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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정장의 미학

잭파이

목차

1. 마더의 딸들

2. 클로버의 수

3. 지향점이 다른 밤

4. 속이는 자와 속는 자

5. 그 안전한 마약상

6. 차 안에서

7. 모자와 커튼콜

8. 줄리엣은 없다

9. PLEASURE GARDEN

10. 의구심

11. 약속

12. 총을 든 남자

13. 자매들의 마더

14. 그와 그의 아들

15. 씁쓸하고 달콤한

16. 푸른색 장미

17. 검은색 축제

18. 불청객

19.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20. 회칠한 무덤

21. 붉은색 축제

22. 마지막 장
1. 마더의 딸들

아무도 마더를 모욕해서는 안 된다. 술집에서 주고받는 안줏거리로도 마더를 입에 올려서는 안 됐다.

농담이라 할지언정 종이에 끄적여서는 안 되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도 금기였다. 물에 흘려보내는


종잇조각 하나, 바람을 타고 흐르는 말소리 한마디라도 그들은 반드시 찾아내 복수했다.

모두가 아는 오메르타(침묵의 계율)가 세워진 건 헤르게임의 별칭이 ‘숨겨진 도시’였을 때의 일이다.

숨겨진 도시. 어느 주에도 속해 있지 않았던 헤르게임은, 그 특수성 탓에 탈세를 노리던 암흑가의 성지가
되었다.

캐지 않은 금광 같은 곳이라는 소문이 돌자 수백 개의 조직이 영역을 다퉜다. 그러나 혼란의 시대는


빠르게 지고 곧 네 조직이 헤르게임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스페이드, 다이아, 하트, 클로버.

헤르게임을 지배하게 된 네 조직은 마음껏 기량을 뽐냈다. 보호세를 명목으로 각 구역에서 세금을 걷는
것은 물론, 살롱을 차렸고, 불법 고리대금업과 인신매매로 돈을 끌어모았다. 이 모든 것에 폭력이
결부되지 않는 부분은 없었다.

헤르게임에 변화가 찾아온 건, 일 년 중 가장 달콤한 연인들의 날이었다.

2 월 14 일, 밸런타인데이.

스페이드 조직 앞으로 익명의 선물이 도착했다. 분홍색 리본으로 묶인 선물 상자는 유독 크기가 컸다.
리본을 풀어보니 안에 들어있는 건 세 가지였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 카드 한 장, 그리고 시체 한 구.

균등한 크기로 곱게 조각난 시체였다. 하지만 신원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상냥한 범인이 얼굴만은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입가에는 초콜릿과 피가 묻어 검고 붉은 자국이 눈에 띄었다.

오랜 시간 구역을 군림해 오던 스페이드의 보스는 한순간에 허무하게 죽어있었다.

내 오랜 악몽 속 친구, 그를 오늘 떠나보냈습니다. 다시없을 영광을 주어 감사합니다. 밸런타인데이 잘


보내시길.

―마더로부터.

유려한 필기체는 찢긴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에 적혀있었다.

마더.

그는 시저 조직의 보스라 자칭했다. 혈연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한 네 사람을 딸이라 부르며 간부로 내세운
그는 스페이드에 선전포고를 던졌다.

이 일은 사람들의 안줏거리로도 딱 좋은 소재였다. 스페이드와 시저를 두고 한동안 모든 살롱에서


도박판이 벌어졌다. 물론 스페이드가 지는 쪽에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모두의 예측을 부수고 시저는 스페이드를 장악했다. 스페이드가 항복을 선언하고, 시저에게
흡수된 이후 딸들은 도박판을 벌인 살롱들을 친히 찾아갔다. 한 손에 아름다운 장총을 낀 상태로.

그중 유독 모욕적으로 굴었던 사람들은 더욱 철저히 응징했다고 한다. 총으로 가루를 만들었다, 발끝부터
밟아 죽였다, 시체의 머리를 잘라 그 머리로 축구를 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 후 아무도 감히 시저를 거역하려 하지 않았다.

마더가 보스의 자리를 첫째 딸인 뷔노에게 넘긴 지금까지는.

“아악! 아는 건 다… 쿨럭, 말했습니다! 제발…….”

의자에 묶여있는 남자는 피를 토하며 말했다.

“아는 거? 제대로 된 정보를 말하라고, 새끼야.”

마더의 둘째 딸, 피네가 펜치를 든 손을 한 번 놀렸다. 삭발한 그의 머리 왼편에는 시저 조직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악! 모, 몰라, 모릅니다……. 보스는 본 적도 없고… 진짜, 진짜로…….”

“우리 정보원을 죽이라는 명령은 누가 내렸는데?”

“패, 팩스… 팩스로만 왔습니다……. 이미 얘기해…….”

“이 새끼가 진짜 뒈지고 싶나―”

“피네.”

뒤에 서있던 마더의 첫째 딸, 뷔노가 흥분한 피네를 저지했다.

차분한 음색이 더한 고문을 막아줬음에도, 남자의 얼굴은 하얘지다 못해 파래졌다. 뷔노는 긴 손으로 제
아랫입술을 꾹 누르며 말했다.

“팩스라.”

피네에게 필사적으로 반박하던 것과 대조되게 남자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눈이 조심스럽게 시저


조직의 새 보스를 살폈다.

옆으로 넘긴 짧고 검은 머리카락, 깊은 회색 눈. 날렵한 코와 군살 하나 없는 근육질 몸에 언뜻 드러나는


흉터들.

그는 단정한 검은 정장을 클래식 연주자들처럼 양말까지 검은색으로 맞추어 입은 채 천천히 신문을 읽고


있었다. 앞의 풍경과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간부 하나 소통에 참여하지 않은, 팩스로만 명령을 받았단 말이지.”

남자는 그 말에 어버버 입을 벌린 채 경련하기만 했다.

“정말로… 아는 게…….”

이를 악물며 금니를 드러낸 피네는 남자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거짓말을 할 때 잠시 나오는 미세한 떨림,
변화 등이 전혀 없었다.
“더 아는 게 없다.”

“예, 예……! 아는 건 전부 이미 말―”

“그렇겠지.”

“…예?”

뷔노는 옆으로 손을 내밀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조직원이 시가의 끝을 커터로 잘라 불을 붙인 후


뷔노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스읍. 뷔노는 두꺼운 바닐라 향 시가를 들이마셨다. 입 안에서만 맴돌게 피우는 독한 연기를, 갈증이 난
것처럼 폐 끝까지 벌컥벌컥 쑤셔 넣었다.

핏빛 입술을 살짝 열자 회색 연기가 위로 피어올랐다.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이 방에서 유일하게 열기가


존재하는 부분이었다.

“피네.”

“내가 할 수 있는데.”

그 말에 피네는 까끌까끌한 제 머리를 불만스럽게 문지르며 비켰다. 뷔노는 남자의 앞에 우뚝 섰다.

“난 받은 건 배로 돌려주는 걸 좋아해서.”

뷔노는 순식간에 단검을 빼 들어 그의 배를 찔렀다. 순식간에 축 늘어져 있던 남자가 싱싱한 물고기처럼


팔딱거렸다.

“끄으으윽!”

날을 몇 번 비틀며 상처를 헤집자, 혀를 깨물었는지 입 안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뷔노가 옆의 조직원에게 물었다.

“우리 정보원은 어디에 찔렸지?”

“옆구리에 한 번, 명치에 한 번 찔렸습니다.”

“그래?”

옆구리에 네 번, 명치에 두 번, 마지막으로 심장에 한 번. 깔끔하게 들어간 칼날에 더 신음도 못 흘리고


숨이 끊어졌다. 죽은 것을 확인한 조직원이 들고 있던 도끼를 내리쳤다. 굵은 목뼈가 한 번에 잘렸다.

똑똑, 누가 방문을 두들겼다. 문을 지키고 있던 조직원이 나직이 말했다.

“마더는(Mother).”

“언제나 옳다(Knows best).”

암호를 맞춘 목소리에, 조직원이 문을 열었다. 뷔노는 칼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진 뒤, 부하가 건네준


손수건에 피를 닦았다.

“언니.”
뷔노를 찾아온 것은 연구원 복장을 한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매부리코에 걸쳐진 안경은 도수가 어찌나 높은지 눈이 두 배는 작아 보이게 했다. 머리는 오랫동안 관리를
못 한 건지, 잔뜩 헝클어져 길이조차 알 수 없었다.

마더의 셋째 딸, 하이직이었다. 뷔노는 바닥을 피로 칠하는 머리를 발로 굴리며 하이직에게 물었다.

“클로버에 대해 뭔가 알아냈나?”

하이직은 안경을 고쳐 쓰며 답했다.

“하아, 아니. 클로버 간부들이 작정하고 숨은 모양이야.”

“이걸 숨었다고 보지는 않지. 멀쩡히 명령을 내리고 있는데.”

뷔노는 널브러져 있는 시체 조각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하이직의 두꺼운 안경이 그 광경을 비췄다.
말단의 조직원이라도 패밀리의 일원이다. 시저는 어떤 빚이든 철저하게 갚기로 유명했다.

“줄기를 쫓다 보면 그 뿌리에 닿기 마련인데, 답지 않게 왜 헤매고 있지?”

말단 직원부터 차근차근 명령 체계를 따라가다 보면 간부의 위치를 찾는 것은 시간문제지 않냐는


질문이었다.

하이직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음, 그게 아무래도 간부 놈들이 몸을 사리고 있는 모양이야. 어지간한 작전은 그 밑의 조직원들만


관여하고 있어.”

“XX, 겁쟁이 새끼들.”

피네가 걸쭉한 욕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이아 쪽에서도 수작 부리는 거 같아. 이 기회에 클로버를 삼키고 싶겠지.”

하이직의 말에 뷔노의 눈썹이 움직였다.

“다이아?”

피네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금니를 빛냈다.

“그쪽 대가리가 야망이 크시긴 하지.”

어지간히 비꼬는 말투가 아니었다. 하이직은 애써 말을 이었다.

“총 개조는 거의 돼가는데.”

“쏠 놈들을 못 찾으면 의미가 있나.”

뷔노는 시가를 더욱 깊게 빨아들인 후, 서류 뭉치를 들어 책상 위에 툭툭 두드리며 정리했다.

그때 뷔노의 손끝에 붉은색 봉투 하나가 닿았다. 고급스러운 인장이 박혀있는 봉투는 꽃무늬가 꾹 눌린
자국처럼 찍혀있었다. 뷔노는 그걸 구기듯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언니, 클로버도 클로버지만 이번에 더 신경 써야 할 게 생겼어.”


하이직은 뷔노에게 오늘 자 신문을 건넸다.

마더는 내려가고 딸이 올라가다, 불안한 시저?

금주법… 드디어 위헌 판결받나?

금주법. 그동안 밀주로 돈을 벌던 시저가 앞으로 수익을 낼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헤드라인 두 개를 읽은 뷔노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검지로 눌렀다. 기사 제목들은 새로운 변화가 이어질 걸
시사하고 있었다.

2. 클로버의 수

클로버와 시저의 앙숙 관계는 꽤 길게 이어져 왔었지만, 갈등이 깊어진 건 근래였다. 시저 때문에


밀주업을 하지 못하게 된 게 그 시작이었고, 클로버가 자기들끼리 은밀히 시저에 대한 뒷담을 주고받은 게
발화점이었다.

남편도 없는데 딸이 넷인 걸 보면 마더가 실은 창녀였다는 둥 낙태를 여러 번 했다는 둥 흔히들 할 것


같은 농담에 불과했지만, 그건 큰 실수였다.

‘아무도 마더를 모욕해서는 안 된다.’ 시저의 방침에 여전히 예외는 없었기에.

“이게 뭐야, 다 사라지고 남은 게 이것뿐이라고?”

간만에 간부들을 소집한 클로버의 보스는 한탄했다. 늙은 보스는 예전의 위용을 되찾고 싶어 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고량주를 퍼마시면서 부하들한테 지시했다.

“로미오, 로미오, 그놈의 로미오!”

로미오. 그것은 시저가 클로버를 무너뜨린 전략 중 하나였다.

“너넨 낯선 놈들이 조직에 드나들 때 대체 뭘 했어!”

“워, 워낙 새로 들어오는 놈들이 많아서 분간이…….”

“변명하지 마!”

깡, 술병 하나가 날아갔다.

“그쪽이 로미오면, 끅, 너넨 프린스 챠밍이라도 만들었어야지!”

“누, 구를 목표로 말입니까?”

“목표? 그거야 당연히 제일 윗대가리지, 멍청한 자식!”

“시저 조직 보스 뷔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왜, 못하겠냐?”

“그, 그게…….”
술병 하나가 더 날아갔다.

“할 수 있습니다!”

로미오에 대적할 프린스 챠밍을 만들어라. 그 말 한마디에 온 조직이 움직였다. 덕분에 클로버 조직에
잡혀 온 미청년 시몬은 덜덜 떨고 있었다.

“너.”

말단 중 말단에 불과한 클로버 조직원은 커다란 덩치를 위압적으로 부풀리며 시몬을 노려봤다. 험악한
감자 같은 얼굴에 겁먹은 시몬이 바로 대답했다.

“네, 네!”

“너 빚 청산하고 싶지?”

“네?”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긴 분홍빛 속눈썹이 팔락였다. 속눈썹 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동요로
흔들리고 있었다.

흉터 가득한 얼굴을 씰룩이며 노려보던 것은 언제고, 클로버 조직원은 퍽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친근한
척 다가왔다.

하지만 이 변덕스러운 자의 친근한 태도가 언제까지 갈지 몰라, 시몬은 그저 침을 꿀꺽 삼켰다.

조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일을 하나 주겠다고. 성공하면 빚을 없애주고.”

“아니, 그전에 했던 말이 뭔지 못 알아들어서… 로미오라는 게…….”

“뭐?”

짜증 난 듯한 말투에 겁먹은 시몬이 토끼처럼 움츠러들었다.

“귀찮으시면 서, 설명 안 해주셔도 되고요.”

시몬의 예쁜 얼굴을 잠시 보던 감자가 싸구려 궐련 끝을 질겅거리다 말했다.

“별거 아냐. 시저 조직이 썼던 더러운 수를 말하는 거지.”

“더러운… 수요?”

“미남계. 로미오들이 우리 조직원의 부인이란 부인, 애인이란 애인은 다 꼬셨지. 하다못해 청소부까지도.
그것들이 정보를 죄다 불어서 클로버가 지금 이 꼴이 났잖아.”

전통적으로 여자의 차지였던 미인계의 자리를 남자로 채운 것, 그게 아주 큰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주위에 화약이나 술 냄새만 풍기는 아저씨들만 있던 여자들이었기에 더 잘 통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깔끔히 정돈된 머리와 목 뒤에서 나는 좋은 향에 바로 넘어가 버렸다.

미인계라고 하면 여자들만 경계했지 남자들은 경계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조직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중 클로버는 이미 활활 타고 있었다.
‘내가 로미오 담당이라는 건…….’

시몬은 침을 꿀꺽 삼켰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눈앞까지 와 있었다.

“그러면, 설마 제가… 미인계를.”

‘로미오들한테?’

“그래. 시저 조직 보스를 네가 유혹하는 거다.”

“보스였구나… 가 아니라 시저 조직 보스요?”

시몬은 입을 벌렸다. 고개를 재빨리 저은 시몬이 말했다.

“저, 저는. 못할 거예요. 아니 못해요.”

시몬은 벌벌 떨었다. 그는 사람 머리로 축구를 한다는 부츠 굽의 전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쩌냐, 네 얼굴이 취향이라는데. 우리 조직에 너 같은 얼굴이 둘이 없거든.”

“아무리 그래도 저는, 말주변도 없고.”

“말을 잘하는 애보다 말을 고분고분 듣는 애가 취향이란다.”

“저, 저는 머리카락이 이상하고 튀어서…….”

“붉은 계열 장발이 취향이래. 너는 분홍색이니 간신히 커트라인이구만.”

“그, 그…….”

겁먹은 주제에 계속 반항하려는 낌새가 보이자 조직원이 사람 좋은 얼굴을 버리고 바로 흰자를 드러냈다.

“아니면 지금 돈 갚든가.”

멍하니 굳은 시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조직원이 말했다.

“아버지도 아프신데 오래오래 모셔야지. 자세한 건 문서로 확인해라?”

시몬은 방의 벽에 등을 기댄 채, 팔로 다리를 감싸 안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을…….’

생각만 해도 막막해서 눈물이 나왔다. 시몬은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은 채 훌쩍거렸다. 그는 사람을


속여야 한다는 죄악감, 공포와 불안감 등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신이시여, 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고…….”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자신이 이런 일을 제대로 해낼 리 없었다. 분명 접근한 순간 들켜서


죽을 것이다.

거기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죽으면,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

병원비가 끊기는 순간 입원 치료를 못 받게 될 것이다. 지금도 생사를 오가는 중인데 절대로 치료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방법은 하나였다. 시몬은 양손을 꼭 붙잡았다.

“죄를 저지르는 것을 용서해 주시고, 부디 저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

그 말을 뱉자마자 머릿속에 묘한 인영이 그려졌다. 그 인영은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역시나 검은


총을 꺼내 들어 쏘았다.

‘…죽어라.’

“헉.”

시몬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몸을 감쌌다. 뷔노와 마주치기도 전이었지만 시몬은 이미 총알로


이곳저곳을 꿰뚫리는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아니, 꼭 총이 아니라 주먹이라고 해도 한 방 맞으면 죽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시몬은 도리질을 했다.

‘잊자.’

이런 생각은 아무 도움도 되질 않았다. 시몬은 클로버의 조직원에게서 받은 봉투를 뒤적거렸다. 그


안에는 뷔노와 관련된 정보가 적힌 문서와 더불어, 인화된 사진이 두 장 있었다.

뷔노의 평소 인상착의가 드러나는 큰 사진 하나와 얼굴이 확대된 작은 사진 하나였다. 밑에는 부연 설명이


적혀있었다.

[항상 양말까지 검은색으로 맞춘 정장을 입음. 자매들과 다르게 코트와 베스트까지도 입는다.]

[190 정도 되어 보이는 큰 키. 깔끔하게 넘긴 검은색 머리카락. 회색 눈.]

시몬은 흑백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카페에서 찍은 건가?’

뷔노는 의자에 앉은 채 한 손에는 시가를 들고 있었다. 흘겨보는 듯한 얼굴 사진은 어쩐지 시몬을


노려보는 듯해 섬뜩했다.

“다른 사진은 없나 보네…….”

시몬은 종이를 꺼내서 살펴보았다. 몸에 힘이 쭉 빠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읽어야만 했다.

[잔인함, 냉정함. 총을 잘 다룸. 간부인 동생들과는 사이가 좋아 보인다.]

당연히 거짓말일 거라 생각한 소문들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대단한 골초로 총을 쏘는 순간까지 시가를 입에서 놓지 않음.]

[와인 애호가. 그러나 하루에 한 잔 이상 마시지 않음.]

의외의 정보에 의아한 동시에 시몬은 씁쓸해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몬은 애써
생각을 지우기 위해 밑의 글씨로 눈을 돌렸다.

[사람 머리로 축구를 하는 것이 취미.]

‘이런 건 안 알려줘도 되는데…….’

시몬은 방금 본 내용 역시 잊으려 애썼다. 그나마 다음 내용은 시몬에게 유용한 정보였다.

[잠자리를 자주 가지지만, 웬만하면 한 상대와는 한두 번만 관계를 맺는다.]

[늘 비슷한 외모의 상대를 만난다. 그 이유가 죽은 첫사랑을 못 잊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다.]

‘첫사랑? 그것도 죽은?’

이렇게 잔인하고 이상한 사람이, 첫사랑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니 이상하게 느껴졌다. 시몬의 눈이 다음
페이지로 향했다.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가학적인 성격.]

시몬은 얼굴을 손에 묻었다. 속으로 울분과 애환과 눈물을 쏟아낸 뒤, 지끈거리는 눈가를 꾹꾹 눌렀다.
올망졸망한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시몬이 부엌으로 향했다. 컵을 잡자 떨리는 손 탓에 컵 안의 물까지 떨렸다.


한 번에 꿀꺽꿀꺽 넘긴 시몬은 넋이 나간 눈으로 말했다.

“아버지…….”

[11 시까지 준비하고 장소로 나올 것]

클로버의 지령을 받은 시몬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긴 머리카락을 모아 반묶음머리를 했다.

“후……. 좋아.”

옷은 조직원이 제공한 걸 입어야 했다. 제일 먼저 속옷을 발견한 시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뭐야…….”

어떻게 입는지도 헷갈리는 모양의 속옷이었다. 속옷을 든 채 살펴보던 시몬이 신음을 흘렸다.

“으으…….”

머리를 쥐어 싸매던 시몬은 결국 속옷을 챙겨 입었다.

가슴과 쇄골이 훤히 보이는 하얀 셔츠로 입었다. 파여있는 데다 짧기까지 한 상의는 움직일 때 언뜻언뜻
복근을 드러냈다.

입고 보니 어쩐지 외설스러워 시몬은 얼굴을 붉혔다. 바지는 허리 부분은 조여 얇은 허리선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에 더해 시몬은 입술과 볼에 연한 분홍빛 화장품을 바르고, 손목에는 시트러스 향이 나는
향수를 뿌렸다.

곁눈질로 아버지나 주위 사람들이 하던 걸 흉내 냈지만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시몬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가늘고 아름다운 발목이 잘 드러나는 구두를 신고 목적지로 향했다. 무장하고 전장에 나가는 군인의
마음과 똑같았다.

‘할 수 있어…….’

‘…시저 구역에 와본 건 처음이네.’

유리창이 깨진 건물들, 어둑어둑하고 총소리가 가득한 거리를 상상했다. 그동안 보아온 것이 그런


풍경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시저 구역은 북적거리지 않고 조용했으며, 새 건물들이 가득했고, 꾸준히 가꾸어 온 건지


조경까지 잘 되어있었다.

‘시저 조직이 들어서기까지의 싸움을 생각하면 폐허가 됐을 줄 알았는데.’

원래 조직이란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고 뒷수습은 싫어하는 법이었다.

시몬은 생소한 거리를 걸으며, 조직이 고지했던 장소로 향했다. 속어로 눈먼 돼지라고 부르던 금주법
시대의 술집이 그 장소였다.

그는 생경한 마음으로 술집의 문을 열었다. 대다수 술집보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금주법이 시행되고 있는 와중에, 이렇게 당당하게 운영하는 술집은 없었다.

호텔의 로비에 운영되고 있는 이 술집은 평소에는 감히 꿈도 못 꿨을 고급 바였다. 바 안쪽은 여러


장식으로 휘황찬란했으며 종업원들의 수도 많았다.

시몬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여기에 그 딸들이 자주 출현한다고 했지.’

뷔노 혼자를 마주하기도 떨렸는데 그 사이코 동생들까지 있다니. 속으로 한숨을 수십 번 내쉰 시몬이 문을


힘겹게 열었다.

“예약하셨습니까?”

“네.”

“성함이?”

“시나몬이요.”

조직이 본명과 비슷한 가명을 쓸 걸 권유했기에 지은 이름이었다. 막상 입 밖으로 꺼내자 시몬은 조금


멋쩍어졌다. 종업원은 상석으로 보이는 자리에 시몬을 안내해 주었다. 메뉴판을 집어 든 시몬은 와인
목록을 훑어보았다.

“…이렇게 주세요.”

조직이 알려준 정보를 토대로 시몬은 와인들을 골라내었다. 모두 뷔노가 좋아한다던 와인들이었다.

“탁월한 안목이십니다. 주문하신 발렌티나 109 년 산은 지금 딱 완숙한 풍미가 나올 때죠. 프로스팅


아이스 와인도 인기가 많아 한정 수량으로 나온 거고요. JP 브랜드 건 독특한 호박 향이 나서 요즘
사람들이 즐겨 마십니다.”
“그렇군요.”

시몬은 종업원의 말을 들으면서도 입구와 창밖을 계속 흘깃거렸다.

수신호가 왔다.

딸들이 도착했을 경우 창밖의 클로버 조직원 한 명이 창문으로 시몬에게 수신호를 보내게 되어있었다.
와인 잔을 잡은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시몬은 심호흡을 했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시몬은 급하게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물론 여기서 다듬다는 드러낸다는 의미와
동일했다.

끼이이익―!

귀를 울리는 굉음이 수차례 겹쳐 들려왔다. 자동차들이 동시에 멈추는 소리였다. 여덟 대의 차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나왔다. 그중 유독 튀는 세 여자가 앞장을 서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마더의 딸들이구나. 한 명은 안 왔고.’

시몬은 흘깃흘깃 행여나 눈이 마주칠까 조심스럽게 밖을 보았다.

“그때 내가 뒤에서 날 잡은 새끼의 팔을 꺾고, 앞의 놈을 발로 차줬지.”

“그래서?”

“바로 기절하길래 얌전히 옮겨드렸어, 지옥으로.”

“친절해라.”

삭발한 머리에 문신이 눈에 띄는 여자가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대답하는 건 짧은 더벅머리, 매부리코가


불거진 두꺼운 안경을 낀 여자였다.

‘저 사람이 피네, 그리고 저 사람이 하이직…….’

인상착의만으로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미 술에 취한 것처럼 움직이던 하이직이 피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 뒤에 위압감이 넘치는 사람이 조용히 바에 걸어 들어왔다.

큰 키, 검고 짧은 머리카락과 잿빛으로 가라앉은 눈.

시몬의 심장이 요동쳤다.

‘저 사람이 뷔노?’

셋은 종업원은 보지도 않은 채 가장 상석으로 향했다. 시몬의 옆 테이블이었다.

“오셨습니까. 늘 드시던 거로 드릴까요?”

“물어 뭐 해, 얼른 가져와.”

하이직이 테이블에 양쪽 발을 올렸다. 종업원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바로 옆 테이블인 시몬이 종업원을


중간에 잡았다.

“저, 저기…….”
“예, 손님?”

“이, 이 술들… 저, 저쪽 테이블에 보내주시겠어요?”

“예?”

“얼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시몬은 빠르게 카드를 들이밀었다. 종업원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준비라도 한 건지, 화려한 한 상이 순식간에 차려졌다. 술병만 벌써 열두 병이 세워진 데다


안주까지 꽉꽉 테이블에 들어섰다.

뷔노가 다리를 꼰 채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와인병을 그새 다 살핀 건지, 구두 끝으로 와인병 세 개를


툭툭 건드렸다.

그 굽을 보자 시몬의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사람 머리로 축구를 한다던 뷔노의 이야기가 떠올라서였다.

“이건 시킨 적 없는데.”

덜 나온 것도 아니고 와인이 추가로 나온 것뿐인데 화를 내는 목소리에 가까웠다. 모든 딸들이 종업원을


쳐다봤다. 주위에 서있는 정장 차림의 사람들 역시 종업원을 노려보듯 했다.

“아, 이건. 저쪽 신사분께서 보내는 겁니다.”

“저쪽 신사분?”

끝을 올리는 목소리가 비꼬는 게 분명했다. 뷔노의 질문에 공손한 종업원의 두 손은 시몬을 가리켰다.
시몬은 죽음의 바통 터치가 이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몬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 테이블로 향했다. 직접 마주하니 분위기가 더더욱 기괴했다.

“뭐 하는 새끼냐?”

피네가 물었다. 주위의 모든 시선이 시몬에게로 옮겨졌다. 시몬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빨리 대답 안 해?!”

의자 하나가 나동그라졌다. 피네의 거친 목소리에 시몬이 완전히 뷔노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답했다. 사실


피네 쪽을 보기가 무서웠다.

“실례했습니다. 마음에 드는 분이 계셔서, 술을 보내는 걸로 대신 전하고 싶었습니다.”

“뭐?”

헛웃음이었다. 피네가 일어나서 한 대 때리려는 걸 하이직이 막았다.

“그게 누군데?”

“이분…이십니다.”

“…….”
뷔노를 가리키자마자 사람들의 표정이 다 굳었다.

“당신이 저한테 반할 때까지, 술을 사 드릴 겁니다. 그게 불편하시다면 지금 마음을 받아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말을 안 더듬은 게 용하다 싶을 정도였다.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릴 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싸해진 분위기에 시몬이 굳어버렸다.

탁, 탁, 탁.

뷔노의 손가락이 책상에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시몬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술집 안 시계의 초침이
떨어지는 소리와 엇박자로 손가락 소리가 울렸다. 뷔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는 알아?”

조곤조곤한 말투에, 생각보다도 근사한 목소리였다. 낮게 귀를 울리는 목소리에 시몬이 잠시 당황하다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술을 사 드릴 가치가 있는 분이라는 건 알, 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정적이 한순간에 깨졌다.

“푸훕.”

“으끅, 끅. 미친놈 하나 나올 때 됐다 싶었다.”

웃음소리가 딸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시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뷔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몬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왔다. 둘의 사이가 약 1 미터 정도 떨어져 있을 때였다.

“누가 시켰지?”

“예?”

탕―! 총성이 울렸다.

시몬은 왼쪽으로 눈이 돌아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매끄러운 하얀색 벽에 못을 빼낸 후처럼 검은색


구멍이 뚫려있었다.

구멍 바깥쪽으로 일그러지고 튀어나온 벽지, 그 사이에 끼어있는 총알. 시몬은 총구가 조금만 더
오른쪽을 향했으면 어땠을까를 상상했다.

“아, 아무도…….”

그러니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뷔노는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을 깔짝거리면서 고개를


까닥였다.

“그래? 아무도 안 시켰단 말이지. 미행이 붙은 지가 3 개월째인데.”

