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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파이) 검은 정장의 미학 1-2권 합본
(잭파이) 검은 정장의 미학 1-2권 합본
잭파이
목차
1. 마더의 딸들
2. 클로버의 수
3. 지향점이 다른 밤
4. 속이는 자와 속는 자
5. 그 안전한 마약상
6. 차 안에서
7. 모자와 커튼콜
8. 줄리엣은 없다
9. PLEASURE GARDEN
10. 의구심
11. 약속
12. 총을 든 남자
13. 자매들의 마더
14. 그와 그의 아들
16. 푸른색 장미
17. 검은색 축제
18. 불청객
20. 회칠한 무덤
21. 붉은색 축제
22. 마지막 장
1. 마더의 딸들
아무도 마더를 모욕해서는 안 된다. 술집에서 주고받는 안줏거리로도 마더를 입에 올려서는 안 됐다.
숨겨진 도시. 어느 주에도 속해 있지 않았던 헤르게임은, 그 특수성 탓에 탈세를 노리던 암흑가의 성지가
되었다.
헤르게임을 지배하게 된 네 조직은 마음껏 기량을 뽐냈다. 보호세를 명목으로 각 구역에서 세금을 걷는
것은 물론, 살롱을 차렸고, 불법 고리대금업과 인신매매로 돈을 끌어모았다. 이 모든 것에 폭력이
결부되지 않는 부분은 없었다.
2 월 14 일, 밸런타인데이.
스페이드 조직 앞으로 익명의 선물이 도착했다. 분홍색 리본으로 묶인 선물 상자는 유독 크기가 컸다.
리본을 풀어보니 안에 들어있는 건 세 가지였다.
균등한 크기로 곱게 조각난 시체였다. 하지만 신원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상냥한 범인이 얼굴만은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입가에는 초콜릿과 피가 묻어 검고 붉은 자국이 눈에 띄었다.
―마더로부터.
마더.
그는 시저 조직의 보스라 자칭했다. 혈연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한 네 사람을 딸이라 부르며 간부로 내세운
그는 스페이드에 선전포고를 던졌다.
그중 유독 모욕적으로 굴었던 사람들은 더욱 철저히 응징했다고 한다. 총으로 가루를 만들었다, 발끝부터
밟아 죽였다, 시체의 머리를 잘라 그 머리로 축구를 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피네.”
차분한 음색이 더한 고문을 막아줬음에도, 남자의 얼굴은 하얘지다 못해 파래졌다. 뷔노는 긴 손으로 제
아랫입술을 꾹 누르며 말했다.
“팩스라.”
“정말로… 아는 게…….”
이를 악물며 금니를 드러낸 피네는 남자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거짓말을 할 때 잠시 나오는 미세한 떨림,
변화 등이 전혀 없었다.
“더 아는 게 없다.”
“그렇겠지.”
“…예?”
스읍. 뷔노는 두꺼운 바닐라 향 시가를 들이마셨다. 입 안에서만 맴돌게 피우는 독한 연기를, 갈증이 난
것처럼 폐 끝까지 벌컥벌컥 쑤셔 넣었다.
“피네.”
“내가 할 수 있는데.”
“난 받은 건 배로 돌려주는 걸 좋아해서.”
“끄으으윽!”
“그래?”
“마더는(Mother).”
“언니.”
뷔노를 찾아온 것은 연구원 복장을 한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매부리코에 걸쳐진 안경은 도수가 어찌나 높은지 눈이 두 배는 작아 보이게 했다. 머리는 오랫동안 관리를
못 한 건지, 잔뜩 헝클어져 길이조차 알 수 없었다.
“클로버에 대해 뭔가 알아냈나?”
뷔노는 널브러져 있는 시체 조각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하이직의 두꺼운 안경이 그 광경을 비췄다.
말단의 조직원이라도 패밀리의 일원이다. 시저는 어떤 빚이든 철저하게 갚기로 유명했다.
“다이아?”
“총 개조는 거의 돼가는데.”
그때 뷔노의 손끝에 붉은색 봉투 하나가 닿았다. 고급스러운 인장이 박혀있는 봉투는 꽃무늬가 꾹 눌린
자국처럼 찍혀있었다. 뷔노는 그걸 구기듯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헤드라인 두 개를 읽은 뷔노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검지로 눌렀다. 기사 제목들은 새로운 변화가 이어질 걸
시사하고 있었다.
2. 클로버의 수
간만에 간부들을 소집한 클로버의 보스는 한탄했다. 늙은 보스는 예전의 위용을 되찾고 싶어 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고량주를 퍼마시면서 부하들한테 지시했다.
“변명하지 마!”
깡, 술병 하나가 날아갔다.
“왜, 못하겠냐?”
“그, 그게…….”
술병 하나가 더 날아갔다.
“할 수 있습니다!”
로미오에 대적할 프린스 챠밍을 만들어라. 그 말 한마디에 온 조직이 움직였다. 덕분에 클로버 조직에
잡혀 온 미청년 시몬은 덜덜 떨고 있었다.
“너.”
말단 중 말단에 불과한 클로버 조직원은 커다란 덩치를 위압적으로 부풀리며 시몬을 노려봤다. 험악한
감자 같은 얼굴에 겁먹은 시몬이 바로 대답했다.
“네, 네!”
“너 빚 청산하고 싶지?”
“네?”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긴 분홍빛 속눈썹이 팔락였다. 속눈썹 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동요로
흔들리고 있었다.
흉터 가득한 얼굴을 씰룩이며 노려보던 것은 언제고, 클로버 조직원은 퍽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친근한
척 다가왔다.
“뭐?”
“더러운… 수요?”
“미남계. 로미오들이 우리 조직원의 부인이란 부인, 애인이란 애인은 다 꼬셨지. 하다못해 청소부까지도.
그것들이 정보를 죄다 불어서 클로버가 지금 이 꼴이 났잖아.”
미인계라고 하면 여자들만 경계했지 남자들은 경계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조직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중 클로버는 이미 활활 타고 있었다.
‘내가 로미오 담당이라는 건…….’
‘로미오들한테?’
“그, 그…….”
겁먹은 주제에 계속 반항하려는 낌새가 보이자 조직원이 사람 좋은 얼굴을 버리고 바로 흰자를 드러냈다.
“아니면 지금 돈 갚든가.”
병원비가 끊기는 순간 입원 치료를 못 받게 될 것이다. 지금도 생사를 오가는 중인데 절대로 치료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죽어라.’
“헉.”
‘잊자.’
[항상 양말까지 검은색으로 맞춘 정장을 입음. 자매들과 다르게 코트와 베스트까지도 입는다.]
‘카페에서 찍은 건가?’
의외의 정보에 의아한 동시에 시몬은 씁쓸해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몬은 애써
생각을 지우기 위해 밑의 글씨로 눈을 돌렸다.
[늘 비슷한 외모의 상대를 만난다. 그 이유가 죽은 첫사랑을 못 잊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다.]
이렇게 잔인하고 이상한 사람이, 첫사랑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니 이상하게 느껴졌다. 시몬의 눈이 다음
페이지로 향했다.
시몬은 얼굴을 손에 묻었다. 속으로 울분과 애환과 눈물을 쏟아낸 뒤, 지끈거리는 눈가를 꾹꾹 눌렀다.
올망졸망한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버지…….”
“후……. 좋아.”
“이, 이게 뭐야…….”
어떻게 입는지도 헷갈리는 모양의 속옷이었다. 속옷을 든 채 살펴보던 시몬이 신음을 흘렸다.
“으으…….”
가슴과 쇄골이 훤히 보이는 하얀 셔츠로 입었다. 파여있는 데다 짧기까지 한 상의는 움직일 때 언뜻언뜻
복근을 드러냈다.
‘할 수 있어…….’
시몬은 생소한 거리를 걸으며, 조직이 고지했던 장소로 향했다. 속어로 눈먼 돼지라고 부르던 금주법
시대의 술집이 그 장소였다.
그는 생경한 마음으로 술집의 문을 열었다. 대다수 술집보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금주법이 시행되고 있는 와중에, 이렇게 당당하게 운영하는 술집은 없었다.
“예약하셨습니까?”
“네.”
“성함이?”
“시나몬이요.”
“…이렇게 주세요.”
조직이 알려준 정보를 토대로 시몬은 와인들을 골라내었다. 모두 뷔노가 좋아한다던 와인들이었다.
수신호가 왔다.
딸들이 도착했을 경우 창밖의 클로버 조직원 한 명이 창문으로 시몬에게 수신호를 보내게 되어있었다.
와인 잔을 잡은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시몬은 심호흡을 했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시몬은 급하게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물론 여기서 다듬다는 드러낸다는 의미와
동일했다.
끼이이익―!
“그래서?”
“친절해라.”
‘저 사람이 뷔노?’
“물어 뭐 해, 얼른 가져와.”
“저, 저기…….”
“예, 손님?”
“예?”
“얼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시몬은 빠르게 카드를 들이밀었다. 종업원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굽을 보자 시몬의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사람 머리로 축구를 한다던 뷔노의 이야기가 떠올라서였다.
“이건 시킨 적 없는데.”
“저쪽 신사분?”
끝을 올리는 목소리가 비꼬는 게 분명했다. 뷔노의 질문에 공손한 종업원의 두 손은 시몬을 가리켰다.
시몬은 죽음의 바통 터치가 이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하는 새끼냐?”
“빨리 대답 안 해?!”
“뭐?”
“그게 누군데?”
“이분…이십니다.”
“…….”
뷔노를 가리키자마자 사람들의 표정이 다 굳었다.
탁, 탁, 탁.
뷔노의 손가락이 책상에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시몬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술집 안 시계의 초침이
떨어지는 소리와 엇박자로 손가락 소리가 울렸다. 뷔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푸훕.”
웃음소리가 딸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시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뷔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몬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왔다. 둘의 사이가 약 1 미터 정도 떨어져 있을 때였다.
“누가 시켰지?”
“예?”
구멍 바깥쪽으로 일그러지고 튀어나온 벽지, 그 사이에 끼어있는 총알. 시몬은 총구가 조금만 더
오른쪽을 향했으면 어땠을까를 상상했다.
“아, 아무도…….”
“미, 미행이요?”
“…전, 정말 몰랐어요.”
시몬은 넋이 나간 채 고개를 저었다. 시몬의 시선이 뷔노의 구두 앞코에 닿았다. 구두의 방향이 시몬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뷔노가 손을 가다듬고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시몬이 입을 열었다.
탕, 시몬의 귓가에 바람이 스쳤다. 이번에는 더 근접했다.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그가 걸고 있던 귀걸이에 총알이 정확히 맞아 박살 났다. 뷔노는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본론.”
그 말에 시몬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시몬은 떨리는 마음으로 눈을 살며시 올려 뷔노를 보았다. 그러자
뷔노의 서늘한 회색 눈과 시몬의 따뜻한 호박색 눈이 마주쳤다.
“제…….”
“제가…….”
큰일이다.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애초에 클로버의 지령에 따르지 말걸. 시몬은 후회했다.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기절할 것 같은 현기증을 느끼며 시몬이 입을 뗐다.
‘너 같은 얼굴이 취향이라더라.’
“제 얼굴이 취향이시잖아요?”
“뭐?”
“그… 끅, 제, 제…….”
주위를 둘러봐도 도움의 손길 따위는 없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은 뷔노의 영역이었으니까.
눈에 눈물마저 고였다.
“제 머리카락도! 끅, 취향이시고…….”
시몬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난 죽었어…….’
놀리듯이 스치며 피해 가는 총알이 여러 번 시몬의 몸을 두드릴 때마다 시몬은 움찔움찔 떨면서 두려움에
눈을 뜨지 못하고 표정으로만 말했다.
“아, 다 떨어졌군.”
총알이 떨어졌다는 말에도 시몬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감은 눈 때문에 어둠 속에서 뷔노의 목소리만
들렸다.
“피네.”
“보스?”
뷔노는 피네에게 빈 총을 건네고, 시몬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제야 시몬은 눈을 살짝 떴다가 뷔노의
눈이 마주치고 몸을 움찔, 떨었다. 그 모습에 뷔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애틋하기보다는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이다. 입술은 피를 머금은 것처럼 빨갰고, 스산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네 눈은 내 얼굴에 고정해야지.”
손가락 틈새로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뷔노는 머리를 쓰다듬다가 돌연 그의 머리를 잡아챘다.
그러고선 시몬의 귀에 속삭였다.
“…머리는 잘 못 굴리고.”
“보스, 뭐라고?”
‘응?’
뷔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와중에 시몬의 손목을 붙잡고 갔는데, 강한 악력에
시몬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뭐, 뭐지?’
“2 층 비워.”
3. 지향점이 다른 밤
위층에는 뷔노가 사람을 물렸기에 뷔노와 시몬 둘 뿐이었다. 그 전에 피네가 몇 번 짖었기 때문에 시몬은
경직되어 있었다.
“내 이름은 알지?”
‘끄덕이면 안 됐는데!’
금세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나몬?”
뱅쇼는 와인(Vino)에 시나몬을 넣어 끓여 만드는 음료였다. 그 의미를 파악한 시몬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네, 네?”
“아니야?”
“그…….”
뷔노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느님…….’
“나쁘지 않네.”
“…감사합니다.”
뷔노가 시몬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자 어색하게 앞으로 갔다. 뷔노의 손이 시몬의 셔츠에 달린 몇
개 없는 단추를 만지작거리더니 우드득, 단추를 아예 뜯어내 버렸다.
“흣……!”
“튕기면 재미없는데.”
뷔노가 손을 빼냈다. 이대로 자신을 두고 가버릴 것 같았다. 급한 마음에 시몬이 양손으로 뷔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 크다…….’
손가락은 길면서도 두께가 있었다. 흉터도 몇 개 자리 잡혀있었고 굳은살로도 가득했다.
“시, 싫은 게 아니라…….”
“아니라?”
“뭐?”
시몬은 손을 가슴에 모으며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이었지만, 애처롭게 떨리는 속눈썹이 그의 마음을
대변했다.
“아, 그래?”
적당히 크고 아름다운 가슴에는 손톱만 한 핑크빛 유두가 자리 잡았고, 허리는 군살 없이 잘록하게 들어가
있었다.
“아, 흣… 자, 자, 자, 잠시만요―!”
시몬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개졌다. 상체를 다 드러내놓고 가지 말아달라 잡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뷔노가 말하니 그 말이 강간이 아니라 다른 범죄는 취미로
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아뇨, 그… 제, 제가 직접 벗을……!”
“건방지네.”
“윽!”
엉덩방아를 찧은 상태에서 시몬이 뷔노를 응시했다. 뷔노의 손이 시몬의 귀를 강하게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귀, 귀……?’
귀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아까 총알이 스쳤던 것이 떠올랐다. 덕분에 뷔노가 자신의 가명이 아니라 본명을
불렀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시몬은 귀를 뚫는다는 것이 총으로 바람구멍을 만든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뷔노는 시몬의 얼굴이
새파래지자, 웃으며 낮게 명령했다.
“벗어.”
잘그락.
시몬은 떨리는 손으로 벨트를 풀어 바닥에 다소곳하게 올려놓았다. 바지가 완전히 몸에서 흘러내리자,
뷔노가 흥미에 찬 감탄사를 흘렸다.
“흠?”
“…….”
“읏!”
“아, 아니…….”
시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뷔노가 손가락으로 시몬의 물건을 튕겼다. 물건이 서다 못해 수직으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볼록하게
부풀어 오른 선단이 뷔노의 손짓에 출렁거리며 흔들렸다.
“윽!”
“그, 그건―”
뷔노는 시몬의 엉덩이를 움켜쥐는 것으로 그의 반항을 꺼뜨렸다. 손에 딱 들어오는 모양에 피부에
달라붙는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자, 자, 잠시만요!”
“가만히.”
당황하는 시몬에게 한마디로 어른 뷔노는 나이프를 허벅지에 들이밀었다. 상대가 반항할 걸 뻔히 알고도
자비 없이 나이프를 드로즈와 허벅지 사이에 쑤셔 넣었다.
“히윽…….”
차가운 나이프의 금속성이 허벅지에 느껴지자 시몬은 온몸이 굳었다. 더군다나 날이 그의 선단에 가까이
있어 소름이 돋았다.
드로즈와 허벅지 사이를 가른 나이프는 순식간에 팬티를 찢어 벗겨버렸다. 어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시몬에게 뷔노가 말했다.
귀찮으니 그냥 팬티를 찢어서 가터벨트를 남기겠다는 거였다. 시몬의 얼굴이 도로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뒤로 돌아.”
강제로 비집고 들어올까 봐 걱정됐던 손가락은 입구를 배회하며 빙글빙글 돌더니 다행히 회음부로
넘어갔다. 시몬이 안심하기 바쁘게, 붓처럼 섬세하게 만지는 손길에 예민한 회음부가 부어오르는 것처럼
달아올랐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시몬은 튀어나오려는 목소리를 억지로 눌렀다. 하지만 감은 눈에서 새어 나오는
눈물은 막을 수 없었다.
‘왜, 왜 이러지……?’
태연하게 회음부를 건드리던 손길이 마침내 그의 옥구슬에 닿았다. 유난히 민감한 아래쪽을 반복적으로
쓸어 그는 몸을 움찔, 움찔 떨었다.
“흐윽……!”
“그, 그런 게 아니……!”
“아니라고?”
뷔노는 손으로 회음부를 왕복하며 시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목 부분을 다른 손으로 쓸어 올렸다. 만진
부근 털이 쭈뼛 섰다.
“아!”
어느새 올라온 양손이 시몬의 가슴을 더듬거려 마치 뷔노가 뒤에서 시몬을 껴안는 형상이 되었다. 뷔노는
작은 연분홍빛 젖꼭지를 지분거리다 강하게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목 뒷부분을 깨물었다.
“하, 읏…….”
“…….”
멈췄던 뷔노는 갑자기 한 부분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어딘가, 고민하던 시몬은 자신의 흉터가 있는
자리란 걸 깨달았다. 등에는 예전 총알을 맞았던 흉터가 두 군데 있었다.
‘왜 내 흉터를…….’
취향 이상해. 빨개진 얼굴로 시몬이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내리니 꼿꼿하게 선 자신의 성기가 보였다.
그는 당황하며 손으로 다시 그곳을 가렸다.
“잘 즐기다가 왜 이 예쁜 걸 다시 가려.”
“질질 쌌군.”
“이, 이건…….”
“윽…….”
바들바들 떠는 다리의 선은 마치 섬세한 유화처럼 고왔다. 군살이 없어 돋보이는 허벅지의 갈라진 근육을
구경하기 위해 뷔노는 말없이 그가 떠는 모습을 지켜봤다.
“더.”
“흐, 흐윽…….”
“보채지 말고.”
“…….”
시몬은 질펀하게 젖은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는 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본 뷔노가
나른하게 웃었다.
“얼마나 잘 싸나 볼까.”
“저기까지 싸.”
“네, 네?”
뷔노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그 무표정이 진심이라는 걸 여실히 드러냈다. 시몬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옳지.”
“위는 청순한데…….”
시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뷔노는 느릿하게 물건을 엄지로 문질렀다. 뷔노는 손을 천천히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애가 탄 시몬이 달뜬 숨을 내뱉었다.
“후…….”
“흐으… 읏.”
“아니지.”
“나를 봐야지.”
뷔노의 손은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이며 시몬의 성기를 쓸었다. 올망졸망한 동그란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으흑, 끅…….”
“흐, 읏…….”
애처로운 음성은 사람을 동정하게 하지만, 뷔노에게는 가학심을 자극할 뿐이었다. 물이 살짝 흘러 속옷과
끝부분이 닿는 부분이 축축하게 젖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시몬의 다리가 파르르 경련하면서 꿀물이 질질 흘렀다.
자극이 너무 강해 공포마저 쾌감으로 치환됐다.
“왜 이렇게 난리일까.”
“…모, 못 참겠어요.”
“벌써?”
뷔노의 손이 바로 멈췄다.
“아니라고?”
여유를 주려는 건지 괴롭히려는 건지 뷔노의 손이 느릿해졌다. 자극이 줄자 시몬의 몸이 저절로 애달았다.
“아…….”
방울방울 아롱진 액이 바닥에 떨어졌다. 손은 갈수록 느려지기만 했다. 이윽고 움직임이 멈췄다. 물건을
감싸기만 하고 가만히 있자 시몬이 뷔노의 눈을 봤다.
시몬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잠시나마 갈등했으나 지금도 충분히 수치스러웠다. 도저히 앞에서
할 자신은 없었다. 뷔노는 시몬의 핏줄이 잔뜩 불거진 성기를 보았다.
“아, 아뇨……!”
“말할 수 있는 걸 보니 참을 만하군.”
“아, 흑……!”
‘죽으라는 소리인가.’
시몬의 입장은 그러했지만, 뷔노는 정말로 이 정도의 상태는 여유로운 거라 생각했다. 끝까지 몰아치면
수치심이고 뭐고 완전히 날아간 상태가 되는 법이었다.
“손 떼.”
“읏, 흑, 저, 으으…….”
“왜?”
“가, 가도 될까요…….”
“안 돼.”
손가락이 움찔거리더니 뷔노의 팔로 향했다. 시몬이 자신을 만지면 발로 걷어찰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머뭇거리던 손은 끝까지 향하지는 않았다. 대신 시몬은 뷔노의 옷깃을 슬쩍 잡았다.
“…부탁, 흣, 드려요.”
“헉!”
손이 갑자기 무지막지한 속도로 움직였다. 원하던 욕망이 충족돼서 기쁜 동시에 갈 수 없다는 절망이
시몬의 머릿속을 채웠다.
“흐윽, 흑, 흑… 윽, 끄윽.”
“네 안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끄윽, 끅…….”
“살려, 끅, 흑… 윽, 주, 세요.”
“죽인다고 한 적 없는데.”
“끅, 흑…….”
“안 죽인다고 한 적도 없지만.”
“으흑, 흑, 끄, 흡, 제, 제발……!”
“싸고 싶어?”
격한 고갯짓이 이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싸.”
“키…….”
시몬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입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언어의 형태로 와 닿지는 않았다.
“제대로 말해.”
“어쩔까.”
얼굴에 피가 몰려서인가, 시몬의 입술이 유난히 새빨갰다. 뷔노의 엄지손가락이 시몬의 입술을 천천히
쓸었다.
“하…….”
“우욱…….”
“가만히 있어.”
“으읍.”
“켈록, 켈록!”
“하…….”
“침도 질질 흘리고.”
“흐으, 흣, 윽, 하아…….”
신음을 흘리자 뷔노가 시몬의 입술을 완전히 삼켜버렸다. 숨이 막혀오고 정신은 차릴 수가 없었다. 혀가
밀듯이 들어오는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시몬은 어쩔 수 없이 그냥 눈을 감은 채 받아들였다.
“우, 웁!”
“제, 제가 닦아드릴…….”
“됐어.”
“이건 뭐지?”
“할 거면 입술에…….”
“아까 해줬잖아.”
“한 번 더, 해주세요.”
예상치 못했다. 시몬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뷔노는 시몬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부드러운 손길에
시몬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딱―
“아!”
이마를 내려치는 통증에 시몬이 눈을 찡그렸다. 눈앞에는 검지를 날리고 히죽 웃고 있는 뷔노가 있었다.
‘따, 딱밤?’
“으으…….”
“이게 무슨…….”
“하아…….”
게다가 누가 보고 있었으면 그렇게 좋은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것 같고. 아까의 장면을 상기하며 뷔노가
입맛을 다셨다.
“아무 짓도 못 하던데.”
“그으래? 아무래도 덜 유혹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정보를 빼낸 다음 나중에 쏘거나 독살할 예정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너무 내 취향이라.”
뷔노가 어깨를 으쓱했다.
“천연모였어.”
뷔노가 중얼거렸다.
“부드럽더라.”
마더 조직 현 보스 뷔노.
연애 경험 무, 섹스 경험 다수.
4. 속이는 자와 속는 자
“예쁘네.”
“저, 저기…….”
시몬이 길을 물으려던 찰나에 쌩하니 지나가 버렸다. 안 그래도 소심한 시몬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로변의 한복판에 있으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데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시몬은 사람도 없는 새벽에
이런 걱정을 했다.
어두운 골목 쪽에 돌벽을 발견한 시몬은 그쪽으로 향했다. 돌벽에 등을 기대어 앉으니 몸에 닿아오는
냉기가 느껴졌다. 시몬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똑똑―
“괘, 괜찮으세요?”
