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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각오

다음 날 키리에가 일어났을 때, 그녀가 안네마리를 보고 흐린 눈으로 물었다.

“누구지? 새로 온 시녀니?”

저택에 한차례 파란이 일었다.

나타니엘은 이야기를 듣고 다소 조급하게 키리에를 찾았다. 키리에는 갤러리에 집사와 함께 있었다.

“에른스트. 먼지가 너무 많아. 손님들 보시는 곳이니까 갤러리를 신경을 써야지.”

경쾌하고 엄한 목소리에 나타니엘이 멈칫했다. 그의 발소리를 들은 키리에가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어딘지 서투른 동작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뷰캐넌 백작가의 키리에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손님이신가요?”

안네마리가 옆에서 입을 벙긋거렸다.

‘유아 퇴행.’

원망스러운 눈이었다.

나타니엘이 고개를 키리에에게 돌렸다. 키리에는 대답을 기다리며 잔뜩 어깨를 굳히고 있었다.

[몇 살이지?]

“……열 살입니다.”

키리에가 조금 불만스럽게 대답했다. 원래의 키리에였다면 귓구멍이 막혔느냐를 우아하게 돌려 말했을


것이다.

[열 살.]

“네.”

[…….]

나타니엘은 자신이 생각만큼 기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키리에가 그 모든 기억을 잊어버려서 다행인
것 같으면서도, 그게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혼란을 삼키고 느리게 대답했다.

[그래. 손님이야.]

“응대가 서툴러 죄송해요. 귀하신 분께서는 성함이……?”

[나타니엘.]

이어지는 말이 없자 키리에가 당황해 머뭇거렸다. 그때 뒤에서 세자르가 다가왔다.


“각하.”

“각하?”

키리에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세자르가 눈살을 찌푸리며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나타니엘이 자연스럽게


그 사이를 가로막았다.

[키리에의 이야기는 전해 들었겠지.]

“물론입니다. 갈수록 일이 꼬이는군요.”

[당분간 내가 돌보지. 용건은?]

세자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실례했습니다. 국왕의 병사들이 저택 주변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공격하겠다던가?]

“아직 그렇진 않습니다만,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병사들이요?”

세자르가 말하는 도중 키리에의 불안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이 앞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었군. 자리를 옮기지.]

바로 목소리를 낮춘 나타니엘과 달리 세자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키리에. 손님과 대화 중이다.”

키리에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죄송해요.”

키리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풀이 죽었다. 나타니엘은 몹시 언짢아졌다. 지팡이로 한 번만 때리면


좋을 것 같은데, 어쨌든 세자르 뷰캐넌은 키리에의 친부였다. 그는 혈연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반대로 그
부분에는 조심스러웠다.

나타니엘이 웃음기 없는 눈으로 미소 지으며 지팡이를 꺼냈다.

[뷰캐넌. 웃어야지. 그렇게 인상이나 쓰고 있으니 키리에가 네가 화났다고 오해하잖니.]

“예?”

[웃을 일이 없다면 내가 웃게 해 주고.]

“각하, 지금은 그보다는…….”

[그래, 그건 내 몫이지. 그러니 너는 웃어야지.]

나타니엘이 조심스레 세자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는 지팡이 끝으로 세자르의 어깨 한쪽을 툭 두드린
뒤 속삭였다.

[그게 아니면 내가 왜 널 살려 두고 있겠어.]


움찔한 세자르가 키리에 쪽으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기며, 주제에 능숙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각하께서 해결해 주신다 하니 이제 걱정이 없군요!”

나타니엘이 심드렁히 그를 주시했다. 간사한 자다. 자신이 손쓰지 않아도 제 명에 죽지는 못할 것이다.

키리에는 영문도 모른 채 아비가 웃으니 그저 따라 웃고 있었다. 복사꽃 같은 미소였다. 나타니엘의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맘에 드니?]

“네?”

키리에가 깜짝 놀라 대답한 뒤 얼굴을 붉혔다.

“음, 두 분 대화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각하…….”

[얼마든지 끼어들렴. 그렇지, 뷰캐넌?]

“하하, 하! 물론입니다.”

세자르가 어색하게 키리에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키리에. 나는…… 일을 해야 하니, 네가 각하를 잘 모시렴. 할 수 있지?”

별거 아닌 작은 어루만짐과 칭찬에 키리에가 바짝 굳었다.

“네, 아버지.”

“넌 뷰캐넌이야.”

“네, 아버지. 알고 있어요.”

“네 어미 같은 무책임한 사람은 되면 안 된다.”

잔뜩 의욕에 차 있던 키리에가 조금 어깨를 늘어뜨렸다. 여전히 주제 파악 못 하는 말에 나타니엘은 좀 더


언짢아졌다.

“……네, 아버지.”

그녀가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아버지……. 그런데 혹시 어머니는 언제 오시나요?”

세자르가 무표정으로 변했다.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정신이 왜 열 살 시점으로 회피했는지를 깨달았다. 아직 세자르 뷰캐넌과 제냐


하트우드가 이혼하기 전이었다. 아직 모든 게 행복했던 시절.

세자르는 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영지에서 저희 쪽 사병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규모는 크지 않습니다만, 아치볼드가 빠지고 버몬트가


내분으로 돌입해 생각만큼 나쁘진 않습니다. 하지만 전면전은 피하고 싶습니다만.”
나타니엘은 대답 대신 엄지와 검지로 입술 앞에 완만한 곡선을 그려 보였다.

[웃어야지?]

새파란 눈빛이 서늘했다. 키리에의 정신이 어려졌기 때문에, 그는 좀 더 엄격해질 필요성을 느꼈다.

세자르는 파르르 입꼬리를 떨다가, 홱 하고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나타니엘이 다시 키리에에게 주의를 돌린 뒤, 미소 지으며 허리를 살짝 굽혔다. 그가 우아하고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차 한잔하실까요?]

키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새침하게 나타니엘의 손을 잡았다.

“얼마든지요.”

***

단장에서 약간의 고비가 있었다.

“아가씨. 환복을 도와드릴게요.”

안네마리가 그렇게 말하며 나섰으나, 키리에는 머뭇거렸다. 뾰족한 귀가 낯설어 불편한 모양이었다.

“저기……. 마르타는?”

마르타는 이미 죽은 키리에의 유모였다. 나타니엘이 눈짓하자 하인 한 명이 재빨리 오래 근무한 하녀를


데리고 왔다. 안네마리는 충격받은 얼굴로 물러났다.

키리에가 단장하는 동안, 나타니엘 역시 복도로 나왔다. 안네마리는 복도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나타니엘의 인기척을 느끼자, 번들거리는 검은 눈을 하고서 고개를 쳐들었다.

빛 들지 않는 복도에서 둘이 동시에 말했다.

“고쳐야 해요.”

[잠시 놔두지.]

잠시 쌕쌕 숨을 내뱉던 안네마리가 온 저택이 떠나가라 외쳤다.

“이게 다 나타니엘 님 때문이에요!”

눈에서 절망이 보였다. 나타니엘이 차분하게 지팡이를 짚었다.

[부정은 안 해. 하지만 잠깐 쉬게 두는 게 좋겠어.]

“아가씨가 안네마리를 잊어버렸다고요!”


[그래서 무슨 수를 쓰겠다고?]

“강제로 기억을 깨울 거예요!”

안네마리가 그렇게 말한 뒤 어깨를 들썩이며 하나 남은 검은 눈을 좌우로 굴렸다.

“엄마가 알려 줬어요, 그런 주술이 있었어요, 분명……!”

[위험은?]

안네마리가 입술을 깨물었지만, 기세는 더 흉흉해졌다.

“하지만 아가씨가 안네마리를 잊었단 말이에요……!”

[위험하단 뜻이군.]

나타니엘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미리 죽여 둘까.

하지만 그는 눈앞에서 훌쩍거리는 안네마리의 머리통과, 그녀를 끌어안고 웃던 키리에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죽이고 아무도 모르게 숨기면 된다. 연고도 없는 하프 엘프 따위 키리에가 아니라면 누구도 찾지


않는다.

키리에가 아니라면.

나타니엘이 이내 지팡이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풀었다.

[……잠시 쉬게 내버려 두지. 키리에는 인간이니 인간의 방식이 덜 유해할 거야.]

안네마리가 고개 숙인 채 눈동자만 찌르듯 올려 원망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나타니엘이 덧붙였다.

[올드시우다드에 연락해. 포트듀케인의 그 망아지에게도.]

“……나타니엘 님을 죽이려 들 거예요.”

[그래, 암살자도 같이 보내라고 하고.]

“안네마리도 나타니엘 님이 죽었으면 좋겠어요…….”

어느새 나타난 작은 단검이 안네마리의 손에 들려 있었다. 흰자위가 드러난 눈은 그의 허점을 찾으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실, 안네마리는 나타니엘이 저택에 있는 내내 그래왔다.

나타니엘이 실없이 웃었다.

[안 그랬던 사람은 키리에밖에 없었어.]

***
정원에 만개한 자카란다를 보며 키리에는 조금 흥분한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나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며 점잖게 꽃들을 흘끔거렸다. 나타니엘은 옅은 애수가 비치는 온화한 눈으로 그런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자카란다를 좋아하니?]

나타니엘이 모른 척 물었다. 키리에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

그녀가 환한 얼굴에 비해 조금 망설이는 태도로, 그러나 정직하게 인정했다. 아마 아직 예절 교육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라, 어디까지가 귀족다운 대답인지 모르는 듯했다.

[다른 건?]

“다른 거요?”

[좋아하는 거.]

키리에가 생긋 웃었다. 분명 예쁜 미소였지만, 이런 대답을 위해 준비했다고 생각되는 표정이었다.

“요즘은 안젤라의 미술 작품이 좋더라고요.”

나타니엘이 입가를 찻잔으로 가렸다.

[어느 작품이?]

“‘강림하는 천사’요.”

열 살짜리의 마음에 들 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나타니엘은 산뜻하게 그녀의 허세를 모른 척해 주었다.

그가 대답이 없자, 키리에가 상체를 내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각하께서는 공작가의 분이신가요?”

[나타니엘이라고 불러. 왜 그렇게 생각했니?]

“아버지가 깍듯하길래요. 올드시우다드는 아닌 듯한데, 이덴홀 공작가 분이신가요?”

[7 대 가문은 영지의 크기와 사병 수에 차이가 있을 뿐 위아래가 없단다.]

“이덴홀은 아니군요? 하긴, 지팡이를 꺼내신 걸 보면 마법사이신 것 같으니까……. 그럼 왕족이신가요?”

어린 키리에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조잘조잘 떠드는 게 좋은 접대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궁금한 건지.

어느 쪽이든 생기 넘치는 키리에를 본 것이 까마득한 옛날이라, 조금 먹먹한 기분이었다.

[뜻대로 생각해.]

“비밀인가요? 그럼 숨겨드릴게요. 저는 입이 무겁답니다.”

나타니엘이 미소 지었다. 연회에서 비난받으면서도 꼿꼿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알아. 그건 내가 잘 알지.]
키리에가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뒤늦게 찻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병사는…… 무슨 말인가요? 혹시 아버지가 왕가에 반기를 들려고 하나요?”

[아이에게 할 이야기가 아니구나.]

“하지만 저는 뷰캐넌이에요.”

[그리고 어리지.]

“하지만…….”

[키리에. 언젠가는 듣기 거북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때가 와. 그러니 그걸 미리 앞당길 필요는


없어.]

나타니엘이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키리에가 말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일순 아이인 키리에와 어른인 키리에가 혼재된 듯 지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빠, 엄마가 날 보러 오지 않잖아요…….”

나타니엘이 멈칫했다. 그는 곧 잔잔하게 차오르는 살의를 능숙하게 갈무리한 뒤 말했다.

[이혼했다고 했나.]

“아직 아니에요!”

키리에가 발끈하듯 외쳤다가, 제 행동에 지레 놀라 울상을 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점잖지 못하게…….”

나타니엘이 보란 듯이 나긋하게 미소 지었다.

[열 살에게 점잖게 있으라 요구하는 어른이 있다면 발을 밟아 주렴.]

“……그게 우리 아버지인데도요?”

[아버지면 더 쉽지. 뒤처리가 곤란하진 않겠어.]

“저보다 더 큰 어른인데요?”

[별수 없으니 나중에 내가 밟아 주도록 하지.]

그녀가 키득거리다가 활짝 웃었다.

“나타니엘 님은 좀 특이하시네요.”

안에 든 것이 열 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타니엘은 조금 멍해졌다. 자카란다 꽃을 받았을 때의 그


미소였다. 준 게 없는데도 받는 미소는 그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타니엘 님?”

그가 말이 없자, 키리에가 상체를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나타니엘이 뒤늦게 시선을 내렸다.


[키리에.]

“네.”

그녀가 좀 더 어른스럽고 당차게 대답했다. 나타니엘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맑고 선한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결국 고작 이런 거였다.

[갖고 싶은 건 없니?]

키리에는 한참 동안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 쑥스러운 듯이 속삭였다.

“하고 싶은 건 있어요.”

[하고 싶은 거?]

“비밀인데, 저희 아버지의 발가락을 괴롭혀 주시는 대가로 특별히 알려드릴게요.”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나타니엘의 귓가에 손을 모아 속삭였다.

“엄마, 아빠랑 놀고 싶어요…….”

***

나타니엘은 바로 제냐 하트우드를 소환했다. 하루가 다 가기도 전이었다.

담뱃대를 문 채 오만하게 뷰캐넌 저택으로 들어오던 제냐는, 나타니엘과 그 옆에 선 세자르를 보더니


담뱃대를 옆에 있던 시종에게 건네주었다.

“또 뵐 줄은 몰랐네요.”

당당한 말투였지만 나타니엘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익숙했다. 나타니엘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키리에가 원하더라고.]

제냐가 의아한 듯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 아이가 저를요? 걔는 그랬던 적이 없는데. 아주 어릴 때 빼고는요. 전보에서는 지금 열 살로


퇴행했다 하시지 않았나요?”

나타니엘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부모는 자신만큼이나 그녀를 모른다.

[그 아주 어릴 때라고 치고 노력해 보렴. 어려운 일도 아닐 테고.]

“이번엔 단란한 가족 연극인가요? 전설경께서는 취미가 참 고약하시네요.”


“제냐.”

세자르가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며 낮게 일갈했다. 그는 나타니엘을 흘끔거리며 낮고 빠르게 말했다.

“허튼소리 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이나 똑바로 해.”

제냐의 눈썹이 다시 활처럼 휘었다.

“지금 너, 나한테 명령했니? 내가 네 말 들어주려고 온 줄 알아?”

“갑자기 없던 모성애가 생기진 않았으리란 건 알지.”

“그러는 넌? 딸 하나 상납해서 공작가가 되니까 속이 시원해?”

“그게 지금 여기서 할 말인가!”

“닥쳐, 990 점짜리가.”

“뭐?”

제냐와 세자르는 나타니엘이 침묵하자 더 기가 살아 서로 삿대질을 해 가며 다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나타니엘은 피로를 느꼈다. 이전 같았으면 재밌다고 싸움을 부추겼을 텐데,
지금은 방에서 깜짝 선물이 뭘까 하며 기다리고 있을 키리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 얻은 건 있었다. 이 집안의 누구도 키리에를 제대로 생각해 주지 않았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만.]

나타니엘이 약간의 위압감을 담아 낮게 말했다. 제냐와 세자르가 동시에 말을 멈췄다.

[너희가 원하는 건 나중에 들어줄 테니, 지금은 너희 딸에게 좋은 꿈을 보여 주고 오렴. 내가 굳이 험한


말을 쓰지 않아도 되게끔, 부탁하지.]

세자르와 제냐는 서로를 노려보다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때 나타니엘이 눈썹을 살짝 들썩였다.

[참. 뷰캐넌.]

“예?”

세자르가 몸을 돌린 순간, 나타니엘이 지팡이를 아래로 찍었다. 잠깐이지만 그의 표정도 조금


부드러워졌다.

“크악!”

세자르가 망가진 구두코를 부여잡으며 몸을 웅크렸다. 나타니엘은 그 위에 금화 몇 개를 던지며 말했다.

[누가 네 발가락 암살을 사주하더라고.]

노을과 반쯤 무너진 뷰캐넌 저택을 배경으로 세 사람이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키리에는 행복한 듯 웃었다. 세자르는 연기를 잘했고, 제냐는 호승심 때문에 연기에 목숨을 건
느낌이었다.

상관없었다. 키리에만 좋아한다면.

나타니엘은 열주랑 한쪽에 서서 키리에가 세자르와 제냐에게 뭔가를 조잘조잘 떠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달아오른 뺨은 분홍빛이었고, 부모 중 한 명이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했다.

키리에가 웃을 때마다 나타니엘은 슬퍼졌다.

결국 그가 가진 무엇으로도 키리에를 웃게 할 수는 없었다. 자카란다는 정말 우연이었던 거다. 시기가


맞고, 때가 맞아서 생긴, 일생에 단 한 번 있을 우연. 그러면 아예 없던 것으로 해 버리면 될 것을,
그러지도 못했다.

나타니엘이 한 걸음 물러나 기둥의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키리에가 웃었으니 그걸로 좋다.
국왕의 일을 처리할 차례였다.

그가 아직 조금 찬 저녁 공기 속에서 몸을 돌렸을 때였다. 뒤에서 요란한 구둣발 소리가 났다.

“나타니엘 님!”

자신을 부르는 키리에의 목소리에 나타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키리에는 조금 숨을 할딱대며, 방긋 웃었다.

“어디 가세요?”

나타니엘이 눈을 내리깔았다.

[네 저택 밖의 불친절한 이웃들과 대화나 좀 할까 하고. 그보다 간만일 텐데 더 이야기 나누지그래.]

“아뇨, 두 분 다 이제 일하셔야 하니까요. 돌아가실 거래요.”

키리에가 드레스를 추스르며 답했다. 그녀가 곧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며 샐쭉 웃었다.

“각하께서 도와주신 거죠? 제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미소 띤 보라색 눈은 옅은 그늘 속에서도 반짝였다. 그를 향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가 가질 수는 없는


반짝임이었다.

나타니엘이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지긋이 내리누르며 시선을 낮췄다.

[마음에 드니?]

“무척이요. 원래 지금은 숙려 기간이었대요. 그래서 주기적으로 들르시기로 했는데, 오지 않으셔서…


….”

키리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감사해요.”

나타니엘은 무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툭 던지듯 내뱉었다.

[그런 것치고는 아주 기뻐 보이진 않는구나.]

키리에가 멈칫했다. 하얀 뺨이 살짝씩 들썩이더니, 그녀는 곧 레몬이라도 씹은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어떻게 아셨어요?”

[보면 알아, 이젠.]

키리에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맑고 또렷하고 은근한 눈빛으로 나타니엘을 응시할 뿐.

그러다, 그녀가 툭 던지듯 말했다.

“사실 벌써 이혼했대요.”

미친 게 틀림없군. 나타니엘은 그렇게 말하지 않기 위해 입을 가렸다. 그는 침묵하며 치솟는 살의를


가다듬었다. 이래서 인간들은 충분히 협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헛소리는 하트우드의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네……. 어머니는 냉정하시니까요. 똑똑하시기도 하고요.”

[퍽이나.]

“틀린 말은 안 하셨어요. 아마 두 분이 이혼하시는 게 싫어서, 제가 너무 무르게 굴었나 봐요. 얼른


꿈에서 깨라고 하시더라고요…….”

키리에가 살풋 웃었다.

아마 참으려 했을 테지만, 얼마 안 있어 가늘게 미소 짓는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제가, 제가 부족해서.”

나타니엘이 잔물결처럼 부드럽게 걸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키리에.]

키리에가 고개를 잘게 저었다.

“저 아직, 예절도 다 익히지 못했고…… 사용인들도, 아직 저를 어린애, 취급하고…….”

[…….]

“내가, 좀 더 열심히 했어야…….”

키리에는 곧 입을 일자로 다문 채, 눈을 부릅뜨고서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타니엘은 인간이 아니었지만, 그게 열 살짜리가 할 생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우는


키리에 앞에 서서, 나타니엘이 가만히 손을 뻗었다.

[알고 있겠지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모르겠어요……. 전부 신기루 같고, 사라질 것 같고, 제가 노력하지 않으면, 발밑이 꺼질 것 같고…


….”

[키리에. 내 이름을 걸어도 좋아. 넌 충분히 열심히 했어.]

나타니엘은 사람을 위로하는 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그는 누군가를 위로해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가만히 사실만을 말했다.
[네 부모의 일은 네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네가 부족해서 그들이 너를 사랑해 주지 않은 게
아니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나타니엘이 키리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키리에의 손톱 끝에 입 맞췄고, 키리에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뺨을 석양이 감쌌다.

[아주 먼 미래에, 네가 지금 받지 못한 것까지 줄 누군가가 나타날 거야.]

키리에의 눈이 떨렸다. 젖은 흰자위가 꼭 물비늘처럼 빛났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있어.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 어딘가에 반드시.]

나타니엘이 나른한 숨을 쉬며 키리에의 네 손가락 위에 입술을 맞댔다.

[그 누군가는 네가 노력하든, 노력하지 않든,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너를 사랑해 줄 거야.]

“…….”

[그 사람은 네가 어느 지옥에 있든 너를 구하러 갈 거고, 네가 원한다면 그 지옥에서 너와 함께 불탈 거야.


너는 누군가의 세계가 될 거야. 반드시.]

키리에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속눈썹에 잘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그 바람에 흩날렸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나타니엘이 멈칫했다. 그의 머릿속에 석양 속 키리에와 자신의 모습이 번져 나갔다. 그때 믿지 못했던


것은 그였고, 그래서 키리에는 목숨을 걸었다.

나타니엘의 손이 떨렸다. 키리에를 만나기 전까지의 시간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늙지 않잖아. 무서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모르는 사람이에요! 난 모른다고요! 난 악마랑 내통한 적 없어!’

‘됐으니까 돈 좀 더 줄래?’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혹시라도 발설하기 전에 먼저 수를 써야…….’

“나타니엘 님?”

키리에가 그를 불렀다. 밤바람이 그녀의 연보랏빛 머리칼을 흩뜨리는 것을 보며, 나타니엘은 아스라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알 수 있을 거야.]

그가 느리게, 다시 한번 키리에의 손끝에 입 맞췄다.


[왜냐면 그 누군가는 널 위해,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걸 포기할 거거든.]

[둄 2 절갠 교환재공타싸 x]

23. 전야

밤이었다. 키리에 뷰캐넌은 훌쩍이다 잠들었다. 그녀가 잠들자 뷰캐넌 저택은 덩달아 고요해졌다.

레쇼는 저택의 옥상에서 주변을 살폈다. 국왕의 군대가 저택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임전
태세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뷰캐넌 저택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압박감을 행사하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나타니엘이 정문을 걸어 나가는 것이 보였다. 평소와 달리 걸음이 정갈하지 못했다.

[안녕.]

그가 인사했다. 술이나 약에 취한 사람처럼 나른하고 긴장이 풀린 목소리였다.

군대의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앞으로 나왔다. 당황한 모양이었다.

“용건이 있으십니까?”

[응.]

나타니엘이 힘없이 대답했다. 레쇼가 칼을 꺼냈다. 시가지에서 나타니엘이 힘을 쓴다면 막아야 했다.

[내일 키리에와 밖에 나가기로 했는데, 너희를 보면 놀랄 것 같구나. 물러나 주면 좋겠어.]

수장이 손을 들었다. 군대는 대답 없이 나타니엘에게 칼을 내밀었다. 나타니엘이 광기 서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구나……. 그렇겠지.]

몇 분의 대화가 더 오갔다. 병사들은 칼과 창을 들었고, 나타니엘은 지팡이를 뽑았다.

[그럼 조용히 끝낼까? 자는 걸 깨우고 싶진 않으니까.]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창에 나타니엘이 꿰였다.

병사들이 놀라기도 전에 그는 피를 쭉쭉 뽑으며 몸을 흔들거리다가, 창에 꿰인 상태로 걷기 시작했다.

[이런 싸움은 정말 오랜만인데…….]

그가 중얼거렸다.

병사 한 명이 고함을 지르며 검으로 나타니엘의 목을 쳤다. 갈라진 목은 검은 피를 쏟더니 그의 몸에 다시


들러붙었다.

[떨어지면…… 보기에 좋지 않으니까.]

레쇼는 검을 물렸다. 그는 나타니엘이 뷰캐넌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병사의 창에 심장을 꿰뚫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병사들이 두려워 우짖기 시작했다.

“악마…… 이 악마!”

“우리를 속였어!”

[글쎄. 나를 신으로 만든 것도, 악마로 만든 것도 항상 너희들이었는걸.]

“죽어! 제발 죽어! 오, 신이시여!”

[그것도 내 이름이고.]

나타니엘에게서 나온 피가 저택 앞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마침내 수장이 절규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우리에게!”

[이상한 질문이구나. 그건 내가 물을 말인 것 같은데.]

나타니엘이 단 한 번도 휘두르지 않은 지팡이를 다시 꽂아 넣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소용없으니 돌아가.]

“이대로 물러나면 우리는 갈 곳이 없습니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파란 눈이 어둠 속에서 번득였다. 얼굴의 피 칠갑 때문에 분위기는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목숨 아까운 줄 알거든 이 일에 더는 끼어들지 말라는 거야. 이건


오레윈브리지와 내 싸움이니까.]

수장이 멈칫했다. 나타니엘은 심드렁히 심장과 팔에 박혀 있던 창을 하나씩 뽑아 떨어뜨렸다.

[가서 너희 국왕에게 전해.]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아졌다.

[일주일 뒤, 아렐라노 외곽의 포베 곶에서 만나지. 나는 키리에를 돌봐야 하니, 그동안 함정이든
마법이든 열심히 준비해 보렴.]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믿고 말고는 오레윈브리지가 결정하겠지.]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는데도 수장은 이렇다 할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항상 말로 하면 못 알아듣더군.]

나타니엘이 키득거리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은 것이 해일처럼 일어나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도, 도망쳐!”

“저걸 어떻게 죽이란 말이야!”

병사들이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수장 역시도.

나타니엘이 그 뒤에 대고 실없이 웃었다.

[문단속 잘하렴.]

검은 그림자는 어느새 다시 잠잠해졌다.

레쇼는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혼자 남은 나타니엘이 늑골에 꽂혀 있던 마지막 창을 빼내는


것까지도.

피가 솟더니 금세 가라앉았다. 나타니엘은 지팡이를 짚는 것조차 잊고 팔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더니, 얕은 한숨을 쉬었다.

[레쇼.]

먼 거리지만 확실히 들렸다. 지친 목소리였다.

[키리에를 지켜 줘.]

그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내뱉은 나타니엘은 다시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리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전설경 나타니엘로 돌아와, 키리에 뷰캐넌을 돌보기 위해 저택으로 되돌아갔다.

레쇼는 뷰캐넌의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버려진 무기를 치우는 것까지 지켜보다 몸을 돌렸다. 그도
이제 마지막을 준비할 차례였다.

키리에가 눈을 뜨자, 나타니엘이 옆에 있었다. 햇빛 드는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나타니엘이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살며시 입꼬리를 당겼다.

[악몽은?]

그의 인사는 특이하다. 키리에는 씻지 않은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대충 고개를 저었다.

[준비하고 나오렴. 밖에 있을 테니.]

햇살 속에서도 유독 그늘진 느낌이 나는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키리에가 멍한 머리로 단장을 마치고 나왔다. 요새는 늘 그랬다. 세상이 희뿌윰한 막 너머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타니엘 님께서는 갤러리에 계십니다.”

하인 한 명이 키리에를 안내했다. 봄볕 드는 복도는 공중을 느리게 떠도는 먼지 탓인지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꿈은 아무리 달콤해도 꿈이야. 정신 차려, 키리에.’


오랜만에 만난 제냐는 그렇게 말했다.

무슨 뜻일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좀 더 깊이 생각하려는 찰나, 앞서 걷던 하인이 갤러리의 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지요.”

갤러리의 끝에 나타니엘이 서 있었다.

키리에는 그의 옆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말 걸기가 어려울 정도로 창백하고 생기 없는 나타니엘은


처음이었다.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기괴했다.

키리에가 숨을 들이켠 순간, 나타니엘의 고개가 느리게 그녀에게로 움직였다. 나타니엘이 미소 지었다.

[왔구나.]

방금까지만 해도 갤러리 전체를 잠식하고 있던 어두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네. 나타니엘 님.”

키리에가 눈을 깜빡였다. 나타니엘 역시 키리에의 깜빡임에 맞춰, 순하게 그것을 따라 했다.

[왜?]

“아뇨, 방금…….”

[방금?]

나타니엘이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천사처럼 정숙한 얼굴에 걱정이 드리워졌다.

[몸이 안 좋다면 나들이는 취소할까?]

“아뇨! 갈 거예요!”

나긋한 목소리에 키리에가 황급히 상념을 털어 냈다. 그러자 나타니엘이 고상한 동작으로 손을 뻗었다.

키리에가 그 길고 차가운 손을 잡았다. 기묘한 불안감 때문에 심장이 쿵쿵대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모른척했다.

‘깨고 싶지 않아.’

그런 목소리가 속에서 들려왔다.

키리에는 나타니엘과 함께, 인적이 드문 호수 공원으로 나들이를 나섰다.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내내 나타니엘은 영혼이 없는 사람 같았다. 눈이 마주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상냥하게 웃어 주었지만, 왠지 금방 부서질 것 같은 미소였다.

다만 주변에 사람이 지나가면 그는 조금 날이 섰다. 그리고 묘하게도 사람들 역시 그런 것 같았다.

키리에가 뒤를 힐끔거리며 양산을 더 세게 쥐었다.

“나타니엘 님. 혹시 방금 지나간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요?”


[글쎄. 잘 모르겠는걸.]

“제 이름이 들린 것 같은데…….”

[보는 눈이 있나 보지.]

나타니엘은 그렇게 말하며 몹시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호수가 있는 공원에서 키리에는 물수제비를 던지다가, 돌이 몇 번 튀어 오르다 말고 가라앉자 분한 마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잘 안 되네요.”

[요령이 필요하니까.]

“나타니엘 님은 할 수 있나요? 해 보셨어요?”

나타니엘이 조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주 예전에 조금 해 봤지.]

빛나는 수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아스라했다. 키리에가 돌을 내밀었다.

“그럼 던져 주세요. 숙녀의 부탁을 거절하진 않으시겠죠?”

나타니엘은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돌을 건네받았다. 키리에가 힘주어 말했다.

“힘껏 던져요!”

[힘껏.]

나타니엘이 중얼거리더니, 성의 없이 돌을 던졌다. 동시에 엄청난 소리가 나더니 호숫물이 터져 나갔다.

“아?”

[아.]

나타니엘의 짧은 침음성이 뒤늦게 들렸다.

키리에가 쫄딱 젖을 것을 예상하고 몸을 움츠린 순간이었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나타니엘이 그녀의 앞에 서서 망토를 덮어 주고 있었다.

[젖은 곳은?]

물방울이 나타니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검은 머리카락은 물에 젖자 좀 더 퇴폐적인 느낌을 주었다.

홀린 듯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키리에는, 뒤늦게 나타니엘 역시 물끄러미 자신을 보고 있음을 눈치챘다.

새파란 눈이 까닭 모르게 깊고 서글퍼, 키리에는 시선을 피해 버렸다.

“호숫물…… 더러울 텐데.”

[다행히 묻진 않은 것 같구나.]
“제 얘기가 아니었어요.”

[넌 너보다 남 걱정을 먼저 하니, 내가 네 걱정을 하는 수밖에.]

