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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복종하세요 5권 완
내게 복종하세요 5권 완
각오
“누구지? 새로 온 시녀니?”
‘유아 퇴행.’
원망스러운 눈이었다.
나타니엘이 고개를 키리에에게 돌렸다. 키리에는 대답을 기다리며 잔뜩 어깨를 굳히고 있었다.
[몇 살이지?]
“……열 살입니다.”
[열 살.]
“네.”
[…….]
나타니엘은 자신이 생각만큼 기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키리에가 그 모든 기억을 잊어버려서 다행인
것 같으면서도, 그게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 손님이야.]
[나타니엘.]
“각하?”
[공격하겠다던가?]
“……병사들이요?”
키리에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죄송해요.”
“예?”
나타니엘이 조심스레 세자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는 지팡이 끝으로 세자르의 어깨 한쪽을 툭 두드린
뒤 속삭였다.
나타니엘이 심드렁히 그를 주시했다. 간사한 자다. 자신이 손쓰지 않아도 제 명에 죽지는 못할 것이다.
[맘에 드니?]
“네?”
“하하, 하! 물론입니다.”
“네, 아버지.”
“넌 뷰캐넌이야.”
“……네, 아버지.”
[웃어야지?]
새파란 눈빛이 서늘했다. 키리에의 정신이 어려졌기 때문에, 그는 좀 더 엄격해질 필요성을 느꼈다.
[차 한잔하실까요?]
“얼마든지요.”
***
안네마리가 그렇게 말하며 나섰으나, 키리에는 머뭇거렸다. 뾰족한 귀가 낯설어 불편한 모양이었다.
“저기……. 마르타는?”
키리에가 단장하는 동안, 나타니엘 역시 복도로 나왔다. 안네마리는 복도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나타니엘의 인기척을 느끼자, 번들거리는 검은 눈을 하고서 고개를 쳐들었다.
“고쳐야 해요.”
[잠시 놔두지.]
[위험은?]
[위험하단 뜻이군.]
하지만 그는 눈앞에서 훌쩍거리는 안네마리의 머리통과, 그녀를 끌어안고 웃던 키리에의 모습을 떠올렸다.
키리에가 아니라면.
***
정원에 만개한 자카란다를 보며 키리에는 조금 흥분한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나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며 점잖게 꽃들을 흘끔거렸다. 나타니엘은 옅은 애수가 비치는 온화한 눈으로 그런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자카란다를 좋아하니?]
“……네.”
[다른 건?]
“다른 거요?”
[좋아하는 거.]
[어느 작품이?]
“‘강림하는 천사’요.”
어린 키리에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조잘조잘 떠드는 게 좋은 접대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궁금한 건지.
[뜻대로 생각해.]
[알아. 그건 내가 잘 알지.]
키리에가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뒤늦게 찻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저는 뷰캐넌이에요.”
[그리고 어리지.]
“하지만…….”
[이혼했다고 했나.]
“아직 아니에요!”
“……그게 우리 아버지인데도요?”
“저보다 더 큰 어른인데요?”
“나타니엘 님은 좀 특이하시네요.”
“나타니엘 님?”
“네.”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결국 고작 이런 거였다.
[갖고 싶은 건 없니?]
“하고 싶은 건 있어요.”
[하고 싶은 거?]
***
“또 뵐 줄은 몰랐네요.”
[키리에가 원하더라고.]
“뭐?”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나타니엘은 피로를 느꼈다. 이전 같았으면 재밌다고 싸움을 부추겼을 텐데,
지금은 방에서 깜짝 선물이 뭘까 하며 기다리고 있을 키리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
세자르와 제냐는 서로를 노려보다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때 나타니엘이 눈썹을 살짝 들썩였다.
[참. 뷰캐넌.]
“예?”
“크악!”
나타니엘은 열주랑 한쪽에 서서 키리에가 세자르와 제냐에게 뭔가를 조잘조잘 떠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달아오른 뺨은 분홍빛이었고, 부모 중 한 명이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했다.
나타니엘이 한 걸음 물러나 기둥의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키리에가 웃었으니 그걸로 좋다.
국왕의 일을 처리할 차례였다.
“나타니엘 님!”
자신을 부르는 키리에의 목소리에 나타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키리에는 조금 숨을 할딱대며, 방긋 웃었다.
“어디 가세요?”
나타니엘이 눈을 내리깔았다.
[마음에 드니?]
“감사해요.”
“사실 벌써 이혼했대요.”
[퍽이나.]
키리에가 살풋 웃었다.
“……제가, 제가 부족해서.”
[키리에.]
[…….]
“하지만…….”
[걱정하지 마.]
“…….”
‘됐으니까 돈 좀 더 줄래?’
“나타니엘 님?”
키리에가 그를 불렀다. 밤바람이 그녀의 연보랏빛 머리칼을 흩뜨리는 것을 보며, 나타니엘은 아스라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알 수 있을 거야.]
[둄 2 절갠 교환재공타싸 x]
23. 전야
밤이었다. 키리에 뷰캐넌은 훌쩍이다 잠들었다. 그녀가 잠들자 뷰캐넌 저택은 덩달아 고요해졌다.
레쇼는 저택의 옥상에서 주변을 살폈다. 국왕의 군대가 저택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임전
태세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뷰캐넌 저택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압박감을 행사하고 있었다.
[안녕.]
“용건이 있으십니까?”
[응.]
나타니엘이 힘없이 대답했다. 레쇼가 칼을 꺼냈다. 시가지에서 나타니엘이 힘을 쓴다면 막아야 했다.
[그렇구나……. 그렇겠지.]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악마…… 이 악마!”
“우리를 속였어!”
[그것도 내 이름이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일주일 뒤, 아렐라노 외곽의 포베 곶에서 만나지. 나는 키리에를 돌봐야 하니, 그동안 함정이든
마법이든 열심히 준비해 보렴.]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도, 도망쳐!”
[문단속 잘하렴.]
[레쇼.]
[키리에를 지켜 줘.]
레쇼는 뷰캐넌의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버려진 무기를 치우는 것까지 지켜보다 몸을 돌렸다. 그도
이제 마지막을 준비할 차례였다.
[악몽은?]
키리에가 멍한 머리로 단장을 마치고 나왔다. 요새는 늘 그랬다. 세상이 희뿌윰한 막 너머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들어가시지요.”
키리에가 숨을 들이켠 순간, 나타니엘의 고개가 느리게 그녀에게로 움직였다. 나타니엘이 미소 지었다.
[왔구나.]
[왜?]
“아뇨, 방금…….”
[방금?]
나타니엘이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천사처럼 정숙한 얼굴에 걱정이 드리워졌다.
“아뇨! 갈 거예요!”
나긋한 목소리에 키리에가 황급히 상념을 털어 냈다. 그러자 나타니엘이 고상한 동작으로 손을 뻗었다.
키리에가 그 길고 차가운 손을 잡았다. 기묘한 불안감 때문에 심장이 쿵쿵대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모른척했다.
‘깨고 싶지 않아.’
“제 이름이 들린 것 같은데…….”
[보는 눈이 있나 보지.]
“잘 안 되네요.”
[요령이 필요하니까.]
“힘껏 던져요!”
[힘껏.]
“아?”
[아.]
[젖은 곳은?]
[다행히 묻진 않은 것 같구나.]
“제 얘기가 아니었어요.”
“……오늘은 좀 이상하시네요.”
[오늘만 그런 건 아니었지.]
다정했는데. 키리에가 말끝을 흐렸다. 숨긴 말을 눈치챈 나타니엘이 갸름한 눈을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그렇진 않아.]
[그저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뿐이야.]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연인인가요?”
그녀의 질문에 나타니엘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아니. 안타깝게도.]
[그건…….]
“아.”
“음……. 어떤 분이에요?”
[예뻐.]
“미인인가 봐요.”
[그 애도 거울은 볼 테니 말 안 해도 알 거란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맹목적인 사고방식이었다. 키리에가 겸연쩍게 나타니엘이 건네는 차가운 수프를 받아
들었다.
“싸우신 거죠?”
수프를 삼키던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얼굴에서 어슴푸레 놀란 기색을 읽어 냈다. 잠자코 그녀의 말을
계시처럼 기다리는 나타니엘을 향해, 키리에가 조심스레 물었다.
[돈을 줬어.]
“멍청…… 죄송합니다.”
“그건 다 가짜잖아요.”
말하고 나서 키리에는 깨달았다. 자신의 말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타니엘의 심장을 찔렀다는 것을.
반박도 분노도 없었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는 마치 어떻게든 거지들 사이에 끼려고 몸부림치는
왕자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왕자는 거지가 될 수 없는 법이었다.
