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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melo 3 Part
Pomelo 3 Part
〈3 권〉
#chapter 23
#chapter 24
#chapter 25
#chapter 26
#chapter 27
#chapter 28
#chapter 29
#chapter 30
#chapter 31
#chapter 32
#chapter 33
#chapter 34
#chapter 35
#chapter 36
#chapter 37
#chapter 23
* * *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겨우 옮겨서 대사관 앞에 섰다. 줄줄이 놓아진 계단참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유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대로 너머 맞은편에 바로 영국 대사관이 있었다. 가깝고도 먼 거리였다. 이 거리를
지켰어야 하는데. 반갑게 맞아주는 얼굴이 좋아서, 저도 모르게 어느새 정원 구석에 같이 앉아 구경을
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 하루의 몇 안 되는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유리의 마음은 진정을 찾지 못했다.
“…나이 먹었군.”
이래서야 군인으로 훈련받은 세월이 아깝다고 봐야겠지. 한낱 사람인지라 이렇게 흔들리는 것인가.
유리는 낯부끄러운 고민이라며 피식 웃고 곧장 정보부로 향했다. 다행히 저택에 수상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지만. 다른 곳에서 언제 어떻게 위협이 가해질지 모른다. 유리 자신도 정보에 접근하는 건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에 큰일은 하지 못하더라도.
“….”
‘뭐지.’
유독, 오늘따라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저가 지나치는 테이블 직원들의 손이 멈추며,
시선이 따라붙으니 기묘한 기분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기분 탓인가.’
그래도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유리는 군모 아래로 그늘진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대령의 사무실 쪽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비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텐데.
“…디미트리?”
“…자네 일이네.”
* * *
군복을 갖춰 입은 디미트리를 따라서 대령의 사무실로 가자 대령의 의자가 돌아간 채로 있었다.
디미트리가 문을 닫는 동안 돌아가 있는 대령의 의자가 까딱까딱 진동했다.
“부르셨습니까?”
“내게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무슨.”
“…블라디미르?”
“…무슨 소리를.”
그제야 대령의 의자가 돌아가며 책상을 향했다. 끼익 대는 의자 소리에 유리의 떨리는 시선이 대령에게로
향했다. 평소와 다르게 자못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대령의 모습에 유리의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설마.
대령의 짤막한 질문에 유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감이 좋고 눈치가 빨라 어설픈 거짓말을 했다가는
더 수상한 사람으로 몰리기 좋았다. 지금처럼 무언가를 알고서 추궁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타깃의 자택을 살피고 왔습니다. 오늘 오찬 모임으로 식구들이 자리를 비운다고 하여 혹시 허점이 있지는
않을까….”
“하!”
‘들켰구나.’
순간의 여운을 간직할 새도 없었다. 들이닥치는 위협에 대충 짐작은 했지만 유리는 여전히 무심한 태도를
고수했다. 아직 그들이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찍이 실토할 이유도 없다.
“감청 실력이 아주 형편없어. 이제껏 기록된 테이프도 무슨 내용만 시작될까 하면 지워져 있고, 왜. 네
기둥서방이 하면 안 될 말이라도 하던가?”
코웃음을 치는 블라디미르의 모습에 유리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틀렸다. 테이프를 언뜻언뜻
조작하던 것도 이미 다 알게 된 건가. 나름 신경 썼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라스콜니코프
대령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만.”
“…덕담 고맙군.”
“…뻔뻔한 자식.”
“….”
자신의 방에 있던 서랍 구석에 숨겨둔 세드릭의 편지였다. 그걸 어떻게 줍지도 못하고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유리에게 대령이 무심하니 처분을 읊었다.
“…죄송합니다.”
“내게 죄송하다 한들, 수용소로 가는 길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
아직 여기서 붙잡히면 안 된다. 적어도, 배후를 잡고 나서야 수용소에 끌려간다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유리는 동요를 애써 감추고 천천히 변론을 꺼냈다.
“더불어 연인 놀음도.”
“그래, 그것도.”
“걱정이 되었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 세드릭이란 변수는 특별한 가치가 있었다. 전쟁을 위한 열쇠가 될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는 대령을 보던 블라디미르는 여전히 의심 어린 어투로 유리를 추궁했다.
“다들 이렇게 넘어갈 정도니, 그 녀석이 제 출신을 알고서도 매달리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출신을 알았다고?”
“그래서, 유리.”
“…예.”
“….”
“자네가 손수 처리하면 되겠어.”
“…처리, 말씀입니까.”
전부 사살하라는 명령에 동요나 일렁이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고 유리는 노력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건가.
* * *
“….”
유리는 깜깜한 방 안에서 대령의 명령을 곱씹었다. 그림자가 길다 못해 잡혔고, 지워지지 않는 의심은
증명을 요구했다.
‘사살이라.’
그는 답답한 군복의 목깃을 풀어헤치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여기까지 와서 그를 죽일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세드릭은 물론이고 유리 자신의 목숨도 위태로웠을 것이다. 비겁한 변명인 걸로는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차가운 침대 위의 시트를 손끝으로 더듬어가며 눈을 깜빡였다.
비참하게라도 살아 있어야 그를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제 손으로 처리하라는 명령은 대체 어떡해야 하는지, 궁리를 해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오른쪽 손바닥을 살짝 펼쳐보면서 피식 웃었다. 쥐었다 싶으면 빠져나가는 건 자신이 아니라 세드릭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다가 이런 사랑을 하고 말았을까. 책임도 지지 못할 걸 알면서도 언제부터 시작을 하게
되고 말았을까…. 희미한 달빛이 스며들어 오는 창가를 보던 유리의 귀에 문소리가 들렸다.
똑똑.
“….”
“…손님?”
“누구를 찾았는데?”
하녀의 대답에 유리의 말에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자신에게 찾아올 손님은 없었다. 제가 밤손님이
되는 것이면 몰라도.
“…아.”
“…어떡할까요?”
어떻게 여기를 찾아왔지? 의아한 마음도 잠시. 유리는 머리를 짚고 웃었다. 대체 어떻게 찾아서 온 건가.
“예, 알겠습니다.”
“하하….”
유리는 침대 턱에 걸터앉아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배신을 의심받는 상황에 자신의
집으로 들여보낸다니. 자살행위라는 건 안다. 어쩌면 함정일 수도 있는데도 그런 것은 상관이 없었다.
하녀가 자리를 비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좀 더 뚜렷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곳이라 귀에 유독 잘 들렸다. 제 방문 앞에 멈춘 발걸음의 주인은 가만히 서 있었다.
“…들어와.”
노리는 사람이 있으니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친히 경고까지 주었건만. 그런 위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올곧게 찾아온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게 이렇게 지척에까지 다가오면 어찌할 수 있을까.
“…나를 걱정해?”
“…너를 만난 건 실수였어.”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데.”
언제나처럼 씨익 웃는 세드릭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금방이라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속 편한 소리를 하는 것도 참 그답다 싶었다. 세드릭이 유리의 손을 잡고 가만히 쳐다보았다.
“…뭐?”
“…게오르그?”
세드릭의 천진한 반응에 유리가 눈살을 찌푸리고 신음했다. 이 녀석, 방금까지만 해도 두 명 이상의
목숨이 황천길을 갈 뻔했다는 건 아는 건가. 그나마 게오르그가 전화 수신인으로 걸려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블라디미르 같은 녀석에게 걸렸더라면 세드릭은…. 유리는 버릇처럼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으며 제가 앉은 침대 위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 앉아.”
“네.”
“아야! 아파요.”
세드릭이 억울함을 매단 표정으로 항의하며 유리의 손목을 붙잡았다. 우습지도 않은 모습에 유리가 피식
웃었다.
“무슨 일 있어요?”
“…네가 이런 일만 안 해도 별일 없어.”
“…별로.”
“…무슨 일 있어요?”
“…쓸데없는 참견이야.”
그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를 죽이라는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에 그라는 존재를 모르고
살았을 것을.
“미안해요. 제가 기분, 나쁘게 했어요?”
그러면 이렇게 제 마음이 흔들릴 일도 없었을 것이고. 자신의 영역 안에서 평안하게 그대로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 모든 것이 그라는 존재 하나로 흔들리고 있었다. 유리는 세드릭의 등을 껴안고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이 찰나의 순간이 유리 그에게 돌아오지 않을 시간일지도 모르니, 조금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세드릭의 팔이 유리를 더욱 꼭 안으며 관자놀이 쪽에 부드러운 입술을 내렸다. 쪼아대듯이 천천히 볼
쪽으로, 특선을 타고서 내려오는 키스 세례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눈을 가만히 내리깔고 있었다. 이내
입술에 맞붙는 감촉에 눈을 꼭 감았다. 비로소 알게 된 사랑이지만, 그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기도 했다.
#chapter 24
* * *
“….”
대답하나 없이 울고 있는 유리에게 세드릭은 입을 연신 달싹거렸다. 고백을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때 세드릭은 예전에 본 이탈리아 대사 부인의 스캔들을 문득 떠올렸다. 이래서 그들은 도망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신분의, 평범한 사람으로 만났더라면. 이렇게 마음 아픈 사랑은 하지
않았을 텐데. 세드릭은 유리의 등에 두른 손을 살짝 떨었다.
“…뭐?”
“스스로 말하기에는 조금, 부끄럽지만…. 저는 외국어를 제법 잘하는 편이라 생계를 이어가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이튼에서도 가끔씩 번역 일을 간간이 받았으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 줄 알고 있는 거야?”
귀족으로서의 명예나 긍지 따위는 당장에라도 버릴 것처럼 단호하게 말하는 세드릭의 모습에 유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음의 방향이야 같다 한들, 그 길이 평탄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심지어, 제가 죽여야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
“…그러게.”
‘목적이 이거였나.’
“아니. 좋아.”
“…정말요?”
“생각보다 나를 잘 아는구나.”
“…너무해요.”
유리의 농담 어린 대답에 세드릭은 엉거주춤 일어서서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아쉬움을
풍겼다.
“그럼 가.”
“…모레 같이 가는 거 맞죠?”
세드릭은 떠나기 전까지 의심을 지우지 못하며 유리에게 신신당부했다. 유리는 저택의 배웅을 하면서 살짝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작은 거 하나에 전전긍긍하는 녀석이 어떻게 도망칠, 대담한 생각을 떠올렸는지.
“알겠어.”
“…으앗.”
“…아, 알겠어요.”
“…뭐야. 그 반응은.”
“왜, 왜요?”
“…됐어. 가.”
* * *
“중립국….”
“…후회할 텐데.”
“…미쳤지.”
하지만 그를 위험에 몰아넣는 사람이 되어,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유리는 티켓을 기대고 있던 베개
안쪽에 숨겨 넣고 털썩 누웠다.
“…원래 다 이런 건가.”
책임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걸 알면서도. 보다 보면 욕심이 나고, 스스로가 정해둔 경계나 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가게 되는 게.
‘다 그런 건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무리라.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정리되는 것이라면 그가 고민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겠지. 점점 멀어져가는 대령의 군화 소리를 들으며 유리는 침대 위에 다시 누웠다.
“…젠장.”
* * *
“…시간이 다 됐는데.”
세드릭은 역전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쳐다보다가 팔짱을 끼었다. 째깍대는 미세한
손목시계의 소리와 함께 심장이 쿵쿵대는 조급함에 다리를 가만히 두지를 못했다. 역전에 앉아서 지나치는
사람들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그가 찾던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 얼굴을 가리기 위한
방법으로 중절모를 깊숙하게 눌러 쓰고 있는 세드릭은 결국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시간에 쫓겨서 역
내의 플랫폼으로 향했다.
“…아직 안 왔는데….”
“…어!”
“이봐요! 그건 제 물건….”
“…어?”
“안 타?”
“허술하기는.”
“…그럴 리가.”
시무룩한 얼굴도 잠시, 이내 수줍게 고백하는 세드릭의 얼굴에 대고 유리가 짧은 볼 키스를 해주었다.
“앗.”
“…세상에, 얼른 와!”
“가, 가고 있어요.”
“얼른, 내 손 잡아!”
“헉, 헉….”
세드릭도 손을 뻗었지만 아주 아슬아슬한 거리가 띄워져 있어서 서로의 손끝이 닳을 듯, 말듯, 스쳤다.
“윽!”
‘됐다.’
“미, 미안해요.”
“…탓하려는 건 아니었어.”
“…어.”
유리가 기대어 앉아 있는 벽에 세드릭이 이마를 대고서 까만 눈을 슬쩍슬쩍 굴려대었다. 그러면 문을 닫고
오라고 하면 될 텐데. 제 상체를 껴안고 안심한 듯, 작게 한숨을 쉬는 유리의 모습에 세드릭은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어찌 됐든 같이 열차를 탔으니.
* * *
“….”
“….”
“…왜.”
유리는 양쪽 대사관의 추적이 언제쯤 따라붙을지 곰곰이 계산하다 말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세드릭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다. 세드릭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까만 눈을 빛내며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저, 혹시 배고파요?”
“그다지….”
“…그렇군요.”
시무룩하게 변하는 세드릭을 보고서 유리가 작게 웃었다. 그렇게 반응할 거면 배고프지 않아도 배고프다
말해야 할 것 같잖아. 결국 유리는 세드릭과 함께 식당칸에서 간단한 샌드위치 따위를 먹고 다시 열차
칸으로 돌아왔다. 든든한 위장이 불러오는 포만감으로 인해 유리는 출발 때부터 긴장하던 몸에 나른함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20 분 후에 깨워 줘.”
결국 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유리는 눈을 감았다. 대사관에 보내둔 편지를 지금쯤에야 발견했을
것이고, 아마 대책을 꾸리는 동안에는 저희들은 이미 제네바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러니 가는 길에는
큰일이 없을 테니 긴장을 조금을 풀어도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유리가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울이자 세드릭은 읽던 책을 다시 펼치고 웃었다.
“네.”
“…윽!”
“누구….”
동시에 제 눈앞에 다가온 인기척을 거칠게 부여잡고 품속에 숨겨둔 소형 권총을 꺼내서 겨눴다. 유리가
잠결에 흐린 시야를 거두고 신음을 내뱉는 사람의 정체를 알았을 때는, 멋쩍게 웃는 세드릭이 있었다.
“…하하…. 놀랐어요?”
“…몇 시야.”
“피곤해 보여서요.”
“….”
그럼 진짜지 가짜겠냐고 타박하는 유리에게 세드릭이 짐짓 쓴웃음을 지었다. 유리의 대답으로 인해 그들이
처한 현실을 비로소 깨달았던 탓이다. 제가 좋아하는 예쁜 손에 어울리지 않는 흉흉한 물건의 정체에
세드릭이 유리의 손을 잡고 나직하게 읊었다.
“…위험한 건 왜 가져왔어요.”
“…혹시 모르니까.”
유리는 가만히 제 손바닥의 거친 마디를 만지작거리는 세드릭을 보면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여 다닌 삶이라 도망 끝에 맞이하는 날이 장밋빛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제 손을
쥐고 있는 사람의 손이 그저 핏빛으로 물들지 않기를 지켜내는 수 말고는 떠올릴 수 있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세드릭은 가만히 유리를 쳐다보다가 곧은 눈빛으로 속삭였다.
“….”
“…그래.”
‘행복이 있다면, 이런 걸까.’
유리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을 느끼며 세드릭과 마주치고 있는 시선이 문득 간지러워져 피했다. 그들이
타고 있는 열차는 긴 밤을 뚫고서 새로운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chapter 25
* * *
“세드릭.”
“…으음….”
새벽녘이 다가올 무렵, 유리는 제 어깨에 기대어 자던 세드릭을 깨웠다. 제네바 중앙역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달리는 기차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철길 너머로 보이는 시내 외곽의 주택가를 보면서
유리는 졸린 눈을 비비는 세드릭을 챙겼다.
“벌써… 다 왔나요?”
“그래. 짐은 내가 챙길게.”
“하암….”
“….”
세드릭의 입꼬리에 새벽녘을 막 터오는 동으로 인한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예전에 보던 말쑥한 모습도
없고, 흐트러진 머리 모양부터 해서 한량처럼 느슨하게 풀어진 양복 차림이 여유로운 모습에 분위기를
더했다. 그들이 지고 있던 책임이나 지위, 명예 따위가 온통 흐려진 모습이 유리가 보기에도 제법 좋았다.
유리는 막 정차하는 열차 복도로 사람들이 꽤 지나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세드릭에게 제 머플러를 꽁꽁
둘러주었다.
“…그러다 감기 걸린다.”
* * *
“휴가철이 아니라 외부 사람들은 별로 없어서 제법 한산합니다. 어떻게 보면 조용히 휴식하기에
제격이지요.”
“원래는 여관의 방으로 드리려고 했지만, 사람도 없으니 이 별장을 쓰셔도 좋습니다.”
