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essional Documents
Culture Documents
Untitled
Untitled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삼국지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그토록 팽팽한 각축전을 벌이며 대립하던 조조, 유비, 손권으로 대표되는
위촉오 삼국이 아닌 웬 쌩뚱맞은 진나라의 사마염(司馬炎)이란 인물이 결국엔 대륙을 통일하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을 보고 꽤나 허탈해 했을 것이다.
출처 - <고우영 삼국지>
저기서 유비, 조조, 손권을 싸잡아 유가, 조가, 손가라 비웃으며 손가락질 하는 양반이 바로 사마염
되시겠다.
사마소(司馬昭).
즉, 사마염의 동생이다.
조환을 명목상인 상전으로만 앉혀두고 위(魏)라는 국가가 거진 사마소의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사마소는
굳이 조환을 몰아내고 천자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 뭐, 전례의 조조(曺操)를 흉내내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마소는 제국의 창업은 아들 사마염의 몫으로 남겨두고 서기 265 년에 사망한다.
그리고 아들 사마염은 아버지 사마소가 남겨준 크나큰(?) 숙제를 아주 빠르고 진작에 했어야 했던 일을
처리하듯 당연하다는 듯이, 수행해나간다. 앞서 말했지만 그냥 폼으로 황위에 앉아있던 조환을 결국에는
끌어내고 서기 265 년, 진(晉) 제국을 개국한다.
연호는 태시(泰始). 크고 거대한 시작이란 뜻이다. 연호가 뜻하듯, 새로운 제국을 세운 사마염의 기대와
야망과 포부를 느낄 수 있다.
후한 13 주 전도
오늘날 중국의 감숙성에 해당되는 양주(凉州), 진주(秦州 - 뜬금없이 등장한 이 새로운 행정구역은
사마염이 진 왕조 창업 이후, 한마디로 행정구역 수정을 했다고 보시면 된다. 새로이 창설된 주(州)는 이
진주(秦州), 양주(梁州), 영주(寧州), 광주(廣州)인데 여기서 양주, 영주, 광주는 오를 멸하고 나서
이후에 새로 개설된 주이거나 기존에 오(吳)에서 진나라 마냥 자기네끼리 따로 지역을 떼내어 만든 주도
있다. 광주가 이에 해당한다.)
아무튼, 지도에 '秦' 자가 보이시는가? 바로 저기 일대를 휩쓸며 이 독발수기능은 진주자사(秦州刺使 -
또 관직명칭이 나왔는데 어려울 것 없다. 진주는 말그대로 저 진주라는 지역을 의미하고 '자사'는
오늘날로 치면 미국의 주지사? 아무튼 그 주의 행정권과 군권을 행사하며 주를 담당하는 관직을 의미한다.
) 호열(胡烈)이란 사람을 전사시키는 기염을 토하기까지 한다.
참고로 이 호열이란 사람은 삼국지 매니아라면 한번씩은 해봤을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 게임에서도
등장한 인물이다.
바로 요렇게.
독발수기능의 군사가 강성하여 석감은 진주자사 두예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서 그들을 치게
하였다.-자치통감 79 권
그리고 유기의 상관이었던 부풍왕 사마량(참고로 이 사마량은 사마의의 7 남인가 그렇다. 즉 사마염의
삼촌이다.)은 오늘날의 군대도 그렇듯이 잘못된 지휘책임을 물어 파직당한다. 그리고 두번째 기록의
석감이란 사람은 결과적으로 말해 그냥 무능력한 장군, 즉 똥별이었다.
아무튼, 이런 두예가 상관인 석감에게 진언하는 것을 석감이 쌩깠다는 것만으로 석감을 똥별내지 병신으로
치부하는 것은 후세에 두예의 명장이란 이미지를 감안했을때 결과론적인 생각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후세의 우리로선 그저 결과만 볼 수밖에..
(하지만 석감이 똥별이라는 증거는 또하나 있다. 언젠가 있었던 오(吳)와의 전투에서 전공을 조작해서
상당한 전공으로 조정에 보고했던 일이 들통나 짤리고 만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마침 독발수기능이 진주와 옹주를 침구하여 혼란하게 하자 황제가 이를 걱정하니 임개가 말하였다. "의당
위엄과 명망이 있는 중요한 신하 가운데 지략이 있는 자를 찾아서 그곳을 진무하게 하셔야 합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임개가 이를 이용하여 가충을 천거하였고, 유순도 역시
그를 칭찬하였다. 7 월 계유일(26 일)에 가충은 진주-양주의 모든 군사적인 사항을 총감독하게 하고,
시중이며 거기장군의 직책은 옛날과 같이 그대로 두었다. 가충은 이를 걱정하였다. 가충이 조정을 떠나
군직을 수행하게 되자 군력을 잃을까 걱정한 것이다.-자치통감 79 권
이것이 너무나 걱정이 되었는지 가충은 양주-진주로 떠나기전에 한가지 방도랄까, 나름의 보험을 들이고
떠나는데, 바로 혼인이었다.
중국 역사상 이들 넷이 그렇게 못됐다고 오늘날까지 명성을 떨치고 있는데, 혹자들은 여기에 한명을 더
넣어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바로 가남풍(賈南風)이란 여인네다.
이 여인이 대관절 얼마나 못돼먹었길래 저 영광의 명단에 넣자고들 하는지는 나중에 볼 일이고 여기서는
그냥 혼인의 등장인물로만 보시면 되겠다.
하지만 가충은 자신의 바람대로 결국에는 양주-진주 전선으로 가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라는 표현이
적절할라나 모르겠다. 자신의 딸과 태자 사마충의 혼인을 성사시키고 나니 주위에서 만류하고 나선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뜻대로 가충은 양주-진주로 떠나지 않고 그대로 중앙에 눌러앉았으며 '군략과 지략에 능하다' 라는
이유로 황제 사마염에게 천거하여 자신을 감히 전선으로 몰아넣으려던 임개를 대차게 까버리고 몰아낸다.
이때가 서기 272 년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느덧 서기 277 년. 진(晉)은 아직도 독발수기능을 진압하지 못했으며 고로 진주(秦
州) 역시 통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여기서 의문스러운 점은 약 5 년간의 이 난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277 년을 기점으로 그 이후의 기록에 독발수기능의 난이 다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그 전까지는 여전히 독발수기능이 건재했다는 얘긴데, 기록이 없으니 알 턱없다.
기록이 분실된 것인지 어쩐 것인지는 몰라도..
다시 박살.
그리고 마무리.
선비족의 (독발)수기능이 오랫동안 변방의 근심거리가 되었는데 복야 이희가 군사를 발동하여 그들을
토벌하겠다고 청하자, 조정에서 의논하면서 모두 군사를 출동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오랑캐도 그렇게
걱정거리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자치통감 80 권
다시 꺼내보는 당시 중국지도.
좀 뜬금없고 급하게 마무리 지은 감도 없잖아 있지만, 여기서 이 마륭의 등장과 등용, 토벌까지 다루자면
사실상 <마륭전>이 되어버리니 그냥 이렇게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사실 의논해도 답은 없었다.
그리고 서기 280 년. 오(吳)는 그렇게 멸망했다. 오랜세월 동안 강남에 웅거하며 지배해오던 세력치고는
너무나도 빠르고 허망한 최후였다.
진(晉)은 그렇게 오(吳)를 멸함으로서 비로소 명실명백한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게 된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당시 진(晉)의 형국에 대해 서술할까 한다. 시기상으로는 건국시기인 A.D 265 년부터 무제(武帝)
사마염이 사망하는 290 년 경까지가 되겠다.
- 번왕(蕃王)들의 권력 비대화 -
황제 - 왕 - 공 - 후 - 백 - .....
특히 여기서 '왕(王)'은 황실의 사람들, 즉 황족들이 주로 봉해져 각자의 봉지를 수여받고 그 봉지에서
왕 노릇을 하며 살았다.
이유부터 간단히 설명하자면 앞선 진(晉)이 계승했다고 여기는 전 왕조인 위(魏) 왕조의 전례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결국에는 상대적으로 공신세력인 사마씨의 권력이 강해져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고는 나라를
집어삼킨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황족들은 각자의 영지를 거느리며 그곳에 눌러앉아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 영지가 중앙인 수도가 아닌 사방팔방 퍼져있는 지방이다. 하지만 그 영지가 속해있는
지방을 다스리고 군권을 행사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장군이나 주자사(州刺史 : '주'를 다스리는 행정관. 군권도 겸임하곤 한다) 등
관리직들이 있었을터.
여기서 사마염은 이 황족들에게 파격적인 특권을 부여한다.
각 번왕에게 지방의 도독직을 겸임시키거나 적게는 1 천에서 많게는 5 천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리게
사마염으로서는 나름의 계산을 통해 내린 판단이었을 것이나 사마염 사후, 이 조치가 불러온 여파는
강력했다.
- 구품관인법과 문벌귀족 -
수능에서 세계사 과목을 배우다 보면 중국사에서 '위진 남북조'라 불리우는 시기가 나온다.
소위 말해 지방의 초야에 묻힌 인재들을 발굴해내어 해당 지방의 향론, 즉 추천을 감안, (주로 그 인물의
명망이나 재덕이 평가요소가 되었다)
대대손손 고위직을 세습하며 명문가 호족, 중앙의 고위귀족들이 짜고치는 고스톱으로 저들끼리
매관매직하며 다 관직을 꿰찬지 오래
인 것이 당시 조정의 실태였다.
일이 이리되니 어느 한미한 가문의 자제는 고위직의 진출을 꿈도 못꾸는 얘기가 되어버리고 조정은
고위가문의 사람들이
그리고 이 제도로 인하여 이득을 보게 된 명문가의 귀족들, 호족들을 지칭하는 '문벌귀족' 이라는 계층이
생겨나게 된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3 편에서 밝혔듯 진(晉)의 지배층인 문벌귀족들이 부정부패에 이은 사치와 향락에 빠지자 황제 사마염도
물들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황제인 내가 뭣하러 이렇게 궁상맞게 살아야 하지?" 라는 심보로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치벽을
보인다.
일화 하나를 보자면..
무제(武帝 : 사마염)가 태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오는 길에 물었다. "나는 한(漢)의 황제들 중에
누구에 비교할 수 있는가?"
"내가 어찌 환제와 영제에 비할 수 있단 말인가?" 유의가 답했다. "환제와 영제는 벼슬을 팔아 번 돈으로
국고를 채웠지만 폐하께서는
벼슬을 팔고도 얻은 돈으로 개인의 국고를 채우시니 어찌 환제, 영제에 비교하겠습니까?" 황제가 이에
웃으며 말하기를,
"환제와 영제 때에는 이렇게 직언하는 신하도 없었는데 나에게는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니 내가 그들보다
낫다."
해석해드리자면...
신하의 디스에 불쾌함을 드러냈고,이 패기넘치는 유의는 한술 더떠 너는 오히려 환제, 영제보다 못하다
라는 식으로 더 까버린 것이다.
한가지더 소개해드리겠다.
"폐하께서는 등애(鄧艾)의 억울함을 알고도 풀어주시지 않으신데 하물며 제갈량과 같은 신하들이 수십명
있다한 들 어찌 감당하오리까?"
등애(魏의 무장)는 삼국지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잘 아시는 무장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등애의
억울함이란,
풀어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사마염이 제갈량 타령하는데 뜬금없이 등애드립을 치는 건 사마염의 처사에
관해 불만을 갖고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제갈량 수십명이 있다해도 너는 워낙 암군이라 대책없다는
식으로 대차게 깐 것.
그리고 사마염 자체가 무능한 인물이 아닌지라 황제노릇은 제대로 해나갔고 나라도 그럭저럭 유지되었다.
- 백치황제 사마충 -
사마충의 우둔함은 일찍이 아버지 사마염도 알아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과연 이놈이 뒤를 이을
자격이 있는가 싶어 아들을
테스트 해보고자 일종의 시험종이를 주었는데 아둔한 사마충은 당연히 뭐가 뭔소린지를 몰라 벙쪄있었고
그걸 본 간특한 태자비 가남풍이
여기서 더 눈길이 가는건 가남풍의 영악함이지만 어쨌든 사마충은 아버지에게까지 의심을 살 정도로
멍청했던 모양이다.
영안(永安 : 303 년) 원년, 동해왕 사마월이 혜제를 끼고 업을 공격했다. 성도왕 사마영이 석초와 함께
탕음에서 격파하고 혜제를 사로잡았다. 그(혜소)는 조칙을 받들어 행재소에 이르러 반란군을 만나 의연히
싸웠다. 황제를 호위하다 결국 적의 화살에 맞아 황제의 곁에서 숨을 거두었고 이때 그의 피가 황제의
어복을 물들였는데, 천자가 이를 몹시 애도했다. 반란이 평정된 뒤 좌우의 신하들이 어복을 빨 것을
청했는데, 황제가 “이것은 충신의 피이니 없애지 말라.” 라고 명했다. - 진서 혜소전
사마충의 또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는데, 이걸 보면 앞뒤분간 정도는 할줄 알았던 인물이었던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그 무능함 때문에 자신이 허수아비 황제신세를 면치 못했고 이를 틈타 황후
가남풍을 비롯한
- 권력싸움의 시작 -
황제에게서 그런 부탁을 받았다라는 것은 그만큼 황제의 신망이 두텁고 조정에서의 위치가 높은데다 중신
중의 중신임을 뜻하기도 한다.
양수(楊修).
사마염의 유서를 조작하여 정치적 라이벌로 여기던 사마량을 내쫓으려는 시도를 하는가 하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은 내쫓거나
한직으로 내몰기도 했으며 감탄토고라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물들을 위주로 기용하기도 했다.
손초가 양준에게 공명정대하고 순리대로 처리해야 한다면서 종실이 강성한데도 그들과 논의하지 않으니
화가 이르는 것이
양씨일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져가자 가남풍이 멍청한 남편 혜제로 하여금 양준을 토벌하라는
식의 조서를 쓰게 하였고
즉 혜제 사마충의 동생을 불러다가 양준을 무력으로 제압할 요량으로 중앙에서의 병권을 맡긴다.
그리고 결국 혜제 사마충의 양준을 역적으로 모는 조서가 떨어지자마자 사마위는 금군을 이끌고 양준의
거처로 찾아가
이 바람에 사마염의 황후였던 양황후도 며느리뻘인 가남풍에게 살해당하고 양준의 형제들이었던 양요,
양제역시 처형당한다.
죽이지 말자는 상소나 여론이 있었지만 가남풍은 기어코 양씨 일가를 멸하고 만다.
삼국지연의에서도 등장하는 문앙, 장화, 왕융, 위관 등.. 당시로서는 선대의 중신들인데도 숙청의
피바람에는 피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 이어지는 권력싸움 -
위관은 삼국지연의에서는 그저 촉(蜀)을 정벌할 때 위(魏)의 무장으로 나오며 강유를 죽이라 명령하는
일개무장으로만 등장하지만, 이후 진(晉)을 섬기고 나서는 고위직들을 역임, 무제 사후에는 혜제
사마충을 보좌하는
이렇듯 각각 황실과 조정에서 원로로 여겨져지며 당대의 존경과 우러름을 한몸에 받는 거물이 두 명씩이나
비록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양준 일파를 숙청했다고는 하지만 사사로운 원한으로 죽인 감도 없잖아 있다고
밝힌 바 있는
그런데 위관이 잡아들인 사마위의 심복들 중 하나가 몰래 가남풍과 접촉하여 사마량, 위관이 혜제
사마충을
근거도 없을 이 참소가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던게 뭐냐면, 일찍이 위관은 무제 사마염에게 황제의 자리가
건의한 이도 위관이고.
그리고 가남풍과도 어느정도 알력이 있었는데, 가남풍이 태자시절의 사마충과 혼인얘기가 오가던 때에
위관의 딸도 태자비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린 바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남풍의 아버지 가충(賈充)
과는
하지만 설사 이런 과거의 일들을 논외로 한다해도 가남풍은 역모를 획책했다는 썰만으로도 사마량과
위관을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 사마량과 위관을 죽일 때 가남풍은 황제의 거짓조서를 내렸다고 했다. 즉 애시당초 그 두
중신을 죽이라는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가남풍은 남편 혜제 사마충으로 하여금 사마위를 처단하라는 조서를 내리게 했고,
- 가남풍 -
가남풍 전도
앞에서 계속해서 가남풍이 궁중에서의 음침한 권모술수에 능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진(晉)의 건국
시조들 중 하나인
1) 태자비 시절
내정되어 있었는데, 체구가 작아 옷이 맞지 않았기에 결국에는 언니인 가남풍이 태자비 후보로 오르게 된
것이다.
독발수기능의 난과 관련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추천으로 인하여 외지로 나가 독발수기능을 토벌하게
된 가충이
아무튼, 이렇게 대타로 태자비 후보로 올라간 가남풍은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게 된다.
가충은 자신의 딸이 위관의 딸보다 어질지 못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양(楊) 황후에게 뇌물을 먹여
권신인 순의와 순욱을 움직이게 하였다. 순의와 순욱은 사마충이 워낙 백치이므로 미인이 황태자비가 되면
후에 바람날 것이라며, 지독한 추녀인 가남풍은 자기가 추녀임을 알고 있으므로 백치 남편에게 만족할
것이다라며, 가남풍이 더욱 좋다고 진 무제를 설득하였고 결국 진 무제는 가남풍을 훗날, 진 혜제가 되는
사마충의 태자비로 책봉하게 된다. 하지만 후일 이 백치남편에게 만족 못 한 가남풍은 추녀인 주제에
애인을 두었다. - 진서
가남풍이 15 세, 사마충이 13 세.
혜제 사마충 초상화
가비(賈妃)의 천성은 몹시 잔학해, 일직이 손수 여러 사람을 죽였다. 혹 극(戟)을 임신한 첩에게 던져,
태아는 병기를 따라 땅에 떨어진 경우도 있었다. 무제(사마염)가 이를 듣고 대노해, 이미 금용성(金墉城)
을 손질했으므로 장차 그곳으로 그녀를 유폐시키려 했다. - 진서 혜황후전
성격은 파탄난데다 궁중에서의 어두운 권모술수 쪽으로는 또 머리가 잘 돌아가 무섭기까지 하다.
이 글 1 편에서 이미 나온 삽화.
4 편인가에서 짤막하게 언급했던 일이기도 하다. 애초에 사마충이 황제가 될 재목으로 보이지 않자,
사마염이 차라리 차라리 자신의 동생,
사마유는 어릴적부터 할아버지 사마의(司馬懿)가 총명하다 여기며 귀여움을 받았고 아버지 사마소도 그런
사마유의 재목됨을 알아보고
몹시 사랑하고 아꼈다고 한다. 인품이 온화하고 겸허했으며, 어진 이들을 아끼는 성품으로, 문무에 고루
능하여 그 재주와 덕망이
아무튼, 이토록 뛰어난 능력의 사마유였기에 형 사마염이 사마유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을 갖게 되자
2) 황후가 되고나서
서기 290 년, 시아버지 사마염이 사망하자 남편 사마충이 제위에 오르고 가남풍 역시 황후가 된다.
그렇게 정적들을 제거하고 비로소 대권을 쥐게된 가남풍은 우둔한 남편 혜제 사마충을 제쳐두고 정치를
한다.
가밀은 본래 가남풍의 외가쪽 조카였는데 숙모가 하도 잘나가자 빌붙을 생각으로 성씨까지 갈아서 가씨로
개명했다.
가후(가남풍)의 모친 광성군(곽씨)의 양손, 가밀은 국사에 간여해, 권력이 임금과 대등했다. - 진서
혜황후전
그리고 성씨 갈은 효과를 톡톡히 보게 된다. 그리고 충실하게 숙모의 앞잡이 역할을 하며 권세를 누리게
된다.
가씨일족의 한낱 한사람의 권력과 임금과 대등했다 하니, 가남풍의 위세는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한마디로 한창일 때인데, 가남풍의 입장에서는 애석하게도 남편인 혜제 사마충이 남편구실을 못하는
저능아였기에,
데려다가 대접해주며 욕구를 풀었다고, 그러다 그 남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물건 하나를 선물했고 그
남자는 그걸 가져가다가 그걸 본 무관들이
이렇게 가남풍과 가씨일가가 막장으로 치닫고 전횡하는 모습을 보면 폭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기록은 이렇다.
즉, 윗놈들끼리만의 세상이었단 얘기다. 백성들이야 오히려 전란의 나날이었던 삼국시대 이후로 통일된
제국이 평안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더 나아가 이건 이후 팔왕의 난이라는 사태를 다루면서 볼 일이지만, 가남풍을 도리어 정변을
노리는 황족들로부터
황권을 굳건히 지킨 인물로 달리 평가하는 이도 있다. 여성이 권력을 쥐었다는 것만으로 눈살을 찌푸리는
유학자들이
개인의 영달을 위해 무능한 황제를 세워 추후에 있을 '팔왕의 난' 이라는 근본적 원인을 제공했다라는 것.
나중에는 '영가의 난' 이라는 재앙이 도래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감안할 때, 가남풍이 진(晉)을
무너뜨리는데에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무슨 말인가 하니, 사마충을 폐태자 시켜버리면 그 아들인 사마휼의 정통성에 문제가 생겨버리니
그 황제의 조서란 종이도 애시당초 가남풍이 사마휼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조작한 거짓 조서였던 것이다.
신하는 조서의 진위여부를 더 신중히 조사하여 처리해야 한다고 진언하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황제의 하사주(酒)를 빙자한 가남풍이 보낸 독약이 당도하자 이를 알아차리고는 하사주 받기를 거부하다
결국에는 절구공이로 맞아 죽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 사마휼의 죽음은 그동안 기회만 노리며 불만이 최고조에 달해있던 사마씨들이 들고
일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사마씨들이 그토록 바라던 대의명분이 생긴 것이다. 살해당한 사마휼은 많은 이들의 동정을 샀고 한편으론
많은 원망과 비난을 불러왔기 때문.
거기다 그토록 증오하는 가씨세력에 같은 혈육인 사마씨 한 사람이 살해당했다는 분노와 복수심도 있었을
것이다.
더불어 가남풍을 찾아가 가남풍에게 사마휼처럼 독약을 마셔 자살할 것을 종용했고 가남풍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는다.
조왕 사마륜이 입궁하여 익군교위 제왕 사마경에게 전각에 들어가 가후(賈后 : 가남풍)을 폐위하게 했다.
가후와 사마경의 모친이 서로 사이가 나빴기에 사마륜이 그에게 하게 했다. 가후가 놀라 이르기를, "경은
어찌 하여 온 것이오?" 사마경이 이르기를, "조서로 황후를 잡으라 하였소." 가후가 이르기를, "조서는
응당 나에게서 나오는 것인데, 무슨 조서란 말이오?" 가후가 상합(上閤)에 이르러, 멀리서 혜제를
부르기를, "폐하께서 부인을 가지시고, 타인에게 이를 폐하게 함은, 곧 폐하를 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사마경에게 묻기를, "이 일을 일으킨 자가 누구인가?" 사마경이 이르기를, "양(梁)왕과 조(趙)
왕이오." 가후가 이르기를, "개를 묶으면 응당 목을 묶어야 하는데, 지금 도리어 꼬리를 묶었으니, 어찌
이와 같지 않을 수 있으랴!" 궁의 서쪽에 이르러 가밀(賈謐)의 주검을 보고는, 소리를 내 통곡하다
갑자기 그쳤다. 사마륜이 임금의 명이라 속여 상서(尙書) 유홍(劉弘) 등을 파견해 부절을 가지고
금가루로 된 술을 가지고 가 가후에게 건네며 죽음을 내리게 했다. 조찬, 가오, 동맹, 한수의 무리도
모두 주살되었다. - 진서 혜황후전
거기다 앞서 언급한 가남풍의 조카 가밀과 가남풍의 동생인 가오도 죽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가씨일족은
물론이고 그 끄나풀들까지
전횡하던 외척세력을 말소했고 정권의 교체가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다만 대권을 쥔 세력이 가씨에서
사마씨로 성씨만 바뀌었다 뿐,
정작 근본적으로 나아진 것은 없었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 조왕 사마륜의 역심과 반발 -
사마장(司馬臧)을 황손으로 책봉하는 등, 그동안 외척들에게 유린되던 사마씨 황권을 다시 공고히 했으며,
명성이 높고 덕망이 깊은 자들을 등용하여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기본적으로 이 사마륜이라는 인간이 원체 용렬하고 멍청한 성격이었기에, 이로인해 벌어질 사태는 사실상
예고된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애시당초 정변을 일으켜 외척을 몰아낸 것도 그걸 공로로 건덕지 삼아 혜제 사마충에게 황제의 자리를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손수는 실질적으로 사마륜의 상전이나 다름없었다. 무슨 소리인가 하니,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사마륜은 용렬한 위인인지라 거의 모든 대소사를 손수에게 물어 해결하고, 손수의 통제를 받았으며
가남풍과 가씨일가를 칠 정변을 일으킬 것을 사마륜에게 부추기고 종용한 이도 손수였다.
우선, 사마륜이 황제가 되는데에 걸림돌이 될 만한 이들을 모조리 숙청하거나 내쫓는 일에 착수한다.
대표적인 희생자로는 회남왕(淮南王) 사마윤(司馬允 : 무제 사마염의 9 남)이란 황족이 있는데, 사마륜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사병들을 모아 사마륜 일당을 선수치고자 계획하고 있었는데
손수 역시 사마윤의 낌새를 눈치채고는 사마륜에게 밀고하여 사마윤의 병권을 박탈할 것을 진언한다.
사마륜의 이와같은 조치의 의미를 사마윤이 모를리 없었다. 더구나 사마륜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면 더더욱이나.
거기다 한술 더떠 손수는 사마윤 휘하의 관속들을 포함한 신하들을 몇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체포해버려
사마윤의 수족을 잘라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조치를 취하고 또 사마윤이 태위직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라는 이유(뻔히 속셈이 다보이는데 눈뜨고 당할리가 없다)로 황제의 조서를 받기를 거부했다는
죄명으로 압박하기에 이른다.
조왕(趙王)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외치면서 자신을 따를 사람은 옷을 왼편으로 여미라고 했고, 그(사마윤)
에게 귀부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궁궐로 갔지만, 상서좌승 왕여가 액문을 닫아걸어 들어가지 못하자
상국부(相國府 : 사마륜의 거처)를 포위하면서 사마륜을 공격해 여러차례 이겼다. - 자치통감
기록대로 사마윤은 싸움에서 몇차례 이겨 사마륜을 거처인 상국부(사마륜은 상국이라는 관직도 겸하고
있었다)까지 몰아넣어 궁지에까지 몰아넣는데에 성공한다. 그런데 여기서 일이 틀어지고 만다.
사마건 : "우리 아빠 편 들으면 출세할 거임. 그러니 사마윤 따위 버리고 우리편으로 오셈."
미래를 약속받은 복윤은 사마륜에게로 돌아섰고 사마윤을 낚고자 함정을 파기로 하는데, 복윤은 혜제
사마충이 직접 보낸 장수였기에 사마윤더러 황제의 조서를 받으라는 구라를 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마윤은 복윤을 만나러 갔고, 사마윤은 복윤의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주군이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사마윤의 병력은 순식간에 와해되어버렸고 사마윤의 가족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싸그리 처형되고 모반에 동조했던 이들은 도주하는 것으로 사마윤의 반란은 끝난다.
사마윤을 정리한 사마륜의 위세는 더 높아졌고 덩달아 심복 손수도 날뛰기 시작한다. 위에서는 언급한
석숭, 반악, 구양건과 같은 인물들이 그저 반란에 연루되어 죽은 것으로 써놓았지만 실제로는 이 손수의
사사로운 원한에 의해 죽었다(사마륜이 죽이라 지시한게 맞긴 하지만 앞에서도 서술했듯, 사마륜은 거의
손수의 꼭두각시였으니 사실 손수가 죽인 것과 다름없다).
거기다 손수 자신이 신임하는 인물만 벼슬을 내려 기용했기 때문에, 사마륜의 친인척은 물론 노비,
시종들까지도 고위직에 오르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하니..
그리고 서기 301 년.
사마위와 사마량이 가남풍과 관련되어 권력다툼을 하던 때까지도 팔왕의 난의 시기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은 지도에서는 표시되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아직
안나왔는데,
사마월은 좀더 뒤에 등장한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 번왕들의 난립 -
웬만한 아침 드라마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한 스케일로,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왕자의 난은 비교도 안되는
막장 가족사를 보여준다 하겠다.
물론 명분은 좋았다.
'감히 제멋대로 지금의 황제를 몰아내고 무엄하게도 황제의 자리를 꿰찬 도적놈을 정벌하러 간다' 라는
거창한 대의명분이 있었으니까.
따로 쓰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피튀는 싸움만이 다가 아니라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결탁이
난무하는 물밑작업도 있었다.
하간왕 사마옹 같은 경우는, 본래 사마륜을 지지하는 입장을 고수했고 제위를 찬탈한 사마륜 역시
가뜩이나 한사람 한사람의 황족들의 지지가 아쉬운 마당에 그와 같은 사마옹의 지지도 번왕 연합군에 맞설
힘에 보탬이 되었기에 철떡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사마옹이 성도왕 사마영의 병력규모가 크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등을 돌려버려 연합군에 가 붙어버렸으니, 병력균형에서 뒤쳐지는 수밖에..
그리고 바로 위에서 등장한 양왕 사마융 역시 원래는 사마륜 파로서, 사마륜과 함께 가남풍을 주살하는
일에도 동참하기도 했고 사마옹 정권 하에서는 무려 승상(丞相 : 오늘날의 재상)직까지 지냈지만, 그
역시 사마륜의 하는 짓거리가 영 마음에 안들었는지 연합군으로 넘어가 도리어 사마륜을 죽일 것을
건의하는 입장이 되버린다.
사마경이 대표로 선출된 이유는 합리적이었다. 현명하고 명망이 깊던 아버지 사마유의 피를 이어받아
그런지, 당시 사마경의 평은 꽤 좋았다. 현명하다는 평판이 있었으며 일찍이 여러 공로가 있다하여
인망이 높았다고 하니, 충분히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었을 터.
결국은 서기 304 년, 성도왕 사마영과 하간왕 사마옹이 사마애의 혼정을 이유들어 군사를 일으켜 장사왕
사마애를 쳐 주살한다.
말이 좋아 혼정을 빌미로 든거지 다들 저마다 하나씩 꿍꿍이가 있어서 그런 것일게다. 나중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 마지막 싸움과 종결 -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자, 사마영은 낙양을 심복장수에게 맡기고 자신은 혜제를 끼고 장안(長安)으로
도주한다.
사마옹의 배반으로 사마영은 꼼짝없이 붙잡혀 감금되는 신세가 되어버렸고 남은 일은 사마월과 사마옹,
마지막 두 세력 간의 싸움 뿐이었다.
정황상 당연히 사마월의 독살이라는 얘기가 퍼졌고 오늘날에도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혜제 사마충.
회제 사마치 초상화.
즉위했을때는 24 살의 젋디 젊은 나이였다.
- 팔왕의 난 종결 -
사마염은 통일 이후, 더이상의 전쟁은 없다 여겼는지 제국의 병력을 대폭 감소시켰고 가뜩이나 부족한
차에 그나마 남아있던 병력은 이 내전을 통해 거의 갈려나나갔고 진(晉)의 국방력은 크게 감소한다.
그렇다고 전쟁의 주축이 된 각 번왕들이 거느린 병력의 규모가 적어 내전의 스케일이 작았냐, 그것도
아니다. 예전 글에서 써놓았듯, 적게는 1 천명, 많게는 5 천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
수천, 수만여명의 병력이 죄다 이 난으로 소모된 것이다.
이 난으로 죽어나간 인재들도 많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의 쟁쟁한 신하며 학자, 사상가,
나아가서는 예술가들까지 어떻게 되서든 난에 연루되어 해를 당했다. 그들이 계속해서 살아남았더라면(
물론 역사엔 IF 가 없는 법이지만) 정치, 문화, 예술 면에서 어떤 발전을 이루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대표적 사례로는 오(吳)의 명장이었던 육손(陸孫)의 손자요, 역시 말기 오나라의 명장이었던 육항(陸抗)
의 아들들인 육기(陸機), 육운(陸雲) 형제가 그러하다. 이 두 형제 모두 고명한 학자들이었는데 제왕
사마경을 섬겼다가 사마경이이 죽으면서 연좌되어 처형당한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팔왕의 난' 이라는 사건의 경과와 결과를 쭉 살펴보았는데, 이 글이 진(晉)이라는 제국을 다루는 글이니
만큼 전체적으로 서술해야 할 필요가 있기에 이번에는 초점을 다른 사건에 맞춰 써볼까 한다.
이 글에서는 팔왕의 난을 다루느라 황족간의 권력다툼 내란이 벌어지는 무대인 중앙을 제외한 제국의 각
지역은 마치 아무 일 없이 평안했던 것처럼 느껴지는 감이 없잖아 있다. 사실은 그게 아니다. 중앙에서의
내란에만 집중적으로 보아 그렇지, 다른 곳도 개판이었다.
당시 진(晉)에서는 비단 팔왕의 난 뿐만 아니라 갖가지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팔왕의 난은 황실의
내분과 중앙에서의 권력싸움에만 국한된 얘기다. 즉, 팔왕의 난은 당시 제국에서 일어난 사건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물론 이 내란으로 나라가 박살이나는 결과를 불러온 중대한 사건임은 틀림없지만, 제국 각지에서도 혼란이
일기 시작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앙에서의 내란을 틈타 제국 각지에서는 이민족들의 유입과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 이특의 반란 -
하지만 이특의 설득과 거기에 덧붙인 뇌물 덕택(?)에 조흠은 이특의 유랑민 무리가 익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
이특의 언변이 좋아 조흠을 설득시켰다라기 보단, 이 조흠이란 작자가 당시 어떠한 생각으로 유랑민의
유입을 승낙했는가가 중요하다.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꿔 이특 집단의 무리가 유입을 허락한 조흠의 계산은 간단했다. 수십만 명의 인구가
자신의 영지로 들어오면 그 무리를 흡수하여 자신의 세력 강화를 도모한다.
아무튼, 이특과 유랑민들은 익주에서 자리잡아 새로이 생활기반을 잡아나가기 시작한다. 조흠은 이특과
그 형제들인 이상(李庠), 이류(李流) 등을 잘 대접하며 자신의 세력으로 편입시켜 수하로 두려했다.
그러던 차에 서기 300 년.
그 동안 독립할 기회만 노리던 조흠이 중앙조정에 반기를 든다. 적당한 때를 노려 드디어 일을 터뜨린
것이었으나 결정적인 계기는 조흠의 아들이 팔왕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일이 그것이었다. 지방직인
아버지와는 달리 조흠의 아들은 중앙조정에서 일하며 번왕들 중 어느 한명을 지지하다 죽은 것인데, 전
편에서도 말했듯이, 난에 휘말려 해를 입은 이들은 다양했다고 했다.
이 나상이란 인물은 삼국지연의에서도 나오는 촉(蜀)의 무장, 나헌의 조카다. 촉의 최후의 명장이라
불리던 삼촌 나헌과는 달리 훌륭한 성품과 장군으로서 갖추어야 될 군재는 찾아볼 수 없는 무능한
인물이었다.
"조흠에게는 영웅의 재간이 없으므로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날짜를 헤아리고 있으면 절로
패전소식이 들려올 것입니다." - 진서 나상전
익주로 떠나면서 나상이 던진 말이다. 무능한 주제에 큰소리친 것 같아 보이지만, 놀랍게도 머지않아
나상의 말이 적중하게 된다.
어찌된 일이냐면, 이특과 그 형제들을 기용하여 자신의 반란에도 동참시킨 조흠은 제 스스로 병크짓을
터뜨린게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특의 동생들 중에 이상(李庠)이란 동생이 있었는데, 병법에 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흠은 이 이상에게 나상의 토벌군을 막고자 한가지 임무를 준다. 이끌고 온 유랑민 부대를
이끌고 주요 길목을 막을 것을 지시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당최 이해가 안되지만 아무튼 조흠은 이상의 재주에 일종의 위협감과 두려움이 생긴
모양이다. 마치 그대로 두었다가는 나중에 저놈이 나를 어떻게 할 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랄까..
그래서 제거하기로 마음 먹는다.
군법을 위반했다는 적당한 구실을 붙여 이상을 처형시켜버리고 그 아들들과 조카를 포함, 도합 30 여명을
죽여버렸다.
이특과 그 아우 이류는 그날로 유랑민 부대 7 천여명을 이끌고 조흠이 위치한 성도(成都)를 쳐, 기습에
놀라 도망가는 조흠과 그 처자를 붙잡아 살해한다. 서기 301 년의 일이다.
나상의 말대로 조흠은 과연 영웅의 재간이 없었는지, 반란을 일으킨지 1 년 남짓만에 자멸해 버린다. 일이
이리되어 버리면 역적으로 낙인찍힌 조흠을 죽인 이특과 토벌오는 나상과의 관계가 미묘해진다. 이특도
나상의 원정군을 두려워하여 미리 사람을 보내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잘 보이고자 굽신거린다.
이특이 나상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 동생 이양에게 영접하도록 시키면서 진기한 노리개를 바치자,
기뻐하면서 이양을 기독으로 삼았으며, 이특, 이류 등이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면죽에서 대접하자 왕돈,
신염 등이 그들은 도적질을 하는 사람이니 이 기회를 노려 그 목을 베어야 한다고 했지만 무시했다. -
진서 나상전
하지만 그런 노력도 헛되이, 나상은 익주에 도착하자마자 이특과 유랑민 집단에게 일주일 내로 익주를
떠날 것을 명령한다. 이특과 유랑민들에게는 실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을 터. 익주를 떠나란 말은
기근이 판치는 옹주, 관중지방으로 되돌아가란 소린데 곧 죽으란 말과 같았다.
그나마 이특은 먹을 식량을 구하기 위해 떠나는 절기를 늦추어 가을에 수확한 곡식만 가져가게 해달라고
사정하지만 나상은 겉으로는 이특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했지만 암암리에 유랑민들을 탄압하며 행패를
부린다.
하지만 나상 치세 하의 익주는 무능한 나상의 폭정으로 인하여 반란이 일고 원망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3 월에, 성도(成都)에 이르러 문산의 강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나상은 왕돈을 파견하지만 진압에
실패하고 왕돈은 살해당했다. - 진서 나상전
반란이 일어나고 사치를 일삼는데다 토목공사에, 나상을 비유하기를 '시랑', 즉 이리와 승냥이로
비유한데다 재앙이란 표현까지 썼다.
다시 이특에게로 돌아가보자면,
영녕(永寧 : 301 년) 원년 겨울, 이특과 유랑민의 무리는 익주를 떠나는데, 나상의 명령을 받은 나상의
부장, 신염이란 장수가 면죽관 일대에서 이특과 그 무리를 습격하는 일이 벌어진다.
나상이 본격적으로 군사행동에 나선 것이다. 면죽관이란 성에서 이특과 나상의 군대는 격돌하였고 이
전투에서 이특이 승리한다.
그리고 내친김에 유랑민들은 이특을 정식 지도자로 추대하면서 유랑민들의 정권을 수립하기까지 하는데,
이것이 진(晉)이 혼란할때 우후죽순 생겨난 이민족들의 정권 가운데 하나인 파저족의 나라 '성(成)' 의
시작이다.
기록은 이렇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 성(成) 정권의 성립 -
이특이 촉(蜀)에서 일어나 성도의 나상(羅尚)을 공격하자, 나헌은 강양(江陽)으로 물러나 수비했다.
하지만 형세가 불리하자 구원을 요청해 형주자사(荊州刺史) 종대(宗岱)와 건평태수(建平太守) 손부(孫
阜)를 인솔하여 나상을 구원하고 임시로 강주(江州)로 갔다. 종대와 손부가 도착하여 많은 사람들을
도적으로 몰아 핍박하자 사람들은 모두 분한 마음을 가졌다. - 진서 나상전
모르는 지명이나 행정구역은 지도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보시다시피 오늘날 중국의 사천성이 익주가
되겠고 바로 그 오른쪽에 접한 주(州)가 형주(荊州)다. 그리고 건평태수(建平太守)에서의 건평(建平)
이란 곳은 형주에 속한 지역이고, 태수(太守)는 주자사 휘하의 지방 관리직이다. 나상은 인근 형주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이특의 봉기는 유랑민 집단만이 그 주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애꿎은 익주의 원주민들까지
역적으로 몰아넣어버리는 병크를 저지른 것. 그렇잖아도 나상의 폭정으로 불만이 많던 익주의 백성들은 이
사건으로 진(晉)에 대한 익주에서의 민심은 완전히 돌아서게 되고, 그그에 반해 선정(善政)을 천명한
이특을 따르게 된다.
나상의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이특의 공약을 크게 환영하며 민심은 이특에게로 쏠린다.
이에 돈 좀 있는 지주층과 호족들은 반대로 나상과 진(晉) 왕조를 지지하며 돈으로 사병을 모아 비밀리에
나상을 지원하고 협공하여 백성들을 탄압한다.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어디든 돈과 빽 좀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기득권을 잃기 싫은게 사람의 심리인 것 같다.
아무튼, 싸움으론 불리하다 판단한 나상은 계책을 쓰기로 한다. 익주가 거의 자신에게 등을 돌린 이
마당에 이특이라는 괴수만 없애버리면 반란군 역시 금새 와해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이특에게
거짓항복하여 죽이기로 한다.
거기다 이특이 진영을 퍼뜨려 놓아 병력이 분산되어 있다는 보고도 들어와, 거짓항복을 하면서 소수의
병력만이 남아있는 진영에 머무르는 이특에 기습을 가하여 죽이기로 한다.
나상은 병조종사 임예를 보내, 이특에게 거짓항복을 시켰고 자신은 은밀히 나와 날짜를 구해 이특을 쳐,
크게 격파하고 목을 베 그 수급을 낙양(洛陽)으로 보냈다. - 진서 나상전
나상은 대군을 보내 이특의 진영을 급습하여, 이틀 연속으로 싸웠다. 이특은 대패하여 잔병을 수습해
물러났으나 나상의 군이 돌아가자, 이특은 쫓아 30 여리 남짓에 걸쳐 싸웠으나, 나상은 대군을 동원해
요격했기에 이특의 군세는 패했다. 나상은 이특과 이보, 이원을 죽이고 그 시체를 태웠으며 수급을
낙양으로 보냈다. - 진서 이특전
건흥 3 년, 범장생이 서산에서 소달구지를 타고 내려와 이웅은 문까지 맞이하러 나왔다. 그리고 장생을
승상(丞相)으로 임명해, 범현(范賢)이라 존칭했다. 그 장생이 제호(帝號)를 칭하도록 권했기 때문에,
이웅은 제위에 즉위했다. 건흥(建興) 3 년을 안평(安平) 원년이라 고치고 국호를 대성(大成)이라 하였다.
아버지 이특을 경황제(景皇帝)로 추존하고 묘호를 시조(始祖)로 했으며, 어머니 나씨를 태후로 했다.
(이후는 생략) - 진서 이웅전
'참람되이(진나라 입장의 기록에서의 표현)' 황제를 칭함으로서 진(晉) 왕조를 부정하는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범장생 조상.
그리고 범장생은 익주의 대지주로서, 기득권 가진 지주들이 이특을 배척했을때 유일하게 이특을 지지한
지주다. 이특에게 군량미를 주기도 하고 군자금이나 필요한 인력이나 물자를 지원해줘, 선대의 이특이
신임했고 이제 그 아들인 이웅도 범장생을 건국의 일등공신으로 여기며 '문까지 맞이하러 나오는' 정도의
정성을 보이는 것이다.
서기 307 년이면 진(晉)의 연호로는 영가(永嘉) 원년. 회제(懷帝) 사마치의 치세가 시작된 해다.
이 성(成) 정권의 수립사건 외에도 진(晉)을 부정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봉기한 사건은 몇차례 더있었다.
그건 다음편에서..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전편에서는 진(晉)에서 일어난 반란들 중 하나인 성(成) 정권의 수립과정을 살펴보았는데, 반진(反晉)에
의거한 반란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 장창의 난 -
장창이 반기를 든 배경에는 앞서 다루어본 익주에서의 유랑민 반란, 즉 이특-이웅 부자의 봉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형주의 백성들에겐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익주라는 먼 타지까지 가서 전쟁을 해야한다는
것도 불만이거니와, 한시라도 빨리 떠나지 않으면 엄벌에 처하겠다는 조정의 엄포가 있었기 때문.
조서에서 각 군(郡), 현(縣)을 지날때 닷새 이상을 머물지 못하게 하여 임오병(壬午兵)의 불만이 많았다.
- 진서 장창전
여기서 임오병이란, 징집된 병사들을 말한다. 임오일(壬午日)에 징집되었다 하여 임오병이라 불렀다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조정에서 내린 조서에 징집된 병사들이 익주로 향하는 도중에 지나가는 군(郡)이나
마을, 고을에 닷새 이상을 머무르지 못하게 했다는 소리다. 그러니 쉴 생각일랑 말고 얼른 익주전선으로
가라는 얘기였다. 거기다 그 병력을 인솔하는 관리도 그런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발생하면 그 즉시
모가지를 날리겠다고 덧붙인다. 실로 당시 조정의 조급함이 느껴지는 기록이다.
익주에서 형주는 수천 수만리 길인데 쉬지도 못하고 꼬박 강행군 할 생각에 '임오병'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레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진(晉) 왕조를 타도하자는 장창의 언변에 불만이 가득했던 임오병들과 역시 기근으로 인하여 발생한
난민들을 제대로 돌보아 주지 않은 무능한 조정에 대해 실망한 유랑민들은 품고 있던 원망과 불만을
터뜨리며 장창에 동조했고, 장창을 따라 봉기를 일으키니 그 무리가 수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서기 303
년의 일이다.
사마준(司馬駿) 초상화.
사마의의 7 남이다.
그런고로 장창은 진(晉)의 학정 밑에서 살아왔다는 얘기다. 진 왕조에 대한 반감은 컸을 것이고 거기다
본인의 야심까지 더하여 적당한 기회를 노리다 기어코 일을 낸 것이다.
근데 반란의 주체자이자 지도자인 장창은 왜 본인이 황제를 자칭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만 팔왕의 난에서 황족들이 제멋대로 황제가 되었다 비참하게 죽은 것을 봐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아니면 출신이 오랑캐라 많은 한(漢)족들 위에 군림하기엔 꺼림직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세력을 가다듬은 장창은 진(晉) 왕조와의 싸움을 계속해나간다. 여기서 일종의 심리전을 쓰는데
'조정에서는 강남의 사람들은 모두 봉기군이라 하여 모조리 살육하라 했다 카더라' 라는 식의 카더라
통신과 찌라시를 퍼뜨려 아직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로 붙게 만들어 그 무리가 무려 3
만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주 무대가 양주(楊州)였다.
도간(陶侃)의 초상화.
괴리에서 괴로워하다 <귀거래사>라는 시구만을 홀연히 남기고 낙향하여 자연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양주(楊州)의 반역자 브라더스인 석빙, 진민, 전회는 도간에게 죽었고, 두증과 호항은 저들끼리의
내분으로 두증이 호항을 살해하고 그 호항의 세력을 흡수한 두증은 토벌나온 진군(晉軍)을 차례로
격파하며 심지어는 명장(明將)이라는 도간도 한번 박살내기까지 한다. 한창 기세등등 했지만 결국에는
토벌당해 참수당하고 만다. 다만 두증은 그 이후로도 활개치다 동진의 토벌로 서기 319 년에 죽었다.
난(亂)을 피해 형주로 이주한 무리가 10 만여명이 넘었고, 고향을 떠나 대부분이 궁핍하고 가난하였다.
도적이 되어 소란을 피우자, 유홍은 그들에게 밭을 지을 땅과 종자(種子)를 주었고 그 중에 재능이 있는
자는 발탁하여 등용했다. - 진서 유홍전
첫번째 기록은 보시는 바 그대로고, 두번째 기록은 전란으로 인하여 식량이 부족하니 법으로 금지된 어업
(漁業)이라도 시행케 하여 백성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유홍의 뜻이다.
익주(益州)가 혼란해 나상(羅尙)이 별가 이흥을 파견해 양식을 요구하자, 유홍의 강기는 양식을 운반하는
길은 어렵고 형주에도 양식이 부족하다 하여 거절하고 영릉의 쌀을 주고자 했는데, 진남장군 유홍은 "
천하가 한 집안이니 서쪽을 돌아보아야 할 근심을 없애야 한다" 면서 3 만 곡의 양식을 보냈다. - 진서
유홍전
그 밖에도 그를 보여주는 기록들은 많다. 필자도 그 일화들과 기록을 모두 싣고 싶지만 그랬다간 졸지에 <
유홍전>을 작성하게 생겼으니 이만 이쯤에서 줄이겠다.
- 난(亂)의 종결 -
유홍이 유능한 지휘관이기도 했지만 뭣보다 장창(張昌)과 그 세력을 이루는 무리가 원래 목불식정의
무지한 유랑민들이었던 탓도 있다.
전편에서 서술했듯 장창은 황제를 옹립하고 정권을 세워 연호를 정하고 관직을 정하는 등, 나름의 제도를
갖추었다지만 그 관직에 임명된 인간들은 칭호만 장군이다 대신이다 하며 거창하게 갖다 붙인 무지렁이
농민들이나 유민들에 불과했을 뿐이다.
농사만 짓던 농민을 갖다가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하여 하루아침에 정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물고기나
잡고 살던 어부를 데려다 칼을 쥐어주고 장군으로 삼았다고 해서 병법에 능하고 싸움 잘하는 거 아니듯이,
장창이 세운 정권은 근본적으로 글러먹은 느낌이 농후했다.
이 상황에서 진(晉)의 소탕이 시작되어 자중지란으로 패색이 짙어져가던 장창군은 이 일격에 풍비박산으로
깨져버린다. 그 거대했던 세력에 비해 순식간에 무너졌다.
거의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팔왕의 난이라는 중앙에서의 뻘짓이 지방에서
불거진 장창의 난이 가속화 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랄까.
그러던 차에 자신의 치소(治所) 형주에서 장창의 반란이 일어나자 사마흠은 급하게 당시 대권을 쥐고 있던
사마영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그때 사마영은 장사왕(長沙王) 사마애(司馬乂)와 대치 중이었던지라
중앙에서의 병력을 함부로 뺐다간 자칫하면 힘의 균형이 깨져버릴 우려가 있었기에 사마흠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거기다 사마애가 사마영과 사마흠, 이 두 번왕이 편을 먹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시작해 관계를 의심당하자 이를 꺼려한 사마영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겉으로 보이도록
사마흠의 청을 묵살한 점도 있었다.
중앙에서의 지원을 받지 못한 사마흠은 할수없이 스스로의 병력만을 이끌고 장창을 요격하러 출전하지만,
병력의 열세로 인하여 패사하고 만다. 만약 사마영이 원군을 보내줬더라면 난 초기에 형주에만 국한되어
있던 장창의 반란을 초장에 진압하고 끝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중앙의 권력싸움이 지방에서의
반란을 외면하는 탓에 사태가 심각해진 것이다.
아무튼 서기 304 년 혜제(惠帝)의 대에에 진압된 장창의 난을 이후로도 반란들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307
년에 출범한 회제(懷帝) 사마치의 치세에까지도.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그 하나가 정강의 변이라 하여 북송(北宋)시대에 여진족의 금(金)이 쳐들어와 북송을 쳐부수고 황제를
포함한 황족들을 포로로 잡아버린 사건이고, 두번째는 토목의 변으로 명(明)나라 때 북원(北元), 즉
몽골이 쳐들어오자 이를 요격하러 나간 황제를 포함한 휘하 병력이 대패하고 정강의 변과 마찬가지로
황제는 사로잡힌 변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가 바로 영가의 난 되겠다.
중국의 한족 왕조가 그토록 오랑캐라 멸시하던 이민족들에게 단순 패하는 수준이 아니라 나라가
유린당하고 황제가 붙잡히는 수준의 수모를 당해 이를 굴욕사건이라 치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콧대높은
한족을 짓밟아드린 주인공들은 앞서 밝힌대로 여진족, 몽골족이었다.
- 흉노와 진(晉) -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가며 대했고 흉노도 저들 꼴리는대로 행동하여 중국에 시비걸거나 그들 장단에
맞춰주기도 했다.
아무리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흉노란 말은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중국사, 특히 고대 중국사에
있어서는 당시 고대 중국과는 실로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던 이민족이었다. 특별히 정해진 외교관계는
없었다. 다만 고대 중국의 역대왕조들이 당시의 대외정세나 형국에 따라 흉노를 윽박지르기도 하고
필요하면 구슬리는 식의 당근과 채찍 외교로 일관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정해진 원칙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예로부터 중국은 이 골치아픈 이민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여러가지 일을 벌였다. 당장 진(秦)의 시황제(始
皇帝)가 이 종잡을 수 없는 민족과 상종조차 아니 하려고 만리장성이란 담을 쌓았고,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도 흉노를 배척하여 정벌에 나서지만 되려 패하는 굴욕을 당하는 한편, 한(漢)의 무제(武帝)도
선조인 고조 유방의 흉노 정책노선을 밟아 강성해진 흉노를 짓누르기 위해 정벌하였으며 그 유명한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서역국들과 군사동맹을 맺고 흉노를 견제하고자 하기도 했다. 하지만 힘으로
제압하기가 귀찮아지자 이쁜 궁녀(궁녀의 이름은 왕소군이라 하여 그녀의 사연은 꽤나 유명하다)를 보내
달래며 유화책을 펼치기도 한다.
그리고 삼국시대 이후에 들어선 진(晉)에서도 조조의 대흉노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여 유지한다.
여기까지가 당시 진(晉) 치하의 흉노의 상황이다.
- 유연(劉淵) -
고간(高幹)이 원군을 요청하자, “나는 조조와 원수를 진일이 없거늘 어찌하여 조조와 나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는가?” 고 하며 고간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 삼국지연의
배경은 원소와 조조의 관도대전 이후, 조조가 원소의 아들들을 토벌할 때의 일이다. 원소 측의 장수인
고간이 조조에게 패해 쫓겨가 흉노족인 좌현왕 유표에게 도움을 청하자 유표가 거절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호주천이 조조로부터 관직을 수여받아 서기 216 년, 후한(後漢)으로 넘어가 선우자리가
비자 조조에 의해 선우로 임명된다.
꿈에서 깨어나 이 사실을 유표에게 말하니, 유표는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가평(嘉平) 연간, 아들이
태어났는데 왼손에 '연(淵)'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름을 '연' 이라고 지었다. - 진서 유원해(劉
元海)기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이어서 쓰는 유연(劉淵) 편.
- 유연(劉淵) 2 편 -
유연(劉淵) 삽화.
전 편에서도 그렇고 계속해서 '볼모생활' 이란 표현을 써 볼모로 보내진 흉노왕족의 자식들이 마치 푸대접
받으며 무시당하고 살았던 것처럼 느껴지는 감이 없잖아 있다. 실상은 그 반대다.
오히려 중국의 고위층 인사나 당대의 명사(名士)들, 나아가서는 황실의 황족들과도 교류시켜주며
황제와도 면대시켜주어 상류층의 삶을 영유하게 해줬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중국에 보냈던 흉노의 우두머리들이 자신의 자식들이 중국에서
대접도 제대로 못받으며 개고생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나올지를 한번이라도 생각해본다면 답은
나온다. 이 방침의 근본적인 목적이 우호적인 외교관계의 유지임을 감안한다면 매우 당연한 조치라 하겠다.
이런 연유로 유연의 진(晉)에서의 생활도 그리 녹록치는 않았다라는 것이다. 오히려 기록을 보면
유학생활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최유(崔游)에게 가르침을 받아 유교경전과 제자백가에 능했고 문무를 겸비하여 그 이름이 조정의 대신들과
황제가 논할 정도였다. - 진서 유원해기
가르침을 받아 문무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유연은 기록대로 조정은 물론이고 황제, 당시는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도 유연의 이름을 들을 정도였다고 하니, 실로 그 능력이 뛰어나기는 했었는 듯 하다.
어찌나 걸출한 인물이었는지 심지어 사마염은 유연에게 오(吳) 정벌까지 맡기려는 모습도 보인다.
왕제(王濟)가 대답했다.
왕제라는 신하는 참고로 삼국지연의에서 오(吳) 정벌 무렵에 짤막하게 나오는 왕혼(王渾)의 아들이다.
무제 사마염의 사위이기도 했다. 유연의 외모가 옛날 유여와 김일제라는 전대의 명신(名臣)들보다 낫다고
칭찬하자 왕제가 맞장구 치며 그 재능은 그들보다 한수 위라고 추켜세우는 장면이다. 그리고 당시 진(晉)
에서 계획하고 있던 오(吳) 정벌을 유연에게 맡기면 능히 해낼 것이라고까지 한다. 그리고 사마염은 진짜
그러려는 듯 옳다고 동의한다.
그 재능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은 또 있다. 사마염의 동생 사마유(司馬攸)가 유연은 훗날의 화가 될
것이니 미리 죽여 없애야 한다며 사마염에게 이를 권한 일이 그것이다. 유연이 들으면 뜬금없고 실로
당황스러운 얘기라 하겠는데, 사마유는 유연의 재능을 사전에 꿰뚫어보고 그런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물론 사마염이 죄없는 사람을 왜 죽이냐며 거절하기는 했지만. 훗날, 유연이 벌인 일들은, 이때 사마유가
사람보는 안목은 실로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었던 꼴만 되었음인데, 유연도 유연이지만 연재글에서
몇번 언급한 내용이지만 비범하기는 사마유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유연을 경계할 것을 당부한 사람들은 사마유 말고도 또 있었다. 바로 위에 싣은 기록인 사마염과 왕제의
대화와 이어지는 기록과 어느정도 이어지는 기록이다.
유연이 마지막 경우가 아니었나 싶다. 어쩌면 훗날 유연에 의해 벌어질 일들은 이때부터 예언되고
있었다고 볼 수있다.
아무튼, 유연의 이러한 진(晉)에서의 볼모생활도 아버지 유표(劉豹)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마땅히 그
후계자로서 죽은 선친의 뒤를 이어 좌부 흉노의 지도자 노릇을 해야 했기에 유연은 볼모생활을 마무리
짓고 다시 흉노의 땅으로 귀환한다. 유표의 정확한 사망년도는 알 수는 없으나, 다만 태강(太康 : 진
(晉)의 연호로, 서기 280 년~289 년, 약 10 여년간 사용된 연호) 말엽에 진(晉)이 흉노 5 부(部)에
설치한 도위(都尉) 중 하나인 북부도위(北部都尉)가 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그 무렵이 아닐까
싶다.
흉노의 지도자 겸 진(晉) 왕조의 관직을 받아 자신의 부족을 다스려 나간 유연의 통치가 훌륭했는지,
무제 사마염의 사망 직후, 당시 대권을 틀어쥔 양(楊)씨 세력으로부터 그 실적을 인정받아 나중에는 흉노
5 부 전체를 총괄하는 '오부대도독(五部大都督)' 으로 승진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팔왕의 쟁패가 시작될 무렵, 진(晉)의 연호로는 원강(元康) 말년, 즉 서기
298~299 년 경에 유연은 다시 진(晉)으로부터 영삭장군(寧朔將軍)이란 벼슬을 하사받아 진나라의 영내인
기주(冀州)라는 주(州)의 주도(州都), 업(鄴)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는다.
서술한대로 한창 진(晉)이 팔왕의 난 시기에 접어들 혼잡한 무렵에 유연은 진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유연은 덩달아 팔왕의 난에 참전하게 된다.
자신의 부족, 흉노를 군림하는 종주국으로서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수하고 선진문물과 제도를 보유했던
선진국 진(晉)을 성장하는 청소년기에 경험하며 그 위압감에 눌려 경외심까지도 생겼을 유연이다. 하지만
그 잘나가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저들끼리의 내분으로 흔들리고 있으니 기분이 어떠했을까.
맥수지탄의 심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허무감은 들지않았을까 싶다. 한때라고는 하지만 잠시나마
몸담고 있던 나라였으니까. 그러나 유연도 이민족. 어디까지나 진(晉)은 외국에 불과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한탄할 일은 그 나라의 백성인 한(漢)족의 몫이지, 이민족일 뿐인 유연에게는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다만 잘나가던 나라 하나가 망해가는 것을 보고 느꼈을 것은 다만 하나, 이 당시 여타
이민족들이 품었을 생각, "아, 얘네도 별거 아니네."
그래서 호연유(呼延攸 : 유연이 남흉노의 왕가인 호연씨와 결혼했음은 전편에서 언급했다. 이 호연유는
유연의 아내인 호연씨의 동생으로, 유연의 처남이 된다)라는 사람을 보내 유연을 모셔오게 한 것이다.
사실상 이때부터가 유연의 본심이 드러나는 때라 할 수있다. 그동안 몸소 팔왕의 난을 겪으며 진(晉)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여 훗날의 야망을 이룩하기 위하여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리고 그
야망이 흉노의 재건과 진(晉)을 몰아내는 것임을 우리는 암묵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지금 두 진(鎭 : 사마등과 왕준을 이른다)이 발호(跋扈 : 제멋대로 날뛰며 행동하다라는 뜻)하여
무릿수가 십만 남짓에 달하니 숙위병과 도읍 가까이의 사서(士庶 : 사족(士族)과 서민을 의미, 즉 병력)
로는 능히 막아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전하를 위해 제 근거지로 되돌아가 흉노 5 부(五部)를
설득하여 국난을 돕게 해 주십시오."
사마영이 말했다,
원해(元海)가 말했다.
"전하께서는 무황제(武皇帝 : 사마염)의 아들로서 황실에 공훈을 세우고 위엄과 은혜가 빛나 사해(四海)
가 전하의 풍도를 흠모하니, 어느 누가 전하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몸을 던질 것을 생각지 않을 것이며,
어찌 흉노 5 부를 동원하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왕준은 어린 놈의 풋내기이고 사마등은 전하와는 촌수 가
먼 남일 뿐이니 어찌 전하와 더불어 다투어 경쟁한다 하겠습니까!
해석하자면 이렇다.
유연 : "당신이 낙양으로 후퇴해서 격문을 띄워본들 싸움도 피하고 도망온 겁쟁이 놈의 격문을 누가
보겠습니까. 되도 않은 소리요. 글고 우리 흉노 무시마시오. 같은 오랑캐라 해도 격이 있소이다. 선비나
오환따위는 아침 해장국 거리에 불과한 놈들이니 내가 흉노 5 부의 병력을 이끌고 와서 사마등, 왕준
머리를 날리는 것이나 구경하시오."
이리하여 유연은 비로소 사마영의 허락을 받고 고향 흉노 5 부(部)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종조부
유선을 필두로 한 흉노 족장들의 추대를 받아 서기 304 년, 대선우로 추대되니 흉노족 전체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 흉노의 한(漢) 건국 -
흉노 땅으로 돌아와 부족의 추대로 대선우(大單于)가 된 유연(劉淵)이 먼저 하려했던 일은 한때 자신이
상전으로 모시던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을 돕는 것이었다.
유연이 흉노의 5 부(部)를 원군으로 끌고 오겠다는 핑계로 고향 땅으로 도주해버린 이후, 사마영은 왕준
(王浚)의 고용한 선비(鮮卑)족의 공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여 근거지 업(鄴)도 잃고 낙양(洛陽)으로까지
혜제 사마충을 끼고 후퇴하는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다. 마치 유연이 사마영 세력의 모든 것이었던 것처럼,
모양빠지게 유연이 빠지자 마자 처참한 패배를 당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이 소식을 접한 유연은
이렇게 말한다.
"내 말을 듣지 않더니 도리어 스스로 달아나 뿔뿔히 흩어지니 참으로 형편없는 놈이로구나. 그러나 내가
그와 더불어 했던 말이 있으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 진서 유원해기
사마영을 뜨자마자 대차게 까버린 유연이다. 그래도 알던 정 보던 정이 있었는지 돕고자 마음먹고 왕준의
용병대인 선비(鮮卑)족을 공격하려 들자, 일찍이 유연을 추대한 장본인이자 종조부이기도 한 유선(劉宣)
이 나서서 만류한다.
해석하자면 이렇다.
거기다 유연이 사마영을 도와 선비족과 오환족을 치려하자, 선비, 오환족과는 오히려 친하게 지내야지
어째서 진(晉)을 도우려 하냐며 반대하고, 마지막 문구에 '하늘을 거스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고
주는데도 취하지 않으면 재앙을 입는다' 라는 말은 왕(王)이나 황제(皇帝)를 칭하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대개 역성혁명 세력이나 혁명의 무리가 천명하고 줄곧 내세워 관용적으로 쓰이곤 하는표현이다. '지금의
군주가 덕이 없고 무능하니 하늘이 우리에게 새로운 군주를 세우라 명하였기에 이렇게 군주를 새로
세운다' 이런 식이다.
솔직히 어디까지나 혁명세력이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고 타당함을 알리기 위한 말이다. 행동으로 보이기
전에 거치는 절차의식이랄까. 이는 고대 중국이나 중세, 근세를 구분할 것 없이 역성혁명으로 왕조나
정권이 교체될 때 항상 이 표현을 써 그 혁명세력의 명분과 그 타당함을 광고하곤 했다.
'진인(晉人)들이 꼭 우리와 같은 마음은 아닙니다. 한(漢)이 오랫동안 천하를 소유하여 인심에 은덕을
맺었으니, 이 때문에 소열(昭烈)은 고작 한 주(州) 땅에서 기구한 처지였음에도 천하에서 능히 맞설 수
있었습니다.'
-> 진나라 백성들은 우리끼리 황제다 왕이다 하며 세운 나라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진(晉)의 백성들의 인심을 얻어야 한다고 결론을 도출지었고, 민심을 얻어 성공한 사례를 드는데,
사례의 주인공은 한(漢)의 소열(昭烈), 한(漢)은 흔히 아는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한(漢)
나라가 아니라 삼국시대 촉한(蜀漢)을 의미한다. 고로 소열(昭烈)은 촉(蜀)의 군주, 유비(劉備)다.
소열(昭烈)은 유비의 시호다. 즉, 소열제(昭烈帝)가 유비의 시호가 되겠다.
아시다시피 유비는 익주(益州)에다 촉(蜀)을 세워 삼국의 한축을 마련한 군주다. 위(魏)나 오(吳)가
여러개의 주(州)를 거느린 반면에 촉(蜀)나라는 겨우 익주(益州) 한개 주 뿐이었는데, 그런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삼국의 한 국가로서 팽팽하게 대결을 벌이지 않았느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유비가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나 또한 한씨(漢氏)의 외손이며, 흉노와 한(漢)은 일찍이 서로 형제의 맹약을 맺었으니, 형이 망하면
동생이 잇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한(漢)을 칭하며 후주(後主)를 추존한다면,
인망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여기서 유연은 자신이 한씨(漢氏)의 외손이며, 흉노와 한(漢)은 서로 형제의 맹약을 맺은 바가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의 유래는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흉노를 토벌할 때의 일에서 비롯되었다.
한(漢)나라 초 무렵에 흉노의 묵돌(冒頓)이라는 선우(單于)가 있었는데 이 묵돌이 평소 한(漢) 왕조에
위협이 되자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묵돌을 토벌하고자 했다.
하지만 싸움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오히려 유방은 백등산(白登山)이란 곳에서 흉노의 병력에 포위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고민 끝에 묵돌에게 화친을 제안하여 이 위기상황을 벗어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밝히지 않았던 내용이기도 한데, 여기서 기인하여 한(漢) 왕조의 성씨인 유(劉)씨를
성으로 하는 흉노족이 생겨난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명색이 형제지간이니까 성씨도 응당 같아야 하지
않겠냐는 얘기도 있었고 뭣보다 유방이 황실의 공주 한명을 묵돌에게 시집보내, 그 이후로 흉노왕족 중
일부는 이것을 이유들어, 자신의 성씨가 유(劉)씨라고 자처하고 다녔다고 한다. 당장 유연(劉淵)만
봐도 성씨가 유(劉)씨다. 유연의 아버지 유표(劉杓)도 그렇고.
그리고 이 논리는 이후 유연이 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를 한(漢)으로 정하는 계기가 된다. 동생이 형의
국호를 계승했다는 원리였다. 그리고 비단 국호 뿐 아니라 그 정통성까지도 계승했다고 역설하기까지
하는데, 그 계보는 다음과 같다.
삼국지에도 나와있듯이, 유비(劉備)는 자신이 한(漢) 왕조 황족의 후예라고 자처한 인물이다. 실제로 그
족보가 맞는지 틀린지는 논외로 두고 훗날인 서기 220 년, 위(魏)의 문제(文帝) 조비(曺丕)가 후한(後
漢)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를 몰아내고 후한(後漢)을 멸하자 유비는 자신이 한나라 황족의 후예임을
내세워 후한(後漢)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한(漢)으로 정한다. 역사에서는 구별을 위해 흔히 '촉한
(蜀漢)' 이라 부른다.
유비가 그러했다. 조비에 의해 쫓겨난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를
제사지내고 추존하여 '민제(愍帝)' 라 시호를 올림으로서, 촉한(蜀漢)만이 후한(後漢)을 계승하는
정통왕조이며, 헌제(獻帝)를 추존하고 제사지내는 유비 본인만이 헌제의 뒤를 잇는 정통 황제라고
만천하에 보란듯이 천명한 것이다.
유연도 똑같았다. 유비가 그랬듯, 유연도 훗날, 한(漢)을 건국한 후에 전대의 한(漢) 왕조인 촉한(蜀漢)
의 마지막 황제, 유선(劉禪)을 효회황제(孝懷皇帝)라 시호를 올려 추존하고 제사를 직접 거행함으로서 그
정통성을 표면화 시키고자 했다.
유연(劉淵)은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 왕(王)을 자칭하니, 이것이 흉노의 한(漢) 정권의 시작이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 흉노의 한(漢) 정권 -
그리고 하늘이 화(禍 : 재앙)을 내려 잠시 한(漢) 왕조가 무너졌었지만, 한(漢)을 멸망케한 하늘이 이제
그 잘못을 뉘우쳐 한(漢)을 부흥시키고자 진(晉)의 사마씨(司馬氏)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었으며 촉한(蜀
漢)이 멸망한지 40 여년 만에 이제 우리의 한(漢) 왕조가 대통을 이어받았다라고 천명한다.
유요(劉曜).
이렇게 지리멸렬한 싸움이 계속해서 오가는 가운데, 한(漢)의 신하들이 유연에게 진언한다.
신하의 진언대로 정권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그 영역은 겨우 병주(幷州)를 비롯한 각 주(州)의 조금씩을
차지한 땅들 뿐이었고 진정 진(晉)의 중앙이라 할 수있는 중원(中原)은 아직까지 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총공격을 감행하여 제대로 진(晉)과 맞붙어보자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석륵(石勒).
왕미(王彌)나 석륵(石勒)은 흉노의 한(漢) 정권의 연재를 마치고 영가의 난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흉노를
제외한 다른 이민족 세력이나 군벌들을 다루는 편에서도 좀더 깊게 살펴보려한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흉노족이 진(晉)을 부정하여 한(漢)을 세우고 대립할 무렵, 제국의 각 지방에서도 반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국의 서쪽, 익주(益州)는 이미 이민족인 저족(氐族)의 나라가 세워져 상실한지 오래였고,
형주(荊州), 양주(楊州)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장창(張昌)을 대표로하는 여러 민중봉기들도 진압된지
5 년도 채 안되었을 때였다.
팔왕의 난을 종결짓고 제위에 오른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의 대에는 거의 사실상 중앙에서의
통치력을 상실했다 봐도 무방했을 정도로, 제국의 전역은 각 이민족 세력과 진(晉)의 신하였지만, 이제는
독립을 도모하는 군벌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석륵(石勒).
석륵은 오늘날 투르크계 민족인 갈족(羯族)이라 했다. 혈통이 서쪽동네인 투르크계 쪽이니 만큼, 갈족(羯
族)은 본래 중국을 무대로 하는 종족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들을
지배하던 흉노(匈奴)족이 서기 1~3 세기 경에 내란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그 무리의 대다수가 중국으로
이동했다고 전해진다. 이때의 중국은 삼국시대로, 갈족(羯族)의 대부분이 위(魏)로 복속되었다. 석륵의
조상도 이때 넘어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기 307 년에 흉노의 유연이 진(晉)을 공략하여 병주(幷州)를 점거하자, 역시
병주에 있던 석륵은 은근한 압박을 느끼고 휘하의 무리를 거느리고 떠오르는 강자인 흉노의 한(漢)에
투항한다.
그리고 영가의 난에도 따라 종군하여 한(漢)의 무장으로서 진(晉)을 박살내는데 앞장선 양반이기도 했다.
이건 나중에 다룰 내용이고..
이렇게 중원이 시끄러울 무렵, 진(晉)의 동북쪽 변방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영녕(永寧) 연간(서기 301 년)에 연(燕) 땅에서 홍수가 나자 모용외가 창고를 열어 식량을 베풀어 유주
(幽州) 땅이 구제되었다. - 진서 모용외전
그리고 영가의 난이 시작되자 그때도 해왔던 것처럼 진(晉)에게는 뜨뜻미지근한 충성을 보이며 한편으로는
실리를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건 나중에 다룰내용이다.
팔왕의 난 말 무렵부터 영가의 난이 시작되는 시점까지 이 석륵이나 모용외 외에도 각지에서 일어난
이민족들은 여럿있다. 옹주(擁州)에서의 저족(氐族) 부홍(苻洪), 강족(羌族)의 요익중(姚弋仲) 등,
똑같이 진(晉)이 영가의 난으로 피떡이 되는 도중에 독립한 부류다. 그리고 이들 지도자들은 모두 각각
훗날 5 호 16 국 시대에 세워진 이민족 국가들의 시조이기도 하다.
반면에 이민족이 아닌 한(漢)족이면서도 독립하려 든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본래 지방의 주자사(州刺
史)거나 해당지방을 지키는 장군들이었는데 나중에는 그 지방에 눌러앉아 근거지로 삼은 군벌들로 탈바꿈
해버린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어느 나라 역사를 보아도 나라가 혼란스러워지면 그 나라 내부로부터 분열이 일어나 붕괴가 시작되곤 한다.
이 당시의 진(晉)도 그랬나보다.
이민족들이 진(晉)의 혼란을 틈타 반란을 일으켰듯이, 진(晉) 내부에서도 그러한 조짐이 보였던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전편에서 밝힌 내용이기도 하지만 독립하여 군벌을 이룬 이들은 대부분은 본래 진(晉)의
신하들이었다.
당시에는 이 주자사들 뿐만 아니라 기타 자잘한 반란들도 많았다. 심지어는 마을을 다스리는 일개 현령(縣
領) 따위가 들고 일어난 사례로 있으니, 내부분열의 상태가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진
왕조가 만만했던 탓도 있고.
왕미(王彌) 같은 경우는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출신은 본래 진(晉)을 섬기는 신하는 아니었지만, 지방의
유력호족이었다. 앞서 장창(張昌)의 반란을 다루면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기도 하다. 장창의 난이 진압될
무렵, 왕미는 유백근이라는 일개 현령(縣領)이 진(晉)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한다. 그리고
왕준(王浚 : 바로 위의 왕준이고, 전에 사마등과 연합하여 흉노의 유연과 싸운 그 왕준이다)의 관군(官
軍)이 토벌하여 유백근을 죽이고 그 무리를 작살내버리자 왕미는 잔당을 이끌고 청주(靑州)의 산악지대로
숨어든다.
일찍이 팔왕의 난 시절부터 번왕들의 싸움에 개입해, 어느 번왕을 지지했는지는 알 수없으나, 흉노의
유연의 한(漢) 정권을 수립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면서 나온 장면이기도 한 동영공(東嬴公) 사마등(司馬
騰)과의 연합으로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과 싸우는 모습이나, 이 사마등이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의 동생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사마월을 지지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 무렵쯤에는 이미 흉노의 한(漢)이 세력을 확장해 진(晉)을 침공함으로서 영가의 난이 발발했을
때였고, 왕준 역시 한(漢)에 크게 패한다.
그가 진(晉)을 무시하는 군벌로서의 뚜렷한 행보를 보이는 때는 훗날, 진(晉)이 장안(長安)에 고립되어
전조(前趙 : 흉노의 한(漢)은 나중에 조(趙)라는 국호로 바뀐다))에 의해 고립되었을 때다. 당시 황제
민제(愍帝) 사마업(司馬業)이 주위의 주자사(州刺史)들에게 SOS 를 치지만, 나라 따위는 개나 줘버려
심보로 이미 독자세력을 이루어 군벌화 되어버린지 오래였던 왕준을 비롯한 다른 주자사들은 fuck↗you↘
로 축약할 수 있는 반응을 보여준다. 그나저나 스포일러 했다..
나중에 진(晉)의 멸망을 다루면서도 나올 내용이지만, 왕준 외에도 위에서 언급한 최비(崔毖)와 장궤(張
軌)가 이와 같은 부류였다. 저마다 각지에 꼼짝않고 진(晉)이 멸망하는 것을 앉아 구경만 했다.
물론 번왕들 대부분은 팔왕의 난으로 죽어 그 숫자가 거의 없었지만, 황실에 황족이 아예 없을리는 없다.
몇몇 황족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있었는데, 아직도 팔왕의 난 시절의 이기주의 심보를 못잊었는지, 영가의
난으로 조상의 나라가 이민족들에게 박살이 나 황제고 백성이고 다 갈려나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봉국에서
꼼짝않고 도움의 손길하나 거의 내밀지 않은 것이다.
신하들로부터도 버림받고 심지어는 나라의 지도층을 이루는 황족들에게조차 외면받은 진(晉)이라는 국가를
보자면 참 등신같은 나라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게 진(晉)을 건국한 사마씨(司馬氏)의 업보인지
운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진(晉)이 멸망한 이후에도 병주에서 하북(河北)에서의 진(晉) 백성들이 도륙나는 것을 막으려 애썼고
훗날 독자정권을 이룩한 석륵과 전조(前趙)에 항거하며 수차례 항복권유에도 나는 진(晉)의 신하이니
개소리 마라라는 식으로 일갈했다고 한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영가의 난 전후의 진(晉)은 앞에서 쭉 살펴보았듯이,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제국의 각지는 반란으로 들끓고 있었다. 팔왕의 난으로 병력을 거의 소모해버린 중앙에서는 이를 모두
막을 방도가 없어 각지의 주자사(州刺史)이나 번왕들에게 거의 위임하다시피 떠넘겨 버렸고 이들은 이를
기회로, 암암리에 독립과 자치를 도모하며 점차 진(晉)과는 별개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유총이 이끄는 이 주력군 외에도 유연은 기주(冀州) 상산군(常山君)이란 곳에서 주둔하고 있던 석륵(石
勒)도 별동대로서 따로 보내 양갈래에서 협동작전을 펼치게 한다.
한편, 흉노(匈奴)가 발족하여 어느새 사주(司州)까지 진출해 낙양까지 넘본다는 소문을 접하고만 있던 진
(晉)의 조정에서는 당시 실질적 군책임자이자 승상(丞相)으로서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을 보좌하던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 이를 요격할 군사를 낸다.
한(漢)의 공격요도
진(晉)의 요격요도
핑크색 : 수도 낙양
여기서 '왕사(王師)' 란 진(晉)의 군대를 의미한다. 기록대로 교전은 진(晉)의 대패로 끝이난다. 패인이
수적열세인지 아니면 전술이나 지휘에서의 실책인지는 기록에 나와있지 않아 모를 일이지만 첫싸움부터 진
(晉)은 패했다.
작전상 후퇴했지만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낙양(洛陽)을 사방으로 포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발
깨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리는 정성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하늘이 그와같은 유총의 기도를 무시하기라도 했는지, 이번에도 다시 진(晉)의 반격에 운이
따른다.
동해왕 사마월이 참군(參軍) 손순(孫詢), 장군 구광(丘光), 누부(樓裒) 등에게 명하여 휘하의 경졸(勁
卒 : 굳세고 강한 병졸) 3 천여명을 이끌고 선양문(宣陽門)으로부터 호연랑(呼延朗)을 공격해 베어
죽였다. 유총이 이를 듣고 급히 돌아왔다. 유려(劉厲)는 유총이 패전의 책임을 물어 자신을 처벌할까
두려워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 진서 유원해기
진(晉)은 앞서 낙양성 근교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내친김에 유총의 한(漢)군을 격파한다. 유총의
휘하부장들인 호연랑은 난전 중에 전사하고 유려는 패전의 책임을 추궁받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낙수(洛
水)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만다. 작년에 이어 낙양을 코앞에 두고 또다시 패한 것이다.
아직은 진(晉)의 방어가 견고하니 일단은 돌아가 나중에 다시 치러 오자는 왕미의 권유에 유총도 마땅히
방도가 없다 여겼는지 한(漢)의 수도, 평양(平陽)으로 회군한다. 그리고 기록에서 보듯, 왕미는 일찍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私兵) 병력을 데리고 따로이 연주(兗州), 예주(豫州)에서 머무르며 훗날을
기약하겠다고 한다. 사실 말이 '군사를 모으고 곡식을 거두겠다' 는 것이지, 왕미는 그길로 연주,
예주를 유린했다. 도적출신이라 그런지 그런 분야는 훗날에 보이는 석륵의 모습과 비교했을때 석륵과
더불어 전문가이지 싶다.
유총은 이미 환군하고 있었을 것이고 유총에게 말한대로 예주(豫州), 연주(兗州)에 있던 왕미는 사마월의
공격으로 쫓겨나 다시 평양(平陽)으로 돌아온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한(漢)이 제국의 동부를 무참히 짓밟고 있다는 소식은 진(晉)의 조정에도 전해졌겠지만, 당시의 실질적
군책임자, 동해왕(凍海王) 사마월(司馬越)은 아무런 조치도 못 취하고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수도권 사주(司州)도 거의 포위되어 지키기도 벅찬 상황인데 그 먼곳까지 지원군을 보낼 여력도, 수단도
없었을 터이다.
진(晉)의 치하에서 억압받으며 보잘 것없던 흉노(匈奴)의 지위를 단기간에 상승시켜 진(晉)을 무너뜨릴
것을 천명했던 지도자답게 끝까지 진(晉)을 몰아세우던 중에 얻은 죽음이었다.
일찍이 유연은 병으로 드러누워 오늘내일 할 때부터 미리 유화를 태자로 책봉하여 후계자로 정한지
오래였는데다, 여러 종친왕들과 대신들에게도 탁고(託孤 : 후계자를 부탁함)하여 자신의 사후에도 뒷말이
없도록 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바람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화(劉和) 자신이 분란을 조장하고 원인을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로서의
입지는 굳건했고 여러 종친왕들이나 대신들로부터도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유연의 여러 아들들이자
유화와는 이복형제들인 여러 번왕들이 제각기 강대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던 점을 두려워하고 시기하여
이들을 제거하려 든 것이다.
아무튼,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행동으로 옮긴 거사인지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뜻밖의
배신자로 인해 유화의 계획은 어그러지고 만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 영가의 난(永嘉之亂) -
유연(劉淵)의 뒤를 이은 소무제(昭武帝) 유총(劉聰)은 선제(先帝)의 유지를 착실하게 받들어 진(晉)에
대한 맹공을 퍼붓기 시작한다.
진(晉)의 연호로 영가(永嘉) 4 년(서기 310 년), 10 월. 유총은 석륵(石勒)을 보내 진(晉)의 남부,
형주(荊州)까지도 정벌케 했다. 형주의 주도(州都), 양양(襄陽)과 형주의 여러 군(郡)들과 현(縣)들이
모두 석륵에 의해 점거당하니 이렇게 진(晉)은 또 하나의 주(州)를 상실하게 되었으니, 한(漢)이
결국에는 낙양(洛陽)을 동서남북으로 포위한 형국이 되고야 만 것이다.
이렇듯 진(晉)의 숨통을 끊어버릴 기세로 한(漢)의 공격이 시작될 무렵에 진(晉)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이러한 악행들은 집권초기에 사마월이 팔왕의 난으로 피폐해진 국정을 되살리려 애쓰는 모습으로 뭇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덕망과 인망을 싹 날아가게 해버린 계기가 되어버렸고, 이는 결국 영가의 난으로
사마월이 한(漢)의 공격을 막을 병사를 모병하는 데에 있어서 민심이 호응하지 않아 병력을 모으지 못한
실패한 원인이 되어 한(漢)과의 싸움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물론 이전의 무제(武
帝) 사마염(司馬炎)이 시행한 병력 축소정책에 의해 전국의 병력이 대폭 감소한 탓도 있고 무엇보다
팔왕의 난으로 제국의 병력을 죄다 날려먹었기에 근본적으로 군사 숫자가 적긴했다. 하지만 외침이라는
국난이 닥쳤을 때 다른 문제도 아니고 지도자에 대한 민심이 호응하질 않아 군사를 모으지 못해 적에게
박살이 났다라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예전의 그런 실수를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 한(漢)의 침공에 사마월은 동서분주하며 대응하기에 바빴다.
애초에 유연(劉淵)의 흉노(匈奴)가 거병했을때도 자신의 친동생인 (앞에서 나온 그 사마등이 맞다)
신채왕(新蔡王) 사마등(司馬騰 : 예전의 동영공 사마등이다. 작위가 올라 신채왕이 되었다)을 병주(幷
州)로 보내어 막게하고 양왕(梁王) 사마략(司馬略)이나 남양왕(南陽王) 사마모(司馬模 : 예전의 평창공
사마모다) 등의 번왕들을 주요 요충지나 전선으로 보냈고, 그리고 자신은 직접 군을 이끌고 낙양(洛陽)
에서 그리 멀지 않은 허창(許昌)에 주둔하여 전황을 관망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다.
당시 번왕들의 주둔상황.
갖은 스트레스로 인하여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진 나머지 사마월은 병을 얻어 골골하게 되는데 그래도
끝까지 허창에 주둔하며 군무를 보았다고 하니, 진짜 애가 타기는 했던 모양이다.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
- 낙양(洛陽) 함락 -
서기 311 년.
작년에 출정했던 유총(劉聰)이 이끄는 한(漢)의 주력군은 낙양(洛陽) 공략을 시작했고, 그 와중에 한
(漢)군의 별동대로서 연전연승 공을 세우고 있는 석륵(石勒)은 계속해서 진(晉)의 수비군을 깨뜨리고
있었다. 기록만으로 보면 석륵은 이곳저곳 왔다갔다 하며 닥치는대로 다 깨부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파괴본능이 있는지, 되는대로 동서남북 다 돌아다니며 일단 다 때려부수고 본다.
그리고 직후에 위에서 사마월의 최후에 대해 싣어놓은 기록에서도 나오듯이, 진류태수 왕찬이란 사람에게
패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북으로 갔다가 또 한번 흔들어 놓고 예주(豫州)로 내려간다.
사마월 휘하의 신하들은 섬기던 주군의 죽음에 마땅히 그 시신을 모시고 고향 땅(사마월의 영지는 동해(東
海)였기에 동해로 간다고 하는 것이다)에서 장례를 치루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왕연(王衍).
군사들은 태위(太尉) 왕연(王衍)을 후임이 되도록 추천하여, 왕연은 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 - 위서
석륵전
그 무리의 구성원들은 실로 다양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황족부터 대소신료에다 부호, 백성들까지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낙양에서 거주하던 이들이었다. 나라에 큰 화가 닥칠 것을 예감이라도 했는지 이를
피하고자 덩달아 왕연의 피난민 무리를 따른 것인데, 훗날 낙양(洛陽)의 함락을 예고라도 하는 듯한
전조이기도 했다.
근데 문제는 왕연이 생전에 사마월이 거느리고 있던 10 만여명의 병력까지도 그대로 데리고 갔다는데에
있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사마월은 수도 낙양을 방어하고자 낙양 수비군을 가까운 허창에 주둔시켜 둔
것인데, 낙양을 수비할 주력군을 죄다 데리고 가버리면 막말로 낙양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군사들에 백성들까지 이리저리 뒤엉켜 혼잡한 상황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재촉하는 무리 뿐이었다. 그래서 석륵은 이들 모두를 다 죽여버린다. 진(晉)군은 말할 것도 없고 황족,
신하, 백성들까지 다 포함해서 10 만여명이 모조리 몰살당했다.
석륵 : "그대는 젊어서 조정에 입조하여 그 이름이 사해를 덮을 정도였고, 지금도 태위(太尉)라는 중요한
관직에 몸담고 있거늘, 어찌하여 출세할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는가? 천하를 망친 자가 그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 십팔사략
그리고는 포로로 끌려온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묻자 모두들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고
한다. 석륵은 이에 왕연을 비롯한 고위인사 48 명을 담장에 앉혀두고 돌담을 무너뜨려 압사시켜 버렸다.
석륵(石勒).
일화에서 보여지는 그대로다. 석륵의 질문에 왕연은 두려운 나머지 "나는 나라나 정치 같은거 몰라요ㅜ
살려주셈ㅜ 그리고 님이 황제나 왕이 되시면 제가 도와드림" 이라는 망발을 해버렸고 석륵 曰, "출세는
관심도 없다는 놈이 국방부 장관질이냐? 나라 망친 놈들 주제에 입만 나불대기는." 하며 죽인 것이다.
사실 진(晉)이 망한게 왕연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왕연의 말대로 뭣보다 팔왕의 난이라는 병크가 나라를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석륵은 그걸 방치한 고위층들에게 그 책임을 물었고, 그와
같은 석륵의 일침에 할말이 없어진 진(晉)의 고위인사들은 대꾸한번 못하고 모두 살해당하고 만 것.
명색의 한 국가의 고위인사라는 사람이 내뱉는 말이 고작 그 정도니 나라가 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그리고 서기 311 년, 5 월.
그리고 다음달인 6 월.
그 뿐만 아니라 왕미는 진(晉)의 역대 황제들의 능(陵)을 훼손하고 도굴하기도 했는데, 이 바람에 진(晉)
의 시조인 사마의(司馬懿)나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 등의 능이 크게 훼손되어 오늘날에 복구하기까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 진(晉)의 굴욕 -
진(晉)의 연호로 영가(永嘉) 6 년, 서기 312 년.
포로로 잡혔던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를 비롯한 진(晉)의 신하들은 한(漢)의 수도, 평양(平陽)에
도착한다. 승리자 소무제(昭武帝) 유총(劉聰)은 포로일행을 잘 대접해주며 의식주에 불편함이 없게
조치해줬다.
더구나 유총과 사마치는 구면이었는데, 예전에 유총의 아버지인 유연(劉淵)이 진(晉)의 흉노정책에 따라
볼모로서 잠시나마 진(晉)에서 생활했던 것처럼, 유총도 똑같이 진(晉)에서 볼모생활을 했을때 아직
예장왕(豫章王) 시절의 사마치를 한번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오랑캐의 왕자가 대국 진(晉)의 왕(王)을 알현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어 승자와 패자가 만나는 자리가 되었다. 유총은 연회를 열어 사마치를 초대해 대화를 나눈다.
씁쓸해지는 일화라 하겠는데, 사마치에게 지금의 위치와는 달랐던 시절, 과거의 일을 꺼내 기억하냐며
묻는 유총의 말은 짖궂다 못해 사마치에게 치욕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거기다 "너네 어쩌다
그리되었누?" 라는 유총의 질문에 "우리끼리 치고박은 팔왕의 난은 다 너희 한(漢)나라가 하늘의 뜻을
받은 나라이니까 우리가 너희를 위해 알아서 자멸한거다." 라 하는 아부성 짙은 대답을 하는 사마치의
심정도 얼마나 굴욕스러웠을지도 대강 짐작이 간다. 하지만 뒤이어 은연 중에 속내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우리가 내분없이 있었더라면 네깟것들이 감히 그 자리에 올랐을 수나 있었겠냐?" (근데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러나?) 라는 사마치의 비꼼에 유총도 그건 인정하는지 감명받아 더 이야기한다.
그리고 유총은 사마치에게 자신이 평소에 아끼던 애첩을 사마치의 부인으로 주었다고 한다.
해가 바뀌어 서기 313 년.
그리고 사마치에게도 불똥이 튀어, 그 역시도 당시 병주(幷州)에서 한(漢)에 항전하던 진(晉)의 장수,
유곤(劉琨 : 18 편에 나왔던 그 유곤이다)과 내통한다는 죄명이 씌워져 독살당하고 만다.
포로로 잡혀있던 사마치마저 죽임을 당해 이제 진(晉)은 완전히 멸망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명맥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진(晉)이 한(漢)에 의해 짓밟히고 깨졌다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중원에만 해당하는 일이었다.
이후, 서진(西晉)이 멸망하자 강남의 호족들의 지지를 받아 그 대통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제위에 오른다.
다만, 한(漢)에 대항할 여력이 없었다라는 점에서 보았을때는 거의 멸망한 것과 다름없긴 했다.
- 민제(愍帝) 즉위 -
회제(懷帝)가 사로잡혀 끌려간 이후로, 난에서 살아남은 신하들은 다시 항전할 구심점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그 구심점이란 다른 황족을 의미했는데, 하지만 팔왕의 난을 거쳐 대다수의 황족들이 죽어나갔고
그나마 남아있던 황족들도 왕연(王衍)을 따라 도망가다 석륵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한데다 영가의 난을
마지막으로 역시 여럿이 피해를 입어 거의 남아난 황족이 없는 실정이었다.
이 형제의 주도하에 진(晉)의 신하들은 사마업을 군주로 추대했고 항전의 구심점으로 삼아 진(晉)을
부흥시키려고 했다.
장안(長安)은 다시 수복되었고 사마업과 그 휘하의 신하들도 장안으로 옮겨와 조정을 차려, 비로소
임시조정을 수립할 만한 기반을 마련한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고는 하나, 상황은 암울했다. 언제든지 한(漢)의 대군이 들이닥쳐 끝장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형국인데다, 무엇보다 민제(愍帝)정권의 세력이 너무나 미약했기에 불안한 요인은 산재했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 최후의 노력 -
장안(長安)을 수복하고 수립된 민제(愍帝)정권은 말이 진(晉) 제국이지 이제는 제국이란 표현을 쓰기도
애매할 정도로 일개 지방정권에 지나지 않는 수준의 규모였다. 지배하는 영역도 장안(長安)과 관중(關中),
옹주(雍州)의 일부 뿐이었던지라.
그러나 옹주(雍州)의 그 일부조차도 확실한 장악이 의심되는 판국이었다. 코앞의 장안(長安)에 진(晉)
세력이 있는걸 알면서도 옹주(雍州)의 이민족들이 대놓고 독자적으로 작위를 자칭하고 심지어는 한(漢)과
접촉하여 손을 잡으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리된다면 양쪽으로 갇혀 협공당할
우려가 있었기에 진(晉)으로서는 그것만은 피해야 할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그 이민족들의 수장들은 각각 저족(氐族)의 부홍苻洪)과 강족(羌族)의 요익중(姚弋仲)이었다.
전편에서도 한번 언급한 인물들이기도 한데, 영가의 난으로 진(晉)이 완전히 무너지자 그 틈을 타
복속에서 벗어나 독립했던 터였다.
민제(愍帝)가 즉위(서기 313 년)하고 새로이 정한 연호는 '건흥(建興)'. 일으키고 흥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만으로도 당시 민제(愍帝)의 의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민제(愍帝)정권의 당면과제는 언제든지 쳐들어올 수있는 한(漢)을 막아낼 병력을 충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자체적으로 병사를 양성하자니 오랜 전란으로 인하여 당시 장안(長安)에는 가구 수가 100 여호
가량 밖에 없는 실정이었던지라 인구가 부족해 그 또한 불가능했다. 거기다 물자도 부족해 수레도 4 대
밖에 없었고 조정에서 사용하는 관복이나 도장과 같은 관청물품도 부족한 마당이었다.
결론은 주위의 도움을 받는 방법 외에는 그 어떠한 자구책으로도 정권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장궤(張軌)는 민제(愍帝)의 요청에 응하여 병력을 보내어 장안(長安)을 수비하는데 조력하고 이후의 한
(漢)의 잇달은 침공에도 몇번 군사를 보내 돕게한 유일한 조력자였다.
- 마지막 발악과 최후 -
장궤가 여러모로 도와준 것이 기록에 나와있다. 전세는 계속해서 엎치락 뒤치락 하며 바뀌고 있었다.
군사만 보내면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던 진(晉)이 의외로 수차례 공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텨내자 유총
(劉聰)은 전략을 바꾼다.
하지만 남양왕(南陽王) 사마보(司馬保)의 권유를 두고 조정에서는 의견이 갈린다. 논쟁의 초점은 사마보
(司馬保)를 믿어도 되겠는가의 찬반다툼이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의 도움의 손길을 뿌리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기라도 하듯, 상황은 민제(愍帝)
정권에게 좋지 않게 돌아가 다음해에 이르러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친다.
장안성(長安城) 평면도.
그나마 밖에서 장궤(張軌)의 원군이 돕고자 멀리 양주(凉州)에서 달려오긴 했지만 장안(長安)을 둘러싼
한(漢)군의 에움이 워낙 두텁고 강했는지라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하고 만다.
그나마 남아있는 식량은 사람들이 서로 앞다투어 사려들어 그 값이 끝없이 치솟아 쌀 한말이 금 몇푼에
거래되기까지 했다.
식량이 없기는 조정도 마찬가지인지라 민제(愍帝)도 쌀죽으로 연명하며 외성(外城)을 탈환할 계획을
세우지만, 버티다 못해 결국 그해 11 월, 항복을 결심한다.
유총은 사냥나갈때 민제(愍帝)로 하여금 그 곁에서 시중드는 몰이꾼 짓을 시키고 연회에서는 회제(懷帝)
처럼 술 시중을 들게 하여 갖은 모욕을 주었다.
서기 318 년 무렵, 한(漢)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일종의 민중 봉기였는데 그들이 내세운 목표 중 하나가
유총의 아들, 태자 유찬(劉粲)을 몰아내고 그 태자 자리에 민제(愍帝)를 앉혀 복위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민제(愍帝)의 존재 자체가 훗날의 화근이 될 것이라 판단한 유총은
결국 민제(愍帝)를 처형한다. 서기 318 년의 일이다.
그리고 훗날, 동진(東晉)의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에 의해 민제(愍帝)로 추존되었다.
존속기간 동안 제국은 지배층의 사치와 향락, 그리고 권력싸움 등으로 대표되는 타락으로 인하여 발생한
내란으로 국정은 피폐해졌고 민생은 불안해져 수많은 민중 봉기를 불러왔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 동진(東晉) 건국 -
구상해오던 일이란, 그들의 주군이자 사마씨(司馬氏) 진(晉) 왕조의 마지막 황족, 낭야왕(琅耶王)
사마예(司馬睿)를 황제로 옹립하여 멸망한 진(晉)의 대통을 잇게 하는 일이었다.
왕도(王導).
- 5 호 16 국 시대(五胡十六國 時代)의 시작 -
서진(西晉) 멸망 후에 화북(華北)지방에 도래한 5 호 16 국 시대(五胡十六國 時代)를 다 다루려면 한개의
연재 시리즈를 써도 모자랄 만큼
먼저 한(漢)부터 살펴보자.
지도에서 보이듯 화북(華北)에는 진(晉)을 멸하고 들어선 한(漢 : 지도에서는 전조(前趙)로 나와있다)이
지배하고 있었다.
서기 318 년, 한(漢)의 소무제(昭武帝) 유총(劉聰)은 말년에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중에는 망국의 황제,
민제(愍帝)를 죽이는 등 황음무도한 행각들을 벌이다 사망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이는 소무제(昭武帝) 유총(劉聰)의 차남, 은황제(隱皇帝) 유찬(劉粲)이었다.
그러나 은제(隱帝) 유찬(劉粲)도 황제가 될 그릇은 못되었는지 '주색에 빠져 정사는 멀리하는' 전형적인
혼군의 면모를 보여 곧 외척세력의 반정으로 폐살되고 만다.
다음으로 황제가 된 사람은 유총(劉聰)의 사촌동생이자 진(晉)과의 전쟁에 참전하여 활약했던 유요(劉曜)
였다.
전조(前趙)와 후조(後趙)의 싸움은 서기 324 년 무렵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석륵(石
勒)의 탁월한 재능 덕택에 전세는 후조(後趙)쪽으로 기울어갔고 전조(前趙)는 여러 주(州)를 상실한 채,
수도는 장안(長安)으로 천도하고 영역은 관중(關中)일대로 좁혀진다.
승리에 도취해 방심한 나머지 석륵(石勒)의 반격으로 크게 패하고 본인은 포로로 잡힌 후 처형당한다. 이
전투에서 패한 전조(前趙)는 사주(司州)에서의 주권을 잃고 장안(長安)으로 후퇴했으며 석륵(石勒)은
사주(司州) 일대를 석권하고 전조(前趙)를 관중(關中)일대로 몰아넣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안(長安)을 탈환할 기회를 엿보지만 곧 후조(後趙)의 토벌군에 의해 무너지고 유희(劉
熙)와 전조(前趙)의 신하들은 사로잡혀 머지않아 처형당하니 서기 329 년, 전조(前趙)는 멸망한다.
전량(前凉)의 최대 강역.
지금까지 보면 여전히 멸망한 진(晉)을 따르는 제후국처럼 보이고 16 국 중 하나였던 독립국가 전량(前凉)
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적어도 장식(張寔) 이후로 집권한 장무(張茂 : 장궤의
아들. 장식의 동생이다)의 대까지는.
장준(張駿).
성한(成漢)의 강역.
여기서 성한(成漢)이 무슨 나라를 말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시련가 모르겠다. 하지만
눈썰미가 있으신 분들이라면 윗글에 첨부된 여러 지도들을 보고 짐작하셨을 법도 하다. 성한(成漢)은
예전에 다룬 성(成) 정권이다. 뒤에 '한(漢)' 자가 붙었는데 이는 나중에 국호가 한(漢)으로 고쳐지기
때문에 초기의 국호인 성(成)과 말기의 국호 한(漢)을 붙여 통틀어 '성한(成漢)' 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듯이, 성(成)은 이웅(李雄)의 죽음을 기점으로 급격한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다름아닌 후계자 문제때문이었다.
이웅(李雄).
성한(成漢) 왕조 가계도.
그러나 그 수많은 친아들들을 다 제쳐두고 조카를 후계자로 삼으니 이웅의 아들들이 반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웅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고 그저 불만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곧 훗날의 화근이 된다.
애시당초 이반(李班)이 제위에 올랐을 때부터 정변은 예고되어 있었다. 눈치때문에 아버지 이웅이
사망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이웅의 아들들이 눈엣가시 같던 이반을 가만둘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적당한 기회를 노리던 차에 오히려 이반(李班)이 그 기회를 제공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보이고 만다.
무엇보다 정사를 멀리하여 나라가 제대로 안돌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정변의 명분이 되었으리라.
반역의 주모자 이기(李期)는 기회를 노려 이반(李班)이 혼자 이웅의 빈소에 머물러 있는 틈을 타 군사를
보내 죽여버리니 이때가 서기 334 년으로, 본격적으로 성한(成漢)이 몰락하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했다.
이기(李期)는 원하는 대로 황위에 앉았지만 그도 애초부터 황제의 자리에 앉을 그릇이 못되는 인물이었다.
그가 재위기간 내내 골몰한 일이라고는 다른 황족들을 숙청하는 일 뿐이었다.
이렇게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며 나라가 휘청거리는 가운데, 동진(東晉)의 정벌로 멸망하니, 그때가 서기
347 년이다. 총 5 대 43 년만에 단명한 나라였다.
그동안 연재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필력이 모자라는지라 어디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거나 그런 부분들
양해부탁드리고요. 예전부터 위진남북조 시대에 관심갖고 공부해왔던지라 파고들 수록 흥미롭고 재밌는
부분들이 많은 것 같아 다른 사람과 공유해보자는 생각에 어쩌다 심심풀이로 역게에다 한번 써본 글이
결국은 스무 몇편에 걸쳐 쓰게 되었네요. 그냥 '아 이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로 이해해주시고 즐기셨길
바랍니다. 다시한번 읽어주셔서 감사하단 말씀드리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이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그 숱하게 생겨났던 나라들 가운데 혼란을 종결짓고 화북(華北)을 통일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전진(前秦)이라는 나라였다.
왕맹(王猛)의 초상화.
지도 출처 : 야스페르츠님의 블로그
당시 전진(前秦)군의 진군도.
김칫국 마시는 부견이었다. 그만큼 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고 상대적으로는 동진(東晉)군을
얕보고 있던 것이다.
이렇듯 전진(前秦)이 동진(東晉)을 씹어먹을 기세로 대군을 동원해 쳐들어 오는동안 동진(東晉)에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었을까.
사안(謝安).
복잡한 지명(굳이 알고싶다면 위 지도를 참고하기 바란다. 지명이 명시되어 있어 참고하면서 기록을 보면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알 수있다. 다만 다른 곳에서의 전투는 윗 지도에서 확인할 수 없고
바로 그 위의 지도에서 확인가능)들이나 관직들은 볼 것 없고 그저 여러 전선에서 전진(前秦)군이 승세를
타고 있었다는 것만 알면 된다.
지금까지의 전황을 정리해서 이때 부견이 보낸 서신의 내용을 보자면, 너희는 병력이 두개로 분산되어
우리를 당해낼 도리가 없는데다 그나마 한갈래 병력도 식량이 없으니 이길 수가 없다. 그러니 항복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서(朱序)라는 이에게 그 서신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겼는데, 이것이 부견(苻堅)이 범한 치명적인
실수 첫번째가 되었음은 부견(苻堅) 본인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평온초(가입:2012-12-18 방문:1691)
2013-12-22 04:51:59 추천 0
2013-12-22 16:33:21 추천 0
나를 토해 베스트로!!!
★안될놈(가입:2009-02-05 방문:1391)
2013-12-22 16:39:40 추천 1
★불량좀비(가입:2011-04-07 방문:629)
2013-12-23 12:46:21 추천 0
정말 감사 합니다
굉장히 재밋네요.
댓글쓰기
리스트 페이지로
뒤로가기
PC 버전
맨위로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앞의 내용은 1 부 참고 :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
table=history&no=13142&s_no=13142&page=1
낙간(洛間)을 수비하던 전진(前秦)의 장수, 양성(梁成)은 잠결에 일어나 허둥대다가 날아든 유뢰지(劉牢
之)의 칼에 목숨을 잃었고 우두머리를 잃고 우왕좌왕 하는 전진(前秦)군도 대패하여 달아나 동진(東晉)
군은 대승을 거둔다.
동진(東晉)의 반격로.
그러나 내심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부견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마치 부견에게 보라는 듯이 엄중히 정돈된
진영과 빼곡히 둘러친 목책들, 그리고 우뚝 솟은 망루들이었다. 더구나 산 아래에 진영을 차렸기에 그
풀숲에 가려진 동진(東晉)군의 숫자도 가늠할 수 없었다. 마치 팔공산 일대가 동진(東晉)의 군사로
가득찬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를 본 부견은 탄식했다.
이윽고 운명의 시간은 다가와, 전진(前秦)의 본군은 비수(淝水)에 도착했다. 다만 강을 건너지는 않았고
강편에 머무르며 도전해오는 동진(東晉)군을 맞으려 했다.
사현(謝玄)의 동진(東晉)군도 비수(淝水)로 접근해 진영을 내리니 양국의 병력은 비수(淝水)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른바 회전(回戰)의 구도로 양측이 위치한 것이다.
기록대로다. 이렇게 서로 선빵날리기를 주저하니 차라리 너희가 뒤로 빠져서 우리가 들어올 공간을
마련해주고 거기서 승부를 보자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가뜩이나 병력에서 열세인 쪽에서 상대가 넘어오길 바라기도 모자랄 판에 왜 먼저 넘어가서 싸우자고
덤비는가?
어찌보면 주객이 전도된 꼴이었다. 공격해온 쪽은 지구전을 펼치려 하고 오히려 방어하는 측에서
속전속결로 끝내자고 덤비고 있으니 말이다.
사현(謝玄)의 서신을 받아본 부견(苻堅)은 응하기로 한다. 그러자 전진(前秦)의 장수들은 모두 하나같이
반대하며 분명 동진(東晉)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런 부견을 말렸다. 저들 눈에도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부견도 통일전쟁을 치루며 전장에서 늙은 노련한 사람이었다. 동진(東晉)군의 속셈이 뭔지는 몰라도 되려
그것을 역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부견의 응답에 동진(東晉)군은 비수(淝水)를 건너기 시작했고 전진(前秦)군은 요구대로 진영을 해체하고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어찌된 일인가 하니, 전에 부견의 명령으로 항복을 권유하는 서신을 가지고 동진(東晉)군의 진영으로
찾아갔을 때부터 주서는 이미 동진(東晉)으로 귀순했었다. 첩보를 일러준 것도 그렇고 또 원래 출신이
동진(東晉)의 항장출신이었고 자기 스스로도 동진(東晉)의 신하라 여기고 있었다.
그랬기에 동진(東晉)의 진영에 항복을 권유하는 사자로 찾아갔을 때부터 사석(謝石), 사현(謝玄)과 함께
모의하여 이러한 일련의 계획들을 세웠던 것이다.
으앙! 졌음ㅠㅠ
그때 사안(謝安)은 한가롭게 집에 찾아온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동생이랑 아들, 조카는
전쟁에 내보내고 정작 자기는 바둑질?)
하지만 조정에서 보낸 서신을 받아본 사안(謝安)은 의외로 담담했다고. 이에 관련된 일화를 소개해보면..
손님이 묻는다.
"무슨 서신입니까?"
사안(謝安)이 대답했다.
"자식놈들이 적을 물리쳤다는군요."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흥분한 나머지 신발굽이 부딪혀 부러진 줄도 몰랐던 사안이었다.
이후 손님이 돌아가자 사안은 그제서야 태도를 바꾸어 흔들리던 이가 빠질 정도로 기뻐 날뛰었다고 한다.
비수대전이 있고 난지 불과 10 여년만이었다.
서기 395 년의 판도.
한차례 대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정세의 변화까지 불러온 비수대전이기에 중국에서는 천하를 바꾼 전투라
하여 3 대 대전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추천수가 10 이 될때 베스트유머로 자동등록됩니다.
(단, 비공감수가 3 이하일 때)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0
[본인삭제]말뚝(가입:2011-09-13 방문:1226)
2013-12-23 14:02:26 추천 0
★지나가다슬쩍(가입:2013-04-30 방문:654)
2013-12-23 17:30:07 추천 0
훌륭한 전투네요.
★평온초(가입:2012-12-18 방문:1691)
2013-12-24 01:47:52 추천 1
리스트 페이지로
뒤로가기
PC 버전
맨위로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바로 송(宋)이란 나라다.
여기서 국호가 동일한 관계로 역사에서는 앞서 말한 조광윤의 송(宋)과 구별하고자 이때의 송(宋) 왕조는
건국자인 유유(劉裕)라는 사람의 성씨인 '유(劉)' 를 붙여서 '유송(劉宋)' 이라 부른다.
워낙 인지도가 떨어지는 나라이니만큼 대강이나마 유송(劉裕)에 대해 설명을 해보자면..
삼국지연의로도 유명한 삼국시대를 통일한 나라는 진(晉). 그러나 진(晉)도 내란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뒤이어 갖은 이민족들이 침입해와 중국에 저마다의 나라를 세우는 이른바 5 호 16 국 시대가
도래한다. 한편 멸망한 진(晉)의 명맥을 잇고자 한족(漢族)들은 양자강 이남에서 다시 진(晉)을 건국하니
이가 곧 동진(東晉)이다.
하지만 이 유의륭도 나중에는 아들에게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이 역시 황족간의
골육상쟁 때문.
대충 감이 온다 하겠는데, 사실 감을 따지고 할 것도 없이 역대 황제들 중 대다수가 싸이코 내지
변태들이었기에 죄다 제 명에 못죽고 폐살당하거나 제위에서 쫓겨났다.
이유는 위에서 설명했다. 유자난이 끌려가면서 남긴 말은 "다음 생에는 다시는 황제의 자손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키는데로 순식간에 어리디 어린 이복동생을 살해한 유자업은 다음으로 평소에 벼르던
(?)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에게 복수하려 들었는데, 덩달아 은(殷)씨에게도 해코지한다.
그저 은(殷)씨가 자신이 싫어하는 유자난을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는 초상화를 그리는 화공을 불러다가 초상화 속 아버지의 코를 빨갛게 칠하라 명령했다. 화공이
명령한대로 코를 칠해놓자 유자업은 그제서야 만족하며 다시 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 사건 이후로 유자업은 자신의 패륜짓엔 한계란 없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너는 어질지도 못하고 불효를 저지르는 놈으로, 황제의 자격이 없다. 네 아비또한 난폭하고
황음무도하여 하늘과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샀고 너 또한 그러하다. 앞으로는 문황제(文皇帝 : 3 대 황제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의 자식들에게 황제를 맡겨야겠다."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
산양왕(山陽王) 유휴우(劉休佑).
이 세명의 숙부들은 살려다가 말 그대로 갖고 놀았다. 궁 안에 가두고 갖은 모욕과 고통을 주며 이를
즐겼다고 한다.
유자업은 유휴인의 말에 옳다고 말하며 죽이려는 것을 멈췄고 그렇게 유욱은 살아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렇게 조카놈에게 비참한 꼴을 당하는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은 유자업 다음으로
즉위하는 제 6 대 황제 태종(太宗) 명제(明帝)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0
★진보랏빛일몰(가입:2013-12-22 방문:339)
2013-12-24 15:11:51 추천 4
★미완성면상(가입:2007-01-23 방문:780)
2013-12-24 15:24:40 추천 6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콩국수(가입:2013-05-14 방문:633)
2013-12-24 16:09:41 추천 1
항상 감사합니다.
★칼립소(가입:2013-08-24 방문:1252)
2013-12-24 17:18:28 추천 4
★알아?(가입:2013-02-06 방문:977)
2013-12-24 18:30:53 추천 5
궁녀들에게 개, 말, 돼지, 원숭이 등과..........음.......여기까지...-_-;
샹그렐라(가입:2013-05-23 방문:1386)
2013-12-24 18:37:16 추천 2
★나가리~(탈퇴)
2013-12-24 18:26:28 추천 0
카르스킨(가입:2012-08-14 방문:1690)
2013-12-24 18:37:38 추천 3
★대단한토끼(가입:2013-02-15 방문:438)
2013-12-24 19:30:02 추천 0
오 신기하다;;;
★리볼버오셀롯(가입:2011-03-12 방문:3242)
2013-12-24 21:12:42 추천 4
2013-12-25 05:14:48 추천 0
댓글쓰기
리스트 페이지로
뒤로가기
PC 버전
맨위로
자그마니님 반갑습니다.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1 편 : http://todayhumor.com/?humorbest_805697
여담으로 말하자면 이전까지는 선양한 망국의 마지막 황제를 잘 대접해주는 것이 관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때부터 선양 받은 후에 전직 황제에게 칼침을 놓는 전통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개국황제 증조부의 눈물겨운 노고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발언이었다. 그저 인간말종 유자업의 눈에는
더럽고 추잡한 물건들로 가득찬 창고에 불과했던 것.
선대 황제이자 유자업의 아비인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도 일찍이 자신의 사촌누이를 탐하여 애까지
낳았음은 앞서 전편에서 밝혔다. 그나마 저 혼자 그랬더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겠는데 문제는 유송(劉宋)
의 역대황제들 중 여럿이 그러한 성향을 보였다는 데에 있다. 근친행위를 벌여서가 아니라 유독 색(色)을
탐하는 모습이 종종 보여서인데, 그냥 일족의 유전자가 그리 생겨먹었는지는 몰라도 유송(劉宋)의
황제들은 물론이고, 다른 황족들까지 그러한 모습을 보여 색골집안임을 증명했다.
말이 필요없다. 그냥 막장이다.
훤칠하고 단정한 용모로 당시 송(宋)에서 최고의 미남으로 불리우던 '저연(褚淵)' 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찌나 잘생겼는지 궁중의 관료들이나 외국사신들도 그의 외모를 보고는 감탄하며 그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근데 왜 아쉬워 하지?)
유자업은 누님의 요청에 응하여 그날로 저연을 불러다가 유초옥에게 넘겨준다. 사실 저연(褚淵)도 문제
(文皇帝) 유의륭(劉義隆)의 딸, 남군공주(南郡公主)와 혼인하여 황실의 어엿한 부마(사위)였고 촌수로
따지면 막장남매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하지만 친오누이 간에도 근친행위를 일삼는 남매가 그런 걸
신경이나 썼겠는가.
결국 완강하게 나오는 저연을 못당해낸 유초옥(劉楚玉)은 포기했고 저연은 정절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근데 뭔가 바뀐 느낌이다?
"비록 남녀가 다르다고는 하나, 폐하와 신첩(臣妾 : 유초옥을 말함)은 모두 선대 황제의 혈육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후궁을 수없이 거느리시고 신첩(臣妾)은 부마(사위) 한명 밖에 없으니 이 얼마나
불공평한 일입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 고모를 황후로 책봉하려 들었는데 사건의 전말을 모두 들은 신채공주(新蔡公主) 유영미
(劉英媚)의 남편이자, 유자업에게는 고모부인 하매(何邁)가 대노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들자 숙청해버리고
마치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이 그러했듯 주위의 시선을 고려해 고모의 성씨를 '사(謝)' 씨로
고치며 황후로 책봉하지만 고모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숙부의 어머니면 제아무리 친 조모(祖母)가 아닐지라도 자신에겐 어쨌거나 조부모 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숙부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 짓을 시켰다고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유휴인(劉休仁)의 표정이나 행동에 조금이라도 불손하고 불편한 기색이 돌면 즉각 둘다
죽이겠다는 협박과 함께.
그 밖에도 인간의 탈을 쓰고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행위들을 일삼으며 여러 친척일가 황녀(皇女)들을
범했다. 개중에는 유자업의 근친행위 요구를 거부하여 분노한 유자업에 의해 죽어나간 이도 여럿 있었다.
명제(明帝) 유욱(劉彧)은 즉위하자마자 폭군의 잔재부터 청산하려 했다. 자신을 돼지취급하며 멸시와
모욕을 준 조카놈과 관련된 것들만 보면 치가 떨렸을 터.
명제(明帝) 유욱(劉彧)도 그게 옳다 여겼는지 건의를 받아들여 유자업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룬다.
하지만 시호나 묘호는 없었다.
아무튼, 명제(明帝) 유욱(劉彧)의 즉위로 비로소 혼탁했던 정치가 바로 잡히고 숙청의 피바람에서부터
벗어나 황실이 편안해졌는가 하니, 그건 아니었다.
비록 전대인 유자업의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워낙 유자업이 가공할만한 일들을 벌여놔서) 명제(明帝)
유욱(劉彧)의 대에도 선대의 잔혹함은 이어져 숙청의 피바람은 계속 불었고 덩달아 조카의 방탕함과
음란함까지 물들었는지, 명제(明帝) 유욱(劉彧)도 폭군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잔인함에 있어서는
유자업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라는 것이 후세의 평이다.
즉, 송(宋) 왕조는 지도자 황제는 물론이고 여러 황족들의 정신머리가 괴상하여 못살겠다 갈아엎자 해서
황제를 갈아치워도 결국엔 그놈이 그놈이라는 식으로 결말이 나버려 그렇게 악순환이 거듭되다가 8 대 59
년 만에 단명해버린 왕조라 하겠다.
추천수가 10 이 될때 베스트유머로 자동등록됩니다.
(단, 비공감수가 3 이하일 때)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평온초(가입:2012-12-18 방문:1691)
2013-12-25 15:08:20 추천 6
2013-12-25 15:31:01 추천 8
★viper76(가입:2013-04-17 방문:1298)
2013-12-25 16:33:01 추천 0
★carrak(탈퇴)
2013-12-25 16:45:53 추천 1
2013-12-25 17:56:32 추천 0
★레미으앙(가입:2013-01-12 방문:694)
2013-12-25 18:18:27 추천 0
우와아아아ㅏ...;;;;;;;;
중국 왕실 보면 참...;;;;;;;;;;;;;;;
콩국수(가입:2013-05-14 방문:633)
2013-12-25 18:43:49 추천 0
백구한접시(가입:2012-05-14 방문:2528)
2013-12-25 18:49:32 추천 0
★얼굴이유머(가입:2013-07-01 방문:1146)
2013-12-25 19:06:41 추천 7
2013-12-25 19:41:06 추천 0
★때리지않아요(가입:2012-04-09 방문:587)
2013-12-25 20:04:05 추천 0
Harintz(탈퇴)
2013-12-25 21:27:17 추천 0
저거랑 같은유쓰는데 때고싶다 진심 ㅠ
★로아나(가입:2011-07-09 방문:1445)
2013-12-26 03:06:50 추천 0
★viper76(가입:2013-04-17 방문:1298)
2013-12-26 10:50:32 추천 0
리스트 페이지로
뒤로가기
PC 버전
맨위로
베오베베스트게시판별베스트최신글
북조(北朝)의 북제(北齊), 북주(北周)로부터의 맹공에 선방하며 오히려 반격으로 영토를 넓히는 치적을
거두었다.
이렇듯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조정에서 업무를 보니 정치에 있어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을 수밖에.
그래서 아예 정사를 신하들에게 위임해버렸는데, 결국 암군 곁에 꼬여든 간신들의 손에 조정의 일이
넘어가버리니 이들이 선정(善政)이란 걸 베풀리가 만무했다.
종친, 조정대신, 환관을 가리지 않고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이 바람에 뜻있는 선비들은 관직에 등용되지를
못할 뿐더러 간신들과 뜻을 함께하는 자들만 조정에 입조했으니 이들이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나라 꼴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숙보가 노상 즐기고 하는 것이라고는 연회와 문인들과 술마시며 시 짓기,
화원에 나가서 수목이나 꽃 감상하기와 같은 것들이었다.
장려화(張麗華).
어찌나 총애했는지 조정에서 대소신료들과 회의를 할때도 장려화를 용상에 함께 앉혀 무릎에 앉히고
했다고.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장려화는 그 위세로 나중에는 조정의 일에도 간섭하여 진숙보를 졸라 기존의
태자를 폐위시키고
진숙보는 토목공사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무능한 군주들이 벌이는 전형적인 행사로 여겨지는
일이기도 했다. 우선 세개의 누각을 세우게 했는데 각 탑의 규모는 높이 수십 장(丈), 너비는 수십 칸에
이르렀는데 그 이름은 임춘각, 결기각, 망선각이라 했다.
비서감 부재란 신하의 상소다. 내용에서 보듯이 현재 나라의 실태를 고발하여 경각심을 일깨워주고자 올린
충성어린 상소였지만, 대개 망국지군이 그러하듯 씨알도 안 먹히고 부재는 오히려 대노한 진숙보에 의하여
처형당하고 만다.
위에서 주재가 상소문의 마지막에서도 경고했듯, 이처럼 난국을 겪는 진(陳)을 예의주시하며 노리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북조(北朝)를 종결짓고 화북(華北)을 통일한 수(隨)나라였다.
서기 560 년의 판도.
빨간색 : 진(陳)
파란색 : 북제(北齊)
하늘색 : 북주(北周)
분홍색 : 서위(西魏)
수(隨)군의 대규모 남하에 진(陳)의 방어라인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패퇴를 거듭한다. 전선은
속수무책으로 계속 밀렸고 위급을 알리는 파발마가 연신 수도 건강(建康)으로 날아들었지만 이미 황제의
눈과 귀를 막은 간신들에 의해 도중에 묵살되기 일쑤였다.
그러다 결국 그제서야 수(隨)의 대군이 몰려온다는 급보가 진(陳)의 조정에 도달했지만 진숙보는
사태파악도 못하고 그와 같은 장계를 듣고도 별거 아니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평소 수(隨)로부터의 공격을 우려한 신하들의 진언에도 "우리 두 나라는 그동안 평화롭게 공존해 왔다.
어찌 저들이 우릴 침범한단 말인가?" 하며 큰소리만 떵떵치던 치곤 했던 그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장강의 천험함만 철석같이 믿고 있던 진숙보는 이 급보를 접하자 소스라치게 놀라 어쩔 줄 몰라하며
밤낮으로 울기만 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수(隨)군이 진(陳)의 백성들에게 환영받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진(陳)에 대한 민심이
좋지 못한 것을 이용한 수(隨)군이 찌라시를 뿌려 악독한 진(陳)가 놈들을 끝장내러 왔다고 선전하고
다닌 탓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서술했듯이 평소 진(陳)악정에 시달리던 진(陳)의 백성들은 수(隨)군의
바램대로 쌍수들어 환영했으니 이래저래 자국민들로부터도조차 지지 못받는 실정이었다.
오오 님이 막아줄거임??
소마가(簫摩訶)의 아내가 미인이었는지 진숙보가 색(色)을 탐하는 성격을 못버리고 소마가의 아내에게
집적댄 것이었다.
아내가 궁중에 갇혀 있으며 황제라는 호색한이 밤낮으로 희롱하고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소마가는 분통이 터지다 못해 기가 막혀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일말의 충성심도 싹 가셔버린 소마가는 오랫동안 생각하던 끝에 수(隨)군에 대한 저항을
그만두기로 하고 퇴각해버린다.
마지막 방어선인 소마가가 뚫려버리자 수(隨)군은 바로 진(陳)의 수도, 건강(建康)으로 진격해 들어갔고
결국은 수군은 건강에 입성하는데에 성공한다.
수(隨)군이 궁성 안으로까지 들어와 진숙보를 찾을 때, 진숙보는 애지중지하던 장려화(張麗華)와 손귀인
(孫貴人)이라는 후궁을 데리고 궁중의 어느 우물 안으로 숨어 있었다고 한다.
보다못한 진숙보가 "나 여기있어! 꺼내줘!" 라고 외치고 나서야 그 소리를 들은 수나라 병사들에 의해
구조(?)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리하여 남북조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고 수(隨) 왕조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수(隨)의 천하통일.
시대 : 중국 동진(東晉)
국가적 상황 : 큰 위기를 넘김
본론입니다.
통이 난 황제는 몇 마디 말을 던집니다.
황제를 질식사시킵니다.
력과 손을 잡게 되니 황제가 매일 술에 찌들어 살때 대신
합니다.
시대 : 춘추시대
魏, 조趙 세 나라로 갈라지며(한씨,위씨,조씨의 세 명의
다.
국가 : 위衛나라
군주 : 위衛 의공
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집하려고 합니다.
위해 뛰어들지만 곧 그는 죽습니다.
시신의 행방을.
의 소식을 듣고 말합니다.
라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 중 아랍사람이 남긴 기록입니다.
죽고 싶은가?"
고 싶습니다."
사했습니다.
습니다.
중국의 삼국시대 위, 촉, 오의 세 나라의 끝은 촉나라는 위나라에 의해서
하를 통일하게 됩니다.
* 선양
: 덕이 많은 자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보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옛적 요임
색된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과를 낳게 될지 두고 볼 일입니다.
니다.
2. 황제보다는 미소년!
니다.
니다.
‘역적 조왕 윤을 토벌한다’
니라 형의 세 아들(조카)까지도 죽여버립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3. 8 왕의 난 정리
1. 용어에 대한 야매 해석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선 용어부터 대강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영가’라는 말은 연호입니다. 연
라고 납득하시면 될 듯 해요.
2. 동해왕 사마월과 황제 회제
동해왕 사마월이 황제 회제의 후견인역을 맡았지만 실상 정권은 사마월의
3. 흉노족 독립하다.
해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4. 영가의 상란
받습니다.
다는 것입니다."
들과 회제를 죽여버립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회제(283~313)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민제는 살해당합니다.(317 년)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민제(300~317)
<!--[if !supportEmptyParas]--> <!--[endif]-->
8. 서진과 동진 그리고 5 호 16 국 시대
(추가)서진의 계보 서진(265~317)
1 대 - 무제 사마염
2 대 - 혜제 사마충
3 대 - 회제 사마치
4 대 - 민제 사마업
니다.
다)
국가였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 참고용
5 호 16 국
<!--[if !supportEmptyParas]--> <!--[endif]-->
흉노족이 건국한 나라
전조(304 ~ 329)
북량(397 ~ 439)
하(407 ~431)
선비족이 건국한 나라
전연(307 ~ 370)
후연(384 ~ 409)
서진(385 ~ 431)
남량(397 ~ 414)
남연(398 ~ 410)
한족이 건국한 나라
전량(301 ~ 376)
서량(400 ~ 421)
북연(409 ~ 436)
저족이 건국한 나라
성(304 ~ 347)
전진(351 ~ 394)
후량(386 ~ 403)
강족이 건국한 나라
후진(384 ~ 417)
갈족이 건국한 나라
후조(319 ~ 351)
기를 쓰겠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1. 전조(前趙)와 후조(後趙)
르게 됩니다.
1. 쌍각양(雙脚羊)
2. 백성징발
1 만여명이라고 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3. 어찌하여 오로지 나쁜 아들만 낳아서 나이가 20 세만 넘으면 번번히 아
염민(? ~ 352)
1. 건국
2. 폭군 부생
부생은 애꾸눈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인 부홍이 그런 부생(부홍에게는 손자)
을 놀립니다.
하냐?”
물입니다.”
것을 그만둡니다.
망하는 말은 없사옵니다.”
니다.
내치를 닦고 이제는 밖으로 영토를 도모할 때가 왔습니다. 미리 양해의 말
다.
4. 왕맹
앗아 가는가!
고 합니다.
왕맹(325 ~ 375)
6. 왕맹에 대한 평가
어느 역사학자는 19 세기까지의 중국의 위대한 정치가를 관중(관포지교의
7. 맺음말
(추가)
이해해주세요.
교훈을 담고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다.
노여움을 산 것이 아닙니까?
정말입니까?
입니다.”
인드라는 간다르바(건달바)를 부르며 말합니다.
니까?”
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쟁을 하려고 합니다.
2. 부견의 믿음
누가 나를 배반하겠는가?”
3.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
다.
4. 전쟁 시작
5. 동진의 대응
마음껏 공격하십시오.
크게 패합니다.
로 돌아옵니다.
8. 동진의 승상 사안
동진
1. 건국(317 ~ 420)
니다.(322 년)
2. 노란 수염의 똑똑한 황제
다.
4. 안제(安帝)
입니다. 그의 나이 36 살, 재위 22 년이 되겠습니다.
5. 공제(恭帝)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죽여주게.”
음 또한 좋지 않습니다.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할 때 도척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쓰게 됩니다. 도
말합니다.
공제(386 ~ 422)
6. 동진 멸망
시작입니다.
7. 맺음말
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서위 - 북주 - 수나라북조 : 북위 - 동위 - 북제(북주에 멸망) 남조 : 송 - 제 - 양 - 진(수나라에
멸망)
바로 송(宋)이란 나라다.
여기서 국호가 동일한 관계로 역사에서는 앞서 말한 조광윤의 송(宋)과 구별하고자 이때의 송(宋) 왕조는
건국자인 유유(劉裕)라는 사람의 성씨인 '유(劉)' 를 붙여서 '유송(劉宋)' 이라 부른다.
삼국지연의로도 유명한 삼국시대를 통일한 나라는 진(晉). 그러나 진(晉)도 내란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뒤이어 갖은 이민족들이 침입해와 중국에 저마다의 나라를 세우는 이른바 5 호 16 국 시대가
도래한다. 한편 멸망한 진(晉)의 명맥을 잇고자 한족(漢族)들은 양자강 이남에서 다시 진(晉)을 건국하니
이가 곧 동진(東晉)이다.
하지만 이 유의륭도 나중에는 아들에게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이 역시 황족간의
골육상쟁 때문.
이유는 위에서 설명했다. 유자난이 끌려가면서 남긴 말은 "다음 생에는 다시는 황제의 자손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키는데로 순식간에 어리디 어린 이복동생을 살해한 유자업은 다음으로 평소에 벼르던
(?)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에게 복수하려 들었는데, 덩달아 은(殷)씨에게도 해코지한다.
그저 은(殷)씨가 자신이 싫어하는 유자난을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유자업이 아버지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을 얼마나 증오했는지는 다음으로 소개할 일화로도 알 수있다.
그리고는 초상화를 그리는 화공을 불러다가 초상화 속 아버지의 코를 빨갛게 칠하라 명령했다. 화공이
명령한대로 코를 칠해놓자 유자업은 그제서야 만족하며 다시 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 사건 이후로 유자업은 자신의 패륜짓엔 한계란 없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너는 어질지도 못하고 불효를 저지르는 놈으로, 황제의 자격이 없다. 네 아비또한 난폭하고
황음무도하여 하늘과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샀고 너 또한 그러하다. 앞으로는 문황제(文皇帝 : 3 대 황제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의 자식들에게 황제를 맡겨야겠다."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
산양왕(山陽王) 유휴우(劉休佑).
유자업은 유휴인의 말에 옳다고 말하며 죽이려는 것을 멈췄고 그렇게 유욱은 살아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렇게 조카놈에게 비참한 꼴을 당하는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은 유자업 다음으로
즉위하는 제 6 대 황제 태종(太宗) 명제(明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