“외로우세요?”
[넌 늘 내게 그런 걸 묻는구나.]
“늘……이요?”
조용한 식사를 마치고, 키리에는 에스코트를 위해 자세를 잡은 나타니엘을 향해 말했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해야 해요.”
[받아 줄까?]
[그래도 받아 주지 않으면?]
[그러면 받아 줄까?]
“그러니까, 저는…….”
[너라면 받아 주겠니?]
“그게…….”
머리가 아파져 왔다. 대충 둘러댈 수 있는 말인데도 키리에의 입술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
저택에 돌아가니 올드시우다드와 포트듀케인에서 사람이 찾아와 있었다. 마리아와 라우라가 키리에를 위해
보낸 의원들이었다.
“내가 아프다고?”
“난 내가 아픈 것 같지 않은데.”
“키리에, 각하께…….”
[뷰캐넌.]
“…….”
[계속 있을 거야.]
키리에가 방으로 들어가고, 안네마리가 의원들을 따라 들어갔다. 당연하지만 나타니엘은 그들의 ‘치료’
에 끼지 못했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제발…… 제발 날 내버려 둬! 미안해, 아론! 아론! 아아아아! 아아아!”
“성공은 했습니다만…….”
[문제라도 있나?]
“우울증과 무기력증이 심합니다.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탓에 일부 기억도 손상되었고요.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라서, 종종 전처럼 분별 능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의원의 말이 마치 별세계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나타니엘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뒤, 키리에의 방으로
향했다.
[키리에.]
“나타니엘…….”
[……키리에.]
죽어 가는 꽃 같았다.
퀭한 눈에는 미소의 흔적도 없었다. 그녀는 산 채로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평온하고 처절했다.
당연하게도 나타니엘은 처음 만났을 때의 키리에 뷰캐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그와 떠들고, 이야기하고, 그에게 화내고, 제 목숨을 걸고서 손을 내밀었던 키리에 뷰캐넌을 떠올렸다.
[……내가.]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그걸로 모든 게 해결되진 않겠지만, 키리에 뷰캐넌이 내놓은 답이니 그것은
분명 정답일 텐데.
하지만 지은 죄와 해야 할 사죄에 비해 목구멍은 턱없이 좁았고, 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타니엘.”
“너무 늦었어요…….”
‘저택의 관리……. 사용인들에게 줄 보상. 추천장이 필요하면 써줘야 하고, 입을 단속해야 하고, 주변에
소문이 어떻게 나 있는지 파악해야 하고…….’
차라리 질식하고 싶었지만 정말로 질식해 죽지 않는 한 움직여야 했다. 키리에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키리에.]
“안네마리. 들어오렴.”
“아가씨…….”
“……이리 와.”
“흐윽, 흐잉……!”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의 키리에는 안네마리의 감정을 제대로 토닥여 줄 여력이 없었다. 정신이 말린
포플러 꽃처럼 버석버석했다. 죽고 싶지만 죽을 의욕마저 없었다. 누군가 고통 없이 죽여 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반복되었다.
“씻어야겠어.”
“크응, 네!”
“단장이 끝나면 아버지에게 갈 거고, 이후엔 저택 수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봐야겠어. 영지에 보낸
공문에 회신이 왔을 테니 가져다주고.”
“일하시게요?”
“……해야지.”
“나가 봐.”
“……네.”
[키리에.]
재차 부르는 소리를 키리에는 무시했다. 그녀가 잠옷의 앞부분 단추를 하나 풀자마자, 큰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뭐?]
적나라한 단어에 나타니엘이 멈칫했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손을 쳐냈다. 건조하고 황폐한 시선이 방
여기저기를 의미 없이 훑었다.
[…….]
“대답이 없네요.”
[네 부모가 네게 과하게…….]
“거기까지!”
그 순간, 지금까지 사념이 모두 풍화된 것처럼 황폐해져 있던 키리에의 목소리가 대번에 서늘해졌다.
달의 뒷면.
[내가 그런 게 아니야.]
“거짓말!”
“저, 저기……!”
***
“호, 아가씨!”
“……무슨 일이 있으시군용.”
“그런데 웬일이야?”
“저희야 감사합니다만.”
호크송 박사가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학자들은 연륜이 있는 만큼 서로 수염 길이를 자랑하며 소란을 피워
주었다.
“아……. 소문.”
“괜찮아.”
[키리에.]
“아버지가?”
“곧 갈게.”
“오늘은 어려울 테니 내일부터 재개하도록 하지. 왕가의 동향에 대해서도 며칠간의 정보를 가져다주고.”
“그리하겠습니다.”
[키리에.]
그렇게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는 마법사들을 상대하고, 하녀에게 서류를 건네받으며 정신없이
걷다 보니 나타니엘은 어느샌가 그녀를 따라오지 않았다.
키리에는 복도에서 걸음을 멈추고 창밖을 보았다. 봄비라 하기엔 사나운 빗줄기가 시야에 가득하였다.
빗소리에 맞춰 약간 달떠 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리 말하던 나타니엘의 푸른 눈 역시, 도무지 뇌리에서 떨쳐지지 않았다. 꿈 같은, 거짓 같은, 그렇기에
심장을 파고드는 말과 떨리던 눈.
하지만 그녀는 이제 아이가 아니다. 노력한다고 상응하는 대가가 돌아올 리 없다는 걸 안다. 음울한 눈의
키리에가 냉연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일은 없다. 절대.
***
키리에는 옹기종기 모인 마법사들을 이끌고 뷰캐넌 저택을 나섰다. 호위는 기사 발디르를 비롯한 뷰캐넌의
사병들이 맡았다. 나타니엘은 쫓아오지 않았지만, 키리에는 차라리 자기 머리 위에 유성이 내리꽂히길
바랐으므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저거?”
“저쪽 방향 말입니다.”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렇습니까……. 그 너머는요?”
“흠.”
“특별한 것은 없는 듯한데…….”
“대체 무슨 일인데?”
“마력?”
“뭐?”
“……그는 나타니엘이야.”
“……오히려 자네들을 미끼로 쓰려고 불렀을 확률이 높아. 전설경이 뭔가를 요구하거든 내 이름을 대고
피해. 그가 자네들한테 득 될 일을 할 리 없으니까.”
“그렇습니까…….”
“손님인데 그럴 수야 없지.”
“그땐 프로노이아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지. 하지만 자네들을 전쟁에 끌어들일 마음은 없네.”
키리에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한 손에는 꽃을 든 채 마차에 올랐다. 그녀는 머뭇거리다 안네마리에게
꽃을 건넸다.
“보관해 줄래?”
“응.”
안네마리가 방긋 웃었다.
‘내 짐. 내 책임…….’
정신이 온전치 못했을 때의 기억은 또렷하지 않다. 대체로 오래된 그림을 보는 것처럼 흐릿했다. 그래도
머리를 쓰다듬던 세자르와 제냐의 손길만은 선명했다.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해야 찾아오는 따뜻한 말, 다정한 손길. 그녀의 어린 시절, 그 무엇보다 간절히
바랐던 것이었다.
그녀에게 타인의 애정이란 상점에 진열된 물건과 같아서, 그걸 사기 위해선 상응하는 성과가 필요했다.
뷰캐넌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며, 없어도 있는 것처럼. 있다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아가씨!”
“발디르 경?”
“조심하십시오!”
“뭐?”
〔키리에 뷰캐넌.〕
순식간에 레쇼가 마차 옆에 매달린 모습으로 나타났다. 너무 의외의 인물에 키리에는 놀라는 것도 잊었다.
〔습격입니다.〕
“콜록, 콜록……!”
“아가씨, 괜찮으세요?”
‘자리를 비웠다고?’
키리에가 고개를 들자 레쇼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손에는 일전에 보았던, 몽둥이처럼 넓적한 검이
들려 있었다.
“아뇨.”
〔그럼 막겠습니다.〕
〔번거로우니 물러나라.〕
그의 엄정한 말에 발디르를 비롯한 뷰캐넌의 기사들이 당황했다. 레쇼는 그들을 무시한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죽이진 않겠습니다.〕
레쇼는 순식간에 습격자들을 정리했다. 정말로 죽이지는 않았다. 팔다리의 관절을 찌른 뒤 던져 버렸을
뿐이다.
키리에는 뒤에서 그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나타니엘의 검술과 닮은 곳이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나타니엘 쪽이 레쇼보다 경지가 높았다.
〔다쳤습니까?〕
“……아뇨.”
“사흘이요?”
〔사흘입니다.〕
“어째서요?”