나타니엘은 약간 끌어안는 듯한 동작으로 팔을 당겼다가, 이내 망토를 풀었다. 그가 팔을 휙 털자 망토가


사라지고 젖었던 옷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에게서는 다시 햇빛에 말린 뒤 향을 입힌 고급
옷감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키리에는 물끄러미 나타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좀 이상하시네요.”

나타니엘이 멈칫했으나, 이내 다시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늘만 그런 건 아니었지.]

“하지만 어제는 아주…….”

다정했는데. 키리에가 말끝을 흐렸다. 숨긴 말을 눈치챈 나타니엘이 갸름한 눈을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신경 쓰이게 했구나. 주의할게.]

“그런 게 아니라, 혹시 고민이라도 있으신가 해서요.”

[그럴 리가.]

매끄러운 대답이었다. 키리에는 가만히 나타니엘을 응시하다, 툭 던지듯 물었다.

“그럼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계세요?”

나타니엘이 멈칫했다. 그러더니 그린 듯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그뿐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공원 가장자리에 피크닉용 나무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인들이 자리를 정돈하고 간단한 요깃거리를 차려줄 때까지도 나타니엘은 침묵했다. 이 주제를 모른
척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품위 있는 귀족이라면 넘어가야 마땅하지만, 키리에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저는 도움이 안 될까요?”

[그렇진 않아.]

나타니엘이 미리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차분히 대답했다.

[그저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뿐이야.]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있어도 하지 않는 게 그 애한텐 좋을 거야. 내 행동은 대체로 너희가 보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모양이니까.]

‘그 애’. 의외의 낱말에 키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인인가요?”
그녀의 질문에 나타니엘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아니. 안타깝게도.]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군요?”

[그건…….]

나타니엘이 멈칫하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맞아.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아.”

어른 남성에게서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정직한 고백에 키리에는 약간 놀랐다. 그녀는 자신이


조금 더 성숙해 보이길 바라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음……. 어떤 분이에요?”

[예뻐.]

또 지나치게 정직하다. 나타니엘은 정말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했다. 괜히 키리에의


뺨이 홧홧해졌다.

“미인인가 봐요.”

[말은 안 했지만, 내가 본 사람 중 제일 예쁘지.]

“그런 건 말해야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 애도 거울은 볼 테니 말 안 해도 알 거란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맹목적인 사고방식이었다. 키리에가 겸연쩍게 나타니엘이 건네는 차가운 수프를 받아
들었다.

“싸우신 거죠?”

[그건 아니야. 내가 일방적으로 잘못한 거니까.]

키리에가 의외란 얼굴로 수저를 들었다.

“엄청 크게 잘못하셨나 봐요. 미안하다고 했는데도 안 받아 줄 정도면.”

수프를 삼키던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얼굴에서 어슴푸레 놀란 기색을 읽어 냈다. 잠자코 그녀의 말을
계시처럼 기다리는 나타니엘을 향해, 키리에가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미안하다고 안 하셨나요?”

얼마나 안하무인으로 살아온 걸까. 그런 생각이 드러났는지, 나타니엘이 망설이다 답했다.

[돈을 줬어.]

“멍청…… 죄송합니다.”

키리에가 급하게 입을 가렸다. 나타니엘은 불쾌한 기색이라곤 없었다.


[신경 쓰지 말렴.]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돈은 왜 주신 거예요?”

[보통 사람들은 말뿐인 사과보다는 확실한 것을 좋아하니까.]

“주변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으레 그렇잖니. 문학, 음악, 역사…….]

키리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마치 사람들과 부대껴 산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아니면 너무 지위가 높아서 주변에 그런 거머리 같은 사람들밖에 없거나.

“그건 다 가짜잖아요.”

말하고 나서 키리에는 깨달았다. 자신의 말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타니엘의 심장을 찔렀다는 것을.

나타니엘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감길 듯 가늘게 인상 쓴 눈에서는 한겨울밤, 혼자 있을 때나 겪을


법한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한참을 말이 없던 나타니엘은 이내 온화하고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가진 게 하나밖에 없으면 그게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는 법이거든.]

반박도 분노도 없었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는 마치 어떻게든 거지들 사이에 끼려고 몸부림치는
왕자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왕자는 거지가 될 수 없는 법이었다.

키리에가 멍하니 그를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외로우세요?”

나타니엘이 맑은 파랑의 눈을 깜빡였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호수가 언 것처럼 투명한 시선이었다.

[넌 늘 내게 그런 걸 묻는구나.]

“늘……이요?”

키리에가 반문했으나 나타니엘은 더는 대답하지 않고 푸딩이 담긴 그릇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조용한 식사를 마치고, 키리에는 에스코트를 위해 자세를 잡은 나타니엘을 향해 말했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해야 해요.”

나타니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키리에가 거듭 힘주어 말했다.

“미안하다고 말해 주세요. 정말 그렇게 소중하다면요.”

나타니엘의 표정이 멍해졌다. 물에 젖은 하늘 같은 눈이 천진하게 삼박거리는 보라색 눈과 마주쳤다가,


서글픈 빛을 띠었다.

[받아 줄까?]

“받아 주지 않아도, 계속 사과하는 수밖에 없어요.”


[받아 주지 않으면?]

“다시 미안하다고 해요.”

[그래도 받아 주지 않으면?]

“그래도 미안하다고 해야 해요.”

[그러면 받아 줄까?]

키리에가 당황으로 말을 흐렸다.

“글쎄요, 그렇게 바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러면 받아 줄까?]

“뭐랄까, 제 생각엔, 음…….”

키리에는 눈앞의 아름다운 남자가 긴장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을 다문 채 사슴 같은 눈을 깜빡이는


나타니엘은 몹시도 정결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마치 성서의 예언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아지경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파란 눈에서 간절한 광기가 깜박깜박하고 점멸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까, 저는…….”

[너라면 받아 주겠니?]

“그게…….”

머리가 아파져 왔다. 대충 둘러댈 수 있는 말인데도 키리에의 입술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나타니엘의 눈은 점점 빛을 잃어 갔다. 결국 키리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믿어 보세요, 진심이 전해지기를.”

***

저택에 돌아가니 올드시우다드와 포트듀케인에서 사람이 찾아와 있었다. 마리아와 라우라가 키리에를 위해
보낸 의원들이었다.

“내가 아프다고?”

키리에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의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찰을 받아 보시지요. 의례적인 것이니 너무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례적인 진찰인데 며칠 동안이나 방 안에 있어야 한다고?”


“치료를 위해 불가피한 일입니다, 뷰캐넌 님.”

“난 내가 아픈 것 같지 않은데.”

낯선 이들 때문인지 키리에는 움찔거리며 나타니엘의 등 뒤로 숨었다. 그러자 다친 발가락 탓에 거동이


불편한 세자르가 삐뚤어진 자세를 하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키리에, 각하께…….”

[뷰캐넌.]

나타니엘이 낮게 세자르의 이름을 불렀다. 세자르가 헛기침했다.

“……각하께 인사드리고, 진료를 받거라. 이 아비도 기다리고 있으마.”

“…….”

키리에가 대답이 없자 세자르가 작게 혀를 찼다.

“잘하고 돌아오면 잘 때 책을 읽어 주마.”

키리에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곧 꽃봉오리보다 고운 미소를 지으며 나타니엘 앞에 섰다.

“제가 진찰받고 와서도 계속 계시나요?”

키리에가 물었다. 나타니엘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계속 있을 거야.]

“아! 다행이에요.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직 많거든요.”

키리에가 방긋 웃더니, 나타니엘에게 귓속말했다.

“다음엔 그분이 좋아하는 게 뭘지 생각해 봐요. 저도 같이 고민해 볼게요. 화해하시면 좋겠어요.”

나타니엘은 이를 악문 다음, 가까스로 미소를 보였다.

[다녀오렴.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너는…….]

“누군가의 세계가 될 거야?”

키리에가 활짝 웃더니, 다시 나타니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왕이면 나타니엘 님처럼 상냥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키리에가 방으로 들어가고, 안네마리가 의원들을 따라 들어갔다. 당연하지만 나타니엘은 그들의 ‘치료’
에 끼지 못했다.

그는 키리에의 침실 옆방에서 사흘을 내리 기다렸다. 사흘 내내 비가 내렸고, 사흘 내내 키리에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제발…… 제발 날 내버려 둬! 미안해, 아론! 아론! 아아아아! 아아아!”

비명이 들리지 않는 날에는 흐느낌이 들렸다. 나타니엘은 어느 쪽이 나은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똑같이 두려웠다.
나흘째 되는 날, 의원 한 명이 복도로 나와 나타니엘을 찾았다.

“성공은 했습니다만…….”

[문제라도 있나?]

“우울증과 무기력증이 심합니다.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탓에 일부 기억도 손상되었고요.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라서, 종종 전처럼 분별 능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의원의 말이 마치 별세계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나타니엘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뒤, 키리에의 방으로
향했다.

비구름 탓에 방 안은 어둑어둑했다. 키리에는 침대 위에 시든 목련처럼 누워 있었다.

[키리에.]

나타니엘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키리에의 고개가 어둠 속에서 움찔거렸다.

정적은 꽤 오래 갔다. 그녀는 한참 뒤에야 너무 비명을 지른 탓에 쉬어버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타니엘…….”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타니엘은 잠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동안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만이


울렸다.

[……키리에.]

그가 다시 말했다. 한 걸음 더 다가가자 키리에의 모습이 확실히 보였다.

죽어 가는 꽃 같았다.

퀭한 눈에는 미소의 흔적도 없었다. 그녀는 산 채로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평온하고 처절했다.

당연하게도 나타니엘은 처음 만났을 때의 키리에 뷰캐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그와 떠들고, 이야기하고, 그에게 화내고, 제 목숨을 걸고서 손을 내밀었던 키리에 뷰캐넌을 떠올렸다.

지나고 나서야 봄인 줄을 알았다.

[……내가.]

나타니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키리에가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썩은 포도 같은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나타니엘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는 내려앉은 심장을 쥐어짜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할 말은 너무나도 많은데, 눈앞의 여자는 그의 숨결 하나로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내가, 네게, 너무…….]

나타니엘이 미간을 좁히고 주먹을 쥐었다. 호흡이 어려웠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그걸로 모든 게 해결되진 않겠지만, 키리에 뷰캐넌이 내놓은 답이니 그것은
분명 정답일 텐데.
하지만 지은 죄와 해야 할 사죄에 비해 목구멍은 턱없이 좁았고, 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키리에는 이미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듯했다.

“……나타니엘.”

그녀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너무 늦었어요…….”

키리에는 한참을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 없이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렀다.


나타니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반응하는 것조차 지치고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결국 움직여야만
했다.

‘저택의 관리……. 사용인들에게 줄 보상. 추천장이 필요하면 써줘야 하고, 입을 단속해야 하고, 주변에
소문이 어떻게 나 있는지 파악해야 하고…….’

차라리 질식하고 싶었지만 정말로 질식해 죽지 않는 한 움직여야 했다. 키리에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 줘요. 피곤하네요.”

그녀는 일부러 나타니엘의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았다. 더는 그로 인해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나타니엘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키리에.]

지독히 낮게 잠긴 목소리였다. 키리에는 그를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네마리. 들어오렴.”

귀가 밝은 안네마리가 키리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안네마리가 문틈 사이에서


울먹거리고 있었다.

“아가씨…….”

“……이리 와.”

안네마리가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흰 앞치마를 쥔 채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키리에는 그런 안네마리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내가 널 잊어서 서운했겠구나.”

“흐윽, 흐잉……!”

안네마리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훌쩍였다. 키리에가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내가 많이 힘들어서 그랬어……. 이제 괜찮아.”

“아가씨한테 영영 잊힐까 봐 안네마리는 너무 무서웠어요…….”

안네마리의 말에 키리에는 대답 없이 그녀의 작은 등만 토닥였다.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의 키리에는 안네마리의 감정을 제대로 토닥여 줄 여력이 없었다. 정신이 말린
포플러 꽃처럼 버석버석했다. 죽고 싶지만 죽을 의욕마저 없었다. 누군가 고통 없이 죽여 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반복되었다.

키리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안네마리를 끌어안았다가, 포옹을 풀 때쯤 다시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나타니엘은 아주 지친 눈으로 바라보았다.

“씻어야겠어.”

우는 걸 그친 안네마리가 곧 해사하게 웃었다.

“크응, 네!”

“단장이 끝나면 아버지에게 갈 거고, 이후엔 저택 수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봐야겠어. 영지에 보낸
공문에 회신이 왔을 테니 가져다주고.”

“일하시게요?”

키리에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지.”

애가 탄 안네마리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뭐라 말할 찰나, 나타니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며칠이라도 좋으니 쉴 순 없니?]

잠깐의 정적 이후, 키리에가 살며시 안네마리의 어깨를 밀었다.

“나가 봐.”

“……네.”

안네마리가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며 방을 나갔다.

[키리에.]

재차 부르는 소리를 키리에는 무시했다. 그녀가 잠옷의 앞부분 단추를 하나 풀자마자, 큰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의원이 네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더구나.]

키리에가 손을 뿌리쳤다. 나타니엘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부탁이니 내가 나가거든 해.]

그 말에 키리에가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나타니엘을 보았다. 그가 이토록 걱정 가득한 눈을 한 것은 처음


보았다. 타고난 오만 탓인지 볼썽사납다는 느낌은 없었다. 땅바닥에 이마를 대고 빌더라도 그는 망국의
왕처럼 고고할 것이다. 결국 바닥을 뒹구는 건 그녀뿐이다.

키리에는 피식 웃으려고 했으나, 뺨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가 무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내가 정신이 나갔을 때 한번 자지 그랬어요.”

[뭐?]

나타니엘은 잠깐 자기가 뭘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뒤늦게 그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내가 그런 짓이나 할 사람으로 보였니?]

“키스했잖아요. 내게 성욕을 느끼는 줄 알았어요. 쌍방 편하게 내가 미쳐 있을 때 한 번 하고 끝내지


그랬어요.”

적나라한 단어에 나타니엘이 멈칫했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손을 쳐냈다. 건조하고 황폐한 시선이 방
여기저기를 의미 없이 훑었다.

“아니…… 애초에 목적이 그거였다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자는 게 귀족에게


뭐 그리 어렵다고.”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말이 이어지는 내내 입을 살짝 벌린 채 들썩이다가, 끝에 가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저 투명하고 아름답기만 하던 파란 눈이 차례로 슬픔과 절망에 젖어 들어갔다.

그는 한참 뒤에 쥐어짜듯이 한마디 했다.

[……절대 그런 목적이 아니었어.]

키리에가 지긋이 나타니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냉소적인 어조로 물었다.

“나와 자고 싶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나요.”

나타니엘의 눈이 약간 커졌다. 맑은 파랑의 홍채 사이에서 동공이 심장 박동에 맞춰 떨리는 것이 보였다.

[…….]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키리에가 예상했던 대로.

“대답이 없네요.”

그녀가 시선을 내리깔며 무심히 말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이건, 내게 뭘 원하건…… 이젠 마음대로 해요. 난 내 할 일을 할 거고……


그뿐이에요.”

그녀가 몸을 돌리자마자 다시 나타니엘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키리에 뷰캐넌. 이제 막 병상에서 일어난 자가…….]

키리에가 인상을 쓰며 손으로 귀를 덮었다. 나타니엘이 어슴푸레한 조바심을 비추며 이어 말했다.

[네 부모가 네게 과하게…….]

“거기까지!”

그 순간, 지금까지 사념이 모두 풍화된 것처럼 황폐해져 있던 키리에의 목소리가 대번에 서늘해졌다.

“내 부모가 왜요. 내 어린 시절이 왜요? 동정이라도 하고 싶으신가요?”

보라색 눈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노골적인 공격성을 띠었다. 그녀가 죽음 앞에서도 숨겼던 모습이었다.

달의 뒷면.

나타니엘이 그런 단어를 떠올리며 동작을 멈췄다.


“남이 숨기고 있는 걸 엿봐서 재미 좋았나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키리에 뷰캐넌에게 살갑게 대해
주면, 뭔가가 바뀔 것 같았어요?”

[그런 의도로 너를 그렇게 대한 게 아니었어.]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당신 눈에 아직도 내가 고작 사랑이나 받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어린애가 아니라는


뜻일 테니까.”

키리에의 혀에 처음으로 상대를 상처 주기 위한 독이 담겼다.

[내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너도 알잖니.]

나타니엘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문장은 매끄럽고 목소리는 감미로웠지만, 그의 표정은 한 번도 남에게


자신의 감정을 설명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긴장이 드러나 있었다.

[네가 어떤 사람이든 내겐 중요하지 않아. 설령 네가 정말로 그렇다 해도 너는 내…….]

키리에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채 가려지지 않은 설움은 목소리를 타고 흘렀다.

“내가 당신의 세계다? 그 세계가 내게 준 게 뭔데요. 더 많은 짐, 더 많은 책임, 더 많은 말, 더 많은


소문, 더 많은 역할!”

키리에가 거칠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동공이 점점 풀리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었는데…… 도망치고 싶었는데! 당신이 날 다시 여기로 데려다 놨잖아요! 이 지옥으로!”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나타니엘이 초조하게 굳은 얼굴로 손을 뻗었다. 진정시켜야 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키리에의 정신이 더


이상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키리에. 난 이제 네게 뭐가 좋은지 알 수 없어서…….]

“거짓말!”

키리에가 거친 숨을 내쉬며 크게 외쳤다.

“돌아오기 싫었어요! 잊고 싶다고요! 전부 지긋지긋해요! 남들 앞에서 멀쩡한 척해야 하는 것도, 남의


말에 상처받지 않은 척하는 것도, 전부! 당신에게서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것도 싫고, 그걸 할 수 있는
게 나뿐인 것도 싫고, 그러면서도 거기에 목매는 나 자신이 가장 싫어요!”

산천초목이 떠나가라 내뱉는 절규에 나타니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키리에는 길게 비명을


내지르더니, 허공을 향해 살차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보라색 눈이 젖어 들었다. 그녀는 떨리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하지만 결국 그게 아니면 난 아무 의미가…….”

“저, 저기……!”

그 순간, 문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순 키리에의 얼굴에 공포가 떠올랐고, 나타니엘은 그를


보자마자 몸으로 키리에를 가렸다. 그가 키리에를 등 뒤에 숨긴 채 고개를 돌리자, 하녀 리모가 불안한
눈으로 문지방에 서 있었다.
“저, 죄송합니다, 아가씨……. 프, 프로노이아에서 손님이 오셨어요…….”

***

키리에가 응접실로 나갔다. 오십은 넘고 백은 안 되는 학자들이 응접실을 꽉 채운 채 앉아 있었다. 집사


에른스트가 의자를 내어 주기 위해 몹시 고생했을 것이 훤히 보였다.

키리에가 그중 가장 반가운 이에게 다가갔다.

“포 박사, 호크송 박사.”

“호, 아가씨!”

수도라고 한껏 멋을 부린 모양인지 앞면은 회색, 뒷면은 자주색인 새틴 조끼를 입은 살라미시 포 박사가


새된 소리를 지르며 키리에에게 달려들려다, 뒤에 있는 나타니엘을 보고 자리에서 멈췄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였다.

“너무 오랜만에 뵙지용? 이 포는 오늘이 너무 기대되어서 밤잠을 설쳤답니다……만.”

포 박사의 얼굴이 흐려졌다.

“……무슨 일이 있으시군용.”

“그리 오랜만은 아니지만 그렇게 느껴지네. 자네도 반가워.”

키리에는 일부러 포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옆에 있는 마가렛 호크송 박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호크송


박사가 안경 밑의 눈을 엄격하게 빛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잘 지내시길 바랐는데, 역시 삶이 그리 쉽지는 않은 법이겠지요.”

“……잠깐 사고가 있었을 뿐이야.”

키리에가 어떻게든 미소 지으며 주제를 넘겼다. 호크송 박사는 다시 한번 안경 너머의 눈을 빛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키리에는 좌중을 한번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웬일이야?”

전부 마법사로 구성된 평균 연령 65 세의 무리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그 사이에서


호크송 박사가 한 걸음 나섰다.

“전에 주신 소개장 일도 있고, 저희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만…….”

그녀가 키리에 뒤쪽의 나타니엘을 한 번 흘끗거렸다.

“영주님이 부르신 건 아닌 모양이군요.”


“아…….”

키리에가 작게 피곤 섞인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에 나타니엘의 시선이 흔들린 것을 그녀는 보지 못했다.

“그래……. 착오가 있었더라도 손님을 내칠 수는 없지. 어서 와. 저택은 지금 수리 중이라 모두를


수용하긴 어려우니 숙소를 잡아 줄게.”

“저희야 감사합니다만.”

호크송 박사가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학자들은 연륜이 있는 만큼 서로 수염 길이를 자랑하며 소란을 피워
주었다.

“……수도에 안 좋은 소문이 많이 떠다니던데요. 괜찮으십니까?”

“아……. 소문.”

키리에가 손으로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짚이는 것이 너무 많아서 특정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뭐든 간에 그녀가 할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 하는 것. 그녀는 없어도


있는 것처럼. 있다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굴어야 하므로.

“괜찮아.”

[키리에.]

뒤에서 나타니엘이 나섰다. 그는 다른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오롯이 키리에만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사흘만이라도 좋으니 제발 쉬어.]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 나타니엘의 목소리가 들리자 숨을 죽였다.

키리에는 어금니를 깨물고서 그를 무시했다. 그녀가 집사 에른스트를 불렀다.

“에른스트. 손님들께 적당한 숙소를 찾아 줘.”

에른스트는 약간 곤란한 얼굴이었다.

“그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보다,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아버지가?”

“저택의 수리와 앞으로의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갈게.”

“아가씨 앞으로 휘하 영주들의 서신도 쌓여 있습니다만…….”

“전부 갖고 와. 쓸데없이 누워 있느라 시간만 허비했어.”

“하녀를 시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후계자 교육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은 어려울 테니 내일부터 재개하도록 하지. 왕가의 동향에 대해서도 며칠간의 정보를 가져다주고.”
“그리하겠습니다.”

[키리에.]

“호크송 박사, 포 박사. 일단 에른스트를 따라가. 나중에 다시 연락하지.”

키리에가 깊고 복잡한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나타니엘을 무시한 채 앞으로 나섰다.

“수도를 소개해 주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이해해 주길 바라.”

그렇게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는 마법사들을 상대하고, 하녀에게 서류를 건네받으며 정신없이
걷다 보니 나타니엘은 어느샌가 그녀를 따라오지 않았다.

키리에는 복도에서 걸음을 멈추고 창밖을 보았다. 봄비라 하기엔 사나운 빗줄기가 시야에 가득하였다.
빗소리에 맞춰 약간 달떠 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누군가는 네가 노력하든, 노력하지 않든,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너를 사랑해 줄 거야.]

그리 말하던 나타니엘의 푸른 눈 역시, 도무지 뇌리에서 떨쳐지지 않았다. 꿈 같은, 거짓 같은, 그렇기에
심장을 파고드는 말과 떨리던 눈.

하지만 그녀는 이제 아이가 아니다. 노력한다고 상응하는 대가가 돌아올 리 없다는 걸 안다. 음울한 눈의
키리에가 냉연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일은 없다. 절대.

***

키리에는 옹기종기 모인 마법사들을 이끌고 뷰캐넌 저택을 나섰다. 호위는 기사 발디르를 비롯한 뷰캐넌의
사병들이 맡았다. 나타니엘은 쫓아오지 않았지만, 키리에는 차라리 자기 머리 위에 유성이 내리꽂히길
바랐으므로 신경 쓰지 않았다.

프로노이아에서 온 마법사들은 간만의 수도를 신기해하며 숙소를 찾아 들어갔다.

‘약속한 게 있으니 레쇼 경과 한 번쯤 만나게 해 줘야겠네.’

키리에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숨을 돌릴 때였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수염에 마가렛 꽃을 꽂은 마법사


한 명이 다가왔다.

“그런데 영주님. 저건 괜찮은 겁니까?”

“저거?”

“저쪽 방향 말입니다.”

마법사가 하늘의 한 귀퉁이를 눈짓했다. 키리에가 생기 없이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

“아이구, 우리 영주님은 마력이 없으시던가?”

마법사가 수염을 쓸어내렸다.

“저 방향에 뭐가 있습니까, 영주님?”

키리에가 수도의 지도를 떠올렸다. 그녀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쪽은 보통의 시가지야. 특별히 큰 건물은 없어.”

“그렇습니까……. 그 너머는요?”

“너머는 평민들이 사는 하성구가 있지.”

“그 너머는 성벽이겠군요. 아렐라노를 넘어가면 뭐가 있습니까?”

마법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키리에가 차분히 답했다.

“포베 곶. 트레베레움과 가장 근접한 바다야.”

“흠.”

마법사가 다시 수염을 쓸었다.

“특별한 것은 없는 듯한데…….”

“대체 무슨 일인데?”

“저 방향으로부터 강력한 마력이 느껴져서 말입니다.”

“마력?”

키리에는 수도에 돌아왔을 때 나타니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혹시 왕궁과 착각한 건 아닌가?”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왕궁 셀은, 허허, 다른 뭔가로 오해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보호 마법이 걸려


있군요.”

아마 인간은…… 하고 마법사가 수염 대신 마가렛 꽃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수도가 혼란하다 하더니 진짜였군요. 예사로운 힘이 아닙니다. 혹시 전설경이 저희를 부른 이유가


저것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뭐?”

뜻밖의 말에 키리에가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사가 반달 모양의 안경을 조금 내리고서 눈을


빛냈다.
“아닙니까? 영주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마법사 부대 하나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그건 봤으니 잘 알지. 하지만.”

키리에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나타니엘이야.”

당사자가 이르되 세상의 모든 악독. 호국경 로르 레쇼조차 두려워하는 겨울의 왕.

그런 나타니엘이 뭔가를 ‘막기 위해서’ 사람들을 부른다? 말도 안 된다. 그는 그런 자가 아니다.

키리에가 한숨을 삼켰다.

“……오히려 자네들을 미끼로 쓰려고 불렀을 확률이 높아. 전설경이 뭔가를 요구하거든 내 이름을 대고
피해. 그가 자네들한테 득 될 일을 할 리 없으니까.”

마법사가 아이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습니까…….”

“되도록 숙소 밖으로는 나가지 말고. 수도의 분위기가 흉흉해.”

늙은 마법사는 자상한 눈으로 키리에를 보았다.

“그러겠습니다. 책상물림만 하고 산 노인네들이지만,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부르십시오.”

“손님인데 그럴 수야 없지.”

“손님이 아니라 영주님의 병사들입니다.”

“그땐 프로노이아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지. 하지만 자네들을 전쟁에 끌어들일 마음은 없네.”

키리에의 단호한 말에 마법사가 일순 복잡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영주님 어깨에는 짐이 참 많은 모양입니다.”

그는 이마에 깊은 주름이 지도록 눈썹을 들썩이더니, 수염에서 흰 마가렛 꽃을 한 송이 빼내 키리에에게


건네주었다. 키리에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버렸다. 아주 잠깐, 자카란다 꽃을 내밀던 희고 고운 손이
키리에의 뇌리를 스쳤다.

“그걸 덜어 줄 사람이 영주님께 나타나길…….”

노인이 그렇게 말한 뒤 숙소로 들어갔다.

키리에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한 손에는 꽃을 든 채 마차에 올랐다. 그녀는 머뭇거리다 안네마리에게
꽃을 건넸다.

“보관해 줄래?”

“말려서 압화로 만들까요?”

“응.”
안네마리가 방긋 웃었다.

마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키리에가 생각에 잠겼다. 노인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 짐. 내 책임…….’

정신이 온전치 못했을 때의 기억은 또렷하지 않다. 대체로 오래된 그림을 보는 것처럼 흐릿했다. 그래도
머리를 쓰다듬던 세자르와 제냐의 손길만은 선명했다.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해야 찾아오는 따뜻한 말, 다정한 손길. 그녀의 어린 시절, 그 무엇보다 간절히
바랐던 것이었다.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고, 나이에 맞지 않게 손이 가지 않는 어린아이. 그게 그 시절 키리에의


역할이었다.

그녀에게 타인의 애정이란 상점에 진열된 물건과 같아서, 그걸 사기 위해선 상응하는 성과가 필요했다.

그게 나쁜 건 아니었다. 언제부턴가는 체념하게 되었지만,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좀 더 일찍


깨닫게 해 주었으니까.

뷰캐넌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며, 없어도 있는 것처럼. 있다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도망칠 곳은 없다. 도망칠 수도 없다. 그런 세계에 태어났다. 아마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키리에가 눈을 감아 버렸을 때였다.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아가씨!”

“발디르 경?”

키리에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마차 밖에서 발디르가 말을 달리며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뭐?”

그녀가 반문하자마자 마차 문이 뜯겨 나갔다.

〔키리에 뷰캐넌.〕

순식간에 레쇼가 마차 옆에 매달린 모습으로 나타났다. 너무 의외의 인물에 키리에는 놀라는 것도 잊었다.

〔습격입니다.〕

레쇼가 바람을 맞으며 말했다. 그가 앞을 보았다.

〔꼬마. 신호하면 키리에 뷰캐넌을 데리고 마차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그새 레쇼와 키리에를 가로막고 있던 안네마리가 키리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안네마리를 잡으세요!”

키리에가 엉겁결에 안네마리를 끌어안은 순간,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지금입니다.〕

키리에와 안네마리가 하늘을 날았고, 검은 용의 날개 같은 큰 궤적이 펼쳐졌다가 사라졌고, 마차가


터졌다.

“콜록, 콜록……!”

마차가 터지면서 날린 연기에 키리에가 기침했다. 안네마리가 다시 그녀를 등지고 섰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괜찮아……. 그보다 어떻게 시가지에서……!”

〔그만큼 급했을 겁니다. 나타니엘이 자리를 비우는 일은 자주 있지 않으니까.〕

‘자리를 비웠다고?’

키리에가 고개를 들자 레쇼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손에는 일전에 보았던, 몽둥이처럼 넓적한 검이
들려 있었다.

그는 검은 옷의 사람들과 대치 중이었다. 귀족들의 타운 하우스가 몰려 있는 탓에 인적은 드물었고,


사람이 있대도 이런 상황이라면 숨을 게 분명했다.

〔당신을 데려가고 싶은 모양입니다. 가고 싶습니까?〕

레쇼의 무심한 질문에 키리에가 미간을 좁혔다.

“아뇨.”

〔그럼 막겠습니다.〕

레쇼가 다시 앞을 보았다. 습격자들이 진형을 짜는 것이 보였다. 먼 곳에서 마력을 쓸 때 생기는 빛이


보이는 걸 보니, 마법사 역시 대기 중인 모양이었다. 뷰캐넌의 기사들 역시 자리를 잡았다.

그 사이로 레쇼가 몇 걸음 나섰다.

〔번거로우니 물러나라.〕

그의 엄정한 말에 발디르를 비롯한 뷰캐넌의 기사들이 당황했다. 레쇼는 그들을 무시한 채 눈을 가늘게
떴다.

〔나타니엘이 없어서 우습게 보이는 모양인데…….〕

멀베리 색 눈에 떠오른 건 명백한 가소로움이었다.

〔죽이진 않겠습니다.〕

레쇼는 순식간에 습격자들을 정리했다. 정말로 죽이지는 않았다. 팔다리의 관절을 찌른 뒤 던져 버렸을
뿐이다.

키리에는 뒤에서 그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나타니엘의 검술과 닮은 곳이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나타니엘 쪽이 레쇼보다 경지가 높았다.