‘왜 이러시지?’
시몬은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끼고 부스의 문을 잡았다. 자세히 보니 남자의 오른손에 깨진 위스키 병이
들려있었다.
‘가장 착하고 온순한 사람조차 짐승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술이야.’
“왜, 왜, 왜 그러세요?”
“나보고 괴물이라고오?!”
“아니, 왜 이러시냐고…….”
하지만 아까의 일로 힘이 빠진 시몬은 남자를 막지 못했다. 부스에 강제로 진입한 남자는 다시 히죽,
웃으며 시몬에게 다가갔다. 술 냄새와 묘한 지린내가 섞인 냄새가 남자의 몸에서 풍겼다.
남자는 시몬의 목덜미를 잡고 그를 부스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주위를 보니 남자와 비슷한 행색의 사람이
여럿 모인 것이 보였다.
‘사, 살려…….’
“대체……!”
“나와!”
남자는 시몬의 옆구리를 잡아채려고 애썼다. 시몬은 팔꿈치로 남자의 손을 밀치려 그랬지만 되려
잡혀버렸다.
“윽―!”
―…뭐야.
뷔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몬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남자의 주먹이 자신을 향하는 것에 비명을
질렀다.
“아악!”
다행히 주먹은 문틈을 통과하지 못하고 부딪쳤다. 술 때문에 균형 감각이 부족해진 모양이었다.
“너 내가 오늘 죽일 거야!”
시몬은 자신을 붙잡는 손을 붙들고 낑낑 밀었다. 그래도 남자가 밀리지 않자 시몬은 고심했다. 이 사람을
공격해도 되는가?
“뭔 개소리야!”
말이 통하지 않았다.
“으윽!”
남자가 엎어지는 방향을 피해 시몬은 도망갔다. 전화 부스 벽에 얼굴을 처박힌 남자가 시몬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히익, 소리를 낸 시몬이 빠르게 부스 밖으로 빠져나가 문을 닫았다.
“끄으…….”
‘이, 이, 이제 어쩌지……?’
시몬은 뒤로 넘어간 채 돌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남자가 다리를 들어 그대로 시몬을 밟으려고 했다.
“…응?”
시몬은 감은 눈 중 하나를 살짝 떴다. 시몬을 해하려던 남자의 몸이 오른쪽으로 꺾이고 있었다. 남자의
머리가 강하게 바닥에 부딪혔다. 단단한 구두 굽 하나가 가차 없이 상대를 밟았다.
“으으……!”
“윽!”
‘위, 위스키병!’
“어, 어떡해.”
“이, 씨……!”
탕―!
“허, 허, 허억―!”
“주, 주, 죽었…….”
인영이 어느새 눈앞까지 와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넘어진 남자를 가리켰다. 남자는 아직 시체가
아니었는지 오른쪽 다리를 붙잡은 채 뒹굴고 있었다.
흥건했던 피, 서재에 쓰러져 있던 시체들. 떠오르는 기억에 시몬이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상상만으로 머리가 새하얘졌다.
“뷔노……?”
‘와줬다고?’
“뷔노?”
“흐음?”
“윽, 그, 그게 아니라…….”
“네, 네?”
“…6 시, 아.”
“주무시다 오셨어요?”
“…….”
시몬의 전화 따위 무시했으면 됐을 텐데 여기까지 걸음한 것일까. 왜 온 것일까. 시몬은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생각했다.
‘시가 몸에 안 좋은데…….’
‘뭐야, 방금 나 말했던가?’
“…그, 그, 길을 잃어서.”
“뭐?”
“아니, 저, 그게…….”
“…….”
시몬은 잠시 아무 말이나 기다리다 압박감을 버티지 못하고 뷔노의 시선을 피해 머리를 숙였다. 봄꽃을
닮은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으, 윽, 자, 잘못했…….”
새하얀 피부에 생채기가 나있었다. 시몬은 뷔노가 턱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자 작게 신음 소리를 냈지만,
얌전히 그의 손에 몸을 내맡겼다.
“…….”
“집이 어디지?”
“예?”
“두 번 묻게 하는 것도 취민가?”
“아, 아뇨! 어… JP 가 9 번지요.”
“뭐 해, 타.”
“바지 털고.”
목소리에 차 시트를 더럽히지 말라는 완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시몬은 제 손이 먼지떨이인 것처럼
다급하게 휘둘러서 바지를 털었다. 시몬이 문을 닫자마자 차가 움직였다.
“안전벨트 매.”
“네, 으윽……!”
창밖으로 풍경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잔상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날카롭게 불어와 시몬의
얼굴을 찰싹찰싹 때렸다.
“아, 아니요!”
“흠.”
뷔노가 아까 달려와 준 후로 시몬의 마음은 널뛰기를 하듯 바뀌었다. 시몬은 뷔노가 이렇게 행동하는 그
어떤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다. 뷔노는 시몬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고 핸들을 꺾고 액셀을 밟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난폭하게 운전하는 모습에 시몬이 간신히 적응하고 나서였다. 그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시몬은 눈치를 보다 물었다.
“뷔노, 저… 혹시 졸리세요?”
“그럼 안 졸릴까?”
“단 거 안 좋아하는데.”
“맛없네.”
“아, 죄, 죄송해요…….”
‘웃는 건가?’
또 한 번의 정적이 흐른 후, 시몬은 갑자기 없던 용기가 생겨난 것인지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뭐?”
“네?”
“위험?”
“새, 생각해 보니까 워낙 잘 싸우시고 그러니까 혼자 오셔도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을지도 모, 모르겠네,
요…….”
“…그래.”
“내려.”
“죄, 죄송합니다…….”
“…….”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시몬은 90 도로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뷔노는 됐다는 듯 손을 휘젓다가 말했다.
“여우같이…요?”
“취소.”
“…….”
자신이 봐도 무리수였는데, 빈말로도 받아줄 수 없는 수준이었나 보다. 상기된 동그란 뺨이나 강아지같이
축 처진 눈매 같은 걸 가만히 보던 뷔노가 말했다.
“네? 네!”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한 시몬은 수첩을 꺼내 주일 3 시 반이라고 적었다. 뷔노는 그걸 잠시 보더니 액셀을
밟았다. 그제야 그는 끝이 잘린 시가를 입에 물고 불을 켰다.
‘일이 늘겠어.’
달리던 뷔노가 도착한 곳은 자신의 집이 아닌, 아까 시몬이 괴한과 마주친 장소였다. 한산한 길거리에선
피네가 아까보다도 더 비뚤어진 정장을 입은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수고했어.”
“뭐, 그렇지.”
뷔노는 주위를 둘러봤다. 시몬을 공격하던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움직일 상태도 아니었고, 분명 술과
마약에 절어있어 놓치기 쉬운 상태도 아니었다.
“어디에 뒀어?”
“지하 창고에 곱게 처넣었지.”
“역시 다이아 새끼들, 우리 구역까지 마약을 팔고 있었어. 클로버를 숨겨주는 것도 모자라 침범까지
하다니.”
“지금.”
“…됐어, 나도 차 있어!”
5. 그 안전한 마약상
주유소에서 한 남자가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햄버거 가게, 세탁소, 그는 카페.
평범하기만 한 광경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근처에는… 한 명뿐인가.’
하얀 정장을 입은 신사는 돌돌 말린 궐련을 피우고 있었고, 그다지 이쪽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남자는
빠르게 주유소 편의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편의점 안에는 노인 한 명과 10 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 한
명만이 있었다.
“물 하나요.”
“어떤 거로 드릴까요?”
남자는 목소리를 급히 낮춰 작게 속삭였다.
“다이아 산.”
그 말을 들은 편의점 점원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하지만 곧 익숙하게 다섯 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남자는 그걸 보고 지갑을 탈탈 털더니, 주머니 밑까지 싹싹 긁어가며 동전을 내밀었다.
갈색 봉투는 속이 보이지 않도록 불투명했고, 그 안에는 하얀 가루가 들어있는 투명한 봉투가 있었다.
매대 위로 봉투를 올린 점원은 아무렇지 않게 물병 한 개를 넣음으로써 동작을 완료했다.
‘뭐, 뭐야?’
“거기 너. 일루 와봐.”
“너 품에 있는 거 꺼내.”
“약 내놔!”
“그, 그런 거!”
“약, 약, 약! 내놓으라고!”
“안 돼!”
투툭, 뜯어지는 봉투에서 뭔가 쏟아져 나왔다. 어떻게든 잡으려는 남자의 팔을 밀치고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왔다. 남자는 누군가의 지저분한 손이 하얀 가루를 눈처럼 감싸서 잡는 것이 보였다.
“더 줘!”
노인은 남자의 멱살을 잡아챘다. 남자가 멱살을 흔드는 손짓에 맞춰 몸이 흔들리는데, 노인이 불현듯
손을 떼놓고 말했다.
“트럭, 트럭…….”
노인이 무릎을 꿇은 채 남자의 바지를 더듬었다. 차 열쇠를 찾는 거였다. 남자는 발로 노인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어찌나 끈질긴지 떼놓을 수가 없었다.
“아, 이런……!”
“이게 무슨 짓입니까?”
“꺼져!”
눈이 뒤집힌 노인은 신사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신사는 하얀 장갑을 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런, 말로 하시죠.”
노인은 인정사정없이 신사의 얼굴을 노리며 주먹을 날렸다. 신사가 눈썹을 찌푸린 채 뒤로 물러났다.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사가 남자를 쳐다봤다. 하지만 남자는 제 코가 석 자였기에 자신을 도우러 온
신사를 신경 써줄 수 없었다.
남자는 그저 급하게 트럭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는데, 뒤늦게 이를 눈치챈 노인이 신사를 놔두고 남자의
옷을 잡아당기며 막았다.
그렇게 난리를 피는 와중에 남자는 실수로 쓰러져 있는 소년을 밟고 미끄러졌고, 두 사람은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
탕, 탕. 총성 두 번이 거의 동시에 울려 퍼졌다.
“끄악!”
노인의 목과 이마 정 가운데에서 끈적한 핏물이 솟구치고 있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시체가 바닥을
장식했다.
“으, 으, 으아아……!”
“…….”
‘저희?’
남자는 옆에 엎어진 시체들과 남자를 번갈아 보며 화들짝 놀라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지를 못했다.
“다행이군요.”
그는 궐련을 돌돌 말아 입에 물었다.
“병원으로 가실까요?”
“그, 그럴 것까지는…….”
신사가 남자의 몸을 살피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자 독한 궐련의 매서운 연기가 남자의 얼굴을 덮쳤다.
남자는 눈과 코가 매워 콜록거리면서도 두려워 피하지 못했다.
“코는 언제 눌린 거죠?”
“…워, 원래 이런데.”
“그랬군요. 실례했습니다.”
“저희는 언제나, 안심하고 물건을 판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아주, 아주 가끔 이런 사태가 발생합니다.”
“괘, 괘, 괜찮…….”
“실버 님. 전언입니다.”
“결국, 터졌군요.”
“죄송합니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예?”
실버는 손목에 찬 시계를 몇 번 만지작거렸다. 화려하지 않지만 클래식한 디자인의 시계를 아무렇지 않게
벗어던지자, 부하가 그것을 급하게 잡았다.
“미리 말하는데 이 자리에서 하는 말은 다 비밀이야. 뭐, 말하지 않아도 한 조직의 보스인 당신이 모르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
“뷔노는 배신자야.”
“무슨 뜻이죠?”
“…마더가 죽었다고요?”
“그건 곤란합니다.”
“왜지?”
“나쁘지 않군요.”
6. 차 안에서
“아니, 살아있다고? 정말로?”
“아뇨, 그건 다른 사람이…….”
“위치 추적기요……?”
‘사분의 일!’
어쩌면 이대로 클로버의 지령을 따르다 운이 좋아 나머지 빚도 차감할 수 있을지 몰랐다. 처음으로 희망을
본 시몬의 눈이 밝아지자마자 그의 머릿속에 뷔노의 얼굴이 스쳤다.
“아…….”
“왜? 문제 있냐?”
‘괜찮은 건가……?’
‘정장 입고 와.’
저번에 헤어질 때 그 소리를 한 걸 보면 아무래도 정장이 뷔노의 취향일 것이다, 시몬은 생각했다.
소매의 커프스와 손목시계를 풀고 팔뚝까지 정장을 접어 올리는 뷔노의 모습이 상상됐다. 그리고 자신의
정장 단추를 뜯어서 벗겨내는 거친 손까지…….
‘미쳤어, 미쳤어!’
‘아냐, 난…….’
‘이, 이건 예행 연습으로…….’
잠시 기억을 더듬던 시몬은 뷔노가 그랬듯이 이제는 꼿꼿하게 솟은 앞섶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 순간,
뷔노와 함께 있던 순간이 오버랩되며 전기라도 통한 것처럼 짜릿한 기분에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흐, 윽…….”
몸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야…….”
클로버의 프린스 챠밍 유망주로 떠오른 시몬은 넉넉한 의상비를 지원받았다. 오랜만에 옷을 고르게 된
그는 몸의 치수를 재고 정장을 새로 맞출 수 있었다.
“머리카락 색이 참 이쁘시구먼.”
마지막 말을 하면서 할머니는 아련한 눈빛을 지었다. 시몬의 얼굴에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걸로 해주세요.”
“후우, 영감이 레이스로 옷 만드는 걸 좋아하곤 했다우. 예전에 모은 레이스들이 아직 한가득 남았지. 볼
때마다 영감 생각이 나선…….”
“레이스로 하죠.”
그 후의 일도 비슷했다.
“저, 저…….”
“완성이라우. 어떤가유?”
“그, 그런 거 같네요.”
접선을 위해 만나기로 해놓고 직전에 약속을 깬 것이다. 뒷좌석에서 긴 다리를 꼬고 앉은 뷔노는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되면 시몬을 굳이 오페라로 데려갈 필요가 없어졌다.
따뜻한 오렌지색 눈은 낮 햇살 앞에서 더욱 빛났다. 벚꽃잎 색깔의 정장은 머리카락과 어우러져 화사한
분위기를 풍겼다. 앞머리도 넘기고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시몬은 귀공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 무슨……?’
“뷔노?”
‘이, 이게 왜, 왜 이러지…….’
시몬은 귓가를 방망이질하는 심장 소리에 당황했다. 자신을 지탱하는 단단한 팔을 느끼며 날뛰는 심장
박동이 낯설었다.
그러다가 뷔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시몬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쿵 소리와 함께 시몬의
눈앞에 별이 튀었다.
“윽!”
“안전벨트.”
“눈빛이 불손한데.”
“아, 아니요…….”
“네?”
“떠오르는 거 없냐고.”
“자, 잘생겼다……?”
“…….”
‘오답이었나 봐.’
“아, 네.”
시몬이 그 말에 허겁지겁 안전벨트를 맸다. 좌석의 손잡이 부분이나 안전벨트 고정대 등이 다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차 안에선 말린 소나무 냄새가 났다.
“저, 번 일이요?”
놀리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몬이 안전벨트가 최대한 당길 때까지 허리를 숙이며 외쳤다. 뷔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말한 건 애교였는데.”
‘응?’
“이번에는 안 해?”
뷔노의 손이 시몬의 쇄골 사이로 갔다. 시몬은 숨조차 멎은 채 굳었다. 뷔노는 상의를 검지로 살짝 당겨
그 속을 확인했다. 시몬의 심장이 쿵쿵 망치질하듯 뛰었다.
“…네?”
시몬은 최대한 모르는 척 되물으려 애썼지만,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뷔노는 시몬의 목 뒤를
쓰다듬었다.
“애교.”
‘애, 애교?’
“한번 해봐.”
사실 연습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뷔노는 취소라고 했지만, 시몬은 가족의 목숨이 걸려있으니 만에
하나라는 가정하에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했다. 뷔노를 만나기 전에 남은 시간 동안 애교가 뭔지를 착실히
학습했다.
‘하지만 막상 하려니까…….’
부끄러움에 몸이 떨렸다.
“…….”
‘으으으…….’
“그, 그, 그리고…….”
어색하게 내민 팔은 경직돼서 뻣뻣했다. 시몬은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로 최대한 당당하게 뷔노를 보며
회심의 일격을 날렸지만, 뷔노의 표정은 무표정 그 자체였다.
“…….”
시몬은 팔을 내민 상태에서 어떻게든 버티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기다렸다. 여전히 반응이 없자, 결국
그는 살짝 시무룩한 목소리로 물었다.
“벼, 별로예요?”
“아, 꽃을 안 좋아해서.”
‘꽃을 안 좋아한다니……!’
‘응?’
“줬다 뺏으려고?”
“아니, 그, 싫어하신다길래.”
“싫어한다고 한 적은 없는데.”
“네?”
“별로 없는데.”
“와인은 좋아하지.”
‘맞아, 와인 애호가랬지.’
‘독특…한 입맛이구나.’
“네? 아, 저, 저는…….”
“응?”
“싫진 않지.”
“그, 그럼…….”
“…죄송합니다.”
“칭찬이야.”
“…감사합니다.”
하지만 시몬은 여전히 기분이 가라앉아 보였다. 뷔노는 제 말에 문제가 있었나 돌이켜봤지만, 딱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이건 별로 재미없네.”
그렇게 말하면서 뷔노는 시몬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시몬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아주 강하게 빼냈다.
몸서리치는 모습에 뷔노가 눈썹을 들어 올리자, 시몬이 식은땀을 흘리며 저도 모르게 다시 변명을
시작했다.
“아, 아파서…….”
“…….”
‘아버지……!’
“기분 상한 거 맞아.”
뷔노는 평소에 하듯 입꼬리를 의식적으로 끌어 올렸다. 그러자 얼굴에 근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 저…….”
뷔노가 시몬의 목 뒤로 오른팔을 둘렀다. 나머지 왼손으로는 시몬의 앞섶을 더듬더니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갔다. 손이 어찌나 능숙한지 벌써 단추 세 개가 풀렸다.
“저, 아, 그… 채, 책이랑…….”
“계속 말해봐.”
시몬은 어쩌지도 못하고 뷔노의 조직원으로 보이는 운전기사를 바라봤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였다.
뷔노의 손이 등을 더듬자 시몬은 한 글자씩 끊어서 외치다가 몸을 움츠렸다. 시몬은 양팔로 몸을 가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뭘 하는데?”
“네?”
차 안에 있는 와인 보관고였다.
“무슨 생각했어?”
뷔노가 시몬의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시몬은 뷔노와 눈을 맞추지도 못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뺨에는 열꽃이 피어올라 화끈거렸다.
“네? 아, 으읏…….”
쪼륵.
다행히 이번에는 시몬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잔에 와인이 따라졌다. 붉은 액체가 유리잔 안을 메우자 차
안에 와인 향이 훅 풍겼다.
“마시고 싶어?”
“론?”
“뭐?”
‘호칭? 론.’
“네? 네.”
순진한 얼굴로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뷔노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뷔노는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서,
그걸로 시몬의 눈을 가렸다.
“어, 뷔, 뷔노……?”
“잘됐네.”
“뷔, 뷔노?!”
그때,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시몬이 불안한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뷔노는 손목시계를
흘끔 봤다.
‘벌써 정각인가.’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아무리 그래도, 차 안에서, 대낮에, 심지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
옆에서 할 짓이 아니었다.
“저… 뷔, 뷔노 님?”
아. 까먹고 있었다는 듯 뷔노가 소리를 내었다. 뷔노는 시몬의 양손을 감싸 쥐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시몬이 멍하고 있는 사이에,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웃은 건가?
“마음껏 해.”
팔을 타고 손목을 넘어선 줄은, 시몬의 양 손바닥을 맞붙여 묶어버렸다. 시몬은 너무 어이가 없어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앞에서는 딱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덜컥―
“보채지 말고.”
차 창문은 선팅이 되어있지만 정차하면 안이 들여다보일 정도는 되었다. 지금도, 도로에서는 사람이 걸어
다니고 있을 터였다. 그 사람들 중 누군가 이 꼴을 보게 된다면?
시몬은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뷔노가 시몬을 잡아서 가려주면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뷔노의 몸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뷔노는 옆자리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뷔, 뷔노 님!”
“왜?”
“제발, 옷 좀 올려주세요.”
시몬은 다리를 바르작거렸지만 금세 발치에 바지가 떨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뷔노는 손바닥으로 시몬의
성기를 꾹 눌렀다. 이미 단단해진 부분을 누르자 시몬의 상체가 저절로 숙여졌다.
“헉!”
“…그, 그게…….”
“삼각으로 사줄까?”
시몬은 묶인 팔을 겨우겨우 들어 얼굴을 가렸다. 뷔노는 시몬의 가슴팍을 손으로 쓸었다. 예상치 못한
자극에 피부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기도해, 시몬.”
“이, 이 상태로요?”
“아! 흐으…….”
“뷔노 님!”
“안 들려.”
“왜 이렇게 말을 더듬어.”
“한 번으로 되겠어?”
“흐으, 으, 아, 아니.”
“너도 또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한 번 더 해. 당신의 신실한 종으로서, 도구로서 쓰일 것을
맹세합니다.”
“좋아?”
“너무 좋아요…….”
“아, 안 돼요!”
“흐, 아…….”
“솔직하게 말해.”
“가, 가, 게 해, 주세요…….”
“사람들 앞에서?”
“…네.”
“변태네.”
“아윽, 뷔노!”
넥타이에 눈물이 묻어있었다. 젖은 부분을 문지른 뷔노가 다시 목에 넥타이를 걸었다. 시몬은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셔서 눈물을 흘렸다.
“흐으…….”
“왜?”
“오, 옷, 입고.”
생각보다 어두운 공간은 밖의 차도보다는 지하 주차장처럼 생겼고, 운전하던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멍하니 입을 벌리는 시몬을 보면서 뷔노가 말했다.
“그, 그럼…….”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
시몬은 허겁지겁 속옷을 끌어 올리고 바지를 챙겨 입었다. 셔츠는 단추를 채우지 못한 채, 그저 양손으로
잡아서 모았을 뿐이었다. 뷔노는 이미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얼른 와, 시나몬.”
시나몬. 그래, 자신은 시나몬이었다. 지금은 하느님의 신실한 종도 아닌, 그저 클로버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시나몬. 시몬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7. 모자와 커튼콜
‘여긴…….’
시몬에게도 낯익은 공간이었다. 헤르게임에 치료받을 만한 병실이 없었기에, 시몬의 아버지는 블랙리버의
병실을 이용했다. 대신 그 병원비는 천문학적이었다.
‘잘 지내고 계신 거겠지……?’
시몬은 고개를 숙이고 숨을 헐떡이다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는 생각도 없이 뛰다가 마주한 모습에
당황했다.
“오랜만이네.”
“왜, 다른 걸 기대했어?”
“아, 아뇨!”
시몬은 긴장이 풀어지며 대화 주제를 바꾸려 애썼다. 원래 오페라를 좋아했기에 설레는 말투로 얘기했다.
‘이제는 하지 않지만.’
“네?”
시몬은 입을 오므렸다.
“앗, 그렇군요…….”
“너는? 좋아해?”
“네, 좋아해요.”
“…….”
뷔노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몬이 의아해하며 뷔노의 눈길을 알아차리자 말없이 눈을 돌렸다.
양쪽으로 펼쳐지는 문 안으로 뷔노가 들어가면서 시몬에게 말했다. 최고의 오페라 가수와 지휘자 중
여기를 거쳐 가지 않는 자는 없다는 명성답게, 복도에는 화려한 캐스팅을 증명하는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실버?’
시몬은 그게 뷔노의 가명인가 아리송했으나 물어보진 않았다. 뷔노가 티켓을 내밀자 제복을 입은 직원이
정중한 태도로 자리까지 데려다주었다. 둘이 안내받은 자리는 거의 맨 중앙 열의 박스석이었다.
‘29 번 박스석이라…….’
뷔노는 검은 모자를 좌석 번호에 해당하는 옷장에 내려놓았다. 시몬은 외투를 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혹시라도 자국이 남아있을 게 걱정되었다.
박스석은 푹신한 2 인용 소파가 놓여있는 자리로, 양옆은 칸막이로 막혀있었다. 그 왼쪽에 뷔노가 앉고
오른쪽에 시몬이 앉았다. 앞이 훤히 보이는 시야에 시몬이 감탄했다.
“앞자리가 다 비어있네요.”
둘은 비어있는 공연장 VIP 좌석에 덩그러니 외딴 섬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싼 좌석들은 꽉 차있다는
점에서 조금 이질적이었다.
“저, 왜, 그렇게…….”
“뷔, 뷔, 노…….”
“이젠 이름 잘 부르네?”
목 근처에서 말하자 숨결이 느껴졌다. 시몬이 목을 빼지도 못한 채 바르르 떨었다. 뷔노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입을 뗐다.
뷔노는 다시 붉어진 자국을 검지로 문질렀다. 시몬은 얼굴부터 목까지 새빨개진 상태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2 층, 3 층 좌석까지 있는 오페라하우스에서 한 짓이라 더욱 그랬다.
뷔노는 시몬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끌어모아 한 손으로 잡아보았다.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손에 닿아오자
기분이 좋았다.
“다음에는 머리 묶고 와.”
“그, 그, 그건.”
마더가 외국어를 교육한다는 이유로 매번 뷔노를 데려왔던 게 지루함의 원인이었다. 대부분의 오페라는 세
번 이상 본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화제작이라면 더더욱.
그렇다면 너는 더 이상 나의 딸이 아니다.
영원히 의절하고,
영원히 저버리고,
영원히 부수리라
자연의 모든 인연을.
“…….”
감동한 사람들이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쳤다. 연주자들은 일부러 관객들이 박수를 치는 걸 기다리다가
연주를 다시 시작했다. 시몬은 일어나서 박수를 칠까 고민했지만 뷔노가 일어나지 않았기에 그만두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답하는 말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시몬은 요 근래 있었던 일 때문에 자신이 예민해진 건가 싶었다.
결말에서 자라스트로가 밤의 여왕을 소멸시킬 때까지도 뷔노는 팔을 등받이에 걸친 채 느긋하게 있었다.
“뷔노?”
커튼콜이 울리자마자 뷔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수들이 무대를 오가는 끝까지 박수를 쳐줘야 하는 게
예의였기에 시몬은 어리둥절했지만 서둘러 뷔노를 따라 나갔다.
그런데 뒤에서 정갈한 구두 소리가 뒤따랐다. 커튼콜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나간 건 뷔노와 시몬만이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자 유별나게 눈에 띄는 남자가 보였다. 단순히 단정한 이목구비 때문은 아니었다. 남자는
백발일 뿐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드디어 오셨군.”
시몬은 평소라면 뷔노의 반응에 궁금증을 가졌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뷔노가 시몬을 살피자
그가 흰 정장의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뷔노도 그 시선을 따라 다시 한번 실버를
바라봤다.
“모자를 두고 가셨습니다.”
하얀 정장의 신사는 그대로 시몬의 앞을 지나쳤다 남자는 빙긋 웃으며 뷔노의 검은 모자를 내밀었다.
뷔노는 무표정으로 그 손을 내려다봤다. 모자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뷔노가 차갑게 웃었다.
“무리한 요구를.”
“좋아해서 다행이네, 실버. 나도 네 선물이 마음에 들었거든. 돌려서 말하느라 고생이 많았겠어.”
뷔노의 대답에 실버는 하얀 중절모를 고쳐 썼다. 오페라의 내용은 뷔노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했다.
‘선물?’
“어느 쪽을 정하시겠습니까?”
“플레져 가든.”
“23 일 오후 2 시.”
“이건 뭐지?”
그것은 한 송이의 연분홍 장미였다. 가시는 곱게 제거되었고, 리본으로 묶여있었다. 게다가 개량된
품종인지, 유달리 크기가 컸다.
“선물에 대한 답례입니다.”
“…….”
‘저건…….’
“잘 보관하도록 하지.”
뷔노는 바로 꽃을 바닥에 버리며 뒤돌아서며 말했다. 실버는 개의치 않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제안?’
분홍빛 눈동자는 따뜻한 색감과 다르게 차가운 느낌이었다. 시몬은 저도 모르게 굳었다.
뷔노가 이를 발견하자, 실버는 바로 뷔노에게 달콤하게 웃었다. 뷔노는 그제야 시몬을 데려온 용도를
떠올리고, 시몬의 두 눈을 한 손으로 덮어 실버의 살기로부터 가려주었다.
“아, 애인이었나요?”
“왜?”
실제로도 뷔노와 시몬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나.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과 노리개 정도일까.
로미오와 실상 별반 차이도 없었다.
실버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뒤늦게 따라온 사람들과 합류했다. 실버가 떠나기 직전에 시선이 잠시
시몬에게 머물렀다.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다. 그제야 자신의 주제가 완벽하게
파악됐기 때문이다.
“다녀오셨습니까?”
‘쟤는 왜 축 처져있지?’
“여행객들까지 다 뒤졌어?”
“공무원까지 뒤진 건 잘했어.”
실버가 이끄는 다이아 조직은 정치계 쪽에 연줄이 두터운 걸로 유명했다. 공무원으로 위장해서 노새(마약
유통책)를 푸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이아와 합병?’
“네? 그럼 저는…….”
“자, 잠깐만요……!”
“위험합니다.”
“혼자서는 길을 잃으려나.”
나른한 목소리에 시몬이 의구심을 표현할 새도 없이, 뷔노는 주위에 있던 조직원 중 하나에게 말했다.
“네, 보스.”
“가시죠.”
둘은 시몬의 양쪽 팔을 연행하듯 잡아 끼고 걸어갔다. 둘의 키가 워낙 큰 데다 시몬이 가벼웠기에,
시몬이 거의 공중에 뜨다시피 한 채로 갔다. 그는 팔을 흔들고 바둥거리며 말했다.
“다음에 보지.”
“…고마워요. 알아들었어요.”
그렇게까지 상세히 알려주지 않아도 아는데. 저번에 거짓말을 한 이후로 단단히 길치 취급을 받고 있었다.
조직원 둘은 시몬의 팔을 툭 놓은 뒤 말했다.
“잘 다녀오시길.”
‘무슨 소리지?’
시몬은 위의 고층 건물을 보았다. 그동안 숙소에서는 클로버의 감시 때문에 함부로 돌아다니질 못했고
뷔노와 함께 있을 때야 의사결정을 할 일이 없었는데, 지금이야말로 자유로운 때가 아닌가?
‘뒷조사하지 않는 이상…….’
시몬은 고개를 빠르게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그러나 기회는 기회였다. 시몬은 잠시 주춤거리다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밖을 클로버가 감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버지를 볼 수 있다는 거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108 번 병실 면회 가능할까요?”
“성함이?”
‘보고 싶어.’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하니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시몬은 주먹을 가슴에 대고 눌렀다. 괜찮아.
“네.”
“병실 이동하셨어요.”
“독실이요? 왜 독실로……?”
“전혀 몰랐어요…….”
‘독실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감사합니다…….”
*
시몬은 119, 120 번 방을 지나가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121 번 방의 작은 창문 틈새를 본 시몬은
바로 기겁했다.
‘무, 무슨…….’
뭔가 해코지를 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정장을 입은 사람은 병실 구석에서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그래도 시몬은 경계를 놓지 않은 채 관찰했다.
‘들, 들어왔다.’
“주무시네…….”
‘…울보네.’
‘왜 갑자기 그 생각이……?’
‘이제 슬슬 나가야겠지.’
“…시몬?”
그냥 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탁자에 포스트잇과 펜을 발견한 시몬은 쪽지를 빠르게 적어 내렸다.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글씨체는 포스트잇을 가득 메우고 나서야 끝이 났다.
자신은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과 한동안 연락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내용. 입맛이 없어도 꼭 밥을 잘
먹어야 한다는 말과 주무셔서 얼굴만 뵙고 간다는 마지막 문장으로 마쳤다.
‘어, 어, 어쩌지!’
시몬은 손으로 가려지지 않는 머리카락을 가렸다. 그 후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병실을 떠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급히 내려간 시몬은 아까 정장을 입은 사람의 정체를 생각했다.
‘역시 클로버겠지……?’
“어라.”
“네?”
시몬이 눈을 끔뻑거렸다.
“흠, 그래요?”
병원비 지불
8 월 19 일
지불한 자
: M
M 이라는 글씨까지 뽑히자마자 종이가 주르륵 흘러 나왔다. 간호사는 종이를 들어서 시몬에게 건네주었다.
병원비가 얼마인지, 치료비, 진료비, 기타 세금 등 자세한 사항이 종이에 적혀있었지만 지불한 사람에
대해서는 더 정보가 없었다.
“M……? 그게 다인가요?”
‘어쨌건… 한 달은 더 버틸 수 있어.’
“다행이다…….”
“잘됐네요. 축하드려요.”
그 말을 하면서 시몬은 눈을 반짝 빛냈다. 간호사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으음, 소리를 냈다.
“이런 식으로 기부, 후원하시는 분들 같은 경우에는 신분이 노출되는 걸 꺼리시기도 해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그렇군요…….”
시몬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도와준 그 사람이 누군지가 궁금해 애타는 심정이었지만, 본인이
신분을 숨기고 싶은 거라면 어쩔 수 없었다.
8. 줄리엣은 없다
“죄, 죄송합니…….”
“알면 닥쳐!”
시몬은 꾹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성과를 낸 게 아무것도 없긴 했다. 정보 유출, 추적, 도청, 암살,
스파이의 요소들 중 그 어떤 것도 해내지 못했으니.
그는 화를 꾹꾹 눌러서 참은 뒤 말했다.
“…저.”
“뭐.”
“저…….”
“아버지를 뵈러 갈 수 있을까요?”
“이 미친 XX 가? 되겠냐?”
그러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뷔노가 뒷조사를 해서 내주었을 거라는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아, 아냐 그럴 리가…….’
뭐 잘 아는 사이라고 대주었겠는가.
“뷔노랑 약속 잡았어?”
이대로 다시 못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단순히 클로버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뿐 아니라,
뷔노와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없…….
“그게, 요즘 바쁜 일이 있으시다고…….”
“넌 클로버냐 시저냐?”
“클, 로버요.”
“있잖아.”
“네…….”
“난 네가 너무 싫어…….”
“죄송합니다…….”
“네에?!”
“사창가라고.”
“네…….”
*
“하아… 읏!”
“가만히 계세요.”
“다 필요한 과정이라니까요?”
“흐아!”
“읏, 간지러워요!”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마사지를 잘 받는 사람, 나머지 하나는 손만 닿아도 미쳐
날뛰는 사람. 시몬은 자신이 후자라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아까부터 영 말 이상하게…….”
시저 구역에 위치한 이 가게는 로미오들이 다니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마사지사는 시몬을 보자마자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이야, 미인이시네요. 근육질 타입은 많이 오는데, 이렇게 예쁜 분은 오랜만이라. 특별히 더 열심히
해드려야겠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태닝이었지만 이 끔찍한 시간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급박한 시몬의 얼굴을 본
마사지사가 흐음, 소리를 냈다.
“테스트?”
마사지사는 씩 웃었다.
“환장하시죠.”
“예에?!”
각질 제거를 한다고 말하더니 갑자기 꾹꾹 지압하는 마사지사의 사랑이 넘치는 손길에 시몬이 끄아악,
비명을 내질렀다.
기다리던 비행기는 조금 지나서야 시야에 들어왔다. 장엄한 하늘을 고고하게 활주하는 모습을 보며 뷔노는
입에 시가를 끼웠다.
“참 보기 좋군.”
“됐어.”
“친구, 오랜만이네.”
“무슨…….”
“왜 이러십니까?”
“그래?”
“안에 뒤져.”
그러자 뷔노는 시가를 툭툭, 털며 재를 떨어뜨린 뒤, 파일럿에게 다가갔다. 뷔노의 키에 압도된 파일럿은
조금 위축됐지만 이내 당당하다는 듯 가슴을 폈다.
“비행기에는 정말 아무도…….”
“관 속은?”
“그, 그건…….”
“열어.”
뷔노가 고개를 까닥였다. 바로 옆에 있던 조직원 하나가 곧바로 앉아서 관 뚜껑을 열려고 애를 썼다.
“비켜.”
“…아무것도 없군.”
월, 월, 월.
“관에서 뭘 찾는 걸까.”
‘냄새가…….’
“보스!”
“무슨 일이지.”
“밖에 관 운반수들이 도착했습니다.”
“감.”
“예?”
“…하다 하다 이젠 별짓을.”
“이건 뼛가루인가?”
“…하하, 그건.”
파일럿은 부리나케 비행기 밖으로 도망가려 했다. 뷔노는 눈짓으로 말했고 주위 조직원들은 파일럿을
곧바로 붙잡았다. 운반수 둘 역시 도망치려 했으나, 옆에 있던 조직원들이 원래부터 잡고 있던지라 그럴
수 없었다.
“누가 시켰지?”
“실버…….”
9. PLEASURE GARDEN
예전 옆집에 살던 제레미가 해줬던 이야기였다. 뷔노는 자신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합리화한 뷔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완전히 해가 지지는 않은 저녁이었다. 창문에 철창이
쳐져있는 이 가게는, 빵 냄새를 간간이 풍기는 거로 보아 빵 가게인 것 같았다.
‘속 쓰려.’
멍하니 몽상을 계속하던 와중 주위가 어두워진 걸 알 수 있었다. 회색빛으로 변한 하늘은 단숨에 먹빛으로
물들었다. 때마침 구름이 달빛을 가린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맞춤으로 제작된 듯한 정장. 구두에선 반질반질 윤이 흘렀고 넥타이와 모자도 완벽하게
갖춰 입은 게, 어딘가 달라 보였다. 분명히 주위에서 보던 어른은 아니었다.
“…이대로……. 좋은 대접이었네.”
‘대접?’
그들은 하하 웃으며 동등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했다. 그러나 허리를 꼿꼿이 편 남자와 지나치게
조아리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 가게 주인을 보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뷔노는 이곳이 평범한 술집과는 느낌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둘은 말을 마치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몇 개, 몇 개만 집어 가면…….
끼이익―!
소년은 천천히 뷔노 쪽으로 걸어왔다. 그걸 본 뷔노는 반사적으로 빵 쪽으로 뻗었던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 움츠리는 동작을 본 소년이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뷔노의 눈에도 선연히 보이는 분홍빛 눈동자였다.
“아버지.”
“실베스트리스.”
“뭘 여기까지 왔느냐.”
“그런가요?”
소년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가게 주인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더니, 허둥지둥 갈색 봉투를
챙겨왔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다.”
“네?”
“먹고 싶어요?”
“…….”
“대답 안 하네.”
그는 봉투를 거꾸로 든 채, 그대로 빵을 쏟았다. 무더기로 쏟아지는 빵에 뷔노는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뷔노의 발치에 바게트, 크림빵, 식빵 조각 등이 떨어져 굴러다녔다.
“개새끼.”
전체적으로 예쁜 목조 주택의 외양을 띤 찻집이었다. 뷔노는 찻집의 삼각형 지붕과 잘 관리된 화단,
분수대 등을 살펴보았다.
‘새하얗군…….’
“오셨습니까?”
“그래.”
“왜 하얀 정장을 입고 오지 않으셨습니까?”
“난 검은색이 잘 어울려.”
“플레져 가든?”
뷔노는 끝을 올려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전혀.”
“아쉽네요. 당신의 마음에 들었으면 했는데요. 여기를 플레져 가든이라고 지은 것엔 나름의 사연이 있죠.
예전에 영국에서 티타임을 가지던 장소를 그렇게 부르곤 했거든요.”
“왈!”
실버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개들은 자신의 임무를 하기 위해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찻집의 창고로 들어갔다. 왈왈, 짖는 걸 보고 뷔노가 말했다.
“별반 다를 것 없지 않습니까.”
바닥에 짓밟힌 시가를 보면서 실버가 말했다. 새로운 시가를 꺼내 피기 시작한 뷔노가 말했다.
“마약도 안 하면서.”
“그러시겠지.”
“그렇지.”
뷔노의 시선이 실버의 이마를 스쳤다. 뷔노가 예전에 남겼던 흉터가 조그마한 하얀 자국으로 남아있었다.
“역시 보고 있었군.”
실버의 은빛 눈썹이 곱게 휘었다. 자신의 추리가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포만감을 가득 느끼고 있었다.
“결론적으로는… 오싹했고.”
‘뻔뻔하긴.’
그러나 설령 다이아가 마약이 어디로 유통하고 있는지 알아내도 로비를 받은 정치인들이 봐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렇죠.”
“그러면서도 우리 구역에서 노새를 풀어놓고, 클로버의 간부들도 계속 숨겨주고 있다? 우리와 정말 척을
지겠다는 건가?”
“저는 시저와 전혀 척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저와는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간 합병할 테니까요.”
“그렇지.”
“우리는? 뭘 하면 되지?”
“싫다면?”
“…좋아.”
“예?”
“마약을 팔지.”
“정말입니까?”
“1 년도 남지 않은 일일 텐데요. 진심입니까?”
“그러면 거짓말일까.”
“이것 참, 놀랍네요.”
“뭐가?”
뷔노의 시선이 실버의 주머니에 고정된 총을 향했다. 은색을 띠는 반질반질한 표면의 총은 검은색 총의
두세 배는 비쌌다.
실버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된 일정에 홀가분해 보였다. 그는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곧 그렇게 될 겁니다.”
“…….”
10. 의구심
문을 약간 열어둔 채 마사지사가 나가고 나서야 시몬은 한숨을 돌렸다. 목부터 허리까지 바짝 긴장하느라
몸이 찌뿌둥했다.
‘도망갈까……?’
클로버에선 뷔노의 약점이나 취향을 알아 오라고 했지만 애초에 약점이라는 것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취향이라면 맞추려 했으나 이미 질질 끌려가 버린 것 아닌가. 뷔노를 유혹하거나 혼을 쏙 빼놓거나, 그런
건 이미 머릿속에 불가능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옷은 어디 있지?’
각자의 특징은 다르지만 시몬은 저 셋이 다 로미오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셋은 확실한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머리 미남들이다…….’
시몬은 이유를 모르게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로미오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맞았다. 셋은 사이좋게 웃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들어오던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다 멈칫했다.
‘여, 여자?’
시몬은 당황했다.
“그리고 키가 너무 작은데.”
‘다 들려…….’
마지막 발언은 특히나 시몬을 울컥하게 했다. 조그맣다니. 최소 180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들 눈에야
어떨지 몰라도 작은 키는 아니었다.
“오!”
“자세히 보니 더 예쁘다.”
‘다시 닫을까…….’
“아, 안녕하세요……?”
“목소리도 좋다.”
“역시 맞나 본데.”
“내 이름은 제임스.”
“난 조지야.”
“난 피터! 잘 부탁해.”
벽돌, 와인,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이 차례로 대답했다. 시몬은 의외의 환대에 당황하다 말했다.
“네?”
“시…나몬이요.”
“네?”
“한… 한 달 전부터요.”
“네? 네.”
“슬픈 일이지.”
제임스, 조지, 피터가 차례로 설명했으나, 시몬은 마지막 말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 바였다. 자신은
마사지를 받고 오히려 더 근육통이 왔다.
“그러는 너는 왜 왔는데?”
제임스의 호기심 어린 눈길에 시몬은 고민했다. 아는 사이는 맞지만, 친구도 아니고 깊은 관계도 아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생각한 시몬은 어째 이 잘생긴 로미오들을 앞에 두고 있으니 이 단어가 불쑥
튀어나왔다.
“잠자리 상대구나.”
“우리 다 그거 해봤지!”
“꽤 즐거웠지…….”
그걸 놓칠 로미오들이 아니었다. 피터는 시몬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보고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맞아, 있었지.”
“용감하다고 할지…….”
‘고, 고백?’
제임스는 느릿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시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왜 자신이 한숨을 내쉬었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뭐, 그런 셈이지.”
“…안타깝네요.”
“…조용히 해.”
조지는 노란색 눈동자를 부드럽게 휘며 시몬에게 말했다. 제임스 역시 비슷한 말을 하며 시몬을 토닥였다.
시몬은 한동안 느껴보지 못한 사람의 온기 속으로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너무 돌려 말했다.’
“뷔노 님 성격?”
제임스가 질문을 반복해서 한마디 말한 다음이었다. 마사지숍은 아무도 없었을 때처럼 조용해졌다.
“뷔노 님… 성격이라…….”
“그런 건 아니지만.”
“무심한 듯 가학적인?”
“다정함 속에 잔인함?”
“네, 네, 네?”
“반한 애들이 많거든. 인성에 반한 거랑 다르게 재력과 권력에 반하면 쉽게 헤어 나오기가 어렵잖아.”
“혹시 너도 반했어?”
‘희생양이 하나 늘었구먼.’
“…….”
“조지, 넌 왜 말 안 해.”
“홍색맹이요?”
“그냥, 잡지 같은 데서 봤어요…….”
‘…이게 흔한 일일까?’
“자, 잠깐만요.”
시몬의 얼굴이 홧홧해져 있었다. 연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뺨이나 눈가를 보며 피터가 말했다.
“애한테는 좀 너무 과한 내용이었…….”
“받아 적게 수첩 좀 꺼낼게요.”
이제 너무 단련되어 있는 시몬이었다.
“…그래.”
‘지독한 순정이구만.’
15 분이 지났는지 마사지사가 돌아왔다. 시몬이 다급히 수첩을 주머니 속에 챙겨 넣었다. 피터는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속으로는 기겁한 시몬이었지만 앞에서는 어색하게나마 웃고 있었다.
“오, 오셨어요……?”
“지금 오셨군요.”
“오랜만이에요.”
시몬이 있는 방에는 침대가 여러 개였다. 일단은 다 누우라는 마사지사의 지시에 로미오들은 옷을 벗었다.
수건이 돌돌 말려있는 침대에 들어가는 남성들은 속옷만 입은 상태였다.
슬쩍 보이는 등 근육과 솟아오른 어깨를 보며 시몬이 생각했다. 뷔노가 매일같이 봤을 몸들이 저런 거란
말인가.
뷔노는 하이직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여러 물품과 종이들이 쌓여있는 연구실은 화약 냄새로 가득 차있었다.
방금까지 실험을 지속한 탓이었다.
총탄마다 날아가는 거리나 명중도가 달라졌고, 유리에 남기는 자국의 크기도 달라졌다. 뷔노는 그걸
꼼꼼히 체크하는 하이직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검증은 받아야지.”
“예술인데.”
“그럼, 비거리, 명중률, 다 언니가 원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렸어. 대가로 뭘 바쳐야 했는지는
선명하지만.”
“내 수명!”
‘귀 아파.’
“…그러든지.”
“네, 이번 총은 손에 잘 맞는 모양이에요.”
짝짝짝, 뷔노가 손뼉을 세 번 쳤다. 하이직은 안경을 한 번 올리더니 다크서클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그래서, 이 총을 쓸 일은 있는 거야?”
“7 일 내로.”
“7 일?”
하이직은 혀를 쯧쯧 찬 뒤 말했다.
“내내 안 나서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는 하나지. 언니가 스파이를 데리고 놀아줘서잖아. 아주 재밌는
계획을 짠 모양인데, 지금이라도 그놈 버려.”
“그걸 위해서라고?”
“일부러 몇 번 도발했으니까.”
다이아와 시저과 관계가 있다는 암시는 클로버와 다이아의 협력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 그리고 둘이
클로버를 완전히 뭉개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협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뷔노는 피식 웃었다.
“…하이직?”
평소에는 무감해 보이는 뷔노는 특정 부분에서만 참으로 감정적이었다. 애정? 집착? 어떤 걸로 불러야
할지 몰랐다. 그 경계 안에 조그만 어리바리 청년이 들어온다는 건 하이직 입장에서 탐탁지 않은
이야기였다.
“네가 신경 안 쓴다면야.”
하이직은 뇌라는 말을 강조하며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어째 하이직의 머리 안에는 뇌가 아니라
쇳덩어리가 들어있을 것 같았다.
삐익― 충전을 요구하시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까? 더 격하게 반응하시오. 뷔노는 자신의
생각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하이직이 혀를 끌끌 찼다.
“뭐?”
“아직 확실하진 않아. 조만간 정리한 내용이 팩스로 오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다이아가 경고를
해준 이유도 알겠어. 클로버에 충분히 타격이 가지 않으면 흡수가 어려우니까……. 재수 없는 놈.”
이렇게 얽히고설키는 악연을 빨리 해결하는데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뷔노의 발언을 들은 하이직이
의아해했다.
“클로버를 흡수한 다이아가 한동안 거기에만 정신 팔렸을 때, 약점을 노리면 되니까. 그러면 두 조직을
한 번에 잡을 수 있겠지.”
‘그뿐만이 아니지만.’
“하이직.”
“왜?”
“그래서? 언니가 죽기라도 한다고? 웃기는 소리네. 폭발에도 살아남은 잡초 같은 사람이. 허튼소리 하지
말고 그럴 바에 부하들이나 더 훈련시키고 경호나 더 데리고 다녀.”
더 이상 뛰지 않는 심장과 숨 쉬지 않는 몸.
“이뤄드려야지, 딸 된 도리로서.”
11. 약속
띠리리―
띠리리― 띠리리― 띡.
전화기가 수화음 세 번을 울리더니 뚝 끊어졌다. 이 건 이웃인 클로버 조직원의 집으로 가라는 의미였다.
시몬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시몬은 로미오에게서 알아낸 별것 아닌 정보들을 정리한 종이를 들고,
조직원의 집으로 향했다.
“왔냐?”
“아, 아직이에요…….”
“아직?”
“내일이요?”
시몬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조직원은 시몬에게 옷장을 가리켰다. 시몬은 주춤하다가 옷장으로 향했다.
“열어.”
시몬은 굳은 표정으로 뷔노의 성격, 특징, 로미오들에 대하여 정리된 문서를 클로버 조직원에게 건넸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조직원을 보며 시몬이 침을 꿀꺽 삼켰다.
“…….”
“없냐고.”
“…어떤 정보요?”
“앞으로 시저 조직이 어디를 목표로 하나, 자기들 마약 농장의 위치나, 거래처, 어디에 폭탄을 설치하나
그런 거 쓸모 있는 정보를 가져오라고!”
“무슨 일인데?”
“무기 보급.”
시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낙서를 한 것 같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단어처럼 간격이 일정하게 떨어져
있었고, 클로버 조직원의 팩스기에 인쇄되는 게 그깟 장난질일 리는 없었다.
이게 뭘까. 시몬은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무언가의 암호일 것이라고. 그러나 종이가 걸렸는지 팩스기는
중간에 멈춰버렸다.
‘더 뽑혀 나오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결국 하는 건가.”
쾅쾅 거칠게 손등으로 팩스기를 쳤으나 팩스기는 종이를 뽑아내지를 않았다. 조직원은 팩스기 쪽은 결국
포기하고 무기 상자를 찾으러 갔다.
무기 상자를 창고로 옮기는 과정은 꽤 오래 걸렸다. 박스가 여러 개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몬은 그사이를
틈타 팩스기로 향했다.
‘뽑혀라…….’
이리저리 버튼을 누르다가 팩스기를 열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종이는 나오지 않았다. 시몬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손으로 당겼다. 그래도 되지 않자 인쇄기와 종이를 동시에 붙잡은 채 슬슬 움직여 자리를 맞췄다.
걸려있던 종이가 풀리면서 나오기 시작하는 때였다.
“나온다…….”
“뭐 하냐?”
문밖에서 조직원이 배급된 무기 상자를 들고 왔다. 총과 총알의 묵직한 무게감에 조직원이 양팔로 상자를
안아 들고 걷다가 멈칫했다. 시몬의 앞에 종이가 있는 걸 보던 조직원이 표정을 구겼다.
“팩스기가 고장 난 것 같아서 손을 좀 봤어요.”
‘아직 못 봤는데…….’
속으로는 심장이 요동쳐 죽을 것만 같았다. 조직원은 시몬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다지 의심될
부분은 없었다. 흠, 소리를 내던 조직원이 말했다.
“꼴에 배경 좋다고…….”
“뭐, 잘했어.”
방금 내려온 지령 중 하나였다. 일 처리도 느리고, 더불어 묘하게 시저를 편드는 것 같은 태도인 이놈을
더 살려둘 이유는 없었다. 배경부터 외모, 성격까지 마음에 드는 게 없는 녀석이었다.
“시몬.”
“네?”
‘…갑자기 왜?’
클로버는 예상보다 꽤나 철저하게 중요 정보를 관리하고 있었다. 뷔노는 피네가 보내준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그러지.”
“조잡하네.”
홍색맹인 뷔노는 여러 색깔의 구분이 희미했다. 그 희미한 경계는 화려한 색채들이 단순한 배열로 보이게
했고, 뷔노의 눈에는 하나의 문장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시몬은 일부러 자신한테 말을 걸면서 암시했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시몬은 다이얼을 돌리려 했다.
시몬은 손을 뻗었다가 다시 몸 쪽으로 당겼다.
“뭐, 뭐, 뭐야!”
시몬이 바짝 전화기 쪽으로 다가갔다. 띠리리. 띠리리. 두 번 더 울려도 전화벨은 끊기지 않았다.
“서, 서, 설마.”
뷔노인 건가. 시몬은 잠시 패닉했다가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수화기 너머로 태연하고 익숙하고 근사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나몬.
“아, 아뇨.”
다른 로미오들도 식사를 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본 거 같은데. 시몬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시몬이 말했다.
“식사요?”
“네, 네!”
―그럼 이만.
뚜― 연결음이 끊기고 시몬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예상하고, 걱정하고, 고민했던 모든 시간들이 허무할
정도로 금세 일이 풀려버렸다.
―약속이 잡혔다고?
“네, 네…….”
―수고했어.
“대체…….”
아마 알파벳에 하나하나 대응하는 구조라 추측한 시몬은 일일이 문자를 넣어보았다. 그러나 너무 복잡했고
괴상한 단어들만 나오기 시작했다.
□N&N44NM
시간이 끝도 없이 걸렸다. 시몬은 멍하니 있다가 내일이 뷔노를 만나기로 한 날이란 걸 떠올렸다.
‘왠지 불안해…….’
시몬은 벌떡 일어났다.
TOMORROW(내일)
□N&N44NM
TWO
□MN
???M??
÷△M&0M
TOMORROW
□N&N44NM
‘둘… 내일… 둘… 내일…….’
시몬은 암호를 대조해 보면서 머리를 굴렸다. 다른 단어들도 풀어내려 노력했으나 풀리지 않았다.
시몬은 길을 잘 찾아갈 수 있을까 고민했으나, 실제로 WF 가에 도착한 이후로는 그 고민을 접었다. 수많은
건물들 사이에서 우뚝 솟은 건물 하나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따라오시죠.”
뷔노가 미리 언질을 주었던 걸까. 그를 따라 긴 복도를 지나가자 두꺼운 콘크리트 벽으로 보이는 것이
나왔다. 벽은 사이에 얇은 금이 가 있었다. 그는 그 옆에 두꺼비집으로 보이는 물건을 열었다.
그러자 전선이나 버튼이 아닌, 열쇠 구멍이 나왔다. 열쇠를 꽂아 돌리자 금을 중심으로 회색 콘크리트
벽이 두두두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러자 안에 새로 지은 걸로 보이는 엘리베이터가 등장했다.
여자는 엘리베이터의 안에 탑승했고 시몬도 따라서 들어갔다. 머뭇거리던 시몬이 그에게 물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뷔노 님의 집입니다.”
“이 건물 전체가요?”
“시나몬.”
“뷔노 님!”
“아, 아니에요.”
“놀이…요?”
‘모, 못할 것 같아…….’
“뒤로 돌아.”
‘여기서 뭘 하시려고?’
시몬은 속으로 긴장하면서도 순순히 뒤로 돌았다. 저번처럼 손이 묶이는 건 아닌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나 붙잡는 손길은 없었다. 띠, 띠, 띠, 버튼을 누르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러자 대문이 덜컥 열렸고 뷔노가 말했다.
“이제 다시 앞 봐도 돼.”
“헉!”
시몬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뼈까지 박히고 살을 뜯어낼 것이다. 잔뜩 긴장한 세포들을
자극하는 이 감각은…….
“응?”
고양이? 고양이라고? 이렇게 큰…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다. 확실히 고양이치고는 크지만 맹수라 보기엔
어폐가 심한 크기였다.
“이리 와, 코르비나.”
한마디에 코르비나, 라고 불린 고양이가 뷔노의 어깨로 우아하게 뛰어올랐다. 뷔노는 고양이를 머리부터
등까지 쓸어주었다.
“치타?”
“물어.”
‘왜… 왜 피했지?’
“안 죽었어요…….”
시몬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코르비나는 시몬의 몸에서 내려와 바닥에서 몸을 쭈욱 늘렸다.
스페이드? 시몬은 코르비나를 훑어보았다. 그러면 원래는 뷔노의 고양이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살벌한 내용에 대조되는 장난기 섞인 어조였다. 스페이드 조직원을 죽였다는 건 놀랍지 않았다.
“좋은 사람?”
“이름을요?”
뷔노는 방에 코르비나를 넣어둔 뒤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몬도 따라서 들어가는데 차가운 대리석의
감촉이 발바닥에 느껴졌다.
긴 복도를 따라 쭉 걸어가자 커다란 내부와 달리 단출한 구조의 침실이 나왔다. 침대와 옆의 서랍장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
소녀는 밤하늘 속 별빛이 호수에 비치는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몬은 그 소녀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지금이 최적의 시기라고 생각했다. 시몬은 주머니 속에서 작은
정육면체 케이스를 꺼냈다. 그 안에 들어있던 얇은 물건을 검지와 엄지로 쥔 시몬이 소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소녀는 뒤돈 후 시몬의 손안에 들린 물건을 보며 말했다.
“이게 뭐야?”
“바, 반지…….”
“뇌물 아니에요…….”
“타, 탄생석…….”
“탄생석?”
“그래?”
“그랬었나.”
낭만적인 미소를 지으며 시몬이 고개를 옆으로 기댔다. 소녀는 시몬의 반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뭐야?”
“그, 그건 아니고. 저는 수, 순결 반지로 쓰기로 했어요. 마침 진주가 순결이라는 의미가 있기도 하고…
….”
“다행이네. 아예 못 낄 뻔했어.”
“으, 응?”
“한 번 하면 못 끼는 거 아냐?”
“그, 그렇죠…….”
“네 반지, 내가 빼줄까?”
“네?”
“…그게 다인가요?”
“그…런가요?”
“당연한 거 아냐.”
가만히 있기, 라고 말하는데 무조건 대상은 시몬이 될 것같이 시몬을 응시했다. 시몬은 움찔 떨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뷔노가 시몬의 턱 밑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묘한 느낌에 시몬이 목을 부르르 떨었다. 새 같네. 시몬은
뷔노의 중얼거림을 애써 무시했다.
“…네?”
“싫어?”
“아뇨!”
“아, 아…….”
“흐음.”
새로운 시도를 해볼까 싶었는데. 뷔노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뷔노는 지갑을 뒤적거렸다.
“있을 거예요.”
있을 거예요, 가 아니라 무조건 있다. 얼마나 돈이 많으면 잔돈을 안 받지! 시몬은 경악했지만, 티 내지
않은 채 방긋방긋 웃으며 동전을 내밀었다.
“이거 귀엽네.”
시몬이 놓칠세라 얼른 말했다. 듣기로는 뷔노는 조신한 남자를 선호한다고 했으니 이런 취미는 플러스
요인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눈치채지 못한 시몬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동전을 내밀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지름의 동전을
뷔노가 몇 번 던졌다 잡은 뒤 말했다.
휙, 날아오른 동전은 앞뒤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빠르게 회전했다. 두 손바닥으로 동전을 잡은 뷔노가
시몬에게 물었다.
“어느 쪽 면일 것 같아?”
“모르겠어요. 너무 빨리 돌아가서.”
시몬은 생각했다. 어차피 뒷면이라면 자신은 벗을 필요가 없고 앞면인 경우에만 지는 거였다. 그러니
앞면이라고 대답하면 시몬은 손해 볼 일이 없었다.
“어디 보자.”
“앞면이네, 축하해?”
진짜 앞면이 나왔다. 시몬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동전을 바라보았다. 뷔노는 그다지 놀란 눈치도 아니었다.
뷔노는 손을 치웠다.
“또 앞면이네.”
“…그러게요.”
확률은 4 분의 1.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다. 시몬은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하늘하늘한 셔츠와 쏙
들어간 허리선이 부각되는 검은 바지였다.
“아!”
“안에 별거 없네?”
“위, 위요!”
“이번엔 네가 잡을래?”
“예?”
“공평해야지. 그치?”
뷔노가 시몬이 주먹을 쥐고 있던 왼손을 잡아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쳤다. 그리고 손바닥을 검지로 그림을
그리듯 문질렀다. 간질거리는 촉감에 기분이 묘해졌다.
퉁―
“운이 좋네.”
“이, 이건…….”
“제, 제가 벗을게요.”
“넥타이는 벗지 말고.”
검은색 넥타이가 상체에 걸쳐져 있었다. 그 광경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시몬이 불안해했다. 뷔노의
눈빛도 묘하게 바뀌어 시몬이 몸을 조금 뒤척였다.
“역시 넥타이도…….”
“놔둬.”
뷔노는 이 순간을 음미하겠다는 듯 가슴 사이와 배에서 갈라진 복근 부분을 검지로 훑어 내렸다. 그러다가
유두 부분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듯 만졌다.
‘여, 여기를?’
“아파?”
아까 꼬집은 바람에 연분홍빛 유두가 새빨개져 있었다. 아니, 전체적으로 하얀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거기 말고.”
“흐윽!”
“보채기는.”
“그대로 있어.”
팅―
뷔노는 동전을 한 번 더 튕겼다. 이번에는 시몬의 배 위에 동전이 떨어졌다. 차가운 감촉이 배에 닿았다.
“뭐일 것 같아?”
“앞면……?”
“정답.”
“저, 저!”
“왜?”
“이대로는 벗을 수가 없어요.”
“아, 아!”
“윽!”
“흐읏, 흐, 응!”
“하아…….”
“흣, 윽!”
사정없이 밀어붙였을 때와는 달리 약간은 힘 조절을 한 것이었다. 그 상태로 뷔노는 성기를 발바닥에 대고
비볐다. 시몬은 두 가지 의미로 성기가 터질 것 같았다.
“발로 해도 좋아?”
“대답 안 하면 멈출 거야.”
“흐, 조, 좋아요.”
“으, 어, 왜…….”
“동전 던지자.”
그 말에 시몬이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뷔노의 정장 차림은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는데, 자신은 이것까지
벗어 내리면 알몸이었다.
“도, 동전 말고 다른 거로.”
“뭐?”
“그렇게 내가 벗는 게 보고 싶나?”
‘시나몬…….’
“알아요.”
“가위, 바위…….”
“보.”
둘이 동시에 손을 멈췄다.
“오!”
“…….”
“그, 그게 아니라.”
“왜 눈치 봐.”
뷔노가 입을 열었다.
“뭐 해, 안 하고.”
“아.”
“난 계속 주먹만 낼 거야.”
“…네?”
“다시 하자?”
“가위, 바위…….”
둘이 손을 내밀었다.
“보.”
“귀엽긴 한데.”
“다시 생각해.”
“잘하네?”
“그럼 가위 바위…….”
“잠시만요.”
“왜?”
시몬은 자신이 이 문장을 말하면서 한 번도 더듬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뷔노가 눈썹을 찡그렸다
풀었다.
“맞아. 뭘 하려고?”
“비밀이라고?”
“그래, 해봐.”
쪽―
“돼, 됐어요.”
“좋아, 게임 끝.”
“네?”
“자, 잠시만…….”
시몬의 말소리는 뷔노의 입술 안으로 삼켜졌다. 뷔노는 대번에 시몬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입술을 몇 번
가볍게 깨물더니, 뷔노의 혀가 시몬의 입술을 가로지르고 들어왔다.
“우, 우읍.”
뷔노는 먹어치우듯 시몬의 안을 침범했다. 탐욕스러운 움직임에 당황한 시몬은 속절없이 끌려갔다.
강하게 빨아들이는 힘은 약해져 살짝살짝 쓰다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애타는 감각에 시몬은 뷔노의 혀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러나 뷔노가 먼저 움직여주지는 않았다.
“하아…….”
피처럼 붉은 뷔노의 입술이 젖어있었다. 아까의 감각에 젖어 시몬이 뷔노의 입술을 보았다.
그러자 굉장히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하면 안 되는 걸 한 것 같았다. 시몬은 뷔노의 몸에서 자신의 몸을
떼고 옆에 앉았다.
“어?”
구릿빛 피부의 상체는 운동을 자주 한 몸답게 균형이 잘 잡혀있었고 복근이 두드러졌다. 선이 뚜렷한 배
위로 시몬이 무심코 시선을 올렸다.
뷔노가 바지, 그리고 속옷까지 벗어 내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스쳐 지나간
광경이 머릿속에 진하게 남았다. 처음으로 본 여자의 몸이었다.
‘거기로 바로 눈을 돌리다니.’
“시나몬.”
그 말에 시몬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이리 와.”
뷔노가 입술을 길게 늘여 웃었다. 시몬은 머뭇거리다 뷔노의 옆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뷔노가 시몬을
감싸 안고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자, 잠깐만요.”
앞뒤로 느릿하게 움직이자 시몬이 비음을 흘렸다. 비비적거리다 멈췄다 비비적거리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주세요.”
“뭘?”
“넣게… 해주세요.”
“끼워.”
명령조의 목소리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시몬이 빠른 동작으로 일어나 바지 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콘돔 케이스에서 하나를 꺼내 껍질을 벗겼다. 서툰 솜씨로 끼우려던 그 찰나에 뷔노가
말했다.
“그거 말고.”
“이거.”
“…뷔, 노 님?”
‘설마 여기에?’
‘대체 뭐 하러?’
―좀 작지 않아?
―아냐, 정말 딱 맞아.
‘이럴 거면 옷은 왜 벗었어…….’
‘한 번, 한 번만 가면 그만둬야지.’
그렇게 합리화한 시몬은 무아지경에 빠지듯 성기를 문질렀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던 절정으로 갈
수는 없었다.
“아, 으, 흑.”
그제야 시몬은 왜 뷔노가 자신이 자위하는 걸 멈추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링이 귀두에 걸쳐있는
바람에 사정을 못 하게끔 되어있었다. 옥죄는 링에 아파오기 시작했다.
애타게 불러도 바뀌는 건 없었다. 성기부터 아랫배가 뻐근한 감각에 시몬이 링에 엄지를 댔다. 그러자
귀신같이 뷔노가 고개를 돌렸다. 시몬이 바로 손가락을 떼어냈다.
“흐윽, 제, 제가 너무 서툴러서…….”
“계속해.”
“으으, 윽, 으으…….”
뷔노는 시몬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목에 걸린 넥타이가 아래로 잡아당겨지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아!”
‘이 정도는 벌도 아닌데.’
고개를 숙인 시몬을 보며 뷔노가 생각했다. 이게 얼마나 관대한 처분인지 모르는 시몬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잘할게요……. 네?”
“흐윽! 흐, 아아아!”
“하아…….”
TV 에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좋았어? 혼자서 잘하던데.”
뷔노가 쪼그려 앉은 상태로 시몬과 눈을 맞추었다. 시몬은 고개를 저었다. 뭔가 결의에 차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동안 저, 저만 갔으니까.”
“왜, 너도 나 애태우게?”
“이게.”
‘이게 좋은 거구나.’
그러자 시몬의 머리칼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갑자기 빠졌다. 왈칵 흘러나온 애액을 시몬은 핥아
삼켰고 뷔노의 손에서 약간의 진동이 느껴졌다.
“하…….”
‘잘… 못한 건가?’
뷔노의 갈비뼈가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온몸이 저릿저릿해서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한동안
숨을 들이쉬고, 내쉬던 뷔노가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떴다.
“앗.”
‘뭐, 뭘 하려고.’
뷔노는 양손으로 시몬의 얼굴을 감싸더니, 분홍빛 뺨을 엄지로 꾹 눌렀다. 볼살이 그 사이로 삐죽
튀어나왔다.
“왜, 왜 그어에요?”
뭉개진 발음도 개의치 않은 채, 뷔노는 시몬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보았다. 뭘 찾기라도 하듯
열심히 살펴보는 것 같았다.
“흐음.”
“시나몬.”
“네.”
‘왜 의자 밑에 저런 게 있지?’
“총 써본 적 있어?”
“…아니요.”
“총 한번 안 쏴보고 뭐 했어.”
시몬의 왼손을 잡은 뷔노는 왼손의 손바닥을 오른손 밑에 두게 했다. 동시에 권총을 감싸서 지지하는
자세를 일러주었다.
철컥―
얼떨결에 사살 도구를 손에 쥐어버린 시몬이었다. 뷔노는 시몬의 손을 잡고 총구를 자신에게 겨누게 했다.
시몬이 질겁하며 손을 빼려 했으나 단단한 손아귀 힘에 빼기가 쉽지 않았다.
“저, 저 놔주세요.”
“쏴야 할 상황에는 머리, 심장, 골반. 이 셋 중에 하나를 노리는 거야. 머리는 되도록 뇌간 쪽에 쏴야
하고……. 뭐, 초보자가 맞추는 것 자체가 용하겠지만.”
뷔노는 시몬의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하나하나 겨누도록 하였다. 시몬은 아예 검지에 힘을 놓아버린
채 있었다. 뷔노는 피식 웃으며 시몬의 얼어붙은 얼굴을 훑어보았다.
“의외로 총으로 치명상을 입는다고 해도 움직이는 경우가 흔해. 적어도 자기를 죽인 사람에게 총을 쏠
시간 정도는 주어지는 경우가 많거든.”
그뿐만 아니라 갈비뼈 부근과 배, 그리고 시몬은 모르는 머리의 흉터는 모두 과거 총격전의 흔적이었다.
“가지고 있어.”
‘왜 갑자기…….’
“…잠깐 씻고 오지.”
‘불안해…….’
그러나 본능이 이끄는 대로 시몬은 펜을 잡은 채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담아두었던 기억을 토대로 펜이
움직였다. 단 하나의 순서도 틀리지 않고 점과 선이 이어졌다.
시몬은 고민하다 해독했던 부분을 펜으로 뭉갠 뒤, 로마자로 바꿔서 썼다. TWO 는 ⅱ로, TOMORROW 는
아예 오늘의 날짜를 적어놓았다. 그리고 종이의 끝부분에 클로버 문양을 그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어쩌면 뷔노와 관련된 계획이 아닐지도 몰랐다. 섣불리 배신했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버릴까……?’
그러나 속에서 찝찝한 감정이 올라와 견딜 수 없었다.시몬이 갈등하는 도중이었다. 시몬의 등 뒤에서
뷔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해.”
“아, 아무것도…….”
전에 조직원 앞에서 거짓말을 했을 때보다도 뷔노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려니 잘 되지를 않았다. 시몬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배고파?”
“잘했어.”
뷔노는 가만히 눈동자를 좌우로 굴려대며 종이를 살펴보았다. 펜으로 하나하나 꾹꾹 눌러 쓴 흔적이 남은
종이를 보며 뷔노는 생각했다. 여전한 필체였다.
뷔노는 태연하게 품 안에 종이를 접어서 다시 쓰레기통으로 넣었다. 클로버의 암호를 해독하는 방법을
미리 익혀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이직이 팩스로 보내준 부분은 공교롭게도 시몬이 적은 암호의 뒷부분이었다. 이어지는 내용을
발견한 뷔노는 이게 가짜 정보가 아니라는 점에 눈썹을 찌푸렸다.
“시나몬, 데려다주지.”
“…네? 네.”
어쩐지 평소와 다른 어조에 시몬이 당황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12. 총을 든 남자
“저, 뷔노…….”
“왜.”
“그, 그게…….”
시몬은 뭐라 핑계를 대지도 못하고 자신이 알고 있던 것들을 설명하지도 못했다. 뷔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전기사는 새 타이어를 구입하기 위해 수리점 안으로 들어갔다. 뷔노는 수리점 앞 인도에 서있었고
시몬은 그런 뷔노 주위의 사람들을 모조리 훑어보았다.
노인부터 아이까지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길거리를 지나다녔다. 하지만 대부분 특별할 것 없는 차림에
뷔노에게는 그다지 관심도 없어 보였다.
뷔노는 손으로 무언가 만지는 듯하다가 별 동작 없이 인도에 서있기만 했다. 운전기사가 수리점에서
한동안 나오지 않자 뷔노는 무료함을 달래려던 건지 시가를 꺼냈다.
뷔노 주변을 살피는 시몬의 눈에 한 남자가 밟혔다. 베이지색의 긴 코트와 청바지를 입은 남자는 느긋하게
길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뷔노는 여전히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남자는 뷔노와 약 서른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도달했다. 잠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기 위해 멈춘 남자는 다시 걸어갔다.
시몬은 뷔노가 있는 수리점 쪽으로 가다가 남자가 가게 앞에서 멈춘 걸 발견하고 근처에 섰다. 남자는
가게 안을 딱히 보지는 않았다. 대신 손목시계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세 명……. 타자기.’
‘더?’
눈이 마주쳤다.
‘…어?’
÷△M&0M
시몬은 가게 안쪽을 쳐다보았다. 운전수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거였다. 그러나 시몬은 금방 관두었다.
덥석 달라붙은 시몬을 남자가 떼어내려 했지만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라 떼어낼 수 없었다. 총을 빼내는 건
무리로 느껴졌기에 절대 놔줄 수 없었다.
“뷔노!”
탕―!
총알은 총구를 통과해 약간 휘어진 궤도를 따라 발사되었다.
“…시몬!”
“윽!”
“보, 보스…….”
뷔노의 목에 칼끝이 닿았다. 뷔노는 얼굴을 뒤로 해 피하려 했으나, 칼끝은 뷔노의 목을 긁고 지나갔다.
운전기사는 한 번 더 깊숙이 칼을 찌르려 했다. 그러나, 그는 칼을 찌르지 못하고 뒤로 고꾸라졌다.
뷔노는 시몬 쪽을 보았다.
“아, 아…….”
“뷔, 뷔노…….”
“너…….”
탕―!
‘더 있었군.’
오늘 완전히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저 혼자면 죽어줄 수 있었지만 시몬이 있으니 그럴 순 없었다.
뷔노는 시몬 끌고 숙임으로써 총알이 날아온 걸 한순간의 차이로 피했다.
아니, 사실은 뷔노가 시몬이 맞을 걸 몸으로 막은 것이다. 뷔노는 총알에 스친 팔이 아파왔지만 여전히
시몬을 감싸 안았다.
“뷔, 뷔노…….”
아까 수리점 안에서 지원 요청을 했기에 시저의 조직원들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클로버, 시저,
한둘씩 사람이 늘어나며 총을 쏘는 대상과 맞는 대상이 늘어만 갔다.
뷔노는 시몬을 안은 채 하이직이 개조한 총 덕을 톡톡히 봤다. 소리가 요란해 타자기라고 불리는 기관총을
연달아서 쏘는 게 클로버의 수법이었다면, 연사는 안 되지만 명중률을 높은 총을 쓰는 게 시저의
수법이었다.
“시몬, 몸에 힘 풀고 딱 붙어있어.”
시몬은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어차피 뷔노도 대답을 들을 여력은 없었다. 시몬은 주위에 기척이 늘자
뷔노의 팔을 치우고 싶었지만 차마 뷔노의 방해가 될까 그러지 못했다.
뷔노는 총을 들어 다가오는 클로버 조직원 하나를 쐈다. 엄호라는 건 한마디로 부하들을 방패로 써야
한다는 의미였다. 차까지 거리를 생각해 뷔노는 이 자리에 남아 한 발이라도 더 쏘는 걸 선택했다.
“…오래 걸렸군.”
“보스!”
“보스! 응급 처치를…….”
“뷔, 뷔노…….”
시몬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굳어있었다. 뷔노의 몸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검은 정장은 상처를 잘
짐작하지 못하게 했지만 바닥에 흐르는 피는 그 크기를 알 수 있게 했다.
“으, 흐, 흐윽…….”
시몬이 사색이 된 채 뷔노의 상처를 손으로 막아 지혈하려 애썼다. 뷔노는 근육이 찢어진 걸 느꼈지만,
최대한 평온한 말투를 유지하려 애썼다.
“…됐어. 오고 있으니까.”
오고 있다니 무슨 소리지? 시몬은 뷔노가 보는 방향을 보았다. 그쪽에는 삭발을 한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살기를 띤 채 달려오고 있었다. 양손에 든 무식하게 큰 기관총이 파르르 떨렸다. 옆에는 의약품 상자를
든 그의 부하들이 쫓아왔다.
“언니…….”
“어떤 새끼야?”
“저 중 하나.”
“으윽…….”
그 소리에 눈이 뒤집힌 피네가 웃으면서 다가갔다.
“안 뒈진 놈이 있나 보네?”
“켈록켈록.”
피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피네가 피를 흘리는 클로버 조직원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조직에 있어서 겁쟁이라는 건 최악의
평가였다. 그는 입에서 피와 침을 줄줄 흘린 채 피네에게 빌었다. 피네는 옆의 조직원에게 명령했다.
“쟤도 데려와.”
“뭐? 왜? 저놈이―”
“데려와.”
“저 새끼도 실어.”
“네가 감히 어딜 들어가려고.”
“꺼져, 당장.”
“…….”
피네는 목에 핏대까지 세운 채 시몬의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꾹꾹 미는 총구엔 살의가 진심으로 담겨있어
시몬은 경직했다. 그러나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네가 없었더라면.”
쏟아져 내리는 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셔왔다. 신발 속까지 물이 들어가 추위에 벌벌 떨었지만 시몬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
시몬은 울적한 마음을 지우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괜찮은 걸까.’
“바보 같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잘 지내기는커녕 아버지의 치료비 하나를 감당하지 못했다. 주위 사람이 자신을
대신해서 고생하게 만들었다.
회색 먹구름이 하늘을 감돌고 흐르는 비는 찻길에 고여 찰랑였다. 그래도 시몬은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붙박아 놓은 양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었다.
시몬은 흐려지는 의식을 부여잡고 건물 앞에서 계속 기다렸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뷔노 님……?’
벌써 나오게 된다는 건 무사한 걸까? 걱정되는 마음과 상태를 알고 싶은 욕망이 올라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다행이다…….’
뷔노의 차가 시몬의 앞에서 멈췄다. 뷔노는 차 안에서 걸어 나와 시몬의 앞까지 왔다. 짧은 거리임에도
비가 거세게 내린 탓에 뷔노의 몸 역시 젖었다.
“…왜 여기 있어.”
시몬이 뷔노의 목덜미를 손으로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축축한 머리카락이 만져졌다.
뷔노는 눈을 살짝 내리깔아 시몬과 눈을 맞췄다. 시몬의 입술이 부드럽게 뷔노의 입술에 닿았다. 둘의
입술이 겹쳤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시몬은 뷔노에게서 몸을 떼었다.
빗물에 식어 차가운 몸과 달리 입술에서 느껴지는 지나치게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뷔노가 눈썹을
찌푸렸다.
“…시몬?”
“뷔…….”
13. 자매들의 마더
이걸 바꿔서 말하면, 어쩌면… 자신은 맞지 않아도 되고, 훔치지 않아도 되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과거를 잊자는 의미에서 예전 이름은 버리기로 했다. 대신 쓰레기통에 굴러다니는 술병을 보며 서로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이름들이 와인병에 적힌 포도 품종들이었다는 건 지금 돌이켜 보면 조금 우스운
일이었다.
“포…도… 품… 뭐시기.”
“왜 하이직이야?”
“뒈질래?”
“난 뭐로 할까…….”
“…좋아.”
그 틈에 막내가 입을 열었다.
“언니는 뷔노 어때?”
“…그래?”
“가족이 뭐야?”
가족이 된 그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양아치였다. 빈집이 있으면 빈집을 털고, 든 집이 있으면 든 집을
털었다. 도둑질을 하고, 소매치기를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돈을 뜯었다.
무리 중에서 가장 체격이 크고 싸움을 잘하는 뷔노가 대장이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게다가 뷔노는
가장 나이가 많았다. 고작 한두 살 차이였지만 그 나이대 아이들에게는 큰 차이였다. 동생들은 뷔노에게
날이 갈수록 더 의지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흉터가 나야만 했다. 동생들을 감싸고 돈을 뜯어서 먹이고 도망쳐야
할 때는 도망쳐야 했다.
뷔노를 포함한 네 자매는 당연히 먹고사는 것만으로 힘에 부쳤다. 보호세는 못 냈고, 조직들은 두려우니
한 장소에 머물지 못하고 돌아다녀야 했다.
악몽 같은 풍경이었다.
쭈그려 앉아있는 동생들은 새하얀 가루를 손바닥에 놓고, 코로 가루를 들이키려고 하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졌다.
약. 이게 이렇게 증오스러울 수 없었다. 뷔노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자,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책상이
단번에 두 동강이 났다.
“미쳤어?”
“돌았냐고!”
“…잘, 못했어.”
“왜. 무슨 정신으로.”
뷔노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하이직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고개를 숙여서 더 보이지
않았다. 하이직의 몸이 들썩였다. 대답을 잇지 못하는 하이직 대신 머스캣이 말했다.
“…나도.”
“…배고파서.”
“뭐?”
“배고파서 그랬다고!”
“그런데 언니는 맨날 이렇게 강압적으로 대하고! 우리가 언니 부하야? 왜 소리를 지르는데? 물건 부수는
것도 협박이라고! 어른들이랑 똑같아!”
뷔노의 작은 어깨에 모든 힘이 빠졌다. 분노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하이직, 그 뒤에서
무섭다는 듯이 떨고 있는 피네와 머스캣.
그간 맏이라는 이유로 일부러 더 나서서 궂은일을 하고, 더 위험한 역할을 맡고, 필요하면 제 음식도
양보했다. 모두 동생들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이 세상에서 뷔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이들
셋밖에 없었다.
뷔노는 처음으로 그간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보기 시작했다. 동생들을 보호해 왔다고 믿었는데, 실상
자신은 제 부모와 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배가 고팠어?”
“아니, 내 말은…….”
뒷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귓가에 웅웅대는 소리만이 퍼져갔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몸이
저절로 뛰쳐나갔다. 뷔노는 동생들을 뒤로 한 채 전속력으로 달렸다.
‘…배고파서 그랬어.’
‘어쩌지.’
막막한 질문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갈라지는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렸다.
“…어이, 친구.”
다 해진 옷과 모자가 보였다. 모자를 어찌나 푹 눌러썼는지 턱밑으로 내려온 수염을 제외하면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
“남는 얼음 없어?”
“얼음?”
하이직이, 피네가, 머스캣이 손끝이 거뭇거뭇해진 채 벌벌 떨면서 골목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가
사라졌다.
‘잠깐.’
‘차라리 내가 마약 일에 뛰어들면.’
어렸을 적 뷔노의 옆집, 정확히는 옆집의 다락방에 얹혀살던 제리가 갈색 봉투를 들어 올리며 해준
얘기였다.
‘밤에 간판 없는, 철창이 많이 쳐진 가게를 찾아. 그중 시끌벅적한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십중팔구가 지하에 술집이 있는 거지. 술집 구석 테이블이나 가게 뒤편을 보면 이런 걸 들고 있는
노새들이 보여. 그 사람들한테 가서, 너도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 돼.’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
팔 생각은 있지만.
‘먹고 싶어요?’
‘대답 안 하네.’
그는 봉투를 거꾸로 든 채, 그대로 빵을 쏟았다. 무더기로 쏟아지는 빵에 뷔노는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미안해, 언니.”
“아냐.”
“그거 총이잖아.”
동생들이 자신 몰래 약을 구해왔던 날이 떠올랐다. 하이직은 뷔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길에서 주웠는데.”
“머스캣!”
“…미안.”
잠시 골목에 둔 거거나, 아니면 거래하려는 거였을 지도 몰랐다. 금세 떠오르는 가설들에 뷔노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며칠 전이라고?’
어린 여자애 넷은 눈에 띄는 조합이었다.
“아냐.”
“…뭐, 그게 뭐. 네가 하는 거랑 똑같잖아.”
“맞고 싶어?”
“그만.”
“…알았어.”
“총 들고 있던 사람은 봤어?”
“어떤 차림새였어?”
별 도움이 안 되는 증언이었다.
“역시 어디 조직 사람이려나?”
피네가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하이직은 약간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뷔노를 보고 있었다.
“총에 뭔 짓 했어?”
“거짓말이네.”
“후우…….”
“…조금 만져봤어.”
“아빠.”
하이직은 전쟁 때문에 국경을 넘어오는 수밖에 없었고, 가족들은 죽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을까.
뷔노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질문은 삼켰다. 자매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가정사를 지나치게 묻지 않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어떻게 바뀐 건데?”
“이게, 발사하는 장치를 보조해 주거든. 그러니까 더 세게 나가게 한 거야. 지지대를 잡기는
불편했지만.”
“…세 번?”
“거짓말이래요.”
“지금 한 번 쏴봐.”
“안전장치 안 했는데에…….”
뷔노의 심기를 염려한 하이직의 말끝이 늘어졌다. 뷔노는 벽에 걸려있던 담쟁이덩굴의 잎 하나를 눈으로
노려보았다. 뷔노는 하이직이 했던 자세를 그대로 따라했다.
‘생각보다 힘드네.’
“그러면 총 갖고 다닐 거야아?”
“가자.”
늘 그렇듯 목적지는 없었고 길을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자매들은 되도록 음식을 쓰레기통에 통째로 버리는,
인심이 넉넉한 마을에 도착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걸어가던 도중 머스캣이 하얗고 짧은 손가락을 뻗었다.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반가운 표식이
있었다.
“…공중화장실.”
“무료네.”
“오랜만에 씻겠구만!”
“뭐지?”
피네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뷔노는 우뚝 멈춰선 다음 동생 중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팔로 막았다.
“쉿.”
“무, 대체 무슨 소리야?”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저기 뒤에…….”
머스캣이 뷔노에게 속삭였다. 뷔노는 공중화장실 뒤편을 쳐다보았고, 범상치 않은 무리를 목격했다.
뷔노는 고갯짓을 했고 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때 화장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협하는 말투였지만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다.
“뭐라고?”
세 걸음. 네 걸음.
“하이직.”
“실례해도 될까?”
“지나가시죠.”
“가자.”
뷔노는 머스캣의 손을 끌고 사람들을 피해 나가려 했다. 그러나 누군가 뷔노의 어깨를 슬며시 붙잡았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뷔노의 목이 굳었다. 낮으면서도 즐거운 듯 들리는 상대의 목소리는 위협적이었다.
‘누구지?’
디자이너나 귀부인의 옷차림 같았다. 그러나 당당한 태도와 조직원들이 물러서는 모양새는 우연히 끼어든
귀부인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그는 파이프를 몇 번 문 후 내뱉었다.
‘젠장.’
“모양새가 꽤 귀여워졌구나.”
개조된 부분을 몇 번 만지작거린 여자가 말했다. 하이직의 얼굴이 새파래지다 못해 보라색으로 변하려고
했다.
뷔노는 자신들이 조직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던 와중, 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한 손 말고 양손 다.”
“아.”
“…마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마담! 저는 억울합니다!”
여자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굳은 표정을 지었다. 여자의 얼굴을 본 남자는 기사도의 정석 같은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쇼, 마담. 이놈이 마담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다만 이놈을 데려가는
걸 조금 도와주시면 됩니다.”
“붙잡아.”
“마담! 오해입니다!”
“그래도 마담의 보디가드 덕분에 잡아서 다행입니다. 보스가 보디가드를 붙여주신 보람이 있군요, 하하.”
“그렇구나. 잘했어.”
진심이었다.
잡아.
“…마담?”
“마담, 왜 이러십니까?”
“…이런 XX!”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동안 보스의 애인이라는 이유로 넘겼는데, 자세히 보니
기시감이 드는 외모였다.
“도망치는 놈은 더 없었겠지.”
“…그래, 그러면.”
여자가 방심한 그 순간을 남자는 놓치지 않았다. 바로 뛰어가서 여자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닥쳐! 네가 감히 보스를…….”
“아악!”
무거운 것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조금 시간이 지나자, 여자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여자의 뺨에
살짝 묻은 피가 현장에서 일어났던 일을 대변했다.
뷔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옆의 부하가 손수건을 정중하게 건넸다. 여자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손수건으로
뺨을 닦았다.
“들어도 못 들은 거고?”
“난 대가 없는 약속은 믿지 않아.”
“입은 막아야겠지.”
고민은 짧았다.
뷔노는 남자를 어깨로 밀쳤다. 남자는 보기와 다르게 힘이 센 건지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미 뷔노는 남자의 총을 뽑아낸 상태였다.
철컥.
뷔노는 총을 든 다음, 여자를 총으로 똑바로 가리켰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이직이 했던 자세를
최선을 다해 흉내 내고 있었다. 부디 그는 자신이 명사수로 보이기를 바랐다.
“…우리를 보내줘.”
“언니…….”
“내가 못 쏠 것 같나?”
‘협박용으로, 한 발만…….’
“쏘렴.”
당황한 뷔노의 옆에 여자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그는 뷔노의 어깨를 쳐, 순식간에 총을 뺏었다.
‘젠장…….’
“가둬놔.”
집만 한 곳이 없다.
―오즈의 마멉사
‘뭐지?’
“네 명이 옹기종기 잘 붙어있네.”
“일단.”
“씻을까?”
여자는 엄지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그 말에 눈을 껌뻑이던 자매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뷔노가 걸음을
옮기는 걸 보고 같이 갔다.
“한 명씩 들어가지 않고?”
혹시나 자신이 들어간 사이에 동생들이 해코지라도 당하면, 아니면 반대의 경우가 있을 수도 있었다.
여자는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마음대로 해.”
“저 사람 속은 도저히 모르겠네.”
“…씻자.”
예전에 부모와 살던 집에도 욕조는 없었다. 낡고 허름해서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녹물만이 흘러나오는
샤워 부스가 있을 뿐이었다.
예전 집과 비교하면 이곳은 아주 호화로웠다. 뷔노는 속으로 자조했다. 조직에 납치당하고 나서야 욕조에
들어가 보다니 아이러니했다.
“왜 그래, 차가워?”
“아니…….”
“언니, 나 무서워…….”
하이직이 말했다.
“도망칠까?”
“XX, 어디든지.”
“헛소리가 너무 심해졌어, 피네.”
“아니… 그게 아니라…….”
머스캣은 코를 훌쩍였다.
머스캣이 눈물을 줄줄 쏟아내며 오열했다. 머스캣이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다 샴푸 거품이 진짜로 눈에
들어가 버렸다. 뷔노는 잠시 거품을 만들어내던 손을 멈췄다.
“눈 따가워어어……!”
“빨리 헹궈.”
“…싫, 흑, 어.”
“왜?”
“라벤더 향이 너무 좋, 아서 씻기 싫, 흐어어…….”
“…푸핫.”
“나 나쁜 언니 아니거든! X 라 좋은 언닌데!”
피네는 사죄의 의미로 머스캣의 눈을 깨끗이 닦아줄 뿐 아니라 코까지 풀어줘야 했다.
“머리 큰 거 봐. 씻어도 씻어도 끝나질 않네.”
“…언니 손이 느린 거겠지.”
“어쭈, 안 지네.”
피네는 투덜거리면서도 샴푸를 처음 경험해 보는 머스캣을 위해 최대한 천천히 두피를 문질러 주었다.
머스캣은 느긋한 표정으로 두피 마사지를 받았다.
“연다?”
“…….”
“진짜 그런 건가.”
그러나 동생들은 말을 들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굶주린 짐승의 눈앞에 음식이 있는데 뷔노의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음식 섭취에 몰두한 셋을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뷔노 역시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모두는 피네가 아무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건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짐을 나르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뭐야, 진짜?”
그렇게 호화로운 방에서 꼬박꼬박 음식과 물자를 제공받는 일상이 지속되었다. 끌려온 지 일주일이 지나자
아이들은 슬슬 살이 포동포동 오르고 있었다.
“미안.”
그 말에 하이직은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있어 보자.”
“왜?”
뷔노가 말하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낙엽이 가라앉고 계절이 바뀌어 가면서 모두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겨울이 지난 다음에 어떻게 빠져나갈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뷔노는 속으로 살짝 안심했다.
“조금 답답해요!”
피네가 냉큼 대답했다. 반면 머스캣은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뷔노는 조용히 있다가, 수그러든
목소리로 여자에게 말했다.
“아무 생각 없는데.”
“가둬 놓고 있잖니.”
“…….”
“걱정하지 않아도 계획이 끝날 때까지 너희를 풀어줄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얌전히 여기서 호의호식하며
지내렴.”
“계획이 언제 끝날까요?”
애인?
“안에 있겠습니다.”
“농담이야. 역시 답답하겠지?”
“글을 모릅니다.”
“…저도 몰라요.”
“…다 글을 몰라?”
“난 조금 알아요!”
“무기 관련 단어는 잘 읽는데, 나머지는 버벅여서 별로…….”
“다들 몇 살이지?”
“네 이름은 뭔데?”
“…뷔노.”
“뷔노? 와인?”
“그럼 네가 대장이구나.”
뷔노는 여자의 말이 연민을 드러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여자는 우연인지
인연인지 모를 기이한 만남을 신기해하고 있었다.
“…너네, 글 배울 생각 없니?”
“그건 괜찮지.”
여자가 그 방에 머무르는 시간은 갈수록 길어졌다. 뷔노와 여자 단둘이 남았을 때, 뷔노는 사뭇 경직된
태도로 말했다.
“정상은 아닙니다.”
“뭐가?”
“너도 어리단다.”
“…….”
“미쳤군.”
“…….”
“…당신.”
뷔노는 입을 닫았다.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뷔노는 이것과 충분히 비슷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저 제 말만 이어갔다.
“…….”
유쾌한 목소리는 말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았다. 뷔노는 이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
“여자애가 돌아와 자신의 동생들이 죽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걸 몰랐던 거야.”
“그건, 당신 얘기…입니까?”
“그러면.”
“이 이야기의 교훈은 길거리를 떠도는 가장 하찮아 보이는 여자아이도 죽이지 말라는 거야. 혹시
모르잖니.”
“그런 게 중요하니.”
“나가도 돼.”
“이름이 뭡니까?”
“메이.”
“왜?”
“괜찮은 솜씨긴 했지. 그런데, 그걸 물은 게 아냐. 왜 들어오고 싶냐는 거지. 멋있어 보여서? 재미로?”
“흐음?”
“돈. 돈 때문이라… 이렇게 솔직한 경우는 오랜만에 봤네. 뷔노, 원래 이럴 때면 좋은 어른은 뭐라고
하는지 아니?”
그는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마더요?”
“…그렇습니까?”
그 상태로 마더가 걸어갔고 뷔노는 마더가 세 걸음을 걸은 후에야 그 뒤를 따랐다. 동생들은 뷔노가 한
걸음을 걸은 뒤에야 그 둘을 따라갔다.
“힘드니?”
“체력이 약한 편이라…….”
마더는 머스캣을 힐끗 보았다. 마른 몸이나 창백한 피부가 그의 건강 상태가 나쁘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몸이 건강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자매들은 모두 신기한 눈으로 자전거를 보았다. 안장을 보던 머스캣은 주춤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왜 그러지?”
어떤 금기나 규율에도 얽매이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뷔노가 생각한 바를 마더에게 말하자
그가 웃더니 말했다.
“어떤 게 좋은 겁니까?”
3 월 14 일. 스페이드 보스 사망 한 달 후.
수많은 살롱이 있었지만 살롱은 모두 남자들의 영역이었다. 그런 가운데 가장 대두된 가십은 분명했다.
“아, 그랬나.”
“자네 외지인인가?”
다른 남자의 질문에 검은 모자를 쓴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스카프를 허리에 두른
사람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검은 모자의 말에 사람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그의 표정을 보고 푸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해가 빠르구만!”
“놔두게.”
“거시기만 뜯기겠어?”
모자를 쓴 사람은 제 오른쪽 허리에 손을 얹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주인장이 큰소리로 외쳤다.
“이봐, 거기 친구들.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람들 가지고 뭐라 했다고 화내는 거야? 우리 알 바 아니지
않나, 좀 유들유들하게 넘기게.”
“좋은 조언이군.”
“…어디서 본 얼굴 같은…….”
남자가 모자를 쓴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보려 하자, 스카프를 두르고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이목을
끌었다.
벽에 붙어있던 사람들이 기겁하며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유리 조각을 맞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까 가장 거친 언사를 보였던 남자들이었다.
“…저, 저거!”
사람들의 움직임이 멎고 정적인 상태가 계속되자 피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살롱의 주인은 제 심장을 향한 총을 의식한 채 고개를 힘겹게 끄덕였다. 힘줄이 솟은 목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살롱 주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스페이드의 보호를 받지 않고 장사를 한다는 건 나머지 조직의 표적이
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죽는 거지.”
“그래.”
“제, 발. 자비를…….”
“…이렇게 말하면 너무 박하겠지, 거래하는 사이에서 말이야. 나는 친구끼리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친구가 위험하다는데 설마 무시하겠어?”
“…시저에서요?”
“친구 사이에서는.”
“…시저랑 계속 거래하겠습니다.”
“좋아.”
“친구? 오래 가자구!”
“자, 그러면…….”
쾅, 쾅, 쾅.
뷔노는 한 손으로 옷깃을 잡고, 바닥에 질질 남자를 끌고 갔다. 별 힘도 들이지 않은 동작으로 보였다.
피네는 뷔노의 뒤를 쫓아갔다.
“기다려, 언니.”
“아, 그렇지.”
“한결 깨끗해졌네.”
14. 그와 그의 아들
‘젠장, 젠장.’
뷔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달려갔다. 그러나 파이프에 맞은 한쪽 다리는 어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잡아! 저게 잡힌 놈을 풀어줬어.”
손으로 나무 펜스의 윗부분을 붙잡은 뷔노는 생각보다 펜스가 높다는 걸 발견했다. 다친 다리로 넘기엔
무리라는 생각뿐이었다.
‘죽기보다 더하겠어.’
“안 보이는데!”
“저 너머로 간 거 아냐?”
“…저, 누, 누구세요?”
“…….”
“잠깐만 숨겨줘.”
“네?”
“나쁜 놈들한테 쫓기고 있어서.”
‘나쁜 놈은 나지만.’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뷔노는 알고서도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러나 눈앞의 소년은 뷔노의 말에
흔들리는 듯 보였다.
“응.”
“결국 부러졌나?”
“부러졌다고요……?”
“저 사람들이에요?”
“여기 뒤에 계세요.”
‘숨 막혀.’
“답답해도 참으세요.”
“…그래.”
풀밭에 누운 뷔노는 팔을 조금 움직여 자리를 잡았다. 팔도 살짝 삐끗했는지 아파왔다. 소년은 어쩔
작정인 걸까.
‘아, 모르겠다.’
“…다는데, 혹시 사람 못 보셨습니까?”
‘숨겨주는 건가.’
‘망했군.’
부스럭, 부스럭. 풀밭을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이불을 들추는 손길에 뷔노가 눈을 떴다.
“이, 이제 괜찮아요.”
“…뭐가?”
“갔다고?”
몇몇 주에서는 길거리에 살롱이 대놓고 만들어질 정도였다. 금주법이 유명무실한 법이 되어가려 할 때였다.
누군가는 칭송하고 누군가는 미쳤다고 욕했다. 분명한 건 온 국민의 관심이 한 명에게 쏠렸다는 거였다.
‘우리 모두는 안전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따뜻한 품에서 자라나, 안정된 가정에서 아이를 길러낼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금주법이 제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가 제일 많이 벌어진 장소는 살롱
앞이었다. 살롱 앞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여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몇 정치인들이 금주법이 제대로 시행될 수 있게끔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런 태도에 누군가 위협을
느꼈던 걸까?
소식은 순식간에 전국에 퍼져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추모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
그날, 마더의 집무실로 들어간 뷔노는 몹시 당혹스러웠다. 마더가 울고 있었다. 정확히 눈에서 물이
흐르고 있는 건 아니었으나, 그 비통한 표정은 목 놓아 울고 있다는 표현 말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뷔노가 신문 기사를 흘끔 훔쳐보려 하는데 마더가 입을 열었다. 그는 어느새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마더는 눈은 살짝 내리깐 채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손가락을 투두둑 두드리는 그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럴 때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됐다. 오랜 정적 끝에 마더가 입을 열었다.
“뷔노.”
“예.”
볼살이 통통하게 올라온 아이를 어머니가 안고 있었고, 옆에는 아버지로 보이는 남성이 광대뼈가 한껏
올라간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내밀고 있었다.
길에는 시끄러운 발걸음 소리와 뱃고동 같은 깊은 소리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남부 특유의 음악 소리였다.
‘장례식인가?’
누구의? 뷔노는 장례식 행렬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행렬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원뿔의 악기를
찾으면 그만이었다.
“캐서린 줄리어스!”
첫 번째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끝마치자 요란한 피리 소리가 막을 열었다. 가느다란 참나무 가지 다발을
다른 사람이 꺾고, 누군가는 붉은 흙을 뿌렸다.
“캐서린 줄리어스!”
“어머니.”
“캐서린 줄리어스!”
세 번째로 이름을 부르면 망자는 제자리를 찾아간다. 소년은 더 이상 미소를 유지하지 못하고 입꼬리를
내렸다. 그는 옆으로 시선을 피한 채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눈물방울이 뺨을 따라 아롱지며 쉴 새 없이
흘렀다.
소년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뷔노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가슴에서 시작된 소름이 온몸으로
번져갔다. 망치질하듯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뷔노는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문질렀다.
“별…….”
뷔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하이직이 늘 조롱하던 ‘첫눈에 반하는 왕자 역할’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었나?
“뭐든 좋으니까 빨리 고치기만 하라고. 돈은 저분이 얼마든지 내줄 거야. 적어도 오늘 밤까지는 고쳐내.”
청년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펜치를 이용해서 파이프 관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조직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청년이 상자에서 이것저것 꺼내가며 수도관을 건드리는 걸 보다, 흥미가 떨어졌는지 이렇게 이르곤
사라졌다.
“그러죠.”
청년은 고개를 끄덕인 뒤 남자가 사라지는 방향을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그가 떠난 걸 확인하자마자
펜치를 내려놓았다.
청년, 아니 뷔노는 천천히 일어나서 복도로 향했다. 사용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뷔노는 어눌해 보이는
말투를 연기했다.
“잠시 기다리세요.”
조직이 집 안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들이 믿는 건 대부분 변호사 사무실로
위장된, 어딘가의 회의실이었다. 법적으로 도청이 금지된 장소를 원하기 마련이니.
그러나 오래도록 다이아 조직의 ‘회의실’이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마더는 조사 결과 그들의 독특한
방침을 알아냈다.
회의실이라는 구조 역시 신뢰할 수 없었던 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조직을 구성했다. 웬만한 다이아의
조직원은 물론 간부까지 다이아의 보스가 누군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도청기를 설치해야 한다는 게 마더의 설명이었다. 전에 설치하려다 붙잡힌 조직원 역시 풀어줘야만
했다.
사용인이 세밀하게 세공된 유리잔을 뷔노에게 내밀었다.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가 나열된 모양의 잔이었다.
“감사합니다.”
“뭘요.”
디오니소스와 데메테르
데메테르의 어깨와 디오니소스의 손 사이에는 포도가 있었다. 마치 일부러 데메테르의 어깨에 포도를
걸치려고 한 것 같았다. 포도주를 쥐고 있는 데메테르의 왼팔은 디오니소스의 손이 슬며시 감싸듯
닿아있었다.
노아의 만취
노인이 된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만취해 알몸 상태로 뒹굴고 있는 그림이었다. 다른 아들들은 노아의
알몸을 보지 않으려 하고 옷을 덮어주었지만, 그중에서 막내아들은 노아를 비웃고 있었다.
뷔노는 그림 쪽에서 시선을 돌렸다. 뷔노는 다리를 두어 번 정도 바닥에 두들기다 발걸음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
‘어떤 소란도 피우지 말고 그 어떤 사람도 죽이지 않으며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고 돌아올 것.’
뷔노는 지금까지 어려운 협상과 임무들을 시도해 왔지만, 아무것도 건드릴 수 없는 거나 다름없는 참으로
까다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뷔노는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지하로 향했다.
미약한 소리가 들렸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반응은 없었다. 뷔노는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다행히 지하 부분의 바닥은 안정되어 있는지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어두운 지하 안은
나무 문이 몇 개 있었고 촛불 몇 개만이 켜져있어 어둑어둑했다.
“…조용히 나가.”
그 말에 조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뷔노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고 생각하며, 전구 윗부분에 도청기를
꾹 눌렀다.
“저, 뷔노 님은 안 가십니까?”
“나는… 할 일이 조금 남아서.”
“지하 계단에는 소리가 많이 나니, 조심해서 올라가고 2 층까지 올라간 후 뒤쪽 창문으로 나가. 그쪽에
경비가 없어.”
조직원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뷔노는 커다란 와인 창고 중 하나를 더 열어 도청기를 설치했다. 그리고
세 와인 창고 중 마지막 하나의 문을 열었을 때였다.
‘사용인이 있었나?’
“조용히.”
뷔노가 귓가에 입을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 가운데 와 닿는 길고 찬 손가락이 말 이상의 위협을
전했다. 소년은 움칫 떨었지만 소리를 지르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뷔노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소년의 목을 잡은 채 천천히 움직였다. 뷔노는 소년의 목 위에서 긴 손가락을
조금 움직여 움켜쥐었다.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지만 당황한 소년이 몸을 빼내려 하기 전,
쾅―!
‘지금 당장 기절시킬까?’
“잠시…….”
입까지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뷔노는 손을 묶은 소년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촛불이 앞에 드리워져 소년의
얼굴이 눈에 선명히 보였다.
‘이놈은…….’
기분 더러운 구원.
뷔노는 서둘러 얼굴을 가리려 했으나 그는 자신의 얼굴에는 관심이 없었다. 뷔노는 그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다. 촛불과 칼, 허리춤에 걸린 총.
“날 죽이러 왔습니까?”
“…….”
“…하나만 알려주시죠.”
그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입막음은 어렵겠고.’
‘매수할 수도 없겠군.’
‘…죽일까?’
“뭘 원합니까.”
“…….”
“무슨 속셈이지?”
“대체 뭘 원하길래?”
“술…….”
“뭐?”
‘그냥 술꾼이었나?’
“…….”
“거래, 하시겠습니까?”
“…….”
“얼마나 필요한데.”
‘역시 죽일까.’
“뭐?”
흠이라고? 뷔노는 바로 눈앞의 소년이 아버지의 사생아일까, 의심했다. 사생아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상류층 집안도 제법 흔한 이야기였다.
뷔노는 오랜 정적 끝에 입을 열었다.
불법적인 조직인 다이아와 소년의 아버지가 연결돼 있다는 증거를 말하는 것이었다. 뷔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 전에.”
“차라리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그러던지.”
문제는 그 이후였다.
침입자가 있던 걸 눈치챈 경비들이 뷔노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아, 응.”
“이름이 뭐야?”
“제 이름이요? 저는 시, 시몬이에요.”
“시시몬? 독특하네.”
“저한테 기대세요.”
“네, 네?”
“후…….”
“아… 금방 준비할게요.”
“고마워.”
‘보고도 해야 할 텐데.’
“윽.”
“그, 죄, 죄송해요.”
“…….”
어찌 됐건 임무의 실패도, 이 회계 장부도 마더에게 보고해야 했다. 뷔노는 무거운 마음으로 소년이 건넨
책을 펼쳐보았다.
“…하.”
“젠장… 그 새끼.”
뷔노는 손으로 이마를 쓸어넘겼다. 어두운 지하실 안에서 일렁이는 촛불을 비췄을 때 이 책은 꼼짝없는
회계 장부였다. 그렇게 믿게 된 건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 당당한 소년의 태도도 한몫했다.
‘보기 좋게 속았군.’
그를 힐끔 보던 시몬이 말했다.
“안 불편해.”
‘엄청 불편하지.’
‘기관지가 안 좋나.’
“너는 안 불편해?”
“네?”
“도둑 맞아요?”
“맞다면?”
“별로 신경 안 쓰나 보네.”
“…그러면 돌려줄래?”
“동생분들이 계시는군요.”
“세 명. 입이 많지.”
시몬은 저절로 측은한 마음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뷔노는 시시각각 바뀌는 시몬의 표정을 보며 속이 훤히
보이는 게 참 편하다고 생각했다.
시몬이 호의로 꺼낸 말에 뷔노는 그다지 반응이 없었다. 프로그래밍 책이야 뷔노도 다 본 지 오래였다.
“원래 이건 손님방이야?”
그 말에 시몬이 살짝 얼어붙었다.
어머니라고 하면 캐서린 줄리어스일 것이다. 뷔노는 시몬을 물끄러미 보았다. 얼굴에 슬픔이 묻어있었다.
“그, 신경 쓰라고 드린 말씀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뭐라고 부르죠? 이름을 모르니까… 어, 손님. 편한
대로 머무르셔도 돼요. 이제 빈집이니까…….”
그의 아버지도 시몬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조금은 의심하고 추궁할 만도 한데 둘은 뷔노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 만큼 사정을 묻지 않았다.
‘뭐 나한테는 좋은 일이지.’
뷔노는 시몬에게 팩스기를 빌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빌려주리라 기대를 하지는 않았는데, 흔쾌히
빌려주겠다고 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뷔노는 마더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시저 조직원을 풀어준 것과 그 집 도련님이 제안한 거래,
현재 머물고 있는 집 등등.
그리고 팩스의 마지막 장에는 다소 걱정되는 얘기가 적혀있었다. 머스캣의 수술 날짜가 잡혔다는
내용이었다.
‘결국은…….’
‘머스캣이 죽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머스캣이 아직 죽지 않은 지금은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수술이 잘못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뷔노는 별채의 창문을 손으로 쓸었다. 어느새 아주 깊은 밤이 와있었다. 그때 시몬이 밖에서 돌아다니는
걸 보였다.
‘잠도 안 자고 뭘 하는 거지?’
시몬은 풀밭에 무릎을 세운 채 앉았다. 까만 어둠, 춥고 서늘한 바람과 정적만이 가득했다. 따뜻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던 이곳이 너무 무섭고 낯선 장소처럼 느껴졌다.
시끄럽고 북적거리는 낮에는 들지 않던 생각들이 밤에는 모여드는 법이었다. 시몬은 여러 기억을 떠올렸다.
“흐윽…….”
“허, 헉.”
뒤에 뷔노가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시몬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우는 걸 들켜서 창피한가 보지? 이제야
알 정도로 눈치가 없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어, 언제 오셨어요?”
“방금.”
“다리도 다쳤으면서!”
“이 정도는 괜찮아.”
“울보네.”
“우, 울보 아니에요…….”
“맞지. 어른들은 밤에 호숫가로 와서 소리 내어 울지 않아.”
“…하지만.”
“뭘 안다고오, 크응.”
“놀리면 뭐.”
“…….”
시몬은 몸을 웅크리더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혼자서 감정을 삭일 줄만 알았지 갑자기 괴롭힘까지 당할
줄은 몰랐다. 오늘은 정말 울적한 밤이 될 것 같았다.
뷔노는 소나무 뒤에서 몸을 일으켜 시몬의 옆으로 가 앉았다. 시몬이 슬금슬금 뷔노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런데 뷔노가 오히려 얼굴을 들이밀었다.
“악!”
뷔노는 그걸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시몬은 창피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뷔노는 시몬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흙투성이야.”
“고, 고마워요.”
시몬은 뷔노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손수건을 내밀었다 다시 당겼다. 손수건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놓친
뷔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
“…호수 보러 왔어.”
바람이 조금 더 거세게 불면서 호수에 잔물결이 흘렀다. 무너질 것 같았던 마음이 가만히 있는 뷔노를
보니까 이상하게도 조금 가라앉았다.
“방독면… 안 쓰셨네요?”
그 말에 뷔노가 시몬의 얼굴을 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서 살짝살짝 이목구비가 보이긴 하지만,
워낙 어두워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시몬에게 자신의 얼굴도 보이진 않을 것 같았다.
“뭐, 그냥.”
“뭐?”
“…없진 않았나.”
저 사람은 자신이 무슨 상황을 겪고 있는지도 모를 텐데, 얼마나 바보처럼 보일까. 울보라고 대놓고 말도
했는데. 하지만 뭔가 변명을 하거나 설명을 덧붙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몬은 흐느끼는
목소리를 최대한 삼키고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너무 울어서 눈이 아프고 건조했다. 시몬은 고르지 않은 숨을 내쉬면서 최대한 머리를 비우려고 노력했다.
“…어, 머니요.”
“결국에는.”
“네?”
“…….”
“도둑질.”
“도, 돌려주세요!”
“어떻게 할까.”
“장난치지 말고!”
“장난?”
시몬은 손바닥을 펴 물건을 확인했다. 손의 온기 때문에 따뜻해진 팔찌가 멀쩡하게 돌아와 있었다.
시몬은 허겁지겁 손목에 팔찌를 다시 채웠다.
“이,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네?”
“…뭘요?”
“클로버 조직원들을.”
‘위로…하려 했던 건가?’
평화는 금방 깨졌다.
시몬의 집으로 도착한 팩스 속 암호를 확인한 뷔노는,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 머스캣의 수술이 끝났지만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표정이 바뀌거나 말투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뷔노의 감정 변화를 시몬은 금세 눈치챘다.
“오늘은 왜 왔어요?”
“오늘 왜 왔냐고?”
뷔노는 입을 다물었다.
“울고 싶어서.”
“호칭?”
“론.”
“론.”
“저, 론. 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는데요.”
“뭔데.”
“뭐?”
“…….”
“울적한 날에는 여기로 와도 좋고요. 저희 어머니가 하는 말인데, 밤의 호수는 슬픔을 집어삼킨대요.”
“울보라뇨!”
‘못 들은 것처럼 굴더니.’
뷔노는 자신이 언제 마지막으로 울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운다고 상황이 나아진 적이 없다고
느꼈을 때 우는 걸 그만두었던 것 같다. 한 다섯 살쯤이었을까.
뷔노는 잠시 억누르고 있었던 머스캣에 대한 생각들을 떠올렸다. 많이 아플지, 괜찮은 건지, 살아날 수
있는 건지. 몇 초 지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별거 아니네.’
“…네.”
“…….”
집에 돌아오자, 뷔노는 풀밭에 앉아 호수를 보고 있었다. 밤하늘 속 별빛이 호수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조용히 뷔노에게 다가간 시몬은 주머니에서 작은 정육면체 케이스를 꺼냈다. 안에 들어있던 얇은 물건을
검지와 엄지로 쥔 시몬이 뷔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미 시몬이 다가오고 있던 것을 안 뷔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가 눈앞의 물건에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뭐야?”
“바, 반지…….”
뷔노가 말했다.
“뇌물 아니에요…….”
“타, 탄생석…….”
“탄생석?”
“그래?”
“그랬었나.”
시몬은 아랫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제 마음을 몰라주는 뷔노가 괜히 야속했다.
낭만적인 미소를 지으며 시몬이 고개를 옆으로 기댔다. 뷔노는 물끄러미 시몬을 보다가 시몬의 반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건 뭐야?”
“그, 그건 아니고. 저는 수, 순결 반지로 쓰기로 했어요. 마침 진주가 순결이라는 의미가 있기도 하고…
….”
“다행이네. 아예 못 낄 뻔했어.”
“으, 응?”
“한 번 하면 못 끼는 거 아냐?”
“그, 그렇죠…….”
“네 반지, 내가 빼줄까?”
“왜?”
“응?”
‘이쯤에서 봐줄까.’
“시집 좋아해?”
“그러면 뭐가 좋은데?”
“해봐.”
“전 당신을 사랑해요.”
뷔노의 눈이 처음으로 등잔만 해졌다. 따뜻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니 뷔노는 손에 들린 시집을 떨어뜨린
줄도 몰랐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시몬은 재잘재잘 말을 이어갔다.
“어, 어? …어떻게?”
“아.”
그제야 다시 머리가 진정된 뷔노가 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긍정했다. 시몬이 기대감에 눈을 반짝거렸다.
“조금은… 알 거 같아요?”
“오르가슴 얘기군.”
뷔노는 겨우 깨달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시몬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타오르며 당혹감에 휩싸였다.
“오르가슴이 뭔지 몰라?”
뷔노가 피식 웃자 시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뷔노는 시몬의 손에 깍지를 껴 잡았다. 시몬이 손을 빼지도
못한 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아, 아… 됐어요!”
뷔노는 다음 날 아침, 머스캣이 깨어났다는 팩스를 받았다. 그리고 수술이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것도.
‘탄생석… 의외로 영험한 건가.’
“피크닉?”
간만에 피크닉을 한다는 생각에 들뜬 시몬은 피크닉 바스켓에 빵과 같은 것을 넣으며 뷔노에게 말했다.
“아, 감사…….”
“실수.”
“춥진 않아?”
“아니, 난 괜찮아.”
“그, 그럼 다행이고요…….”
그렇게 말하고 시몬은 얼굴을 붉혔다. 뷔노가 다리를 쭉 펴며 편하게 앉자, 밤하늘에 쏟아질 듯 놓인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식빵 자리네.”
“식빵이요?”
“몰라?”
“아, 처, 처음 들어요.”
“별 좋아한다더니.”
“뭐 만들어낸 별자리지만.”
“…….”
“저 별 세 개요?”
“두 개 더 있는데.”
“내 눈 대신에 매 눈을 집어넣었거든.”
“네?”
워낙 진지한 말투로 말하니, 아니, 말하는 사람 때문인지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안 웃겨?”
“하, 하하하.”
‘비웃는다…….’
“넌 눈에 띄어.”
“네?”
‘이건 마치 고, 고백…….’
“난 색맹이야.”
“네?”
“뭐 색이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니고, 대부분 회색으로 보이지만, 붉은색만은 눈에 들어오지.”
“아…….”
“그렇…죠?”
“아…….”
“…네?”
단순히 색맹인 자신의 시야에 대한 얘기였을 뿐인데 기묘하게 로맨틱하게 들렸다. 시몬은 제 뺨을
양손으로 가볍게 쳤다.
‘정신 차려!’
뷔노가 특유의 말투로 다시 묘했던 기류를 꺼뜨리려 했지만, 익숙해진 시몬은 그 짓궂음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네?”
“오리온자리요?”
“별자리 좋아해요?”
“싫어하진 않지.”
“몸에 안 좋은데!”
“…뭐?”
뷔노는 눈썹을 찌푸렸다. 살면서 처음 들어본 소리였다.
“담배 냄새 싫어해?”
“아, 안 피워요?”
“뭔데.”
“그래?”
“네.”
“기특한 말을 하네.”
“그렇군요.”
“그래?”
“시몬, 입 맞춰 볼래?”
“그, 왜, 왜, 왜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수줍어서 싫다고 할까, 아니면 속아서 해줄까. 그러나 시몬은 예측한 반응 두 개를
모두 빗겨나갔다.
“그러면 안 돼?”
“안, 될 건 없지만.”
“잘 가요, 론.”
“…거, 거짓말이었죠?”
“속는 쪽이 나쁜 거지.”
“내, 내일 배웅 안 해줄 거예요!”
“배웅 안 해준다면서.”
“그, 그건…….”
“뷔노, 춤출래요?”
“…울보랑은 안 춰.”
‘이렇게 굴 줄은 몰랐는데.’
“워, 월식?”
“너답지 않게 싫어하네.”
“미, 미신쟁이…….”
시몬은 순순히 뷔노의 앞으로 걸어왔다. 뷔노는 시몬의 뒷머리에 손을 넣어 쓸었다. 그 상태로 목을 받친
뷔노는 시몬에게 입을 맞췄다.
“으, 어, 어어?!”
“하하하하!”
“웃지 마세요…….”
“자.”
“잡아줄게.”
“…잡아준다고 하고 손 놓을 거잖아요.”
“안 그래.”
“어푸푸, 안 그런다면서!”
“손이 미끄러졌네.”
뷔노는 시몬을 보다 피식 웃었다. 뷔노는 시몬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뺨이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이 정도면 추억인가?”
“…기회 되면 다시 올게.”
빈말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소한 한마디에 시몬의 표정이 밝아졌다. 강아지 같은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보기 좋았다. 뷔노는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기다릴게요.”
‘실베스트리스라고 했나.’
실베스트리스가 증거를 가져왔다면 술병을 건네주고, 가져오지 않았다면 마더에게 그를 데려갈 예정이었다.
뷔노는 피우지 말라고 난리를 치던 시몬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느꼈던 호수 근처의 물
냄새가 섞인 시원한 공기가 그리웠다.
“와주셨군요.”
그 말과 함께 그가 건넨 것은 서류와 녹취록이었다.
‘깔끔하네.’
뷔노는 실베스트리스가 제대로 된 증거를 넘겨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뷔노는 실베스트리스가
건넨 녹취록과 계좌 이체 정황을 확인하고, 옆의 조직원에게 넘겼다.
“약으로 쓰려 합니다.”
“약?”
“약과 독은 한 끗 차이니까?”
“…….”
“뭘 하려는지 대충 알 것 같군.”
“…….”
“그런데 네가 굳이 손대지 않아도, 조금 있으면 처리할 사람들이 생길 텐데.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 말고
기다리는 게 어때.”
“오해하시는 게 있나 봅니다.”
“미친놈.”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지?”
“로미오를 투입했다는 걸 눈치챈 건지, 아주 단단히 화가 난 모양입니다. 우리가 부유층의 후원을 받아서
저지른 일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더의 팩스 번호를 추적하고 있던 모양인데… 최근 마더와 팩스를 주고받았던 팩스들의 전화국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팩스기를 갖고 있는 가정은 얼마 없으니… 금방 좁혀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몬…….”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몬을 노린 것이다. 뷔노는
집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시몬의 부친은 없는 모양이었다. 시몬은 어디 있지?
‘서재겠지.’
시몬은 뷔노가 있던 별채로 올 때 빼놓고는 거의 서재에 있었다. 뷔노는 지체하지 않고 쾅, 문을 열었다.
눈앞에 보이는 놈만 셋이었다. 총을 든 사람들 앞에서, 시몬은 겁먹은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꽂이 뒤에 숨어있는 놈이 있었다. 파이프로 뷔노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시몬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부르르 떨었다.
탕―!
뷔노의 머리를 내리친 남자는 소리와 동시에 쓰러졌다. 뷔노는 자꾸 감기는 눈을 애써 떴다.
“로, 론! 괜찮아요?!”
“시끄럽다, 골 울려…….”
“아… 론?”
“…죽, 었…….”
“조용히…….”
“…….”
‘심하게 다쳤어…….’
“뷔노!”
탕, 탕. 총알은 두 발이 끝이었는지 더 이상 날아오지는 않았다. 붉은색으로 물든 뷔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젠장.”
“병원.”
“뷔, 뷔노 님?!”
블랙리버에서 돌아온 뷔노는 머스캣의 방에 들렀다. 멀쩡한 동생의 얼굴을 뷔노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밤까지 머스캣의 얼굴만 보던 뷔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왜 밤중에 마더의 방에 찾아갔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이니?”
“머리가.”
그렇다고 눈물이 고이지도 않았다. 그저 새하얗게 비워졌다. 마더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자기 침대를
툭툭 마더가 손으로 쳤다. 뷔노는 마더의 옆에 올라가 누웠다.
“그렇군요.”
“전 아무렇지도 않은데.”
“절 죽이실 생각인가요?”
“누구에게?”
“사랑하는 사람.”
“죽였나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제가 틀렸나요?”
“전 멀쩡…….”
“아뇨.”
“뷔노.”
“감사하게도.”
비꼬는 말투가 아니었다. 뷔노는 진심으로 조직에 일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감사히 여겼다. 어리다고
봐주거나 뒷전인 건 끔찍이 싫었다. 그는 최전선에 나간 지금 상황이 가장 기뻤다.
마더 나름의 배려였다.
“힘들다면 지금 포기할래?”
“그럴 리가.”
“술을 마시고 웃어른에게 예의를 지키는 법을 알아야, 그래야 성공할 수 있는 거지. 나처럼. 듣고 있는
거냐, 실베스트리스? 물론 약한 놈들을 밟고 일어서는 법…도 알아야 하고.”
그는 이미 술에 잔뜩 취한 상태였다. 실베스트리스는 계속해서 와인을 부어주며,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아버지. 아버지?”
“죽었습니까?”
평생을 골머리를 썩이며 앓아온 문제가, 단번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실베스트리스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자신을 닮은 늙은 남자의 초라한 자태를 살폈다.
“…….”
*
‘설마 그놈이 다이아 보스가 될 줄은 몰랐지.’
‘뭐를?’
그는 싱긋 웃으며 말을 돌렸다.
“시작이 헤르게임이라고?”
“마약도, 술도, 도박도, 너무 불안정합니다. 사람이 그만두고 나라가 규제하면 그만이죠. 저는 안정적인
기반을 원합니다.”
“금주법은 머지않아 폐기됩니다. 길어도 10 년밖에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시저의 자금줄은
끊기는 셈인데, 현명하게 생각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정확했다.
9 년 뒤.
“이건 시킨 적 없는데.”
“저쪽 신사분?”
‘시몬.’
예전보다는 키도 커지고, 골격도 바뀌었다. 더 성숙한 모습이었으나 속내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클로버가 인생에 도움이 된 날이었다. 준비된 선물은 사양하지 않는 게 뷔노의 신조였다.
뷔노를 노렸던 암살자들을 심문하자 시저에게는 길이 보였다. 그들은 어려운 임무를 맡은 만큼 확실히
클로버의 간부에게서 명령을 받은 게 맞았다.
몇 번의 심문과 해킹을 통해 시저는 클로버 조직의 보스는 아니지만, 클로버 간부들의 위치와 얼굴을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
“저희가 처리하죠.”
게다가 저격수가 언제 총구를 돌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저격이라는 건 방어가 거의 불가능한 공격. 괜히
저격수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게 보통이었다.
그런 까닭에 소속된 저격수가 있는 건 모든 조직을 통틀어 시저뿐이었다. 은퇴한 군인인 레이라가 시저로
들어오고 나서였다.
‘저격수를 키워야겠어.’
그들은 많은 보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시저에 감사한 마음 때문도 있겠지만, 떠돌아다니다 타 조직에
잡혀가 인신매매당한 친구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게 더 컸을 것이다. 조직들에 대한 강한 반발심. 그
반발심이 저격수들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탕.
“뷔노?”
왜 내 침실에 뷔노가 있지? 눈을 깜빡인 시몬은 이곳이 자신의 집도, 클로버의 거처도 아님을 깨달았다.
‘어?’
“후우…….”
“누워.”
“네?”
시몬이 어지러움을 느끼고 얌전히 누웠다. 뷔노는 시몬의 턱 끝까지 이불을 단단히 올렸다. 여전히
시몬과 눈을 마주치고 있지는 않았다.
왜 뷔노의 심기가 불편한 건지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시몬이 눈을 또르르 또르르 굴렸다.
‘이제 기억났다…….’
“아픈 게 좋아?”
걱정을 끼쳤던 걸까. 시몬의 표정이 눈치를 보던 표정에서 금세 미안한 얼굴로 변했다.
“말하지 마.”
“좋아, 시몬.”
“죽고 싶어?”
“조용.”
“…….”
“…….”
물론 기다렸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머릿속에 뷔노를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죄송해요, 무심코…….”
“입 벌려.”
“이… 쓰…….”
“삼켜야지.”
그러다 뷔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건 짓궂은 표정이었다. 자신이 괴로워하는
걸 보고 즐거워하는 저 악동한테 화가 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몬은 입을 벌리고 다가올 고통을 기다렸다. 그러나 실제로 다가온 건 아까의 끔찍한 맛이 아닌, 달콤한
맛이었다.
‘각설탕?’
“어, 뷔, 뷔,노!”
단맛이 서로의 입에 퍼져나갔다.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뷔노가 주는 감각에 집중하다, 자신이 환자라는
걸 깨닫고 뷔노의 어깨를 잡았다.
시몬은 안간힘을 다해서 뷔노를 밀어내려 했으나 평상시보다도 체력이 더 떨어진 상태에서는 무리였다.
“하아…….”
시몬이 살짝 원망스러운 눈길로 뷔노를 보았다. 뷔노는 시몬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대고 장난스레
웃었다.
“아… 제가…….”
“쉿.”
시몬은 고개를 저으면서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그다음 오른쪽 검지를 들어 올려 1 을
표현하고, 양팔을 끌어당겼다.
“해달라는 거지?”
뷔노는 시몬을 안아 올린 채 욕실로 향했다. 허리에 띠 하나만이 둘러져 있는 가운은 몸을 가리고 있다고
보기엔 부실했다.
뷔노는 묶여있던 리본을 단숨에 잡아당겨서 풀었다. 가운 사이를 지탱하던 끈이 풀리면서 시몬의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흐읏…….”
허리를 몇 번 왕복한 손은 골반을 향했다. 골반을 약하게 짜듯 만지던 뷔노의 손에 시몬이 부르르 떨었다.
“제가 할, 콜록.”
뷔노는 시몬의 말을 무시한 채, 성기를 움켜잡고 아주 느리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뷔노는 중심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거품 때문이라며 핑계를 댔다.
“흣, 흐아…….”
시몬이 절정을 맞이하면서 흐른 정액이 뷔노의 발에 튀었다. 새하얀 액체가 묻은 걸 보고도 뷔노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시몬은 욕조에 따뜻한 물을 틀어 얕게나마 찰랑이는 정도로 채웠다. 뷔노의 허벅지 반 정도 차있는 물
높이를 본 시몬은 물을 잠갔다. 욕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뷔노의 한 다리를 들어 올렸다.
조그마한 목소리가 밑에서 타고 올라왔다. 시몬은 손가락으로 뷔노의 허벅지에 원을 그리며 물어보았다.
“네가?”
시몬은 뷔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언제나 그렇듯 순수하지만 강한 열망이 담겨있는 눈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도발이었다.
시몬은 왼손은 바닥에 짚고, 매달리듯 시몬은 뷔노의 유두를 입 안에 머금었다. 오른손은 음부를 파고든
채, 음핵에 대고 문질렀다.
“조금 더 빠르게.”
가슴 쪽에서 혀가 움직이는 감촉과 시몬의 손안에서 음핵이 마찰하는 감각이 섞이자 기분 좋은 느낌이
온몸에서 피어올랐다. 뷔노는 잘하고 있다는 의미로, 시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참, 달라졌어.”
“더 빠르게.”
뷔노는 시몬의 머리카락을 꾹 잡았다. 살살 피어오르는 느낌이, 조만간 절정이 올 걸 알았다. 시몬은
뷔노의 만족 하나만을 생각하며 혀를 움직였다.
음핵의 단단한 부분을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리는 순간, 뷔노의 발끝이 곱아들었다. 아랫배에서 시작된
찌릿찌릿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쿵쿵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후…….”
“저, 괜찮았나요……?”
욕실에서 나온 뷔노는 시몬의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뷔노는 사르륵 날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며
말했다.
뷔노는 천천히 시몬의 잠옷 단추를 채워주었다. 사락 비단이 스치는 감각이 더욱 예민하게 다가왔다.
“그래도 열은 내렸겠지.”
“열이 더 오른 것 같아요…….”
“어디 가시게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기다릴게요.”
“그래.”
16. 푸른색 장미
가장 체계적이고 다양한 도박장을 운영하는 조직은, 단연 하트였다. 하트의 수많은 카지노 중 뷔노가
방문한 곳은 HG 호텔의 카지노였다.
뷔노가 입장한 순간부터 도박장의 분위기는 조용하게 바뀌었다. 다들 그들이 누군지 짐작한 것이다.
“1 만 달러.”
“네?”
“1 만 달러 바꾸겠다고.”
조직원이 직육면체의 가방을 내밀었다. 카드도 아니고, 현금으로 준비되어 있던 돈다발을 본 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만 확인 절차 있겠습니다.”
“VIP 룸은 어디지?”
“예약하셨습니까?”
“아니, 할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뷔노가 말했다.
직원이 곤란한 표정으로 잠시 있었다. 그는 뷔노의 얼굴을 봤다가, 돈 가방을 봤다가, 다시 뷔노의
얼굴을 봤다. 머릿속에서 판단을 내린 건지 직원은 몸을 숙이며 말했다.
“내 포커 실력이?”
“필요 없어.”
“어떤 걸로 하지?”
“올인.”
“카드 안 바꿔?”
“바꿀 필요 없어.”
“잘생긴 얼굴로 무표정을 지으니, 블러핑인지 아닌지 확인을 할 수가 없네. 나는 접을게. 폴드.”
“올인.”
둘의 칩이 가운데로 몰렸다.
“그러면 패를 확인하겠습니다.”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라.”
“내 애한테 셔플로 장난질을 치라고 시키는 용기에는 박수를 보낼게. 고작 이 정도 돈을 벌려고 나한테
사기를 친 건 아닐 테고. 단순히 나를 약 올리고 싶었던 걸까? 어떻게 생각해, 자기?”
“뭐, 나도 카지노를 운영하는 사람을 상대로 사기가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은.”
“앞으로는?”
“동업자가 되면 좋겠는데.”
“뭘 하고 싶은 건지 똑바로 말해.”
“그만.”
“과격한 방식이지만 이해는 되네. 근데 트럼프 카드에는 하트도 있잖아? 우리 보고 자살을 하라는 거야?”
“미안하지만 시저와 다르게 우리는 자경단에서 출발해서 말이야, 전통이 깊거든. 함부로 이름을 바꿀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고.”
“…….”
“백팔십 명.”
“대가는?”
“그것뿐?”
“그래.”
“협상은 결렬이야.”
“아쉽게 됐네.”
둘은 잠시 숨을 죽인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 중 하나의 손가락만 움직여도 이 싸움의 판도가 흔들릴 것이다. 하등 도움이 될 게 없다는 걸 예상한
카네포라는 칼을 떼었고 뷔노는 총을 집어넣었다.
“…제안을 받아들일게.”
“현명한 판단이군.”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돼서?”
“그 말, 지켜.”
아까의 흉흉한 기운은 어디 가고, 카네포라는 싱긋 웃었다. 그 모습에서 뷔노는 피네를 떠올렸다.
카네포라는 뷔노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자기야, 우리 사귈까?”
“난 여자한테 관심 없는데.”
“생기게 해줄게.”
뷔노는 돌아서서 VIP 룸을 나섰다. 뜻밖에도 뒤를 쫓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카네포라가 따라온 것이다.
“뭔데.”
“…그걸 진짜 주겠다고?”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약간 걱정이 되었던 시몬은 문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아, 안 계시네…….”
‘잠깐, 푸른 장미?’
헤르게임에서 단풍이 이어져 난 길은 예로부터 사랑의 길이라고 불렸다. 붉은 길을 따라서 걸으면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곤 했다.
장미는 선명한 푸른빛을 띠었다. 인조적인 느낌이 들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장미 향이 안 나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열이 단순히 돈다고 하기엔 너무나 기분이 이상했다. 시몬은 부엌으로 걸어가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흐른 물이 얼굴과 목가에 흘렀지만 개의치 않고 퍼마셨다.
‘…몸이 뜨거워.’
“…시몬.”
“뷔노!”
시몬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한눈에 봐도 이상한 시몬의 상태에 뷔노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주위를 둘러보자 푸른색 장미 다발이 보였다. 바로 상황이 파악된 뷔노가 한숨을 쉬었다. 푸른색 장미는
조사용으로 챙겨온 것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지 시몬은 이상한 얘기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뷔노는 시몬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완전 맛이 갔네.”
“…그, 래요?”
시몬은 본능적으로 뷔노를 향해 기어갔다. 의자에 앉아있는 뷔노는 눈썹을 찌푸린 채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시몬은 뷔노의 옷깃을 잡은 채 매달리듯 다리에 기댔다.
“흑, 읏… 빠, 빨리…….”
시몬은 뷔노의 상체에 팔을 감으며 엉겨 붙었다. 시몬의 뜨거운 숨이 뷔노의 목가에 닿아왔다.
멋대로 들떠버린 자신의 탓이 컸다. 뷔노와 관계없는 일이니 혼자서 해결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시몬의
행동은 머리와 다르게 흘러갔다. 시몬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뷔노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하면 날 봐줄까?’
뷔노는 시몬의 페니스 근처를 발로 쓸어내렸다. 스쳐 지나가는 아주 작은 자극에도 시몬이 부르르 떨었다.
시몬의 성기는 이미 딱딱해져 속옷을 긁어 올리고 있었다.
“조, 조금 더…….”
“시몬.”
시몬은 직접 자신을 달래지도 못하고, 뷔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못한 채 있었다. 그렇다고 상태가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갈수록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 시몬을 보던 뷔노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경계하도록 버릇을 고쳐줘야 하는데. 뷔노의 반응을
살피던 시몬은 한숨을 쉬는 걸 보고 지레 겁을 먹었다.
뷔노는 그제야 시몬과 눈을 마주쳐 주었다. 여전히 서늘한 말투였으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자업자득이야.”
“참아야지. 아직 참는 법을 못 배웠어?”
“죄, 읏, 죄송해요.”
“…….”
“죽을 것 같, 흣, 목이 너무 타요…….”
시몬은 양팔을 뷔노의 어깨에 감싸고 입을 맞추려 했다. 뷔노는 눈만 찌푸리고 시몬에게 응해주지 않았다.
코끝이 닿기 직전에 거리에서 와주질 않으니 미칠 것 같았다.
“제, 가 잘못했어요.”
평소보다 뜨거운 시몬의 입술을 베어 물던 뷔노가 혀로 은근하게 입천장을 훑자, 시몬이 몸을 크게 떨었다.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헐떡이며 애무를 받아먹으면서, 뷔노가 조금이라도 물러날 기미가 보일까
봐 애처롭게 매달렸다.
열기로 가득 찬 시몬의 머리는 평소의 수치심은 어딘가에 갖다버린 것처럼 온몸으로 뷔노에게 구애했다.
평소와는 다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뷔노는 시몬의 머리를 꾹, 누르고 뷔노의 바지춤에 얼굴을 묻게 했다.
“정성스레 벗겨봐.”
“…….”
“입으로.”
“…흐, 으, 네?”
가까스로 당겨서 단추를 풀어내자 이번에는 입으로 지퍼를 잡고 최대한 빨리 내리려 애썼다. 하지만
조급해하는 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았기에 흘린 타액이 바지를 적셨다.
“더럽히라고 한 적은 없는데.”
힘들게 여기까지 달성한 시몬은 열로 들뜬 정신으로 편법을 쓰기로 했다. 한 번에 바지와 속옷을 입으로
물고 끌어내리려 한 것이다.
“못 참겠어?”
“네, 읏, 더 이상은…….”
미끌미끌한 액체가 성기 위에서 흐르고 있었다. 시몬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의 손으로 성기를 잡고
문질렀다.
“윽!”
뷔노가 다리를 벌리자마자 시몬은 침대로 기어 올라가 엎드렸다.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양팔을 앞으로
뻗어 상체를 지지했다.
“허락.”
“핥으면서 가고 싶어?”
“네, 네.”
뷔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시몬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시몬은 정신없이 뷔노의 성기를 핥기 시작했다.
자신의 성기를 문지르면서 핥던 시몬은 머지않아 절정에 다다랐다.
“윽!”
탈진한 시몬은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뷔노는 시몬의 엉덩이를 힘줄이 돋아있는 큰 손으로 찰싹 때렸다.
손바닥이 닿음과 동시에 탱탱한 엉덩이 살이 튕겼다.
“윽!”
성기 부분이 침대에 부딪혀 충격과 쾌감이 살짝 느껴졌다. 다시 한번 가볍게 간 시몬은 귀까지 빨개진 채
얼굴을 침대에 묻었다.
“아…….”
“그동안은 만족 못 해서 힘들었겠어?”
엉덩이를 쓰다듬던 뷔노는 손바닥을 재차 강하게 내리쳤다. 시몬의 무릎이 꺾이며 종아리가 올라갔다.
“아흑!”
“뷔, 윽, 노!”
시몬은 이불을 손으로 꾹 말아쥔 채 쾌락을 견뎌내려 했다. 시몬은 입술을 악물고 버텼으나 금세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윽!”
“하아…….”
시몬이 새빨개진 얼굴을 이불에 묻었다. 창피한 나머지 고개를 도저히 들 수가 없었다. 그런 시몬을 보며
뷔노가 놀리듯 말했다.
“아, 아니에요!”
시몬이 상체를 일으키자, 침대 위에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되었다. 다리 사이의 이불을 보는 뷔노의 눈빛이
변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싫어졌어요……?”
“글쎄.”
뷔노는 시몬의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가는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글쎄라는 건 아니라는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한결 편안한 상황이 되자, 시몬이 가볍게 투정을 부렸다.
“아… 그랬었지.”
“시몬. 내 시가 향이 뭔지 아나?”
“그건, 한번 맛, 봐야 알겠는데요.”
“…바닐라 향이네요.”
“몰랐던 척하긴.”
“맞췄나 봐봐.”
“…이거.”
“아직 갖고 있었어요?”
“언제부터겠어.”
분명히 이 정도는 아니었으나, 시몬의 마음속 자신은 갈수록 왜곡되고 우스꽝스러워지고 있었다.
‘얼마나 별로였을까!’
“너?”
‘내 거였는데.’
“저건 내 거야.”
“네?”
“…그, 그랬어요?”
“그것뿐이었어요? 다른 마음은……?”
“역시 그랬군요.”
“반갑기도 했어.”
“네?”
“어, 어디 가세요?”
“일하러.”
“아…….”
뷔노가 떠나고, 시몬은 약효가 덜 사라져 몽롱한 정신으로 발코니에 기대어 섰다.
“후우…….”
뷔노는 어느새 건물을 빠져나가 텅 빈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시몬이 쳐다보는데, 뷔노 역시
시몬이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멈춰 섰다.
“…다녀오세요.”
시몬이 찡그리듯 웃었다. 빨개진 눈가와 억지로 지어내는 것 같은 미소를 본 뷔노가 잠시 멍하니
쳐다보았다. 꼭 처음 봤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17. 검은색 축제
앞에는 운전기사가 한 명, 뒤에는 못해도 70 대 후반으로 보이는 노인과 보좌인 남성이 한 명 앉아있었다.
클로버 보스와 그가 가진 초라한 아군이었다.
현재 클로버 보스이자, 전 스페이드 간부인 그가 하는 말이니 사실일 것이다. 보좌는 흥미로운 눈길로
보스를 보았다.
내분이 일어나면 아들이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거나, 외부 조직이 이때를 틈타 클로버의 보스 자리를
뺏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의 노쇠한 심장이 긴장과 불안으로 쿵쿵 뛰었다.
“…정말 견딜 수가 없군.”
“클로버는 내 거야. 오래도록 일군, 내가 만들어낸 내 조직이란 말이다. 내 새끼를 돌보는 시간보다
조직에 신경 쓰던 시간이 많았다고. 그걸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애송이한테 넘길 수는 없지.”
노인은 눈을 깜빡거렸다.
“…너, 누구냐?”
“뭡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실베스트리스가 답했다. 머스캣은 말없이 문을 닫고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차 안에는 머스캣밖에 없었다. 머스캣은 차분하게 차에서 내린 뒤, 조직의 전통적인 인사를 했다. 보스인
뷔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머스캣이 말했다.
“돈 시저.”
뷔노의 뒤에는 그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하이직이 서있었다. 뷔노는 하이직의 불을 받으며 말했다.
‘차라리 붉은색 축제에서 장미를 태워버리는 걸로 하지. 미신적인 걸로 시작된 거라면 미신적인 걸로
설득하는 거야. 푸른색 장미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 꽃을 받아 들면 연인의 결말이 어떻게
되겠어?’
피네의 주장은 그럴듯했다. 시저는 모아둔 장미를 온통 붉은색 축제에서 태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피네의 얘기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뷔노가 시가를 물자, 그 끝이 붉게 타오르며 연기를 자아냈다. 회색 구름을 뱉으며 뷔노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정 그렇다면.”
“머스캣.”
달라진 뷔노의 분위기에도 머스캣은 긴장하지 않았다. 맹수 같은 눈으로 뷔노는 머스캣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내 포식자 같은 미소를 입가에 걸며 말했다.
“예, 돈 시저.”
“시몬.”
“뷔노?”
“예?!”
시몬의 얼굴이 놀라움과 환희에 찬 표정으로 변했다. 그러다 뷔노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의문이
들었다.
“뭐… 그런 셈이지.”
“뭘?”
“내가 아니야.”
“…네?”
나는 캐서린의 계획에 찬성한다. 금주법은 반드시 시행되어야 할 법이었다. 곧 만들어질 시저의 자금원을
위해서라면 말이다.
뷔노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일기장을 읽으면 읽을수록 몰랐던 사실을 다시 알게 되었다.
시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시몬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훌쩍거리던 시몬은 눈물이
멎자, 손을 떼어내고 결심한 듯 말했다.
더 이상 다른 조직들이 예전처럼 시몬을 ‘뷔노의 노리개’ 아니면 ‘로미오 대체재’ 정도로 취급하진
않을 거란 의미였다. 그러나 뷔노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수술이 잘못되면 마지막 시간이 될지도 모르니, 찾아가고 싶어요. 이기적일 수도
있겠지만.”
“피, 피네 님이요?”
“싫어?”
“아, 아니에요.”
“그래.”
“임무가 끝났으니까.”
“…그런가요.”
“네?”
시몬이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당시에는 뷔노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다이아와의 유착 관계를
찾아내려던 건, 그 남자가 캐서린을 죽였다는 확실한 증거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뭐라고요?”
“왜, 죽인 건데요?”
“…고작 그딴 이유로.”
그건 시저가 운영하는 술집에 관한 걸 얘기하는 걸까? 거기서 알코올 중독으로 죽은 사람들? 시몬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당시는 애도했었는데…….’
“그 남자는 살해당했어.”
“시몬, 옷이 얇은 거 같은데.”
“네?”
“날이 추워졌거든.”
‘이 정도 장치는 해둬야겠지.’
피아노의 건반이 묵직하게 내려앉으며, 장송곡이 울려 퍼졌다.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방문한
사람들의 수는 많았다.
“쉿, 저기 왔어요.”
“클로버를 잘 부탁합니다.”
4 대 조직 중 하나의 몰락이었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앞으로 다이아는 헌신적으로 클로버를 보살필 것을 약속하죠. 마치 동생과 같이.”
18. 불청객
그들의 수작이 눈에 훤히 들여다보였다. 조직에 분열을 일으켜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준비했던
물건을 들고 왔다. 꾹. 물건의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뷔노는 배신자야.
―무슨 뜻이죠?
―마더가 죽었다고요?
뷔노의 눈이 흔들렸다.
“하.”
방 안으로 돌아온 뷔노는 전화기가 울리는 걸 발견했다. 뷔노는 전화기를 거칠게 들어 올렸다.
“본론.”
“이유는?”
뚝.
“에이 썅, 뒈질 뻔했네.”
“어디, 어디?”
“왜 웃어?”
“빨리 안 말해?”
하이직이 꺽꺽 웃다가 대답했다.
“이 미친놈이!”
“어떻길래, 나도 좀 보자.”
“아씨… 봉합 자국 눈에 XX 띄게 남았네.”
힘이 빠진 피네는 뒤로 드러누웠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피네는 느껴지는 고통을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표현했다.
“피네.”
“보스……?”
“몸은 어때.”
“음, 그러니까. 수상쩍은 놈들이 들어왔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몬을 납치하러 온 것 같았어.
그놈들은 사정이라는 걸 봐주지 않더라고. 병원 안에서 총을 꺼내 쏘는, 그런 미친 짓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어떤 면에서?”
“클로버 놈들인가?”
“클로버?”
오메르타는 침묵의 계율. 명칭은 조직마다 달랐지만, 이 규율만은 모든 조직이 공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첫째 규칙은 그것이었다. 조직의 일을 발설하지 않는다.
“…아…면.”
“언니… 배후 알아내면…….”
“나 불러, 꼭.”
저 건너편 병실에는 시몬의 아버지, 그의 수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뷔노는 시가를 문 채 그쪽을 잠시
보았다.
“언제쯤 깨어나지?”
카렌 렌드버그. 검은색 명패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뷔노가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앉아있던,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장난은 그만 치시죠.”
“뭐어?”
카렌은 큰소리로 말하며 분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뷔노가 제 호통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카렌은 멋쩍게 입맛을 다시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들켰냐?”
“일은 잘 풀린 건가?”
“네, 그렇습니다.”
“카렌 님께 이런 일도 있었습니까?”
“저도 얼마 전에 느꼈습니다.”
“너 같은 경우는 가짜 과거 아니었냐?”
“확실한 편이 좋으니까.”
“서류는 잘 받아 가겠습니다.”
“실패하지 마세요. 당신이 실패하면 난 역대 최악의 인수 합병을 진행한 브로커로 소문날 겁니다.”
“참고해 두지.”
“끌리는 조건이네요.”
“전화?”
뷔노는 재빨리 전화를 받아들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상대를 알아챈 뷔노의 표정이 구겨졌다.
“실베스트리스.”
―추궁하실 때가 아닐 텐데.
“…….”
그 명성답게 J 는 블랙리버뱅크가 제시한 주가의 반을 깎아서 인수한 상태였다. 나라가 뒤집힐 문제에, 이
이상의 시간을 쏟을 수는 없었다. 금요일 종가로는 알 수 없었다. 조만간 주식 시장이 열릴 그때,
판가름이 날 것이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실베스트리스의 기분은 아주 좋았다. 인생에 있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좋은 흐름을 타는 구간이 있다는데,
그에게 있어서 그건 요즘인 것 같았다.
“실버 님.”
“온 모양이군요.”
“정했으니 불렀지.”
뷔노가 현명하지 못했다고 대놓고 내리꽂은 것이었다. 시저의 조직원들은 실베스트리스를 향해 살기를
뿜었다.
“재벌가의 사생아로 태어나서 아등바등 노력했나 봐. 아마 가문의 회사도 차지하고 싶었을 테고.”
“네 것?”
참으로 그답지 않았다. 평정심을 유지한 상태였다면, 정보의 경로보다 뷔노가 알고 있는 정보가
어디까지인지, 이 말을 하는 의중이 뭔지 고민해 대책을 세워내려 했을 것이다.
이미 실베스트리스가 아니면 회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나이트들은 손쉽게 회사를 장악했다.
하트의 도박장에서 다이아가 그동안 돈세탁 및 탈세를 해온 정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급하게 처리한 일이긴 했지만, 분명 괜찮으리라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뷔노가 은행을 언급한 후로
불안감에 실베스트리스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수?”
“그렇습니까.”
“언제부터…….”
“머스캣…….”
물론 위장일 수는 있다고 처음부터 생각했다. 하지만 뷔노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려준 게 머스캣
아니었던가. 마더의 죽음뿐만 아니라, 나중에 뷔노를 죽이려던 클로버에 위치를 넘긴 것도 머스캣이었다.
‘그게 거짓이라고?’
“아무것도 없는데.”
“…….”
어둡게 가라앉은 회색 눈은 평소와 다르게 약을 한 직후처럼 동공이 확장되어 있었다. 양옆으로 쫙 찢어진
입술은 웬일로, 가감 없이 웃고 있었다. 순간 훅 소름이 끼친 실베스트리스 발을 굴러 뒤로 피했다.
“내가 내 목숨까지 걸 것 같지는 않았던 건가. 아니면 동생을 아끼니까? 그것도 아니면 마더
때문이었나?”
실베스트리스는 다급하게 숨을 쉬며 뷔노의 눈을 피했다.
“하, 흐, 하하하!”
“나만 보지 그랬어.”
궐련으로 부족해진 산소량을 채우는 것 같기도 했고, 깊게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실상은 그저
짜증이 났을 뿐이었지만.
‘아니면…….’
“클로버에 도움을 청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네가 클로버 보스를 죽였을 때의 녹취록을 그쪽에
넘겼거든.”
“…….”
헤르게임이 자신의 모든 재력과 인력, 능력을 동원해서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할 가치가 있을까.
긴 다리가 사람들 사이를 거침없이 빠져나갔다. 그는 방을 나가며 사람들의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았다.
괜한 자존심이었다.
“아악!”
뷔노는 시가를 입에서 빼내어 바닥에 던지고, 빙긋 웃었다. 평소의 옅게 짓는 미소가 아니라, 예전에
마더가 지었던 것과 같은, 송곳니를 훤히 드러내는 미소였다.
뷔노는 탁자에 있는 꽃병을 발로 걷어찼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안에 있는 내용물이 바닥에
넘쳤다.
“…….”
“하하하하하.”
“대신 나를 섬겨.”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만일 나이트를 이용해서 이사들을 쫓아내지 않았다면. 클로버 보스를 죽이지 않았다면. 머스캣을
이용해서 시저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면. 마약을 판매하지 않았다면.
아랫것, 하찮은 것으로 세상 모두에게 인지되는 건 공포스러웠다. 그거에 비하면 강자 한 명에게 무릎을
꿇고 복종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쳤군.”
총으로 뷔노를 쏘고, 저 계약서를 제 손으로 찢어내면 그만이었다. 밖의 충실한 부하들이 뷔노의 죽음을
없었던 일처럼 말끔하게 치워줄 것이다.
언제나 사람이 아니라 물건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조모는 자신을 경멸했고 어머니는 제게 무관심했지만,
저건 달랐다.
자신의 출생과 감정과 과거 모두를 중요하지 않은, 아무렇지도 않은 걸로 취급하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눈빛.
‘그럼 뭘 말한 겁니까?’
‘네 친부.’
‘이젠 다…….’
정말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쁘게, 섬겨드리죠.”
“빨라서 좋네.”
만약 뷔노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저 남자는 상황을 역전시키는 데에 망설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누구보다 충직하고 유능하리라.
‘언니… 나한테 정보를 빼돌리라 할 뿐, 실베스트리스를 죽이라고 하지는 않네. 원한다면 거기까지도 할
수 있는데.’
머스캣은 자신이 신뢰를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뷔노는 그 점을 재빨리 부인하며 말했다.
‘안 되지. 그놈이 죽으면 어차피 다이아는 딴 놈 소유가 될 뿐이야. 확실히 뺏는 편이 좋지 않아? 게다가
…….’
‘난 실베스트리스를 죽이고 싶지는 않아. 그놈에게 나락을 뒹굴게 하고 싶을 뿐. 그리고 그때, 구원의
손길을 건네주는 거지.’
20. 회칠한 무덤
다행인 건 위치 추적기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시저는 계속된 추적으로 시몬의 위치가 끊임없이
변해 차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몬의 위치는 고정이 되었다.
“어디길래?”
“그?”
“인신매매한 적 없습니다.”
진짜 상류 사회는 막대한 부와 명예, 사회적 지위로는 모자랐다. 넘치는 교양과 수집품 역시 그 수준을
결정하는 부분이었다.
“별게 다 사냥이군.”
“경매는 품목을 나눠서 미리 진행하나 봅니다. 경매장은 물건을 나눠주는 행사에 불과하고요. 최고가
낙찰입니다.”
“최고가 낙찰?”
“블라인드인가?”
낮은 금액에서 시작해 판돈을 올리는 것보다 복잡하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실베스트리스는 붉은 벨벳
질감의 겉지와, 하얀 속지로 연결된 팸플릿을 꺼냈다.
‘성 노리개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뭐야.”
“…….”
“애인이니 뭐니, 포장은 좋지만 다 결국 필요가 있어서 쓰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애정도야 돈으로 환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시몬의 가치는 얼마입니까?”
“이게 좋겠어.”
“백지군요. 뭡니까?”
“…그렇죠.”
차 안에서 계속 운반된 이후로는 독실에 갇혀있었다 안에서 들리는 대화를 종합해 보면 오늘 밤 열리는
경매에 본인은 상품으로 팔리는 듯했다.
‘경매?’
시몬은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렸다.
‘싫어……!’
‘미친 게 어느 쪽인데!’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뭐?”
“튀자.”
“휴…….”
어차피 팔려나가면 이 짓도 소용이 없을 텐데. 시몬은 철창을 손톱으로 쭉 긁었다. 쇠가 끼기긱 긁히는
소리가 났으나, 흠집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입 안이 썼다.
“연기 아냐?”
관리인은 시몬을 측은지심이 섞인 경멸의 눈빛으로 보더니 복도로 나갔다. 그냥 경멸보다도 더욱 기분이
나쁜 시선이었다.
“…후우우.”
바깥에서는 상품을 소개하는 진행자의 말, 가격을 부르는 소리, 환호성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들렸다.
그러나 시몬의 차례는 꽤 늦게까지도 오지 않았다.
“어디 보자… 시저에 원한 있으신 분? 캐서린을 경멸하셨던 분? 딱 추천해 드리는, 화제의 그 남자!
시저 보스의 현 애인 시몬! 원한이 없으셔도 탐낼 만한 미모와 재미있는 뒷배경이 있습니다!”
무대 밑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눈길은 매서웠다. 모두
의자에 앉은 채, 시몬을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었다.
회장이 웅성거렸다. 시몬은 자신이 천만 달러에 팔렸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만 달러로 사갈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설마, 뷔노인가?’
‘실베스트리스?’
“이게…….”
가면을 쓴 건 신분을 숨기고 싶다는 의사의 표시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관중들은 실버를 알아보았다.
그럴 만하다는 듯 수긍하는 청중들과 대조적으로 시몬의 눈이 커졌다. 당연히 누군가 자기를 사 간다면
뷔노일 줄 알았다. 이 남자일 거라는 예상은 한 적이 없었다.
“직접 가져가죠.”
그 말에 경매를 진행하는 사람이 싱글벙글 웃으며 철창문을 열쇠로 땄다. 그러나 수갑은 풀어주지 않았다.
시몬은 실베스트리스를 따라 나왔다.
시몬은 실베스트리스가 뷔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을 샀다고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조용한 한마디에
실베스트리스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니, 그건…….”
“따라오시죠.”
시몬은 실베스트리스의 옆자리에 다소곳이 서게 되었다. 이 기묘한 상황에 시몬의 몸이 굳었다. 회장의
분위기 역시 둘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진행자의 경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여러분! 다음은 블루 차우차우 스핑크스 고양이의 차례였죠. 그러나 동물 보호 협회의 개입으로
인해 아쉽게도 고양이는 선보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에 야유가 회장에 퍼졌다. 진행자는 회장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다 말을 이었다.
“마더!”
가녀리고 우스꽝스러운 목소리였다. 배우들은 계속해서 극을 펼쳐나갔다. 마더는 울었고, 스페이드
보스를 유혹해서 죽였다. 그 뒤로도 극에서 시저는 미인계만을 펼쳤다. 시저는 세력을 넓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제 극에서 시저는 망할 때가 되었다.
“뭐, 뭐야?!”
순식간에 사람들이 책상과 의자 밑으로 숨었다. 피네는 이빨을 보이며 입이 찢어질 듯 웃었다.
“다 지옥행인 거지 뭐긴 뭐야!”
짝, 짝, 짝―
‘…뷔노?’
시몬은 경매 공연장에 서있는 인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뷔노가 맞았다.
“그럼! 우하하하!”
“그건 그러네.”
“뷔노…….”
시몬이 힘을 쭉 뺀 채 뷔노에게 몸을 기댔다. 뷔노는 목에 닿아오는 차가운 감촉의 손으로 시몬이 어찌나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뷔노는 시몬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시몬.”
“뷔노…….”
시몬은 뷔노의 품에 쏙 안겼다. 뷔노는 뿌리치지도 않고 마주 안아준 채 시몬의 옷자락을 정리해 주었다.
시몬은 마음속에서 뭉클하는 감정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정확한 정황은 모르겠지만, 실베스트리스도 뷔노를 따르고, 클로버도 정리가 되었다. 이제 뷔노는 누가
뭐래도 명실상부한 헤르게임의 지배자였다.
“제, 제가요?”
자신의 무얼 보고 뷔노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시몬은 눈을 깜박거렸다.
“클로버 스파이였지만.”
“…네?”
“어, 어, 언제부터…….”
“글쎄, 처음부터?”
시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러면 뷔노는 자신을 기억했던 것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스파이라는
걸 알았고, 그래도 받아줬다는 의미였다.
“…그, 가, 감사합니다.”
“시몬, 가지.”
“…어디로요?”
이제는 뷔노의 거친 운전에도 익숙해진 시몬은 차를 탈 때보다 긴장한 표정으로 문밖에 섰다.
“잘 이야기하고 와.”
“왜.”
“…뭐?”
뷔노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고백을 이딴 식으로?”
“괜찮아요. 뭔가를 강요할 생각도 없어요. 단지 아버지도 소중한 사람이고, 뷔노도 소중한 사람이니까.
소개드리면… 좋을 거 같아서요.”
“…….”
“죄송―”
“마음대로 해. 들어가지.”
“…뷔노?”
“들어가자고.”
병실에 도착한 시몬은 최대한 들뜬 것을 티내지 않으려 애쓰며,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저 왔어요.”
“…시몬?”
“왔구나. 아들.”
그는 시몬을 보자마자 양팔을 벌렸다. 시몬은 수술한 부위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그에게 포옹했다.
“뒤의 분은 누구시니?”
“아, 이분은… 수술비도 대주시고, 그리고 저도 구해주신 분이에요. 자세히 말씀은 못 드리지만 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거든요. 아, 아주 위험한 건 아니고요!”
빈약한 설명에 뷔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못 들은 사실에 아버지의 표정이 이상하게 바뀌었다.
“일어나지 마시죠.”
“아버지, 왜 그러세요?”
‘바로 알아본다고?’
그는 뷔노에게 몸을 앞으로 내밀며 손을 뻗었다. 순수한 호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뷔노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잘 지냈습니다.”
“…고생 많으셨군요.”
그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제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경영합니다.”
“아이고, 어려운 걸 하네요. 신기하지 않니, 시몬? 예전에 알던 사람이 이렇게 다시 만나고. 아니, 그냥
아는 건 아니고, 첫사랑이었나?”
“아버지…….”
뷔노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절도 있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시몬의 아버지가 뷔노를
붙잡았다.
“잠시만요!”
“…왜 그러십니까.”
“그러시군요.”
뷔노가 딱딱하게 말했다. 방독면을 써서 얼굴을 감추던 옛날과는 달랐다. 어리다고 봐줄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메이의 딸이 아닙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예전에 캐서린과 메이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죠. 둘은 매일 집에서 토론을 진행했어요.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 지적 수준으로는 따라갈 수 없었거든요.”
“…별말씀을.”
뷔노 역시 고개를 까닥 숙였다.
21. 붉은색 축제
아름다운 5 월(May), 꽃들이 피어날 때 내 마음속에는 사랑이 싹튼다네. 아름다운 5 월, 새들이 노래할
때 나는 그대에게 고백한다네. 그리움과 갈망을.
―슈만, 아름다운 5 월에
“뭘 생각하는지 알 거 같군.”
“곧 잊게 될 거야.”
“…그러지.”
“고맙군.”
“내일.”
“알아.”
“애도를 표합니다.”
“그렇긴 하죠.”
장례식에 걸맞은 예법이 아니었다. 뷔노는 얼굴을 구기며 손을 뺐다. 기분이 나쁜 것도 나쁜 거였지만,
꽤 놀라운 일이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마더가 죽기 약 한 달 전 일이었다.
“보스, 괜찮아?”
“보면 알잖아.”
클로버가 마더의 거처를 알아냈을 때의 일이었다. 뷔노와 마더가 같이 있던 그 집무실 안으로 클로버의
용병들이 들어왔다.
당연히 시저의 조직원들 역시 곧바로 집무실로 와 전투를 벌였다. 총이 난사하던 그 와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없다는 건 기적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는 너무나 큰 손실이 있었다. 클로버의 조직원 중 중 한 명이 마지막 남은 힘으로 집무실
안 화병을 뷔노에게 휘둘렀다는 것이다. 그걸 뷔노가 맞았더라면 큰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둔기는 뷔노를 감싼 마더가 대신 맞았다.
뷔노는 대마를 마더의 입에 물렸다. 평소처럼 불을 붙이고 나자 마더는 익숙하게 대마를 빨아들였다.
대마는 마더를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효과를 보였다. 몇 번의 호흡이 오가고, 마더는 찬찬히 눈을
굴려 뷔노를 보았다.
“딱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거짓말이구나.”
“농담이란다.”
“…….”
“그거면 된 겁니까?”
분명 바라는 게 많은 사람이었는데.
“…….”
“농담이란다.”
농담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마더는 절망하고 있었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에서 아무 판단도 못 하는
걸림돌이 되었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뷔노는 맹렬히 다른 조직들을 쫓았다. 그러나 끝내 마더에게 조직을 통합하는 걸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
이건 도박이었다. 언젠가는 마더의 죽음이 알려질 것이다. 그러면 이걸 어떻게 더 유용하게 활용할까?
뷔노는 머스캣에게 정보를 흘릴 것을 명했다.
이건 치명적인 정보였다. 마더가 죽었다는 게 알려지면 조직은 금세 축소될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금주법이 폐지된 순간 밟아야 하는 수순이기도 했다.
“오셨군요.”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망자의 영혼을 불러오는 의식이었다. 머지않아, 자매들은
슬쩍슬쩍 고개를 들었다.
뷔노는 유골함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천천히, 장엄한 음악 속에서 걸어갔다.
“마더께서 이런 분위기를 즐기실까?”
피네가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라면 죽은 사람이 좋아할 걸 해줘야 했다. 그
말에 원뿔 피리를 든 남자가 악기에 깊이 숨을 불어 넣었다.
우우웅―
뱃고동 소리가 울리자마자 사람들은 손뼉을 쳤다. 축제 같은 활기찬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메이!”
“춤춰요, 뷔노.”
뷔노는 시몬과 맞닿은 손을 잡은 채 뒤로 빙그르르 돌았다. 균형을 잃은 시몬이 휘청거리며 소리를 냈다.
“어, 뷔, 뷔노!”
“메이!”
“메이!”
그리고 한동안 침묵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메이에게 인사를 전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위에
한둘씩 발걸음을 옮기자, 낙엽이 흩날리다 떨어졌다. 뷔노는 낙엽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붉네.”
“메이!”
이제는 진짜 끝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름을 부르면 망자는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뷔노는 마더에게서 받았던 시계에 왼쪽 손을 얹었다. 병이 진행되며 오른쪽, 왼쪽의 구분도 희미하던
마더는 무턱대고 떠넘기듯 그 시계를 뷔노에게 주었었다.
마더가 채워줬던 그 순간을 놓지 않기 위해서 뷔노는 마더가 오른손에 시계를 채워준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22. 마지막 장
마더는 끊임없이 기억을 잃어갔고, 자신을 구축해 왔던 경험을 잃어갔다. 때로는 자매들이 누군지 물었고
사람을 착각했으며 그보다 더 심한 일도 했다.
노인에서 중년, 청년에서 소년. 그 행색은 갈수록 과거로 돌아가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더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억이 사라지는 걸 인식하기 위해서였다.
일기 속 내용은 오락가락 마더의 세계처럼 여러 시공간을 오가는 듯했고 뷔노는 마더가 그 일기장을
자신의 머리에 던진 순간까지도 그것을 엿보지는 않았다.
계승식 당일, 마더의 정신은 여느 때보다 또렷하고 맑아 보였다. 그 자리에서 마더는 말했다. 내 남은
꿈의 뒷장은 너희가 이루라는 명령이었다. 그 말을 하며 일기장을 뷔노에게 건넸다.
꿈의 뒷장.
꿈의 뒷장이라고 하면 그것이겠구나.
이게 마지막 뜨거움이다.
이게 뭐지? 뷔노는 종이를 주워들었다. 일기의 마지막 장에 풀이 말라붙은 흔적이 보였다. 그동안 일기의
마지막 장에 이 엽서를 붙여두었던 걸까. 무슨 엽서길래? 뷔노는 엽서를 읽어보았다.
맨 위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메이라는 이름과 빛바랜 종이의 노란색에서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나 예전의 이야기일까?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마더의 어머니께서는…….”
“동생…….”
뷔노는 일기장과 노트를 서랍장 안에 다시 넣었다. 이제는 잃어버림과 잃어버린 이후의 삶을 받아들일
때가 됐다.
‘마약은 일단 접었고.’
동생들, 그리고 재수없어도 머리는 좋은 실베스트리스와 함께라면 합법적인 사업으로 수익을 낼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잘 뵙고 왔지?”
“말 돌리지 말고요.”
“…….”
담배 회사가 언론사에 로비해 기사를 막아온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담배 회사가 돈이 떨어진 건지,
아니면 양심 있는 몇 언론인들이 드디어 보도하기 시작한 건지 담배의 위험성이 점차 알려지고 있었다.
애연가인 뷔노에게는 슬픈 소식이었다.
“뭐라고요?”
“바닐…….”
쪽.
“바, 읍, 하…….”
“네, 맞아요.”
“…들어갈까요?”
“적극적으로 변했네?”
“뷔노가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뷔노가 눈을 휘며 웃었다.
사랑?
‘사랑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