〔때가 되면 알게 될 겁니다.〕
그동안 기사들이 사고 현장을 정리했다. 키리에는 새 마차가 올 때까지 레쇼와 함께 근처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안네마리가 정찰을 위해 약간 거리를 벌리자, 레쇼가 키리에에게 말을 붙였다.
“아무 생각 없습니다.”
〔싫지 않습니까.〕
“싫어요.”
〔당사자에게 말해 주십시오.〕
“네?”
“……어째서요?”
레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먹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레쇼는 무심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사실 나는…….〕
***
그 날, 나타니엘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엔 뷰캐넌 저택에 국왕의 병사들이 찾아왔고, 레쇼가
물리쳤다.
새벽까지 뒤척이다 겨우 잠든 키리에는 바깥의 인기척에 어렴풋한 잠에서 깼다. 방문 틈으로 들어오는
불빛에 사람 그림자가 졌다.
[키리에는?]
‘몇 번’이라는 단어에 키리에가 움찔했다. 키리에의 기억에는 한 번뿐이었으니,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레쇼가 처리한 모양이었다.
〔그보다 오래 걸렸군.〕
〔모레인가?〕
[그래.]
〔오레윈브리지는…….〕
몇 마디의 대화가 더 이어진 뒤, 침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두꺼운 카펫을 밟는 발소리가 났다.
키리에가 재빨리 다시 자는 척했다.
키리에가 불편한 마음에 몸을 조금 뒤척였다. 그러자 나타니엘이 가늘게 한숨을 짓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잘 자렴.]
나타니엘은 심지어 키리에와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그는 시선이 조금이라도 마주칠 때마다 사붓이
미소를 지었다.
[키리에. 오늘 일정은?]
[키리에?]
“……그만해요.”
[뭘?]
“들 것 같아요?”
“제발 좀 날 혼자 있게 해 줘요…….”
“……먼저 나갈게요.”
[오늘만.]
“…….”
[……아니, 한 시간 만이라도.]
쥐어짜듯 내뱉은 목소리의 호흡이 거칠었다. 잠시 흠칫한 나타니엘이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정말, 보기만…….]
키리에가 이를 악물었다.
“……싫어요.”
키리에가 방에서 나가고, 나타니엘은 한동안 그 자리에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가슴 안쪽이 조용히
불타는 듯했다. 나타니엘은 눈을 감은 채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무릇 모든 일이 그러했다.
전무후무의 천재란 없다. 불세출의 영웅도 없다. 아무리 특별해 보이는 것도, 영원이라는 잣대를 대면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끝도 없는 시간 속에서 정말로 ‘딱 하나’뿐인 존재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믿고, 배신당하고.
믿고, 죽임당하고.
믿고, 외면받고.
그래도 믿고, 믿고, 그리고 또 믿고…….
그러다 그럴 바에야 증오로 무너지지 않을 성을 쌓겠다 마음먹었다. 나타니엘이 실소를 흘렸다. 웃음과
함께 가슴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렸다.
방 안에는 노을이 졌고, 밤이 찾아들었다. 뷰캐넌 저택에 하나둘씩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켜졌다. 레쇼는
나타니엘의 부탁대로 키리에 근처에서 호위 중이었고, 키리에는 평소보다 늦게 잠이 들었다.
누가 독이라도 먹이면.
‘싫어요.’
그럴 거면.
그래도 밤은 속절없이 흘렀고, 이윽고 마지막 날이 밝았다. 커튼 틈으로 새벽빛이 들었을 때, 나타니엘은
어리석게도 시간을 돌렸다. 태양의 끄트머리가 다시 땅으로 꺼지고, 하늘이 검게 익고, 그마저 지나
무르익은 저녁으로. 그리고 차츰차츰 원래의 시간으로.
[……키리에.]
‘미안해. 네가 무서워.’
‘미안. 넌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이미 늦었지만.
“크헉, 컥, 큭…….”
[할 말이라도?]
“가, 가시나요……?”
[가야지.]
[알고 있었겠지. 아무리 변변찮아도 세자르 뷰캐넌은 키리에의 친부고, 키리에는 제 아비를 죽인 자를
아낄 수 있을 정도로 융통성 있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아, 안네마리는, 아가씨에게 미움받기 싫었어요. 안네마리도 당연히 주인님이 싫고, 없어졌으면
좋겠지만…….”
[그래. 그건 내 몫인 모양이야.]
“……네?”
목소리가 한 단계 낮아졌다.
[그런 건 항상 내 몫이거든.]
[둄 2 절갠 교환재공타싸 x]
24. 선택
서류를 보던 키리에의 펜이 멈췄다. 그녀가 잠시 나타니엘을 떠올렸다.
키리에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도는 변화가 없었다. 저택의 재건도 무사히 진행되고 있었고, 다른
공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프로노이아의 마법사들이 찾아와 “마법이! 마력이! 하지만 영주님을
믿습니다!” 같은 말을 하곤 했지만, 자세히 물어보면 정작 그들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아, 아가씨.”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슬퍼졌다. 세상에는 이토록 불행이 가득하다. 사람들의 삶이 이러하니 나타니엘이
신처럼 여겨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랑 가요.”
“알 바 아니잖아요? 나랑 가요.”
“가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네?”
“오늘 추도식으로 그들을 명예롭게 전사한 것으로 처리할 거예요. 모두 유공자로 대우하고, 국립묘지에
안치할 거고요. 뷰캐넌 가문에서 그동안 금전적인 지원은 해 줬지만, 명예는 왕가만이 줄 수 있죠.”
“아론 피츠. 그도 명예를 되찾을 거예요.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훈장을 주기로 했어요. 이례적인
일이죠.”
“제가 간다면.”
키리에가 눈을 감았다.
“내 말을 믿어요?”
“하겠다고 한 건 하는 분이니까요.”
“…….”
“…….”
“레쇼 경.”
“떠났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뭘 하든요?”
〔예.〕
키리에가 물끄러미 레쇼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키리에는 그에게서
그녀가 루비니아를 따라가기를 바라는 기색을 읽어 냈다.
한참 뒤, 키리에가 옅게 미소 지었다.
“경은 사실 내가 죽기를 바랐거나, 혹은 바라는군요.”
“출발하죠, 저하.”
***
셀의 분위기는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몹시 어둡고 침체된 분위기였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전하의 마법이에요.”
“마법이요?”
루비니아의 태도가 지나치게 태연했기 때문에, 키리에는 그녀가 사실은 그 마법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키리에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요?”
“네?”
“모르나요?”
“얼마나 애지중지하면.”
나타니엘의 이야기인 것이 확실했다. 키리에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루비니아는 쾌활하게 걸음을 옮겼다.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나쁜 의미는 아니니까.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 거죠. 뭘 하든 나라, 세계, 뭐
이런 단어가 나오는 사람이 무슨 일을 벌이겠다는데 고작 인간이 어떻게 그걸 다 파악하겠어요.”
“예리해라.”
“다 왔어요.”
“제 발로 올 줄은 몰랐네.”
“맘에 들어. 그 배짱이 좋았지. 사람은 모름지기 가슴 속에 심지 하나는 있어야 하는 법이거든. 비굴할
바에야 죽는 게 낫지 않나?”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키리에가 약간 미소 지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게.”
키리에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쯤이야.”
짝!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전후를 따지자면 시조가 전설경을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포베 곶?’
국왕이 나타니엘을 죽이기 위해 뭔가를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레쇼에게 자신을 맡긴 것을 보면,
나타니엘도 필시 그걸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오늘 하루만.]
“뭘 할 생각이에요?”
***
포베 곶.
그가 중얼거리던 찰나였다.
“온다! 준비해!”
그런 불가사의 차원이 대략 십여 개.
나타니엘이 놀란 듯 미소 지었다.
[제법이네.]
마법이 내리꽂혔다.
***
국왕이 쥔 왕홀은 들끓는 마력으로 마치 거대한 번개처럼 보였다. 마법의 매개인 왕홀에서 마력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낼 때마다, 포베 곶과 이어진 머리 위의 게이트도 요동쳤다.
“공격!”
“이게 대체…….”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건가요?”
“전하의 뜻이에요.”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고 다시 국왕을 바라보았다. 왕홀이 번쩍였다. 포베 곶에는 천둥, 번개가 쳤다.
아무리 큰 전쟁도 일시에 끝낼 만한 어마어마한 마법이 단 한 사람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큭!”
국왕이 피를 닦으며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허공에 띄워진 마법의 은반으로
향했다.
[실망시키지 말아다오.]
홀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
국왕이 자지러지게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에 광기가 서렸다.
“그렇게 나와 줘야지!”
루비니아는 어느새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키리에는 벽에 붙어 눈앞의 일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핫!”
[…….]