“미, 미행이요?”

생각해 보니 미행하지 않고서야 그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리 없다. 짚이는 데가 있던 시몬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뷔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카페건 공원이건 교도소건 어디를 가든 따라붙어서 무시할 수가 있어야지.”

“…전, 정말 몰랐어요.”
시몬은 넋이 나간 채 고개를 저었다. 시몬의 시선이 뷔노의 구두 앞코에 닿았다. 구두의 방향이 시몬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뷔노가 손을 가다듬고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시몬이 입을 열었다.

“지, 지금 저를 쏘시면 후회할 거예요.”

뷔노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쏘고 후회한 사람이 없는데. 안 쏴서 후회한 경우라면 모를까.”

“저, 저한테 한 번만 기회를…….”

탕, 시몬의 귓가에 바람이 스쳤다. 이번에는 더 근접했다.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그가 걸고 있던 귀걸이에 총알이 정확히 맞아 박살 났다. 뷔노는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본론.”

그 말에 시몬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시몬은 떨리는 마음으로 눈을 살며시 올려 뷔노를 보았다. 그러자
뷔노의 서늘한 회색 눈과 시몬의 따뜻한 호박색 눈이 마주쳤다.

“제…….”

지금 당장 뷔노의 마음을 돌릴 무언가를 떠올려야 했다. 시몬은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억지로 쉬며


머리를 굴렸다. 뷔노가 달칵, 총을 매만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큰일이다.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애초에 클로버의 지령에 따르지 말걸. 시몬은 후회했다.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기절할 것 같은 현기증을 느끼며 시몬이 입을 뗐다.

‘너 같은 얼굴이 취향이라더라.’

“제 얼굴이 취향이시잖아요?”

“뭐?”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자마자 시몬은 헉, 놀라 숨을 들이켰다.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와 서늘해진


분위기였다. 주위 사람들마저 긴장한 채 이곳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끅.”

너무 놀란 탓에 딸꾹질까지 나오고 있었다. 시몬이 말을 멈추고 딸꾹질만 하자 뷔노가 고갯짓을 했다.

“그… 끅, 제, 제…….”

주위를 둘러봐도 도움의 손길 따위는 없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은 뷔노의 영역이었으니까.
눈에 눈물마저 고였다.

‘붉은 계열 머리카락을 좋아한다던데.’

“제 머리카락도! 끅, 취향이시고…….”

시몬이 눈을 질끈 감았다.

“우, 우선 저랑 하, 하고 나서, 끅, 제 머리로 축구하셔도… 흑, 취, 취향이시니까……! 소, 손해는


아닐걸요……!”

시몬의 목소리도 몸도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아, 난 죽었어…….’

그는 총알이 어디로 날아올지 몰라 그저 눈을 감고 몸을 계속 움찔, 움찔 떨었다.

탕, 총소리가 났지만, 맞지 않았다. 총알은 그저 어깨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탕, 다시 한번 총소리가


나며 이번에는 허벅지가 따끔했다.

놀리듯이 스치며 피해 가는 총알이 여러 번 시몬의 몸을 두드릴 때마다 시몬은 움찔움찔 떨면서 두려움에
눈을 뜨지 못하고 표정으로만 말했다.

“아, 다 떨어졌군.”

총알이 떨어졌다는 말에도 시몬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감은 눈 때문에 어둠 속에서 뷔노의 목소리만
들렸다.

“피네.”

“보스?”

뷔노는 피네에게 빈 총을 건네고, 시몬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제야 시몬은 눈을 살짝 떴다가 뷔노의
눈이 마주치고 몸을 움찔, 떨었다. 그 모습에 뷔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애틋하기보다는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이다. 입술은 피를 머금은 것처럼 빨갰고, 스산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뷔노의 손이 시몬의 상체를 건드리더니, 서서히 타고 올라갔다. 시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천천히


움직이던 손은 가슴 사이 파인 부분으로 향했다. 검지로 셔츠를 끌어 내릴락 말락 하는 손길에 시몬이
눈을 또르륵 굴렸다.

‘이, 이렇게 공개적인 곳에서?’

“눈알 귀엽게 잘 굴리네.”

뷔노가 비소를 지었다.

“네 눈은 내 얼굴에 고정해야지.”

그 한마디에 시몬의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는 바로 고개를 들고 뷔노의 얼굴만 바라봤다. 뷔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시몬의 앞머리에 손을 넣었다.

손가락 틈새로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뷔노는 머리를 쓰다듬다가 돌연 그의 머리를 잡아챘다.
그러고선 시몬의 귀에 속삭였다.

“…머리는 잘 못 굴리고.”

그 말에 시몬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뷔노의 이가 귓바퀴를 가볍게 물고 말했다.

“공개적인 장소는 아무래도 취향이 아니라서. 위로 갈까.”

“보스, 뭐라고?”
‘응?’

뷔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와중에 시몬의 손목을 붙잡고 갔는데, 강한 악력에
시몬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뭐, 뭐지?’

피네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소리 질렀다.

“보스, 진짜 저런 수상한 새끼를 따먹게?”

뷔노는 피네를 흘깃 보자, 피네가 입을 다물었다. 위에 무슨 공간이 있단 말인가? 뷔노는 직원을


지나치면서 말했다.

“2 층 비워.”

뒤에 있던 다른 조직원이 직원에게 카드를 던져줬다. 시몬의 심장이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3. 지향점이 다른 밤

위층에는 뷔노가 사람을 물렸기에 뷔노와 시몬 둘 뿐이었다. 그 전에 피네가 몇 번 짖었기 때문에 시몬은
경직되어 있었다.

“내 이름은 알지?”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면 안 됐는데!’

금세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널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시, 시나몬이라고 불러주세요.”

“시나몬?”

뷔노가 피식, 웃었다. 그 의중을 알 수 없어 시몬이 눈을 또르륵 굴렸다.

“시나몬이라… 뱅쇼 만들기 딱이군.”

뱅쇼는 와인(Vino)에 시나몬을 넣어 끓여 만드는 음료였다. 그 의미를 파악한 시몬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거의 노리고 만든 이름이란 생각이 들 정도야. 신기하지 않아?”

“네, 네?”

절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본명이 시몬이니 시나몬으로 가명을 정했을 뿐이었다.

‘가명은 본명이랑 비슷한 쪽이 나아. 괜히 반응 못 해서 의심 사지 말고.’


그는 지시 사항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은 유혹하는 입장이었다. 뷔노는 크게 동요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당황하다니.

“아니야?”

뷔노는 술잔에 숟가락을 빠르게 돌리며 시몬을 응시했다.

“그…….”

시몬이 귀가 붉어진 것도 모른 채 고개를 들며 말했다.

“뱅쇼 만들면… 안 되나요?”

뷔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안 될 건 없지. 얼굴도, 머리카락도, 몸도 다 내 취향이군. 짜 맞춘 것처럼.”

뷔노가 손끝으로 시몬의 턱을 들어 올렸다.

‘하느님…….’

시몬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래위로 노골적으로 훑는 눈빛에 어쩐지 몸 안이 홧홧해졌다. 특히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나쁘지 않네.”

“…감사합니다.”

어째 이런 말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뷔노는 빨개진 시몬의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뷔노는 비치된 소파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시몬은 감히 옆에 앉을 생각은 못 하고 바로 앞에 섰다.

뷔노의 시선이 시몬의 몸을 감싼 선정적인 옷을 훑었다. 순결해 보이는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었다.

선정적인 걸 넘어서 배덕적이기까지 한 모습이었지만, 거추장스러운 천은 뷔노에게 있어 남자의 몸을


가리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뷔노가 시몬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자 어색하게 앞으로 갔다. 뷔노의 손이 시몬의 셔츠에 달린 몇
개 없는 단추를 만지작거리더니 우드득, 단추를 아예 뜯어내 버렸다.

순식간에 단추 세 개가 아예 실밥과 같이 뜯어졌고, 셔츠 안으로 뷔노의 손이 들어갔다.

“흣……!”

차가운 손이 닿자 시몬이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뷔노는 직감적으로 그가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내리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튕기면 재미없는데.”

뷔노가 손을 빼냈다. 이대로 자신을 두고 가버릴 것 같았다. 급한 마음에 시몬이 양손으로 뷔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 크다…….’
손가락은 길면서도 두께가 있었다. 흉터도 몇 개 자리 잡혀있었고 굳은살로도 가득했다.

“시, 싫은 게 아니라…….”

“아니라?”

뷔노가 팔짱 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마,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하는 관계는 싫어요.”

내뱉자마자 시몬은 후회했다. 뷔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거 봐라, 하는 느낌의 눈빛이었다.

“뭐?”

“그, 그게 아니라… 저한테, 조금이라도 호감이 있으셨으면 해서…….”

시몬은 손을 가슴에 모으며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이었지만, 애처롭게 떨리는 속눈썹이 그의 마음을
대변했다.

“아, 그래?”

뷔노가 가차 없이 손을 움직였고 셔츠가 어깨 밑으로 흘러내렸다. 찢어진 옷 사이로 탐스러운 남자의 몸이


드러났다. 시몬은 애써 가슴을 가렸지만, 상반신은 완전한 나체가 되었다.

적당히 크고 아름다운 가슴에는 손톱만 한 핑크빛 유두가 자리 잡았고, 허리는 군살 없이 잘록하게 들어가
있었다.

뷔노의 손은 시몬의 약한 주춤거림 따위에는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하얀 밀가루 반죽을 닮은 가슴과 배는


간질이듯 만지기만 해도 연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배를 쓸어내리던 손은 허벅지에 잠시 멈춰 섰다. 허벅지를 주무르는 손길에 시몬이 부르르 떨었다.

“아, 흣… 자, 자, 자, 잠시만요―!”

뷔노가 눈을 찌푸리며 손을 멈췄다. 지금이라도 떠날 기세였다.

시몬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개졌다. 상체를 다 드러내놓고 가지 말아달라 잡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대로 보낸다면 클로버가 문제가 아니라, 뷔노를 오라 가라 했다고 그의 동생들에게 맞아


죽을지도 몰랐다. 시몬은 입술을 달싹였다.

“싫으면 빨리 말해. 강간하는 취미는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 말하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뷔노가 말하니 그 말이 강간이 아니라 다른 범죄는 취미로
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아뇨, 그… 제, 제가 직접 벗을……!”

뷔노는 발로 시몬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건방지네.”

“윽!”
엉덩방아를 찧은 상태에서 시몬이 뷔노를 응시했다. 뷔노의 손이 시몬의 귀를 강하게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귀걸이가 잘 어울리던데, 귓불만 뚫긴 아깝지 않아? 시몬.”

‘귀, 귀……?’

귀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아까 총알이 스쳤던 것이 떠올랐다. 덕분에 뷔노가 자신의 가명이 아니라 본명을
불렀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시몬은 귀를 뚫는다는 것이 총으로 바람구멍을 만든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뷔노는 시몬의 얼굴이
새파래지자, 웃으며 낮게 명령했다.

“벗어.”

그는 바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셔츠가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졌다.

잘그락.

시몬은 떨리는 손으로 벨트를 풀어 바닥에 다소곳하게 올려놓았다. 바지가 완전히 몸에서 흘러내리자,
뷔노가 흥미에 찬 감탄사를 흘렸다.

“흠?”

시몬이 항변을 하려다 말았다. 얼굴이 석류처럼 새빨개졌다.

“제대로 작정하고 왔네?”

“…….”

새하얀 허벅지와 대비되는 검은 끈이 눈에 띄었다. 속옷에서 시작해 세로로 이어진 끈 밑에는, 고리


모양으로 허벅지를 감싸는 또다른 끈이 있었다.

흔히 가터벨트라고 부르는 속옷이었다. 뷔노는 시몬이 입고 있는 가터벨트의 끈을 검지로 만지작거렸다.


몇 번 잡았다, 놓았다 하며 끈을 갖고 놀던 뷔노는 그게 팽팽해질 때까지 늘어뜨리다가 놓았다.

“읏!”

별로 아픈 건 아니었지만 수치심이 컸다. 다시 빨개진 시몬의 얼굴을 본 뷔노가 웃었다.

“반응이 좋네. 네 취향이야?”

“아, 아니…….”

뷔노는 딱히 시몬의 변명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아까 마음이 없는 관계는, 뭐 그런 소리 하지 않았었나?”

시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것도 작정하고 있고.”

뷔노가 손가락으로 시몬의 물건을 튕겼다. 물건이 서다 못해 수직으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볼록하게
부풀어 오른 선단이 뷔노의 손짓에 출렁거리며 흔들렸다.
“윽!”

흥분이 아니라 통증 때문에 나는 신음 소리였다. 하지만 뷔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좋은가 봐? 바로 몸을 흔드는 걸 보니.”

“그, 그건―”

뷔노는 시몬의 엉덩이를 움켜쥐는 것으로 그의 반항을 꺼뜨렸다. 손에 딱 들어오는 모양에 피부에
달라붙는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뷔노는 잠시 그 감촉을 감상하다가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날이 선 나이프는 시몬의 드로즈를


향했다.

“자, 자, 잠시만요!”

“가만히.”

당황하는 시몬에게 한마디로 어른 뷔노는 나이프를 허벅지에 들이밀었다. 상대가 반항할 걸 뻔히 알고도
자비 없이 나이프를 드로즈와 허벅지 사이에 쑤셔 넣었다.

“히윽…….”

차가운 나이프의 금속성이 허벅지에 느껴지자 시몬은 온몸이 굳었다. 더군다나 날이 그의 선단에 가까이
있어 소름이 돋았다.

드로즈와 허벅지 사이를 가른 나이프는 순식간에 팬티를 찢어 벗겨버렸다. 어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시몬에게 뷔노가 말했다.

“가터벨트는 계속 하고 있게 해주려고. 좋아하잖아.”

귀찮으니 그냥 팬티를 찢어서 가터벨트를 남기겠다는 거였다. 시몬의 얼굴이 도로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뒤로 돌아.”

시몬이 엉거주춤 몸을 돌렸다. 그 마른 뒤태를 본 뷔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천사의 나체를


엿보는 명화 속 장면이 그대로 나타난 것 같았다.

거친 손이 엉덩이골을 지나 회음부를 건드렸다. 느닷없이 소중한 곳이 만져지자 시몬은 저도 모르게


뷔노를 막으려 했지만, 뷔노의 비어있는 손이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시몬은 바로 숨도 쉬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입구를 톡톡 건드리는 손길에 그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강제로 비집고 들어올까 봐 걱정됐던 손가락은 입구를 배회하며 빙글빙글 돌더니 다행히 회음부로
넘어갔다. 시몬이 안심하기 바쁘게, 붓처럼 섬세하게 만지는 손길에 예민한 회음부가 부어오르는 것처럼
달아올랐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시몬은 튀어나오려는 목소리를 억지로 눌렀다. 하지만 감은 눈에서 새어 나오는
눈물은 막을 수 없었다.

‘왜, 왜 이러지……?’

태연하게 회음부를 건드리던 손길이 마침내 그의 옥구슬에 닿았다. 유난히 민감한 아래쪽을 반복적으로
쓸어 그는 몸을 움찔, 움찔 떨었다.

자극적이던 손길은 예고 없이 그의 입구를 강하게 눌렀다.

“흐윽……!”

진입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강렬한 자극에 다리가 절로 오므려졌다.

“이렇게 반응이 좋은 걸 보면 타고났군.”

“그, 그런 게 아니……!”

“아니라고?”

뷔노는 손으로 회음부를 왕복하며 시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목 부분을 다른 손으로 쓸어 올렸다. 만진
부근 털이 쭈뼛 섰다.

“아!”

어느새 올라온 양손이 시몬의 가슴을 더듬거려 마치 뷔노가 뒤에서 시몬을 껴안는 형상이 되었다. 뷔노는
작은 연분홍빛 젖꼭지를 지분거리다 강하게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목 뒷부분을 깨물었다.

“하, 읏…….”

시몬을 문 뷔노는 입술로 한 번 더 빨아들여 자국을 남겼다.

쪽. 가볍게 빨아들이는 입술이 능숙하게 몸을 훑고 지나갔다. 목, 어깨, 날개 뼈 부분에 도달했을 무렵


뷔노의 입술이 멈췄다.

“…….”

‘뭐, 뭐지, 왜… 윽……!’

멈췄던 뷔노는 갑자기 한 부분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어딘가, 고민하던 시몬은 자신의 흉터가 있는
자리란 걸 깨달았다. 등에는 예전 총알을 맞았던 흉터가 두 군데 있었다.

‘왜 내 흉터를…….’

취향 이상해. 빨개진 얼굴로 시몬이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내리니 꼿꼿하게 선 자신의 성기가 보였다.
그는 당황하며 손으로 다시 그곳을 가렸다.

“잘 즐기다가 왜 이 예쁜 걸 다시 가려.”

“즈, 즐기지 않았…….”

뷔노가 시몬의 손을 치우자 빨갛게 익은 선단이 바로 꿀물을 토했다. 계속 그런 상태였는지 그의


허벅지까지 젖어있었다.

“질질 쌌군.”

“이, 이건…….”

시몬은 변명거리를 찾으며 뒷걸음질을 치다 허벅지에 무언가 걸려 뒤를 돌았다. 엉겁결에 테이블이 있는


곳까지 밀려와 있었다. 뷔노는 시몬의 양 손목을 각각 쥔 채 말했다.
“다리 벌려.”

“윽…….”

시몬은 떼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들어 올리며 테이블에 앉았다. 뷔노가 다리 사이에 버티고 서서 그는


다리를 벌리며 들어 올려야 했다. 덕분에 시몬의 다리가 바닥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채 떠있었다.

바들바들 떠는 다리의 선은 마치 섬세한 유화처럼 고왔다. 군살이 없어 돋보이는 허벅지의 갈라진 근육을
구경하기 위해 뷔노는 말없이 그가 떠는 모습을 지켜봤다.

“더.”

“흐, 흐윽…….”

벌릴 수 있을 만큼 벌리던 시몬의 양발을 뷔노가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의 다리가 M 자로 벌려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게 된 시몬은 당황하다가 성기가 움찔, 움찔 고개를 흔들었다.

“보채지 말고.”

“…….”

시몬은 질펀하게 젖은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는 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본 뷔노가
나른하게 웃었다.

“얼마나 잘 싸나 볼까.”

그는 팬티를 찢을 때 썼던 나이프를 2 미터 정도 멀리 있는 바닥에 던져서 꽂았다. 대리석 바닥에 칼이


그대로 꽂힌 걸 보고 시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기까지 싸.”

“네, 네?”

바지 위로 뷔노가 골반 쪽을 뭉근하게 주물렀다. 허벅지와 치골 사이를 문지르자 시몬이 신음을 흘렸다.

“그 정도는 해야 내가 다음에 볼 때까지 널 놔둘 가치가 있겠지?”

뷔노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그 무표정이 진심이라는 걸 여실히 드러냈다. 시몬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옳지.”

뷔노가 웃으면서 시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은 금세 아래쪽에 있는 중심으로 향했다. 손안에 가득 찬


성기는 크기도 굵기도 훌륭했다. 뷔노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위는 청순한데…….”

시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뷔노는 느릿하게 물건을 엄지로 문질렀다. 뷔노는 손을 천천히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애가 탄 시몬이 달뜬 숨을 내뱉었다.

“후…….”

손은 부드럽기보다는 굳은살로 가득해 거칠었다. 그게 또 다른 자극이 된다는 게 시몬 스스로 한심스러울


정도였다.

“흐으… 읏.”

부끄러움에 시몬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그 말에 부러 신음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얼마 안 가


참지 못하고 다시 흐느꼈다.

“아니지.”

뷔노는 손가락으로 시몬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나를 봐야지.”

뷔노의 손은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이며 시몬의 성기를 쓸었다. 올망졸망한 동그란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으흑, 끅…….”

‘기, 기분이, 이, 상해…….’

뷔노는 특히 귀두의 튀어나온 부분을 쓸 때는 손에 힘을 줘, 마치 진짜 성교를 나누는 기분이 들게 했다.


그럴 때마다 자극이 너무 강해 시몬의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흐, 읏…….”

애처로운 음성은 사람을 동정하게 하지만, 뷔노에게는 가학심을 자극할 뿐이었다. 물이 살짝 흘러 속옷과
끝부분이 닿는 부분이 축축하게 젖었다.

“아직 흘려도 된다고 안 했는데.”

뷔노는 끝부분을 만지작거리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시몬의 다리가 파르르 경련하면서 꿀물이 질질 흘렀다.
자극이 너무 강해 공포마저 쾌감으로 치환됐다.

최소한 다리를 오므려서 비비기라도 하고 싶었으나, 뷔노가 보는 앞에서는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난리일까.”

뷔노가 시몬의 성기를 세게 움켜쥐었다.

“…모, 못 참겠어요.”

“벌써?”

뷔노의 손이 바로 멈췄다.

“얼굴이랑 달리 밝히는 편인가 보네.”

이번 발언은 별로 시몬을 괴롭히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속마음이 흘러나온


것뿐이었으나 시몬은 꽤 충격을 받았다.

“흑, 아, 흑, 아니, 아닌데…….”

“아니라고?”
여유를 주려는 건지 괴롭히려는 건지 뷔노의 손이 느릿해졌다. 자극이 줄자 시몬의 몸이 저절로 애달았다.

“아…….”

방울방울 아롱진 액이 바닥에 떨어졌다. 손은 갈수록 느려지기만 했다. 이윽고 움직임이 멈췄다. 물건을
감싸기만 하고 가만히 있자 시몬이 뷔노의 눈을 봤다.

하지만 뷔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다리를 떨던 시몬이 슬쩍 골반을 들었다.


자기가 움직일 요량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뷔노가 허벅지를 발로 찍어 눌렀다.

“누가 움직여도 된다고 했지?”

“죄, 죄송… 하읏.”

시몬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잠시나마 갈등했으나 지금도 충분히 수치스러웠다. 도저히 앞에서
할 자신은 없었다. 뷔노는 시몬의 핏줄이 잔뜩 불거진 성기를 보았다.

“다행히 아직 참을 만한가 보네.”

“아, 아뇨……!”

“말할 수 있는 걸 보니 참을 만하군.”

“아, 흑……!”

‘죽으라는 소리인가.’

시몬의 입장은 그러했지만, 뷔노는 정말로 이 정도의 상태는 여유로운 거라 생각했다. 끝까지 몰아치면
수치심이고 뭐고 완전히 날아간 상태가 되는 법이었다.

시몬이 손을 움찔거리더니 제 허벅지를 잡았다.

“손 떼.”

그러자 바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손을 바로 뗀 시몬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손가락 틈새로 엿봤다.

“읏, 흑, 저, 으으…….”

“왜?”

“가, 가도 될까요…….”

“안 돼.”

뷔노는 손을 더 감질나게 놀렸다.

“아, 아읏, 제, 제발…….”

시몬이 뷔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앙탈 부려도 안 돼.”

손가락이 움찔거리더니 뷔노의 팔로 향했다. 시몬이 자신을 만지면 발로 걷어찰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머뭇거리던 손은 끝까지 향하지는 않았다. 대신 시몬은 뷔노의 옷깃을 슬쩍 잡았다.
“…부탁, 흣, 드려요.”

그 말에 잠시 멈칫한 뷔노가 시몬 쪽으로 몸을 숙였다.

“헉!”

손이 갑자기 무지막지한 속도로 움직였다. 원하던 욕망이 충족돼서 기쁜 동시에 갈 수 없다는 절망이
시몬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 와중에 뷔노의 손짓은 더 빨라졌다. 시몬이 계속 신음을 토해냈다.

“흐윽, 흑, 흑… 윽, 끄윽.”

시몬이 애걸복걸 빌었다.

“아, 제발, 빨, 리… 흑, 모, 모, 못 참아요.”

시몬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순진무구한 눈동자는 한 가지 열망을 담아 뷔노의 눈을 향했다.

뷔노는 그 눈을 잠시 들여다보다 손을 빠르게 움직이는 동시에 흔들기까지 했다. 시몬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땀에 젖은 손가락이 손바닥 안에서 미끄러졌다.

“아! 흑, 이건 정말, 더는, 끅, 못 버티겠, 제발…….”

“네 안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 말에 몸이 확 굳었다. 뷔노는 바로 옆에 있는 창을 보았다. 너 같은 건 금세라도 내던질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 시선에, 시몬이 양어깨를 움츠렸다.

담장 위의 험프티 덤프티, 담장에서 떨어졌네, 신하 중 누구도, 말들조차도, 깨진 험프티 덤프티를 못


붙였네.

계속해서 물건을 흔들면서, 아무 표정 없이 뷔노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몸은 달아올랐는데 잘못하면


으깨진 계란 신세가 된다. 시몬은 안간힘을 써서 사정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액이 조금씩 새고 있었다.

“끄윽, 끅…….”

시몬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살려, 끅, 흑… 윽, 주, 세요.”

“죽인다고 한 적 없는데.”

“끅, 흑…….”

“안 죽인다고 한 적도 없지만.”

흠흠. 뷔노는 아까의 곡조를 콧노래로 이어갔다.

“으흑, 흑, 끄, 흡, 제, 제발……!”

눈물범벅이 됐는데도 애처롭고 예쁜 얼굴이었다. 잠시 그걸 보던 뷔노가 느릿하게 물었다.

“싸고 싶어?”
격한 고갯짓이 이어졌다.

“싸게 해달라고 빌어봐.”

“제, 제발, 가, 가게…….”

“그런 고상한 말 말고,”

“흡, 제… 제발, 읏, 싸, 싸게 해, 해, 주세… 흐으응……!”

뷔노는 시몬의 눈을 보면서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성기를 쓰다듬는 손길이 세 번 이어졌을 때 뷔노는 크게 선심을 썼다.

“싸.”

허락을 받고 나자 거칠 게 없었다. 싸라는 글자가 떨어지자마자 시몬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러나


시몬은 사정하지 못했다.

바로 갈 줄 알았던 시몬이 버티고 있자 여유가 있는데 풀어줬나 싶어 뷔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키…….”

시몬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입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언어의 형태로 와 닿지는 않았다.

“제대로 말해.”

뷔노가 시몬의 입가에 귀를 댔다. 뜨거운 숨이 귓가에 닿아왔다.

“입, 흑, 맞춘, 상태로, 가고 싶어서.”

시몬이 젖은 눈으로 뷔노를 올려다보았다. 뷔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어쩔까.”

얼굴에 피가 몰려서인가, 시몬의 입술이 유난히 새빨갰다. 뷔노의 엄지손가락이 시몬의 입술을 천천히
쓸었다.

“하…….”

조급한 마음에 시몬의 입에서 살짝 낮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엄지를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입 안쪽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안을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

“우욱…….”

“가만히 있어.”

혀 중간을 엄지손가락이 꾹 눌렀다. 그 상태로 뷔노는 치아를 검사라도 하듯 입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거기까지는 버틸 만했다. 뷔노는 그 후 혀 밑으로 엄지를 넣어 혀를 들어 올렸다. 시몬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으읍.”

그 상태로 혀 밑 살을 엄지로 헤집다 눌렀다. 몇 번 누르나 싶더니 입 안쪽 볼을 손가락으로 한 번 훑고,


목젖까지 확인하고서야 뷔노는 손가락을 빼주었다.

“켈록, 켈록!”

시몬이 한참을 콜록거리며 침을 뱉어냈다.

“하…….”

고개를 들어서 뷔노를 보는 시몬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눈이 새빨개진 걸 보고 뷔노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핥았다.

‘이것도 나쁘지 않네.’

굳이 손가락으로 입 안을 뒤적거린 건 독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뿐이었다. 물론 시몬에게 설명해 줘야 할


이유는 없다.

“침도 질질 흘리고.”

뷔노는 시몬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흐른 침을 핥아냈다. 그 후 시몬의 아랫입술을 쪽 빨아들였다. 입 안은


건드리지 않은 채 애를 태우는 것 같은 동작이 계속됐다.

허벅지 위에 앉은 뷔노는 입을 맞대고 시몬을 만지던 손을 더욱 격하게 움직였다.

“흐으, 흣, 윽, 하아…….”

신음을 흘리자 뷔노가 시몬의 입술을 완전히 삼켜버렸다. 숨이 막혀오고 정신은 차릴 수가 없었다. 혀가
밀듯이 들어오는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시몬은 어쩔 수 없이 그냥 눈을 감은 채 받아들였다.

입 안쪽과 아랫배가 간질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뜨거웠다.

‘원래 키스가 이렇게 좋은 건가?’

아니면 지금 기분이 좋아서 다 좋게 느껴지는 건지. 입 안에서 움직이는 혀에 더 올라갈 곳도 없다


생각했던 흥분이 고조되었다.

피부에 거칠게 닿는 손길이 아플 정도였지만 시몬은 멈추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우, 웁!”

허벅지에 경련이 오는 것처럼 떨리면서 선단에서 꿀물이 터져나갔다.

“하아, 하아, 읏……!”

완벽하게 절정에 닿자 한 번 더 짜내듯 뷔노가 중심에서 바깥으로 한 번 쓸었다. 덕분에 사정 후 예민해진


선단은 다시 한번 억지로 꿀물을 계속 토해냈다.

시몬이 항변이라도 하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다시 한번 뷔노에게 입술을 잡아먹혀 그저 신음밖에 흘리지


못했다. 마침내 그저 묽은 액을 질질 쌀 때까지.
“흐, 하아, 하아…….”

시몬이 눈이 풀린 채로 거친 호흡을 반복했다. 의식이 몽롱할 정도였다. 사위가 분간이 안 되면서


막연하게 쾌감에 절은 상태로 뷔노에게 몸을 기댔다.