“…아.”
유리는 키를 받으며 세드릭의 우스운 꼴을 보고 입술을 꼭 깨물어서 웃음을 참았다. 그러고는 훈련된
순발력으로 겨우겨우 수습했다. 이런, 세드릭의 잘생긴 얼굴이 눈에 띄어 가렸던 것이 도리어 수상해
보였다.
“제가 모시는 분은 어렸을 때부터 천식이 심해서, 평소에 기침을 자주 하는 바람에…. 요양을 하러
왔습니다.”
“푸하!”
“진짜인데.”
“너, 대체….”
유리는 트렁크 앞에 소중하게 감싸인 찻주전자와 두 사람 몫의 찻잔을 발견하고 물끄러미 세드릭을
째려보았다. 세드릭은 아직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지 찻주전자를 조심스럽게 들어서 싱글벙글 웃었다.
“…말을 말자.”
그야말로 뼛속까지 영국인 티를 낸다며 유리는 이마에 손을 짚고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잠시, 유리는
세드릭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함께 도와주었다. 아까 찻주전자 세트만 빼면, 세드릭이 챙겨온 짐은 제법
평범했다. 셔츠와 바지, 양말과 같은 옷가지. 그리고 자주 읽는 듯, 가죽 양장이 닳은 책 두어 권.
종이와 필기구…. 그리고 트렁크 안쪽에 깊숙이 넣어둔 작은 상자.
“…이건 또….”
“앗. 이건 괜찮아요.”
“…안 궁금해요?”
“…안 보여 줄 거라면서.”
자기가 말해놓고 궁금하지 않냐고 물어보면, 어찌해야 할지. 유리는 물건을 정리해 놓고 그사이 느슨해진
워커의 매듭을 다시 묶었다. 세드릭은 품에 꼭 안고 있던 상자를 멋쩍은 표정으로 등 뒤에 숨겼다. 애써
캐묻지 않는 유리의 태도에 대해 어딘가 아쉬움이 보였다.
“…왠지 좀, 쓸쓸해지네요.”
“…뭐? 왜. 가족들…때문에?”
유리는 세드릭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고 심장이 살짝 내려앉았다. 세드릭은 좋은 가족들 사이에 있었으니
잠시 만나고 말 인연에 평생을 등지고 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유리는 지금이라도
세드릭을 열차에 태워 베를린으로 보내야 하나, 빠르게 계산을 하는 중에 세드릭의 뾰로통한 불만을 듣고
다시 혼란에 빠졌다.
“아니요. 당신 때문에요.”
“….”
‘내가 뭘 어쨌다고?’
“…사과는 좋아해?”
“…네.”
완고한 입술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슬쩍 움찔대는 모습에 유리가 웃음을 참았다. 젠장, 너무 귀엽잖아.
이럴 때만 보면 세드릭이 유리 자신과 같은 나이대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세드릭의 머리를 손으로 헤집었다.
“…못 할 것도 없지.”
사실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잠시만이라도, 그가 말하던 평범한 삶과 행복을 같이 누리고 싶었다. 유리는
세드릭과 함께 호숫가를 걸으면서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 *
“…날씨 좋네요.”
“그러게.”
팔을 풀밭에 기대고 비스듬하게 일어난 유리의 모습에 세드릭은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군복도 벗어
던지고 그와 함께 따라온 연인이 기쁘게 웃다가, 이내 메마른 표정을 지었다.
‘저, 표정….’
그게 자꾸 눈에 걸렸다. 제 눈앞에, 온전하게 있건만. 그들을 갈라놓을 사람은 없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
표정을 짓는 것인가. 불안함에 마음이 달은 세드릭이 유리의 팔을 잡아서 일으켰다.
“왜? 어디 가게?”
“기분 전환?”
“됐다.”
“윽. 이게 무슨….”
유리는 배의 옆구리를 부여잡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호수에 떨어질 것처럼 겁을
내는 유리의 모습에 세드릭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어, 배 무서워해요?”
점점 균형을 찾아가는 조각배의 옆구리를 꼭 부여잡은 채로, 유리는 투덜거렸다. 세드릭은 젖은 셔츠의
소매를 걷으며 고정되지 않아 흘러내린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뭐든지 잘해 보이고 빈틈이 없다 싶은
그의 연인의 솔직한 고백이 귀엽다 못해 깜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조각배 옆에 있는 노를 쥐고서
천천히 저어나가며 씩 웃었다.
“무서워요?”
“…구경 다 했어?”
베를린도, 어디도 아닌 곳이니 누군가의 시선을 두려워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유리
자신의 목덜미를 붙잡고 한참을 맛보는 세드릭을 가만히 두었다. 밀착되는 살결에 점점 두 사람 사이로
열이 오를 때쯤, 유리의 하얀 이마에 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그제야 둘 사이의 연결이 멎을 수 있었다.
세드릭이 욕정으로 들끓는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아… 그, 이건.”
제가 해놓고도 부끄러운지, 얼굴을 확 붉히는 모습에 도리어 유리가 동했다. 제가 먼저 해놓고 부끄럼을
탈 것은 또 뭔가. 그래도 그런 성격이라서 좋았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따라오는 거겠지.
그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간 입술을 혀로 훔쳤다.
“…더 해도 상관없는데.”
“왜, 싫어?”
“…그럴 리가요.”
세드릭은 참을 수 없는 욕구를 느끼는 자신을 다스리려고 하는지 끙끙대며 유리의 시선을 피하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달콤한 시간도 잠시, 작고 좁은 배 안에서 두 성인 남자가 밀착한 탓에
양옆으로 슬쩍슬쩍 흔들리던 배가 이기지 못하며 결국 뒤집혔다. 서로에게 빠져 들은 탓에 그걸 모르는 두
사람은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잔잔한 호수에 파란을 일으켰다.
“푸핫.”
‘설마.’
“…괜찮아요?”
“켁, 켁….”
“…이런.”
“…으.”
“…좀, 괜찮아요?”
“…응.”
“그래…. 고마워.”
정신을 차린 거 보면, 우려하던 불상사는 아닌데, 세드릭은 괜히 걱정이 되었다. 세드릭은 별장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욕실에 유리를 넣어두고, 추위에 떠는 유리의 젖은 옷을 벗겨주려 손을 뻗었다.
“…몸이 차니 목욕부터.”
“…아.”
세드릭은 스스로를 타박하며, 유리의 젖은 셔츠의 단추를 풀어 내렸다. 그러다 유리의 옆구리 부근에
전에 자신이 남긴 잇자국을 발견하자 손이 멈췄다. 하얗게 젖은 곳에 남겨진 불그스레한 자국이 묘한
분위기를 내었다. 양심이고 뭐고 순식간에 휩싸이는 욕구에 세드릭의 목울대가 긴장에 차서 느리게
움직였다. 유리가 바닥부터 차오르는 뜨거운 물을 느끼며 욕조 등받이에 고개를 기대었다.
동시에 언제나 시선을 빼앗던 금발 머리도 물기에 젖어서 여린 목덜미에 달라붙으며, 알 수 없는 식욕을
자극했다.
“왜.”
“그야, 그런 말을 들으면….”
유리가 느른하게 웃으며 되묻는 모습에 세드릭이 살짝 발끈했다. 그러다가 자신을 놀리는 게 역력한
유리의 표정에 심술이 돋았다. 세드릭은 훈기로 발그레해진 유리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못내 소중함을
표현했다.
“마음대로, 해.”
“….”
“…안 남는 게 이상하지.”
“…정말 큰일이에요.”
세드릭이 유리의 등 부분을 너른 손으로 슬슬 더듬다가, 간지러움에 신음하는 유리를 보면서 탄식했다.
어쩌면 좋을까, 보면 볼수록 더 빠져들 것만 같은 기분이란. 절제도, 자제도 할 수 없는 마음. 세드릭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은 유리가 조곤조곤 속삭였다.
“…젠장.”
“흐윽…. 아, 거긴….”
“흐윽, 으응….”
“여기가, 좋아요?”
세드릭의 부드러운 입술이 유리의 등에 대고 입을 맞추니 피부가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흠칫, 흠칫 떨렸다.
동시에 다리가 배배 꼬여가며 쾌감을 선연하게 느꼈다. 세드릭의 손끝이 회음부 부분을 더듬자, 유리도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하아….”
아까와 다르게,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바로 침범해오는 부피감을 느낀 유리가 헛숨을 삼켰다. 그때도
생각했지만, 정말 적응이 되지 않는 크기였다. 어디 남는 곳 하나 없이, 꽉 차버린 복부 쪽을 유리가
손으로 쓸어내리며 가쁘게 숨을 쉬었다. 살짝 볼록하게 나온 부분이 마치 애라도 하나 임신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저는… 윽.”
세드릭과 이어져 있는 부분의 아슬아슬한 한계를 넘어갈 정도로 허리를 내리던 유리가, 안쪽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는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안쪽을 조였다. 세드릭은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다가 자신의
물건을 사정없이 조여오는 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유리를 꼭 껴안았다. 움직이지 말라고 해놓고, 도리어
고문하는 격이었다. 결국 세드릭은 유리를 꼭 부여잡고 허리를 들썩이며 움직였다. 그러자 유리가 욕조의
물에서 숨을 할딱이며 쾌감에 젖은 신음을 내었다.
“윽, 흐읏, 아, 안 돼….”
“읏.”
“아, 응….”
“흐, 더…해줘.”
“…세드릭.”
마지막 순간을 후회 한 점 없이 보내고 싶었다.
#chapter 26
* * *
“….”
유리는 옆에서 곯아떨어진 세드릭의 옆에서 가만히 뜯어보았다. 커튼의 틈 사이로 비춰 들어오는 달빛에
드러난 세드릭의 얼굴은 여전히 유려했다. 쭉쭉 뻗은 콧날과 다부진 턱선, 적당히 도톰한 입술에 촘촘한
속눈썹이 내려진 얼굴이, 흠 하나 없이 완벽했다. 색이 엷은 저와 다르게 진한 색의 머리카락이 이마
쪽에 내려온 것을 유리가 슬쩍 정리해주면서 어디 놓치기라도 할까 세드릭의 모습 하나하나를 눈에 가득
담았다.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났으니, 적어도 오늘 오후에는 지척에 다가올 것이다. 추격대의 행적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던 유리는 자세를 고쳐서 누웠다. 몸에 푹신하게 달라붙는 침구가 무게를 따라 축, 가라앉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드릭은 우리들이 그저 이렇게, 안온하게 살아갈 줄로만 알고 있겠지. 사실은 지금
당장이라도 깨져버릴 찰나의 꿈이라는 것도 모르고.
“….”
“…바보 같은 녀석.”
이런 순진한 녀석을 데리고 살게 될 여자가 참으로 고생이 많겠다며, 유리는 혀를 찼다. 이 녀석은,
공부만 열심히 해서 그런지 꽉 막히고, 반듯하기만 하고 스스로의 잇속에는 영 어두웠다.
그래서 사람이 속여도 그저, 허허 웃고 넘어가고. 눈치도 없어서 남의 사정만 생각하고 저 자신은 생각도
못 하는 녀석인데. 그런 녀석인데….
괜한 걱정만 이렇게 저렇게 만드는 그런. 유리의 사소한 괴롭힘에 결국 감겨 있던 눈이 반짝, 떠졌다.
유리를 확인하자마자 느슨하게 풀린 눈꼬리가 이내 호선으로 휘었다.
“…더 자.”
“계속, 저 보고 있었어요?”
퉁명스러운 유리의 말에도 세드릭의 눈꼬리는 풀릴 줄을 몰랐다. 유리는 멍청하게 웃는 세드릭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자고 있는 걸 봤다는 말이 그렇게도 기분이 좋은가. 유리는 세드릭을 보면서
저도 똑같이 좋아하던 걸 까무룩 잊어버린 듯, 속으로 투덜대었다.
유리는 전에 대사관 주최 파티에서 지나치듯 마주친 세드릭의 약혼녀를 떠올렸다. 같은 나라의, 괜찮은
집안의 여식. 그렇다고 못난 구석도 없는, 책에서 튀어나온 숙녀의 정석 같은 여자. 세드릭의 옆에 그
여자의 모습을 그려 넣으며 유리는 입맛을 쓰게 다셨다.
“…그냥.”
“….”
“…내일은 뭐 할까요.”
“글쎄.”
세드릭은 혼자서 웃었다, 민망해하다가 결국에는 유리의 몸을 슬쩍 껴안았다. 유리는 코앞에 다가오는
탄탄한 가슴팍에 뺨을 기대고 피식 웃었다.
“좋아.”
“….”
* * *
“아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둘은 아침이 오기 전까지 서로를 안고서 졸다가, 약속한 대로 공원을 산책했다. 아직 봄이라고 하기엔
조금 일러서, 아주 만개한 광경은 없었지만 산들거리는 바람에 맞추어 여린 꽃봉오리들이 흔들리는 것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호숫가를 따라서 걸으면 걸을수록, 아침 햇살에 부서지는 물결이 눈앞을 간지럽혔다. 둘의 곁을 따라서
지나치는 사람들의 일상과 한가로운 대화가 긴장을 느슨하게 풀어 내렸다. 특히 방금 공원길을
뛰어다니다가 부딪힌 아이도 그렇고. 세드릭의 허벅지에 제대로 부딪혀서 나동그라진 아이를 쫓아온
어머니가 난색을 하는 것을 두고 세드릭은 가볍게 웃고 보냈다.
“…예쁘다….”
“…아뇨.”
옆에 서 있던 유리를 뒤늦게 알아차린 아이가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속마음을 내뱉었다. 솔직함을 넘어선
감탄에 아이 엄마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장난꾸러기 아이의 손을 잡고 황급히 떠나는 엄마를 보던 유리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솔직하기 짝이 없는 태도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세드릭이, 나중에
애가 생긴다면….
“…귀엽네.”
떠나가는 아이가 연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보던 유리가 속으로 상상했다. 까만 머리에, 동그란 뒤통수.
젖은 흙처럼 깜깜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보면서 환히 웃겠지. 생각에 잠긴 유리에게 세드릭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런가요.”
‘아이를, 좋아하나.’
“저기….”
“…쉿.”
“….”
“넌 여기에 있어.”
“무슨… 일이예요?”
“…별거 아니야.”
유리는 굳은 표정으로 가슴팍의 홀스터에 걸어둔 소총을 꺼내서 장전했다. 별거 아닌 데 왜 저런 얼굴을
한단 말인가. 눈치가 나쁜 세드릭이 봐도 지금, 그들의 보금자리에 있는 게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게
분명했다. 유리가 총구를 지면으로 두고, 슬쩍 덧붙였다.
“…괜찮아.”
“그건… 못 해.”
“너는….”
“내가 지켜.”
“….”
“…예.”
탕!
탕, 탕탕….
“…안녕히.”
탕!
“…유리?”
“…게오르그.”
“대체 왜… 대령님을….”
“…미안.”
탕, 탕!
연발되는 소음에 당황함을 숨기지 못한 눈에 빛이 꺼졌다. 커다란 몸이 계단참을 볼품없게 쿠당탕 구르는
것을 보면서 유리는 마른 입을 혀로 적셨다. 누가 더 있는 건가. 그는 얼른 2 층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대령이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요원 두셋 정도는 데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추측은 틀리지
않았는지, 유리가 몸을 숨기고 있는 벽 너머로 앙칼진 목소리가 고성을 질렀다.
유리는 잽싸게 벽 너머로 나머지 총탄을 날렸고, 방어 사격이 날아드는 것을 피해서 발목에 숨겨둔 탄창을
갈아 끼웠다. 빈 탄창이 발치에 떨어지고, 착, 하고 들어맞는 새로운 탄창을 확인하자마자 사격이 멎은
예카테리나 쪽으로 몸을 날렸다. 최대한 빨리 처치해야 했다. 그녀도 탄창을 갈아 끼우는 동안에
달려드는 유리의 모습에 손이 헛돌아 총을 놓쳤다. 그 상황을 유리는 놓치지 않고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창문 몇 개가 빗나간 총알을 맞고 와장창 깨져 들었다. 동시에 검은 핏자국이 바닥에 좌르르, 퍼져
들었다.
“윽! 이, 미친….”
유리는 저무는 노을이 창문가에서 스며들어 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느리게 껌뻑였다. 됐다. 이제, 그를
위협할 사람은 없다. 비릿한 혈향이 습한 땀방울에 섞여 들어가며 후각을 자극했다. 더불어 매캐한 화약
냄새도.
“….”
모든 게 끝이었다.
