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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1

게시물 ID : history_12833 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추천 : 36
조회수 : 3854 회
댓글수 : 5 개
등록시간 : 2013/12/04 13:55:14

흔히 삼국지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중국의 삼국시대(A.D 220~280)를 통일한 국가는 촉(蜀)의 유


(劉)씨나 오(吳)의 손(孫)씨, 위(魏)의 조(曺)씨도 아닌 진(晉)의 사마(司馬)씨였다.

삼국지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그토록 팽팽한 각축전을 벌이며 대립하던 조조, 유비, 손권으로 대표되는
위촉오 삼국이 아닌 웬 쌩뚱맞은 진나라의 사마염(司馬炎)이란 인물이 결국엔 대륙을 통일하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을 보고 꽤나 허탈해 했을 것이다.

출처 - <고우영 삼국지>

저기서 유비, 조조, 손권을 싸잡아 유가, 조가, 손가라 비웃으며 손가락질 하는 양반이 바로 사마염
되시겠다.

그리고 이 사마염은 삼국지연의에서 그 유명한 제갈량의 호적수로 등장하는 사마의(司馬懿)의 손자다.

위(魏)의 중신이었으나 쿠데타로 자신의 가문인 사마씨가

위(魏)를 집어삼키고 훗날 진을 건국하는 기틀을 닦은 사마의.

손자 사마염에 의해 진(晉) 고조(高祖)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다.

사마의가 쿠데타로 위의 권력가로 재집권(재집권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삼국지를 읽어보셨으면 아시리라


믿어 굳이 이유를 적지 않겠다..)한 때는 서기 249 년 경. 그리고 251 년에 사망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집권한 이는 사마의의 장남, 사마사(司馬師).

이 사마사도 위(魏)를 농락하다시피 하며 마음껏 권세를 누리다 사망(이후, 조카 사마염에 의해 세종(世


宗) 경황제(景皇帝)로 추존되었다)하고 그리고 그 후계자는 사마의의 차남이자 사마사의 동생인 사마소
(司馬昭)가 된다. 사실상 진(晉) 왕조는 이 사마소의 대에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는데 사마소가 위
(魏)의 원제(元帝), 제 5 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였던 허수아비 황제 조환(曹奐)을 겁박하여 진왕(晉王)
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비로소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가 삼국의
한축이었던 촉(蜀)이 멸망했던 서기 263 년 쯤 되겠다.

사마소(司馬昭).

사망 후, 아들 사마염에 의해 태조(太朝) 문황제(文皇帝)로 추존된다.

오해없도록 하자. 왼쪽의 깜찍해 보이는 아이(?)가 사마소가 아니라 오른쪽의

험상궂은 아저씨가 사마소다. 참고로 왼쪽의 인물은 사마소의 차남, 사마유(司馬攸)다.

즉, 사마염의 동생이다.

조환을 명목상인 상전으로만 앉혀두고 위(魏)라는 국가가 거진 사마소의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사마소는
굳이 조환을 몰아내고 천자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 뭐, 전례의 조조(曺操)를 흉내내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마소는 제국의 창업은 아들 사마염의 몫으로 남겨두고 서기 265 년에 사망한다.

그리고 아들 사마염은 아버지 사마소가 남겨준 크나큰(?) 숙제를 아주 빠르고 진작에 했어야 했던 일을
처리하듯 당연하다는 듯이, 수행해나간다. 앞서 말했지만 그냥 폼으로 황위에 앉아있던 조환을 결국에는
끌어내고 서기 265 년, 진(晉) 제국을 개국한다.

진(晉) 세조(世祖) 무황제(武皇帝) 사마염.

한 제국을 창업한 시조에 걸맞도록 위엄있게 그려진 모습이다.

연호는 태시(泰始). 크고 거대한 시작이란 뜻이다. 연호가 뜻하듯, 새로운 제국을 세운 사마염의 기대와
야망과 포부를 느낄 수 있다.

이때가 서기 265 년, 진나라는 몇년전에 위가 촉을 멸하여 얻은 옛 촉 땅인 익주(益州)를 아우르고 양주


(陽州), 형주(荊州), 교주(交州) 이 세개의 주, 즉 오(吳)를 제외한 당시 중국의 영역으로 일컬어지는
10 개의 주(州)를 기반으로 겨우 세개의 주로 버티고 있는 강남의 오(吳)와 필연적으로 대치하게 된다.

후한 13 주 전도

이 중 오(吳)는 양주(陽州), 형주(荊州)의 일부, 교주(交州)만을 차지하고 있었고 진(晉)은 그거 빼고


다...

셋 중 하나가 없어졌으니 당연스레 남은 둘이 대립하게 되는 일은 당연지사라 하겠다.

진과 오가 그러했다. 아닌게 아니라 진에서도 끊임없이 오정론(吳征論)이 들고 일어났다.

(264 년)황제는 오를 멸망시킬 뜻을 갖고 있었다. 임인일에 상서좌복야 양호를 형주 지역의 모든 군사에


관한 일을 총감독하도록 하여 양양에 진수하도록 하였다. 정동대장군 위관은 청주 지역 모든 군사에 관한
일을 총감독하면서 임치를 진수하게 하였고, 진동대장군 동완왕 사마주는 서주 지역의 모든 군사적인 일을
총감독하면서 하비를 진수하게 하였다.-자치통감 79 권

이건 고서의 기사이니만큼 어려운 관직과 지명이 나와 그냥 역사를 즐기려고 가볍게 보고 계실 독자분들은


뭔말인지 하나도 모르실 것이다.

그냥 이렇게 밑의 신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시켜 여차하면 콱 들어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다.

진이 마음만 먹고 오를 크게 쳤으면 오의 멸망(서기 280 년)이 빨라졌을지 어쨌을지는 역사에 if 란 없는


법이니 단언치는 못하겠지만.

위의 기사기록에서 보이듯 이미 서기 264 년부터, 즉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도 전부터 오를 칠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는 소리인데, 저러던 차에 서기 270 년, 멀리 양주(凉州)라는 서쪽지방(위의 지도에서 '
량주'라고 표기되어 있는 초록색 영역)에서 뜻밖의 반란사건이 일어나 계획에 차질을 빚게된다.

바로 선비(鮮卑)족인 독발수기능(禿發樹機能)이란 인물이 일으킨 난 때문이었다.

오늘날 중국의 감숙성에 해당되는 양주(凉州), 진주(秦州 - 뜬금없이 등장한 이 새로운 행정구역은
사마염이 진 왕조 창업 이후, 한마디로 행정구역 수정을 했다고 보시면 된다. 새로이 창설된 주(州)는 이
진주(秦州), 양주(梁州), 영주(寧州), 광주(廣州)인데 여기서 양주, 영주, 광주는 오를 멸하고 나서
이후에 새로 개설된 주이거나 기존에 오(吳)에서 진나라 마냥 자기네끼리 따로 지역을 떼내어 만든 주도
있다. 광주가 이에 해당한다.)
아무튼, 지도에 '秦' 자가 보이시는가? 바로 저기 일대를 휩쓸며 이 독발수기능은 진주자사(秦州刺使 -
또 관직명칭이 나왔는데 어려울 것 없다. 진주는 말그대로 저 진주라는 지역을 의미하고 '자사'는
오늘날로 치면 미국의 주지사? 아무튼 그 주의 행정권과 군권을 행사하며 주를 담당하는 관직을 의미한다.
) 호열(胡烈)이란 사람을 전사시키는 기염을 토하기까지 한다.

참고로 이 호열이란 사람은 삼국지 매니아라면 한번씩은 해봤을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 게임에서도
등장한 인물이다.

바로 요렇게.

삼국지 시리즈 해보신 분들이라면 눈에 익은 분도 계실 터.

하지만 원체 최후반부에 등장하는 무장이라 인지도는 엄청 낮다.

아무튼 그 주의 장(長)까지 전사시키며 진주를 박살내던 독발수기능에 맞서 진(晉)에서는 대응책을


강구한다.

고서의 기사를 빌려본 진의 대응은 이렇다.

진주-양주 지역의 모든 군사에 관란 일을 총감독하는 부풍왕 사마량이 장군 유기를 파견하여 그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유기는 관망만 할 뿐 진군하지 아니하였다.-자치통감 79 권

상서인 낙릉 사람 석감을 파견하여 행안서장군으로 삼고 진주 지역의 모든 군사적인 일을 총감독하게 하고


독발수기능을 토벌하게 하였다.

독발수기능의 군사가 강성하여 석감은 진주자사 두예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서 그들을 치게
하였다.-자치통감 79 권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런 대응들은 죄다 실패로 돌아간다.

보시다시피 장군 유기라는 사람은 무려 '관망'까지 하시며 독발수기능의 행패를 지켜보시다 결국 진노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중앙으로 소환된 뒤, 모가지가 날아간다(직책에서 짤렸다는게 아니라 진짜 모가지가
날아갔다. 즉 처형당했다는 얘기..).

그리고 유기의 상관이었던 부풍왕 사마량(참고로 이 사마량은 사마의의 7 남인가 그렇다. 즉 사마염의
삼촌이다.)은 오늘날의 군대도 그렇듯이 잘못된 지휘책임을 물어 파직당한다. 그리고 두번째 기록의
석감이란 사람은 결과적으로 말해 그냥 무능력한 장군, 즉 똥별이었다.

(270 년 6 월 이후)두예는 오랑캐들이 이긴 형세를 타고 있고 말들이 살쪘으나 관군은 현군이어서 궁핍한


상태이니 의당 힘을 합하여 말먹이를 크게 운반하여야 하므로 봄까지 기다렸다가 나아가서 토벌하겠다고
하였다. 석감은 두예가 군사 일으키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상주하여 불라들여서 함거에 가두어 정위에게
보내서 속죄를 받도록 결정하였다. 그리고 나서 석감은 독발수기능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결국에는 이길
수 없었다.-자치통감 79 권

역사 좀 아신다는 분들은 여기서의 기사에서나 바로 위의 기사에서 언급된 이름들 중 상당히 눈에 익은


인물이 있음을 아실 것이다.

바로 '두예(杜預)'인데, 두예로 말할 것 같으면 진의 역대 명장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이며 고사성어


'파죽지세'의 주인공이기도하다.

아무튼, 이런 두예가 상관인 석감에게 진언하는 것을 석감이 쌩깠다는 것만으로 석감을 똥별내지 병신으로
치부하는 것은 후세에 두예의 명장이란 이미지를 감안했을때 결과론적인 생각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후세의 우리로선 그저 결과만 볼 수밖에..

(하지만 석감이 똥별이라는 증거는 또하나 있다. 언젠가 있었던 오(吳)와의 전투에서 전공을 조작해서
상당한 전공으로 조정에 보고했던 일이 들통나 짤리고 만다.)

본론으로 돌아가, 서진의 이러한 대응에도 이민족의 반란은 날로 거세어져 갔다.

(271 년 4 월~5 월)북지의 호인들이 금성을 침구하자 양주 자사 견홍이 이를 토벌하였다. 호인 무리들이


모두 안에서 반란을 일으켜 독발수기능과 더불어 청산에서 견홍을 포위하자 견홍의 군사들은 패하여
죽었다.-자치통감 79 권

반란이 일어난지 1 년째, 서진이 건국된지는 불과 10 년도 안된 무렵에 어찌보면 한 주(州)에만


국한되었을 소동이 이제는 국가가 본격적으로 진압에 나서야하는 사태에 이를지도 모를 상황이 벌어지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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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2


게시물 ID : history_12834 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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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수 : 5 개
등록시간 : 2013/12/04 15:34:20

앞서 편에서 썼듯, 독발수기능의 반란은 이제 중앙조정에서 개입해야 할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었다.

이름난 장수만 해도 두명(호열, 견홍)씩이나 전사한데다 나름 믿고 보냈던 토벌군들까지 병크를 저지르며


깨져버렸으니 말이다.

상황이 이쯤되니 사마염도 슬슬 걱정이 되는지 신하를 불러다 놓고 대책을 논의한다.

이건 기록을 빌려 보도록 하겠다.

마침 독발수기능이 진주와 옹주를 침구하여 혼란하게 하자 황제가 이를 걱정하니 임개가 말하였다. "의당
위엄과 명망이 있는 중요한 신하 가운데 지략이 있는 자를 찾아서 그곳을 진무하게 하셔야 합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임개가 이를 이용하여 가충을 천거하였고, 유순도 역시
그를 칭찬하였다. 7 월 계유일(26 일)에 가충은 진주-양주의 모든 군사적인 사항을 총감독하게 하고,
시중이며 거기장군의 직책은 옛날과 같이 그대로 두었다. 가충은 이를 걱정하였다. 가충이 조정을 떠나
군직을 수행하게 되자 군력을 잃을까 걱정한 것이다.-자치통감 79 권

가충(賈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마사-사마소를 섬겼던 중신 중의 중신이요, 훗날의 창업공신인데다


당시 진(晉)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던 권세가이자 정치적으로도 그가
위치해있는 관직을 보자면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인재로서의 면모는 훌륭할지는 몰라도 인품만은
개차반이었는지 기록의 마지막 줄에서 보이듯 외지로 떠나 군직을 수행하는 것을 중앙에서의 권력을 잃는
악재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이것이 너무나 걱정이 되었는지 가충은 양주-진주로 떠나기전에 한가지 방도랄까, 나름의 보험을 들이고
떠나는데, 바로 혼인이었다.

중국의 4 대 악녀라는 말이 있다. 은의 주왕의 비(妃), 달기. 한 고조 유방의 황후, 여태후. 당의


측천무후. 청의 서태후.

중국 역사상 이들 넷이 그렇게 못됐다고 오늘날까지 명성을 떨치고 있는데, 혹자들은 여기에 한명을 더
넣어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바로 가남풍(賈南風)이란 여인네다.
이 여인이 대관절 얼마나 못돼먹었길래 저 영광의 명단에 넣자고들 하는지는 나중에 볼 일이고 여기서는
그냥 혼인의 등장인물로만 보시면 되겠다.

가남풍은 가충(賈充)의 딸이자 훗날, 진(晉)의 제 2 대 황제, 혜황제(惠皇帝) 사마충(司馬衷)의 황후가


되어 혜문황후(惠文皇后)라고도 불리운다. 가충은 딸 가남풍을 황제 사마염의 아들, 즉 태자 사마충과
혼인시키고 외지로 떠난 것이었다. 명색이 황제의 사돈인데 어느 누가 감히 내가 없는 사이에 빈집을
털겠는가 하는 것이 가충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한 국가의 재상의 머릿속에 들어앉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충은 자신의 바람대로 결국에는 양주-진주 전선으로 가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라는 표현이
적절할라나 모르겠다. 자신의 딸과 태자 사마충의 혼인을 성사시키고 나니 주위에서 만류하고 나선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명색이 황제의 사돈양반인데 전쟁터 같이 살벌한 곳에 가서야 되겠는가?"

가충 : "응, 아무래도 그렇겠지?"

뜻대로 가충은 양주-진주로 떠나지 않고 그대로 중앙에 눌러앉았으며 '군략과 지략에 능하다' 라는
이유로 황제 사마염에게 천거하여 자신을 감히 전선으로 몰아넣으려던 임개를 대차게 까버리고 몰아낸다.
이때가 서기 272 년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느덧 서기 277 년. 진(晉)은 아직도 독발수기능을 진압하지 못했으며 고로 진주(秦
州) 역시 통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여기서 의문스러운 점은 약 5 년간의 이 난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277 년을 기점으로 그 이후의 기록에 독발수기능의 난이 다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그 전까지는 여전히 독발수기능이 건재했다는 얘긴데, 기록이 없으니 알 턱없다.
기록이 분실된 것인지 어쩐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이 독발수기능이 다시 등장하는 때는 277 년이다.

(277 년) 3 월에 평로호군 문앙(文鴦)이 양주-진주-옹주의 여러 군사를 감독하여 독발수기능을 토벌하여


그들을 격파하니, 여러 호족 20 만명이 와서 항복하였다.-자치통감 80 권
문앙이란 장수가 선전하는가 싶더니만,

여름, (278 년) 6 월에 양흔이 (독발)수기능의 무리인 약라발능과 무위에서 전투하였는데, 패하여


죽었다.-자치통감 80 권

다시 박살.

(279 년) 봄, 정월에 (독발)수기능이 양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자치통감 80 권

그리고 마무리.

진주에 이어 양주(凉州)까지 함락되었다는 소리인데 여전히 진(晉) 조정에서는 태평했다.

선비족의 (독발)수기능이 오랫동안 변방의 근심거리가 되었는데 복야 이희가 군사를 발동하여 그들을
토벌하겠다고 청하자, 조정에서 의논하면서 모두 군사를 출동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오랑캐도 그렇게
걱정거리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자치통감 80 권

사실, 시야를 좀더 넓게 보자면 진(晉)의 입장에서는 저런 이민족 나부랭이들의 소란보다는 오(吳)와의


대치구도가 훨씬 더 중요했음은 구태여 덧붙여 말할 것도 없다. 어디까지나 진의 주적은 오(吳)였으니
말이다.

사실 저렇게 진주-양주쪽의 서쪽 지방에서의 이민족 반란에 직면함과 동시에 진은 형주-양주 전선에서


오와 대치하고 있었다.

다시 꺼내보는 당시 중국지도.

지도를 참고하며 보는 것이 편하다.

여기서는 따로 오(吳)와의 전쟁을 다루지는 않았는데, 이유는 사료가 없다라기보다는 이 글 자체가 한


국가의 헛짓거리로 인한 결과들, 그리고 사건들, 결국에는 무너지는 일련의 과정에 주로 초점을 맞추기
위한 글인지라 상대적으로 대오(對吳)전선에서의 사건들보다는 이 독발수기능의 난이 좀더 주제에
부합하다 여겨 따로 오와의 전쟁은 다루지 않았다.
본론으로 돌아가, 서기 279 년에 이르러 진주-양주가 함락되었을 무렵, 혜성처럼 등장한 마륭이란
인물덕택에 진(晉)은 독발수기능을 비로소 진압한다.

좀 뜬금없고 급하게 마무리 지은 감도 없잖아 있지만, 여기서 이 마륭의 등장과 등용, 토벌까지 다루자면
사실상 <마륭전>이 되어버리니 그냥 이렇게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여기서 짚어볼 것은, 진이 본격적으로 오(吳)를 정벌하는 서기 280 년 경의 불과 1 년전인 서기 279


년까지도 진주-양주에서의 독발수기능 문제로 골치를 썩어가면서도 오 정벌에 착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앞서 밝혔듯 한낱 이민족의 반란과 국가 중대지사인 오 정벌의 그 중대점을 저울질 해볼 필요조차 없이
진에서는 그만큼 오를 정벌하는 것을 크게 중요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그리고 서기 280 년, 사마염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오를 친다.

진남대장군 두예를 대도독으로 봉해 군사 10 만을 주어 강릉으로 가도록 했으며, 진동대장군 낭야왕


사마주는 도중으로 가고, 안동대장군 왕혼은 횡강으로, 건위장군 왕융은 무창으로, 평남장군 호분은
하구로 가 20 만의 군사를 주었으며 악주 자사 용양장군 왕준과 광무장군 당빈으로 수군과 육군 20 만 명과
전선 수만 척으로 하여금 장강으로 동쪽으로 가게 했으며 관군장군 양제에게 양양으로 나아가 주둔해 모든
길의 군마를 통제하게 했다.

지도로 표시하면 이렇다.

빨강색 : 익주에서 쳐들어오는 왕준, 당빈의 수군.

파란색 : 두예를 중심으로 왕융, 호분의 병력. 양제는 형주에서 대기.

초록색 : 사마주, 왕혼의 병력

두예의 고사처럼, 말그대로 '파죽지세'로 짓쳐든 진(晉)의 공세에

오(吳)의 고을과 주군(州郡)은 차례차례 함락당하거나 투항한다.


오(吳) 말제(末帝) 손호(孫皓)

손권(孫權)의 손자가 되시겠다.

오나라 최후의 황제.

진(晉)의 대공세에 신하들을 불러모아 대책을 논의하는 손호.

사실 의논해도 답은 없었다.

그리고 서기 280 년. 오(吳)는 그렇게 멸망했다. 오랜세월 동안 강남에 웅거하며 지배해오던 세력치고는
너무나도 빠르고 허망한 최후였다.

진(晉)은 그렇게 오(吳)를 멸함으로서 비로소 명실명백한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게 된다.

그리고 오를 멸한 직후, 연호를 기존의 태시(泰始)에서 태강(太康)으로 개원한다. 참고로 태강(太康)은


크게 편안하다 정도의 뜻으로 풀이하면 된다.

통일제국에 걸맞는 연호다.

천하를 통일하고 난 후의 통치목표였을까. 아니면 단순 천하에 적이 없어졌으니 편안하다 생각하여 그리


한건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진(晉)의 몰락은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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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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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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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수 : 3 개
등록시간 : 2013/12/06 09:23:16
이번 편에서는 진(晉)이 결정적으로 망조가 보이게 된 원인이었던 '팔왕의 난(八王之亂)' 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팔왕의 난이 발발하게 된 원인과

당시 진(晉)의 형국에 대해 서술할까 한다. 시기상으로는 건국시기인 A.D 265 년부터 무제(武帝)
사마염이 사망하는 290 년 경까지가 되겠다.

다시보는 무제 사마염의 초상화

- 번왕(蕃王)들의 권력 비대화 -

우리나라나 중국과 같이 동양의 작위제도는 간단하다.

황제 - 왕 - 공 - 후 - 백 - .....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라면 황제 아래의 제후들은 왕, 공, 후 등으로 나뉜다.

특히 여기서 '왕(王)'은 황실의 사람들, 즉 황족들이 주로 봉해져 각자의 봉지를 수여받고 그 봉지에서
왕 노릇을 하며 살았다.

이는 진(晉) 왕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삼국시대, 한(漢) 등 황제를 칭한 진시황 이래


중국의 역대왕조가 택한 제도였다.

사마(司馬)씨의 진나라도 그러했다.

이 제도에 있어서 뭐 특별히 앞선 시대인 삼국시대와 크게 구별되는 점은 없었지만, 무제 사마염은 한가지


개혁을 추진한다.
위의 제목에서 보시다시피, '번왕(蕃王 : 위에서 말한 왕으로 봉해진 황족들을 의미)들의 권력 비대화'
를 꾀한 것이 그 개혁이다.

이유부터 간단히 설명하자면 앞선 진(晉)이 계승했다고 여기는 전 왕조인 위(魏) 왕조의 전례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였는가 하니..

공신세력이 황제와 황실을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1 편에서 설명했듯이 위(魏)는 사마씨라는 공신세력에 의해 나라가 넘어가 망한 케이스다.

물론 비단 이 위나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 역사상 어느 왕조인들 이런


경우가 없겠냐만은.

사실 위(魏)에서 대놓고 공신들의 힘을 키워주는 반면 황족들은 찍어눌렀던 감이 없잖아 있긴 하다.

문제(文帝) 조비(曺丕)가 동복형제들에게 취한 조치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제딴에는 황권 강화를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상대적으로 공신세력인 사마씨의 권력이 강해져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고는 나라를
집어삼킨 것이다.

이러했기에 불과 몇년 전에 자신의 조부와 백부, 아버지가 나라하나를 집어삼키는 걸 보아왔을 사마염은


그러한 사태가 다시 진나라에서

벌어지는 것을 막고자 상대적으로 황실을 굳건히 하고자 이를 지킬 황족들의 힘을 키워주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힘을 불어넣어주었는지 알아보자.

위에서 언급했듯, 황족들은 각자의 영지를 거느리며 그곳에 눌러앉아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 영지가 중앙인 수도가 아닌 사방팔방 퍼져있는 지방이다. 하지만 그 영지가 속해있는
지방을 다스리고 군권을 행사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장군이나 주자사(州刺史 : '주'를 다스리는 행정관. 군권도 겸임하곤 한다) 등
관리직들이 있었을터.
여기서 사마염은 이 황족들에게 파격적인 특권을 부여한다.

우선 황족들이 임의로 휘하의 관리를 임명할 수 있게 했다.

나름의 행정권도 준 셈이다.

각 번왕에게 지방의 도독직을 겸임시키거나 적게는 1 천에서 많게는 5 천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리게

함으로써 군권까지 쥐어주었다.

여기서 '도독(都督)' 이란 장군직으로서 몇개의 주(州)를 거느리고 관할하는 직책이다.

특히 군권에 있어서는 해당 지역에서의 최고 통수권자가 되겠다.

사마주(司馬伷 : 사마의의 9 남이다)라는 황족의 예로 보자면..

진동대장군 동완왕 사마주는 서주 지역의 모든 군사적인 일을 총감독하면서 하비를 진수하게 하였다.-


자치통감 79 권

밑줄 그인 문구의 관직은 '도독서주제군사' 가 되겠다.

'서주(徐州)'라는 주(州)의 군권을 쥐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오(吳) 정벌 이후의 행보는 이렇다.

독청주제군사, 대장군이 되었다.-자치통감 79 권

이것 역시 같다. '청주(靑州)'라는 주(州)의 군권을 감독한다는 뜻이다.

본래는 지방장관 격인 주자사(州刺史)의 권한인 해당 주(州)에서의 군권도 이제는 각지의 번왕들이


행사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거기다 행정권도 얹어서.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왕들의 권한이 강해졌다 하겠지만 사마염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하나 더


얹어준다.

이후, 오(吳) 정벌이후에는 제국의 재분열을 막기 위해 지방의 도독직과 자사(주자사를 의미)직을


분리시키면서

번왕의 권력을 통제할 수단은 오직 황제의 권위와 중앙의 군부만이 남게 했다.

한마디로 이제 지방에서 왕들을 건드릴 이는 없게 된 것이다. 이쯤되면 거의 하나의 군벌수준이라 하겠다.

그것도 황족들이 한 두명이 아니고 사마씨 성 가진 황족들이라면 죄다 자동적으로 왕의 작위를 부여받게


되니..

결과적으로 진(晉)은 각 지방에 수십명의 작고 큰 군벌들이 할거한 형국이 된다.

사마염으로서는 나름의 계산을 통해 내린 판단이었을 것이나 사마염 사후, 이 조치가 불러온 여파는
강력했다.

- 구품관인법과 문벌귀족 -

수능에서 세계사 과목을 배우다 보면 중국사에서 '위진 남북조'라 불리우는 시기가 나온다.

풀이하자면 위(魏 : 조조의 그 위나라 맞다)-진(晉 : 이 글에서 다루는 그 진나라다)-남북조(南北朝 :


A.D 4~6 세기 시기를 싸잡아 부르는 거다) 이렇다.

그리고 이 위진남북조 시기를 배우면 항상 붙어 나오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구품관인제와 문벌귀족 사회라는 것이다.

이 구품관인제는 구품중정제라고도 불리우며, 위(魏)에서 시작된 관리등용제도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홉개의 등급(九品)으로 나누어 관리의 점수를 매긴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당최 무슨 소리인지 알 수없으니 제도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겠다.

삼국시대라는 난세에서 생겨난 관리등용제도였던 만큼 인재를 출신지방이나 능력에 상관없이 뽑는 것이 이


제도의 취지다.

소위 말해 지방의 초야에 묻힌 인재들을 발굴해내어 해당 지방의 향론, 즉 추천을 감안, (주로 그 인물의
명망이나 재덕이 평가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인재에 대한 중앙에서의 평가를 통해 등용하는 개념이라 하겠다.

이는 지방의 여론를 규합한다는 장점도 가져가면서 무엇보다 겉으로 딱 보기에도 알 수 있듯이 실로


괜찮은 등용제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무언가를 함에 있어 취지는 좋은 법이다.

이 좋은 구품관인법도 점차 때를 타기 시작한다. 소위 말하는 부정부패에 물들게 된 것이다.

제아무리 지방에서의 평이 좋고 추천을 받은 인물이 중앙정부로 나아가도 이미 조정은 '높으신 분'


들끼리만의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대대손손 고위직을 세습하며 명문가 호족, 중앙의 고위귀족들이 짜고치는 고스톱으로 저들끼리
매관매직하며 다 관직을 꿰찬지 오래

인 것이 당시 조정의 실태였다.

일이 이리되니 어느 한미한 가문의 자제는 고위직의 진출을 꿈도 못꾸는 얘기가 되어버리고 조정은
고위가문의 사람들이

저들끼리 해먹는 판국이 되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이 제도로 인하여 이득을 보게 된 명문가의 귀족들, 호족들을 지칭하는 '문벌귀족' 이라는 계층이
생겨나게 된다.

그렇다고 저들끼리 해먹어서 나라나 잘다스렸으면 그나마 문제라도 없겠는데

얘네들이 사치와 향락에 빠지며 과도한 부정부패를 일삼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나름 치세초기에는 성군의 면모를 보였던 황제 사마염마저 물들어버리게 된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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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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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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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3/12/06 15:24:10

3 편에서 밝혔듯 진(晉)의 지배층인 문벌귀족들이 부정부패에 이은 사치와 향락에 빠지자 황제 사마염도
물들기 시작한다.

치세초기에는 간관(諫官 : 황제에게 직언을 하는 관리)를 두고 한(漢) 왕조 시대의 유교질서를 회복할


것을

정치 모토로 삼는가 하면 사치를 경계할 것을 중요시여겨 이에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이는 등 나름의


성군면모를 보이던 사마염이었으나,

나중에는 "황제인 내가 뭣하러 이렇게 궁상맞게 살아야 하지?" 라는 심보로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치벽을
보인다.

일화 하나를 보자면..

지방관리를 임명하는데에 있어 두사람이 있었다. 한사람은 술버릇이 심한 사람이었고, 다른 한사람은


사치벽이 심한 사람이었다.

이에 황제(사마염)는 "사치가 심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술버릇이 심한 것은 고치지 못할 일이다." 라


이르며

사치벽이 심한 사람을 지방관리로 임명했다.

비단 이 일화만으로 사마염이 사치스러워 졌다고 까는게 아니라

역사서에도 다들 사마염의 사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거기다 나중에 가서는 심지어 신하들에게 쓴소리도 듣게 되는데..


이상한 것은 신하들이 마치 사마염이 암군인 것처럼 까댄다는 것이다.

무제(武帝 : 사마염)가 태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오는 길에 물었다. "나는 한(漢)의 황제들 중에
누구에 비교할 수 있는가?"

이에 유의가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영제(靈帝)에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불쾌하여 되묻기를,

"내가 어찌 환제와 영제에 비할 수 있단 말인가?" 유의가 답했다. "환제와 영제는 벼슬을 팔아 번 돈으로
국고를 채웠지만 폐하께서는

벼슬을 팔고도 얻은 돈으로 개인의 국고를 채우시니 어찌 환제, 영제에 비교하겠습니까?" 황제가 이에
웃으며 말하기를,

"환제와 영제 때에는 이렇게 직언하는 신하도 없었는데 나에게는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니 내가 그들보다
낫다."

해석해드리자면...

환제(桓帝), 영제(靈帝)는 후한(後漢)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무능력한 황제들이었다. 그러니 자신을


그들에 비교한 유의라는

신하의 디스에 불쾌함을 드러냈고,이 패기넘치는 유의는 한술 더떠 너는 오히려 환제, 영제보다 못하다
라는 식으로 더 까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마염의 정신승리.

한가지더 소개해드리겠다.

황제(사마염)가 말했다. "나에게는 어찌 제갈량과 같은 신하가 없는가?" 이에 번건과 단작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등애(鄧艾)의 억울함을 알고도 풀어주시지 않으신데 하물며 제갈량과 같은 신하들이 수십명
있다한 들 어찌 감당하오리까?"

등애(魏의 무장)는 삼국지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잘 아시는 무장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등애의
억울함이란,

등애가 반란을 꾀했다하여 사마염의 아버지인 사마소가 역모죄로 죽였는데 이제 와서 그 아들인


사마염에게 등애의 억울함을

풀어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사마염이 제갈량 타령하는데 뜬금없이 등애드립을 치는 건 사마염의 처사에
관해 불만을 갖고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제갈량 수십명이 있다해도 너는 워낙 암군이라 대책없다는
식으로 대차게 깐 것.

대관절 사마염이 정확히 무슨 짓을 벌였길래 저런 일화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물론 유의가 디스한 매관매직이라는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하지만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랴란 말이 있듯이, 분명히 사마염의 맛간행동들로 인하여

저런 일화가 생겼으리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사마염의 저런 나사빠진 행동들이 나라가 휘청걸릴 정도로 큰 악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마염 자체가 무능한 인물이 아닌지라 황제노릇은 제대로 해나갔고 나라도 그럭저럭 유지되었다.

다만 황제고 지배층이고 다들 고위층들의 정신상태가 해이해졌다라는 것뿐.

문제는 이 사마염의 장남이자 태자였던 사마충(司馬衷)이 뒤를 이어 황제가 되고 나서부터였다.

- 백치황제 사마충 -

A.D 290 년, 사마염이 사망한다.

그리고 진(晉)의 제 2 대 황제로 태자였던 사마충이 즉위하니 이가 곧 혜황제(惠皇帝)다.

사마충이 어떤 황제였는지는 당장 그의 시호에서부터 가늠할 수 있다.

대개 중국 역대 황제들의 시호를 볼때 앞에 '혜(惠)'가 붙으면 우선 별볼일 없는 황제라고 봐도 거의


맞다.

나쁘게는 무능, 그나마 좋게는 매우 평범.

이 사마충이란 인물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있는데 소개해보겠다.

전국에 기근이 들었는데, 백성들이 많이 굶어 죽었다. 황상(사마충)에게 글이 올라왔는데, 황상은 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굶어 죽었는지 물어보았다. 답변은 백성들에게 먹을 양식이 없어서 라는 이유였다.
이때 사마충은 "쌀이 없으면 어찌하여 고기를 먹지 않느냐?" 라 물었다.

어디서 들어본법한 레퍼토리의 글이다. 먼 훗날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물은 우문과 똑같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지 그러냐였던가..


밤에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개구리가 울었다. 황제가 시종에게 "저 개구리들은 공적으로 우는가, 아니면
사적으로 우는가?" 라고 물었다. 이에 시종은 "공유지의 개구리들은 공적으로 울고 사유지의 개구리들은
사적으로 울고 있습니다." 라고 답했다. - 진서 혜제기

어딘가 모자라는 듯한 인상을 남기는 일화들인데, 실제로 사마충이 지적장애가 아니었나 하는 설도


존재한다.

흔히 촉(蜀)의 유선(劉禪)과 비교되고는 하는데, 유선은 무능했다뿐이지 멍청하지는 않았다라고 재조명


받는반면

사마충은 그냥 장애인으로 인식되곤 한다.

사마충의 우둔함은 일찍이 아버지 사마염도 알아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과연 이놈이 뒤를 이을
자격이 있는가 싶어 아들을

테스트 해보고자 일종의 시험종이를 주었는데 아둔한 사마충은 당연히 뭐가 뭔소린지를 몰라 벙쪄있었고
그걸 본 간특한 태자비 가남풍이

어느 학자더러 대리시험을 쳐 답안을 보내 사마염이 "이놈이 그렇게 아둔한 놈은 아니었구만." 하고


안심했다 얘기도 있다.

여기서 더 눈길이 가는건 가남풍의 영악함이지만 어쨌든 사마충은 아버지에게까지 의심을 살 정도로
멍청했던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사마염이 동생 사마유(司馬攸)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까지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런 모습도 보여준다.

영안(永安 : 303 년) 원년, 동해왕 사마월이 혜제를 끼고 업을 공격했다. 성도왕 사마영이 석초와 함께
탕음에서 격파하고 혜제를 사로잡았다. 그(혜소)는 조칙을 받들어 행재소에 이르러 반란군을 만나 의연히
싸웠다. 황제를 호위하다 결국 적의 화살에 맞아 황제의 곁에서 숨을 거두었고 이때 그의 피가 황제의
어복을 물들였는데, 천자가 이를 몹시 애도했다. 반란이 평정된 뒤 좌우의 신하들이 어복을 빨 것을
청했는데, 황제가 “이것은 충신의 피이니 없애지 말라.” 라고 명했다. - 진서 혜소전

나중에 다룰 팔왕의 난의 한 장면이다. 난리통에 사마충이 혜소라는 신하의 호위를 받아 도망가던 중,


반란군의 무리에게 혜소가 죽자

그 이후에 자신의 옷에 묻은 혜소의 피가 충신의 피이니 옷을 빨지 말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마충의 또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는데, 이걸 보면 앞뒤분간 정도는 할줄 알았던 인물이었던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그 무능함 때문에 자신이 허수아비 황제신세를 면치 못했고 이를 틈타 황후
가남풍을 비롯한

외척 가(賈)씨가 득세하여 대립하던 황실의 사마씨와 외척의 가씨가 대립하여 싸움 붙게 되는 주 원인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권력싸움의 시작 -

혜제 사마충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제국은 평온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즉위한지 채 1 년도 지나지 않아 발생하게 된다.

사마염은 죽기 직전 여남왕 사마량(司馬亮 : 사마의의 4 남이니 사마염의 숙부가 된다)과 중신 양준(楊


駿) 등의

대소신료들을 모아두고 탁고(托孤)한다. 탁고란 후계자를 잘 돌봐줄 것을 부탁함을 말한다.

황제에게서 그런 부탁을 받았다라는 것은 그만큼 황제의 신망이 두텁고 조정에서의 위치가 높은데다 중신
중의 중신임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양준(楊駿)이란 인물에 주목해야 한다.

이 양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마염의 장인이자 홍농 양씨라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 사람으로서

고사성어 '계륵(鷄肋)' 과 관련있는 양수(楊修)의 친척이기도 했다.

양수(楊修).

삼국지에서는 조조(曺操)가 무심코 내뱉은 계륵(鷄肋)의 뜻을 알아차려

조조의 질투 반 앙심 반을 사 처형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삼국지에서는 그냥 해프닝처럼 지나가는 인물로 나오지만

홍농 양씨라는 명문가의 일원이기도 했다.

앞에서 말한 문벌귀족이란 이런 사람들을 두고 말함이다.


이 양준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 두명(양요, 양제가 그들. 참고로 이 양제는 2 편에서 언급하기도 했는데 오
정벌때 관군장군으로 나왔다.

그리고 양요는 딸이 사마염의 후궁이었다)도 다들 한자리씩 고위직을 꿰차고 있어 당시 사람들은 이


삼형제를 '삼양(三楊 : 세명의 양씨)'이라

부르며 그들의 권세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만큼 잘나가시던 양반들이었다는 거다.

위에서 말했듯 양준은 종친의 어른격인 사마량과 함께 사마염으로부터 탁고를 부탁받았는데

문제는 이 양준이 권력에 꽤나 집착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함녕(咸寧 : 서기 276 년) 2 년 12 월, 황후의 부친 진군장군 양준이 거기장군이 되어 임진후에 봉해졌다.


상서 저략과 곽혁이 함께 상표하여 양준의 그릇이 작아 중임을 맡길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황제(사마염)
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준이 매우 교오자득하자 호분이 양준에게 충고하여 말했다. "경은 딸을 믿고
더욱 호기를 부리는 것이오. 역대를 두루 살펴보면 황실과 혼인하여 멸문의 화를 당하지 않은 자가 없소.
이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오." 양준이 대꾸하여 말했다. "경의 딸도 황실에 있지 않소." 그러자
호분이 잘라 말했다. "내 딸은 경의 딸에게 시녀로 주었을 뿐이니 나에게 무슨 손익이 있을 수 있겠소."
- 자치통감

훗날 양준의 최후에 비추어보았을때, 호분의 조언은 섬뜩하다.

사마염의 유서를 조작하여 정치적 라이벌로 여기던 사마량을 내쫓으려는 시도를 하는가 하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은 내쫓거나

한직으로 내몰기도 했으며 감탄토고라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물들을 위주로 기용하기도 했다.

영희(永熙 : 서기 290 년) 원년, 4 월 12 일에 태위, 태자태부, 도독중외제군사, 시중, 녹상서사로


임명되어 전권을 장악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동생들인 양요, 양제도 각자 한 자리씩 잡는다.

다만 양준과는 달리 양요, 양제는 명망깊은 사람들이었다.

스스로 평판이 좋지 않은 것을 알고 모든 관원의 봉작을 높여 환심을 사려고 했다.

손초가 양준에게 공명정대하고 순리대로 처리해야 한다면서 종실이 강성한데도 그들과 논의하지 않으니
화가 이르는 것이

얼마 안 남았다고 충고했지만 이를 무시했다.

기록에서는 양준 일파의 정치를 '학정' 이라 표현해 놓았다.

이렇듯 전횡하던 양준 일파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는데, 바로 황후 가남풍이었다.

양씨일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져가자 가남풍이 멍청한 남편 혜제로 하여금 양준을 토벌하라는
식의 조서를 쓰게 하였고

가황후(가남풍을 지칭한다)의 일파가 양준 일파에 대한 비난 여론 물타기에 나선 것이다.

사전에 조정신료들로부터 양준을 탄핵하는 지지를 얻어내고는 무제 사마염의 5 남인 초왕(楚王) 사마위(司


馬瑋),

즉 혜제 사마충의 동생을 불러다가 양준을 무력으로 제압할 요량으로 중앙에서의 병권을 맡긴다.

얼핏보면 차도살인의 계획이나 평소 사마위가 양준을 싫어하던 탓도 있었다.

양준이 권력을 남용하면서 사마위도 피해를 입었기 때문.

가남풍의 계교에 사마위의 사사로운 원한이 교묘하게 맞물린 계획이었다랄까.

그리고 결국 혜제 사마충의 양준을 역적으로 모는 조서가 떨어지자마자 사마위는 금군을 이끌고 양준의
거처로 찾아가

양준을 죽이고 그 양씨 일가를 도륙내버린다. 이때가 서기 291 년. 사마염이 죽은지 1 년 남짓 쯤 지났을


때였다.

자고로 역적으로 몰린 집안은 삼족은 물론이요 구족까지 멸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 바람에 사마염의 황후였던 양황후도 며느리뻘인 가남풍에게 살해당하고 양준의 형제들이었던 양요,
양제역시 처형당한다.

다만 위에서 밝힌대로 양요나 양제 같은 경우는 형 양준과는 달리 워낙 정반대의 인물들로서 공적이 높고


덕망이 깊다 여겨져 그들만은

죽이지 말자는 상소나 여론이 있었지만 가남풍은 기어코 양씨 일가를 멸하고 만다.

그뿐 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양씨일가와의 관계가 있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은 모두 혐의를 받아 역시 해를


입는다.

삼국지연의에서도 등장하는 문앙, 장화, 왕융, 위관 등.. 당시로서는 선대의 중신들인데도 숙청의
피바람에는 피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피의 숙청을 끝낸 이 모든 계획의 주인공 가남풍은 혜제 사마충 뒤에서의 정치놀음은 그만두고

비로소 정식으로 정치일선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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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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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추천 : 24
조회수 : 1802 회
댓글수 : 0 개
등록시간 : 2013/12/07 02:17:25

- 이어지는 권력싸움 -

양준 일파를 숙청하고 어느덧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 가남풍(賈南風)은 양준과 같이 나름 정치적으로


거물이라 여겨지는

인사들에 대한 칼부림을 멈추지 않았다.

대표적 인물들이 저번에 언급한 사마량(司馬亮)과 위관(衛瓘)이라는 중신이다.

사마량은 사마의의 네번째 아들로 황실의 웃어른 격이자 그의 관직또한 태재(太宰)라 하는


고위직이었는데다

죽은 양준과 함께 무제 사마염의 탁고대신이었으니 그 명예와 권력이 실로 컸다하겠다.

위관은 삼국지연의에서는 그저 촉(蜀)을 정벌할 때 위(魏)의 무장으로 나오며 강유를 죽이라 명령하는
일개무장으로만 등장하지만, 이후 진(晉)을 섬기고 나서는 고위직들을 역임, 무제 사후에는 혜제
사마충을 보좌하는

원로대신으로서의 입지가 컸다.

이렇듯 각각 황실과 조정에서 원로로 여겨져지며 당대의 존경과 우러름을 한몸에 받는 거물이 두 명씩이나

정계에 버티고 있으니 장차 권력을 손에 쥐려하는 황후 가남풍에게 있어선 이 두명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제거할 마땅한 구실이 없어 마냥 있는차에 기회가 저절로 굴러들어온다.

4 편에서 등장한 바 있는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가 그 구실이었다.

비록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양준 일파를 숙청했다고는 하지만 사사로운 원한으로 죽인 감도 없잖아 있다고
밝힌 바 있는

사마위는 성격이 모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 인품 탓에 주위로부터 미움을 사는 것은


당연지사였을 터.

사마량과 위관과도 알력이 있었다고 한다.

사마량 같은 경우에는 역적(양준을 말한다)을 주살한 일에 공로가 있다하여 위장군(衛將軍)이라 하는


황궁에서의

군 통수권직을 받은 사마위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한다하여 혜제 사마충에게 건의해 다른사람이 대신하게


하고

사마위는 다시 봉국으로 되돌려보내버린 적이 있어 사마위의 원한을 샀고,

위관 역시 평소 사마위의 살인마 본능을 꺼려하여 사마량과 함께 사마위의 직위해제에 동참,

사마위의 힘을 깎으려는 의도로 사마위의 심복신하들 몇명을 잡아들여 역시 사마위의 앙심을 사게 된 바


있었다.

그런데 위관이 잡아들인 사마위의 심복들 중 하나가 몰래 가남풍과 접촉하여 사마량, 위관이 혜제
사마충을

폐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구라를 쳐버린 일이 화근이 되었다.

근거도 없을 이 참소가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던게 뭐냐면, 일찍이 위관은 무제 사마염에게 황제의 자리가

태자시절의 사마충에게는 과분하다고 돌려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태자를 교체할


것을

건의한 이도 위관이고.

그리고 가남풍과도 어느정도 알력이 있었는데, 가남풍이 태자시절의 사마충과 혼인얘기가 오가던 때에
위관의 딸도 태자비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린 바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남풍의 아버지 가충(賈充)
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정적이었으니.. 결국에는 가남풍이 태자비로 간택되어 위관과 가충 간의 감정의 골은


더 깊어지게 된다.

아버지 가충과 대립하던 정적이었으니 가남풍에게는 나름의 증오(?)가 있었을 수도.

하지만 설사 이런 과거의 일들을 논외로 한다해도 가남풍은 역모를 획책했다는 썰만으로도 사마량과
위관을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그 밀고를 들은 가남풍은 몰래 살인머신 사마위에게 황제의 조서를 가장한 거짓밀명을 내려 사마량과


위관을 주살할 것을 명한다.

그렇잖아도 봉국에서 이만 갈고 있었을 사마위는 그 조서를 받자마자 얼씨구나 냉큼 사병들을 이끌고

사마량과 위관의 집으로 쳐들어가 일을 끝내버린다.

가남풍은 이렇게 다시한번 차도살인의 계로 목적을 달성한다.

한편 사마위로서는 이 공로(?)로 '도독중외제군사(전국의 군권을 모두 통솔하는 최고의 통수권자 직)' 라


하는

거창한 벼슬을 받은데다 개인적으로 사무친 원한도 풀어 일석이조라 했겠지만,

이 사마위도 역시나 가남풍의 숙청대상이 된다.

위에서 말했듯 사마량과 위관을 죽일 때 가남풍은 황제의 거짓조서를 내렸다고 했다. 즉 애시당초 그 두
중신을 죽이라는

명령은 존재하지도 않는 명령이었단 소리다.

하룻밤 사이에 두 원로대신이 끔찍하게 살해되었다는 뉴스가 장안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조정에서도 논란이 불거지자 사마위를 처벌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게 된다.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가남풍은 남편 혜제 사마충으로 하여금 사마위를 처단하라는 조서를 내리게 했고,

이에 혜제는 조서를 내려 '조서도 없이 두 원로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참살한 사마위를 처단하라' 라 명령,

황실의 금군이 사마위의 집으로 들이닥쳐 사마위를 죽여버린다.

이 모두가 가남풍의 계산대로 놀아난 연극이었다.

애시당초 가남풍은 사마량과 위관은 물론이고 장기 판의 말에 불과했던


사마위까지 모두 없애버릴 심산이었음을 알 수있는 대목이다.

이 사건을 통해 적어도 '중앙'에서의 가남풍의 정적은 사실상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해진다.

- 가남풍 -

가남풍 전도

앞에서 계속해서 가남풍이 궁중에서의 음침한 권모술수에 능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진(晉)의 건국
시조들 중 하나인

사마사(司馬師) 시절부터 사마씨의 참모이자 책사로서 각종 권모술수로 사마씨를 도와 위(魏)를 멸하게


되는

일등공신으로 활약했던 아버지 가충(賈充)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인지, 실로 무서운 여자가 아닐 수


없다.

1) 태자비 시절

사실 가남풍은 태자 사마충의 태자비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원래는 가충의 차녀이자 가남풍의


여동생인 가오(賈午)가 태자비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체구가 작아 옷이 맞지 않았기에 결국에는 언니인 가남풍이 태자비 후보로 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언니 가남풍이든 동생 가오가 태자비 후보로 올라가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게 2 편인가에서 다룬

독발수기능의 난과 관련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추천으로 인하여 외지로 나가 독발수기능을 토벌하게
된 가충이

중앙에서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딸을 태자 사마충과 혼인시키려 했던 일종의 권력유지 수단이었기에,


아버지 가충의 입장에서는
그냥 딸들은 도구..

아무튼, 이렇게 대타로 태자비 후보로 올라간 가남풍은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게 된다.

진 무제 사마염이 태자비를 고를때 당시 권신이었던 위관과 가충의 딸을 두고 저울질을 할 때였다.


최종적으로 위관의 딸을 고르고자 신하들을 불러두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였다.

"위(衛)씨의 딸은 풍채가 크고, 살이 희고 고우며, 위씨의 집안은 대대로 지혜로워 그의 딸 역시 어질고


지혜를 겸하고 있다. 반면에 가(賈)씨의 딸은 키가 작고, 피부는 검고 거칠며, 상이 좋지 못하다.
경들은 어떠한가?"

가충은 자신의 딸이 위관의 딸보다 어질지 못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양(楊) 황후에게 뇌물을 먹여
권신인 순의와 순욱을 움직이게 하였다. 순의와 순욱은 사마충이 워낙 백치이므로 미인이 황태자비가 되면
후에 바람날 것이라며, 지독한 추녀인 가남풍은 자기가 추녀임을 알고 있으므로 백치 남편에게 만족할
것이다라며, 가남풍이 더욱 좋다고 진 무제를 설득하였고 결국 진 무제는 가남풍을 훗날, 진 혜제가 되는
사마충의 태자비로 책봉하게 된다. 하지만 후일 이 백치남편에게 만족 못 한 가남풍은 추녀인 주제에
애인을 두었다. - 진서

고대 중국에도 외모지상주의는 존재했는 모양이다. 까딱하면 못난 외모 탓에 출세는 물 건너 갔을


가남풍이다.

결국 가남풍은 태자비로 간택되었고 태자 사마충과는 연상연하 커플이 되었다.

가남풍이 15 세, 사마충이 13 세.

혜제 사마충 초상화

그리고 태자비가 되고 나서부터는 그 진면목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가비(賈妃)의 천성은 몹시 잔학해, 일직이 손수 여러 사람을 죽였다. 혹 극(戟)을 임신한 첩에게 던져,
태아는 병기를 따라 땅에 떨어진 경우도 있었다. 무제(사마염)가 이를 듣고 대노해, 이미 금용성(金墉城)
을 손질했으므로 장차 그곳으로 그녀를 유폐시키려 했다. - 진서 혜황후전

남편 태자시절의 사마충이 첩을 들여 애까지 갖자 빡친 나머지 저런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극(戟)은 한자를 검색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창이다..

성격은 파탄난데다 궁중에서의 어두운 권모술수 쪽으로는 또 머리가 잘 돌아가 무섭기까지 하다.

가남풍의 음험함은 그녀의 남편 사마충을 다루면서 한번 언급한 바 있다.

무제 사마염이 태자 사마충의 능력을 재보기 위한 시험에서 시아버지 사마염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에


알맞게 대처한 이도 가남풍이다.

다들 눈치채셨다시피, 이는 곧 남편 사마충을 무탈하게 황제로 만들기 위함이며 당시 태자비 시절에 그런


야심이 있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추후 황후가 되서의 행보로 미루어 보아 본인 역시 황후가 되고자 그런 일을 벌였으리라고 추측된다.

태자 남편이 무능아 수준이니 권력욕 많은 아내 태자비 입장에서는 그럴 바엔 차라리 남편을 황제의


자리에 앉힌 후에

황권은 내가 누려야 겠다고 다짐했을 수도.

또 가남풍의 권력욕을 뒷받침 해주는 설이 하나 존재하는데, 바로 가남풍이 사마염의 동생 사마유(司馬


攸)를 독살했다는 설이다.

이 글 1 편에서 이미 나온 삽화.

그때는 오른쪽의 사마소(司馬昭)가 다루는 인물이었지만

이번에는 왼쪽의 사마유가 주인공이다.

형 사마염이 후계자로 삼을 생각을 했을 만큼, 이 글에서 나오는

진(晉)의 황제들 및 황족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정상적인 인물이다.

4 편인가에서 짤막하게 언급했던 일이기도 하다. 애초에 사마충이 황제가 될 재목으로 보이지 않자,
사마염이 차라리 차라리 자신의 동생,

사마유를 후계자로 삼아 황위를 물려주려 했다는 얘기.

사마유는 어릴적부터 할아버지 사마의(司馬懿)가 총명하다 여기며 귀여움을 받았고 아버지 사마소도 그런
사마유의 재목됨을 알아보고
몹시 사랑하고 아꼈다고 한다. 인품이 온화하고 겸허했으며, 어진 이들을 아끼는 성품으로, 문무에 고루
능하여 그 재주와 덕망이

형 사마염을 앞설 정도라고 평 될 정도였던 데다 사마소가 죽을 때 후계자로 장남 사마염과 차남 사마유를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결국에는 장유유서의 원칙에 따라 사마염이 황제가 되지만..

아무튼, 이토록 뛰어난 능력의 사마유였기에 형 사마염이 사마유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을 갖게 되자

이를 알아차린 가남풍이 독살해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썰'이다. 근거도 증거도 없다.

그냥 가남풍을 깎아내리려고 지어낸 것 같다. 이런 설이 나도는 이유는 그저 사마유가 원인불명의 병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설이 존재할 만큼 가남풍의 권력욕을 탐하여 벌인 악행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았다는


얘기다.

2) 황후가 되고나서

서기 290 년, 시아버지 사마염이 사망하자 남편 사마충이 제위에 오르고 가남풍 역시 황후가 된다.

그리고 황후가 되고 나서의 아름다운 짓거리에 대해서는 위에서 길게 서술했다.

그렇게 정적들을 제거하고 비로소 대권을 쥐게된 가남풍은 우둔한 남편 혜제 사마충을 제쳐두고 정치를
한다.

이때부터 가남풍의 가문인 가(賈)씨들이 득세하게 되는 것이다. 친척들이 졸지에 살판이 나 죄다


한자리씩 꿰찬다.

이때 등용된 가씨 일족이 워낙 많은지라 가밀(賈謐)이란 사람을 예로 보겠다.

가밀은 본래 가남풍의 외가쪽 조카였는데 숙모가 하도 잘나가자 빌붙을 생각으로 성씨까지 갈아서 가씨로
개명했다.
가후(가남풍)의 모친 광성군(곽씨)의 양손, 가밀은 국사에 간여해, 권력이 임금과 대등했다. - 진서
혜황후전

그리고 성씨 갈은 효과를 톡톡히 보게 된다. 그리고 충실하게 숙모의 앞잡이 역할을 하며 권세를 누리게
된다.

가씨일족의 한낱 한사람의 권력과 임금과 대등했다 하니, 가남풍의 위세는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소위 말해 외척이 득세한 것이다.

가남풍의 별난 짓 중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음탕함이다.

가남풍은 서기 256 년 생이다. 그리고 황후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나이가 34 세.

이런 말 하기 좀 그렇긴 하지만 여자의 성욕이 제일 불타오른다는 30 대 초중반의 나이대다.

한마디로 한창일 때인데, 가남풍의 입장에서는 애석하게도 남편인 혜제 사마충이 남편구실을 못하는
저능아였기에,

그 욕구를 풀데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고안해낸다.

낙양(洛陽) 남쪽에 도위부(盜尉部)의 소리(小吏 : 하급관리)가 있어, 단정하고 아름다운 용모와


행동거지를 가졌었는데, 무덤의 요역을 공급하고 나서, 홀연히 예사롭지 않은 의복을 입었기에, 무리는
모두 그가 절도했다고 의심했고, 위(尉 : 일종의 무관관리)도 의심하여 이를 바로잡으려 했다. 가후(賈
后 : 가남풍)의 먼 친속이 도둑맞은 물건을 구하고자 하여, 가서 들으며 조사를 했다. 소리가 이르길,

"이전에 가다 한 늙은 여자를 만났는데, 집에 질병에 걸린 이가 있어, 무당이 의당 성 남쪽의 소년이


이를 막을 수 있다고 일렀기에, 잠깐 일을 부탁하고자 하는 거라며, 반드시 큰 보답이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가니, 수레에 올라 휘장을 내리고는, 대나무 상자 안에 들어가게 하고, 10 여 리
정도 가니, 6, 7 개의 문을 지나서, 상자를 열었는데, 높은 궁전과 아름다운 집이 갑자기 보였습니다.
어디냐고 물으니, 천상계라고 이르며, 곧 향탕香湯으로 목욕시켰고, 좋은 옷과 맛난 음식이 장차
들어왔습니다. 한 부인을 보니, 나이는 35, 6 정도로, 작고 푸르고 검은 안색에, 눈썹 옆에는 혹이
있었습니다. 남겨져 여러 밤을, 함께 자며 주연을 즐겼는데, 떠날 때 이러한 물건을 선사했었습니다."

듣던 이는 그녀의 형상을 듣고, 가후임을 알게 돼, 부끄러워 웃으며 떠났고, 위 또한 의심이 풀어졌다.


당시에 다른 이 중 들어갔던 자는 다수가 죽었지만, 오직 이 소리는, 가후가 그를 아꼈기에, 온전히 나올
수 있었다. - 진서 혜황후전

이해 안되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드리자면..

좀 속된 말로 호빠 내지 영계 플레이를 즐겼다는 얘기다. 기록의 내용대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용모와


행동거지' 를 가진 남자들을

데려다가 대접해주며 욕구를 풀었다고, 그러다 그 남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물건 하나를 선물했고 그
남자는 그걸 가져가다가 그걸 본 무관들이

그 물건의 출처를 의심하여 물었더니 남자 曰, "황후께서 주신 건데요?" 이러자 평소 가남풍의 이런


행각을 알고 있던 무관들이 그제서야

이해하며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록의 마지막 줄이 서술해놓았듯, 바로 위의 남자와는 달리 다른 남자들은 궁중에 들어갔다가


다수가 죽었던 모양이다.

이런 짓들로도 욕구가 정 안 풀렸는지 다른 파트너(?)를 찾기에 이른다.

가후의 음탕함은 날로 방자해져, 태의령(太醫令) 정거와 간음함이 내외에 알려졌다. - 진서 혜황후전

'태의'는 한자에서도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의원이다. 그것도 황실 주치의.

이렇게 가남풍이 막장이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가남풍과 가씨일가가 막장으로 치닫고 전횡하는 모습을 보면 폭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기록은 이렇다.

비록 암주(혜제)와 학후(가남풍)의 조정이라고 간주하기도 하나, 천하는 이와 같이 편안하였다. - 진서


혜제기

즉, 윗놈들끼리만의 세상이었단 얘기다. 백성들이야 오히려 전란의 나날이었던 삼국시대 이후로 통일된
제국이 평안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저 자신을 배부르고 등따시게만 해주어 태평가를 부를 수 있는 시대만 온다면야


누가 지배자가 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혹자는 이 혜제가 암군이었고 가씨 외척들이 득세했어도 혼란기라 말할 수 있는 시나리오인 '세금을
과하게 걷거나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인다'

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았다라는 점을 들어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거기다 더 나아가 이건 이후 팔왕의 난이라는 사태를 다루면서 볼 일이지만, 가남풍을 도리어 정변을
노리는 황족들로부터

황권을 굳건히 지킨 인물로 달리 평가하는 이도 있다. 여성이 권력을 쥐었다는 것만으로 눈살을 찌푸리는
유학자들이

의도적으로 깎아내렸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시각의 차이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가남풍의 행적들 가운데 이것만은 분명하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무능한 황제를 세워 추후에 있을 '팔왕의 난' 이라는 근본적 원인을 제공했다라는 것.

그리고 이 팔왕의 난으로 인하여 진(晉)은 내란으로 인한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되고 그 연쇄반응으로

나중에는 '영가의 난' 이라는 재앙이 도래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감안할 때, 가남풍이 진(晉)을
무너뜨리는데에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라는 점에서는 변론의 여지가 없다.