뷔노는 부드러운 분홍빛 머리를 쓰다듬더니 뒤를 보며 말했다.

“목적지까지 갔는지 볼까.”

눈을 몇 번 깜박거린 시몬의 눈앞에 대리석 바닥이 보였다. 온통 하얀색이라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뷔노는 몸을 일으켜 나이프를 확인했다. 나이프는 하얀 액체에 젖어있었다.

“뭐, 명중이라고 치지.”

시몬은 정액이 묻은 뷔노의 손을 보고 급하게 말했다.

“제, 제가 닦아드릴…….”

“됐어.”

쪽, 뷔노가 시몬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시몬의 눈이 키스했을 때보다 커졌다.

시몬이 입을 오므렸다 열었다를 반복했다. 뷔노가 검지로 시몬의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

“이건 뭐지?”

분수 쇼를 하고 난 뒤에 이성을 상실한 것인지 당돌해진 시몬이 말했다.

“할 거면 입술에…….”

“아까 해줬잖아.”

“한 번 더, 해주세요.”

뷔노가 자신의 얼굴을 시몬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진짜로 해주는 건가?’

예상치 못했다. 시몬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뷔노는 시몬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부드러운 손길에
시몬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딱―

“아!”

이마를 내려치는 통증에 시몬이 눈을 찡그렸다. 눈앞에는 검지를 날리고 히죽 웃고 있는 뷔노가 있었다.

‘따, 딱밤?’

“상을 두 번이나 달라고 해?”

“으으…….”

어찌나 힘이 센지 이마가 얼얼했다. 이마를 만지는 시몬의 손에 뷔노가 깍지를 꼈다.


“문지르지 마, 키스 마크 남긴 거니까.”

“이게 무슨…….”

확실히 붉은 자국이 남긴 했다. 때마침 방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곱게 주먹으로 치는 게 아니라


발로 쾅쾅 차는 소리 같았다.

“보스, 이쯤이면 됐잖아!”

밖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뷔노는 재킷을 챙겨 입었다.

“내 동생이 질투가 많아서.”

“가, 가시는 거예요?”

끙, 시몬이 앓는 소리를 냈다. 뷔노가 손을 휘적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뷔노는 탁자 위에 놓인 포스트잇에 무언가를 적었다. 펜은 도중에 멈추지 않고 쓱쓱 움직였다. 뷔노는


메모지를 던졌고 시몬은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들었으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주, 주시는 건가?’

딱히 설명은 해주지 않은 채 뷔노가 문을 열고 나갔다.

쾅, 닫힌 문을 본 시몬이 멍하니 있었다.

“하아…….”

뭐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포인지 흥분인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멈추질 않았다.

“보스, 미쳤어? 왜 둘만 있었냐고, 위험하게.”

피네가 뷔노에게 엉겨 붙으면서 말했다.

“그래, 알지. 근데 나는 누가 보는 건 싫어서.”

게다가 누가 보고 있었으면 그렇게 좋은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것 같고. 아까의 장면을 상기하며 뷔노가
입맛을 다셨다.

“그게 중요해?! 둘만 있을 때 그 자식이 칼 꺼내지는 않았어?”

“아무 짓도 못 하던데.”

뷔노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하이직이 나초를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말했다.

“그으래? 아무래도 덜 유혹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정보를 빼낸 다음 나중에 쏘거나 독살할 예정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걸 알고도 둘만 남아?!”

“…너무 내 취향이라.”
뷔노가 어깨를 으쓱했다.

여자의 본능인걸. 피네는 삭발한 거친 외모와 달리 뷔노의 등을 주먹으로 가볍게 팡팡 두드렸다.

“성욕 해소도 적당히 하라고!”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쩌겠어.”

뷔노는 피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이렇게 바로 나타날 줄도 몰랐지.”

하이직은 나초를 다 먹고 가루가 남은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흘러내리는 안경을 손바닥으로 밀어올리며


말했다.

“머리는 염색이려나? 분홍색이라니.”

“천연모였어.”

뷔노가 중얼거렸다.

“부드럽더라.”

토끼털처럼. 뷔노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그걸 또 언제 알아보셨대, 바로 죽이기나 하지.”

여전히 기분이 상한 피네가 핀잔을 던지자 뷔노가 웃으면서 말했다.

“주어진 선물을 마다해야 하나?”

마더 조직 현 보스 뷔노.

연애 경험 무, 섹스 경험 다수.

그리고 죽은 첫사랑 없음.

4. 속이는 자와 속는 자

어느새 시간이 지나 해가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매 걸음마다 붉은 햇빛이 너울거리며 따라왔다.


시몬은 한탄하듯 말했다.

“예쁘네.”

몸에는 진이 다 빠졌고 긴장하고 있던지라 이곳저곳이 욱신거렸다. 아까의 잔상들이 떠올랐지만 계속


집중하기엔 머리가 너무 멍했다.

그는 클로버가 준비해 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술집 안에 울리던 총소리를 들은 클로버 조직원들이, 시몬이 스파이라는 게 발각됐으리라 지레짐작하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집에… 어떻게 돌아가지?’

시몬은 애써 차를 타고 왔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창밖으로 흘러가던 풍경들을 떠올리려 했다. 그러나


시저 구역의 잘 정비된 길과 건물들은 오히려 그 풍경이 그 풍경 같아 보이게 했다.

이대로 더 움직이면 꼼짝없이 길을 헤맬 것 같았다. 시몬은 발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이


새벽에도 사람 한 명이 지나가고 있었다.

“저, 저기…….”

시몬이 길을 물으려던 찰나에 쌩하니 지나가 버렸다. 안 그래도 소심한 시몬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디 구석진 곳으로 가자.’

대로변의 한복판에 있으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데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시몬은 사람도 없는 새벽에
이런 걱정을 했다.

어두운 골목 쪽에 돌벽을 발견한 시몬은 그쪽으로 향했다. 돌벽에 등을 기대어 앉으니 몸에 닿아오는
냉기가 느껴졌다. 시몬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택시를 탈 돈도 없었으니 집에 돌아갈 방도는 없었다.

‘이대로 날이 완전히 밝아 경찰서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때 붉은 공중전화 부스가 시몬의 눈에 띄었다. 시몬은 서둘러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 안은 그나마


찬바람이 좀 덜했다. 주머니를 뒤져서 있는 동전을 다 세어보니 45 센트가 있었다.

‘최소한 50 센트는 있어야 5 분 동안은 걸 수 있을 텐데…….’

10 센트면 1 분. 1 분 가지고 누구한테 도움을 청한단 말인가.

‘아니, 생각해 보니까 연락할 사람도 없지…….’

휴, 다시 한숨을 내쉰 시몬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똑똑―

밖에서 누가 전화 부스를 두드리고 있었다. 시몬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어떤 남자가 전화 부스에


몸을 기댄 채 서있었다. 낡고 헤져 까만 자국이 잔뜩 남은 옷이나 수염이 가득한 거친 뺨이 유리 너머로
보였다.

뭐지? 당황한 시몬은 남자가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걸 보고 물었다.

“괘, 괜찮으세요?”

남자가 느른한 눈을 접고 헤죽 웃었다. 그러더니 부스의 문을 미친 듯이 당겼다.

‘왜 이러시지?’

시몬은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끼고 부스의 문을 잡았다. 자세히 보니 남자의 오른손에 깨진 위스키 병이
들려있었다.
‘가장 착하고 온순한 사람조차 짐승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술이야.’

늘 어머니가 누누이 하시던 말씀이었다. 시몬은 손에서 땀이 나는 걸 느끼며 문을 잡았다.

“왜, 왜, 왜 그러세요?”

시몬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남자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나보고 괴물이라고오?!”

“아니, 왜 이러시냐고…….”

하지만 아까의 일로 힘이 빠진 시몬은 남자를 막지 못했다. 부스에 강제로 진입한 남자는 다시 히죽,
웃으며 시몬에게 다가갔다. 술 냄새와 묘한 지린내가 섞인 냄새가 남자의 몸에서 풍겼다.

남자는 시몬의 목덜미를 잡고 그를 부스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주위를 보니 남자와 비슷한 행색의 사람이
여럿 모인 것이 보였다.

시몬은 등에서 진땀이 주룩 났다. 남자는 광부 옷을 입고 있었는데 키가 크고 손아귀 힘이 아주 셌다.


아까 뷔노를 마주했을 때와는 다른 공포심이 기어올라 왔다.

시몬은 한 손으로 부스 문을 잡고 버틴 채, 공중 전화기를 잡아챘다. 그러나 남자가 다시 시몬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몸이 쏠려 전화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 살려…….’

헤르게임에 경찰이 올 리 없었다. 시몬은 아는 전화번호를 떠올려봤지만 외우고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아버지의 병원 전화번호. 그건 지금 상황에서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오, 오늘 죽어도 시저 손에 죽을 줄 알았더니… 아!’

시몬은 자신을 잡아당기는 남자를 간신히 뒤로 걷어찬 뒤,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손끝에 닿는 게 있어


꺼내 보니, 뷔노가 건넨 메모지였다. 거기엔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그걸 본 순간 그의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전화한다고 올 리도 없고, 오히려 거슬리게


했다고 죽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몬이 급하게 전화 부스 문을 다시 닫자 와장창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위스키 병을 전화 부스 문에 내던졌다.

“이 개새끼! 안 나와?! 당장, 나와아―!”

“대체……!”

시몬은 옆의 벽에 발을 밀어붙인 채 안간힘을 다해 문을 잡아당겼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우선 다이얼을


돌렸다. 간신히 번호를 다 입력하고 전화를 걸었지만, 문이 그만 살짝 열려버렸다. 그 틈새로 남자의
손이 들어왔다.

“나와!”

남자는 시몬의 옆구리를 잡아채려고 애썼다. 시몬은 팔꿈치로 남자의 손을 밀치려 그랬지만 되려
잡혀버렸다.

“윽―!”

시몬의 손이 아직 덜렁거리는 수화기를 잡으려 했지만 놓쳤다.


띠―띠―띠―

―…뭐야.

뷔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몬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남자의 주먹이 자신을 향하는 것에 비명을
질렀다.

“아악!”

다행히 주먹은 문틈을 통과하지 못하고 부딪쳤다. 술 때문에 균형 감각이 부족해진 모양이었다.

“너 내가 오늘 죽일 거야!”

“이, 이러지 마세요!”

시몬은 자신을 붙잡는 손을 붙들고 낑낑 밀었다. 그래도 남자가 밀리지 않자 시몬은 고심했다. 이 사람을
공격해도 되는가?

“정신 차리셔야 해요! 수, 술의 마수에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뭔 개소리야!”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하느님, 저에게 힘을……!’

시몬은 아예 부스의 문을 열어버렸다. 얼떨결에 남자가 균형을 잃자 시몬은 바로 발을 뻗어 남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으윽!”

남자가 엎어지는 방향을 피해 시몬은 도망갔다. 전화 부스 벽에 얼굴을 처박힌 남자가 시몬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히익, 소리를 낸 시몬이 빠르게 부스 밖으로 빠져나가 문을 닫았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야! 열어, 개새끼야!”

이번엔 반대 입장이었다. 부스 안에 남자를 가둬둔 시몬은 이게 얼마 버티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구경하고 있던 노숙자들이 시몬을 보고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으…….”

남자는 안간힘을 다해 문을 잡아당겼고 시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이, 이제 어쩌지……?’

시몬이 점점 좁혀오는 포위망을 지켜보다가 결국 문이 활짝 열렸다.

“이제 열리네, XX!”


“윽!”

시몬은 뒤로 넘어간 채 돌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남자가 다리를 들어 그대로 시몬을 밟으려고 했다.

퍽, 소리가 강하게 났다.

“…응?”

시몬은 감은 눈 중 하나를 살짝 떴다. 시몬을 해하려던 남자의 몸이 오른쪽으로 꺾이고 있었다. 남자의
머리가 강하게 바닥에 부딪혔다. 단단한 구두 굽 하나가 가차 없이 상대를 밟았다.

“으으……!”

남자는 신음을 내며 양팔로 몸을 감쌌다. 시몬은 이때를 틈타 바닥을 손으로 짚고 일어났다.

“윽!”

손이 아픈 걸 보니 바닥에 긁혀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그래도 시몬은 개의치 않았다.

‘위, 위스키병!’

반쯤 깨져 도리어 더 위험해진 위스키병이 가장 큰 흉기였다. 시몬은 위스키병을 집고 남자에게서


도망갔다.

“어, 어떡해.”

시몬은 말리지도 더 멀리 가지도 못한 채 발을 동동 굴렀다. 검은 인영은 쓰러진 남자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자 그제야 멈췄다. 그러곤 시몬을 향해 몸을 돌리자 시몬은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 도망가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이, 씨……!”

그때 쓰러졌던 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돌을 든 채 인영에게 덤벼들었다.

탕―!

귀를 울리는 폭발적인 굉음. 오늘만 몇 번째 듣는 총성이었는지. 시몬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허, 허, 허억―!”

바닥에 뒤로 넘어진 시몬이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을 거칠게 내쉬던 시몬은, 남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눈을 떴다.

바닥에 흥건한 피, 그리고 엎어진 몸이 가늘게 뜬 시야 너머로 보였다.

“주, 주, 죽었…….”

“아, 죽여줬으면 해?”

인영이 어느새 눈앞까지 와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넘어진 남자를 가리켰다. 남자는 아직 시체가
아니었는지 오른쪽 다리를 붙잡은 채 뒹굴고 있었다.

“악, XX! XXX!”


욕을 내뱉고 있는 남자는 힘이 빠졌는지 바닥에 기대고 옆으로 누웠다. 아픈 듯 흐느끼고 있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인영은 허리를 숙인 채 시몬과 눈을 맞추었다.

“저 정도론 안 죽지. 죽여줘?”

흥건했던 피, 서재에 쓰러져 있던 시체들. 떠오르는 기억에 시몬이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상상만으로 머리가 새하얘졌다.

“주, 죽이는 건… 싫어요.”

시몬은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익숙한 회색 눈이 시몬을 보고 있었다. 까만 머리카락과 정장을 보며


시몬이 말했다.

“뷔노……?”

‘와줬다고?’

전화가 연결은 됐으나 자신이 뭐라 말한 것도 아니었다. 넣은 돈도 얼마 없으니 연결도 오래 안 됐을


것이다.

근데 그걸로? 이렇게나 빨리? 머릿속이 혼란스러운데, 뷔노가 끝을 올리며 말했다.

“뷔노?”

시몬은 그제야 자신이 반말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하게 정정했다.

“아, 아니, 뷔, 뷔노 님!”

“흐음?”

“윽, 그, 그게 아니라…….”

뷔노가 피식 웃었다. 딱히 반말을 지적하려 했던 게 아닌 모양이다.

“그렇게 안 봤는데 꽤 배짱이 있네.”

“네, 네?”

‘아까 저 사람을 넘어뜨린 걸 본 건가?’

제정신도 아닌 사람을 공격했다는 점에 시몬의 양심이 찔리고 있었다.

“새벽 4 시에 헤어져 놓고 6 시에 전화를 다시 걸다니.”

“…6 시, 아.”

“나도 잠이라는 걸 자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이 안 드나 보지?”

이제 보니 아까보다도 뷔노의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약간 거칠어진 목소리에 시몬이 의외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무시다 오셨어요?”

“…….”
시몬의 전화 따위 무시했으면 됐을 텐데 여기까지 걸음한 것일까. 왜 온 것일까. 시몬은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생각했다.

‘잠을 깨워서 날 죽이러……?’

정말 산 넘고 산 넘어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이젠 태산이 눈앞에 들이닥쳤다.

뷔노는 머리를 북북 헝클어뜨리다 시가를 꺼냈다. 불을 붙이기 전부터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니 오는


도중에 꺼진 모양이었다.

‘시가 몸에 안 좋은데…….’

시몬의 머릿속에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듣기라도 한 듯, 잠시 시몬을 보던


뷔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시가를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뭐야, 방금 나 말했던가?’

“보내줄 때 집에 얌전히 들어가지 왜 여기서 얼쩡거리고 있을까.”

“…그, 그, 길을 잃어서.”

“뭐?”

뷔노가 시가를 거칠게 씹자 으득, 소리가 났다.

“아니, 저, 그게…….”

거짓말인 걸 들켰나 보다. 시몬은 급하게 다른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다.

“제, 제가 전화 부스에서 자, 자는 게 취미라……!”

“…….”

뷔노는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몬은 계속 뷔노의 손에 들린 총을 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시몬은 잠시 아무 말이나 기다리다 압박감을 버티지 못하고 뷔노의 시선을 피해 머리를 숙였다. 봄꽃을
닮은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뷔노의 손이 시몬의 턱을 탁, 잡아챘다. 시몬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으, 윽, 자, 잘못했…….”

“쓸 만할 거라더니 상처를 냈네.”

새하얀 피부에 생채기가 나있었다. 시몬은 뷔노가 턱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자 작게 신음 소리를 냈지만,
얌전히 그의 손에 몸을 내맡겼다.

“…….”

“집이 어디지?”

“예?”

“두 번 묻게 하는 것도 취민가?”
“아, 아뇨! 어… JP 가 9 번지요.”

뷔노는 턱을 쓰다듬었다. 시몬이 뷔노를 올려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주소를 말해도 됐던 것일까?


하지만 뷔노 앞에서는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뷔노는 더 이상 캐묻고 싶어 하는 거 같지는 않았다.

거칠게 차 문을 연 뷔노가 운전석에 앉았다.

“뭐 해, 타.”

그러자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딜 가려고! 거기서! XXX 야!”

뷔노가 눈을 찌푸린 채 총을 들려 하자 시몬이 팔을 잡았다.

“차, 차, 참으시면 복이 와요……!”

“…셋 센다. 얌전히 안 타면 시체가 2 구.”

시몬은 재빠르게 조수석의 차 문을 열었다. 차 안에 들어가려 하자 뷔노가 다시 눈썹을 찌푸렸다.

“바지 털고.”

목소리에 차 시트를 더럽히지 말라는 완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시몬은 제 손이 먼지떨이인 것처럼
다급하게 휘둘러서 바지를 털었다. 시몬이 문을 닫자마자 차가 움직였다.

뷔노는 시가를 고쳐 물며 말했다.

“안전벨트 매.”

“네, 으윽……!”

안전벨트에 손이 닿기도 전에 차가 급하게 커브를 돌며 시몬의 몸이 기울었다. 허락 없이 뷔노의 몸에


닿지 않기 위해 시몬은 필사적으로 의자를 붙들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시몬은 눈앞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외쳤다.

“뷔, 뷔노, 님! 막다른 길이에요!”

창밖으로 풍경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잔상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날카롭게 불어와 시몬의
얼굴을 찰싹찰싹 때렸다.

뷔노는 차의 헤드가 벽에 닿기 직전에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 끼이익, 마찰음이 나며 차가 미끄러지듯


돌았다. 시몬은 넋이 나간 채 의자에 등을 붙이고 기댔다.

긴장을 놓을 새도 없이 뷔노는 다시 액셀을 밟았다. 시몬이 소리쳤다.

“노, 노란불, 인데…요!”

“일부러, 말, 끊어서, 하는 건가?”

“아, 아니요!”
“흠.”

뷔노는 뚝뚝 끊기는 말투로 따라 하더니 꾹 액셀을 밟았다. 그는 다시 몸이 산산조각 난 달걀,


험프티덤프티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진절머리나는 곡조는 아까의 기억을 완전히 각인시켰다. 시몬의 목이
빨개졌다.

‘다시는 안 들어, 이 노래.’

앞으로 쏠리는 시몬의 몸을 안전벨트가 겨우 잡아주었다. 시몬은 담장 위를 당당하게 걷다가 균형을 잃고


떨어진 계란에 대한 노래를 들으며 손으로 귀를 막고 싶었지만, 손을 떼면 몸이 너무 흔들릴 것 같아 차마
움직이지 못했다.

뷔노가 아까 달려와 준 후로 시몬의 마음은 널뛰기를 하듯 바뀌었다. 시몬은 뷔노가 이렇게 행동하는 그
어떤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다. 뷔노는 시몬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고 핸들을 꺾고 액셀을 밟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난폭하게 운전하는 모습에 시몬이 간신히 적응하고 나서였다. 그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시몬은 눈치를 보다 물었다.

“뷔노, 저… 혹시 졸리세요?”

“그럼 안 졸릴까?”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지만, 뷔노는 시몬의 눈치에 내심 놀랐다.

“아… 저만 아니면 더 주무셨을 텐데… 죄송해요.”

시몬은 잠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뭔가를 뷔노에게 건넸다.

“이, 이거… 드시겠어요?”

내민 건 포장지에 싸인 녹말 사탕이었다. 뷔노는 다람쥐가 준 도토리 선물을 보듯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단 거 안 좋아하는데.”

“그, 그러면 안 드셔도…….”

뷔노는 사탕을 받아 낼름 입 안에 넣었다.

“맛없네.”

“아, 죄, 죄송해요…….”

시몬이 시무룩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뷔노의 몸이 아주 잘게 떨렸다.

‘웃는 건가?’

또 한 번의 정적이 흐른 후, 시몬은 갑자기 없던 용기가 생겨난 것인지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왜 나와주신 거예요?”

“뭐?”

“…아니, 제 전화는 그냥 무시하셔도 됐을… 텐데…….”


“내 번호를 아는 놈이 몇 없으니까.”

“네?”

“공중전화에서 비명이 들리니까, 부하가 당하고 있는 줄 알았지.”

뷔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란 공중전화는 다 뒤졌는데. 설마 너일 줄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몬은 갑자기 자세를 바르게 하고 정면을 바라봤다.

‘그럼 그렇지, 날 구하러 왔을 리가.’

그 오해 덕에 자신이 살았으니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시몬은 다시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다가 뷔노가 아무 말이 없자 슬그머니 질문했다.

“근데 왜 혼자 오셨어요? 위험할 것 같은데.”

뷔노는 시몬을 흘깃 노려봤다.

“위험?”

가당치도 않은 소리라는 말투였다. 아까 싸우던 모습을 떠올리면 이유 있는 자신감이었다.

“새, 생각해 보니까 워낙 잘 싸우시고 그러니까 혼자 오셔도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을지도 모, 모르겠네,
요…….”

‘…그, 그래도 여럿이서 다니는 게 안전할 것 같은데.’

시몬이 쭈뼛대며 말하자 뷔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새벽에 자주 혼자 다녀.”

“아, 새벽이어서. 깨우기는 좀 그렇죠, 아무래도.”

시몬은 뷔노가 의외로 배려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뷔노가 습관적으로 시가를 손가락에 끼웠다. 한 손으로만 운전대를 잡은 걸 본 시몬이 기겁했다.

“뷔, 뷔노! 양손으로 운전해야……!”

“내려.”

“죄, 죄송합니다…….”

“…….”

잠시간의 운전 뒤 차는 시몬의 집 앞에 정차했다. 시몬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할세라 빠르게 차에서


내렸다. 뷔노는 운전석 창문을 반쯤 내렸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시몬은 90 도로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뷔노는 됐다는 듯 손을 휘젓다가 말했다.

“너 말이야… 조금 더 여우같이 구는 법 배워놔.”

“여우같이…요?”

뷔노가 졸린 말투로 말했다.

“…뭔가 더 엉겨 붙고, 짜증 나게 애교 부리고, 성가시게 구는 그런 거. 이번 주 일요일까지 익혀두면


좋겠군.”

“그, 그래요? 워, 원하시면 노력할게요… 그…….”

시몬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결심한 듯, 뷔노의 차창 앞으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히잉, 버, 벌써 가시는 거예요? 시나몬은 아쉬워요.”

“취소.”

“…….”

자신이 봐도 무리수였는데, 빈말로도 받아줄 수 없는 수준이었나 보다. 상기된 동그란 뺨이나 강아지같이
축 처진 눈매 같은 걸 가만히 보던 뷔노가 말했다.

“지금 같은 백지상태가 더 짜증 나고 좋겠어.”

시몬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채 뷔노가 말했다.

“일요일 3 시 반. 집 앞으로 데리러 올 테니까 준비해.”

“네? 네!”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한 시몬은 수첩을 꺼내 주일 3 시 반이라고 적었다. 뷔노는 그걸 잠시 보더니 액셀을
밟았다. 그제야 그는 끝이 잘린 시가를 입에 물고 불을 켰다.

‘일이 늘겠어.’

달리던 뷔노가 도착한 곳은 자신의 집이 아닌, 아까 시몬이 괴한과 마주친 장소였다. 한산한 길거리에선
피네가 아까보다도 더 비뚤어진 정장을 입은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뷔노는 그 앞으로 미끄러지듯 달려가 안정적으로 정차했다.

“수고했어.”

“웬일이야 보스, 새벽에 전화하고. 이런 시간까지 조사했던 거야?”

“뭐, 그렇지.”

“대단한 체력이야, 정말.”

뷔노는 주위를 둘러봤다. 시몬을 공격하던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움직일 상태도 아니었고, 분명 술과
마약에 절어있어 놓치기 쉬운 상태도 아니었다.

“어디에 뒀어?”
“지하 창고에 곱게 처넣었지.”

발 빠른 피네가 이미 잡아둔 것이었다. 뷔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다이아 새끼들, 우리 구역까지 마약을 팔고 있었어. 클로버를 숨겨주는 것도 모자라 침범까지
하다니.”

스페이드가 사라지고 나서 헤르게임 안에 마약 유통은 한동안 끊겨있었다. 그러나 다이아 조직이 다시


마약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 제대로 손을 봐줘야겠지.”

뷔노가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뷔노의 마약에 대한 감정은 좋을 수가 없었다.

“고생했어. 심문하고 노새 알아내.”

노새란 마약을 파는 사람들을 말하는 은어였다. 피네는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보스, 나 두 시간도 못 잤는데?”

“지금.”

피네가 입을 벌린 채 멍하게 있었다. 툭, 어깨에 손을 올린 뷔노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집까지 태워다 줘?”

“…됐어, 나도 차 있어!”

격앙된 목소리로 내뱉은 피네는 씩씩거리며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5. 그 안전한 마약상

주유소에서 한 남자가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햄버거 가게, 세탁소, 그는 카페.
평범하기만 한 광경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근처에는… 한 명뿐인가.’

하얀 정장을 입은 신사는 돌돌 말린 궐련을 피우고 있었고, 그다지 이쪽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남자는
빠르게 주유소 편의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편의점 안에는 노인 한 명과 10 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 한
명만이 있었다.

‘이 정도라면 들키지 않겠어.’

심호흡을 한 번 내쉰 그는 편의점에 들어가 바로 판매대로 직행했다.

“물 하나요.”

“어떤 거로 드릴까요?”
남자는 목소리를 급히 낮춰 작게 속삭였다.

“다이아 산.”

그 말을 들은 편의점 점원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하지만 곧 익숙하게 다섯 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남자는 그걸 보고 지갑을 탈탈 털더니, 주머니 밑까지 싹싹 긁어가며 동전을 내밀었다.

떨리는 손으로 건넨 돈을 점원은 꼼꼼하게 수를 세어 조금이라도 부족하진 않은지 확인했다.

액수가 정확하다는 걸 알자, 점원은 매대 밑으로 몸을 숙여 다이아가 아주 조그맣게 그려져 있는 갈색


봉투를 꺼냈다.

갈색 봉투는 속이 보이지 않도록 불투명했고, 그 안에는 하얀 가루가 들어있는 투명한 봉투가 있었다.
매대 위로 봉투를 올린 점원은 아무렇지 않게 물병 한 개를 넣음으로써 동작을 완료했다.

그 봉투를 내놓자마자 봉투를 품에 꼭꼭 숨긴 채 남자가 뛰어나갔다. 그는 흥분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손에 묻은 땀을 털어내려 애썼다. 간신히 진정하며 그가 자신의 트럭에 올라타려고 했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뭐, 뭐야?’

“거기 너. 일루 와봐.”

편의점 안에 있던 노인이었다. 간신히 욕지거리를 삼키며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트럭에


올라타려는데 노인이 갑자기 발을 쿵 굴렀다.

“야! 어디서, 어디서, 무시를 해?!”

빽 소리를 지른 노인이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인정사정없이 잡은 건지 어깨를 잡은 악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의외의 힘에 남자는 놀라 봉투를 더 힘껏 껴안았다.

“너 품에 있는 거 꺼내.”

“무, 물밖에 없는데…….”

깡마른 남자가 흠칫 놀라도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의 품을 할퀴듯 손을 밀어 넣었다. 허술하게


숨겨진 갈색 봉투는 금세 노인의 손아귀에 잡혔다. 노인은 갈색 봉투를 쥐어뜯다시피 잡아당겼다.

“약 내놔!”

“그, 그런 거!”

“약, 약, 약! 내놓으라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노인의 동공은 풀린 지 오래였다. 갈색 봉투가 찢어지려 하고 있었다. 남자가


기겁하면서 봉투를 꽉 잡았다.

“안 돼!”

투툭, 뜯어지는 봉투에서 뭔가 쏟아져 나왔다. 어떻게든 잡으려는 남자의 팔을 밀치고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왔다. 남자는 누군가의 지저분한 손이 하얀 가루를 눈처럼 감싸서 잡는 것이 보였다.

손의 주인은 편의점 안에 있던 소년이었다. 그는 하얀 가루를 보고서는 덜덜 떨리는 손에 코를 묻었다.


그는 그대로 가루를 들이마셨다. 눈썹을 잔뜩 찡그린 소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킁, 큭, 으흐, 흐흐.”