아까 누리던 평범하던 일상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지금의 상황은 참, 어울리지 않았다. 동료와 상관이자
아버지를 쏘고 그들의 피 위에 있는 그가. 숨을 재차 몰아쉬면서, 그가 몸을 일으키자, 급하게 2 층
쪽으로 올라오는 발걸음이 있었다. 누가, 더 있었던 건가. 유리는 느슨하게 두었던 총신을 다시 바로
쥐고 기대고 있던 벽에다 몸을 바짝 대었다.
“다니엘!”
“아버지, 저 사람은….”
“…아버지?”
“몸은, 좀 괜찮습니까.”
“…보시다시피.”
“…다니엘?”
“…좋으실 대로.”
“포박하게.”
어차피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익숙한 패턴의 구속령에 유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포박하기 위해
달려드는 로열 가드들에게 순순히 붙잡히고, 백작의 말에 대해서 전혀 부정하지 않는 유리의 태도에
세드릭의 얼굴이 굳었다.
“…말도 안 돼.”
아까만 해도, 자신을 지켜주겠다고 다짐하던 사람이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언제나 그런 사람이….
‘…나를 속였다고?’
애처롭게 유리의 무고함을 외치는 세드릭에게 프림로즈 백작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참, 어찌해야 할지.
아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차라리 그냥 러시아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골치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다름 아닌 러시아 대사관의 정보부 소속 첩보 요원이라니. 그것도 자신들을 감시할 목적으로 따라붙은
사람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백작이 이 상황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가운데 무표정한 유리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대신 대답했다.
“얼마나 무지하면, 뻔한 유혹에 정신을 못 차리고. 저런 얼간이가 영국의 귀족이라니. 영국의 앞날이 볼
만합니다.”
“…뭐라고요?”
세드릭의 커다란 손이 핏줄기와 먼지로 더럽혀진 바닥을 떨면서 짚었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들려오는 세드릭의 목소리로 유리의 마음이 지끈, 통증을 겪었다. 원래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충분히
생각했었는데.
유리의 뻔한 눈길에 옆에서 그를 포박하고 있던 로열 가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가드가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피하는 것을 두고 세드릭이 거의 울먹이다시피 외쳤다.
“….”
“안 갑니까.”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벌건 노을빛이 하루의 끝을 알렸다. 유리는 강제로 이끄는 가드들의 발걸음을
따라서 별장을 나섰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이제는, 그저….
‘잘, 살아 있기를.’
마음에 둔 사랑을, 사람의 안녕을 바라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명령을 어기고 아군을 사살한 죄로 본국으로 송환 당해서 즉결 처분으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유리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저, 다시는 세드릭을 보지 못한다는 게 아주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chapter 27
* * *
“어… 깜빡했어요.”
“정신들 차려! 평소와 같이해선 절대로 안 돼.”
프림로즈 가에서 대대로 수석 하녀장을 맡아온 코델리아 에반스는 지끈대는 머리를 짚고서 저택의 중앙
홀을 사나운 기세로 돌아다녔다. 그녀의 곁으로 지나다니는 고용인들의 실수를 가감 없이 지적하면서 어디
하나라도 흠이 될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확실히 평소답지 않았다.
지금은 두 명의 건장한 자녀를 길러낸 지긋한 나이인 그녀는 다른 귀족 저택의 하녀장들에 비하면 꽤나
넉넉하고 후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고용인들은 입 모아서 말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그녀는 풍성하게 드리워진 치맛자락을 붙잡고 평소와 다르게 잰걸음으로 저택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다니기
시작했다.
이러다 흠이라도 잡혀서 대대로 물려받은 하녀장의 지위를 박탈당한다면 그것보다 불명예스러운 일은
없기에 더 그러했다. 은 식기와 촛대 따위를 평소보다 윤이 나게 손질하는 것을 하나하나 관찰하던 에반스
부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옆에서 은 식기를 손질하던 집사장 로렌스가 위로했다.
“오, 로렌스 그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새로운 주인님이 어떠신 분인지를 모르니 영 불안해서야 말이죠.”
에반스 부인은 자신의 어머니가 예전에 모셨다는 어린 주인의 귀환 소식에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귀족이란 종족들은 태어날 때부터 고약한 성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겉으로는 젠체를 해도
안에서는 성질을 부리기 마련이었다. 다행히 프림로즈 가의 전 가주는 명예를 알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라 대부분의 고용인들은 감사하며 오랜 기간을 일하다 못해 대대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중간한 곳에 가서 고생하며 일하느니 나름대로 원활한 성격의 주인 밑에서 편하게 일하는 게 낫다는 걸
모두들 알기 때문이었다. 로렌스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인님을 어린 시절부터 봤지만 전혀 걱정할 만한 성격이 아닙니다.
집안사람들에겐 너그럽고 친절하신 분이니 벌써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 화려한 정찬으로 꾸미면 낭비 같다고 싫어하실까요? 사실 상인에게 미리 말해서 최대한 다양한
재료를 준비해 뒀는데….”
“다행이군요. 에반스 부인, 그래서 말인데 주인님 앞에서 그 시기와 관련된 대화는 꺼내지 마세요.”
궁금함을 감추지 못하는 에반스 부인의 눈빛에 로렌스는 결국 담아두었던 한숨을 풀어내고 말았다. 아무리
미성숙한 시절의 사건이라지만 대영제국의 귀족이 반대 진영 쪽 사람과 추문으로 엮였다는 일 자체가
굉장한 모욕이자 추문이었다.
“물론 하찮은 소문 따위를 저도 믿진 않아요, 로렌스. 아무리 추남이니, 괴팍한 사람이니 세간에서
떠든다고 한들 제가 평생 모셔야 할 분이니까요. 그리고 분명 제 기억으로는 주인님이 도련님이실 적,
분명 늠름하고, 멋있으셨는데 대체 추남이라는 소리는 어디서 나온 걸까요?”
“원래 소문이라는 건 믿을 수 없기 마련이죠. 무튼, 에반스 부인. 혹여라도 실수로 그 시절에 대해서
주인님에게 물어보거나 언급하는 건 삼가해 주세요.”
“물론이죠.”
확실히 ‘그날’ 이후로 ‘서독’, ‘베를린’과 같은 단어는 저택에서 언급되는 일이 드물었고, 프림로즈
가로 돌아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세드릭은 이튼 스쿨로 돌아갔다. 그렇게 8 년이 지났다. 그가
모시던 주인 부부는 유행병에 걸려서 2 년 전에 자연으로 돌아갔고, 그가 모시던 도련님은 어린 백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추남이어도 좋고, 괴팍한 사람이어도 그저 좋다며 대필한 게 틀림없는 연서나 약혼 이야기가 저택으로
심심찮게 들어오곤 했다. 주인 없는 저택에 날아온 연서의 양도 꽤나 됐는데 주인이 거주하는 기숙사로는
대체 얼마나 날라왔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로렌스는 가물대는 도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어린 주인의 귀환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 * *
모스크바로 돌아가도 생각날 법한 뼛속까지 시린 추위라며 속으로 투덜대다 어스름한 동이 터오는 바깥의
풍경을 구경했다. 봄이 완연한 시기에도 시베리아의 풍경은 변함없이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움을 떨치지
못했다. 동이 터오는 순간에도 한 줌의 빛줄기만 겨우 내보일 뿐이다.
“아직도 멀었나?”
“10 분 내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죄송합니다. 날이 따뜻해진 이후로 도로가 녹아서 상태가 엉망인지라
….”
비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군용차가 덜컹, 덜컹하고 흔들리며 멈췄다. 진흙이 녹아 빠진 도로를 몇
시간씩 쉼 없이 달리던 게 결국 탈이 난 모양이었다. 결국 군용차 곳곳에 더덕더덕 말라붙은 진흙처리와
함께 보닛 부분에서 올라오는 연기에 엔진도 수리할 겸 쉬기로 했다.
“예!”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위치한 지루한 중앙정보부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한 단순한 유흥거리가 아니다. 질퍽하게 변한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길에 요란한 모터 소리가 설핏설핏 들려왔다. 목표하던 곳이 멀지 않았다는 비서의 말이 허튼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두어 번 정도 파이프의 연기를 마시며 작업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빽빽한 숲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도 들려왔다. 주로 목재 따위를 어디로 옮기고, 톱질을 좆같이 한다는 것 따위의 욕설이 주
내용이었다. 손질이 되지 않은 지 한참 되어 보이는 덥수룩한 머리의 산적 같은 사내가 낡은 옷차림의
사내에게 혀를 찼다.
“….”
“…큭.”
갑갑한 숨이나 돌릴 겸, 그 악명높은 정치범 전용 수용소에 낯익은 얼굴이라도 있으면 안부나 전해줄 겸
들렀던 것이 이 급한 여행의 원인을 찾을 줄은 몰랐다.
“….”
옛날의 명성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다. 시간 속에서도 퇴색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저 모양새에 넘어간
정치 인사들이 몇이던가, 그 밑의 잔챙이들은 목숨을 달리했으니 그런 일을 만들어도 죽이지도 못하고
겨우 살려둘 만하다. 어찌 됐든 사람이란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써먹을 날이 오기 때문이다.
“….”
갑자기 등 돌려서 작업장을 떠나는 유리를 두고 작업장 동료들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원체 말도 없고
제멋대로인 녀석인 건 알지만, 가끔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조용한 녀석이라 말을 해도 소통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있는 건 알았지만 도통 말을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게 붙여진
별명이 벙어리였다.
“자자, 저녁 시간 넘어서 일하기 싫으면 얼른 일하자고.”
그저 화장실이 급했나 보다, 짐작할 뿐. 작업장의 골칫덩어리, 벙어리 샌님의 멀어져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조장은 손을 저었다.
“쓸데없는 소리.”
* * *
“…무슨 일이지.”
“….”
방아쇠를 장전하는 소리가 공허한 숲속을 울렸다. 장교들에게 나오는 베레타의 권총음을 들은 지가 벌써
몇 년 만인지. 지저분하게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든 금속의 감촉이 유독 서늘했다. 얼굴의 반을
가린 머리카락 속 유리의 눈빛이 슬며시 가라앉았다. 함부로 죽이기 어려운 정치범들을 모아둔 수용소지만,
그렇다고 정치범들이 계속 살아 있는 건 아니다.
“…뭐?”
“….”
“그걸, 왜….”
블라디미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유리에게 슬며시 웃었다. 8 년이 지나도 놈의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동요하는 모습에 기분이 묘했다.
#chapter 28
* * *
프림로즈 백작.
잊자, 잊어야 한다고 그렇게 되뇌던 사람이다. 하지만 어쩌면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둔 사람은 잊고 싶다고 잊혀지는 게 아니었다. 열차 칸에 탑승할 때부터 유리의 모습을 내내
지켜보던 블라디미르는 영 입맛이 썼다.
이전에 한 달에도 몇 번씩 찾아와 정보부 복귀 명령을 내렸지만 유리는 거절했다. 그 전의 죗값을
내려두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몇 번씩 주어도 번번이 거절하는 게 괘씸하여 한 번은
반년간 찾아오지 않고서 내버려 둔 적도 있었다.
“장소는?”
“런던.”
“아니. 그냥….”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봤자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런 식으로 해도, 유리가 마음에 두고
있는 그 영국 귀족 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헛소리.”
“…비서?”
“이틀 후에 런던의 수정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가할 테니 춤 연습이라도 좀 하고. 그동안 숲속에서
사느라 실력이 좀 녹슬었을 테니까.”
평생에 기억할 사람을 없애면 됐다. 물론 아직도 마음이 남아 있는 반응을 보아하니 성공률이 높아 보이진
않지만, 유리만 단독으로 투입시키는 일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제 눈앞에서 죽어야 정신이라도 차릴까
싶은 마음으로 걸어보는 도박이었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도 없는 놈을 평생 마음에 담고 삼을 이유가 있나.
“내가 왜 네놈 비서로….”
“유리 라스콜니코프.”
차라리 하인으로 가겠다는 어투에 블라디미르는 팔짱을 끼고서 으름장을 놓았다. 좀 편하게 가라고 해도
언제나 저런 식이다. 굳이 좋은 길을 놔두고 고생을 사서 하는 이유는 뻔하지. 나 같은 놈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다는 건 아는데, 좀 의지해줬으면 하는 건 블라디미르의 욕심이기도 했다. 그 귀족 말고도 자신
또한 유리의 저 시린 눈빛이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글쎄….”
블라디미르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작전이 정해졌다며 유리를 이끌었지만 정작 지금은 이 작전의 목적을
말하지 못했다.
“사살, 해야겠지.”
당연한 소리였다. 그 정도의 인물은 책략 적으로 이용할 인사가 되기도 어렵다. 그들이 굳이 회유를 하지
않아도 기존의 세력에서 입지가 이미 다져진 인물이기에 끄나풀이 되기에는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위협적인 인사라는 건 분명했다. 따라서 죽이는 것 말고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목적을 들은 유리의
낯이 미미하게 굳어갔다. 이전에는 사살이라는 목적을 가지고도 별다른 반응도 없던 녀석이 많이 물러졌다.
“하지만….”
“….”
“자신이 없나?”
* * *
“실례합니다, 의원님.”
“들어와요.”
“음.”
연합국의 목록을 비롯하여 적진이나 다름없는 바르샤바 측의 인원도 적혀 있었다. 세드릭은 개중에 러시아
연방의 목록을 최대한 꼼꼼하게 살폈다. 이번 협상의 주축은 러시아 쪽에서 발언권이 제일 셌기 때문에
그쪽 인사를 미리 파악해두어야 했다. 그렇게 죽 훑어보던 짙은 색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유리 라스콜니코프〉
“…잠시만.”
비서가 건네준 서류를 읽다가 갑자기 일어서는 세드릭의 급한 모습에 비서는 크게 당황했다. 평소 딱히
어느 레스토랑을 선호하는 걸 드러내지 않는 세드릭을 알았기에 이런 갑작스러운 반응이 익숙하지가
않았던 탓이다. 그런 비서의 예상과 다르게 세드릭은 다른 점을 추궁했다. 당연한 것을 물어보는
세드릭에게 비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설명했다.
“…알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예에….”
“나가도 좋습니다.”
강제로 귀국한 그 날부터 몰래,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유리의 신분 따위나 소속, 그리고 현재 어디에
있는 것까지 찾아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에게 알려준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에 분노하기도
했지만, 바다 건너 저 너머에서 무거운 형벌을 받고 있다는 또 다른 사실에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분명 자신을 지독하게 속이고 이용한 사람인데,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아도 분이 풀릴까 싶을 정도의
분노가 문득문득 치미는데, 흐르는 세월 속에서 분노로 벼려진 마음은 깊어지다 못해 문드러졌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세월 속에 가려둔 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겨우 가라앉히고, 가려두고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엉망이었다.
“젠장.”
자신의 배경과 위치를 목적으로 속이고 버렸다는 걸 알았을 때는 당장이라도 그가 있다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벌판으로 달려가 눈앞에 두고 추궁하고 싶었다. 정말 그게 목적이었냐고. 하지만 베를린에서
있던 일로 인해 보안국의 감시를 받는 처지인지라 아무런 목적 없이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대학
동기들과 그랜드 투어라는 거창한 명목 아래 러시아 연방 부근의 연합국 나라의 경계선을 맴돌다 올
뿐이었다. 그 생각을 다시 하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무 오래됐어.”
가끔은 그 경계선 너머로 기다리던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잠시의 변덕으로 시작했던 기다림이 계절을 달리할 때마다 찾아가는 장소가 됐다.
정리하기 어려운 마음에 그럴듯한 핑계를 덧대어 정리를 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렇게라도
겨우겨우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몇 년 만에 그의 이름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자신을 뒤흔들고도
남아도는 불안감이 순식간에 덮쳤다.
아마 이전에 자신과의 일로 인한 접점을 통해서 다시 자신을 이용하려 들고, 또 흔들어 놓으려는 것이겠지.
너무 정직하다 못해 빤하게 패를 보여주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세 살짜리 꼬마가 와도 이런 작전을
짜지는 않는다. 그가 있는 서재의 창 너머로 동이 터오는 야트막한 빛줄기가 그의 두 눈을 꿰뚫었다.
몽롱하게 번져가는 시야 속에서 그의 마음도 다른 식으로 번져갔다.
“…한심하긴.”
뻔한 작전이 보이면서도 자신이 아직은 접근할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서 배신을 당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뼈저리게 아픈 일인지 안다. 그처럼 아픈 일을 모를
수가 없었다. 한 번 당해본 마음이, 두 번째를 기대하게 되는 이 이율배반적인 마음은 도저히 설명할
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드디어 미친 건가.”
“세드릭!”
“…아델라인?”
“뭐예요, 놀랐어요?”