***
그 시각, 세자르 뷰캐넌은 뷰캐넌 저택 안에 있었다.
모든 게 잘 풀리리라 생각했다.
“큰일이에요!”
“나타니엘 님이 폭주했어요!”
“무슨 말이냐?”
큰 지진이 일었다. 아니, 지진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큰 천둥소리였다. 반사적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검은 구름이 왕궁 위를 휘감고 있었다.
“마차로 가지.”
“네!”
안네마리가 고개를 끄덕이곤 세자르의 뒤를 따랐다. 세자르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는 위치가 되자마자,
조바심 가득하던 안네마리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
한참 뒤, 키리에가 눈을 떴다.
“흐어…… 어어…….”
“아…….”
“……거짓말.”
“나타니엘이 죽을 리가…….”
“죽었다고?”
“죽었나……? 죽었어……?”
그런 자가 권력의 정점에 자리해 있다는 점에서 키리에는 지금껏 맡아 보지 못한 지독한 악취를 느꼈다.
아마 나타니엘은 내내 맡고 지냈을 그런 음습한 냄새였다.
“이상…… 기운이……!”
“저건……?”
“저게 대체…….”
“……!”
“종말…….”
“넌 저게 뭔지 아는구나.”
“……루비니아 양?”
키리에와 국왕이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루비니아와 손도끼와 웃는 얼굴이라는 아주 괴상한
조합이었다.
“그 전설경이 부탁까지 하는데 어쩌겠어. 키리에 뷰캐넌이라도 지켜 줘야지. 당신,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
해요.”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고. 기껏 왕세자빈이 되었는데 국왕은 미쳤지, 완전 인간 같지도 않지, 말인즉
죽을 때까지 왕을 해 먹겠다는 소리 아냐? 그럼 난 언제 왕비 하라는 거야? 이든 같은 똥 덩어리의
뒤치다꺼리 하는 것도 짜증 나는데, 평생 너한테 굽신거리며 살아야 한다고?”
약간의 눈치싸움 후, 국왕이 잽싸게 왕홀의 끝을 루비니아에게 겨눴다. 국왕의 자신만만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어떻게……!”
“크헉!”
동시에 머리 위에서 바람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소리가 귀청을 찢는 크기로 울려댔다. 마법과 시전자를
잇는 매개가 부서지자, 게이트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이…… 은혜도 모르는 년이……!”
“이제 어떡하죠?!”
“어떻게 된 거예요?”
“누구한테요?”
“거기…… 서!”
“……죽었겠죠?”
“…….”
키리에가 대답을 망설였다. 상대가 상대이니 죄책감은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죽음이 즐겁지도
않았다.
“…….”
“대답 좀 해 봐요!”
“네?”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키리에가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정보가 단숨에 스쳐 지나갔다. 키리에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째서 나타니엘이 자신을 여기에 두었는지, 어째서 프로노이아의 마법사들을 불렀는지, 어째서 굳이 그
먼 포베 곶으로 향했는지, 어째서 마지막에 미소 지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왕궁은 무너졌다. 국왕은 죽었다. 이경은 왕가를 지지하지 않았고, 왕가는 몰락할 것이다.
“멍청이!”
“하……!”
“그보다! 왕궁이 무너질 정도면 벌써 경보가 발령돼야 했는데, 기미가 없어요. 뭔가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키리에가 이마를 짚었다. 시간은 없는데 방법도 없었다. 상황을 모르는 루비니아는 초조한 모양이었다.
“나타니엘을 믿어요?”
“네?”
“그걸 몰라요?!”
“…….”
때마침 건물이 균형을 잃고 다시 무너져 내렸다. 먼지 바람이 날렸다.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루비니아의
팔을 잡았다.
“머리를 다친 거죠?”
루비니아가 폭발했다.
“왜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 말을 믿는 건데요!”
“……몰래 접촉했다고요?”
그 나타니엘이?
키리에는 멍한 머리로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그녀가 느리게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하지만 왜 이제 와서…….
키리에가 이를 악문 순간이었다.
“이럴 리 없어! 이럴 리 없다! 연구는 완벽했는데! 완벽했단 말이다! 신조차 고꾸라뜨릴 마법이었거늘!
아아악!”
온갖 보호 마법을 걸어 놓았을 갑옷이 주인을 지키는 사명을 끝내고 바스러졌다. 국왕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손을 내려다보다가, 손톱으로 얼굴 가죽을 긁기 시작했다.
“전설경이…… 나를 죽이러 올 거야! 죽는다! 종말이 올 거야! 종말이 나를 죽이러 올 거야! 나를!”
국왕은 그렇게 외치며 꼭두각시 인형처럼 삐걱대는 걸음으로 어딘가로 달려가 버렸다. 어느새 몰려든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종말이라니……?”
키리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왕궁의 이변을 감지한 사람들이 불안한지 거리로 나오고 있었다.
〔키리에 뷰캐넌.〕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레쇼가 여상스러운 태도로 서 있었다. 다만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더 예리하고
무거웠다.
〔가까이 왔습니다.〕
〔안 됩니다.〕
“네?”
“레쇼 경!”
〔이름을 걸겠습니다.〕
“그 말, 지켜야 할 거예요.”
〔이편이 더 편하겠습니다.〕
“흣!”
“어디로 가는 거예요?”
“특별할 건 없어 보이는데요.”
“만든다고요?”
레쇼가 먹구름이 뒤덮은 하늘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키리에의 눈썹이 활처럼 휘었다.
“레쇼 경?”
검은 어둠이 코앞이었다. 이름을 불러도 레쇼는 여전히 자리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키리에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레쇼 경!”
“저기…….”
그때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키리에가 흠칫해 뒤를 돌았다. 순한 얼굴의 아낙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그래. 보통 이런 반응이겠지.’
“어머. 구름인가?”
아낙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키리에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서늘하고 무시무시한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길한 감각이 들었다. 아낙 역시 같은 것을 느꼈는지 얼굴이 굳었다. 등 뒤에서 무언가가 와글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절망에 질린 키리에가 뻣뻣하게 몸을 돌렸다.
레쇼가 검을 수직으로 바닥에 꽂았다. 그러자 검을 중심으로 키리에와 레쇼의 주변을 돔 모양의 투명한
막이 감쌌다.
아낙은 튕겨 나갔다.
“안 돼!”
키리에가 외쳤지만, 그녀는 아낙의 눈코입에 검은 그림자가 침범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이야기를 합시다, 키리에 뷰캐넌. 이곳과 바깥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 수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일이 잘 끝나면 당신은 방금 봤던 그녀뿐만 아니라 모두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선택이요?”
〔그리고 둘째.〕
〔있습니다.〕
“그 방법은?”
“……이게 나타니엘의 계획인가요? 키리에 뷰캐넌을 초월자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구하게 하고, 시조의
재림이라 칭송받게 하는 게?”
〔아니요. 이것은 오로지 내 독단입니다. 따지자면 나타니엘의 의도와는 반대되는 행동이긴 합니다.〕
“네. 그건 들었어요.”
일전에 눈 내리는 날, 그가 마차에 찾아와 한 말과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리 호국경 본인의
감정이 짙게 묻어났다.
〔나는 똑같은 일이 반복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다시 누군가가 나타니엘을 깨우고, 죽이려 들고,
나타니엘은 그 증오를 즐기는 그런 굴레 말입니다.〕
“……제가요?”
레쇼는 조금 재밌다는 듯이 낮게 웃었다.
이윽고 레쇼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무릎 위에 손을 얹고 허리를 굽히는 동작이 정갈하고 엄숙했다. 그
역시 초월자인 터라, 그 모습은 마치 사자가 머리를 숙이는 것 같았다.
“하. 큰일이요……?”
지나간 일들이 떠올랐다. 한시도 마음 편했던 날이 없었다. 뭔가를 잘해 보려고 하면 도리어 망가지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탓했고, 그녀가 살기를, 동시에 죽기를 바랐다.
그래도 괜찮다고, 버틸 수 있다고 자신을 속였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있다면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왔으니 가뿐하다고 자신을 달랬다.
왜? 왜 그걸 말하게 만드나.
‘돌아오기 싫었어요! 잊고 싶다고요! 전부 지긋지긋해요!’
없어도 있는 것처럼 구는 이유가 사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임을 왜 자각하게 만드나.
모른척할 수 있었는데.
[키리에.]
“내가…….”
키리에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 말하던 나타니엘의 눈빛, 손길, 거기에 뚝뚝 묻어나오던 오롯한
마음이 떠올라 괴로웠다.
“내가 얼마나…….”