봉투에서 새어 나온 가루가 바닥에 떨어졌다. 소년이 눈을 까뒤집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빨대를 이용해 미량으로만 쓰는 마약인데, 이를 사정없이 들이마신 소년이 버틸 턱이 없었다.

“헉, 흐읍, 헉.”

소년의 발작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바닥에 떨어진 가루를 노인이 허겁지겁 주워 코에 들이밀었다. 하지만


웬만한 덩어리들은 소년이 썼고 나머지는 공중에 날아가 버렸다. 노인은 다시 남자를 노렸다.

“더 줘!”

“어, 없어. 이게 끝이야.”

“돈을 그렇게 줘 놓고선! 열쇠, 열쇠 내놔. 트럭에 더 있지? 더 있잖아?!”

노인은 남자의 멱살을 잡아챘다. 남자가 멱살을 흔드는 손짓에 맞춰 몸이 흔들리는데, 노인이 불현듯
손을 떼놓고 말했다.

“트럭, 트럭…….”

노인이 무릎을 꿇은 채 남자의 바지를 더듬었다. 차 열쇠를 찾는 거였다. 남자는 발로 노인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어찌나 끈질긴지 떼놓을 수가 없었다.

“아, 이런……!”

그때, 소란을 들은 것인지 하얀 정장의 신사가 현장으로 뛰어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신사는 노인의 어깨에 툭 손을 올렸다.

“꺼져!”

눈이 뒤집힌 노인은 신사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신사는 하얀 장갑을 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런, 말로 하시죠.”

“말로 하길 바라면 처음부터 끼질 말든가!”

노인은 인정사정없이 신사의 얼굴을 노리며 주먹을 날렸다. 신사가 눈썹을 찌푸린 채 뒤로 물러났다.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사가 남자를 쳐다봤다. 하지만 남자는 제 코가 석 자였기에 자신을 도우러 온
신사를 신경 써줄 수 없었다.

남자는 그저 급하게 트럭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는데, 뒤늦게 이를 눈치챈 노인이 신사를 놔두고 남자의
옷을 잡아당기며 막았다.

그렇게 난리를 피는 와중에 남자는 실수로 쓰러져 있는 소년을 밟고 미끄러졌고, 두 사람은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

아수라장이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신사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 전 몸을 쓰는 일은 적성이 아닌데…….”

탕, 탕. 총성 두 번이 거의 동시에 울려 퍼졌다.

“끄악!”

넘어졌던 남자는 총소리에 저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질렀다.

“흐, 흐으……. 어?”

하지만 그의 몸은 멀쩡했다. 쿵쾅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는 뜨끈한 것이 느껴져 아래를 보고 다시 비명을 꽥 질렀다.

노인의 목과 이마 정 가운데에서 끈적한 핏물이 솟구치고 있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시체가 바닥을
장식했다.

죽은 노인과 다리가 얽힌 남자는 재빨리 시체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허우적거렸다. 급히 일어선 그가 다시


물컹한 무언가를 밟았다.

“으, 으, 으아아……!”

이번에 밟은 것은 소년의 시체였다. 입에 물려있는 거품, 그리고 확장된 동공이 소름 끼쳤다. 그 옆에


신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했다.

“저런, 이건 못 쓰겠네요. 평소에 싸구려 얼음을 구입했나 봅니다. ”

얼음은 마약의 다른 이름이었다. 마약상은 약에 다른 재료를 섞어 팔기도 했다. 그 때문에 적정 복용량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신사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바라봤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지? 남자가 추측했던 대로 그저 평범한 회사원일 리는 없었다.

“진짜는 이렇게 효과가 좋답니다. 고객님.”

“…….”

신사는 절도있게 옷을 털더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총을 다시 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런 사기꾼들과 달리 저희는 순도 높은 얼음만 팔죠. 그렇지 않습니까?”

‘저희?’

남자는 신사의 하얀 정장과 은빛 총을 보자 무언가 떠올렸다.

‘높은 노새나 정보원들은 전부 흰 정장을 지나치지 않아. 흰 정장은 죄다 그 남자 본인이거나 간부거든.’

남자는 옆에 엎어진 시체들과 남자를 번갈아 보며 화들짝 놀라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지를 못했다.

하얀 정장을 입은 신사가 눈을 휘며 웃었다. 긴 속눈썹 탓에 연분홍색 눈동자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반듯한 눈썹 뼈와 이어진 콧대 등이 아주 가지런했고, 몸에서는 머스크 향이 났다. 그는 흰 장갑을 낀 손
그대로,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런, 많이 놀라셨나 봅니다, 고객님. 괜찮으신가요?”


남자는 차마 손을 잡을 생각은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사는 확실한 생체반응에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군요.”

그는 궐련을 돌돌 말아 입에 물었다.

“병원으로 가실까요?”

“그, 그럴 것까지는…….”

신사가 남자의 몸을 살피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자 독한 궐련의 매서운 연기가 남자의 얼굴을 덮쳤다.
남자는 눈과 코가 매워 콜록거리면서도 두려워 피하지 못했다.

“이런, 아니에요. 여기 뺨에도 멍이 들었고, 다리에도 상처가…….”

신사는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코는 언제 눌린 거죠?”

“…워, 원래 이런데.”

“그랬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는 눈썹을 꺾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째 그의 높은 콧대가 눈에 띄었다.

“요즘 고객님들이 안심하고 물건을 구매하지 못한다는 소식에, 잠시 확인차 온 것인데…….”

그가 고개를 숙이자, 쓸어 넘긴 앞머리가 떨어져 눈을 가렸다. 그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다시 정돈했다.

“저희는 언제나, 안심하고 물건을 판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아주, 아주 가끔 이런 사태가 발생합니다.”

궐련을 빨아들인 그가 후, 연기를 내뱉었다.

“저희가 더욱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괘, 괘, 괜찮…….”

남자는 손사래를 쳤다. 신사는 뒷말은 듣지도 않은 채 불이 꺼지지 않은 궐련을 바닥에 버린 뒤, 구두


굽으로 짓이겼다. 불씨는 한순간 붉게 타올랐다가 그대로 식어갔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죠.”

신사는 구두를 툭툭 쳐 담뱃재를 털고, 재킷을 가다듬은 후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남자는 간신히 안도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단체로 모습을 드러내자
다시 한번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그중 한 부하가 신사 옆에 따라붙었다.

“실버 님. 전언입니다.”

실버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받쳐 그의 귀에 속삭였다. 말이 끝나고, 실버라


불린 신사는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터졌군요.”
“죄송합니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실버는 건조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제가 시저의 구역을 건드릴 때는 조심하라고 이르지 않았습니까?”

벌써부터 시저에게 노새를 들켜버린 건 문제였다. 부하가 쩔쩔매며 변명했다.

“그게, 저희 노새들의 문제가 아닌 모양입니다. 약을 구매하는 사용자들이 원흉인데, 그들까지 관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럼 그들도 죄다 노새로 만들어버리면 되겠군요. 관리할 수 있도록.”

“예?”

실버는 손목에 찬 시계를 몇 번 만지작거렸다. 화려하지 않지만 클래식한 디자인의 시계를 아무렇지 않게
벗어던지자, 부하가 그것을 급하게 잡았다.

부하가 시계를 확인하니 유리 부분에 금이 약간 가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익숙하게 주머니에서 새


손목시계를 꺼내 실버의 손목에 단정하게 묶어주었다.

실버는 다른 손으로 넥타이를 조정하며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다시 길게 내쉰 숨과 함께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가지치기용 가위(시저)조차 교정을 해야 한다니…….”

그는 잠시 머스캣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실버는 자신을 찾아온 대상을 흥미롭게 보며 말했다.

“요즘 위세가 가장 강하다는 시저 조직, 그것도 마더의 딸이 왜 저를 찾아온 건지. 전혀 이유를


모르겠군요.”

내부의 단합이 탄탄하다는 시저에서 말단도 아닌 수뇌부가 실버를 찾아온 것이다.

“정말 몰라서 물어?”

머스캣은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미리 말하는데 이 자리에서 하는 말은 다 비밀이야. 뭐, 말하지 않아도 한 조직의 보스인 당신이 모르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

머스캣은 입술을 가볍게 물고 꾹 참아놓은 걸 털어놓듯 빠르게 말했다.

“…난 뷔노가 싫어.”

“이거 의외군요. 저는 좋습니다만.”

머스캣의 표정에 동요가 일었다.

“좋다고? 상대 조직의 보스가?”

실버는 감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주용 말에게 안경을 씌우지 않습니까. 옆을 바라볼 수 없게 막은, 앞만 보도록 만들어진 안경


말입니다. 그녀는 사람이지만, 그 말들 중 한 마리인 것처럼 한 곳만 바라보고 뛰지요. 그 점이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뷔노는 배신자야.”

실버의 눈이 살짝 커졌지만, 그는 바로 표정을 관리했다. 짐작 가는 구석이 있으면서도 그는 모르는 척


물었다.

“무슨 뜻이죠?”

머스캣의 살갗이 파르르 떨렸다.

“마더를, 어머니를 살해한 게 그놈이라고.”

“…마더가 죽었다고요?”

“사람들은 어머니가 보스 자리를 넘긴 줄로만 알지.”

“그렇죠, 저도 계승식 때 있었으니까요.”

머스캣은 소매를 돌돌 말아서 걷어 올린 다음 책상에 팔을 내려놓았다.

“그건 협박이었어. 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머스캣이 창백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뷔노를 죽이는 걸 도와줘.”

“그건 곤란합니다.”

“왜지?”

“저는 살아있는 그녀와 해야 할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실버가 발을 빼도 머스캣은 당황하지 않고 재차 제안했다.

“그러면 보스 자리에서 물러나게 무너뜨리는 거라도. 대가는 확실하게 지불하지.”

“대신 시저는 당신이 차지하겠군요.”

“다이아와 우호적인 시저는 어때?”

실버의 도움으로 보스 자리를 차지한다면 M 이 보스 자리에 올라도 실질적으로 권한은 실버가 쥐고 있을


것이다. 합병이나 다름없었다.

시저, 뷔노가 제 발아래에. 실버는 그 장면을 그리며 입술을 중지로 눌렀다.

“나쁘지 않군요.”

6. 차 안에서
“아니, 살아있다고? 정말로?”

클로버의 조직원은 사지 멀쩡한 시몬의 꼴을 보고 당혹스러워했다.

“아, 뷔노가 얼굴에 생채기는 냈구나.”

“아뇨, 그건 다른 사람이…….”

“그럼 아무 상처도 안 냈단 말이야?”

결과적으로 따지고 보면 그랬다. 중간에 죽을 것 같았던 순간이 무척 많았는데도, 이상하게 상처 하나 안


나긴 했다. 클로버 조직원은 멍하니 시몬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네. 하긴 얼굴이…….”

“그,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엄청난 특별 취급이라고 할 수 있지. 단번에 죽일 줄 알았는데.”

그 말에서 클로버가 자신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일요일에 약속이 잡혔다고 그랬지?”

시몬은 일회용 말에서, 나름 쓸 만할지도 모르는 물건이 격상되었다.

“이번엔 위치 추적기를 달아와. 작은 걸 건네줄 테니까.”

“위치 추적기요……?”

“성공만 하면 빚의 사분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

‘사분의 일!’

어쩌면 이대로 클로버의 지령을 따르다 운이 좋아 나머지 빚도 차감할 수 있을지 몰랐다. 처음으로 희망을
본 시몬의 눈이 밝아지자마자 그의 머릿속에 뷔노의 얼굴이 스쳤다.

“아…….”

미묘하게 아릿한 감정이 심장에서부터 퍼져나갔다. 뭔가 그리운 감정이었다.

“왜? 문제 있냐?”

그 말에 시몬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말했다.

“아, 아뇨. 알겠습니다…….”

‘괜찮은 건가……?’

시몬은 거울 앞을 보며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뷔노가 부른다는 건 한 가지 이유뿐일 거라는 강한 다짐


때문이었다.

‘여, 역시 그거겠지? 오늘도 그걸 하는 거겠지?’


강렬했던 기억에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그는 아무 자극도 없이 반응하는 자기 몸에 당황하며 그 기억을
애써 물리려 했다. 하지만 벌써 볼록해진 바지 앞섶에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장 입고 와.’

저번에 헤어질 때 그 소리를 한 걸 보면 아무래도 정장이 뷔노의 취향일 것이다, 시몬은 생각했다.

‘혹시 본인도 매번 정장을 입는 이유가……?’

소매의 커프스와 손목시계를 풀고 팔뚝까지 정장을 접어 올리는 뷔노의 모습이 상상됐다. 그리고 자신의
정장 단추를 뜯어서 벗겨내는 거친 손까지…….

‘미쳤어, 미쳤어!’

그는 변태가 아니었다. 억지로 바지 앞섶을 누르려다 젖은 느낌에 놀라 다시 손을 뗐다.

‘아냐, 난…….’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부풀어 오른 제 선단을 살짝 쓸었다. 바지 위로 만진 것인데도 그 자극에 몸이


튀어 올랐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 이건 예행 연습으로…….’

애써 변명으로 합리화하며 그는 미숙한 손놀림으로 어색하게 몇 번 더 앞섶을 쓰다듬었지만, 뷔노와 있을


때와 같은 자극은 없었다.

‘어, 어떻게 했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던 시몬은 뷔노가 그랬듯이 이제는 꼿꼿하게 솟은 앞섶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 순간,
뷔노와 함께 있던 순간이 오버랩되며 전기라도 통한 것처럼 짜릿한 기분에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흐, 윽…….”

몸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신이시여.”

성욕에 몸이 달아올라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깨달은 순간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는 결 좋은


분홍빛 머리를 헝클어뜨린 뒤 몸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찬물을 세 컵 마시며 시간을 끌자, 달아올랐던
몸도 간신히 진정했다.

“제정신이 아니야…….”

시몬은 잡념을 지우고, 시키는 일을 해내기로 했다.

클로버의 프린스 챠밍 유망주로 떠오른 시몬은 넉넉한 의상비를 지원받았다. 오랜만에 옷을 고르게 된
그는 몸의 치수를 재고 정장을 새로 맞출 수 있었다.

“머리카락 색이 참 이쁘시구먼.”

정장을 맞추어주던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연분홍빛 원단을 가지고 왔다.


“예? 이 색이요?”

“별로예유? 참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우리 손녀도 예전에 분홍색을 좋아했다우.”

마지막 말을 하면서 할머니는 아련한 눈빛을 지었다. 시몬의 얼굴에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손녀분이 돌아가셨나 봐……!’

시몬은 자기 때문에 할머니가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한 것은 아닐까, 잠시 양심의 가책에 떨었다. 그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뷔노의 취향을 떠올리기로 했다. 뷔노의 취향은…….

‘어라? 분홍색도 붉은 계열 색 아닌가?’

뷔노는 붉은색을 무척 좋아한다. 그게 아니라면 붉은 계열 머리카락인 남자들만 골랐을 리 없다. 사실


흔한 머리카락 색도 아니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붉은 계열의 머리를 가진 남자들을 몇 명이나 만났을까.’

시몬은 평소보다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로 해주세요.”

시몬이 부탁하자마자 할머니는 콧노래를 부르며 정장을 짰다.

“이 레이스는 어떠슈? 포인트로 살리면 예쁠 텐데.”

“아, 레이스는 좀…….”

“후우, 영감이 레이스로 옷 만드는 걸 좋아하곤 했다우. 예전에 모은 레이스들이 아직 한가득 남았지. 볼
때마다 영감 생각이 나선…….”

“레이스로 하죠.”

할머니가 밝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내가 아주 잘 만들어줄 테니 걱정 말라우, 이쁜 총각.”

그 후의 일도 비슷했다.

“여기는 허리 부분을 조여서 허리선을 살리는 게…….”

“원단은 두 개를 섞어서 쓰면 아주 예쁘고…….”

“단추는 은색으로 하려는데, 백금으로 도금한 게 있다우…….”

그렇게 이틀 뒤 정장을 받으러 온 시몬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저…….”

“완성이라우. 어떤가유?”

시몬은 할 말이 많았지만,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우선 색부터 짚었다.

“너, 너무 진한 분홍색 아닌가요?”


그가 처음 봤을 때의 원단 색은 흰색이랑 거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옅은 분홍빛이었다. 그런데
완성품은 멀리서 봐도 분홍색인 것이 티가 날 정도로 진하게 바뀌어있었다.

“무슨 소리. 하늘하늘하고 예쁜 게 아주 잘 만들어졌구먼.”

시몬은 저걸 과연 소화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감이 들었으나, 새로 옷을 맞출 시간이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도… 할머니께서 정성껏 만들어주셨으니까.’

“그, 그런 거 같네요.”

연분홍색 정장은 확실히 하늘하늘한 재질이지만 시몬의 몸에 딱 맞았다. 시몬의 머리카락 색을 잘


받쳐주는 데다가 피부도 환하게 보이게 하는 색이었다.

다만 재킷도 분홍색. 바지도 분홍색이다 보니 눈에 확 띄긴 했다.

‘뷔노 님이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쩌지…….’

시몬의 집 앞에 차를 주차한 뷔노는 약속 시각 2 분 전에 도착했다. 선팅을 과하게 한 차는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차 안에서 시몬을 기다며 뷔노는 불만스레 손을 창틀에 두드렸다.

‘실버 놈을 골리려는 목적으로 시몬을 데려가려 했는데, 오페라에 못 온다니.’

접선을 위해 만나기로 해놓고 직전에 약속을 깬 것이다. 뒷좌석에서 긴 다리를 꼬고 앉은 뷔노는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되면 시몬을 굳이 오페라로 데려갈 필요가 없어졌다.

약속을 취소할까 고민했으나 예쁜 얼굴을 빨리 다시 봐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시몬이 나오는지


확인하려는 뷔노의 시야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잡혔다.

멀리서 봄꽃 같은 남자가 걸어오는 걸 목격한 뷔노의 눈이 가늘어졌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를 못하고 있었다.

따뜻한 오렌지색 눈은 낮 햇살 앞에서 더욱 빛났다. 벚꽃잎 색깔의 정장은 머리카락과 어우러져 화사한
분위기를 풍겼다. 앞머리도 넘기고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시몬은 귀공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역시 옷이 이상한 거 아닐까?’

시몬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집 앞에 도착한 순간. 차 문이 덜컥 열리고 시몬을 누군가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 시몬은 누군가의 품속에 안긴 행색이 됐다.

‘무, 무슨……?’

하지만 시몬은 거친 행동과 시가에서 나던 바닐라 향에서 누군가를 쉽게 연상시킬 수 있었다.

“뷔노?”

뷔노가 뒷자리에 앉은 걸 보고 시몬은 조금 놀랐다. 생각해 보면 이게 당연한 거였다. 뷔노가 운전을 할


위치는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살짝 쓴 채 시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옷이 마음에 안 든 걸까?’


시몬은 침을 살짝 삼키고 굳었다. 뷔노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은 채 시몬의 맑은 얼굴을 바라봤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 탐색하는 시선에 시몬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뷔노가 계속 자신을 쳐다보자


부끄러워졌다.

시몬은 볼이 발개지면서도 감히 뷔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우유에 붉은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하얀 뺨에 홍조가 번져나갔다.

‘이, 이게 왜, 왜 이러지…….’

시몬은 귓가를 방망이질하는 심장 소리에 당황했다. 자신을 지탱하는 단단한 팔을 느끼며 날뛰는 심장
박동이 낯설었다.

‘무, 무서워서 그래. 계속 말도 안 하고 쳐다보고……. 갑자기 차에 끌고 들어오고! 그렇게까지


난폭하게 대할 건 없잖아.’

그러다가 뷔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시몬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쿵 소리와 함께 시몬의
눈앞에 별이 튀었다.

“윽!”

“안전벨트.”

껴안을 때는 언제고 뷔노는 시몬을 툭, 옆자리에 앉히더니 안전벨트를 톡톡 건드렸다. 시몬은 아픈


이마를 부여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시몬이 무언의 항의를 담은 시선을 던지자 뷔노가 검지로 그의 이마를 다시 눌렀다.

“눈빛이 불손한데.”

“아, 아니요…….”

“그렇게 오래 내 얼굴을 쳐다봤는데 아무 생각도 안 들어?”

“네?”

뷔노는 인심 쓴다는 말투로 말했다.

“떠오르는 거 없냐고.”

‘떠, 떠오르는 거?’

시몬은 이 매혹적인 사람을 다시 눈으로 살피면서 속으로 갈팡질팡했다. 그는 뇌 속을 헤집듯이


고민하다가 본심을 꺼냈다.

“자, 잘생겼다……?”

“…….”

‘오답이었나 봐.’

뷔노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짧게 말했다.


“안전벨트나 매.”

“아, 네.”

시몬이 그 말에 허겁지겁 안전벨트를 맸다. 좌석의 손잡이 부분이나 안전벨트 고정대 등이 다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차 안에선 말린 소나무 냄새가 났다.

문이 열린 채로 승용차가 출발해 시몬은 급하게 차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차 문이 저절로 닫히는 걸


보고 머쓱해했다.

“저번에만 그런 줄 알았는데, 원래 이렇게 서툰가?”

그 말에 시몬은 심장이 쿵 떨어졌다.

“저, 번 일이요?”

“기억 안 나는 척하지 마.”

잠자리를 지적하는 건가? 아니면 뷔노를 부른 일?

시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삐질삐질 흘리는 식은땀이 그의 긴장을 드러냈다.

“저, 저, 저번 일은 정말로 죄송합니다!”

놀리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몬이 안전벨트가 최대한 당길 때까지 허리를 숙이며 외쳤다. 뷔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말한 건 애교였는데.”

‘응?’

뒤늦게 뷔노의 말을 들은 시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 뷔노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안 해?”

뷔노의 손이 시몬의 쇄골 사이로 갔다. 시몬은 숨조차 멎은 채 굳었다. 뷔노는 상의를 검지로 살짝 당겨
그 속을 확인했다. 시몬의 심장이 쿵쿵 망치질하듯 뛰었다.

“…네?”

시몬은 최대한 모르는 척 되물으려 애썼지만,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뷔노는 시몬의 목 뒤를
쓰다듬었다.

“애교.”

‘애, 애교?’

시몬은 간신히 멈췄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거, 취소라고 하셨잖…….”

“한번 해봐.”
사실 연습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뷔노는 취소라고 했지만, 시몬은 가족의 목숨이 걸려있으니 만에
하나라는 가정하에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했다. 뷔노를 만나기 전에 남은 시간 동안 애교가 뭔지를 착실히
학습했다.

‘하지만 막상 하려니까…….’

부끄러움에 몸이 떨렸다.

‘아냐, 아버지를 생각해!’

아버지의 인자한 얼굴을 떠올리니 수치심이 배가 되었다.

‘아냐, 아냐, 아버지는 잊어! 나, 나는 뷔노 님을 사랑한다… 여기서 유혹해야 한다…….’

심호흡을 한 시몬은 뷔노의 팔 쪽 옷을 검지와 엄지로 슬쩍 잡고 말했다.

“…그, 그, 그동안 저 안 보고 싶었어요?”

앙증맞은 분홍빛 입술이 귀엽게 오므려졌지만, 목소리에서 삑사리가 났다.

“…….”

시몬은 목부터 귀까지 새빨개졌다. 그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머리 위로 풋,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으으으…….’

시몬은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주문을 되뇌며 품 안에 손을 넣고 말했다.

“그, 그, 그리고…….”

붉은 장미꽃 하나랑 리본으로 묶인 편지를 내밀었다.

“뷔노… 님을 생각하면서 준비, 했어요.”

어색하게 내민 팔은 경직돼서 뻣뻣했다. 시몬은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로 최대한 당당하게 뷔노를 보며
회심의 일격을 날렸지만, 뷔노의 표정은 무표정 그 자체였다.

“…….”

시몬은 팔을 내민 상태에서 어떻게든 버티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기다렸다. 여전히 반응이 없자, 결국
그는 살짝 시무룩한 목소리로 물었다.

“벼, 별로예요?”

그제야 뷔노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 꽃을 안 좋아해서.”

‘꽃을 안 좋아한다니……!’

“물병에 담아두어도 금방 시들고, 마땅하게 놔둘 자리도 없고.”

그 말에 시몬이 충격에 입을 벌렸다. 시몬은 꽃을 아주 좋아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상대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선물을 준비했다는 게 두 번째였다.
“그, 그럼 꽃은 그냥…….”

시몬이 슬쩍 팔을 내리면서 꽃을 도로 품에 넣으려는데 뷔노가 쏙 뽑아갔다.

‘응?’

“줬다 뺏으려고?”

“아니, 그, 싫어하신다길래.”

“싫어한다고 한 적은 없는데.”

“네?”

꽃은 얌전히 뷔노의 정장 앞주머니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시몬이 불쑥


질문했다.

“좋, 좋아하는 선물은 뭐예요?”

뷔노는 익숙한 질문인 것처럼 바로 대답이 나왔다.

“별로 없는데.”

“그, 그래도요. 아, 물론 말하기 싫으시면 안 해도 되지만…….”

턱을 괸 뷔노는 우물쭈물하는 시몬을 내려다보더니 의외로 대답을 해주었다.

“와인은 좋아하지.”

‘맞아, 와인 애호가랬지.’

“좋아하시는 브랜드가 있으신가요?”

“브랜드는 별로 안 따지는데, 고급 아이스 와인에 호박 향과 민트 향, 거기다가 파슬리를 얹으면


최고지.”

와인에 호박? 민트? 파슬리?

‘독특…한 입맛이구나.’

“아… 다음에는 꼭 그걸로 준비할게요.”

뷔노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래, 그러면 같이 마시지.”

“네? 아, 저, 저는…….”

사실 시몬은 와인도 호박도 민트도 파슬리도 좋아했지만, 그것을 동시에 먹는 것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뷔노 앞에서 차마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차 밑쪽 굴곡진 부분에서 책을 꺼낸 뷔노는 그 안에 꽃잎을 툭툭 뽑아 종이 사이에 넣었다. 그것을 본


시몬이 밝게 말했다.
“책도 좋아하시나요?”

“응?”

“아, 그게, 제가… 제가 좋아해서 저도 모르게…….”

뷔노는 시몬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책을 도로 꽂아 넣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싫진 않지.”

“그, 그럼…….”

시몬은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에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다음에는 책갈피를 드릴게요! 책을 좋아하신다니까.”

뷔노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조금 전까지 우울해하더니 시몬은 금방 다시 밝아졌다. 뷔노는 다정하게


웃으며 시몬을 칭찬했다.

“밟을 때마다 도로 일어나서 살아나는 게 잡초랑 똑같네.”

시몬은 잡시 입술을 벌리고 멍하게 있다가 조용히 읊조렸다.

“…죄송합니다.”

뷔노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칭찬이야.”

“…감사합니다.”

하지만 시몬은 여전히 기분이 가라앉아 보였다. 뷔노는 제 말에 문제가 있었나 돌이켜봤지만, 딱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얌전해지니 조용해서 좋았다. 뷔노는 본래 조용한 것을 좋아했다. 확신도 없이 매번 더듬거리며


우왕좌왕하는 것보다.

뷔노는 다시 축 처진 시몬을 보며 말했다.

“이건 별로 재미없네.”

그렇게 말하면서 뷔노는 시몬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시몬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아주 강하게 빼냈다.
몸서리치는 모습에 뷔노가 눈썹을 들어 올리자, 시몬이 식은땀을 흘리며 저도 모르게 다시 변명을
시작했다.

“아, 아파서…….”

손가락이 닿은 정도였는데 아팠다니, 안 하느니만 못한 변명이었다.

“…….”

뷔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눈치를 보던 시몬이 조심스레 물었다.

“처음 차에서 뵀을 때부터 표정 아, 안 좋으신 것 같아서……. 괜히 저 때문에, 기, 기분 더 상하셨나요


……?”
여전히 그는 말이 없었다. 시몬은 다시 죽음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머리 위로 천사들이 종을 댕댕
울리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

뷔노는 조용히 제 턱을 쓸고 있었다. 그는 긴 다리를 쭉 뻗으며 구두를 까딱였다.

“기분 상한 거 맞아.”

뷔노는 평소에 하듯 입꼬리를 의식적으로 끌어 올렸다. 그러자 얼굴에 근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책임지고 기분 좋아지게 해봐.”

“저, 저…….”

뷔노가 시몬의 목 뒤로 오른팔을 둘렀다. 나머지 왼손으로는 시몬의 앞섶을 더듬더니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갔다. 손이 어찌나 능숙한지 벌써 단추 세 개가 풀렸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

“저, 아, 그… 채, 책이랑…….”

“계속 말해봐.”

“호, 호박 민트 파슬리 아이스 와인이랑……!”

이제 셔츠 앞섶의 단추가 다 풀려 휑해졌다. 시몬의 가슴팍을 뷔노가 가볍게 쓸었다.

시몬은 어쩌지도 못하고 뷔노의 조직원으로 보이는 운전기사를 바라봤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였다.

‘보는 사람도 있는데!’

“공개적인 건 취향이 아니라고 하셔, 셨, 었, 잖아요?!”

뷔노의 손이 등을 더듬자 시몬은 한 글자씩 끊어서 외치다가 몸을 움츠렸다. 시몬은 양팔로 몸을 가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저, 이런 데서 하면 창피해서 죽을지도 몰라요!”

한번 창피해서 죽게 만들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뷔노는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뭘 하는데?”

“네?”

뷔노는 시몬의 목 뒤에 둘렀던 팔을 조금 더 뻗어서 옆에 있는 버튼을 건드렸다. 그러자 캐비닛이 열리고


냉기가 피어올랐다.