레쇼의 검이 파괴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방팔방 뻗어 나가는 느낌이라면, 나타니엘의 검은 그 모든


단계를 뛰어넘어 소리 없이 고요하다는 인상이었다. 마치 그 자신처럼.
키리에는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주변을 정돈했다. 폭발 마법 때문에 부상자가 있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다쳤습니까?〕

레쇼가 마지막 습격자를 처리한 뒤 몸을 돌리고 물었다.

“……아뇨.”

거대한 몽둥이 같은 검이 주는 위압감에 키리에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나타니엘이라면 그걸 보자마자 검을


물렸겠지만, 레쇼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사흘 동안은 나타니엘이 있든 없든 내가 주변에 있을 겁니다. 쓸데없는 호위 인력은 뷰캐넌


저택으로 돌리는 게 좋겠습니다.〕

“사흘이요?”

〔사흘입니다.〕

키리에의 눈이 흔들렸다. 묻지 않고 지나가기에는 지나치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어째서요?”

레쇼가 고개를 기울였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겁니다.〕

갑자기 레쇼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친근했던 적조차 없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녀 옆에 있는 사람 중


가장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왜 지금까지 그의 목적이 뭔지 생각해 보지 않았지?’

키리에가 희미한 불안을 삼키며 괜히 팔을 매만졌다.

그동안 기사들이 사고 현장을 정리했다. 키리에는 새 마차가 올 때까지 레쇼와 함께 근처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안네마리가 정찰을 위해 약간 거리를 벌리자, 레쇼가 키리에에게 말을 붙였다.

〔나타니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키리에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 생각 없습니다.”

레쇼의 얼굴에 잠시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 스쳐 갔다.

〔싫지 않습니까.〕

“싫어요.”

〔당사자에게 말해 주십시오.〕

키리에는 잠시 고개를 들어 레쇼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타니엘이 소중한 거 아니었나요?”


레쇼도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체리 색 눈이 일순 아주 깊고 맑아졌다.

〔고작 그런 단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렇습니다.〕

키리에가 멈칫한 뒤, 고개를 돌렸다. 나타니엘 역시 말로는 잘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타니엘을 용서하라고는 하지 않네요.”

키리에의 말에 레쇼가 고개를 저었다.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별로 그걸 바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이 나락 끝까지 나타니엘을


밀어 넣어도 상관없습니다.〕

“네?”

키리에가 약간 놀라 레쇼를 보았을 때, 그는 어느새 다시 정면을 보고 있었다. 허리춤에 거대한 검을 찬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선 그의 모습은 어딘지 사막이나 평원의 전사들을 떠올리게 했다.

〔나타니엘은 되도록 무엇에도 정 붙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는 죽지 않으므로, 무언가를 잃지


않는다는 게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레쇼가 잠시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게다가 그것에 무뎌지지도 않습니다.〕

“……어째서요?”

키리에가 망설이다 물었다.

〔그는 그냥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새가 날개를,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달고 태어나듯이.〕

레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먹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레쇼는 무심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괴로운 일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물론 지금의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다시 천둥이 쳤다. 엄청난 소리였다. 꼭 레쇼의 말을 가로막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저 멀리서


안네마리가 불안한 눈으로 이쪽을 흘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레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서 사실 나는…….〕

멀베리 색의 말간 눈동자에 깊은 회한이 묻어났다. 언젠가 나타니엘에게서도 본 적이 있는 천진하고 설운


눈이었다.

〔슬픕니다. 나타니엘이 언젠가 죽어 버릴 당신을 그토록 아끼는 게.〕

***
그 날, 나타니엘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엔 뷰캐넌 저택에 국왕의 병사들이 찾아왔고, 레쇼가
물리쳤다.

나타니엘이 돌아온 건 이틀 뒤 밤이었다.

새벽까지 뒤척이다 겨우 잠든 키리에는 바깥의 인기척에 어렴풋한 잠에서 깼다. 방문 틈으로 들어오는
불빛에 사람 그림자가 졌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이 몹시 지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침실에 딸린 응접실에서 호위 중이던 레쇼가 답했다.

〔오레윈브리지의 습격이 몇 번 있었지만 무사하다.〕

‘몇 번’이라는 단어에 키리에가 움찔했다. 키리에의 기억에는 한 번뿐이었으니,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레쇼가 처리한 모양이었다.

〔그보다 오래 걸렸군.〕

[그래……. 내 방식은 아니니까.]

나타니엘이 들릴락 말락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피로가 소리가 되어 들리는 듯했다.

[살면서 시간이 없다고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게 보통 사람들의 속도라면 그토록 참을성이


없는 것도 이해가 가네.]

〔모레인가?〕

[그래.]

〔오레윈브리지는…….〕

그 뒤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더 작아져서 잘 들리지 않았다.

몇 마디의 대화가 더 이어진 뒤, 침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두꺼운 카펫을 밟는 발소리가 났다.
키리에가 재빨리 다시 자는 척했다.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누운 침대로 다가왔다. 그리고 옆에 서서 한참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딜 다녀온 걸까. 키리에는 자꾸 그에 대해 생각하려는 자신을 멈추었다.

키리에가 불편한 마음에 몸을 조금 뒤척였다. 그러자 나타니엘이 가늘게 한숨을 짓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잘 자렴.]

그리고 평소와 달리, 이마가 아니라 키리에가 덮은 이불의 끝을 톡톡 두드린 뒤 방을 나섰다.


***

잠에서 깨어났을 땐, 당연하다는 듯이 나타니엘이 곁에 있었다. 그는 상쾌할 정도로 가뿐하게 미소


지었다. 지난밤에 보였던 피로감이 마치 거짓말 같았다.

[일어났구나. 씻고 식사를 하지. 날이 맑아. 오늘은 나들이를 가도 좋겠어.]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타니엘은 심지어 키리에와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그는 시선이 조금이라도 마주칠 때마다 사붓이
미소를 지었다.

[키리에. 오늘 일정은?]

괜히 친근하게 구는 그의 태도에 속이 불편했다. 레쇼의 말이 아직 기억에 남아 있어서 더더욱.

키리에가 나지막이 한숨 쉬었다. 나타니엘의 미소가 아주 잠깐 흔들렸으나, 그는 바로 표정을 부드럽게


정돈했다.

[프로노이아의 박사들을 만나러 가나? 같이 가지.]

이후 나타니엘은 정말로 키리에의 모든 일정에 따라다녔다. 이전의 나타니엘이 그저 키리에와 동행하는


수준이었다면, 오늘은 그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속눈썹의 떨림 하나까지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거기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여유로운 태도와 나긋한 우아함 탓에, 그는 모든 곳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속이 뒤틀렸다. 그가 빛날수록, 그녀는 조금씩 더 비참해졌다.

오전 업무가 끝나고 오후 업무로 들어가기 직전, 결국 참다못한 키리에가 나타니엘을 빈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키리에?]

등 뒤에서 들리는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에 키리에가 다시 한숨 쉬었다.

“……그만해요.”

나타니엘의 미소가 조금 흐려졌다.

[뭘?]

“무슨 꿍꿍이속인지는 몰라도…… 그만해요, 제발.”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그렇게 웃는 거, 따라다니는 거, 관찰하는 거. 그만하라고요.”

노려볼 힘도 없었다. 키리에가 팔을 늘어뜨린 채 나타니엘을 응시했다. 나타니엘은 멍하니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예의 아름답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안 드니?]

“들 것 같아요?”

고단함이 얼룩진 목소리에 나타니엘이 다시 말을 멈췄다. 미소는 거의 사라졌다. 그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치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보통은 내 이런 모습을 좋아하니까.]

키리에가 헛웃음 쳤다.

“……아뇨, 나타니엘. 당신은 뭔가 착각하고 있어요.”

나타니엘이 눈을 들어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키리에는 그의 눈을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이 뭘 해도 이제 나는 당신이 지긋지긋해요.”

나타니엘의 얼굴에서 완전히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굳었다.

“당신이 날 보고 있으면 두려워요. 도망치고 싶고요. 당신이 말 거는 것도 싫고, 당신이 부르는 내


이름에…… 미쳐 버릴 것 같아요.”

서서히 텅 비어 가는 새파란 눈을 보며 키리에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가 가빠오는 숨을 들이켠 뒤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좀 날 혼자 있게 해 줘요…….”

나타니엘은 아주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뒤, 그가 입꼬리를 움직였다. 어떻게든 미소 짓고 싶은 사람처럼 입매가 움직였지만, 이내 멈췄다.


흔들리는 푸른 눈이 인파 속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떨렸다.

일단 한 번 보면 내칠 수 없는, 발버둥 같은 시선에 키리에는 고개를 돌렸다.

“……먼저 나갈게요.”

그를 지나쳐 나가려던 키리에의 귀에 잔뜩 쉰 목소리 들렸다.

[오늘만.]

키리에가 멈칫했다. 나타니엘이 선 자세 그대로, 약간 고개를 숙인 채 힘겹게 입을 뗐다.

[내 이름을 걸고…… 내 능력 안의 일이라면 뭐든 해 줄 테니, 오늘 하루만.]

“…….”

[……아니, 한 시간 만이라도.]

쥐어짜듯 내뱉은 목소리의 호흡이 거칠었다. 잠시 흠칫한 나타니엘이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정말, 보기만…….]

키리에가 이를 악물었다.

지긋지긋했다. 종말이 다 뭐고 세계 최흉이 다 뭐란 말인가. 지금 그는 열심히 할 테니 쓰다듬어 달라고


애원하던 어릴 적의 키리에 뷰캐넌 같았다. 키리에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싫어요.”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서 방에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나타니엘은 홀로 지옥에 남겨졌다.

키리에가 방에서 나가고, 나타니엘은 한동안 그 자리에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가슴 안쪽이 조용히
불타는 듯했다. 나타니엘은 눈을 감은 채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것은 도통 지나가지를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심장의 무게는 더 선명해졌다. 아마 열두 개로 조각나 피를 타고 흐르는


모양이었다. 이렇게나 온몸이 뜨거운 것을 보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뭔가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나타니엘은 내도록


자리에 서서 그것을 삼켜 냈다.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꿀렁이고, 미간에 들어간 힘은 풀리지 않았다.

녹아내리는 것 같은데, 기이하게도 머리 위쪽은 오히려 안쪽이 꽉 차 터져 나가는 듯했다.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들썩대다 가라앉고, 그러다 다시 뭔가가 치밀어오르는 것이 반복되었다.

그게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라는 걸, 그가 알 턱이 없었다.

나타니엘은 한참 뒤에야 겨우 몇 걸음 거리에 떨어져 있는 소파 위로 무너지듯 앉을 수 있었다.

몸에 힘을 빼면 무슨 행동을 할지 몰라, 그는 양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 작은 신음도 흘리지 않기


위해 단단히 턱을 악물었다.

다행히 키리에가 내뱉은 말이 아직 방 안에 고여 있었다. 그게 나타니엘의 인내심을 가늘게 유지시켰다.

언젠가 비슷한 밤을 보냈던 적이 있다. 키리에가 오레윈브리지에게 납치당했을 때다. 그때도 그는 별로


멀쩡하진 않았지만, 분명 여유는 있었다.

그때의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물론 아주 작고 귀엽지만, 대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릇 모든 일이 그러했다.

전무후무의 천재란 없다. 불세출의 영웅도 없다. 아무리 특별해 보이는 것도, 영원이라는 잣대를 대면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끝도 없는 시간 속에서 정말로 ‘딱 하나’뿐인 존재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나타니엘은 그중 하나였고, 그에 비해 인간은 무수히 많았다.

키리에는 분명 나타니엘의 세계였다. 적어도 이 한 세기는 그럴 터였다. 하지만 과거 그 세계가 얼마나


자주, 쉽게 무너지는지를 깨달은 나타니엘에게 그것이 굳건하리라 믿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믿고, 배신당하고.

믿고, 죽임당하고.

믿고, 외면받고.
그래도 믿고, 믿고, 그리고 또 믿고…….

그러다 그럴 바에야 증오로 무너지지 않을 성을 쌓겠다 마음먹었다. 나타니엘이 실소를 흘렸다. 웃음과
함께 가슴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렸다.

그래도 키리에에게만은 그러지 말 걸 그랬다.

방 안에는 노을이 졌고, 밤이 찾아들었다. 뷰캐넌 저택에 하나둘씩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켜졌다. 레쇼는
나타니엘의 부탁대로 키리에 근처에서 호위 중이었고, 키리에는 평소보다 늦게 잠이 들었다.

나타니엘은 다시 슬퍼졌다. 숨이 막혀 왔다. 키리에가 또 악몽을 꾸면 어떻게 하지? 이제는 악몽을


없애줄 사람이 없다. 누군가 암살자를 보내면? 약해빠진 키리에 뷰캐넌은 팔 하나만 잘려도 픽 죽어 버릴
텐데.

누가 독이라도 먹이면.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 아비가 해코지라도 하면.

하지만 그 모든 걱정에도 그는 결국 키리에의 침실로 향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냉랭한 목소리가 귓가에


고여 소용돌이쳤다.

‘싫어요.’

나타니엘은 그 말을 들을 때 자신이 어땠는지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온몸이 키리에 뷰캐넌의 모든


목소리를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만이 기억났다.

‘당신이 날 보고 있으면 두려워요. 도망치고 싶고요. 당신이 말 거는 것도 싫고, 당신이 부르는 내


이름에 미쳐 버릴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마지막이니까 기왕이면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이다. 마음 약한 키리에 뷰캐넌이라면,


언젠가 ‘내가 심했던 걸까.’ 같은 생각을 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나타니엘이 미소 지을 때마다 그녀는 한숨 쉬었고, 나타니엘은 당황을 숨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나타니엘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가장 슬펐다. 마치 너는


영원히 부외자라는 선고 같았다. 그는 영원히 키리에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타니엘이 천천히 고개를 젖혔다.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럴 거면.

그럴 거면 차라리 고독을 알게 하지나 말지.

타인의 손길이 따뜻하다고 느끼게 하지나 말지.

겨울의 끝에는 봄이 온다는 걸 알려 주지나 말지.

오장육부가 난도질당해 찢기는 것 같은 괴로움이었다.

그래도 밤은 속절없이 흘렀고, 이윽고 마지막 날이 밝았다. 커튼 틈으로 새벽빛이 들었을 때, 나타니엘은
어리석게도 시간을 돌렸다. 태양의 끄트머리가 다시 땅으로 꺼지고, 하늘이 검게 익고, 그마저 지나
무르익은 저녁으로. 그리고 차츰차츰 원래의 시간으로.

그는 수십 번을 그렇게 도망친 끝에야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볼 수 있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는 이제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다.

[……키리에.]

이름 하나에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어째서 갖고 태어났어야 했는지. 그는 영영 모를 것이다.

눈으로 들이치는 햇살에 눈을 감으며, 나타니엘은 채 삼키지 못한 침음을 흘렸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면, 미안하다고 말할 걸 그랬다. 그게 아무리 가치 없고 흔한 말이더라도 말할 걸


그랬다.

‘미안해. 네가 무서워.’

‘나는 네가 두려워……. 그러니까 이건 대의를 위해서야. 이해해 줘.’

‘미안. 넌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미안해도 돌은 던지고, 미안해도 그를 배신하고, 미안해도 죽이려 든다.

정당화에 자기 합리화. 그저 죄책감을 덜기 위한 말. 그까짓 걸 줄 바에야 행동으로, 물질로 보상하는 걸


기뻐하리라 생각했다.

그래도 미안하다고 말할 걸 그랬다.

이미 늦었지만.

나타니엘이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났다기보다 미끄러지는 것에 가까웠다. 이제 그는 인간형의


몸을 움직인다는 자각이 없었다. 키리에가 없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방을 나선 나타니엘은 문 앞에서 안네마리를 마주쳤다. 애꾸눈의 시녀는 가장 먼저 공포와 경악에 질렸다.

“……나, 타니엘, 님.”

시녀가 숨을 헐떡였다. 나타니엘이 뭔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보통의 존재는 그의 본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치거나 죽는다. 시녀도 곧 심장이
멎을 터였다.

하지만 죽으면 키리에가 슬퍼할 것이다.

하얗게 눈을 까뒤집은 시녀를 내려다보던 나타니엘이 몸을 정제했다. 안네마리는 새빨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크헉, 컥, 큭…….”

[할 말이라도?]

안네마리가 두려움과 적의가 섞인 눈으로 나타니엘을 올려다보았다.

“가, 가시나요……?”
[가야지.]

나타니엘이 차분하게 답했다. 그는 키리에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녀에게 달려가 무릎 꿇지 않기 위해


지팡이를 세웠다.

[너도 역할이 있어.]

나타니엘이 잠시 고개를 들어 창 너머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어딘가에 키리에가 살아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니 애틋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알고 있었겠지. 아무리 변변찮아도 세자르 뷰캐넌은 키리에의 친부고, 키리에는 제 아비를 죽인 자를
아낄 수 있을 정도로 융통성 있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안네마리가 허를 찔린 사람처럼 움찔했다. 작은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아, 안네마리는, 아가씨에게 미움받기 싫었어요. 안네마리도 당연히 주인님이 싫고, 없어졌으면
좋겠지만…….”

나타니엘이 사붓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내 몫인 모양이야.]

“……네?”

[너는 세자르 뷰캐넌에게 붙어 있도록. 때가 되었을 때, 그가 만에 하나라도 키리에를 먼저 찾는다면


키리에에게 데려다주렴.]

나타니엘이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목소리가 한 단계 낮아졌다.

[내버려 두고 물러나. 그리고 키리에에겐 내가 죽였다고 전해.]

안네마리의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나타니엘은 말문이 막힌 금발의 시녀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왕궁에 응집된 마력이 깨질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나타니엘이 실소하듯 미소 지었다.

[그런 건 항상 내 몫이거든.]

[둄 2 절갠 교환재공타싸 x]

24. 선택
서류를 보던 키리에의 펜이 멈췄다. 그녀가 잠시 나타니엘을 떠올렸다.

나타니엘이 무너질 것 같이 보인 건 두 번째였다. 처음은 프로노이아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집에서였고,


그때도 그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애처롭게.’

키리에가 펜을 까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레쇼 경이 말한 사흘이 오늘이야. 어째서 사흘이지?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나?’

키리에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도는 변화가 없었다. 저택의 재건도 무사히 진행되고 있었고, 다른
공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프로노이아의 마법사들이 찾아와 “마법이! 마력이! 하지만 영주님을
믿습니다!” 같은 말을 하곤 했지만, 자세히 물어보면 정작 그들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키리에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뭐가 됐든 그녀는 지쳤고, 매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생각이었다. 아마 평생 그렇게 살아야겠지만, 상관없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는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리모가 들어왔다.

“아, 아가씨.”

“무슨 일이야?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하렴.”

키리에가 시선도 옮기지 않고 말했다. 리모가 침을 꿀꺽 삼키고 답했다.

“왕세자빈 저하가…… 찾아오셨어요.”

키리에의 펜이 멈췄다. 종이를 찌른 잉크가 방울방울 흘러내려 검은 점을 키워 갔다. 불안이 꼭 그만큼


마음속에서 번져 나갔다.

“……곧 가겠다고 전해.”

루비니아 오레윈브리지는 온통 검은색 일색이었다. 목 끝, 손끝까지 덮은 검은 드레스가 섬찟한 인상을


주었다. 손바닥만 한 모자에 달린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루비니아가 말했다.

“나랑 가요, 키리에 뷰캐넌 양.”

키리에가 그녀 앞에 마주 앉아 눈을 깜빡였다. 루비니아는 천천히 얼굴을 가린 베일을 걷어 냈다.

“나랑 가요. 당신은 나랑 가야 해.”

키리에는 루비니아의 뺨에 있는 상처를 발견했다. 맞은 자국이었다.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슬퍼졌다. 세상에는 이토록 불행이 가득하다. 사람들의 삶이 이러하니 나타니엘이
신처럼 여겨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왜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그곳에 계시는 건가요, 저하?”

루비니아가 코웃음 쳤다.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내가 볼 땐 당신이 더 답답해. 적어도 나는 내가 원해서 이 자리에 있는


거예요.”
루비니아의 말에 키리에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맞는 말이다. 자신은 죽지 못해 여기 있을
뿐이다.

“국왕 전하가 저를 데려오라고 하던가요.”

“나랑 가요.”

“가지 않으면 저하는 어떻게 되나요?”

“알 바 아니잖아요? 나랑 가요.”

“가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거절인데도 루비니아는 대답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하지만 곧 살쾡이처럼 눈을 치떴다.

“그래서 오늘 추도식을 하기로 했어요.”

“네?”

“죽은 근위병들. 불명예 제대였죠.”

키리에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녀는 다음에 루비니아가 할 말을 예측할 수 있었다.

“오늘 추도식으로 그들을 명예롭게 전사한 것으로 처리할 거예요. 모두 유공자로 대우하고, 국립묘지에
안치할 거고요. 뷰캐넌 가문에서 그동안 금전적인 지원은 해 줬지만, 명예는 왕가만이 줄 수 있죠.”

“하지만, 묘를 파헤쳐서 유골을 버렸다고…….”

“전설경의 명으로 왕가가 실행했죠. 설마 정말 그걸 내다 버렸을 리는 없잖아요? 그렇게 써먹기 좋은


패를.”

키리에가 침묵했다. 루비니아의 눈빛은 무심했다.

“아론 피츠. 그도 명예를 되찾을 거예요.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훈장을 주기로 했어요. 이례적인
일이죠.”

분명히 그렇다. 키리에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 이례적인 일이 당신이 추도식에 참여하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아요.”

“제가 간다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의 명예는 회복시켜 줄게요. 물론 당신이 날 믿는다면 말이지만요.”

키리에가 눈을 감았다.

아론과 멜로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슬픈 것은 이제 키리에가 그들의 죽음에 무뎌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삶의 고난에 감정의 예리함은 나날이 뭉툭해진다. 그러니 더 늦어서는 안 된다.

결국 나타니엘의 말이 맞았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탈출구는 죽음뿐이다.

키리에가 천천히 눈을 떴다.


“……다행이네요. 나와 내 아버지가 동시에 죽었을 때 뷰캐넌 가문을 어떻게 할지 어제 막 문서화해
놨는데.”

루비니아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말을 믿어요?”

“하겠다고 한 건 하는 분이니까요.”

“…….”

루비니아의 녹색 눈이 차분해졌다. 그녀의 속에서 어떤 결단이 내려진 듯했다.

“그래요. 여기까지 왔으니 말하는 거지만, 오면 당신은 죽을지도 몰라요.”

“…….”

“남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겠어요?”

키리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키리에는 느린 걸음으로 복도로 나와, 아무도 없는 작은 정원으로 들어섰다.

“레쇼 경.”

짧게 중얼거리자마자 레쇼가 풀을 밟으며 나타났다. 여전히 거대한 검을 허리춤에 느슨히 찬 모습이었다.

〔나타니엘은 아침에 저택을 떠났습니다.〕

키리에가 멈칫했다. 뉘앙스가 이상했다.

“떠났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녀의 반문에 레쇼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답했다. 아마 그는 영영 제 목적을 밝히지 않을 요량인 것


같았다.

레쇼가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키리에는 침묵 끝에 시선을 피했다.

“그렇군요.”

〔그리고 나는 당신이 뭘 하든 제재하지 않을 겁니다.〕

“뭘 하든요?”

〔예.〕

키리에가 물끄러미 레쇼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키리에는 그에게서
그녀가 루비니아를 따라가기를 바라는 기색을 읽어 냈다.

한참 뒤, 키리에가 옅게 미소 지었다.
“경은 사실 내가 죽기를 바랐거나, 혹은 바라는군요.”

레쇼는 대답 대신 마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였다.

키리에가 몸을 돌려 루비니아가 있는 방으로 돌아가 말했다.

“출발하죠, 저하.”

***

셀로 들어가는 동안 키리에는 루비니아와 손을 잡고 걸었다.

“마법으로 보호되어 있어요.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루비니아가 그렇게 말했다. 손을 잡는 행위가 좀 짜증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셀의 분위기는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몹시 어둡고 침체된 분위기였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왕궁이 왜 이렇게 됐죠?”

키리에의 질문에 루비니아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본디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의


마법으로 영구적인 푸름을 간직하고 있던 정원이 노랗게 말라 죽어 있었다.

“전하의 마법이에요.”

루비니아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마법이요?”

“네. 뭔가를 하시는 것 같던데, 잘은 모르겠어요. 난 마법은 문외한이니까.”

루비니아의 태도가 지나치게 태연했기 때문에, 키리에는 그녀가 사실은 그 마법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키리에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요?”

“많이들 그만뒀어요. 휴직계를 내거나요. 특히 병사들은 대부분이 그만두었죠. 뭐,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네?”

“모르나요?”

키리에가 눈을 깜빡였다. 루비니아가 피식 웃었다.

“얼마나 애지중지하면.”

나타니엘의 이야기인 것이 확실했다. 키리에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루비니아는 쾌활하게 걸음을 옮겼다.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나쁜 의미는 아니니까.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 거죠. 뭘 하든 나라, 세계, 뭐
이런 단어가 나오는 사람이 무슨 일을 벌이겠다는데 고작 인간이 어떻게 그걸 다 파악하겠어요.”

위로인지 타박인지 알 수 없었다. 키리에가 입을 다물었다. 루비니아는 키리에의 뒤를 흘끔거렸다.

“그 시녀는 안 왔네요. 들여보내 주지도 않을 거지만, 좀 더 생떼를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키리에가 안네마리를 떠올렸다. 애초에 두고 올 생각이었지만, 먼저 저택에 남아 있겠다고 말한 건


안네마리 쪽이었다.

‘저는 할 일이 있어요, 아가씨.’

가라앉은 얼굴이 비장하여,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두고 왔어요. 좋은 꼴을 볼 리 없으니까.”

“예리해라.”

루비니아가 가볍게 말했다.

“다 왔어요.”

한참을 왕궁의 지하로 내려가던 루비니아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녹색 눈이 엄정해졌다.

“처신 똑바로 해요.”

경고일까, 걱정일까. 키리에가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문이 열리고, 기괴한 마법진이 가득 찬 방이


드러났다.

찬란한 금빛이었지만 한눈에 봐도 불길한 기운이 이글거리는 마법진이었다. 주변으로는 수십 명의


마법사가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몇 걸음 안으로 들어선 키리에가 멈칫했다. 마법진의 중앙에 진저 오레윈브리지가 있었다.

“키리에 뷰캐넌 양이 오셨군.”

비틀거리며 일어난 진저 오레윈브리지는 전과 달리 초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앙상한 뼈 위에


가죽만 얹은 것 같은 몰골에 키리에는 내심 놀랐다.

“제 발로 올 줄은 몰랐네.”

국왕이 루비니아를 흘낏거렸다. 루비니아는 애교스러운 걸음걸이로 국왕에게 다가갔다.

“아이, 전하!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죽은 근위병들을 이용하면 반드시 올 거라고요!”

“그래. 그대의 말이 맞군.”

루비니아를 보는 국왕의 눈에 호감이 서려 있었다. 그를 보며 키리에는 루비니아가 기어코 국왕까지


함락시켰음을 깨달았다.

“자, 키리에 뷰캐넌 양. 오랜만이지?”

국왕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왕홀을 들고 갑옷을 입은 그녀는, 마치 오래전에 전장에서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 것처럼 보였다.
키리에가 짧게 묵례했다. 국왕이 피식 웃었다.

“전설경과 같이 지내더니 이제 윗사람에 대한 예의도 다 잊어먹었나 보군.”

“산 날보다 살 날이 적으니 그게 무슨 흠이 될까 합니다.”

국왕이 광소를 터뜨렸다. 녹색 눈이 살차게 번뜩였다.

“맘에 들어. 그 배짱이 좋았지. 사람은 모름지기 가슴 속에 심지 하나는 있어야 하는 법이거든. 비굴할
바에야 죽는 게 낫지 않나?”

국왕이 말을 마치며 루비니아를 한 번 바라보았다. 루비니아는 모멸감은커녕 뺨을 붉히고 생긋 웃기만


했다. 강인한 여자였다.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무엇에 살고 죽을지는 본인이 선택할 일입니다. 그를 어찌 남의 혓바닥으로


재단하겠습니까.”

키리에가 약간 미소 지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게.”

국왕의 눈빛에 광기가 한 점 떠올랐다.

“허나 명예는 왕가만이 하사할 수 있는 법.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든, 타인의 인정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그대는 아주 잘 알지 않나?”

키리에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를 알기에 여기 왔습니다. 약속은 지켜 주십시오.”

“그쯤이야.”

국왕이 성큼성큼 키리에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짝!

키리에의 고개가 돌아갔다. 키리에의 뺨을 때린 자세 그대로, 국왕이 씨근거렸다.

“이가 갈리는군. 네가 그를 깨우지만 않았어도…….”

키리에가 시선만을 움직여 국왕을 오시했다.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전후를 따지자면 시조가 전설경을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옳은 소리 좋아하는 건 여전하군그래.”

국왕이 한 번 더 손을 휘둘렀다. 사슴뿔보다 가는 손 어디에 그런 힘이 있는지, 키리에는 주먹을 맞고


쓰러졌다.

“그래, 키리에 뷰캐넌은 제 발로 여기에 왔고, 전설경 나타니엘은 제 발로 포베 곶으로 향했군. 실로


기이하지만 흡족하다 할 일이야.”
낯선 단어에 키리에가 멈칫했다.

‘포베 곶?’

그가 그런 곳에 가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동시에 노마법사의 말이 떠올랐다.

‘저 방향으로부터 강력한 마력이 느껴져서 말입니다.’

국왕이 나타니엘을 죽이기 위해 뭔가를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레쇼에게 자신을 맡긴 것을 보면,
나타니엘도 필시 그걸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키리에의 마음에 불안이 스쳤다.

[오늘 하루만.]

그렇게 말할 때 그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지?

몸에 밴 오연한 태도에 가려져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괴로움에 젖어 든


목소리였던 것 같다.

키리에가 말이 없자 국왕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코웃음 쳤다.

“뭘 생각 중이든 소용없네. 준비는 이미 끝마쳤어. 그대가 여기 있으니 전설경도 함부로 공격하진


못하겠지.”

국왕이 손가락을 튕겼다. 바닥의 금빛 진에서 빛이 더 강해졌다.

“그렇다 한들 방심은 금물이야. 그렇고말고.”

키리에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뭘 할 생각이에요?”

“그는 기사 중의 기사. 포베 곶에서 만나자고는 했지만…….”

그녀가 오만하게 말한 뒤 왕홀을 쥐고 마법진의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법사가 검사 앞에 나서는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잖은가.”

***

포베 곶.

보잘것없는 수의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겁에 질린 눈으로 나타니엘과 대치 중이었다.

나타니엘은 그들을 무시한 채 산책하듯 포베 곶과 이어진 해식 절벽 근처를 걷고 있었다.


[오래도 걸리는군.]

그가 중얼거리던 찰나였다.

“온다! 준비해!”

마법사들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그의 예민한 청각에 잡혔다. 나타니엘이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바닥에서 백여 각, 백여 주의 술식이 경고 없이 빛을 발했다. 나타니엘이 서 있는 지역 전체에서


금빛 마력이 하늘로 치솟았다.

동시에 밤이 찾아온 것처럼 하늘이 어두워졌다. 나타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마을 하나는 거뜬히 삼킬 크기의 다차원 공간 마법이 둥글게 열리고 있었다. 태양을 가린 미늘 같은


남보라색 막 너머에서, 수백여 개의 금빛 쐐기가 미끄러지듯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 불가사의 차원이 대략 십여 개.

나타니엘이 놀란 듯 미소 지었다.

[제법이네.]

마법이 내리꽂혔다.

***

가히 폭격이었다. 수은으로 만든 거울 같은 상에 포베 곶이 터져 나가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멈추지 마라, 이 정도에 죽을 놈이 아니야.”

국왕이 쥔 왕홀은 들끓는 마력으로 마치 거대한 번개처럼 보였다. 마법의 매개인 왕홀에서 마력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낼 때마다, 포베 곶과 이어진 머리 위의 게이트도 요동쳤다.

“공격!”

국왕이 노호를 내질렀다.

그에 맞춰 마법진을 둘러싼 다른 마법사들은 경건하고 엄숙하게 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부터 한 명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키리에에게 루비니아가 다가왔다.

“마력을 불어넣는 거예요. 시조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의 마법을 익힌 건 국왕 전하뿐이고, 따라서


전설경을 상대할 수 있는 것도 전하뿐이죠. 마법사들은 마력을 제공하는 게 전부예요.”
루비니아의 말에 답하듯 국왕이 왕홀을 사납게 휘둘렀다. 마법사가 한 명 더 쓰러졌다. 눈코입에서 피
흘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건가요?”

“전하의 뜻이에요.”

루비니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보다 당신이 여기 있는 걸 아는 모양인데요. 공격을 안 하는 걸 보면. 전설경 실력이면 저기서도


어떻게든 공격할 수 있지 않아요?”

“……몰라요. 그런 이야긴 하지 않으니까.”

“그래요? 흐응. 사실 부탁만 잘 들어주면 전쟁 병기로 딱인데.”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고 다시 국왕을 바라보았다. 왕홀이 번쩍였다. 포베 곶에는 천둥, 번개가 쳤다.
아무리 큰 전쟁도 일시에 끝낼 만한 어마어마한 마법이 단 한 사람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큭!”

어느 순간 국왕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마법 병단의 단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외쳤다.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게이트를 너무 많이 여셨습니다! 인간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가……!”

“호들갑 떨지 마라……. 전설경은?”

국왕이 피를 닦으며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허공에 띄워진 마법의 은반으로
향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부드럽고 엄숙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제법이긴 한데, 좀 부족하구나.]

구름처럼 거대한 연기 속에서, 아주 크고 검은 것의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아마 모두가 잠시간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나 짐승의 실루엣이라기엔 부정형(不定形)


이었다. 그리고 분명 연기에 가려져 있는데도, 그것의 본체는 왠지 그 연기보다 더 클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이윽고 연기를 꿰뚫고 나타니엘이 걸어 나왔다. 흰 검을 들고 옅게 미소 띤 채. 예복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실망시키지 말아다오.]

왕궁에 정적이 흘렀다.

내내 그를 보아온 키리에마저 잠시간 생각을 멈췄다.

압도적인 강함. 여유. 그리고 비정한 아름다움.

홀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
국왕이 자지러지게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에 광기가 서렸다.

“그렇게 나와 줘야지!”

그녀의 외침과 함께 마법사들이 피거품을 물며 일제히 쓰러졌다.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마법이 시전되고


있었다. 포베 곶와 왕궁을 이어 주는 머리 위의 게이트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죽일 수…… 있다! 죽일 수 있어! 발라브리가는 너를 잠들게 하는 데에서 그쳤지만, 나는 널 죽일


것이다!”

국왕의 입에서 피가 흐르다 못해 터져 나왔다.

“아직, 아직이야, 아직 더……!”

국왕은 각혈하면서도 왕홀을 놓지 않았다.

루비니아는 어느새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키리에는 벽에 붙어 눈앞의 일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핫!”

마침내 국왕의 왕홀과 바닥의 술식에서 빛이 한순간에 일소했다.

키리에는 그 순간, 마법의 상 너머에 있는 나타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 없는데도.

찰나가 주마등처럼 길었다.

키리에는 살아생전 누군가에게 그렇게 간절한 눈빛을 받을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나타니엘을 만났을 적엔 그 눈이 얼음처럼 맑고 투명하여 참으로 인간 같지 않다 여겼는데. 이제 와


마주하니, 그렇기에 그는 늘 그 안에 든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불현듯 키리에는 알 수 있었다.

살든 죽든, 그는 다시는 사람들 눈 앞에 나타나지 않겠구나. 겨울이 잘 어울리는 저 고고한 멸종 위기종


같은 사내는, 왔던 것처럼 홀연히 어딘가로 사라지겠구나. 그렇게 앞으로의 영원을 홀로 짊어지기로
했구나.

그의 세계이고 전부이고 모든 것인 키리에 뷰캐넌을 위해.

[…….]

잠깐이지만 파랗고 아름다운 눈이 뭔가를 눌러 참듯이 흔들렸다. 입술 역시 뭔가를 말할 것처럼 달싹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입을 꾹 다물고, 나른하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차고 올연한 겨울의 왕 같은 모습이었다.

눈을 찌르는 금빛이 작렬했다. 키리에가 백작하는 시야에 눈을 질끈 감았다.

***
그 시각, 세자르 뷰캐넌은 뷰캐넌 저택 안에 있었다.

나타니엘은 그에게 ‘끝내겠다’고 말했고, 세자르 뷰캐넌은 그 말을 믿고 안심하고 있었다.

모든 게 잘 풀리리라 생각했다.

그때, 돌연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큰일이에요!”

문을 강하게 열어젖힌 안네마리가 외쳤다.

“나타니엘 님이 폭주했어요!”

세자르는 당장 서류를 내려놓았다.

“무슨 말이냐?”

“나쁜 냄새가 났어요! 위험해질 거예요! 아가씨가 가주님을 안네마리에게 맡겼어요!”

“지금 나더러 네깟 시녀의 말을 믿으라는 거냐?”

세자르가 마뜩잖은 얼굴로 대답한 순간이었다.

큰 지진이 일었다. 아니, 지진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큰 천둥소리였다. 반사적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검은 구름이 왕궁 위를 휘감고 있었다.

세자르의 곧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는 바로 몇 가지 서류를 챙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로 가지.”

“네!”

안네마리가 고개를 끄덕이곤 세자르의 뒤를 따랐다. 세자르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는 위치가 되자마자,
조바심 가득하던 안네마리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

한참 뒤, 키리에가 눈을 떴다.

웅장한 예배당 같던 지하는 초토화되어 있었다. 여전히 불길한 빛을 발하고 있는 술식 주변으로


마법사들이 뿌리 뽑힌 잡초처럼 널브러진 채였다. 서 있는 건 키리에뿐이었다.

“흐어…… 어어…….”

국왕이 왕홀에 체중을 실은 채 헐떡였다. 시랍화된 시체처럼 변한 몸은 피부마저 갈색이었다.

“전, 전설…… 전설경은……?”

그녀가 중얼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고개를 들 기력도 없는 모양이었다. 키리에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을 바라보았다.

“아…….”

그녀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연기가 걷히자 더 이상 곶이라고 부를 수 없는 풍경이 드러났다. 무너진 땅 어디에도 나타니엘의 모습은


없었다.

“……거짓말.”

그녀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타니엘이 죽을 리가…….”

“죽었다고?”

국왕이 고개를 홱 쳐들었다.

“죽었나……? 죽었어……?”

그녀가 상으로 다가갔다. 포베 곶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뭔가를 말하는 것 같았으나, 잘


들리지는 않았다.

국왕의 녹색 눈이 핥듯이 상을 훑어보는 동안, 몇 분이 흘렀다. 죽은 척이었다면 진작 살아나 사람들을


놀래줬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포베 곶은 오래도록 고요했다. 부서진 땅으로 바다가 밀려드는 잔잔한
풍경이었다.

천천히, 국왕의 낯에 승리자의 환희가 떠올랐다.

“내가…… 내가 이겼다……. 내가! 내가 이겼어! 내가 전설경을 물리쳤다! 내가 전설경을 죽였단


말이다!”

낄낄대며 춤을 추는 국왕에게서 키리에는 나타니엘보다 더한 광기를 느꼈다.

자식의 복수? 그렇지 않다. 국왕은 단 한 번도 줄리아 오레윈브리지의 이름을 꺼낸 적이 없었다.

저런 몰골이 되면서까지 갖고 싶은 힘이란, 우월감이란 무엇인가.

그런 자가 권력의 정점에 자리해 있다는 점에서 키리에는 지금껏 맡아 보지 못한 지독한 악취를 느꼈다.
아마 나타니엘은 내내 맡고 지냈을 그런 음습한 냄새였다.

“이상…… 기운이……!”

그때 상 너머에서 띄엄띄엄 외침이 들려왔다. 포베 곶에 나가 있던 마법사의 목소리였다.


“검은 것……!”

마법의 거울 너머에서 마법사 한 명이 바다 쪽을 가리켰다.

국왕과 키리에가 무심결에 그곳을 바라보았다.

거짓말 같은 광경이었다. 밤이 몰려들고 있었다. 칼로 자른 듯한 경계였다. 햇빛은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바다에서부터 땅이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저건……?”

국왕이 중얼거렸다.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새까만 어둠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들을 향해 기어오기 시작했다.

“저게 대체…….”

국왕이 눈살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검은 것이 갑자기 속도를 빨리하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던 마법사의


발밑에 닿았다.

“……!”

이어진 광경에 키리에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마법사의 몸을 어둠이 메뚜기 떼처럼 기어올랐다. 그가 벌레를 떼어 내고 싶은 사람처럼 몸을 털며 비명을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이내 그의 온몸이 새까맣게 덮였다. 꼭 그 부분만 검은 종이로 덧칠한 것처럼
비현실적인 검정이었다. 마법사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그대로, 검고 꿈틀거리는 것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법은 끊어졌다. 더는 포베 곶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모습은, 수도 방향으로 빠르고 낮게


기어오는 어둠이었다.

국왕이 눈을 부릅뜬 채 가슴을 들썩였다. 그녀는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키리에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조금 달랐다. 그녀는 기시감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종말…….”

국왕의 고개가 돌아갔다. 녹색 눈이 비이성적인 빛으로 희번덕댔다.

“넌 저게 뭔지 아는구나.”

국왕이 순식간에 키리에에게 다가와 멱살을 움켜쥐었다.

“저게 뭔지 말해! 설마 저게 지금 여기로 오고 있는 거냐!”

빼빼 마른 몸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의 강한 힘이었다. 국왕은 아예 키리에의 턱밑에 왕홀을


들이댔다.

“말해! 전설경이 무슨 꿍꿍이속인지 말해! 기껏 방패막이로 쓰려고 네년을 데려왔는데 설마……!”

“아, 잠깐만요. 멈춰 주실래요?”

그때, 국왕의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키리에와 국왕이 동시에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시선 끝에 루비니아가 있었다. 그녀는 쓰러진
마법사들을 넘어, 손도끼를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루비니아 양?”

키리에와 국왕이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루비니아와 손도끼와 웃는 얼굴이라는 아주 괴상한
조합이었다.

“하,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어쨌든 전설경이 날 살려 준 건 사실이잖아요? 게다가 내가 또


빚지고는 못 살거든.”

반면 루비니아는 쾌활하고 짜증스러운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 전설경이 부탁까지 하는데 어쩌겠어. 키리에 뷰캐넌이라도 지켜 줘야지. 당신,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
해요.”

“지금 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고. 기껏 왕세자빈이 되었는데 국왕은 미쳤지, 완전 인간 같지도 않지, 말인즉
죽을 때까지 왕을 해 먹겠다는 소리 아냐? 그럼 난 언제 왕비 하라는 거야? 이든 같은 똥 덩어리의
뒤치다꺼리 하는 것도 짜증 나는데, 평생 너한테 굽신거리며 살아야 한다고?”

“……지금 그대 내게 ‘너’라고 말한 건가?”

국왕이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멍한 얼굴로 물었다. 루비니아가 새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입으로 그랬잖아. 내가 시골 출신이라 위아래가 좀 없어.”

루비니아는 쉼 없이 말하며 국왕 앞에 다다랐다.

약간의 눈치싸움 후, 국왕이 잽싸게 왕홀의 끝을 루비니아에게 겨눴다. 국왕의 자신만만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이럴 줄 알았다, 이 건방진 계집!”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루비니아가 코웃음 치며 녹색 보석이 박힌 반지를 바닥에 던졌다.

“이거 찾니? 지독한 걸 걸어 놨더라?”

“어떻게……!”

국왕의 눈이 커졌다. 루비니아가 방긋 웃었다.

“지옥에서 전설경한테 물어보세요, 전하!”

루비니아가 힘차게 도끼를 휘둘렀다. 왕홀이 두 동강 났다. 일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크헉!”

국왕은 자리에서 무너지며 다시 대량의 피를 토했다.

동시에 머리 위에서 바람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소리가 귀청을 찢는 크기로 울려댔다. 마법과 시전자를
잇는 매개가 부서지자, 게이트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이…… 은혜도 모르는 년이……!”

국왕이 피에 젖은 몰골로 루비니아에게 손을 뻗었다. 루비니아는 가까스로 그것을 피해 키리에 뒤에


숨었다.

“이제 어떡하죠?!”

루비니아가 무책임하고 발랄하지만 다급하게 외쳤다.

“어떻게 된 거예요?”

“몰라요! 마법 시전 도중에 매개를 부수면 마력이 역류한다고 들어서 부쉈을 뿐이에요!”

“누구한테요?”

“누구한테겠어요! 저기 널브러져 있는 마법사들한테서지!”

루비니아가 다 똑같아 보이는 로브 쓴 마법사들을 가리켰다.

그때, 다시 한번 머리 위에서 콰드득, 소리가 났다. 이제는 건물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키리에가 굳어 버린 루비니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여기서 나가야 해요!”

“거기…… 서!”

국왕이 노호를 내질렀지만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두 사람이 왕궁의 너른 공터로 빠져나온 순간, 갈 곳 잃은 마력은 위로 향했다. 왕궁이 지하에서부터


터져 나갔다.

무사히 빠져나온 키리에와 루비니아는 멍하니 눈앞의 폐허를 바라보았다.

루비니아가 불안하게 물었다.

“……죽었겠죠?”

“…….”

키리에가 대답을 망설였다. 상대가 상대이니 죄책감은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죽음이 즐겁지도
않았다.

반면 루비니아는 좀 다르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안 죽었으면 어떡해요? 화, 확인하러 가야 하나?”

“…….”

“대답 좀 해 봐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키리에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 멈칫했다. 굳은 피에 손가락이 걸렸다.


“종말이 오고 있는 것 같아요.”

“네?”

“포베 곶이 여기서 거리가 꽤 있긴 하지만, 속도가 빨랐어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네? 대체 뭐라는 거예요?”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키리에가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정보가 단숨에 스쳐 지나갔다. 키리에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니. 그 반대예요. 도망치는 게 아니라 숨어야 해요!”

키리에가 루비니아의 팔을 잡았다.

“문을 닫으라고 말해야 해요! 그건 초대받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으니까!”

거기까지 내뱉은 키리에가 다시 굳었다.

어째서 나타니엘이 자신을 여기에 두었는지, 어째서 프로노이아의 마법사들을 불렀는지, 어째서 굳이 그
먼 포베 곶으로 향했는지, 어째서 마지막에 미소 지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왕궁은 무너졌다. 국왕은 죽었다. 이경은 왕가를 지지하지 않았고, 왕가는 몰락할 것이다.

난세는 영웅을 만들고, 그 영웅은…….

“멍청이!”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외쳤다. 루비니아가 지레 놀라 움찔했다.

“나, 나, 나한테 하는 말이에요, 지금?!”

“하……!”

키리에가 속을 달래려 한숨을 쉬었다. 속이 들끓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 왕궁이 무너질 정도면 벌써 경보가 발령돼야 했는데, 기미가 없어요. 뭔가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그게 국왕이 오늘 수도에 무슨 일이 있어도 반응하지 말라고 말해 놔서 그래요…….”

키리에가 이마를 짚었다. 시간은 없는데 방법도 없었다. 상황을 모르는 루비니아는 초조한 모양이었다.

“대체 종말이 뭔데요?! 뭔가 잘못 안 거 아니에요? 그가 말한 것 중에 이런 상황은 없었다고요! 분명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

“나타니엘을 믿어요?”

“아,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고요!”

루비니아가 발을 동동 굴렀다. 무게 중심이 불안정하게 걸쳐져 있던 왕궁 일부가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를 본 루비니아가 입술을 깨물며 한 걸음 물러났다.
“뭐가 됐든…… 난 이든을 살피러 가야 해요!”

“네?”

뜻밖의 말에 키리에가 눈을 크게 떴다. 루비니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내 계획을 위해서는 이든이 살아 있어야 한단 말이에요!”

“대체 무슨 계획이길래 그래요?”

“그걸 몰라요?!”

루비니아가 엄지로 자신의 명치를 척 가리키며 눈을 부라렸다. 그녀에게는 더는 망설임이 없었다.

“국왕은 죽었고! 이든은 이제 왕! 그럼 나는 왕비!”

“…….”

키리에는 잠시 상황도 잊고 감탄과 어이없음이 반씩 섞인 신음을 흘렸다.

때마침 건물이 균형을 잃고 다시 무너져 내렸다. 먼지 바람이 날렸다.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루비니아의
팔을 잡았다.

“머리를 다친 거죠?”

루비니아가 폭발했다.

“아, 진짜 은근히 짜증 나네, 이 여자! 전설경이 꼭 이든 옆에 붙어 있으라고 했다고요!”

“왜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 말을 믿는 건데요!”

“그야 그 인간 같지도 않은 남자가 나를 살려 줬으니까!”

키리에의 동작이 멈췄다. 아까 듣고도 겨를이 없어 묻지 못한 말이었다. 루비니아는 머뭇거림이 아예


사라진 태도로 바락 외쳤다.

“전설경이 아무 관계도 없는, 당신이랑 친하지도 않은 나를 살렸다고요! 나한테 몰래 접촉했을 때,


심지어 ‘부탁’이란 단어까지 썼다고요!”

“……몰래 접촉했다고요?”

“그럼 국왕이 저 짓을 하는데 그 사람이 가만있었겠어요?”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게 누군가를 살리거나, 돕거나, 협력을 요구하는 방식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 나타니엘이?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정신을 놓고 외부의 두려움으로부터 숨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빠진 얼굴을 한 키리에를 향해 루비니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전설경을 믿는 게 아니에요! 그런 정체 모를 사람을 어떻게 믿어요! 내가 믿는 건!”

루비니아는 말을 끊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아, 예의 자신만만한 루비니아


캐스너의 모습으로 말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의 멍청함을 믿어요. 난 당신 이름을 말하는 그 사람의 표정을 봤거든요.”

루비니아가 떠나갔다. 건물이 몇 번 더 무너졌다.

키리에는 멍한 머리로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그녀가 느리게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아론. 내 행동이 의미가 있었던 걸까.’

하지만 왜 이제 와서…….

키리에가 이를 악문 순간이었다.

“내 마력이……! 내 마력 회로가! 내 힘이이이!”

국왕의 목소리가 하늘을 갈랐다. 키리에가 놀라 몸을 돌렸다. 그녀는 곧 폐허 위에 서 있는 국왕의


모습을 발견했다. 국왕은 점점 구름이 깔리는 폐허 위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이럴 리 없어! 이럴 리 없다! 연구는 완벽했는데! 완벽했단 말이다! 신조차 고꾸라뜨릴 마법이었거늘!
아아악!”

온갖 보호 마법을 걸어 놓았을 갑옷이 주인을 지키는 사명을 끝내고 바스러졌다. 국왕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손을 내려다보다가, 손톱으로 얼굴 가죽을 긁기 시작했다.

“제기랄, 제기랄! 이놈, 전설경……! 내 그릇을 돌려내……! 돌려내란 말이야……!”

마력의 역류와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탐한 대가는 컸다.

갈색으로 말라붙은 피부에 퀭한 눈, 사람 같지 않은 가는 팔다리. 머리털도 뭉텅 빠져, 그녀를 인간답게


보이게 하는 건 뺨에 흐르는 눈물과 입가의 핏자국뿐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동작을 뚝 멈췄다.

“전설경이 나를 죽이러 온다…….”

갈라진 나뭇결 같은 국왕의 입술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전설경이…… 나를 죽이러 올 거야! 죽는다! 종말이 올 거야! 종말이 나를 죽이러 올 거야! 나를!”

그녀가 길길이 날뛰며 펄쩍거리더니, 폐허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종말! 종말이 온다!”

국왕은 그렇게 외치며 꼭두각시 인형처럼 삐걱대는 걸음으로 어딘가로 달려가 버렸다. 어느새 몰려든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방금 지나간 사람, 국왕 전하 아니었어?”

“그런데 종말이라니……?”
키리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왕궁의 이변을 감지한 사람들이 불안한지 거리로 나오고 있었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이 시간에도 종말은 바닥을 기며 수도로 향하고 있을 터였다.

‘마법사를 찾아야 해. 수도 전역에 목소리가 들리게 하려면 그 수밖에…….’

그때, 쉰 듯한 저음이 들려왔다.

〔키리에 뷰캐넌.〕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레쇼가 여상스러운 태도로 서 있었다. 다만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더 예리하고
무거웠다.

〔가까이 왔습니다.〕

키리에의 입이 벌어졌다. 왜 이제야 그를 떠올렸나 싶었다. 그녀가 급하게 외쳤다.

“날 프로노이아에서 온 마법사들에게 데려다줘요! 근처에 있을 거예요!”

레쇼는 물끄러미 키리에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네?”

예상치 못한 대답에 키리에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마 나타니엘은 그걸 바라고 내게 당신을 부탁한 모양이지만, 들어줄 수 없습니다.〕

멍하던 키리에의 눈이 점차로 사나워졌다.

“사람이 죽을 거예요, 경! 당신들이 세운 나라잖아요! 아니면 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상관없는 건 아닙니다. 발라브리가가 사랑한 나라니까, 지키고 싶습니다.〕

레쇼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나와 갑시다, 키리에 뷰캐넌.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레쇼 경!”

〔시간이 없습니다. 이게 사람들을 살리는 길입니다.〕

키리에의 말문이 막혔다. 레쇼의 차분한 눈은 요지부동이었다.

“제가 경을 어떻게 믿죠?”

〔이름을 걸겠습니다.〕

레쇼가 주먹을 쥐더니, 그것을 가볍게 심장이 있는 가슴 위에 몇 번 두드렸다.

〔로르 레쇼의 이름을 걸고, 나와 함께 가는 게 가장 효율적으로 사람들을 살릴 방법입니다.〕

그는 맹세를 마치더니 눈을 스르르 올려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인간이 아닌 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기를 바랍니다.〕

키리에가 주먹을 쥐었다.

“그 말, 지켜야 할 거예요.”

〔당신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레쇼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키리에가 손을 맞잡은 순간, 레쇼는 휙 하고 팔을 움직여 키리에의 허리를


들어 올렸다.

〔이편이 더 편하겠습니다.〕

레쇼는 짐짝 들 듯 키리에를 들고서 발돋움했다.

“흣!”

그는 순식간에 하늘로 떠올랐다. 날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날고 있다고 착각할 만큼 높게 뛰었을 뿐이다.


어마어마한 체공 시간이었다.

높은 하늘에서 키리에는 수도 쪽으로 검은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상보다 빠른 속도였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대답 대신 레쇼는 땅 위에 내려앉았다. 수도 셀 아렐라노의 초입이었다. 멀리 있는 건물들의 테두리가


점차 검게 물드는 것이 보이는 자리였다.

키리에가 허리를 문지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특별할 건 없어 보이는데요.”

〔아직은 없습니다. 곧 만들 겁니다.〕

“만든다고요?”

레쇼가 먹구름이 뒤덮은 하늘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키리에의 눈썹이 활처럼 휘었다.

“레쇼 경?”

검은 어둠이 코앞이었다. 이름을 불러도 레쇼는 여전히 자리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키리에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속은 거야? 아니, 이 상황에 나를 속인 거야?’

참다못한 키리에가 언성을 높였다.

“레쇼 경!”

“저기…….”

그때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키리에가 흠칫해 뒤를 돌았다. 순한 얼굴의 아낙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기, 혹시 방금 있었던 거, 무슨 일인지 아시나요? 엄청난 소리가 났는데…….”


“그게…….”

키리에가 얼굴을 찡그린 채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동안, 레쇼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예식이라도 진행하는 듯한 느린 동작에, 키리에는 그를 쏘아본 뒤 급하게 아낙의 어깨를 잡았다.

“집에 들어가! 그리고 밖이 캄캄해져도 절대 문을 열지 마!”

“네?”

아낙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키리에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래. 보통 이런 반응이겠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설명을 반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눈밭의 참상이 다시 스쳐


지나갔다. 무력감과 절망이 가슴을 저미며 차올라, 키리에는 좀처럼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낙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키리에를 보다가, 그녀의 등 뒤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 구름인가?”

아낙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키리에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서늘하고 무시무시한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길한 감각이 들었다. 아낙 역시 같은 것을 느꼈는지 얼굴이 굳었다. 등 뒤에서 무언가가 와글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절망에 질린 키리에가 뻣뻣하게 몸을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것이 그들의 위를 덮은 순간이었다.

레쇼가 검을 수직으로 바닥에 꽂았다. 그러자 검을 중심으로 키리에와 레쇼의 주변을 돔 모양의 투명한
막이 감쌌다.

아낙은 튕겨 나갔다.

“안 돼!”

키리에가 외쳤지만, 그녀는 아낙의 눈코입에 검은 그림자가 침범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은은하게 빛나는 반구형의 막 안쪽에서 키리에는 할 말을 잃고 서 있었다. 그림자는 막을 넘어오지 못했다.


주변은 온통 새까매서, 검은 잉크 속에 가라앉은 것만 같았다.

그제야 레쇼가 검에 양손을 얹은 채 입을 열었다.

〔이전까지의 모든 상황과 이후에 있을 모든 상황에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겠습니다.〕

들어본 적 있는 말이었다. 키리에가 사납게 레쇼를 노려보았다.

“경.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면서 방금 그녀를 내쫓았군요?”

방금 놓친 아낙의 온기 때문인지 약간 으르렁거리는 듯한 말이 나왔다. 레쇼는 태연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나타니엘이 잠든 540 년 동안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습니다. 그걸 방해받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 목숨이 우습나요?”

〔이야기를 합시다, 키리에 뷰캐넌. 이곳과 바깥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 수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일이 잘 끝나면 당신은 방금 봤던 그녀뿐만 아니라 모두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말을 마친 레쇼가 검을 놓고 정좌했다. 그의 평소 행동은 나타니엘과 달리 투박했는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는 그 동작만큼은 몹시도 정갈하고 단정했다.

키리에는 그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나타니엘의 손에 갇힌 이후, 레쇼를 불렀을 때 그는 꼭 저런 자세로


‘마지막’을 이야기했다.

잠깐이지만 키리에의 머릿속에 나타니엘의 마지막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키리에는 애써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동안 내가 여기까지 도달하기를 바라서 날 도와줬군요.”

〔맞습니다.〕

레쇼가 손을 펼쳐 보이며 앉으라 시늉했다. 그에게서 무도인의 엄격성을 느낀 키리에는 이를 악물며 그와


같이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았다. 레쇼가 어렴풋한 미소를 비쳤다.

〔키리에 뷰캐넌. 나는 당신이 선택하길 바랍니다.〕

“선택이요?”

레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신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내게 힘을 물려받아 아주 강한 마력을 가진 마법사가


되는 것. 이 경우 발라브리가처럼 아주 강력한 대마법사가 될 수 있지만, 인간으로 그칠 것입니다.〕

키리에의 눈이 떨렸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둘째.〕

레쇼의 목소리는 좀 더 낮게 가라앉았다. 그는 언젠가 나타니엘의 푸른 눈이 그랬던 것처럼, 멀베리 색


눈동자를 자줏빛 우주처럼 빛내며 속삭였다.

〔내게 힘을 물려받아 인간을 넘어서는 것.〕

키리에의 머리가 놀랍도록 차분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지금 이 상황이 앞으로의 일에 있어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혹시 기억합니까? 당신은 언젠가 내게 강해지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때 경은, 사람에겐 각기 다른 깨달음의 방식이 있다고 말했죠.”

〔나는 당신 몸부터 어떻게 해 보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강해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냐고 물었고요.”

〔그리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는 거군요.”

〔있습니다.〕
“그 방법은?”

키리에가 물었다. 레쇼가 깊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내가 당신을 초월자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레쇼의 말이 수면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공기를 울렸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키리에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이게 나타니엘의 계획인가요? 키리에 뷰캐넌을 초월자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구하게 하고, 시조의
재림이라 칭송받게 하는 게?”

레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것은 오로지 내 독단입니다. 따지자면 나타니엘의 의도와는 반대되는 행동이긴 합니다.〕

레쇼의 말에서 그녀가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키리에는 닥친 상황을 이해하느라 말을 잃었다. 그동안 그들의 머리 위에서 그림자가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당신의 결정을 돕기 위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레쇼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들판을 쓰다듬는 산들바람같이 부드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옛날, 나는 발라브리가가 나타니엘을 죽이려 하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네. 그건 들었어요.”

〔나타니엘이 두려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일을 모른척했습니다.〕

일전에 눈 내리는 날, 그가 마차에 찾아와 한 말과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리 호국경 본인의
감정이 짙게 묻어났다.

〔그로 인해 발라브리가는 미쳤고, 나타니엘은 다시 얼음 속에 잠들었습니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키리에는 가만히 앉아 레쇼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맑고 투명하고, 슬퍼 보였다. 옛날


일을 말하던 나타니엘처럼.

〔나는 똑같은 일이 반복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다시 누군가가 나타니엘을 깨우고, 죽이려 들고,
나타니엘은 그 증오를 즐기는 그런 굴레 말입니다.〕

레쇼가 분위기를 환기하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시선이 다시 키리에를 향했다.

〔그래서 처음엔 당신이 죽기를 바랐습니다. 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레쇼의 말이 멈췄다. 그는 무표정이었지만, 키리에는 왜인지 그가 방금 옅게 미소를 머금었다고 느꼈다.

〔그런데 놀랍게도 누구도 즐겁지 않은 그 굴레를, 당신이 끝낸 겁니다.〕

“……제가요?”
레쇼는 조금 재밌다는 듯이 낮게 웃었다.

〔끝까지 이런 비유를 하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만, 나타니엘을 자신이 키우는 지렁이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으로 만든 건 당신이 최초이고, 또 마지막일 테니 말입니다.〕

이윽고 레쇼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무릎 위에 손을 얹고 허리를 굽히는 동작이 정갈하고 엄숙했다. 그
역시 초월자인 터라, 그 모습은 마치 사자가 머리를 숙이는 것 같았다.

〔로르 레쇼의 이름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키리에가 말문을 잃은 사이, 레쇼는 굽혔던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감사를 표합니다. 나타니엘을 그 굴레 속에서 빼내 주어서 고맙습니다.〕

이제 그는 만면에 초연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후련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키리에는 도리어 속이 뒤틀렸다.

“……나는 경을 만족시키려고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니에요.”

키리에의 차가운 말에도 레쇼는 태연했다.

〔압니다. 당신이 나타니엘을 긍휼히 여긴 건 그저 당신이 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 한마디로 때울 수 있을 만큼 내가 겪은 고통이 우스워 보이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힘겨웠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건조한 말인데도 어딘지 달래듯 온화한 대답이었다.

〔나는 그저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하. 큰일이요……?”

키리에가 떨리는 목소리로 코웃음 쳤다.

“그 큰일 때문에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경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하네요.”

키리에가 젖어 가는 눈으로 레쇼를 노려보았다.

지나간 일들이 떠올랐다. 한시도 마음 편했던 날이 없었다. 뭔가를 잘해 보려고 하면 도리어 망가지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탓했고, 그녀가 살기를, 동시에 죽기를 바랐다.

키리에 뷰캐넌은 너무 많이 부서졌다. 가장 두려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서진 채로 계속 살아


나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버틸 수 있다고 자신을 속였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있다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왔으니 가뿐하다고 자신을 달랬다.

그런데 나타니엘은 그걸 자꾸 소리치게 만들었다. 그는 늘, 처음부터 키리에가 남들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모습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당신이 날 다시 여기로 데려다 놨잖아요! 이 지옥으로!’

왜? 왜 그걸 말하게 만드나.
‘돌아오기 싫었어요! 잊고 싶다고요! 전부 지긋지긋해요!’

사실은 버겁다는 것을 왜 굳이 말하게 만드나.

‘남들 앞에서 멀쩡한 척해야 하는 것도, 남의 말에 상처받지 않은 척하는 것도, 전부!’

없어도 있는 것처럼 구는 이유가 사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임을 왜 자각하게 만드나.

말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모른척할 수 있었는데.

지금도 무너지려 하는 것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데.

[키리에.]

그리고 대체 왜. 하필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너는 누군가의 세계가 될 거야. 반드시.]

왜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나를 부순 당신이 말하나.

“내가…….”

키리에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 말하던 나타니엘의 눈빛, 손길, 거기에 뚝뚝 묻어나오던 오롯한
마음이 떠올라 괴로웠다.

“내가 얼마나…….”

입술을 깨무는 키리에를 레쇼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타니엘에게 온몸으로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키리에의 목울대에서 울컥하는 소리가 났다. 레쇼가 고개를 들었다. 마치 하늘을 바라보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나는 정말로, 그저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당신이 햇살이라면, 당신이 부서져 만들어 낸 물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하, 하하…….”

키리에가 손을 내렸다. 그녀는 더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눈가가 발갛게 물든 얼굴에 슬픔과 냉소가
번갈아 나타났다.

“……이제 와서요?”

눈물 젖은 보랏빛 눈이 사나워졌다.

“돈을 준다고, 힘을 준다고 부서진 것이 돌아오나요? 내가 겪은 일들이 없어지나요?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맞습니다. 세상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란 것도 있고, 당신이 나타니엘에게 알려 준 가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기어코 키리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그래요! 나를 불살라서, 키리에 뷰캐넌 하나가 깨져 나가는 것으로 위대한 전설경에게 깨달음을
주었다니 참으로 황송한 일이네요!”

레쇼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리에 뷰캐넌. 당신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무엇을 준다 한들 당신이 입은 상처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겁니다.〕

“그걸 안다면!”

〔그래서 나타니엘은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키리에가 멈칫했다. 그녀의 눈이 떨렸다.

“……가져간다고요?”

레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책임을 말입니다.〕

[둄 2 절갠 교환재공타싸 x]

25. 자유

마차가 전속력으로 도시를 달렸다. 마부석에서는 안네마리가 말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이랴!”

적당히 방향을 지정해 준 뒤, 안네마리는 말들을 보며 슬픈 눈으로 속삭였다.

“무서워도 계속 가야 해. 알았지?”

말들은 대답 없이 달릴 뿐이었다.

안네마리는 발디딤 하나로 마부석에서 마차 지붕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마차 문을 박차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짓이지?”

마차 안에 있던 세자르 뷰캐넌이 눈을 부라렸다. 안네마리가 불안한 얼굴로 외쳤다.

“보셔야 할 게 있어요! 밖이 위험해요!”

세자르의 눈썹이 휘었다.


“무슨 말이냐. 전설경의 폭주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었나?”

“맞아요! 그걸 보셔야 해요!”

“되었다. 꿈자리만 사나워져.”

“안 돼요! 꼭 보셔야 해요!”

안네마리가 세자르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은근슬쩍 세자르의 팔을 비틀었다.

“저리 치우…… 윽!”

“보셔야 한다니까요!”

세자르가 안네마리의 힘에 이끌려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그가 이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저게 뭐지?”

검은 것이 시야의 가장자리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나타니엘 님이에요.”

안네마리가 대답했다. 그녀가 다시 세자르를 마차 안으로 집어 던졌다.

“큭!”

내던져진 세자르가 비명을 토했다.

“이 빌어먹을 계집이……!”

“저곳으로 가야 해요!”

“대체 아까부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인간답게 말해라.”

세자르가 얼굴을 찌푸리며 옷을 털어 내고 자리에 앉았다. 안네마리는 애원하는 입, 웃지 않는 눈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기묘한 모습이었으나, 세자르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가씨가 저곳에 있어요! 위험해요!”

세자르가 멈칫했다.

“키리에가?”

“네!”

그는 잠시 침묵했다. 중년이 되었어도 준수한 얼굴에 미묘한 망설임이 스쳤다. 그를 보는 안네마리의


검은 눈이 끝도 없이 깊어졌다.

안네마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가 있는 곳으로 갈까요……?”

“키리에가 어디 있느냐?”
“저쪽인 것 같아요.”

안네마리가 대충 아무 곳을 가리켰다. 이미 검고 꿀렁대는 무언가로 덮여 있는 부분이었다. 세자르는


천천히 안네마리가 가리킨 방향을 창밖으로 바라보았다.

“위험해 보이는군.”

“안네마리가 같이 갈게요!”

“키리에는 저기에 왜 가 있는 거지? 제 발로 왕궁으로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만.”

세자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녀가 ‘둘 이상은 지키기 어렵다’고 우겨서 홀로 떠나긴 했지만, 역시
집사와 수색꾼을 데려올 걸 그랬다.

안네마리가 손을 꼼지락대며 답했다.

“나타니엘 님의 폭주를 막고 싶어 하신 것 같아요…….”

“쓸데없는 짓을. 그러게 평소에 좀 잘 보이랬더니.”

안네마리는 잠깐 무표정이 되었다가, 빠르게 다시 표정을 되돌려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을 했다.

“그래도 가실 거죠? 아가씨를 보러 가실 거죠? 아가씨를 구하러 가실 거죠?”

애원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세자르는 서늘한 눈으로 안네마리를 오시했다.

“아니. 마차를 돌려라.”

“사용인들에게는 짐을 챙겨 영지로 돌아가라고 명령해 두었으니, 앞서 돌아가지. 수도는 청소가 끝나면


오는 게 낫겠군.”

“네……?”

안네마리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아가씨가 위험한데요……?”

“전설경이 저 모양이라면 더는 키리에를 매개로 그와 협상할 수 없으니 별수 없다.”

세자르 뷰캐넌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멍한 얼굴의 안네마리를 두고 태연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후계자 자리가 또 비겠군……. 역시 결혼을 빨리 시켰어야 했는데.”

안네마리가 무표정이 되었다. 그녀가 조용히 있자, 세자르가 뒤늦게 안네마리를 돌아보았다.

“뭐하고 있나. 어서 말을 돌리지 않고.”

“당신은 정말…… 예상했던 그대로네요.”

“당신?”

“네. 당신이요.”
안네마리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갔다. 세자르가 앉은 각도에서는 안네마리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안네마리가 치마를 들쳐, 안쪽 호박 바지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타니엘 님은 적어도 아가씨를 소중하게 생각해 줘요. 아가씨가 위험해지면, 자기는 신경 쓰지 않고


아가씨에게로 향했을 거예요. 당신과 달리.”

안네마리가 꺼낸 것은 단검과 비수, 티 스푼, 아이스크림 스푼, 종이 다른 나뭇가지들, 그리고 여러


종류의 나뭇잎이었다.

“안네마리는 이제 알 것 같아요. 세상의 모든 악독이 모여 나타니엘 님을 만들었지만…….”

안네마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섬세하게 그것들을 살폈다. 마치 고기를 정육하기 위한 도구를 고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세자르는 왜인지 그 동작이 몹시 신경 쓰였다.

“시녀. 말을 돌려라.”

“생각해 보면 그 악독을 만든 게 인간이었네요.”

마침내 안네마리가 몇 개의 나뭇잎을 선택했다. 그녀는 남은 것들을 전부 속바지 안에 쓸어 넣은 뒤


고개를 들었다.

“나타니엘 님은 자기가 죽인 거로 하라고 말했지만…….”

죽음이 언급되자마자 세자르가 품을 더듬었다. 뷰캐넌 공작가의 가주답게 그는 여러 호신용 마법 용품을


들고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안네마리가 더 빨랐다.

“크악!”

안네마리는 세자르가 뭔가를 꺼내기도 전에 그 손을 붙잡아 비틀었다. 세자르의 손목뼈가 부러졌다.

“큿!”

세자르는 신음을 내지르면서도 재빨리 다른 손을 움직였다. 놀라운 판단력이었다.

“어림없어요.”

하지만 그 역시 안네마리에게 막혔다.

“크아악!”

세자르의 양 손목뼈가 부서졌다. 그는 뚝뚝 끊기는 비명을 내지르며 양팔을 덜덜 떨었다.

“크흑, 아, 흐어……!”

안네마리가 그 모습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아가씨는 절대 자기 아버지를 해친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예요. 안네마리는 그걸 알아서 당신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어요. 아마 나타니엘 님이 당신을 죽이지 않은 건, 안네마리를 보고 그걸 파악한
걸 거예요.”

“전, 전설경의 사주냐!”


세자르가 살찬 목소리로 외쳤다.

“사주는 아니지만요. 마무리를 부탁했을 뿐이니까.”

안네마리는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휘파람을 불었다. 말들이 달리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방향을
바꿔 보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네가 뭘 착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전설경이 날 죽이지 못하는 건 고작 그런 이유가 아니다. 하지만 네가


들을 리 없겠군. 거래를 제안하마. 뭘 원하지?”

세자르가 가슴을 들썩이며 물었다. 그는 양팔이 불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그 모습에 안네마리가 피식 웃었다.

“안네마리는 당신에게 원하는 게 없어요. 그냥 기회를 주었을 뿐이에요.”

“하, 하하.”

세자르가 웃기 시작했다. 그의 보라색 눈이 지옥 불처럼 불탔다.

“그래. 넌 키리에에게 충성했지.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도 모를 너를 들이겠다고 했을 때 진작 쳐냈어야


했는데.”

“옛날이야기 하는 게 재밌나요? 나이도 나보다 어린 게.”

“그래서 지금 날 죽이겠는 거냐?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키리에를 낳은 나를?”

“당신은 참 자기 편할 때만 아가씨의 아버지인 척 구네요.”

“너 같은 잡종은 모르겠지만 귀족이란 그런 거다.”

“귀족이 뭔지 안네마리는 잘 몰라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가씨가 내내 괴로웠다는 건 알아요. 알면서도,


안네마리는 아가씨의 괴로움을 덜어 줄 힘이 없었어요.”

“당연하지. 네 능력이 얼마나 뛰어나든, 너는 그냥 일개 시녀고 엘프 혼혈일 뿐이니까.”

세자르가 야비하게 웃었다.

“제대로 생각해라, 시녀. 네가 키리에의 괴로움을 덜어 주고 싶은 거라면 날 죽여서는 안 되지. 지금


뷰캐넌 공작가를 책임지고 있는 건 나지만, 내가 죽으면 키리에가 그걸 떠맡게 되지.”

안네마리가 멈칫했다. 세자르는 그것이 자신의 말이 통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좀 더


기세등등해졌다.

“전설경이 널 뭐라고 꼬드겼는지 알겠다. 모든 일이 다 세자르 뷰캐넌의 탓이니 그를 죽이라 했겠지.


키리에를 위해서 말이야. 하지만 그게 맞는 말인가? 잘 생각해. 키리에의 정신이 온전치 못했을 때 그
애가 원한 게 뭐였는지.”

세자르는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냉철하고 똑똑한 발음으로 말했다.

“바로 가족이다. 나와 제냐. 혈연 말이지. 천애 고아인 너나 인간이 아닌 전설경은 모르겠지만,


혈연이란 건 그런 거다.”

그때 세자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안네마리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뇨. 아가씨가 원한 건 혈연이 아니에요. 정말 열 받고 화나지만…… 당신은 그걸 모르고, 나타니엘
님은 그걸 아네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큭!”

세자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네마리가 세자르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세자르가 발버둥 쳤지만 안네마리는 멈추지 않았다.

“여기가 좋겠어요.”

주변을 둘러보던 안네마리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골목을 택해 세자르를 끌고 들어갔다.

“이거 놔! 이봐! 거기 아무도 없나! 이봐!”

“사람들은 그런 말을 들을수록 더 나오지 않는데, 모르나 봐요.”

안네마리가 세자르를 벽에 내던졌다. 세자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힌 뒤, 바닥을 굴렀다. 그는


그제야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세자르가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안네마리를 올려다보았다.
안대로 가린 애꾸눈의 소녀는 표정이 없었다.

“자, 잠깐……. 대화를 하지.”

“싫은데요.”

“난 키리에의 아비라고!”

“네. 아주아주 못된 사람이고요.”

안네마리가 그렇게 말한 뒤 폴짝 뛰었다. 그녀는 가뿐하게 세자르의 발목 위에 착지했고, 세자르의


발목이 부서졌다. 세자르의 입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격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크아악!”

“안네마리는 아가씨에게 이렇게 말할 거예요. 주인님은 수도에 이변이 생기자 아가씨를 걱정해 찾아
나섰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통에 마차에서 내렸고.”

안네마리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반대쪽 발목으로 뛰었다.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세자르가
바닥에서 몸을 비틀었다.

“그러다 주인님의 비싼 옷을 본 나쁜 사람들이 주인님을 노렸고.”

안네마리는 다시 세자르의 정면으로 되돌아갔다.

“골목으로 데려가서, 죽였다고.”

뷰캐넌 공작가의 수장, 세자르 뷰캐넌은 양 손목과 발목의 뼈가 부서져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헐떡대고
있었다. 항상 깔끔하게 넘기고 있던 머리카락은 땀으로 흐트러졌고, 목에는 핏대가 섰다. 안네마리가
그런 세자르를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타니엘 님은 자기가 처리하겠다고 했지만, 그러면 시체가 남지 않을 테니까 아가씨는 나타니엘 님이


당신을 죽였다는 걸 눈치채고 말 테죠…….”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건물 틈, 창문 틈으로 세자르의 비명을 들은 목격자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안네마리가 다시 호박 바지를 뒤졌다. 안네마리가 꺼낸 것은 꽃잎을 접어 만든 작은 새 여러
마리였다. 안네마리가 숨을 후 불자, 새들이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리고 골목을 엿보는 사람들에게
날아갔다.

“구경하는 분들! 그냥 추적이니까 내버려 둬도 돼요. 아가씨에게 괜한 말을 하면 안 되니까 붙여 놓은


것뿐이에요.”

안네마리가 주변을 향해 조금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이쪽을 보는 사람들은 곧 완전히 사라졌다.


안네마리는 다시 세자르에게 고개를 돌린 뒤, 약한 실소를 흘렸다. 승냥이같이 질기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남자. 세자르는 안간힘을 쓰며 대로로 나가려고 바닥을 기고 있었다.

안네마리가 다시 세자르의 다리를 질질 끌고 골목 안쪽으로 당겼다.

“크아악!”

“그러니까 안네마리가 해야 해요. 아가씨는 행복해야 하니까. 아가씨에게 주어지는 건 완전무결해야


하니까. 분하지만 그걸 줄 수 있는 건 나타니엘 님뿐이니까요…….”

세자르의 다리를 쥔 채 안네마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는 나타니엘이 싫었다. 하지만 수도로 돌아와, 키리에를 보는 나타니엘의 눈빛이 얼마나 애틋한지는
알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도.

그가 벌레, 지렁이, 종달새, 고양이로 이루어진 동물원에 사는 사람이라면, 키리에를 보는 그의 눈빛은


그 동물원에서 처음으로 같은 인간을 만난 사람 같았다.

사랑하는 키리에. 사랑하는 자신의 아가씨. 자신의 구원자……. 그녀가 또 누군가를 구원한 것이다.

안네마리가 자리에 멈춰 쓴웃음을 흘렸다.

안네마리는 키리에가 자신을 구했기 때문에, 구조자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키리에에게 보내는 애정은 무한했지만, 그렇다고 안네마리가 키리에에게 아무 부담 없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겠지. 짜증이 나고, 슬프고, 힘들고, 아픈데도 웃어 주어야 하는 어린애란 사실 얼마나 귀찮은가.

그런데 키리에는 단 한 번도 안네마리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분명 귀찮은 순간이 있었을


텐데도, 항상 조곤조곤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타일러 주었다.

엘프의 나이로는 어리지만, 그녀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는 말을 했을 때도 맑은 눈으로 ‘그럼 내가 널


어떻게 대해 주는 게 좋을까?’하고 물었을 뿐이다.

그런 키리에가 너무 좋았다. 너무너무 좋아서, 계속 곁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사랑하는 아가씨는 너무 많이 힘들었고, 안네마리는 키리에가 자신


앞에서 힘들어도 애써 웃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안네마리는 키리에가 행복하길 바랐다.

“그러니까, 당신의 마지막은 아가씨를 위해 아름답게 포장되어야 해요.”

안네마리가 세자르의 다리를 내려놓고, 하나 남은 검은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시선이 무겁게 세자르를


짓눌렀다.

“……어차피 겉모습만 성하면 모를 테니까요.”

낮은 중얼거림에 세자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그 순간 고통마저 잊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라! 정 그렇다면 내가 연기를 하마! 키리에를 아끼는 아비 연기야 아주 잘할 수
있지! 키리에도 살아 있는 아비를 보는 게 더 좋지 않겠나!”

세자르의 얼굴에 아마 인생 최초가 아닌가 싶은 비굴함이 떠올랐다. 그 와중에도 거래를, 그것도 이전의
안네마리라면 혹했을 거래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그는 확실히 수완가였다.

“그러니…….”

세자르가 최대한 키리에와 닮은 보라색 눈이 잘 보이게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사…… 살려다오…….”

안네마리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싫은데요. 죽어 버려요, 이 쓰레기.”

안네마리가 쥐고 있던 나뭇잎을 와그작 소리가 나도록 뭉쳤다. 그녀가 한 걸음 물러나며 양손을 펼치자,
잘게 바스러진 잎이 꽃잎처럼 세자르의 몸 위로 흩날렸다.

스산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사사사사. 사사사사…….

그게 무슨 소리인지 세자르는 바로 깨달았다. 한밤중에 머리 위에서, 조용한 순간에 마루 밑에서 들리곤


하는 발이 여러 개 달린 것들의 발소리였다. 이윽고 골목 사이사이에서 검붉은 벌레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으아아! 오지 마! 으아아! 사, 살려다오! 살려 줘! 내가 잘하마! 내가 잘하겠다!


키리에에게 바로 가겠다! 바로 가겠다고!”

세자르가 앞으로의 일을 예감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안네마리는 검은 동굴 같은 눈으로 그를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고, 벌레들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행군했다.

“제발! 살려 줘! 살려다오! 안 돼! 으아아아! 저리 가! 아아아아악!”

공포와 두려움에 세자르의 비명이 더 높아졌다. 그가 어떻게든 몸을 타고 올라오는 벌레들을 떨쳐 내려


애썼지만, 그는 결국 반짝이는 등딱지와 부드러운 표피를 가진 작은 친구들에게 몸이 뒤덮였다.

목구멍으로 벌레들이 넘어가고, 눈, 코, 귀, 더불어 몸의 다른 구멍을 통해 작은 벌레들이 세자르의


몸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세자르는 더는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작은 벌레들이 와글거리는 팔이
안네마리를 향해 뻗어진 채 꿈틀거렸다.

안네마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겉은 안 돼요. 속만 씹어 주세요……. 최대한 오래. 고통스럽게.”

안네마리는 곧 세자르를 뒤로하고 도시 저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인기척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게’ 도시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이젠 키리에를 기다릴 시간이었다.


***

“……만약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나요?”

키리에가 물었다. 레쇼는 짧게 묵례했다.

〔미안합니다. 당신이 인간으로 남겠다 말해도 나는 당신에게 힘을 주어야겠습니다.〕

“그게 나타니엘이 아니라 경의 뜻이라는 거죠?”

〔그렇습니다. 나타니엘은 내가 당신을 지키길 바랐겠지만, 그럴 거라면 이렇게 긴 시간을 기다리진


않았을 겁니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레쇼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지만, 나타니엘의 부탁이라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를 도와줄 터였다.

키리에가 혼란에 가득 차 억눌린 목소리를 내었다.

“……정말 죽었나요?”

내내 차분하고 즉각적이었던 레쇼의 답이 멈췄다. 그는 깜빡임 없는 눈으로 키리에를 응시했다.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만.〕

“말해요.”

〔그는 죽을 수 없기에, 영원한 잠을 택했습니다. 더는 누구도 그를 깨울 수 없는 곳에서.〕

레쇼가 곧장 입을 열었다. 키리에는 사실 그가 그걸 말하고 싶어 했음을 눈치챘다.

〔이제 나타니엘은 인세에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키리에가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그건…… 스스로를 봉인했다는 뜻인가요?”

〔비슷합니다. 다만 편의상 ‘잠’이라고 표현할 뿐이지, 실제로는 그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죠?”

〔나타니엘은 잠들지 않습니다. 그러니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을 뿐이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키리에가 멍한 얼굴을 했다. 그녀가 말을 툭 떨어뜨리듯 중얼거렸다.

“……괴롭겠네요.”

레쇼의 입꼬리가 살짝 부드러워졌다.

〔혹시라도 동정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가 그런 걸 바라진 않았습니다.〕

키리에가 떨리는 눈을 들어 레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해서 그가 이루고 싶었던 게 대체 뭔데요. 분명 내가 뭔가를 하길 바랐으니까 경을 내게 맡긴
걸 텐데, 하지만 나는.”

〔아니요, 키리에 뷰캐넌.〕

레쇼가 키리에의 말을 가로막았다.

〔말해 두겠습니다. 당신은 나타니엘의 죽음에 아무 책임도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 그 지옥을 선택했고,
당신에게 뭔가를 바란 적은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평생을 꼼짝도 안 하고, 그저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겠다는 게……. 대체 언제까지요?”

〔그야 세상이 끝날 때까지입니다.〕

키리에가 작게 입을 벌렸다. 말도 안 된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

“……혹시 거짓말인가요? 아니면 제게 유언이라도 남겼나요?”

레쇼가 마치 어린아이의 공상을 들은 어른처럼 짧게 웃었다.

〔키리에 뷰캐넌. 그가 그런 귀여운 짓을 할 사람입니까. 나타니엘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건 하나뿐이었습니다.〕

아. 역시나. 키리에가 입술을 잘근거린 뒤 좀 더 차가운 머리로 물었다.

“그게 뭔가요?”

레쇼는 입가에 머금고 있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부드럽게 답했다.

〔하고 싶은 걸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

그 순간, 키리에는 심장이 멈춘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기억 하나가 펼쳐졌다.

사방이 적밖에 없는 것 같던 그 약혼 축하연이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고, 악사들의 손은 분주했다.


공기가 느리게 흘렀다. 겨울인데도 분위기는 마치 봄처럼 온화했다.

나타니엘과 키리에는 그 사이에서, 마치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 말하듯 왈츠를 추었다.


자신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시선이, 등을 받치던 단단한 손이, 맞잡은 손가락의 예쁜 모양새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마지막에 떠오른 것은 그 순간의 대화였다.

‘마치 사람들이 당신에게 계속 바라기만 했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틀리진 않아.]

‘그럼 하나 요청해도 될까요?’

[말해 봐.]

‘하고 싶으신 걸 하세요. 그게 제 요청이에요.’

키리에의 눈이 커지고, 숨이 멈췄다. 눈시울이 달아오르고 속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돌고 돌아 시작점이었다. 나타니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고 싶은 걸 해. 키리에 뷰캐넌.]

기어코 키리에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져 내렸다.

누가 그랬던가.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남에게 하는 법이라고.

그 말이 참으로 옳았다.

일부러 남들이 보면 과하다고 여길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였다. 남의 일에 이입하는 정도가 지나치다고


욕하는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사실 아주 타산적인 행동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충분히 행복해지면, 그녀에게 그 행복의 부스러기라도 나누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키리에가 ‘네가 행복하길 바라.’하고 말하면, ‘나는 나보다 네가 행복하길 바라.’하고 말해 주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한마디가 고파, 지나가는 안부 인사에도 진심을 담았다.

필사적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유아적이고 음습한 바람인지 키리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키리에의 내면에 있는 어린
키리에 뷰캐넌은 여전히 애정에 목말라 있었다.

어른 키리에 뷰캐넌은 그걸 해결할 방법을 몰랐다. 갈증이 채워지지 않은 심장은 자라지 않았는데,
머리만 자라 세상에 물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깎아 남에게 주고 그 대가를 한 점씩 주워 먹을 수밖에 없었다. 방법을 몰랐다.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안절부절못하며 돈, 명예, 보석, 권력을 주겠다는 말밖엔 하지 못했던
나타니엘처럼 말이다.

그렇게 자신을 소모할수록 어깨 위에는 더 많은 짐이 올라갔고, 키리에는 종래 무엇을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나타니엘이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필사적이지 않아도 된다고.

왜냐면 그의 말마따나 키리에가 누구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선하든 악하든, 그녀는 그의 세계일
것이므로.

“이건…… 정말…….”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이 제멋대로 일그러졌다. 뺨에서 뚝뚝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그녀는 이내 눈을 꾹 감아 버렸다.

“반칙이에요…….”

그녀를 부드러운 눈으로 응시하던 레쇼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마지막입니다. 키리에 뷰캐넌. 결정하십시오. 인간으로 남을지, 인간을 초월할지.〕


키리에는 레쇼의 말을 듣고도 한참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감은 눈이 무색하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어둠이 머리 위를 지나치는 소리를 들으며 오래도록 서 있다가, 마침내 눈을 떴다.

“내 선택은…….”

프로노이아의 마법사들은 이변을 늦게 알아챘다. 먹구름이 수도 전체를 뒤덮어 밤처럼 어둡게 만든 뒤였다.

그들은 상황을 파악한 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사방에 외치고 다녔다.

“숨어! 집 안에 숨으라고!”

“제발 나오지 마세용!”

“가만히 있으면 괜찮소! 저건 허락받지 않으면 못 들어온다니까!”

하지만 아무리 마법으로 목소리를 높여도 소용없었다. 사람들은 허공에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조언자의
말을 따르기보다는 제 발로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저리 비켜!”

“내 눈앞에서 사람이 먹혔어! 난 도망칠 거야!”

시민들이 마법사들을 밀치고 달렸다. 마차와 짐 마차, 사람들이 한데 섞여 아비규환이었다.

포 박사가 절규했다.

“이런 식으로는 통제가 안 돼요! 모두 먹혀 버릴 거예용!”

“하지만 사람들이 말을 안 듣소!”

“저러다 따라잡힐 거요!”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 헐떡이던 마법사 한 명이 절망적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냥 우리라도 숨읍시다! 솔직히 우리와는 상관없는 사람들 아니오! 듣지도 않는 머저리들을 데리고
대체 뭘 하겠소!”

그의 솔직한 발언에 마법사들이 멈칫했다. 그건 아까부터 생존 본능이 속삭이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한차례 정적이 찾아왔다. 대머리 마법사 한 명이 모자를 벗어 챙을 만지작거렸다.

“그, 그럼 멀리 나간 마법사들을 호출할까요……?”

그때 개중 가장 나이가 많은, 길고 하얀 수염을 마가렛 꽃으로 장식한 마법사가 손을 들었다.

“잠깐. 마력이 진동하오.”

마법사들은 일순 상황을 잊은 채 입을 떡 벌렸다. 살갗에 달라붙는 힘의 크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뭐죠? 이런 어마어마한…….”

마법사가 아닌 포 박사와 호크송 박사만이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빛으로 된 둥근 원이 바닥에 그려졌다. 그리고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키리에 뷰캐넌이 나타났다.
“……공간 이동 마법?”

마법사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아. 드디어 맞게 왔네.”

키리에 뷰캐넌은 어딘지 무심하고 초연한 얼굴로 사뿐 바닥에 내려앉았다.

“다행이야. 다 모여 있었구나.”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드러운 표정과 달리 눈물 자국이 뺨에 가득했다.

마법사들은 좀처럼 입을 열 수 없었다. 분위기도 분위기거니와, 무엇보다 그들이 아는 키리에 뷰캐넌은


분명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키리에 뷰캐넌은…….

“……영주님? 마력을 다룰 줄 알게 되신 겁니까?”

수염과 머리에 흰 마가렛 꽃을 꽂은 노마법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키리에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호국경의 도움으로 그렇게 됐어.”

“허어……. 그런 게 가능하다니.”

“그보다, 다들 도망치지 않고 힘써주고 있었던 거 고마워.”

숨을 궁리를 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어설프게 시선을 피했다. 노마법사가 그들을 훑어본 뒤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체 호국경이 어떤 연유와 능력으로……?”

“궁금한 게 많겠지만 지금은 급한 불부터 끄도록 하자.”

키리에가 부드럽게 답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호크송 박사와 포 박사가 앞으로 나섰다.

“집으로 들어가라고 말해야 합니다! 아니, 말하는데 도무지 듣지를 않아요!”

“사람들이 도시 밖으로 도망치면, 거긴 엄폐물이 없어용! 모두 죽을 거예용!”

키리에가 쌕 미소 지었다. 어쩐지 지쳐 보이는 미소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저게 그대들이 연구하던 종말이라면 말이지만.”

“예?”

키리에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약간의 연출이 좀 섞였을 뿐이야.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무슨……?”

“마법사들은 내가 하는 걸 보고 따라 해. 최대한 넓고 강하게.”

“예?”
“보면 알 거야.”

키리에의 발밑에 술식이 그려졌다. 호국경의 힘을 이어받았다는 말이 사실인지 진한 포도주색의


마력이었다.

키리에의 몸이 중력을 무시하듯 천천히, 높이 떠올랐다. 그녀가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자줏빛 마력이
요정의 날개 가루처럼 반짝거렸다.

키리에가 허공에 섰다. 그녀는 이미 수도의 반을 집어삼킨, 밤보다 더 어두운 물결을 바라보았다.

레쇼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키리에가 그의 힘을 이어받은 뒤, 레쇼는 홀가분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나는 죽습니다.’

‘네?’

그때 키리에는 마력을 처음 느끼고, 세상의 찬란함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던 중이었다.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레쇼의 몸은 이미 검은 재가 되어 바스러지고 있었다.

‘수도의 일은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잠시만요, 죽는다뇨?’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내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런 말은 없었잖아요! 경이 죽어야 하는 줄 알았으면 절대……!’

‘하고 싶은 건 다 이뤘으니 만족합니다. 드디어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레쇼는 지나가던 사람이 표정만 보고도 괜히 부러워할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키리에의 입이 말을 찾지
못하고 들썩였다. 이미 힘은 넘어왔고, 레쇼의 몸은 형체를 잃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럴 거라면 대체 왜 540 년이나…….’

그녀의 말에 레쇼의 평온한 낯에 슬픔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것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뒤에야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타니엘에게.

그 말이 끝이었다. 레쇼는 재마저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희미하게 빛나는 돔 안에 주저앉아, 키리에는 이를 악물었다. 자카란다 꽃이 좋다 하니 엘서스를 주겠다


말하던 남자가 떠올랐다.

“전부…….”

멍청이들이다.

고작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못 해서 제 목숨 버리는 멍청이들.

상념에서 깨어난 키리에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녀는 아직도 나타니엘이 누군지, 그들이 왜 그렇게 답답할 정도로 한 사람만 바라보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나타니엘이 종말 같은 위험한 걸 자신에게 들이밀 리 없다.

[그림자가 적어서 불편하군.]

“내가 기억을 못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언젠가 국왕의 마법 병단을 피해 숨어든 조명사에서 나타니엘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키리에가 작게


중얼거렸다.

손끝에서 붉은 보랏빛의 마력이 펼쳐졌다. 그녀를 중심으로 먹구름 낀 하늘에 거대한 술식이 그려졌다.

이윽고 구름 한가운데에, 컴컴한 하늘을 가르고 실낱같은 빛이 드리워졌다.

“잠깐만, 저기 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도망치던 것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개기 시작했다. 둥글게 벌어진 틈 사이로 햇살이 후광처럼 내려와 키리에의 몸을 비췄다. 구름은
점차 물러나고, 사람들을 덮치던 그림자는 빛이 닿자 검은 벌레처럼 꿈질거리며 물러났다. 그때마다
그것이 삼켰던 사람들을 꿀렁꿀렁 토해 냈다. 사람들은 기절한 채로 바닥에 엎어졌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아! 종말이 아니라……!”

“빛 마법! 빛 마법을 쓰시오!”

마법사들이 키리에를 보고 하나둘씩 술식을 그렸다.

“시조의 재림…….”

누군가 중얼거렸다. 이제 시민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들은 키리에 뷰캐넌이 수십여 명의 마법사들을
데리고 그림자를 물리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역사에 기록될 한순간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소름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하나둘씩 키리에를 향해 기도하거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키리에는 그 중심에서 고개를 들었다.

몸에 마력이 넘쳤다. 새로운 감각이 열린 듯했다. 세상은 지금까지 어떻게 모르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오색찬란한 무지갯빛이었다. 넓고 아득했다. 그리고 아주 외롭고 막막했다.

키리에가 눈을 감았다.

“모두 눈을 감아.”

그녀의 목소리가 지진보다 크고 산들바람보다 잔잔하게 수도 전체에 울렸다. 빛이 더 강해지자 사람들은


경외의 마음으로 눈을 감았고, 키리에는 힘을 터뜨렸다.

아주 강한 빛이 키리에를 중심으로 터져 나갔다. 수도에서 포베 곶까지 이어지는 하늘을 덮고 있던


먹구름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마침내 키리에가 손을 거두자, 거기엔 더 이상 빛도 그림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온화한 늦봄의 햇볕만이


수도를 감싸 안고 있었을 뿐이다.

새파라니 아득한 하늘 아래, 키리에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람들의 함성과 축복은 들리지도 않았다.

과거에 안녕을 고하듯 눈물이 한 방울 뺨 위로 흘렀다.

***

며칠이 흘렀다.

왕비가 된 루비니아 오레윈브리지는 임시 집무실의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며칠 새에 많은 일이 있었다.

국왕은 반미치광이의 상태로 발견되었다.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간 것처럼 미라 같은 모습인데도, 살아는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녀는 폐위되었다.

단출한 즉위식과 함께 이든 오레윈브리지는 국왕이, 루비니아는 왕비가 되었다.

또 당연하게도, 이든은 별로 쓸모가 없었다.

타인에게서 마력을 갈취하는 발라브리가 오레윈브리지의 마법은 잔인했다. 이든은 어미인 진저


오레윈브리지에게 마력을 빼앗겼고, 그 부작용으로 몸과 마음이 노쇠해졌다.

국정은 사실상 루비니아에게 맡겨졌다. 루비니아는 가장 먼저 무너지지 않은 궁 하나를 거처로 삼고,


사상자의 구조를 우선했다.

놀랍게도 그림자가 삼켰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왔다. 사상자는 전부 사람들끼리의 분쟁 때문에 일어났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니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똑똑.

거기까지 생각한 루비니아의 귀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그녀가 말했다. 문이 스르르 열리고, 키리에 뷰캐넌이 나타났다. 키리에가 루비니아를 발견하고는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인 것 같네요.”

“사방에 공고를 때리니 이제야 나오네. 어디 갔었어요?”

루비니아가 격의 없이 투덜댔다.

“볼일이 있어서요.”

키리에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흥. 여전히 고상도 하셔라.”

루비니아의 핀잔에 키리에가 어렴풋이 미소 지었다. 루비니아는 건성건성 차를 타 키리에에게 내밀었다.

“내가 진작부터 당신한테 왕비가 타주는 차 맛 한번 보여 주고 싶었지. 맛있죠? 권력의 맛, 끝내주죠?”

“그 권력이 공작가 영애에게 하대해도 되는 권력은 아닌가 봐요.”

키리에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루비니아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직 이게 더 익숙해서 그렇거든요? 남들 앞에선 하대할 거니까 나중 가서 사람 낯부끄럽게 만들지나


말아요.”

루비니아의 산뜻한 대답에 키리에는 아무렴 여부가 있겠느냐는 식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며 차향을 음미했다. 평화로운 새소리가 거짓말처럼 온화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루비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아요, 키리에 뷰캐넌 양. 뷰캐넌의 이름을 벗어던질 생각이 있나요?”

키리에는 대답 없이 찻물의 수색을 감상하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루비니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을 호국경으로 추대하기로 했어요. 이경이 모두 공석인데, 알다시피 그 둘이 이 나라의


근간이니만큼 비워 두는 건 별로 보기 좋지 않거든요.”

루비니아가 잠시 말을 멈췄다. 키리에는 그녀의 시선을 무시한 채 차를 마셨다.

“이경이 얼마나 특이한 작위인지는 알죠? 세습되지 않고,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명예직. 뭔가를 할
필요도 없어요. 그런 자리니까.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고요.”

“그런가요.”

“여론도 완벽하게 당신 편이에요. 그 날, 당신이 어둠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한 게 널리 알려졌어요. 이


나라 사람들은 신화를 정말 좋아한다니까.”

“그렇군요.”

키리에의 싱거운 반응에 루비니아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했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키리에의 눈치를 보지 않는 척 애쓰던 루비니아가 머뭇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요?”

“당신…….”

루비니아가 띄엄띄엄 말했다.

“혹시…… 이제 인간이 아닌 거예요? 마법사들은 대답해 주지 않던데.”

키리에는 아리송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그게 중요할까요.”

알 수 없는 대답과 얼굴이었다. 모든 일에 초연해진 것처럼 담담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어딘지 슬픔이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루비니아가 멈칫하고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뭐, 중요하진 않죠!”

“네. 중요하지 않은 문제네요.”

“하던 얘기에 이어서, 제안할 게 있어요.”

키리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루비니아의 눈빛이 한층 더 진중해졌다.

“알다시피 왕가의 입지가 위태로워요. 그러니까 상부상조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요?”

“당신 앞으로 있는 영토를 왕가에 주면 좋겠어요. 괜찮을까요?”

키리에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런 게 있었지 참,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쓰여 있는 걸


읽듯이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명예를, 왕가는 실속을 챙기고, 시민들은 새로운 호국경이 왕가를 지지한다는 것에 안심하고, 그로
인해 왕가는 다시 지지율을 되찾고, 당신은 그 대영토를 회수한 희대의 책략가가 되겠군요, 루비니아
양.”

루비니아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말해 두지만! 뺏으려는 건 아니에요! 당신이 그걸 갖고 있겠다고 하면 당연히 그냥 내버려 둘 거지만!”

고양이가 털을 부풀리는 것 같은 반응에 키리에가 킥 웃었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원래 내 것도 아니었으니 상관없어요.”

루비니아가 멈칫했다. 녹색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정말은 키리에가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말요? 말해 두는데, 전설경 때랑은 달라요? 임대가 아니라 완전한 양도인 거예요?”

“네.”

키리에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이건 나타니엘의 생각이겠군요.”

“그는 당신이 땅 같은 걸 별로 필요로 하지 않을 거라고 하던데요.”

“……그렇네요.”

“당신을 잘 알긴 하네요, 그 사람.”

키리에의 수월한 수락에 루비니아는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그녀는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찻물을 새로
들였다. 차를 내리는 동작이 제법 근엄하고 우아했다. 그를 지켜보던 키리에가 나른하게 말했다.
“하지만 호국경의 작위는 고사하겠습니다, 전하.”

“뭐요?”

당황한 탓에 루비니아의 주전자가 흔들거렸다. 찻물이 테이블에 넘쳐 흘렀다.

“아이참……!”

루비니아가 짜증스럽게 사람을 부르려던 순간, 키리에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허공에 포도주색의 마력이
작게 술식을 그렸다.

테이블 위를 적시던 찻물이 방울방울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방울은 아름답게 빛을 반사하다가, 한데 모인


뒤 허공으로 증발해 버렸다.

루비니아가 놀라 입을 벌렸다.

“얼마나 강한 거예요?”

“꽤 강해요.”

키리에가 차분하고 무심하게 답하며 손을 얌전히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제안은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아무리 싫어도 저는 뷰캐넌의 적자고, 후계자입니다. 그저 도망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공작가에서 나올 수는 없어요.”

마법에 정신이 팔려 있던 루비니아가 삽시간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인즉, 공작가를 책임질 합당한 후계자만 있으면 된다는 건가요?”

“그게 저밖에 없습니다. 제가 죽었다면 모를까, 남에게 가문을 떠넘길 수는…….”

“아. 놀랍게도 이건 ‘떠넘기는 게’ 아니에요!”

“네?”

“아무래도 그 사람은 당신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루비니아가 손뼉을 두 번 쳐서 궁내관을 불렀다.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들어오라고 해.”

문이 열렸다. 끼익끼익 소리가 나고, 누군가가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아 방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을 보고,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레이 뷰캐넌이었다. 사고로 의식 불명이 되었던, 키리에의 오라비. 뷰캐넌의 적자.

“키리에……. 잘 지냈니?”

그레이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

그레이의 마지막 기억은 마차 안에서 나타니엘과 마주친 순간이었다. 나타니엘의 지팡이가 명치에 닿았고,
느베야가 그를 배신했고, 빗물 탓에 옷에는 둥근 얼룩이 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직후 그는 쓰러졌다. 그리고 시차 없이 검은 공간에 떨어져 있었다.

“어?”

그는 전설경이 자신을 죽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아 있었다.

“뭐야. 죽이려다가 실수로 딴 데로 보내기라도 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방이 검었지만 자신의 몸은 보였고, 감각도 이성도 멀쩡히 기능하고 있었다.

“괴롭힐 생각인가 본데? 어림도 없지. 이 그레이가 누군지 알고.”

그레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검은 공간을 걸어 나갔다.

한참을 걸어도 자신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아무도 없나?”

중얼거려도, 외쳐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소리가 돌아오지도 않았다.

“대체 여긴 어디야? 사람을 이런 데다 처박아 놓고서 얼굴도 안 비쳐?”

그레이는 오래도록 그곳을 헤맸다.

그곳에서는 배가 고프지도, 목이 마르지도, 졸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레이는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그레이는 전설경이 자신과 협상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같이 깨달았다.
전설경은 그저 버리기엔 애매하고 자주 쓸 일은 없는 물건을 다락방에 넣어놓듯이 자신을 여기에 두었을
뿐이었다.

공포가 밀려들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 거기 그냥 계시옵소서! 그러면 우리도 이 땅 위에 남아 있으리다!”

어떻게든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아는 노래를 전부 불렀다. 아는 시를 전부 낭송했다. 아는 사람을 전부


욕했고, 아는 지식을 전부 늘어놓았다.

동서남북이 없는 새까만 공간에서 그레이의 정신과 비대한 자아는 천천히 말라 죽어 갔다.

“제발, 제발 누구든 대답 좀 해 줘……!”

아무리 울부짖어도 어둠은 고요했다. 그레이는 서서히 미쳐 가기 시작했다.

하루? 아니다. 한 달? 그보다 길게 느껴졌다. 그레이로 살았던 모든 인생보다도 더.


“아아…….”

시간이 흘러 그레이는 자신이 그레이 뷰캐넌인 것도, 그레이 뷰캐넌의 경험도 전부 자신의 망상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레이가 느끼기에 거의 영겁 같은 시간이 흐른 뒤, 그레이의 정신이 마모될 대로 마모된 뒤에야,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그레이 뷰캐넌.]

그레이가 고개를 쳐들었다. 다른 누군가였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

“아! 아! 아아! 흐아아아아!”

그레이가 눈물을 흘리며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렸다.

그 끝에 서 있는 건 지팡이를 짚은 전설경이었다. 그는 밤의 양귀비처럼 위험하고 고혹적인 얼굴로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레이 뷰캐넌.]

“아, 아……. 그…….”

[그래. 그게 네 이름이야.]

“아아아……! 아아아아아!”

눈물이 그레이의 뺨을 흠뻑 적셨다. 착각이 아니었던 거다. 그레이는 전설경 앞에 무릎 꿇었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과거의 기억이 꽃처럼 피어났다. 그는 살아 있던 존재가 맞았다. 망상이 아니었다.
아니,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말할 상대가 있고, 소통이 가능했다.
거의 전설경을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유리알 같은 눈을 본 순간, 그레이는 다시 공포에 질렸다.

그는 자신을 여기 집어넣었고, 지금 마지막 기회를 주러 온 것이다. 절대 그가 떠나가게 두어서는 안


됐다.

그레이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제발 여기서…… 나가게……!”

전설경은 그런 그를 무시한 채 나른하고 평온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한텐 고향 같은 곳이지. 인간에게는 좀 가혹했을지도 모르겠구나.]

비스듬히 옆얼굴을 보인 채 무심히 주변을 살피는 그는 어쩐지 조금 고적해 보였다.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가지 마세요, 잘하겠습니다, 뭐든 하겠습니다…….”

그레이는 전설경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 위해 무릎으로 기며 다가갔다.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부피를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전설경은 그레이의 손을 피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내가 비위가 약해서.]


“으흐, 흐윽……!”

그레이가 바닥에 무너졌다. 전설경은 지팡이를 짚은 채 허리를 조금 굽혀 그레이를 내려다보았다.

[나가고 싶나, 그레이 뷰캐넌?]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이미 얼굴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었다.

“네, 네……!”

전설경이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빛을 다시 보고 싶니? 사계와 시간이 있고, 어여쁜 숙녀들과 늙은 벌레들이 있고, 강철의 검집 아래
썩어 가는 가난의 지푸라기도 있는, 바깥세상 말이다.]

그거야말로 그레이가 간절하게 바라던 것이었다.

“나가고 싶습니다! 나가게 해 주십시오! 뭐든 하겠습니다! 시키는 거라면 다 하겠습니다! 핥으라면 핥고,
죽으라면 죽을 테니, 제발……!”

그레이는 자신의 간절함이 더 잘 드러나도록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눈앞의 검은 신이 자신을 버리고
다시 돌아가지 않도록 그의 신앙심을 보여야만 했다.

전설경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럼 뷰캐넌을 책임져 줘야겠어.]

“네……?”

벌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레이가 눈을 크게 떴다.

[키리에가 신경 쓸 일 없게끔 성실히, 잘. 그 아이의 눈이 높은 건 알고 있겠지? 수준을 맞춰.]

전설경은 변화 없이 냉연한 태도로 말했다.

기회였다. 그레이가 그의 마음이 바뀔세라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입니다! 하겠습니다!”

[깨어나면 네 하인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다. 너보다 영리한 듯하니 데리고 다녀. 그리고 하늘에 이변이
나타나면, 하루를 기다린 뒤 마차를 타고 수도로 가도록.]

“예, 예! 그러겠습니다!”

[그다음은 오레윈브리지가 알아서 할 거야.]

“예……!”

드디어 여기서 나갈 수 있다. 그레이는 감격으로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울었다.

나타니엘은 그런 그레이를 무심하고 담백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차라리 여기서 미치는 게 나았을 텐데.]


“네……?”

난데없는 말에 그레이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된다. 지옥이 여기보다 나을 터였다.

[착각하지 말렴. 이건 구원이 아니고, 난 널 풀어 준 게 아니야. 오히려 네 짧은 삶의 전부를 내게 저당


잡혔다 봐야겠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전설경은 사정없이 떨리는 그레이의 눈을 내려다보며 냉연히 미소 지었다. 그가


그레이의 얼굴을 향해 손을 펼쳤다.

[네 야비한 본성이 영 미덥지가 않으니, 작은 선물을 두고 가마…….]

***

이후 그레이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전설경이 말한 것을 충실히 따랐다.

“물론 잘 못 지냈겠지? 하하…….”

그레이가 약간 어색하게, 그러나 여전히 조금은 능청스럽게 인사했다.

“느베야, 가까이.”

“예.”

그레이의 뒤에서 덩치 큰 근육질의 하인이 그레이의 의자를 밀었다. 키리에의 시선이 그레이의 다리로
향했다. 담요를 덮고 있었다.

“아, 이거?”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레이가 무릎을 슬쩍 문질렀다.

“그, 별거 아니야. 마차 사고 때문이지. 누워 있느라 근육이 퇴화하기도 했고.”

“마차 사고?”

키리에의 눈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그레이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알잖아? 내가 마차 사고 때문에 의식이 없었던 거.”

“…….”

키리에가 물끄러미 그레이를 응시했다. 한쪽 눈에 안대를 쓴 그레이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해 루비니아를


바라보았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전하.”

“됐어. 괜찮아. 난 신경 쓰지 말고 볼일들 봐요?”


루비니아가 손을 내젓고서 찻잔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레이가 어렴풋이 미소 짓곤 다시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전하께 이야기는 들었지? 그, 가문은 내가 이을 거야. 아, 물론 네가 가주가 되고 싶다면 당연히


양보할 거지만.”

“…….”

키리에가 좀처럼 대답하지 않자, 그레이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저기, 키리에? 내 말은 네 자리를 빼앗겠다는 게 아니라…… 네가 더는 뷰캐넌의 이름 때문에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야. 잘 운영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나도 이제 정착해야 하기도 하고. 하하.”

그레이가 멋쩍게 웃었다. 전과 같은 미소였으나 약간의 비굴함이 엿보였다. 잠깐 말을 멈춘 뒤, 그레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키리에는 그가 말하는 내내 그레이를 물끄러미 응시하기만 했다. 그레이가 혀로 말라 가는 입술을 축인 뒤,


입을 열었다.

“……그동안 미안했다.”

키리에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그제껏 침묵하던 키리에가 물었다.

“정말 마차 사고야?”

“당연하지.”

그레이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키리에의 시선이 꿰뚫듯 그레이의 하나 남은 눈으로 향했다.

그레이는 무구하게 눈을 깜빡이며 피식 웃었다.

“네가 내 말을 안 믿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정말이다? 그렇지, 느베야?”

“그렇습니다.”

뒤에서 느베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얼굴 어디에도 거짓말하는 기색은 없었다.

탐색하듯 둘을 응시하던 키리에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레이는 좌불안석이었다. 그는 몹시 애면글면한 눈으로 키리에를 살피기


바빴다.

“그, 키리에……?”

“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들었지?”

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들었어.”

“장례식……. 올 거냐?”

그레이는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물론! 강제는 아니다? 안 와도 되지만, 그냥…… 너도 마무리를 제대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마무리. 그레이가 내뱉은 단어 중 하나가 키리에의 마음에 성큼 들어섰다. 키리에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네. 마무리…….”

햇살이 들이치는 창문 아래로 창틀의 모양을 따라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봄이라고 하기엔 이젠 제법
날이 더웠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거짓말 같은 겨울이었다. 키리에의 눈이 아득해졌다. 그녀는 한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장례식에서 봐.”

***

키리에가 방을 나서자마자 그레이의 미소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나, 나 잘했지? 뭐 잘못 말한 거 없지? 키, 키리에가 날 미, 미워하진 않겠지?!”

공포에 질린 목소리였다. 그는 한순간에 30 년도 더 늙어 버린 것 같았다.

“안 돼, 나, 난 거기로 다시 돌아가긴 싫어…… 싫다고……!”

그레이가 무릎을 쥐고서, 질린 얼굴의 루비니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울부짖었다.

그 악몽 같던 공간에서 돌아온 뒤, 그레이의 하반신은 새까맣게 죽었다. 걷기는커녕 혼자 대소변을


처리할 수조차 없었다.

그게 굴욕이나 분노로 전환되지 않도록 막은 것은 다리의 혈관에서 피부를 뚫고 나올 것처럼 펄떡거리는


무언가였다.

괴사한 것처럼 푸르고 검게 죽은 다리에서, 누가 보아도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는 새까만 색의 무언가.

다리가 그럴 때마다 심장 역시 불규칙적으로 과하게 뛰었다. 그리고 생살을 찢는 듯한 극도의 고통이


밀려들었다.
전설경이 남긴 무언가가 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내가 어떻게, 거기서 벗어났는데…….”

그레이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미 전설경의 말을 어기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불면증이
도졌다. 탈모와 섭식 장애, 강박적으로 몸을 씻는 버릇도 생겼다. 그뿐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날붙이로 다리를 미친 듯이 찔러대기도 했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이 상태를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느베야를 데리고 다녀야 했다.

모든 게 전설경의 손바닥 안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막상 세상을 마주하면, 그 공허 속에 있을 때와


달리 죽음이 턱없이 멀고 두려웠다.

그레이는 앞으로 그의 삶에 남아 있는 것이 끝없는 불안과 광기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흐느꼈다.

***

궁을 나선 키리에는 정원 근처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마주쳤다. 마리아와 라우라, 그리고 다른 가문의


가주들이었다.

“키리에!”

키리에를 발견한 마리아와 라우라가 달려와 키리에를 끌어안았다.

“키리에! 걱정했어. 어디 갔었던 거니?”

“몸은! 몸은 괜찮은 거야?”

라우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키리에의 몸을 더듬었다.

하지만 둘과 달리 뒤쪽에 선 가주들은 키리에의 시선을 피했다. 전부 나타니엘이 키리에를 속일 적, 그를


도왔던 이들이었다.

마리아가 그들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이야기 좀 하다 가겠습니다. 먼저 들어가 있으세요.”

가주들은 예의상 거절하는 법 하나 없이 슬그머니 궁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세 사람이 정원으로 향했다. 라우라가 가장 먼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마법을 쓰길래 깜짝 놀랐어!”

“호국경의 힘을 넘겨받았어.”

라우라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넘겨받았다고? 그럼 검을 쓰게 되는 거야?”

“아니. 마법이야. 원래 뷰캐넌은 마법사 가문이었으니까.”

“그게 가능해?”

키리에가 손을 펼쳤다. 손바닥 위에서 술식이 그려지고, 작은 물방울이 모여 보글거리다 팡 하고 터졌다.


라우라의 입이 벌어졌다.

“산에 내린 빗물이 냇물이 되는지 지하수가 되는지의 차이라, 힘의 근원은 같거든.”

“그럼…….”

“응?”

“……정말 둘 다 죽은 거야? 전설경과 호국경 말이야.”

키리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리아는 의미 모를 한숨을 쉬었고, 라우라는 찝찝한 얼굴이었다.

“에이! 자기 입으로 그러겠다 했으니 확실하겠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까 또 아주 개운하진 않네.”

“자기 입으로?”

“전설경이 찾아왔었거든. 그 일이 있기 하루 전에.”

대답한 것은 마리아였다. 키리에가 희미하게 놀랐다. 자리를 꽤 오래 비웠다 싶더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닌 걸까.

“나타니엘이?”

“한밤중에 침실에 서 있길래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사과라도 하려고 온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사과는 무슨!”

라우라가 말을 받았다.

“끝까지 네 이야기밖에 안 하던데! 우리한텐 한 톨도 안 미안한 얼굴이었다니까?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그 사람, 좀 돈 거 아냐?”

라우라는 그렇게 말한 뒤 몸을 낮추고 주변을 살폈다. 그리곤 짜증을 냈다.

“그놈 때문에 욕하고 주변 살피는 버릇 들었어!”

마리아가 키득거리다 키리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보다 키리에. 전하께 이야기는 들었니?”

“이야기하고 나오는 길이야. 호국경을 맡기겠다고 하더라고.”

마리아가 좀 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국민들 사이에선 왕조를 교체하는 게 맞지 않냐는 말이 많아. 하지만 키리에 넌 그런 걸 원하지 않을


테고, 그러려면 왕가가 좀 더 믿을 만해져야 해.”

“그! 래! 서! 우리의 지지가 필요했던 거지.”


라우라가 어깨를 으쓱대며 나섰다.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나 잽싸게 후작 자리 꿰찼다? 이제 후작이야, 내가! 뭐 갖고 싶은 거 있니? 말만 해! 내가 루비니아


양의 왕관도 훔쳐다 줄게!”

라우라는 그렇게 외친 뒤 다시 주변을 살폈다. 그 잔망스러운 태도에 키리에가 웃음을 터뜨렸다.

“축하해, 라우라. 너라면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나도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몰랐어! 네가 제일 먼저 알아줬지. 넌 눈이 너무 좋다니까! 내 귀염둥이!”

라우라가 깔깔 웃으며 키리에와 팔짱을 꼈다. 그러곤 엄한 표정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남자 보는 눈은 좀 없는 것 같아. 알지?”

키리에가 다시 웃었다. 그 모습을 살풋 미소 지으며 지켜보던 마리아가 말했다.

“이상하네, 키리에. 넌 원래 늘 다리에 추를 하나씩 달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 추가 사라지니까 어쩐지


지금은 그대로 날아갈 것 같아.”

마리아의 말에 키리에는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녀 역시 아직은 혼란스러웠다.

그동안은 내내 신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춤추게 된다는 동화 속의 빨간 구두를 신고 있는 느낌이었다.


키리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를 이끄는 것은 귀족의 책임과 내면의 고독이라는 이름의 빨간
구두였다.

나타니엘이 그런 그녀의 구두를 벗겼다. 이제 키리에는 춤추지 않아도 되었다. 맨발로 밟는 땅은


서늘하고 낯설었다. 막막한 자유였다.

키리에가 대답하지 못하자, 라우라가 다시 키리에와 팔짱을 끼며 옆구리를 붙여 왔다. 명랑한 목소리였다.

“그거 알아, 키리에? 우린 엄청 잘 살 거야! 그렇지, 예쁜아?”

마리아가 웃었다.

“물론이지.”

“마리아가 맞다면 맞는 거야! 알지? 솔직히 전설경이나 호국경이 좀 비인간적으로 강해서 그렇지, 보통은
공작이랑 후작이 제일 세거든? 응? 인간 수준의 싸움에서는 말이야!”

라우라가 팔짱 끼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휘두르며 웃었다. 하지만 쾌활하게 웃던 라우라의 표정은 이내


흐려졌다.

“하지만 넌 떠날 거지?”

아. 키리에의 말문이 막혔다. 역시 그녀들은 키리에의 친구였다. 키리에가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그냥 좀 쉬고 싶어. 나타니엘하고 만난 이후로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어디로 갈지 정한 거야?”

키리에는 팔을 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마리아가 다정히 말했다.

“키리에. 대륙 남서부에 네 영지를 만들어 놨어. 왕가와 다른 귀족들도 합의한 일이야.”


“남서부?”

“원래 네가 갖고 있던 땅은 아니지만, 아치볼드 백작님이 협조해 줬어. 면목이 없으니 말을 안 할 뿐,


다들 네게 부채감을 느끼고 있거든.”

키리에는 조금 전 그녀를 스쳐 지나갔던 가주들의 시선을 떠올렸다. 그게 아마 죄책감이었나 보다.

전설경이 무서워 그의 연극에 협조했는데, 정작 그들을 구한 게 그 연극의 주연 배우라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렇게까진 안 해 줘도 됐는데.”

“그냥 받아!”

라우라가 끼어들었다. 약간 젖어 있는 그녀의 눈이 애써 쾌활하게 반짝거렸다.

“내가 사람 시켜서 미리 살펴봤거든? 완전 최고야! 바다도 보이고, 집도 넓고 깨끗해! 시가 220


억짜리인데, 게다가 내가 안에 가구랑 장식을 뭘로 채워 놨는지 알아? 바로…….”

“흠흠, 라우라…….”

“너에 대한 사랑이지! 사랑해, 귀염둥이!”

마리아의 눈치를 보며 라우라가 다시 키리에를 껴안았다. 그녀가 신나서 방긋거렸다.

“마리아도 참. 그럼 내가 상회의 주인인데 뭐라고 설명하겠어? 하지만 키리에 너는 창가에 수국이랑


자카란다가 심겨 있다고 소개해야 더 좋아하긴 하겠다!”

라우라는 상쾌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키리에의 어깨를 살짝 찔렀다.

“거절하지 마라? 내가 편지 보낼 주소는 있어야지.”

분위기를 밝히는 라우라의 농담에 키리에가 미소 지었다.

“거절하면 시가 220 억짜리는 어디로 가나요, 포트듀케인 후작님?”

그녀의 장난스러운 말에 라우라와 마리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들이 아는 키리에는 그렇게 진지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에 키리에는 여전히 장난을 제법 좋아하고, 빈정대는 건 잘하고, 맡은
일에 조금 열심인 친구일 뿐이었다.

“그거야 제 비밀 사재 아니겠어요?”

“라우라.”

“아하하! 농담입니다, 공작님!”

라우라의 능청에 마리아가 별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키리에. 호국경이 되면 공식적으로 뭔가를 해야 할 일은 없어지잖아. 뭐 하면서 지낼 생각이니?”

키리에가 멈칫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내내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런데 아마…….”


그녀는 발끝을 내려다보며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너희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할 것 같기도 해.”

라우라와 마리아의 눈이 커졌다. 키리에의 얼굴에는 여전히 망설임이 가득했다. 그를 본 라우라가


키리에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단호한 빠르기, 상냥한 몸짓과 달리 조금 속상한 얼굴이었다.

“이거야 원. 그 사람은 너랑 그렇게 오래 지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너를 잘 알아?”

키리에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타니엘을 말하는 거야?”

“그으래! 전설경이 네가 그렇게 말하면 이 말을 해 주라더라! 원래 내가 한 말인 척하려고 했는데,


상인은 원산지를 속이면 안 되는 법이거든.”

라우라가 윙크했다. 그리고 배시시 미소 지었다.

“하고 싶은 걸 해, 키리에. 이제 괜찮아.”

***

루비니아에게 향하는 두 사람을 배웅하고 왕궁을 나선 키리에는 마법으로 모습을 숨겼다. 힘이 있다는 건
편리했다. 언젠가 고요한 일상은 강자의 것이라던 나타니엘의 말이 떠올랐다.

거리로 나선 키리에의 귀에는 익숙한 이야기가 낯선 탈을 쓰고 들려왔다.

“왕궁에서 일하던 사람한테 들었는데요, 알고 보니 국왕이 제일 나빴대요.”

키리에가 걸음을 멈추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흥분한 소년 하나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사실 건국 때부터 전설경이 종말을 봉인하고 있다가, 도리어 종말에 먹혀 사악하게
물들었던 거래요.”

“아, 그래서 키리에 뷰캐넌한테 그런 짓까지……?”

“네! 그런데 국왕 놈이 그걸 알면서도 그 힘을 이용하고 싶었던 거지!”

“어떻게?”

“난들 아나요? 마법으로 요렇게 조렇게 잘 주무르면 되나 보죠! 아무튼, 국왕이 나쁜 마음을 먹었는데,
여기서 호국경이랑 키리에 뷰캐넌이 나타난 거야!”

“호국경은 이해가 가는데, 사실 키리에 뷰캐넌은 힘없는 보통 사람이었잖아. 무슨 수로?”

“뷰캐넌이 원래 마법사 가문인 거 잊었어요? 옛날이야기긴 하지만. 위기의 순간이 닥치니까 짠! 하고


능력이 발휘된 거 아닐까요?”

“그럴 거였으면 진작 생기고도 남지 않았나? 알다시피, 그, 연극이…….”

대답하던 중년 남자가 말을 마치지 못하고 헛기침했다.

“그러니까 키리에 뷰캐넌이 더 대단한 거죠! 난세에는 항상 영웅이 나온다던데, 진짜긴 한가 봐요.”

“하긴, 나도 그 날 멀리서 그 여자가 마법 쓰는 걸 봤는데…… 괜히 눈물이 나더라고. 신이 내려온 줄


알았어. 역시 트레베레움은 드높은 신에게 사랑받는 나라가 맞나 봐.”

“윽. 저도 사실 그랬어요. 전설경이 연극을 할 때 모르는 척했던 게 좀 미안하더라고요…….”

소년과 주로 대화하던 남자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그거야 상대가 전설경이니까…… 건국 영웅이 하는 일이니 뭐든 맞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뚱뚱한 남자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이경 모두가 모습을 안 보이잖아.”

“어, 글쎄요……. 전설경은 죽은 게 확실하다던데, 호국경은 잘…….”

대화를 주도하던 소년이 어리숙하게 굴자,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그럼 작위를 하나 더 만들어야 하나? 삼경 되는 거야?”

“있던 걸 주긴 좀 그렇겠지?”

“에이, 새로 해 줘야지.”

“안 받으면 어떡해?”

사이에서 누군가가 사실 이 모든 게 왕가와 전설경, 그리고 키리에 뷰캐넌이 짜고 친 연극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했으나 사람들의 뭇매를 맞고 금세 사그라들었다.

사람들 모두 키리에 뷰캐넌이 얼마나 감쪽같이 속았는지, 얼마나 처절하게 갇히고 묶여 지냈는지, 키리에
뷰캐넌이 도망친 이후로 수도가 얼마나 살 떨리는 분위기였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 루비니아 캐스너도 대단했다던데?”

“아! 맞아요! 사람들 다 도망칠 때, 왕세자를 먼저 찾아갔다면서요? 솔직히 시작은 불륜…….”

“야, 입조심 해라, 꼬마야. 이제 왕비님이시라고.”

“헤헤. 욕도 아니잖아요! 솔직히 이렇게 된 마당에 누가 오레윈브리지를 곱게 봐요?”

“너 그러다 밤에 누가 문 두드리는 수가 있어…….”

키리에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떠들썩한 목소리가 멀어져 갔지만, 거리에서는 여섯 명 중 한 명이 전설경,


호국경, 오레윈브리지, 키리에 뷰캐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갈 곳이 있었다. 진작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럴 엄두를 못 내던 곳이었다. 그런


키리에의 심정을 알았는지 궁에서 헤어지기 전, 마리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참. 그리고, 네가 들르면 좋을 것 같은 곳이 있는데.’

‘어디를?’

‘……오티움 국립묘지.’

키리에가 탁 트인 국립묘지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 아래 흰 묘비들이 하얗게 빛났다.

길에서 산 꽃다발을 들고서, 키리에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 묘비로 다가갔다.

그러다 문득 묘비 앞에서 희고 투명한 무언가가 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수국이었다. 태양 아래서도 녹지 않는 투명한 꽃들이 사방에서 찬란히 빛났다.

[수국은 계절이 아직이라.]

그리 말하던 나직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키리에는 머뭇거리다 손가락 끝으로 꽃잎을 건드렸다. 차가웠다. 누군가의 손가락처럼.

“어딜 그렇게 돌아다녔나 했더니…….”

실소가 흘러나왔다.

마리아를 만나고, 라우라를 만나고. 루비니아를 만나고, 또 아마 그레이를 만났겠지. 자신이 움츠리고
있는 동안, 그는 꽤 바빴던 모양이다.

나타니엘이 정말 자신과의 이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떨어져 있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을 리 없었을
텐데.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키리에가 조금이라도 더 좋아할 것 같은 쪽을 택했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지 않으리란 것을 그도 알았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그녀가 좋아할 것 같은


부분은 일단 모조리 챙기고 본 것이 참으로 나타니엘다웠다.

냉기가 남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키리에는 천천히 묘지를 걸었다. 곧 익숙한 이름을 찾아냈다.

아론 피츠. 그리고 멜로니 버츠.

키리에는 아론의 묘 앞에 오래 서 있었다. 혹시라도 아론의 환각이 나타날까 기다려 보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키리에가 몇 걸음을 옮겨, 멜로니의 묘비 앞에 섰다. 멜로니의 다정한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아가씨. 삶은 그리 각박하지 않아요. 아가씨 잘못도 아니고, 산 사람들도 결국은 살아야지 않겠어요?’

키리에는 무릎을 꿇고, 천천히 두 사람의 묘비 앞에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마지막 애도였다.

[둄 2 절갠 교환재공타싸 x]
26. 돌아갈 곳

세자르 뷰캐넌의 장례식은 단출하게 이루어졌다. 어느 선량한 사람이 하늘로 돌아가기 좋은 날이었다.
그게 세자르 뷰캐넌은 아니겠지만.

죽은 세자르의 입술 사이에서 벌레 하나가 기어 나오는 소동을 제외하면 조용한 장례식이었다.

작은 신전에서 진행한 추도식이 끝나고, 관을 운구하기 전이었다. 키리에는 천천히 일어나 사람들을
접대하고 있는 그레이에게 다가갔다.

“그레이.”

“으, 응. 키리에……! 뭐 맘에 안 드는 거라도 있어?”

그레이가 당당하면서 비굴하게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사람들은 자리를 피해 주었고, 키리에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생각해 보니, 이제 볼 일이 없을 것 같더라고.”

“응.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아쉬워서 어떡하지?”

그레이는 호국경인 키리에를 이용할 수 없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반, 절대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후련한


마음이 반쯤 섞인 얼굴로 웃었다.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좀 아쉬운 거 같아서.”

“응…… 응?”

“좀 아플 거야. 느베야, 물러나.”

“네.”

“뭐?”

영리한 하인 느베야가 빠르게 그레이의 의자를 놔두고 이탈했다.

“자, 잠깐……!”

키리에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술식 여섯 개가 허공에 그려졌다. 곧이어 강하게 압축된 공기가 그레이를
명치를 향해 튀어 나갔다.

“크헉!”

그레이는 여섯 대의 마법을 맞고, 세자르가 누워 있는 관까지 날아갔다.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알 바 아니지만.

그 위에 대고 키리에는 언젠가 레드로우트에서 그레이가 자신을 때린 뒤 한 말을 돌려주었다.

“진짜 다리 못 쓰게 됐구나. 예전 같았으면 바로 시끄럽게 굴었을 텐데. 미안하다고는 안 할게. 그냥


확인 좀 해 보느라 그랬어.”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누구 하나 키리에를 탓하진 않았다. 그저 그레이를 흘겨보며 쑥덕대기
바빴다.

“그레이 뷰캐넌 공작이 뭔가 잘못했나 봐요.”

“장례식이긴 하지만…… 이해할 만한 일이 있었겠죠? 차기 호국경이잖아요.”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터뜨릴 수도 있는데, 저 정도로 봐주는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지.”

“그냥 모른척하죠. 행여나 나중에라도 이런 위험한 사태가 또 생기면 도움이라도 받아야…….”

우스워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나타니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손바닥 뒤집듯 달라진 태도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뻔히 보이는 욕망이 그저 우습고 재밌었다.

키리에는 더는 웃음을 참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곤, 소리 내어 웃으며 장례식장을 나왔다. 과거의


키리에 뷰캐넌을 그 아비의 관 속에 남겨 둔 채.

출구로 나 있는 숲을 걷던 키리에는 작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안네마리?”

“네. 저예요, 아가씨.”

키리에가 자리에 우뚝 섰다.

안네마리는 평소의 메이드복 차림이 아니었다. 딱 한 벌 있는 외출복에 진한 녹색의 케이프, 손에는


가죽으로 된 트렁크 가방, 등에는 대륙 너머에서 빌려 왔다던 긴 창까지.

여행을 떠날 사람의 모습이었다.

안네마리가 방긋 웃었다.

“아가씨. 마지막으로 한 번만 저를 안아 주실래요?”

키리에는 조용히 다가가 안네마리를 안아 주었다. 안네마리는 트렁크를 쥔 손에 힘을 준 채, 남은 손으로


키리에의 등을 토닥거렸다.

“안느. 키가 큰 것 같은데?”

키리에가 얼마 뒤, 몸을 떼고서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요? 저도 어른이 되려나 봐요!”

“그러게. 금방 나보다 더 커지겠는걸.”

안네마리가 씩 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커져도 이젠 아가씨를 지킨다고 말할 수가 없어졌네요!”

키리에는 조용히 물었다.

“서운하니?”

안네마리가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뇨! 이제 누구도 아가씨를 해칠 수 없어져서 안심이에요.”

“낯설진 않고?”

“아가씨는 아가씨인걸요.”

안네마리의 대답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키리에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흘려보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안네마리. 그 날, 괜찮았던 거야?”

안네마리가 조용하게 숨을 들이켰다.

“저한테는 별일이 없었어요.”

잔뜩 들이마신 숨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아가씨한테 사과드릴 게 있어요.”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구나.”

안네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르 뷰캐넌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키리에도 간략히 전해 들었다. 하지만 안네마리에게 세자르의 호위를
맡긴 것도 아니었고, 그 날은 비슷한 일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굳이 따지자면 사람들의 악한 본성이
문제였을 뿐이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안네마리.”

“제가 말렸어야 했어요. 주인님이 아가씨를 찾으러 위험한 곳에 가겠다고 했는데, 저도 아가씨가
걱정돼서 그걸 말리지 못했어요…….”

이상한 말을 들은 키리에가 멈칫했다.

“아버지가 나를 걱정했다고?”

“네.”

안네마리가 손을 당겨 키리에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말려도 듣지 않았어요. 저는 주인님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아가씨를 걱정했다는
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키리에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가만히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자 안네마리가 고개를 숙였다.

“그랬는데 제가 한눈을 팔아서 나쁜 사람들이 주인님을……. 죄송해요, 아가씨…….”

자책하는 안네마리의 모습을 보며, 키리에는 어쩐지 몹시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생판 모르는 남의
부고를 듣는 듯했다.

“신경 쓰지 마.”

키리에는 그런 자신이 낯설어, 별다른 반응 없이 안네마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보다, 아버지가 혹시 유언 같은 건 남기지 않았니?”

안네마리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들었어요. 다른 사람한테 말할 게 아니라서 아무한테도 이야기는 안 했어요.”

“그래? 가문을 어떻게 하라든?”

키리에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하는 말에 안네마리의 표정이 약간 울 듯이 찡그려졌다.

“아뇨……. 그런 게 아니었어요.”

“재산 이야기였니?”

“아뇨.”

안네마리가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은 마지막에 아가씨를 걱정하셨어요.”

키리에는 잠시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나를?”

“네.”

“아버지가?”

“네.”

안네마리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키리에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 하셨어요.”

키리에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거짓말.’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 세자르 뷰캐넌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원래 안네마리는 거짓말을 할 때면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곤 했는데, 지금 한쪽만 남은 안네마리의


눈은 키리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키리에의 의구심을 눈치챈 안네마리가 단호하고 무구하게 말했다. 검은 눈은 맑았다. 어딘지 간절하기
보이기도 했다.

그 눈을 보자 문득 이제 그게 거짓말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리에가 천천히 팔을 뻗어 안네마리의 몸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 줘서 고마워.”


“…….”

“고생했어, 안느.”

엇갈린 고개 너머로 안네마리가 숨을 참는 것이 느껴졌다. 숨인지, 울음인지는 안네마리 본인만 알


것이다.

안네마리는 자리에 선 채로 머뭇거렸고, 키리에가 낮게 웃었다.

“날 안아 주지 않을 거니?”

그녀의 말에 안네마리가 들고 있던 트렁크 가방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작은 손으로 키리에의 등을 와락


껴안으며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가씨……! 안네마리는, 안네마리는……!”

이제 명백했다. 울음을 참는 목소리였다. 키리에는 몇 번이고 안네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옷의


앞섶이 젖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안네마리가 더 소리 높여 울었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키리에는 묻지 않았다.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안네마리는 한참 뒤에야, 발갛게 물든 한쪽 눈을 비비며 물러났다.

“……아가씨.”

“응.”

안네마리가 가슴을 들썩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전 이제 떠날 거예요.”

안네마리의 말에 키리에는 지긋이 금발 고수머리의 작은 시녀를 내려다보았다. 의외로 큰 충격은 없었다.


마음속 깊이, 왠지 이렇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있었다.

“베일이랑 창을 돌려주러 가야 해요. 빌려주는 대신, 반납하면서 저도 그쪽으로 이주하기로 했거든요.


얼굴도 모르는 저한테 이런 귀한 걸 빌려준 것도 그거 때문이에요.”

“그럼 어떤 곳인지는 모르는 거니? 위험한 곳이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잘해 줄 거 같아요! 왜냐하면, 인간이랑 엘프의 혼혈은 원래는 있을 수 없는 거래요.


아주아주 특이한 거라서, 동화 속 공주님처럼 대접해 주겠대요!”

안네마리가 헤헤 웃었다.

키리에는 물끄러미 안네마리를 바라보다 담담히 물었다.

“가지 않을 수는 없는 거지?”

안네마리의 미소가 조금 달라졌다. 몹시 어른스러운 미소였다. 그녀는 지금, 정말로 같은 해를 산


인간만큼이나 노숙해 보였다.

“네. 저는 이제 자랄 때가 됐어요. 아가씨의 다정함에 기대서 영영 어른이 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키리에는 말없이 과거를 떠올렸다.


세상천지에 홀로 남은, 투기장 노예였던 혼혈 여자아이. 그녀는 마음 둘 곳이 필요했고, 키리에 역시
안네마리를 돌보며 간접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위로했다.

하지만 이제 안네마리는 어른이 되었고, 키리에도 더는 과거의 자신에게 매여 있지 않았다.

“원래는 아가씨의 수명이 다하면 그때 넘어가기로 했어요. 아시다시피, 엘프는 인간보다 오래 사니까요…
….”

안네마리가 길 저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때마침 느티나무가 바람에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안네마리의 말 아래에 음악처럼 깔렸다.

“그렇지만…….”

안네마리가 키리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는 이제 괜찮으니까요.”

안네마리는 곧 트렁크 가방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타박타박, 오솔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더는 자신을 3 인칭으로 지칭하지 않는 여자아이의 등은 굳세고 또 강인했다. 정말로 괜찮아진 건


안네마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만날 수 있지?”

안네마리의 모습이 숲에 가려지기 직전, 키리에가 던지듯 말했다.

안네마리는 몸을 돌리고서,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한 웃음이었다.

“당연하죠!”

***

며칠 뒤, 사람들이 트레베레움의 중앙 광장에 모였다. 키리에를 호국경으로 임명하는 식이 있는 날이었다.

귀족들이 전부 참석했고, 수도의 모든 사람이 모였다. 키리에는 그들과 떨어진 단상 위에 홀로 앉았다.

“모두 이렇게 모여 주어서 고맙소.”

악대의 연주가 끝나자, 새 국왕 이든 오레윈브리지가 앞으로 나섰다.

“트레베레움의 영고성쇠 가운데, 지난 몇 달간 있던 일만큼 더 큰 불안함을 느낄 사건이 없었을 거요. 나


이든 오레윈브리지는 국왕으로서…….”

마법으로 키운 목소리가 조금 듣그럽게 주변에 퍼져 나갔다. 대부분은 시민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돌려 말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쁜 게 누구라고?”
“전설경이랑 국왕이지.”

“난 처음부터 전설경이 좀 섬뜩했어.”

“사실 나도……. 남들이 좋아하니까 말 못 했을 뿐이지.”

“그걸 버텨낸 키리에 뷰캐, 아니지, 호국경이 진짜 대단한 거야.”

이든이 헛기침했다.

“비록 불유쾌한 불상사가 있었으나…….”

새 화제가 나오자 사람들이 귀를 쫑긋거렸다.

“불상사라니, 무슨 말이야?”

“자네 모르나?”

사람들이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속닥거렸다.

“며칠 전, 누가 전 국왕을 몰래 죽였다는군. 목을 쳤다던데?”

“자넨 그걸 어떻게 알아?”

“그 미친놈이 개 꼬리에 자른 머리를 묶어 놓고 시장을 돌게끔 해 놨지 뭔가.”

“허…….”

“뭐, 나라 꼴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심지어 다들 그게 국왕의 머리란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지.”

“개는 어찌 됐는데?”

“어…… 그러게 말일세. 은빛 개였는데 분명…….”

이든이 사람들의 수런거림을 덮기 위해 더 강하게 말했다.

“이러한 시기와 원한이 왕가를 향한 반발심리를 충동질하는 결과가 된다면, 왕가는 이를 가만 보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키리에는 물끄러미 그가 연설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든은 진저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 유감이 없는 듯했다. 그녀가 자식의 마력을 뽑아내기 위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하지만 일전의 경험 때문인지, 이든은 연신 불안한 눈으로 루비니아를 돌아보았다.

“앞을 봐야죠, 이든!”

루비니아는 상냥하고 사랑스럽게, 그러나 키리에 눈에는 아무리 봐도 귀찮아하는 듯한 기색으로 이든에게
웃어 주었다.

이든이 애써 태연한 척 연설을 이어 갈 때였다.

“신께서 그의 지상 대리인인 오레윈브리지를 굽어살피시어…….”


그때 관중 속 누군가가 외쳤다.

“뻔뻔하기도 하지!”

이든의 몸이 덜컥 굳었다. 병사들이 경계 태세를 취했지만, 하도 많은 병사가 그만둔 탓에 시민의 수보다


병사의 수가 월등히 적었다. 병사들 역시 별로 진심으로 대립하고 싶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 개지랄을 떨어놓고, 뭐? 대리인? 오레윈브리지? 웃기지 말라 그래!”

누굴까? 용감하기도 해라. 키리에가 심드렁히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누군가 먼저 돌을 던져 주길 기다리고 있던 모양인지,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그래! 국왕이 욕심만 안 부렸어도 되는 건데!”

“그러면 호국경이 죽지도 않았을 거 아냐! 또 이런 위험한 일이 생기면 누가 우릴 지켜 주냐고!”

자연히 사람들이 키리에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키리에!”

“키리에!”

“키리에!”

사람들이 발을 굴렀다. 그 많은 수의 사람들이 동시에 발을 구르자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들은


키리에가 아주 작은 신호라도 보내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눈앞의 왕궁을 무너뜨릴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태도. 남에게 떠넘기기 급급한 책임.

그 사이에서, 키리에는 냉소했다.

이토록 의미 없고 공허한 지저귐을 신경 쓰고 살았다니, 시간이 다 아까울 지경이었다.

키리에가 천천히 일어나 단상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키리에! 키리에!”

“호국경이 우리 곁에 있다!”

키리에는 단상의 끝, 국왕 부처와 귀족들이 앉은 자리 가까이에서 멈췄다. 그리고 주변의 소란을 무시한
채 루비니아를 응시했다.

“루, 루, 루비……. 얘, 얘기가 다르잖아. 다, 당신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했잖아……!”

“가만있어요, 이든.”

“루, 루비……!”

도망치고 싶어서 안달하는 이든과 달리, 루비니아의 녹색 눈은 몹시도 강건했다. 그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키리에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는 자신이 대마법사인 것을 알면서도.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 보면 루비니아는 항상 그랬다. 사교계의 얼굴 없는


적들과 달리, 항상 정면으로 키리에와 맞섰다.

정말 신경 써야 하는 건 입만 산 백만 명이 아니라, 이렇듯 눈을 마주 보는 단 한 명이다. 나타니엘은


그걸 알고 있었다.

키리에는 천천히 루비니아 앞에 서서, 상아색 로브를 뒤로 펼치며 허리를 굽혔다.

“바라건대, 선성이 상하로 자자한 트레베레움의 새 태양께서 내내 기체후 일향 만강하시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던 사람들이 술렁였다.

“호국경이 왕비한테 예의를 차리는데……?”

“뭐야, 왕가를 뒤집을 게 아니었어?”

“아, 알 거 같다. 나라가 더는 혼란스럽길 바라지 않는 거 아냐? 키리에 뷰캐넌은 원래 그랬잖아.”

“아!”

“그런데 왜 국왕이 아니라 왕비에게……?”

“왕비랑 뭐가 있나 봐.”

루비니아는 그 모든 수군거림이 들리지 않는 척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키리에의 눈에는 그녀의


머리가 맹렬히 회전하는 것이 보였다.

올드시우다드 공작과 포트듀케인 후작이 돕는다 해도 루비니아는 정계에 지지층이 없다. 기득권층을
설득하긴 어려우니, 그녀는 민심을 휘어잡아 맞서야 한다.

키리에는 거기에 약간의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거래에 가까웠다. 키리에가 넘긴 영토와, 그녀가 남기고
가는 사람들을 잘 책임져 달라는.

혹시 부담스러워할까?

키리에가 짓궂은 눈으로 루비니아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루비니아는 씩 웃더니, 낭랑하게 외쳤다.

“꺄아! 너무 좋아! 어떡하죠, 이든? 호국경이 제게 인사해 줬어요! 저보고 태양이래요! 루비가 그렇게
빛나요? 반짝반짝해요?”

양손으로 뺨을 감싼 채, 루비니아는 도전적인 눈으로 키리에의 시선을 받아쳤다.

그래. 그래야지. 키리에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루비니아 캐스너, 그녀야말로 폰에서 시작해 체스판의 끝에서 퀸이 된 여자. 그녀는 남을 책임지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다. 잘해 낼 것이다.

“고마워요, 키리에 경! 루비가 힘낼게요. 아! 물론 이든도.”

그때 루비니아와 키리에 사이에 이든이 끼어들었다.

“잠깐, 키리에 뷰캐넌 양. 지금 말 다 하셨소? 국왕인 나를 두고 왕비에게 태양이라니, 그건……!”

키리에가 순식간에 미소를 거뒀다.


“그건?”

“그러니까!”

“그러니까?”

“바, 방금…….”

이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시선이 주변으로 굴러갔다.

“뭐야. 또 쟤야?”

“전설경 때도 저러더니…….”

“또 보여 주나?”

“엄지만 한 게……. 마음 말이야, 마음.”

웃음기 없는 눈으로 킬킬대는 시민들, 별반 다를 거 없는 병사들, 할 줄 아는 건 모른 척이 전부인


귀족들.

“날이 덥군요.”

그 사이에서 마리아 올드시우다드 공작이 냉랭하고 우아하게 말했다.

“그러게요, 공작님? 제 눈엔 별문제 없어 보이는데 말이에요!”

라우라 포트듀케인 후작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다른 가문의 가주들은 갑자기 헛기침하는 법을 새로 배운 사람들처럼 고개를 돌렸다.

“하, 하지만 왕국의 태양은 국왕을 이르는…….”

이든이 마지막으로 루비니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루비니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이든.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결국, 이든은 애써 근엄한 척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래……. 그대가 좋다면 됐어……. 그렇지만 나중에 왕궁의 예절을…….”

“어머, 안색이 좀 창백해요. 앉아 있을래요? 나머진 제가 다 할게요!”

“아니, 그럴 것까진…….”

“아니야, 이든은 아픈 게 분명해요! 걱정하지 말고 나한테 맡겨요!”

루비니아는 방긋방긋 웃으며 이든을 끌고 가, 기어이 자리에 앉혔다.

“괘, 괜찮다니까?”

“괜찮긴요! 우리 이든, 내 말 잘 듣기로 했죠?”


“그건…….”

루비니아가 귀엽게 눈을 부릅떴다. 우스운 꼴이 된 왕세자를 성심성의껏 보살피고, 위기 상황에 가장


먼저 구하러 찾아온 여자의 말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이든이 지친 얼굴로 자리에 앉아 헛기침했다. 루비니아가 앞으로 나서서 윙크했다.

“자, 앞으로는 제가 진행할게요?”

키리에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짧게 묵례했다.

때마침 궁내관이 서임식에 쓰는 왕홀을 가져왔다. 루비니아가 냉큼 그것을 들어, 키리에의 어깨 위에


얹었다. 장난스럽던 루비니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이 나라가 신의 섭리 아래에서 자유로운 평화를 되찾은 것에 대하여 삼라만상을 지배하고 뭇 국가들의


명운을 주재하며 그 섭리에 의한 도움으로 인간의 모든 결함을 메우는 드높은 곳의 여신께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녀가 첫 문장을 말하자마자 키리에는 다시 웃을 뻔했다. 공부를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잘할 것이다.

“신께서 트레베레움에게 평온의 상태를 즐거이 허락하셨기에, 나 루비니아 오레윈브리지는 이날로


트레베레움의 상서로운 새 시작을 기하려 한다.”

루비니아가 곧 왕홀로 키리에의 양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많은 의미가 담긴 녹색 눈이 씩 웃으며


키리에를 보았다.

“하여 나 여기 키리에 뷰캐넌의 고결한 희생을 기리며, 인간이 부여한 이름을 수급하고 그녀를 호국경에
봉헌하노라.”

연설이 끝나자마자 키리에가 약간의 마력을 사용했다. 선명한 금빛이 왕홀에서 터져 나갔다. 하늘에서
금빛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와……!”

마법으로 만든 연출인 줄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기뻐했다. 시민들은 곧 키리에와 루비니아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키리에의 역할은 거기가 끝이었다. 나머지는 사람들을 즐겁게 할 여흥 무대였다. 키리에가 조용히
무대에서 내려가려는데, 재빨리 다가온 루비니아가 그녀의 팔뚝을 붙잡았다.

“뭔가요?”

키리에가 루비니아를 바라보았다. 루비니아는 계속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그 말에 키리에가 양팔을 벌렸다. 루비니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뭔데요?”

“이제 우린 평생 친구라고 말하면서 끌어안을 차례 아니었어요?”


“미쳤어요?”

“겪은 게 얼만데 좀 제정신 아니어도 어떤가요.”

“참나. 원래 이런 사람이에요?”

“네. 생각해 보니 원래 이랬던 것 같네요.”

키리에의 뻔뻔한 대답에 루비니아가 헛웃음 쳤다. 그리고 곧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키득거렸다.

“내가 진작 알아봤지!”

“아무렴요. 고상한 척하느라 좀 힘들더라고요.”

키리에의 나긋한 대답에 루비니아가 키리에의 팔뚝을 놓았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나, 장난스럽게 웃었다.
잠깐이지만 그녀의 눈에 진지한 빛이 스쳤다.

그러나 루비니아는 이내 늘 그래 왔듯이 사랑스럽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배짱 있으면 나중에 놀러 와요! 발판이 꺼지는 함정은 없을 거고, 찻잔에 독이 묻어 있지도 않을
거랍니다!”

키리에의 눈인사를 끝으로 루비니아는 다시 단상 위로 돌아갔다.

키리에가 몇 걸음 안 갔을 때, 다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영주님.”

프로노이아의 마법사들이었다. 그중 분홍색 풍선으로 된 하트 모양 모자를 쓰고 있는 노 마법사와, 흰


턱시도를 입은 포 박사, 여전히 자유로운 차림새의 호크송 박사가 앞으로 나섰다. 키리에의 얼굴이
밝아졌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어. 모두 그동안 고마웠어.”

“아가씨……!”

훌쩍이는 포 박사의 포옹을 키리에는 웃으며 받았다.

“시워드 박사는 걱정하지 마. 뷰캐넌에서 돌봐줄 거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왕가, 올드시우다드,
포트듀케인. 셋 중 하나로 가서 말해.”

“감사해용……. 이 살라미시 포는, 절대 아가씨를 잊지 못할 거예요!”

호크송 박사는 그윽하고 다정한 눈인사와 함께 키리에와 악수했다.

그 뒤에는 프로노이아의 마법사들을 대표해 긴 수염을 기른 노 마법사가 나섰다.

“그러니까…… 이제 저희 영주님이 아니게 되시는 거군요.”

그가 조금 시무룩한 얼굴이기에 키리에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새 영주가 필요한가?”

“그건 아닙니다만…….”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마침 루비니아 양에게 프로노이아를 자유 도시로 지정해 달라고 말해
놨으니, 하던 대로 자유롭게 지내는 수밖에.”

마법사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키리에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왕실 서고에 있는 금서들을 풀 거야. 원본은 그대로 두어야겠지만, 필사본은 프로노이아


대도서관에 두는 것을 허락받았어.”

“꺄아! 왕실 서고라니!”

“이럴 수가…….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시조 발라브리가의 연구실이 발견되어서 그 연구 내용도 곧 공표될 거야.”

마법사들이 뒤쪽에서 환호했다. 키리에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만하면 취소된 전(前) 호국경과의 면담을 만회할 정도가 됐으려나?”

노 마법사가 가는 손가락을 펼치며 살짝 허리를 굽혔다.

“물론이지요.”

키리에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녀는 주머니를 뒤져, 주머니보다 큰 책을
꺼냈다.

“참. 이걸 받아.”

“이건……?”

“어느 역사가의 시조 시절 기록이야. 마지막은 오레윈브리지의 마법식이고.”

키리에는 그것을 가주 전용 서재에서 발견했다. 마법으로 꽁꽁 숨겨진 책은 마법사가 아니면 읽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비 마법사가 읽을 수 있는 건 마지막 문단뿐이었다.

「389 년 12 월 1 일.

나는 드디어 뷰캐넌 백작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여 여기에 겨울의 왕을 죽음에서 돌이킨 마법의
술식을 기록한다. 누군가가 이것으로 그를 도울 수 있길 바라며.」

키리에는 세자르 뷰캐넌이 어째서 나타니엘에게 그렇게 뻔뻔하게 굴 수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왕가가
나타니엘을 죽이려 들면, 자신이 가진 술식이 크게 활약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고작 그거였다.

키리에는 자신의 두려움이 그저 하룻강아지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깨닫고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내 사유 재산이니까, 프로노이아에 완전히 증여하는 것으로 하지.”

감격한 얼굴로 망설이던 노 마법사는 이내 작게 속삭였다.

“호국경께서는 이제 저희 영주님이 아니시지만…….”

반달 모양 안경 너머의 눈이 다정한 빛으로 빛났다.


“늙은이의 손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부르십시오……. 그때 가선 저희 평균 연령이 85 세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노 마법사가 윙크한 뒤 몸을 돌렸다. 그 뒤를 이어 수십 명의 마법사가 차례로 윙크를 하고 떠나갔다.


키리에는 일일이 그들을 배웅했다.

그리고 이제 더는 배웅할 사람도, 그녀를 부를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키리에는 마침내 그 어떤


책임도 없이 혼자가 되었다.

키리에는 일부러 마차를 잡지 않고 걸어서 수도를 나왔다.

특별히 짐이 많지는 않았다. 필요하다면 세상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아서, 도리어 뭔가를 손에 움켜쥐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타니엘이 그러했듯이. 있는 짐마저 작게 축소해 주머니에 넣고 나니 양손이 두
발만큼이나 가벼웠다.

“신분증을 부탁드립니다.”

유일하게 그녀를 잡아 세운, 성문을 담당하는 문지기는 머리에 쓴 로브를 살짝 벗어 보여 주자 바로


경례했다.

“실례했습니다.”

“수고해.”

셀 아렐라노를 완전히 나선 키리에는 펼쳐진 길을 바라보았다. 어디로도 갈 수 있었다.

“어디로 갈까…….”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아직 바다를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서쪽으로 꼬박 하루를 걸었다.

그러다 아주 근사한 아름드리나무를 마주쳤을 때, 키리에는 아무 계획 없이 그 밑에 앉았다.

며칠이고 그저 앉아 있을 뿐인 하루가 지나갔다.

키리에는 나무 그늘에 앉아 하늘에 해가 뜨고, 석양이 지고, 밤이 되어 별이 뜨고, 천체가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사이 누구도 키리에를 부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키리에를 힐끗거리긴 했어도, 무시하고 지나쳤다.

키리에가 웃으며 나무기둥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는 이제 어디에도 빚진 것이 없었다. 나타니엘이 진실로 그녀의 모든 책임을 거둬간 것이다. 이제야
그것이 실감 났다.

키리에는 다시 일어나 강을 따라 걸었다. 피곤하면 멈춰 섰다. 배가 고프면 대충 아무거나 주워 먹었다.


반주 없이 노래했고, 춤추고 싶어서 춤을 추었다. 심심해서 강을 가르기도 했고, 괜히 나무 위로 걸어
보기도 했다. 키리에는 자신이 생각보다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라는 걸 새로 알게 되었다.

굳이 셀 필요도 없는 시간이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환희도 점차 가라앉고,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이 드러났다.


턱없이 막막하고 아득한 외로움이었다.

전과 달리 손가락 하나로 모닥불을 피워낼 수 있게 된 키리에는, 길에서 동떨어진 숲에 앉아 하늘에


흐르는 은하수를 바라보았다. 조금 못마땅하게도 그것을 보자마자 시리도록 푸른 눈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그것 또한 스쳐 지나가게 두었다.

레쇼의 마지막이 덩달아 떠올랐다.

〔여기가 마지막입니다. 키리에 뷰캐넌. 결정하십시오. 인간으로 남을지, 인간을 초월할지.〕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지금 조금 외롭다 하더라도, 다시 돌아가면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러니 어깨에 내리는 눈도 비도 온전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역시 사람인지라, 키리에는 때때로 외로움에 겨워, 뒤돌아 자신의 그림자를 보곤
했다.

어쩔 수 없이 그리 태어났다. 홀로 걷는 것에 지칠 때면, 공연히 남의 집 처마 밑에 기대앉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 밤에는, 공연히 달빛을 찾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나타니엘도 아마 그래서…….’

모포도 필요 없는 밤, 모닥불을 보며 키리에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이제는 모닥불의 붉음을 보고도 나타니엘을 떠올리게 되었으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왔을지, 왜 그렇게 태어났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너무 강하고 악하기에, 신은 그에게 외로움을 알게 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공연히 다른 집의 처마


밑을, 달빛 드는 창가를 찾아들게끔.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가지게끔 태어나지는 않았다. 아침이 되면 다시 홀로 걸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이제 그와 비슷한 입장이 된 키리에에게도 같은 길이 펼쳐져 있었다. 무엇도 책임지지 않는 대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은 그걸 선택했지만, 나타니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이다.

“…….”

모닥불이 사그라들 때면, 어김없이 그의 등이 떠올랐다. 지팡이를 짚은 채, 눈 내린 숲을 바라보던 그


견고한 등이.

새벽이 올 때면 힘겹게 그 기억을 지워 냈지만, 그게 갈수록 어려워지는 이유를 키리에는 알 수 없었다.

정처 없는 여행이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키리에는 어딘지 낯익은 산을 보았다.

번드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
단풍 사이로 작은 오두막집이 보였을 때, 키리에가 멈칫했다. 오두막집 옆, 양지바른 곳에 작은 자카란다
나무가 심겨 있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때마침 문을 열고 덩치 큰 털보가 나왔다. 그는 키리에를 보자마자 입을 크게 벌리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리에 님!”

키리에가 멈칫했다. 혼자 떠돌며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번드의 얼굴에 못 보던 주름이 생겨 있었다.

“음…… 안녕. 잠깐 들렀어. 폐는 아닌지 모르겠네.”

“폐라뇨, 하하! 이브! 이리 나와서 누가 왔는지 보렴!”

“우응?”

번드의 뒤에서 이브가 꼬물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키리에를 보며 배시시 웃고는 번드의 뒤에
숨어 버렸다.

“얘가 부끄럼을 타나 봅니다.”

키리에는 한 번 더 놀랐다.

“언제 저렇게 컸지?”

“시간이 꽤 흘렀으니까요. 들어오시지요!”

키리에는 자신에게 시간을 허황되게 보내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새로이 깨달았다.

“고마워. 실례할게.”

키리에가 번드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번드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타니엘 님은 같이 안 오셨나요?”

“……사정이 있어서.”

“그렇습니까? 일단 들어오십시오.”

번드는 더는 묻지 않았다. 여전히 배려심이 넘쳤다.

키리에는 빙그레 웃고서 전과 같은 자리에 앉았다. 놀랍도록 변한 게 없는 공간이었다.

“돈을 꽤 준 것 같은데, 집을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안 그래도 이브의 공부 때문에 이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 한 번 와 주시길 바랐는데, 다행인


일이죠. 하하.”

번드는 주방으로 들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브는 자기 자리에 앉아 얌전히 책을


읽었다.

전과 같았다. 나타니엘만 없고, 계절만 가을일 뿐이었다.

“그런데, 혼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산이 좀 험준해서 오시기에 괜찮았을지…….”

번드가 차를 내오며 말했다. 키리에가 웃으며 차를 받았다.

“그래도 한 번 와 봤다고 그리 힘들진 않았어.”

“다행이네요. 저, 그런데…….”

번드의 얼굴이 약간 흐려졌다. 키리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앞에 내어진 찻잔을 들었다.

“나타니엘 말하는 거지?”

“예. 무슨 일이라도…….”

잠시 고민한 키리에가 어색하게 속삭였다.

“사별했어.”

번드가 잔을 떨어뜨렸다. 그 소리에 놀란 이브가 고개를 들었다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사별? 별? 잘생긴 오빠?”

이브의 천진한 물음에 키리에가 오랜만에 지친 웃음을 지었다.

“응. 별이 됐어.”

이브가 웃었다.

“잘 어울려요…….”

“그러니.”

키리에가 이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브는 그녀의 손에 머리를 비비며 다시 웃었다.

“언니 보는 눈…… 반짝반짝. 별 같다고 생각했는데.”

키리에의 손이 멈칫했다. 내내 고요하던 그녀의 눈이 크게 요동쳤다.

그때 번드가 인자하고 초조한 미소를 지으며 이브에게 말했다.

“이브. 잠깐 들어가 있겠니? 언니가 오늘 이브의 침대를 쓰면 좋겠는데, 우리 이브가 요를 깔아 주면


아빠가 너무 고마울 것 같아.”

“응!”

이브는 싫은 소리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락한 오두막집 안, 정적이 주위를 감쌌다. 번드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테이블 밑에 떨어진 나무 잔을
주워 만지작거렸다. 그의 표정은 처참했다.

“대체 어쩌다……. 홀로 찾아오셨을 때 그리 슬퍼 보였던 이유가 있군요…….”


“나타니엘이 찾아왔었어?”

키리에가 놀라 되물었다.

“예……. 아마 예감하셨던 모양입니다. 말하지 말라고는 하셨지만…….”

“……뭘 했는데?”

“차를 마시고 가셨습니다.”

“차?”

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리에 님이 닮았다고 하시더군요. 아주 조금. ……물론 리에 님을 제게 빗대다니 아주 과분한 일인 줄


알라고도 말씀하셨지만요.”

“……들어주느라 고생 많았어.”

“그리고 사별한 제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키리에가 멈칫했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없으면, 어찌하냐고 하셨습니다…….”

번드가 눈을 질끈 감았다. 씨알 굵은 눈물이 흘렀다.

“그때는 그저 문제가 있나 보다 했을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키리에는 조금 당황했다. 어쩐지 아까부터 귀가 먹먹했다. 귀뿐만 아니라, 가슴 속에 가라앉아 있던


뭔가가 불안하게 흩날리는 기분이었다.

“……번드. 괜찮아.”

“죄송합니다, 저보다 더 힘드실 텐데…….”

“아니야. 별로 그렇지도 않아. 그냥 바닷물이 밀려왔다 나간 기분이야.”

“리에 님……!”

번드가 더 통곡하기 시작했다.

키리에는 그의 울음을 달래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문득 자연스럽게 입이 열렸다.

“아내가 그렇게 되고……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은 안 해 봤어?”

번드가 가슴을 들썩였다. 그는 아주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면서 울음을 참으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해 봤지요. 시도도 해 보고, 노력도 해 보고…….”

“그런데?”
아주 멍청하고 돼먹지 못한 질문인데도 번드는 키리에를 질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멍해지는 키리에의
얼굴을 보며, 더 크게 꺽꺽대며 울 뿐이었다.

“안 되더라고요. 그게 어디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거랍니까.”

“안 될까?”

번드의 젖은 눈이 키리에를 담았다.

“될까요?”

키리에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뇌가


아니라 다른 게 대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갈비뼈 안쪽에 있는 심장 같은 것.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르면,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세상의 즐거움에 취하면…… 잊을 수 있을지도 몰라.”

번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벅찬 슬픔과 동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를 보며 키리에가 한 번 더 말했다.

“그럴 수 있을 거야. 그렇지?”

“리에 님, 저는…… 원래는 여기서, 그럴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

“그런데, 알지만 저는…….”

“난 괜찮아. 자네 생각을 말해 봐.”

번드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양손으로 머리를 앞에서부터 쓸어 넘겼다. 힘겨워 보였다.

“……아니요.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찾아보면 더 있을지도 몰라.”

“아니요. 없습니다. 제 사랑의 형태는 이미 제 아내에게 맞춰졌습니다.”

“변하지 않는 건 없어.”

키리에가 단호하게 말했다. 언젠가 나타니엘이 말하고, 키리에가 부정했던 말이었다.

번드가 고개를 저었다.

“산 것은 모두 변합니다. 오직 죽음만이 불변을 약속하죠……. 죽음은 우리네 마음 한구석까지 함께


가지고 갑니다. 우리는 그걸 돌려받을 수 없고, 제 마음은 전부 제 아내가 가져갔습니다.”

“아니야.”

키리에의 부정에 번드는 상처받지도 않았다. 자신을 향해서 하는 말이 아니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키리에는 뭔가를 잃어버렸는데 그게 뭔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가 흘리는 눈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떨리는
눈을 가만히 응시하던 번드가, 손등 위로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나타니엘 님이 그리우신 거군요.”


키리에가 멈췄다.

“난…….”

목소리가 떨렸다.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정신마저 크게 흔들린 듯했다.

“아니야, 난…….”

말꼬리가 끊겼다. 댐이 무너지듯 온갖 생각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대체 자신에게 나타니엘은 대체 무언가.

아름다운 외모, 손끝에서 솟아나는 찬란한 보석, 강대한 힘.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적 유리알 같던 눈동자에 차츰 감정이 담겼고, 그녀의 말 한마디를 귀담아들었고, 농담을


걸면 농담으로 받아쳤으며, 잘해 주면 순수하게 기뻐했다.

자신 앞에서만 안절부절못하고, 아이처럼 심통을 부리기도 하고, 그리고 때때로 아주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가진 게 너무 많기에, 그가 정말은 무슨 마음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를 보아온 키리에는 안다. 나타니엘은 키리에가 먹을 게 없다면 자기 팔다리라도 잘라서 내밀


사람이었다.

키리에가 칼을 내밀면 심장의 위치를 알려 줄 사람이었다.

설령 키리에가 아주 강하고 부자에, 그는 아주 약하고 가난하더라도, 그는 가진 모든 것을 그녀에게


바쳤을 것이다. 키리에에게 그런 게 필요 없다는 걸 알아도. 눈앞에서 그가 준 것을 내동댕이쳐도.

키리에가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그녀의 고개가 무너지고, 숨이 거칠어졌다.

맞다. 그 무엇도 나타니엘을 대신할 수는 없다.

나타니엘은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했지만, 아무리 돌이켜봐도 그런 건 없었다.

내내 갖고 싶던 것만이 있었다.

그저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배가 부를 만큼 사랑받고 싶었다.

꼭 많은 사람일 필요도 없었다. 생에 다시 없을 기회여도 좋다. 딱 한 번, 그거면 되었다.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너무 많이 먹었어요. 이제 배불러요. 괜찮아요.’하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부모에게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누가 그런 것을 줄 수 있나.

하여 천천히 길드는 것이다.

아. 저건 내가 바라서는 안 되는 것이구나. 나는 저걸 허락받고서 태어나질 않았구나.

그때, 눈앞에 나타니엘이 나타났다. 기적 같았다. 마치 그녀만을 위해 준비된 선물 상자 같았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전설경이었고, 키리에는 뷰캐넌이었으며,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억제력으로 작용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사람들은 옆에서 그녀가 꼭 그 선물 상자를 풀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주변의 종용에 키리에는 더 알 수
없어졌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게 맞을까?’

나타니엘도 알고 있었던 거다. 그 상태로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걸.

키리에는 무릎 위에 떨리는 주먹을 얹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오랫동안 흐르지 않은 눈물이 뺨 위로 다시


흘렀다.

“이상하지 않아? 날 그런 식으로 대한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게…….”

무성한 수염에 눈물이 아롱진 번드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사람 마음에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정말 심각해 보였다면, 저 역시 그때 두 분을 그냥


보내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나타니엘 님의 눈빛이…….”

“눈빛……?”

키리에의 표정을 본 번드가 지친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그런 눈빛이어서 익숙해지신 모양입니다. 제가 볼 땐, 눈에서 꿀이라도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요.”

“…….”

“실례일지 모르지만, 오히려 명확하지 않았던 것은 리에 님 쪽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으시면


돕겠다 말씀드린 겁니다.”

다정하지만 냉정한 번드 카프. 키리에는 얼굴을 찡그렸다가, 이내 힘없이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맞아……. 그랬어.”

그녀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그땐 선택할 수가 없었어…….”

사람들, 책임, 해야 할 일. 그런 걸 무시하고자 하면 무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타니엘이 원하는 것도, 키리에가 원하는 것도 그런 게 아니었다.

선택을 한다면 자신의 뜻이고 싶었다.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

‘그럼 지금은?’

내내 안개 낀 것 같던 마음속에 별이 하나 떴다. 눈앞이 보얗게 흐려졌다.

“내가 하고 싶은 거…….”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곧 너그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번드를 향해 물었다.

“번드.”
“네.”

“더는 못 볼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만나러 온다면…… 기쁠까?”

번드가 아직 젖어 있는 눈을 껌뻑였다. 키리에는 시선을 빗긴 채, 약간 초조한 마음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번드는 이내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기뻐할 겁니다.”

***

‘그 일’이 있고 나서, 이제는 곶이 아니게 된 포베 만은 누구도 다가가지 않는 곳이 되었다.

왕비는 그곳에 망루 하나를 세웠다. 그리고 병사를 배치해 바다를 감시하게 했다. 당연하지만 평소에는
철썩이는 바다밖에 볼 게 없기에, 병사들은 별로 열심이지 않았다.

그날도 병사는 꾸벅꾸벅 조는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아무 이유 없이 잠에서 깬 병사가 습관적으로 포베 만을 바라보았다.

“어라?”

그리고 그 끝에 여자 한 명이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자. 외딴곳. 햇빛을 받으면 은빛으로 보이기도 하는 연보랏빛 머리카락. 짐 하나 없이 가벼운 손에,
흩날리는 상아색 마법사 로브.

병사가 그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그녀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멀리 가 있을래?”

거리가 아주 먼데도 여자의 목소리는 몹시 또렷이 들렸다. 병사가 뒤늦게 눈을 부릅떴다.

“호국……!”

그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이었다. 호국경은 꽃잎처럼 날아 바다로 들어갔다.

***
마법 덕에 숨을 잠시 멈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속에서 숨 쉴 수 있는 마법을 쓸 수도 있었지만, 별로
바닷물을 먹고 싶진 않았다.

키리에는 머리카락 사이의 공기 방울이 수면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춤추듯 발끝을 세우고서 천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해수면과 가까운 얕은 바다는 밝고 맑았다. 어디를 둘러봐도 연한 금빛의 햇살이 물결에 따라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상어 떼가 키리에의 주변을 맴돌다 금세 흥미를 잃고는 사라져 갔다.

키리에가 별 기대 없이 사방으로 마력을 펼쳤다. 되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넓게 펼쳐진 상아색의 모래를 몇 번 발로 밟으며, 키리에는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어둠은 순식간에 깊어졌다. 사방이 한없이 칠흑에 가까운 파랑이었다.

키리에가 손을 펼쳐 빛무리 수십여 개를 만들어 냈다. 마력을 펼쳐 봤지만, 자연물에 반사되는 게


전부였다.

그쯤 바닷속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키리에는 귀가 먹먹한 소리를 내는 향유고래 무리를 지나쳐,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수온은 0 도. 지독한 수압이 키리에의 몸을 덮쳤다. 마법이 아니었다면 진작 짜부라졌을 것이다.

키리에가 다시 한번 마력장을 펼쳤다. 이번엔 좀 더 넓은 범위였다.

돌아오는 마력은 없었다.

주변엔 어떤 해초도 없었다. 불모지 위를 기괴한 생김새의 물고기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죽을 수 없기에, 영원한 잠을 택했습니다. 더는 누구도 그를 깨울 수 없는 곳에서.〕

키리에는 레쇼의 말을 떠올리며 심해의 넓고 고요한 평원에 사뿐 섰다. 눈앞에는 깊은 골짜기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나타니엘이고, 도무지 중간을 모르는 남자다. 그러니 잠든다면 더 깊은 곳이다.

키리에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마력이 내뿜는 빛을 제외하면 주변은 칠흑이었다. 언젠가 나타니엘이 보여 준 그림자 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려갈수록, 키리에는 확신했다.

그가 있다면 여기다.

인간은 닿을 수 없는 곳. 귀가 먹먹하도록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들리는 곳.

마침내 마력이 반응했다.

발밑에 있는 흰 것을 본 키리에의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빛은커녕 온기도 없는 바다의 밑바닥에, 거대하고 투명한 얼음이 골짜기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아주
섬세하게 세공한 보석 같은 얼음은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한기를 흘렸다.
그 안에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남자가 잠들어 있었다.

지나치게 완벽한 조형의 이목구비가 누구라도 그의 정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모자람도 없고, 넘침도 없다.

천사라고 하기엔 색정적이고, 악마라고 하기엔 고결하다.

비인간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키리에마저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빨려 들어간다.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나타니엘.’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얼음 위에 손을 댄 순간이었다.

파사삭.

냉기가 키리에의 손가락을 얼리고 팔꿈치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

급하게 마법을 써도 소용없었다. 당연했다. 키리에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나타니엘의 힘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마법이 먹히지 않자 당황한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런!’

뒤늦게 후회했지만 늦었다. 공기 방울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입 안으로 바닷물이 밀려들었다.

‘숨이……!’

그 순간이었다.

파란 것이 눈앞에 반짝였다.

곧 강한 힘이 키리에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누군가가 키리에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나타니엘의 입술을 타고 숨이 넘어왔다.

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읍……!”

그녀가 반사적으로 나타니엘의 팔을 짚자,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 키리에의 뒷목을 당겼다.

그도 잠깐이었다.

나타니엘은 곧 약간의 미련이 느껴지는 동작으로 키리에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바다 깊은
곳에 얼음으로 된 공간이 만들어졌다.

“콜록, 콜록……!”

키리에가 바닥에 주저앉아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나타니엘이 수천 개의 생각이 담긴 눈으로 지켜보았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인 키리에와 달리,


그는 젖은 적도 없어 보였다.

[……난 또 내가 난생처음 환상이라도 보나 했다.]

나타니엘이 나직하게 한숨 쉰 뒤, 축 늘어져 기침하는 키리에의 등 위에 손수 검은 망토를 둘러주었다.

“콜록, 하아…….”

때마침 고개를 든 키리에와 그의 시선이 지척에서 마주쳤다.

[…….]

키리에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고 느꼈다. 유리알처럼 맑고 선명한 파란 눈도 잠깐이지만 불안하게


흔들렸다.

[……레쇼의 짓이군.]

나타니엘이 시선을 피하며 손을 놓았다.

키리에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냉랭해졌다.

“할 말이 그거뿐이에요?”

나타니엘이 굳었다. 키리에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증오도 달갑다던 사람이, 이제는 날 선
눈빛 하나에 심장이 멎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타니엘은 몇 번이고 입술을 들썩이다 지독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최선이 네게 부족했나 보구나.]

키리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나타니엘이 얼음벽 어딘가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조금이라도 기뻐하길 바랐을 뿐이야.]

“당신을 죽여 놓고, 마냥 기뻐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있으면 너는 네 의지와 관계없이 날 감당하려 들었겠지.]

“그랬겠죠.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길 바랐어.]

“내가 뭘 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나타니엘이 조금 시선을 들어 키리에를 보았다. 그는 어떤 단어 하나를 몹시 내뱉기 싫은 눈치였다.

그러나 키리에가 미동도 않자, 마지못해 속삭였다.


[글쎄……. 중정에 수국과 포플러를 심고, 함께 엘서스의 여름 별장에 들르고, 가을엔 같이 꿩 사냥을
가고, 겨울엔 벽난로 근처에 둘러앉아 시를 읽어 줄 누군가를 찾을 수도 있겠지.]

그리 말하는 나타니엘의 얼굴에 몹시 배타적인 감정이 매우 절제된 형태로 드러났다.

잠시 말을 멈췄던 나타니엘이 이내 나직하게 탄식했다. 마지못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그걸 보여 주고 싶니?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니?]

“…….”

[그런 거라면 분명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지옥은 넘어섰구나.]

“……정말 그런 거라면 어떻게 되는데요?”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나타니엘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툭 던지듯 속삭였다.

[그것만은 못 참았겠지.]

그리 말하는 입매가 놀랍도록 단정했기 때문에 키리에는 알 수 있었다. 그 뒤에 있는 감정이 너무 커서,


도리어 드러나지 않을 뿐이라는 걸.

키리에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몸에 힘이 풀렸다.

오기 전까지는 약간 반신반의했다. 혼자만의 감정을 밀어붙이게 되는 건 아닐까.

기우였다.

[키리에?]

당장 나타니엘이 초조한 듯이 이름을 불러왔다.

[아프니?]

오랜만에 듣는, 그러나 공백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조심스러운 걱정에 키리에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입을 열었다.

“나타니엘…….”

[응.]

“그거 알아요? 나, 당신을 만나고서 너무 힘들었어요.”

나타니엘이 멈칫했다. 그가 조금 느리게 답했다.

[알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 나타니엘의 얼굴이 있었다. 상심한 게 분명한데도, 시선은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키리에는 가까이서 그의 푸른 눈이 강물처럼 바다처럼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역시, 이게 갖고 싶었다. 무얼 봐도 이보다 아름다운 게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

오직 그녀만을 위해 준비된, 세상의 모든 파랑.

키리에가 옅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고마워요.”

나타니엘이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보며 키리에는 다시 미소 지었다.

그날, 자카란다 꽃을 받았던 그때처럼.

“고마워요. 내가 버린 나를 소중하게 여겨 줘서.”

나타니엘은 잠시간 키리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키리에는 이 깊은 바닷속까지 찾아와, 심장에 칼을 꽂아도 모자랄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있었다.

꽃보라가 몰아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리 없는데도.

나타니엘이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나를…….]

“욕하려고 왔는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지 않잖아요?”

[…….]

“당신이 잠들고 나서, 대부분은 혼자 지냈어요. 당신이 지내온 세월에 비하면 아주 잠깐이겠지만, 조금은
당신의 입장을 이해하게 됐고요.”

키리에의 입가에 쓴 미소가 떠올랐다. 떨리는 눈이 나타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알 것 같아요.”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였다.

“당신은 외롭고요.”

그녀가 천천히 나타니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나타니엘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 나타니엘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굳었다. 키리에가 이런 식으로 그를 만지는 건 처음이었다.

“나를 엄청 좋아해요.”

장난스러운 속삭임과 함께,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앞머리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닿은 곳이 뜨거웠다.

속눈썹을 스치는 앞머리에 나타니엘이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짧은 시간이 불안했다.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환상이라도 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키리에는 여전히 그의 눈앞에서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이건 내 자기 투영인 것 같네요.”

심장이 멈추는 듯한 말이었다.

[키리에. 그 말은…….]

나타니엘이 키리에의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잡히기 직전, 키리에가 손을 물렸다. 그녀는 맑게 웃으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수국 심을 줄 알아요?”

[배우면 되지.]

“여름은 좋아하나요?”

[좋아질 것 같은데.]

“꿩 사냥은 할 줄 아나요?”

[그건 내 전문이고.]

“시는…… 물어볼 필요가 없네요.”

[물론.]

나타니엘이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대답했다.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그를 보는 키리에의 보라색 눈은 곧고 맑았다. 이윽고 그녀가 눈매를 곡선으로 휘며 청량하게 웃었다.

“그럼 이제 에메랄드 배와 황금의 강만 남았네요.”

일순 나타니엘의 머리가 진공 상태가 되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신이 자신을 갖고 장난을 치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어떻게…….

그 생각밖에는 할 수 없었다. 거의 그의 심장을 터뜨리고 싶어서 태어난 존재 같았다. 아니면.

[드디어 나도 미쳐보는군.]

나타니엘의 손에 흰 검이 나타나자마자 키리에는 정색했다.

“미안한데 꿈 아니고요, 환상 아니고, 환각 아니고, 마법도 아니에요. 뭘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서우니까 집어넣어 줄래요?”

그리 말하며 선하고 맑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키리에를 마주한 순간, 나타니엘은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미끄러지듯 흘러나왔다.

[……미안해.]

키리에의 미소 한 귀퉁이가 허물어졌다. 나타니엘은 얼굴을 조금 숙인 채, 키리에의 손을 잡았다.

[전부 미안.]

떨리는 손은 몇 번이고 그녀의 손을 놓쳤다. 그러나 그는 몇 번이고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키리에의


입꼬리가 떨렸다.

“참나…… 뭐예요……?”

[미안.]

“낯설게 대체…….”

[미안해.]

나타니엘의 말이 이어질수록, 키리에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덜컹거렸다.

[미안해.]

“사과받으려고 한 게 아니에요.”

[알아. 그래도 미안해.]

그녀의 얼굴이 점차 흐려졌다. 대답이 없는 키리에를 올려다보며, 나타니엘이 재차 낮게 속삭였다.

[미안.]

용서해 주든, 용서해 주지 않든,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나타니엘은 키리에의 손바닥에 입


맞추며 끊임없이 사과했다.

전해지길 바랐다. 그가 아는 인간의 언어는 몹시도 하찮아 그가 가진 감정의 편린도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전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의 마음은 늘 하나였다.

네가 좋아.

그래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

키리에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아…….”

키리에는 제 눈물을 보고 놀라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나타니엘과 눈물이 떨어진 자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타니엘이 손을 뻗어, 그런 키리에의 뺨을 끌어당겼다.

[네게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입술이 키리에의 뺨 위에 머물렀다. 갈라진 틈 사이로 눈물이 스며들었다.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 소중히 여겨본 적이 없어서…… 실수했어.]

복숭앗빛으로 상기되어 있던 키리에의 뺨은 순식간에 눈물로 흠뻑 젖었다.

나타니엘은 소리 없이 우는 키리에를 끌어안은 채, 그녀의 눈꺼풀, 콧잔등, 양 뺨, 이마에 속죄하듯 입을


맞췄다.

[그냥 네가 웃기를 바랐을 뿐이야. 네가 웃는 게…… 꽃이 피는 것 같아서.]

키리에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새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런 키리에의 등을 나타니엘이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키리에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나뭇가지처럼 여린 팔이 머뭇거리다 자신의 등을 감쌌을 때, 나타니엘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신에게 감사했다.

“다신…….”

키리에가 잔뜩 쉰 목소리로 헐떡였다. 그마저 사랑스러우니, 반칙이었다.

[그러지 않을게.]

“다신 그러지 말아요…….”

[그래.]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감쪽같이……. 내가, 얼마나……!”

[미안.]

“눈앞에서 사람이나, 죽이고…….”

[미안해.]

“사람들이 내 얘기나 하게 만들고……!”

[미안.]

키리에는 아이처럼 투정 부리며 엉엉 울었다. 분한 마음에 그녀의 주먹이 수차례 나타니엘의 등을


두드렸지만, 그는 그마저 좋았다.

“내가, 당신, 정말, 미워서…….”

[그러진 말고.]

“…….”

[농담이야.]

키리에는 한참을 앞도 뒤도, 맥락도 논리도 없이 그간의 상처를 내뱉었다. 개중에는 아예 그의 잘못이
아닌 일도 있었고, 책임을 묻기에는 지나치게 오래된 일도 있었다.

그래도 나타니엘은 그 모든 말에 미안하다고 답했다. 키리에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마침내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었을 때, 나타니엘이 조금 몸을 떼어 냈다.


키리에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짐짓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의 키리에는,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야 마는 키리에는 결국엔 하얗게 부서지는 미소를
보여 주었다.

“두 번은 안 봐줄 거예요…….”

속눈썹 끝에 작은 별 같은 눈물방울이 잔뜩 매달린, 수줍고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천천히 나타니엘의 고개가 기울었고, 키리에의 눈이 감겼다.

[나도 이젠 못 놔.]

두 사람의 입술이 부딪혔다. 더는 대화가 필요 없었다.

***

바다를 나온 키리에는 나타니엘과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미리 전해 들은 주소로 찾아간 키리에는 벼랑에 세워진 저택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220 억…….”

가격이 의심 가지 않는 대저택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저택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정원이 자세히 드러났다.

키리에는 약간 멍해졌다.

중앙에는 수령이 짐작도 가지 않는 거대한 포플러 나무가 있었다. 그 주변으로 꽃이 지고 황금빛 열매가
맺힌 자카란다가 울창했고, 수국은 잎이 무성했다.

[수국 심는 법은 다음 봄에 배워 보기로 하지.]

나타니엘이 옆에서 나긋하게 속삭였다. 키리에가 헛웃음을 흘렸다.

“……조경에 누구 입김이 들어갔는지 확실하네요.”

[아무렴. 누가 지낼 집인데. 꽤 신경을 썼는데 그동안 온 적이 없다니 좀 속상하구나.]

두 사람은 간단히 정원을 둘러본 뒤, 저택으로 향했다.

키리에가 먼저 가벼운 걸음걸이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문지방 안쪽에서 미소를 지으며 물끄러미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나타니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우리 키리에 양께서는 장난기가 좀 있으시군.]

“초대해 줄까요?”

나타니엘이 살짝 눈썹을 들썩였다.

[누구에게 시를 좀 읽어드려야 하는 몸이라, 부디.]

능청스러운 대답에 키리에가 키득거렸다.

“아뇨. 안 할 거예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한 걸음 더 안쪽으로 물러났다. 그러곤 배시시 웃었다.

“초대가 필요할까요? 난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 말에는 나타니엘도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 그녀는 때때로, 아니, 꽤 자주 그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곤 한다.

나타니엘이 키리에를 한 번, 바닥의 문지방을 한 번 보았다. 그리고 다시 키리에를 보았다. 그녀는


사붓이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시다면야.]

망설임은 없었다. 나타니엘이 성큼 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몸이 연기가 되어 흩어지는 일은 없었다. 의식도 멀쩡했다. 나타니엘은 온전한 상태로, 문설주에서


한 걸음 안쪽에 서 있었다.

그리고 아직 눈가가 빨간 키리에가 그를 향해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나타니엘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조금 돌리고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키리에가 장난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감상은요?”

이윽고 나타니엘이 손을 내리며 눈부시게 웃었다.

[역시 넌 최고야.]

키리에도 마주 웃었다.

“나도 알아요.”

[내게 복종하세요(完)]

[둄 2 절갠 교환재공타싸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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