다음부터 팔왕의 난에 대해 다루어보겠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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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추천 : 29
조회수 : 1691 회
댓글수 : 3 개
등록시간 : 2013/12/07 15:47:47
앞서 살펴보았던 외척세력 가남풍의 도를 넘는 전횡에도 황족들인 사마(司馬)씨들은

그저 조상이 세운 나라가 외척의 손에 놀아나는 것을 지켜만 보았느냐, 그건 아니올시다였다.

세상만사에 관심이 없거나 자존심도 명예도 버리지 않은 이상,

조상의 나라에서 외척이 판치는 꼴을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다만 가씨세력을 제거할 마땅한 명분이 없었기에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것이었다.

만인으로부터의 공감과 지지를 얻어낼 만한, 명실명백한 명분이 없었다랄까.

단순 외척이 득세한다는 이유로 먼저 반기를 들었다간 되려 역적으로 몰리기 십상이었니 말이다.

가남풍에게 토사구팽 당한 초왕 사마위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렇게 기회를 노리던 중, 사마씨가 그토록 기다리던 찬스가 찾아오게 된다.

- 가남풍이 태자 사마휼을 죽이다 -

사마휼(司馬遹)은 혜제 사마충의 아들(가남풍의 소생이 아니라 후궁소생)로서 혜제가 즉위하자 태자가


되었고,

할아버지 무제 사마염의 총애를 받을 정도로 아버지 사마충과는 달리 유망주였다고 한다.

무제 사마염이 이 총명 손자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던 만큼, 사마충이 태자시절에

우둔함에도 불구하고 태자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은 이유도 이 사마휼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사마충을 폐태자 시켜버리면 그 아들인 사마휼의 정통성에 문제가 생겨버리니

훗날 손자 사마휼을 제위에 앉히려는 사마염의 의도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총명한 사마휼을 가남풍이 경계하기 시작한다.

사마씨들은 죄다 찍소리 한번 못하는 머저리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미래를 촉망받는 젊은 사마씨 황족 하나가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장차 남편 혜제 사마충을 이어 제위에 오를 태자이니 만약 사마휼이

후계자로서 황제가 된다면 자신의 정권유지에 방해가 될 것이라 판단한 것.

그래서 이 사마휼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가남풍 자신의 전공분야인

온갖 모함과 음모를 꾸며 사마휼을 견제하고 몰아내려 시도한다.

그러던 중, 하루는 가남풍이 사마휼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막상 만나지는 않고 신하를 시켜 황제가 하사한 술이라 하며 먹이게 했다.

처음에는 거부하던 사마휼이었으나 어거지로 먹이는 신하때문에 사마휼은 꽐라가 되고 만다.

그리고는 사마휼에게 붓과 종이를 쥐어주며 황제의 조서를 베껴 적게 시켰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니 그냥 시키는 대로 쓴 모양인데, 문제는 그 내용이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폐하(사마충)께서는 이제 그만 물러나십시오. 스스로 물러나시지 않으면 제가 끝내드리겠습니다. 중궁(


가남풍)께서도 또한 스스로 물러나셔야 될 겁니다. 중궁께서도 물러나시지 않으면 제 손으로
끝내드리겠습니다. 아울러 제 어머니 사씨와 더불어 기일을 정해놓고 행동을 개시할테니 괜히 미루어서
후환을 초래하지 마십시오. 삼진(해, 달, 별) 아래에서 털을 먹고 피를 마시며 맹세하고 황천이
걱정거리와 해로운 것을 없애버리라고 허락했으니 도문(사마반)을 세워 왕으로 삼고 장씨를 황후로 삼을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소망이 이루어지면 마땅히 천제에게 제사를 지낼 것입니다. - 자치통감

즉, 아들이 아버지에게 황제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얘기다.

자리를 내놓지 않으면 아버지와 양어머니(가남풍을 말한다)에게 자신의 친어머니(사씨)와 반란을

일으켜 두 사람을 해칠지도도 모르니 어서 양위하라는 것. 거기다 아들(본문에서의 사마반. 자(字)가


도문이다)을

왕으로 삼고 아내(장씨)를 황후로 삼을 것이라는 엄청난 패륜 시나리오가 담긴내용.


앞뒤분간도 안될 정도로 대취해있던 사마휼은 그저 생각없이 베껴 적었을 것이고

그 황제의 조서란 종이도 애시당초 가남풍이 사마휼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조작한 거짓 조서였던 것이다.

이 종이가 바로 다음날 혜제 사마충에게로 넘겨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사마충은 즉각 대소신료들을 모아 사마휼을 죽일 것을 의논했고

워낙 증거가 분명한지라 변호해 줄 이도 없었다.

다만 평소 가남풍의 행실을 잘 알고 있는 몇몇 신료들, 삼국지연의에서도 등장하는 장화(張華)같은

신하는 조서의 진위여부를 더 신중히 조사하여 처리해야 한다고 진언하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사마휼은 즉각 폐위되어 서인으로 격하되었고 가남풍은 각각 사마휼의 친모와 아내인

사씨, 장씨를 죽여 없애는 치밀함까지 보여준다. 본래 역적모의에 관해서는 연좌제로 가족까지

책임을 물어 해를 입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남풍이 후환을 두려워하여 벌인 짓이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가남풍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섹 X 파트너 태의령 정거를 시켜 독약을 제조,


사마휼을 독살할 것을 명령한다.

아니나 다를까, 사마휼은 폐위된 후, 유폐지에서 지내며 항시 가남풍이자신을 독살할 것을 두려워하며


먹는 음식을 직접 조리해 먹고 있었는데

황제의 하사주(酒)를 빙자한 가남풍이 보낸 독약이 당도하자 이를 알아차리고는 하사주 받기를 거부하다
결국에는 절구공이로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때가 정확히 A.D 300 년이다.

- 가남풍의 죽음과 팔왕의 난의 시작 -

결과적으로 이 사마휼의 죽음은 그동안 기회만 노리며 불만이 최고조에 달해있던 사마씨들이 들고
일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사마씨들이 그토록 바라던 대의명분이 생긴 것이다. 살해당한 사마휼은 많은 이들의 동정을 샀고 한편으론
많은 원망과 비난을 불러왔기 때문.

거기다 그토록 증오하는 가씨세력에 같은 혈육인 사마씨 한 사람이 살해당했다는 분노와 복수심도 있었을
것이다.

제일 먼저 반기를 든 이는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 사마의의 9 남)이란 번왕이었다.

즉각 군사를 휘몰아 궁성으로 쳐들어가 뜻을 함께한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 앞편에서 얘기한


사마유의 아들이다)과

더불어 가남풍을 찾아가 가남풍에게 사마휼처럼 독약을 마셔 자살할 것을 종용했고 가남풍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는다.

고서의 기록을 빌려 보자면..

조왕 사마륜이 입궁하여 익군교위 제왕 사마경에게 전각에 들어가 가후(賈后 : 가남풍)을 폐위하게 했다.
가후와 사마경의 모친이 서로 사이가 나빴기에 사마륜이 그에게 하게 했다. 가후가 놀라 이르기를, "경은
어찌 하여 온 것이오?" 사마경이 이르기를, "조서로 황후를 잡으라 하였소." 가후가 이르기를, "조서는
응당 나에게서 나오는 것인데, 무슨 조서란 말이오?" 가후가 상합(上閤)에 이르러, 멀리서 혜제를
부르기를, "폐하께서 부인을 가지시고, 타인에게 이를 폐하게 함은, 곧 폐하를 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사마경에게 묻기를, "이 일을 일으킨 자가 누구인가?" 사마경이 이르기를, "양(梁)왕과 조(趙)
왕이오." 가후가 이르기를, "개를 묶으면 응당 목을 묶어야 하는데, 지금 도리어 꼬리를 묶었으니, 어찌
이와 같지 않을 수 있으랴!" 궁의 서쪽에 이르러 가밀(賈謐)의 주검을 보고는, 소리를 내 통곡하다
갑자기 그쳤다. 사마륜이 임금의 명이라 속여 상서(尙書) 유홍(劉弘) 등을 파견해 부절을 가지고
금가루로 된 술을 가지고 가 가후에게 건네며 죽음을 내리게 했다. 조찬, 가오, 동맹, 한수의 무리도
모두 주살되었다. - 진서 혜황후전

사마륜이 혜제 사마충의 명을 빙자하여 가남풍을 죽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정변 또한 사사로이


저질러진 일이라는 얘기다.

거기다 앞서 언급한 가남풍의 조카 가밀과 가남풍의 동생인 가오도 죽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가씨일족은
물론이고 그 끄나풀들까지

모조리 숙청당한 것으로 나온다.

이 공(?)으로 조왕 사마륜은 사지절, 도독중외제군사, 상국, 시중이라는 거창한 벼슬을 하사받는다.

전횡하던 외척세력을 말소했고 정권의 교체가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다만 대권을 쥔 세력이 가씨에서
사마씨로 성씨만 바뀌었다 뿐,
정작 근본적으로 나아진 것은 없었다.

이 사마륜이란 사람도 가남풍에 비해 하나 나을 것 없었기 때문이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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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3/12/08 07:31:01

- 조왕 사마륜의 역심과 반발 -

정변을 통해 황후 가남풍과 가씨세력을 축출하는데에 성공한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은

새로운 실권자가 되어 혜제 사마충을 보좌하게 된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가남풍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 사마휼(司馬遹)에게 민회태자(愍懷太子)라는 시호를


올려 그 명예를 회복시키고 사마휼의 아들,

사마장(司馬臧)을 황손으로 책봉하는 등, 그동안 외척들에게 유린되던 사마씨 황권을 다시 공고히 했으며,
명성이 높고 덕망이 깊은 자들을 등용하여

대소신료들이 정변으로 죽어나가는 바람에 썰렁해진 조정을 다시 바로 세우려는 노력도 보여준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만 좋았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기본적으로 이 사마륜이라는 인간이 원체 용렬하고 멍청한 성격이었기에, 이로인해 벌어질 사태는 사실상
예고된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사마륜이 역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정변을 일으켜 외척을 몰아낸 것도 그걸 공로로 건덕지 삼아 혜제 사마충에게 황제의 자리를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우둔한 주군 곁에는 항시 간신이 들러붙기 마련이다.

이 사마륜에게는 손수(孫秀)라는 참모 겸 심복이 딱 그 짝이었다.

손수는 예전부터 쭉 사마륜을 섬겨왔던 사마륜의 심복 중 심복으로서, 그가 과거에도 벌인 행각들을


보자면 가히 그의 됨됨이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손수는 실질적으로 사마륜의 상전이나 다름없었다. 무슨 소리인가 하니,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사마륜은 용렬한 위인인지라 거의 모든 대소사를 손수에게 물어 해결하고, 손수의 통제를 받았으며
가남풍과 가씨일가를 칠 정변을 일으킬 것을 사마륜에게 부추기고 종용한 이도 손수였다.

사마륜이 황제가 될 생각을 품자, 손수는 충실(?)하게 킹메이커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선, 사마륜이 황제가 되는데에 걸림돌이 될 만한 이들을 모조리 숙청하거나 내쫓는 일에 착수한다.
대표적인 희생자로는 회남왕(淮南王) 사마윤(司馬允 : 무제 사마염의 9 남)이란 황족이 있는데, 사마륜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사병들을 모아 사마륜 일당을 선수치고자 계획하고 있었는데
손수 역시 사마윤의 낌새를 눈치채고는 사마륜에게 밀고하여 사마윤의 병권을 박탈할 것을 진언한다.

사마윤은 사마륜의 정변이후, 사마륜 정권 하에서 '표기장군, 개부의동삼사' 라는 관직에 임명되어


중앙에서의 병권을 쥐고 있었는데, 사마륜과 손수는 행여나 사마윤이 그 병권으로 자신들을 칠 것을
두려워해 병권을 빼앗고자 태위(大尉)라하는 실질적인 병권이 없는 일종의 군권 명예직으로
이임시켜버린다. 태위라는 직책은 고위직 중의 최고 고위직이라 불리우는 삼공(三公 : 태위, 사도,
사공)의 벼슬 중 하나였으니 겉으로 보기엔 관직을 높여준 것처럼 보이나, 실권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마륜의 이와같은 조치의 의미를 사마윤이 모를리 없었다. 더구나 사마륜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면 더더욱이나.

거기다 한술 더떠 손수는 사마윤 휘하의 관속들을 포함한 신하들을 몇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체포해버려
사마윤의 수족을 잘라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조치를 취하고 또 사마윤이 태위직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라는 이유(뻔히 속셈이 다보이는데 눈뜨고 당할리가 없다)로 황제의 조서를 받기를 거부했다는
죄명으로 압박하기에 이른다.

사마윤은 더이상 참지못하고 그날로 수도 낙양(洛陽)을 떠나 자신의 근거지이자 봉국인 회남국(淮南國)


에서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고서에서의 기록은 이렇다.

조왕(趙王)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외치면서 자신을 따를 사람은 옷을 왼편으로 여미라고 했고, 그(사마윤)
에게 귀부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궁궐로 갔지만, 상서좌승 왕여가 액문을 닫아걸어 들어가지 못하자
상국부(相國府 : 사마륜의 거처)를 포위하면서 사마륜을 공격해 여러차례 이겼다. - 자치통감

기록대로 사마윤은 싸움에서 몇차례 이겨 사마륜을 거처인 상국부(사마륜은 상국이라는 관직도 겸하고
있었다)까지 몰아넣어 궁지에까지 몰아넣는데에 성공한다. 그런데 여기서 일이 틀어지고 만다.

사마윤은 승화문 앞에 진을 쳤고, 이 때 태자좌율 진휘가 사마윤을 돕기 위해 사마충에게 백호번(궁궐에서


근무하는 장교)을 보내 싸움을 해산시켜야 한다고 했고, 사마독호 복윤이 기병을 거느리고 나갔다. -
자치통감

진휘라는 신하가 혜제 사마충에게 사마륜과 사마윤 두 왕들 중에서 사마윤을 지지하여 군사를 보내 도울


것을 진언하고 혜제가 승낙, 복윤이란 장수를 보내 사마윤을 돕게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복윤에게 사마륜이 아들 여음왕(汝陰王) 사마건(司馬虔)을 보내 회유하게 한다.

사마건 : "우리 아빠 편 들으면 출세할 거임. 그러니 사마윤 따위 버리고 우리편으로 오셈."

복윤 : "오케이, 사마윤한테 페이크치고 그쪽으로 튀겠음."

미래를 약속받은 복윤은 사마륜에게로 돌아섰고 사마윤을 낚고자 함정을 파기로 하는데, 복윤은 혜제
사마충이 직접 보낸 장수였기에 사마윤더러 황제의 조서를 받으라는 구라를 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마윤은 복윤을 만나러 갔고, 사마윤은 복윤의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주군이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사마윤의 병력은 순식간에 와해되어버렸고 사마윤의 가족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싸그리 처형되고 모반에 동조했던 이들은 도주하는 것으로 사마윤의 반란은 끝난다.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싸잡아 표현했지만, 실제로 이 숙청으로 죽어나가거나 쫓겨난


이들들은 황족, 고위직 관료, 학자들이었다.

석숭(石崇 : 삼국지 연의에서도 나오는 석포(石苞)의 아들이기도 하며 이 당시 고위관료였다), 구양건


(歐陽建 : 진(晉)의 유명한 학자이자 사상가), 반악(潘岳 : 역시 고명한 학자다), 제왕(齊王) 사마경
(司馬冏 : 사마륜과 함께 가남풍을 몰아낸 그 사마경이 맞다. 사마륜이 맛이간 나머지 자신을 중앙에서
축출하려 들자 사마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 직접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등.

반악(潘岳)의 초상화.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진(晉)의 고명한 학자다.

추후에서 다룰 본격적인 팔왕의 난(정확히는 사마륜이 황위를 찬탈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지만)에서도


언급할 내용이지만,

이 난에 연루되어 죽어나가는 인물들의 계층은 각기계층으로 학자나 사상가가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다양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재들이 죽어나가는 사태는 나라의 큰 손실이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사마윤을 정리한 사마륜의 위세는 더 높아졌고 덩달아 심복 손수도 날뛰기 시작한다. 위에서는 언급한
석숭, 반악, 구양건과 같은 인물들이 그저 반란에 연루되어 죽은 것으로 써놓았지만 실제로는 이 손수의
사사로운 원한에 의해 죽었다(사마륜이 죽이라 지시한게 맞긴 하지만 앞에서도 서술했듯, 사마륜은 거의
손수의 꼭두각시였으니 사실 손수가 죽인 것과 다름없다).

손수는 하급관리 시절에 반악으로부터 일을 잘못해 꾸지람을 받은 적이 있어 앙심을 갖고 있었고,


석숭과는 석숭의 첩인 녹주(綠珠)를 달라했다가 거절을 당한 알력이 있어 원한을 품었으며(이건 순전히
손수가 미친놈), 구양건은 그저 주군인 조왕 사마륜과의 관계가 나빠서 그러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사마윤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자 이를 빌미로 원한도 갚을 겸해서 이들 셋은 물론이고
그 일족까지 싸그리 멸했다고 한다.

거기다 손수 자신이 신임하는 인물만 벼슬을 내려 기용했기 때문에, 사마륜의 친인척은 물론 노비,
시종들까지도 고위직에 오르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하니..

여튼 손수가 호가호위하며 권력을 휘둘렀다는 얘기다.

또한 다른 황족들도 난데없이 피해를 보게 되는데, 사마륜이 집권 초기에 죽어서나마 명예를 회복시켜준


사마휼의 아들, 사마장(司馬臧)도 대우해주더만 사마윤 반란사건 후에는 황족들에 대한 의심이 생겼는지
죽여버린다. 거기다 사마윤의 동복동생인 오왕(吳王) 사마안(司馬晏 : 무제 사마염의 15 남. 여담이지만
이 사마안의 아들인 사마업(司馬業)은 훗날 진(晉)의 마지막 황제 민제(愍帝)가 된다. 아주 나중에 다룰
영가의 난과 관련된 인물이니 그냥 참고하실 것)도 일족이 멸해질때 죽을 뻔하지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되 빈도현왕으로 지위가 격하되어 중앙에서 쫓겨나는 등, 사마륜 정권 하의 피의 숙청은 계속되고
있었다.
- 사마륜의 제위찬탈과 팔왕의 난의 발발 -

그리고 서기 301 년.

손수는 혜제 사마충에게 구석(九錫)의 지위를 조왕 사마륜에게 하사해줄 것을 요구한다. '구석의 지위란'


아홉(九)가지의 특권을 의미한다. 예로부터 권신이 허수아비 황제로부터 거의 반 협박식으로 받는 것과
같은 일종의 절차였다. 진(晉)의 시조들 중 하나인 사마소(司馬昭)가 위(魏)의 원제(元帝)로부터
하사받았고 좀더 앞선 사례로는 조조(曹操)가 한(漢)의 헌제(獻帝)에게서 받은 바 있다. 전례들이
심상찮은 것을 느끼실텐데, 보시는 바와 같다. 사마륜도 언젠가는 지금의 황제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을 뜻을 간접적으로 보였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게 된다.

혜제 사마충이 아둔하다 하여 태상황(太上皇)으로 올려버리고, 결국 사마륜은 제위에 오르고야 만다.

연호는 건시(建始).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는 것을 못박기라도 하려는 듯 장남 사마과(司馬荂)는 태자로


책봉해버린다.

정월에 산기상시인 의양왕 사마위, 상서령 만분 등을 시켜 선양할 준비를 마련했다가, 9 일에 황제로


즉위해 연호를 '건시(建始)'라고 고쳤으며, 사마충을 폐위해 금용성에 살게 했다가, 10 일에 사마충을
태상황으로 높이면서 금용성을 영창궁으로 고쳤다. 아들 사마과를 황태자로 삼으면서 다른 아들이나
친척들을 왕으로 임명했으며, 그 밖의 부하들도 관직을 승진시켰다. - 자치통감

황후 가남풍과 외척 가씨세력은 황제만큼은 건들지는 않았지만 사마륜은 황제까지 갈아치운 것이다. (


상관없는 얘기지만 기록에서의 만분(滿奮)이란 신하는 삼국지연의에서의 위(魏)의 신하였던 만총의
손자다)

그리고 그해 3 월, 사마륜의 제위 찬탈소식에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이 여러 왕들에게 사마륜을 칠


것을 권유하는 격문을 돌리니, 이에 장사왕(長沙王) 사마애(司馬乂),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등이 동참의 뜻을 밝혀 역적 사마륜을 쳐없앨 것을 맹세하며 군사를
일으킨다.

이것이 팔왕의 난의 진정한 시작이라 하겠다.

여기서 표시된 초(楚)왕 사마위(司馬瑋)와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은 이미 죽었지만,

사마위와 사마량이 가남풍과 관련되어 권력다툼을 하던 때까지도 팔왕의 난의 시기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은 지도에서는 표시되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아직
안나왔는데,

사마월은 좀더 뒤에 등장한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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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추천 : 29
조회수 : 1483 회
댓글수 : 2 개
등록시간 : 2013/12/08 17:25:51

- 번왕들의 난립 -

재탕하는 당시 팔왕의 위치도

여기서 잠시 팔왕의 가계도를 짚고 넘어가자.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 - 사마염의 5 남.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 - 사마의의 4 남.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 사마의의 9 남.

제왕(齊王) 사마경(司馬?) - 사마염의 동생, 사마유의 아들.


장사왕(長沙王) 사마애(司馬乂) - 사마염의 12 남.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 사마염의 14 남.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 - 사마의의 두번째 동생, 사마부의 손자. 아버지는 불명.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 - 사마의의 네번째 동생, 사마규의 손자. 사마태의 아들.

각기 인물마다 짝지어 보면 가깝게는 형제(물론 이복형제지만), 멀게는 몇촌씩 가는 관계에다


항렬상으로는 심지어 작은 할아버지와 손주관계도 있다.관계가 멀고 가깝고 간에 어쨌든 피를 나눈
친척사이요, 모두가 고조(高祖) 선제(宣帝) 사마의(司馬懿)를 조상으로 둔 가문의 일족이다.

웬만한 아침 드라마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한 스케일로,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왕자의 난은 비교도 안되는
막장 가족사를 보여준다 하겠다.

조왕 사마륜이 혜제 사마충을 폐위하고 참람되이 스스로 황제가 되자 이에 제왕 사마경이 반란의 물꼬를


터, 각지의 번왕들이 들고 일어난다.

팔왕의 난에 앞서 삼국통일 이후, 사마염이 종친 번왕들에게 군권을 쥐어줌으로서 힘을 실어주었다는


얘기는 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일이 나중에는

참사를 불러온다고 했는데, 이제 그 부작용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마염의 의도는 본래 각기 병력을 거느린 종친왕들이 전국 각지에 위치하며 만약에 있을 황실에서의


변란이나 위기에 대응시키고자 울타리 역할을 기대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 울타리들이 난립하여 도리어
나라를 말아먹으려고 죄다 중앙으로 몰려들고 있는 형국이었다.

- 사마륜을 죽이고 사마경을 세우다 -

물론 명분은 좋았다.

'감히 제멋대로 지금의 황제를 몰아내고 무엄하게도 황제의 자리를 꿰찬 도적놈을 정벌하러 간다' 라는
거창한 대의명분이 있었으니까.

마치 천하의 인심을 등에 업기라도 했는 듯, 반기를 든 번왕 연합군은 수도 낙양으로 몰려가 조왕


사마륜의 병력과 한바탕 전투를 벌이고, 전투에서 승리하여 삽시간에 궁성으로 짓쳐들어가 조왕 사마륜을
잡아 감금시켜 버린다. 이때가 서기 301 년, 3 월 17 일. 황제가 된 지 불과 일주일만의 일이었다.

반란군(성공했으니 혁명군이라 해야할지도?)은 태상황으로 물러나 거의 유폐되다시피 쳐박혀 있는 혜제


사마충을 다시 황제로 옹립한다. 그리고 아무래도 사마륜의 존재가 꺼림직 했던지 이놈을 어찌할까 하다,
양왕(梁王) 사마융(司馬肜 : 사마의의 8 남)이란 황족의 건의로 사마륜을 주살해버리고 그 아들들과 그
일가를 모두 처형한다.

따로 쓰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피튀는 싸움만이 다가 아니라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결탁이
난무하는 물밑작업도 있었다.

하간왕 사마옹 같은 경우는, 본래 사마륜을 지지하는 입장을 고수했고 제위를 찬탈한 사마륜 역시
가뜩이나 한사람 한사람의 황족들의 지지가 아쉬운 마당에 그와 같은 사마옹의 지지도 번왕 연합군에 맞설
힘에 보탬이 되었기에 철떡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사마옹이 성도왕 사마영의 병력규모가 크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등을 돌려버려 연합군에 가 붙어버렸으니, 병력균형에서 뒤쳐지는 수밖에..

그리고 바로 위에서 등장한 양왕 사마융 역시 원래는 사마륜 파로서, 사마륜과 함께 가남풍을 주살하는
일에도 동참하기도 했고 사마옹 정권 하에서는 무려 승상(丞相 : 오늘날의 재상)직까지 지냈지만, 그
역시 사마륜의 하는 짓거리가 영 마음에 안들었는지 연합군으로 넘어가 도리어 사마륜을 죽일 것을
건의하는 입장이 되버린다.

이 두 황족뿐만 아니라 당시 여러 황족들이 사마륜이냐 연합군이냐 사이에서 지지하는 주장이 갈려 편이


갈렸다. 어느쪽에 붙느냐에 따라 승자냐 역적이냐가 갈려 생사가 왔다갔다 하는 마당이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렇게 보면 비단 팔왕에만 국한된 난이 아니라 '황족들의 난' 으로 풀이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죽은 사마륜의 뒤를 이어 대권을 쥐게 된 사람은 제왕 사마경이었다. 사마륜과 함께 가남풍을 몰아내고


나중에는 사마륜을 토벌하려 했던 그 사마경이다. 아마 황족들이 저들끼리 논의하여 황족 중 하나를
대표로 세워 혜제 사마충을 보좌하기로 결정한 듯 하다. 황족들이 지지하고 추켜세워 줬으니 합법적인
실권자라 하겠다.

사마경이 대표로 선출된 이유는 합리적이었다. 현명하고 명망이 깊던 아버지 사마유의 피를 이어받아
그런지, 당시 사마경의 평은 꽤 좋았다. 현명하다는 평판이 있었으며 일찍이 여러 공로가 있다하여
인망이 높았다고 하니, 충분히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었을 터.

하.지.만(이 글을 쓰다보니 하지만 이란 말을 자주 쓰게 된다. 그만큼 번잡한 역사라서 그런가)

이 사마경도 결국엔 똑같은 놈이었다.

권력의 맛이 정말 그런지는 모를 일이나, 사마경도 권력을 잡게 되자 순식간에 타락해버린다. 토목공사를


일삼고 사치에 빠져 흥청망청 노는데다

정치는 이미 아웃 오브 안중이었으니 오죽했으면 그의 숙부, 평원왕(平原王) 사마간(司馬幹 : 사마의의


막내아들로서 사마사, 사마소, 사마주와는 동복형제)이 경고까지 한다.

"그대가 천하를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은 공적이오. 하지만 아직 내란이 끝난 것이 아니니 조심하기


바라오."
하지만(또 하지만) 쇠 귀에 경 읽기였고 사마경은 혼정으로 많은 이들의 반발을 사기에 이른다.

결국은 서기 304 년, 성도왕 사마영과 하간왕 사마옹이 사마애의 혼정을 이유들어 군사를 일으켜 장사왕
사마애를 쳐 주살한다.

말이 좋아 혼정을 빌미로 든거지 다들 저마다 하나씩 꿍꿍이가 있어서 그런 것일게다. 나중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몇 년에 걸쳐 사마경과 번왕의 연합군은 격전을 벌였고 낙양 근교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사마애는


사마월의 기습으로 불에 타 죽였다는데..

나중에도 그렇지만 이렇게 무한루프다. 한놈이 권력을 쥐고 맛이 가버리면 다른 놈들이 와 족치고


흩어지고, 그 다음 사람이 똑같이 난리피우면 또 다시 족치고 흩어지는..

- 마지막 싸움과 종결 -

사마경의 후임이 된 번왕은 성도왕 사마영이었다.

사마영은 혜제 사마충으로부터 황태제로 책봉되어 후계자로서 내정받고 승상이 되어 군림하게 된다.

근데 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같은 쿠데타의 주인공, 동해왕 사마월이었다.

내심 사마경의 후임자리를 기대하고 있던 차에 순 엉터리(사마월 기준) 논공행상에다 웬 뚱딴지 같은


사마영이 일등공신으로 책봉되어

온갖 후한 대우는 다 받게 되니 속이 뒤틀리고 만 것이다.

불만이 가득했던 사마월은 예장왕(豫章王) 사마치(司馬熾 : 사마염의 막내아들)이란 황족과 더불어 혜제


사마충의 밀명을 핑계삼아 사마영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사마영 역시 만만찮은 대응을 보여주어
쌍방의 군대는 수차례 격전을 벌였고 한때는 사마월이 패해 봉국인 동해(東海)국까지 쫓겨가기도 하지만,
여러 군벌(여기서 여러군벌들은 나중에 살펴볼 필요가 있다)들의 지지와 도움으로 재기하여 사마영을
재공격하여 궁지로까지 몰아넣는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각숨죽이고 번왕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군벌들과
번왕들의 부하들은 제각기 섬기는 주군을 위하여 각지에서 똑같이 편을 갈라 싸우니 전국이 시끄러웠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자, 사마영은 낙양을 심복장수에게 맡기고 자신은 혜제를 끼고 장안(長安)으로
도주한다.

낙양과 장안은 가깝다.

헌데 장안과 그 일대의 지방인 관중(關中) 일대는 하간왕 사마옹의 영역이었다라는 것이 함정이었다.


원래 사마옹은 사마월과 사마영의 싸움에서 사마영의 편을 들고 있었으나 사마영이 패해 속절없이
쫓겨오자 슬몃 다른 생각을 품은 것.

사마옹의 배반으로 사마영은 꼼짝없이 붙잡혀 감금되는 신세가 되어버렸고 남은 일은 사마월과 사마옹,
마지막 두 세력 간의 싸움 뿐이었다.

사마월과 사마옹의 싸움에서 누가 이겼는지는 기록의 구절을 통해 요약하겠다.

사마옹은 질보를 안정태수로 삼고 장방의 머리를 사마월에게 보내 화의할 것을 청했지만, 사마월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장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함곡관으로 들어오자 사마옹은 후회하면서 질보의 목을
베었다. - 진서

누가 누구고 왜 누구의 목을 베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다만 보시는 바와 같이 사마옹이 사마월에게 자신의


부하를 죽여 그 머리를 바쳐가면서 까지 화의를 구걸해도 사마월이 쌩깠다는 것만 보시면 된다. 즉,
싸움은 사마월의 승리로 끝났다는 얘기다. 이때가 어언 서기 306 년 되겠다.

장안(長安)을 함락하고 관중지방도 손에 넣은 사마월은 의기양양하게 처음부터 사마옹의 포로신세였던


사마영과 사마옹, 혜제를 데리고 낙양으로 입성한다. 그리고 사마영과 사마옹은 쓱싹....해치워 버리고는
혜제를 다시 옹립했다. 물론 사마영과 사마옹의 일족도 멸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참고로 사마옹의 최후는 이렇다.


광희(光熙 : 306 년 경의 연호) 원년, 12 월에 사마월이 천거하자 사도가 되었고 남양왕 사마모가 그의
장수인 양신을 파견해 신안에서 맞이하게 해 죽이도록 했는데, 사마옹은 수레에서 내렸다가 양신이 손으로
목을 조르자 죽었다.

그러던 중 306 년, 혜제 사마충이 급사한다.

'급사' 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갑작스레 죽은 것인데, 기록에는 사마충이 사마월이 올린 떡을 먹고


앓다가 죽었다고 되어있다.

정황상 당연히 사마월의 독살이라는 얘기가 퍼졌고 오늘날에도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 죽였는지는 안봐도 훤하다.

그렇게 백치황제였던 사마충은 43 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언급은 안하고 있었지만 이 팔왕의 난 동안


사마충은 수모란 수모는 다 겪었다.

예전 편에서도 얘기한 혜소라는 신하와 함께 도망가다 면전에서 자신을 지키려던 신하가 죽는 꼴도 봤고


유폐되고 감금되는 것은 다반사요, 풀숲에 숨어 있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얼굴에 화살도 몇 대 맞았다고
한다.

혜제 사마충.

한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었다.

참으로 안습하다 할 수 있겠는데..

아무튼 이 혜제 사마충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는 예장왕 사마치였다.

사마월과 함께 사마영에게 덤볐던 그 인물이다. 사마월은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은 거부하고 이 사마치를


적극 밀어주며 추천했다.
그리고 황족들의 지지를 얻어 즉위하니 이가 곧 진(晉)의 제 3 대 황제, 회제(懷帝)다.

회제 사마치 초상화.

즉위했을때는 24 살의 젋디 젊은 나이였다.

(서기 284 년 생. 즉위시기는 307 년)

서기 307 년의 일이다. 그리고 연호를 '영가(永嘉)'로 개원하니...

훗날의 헬게이트를 예고하게 된다.

- 팔왕의 난 종결 -

결론부터 말해 사마염의 25 명의 아들들 중, 막내아들인 사마치(司馬熾)만이 살아남아 황제가 되었다.

사마염만의 아들들이다. 다른 황족들의 후손들의 생사는 확인할 길이 없으며 확인할 필요조차 없이 거의


대부분이 해를 봤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마염은 통일 이후, 더이상의 전쟁은 없다 여겼는지 제국의 병력을 대폭 감소시켰고 가뜩이나 부족한
차에 그나마 남아있던 병력은 이 내전을 통해 거의 갈려나나갔고 진(晉)의 국방력은 크게 감소한다.

시기상으로는 초왕 사마위와 여남왕 사마량이 정변으로 죽은 291 년 경을 팔왕의 난이 시작된 때라 본다.


그리고 회제 사마치가 등극한 때인 307 년을 그 종결점으로 보는데, 시기상으로 보면 무려 15 여년에 걸쳐
내전을 벌였다는 얘기가 된다. 15 년간의 내전이니 그 피해가 오죽할까.

그렇다고 전쟁의 주축이 된 각 번왕들이 거느린 병력의 규모가 적어 내전의 스케일이 작았냐, 그것도
아니다. 예전 글에서 써놓았듯, 적게는 1 천명, 많게는 5 천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
수천, 수만여명의 병력이 죄다 이 난으로 소모된 것이다.
이 난으로 죽어나간 인재들도 많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의 쟁쟁한 신하며 학자, 사상가,
나아가서는 예술가들까지 어떻게 되서든 난에 연루되어 해를 당했다. 그들이 계속해서 살아남았더라면(
물론 역사엔 IF 가 없는 법이지만) 정치, 문화, 예술 면에서 어떤 발전을 이루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대표적 사례로는 오(吳)의 명장이었던 육손(陸孫)의 손자요, 역시 말기 오나라의 명장이었던 육항(陸抗)
의 아들들인 육기(陸機), 육운(陸雲) 형제가 그러하다. 이 두 형제 모두 고명한 학자들이었는데 제왕
사마경을 섬겼다가 사마경이이 죽으면서 연좌되어 처형당한다.

한마디로 국력을 내전으로 크게 소모한 케이스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팔왕의 난이 낳은 최대의 결과는 영가의 난이 되겠다.

단순 국방력이 약화되었다는 이유만이 영가의 난을 초래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번왕들이 전란의 과정


중에서 부족한 병사 수를 채우고자

이민족 용병들을 마구 기용했다는 점도 한 몫했다.

이건 나중에 다루도록 하면서..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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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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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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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3/12/09 04:17:37

'팔왕의 난' 이라는 사건의 경과와 결과를 쭉 살펴보았는데, 이 글이 진(晉)이라는 제국을 다루는 글이니
만큼 전체적으로 서술해야 할 필요가 있기에 이번에는 초점을 다른 사건에 맞춰 써볼까 한다.

이 글에서는 팔왕의 난을 다루느라 황족간의 권력다툼 내란이 벌어지는 무대인 중앙을 제외한 제국의 각
지역은 마치 아무 일 없이 평안했던 것처럼 느껴지는 감이 없잖아 있다. 사실은 그게 아니다. 중앙에서의
내란에만 집중적으로 보아 그렇지, 다른 곳도 개판이었다.
당시 진(晉)에서는 비단 팔왕의 난 뿐만 아니라 갖가지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팔왕의 난은 황실의
내분과 중앙에서의 권력싸움에만 국한된 얘기다. 즉, 팔왕의 난은 당시 제국에서 일어난 사건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물론 이 내란으로 나라가 박살이나는 결과를 불러온 중대한 사건임은 틀림없지만, 제국 각지에서도 혼란이
일기 시작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앙에서의 내란을 틈타 제국 각지에서는 이민족들의 유입과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눈을 돌려 제국의 각 지방에서의 사건들을 짚어볼까 한다.

그러기 위해선 과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 이특의 반란 -

중앙에서는 가남풍과 외척세력이 한창 판을 치던 서기 298 년.

옹주(擁州)와 관중(關中)지역에 심한 기근이 든다(내란에 자연재해까지 생겨난걸 보면 망조가 보이는


나라였던 것 같긴 하다).

천수(天水)군을 비롯한 6 개의 군에서는 유랑민이 생겨났고 이중에는 이민족들도 제법 섞여있었다.

이 글에서는 따로 언급은 한했지만 당시 진(晉)은 팔왕의 난이라는 전란에다 관중지방에서의

자연재해까지 겹쳐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세상이었다. 각자 살길을 찾아

각지로 이주하게 되는데 위의 지도가 그 이주 노선도다. 이때 발생한 난민이 백만명 가량 된다하니

당시의 혼란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유랑민들을 이끄는 우두머리 중에 이특(李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특은 파저족(巴氐族 : 오늘날 티베트계)족이라 하는 이민족이었는데, 이특은 유랑민들을 데리고 기근을


피해 기근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익주(益州)란 지역으로 향한다. 익주는 오늘날 중국의 사천성 일대로,
과거 삼국시대에는 유비의 촉(蜀)이 세워진 땅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익주를 다스리는 지방 행정관인 익주자사(益州刺史) 조흠(趙廞)이 이특의 유랑민 무리가


익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선다.

자신이 다스리는 익주에 수십만의 유랑민들이 갑작스레 대거 유입 되어버리면 꽤나 귀찮아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특의 설득과 거기에 덧붙인 뇌물 덕택(?)에 조흠은 이특의 유랑민 무리가 익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

이특의 언변이 좋아 조흠을 설득시켰다라기 보단, 이 조흠이란 작자가 당시 어떠한 생각으로 유랑민의
유입을 승낙했는가가 중요하다.

무슨 말인가 하니, 이 조흠은 중앙조정에 반기를 들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앙은 이미


저들끼리의 싸움으로 혼란스러워 제국의 전 지역에 통치의 손길을 뻗칠 여유도 힘도 없었다.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왕초라고, 각지의 지방관들은 중앙으로부터의 통제와 간섭을 벗어나 독립할 마음을 품게 된
것이다.

이는 꼭 조흠 뿐만 아니라 제국 각지의 힘 좀 있다하는 세력들이 그러했다. 나중에 영가의 난을


다루면서도 나올 내용인지라.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꿔 이특 집단의 무리가 유입을 허락한 조흠의 계산은 간단했다. 수십만 명의 인구가
자신의 영지로 들어오면 그 무리를 흡수하여 자신의 세력 강화를 도모한다.

아무튼, 이특과 유랑민들은 익주에서 자리잡아 새로이 생활기반을 잡아나가기 시작한다. 조흠은 이특과
그 형제들인 이상(李庠), 이류(李流) 등을 잘 대접하며 자신의 세력으로 편입시켜 수하로 두려했다.

그러던 차에 서기 300 년.
그 동안 독립할 기회만 노리던 조흠이 중앙조정에 반기를 든다. 적당한 때를 노려 드디어 일을 터뜨린
것이었으나 결정적인 계기는 조흠의 아들이 팔왕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일이 그것이었다. 지방직인
아버지와는 달리 조흠의 아들은 중앙조정에서 일하며 번왕들 중 어느 한명을 지지하다 죽은 것인데, 전
편에서도 말했듯이, 난에 휘말려 해를 입은 이들은 다양했다고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조흠은 분개하여 시나리오대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중앙에서 파견나와 있던


감찰관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익주를 온전히 자신의 땅으로 만드는데에는 이특과 그 형제들도 동참하여
조흠을 돕는다.

당연히 이를 용납할리 없는 조정에서는 나상(羅尚)이란 이를 평서장군(平西將軍)으로 임명하여 조흠을


토벌할 것을 명한다.

이 나상이란 인물은 삼국지연의에서도 나오는 촉(蜀)의 무장, 나헌의 조카다. 촉의 최후의 명장이라
불리던 삼촌 나헌과는 달리 훌륭한 성품과 장군으로서 갖추어야 될 군재는 찾아볼 수 없는 무능한
인물이었다.

"조흠에게는 영웅의 재간이 없으므로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날짜를 헤아리고 있으면 절로
패전소식이 들려올 것입니다." - 진서 나상전

익주로 떠나면서 나상이 던진 말이다. 무능한 주제에 큰소리친 것 같아 보이지만, 놀랍게도 머지않아
나상의 말이 적중하게 된다.

조흠이 제 스스로 자멸해 버린 것이다.

어찌된 일이냐면, 이특과 그 형제들을 기용하여 자신의 반란에도 동참시킨 조흠은 제 스스로 병크짓을
터뜨린게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특의 동생들 중에 이상(李庠)이란 동생이 있었는데, 병법에 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흠은 이 이상에게 나상의 토벌군을 막고자 한가지 임무를 준다. 이끌고 온 유랑민 부대를
이끌고 주요 길목을 막을 것을 지시했다.

병법에 통달한 이상은 그에 앞서 아무 전투경험없는 유랑민들을 훈련시키는데, 자신의 재주를


십분활용하니 일개 유랑민들을 정예부대로 만들어 버렸다. 조흠은 이걸 보고 슬몃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당최 이해가 안되지만 아무튼 조흠은 이상의 재주에 일종의 위협감과 두려움이 생긴
모양이다. 마치 그대로 두었다가는 나중에 저놈이 나를 어떻게 할 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랄까..
그래서 제거하기로 마음 먹는다.
군법을 위반했다는 적당한 구실을 붙여 이상을 처형시켜버리고 그 아들들과 조카를 포함, 도합 30 여명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이특과 남은 형제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자신의 동생을 되도 않은 이유로


죽여버린데다 기껏 도와주어 돌아온 대가가 겨우 이딴 것이었으니, 눈이 뒤집힐 수 밖에.

이특과 그 아우 이류는 그날로 유랑민 부대 7 천여명을 이끌고 조흠이 위치한 성도(成都)를 쳐, 기습에
놀라 도망가는 조흠과 그 처자를 붙잡아 살해한다. 서기 301 년의 일이다.

나상의 말대로 조흠은 과연 영웅의 재간이 없었는지, 반란을 일으킨지 1 년 남짓만에 자멸해 버린다. 일이
이리되어 버리면 역적으로 낙인찍힌 조흠을 죽인 이특과 토벌오는 나상과의 관계가 미묘해진다. 이특도
나상의 원정군을 두려워하여 미리 사람을 보내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잘 보이고자 굽신거린다.

이특이 나상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 동생 이양에게 영접하도록 시키면서 진기한 노리개를 바치자,
기뻐하면서 이양을 기독으로 삼았으며, 이특, 이류 등이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면죽에서 대접하자 왕돈,
신염 등이 그들은 도적질을 하는 사람이니 이 기회를 노려 그 목을 베어야 한다고 했지만 무시했다. -
진서 나상전

하지만 그런 노력도 헛되이, 나상은 익주에 도착하자마자 이특과 유랑민 집단에게 일주일 내로 익주를
떠날 것을 명령한다. 이특과 유랑민들에게는 실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을 터. 익주를 떠나란 말은
기근이 판치는 옹주, 관중지방으로 되돌아가란 소린데 곧 죽으란 말과 같았다.

그나마 이특은 먹을 식량을 구하기 위해 떠나는 절기를 늦추어 가을에 수확한 곡식만 가져가게 해달라고
사정하지만 나상은 겉으로는 이특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했지만 암암리에 유랑민들을 탄압하며 행패를
부린다.

이후, 나상은 전임 익주자사인 조흠의 후임으로 익주자사로 임명된다.

하지만 나상 치세 하의 익주는 무능한 나상의 폭정으로 인하여 반란이 일고 원망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3 월에, 성도(成都)에 이르러 문산의 강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나상은 왕돈을 파견하지만 진압에
실패하고 왕돈은 살해당했다. - 진서 나상전

"나상은 욕심이 많고 간사하여 법을 잘 지키지 않는다. 부유함은 노(魯), 위(衛)에 버금가고 집과


저자를 거리에 함부로 지어대니 탐욕스럽기가 시랑(豺狼)과 같다. 우리는 아마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
진서 나상전

"촉(蜀)의 도적은 나상이다. 우리를 죽이는 것은 나상이니, 평서장군은 다신 없을 재앙이다." - 진서


나상전

반란이 일어나고 사치를 일삼는데다 토목공사에, 나상을 비유하기를 '시랑', 즉 이리와 승냥이로
비유한데다 재앙이란 표현까지 썼다.

극단적인 표현까지 쓴 것으로 보아 나상의 폭정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이라는 속담이 이걸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다시 이특에게로 돌아가보자면,

영녕(永寧 : 301 년) 원년 겨울, 이특과 유랑민의 무리는 익주를 떠나는데, 나상의 명령을 받은 나상의
부장, 신염이란 장수가 면죽관 일대에서 이특과 그 무리를 습격하는 일이 벌어진다.

나상이 본격적으로 군사행동에 나선 것이다. 면죽관이란 성에서 이특과 나상의 군대는 격돌하였고 이
전투에서 이특이 승리한다.

그리고 내친김에 유랑민들은 이특을 정식 지도자로 추대하면서 유랑민들의 정권을 수립하기까지 하는데,
이것이 진(晉)이 혼란할때 우후죽순 생겨난 이민족들의 정권 가운데 하나인 파저족의 나라 '성(成)' 의
시작이다.

기록은 이렇다.

이특은 스스로를 진북대장군이라 칭하고, 아우 이류를 진동장군으로, 이보를 표기장군으로, 이양을


효기장군으로, 자신의 맏아들인 이시를 무위장군으로, 둘째아들 이탕을 진군장군으로, 막내아들 이웅을,
전장군으로 임명했다. - 자치통감
결국에는 최초로 진 제국에 대항하는 정권하나가 수립된 것이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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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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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3/12/10 06:11:44

- 성(成) 정권의 성립 -

이특(李特)의 봉기 직후, 그 기세를 타 성도(成都 : 익주(益州)의 주도(州都)가 성도다. 삼국시대 촉


(蜀)의 수도이기도 함)를 공격한다.

이특이 촉(蜀)에서 일어나 성도의 나상(羅尚)을 공격하자, 나헌은 강양(江陽)으로 물러나 수비했다.
하지만 형세가 불리하자 구원을 요청해 형주자사(荊州刺史) 종대(宗岱)와 건평태수(建平太守) 손부(孫
阜)를 인솔하여 나상을 구원하고 임시로 강주(江州)로 갔다. 종대와 손부가 도착하여 많은 사람들을
도적으로 몰아 핍박하자 사람들은 모두 분한 마음을 가졌다. - 진서 나상전

모르는 지명이나 행정구역은 지도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보시다시피 오늘날 중국의 사천성이 익주가
되겠고 바로 그 오른쪽에 접한 주(州)가 형주(荊州)다. 그리고 건평태수(建平太守)에서의 건평(建平)
이란 곳은 형주에 속한 지역이고, 태수(太守)는 주자사 휘하의 지방 관리직이다. 나상은 인근 형주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특의 봉기군이 나상의 진군(晉軍)과 교전, 나상 쪽이 불리해지자 나상이 인근 주(州)인 형주(荊州)의


주자사(州刺史) 종대란 사람과 손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종대와 손부의 원군이
도착하여 나상을 구하고는 잠시 강주란 곳에서 머무르는데 이때 익주의 백성들을 싸그리 이특에 동조한
반란군 취급하여 백성들이 원망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어디까지나 이특의 봉기는 유랑민 집단만이 그 주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애꿎은 익주의 원주민들까지
역적으로 몰아넣어버리는 병크를 저지른 것. 그렇잖아도 나상의 폭정으로 불만이 많던 익주의 백성들은 이
사건으로 진(晉)에 대한 익주에서의 민심은 완전히 돌아서게 되고, 그그에 반해 선정(善政)을 천명한
이특을 따르게 된다.

이특은 봉기하면서 공약 몇가지를 내세웠다.

첫째, 창고를 열고 양식을 내놓아 백성을 구한다.

둘째, 덕망이 높고 능력이 높은 이들을 받들며 관직에 등용한다.

셋째, 군대와 관리들이 지켜야 할 규율을 엄격히 제정한다.

나상의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이특의 공약을 크게 환영하며 민심은 이특에게로 쏠린다.

민중들에게는 이특이 마치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특은 착한 사람, 나상은 악한 사람.

평서장군 나상은 우리의 화근일세.

당시 사람들이 지어 불렀다는 노래가 뒷받침 해준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이특의 네가지 공약 중 첫번째와 관련이 있는데, '창고를 열고
양식을 내놓아 백성을 구한다.' 이 말은 곧 헐벗고 가난한 대다수의 백성들을 익주의 지주층, 호족들의
부로 구휼하겠다는 뜻이었던 것.

이에 돈 좀 있는 지주층과 호족들은 반대로 나상과 진(晉) 왕조를 지지하며 돈으로 사병을 모아 비밀리에
나상을 지원하고 협공하여 백성들을 탄압한다.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어디든 돈과 빽 좀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기득권을 잃기 싫은게 사람의 심리인 것 같다.

아무튼, 싸움으론 불리하다 판단한 나상은 계책을 쓰기로 한다. 익주가 거의 자신에게 등을 돌린 이
마당에 이특이라는 괴수만 없애버리면 반란군 역시 금새 와해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이특에게
거짓항복하여 죽이기로 한다.

거기다 이특이 진영을 퍼뜨려 놓아 병력이 분산되어 있다는 보고도 들어와, 거짓항복을 하면서 소수의
병력만이 남아있는 진영에 머무르는 이특에 기습을 가하여 죽이기로 한다.

나상은 병조종사 임예를 보내, 이특에게 거짓항복을 시켰고 자신은 은밀히 나와 날짜를 구해 이특을 쳐,
크게 격파하고 목을 베 그 수급을 낙양(洛陽)으로 보냈다. - 진서 나상전

나상은 대군을 보내 이특의 진영을 급습하여, 이틀 연속으로 싸웠다. 이특은 대패하여 잔병을 수습해
물러났으나 나상의 군이 돌아가자, 이특은 쫓아 30 여리 남짓에 걸쳐 싸웠으나, 나상은 대군을 동원해
요격했기에 이특의 군세는 패했다. 나상은 이특과 이보, 이원을 죽이고 그 시체를 태웠으며 수급을
낙양으로 보냈다. - 진서 이특전

작전은 성공을 거두고 이특은 전사한다. 서기 303 년의 일이다.

이특이 죽으면서 지도자를 잃은 봉기군도 우왕좌왕 할 것처럼 보였으나, 그게 아니었다.

이특의 셋째아들, 이웅(李雄)이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봉기군의 수장으로서 계속해서 싸움을 진행한다.

전투에서 많은 손실이 있어 잔여병력도 거의 없었고 이웅의 숙부이자 이특의 동생, 이류(李流)는


나상에게 항복하자는 말까지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이웅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나상에 맞서
분전분투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데에 성공, 성도(成都)를 함락한다.

그리고 서기 304 년 10 월, 이웅은 주위의 추대를 받아 성도왕(成都王)을 자칭하게 되는데, 이것이


파저족(巴低族)의 정권인 '성(成)'의 수립되겠다.

영흥(永興 : 서기 304 년) 원년, 10 월, 제장의 강한 요구에 따라 이웅은 존위(尊位)에 오를 것을


결의했다. 성도왕을 칭하고, 경내에 은사를 내려 연호를 건흥(建興)이라 하였다. 진(晉)의 법을 버리고
약법 7 장으로 정했다. (이후는 생략) - 진서 이웅전

나상이 아직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왜 다 끝낸 것처럼 그러나 싶은 분들이 계실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는 이미 이웅은 익주를 거의 장악한 것과 마찬가지였고 나상은 이웅과의 몇 차례의 대규모
전투에서 패해 다른 곳에 도망가 "쟤네가 익주 먹었음. 빨리 원군 보내주셈." 이런 식으로 조정에
표문이나 보내 징징대고 있는 처지였다. 참고로 서기 310 년에 나상은 이웅이 보낸 군사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나마 근거지로 버티고 있던 나상의 땅도 모두 성(成) 정권이 장악함으로서 익주는 온전히
성의 영토가 된다.

그리고 3 년 후인, 서기 307 년.

건흥 3 년, 범장생이 서산에서 소달구지를 타고 내려와 이웅은 문까지 맞이하러 나왔다. 그리고 장생을
승상(丞相)으로 임명해, 범현(范賢)이라 존칭했다. 그 장생이 제호(帝號)를 칭하도록 권했기 때문에,
이웅은 제위에 즉위했다. 건흥(建興) 3 년을 안평(安平) 원년이라 고치고 국호를 대성(大成)이라 하였다.
아버지 이특을 경황제(景皇帝)로 추존하고 묘호를 시조(始祖)로 했으며, 어머니 나씨를 태후로 했다.
(이후는 생략) - 진서 이웅전

'참람되이(진나라 입장의 기록에서의 표현)' 황제를 칭함으로서 진(晉) 왕조를 부정하는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윗 기록에서 범장생(范長生)이란 인물은 도가(道家) 쪽에서는 꽤나 유명한 도사(道士)로, 기록에는 그


나이가 백세를 넘었으며 심지어는 삼국시대 촉(蜀)의 유비를 섬겼었다고 하는데.. 불로장생이나 도사(道
士)와 같은 것이 존재하는 도교 쪽 인물이다 보니 이런 기록이 있는 듯 하다. 거기다 이름도 장생(長生 :
길게 살다)이라 그런가?

범장생 조상.

그리고 범장생은 익주의 대지주로서, 기득권 가진 지주들이 이특을 배척했을때 유일하게 이특을 지지한
지주다. 이특에게 군량미를 주기도 하고 군자금이나 필요한 인력이나 물자를 지원해줘, 선대의 이특이
신임했고 이제 그 아들인 이웅도 범장생을 건국의 일등공신으로 여기며 '문까지 맞이하러 나오는' 정도의
정성을 보이는 것이다.

서기 307 년이면 진(晉)의 연호로는 영가(永嘉) 원년. 회제(懷帝) 사마치의 치세가 시작된 해다.

제국의 한귀퉁이가 뚝 떨어져나간 셈이었지만, 당시 진나라는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성(成) 정권의 수립사건 외에도 진(晉)을 부정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봉기한 사건은 몇차례 더있었다.

그건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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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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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3/12/10 15:05:07

전편에서는 진(晉)에서 일어난 반란들 중 하나인 성(成) 정권의 수립과정을 살펴보았는데, 반진(反晉)에
의거한 반란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앞으로 몇개를 더 열거할 예정인데 그 중 최대 규모의 반란이었다고 할 수 있는 장창(張昌)의 난에 대해


써볼까 한다. 장창이란 사람이 일으킨 난을 말한다. 난이 벌어진 범위영역이나, 그 영향과 결과로
보았을땐 익주(益州)에서의 유랑민 집단의 봉기보다 더 규모가 큰 반란사건이라 할 수있다.

- 장창의 난 -

기록에는 장창(張昌)이 '만족(蠻族)' 이라 했다. 즉, 오랑캐다. 그리고 출신지가 형주(荊州)의 신야(新


野)현. 삼국지를 읽어보았으면 상당히 익숙한 지명인데, 유비가 한때 궁벽하던 시절에 다스리던 고을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장창의 출신지를 밝힌 이유는 장창이 이후 반란을 일으키고자 거병한 무대여서다.

장창이 반기를 든 배경에는 앞서 다루어본 익주에서의 유랑민 반란, 즉 이특-이웅 부자의 봉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기 303 년, 이특(李特)이 익주에서 진(晉)의 익주자사(益州刺史) 나상(羅尙)과 박터지게 싸우고 있을


무렵, 조정에서는 이 익주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익주의 인근 주(州)인 형주(荊州)에서 징병을
실시한다. 무지렁이 농민들에게 칼을 쥐어주고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등떠밀 정도로 당시 사태가 급박했던
것이다.

그러나 형주의 백성들에겐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익주라는 먼 타지까지 가서 전쟁을 해야한다는
것도 불만이거니와, 한시라도 빨리 떠나지 않으면 엄벌에 처하겠다는 조정의 엄포가 있었기 때문.

조서에서 각 군(郡), 현(縣)을 지날때 닷새 이상을 머물지 못하게 하여 임오병(壬午兵)의 불만이 많았다.
- 진서 장창전

여기서 임오병이란, 징집된 병사들을 말한다. 임오일(壬午日)에 징집되었다 하여 임오병이라 불렀다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조정에서 내린 조서에 징집된 병사들이 익주로 향하는 도중에 지나가는 군(郡)이나
마을, 고을에 닷새 이상을 머무르지 못하게 했다는 소리다. 그러니 쉴 생각일랑 말고 얼른 익주전선으로
가라는 얘기였다. 거기다 그 병력을 인솔하는 관리도 그런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발생하면 그 즉시
모가지를 날리겠다고 덧붙인다. 실로 당시 조정의 조급함이 느껴지는 기록이다.

익주(益州)와 형주(荊州)는 인접해 있는 주이긴 했으나 땅덩어리가 워낙 큰 중국인지라..

익주에서 형주는 수천 수만리 길인데 쉬지도 못하고 꼬박 강행군 할 생각에 '임오병'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레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그 무렵, 형주(荊州)의 한 고을 중 하나인 강하(江夏)군에서는 대풍작이 든다. 불만이 가득한


임오병들과는 달리 강하군 백성들은 풍작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을 터. 그러자 강하군에 풍작이 들었다는
소식에 각지를 떠돌던 유랑민들, 9 편에서 언급한 서기 298 년, 옹주(雍州)와 관중(關中)지역에서의
기근을 피해 대이동을 시작한 그 유랑민 집단이 강하군으로 몰려드는 일이 벌어진다.

유랑민들은 밥을 얻어먹기 위해 꾸역꾸역 형주로 몰려왔고 삽시간에 형주는 유랑민들이 득실거리는 땅이


되어버린다. 유랑민에다 현지인이 뒤섞이고 전장으로 향하는 도중 때마침 강하군을 지나가던 임오병들까지
합세해 형주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바로 그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반진(反晉)을 부르짖는 이가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장창(張昌)이었다.

진(晉) 왕조를 타도하자는 장창의 언변에 불만이 가득했던 임오병들과 역시 기근으로 인하여 발생한
난민들을 제대로 돌보아 주지 않은 무능한 조정에 대해 실망한 유랑민들은 품고 있던 원망과 불만을
터뜨리며 장창에 동조했고, 장창을 따라 봉기를 일으키니 그 무리가 수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서기 303
년의 일이다.

사실 장창의 반란은 거의 예고된 것이라 할 수있다. 장창에 대해 기록한 진서(晉書) 장창전(張昌傳)에는


그가 일찍이 이특(李特)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이특을 본받고 모방하여 사람들을 모아
자신의 휘하로 두며 도적 비스무리한 집단을 만들었다고 전하고 또한 점괘를 보았을 때, 훗날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병법과 무예를 연마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선 진(晉)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이특을 본받고 모방하여 사병(私兵)집단을 조직했다라는 것부터가
애초 장창이 반란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충분한 증거다. 그런데 자신의 장래를 점친 점괘결과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는 말을 했다하여 병법과 무예를 닦은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재능을
밑천삼아 아마 언젠가가 될지모를 반진(反晉) 반란을 준비하기 위한 단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디까지나
내 의견이다.

그 뿐만 아니라 장창이 평소 형주(荊州)에서의 학정에도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도 반란을


일으키는데에 한 몫했다. 앞서 말했듯 장창은 형주군 신야현 출신으로, 형주에서 나고 자랐다. 당시
형주를 다스리던 이는 신야왕(新野王) 사마흠(司馬欽)이란 황족으로 사마의의 7 남인 사마준(司馬駿)의
아들이다. 정치를 개판으로 한다는 것이 사마씨 가문의 내력(이쯤되면 정말 의심해볼만 하다)이라 그런지
이 사마흠도 학정을 일삼았다.

사마준(司馬駿) 초상화.