차 안에 있는 와인 보관고였다.

거기서 서늘한 와인을 꺼내며 뷔노가 말했다.

“그래, 내가 아까 좋아한다고 했던 건 와인이라고.”


뷔노의 검지가 가슴에서 쇄골, 목을 타고 올라갔다. 쿡, 볼을 찌른 뷔노가 씨익 웃으면서 물었다.

“무슨 생각했어?”

뷔노가 속삭이자 시몬이 수치스러움에 파르르 떨었다. 시몬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은 술집에 갈 시간적 여유도 없고, 여기서 한잔하려고 했는데.”

뷔노가 시몬의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시몬은 뷔노와 눈을 맞추지도 못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뺨에는 열꽃이 피어올라 화끈거렸다.

“네가 그리 바란다니 들어줘야겠네.”

“네? 아, 으읏…….”

차가운 와인이 쪼르륵, 시몬의 목을 타고 흘렀다. 뷔노는 와인이 시몬의 하얀 셔츠에 닿기 전에 입을


대서 음미하듯이 마셨다. 입을 뗄 때는 혀로 살짝 건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몬은 낯선 감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쪼륵.

다행히 이번에는 시몬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잔에 와인이 따라졌다. 붉은 액체가 유리잔 안을 메우자 차
안에 와인 향이 훅 풍겼다.

시몬이 그걸 유심히 바라보자 뷔노가 물었다.

“마시고 싶어?”

“아, 아뇨. 술은 안 마셔요.”

“그러면 왜 술집에 있었어?”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시몬의 동공이 커졌다.

“그, 그건 뷔노를 보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뷔노는 피식 웃더니 와인 잔을 몇 번 흔들었다. 그때 와인병 라벨이 시몬의 눈에


들어왔다.

“론?”

“뭐?”

뷔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아니. 론 와인이구나. 해서.”

‘뭐라고 부를지, 호칭을 알려주세요.’

‘호칭? 론.’

과거의 일이 머리에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뷔노(Vino)는 와인이라는 의미. 그걸 깨달은 시몬의


표정이 묘해졌다. 뷔노는 시몬을 잠시 보다가 와인 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이 정도로는 기분이 안 좋아지네.”


그 말에 시몬이 뷔노의 눈치를 보았다.

“시나몬, 내 기분 좋아지게 도와줄래?”

시나몬이라는 말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그냥 우연에 불과한 걸 너무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네? 네.”

순진한 얼굴로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뷔노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뷔노는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서,
그걸로 시몬의 눈을 가렸다.

“어, 뷔, 뷔노……?”

“그럼 가만히 있어.”

얌전히 뷔노가 하는 대로 손길을 받아들이던 시몬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누, 눈은 왜 가리시는 거예요? 안 보여요…….”

“잘됐네.”

뷔노는 그 상태로 시몬의 셔츠를 한층 더 끌어 내렸다. 하얀 어깨가 훤히 드러났다.

“뷔, 뷔노?!”

그때,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시몬이 불안한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뷔노는 손목시계를
흘끔 봤다.

‘벌써 정각인가.’

안전벨트가 목을 긁는 감각이 느껴졌다. 뷔노가 시몬의 얼굴 옆에 팔을 대자, 시몬이 바르작거렸다. 의미


없는 움직임이었다.

“이, 이건 아니에요. 다들 기도할 텐데, 저, 저도…….”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아무리 그래도, 차 안에서, 대낮에, 심지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
옆에서 할 짓이 아니었다.

신앙심으로 똘똘 뭉친 시몬이 용기를 내어 뷔노를 슬쩍 밀쳤다. 그러나 돌덩이 같은 몸은 어지간한


힘으로는 떠밀리지 않았다.

“아, 기도 시간이었나? 하긴 아무리 나라도 감히 기도를 방해할 순 없지.”

시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뷔노의 손은 계속해서 시몬의 옷을 끌어 내렸다.

“저… 뷔, 뷔노 님?”

눈이 보이질 않으니 모든 상황이 예상되지 않고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시몬은 파르르 떨었다.

“이, 이러면 기도를 할 수가…….”

“입을 막은 것도 아닌데 왜 못하지?”

아. 까먹고 있었다는 듯 뷔노가 소리를 내었다. 뷔노는 시몬의 양손을 감싸 쥐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시몬이 멍하고 있는 사이에,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웃은 건가?

“마음껏 해.”

팔을 타고 손목을 넘어선 줄은, 시몬의 양 손바닥을 맞붙여 묶어버렸다. 시몬은 너무 어이가 없어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앞에서는 딱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덜컥―

차가 중간에 정차한 건지 몸이 앞으로 쏠렸다. 시몬이 뷔노의 품 안에 안긴 형색이 되자, 시몬은


벗어나려고 했지만 손이 묶여있어 거동이 불편했다.

벗어나려고 한 몸짓이었는데 얼떨결에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거린 게 되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시몬에게


뷔노가 어르듯 말했다.

“보채지 말고.”

차 창문은 선팅이 되어있지만 정차하면 안이 들여다보일 정도는 되었다. 지금도, 도로에서는 사람이 걸어
다니고 있을 터였다. 그 사람들 중 누군가 이 꼴을 보게 된다면?

시몬은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뷔노가 시몬을 잡아서 가려주면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뷔노의 몸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뷔노는 옆자리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뷔, 뷔노 님!”

“왜?”

교회의 종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시몬이 귀까지 빨개진 채 호소했다.

“제발, 옷 좀 올려주세요.”

“보기 좋은데 왜.”

도리어 뷔노는 시몬의 바지 버클을 풀어 끌어 내렸다.

“정장을 더럽힐 순 없지.”

시몬은 다리를 바르작거렸지만 금세 발치에 바지가 떨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뷔노는 손바닥으로 시몬의
성기를 꾹 눌렀다. 이미 단단해진 부분을 누르자 시몬의 상체가 저절로 숙여졌다.

“헉!”

“삼각은 싫어? 맨날 사각이네.”

“…그, 그게…….”

“삼각으로 사줄까?”

“아, 아뇨, 그게… 삼각은… 아, 안 맞아서…….”

그 말을 하면서 시몬은 발을 동동 굴렀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뷔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나


곧 시몬의 성기를 가지고 놀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이 크기면 그렇겠네.”


뷔노는 시몬의 속옷 안쪽 성기 끝이 닿는 부분에 얼룩이 진 걸 발견했다. 쿠퍼액이 흘러나와 이미 젖은
것이다. 뷔노는 그 부분을 엄지로 밀어내듯 만지작거렸다.

그는 속옷 역시 천천히 끌어 내렸다. 시몬은 다리 쪽에서 속옷이 움직이는 걸 느끼고는 시몬이 몸을


움츠렸다. 앞좌석에서 하체까지는 보이지 않으리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시몬은 묶인 팔을 겨우겨우 들어 얼굴을 가렸다. 뷔노는 시몬의 가슴팍을 손으로 쓸었다. 예상치 못한
자극에 피부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쇄골의 도드라진 뼈 부분을 따라 문지르던 뷔노는 목을 타고 올라, 턱선을 스치듯 만졌다.

“기도해, 시몬.”

무심한 듯 오만한 목소리에, 시몬의 머리가 잠시 새하얗게 변했다.

“이, 이 상태로요?”

“못 하겠어? 신앙심이 부족하네.”

“아, 아니에, 흐읏……!”

시몬이 말을 시작하자마자 뷔노가 아래를 매만졌다.

“아! 흐으…….”

시몬의 목소리가 너무 높아져 삑사리가 났다.

뎅, 교회의 종이 한 번 울렸다. 종이 울리는 소리에 머리가 물론 몸 전체가 울리는 것 같았다. 멍한


시몬의 표정을 보면서 뷔노는 웃었다. 시몬이 봤더라면 악마를 떠올렸을 웃음이었다.

“기도문을 잊기라도 한 건가?”

“나, 남이, 보는, 앞에서!”

“잊었으면 알려줘야지. 자, 따라 해. 당신의 신실한 종으로서…….”

“뷔노 님!”

“당신의 신실한 종으로서.”

두 번 거듭해서 말하자 시몬의 입을 벌린 채 달싹였다.

“다, 당…의 신실…한 종…서.”

“안 들려.”

“다, 당신의, 흣, 신실한 종으로서.”

“왜 이렇게 말을 더듬어.”

뷔노가 시몬의 입술을 엄지로 훑었다. 시몬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한 번으로 되겠어?”

“흐으, 으, 아, 아니.”
“너도 또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한 번 더 해. 당신의 신실한 종으로서, 도구로서 쓰일 것을
맹세합니다.”

“다, 당신의 신실하, 조, 으로서, 도구, 쓰일 것을 맹세합니다.”

“대충이네. 날라리 신도 같으니라고.”

뷔노가 시몬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렸다.

“좋아?”

“너무 좋아요…….”

시몬이 신음을 흘렸다. 정말 신이 보셨더라면, 감히 용서하지 못할 장면이었다. 사정감 직전에 뷔노가


손을 멈췄다.

“아, 안 돼요!”

“정말로 남이 보는 앞에서 갈 작정이야?”

시몬은 으, 아, 소리를 내다가 결국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몸은 땀으로 푹 젖은 채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머릿속에 마지막 이성의 끈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흐, 아…….”

시몬이 입술을 혀로 핥다가 입을 벌렸다.

“솔직하게 말해.”

“가, 가, 게 해, 주세요…….”

“사람들 앞에서?”

“…네.”

“변태네.”

툭 던진 듯한 말에 시몬이 헉 소리를 내었다. 뷔노의 성에 차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럽기도 하니


봐주기로 했다.

“아윽, 뷔노!”

손이 빨라지자 시몬이 숨을 참았다. 시몬은 다리를 안쪽으로 뒤틀다가 사정했다.

액이 흘러나와 그 근처를 흥건히 적셨다. 뷔노는 물티슈를 뽑아 손과 주변을 닦아 준 뒤, 눈에 묶었던


넥타이까지 풀어주었다.

넥타이에 눈물이 묻어있었다. 젖은 부분을 문지른 뷔노가 다시 목에 넥타이를 걸었다. 시몬은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셔서 눈물을 흘렸다.

“흐으…….”

신음을 참느라 목이 아팠다. 시몬은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눈 안에 들어온 광경은, 차 문이 반쯤


열려있는 모습이었다. 뷔노의 뒤에서 빛이 비치었다. 다급하게 시몬이 뷔노의 손을 잡았다.
“아, 안 돼요! 열지 마세요!”

“왜?”

운전기사에 모자라서 행인에게까지 이 꼴을 보여야 한다는 건 말도 안 됐다. 시몬은 파르르 떨며 뷔노에게


애걸복걸했다.

“오, 옷, 입고.”

‘그러고 보니 여기는 어디지?’

생각보다 어두운 공간은 밖의 차도보다는 지하 주차장처럼 생겼고, 운전하던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멍하니 입을 벌리는 시몬을 보면서 뷔노가 말했다.

“진짜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한다고 생각했어?”

“그, 그럼…….”

시몬은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주차하고 나서… 하신 거예요?”

“왜, 누가 본다고 흥분했는데 아니라니까 식어?”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

뷔노는 건성으로 대답하더니 먼저 걸어 나갔다.

시몬은 허겁지겁 속옷을 끌어 올리고 바지를 챙겨 입었다. 셔츠는 단추를 채우지 못한 채, 그저 양손으로
잡아서 모았을 뿐이었다. 뷔노는 이미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얼른 와, 시나몬.”

시나몬. 그래, 자신은 시나몬이었다. 지금은 하느님의 신실한 종도 아닌, 그저 클로버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시나몬. 시몬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7. 모자와 커튼콜

주차장에서 내린 시몬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풍경을 마주했다. 쌩쌩 지나다니는 차들, 클래식한


옷을 입고 빠르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 고층 건물들과 분수대까지.

블랙리버. 헤르게임 외곽에서 차로 15 분을 달려 나가면 올 수 있는 이곳은, 헤르게임과 대조적으로 나라


최고의 부촌이었다.

‘여긴…….’

시몬에게도 낯익은 공간이었다. 헤르게임에 치료받을 만한 병실이 없었기에, 시몬의 아버지는 블랙리버의
병실을 이용했다. 대신 그 병원비는 천문학적이었다.

‘잘 지내고 계신 거겠지……?’

클로버 병원비를 제대로 대고 있을지 도통 확신이 들지 않았다. 여기 온 김에 한 번 뵐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클로버가 이를 허락할 리 없다.

‘네가 잘못하면 네 애비가 잘못될 줄 알아.’

클로버에서 협박할 때 누누이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생각하면, 아버지는 아직 괜찮으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했다.

시몬은 서둘러 뷔노를 따라갔다. 뷔노는 가장 화려한 건물 중 하나의 앞에 서있었다.

시몬은 고개를 숙이고 숨을 헐떡이다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는 생각도 없이 뛰다가 마주한 모습에
당황했다.

‘잠깐 여기는… 호텔이 아니네?’

당연히 조금 전 차에서의 행위를 이어 갈 거라 지레짐작했던 시몬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오페라하우스 메트로폴리탄 블랙리버

글씨부터 근사하게 적힌 이곳은 블랙리버 예술가의 중심지였다.

건물의 정면에는 기하학적 장식이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붙어있었다. 그 창 너머로는 고급스러운


붉은 벽지, 대칭으로 걸려있는 명화와 샹들리에를 틈으로 엿볼 수 있었다.

벌써 어두워지는 밖과 다르게 주황빛 불이 새어 나오는 직육면체의 큰 건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전구처럼


빛났다.

“오랜만이네.”

“저를 부른 게 오, 오페라를 보기 위해서였…나요?”

“왜, 다른 걸 기대했어?”

“아, 아뇨!”

시몬은 긴장이 풀어지며 대화 주제를 바꾸려 애썼다. 원래 오페라를 좋아했기에 설레는 말투로 얘기했다.

“자주 오페라를 보러 오셨나요?”

“예전에는. 후원도 했었고.”

‘이제는 하지 않지만.’

뷔노는 뒷말을 삼켰다.

“오페라를 좋아하시나 봐요.”

상황이 어려워진 후로 오지 않았을 뿐 시몬은 오페라를 무척 좋아했다. 뷔노가 조금 더 인간적으로 보였다.


조금 전 차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아무렇지 않게 총을 쏴대는 사람의 취미가 오페라 관람이었다는 게
의외라고 느껴져서일지도 몰랐다.
“별로. 싫어하는 편이지.”

“네?”

시몬은 입을 오므렸다.

“나보다는 마더께서 좋아하셔서.”

“앗, 그렇군요…….”

“너는? 좋아해?”

“네, 좋아해요.”

어릴 때는 어머니 아버지와 종종 즐겨 봤었다. 시몬은 그때 일이 떠오르자 꽃이 피어오르듯 웃음이


피어올랐다.

“…….”

뷔노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몬이 의아해하며 뷔노의 눈길을 알아차리자 말없이 눈을 돌렸다.

시몬은 왜 뷔노가 자신을 쳐다봤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깜짝 놀랐다. 저도 모르게 뷔노 앞에서 풀어져


있었다.

‘게다가 방금 나 돌려서 고백하는 거 같았어. 그래서 쳐다보신 건가!’

오해하시는 건 아니겠지, 괜한 걱정을 하며 시몬은 뺨을 손으로 식혔다.

둘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서부터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몸을 숙이고 인사했다.

“세계 최대, 세계 최고의 오페라하우스 메트로폴리탄 블랙리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양쪽으로 펼쳐지는 문 안으로 뷔노가 들어가면서 시몬에게 말했다. 최고의 오페라 가수와 지휘자 중
여기를 거쳐 가지 않는 자는 없다는 명성답게, 복도에는 화려한 캐스팅을 증명하는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커다란 규모와 화려한 장식들에 놀란 시몬은 입을 벌렸다. 클로버 구역의 오페라하우스보다 두세 배는


높은 천장이 그 고급스러움을 배가했다.

“어서 오십시오, 실버 님의 초대로 오셨군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실버?’

시몬은 그게 뷔노의 가명인가 아리송했으나 물어보진 않았다. 뷔노가 티켓을 내밀자 제복을 입은 직원이
정중한 태도로 자리까지 데려다주었다. 둘이 안내받은 자리는 거의 맨 중앙 열의 박스석이었다.

‘29 번 박스석이라…….’

뷔노는 검은 모자를 좌석 번호에 해당하는 옷장에 내려놓았다. 시몬은 외투를 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혹시라도 자국이 남아있을 게 걱정되었다.

박스석은 푹신한 2 인용 소파가 놓여있는 자리로, 양옆은 칸막이로 막혀있었다. 그 왼쪽에 뷔노가 앉고
오른쪽에 시몬이 앉았다. 앞이 훤히 보이는 시야에 시몬이 감탄했다.

‘보통 후원자들이나 앉는 자리인데…….’


꽤 부유한 집 자식이었던 시몬도 이런 좌석에는 처음 앉아보았다. 시몬은 재킷의 두 단추를 꼼꼼히 채우고,
다소곳이 자신의 무릎에 두 손을 올렸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앞자리가 다 비어있네요.”

둘은 비어있는 공연장 VIP 좌석에 덩그러니 외딴 섬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싼 좌석들은 꽉 차있다는
점에서 조금 이질적이었다.

“아마 자리 주인은 다 있을 거야. 귀한 분들은 조금 지각을 하는 법이지.”

뷔노는 팔짱을 낀 채 좌석 오른쪽, 시몬이 있는 방향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저 얼굴을 구경하려던


것뿐이었는데, 아까의 일 때문인지 처음에는 귀만 빨개졌다가 점점 얼굴부터 목까지 붉은 기가 번져갔다.

“저, 왜, 그렇게…….”

좀 재밌네. 은근하게 웃은 뷔노는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이대로 아무도 안 오는 것도 나름 괜찮겠는데. 이것저것 할 수도 있고.”

“네, 네?! 뭐, 뭐, 뭘 하시려고…….”

대충 던진 말에도 과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뷔노는 시몬의 목을 끌어와 뒷목에 입을 맞췄다.

멀리 있는 사람들에겐 안 들리겠지만 쪽쪽 빨아들이는 소리가 시몬에게는 적나라하게 들렸다. 목의 솜털을


곤두세운 채 시몬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뷔, 뷔, 노…….”

뷔노는 가느다란 사슴 같은 목을 살짝 깨물었다.

“이젠 이름 잘 부르네?”

목 근처에서 말하자 숨결이 느껴졌다. 시몬이 목을 빼지도 못한 채 바르르 떨었다. 뷔노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입을 뗐다.

“저번에 만든 이후로 좀 옅어진 거 같길래.”

뷔노는 다시 붉어진 자국을 검지로 문질렀다. 시몬은 얼굴부터 목까지 새빨개진 상태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2 층, 3 층 좌석까지 있는 오페라하우스에서 한 짓이라 더욱 그랬다.

‘위에서는 보였을 텐데……!’

뷔노는 시몬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끌어모아 한 손으로 잡아보았다.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손에 닿아오자
기분이 좋았다.

“다음에는 머리 묶고 와.”

귀에 속삭인 시몬이 목을 뻣뻣하게 굳힌 채 말했다.

“그, 그, 그건.”

극장의 뒤쪽 문이 열렸다. 여러 관객들이 들어왔는데, 수많은 정치계 인사들이었다. 그들이 모두 들어와


좌석에 앉자 그와 동시에 공연장의 불이 꺼지고 붉고 두꺼운 커튼이 열렸다. 오페라의 시작이었다. 팔을
시몬의 목에 두른 뷔노는 앞자리에도 다 들리게 속삭였다.
“조금 더 일찍 시작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

그 말에 몇 명이 뒤를 돌아 뷔노를 쳐다보았다. 허 참, 등의 소리를 냈지만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페라가 시작된 후로 시몬은 빨려 들어갈 듯이 집중해서 보았다. 반면 뷔노는 보고 있는 건지 아닌지


그다지 관심 있어 보이는 태도는 아니었다.

마더가 외국어를 교육한다는 이유로 매번 뷔노를 데려왔던 게 지루함의 원인이었다. 대부분의 오페라는 세
번 이상 본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화제작이라면 더더욱.

오페라 마술피리, 그 안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는 아리아가 시작될 때였다. 끝도 없는


고음과 배우의 카리스마가 두드러지는 밤의 여왕의 두 번째 아리아.

시몬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팸플릿에는 이렇게 서술이 되어있었다.

마술피리 제 2 막 6. 지옥의 복수심이 내 마음에 끓어오르고

―밤의 세계의 여왕, 그가 자신의 딸에게 자라스토를 죽이라 명한다.

지옥의 복수심이 내 마음에 끓어오르고,

죽음과 절망이 내 주위에 불타오르네!

네가 자라스트로가 죽음의 고통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너는 더 이상 나의 딸이 아니다.

너는 더 이상 나의 딸이 아니다, 그 대목이 끝나자마자 뷔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시몬은 좀체 표정 변화가 뚜렷하지 않은 뷔노가 눈에 띄게 표정이 굳었다는 점에서 당황했다. 너무 훌륭한


가창 실력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데, 뷔노의 귀에는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던 걸까.

영원히 의절하고,

영원히 저버리고,

영원히 부수리라

자연의 모든 인연을.

네가 자라스트로가 죽게 만들지 않는다면!

들어라, 들어라, 들어라, 복수의 신들이여, 들어라, 마더의 맹세를!

“…….”

감동한 사람들이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쳤다. 연주자들은 일부러 관객들이 박수를 치는 걸 기다리다가
연주를 다시 시작했다. 시몬은 일어나서 박수를 칠까 고민했지만 뷔노가 일어나지 않았기에 그만두었다.

“뷔노, 어디 불편한가요? 혹시 아프거나…….”

“아무렇지도 않아.”

답하는 말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시몬은 요 근래 있었던 일 때문에 자신이 예민해진 건가 싶었다.
결말에서 자라스트로가 밤의 여왕을 소멸시킬 때까지도 뷔노는 팔을 등받이에 걸친 채 느긋하게 있었다.

“뷔노?”

커튼콜이 울리자마자 뷔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수들이 무대를 오가는 끝까지 박수를 쳐줘야 하는 게
예의였기에 시몬은 어리둥절했지만 서둘러 뷔노를 따라 나갔다.

그런데 뒤에서 정갈한 구두 소리가 뒤따랐다. 커튼콜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나간 건 뷔노와 시몬만이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자 유별나게 눈에 띄는 남자가 보였다. 단순히 단정한 이목구비 때문은 아니었다. 남자는
백발일 뿐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시몬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정장을 다시 내려다봤다.

‘나도 차라리 하얀색으로 해달라 할 걸 그랬나… 어라?’

시몬은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시몬이 눈을 크게 뜨고 흰 정장의 남자를 자세히 살필 때, 뷔노는 턱을


바짝 당기고선 눈을 가늘게 떴다.

“드디어 오셨군.”

시몬은 평소라면 뷔노의 반응에 궁금증을 가졌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뷔노가 시몬을 살피자
그가 흰 정장의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뷔노도 그 시선을 따라 다시 한번 실버를
바라봤다.

평소와 다름없는 세련된 미소였지만, 어째 터지기 직전의 폭탄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모자를 두고 가셨습니다.”

하얀 정장의 신사는 그대로 시몬의 앞을 지나쳤다 남자는 빙긋 웃으며 뷔노의 검은 모자를 내밀었다.
뷔노는 무표정으로 그 손을 내려다봤다. 모자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뷔노가 차갑게 웃었다.

“어떻게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까, 실버.”

실버는 뷔노의 손에 모자를 쥐여주며 자연스레 속삭였다.

“뭘요, 화만 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무리한 요구를.”

신사는 아름다운 분홍빛 눈을 곱게 휘며 뷔노에게 인사했다.

“제가 지각을 해서 걱정했습니다. 다른 일행분이 있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지루하진 않으셨습니까?”

“덕분에 즐겁게 지냈네.”

실버는 웃으면서 말했다.

“저 역시 지난번에 주신 선물로 한동안 바쁘게 지냈습니다.”

“좋아해서 다행이네, 실버. 나도 네 선물이 마음에 들었거든. 돌려서 말하느라 고생이 많았겠어.”

뷔노의 대답에 실버는 하얀 중절모를 고쳐 썼다. 오페라의 내용은 뷔노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했다.
‘선물?’

시몬은 두 사람의 기 싸움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단어에 집중했다.

‘선물도 주고받고 실버라는 건… 애칭인가?’

예전에 생일 파티에서 마주쳤던, 그 소년. 자신이 아는 그의 본명은 실버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느 쪽을 정하시겠습니까?”

본격적인 접선을 위한 장소와 시간 중 어느 것을 고르겠냐는 질문이었다. 뷔노는 낮게 읊조렸다.

“플레져 가든.”

뷔노가 다음 접선 장소의 이름을 말하자 실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곳은 실버 본인이 다른 이름으로


운영하는 ‘찻집’이었기 때문이다. 실버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23 일 오후 2 시.”

그건 분명 작은 목소리이긴 했다. 그러나 시몬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뷔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뷔노는 실버가 몸을 떼자 뒤늦게 모자 속에 무언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뭐지?”

그것은 한 송이의 연분홍 장미였다. 가시는 곱게 제거되었고, 리본으로 묶여있었다. 게다가 개량된
품종인지, 유달리 크기가 컸다.

“선물에 대한 답례입니다.”

“…….”

뷔노는 장미 끝을 대롱대롱 잡고 흘겨보았다. 실버의 눈과 마찬가지로 역시 연분홍색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본인의 눈 색을 강조하기 위해서 장미를 고른 것이 아니었다.

그 본래 의도는 선물을 받은 장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눈치챘다. 꽃을 본 시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건…….’

뷔노는 모르는 눈치였지만, 꽃에 관심이 많던 시몬은 장미의 여러 꽃말을 알고 있었다. 시몬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연분홍 장미의 꽃말은 ‘그대만이 내 마음을 아네.’였다.

“잘 보관하도록 하지.”

뷔노는 바로 꽃을 바닥에 버리며 뒤돌아서며 말했다. 실버는 개의치 않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런, 마음에 안 드셨나 봅니다. 다음에는 더 신경 써서 보내겠습니다.”

“굳이 쓰레기를 늘릴 필요가 있나?”

“그래야 제 제안을 잘 고려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제안?’

뷔노는 그저 피식 웃으며 상대를 같잖다는 듯이 보았지만, 시몬은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신경 쓰였다.


그때, 시몬과 실버의 눈이 처음으로 마주쳤다.

분홍빛 눈동자는 따뜻한 색감과 다르게 차가운 느낌이었다. 시몬은 저도 모르게 굳었다.

뷔노가 이를 발견하자, 실버는 바로 뷔노에게 달콤하게 웃었다. 뷔노는 그제야 시몬을 데려온 용도를
떠올리고, 시몬의 두 눈을 한 손으로 덮어 실버의 살기로부터 가려주었다.

“내 애인이 조금 여려서 말이야. 그만 가주겠어?”

“아, 애인이었나요?”

“왜?”

“아뇨, 그저 제 예상과는 달라서. 평소처럼 로미오를 데리고 오신 줄 알았습니다.”

‘로미오’라는 단어에 시몬은 저도 모르게 욱했다. 하지만 제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어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실제로도 뷔노와 시몬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나.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과 노리개 정도일까.
로미오와 실상 별반 차이도 없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실버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뒤늦게 따라온 사람들과 합류했다. 실버가 떠나기 직전에 시선이 잠시
시몬에게 머물렀다.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다. 그제야 자신의 주제가 완벽하게
파악됐기 때문이다.

집은 몰락하고, 옆에 있는 뷔노와는 애인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사이. 스스로 아버지의 병원비를 낼


능력도 없어 조직에는 빚까지 진…….

“다녀오셨습니까?”

차도에서 조직원들이 미리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뷔노는 고개를 끄덕이고 검은 모자를 푹 눌러썼다.


실버를 만나는 날, 23 일 전까지 무슨 수를 쓸 필요가 있었다.

정장을 입은 조직원들이 붙어서 서자 뷔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약 유통처 알아내는 건?”

시몬은 조직원들의 무리 맨 끝에 뒤처진 채 따라오고 있었다.

‘쟤는 왜 축 처져있지?’

시몬 쪽을 힐끔 본 조직원이 뷔노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게, 분명 차량이 늘긴 했습니다만, 다른 구역에서 오는 차량 중 수상해 보이는 차량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여행객들까지 다 뒤졌어?”

“네. 관광객이건 화물 수송 트럭이건, 심지어 공무원까지도 의심스러워 보이면 다 확인해 봤습니다.”

“공무원까지 뒤진 건 잘했어.”
실버가 이끄는 다이아 조직은 정치계 쪽에 연줄이 두터운 걸로 유명했다. 공무원으로 위장해서 노새(마약
유통책)를 푸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뒤졌는데 안 나왔단 말이지.”

차가 아니라 사람으로 운반을 하고 있나? 그렇지만 탐지견을 풀어놓은 걸 생각하면 그렇게 많은 양을


운반할 수 없다. 몸속에 조그마한 양의 가루를 넣는 게 다일 텐데, 그런 것치고는 지금 오가는 추정량이
지나치게 많다. 뷔노는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차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면…….

“너희들이 검사 안 해봤을 법한 건 이제 하나밖에 없지.”

“뭔가 알아내신 겁니까?”

“아마도. 어디를 오가서 이쪽으로 오는지, 확실한 루트를 알아내려면 더 걸리겠지만.”

뷔노는 순간 느릿하게 발걸음을 걷더니 시몬도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이아와 조직이 이어지게 될지도 모르니까.”

‘다이아와 합병?’

