가입진론에 의해
신돈의 혈육으로 몰려 우왕은 아들 창왕과 함께 향년 25 세의 나이로 처형당한다.
司宰副令尹會宗上 請誅禑 昌。王歷問諸宰相皆黙然 我太祖獨曰 此事不易。旣以安置江陵 聞于朝廷 不可中變。
且臣等在 禑雖欲爲亂何憂哉 王曰 禑多殺無辜 宜其自及。命知申事李行下旨 遣政堂文學徐鈞衡于江陵 誅禑 藝
文館大提學柳玽于江華 誅昌。
사재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우왕과 창왕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공양)왕이 재상들
하나 하나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다들 말이 없었는데 우리 태조(이성계)가 홀로 의견을 말했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왕을 강릉에 안치했다고 명나라 조정에 이미 알린 터에 중간에 말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또 저희들이 있으니 우가 비록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들 무엇이 걱정되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우왕은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으니 죽어야 마땅하다고 결론지은 후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에게
분부해 정당문학(政堂文學) 서균형(徐鈞衡)을 강릉에 보내 우왕을 처형하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
學) 유구(柳玽)를 강화에 보내 창왕을 처형하게 했다. 《고려사》 공양왕 원년

무덤이 있다면 루이 나폴레옹처럼 현대과학으로 생부를 판별할 수도 있었겠지만 무덤에 관한 기록 자체가


없고 발견되지도 않았다. 반역자인 신돈의 아들로 간주되어 처형되었으므로 무덤에 제대로 안장되었을지
의문이다. 다만 경기도 내에 예로부터 우왕의 무덤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무덤이 있긴 하다.

이때 위에서 언급된 최영의 서녀, 영비 최씨가 우왕의 유배지까지 따라갔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우왕이
처형된 후 밤낮으로 곡을 하다가 우왕의 시체를 끌어안고 자고 시체에 밥을 지어 올리고 하며 시체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8. 야사와 평가[편집]

야사에는 사망할 당시 자신을 죽이러 온 사람에게 "왕씨 일족에게는 겨드랑이에 용의 비늘이 있다!"고
외치며 웃통을 벗어 그 용 비늘을 보여줬다고 한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우왕의 최후 장면에서 이
이야기를 채용했다. 정도전에서는 조금 더 현실적으로 각색되어 우왕이 직접 자기 몸에 인두를 대어
상처를 낸 후 이를 용의 비늘로 주장하다가 참수되는 모습이 나왔다.

이 야사를 채택한 저술 중에 이중환의 《택리지》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녀에 대한 일은 믿을 수 없지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태조(왕건)가 낳은 자녀들 중에 양쪽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있다 한다. 태조의 외가가 용이고, 용녀가 바다로 돌아가면서 어린 딸을 데리고 가서 다시
용이 된 것은 어린 딸이 시집가서 혹 왕자를 낳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왕실의) 여자
중에서 비늘이 없는 사람은 신하에게 시집보냈으나, 비늘이 있는 사람은 모두 대를 잇는 임금의 후궁으로
삼아 윤기(倫氣, 윤리와 기강)를 더럽히는 부끄럼도 서슴지 않았다. 중기에 들어서는 여동생을 비로 삼는
임금까지 있었다. 송사(宋史)에서도 "이러한 일은 이상하기 이를 데 없다" 하였으나, 하지만 그런 일은
오직 왕가에서만 그러하였고 민간 풍속은 그렇지 아니하였음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에 왕우를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위시켰다. 그리고 공양왕 요(瑤)를 임금으로 세우고, 또
공양왕으로 하여금 우를 강릉에서 베어 죽이도록 시켰다. 우가 형을 당하게 되자 겨드랑이를 들어
보이면서 "나를 신씨(辛氏)라 하지만 왕씨는 용의 종내기이므로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있는데, 너희들은
와서 보아라." 하였다. 참관하던 사람이 가까이 가서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으니 이것은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다시쓰는 택리지》 1 권, 신정일 저, 166 페이지
용 비늘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이성계 일파가 그의 목을 베려고 했는데 용의 후손이라서 병장기가 먹혀
들어가지 않아 죽이질 못하자 이성계가 마침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버지 이자춘(환조)이 조상의 묘를
옮기다 나온 것을 아들에게 준 명검인 전어도(傳御刀)[18]로 손수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전어도를 꽃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 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갔다고 한다. 사진참사검은 비록 망가졌지만, 이성계의 혈통에 내린 저주가
남아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실에서는 용의 기운을 가진 사진참사검과는 정 반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담긴 사인참사검을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정기적으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박살난 전어도와 금간 사진참사검은 무학대사가 거두었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야사인 만큼 믿거나 말거나…

다만 후대로 내려갈수록 왜곡이 심해진 왕이었을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그렇게 유능했던 군주라고는 보기
어렵다. 소년기의 막장 행각을 뒤로 하고 청년기에는 나름대로 정치적인 모습도 보여 줬지만 결국
충동적이고 혈기를 누르지 못해 폐위되어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일단 홍륜을 죽인답치고
홍사우 같은 고려 말에 손꼽히던 무장을 죽이는데 집행에 앞장선 최인철을 아꼈는데, 최인철은 왜구를
무찌르지도 않았는데 거짓말을 해버린 바람에 사헌부에서 탄핵을 하자 태형을 맞고 이후 죽게 된다. 사실
홍사우를 죽인 것은 어린 우왕이 아니라 우왕이 휘둘렸던 권문세도가들이었는데, 이루 인해 신흥 무인들의
분노가 이때부터 하늘을 찔러버린 원흉을 제공했고, 되려 이를 아낀게 우왕이었다.더욱이 홍건적을 격퇴한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와 같은 무인들이 숙청되었는데 이때까지도 그들을 복권을 안시켰다. 결국
공양왕 때에서야 이들을 복권을 시키고 조선 왕조 시절에서 이들을 열전록에 올리고 특히 안우, 이방실,
김득배는 고려 왕조보다 조선 왕조에서 오히려 추모를 했다. 주색이나 놀기에 급급한 왕과 동시에 이러한
것조차도 하지 않았다. 경순왕이나 순종이 찬탈자에 순응해서 결국 왕위는 잃었어도 평생 잘 먹고 잘 산
것과는 대조된다. 그리고 그렇게 비참한 왕의 운명과 함께 고려 왕조의 운명도 기울어졌다.

9. 다른 매체에서의 모습[편집]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이 많아서인지 아버지 공민왕과 더불어 사극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 고려 왕이다.

•용의 눈물에서는 위화도 회군으로 당황하는 모습과 이성계를 죽이려는 시도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특히 위화도 회군신에서는 정도전(드라마)의 우왕보다는 배짱이 없는데, 1 화에서 이성계가 최영의 처벌을
요구하자 "최 시중을 보내주면 과인을 살려준다더냐? 그래라, 보낸다고 하여라!"라며 흔쾌히 말한다.
그러나 대비에게 제정신이냐는 돌직구를 맞자 바로 철회한다. 이는 왕실의 어르신으로서 정비 안씨의
위엄과 우왕의 무능함을 드러낸 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죽기 직전에는 매우 당당한 편. 죽기
직전에도 창왕의 죽음을 묻더니 이성계의 폐가입진 논리를 듣고는 허탈해 한 뒤, 야사 내용대로 "
왕씨에게는 겨드랑이에 용의 비늘이 있다!"며 그것을 보여주고는, 이성계를 역적이라고 외치며
열성조에게 사죄하며 당당하게 최후를 맞는다.

•신돈(드라마)에서는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

•대풍수에서는 우왕의 저런 난행들이 이인임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암군의 행동을 벌이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더욱이 생모인 반야도 살아남았다. 결국 이인임을 숙청하는 데는 성공해서 왕다운 정치를
펼치려고 한다.

•정도전(드라마)에서도 등장. 권신 이인임 일파의 국정 농단에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거기에 출생의


비밀에 대한 트라우마를 간직한 똘끼혈기 넘치지만 우유부단한 청년 군주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는 평을
받았다. 더불어 용의 눈물처럼 우왕의 최후에 야사를 각색하여 넣었는데, 용의 눈물과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최악의 암군이라는 것은 감싸주지 않았다. 자세한 건 항목으로.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뜬금없이 원래 제작진의 말로는 고려의 왕은 공양왕만 출연시키기로 했었으나 도당


3 인방이 몰락한 후에 풍악을 울리던 도중 악공이 실수를 하자(음을 틀리자) 죽이려는 모습으로 첫
등장했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살벌했다..... 그리고 최영에게 홍인방과 길태미에게서 몰수한 가산들 중
일부를 자신의 내탕금[19]으로 요구하며, 하라는 정치는 안하고 굉장히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후
이성계를 불러 사냥을 같이 하는데 그때 그에게 요동 정벌을 명한다. 정도전이 그것을 막으러 계략을
꾸몄지만 결국 이성계의 결정으로 실패하며, 그가 요동 정벌을 떠나자, 최영과 함께 이방원을 제외한
이성계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는다. 하지만 압록강 위화도에서 병사들이 죽는 것을 보다못한 이성계가
회군하자, 개경에 있는 가족들은 이성계가 들어오는 순간 만월대 성벽에 세워 인질로 세우려고 했고,
서경에 있는 두 아들 이방우와 이방과를 죽여 효수하려고 했으나 개경 쪽은 이방원, 서경 쪽은 무휼에
의해 실패하고 만다. 결국 이성계는 성까지 쳐들어오게 되고, 몸을 피하라고 하는 최영에게 한마디
하는데…

당신들이 왕을 하라기에 왕을 했소. 당신들이 놀라기에 향락 속에 버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야


당신들이 정치를 해보라기에 하려고 했지. 헌데 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소.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허나 난 당신들이 그리 비교하던 공민대왕 보단 딱 한가지 나은 것을 보이려한다. 과인은 궁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오.

결국 최영은 패배하고 자신은 폐위된다. 이후 아들 창왕도 폐위되고, 그 뒤 사형당했다는 언급만 나온다.

33 대 창왕 왕창 (1380~1389) 재위 1388~1389

1.1. 개요[편집]

고려의 제 33 대 국왕. 폐위가 되면서 묘호와 시호는 없다. 휘는 창(昌). 우왕과 우왕의 1 비 근비 이씨의
아들. 아버지 우왕이 위화도 회군으로 대권을 손에 넣은 이성계 암살 시도 등으로 폐위되자 8 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사실 우왕이 폐위 된 이상 즉위 가능성은 없었으나, 이성계의 정적이었던 조민수와
이색이 옹립한 것. 그러나 나이가 어리고 이미 이성계 일파에 의해 정국이 장악된 시대이니만큼
실권이라고는 없었던 허수아비 왕이었다.

1.2. 상세[편집]

창왕의 1 년 치세 동안에 토지 제도에 대한 개혁 시도가 있었으나, 이것은 정도전 등을 위시한 신진


사대부들의 계획안이었고 그저 숨가쁘게 왕좌를 유지할 뿐이었다. 급기야 우왕의 복위 시도 이후, 우왕은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신돈의 아들이라고 몰려 폐왕의 지위까지 빼앗겼고 창왕은 우왕의 아들이므로 결국
창왕도 신돈의 손자라는 명분으로 폐위당하였다. 따라서 시호도 받지 못하였으며 오늘날 창왕이라고
불리우는 것도 그냥 이름이 '창'이기 때문이다.

이후에 강화도로 쫓겨났다가 강릉에 유배되있던 아버지 우왕과 함께 공양왕에 의해 처형당한다. 이 때


창왕의 나이는 만 9 세, 한국 나이로 10 살[5]이었다. 고려의 역대 국왕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죽었고,
한국의 모든 군주들을 통틀어 가장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은 왕이 되어 버렸다.[6] 흔히 '소년 임금'
하면 조선의 단종이 잘 알려졌지만 실은 이 창왕이야말로 진정한 비극의 소년 군주. 폐위된 후부터 신진
사대부 일파에 의해 신돈의 손자란 의미에서 '신창(辛昌)'으로 불렸다. 이후 조선 초기에 작성된
고려사와 동국통감을 비롯하여 조선 시대 서적들에는 신창이라는 이름으로 반역 열전에 올라갔다. 이는
조선 개국의 명분인 폐가입진론, 우창비왕설을 주장하기 위한 당연한 왜곡으로, 창왕의 본명이 왕창이
아닌 신창이라는 것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보통 사극에서는 사약으로 사사당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칼에 목이 베어 죽었다. 고려사 원문에도 우왕과 창왕의 죽음에 모두 誅(벨 주)자를 쓰고 있다.
무덤 기록은 전무하며 무덤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반역자의 손자로 취급되었으니 애초에 제대로 무덤에
안장되었을지 의문이다.

짧은 치세 동안 군사적으로는 제법 큰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박위의 쓰시마 섬 정벌. 이 원정에서


박위는 전함 백 척을 인솔하여 쓰시마 섬을 원정, 무려 왜구의 배 3 백 척을 불태우고 개선했다. 훗날
세종대왕 때에 이루어진 쓰시마 원정이 속사정을 알고 보면 의외의 고전이 있었던 반면에 이 원정의
전과는 대단했다.하지만 박위의 원정은 창왕의 치세에 있긴 했으나 창왕의 치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인 것이 박위는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이끈 인물이었고, 당시 창왕은 실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박위는 창왕을 폐위하는데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여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었고, 훗날 1 차
왕자의 난 때 궁궐의 경비를 맡다가 살해당했다.

창왕 본인은 그 나이치고 상당히 똘똘하고 영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단종이나 영창대군과 달리
이쪽은 이상하게 동정을 별로 못 받는다. 단종은 숙종 대에 이르러, 영창대군은 인조반정을 통해 신원이
된데 비해서 창왕은 그런 거 없다. 왜냐하면 단종과 영창대군은 조선 시대 왕과 왕족인 것은 둘째치고,
각각 문종과 선조의 적통이었다는 정통성이 있었던 반면 창왕은 조선 왕조 개창 세력 입장에서는
반동세력인 이색과 조민수 같은 이들에 의해 옹립되었고, 신돈의 손자, 즉 가짜 왕씨일 수 있다는 이유로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고려의 왕이라서 고려를 멸한 조선 때에 당연히 복권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조선의 시조 이성계를 위시로 한 역성혁명파가 완전히 승리하여 고려를 멸했고 조선의 건국은
표면적으로 신씨의 씨앗에게 장악되고 힘없는 왕씨 왕조를 대신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이 망하고 한참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제대로 조명 못 받는다.지못미 아마 그가 우왕의 자식인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었고, 살아나도 고려는 국가 막장 테크를 고스란히 밟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최종 단계로.

1.3. 매체에서[편집]

사극에서는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에서 등장할 가능성이 높은데, 대표적으로 KBS 용의 눈물과 KBS 정도전,
SBS 육룡이 나르샤 등이 있다. 물론 실제 인물의 당시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역배우들이 이 배역을
소화한다. 용의 눈물에서는 4 회에 폐위되어 사사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죽음의 공포 앞에 떠는 어린
폐주의 입을 강제로 벌려 사약을 들이붓는 장면이 나온다.

정도전에서는 아역배우 김준성 군이 이 배역을 맡았다. 왕자 시절에 첫 등장했을 때에는 이인임을


할아버지라 부르면서 어린 시절의 부왕처럼 이인임을 크게 믿고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회군 이후
부왕이 폐위되자 조민수와 이색 등에 의해 추대되어 즉위하기는 했지만 너무도 어린데다[12] 권신들의
편의에 맞춰 옹립된 왕인지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결국 허수아비 임금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팬들 사이에서도 창왕 역할을 맡은 아역배우의 연기력에 대한 논란은 있었지만 무서운 신하들 사이에서
눈치나 봐야 하는 역사 속의 어린 왕은 가여워하는 반응이 대다수. 결국 역사대로 폐가입진의 논리를
앞세운 정몽주에 의해 폐위당한 뒤, 유배지에서 사약을 마시고 쓰러지는 장면을 끝으로 극에서 퇴장한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등장은 하는데, 고려 왕의 비중이 적은 작품이다 보니 몇 번 등장하지 않았다.


이색과 조민수의 의해 왕위에 옹립됐을 때 첫 등장, 이인겸을 복귀시키겠다고 선언해 이성계를 서늘하게
했다. 그 이후 등장은 정몽주의 보고를 받을 때, 다음에는 우왕이 주도하고 무명이 숟가락을 얹은 이성계
암살 계획의 책임으로 귀양을 가는 장면이다. 참고로 초반 빼고 나머지 등장한 두 장면 모두 대사 없이
아이 특유의 서럽게 펑펑 우는 장면만 나왔다.

34 대 공양왕 왕요 (1345~1394) 재위 1389~1392

1. 소개[편집]

고려의 제 34 대 왕이자, 마지막 왕. 묘호는 없고, 시호는 공양왕(恭讓王). 휘는 요(瑤). 창왕이


폐위되자, 이성계 일파에 의해 옹립되어 즉위했다.

신종의 7 대손으로 아버지는 정원부원군 왕균이고, 어머니는 연덕부원대군 왕훈의 딸이다. 부계로는
충선왕의 3 비 정비의 아버지 왕영의 고손자,[3] 모계로는 충렬왕과 정화궁주의 고손자가 된다. 덧붙여서
왕영과 정화궁주는 남매다.

왕족 직계와는 많이 떨어져 있으므로 왕 자리와는 거리가 멀어 치부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아서 부유하게


살았던, 평범한 왕족이었으나 엉겁결에 왕위에 올라 망국의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이성계 일파가 그를
선택한 이유는 그의 형 정양군 왕우가 이방번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2. 정말로 무능한 군주였는가?[편집]

당시 정국은 이성계 일파가 잡고 있어서 실권은 없었지만, 왕은 이성계 일파에 대한 대항마로 이색과
정몽주 같은 반 이성계파 인사들에게 주목했고 그들을 이용하여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여 고려 왕조를
지키고자 했다. 치부에 힘쓴 배경 탓인지 우왕과 창왕 시절 토지 개혁을 추진했던 조준과 정도전을 즉위
전부터 미워했던 탓도 있다.

망국의 군주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그저 멍 때리고 있다가 이성계에게 왕 자리를 뺏기고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인상이 있지만, 실상 기록을 보면 없는 힘이라도 쥐어짜서 이성계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곤 했다. 대표적인 예가 우왕과 창왕의 처리. 기록상으로는 당초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의 처단에
대해 조금 더 미루자는 입장이었으나 왕의 결단으로 이 둘은 신속히 제거되었다.

사실 이성계의 입장에서도 '주위의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우왕과 창왕의 빠른 처리는 그렇게 좋은 일은


되지 못했지만, 아무튼 왕위에 오른 공양왕의 입장에서는 우왕과 창왕이 살아있어 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즉, "결정은 내가 내리지만 전왕을 시해했다는 욕은 이성계가 다 먹겠지??"라는 계산에서 이런
결단을 내린 것이었고 실제로도 백성들의 여론은 그런 식으로 돌아갔다.

특히 반 이성계파의 정점으로 유능한 관료이자 유력한 정치인이기도 한, 그리고 공양왕에게 있어서 마지막
희망이기도 한 정몽주와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정몽주는 공양왕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성계 일파를 계속
공격했고 급기야 1392 년 이성계가 아들을 마중나가면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부상당했을 때에는
이성계의 부재를 틈타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 일파의 핵심 인사들을 모두 탄핵하여 귀양을 보내 이성계의
수족을 잘라 버렸다.

정몽주는 왕에게 크리티컬 히트를 날릴 것을 계속 주문했지만 왕은 여기서 어물어물거려 결정타를 날리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이성계의 부상은 생각보다 그렇게 심한 편도 아니었고, 특히 이성계의 5 남 이방원의
빠른 행동력으로 인해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와 버렸고 이들을 일망타진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사실 공양왕 자신이 바로 그 이성계에게 옹립된 왕인 데다가 방계 왕족이라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성계 일파를 완전히 몰아낸 다음에도 사대부들이 공양왕을 확고하게 지지해준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 세력을 꺾었으니 이쯤에서 숨을 고르면서 '세력 균형'을 잡아야겠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실제로 고려 명종은 무신정변으로 무신들에게 옹립되었는데, 정변을 주도한 1
세대 무신집권자들이 이의민의 죽음을 끝으로 모두 사라지자 최충헌에게 폐위되어 버렸다.

거기에 당시 이성계와 일파는 정치적으로는 고려 조정에서 추방당했지만,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의


군사권은 이미 이성계와 그 일파가 완전히 장악한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이성계가 공양왕을 옹립하고,
무력적인 수단을 쓰지 않고 있었던 (표면적으로는) 신하로서 있었던 이유는 이성계가 평화적인 왕위
양위를 원해서 그런 것뿐이지, 만약 공양왕이 계속 밀어붙이다가 이성계가 마음을 바꾸거나 혹은 공양왕이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냥 군사력을 동원해서 왕조를 바꿔버릴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무신정권 시절이나 바로 전 왕인 우왕, 창왕처럼 그냥 퇴출시켜버리고 다른 왕씨를 옹립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공양왕은 숨을 고르고 이성계와 타협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사직은 이미 그런 안이한 생각으로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3. 고려 왕조의 멸망[편집]

공양왕 때 고려의 멸망이 시작된 것은 윤이, 이초 사건이었는데, 본시 명나라를 끌어들여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했던 계획이었고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침내 급진 사대부가 권력을 잡게된다.
공양왕은 본시 정몽주의 말을 묵살하며 이 사건을 오히려 조사하려고 했고, 이는 공양왕과 정몽주가 각기
고립되었고 결국 이것은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이 결정타로 이어지게 된 셈이다. 명망 있는 대신이자 반
이성계파로써 왕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정몽주조차 무참히 살해되고 그에 대해서 왕이 이성계 일파에
아무 책임도 물을 수 없는 상황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이로써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 무너지자 왕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조회가 끝나면 대신들이 왕이 아직 자리에 있는데도 그냥 일어나서 나가버리거나
연회에서 공양왕 면전에서 술주정을 하는 대신도 있을 지경이었다.

급기야 신하인 이성계에게 동맹을 맺자는 제안을 할 정도로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사실 동맹이란 것은 나라와 나라 또는 세력과 세력 간이 맺는 것이지 군주와 신하가 맺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고려의 역사에는 무신정권이라는 전례가 있었으니 그를 모범으로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실제로 과거
최씨 무신정권이 장기 집권한 사례도 있으니, 무신정권 시대의 전례를 따라 이를 반복하여 이성계의
실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고 고려 왕조는 그저 허울만 남는 한이 있어도 왕씨 왕조는 지키겠다는 처절한
시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성계는 단순한 권신이 아니라 동북면(함경남도) 지역을 통째로 사실상 독립 왕국으로 경영하면서
만주 지역에까지 자신을 섬기는 부족들을 수두룩하게 거느린, 고려 역사상 최강의 권신이요 군벌이었다.
이미 일개 신하로 볼 수준을 넘어서버린 것이었다. 이성계가 조선의 건국자라서 묻히는 감이 있지만
동북면에서의 이성계의 입지는 이미 왕이나 다름없었고 우왕이 즉위하던 시점에서 이성계를 건드릴 사람이
없었으며 위화도 회군을 하기 전에 사병 군사력이 이미 고려 전체를 뛰어넘었다.

더욱이 무신정권에서 최씨 정권을 빼놓고 2 인자들이 제명에 못가 살해당한 것만 봐도 그렇다. 실제로


최씨 정권은 실각하고, 나머지 2 인자들 대부분은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 1392 년 7 월, 왕대비 안씨의 이름으로 왕은 폐위되고 원주로 유배되었다.
7 월 16 일 대비로부터 옥새가 전해지고, 7 월 17 일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7] 이로써 고려 왕조는 34 대 475 년만에 멸망했다. 정몽주가 죽은 지 4 개월만이었다.

애초 이성계가 왕위를 단순 찬탈하고자 했으면 위화도 회군 때 이미 왕위에 오를 힘이 있었지만 최대한


보기 좋게 왕위를 이어받고 싶기에 세운 것이 공양왕이었다. 그래서 선양이라는 이상적인 역성을 꿈꾸던
이유로 공양왕과 정몽주는 끝까지 이성계를 견제할 수 있었지만 결국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다. 사실
유명한 삼국지의 조조나 사마의 일가가 '보기 좋은 선양'을 위해 허수아비 앉혀놓고 공들인 수십 년의
시간에 비하면 고작 쿠데타 4 년만에 다 죽이고 왕이 된 이성계는 상당히 빨리 판을 뒤집은 편이다.

백관들이 왕대비 안씨의 옥새를 받들어 이성계의 집을 찾았을 때 이성계는 사양의 뜻으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며 백관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몇 번의 사양 끝에 옥새를 받들었으며,
즉위식에서 또한 자신의 몸이 성하지 못해 도망가지 못했다며 최대한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4. 최후[편집]

유배된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되었고 강원도 원주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고려 왕실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끊이질 않고 왕씨 왕족들이 역모를 일으킨다는 말도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불안감탓에 결국
조선 개국 후 대대적인 왕씨 몰살극이 벌어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강의 반란 모의 이후로 거제도와
강화도에 귀양가 있던 왕씨들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되어 있다.[8]

결국 폐위 2 년 후인 1394 년 3 월 삼척으로 유배되었고, 음력 4 월 17 일 삼척 고돌산의 살해재[9]에서


정남진에 의해 왕세자 왕석, 왕자 왕우와 함께 교살되었다. 향년 50 세.[10]

공양왕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와 삼척시에 2 개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공양왕의 유족과 조선 왕조


측에서 인정하고 예우해준 것은 고양에 있는 무덤으로, 시체를 확인한 후 삼척에서 이장한 것이다.
때문에 공양왕릉으로 가는 공양왕길도 삼척과 고양 2 곳에 존재한다.

하지만 2 군데 존재하는 능에는 여러모로 심상치 않은 전승들이 내려오고, 이에 대한 기록들도 모순되어


공양왕의 죽음에는 상당히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실록에는 삼척에서 교형에 처해졌다고 하는데,
고양시의 공양왕릉 주변 지역에는 공양왕이 탈출해서 이 근처까지 왔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으며[11] 실제로 조선 왕조에서도 고양시의 능을 공인된 것으로 다뤘다. 왕씨 세력 학살과 엮어 보면
공양왕이 유배지 삼척에서 탈출을 감행해 모종의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처형된 뒤 그 일체가 조선
왕조에 의해 은폐된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도 있다.
반면에 사서 기록에 따르면 공양왕의 처형은 왕씨 몰살과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12] 실록의 기록을
신뢰하게 되면 공양왕이 무언가 큰 사건을 일으키려고 탈출한 게 아니라 단순히 처형을 피하기 위해
탈출했다가 잡혀 죽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는 왕비인 순비 노씨와 합장되어 있으며 조선 태조의 재위 3 년 만인 1394 년에 고릉(高陵)의 능호가


붙여졌다. 원래 폐위 직후에 공양군(恭讓君)[13]이라 불리었으나, 1416 년에 조선 태종이 공양왕(恭讓
王)으로 추봉을 하고, 사신을 보내 그의 능에 제사를 지내었다.

이성계에게 견제와 방해를 시도했고, 최후에도 저런 수상쩍은 사건이 있어서인지 능에 대한 예우는


그야말로 안습. 본래 왕릉보다 높은 곳에는 무덤을 못 쓰게 되어 있고 근처의 숲에서는 나무도 함부로
자를 수 없을 만큼 예우받아야 하는데, 공양왕릉은 아무리 능 근처 지역이 명당 자리로 꼽혀 왔다지만
왕릉을 대놓고 굽어보는 자리에 조선 시대 민간인, 사대부들의 묘가 수두룩해서 전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망국의 슬픔이 절절하게 와닿는 모양새.

5. 평가[편집]

고려의 마지막 임금으로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앞에 언급한 것처럼 그저 무능한 군주는
아니었고 나름대로 없는 힘이라도 쥐어짜서 고려왕조를 지키고자 했던 왕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서
망설인 것이 결국 자신의 나라와 목숨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적어도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같지만
실은 조선 태종 이방원이 내린 시호인 '공양(恭讓 : 공손할 공에 양보할 양)'이라는 이름에 꼭 걸맞는
왕은 아니었던 셈.[14]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냥 부유하게 살다가 갔을지도 모르는 인물. 애초에 이성계가 자신을 왕위에 올린
이유도 알고 있었을 테니 그냥 이성계가 하자는 대로 해서 끝까지 목숨을 보전하자는 생각도 했겠지만,
어떤 길을 택하든 이성계가 자신을 살려두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나름의 저항을 시도했던 듯하다.[15]
어쨌든 모든 망국의 왕들이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잔혹한 숙청을 당한 안습의 군주.

한편으론 시대를 너무 잘못 타고난 왕으로 권력욕이 그렇게 강하지 않는 대신 신하들의 상소에 도장을
찍고, 무과를 받아들일만큼 덕망도 있고 우왕과 창왕을 치는데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고, 공양왕은 문종,
예종과 같이 성군이 되기론 꽤 충분했으나 참고로 공양왕 같은 왕들은 앞전 왕들이 잘해야 성군이 되는 왕
중 하나이다. 앞전에 왕이 너무나도 무능하여 비극을 당한 왕이기도 했다. 즉 본인이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도저히 수습이 불가였다. 실제로 고려사 공양왕기를 보게되면 상소들이 숱하게 올라오고 그 내용도
매우 긴데, 대체적으로 공양왕 개인의 실정보단 전왕의 실정이 주류를 이루어 공양왕은 이러지 말라는
것을 아예 엄청난 장문으로 적은 상소들이었다. 왕이 이런 상소들을 다 보고 다 찍는 것도 어지간한
성군조차도 하기가 힘들고, 도장을 다 찍기란 상소의 오류도 시정해야하고, 또 상소글들이 줄기차게
올라왔다는 것은 상소문들이 생각보다 엄청났다는 것인데 우스갯소리로 소위 상소가 산을 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왕을 비롯해 심지어 당대의 학자이자 문하시중인 정몽주조차도 이걸 다 하기 어려울
실정이고, 실제로 고려사 공양왕기의 상소는 어지간한 사학자들조차도 다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
실제로 앞전의 왕은 공민왕은 자기가 마음에 안들거나 문제를 지적한다거나 귀찮다 싶은 상소들은
본보기로 불을 태우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이존오의 상소가 그러했다. 심지어는 빌미잡아 숙청까지 했기에
상소문들이 공양왕보다 더 적었다. 그래서인지 공민왕 시절에 신하들의 상소 기록이 공양왕 때보다 훨씬
적다.(....)

한국 역사의 다른 마지막 임금의 최후에 비교해 보더라도 훨씬 비참한 편이다. 고조선 준왕은 그래도
목숨과 어느 정도 세력을 부지한 채 달아나 재기할 수 있었고, 금관가야의 구형왕은 그래도 신라의 지배
계층인 진골로 편입되었고[16], 경순왕과 자견왕은 신라, 탐라 멸망 이후 고려 왕조의 지배층이 되어
높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17] 보장왕과 의자왕, 풍왕[18], 대인선은 모국들이 패망한 후 당나라,
요나라로 끌려가 그 곳에서 생을 마쳤고[19], 순종황제의 경우에는 일제가 내린 '창덕궁 이왕'직을
순순히 받고 당구나 치면서 놀면서 살다가 편안히 갔고 일족도 일제가 망할 때까지는 일본 귀족 대우를
받았다. 반면 공양왕은 폐위 후 본인도 유배사사당하는
것 배ᆞ
은 물론 왕씨 일족들까지 대부분 조선 조정에
의해 일족 청소를 당했으니...

물론 그나마 왕건에게 쫓기던 중 농민들에게 맞아 죽고 왕건이 세운 고려 왕조 시기 내내 일방적으로


격하된 태봉의 궁예나 왕위에 오르자마자 1 년도 안돼 나라가 고려에게 멸망, 흡수당한 후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조차 없는 후백제의
신검[20]이나 발해가 요나라의 침공으로 멸망당한 후 망한 발해 대씨 왕족 후손이란 명분을 앞세워 발해
유민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아 옛 발해 땅에서 발해부흥운동을 일으켜 요가 지배하던 옛 발해 땅 일부
지역을 점령, 장악하는데 성공하여 나라를 건국하고 왕위에 올라 요나라에게 대항했다가 요나라 대군의
공세와 내부 배신으로 1 년도 채 못가고 요나라에게 멸망당한 흥료국의 대연림, 자신의 아버지가 신라
왕이 되지 못했다고 분노가 폭발하여 신라 조정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끝내 패사한 장안국의 김헌창,
적국 고구려의 호동왕자와의 사랑에 눈이 멀어 적국으로 배신을 하려던 딸 낙랑공주를 죽여가며 사직을
지키려다 고구려한테 나라가 망해버린 최씨낙랑국의 최리 같은 사람들보다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성계는 주성왕이 제신의 이복형 미자계를 송에 봉해 상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을 본받아 공양왕의
형이자 자신의 사돈인 정양군 왕우를 귀의군으로 봉해 고려 임금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왕우가
이성계의 사돈이었기 때문에 그와 두 아들 왕관, 왕조는 왕씨 숙청 때도 무사할 수 있었으나, 왕우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 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자 왕관과 왕조가 비명에 가 귀의군의 직계가
단절되었다.

6. 사극에서[편집]

공양왕이 나오는 드라마로는 KBS 용의 눈물, SBS 대풍수, KBS 정도전, SBS 육룡이 나르샤 등이 있다.

<용의 눈물>에서는 중견배우 김영선[21]이 연기했다. 어보를 갖고 온 이성계의 군사들에게 자신은 왕


하기 싫다[22]고 말하는 장면이나, 이성계에 대한 암살을 주저하는 장면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전의
공양왕에 대한 전형적인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역사대로 폐위되었다가 결국 아들과 함께
처형당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자신의 혈족들이 떼로 죽었으니, 우리만 어찌 살아남길 바라겠냐며
사약을 거부하고, 의연하게 죽고 싶다며 단검으로 배를 갈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장면에서 마지막
유언은 "왕씨의 혼령들이여! 끝까지 살아남아 오늘을 잊지 말지어다!"

정도전에서는 배우 남성진[23]이 연기했다. 첫 등장에서 자신에게 어보를 바치려는 배극렴을 보고 담장을


넘어 도망가려다가 그 곳에 이지란이 있어서 망했어요. 결국 왕으로 즉위하지만 정사를 돌보는 것에는
무관심하여 이에 대해 간언하는 이색에게 "반석이니 뭐니 하는 것은 수시중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과인이야 옥새만 제때 제때 찍으면 되는 것이고요."라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다. 급기야는 누가
듣겠다면서 이색에게 그만 돌아가라고 할 정도.

그러면서 나인들과 놀기에만 바쁜 한심한 임금으로 그려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일부러 이성계 일파의
눈에 나서 방심하게 하여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암군인 척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몽주에게 "왕씨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과인은 바보가 될 것이오. 지키는 것은 그대가 하시오."라는
말을 남긴다. 물론 이성계에게 그 수를 간파당하지만, 요즘 이루어지고 있는 공양왕에 대한 재평가를
반영한 모습. 그리고 실제로 그가 결코 허수아비 임금만은 아니었다는 것은 지나치게 심한 간언을 하는
윤소종을 하옥하는 것에서도 드러났다. 특히, 이성계가 낙마할 당시 아예 정몽주에게 살수를 보내
암살하자는 제안까지 하는 장면도 있다. 이 장면은 용의 눈물 초반 장면에서 완전히 뒤집한 신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는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를 참형에 처하라 했고, 공양왕은 다소 우유부단한 포지션에 있었다.
그 외에도 힘없고 의욕없는 무능한 인물인 척 하면서 이성계 일파의 요청을 거부하는 등, 은근히 이성계
측을 방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정몽주가 처참하게 살해당한 후 이성계 일파가 조정을 장악한 뒤에는 완전히 허수아비 임금으로
전락했고, 마지막 최후의 수단으로 이성계와 동맹을 맺기 위해 이성계 집 앞에 가지만, 그 자리에서 대비
안씨가 내린 폐위의 교지를 받고 끌려나간 뒤 유배되어 사사되었다는 나레이션을 끝으로 극에서 퇴장했다.
이때 공양왕이 남긴 마지막 말이 참으로 처량한데,

"결국은 이렇게 되고야 말았구나! 500 년 왕씨의 사직이 이 왕요의 대에서 결단이 나다니. 내 이래서
왕이 되지 않으려고 하였거늘, 내 이 죄를 어찌 갚을 것인고. 죽어서 열성조들의 용안을 또 어찌
뵙는다는 말인가! 이놈의 팔자 한번 고약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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