사마의의 7 남이다.

그런고로 장창은 진(晉)의 학정 밑에서 살아왔다는 얘기다. 진 왕조에 대한 반감은 컸을 것이고 거기다
본인의 야심까지 더하여 적당한 기회를 노리다 기어코 일을 낸 것이다.

장창과 그를 따라 벌떼같이 들고 일어난 유랑민과 임오병들의 무리는 형주를 유린하며 이를 막으려는 진군


(晉軍)과 수차례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총체적 난국이란 말은 이 시기의 진(晉)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익주, 형주라는 큰 두 주(州)가 난에


휩싸였고 한편으론 제국의 동쪽과 중원에서는 산동(山東 : 오늘날의 산동반도다)지방에서 일어난 왕미(王
彌)라는 도적이 그 일대인 청주(靑州), 서주(徐州), 연주(袞州), 예주(豫州) 등을 휩쓸고 있었는데다
나중에는 하북(河北)지방에서 마저 왕여(王如)라는 도적이 창궐하여 하북지방도 유린되기 시작한다. 물론
왕여는 약간 뒤에 등장하긴 하지만. 여튼, 이 시기의 진나라는 팔왕의 난에다 유랑민들과 이민족들의
반란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다시 장창의 난으로 돌아가서,

기세등등 해진 장창은 진(晉)을 부정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을 벌인다.


바로 황제를 칭하는 것. 다만 장창이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갖다가 황제로 세운다. 어느 고을을
공략하다가 그 마을의 관리였던 구심(丘沈)이란 사람이 인물이 좋다하여 그를 붙잡아다 성씨를 유(劉)
씨로 고치고는 한(漢) 왕조의 후손이라 선전한다. 아시다시피 한나라 황족의 성씨는 유씨다.

그리고 장창 자신도 개명하는데, 성(姓)은 이(李)씨로, 이름은 진(辰)이라 했다. 왜 하필 이씨이냐면


위에서 밝혔듯 장창은 처음에 이특(李特)을 본받고 모방하여 군사를 모았다고 했다. 장창에겐 이 이특이
롤모델을 넘어선 존경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기록인 <진서 장창전>에서도 그런 연유로 이특의 성씨인 이
(李)씨로 바꾸었다고 나와있다.

근데 반란의 주체자이자 지도자인 장창은 왜 본인이 황제를 자칭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만 팔왕의 난에서 황족들이 제멋대로 황제가 되었다 비참하게 죽은 것을 봐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아니면 출신이 오랑캐라 많은 한(漢)족들 위에 군림하기엔 꺼림직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황제를 세워 제국을 칭한 장창(이진(李辰)이라 개명했다지만 여기선 그냥 장창이라 하겠다)은


관직을 두고 제도를 정비하며 연호까지 정하여 그 뜻을 굳건히 한다.

장창 자신은 상국(相國)이 되었고 그 형제들은 각기 거기장군과 광무장군으로 임명하여 대오를 인솔케


했다. - 진서 장창전

연호는 신봉(神鳳)이라 하였고 모든 예법을 한(漢)과 같게 했다. - 진서 장창전

이렇듯 세력을 가다듬은 장창은 진(晉) 왕조와의 싸움을 계속해나간다. 여기서 일종의 심리전을 쓰는데
'조정에서는 강남의 사람들은 모두 봉기군이라 하여 모조리 살육하라 했다 카더라' 라는 식의 카더라
통신과 찌라시를 퍼뜨려 아직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로 붙게 만들어 그 무리가 무려 3
만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머리에는 붉은 두건을 두르고 양 귀 밑머리에 짐승의 털을 붙였는데, 관군(官軍)을 보기만 하면 칼과


창을 휘두르며 난도질 해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었다. - 진서 장창전

피아식별의 수단을 마련했다는 얘긴데, 그만큼 무리의 숫자가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창은 그 이후로 실로 눈부신(?) 전공을 세워나가는데 다음과 같다.

대장 황림에게 군사를 주어 예주(豫州)를 치게 하고 무창(武昌)을 침범하여 태수(太守)를 죽였다. -


진서 장창전

직접 대오를 이끌고 완성(宛城)을 쳐, 성을 함락시킨 후 전장군(前將軍) 조양을 무찌르고 평남장군(平南


將軍) 양이를 죽였다. - 진서 장창전

양양(襄陽)을 공격하여 신야왕(新野王) 사마흠(司馬欽)을 죽였다.

여기서 학정을 일삼던 사마흠을 결국 죽이고야 말았다.

이게 끝이 아니다.

양주자사(陽州刺史) 진휘를 물리치고 각 군을 점령하였다. - 진서 장창전

진원 등의 장수를 파견하여 장사, 무릉, 영릉 등의 군(郡)을 공략하니 각 고을과 군(郡)이 이를 두려워


하여 항복했다 - 진서 장창전

이 결과, 장창은 형주(荊州), 예주(豫州), 양주(陽州), 서주(徐州) 등의 여러 주(州)를 유린하고 그


세력권 하로 둔다. 그 세력이 어느정도인지는 위에 올려둔 지도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야말로 연전연승을 거둔 장창이었는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그 심각성을 절감한 진(晉)


에서는 대대적으로 토벌에 나서는데, 유홍(劉弘)이란 무장을 진남장군(鎭南將軍)으로 임명하여 지휘권을
맡긴다. 참고로 이 유홍은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을 앞두고 흥에 취해 시를 읊던 조조(曺操)에게 그런 시는
불길하다면서 간언했다가 빡친 조조에게 창에 꿰뚫려 죽임을 당한 유복(劉馥)의 손자다. 삼국지를 읽으신
분들이라면 아실터.
이때부터가 진의 반격이라 할 수 있겠다. 다음글에서도 서술할 예정이지만 이 장창의 난은 당시 중앙에서
벌어지고 있던 팔왕의 난과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다. 대권다툼을 하던 번왕들이 저들 권력다툼에 눈이
멀어 장창의 난을 등한시 한 것 때문에 초장부터 진압하지 못하고 나중에는 난의 규모가 커진 탓도 있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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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12

게시물 ID : history_12948 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추천 : 22
조회수 : 1261 회
댓글수 : 4 개
등록시간 : 2013/12/11 02:27:05

- 유홍과 그 이후의 반란들 -

태안(太安 : 서기 303 년) 원년 6 월, 남만장사(南蠻長史) 도간(陶侃)을 대도호, 참군 괴긍을 의군독호,


아문장 피초를 도전수로 삼아 진격하여 양양을 점거하였다. - 진서 유홍전

조정의 명을 받아 장창의 토벌에 나선 유홍은 형주(荊州)의 주도(州都)이자 장창에 의해 함락되었던 양양


(襄陽)을 탈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윗 기록에서 도간(陶侃)이란 인물을 강조해 두었는데, 이 도간의 행적을 보면 장군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며 진압하고 평정한 반란들이 있는데 역시 진(晉) 말기에 벌어진 것들인지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열거해보면 이렇다.

서기 303 년, 양주(楊州)에서 장창의 난에 호응하여 일어난 석빙(石氷).


석빙이 일으킨 반란의 범위.

주 무대가 양주(楊州)였다.

서기 304 년, 석빙이 토벌된 이후에 다시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진민(陳敏).

서기 304 년, 또 양주의 광릉(廣陵)이란 곳에서 자신을 '팔주도독(八州都督 : 여덟개의 주를 감독하는


직책)' 이라 칭하며 궐기한 전회.

서기 307 년~308 년, 형주(荊州)에서의 두증(杜曾), 호항(胡抗)의 반란. 두증과 호항은 원래 각기 진


(晉)의 관리와 무장(호항은 앞서 장창에게 죽은 신야왕(新野王) 사마흠(司馬欽)의 부하장수였다)
이었으나 중앙의 혼란을 노리고 반란을 일으킨 경우다.

장창(張昌)의 난과 동일시기나 이후로도 갖가지 반란이 속출했음을 알 수있다.

진(晉)에서 일어난 역대 반란들의 위치도다.

지도가 작아 잘은 보이지는 않지만 오늘날의 사천성 지역, 당시의 익주(益州)지역에

이특(李特)이라 쓰여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고 있는 장창(張昌)은 오늘날

중국의 호북성 일대에 표기되어있다. 그 밖에도 예전에 쓴 독발수기능도 감숙성 쪽에 명시되어있고,

산동지방의 왕미(王彌), 남양의 왕여(王如)와 같이 나중 영가의 난을 쓰면서 나올 인물들의 이름도 잘


찾아보면 보인다.

내친김에 도간의 이후 행보도 보자.

영가의 난이 발발한 무렵에는 형주의 강하군(江夏郡 : 11 편에서 대풍작이 들었다는 그 동네다)을


지켜내어 나중에는 동진(東晉 : 이 글에서 다루는 진(晉) 왕조가 영가의 난으로 멸망하자 그 명맥을 이은
국가다. 지금까지는 그냥 진(晉)이라 써왔는데 훗날의 사마예(司馬譽)가 건국하는 동진(東晉)과의 구별을
위해 역사에서는 서진(西晉)이라 부른다) 을 섬기어 고위직을 역임한다.
참고로 이 도간은 동진(東晉)의 시인이자 특히 <귀거래사>란 시로 유명한 도연명(陶淵明 : 이름은 도잠
(陶潛)이고 자(字)가 연명(淵明)이다. 흔히 도연명이라 부른다)의 증조부다.

도간(陶侃)의 초상화.

서진(西晉)과 동진(東晉), 양진(兩晉)을 섬긴 중신으로서

이후 강남에서 아직 기반을 잡지 못한 동진(東晉)을 내란과

외침으로부터 굳건히 지킨 인물이다.

도연명(陶淵明). 본래 이름은 도잠(陶潛)이고 자(字)가 연명(淵明)이다.

흔히 도연명이라 부른다. 도간의 증손자이기도. 증조부가 '무려' 동진(東晉)의 공신 도잠이었기에

그 음덕으로 그 역시 동진(東晉)에서 벼슬을 살지만 일찍이 품고있던 제세구민(濟世求民)의 포부와는

달리 동진(東晉)의 부정부패도 서진(西晉)과 도진개진이었는지 현실에 낙심하고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괴로워하다 <귀거래사>라는 시구만을 홀연히 남기고 낙향하여 자연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저 반란군들의 최후는 다음과 같다.

양주(楊州)의 반역자 브라더스인 석빙, 진민, 전회는 도간에게 죽었고, 두증과 호항은 저들끼리의
내분으로 두증이 호항을 살해하고 그 호항의 세력을 흡수한 두증은 토벌나온 진군(晉軍)을 차례로
격파하며 심지어는 명장(明將)이라는 도간도 한번 박살내기까지 한다. 한창 기세등등 했지만 결국에는
토벌당해 참수당하고 만다. 다만 두증은 그 이후로도 활개치다 동진의 토벌로 서기 319 년에 죽었다.

비단 장창의 난만이 끝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다시 유홍(劉弘)의 토벌로 돌아가자면..

양양(襄陽)을 탈환한 유홍은 그 공로로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임명되어 형주(荊州)의 장창군을 소탕하고


전란으로 피폐해진 형주를 재건하는 일에 나선다. 전쟁을 치루다보니 이것저것 결제할 것도 많거니와
관청의 업무나 기록이 분실되고 구멍난 것이 많았는데 유홍은 이를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산다.

거기다 백성들을 구휼하며 양잠(아시겠지만 누에를 사육하여 실을 뽑는 작업이다)과 농사를 권장했고(


백성들의 생업재건을 도왔다는 말이다) 가뜩이나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이 궁핍한 것을 감안해서 세금을
가볍게 하는 등의 훈훈한 선정(善政)을 펼쳐 형주의 백성들로부터 큰 인망을 얻는다.

이 밖에도 유홍의 선정(善政)에 대한 기록은 더있다.

난(亂)을 피해 형주로 이주한 무리가 10 만여명이 넘었고, 고향을 떠나 대부분이 궁핍하고 가난하였다.
도적이 되어 소란을 피우자, 유홍은 그들에게 밭을 지을 땅과 종자(種子)를 주었고 그 중에 재능이 있는
자는 발탁하여 등용했다. - 진서 유홍전

옛 제도에서는 두 산의 골짜기가 있는 큰 못에서 백성들이 물고기를 잡는 것을 금지했지만, 유홍은 문장을


내려 예기에서는 명산의 큰 못을 봉쇄해서는 안되고 백성과 그 이익을 공유해야 한다고 했다. - 진서
유홍전

첫번째 기록은 보시는 바 그대로고, 두번째 기록은 전란으로 인하여 식량이 부족하니 법으로 금지된 어업
(漁業)이라도 시행케 하여 백성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유홍의 뜻이다.

거기다 성품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다.

익주(益州)가 혼란해 나상(羅尙)이 별가 이흥을 파견해 양식을 요구하자, 유홍의 강기는 양식을 운반하는
길은 어렵고 형주에도 양식이 부족하다 하여 거절하고 영릉의 쌀을 주고자 했는데, 진남장군 유홍은 "
천하가 한 집안이니 서쪽을 돌아보아야 할 근심을 없애야 한다" 면서 3 만 곡의 양식을 보냈다. - 진서
유홍전

우리의 평서장군님 나상께서 이웅(李雄)과의 싸움에서 개박살이나 익주 어느 한구석에 쳐박혀 형주의


유홍에게로 SOS 를 쳤지만 유홍 밑의 강기라는 사람이 형주도 곡식이 부족하니 안되겠다는 식으로
거절하자 유홍이 나서서 대인배다운 멘트와 함께 나상을 도왔다는 기록이다. 유홍이 말한 '서쪽' 이란
서쪽의 익주를 이르는 말이다.

당시 유홍이 다스리는 형주의 유민도 10 만여명이 넘어갔다고 바로 윗 기록이 보여주는데, 그들을


먹여살릴 쌀 낱알 하나 하나가 아쉽고 부족하여 아까운 마당인데다 그때와 같이 혼란스러운 시기엔 남을
돕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었다. 지방관들끼리도 자신이 다스리는 주를 반란군으로부터 지켜내기 급급했지
다른 주를 돕기는 실상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인데, 다른 주(州)를 구원하고자 무려 3 만곡의 양식을 보낸
것은 순전히 유홍의 훌륭한 성품 덕분이라 하겠다.

유홍이 어느날 잠을 깨, 성벽의 보초가 고통에 찬 탄식을 하자 이를 듣고 불렀더니, 보초는 나이가


예순을 넘어 피로에 수척했고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유홍이 이를 불쌍히 여기고 그에게 감시 역할을
시킨 자를 꾸짖어 처분하고 보초에게 모자와 옷가지를 주면서 다른 부서로 옮겼다. - 진서 유홍전

달리 해석이 필요없다. 그냥 유홍이 짱이라는 거다.

또 이런 기록도 있다. 어떤 사람이 유홍에게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자를 뽑도록 권하자, 유홍이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황제(혜제 사마충)께서는 난리(팔왕의 난)로 고생하고 계신데 한낱 신하인
내가 어찌 음악을 만드는 자를 뽑아 음악을 즐기겠는가?" 간만에 정상적인 인물을 보는 것 같아 정신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참고로 이후 유홍(310 년에 사망)이 죽었을때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형주의 사람들 치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그를 보여주는 기록들은 많다. 필자도 그 일화들과 기록을 모두 싣고 싶지만 그랬다간 졸지에 <
유홍전>을 작성하게 생겼으니 이만 이쯤에서 줄이겠다.
- 난(亂)의 종결 -

유홍이 지휘봉을 잡은 이후로, 전세는 역전된다.

유홍이 유능한 지휘관이기도 했지만 뭣보다 장창(張昌)과 그 세력을 이루는 무리가 원래 목불식정의
무지한 유랑민들이었던 탓도 있다.

전편에서 서술했듯 장창은 황제를 옹립하고 정권을 세워 연호를 정하고 관직을 정하는 등, 나름의 제도를
갖추었다지만 그 관직에 임명된 인간들은 칭호만 장군이다 대신이다 하며 거창하게 갖다 붙인 무지렁이
농민들이나 유민들에 불과했을 뿐이다.

농사만 짓던 농민을 갖다가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하여 하루아침에 정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물고기나
잡고 살던 어부를 데려다 칼을 쥐어주고 장군으로 삼았다고 해서 병법에 능하고 싸움 잘하는 거 아니듯이,
장창이 세운 정권은 근본적으로 글러먹은 느낌이 농후했다.

무식한 자들이 넘쳐나니 그 사이에서 싸움이 붙고 불화가 일어 결국에는 분열되기 시작한다.

이 상황에서 진(晉)의 소탕이 시작되어 자중지란으로 패색이 짙어져가던 장창군은 이 일격에 풍비박산으로
깨져버린다. 그 거대했던 세력에 비해 순식간에 무너졌다.

무려 다섯여개의 주(州)에 뻗치던 그 넓던 세력권도 조정의 토벌에 급속하게 줄어든다. 몇 차례 대규모


교전을 벌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장창의 패배로 끝나고 조정에서는 토벌군 사령관 유홍의 뒤를
받쳐주고자 예주자사(豫州刺史) 유교(劉橋)란 이를 보내 동쪽에서 치고 들어가게 시켰고 유교도 선전하여
강하군을 탈환하고 장창이 세운 괴뢰국의 황제, 유니(劉尼 : 전편에서 장창이 뽑아 만든 황제 구심(丘沈)
이란 남자다. 따로 밝히지는 않았는데 구심은 성씨도 바꾸면서 이름도 '니(尼)'로 바꿨었다.)를 죽이니
장창은 하릴없이 포기하고 도주한다.

서기 304 년, 가을. 진(晉)의 연호로는 영흥(永興) 원년.

장창은 하준산(下俊山)이라는 어느 산의 숲속에 숨어있다가 추격군에 의해 체포되어 곧 처형당한다.


장창이 죽음으로서 약 1 년여간에 걸쳐 다섯여개의 주를 쑥밭으로 만들며 난리피우던 장창의 난은 종결된다.

전편의 마지막에서 밝힌 내용이기도 한데, 이 장창의 난이 팔왕의 난과 관련이 있다고 한 바 있다.

거의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팔왕의 난이라는 중앙에서의 뻘짓이 지방에서
불거진 장창의 난이 가속화 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랄까.

형주를 다스리며 학정을 일삼았다는 신야왕(新野王) 사마흠(司馬欽)을 기억하실 것이다. 사마흠은 당시


팔왕 중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과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사마경이 다른 번왕들에게
싸움에서 패해 죽자, 사마흠은 행여나 그 피해가 자신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 했다. 연좌될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래서 사마경을 죽인 번왕들 중 한명인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에게 붙기로 한다.

그러던 차에 자신의 치소(治所) 형주에서 장창의 반란이 일어나자 사마흠은 급하게 당시 대권을 쥐고 있던
사마영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그때 사마영은 장사왕(長沙王) 사마애(司馬乂)와 대치 중이었던지라
중앙에서의 병력을 함부로 뺐다간 자칫하면 힘의 균형이 깨져버릴 우려가 있었기에 사마흠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거기다 사마애가 사마영과 사마흠, 이 두 번왕이 편을 먹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시작해 관계를 의심당하자 이를 꺼려한 사마영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겉으로 보이도록
사마흠의 청을 묵살한 점도 있었다.

중앙에서의 지원을 받지 못한 사마흠은 할수없이 스스로의 병력만을 이끌고 장창을 요격하러 출전하지만,
병력의 열세로 인하여 패사하고 만다. 만약 사마영이 원군을 보내줬더라면 난 초기에 형주에만 국한되어
있던 장창의 반란을 초장에 진압하고 끝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중앙의 권력싸움이 지방에서의
반란을 외면하는 탓에 사태가 심각해진 것이다.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도 한몫 한 바있다. 조정에서 한창 불거지던 장창의 난을 두고 사마옹에게


이를 토벌할 것을 지시한다. 그때 사마옹은 옹주(擁州)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에 그 옹주(擁州)의
병력을 이끌고 가라 했다. 하지만 이 사마옹도 위의 사마영과 같은 속내였다. 다른 번왕들과 힘싸움을
하기도 벅찬 마당에 자신의 친위사병들을 제국의 변두리에서의 쓸데없는(사마옹 기준) 싸움이 소모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휘하의 옹주자사(擁州刺史) 더러 "니가 가라 하와이" 심보로 대신 등떠밀어 보낸다. 졸지에 상관


사마옹의 지시로 출전하게 된 이름없는 옹주자사(이름을 알길이 없어 그냥 직책으로 대신한다)는 어쩔 수
없이 사마옹이 내어준 병력만을 데리고 출전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사마옹이
계속해서 압박을 넣은 탓이었다. "내 소중한 병사들이니까 피해 입히지 말고 대충 싸워." 이런 식으로
행패를 부리니 옹주자사로서는 실로 어찌 할바를 모르고 전장에 나와도 임무를 수행하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결국 사마옹은 그 병력마저 다시 탈취해버린다. 온갖 농간과 훼방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그 덕에 장창은 마음껏 활개치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엔 IF 란 없다라지만, 당시 장창 반란군의 초기 규모와 팔왕이 거느리고 있던 병력들을 종합하여


감안해보면 팔왕들이 그 사태를 외면만 하지 않았더라면 장창은 초반에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전성기에
가서야 겨우 몇만명의 무리를 이루는 반란군의 초기규모가 크면 얼마나 컸겠는가. 충분히 그럴 여지가
있을 법한 얘기다.

거기다 반란군의 구성군도 일개 백성부터 유랑민, 임오병이라고 불리우는 긴급 징병대상자들 뿐이고


반면에 팔왕이 거느린 친위군들은 모두가 독발수기능, 제만년(齊萬年 : 이 글에서는 따로 밝히지는
않았는데 서기 299 년 경에 반란을 일으킨 강(姜)족이란 이민족의 우두머리다. 옹주(擁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번왕들에 의해 제압되었다)과 같은 여러 이민족들과 교전한 경험이 있으며 무엇보다 팔왕
자신들끼리 줄기차게 싸움을 벌이지 않았던가. 당시 친위군은 전투경험 많은 노련한 정예부대 수준이었을
것이다.

결국은 이 장창의 난도 팔왕의 난이라는 사태가 나라를 말아먹은 희대의 병신 뻘짓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각인 시켜준 사건이라 하겠다.

아무튼 서기 304 년 혜제(惠帝)의 대에에 진압된 장창의 난을 이후로도 반란들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307
년에 출범한 회제(懷帝) 사마치의 치세에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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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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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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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3/12/11 14:21:42
중국 역사상 한(漢)족이 이민족에게 패해 무릎을 끓은 굴욕사건이 세가지 있다.

그 하나가 정강의 변이라 하여 북송(北宋)시대에 여진족의 금(金)이 쳐들어와 북송을 쳐부수고 황제를
포함한 황족들을 포로로 잡아버린 사건이고, 두번째는 토목의 변으로 명(明)나라 때 북원(北元), 즉
몽골이 쳐들어오자 이를 요격하러 나간 황제를 포함한 휘하 병력이 대패하고 정강의 변과 마찬가지로
황제는 사로잡힌 변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가 바로 영가의 난 되겠다.

중국의 한족 왕조가 그토록 오랑캐라 멸시하던 이민족들에게 단순 패하는 수준이 아니라 나라가
유린당하고 황제가 붙잡히는 수준의 수모를 당해 이를 굴욕사건이라 치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콧대높은
한족을 짓밟아드린 주인공들은 앞서 밝힌대로 여진족, 몽골족이었다.

그렇다면 영가의 난의 경우는 대관절 어떤 오랑캐들에게 당했는가 하니, 바로 흉노(匈奴)라 불리우는


자들에게 털리셨다.

- 흉노와 진(晉) -

흉노(匈奴). 중국 북부 내지 몽골고원과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일어나 좁게는 아시아, 넓게는 유라시아


대륙까지 활동하며 '마장(馬將)'을 뜨고 다니신 유목 기마민족이다. 특히 고대 중국과는 그 관계가
변화무쌍했다. 한족의 역대왕조들은 이 흉노정책에 있어서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가며 대했고 흉노도 저들 꼴리는대로 행동하여 중국에 시비걸거나 그들 장단에
맞춰주기도 했다.

아무리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흉노란 말은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중국사, 특히 고대 중국사에
있어서는 당시 고대 중국과는 실로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던 이민족이었다. 특별히 정해진 외교관계는
없었다. 다만 고대 중국의 역대왕조들이 당시의 대외정세나 형국에 따라 흉노를 윽박지르기도 하고
필요하면 구슬리는 식의 당근과 채찍 외교로 일관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정해진 원칙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예로부터 중국은 이 골치아픈 이민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여러가지 일을 벌였다. 당장 진(秦)의 시황제(始
皇帝)가 이 종잡을 수 없는 민족과 상종조차 아니 하려고 만리장성이란 담을 쌓았고,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도 흉노를 배척하여 정벌에 나서지만 되려 패하는 굴욕을 당하는 한편, 한(漢)의 무제(武帝)도
선조인 고조 유방의 흉노 정책노선을 밟아 강성해진 흉노를 짓누르기 위해 정벌하였으며 그 유명한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서역국들과 군사동맹을 맺고 흉노를 견제하고자 하기도 했다. 하지만 힘으로
제압하기가 귀찮아지자 이쁜 궁녀(궁녀의 이름은 왕소군이라 하여 그녀의 사연은 꽤나 유명하다)를 보내
달래며 유화책을 펼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흉노와 중국이 마치 서로 대등한 입장으로 외교를 한 것처럼 보이지만(물론 흉노가 한창


강성할때는 그랬고 여러모로 중국에게 굴욕을 안겨다 주기도 했다), 중국이 워낙 대국이고 흉노는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북방의 유목민족 수준에 불과했기에, 중국이 주로 흉노에게 베풀고 하대하는
입장이었다. 하대한다고 해서 상전이 아랫것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관계가 아니라 중국이 형이 되고
흉노가 아우가 되는 식의 형제 관계(실제로 그렇게 관계를 맺기로 조약까지 맺었다. 이에 관련해서는
나중에 한번 언급할 일이 있는데 그때 써보도록 하겠다)를 맺어 살가운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통일왕조를 오랜세월 유지하며 국력이 축적된 중국과 흉노 간의 힘의 균형은 깨지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중국이 흉노를 관할하고 감독하는 입장이 되어버렸고 흉노는 더이상 중국에게 그리 큰
위협요소가 아니었다.

그리고 후한(後漢) 말에 이르러서는 조조(曹操 : 삼국지의 그 유명한 조조맞다)에 의해 흉노는 다섯개의


부락, 즉 오부(五部)로 나뉘어진다. 조조도 흉노에 관하여 신경을 쓰고 있었고 북방에서의 위험요소를
제거할 겸, 관리도 편하게 할 겸해서 그 힘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흉노를 다섯갈래로 찢어놓은 것이다.

조조(曹操). 그가 후한에서 실시한 흉노 5 부 분할 정책은

이후 삼국시대의 그가 세운 위(魏)에서도 적용되었으며,

위(魏)를 계승한 진(晉)에서도 이를 그대로 따라 실시되었다.

조조는 이 다섯개의 부에 조정에서 뽑은 감독관을 파견하여 감독하게 했고, 각 부의 흉노 왕족들의


아들들을 데려다 볼모로 삼아 중국에 두는 대신에 그 실력자들에게 여러 예물과 곡식 등의 물자들을
보내준다. 혹시나 모를 반란에 대비하여 흉노 왕족들의 왕자들을 잡아다가 인질로 삼은 것이고 또 그들을
달래기 위해 예물을 주어 달래주어 당근과 채찍 정책을 적절하게 사용한다.

그리고 삼국시대 이후에 들어선 진(晉)에서도 조조의 대흉노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여 유지한다.
여기까지가 당시 진(晉) 치하의 흉노의 상황이다.

- 유연(劉淵) -

삼국지를 보면 어부라(於扶羅)라는 흉노족 인물이 등장한다.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생소할


만한게 삼국지연의에서도 어떤 평역버전에서는 아예 안나오고 이문열의 삼국지에서나 짤막하게 한줄
나오기 때문이다. 그나마 나오는 기록도 원술(袁術)과 연합하여 조조와 싸우다 패하는 모습으로 잠깐
등장할 뿐이다.

일본에서 만든 삼국지 시리즈 게임 중 하나인 삼국지 12PK 에서는

이런 일러스트로 그려져 나왔다.

어부라의 동생, 호주천(呼廚泉)은 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되었고 조조에게 대항했던 형과는


달리 조조에게 복속되어 위에서 설명한 오부 분할 정책에 따라 다섯개의 부 중 하나인 좌부(左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죽은 어부라에게는 유표(劉豹)라는 아들이 있었다. 숙부 호주천이 좌부 흉노의 선우(單于 : 흉노 말로


부족의 우두머리를 칭하는 말이다)가 되자 유표는 좌현왕(左賢王)으로 임명된다. 여담으로 이 유표도
삼국지 연의에 등장한다.

고간(高幹)이 원군을 요청하자, “나는 조조와 원수를 진일이 없거늘 어찌하여 조조와 나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는가?” 고 하며 고간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 삼국지연의

배경은 원소와 조조의 관도대전 이후, 조조가 원소의 아들들을 토벌할 때의 일이다. 원소 측의 장수인
고간이 조조에게 패해 쫓겨가 흉노족인 좌현왕 유표에게 도움을 청하자 유표가 거절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호주천이 조조로부터 관직을 수여받아 서기 216 년, 후한(後漢)으로 넘어가 선우자리가
비자 조조에 의해 선우로 임명된다.

유표는 남흉노 왕가인 호연씨(呼延氏) 가문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유연(劉淵)이다.


위에서 쓴 소제목의 주인공이다.

호연씨가 용문(龍門)에서 아들을 점지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머리에 뿔 둘 달린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가 제사를 지내는 곳까지 뛰어 오르자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이 말을 들은 무당은
"이것은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날 밤, 호연씨는 꿈을 꾸었다. 낮에 보았던 큰 물고기가 갑자기 사람으로 변하더니 다가왔다. 그의


왼손에는 달걀 반 정도 크기의 물건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호연씨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것은 태양의 정기다. 먹으면 귀한 아들을 얻으리라."

꿈에서 깨어나 이 사실을 유표에게 말하니, 유표는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가평(嘉平) 연간, 아들이
태어났는데 왼손에 '연(淵)'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름을 '연' 이라고 지었다. - 진서 유원해(劉
元海)기

'원해(元海)' 는 유연의 자(字)다. 가평(嘉平) 연간은 위(魏)의 당시 연호로 서기 249 년~254 년을


통틀어 '연간' 이라 부른다. 대개 영웅들의 탄생설화가 그러하듯, 이 경우도 훗날 유연의 비범함을
예고하는 설화라 하겠다.

이제부터 유연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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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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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3/12/13 02:30:48

이어서 쓰는 유연(劉淵) 편.

- 유연(劉淵) 2 편 -

유연(劉淵) 삽화.

조조(曺操)의 지침으로 흉노 왕족의 아들들(특히 장남)은 필히 중국에 볼모로 보내져야 했다는 것은 앞서


언급했다. 유연 역시 아버지 유표(劉豹)가 좌부(左部) 흉노의 선우(單于 : 흉노 말로 부족의 우두머리를
칭하는 말이다)였기에 그에 따라 진(晉)으로 볼모로 보내진다.

전 편에서도 그렇고 계속해서 '볼모생활' 이란 표현을 써 볼모로 보내진 흉노왕족의 자식들이 마치 푸대접
받으며 무시당하고 살았던 것처럼 느껴지는 감이 없잖아 있다. 실상은 그 반대다.

오히려 중국의 고위층 인사나 당대의 명사(名士)들, 나아가서는 황실의 황족들과도 교류시켜주며
황제와도 면대시켜주어 상류층의 삶을 영유하게 해줬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중국에 보냈던 흉노의 우두머리들이 자신의 자식들이 중국에서
대접도 제대로 못받으며 개고생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나올지를 한번이라도 생각해본다면 답은
나온다. 이 방침의 근본적인 목적이 우호적인 외교관계의 유지임을 감안한다면 매우 당연한 조치라 하겠다.
이런 연유로 유연의 진(晉)에서의 생활도 그리 녹록치는 않았다라는 것이다. 오히려 기록을 보면
유학생활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최유(崔游)에게 가르침을 받아 유교경전과 제자백가에 능했고 문무를 겸비하여 그 이름이 조정의 대신들과
황제가 논할 정도였다. - 진서 유원해기

기록에서 묘사된 유연의 비범함은 뒤로하고, 그가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최유(崔游)란 학자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이 위에서 말한 바를 증명해준다 하겠다.

가르침을 받아 문무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유연은 기록대로 조정은 물론이고 황제, 당시는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도 유연의 이름을 들을 정도였다고 하니, 실로 그 능력이 뛰어나기는 했었는 듯 하다.

어찌나 걸출한 인물이었는지 심지어 사마염은 유연에게 오(吳) 정벌까지 맡기려는 모습도 보인다.

"유원해(劉元海 : 원해(元海)는 유연의 자(字))의 용모를 살펴보니, 비록 진(秦)의 유여(由余)나 한


(漢)의 김일제(金日磾)라도 그보다 더 나을 수는 없겠소."

왕제(王濟)가 대답했다.

"원해(元海)의 용모는 실로 말씀하신 대로이나 비단 용모 뿐만 아니라, 그의 문무 재간은 그 두 사람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폐하께서 만약 그에게 동남쪽의 일을 맡기신다면 오회(吳會 : 오(吳)나라를 의미)는
족히 평정할 것입니다."

무제(武帝)가 이를 칭찬하며 옳게 여겼다. - 진서 유원해기

왕제라는 신하는 참고로 삼국지연의에서 오(吳) 정벌 무렵에 짤막하게 나오는 왕혼(王渾)의 아들이다.
무제 사마염의 사위이기도 했다. 유연의 외모가 옛날 유여와 김일제라는 전대의 명신(名臣)들보다 낫다고
칭찬하자 왕제가 맞장구 치며 그 재능은 그들보다 한수 위라고 추켜세우는 장면이다. 그리고 당시 진(晉)
에서 계획하고 있던 오(吳) 정벌을 유연에게 맡기면 능히 해낼 것이라고까지 한다. 그리고 사마염은 진짜
그러려는 듯 옳다고 동의한다.
그 재능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은 또 있다. 사마염의 동생 사마유(司馬攸)가 유연은 훗날의 화가 될
것이니 미리 죽여 없애야 한다며 사마염에게 이를 권한 일이 그것이다. 유연이 들으면 뜬금없고 실로
당황스러운 얘기라 하겠는데, 사마유는 유연의 재능을 사전에 꿰뚫어보고 그런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물론 사마염이 죄없는 사람을 왜 죽이냐며 거절하기는 했지만. 훗날, 유연이 벌인 일들은, 이때 사마유가
사람보는 안목은 실로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었던 꼴만 되었음인데, 유연도 유연이지만 연재글에서
몇번 언급한 내용이지만 비범하기는 사마유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유연을 경계할 것을 당부한 사람들은 사마유 말고도 또 있었다. 바로 위에 싣은 기록인 사마염과 왕제의
대화와 이어지는 기록과 어느정도 이어지는 기록이다.

"신이 원해(元海)의 재주를 보건대, 오늘날 그에게 비할 자가 없을 정도라 생각됩니다. 폐하께서 만약


그의 무리들을 경시한다면, 족히 일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그에게 위엄과 권세를 내린다면 오
(吳)를 평정한 뒤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봐 두렵습니다. 본래 유연은 다른 민족이니 품고 있는 마음이
필시 다를 것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는 것은 신의 생각으로는 매우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만약
그가 오(吳)에 머무르며 강남의 천험함을 바탕으로 삼는다면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제(武帝)가 묵연(默然 : 침묵)하였다. - 진서 유원해기

무제 사마염에게 저렇게 진언한 이는 공순(孔恂)과 양요(楊珧)라는 신하들이다. 양요(楊珧)는 꽤 낯익은


이름인데, 앞서 양(楊)씨세력을 다룰때 나온 양준(楊駿)의 동생임을 아실 것이다.

기록을 해석하자면, 오(吳)를 정벌하려 함에 있어서 사마염은 유연에게도 그 일을 맡기려 했던 것 같다.


그만큼 유연을 믿었다는 뜻이다. 그러자 공순과 양요가 사마염을 만류한다. 그리고 "유연은 속내를 알
수없는 놈이니 중용하지 말 것이며 그놈에게 병력을 줬다가, 오(吳)를 이긴 후에 그놈이 옛 오(吳)나라
땅에서 강남의 험난한 지형을 끼고 반란을 일으키면 어쩔 거임?" 이런 식으로 되묻기까지 한다.

유연을 둔 평가가 당대에도 이렇게 엇갈리는 것으로 봐선 유연이 가늠할 수 없는 그릇이기는 했는


모양이다.

대개 역사서의 인물평은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고 할 수있다.

어느 재능있는 인물을 두고 얘기했을때,


모든 기록이 칭찬일색으로 일치한 경우.

반대로 칭찬 <-> 무능력했다로 평가가 극과 극인 경우.

마지막으로 그 능력은 인정하나, 그 인물의 속내나 됨됨이는 알 수가 없다.

유연이 마지막 경우가 아니었나 싶다. 어쩌면 훗날 유연에 의해 벌어질 일들은 이때부터 예언되고
있었다고 볼 수있다.

아무튼, 유연의 이러한 진(晉)에서의 볼모생활도 아버지 유표(劉豹)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마땅히 그
후계자로서 죽은 선친의 뒤를 이어 좌부 흉노의 지도자 노릇을 해야 했기에 유연은 볼모생활을 마무리
짓고 다시 흉노의 땅으로 귀환한다. 유표의 정확한 사망년도는 알 수는 없으나, 다만 태강(太康 : 진
(晉)의 연호로, 서기 280 년~289 년, 약 10 여년간 사용된 연호) 말엽에 진(晉)이 흉노 5 부(部)에
설치한 도위(都尉) 중 하나인 북부도위(北部都尉)가 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그 무렵이 아닐까
싶다.

위에서 서술한 '도위(都尉)' 라는 직책은 진(晉)이 조조가 설치한 기존의 흉노 5 부에다 이를 좀더


수월하게 감독하고자 만든 직책으로, 유연이 그 중 하나인 북부도위(北部都尉)가 된 것이다.

흉노의 지도자 겸 진(晉) 왕조의 관직을 받아 자신의 부족을 다스려 나간 유연의 통치가 훌륭했는지,
무제 사마염의 사망 직후, 당시 대권을 틀어쥔 양(楊)씨 세력으로부터 그 실적을 인정받아 나중에는 흉노
5 부 전체를 총괄하는 '오부대도독(五部大都督)' 으로 승진한다.

이 양(楊)씨 세력이 누구를 의미하는 지는 이 연재글을 처음부터 읽어보신 분이라면 아시리라 믿어 굳이


따로 설명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팔왕의 쟁패가 시작될 무렵, 진(晉)의 연호로는 원강(元康) 말년, 즉 서기
298~299 년 경에 유연은 다시 진(晉)으로부터 영삭장군(寧朔將軍)이란 벼슬을 하사받아 진나라의 영내인
기주(冀州)라는 주(州)의 주도(州都), 업(鄴)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는다.

지도를 보면 여러 주(州)들 중에 '기주(冀州)'라는 주가 보인다. 그리고 그 주내에 표기된

업(鄴)도 볼 수있는데, 유연이 임명된 영삭장군(寧朔將軍)이라는 장군직은 이 업(鄴)을


지키는 전문 벼슬직이라 할 수 있다.

서술한대로 한창 진(晉)이 팔왕의 난 시기에 접어들 혼잡한 무렵에 유연은 진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유연은 덩달아 팔왕의 난에 참전하게 된다.

유연이 지키는 업(鄴)은 본래 팔왕 중 한명,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의 근거지였다. 임지는 그의


작위가 보여주듯이, 익주(益州)의 주도(州都), 성도(成都)였는데, 각 번왕들이 각지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차에 사마영은 기주의 업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은 터였다. 다른 번왕들과의 싸움으로 병력이
감소하던 사마영은 이를 메꾸기 위해 이때부터 유연과 같은 이민족들을 끌어들여 용병으로 삼기 시작한다.
이는 꼭 사마영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 당시 번왕들 모두가 그러했다.

유연 같은 흉노(匈奴)족 뿐만 아니라 북방에 많던 선비(鮮卑)족, 오환(烏丸)족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들이


이 팔왕의 난 무렵에 용병으로서 유입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용병으로 기용되어 중원의 진(晉)으로 흘러들어온 여러 이민족들이 난이 끝난


직후에도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눌러앉아 세력을 꾸렸다는 결과를 낳았다라는 점에서
강조할 만하다.

삼국을 통일한 통일제국으로 주변 이민족들에게 군림해오던 강자 진(晉)이 내란으로 쇠퇴하는 것을 난


(亂)에 참전하여 직접 보고 느낀 여러 이민족들에게 진(晉)의 붕괴는 많은 것을 시사했다.

한마디로 이민족들에게 "아, 얘네도 별거 아니네. 그럼 좀 건드려볼까?" 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다.


한순간에 호구가 되어 얕잡아 보인 진(晉)은 이후로 이민족들의 거듭된 유입을 허락하다시피 한 꼴이 되어
나중에 벌어지는 영가의 난 무렵에는 눌러 앉아있던 이민족들이 저마다 세력을 이루는 결과를 불러왔다.

유연도 마찬가지다. 사마영의 휘하의 부하장수로서 참전하여,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꼈을 터이다.

자신의 부족, 흉노를 군림하는 종주국으로서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수하고 선진문물과 제도를 보유했던
선진국 진(晉)을 성장하는 청소년기에 경험하며 그 위압감에 눌려 경외심까지도 생겼을 유연이다. 하지만
그 잘나가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저들끼리의 내분으로 흔들리고 있으니 기분이 어떠했을까.
맥수지탄의 심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허무감은 들지않았을까 싶다. 한때라고는 하지만 잠시나마
몸담고 있던 나라였으니까. 그러나 유연도 이민족. 어디까지나 진(晉)은 외국에 불과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한탄할 일은 그 나라의 백성인 한(漢)족의 몫이지, 이민족일 뿐인 유연에게는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다만 잘나가던 나라 하나가 망해가는 것을 보고 느꼈을 것은 다만 하나, 이 당시 여타
이민족들이 품었을 생각, "아, 얘네도 별거 아니네."

성도왕 사마영 휘하에서 활약하던 유연은 사마영이 대권을 잡아 집권하자 그에 따른 벼슬까지도 받고 거의


사마영의 사람이 되었는 듯 했다. 만약 외부로부터의 사건 하나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유연은 꼼짝없이
사마영에게 잡혀 나중에 죽는 사마영의 최후까지도 같이 했을 지도 모를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외부 사건이란, 바로 흉노 땅에서의 일이다.

혜제(惠帝)가 실권하여, 도둑이 봉기하자 원해(元海)의 종조부인 북부도위(北部都尉) 좌현왕(左賢王)


유선(劉宣) 등이 몰래 의논하였다.

"옛날 우리 선인(先人)들은 한(漢)과 더불어 서로 형제의 맹약을 맺어 근심과 편안함을 함께 하였다. 한


(漢)이 망한 후로는 위(魏), 진(晉)이 대신하여 흥하니 우리 선우(單于)에게 실속없는 칭호를 붙여
척토지업(尺土之業 : 아주 작은 땅)조차 다시는 가지 못하여, 여러 왕후(王侯 : 왕과 제후)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편호(編戶 : 호적에 편제된 일반가호)와 같은 처지로 떨어진지 오래다. 이제
사마씨의 골육들이 상잔하여 사해(四海)가 시끄러우니, 바로 지금이 흥방복업(興邦復業 : 나라를 흥하게
하여 회복함) 할 때라 할 수 있다. 원해(元海)의 자질과 그릇이 절륜하고 재간과 도량이 걸출하니, 만약
하늘이 선우(單于)를 회숭(恢崇 : 더욱 넓히고 높게 하려함)하려 하지 않았더라면 끝내 이런 사람을
헛되이 낳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함께 은밀히 의논해 원해(元海)를 대선우(大單于)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그 일당인 호연유(呼延


攸)를 업(鄴)으로 보내 그 모책을 고하였다. 원해는 이를 듣고 승낙하여 사마영(司馬穎)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회장(會葬 : 모여서 장례를 치름)하기를 청했으나 사마영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유연은 호연유에게 명하여 먼저 돌아가서 5 부(五部)를 불러서 집결시키게 하고 의양(宜陽 : 사주


(司州)의 어느지방)의 여러 호(胡)를 끌어모아 겉으로는 사마영에게 호응한다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그를
배신하고자 하였다. - 진서 유원해기

해석하면 이렇다. 유연의 종조부인 유선(劉宣)이 여러 흉노 족장들과 모여 논의를 했다. 그 내용은 알기


쉽게 풀이하자면..

"위(魏)-진(晉)이 세워진 이후로, 그들 때문에 우리 흉노는 쇠퇴하여 지도자라는 작자는 진(晉)의


관직이랍시고 받아 고향 땅으로 돌아오지도 못한채 애꿎은 외국에서 뻘짓 중이고 흉노왕족이나
일개백성이나 너나 할 것 없이 죄다 거지가 된 마당이다. 지금 사마씨의 진(晉)나라가 개판 오분 전 꼴로
정신도 못차리는 판국이니 우리 다시 유연을 대선우로 추대해서 잘살아봅세."

그래서 호연유(呼延攸 : 유연이 남흉노의 왕가인 호연씨와 결혼했음은 전편에서 언급했다. 이 호연유는
유연의 아내인 호연씨의 동생으로, 유연의 처남이 된다)라는 사람을 보내 유연을 모셔오게 한 것이다.

하지만 기록에 나와있는대로 그냥 무턱대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사마영이 안받아줄 것 같으니까,


고향 친지 중에 어느 한사람이 죽어 장례를 치르러 가겠다고 핑계를 댔는데 그것마저 거절당한다.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 우선 처남 호연유에게 먼저 돌아가 흉노 5 부를 집결시켜두라 이르고는, 자신은


사마영에게 사주(司州 : 당시 수도 낙양과 그 일대의 지방을 이른다)에서 다른 병력들을 모집하여
돕겠다고 구라를 쳤지만 배신을 맘먹고 있었다라는 것.

사실상 이때부터가 유연의 본심이 드러나는 때라 할 수있다. 그동안 몸소 팔왕의 난을 겪으며 진(晉)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여 훗날의 야망을 이룩하기 위하여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리고 그
야망이 흉노의 재건과 진(晉)을 몰아내는 것임을 우리는 암묵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병주자사(幷州剌史) 동영공(東嬴公) 사마등(司馬騰)이라는 황족과 안북장군(安北將軍) 왕준(王浚)


이라는 장군 둘이서 합세하여 당시 집권자였던 사마영에 대항하여 싸울 때의 일이다. 사마등(司馬騰)은
사마의의 동생인 사마규의 손자이며,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의 동생이고, 왕준은 병주(幷州)
라는 주의 군벌이었다. 병주가 어디있는 주(州)인지는 위에 첨부한 지도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병주자사(幷州剌史) 동영공(東嬴公) 사마등(司馬騰)과 안북장군(安北將軍) 왕준(王浚)이 군대를 일으켜


사마영을 치니, 유원해(劉元海)가 사마영에게 말했다.

"지금 두 진(鎭 : 사마등과 왕준을 이른다)이 발호(跋扈 : 제멋대로 날뛰며 행동하다라는 뜻)하여
무릿수가 십만 남짓에 달하니 숙위병과 도읍 가까이의 사서(士庶 : 사족(士族)과 서민을 의미, 즉 병력)
로는 능히 막아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전하를 위해 제 근거지로 되돌아가 흉노 5 부(五部)를
설득하여 국난을 돕게 해 주십시오."
사마영이 말했다,

"5 부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고 보증할 수 있겠는가? 설령 동원할 수 있다 해도 사마등과 왕준이


동원한 선비(鮮卑), 오환(烏丸)이 강하고 날래니 어찌 쉽게 당해낼 수 있겠는가, 나는 승여(乘輿 :
임금의 수레란 뜻으로 황제를 의미한다)를 받들어 낙양(洛陽)으로 되돌아가 이들의 기세를 피하고 천천히
천하에 격문을 돌려 이들을 제압하고자 한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원해(元海)가 말했다.

"전하께서는 무황제(武皇帝 : 사마염)의 아들로서 황실에 공훈을 세우고 위엄과 은혜가 빛나 사해(四海)
가 전하의 풍도를 흠모하니, 어느 누가 전하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몸을 던질 것을 생각지 않을 것이며,
어찌 흉노 5 부를 동원하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왕준은 어린 놈의 풋내기이고 사마등은 전하와는 촌수 가
먼 남일 뿐이니 어찌 전하와 더불어 다투어 경쟁한다 하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전하께서 만일 업(鄴)을 떠나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낙양엔들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낙양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전하께 다시는 위엄과 권세가 없게 될 것이니, 전하께서
내린 격문을 어느 누가 받들겠습니까. 게다가 오환족과 선비족의 용맹함이 우리 흉노 5 부보다 낫지
않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군사들을 독려하고 달래시어 진정시키십시오. 저는 전하를 위하여 흉노 5 부 중,
2 부의 군사로써 사마등의 무리를 꺾고 남은 3 부의 군사로써 왕준을 붙잡아 그 목을 베어 효수할 것이니,
머지않아 두 놈의 머리를 매달 수 있을 것입니다."

사마영이 기뻐하며 원해(元海)를 북선우(北單于),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 : 승상을 보좌하는 직책으로,


당시 사마영은 승상(丞相)이었다)로 임명하였다. - 진서 유원해기

해석하자면 이렇다.

유연 : "야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너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지금 흉노 5 부를 이끌고 와서 네놈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어!"

사마영 : "흉노 병력으로 가능할까? 쟤넨 선비족에다 오환족까지 거느리고 있어서 우리 만으로는


안되겠는데. 차라리 후퇴한 후에 낙양에서 격문 띄워서 병력을 모집한 후에 다시 싸우는게 나을듯."

유연 : "당신이 낙양으로 후퇴해서 격문을 띄워본들 싸움도 피하고 도망온 겁쟁이 놈의 격문을 누가
보겠습니까. 되도 않은 소리요. 글고 우리 흉노 무시마시오. 같은 오랑캐라 해도 격이 있소이다. 선비나
오환따위는 아침 해장국 거리에 불과한 놈들이니 내가 흉노 5 부의 병력을 이끌고 와서 사마등, 왕준
머리를 날리는 것이나 구경하시오."

사마영 : "우왕, 굳ㅋ"

이리하여 유연은 비로소 사마영의 허락을 받고 고향 흉노 5 부(部)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종조부
유선을 필두로 한 흉노 족장들의 추대를 받아 서기 304 년, 대선우로 추대되니 흉노족 전체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원해(元海)가 좌국성(左國城)에 이르자 유선(劉宣) 등이 그에게 대선우(大單于)의 호칭을 올렸다. 20 일


사이에 무리가 이미 5 만에 이르렀다. 이석(離石 : 병주(幷州)의 어느 지방)에 도읍했다. - 진서
유원해기

그리고 더나아가서는 그해(서기 304 년) 10 월에는 아예 일을 벌이는데, 이건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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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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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추천 : 24
조회수 : 1142 회
댓글수 : 2 개
등록시간 : 2013/12/13 16:50:11

- 흉노의 한(漢) 건국 -
흉노 땅으로 돌아와 부족의 추대로 대선우(大單于)가 된 유연(劉淵)이 먼저 하려했던 일은 한때 자신이
상전으로 모시던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을 돕는 것이었다.

유연이 흉노의 5 부(部)를 원군으로 끌고 오겠다는 핑계로 고향 땅으로 도주해버린 이후, 사마영은 왕준
(王浚)의 고용한 선비(鮮卑)족의 공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여 근거지 업(鄴)도 잃고 낙양(洛陽)으로까지
혜제 사마충을 끼고 후퇴하는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다. 마치 유연이 사마영 세력의 모든 것이었던 것처럼,
모양빠지게 유연이 빠지자 마자 처참한 패배를 당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이 소식을 접한 유연은
이렇게 말한다.

"내 말을 듣지 않더니 도리어 스스로 달아나 뿔뿔히 흩어지니 참으로 형편없는 놈이로구나. 그러나 내가
그와 더불어 했던 말이 있으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 진서 유원해기

사마영을 뜨자마자 대차게 까버린 유연이다. 그래도 알던 정 보던 정이 있었는지 돕고자 마음먹고 왕준의
용병대인 선비(鮮卑)족을 공격하려 들자, 일찍이 유연을 추대한 장본인이자 종조부이기도 한 유선(劉宣)
이 나서서 만류한다.

"진(晉)이 무도하여 우리를 노예처럼 부려먹으니, 이 때문에 우현왕(右賢王) 유맹(劉猛)이 분을 이기지


못하여 거병하였으나, 진(晉)의 기강이 아직 해이해지기 전이라 대사를 이루지 못하고 타계했으니 이는
선우(單于)의 치욕입니다. 하지만 이제 사마씨(司馬氏)의 부자형제들이 스스로 골육상잔하니, 이는
하늘이 진(晉)의 덕을 미워하여 우리에게 천하를 주려는 것입니다. 선우(單于)께서는 몸소 덕을 쌓고
이제 바야흐로 우리 방족(邦族 : 나라와 종족)을 흥하게 하고 옛날 호한야(呼韓邪) 선우(單于)의 업(業)
을 회복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니 선비(鮮卑), 오환(烏丸)을 외원으로 삼아야지, 어찌 그들과 서로
다투면서 도리어 구적(仇敵 : 사마영을 가리킨다)을 돕는단 말입니까! 이제 하늘이 우리 손을 빌리려
하니 이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하늘을 거스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며, 중론을 거역하는 것은
유의하지 않습니다. 하늘이 주는데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입습니다. 원컨대, 선우께서는
의심하거나 주저하지 마십시오." - 진서 유원해기

해석하자면 이렇다.

우현왕(右賢王) 유맹(劉猛 : 흉노의 족장으로서 서기 277 년에 기록의 내용대로 진(晉)의 횡포에


분노하여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여 죽었다)이란 흉노의 지도자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아직 진(晉)이
강성했기에 실패했었으나, 이제 지금은 진(晉)이 혼란하니 때가 좋으며 흉노족을 강성케 할 시점이라
천명하고 있다.
그리고 진(晉)을 공격하는 것을 '하늘이 진(晉)의 덕을 미워하여 우리에게 천하를 주려는 것' 이라
표현함으로서, 그 명분과 타당성을 주장한다. 흉노는 이미 자신의 적을 진(晉)으로 못박아 두고 있던
것이다.

거기다 유연이 사마영을 도와 선비족과 오환족을 치려하자, 선비, 오환족과는 오히려 친하게 지내야지
어째서 진(晉)을 도우려 하냐며 반대하고, 마지막 문구에 '하늘을 거스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고
주는데도 취하지 않으면 재앙을 입는다' 라는 말은 왕(王)이나 황제(皇帝)를 칭하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대개 역성혁명 세력이나 혁명의 무리가 천명하고 줄곧 내세워 관용적으로 쓰이곤 하는표현이다. '지금의
군주가 덕이 없고 무능하니 하늘이 우리에게 새로운 군주를 세우라 명하였기에 이렇게 군주를 새로
세운다' 이런 식이다.

솔직히 어디까지나 혁명세력이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고 타당함을 알리기 위한 말이다. 행동으로 보이기
전에 거치는 절차의식이랄까. 이는 고대 중국이나 중세, 근세를 구분할 것 없이 역성혁명으로 왕조나
정권이 교체될 때 항상 이 표현을 써 그 혁명세력의 명분과 그 타당함을 광고하곤 했다.

유선도 이런 개념에서 유연에게 왕(王)이나 황제(皇帝)를 칭할 것을 은연 중에 권한 것이다.

유선(劉宣)의 이와같은 진언에 유연도 응한다.

"옳은 말입니다. 대장부로서 마땅히 숭강준부(崇岡峻阜 : 높고 험한 산등성이)가 되어야지, 어찌 부루


(培塿 : 작은언덕)가 되겠습니까. 어찌 제왕(帝王)이 늘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 하겠습니까. 우왕(禹王)
은 서융(西戎)에서 나오고 문왕(文王)은 동이(東夷)에서 났으니, 오로지 덕이 있는 자에게 천하가 돌아갈
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군사를 보면 모두 한명이 진병(晉兵 : 진나라 병사) 열 명을 감당할 수 있으므로,
북을 치며 진격한다면 진(晉)을 꺾고 어지럽히는 것은 마치 마른 나뭇가지를 꺾는 것처럼 쉬울 뿐이니,
위로는 한고(漢高 : 한 고조 유방)의 업을 이루고 아래로는 위씨(魏氏 : 삼국시대 위나라)의 업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진인(晉人)들이 꼭 우리와 같은 마음은 아닙니다. 한(漢)이 오랫동안
천하를 소유하여 인심에 은덕을 맺었으니, 이 때문에 소열(昭烈) 고작 한 주(州) 땅에서 기구한
처지였음에도 천하에서 능히 맞설 수 있었습니다. 나 또한 한씨(漢氏)의 외손이며, 흉노와 한(漢)은
일찍이 서로 형제의 맹약을 맺었으니, 형이 망하면 동생이 잇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한(漢)을 칭하며 후주(後主)를 추존한다면, 인망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진서 유원해기

기록이 꽤나 길어졌는데 상당히 중요한 발언이다.


기록 첫 줄과 같이 '싸나이라면 포부를 크게 가져야지' 같은 문구는 제쳐두고, 그 다음부터가 본론이다.
기록만 봐도 이해될 법한 문구들은 생략하고 필자 기준에서 해석이 요구된다 싶은 것들만 풀이해보겠다.

'우왕(禹王)은 서융(西戎)에서 나오고 문왕(文王)은 동이(東夷)에서 났으니, 오로지 덕이 있는 자에게


천하가 돌아갈 뿐입니다.'

-> 우왕(禹王)과 문왕(文王)은 각각 고대 하(夏)나라와 주(周)나라의 성군이요, 명군(名君)들이다.


그래서 후세에까지 그 이름이 칭송받는 임금들인데, 그런 임금들이 한(漢)족이 멸시하고 낮춰보는 서쪽
동쪽 변방 오랑캐 땅 출신들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없으며, 오로지 덕이 있는 자가
천하를 얻을 뿐이고 하물며 같은 오랑캐 취급받는 나라고 황제, 왕 노릇 못하겠느냐고 하는 내용이다.

주(周) 문왕(文王). 폭군의 대명사가 된 고대 은(殷)의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周)의 기틀을 다지고 융성케 한 명군(名君)이다.

하(夏) 우왕(禹王). 흔히 '우임금' 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우수치(大禹治水)라 하여 자주 범람하는 황하(黃河)를 잘 다스려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 덕에 임금이 되어 흔히 말하는 요순시대의 뒤를 이어 태평성대를 이룩한 군주다.

'진인(晉人)들이 꼭 우리와 같은 마음은 아닙니다. 한(漢)이 오랫동안 천하를 소유하여 인심에 은덕을
맺었으니, 이 때문에 소열(昭烈)은 고작 한 주(州) 땅에서 기구한 처지였음에도 천하에서 능히 맞설 수
있었습니다.'
-> 진나라 백성들은 우리끼리 황제다 왕이다 하며 세운 나라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진(晉)의 백성들의 인심을 얻어야 한다고 결론을 도출지었고, 민심을 얻어 성공한 사례를 드는데,
사례의 주인공은 한(漢)의 소열(昭烈), 한(漢)은 흔히 아는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한(漢)
나라가 아니라 삼국시대 촉한(蜀漢)을 의미한다. 고로 소열(昭烈)은 촉(蜀)의 군주, 유비(劉備)다.
소열(昭烈)은 유비의 시호다. 즉, 소열제(昭烈帝)가 유비의 시호가 되겠다.

아시다시피 유비는 익주(益州)에다 촉(蜀)을 세워 삼국의 한축을 마련한 군주다. 위(魏)나 오(吳)가
여러개의 주(州)를 거느린 반면에 촉(蜀)나라는 겨우 익주(益州) 한개 주 뿐이었는데, 그런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삼국의 한 국가로서 팽팽하게 대결을 벌이지 않았느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유비가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민심을 얻는 것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나 또한 한씨(漢氏)의 외손이며, 흉노와 한(漢)은 일찍이 서로 형제의 맹약을 맺었으니, 형이 망하면
동생이 잇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한(漢)을 칭하며 후주(後主)를 추존한다면,
인망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여기서 유연은 자신이 한씨(漢氏)의 외손이며, 흉노와 한(漢)은 서로 형제의 맹약을 맺은 바가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의 유래는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흉노를 토벌할 때의 일에서 비롯되었다.
한(漢)나라 초 무렵에 흉노의 묵돌(冒頓)이라는 선우(單于)가 있었는데 이 묵돌이 평소 한(漢) 왕조에
위협이 되자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묵돌을 토벌하고자 했다.