입술을 깨무는 키리에를 레쇼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리에의 목울대에서 울컥하는 소리가 났다. 레쇼가 고개를 들었다. 마치 하늘을 바라보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나는 정말로, 그저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당신이 햇살이라면, 당신이 부서져 만들어 낸 물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하, 하하…….”
키리에가 손을 내렸다. 그녀는 더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눈가가 발갛게 물든 얼굴에 슬픔과 냉소가
번갈아 나타났다.
“……이제 와서요?”
눈물 젖은 보랏빛 눈이 사나워졌다.
“네! 그래요! 나를 불살라서, 키리에 뷰캐넌 하나가 깨져 나가는 것으로 위대한 전설경에게 깨달음을
주었다니 참으로 황송한 일이네요!”
레쇼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안다면!”
“……가져간다고요?”
[둄 2 절갠 교환재공타싸 x]
25. 자유
“이랴!”
“무서워도 계속 가야 해. 알았지?”
말들은 대답 없이 달릴 뿐이었다.
“무슨 짓이지?”
“보셔야 한다니까요!”
“저게 뭐지?”
“나타니엘 님이에요.”
“큭!”
“이 빌어먹을 계집이……!”
“저곳으로 가야 해요!”
세자르가 멈칫했다.
“키리에가?”
“네!”
“키리에가 어디 있느냐?”
“저쪽인 것 같아요.”
“위험해 보이는군.”
“안네마리가 같이 갈게요!”
세자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녀가 ‘둘 이상은 지키기 어렵다’고 우겨서 홀로 떠나긴 했지만, 역시
집사와 수색꾼을 데려올 걸 그랬다.
“네……?”
안네마리가 눈을 크게 떴다.
세자르 뷰캐넌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멍한 얼굴의 안네마리를 두고 태연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안네마리가 무표정이 되었다. 그녀가 조용히 있자, 세자르가 뒤늦게 안네마리를 돌아보았다.
“당신?”
“네. 당신이요.”
안네마리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갔다. 세자르가 앉은 각도에서는 안네마리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안네마리가 치마를 들쳐, 안쪽 호박 바지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시녀. 말을 돌려라.”
“크악!”
“큿!”
“어림없어요.”
“크아악!”
“크흑, 아, 흐어……!”
안네마리는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휘파람을 불었다. 말들이 달리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방향을
바꿔 보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세자르가 가슴을 들썩이며 물었다. 그는 양팔이 불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그 모습에 안네마리가 피식 웃었다.
“하, 하하.”
“여기가 좋겠어요.”
“싫은데요.”
“난 키리에의 아비라고!”
“크아악!”
“안네마리는 아가씨에게 이렇게 말할 거예요. 주인님은 수도에 이변이 생기자 아가씨를 걱정해 찾아
나섰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통에 마차에서 내렸고.”
안네마리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반대쪽 발목으로 뛰었다.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세자르가
바닥에서 몸을 비틀었다.
뷰캐넌 공작가의 수장, 세자르 뷰캐넌은 양 손목과 발목의 뼈가 부서져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헐떡대고
있었다. 항상 깔끔하게 넘기고 있던 머리카락은 땀으로 흐트러졌고, 목에는 핏대가 섰다. 안네마리가
그런 세자르를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크아악!”
그녀는 나타니엘이 싫었다. 하지만 수도로 돌아와, 키리에를 보는 나타니엘의 눈빛이 얼마나 애틋한지는
알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도.
사랑하는 키리에. 사랑하는 자신의 아가씨. 자신의 구원자……. 그녀가 또 누군가를 구원한 것이다.
안네마리는 키리에가 자신을 구했기 때문에, 구조자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키리에에게 보내는 애정은 무한했지만, 그렇다고 안네마리가 키리에에게 아무 부담 없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겠지. 짜증이 나고, 슬프고, 힘들고, 아픈데도 웃어 주어야 하는 어린애란 사실 얼마나 귀찮은가.
세자르의 얼굴에 아마 인생 최초가 아닌가 싶은 비굴함이 떠올랐다. 그 와중에도 거래를, 그것도 이전의
안네마리라면 혹했을 거래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그는 확실히 수완가였다.
“그러니…….”
“사…… 살려다오…….”
안네마리가 쥐고 있던 나뭇잎을 와그작 소리가 나도록 뭉쳤다. 그녀가 한 걸음 물러나며 양손을 펼치자,
잘게 바스러진 잎이 꽃잎처럼 세자르의 몸 위로 흩날렸다.
사사사사. 사사사사…….
안네마리는 곧 세자르를 뒤로하고 도시 저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인기척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게’ 도시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키리에는 나타니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레쇼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지만, 나타니엘의 부탁이라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를 도와줄 터였다.
“……정말 죽었나요?”
“말해요.”
“어떻게 다르죠?”
“……괴롭겠네요.”
〔말해 두겠습니다. 당신은 나타니엘의 죽음에 아무 책임도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 그 지옥을 선택했고,
당신에게 뭔가를 바란 적은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평생을 꼼짝도 안 하고, 그저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겠다는 게……. 대체 언제까지요?”
“그게 뭔가요?”
“…….”
그 순간, 키리에는 심장이 멈춘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기억 하나가 펼쳐졌다.
[틀리진 않아.]
[말해 봐.]
그 말이 참으로 옳았다.
사실 아주 타산적인 행동이었다.
키리에가 ‘네가 행복하길 바라.’하고 말하면, ‘나는 나보다 네가 행복하길 바라.’하고 말해 주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필사적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유아적이고 음습한 바람인지 키리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키리에의 내면에 있는 어린
키리에 뷰캐넌은 여전히 애정에 목말라 있었다.
어른 키리에 뷰캐넌은 그걸 해결할 방법을 몰랐다. 갈증이 채워지지 않은 심장은 자라지 않았는데,
머리만 자라 세상에 물들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나타니엘이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필사적이지 않아도 된다고.
왜냐면 그의 말마따나 키리에가 누구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선하든 악하든, 그녀는 그의 세계일
것이므로.
“이건…… 정말…….”
키리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이 제멋대로 일그러졌다. 뺨에서 뚝뚝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그녀는 이내 눈을 꾹 감아 버렸다.
“반칙이에요…….”
“내 선택은…….”
프로노이아의 마법사들은 이변을 늦게 알아챘다. 먹구름이 수도 전체를 뒤덮어 밤처럼 어둡게 만든 뒤였다.
“숨어! 집 안에 숨으라고!”
하지만 아무리 마법으로 목소리를 높여도 소용없었다. 사람들은 허공에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조언자의
말을 따르기보다는 제 발로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저리 비켜!”
포 박사가 절규했다.
“그냥 우리라도 숨읍시다! 솔직히 우리와는 상관없는 사람들 아니오! 듣지도 않는 머저리들을 데리고
대체 뭘 하겠소!”
“뭐죠? 이런 어마어마한…….”
빛으로 된 둥근 원이 바닥에 그려졌다. 그리고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키리에 뷰캐넌이 나타났다.
“……공간 이동 마법?”
마법사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다 모여 있었구나.”
“허어……. 그런 게 가능하다니.”
“예?”
키리에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무슨……?”
“예?”
“보면 알 거야.”
키리에의 몸이 중력을 무시하듯 천천히, 높이 떠올랐다. 그녀가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자줏빛 마력이
요정의 날개 가루처럼 반짝거렸다.
키리에가 허공에 섰다. 그녀는 이미 수도의 반을 집어삼킨, 밤보다 더 어두운 물결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죽습니다.’
‘네?’
‘잠시만요, 죽는다뇨?’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내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레쇼는 지나가던 사람이 표정만 보고도 괜히 부러워할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키리에의 입이 말을 찾지
못하고 들썩였다. 이미 힘은 넘어왔고, 레쇼의 몸은 형체를 잃어 가고 있었다.
나타니엘에게.
“전부…….”
멍청이들이다.
손끝에서 붉은 보랏빛의 마력이 펼쳐졌다. 그녀를 중심으로 먹구름 낀 하늘에 거대한 술식이 그려졌다.
“잠깐만, 저기 봐…….”
구름이 개기 시작했다. 둥글게 벌어진 틈 사이로 햇살이 후광처럼 내려와 키리에의 몸을 비췄다. 구름은
점차 물러나고, 사람들을 덮치던 그림자는 빛이 닿자 검은 벌레처럼 꿈질거리며 물러났다. 그때마다
그것이 삼켰던 사람들을 꿀렁꿀렁 토해 냈다. 사람들은 기절한 채로 바닥에 엎어졌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시조의 재림…….”
누군가 중얼거렸다. 이제 시민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들은 키리에 뷰캐넌이 수십여 명의 마법사들을
데리고 그림자를 물리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역사에 기록될 한순간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소름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하나둘씩 키리에를 향해 기도하거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몸에 마력이 넘쳤다. 새로운 감각이 열린 듯했다. 세상은 지금까지 어떻게 모르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오색찬란한 무지갯빛이었다. 넓고 아득했다. 그리고 아주 외롭고 막막했다.
키리에가 눈을 감았다.
“모두 눈을 감아.”
새파라니 아득한 하늘 아래, 키리에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람들의 함성과 축복은 들리지도 않았다.
***
며칠이 흘렀다.
며칠 새에 많은 일이 있었다.
국왕은 반미치광이의 상태로 발견되었다.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간 것처럼 미라 같은 모습인데도, 살아는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녀는 폐위되었다.
똑똑.
“들어와요.”
그녀가 말했다. 문이 스르르 열리고, 키리에 뷰캐넌이 나타났다. 키리에가 루비니아를 발견하고는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인 것 같네요.”
루비니아가 격의 없이 투덜댔다.
“볼일이 있어서요.”
루비니아의 산뜻한 대답에 키리에는 아무렴 여부가 있겠느냐는 식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며 차향을 음미했다. 평화로운 새소리가 거짓말처럼 온화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루비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경이 얼마나 특이한 작위인지는 알죠? 세습되지 않고,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명예직. 뭔가를 할
필요도 없어요. 그런 자리니까.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고요.”
“그런가요.”
“그렇군요.”
“뭐가요?”
“당신…….”
“어떻게요?”
“나는 명예를, 왕가는 실속을 챙기고, 시민들은 새로운 호국경이 왕가를 지지한다는 것에 안심하고, 그로
인해 왕가는 다시 지지율을 되찾고, 당신은 그 대영토를 회수한 희대의 책략가가 되겠군요, 루비니아
양.”
“정말요? 말해 두는데, 전설경 때랑은 달라요? 임대가 아니라 완전한 양도인 거예요?”
“네.”
키리에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네요.”
키리에의 수월한 수락에 루비니아는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그녀는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찻물을 새로
들였다. 차를 내리는 동작이 제법 근엄하고 우아했다. 그를 지켜보던 키리에가 나른하게 말했다.
“하지만 호국경의 작위는 고사하겠습니다, 전하.”
“뭐요?”
“아이참……!”
루비니아가 짜증스럽게 사람을 부르려던 순간, 키리에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허공에 포도주색의 마력이
작게 술식을 그렸다.
루비니아가 놀라 입을 벌렸다.
“얼마나 강한 거예요?”
“꽤 강해요.”
“제안은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아무리 싫어도 저는 뷰캐넌의 적자고, 후계자입니다. 그저 도망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공작가에서 나올 수는 없어요.”
“네?”
“들어오라고 해.”
“키리에……. 잘 지냈니?”
그레이의 마지막 기억은 마차 안에서 나타니엘과 마주친 순간이었다. 나타니엘의 지팡이가 명치에 닿았고,
느베야가 그를 배신했고, 빗물 탓에 옷에는 둥근 얼룩이 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방이 검었지만 자신의 몸은 보였고, 감각도 이성도 멀쩡히 기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배가 고프지도, 목이 마르지도, 졸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레이는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그레이는 전설경이 자신과 협상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같이 깨달았다.
전설경은 그저 버리기엔 애매하고 자주 쓸 일은 없는 물건을 다락방에 넣어놓듯이 자신을 여기에 두었을
뿐이었다.
공포가 밀려들었다.
시간이 흘러 그레이는 자신이 그레이 뷰캐넌인 것도, 그레이 뷰캐넌의 경험도 전부 자신의 망상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그레이 뷰캐넌.]
[그레이 뷰캐넌.]
[그래. 그게 네 이름이야.]
“아아아……! 아아아아아!”
“네, 네……!”
[빛을 다시 보고 싶니? 사계와 시간이 있고, 어여쁜 숙녀들과 늙은 벌레들이 있고, 강철의 검집 아래
썩어 가는 가난의 지푸라기도 있는, 바깥세상 말이다.]
“나가고 싶습니다! 나가게 해 주십시오! 뭐든 하겠습니다! 시키는 거라면 다 하겠습니다! 핥으라면 핥고,
죽으라면 죽을 테니, 제발……!”
그레이는 자신의 간절함이 더 잘 드러나도록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눈앞의 검은 신이 자신을 버리고
다시 돌아가지 않도록 그의 신앙심을 보여야만 했다.
“네……?”
[깨어나면 네 하인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다. 너보다 영리한 듯하니 데리고 다녀. 그리고 하늘에 이변이
나타나면, 하루를 기다린 뒤 마차를 타고 수도로 가도록.]
“예, 예! 그러겠습니다!”
“예……!”
***
“느베야, 가까이.”
“예.”
그레이의 뒤에서 덩치 큰 근육질의 하인이 그레이의 의자를 밀었다. 키리에의 시선이 그레이의 다리로
향했다. 담요를 덮고 있었다.
“아, 이거?”
“마차 사고?”
“…….”
“감사합니다.”
“…….”
“저기…….”
“……그동안 미안했다.”
“정말 마차 사고야?”
“당연하지.”
“그렇습니다.”
“그래…….”
“그, 키리에……?”
“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들었지?”
“들었어.”
“장례식……. 올 거냐?”
마무리. 그레이가 내뱉은 단어 중 하나가 키리에의 마음에 성큼 들어섰다. 키리에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네. 마무리…….”
햇살이 들이치는 창문 아래로 창틀의 모양을 따라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봄이라고 하기엔 이젠 제법
날이 더웠다.
***
그레이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미 전설경의 말을 어기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불면증이
도졌다. 탈모와 섭식 장애, 강박적으로 몸을 씻는 버릇도 생겼다. 그뿐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날붙이로 다리를 미친 듯이 찔러대기도 했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이 상태를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느베야를 데리고 다녀야 했다.
***
“키리에!”
“호국경의 힘을 넘겨받았어.”
“그게 가능해?”
“그럼…….”
“응?”
“자기 입으로?”
대답한 것은 마리아였다. 키리에가 희미하게 놀랐다. 자리를 꽤 오래 비웠다 싶더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닌 걸까.
“나타니엘이?”
“한밤중에 침실에 서 있길래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사과라도 하려고 온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사과는 무슨!”
라우라가 말을 받았다.
키리에가 대답하지 못하자, 라우라가 다시 키리에와 팔짱을 끼며 옆구리를 붙여 왔다. 명랑한 목소리였다.
마리아가 웃었다.
“물론이지.”
“마리아가 맞다면 맞는 거야! 알지? 솔직히 전설경이나 호국경이 좀 비인간적으로 강해서 그렇지, 보통은
공작이랑 후작이 제일 세거든? 응? 인간 수준의 싸움에서는 말이야!”
“하지만 넌 떠날 거지?”
“어디로 갈지 정한 거야?”
“그렇게까진 안 해 줘도 됐는데.”
“그냥 받아!”
“흠흠, 라우라…….”
그녀의 장난스러운 말에 라우라와 마리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들이 아는 키리에는 그렇게 진지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에 키리에는 여전히 장난을 제법 좋아하고, 빈정대는 건 잘하고, 맡은
일에 조금 열심인 친구일 뿐이었다.
“그거야 제 비밀 사재 아니겠어요?”
“라우라.”
***
루비니아에게 향하는 두 사람을 배웅하고 왕궁을 나선 키리에는 마법으로 모습을 숨겼다. 힘이 있다는 건
편리했다. 언젠가 고요한 일상은 강자의 것이라던 나타니엘의 말이 떠올랐다.
키리에가 걸음을 멈추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흥분한 소년 하나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사실 건국 때부터 전설경이 종말을 봉인하고 있다가, 도리어 종말에 먹혀 사악하게
물들었던 거래요.”
“어떻게?”
“난들 아나요? 마법으로 요렇게 조렇게 잘 주무르면 되나 보죠! 아무튼, 국왕이 나쁜 마음을 먹었는데,
여기서 호국경이랑 키리에 뷰캐넌이 나타난 거야!”
“그러니까 키리에 뷰캐넌이 더 대단한 거죠! 난세에는 항상 영웅이 나온다던데, 진짜긴 한가 봐요.”
“있던 걸 주긴 좀 그렇겠지?”
“에이, 새로 해 줘야지.”
“안 받으면 어떡해?”
사람들 모두 키리에 뷰캐넌이 얼마나 감쪽같이 속았는지, 얼마나 처절하게 갇히고 묶여 지냈는지, 키리에
뷰캐넌이 도망친 이후로 수도가 얼마나 살 떨리는 분위기였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어디를?’
‘……오티움 국립묘지.’
실소가 흘러나왔다.
마리아를 만나고, 라우라를 만나고. 루비니아를 만나고, 또 아마 그레이를 만났겠지. 자신이 움츠리고
있는 동안, 그는 꽤 바빴던 모양이다.
나타니엘이 정말 자신과의 이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떨어져 있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을 리 없었을
텐데.
냉기가 남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키리에는 천천히 묘지를 걸었다. 곧 익숙한 이름을 찾아냈다.
‘아가씨. 삶은 그리 각박하지 않아요. 아가씨 잘못도 아니고, 산 사람들도 결국은 살아야지 않겠어요?’
[둄 2 절갠 교환재공타싸 x]
26. 돌아갈 곳
세자르 뷰캐넌의 장례식은 단출하게 이루어졌다. 어느 선량한 사람이 하늘로 돌아가기 좋은 날이었다.
그게 세자르 뷰캐넌은 아니겠지만.
작은 신전에서 진행한 추도식이 끝나고, 관을 운구하기 전이었다. 키리에는 천천히 일어나 사람들을
접대하고 있는 그레이에게 다가갔다.
“그레이.”
그레이가 당당하면서 비굴하게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사람들은 자리를 피해 주었고, 키리에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응…… 응?”
“네.”
“뭐?”
“자, 잠깐……!”
키리에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술식 여섯 개가 허공에 그려졌다. 곧이어 강하게 압축된 공기가 그레이를
명치를 향해 튀어 나갔다.
“크헉!”
그레이는 여섯 대의 마법을 맞고, 세자르가 누워 있는 관까지 날아갔다.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알 바 아니지만.
“안네마리?”
안네마리가 방긋 웃었다.
“안느. 키가 큰 것 같은데?”
안네마리가 씩 웃었다.
“서운하니?”
“낯설진 않고?”
“아가씨는 아가씨인걸요.”
안네마리의 대답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키리에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흘려보냈다.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구나.”
세자르 뷰캐넌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키리에도 간략히 전해 들었다. 하지만 안네마리에게 세자르의 호위를
맡긴 것도 아니었고, 그 날은 비슷한 일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굳이 따지자면 사람들의 악한 본성이
문제였을 뿐이다.
“제가 말렸어야 했어요. 주인님이 아가씨를 찾으러 위험한 곳에 가겠다고 했는데, 저도 아가씨가
걱정돼서 그걸 말리지 못했어요…….”
“아버지가 나를 걱정했다고?”
“네.”
안네마리가 손을 당겨 키리에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말려도 듣지 않았어요. 저는 주인님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아가씨를 걱정했다는
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키리에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가만히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자 안네마리가 고개를 숙였다.
자책하는 안네마리의 모습을 보며, 키리에는 어쩐지 몹시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생판 모르는 남의
부고를 듣는 듯했다.
“신경 쓰지 마.”
“아뇨……. 그런 게 아니었어요.”
“재산 이야기였니?”
“아뇨.”
“나를?”
“네.”
“아버지가?”
“네.”
‘거짓말.’
“정말이에요.”
키리에의 의구심을 눈치챈 안네마리가 단호하고 무구하게 말했다. 검은 눈은 맑았다. 어딘지 간절하기
보이기도 했다.
“고생했어, 안느.”
“날 안아 주지 않을 거니?”
“……아가씨.”
“응.”
“전 이제 떠날 거예요.”
안네마리가 헤헤 웃었다.
“가지 않을 수는 없는 거지?”
“원래는 아가씨의 수명이 다하면 그때 넘어가기로 했어요. 아시다시피, 엘프는 인간보다 오래 사니까요…
….”
“그렇지만…….”
“……아가씨는 이제 괜찮으니까요.”
“다시 만날 수 있지?”
“당연하죠!”
***
“그래서 나쁜 게 누구라고?”
“전설경이랑 국왕이지.”
이든이 헛기침했다.
“불상사라니, 무슨 말이야?”
“자네 모르나?”
“허…….”
“개는 어찌 됐는데?”
이든은 진저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 유감이 없는 듯했다. 그녀가 자식의 마력을 뽑아내기 위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루비니아는 상냥하고 사랑스럽게, 그러나 키리에 눈에는 아무리 봐도 귀찮아하는 듯한 기색으로 이든에게
웃어 주었다.
“뻔뻔하기도 하지!”
“키리에!”
“키리에!”
“키리에!”
“키리에! 키리에!”
“호국경이 우리 곁에 있다!”
키리에는 단상의 끝, 국왕 부처와 귀족들이 앉은 자리 가까이에서 멈췄다. 그리고 주변의 소란을 무시한
채 루비니아를 응시했다.
“가만있어요, 이든.”
“루, 루비……!”
도망치고 싶어서 안달하는 이든과 달리, 루비니아의 녹색 눈은 몹시도 강건했다. 그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키리에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는 자신이 대마법사인 것을 알면서도.
“아!”
“왕비랑 뭐가 있나 봐.”
올드시우다드 공작과 포트듀케인 후작이 돕는다 해도 루비니아는 정계에 지지층이 없다. 기득권층을
설득하긴 어려우니, 그녀는 민심을 휘어잡아 맞서야 한다.
키리에는 거기에 약간의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거래에 가까웠다. 키리에가 넘긴 영토와, 그녀가 남기고
가는 사람들을 잘 책임져 달라는.
혹시 부담스러워할까?
“꺄아! 너무 좋아! 어떡하죠, 이든? 호국경이 제게 인사해 줬어요! 저보고 태양이래요! 루비가 그렇게
빛나요? 반짝반짝해요?”
루비니아 캐스너, 그녀야말로 폰에서 시작해 체스판의 끝에서 퀸이 된 여자. 그녀는 남을 책임지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다. 잘해 낼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바, 방금…….”
“뭐야. 또 쟤야?”
“전설경 때도 저러더니…….”
“또 보여 주나?”
“날이 덥군요.”
이든이 마지막으로 루비니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루비니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아니, 그럴 것까진…….”
“괘, 괜찮다니까?”
“알았어, 알았어…….”
“하여 나 여기 키리에 뷰캐넌의 고결한 희생을 기리며, 인간이 부여한 이름을 수급하고 그녀를 호국경에
봉헌하노라.”
연설이 끝나자마자 키리에가 약간의 마력을 사용했다. 선명한 금빛이 왕홀에서 터져 나갔다. 하늘에서
금빛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와……!”
키리에의 역할은 거기가 끝이었다. 나머지는 사람들을 즐겁게 할 여흥 무대였다. 키리에가 조용히
무대에서 내려가려는데, 재빨리 다가온 루비니아가 그녀의 팔뚝을 붙잡았다.
“뭔가요?”
“……고마워요.”
“뭔데요?”
“참나. 원래 이런 사람이에요?”
키리에의 뻔뻔한 대답에 루비니아가 헛웃음 쳤다. 그리고 곧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키득거렸다.
“내가 진작 알아봤지!”
키리에의 나긋한 대답에 루비니아가 키리에의 팔뚝을 놓았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나, 장난스럽게 웃었다.
잠깐이지만 그녀의 눈에 진지한 빛이 스쳤다.
“배짱 있으면 나중에 놀러 와요! 발판이 꺼지는 함정은 없을 거고, 찻잔에 독이 묻어 있지도 않을
거랍니다!”
“영주님.”
“아가씨……!”
“시워드 박사는 걱정하지 마. 뷰캐넌에서 돌봐줄 거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왕가, 올드시우다드,
포트듀케인. 셋 중 하나로 가서 말해.”
“새 영주가 필요한가?”
“그건 아닙니다만…….”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마침 루비니아 양에게 프로노이아를 자유 도시로 지정해 달라고 말해
놨으니, 하던 대로 자유롭게 지내는 수밖에.”
“꺄아! 왕실 서고라니!”
“물론이지요.”
키리에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녀는 주머니를 뒤져, 주머니보다 큰 책을
꺼냈다.
“참. 이걸 받아.”
“이건……?”
「389 년 12 월 1 일.
나는 드디어 뷰캐넌 백작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여 여기에 겨울의 왕을 죽음에서 돌이킨 마법의
술식을 기록한다. 누군가가 이것으로 그를 도울 수 있길 바라며.」
키리에는 세자르 뷰캐넌이 어째서 나타니엘에게 그렇게 뻔뻔하게 굴 수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왕가가
나타니엘을 죽이려 들면, 자신이 가진 술식이 크게 활약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고작 그거였다.
키리에는 자신의 두려움이 그저 하룻강아지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깨닫고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짐이 많지는 않았다. 필요하다면 세상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아서, 도리어 뭔가를 손에 움켜쥐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타니엘이 그러했듯이. 있는 짐마저 작게 축소해 주머니에 넣고 나니 양손이 두
발만큼이나 가벼웠다.
“신분증을 부탁드립니다.”
“실례했습니다.”
“수고해.”
“어디로 갈까…….”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그사이 누구도 키리에를 부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키리에를 힐끗거리긴 했어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녀는 이제 어디에도 빚진 것이 없었다. 나타니엘이 진실로 그녀의 모든 책임을 거둬간 것이다. 이제야
그것이 실감 났다.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지금 조금 외롭다 하더라도, 다시 돌아가면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역시 사람인지라, 키리에는 때때로 외로움에 겨워, 뒤돌아 자신의 그림자를 보곤
했다.
‘나타니엘도 아마 그래서…….’
“…….”
번드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
단풍 사이로 작은 오두막집이 보였을 때, 키리에가 멈칫했다. 오두막집 옆, 양지바른 곳에 작은 자카란다
나무가 심겨 있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리에 님!”
키리에가 멈칫했다. 혼자 떠돌며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번드의 얼굴에 못 보던 주름이 생겨 있었다.
“우응?”
번드의 뒤에서 이브가 꼬물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키리에를 보며 배시시 웃고는 번드의 뒤에
숨어 버렸다.
키리에는 한 번 더 놀랐다.
“고마워. 실례할게.”
“나타니엘 님은 같이 안 오셨나요?”
“……사정이 있어서.”
“그렇습니까? 일단 들어오십시오.”
“다행이네요. 저, 그런데…….”
“예. 무슨 일이라도…….”
“사별했어.”
“응. 별이 됐어.”
이브가 웃었다.
“잘 어울려요…….”
“그러니.”
“응!”
안락한 오두막집 안, 정적이 주위를 감쌌다. 번드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테이블 밑에 떨어진 나무 잔을
주워 만지작거렸다. 그의 표정은 처참했다.
키리에가 놀라 되물었다.
“……뭘 했는데?”
“차?”
“……들어주느라 고생 많았어.”
키리에가 멈칫했다.
“……번드. 괜찮아.”
“리에 님……!”
문득 자연스럽게 입이 열렸다.
번드가 가슴을 들썩였다. 그는 아주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면서 울음을 참으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주 멍청하고 돼먹지 못한 질문인데도 번드는 키리에를 질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멍해지는 키리에의
얼굴을 보며, 더 크게 꺽꺽대며 울 뿐이었다.
“안 될까?”
“될까요?”
그를 보며 키리에가 한 번 더 말했다.
“…….”
“변하지 않는 건 없어.”
“아니야.”
“난…….”
“아니야, 난…….”
하지만…….
자신 앞에서만 안절부절못하고, 아이처럼 심통을 부리기도 하고, 그리고 때때로 아주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내내 갖고 싶던 것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옆에서 그녀가 꼭 그 선물 상자를 풀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주변의 종용에 키리에는 더 알 수
없어졌다.
“눈빛……?”
“…….”
다정하지만 냉정한 번드 카프. 키리에는 얼굴을 찡그렸다가, 이내 힘없이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맞아……. 그랬어.”
‘그럼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키리에가 중얼거렸다.
“번드.”
“네.”
***
왕비는 그곳에 망루 하나를 세웠다. 그리고 병사를 배치해 바다를 감시하게 했다. 당연하지만 평소에는
철썩이는 바다밖에 볼 게 없기에, 병사들은 별로 열심이지 않았다.
“어라?”
여자. 외딴곳. 햇빛을 받으면 은빛으로 보이기도 하는 연보랏빛 머리카락. 짐 하나 없이 가벼운 손에,
흩날리는 상아색 마법사 로브.
“호국……!”
***
마법 덕에 숨을 잠시 멈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속에서 숨 쉴 수 있는 마법을 쓸 수도 있었지만, 별로
바닷물을 먹고 싶진 않았다.
키리에는 머리카락 사이의 공기 방울이 수면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춤추듯 발끝을 세우고서 천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해수면과 가까운 얕은 바다는 밝고 맑았다. 어디를 둘러봐도 연한 금빛의 햇살이 물결에 따라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상어 떼가 키리에의 주변을 맴돌다 금세 흥미를 잃고는 사라져 갔다.
키리에는 레쇼의 말을 떠올리며 심해의 넓고 고요한 평원에 사뿐 섰다. 눈앞에는 깊은 골짜기가 펼쳐져
있었다.
마력이 내뿜는 빛을 제외하면 주변은 칠흑이었다. 언젠가 나타니엘이 보여 준 그림자 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있다면 여기다.
빛은커녕 온기도 없는 바다의 밑바닥에, 거대하고 투명한 얼음이 골짜기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아주
섬세하게 세공한 보석 같은 얼음은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한기를 흘렸다.
그 안에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남자가 잠들어 있었다.
비인간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나타니엘.’
파사삭.
“……!”
‘이런!’
‘숨이……!’
그 순간이었다.
파란 것이 눈앞에 반짝였다.
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읍……!”
그녀가 반사적으로 나타니엘의 팔을 짚자,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 키리에의 뒷목을 당겼다.
그도 잠깐이었다.
나타니엘은 곧 약간의 미련이 느껴지는 동작으로 키리에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바다 깊은
곳에 얼음으로 된 공간이 만들어졌다.
“콜록, 콜록……!”
“콜록, 하아…….”
[…….]
[……레쇼의 짓이군.]
“할 말이 그거뿐이에요?”
나타니엘이 굳었다. 키리에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증오도 달갑다던 사람이, 이제는 날 선
눈빛 하나에 심장이 멎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길 바랐어.]
“…….”
[그것만은 못 참았겠지.]
기우였다.
[키리에?]
[아프니?]
“나타니엘…….”
[응.]
[알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 나타니엘의 얼굴이 있었다. 상심한 게 분명한데도, 시선은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키리에가 옅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고마워요.”
그런 그를 보며 키리에는 다시 미소 지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키리에는 이 깊은 바닷속까지 찾아와, 심장에 칼을 꽂아도 모자랄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를…….]
[…….]
“당신이 잠들고 나서, 대부분은 혼자 지냈어요. 당신이 지내온 세월에 비하면 아주 잠깐이겠지만, 조금은
당신의 입장을 이해하게 됐고요.”
“이제 알 것 같아요.”
“당신은 외롭고요.”
“나를 엄청 좋아해요.”
닿은 곳이 뜨거웠다.
[키리에. 그 말은…….]
“수국 심을 줄 알아요?”
[배우면 되지.]
“여름은 좋아하나요?”
[좋아질 것 같은데.]
“꿩 사냥은 할 줄 아나요?”
[그건 내 전문이고.]
[물론.]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떻게.
어떻게…….
[드디어 나도 미쳐보는군.]
그리 말하며 선하고 맑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키리에를 마주한 순간, 나타니엘은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미끄러지듯 흘러나왔다.
[……미안해.]
[전부 미안.]
“참나…… 뭐예요……?”
[미안.]
“낯설게 대체…….”
[미안해.]
[미안해.]
“사과받으려고 한 게 아니에요.”
[미안.]
전해지길 바랐다. 그가 아는 인간의 언어는 몹시도 하찮아 그가 가진 감정의 편린도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전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의 마음은 늘 하나였다.
네가 좋아.
그래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
“아…….”
“다신…….”
[그러지 않을게.]
[그래.]
[미안.]
[미안해.]
[미안.]
[그러진 말고.]
“…….”
[농담이야.]
키리에는 한참을 앞도 뒤도, 맥락도 논리도 없이 그간의 상처를 내뱉었다. 개중에는 아예 그의 잘못이
아닌 일도 있었고, 책임을 묻기에는 지나치게 오래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키리에는,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야 마는 키리에는 결국엔 하얗게 부서지는 미소를
보여 주었다.
“두 번은 안 봐줄 거예요…….”
[나도 이젠 못 놔.]
***
“220 억…….”
가격이 의심 가지 않는 대저택이었다.
키리에는 약간 멍해졌다.
중앙에는 수령이 짐작도 가지 않는 거대한 포플러 나무가 있었다. 그 주변으로 꽃이 지고 황금빛 열매가
맺힌 자카란다가 울창했고, 수국은 잎이 무성했다.
키리에가 먼저 가벼운 걸음걸이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문지방 안쪽에서 미소를 지으며 물끄러미
나타니엘을 바라보았다.
“초대해 줄까요?”
“아뇨. 안 할 거예요.”
[그러시다면야.]
[…….]
“감상은요?”
[역시 넌 최고야.]
키리에도 마주 웃었다.
“나도 알아요.”
[내게 복종하세요(完)]
[둄 2 절갠 교환재공타싸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