시몬이 떠먹여 주듯 전해진 정보에 당황했다. 뷔노는 뒤를 돌아 시몬을 보며 말했다.

“내가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네? 그럼 저는…….”

시몬은 당황했다. 뷔노의 차 안에 부착했어야 할 위치추적기를 아직 못 붙였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요즘


유효한 성과를 내지 못해 클로버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다.

“자, 잠깐만요……!”

뷔노는 태연하게 차에 올라탔다. 쾅, 매정하게 닫힌 문에 시몬이 손대려 하자 조직원 중 한 명이 막았다.

“위험합니다.”

선탠이 되어있는 차 창문이 쭉 내려갔다. 힘이 들어간 턱, 살짝 꺾인 아치형의 눈썹. 뻣뻣한 한쪽 입매.


기분이 좋은 듯, 좋지 않은 듯 아슬아슬한 감정이 시몬에게 전해져왔다.

“혼자서는 길을 잃으려나.”

나른한 목소리에 시몬이 의구심을 표현할 새도 없이, 뷔노는 주위에 있던 조직원 중 하나에게 말했다.

“근처 정류장으로 데려가 줘. 여기는 병원이 가깝던가?”

“네, 보스.”

머리를 한쪽으로 묶어 올린 여자, 그리고 사막여우 같은 눈매를 가진 여자가 고개를 숙였다.

“베이랑 레이가 데려다줄 거야.”

“가시죠.”
둘은 시몬의 양쪽 팔을 연행하듯 잡아 끼고 걸어갔다. 둘의 키가 워낙 큰 데다 시몬이 가벼웠기에,
시몬이 거의 공중에 뜨다시피 한 채로 갔다. 그는 팔을 흔들고 바둥거리며 말했다.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뷔노?”

“다음에 보지.”

뷔노는 차 창문을 올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블랙리버 메디컬 센터 앞 정류장.

헤르게임에는 자가용이 없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버스와 택시가 곧잘 오가곤 했다. 헤르게임에서


유일하게 눈감고도 시몬이 갈 수 있는 길이라면 아버지의 병실이 위치한 이 블랙리버 메디컬 센터와 집
사이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조직원 둘은 시몬을 붙잡고 구구절절 같은 길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시고 정확히 세 정류장 뒤에 벨을 누르셔야 합니다. 세 정거장 뒤입니다. 벨을


누르시고 내릴 때는 계단과 턱을 조심하시고 그 상태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십시오. 쭈욱 세 블록을 간 뒤
왼쪽으로 꺾으면 오른편에 자택이 있으실 겁니다.”

“…고마워요. 알아들었어요.”

그렇게까지 상세히 알려주지 않아도 아는데. 저번에 거짓말을 한 이후로 단단히 길치 취급을 받고 있었다.
조직원 둘은 시몬의 팔을 툭 놓은 뒤 말했다.

“잘 다녀오시길.”

‘무슨 소리지?’

시몬은 위의 고층 건물을 보았다. 그동안 숙소에서는 클로버의 감시 때문에 함부로 돌아다니질 못했고
뷔노와 함께 있을 때야 의사결정을 할 일이 없었는데, 지금이야말로 자유로운 때가 아닌가?

‘혹시 병원을 다녀오라고 일부러 보내준 건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뷔노가 한 번 구해준 이후로 뭐든지 해줄 거라 믿게 된 것


같았다. 게다가 뷔노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안단 말인가?

‘뒷조사하지 않는 이상…….’

시몬은 고개를 빠르게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그러나 기회는 기회였다. 시몬은 잠시 주춤거리다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밖을 클로버가 감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버지를 볼 수 있다는 거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시몬이 걸어가면서 바닥에 또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병원 바닥은 대리석으로, 한쪽 면이 아예 통유리로


되어있었는데, 둘 다 먼지 하나 붙어있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다. 시몬은 깔끔한 환경을 보면서 조금
안도했다.

문을 열고 직진으로 10 미터 정도의 거리에 병원의 카운터가 보였다. 줄을 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실에 사람이 준 모양이었다.
돈이 떨어지거나 병이 나았을 것이다. 시몬은 자신이 전자가 되리라는 불안한 짐작을 하며, 카운터로
다가가 간호사에게 물었다.

“108 번 병실 면회 가능할까요?”

시몬은 말하면서도 초조한 마음이었다. 이번 달이 이제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치료비를 낸 건 이번


달로 끝이었다. 이젠 생활비고 뭐고 없었다.

‘클로버에 빚까지 진 신센데 은행에서 돈을 빌려줄 리가 없어…….’

시몬은 동동 발을 굴렸다. 카운터에 있는 간호사가 물었다.

“성함이?”

“시몬 줄리어스 페르딘입니다.”

시몬 줄리어스 페르딘. 오랜만에 말한 풀 네임이었다. 자신의 이름, 어머니의 성과 아버지의 성 모두를


이은 문장이었다. 이제는 성은커녕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처지인데…….

‘보고 싶어.’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하니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시몬은 주먹을 가슴에 대고 눌렀다. 괜찮아.

“제임스 페르딘 환자분 뵈러 오신 거죠?”

아버지의 성함이었다. 간호사가 재차 묻는 말에 시몬이 살짝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병실 이동하셨어요.”

“예? 설마, 중환자실로…….”

이 병원은 워낙 위중한 사람만이 입원했다. 이 병원 안에서 중환자실로 옮긴다는 건, 삶이 하루 이틀


남았다는 걸 의미했다. 시몬은 불안감에 손으로 자신의 목을 만지작거렸다.

“중환자실? 아뇨, 독실로 옮기셨어요. 모르셨어요?”

“독실이요? 왜 독실로……?”

독실은 병원비가 세 배는 더 나갔다. 화들짝 놀란 시몬을 간호사가 이상하게 봤다.

“얼마 전에 옮겨달라는 요청이 있어서요. 추가 비용 지불하시고 옮기신 거로 압니다.”

“전혀 몰랐어요…….”

‘독실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했다. 혹시 클로버가 독실로 옮겼나? 그렇게 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알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중환자실로 옮기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시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21 번 방으로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

시몬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보았다. 예전 6 인실과 다르게 병실 복도는 문과 문 사이의 거리가


멀고 쾌적해 보였다. 이런 곳에서 아버지가 지낸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시몬은 119, 120 번 방을 지나가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121 번 방의 작은 창문 틈새를 본 시몬은
바로 기겁했다.

‘무, 무슨…….’

안에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시몬은 서둘러 뒷걸음질을 치고 문 옆에 몸을 기댔다.

‘클로버가 감시하고 있는 건가?’

뭔가 해코지를 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정장을 입은 사람은 병실 구석에서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그래도 시몬은 경계를 놓지 않은 채 관찰했다.

정장을 입은 사람은 꼿꼿하게 서서 시계를 보더니 병실 밖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다.

시몬은 그걸 보자마자 뛰어서 계단 쪽 벽 뒤편으로 숨었다.

‘들, 들어왔다.’

마치 금기의 영역을 들어오기라도 한 듯 긴장이 되었다. 시몬과 퍽 닮은 이목구비, 조금 는 주름살을


보며 시몬이 안도하며 말했다.

“주무시네…….”

그 말을 하자마자 시몬은 투명한 눈물방울을 아버지의 얼굴에 똑똑 떨어뜨렸다.

‘…울보네.’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환청처럼 울렸다.

‘왜 갑자기 그 생각이……?’

10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물론 시몬에게 크나큰 의미로 남아 추억에 한 점을 남긴 일이긴 했다.

‘아버지도 그분을 종종 챙겨주곤 했는데.’

시몬은 손수건을 꺼내 아버지의 얼굴에 묻은 눈물방울을 닦았다. 더 좋은 환경으로 온 덕인지, 아버지는


얼굴이 더 좋아 보였다. 복도 저 멀리에서 들리는 구두 굽 소리에 시몬이 병실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이제 슬슬 나가야겠지.’

“…시몬?”

아버지가 깬 줄 알고 시몬이 얼어붙었다가, 여전히 자는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잠꼬대로 중얼거리신 거구나.’

그냥 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탁자에 포스트잇과 펜을 발견한 시몬은 쪽지를 빠르게 적어 내렸다.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글씨체는 포스트잇을 가득 메우고 나서야 끝이 났다.
자신은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과 한동안 연락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내용. 입맛이 없어도 꼭 밥을 잘
먹어야 한다는 말과 주무셔서 얼굴만 뵙고 간다는 마지막 문장으로 마쳤다.

터벅, 터벅. 복도의 발걸음 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슬쩍 엿보자 아까 정장을 입은 인물이었다.

‘어, 어, 어쩌지!’

시몬은 손으로 가려지지 않는 머리카락을 가렸다. 그 후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병실을 떠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급히 내려간 시몬은 아까 정장을 입은 사람의 정체를 생각했다.

‘역시 클로버겠지……?’

아버지를 이렇게 두고 가도 되는 걸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빚을 갚지 않고 도망친다면,


그때야말로 클로버가 아버지에게 해코지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면회 요청하신 분이시네요. 도움 필요하신가요?”

카운터에서 시몬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다, 다음 달 병원비를… 혹시 연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죄송해요, 부탁드려요. 꼭 갚을게요. 몸 안에 장기를 팔 건 뭘 하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구해


올게요.’

시몬은 속으로 애걸복걸했다.

“체납은 곤란한데……. 일단 확인해 볼게요.”

카운터의 간호사는 툭툭 키보드를 두드렸다.

“어라.”

간호사의 표정이 변했다.

“이미 지불되어 있는데요?”

“네?”

시몬이 눈을 끔뻑거렸다.

“내시고 깜빡하신 건 아니에요? 이게 통장에서 저절로 빠져나가는 시스템이 오래된 것도 아니고,


익숙하지 않아서 그러시는 분들이 종종 있어요.”

“통장에 낼 돈 자체가 없었을 텐데…….”

“흠, 그래요?”

간호사는 몇 번 더 키보드를 두드렸다. 직, 직, 직, 인쇄기에서 살짝씩 끊기면서 종이가 나왔다. 시몬은


종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병원비 지불

8 월 19 일

지불한 자
: M

M 이라는 글씨까지 뽑히자마자 종이가 주르륵 흘러 나왔다. 간호사는 종이를 들어서 시몬에게 건네주었다.
병원비가 얼마인지, 치료비, 진료비, 기타 세금 등 자세한 사항이 종이에 적혀있었지만 지불한 사람에
대해서는 더 정보가 없었다.

“M……? 그게 다인가요?”

“아무래도 후원자분이 이니셜만 대고 가신 모양이에요.”

시몬은 혼란스러워졌다. 클로버가 아버지를 협박거리로 삼기 위해서 치료비를 낸 건가? 그런 것치고는


아버지의 사진 한 장 보내주지 않았었다. 당연히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원래 이렇게 후원받는 경우가 흔한가요?”

“아뇨, 거의 없죠.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말에 시몬은 더욱 알쏭달쏭한 기분이 되었다.

‘어쨌건… 한 달은 더 버틸 수 있어.’

클로버가 보내준 거면 어떻고, 다른 사람이 보내준 거면 어떨까.

아까와 달리 지금은 심장이 안도감으로 뛰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시몬이 미소를 짓자 간호사도 따라서 웃었다.

“잘됐네요.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저,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정말로 후원자분에 대한 정보는 구할 수 없나요?”

그 말을 하면서 시몬은 눈을 반짝 빛냈다. 간호사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으음, 소리를 냈다.

“이런 식으로 기부, 후원하시는 분들 같은 경우에는 신분이 노출되는 걸 꺼리시기도 해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그렇군요…….”

시몬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도와준 그 사람이 누군지가 궁금해 애타는 심정이었지만, 본인이
신분을 숨기고 싶은 거라면 어쩔 수 없었다.

8. 줄리엣은 없다

“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시몬은 잔뜩 경직된 채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렇게 차를 타고 왔다가, 갔다가 해놓고 추적기 하나를 못 달았다고? 너 추적기가 얼마만 한지 아니?
엄지손톱. 엄지손톱만 한 거 하나를 못 달아?! 엄지손톱을 뽑아서 달아도 열 번은 달았겠다!”

클로버 조직원은 엄지손가락을 마구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시몬이 위축된 채 기어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 죄송합니…….”

“알면 닥쳐!”

시몬은 꾹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성과를 낸 게 아무것도 없긴 했다. 정보 유출, 추적, 도청, 암살,
스파이의 요소들 중 그 어떤 것도 해내지 못했으니.

씩씩대던 조직원은 시몬의 얼굴을 보고 주먹질을 하는 시늉을 몇 번 했다.

“얼굴은 건드릴 수도 없고!”

그는 화를 꾹꾹 눌러서 참은 뒤 말했다.

“별다른 정보 알아낸 건 없고.”

“…저.”

“뭐.”

‘다이아와 조직이 이어질 수도 있고.’

‘23 일. 플레져 가든.’

시몬은 한 번 들었던 건 잊지 않는다. 그것 외에도 실버와의 의미심장한 대화나 약속 장소도 알고


있었지만, 시몬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전에 재차 확인을 해보기로 했다.

“저…….”

“아오! 답답해! 좀 빨리 말해! 왜 이렇게 어리바리한 거야?”

“아버지를 뵈러 갈 수 있을까요?”

“이 미친 XX 가? 되겠냐?”

“못 본 지 한 달이 넘어서요……. 다음 달 치료비도 못 낼 거 같고.”

“치료비? 또 낼 때 됐냐? 그걸로 빚져서 몸 파는 주제에 뭔 놈의 병신을 살리겠다고 그 돈을 낸대.”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부모님 욕을 하는 조직원이었다. 본인은 별로 욕이라는 자각도 없었지만. 시몬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역시 클로버가 병원비를 낸 게 아냐…….’

그러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뷔노가 뒷조사를 해서 내주었을 거라는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아, 아냐 그럴 리가…….’

뭐 잘 아는 사이라고 대주었겠는가.
“뷔노랑 약속 잡았어?”

“…아뇨. 그 뒤로 연락이 없어요.”

이대로 다시 못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단순히 클로버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뿐 아니라,
뷔노와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없…….

‘어? 반대 아닌가? 뷔노와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없을 뿐 아니라 클로버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지.’

오만상을 잔뜩 찌푸린 클로버 조직원이 물었다.

“약속을 잡아볼 생각은 안 해?”

“그게, 요즘 바쁜 일이 있으시다고…….”

“넌 클로버냐 시저냐?”

“클, 로버요.”

더듬거린 시몬을 보고 클로버 조직원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를 악문 그의 표정에 분노가 여실히. 그는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이를 악물며 말했다.

“있잖아.”

“네…….”

“난 네가 너무 싫어…….”

“죄송합니다…….”

그나마 조금 화를 표출하자 진정이 됐는지, 클로버의 졸개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아니 죄송할 건 없지. 스파이로서의 가치가 사라지면 누구 손해겠어.”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일주일 내로 약속 잡아. 못 잡으면 사창가다.”

“네에?!”

“사창가라고.”

시몬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그 예쁜 몸 잘 보존하고 싶으면 제대로 일하는 게 좋을 거야.”

“네…….”

순종적인 시몬의 대답에 조직원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단은, 정보 조사부터 다녀와.”

*
“하아… 읏!”

가냘픈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쉿, 소년미 넘치는 목소리가 그를 타일렀다.

“가만히 계세요.”

“하, 하지만, 으읏, 가만히 있을 수가…….”

“다 필요한 과정이라니까요?”

시몬은 되레 아픈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무 약한 자극이기에 오히려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능숙하게 움직이는 손은 그의 쇄골을 향했다. 반들거리는 피부는 땀에 젖어있었다.

“흐아!”

조물거리는 손은 오일을 옮겨가며 온갖 간지럼을 태우고 있었다. 마사지사의 손이 시몬에게는 악마의


손처럼 보였다. 부들부들 떠는 시몬을 보며 마사지사가 웃었다.

“아이, 참. 마사지하는데 이렇게 움직이시지 말라니까.”

“읏, 간지러워요!”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마사지를 잘 받는 사람, 나머지 하나는 손만 닿아도 미쳐
날뛰는 사람. 시몬은 자신이 후자라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되게 민감하시네, 원래 이렇게 잘 느껴요?”

“아까부터 영 말 이상하게…….”

“아로마 더 태워드리면 되죠?”

그는 징징대는 아이를 달래듯 화로 쪽에 허브를 더 던졌다. 상쾌한 페퍼민트 향이 공기 중에 퍼졌지만


시몬은 기쁘지 않았다.

‘뭐가 됐다는 거야.’

마사지사는 방긋방긋 눈웃음을 지어가며 웃었다. 그게 퍽 친절해 보였지만 시몬은 속지 않았다.

“읏, 목만, 읏, 몇 번을 건드리는 거예요?”

“그야 목이 많이 뭉쳐서 그랬죠. 사무직이세요?”

그건 아니었다. 그저 뷔노를 유혹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생전 보지도 않은 남녀의 정사에 관한


책을 수십 권 읽었을 뿐이다.

“이런 데를 다 풀어줘야 승모근이 없어지고 예쁜 직각 어깨가 완성이 되는 거랍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과, 정, 일 줄이야.”

“원래 아름다움에는 고통이 따르죠.”

시저 구역에 위치한 이 가게는 로미오들이 다니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마사지사는 시몬을 보자마자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이야, 미인이시네요. 근육질 타입은 많이 오는데, 이렇게 예쁜 분은 오랜만이라. 특별히 더 열심히
해드려야겠네~!’

그 뒤로 당한 게 이 꼴이었다. 마사지인지 고문인지 모를 과정이 끝도 없이 반복되었다.

“태닝하실 생각은 없으시죠? 미백 케어 추가로 할게요.”

‘추가로 관리를 더 한다고?’

“아뇨, 아뇨, 아뇨! 태닝할 거예요. 나, 나중에…….”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태닝이었지만 이 끔찍한 시간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급박한 시몬의 얼굴을 본
마사지사가 흐음, 소리를 냈다.

“그래요? 여리여리 청순 미인이라 안 어울릴 것 같은데.”

“구릿빛이어도, 읏, 청순할 수도… 있죠. 허리는 왜 만지세요……?”

“테스트?”

대체 점원이 고객의 허리 상태를 테스트할 이유가 어디 있느냔 말이다.

“근데 뷔노 님은 하얀 피부에 청순한 타입을 좋아하세요.”

“뷔노 님이 하얀 피부를 좋아하신다고요?”

마사지사는 씩 웃었다.

“환장하시죠.”

“어서 미백 케어를 진행해 주시죠.”

“이야, 절박하신가 보네.”

마사지사가 조용히 중얼거리더니 뜨거운 수건을 시몬의 등 위에 올려놨다.

“네? 방금 뭐라고, 악!”

홧홧한 뜨거움에 시몬이 꿈틀대자 마사지사가 시몬의 어깨를 꾹 잡아 눌렀다.

“등 쪽은 각질 제거가 덜 된 거 같아서. 조금 더 진행할게요?”

“예에?!”

각질 제거를 한다고 말하더니 갑자기 꾹꾹 지압하는 마사지사의 사랑이 넘치는 손길에 시몬이 끄아악,
비명을 내질렀다.

“약하게 약하게, 읏, 아, 으으, 아니 차라리 세게!”

“시나몬이 로미오들이 있는 마사지숍으로? …아니, 내버려 둬.”

뷔노는 전화를 끊었다. 로미오가 아는 거라곤 뷔노의 성적 취향뿐이었다.


‘뭐, 차라리 조금이라도 공부하고 오는 게 나으려나.’

동정인 것이 너무 티가 나서 손장난밖에 못 치고 있었다. 입으로 하는 법에 대한 팁을 받을지도 몰랐다.

한창 바쁜 뷔노가 향한 곳은 헤르게임의 유일한 공항, 헤르게임 공항이었다. 항공편도 몇 개 없었으며


이곳을 오가는 비행기는 군용 비행기가 대부분이었다.

뷔노는 비행기가 도착할 선착장에서 다른 수많은 조직원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던 비행기는 조금 지나서야 시야에 들어왔다. 장엄한 하늘을 고고하게 활주하는 모습을 보며 뷔노는
입에 시가를 끼웠다.

“참 보기 좋군.”

멀리서 비행기가 선착장에 내려앉은 후 바퀴를 굴려 가며 뷔노가 있는 근처까지 왔다. 비행기의


엔진소리는 크게 울렸고, 기름 냄새 섞인 강풍이 불어 옷과 머리카락을 헤집어놓았다.

주변 부하들이 강한 바람에 잠시 주춤거리는 동안, 뷔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뒤늦게


부하들이 쫓아오며 말했다.

“보스! 저희가 먼저…….”

“됐어.”

선두에 나선 뷔노는 비행기 입구 앞에 섰다. 역시나 국기가 그려져 있는 군용 비행기였다.

파일럿은 비행기의 문을 열고 내려가려 했다. 그 앞에 철제 계단 손잡이에 뷔노가 기대어 서있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는 뷔노의 얼굴을 보고 안색이 파래졌다.

뷔노는 입에 물던 시가를 뽑고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친구, 오랜만이네.”

“무슨…….”

말을 이으려던 파일럿은 뷔노와 주변 사람들의 옷차림을 살피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카무플라주가 그려진


모자를 꾹 내려 쓰고 말했다.

“왜 이러십니까?”

“헤르게임이 요즘 흉흉해서 말이야. 범죄자들이 숨어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하거든.”

그 말에 파일럿이 살짝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답니까? 그거참 큰일이군요. 헤르게임 안의 치안이 나아지면 좋겠는데요…….”

“나도 늘 그렇게 생각하지. 비행기 안을 확인해 봐도 될까.”

“그건 좀 곤란합니다… 보안상의 문제도 있고요.”

파일럿은 금세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저희 비행기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관을 운반하는 비행기라서요. 군대에서 죽은 사람들을 안식처로


돌려보낼 뿐이죠.”
“안에 누가 있지?”

“사람이라곤 저랑 운반수 둘밖에 없습니다.”

“그래?”

뷔노는 철제 계단에서 몸을 뗀 후 조직원들에게 일렀다.

“안에 뒤져.”

“…국가에서 보낸 비행기입니다. 이렇게 의심해도 시저에 타격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뷔노는 시가를 툭툭, 털며 재를 떨어뜨린 뒤, 파일럿에게 다가갔다. 뷔노의 키에 압도된 파일럿은
조금 위축됐지만 이내 당당하다는 듯 가슴을 폈다.

“잠시 살펴볼 뿐이야, 친구.”

“비행기에는 정말 아무도…….”

“사람을 찾는 게 아니야. 이제 슬슬 비켜.”

그 말에 파일럿의 표정이 굳었다.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뒤적거리는


소리, 발로 차고 열어보고 확인하는 소리가 바깥까지 울렸다. 안에 있던 사람 둘의 신분을 꼬치꼬치
캐묻는 소리까지.

“운반수 둘 말고는 관밖에 없습니다.”

“관 속은?”

“아직 확인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확인하면 되겠네.”

“그, 그건…….”

뷔노의 말에 조직원들이 머뭇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죽은 자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건 꺼림칙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뷔노는 뚜벅뚜벅 걸어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파일럿이 쫓아 들어오면서 만류했다.

“관을 열어보시면 안 됩니다! 모두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

“위인이 참 많기도 하군.”

뷔노는 비행기 안을 살펴보았다. 단순한 구조의 비행기는 수화물용이라 그런지 의자가 아닌 텅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서로 묶여있는 관들이 비행기 안에 가득 차있었다.

붉은 갈색을 띠는 관들을 내려다본 뷔노가 말했다.

“열어.”

뷔노가 고개를 까닥였다. 바로 옆에 있던 조직원 하나가 곧바로 앉아서 관 뚜껑을 열려고 애를 썼다.

“이런 짓을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까?”

“해도 괜찮은 짓을 평소에 잘 안 해서.”


조직원은 파일럿의 말을 무시하고 관 뚜껑을 따려 했다. 그러나 못이 박혀있는지라 여는 게 쉽지 않았다.
총으로 두드려서 관을 열려는 조직원을 보다 뷔노가 쯧, 혀를 찼다.

“비켜.”

조직원이 자리에서 물러나자마자 뷔노는 관 뚜껑을 발로 차서 빼버렸다.

쿠당탕, 소리와 함께 관이 활짝 열렸다. 반쯤 부서진 관을 보고 조직원들이 기겁했다.

먼지 같은 하얀 가루가 주위에 날렸다. 뷔노는 관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관 안은 텅 비어있었다.

“…아무것도 없군.”

“이번에는 과, 관만 옮기는 거라서요.”

운반수 하나가 말했다. 눈에 뻔히 보이는 변명이었다.

“그럼 시체도 없는 관짝 좀 부쉈다고 문제 될 건 없겠군.”

뷔노가 큰소리로 말했다.

“밖에 대기하고 있는 놈들, 개 풀어.”

마약 탐지견으로 데려온 셰퍼드 세 마리가 비행기 안쪽으로 기어들어 왔다. 월, 월, 월! 순식간에


비행기가 개 짖는 소리로 가득해졌다.

가루를 빼놓은 관 앞에 개가 오랫동안 머무는 걸 보고 뷔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월, 월. 개는 계속


짖을 뿐이었다.

뷔노는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관을 살펴보았다. 그 표면을 손가락으로 훑은 뷔노는 이 관이 대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 예정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사람은 다 밖으로 나가고 마약 탐지견들만이 뷔노의 바로
옆에 앉은 채 남아있었다.

월, 월, 월.

개들은 관에 코를 들이밀고 앞발로 관을 툭툭 건드렸다. 아무것도 없는 관 앞에서 개들은 계속해서 짖었다.


한참을 짖고 있는 개와 같이 뷔노는 비행기 안에서 공상을 펼쳤다.

뷔노는 무릎을 숙이고 개와 눈을 맞춘 채 말했다.

“관에서 뭘 찾는 걸까.”

개들은 뷔노와 눈을 마주치고 낑낑댔다. 애처로워 보이는 모습에 뷔노가 말했다.

“안에 잠든 줄리엣이라도 있나?”

열린 뚜껑과 관 속을 유심히 관찰하던 뷔노는 불현듯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냄새가…….’

“보스!”

밖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밖에 관 운반수들이 도착했습니다.”

“보스, 이제 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미심쩍은 면은 있지만…….”

이 이상 정부의 미움을 사는 게 걱정되는 것이다. 뷔노는 조직원을 힐끗 보더니 무시했다.

“감.”

“예?”

“감이 안 좋아. 운반수들 못 들어오게 막아.”

아까 발로 찰 때, 그건 나무를 걷어차는 감각이 아니었다. 뷔노는 칼을 꺼내 관을 긁기 시작했다. 슥, 삭,


슥, 삭. 플라스틱 표면을 긁듯 거친 느낌이 들던 관은 하얀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그건 아주 익숙한
가루였다. 어릴 적 집에서도, 밖의 거리에서도, 술집 뒷골목에서도 자주 보던 그 가루였다.

“…하다 하다 이젠 별짓을.”

뷔노는 기가 찬 웃음을 지었다. 운반수들이 계속 불안해하던 이유가 있었다. 시저가 관을 확인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은 관을 비행기에 남기고 가길 바랐다. 왜냐면 관 자체가 마약이니까.

“이건 뼛가루인가?”

뷔노는 무표정으로 가루를 만지작거렸다.

“우리 영웅들이 마약관 안으로 들어가게 될 줄이야. 나라 망신인데?”

“…하하, 그건.”

파일럿은 부리나케 비행기 밖으로 도망가려 했다. 뷔노는 눈짓으로 말했고 주위 조직원들은 파일럿을
곧바로 붙잡았다. 운반수 둘 역시 도망치려 했으나, 옆에 있던 조직원들이 원래부터 잡고 있던지라 그럴
수 없었다.

“누가 시켰지?”

“저, 저희는 정말 모릅니다. 관을 옮기라고 해서 옮겼던 거지! 설마 그 관이 마약으로 만들어진 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거야 나중에 알게 되겠지.”

대체 어떤 비상한 상상력과 기술력을 가진 인물이 이런 짓을 벌였을까.

“실버…….”

뷔노는 입술을 짓씹었다.

9. PLEASURE GARDEN

그건 약 십 년 전의 일이었다. 뷔노와 자매가 아직 마더를 만나기 이전.


‘밤에 간판 없는, 철창이 많이 쳐진 가게를 찾아. 그중 시끌벅적한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십중팔구가 지하에 술집이 있는 거지. 술집 구석 테이블이나 가게 뒤편을 보면 이런 걸 들고 있는
노새들이 보여. 그 사람들한테 가서, 너도 일하고 싶다고 하면 되는 거야’

예전 옆집에 살던 제레미가 해줬던 이야기였다. 뷔노는 자신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헛웃음을 지었다.

‘동생들을 굶겨 죽일 바에야 뭐라도 하는 게 낫겠지.’

그렇게 합리화한 뷔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완전히 해가 지지는 않은 저녁이었다. 창문에 철창이
쳐져있는 이 가게는, 빵 냄새를 간간이 풍기는 거로 보아 빵 가게인 것 같았다.

뷔노는 그 가게 옆에 있는 나무 앞에 걸터앉았다. 하긴 이 동네에 철창이 쳐진 가게가 한둘은 아니었다.


이 가게는 철창이 몇 번 휘어지기까지 했으니 더 사정이 안 좋은 가게일 것이다.

‘속 쓰려.’

어제부터 종일 먹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뷔노는 나무에 머리를 기댄 채 하늘을 보았다. 어지러워서


그런지 하늘이 참 우중충해 보였다. 코끝에 닿는 빵 냄새는 고문에 가까웠다.