잔뜩 신경을 썼는지 고운 빛깔의 드레스 차림과 얼굴에 홍조를 띄운 채로 자신을 반기는 약혼녀의 존재에
놀라지 않았더라면 거짓말이었다. 저녁 식사에나 만날 줄 알았던 인물을 갑작스럽게,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가장 중요한 방까지 들여보낼 줄은 몰랐던 탓이다.
“일하는 시간에는 찾아오지 말라고 몇 번씩 말했던 거 같은데, 경고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군요.”
어쩔 줄 모르는 약혼녀 아델라인을 두고서 세드릭은 딱 잘라서 말했다. 냉정하다 못해 불쾌함이 역력했다.
약혼 상대라고 하기엔 한 점의 애정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불편합니다. 앞으로는….”
“…네, 미안해요.”
하지만 더욱이 꾸지람을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밝은 갈색 머리가 햇볕에 비춰오고 우울한 듯
푸른 눈에 깊이를 더할 때면, 예전의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해서 말문이 턱, 막히곤 했다. 세드릭은 다시금
떠오르는 잔상을 떨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잘, 다녀오세요.”
건조한 인사를 뒤로했지만 약혼녀의 목소리는 한창 밝아진 감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혼담을
뿌리치고 한미한 배경의 여식을 약혼녀로 앉혀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 * *
오랜만에 돌아온 모스크바의 풍경은 어딘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특유의
경직된 회색빛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가게나, 건물 따위가 새로 있고, 없어지고 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전의 기억과는 딴판인 곳도 제법 있었다.
갓 도착해서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는 기차의 플랫폼을 빠져나오는 인파가 많지는 않았다. 크리스마스 같은
큰 명절이 아닌 이상에야 모스크바까지 직통으로 가는 열차를 탈 사람은 중앙과 관련된 군인들이
아니고서야 평범한 사람들이 이용할 일이 드물었다.
그들이 도착한 모스크바의 중앙역은 높은 돔 천장에 화려한 빛깔의 샹들리에가 수없이 줄지어 있어서
사치스러운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역 앞에 차를 준비했어.”
“쓸데없게.”
“…퍽이나.”
귀하다는 단어가 언제부터 저한테 쓰이던 말이던가. 유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아직은 쓸만한
패다 이거겠지. 블라디미르가 준비한 군용차 덕분에 모스크바의 중심, 붉은 광장에 금방 도착했다.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광장이라는 장소의 이름과 다르게 붉은 광장의 주변은 각 잡힌 군복을 입은
보초병을 제외하면 공허하기가 짝이 없었다. 그 가운데로 불어오는 바람이 유독 거셌다. 유리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낡은 외투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시베리아 벌판으로 쫓겨난 이후로 다시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곳이라 생각했다.
“…여전하네.”
“오랜만이지?”
“…아무래도.”
“…피곤해.”
“생각보단 간단하군.”
“있기야 있지.”
“방이 없을 뿐이지.”
“물론. 백업은 틈틈이 길러둬야지. 예전처럼 반이 죽어났는데 당장에 작전이 있어도 투입할 수 있는
정예가 하나도 없으면 안 되잖아?”
“….”
“그래서?”
“그럼 누가 너와 함께 하는 거지.”
“군부.”
“….”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죽일 것이다.
“아마도.”
예전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온 격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달라진 건 서로의 위치였지
상황이 아니었다.
“….”
“그럼, 난 이만.”
유리를 두고 돌아서는 블라디미르를 두고 유리가 급하게 붙잡았다. 절도 있는 자세로 걸어가려던
블라디미르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만약….”
블라디미르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자 유리의 붉은 입술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마치 꺼림칙한 상황을
상상이라도 하는 듯, 표정이 영 편치 않았다.
말로는 작전에 참가한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본의와 불안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블라디미르의 입꼬리가 일자로 경직된 채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럴 바에는….”
블라디미르의 얼굴에서 웃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싸늘한 표정만이 남았다. 그는 유리가 붙잡은 손을
털어내면서 딱딱한 어조로 유리를 나무랐다.
“그럴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시베리아로 돌아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훈련된 요원이지 감정에 휘둘리는
반푼이가 아니니까.”
“…현장에서 뛰어다닌 기억도 아득한 반푼이를 부른 건 너야.”
“이런 상황에선, 뛰어다닐 필요가 없지. 넌 그저 알량한 귀족 녀석의 정신만 빼두면 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유리의 대꾸에 블라디미르는 가볍게 웃고 넘겼다. 그러면서도 세드릭에 대한 임무를 받고서 확연하게
태도가 달라진 유리를 향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
블라디미르의 입가에 잔혹하고도 냉정한 비소가 감돌았다. 블라디미르의 차가운 일갈에 유리의 불그스레한
입술이 달싹이다 말고 하얀 잇새로 뭉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안 그래도 붉은 입술이 더욱 색을 더하는
것을 보고 블라디미르의 진한 눈썹이 살짝 무너졌다. 사람의 흥미를 끄는 게 타고날 수 있다면.
“…무슨.”
그의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제껏 자신을 이렇게 흔드는 존재가 있었던가. 총과
칼이 날아들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블라디미르였다. 바르샤바의 주축국 중 하나인 러시아의 정보부
수장에 가까운 자신을 흔드는 존재는 드물다 못해 없었다. 그런 자신을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요동하게 만드는 모습에 입맛이 썼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 담긴 깊이가 헤아릴 수 없도록 진득하고도 끝이 없었다.
블라디미르의 집착의 강도가 세지면 세졌지, 결코 약해진 적이 없었다는 걸 지금 와서야 깨달았다. 유리
자신을 향해 짓는 블라디미르의 미소가 진하게 물들었다. 선연하게 보이는 집착적인 눈길을 유리는 애써
외면했다. 위험했다.
“…쓸데없는 짓을 했어. 명령이 떨어지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에 아까운 네 인생을 낭비했군.”
그리고 세드릭의 소식을 듣고 너무, 성급하게 모스크바로 돌아온 것도, 결코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는
것도. 도리질을 치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매일 같은 특수 훈련으로 단련 받은 군인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흠, 이래서야 조금은 너를 내보내는 게 좋은 선택인지 모르겠는걸. 그렇게 겁먹은 눈빛으로 바라보면
아무리 나란 놈이라도 마음이 약해진단 말이지.”
“…전혀.”
“아니면, 예전의 그때처럼 누가 네 상대인지도 까먹을 정도로 돌려줄까. 오랜만에 네 명성을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명…령이라면.”
명령이면 따르겠다는 유리의 말에 블라디미르의 짓궂은 표정이 한순간 굳었다. 심지가 곧은 나무일수록
꺾어보고 싶은 이 마음은 무엇인지.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하지 않으려는 것이 제법
불편했다. 결국 비뚤어진 블라디미르의 마음은 생각과 다른 말을 꺼냈다.
살로메, 블라디미르가 짓씹듯이 내뱉는 유리의 요원 시절 적 이름에 유리는 눈을 감았다. 세월이 지나도,
있는 곳이 달라져도 그림자처럼 자신의 뒤에 붙어오는 과거의 이름은 떨어지지 않는다. 블라디미르는
유리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쥐고서 딱딱하게 한 자, 한 자 끊어서 명령했다. 더불어 작은 경고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
붙잡힌 머리채 사이로 블라디미르의 잔혹한 미소가 스쳤다. 그 미소의 이면에 무슨 훈련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로마의 탕녀를 본뜬 이름을 요원 이름으로 쓰던 건 별다른 이유가
아니었으니까.
#chapter 29
* * *
심지어 영국으로 출발하는 날까지 유리의 대접을 요구한 연합국 대사, 특히 영국 대사 덕분에 모스크바
중앙역에 대기하고 있던 특별 열차의 시간을 수리를 핑계로 대면서 늦춰야 했다. 부하의 전달에 평소에
서두르는 법도 없고, 여유로운 모습만 보이던 블라디미르가 진한 카키색 군복 코트 안쪽에 달린
회중시계의 덮개를 열었다 말았다 만을 반복했다.
“아까 전 관리인이 운전하는 차편으로 배웅을 보냈다는 연락 이후로는 자리를 비웠다는 말밖에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짜증 나게.”
한 모금씩 깊게 빨아올릴 때마다 슬렁슬렁 피어오르는 연기는 하늘의 색깔만큼 어둡고 탁했다. 사실
복귀한 이후로도 꼿꼿하게 쳐든 얼굴에 좀 그늘이라도 만들면 우는소리라도 하지 않을까 싶은 기대로
적당히 막고 관리들에게 돌린 것도 있다. 그럼에도 어디 한 번 힘들다, 싫다 하는 소리를 내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무감각하게 일 처리를 해내는 걸 볼 때마다 오히려 마음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건 블라디미르
자신이었다.
“젠장.”
허탈하게 부스러지는 웃음과 함께 강직한 입가에서 작은 욕이 나왔다. 아무리 이 나이를 먹고도 구르고
구른 첫사랑에게 흔들리는 블라디미르 자신이 한심했다. 이제는 귀족이라는 신분도 없는 러시아지만,
그래도 보이지 않는 계급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그, 그만….-
굳이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억지로 침대에 끌어당길 만큼 궁한 것도 아닌데, 이상한 정복욕을 자극하는
맛이 있었다. 저를 밀어내는 손목을 잡고서 쳐올릴 때마다 파드득 놀라던 그 하얀 살결이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 은근히 비쳤다. 하얀 피부 아래 적절하게 잡힌 마른 근육은 탄력이 넘치지만 여자들처럼 온몸이
푹신한 살결이라고 보긴 어렵다. 저와 같은 훈련을 하면서 만들어진 그 살결에 왜 잡기만 해도 찢어질 것
같은 연약함을 느끼는지.
그리고 동시에 흔적이 남는 곳이라면 자신의 손을 타게 만들고 싶었다. 오랜만에 받아들이는 몸은 이전과
다르게 길들여진 맛이 덜했다. 사실 그것도 나쁘진 않았다. 한동안 쾌감을 느끼지 못한 몸이라 그런지
오히려 예전보다 감도가 더 좋아진 것도 같고. 짐승 같은 움직임을 받아내던 푸른 눈이 자신의 품 안에서
짙게 번져가며 사정하는 모습에 제법 만족감도 들었다.
-아, 흑, 거긴, 깊….-
“…한심한 놈들.”
앗뜨. 몽롱한 회상에 젖어 있던 블라디미르는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궐련형 담배가 다 타들어 가다 못해
제 살갗을 따끔하게 파고드는 것도 몰랐다. 물론 풋내기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침대 경험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하는 자신도 한심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 고맙군.”
“예!”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 유리의 모습에 블라디미르는 기차에 타는 것을 주저했다.
그렇지만 보좌관인 유리도 아니고 자신이 타지 않았다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는 불상사나 그사이를
노린 암살 위협이 들어오면 그것 또한 곤란한 일이었다.
“좋지.”
“이 친구 제법 자신 있는데?”
껄껄 웃는 소리도 출발하는 기차 소음에 묻히고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는 기차의 끄트머리 계단을 중앙역
직원이 정리하고 닫을 무렵, 급한 발걸음 두 쌍이 그걸 만류했다.
“잠시만요!”
“듣고 있습니까?”
“….”
“이봐요.”
혹시라도 들여보내 주지 않아서 기차를 놓치고 유리를 태우지 못할까 애가 탄 부하직원은 표트르의 눈앞에
이번 특별 열차 승객용 확인증을 다짜고짜 들이밀었다. 유리의 얼굴을 요목조목 뜯어보다 못해 가쁜 숨이
뱉어지는 붉은 입술 사이로 시선이 깊게 들어가다가 자신의 눈앞에 견고한 벽처럼 나온 확인증 덕분에
표트르의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정보부, 정보부입니다.”
유리가 급하게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바로 속도를 내는 기차 때문에 자신을 모스크바 중앙역 입구에서 바로
잡아서 각종 서류작성과 검사를 한 번에 끝내버린 군인에게 고맙다는 소리도 하지 못했다.
덜컹대며 흔들리면서 달리는 기차의 벽을 붙잡고 무거운 슈트케이스를 다시 들었다. 속도를 내는지
중앙역사의 수두룩한 철로가 점점 방향을 달리하면서 가짓수를 줄어가는 것이 천천히 보였다.
“…휴.”
아침이 되어서도 달라붙었던 연합국 대사, 그것도 영국 대표는 제법 끈덕진 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제껏 안 그런 사람이 없던 것도 아니지만, 중요한 날을 두고도 잡아둘 줄은 몰랐다.
급하게 오느라 졸리고 지친 유리는 잠시 한산한 객실에서 눈을 붙였다가 옮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사람이 한
명밖에 없던 객실의 문을 열었다. 그 객실에 앉아 있던 한 승객은 신문을 자세히 읽고 있는지, 누런
신문을 양쪽으로 펼치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승객이 비스듬하게 기대고 있는 창문가 너머로 유리의
흐트러진 모습이 비쳤다.
촉박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부끄러운 모습을 하고서 역사를 헤집고 다닌 줄은 몰랐다. 유리는 작게
신음하며 얼른 풀어헤쳐 진 셔츠 단추를 꼼꼼히 채웠다. 어쩐지 자신과 마주친 모든 사람들이 빤히
바라본다 싶었다며, 낯 뜨거운 모습을 급하게 갈무리했다.
“…실례합니다, 선생님.”
“….”
그렇게 눈에 띄는 사람이 들어왔으니, 한 번쯤 곁눈질이라도 하면서 초대받지 않은 방문자를 살필 법도
한데, 그때까지도 객실의 승객은 요지부동이었다. 유리가 말을 건네도 고개 한 번 쳐 들어보지 않는 채로
신문 읽기에 제법 열중한 승객에게 유리가 다시 한번 양해를 구했다.
자신은 정보부 소속의 보좌관이고, 원래는 앞에 자리가 있지만 급하게 타느라 잠시만 앉아 있으려 한다,
간략하게 설명했다. 어차피 이 열차를 타는 사람들이라고는 한정된 사람들에 알음 직한 위치에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정확하게 말할 필요까진 없었다.
정중한 부탁과 함께 슬쩍 둘러보니 한산한 객실에는 텅 빈 자리만큼이나 단출한 여행용 슈트케이스 하나가
전부였다. 일주일이나 되는 일정을 소화하는 사람의 짐이라고 보기엔 솔직히 너무 작았다.
“…고맙습니다.”
물론 잘 훈련된 유리의 입에서는 마음과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얼마나 오만한 사람인지는 몰라도 ‘
그러시오’, ‘자리가 있으니 안 된다’, 그런 흔한 대꾸 한 번도 없이 손짓으로 오라 가라 하는 모습에
기가 찼다.
감히 허락을 내려준 오만한 승객의 평온을 길게 방해하지 않겠다며 유리는 작게 덧붙인 후에 객실의 천장
가까이 설치된 짐칸용 그물망에 자신의 짐을 올렸다. 더불어 정보부 소속의 보좌관들이 외출 시에 입는
군복 외투를 그 위에 걸치고 나서야 비로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
하지만 아주 잠시만 앉아서 쉬다가 스치듯이 헤어질 사람이기도 하고, 딱히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전의 귀찮은 손짓을 통해서 가식과 눈치가 섞인 쓸데없는 대화가
오가지 않을 거라는 강한 예감도 들었다. 그러니 조용히 눈을 붙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특히 새벽 내내 시달리던 유리에겐 간절한 순간이었다.
‘…눈이나 좀 붙여볼까.’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팔짱을 끼고서 창문가 쪽 좌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눈을 감고 있으니 쉼 없이 달리는
열차의 진동이 유리의 정신을 더욱 또렷하니 깨웠다. 더불어 간헐적으로 팔락, 대는 신문 특유의
바스락대는 소리는 유독 귓가에 거슬릴 만큼 크게 들렸다. 객실 내에 신문을 읽는 과묵한 사내와 유리밖에
없는 것도 이 거슬림에 한몫을 했다. 쉽사리 잠들지 못한 깊은 피곤함은 결국 감겨 있던 유리의 두 눈을
깨웠다.
“…선생님은, 실례지만 어느 소속에 계신가요.”
“글쎄요.”
과묵한 사내의 손에 쥐어져 있던 신문이 차곡차곡 접혀가며 비로소 가려진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 말쑥한
정장 차림에 중절모를 푹 눌러쓴 사내의 모습은 우습게도 신문에 가려진 모습과 별다르지 않았다.
실내에서도 중절모를 벗지 않는 탓에 윤기가 흐르는 모직의 챙 아래로 그늘이 드리워져 눈가를 가렸다.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와 곧게 뻗은 콧날 밑으로 슬쩍 웃고 있는 모습만 간신히 보일 뿐이다. 알 수 있는
게 그다지 많지 않았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건, 가려진 그림자 뒤로 제법 미려한 외모를 가졌다는 점.
“…내 소속이라.”
아주 잠시, 침묵을 고수하던 낯선 사내의 입에서 스치듯이 짧은 대답이 나왔다. 아주 찰나의 진폭과
떨림이었지만 절대 모를 수 없는 음색에 유리의 몸이 굳었다. 명령으로 내려온 임무였던 감청을 위하여
매일 밤마다 들었던 그 목소리.
‘설마.’
#chapter 30
* * *
유리의 파란 시선이 그가 들고 있던 신문의 헤드라인 쪽에 걸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베를린을 떠나게 된 이후로 꿈에서 만나는 일은 있어도 그저 원망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볼 뿐, 단 한
번도 자신을 불러주지 않던 그 다정한 목소리였다. 애를 태우듯, 느릿한 어조가 유리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둘째는, 8 년 전에 병사한 프림로즈 백작의 지위와 유산을 물려받으며 귀족원 내에서도 주목받는 젊은
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드릭 프림로즈는 영국 여왕의 가까운 친척이자 최측근으로서 두터운 신임을
받는 왕실의 일원 중 하나였고, 베를린의 학교에서 내로라하는 귀족과 부르주아 자제들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유리, 그가 본 귀족 중에서 가장 귀족다운 존재였으니까. 그의 적나라한 경계 어린 태도를 멍하니
지켜보던 유리는 굳은 입술을 가까스로 벌리며 끊어질 것 같은 대화의 갈피를 잡았다.
“못 알려줄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순간이, 환각과 환청일지도 모른다고 응당히 생각하게 됐다. 마른 우물처럼 깊어져 가는
그리움이 빚어낸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그를 만나러 가는 이 여행의 시작에 들뜬 마음이 만들어낸
환청일지도 모른다.
유리가 외워둔 세드릭의 하루 일정을 생각한다면, 지금쯤 런던의 타운하우스의 정원에서 단출한 티타임을
즐기고 있어야 한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보고서에서 읽었던 마지막 정보가 유리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세드릭.”
그렇지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리움을 거짓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마음이 흘러나와
객실을 가득 메웠다. 기차가 속도를 쳐올리는지, 그들이 있는 객실의 전등이 걸치고 있는 색유리로
장식된 갓이 흔들리며 객실의 명암을 어지럽혔다. 유리의 부름에 종일 굳건하게 다물려 있던 사내의 입술
끝이 슬쩍 비틀렸다.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아.”
“어떻게… 여기에.”
그때도 그랬다. 이렇게, 사람을 모르는 척, 순진한 척, 우연히, 아주 우연히 마주쳐 감정에 놀아나는 척
….
“…여긴 바르샤바 연방의 관료들이 널려 있고, 바르샤바 연방국 주요 도시를 정차합니다. 기차 여행을
하기엔… 별로 추천하고 싶은 코스는 아니군요.”
“…기차 여행이라.”
“…런던에서?”
“….”
덕분에 유리 자신도 모르게 세드릭의 일상을 말하고야 말았다. 누가 들어도 뒷조사를 한 것이 분명했다.
그 기색을 놓치지 않고 세드릭은 집요하게 캐물었다.
아차. 유리는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한 자신의 쓸모없는 입을 애꿎게 탓했다. 이래서야 예전의 자신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고 실토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리는 세드릭의 팔을 잡았던 손을 천천히 떼었다.
그 모습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세드릭의 한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말해보세요.”
“…실수로 나온 말입니다.”
당연한 소리였다. 세드릭의 일정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본인일 것이다. 그걸 본인 앞에서 흘렸으니 못
맞출 일도 없다. 발뺌하는 유리의 손을 세드릭이 거칠게 잡아당겼다. 이전보다 너른 품이 유리를 감쌌다.
그때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윽!”
“‘런던에서 티타임을 즐긴다’.”
“….”
그 너른 품에 안쪽으로 살결이라고 보기엔 딱딱한 물체의 실루엣이 보인다는 거였다. 오랫동안 훈련받은
유리의 눈썰미는 어렵지 않게 그 물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권총이었다.
“맞습니까?”
세드릭은 원래도 수상하다고 생각한 보좌관과 비서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번 대화로
마음이 더욱 기울여졌다. 새로 들어온 에식스 출신의 비서가 몇 번씩 정해진 일정과 다른 날에 런던의
타운하우스로 찾아오는 날이 종종 있었는데, 아마 그때 자신의 일정을 기록한 게 틀림없었다.
“살로메.”
“…그건 어떻게.”
숨겨온 이름으로 불리운 유리의 눈이 불안에 떨었다. 복잡한 생각에 가두어진 유리를 두고 세드릭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참 가증스럽지 않은가.
“….”
심지어 세드릭의 이죽이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가 객실에 들어오는 걸 걱정하는 것처럼 객실의
커튼을 쳐서 가리고 문짝의 걸쇠를 잠갔다. 그와 함께 나온 유리의 말은 세드릭 마음을 어지럽혔다.
유리는 세드릭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자신을 이 장소에서 무사히 빼내는 방법에 모든 정신이
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지금은 자신을 처리할 수 있는 분명히 좋은 기회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네요.”
“…그건.”
유리의 걱정하는 투에도 세드릭의 반응은 제법 매몰찼다. 차가운 답에 유리의 입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어물어물,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걸 잘 아는 사람이 용케 이 열차에 올라탔다. 자살행위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적어도, 연합국의 주요 인사인 당신을 반기는 사람이 이곳에 없다는 건 확실하겠어.”
“늘 그럽니까?”
“…내가.”
“세드릭.”
유리의 무뚝뚝한 낯에 희미한 미소가 담겼다. 같은 하늘 아래에만 있다는 사실 하나로 족하다고 살아왔다.
자신은 어찌 되어도 좋으니 당신은 원래의 길을 벗어나지 않고 잘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거 하나면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던 사람을 막상 눈앞에 마주하고 있으니 다른 바람이 생긴다. 오랫동안 잘 견뎌왔던 마음이 흔들리다
연약하게 부서지고 만다. 마음에 묻어 둔 건 기억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달라고 하면 줄 건가?”
유리의 자조적인 웃음을 마주한 세드릭은 결국 그런 게 목적이었냐고 말하지 못했다. 곧이어 나온 유리의
한탄 같은 말이 세드릭을 멍하게 만들었다.
“….”
“거짓말.”
“좋은 자세야. 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말해.”
“말하란 말입니다!”
“…목소리를 낮춰.”
언제나 그랬다. 자신의 앞에 있는 유리는 언제나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차라리 뻔하디뻔한 계략
따위로 자신을 농락했더라면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언제나 저렇게 푸른 눈으로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혼자서 짊어지고 간다. 모든 상처를 당연하게 가지고 간다.
“지금….”
가볍게, 살짝 대었다 멀어지는 입술이 아쉬울 무렵 가느다란 속삭임이 웃음을 담았다.
“하아… 하아….”
“아직도, 키스 잘 못합니까.”
뜨거운 열기를 품은 숨결이 예민해진 목덜미 쪽에 은근히 퍼졌다. 푹 가라앉은 세드릭의 목소리가 유독
섬찟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세드릭이 피식 웃었다.
“…그만.”
세드릭은 마치 천상의 과일을 탐하듯, 유리의 보드라운 목덜미를 은근히 물다가 어깨와 이어지는 근육에
날카로운 이를 대었다.
“뭐하면, 내가 다시 훈련 시켜주죠.”
“…아!”
“…누구랑 했습니까.”
세드릭의 어둡고 집요한 시선이 미처 가리지 못한 흔적을 빠짐없이 손끝으로 덧그리면서 눈에 담았다.
피딱지가 달라붙고 옴폭하니 파인 상흔이 하얀 살결 위로 붙어 있는 부분이 눈이 갔다. 유리는 고개를
돌려서 세드릭의 눈길을 피했다.
“그 남자가 만든 겁니까?”
“…뻔뻔한 남창.”
“….”
“…하.”
유리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이상하게 머리로 열이 치솟았다. 참, 사람을 여러모로 미치게 하는 재주가
있다. 이런 것마저도 한결같을 건 없는데. 본인 입으로 말하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낮게
탄식하던 세드릭은 아까 키스하느라 붙잡았던 유리의 뒤통수를 거칠게 쥐었다.
“윽!”
“누구랑 해도 상관없다?”
“…명령에 따를 뿐이야.”
세드릭은 유리가 입고 있던 진한 녹색의 군복 바지의 혁대와 단추를 손쉽게 풀었다. 허리를 조이던 군복
바지가 헐렁하게 풀리자 유리의 얼굴이 당황으로 번져갔다.
“지금 무슨….”
“이 자리에서 나랑 해도 상관없겠군요.”
“흣, 아! 거, 거긴.”
세드릭이 유리의 얼굴에 홀린 사이에 유리가 고개가 젖혀진 채로 숨을 헐떡이며 애원했다. 벌어진 입 안에
미처 넘기지 못한 타액이 고여서 분홍빛 혀를 촉촉하게 적시고 있는 것이 빤히 보였다. 마치 제 숨을
바라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세드릭이 유리의 성기를 잡고 은근히 자극하는 바람에 유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신음을 세드릭의
입에 묻었다. 서로의 숨을 앗아버리겠다는 듯이 객실 안에서는 한참 동안 척척한 소리가 났다. 간간이,
자극을 이기지 못한 둘의 억눌린 신음도 튀어나왔다.
“안쪽이 제법 부드러운데.”
“흑!”
오물오물 씹어오다 못해 안쪽이 물건을 품다 온 것처럼 눅진하게 풀려 있었다. 급하게 고개를 젓는 유리를
두고 굵은 손가락 하나가 더 예고도 없이 파고들었다. 허벅지 안쪽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은 세드릭의 거친
욕망을 부채질할 뿐이었다.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 사람의 앞에선 굳은 다짐 따위가 다시 손쉽게 무너져 내린다.
어쩌면 이렇게 될 줄 알고 달리는 열차에 다시 뛰어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세드릭은 씁쓸하게
되뇌었다.
“하윽!”
“…후우.”
그것도 잠시, 배 안쪽을 사정없이 파고드는 격통에 숨이 턱턱 막혔다. 거칠게 숨을 내뱉는 세드릭에게
자연스럽게 손이 뻗치고 숨을 갈구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건장한 육체에 맡기자 단단하고 중압감이
느껴지는 세드릭의 육체가 유리를 위에서 내리눌렀다. 찌릿하게 들어오는 쾌감의 향연에 유리는 애꿎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허리 짓을 하며 발갛게 물들어가는 하얀 뺨을 구경하던 세드릭은 핏물이 들어가는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마저도 달콤했다.
귓가에 울리는 낮은 저음이 어깨 쪽의 신경을 유독 건드리고 움츠리게 했다. 속삭이던 입술은 가까워지다
못해 귓바퀴 쪽의 연골을 잘근잘근 씹었다.
세드릭의 면박에 유리는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을 창녀로 모욕하고, 욕구 풀이 상대로
취급하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다른 고위 관료가 이런 식으로 말했더라면 분명
찝찝한 마음으로 받아줬을 텐데.
“….”
“흐읏.”
대답을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연신 허리를 쳐올리며 아득하게 만드는 쾌감을 주는 탓에 제대로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아니, 말한다고 해도 믿어주기나 할까. 이미 자신은 그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힌
것을 잘 알면서도 말해주고 싶었다.
“…젠장.”
* * *
긴 정사가 끝난 후에 세드릭은 기절한 유리를 객실 좌석에 눕혔다. 전날부터 죽 침대에서 관료를 접대한
것도 모자라 객실 안에서 몇 번이고 세드릭을 받아내느라 무리가 온 게 분명했다. 세드릭은 격렬한
몸짓으로 흘러내린 서스펜더 따위를 대충 끌어 올리다가 제가 눕힌 사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곤히
잠이 들어 있는 모습이 유독 눈에 밟혔다.
“…예쁘네.”
만에 하나.
“…하.”
“왜.”
…결국 잊혀질 것이다.
“왜 하필 나를… 찾아왔습니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신이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당신의 존재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세드릭은 묻었던 고개를 들고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혼잣말처럼 나온 말은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8 년 동안 듣지 못한 답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을 텐데.
“왜 내게….”
말없이 평안하게 잠들어 있는 얼굴이 그저 야속할 따름이다. 당신은 내 마음을 알기나 할까. 세드릭의
손이 흐트러진 유리의 머리카락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미려한 얼굴을 번잡스럽게 가리는 것들이 보기
싫었다. 하얀 뺨이 온기로 불그스레 달아오른 것이 참으로 어여쁘다.
“…한심하긴.”
삼키지 못한 깊은 한숨이 탄식과 함께 나온다. 복잡한 머리를 손바닥으로 짚고서 기차 칸의 연결부 쪽으로
향했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역에 정차하기 전, 담배가 간절했다. 한숨이 숨겨진 숨
자취를 가릴 이유가 필요했다. 잘 밀봉된 박스 같은 기차 칸 연결부의 쪽 창문을 열고 상아로 깎아진
케이스 안에 미리 말아둔 담배 하나를 물었다.
-치이익
“…너무 단순한가.”
“…후우.”
깊숙한 연기가 눈앞을 어른어른하게 가렸다. 잔뜩 열이 올라서 고정시켜둔 머리가 흘러내린 것을 대충
쓸어올렸다. 어차피 런던에서 가만히 기다렸어도 만날 사람이긴 했다. 자신은 그들의 타깃인 이상 만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그래서 열차에 오르겠다고 자진했다. 가만히 노려지는 것을 지루하게 기다릴
바에야 자신이 먼저 선수를 칠 생각이었다. 딱 마지막으로, 얼굴만 한 번 보고.
“…죽일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손가락 사이에 끼워 둔 담배가 삽시간에 타들어 갔다. 자욱한 연기가 눈앞을
아릿하게 자극했다. 분명 나쁘지 않은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팍 쪽에 걸어 둔 권총을 잡지 못했다.
우스운 것은 살로메도. 아니, 유리도.
“…가만히 있었지.”
분명 자신과 접촉하면서 가슴팍에 있는 권총의 무게를 느꼈을 텐데. 경계하는 몸짓도, 무엇도 하지
않았다. 마치 당장이라도 죽여 달라는 듯이 빈틈을 보였다. 분명히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는 많았다.
그러나 주어진 기회 그 무엇도 하나 잡을 수 없었다.
* * *
“…아.”
깜빡 잠이 들었다. 유리는 눈앞을 찌르는 객실의 주황 조명을 받고서 정신을 차렸다. 허겁지겁 몸을 반쯤
일으키자 다리 위로 두툼한 코트 따위가 흘러내렸다.
“…이건.”
“아….”
#chapter 31
* * *
“…세드릭.”
아무도 없었다. 유리가 반쯤 일으킨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힘을 잃은 손이 저절로 텅 빈 좌석 쪽으로
향했다. 그가 가져왔던 작은 짐가방도, 반듯하게 접혀진 신문 따위도 없었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있었어.”
“이 자리에, 앉아서….”
들어오는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자신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자신에게 보인 격렬한 감정의
반응을 돌이켜 보면 분명 좋은 기분만 존재하진 않았겠지. 유리는 그의 가슴팍 쪽에서 느꼈던 총구의
묵직한 실루엣을 떠올렸다.
호신용이라고 가볍게 넘기기엔 유리가 그간 지나쳐온 경험이 많았다. 그가 가져온 무기의 목적이 모를
정도로 순진하진 않았다. 유리의 멍한 시선이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이 비치는 객실 내 창문을 향했다.
아직 이른 봄을 맞은 침엽수림에는 미처 녹지 않은 눈이 시퍼렇게 매달려서 스산한 회색빛 풍경을
그려냈다.
* * *
“늦었군.”
“앉아.”
그가 앉으라고 말해준 좌석은 제법 무두질이 잘된 매끈한 가죽으로 씌워져 있었다. 손걸이 부분은 상아와
귀갑, 값비싼 금속으로 세공되어 있었으며 보드라운 실크로 만들어진 쿠션이 장식을 했다. 저 같은
사람이 앉아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화려했다. 유리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겨서 자리에 앉았다.
“…다른 보좌관들은?”
“그런가.”
“그냥.”
“기차 여행은.”
블라디미르가 자신이 지내던 시베리아의 수용소를 가지고 드넓은 곳, 이라 칭하는 말에 쓴 웃음이 나왔다.
수용소 바깥에 있는 사람이 보기엔 드넓어 보일지 모르지만 막상 들어와 보면 그보다 좁은 세상이 더
있을까. 오히려 지금 이 기차 칸을 넘나들 수 있는 작은 자유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들어간 적 없는 사람은 결코 이 사실을 알 수 없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 모든 당연한 것들이 자신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몸은 조금이나마 편안한 곳으로 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마음은 가시밭길에 구르는 듯한 불편함이 앞섰다. 조용해진 유리를 알아챈 블라디미르가 서류를 검토하다
말고 만년필을 테이블 위로 탁, 내려놓았다.
“어땠지.”
“…무엇이?”
“….”
“왜 그렇게 보지?”
“알고… 있었어?”
“물론.”
“…알고 있었다고?”
“왜 내게 말 안 했지?”
“왜 말을 안 했냐고?”
잠시만 빌려주는 아량을 받았으면, 좀 곱게 쓸 것이지. 기어코 흠집을 내. 블라디미르는 피어오르는
불쾌를 애써 참고서 대답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말장난하지 마.”
“블라디미르!”
“…뭐?”
“헛소리하지 마.”
“이유?”
“목적?”
“…그건.”
블라디미르의 날카로운 추궁이 따라붙었다. 뻔한 대답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애초에 유리가 타깃을 바로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패한다는 쪽에 가능성을 높여둔 참이다.
“지금 상황에 대해서 물어볼 사람은 유리, 네가 아니라 나라는 걸 모르지 않겠지.”
“…미친놈.”
“자주 듣는 소리야.”
함정이었다. 유리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죽여야 할 타깃이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것을 뻔히 알았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봤다.
아니, 오히려 자신과 그가 만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가, 자신에게 감정을 드러내기를 고대했던
것처럼. 찰나의 틈이라도 보이기를 바랐던 것처럼.
“둘이서 꽤 좋은 시간 보냈다고 생각했거든.”
“닥쳐!”
“왜 그러지? 그게 네가 해야 할 일 아니던가.”
“살로메.”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사관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방학 때 잠시간 투입된 정보부에서 마주친 유리를
블라디미르는 아직도 기억했다. 여자보다 뛰어난 미색을 가진 것도 모자라, 사격 훈련을 빈틈없이 해내는
것에 몸에 전율이 흘렀다.
특히, 그가 쏜 산탄총이 자신의 귀 옆을 스치는 것도 깜빡 모를 정도로. 상위 부서로 갈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고 정보부의 일개 요원으로 남아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놔.”
“비켜!”
“윽!”
“살로메.”
군복 특유의 빳빳한 옷감이 끌러지면서 스치는 소리가 객실을 울리고, 등 뒤로 고정된 손목에 부드러운
줄이 뱀처럼 감겨 들어오며 결박했다. 무엇을 하려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반항하는 유리의 견갑골
사이를 블라디미르가 자신의 무게로 누르며 귓바퀴 너머로 속삭였다.
“그대는 알몸으로 총을 들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야.”
* * *
“각하, 나가십니까?”
평소 간결한 차림을 선호하는 세드릭의 성향을 아는 비서는 자기가 모르는 귀족들 간 비밀스러운 사교
모임이 있나, 추측했다.
“집사에게 미리 일러두겠습니다.”
“예.”
의원실의 비서는 짧은 인사로 서두르는 세드릭을 배웅하면서 의외라고 생각했다.
세드릭이 나간 의원실을 정리하고 비서가 퇴근을 준비할 때, 야트막하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어머. 벌써요?”
노크의 주인은 세드릭의 약혼녀 아델라인이었다. 사교계의 요정이라고 불리는 미모를 마주한 비서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복을 굴러 차는구나.’
“그렇군요….”
“의원님은 아마….”
* * *
“자네도.”
세드릭은 국회의사당 입구의 풋맨이 잡아준 블랙 캡에 올라탔다. 운전사가 백미러로 눈인사를 했다.
이름이나 작위를 굳이 대지 않아도 귀족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남자였다.
“어디로 모실까요?”
“예.”
행선지도 런던의 사교 클럽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세드릭이 서두른 덕에 런던의 출퇴근 인파에 밀리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한 세인트 제임스 스퀘어 스트리트에 여러 대의 블랙 캡이 줄줄이
늘어져 있었다.
‘다들 몸이 달았군.’
“자네도.”
“여전하군.”
바깥의 문지기를 이은, 현관의 포예(Foyer)에 서 있는 연미복 차림의 사교 클럽의 매니저가 세드릭을
알아보고 예를 표했다.
“손님들은?”
“우리 쪽은?”
“…후우.”
“하하, 그랬지.”
“그랬던가? 난 기억이….”
“이게 누구야!”
목이 타는지 에저튼 후작이 크리스털 잔에 담긴 위스키를 들이켜는 동안 두 남자의 첨예한 시선이 스쳤다.
세드릭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그와 같이.’
세드릭은 짧게 대답했다.
진심을 숨기는 세드릭의 모습에 블라디미르가 굳은살이 박인 손끝으로 턱을 쓸면서 넌지시 물었다.
“즐기진 않지만.”
세드릭이 답지 않게 위스키 잔의 바닥을 빨리 비웠다. 그토록 바라던 목표물을 실제로 눈앞에 두고 있으니
이상하게 술이 당겼다.
블라디미르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그다지.”
“조용한 곳이 좋겠습니다.”
“바라던바.”
위스키의 원액을 꽤 진하게 탄 크리스털 잔을 들고 둘이 자리를 옮기자 에저튼 후작이 세드릭을 세웠다.
“서로 구면이라.”
“좋은 저녁 보내길.”
에저튼 후작을 비롯한 내실의 모든 시선이 두 사람을 따라붙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서로 다른 진영의
사람들은 금방 대화를 재개했다.
독실에 들어온 두 남자는 사교 클럽의 시종이 커다란 테이블 위에 차려둔 체스판 양쪽에 섰다.
세드릭이 손짓했다.
“선호하시는 대로.”
“시작하시죠.”
“귀족치곤 험한 일을 즐기신다더니.”
블라디미르도 제 앞의 검은 폰을 움직였다.
‘왜 이러실까.’
블라디미르가 말하며 세드릭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얌전빼던 세드릭의 손은 날카로운 수를 뒀다.
툭, 블라디미르의 자신 있던 체스 말이 사라졌다.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내어주더군요.”
세드릭의 반격에 당한 블라디미르의 입매가 순간, 굳었다가 풀어졌다. 세드릭의 말처럼 앞서나간
블라디미르의 앞에는 백색의 체스 말만 남았다.
명백한 경고였다. 세드릭의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전법에 당했다. 세드릭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내기에 따라 다릅니다.”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
“우연찮게도 말이죠.”
우연. 세드릭의 약혼녀와 유리를 비교하는 말에 세드릭의 손이 테이블 아래로 내려갔다. 두 손을 맞잡은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대령,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저는 제 부하를 걸겠습니다. 의원님은?”
“그럼요. 차고 넘칩니다.”
#chapter 32
* * *
빠짐없이 채워진 단추들이 벌어지며 틈새로 근육의 결을 내보였고, 고심의 흔적이 보이는 머리카락은
까마귀들의 둥지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체크메이트.”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연초가 블라디미르의 마음처럼 타들어 갔다. 담뱃재가 수북하게 쌓인 재떨이 위로
비벼 끄면서 블라디미르가 허탈하게 말했다.
얼마 남지 않은 체스 말 위로 악수가 오갔다.
서로의 대답에서 이념의 대립이 엿보였다. 국책은 따르지만 태도는 명백하게 반대인 세드릭. 중앙의
정책은 어쨌든 군말 없이 따르는 블라디미르.
“덕분에.”
“그것참.”
“…영광입니다.”
* * *
‘오늘 밤인가….’
“백작님, 준비됐습니다.”
셔츠의 팔과 목 부분을 대충 풀어헤친 모습이 돌아온 탕아라고 해도 놀랍지 않았다. 세드릭은 씁쓸하게
찌푸린 미간으로 빈 잔을 매니저에게 넘겼다.
벽 쪽의 태피스트리를 걷어내고 화려한 무늬의 벽지 한구석을 손으로 더듬어서 눌렀다. 그러자 평범해
보이는 벽지가 스르륵, 튀어나오며 비밀의 문을 보였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악담도 여전하군그래.”
“오셨다, 오셨다.”
“나으리, 꼴이 왜 그러슈?”
“실연당하셨소?”
“손님이 와서 가볍게 놀아줬을 뿐이야. 이상한 말은 그만해. 사교계의 마담들보다 자네들이 더 하군.”
까딱하면 런던에서 국가 사이에 축소형 3 차대전이 이루어질 판이었다. 세드릭이 체크된 런던 위 지도를
보다가 굳은 마디로 지도를 툭, 툭 쳤다.
“알겠습니다.”
“…러시아가?”
‘그럴 리가 없다.’
대륙에서 횡단 열차를 타고 출발하기 전에도 그쪽이 가장 많은 인원의 참가를 알렸다. 보고하던 요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세드릭이 바로 지도로 위치를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인원이 빠졌는데 체류 위치는 갈라 파티장과 5
분 거리 남짓. 너무나 노골적인 습격을 예고하고 있었다.
“사람 보내서 참가 인원 다시 받겠다고 전해. 사람이 갑자기 증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주축국의 다른 인원은?”
“그대로 참가합니다. 주요 인사인 폴란드 공화국의 비톨트 기에레크, 동독의 에리히 울브리히트 그리고
….”
“파일.”
“여기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대령이라….’
사진의 주인공은 그와 새벽이 새도록 체스 게임을 하던 남자였다. 전 정보부 수장인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은 젊은 수뇌부. 사교 클럽에서 몸풀기처럼 맛본 그의 제안은 노골적이었다.
-이번에 제 밑으로 들어온 부하인데. 의원님의 약혼녀와 굉장히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귀족원의 일원이자 정계에 깊이 몸담은 세드릭에게 약혼녀의 유무를 제쳐두고, 사실 그런 종류의 제안은
꽤 자주 들어오는 편이었다. 물론 평소의 세드릭이었다면 분명 그런 노골적인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사람 붙여.”
“알겠습니다.”
“아니. 내가 간다.”
하지만 아직 누구를 노리는지는 불투명하다. 세드릭이 여왕의 사촌인 이상, 왕위계승권에 가까운
왕족이었다.
어김없이 쏟아지는 1 차 잔소리에 세드릭이 이마를 짚었다. 보안국의 왕족 관리인이 세드릭 자신이 나설
때마다 난리 치는 것도 버거운데 이젠 동료들까지 난리였다.
“내가 사라지면 계승권 구도가 깔끔해지고 좋을 텐데 자네들은 쓸데없는 걱정이 태산이군. 마가렛이
슬퍼하겠어.”
여왕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부르는 세드릭이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허공에 툭툭, 휘두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특수 부대 요원을 비서나 서기관, 보좌관 등으로 둔갑시켜서 투입시켰다. 이건 분명히 대인원이 모이는
이벤트에서 습격을 계획한 명백한 증거고….”
이번 파티의 습격을 대비해서 고용한 메이드나 버틀러들도 보안국에서 협조받은 장교들이나 부사관
출신들이었다. 세드릭의 켄싱턴 하우스를 눈짓했다.
“알겠습니다.”
“넵.”
* * *
“운전사를 불러드릴까요?”
“음.”
세드릭은 한참 동안 귀족원을 위한 사교 클럽에서 보안국 요원들과 회의를 했다. 클럽의 매니저가 불러준
블랙 캡의 뒷좌석에 비스듬하게 앉았다.
“고맙네.”
“도착했습니다.”
“고맙네.”
‘무리했나.’
세드릭은 얼굴을 찌푸리고 끄트머리에 은색의 장식이 달린 지팡이로 기대어 서서 뒤늦게 온 숙취의
후폭풍을 견뎠다.
“제게 기대십쇼. 부축해드리겠습니다.”
“부탁하…지.”
알버트 집사장이 세드릭을 부축해서 타운하우스 안으로 이끌었다. 안색이 좋지 않은 세드릭이 들어가면서
목욕물의 안부를 물었다.
“세드릭 님!”
“…아델라인?”
“일이 있었어.”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세드릭의 눈길이 집사장 알버트에게 향했다. 알버트가 난감한 기색으로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그의 아름다운 약혼녀는 어제저녁부터 약혼자의 타운하우스에서 기다린 것이다.
“그, 그게.”
세드릭은 정중한 사람이지만 증거 없는 의심을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의심에
불쾌함을 느끼고 파혼 의사를 내비칠 수도 있다.
아델라인이 사교계의 추문을 무릅쓰고 찾아온 게 무색하도록 바로 쫓겨나기 직전이었다. 세드릭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늘 켄싱턴 하우스에서 외교부와 하원 의원, 그리고 귀족원들과 함께 갈라 파티가 있다고 들었어요.”
“…뭐?”
이걸 단순한 갈라 파티라고 생각하면 그녀의 반응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번 일은 순진한 그녀가
생각하는 화려한 궁정 파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아델라인.”
“하지만….”
“돌아가도록, 피곤하니까.”
세드릭은 가까스로 상황을 정리하고 약혼녀를 어렵게 보냈다. 다른 사람의 어리광이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그 사람’의 얼굴을 닮아서 유난히 약해지는 감이 있었다.
* * *
“하아….”
알버트가 미리 물을 받아둔 욕조에 들어간 세드릭이 눈을 나른하게 떴다. 물기로 젖은 얼굴이 지독하게
섹시하게 보였다. 그는 천장에 금으로 장식된 장미 부조를 보면서 저녁에 있을 갈라 파티 작전을 다시
정리했다.
‘뻔하지.’
총성이 오가며 개판이 된 파티장. 아무리 일반인의 출입을 최대한 줄였다곤 하지만 관료들의 멱따는
소리가 켄싱턴 하우스의 천장을 뚫어버릴 것이다.
‘아니,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 * *
“윽.”
세드릭이 턱시도 소매 쪽의 커프스 링크를 채우다 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귀 안쪽에 끼워진 무전이 통신
불량으로 고막을 날카롭게 긁었다. 보안국 요원이 무전에다 대고 사과했다.
[아이고, 방금 건 실수.]
“바르샤바 사람들은?”
[물론이죠. 참, 우리가 주목하는 블라디미르 대령 같은 경우는 보좌관을 자신의 방으로 들여보낸 이후로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답니다. 즐거운 시간을 즐기느라 바쁜 모양입니다.]
“…보좌관을?”
“…그래?”
“한눈팔다가 목 날라간다.”
세드릭과 농담을 주고받던 요원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관료 인사들의 호위에 집중하느라 직접적인
충돌은 피할 줄 알았다.
“…마음이 바뀌었어.”
#chapter 33
* * *
-켄싱턴 하우스, 저녁 8 시
하이드 파크에 위치한 켄싱턴 하우스 입구의 살벌한 보안 요원들을 지나쳐서 레드카펫이 깔린 중앙
연회장엔 왈츠곡이 울려 퍼졌다. 합주곡처럼 낯선 억양이 부드러운 연회 음악에 녹아들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손에는 휴전을 축하하는 둥그런 쿠페 잔을 하나씩 들면서 연신 이어지는 대화로 마르는 입을 축였다.
“입장.”
세드릭의 시선이 화려한 불빛이 가득 찬 연회장 곳곳에 포진한 주요 인물의 위치를 파악했다.
‘러시아 연방의….’
“블라디미르 대령.”
“….”
세드릭의 귀에 무전을 통해서 보고가 들어왔지만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유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세드릭의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의아함이 가득한 보고가 따라붙었다. 세드릭이 연회장 기둥 쪽으로 몸을
숨기고 뒤늦게 소리를 내었다.
“…음.”
“…알겠다.”
“이쪽은…?”
“이런, 지루한 정보부 업무만 하기엔 아름다운 얼굴이 너무 아까운 거 아닙니까? 대령, 이런 부하가
있으면 종종 알려줘야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한번 따로 소개시켜드리지요.”
“저도 궁금하군요.”
“…아.”
유리의 흔들리는 시선이 세드릭에게 닿았다. 긴 세월을 넘어서 비로소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때 말한….”
블라디미르가 유리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반갑습니다.”
“마찬가지.”
“좋은 저녁 되시길.”
“…저.”
“…그.”
둘의 입이 동시에 열리고, 무안한 침묵이 흘렀다. 세드릭이 재빨리 대화의 주도권을 넘겼다.
“먼저 말해요.”
“…프림로즈 의원님.”
원인은 그 남자인가. 세드릭의 머리에 낮에 제임스가 보고한 쓸데없이 선정적인 내용이 떠올랐다.
“…몇 년 만이죠?”
-보좌관을 자신의 방으로 들여보낸 이후로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답니다. 즐거운 시간을 즐기느라 바쁜
모양입니다.-
세드릭이 속으로 질책하는 동안 연회장 기둥 그림자에 가려진 유리의 얼굴이 희미하게 웃었다.
“8 년만입니다.”
“…건강해 보입니다.”
“의원님도….”
“세드릭.”
“…네?”
“아니… 아닙니다.”
“나쁘지 않군요.”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말해야 해. 유리의 심장이 고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말해놓고도 염치가 없었다. 적대국의
대표로 만난 사람에게 부탁이라니.
“부탁?”
유리는 속으로 멍청한 자신을 탓했다. 이상하게도 이 남자의 앞에선 평생에 혹독한 훈련으로 익혀온
절제심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세월이 지나도 그 마음 하나만큼은 여전했다. 세드릭의 턱시도 재킷의 소매를 쥔 유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왕이 도착하기 전에 빨리.
“몸을 피해야….”
유리의 마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세드릭에게 보고한 보안국 요원의 말대로 여왕의 등장을 시작으로
연회장을 습격하기로 했다.
유리의 시선은 곳곳에 장교와 보좌관으로 분장한 낯익은 특수 부대 요원들에게 향했다. 모두 작전대로
인파에 섞여서 움직이면서 몰래 무장한 무기들을 꺼내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탕!
[M 피격, 작전 개시!]
“꺄아악!”
“여왕님이!”
-탕, 탕!
“엎드려!”
-와장창!
오가는 총성에 화려한 샹들리에가 테이블 위로 떨어지면서 시원하게 박살 났다. 서로의 진영 사람이 몰려
있는 쪽으로 도망치던 사람들이 물 폭탄을 맞은 개미처럼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살려줘요!”
‘…알고 있었어?’
-탕, 탕….
그때, 가녀린 외침이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세드릭과 유리, 블라디미르의 시선이 돌아갔다.
“…아델라인?”
자신의 이름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세드릭의 시선이 흔들렸다. 샹들리에가 무너진 자리 위로
불길이 치솟았다. 아델라인이 화려한 드레스 자락을 잡고서 기겁했다.
“이게, 무슨 일… 꺄악!”
그때, 러시아의 특수 부대 요원이 세드릭의 약혼녀를 뒤에서 덮쳤다. 위험해. 유리의 손이 절로 움직였다.
-탕! 탕!
러시아 군복을 입은 아름다운 군인이 날린 총알을 담담히 기다렸다. 아델라인의 예상과 다르게,
고통스러운 신음은 다른 사람에게서 터졌다.
“으윽!”
“레이디, 이쪽으로.”
매캐한 연기가 연회장 곳곳에서 퍼졌다. 하지만 총격전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연기 사이로 누군가가
소리쳤다.
“유리!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당장 죽여!”
그들의 목표였던 여왕은 처치했다. 그다음은 가까운 왕위 승계자인 세드릭이었다. 하지만 뻔뻔한 귀족
놈의 낯은 멀쩡하게 살아서 블라디미르 자신과 특수 부대 요원들에게 총구를 겨눴다.
‘제길, 타깃을 코앞에 두고 뭐 하는 거야!’
“죽여!”
유리가 자신에게 명령하는 블라디미르의 외침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어쩌다 가까워지면 언제나 이런
식이다.
“아….”
언제나 마음이 향한 사람을 결국 어떻게든 만났기 때문에. 그리움에 가려진 허상 사이에서 헤매는
세드릭의 손을 보던 유리가 허탈하게 웃었다.
“…당신은.”
여전하다. 시간이 흐르고 몸이 자라고 서로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다정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
“쏴요.”
그토록 연습한 대상인데. 모스크바로 돌아온 이후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사격 연습을 했다.
세드릭은 가만히 유리가 겨누고 있는 총구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상하게, 죽는 게 두렵지 않았다.
“….”
복수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그토록 탐내던 이 목숨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겠다고. 하지만 이상하게 살아 있는 날마다 알 수 없는 허무함이 그를 덮쳤다.
“이상한 말인 건 압니다.”
“…근데.”
“보고 싶을 거 같아서요.”
넘어갈 수 없는 국경선 앞에 서서 유리의 얼굴을 그리워했다. 어쩌면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은, 그날의
유리가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하고, 한심한 어린 날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울어주면 더 좋고.”
가문의 가주로서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맹목적인 가르침과 규율, 책임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쏴요.”
찰나의 침묵이 둘 사이를 메웠다. 침묵을 깬 사람은 세드릭이었다. 한창 사격을 퍼붓던 세드릭의 총은
천장을 향했다.
“유리!”
“…못 해. 알고 있었어?”
“난 당신을 죽일 수 없어.”
그건 절규에 가까웠다. 이상한 일이다. 명령은 언제나 절대적이었고, 그것만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도, 지금도….”
“비켜!”
젠장. 그렇게 훈련을 시켜도 결국 제자리다. 그럼 내가 끝내주지. 저놈이 죽으면 유리의 미련도 없어질
것이다.
“대령님?”
“내가 한다.”
-탕!
대리석 바닥에 무거운 총신이 구르는 순간. 그의 손이 다시 허공을 저었다.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블라디미르가 총을 내리고 황급히 소리를 질렀다. 이건 작전을 망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계획이
일그러지다 못해 진창에 구르는 셈이었다.
“세드릭.”
나의 요한.
“…다행, 이다.”
네가 아니라서. 후회는 없었다. 쿨럭, 기침과 함께 붉은 피가 하얀 대리석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그때
미처 매듭짓지 못한 행위가 돌고 돌아 지금 이루어지는 것뿐.
“유리!”
“대체… 대체!”
[알겠습니다.]
“대답해요, 제발.”
저 손이 주는 온기를 자신은 알고 있다. 잊을 수가 없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왜, 왜….”
처음으로 느꼈던 타인의 온기, 타인의 곁, 타인의 소중함. 겨우 버티며 살아가던 자신에겐 그게 너무
낯설어서, 절대로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왜 그랬어, 왜 또 그랬냐고….”
하지만 처음으로 느낀 온도는 결국 자신의 전부를 차지했다. 애초에 이렇게 될 것을 알아서 그랬을까.
네가 나의 전부가 될 것을 알아서….
애초에 작전이 아니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이었고, 작전이 끝나면 헤어질 사람이었다. 멈추지 않는 눈물에
젖은 푸른 눈이 점점 감겼다.
“…보고 싶… 어서.”
“당신이….”
이 모든 것이 영원하지 못할 걸 알았다.
“…좋아… 서.”
“사랑해요….”
세드릭이 울먹이는 목소리가 한탄하듯이 읊조렸다. 세드릭은 복수할 기회도, 사랑할 기회도 주지 않는
애틋한 사람이 야속했다.
“언제나, 당신을….”
눈물에 젖어서 세드릭의 절규하는 표정이 잿더미를 사이로 흐릿하게 보였다. 삶의 마지막을 세드릭으로
장식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눈앞이 멀어지고 있었다. 늦었다. 이미 자신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전하지 못한 말을
했다.
“…나… 도.”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두 눈이 감겼다. 사람 없는 황무지에서 시작한 긴 여행의 마지막 장이었다.
#chapter 34
* * *
눈앞을 가득 채우던 하얀빛의 정체는 상앗빛의 모슬린 커튼이 흔들리는 창문 너머로 흐르는 햇살이었다.
아. 눈을 감았다.
이 환한 햇살 아래서.
이 모든 게 헛된 꿈인 걸 알면서도. 다 알면서도….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 실낱같은 꿈에 얹혀살았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서 따뜻한 햇볕이 비추는
세상으로 가는 일은 없었다.
시야를 가리는 눈물을 덜어내고자 깜빡거리자 주변이 선명해졌다. 화려하진 않지만 적당히 포근한
느낌으로 꾸며진 방. 천국이라고 보기엔 방 안이 너무 목가적이고 정답게 꾸며져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윽!”
-끼이익….
살아서 그를 다시 볼 수 있으니까.
“…유리?”
하녀가 그릇을 줍고 허리를 편 순간, 2 주 전에 농장의 주인. 세드릭이 얼굴에 피와 잿더미를 뒤집어쓴
채로 품에 안고 온 금발 머리의 미인과 눈이 마주쳤다.
“…한나.”
하지만 주인님이 숨넘어가는 얼굴로 데려온 미인은 약혼녀가 아니었다. 심지어 남자였다. 요즈음
신문에서 떠들썩하게 떠드는 소문의 주인.
“예, 주인님.”
* * *
쪼르륵, 물이 담기는 소리. 살랑대는 바람에 커튼이 어른대는 소리. 고요함 가운데 말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마셔요.”
“…왜 데려왔어?”
유리의 시선은 여전히 그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세드릭이 한숨을 쉬며 들고 있던 물컵을 유리의 침대맡
테이블에 놓았다. 세드릭의 타박에 유리가 뻣뻣한 목을 돌렸다. 하늘대는 금발이 미풍에 흔들렸다.
“…고마워.”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괜찮아.”
그런 걸 툭 털어놓고 말하기엔 우린 너무나 명백한 적이지 않나. 유리의 메마른 목울대가 차마 나오지
못한 말을 삼켰다. 유리가 성치 못한 몸을 애써 일으켰다.
“유리!”
“괜찮습니까?”
“한 달 지났습니다.”
“…뭐?”
“…죽는 줄 알았습니다.”
“….”
“다시는….”
유리의 어깨 쪽이 뜨거운 눈물로 축축하게 젖었다. 세드릭이 조용하게 흐느꼈다. 유리의 손이 세드릭의
등 뒤에서 가까이 다가갔다가, 어쩔 줄을 모르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
“축하해요. 유리 라스콜니코프.”
정신을 차려보면 언제나 자신의 발걸음은 넘을 수 없는 국경선 앞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복수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 스스로 타일렀다.
“날 죽일 수 없다고 했던가요.”
누군가가 억지로라도 자신의 발걸음을 당신이 있는 쪽으로 이끌어주기를.
“그건….”
“마찬가집니다. 나도.”
그렇게라도 당신의 곁에 있고 싶었다. 세드릭은 파란 핏줄이 불거진 커다란 손바닥으로 찡그린 얼굴을
가렸다.
“세드릭.”
“사랑합니다.”
몇 번씩 기회가 있었는데도, 쓸모없는 자존심에 휩쓸려 미처 전하지 못했던 것을 얼마나 후회했던가.
세드릭이 유리의 손목을 잡고 손등에 입 맞췄다.
“세드릭.”
그냥, 그렇게 두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그 온기를 느끼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알기에…. 유리의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목이 메었다.
“…세드릭, 나는.”
나는, 살아서 소중한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소중한 것은 언제나 사람의 약점이 됐다. 가족, 지위,
돈, 사랑…. 그걸 이용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누군가의 소중한 것을 망가뜨리며 살아가는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 남의 도구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비겁한 변명이라고 해도 좋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늘 그랬지.”
“유리.”
“너를 잊은 적이 없었어.”
너는 행복한지.
“살아 있다면.”
구차하고 더러운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다시 남의 침대를 구르는 탕녀가 되어도 좋았다. 유리의
시선이 세드릭의 얼굴에 닿았다.
“널 만날지도 모르니까.”
“너는 날 기억하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도 난.”
누군가와 같이 행복해지는 사랑도 있지만 멀리서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랑도 있다.
자신에게 한 줄기 구원처럼 비춰주던 따뜻함을 다시 느낄 수만 있다면.
“그래서….”
하지만 그를 보면 볼수록 욕심이 났다.
“보고 싶었어.”
“유리.”
보통의 연인이 사랑하는 이에게 그러하듯, 자신도 그에게 그러고 싶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유리의
머리에 세드릭이 입을 맞췄다.
“좋은 판단이었어요.”
“….”
유리가 파스스 웃었다.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휴전을 어그러뜨린 자신의 처치는 다시
러시아로 끌려가 총살을 당하든, 아니면 여기 영국에서 처분을 내리든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머지않은
죽음을 예감한 유리에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읍.”
서로의 입술은 갈구하는 물기로 젖었다. 뜨거움이 서린 세드릭의 입술이 유리의 피부와 감각을 갈급하게
찾았다. 유리의 팔 안에 들어오지 않는 세드릭의 넓은 등이 살며시 떨렸다. 열락이 피어오르는 유리의
뜨거운 뺨 위로 세드릭이 더운 숨을 뱉었다.
“하아….”
“세드릭.”
“…예.”
“그러니까….”
무엇보다 이건 그가 하던 임무나 훈련이 아니었고, 평범한 연인들은 어떻게 하는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유리가 고민하며 말을 고르는 동안 젖은 입 밖에서는 느릿한 속닥거림이 이어졌다.
“괜찮다면.”
“지금.”
“…일부러 그런 거죠.”
“그건… 읏.”
* * *
“….”
제 옆에 잠들어 있는 세드릭의 얼굴을 보면서 유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언제나 멀리 있던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 유리의 다친 손이 곤히 잠들어 있는 세드릭의 얼굴에 다가갔다.
-사랑해요.-
이 말을 전하기까지 8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어쩌면 이날을 위해서 그 허망한 벌판에서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버텼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리가 눈을 감았다.
“또 한편으로는….”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자신을 위해서 다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무사했을 것을. 모든 게
자신의 탓처럼 후회스러웠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드릭.”
유리의 손끝이 그를 안고 있는 세드릭의 강한 손에 닿았다. 언제나 바라고 원하던 온기가 곁에 있었다.
세드릭의 손아귀에 들어간 힘이 강하게 압박했다. 어떻게 만난 사람인데,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없는 앞으로의 생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세드릭.”
“사랑해요.”
“제발….”
그 어떤 이보다 강한 남자가 유리의 앞에서 삽시간에 무너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자신을 떠날까.
기어코 맞잡은 손을 내칠까. 두려워하면서.
#chapter 35
* * *
세드릭은 첨예한 절벽이 바닷가를 따라 늘어져 있는 백사장을 유리와 나란히 걸었다. 철썩대는 파도
소리와 함께 하얀 포말이 그들이 걷는 백사장 위로 늘어졌다.
“여긴 데본셔에 있는 별장입니다.”
런던에는 그들을 주목하는 이목이 많기도 했고, 여전히 두 사람을 끌어내리기 위한 사람들이 여전했다.
유리가 백사장을 걷다가 멈췄다. 바람이 불어오는 수평선 너머로 한없이, 끝없이 자유롭게 펼쳐진 바다는
날씨가 좋아 풍경이 꽤 멋졌다.
햇빛에 수면이 반사되며 은빛으로 빛나는 것을 구경하던 유리의 곁에 세드릭이 서서 부드럽게 물었다.
“…나를?”
“예.”
“…어렸을 땐, 섬에 살았어.”
“짧지만.”
아버지의 이름을 외기도 전에 골방에 갇혀서 훈련을 받았다. 감정을 거세당하고 모든 욕구를 억눌러야
했다. 유리의 어깨를 잡고 있는 세드릭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언제나 너뿐이었어.”
도구로 이용당하는 일엔 익숙했다. 그래서 세드릭의 호의가 불편했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이용하지 않는 그가 낯설었다.
유리의 대답에 세드릭은 가슴이 아팠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독점욕에
작은 환멸이 들었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사내였다.
둘 사이에 바닷바람이 휘몰아쳤다. 복종과 순종. 그게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족쇄를 부수고
들어온 건 처음으로 느껴보는 타인의 감정.
“당연한 목적에 순순히 따라가다 죽으면 그만이다. 원래 나란 사람이 그렇게 태어났으니 생각할 이유 따윈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어.”
사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설명될 수 없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동료들을 도륙하는 짓을 해놓고도
이상하게 후회가 없었다.
“유리.”
“난 후회하지 않아.”
지금도, 죽음이 목 앞에 있는걸 뻔히 알면서도 한 점의 미련은 없었다. 자신의 목적은 달성했다. 유리는
눈부신 바다를 보면서 눈을 감았다.
“유리!”
“…세드릭.”
* * *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별장으로 돌아오자 세드릭을 찾는 급한 전보가 들어왔다. 별장의 대문으로
들어오자 하녀 하나가 급하게 뛰어왔다.
“주인님!”
그 덕분에 런던의 타운하우스에 있는 집사가 굉장히 우려하고 있다는 것도. 세드릭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바쁘다고 해.”
도움을 갈구하는 하녀의 눈빛에 결국 유리가 나섰다. 자신 때문에 세드릭이 고집을 부리는 게 보였다.
“세드릭.”
“정말입니다. 괜찮아요.”
그는 자신이 정보부로 복귀했을 때에도 굉장히 중요 인사로 뽑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리를
비웠으니 관련된 사람들은 난리가 난 게 분명하다. 그런 그가 ‘괜찮다, 가지 않겠다’ 고집을 부리는 건
아마 자신 때문이겠지. 유리가 그의 외투 소매를 잡고 말했다.
“갔다 와.”
“…싫습니다.”
“들어가서 얘기하죠.”
세드릭은 유리와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세드릭은 연락을 받고 오겠다며 서재로 갔고, 유리가 먼저 환히
꾸며진 응접실에서 미리 준비된 홍차를 마셨다. 햇살의 색깔이 살짝 진해졌을 무렵 세드릭이 응접실로
돌아왔다.
징그러운 능구렁이들. 분명히 부상이 심하니까 당분간 쉬고 싶다고 했는데. 이젠 여왕의 명령을 이용해?
연인과의 단란한 만남을 방해받아서 세드릭의 기분은 저조했다. 유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 때문인가?”
“…아닙니다.”
“맞구나.”
잘 가꿔진 푸른 뒤뜰이 보이는 발코니 쪽 윈도우에 기대어 앉아 있는 세드릭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서,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미루고 있었다. 하녀가 주인에게 재촉을 할
정도인 걸 보아, 아무리 봐도 급한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럼 내가 갈게.”
세드릭이 유리의 팔을 붙잡고 안았다. 훤칠한 덩치의 세드릭이 유리를 넉넉하게 안았다.
“안 곤란합니다.”
“…세드릭.”
“안 곤란하니까 그냥 있어 주면 안 됩니까.”
“…알겠어.”
유리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아마 그는 불안에 미쳐서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여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귀족은 없다. 사적인 이유도 아니고 공식적인 일을 처리하라고 부르는
것이라 그동안 잘 써먹은 부상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그래.”
“약속할게.”
* * *
유리와 불안한 약속을 한 세드릭은 런던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마저도 유리가 재촉하지 않았으면
날이 새도록 나갈 준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유리가 꾸물대는 세드릭에게 한마디 했다.
“늦겠어.”
“아직은 좀 여유 있습니다.”
세드릭은 외출할 준비를 다 해놓고 모른 척을 했다. 시선을 돌리며 차를 마시는 모습에 유리가 괜히
불안해졌다. 런던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며 별장의 관리인이 안절부절못하는 걸 봤던 탓이다.
“나랑 있는 게 싫습니까?”
“실언입니다. 잊어주세요.”
“얼른 가.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나한테 뭐… 묻었어?”
“…아닙니다.”
“그냥, 좋아서요.”
“….”
좀 괜찮은 신하를 키워둘 것이지. 무슨 일만 있으면 여왕은 자신을 곧바로 찾곤 했다. 유리는 자신을
껴안은 세드릭의 팔을 툭툭,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유리의 타박에 세드릭이 씩 웃었다. 잔소리 받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리가 해주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것도 좋네요.”
평소 감정 표현이 없는 유리가 그렇게 말해주니 애정과 관심으로 느껴질 정도다. 자신이 생각해도
중증이었다. 결국 유리가 세드릭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가. 늦겠어.”
“아. 혹시라도.”
“제게 연락하고 싶으면 서재에 있는 전화를 이용하면 돼요. 전화번호는 책상에 메모해뒀어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런가요?”
그러나 세드릭은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을 했다.
“혹시 압니까? 저녁에 당신 목소리 듣고서 힘이 나는 바람에 밤새워 일을 빨리하고 내일 아침이면 돌아와
있을지.”
“…그러진 마.”
“다녀올게요.”
“…잘 가.”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인사였다.
* * *
“…없네.”
그의 빈자리가 선연하게 느껴졌다. 쌀쌀해진 저녁나절의 공기에 마음이 헛헛해졌다. 언제쯤 나갈까.
“…손님이라면.”
유리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세드릭의 손님인가? 주인이 없는데 어떡한담. 약간 난감한 기색을
띄우는 유리에게 집사장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저를 말입니까?”
“예.”
세드릭의 별장에 온 손님이, 세드릭이 아니라 자신을 보고 싶다고? 알 수 없는 손님의 등장에 유리의
몸이 긴장했다.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텐데. 대체 누구길래?
“만나 보시겠습니까?”
집사가 돌려보낸 사람이 아니라면, 믿을 만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세드릭에게 적대적인 사람은
아닐 것이 분명하고. 그럼….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유리가 있는 응접실로 들어왔다. 실크해트를 물 흐르는 동작으로 벗어서
인사했다. 살짝 내리깐 눈이 호선을 그리며 웃는 모습은 누가 봐도 호감을 부르는 인상의 사내였다.
유리가 어색하게 응접실의 소파를 손짓했다. 그러자 사내는 마치 제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앉았다.
그는 집사가 차려준 빈 찻잔에 홍차를 따르고 취향껏 밀크티를 만들었다.
“괜찮습니다.”
“예….”
유리가 앉아 있는 무릎 위에 놓인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사내는 낯빛이 안 좋아진 유리의 모습을 보면서
반쯤 비운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런가요.”
비꼬는 건지, 순수한 칭찬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비꼬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아.”
여왕의 가까운 사촌이자 가신. 그런 중요한 사람이 적 세력과 연결고리를 가진 게 세간에 알려지면 좋지
않다. 시종장은 살짝 허가 찔린 얼굴을 했다.
“아닙니까?”
“어차피…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유리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별은 언제나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하게 다가왔다.
“뭡니까?”
#chapter 36
* * *
“증인… 말입니까?”
증인을 해달라는 말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사지에 제 발로 걸어가 달라는 거겠지.
시종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전에 자신의 아버지를 자기 손으로 죽였듯이, 이제는 자신의 나라를 저버리다 못해 죽어달라. 각오했던
바다. 유리의 침묵을 고민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시종장이 세드릭을 들먹였다.
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세드릭의 별장에서 천년만년 숨어서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순진한 상상을 하진 않았을 거라 믿습니다.
당신은 영리한 사람이니까.”
“….”
시종장은 유리의 존재가 세드릭에겐 도움이 안 된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단념시키려고 하는 말이었다면
성공했다.
유리는 마음속에 남겨둔 자그마한 미련을 접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 때문에 그의 앞길이 막히는 건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예전에 당신과 세드릭이 휘말린 스캔들로 사망, 어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사망하신 지 오래고.
이복형제는 군내 사고로 반병신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건.”
정치에선 사랑도 자로 잰 듯이 계산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세드릭은 분명히 잘하고 있었다. 예전에
엮였던 유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시종장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폐하도 참 무심하시지. 왜 나쁜 역할을 자신에게 맡기셨단 말인가.
눈앞의 미인이 침울한 표정을 짓는 모습에 자신도 살짝 미안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 사람이 잃을
게 너무 많은 사랑이었다.
목적은 이루었다. 떠나야 한다는 건 애초에 알았다. 그저 그가 전해주는 따뜻한 감정에 잠시 사로잡혀
발을 떠나지 못했을 뿐이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어차피 재판이 끝나면 난 죽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에서 사람을 보내든, 재판 결과를 받고 사건의
연루자로 체포를 당해서 감옥에서 평생을 살든지 하겠죠.”
“…예?”
“러시아에서는 죽어도 자신들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할 겁니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구석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리고 증인인 나만 없으면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죠.”
“저희도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증인을 부탁한 겁니다. 실무에 투입되어 있던 당신이 증인을
해준다면 그 주장도 물거품이 되니까. 하지만… 굳이 죽음을 자처할 필요까진 없습니다.
무기징역이겠지만 결판 날 확률이 큽니다.”
무엇보다 여왕은 유리에게 증인을 부탁했지, 죽어달라 한 적은 없었다. 또한 부탁을 들어준다면 최대한
옥형으로 마치기 위해서 이쪽도 나름 애를 쓸 생각이었다.
“….”
“나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가 하찮은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고 온당히 평온한 삶 속에서 살아가기를….”
“…전달하겠습니다.”
* * *
유리는 부슬비가 내리는 바깥을 구경하며 마지막 풍경을 마주했다. 마지막으로 얼굴은 보고 싶었는데,
어쩌면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며.
“이런, 내가 깨운 겁니까?”
손길의 주인공은 세드릭이었다. 그걸 알아챈 유리는 허겁지겁 일어났다. 그러자 몸에 걸쳐진 담요가
스르륵 떨어졌다.
“아, 언제 왔지?”
여기가 아무리 세드릭의 별장이라고 해도 이렇게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세드릭은 일어나려는 유리를
만류했다.
“더 자요. 아직 저녁 식사 시간까진 좀 남았으니까.”
그때, 별장의 대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문소리가 들렸다. 쾅쾅, 대문 앞에 붙은 노커를 두드리는 소리가
제법 요란했다. 세드릭이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누가 이런 시간에….”
집사가 알아서 처리하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집사가 창백한 얼굴로 응접실에 들어왔을 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보안국? 무슨 사람?”
세드릭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의아한 듯 물었다. 본인도 보안국 소속이지만, 자신을 찾아온다는 기별 같은
건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것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왔구나. 유리는 직감했다. 낮에 시종장이 말했던 자신을 잡으러 올 사람들. 소리 없이 일어선 유리에게
세드릭이 눈치채고 안심시켰다.
“별일 아닐 겁니다. 제가 가서 처리하고 있을 테니, 여기 있어요.”
“나도 가지.”
“그럴 필요 없….”
“날 찾으러 온 사람들이야.”
“그게 무슨….”
“무슨 일이지? 보안국 특별 요원 소속인데 사람이 온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 보안국 어디 소속인지
먼저 말해.”
“M 의 직속입니다.”
“…마가렛의?”
“잠시만.”
“러시아 소속의 정보부 요원을 국제 재판소에 넘기는 일입니다. 당사자도 동의한 일입니다. 그만
비켜주실까요.”
“…뭐?”
세드릭은 당사자도 동의한 일이라는 말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유리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간다고 했어.”
“잠시만 나가주겠나.”
“백작님.”
“잠시 할 말이 있어서.”
“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설명을 요구하는 세드릭의 눈빛은 분노와 실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연신 한숨을 내뱉으며 눈가를
짚었다. 유리는 가만히 서서 대답했다.
“…미안.”
“지금 미안하다는….”
차라리 몰랐다고 했으면 좋겠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몰라서 나가겠다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세드릭 자신이 어떻게든 유리를 숨겨두고 최대한 상황을 고쳐볼 셈이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바라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알아.”
“당신은….”
“….”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긴 합니까?”
“세드릭.”
“….”
“…제발.”
“그리고….”
“고마웠어.”
“….”
세드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응접실을 나서자 축축하게 젖은 레인코트를 걸친 보안국 요원들이 유리에게
다가섰다.
“대화는 마치셨습니까?”
죄인을 호송하는 사람치고는 제법 깍듯했다. 괜한 소리로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순순히 내민 손목에 거친 수갑이 기계적으로 걸렸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무게감이 걸리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그래도 마음은 편안했다.
“…예.”
보안국 요원들은 유리를 호송 차량에 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몰라도 일한 경력 덕분에
대충 예상이 가는 상황을 그릴 수 있었다.
군용 트럭 비슷한 호송 차량이 묵직한 배기음과 함께 출발하자, 푸르른 녹음에 휩싸인 별장의 주변이
창문을 느리게 스쳐 지나갔다. 푸른 숲을 벗어나자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파도가 치는 바다가 보였다.
그와 함께 백사장을 걷던 날이 생각났다.
앞으로 있을 일은 분명 유쾌하지 않은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살아온 게 이것을 위했던 걸까,
싶을 정도로 의연했다. 그러다가도 눈앞에 어른대는 그의 웃는 얼굴이 시리도록 망막을 자극하는 바람에
눈을 감고 소원했다.
* * *
“곧 참석할 시간입니다.”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팔죽지에 묶인 줄을 잡고서 천천히 재판장 입구로 이끌었다.
“증인, 참석합니다.”
공개재판이라 그런지, 재판장에 참석해 있는 사람이 꽤 있었다. 그중에는 유리의 눈에 낯익은 사람도
있었다. 블라디미르의 아버지였다. 그는 증인으로 나온 유리를 보고 주름진 이마를 찡그렸다. 살찐
입술로 욕설을 슬쩍 읊었다.
“예.”
증인에 대한 선서를 짤막하게 마치고 나서 구속한 검사와 판사들은 일련의 사건에 대해 증언을 요구했다.
유리는 약속한 대로 자신이 아는 내용을 말했다.
“러시아 정보부 소속의 블라디미르 대령이 계획한 일이었고, 저 또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목표는
영국의 여왕과 주요 정치 인사들이었고….”
러시아도 나름대로 준비를 해온 것인지 증거 서류를 내밀었다. 유리는 듣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예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주장이었다. 자신의 증언이 너무 결정타이다 보니 어떻게든 연관이 없다고
나서는 게.
“잠시만.”
블라디미르가 자신의 보안 요원을 세웠다. 그러자 보안 요원이 난감한 투로 그를 데려가려 했다. 그러자
러시아 쪽 대변인이 나섰다. 이미 형이 나온 참이라 괜히 열을 내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유리.”
“….”
유리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고, 호송 차량을 기다리는 대기실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보이는 푸른 녹음은 아마도 다시는 보지 못할 광경이었다. 보안 요원은 다시 시계를
보다가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자신을 찾으러 올 손님이 있었던가. 아니면 보안국에서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러 온 건가. 유리의
눈은 대기실의 열리는 문을 향했다.
“반가워요.”
유리를 찾아온 사람은 비슷한 나이대의 젊은 여성이었다. 수수한 옷차림으로 가장하고 있지만 어딘가 귀한
티가 나는. 그녀는 옆에 따라온 경호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경호원들은 자리를 잠시 비켰다.
“우리 처음 보죠?”
“저를… 아십니까?”
“오늘도 나한테 얼마나 난리를 치는지. 작위도 박탈하고 싶은 걸 핏줄이라는 이유로 참았지 뭐야.”
“그 사람은… 잘 지냅니까?”
“어머, 궁금해요? 사촌도 나한테 그 소리부터 먼저 하던데. 좋아하는 사람끼린 닮는다고 하더니, 진짜
그런가 봐.”
그녀는 배를 잡고 폭소했다.
“근데 궁금한데.”
“증언으로 나서면 당신, 죽을 수도 있는데 왜 도망치지 않았지? 세드릭이면 그래도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었을 텐데.”
유리가 작게 웃었다.
“….”
그래도 나름 형을 맞춰서 목숨은 살려준 거 아니었나. 의아해하는 유리에게 여왕이 호위를 불렀다.
“조지, 들어와.”
“옮겨.”
“알겠습니다.”
몰래 처리하려는 건가. 두건을 뒤집어쓴 유리가 체념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유리에게 여왕이 안녕을
고했다.
#chapter 37
* * *
감옥에서 잘 살라니. 다시 생각해도 이상한 말이었다. 자국인들을 괴롭혀서 저주라도 하는 건가. 유리는
머리에 죄인처럼 천을 뒤집은 채로 몇 번을 생각했다. 그래도 어찌 됐든 목숨은 건졌으니 그나마 다행인
건가.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떠날 수 있으니 미련도 없었고. 천으로 가려진 고개를 가만히 떨구고 처분을
기다리자 보안 요원이 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도착했습니다.”
항구가 이렇게 가까웠던가? 자신을 이끌어 갈 악력을 기다렸는데, 유리에게 찾아온 건 무력이 아니라
머리에 쓴 천을 벗겨주는 자유였다.
하얀 천으로 흐릿하게 보였던 시야가 환히 밝아지고 주변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침 일찍 공판이 열렸던
탓에 아직도 낮이 훤했다. 낡은 산장 앞에 있는 요원들이 주변을 살피며 유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유리를 속박한 수갑과 포승줄을 풀어 주는 보안 요원들이 간략하게 대답했다.
“면책… 이라면.”
“옷은 이걸로 갈아입으시고, 짐가방에 새로운 신분증이 들어 있습니다. 티켓이랑 같이 제시하면 됩니다.”
요원들의 말대로 유리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미리 준비한 평범한 트럭에 유리를 태워서 마르세유에 있는
항구까지 배웅해주었다. 정박해 있는 커다란 크루즈 입구로 가기 전, 보안 요원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손에 있는 자줏빛 여권과 크루즈 티켓을 보면서 유리가 중얼거렸다.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복병이었다. 고민은 짧았다.
갑판에 오르기 전, 티켓과 신분증을 확인하는 직원이 여권을 받아들고 꼼꼼히 살폈다. 유리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괜한 행동으로 수상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영국인인가?”
“바다, 좋아합니까?”
“나는 좋아합니다.”
환청인가? 그 사람이…. 믿기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려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자 다정한 흑색의 눈빛이 유리를 마주했다. 유리는 믿기지 않아 목소리를 겨우 내었다.
“왜 당신이… 여기에.”
“그게 무슨.”
“왕실 핏줄이 자살로 타블로이드를 화려하게 광고하는 꼴을 보고 싶다면 생각대로 하라고 했어요.”
“왜 그랬어? 당장이라도….”
“살아 있으면.”
“기억합니까?”
<끝>
살로메 (SALOMÉ) 3 권
ⓒ 2021, pomelo
초판 발행일 2021 년 7 월 9 일
지은이 pomelo
펴낸이 박대령
펴낸곳 (주)북팔
출판등록 2011 년 3 월 25 일
홈페이지 novel.bookpal.co.kr
블로그 blog.naver.com/bookpal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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