하지만 싸움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오히려 유방은 백등산(白登山)이란 곳에서 흉노의 병력에 포위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고민 끝에 묵돌에게 화친을 제안하여 이 위기상황을 벗어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패자 쪽에서 건네는 화친이다 보니 조건이 실로 굴욕적이었다. 여러가지 조항들이


있었지만, 그 중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바로 '한(漢)과 흉노는 형제의 맹약을 맺는다.' 였다.

말이 좋아 형제지, 당시 한(漢)으로서는 한낱 변방 오랑캐 따위에게 처참한 굴욕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얹은 조항으로 한(漢)은 흉노에게 예물과 공주를 바치기로까지 합의 본지라, 실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형식상으로는 그나마 한(漢)이 형이고, 흉노가 아우가 되기로 해 최소한의
자존심은 살렸다지만, 이건 그냥 그깟 형식적 관계 따위는 흉노가 양보해줬다고 봐도 무방하지 싶다.

유연은 바로 과거 이 때의 일을 상기하면서 자신이 한씨의 외손(外孫 : 솔직히 왜 외손이란 표현을


썼는지는 필자도 잘 모르겠다. 외손이면 외가 얘기가 나와야 하는데.. 하지만 한(漢)의 후손이라 자처한
표현 임은 분명하다)이라 자칭하고, 형인 한(漢)이 망했으니 그 뒤를 동생인 흉노가 잇는 것이 맞지
않냐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밝히지 않았던 내용이기도 한데, 여기서 기인하여 한(漢) 왕조의 성씨인 유(劉)씨를
성으로 하는 흉노족이 생겨난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명색이 형제지간이니까 성씨도 응당 같아야 하지
않겠냐는 얘기도 있었고 뭣보다 유방이 황실의 공주 한명을 묵돌에게 시집보내, 그 이후로 흉노왕족 중
일부는 이것을 이유들어, 자신의 성씨가 유(劉)씨라고 자처하고 다녔다고 한다. 당장 유연(劉淵)만
봐도 성씨가 유(劉)씨다. 유연의 아버지 유표(劉杓)도 그렇고.

다만, 유연의 조부 어부라(於扶羅)나, 종조부 호주천(呼廚泉)은 성씨가 유(劉)씨가 아닐 뿐더러 정확한


성씨까지도 기록에 전해져 내려온다. 어부라, 호주천의 성은 '난제(欒提)'. 아마 흉노식 성씨로
추정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어부라(於扶羅) 본인은 자신의 성을 유씨로 쓰지 않았지만 정작 그 아들인
유표(劉杓)에게는 성을 유씨로 붙여주었다. 그리고 호주천은 위에서 말한 그 논리를 근거들어 자기
가문은 유(劉)씨 성을 쓰기로 정한 장본인인데도 정작 본인은 쓰지 않았으니 실로 궁금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 논리는 이후 유연이 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를 한(漢)으로 정하는 계기가 된다. 동생이 형의
국호를 계승했다는 원리였다. 그리고 비단 국호 뿐 아니라 그 정통성까지도 계승했다고 역설하기까지
하는데, 그 계보는 다음과 같다.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 왕조 - 삼국시대에 유비(劉備)가 건국한 촉한(蜀漢) - 유연(劉


淵)이 세울 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 왕조야 두말할 것 없이 중국 역사상 수없이 등장한 한(漢)


나라들의 원조인지라 굳이 따로 설명은 않겠다. 다만 설명할 것은 유비의 한(漢) 왕조 부터다.

삼국지에도 나와있듯이, 유비(劉備)는 자신이 한(漢) 왕조 황족의 후예라고 자처한 인물이다. 실제로 그
족보가 맞는지 틀린지는 논외로 두고 훗날인 서기 220 년, 위(魏)의 문제(文帝) 조비(曺丕)가 후한(後
漢)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를 몰아내고 후한(後漢)을 멸하자 유비는 자신이 한나라 황족의 후예임을
내세워 후한(後漢)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한(漢)으로 정한다. 역사에서는 구별을 위해 흔히 '촉한
(蜀漢)' 이라 부른다.

촉한(蜀漢)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


삼국지연의에서나 다른매체에서 자주 접한 인물인지라 굳이 따로 설명을 적지는 않겠다.

그리고 유비(劉備)의 한(漢)이 멸망한지 약 40 년 후, 똑같이 유(劉)씨 성을 쓰며 역시 한(漢)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유연(劉淵)이 앞선 두개의 한(漢) 왕조를 계승함으로서 진(晉)을 부정하고 인심을
얻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유비의 아들이자 촉한(蜀漢)의 제 2 대 황제였던 유선(劉禪), 즉 후주(後主)를 추존한다면 인망을


얻을 것이라고 유연이 말하는데, 이 역시 위에서 설명했듯 두개의 한(漢) 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원리다.

선제(先帝)를 제사지내고 추존하여 그 황제의 시호나 묘호를 정하는 일은 해당 왕조에서 그 뒤를 이은


황제가 해야할 일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후임 황제는 선제(先帝)를 계승했다는 명분만으로도 당연히
그 권한과 명분을 가질 수 있다.

유비가 그러했다. 조비에 의해 쫓겨난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를
제사지내고 추존하여 '민제(愍帝)' 라 시호를 올림으로서, 촉한(蜀漢)만이 후한(後漢)을 계승하는
정통왕조이며, 헌제(獻帝)를 추존하고 제사지내는 유비 본인만이 헌제의 뒤를 잇는 정통 황제라고
만천하에 보란듯이 천명한 것이다.

유연도 똑같았다. 유비가 그랬듯, 유연도 훗날, 한(漢)을 건국한 후에 전대의 한(漢) 왕조인 촉한(蜀漢)
의 마지막 황제, 유선(劉禪)을 효회황제(孝懷皇帝)라 시호를 올려 추존하고 제사를 직접 거행함으로서 그
정통성을 표면화 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유연은 '인망을 얻을 것' 이라고 강조했는데, 이건 한(漢)이라는 국호만으로도 얼마나 큰


파급효과를 지니고 있었는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도 중국민족을 한(漢)족이라 부르듯, 고조 유방이 세운 이 한(漢)이라는 나라가 갖는 무게감은


실로 컸다.

진(秦) 왕조 이후로 들어서, 장장 몇백년간 존속되어 오던 국가였던데다 한(漢)족, 한(漢)족 문화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도 이 한나라 때부터로, 중국의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가
융성하여 근본적으로 그 기틀이 확립되었던 때였던 만큼, 이 한(漢)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과거 전성기의
융성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여 일종의 회귀본능을 건드려 향수에 젖게 만들곤 했던 것.

진(晉) 왕조 치하에서 혼잡스러움과 학정에 시달려 왔을 백성들에게서 한(漢)을 계승한 국가라는


타이틀만으로도 많은 호감과 지지를 얻어낼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유선(劉宣)과 유연(劉淵)의 뜻은 통하여, 근거하고 있던 이석(離石)에서 좌국성(左國城)으로


근거지를 옮기니, 많은 이들이 따랐다고 기록은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서기 304 년, 10 월. 진(晉)의 연호로는 영흥(永興) 원년.

유연(劉淵)은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 왕(王)을 자칭하니, 이것이 흉노의 한(漢) 정권의 시작이다.

진대(晉代) 말기의 이민족 분포도.

흉노를 비롯하여 선비(鮮卑), 오환(烏桓), 강(羌), 저(氐), 갈(羯) 등 여러 이민족들이 눈에 띄는데

이들 모두가 우후죽순으로 나라 하나씩을 건국하는 주역들이다.

이 중에 오부흉노(五部匈奴), 즉 흉노 오부라 표시 되어있는 영역권이 보인다.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한(漢) 정권 초기의 영역과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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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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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노의 한(漢) 정권 -

재탕하는 흉노 한(漢) 정권의 영역.

정권 초기에는 흉노 5 부의 세력권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서기 304 년, 10 월. 좌국성(左國城 : 병주(幷州) 부근)에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한(漢)이라 칭하고


연호를 원희(元熙)라 정한 유연(劉淵)은 즉위문을 하령한다.

"옛날 우리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가 신무(神武)함으로 천하의


뜻에 응하여 대업을 크게 열고, 태종(太宗) 효문황제(孝文皇帝)(->한(漢) 문제(文帝) 유항(劉恒))는
또한 명덕(明德)으로서 나라를 다스려 나가 태평하게 만들었다. 세종(世宗) 효무황제(孝武皇帝)(->한
(漢) 무제(武帝) 유철(劉撤))는 척토양이(拓土攘夷 : 국토를 개척하고 오랑캐를 물리침)하여 그 땅의
크기가 당(唐 = 당요(唐堯, 즉 요임금) 때를 넘어섰고...(중간 생략)....소열(昭烈)(->촉한(蜀漢)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은 촉(蜀) 땅으로 파월(播越 : 파천, 외지로 떠돔)하면서 불운이 끝나고
태평함이 다시 생겨나 옛 도읍으로 돌아가기를 바란 것이다(유비가 한(漢)을 다시 부흥시켜 했던 노력을
의미한다). 어찌 하늘은 한(漢)에 내린 화를 뉘우치지 아니하여, 또다시 후제(後帝)(->촉한(蜀漢) 후주
(後主) 유선(劉禪)) 치욕을 당하게 하였는가(서기 263 년 촉한(蜀漢)의 멸망을 가리킴) 사직이 멸망한
이래, 지금까지 종묘에 혈식(血食 : 제사)을 올리지 못한지 40 년에 이르렀도다..(중간 생략)...이제
하늘이 자신의 속마음을 달래어 한(漢)에 내린 화를 뉘우쳐, 사마씨(司馬氏) 부자형제로 하여금 서로
잔멸하게 하였으나 뭇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하소연 할 곳조차 없다..(이하 생략) - 진서 유원해기
전편에서 언급한 대로, 유연의 한(漢)은 이 즉위문을 통해 전한(前漢)-후한(後漢)-촉한(蜀漢)을 잇는
왕조임을 다시한번 드러내고 있다.

우선 즉위문 제일 처음에 보면 '옛날 우리~' 란 표현을 써, 전한(前漢)의 역대 황제들이 마치 자신의


윗대 조상인 것처럼 나열하며 그 덕과 공을 기리고 있으며, 또한 촉한(蜀漢)의 유비와 유선 또한 같은
맥락에 넣었다.

그리고 하늘이 화(禍 : 재앙)을 내려 잠시 한(漢) 왕조가 무너졌었지만, 한(漢)을 멸망케한 하늘이 이제
그 잘못을 뉘우쳐 한(漢)을 부흥시키고자 진(晉)의 사마씨(司馬氏)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었으며 촉한(蜀
漢)이 멸망한지 40 여년 만에 이제 우리의 한(漢) 왕조가 대통을 이어받았다라고 천명한다.

즉, 건국한 왕조의 정통성과 명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흉노족이 진(晉)으로부터 독립하여 감히 무엄하게 제멋대로 왕을 자칭했다는 소식은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과 대결을 벌여 몰아냈던 동영공(東嬴公) 사마등(司馬騰)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게다가
흉노가 자립한 지역 역시 자신의 임지인 병주(幷州)였다.

사마등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수하무장 섭현(聶玄)이란 자에게 군사를 주어 유연을 치게했지만, 되려


대패하여 쫓겨오자 사마등은 이를 두려워하여 병주(幷州)의 백성 2 만여명을 이끌고 도주한다.

이에 유연도 대응을 신속히 하여 조카 유요(劉曜)를 보내 병주(幷州)의 각 군(郡)과 고을을 함락케 하니,


병주(幷州)는 완전히 흉노의 한(漢)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유요(劉曜).

유연의 조카로, 이후 영가의 난에 활약하면서도 줄곧 등장할 인물이다. 유연 이래로 몇대를 지나 황제로


즉위한 후, 기존의 국호 한(漢)을 '조(趙)' 로 고쳤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동시기에 존재한 후조(後趙)
와의 구별을 위해 전조(前趙)라 부르고 있다. 차차 다룰 내용이다.
흉노족이 한(漢) 정권을 수립했다는 소식에 당시 진(晉) 조정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해 알 수없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당연히 이를 용납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깔보던 흉노족이
독립하겠다고 찢어져나가 이제는 제국의 한 주(州)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니 말이다.

이 한(漢) 정권에 대항하는 주체가 계속해서 사마등(司馬騰)인 것으로 보아 아마 진(晉) 조정에서는 이


사마등에게 토벌을 명한게 아닌가 싶다. 물론 사마등이야 자신의 임지 병주를 탈환하고자 줄기차게 싸우려
드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흥(永興) 2 년(서기 305 년), 사마등이 또 사마유(司馬瑜), 주량(周良), 석선(石鮮) 등을 보내


유연을 치게하며 이석(離石)에 주둔했다. 유연은 그의 무아장군(武牙將軍) 유흠(劉欽) 등의 여섯 군(六
軍)으로 사마유 등에게 항거하니, 네번 싸워 사마유가 모두 패하였고, 유흠은 대오를 정돈해 개선하여
돌아왔다. - 진서 유원해기

사마등이 박살나자 조정에서는 답답했는지 따로 유연을 토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한다.

병주자사 유곤(劉琨)을 판교(版橋)에서 요격하게 했으나 유곤에게 패하였다. 이에 유곤은 진양(晉陽 :


병주(幷州)의 군(郡)들 중 하나)을 점거하였다. - 진서 유원해기

이렇게 지리멸렬한 싸움이 계속해서 오가는 가운데, 한(漢)의 신하들이 유연에게 진언한다.

"전하께서 거병하신 이후로 벌써 만 1 년이 다 되어가는데, 오로지 편방(偏方 : 한쪽구석)을 지킬 뿐,


아직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습니다. 실로 사방으로 출전하도록 장수들에게 명해 결기일척(決機一擲 :
기회에 따라 결단해 승부를 겨루다)하여 유곤(劉琨)을 효수하고, 하동(河東)을 평정한 뒤에 제호(帝號 :
황제의 호칭)를 세우고 북을 치며 남쪽으로 진격하여 장안(長安)을 함락하고, 이를 도읍으로 삼는다면
관중(關中 : 장안일대를 가리킴)의 군사로서 낙양(洛陽)을 석권하는 것은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가리키듯
쉬운 일입니다.."(이하 생략) - 진서 유원해기

신하의 진언대로 정권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그 영역은 겨우 병주(幷州)를 비롯한 각 주(州)의 조금씩을
차지한 땅들 뿐이었고 진정 진(晉)의 중앙이라 할 수있는 중원(中原)은 아직까지 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총공격을 감행하여 제대로 진(晉)과 맞붙어보자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제호(帝號 : 황제의 호칭)까지 칭할 것을 은연 중에 권하고 있는데, 나중에 이르러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진다.

유연 역시 이에 동의하여 군사를 크게 일으켜 공격을 감행한다.

이에 진격하여 하동(河東)을 점거하고 포판(蒲坂), 평양(平陽)을 공격해 모두 함락하였다. 그리하여


포자(蒲子)로 들어가서 그곳에 도읍하니, 하동(河東), 평양(平陽)의 속현(屬縣)과 그 주변 고을이 모두
항복하였다. 당시 급상(汲桑)이 조(趙), 위(魏) 땅에서 거병하였는데 상군(上郡)의 사부(四部) 선비(鮮
卑)인 육축연(陸逐延), 저족(氐)의 추대선우(酋大單于)인 선징(單徵), 동래(東萊) 사람인 왕미(王彌)
및 석륵(石勒) 등이 모두 차례로 와서 항복하니, 원해(元海 : 유연의 자(字))가 그들 모두에게 관작(官
爵)을 내렸다. - 진서 유원해기

사주(司州)가 병주(幷州) 옆에 위치한 주(州)임을 지도를 통해 알 수있다. 여기서 사주(司州)라는 주


(州)는 정식 행정구역이 아니라 진(晉)의 수도, 낙양(洛陽)과 그 일대를 속칭, 사주(司州)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우리나라의 서울 - 경기권 같은 개념이랄까? 흉노의 한(漢)이 그 사주(司州)
에까지 진출했다는 말은 진(晉)의 수도, 낙양(洛陽)도 지척에 놓여진 상태로, 이제는 흉노의 한(漢)도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병주(幷州)를 벗어나 사주(司州)란 주(州)로까지 진출하여 사주(司州)까지 점거했다는 얘기다. 이렇게


흉노의 한(漢)이 위세를 떨치자 당시 진(晉)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세력을 꾸리고 있던 군벌들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들이 찾아와 유연에게 항복하며 귀순하는데, 그 중 장창(張昌)의 난을 다루며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왕미(王彌), 석륵(石勒)의 이름도 있다. 특히 석륵(石勒)은 갈족(羯族)이라 하는 돌궐
쪽 계통의 민족으로 오늘날 투르크 계라 보면 되겠다.

석륵(石勒).

갈족(羯族)이라는 이민족으로, 당시 진(晉)에 한창 유입되던 이민족들 중 한 부류다. 뒤에 다룰


내용에서도 서술하겠지만, 특히 석륵은 유독 독보적인 존재로, 한때 흉노족의 한(漢) 정권 아래에서
영가의 난에 참전하며 몰래 독자세력을 구축하고 결국에는 독립하여 후조(後趙)를 건국한 시조가 된다.
국호는 '조(趙)' 지만 위에서 서술한 유요(劉曜)의 조(趙)와 구별하고자 전조(前趙)보다 늦게
건국되었다 하여 편의상 후조(後趙)라 불리운다. 진(晉) 멸망 직후에 도래한 '5 호 16 국 시대' 의
주역이기도 했다. 근데 이렇게 미리 써놓으면 스포일러인가?

왕미(王彌)나 석륵(石勒)은 흉노의 한(漢) 정권의 연재를 마치고 영가의 난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흉노를
제외한 다른 이민족 세력이나 군벌들을 다루는 편에서도 좀더 깊게 살펴보려한다.

그리고 2 년 반 가량이 지난 서기 308 년. 진(晉)에서는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의 치세가


시작된지도 2 년째에 접어들었던 영가(永嘉) 2 년.

영가(永嘉) 2 년, 가을 갑진일(2 일), 유원해(劉元海)가 평양(平陽)을 침범하니 평양태수(平陽太守)


송추(宋抽)는 낙양(洛陽)으로 달아나고 하동태수(河東太守) 노술(路述)은 힘껏 싸우다 죽었다..(중략)..
그해 겨울 10 월 갑술일(3 일), 유원해(劉元海)가 평양(平陽)에서 제호(帝號)를 참칭하고는 한(漢)이라
칭하였다. - 진서 유원해기

위에서는 평양(平陽)을 이미 점거했다는 기록을 싣어놓았는데 여기서는 또 다시 평양을 침범했다 되어있어


갸우뚱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아마 처음에 평양을 점령하고난 서기 305 년부터 이 기록의 배경시점인
서기 308 년까지 2~3 년간 계속해서 진(晉)과 교전을 펼치며 세력권 싸움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록의 마지막 문구대로, 유연은 결국 황제를 자칭하고야 만다. 연호는 영봉(永鳳). 도읍은 평양
(平陽)에 두었다.

역사에서는 유연이 황제를 칭한 서기 308 년부터를 영가의 난의 시작이라 본다.

진(晉)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를 갖추는 때이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영가의 난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한숨돌려 흉노의 한(漢) 정권 수립이외의 기타 사건 및


인물들에 관해 연재할까 한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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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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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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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3/12/14 14:10:00

- 일어나는 이민족과 독립하는 군벌들 -

흉노족이 진(晉)을 부정하여 한(漢)을 세우고 대립할 무렵, 제국의 각 지방에서도 반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국의 서쪽, 익주(益州)는 이미 이민족인 저족(氐族)의 나라가 세워져 상실한지 오래였고,
형주(荊州), 양주(楊州)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장창(張昌)을 대표로하는 여러 민중봉기들도 진압된지
5 년도 채 안되었을 때였다.
팔왕의 난을 종결짓고 제위에 오른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의 대에는 거의 사실상 중앙에서의
통치력을 상실했다 봐도 무방했을 정도로, 제국의 전역은 각 이민족 세력과 진(晉)의 신하였지만, 이제는
독립을 도모하는 군벌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당시 대표적인 이민족 세력 중에는 앞서 전편에서 한번 나온 갈족(羯族)의 석륵(石勒), 선비(鮮卑)족의


모용외(慕容廆)를 예로 들 수있다.

석륵(石勒).

석륵도 얘기하는 김에 그 출신부족인 갈족(羯族)까지 알아보고 가자.

석륵은 오늘날 투르크계 민족인 갈족(羯族)이라 했다. 혈통이 서쪽동네인 투르크계 쪽이니 만큼, 갈족(羯
族)은 본래 중국을 무대로 하는 종족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들을
지배하던 흉노(匈奴)족이 서기 1~3 세기 경에 내란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그 무리의 대다수가 중국으로
이동했다고 전해진다. 이때의 중국은 삼국시대로, 갈족(羯族)의 대부분이 위(魏)로 복속되었다. 석륵의
조상도 이때 넘어온 것이다.

갈족(羯族)은 백인종에 가까웠으며, 당시 중국인에 비해 상당히 이국적인 외모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는 '갈족(羯族)은 대부분이 심목다수(深目多鬚)' 라 하여, '눈이 깊고 수염이 많았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적어도 눈이 깊다는 표현에서부터 동양인의 외모와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그리고 이후 5
호 16 국 시대에 후조(後趙)를 건국하였고 나중에 그 말기에는 한(漢)족의 염민(冉閔)이란 장수에 의해
도륙이 나는데, 이때 염민은 '눈이 푹 들어가고 코가 높은 자들이 갈족이니 모조리 죽여없애라' 라는
명령을 내려 갈족과 한(漢)족간에 외모를 분간했다고 한다. 염민의 갈족 학살도 한건 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갈족은 대다수가 그 자취를 감췄고 오늘날에 그들의 후손은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소수민족들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그나저나 이쁜데?
석륵은 갈족부락의 추장의 아들이었다. 그러던 중 진(晉)의 연호로는 태안(太安) 연간, 서기 302~303 년
무렵에 기근이 들어 갈족의 무리는 먹을 것을 찾아 각지로 뿔뿔히 흩어졌고, 석륵 역시 헤매이다가 진
(晉)의 동영공(東嬴公) 사마등(司馬騰)에게 붙잡혀 노예가 된다. 낯익은 이름인데, 나중에 유연(劉淵)과
싸우던 그 사마등이 맞다.

그러나 석륵은 비범한 인물이었는지, 재능을 인정받아 해방되고 급상(汲桑)이란 이와 뜻이 맞아 도적


떼의 수령이 된다. 그리고 당시 한창 난리였던 팔왕의 난에도 용병으로 고용되어 참전하기까지 한다.
그때 번왕들이 이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는 것이 마치 유행처럼 번져나가는 시기였던 지라, 한낱 도적떼
무리의 수장에 지나지 않던 석륵은 이때를 계기로 자신의 씨족인 갈족들을 규합하고 독자적 세력을
구축해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기 307 년에 흉노의 유연이 진(晉)을 공략하여 병주(幷州)를 점거하자, 역시
병주에 있던 석륵은 은근한 압박을 느끼고 휘하의 무리를 거느리고 떠오르는 강자인 흉노의 한(漢)에
투항한다.

그리고 영가의 난에도 따라 종군하여 한(漢)의 무장으로서 진(晉)을 박살내는데 앞장선 양반이기도 했다.
이건 나중에 다룰 내용이고..

이렇게 중원이 시끄러울 무렵, 진(晉)의 동북쪽 변방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진(晉)의 동북쪽 변방이라면 평주(平州), 유주(幽州)가 되겠다. 오환(烏桓), 흉노(匈奴)족과 같은


오랑캐들의 땅과 접해있어 예로부터 이민족의 출몰이 잦은 동네이기도 했다. 이후 진(晉)이 혼란스러워져
변방에까지 통치의 손길이 미치지 않게되자 평주(平州), 유주(幽州)도 이민족들의 놀이터가 되는데, 여러
특히 요동(遼東)일대를 근거로 하는 선비(鮮卑)족의 나와바리가 근처에 있었기에 선비족의 입김이 쎈
곳이었다.
선비(鮮卑)족의 모용외(慕容廆)는 여러 선비족들의 일파 중 하나인 모용부(慕容部) 선비(鮮卑)족이었다.
첨부해둔 바로 윗지도에서도 '모용선비' 라 쓰여있는 것이 보이실 것이다.

다른 이민족들과는 달리 모용부(慕容部) 선비(鮮卑)족은 이민족들이 급격히 유입되는 팔왕의 난 시기


이전부터 진(晉)과 대립하던 부족이었다. 종종 진(晉)의 변방, 즉 요서(遼西)지방이나 평주(平州),
유주(幽州) 일대를 공격하여 노략질도 일삼곤 했다. 시기상으로는 서기 280 년대 무렵이다.

모용외는 모용부(慕容部) 선비(鮮卑)족의 대인(大人 : 지도자를 말한다)의 아들로서, 왕족이었다.


아버지를 이어 지도자가 된 모용외는 위에서 밝힌 것처럼 이해관계에 따라 진(晉)을 공격하여 이득을
따내고 같은 선비족이지만 다른 분파인 우문부(宇文部) 선비(鮮卑)족이나 우리나라의 부여를 건드리며
동북의 양아치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당시 진(晉)이 떠오르는 글로벌 호구였다 하더라도 대국이었던지라, 소수민족으로


깝치는데에 한계를 느낀 모용외는 진(晉)에 항복한다.

"나는 선공(先公 : 모용외의 아버지를 뜻한다) 이래 대대로 대국(大國)을 받들었으며, 또한 화예(華裔 :


중화와 오랑캐)가 서로 다스림이 다르고 강약(强弱)이 실로 차이나니, 어찌 진(晉)과 더불어 다투겠는가?
어찌 불화하여 내 백성들을 해롭게 하겠는가?" - 진서 모용외전

제 스스로 힘이 모자라 항복했는데 구차하니까 이런저런 핑계대며 항복한 셈이다.

하지만 어쨌든 진(晉)으로서는 동북에서의 골칫거리 하나를 덜은 셈이었기에, 이에 무제(武帝) 사마염(司


馬炎)은 모용외의 항복을 기꺼워하며 받아준다.

황제(무제 사마염)가 이를 가상히 여겨 모용외를 선비도독(鮮卑都督)으로 임명했다. - 진서 모용외전

정식으로 진(晉)의 관직을 하사받음으로서 모용부(慕容部) 선비(鮮卑)족의 근거지에서 그 통치권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모용외는 그곳에서 착실하게 내치에 힘쓰면서 진(晉)이 팔왕의 난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주변세력 소탕에 나선다.
농사와 누에치기를 가르치고 법제(法制)를 상국(上國)(진(晉)나라)과 같게 하였다. - 진서 모용외전

영녕(永寧) 연간(서기 301 년)에 연(燕) 땅에서 홍수가 나자 모용외가 창고를 열어 식량을 베풀어 유주
(幽州) 땅이 구제되었다. - 진서 모용외전

얼핏보면 그저 모용외의 정치기록에 불과해 보이지만, 이를 모용외가 장차 진(晉)으로 부터의 독립을


꾀하는 절차라고 볼 수도 있다.

자신이 다스리는 모용부(慕容部) 선비(鮮卑)족에게 진(晉)의 앞선 문물을 전수함으로서, 국력의 강화와


발전을 도모하고 근거지와 인접한 진(晉)의 유주(幽州)에서의 자연재해로 발생한 난민들을 도움으로서
민심을 얻고자 한 것이다. 근거지 모용부(慕容部) 선비(鮮卑)에서 거병하여 독립하면 의당 인접한 진
(晉)의 유주(幽州)나 평주(平州)는 정복대상이 된다. 그곳에서의 민심을 사전에 얻어놓음으로서, 보다
수월하게 점거하기 위한 포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를 뒷받침해주듯 서기 307 년, 중원에서 흉노족이 한(漢)을 세우고 진(晉)을 공격하자 모용외는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한다. 실질적인 독립이나 마찬가지인 사건이었다.

다만, 진(晉)의 의심을 사기 않기 위해 겉으로는 충성하는 척했지만 뒤로는 중원에서의 전란을 피해 온


백성들을 받아들이며 세력확장을 꾀했고, 당시 변경의 다른 선비족인 소련(素連), 목진(木津)이란 이들이
무리를 이루어 진(晉)의 요동(遼東)을 유린하자 이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소련과 목진을 박살내고
요동을 거의 먹다시피 한다.

그리고 영가의 난이 시작되자 그때도 해왔던 것처럼 진(晉)에게는 뜨뜻미지근한 충성을 보이며 한편으로는
실리를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건 나중에 다룰내용이다.

팔왕의 난 말 무렵부터 영가의 난이 시작되는 시점까지 이 석륵이나 모용외 외에도 각지에서 일어난
이민족들은 여럿있다. 옹주(擁州)에서의 저족(氐族) 부홍(苻洪), 강족(羌族)의 요익중(姚弋仲) 등,
똑같이 진(晉)이 영가의 난으로 피떡이 되는 도중에 독립한 부류다. 그리고 이들 지도자들은 모두 각각
훗날 5 호 16 국 시대에 세워진 이민족 국가들의 시조이기도 하다.
반면에 이민족이 아닌 한(漢)족이면서도 독립하려 든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본래 지방의 주자사(州刺
史)거나 해당지방을 지키는 장군들이었는데 나중에는 그 지방에 눌러앉아 근거지로 삼은 군벌들로 탈바꿈
해버린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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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18

게시물 ID : history_13019 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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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3/12/15 05:44:57

- 일어나는 이민족과 독립하는 군벌들 2 편, 그리고 번왕들 -

어느 나라 역사를 보아도 나라가 혼란스러워지면 그 나라 내부로부터 분열이 일어나 붕괴가 시작되곤 한다.
이 당시의 진(晉)도 그랬나보다.

이민족들이 진(晉)의 혼란을 틈타 반란을 일으켰듯이, 진(晉) 내부에서도 그러한 조짐이 보였던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전편에서 밝힌 내용이기도 하지만 독립하여 군벌을 이룬 이들은 대부분은 본래 진(晉)의
신하들이었다.

특히 지방직인 주자사(州刺史)들이 주체가 되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계기는, 무제 사마염의 특단의


조치로 제국의 각 주(州)를 기반으로 삼으며 할거해있던 번왕들이 팔왕의 난으로 거의 대부분이 죽어
없어지는 바람에 본래 지방을 다스리는 벼슬인 주자사(州刺史)가 자연스레 본래의 권한인 주(州)에서의
행정권과 군권을 되찾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 주자사들 뿐만 아니라 기타 자잘한 반란들도 많았다. 심지어는 마을을 다스리는 일개 현령(縣
領) 따위가 들고 일어난 사례로 있으니, 내부분열의 상태가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진
왕조가 만만했던 탓도 있고.

그래서 대표적인 인물들만 나열해보자면, 왕미(王彌), 왕준(王浚) 등에다 나중에 가면 평주(平州)의


최비(崔毖), 양주(凉州)의 장궤(張軌)와 같이 영가의 난으로 위기에 처한 진(晉) 왕조를 거의
외면하다시피 하여 독자세력을 구축한 이들도 등장한다.

최비(崔毖)와 장궤(張軌)는 영가의 난 무렵에 각각 평주(平州)와 양주(凉州)의 주자사(州刺史)들이었다.


군벌수준의 독자세력을 거느리고 버티고 있었지만 흉노의 한(漢)에 의해 진 왕조가 짓밟히는 것을
외면하다시피 했다.

왕미(王彌) 같은 경우는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출신은 본래 진(晉)을 섬기는 신하는 아니었지만, 지방의
유력호족이었다. 앞서 장창(張昌)의 반란을 다루면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기도 하다. 장창의 난이 진압될
무렵, 왕미는 유백근이라는 일개 현령(縣領)이 진(晉)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한다. 그리고
왕준(王浚 : 바로 위의 왕준이고, 전에 사마등과 연합하여 흉노의 유연과 싸운 그 왕준이다)의 관군(官
軍)이 토벌하여 유백근을 죽이고 그 무리를 작살내버리자 왕미는 잔당을 이끌고 청주(靑州)의 산악지대로
숨어든다.

그리고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이라 자칭하며 서기 307 년 경에 청주(靑州)와 서주(徐州) 두 주(州)를


크게 유린하며 도적질을 일삼는다. 이 당시 진(晉)은 북에서 치고 내려오는 흉노의 한(漢)과도 교전 중인
상황이었던지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탓도 크지만, 두개 주(州)를 휩쓸을 만큼 왕미의 세력은 군벌로서
규모가 꽤나 컸다.
하지만 제국의 동쪽에서 활개치는 도적놈을 내버려둬서는 안될 일이었기에, 함께 팔왕의 난을 종식시킨
예장왕(豫章王) 사마치(司馬織)를 회제(懷帝)로 추대하여 보좌하던 당시의 실권자,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은 국선이란 장수를 보내 토벌하게 하지만 되려 국선은 크게 패해 왕미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고 만다.

나중에는 기세가 더 올라 예주(豫州)까지 넘봐 그곳까지 공략하려 들었지만 진(晉)의 청주자사(靑州刺史)


구순의 토벌로 큰 타격을 입자, 그 무렵 황제를 칭하여 한창 기세등등했던 흉노의 유연(劉淵)에게로
귀부하게 된다. 이는 미리 흉노의 한(漢) 편에서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같이 귀부한 갈족(羯族)의 석륵(石勒)과 함께 진(晉)을 무너뜨리는 데에 크게 일조한다.

한편 왕준(王浚)은 최종관직이 병주자사(幷州刺史)였던만큼, 병주(幷州)에서 세력을 이룬 인물이다.


거기다 예전의 관직은 안북장군(安北將軍)으로서, 진(晉)의 유주(幽州)나 병주(幷州)와 같이 북방
변방과 맞닿아 있는 주(州)를 북방의 이민족들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왕준의 임무였던지라, 예전부터
병주는 왕준의 기반이 되는 곳이었다. 참고로 위에서 말한 평주(平州)의 최비(崔毖)는 이 왕준의
처남이다.

일찍이 팔왕의 난 시절부터 번왕들의 싸움에 개입해, 어느 번왕을 지지했는지는 알 수없으나, 흉노의
유연의 한(漢) 정권을 수립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면서 나온 장면이기도 한 동영공(東嬴公) 사마등(司馬
騰)과의 연합으로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과 싸우는 모습이나, 이 사마등이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의 동생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사마월을 지지하지 않았나 싶다.

더구나 선비족(鮮卑族)이나 오환족(烏丸族) 같이 이민족들을 대거 영입하여 용병으로 고용했던 이도 이


왕준이다. 이 용병들을 팔왕의 난에다 써먹어 자신이 지지하는 번왕이 권력싸움의 승리자로 만드는데에
조력하여 한몫 챙기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받기라도 했는지 왕준은 병주자사로
전임되어 비로소 병주(幷州)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에 성공한다. 바로 이 시기부터 왕준이
군벌화 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무렵쯤에는 이미 흉노의 한(漢)이 세력을 확장해 진(晉)을 침공함으로서 영가의 난이 발발했을
때였고, 왕준 역시 한(漢)에 크게 패한다.
그가 진(晉)을 무시하는 군벌로서의 뚜렷한 행보를 보이는 때는 훗날, 진(晉)이 장안(長安)에 고립되어
전조(前趙 : 흉노의 한(漢)은 나중에 조(趙)라는 국호로 바뀐다))에 의해 고립되었을 때다. 당시 황제
민제(愍帝) 사마업(司馬業)이 주위의 주자사(州刺史)들에게 SOS 를 치지만, 나라 따위는 개나 줘버려
심보로 이미 독자세력을 이루어 군벌화 되어버린지 오래였던 왕준을 비롯한 다른 주자사들은 fuck↗you↘
로 축약할 수 있는 반응을 보여준다. 그나저나 스포일러 했다..

나중에 진(晉)의 멸망을 다루면서도 나올 내용이지만, 왕준 외에도 위에서 언급한 최비(崔毖)와 장궤(張
軌)가 이와 같은 부류였다. 저마다 각지에 꼼짝않고 진(晉)이 멸망하는 것을 앉아 구경만 했다.

그리고 이 또한 나중에 밝히겠지만, 비단 이 신하들 뿐만 아니라, 진(晉)의 멸망을 보고도 방치한 이는


또 있다. 바로 번왕들이다.

물론 번왕들 대부분은 팔왕의 난으로 죽어 그 숫자가 거의 없었지만, 황실에 황족이 아예 없을리는 없다.
몇몇 황족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있었는데, 아직도 팔왕의 난 시절의 이기주의 심보를 못잊었는지, 영가의
난으로 조상의 나라가 이민족들에게 박살이 나 황제고 백성이고 다 갈려나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봉국에서
꼼짝않고 도움의 손길하나 거의 내밀지 않은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위에서 다룬 주자사(州刺史)들처럼 독자세력을 형성해 이미 나라에는 관심을 잃은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신하들로부터도 버림받고 심지어는 나라의 지도층을 이루는 황족들에게조차 외면받은 진(晉)이라는 국가를
보자면 참 등신같은 나라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게 진(晉)을 건국한 사마씨(司馬氏)의 업보인지
운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하지만 당시 주자사(州刺史)들이라고 해서 다 딴마음 품었던 것은 아니다. 무너져가는 나라에 끝까지


충성한 주자사도 있었으니, 유곤(劉琨)이란 사람이 그 경우다. 아무리 진(晉)이 막장국가였다고 한들,
자고로 망해가는 나라일지라도 충신은 한 명쯤 있어줘야 진(晉)의 시조들인 사마의나 사마염이 지하에서도
그나마 덜 섭섭하지 않겠나 싶다.
유곤(劉琨).

나는 잘 모르겠는데 위진 남북조 문화-예술사에 시인(詩人)으로서 한획을 그었다고도 하는 인물이다.


그가 남긴 정치적 행보보다는 주로 문화-예술 쪽으로 조명받는 인물이다. 위에서 설명했듯 여느
신하들처럼 진(晉)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무너져가는 나라를 지킨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충신이었다.
여담으로 그의 시풍(詩風)은 영가의 난 전후로 나뉜다고 하는데 난(亂) 전에는 호방했지만 난(亂) 후로는
비분강개해졌다고 한다. 이는 역시 나라를 잃은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면 될 것 같다. 역시 충신이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팔왕의 난으로 번왕들에게 치이고 살던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을


안전하게 호위하여 공로를 인정받았고, 서기 307 년에는 병주자사(幷州刺史), 진위장군(振威將軍)으로서
영가의 난을 피해 방황하던 유민들을 거두어 학살머신 석륵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했다고 한다.

진(晉)이 멸망한 이후에도 병주에서 하북(河北)에서의 진(晉) 백성들이 도륙나는 것을 막으려 애썼고
훗날 독자정권을 이룩한 석륵과 전조(前趙)에 항거하며 수차례 항복권유에도 나는 진(晉)의 신하이니
개소리 마라라는 식으로 일갈했다고 한다.

그냥 이런 신하도 있었구나 하고 알기만 하면 된다.

정리하자면, 흉노의 한(漢)에 의해 영가의 난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런 조짐들을 보였으며, 난이 발발한


직후에는 지금까지 쭉 서술했다시피 마땅히 나라를 지켰어야할 주자사들은 모두 등을 돌렸다는 얘기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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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19

게시물 ID : history_13052 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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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3/12/17 03:13:07

영가의 난 전후의 진(晉)은 앞에서 쭉 살펴보았듯이,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제국의 각지는 반란으로 들끓고 있었다. 팔왕의 난으로 병력을 거의 소모해버린 중앙에서는 이를 모두
막을 방도가 없어 각지의 주자사(州刺史)이나 번왕들에게 거의 위임하다시피 떠넘겨 버렸고 이들은 이를
기회로, 암암리에 독립과 자치를 도모하며 점차 진(晉)과는 별개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 한(漢)의 본격적인 공세와 진(晉)의 선방 -

다시 흉노(匈奴)의 한(漢)으로 돌아가자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유연(劉淵)에게 이제 남은 일은 앞서


그가 천명하였듯이 '하늘로부터도 버림받은 진(晉)을 멸하고 한(漢)을 다시 부흥하는 것' 뿐이었다.

이미 하북(河北)은 거의 점거한데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기권에 비할 수 있는 사주(司州)도 점령하여 진


(晉)의 도읍, 낙양(洛陽)은 이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놓여있었다.

유연은 바로 출정할 장수진을 꾸린다. 자신의 차남 유총(劉聰)을 필두로 하여 귀순한 왕미(王彌)와 함께


곧장 낙양(洛陽)으로 진격하게 했고, 조카 유요(劉曜)는 후속부대로서 그 뒤를 받쳐주게 했다. 이때가 진
(晉)의 연호로는 영가(永嘉) 2 년 정월, 서기 308 년이다.

유총(劉聰)에게 명하여 왕미(王彌)와 함께 낙양(洛陽)으로 진격해 침범하게 하고, 유요(劉曜)에게는


조고(趙固) 등과 함께 그들을 위하여 뒤잇도록 하였다. - 진서 유원해기

유총이 이끄는 이 주력군 외에도 유연은 기주(冀州) 상산군(常山君)이란 곳에서 주둔하고 있던 석륵(石
勒)도 별동대로서 따로 보내 양갈래에서 협동작전을 펼치게 한다.
한편, 흉노(匈奴)가 발족하여 어느새 사주(司州)까지 진출해 낙양까지 넘본다는 소문을 접하고만 있던 진
(晉)의 조정에서는 당시 실질적 군책임자이자 승상(丞相)으로서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을 보좌하던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 이를 요격할 군사를 낸다.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 평북장군 조무(曹武), 장군 송추(宋抽), 팽묵彭默) 등을 보내 이를


막게 하였으나 왕사(王師)가 대패하였다. - 진서 유원해기

서기 308 년경의 한(漢)과 진(晉)의 접전도.

한(漢)의 공격요도

빨간선 : 유총의 진군로

초록색 : 석륵의 진군로

하늘색 : 왕미의 진군로

진(晉)의 요격요도

갈색 : 조무를 필두로한 송추, 팽양의 좌회로

보라색 : 왕감(王堪)의 요격로

주황색 : 배귀(裵鬼)의 요격로

핑크색 : 수도 낙양

본문에서는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마월은 조무(曹武), 송추(宋抽), 팽묵(彭默) 외에도 지도에도


보이듯이 예주자사(豫州刺史) 배귀(裵鬼)를 원군으로 부르고 따로 거기장군(車騎將軍) 왕감(王堪)라는
무장을 뽑아 요격하게 했다. 여기서 조무(曹武)는 좌회하여 유총을 치려했지만 지도에 조그맣게 표기되어
있는 사주(司州)의 홍농군(弘農郡) 의양(宜陽)이란 곳에서 오히려 유총에 의해 격파당한다. 주력군이
패하니 원군들 역시 하릴없이 후퇴하고 말았는데, 배귀는 아예 전사해버렸고 왕감은 패해 낙양으로
쫓겨왔다.

여기서 '왕사(王師)' 란 진(晉)의 군대를 의미한다. 기록대로 교전은 진(晉)의 대패로 끝이난다. 패인이
수적열세인지 아니면 전술이나 지휘에서의 실책인지는 기록에 나와있지 않아 모를 일이지만 첫싸움부터 진
(晉)은 패했다.

다만 한(漢)이 보낸 다른 군세 중 하나였던 석륵(石勒)은 진(晉)의 안북장군(安北將軍) 왕준(王浚)이


이끄는 선비(鮮卑)족 기병대에게 패했다. 이 바람에 낙양(洛陽)을 두갈래의 길로 공격하려던 한(漢)의
계획은 어그러진다. 그리고 이 왕준은 앞에서 살펴본 군벌 중 하나였던 그 왕준이다.

진(晉)에서는 이에 위기라도 느꼈는지, 당시 장안(長安)에 주둔하던 평창공(平昌公) 사마모(司馬模)란


황족에게 도움을 청한다. 사마모(司馬模)는 전에 팔왕의 난을 다루면서 한번 나온 적이 있는데, 동해왕
(東海王) 사마월(司馬越)에 편승하여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을 죽인 인물이다. 이 무렵에는
본래 사마옹(司馬顒)이 근거로 삼고 있던 장안(長安)을 비롯한 관중(關中)일대를 사마옹이 죽자 대신해서
차지하고 있었다. 본래 작위는 남양왕(南陽王)이었지만, 무슨 연유로 한 단계 깎여 평창공(平昌公)으로
격하되어 있었는데, 조정에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병력을 내어줄 것을 요구하며 그와 동시에 작위도
다시 남양왕으로 복위시켜줄 것을 약속한다. 당시 진(晉)의 다급함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를 받아들인 사마모는 자신의 사병(私兵)들을 내어 의양(宜陽)까지 이르렀던 유총(劉聰)이 이끄는 한


(漢)군을 공격한다.

유총(劉聰) 등이 멀리 달려가 의양(宜陽)에 이르자 평창공(平昌公) 사마모(司馬模)가 장군 순우정(淳于


定), 여의(呂毅) 등을 보내 장안(長安)으로부터 가서 이를 쳤는데, 의양(宜陽)에서 싸워 순우정 등이
대패하였다. - 진서 유원해기

기록대로다. 또 박살나고 말았다. 두 차례 대규모 교전에서 대승을 거둔 한(漢)군은 기세등등했을 것이다.


승리에 도취해 경계를 소홀히 한 탓인지, 이때 진(晉)이 그 틈을 타, 반격을 가한다.
유총이 연달아 이긴 것을 믿고 방비하지 않으니, 홍농태수(弘農太守) 원연(垣延)이 거짓항복하고는
유총을 야습하였다. 유총이 대패하여 평양(平陽)으로 돌아가니 원해(元海 : 유연(劉淵)의 자(字))가
소복(素服)을 입은 채 돌아오는 군대를 맞이했다. - 진서 유원해기

진(晉)의 홍농태수(弘農太守) 원연(垣延)이라는 사람의 계책에 휘말려 야간에 기습을 당한 유총이


대패하여 한(漢)의 수도, 평양(平陽)으로까지 쫓겨갔다는 기록이다. 얼마나 크게 깨졌는지는 몰라도
유연이 돌아오는 패잔병들을 위로하는 의미로 소복을 입은채 맞이했다고 하니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원연(垣延)의 기지로 한차례 한(漢)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세한 쪽은 한(漢)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서기 309 년) 10 월, 유연은 다시 군사를 일으킨다.

영가(永嘉) 3 년, 10 월에 유총(劉聰), 왕미(王彌)를 보내 유요(劉曜), 유경(劉景) 등과 함께 기병 5


만을 이끌고 다시 낙양(洛陽)을 침범하게 하고, 호연익(呼延翼)에게는 보졸(步卒 : 보병)을 이끌고
뒤잇게 하니, 하남(河南)에서 왕사(王師)를 격파했다. - 진서 유원해기

한(漢)의 공격에 다시 한번 진(晉)이 대응하지만 역시 사주(司州) 하남군(河南郡)에서 되려 격파당한다.


그리고 이 전투를 계기로 한(漢)은 낙양(洛陽)으로 즉각 진격할 기회를 얻어, 낙양(洛陽)에까지 도달한다.

유총이 진격하여 서명문(西明門 : 낙양성(洛陽城)의 서쪽 문들 중 하나) 밖에 진을 치고 주둔하니 진


(晉)의 호군(護軍) 가윤(賈胤)이 밤에 공격하여 대하문(大夏門 : 낙양성 북쪽 문 들 중 하나)에서 크게
싸워 유총의 장수인 호연호(呼延顥)를 베자 그 군사가 무너졌다. - 진서 유원해기

위(魏)- 진(晉)시대 낙양성(洛陽城) 지도.

유총은 낙양까지 진격해 낙양성의 서쪽 문들 중 하나인 서명문(西明門 : 지도에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는 문) 밖에 진을 쳤다.
그리고 기록에 나와있는대로 가윤(賈胤)의 야간기습으로 난전을 벌이다 대하문(大夏門 : 파란색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는 문)에서 크게 패해 후퇴한다.

낙양에까지 진출하여 그 성(城) 밖에 진까지 치고 공방전을 준비했지만 진(晉)의 장수, 가윤(賈胤)이란


사람이 분전해서 다시한번 유총의 군대를 깨뜨린다. 여담이지만 이 가윤(賈胤)이란 장수의 성씨인 '가
(賈)' 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가윤은 예전에 전횡했다가 폐살당한 황후 가남풍(賈南風)과 같은
가씨(賈氏)집안 사람이다. 역적집안의 사람이 멸문지화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무렵에는 되려 진(晉)을 외침으로부터 구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혜제(惠帝) 사마충(司馬
衷)을 다루면서도 나온 일화이기도 한데, 밤에 개구리들이 우는 것을 듣고 "저 개구리들이 공적으로 울까,
사적으로 울까?" 라는 우문에 "공유지의 개구리들은 공적으로 울고 사유지의 개구리들은 사적으로 울고
있습니다." 라는 현답을 준 그 인물이기도 하다.

아무튼, 가윤의 선전으로 노리고 왔던 낙양 공방전은 커녕 그 문턱에서 진(晉)에게 패한 유총은 군을


뒤로 물려 낙양근처에 있는 낙수(洛水)라는 강가까지 후퇴한다.

유총이 군을 돌려 남쪽으로 가서 낙수(洛水) 가에 진을 내리고 주둔했다. 곧이어 진격하여 선양문(宣陽門


: 낙양성 남문들 중의 하나)에 주둔하고 유요(劉曜)는 상동문(上東門 : 낙양성 동문들 중 하나)에
주둔하고, 왕미(王彌)는 광양문(廣陽門 : 서문들 중의 하나)에 주둔하고 유경(劉景)은 대하문(大夏門)을
공격하였다. 유총은 친히 숭악(嵩嶽)으로 가서 기도를 올리며 그의 장수인 유려(劉厲), 호연랑(呼延朗)
등으로 하여금 남은 군대를 독려하게 하였다. - 진서 유원해기

작전상 후퇴했지만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낙양(洛陽)을 사방으로 포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발
깨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리는 정성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하늘이 그와같은 유총의 기도를 무시하기라도 했는지, 이번에도 다시 진(晉)의 반격에 운이
따른다.

동해왕 사마월이 참군(參軍) 손순(孫詢), 장군 구광(丘光), 누부(樓裒) 등에게 명하여 휘하의 경졸(勁
卒 : 굳세고 강한 병졸) 3 천여명을 이끌고 선양문(宣陽門)으로부터 호연랑(呼延朗)을 공격해 베어
죽였다. 유총이 이를 듣고 급히 돌아왔다. 유려(劉厲)는 유총이 패전의 책임을 물어 자신을 처벌할까
두려워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 진서 유원해기
진(晉)은 앞서 낙양성 근교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내친김에 유총의 한(漢)군을 격파한다. 유총의
휘하부장들인 호연랑은 난전 중에 전사하고 유려는 패전의 책임을 추궁받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낙수(洛
水)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만다. 작년에 이어 낙양을 코앞에 두고 또다시 패한 것이다.

두번이나 패해 실의에 빠져있는 유총에게 왕미(王彌)가 넌지시 권한다.

"이제 이미 우리 군이 패배하였고 낙양(洛陽)이 여전히 굳건하니, 전하께서는 환군하시어 천천히 뒤에


다시 군대를 일으키느니만 못합니다. 저는 연주(兗州), 예주(豫州) 사이에서 군사를 모으고 곡식을
거두며 기한을 기다려 명을 받들겠습니다." - 진서 유원해기

아직은 진(晉)의 방어가 견고하니 일단은 돌아가 나중에 다시 치러 오자는 왕미의 권유에 유총도 마땅히
방도가 없다 여겼는지 한(漢)의 수도, 평양(平陽)으로 회군한다. 그리고 기록에서 보듯, 왕미는 일찍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私兵) 병력을 데리고 따로이 연주(兗州), 예주(豫州)에서 머무르며 훗날을
기약하겠다고 한다. 사실 말이 '군사를 모으고 곡식을 거두겠다' 는 것이지, 왕미는 그길로 연주,
예주를 유린했다. 도적출신이라 그런지 그런 분야는 훗날에 보이는 석륵의 모습과 비교했을때 석륵과
더불어 전문가이지 싶다.

한편, 평양(平陽)의 유연도 태사령(太史令 : 천문을 담당하는 관리) 선우수지(宣于脩之)라는 신하가


패전을 예고해 어느정도 예감은 하고 있었는 듯 하다.

"신미년(辛未年)에 낙양(洛陽)을 얻을 것입니다. 지금 진(晉)의 기운이 여전히 성하고 우리의 대군(大


軍)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필시 진(晉)에게 패했을 것입니다." - 진서 유원해기

신미년(辛未年)이란 그때를 기준으로 십이간지로 계산하면 서기 311 년을 의미한다. 그때는 서기 309 년.


2 년 후에나 낙양을 함락할 수 있다고 예언(?)하며 못박아 버린 것이다. 당시에는 아무래도 천문을 통해
미래를 예견하고 믿다보니 유연도 불안했는지 아들 유총에게 돌아올 것을 명한다.
원해(元海 : 유연의 자(字))가 급히 황문랑(黃門郎) 부순(傅詢)을 보내 조칙을 내려, 유총 등에게
환군하도록 했다. 왕미(王彌)는 환원(轘轅 : 낙양의 남동쪽 지역)을 통해 예주(豫州)로 나갔는데,
사마월(司馬越)이 박성(薄盛) 등을 보내 왕미를 뒤쫓아 공격하게 하니, 예주(豫州) 신급(新汲)에서
싸워 왕미가 대패하였다. 이에 평양으로 돌아갔다. - 진서 유원해기

유총은 이미 환군하고 있었을 것이고 유총에게 말한대로 예주(豫州), 연주(兗州)에 있던 왕미는 사마월의
공격으로 쫓겨나 다시 평양(平陽)으로 돌아온다.

두차례에 걸친 출정이 모두 실패하고 사주(司州)와 그에 속한 수도 낙양(洛陽)의 진(晉)의 방어가 의외로


만만찮음을 깨달은 유연은 여기서 전략을 바꾸기로 한다.

지금까지는 사주(司州)와 낙양(洛陽)에만 매달려 집중공략해 왔는데, 이번에는 진(晉)의 중앙이 아닌


지방의 여러 주(州)를 차례로 점거함으로서 포위망을 좁혀 낙양(洛陽)을 고립무원의 처지로 만들어
함락하려 했다. 전쟁을 장기적으로 보고 있던 것이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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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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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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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3/12/17 12:40:46
- 무너져가는 진(晉) -

세번째 출정은 서기 309 년, 11 월에 시작되었다.

앞서 전편에서 밝힌 바와 같이, 두차례에 걸친 사주(司州)-낙양(洛陽)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진(晉)


의 다른 주(州)들을 차례로 함락하여 주위로부터의 어떠한 지원도 없이 낙양(洛陽)을 고립시키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번에는 두 차례 출정군의 사령관을 맡았던 유연(劉淵)의 차남, 유총(劉聰)이 아니라 석륵(石勒)과 왕미


(王彌)를 내세워 중원의 연주(兗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예주(豫州)를 목표로 했다.

한(漢)이 목표로 한 연주(兗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예주(豫州)가 지도에 보인다. 그 밖의 주


(州)들인 옹주(雍州)나 양주(凉州), 익주(益州), 그리고 양주(楊州) 등은 이미 저마다 주인들이 있었다.
옹주(雍州)에는 남양왕(南陽王) 사마모(司馬模), 양주(凉州)에는 양주자사(凉州刺史) 장궤(張軌),
익주(益州)의 파저족(巴低族)의 성(成) 정권. 양주(楊州)의 낭야왕(琅琊王) 사마예(司馬睿).

특히 사마예(司馬睿)는 이 글에서는 따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 무렵에는 삼국시대의 옛 오(吳)나라 땅인


강남의 건업(建業)에 자리잡고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훗날, 동진(東晉)을 세우는 바탕이
된다.

석륵은 사주(司州)에서 진(晉)의 기주자사(冀州刺史) 왕빈(王斌)을 죽이고 사주(司州)의 여러 현(縣)을


점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가(永嘉) 3 년, 11 월. 석륵(石勒)이 장락(長樂)을 함락하니, 기주자사(冀州刺史) 왕빈(王斌)이 해를


입었고 석륵은 이어서 여양(黎陽)을 도륙했다. - 진서 권 5 회제기
장락(長樂), 여양(黎陽)은 현(縣)으로, 사주(司州)의 고을들이다. 그곳을 방비하던 기주자사(冀州刺史)
왕빈(王斌)을 깨뜨리고 두 고을을 점령하는데에 있어서 '도륙' 했다는 표현을 썼는데, 고을의 백성들을
학살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서기 310 년, 정월에 왕미(王彌)와 만나 본격적으로 연주(兗州), 청주(靑州), 서주(徐


州), 예주(豫州) 등지로 침입하여 휩쓸기 시작한다. 비단 진(晉)의 군사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살육의 대상이었다. 마치 메뚜기 떼처럼 삽시간에 여러 주(州)를 유린하고 이번에는 기주(冀
州)로 다시 북상하여 진(晉)의 잔여병력을 소탕한다.

한(漢)이 제국의 동부를 무참히 짓밟고 있다는 소식은 진(晉)의 조정에도 전해졌겠지만, 당시의 실질적
군책임자, 동해왕(凍海王) 사마월(司馬越)은 아무런 조치도 못 취하고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수도권 사주(司州)도 거의 포위되어 지키기도 벅찬 상황인데 그 먼곳까지 지원군을 보낼 여력도, 수단도
없었을 터이다.

그리고 그해 7 월, 유연은 다시 유총(劉聰)을 필두로 하여 유요(劉曜), 조국(趙國) 등을 보내 사주(司


州)의 하내군(河內郡)을 공략하는 석륵을 돕게했다.

이미 사주(司州)의 여러 군(郡)은 한(漢)에 의해 함락되었었지만 이 하내군(河內郡)만은 아직까지


함락되지 않고 하내태수(河內太守) 배정(裴整)이란 사람이 끝까지 항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동해왕(凍海王) 사마월(司馬越)도 하내군을 구원하고자 앞서 여러차례 한(漢)과 교전한 경험이


있는 정로장군(征虜将軍) 송추(宋抽)를 보내지만 석륵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해 도주하고 만다. 이 바람에
하내사람들의 그나마 남아있던 항전의지도 싹 사라졌는지, 몰래 하내태수(河內太守) 배정(裴整)을
사로잡아다가 한(漢)에 항복해버린다.

결국 이리하여 사주(司州)는 완전히 한(漢)에게 넘어가게 된다. 바라던 대로 사주(司州)에서의 항전은


사라지고 진(晉)의 여러 주(州)도 계획대로 깨뜨려놓아, 한(漢)이 완전한 주도권을 쥐게 된다.

- 한(漢)의 내분과 유총(劉聰)의 집권 -


서기 310 년 7 월. 진(晉)의 연호로는 영가(永嘉) 4 년.

한(漢)의 황제, 유연(劉淵)이 사망한다.

진(晉)의 치하에서 억압받으며 보잘 것없던 흉노(匈奴)의 지위를 단기간에 상승시켜 진(晉)을 무너뜨릴
것을 천명했던 지도자답게 끝까지 진(晉)을 몰아세우던 중에 얻은 죽음이었다.

영가(永嘉) 4 년에 죽었다. 6 년간 재위하였다. 시호를 내려 광문황제(光文皇帝)라 하고 묘호는 고조(高


祖), 묘호(墓號 : 무덤의 이름)는 영광릉(永光陵)이라 하였다. 아들인 유화(劉和)가 즉위하였다. -
진서 유원해기

그리고 유연의 뒤를 이은 이는 장남인 양왕(梁王) 유화(劉和)였다. 여기서 잠시 한(漢)에서는 정변이


일게 되는데, 다름아닌 후계자 자리 다툼 때문이었다.

일찍이 유연은 병으로 드러누워 오늘내일 할 때부터 미리 유화를 태자로 책봉하여 후계자로 정한지
오래였는데다, 여러 종친왕들과 대신들에게도 탁고(託孤 : 후계자를 부탁함)하여 자신의 사후에도 뒷말이
없도록 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바람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화(劉和) 자신이 분란을 조장하고 원인을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로서의
입지는 굳건했고 여러 종친왕들이나 대신들로부터도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유연의 여러 아들들이자
유화와는 이복형제들인 여러 번왕들이 제각기 강대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던 점을 두려워하고 시기하여
이들을 제거하려 든 것이다.

그 블랙 리스트 중의 제거대상 0 순위는 바로 그동안 진(晉)과의 전쟁에 쭉 등장했던 유연의 차남, 조왕


(趙王) 유총(劉聰)이었다.
유총(劉聰)은 그동안 쭉 대진전(對晉戰)의 야전 사령관이었던데다 당시 직위또한 대사마(大司馬)라는
고위 군책임직을 겸하고 있었기에 거느린 병력의 규모가 클 수밖에 없었지만, 유화는 이를 꺼려한 나머지
제거하려 마음 먹는다.