‘저거 조금만 먹으면 살 것 같은데.’

가게는 사람은 없이 진열대에 빵만 잔뜩 놓여있었다. 왔다 갔다 하는 기척이 있는 걸 보면 사람이 안에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면 미리 기다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오질 않는다는 의미였다.

단순히 장사가 안 돼서? 아니면 주업은 따로 있으니까?

뷔노는 저 빵을 몽땅 훔쳐서 배 속에 넣는 상상을 몇 번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마른 입 안에 군침이


돌았다. 실없는 상상이었다.

멍하니 몽상을 계속하던 와중 주위가 어두워진 걸 알 수 있었다. 회색빛으로 변한 하늘은 단숨에 먹빛으로
물들었다. 때마침 구름이 달빛을 가린 것이다.

가게 안에서 하얀색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가 웃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맞춤으로 제작된 듯한 정장. 구두에선 반질반질 윤이 흘렀고 넥타이와 모자도 완벽하게
갖춰 입은 게, 어딘가 달라 보였다. 분명히 주위에서 보던 어른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주변에선 술 냄새가 풍겼다. 금주법이 시행되고 나서 이토록 진한 술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었다.

‘술집이 맞았던 건가?’

그런 것치고는 사람이 몇 명 있지도 않은 듯 말소리가 작게 들렸다. 남자는 술집 주인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뷔노는 저도 모르게 나무 뒤로 숨었다.

“…이대로……. 좋은 대접이었네.”

“네, 살펴 가십시오. 의원님.”

뭔가 소곤거리는 대화를 듣자 하니 평범한 손님은 아닌 모양이었다.

‘대접?’
그들은 하하 웃으며 동등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했다. 그러나 허리를 꼿꼿이 편 남자와 지나치게
조아리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 가게 주인을 보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뷔노는 이곳이 평범한 술집과는 느낌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둘은 말을 마치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걸 본 뷔노가 퍼뜩 정신 차리고 일어섰다. 아무리 그래도 음식 하나 없이 동생들에게 돌아갈 순 없었다.


뷔노는 빵이 진열된 매대 앞으로 다가갔다.

몇 개, 몇 개만 집어 가면…….

끼이익―!

요란한 소리에 놀란 뷔노가 손을 멈췄다. 뒤를 보자 잘 알 수는 없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하얀 세단이


정거한 채였다.

운전기사는 앞만 보고 있던 거 같았다. 뷔노는 뒷좌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문 쪽을 보자 웬 소년의


옆얼굴이 보일락 말락 했다. 선팅되어 있던 유리창이라 표정이 분명히 보이지는 않았다.

제일 잘 보인 건 옅은 흰색 머리카락이었다. 소년은 머리카락을 아주 깔끔하게 잘라 정리한 상태였다.


누가 매만져주지 않는 이상 만들어질 것 같지 않은 머리카락이었다.

그다음으로 보인 건 곧게 뻗어있는 직선이었다. 그게 코의 옆선인 걸 알아챈 뷔노는 소년 역시 자신을


목격하진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뒷좌석의 차 문이 덜컥 열렸다. 소년은 잠가뒀던 슈트 단추 두 개를 툭툭 풀었다. 그 동작이 어찌나


정갈한지 아주 오랫동안 연습해 왔을 거란 게 티가 났다. 아까 남자와 비슷한, 고급스러워 보이는 하얀
정장 역시 눈에 밟혔다.

소년은 천천히 뷔노 쪽으로 걸어왔다. 그걸 본 뷔노는 반사적으로 빵 쪽으로 뻗었던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 움츠리는 동작을 본 소년이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뷔노의 눈에도 선연히 보이는 분홍빛 눈동자였다.

“아버지.”

“실베스트리스.”

남자는 소년을 보자 반갑게 웃었다.

“뭘 여기까지 왔느냐.”

“잭이 아버지를 모시러 간다고 해 따라왔습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뵙고 싶어서요.”

“할머니와의 시간은 즐거웠나 보구나. 배움도 미뤄두고 온 걸 보니 말이다.”

소년이 장갑을 낀 상태로 검지와 엄지를 문질렀다.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아버지.”

소년이 흘긋 뷔노를 본 듯했다.

“빵 냄새를 맡으니 입맛이 조금 당기네요.”

마치 과시하는 듯한 행색이었다. 고작 저 정도 가지고 기분이 나빠지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 뷔노는


속으로 소년을 애새끼로 부르기로 결심했다.
“이런 싸구려를 먹을 생각이냐?”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끔씩은 싸구려도 먹을 만하지 않나요.”

“…입맛은 누굴 닮은 건지, 마음대로 하거라.”

남자는 저 건너편에 있는 가게 주인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가게 주인이 바로 대답했다.

“아, 워, 원하시는 만큼 마음껏 가져가시지요. 어차피 내일 되면 못 팔게 될 빵들입니다.”

그 말을 들은 남자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손짓하고 먼저 차로 돌아갔다. 소년은 청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가요?”

소년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가게 주인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더니, 허둥지둥 갈색 봉투를
챙겨왔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다.”

“네?”

소년은 두 번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눈썹을 까닥였다. 가게 주인은 빵을 갈색 봉투에 빠르게 담기


시작했다. 터질 듯한 갈색 봉투를 소년에게 내민 가게 주인이 저걸 다 먹을 수 있나, 미심쩍은 눈초리로
보았다.

그러나 소년이 갈색 봉투를 차 안까지 가져갈 일은 없었다.

“먹고 싶어요?”

소년은 뷔노를 보며 물었다.

“…….”

뷔노가 가만히 있자, 소년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대답 안 하네.”

그는 봉투를 거꾸로 든 채, 그대로 빵을 쏟았다. 무더기로 쏟아지는 빵에 뷔노는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뷔노의 발치에 바게트, 크림빵, 식빵 조각 등이 떨어져 굴러다녔다.

그 위로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간 소년은, 뷔노를 지나쳐 운전기사가 열어주는 차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 뷔노와 스친 어깨를 소년은 오른손으로 두 번 털고 있었다.

뷔노는 가만히 바닥에 떨어진 빵을 쳐다보았다.

못 먹을 건 아니었다. 소년의 구두는 분명히 자주 닦는 것처럼 보였고, 풀밭도 별 오물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뷔노는 빵들을 몇 번 손으로 털고, 조심히 갈색 봉투 안에 담았다.

적어도 오늘은 안 굶겠네.

부자들에게서 선심 쓰듯 뭘 받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뷔노는


뻣뻣한 입매를 일부러 당겨 웃었다.

“개새끼.”

뷔노는 손에 목줄 하나를 쥐고 있었다. 전에 마약 탐지견으로 데려왔던 셰퍼드 중 한 마리였다.

“가끔 생각해 보면 개새끼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거 같지. 사람보다 개가 더 나을 때도 있으니까.”

뷔노는 셰퍼드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뷔노 주위에 서있던 조직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Pleasure Garden 기쁨의 정원

앞에 붓글씨로 적힌 표지판이 꽂혀있었다. 나무 몇 개를 덧대서 만든 표지판은 하얀 물감으로 칠해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예쁜 목조 주택의 외양을 띤 찻집이었다. 뷔노는 찻집의 삼각형 지붕과 잘 관리된 화단,
분수대 등을 살펴보았다.

‘새하얗군…….’

썩 잘 어울렸지만, 모조리 새하얗기는 했다. 뷔노는 실버의 강박증이 이런 데서 드러나는 것이라


짐작했다.

“오셨습니까?”

“그래.”

“왜 하얀 정장을 입고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묘한 눈빛으로 뷔노를 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다이아의 모습을 띤 뷔노가 그려지고 있었다.


뷔노는 가벼운 웃음도 짓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난 검은색이 잘 어울려.”

“의외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죠.”

“넌 네가 작명을 못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 같군.”

뷔노는 그렇게 말하고, 표지판을 한 번 발로 툭 건드렸다.

“플레져 가든?”

뷔노는 끝을 올려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전혀.”

“아쉽네요. 당신의 마음에 들었으면 했는데요. 여기를 플레져 가든이라고 지은 것엔 나름의 사연이 있죠.
예전에 영국에서 티타임을 가지던 장소를 그렇게 부르곤 했거든요.”

“진짜 찻집도 아니면서.”


“그와 다름없습니다.”

실버는 사무적으로 웃었다. 돌연 개들이 실버를 보고 으르렁댔다.

“워,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시키기 전에 물면.”

뷔노는 성의 없이 개들을 말렸다.

“조금 더 성의 있게 말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개털이 날립니다.”

실버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동물은 나쁜 사람을 알아본다던데 어쩌겠어.”

“세상에 나쁜 개는 없고 잘못 교육한 주인만 있다는 말도 있죠.”

그 말에 뷔노는 끌고 왔던 셰퍼드의 목줄을 풀었다. 개들은 꽉 잡아당기고 있던 목줄이 풀리자마자


실버에게 한 번 크게 짖었다.

“왈!”

실버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개들은 자신의 임무를 하기 위해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찻집의 창고로 들어갔다. 왈왈, 짖는 걸 보고 뷔노가 말했다.

“찻집이 아니라 마약집이군.”

“별반 다를 것 없지 않습니까.”

실버는 고개를 기울였다. 뷔노는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바닥에 던져 밟았다.

“이 플레져 가든은,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하며 정을 나누었던 것처럼 의약품을 즐기는


사람들도 정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만들었죠. 도둑질도 폭력도 없는,
건전한 공간입니다.”

바닥에 짓밟힌 시가를 보면서 실버가 말했다. 새로운 시가를 꺼내 피기 시작한 뷔노가 말했다.

“마약도 안 하면서.”

실버는 입술을 길게 늘였다. 목 끝에서 쿡쿡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는 차를 마시는 걸 더 선호하기 때문에.”

“그러시겠지.”

실버는 손끼리 맞닿은 상태로 쭉 손가락을 늘였다.

“아직 당신의 조직원들은 마더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죠?”

실버는 차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와 똑같은 어조로 태연히 말을 꺼냈다. 뷔노 역시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듯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그렇지.”

“그렇다면, 그 사실도 이야기하진 않았겠군요.”


뷔노는 ‘그 사실’에 대해서 묻지는 않았다. 그저 실버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실버는 찻잔을 약간 기울이고, 안의 붉은 액체를 보다가 흥미가 떨어진 듯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일어나서 성큼성큼 뷔노에게 걸어갔다.

뷔노의 시선이 실버의 이마를 스쳤다. 뷔노가 예전에 남겼던 흉터가 조그마한 하얀 자국으로 남아있었다.

“당신이 마더를 죽였다는 점.”

“역시 보고 있었군.”

계승식 직후, 마더가 죽은 방 앞 복도. 뷔노는 실버의 뒷모습을 목격했었다. 그가 방 안을 제대로


보았는지는 긴가민가했지만.

뷔노는 검은색 총구를 실버의 관자놀이에 대었다. 실버는 그 총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지금 저를 죽였을 때의 반향 정도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떤 이야기를 하건 내 총이 상대의 머리를 향한 상태에서 하는 게 수월하다는 건 알고 있지.”

실버의 은빛 눈썹이 곱게 휘었다. 자신의 추리가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포만감을 가득 느끼고 있었다.

“마더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그렇게 두렵습니까?”

“똑똑하기도 하지. 새치는 머리를 잔뜩 굴려서 생긴 건가?”

뷔노는 잔뜩 비꼰 다음 시가를 입에 물었다. 실버는 표정에 동요 하나 주지 않은 채 뷔노에게 물었다.

“마더의 단말마는 어땠습니까?”

“평소와 다름없이 우아했지.”

뷔노는 그렇게 말하고 불도 피지 않은 시가를 문 채 잘근잘근 씹었다.

“결론적으로는… 오싹했고.”

그때만 떠올리면 몸에 오한이 들었다. 뜨거운 연기를 몸 안에 쑤셔 넣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차가운 냉기가


몸에 돌았다.

“그쪽은? 정치인들이, 네가 마약을 팔고 있다는 건 알고 있나?”

“헤르게임 안에서라면 그 어떤 정치인이 신경 쓰겠습니까? 자기 지역도 아닌 것을.”

‘뻔뻔하긴.’

분명 범위가 헤르게임을 넘어서고 있는 것 같은데, 실버는 그걸 교묘하게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설령 다이아가 마약이 어디로 유통하고 있는지 알아내도 로비를 받은 정치인들이 봐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우리가 마약을 싫어하는 걸 잘 알겠지.”

“그렇죠.”
“그러면서도 우리 구역에서 노새를 풀어놓고, 클로버의 간부들도 계속 숨겨주고 있다? 우리와 정말 척을
지겠다는 건가?”

“저는 시저와 전혀 척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저와는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간 합병할 테니까요.”

마치 기업 간의 거래 같은 느낌이 드는 단어 선택이었다. 뷔노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건넨 그 입에 담기도 끔찍한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라 믿어.”

“예, 저도 우리가 당장 결혼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우선해서 합병에 대한 준비를


마쳐야겠죠.”

완전히 반박하는 것보다 슬쩍 여지를 남기는 태도가 더 얄미웠다.

뷔노는 시가 연기를 내뱉은 뒤 물었다.

“말장난은 그만하고. 정확히 뭘 원해?”

뷔노가 실버를 내려다보았다.

“저는 마약을 유통하는 걸 들키는 게 문제고, 당신은 제가 클로버를 숨겨주는 게 문제죠.”

“그렇지.”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제가 클로버에 대한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물론 아주 자세한 것까지는 안


됩니다.”

“우리는? 뭘 하면 되지?”

“얼음을 어느 정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세요.”

사업? 웃기는 표현이었다. 뷔노는 총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싫다면?”

“당신이 마더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그게 그렇게 큰 협박이 될 것 같아?”

“스페이드, 클로버랑 연속으로 싸우며 전력 손실이 큰 걸 알고 있습니다. 조직원들의 성격이 달라 통합이


쉽지 않았다는 것도. 내실이 탄탄해진 건 전부 마더의 덕이라는 것도.”

뷔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좋아.”

“예?”

“마약을 팔지.”

“정말입니까?”

실버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단, 금주법이 위헌 결정을 받고 나서.”

“1 년도 남지 않은 일일 텐데요. 진심입니까?”

“그러면 거짓말일까.”

“이것 참, 놀랍네요.”

실버는 기쁜 듯 아닌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뭐가?”

“당신이 자존심 탓에 오랫동안 수긍하지 않다가 결국 시저가 반 토막이 나고, 제 것이 되는 상상을


했거든요.”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시저가 무너질 일은 없어.”

“그런 점을 자존심이라 부르는 겁니다. 저는 싫어하지 않지만요.”

뷔노의 시선이 실버의 주머니에 고정된 총을 향했다. 은색을 띠는 반질반질한 표면의 총은 검은색 총의
두세 배는 비쌌다.

‘평생 은색 수저에, 은색 총만 써온 놈이 뭘 알까.’

실버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된 일정에 홀가분해 보였다. 그는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저는 거래의 대가를 바로 드리죠. 클로버는 곧 다이아 밑으로 들어갑니다.”

“뭐라고?”

“시저와 싸우느라 전력이 줄어든 클로버를 흡수하는 건 쉬우니까요.”

“아직 그 정도는 아닐 텐데.”

그 말에 실버는 미소를 지었다.

“곧 그렇게 될 겁니다.”

“…….”

실버는 장갑을 낀 손을 몇 번 매만지다가 말했다.

“몸,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10. 의구심

“잠시 쉬고 계세요~ 2 차 케어는 15 분 뒤에 진행할게요.”

문을 약간 열어둔 채 마사지사가 나가고 나서야 시몬은 한숨을 돌렸다. 목부터 허리까지 바짝 긴장하느라
몸이 찌뿌둥했다.
‘도망갈까……?’

지금 로미오는 오지도 않은 상태고, 더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시몬은 슬쩍 가운을 챙겨 입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애초에 로미오를 만난다고 해도…….’

클로버에선 뷔노의 약점이나 취향을 알아 오라고 했지만 애초에 약점이라는 것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취향이라면 맞추려 했으나 이미 질질 끌려가 버린 것 아닌가. 뷔노를 유혹하거나 혼을 쏙 빼놓거나, 그런
건 이미 머릿속에 불가능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시몬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침대 밑에 있는 슬리퍼에 발을 쏙 넣었다.

‘옷은 어디 있지?’

시몬이 손잡이를 잡고 문을 반쯤 열었던 때, 딸랑이는 종소리가 울렸다. 마사지숍 문에 걸린 종에서 난


소리였다. 시몬은 깜짝 놀라 문을 살짝 닫았다. 문 틈새로 체격이 건장한 남성 셋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벽돌색 곱슬머리에 서글서글한 눈웃음이 눈에 띄는 남자, 붉은빛 머리카락에 눈썹 뼈와 콧대가 불거진


각진 남자. 아주 짧은 와인색 머리카락에 신비로운 노란색 눈동자가 눈을 사로잡는 남자.

각자의 특징은 다르지만 시몬은 저 셋이 다 로미오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셋은 확실한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머리 미남들이다…….’

시몬은 이유를 모르게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로미오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기 때문이다.

‘뷔노의 파트너들 모임도 아니고…….’

사실을 말하자면 맞았다. 셋은 사이좋게 웃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들어오던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다 멈칫했다.

“마사지사분은 어디 가셨을까… 어?”

문 틈새로 엿보고 있는 시몬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이 숍에 여자가 다니던가?”

‘여, 여자?’

시몬은 당황했다.

“뭐, 여자가 다닌다고? 우리만 있는 거 아니었어?”

우리라는 건 로미오를 의미했다. 셋은 머리를 기울여가며 시몬의 얼굴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셋의


눈알이 돌아갈 때마다 시몬의 목은 움츠러들었다.

“얼굴만 봐서는 모르겠… 아. 남자네.”

시몬의 가슴 쪽을 바라본 조지가 말했다. 피터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어째 창피해진 시몬은


슬쩍 가운의 허리춤을 잡아 가슴 쪽으로 끌어모았다. 소심한 시몬은 문지방에 서서 나가지도 다시
들어가지도 못한 채 있었다.
“귀엽네. 누굴까?”

“우리가 모르는 신입인가?”

제임스의 말에 피터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저렇게 예쁜 애가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어.”

“그리고 키가 너무 작은데.”

“우리 키 제한도 있던가?”

‘다 들려…….’

마지막 발언은 특히나 시몬을 울컥하게 했다. 조그맣다니. 최소 180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들 눈에야
어떨지 몰라도 작은 키는 아니었다.

일단 로미오를 만났으니 접근하는 게 순서였다. 그렇지만 어떻게? 고민하던 시몬은 문을 확 열었다.

“오!”

“자세히 보니 더 예쁘다.”

셋은 한시도 시몬에 대해서 쉬지 않고 얘기했다.

‘다시 닫을까…….’

잠깐 사이에 엄청난 충동이 들었지만 시몬은 꾹 참아냈다.

“아, 안녕하세요……?”

“목소리도 좋다.”

“역시 맞나 본데.”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돼서 어쩌나.”

셋은 영문 모를 소리를 몇 번 주고받은 후에야 시몬의 인사에 화답했다.

“내 이름은 제임스.”

“난 조지야.”

“난 피터! 잘 부탁해.”

벽돌, 와인,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이 차례로 대답했다. 시몬은 의외의 환대에 당황하다 말했다.

“저… 기다리시는 거면, 마사지사분께서는 15 분 뒤에 온다고 말씀하셨어요.”

“고마워. 얼굴만큼이나 마음도 예쁘구나. 이름이?”

“네?”

시몬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한숨을 쉰 제임스가 조지를 타박했다.


“일반인한테 임무 멘트 쓰지 마.”

“헉, 나 방금 작업 걸었구나! 버릇이 이렇게 무섭다니까.”

‘이렇게 로미오란 걸 티 내도 되는 거야?’

시몬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셋을 바라보자 셋이 웃었다.

“그래서, 이름이 뭐야?”

“시…나몬이요.”

하도 소개하지 않던 이름이라 다시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 이름을 들은 피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로미오는 언제부터 했던 거야? 내가 모르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서.”

“네?”

‘아, 날 로미오라고 착각했구나.’

시몬이 놀란 마음을 가라앉힌 뒤 기간을 꾸며냈다.

“한… 한 달 전부터요.”

뷔노와 만난 때가 한 달 전이었다. 피터가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래서 몰랐구나. 한 달 정도면 모를 법도 하지.”

“그러면 본 임무는 아직 안 들어갔겠네?”

제임스가 물어보았다. 본 임무라고 하면 아마 미인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네? 네.”

아무래도 로미오는 바로 임무에 투입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시몬이 문득 자신의 경우를 생각했다.


외모가 취향이라고 바로 들이민 클로버 조직이 떠올랐다.

‘나도 차라리 교육이라도 받고 들어갔더라면 나았을 텐데.’

“시작하자마자 그만두게 됐으니 상심이 크겠네.”

“우리도 갑자기 잘려서 놀랐어.”

로미오들이 잘렸다고? 시몬은 놀랐지만, 표정에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궁금한 걸 물어보기도


전에 제임스가 대답했다.

“이제 로미오를 임무에 쓸 일이 없나 봐.”

“슬픈 일이지.”

“시간 대비 수당을 잘 주는 좋은 직업이었는데 말이야.”

슬퍼하는 이유가 굉장히 현실적이었다. 시몬은 로미오에 대해 갖고 있던 환상이 조금 깨지는 걸 느꼈다.


“세 분은 로미오 일도 끝났는데, 왜 마사지숍에 오셨어요?”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셋 다 조용해졌다. 로미오 외에 남성들에게, 마사지숍에 오는 게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마사지숍에 왔던 건 로미오들에게 업무의 연장이나 다름없는 셈이라 왔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버릇이란 게 무서운 거라.”

“놀려고 해도 평소에 놀아봤어야지…….”

“이 시간 되면 늘 관리받으러 왔더니 안 하면 허전해. 원장 손길이 은근 시원하고 좋고.”

제임스, 조지, 피터가 차례로 설명했으나, 시몬은 마지막 말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 바였다. 자신은
마사지를 받고 오히려 더 근육통이 왔다.

“그러는 너는 왜 왔는데?”

“저, 저요? 저는… 그, 뷔, 뷔노 님이 하얀 피부를 좋아한대서……?”

“뷔노 님이랑 아는 사이야?”

제임스의 호기심 어린 눈길에 시몬은 고민했다. 아는 사이는 맞지만, 친구도 아니고 깊은 관계도 아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생각한 시몬은 어째 이 잘생긴 로미오들을 앞에 두고 있으니 이 단어가 불쑥
튀어나왔다.

“애, 애, 애인…까지는 아니고…….”

“잠자리 상대구나.”

“우리 다 그거 해봤지!”

제임스와 피터가 바로 대답했다. 다 해봤다고? 당혹감에 시몬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재밌지 않나? 피임 걱정할 필요도 없고.”

“피, 피임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요?”

“애초에 넣지를 않잖아.”

‘나한테만 그러시는 줄 알았더니…….’

원래 뷔노의 취향이었나 보다. 제임스는 턱을 손에 얹더니 과거를 떠올리는 표정을 지었다.

“꽤 즐거웠지…….”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른다는, 로미오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즐길 수 없는 스릴이랄까.”

이렇게 보니 시몬은 정말 로미오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취급을 받고 있던 것이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수많은 위성 중 하나라는 걸 깨닫자 시몬의 표정이 서글퍼졌다.

그걸 놓칠 로미오들이 아니었다. 피터는 시몬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보고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고백하는 애들도 있었는데.”

“맞아, 있었지.”
“용감하다고 할지…….”

조지는 말끝을 흐렸다. 시몬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고, 고백?’

눈앞에 있는 로미오들은 뷔노와의 관계에 있어 집착 없이 굉장히 시원시원해 보였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그런 애들은 나중에 얼굴도 못 보게 됐지만. 불쌍한 놈들이지.”

제임스는 느릿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시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왜 자신이 한숨을 내쉬었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면… 뷔노 님은 고백을 받아준 분은 없는 거예요?”

“뭐, 그런 셈이지.”

“…안타깝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너무 좋아하는 표정 아냐?”

피터의 말에 시몬이 퍼뜩 놀랐다. 내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나? 조지가 시몬을 보다가 정곡을 찔린 걸


측은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있잖아, 왜 로미오가 됐어? 해보면 생각보다 좋은 직장인 걸 알지만, 글쎄 아닌 경우에야…….”

시몬은 곤란함에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그,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요…….”

그 말에 로미오 셋이 측은한 표정을 짓더니 시몬의 어깨를 두드렸다.

“더 자세히 말할 거 없어. 어차피 로미오들은 다 비슷한 사정으로 로미오가 되거든.”

제임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다 주인공으로 소설 하나씩 쓸 정도로 깊은 사연들이 있다고…….”

조지는 눈물을 삼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없는데? 그냥 적성에 맞을 것 같아서 했는데.”

피터는 로미오에 대한 편견을 만들지 말라며 조잘거렸다.

“…조용히 해.”

조지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안 좋은 사정이 있는 건 맞지만 거짓말을 한 게 미안해질 정도로 로미오들은


공감해 주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앞으로 살날도 많이 남았고, 돈은 생길 수 있는 문제 중에 가장 작은 거지. 정 필요하면


나도 조금은 빌려줄 수 있어, 시나몬.”

조지는 노란색 눈동자를 부드럽게 휘며 시몬에게 말했다. 제임스 역시 비슷한 말을 하며 시몬을 토닥였다.
시몬은 한동안 느껴보지 못한 사람의 온기 속으로 생각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유혹당했던 건가?’

“감사합니다…….”

말하고 나자 코가 찡해졌다. 시몬은 슬쩍 훌쩍인 다음에 어떻게 하면 떠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일단 내달 치 병원비가 있으니까 아직은 괜찮았다. 그다음이 문제였지만. 설령 클로버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해도 그 다음 달 병원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답이 없었다.

‘이번 병원비를 내준 건… 역시 뷔노 님일까?’

시몬은 대놓고 뷔노가 치료비를 내주었는지를 묻고 싶었으나 빙빙 돌려서 나온 질문밖에는 하지 못했다.

“그, 근데… 혹시 뷔노 님 성격이 어떻다고 생각하세요?”

‘너무 돌려 말했다.’

시몬은 아차 하는 마음이었지만 로미오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뷔노 님 성격?”

제임스가 질문을 반복해서 한마디 말한 다음이었다. 마사지숍은 아무도 없었을 때처럼 조용해졌다.

“뷔노 님… 성격이라…….”

피터가 하하, 웃더니 아플 정도로 시몬의 등을 두드렸다.

“아직 뷔노 님이랑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나 봐? 그런 걸 묻는 걸 보니. 하긴 한 달 전에 들어왔다고


했으니.”

“네, 네? 맞긴 한데……. 그렇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피터와 주고받은 대화 뒤로 골똘히 생각하던 제임스가 답을 던졌다. 조지와 피터 역시 뒤따라 말했다.

“냉정 뒤에 숨겨진 열정?”

“무심한 듯 가학적인?”

“다정함 속에 잔인함?”

‘결론적으로 열정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건가?’

“뷔노 님 성격이 마, 많이 안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 같지는 않은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 뷔노의 성격이 좋은 건 아니었다. 시몬은 상당히 편향적인 관점으로 물었다.

“음? 아냐, 아냐. 뷔노 님 나쁜 분 아니지. 오히려 좋으신데.”

피터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뷔노 님은 은근 착하시다고. 비록 사람 머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차고 다녀도 말이야.”

“그래, 가끔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총으로 쏘기도 하지만.”

“부츠 굽으로 밟아 죽인 부하를 다 볼 수 있게 전시해 놨지만 그래도 속내는 따뜻하시지.”

비꼬는 건가 싶을 정도의 말들이었다. 시몬은 들을 필요 없는 정보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혹시 뷔노 님이 로미오 분들 빚을 해결해 주거나… 그런 적은 없을까요?”

치료비라든가 그런 얘기를 할 수 없으니 최대한 돌려서 말했다. 시몬의 말을 들은 제임스가 알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뷔노 님이 빚 해결해 줬구나.”

시몬은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삼키고 숨을 내쉬었다.

“네, 네, 네?”

“흔한 일이야, 흔한 일. 굳이 숨기려고 안 해도 돼.”

조지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어쩐지 셋은 모두 심드렁한 태도였다.

“로미오 아니어도 그런 경우 많아. 다른 조직원들한테도 이것저것 많이 들었어.”

“혼자 키우던 애한테 갑자기 베이비시터가 붙거나 지고 있던 빚 같은 게 사라지고, 그것도 아니면


부모님의 원수가 죽어있거나…….”

시몬은 뭔가 직접 당하면 소름 돋을 법한 일들도 있다고 생각했다. 집에 갔는데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있다거나 어느 순간 시체를 발견한다는 얘기 아닌가.

“뷔노 님 특유의 애정 표현이랄까. 애정치고는 좀 차갑지만.”

“문제는 거기서 사랑이 시작되는 게 문제지.”

“반한 애들이 많거든. 인성에 반한 거랑 다르게 재력과 권력에 반하면 쉽게 헤어 나오기가 어렵잖아.”

시몬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구렁텅이 같은 인생을 책임져 주고 나를 지켜줄 사람은 뷔노 님뿐이야! 이런 거.”

피터가 연극배우처럼 약간 과장된 억양으로 말했다. 시몬은 알게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고 있진 않나


스스로 확인했다. 그리고 가슴 한구석이 찔리는 걸 느꼈다.

“혹시 너도 반했어?”

“예, 예, 예? 저요? 아, 아닌데요.”

미치도록 더듬은 걸 깨닫고 시몬의 얼굴이 빨개졌다. 피터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희생양이 하나 늘었구먼.’

시몬은 화제를 돌리고 싶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자 로미오들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 뷔노 님은 왜 붉은 계열 머리카락을 좋아하실까요?”

“그냥 취향이 붉은 머리인 거 아냐?”

“내 생각엔 페티시 아닐까? 피 같아서 흥분한다거나.”

“…….”

한 명만이 입을 꾹 다물고 얘기하지 않고 있었다.

“조지, 넌 왜 말 안 해.”

피터가 눈치 좋게 타박하자 조지가 머뭇거렸다.

“그게… 확실한 건 아니라. 뷔노 님이 밝히길 꺼려할지도 모르고.”

“뭔데, 해고당한 전 직장 상사만큼 뒷담화하기 좋은 소재가 어딨다고! 빨리 말해.”

피터의 한마디에 얄팍한 의리는 금세 무너졌다. 조지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색맹이라 그러신 거 아니셨어?”

“색맹인데 왜 붉은색을 좋아해? 헛소리는.”

“막 완전 색맹은 아니고, 뭐랬지? 홍… 아무튼, 다 보이시진 않나 봐. 그래서 붉은 계열 머리가 눈에


띈대. 이건 나도 들은 이야기야.”

시몬이 잠시 멍하니 있었다. 붉은 계열만 보이는 색맹이라면 들은 바가 있었다.

“홍색맹이요?”

“오, 어떻게 알아?”

시몬은 피터의 눈을 봤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냥, 잡지 같은 데서 봤어요…….”

사실 그건 아니었다. 시몬은 똑같이 홍색맹인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다.

‘색이 덜 보이는 게 아니라, 다르게 보이는 거죠.’

시몬은 과거의 일과 동시에 자신이 했던 말 역시 떠올렸다.

‘…이게 흔한 일일까?’

시몬이 과거의 생각에 빠지기 전 제임스가 말을 꺼냈다.

“아무튼, 붉은색이 눈에 띈다니 뭔가 뷔노 님 답네.”

“페티시인 편이 재밌었을 텐데!”

피터는 개구진 웃음을 지었다. 시몬은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시몬, 그러면 앞으로는 어쩔 셈이야?”


“네?”

미인계를 이어나가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울적해졌다. 시몬은 고민했다. 만약 클로버에 잡힌 빚도


무사히 해결한다면, 그러면 뭘 하게 될까.

“…전 아직 방향이 잡힌 건 없어요.”

“그래, 구강성교를 하는 법이라도 가르쳐줄까? 언제든지 쓰기 좋은 지식이지. 여자를 사로잡으려면,


클리토리스를 사로잡아야―”

“자, 잠깐만요.”

시몬의 얼굴이 홧홧해져 있었다. 연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뺨이나 눈가를 보며 피터가 말했다.

“애한테는 좀 너무 과한 내용이었…….”

“받아 적게 수첩 좀 꺼낼게요.”

이제 너무 단련되어 있는 시몬이었다.

“…그래.”

‘지독한 순정이구만.’

피터는 마음 속으로 이미 시몬의 상태를 단정 지었다. 피터가 그 혀를 나불나불 놀리는 사이 시몬은 펜을


열심히 놀렸다. 로미오들의 경험은 이론적 지식과 경험적 입증이 뒷받침되어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한 번 한 번을 정성스럽게 핥아 올려야 한다는 거지. 너무 부담스럽지 않도록 하는


것도 신경 써야 하고. 이 과정을 최대한 즐겁게 할 수 있어야…….”

“어라, 손님이 더 늘었네요?”

15 분이 지났는지 마사지사가 돌아왔다. 시몬이 다급히 수첩을 주머니 속에 챙겨 넣었다. 피터는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속으로는 기겁한 시몬이었지만 앞에서는 어색하게나마 웃고 있었다.

“오, 오셨어요……?”

도망칠 타이밍을 놓치다니! 로미오들과의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만들었다.

“지금 오셨군요.”

“오랜만이에요.”

“네, 세 명 다 오랜만이에요. 여전히 덩치들이 크군요. 안마하기 귀찮게.”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치고 참 말투가 공손하지 못했다. 로미오들은 싹싹하게 대답했다.

“그렇죠, 뭐.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피터가 웃었다. 마사지사는 셋을 어디에 둘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재밌는 시간 보내시던 거 같은데, 다 그냥 같은 방에서 진행할까요?”

시몬이 있는 방에는 침대가 여러 개였다. 일단은 다 누우라는 마사지사의 지시에 로미오들은 옷을 벗었다.
수건이 돌돌 말려있는 침대에 들어가는 남성들은 속옷만 입은 상태였다.
슬쩍 보이는 등 근육과 솟아오른 어깨를 보며 시몬이 생각했다. 뷔노가 매일같이 봤을 몸들이 저런 거란
말인가.

‘피, 필요 이상으로 근육이 많은 거 아냐?’

혼자서 툴툴거렸지만, 속이 아려오는 건 멈출 수 없었다.

뷔노는 하이직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여러 물품과 종이들이 쌓여있는 연구실은 화약 냄새로 가득 차있었다.
방금까지 실험을 지속한 탓이었다.

연구실 안에 있는 건 하이직과 조직원인 레이라 딱 두명이었다.

뷔노는 별 반응 없이 연구실 안쪽에 한 의자를 보고 거기에 앉았다.

하이직은 비딱하게 의자에 앉은 채 손안의 종이만을 들여다보았다. 실험 기록을 정리하느라 끄적거리는 펜


소리가 연구실을 메웠다. 하암, 하품을 하던 하이직은 졸린 눈을 비비다가 일어났다.

연구실은 무기가 어느 거리까지도 명중하는지를 테스트하기 위해 아주 넓게 만들어졌다. 그 넓은 바닥


곳곳에는 찌그러진 유리 슬라이드가 널려있었다. 수백, 수천 장의 방탄유리 슬라이드는 둘이 3 일 내리
테스트를 한 흔적이었다.

탕, 레이라는 한 번씩 유리 슬라이드를 향해 총을 쏘고 손을 내밀었다. 하이직은 그때마다 유리


슬라이드를 갈고, 새로운 총탄을 찾아서 레이라에게 건네주었다.

총탄마다 날아가는 거리나 명중도가 달라졌고, 유리에 남기는 자국의 크기도 달라졌다. 뷔노는 그걸
꼼꼼히 체크하는 하이직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세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뷔노는 하이직에게 말을 걸었다.

“무리했을 텐데 계속해서 실험해도 되겠어?”

그제야 하이직이 뷔노에게 알은척을 했다.

“실험? 해도 되겠냐고? 당연히 안 되지.”

한 번 열린 입에 봇물 터지듯 말들이 흘러나왔다.

“안 그래도 죽을 것 같아. 지금 당장 이 책상에 머리를 박고 코피 흘려서 그대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세상은 빙그르르 돌고 있고, 지금 눈앞에 언니가 하난지 둘인지 셋인지 구분이 안 가. 내 상태 알겠어?”

“수고했어, 하이직. 완성했으면 쉬어도 돼.”

“검증은 받아야지.”

완벽주의 성향은 어디로 가지 않았다. 하이직은 휙 팔을 휘둘렀다. 정확히는 총탄 하나를 뷔노에게 던진


것이다. 뷔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총탄을 받은 뒤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각도나 정밀도 등을 조명에
비추어 확인한 뷔노가 흡족하게 말했다.

“예술인데.”

“그렇겠지. 내 피와 살이 섞여서 만들어진 걸작이니까.”


하이직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도 뷔노는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중요한 건 총탄이었다. 총탄의 정밀도가
곧 총의 명중도가 되는 것이다.

“기능은 확실한 거지?”

“그럼, 비거리, 명중률, 다 언니가 원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렸어. 대가로 뭘 바쳐야 했는지는
선명하지만.”

하이직이 뷔노에게 다가가더니, 뷔노의 귀에 대고 말했다.

“내 수명!”

‘귀 아파.’

뷔노는 하이직이 소리친 오른쪽 귀를 손으로 몇 번 문질렀다. 잠을 안 재웠더니 히스테릭한 성격이 더욱


심해졌다.

“하이직, 총을 쏴봐도 될까?”

“…그러든지.”

실험하는 거에 있어서만큼은 화내는 게 없었다. 하이직은 읏차 소리를 내며 방탄유리를 벽에 걸었다.

뷔노는 빨갛게 테이프가 붙여진 선에 서서 총을 내리쏘았다. 왼쪽 손 말고는 별다른 지지대도 없는데


총알은 유리의 정가운데에 완벽하게 명중했다. 하이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사격 실력은 어디 가지를 않으시네요.”

“레이라 너만은 못하겠지. 누가 뭐래도 조직 최고의 저격수니까.”

하이직은 팔짱을 끼고 뭔가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연구실에서 입고 있던 가운이라 팔 쪽에


잿더미가 그대로 묻어있었다.

“거, 부하들 좀 시켜서 일을 하면 그렇게 총을 잘 쓸 일도 없을 텐데.”

하이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루시랑 라이카는 좀 잘 다루던가?”

“네, 이번 총은 손에 잘 맞는 모양이에요.”

다른 저격수들의 이름을 언급한 뷔노는 총을 훑어보았다.

“완성품이 맞네. 내 동생이 똑똑한 건 알고 있었지만 3 일 만에 완성이라니.”

짝짝짝, 뷔노가 손뼉을 세 번 쳤다. 하이직은 안경을 한 번 올리더니 다크서클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그래서, 이 총을 쓸 일은 있는 거야?”

“자세한 설명은 안쪽에서 하지.”

하이직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향한 곳은 연구실 옆에 있는 창고 같은 공간이었다.

창고라고 하긴 했으나 짐은 거의 없었고 의자 둘이 전부였다. 숨겨진 공간이었기 때문에 문은 바깥에서


봤을 때 티가 거의 나지 않았다.
“여기라면 도청 걱정은 없겠군.”

하이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렇게 계획을 앞당긴 이유가 뭐야.”

“다이아 보스가 경고하더군. 클로버가 곧 나설 거라고.”

클로버라는 표현에 지긋지긋하다는 듯 하이직이 표정을 구겼다.

“뭐, 차라리 빨리 끝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근데 곧이 대체 언제야? 정확한 표현을 써줘.”

“7 일 내로.”

하이직의 표정이 구겨졌다.

“7 일?”

하이직은 혀를 쯧쯧 찬 뒤 말했다.

“내내 안 나서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는 하나지. 언니가 스파이를 데리고 놀아줘서잖아. 아주 재밌는
계획을 짠 모양인데, 지금이라도 그놈 버려.”

“하이직, 선후 관계가 잘못됐어. 내가 스파이를 받아들였기에 놈들이 계획을 짠 게 아니라, 놈들이


계획을 짜게 하기 위해 스파이를 데리고 있던 거지.”

“그걸 위해서라고?”

“일부러 몇 번 도발했으니까.”

다이아와 시저과 관계가 있다는 암시는 클로버와 다이아의 협력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 그리고 둘이
클로버를 완전히 뭉개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협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까지 잡은 잔챙이들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스의 명령을 직접 받는 위치가 아니잖아. 하지만 나를


암살하려는 놈들이면 다르겠지.”

“클로버를 빨리 잡겠다고 언니가 위험해지겠다고?”

하이직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꼭 그런 것만 같지는 않은데 진짜 이유가 뭐야. 혹시… 스파이 놈이 마음에 들어? 외모가 언니


취향이니까?”

뷔노는 피식 웃었다.

“외모는 내 취향이지. 근데 그것뿐인 건 아냐. 걔한테는 따로 갚아줄 게 있어.”

뷔노는 그 말을 한 뒤 시가를 물었다. 하이직은 뷔노를 유심히 보다가 말했다.

“에이, 폼 잡기는. 거짓말이지? 이건 피네가 아니어도 알겠다.”

“…하이직?”

뷔노가 말꼬리를 올려 말하자 하이직이 금세 눈을 피했다.


“…단순한 호기심이지.”

태연한 말투였지만 하이직은 덜미를 놓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봤다고. 왜 그런 평범한 놈한테 호기심이 가는 거야? 아, 미인이긴 하지만.”

“원래 난 별거에 호기심이 다 생기잖아.”

마더, 동생들, 섹스.

평소에는 무감해 보이는 뷔노는 특정 부분에서만 참으로 감정적이었다. 애정? 집착? 어떤 걸로 불러야
할지 몰랐다. 그 경계 안에 조그만 어리바리 청년이 들어온다는 건 하이직 입장에서 탐탁지 않은
이야기였다.

“일 났네, 일 났어. 여기까지 들린다. 피네가 눈물을 쥐어짜는 소리가…….”

“네가 신경 안 쓴다면야.”

“아니, 나도 반대인데. 언니의 의사는 어쨌건 좀 효율이 좋은 행동을 했으면 좋겠어.”

하이직이 정색하고 말했다. 역시 사랑 반대론자인 동생이었다.

“사랑이라고 해봤자, 어? 다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 작용이란 말이야. 약으로도 조절할 수 있고 몇


개월이면 사라진다고. 나는 그런 거를 사랑이라 믿고 집착하고 휘둘리는 게 이해가 안 돼. 섹스 때문이면
자위 기구를 써. 남자보다 훨씬 안전하고 기분이 좋으니까.”

하이직은 뇌라는 말을 강조하며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어째 하이직의 머리 안에는 뇌가 아니라
쇳덩어리가 들어있을 것 같았다.

‘배고플 때나 졸릴 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다 연료 부족이라 그런 건가.’

삐익― 충전을 요구하시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까? 더 격하게 반응하시오. 뷔노는 자신의
생각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자위 기구는 울지도 빌지도 않는걸?”

“그 지독한 성벽. 내 뇌 속 1 위 변태는 언니야, 진짜로.”

하이직이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하이직. 사랑이 아니야.”

차분히 말한 뷔노는 시가를 물었다.

“…뭐, 언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이직은 눈치 좋게 화제를 돌렸다.

“근데 클로버에 대한 정보가 확실한 걸까? 다이아 보스? 가장 믿기 힘든 놈 중 하나잖아.”

하이직은 골똘히 생각하다 비소를 지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피네한테 들은 게 있어. 클로버의 전화 내용을 도청한 결과를 분석하고 있다는데.”


“암호로 되어있어서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많이 해석 못 했는데도 꺼림칙한 문구를 발견했나 봐. 다이아가 클로버를 먹을 작정인가 보던데.”

“뭐?”

“아직 확실하진 않아. 조만간 정리한 내용이 팩스로 오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다이아가 경고를
해준 이유도 알겠어. 클로버에 충분히 타격이 가지 않으면 흡수가 어려우니까……. 재수 없는 놈.”

“우리한테는 나쁘지 않아.”

이렇게 얽히고설키는 악연을 빨리 해결하는데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뷔노의 발언을 들은 하이직이
의아해했다.

“뭐가? 완전 나쁘기만 한데.”

“클로버를 흡수한 다이아가 한동안 거기에만 정신 팔렸을 때, 약점을 노리면 되니까. 그러면 두 조직을
한 번에 잡을 수 있겠지.”

다이아의 자금원이 확실한 만큼, 약점도 확실했다. 그 자금원만 끊어놓으면 되니까.

“…뭐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굳이? 일단은 좀 위험한 계획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하이직은 머리를 긁적이다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따라 조바심이 나는 것처럼 보여. 왜 이렇게 다급해?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어? 사실 피네


언니한테서 들어서 눈치챈 거지만.”

“피네가 그런 소리를 했나?”

정확하게 봤다. 뷔노는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지만 아주 다급한 상태였다. 1 년 내로 조직들을 정리하고


한 번에 와해시키고 싶었으니까.

뷔노는 일기장에 적힌 문구를 떠올렸다.

금주법은 곧 폐지될 것. 밀주업에 대한 문제가 계속 늘어나고 있고, 주세를 못 걷어 연방 정부의 금전적


문제가 대두되고 있음. 앞으로 이른 시일 내에 조직 정리와 사업의 전환이 필요할 것으로 보임.

금주법이 폐지되면 밀주업으로 버는 돈은 한없이 줄어든다. 실버가 계속 위험한 마약 사업에 손을 뻗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마약이 합법화되기까지는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지만.’

뷔노는 시가를 물었다.

“하이직.”

“왜?”

“내가 죽으면 차기 보스는 너로 할 거야.”

하이직이 입을 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피네는 똑똑하지만 가끔 감정적이야. 머스캣은 판단력이 나쁜 건 아닌데 통솔력이 부족하고. 그러니까


네가 하는 게 낫겠어.”
“…뜬금없이 왜 이런 말을 할까아?”

“일주일 안으로 일이 생긴다고 했으니까, 아마 노리는 건 나일 거야.”

“그래서? 언니가 죽기라도 한다고? 웃기는 소리네. 폭발에도 살아남은 잡초 같은 사람이. 허튼소리 하지
말고 그럴 바에 부하들이나 더 훈련시키고 경호나 더 데리고 다녀.”

하이직이 발끈했다. 뷔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야지. 만약의 일에 대비하자는 것뿐이니.”

일단은. 뷔노는 모든 계획을 조금 뒤의 일로 미뤄두기로 했다.

탕, 총이 발포되고 마더의 몸이 뒤로 넘어갔을 때. 흐르던 피와 죽음의 냄새.

더 이상 뛰지 않는 심장과 숨 쉬지 않는 몸.

마더의 소망과 함께 불타버리고 싶다는 짙은 욕망은 일단은 담아둘 것이다.

“이뤄드려야지, 딸 된 도리로서.”

하이직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1. 약속

‘홍색맹의 인구 비율은 0.001%…….’

한마디로 십만분의 일이라는 소리이다. 시몬이 책을 착잡한 눈으로 보던 도중, 시몬 집의 전화기가


울렸다.

띠리리―

시몬은 전화기에 손을 올려 당장이라도 들고 싶은 걸 멈췄다. 클로버의 교육 사항 중 하나가 수화음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수화음으로 전달하는 명령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띠리리― 띠리리― 띡.

전화기가 수화음 세 번을 울리더니 뚝 끊어졌다. 이 건 이웃인 클로버 조직원의 집으로 가라는 의미였다.

시몬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시몬은 로미오에게서 알아낸 별것 아닌 정보들을 정리한 종이를 들고,
조직원의 집으로 향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마자 거칠게 문이 열렸다.

“왔냐?”

그 바람에 시몬의 이마가 부딪혔다. 안에서 대마 향기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시몬은 독한 향에 눈을


찌푸렸다. 으으. 시몬의 신음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굵은 음성이 물었다.
“뷔노랑 약속은. 잡았어?”

“아, 아직이에요…….”

조직원이 시몬의 어깨를 아프게 붙잡았다.

“아직?”

더 힘을 주자 시몬이 인상을 찌푸렸다. 멍이 들 것처럼 아팠다.

“하여간 비리비리해 가지고.”

조직원이 피식 웃음을 흘리고 시몬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뭐, 잘됐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약속을 잡아. 안 그러면 너는 죽은 목숨이니까.”

“내일이요?”

시몬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조직원은 시몬에게 옷장을 가리켰다. 시몬은 주춤하다가 옷장으로 향했다.

“열어.”

옷장 문을 열자 안에는 시몬의 몸에 맞춘 옷들이 있었다.

“저 옷을 입고 내일 나가도록. 보고할 사항은 없나?”

시몬은 굳은 표정으로 뷔노의 성격, 특징, 로미오들에 대하여 정리된 문서를 클로버 조직원에게 건넸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조직원을 보며 시몬이 침을 꿀꺽 삼켰다.

“누가 색맹인지 아닌지 같은 게 궁금하대. 더 제대로 된 정보는 없냐?”

“…….”

“없냐고.”

시몬은 굳은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어떤 정보요?”

“앞으로 시저 조직이 어디를 목표로 하나, 자기들 마약 농장의 위치나, 거래처, 어디에 폭탄을 설치하나
그런 거 쓸모 있는 정보를 가져오라고!”

“시, 저 조직은 마약은 거래하지 않는 거로 아는데요.”

그건 마더의 수칙으로도 유명했다. 정맥에 주사기를 놓는 놈은 살아나갈 수 없다.

“그걸 믿냐, 새끼야? 그게 아니면 자금을 어디서 댔겠어.”

조직원은 시몬의 이마를 검지로 툭툭 밀쳤다. 밀치는 족족 시몬의 작은 머리가 떠밀렸다.

“설령… 그렇다 쳐도 그런 걸 저에게 알려줄 리가 없어요.”

“네가 비위 맞추고 잘 구슬려서 가져오면 되잖아. 남들이 모르는 걸 알아 오는 게 네 역할인 걸 몰라?


몸이라도 더 굴리든가.”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쾅쾅 울리는 소리에 조직원이 거실 밖으로 나왔다. 동시에 거실에서 팩스기가
작동했다. 종이가 팩스기에서 조금씩 나오다가 도중에 멈추었다. 기계 고장인가? 시몬은 조금씩 팩스기로
다가갔다.

“무슨 일인데?”

“무기 보급.”

멀리서 조직원의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은 대화를 나눌 것 같은 낌새에 시몬은 걸음을 한 번, 두 번 더


옮겼다. 그러자 전체적인 종이의 모양새가 뚜렷하게 보였다.

□MN ÷△M&0M √ □N&N44NM

시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낙서를 한 것 같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단어처럼 간격이 일정하게 떨어져
있었고, 클로버 조직원의 팩스기에 인쇄되는 게 그깟 장난질일 리는 없었다.

이게 뭘까. 시몬은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무언가의 암호일 것이라고. 그러나 종이가 걸렸는지 팩스기는
중간에 멈춰버렸다.

‘더 뽑혀 나오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시몬은 이미 나와 있는 단어라도 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


종이가 그저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그날 처리할 거야.”

시몬은 암호 해독 같은 걸 어디서 배운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암호 그 자체를 보고 눈에 담을 수는 있었다.

“결국 하는 건가.”

“자세한 건 문서로 확인해.”

조직원의 눈이 팩스기로 향했다. 팩스기에서 나오는 종이를 살펴본 조직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XX, 이놈의 팩스기는 말을 듣는 날이 없어!”

쾅쾅 거칠게 손등으로 팩스기를 쳤으나 팩스기는 종이를 뽑아내지를 않았다. 조직원은 팩스기 쪽은 결국
포기하고 무기 상자를 찾으러 갔다.

무기 상자를 창고로 옮기는 과정은 꽤 오래 걸렸다. 박스가 여러 개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몬은 그사이를
틈타 팩스기로 향했다.

‘뽑혀라…….’

이리저리 버튼을 누르다가 팩스기를 열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종이는 나오지 않았다. 시몬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손으로 당겼다. 그래도 되지 않자 인쇄기와 종이를 동시에 붙잡은 채 슬슬 움직여 자리를 맞췄다.
걸려있던 종이가 풀리면서 나오기 시작하는 때였다.

“나온다…….”

“뭐 하냐?”

문밖에서 조직원이 배급된 무기 상자를 들고 왔다. 총과 총알의 묵직한 무게감에 조직원이 양팔로 상자를
안아 들고 걷다가 멈칫했다. 시몬의 앞에 종이가 있는 걸 보던 조직원이 표정을 구겼다.
“팩스기가 고장 난 것 같아서 손을 좀 봤어요.”

‘아직 못 봤는데…….’

속으로는 심장이 요동쳐 죽을 것만 같았다. 조직원은 시몬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다지 의심될
부분은 없었다. 흠, 소리를 내던 조직원이 말했다.

“꼴에 배경 좋다고…….”

시몬이 큰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빛났다.

“뭐, 잘했어.”

조직원은 팩스기를 힐끔 보았다. 어차피 암호를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팩스기에서 뽑혀 나오는


도중 휘어진 종이의 가운데 부분을 확인한 그는 웃었다.

[그날 계획이 성공하면 시몬 역시 처리할 것.]

방금 내려온 지령 중 하나였다. 일 처리도 느리고, 더불어 묘하게 시저를 편드는 것 같은 태도인 이놈을
더 살려둘 이유는 없었다. 배경부터 외모, 성격까지 마음에 드는 게 없는 녀석이었다.

“시몬.”

“네?”

“이번 임무에서 정보를 성공적으로 얻어오면 빚을 없던 거로 해줄지 몰라.”

‘…갑자기 왜?’

시몬은 어리둥절한 마음이 반, 불안한 마음이 반이었다.

“대신 잘해야 할 거야.”

앞으로 한 번. 한 번만 이용하고 없앨 예정이다. 조직원이 묘하게 신나 있는 건 알았으나 시몬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등 뒤로는 손으로 선을 그어가며 아까의 종이를 다시
복기하고 있었다.

뷔노는 종이를 펼쳐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한 손으로는 전화기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으며 한 손으로는


해석문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클로버를 도청하고 얻어낸 암호는 그게 다야?”

―응. 정보원들이 더 찾는 중이야.

클로버는 예상보다 꽤나 철저하게 중요 정보를 관리하고 있었다. 뷔노는 피네가 보내준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대충 뭘 할지는 짐작이 가는데.’

웬만한 건 말이 아니라 글로 주고받는지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피네가 암호 해독문을 구해 오기는


했으나 정작 암호를 거의 찾지를 못했으니 곤란한 일이었다.

“정확한 기간을 알아 와.”


―시간을 주면 꼭 알아 올게. 그래도 미리 준비는 해놔.

“그러지.”

일주일 안이라고 했으니 알아내는 건 무리일 것이다. 뷔노는 그렇게 짐작했다.

뷔노는 피네가 건네준 암호와 거기에 대칭되는 암호 해석문을 열어보았다.

“조잡하네.”

암호 자체는 별 체계 없이 조잡했다. 뷔노는 몇 번 해석문을 읽어보았다. 피네가 건넨 문서는 평범한


눈으로 보기엔 그저 여러 색깔의 점이 찍혀있는 종이로 실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뷔노의 눈에는
글씨가 선명히 보이는 문서였다.

홍색맹인 뷔노는 여러 색깔의 구분이 희미했다. 그 희미한 경계는 화려한 색채들이 단순한 배열로 보이게
했고, 뷔노의 눈에는 하나의 문장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뷔노는 종이를 서랍 속에 쑤셔 넣고 열쇠로 잠갔다.

‘어떻게 할까.’

매번 방탄조끼를 입고 나가고 부하들을 모은 채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뷔노는 고민하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만약 날짜를 알 수 없다면 유도해 주면 될 문제였다.

조직원의 집에서 빠져나간 시몬은 암호를 종이에 적어 내린 뒤, 아까 조직원한테 받은 옷을 살펴보고


있었다. 클로버가 준 옷은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평범한 셔츠와 바지에 시몬이 의아해하면서도
옷을 챙겼다.

“이제는 진짜 걸어야 해.”

시몬은 일부러 자신한테 말을 걸면서 암시했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시몬은 다이얼을 돌리려 했다.
시몬은 손을 뻗었다가 다시 몸 쪽으로 당겼다.

“마, 마지막으로 연습 한 번만 하자.”

어떻게 약속을 잡아야 할까. 특별히 티켓 같은 것도 없는데.

“뷔노 님, 저랑 약속을… 저랑 한 번 만나주실… 저랑 노실… 이게 아닌 거 같은데.”

시몬은 머리카락을 잡고 끙끙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후, 한숨을 내쉰 시몬이


종이와 펜을 꺼냈다.

‘대본을 쓴 다음에 그대로 말하자.’

안녕하세요? 전화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좋은 하루 보내셨나요? 점심 식사는 맛있게 하셨나요?


밖에 날씨가 조금 우중충하지만 푸르게 자라난 여름 풀들이 보기 좋습니…….

전화 내용이 아니라 편지 내용에 가까웠다. 시몬은 몇몇 단어들을 지웠다가 다시 썼다. 이런 지루한


첫인사가 아니라…….
띠리리, 전화기가 울렸다.

“뭐, 뭐, 뭐야!”

시몬이 바짝 전화기 쪽으로 다가갔다. 띠리리. 띠리리. 두 번 더 울려도 전화벨은 끊기지 않았다.

“서, 서, 설마.”

뷔노인 건가. 시몬은 잠시 패닉했다가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수화기 너머로 태연하고 익숙하고 근사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나몬.

“거, 아, 안, 여름, 뷔노 님?”

―…거기 전화가 끊기나?

“아, 아뇨.”

하도 말을 더듬었더니 끊기는 줄 알았나 보다. 시몬은 머쓱하게 대답했다.

―별건 아니고 내일 식사나 할까 해서.

‘식사? 우리가 식사를?’

다른 로미오들도 식사를 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본 거 같은데. 시몬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시몬이 말했다.

“식사요?”

―장소는 WF 가 19 번지. 가장 큰 건물. 12 시까지 올 수 있나?

WF 가 19 번지. 가장 큰 건물. 12 시까지. WF 가 19 번지. 가장 큰 건물. 12 시까지. 시몬은 속으로 되뇐


뒤에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네!”

―그럼 이만.

뚜― 연결음이 끊기고 시몬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예상하고, 걱정하고, 고민했던 모든 시간들이 허무할
정도로 금세 일이 풀려버렸다.

“야, 약속이 잡혔다…….”

시몬은 굳었던 어깨를 내려놓았다가 푹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약속이 잡혔다고?

“네, 네…….”

―수고했어.

성의 없는 답변 후 전화는 완전히 끊겼다. 어쨌건 시몬의 하루 일과는 마친 셈이었다. 뷔노와의 약속이


잡혔다는 사실을 조직원에게 보고한 시몬은 암호를 적어놓은 종이를 붙들고 머리를 싸맸다.
□MN ