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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末麗初 불교사상의 흐름에

대한 일고찰*

-선의 전래와 화엄종의 대응을 중심으토-

석 길 암〜

들어가는 말
3. 의상계 화엄승들의 禪宗 전향 원인
1. 신라 하대 禪•嚴 관계에 대한
4. 華嚴宗의 대응
기존 견해의 검토
맺는 말 /
2. 관련 史料에 보이는 禪과 華嚴의 匕一于1斗
갈등

〈국문요약〉

신라하대의 선 전래는 신라 사회만이 아니라 한국불교사상사의 지


형도를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선종의 전래와 화엄종
의 쇠퇴’라는 도식으로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선종의 전
래와 흥성이 곧바로 화엄종의 쇠퇴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본 논문은
최근의 연구 성과들에 의지하면서 선의 전래가 화엄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그리고 화엄종은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살펴몸으로써 신라하

본 연구는 2004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육성 인문사회분야 일반연


구(KRF-2m4-072-AM3024)비 지원에 의해서 수행되었음.
한국불교연구원 전임 연구원.
주요 논저 . 예02, ■" 眞如 • 生滅 二門의 關係를 통해 본 元嘵의 起信論觀」
『불교학연구』5, 불교학연구회 ; 예04,「길장의 삼론교학이 원효에게 미친 영
향」『불교학연구』8, 불교학연구회 ; 2M5,「법장교학의 사상적 전개와 원효
의 영향」『보조사상』24, 보조사상연구원 ; 2005,「화엄의 상즉상입설,그 의
미와 구조-數十錢法의 전개와 관련하여」『불교학연구』10, 불교학연구회 둥.
대의 불교사상계에 대한 기존의 도식화된 이해에 반른을 제기하고자
하였다.
첫째, 신라 하대의 화엄종 승려 및 화엄종 출신 입당구법승들의 선
종 전향은 종래에는 화엄의 현학화와 그에 대한 반성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입당구법승들이 新思潮로서의
선종으로 전향하는 것은 유학승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신사조의 선택일
수 있다. 더구나 화엄종, 특히 강한 실천적 성향 때문에 선종과 통하
는 부분이 많은 부석사계 화엄승들의 선종 전향이 많았다는 것은 구
법승들이 화엄종에 대한 회의와 반성 때문에 전향했다고 보기에는 무
리가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신라 하대의 선종이 흥성하는 것은 9세기의 최종반 이후 10세
기 초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이 시기 선종은 책봉된 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독자적인 사원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대부
분의 화엄종 사찰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화엄종 고승들의 활동 역시
활발하다. 더구나 화엄종 차원의 조직적인 대응 움직임이 신라하대에
더 두드러진다. 곧 선종의 흥성이 곧바로 화엄종의 쇠퇴라는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선종의 흥성은 오히려 화엄종의 결속과 조직의 정비
라는 결과를 낳았다. 법계도인을 매개로 한 사자상승 개념의 등장, 전
적의 정비와 결사 등을 통한 조사에 대한 존숭과 종파의식의 강화,
『화엄신중경』과 같은 좀더 독송하기 쉬운 형태의 화엄종 전적이 성립
하는 등의 흐름은 선종의 전래에 따른 화엄종의 대응으로 나타난 결
과이다.
셋째,이처럼 새롭게 전래된 선종의 영향에 대한 화엄종의 성공적이
라고 할 수 있는 대응은 이후 한국선 및 한국불교사상의 전개에 있어
서 중국에서의 흐름과 사뭇 다른 특징을 초래하게 된다. 중국과는 달
리,화엄사상과 훨씬 더 긴밀하게 결합된 한국적인 선(보조선)의 등장,
화엄사상을 토대로 하는 한국적인 불교의 형성이라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주제어 [: 신라하대(新羅下代>, 구법法僧), 선종(禪宗), 화엄종(華嚴宗),
의상계(義湘系) 화엄(華嚴) i
들어가는 말

신라 하대의 선 전래는 신라 사회만이 아니라 한국불교사상의 지형


도를 바꾸게 되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 사건이다. 그런
데 이 신라 하대의 선 전래는, 단순히 ‘화엄종의 몰락과 선종의 대두’
라고 하는 도식화된 의미로만 이해하는 데는 적지 않은 무리가 따른
다. 신라 하대의 입당구법승들에 의해 전래된 선종은 新思潮로서 당시
대인들의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그 자체로서 당대를 압도하는 주도적
인 사상으로서 기능했다고 보기 힘든 점 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일부 연구 성과를 제외하면 선종만을 부각시켜
서 조명하는 경향이 학계에 상존해왔다. 또 이때 선문은 화엄종과 서
로 대립 각축하는 입장에 서있는 것으로서, 선종의 흥성이 곧 화엄종
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처럼 서술되고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성과들에 의하면 선종만을 부각시키고 있는 신라 하대에
도 화엄종을 비롯한 교학불교의 위세는 여전하였던 것으로 파악되며,
선과 화엄의 관계 또한 대립으로만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많다. 또 중
고기의 특정 불교사상 흑은 종파의 발전을 왕권 혹은 상층 지배집단
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해하였던 시각도 한국 초기 선문형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장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논자는 최근의 연구 성과들을 반영하면서, 선문형성의 일 원인
으로서 왜 8세기의 화엄종 출신 입당구법승들이 선종으로 전향하게
되었는지, 또 선의 대두가 당대의 한국불교 특히 화엄종과 그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차례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신라하대의 禪•嚴 관계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검토하고, 禪 • 嚴 관계를 갈등과 대 립으로 파악하게 한 몇 가지 관련
사료를 분석한다. 그런 연후 신라 하대의 초기 선승들의 출신이 대부
분 신라 화엄 특히 의상계 화엄종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의
상계 화엄승들이 선종으로 전향했던 원인에 대해서 검토한다. 이 과정
에서 논자는 唐末 중국불교에서의 선종 흥기라는 외적 요인은 물론
신라의 의상계 화엄이 가지고 있던 내적 요인도 신라 하대의 선종 유
입을 더욱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
한 이유 때문에 신라 하대의 불교계에서 흔히 알고 있는 것과 같은
禪 • 嚴의 극적 인 교체는 일어나지 않았으며,오히려 선종의 수용이 화
엄종의 체질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1. 신라 하대 禪 • 嚴 관계에 대한 기존 견해의 검토

신라에서 선문의 형성 혹은 선의 전래는 화엄과 밀접한 관련을 가


지고 있다. 초기 선의 전래자들 중 상당수가 화엄종으로부터의 전향자
였던 까닭이다. 중국불교에서도 선과 화엄이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신라에서처럼 화엄종의 승려가 전향하여 선법을 사사하
고,그것을 신라에 전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형태라고 보기는 어렵
다.1) 우선 선의 전래 초기에 해당하는 신라 하대의 선사들 중에서 화
엄종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을 적시하면 다음과 같다.
가지산문의 도의국사(〜783년 입당〜821년 귀국〜)처음 입당하
였을 때 곧바로 오대산으로 가서 文殊를 感하였다는 기사2>는 입당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도의국사가 화엄종의 승려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동리산문의 慧徹(785〜861)은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수
학하고 저술을 지어 후학을 깨우친 사실이 전하고,13) 2성주산문의 낭혜화
상 無染(8W〜888)은 입당하기 전에 부석사의 釋澄 대덕에게 화엄을 배
우고, 입당 후에도 중국 화엄종의 본산인 지상사에서 화엄을 배우다가

1) 중국의 선종, 특히 남종의 발전기에 대표적인 화엄조사였던 澄觀과 宗密은


오히려 선으로부터 화엄으로 전향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종밀의
경우에는 하택종의 계승자이면서 화엄종의 계승자이기도 했으므로 전향했
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먼저 선을 수습하고 나중에
징관을 만나 화엄종의 제5조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전향의 의미가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2)『조당집』권17,「진전사원적선사」.
3) 「태안사적 인선사조륜청정 탑비문」(이지관,『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신라편』),
82쪽.
선종으로 전향한 인물이다.4) 희양산문의 지증대사 道憲(824~882) 또한
9세에 출가하여 17세에 구족계를 받기까지 梵體大德에게 화엄경을 수
학하였다.5) 行寂(832〜916)도 처음 해인사에서 화엄을 배우다가 사굴
산 범일 선사에게 전향한 뒤 입당하여서 청원 계통의 석상경서에게서
선을 전승하고 있다.6> 또 귀신사에서 화엄을 공부하다 입당한 후 남
전 보원의 법을 계승한 사자산문의 道允(798〜868)이 있고,7) 그 사상
이 전통적인 화엄교학과 다를 바 없다고 평해지는8) 9順之和尙은
10 潙仰
宗을 전래한 선사이다.
入唐求法 후 선을 전래한 선사들의 출신을 중심으로 화엄과의 관계
를 간단히 언급하였는데, 초기 선 전래자들의 상당수가 화엄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입당유학의 경험이 없으면서 이른바 구산
선문의 형성기에 활약한 선사들 중에서도 화엄을 공부하다 선종으로
전향한 이들이 적지 않다.9> 여타의 교종 계열에서 선종으로 전향한
승려들이 간간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신라 하대의 선 전래 및 선문형
성에 대한 기여라는 측면에서 화엄종 출신 승려들의 역할과 비중은
압도적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기존 연구들에서는 신라하대
의 불교 특히 선종을 말할 때 화엄을 그 대립각에 있는 것으로 파악
하는 경향이 존재한다.10)

4)「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문』( 이지관,『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신라편』),


181 ~ 183쪽.
5)「봉암사지증선사적조탑비문」(이지관,『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신라편』), 307쪽.
6)「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이지관,『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1』),
319쪽.
7)『조당집』권17,「쌍봉화상전二
8) 고익진, 1989,『한국고대불교사상사』,동국대출판부, 521-523쪽.
9)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들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므로 참고할 것.
고익진, 위의 책, 487~503쪽 ; 김복순, 1996,「신라하대 선종과 화엄종 관계
의 고찰ᅪ『국사관논총』48 ;『한국고대불교사연구』, 민족사,재수록. 254~
275쪽.
10) 김복순의 이에 대한 연구사 검토에 의하면, 신라 하대의 선과 화엄의 관계
를 대립적으로 본 견해들은 대부분 선종 우위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 곧 ‘무설토론’과 ‘진귀조사설’ 등을 들어서 선종 우위의 교판론이 당시
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김두진의 주장, 신라 하대의 화엄교학
고익진은 도의의 禪敎判釋, 무염의 ‘有舌土論無舌土論범일의 ‘진귀
조사설’, 도선의 '비보사탑설’ 등이 그 진위여부를 떠나서 당대의 분위
기를 전하는 것으로 파악하고,화엄 이 당시의 대표적 교학불교로서 선
종의 비판 대상이 되었음을 지적한다.⑴ ‘신라 하대의 初傳禪은 마조
계의 선사상(흥주종)을 도입하여 전통적인 화엄교학에 정면으로 도전
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11
12)는 고익진의 표현은 신라 하대 선 전래기의
선종과 화엄종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과악하는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
낸다.
이 외에 선종의 입장에서 교학을 인정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들
이 존재한다. 곧 신라 하대의 선종을 純禪의 북악과 融禪의 남악으로
나누고, 남악의 입장을 교를 융해하는 입장으로 파악하는 견해와,13) 14 15
또 ‘무설로론’과 ‘진귀조사설’이 후대의 가탁이라고 보아서 반드시 선
교가 대립했던 것은 아니라는 입장도 존재한다.14) 김복순에 의하면
이들은 선교의 융섭 내지 포용의 관계 곧 선종의 입장에서 교학을 인
정하는 견해이다.때 김복순은 신라 하대의 선종과 화엄종의 관계를
‘선종이 화엄종에 영향을 주어 화엄교학 내에 선종의 종지를 포용하는
단계에서, 선종이 화엄의 교학을 채용하는 융화의 단계로 발전하고 있

이 현학화 되어서 그에 대한 반성으로 선종으로의 대치가 이루어졌다는 최


병헌의 주장, 신라 하대의 선이 당시의 사회에 사상적으로 충격적인 변화를
주긴 했지만 번쇄한 신라 전통의 교학불교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는 고익
진의 주장 등이 이러한 견해에 선 것으로 파악된다(김복순, 위의 논문, 262
~265쪽).
11) 이것은 고익진이 ‘전통적 교학관념이 부정’이라는 제목 하에 초기선의 중심
사상을 분석하고 있는 부분에 해당한다(고익진, 위의 책, 514-523쪽). 같은
제목 아래에 순지의 위앙선 같은 부분은 선과 화엄의 일치점을 얘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교학관념으로부터의 무애함에서 순지의 선이 가진 특
징을 주목하고 있으므로 이것 역시 화엄으로 대표되는 교학관념에 대한 부
정적인 입장을 선종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적시되고 있다.
12) 같은 책, 523쪽.
13) 한기두,「신라시대의 선사상-신라선의 北山과 南岳」『한국불교학』1, 21~43쪽.
14) 정성본, 1992,「신라 선종의 선사상」『가산이지관스님화갑기념논총 신라불
교문화사상사』, 517〜533쪽.
15) 김복순, 앞의 논문, 264쪽.
다’고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고 있다.예
한편 김상현은 화엄종이 선종에 의해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바로 화엄에 대한 부정 내지는 대립적 관계가 되는 것은 아
니며,선종의 일방적 입장만이 아닌 화엄종의 입장에서도 선종과의 관
계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곧 선종과 화엄종의 공존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견해를 제시한다.⑺
인경은, 신라 말의 선사상이 결코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선사상은
아니며,『선문보장록』에 전하는 도의, 무염, 범일의 선사상은 고려 후
기의 선교관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며,따라서 신라의 선문이 기존의
화엄을 정면으로 공격하면서 형성되었다는 기존의 시각은 재검토되어
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선교일치로서 신라 말의 선사상을 설명하
는 것 역시 선교일치에 관한 논의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이 시기에
화엄종의 승려가 선으로 전향한 것은 ‘捨敎入禪’의 경향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후에 신라 의상계 화엄은 당시 불교계의 변화
를 인식하고 있었고,중국 법장계 화엄과는 다른 실천철학을 확립 전
승하였기 때문에 신라 말의 화엄 이 이론적 이고 현학적이라는 기존 시
각은 재검토되어야 하며, 화엄종 승려들이 선종으로 전향한 원인도 화
엄의 한계보다는 의상 화엄 이 가지는 선과의 친밀성에서 찾고 있다.⑻
이 같은 인경의 이해는 신라 하대의 화엄과 선의 관계가 대립적이었다
는 주장들을 부정하고 오히려 선과 화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새롭다. 하지만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역시
선 우위의 입장에서 화엄과 선의 관계를 설정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연식은 삼국 통일 이후 신라불교를 중대의 화엄종과 하대의 선종
으로 구분하는 일반적인 이해는 1970년대 초부터 형성된 것으로, 통일
신라 사회 불교계의 구체적인 동향은 물론 당시의 정치,사회사에 대
한 이해가 충분히 축적되지 못했던 학계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며,학
계의 이해가 심화됨에 따라 그 타당성에 이의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16 17 18

16) 같은 논문, 266쪽.


17) 김상현, 1991,『신라화엄사상사연구』, 민족사, 245쪽.
18) 인경, 2001, 떻末 華嚴敎團과 禪宗의 諸問題」『韓國禪學』제2호, 172-L73쪽.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8세기 신라불교 흐름의 특징으로, 경덕왕
대를 경계로 하여 기존의 종합적인 학문불교가 쇠퇴하고 의상계 화엄
종과 진표계 미록신앙이 크게 세력을 확대하면서 불교계의 중심세력
으로 등장하였음을 주목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특징으로 중대의 종합
적 • 학문적 불교가 하대의 종파적 • 실천적 불교로 전환되었다고 지적
한다.20) 최연식의 견해는 신라 중대에 이미 화엄종이 신라 불교계의
중심적인 흐름이었다는 기존의 견해를 수정하면서,경덕왕대 이후에
나타난 신라 불교의 흐름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실천성과 종파성을 지
적한다. 최연식은 9세기 이후 선종의 전래와 화엄종의 대응에 대한 직
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다만, ‘한국의 경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의상의『법계도』가 중시되고 사찰의 주존불 등에 화엄종의 영향이 강
하게 남아있는 것은 신라 하대 화엄종에서 비롯된 것’2나이라 하여, 신
라 하대 화엄종의 역할을 상당히 중요시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신라하대의 불교사상 동향에 대하여 처음에는 선과 화
엄의 갈등 및 선이 화엄을 대체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었으나,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면서 점차 선과 화엄의 공존 병행으로 보는 시
각이 우세해져 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들 선행 연구자들이 신라
하대의 선 전래를 논하면서 간과하고 있는 몇 가지를 언급한 후 논의
를 계속하기로 하자.
첫째, 선종과 화엄종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연구자들은 대
부분 화엄종에서 선종으로의 전향을 ‘현학화된 화엄에 대한 반성’ 혹
은 ‘전통적 교학관념의 부정’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 19 20 21

19) 최연식, 2005,「8세기 신라 불교의 동향과 동아시아 불교계」『불교학연구』


12, 불교학연구회, 241~242쪽.
20) 같은 논문, 262 • 263쪽.
최연식은 의상계 화엄과 진표계 미륵신앙의 특징으로 단일한 경전의 가르
침만을 중시하면서, 종교적 실천에 있어서는 신체를 이용하는 실천과 신비
주의적 신앙을 중시한 점을 들고, 이것은 중대 불교가 다양한 경전을 종합
적으로 연구하면서 교학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중시했던 것과 크게 대조적
인 점이라고 한다.
21) 같은 논문, 272쪽.
나 화엄에 대한 부정, 혹은 화엄의 현학화가 실제로 일어난 현상인지
그리고 그것이 선종으로의 전향 원인이 될 수 있을지는 검토를 요하
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선종이 교학을 융섭 내지 포용한다고 보는 입장이나 선교일치
를 주장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여전히 선종의 우위라는 관념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 선종이 전래되
자마자 단 몇 십 년만에 교종에 대하여 우위의 입장을 확보하였다는
것은 선뜻 수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22) 혹여 이러한 시각이 회장법
난을 계기로 교학이 지리멸렬한 시대에 요원의 불길처럼 성장해간 중
국 남종선의 흥성을 신라 하대에 그대로 이입시켜 바라본 것은 아닌
지 검토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선의 전래 초기에 처음 선을 접하고 신라에 전했던 선사들의
입장에 대해서 간과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곧 초기의
선 전래자들이 기본적으로 구법승이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말
이다. 구법승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입장을 무시하고 오늘날 혹은
후대의 입장을 그들에게 그대로 이입시켜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지
적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화엄종 승려들의 전향이 반드시 선종과 화엄종의 대립
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대체로 후대의 선 우위
의 입장 내지는 중국불교사상의 전개에서 선종이 화엄을 극복하고 일
어난 것이라고 하는 관행적 이해를 신라 하대의 禪•嚴 관계 이해에
도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신라 하대의 불교 특히 의상
계 화엄의 성격에 대한 고려가 충분하지 않았던 때문으로 생각된다.

22) 한기문은 신라 하대에도 교종의 세력이 만만치 않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지


적하였고(한기문, 1983,「고려태조의 불교정책」『대구사학』22, 79쪽 : 1986,
『고려전기불교사론』민족사, 174쪽), 추만호 또한 신라 말 선사들의 대부분
이 선교양립적인 교판관을 견지하고, 당시의 불교 역시 선교양립적인 분위
기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추만호, 1992,『나말려초 선종사상사연구』, 이
론과실천, 182〜188쪽).
2. 관련 史料에 보이는 禪과 華嚴의 갈등

먼저 선종과 화엄종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근거로 제시되


는 몇 가지 사료들을 검토해보자.

A) 처음으로 선종을 전래하였다. … 이미 誦言(교종)에 심취하여 다투어


선종을 魔語라고 비방하였다. 이 때문에 빛을 행랑 아래 감추고 자취
를 별천지에 거두듯 왕경에 머물 생각을 버리고 끝내 北山에 은둔하
였다.23)
B) 智遠僧統이 도의국사에게 묻기를 “화엄의 사종법계 외에 또 어떤 법
계가 있으며, 55선지식의 行布法門 외에 다시 어떤 법문이 있습니까?”
하니 도의가 답하되, “승통이 든 사종법 계는 祖門에서는 정당히 그 일
체를 들어서 모든 正理를 눈 녹이듯 하니 손안의 법계 모양도 오히려
얻지 못하며, 行과 智가 본래 없는 祖師心禪 안에서는 문수와 보현의
모양도 오히려 볼 수 없습니다. 55선지식의 行布法門은 정말 물거晉과
같은 것이며, 四智와 菩提 등의 道는 金鑛 같은 것일 뿐이니 모든 교
설이 혼잡하여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24)
C) 有舌無舌의 뜻은 早엇인가? 仰山은 말하되, 有舌土는 佛土이니 應機
門이요,無舌土는 禪이니 正傳門이라 했다. 응기문은 무엇인가? 선지
식이 揚眉動目으로 법을 보이는 것은 모두 응기문이요, 따라서 有舌
이니, 하물며 語言이겠는가? 무설토란 어떤 것인가? 禪根人이 그것이
니 이 속에는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다.2미
D) 석가는 유성출가하여 설산에서 因星悟道 하였지만 그 법이 아직도 극
에 이르지 못함을 느끼고 수십월을 유행한 끝에 조사 眞歸大師를 만
나 처음으로 玄極의 뜻을 전득하였으니 이것이 敎外別傳이다.26)

이상의 네 가지 인용문은 주로 신라 하대에 선이 전래되었을 때의

23)「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 문」(이지관,『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신라편』),


302 ~ 303쪽.
24)『선문보장록』「해동칠대톡」, 한불전6, 478~479쪽.
25) 같은 책, 473c.
26) 같은 책, 474a.
선종과 교종의 대립과 갈등을 보여주는 예로서 언급된다. A)는 도의
국사가 821년 귀국하였을 때 王京의 사람들이 선의 종지를 이해하지
못하여 魔語, 虛誕이라고 비방하므로, 도의국사가 때가 이르지 못하였
음을 알고 북산에 은거하였다는 것을 전하는「지증대사비문」중의 일
부이다. 유사한 내용이 r보림사보조선사탑비3와『조당집』의「진전사원
적선A}」조에도 전한다.『조당집』의 내용이 비문의 일부를 채록한 것임
을 감안할 때 아마도 1■진전사원적선사비」가 존재했었고,27) 다른 곳에
실린 내용들은 동일한 내용을 어투만 바꾸어 전재한 것이 아닌가 생
각된다. 그런데 도의국사가 귀국한 821년은 헌덕왕 13년으로 신라에
기근과 賊亂이 심하包으며, 이듬해에도 김헌창의 난이 발발하였으므로
신라의 王京 일대는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28) 29따라서 도의국사가
선지를 전하지 못했던 것은 교종이 선종을 이해하지 못하여 비방했던
때문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상황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820년대이
면,당나라에서 마조 계통의 흥주종이 크게 흥성했던 때이고,따라서
신라 왕경의 불교계가 당나라 장안으로 향하는 주요 통상로에서 크게
흥성했던 남종선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기사는 도의국사의 깨달음을 높이 세우고 선종의 가르침을 교종과
차별화 시키려는 _의도로 이해되며,당시 신라불교계 전반의 선종 이해
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과 몇 년 뒤인 흥덕
왕 5년(830)에 귀국하여 선지를 전한 혜소선사는 왕의 환영을 받고
있고,29) 두드러진 갈등 없이 선지를 전파하고 있는 사실 또한 당시
신라불교계의 선종에 대한 이해가 낮은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해
준다.
다음의 C)와 D)는 고려 말에 간행된『선문보장록』에 게재된 기사
이다. 일단 이 두 기사는 그 진위 여부를 떠나서 신라 하대의 상황을

27) 정성본,1995,『신라선종의 연구』, 민족사,25쪽.


28) 고익진도 신라의 이 같은 사회혼란이 도의의 선이 수용될 수 없었던 원인
으로 지목하고 있다(고익진, 앞의 책, 488쪽).
29) r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영탑비문』『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신라편』,
143쪽.
어느 정도는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다만 이 경우에
도 교학불교에 대한 선종의 우위 확보를 증명하는 것으로, 혹은 선종
과 교종의 대립과 갈등을 의미하는 단선적인 예증으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시대적 간극도 문제이지만,열세에 있는 쪽이 자신의
위지 확보를 위해 억설이나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경우도 적지 않
기 때문이다. 이들 기사는 이미 몇몇 연구에 의해서 고려 말의 인식이
투영된 것이라는 지적이 이루어진 바 있으므로 별도로 상설하지 않는
다.30)
인용문 B) 역시 그 진위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지원 승통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측면에서 C), D) 보다는 월씬 신뢰성이 높은 기사
라 할 것이다. 또 선사들에 의해서 비판되는 화엄의 수행관법이 사종
법계관이라고 하는 점을 생각할 때도 충분히 있었을 법한 기사로 보
인다. 다만 이 경우에는 신라의 의상계 화엄 곧 해동화엄의 본류는 사
종법계관을 채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법장계
화엄사상의 존재를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곧 도의국사의 직접적인 비판대상이
되고 있는 화엄사상은 의상계의 해동화엄이 아니라 법장계 화엄이라
는 점 역시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피 선종의 비판내용으로 알 수 있
는 것은 그 직접적 비판대상이 화엄교학 그 중에서도 법장계의 사상
이기 때문이다.30
32) 31

30) 정성본의 앞 책과 인경의 앞 논문을 참고할 것.


31) 신라 하대에 법장계 화엄-징관과 종밀의 사상을 포함하여-의 세력이 상당
했음은 최치원이 쓴「법장화상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치원은 “처음 이
르렀을 때(의상이 전교하였을 때)는 그저 ‘東家의 丘[공자]와 같았을 뿐이
었나, 法信(법장의 장소)이 전해지자 모든 의혹을 두루 깨닫게 되었다. …
교화가 온 나라에 미치고 學이 온 산에 퍼졌는바 화엄이 신라에 빛나게 된
것은 대개 法藏의 힘이다.”(최치원,「법장화상전」)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신
라 하대에 법장계 화엄이 성세를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32) 신라 하대 선 전래 초기의 70여 년 동안의 어느 시기에 신라에 징관과 종
밀의 저술들이 유포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하다. 다만 도의가 비판한 사종법계관은 법장보다는 징관과 종밀에게서
더욱 정형화된 것이다. 징관의『華嚴法界玄鏡』, 종밀의『注華嚴法界觀門』은
반면에 의 상계(부석사계 ) 화엄승들이 선종으로 전향한 경우도 적 지
않다. 초기 마조 계통의 선을 전승한 인물들 중의 상당수가 의상계 화
엄승이었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의상계 화엄승들이 선종으로
전향한 구법승의 상당수에 이른다는 것은 그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
다. 의상계 화엄승들이 쉽게 전향할 만큼 의상계 화엄사상과 초기 선
사들이 전향한 마조계 선법이 유사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신라 하대의 상황이 반드시 선의 우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 하
더라도, 선종의 전래가 당시의 신라불교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33) 아래에서는 신라하대에 의상계 화엄승들
이 선종으로 전향했던 원인을 검토하고, 그것이 신라 하대 혹은 고려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화엄종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살
펴보기로 한다.

3. 의상계 화엄승들의 禪宗 전향 원인

신라 선종 승려들의 화엄과의 인연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

사종법계관을 담고 있는 중국 화엄종의 대표적인 전적이다. 따라서 사종법


계관이 도의가 활동할 때 알려져 있었다는 것은 9세기 전반에 이미 징관과
종밀의 사상이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음을 보여 준다. 늦어도 880년대 이전
에는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때 징관이 우두선을 겸하였고, 종밀이
하택선의 조사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이 된다. 왜냐하면 종밀의
경우 같은 남종선 내에서도 하택의 입장에 서서 마조도일의 홍주종에 대하
여 우위를 강력하게 주장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종밀은 하택선을
화엄종과 일치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홍주종으로서는 종밀을 중심으로 하는
하택선 내지는 화엄종과 대립 의식을 가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33)「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문』의 陰記(이지관, 앞의 책,334쪽)에서 최치원은
“나라에서 佛書를 중하게 여기고, 집에서는 僧史를 간직하며, 法碣가 서로
바라보고, 禪碑가 가장 많게 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적어도 최치원(857〜
868년 입당〜885년 귀국〜?)이 활동했던 9세기 말 10세기 초에는 선문의
세력이 상당히 팽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9세기 중반 이후 국사로 책
봉된 승려들이 대부분 선종 승려였다는 점도 선문의 융성을 반증한다.
하였고, 이에 대한 연구 성과34>도 적지 않으므로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왜 유독 화엄종 출신 승려, 특히 의상계 화엄승들
의 선종 전향이 많이 나타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자.
우선은 의상의 화엄사상 형성에 선종의 영향이 적지 않다는 최근의
연구 성과를 주목할 수 있다.35) 36이시이는 북종의 신수와 남종의 혜능
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했던 老安(582-707) 이야말로 돈오사상을 확대
시킨 조사선의 원류라 할 만한 인물이었으며, 노안이 664년 종남산으
로 오게 되면서 지엄과 의상이 선종 특히 북종선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법계도』에서 나타나는 ‘고요하면서도 끊임없이
작용하며 작용하면서도 늘 고요하다[寂而常用 用而常寂]’삐는 2회에
걸친 용례가 북종선의 문헌인『대승방편문』과 그 異本群에서 사용하
고 있는 어투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지엄의 영향을 받은 의상은
이 표현을 삼승으로 비판하였으나, 한편 실천적 측면에서는 돈교적 수
용을 허용하였다고 평한다. 이에 대해 김천학은 의상이 이 개념 자체
를 통해 선종에 대한 비판과 수용의 양면을 보여주고 있으며,그것을
자신의 용어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에서 실천적 명제로 제시한 것이라
보고 있다.3가 또 이시이는 의상이 지엄의 영향 때문에 선종에 대한

34) 김상현,1991,「신라 하대 화엄종의 이해』『신라화엄사상사연구』, 민족사 ;


김복순, 1996,「신라하대 선종과 화엄종 관계의 고찰』『국사관논총』48 : 전
호련(해주), 1995,「한국 화엄선의 형성과 전개」『한국사상사학』7집 등을
참고할 것.
35) 石井公成(2M3)의 「禪宗!二封十조華嚴宗對應」(『韓國佛敎學 SEMINAR』
제9호, 한국유학생인도학불교학연구회) 및 r新羅華嚴學基礎的硏究-義相一
乘法界圖»成立事情-」(靑丘學術論集』4). 이시이의 의상화엄과 선종의 관계
에 대한 일련의 연구 성과는 김천학(예02)의「의상과 동아시아 불교사상」
(『의상만해연구』제1집, 15~21쪽)에 반영되어 있으므로 쉽게 참고할 수 있
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김천학의 정리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36) 義湘,『화엄일승법계도』에서 ‘用而常寂 寂而常用’이 용례는 다음과 같다.
“問若如是者以自所證爲衆生說與末不異尋常差別耶答得其義若爲所證在
言與末不異言說在證與本不異與本不異故用而常寂說而不說與末不異故
寂而常用 不說而說 不說而說故 不說卽非不說 說而不說故/’(한불전2, 4c-5a) ;
“問三乘敎中亦有寂而常用用而常寂如是等義何故上言偏卽理門不卽事中
不自在也.” (6a).
비판적 입장을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상 본인의 실천적 성격 때
문에 선종의 영향을 지엄보다도 더 많이 받고 있으며, 의상이 사용하
고 있는 ‘寂用一相’37
38>이란
39 40 용례도
41 일승의 개념이라기보다는 돈교에서
설하는 무상으로서의 무분별에 가깝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김천학은
‘적이 상용 용이 상적 ’의 예 와 마찬가지로 ‘一相’의 경 우도 선종의 개 념
을 화엄의 개념으로 환골탈태시킨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
한다.39)
의상이 본인의 실천적 성격 때문에 선종의 개념을 수용했든,아니면
화엄의 개념으로 환골탈태시켜서 사용하고 있든,의상이 선종의 영향
을 받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선종의 영향을 받은 의상 그리고 의상계 화엄의 사상적 특징이 아닐
까 하는 점이다. 의상 화엄의 가장 큰 특징은 특유의 성기관에 있
다.40) 그 일단을 살펴보자.
의상은 法性의 性과 相을 중도 • 무분별로 해석하고 있으며 다시 중
도는 무분별이고 부주의 뜻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의상은 중도 • 무
분별 • 부주 또는 無住를 유사하거나 동일한 의미로 보고 법성과 연결
짓고 있다.41) 그리고 이러한 무주법성을 의상은 다시 범부의 신심에

37) 김천학, 앞의 논문, 16~17쪽.


38)『화엄일승법계도』, 한불전2, 7c.
39) 김천학, 앞의 논문, 21쪽.
40) 의상의 화엄사상이 •성기사상’을 그 중핵으로 한다는 것은 해주 스님(1990)
의「新羅 義湘의 華嚴敎學 硏究-『一乘法界圖』의 성기사상을 중심으로」(동
국대 박사학위논문)에 의해서 처음.주장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 논문 발표
당시 논평을 했던 최연식 선생이 의상 스님의 저술에는 ‘性起’라는 개념어
가 나타나지 않는 등 성기사상으로 의상 화엄사상을 특징짓는 것은 무리가
아니냐는 반론이 있었다. 그러나 의상이『일승법계도』에서 중심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법성’, ‘不住’,‘中道’ 등의 개념들이 지엄이 사용하고 있는
연기 및 성기의 개념과 비교했을 때 ‘성기’적 사고에 해당한다는 점, 그리고
법장의 화엄에 비추어 보았을 때도 역시 성기적 개념에 가깝다는 점에서
의상의 화엄사상을 •성기사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크게 무리가 없다고 생각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지면의 제약상 추후 별도의 논의를 통해서 해명할
기회가 있기를 기대한다.
41)『화엄일승법계도』, 한불전2, lb, 6bc, 8b ; 전해주, 1988, r—乘法界圖에 나타
바탕하여 설하고 있다. 의상은「법성게」의 증분4구를 설명하면서 “금
일 오척신의 不動함을 無住라 한다”,42) “나의 범부의 5척신이 3제에
칭합하여 부동함을 무주라 한다”42
43)라고 해석하고 있다. 不動吾身이
곧 법신 그 자체라는 의상의 법성설은 지엄의 성기관을 수용한 해석
으로 볼 수 있다. 지엄은『수현기』에서 “性者體 起者現在心地耳”44따
고 성기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45) 이 점은 의상이 지엄의 성기설을
이어받은 측면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러나 의상의 법성성기설은 분명
지엄의 淨分緣起를 성기라 한 것과는 다르다. 緣性二起의 관점에서 보
았을 때, 지엄의 성기는 법계연기의 극치이기 때문에 연기와 성기 사
이에 본질적인 상위는 없지만,성기는 연기의 극치라는 점에서 연기에
포섭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 의상은 증분과 연기분을 자리행의
두 영역으로 분류하고 있고,『총수록』의「眞記」에서는 증분과 연기분
을 나누지 않는 것이 곧 중도이며, 그러한 중도가 法性家라고 해석하
고 있다.46) 이는 연기와 성기를 병렬시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
다.47) 의상이 지엄과 비교하여 연기보다는 성기에 더 중점을 둔 화엄
사상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연기는 그 기본적인 지향점은 부처인 반면,성기는 그 기본적인 지
향점 이 중생에 있다. 다시 말하면 自利와 利他의 어디에 더 초점을 둘
것인가의 문제이다. 증분과 연기분을 나누지 않는 것이 곧 無住, 中道
라고 이해한다면,어느 것에 초점을 두든 둘 다 겸해진다. 그러나 증
분과 연기분의 원융을 말하면서 분류하는 자체가 둘의 의의가 다름을
의미한다. 어느 것이나 종교의 실천행이라 할 것이지만,연기보다는
성기를 더 강조하는 입장은 깨달은 자의 실천행을 강조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 경우 수행만큼이나 실천의 행이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난 의상의 性起思想』『韓國佛敎學』13, 119~120쪽.


42)『총수록』, 한불전6, 776c.
43) 위와 같음.
44)『수현기』,대정장35, 79b-c.
45) 전해주,『의상화엄사상사연구』, 140-141 쪽.
46)『총수록』,한불전6, 795c.
47) 전해주,「의상의 법성과 법계관」『2002한국불교학결집대회논집』, 368~369쪽.
우리가 의상의 화엄을 중국화엄의 그것과 비교해서 더욱 실천적이라
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9세기 중엽 이후의 저술로 추정되는『眞記』(『眞秀記』로도 불린다)
에서는 “法性家는 오늘의 연(緣) 중에서 일으키는 법을 기준으로 하
여 증분 및 연기분의 법성이 되는 것이니,어떤 사람은 ‘증분과 교분
을 나누지 않는 중도가 비로소 법성가’라고 말한다.”■ 고 되어있다. 의
상의 법성게는 성기에 해당하는 證分과 敎分에 해당하는 緣起分 및
利他 • 修行分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 중에서 성기에 해당하는 증분
과 연기에 해당하는 연기분을 나누지 않음을 중도라고 하고, 다시 그
것을 "法性家"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연기와 성기의 분별을 떠나는 것
을 중도 곧 성기라고 이해하는 입장이므로,『진기』의 이해는 오히려
성기 안에 연기가 포함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따라서 화엄사상에서
성기와 연기가 가지는 성격을 고려한다면, 이는 실천적 성격이 훨씬
더 강화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의상계 화엄 안에서도 시대의 추이에 따라 점차 성기론을
중심으로 화엄사상을 이해하는 경향이 강화되어 갔음을 의미한다. 이
는 의상 당대에 비하여『진기』가 성립될 무렵의 의상계 화엄사상 일
부에 화엄을 더욱 실천적으로 해석하는 그룹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리고 이러한 실천적 해석이 등장했던 중요한 배경 중의 하나가 남종
선의 전래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이는 전해주도 이미 지적하고 있는
바이지만,4!»『진기』에 선적 용어로 이해될 수 있는 표현이 등장한다
는 점에서도 그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다.『진기』에서는 깨달음의 세
계인 證分을 “言語道斷 心行處滅故名絶名也 心行處滅故離相也”5W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 다음에 다시 다음과 같은 문답이 등
장한다.

문: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행하는 곳이 멸한 것’도 또한 지극히 48 49 50

48)『총수록』, 한불전6, 795c.


49) 전해주, 앞의 책, 173쪽.
50)『총수록』, 한불전6, 770b.
깊은데, 다시 어떤 뜻을 기준으로 하여 10불(佛)의 경계로 삼는 것인
가?
답: 앞에서는 비록 침묵이라 하더라도 이름과 모습 중의 침묵이지만, 만
일 과분(果分)이라면 맨 처음부테初初] 이름과 모습을 보지 않는
곳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곳에는 법(法)도 없고 물(物)도 없는가?
답: 앞의 위(位) 중에서 논한 법과 같아서 맨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문: 그렇다면 이 가운데 실제로 법 이 없는가?
답: 갖추고 있다.
문: 어떤 사물이 있는가?
답: 이는 옛 스님[古德]이 말한 바 ‘정을 돌이켜 보는 곳[反情見處]’인 것
이다.51)

이 부분은『진기』에서 ‘언어도단 심행처멸’의 언구에 의해서 화엄의


증분을 제시한 다음 다시『유마경』에서의 침묵과 대비하여 비교하는
가운데 나오는 설명이다. 그러는 가운데 ‘언어도단 심행처멸’의 화엄세
계를 옛 성인의 말을 빌려 ‘정을 돌이켜 보는 곳[反情見處]’이라고 설
명하고 있다. ‘견처’라고 하는 용어가『진기』의 성립 이전에도 쓰여진
것임에는 분명하지만,『진기』에서 등장하는 바와 같이 ‘언어도단 심행
처멸’의 경 계를 언급하는 것으로 명 확히 드러나는 경우는 선어 록을 제
외하면 흔하지 않다는 것 또한 분명 하다.51
52) 많지 않은 용례 이기는 하
지만 이런 부분에서 의상계 화엄이 새롭게 전래된 선종의 영향을 받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의상계에서 구극적인 경지로 상정하는 성
기세계 곧 불경계를 해 명 하는 데 선의 의취를 원용하는 방식 이 되고
있다는 것은 독특한 점이다. 이는 의상계 화엄의 내부에서 선으로의

51) 위와 같음.
52)『대기』에서는 생멸을 열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중에, 신림의 말을 빌어서
열 번째 ‘性起生滅’을 설명하면서 “越情見處無住生滅也”(같은 책, 818a)라고
하는 표현이 사용된다.『진7ᅵ』에서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禪的인 사유의 정도라고 하는 측면에서는 8세기 전후
의 신림이 사용한 것보다 9세기 중반 이후에 성립된『진기』에서의 용례가
훨씬 더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향자만이 아니라 새롭게 전래된 선을 원용하여 의상화엄의 사상적
정비를 추구하는 계통 역시 존재했음을 보여준다.에
표훈,진정 등 10여 명의 제자가 모여서 법계도를 배울 때 의상에게
묻는다. “‘부동한 나의 몸이 그대로 곧 법신 자체이다’고 하는데,이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의상이 대답했다. “나의 범부의 五尺
身이 三際에 칭합하여 부동함을 무주라 한다.”비 의상은 일승의 내용
곧 진리를 곧바로 자신의 신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신체가 곧바로 진리세계와 상응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곧 세간
의 몸이란 더럽고 무상하며,그래서 멀리 떠나야 할 것인데,세간 그
자체로 일승이며 몸은 무상한 것이 아니라 부동의 法身 그 자체로 이
해되어지고 잇는 것이다. 곧 표훈을 비롯한 의상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중심과제는 일승의 법계에 무상한 몸으로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같은 이해는 ‘平常心是道’를 주장하는 마
조의 주장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평상심이 바로 道’라고 하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것을 체득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에서 문제의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의상
계와 마조 계통의 홍주종은 거의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유사성은 의상계 화엄승들이 쉽게 마조 계통으로 전향하는 일
원인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의상의 직제자인 표훈은 법성게 30구를, 증분 4구는 實相觀, 연기분
14구는 無住觀,이타분 4구는 性起觀과 緣起觀,나머지는 緣起觀과 因
緣觀으로 분류한다.53
56> 54
교학적인
55 체계로서는 차이가 없지만 觀法으로
서「법계도」를 이해하는 특징 이 있다. 교학적인 체계 곧 이론적인 틀
로서가 아니라 직접 체득해야 할 대상으로서 관법의 대상으로서 이해
하는 것에 의상과 의상계 화엄의 실천적 특징이 존재하는 것이다.

53) 이 같은 부분은 이미 선종의 입지가 어느 정도 확고해진 시기인 고려 초의


균여가 굳이 선과의 직접적인 교섭보다는 의상계 화엄 내부의 사상적인 정
비 작업에 더 열중한 맥락과도 연결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54)『총수록』, 한불전6, 776c.
55) 인경, 2002,「라말 화엄교단과 선종의 諸問題」『한국선학』제2호, 159쪽.
56)『법계도기총수록』, 한불전6, 775b. 이 부분은 표훈의 五觀釋에 대한 설명이다.
이 러 한 의 상계 화엄 의 실천적 성 격 은 사상적 인 측면 에 만 그치 지 않
는다. 그 전승방법에 있어서도 선종과 유사한 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
문이다.

신림대덕이 설법할 때 대운법사 군이 아뢰어 말했다.


“연기분의 설법은 이와 같으니 증분의 설법은 어떻습니까?”
신림대덕이 침묵하며 잠시 있다가 말하였다.
"대답해 마쳤다.”57)

일례를 든 것인데, 선어록을 읽어 본 이라면 누구나 그 유사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사토 아츠시 같은 학자는 의상계 화엄의
특징으로 ‘상승에 있어서의 口傳性과 秘義性’,그리고 ‘현실의 신체에
의한 직접적인 진리의 체득’과 ‘화엄경 혹은 화엄교학만을 심화시킨
점’에서 찾는다.58)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인 구체성이 강조되는 데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다. 이론의 전승이 아니라 그 세계에
직입 하는 체득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사상의 전승이 즉자적으로 이루
어질 가능성이 많고, 그것이 외부에서 바라보면 비의적인 것으로 이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무아 내지 무분별의 진리세계가 강조됨으로
서 현실적 자아, 구체적인 현실 자체가 상실되는 사태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 인경 스님은 “화엄철학의
새로운 실천적 해석학이며 또 하나의 접근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법
계에 대한 이해를 기존의 번쇄한 교학체계로 환원시키지 않고,실천의
주체로서 ‘지금의 자신’ 특히 현실 속의 구체적인 ‘몸’에서 구현하려는
노력”59)이라고 평하고 있다.
동시에 그러한 점은 의상계 내에서 독특한 사장상승의 방식을 만들
어내기도 했다. 앞서 본 것처럼 표훈은 오관석을 지어서 인가를 받고
있고, 지통은 三世一際의 법문을 깨달은 후에 의상에게 이를 말하고서

57) 같은 책,777a.
58) 佐藤 厚,2001,「의상계 화엄학파의 사상과 신라불교에서의 위상』『보조사
상』16집, 127 〜 128쪽.
59) 인경, 앞의 논문, 162쪽.
"법계도인’을 받았다.6« 이 외에도 의상계는 대부분 스승의 강의와 질
의응답 등을 통해서 상승되었음이『총수록』에서 확인된다. 이 같은 의
상계 화엄의 실천적 특성 그리고 선종과의 유사성이 쉽게 그리고 다
수가 선종으로 전향할 수 있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신라 하대에 접어들면서 의상계 화엄이 신라불교의 주된
흐름 중의 하나로 등장하였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61) 주된 흐
름으로 등장하였다는 것은 그 계통에서 그만큼 많은 구법승들이 의상
계 화엄에서 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라 하대 구법승들의 상
당수가 의상계 화엄과 관련을 맺고 있는 이유의 하나를 여기에서 찾
을 수 있다. 중국에서 새로운 사조로 등장한 선종 특히 남종선을 전래
한 초기 선승들 중에 의상계 관련 화엄승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기본
적인 조건들이 여기에서 충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장계 화엄과는
달리 애초부터 선종과 유사한 점이 많았던 의상계 화엄승들이 남종선
을 수용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구법
승의 입장에서는 기본적으로 국내에 있지 않은 신사조에 민감했을 가
능성이 크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최초기 이후에 선종에 관
심을 두고 입당한 승려들의 대부분이 최초기 구법 선승들의 후예들이
라는 점,도의가 귀국하는 821년부터 88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의 약
70여 년 동안 선종의 다양한 조류 전체에 대해서가 아닌 마조도일 계
통의 선에 대한 집중적인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유독 의상
계를 비롯한 화엄종 계통의 승려들이 주로 선종으로 전향하는 예가
많았던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60
62) 61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화엄종 승려들의 선종 전향이 반드시 선종과
화엄종의 대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선종과 화엄종의 긴밀
한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 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신라 하대의 선승들이

60) 균여,『석화엄지귀장원통초』, 한불전4, 139c-140a.


61) 이 점에 대해서는 최연식의 앞 논문을 참고할 것.
62) 물론 이것이 화엄종 승려들이 선종으로 전향한 유일한 원인이 아니라는 점
은 분명하다. 다만 당시 의상계의 주도적인 위치와 선종과의 친밀성 때문에
유독 의상계에서 선종으로 전향하는 승려가 많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을 것
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나 화엄승들 사이에서 학문적인 의미에서의 선교일치에 관한, 어떠한
진지한 논의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63)고 인경 스님은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신라 하대에 선이 새로운 사조로서 수용되기는 했지만
곧바로 의상계 화엄과 대립되거나 융화시켜야 할 어떤 것으로 이해되
지는 않았던 것이다. 곧 의상계 화엄에서는 전래 초기의 선을 대척점
에 있는 어떤 것으로 보는 강력한 인식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4. 華嚴宗의 대응

그렇다고 해서 선종이 신라불교 특히 의상계로 대표되는 화엄종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신라하대의 선승들이 왕실
내지는 귀족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데서
보이듯이, 수용된 이후의 선종이 빠르게 신라 불교사회의 한 흐륨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기 종파 출신의 많은 승려들이 선종
으로 전향했다는 점에서, 일시적이기는 했지만, 화엄종이 받았던 충격
은 작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선종이 강성해지면서 화엄 이 쇠퇴
하는 일방적 양상을 보였던 중국과는 달리,64) 65
신라 화엄 특히 의상계
화엄이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이 곧바로 선종의 우세로 연결되지
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65)

63) 인경, 앞의 논문, 146쪽.


64) 선종이 대두하면서 화엄종의 저ᅵ4조인 징관이 선과의 융화를 의도하는 점,
제5조인 종밀이 교선일치를 주장하는 것은 그만큼 화엄종의 입장이 후퇴했
다고 보아야 한다. 교판상으로 징관은 선을 일승화엄의 아래인 頓敎에 배대
하지만 종밀은 화엄과 선을 병립시키는 데서도 이 점은 확인된다. 물론 중
국에서 화엄종의 쇠퇴와 선종의 대두는 회창법난을 비롯한 사회적 배경에
서도 기인한다. 종밀 이후 화엄은 선에 대하여 끝내 우위를 회복하지 못하
고 쇠퇴일로를 걷게 된다.
65) 충격에 그쳤다는 것은 대부분의 화엄종 사찰이 선종 전래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범체, 석징, 현량, 정행, 홍진, 결언, 현준, 희랑, 관혜 등의 화엄
종 고승들이 신라 하대에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된다.(김
상현, 앞의 책, 246쪽〉.
그러나 9세기 중반 이후에 보이는 화엄종의 교학 진작을 위한 노력
과 華嚴結社의 시도는 선종의 영향을 받은 화엄종의 대응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66) 반드시 선종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단언하기는 힘들
지만, 선종의 독자적인 세력가반들이 구축되던 시기에 화엄종의 재정비
를 위한 노력이 나타나는 것은 그 개연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엄종의 교학 진작을 위한 노력 곧 사상적인 재정비는 선종에 대
한 교리적인 측면에서의 대응으로 볼 수 있다. 그 일환으로 볼 수 있
는 것이 선을 융섭하고 있는 청량 징관의『화엄경소』의 수용,67)『화
엄일승법계도』에 대한 註記들인『大記』,『진기』등이 9세기 중후반에
이루어진 점을 들 수 있다. 또 9세기 전 • 중반에는『崇業觀師釋』이,
10세기 전반에 활동했을 南岳 觀公의『南岳觀公記』등이 선종이 신라
에 전해져서 세력을 확장해나가던 시기에 이루어진 것들이다.68)69이
중에서 의상계 화엄 문헌들의 새로운 줄현은 그 사상성에 대한 주早
검토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선종의 영향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
다.69)
또 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화엄종을 중심으로 한 화엄결사들이 성

66) 추만호는 9세기 전반에는 화엄종에서 선종을 융섭하는 경향이 보이다가, 선


종이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구축하고 확장해나가면서 그 반동으로 화엄종의
세력이 위축되고 사회적 영향력이 현저하게 축소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화엄을 수학한 승려들이 선종으로 전향하고,교종 사찰들이 선종
사찰로 바뀌는 일이 발생한 것을 들고 있다(추만호, 같은 책, 208~212쪽).
본래 논문을 발표할 때는 화엄종 사찰 안에서 선종이 겸수되는 경향에 대
하여 서술하였으나, 논평자였던 최연식의 지적에 따라 원문을 검토한 결과
필자의 오독임이 확인되어 해당 부분을 삭제하였다. 최연식은 당시 해인사
의 경우에는 교선 융섭외 여부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였으나, 논자가 확인하
지 못했던 남동신(1993)의 논문(「羅末麗初 華嚴宗團의 대응과 華嚴神衆經
의 성립」『外大史學』5, 150쪽 각주28)에서는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이 우두
선을 전하였다고 보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그 의
견을 수용하여 발표문과 달리 해당 부분을 삭제하였다.
67) 김복순, 1990,『신라화엄종연구』, 민족사, 139~141쪽.
68) 김상현, 앞의 책, 42〜48쪽.
69) 이 점에 대해서는 인경 스님 역시 같은 의견을 보이고 있다(인경, 앞의 논
문, 173쪽). 언급한 내용 중에서『진기』에 보이는 선종의 영향에 대한 부분
은 앞 절에서 언급하였으므로 참고할 것.
행한다. 이전까지 신라의 화엄관련 결사 중에는 오대산의 결사만이 기
록으로 전할 뿐이다.개) 그런데 9세기 말이 되면 화엄결사가 ‘성행’이란
표현을 사용해도 좋을 정도로 자주 나타난다.
9세기 말에 활동한 최치원은 화엄결사와 관련해서만「故終南山儼和
尙報恩社會願文』, 나每東華嚴初祖忌晨願文」,「華嚴社會願文」,「華嚴經社
會願文」등 4종의 願文7071>을 남기고 있다. 첫 번째 것은 決言과 賢俊
등이 884년 의상에게 화엄을 전한 智儼의 法恩을 갚고자 결성된 것이
고, 두 번째는 해동화엄 초조인 의상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결성된 것
이며, 세 번째는 華嚴業(화엄종)에 속한 승려들이 맺은 香社이며, 네
번째는 886년 정강왕이 先王인 형 헌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결성
된 것이다. 이 중 앞의 둘은 화엄의 조사를 기리려는 목적에서,뒤의
둘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다. 또 네 번째의 것은 선왕의 명
복을 빌면서 결사를 통해 왕실과의 결속을 강화하는 예로 볼 수 있으
며, 화엄 조사를 기리는 앞의 두 결사는 화엄종 내의 결속과 반성에
의미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 화엄종단의 세
력 유지 및 강화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72) 사상적인 재
정비가 내적인 것이라면 화엄결사는 외적인 의미가 강한 것이다. 9세
기 후반부터 점증하는 선종과 중앙 흑은 지방 세력과의 연결에 대해
위기감을 느꼈을 화엄종으로서는 어떤 형태로든 견제와 함께 내적 결
속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것이 결사의 형태로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사례들과 함께 주목되는 것은 신라하대에 들어서면서『화엄

70)『삼국유사』「대산오만진신」조.
71) 이들 願文은『원종문류』(한불전4, 644~647쪽)에 수록되어 있다.
72) 김상현, 앞의 책, 151〜154쪽.
이 중에서 화엄종의 조사인 지엄과 의상, 법장을 추모하기 위한 결사는 선
종의 조통설에 대응하여 상대적으로 계보의식이 약했던 화엄종의 내적 결
속을 위한 성격이 강한 것으로 이해된다(남동신, 앞의 논문, 147쪽). 이와
더불어 의상계 초기부터 보이는 ‘법계도인’을 통한 認可의 방식이나 스승의
물음에 답한 후에 認可 받는 양식 등의 경우에도 주로 9세기 중후반부터
편집된 것으로 보이는『법계도기총수록』상의 각 저술에 기재되었다는 점
에서 의상계 본래의 전통적인 방식인가 아니면 선종 전래 이후 강화된 계
보의식의 반영인가 하는 점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
경』과 친연성이 깊은 신앙이 특별히 강조되면서 성행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智拳印 비로자불상이 화엄종을 비룻한 여타 종파의
사찰에서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화엄신중신앙 역시 성행하였
다. 특히 화엄신중신앙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화엄신중경』은 선종
의 득세에 직면한 화엄종단 특히 해인사의 북악파에 의해서 성립되었
던 것, 곧 해인사의 緇軍 조직을 중심으로 한 사원공동체의 구축 및
유지와 구성원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으
로 남동신은 추정한다.73) 이는 당시의 화엄종단이 선종에 대한 대응
으로 화엄 신앙을 강화했다는 의미이며,동시에 화엄종의 대응이 사상
적인 재정비에서부터 대중의 지지기반 결속과 신앙에 이르기까지 다
방면에 걸쳐서 이루어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화엄종이 9세기 초반 신라에 전래되어 점차 세력을 강화해
나간 선종에 대하여 본격적 인 대웅을 보이고 있는 것은 9세기 중후반
에 이르러서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9세기 중반에 이를 때까지도 선
종의 등장이 화엄종의 기반을 잠식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의미로 이해
될 수 있다. 또 신라에 선종이 전파되는 속도 또한 그리 빠르지 않았
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화엄종의
선종에 대한 대응이 적극적으로 변화해간 것은 선종의 확장이 화엄종
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화엄종은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신앙결사와 사상의 정비를 위해 크
게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선종의 세력 확장도 하나의 위협은 될 수 있었겠지만 화엄종 내에서
선종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이 눈에 띠지 않고, 선 전래 초기의 선사들
또한 대부분이 선교의 구별을 크게 강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고려
해야 할 것이다.
이같은 화엄종의 다각적인 대응은 일단은 성공적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고려 초에 이르러 새 왕조의 이념으로 채택됨으로써73
74)

73) 남동신, 앞의 논문.


74) 김복순은 고려 태조가 친히 지었다고 하는 r開泰寺 華嚴法會疏』(崔瀣,『東
人之文四六』卷8)를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또 고려 초에 대부분의 국사
선종을 비롯한 여타 종파에 대한 우위를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
히 고려 초에 화엄이 선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된 예로 균여로 대표되
는 의상계 화엄과 탄문으로 대표되는 원효계 화엄*75>의
76 재부흥을 지목
해야 할 것이다.76)
이것은 결과적으로 화엄의 재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혹은
나말여초의 화엄종 내부에 있어서도 신라 의상계 화엄의 우위확보를
보여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禪敎의 갈등이 있었다고 해도 선
이 비판한 '화엄의 수행법은 법계관인데, 법계관이 아니라 성기관을 위
주로 하는 의상화엄이 정비되면서 선에 맞대응할 정도로 입지를 강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입지의 강화는 탄문(900~974)이 성상
융희에 선종의 사상을 융화하여 교선의 일치를 모색할 수 있을 정도
로77> 자신감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에 화엄종이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사례에서
확인된다. 동일인 여부가 논란이 되기는 하지만,사자산문인「영월 흥
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비문」의 陰記에 해인사 북악의 희랑대사가 흥녕
사의 院主로 기록되어 있다.78) 이는 해석에 이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화엄의 고승이 선종사원에 영향력을 미친 예로 이해할 수 있다. 또 고
려 초 균여와 탄문에 의한 화엄종단의 약진과 정비는 화엄종이 신라

나 왕사가 선종 승려였던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선종이 흥성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태조 왕건에 의해서 창건된 사찰은 선종의 사찰보다
는 교종의 사찰이 더 많았다고 한다(한기문, 1983,「고려태조의 불교정책」
『大邱史學』22집 : 1986,「고려태조의 불교정책j『고려초기불교사론』,민족
사% 재수록,161~1기쪽).
75) 탄문의 소속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하는데,여기에서는 그 소속은 크게 문
제가 되지 않으므로 일단 김지견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다(김지견,「균여전
711그1」, 164^).
76) 물론 이에 대해서 지배 권력의 향방이 주요하게 작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축소시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하나의 종파 내지 사상집단이 지배세력의
이념으로 채택되기 위해서는 역시 거기에 부응할 만한 여건을 갖추어야 한
다는 것도 사실이다. 곧 지배세력의 채택 자체가 화엄종이 당시 사상계에
서 강력한 집단이었다는 반증일 수 있기 때문이다.
77) 해주스님, 앞의 책, 340쪽.
78) 이지관,『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1』, 240쪽.
하대의 정비과정을 거쳐서 고려 초에 이르면 상당한 세력을 확보하였
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淸泰年初(934년경)부터 화엄대
교가 크게 성행하였다는 기사79〉는 탄문을 중심으로 한 화엄종의 약진
을 보여준다. 탄문은 또한 광종의 탄생을 기원하는 법회, 籃州와 白州
의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의 法主로 참석하고 있는데,예 태조와 교류
한 선사들 중에 이런 법회의 법주가 되어 주재했다는 기사는 거의 나
타나지 않는다. 이 같은 사례들은 중앙집권적인 교학불교로의 전환을
위해 노력한 고려 태조의 노력8n과 맞물려서 나타나게 되는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화엄종 교단 내에서의 다방면에 걸친 재정비 작업
이 없었다면 그러한 결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처럼 신라 하대에
선종이 전래되어 흥성해지기 시작하면서 화엄종은 지속적으로 사상과
신앙, 조직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방식의 대응을 한 결과, 고려 초에
이르러 확연히 달라진 위상을 내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화엄의 대응은 이후의 한국선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
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화엄과 선의 사상적 결합-때로는 외형적인 결
합까지 포함하여-이 중국불교에서보다 훨씬 더 긴밀하게 이루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그 단적인 예를 고려 중기 보조 지눌의 화엄선
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를 빌려 상세히 논하
기로 한다.

맺는 말

이상으로 신라 하대의 선 전래와 그 대응의 결과 고려 초에 이르러


화엄종이 재흥하게 되는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논자
는 신라 하대의 불교사상계에 대한 종래의 해석과 관련하여 몇 가지
이견을 제시하였다.

79)「海美 普願寺 法印國師 寶乘塔碑文」, 위의 책, 96쪽.


80) 같은 책, 93+ 96쪽.
81) 한기문, 앞의 논문, 1기쪽.
우선 신라 하대 화엄종 출신의 입당구법승들의 선종 전향에 대해서
인데. 종래에는 이를 국내에서의 전향자와 함께 묶어서 화엄의 현학화
와 그에 대한 반성을 전향의 원인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많았다. 그러
나 입당구법승들의 전향원인을 단순히 그렇게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논자는 구법승들이 新思潮로서의 선종으로 전향하는 것은 오
히려 당연한 선택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더구나 화엄종 특히
강한 실천적 성향 때문에 선종과 통하는 부분이 많은 부석사계 화엄
승들의 선종 전향이 많았다는 것은 구법승들의 선택이 화엄종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신라 하대에 선종과 화엄종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파악하고 있
는 견해들이 적지 않지만, 오히려 많은 경우에 화엄종이 선종과 공존
융화하는 경향이 강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신라 하대에 선종
이 화엄종에 대하여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고 사상계를 주도하였다는
견해 역시 무리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선종이 주도적인 입장에
서는 것은 9세기의 최종반 이후 10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이
시기 선종의 약진은 책봉된 국사의 대부분이 선종 승려였으며, 이전과
는 달리 독자의 사원을 확보하였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김상현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화엄종 사찰이 선종 전래 이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화엄종의 고승들이 신라하대에도 여전
히 활동하고 있다. 더구나 화엄종 차원의 조직적 인 대응 움직 임 이 신
라하대에 더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선종의 전래가 곧바로 화엄종의 쇠
퇴로 이어진 것은 아니며, 오히려 화엄종의 결속과 조직의 정비라는
결과를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법계도인을 매개로 한 사자상승 개념의
등장,전적의 정비, 결사 등을 통한 종파의식의 강화,『화엄신중경』과
같은 좀더 독송하기 쉬운 형태의 화엄종 전적이 성립하는 등의 흐름
은 선종의 전래에 따른 화엄종의 대응으로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셋째, 그러나 9세기 후반 이후 선종이 독자적인 기반을 확보하고 세
력을 확장해나감에 따라서 화엄종 역시 사상의 재정비와 화엄결사를
통한 세력 유지 및 결속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 고려 초에는
새 왕조의 이념으로 채택된다. 이처럼 새晉게 전래된 선종의 영향에
대한 화엄종의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응은 이후 한국선의 전개
에 있어서 중국에서의 흐吾과 사뭇 다른 특징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
게 된다.

논문 투고일 : 2006. 3. 8 논문심사 완료일 : 2006.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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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문, 1983,「고려태조의 불교정책」『대구사학』22집
Abstract

A Study on Current of Buddhist Thoughts

in the Late Silla and the Early Goryeo

Dynasty

Seok, Gil-am

Seon’s introduction from China in the late Silla is a decisive


event which not only transformed Shillan society but also was a
turning point of Korean Buddhist thoughts. It is generally and
formally understood as a phrase of ”Seon’s introduction and
Hwa-eom (Huayen)’s decline.” But it can’t be thought that as soon
as Seon was introduced to Silla, it became prosperity and made
Hwa-eom dedined. This paper has intention to examine, relying on
current results,how Seon’s introduction had influence on Hwa-eom
and how the latter reacted, and to bring forth a counter-argument
to formally understanding of Buddhist thoughts in the late Silla.
First,it is generally said that because Hwa-eom masters who
were both in Silla and in China from Silla for studying, thought
Hwa-eom had become pedantic and doubted its efficiency, they
converted to Seon. But it is natural for Shillan masters studying in
China that converted to a new trend such as Seon. In addition,
many converts were Hwa-eom masters belonging to the Buseok-sa
Temple faction whose characteristic of strong practice had lots of
something in common with Seon. It is a good evidence that they
didn’t convert to Seon because of their doubts and unbelief.
Second, Seon in Silla flourished from the late in the 9th century to
the early in the 10th : Seon produced most of National Masters and
had its own temples. But in the meanwhile, most of Hwa-eom
temples were maintained and Hwa-eom masters were in full activities.
In addition, Hwa-eom’s systematic movements and responses were
outstanding in the time of the late Shilla. In a word, Seon’s
prosperity doesn’t produce direct result of Hwa-eom’s decline,but,
rather, makes Hwa-eom unite and consolidate organization. Its results
as follow: emergence of handing on and receiving from teacher to
student by the medium of the Seal of Dharma Realm Diagram,
reinforced sectarianism and respects for masters through consolidating
texts and forming Hwa-eom society, and publishment of easy-
readable or easy-recitable texts like the Sutra of Hwa-eom Guardian
Deity.
Third, Hwa-eom's successful responses to newly introduced
Seon made succeeding Korean Seon and Korean Buddhist thoughts
different with Chinese. Starting from Seon of Korean style that
closely confused with Hwa-eom, or Bojo Seon, Korean Buddhism,
unlike China,has characteristics peculiar that based on Hwa-eom
thoughts.

Key words : Korean Buddhism, Huayen(Hwa-eom), Korean Seon(cha'n),


Ui-Sang,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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