유화는 외숙부인 호연유(呼延攸)을 평소 신뢰하여 제위에 오르자 승상(丞相)의 자리에 앉히고 함께


중상모략에 골몰한다. 호연유를 재상으로 임명한 데에는 평소 호연유도 강력한 병력을 거느린 번왕들을
시기했기에 둘이 손발이 맞아난 것이다.

"선제(先帝 : 유연)께서 일의 경중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삼왕(三王)에게는 내부에서 강병(强兵)들을


총괄하게 하시고, 대사마(大司馬)에게는 10 만여명의 경졸(勁卒)들을 장악한 채 근교(近郊)에 머물도록
하셨으니, 이는 곧 폐하께서 지금 기좌(寄坐 : 손님처럼 남에게 빌붙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하고 있는
꼴입니다. 이는 곧 추후에 화근이 되어 어찌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원컨데 폐하께서는 일찍
조처하십시오. " - 진서 유화전

기록에서 삼왕(三王)은 제왕(齊王) 유유(劉裕), 노왕(魯王) 유륭(劉隆), 북해왕(北海王) 유예(劉乂),


이 세명을 말한다. 이들 역시 유총처럼 저마다 사병(私兵)들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경계할 것을 호연유가
진언한다. 그리고 대사마(大司馬)는 위에서 말한대로 당시 유총의 직책으로, 즉 유총을 의미한다. 결국은
이렇게 위험한 번왕들을 그대로 두는 건 황제의 자리가 위협받는 일이니, 얼른 이 번왕들을 정리해버려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

황제 유화와 재상 호연유는 은밀히 자신의 뜻에 동조할 이들을 모아나갔고 여러 번왕들, 특히 궁극적


목표이자 최종보스라 할 수있는 유총을 제압할 만을 힘을 기르며 세력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결전의 날, 이윽고 유화는 숙청의 칼을 뽑아 삼왕(三王)들과 조왕(趙王) 유총(劉聰)에게


휘두른다.

서창왕(西昌王) 유예(劉銳), 장군 마경(馬景)에게는 조왕(趙王) 유총(劉聰)을 공격하게 하고,


호연유에게는 군사를 이끌고 제왕(齊王) 유유(劉裕)를 공격하게 하고, 시중(侍中) 유승(劉乘)과
무위장군(武衛將軍) 유흠(劉欽), 유안국(劉安國)에게는 노왕(魯王) 유륭(劉隆)을, 상서(尙書) 전밀(田
密)과 유선(劉璿)에게는 북해왕(北海王) 유예(劉乂)를 공격하게 하였다. - 진서 유화전
기록에 보면 다른 번왕들도 유화에게 가담해 일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서창왕(西昌王)
유예(劉銳)처럼 뚜렷이 구별되는 황족 외에도 기록에서 보이는 유(劉)씨 성 가진 이들은 십중팔구
황족이라 봐도 된다.

진(晉)에서 벌어진 팔왕의 난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이 변란도 팔왕의 난처럼 권력에 눈이 먼


골육상쟁인지라. 예전에 유연은 한왕(漢王)의 자리에 오르면서 사마씨(司馬氏)의 진(晉)나라가 혈육간에
치고 박는 골육상쟁을 언급하며 한심하다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유연의 시체가 채 식기도 전에 이런
난리가 벌어지니 유연이 이걸 지하에서 들었더라면 뭐라 했을까 싶다.

아무튼,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행동으로 옮긴 거사인지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뜻밖의
배신자로 인해 유화의 계획은 어그러지고 만다.

전밀(田密), 유선(劉璿) 등이 사람을 시켜 관문을 뚫고 유총에게로 달아나니, 유총은 휘하 군사들에게


갑옷을 꿰어입도록 명하고 서창왕(西昌王) 유예(劉銳), 장군 마경(馬景)의 군사들을 기다렸다. 유예(劉
銳)는 유총이 방비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급히 되돌아가 호연유, 시중(侍中) 유승(劉乘) 등과 함께 노왕
(魯王) 유륭(劉隆)과 제왕(齊王) 유유(劉裕)를 공격하였다. 호연유와 유승은 유흠과 유안국이 다른
마음을 품었을까 의심하여 그들을 베어죽였다. 이날 노왕(魯王) 유륭(劉隆)과 제왕(齊王) 유유(劉裕)를
참살했다. - 진서 유화전

실패의 계기는 북해왕(北海王) 유예(劉乂)를 치기로 했던 상서(尙書) 전밀(田密)과 유선(劉璿)이 배신을


하면서 부터였다. 특별한 계기없이 유총에게로 항복한 것을 보면 이미 예전부터 유총의 사람이었거나
적어도 그 이전부터 배신을 마음 먹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밀과 유선에게 황제의 군대가 자신을
토벌하러 온다는 엄청난 소식을 접한 유총은 즉시 대응에 나선다. 그리고 본래 유총을 공격하기로 했던
서창왕 유예와 마경이 유총이 대비하고 있음을 보고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되돌아가 다른 번왕들부터
제압하려 든 것이다.

재상 호연유는 전밀과 유선이 배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심이 더 커지고 많아진 나머지, 다른


거사동지들까지 의심하여 애꿎은 유흠과 유안국을 죽여버리는 실책을 범한다. 결과적으로 노왕 유륭과
제왕 유유를 죽였다지만 최종보스인 조왕 유총은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뒤이어 유총의 반격이 시작된다.


유총(劉聰)이 서명문(西明門)을 공격해 함락하였다. 유예(劉銳) 등이 달아나 남궁(南宮)으로 들어가니
유총의 선봉대가 이를 뒤따라 광극전(光極殿)에서 유화(劉和)를 베어 죽였다. 유예(劉銳)와 호연유는
참수되어 네거리에 효수되었다. - 진서 유화전

결국은 황제 유화(劉和) 측의 패사로 끝이난 내란이었다. 유화는 물론이고 그를 따르던 승상(丞相)


호연유(呼延攸)를 비롯하여 몇몇 번왕들과 신하들도 죽임을 당했다. 서기 310 년의 일로, 유화의
재위기간은 불과 몇달 남짓이었다.

그리고 유화의 뒤를 이어 유총(劉聰)이 즉위하니, 그가 곧 한(漢)의 제 3 대 황제, 열종(烈宗) 소무황제


(昭武皇帝)다.

유총은 워낙 호전적인 성격이었던지라 진(晉)과의 전쟁은 더 본격적으로 돌입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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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21

게시물 ID : history_13075 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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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3/12/18 02:42:04

- 영가의 난(永嘉之亂) -
유연(劉淵)의 뒤를 이은 소무제(昭武帝) 유총(劉聰)은 선제(先帝)의 유지를 착실하게 받들어 진(晉)에
대한 맹공을 퍼붓기 시작한다.

진(晉)의 연호로 영가(永嘉) 4 년(서기 310 년), 10 월. 유총은 석륵(石勒)을 보내 진(晉)의 남부,
형주(荊州)까지도 정벌케 했다. 형주의 주도(州都), 양양(襄陽)과 형주의 여러 군(郡)들과 현(縣)들이
모두 석륵에 의해 점거당하니 이렇게 진(晉)은 또 하나의 주(州)를 상실하게 되었으니, 한(漢)이
결국에는 낙양(洛陽)을 동서남북으로 포위한 형국이 되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다음달인 11 월, 유총 자신은 유찬(劉粲 : 유총의 차남), 유요(劉曜), 왕미(王彌)등을 거느리고


점령한 사주(司州)에 홀로 남겨진 낙양(洛陽)을 목표로 하고 직접 4 만여명의 친정군을 이끌고 나선다.

유총(劉聰)은 유찬(劉粲), 유요(劉曜), 왕미(王彌) 등에게 군사 4 만을 거느리고 다시 낙양(洛陽)을


공격하게 하였다. 석륵(石勒)은 2 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대양(大陽)에서 유찬(劉粲)과 회사하였다.
유찬은 헌원(軒轅), 공양(攻梁), 진(陳), 여(汝), 허창(許昌) 등의 군(郡)으로 나아갔다. - 진서
유총전

형주(荊州)를 공략하고 다시 북상한 석륵과 유찬(劉粲)이 만나 합세하여 병력을 몇갈래의 길로 나누어


진군하게 했다는 기록이다.

이렇듯 진(晉)의 숨통을 끊어버릴 기세로 한(漢)의 공격이 시작될 무렵에 진(晉)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앞에서 쭉 보셨다시피, 늘상 한(漢)의 공격에 대처해오던 이는 황제인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가


아니라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었다. 하지만 사마월은 승상(丞相)으로서 영가의 난 이전에도
진(晉)의 대권을 잡고 실질적인 권력가로서 조정을 좌지우지 했기에 회제(懷帝)는 이를 꺼려하여
사마월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못했다.
거기다 사마월이 저지른 병크짓도 한몫했다. 또 황족들을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무분별한
숙청이 아니라 황제와 관련있는 황족들만을 가려서 제거한 것인데, 이유는 그저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함이었다. 행여나 황제가 주위 황족들을 통해 자신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왜 굳이 그런짓을 했는지는 모를일디다. 청하왕(清河王) 사마담(司馬覃)이라는
회제의 친족을 비롯하여 친척일가를 모두 유배하거나 심하게는 처형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악행들은 집권초기에 사마월이 팔왕의 난으로 피폐해진 국정을 되살리려 애쓰는 모습으로 뭇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덕망과 인망을 싹 날아가게 해버린 계기가 되어버렸고, 이는 결국 영가의 난으로
사마월이 한(漢)의 공격을 막을 병사를 모병하는 데에 있어서 민심이 호응하지 않아 병력을 모으지 못한
실패한 원인이 되어 한(漢)과의 싸움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물론 이전의 무제(武
帝) 사마염(司馬炎)이 시행한 병력 축소정책에 의해 전국의 병력이 대폭 감소한 탓도 있고 무엇보다
팔왕의 난으로 제국의 병력을 죄다 날려먹었기에 근본적으로 군사 숫자가 적긴했다. 하지만 외침이라는
국난이 닥쳤을 때 다른 문제도 아니고 지도자에 대한 민심이 호응하질 않아 군사를 모으지 못해 적에게
박살이 났다라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예전의 그런 실수를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 한(漢)의 침공에 사마월은 동서분주하며 대응하기에 바빴다.
애초에 유연(劉淵)의 흉노(匈奴)가 거병했을때도 자신의 친동생인 (앞에서 나온 그 사마등이 맞다)
신채왕(新蔡王) 사마등(司馬騰 : 예전의 동영공 사마등이다. 작위가 올라 신채왕이 되었다)을 병주(幷
州)로 보내어 막게하고 양왕(梁王) 사마략(司馬略)이나 남양왕(南陽王) 사마모(司馬模 : 예전의 평창공
사마모다) 등의 번왕들을 주요 요충지나 전선으로 보냈고, 그리고 자신은 직접 군을 이끌고 낙양(洛陽)
에서 그리 멀지 않은 허창(許昌)에 주둔하여 전황을 관망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다.

당시 번왕들의 주둔상황.

검은색 화살표 :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 허창(許昌)에 주둔하며 수도 낙양을 방어.

초록색 화살표 : 양왕(梁王) 사마략(司馬略), 양양(襄陽)에 주둔.

빨간색 화살표 : 남양왕 사마모(司馬模), 장안(長安)에 주둔.

파란색 화살표 : 신채왕(新蔡王) 사마등(司馬騰), 업(鄴)에 주둔.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각 번왕들은 모두 각 주(州)의 주도(州都)에 주둔하며 해당 주(州)도 방어할


겸해서 수도 낙양(洛陽)을 여러방향에서 방어하는 형국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전세는 이미 한(漢)에게로 많이 기울어 진(晉)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러 주(州)가 한(漢)에 의해 결딴나버렸고 각지에서는 패전소식만이 들려오는데다, 병력을 모집하려
해도 이미 돌아선 민심 탓에 더이상 병력을 모으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사마월은 이에 큰 위기를 느낀다. 그래서 그 불안감과 두려움을 애꿎은 회제(懷帝)와 신하들에게


발산하기 시작한다. 예전의 과오까지 들춰내 한(漢)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비난을 덮고자 했던
것이다. 황제 회제를 겁주고자 이번에는 황족들에 이어 신하들까지 숙청의 칼부림에 죽어나갔다.

갖은 스트레스로 인하여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진 나머지 사마월은 병을 얻어 골골하게 되는데 그래도
끝까지 허창에 주둔하며 군무를 보았다고 하니, 진짜 애가 타기는 했던 모양이다.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사마월의 횡포가 그 쯤되니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도 이를 더는 용납할


수 없다 여겼는지, 사마월을 역적으로 몰아 주살하려고 했다.

그리고 서기 311 년, 당시 전선에 있던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구희(苟晞)란 장군에게 대장군(大將軍)


의 직책과 사마월을 역적으로 간주하여 이를 토벌할 것을 명하는 조서를 내린다.

그러나 이는 머지않아 사마월에 의해 발각되고 구희(苟晞)는 체포되어 사마월 앞으로 끌려온다.


구희로부터 일의 전말을 들은 사마월은 병으로 가뜩이나 쇠약했던 차에 울분에 찬 나머지 분통이 터져
병이 더 악화되었고, 진중의 병상에서 머지않아 사망한다. 사인은 분사(憤死)였다.

석륵(石勒)이 성고관(成皐關)으로 들어갔을때, 진류태수(陳留太守) 왕찬(王鑽)에게 패했는데, 태부(太


傅) 사마월(司馬越)이 이 기회에 석륵을 정벌하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섰다가 항(項)에서 죽고 말았다.
- 진서 사마월전
이처럼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상황에도 진(晉)에서는 그 순간까지도 내분이
일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그 값을 제대로 치루게 된다.

- 낙양(洛陽) 함락 -

서기 311 년.

작년에 출정했던 유총(劉聰)이 이끄는 한(漢)의 주력군은 낙양(洛陽) 공략을 시작했고, 그 와중에 한
(漢)군의 별동대로서 연전연승 공을 세우고 있는 석륵(石勒)은 계속해서 진(晉)의 수비군을 깨뜨리고
있었다. 기록만으로 보면 석륵은 이곳저곳 왔다갔다 하며 닥치는대로 다 깨부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파괴본능이 있는지, 되는대로 동서남북 다 돌아다니며 일단 다 때려부수고 본다.

진(晉)의 감군(監軍) 배막(裵邈)을 민지(澠池)에서 크게 무너뜨리고 마침내 낙천(洛川)에 이르렀다. -


위서 석륵전

그리고 직후에 위에서 사마월의 최후에 대해 싣어놓은 기록에서도 나오듯이, 진류태수 왕찬이란 사람에게
패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북으로 갔다가 또 한번 흔들어 놓고 예주(豫州)로 내려간다.

예주자사(豫州刺史) 풍숭(馮嵩)을 진군(陳郡)에서 요격하나 이기지 못하고 양성태수 최광(崔廣)을


공격해 죽였다. - 위서 석륵전

그리고 이후로도 또 형주(荊州)나 옹주(雍州)로 왔다갔다 하던차에, 진(晉)에서는 동해왕(凍海王)


사마월(司馬越)이 사망한다.

사마월 휘하의 신하들은 섬기던 주군의 죽음에 마땅히 그 시신을 모시고 고향 땅(사마월의 영지는 동해(東
海)였기에 동해로 간다고 하는 것이다)에서 장례를 치루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동해왕 사마월의 영지는 수도 낙양에서 멀고 먼 서주(徐州)였다.


근데 저들끼리만 가는 것이 아니라 황족, 대신, 부호, 낙양(洛陽)의 백성들에다 호위하는 병력까지
포함해 도합 10 만여명이 넘는 무리를 모두 데리고 떠났는데, 이 운구행렬을 이끄는 사람은 죽은 사마월의
심복이자 당시 진(晉)의 태위(太尉), 왕연(王衍)이라는 인물이었다.

왕연(王衍).

이 글에서는 조금 무능력하게 비추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위진 남북조 시대에 유행했던 청담사상 쪽에서는


으뜸가는 사상가였다고 한다. 진(晉)에서도 알아주는 명사(名士)이기도 했다고 하지만 다만 성품만은
별로였는지 '의리가 없다' 라고 평되었고 삼국지연의의 대미를 장식하는 인물들 중 하나인 진(晉)의 명장,
양호(羊祜)도 그를 두고 '큰 인물이 되겠지만 풍속을 무너뜨리고 교화를 손상시킬 것이다' 라고 평했다.
근데 나중가면 단순 풍속만이 아니라 나라를 무너뜨리는 위인으로 거듭나게 되신다.

태위(太尉)란 예로부터 고대 중국의 최고 벼슬인 삼공(三公) : 태위, 사공, 사도)의 하나로, 최고


군책임자직 중 하나다. 그런 거물이, 더구나 고위 군책임자라면 외침으로 인한 국난에 순전히 장례를
핑계로 타지로 간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될 말이었다.

사실, 이 무리의 본질은 난을 피해 도망가는 피난민이었다. 수도 낙양(洛陽)도 포위되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마당에, 장례를 핑계로 하여 아예 다른 곳으로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왕연 또한 마찬가지.
사마월이 죽으면서 왕연에게 권력을 이임했는데, 그것을 명분삼아 대이동을 결심한다.

군사들은 태위(太尉) 왕연(王衍)을 후임이 되도록 추천하여, 왕연은 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 - 위서
석륵전

그 무리의 구성원들은 실로 다양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황족부터 대소신료에다 부호, 백성들까지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낙양에서 거주하던 이들이었다. 나라에 큰 화가 닥칠 것을 예감이라도 했는지 이를
피하고자 덩달아 왕연의 피난민 무리를 따른 것인데, 훗날 낙양(洛陽)의 함락을 예고라도 하는 듯한
전조이기도 했다.

근데 문제는 왕연이 생전에 사마월이 거느리고 있던 10 만여명의 병력까지도 그대로 데리고 갔다는데에
있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사마월은 수도 낙양을 방어하고자 낙양 수비군을 가까운 허창에 주둔시켜 둔
것인데, 낙양을 수비할 주력군을 죄다 데리고 가버리면 막말로 낙양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마치 왕연의 실책을 벌하기라도 하듯 그들을 쫓는 재앙의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석륵(石勒)이 이끄는 한


(漢)군이었다.
본래 석륵은 사마월에게 반격을 가할 생각으로 왔으나 때마침 사마월이 죽었고 그 남은 병력이 동쪽으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칠 요량으로 왔던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군사들에 백성들까지 이리저리 뒤엉켜 혼잡한 상황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재촉하는 무리 뿐이었다. 그래서 석륵은 이들 모두를 다 죽여버린다. 진(晉)군은 말할 것도 없고 황족,
신하, 백성들까지 다 포함해서 10 만여명이 모조리 몰살당했다.

석륵이 추격하여 고현(古縣)에서 이를 격파했다. 석륵이 거느리고 있던 기병을 나눠 포위하게 하고


살육하니, 시체가 산과 같이 쌓였고 왕연과 양양왕(襄陽王) 사마범(司馬範) 등 10 만여명을 죽였다. -
위서 석륵전

기록에는 그냥 살육 중에 죽였다고 되어있지만 사실은 왕연과 여러 종실왕들, 신하들과 같은 고위층


인물들은 살려두고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이때 잡힌 숫자가 도합 48 명이었다.

그리고 그 우두머리 격이 되는 왕연은 석륵 앞에로 끌려와 이야기를 나눈다.

석륵 : "그대의 나라가 이렇게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왕연 : "황족들의 다툼(팔왕의 난) 때문입니다. 나라가 망한 것에 대해서는 저는 관여한 바가 없습니다.


저는 원래 젊었을 때부터 출세할 생각이 없었고, 천하의 일에도 알지 못했을 뿐더러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장군께서 존호(왕이나 황제를 말함)를 칭하시면 제가 따르겠습니다."

석륵 : "그대는 젊어서 조정에 입조하여 그 이름이 사해를 덮을 정도였고, 지금도 태위(太尉)라는 중요한
관직에 몸담고 있거늘, 어찌하여 출세할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는가? 천하를 망친 자가 그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 십팔사략

그리고는 포로로 끌려온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묻자 모두들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고
한다. 석륵은 이에 왕연을 비롯한 고위인사 48 명을 담장에 앉혀두고 돌담을 무너뜨려 압사시켜 버렸다.

석륵(石勒).

일화에서 보여지는 그대로다. 석륵의 질문에 왕연은 두려운 나머지 "나는 나라나 정치 같은거 몰라요ㅜ
살려주셈ㅜ 그리고 님이 황제나 왕이 되시면 제가 도와드림" 이라는 망발을 해버렸고 석륵 曰, "출세는
관심도 없다는 놈이 국방부 장관질이냐? 나라 망친 놈들 주제에 입만 나불대기는." 하며 죽인 것이다.
사실 진(晉)이 망한게 왕연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왕연의 말대로 뭣보다 팔왕의 난이라는 병크가 나라를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석륵은 그걸 방치한 고위층들에게 그 책임을 물었고, 그와
같은 석륵의 일침에 할말이 없어진 진(晉)의 고위인사들은 대꾸한번 못하고 모두 살해당하고 만 것.
명색의 한 국가의 고위인사라는 사람이 내뱉는 말이 고작 그 정도니 나라가 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아무튼, 이 학살사건으로 인해 수도 낙양(洛陽)을 방어할 주력군은 전멸당했고 이제 남은 것은 텅빈


것이나 다름없는 낙양을 접수하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서기 311 년, 5 월.

유총은 대장군(大將軍) 호연안(呼延晏)을 선봉으로 삼아 2 만 7 천여명의 군사를 주어 낙양(洛陽)을


총공격하게 했다. 이미 주력군을 상실했던 진(晉)군은 낙양근교에서의 싸움에서 수차례 패해 3 만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한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치자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는 장안(長安)으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도중에


도적들을 만나 실패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이번에는 북쪽으로 탈출하려 하자 뭇 대신들이 반대했는데
이유인즉, 자신들의 토지와 재산을 모두 들고 갈 방법이 없어서였다. 참 가지가지 한다. 최후의 순간까지
병신짓을 잊지 않는 진(晉)의 신하들이었다. 세번째로는 낙양(洛陽)에 흐르는 강인 낙수(洛水)에 배를
띄워 탈출하려 했는데, 한(漢)의 호연안이 죄다 태워버려 이마저도 실패한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낙양에 갇혀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달인 6 월.

호연안에 이어 유요(劉曜), 왕미(王彌)의 후속부대가 도착해 공격하니 끝까지 버티던 낙양(洛陽)은


함락당했다. 유요(劉曜)는 병사들에게 방화, 약탈을 허용해 낙양은 삽시간에 생지옥으로 변해버린다.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는 궁성을 빠져나가 탈출을 감행하지만 곧 한(漢)의 추격군에게 붙잡혀버린다.


그리고 조정대신들과 황족들도 포로신세가 되었고 낙양 백성 3 만여명이 한(漢)군에 의해 살육당했다.
특히, 왕미(王彌)의 병사들에 의해 자행된 경우가 많았다. 도적출신이라 그런지 그 쪽분야에선 전문가다.

그 뿐만 아니라 왕미는 진(晉)의 역대 황제들의 능(陵)을 훼손하고 도굴하기도 했는데, 이 바람에 진(晉)
의 시조인 사마의(司馬懿)나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 등의 능이 크게 훼손되어 오늘날에 복구하기까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치 진(晉)이라는 나라를 지워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낙양을 철저히 파괴하고 태워벼려, 예전


후한(後漢)의 동탁(董卓)에 의해 파괴되어 삼국시대 위(魏) 왕조의 수도로서 꾸준히 재건되던 낙양은
그렇게 120 여년만에 다시 한번 파괴되고 말았다.

유총은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와 진(晉)의 신하들을 한(漢)의 수도, 평양(平陽)으로 압송해가니 진


(晉)은 그렇게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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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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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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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3/12/18 11:13:40

- 진(晉)의 굴욕 -
진(晉)의 연호로 영가(永嘉) 6 년, 서기 312 년.

포로로 잡혔던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를 비롯한 진(晉)의 신하들은 한(漢)의 수도, 평양(平陽)에
도착한다. 승리자 소무제(昭武帝) 유총(劉聰)은 포로일행을 잘 대접해주며 의식주에 불편함이 없게
조치해줬다.

특히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는 '회계공(會稽公)' 에 봉해 한(漢)의 작위를 내려 한(漢)의 제후이자


신하로 삼았다. 망국의 황제이니 더이상 황제가 아니었기에 작위를 두단계 깎아 '공(公)' 으로 봉한
것이다.

더구나 유총과 사마치는 구면이었는데, 예전에 유총의 아버지인 유연(劉淵)이 진(晉)의 흉노정책에 따라
볼모로서 잠시나마 진(晉)에서 생활했던 것처럼, 유총도 똑같이 진(晉)에서 볼모생활을 했을때 아직
예장왕(豫章王) 시절의 사마치를 한번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오랑캐의 왕자가 대국 진(晉)의 왕(王)을 알현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어 승자와 패자가 만나는 자리가 되었다. 유총은 연회를 열어 사마치를 초대해 대화를 나눈다.

"유총 : 공(公)이 예장왕(豫章王)이던 시절, 나는 왕무자(王武子 : 왕제(王濟)를 말한다. 무제


사마염의 사위)와 함게 공을 방문한 적이 있소. 그때 왕무자(王武子)는 나를 칭찬했고 공은 "그대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라고 했소. 그리고 공은 직접 작곡한 음악을 들려주었고 나와 왕무자에게
작사를 부탁했소. 우리는 공을 찬양하는 가사를 썼는데, 공은 이를 좋아하고 기뻐했소. 그리고 활을 쏘며
즐겼는데 나는 열두번 명중시켰고 왕무자와 공은 아홉 번씩 명중시켰소. 그리고 공으로부터 뽕나무로 만든
활과 벼루를 선물로 받았는데, 이를 기억하시오?"

사마치 : 신(臣)이 어찌 그걸 잊겠습니까? 다만 후회스러운 일은 그때 폐하를 미처 몰라뵈었다는 것을


한스럽고 안타깝게 여길 뿐입니다."

유총 : "공의 집안에서 어쩌다가 일족끼리 살육(팔왕의 난)을 벌이게 되었소? 또 공은 이를 어찌


생각하시오?"
사마치 : "대한(大漢)은 장차 하늘의 뜻에 감응하여 천명을 받았던 연고로 폐하를 위해 스스로 서로
살육을 벌였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지 사람이 저지른 일은 아닐 것입니다. 또 만약 신의 집안이 무황제
(武皇帝) : 사마염의 뜻을 받들어 9 족이 단합된 상태로 있었다면 어떻게 폐하께서 황제가
되셨겠습니까?"

유총은 이에 감명받아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 자치통감

씁쓸해지는 일화라 하겠는데, 사마치에게 지금의 위치와는 달랐던 시절, 과거의 일을 꺼내 기억하냐며
묻는 유총의 말은 짖궂다 못해 사마치에게 치욕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거기다 "너네 어쩌다
그리되었누?" 라는 유총의 질문에 "우리끼리 치고박은 팔왕의 난은 다 너희 한(漢)나라가 하늘의 뜻을
받은 나라이니까 우리가 너희를 위해 알아서 자멸한거다." 라 하는 아부성 짙은 대답을 하는 사마치의
심정도 얼마나 굴욕스러웠을지도 대강 짐작이 간다. 하지만 뒤이어 은연 중에 속내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우리가 내분없이 있었더라면 네깟것들이 감히 그 자리에 올랐을 수나 있었겠냐?" (근데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러나?) 라는 사마치의 비꼼에 유총도 그건 인정하는지 감명받아 더 이야기한다.

그리고 유총은 사마치에게 자신이 평소에 아끼던 애첩을 사마치의 부인으로 주었다고 한다.

이렇듯, 망국의 황제 사마치와 진(晉)의 유신들에게 대접을 잘해주던 유총이었으나, 점차 뒤로가면서


대접은 소홀해지고 오히려 굴욕을 안겨다주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는 유총이 자만해진 나머지 뒤로 갈수록
성격이 글러먹어진 탓도 있었다.

해가 바뀌어 서기 313 년.

새해를 맞아 평양(平陽)의 궁성에서는 연회가 열렸다. 여러 대소신료들과 황족들이 즐기는 가운데,


유총은 사마치도 부른다. 하지만 '푸른 옷을 입히고 술을 시중들게' 시켰다.

비록 망국의 황제라 하지만 한때나마 황제였고 또 한(漢)에서도 '회계공(會稽公)' 의 작위를 받아 어엿한


제후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엄청난 굴욕을 준 것이다.
그때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진(晉)의 신하들은 차마 이를 보지 못하고 울분에 찬 나머지 울었다고 한다.
유총은 이를 보고 불쾌해져 그 신하들을 모두 잡아다 죄를 씌우고 처형해버린다.

그리고 사마치에게도 불똥이 튀어, 그 역시도 당시 병주(幷州)에서 한(漢)에 항전하던 진(晉)의 장수,
유곤(劉琨 : 18 편에 나왔던 그 유곤이다)과 내통한다는 죄명이 씌워져 독살당하고 만다.

유총은 진제(晉帝)를 핍박하여 술을 권했고, 진(晉)의 광록대부(光祿大夫) 유록(劉錄) 등이 평양(平陽)


에서 유곤(劉琨)과 호응하길 도모했기에, 진제(晉帝)를 살해하고 유록 등을 주살했다. - 위서 유총전

포로로 잡혀있던 사마치마저 죽임을 당해 이제 진(晉)은 완전히 멸망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명맥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진(晉)이 한(漢)에 의해 짓밟히고 깨졌다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중원에만 해당하는 일이었다.

동진(東晉)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

팔왕의 난을 피해 일찌감치 강남에 자리잡아 그 신의 한수 덕택에 팔왕의 난, 영가의 난을 피해갈 수


있었다.

이후, 서진(西晉)이 멸망하자 강남의 호족들의 지지를 받아 그 대통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제위에 오른다.

전에도 밝혔지만 제국 각지에는 비록 반독립 세력이었지만, 여러 번왕들과 주자사(州刺史)들이 건재했고


특히 번왕들 가운데 양자강 이남의 강남에 위치한 낭야왕(琅耶王) 사마예(司馬睿)는 강남의 호족들의
지지와 호응을 바탕으로 한창 세력을 확장 중인 상태였다. 즉, 황제가 죽고 도읍이 불타 파괴되었다
하더라도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은 상당수 있었으며, 여전히 진(晉)이라는 나라 또한 아직 멸망이란
말을 쓰기엔 과한 감이 있었다.

다만, 한(漢)에 대항할 여력이 없었다라는 점에서 보았을때는 거의 멸망한 것과 다름없긴 했다.
- 민제(愍帝) 즉위 -

회제(懷帝)가 사로잡혀 끌려간 이후로, 난에서 살아남은 신하들은 다시 항전할 구심점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그 구심점이란 다른 황족을 의미했는데, 하지만 팔왕의 난을 거쳐 대다수의 황족들이 죽어나갔고
그나마 남아있던 황족들도 왕연(王衍)을 따라 도망가다 석륵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한데다 영가의 난을
마지막으로 역시 여럿이 피해를 입어 거의 남아난 황족이 없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찾아낸 이가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의 손자요, 오왕(吳王) 사마안(司馬晏)의 아들로서,


당시 고작 12 살의 소년이었던 진왕(秦王) 사마업(司馬業)이었다.

사마업(司馬業)은 낙양(洛陽)이 함락될 때 간신히 몸을 피해 숙부인 회제 사마치를 비롯해 여러


황족들처럼 끌려가는 일은 면했다. 해가 바뀌어 서기 312 년에는 밀현(密縣)이란 곳에 은거해있다가
그곳에서 순번(荀藩), 순조(荀組)라는 신하들에게 구출되어 진(晉)의 유신들로부터 보좌받게 된다.

참고로 순번(荀藩), 순조(荀組)는 형제로, 위(魏)진(晉)시대의 명문호족들 중 하나인 영천(潁川) 순씨


(荀氏) 출신의 인물들이며, 삼국지연의에서 조조(曹操)의 책사이자 위(魏)의 중신이었던 순욱(荀彧)의
후손들이다.

이 형제의 주도하에 진(晉)의 신하들은 사마업을 군주로 추대했고 항전의 구심점으로 삼아 진(晉)을
부흥시키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반이 되는 곳이 필요했는데, 마땅한 곳이 없다라는 게 문제였다. 그때 염정(閻鼎)이란


장수가 장안(長安)이 속해있는 관중(關中)지방으로 옮겨갈 것을 건의하는데, 이때 관중(關中)지방 일대는
비교적 한(漢)의 세력이 미약한 곳일 뿐더러 관중지방과 접해있는 옹주(雍州)에는 아직 힘을 가진
신하들과 무장들이 있어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여러 신하들 간에 의견이 갈려 분분했고 결국 이 과정에서 반대하는 이들은 떠나버린다.
다만 그 반대자들이 사마업을 추대한 지지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라는 점이 큰 타격이긴 했다.

결국 사마업(司馬業)은 염정(閻鼎)의 뜻대로 관중(關中)지방으로 향했고, 옹주(雍州)의 안정군(安定郡)


을 수비하던 안정태수(安定太守) 가필(賈疋)과 옹주자사(雍州刺史) 국윤(鞠允)에게 환영받으며 지원
받게된다.

그리고 가필(賈疋)과 국윤(鞠允)은 여기서 사마업에게 장안(長安)을 공략할 것을 건의한다. 그렇잖아도


기반이 될 곳이 필요했던 사마업과 신하들은 이를 승낙했고 가필과 국윤은 곧장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쳐들어간다.

옹주(雍州)와 안정군(安定郡)이 보인다. 관중(關中)지방은 장안(長安)과 그 주변일대를 말한다.

애초에 한(漢)의 유총(劉聰)은 낙양을 함락하면서 더 나아가 장안(長安)과 관중(關中)지방까지


공략했었다. 당시 장안을 수비하던 이는 남양왕(南陽王) 사마모(司馬模)로,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동해왕
(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 한(漢)의 침공에 대비하고자 이 사마모를 장안에 주둔하게 했었는데,
사마월이 죽고 낙양이 함락되고 난 이후에도 사마모는 계속 장안에 있었던 것이다.

한(漢)의 공격은 장안공략은 낙양이 함락되고 2 달 후인 서기 311 년, 8 월에 시작되었다. 유총은


사촌동생인 유요(劉曜)를 보내 장안(長安)을 치게 했고 아들 유찬(劉粲)도 후속부대로 보내 지원하게
했다.

몰려오는 한(漢)의 대군에 비해 장안(長安)을 수비하는 진군(晉軍)의 숫자와 물자 및 무기는 보잘 것


없었다. 며칠 채 버티지 못하고 남양왕 사마모는 한(漢)에 항복하고 만다.
한(漢)은 그렇게 장안과 관중지방까지 점거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로부터 약 1 년 후에 진(晉)이 장안(長
安)을 탈환하러 쳐들어온 것이다.

가필(賈疋)과 국윤(鞠允)의 병력은 5 만여명 정도였고 장안(長安)의 한(漢)군은 그 갑절이었다. 하지만


장안을 포위당해 일종의 고립전의 양상으로 흘러가며, 성 밖으로 치고나오는 한(漢)군을 진(晉)군이 족족
격파하니, 장안을 진수하던 유요(劉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장안의 백성 8 만여명을 인질삼아 평양(平
陽)으로 도주한다.

장안(長安)은 다시 수복되었고 사마업과 그 휘하의 신하들도 장안으로 옮겨와 조정을 차려, 비로소
임시조정을 수립할 만한 기반을 마련한다.

그리고 서기 312 년, 가을.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사마업(司馬業)은 황태자(皇太子)가 되어 훗날 진


(晉)의 대통을 이을 후계자가 된다.

황제를 칭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까지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 뒤를


이을 황태자(皇太子)가 되어 정식 후계자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서기 313 년, 봄.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는 살해당했고, 이 소식은 장안(長安)


에 있는 사마업에게 전해지기까지 3 개월이 걸렸다.

숙부가 피살되었다는 비보를 접한 사마업은 정식으로 상을 치루고 시호를 '회제(懷帝)' 라 올린다.

그리고 바로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니, 그가 곧 진(晉)의 제 4 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민제(愍帝)다.


이때 사마업의 나이는 13 살에 불과했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고는 하나, 상황은 암울했다. 언제든지 한(漢)의 대군이 들이닥쳐 끝장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형국인데다, 무엇보다 민제(愍帝)정권의 세력이 너무나 미약했기에 불안한 요인은 산재했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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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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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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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수 : 2 개
등록시간 : 2013/12/20 02:11:06

- 최후의 노력 -

장안(長安)을 수복하고 수립된 민제(愍帝)정권은 말이 진(晉) 제국이지 이제는 제국이란 표현을 쓰기도
애매할 정도로 일개 지방정권에 지나지 않는 수준의 규모였다. 지배하는 영역도 장안(長安)과 관중(關中),
옹주(雍州)의 일부 뿐이었던지라.

그러나 옹주(雍州)의 그 일부조차도 확실한 장악이 의심되는 판국이었다. 코앞의 장안(長安)에 진(晉)
세력이 있는걸 알면서도 옹주(雍州)의 이민족들이 대놓고 독자적으로 작위를 자칭하고 심지어는 한(漢)과
접촉하여 손을 잡으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리된다면 양쪽으로 갇혀 협공당할
우려가 있었기에 진(晉)으로서는 그것만은 피해야 할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그 이민족들의 수장들은 각각 저족(氐族)의 부홍苻洪)과 강족(羌族)의 요익중(姚弋仲)이었다.
전편에서도 한번 언급한 인물들이기도 한데, 영가의 난으로 진(晉)이 완전히 무너지자 그 틈을 타
복속에서 벗어나 독립했던 터였다.

결국에는 그런 사태까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진(晉)은 이제 한낱 이민족의 동향에도 일일이 신경써야 할


만큼 애초에 목표로 삼았던 진(晉) 왕조의 부흥은 커녕 그나마 수립한 정권의 존속조차 위태로운 처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13 살 소년, 민제(愍帝) 사마업(司馬業)은 어떻게든 이 난국을 헤쳐나가고자 끈질긴


노력을 보여준다.

민제(愍帝)가 즉위(서기 313 년)하고 새로이 정한 연호는 '건흥(建興)'. 일으키고 흥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만으로도 당시 민제(愍帝)의 의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재위기간 동안 그가 벌인 일련의 노력들을 보면 딱하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민제(愍帝)정권의 당면과제는 언제든지 쳐들어올 수있는 한(漢)을 막아낼 병력을 충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자체적으로 병사를 양성하자니 오랜 전란으로 인하여 당시 장안(長安)에는 가구 수가 100 여호
가량 밖에 없는 실정이었던지라 인구가 부족해 그 또한 불가능했다. 거기다 물자도 부족해 수레도 4 대
밖에 없었고 조정에서 사용하는 관복이나 도장과 같은 관청물품도 부족한 마당이었다.

결론은 주위의 도움을 받는 방법 외에는 그 어떠한 자구책으로도 정권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민제 사마업은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한다.

당시 진주(秦州)에 주둔해 있던 남양왕(南陽王) 사마보(司馬保)가 첫번째 상대였다.


앞서 장안(長安)을 지키던 남양왕(南陽王) 사마모(司馬模)가 한(漢)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던
일은 전편에서 밝힌 바 있다. 이 사마모의 아들이 바로 사마보(司馬保)다. 사마보는 투항한 아버지와는
달리 세력을 이끌고 탈출하여 남서쪽의 진주(秦州)까지 달아나 그 곳에서 자리잡고 아버지의 남양왕(南陽
王) 작위를 세습하여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터였다.

서기 313 년 무렵의 진(晉).

검은색 원 :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한 관중(關中)의 민제(愍帝)정권.

빨간색 원 : 진주(秦州)의 남양왕(南陽王) 사마보(司馬保).

초록색 원 : 양주(凉州)의 장궤(張軌).

파란색 원 : 양주(揚州)의 낭야왕(琅耶王) 사마예(司馬睿).

민제(愍帝)는 이 사마보를 남양왕(南陽王)으로 정식 책봉하고 우승상(右丞相)으로 임명했다. 사마보는


이미 자체적으로 아버지 사마모의 남양왕 작위를 세습해 스스로를 남양왕으로 칭하고 있었지만 황제 민제
(愍帝)가 정식으로 내린 작위이니 정통성이 부여된다 하겠다. 거기다 재상의 자리에까지 앉혀 최고
권력자로 임명함으로서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바란 것이다.

하지만 이미 다 망해버린 나라의 왕(王)이고 재상이고 책봉되고 임명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저


이름만 거창할 뿐 아무 의미없는 칭호들에 불과했던지라 사마보는 그냥 무덤덤하게 반응했을 뿐, 민제(愍
帝)가 내심 바랬던 원군은 커녕 특별한 충성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마보로부터 이렇다할 반응을 못얻어내자 민제(愍帝)는 강남에 할거해 있던 낭야왕(琅耶王) 사마예(司馬


睿)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사마예(司馬睿)가 양주(揚州)에서 상당한 세력을 거느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접근한 것이다. 사마보처럼 민제는 사마예에게도 낭야왕(琅耶王)의 작위와 좌승상(左丞相)으로
임명한다는 조서를 내린다.
그러나 사마보의 경우와는 달리 사마예 역시 그의 할아버지 사마주(司馬伷 : 사마의(司馬懿)의 4 남)의
대부터 대대로 세습되어오던 작위를 물려받아 사마보처럼 정통성 운운할 것 없이 정식으로 낭야왕으로
책봉받았기에 이 또한 아무런 의미도 없었거니와 더구나 양주(揚州)의 사마예가 장안(長安)의 민제(愍帝)
를 돕기엔 실질적으로나 물리적으로도 제한되는 점이 많았다. 그래서 이 시도도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했다.

그나마 반응을 보인 쪽이 양주(凉州)의 장궤(張軌)였다.

전편에서도 밝혔듯 장궤(張軌)는 본래 양주자사(凉州刺史)였지만 중앙에서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이라는


두 국난을 거치는 동안 독자세력을 이룬 인물이다. (그리고 훗날 5 호 16 국 시대에 전량(前凉)의 기반이
된다)

나중에 진(晉)이 멸망한 후에도 여전히 진(晉)의 연호인 '건흥(建興)' 을 쓰며(이후 5 호 16 국들 중


하나인 전량(前凉 : 장궤가 시조)에서는 멸망하는 361 년까지 이 연호를 썼다) 진(晉) 왕조의 대통을
이은 동진(東晉)에도 충성을 표한 이후의 행보를 미루어 보면 이 당시에도 진(晉)에 대한 어느정도의
충성은 남아있던 것으로 보인다.

장궤(張軌)는 민제(愍帝)의 요청에 응하여 병력을 보내어 장안(長安)을 수비하는데 조력하고 이후의 한
(漢)의 잇달은 침공에도 몇번 군사를 보내 돕게한 유일한 조력자였다.

결론적으로 피를 나눈 친족들인 번왕들로부터의 도움을 바랬던 민제(愍帝)의 기대와는 달리 번왕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며 외면하다시피 했고 결국은 한(漢)의 공격을 홀로
막아내야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 마지막 발악과 최후 -

서기 313 년 4 월에 사마업(司馬業)이 황제로 즉위했다는 소식은 한(漢)의 수도 평양(平陽)에 있는 유총


(劉聰)에게까지 보고된다.

그리고 이 참에 진(晉)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리고자 유총은 토벌군을 보낸다.

건흥(建興) 원년, 10 월. 유총이 조염(趙染)에게 명하여 기병 5 천을 거느리고 장안(長安)을 기습하게


하자 장궤(張軌)의 장수 국감(鞠鑒)이 5 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장안(長安)을 지원하고 나섰다. 조염
(趙染)이 패하여 도망가자 국감(鞠鑒)이 영무(零武)까지 뒤쫓았으나 유요(劉曜)를 만나 크게 패하였다.
- 진서 민제기

장궤가 여러모로 도와준 것이 기록에 나와있다. 전세는 계속해서 엎치락 뒤치락 하며 바뀌고 있었다.

유요(劉曜)는 승리에 자만하여 대비에 소홀했기에 11 월에 국윤(鞠允)의 공격으로 크게 패해 평양(平陽)


으로 회군했다. - 진서 민제기

계속해서 본국에서 병력이 보충되어 쳐들어오는 한(漢)과 달리 민제(愍帝)정권은 보충할 길이 없어 매번


전투마다 한정된 병력이 계속해서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위태롭고도 처절한 싸움은 어느덧 다음
해로 접어든다.

그리고 서기 314 년, 5 월. 유총은 다시한번 군사를 일으켜 장안(長安)을 공략했다.

건흥(建興) 2 년, 5 월. 유요(劉曜)는 위예(渭汭)에 주둔하고 조염(趙染)은 신풍(新豊)에 주둔하고 장수


은개(殷凱)는 수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장안(長安)을 진공하였다. - 진서 민제기

하지만 민제(愍帝)의 적극적 대처로 다시 한번 선방한다.

장군 색빈(索彬)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요격하게 하고 국윤(鞠允)에게 명하여 마익(溤翊)에서 유요(劉


曜)를 맞게 하니 은개(殷凱)는 패하여 죽고 유요(劉曜)는 후퇴하여 포판(蒲坂)까지 물러났다. - 진서
민제기

군사만 보내면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던 진(晉)이 의외로 수차례 공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텨내자 유총
(劉聰)은 전략을 바꾼다.

장안(長安)의 서북쪽에는 북지군(北地郡)이라는 군(郡)이 있었다. 이 북지군(北地郡)에는 진(晉)이


방어수단의 일환으로 비밀리에 설치해둔 진(鎭 : 요새)이 몇군데 있었는데 요새라기보단 사실 일종의
병참기지에 가까운 시설로, 전쟁에 필요한 군량과 물자를 저장해두고 필요시에는 그 물자를 장안(長安)
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진(晉)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다시 재탕하는 지도. 빨간 원 안에 '북지(北地)' 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러나 이는 곧 유총(劉聰)에 의해 발각되고 만다.

거기다 기지가 갖는 중요성을 알아차린 이상 이를 방치할 리 없었던 유총은 매달리던 장안(長安)은 잠시


제쳐두고 먼저 북지군(北地郡)을 공략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서기 315 년, 북지군(北地郡)을 비롯한 진(晉)의 세력권 하에 놓여있던 그 인근의 고을들이


함락되면서 장안(長安)으로의 공급은 끊겼고 사실상 장안(長安)은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사태가 파국으로 치닫자 민제(愍帝)정권은 탈출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더구나 그 무렵에는 쌩까던
예전과는 달리 생각이 바뀌기라도 했는지 진주(秦州)의 남양왕(南陽王) 사마보(司馬保)로부터 자신이
있는 진주(秦州)로 망명을 해올 것을 권유받아, 때나 조건이 충족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양왕(南陽王) 사마보(司馬保)의 권유를 두고 조정에서는 의견이 갈린다. 논쟁의 초점은 사마보
(司馬保)를 믿어도 되겠는가의 찬반다툼이었다.

이건 사마보의 개인 성품과 결부지어 볼 필요가 있는데, 기록에는 사마보가 '의리가 없고 탐욕스러우며


이기적이다' 라고 평해놓았다. 거기다 진(晉) 멸망 이후에 그가 보이는 뭇 행동들로 보아도 그가 얼마나
개차반 성격이었는지를 알 수있다. 굳이 기록을 들추지 않더라도 당장 위에서 보이듯 민제(愍帝)정권의
신하들이 사마보의 됨됨이를 두고 망명을 망설이는 것만 봐도 알 수있지 않나 싶다.

즉, 행여나 망명한 황제 민제(愍帝)와 조정이 사마보에게 휘둘릴 것을 우려한 것이다.

거기다 삭침(索綝)이라는 장군이 강력하게 반대를 주장하고 나서 망명논의는 무산되었고 사마보(司馬保)


도 또 그새 생각이 바뀌어 권유를 철회함으로서 그냥 해프닝으로 끝난다.

그러나 외부로부터의 도움의 손길을 뿌리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기라도 하듯, 상황은 민제(愍帝)
정권에게 좋지 않게 돌아가 다음해에 이르러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친다.

서기 316 년 8 월, 북지군(北地郡)이 함락된 데에 이어 유요(劉曜)가 이끄는 한(漢)군이 진(晉)의 최후의


보루이자 마지막 남안 장안(長安)을 공격해와 장안성(長安城)의 외성(外城)까지 점령해버린다.

건흥(建興) 4 년, 7 월. 유요(劉曜)가 위수(渭水 : 장안(長安) 인근의 강)의 여러 성(城)을 공격하니


모두 함락되었다. 8 월에 장안(長安)으로 진공해오니 외성(外城)이 떨어져 성(城)의 내외가 격리되었다.
- 진서 민제기
서기 316 년 가을에 시작된 한(漢)군의 장안(長安) 공략전. 연두색으로 표시된게 당시 한(漢)의
영역이고 서쪽의 파란색 영역은 파저족(巴氐族) 이웅(李雄)의 성(成) 정권이다. 여기서 중국의 영역으로
표시되어있는 한반도는 무시하자. 중국자료다.

장안성(長安城) 평면도.

장안성(長安城)은 방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의 형태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한다. 외성(外城)은 말그대로 바깥 쪽 성내고 내성(內城)은 그 안의 구역이다.

이제는 목에까지 칼이 들이닥친 것이다. 장안(長安)의 내부마저 장악당했다는 소리인데 고립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밖에서 장궤(張軌)의 원군이 돕고자 멀리 양주(凉州)에서 달려오긴 했지만 장안(長安)을 둘러싼
한(漢)군의 에움이 워낙 두텁고 강했는지라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하고 만다.

포위는 몇 달간 계속되었다. 그 말은 민제(愍帝)정권이 이미 모든게 끝난 것과 다름없는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했다는 얘기도 된다. 하지만 외부로부터의 공급은 끊긴지 오래라 곧
식량이 동이 나 내성(內城)의 백성들과 병사들이 굶주리기 시작한다.
성 안에서는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여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 진서 민제기

그나마 남아있는 식량은 사람들이 서로 앞다투어 사려들어 그 값이 끝없이 치솟아 쌀 한말이 금 몇푼에
거래되기까지 했다.

식량이 없기는 조정도 마찬가지인지라 민제(愍帝)도 쌀죽으로 연명하며 외성(外城)을 탈환할 계획을
세우지만, 버티다 못해 결국 그해 11 월, 항복을 결심한다.

건흥(建興) 4 년, 11 월. 소매를 걷어올리고 옷을 풀어헤쳐 가슴을 드러내고 양(羊)을 끌며 입에 옥(玉 :


구슬)을 물고 성에 나와 항복하였다.- 진서 민제기

항복하는 민제(愍帝) 사마업(司馬業).

삽화에는 윗 기록대로 고대 중국의 항복의식에 따라 옷을 풀어헤치고 양(羊)을 끌고 나와 항복하는 모습이


묘사되어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삽화 속의 민제(愍帝)는 웬 배불뚝이 중년 아저씨로 그려져있는데 이때 민제(愍帝)는


17 세의 소년이었다.

민제(愍帝)는 한(漢)의 총사령관 유요(劉曜)의 진영에서 항복절차를 마치고 숙부 회제(懷帝) 사마치(司


馬織)가 그랬던 것처럼 한(漢)의 수도, 평양(平陽)으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서기 265 년,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에 의해 건국되어 서기 316 년, 민제(愍帝) 사마업(司馬


業)을 마지막으로 4 대 56 년 만에 진(晉) 왕조는 멸망한다.
평양(平陽)으로 압송되어간 민제(愍帝)의 처우는 회제(懷帝)와 다를 것 없었다. 아니, 어쩌면 더
비참했을지도 모른다. 회제(懷帝)는 그나마 처음에 대접받기라도 했다지만 민제(愍帝)는 시작부터가
굴욕이었다.

유총(劉聰)을 만나는 민제(愍帝).

왼쪽이 민제(愍帝)와 진(晉)의 유신들이고 오른쪽이 유총(劉聰)이다.

유총이 회평후(懷平侯)로 봉하여 제후로 인정해주었고 관직도 최고위 군직 중 하나인 거기장군(車騎將軍)


에 임명해줬다라지만 무늬만 그랬다.

유총은 사냥나갈때 민제(愍帝)로 하여금 그 곁에서 시중드는 몰이꾼 짓을 시키고 연회에서는 회제(懷帝)
처럼 술 시중을 들게 하여 갖은 모욕을 주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민제(愍帝)도 유총에게 죽임을 당한다.

서기 318 년 무렵, 한(漢)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일종의 민중 봉기였는데 그들이 내세운 목표 중 하나가
유총의 아들, 태자 유찬(劉粲)을 몰아내고 그 태자 자리에 민제(愍帝)를 앉혀 복위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민제(愍帝)의 존재 자체가 훗날의 화근이 될 것이라 판단한 유총은
결국 민제(愍帝)를 처형한다. 서기 318 년의 일이다.
그리고 훗날, 동진(東晉)의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에 의해 민제(愍帝)로 추존되었다.

진(晉)이 멸망했다라지만, 연재글 도중에서 몇번 언급했듯이 그 대통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강남에


할거해있던 낭야왕(琅耶王) 사마예(司馬睿)가 제위에 올라 다시 진(晉) 제국의 중흥을 선포하니,
역사에서는 서기 265 년에 건국되어 서기 316 년에 멸망한 이 진(晉)나라와 서기 317 년에 세워져 서기
420 년에 멸망하는 진(晉)을 구분하기 위해 전자는 서진(西晉), 후자는 동진(東晉)으로 나누어 부른다.

사실 이 두 개의 왕조를 같이 묶어서 진(晉)이라 부르지만 이 글에서는 따로 서진(西晉)이라 부르지 않고


편의상 진(晉)이라 칭했음을 이제서야 밝힌다.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은 진(晉)을 개국하고 첫 연호를 '태시(太始)' 라 정했다. 크고 거대한


시작이란 뜻이다. 그러나 그 거창한던 시작에 비해 제국의 최후는 보잘 것 없고 비참했다.

존속기간 동안 제국은 지배층의 사치와 향락, 그리고 권력싸움 등으로 대표되는 타락으로 인하여 발생한
내란으로 국정은 피폐해졌고 민생은 불안해져 수많은 민중 봉기를 불러왔다.

국력은 급감하여 이 내란 도중에 이민족들이 개입할 여지를 제공했고 연쇄작용으로 이민족들의 거센


유입이 이루어져 제국의 멸망 이후로는 재분열하여 5 호 16 국 시대 및 남북조 시대가 도래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후 서기 589 년에 수(隨) 문제(文帝)에 의해 다시 통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중국은 장장 몇
백년에 걸친 난세를 겪게 된다.

내란 이후로도 돌이킬 수 없는 쇠락의 길을 걸어 결국 건국된지 채 반세기 남짓만에 이민족들에게 나라를


내어주고 만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음글에서는 진(晉)이 멸망한 그 후를 간략하게나마 써볼까 합니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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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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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추천 : 27
조회수 : 1411 회
댓글수 : 13 개
등록시간 : 2013/12/20 17:39:25

- 동진(東晉) 건국 -

서기 318 년, 양주(楊州)의 건업(建業)으로 장안(長安)이 함락되고 황제는 피살되었다는 비보가 날아든다.

이 소식을 접한 낭야왕(琅耶王) 사마예(司馬睿)의 안동사마(安東司馬)이자 강남(江南 : 양자강 이남)의


명문가 호족, 왕도(王導)는 때가 왔음을 직감한다.

왕도(王導)는 그 길로 왕부(王府 : 사마예(司馬睿)는 엄연한 왕(王)이므로 조정을 열 수있다. 왕부는 그


조정을 의미한다)의 신하들을 소집하여 그동안 구상해오던 일을 논의하여 의견을 하나로 모았다.

구상해오던 일이란, 그들의 주군이자 사마씨(司馬氏) 진(晉) 왕조의 마지막 황족, 낭야왕(琅耶王)
사마예(司馬睿)를 황제로 옹립하여 멸망한 진(晉)의 대통을 잇게 하는 일이었다.

그 무렵 사마예(司馬睿)는 민제(愍帝) 사마업(司馬業)으로부터 '진왕(晉王)' 의 작위를 하사받은


상태였다. 제국의 국호가 진(晉)인데 하사하는 왕(王)자리의 작호가 어떻게 진(晉)이 될 수있었는지에
대한 답은 당시 민제(愍帝) 사마업(司馬業)의 조치에서 찾을 수있다.

서기 316 년, 장안(長安)이 함락되기 직전의 상황에서 민제(愍帝)는 일이 이미 틀렸음 예감하고 제국의


모든 권한을 강남의 사마예(司馬睿)에게 위임했다. 더불어 진왕(晉王)의 작위를 하사하여 그 작호가
보여주듯 사실상 제위를 넘겨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암묵적으로 사마예(司馬睿)를 후계자로 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진(晉) 중종(中宗)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

선제(先帝) 민제(愍帝)로부터도 인정받은 후계자였던만큼, 멸망한 제국을 계승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


계승자의 정통성 여부나 계승 명분도 어느 누구도 반박의 여지가 없었을 터였다.

그리하여 서기 318 년,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사마예(司馬睿)는 제위에 올라 진(晉)의 계승을 선포하니,


이가 곧 동진(東晉)이다. 따로 '동(東)' 자를 붙여 구별하는 이유는 당시 수도가 동쪽으로 치우친
강남의 건업(建業)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낙양(洛陽)이 수도였던 진(晉) 왕조는 서쪽의 진(晉)이라
하여 서진(西晉)이라 불렀음은 이미 몇번 언급했다.

왕도(王導).

동진(東晉)의 건국공신이자 이후로 삼대(三代)의 황제를 모신 명신(名臣)이기도 했던 왕도(王導)는


명문가 호족인 낭야(琅?) 왕씨(王氏)출신으로, 팔왕의 난을 피해 강남으로 내려와있던 사마예(司馬睿)를
보좌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건국 이후에는 아직 동진(東晉)을 지지하지 않던 강남의 여러 사족들을
규합함으로서 건국 후에도 강남에서 불안정했던 동진(東晉)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흔히 사마예가 유비
(劉備)에 비유되면 왕도는 제갈량(諸葛亮)으로 비견될 만큼 동진(東晉)을 개국함에 있어서 지대한 공을
세웠다.

제위에 오른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는 서진(西晉)을 멸한 한(漢)의 유총(劉聰)과 당시 독자세력을


구축하던 석륵(石勒)을 역적으로 규명하고 서신을 보내 정벌할 뜻을 보여 다시한번 동진(東晉)이 서진(西
晉)의 계승국가임을 천명한다.

이후로 동진(東晉)은 서기 318 년, 건국을 시작으로 서기 420 년에 멸망하기까지 약 100 여년간


존속했으며, 그 다음으로 들어선 송(宋) 왕조를 시작으로 강남에서는 남조(南朝)가, 화북(華北)에서는
북위(北魏)를 시초로 보는 북조(北朝)가 들어서니 역사에서는 이를 남북조 시대(南北朝 時代)라 부른다.

- 5 호 16 국 시대(五胡十六國 時代)의 시작 -
서진(西晉) 멸망 후에 화북(華北)지방에 도래한 5 호 16 국 시대(五胡十六國 時代)를 다 다루려면 한개의
연재 시리즈를 써도 모자랄 만큼

다사다난했던 시대였다. 시대명칭 그대로 5 호(五胡), 다섯 오랑캐 이민족이 십육국(十六國), 무려 16


개의 나라를 세웠던 시대다.

물론 동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약 130 여년 간에 걸쳐 여러 나라가 흥하고 멸망했던


것이다.

윗 지도들이 보여주듯 각종 이민족들에 의해 나라가 우후죽순 세워지던 때였던지라 이들 모두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이 연재글들 중에 한번씩은 언급했던 나라들 위주로만 서술할까 한다. 한(漢)이나
전량(前凉), 성(成) 이 정도..

강남에서는 동진(東晉)의 건국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그 이북의 화북(華北)지방에서는 정세의 변화가


일고 있었다.

먼저 한(漢)부터 살펴보자.

서기 318 년 무렵, 진(晉)이 멸망한 직후의 형국.

지도에서 보이듯 화북(華北)에는 진(晉)을 멸하고 들어선 한(漢 : 지도에서는 전조(前趙)로 나와있다)이
지배하고 있었다.

서기 318 년, 한(漢)의 소무제(昭武帝) 유총(劉聰)은 말년에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중에는 망국의 황제,
민제(愍帝)를 죽이는 등 황음무도한 행각들을 벌이다 사망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이는 소무제(昭武帝) 유총(劉聰)의 차남, 은황제(隱皇帝) 유찬(劉粲)이었다.

그러나 은제(隱帝) 유찬(劉粲)도 황제가 될 그릇은 못되었는지 '주색에 빠져 정사는 멀리하는' 전형적인
혼군의 면모를 보여 곧 외척세력의 반정으로 폐살되고 만다.

다음으로 황제가 된 사람은 유총(劉聰)의 사촌동생이자 진(晉)과의 전쟁에 참전하여 활약했던 유요(劉曜)
였다.

이 유요(劉曜)의 대에 이르러 한(漢)은 국호를 '조(趙 : 본래 국명은 '조(趙)' 지만 나중에 세워지는


석륵의 '조(趙)' 와의 구별을 위해 전조(前趙)로 불렀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로 바꾸었는데,
중국의 한족(漢族)을 상기하게 하는 '한(漢)' 이라는 국호보다는 본래의 흉노(匈奴) 정체성을 되찾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이었다.

황제가 된 유요(劉曜)의 당면과제는 당시 무섭게 팽창하던 석륵(石勒)과의 전쟁이었다.

일찍이 유연(劉淵)에게 귀순하여 그 휘하에서 진(晉)과의 전쟁에서 활약하던 석륵(石勒)은 차츰


독자세력을 모으며 성장해나갔고 진(晉)이 멸망한 이후에는 전조(前趙)로부터 독립하여 '조왕(趙王)' 을
칭하고는 '후조(後趙)' 를 건국하고 전조(前趙)와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조(後趙)를 건국한 석륵(石勒).

어쩌면 애초에 다른 목적으로 전조(前趙)에 귀순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될 만큼 그가 보여준 이후의


행보는 지극히 독립적이었다.
전조(前趙)에는 그런대로 복속의사를 표하면서도 남몰래 자신만의 세력을 꾸려나가는 희대의 야심가의
모습을 보여준 석륵은 길러놓은 그 힘으로 종주국이 되는 전조(前趙)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나중에는 황제가 된다.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명황제(明皇帝)다.

전조(前趙)와 후조(後趙)의 싸움은 서기 324 년 무렵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석륵(石
勒)의 탁월한 재능 덕택에 전세는 후조(後趙)쪽으로 기울어갔고 전조(前趙)는 여러 주(州)를 상실한 채,
수도는 장안(長安)으로 천도하고 영역은 관중(關中)일대로 좁혀진다.

서기 328 년 무렵에 벌어진 전조(前趙)와 후조(後趙)의 전투.

파란 화살표가 후조(後趙)군의 공격로이고 빨간 화살표는 전조(前趙)의 요격로다.

전투가 벌어진 무대는 사주(司州) 일대로, 전조(前趙)의 유요(劉曜)는 낙양(洛陽)의 석륵(石勒)을


공략해 포위하고 궁지로 몰아넣었지만

승리에 도취해 방심한 나머지 석륵(石勒)의 반격으로 크게 패하고 본인은 포로로 잡힌 후 처형당한다. 이
전투에서 패한 전조(前趙)는 사주(司州)에서의 주권을 잃고 장안(長安)으로 후퇴했으며 석륵(石勒)은
사주(司州) 일대를 석권하고 전조(前趙)를 관중(關中)일대로 몰아넣게 된다.

마치 불과 수년 전에 전조(前趙)가 진(晉)을 압박하여 장안(長安)과 관중(關中)으로 몰아넣었듯이 말이다.


마치 전조(前趙)에 맞서 처절한 항전을 벌이던 민제(愍帝)의 망령이라도 되살아나 똑같이 앙갚음이라도
해주려는 듯이 이제는 전조(前趙)가 그 꼴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서기 328 년 무렵의 정세.

서기 318 년 경의 지도와 비교했을때 전조(前趙)의 영역이 한눈에 봐도 줄어들었다.


그에 비해 후조(後趙)의 세력권은 넓혀져 있다.

유요(劉曜)의 아들이자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전조(前趙)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한 유희(劉熙)는 장안


(長安)에서 항거하지만 이내 옹주(雍州)의 천수군(天水郡)이란 곳으로 도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안(長安)을 탈환할 기회를 엿보지만 곧 후조(後趙)의 토벌군에 의해 무너지고 유희(劉
熙)와 전조(前趙)의 신하들은 사로잡혀 머지않아 처형당하니 서기 329 년, 전조(前趙)는 멸망한다.

후조(後趙)의 화북(華北) 지배.

이리하여 후조(後趙)는 화북(華北)의 주인이 되었고 서기 333 년, 석륵(石勒)은 제위에 올라 후조(後趙)


의 개국을 정식으로 선포한다.

그러나 중국사에서 가장 복잡하고 혼란했던 시기 중 하나로 여겨지는 5 호 16 국 시대였던만큼, 이 후조


(後趙)도 반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한(漢)족의 염민(冉閔)이란 이에게 멸망당하고 염민(冉閔)이
일시적으로 세운 위(魏)도 전에 한번 다룬 적이 있는 모용외(慕容廆)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이 세운
전연(前燕)에게 멸망당해 화북(華北)은 다시 혼란기로 접어든다.

그리고 이 혼란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훗날 탁발부(拓跋部)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북위(北魏)에 의해


화북(華北)이 재통일 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 전량(前凉)과 성한(成漢) -

전량(前凉)의 최대 강역.

지금까지 계속 전량(前凉)이라 써오고 앞에 '전(前)' 자가 붙은 이유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제서야 밝혀보자면 위에서 말한 후조(後趙)와 전조(前趙)의 경우와 같은 경우다. 전량(前凉)이
멸망하고 난 이후, 양주(凉州)에는 훗날 16 국 중 하나인 후량(後凉)이라하는 나라가 들어서는데 역시
구분을 위해 전후를 붙인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감숙성(甘肅省). 전량(前凉)의 영역은 현재의 감숙성(甘肅省)과 거의 일치했다.

전량(前凉)의 시조가 진(晉)의 양주자사(凉州刺史) 출신인 장궤(張軌)라는 것은 앞에서 밝혔다.

한족(漢族)인데다 출신이 본래 진(晉)의 신하여서인지는 모를 일이나 장궤(張軌)의 사후, 그 아들인 장식


(張寔)도 친진(親晉)노선을 이어갔다.

진주(秦州)의 남양왕(南陽王) 사마보(司馬保)를 기억하실 것이다. 진(晉)이 멸망한 이후에도 사마보(司


馬保)는 진주(秦州)에서 계속 할거하며 전조(前趙)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순망치한이라고, 장안(長安)의 민제(愍帝)정권이 무너지면 그 다음 타겟은 진(晉)의 잔여세력인 자신이


될 것이란 걸 몰랐는지 결국엔 전조(前趙)와의 싸움을 벌이고 있던 것이다.
이때 장식(張寔)은 화북(華北)을 점거하고 기세등등했던 전조(前趙)를 섬기기를 거부하고 마치 진(晉)의
신하임을 표방하기라도 하려는 듯 진(晉)의 황족 사마보(司馬保)를 적극 지원하며 전조(前趙)에
항전한데다 민제(愍帝)의 연호인 '건흥(建興)' 을 계속해서 썼다.

또한 동진(東晉)이 세워지자 복속의사를 표명했으나 다만 그 정통성은 인정하지 않았는지 서진(西晉)의


마지막 연호인 '건흥(建興)' 을 쓰기를 고집했다.

지금까지 보면 여전히 멸망한 진(晉)을 따르는 제후국처럼 보이고 16 국 중 하나였던 독립국가 전량(前凉)
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적어도 장식(張寔) 이후로 집권한 장무(張茂 : 장궤의
아들. 장식의 동생이다)의 대까지는.

역사에서는 실질적으로 전량(前凉)정권이 수립되는 때는 장무(張茂)의 뒤를 이은 장준(張駿 : 장식의


아들)의 치세부터라고 보고 있다.

장준(張駿).

그동안 장준(張駿) 이전의 군주들인 장식(張寔)과 장무(張茂)는 아버지 장궤(張軌)의 벼슬이었던


양주자사(凉州刺史) 직을 계속 세습해와서 공식작위는 한낱 양주자사(凉州刺史)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찌보면 하나의 국가라기 보다는 그냥 말그대로 군벌이라 부름이 타당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장준(張駿)은 자신의 치세동안 정권 내에서 스스로를 대도독(大都督), 대장군(大將軍), 가량왕(假凉王)
이라 자칭했는데 여기서 왕(王)을 칭한 것을 계기로 이때부터를 진정한 전량(前凉)의 시작이라 여긴다.
훗날 7 대 국왕인 장조(張祚)에 의해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문왕(文王)으로 추존되었다. 여기서
황제로 추존되지 않은 이유는 전량(前凉) 자체가 왕국(王國)체제였기 때문.

장준(張駿)은 치세동안 전조(前趙)로부터의 거듭되는 복속 요구와 때에 따른 침공에 맞서 전량(前凉)의


자주권을 지켜냈으며 스스로는 왕(王)을 칭해 비로소 전량(前凉)이 이전의 장씨(張氏)군벌에 가깝던
모습을 버리고 16 국 중 하나인 진정한 나라로 발돋움하게 한 인물이라고 평가 받는다.

장준(張駿)을 기준으로 전량(前凉)은 5 대를 더 갔다. 장준(張駿) 이전의 추존된 군주들까지 치면 총 9


대다. 존속기간은 시조 장궤(張軌)가 팔왕의 난을 피하고자 외직인 양주자사(凉州刺史)를 자청해 양주(凉
州)에 자리잡았던 서기 301 년부터를 시작으로 하여 한창 잘나가던 전진(前秦)에게 망하는 때인 서기 376
년까지, 약 75 년간이었다.

한편 성한(成漢)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성한(成漢)의 강역.

여기서 성한(成漢)이 무슨 나라를 말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시련가 모르겠다. 하지만
눈썰미가 있으신 분들이라면 윗글에 첨부된 여러 지도들을 보고 짐작하셨을 법도 하다. 성한(成漢)은
예전에 다룬 성(成) 정권이다. 뒤에 '한(漢)' 자가 붙었는데 이는 나중에 국호가 한(漢)으로 고쳐지기
때문에 초기의 국호인 성(成)과 말기의 국호 한(漢)을 붙여 통틀어 '성한(成漢)' 이라 부르는 것이다.

파저족(巴氐族) 이특(李特)-이웅(李雄) 부자가 익주(益州)로 진출하여 진(晉) 세력을 꺾고 성(成)


정권을 수립해 이웅(李雄)이 황제로 즉위한 것까지는 아실터이다.

그리고 성(成)은 이웅(李雄)의 탁월한 지도력과 승상(丞相) 범장생(氾長生)의 보좌로 특히 익주(益州)의


토착세력으로 대표되는 범장생(氾長生)의 호족규합 노력 덕택에 훌륭한 내치성적을 거두어 전성기를 맞아
약 30 여년간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듯이, 성(成)은 이웅(李雄)의 죽음을 기점으로 급격한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다름아닌 후계자 문제때문이었다.

이웅(李雄).

이민족이었지만 정치수완만은 좋았는듯. 뛰어난 내치로 성(成)의 전성기를 이끌어낸 장본인.

하지만 이룩해놓은 업적도 후계자 문제로 다 날려먹으니 다 물거품이 되고 만다.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무제(武帝)다.

생전에 이웅(李雄)은 후계자로 자신의 아들들이 아닌 형 이탕(李蕩)의 아들, 이반(李班)을 점찍어 두고


있었다. 즉 조카를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다.

성한(成漢) 왕조 가계도.

한자가 즐비하지만 어느정도 급수 되시는 분들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가계도에서 보이듯 이웅은 형 이탕(李蕩)의 아들인 이반(李班 : 2 번)을 후계자로 삼았다.

이웅의 선택은 국가적 차원에서는 옳았다고 하더라도 가족사 차원에서는 영 아니올시다였다.


이유인즉 이반(李班)의 효성과 덕망이 깊으며 성품 또한 온화하다고 평들이 나있어 본인도 눈여겨보니
실로 그러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아예 양자로 들이고 태자로까지 책봉해 못박아 둔다.

그러나 그 수많은 친아들들을 다 제쳐두고 조카를 후계자로 삼으니 이웅의 아들들이 반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웅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고 그저 불만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곧 훗날의 화근이 된다.

그러던 차에 이웅(李雄)이 병을 얻어 곧 병사하자 그 뒤를 이어 태자 이반(李班)이 즉위하니 그가 곧


애제(哀帝)다.

애시당초 이반(李班)이 제위에 올랐을 때부터 정변은 예고되어 있었다. 눈치때문에 아버지 이웅이
사망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이웅의 아들들이 눈엣가시 같던 이반을 가만둘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적당한 기회를 노리던 차에 오히려 이반(李班)이 그 기회를 제공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보이고 만다.

평이 그랬던 것처럼 이반은 정말 효성이 깊었는지, 황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이웅(李雄)의 상


(喪)을 치루느라 정사는 멀리한채 이웅의 시신이 든 관의 곁을 지킬 것을 고집하며 한시라도 떠나지
않으려 했는데, 바로 이것이 빌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정사를 멀리하여 나라가 제대로 안돌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정변의 명분이 되었으리라.
반역의 주모자 이기(李期)는 기회를 노려 이반(李班)이 혼자 이웅의 빈소에 머물러 있는 틈을 타 군사를
보내 죽여버리니 이때가 서기 334 년으로, 본격적으로 성한(成漢)이 몰락하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했다.

이기(李期)는 원하는 대로 황위에 앉았지만 그도 애초부터 황제의 자리에 앉을 그릇이 못되는 인물이었다.
그가 재위기간 내내 골몰한 일이라고는 다른 황족들을 숙청하는 일 뿐이었다.

피로 흥한 자, 피로 망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무분별한 폭정을 일삼던 이기(李期)도 결국에는 건녕왕(建


寧王) 이수(李壽)라는 황족의 정변으로 목숨을 잃고 만다.
그렇다고 이수(李壽 : 중종(中宗) 소문제(昭文帝))도 황제가 되어서 잘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심한 폭정을 일삼기에 이른다.

수도 성도(成都)에서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이고 맘에 안드는 신하들은 모두 처형하는데다 황족들에 대한


숙청은 이기(李期)의 대의 그것에 비해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아 공포정치로 인해 민심을 잃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이때 국호를 '한(漢)' 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러던 그도 서기 343 년에 사망하고 그 아들인 이세(李勢)가 즉위하니 성한(成漢)의 마지막 황제


되시겠다.

부전자전이라고, 그 아비에 그 아들이었기에 이세(李勢)의 대에도 상황은 여전했다. 촉(蜀)의 원주민들의


반란이 일어나는가 하면, 핍박받던 황족들의 반란도 터져나왔다.

이렇게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며 나라가 휘청거리는 가운데, 동진(東晉)의 정벌로 멸망하니, 그때가 서기
347 년이다. 총 5 대 43 년만에 단명한 나라였다.

팔왕의 난이라는 골육상쟁으로 진(晉)이 어지러운 틈을 타 세워진 나라의 최후도 골육상쟁으로 인한


것이라 하니 정말 역사는 되풀이 되는게 맞나 싶다.

그동안 연재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필력이 모자라는지라 어디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거나 그런 부분들
양해부탁드리고요. 예전부터 위진남북조 시대에 관심갖고 공부해왔던지라 파고들 수록 흥미롭고 재밌는
부분들이 많은 것 같아 다른 사람과 공유해보자는 생각에 어쩌다 심심풀이로 역게에다 한번 써본 글이
결국은 스무 몇편에 걸쳐 쓰게 되었네요. 그냥 '아 이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로 이해해주시고 즐기셨길
바랍니다. 다시한번 읽어주셔서 감사하단 말씀드리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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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3 대 대전 중 하나, 비수대전(淝水大戰) - 1

게시물 ID : history_13142 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추천 : 29
조회수 : 3942 회
댓글수 : 4 개
등록시간 : 2013/12/22 04:20:54

중국 역사상 3 대 대전(大戰)이라 불리우는 세가지 전투가 있다.

<삼국지연의>로도 널리 알려진 적벽대전(赤壁大戰).

역시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조조(曹操)와 원소(袁紹)가 격돌한 관도대전(官渡之戰).

그리고 이번 글에서 다루어 보고자 하는 비수대전(淝水大戰), 이렇게 세가지다.

이 전투들의 공통점은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격파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전투의 결과가 정세의 변화를 불러왔다는 면에서도 공통된다 하겠다.

삼국지연의나 영화같은 대중매체로도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는 당시 대륙통일을 목적으로


쳐들어왔던 조조(曹操)가 손권(孫權), 유비(劉備) 연합군에 패해 통일의 꿈을 접고 후퇴해야 했으며,
관도대전(官渡之戰)에서는 하북(河北)의 강자 원소(袁紹)를 꺾음으로서 조조(曹操)가 후한(後漢) 말
여러 군벌들 중 최강자로 군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수대전(淝水大戰)은 서기 383 년, 전진(前秦)과 동진(東晉)이라는 두 국가 간에 비수(淝水)라는 강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그 승패에 따라 중국의 통일이 이루어지느냐 마느냐의 운명이 걸린 싸움이었다.

먼저 당시 서기 4C 후반 무렵의 중국의 정세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서기 376 년 무렵의 중국의 형국.

푸른색으로 표시된 영역의 국가가 전진(前秦), 노란색의 영역은 동진(東晉)이다.

우리에게 <삼국지>로도 유명한 삼국시대를 통일한 나라는 진(晉)이라는 나라였다. 그러나 서기 4C 초에


진(晉) 왕조는 얼마가지 못하고 내란과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붕괴하고 중국의 북부지방, 즉 화북(華北)
에서는 이른바 '5 호 16 국 시대' 라고 하는 시대가 도래하여, 여러 이민족들에 의한 나라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또 지는 혼란한 시기가 시작된다.

한편 이미 붕괴했던 진(晉) 왕조는 중국의 남부, 다른 말로는 화남(華南)지방에서 다시 건국되니,


역사에서는 이를 동진(東晉)이라 부른다.

화북(華北)에서는 5 호 16 국 시대가, 화남(華南)에서는 동진(東晉)이 있는 형태로 서기 4C 중후반까지


계속된다.

그러던 중, 그 숱하게 생겨났던 나라들 가운데 혼란을 종결짓고 화북(華北)을 통일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전진(前秦)이라는 나라였다.

당시 전진(前秦)의 황제는 부견(苻堅)이라는 사람으로, 출신은 비록 이민족이었으나 정치감각만은 탁월해,


뛰어난 재능을 소유한 한족(漢族) 왕맹(王猛)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여러제도의 개혁과 실시를 통해,
전진(前秦)을 부국강병하게 만들어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모두 병합함으로서 통일을 이루어낸 명군(名君)
이었다.

왕맹(王猛)의 초상화.

한족(漢族)출신으로 이민족의 국가 전진(前秦)의 부름을 받아 재상으로서 훌륭한 내치를 펼쳐

부견(苻堅)을 도와 전진(前秦)을 화북의 강자로 발돋움하게 한 장본인.

군주 부견의 지도력과 재상 왕맹의 재능덕택에 통일을 이룩한 이후로도 나라는 더욱 융성했졌고 오랜


전란도 끊겨 민생도 안정되어 실로 전진(前秦)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던 것.

전진(前秦)이 화북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는 서기 376 년이다. 한편 화남에서는 동진(東晉)이 계속해서


존속해오고 있었다.
이제 중국대륙은 전진(前秦)과 동진(東晉)이 둘로 나누어 대립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강자는 전진(前秦)이었으나, 재상 왕맹(王猛)은 일찍이 부견(苻堅)에게 절대 동진(東晉)을


공격하려 들지 말 것이며, 오히려 화친을 도모해야한다고 누누이 이르곤 했었다.

그러나 왕맹(王猛)이 죽자 부견(苻堅)은 슬슬 다른 생각을 품기 시작한다.

앞서 말했듯 전진(前秦)의 국력은 동진(東晉)을 능가했으며 나라는 전성기를 맞아 번성하고 군사, 경제


등의 분야에서도 앞서는 터였다. 동진(東晉)만 멸한다면 전진(前秦)은 명실명백한 중국의 통일제국이 될
수있었다.

이러니 부견(苻堅)이 욕심을 안내고 배기겠는가. 모든 조건은 완벽했다. 자신의 대에 통일을


이룩했다라는 업적을 남기고 싶었던 부견은 점차 동진(東晉)을 침공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평소 왕맹(王猛)을 제갈량(諸葛亮)에 비유하며 그토록 신임하고 존중하던 왕맹(王猛)의 말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귀담아 듣던 부견(苻堅)은 왕맹의 사후를 기점으로 생각을 바꾸어 공식적으로 동진(東晉)을
침공할 뜻을 밝힌다.

죽은 왕맹(王猛)의 뜻에 함께하던 조정대신들이 이를 반대했지만 통일이란 업적달성에 눈이 멀어버린 부견


(苻堅)은 요지부동으로 출정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서기 383 년, 8 월. 전진(前秦)은 총 97 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수륙에 걸쳐 장장 동서로 약 1 만여


리에 펼쳐진 진용으로 진군, 동진(東晉) 국경으로 일제히 침공해 들어간다.
갑자일(8 일)에 장안(長安)을 출발, 보졸(步卒)은 60 만, 기병은 27 만명이었고 깃발들과 북소리가 서로
바라보이는 것이 앞뒤로 1 천리에 달했다. 9 월, 부견(苻堅)이 항성(項城)에 이르렀는데, 양주(凉州)의
군사가 함양(咸陽)에 도착했으며, 촉(蜀)의 병사가 장강(長江)을 따라 내려가고 유주(幽州)와 기주(冀
州)의 병력이 팽성(彭城)에 이르러 동서로 1 만여 리에 걸쳐 수륙으로 일제히 진군, 운반하는 배가 1 만여
척이었다. 양평공(陽平公) 부융(苻融)의 군사 30 만명이 영구(潁口)에 도착해 주둔했다. - 자치통감

지도 출처 : 야스페르츠님의 블로그

당시 전진(前秦)군의 진군도.

지도에서 보이듯 전진(前秦)군은 동진(東晉)의 국경 전역에 걸쳐 짓쳐들어 갔다. 쳐들어간 방향은


여러갈래였지만 주요 접전지는 검은색 동그라미로 표시된 '비수(淝水)' 였다. 이곳에서의 승패에 따라
부견의 바람대로 통일이 이루어지느냐 마느냐가 결정될 만큼 전진(前秦)과 동진(東晉)의 주력군이
맞부딪치는 곳이었다.

여담이지만 지도 왼쪽 위에 '여광' 이라 표시된 푸른색 화살표는 '여광(呂曠)' 이란 장군이 이끄는 서역


정벌군으로, 당시 대군을 동원해서 동진(東晉)을 치는 그 와중에도 서역정벌까지 병행하고 있었으니 전진
(前秦)의 국력을 짐작할 만하다 하겠다.

흔히 많은 숫자의 병력을 비유하는 말로 '백만대군' 이란 표현을 쓰는데, 전진(前秦)은 실제로 백만에


가까운 무려 97 만명의 군사를 동원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거기다 그 병력이 진군해 나갈때 동서로 길게
장사진을 펼쳤는데 그 길이가 1 만여 리에 달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또한 기록에서 보듯이 부견(苻堅)은 나라 각지의 주(州)의 병력까지도 동원했는데, 이것만 봐도 부견(苻


堅)이 이 전쟁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또한 거의 모든 것을 걸다시피하여 만전의 준비를 다했는지를
알 수있다.
총사령관은 동생인 부융(苻融)이었고, 부견(苻堅)도 자신이 친정하는 전쟁이니만큼 직접 지휘하는 3
만여명의 어림군을 거느리고 제일 최전선으로 나간다.

그리고 마치 이미 전쟁에서 이기기라도 한듯 동진(東晉)의 황제인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馬曜)와 동진


(東晉)의 재상 사안(謝安)에게 그들이 전쟁에서 패해 항복하고 난 이후에 하사할 관직들까지 미리
마련하고 게다가 친절하게도 살 집까지 마련해주겠다고 하며 자신감에 찬 행동들을 보여준다.

"사마창명(司馬昌明 : 사마요를 말한다. 창명(昌明)은 사마요의 자(字))은 상서좌복야로 삼고, 사안(謝


安)을 이부상서로 삼을 것이며, 환충은 시중으로 삼을 것이다. 형세로 보아 이기고 돌아갈 일도
머지않았으니 이들에게 살 저택을 새로 만들어 줄 것이다! - 자치통감

김칫국 마시는 부견이었다. 그만큼 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고 상대적으로는 동진(東晉)군을
얕보고 있던 것이다.

전진(前秦)군은 오늘날 중국의 안휘성(安徽省)에 속하는 비수(淝水)란 곳에 이르러 진을 펼치고 주둔했다.


동진(東晉)군을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전진(前秦)이 동진(東晉)을 씹어먹을 기세로 대군을 동원해 쳐들어 오는동안 동진(東晉)에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었을까.

위에서 밝혔듯 당시 동진(東晉)의 황제는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馬曜).


전진(前秦)이 대군을 동원해 쳐들어온다는 급보를 접하자 즉각 재상 사안(謝安)을 불러들여 대책을
논의했다. 백만에 가까운 대군 앞에서는 쫄만도 해서 항복론이 기어나올 법도 한데 논의는 '어떻게
막을까'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馬曜) : "우리의 병력이 얼마나 되오?"

사안(謝安) : "이곳 저곳의 병력을 모으면 족히 8 만 가량 됩니다."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馬曜) : "......"

사안(謝安) : "폐하께서는 조금도 심려마십시오. 신이 막아 보이겠나이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몰라도 황제 앞에서 담담하게 출사표를 던지고 나온 사안(謝安)은 그길로 집으로


돌아가 동생과 아들들, 조카 모두를 전쟁에 장수로 내보낸다. 이들 역시 모두 관직에 몸담고 있는
몸들이었다.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재상의 친족들도 출전한 것이다.

사안(謝安).

당대의 명문가인 양하(陽夏) 사씨(謝氏)출신으로 동진(東晉)의 명재상으로 뛰어난 문학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재상으로서의 취임기간 동안 동진(東晉)의 중흥기를 이룩해내는 업적을 세웠다.

전진(前秦)의 대군에 맞설 동진(東晉)군의 총사령관은 사안(謝安)의 동생인 사석(謝石), 선봉장은 조카


사현(謝玄), 그리고 아들 사염(謝炎)도 장수로 참전했다. 그 밖의 여러 제장들에게 각자의 임무를 주어
요격하고 대비하게 했다.
아무리 동진(東晉)군이 비장하게 출전했다고 해도 아무래도 쪽수가 쪽수이니만큼 전투초반에는 전진(前
秦)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먼저 선봉군 몇갈래를 보내 주요 요충지를 점거하게 하고 동진(東晉)의 선봉을 꺾는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는 본군이 당도하기 전에 안전하게 자리잡을 조건을 미리 마련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해 10 월, 양평공 부융이 수양을 공격하고 계유일(18 일)에 승리해 진(晉)의 평로장군(平虜將軍)


서원희(徐元喜) 등을 사로잡았다. 부융은 자신의 참군(參軍)인 곽포(郭褒)를 회남태수(淮南太守)로 삼아
그곳을 지키게했다. 모용수(慕容垂)가 운성(隕城)을 함락시켰으며 진(晉)의 장수 호빈은 수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후퇴하여 협석(硤石)을 지키는데, 부융이 나아가 이곳을 공격했다. - 자치통감

복잡한 지명(굳이 알고싶다면 위 지도를 참고하기 바란다. 지명이 명시되어 있어 참고하면서 기록을 보면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알 수있다. 다만 다른 곳에서의 전투는 윗 지도에서 확인할 수 없고
바로 그 위의 지도에서 확인가능)들이나 관직들은 볼 것 없고 그저 여러 전선에서 전진(前秦)군이 승세를
타고 있었다는 것만 알면 된다.

위에서 말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전진(前秦)군은 애초에 동진(東晉)의 국경 전역에 걸쳐 쳐들어 왔기에


비단 비수(淝水)에서의 전투만이 전부는 아니다. 다만 비수(淝水)에 전진(前秦)과 동진(東晉)의
주력군이 대치 중이었다는 점에서 전쟁의 중심이 되었다 뿐, 전선은 꼭 이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전진(前秦)군은 '수양' 이란 곳을 집중공략했다. 수양의 점령여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될 정도로 수양은


중요 거점이자 진출의 교두보였다. 그러나 위에 싣어놓은 기록대로 전진(前秦)군의 총사령관 부융이
공격해와 기존에 점거하고 있던 호빈의 동진(東晉)군은 수양을 빼앗겨 협석으로 후퇴했고, 전진(前秦)
군은 더 나아가 '낙간(洛間)' 이란 곳에 목책을 설치해 동진(東晉)의 주력군을 통솔하는 사석(謝石),
사현(謝玄)의 병력과 앞서 협석으로 물러난 호빈의 병력 간에 연계하는 것을 차단하기에 이른다. (말로만
설명해서는 모르니 윗지도를 참고바람)
설상가상으로 협석(硤石)에 고립된 호빈의 동진(東晉) 병력은 식량마저 동이 나, 호빈은 총사령관 사석
(謝石)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파발마를 띄웠지만 중간에 버티고 있던 전진(前秦)군에 의해 붙잡혀 버리는
사태가 일어난다.

구원을 요청하는 서신은 부견(苻堅)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이를 통해 동진(東晉)군의 포진을 알게 된


부견은 갓 점령한 수양에 주둔하고 있는 동생 부융에게 즉각 공격할 것을 명령하는 한편, 적의 총사령관
사석(謝石)에게는 항복을 권유하는 서신을 보내 그 의사를 물어보게 했다.

지금까지의 전황을 정리해서 이때 부견이 보낸 서신의 내용을 보자면, 너희는 병력이 두개로 분산되어
우리를 당해낼 도리가 없는데다 그나마 한갈래 병력도 식량이 없으니 이길 수가 없다. 그러니 항복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서(朱序)라는 이에게 그 서신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겼는데, 이것이 부견(苻堅)이 범한 치명적인
실수 첫번째가 되었음은 부견(苻堅) 본인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실책의 원인은 주서(朱序)의 출신에 있었다. 주서(朱序)는 본래 개전 초기에 형주(荊州)전선을 방어하던


동진(東晉)의 장수였으나, 싸움에서 패해 어쩔 수없이 전진(前秦)에 투항한 사람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여전히 동진(東晉)의 신하였다는 것이다.

주서는 우선 명령받은대로 동진(東晉)의 진영을 찾아가 사석(謝石)에게 서신을 전달하며 부견의 말을


전했다.

강약의 기세가 다르니 빨리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


그리고 바로 기다렸다는 듯 동진(東晉)의 편으로 돌아서서는 정보를 흘려준다.

"부견이 이끄는 본군이 당도하기 전에 신속히 이곳 전진(前秦)군의 선봉대를 쳐야 합니다. 만약 본군이


도착해 선봉군과 합류한다면 실로 이기기가 어려워 질 것입니다. 선봉이 무너지면 전진(前秦)군은 사기가
꺾일 것이고 그 나머지를 물리치기란 쉬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별거 없어보이는 듯한 기밀유출이었으나 이는 당시 전진(前秦)군의 포진형태나 병력 규모


등의 정보에 대해서 아는 바가 부족했던 동진(東晉)군에게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아직 본군이 도착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거니와, 더구나 지금 상대하고 있는 병력이 선봉대라는 것을 안 이상, 주서의
말대로 전투에 있어서 초장부터 그 선봉을 꺾으면 사기가 크게 저하되리라는 것은 오랜 세월간 무관직에
몸을 담아왔던 사석(謝石)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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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비공감수가 3 이하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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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초(가입:2012-12-18 방문:1691)

2013-12-22 04:51:59 추천 0

와우 :) 계속 확인한 보람이있네요 연재 감사합니다


★랑랄라(탈퇴)

2013-12-22 16:33:21 추천 0

나를 토해 베스트로!!!

★안될놈(가입:2009-02-05 방문:1391)

2013-12-22 16:39:40 추천 1

근대 이전에 문자 그대로 백만을 찍은 유이한 전투. 대륙의 물량이란...

★불량좀비(가입:2011-04-07 방문:629)
2013-12-23 12:46:21 추천 0

정말 감사 합니다
굉장히 재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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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3 대 대전 중 하나, 비수대전(淝水大戰) - 完

게시물 ID : history_13156 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추천 : 30
조회수 : 1916 회
댓글수 : 2 개
등록시간 : 2013/12/23 04:48:47

앞의 내용은 1 부 참고 :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
table=history&no=13142&s_no=13142&page=1

주서(朱序)로부터 첩보를 귀띔받은 사석(謝石)과 사현(謝玄)은 즉각 낙간(洛間)의 전진(前秦)군을


공격할 것을 명했다.

낙간(洛間)의 전진(前秦)군이 그 선봉대라는 것도 알았거니와, 낙간(洛間)만 무너진다면 협석(硤石)에


고립되어 있는 호빈의 병력과도 합류할 수 있었을 터였다.

이 막중한 임무를 맡은 장수는 동진(東晉)의 맹장으로 불리우던 유뢰지(劉牢之)라는 장수로, 그가 이끄는


병력도 북부군(北部軍)이라 불리우는 정예병들로 구성된 동진(東晉) 최고의 정예부대였다. 이번 공격에
전쟁의 사활이 걸려있는만큼 총사령관 사석(謝石)도 최상의 패를 꺼낸 것이다.

기습은 밤에 이루어졌다. 몰래 비수(淝水)를 건너 낙간(洛間)으로 잠입해가는데에 성공한 유뢰지(劉牢之)


는 바로 전진(前秦)군의 진영을 들이쳤고 야밤의 기습이었던지라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전진(前秦)군의
진영은 순식간에 뚫리고 만다.

낙간(洛間)을 수비하던 전진(前秦)의 장수, 양성(梁成)은 잠결에 일어나 허둥대다가 날아든 유뢰지(劉牢
之)의 칼에 목숨을 잃었고 우두머리를 잃고 우왕좌왕 하는 전진(前秦)군도 대패하여 달아나 동진(東晉)
군은 대승을 거둔다.

11 월, 사현(謝玄)이 광릉상(廣陵相) 유뢰지(劉牢之)를 보내니, 정예병 5 천여명을 거느리고 곧장 나아가


낙간(洛間)으로 진격해 진병(秦兵)들을 대파하였다. 양성(梁成)과 왕영(王詠)을 참살하고 군사를 나누어
뱃나루를 차단하고 도망가는 진병(秦兵)들을 크게 물리쳤다. 진(秦 : 전진)의 보졸(步卒)과 기병이
붕괴되어 앞다투어 회수(淮水)로 도주하였다. 죽은 자가 1 만 5 천명이었으며, 양주자사(楊州刺史) 왕현
(王顯)을 사로잡고 무기와 군량 등을 거두어들였다. - 자치통감

전진(前秦)의 병력은 기습해온 동진(東晉)의 병력에 비해 갑절 이상이었거니와, 더구나 강을 도하하는


적을 막는 쪽으로, 전략적 상으로도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서 싸우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뢰지(劉牢
之)와 동진(東晉)의 정예부대, 북부군(北部軍)의 저돌적인 돌파력에 의해 붕괴되고 만 것이다.

동진(東晉)군에게는 사기도 올려주고 분산되어 있던 병력도 다시 합류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승승장구하던 전진(前秦)군의 선봉을 격파함으로서 주서(朱序)가 말한대로 그 기세를 꺾을 수 있었던
중요한 전투였다.
동진(東晉)의 명장, 사현(謝玄).

재상 사안(謝安)의 조카이기도 하다. 비수대전 이후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고위직을 역임했다.

동진(東晉)의 반격로.

낙간(洛間)에서의 승리로 동진(東晉)군은 팔공산(八公山)까지 진격했다.

동진(東晉)의 선봉장, 사현(謝玄)은 그 기세를 몰아 팔공산(八公山)까지 진격하여 그 곳에 진영을 차리고


주둔했다. 곧이어 당도할 전진(前秦)의 본군을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낙간(洛間)의 병력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전진(前秦)의 황제, 부견(苻堅)은 펄펄 뛰며 대노한다.


개전 초반부터 계속해서 수세로 몰려 거의 죽어가던 동진(東晉)군에게 제대로 어퍼컷을 얻어맞았으니
체감상 느껴지는 그 아픔도 배가 되었던 것이다.

화가 난 나머지 부견(苻堅)은 점거하고 있던 수양성(壽陽城)의 망루에 올라 팔공산에 진영을 내린 동진


(東晉)군의 동태를 직접 살펴보고자 했다.

그러나 내심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부견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마치 부견에게 보라는 듯이 엄중히 정돈된
진영과 빼곡히 둘러친 목책들, 그리고 우뚝 솟은 망루들이었다. 더구나 산 아래에 진영을 차렸기에 그
풀숲에 가려진 동진(東晉)군의 숫자도 가늠할 수 없었다. 마치 팔공산 일대가 동진(東晉)의 군사로
가득찬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를 본 부견은 탄식했다.

"이들 또한 강한 적인데, 어찌 약하다고 했는가!"

내심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운명의 시간은 다가와, 전진(前秦)의 본군은 비수(淝水)에 도착했다. 다만 강을 건너지는 않았고
강편에 머무르며 도전해오는 동진(東晉)군을 맞으려 했다.

사현(謝玄)의 동진(東晉)군도 비수(淝水)로 접근해 진영을 내리니 양국의 병력은 비수(淝水)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른바 회전(回戰)의 구도로 양측이 위치한 것이다.

이렇게 강을 사이에 두고 양측이 위치한 구도라면 먼저 공(攻)을 취하는 쪽은 강을 건너야 하는 리스크를


감당해야만 한다는 단점이 있는 반면에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도하하느라 버벅대는 적군을 일격에 소탕할
수 있는 이로움이 있었다.

즉, 어느 쪽이든 먼저 공격하건 간에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이기 전부터 핸디캡 하나를 얹고 시작해야


했기에 양측은 쉽사리 선공을 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사현(謝玄)은 부견(苻堅)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대의 군사들은 깊이 들어왔는데 강가 옆에 진을 치니, 이는 곧 지구전의 계책이고 속전속결의 뜻이
아니구려. 만약 그대가 진영을 옮겨 군사를 조금만 뒤로 물려준다면 우리의 병력이 그쪽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오. 그때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소?" - 자치통감

기록대로다. 이렇게 서로 선빵날리기를 주저하니 차라리 너희가 뒤로 빠져서 우리가 들어올 공간을
마련해주고 거기서 승부를 보자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가뜩이나 병력에서 열세인 쪽에서 상대가 넘어오길 바라기도 모자랄 판에 왜 먼저 넘어가서 싸우자고
덤비는가?

어찌보면 주객이 전도된 꼴이었다. 공격해온 쪽은 지구전을 펼치려 하고 오히려 방어하는 측에서
속전속결로 끝내자고 덤비고 있으니 말이다.

제 아무리 낙간(洛間)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해도 백만에 가까운 전진(前秦)군에게 그 손실은 미약했다.


여전히 전진(前秦)군은 건재했으며 강을 건너서 그들과 전면전을 벌인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었던 것이다. 사석(謝石)과 사현(謝玄)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짓을 벌일 리 만무했다. 분명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사현(謝玄)의 서신을 받아본 부견(苻堅)은 응하기로 한다. 그러자 전진(前秦)의 장수들은 모두 하나같이
반대하며 분명 동진(東晉)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런 부견을 말렸다. 저들 눈에도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견은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군사를 이끌고 뒤로 물러나는 척하다가 저들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철기(鐵騎)로 들이닥쳐 쫓아가 모두
죽여 없앨 것이다. 그러면 승리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부견도 통일전쟁을 치루며 전장에서 늙은 노련한 사람이었다. 동진(東晉)군의 속셈이 뭔지는 몰라도 되려
그것을 역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도하하는 때만큼 적의 공격에 노출되기 쉬운 때는 없다. 그리고 적이 도하하는 것을 뻔히 봐주고 있을


무지몽매한 군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오히려 부견은 사현(謝玄)을 비웃었을 것이다. 적을 믿는 바보도 있구나 하면서. 내가 정말 그 어처구니


없는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냐면서.

부견의 응답에 동진(東晉)군은 비수(淝水)를 건너기 시작했고 전진(前秦)군은 요구대로 진영을 해체하고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찰나에,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아군이 패했다! 진(秦)의 군사가 패했다!"

이와 같은 말을 외치고 다니며 최후방의 병력을 동요하게 만든 이는 앞서 동진(東晉)군에게 전진(前秦)


군의 정보를 흘려준 주서(朱序)였다.
전진(前秦)의 장수가 이 무슨 짓인가 싶겠지만 애시당초 주서는 동진(東晉)의 신하가 된지 오래였다.

어찌된 일인가 하니, 전에 부견의 명령으로 항복을 권유하는 서신을 가지고 동진(東晉)군의 진영으로
찾아갔을 때부터 주서는 이미 동진(東晉)으로 귀순했었다. 첩보를 일러준 것도 그렇고 또 원래 출신이
동진(東晉)의 항장출신이었고 자기 스스로도 동진(東晉)의 신하라 여기고 있었다.

그랬기에 동진(東晉)의 진영에 항복을 권유하는 사자로 찾아갔을 때부터 사석(謝石), 사현(謝玄)과 함께
모의하여 이러한 일련의 계획들을 세웠던 것이다.

주서 자신이 후방에서 적을 교란할 것을 자청했고 사현도 이를 믿고 호응하기로 하여 혼란에 빠져 거짓


패전소식에 우왕좌왕하는 전진(前秦)군을 들이치기로 약속했던 것. 이것이 동진(東晉)군이 적은군세로도
과감하게 비수(淝水)를 건넌 이유였다.

지금까지의 비수대전(淝水大戰) 전황도.

주서(朱序)의 작전은 주효해, 주서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외쳐댄 패전소식에 후방의 전진(前秦)군은


술렁이더니 곧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말의 진위여부를 가릴 것도 없이 그냥 두려움부터 앞섰던 것이다.

그 파급효과는 엄청나 메마른 들에 불이 번져나가듯 순식간에 전진(前秦)군 진용 전체로까지 퍼져나가


전진(前秦)군 전체가 공포에 질려 대혼란이 일기에 이른다. 동요한 나머지 대열은 이미 무너져 앞다투어
병사들은 죽을 둥 살 둥 도망가기에 바빴고 장수들은 이를 진압하고자 동서분주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정신없었다. 한마디로 개판이 된 것이다.

참으로 예상치 못한 어처구니 없는 전개에 부견(苻堅)도 적잖이 당황한다. 거짓퇴각하다가 진짜로


퇴각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제장들을 다그쳐 병사들을 속히 제압하라 하는한편 자신도 직접 병사들을
진압하고자 이리저리 말을 달리고 다니던 차에,

바로 그때 뒤에서 강을 건너던 동진(東晉)군이 빠른속도로 몰아쳐오기 시작했다.

동요하여 도주하는 전진(前秦)군을 공격하는 동진(東晉)군.

전투라기보다는 차라리 학살에 가까운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전진(前秦)군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지


오래였기에 동진(東晉)군은 그런 전진(前秦)군을 죽이며 추격했다.

대혼란 속에 앞다투어 달아나는 전진(前秦)군은 그 바람에 넘어져 저들끼리 밟혀죽은 숫자만해도


부지기수라고 했다. 수십만 규모의 대군이 순식간에 무너지니 그럴만도 하다.

이 난전 중에 부견의 동생이자 전진(前秦)군의 총사령관, 부융(苻融)은 전사했고 심지어는 부견도 날아온


화살에 몇대 맞는 수모를 당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사현파진백만대병도(謝玄破秦百萬大兵圖)> 병풍도.

그림의 제목 뜻은 '사현(謝玄)이 백만의 진병(秦兵)을 깨뜨리다' 이다.

왼쪽이 전진(前秦)군이고 오른쪽이 동진(東晉)군이다. 병사들과 장수들의 표정에서도 보이듯이 전진(前


秦)군은 다들 겁에 질린 기색들이고 반면에 동진(東晉)군은 승세를 탄 의기양양한 표정들이다.

팔공산의 동진(東晉)군 진영을 묘사한 부분.

혼잡한 난전을 묘사한 장면


학 울음소리에도 동진(東晉)군이 추격해온 줄 알고 놀랐다는 전진(前秦)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인 '
풍성학려(風聲鶴唳)' 를 나타낸 부분.

그림 위에 붉은 곤룡포를 입고 말을 달려 도망가는 사람은 부견(苻堅)이다.

으앙! 졌음ㅠㅠ

사현(謝玄)과 사염(謝炎), 환이(桓伊) 등이 군사를 인솔하여 강을 건너서 공격했다. 부융이 진지를


순행하면서 군사들을 통솔하고자 했으나, 진병(晉兵)들에게 패해 죽었다. 사현이 승리한 기세를 타고
추격하여 청강(靑岡)에 이르렀다. 진병(秦兵)들 가운데 서로 짓밟혀 죽은 자가 들판을 덮고 개울을
메웠다. 바람소리나 새 울음소리만 듣고도 모두 진병(晉兵)이 추격해온 것으로 여겨 밤낮을 쉬지 않고
풀숲을 헤치고 이슬을 맞으며 걸었으니, 굶주리고 얼어서 죽은 자가 열에 일곱 여덟이었다. - 자치통감

동진(東晉)군은 패주하는 전진(前秦)군을 30 여리나 더 쫓아가고 나서야 추격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진(前秦)군은 윗 기록대로 처참한 몰골로 도망갔고 돌아간 이는 얼마 되지 않았었다.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 기세로 남하해왔던 전진(前秦)의 97 만 대군은 이 비수대전 한판
싸움으로 말그대로 '개박살' 이 나 쫓겨갔고 불과 8 만의 병력으로 맞섰던 동진(東晉)은 대승을 거두게
된다.

사석(謝石)과 사현(謝玄)은 이 승전보를 바로 조정에 보고했고, 조정에서도 재상 사안(謝安)에게


파발마를 띄워 알렸다.

그때 사안(謝安)은 한가롭게 집에 찾아온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동생이랑 아들, 조카는
전쟁에 내보내고 정작 자기는 바둑질?)

하지만 조정에서 보낸 서신을 받아본 사안(謝安)은 의외로 담담했다고. 이에 관련된 일화를 소개해보면..

손님이 묻는다.

"무슨 서신입니까?"

사안(謝安)이 대답했다.

"자식놈들이 적을 물리쳤다는군요."

별 특별한 소식도 아니라는 듯 응수하는 사안이었지만 바둑돌을 든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악수(惡手)를 두셨습니다 그려."

손님의 지적에 사안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소식에 동요하다니, 이 늙은이도 주책입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흥분한 나머지 신발굽이 부딪혀 부러진 줄도 몰랐던 사안이었다.

이후 손님이 돌아가자 사안은 그제서야 태도를 바꾸어 흔들리던 이가 빠질 정도로 기뻐 날뛰었다고 한다.

위에서 소개한 일화를 주제로 그린 <동산보첩도(東山報捷圖)>.

한가롭게 바둑을 두는 사안이 보인다.

앞서 1 편의 서두에서도 밝힌 것처럼 세 대전(관도대전, 적벽대전) 모두 천하의 판도가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듯이 이 비수대전 역시 이후의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진(前秦)은 패전의 영향으로 큰 타격(무려 백만에 가까운 인구가 한순간에 증발했는데 어련했을까)을
입고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음은 물론이고 그 바람에 얕보인 나머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 나라가
사분오열하는 결과를 초래해 후진(後秦), 서진(西秦), 후량(後凉), 서연(西燕) 등으로 찢어져 나가기에
이른다.

그리고 4C 말인 서기 394 년에 이르러서는 멸망하니, 이로서 전진(前秦)에 의해 일시적으로나마


통일되었던 화북(華北)지방은 다시 분열되어 전란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비수대전이 있고 난지 불과 10 여년만이었다.

지도출처 : 초코벌레의 서랍장 블로그

서기 395 년의 판도.

사분오열되어 갈갈이 찢겨나가 그 자리에 여러 나라가 생겨났다.

한차례 대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정세의 변화까지 불러온 비수대전이기에 중국에서는 천하를 바꾼 전투라
하여 3 대 대전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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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삭제]말뚝(가입:2011-09-13 방문:1226)

2013-12-23 14:02:26 추천 0

★지나가다슬쩍(가입:2013-04-30 방문:654)

2013-12-23 17:30:07 추천 0

훌륭한 전투네요.

먼저 초반에 기선을 제압하고,


적벽대전처럼 떡밥 속의 떡밥을 통해서 상대를 완벽하게 기만한거.
조조가 황개의 투항을 100% 신뢰하지 않았지만 투항을 계기로 무엇인가 전황을 바꾸려고 획책하다
화공에 넘어간것처럼,
부견도 상대의 요청에 함정이 있음을 알고도 그걸 역이용하려다 도리어 콧잔등을 얻어맞았네요.

★평온초(가입:2012-12-18 방문:1691)

2013-12-24 01:47:52 추천 1

비수대전이라.. 워워.. 100 만명 인구가 증발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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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최강의 막장 왕가, 유송(劉宋) - 1

게시물 ID : history_13174 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추천 : 23
조회수 : 3640 회
댓글수 : 11 개
등록시간 : 2013/12/24 15:08:50

중국 역사상 최고의 막장가도를 달린 왕조가 하나있다.

바로 송(宋)이란 나라다.

흔히 송(宋)나라라고 하면 서기 10C 경에 조광윤(趙匡胤)이 건국한 그 송나라를 떠올리지만, 여기서의


송나라는 흔히 위(魏)-진(晉) 남북조(南北朝) 시대라 불리우는 시대에 세워졌던 서기 5 세기 무렵의 송
(宋) 왕조를 말한다.

여기서 국호가 동일한 관계로 역사에서는 앞서 말한 조광윤의 송(宋)과 구별하고자 이때의 송(宋) 왕조는
건국자인 유유(劉裕)라는 사람의 성씨인 '유(劉)' 를 붙여서 '유송(劉宋)' 이라 부른다.
워낙 인지도가 떨어지는 나라이니만큼 대강이나마 유송(劉裕)에 대해 설명을 해보자면..

서기 440 년 무렵의 중국 판도.

남쪽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영역이 유송(劉裕)이다.

위의 파란색 영역은 북위(北魏)라는 나라.

삼국지연의로도 유명한 삼국시대를 통일한 나라는 진(晉). 그러나 진(晉)도 내란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뒤이어 갖은 이민족들이 침입해와 중국에 저마다의 나라를 세우는 이른바 5 호 16 국 시대가
도래한다. 한편 멸망한 진(晉)의 명맥을 잇고자 한족(漢族)들은 양자강 이남에서 다시 진(晉)을 건국하니
이가 곧 동진(東晉)이다.

중국의 화북(華北)지방에서는 이민족들에 의한 5 호 16 국 시대가, 화남(華南)에서는 한족(漢族)의 동진


(東晉)이 존속되던 중, 서기 420 년에 이르러 동진(東晉)은 당시 권신이었던, 바로 위에서도 말한 유유
(劉裕)에 의해 멸망당한다. 그리고 이 유유(劉裕)는 송(宋)을 건국하니, 화남(華南)에서는 남조(南朝)
시대가 시작된다. 그리고 화북에서도 서기 439 년에 북위(北魏)란 나라가 5 호 16 국 시대를 종결짓고
화북을 통일하니 이때부터를 북조(北朝)시대라 한다.

송(宋) 고조(高祖) 무제(武帝) 유유(劉裕).


나중에 자손들이 벌인 행각들을 보았더라면 초상화에서의 모습처럼 마냥 사람 좋은 미소만 짓고 있지는
않았겠지.

남조(南朝), 북조(北朝)란 말은 각각 남북에서의 여러 왕조들을 의미한다. 화남에서의 송(宋),


화북에서의 북위(北魏) 이후로도 해당왕조를 잇는 왕조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남북에서 여러 나라가
세워졌던 시기라 하여 이를 두고 남북조(南北朝) 시대라고 부른다.

이렇듯 남조(南朝)시대의 첫 왕조이기도 했던 유송(劉宋)은 한마디로 말해 막장왕조였다.

총 8 대 59 년만에 단명해버린 왕조인데, 황제들의 평균 재위기간을 계산해보면 각 황제들의 재위기간이


7~8 년 밖에 안된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이것도 그나마 성군(聖君)이라 칭송받던 제 3 대 황제, 태조
(太祖) 문제(文皇帝) 유의륭(劉義隆)과 4 대 황제 세조(世祖)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 : 유준은
성군이 아니다), 그나마 10 년 조금 넘게 재위에 있던 이 두명을 감안한다면 그 평균치는 더 낮아진다.

송(宋) 태조(太祖) 문제(文皇帝) 유의륭(劉義隆).

유송(劉宋)에서 뿐만 아니라 남조(南朝)시대에서 몇 안되는 태평성대를 이룩한 성군(聖君).

아버지 고조(高祖) 무제(武帝) 유유(劉裕)와 함께 유송(劉宋)에서 몇 안되는 정상적이었던 황제들 중


하나.

이 때의 치세만큼은 당시의 연호인 '원가(元嘉)' 를 따서 '원가지치(元嘉至治 : 원가 때의 정치라는


뜻)' 라 하여 별도로 치고 있다.

하지만 이 유의륭도 나중에는 아들에게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이 역시 황족간의
골육상쟁 때문.
대충 감이 온다 하겠는데, 사실 감을 따지고 할 것도 없이 역대 황제들 중 대다수가 싸이코 내지
변태들이었기에 죄다 제 명에 못죽고 폐살당하거나 제위에서 쫓겨났다.

이 여덟명의 황제들 중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강의 막장 황제는 바로 제 5 대 황제, 폐제(廢帝) 유자업


(劉子業)이라고하는 걸출한 인물로, 이 글에서 다루고자하는 주인공 되시겠다.

폐제(廢帝) 유자업(劉子業) 초상화.

유자업(劉子業)의 재위기간은 고작 1 년(서기 464 년~465 년). 당시 16~17 세의 나이였다.

정녕 저게 중 3~고 1 의 얼굴이란 말인가?

한자를 좀 아시는 분들이라면 유자업(劉子業)의 시호에서 이미 대충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다. 유자업의


시호는 폐제(廢帝). 사실 이건 시호도 아니라 그냥 임의로 붙인 것이다. 왜냐면 폐위(廢位)되었기 때문에.
폐위 했다하여 '폐(廢)' 자를 갖다 붙여 그냥 폐위된 황제란 뜻의 '폐제(廢帝)' 로 불리는 것이다.

대관절 뭐하다 폐위당했는지 이제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유자업(劉子業)은 4 대 황제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의 아들로, 서기 449 년에 태어났다.

그 무렵의 송(宋) 왕조는 고조(高祖) 무제(武帝) 유유(劉裕) 사후 이래로 2 대 황제인 소제((少帝)


유의부(劉義符) 치세부터 시작된 황족간의 권력싸움에 의한 골육상쟁으로 피바람이 한창 몰아치던 때로,
친형제는 물론이고 조카, 사촌에다가 심지어는 작은 할아버지까지 제거대상이 되는 패륜이 판치는
시기였다.

유자업(劉子業)의 선대인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의 대에도 친족숙청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고,


유자업도 불과 네 살때 그 권력다툼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을 뻔한 적까지 있었다 하니 어린애고 뭐고 가릴
것없이 칼부림을 하던 당시의 실태를 짐작할 만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자업(劉子業)은 태자(太子)가 된다. 하지만 어렸을 때 험한 일을 겪어 트라우마라도


생겼는지 유자업은 평소 실수를 자주 범하고 행동거지가 그리 올바르지는 못했다. (애시당초 싹수부터가
노랬다)

거기다 어릴 적부터 관심을 두는 쪽이라고는 삼국시대 위(魏)의 조조(曹操)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직책인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 : 황제나 왕의 무덤을 도굴하여 부장품을 챙겨 관리하는 벼슬)이나
모금교위(摸金校尉 : 역시 도굴전문 관리직)와 같은 괴상하고 비정상적인 분야였다. 그리고 이토록
관심을 두던 분야에서 빛을 발하는 때가 머지않아 오게되니 이는 밑에서 확인하기 바란다.

이 때문에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으로부터 자주 혼나고 꾸중들었는데, 이것에 대해 유자업은


앙심을 품었으니 훗날 유자업이 보여준 패륜행위들 중 하나를 장식하는 계기가 된다.

거기다 아버지를 꺼려한 이유는 또 있었다.

유자업에게는 유자난(사실 이 유자난도 유준이 사촌 여동생이랑 근친상간해서 낳은 애다. 이 쯤되면 유송


왕조가 얼마나 막장이었는가를 알 수있다. 유자업만 다루어 다른 황제들의 아름다운 패륜짓들을 보여주지
못하는게 안타까울 따름)이란 이복동생이 있었는데,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이 매상 이
유자난만을 총애했기에 유자난을 질투한 것은 물론이고,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아버지에게도 분노를
느낀다.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과 놀아나는 유씨(劉氏).

여기서 유씨(劉氏)는 위에서 말한 유자난의 친모로, 사촌오빠였던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과


근친상간을 벌여 이 유자난을 낳은 여인네다.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에게는 숙부가 되는 남군왕(南郡
王) 유의선(劉義宣)의 딸로,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이 반한 나머지 취하려 들었고 근친 짓을 한다는
주위의 시선을 고려해 성씨도 은(殷)씨로 갈아버렸다고 한다.

여러모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싹터가던 차에 서기 464 년,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태자였던 유자업이 제위에 오른다. 불과 16 세의 어린 나이였다. 이때 효무제(孝
武帝) 유준(劉駿)의 상(喪)을 치루면서도 유자업은 단 한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유자업이 제위에 오르자마자 한 일은 이복동생이자 사촌동생도 되는 7 살 난 유자난을 죽이는


일이었다.

이유는 위에서 설명했다. 유자난이 끌려가면서 남긴 말은 "다음 생에는 다시는 황제의 자손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키는데로 순식간에 어리디 어린 이복동생을 살해한 유자업은 다음으로 평소에 벼르던
(?)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에게 복수하려 들었는데, 덩달아 은(殷)씨에게도 해코지한다.
그저 은(殷)씨가 자신이 싫어하는 유자난을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과 그 전에 죽은 은(殷)씨의 능(陵)을 파헤치게 하고 부장품을


챙겼으며 그것만으로는 분이 안풀렸는지 똥을 가져다가 뿌렸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온갖 욕을
퍼부어 분풀이를 했다. (위에서 말한대로 무덤도굴에 관심을 갖고 팠던 보람이 생겼다)
유자업이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을 얼마나 증오했는지는 다음으로 소개할 일화로도 알 수있다.

우리나라에도 조선왕조의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宗廟)가 있듯이, 송(宋) 왕조에도 역대 황제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종묘(宗廟)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위패 외에도 황제들의 어진이 걸려있었는데,
하루는 유자업이 종묘를 찾아가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의 초상화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놈은 본래 술주정뱅이로서 코가 빨갛거늘, 왜 초상화엔 그것이 안 나타나있는 것이냐?"

그리고는 초상화를 그리는 화공을 불러다가 초상화 속 아버지의 코를 빨갛게 칠하라 명령했다. 화공이
명령한대로 코를 칠해놓자 유자업은 그제서야 만족하며 다시 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패륜 중에서 최강의 패륜을 보여주는 유자업이었다. 아버지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이 패륜아의


수준으로 봤을때, 하물며 어머니에게까지 그러지 못하란 법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 사건 이후로 유자업은 자신의 패륜짓엔 한계란 없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루는 유자업의 친모인 태후 왕씨가 병을 앓아 유자업을 불렀다. 몸이 쇠약해지니 정신도 나약해져


간만에 어미의 정으로 아들의 얼굴도 보고 위로도 받을 생각으로 부른 것인데, 이 아들이란 놈이 어머니
태후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내뱉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환자의 방에는 귀신이 많다고 하던데, 황제인 내가 어찌 들어가겠는가?"


그러고는 곧장 걸음을 돌려 돌아가자, 태후 왕씨가 기가 막히고 분통이 터지는 나머지,

"내 배를 갈라보거라, 도대체 어떻게 내가 저런 짐승을 낳았는지 봐야겠다!"

분을 삭이다 못해 홧병까지 얻은 태후 왕씨는 얼마 후에 죽고 만다.

그리고 태후 왕씨는 유자업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저주했다.

"너는 어질지도 못하고 불효를 저지르는 놈으로, 황제의 자격이 없다. 네 아비또한 난폭하고
황음무도하여 하늘과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샀고 너 또한 그러하다. 앞으로는 문황제(文皇帝 : 3 대 황제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의 자식들에게 황제를 맡겨야겠다."

그리고 유자업은 잠에서 깼고 어머니의 그런 저주가 두려웠는지 행여나 저주대로 작은 할아버지의


자손들이 정변이라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그 자손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다.

그 중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의 몇 아들들, 즉 유자업에게는 숙부가 되는 황족들만은 살려두어 갖고


놀았는데 그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

산양왕(山陽王) 유휴우(劉休佑).
이 세명의 숙부들은 살려다가 말 그대로 갖고 놀았다. 궁 안에 가두고 갖은 모욕과 고통을 주며 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별명까지 붙여주었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유치하고 치욕스러운 것들이었다.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은 몸집이 크고 뚱뚱하다 하여 '돼지왕'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은 살인귀 같이 생겼다 하여 '살인마왕'

산양왕(山陽王) 유휴우(劉休佑)은 도적질을 잘할 것 같이 생겼으니 '도적왕'

이렇듯 유치한 별명들을 지어주고 매번 놀리고 다녔다.

특히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이 유독 놀림대상이 되어 유자업의 놀잇감이 되다시피 했는데, 한번은


유자업이 시종들을 시켜 유욱의 옷을 벗기고 양 손을 뒤로 묶어 포박하여 구덩이에 집어 쳐넣고 거기다
밥과 반찬을 담은 바구니를 던져주며 마치 돼지를 사육하듯 시키며 자신은 그 옆에서 웃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또 어느 날은 아예 죽일 생각이었는지 그 날이 돼지를 잡는 날이라면서 애꿎은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을 다시 불러다가 장대에다 묶어 매달고 죽이려던 차에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이 보다
못해 동생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을 살리려고 유자업의 장단에 맞춰준다.

"돼지를 지금 죽이기엔 아깝습니다. 폐하의 생신 때 그 간과 폐를 꺼내어 죽이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유자업은 유휴인의 말에 옳다고 말하며 죽이려는 것을 멈췄고 그렇게 유욱은 살아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렇게 조카놈에게 비참한 꼴을 당하는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은 유자업 다음으로
즉위하는 제 6 대 황제 태종(太宗) 명제(明帝)다.

이렇듯 그 패륜행위가 도를 넘어선 그 이상의 정도로 심했는데, 이것 외에도 조상능욕은 물론이요,


근친행위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니, 이는 다음편에서 다루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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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랏빛일몰(가입:2013-12-22 방문:339)

2013-12-24 15:11:51 추천 4

말로만 듣던 성경과 그리스로마신화 그리고 막장드라마의 크로스오버인가??

★미완성면상(가입:2007-01-23 방문:780)

2013-12-24 15:24:40 추천 6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위진 남북조 시대의 경우, 이러한 시대가 있다는 것만 알고있지 자세히는 몰랐는데

삼국지 이후부터 이러한 남북조 시대의 얘기를 자세히 써주셔서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콩국수(가입:2013-05-14 방문:633)

2013-12-24 16:09:41 추천 1

항상 감사합니다.

★칼립소(가입:2013-08-24 방문:1252)

2013-12-24 17:18:28 추천 4

남북조 역사도 잘 몰랐었는데 이번에 알게 되네요.


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알아?(가입:2013-02-06 방문:977)

2013-12-24 18:30:53 추천 5
궁녀들에게 개, 말, 돼지, 원숭이 등과..........음.......여기까지...-_-;

샹그렐라(가입:2013-05-23 방문:1386)

2013-12-24 18:37:16 추천 2

많은 공부가 되네요!! 앞으로도 글 많이 써주세요!!^0^

★나가리~(탈퇴)

2013-12-24 18:26:28 추천 0

중국 최강의 막장 왕가슴 유송이라고 읽어 버렷다 ㅜㅜ

카르스킨(가입:2012-08-14 방문:1690)
2013-12-24 18:37:38 추천 3

진짜 희대의 막장 황제네요;; 다음편 빨리 보고싶네요

★대단한토끼(가입:2013-02-15 방문:438)

2013-12-24 19:30:02 추천 0

오 신기하다;;;

★리볼버오셀롯(가입:2011-03-12 방문:3242)

2013-12-24 21:12:42 추천 4

유자업이 고작 1 년동안 한 짓들도 대단하지만 (다른 선,후배 폭군들이 몇년 혹은 평생에 걸쳐 저지를


악행들을 1 년이란 짧은 기간 안에 몰아서 저지르는 비범한 면모..) 무엇보다 10 대 중후반의 소년이 저런
얼굴을 가질수 있다는게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생긴것만 봐서는 10 대 중후반정도 되는 아들이
있을거같은 외모인데 말이죠.
★평온초(가입:2012-12-18 방문:1691)

2013-12-25 05:14:48 추천 0

스펙타클하네요 ㅎㅎ 1 년사이에 저렇게 많은일을 벌이기두 참 힘들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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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최강의 막장 왕가, 유송(劉宋) - 完

게시물 ID : history_13192 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추천 : 26
조회수 : 4337 회
댓글수 : 14 개
등록시간 : 2013/12/25 14:51:08

1 편 : http://todayhumor.com/?humorbest_805697

전편에서 쭉 열거한 유자업(劉子業)의 패륜행위들 외에도 그가 달성한(?) 인간말종 행위들은 많았다.


현존하는 부모나 친족일가에게 치는 패드립도 모자라 나중에는 애꿎은 조상에게까지 패드립을 시전하는데,
그 중에는 송(宋) 왕조의 시조이자, 유자업에게는 증조부가 되는 고조(高祖) 무제(武帝) 유유(劉裕)도
포함되어 있었다.

송(宋) 고조(高祖) 무제(武帝) 유유(劉裕).

미천한 출신이었지만 자수성가하여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라 인생성공이란게 무엇인지를 보여준 남자.

일찍이 동진(東晉)을 섬겨 장군이 되었지만 남다른 판단력과 정치감각으로 곧 권신이 되어 나중에는 동진


(東晉)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恭帝) 사마덕문(司馬德文)에게 황위를 양위받음으로서 송(宋)을 개국했다.

여담으로 말하자면 이전까지는 선양한 망국의 마지막 황제를 잘 대접해주는 것이 관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때부터 선양 받은 후에 전직 황제에게 칼침을 놓는 전통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개국황제인 무제(武帝) 유유(劉裕)는 본래 미천한 천민출신이었다. 그러나 본인이 출세하고자


적극노력하여 동진(東晉)의 신하가 되었고 나중에는 황제까지 된 이른바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유유(劉裕)는 황제가 되고 난 뒤, 궁중에다 건물하나를 지어 자신이 소싯적에 종살이 및


농사일에 쓰던 쟁기나 낫 등과 같이 여러 물건들을 전시해두고 후손들에게 대대손손 보여주고자 했다.
일종의 박물관 같은 시설이라 하겠는데, 취지는 한마디로 내가 이렇게 고생해가며 세운 나라이니 후대
황제들은 이를 잘 보고 할애비가 뭣빠지게 고생한 걸 봐서라도 경각심을 갖고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으로 보면 된다.

개국황제의 이와 같은 작은 바램이었는데, 어느날 증손자놈이 이곳에 들어와 쭉 둘러보더니만 증조부의


초상화를 보고 한마디 내뱉었다.

"이놈은 본래 미천한 출신이었거늘, 어떻게 감히 황궁에 함께 있을 수 있단 말이냐? 너무 과분하지


않은가?"

개국황제 증조부의 눈물겨운 노고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발언이었다. 그저 인간말종 유자업의 눈에는
더럽고 추잡한 물건들로 가득찬 창고에 불과했던 것.

무제(武帝) 유유(劉裕)가 이 말을 들었으면 빡쳐서 무덤을 박차고 뛰어나가기 보단 아마 땅을 치고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세운 나라가 증손자놈이 말아먹는다고 말이다. 사실 굳이 증손자 대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유유의 아들 대부터 망조가 보이던 나라였던지라 그냥 본인의 자식농사가 대흉년이었던
것을 한탄하는게 빠를지도.

아무튼, 인간말종 유자업은 패드립 뿐만아니라, 근친상간에도 손을 댔다.

선대 황제이자 유자업의 아비인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도 일찍이 자신의 사촌누이를 탐하여 애까지
낳았음은 앞서 전편에서 밝혔다. 그나마 저 혼자 그랬더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겠는데 문제는 유송(劉宋)
의 역대황제들 중 여럿이 그러한 성향을 보였다는 데에 있다. 근친행위를 벌여서가 아니라 유독 색(色)을
탐하는 모습이 종종 보여서인데, 그냥 일족의 유전자가 그리 생겨먹었는지는 몰라도 유송(劉宋)의
황제들은 물론이고, 다른 황족들까지 그러한 모습을 보여 색골집안임을 증명했다.

제 사촌누이에게 손을 댄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의 피를 물려받아 그런지 유자업도 근친행위에


몰두했는데, 상대는 다름아닌 친누나인 산음공주(山陰公主) 유초옥(劉楚玉)과 고모 신채공주(新蔡公主)
유영미(劉英媚)였다.
산음공주(山陰公主) 유초옥(劉楚玉).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의 딸로, 유자업과는 오누이 관계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인간말종 유자업(劉子業)이 먼저 접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나인


산음공주(山陰公主) 유초옥(劉楚玉)이 먼저 추파를 날렸다는 점이다. 이쯤되면 정말 핏줄을 의심해봐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

용모가 빼어나고 풍류를 즐기기를 좋아했다는 산음공주(山陰公主) 유초옥(劉楚玉)은 일찍이 남편도 둔


유부녀였다. 그런데 남편으로는 만족못하고 친동생인 유자업(劉子業)과 놀아났다고 한다. 그런데 웃긴건
유자업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친누나의 유혹에 호응했다는 것이다.

유자업(劉子業)과 놀아나는 산음공주(山陰公主) 유초옥(劉楚玉).

말세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기록에서는 이 둘이 매일 밤을 같이 지내며 흡사 부부처럼 지냈다고 한다. 무슨 일본 AV 시리즈 물에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를 실제로 찍고 있던 것인데,

유자업도 그렇지만 그 누나도 막장스러운 인간이었던 것이다.

산음공주(山陰公主) 유초옥(劉楚玉)은 본래 음탕했다. 그래서 주색을 즐겨 항시 집에는 외간남자들의


출입이 끊이질 않았고 날마다 연회가 열렸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는데 소개해 보겠다.
산음공주(山陰公主) 유초옥(劉楚玉) 삽화.

말이 필요없다. 그냥 막장이다.

훤칠하고 단정한 용모로 당시 송(宋)에서 최고의 미남으로 불리우던 '저연(褚淵)' 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찌나 잘생겼는지 궁중의 관료들이나 외국사신들도 그의 외모를 보고는 감탄하며 그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근데 왜 아쉬워 하지?)

뛰어난 외모로 장안의 화제였던 저연의 소문을 색을 탐하는 산음공주(山陰公主) 유초옥(劉楚玉)이


몰랐을리 만무했을 터.

아니나 다를까, 유초옥(劉楚玉)은 저연을 자기 집에 데려다 즐기고(?) 싶다고 동생 유자업에게 졸랐다.


동생이 황제폐하이시니 황제가 까라면 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유자업은 누님의 요청에 응하여 그날로 저연을 불러다가 유초옥에게 넘겨준다. 사실 저연(褚淵)도 문제
(文皇帝) 유의륭(劉義隆)의 딸, 남군공주(南郡公主)와 혼인하여 황실의 어엿한 부마(사위)였고 촌수로
따지면 막장남매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하지만 친오누이 간에도 근친행위를 일삼는 남매가 그런 걸
신경이나 썼겠는가.

황제의 명령으로 산음공주(山陰公主) 유초옥(劉楚玉)의 저택에 불려온 저연은 평소 품위있는 행동거지와


대쪽같은 성품으로 이름이 높았던 만큼, 유초옥(維楚玉)이 던지는 추파나 부리는 교태에도 아랑곳 않고
끝까지 체통을 지켰다.

아무리 유혹해도 저연이 넘어오질 않자 유초옥(劉楚玉)은 화가 난 나머지 이렇게 물었다.

"풍채가 당당한 것으로 보아, 분명 대장부이거늘, 어찌 이리 양기(陽氣)가 없소?"


즉, 너 고자냐? 라고 물은 것이다. (고모부에게 조카가 말하는 싸가지가 훌륭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저연의 답변.

"제가 비록 재능은 모자라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유초옥(劉楚玉)은 계속해서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했고 저연(褚淵)은 참다못해 정 이러면


차라리 자결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에 이른다.

결국 완강하게 나오는 저연을 못당해낸 유초옥(劉楚玉)은 포기했고 저연은 정절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근데 뭔가 바뀐 느낌이다?

유초옥(劉楚玉)의 주색잡기는 계속 이어져 또 동생 유자업에게 조르기 시작한다.

"비록 남녀가 다르다고는 하나, 폐하와 신첩(臣妾 : 유초옥을 말함)은 모두 선대 황제의 혈육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후궁을 수없이 거느리시고 신첩(臣妾)은 부마(사위) 한명 밖에 없으니 이 얼마나
불공평한 일입니까?"

즉, 아무리 우리가 남자 여자 다르더라도 너나 나나 모두 같은 혈육인데 왜 너는 하렘을 조성하고 나는 왜


남자가 달랑 하나냐 이런 말이다.
그런데 유자업은 이와같은 누이의 말에 수긍하고 그 날로 미남 서른여명을 누이의 저택으로 보내준다.

누이 유초옥(劉楚玉)이 서른 명의 꽃미남 무리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누이와의 관계가


멀어지자 유자업은 다른 상대 물색에 나섰고 그래서 찾은 이가 고모 신채공주(新蔡公主) 유영미(劉英媚)
였다.

평소 신채공주(新蔡公主) 유영미(劉英媚)는 궁중에서 미인으로 소문나있던 터라, 유자업은 그 소문을


듣고 무려 고모를 상대로 근친행위를 시도한다.

방 안에서 강제로 겁탈하려 들자 유영미(劉英媚)가 고모와 조카간에 이래서는 안된다고 소리치며


저항했지만 유자업은 막무가내로 누이와도 동침했는데 고모와는 안될게 무어냐며 칼을 빼들고 위협하자
결국엔 굴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고모를 황후로 책봉하려 들었는데 사건의 전말을 모두 들은 신채공주(新蔡公主) 유영미
(劉英媚)의 남편이자, 유자업에게는 고모부인 하매(何邁)가 대노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들자 숙청해버리고
마치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이 그러했듯 주위의 시선을 고려해 고모의 성씨를 '사(謝)' 씨로
고치며 황후로 책봉하지만 고모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사례들 뿐만 아니라 유자업이 건드린 친족은 위에서 말한 둘 외에도 여럿 더 있다. 그 중 한가지


사례만 더 보겠는데, 이번에는 본인이 아니라 신하더러 황족 가운데 한명을 겁탈하라 지시했다.

우위장군(右衛將軍) 유도융(劉道隆)이란 신하가 있었는데, 유자업은 여기서 유도융에게 전편에서도


언급한 일찍이 조카 유자업에게 온갖 굴욕을 당한 바 있는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의 어머니인
태비(太妃) 왕씨(王氏)를 강제로 겁탈하라 명령했다. 태비(太妃) 왕씨(王氏) 또한 불혹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색이 곱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숙부의 어머니면 제아무리 친 조모(祖母)가 아닐지라도 자신에겐 어쨌거나 조부모 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숙부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 짓을 시켰다고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유휴인(劉休仁)의 표정이나 행동에 조금이라도 불손하고 불편한 기색이 돌면 즉각 둘다
죽이겠다는 협박과 함께.
그 밖에도 인간의 탈을 쓰고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행위들을 일삼으며 여러 친척일가 황녀(皇女)들을
범했다. 개중에는 유자업의 근친행위 요구를 거부하여 분노한 유자업에 의해 죽어나간 이도 여럿 있었다.

당시 유자업의 흉악스러운 짓거리들은 예나 지금이나 봐도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행동들이다. 그래서


폭군의 악정에 참다 못한 황족들의 반란이 일어난다.

먼저 반란을 일으킨 이는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으로, 유자업에게는 작은 할아버지 뻘이 되는


사람이었다. 임지에서 거병하여 황제를 폐위할 모의에 한창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누군가의 밀고로 오히려
유자업의 어림군에 의한 급습으로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의 병력은 무너지고 유의공(劉義恭)은
사로잡혀 유자업이 친히 휘두른 칼에 여덟조각이 나 죽었고 그 네명의 아들들도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만다.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을 시작으로, 황제를 모살하려는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유자업의 폭정에 피해를 입거나 혹은 그 가족이 피해를 본 황족들에 의한 반란이었다.

만인이 뜻을 함께하여 오직 한 목숨을 노리는데 그 한 목숨이 안 죽고 배기겠는가. 머지않아 17 세의 어린


폭군에게도 최후가 찾아온다.

폭군답게 그 최후도 주색잡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궁궐 뒷뜰 화원에서 한창 연회를 벌이던 유자업은 문득


주위의 시종들과 궁녀들에게 옷을 벗으라 하고 개, 말, 양, 원숭이 등, 한 무리의 동물들을 데려와서는
그것들과 수간(獸姦)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평소 유자업이 사람 죽이기를 파리 죽이듯이 일삼는 것을 잘 아는 시종들과 궁녀들은 군말없이 시키는데로


따랐는데, 한 궁녀만이 끝까지 버티며 거부했다고 한다. 유자업은 항명하는 그 궁녀를 바로 죽였고
그날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여기서 그 죽은 궁녀가 유자업의 꿈에 나타난다.
"내가 너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 이 억울함과 너의 죄를 하늘에 고해 바쳤으니, 너는 아무데도 도망가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한맺힌 궁녀의 저주에 유자업은 잠에서 깨 두려운 생각이 들어 무당들을 불러 굿을 벌였다. 그 중 한


무당이 유자업에게 아뢰기를,

"그 궁녀가 죽은 후원에 귀신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자업은 칼을 빼들고 감히 자신을 협박하려 든 그 궁녀귀신을 잡겠다고 뛰쳐나간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뛰쳐나간 유자업을 기다리고 있던 이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란 앞서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처럼 함께 조카 유자업에게 능욕을 당한 바 있는


'돼지왕'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이 보낸 자객들이었다.

귀신을 찾아 두리번 거리던 유자업에게 한 무리의 자객들이 덮쳐갔고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유자업은 꽁무니를 뺐지만 곧 붙잡혀 무수히 날아드는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하니, 재위에 오른지 불과 1
년만인 서기 465 년의 일이었다.

저번에 능욕을 당하며 죽음직전까지 갔던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이 평소 조카 유자업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일을 꾸민 것이었다. 무당도 유욱이 보낸 사람으로, 매복해있던 자객들에게로 유자업을 보내
죽인 것이다.

폭군을 몰아냈으니 의당 그 공로는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에게로 돌아갔을 터. 그리고 유자업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그가 유송(劉宋)의 제 6 대 황제, 명제(明帝)다.
송(宋) 태종(太宗) 명제(明帝) 유욱(劉彧).

명제(明帝) 유욱(劉彧)이 전 황제인 유자업(劉子業)에게 올릴 시호나 묘호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진작에 폐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을 담아 그저 폐제(廢帝)라고 부를 뿐.

명제(明帝) 유욱(劉彧)은 즉위하자마자 폭군의 잔재부터 청산하려 했다. 자신을 돼지취급하며 멸시와
모욕을 준 조카놈과 관련된 것들만 보면 치가 떨렸을 터.

먼저 음란마귀가 씌여도 단단히 씌인 산음공주(山陰公主) 유초옥(劉楚玉)부터 죽여 없앴고 폭군에


달라붙어 함께 놀아나던 이들도 죄다 제거되었다. 게다가 유자업의 친형제들, 즉 효무제(孝武帝) 유준(劉
駿)의 자식들도 모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행여나 친형제인 유자업의 복수를 하려 들까봐 후환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고는 하는데, 내 생각에는 순전히 명제(明帝) 유욱(劉彧)의 앙갚음 같다.

특히 유자업의 시체는 죽임을 당한 후원 뜰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애당초 명제(明帝) 유욱(劉彧)은


그 시체를 수습하여 묘를 만들어 줄 생각도 없었다. 아무리 폭군이었어도 명색이 황제였는데 그 묘도
없다는 것은 그냥 황제 취급도 안해준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선제(先帝)의 시신이 그냥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보다 못한 채흥종(蔡興宗)이란 신하를 필두로 한


여러 신하들이 유자업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 줄 것을 건의했다.
"아무리 폭군이었다고 하나, 한때는 천하를 다스리던 주인이었으니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루어 주는 것이
옳습니다. 선제(先帝)의 시신을 방치해두었다가는 천하가 어지러워 질 것입니다."

명제(明帝) 유욱(劉彧)도 그게 옳다 여겼는지 건의를 받아들여 유자업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룬다.
하지만 시호나 묘호는 없었다.

아무튼, 명제(明帝) 유욱(劉彧)의 즉위로 비로소 혼탁했던 정치가 바로 잡히고 숙청의 피바람에서부터
벗어나 황실이 편안해졌는가 하니, 그건 아니었다.

비록 전대인 유자업의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워낙 유자업이 가공할만한 일들을 벌여놔서) 명제(明帝)
유욱(劉彧)의 대에도 선대의 잔혹함은 이어져 숙청의 피바람은 계속 불었고 덩달아 조카의 방탕함과
음란함까지 물들었는지, 명제(明帝) 유욱(劉彧)도 폭군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잔인함에 있어서는
유자업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라는 것이 후세의 평이다.

즉, 송(宋) 왕조는 지도자 황제는 물론이고 여러 황족들의 정신머리가 괴상하여 못살겠다 갈아엎자 해서
황제를 갈아치워도 결국엔 그놈이 그놈이라는 식으로 결말이 나버려 그렇게 악순환이 거듭되다가 8 대 59
년 만에 단명해버린 왕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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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초(가입:2012-12-18 방문:1691)

2013-12-25 15:08:20 추천 6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친누이랑 친고모라니 일본 AV 막장시리즈에나 나올듯한 내용이네요


★3985576(탈퇴)

2013-12-25 15:31:01 추천 8

두 편에 걸친 막장짓이 고작 1 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단 건가요?;;정말 희대의 막장 황제구나,ㄷㄷㄷ

★viper76(가입:2013-04-17 방문:1298)

2013-12-25 16:33:01 추천 0

정말 5 호 17 국시대 남북조 시대는 개또라이 스펙타클한 황제들이 많았어요.

★carrak(탈퇴)

2013-12-25 16:45:53 추천 1

근데 한가지 궁금한게 저렇게 막장 개또라이들인데 시호들이 왜 저렇게 좋을까요??


명제, 효무제....
★얼굴이유머(가입:2013-07-01 방문:1146)

2013-12-25 17:56:32 추천 0

덕분에 재밌는 글, 즐겁게 읽고 갑니다.


다음에 언젠가 시간이 되시면 당말오대도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괜한 부탁, 부담드리는 것같기도 해서 죄송합니다.

★레미으앙(가입:2013-01-12 방문:694)

2013-12-25 18:18:27 추천 0

우와아아아ㅏ...;;;;;;;;
중국 왕실 보면 참...;;;;;;;;;;;;;;;

콩국수(가입:2013-05-14 방문:633)
2013-12-25 18:43:49 추천 0

와.. 정신이 ㅎㄷㄷ해지는 막장 甲 스토리군요.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화이팅!

백구한접시(가입:2012-05-14 방문:2528)

2013-12-25 18:49:32 추천 0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ㅎㄷㄷ

★얼굴이유머(가입:2013-07-01 방문:1146)

2013-12-25 19:06:41 추천 7

이다음 왕조인 제나라도 송에 버금갑니다.


모두 기대하고 보셔도 좋습니다.

작성자님의 끗발날리는 멋진 필력으로 그려질 막장왕조 시즌 2~!!!!!!!


세상 어디에도 없고, 다시 태어나도 없을 애인에 대한 상상은 이젠 그만~!!!!!
2013 년 겨울, 외로운 마음에 역게를 찾아오신 분들을 열광케 할 전무후무한 지상최대의 막장황실 시즌
2!!!
이제 곧 공개됩니다!!!!!!!!!
★지나가다슬쩍(가입:2013-04-30 방문:654)

2013-12-25 19:41:06 추천 0

그러고보니 제환공인가도 자기 조카며느리인지 하고 결혼하지 않았나 싶은데.

★때리지않아요(가입:2012-04-09 방문:587)

2013-12-25 20:04:05 추천 0

연산군은 명함도 못 내밀겠네요..

Harintz(탈퇴)

2013-12-25 21:27:17 추천 0
저거랑 같은유쓰는데 때고싶다 진심 ㅠ

★로아나(가입:2011-07-09 방문:1445)

2013-12-26 03:06:50 추천 0

저번부터 봤는데 너무 재밌어요!! ^_^ 자주 올려주세요!!

★viper76(가입:2013-04-17 방문:1298)

2013-12-26 10:50:32 추천 0

연산군은 5 호 16 국이나 남북조시대 개또라이 황제에 비하면 성군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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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색잡다 나라를 말아먹은 황제, 진숙보(陳叔寶)

게시물 ID : history_13207 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가입:2013-12-04 방문:521)
추천 : 23
조회수 : 2245 회
댓글수 : 11 개
등록시간 : 2013/12/26 12:09:18

역대 망국의 군주들이 나라를 말아먹은 시나리오들을 보노라면, 흔히 말하는 주색(酒色)잡기로 대표되는


혼정을 일삼다가 외침이나 내부의 반란으로 나라를 내어주는 경우가 대다수다.

과거에도 주지육림으로도 대표되는 은(殷)의 주왕(紂王)이 그랬고 주(周)의 유왕(幽王) 역시 포사(褒姒,


라는 미녀에 빠져 망국지군이 되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군주들이 이 주색(酒色)에 빠져 나라를 시원하게
말아잡수셨으니, 예나 지금이나 술, 도박, 색(色)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임은 불변의 진리인 듯하다.

이 글에서도 다룰 진숙보(陳叔寶)라는 황제도 위의 절차를 그대로 밟은 전형적인 암군(暗君)이다.

들어가기에 앞서 당시 배경을 설명해보자면..


위의 연표에서도 확인할 수있듯이 서기 5C 무렵의 중국은 화북(華北)과 화남(華南)에 각각 북조(北朝)와
남조(南朝)가 들어서서 양립하는 구도였다.

남조(南朝)는 동진(東晉) - 제(齊) - 양(梁) - 진(陳)의 순서로 왕조가 들어섰고 진숙보(陳叔寶)는


남조(南朝)의 마지막 왕조, 진(陳)의 마지막 황제였다.

진(陳)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

시호나 묘호가 없고 그냥 후주(後主)로 불리운다.

촉(蜀)의 후주(後主)로 칭해지는 유선(劉禪)과 같은 경우.

유선도 나라 망하게 한 군주인지라 동격취급하는 것이다.

진숙보(陳叔寶)는 서기 582 년, 아버지 고종(高宗) 선제(宣帝) 진욱(陳頊)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당시 물려받은 나라는 북조(北朝)와의 전쟁과 오랜세월 동안 이어진 남조(南朝) 특유의 황족내란으로


인하여 발생한 자체적 소모로 인하여 국력은 감소해 있었지만 이를 회복하는 것은 재량껏 노력 하기나름에
달린 문제였을 뿐, 돌이킬 수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거나 재생불가의 수준은 아니었다.
진(陳)의 제 4 대 황제, 고종(高宗) 선제(宣帝) 진욱(陳頊).

북조(北朝)의 북제(北齊), 북주(北周)로부터의 맹공에 선방하며 오히려 반격으로 영토를 넓히는 치적을
거두었다.

즉, 군주 진숙보(陳叔寶)만 정신차리고 내치에 힘썼더라면 해결되는 문제였던 것이었는데, 안 그랬으니까


암군이라는 욕을 먹어가며 후대의 왕조는 물론이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몸소 겪은 망국의 지름길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어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진숙보(陳叔寶)는 황제의 재목이라기 보단 차라리 감성 풍부한 예술가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태자시절부터 문장에 능했고 그가 창작한 시 또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곤 하여 주로 문학 쪽으로
이름이 높던 사람을 갖다가 황제자리에 앉혀두니 애시당초 지도자의 자리가 요구하는 덕목과 능력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해당되는 사항도 거의 없던 진숙보는 자연스레 정사를 멀리하게 된다.

더구나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 자랐기에 오랜 전란과 황족간의 내란으로 어려워진 민생의 실태나


세상살이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아예 무지했다. 황족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는데,
그에 비해 다른 황족들은 일찍이 제국 각지의 임지로 나가 변경을 지키며 북조(北朝)와의 전쟁에서
참전하여 장수가 되거나 일찍부터 정계로 나아가 고위관료로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유독 진숙보만이 세상
때를 거의 타지 않은 황족이었다.

이렇듯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조정에서 업무를 보니 정치에 있어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을 수밖에.
그래서 아예 정사를 신하들에게 위임해버렸는데, 결국 암군 곁에 꼬여든 간신들의 손에 조정의 일이
넘어가버리니 이들이 선정(善政)이란 걸 베풀리가 만무했다.

종친, 조정대신, 환관을 가리지 않고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이 바람에 뜻있는 선비들은 관직에 등용되지를
못할 뿐더러 간신들과 뜻을 함께하는 자들만 조정에 입조했으니 이들이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나라 꼴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숙보가 노상 즐기고 하는 것이라고는 연회와 문인들과 술마시며 시 짓기,
화원에 나가서 수목이나 꽃 감상하기와 같은 것들이었다.

특히 유독 밝히는 것은 색(色). 아름다운 궁녀들이나 후궁들에 둘러싸여 즐기는 것이 그의 낙이었다.

중국 드라마 <수당연의>에서의 한 장면.

자막에도 나와있듯이 미녀궁녀들에게 둘러싸인 중앙의 후덕한 남자는 진숙보(陳叔寶)다.

수많은 후궁들 가운데서도 유독 진숙보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있었는데 장려화(張麗華)라는 귀비(貴妃)


였다.

장려화(張麗華).

진숙보는 장려화(張麗華)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해 매일같이 장려화의 처소를 드나드며 놀았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기려 평소 자랑하는 시작 실력을 뽐내어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라는 시까지 지어주었다고
한다.

중국 드라마 <수당연의>에서의 장려화(張麗華). 반할만 하다

어찌나 총애했는지 조정에서 대소신료들과 회의를 할때도 장려화를 용상에 함께 앉혀 무릎에 앉히고
했다고.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장려화는 그 위세로 나중에는 조정의 일에도 간섭하여 진숙보를 졸라 기존의
태자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소생을 황태자로 책봉시키는 전횡을 보여준다.

진숙보는 토목공사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무능한 군주들이 벌이는 전형적인 행사로 여겨지는
일이기도 했다. 우선 세개의 누각을 세우게 했는데 각 탑의 규모는 높이 수십 장(丈), 너비는 수십 칸에
이르렀는데 그 이름은 임춘각, 결기각, 망선각이라 했다.

워낙 예술미를 중요시 하는 진숙보였기에 그 거대한 누각들을 치장하는데도 돈지랄을 했다. 세 누각을


모두 다리로 연결했을 뿐더러, 기록에 따르면 문과 창문, 난간들은 금, 은, 옥, 비취 등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거기다 누각 아래에는 흡사 신선이 노닐만한 풍경을 조성하고자 연못과 향나무숲도 만들어 그 향이
2~3 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게 했다하니.. 국고를 탕진하다시피 돈을 쏟아 부은 것이다.

황제가 갈수록 맛간 행동만 일삼자 이를 우려하여 충언을 올리는 신하도 있었다.

"군주란 모름지기 하늘을 섬기고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며, 아첨들을 멀리하고..(중략)..이것이


은혜를 입고 거처를 보호하며 자손에게 흐르는 복입니다. 후궁들은 호화로운 비단 옷을 끌고 창고에는
곡식이 넘치는데, 백성들은 궁핍하여 죽은 자가 들을 덮었고 뇌물들이 오가며 국고에 보관된 재산들이
바닥이 났으니 이에 신령들이 노하시고 백성들은 모두가 조정을 원망하니, 무리들이 배반하고 친척들이
흩어집니다...(중략)...다만 신이 두려운 것은 동남(東南)의 왕기(王氣)가 여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비서감 부재란 신하의 상소다. 내용에서 보듯이 현재 나라의 실태를 고발하여 경각심을 일깨워주고자 올린
충성어린 상소였지만, 대개 망국지군이 그러하듯 씨알도 안 먹히고 부재는 오히려 대노한 진숙보에 의하여
처형당하고 만다.

위에서 주재가 상소문의 마지막에서도 경고했듯, 이처럼 난국을 겪는 진(陳)을 예의주시하며 노리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북조(北朝)를 종결짓고 화북(華北)을 통일한 수(隨)나라였다.

서기 560 년의 판도.

빨간색 : 진(陳)

파란색 : 북제(北齊)

하늘색 : 북주(北周)

분홍색 : 서위(西魏)

여기서 서위(西魏)라는 나라는 예전 5 호 16 국 시대를 통일한 북위(北魏)가 분열하여 생긴 나라 중


하나다.

서기 566 년에 서위(西魏)는 북주(北周)에 의해 멸망당했고 북제(北齊)도 그로부터 10 여년 후에


무너졌다.

마지막으로 북주(北周)는 당시 실권자인 수국공(隨國公) 양견(楊堅)에 의해 황위 양위의 형식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양견(楊堅)은 수(隨)를 세우니 이때가 서기 581 년이다.


수(隨) 고조(高祖) 문제(文帝) 양견(楊堅).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名君) 중의 하나.

북조(北朝)를 통일하고 남조(南朝)의 진(陳)도 멸하여 대륙통일을 이룩했다.

치세동안 스스로 모범이 되어 법제와 각종 제도와 정책의 실시 및 정비를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었지만

다만 자식농사는 실패해서 말년에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했다.

수(隨)가 건국되었을 때는 서기 581 년, 진(陳)에서 진숙보가 제위에 오르기 1 년 전이다.

진숙보 치세 하의 진(陳)의 동향을 주시하며 혼군 치하에서 정신 못차리는 진(陳)을 보고 때가


무르익었음을 감지한 수(隨)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서기 588 년 정월, 차남인 진왕(秦王) 양광(楊
廣)에게 50 만의 대군을 주어 진(陳)을 공격하게 했다.

수(隋) 세조(世祖) 명제(明帝) 양광(楊廣).

흔히 수(隋) 양제(煬帝)라 하여 '고구려 백만대군 꼬라박기' 로 우리에게도 많이 익숙한 중국 황제다.

여기서 왜 시호가 양제(煬帝)가 아닌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사실 정식 시호는


명제(明帝)다.

양제(煬帝)는 훗날 수(隋)를 멸하고 세워진 당(唐) 왕조가 명제 양광을 비하하여 붙인 시호다.

수(隨)군의 대규모 남하에 진(陳)의 방어라인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패퇴를 거듭한다. 전선은
속수무책으로 계속 밀렸고 위급을 알리는 파발마가 연신 수도 건강(建康)으로 날아들었지만 이미 황제의
눈과 귀를 막은 간신들에 의해 도중에 묵살되기 일쑤였다.

그러다 결국 그제서야 수(隨)의 대군이 몰려온다는 급보가 진(陳)의 조정에 도달했지만 진숙보는
사태파악도 못하고 그와 같은 장계를 듣고도 별거 아니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우리에겐 장강(長江)이 있고 아직 동남(東南)에 왕기(王氣)가 서려있거늘, 어찌 수(隨)군이 우릴


멸한단 말인가?"

진숙보가 믿고 기대고 있던 것은 순전히 진(陳)의 북부를 끼고 흐르는 장강, 즉 양자강이라는 천혜의


요새였다. 수(隨)의 대군이 장강을 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다 되도않은 왕기(王氣) 타령,
즉 왕의 기운이 동남(東南)에 위치한 진(陳)에 서려있으니 수군이 해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나 하고 있었다.

그저 간단하게 대응할 지시만 내리고는 평소 즐기던 꽃 구경에 몰두했는데 진숙보의 그와 같은 기대는 곧


깨지고 만다.

며칠 지나지 않아 수(隨)군이 이미 장강을 넘어 수도 건강(建康)으로 진군해 들어오고 있다는 급보가


날아든 것이다.

평소 수(隨)로부터의 공격을 우려한 신하들의 진언에도 "우리 두 나라는 그동안 평화롭게 공존해 왔다.
어찌 저들이 우릴 침범한단 말인가?" 하며 큰소리만 떵떵치던 치곤 했던 그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장강의 천험함만 철석같이 믿고 있던 진숙보는 이 급보를 접하자 소스라치게 놀라 어쩔 줄 몰라하며
밤낮으로 울기만 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수(隨)군이 진(陳)의 백성들에게 환영받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진(陳)에 대한 민심이
좋지 못한 것을 이용한 수(隨)군이 찌라시를 뿌려 악독한 진(陳)가 놈들을 끝장내러 왔다고 선전하고
다닌 탓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서술했듯이 평소 진(陳)악정에 시달리던 진(陳)의 백성들은 수(隨)군의
바램대로 쌍수들어 환영했으니 이래저래 자국민들로부터도조차 지지 못받는 실정이었다.

진숙보는 매일마다 신하들을 붙잡고 "우야면 좋노ㅜㅜ" 하며 애가 말라 징징댔지만 조정에서의 부정부패로


인한 실망 탓에 이미 나라에 대한 충성이라곤 쇠털만큼도 안남아 있던 조정대신들은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아무도 애국심을 불사르지 않던 차에 수(隨)군을 막겠다고 자청하고


나선 신하가 있었는데, 소마가(簫摩訶)라는 장군이었다.

소마가(簫摩訶)는 본래 남조(南朝)의 세번째 왕조인 양(梁) 왕조의 황족출신으로, 그 뒤에 들어선 진


(陳)을 섬긴 이른바 망국의 후예였다.

평소 망국의 후예를 거두어 준 것에 대해 진(陳)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던 소마가(簫摩訶)는 진(陳)이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그 은혜를 갚고자 출전을 자청한 것이다.

소마가라고 해서 진(陳)의 멸망을 예감 못했을리는 없다. 말그대로 은혜 갚고자 출전했을 뿐.

소마가(簫摩訶)가 나서자 진숙보는 기뻐 어쩔 줄 몰라하며 소마가의 벼슬을 올려주고 또한 그 가족들도


황궁으로 데려와 살게 했다고 한다.

오오 님이 막아줄거임??

대신에 내가 님 벼슬 올려주고 님 가족들 황궁에서 안전하게 보살펴 주겠음 ㅇㅇ


저 수가놈들 몰매 줘서 쫓아내 달라는..

소마가(簫摩訶)는 남은 병력을 긁어모아 수(隨)군을 요격하러 출전했고 최후의 저항이라 사뭇 비장했는지


나름 선전하며 수(隨)군을 막아낸다.

그리고 위에서 밝혔듯, 진숙보는 소마가(簫摩訶)의 가족들을 보호해준답시고 황궁으로 불러들였는데,


여기서 진숙보는 다시한번 일을 그르치고 만다.

소마가(簫摩訶)의 아내가 미인이었는지 진숙보가 색(色)을 탐하는 성격을 못버리고 소마가의 아내에게
집적댄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 목숨걸고 전쟁에 나가 있는 신하의 아내를.

소마가가 그 소식을 접하게 된 때는 몇달이 지나서였다. 가솔들이 직접 소마가에게 찾아와 일의 전말을


낱낱이 고해바쳤던 것이다.

아내가 궁중에 갇혀 있으며 황제라는 호색한이 밤낮으로 희롱하고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소마가는 분통이 터지다 못해 기가 막혀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일말의 충성심도 싹 가셔버린 소마가는 오랫동안 생각하던 끝에 수(隨)군에 대한 저항을
그만두기로 하고 퇴각해버린다.

마지막 방어선인 소마가가 뚫려버리자 수(隨)군은 바로 진(陳)의 수도, 건강(建康)으로 진격해 들어갔고
결국은 수군은 건강에 입성하는데에 성공한다.
수(隨)군이 궁성 안으로까지 들어와 진숙보를 찾을 때, 진숙보는 애지중지하던 장려화(張麗華)와 손귀인
(孫貴人)이라는 후궁을 데리고 궁중의 어느 우물 안으로 숨어 있었다고 한다.

거기 들어가 숨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냐만은 진숙보가 내놓은 최고의 자구책이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니 춥고 답답했을터. 결국은 항복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수(隨)군이 우물까지는 뒤져보질 않아
진숙보와 두 귀비를 못찾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보다못한 진숙보가 "나 여기있어! 꺼내줘!" 라고 외치고 나서야 그 소리를 들은 수나라 병사들에 의해
구조(?)되었다고 한다.

우물에 걸린 두레박으로 한명씩 꺼냈다고 하는데 이때 진숙보를 끌어올리던 수나라 병사 曰,

"황제라 그런가 무게도 무겁구나."

진숙보와 진(陳)의 유신들은 수(隨)군의 총사령관, 양광(楊廣)에게 정식으로 항복했다. 서기 589 년,


재위 7 년만의 황제 생활이었다.

그리하여 남조(南朝)의 최후의 왕조, 진(陳)은 멸망하고 수(隨)는 천하통일을 이룩한다.

그들은 곧장 수(隨)의 도읍, 장안(長安)으로 압송되었고 거기서 수(隨) 문제(文帝) 양견(楊堅)과


조우한다.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망국의 황제 진숙보에게 알맞은 작위를 하사하고 집도 줘서 사는데에 부족함이


없게 조치해줬다.
그렇게 남은 여생을 편안히 지내던 진숙보가 하루는 문제(文帝) 양견(楊堅)에게 궁성도 크게 짓고 향락
좀 누리라고 권했다고 한다.

양견(楊堅)은 그자리에서 그냥 알겠소 하고 말았지만 나중에 대신들 앞에서는,

"자신이 어쩌다 망했는지도 모르고 그걸 뉘우치기는 커녕 이제는 나에게까지 향락을 권하는구먼."

하며 웃었다는 얘기가 전해내려온다.

그리고 진숙보는 서기 604 년, 54 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진숙보에게 '장선양공' 이란 시호를 올려주었는데, 여기서 '양(煬)' 자는


위에서도 밝혔듯, 후세의 당(唐) 왕조가 수(隨) 양제(煬帝)를 폄하하고자 고의로 올린 시호와 동일하다.

'양(煬)' 자는 시법으로 '여자를 좋아하고 예를 멀리한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문제 양견이 무슨


의도로 그런 시호를 올렸는지 아실터.

진숙보는 낙양(洛陽)의 북망산(北邙山)에 안장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삼국시대 오(吳)의 마지막 황제인


손호(孫皓)의 옆자리였다.

삼국지연의를 읽어본 독자라면 손호(孫皓) 역시 폭정을 일삼던 망군지군이었을을 알 것이다. 이 또한


양견의 의도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먼 훗날에는 백제(百濟)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도 백제 멸망 후에 당(唐)으로 끌려와


낙양에서 여생을 마친 뒤에 의자왕도 자국의 혼군들이었던 손호와 진숙보와 다를 것없는 무능했던
군주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당(唐)에 의해 나란히 묻히는 얘기는 유명하다.

아무튼 이리하여 남북조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고 수(隨) 왕조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수(隨) 문제(文帝) 양견(楊堅).

수(隨)의 천하통일.

시대 : 중국 동진(東晉)

동진이라는 국가를 들어보셨을까요? 위,촉,

오의 삼국시대를 통일한 것은 그 세나라가 아닌 위나라의

정권을 탈취한 사마씨의 진(晉)나라입니다. 제가 굳이 한

자를 집어넣은 것은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나라와 혼


동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진(晉)나라는 흉노족

의 침입으로 수도를 낙양에서 강남지방으로 옮기게 됩니

다. 그래서 수도가 낙양이었던 시기는 서(西)진이고 수도

가 강남지방이었던 시기를 동(東)진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 그리고 이때부터 흉노족을 비롯한 저족, 갈족, 선비족,

강족등등의 이민족이 북쪽지방에 국가를 세우니 이를 5

호 16 국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북쪽지방은 5 호 16

국 시대, 남쪽에는 동진정권이 있는 형국입니다.

황제명 : 효무제 사마요

국가적 상황 : 큰 위기를 넘김

당시 중국 동진의 9 대 황제인 효무제 사마요는 국가의 큰

위기를 넘기게 됩니다. 그 큰위기라는 것은 북쪽에 난립

해있던 5 호 16 국시대를 거의 종지부를 찍는 영웅이 나타

나니 그는 저족으로 전진(前秦)의 왕(황제칭호를 쓰지 않

았습니다)인 부견입니다. 그의 정책은 워낙 훌륭한 것이

어서 그 당시의 역사가 피로 범벅된 잔혹한 시대에서 이

례적인 것이었습니다. 북쪽지방을 거의 통일하니 남은것

은 남쪽인 동진을 공략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벌인

전투가 비수대전(중국의 3 대대전-적벽대전, 관도대전)입


니다. 무려 97 만(전진) VS 7 만(동진)대 싸움은 동진의 승

상 사안과 그의 아들의 활약등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

게 됩니다. 그 싸움의 결과로 전진은 곧 몰락하니 다시

북쪽은 5 호 16 국의 형세로 난립하게 됩니다.

본론입니다.

이런 국가적 위기상황을 넘기게 되니 황제인 사마요는 술

파티에 절어 살게됩니다. 그리고 그의 파트너는 후궁인

장귀인이라고 합니다. 황제의 나이 36 세, 장귀인의 나이

30 세라고 합니다. 술을 마시고 마시고 하다 보니 장귀인

이 술을 먹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황제는 그래도 끝까지

권하는데요, 이에 장귀인이 완강하게 거절을 합니다. 심

통이 난 황제는 몇 마디 말을 던집니다.

" 나이 먹더니 한물 갔구나?"

" 얼굴도 예전 같지 않네?"

" 너 내쫓고 어린여자와 지내야겠다."

3 연속 크리가 터졌습니다. 안그래도 장귀인의 입장에서

는 다른 어린여자들도 많은데 나이 30 살의 자신을 가까이

하는 황제를 보며 위기의식을 많이 느꼈을거라고 생각합

니다. 그런데 황제가 장귀인의 컴플렉스를 확실히 건드리


게 되네요. 이에 장귀인은 곁에 있던 환관과 궁녀들에게

술을 먹여 밖으로 내보냅니다. 그리고 장귀인은 이불로

황제를 질식사시킵니다.

(추가) 그 후 장귀인은?황제가 가위에 눌렀다고 둘러댑니

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코난과 김전일같은 사람은 있었

을 거에요. 더구나 황제의 죽음인데요. 그래서 그녀는 권

력과 손을 잡게 되니 황제가 매일 술에 찌들어 살때 대신

정치를 해준 인물이 있어요. 그 인물은 바로 황제의 동생

인 사마도자에요. 장귀인은 사마도자에게 붙어 죽음을 면

합니다.

시대 : 춘추시대

사실 춘추시대라는 말보다 춘추전국시대라는 말을 많이

듣고 쓸것입니다. 그러나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구분되

어야하는 시대입니다. 춘추시대의 유래는 공자가 엮었다

고 하는 <춘추>라는 역사서에서 나온것이며 전국시대의

유래는 전국시대의 전략을 편집한 <전국책>에서 나왔다

고 합니다. 흔히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바뀌는 분기점

은 춘추 5 패(제환공, 진晉문공, 초장왕이며 나머지 두 사

람은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릅니다.-월왕구천, 오왕부차,


송양공, 진秦목공 등)를 했던 나라중 진晉나라가 한韓, 위

魏, 조趙 세 나라로 갈라지며(한씨,위씨,조씨의 세 명의

신하가 진나라를 찬탈) 종주국인 주나라가 이를 승인하면

서 그 이후의 시대를 전국시대라고 합니다. 전국시대가

되면 약육강식의 시대로 간단히 말하면 국가를 멸하고 영

토를 편입시키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 각 국가들은 인

재에 매달리게 되니 중국 각 시대를 통틀어서 사상의 발

전과 자유로움에 있어 가장 찬란했던 시기라고 생각합니

다.

국가 : 위衛나라

군주 : 위衛 의공

여기에서 의공이라 함은 제후의 명칭입니다. 헷갈리시는

분이 있을까봐 말씀드리자면 왕이 아닌 제후의 명칭입니

다. 왕은 엄연히 종주국인 주나라의 군주가 쓰는 용어입

니다. 주나라는 봉건제를 실시하는데요, 수도 인근지역을

직접다스리고 나머지 각 지역은 친척이나 공신으로 하여

금 다스리게 합니다. (제나라는 강태공, 노나라는 주공등

등) 그래서 정작 주나라가 위급해지면 나머지 각 지역의

제후들은 군대를 이끌고 주나라를 도와주어야 합니다.(존


왕양이-왕을 도와서 오랑캐를 물리친다. 이런 이념이 춘

추시대까지는 이어지나 전국시대가 되면 개(?)소리가 됩

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위 의공은 학을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벼슬까

지 학들에게 주었다고 하는데요. 백성들은 학 키우는데

드는 돈을 세금으로 내야 했습니다. 백성들의 원성이 심

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겠네요. 그런데 어느날 오랑캐가

쳐들어옵니다. 위 의공은 오랑캐를 막기 위해 군대를 모

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군대를 모집할 수가 없었습니다. 위 의공은 궁금

해져서 신하에게 묻습니다.

위 의공 : "왜 군대를 모집할 수 없는가?"

신하 : "백성들이 말합니다. 학에게만 잘해주었으니 학에

게가서 오랑캐를 막으라고요."

이 말에 위 의공은 후회합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

하며 학을 풀어줍니다. 그리고 그는 단신으로 적을 막기

위해 뛰어들지만 곧 그는 죽습니다.

위 의공의 시신을 찾기 위해 분주해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홍연, 이웃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옵

니다. 그는 위 의공을 모시던 사람에게 묻습니다. 의공의

시신의 행방을.

그러자 모시던 사람이 말합니다. 위 의공의 시신을 오랑

캐가 어찌나 짓이겨놓았던지 간밖에 남지않았다고요. 홍

연은 통곡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주군의 수치를 보이지

않기 위해 자기자신을 관으로 삼아 자신의 배를 갈라 주

군(위 의공)의 간을 집어 넣어 주군의 간을 보전합니다.

(추가) 위나라를 구하기 위해 제 환공이 위나라에 당도합

니다. 그는 오랑캐를 물리치고 위나라를 다시 재건하는데

요(춘추시대의 일반적인 풍조입니다. 국가를 멸망시키고

영토화시키는 것은 전국시대의 일반적인 풍조고요.) 홍연

의 소식을 듣고 말합니다.

" 위나라에 이런 충신이 있다니! 이런 충신이 있다면 위나

라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 중 아랍사람이 남긴 기록입니다.

비잔티움의 한 의사가 다리에 종기가 난 기사와 폐병을

앓던 여성을 살펴보았습니다. 기사에게는 고약을 발라 주

고 여성에게는 음식물을 조절하도록 해서 상태가 호전되

었다고 합니다. 그 즈음 서방의 의사가 왔습니다.


의사 : "한 다리를 가지고 살고 싶은가, 두 다리를 가지고

죽고 싶은가?"

다리에 종기가 난 기사 : "당연히 한 다리만 남더라도 살

고 싶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건장한 기사를 시켜 환자의 다리를 도끼로

내려쳤고, 한번에 잘리지 않자 다시 내려쳤습니다. 골수

가 드러나고 많은 피를 흘린 다리에 종기가 난 기사는 즉

사했습니다.

폐병에 걸린 여인에게는 "머리 속에 악마가 들어 있다"고

말하며 그녀의 머리를 삭발한 뒤 면도칼로 머리 위에 십

자가를 그었습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십자가를 긋고는

그 위에 소금을 뿌렸습니다. 결국 그 여인 역시 즉사하였

습니다.
중국의 삼국시대 위, 촉, 오의 세 나라의 끝은 촉나라는 위나라에 의해서

멸망하고 위나라는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위나라 마지막 황제인 조환에

게 *선양의 의식으로 황제가 되어 진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사마염

은 오나라를 공격하여 오나라 마지막 황제인 손호에게 항복을 받으면서 천

하를 통일하게 됩니다.

* 선양
: 덕이 많은 자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보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옛적 요임

금과 순임금의 고사를 본받은 것이지만 사실상 황제찬탈을 보기좋게 꾸며

놓은 것입니다. 전(前) 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이 그러했으며

, 위나라의 조비 또한 같은 형식으로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왕망은 자

신의 외손자인 평제를 독살시키고 황제가 되었기때문에 선양의 의미가 퇴

색된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천하를 통일한 사마염은 봉건제를 실시합니다. 그 이유는 조씨의 위나라가

멸망한 이유가 황제를 뒷받침해줄 황족의 권한이 약했기 때문에 힘이 강한

신하에게 황제를 빼앗겼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사마염은 아들

및 친척을 왕으로 삼아 각 지역에 임명하게 됩니다. 이것은 후에 어떤 결

과를 낳게 될지 두고 볼 일입니다.

진나라의 멸망은 첫번째 황제인 사마염에서부터 그 징조가 보이기 시잡합

니다. 사마염은 초창기의 참신한 기풍은 온데간데 없고 사치에 열중하게

됩니다. 그 케이스로 후궁을 1 만명을 두기 시작하게 됩니다. 1 년을 365 일

로 잡고 해도 엄청난 숫자인데요, 그러다보니 대체 누구와 밤을 보내야 할

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양이 끄는 마차에 타는데요,

양이 멈추면 그 지점에서 가까운 후궁의 처소로 가는 것입니다. 이에 똑똑

한 여자가 양이 좋아하는 대나무잎과 소금을 자신의 방앞에 뿌려놓게 됩니

다. 그래서 양은 언제나 그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널리 알려지게 되니 대나무잎 과 소금값이 폭등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치를 일삼던 사마염에게도 근심걱정이 있었습니다. 바로 황태자

인 사마충입니다. 걱정을 한 이유는 별거 없습니다. 멍청해서입니다. 그것

도 나라를 말아먹을정도로 멍청하다는데 있습니다. 물론 마리앙투아네트

가 말한적은 없다고 하지만 사마충은 "쌀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라는 말

과 신하에게 "개구리는 공적으로 우는 것이냐, 사적으로 우는 것이냐?"라

는 자못 철학자같은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마염은 황태자를 폐

하는것을 망설이는데요 왜냐하면 황태자의 아들인 사마휼이 똑똑하다는데

있습니다.(혹시 제 글중에 숙부 VS 조카를 읽으신 분이라면 비슷하다는 것

을 느끼실 듯 해요) 그러던 어느 날 황제와 신하들간 술자리에서 노신(老

臣) 위관이 술취한척하고 말합니다.

"폐하, 저 용상이 참으로 아깝습니다."

사마염은 이 말뜻을 알아채고 황태자를 테스트합니다.

그 결과 황태자는 미스테리하게 테스트에 합격을 합니다.

아들과 손자에 대한 사랑때문이었을까요? 사마염은 황태자폐립을 단념합

니다.

황태자가 미스테리하게 테스트에 합격하게 된 이유는 바로 부인인 가남풍

의 재치였습니다. 그녀는 황제가 황태자를 테스트할 거라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다음 답안지를 마련하여 테스트에 합격하게 합니다. 그런 줄 모르


는 사마염은 황제의 자리를 황태자인 사마충에게 물려주니 그가 진나라의

2 대황제인 진(晉)혜제 사마충입니다. 황제는 사마충이나 이번 이야기와 사

건은 가남풍을 중심으로 서술할 것입니다. 사실 사무충은 들러리나 마찬가

지여서 쓸 이야기도 없습니다.

가남풍의 외모는 얼굴은 사마귀가 나있으며 피부는 까무잡잡하다고한 추

녀라고 합니다. 그래도 현대의 시각에서 외모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가남풍의 성격은 무섭습니다. 그녀의 질투심은 어마

어마해서 사마충과 정을 나눠 임신한 궁녀의 배에 창을 꽂을 정도라고 합

니다. 앞서 사마충의 똑똑한 아들인 사마휼은 가남풍의 자식이 아닙니다.

사마휼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의문이네요. 그런 그녀의 포악함을 보고 주위

사람들은 질려버립니다. 사마염도 예외는 아니어서 황태자비 폐립을 생각

합니다.(부부가 쌍으로 폐립위기에. . .) 그러나 가남풍의 아버지인 가충은

사마염의 최측근 공신이기 때문에 황태자비폐립논의도 사그러지게 됩니다

. 사마염의 망설임은 진나라에 엄청난 재앙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1. 이 나라는 사마씨의 나라이지 양씨의 나라가 아니다!

사마충이 황제가 되니 이 세상이 자신의 것으로 여겼던 가남풍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마염의 장인인 양준(황태후

측)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준을 비롯한 양씨일족은 전횡을 일삼

는데요, 가남풍은 이에 불만을 가진 사마충의 동생인 초왕 사마위를 꼬드


깁니다. 역시 불만을 가진 초왕 사마위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양씨 일족들

을 모두 죽여버립니다. 가남풍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원로대신인 황족

들의 우두머리로 여남왕 사마량과 앞서 술취한척 건의했던 위관으로 하여

금 황제를 보좌하게 합니다. 이에 화가치민 사람은 초왕 사마위인데요, 재

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다른 놈이 먹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마위의 생각을 잘 알아챈 가남풍은 또다시 꼬드겨서 사마량과 위관을 죽

이도록 합니다. 신난 사마위는 사마량과 위관을 모두죽입니다. 이 소식에

가남풍은 빙긋이 웃고 함정에 함정을 덧씌웁니다. 그것은 사마위가 함부로

두 신하를 죽였다는 죄목을 덮어 씌운것입니다. 그 결과 사마위는 21 세의

나이로 처형당합니다. 여기까지해서 사마씨의 일족인 두왕을(여남왕

사마량, 초왕 사마위)을 죽여버립니다.

2. 황제보다는 미소년!

사마충은 밤일에도 별거 없었나봅니다. 가남풍은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기

(황제간에 아들이 없기 때문에 아들을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위해서 밤

마다 미소년을 납치합니다. 미소년을 상자에 집어 넣고 궁궐로 들어가게

되면 가남풍과 미소년은 뜨거운 밤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미소년의 테

크닉이 별로다면 그는 아침이 되면 상자속에 담겨서 밖으로 내보내게 됩니

다. 물론 시신으로요. 반대로 테크닉이 좋다면 엄청난 보화와 함께 다음에

도 뜨거운 밤을 보낼수 있습니다.(좋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3. 황태자를 죽여야 한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황태자인 사마휼은 가남풍의 자식이 아닙니다. 어려서

부터 기대를 받았던 사마휼은 똑똑하긴 하지만 개망나니가 됩니다. 가남

풍은 황태자를 죽이려고 합니다. 첫번째 계획으로 황태자가 술을 먹고 취

할때 가남풍이 글자를 받아 적게 합니다. 이 글자의 내용은 모반의 내용이

담겨있어서 황태자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 결과 황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에 성이 안찬 가남풍은 축하주(실은 독주)를

사마휼에게 보냅니다. 사마휼은 독주라는 것을 알고 거부를 합니다. 이에

독주를 전달하는 관리가 갑자기 절굿동이(?)로 황태자를 때려죽입니다.

4. 황태자(사마휼)가 죽어야 가남풍을 죽일 수 있다!

가남풍이 사마휼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는 조왕 사마윤(사마량의 동생)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조왕

사마윤은 관망합니다. 왜냐하면 사마휼이 가남풍에게 죽어야 가남풍토벌

에 대한 대의명분이 서기 때문에 그는 기다립니다. 마침내 사마휼이 가남

풍에 의해 죽자 그는 군대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조왕 사마윤은 가씨 일족

과 가남풍을 죽입니다. 그러나 조왕 사마윤은 뜬금없이 자신이 황제가 되

고 사마충은 태상황으로 모십니다. 그 결과는 엄청난 사건으로 번지게 됩

니다.

이번편에서는 사마씨를 가진 인물들이 너무 많이 나와 정신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이유로 각 인물들마다 일관되게 색깔을 집어 넣겠습니다.

1. 황제를 찬탈한 역적을 죽인다!

조왕 사마윤이 황제가 되자 제왕 사마경(사마염의 동생 사마유의 아들)은

성도왕 사마영(사마염의 아들), 하간왕 사마옹(사마의의 둘째 동생 사마부

의 손자), 장사왕(당시 상산왕) 사마애(사마염의 아들)등에게 격문을 보냅

니다.

‘역적 조왕 윤을 토벌한다’

제왕, 성도왕, 하간왕, 장사왕 연합군은 사마윤을 잡아 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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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가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는가!

사마충은 다시 황제의 자리에 복귀하고 제왕 사마경이 천자를 보좌하게 되

었습니다. 그러나 사마경이 정치를 맘대로 하자 사마영, 사마옹, 사마애가

다시 연합하여 사마경을 죽입니다.

그리고 사마영, 사마옹, 사마애간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 사마영과

사마옹은 연합하여 사마애를 불에 태워 죽입니다. 성도왕 사마영은 사마염

의 아들로서 황태제와 승상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곧 전횡을 일

삼으니 동해왕 사마월(사마의의 동생 사마권의 아들)과 예장왕 사마치(사

마염의 아들)가 사마영토벌에 앞장 섭니다. 그 사이 혜제 사마충은 식중독

으로 죽습니다.(독살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장왕 사마치가 황제

가 되니 회제(帝)라고 부릅니다. 사마옹은 그의 동생 남양왕 사마모에게


죽음을 당합니다. 사마모는 형인 사마옹을 역적이라 생각하여 사마옹뿐 아

니라 형의 세 아들(조카)까지도 죽여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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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8 왕의 난 정리

앞서 가남풍에게 죽은 사마위를 포함하여 사마윤, 사마경, 사마영, 사마옹

, 사마애, 사마월, 사마치가 8 왕으로 봅니다.

왕들의 싸움에 여러 이민족이 용병으로 참가하게 됩니다. 이는 로마말기와

비슷한데요,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쓰게 되면서 그 결과는 (서)로마의 멸망

으로 이어집니다. 진나라는 어떨까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1. 용어에 대한 야매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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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용어부터 대강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영가’라는 말은 연호입니다. 연

호라는 것은 황제의 치세년도를 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광개토대왕의

연호는 영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광개토대왕 15 년을 영락 15 년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광개토대왕을 영락대왕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영가라는 말

은 진의 회제가 쓰는 연호입니다. 그러니 영가는 진 회제라고 보시면 됩니

다. 그리고 상란에서 상(喪)은 장례를 뜻하며 란(亂)은 반란, 난리, 전쟁이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진 회제 때의 장례도중의 난리, 전쟁이

라고 납득하시면 될 듯 해요.

이 이야기를 읽으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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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해왕 사마월과 황제 회제
동해왕 사마월이 황제 회제의 후견인역을 맡았지만 실상 정권은 사마월의

것이었습니다. 이에 자립을 원하는 회제는 사마월을 죽이려 합니다. 이때

발흥하는 흉노족을 막으려한 사마월은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황제의 소식

을 듣고 분해서 피를 토하며 죽습니다.(311 년) 사마월의 영구는 사마월의

본거지인 동해로 모시기로 하는데 이 장례인파가 무려 10 만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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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흉노족 독립하다.

흉노족 유연은 330 년 진나라로부터 독립하기로 합니다. 국호는 한(漢). 이

는 옛적 한(漢)나라와의 황제와 흉노의 선우(추장)과의 인연으로 한이란

국호를 선택합니다.-유연의 유(劉)씨는 한(漢)나라 황실의 성씨이며 옛적

한(漢)나라 황제에게 받은 것입니다.

311 년 유연의 아들인 유총이 즉위를 합니다. 이 때 동해왕 사마월이 죽은

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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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가의 상란

유총은 10 만의 장례행렬을 분쇄시킵니다. 그 결과 10 만명은 모두 죽었다

고 합니다. 그리고 진나라의 수도 낙양을 공격하기 위해 2 만 7 천명의 병사

를 보냅니다. 진나라의 군대는 흉노족의 군대롤 못막고 방어하지 못하니

회제는 배를 타고 도망가려 합니다. 그러나 흉노족이 이미 배를 불태워버

렸기 때문에 탈출하지 못하고 붙잡혀 압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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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회제와 유총

회제는 한의 수도로 끌려갑니다. 그곳에서 회제는 유총의 연회에 초대를

받습니다.

유총 : "공이 예장왕이던 때에, 왕제(사람이름)와 함께 당신을 뵌 적이 있

습니다. 왕제는 나를 칭찬했고, 공은 "당신의 명성을 들어서 알고 있소."라

고 했지요. 그리곤 공은 손수 작곡한 음악을 보여주었고, 왕제와 내게 작

사를 부탁하였습니다. 우리는 공을 찬양하는 가사를 썼고, 당신은 정말 좋

아했지요. 그리고 화살을 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난 열두 번 명중시켰

고, 왕제와 당신은 아홉 번씩 명중시켰죠. 그리고 뽕나무 활과 은 벼루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기억하시나요?"

회제 : "어떻게 그것을 잊겠습니까? 후회스러운 것은 용을 미처 몰라뵈었

다는 것입니다."

유총 : "일족끼리 살육을 벌인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회제 : "그건 사람의 의지가 아니고 하늘의 뜻이었습니다. 한나라는 신의

가호를 받으려는 참이었고, 우리 일족은 그래서 한나라를 위해 제거되었습

니다. 우리가 무제의 뜻을 받들어 단합된 상태로 있었다면, 어떻게 주군께

서 황제가 되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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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좋아진 유총은 자신의 첩을 회제에게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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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회제 죽다.

313 년 회제는 연회에 초대를 받습니다. 이때 유총은 회제에게 자신들의 관

리에게 술을 접대하라고 합니다. 회제는 순순히 술을 접대 하니 이를 본

진나라의 신하들은 통곡을 합니다. 이에 유총은 화가 나서 진나라의 신하

들과 회제를 죽여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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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제(28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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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진나라 멸망의 기로에서

회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마염의 손자인 사마업이 장안에서 즉위합

니다. 그는 민제(帝)라고 부릅니다. 그의 나이 14 세. 그러나 유총의 친척인

유요가 공격을 하니(316 년) 민제는 항복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총은 연

회때 민제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술잔을 씻게 합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민제는 살해당합니다.(317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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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제(3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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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진과 동진 그리고 5 호 16 국 시대

이렇게 멸망할 듯 보이던 진나라는 살아남은 황족이 있으니 그는 낭야왕

사마예(사마의의 증손)입니다. 그에게는 왕도라는 뛰어난 인물이 곁에 있

는데 민제의 사망소식을 듣고 왕도의 조언에 따라 남쪽지방인 건강에서 진

나라의 재건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이전 수도가 낙양, 장안이었던 진나라


는 서(西)진이라 부르고 남쪽지방에서 발족한 진나라는 동(東)진이라 부르

게 되니 낭야왕 사마예는 동진의 원제(元帝)가 되겠습니다.

북쪽지방은 흉노족을 비롯하여 8 왕의 난때 용병으로 활약했던 저족, 갈족,

강족, 선비족등 다양한 이민족이 창궐하게 됩니다. 이를 5 호 16 국시대

라 부릅니다. 지도의 형태가 이해가 안 되신다면 둥근 원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그것을 반으로 나눕니다. 북쪽에는 16 국가(사실 그보다 많습니다.)

로 쪼개져 있고 남쪽에는 동진정권이 있는 형국입니다.

다음에는 5 호 16 국시대의 간략한 설명과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

니다. <서진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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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서진의 계보 서진(265~317)
1 대 - 무제 사마염
2 대 - 혜제 사마충
3 대 - 회제 사마치
4 대 - 민제 사마업

1. 앞서의 이야기 요약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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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의 첫째 황제인 사마염의 사치, 그리고 둘째 황제인 사마충의 무능과

그의 황후 가남풍의 전횡으로 인하여 결국 8 왕의 난이 발생하게 됩니다. 8

왕의 난이 종결되면서 그 중의 두 왕(예장왕과 동해왕)중에서 예장왕이

황제가 되니 그가 서진의 세 번째 황제인 회제가 됩니다. 그리고 동해왕

사마월은 그를 보좌하기로 합니다. 그 즈음 흉노족은 진나라로부터 독립을


하여 국호를 ‘한’이라 하며 진나라를 넘보게 됩니다. 이에 동해왕 사마월은

흉노족을 막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회제, 동해왕 사마월간 사이가

벌어져 회제가 사마월을 죽이려하니 그 소식을 들은 사마월은 피를 토하며

죽습니다. 이에 사마월을 따르는 무리들은 사마월의 본거지인 동해로 가서

장례를 치르려고 하니 그 인파가 10 만이었습니다. 흉노족 유총은 그 기회

를 놓치지 않고 사마월의 장례행렬을 공격하니 영가의 상란이 시작

됩니다. 그리고 수도 낙양을 공격해서 황제인 회제를 압송하고 결국

회제를 죽입니다. 황제가 죽자 사마염의 손자였던 사마업이 장안에서 황제

가 되니 민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또한 흉노족 유요가 사로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제를 죽이니 진나라는 멸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살

아남은 황족인 낭야왕 사마예가 강남지방에서 진나라의 재건을 선포하니

앞서의 낙양, 장안이 수도였던 진나라를 서진으로 하고 강남지방에서 일어

난 진나라를 동진으로 합니다. 이에 북쪽지방에는 다섯 이민족이 창궐하여

수많은 정권을 세우는 5 호 16 국시대가 개막을 하며, 남쪽에는 동진정권이

수립하는 그야말로 난세의 또 다른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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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 호(胡)에 대한 간략한 설명(?)

저 역시 북방 이민족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말씀드리겠습

니다.

5 호는 흉노족, 선비족, 갈족, 저족, 강족을 칭합니다.


흉노족은 인종면에서 투르크(터키)계로 보고있습니다. 물론 여러설이 있기

는 합니다. 흉노족의 세력은 강대한 것이어서 옛적 한나라 때에는 공주를

흉노족 선우(추장)과 맺어주기도 합니다. 유명한 일화가 중국 4 대미녀중 왕

소군에 관한 것일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중

에 흉노족이 북흉노, 남흉노로 갈라져서 북흉노가 서쪽으로 이동하니 이것

이 유럽에서 훈족이라고 부르게 됩니다.(이 역시 여러가지 설이 존재합니

다)

이에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세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훈

족의 왕인 아틸라는 유럽인에게 신의 채찍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었습

니다. 그리고 중세 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노래에서도 등장하기도 하죠.(남

편인 지크프리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부인인 크림힐트가 아

틸라에게 시집을 간다고 기억합니다)

선비족은 5 호 16 국 이후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인 것도 그렇

지만 제 자신의 지식이 부족한 탓으로 소략하게 적겠습니다. 이 민족역시

계열은 투르크(터키)계로 보고 있습니다. 동진의 첫째 황제인 동진 원제

사마예의 아들인 사마소의 수염은 붉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그의 어머

니인 순(旬)씨가 선비족의 여성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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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족은 흉노족의 일파로서 백인종이라고 합니다. 후에 갈족이 세운 후조(

後趙)라는 나라를 멸하는 염민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외칩니다. “눈이 푹들


어가고 코가 높은자들은 모조리 다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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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족과 강족은 티벳계통입니다. 저족에 대해서 나중에 약간 다루도록 할것

이고 강족의 후예가 뒷날 토번과 탕구트(서하제국)가 된다고 합니다. 토번

은 중국 당나라와 맞설 정도로 강한 국가였으며 당나라의 공주가 토번제국

에 시집을 가기도 합니다. 서하역시 중국 송나라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국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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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지식이 많이 일천하여 이 정도까지 밖에 못쓰겠습니다.

제 계획은 이렇습니다. 5 호 16 국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살펴본다는 것은

제 능력자체도 안될뿐더러 엽호판에 부합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나게 비약적으로 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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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용

5 호 16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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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족이 건국한 나라

전조(304 ~ 329)
북량(397 ~ 439)
하(407 ~431)

선비족이 건국한 나라

전연(307 ~ 370)
후연(384 ~ 409)
서진(385 ~ 431)
남량(397 ~ 414)
남연(398 ~ 410)
한족이 건국한 나라

전량(301 ~ 376)
서량(400 ~ 421)
북연(409 ~ 436)

저족이 건국한 나라

성(304 ~ 347)
전진(351 ~ 394)
후량(386 ~ 403)

강족이 건국한 나라

후진(384 ~ 417)

갈족이 건국한 나라

후조(319 ~ 351)

앞서 영가의 상란을 일으킨 흉노족을 언급했기 때문에 흉노족에 대한 이야

기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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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조(前趙)와 후조(後趙)

유총이 죽고 황태자인 유찬이 즉위합니다. 이에 태사공(법무장관)인 근준

이 모반하여 황제 유찬을 죽이고 유총의 시체를 파내어 토막을 치고 종묘

를 불사릅니다. 승상인 유요와 대장군인 석륵은 근준을 잡아 죽였습니다.

318 년 유요(앞서 진나라 황제 민제를 사로잡은 인물)가 황제의 자리에 오

르게 됩니다.

‘한’이라는 국호를 썼던 흉노 제국은 유요의 시대 때 국호를 ‘조(趙)’로 바


이 글을 쓰고나서 곧 삭제되었는데 이틀후에서야 다시 올라왔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네요. 졸지에
조회수가 안습이 되버렸네요.ㅎ

1. 쌍각양(雙脚羊)

쌍둥이의 쌍(雙)과 각선미할 때의 각(脚), 그리고 sheep 인 양(羊)입니다.

다시 말해 다리가 2 개인 양을 말하는 것으로서 인간을 뜻합니다. 갈족은

한족 여자들을 약탈해서 군량으로 삼았는데 쌍각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

다. 이는 저녁에는 사병들의 간음의 대상으로 제공되었다가 낮에는 삶아

먹었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석호는 신하의 집을 방문하면 그 아내를 범하고 미녀는 그 머리를 잘라 접

시에 담아서 소나 양의 고기와 함께 삶아 먹었다고 합니다.

태자인 석수는 한 술 더 떠서 자기의 시녀를 만나기라도 하면 그녀의 머리

를 두 동강으로 내버리고, 거기에 쟁반을 놓고 그 안에 공예품을 만들어

부하들에게 구경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자의 살을 베어 소와 양고

기를 함께 끓여 부하들에게 재료가 무엇인지 맞추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

XX 는 후에 아버지인 석호에게 반기를 들다가 처형당하고 자신의 아들(석

호에게는 손자)과 아내(석호에게는 며느리)는 불에 타서 죽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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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성징발

석호는 노역자 40 만을 뽑아 궁궐을 지었으며, 그리고 백성 50 만은 갑옷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은 삼분지일이었으며 군

사를 징집하여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는데 세금을 내지 못한다면 죽인다고


하니 자식을 팔아서 세금을 충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마저도 못한 백

성들은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고 하나 세금징발은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녀를 뽑게 했는데 관리들은 황제인 석호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

해 유부녀 9 천인을 강탈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 합니다. 황자들과 고관들도 사사로이 강탈했기 때문에 그 또한 숫자가

1 만여명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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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찌하여 오로지 나쁜 아들만 낳아서 나이가 20 세만 넘으면 번번히 아

버지를 죽이고자 하는가!

석호는 둘째 아들인 석선을 태자로 세웁니다.(첫째는 반란으로 처형) 그런

데 석호는 태자보다 태자의 동생인 석도를 더아낍니다. 자신의 위치에 대

한 위기심을 느껴 동생 석도를 죽이고 아버지인 석호까지도 제거하려합니

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붙잡히게 됩니다. 평소 불교에 대한 신앙이

깊고 승려인 불도징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던 석호는 ‘석선 또한 폐하의 자

식입니다.’라는 불도징의 충고를 무시하고 쇠고리로 석선의 턱을 뚫고는

자물쇠를 채웠고, 촘촘하게 뾰족한 나무 구유를 만들어, 국과 밥을 부은

뒤, 돼지와 개처럼 먹게 했다고 합니다. 석도가 아끼던 환관 학아, 유령에

게 그의 머리카락을 뽑고, 그의 혀를 뽑으며, 노끈으로 그의 턱을 뚫었습

니다. 그리고 그의 수족을 자르고는, 눈을 찍고 배를 터트렸으며 사방에서

불을 지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았고, 석호는 수천 인을 따라, 중대


에 올라 이를 봤다고 합니다. 불이 꺼진 뒤, 재를 취해 나눈 뒤 여러 문의

길 가운데 뿌렸다고 합니다.. 평소에 석호가 귀여워하던 손자(태자의 아들

)가 있었는데 형집행자가 손자를 석호에게 떼어내려 합니다. 손자가 울면

서 할아버지의 옷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옷이 찢어질 정도 였다고 합니다

. 결국 그 손자 또한 죽게 됩니다. 그 손자를 비롯해서 처자식 29 인을 죽이

고, 그가 사방으로 거느리던 이하 3 백 인, 환관 5 십 인을 주살하니, 모두

거열형으로 몸이 흩어져, 이를 강에 버렸다고 합니다. 그의 동궁을 진흙탕

으로 만들고, 돼지와 소를 길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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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석호의 죽음과 후조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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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는 349 년에 죽고 그의 후손들은 서로 죽고 죽이다 하다가 351 년 염민

에게 멸망당합니다. 아버지가 석호의 양자였기 때문에 성을 석씨로 해서

석민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그러나 한족(漢族)이었던 석민은 후조의 황족

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원래 이름인 염민으로 이름을 바꾸고 갈족을

토벌합니다. “눈이 움푹패이고 코가 높은 자는 모조리 죽여라.”라는 구호

와 갈족을 죽인자는 포상하겠다는 그의 말에 사람들은 갈족들을 살육합니

다. 이에 죽은 갈족의 수는 20 만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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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후조의 멸망(350 년)과 염위(350 ~ 352)의 건국

염민은 위나라를 세우는데 구분하기 위해서 그의 성씨를 따 염위라고 합니


다. 그러나 염위는 선비족의 모용준에게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염민은 모

용준의 포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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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준 : “너는 갈족의 인간인데 어째서 함부로 황제라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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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민 : “너희들 오랑캐 금수와 같은 것들까지도 황제라고 칭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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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준은 크게 노해서 회초리로 염민을 3 백대를 때리고 곧 죽여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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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민(? ~ 352)

이번편은 고어틱한 내용이 많네요. 원래 호러틱한 문장은 빨간색으로 하려

고 했으나 워낙 많은지라 그냥 검은색으로 하였습니다.

다음편은 전진(前秦)이라는 국가를 보겠습니다. 이 나라는 고구려 소수림

왕과 관련이 있는데 전진의 순도라는 승려가 고구려에 불경을 전해줍니다

전진(前秦) - 351 ~ 394

1. 건국

티베트계 저족의 수장인 부홍은 후조의 석호 밑에 있엇으나 부홍의 아들인

부건은 후조의 멸망을 기회로 자립해서 국가를 세우니 이것이 전진입니다.

그리고 후에 부건의 아들인 부생이 즉위하게 됩니다.

2. 폭군 부생
부생은 애꾸눈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인 부홍이 그런 부생(부홍에게는 손자)

을 놀립니다.

부홍 : “애꾸눈인 사람은 한 쪽 눈으로만 눈물을 흘린다던데 정말로 그러

하냐?”

부생 : “(칼을 빼들어 애꾸눈인 눈을 찌르며)이 눈에서 흐르는 피 또한 눈

물입니다.”

천성적으로 잔인한 성품과 행동으로 뜨악한 부홍은 아들인 부건에게 부생

을 죽이라고 이릅니다. 부건 또한 부생을 죽이려 하나 주위사람이 ‘부생이

자라게 되면 저절로 행동을 고치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니 죽이려는

것을 그만둡니다.

부생은 장성하면서 천균을 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1 균은 30 근이며 환산

하면 30000 근, 이는 무려 18 톤이라고 합니다. 그냥 힘이 장사였다고 보시

는 편이 좋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달리기도 말과 겨룰 수 있었고 맹수와

격투하는 등 피지컬면에서도 최강이었고 무술과 전쟁에 있어서도 엄청난

재능을 보인 인물이었습니다. 죽이기에는 아까운 재능이었습니다.

그런 부생이 즉위를 합니다.

그는 사람 죽이기를 좋아해서 즉위 하고나서 곧 위아래 가리지 않고 500

여명을 죽입니다. 이에 외삼촌 강평이 부생에게 직언을 하니 부생은 외삼


촌의 머리를 쳐서 죽여버립니다.

어느 날, 부생은 여동생이 어떤 사람과 함께 길을 걷고 있는 것을 보았습

니다. 부생은 그 사람에게 명하여 여동생을 강간하라고 명하니 따르지 않

자 죽여버립니다. 사람죽이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술도 좋아하는 그는 병

이 듭니다. 그는 취해서 신하에게 묻습니다.

부생 : “내가 통치한 후에 사람들은 나에게 무어라고 말하는지 들었는가?”

신하 1 : “폐하의 정치는 공명정대하고 태평성대입니다. 칭송만 있을 뿐 원

망하는 말은 없사옵니다.”

부생 : “아첨하는 놈은 죽어야 한다.” (신하 1 을 죽여버립니다.)

신하 2 : “폐하의 정치는 잔혹하옵니다.”

부생 : “나를 헐뜯는 놈도 죽어야 한다.” (신하 2 도 죽여버립니다.)

부생은 궁궐에서 일하는 남녀를 모아 벌거벗기고 성교를 하게해 이를 구경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얼굴가죽을 벗기고 노래와 춤을 추게 하고 신하들

에게 구경하게 합니다.(얼굴가죽 벗기고도 살 수 있나요?)

친척과 공신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니 그들에게는 하루가 마치 1 년과

같습니다. 또한 부생은 사람의 목을 자를 때 톱을 사용하는 것에 있어서

는 수천명을 헤아리게 됩니다.


부생은 또한 남아있는 친척들을 없애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부법과

부견(부생의 아버지인 부건의 동생인 부웅의 아들들)은 군대를 일으켜 궁

궐에 침입하니 궁궐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고 합

니다. 결국 부생을 폐하고 곧 죽여버립니다.(357)

부생(335 ~ 357) - 생각보다 엄청 젊네요. 재위 2 년입니다.

3. 전진, 북중국의 패자(覇者)가 되다.

부생을 죽인다음 형인 부법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형인

부법은 한사코 제위를 사양하니 ‘아름다운 형제의 우애를 볼 수 있겠습니

다’는 개뿔, 부견은 형을 의심해서 부법을 죽여버립니다.

부견의 통치기는 당시 참혹했던 5 호 16 국의 정치에 있어서는 이레적일 정

도로 평온했으며 가장 안정된 시기였습니다. 그 이유는 부견자신에게서도

찾을 수 있으나 부견의 제갈공명이라고 일컬어지는(부견이 실제로 왕맹을

자신의 제갈공명이라고 말합니다.) 왕맹이라는 인물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왕맹은 한족(漢族)입니다. 5 호 16 국의 이민족이 세운 국가들은

이민족인 한족과 다른 이민족을 차별합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 있겠지

만 국가의 통치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저족인 부견은

이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한족인 왕맹을 등용합니다. 왕맹은 엄격한 법집행

을 통해서 백성들과 관리들의 멘탈을 바로 잡기 시작합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드러내놓고 왕맹을 욕하자 왕맹은 그 사람에게

채찍질을 가해서 죽여버립니다.

부견 : “그대의 법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오?”

왕맹 : “나라의 편안함은 예로 다스리고, 나라의 혼란은 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흉악하고 잔악한 자들을 제거하는 데 처음 간신 한명만 죽이면 일

은 저절로 풀리게 됩니다. 신이 포악하고 흉악한 자들을 제거하지 못한다

면 어떻게 국가를 통치 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법이 잔혹하다고 말씀하신

주군의 말씀은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왕맹의 말이 맘에든 부견은 왕맹을 칭찬하면서 1 년에 무려 5 번 승진을 시

킵니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여섯 살이라고 합니다. 왕맹은 이번에는 토착

세력인 저족의 권한을 약화시키려고 합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개국공신중

번세가 부견이 보는 앞에서 왕맹과 말다툼을 합니다. 왕맹이 얄밉게 말을

잘했는지는 몰라도 번세가 칼을 빼들어 왕맹을 죽이려고 하나 궁중에서 칼

을 빼든 것은 역모에 해당하므로 번세는 처형당합니다. 또한 승상을 비롯

하여 관리들이 왕맹을 비방하자 부견은 관리들을 파면시킵니다. 그리고 왕

맹은 부견의 친척이 전횡을 일삼자 그를 목 베어 죽이고 효수(머리를 내다

걸어 전시)하니 저족과 이민조간의 차별은 물론 국가의 기강이 잡히게 됩

니다.
내치를 닦고 이제는 밖으로 영토를 도모할 때가 왔습니다. 미리 양해의 말

씀을 드립니다. 전진의 영토확장을 엄청나게 대강 쓰겠습니다. 제 능력 밖

이기도 하고 글이 길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견은 망명하는 자와 투항하는 자, 적이라해도 용서해서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관대함을 보여줍니다. 이런 관대함을 통해서 그는 영토를 확대

해 갈 수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왕맹의 능력은 내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병법가로서 북중국을 통일해 나갑니다. 그즈음 북방에서 가장 강력

한 국가는 전진과 모용씨의 연나라입니다. 마침 연나라는 쇠약해져 있는

상태로 모용씨의 일족중 모용수가 전진에 귀부합니다. 왕맹은 그런 연나라

를 땅굴과 화공 등으로 각개격파를 하여 연나라를 멸망시키게 되니 북중국

의 패자는 전진으로 남쪽의 동진(東晉)정권과 함께 남북의 형세를 이룹니

다.

4. 왕맹

승진을 거듭하여 그는 마침내 승상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연을 멸망시

킨 뒤 내치에 힘을 쏟습니다. 관료들에 있어서는 엄격한 법집행으로 부정

과 비리를 저지를 수 없었고 일정한 기준에 합격하지 못하면 파면이나 좌

천시키는 등 능력 있는 관료를 등용하고자 하였습니다. 경제에 있어서는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하였고 상공업을 장려하여 경제발전을 이룩하였습

니다. 그리고 빈민구제에 힘써 세금과 부역을 줄였습니다. 교육부문에서도


유학을 장려하여 학교를 지었는데 성적이 좋으면 관리에 임용되었지만 그

렇지 못한 자는 퇴학시켰다고 합니다. 민족 간의 화합을 꾀해 민족갈등을

완화시킵니다. 이에 다른 민족이나 국가가 전진에 귀부하는 일이 발생합니

다. 이렇게 왕맹은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 전진을 부강하게 만들지만 오히

려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아 날로 쇠약해져만 갑니다.

5. 하늘이 나에게 천하를 통일하라고 하면서 어찌 왕맹을 이렇게 빨리 빼

앗아 가는가!

왕맹의 병이 위중해지자 부견은 직접 종묘사직에 제사를 지내며 신하들에

게는 각지의 산천에 기도를 하게 합니다. 그러나 왕맹의 병에는 차도가 없

어 부견은 마지막으로 왕맹의 조언을 듣고자 합니다.

왕맹 : “신이 죽으면 동진(東晉)을 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동진은 손을 잡

아야 할 대상이지 도모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왕맹은 이 말 뒤에 곧 죽었고 부견은 “하늘이 나에게 천하를 통일하라고

하면서 어찌 왕맹을 이렇게 빨리 빼앗아 가는가!”라고 말하며 울부짖었다

고 합니다.

왕맹(325 ~ 375)

6. 왕맹에 대한 평가
어느 역사학자는 19 세기까지의 중국의 위대한 정치가를 관중(관포지교의

주인공), 공손앙(상앙이란 이름으로 유명합니다.), 제갈량, 왕안석(송나라)

, 장거정(명나라)와 함께 왕맹을 들고 있습니다. 민족 간의 화합을 도모하

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발전을 이룩한 그는 오늘날 위정자

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집니다.

7. 맺음말

어쩌다보니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왕맹이 되버린듯한 느낌입니다. 언제

나 글을 쓸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제 자신의 글솜씨가 부족한 것을 느낍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편은 중국을 뒤흔들었던 비수대전(중국의 3 대 대전 - 관도대전, 적벽대전,

비수대전)을 쓰겠으나 아마 비수대전을 길게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역시

제 자신의 능력부족인 이유입니다. 비수대전의 내용이 짧다고여겨지면 비

수대전에 이어서 다시 눈을 남쪽으로 돌려 동진(東晉)정권에 대해 대략 쓰

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추가)

혹시 잔인한 내용이 있어서 달갑지 않으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역사에는 좋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순신장군의 찬란한


승전보가 있다면 그 반면에는 왜군들이 전리품으로 조선인의 코를 자르기

도하였습니다. '코무덤' 이라고 지금도 남아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역시 중국의 역사에도 특히 5 호 16 국시대를 비롯한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참혹한 시기이기도 하였지만 도연명, 왕희지, 고개지를 비롯한 문화면에서

찬란한 시기였습니다. 특히 남조의 양(梁)나라의 문화는 중국의 문화사에

도 손꼽을만한 것이어서 이는 우리나라, 특히 백제에 영향을 끼치니 우리

나라 무덤양식에서는 볼 수 없는 벽돌양식의 무덤이 만들어집니다. 이것

이 백제 무령왕릉입니다. 또한 양나라의 소명태자가 지은 <문선文選>이

라는 책은 소명태자가 훌륭한 시문들을 엮어 만든 것인데 이에 영향을 받

아 조선의 서거정이 중심이되어 해동의 문선이라고 해서 <동문선東文選>

을 편찬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사성어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배경이 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북조의 북위(北魏)역시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돈황석

굴, 운강석굴이만들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잔인한 내용역시 담고

자 하는 것이며 이 판의 이름이 엽기호러판이기 때문에 그에 부합될 수 있

는 내용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사를 기대하고 오신 분께 죄송합니다. 비수대전을 어떻게 써야할지 감

이 안잡혀서 다른 이야기를 써볼까 합니다. 저 역시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해해주세요.

<마하바라타>에 대해 약간의 소개를 할 것이니 본론만 보실 분들은 빨간


색으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라는 글부터 보시길 바랍니다.

<마하바라타>는 위대한(마하)바라타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인도의

대서사시입니다. 특히 같은 일족을 죽여야 한다는 것에 회의를 느낀 아르

쥬나(주연급인물)에게 크리슈나(비슈누신의 아바타)가 노래를 불러줍니다

. 이 노래가 시의 형태로 마하바라타에 담겨있는데 이것을 바가바드기타라

고 불리며 힌두교의 3 대 경전입니다. 마하바라타는 전쟁이야기이지만 결

국은 반전(反戰)을 지향하고 있으며 노름을 하면 패가망신한다는 훌륭한

교훈을 담고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제 생각에 메이플 story 라는 게임에 간디바보우라는 것이 나오

는데 아마 마하바라타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르쥬나는 무술의

달인이지만 특히 간디바라는 활을 휴대하고 싸웠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책

이 아니니 한번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소설 <퇴마록>에

마하바라타에 대한 내용이 있어 흥미를 가진 끝에 보게 되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성자(聖者)인 비야사가 유디슈티라(주연급인물)에게 이야기를 해줍니다.

브리하스파티는 신들의 스승이며 모든 지식에 통달해 있는 성자중의 성자

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동생인 삼바르타 역시 학문에 통달해 있으며 선량

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브리하스파티는 동생을 질투하여 박해


를 합니다. 삼바르타는 형의 박해를 피해 유랑걸식을 합니다.

어느날 어떤 왕이 신으로부터 은혜를 입게 되자 크게 희생제를 올리기로

합니다. 왕은 브리하스파티에게 희생제를 맡도록 간청을 하지만 브리하스

파티는 희생제를 통해 왕의 공덕이 높아지는 것을 우려해 거절을 합니다.

결국 왕은 삼바르타에게 희생제를 맡을 것을 간청을 합니다. 삼바르타역시

거절을 하지만 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승낙을 합니다. 이렇게 되니 배알이

꼬인 것은 브리하스파티입니다. 삼바르타가 희생제를 맡아 성대하게 마친

다면 삼바르타의 명성이 드높아 질 것을 우려합니다.

브리하스파티는 동생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로 밥도 안 먹고 잠도 들지 않

아 병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니 신들의 왕인 인드라가 걱정을 합니

다.

인드라 : “스승님, 무엇 때문에 편찮아 하십니까? 혹시 신들이 스승님의

노여움을 산 것이 아닙니까?

브리하스파티 : (동생인 삼바르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인드라 : (웃으며) “스승님의 명성은 높고 높아 신들의 스승이 되기에 이르

렀습니다. 삼바르타가 아무리 희생제를 잘 치른다고 해도 그 명성이 스승

님보다 높아지겠습니까? 그리고 높아진다고해서 스승님께 무슨 영향을 끼

치겠습니까? 말도 않되는 시기심으로 몸을 해치시다니 우스운 일입니다.‘


인드라에게는 우스운일 이었지만 브리하스파티에게는 정말로 심각한 일이

었습니다. 브리하스파티는 인드라에게 삼바르타의 희생제를 중지시킬 것

을 간청합니다. 인드라는 불의 신인 아그니를 불러 말합니다.

“가서 삼바르타의 희생제를 중지시키세요.”

아그니는 길을 나섭니다. 그가 가는 길마다 불이 붙었고 지진이 일어납니

다. 아그니의 현신에 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경의를 표합니다.

아그니 : “이번 희생제는 삼바르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기십시오. 대

신 할 사람이 없다면 브리하스파티에게 맡기도록하겠습니다.”

삼바르타 : (분노하며)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의 분노가 당신을 태워

버리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삼바르타의 분노에 아그니는 벌벌 떨면서 급히 물러납니다. 아그니는 인드

라에게로 돌아가 보고합니다.

인드라 : “그대는 만물을 태워버릴 수 있으면서 어떻게 당신을 태워버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삼바르타의 분노가 그대를 태워버릴 수 있다는 것이

정말입니까?

아그니 : “그렇습니다. 순결한 성직자에게서 오는 권능은 대단한 것

입니다.”
인드라는 간다르바(건달바)를 부르며 말합니다.

“ 그대가 가서 삼바르타의 희생제를 포기시키라는 나의 뜻을 전하시오. 만

일 나의 뜻을 거역한다면 파멸만이 있을 뿐이라고 분명히 전하시오.”

간다르바는 왕에게 가서 전합니다. 그러나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죽었으면 죽었지 제가 신뢰하는 삼바르타를 버릴 수 없습니다. 저는 삼바

르타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다급해진 간다르바는 왕에게 말합니다.

“왕이시여, 인드라의 번개를 당신이 맞게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습

니까?”

이때 하늘의 구름이 갈라지면서 천둥과 번개가 치니 모든 이들은 인드라가

오는 것을 직감하고 벌벌떱니다. 왕도 예외는 아니어서 삼바르타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합니다. 삼바르타는 자신만만하게 말합니다.

“왕이시여, 두려워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삼바르타는 그간 그의 고행으로 얻은 힘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삼바르타

의 힘에 인드라는 질려버립니다. 결국 인드라는 삼바르타가 올리는 희생제

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1. 승상 왕맹의 유언을 잊어버리고


왕맹은 동진을 도모하지 말 것과 부견에게 항복한 모용수(선비족), 요장(

티베트계)를 조심하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나 부견은 남쪽의 동진을 멸함

으로써 천하를 편안하게 한다는 자신만의 이상을 가지고 있어서 동진과 전

쟁을 하려고 합니다.

2. 부견의 믿음

동진과 싸우기 위해 저족(부견과 같은 민족)의 군사를 이주시킵니다. 그

결과 수도인 장안에는 저족의 군대가 이민족인 선비족의 군대보다 적게 됩

니다. 신하가 그 이상함을 간하자 부견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모두를 같은 마음으로 똑같이 사랑하는데

누가 나를 배반하겠는가?”

3.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

왕맹의 유언을 들어 반대하는 신하들은 많았습니다. 그런 신하들에 기분

나빠하던 부견을 편들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모용수와 요장입니

다.

모용수 : “천하를 통일하게 되면 천왕(부견은 황제의 칭호대신 천왕이란

칭호를 씁니다.)의 업적은 영원히 빛날 것이옵니다.”


요장 : “천왕께서 결정하신 일이 반드시 옳은 길이라고 믿을 뿐이옵니다.”

모용수와 요장은 진심으로 항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일족의

자립을 위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강력한 전진의 국력에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차에 부견이 동진과 싸운다고 합니다. 이는 전진이 이기든 지든 간에

전진의 국력 약화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기회를 통해서 모용수와

요장은 일족의 자립을 꾀합니다.

4. 전쟁 시작

383 년 부견은 동생인 부융에게 모용수 등 27 만의 군사를 주어 먼저 떠나게

하고 요장에게 4 천의 군사를 주어 장강(양쯔강)을 따라 내려가게 합니다.

그리고 부견 자신은 보병 60 만, 기병 27 만을 데리고 출발합니다. 백만이

넘는 엄청난 대군입니다. (군사 수에 대해서 이견이 많습니다. 그냥 엄청

난 군대였다고 생각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5. 동진의 대응

전진의 전쟁소식에 동진정권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런 와중에도 동진의 승상인 사안은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총 8 만의 군대를

모집하고 동생인 사석, 조카인 사현, 아들인 사담을 전쟁에 투입시킵니다.


6. 우리 중에 스파이가 있어

양쪽 군대가 비수(지금의 회수의 한 지류라고 합니다.)를 사이에 두고 대

치를 하자 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부견은 주서라는 인물을 동진군의

진지에 보내 항복을 종용하게 합니다.

주서 : “선봉을 깨뜨리면 이길 수 있습니다. 염려 마시고 강을 건너서 공격

을 하십시오. 저는 반격 명령을 깨뜨리겠습니다. 전진군은 도망칠 뿐이니

마음껏 공격하십시오.

7. 전쟁의 시작과 그 허무한 결말

부견은 동진군을 끌어들이게 하기 위해서 후퇴하는 척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동진의 군대에게 진짜로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전진의

아군까지도 속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서의 의견에 부견은 동의합니다.

마침내 전진의 군대가 철수를 하려고 하자 동진의 군대가 강은 건너 공격

을 하려고 합니다. 이때 부견은 명령을 내립니다.

부견 : “반격하라! 적의 군대가 강 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전진의 군대는 정말로 후퇴만 합니다. 그 이유는 주서가 말을 타고

달리면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주서 : “후퇴하라! 우리 군대가 패했다! 도망치는 것이 살길이다!”


전술에 대해서 어떠한 설명을 듣지 못한 전진의 군사들은 전술적 후퇴인지

정말로 전쟁에 져서 후퇴한 것인지 알지 못해 계속 도망치기에 바쁩니다.

마침내 강을 건넌 동진군이 공격을 하자 전진군은 전쟁에서

크게 패합니다.

이것이 비수대전이며 중국의 3 대 대전(관도대전, 적벽대전)중의 하나입니

다. 이 싸움으로 부견의 동생인 부융이 죽고 부견은 383 년 12 월에 장안으

로 돌아옵니다.

8. 동진의 승상 사안

동생, 조카, 아들을 한꺼번에 전쟁에 투입시키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

현한 동진의 승상 사안은 전쟁 와중에 손님과 바둑을 둡니다. 그런데 바둑

중에 첩보가 옵니다. 첩보를 읽고 사안은 다시 바둑을 둡니다. 손님이 궁

금해서 묻습니다. 그러자 사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전쟁에서 이겼답니다.”

9. 부견의 몰락과 다시 5 호 16 국의 형세로

전쟁의 패배로 전진의 국력은 쇠퇴해지고 모용수와 요장이 독립을 합니다.

모용수는 부견의 은혜를 생각해서 부견을 죽이자는 아들인 모용보의 의견

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장은 부견을 죽입니다.(385 년) 그리고 다시


북중국은 5 호 16 국의 형세가 되니 천하통일은 아직도 요원해 보입니다.

부견(338 ~ 385, 재위 357 ~ 385)

예상보다 비수대전의 내용이 별거 아님에도 불구하고 긴 글이라서 한 편만

쓸까 했지만 비수대전을 쓴 다음에 바로 동진에 대해서 읽으시는 것이 이

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2 편 연속으로 쓰겠습니다.

동진

1. 건국(317 ~ 420)

낭야왕 사마예는 진나라의 재건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니 동진의

원제(元帝)가 됩니다. 원제를 도운 왕돈(왕도의 친척형)과 왕도가 실세가

되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씨와 마씨(사마씨)가 천하를 나눠 가진다네.”

그러나 왕돈이 반역을 일으키자 반란을 미처 평정하지 못하고 원제가 죽습

니다.(322 년)

2. 노란 수염의 똑똑한 황제

원제가 죽고 그의 아들인 사마소가 황제가 되니 명제(明帝)라고 합니다. 2

4 살에 황제가 된 명제는 어렸을 적부터 똑똑해서 모든 사람들의 기대가 높

았던 황제입니다. 어째서 노란 수염인지는 이미 밝혔으니 따로 적지 않겠


습니다. 그가 황제가 되자 척결해야 할 것은 왕돈의 반역입니다. 명제는

왕도에게 왕돈토벌의 책임을 맡깁니다. 그러나 왕돈은 병들어 죽어 자연히

반란은 종결됩니다. 신하들은 왕돈에 대한 반역죄에 대한 연좌제를 왕도에

게 씌워 왕도를 처벌할 것을 명제에게 종용하지만 명제는 이를 듣지 않고

왕도를 중용합니다. 왕도는 승상까지 지내게 되며 한석봉의 워너비였던 왕

희지는 왕도의 조카가 됩니다.

그러나 이 온화하고 똑똑한 황제는 병 때문에 재위 3 년만에 27 살의 나이

로 죽으니 동진으로서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겠습니다.

3. 시간이 흐르고 흘러~

비수대전을 막아낸 동진, 그 당시의 황제는 효무제 사마요입니다. 24 년을

재위했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고 결국 취중농담이 원인이 되어 후궁에게 살

해당합니다.(여자를 화나게 하면 안되요 라는 제 글이 있으니 참고해주셨

으면 합니다.) 그리고 장남인 사마덕종이 즉위하니 안제(安帝)라고 부릅니

다.

4. 안제(安帝)

그는 선천적으로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운 것도

추운 것도 몰랐으며 대소변도 가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혼자서 목숨을 연

명하지 못했던 안제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던 인물이 동생인 사마덕문입니


다. 그러나 환현의 난으로 안제는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

다.(403 년) 그러나 동진의 신성인 유유가 환현을 격파하여 다시 안제를 복

위시킵니다.(404 년) 그리고 418 년 유유는 사람을 시켜 안제를 목졸라 죽

입니다. 그의 나이 36 살, 재위 22 년이 되겠습니다.

5. 공제(恭帝)

유유는 성급히 황제가 되려 하지 않고 형인 안제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던

동생 사마덕문을 황제로 세우게 되니 공제(恭帝)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결

국 재위 2 년 만에 황제의 자리를 유유에게 물려줍니다. 그러나 유유는 공

제를 죽이려고 장위라는 사람을 시켜 독주를 먹여 자결하게 합니다. 하지

만 장위는 “이렇게 착한 황제를 죽이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라

고 말하며 자신이 대신 독주를 먹고 자살합니다. 그러자 유유는 병사들을

시켜 공제를 죽이려고 합니다. 병사들이 공제에게 자결을 강요하자 공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자살하면 인간으로 환생할 수 없으니 내가 죽기를 원한다면

나를 죽여주게.”

이에 병사들은 공제를 질식사시킵니다.

공제인 사마덕문은 성품이 선량해서 지적쟁애가 있던 형(안제)을 평생 돌

봐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좋지 않았으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의 마

음 또한 좋지 않습니다.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할 때 도척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쓰게 됩니다. 도

척이라는 인물은 춘추시대때의 도적으로 온갖 악행을 다하면서도 평온하

게 생을 마감한 인물입니다. 사마천은 도척이라는 인물평을 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하게 정의롭게 살면서도 화를 입은 인물은 수없이 많다. 반면 악행을

일삼으면서도 온갖 향락을 누리면서도 대대로 부귀영화를 이어가는 자들

도 많다. 나는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절망감이 든다. 도대체 천도(하늘의

길)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사마천의 말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 대한 슬픈 회의감을 느끼게 합니다.

공제(386 ~ 422)

6. 동진 멸망

공제에 감정이입하다 보니 동진의 멸망에 대해 쓰지 못했습니다. 공제가

유유에게 재위를 물려주고 유유가 황제에 즉위한 순간 동진은 멸망했습니

다. 그리고 유유는 나라이름을 송(宋)이라고 하나 우리가 잘 아는 고려와

무역을 했던 송나라가 더 유명한 관계로 유유가 세운 송나라를 유유의 성

을 따서 유송(劉宋)이라고도 부릅니다. 저는 이후 이야기를 쓸 때 유송이

라고 부르겠습니다. 유유는 공제를 죽이는데, 이전의 역사에서는 마지막

황제를 죽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이후의 역사에서는 유유를 본받아


마지막 황제는 죄다 죽이게 됩니다. 이는 유유의 자손들도 예외는 아닙니

다. 이로써 아직 다루지 못했지만 북쪽에는 386 년 선비족의 탁발씨가 5 호

16 국의 형세로 이루어져 있던 북중국을 통일해서 북위(北魏)를 건국하고

남쪽에는 동진이 멸망하고 420 년 유송이 건국하게 되니 이로써 남북조의

시작입니다.

7. 맺음말

한꺼번에 2 편을 쓰니 정말 힘드네요.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북쪽의 북위정권보다 남쪽의 유송정권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

니다.

안녕하세요. 유송정권에 앞서 남북조시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흔히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라고 알려있습니다. 위진남북조라는 용 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진남북조에서 '위'는 중국 삼국시대의 위나라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촉나라, 오나라도 있지만 위나라를
정통국가 로 취급한다는 뜻으로 '위'라는 단어를 쓴것이며 그 다음 '진'이라는 단어 는 서진과
동진정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북조는 북쪽의 이민족 이 세운 정권과 남쪽의 한족이 세운정권이
병립해있는 형국이기 때문에 남 북조라는 용어를 쓴것입니다. 다시 말해 삼국시대의 위나라와 서진과 동진
을 정통으로 하고(5 호 16 국시대의 이민족 국가는 변방국가라고 생각하셔 도 됩니다.) 남북으로 나눠진
정권을 통틀어서 위진남북조시대라고 말합 니다. 저는 위나라를 다루지 않았는데요, 이는 <삼국지연의>나
등등의 컨 텐츠를 통해서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 이유입니다.

뒤에 쓰게될 제 이야기의 스포일수도 있겠으나 어자피 지나간 과거의 역사 이니 미리 알아두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우선 남조정권부터 보겠습니다. 앞서 이야기를 보듯이 동진이 멸망하고 송 나라(유송)가 건국합니다.
그리고 송나라는 얼마 못가 멸망하고 제나라가 건국됩니다. 이 제나라는 춘추전국시대때의 오리지널
제나라가 유명하기 때문에 남제(南齊)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남제또한 멸망하고 양(梁)나라가 건국합니다.
양나라 또한 진(陳)나라에 멸망당하니 남조정권의 흥망의 순 서는 송-제-양-진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북조정권은 5 호 16 국시대를 통일한 선비족의 탁발씨(이름이 아닌 부족)가 북위라는 나라를 건국합니다.
북위는 남조의 국가와는 다르게 무려 100 년 이상 지속하는데요, 편하게 생각해서 북위의 황제들의 능력이
남조의 황제보다 뛰어났다고 생각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북위는 동서로 분열되니 동위, 서위로
불리게 됩니다. 허나 곧 동위, 서위 각각 황제보다 힘이 강한 신하가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니 동위는
북제로 서위는 북주로 국호가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북제는 북주에게 멸망됩니다. 그 결과 북주 와
진나라 두 남북정권이 양립하게 됩니다. 이 때 북주는 황제의 외할아버 지가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니 이
사람이 양견으로 수나라를 세우니 수 문 제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수문제는 남쪽의 진나라를 공격해서 멸망시키니 이로써 천하를 통 일하게 됩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서위 - 북주 - 수나라북조 : 북위 - 동위 - 북제(북주에 멸망) 남조 : 송 - 제 - 양 - 진(수나라에
멸망)

(추가) 남북조는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발해, 신라), 일본( 교토정권-북조, 요시노정권-


남조), 베트남(참파-남조, 레왕조-북조, 후에 레왕조는 남북분열) 같이 유교문화권의 대표적인 4 나라가
남북조를 경험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은 아직도 남북으로 정권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씁쓸하면서도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번편이 뒤에 전개될 이야기 이해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막장가도를 달린 왕조가 하나있다.

바로 송(宋)이란 나라다.

흔히 송(宋)나라라고 하면 서기 10C 경에 조광윤(趙匡胤)이 건국한 그 송나라를 떠올리지만, 여기서의


송나라는 흔히 위(魏)-진(晉) 남북조(南北朝) 시대라 불리우는 시대에 세워졌던 서기 5 세기 무렵의 송
(宋) 왕조를 말한다.

여기서 국호가 동일한 관계로 역사에서는 앞서 말한 조광윤의 송(宋)과 구별하고자 이때의 송(宋) 왕조는
건국자인 유유(劉裕)라는 사람의 성씨인 '유(劉)' 를 붙여서 '유송(劉宋)' 이라 부른다.

워낙 인지도가 떨어지는 나라이니만큼 대강이나마 유송(劉裕)에 대해 설명을 해보자면..

서기 440 년 무렵의 중국 판도.


남쪽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영역이 유송(劉裕)이다.

위의 파란색 영역은 북위(北魏)라는 나라.

삼국지연의로도 유명한 삼국시대를 통일한 나라는 진(晉). 그러나 진(晉)도 내란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뒤이어 갖은 이민족들이 침입해와 중국에 저마다의 나라를 세우는 이른바 5 호 16 국 시대가
도래한다. 한편 멸망한 진(晉)의 명맥을 잇고자 한족(漢族)들은 양자강 이남에서 다시 진(晉)을 건국하니
이가 곧 동진(東晉)이다.

중국의 화북(華北)지방에서는 이민족들에 의한 5 호 16 국 시대가, 화남(華南)에서는 한족(漢族)의 동진


(東晉)이 존속되던 중, 서기 420 년에 이르러 동진(東晉)은 당시 권신이었던, 바로 위에서도 말한 유유
(劉裕)에 의해 멸망당한다. 그리고 이 유유(劉裕)는 송(宋)을 건국하니, 화남(華南)에서는 남조(南朝)
시대가 시작된다. 그리고 화북에서도 서기 439 년에 북위(北魏)란 나라가 5 호 16 국 시대를 종결짓고
화북을 통일하니 이때부터를 북조(北朝)시대라 한다.

송(宋) 고조(高祖) 무제(武帝) 유유(劉裕).

나중에 자손들이 벌인 행각들을 보았더라면 초상화에서의 모습처럼 마냥 사람 좋은 미소만 짓고 있지는


않았겠지.

남조(南朝), 북조(北朝)란 말은 각각 남북에서의 여러 왕조들을 의미한다. 화남에서의 송(宋),


화북에서의 북위(北魏) 이후로도 해당왕조를 잇는 왕조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남북에서 여러 나라가
세워졌던 시기라 하여 이를 두고 남북조(南北朝) 시대라고 부른다.
이렇듯 남조(南朝)시대의 첫 왕조이기도 했던 유송(劉宋)은 한마디로 말해 막장왕조였다.

총 8 대 59 년만에 단명해버린 왕조인데, 황제들의 평균 재위기간을 계산해보면 각 황제들의 재위기간이


7~8 년 밖에 안된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이것도 그나마 성군(聖君)이라 칭송받던 제 3 대 황제, 태조
(太祖) 문제(文皇帝) 유의륭(劉義隆)과 4 대 황제 세조(世祖)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 : 유준은
성군이 아니다), 그나마 10 년 조금 넘게 재위에 있던 이 두명을 감안한다면 그 평균치는 더 낮아진다.

송(宋) 태조(太祖) 문제(文皇帝) 유의륭(劉義隆).

유송(劉宋)에서 뿐만 아니라 남조(南朝)시대에서 몇 안되는 태평성대를 이룩한 성군(聖君).

아버지 고조(高祖) 무제(武帝) 유유(劉裕)와 함께 유송(劉宋)에서 몇 안되는 정상적이었던 황제들 중


하나.

이 때의 치세만큼은 당시의 연호인 '원가(元嘉)' 를 따서 '원가지치(元嘉至治 : 원가 때의 정치라는


뜻)' 라 하여 별도로 치고 있다.

하지만 이 유의륭도 나중에는 아들에게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이 역시 황족간의
골육상쟁 때문.

대충 감이 온다 하겠는데, 사실 감을 따지고 할 것도 없이 역대 황제들 중 대다수가 싸이코 내지


변태들이었기에 죄다 제 명에 못죽고 폐살당하거나 제위에서 쫓겨났다.

이 여덟명의 황제들 중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강의 막장 황제는 바로 제 5 대 황제, 폐제(廢帝) 유자업


(劉子業)이라고하는 걸출한 인물로, 이 글에서 다루고자하는 주인공 되시겠다.
폐제(廢帝) 유자업(劉子業) 초상화.

유자업(劉子業)의 재위기간은 고작 1 년(서기 464 년~465 년). 당시 16~17 세의 나이였다.

정녕 저게 중 3~고 1 의 얼굴이란 말인가?

한자를 좀 아시는 분들이라면 유자업(劉子業)의 시호에서 이미 대충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다. 유자업의


시호는 폐제(廢帝). 사실 이건 시호도 아니라 그냥 임의로 붙인 것이다. 왜냐면 폐위(廢位)되었기 때문에.
폐위 했다하여 '폐(廢)' 자를 갖다 붙여 그냥 폐위된 황제란 뜻의 '폐제(廢帝)' 로 불리는 것이다.

대관절 뭐하다 폐위당했는지 이제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유자업(劉子業)은 4 대 황제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의 아들로, 서기 449 년에 태어났다.

그 무렵의 송(宋) 왕조는 고조(高祖) 무제(武帝) 유유(劉裕) 사후 이래로 2 대 황제인 소제((少帝)


유의부(劉義符) 치세부터 시작된 황족간의 권력싸움에 의한 골육상쟁으로 피바람이 한창 몰아치던 때로,
친형제는 물론이고 조카, 사촌에다가 심지어는 작은 할아버지까지 제거대상이 되는 패륜이 판치는
시기였다.

유자업(劉子業)의 선대인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의 대에도 친족숙청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고,


유자업도 불과 네 살때 그 권력다툼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을 뻔한 적까지 있었다 하니 어린애고 뭐고 가릴
것없이 칼부림을 하던 당시의 실태를 짐작할 만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자업(劉子業)은 태자(太子)가 된다. 하지만 어렸을 때 험한 일을 겪어 트라우마라도


생겼는지 유자업은 평소 실수를 자주 범하고 행동거지가 그리 올바르지는 못했다. (애시당초 싹수부터가
노랬다)

거기다 어릴 적부터 관심을 두는 쪽이라고는 삼국시대 위(魏)의 조조(曹操)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직책인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 : 황제나 왕의 무덤을 도굴하여 부장품을 챙겨 관리하는 벼슬)이나
모금교위(摸金校尉 : 역시 도굴전문 관리직)와 같은 괴상하고 비정상적인 분야였다. 그리고 이토록
관심을 두던 분야에서 빛을 발하는 때가 머지않아 오게되니 이는 밑에서 확인하기 바란다.

이 때문에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으로부터 자주 혼나고 꾸중들었는데, 이것에 대해 유자업은


앙심을 품었으니 훗날 유자업이 보여준 패륜행위들 중 하나를 장식하는 계기가 된다.

거기다 아버지를 꺼려한 이유는 또 있었다.

유자업에게는 유자난(사실 이 유자난도 유준이 사촌 여동생이랑 근친상간해서 낳은 애다. 이 쯤되면 유송


왕조가 얼마나 막장이었는가를 알 수있다. 유자업만 다루어 다른 황제들의 아름다운 패륜짓들을 보여주지
못하는게 안타까울 따름)이란 이복동생이 있었는데,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이 매상 이
유자난만을 총애했기에 유자난을 질투한 것은 물론이고,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아버지에게도 분노를
느낀다.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과 놀아나는 유씨(劉氏).

여기서 유씨(劉氏)는 위에서 말한 유자난의 친모로, 사촌오빠였던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과


근친상간을 벌여 이 유자난을 낳은 여인네다.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에게는 숙부가 되는 남군왕(南郡
王) 유의선(劉義宣)의 딸로,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이 반한 나머지 취하려 들었고 근친 짓을 한다는
주위의 시선을 고려해 성씨도 은(殷)씨로 갈아버렸다고 한다.

여러모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싹터가던 차에 서기 464 년,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태자였던 유자업이 제위에 오른다. 불과 16 세의 어린 나이였다. 이때 효무제(孝
武帝) 유준(劉駿)의 상(喪)을 치루면서도 유자업은 단 한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유자업이 제위에 오르자마자 한 일은 이복동생이자 사촌동생도 되는 7 살 난 유자난을 죽이는


일이었다.

이유는 위에서 설명했다. 유자난이 끌려가면서 남긴 말은 "다음 생에는 다시는 황제의 자손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키는데로 순식간에 어리디 어린 이복동생을 살해한 유자업은 다음으로 평소에 벼르던
(?)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에게 복수하려 들었는데, 덩달아 은(殷)씨에게도 해코지한다.
그저 은(殷)씨가 자신이 싫어하는 유자난을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과 그 전에 죽은 은(殷)씨의 능(陵)을 파헤치게 하고 부장품을


챙겼으며 그것만으로는 분이 안풀렸는지 똥을 가져다가 뿌렸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온갖 욕을
퍼부어 분풀이를 했다. (위에서 말한대로 무덤도굴에 관심을 갖고 팠던 보람이 생겼다)

유자업이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을 얼마나 증오했는지는 다음으로 소개할 일화로도 알 수있다.

우리나라에도 조선왕조의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宗廟)가 있듯이, 송(宋) 왕조에도 역대 황제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종묘(宗廟)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위패 외에도 황제들의 어진이 걸려있었는데,
하루는 유자업이 종묘를 찾아가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의 초상화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놈은 본래 술주정뱅이로서 코가 빨갛거늘, 왜 초상화엔 그것이 안 나타나있는 것이냐?"

그리고는 초상화를 그리는 화공을 불러다가 초상화 속 아버지의 코를 빨갛게 칠하라 명령했다. 화공이
명령한대로 코를 칠해놓자 유자업은 그제서야 만족하며 다시 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패륜 중에서 최강의 패륜을 보여주는 유자업이었다. 아버지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이 패륜아의


수준으로 봤을때, 하물며 어머니에게까지 그러지 못하란 법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 사건 이후로 유자업은 자신의 패륜짓엔 한계란 없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루는 유자업의 친모인 태후 왕씨가 병을 앓아 유자업을 불렀다. 몸이 쇠약해지니 정신도 나약해져


간만에 어미의 정으로 아들의 얼굴도 보고 위로도 받을 생각으로 부른 것인데, 이 아들이란 놈이 어머니
태후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내뱉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환자의 방에는 귀신이 많다고 하던데, 황제인 내가 어찌 들어가겠는가?"

그러고는 곧장 걸음을 돌려 돌아가자, 태후 왕씨가 기가 막히고 분통이 터지는 나머지,

"내 배를 갈라보거라, 도대체 어떻게 내가 저런 짐승을 낳았는지 봐야겠다!"


분을 삭이다 못해 홧병까지 얻은 태후 왕씨는 얼마 후에 죽고 만다.

그리고 태후 왕씨는 유자업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저주했다.

"너는 어질지도 못하고 불효를 저지르는 놈으로, 황제의 자격이 없다. 네 아비또한 난폭하고
황음무도하여 하늘과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샀고 너 또한 그러하다. 앞으로는 문황제(文皇帝 : 3 대 황제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의 자식들에게 황제를 맡겨야겠다."

그리고 유자업은 잠에서 깼고 어머니의 그런 저주가 두려웠는지 행여나 저주대로 작은 할아버지의


자손들이 정변이라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그 자손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다.

그 중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의 몇 아들들, 즉 유자업에게는 숙부가 되는 황족들만은 살려두어 갖고


놀았는데 그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

산양왕(山陽王) 유휴우(劉休佑).

이 세명의 숙부들은 살려다가 말 그대로 갖고 놀았다. 궁 안에 가두고 갖은 모욕과 고통을 주며 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별명까지 붙여주었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유치하고 치욕스러운 것들이었다.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은 몸집이 크고 뚱뚱하다 하여 '돼지왕'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은 살인귀 같이 생겼다 하여 '살인마왕'

산양왕(山陽王) 유휴우(劉休佑)은 도적질을 잘할 것 같이 생겼으니 '도적왕'

이렇듯 유치한 별명들을 지어주고 매번 놀리고 다녔다.

특히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이 유독 놀림대상이 되어 유자업의 놀잇감이 되다시피 했는데, 한번은


유자업이 시종들을 시켜 유욱의 옷을 벗기고 양 손을 뒤로 묶어 포박하여 구덩이에 집어 쳐넣고 거기다
밥과 반찬을 담은 바구니를 던져주며 마치 돼지를 사육하듯 시키며 자신은 그 옆에서 웃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또 어느 날은 아예 죽일 생각이었는지 그 날이 돼지를 잡는 날이라면서 애꿎은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을 다시 불러다가 장대에다 묶어 매달고 죽이려던 차에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이 보다
못해 동생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을 살리려고 유자업의 장단에 맞춰준다.

"돼지를 지금 죽이기엔 아깝습니다. 폐하의 생신 때 그 간과 폐를 꺼내어 죽이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유자업은 유휴인의 말에 옳다고 말하며 죽이려는 것을 멈췄고 그렇게 유욱은 살아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렇게 조카놈에게 비참한 꼴을 당하는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은 유자업 다음으로
즉위하는 제 6 대 황제 태종(太宗) 명제(明帝)다.

이렇듯 그 패륜행위가 도를 넘어선 그 이상의 정도로 심했는데, 이것 외에도 조상능욕은 물론이요,


근친행위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니, 이는 다음편에서 다루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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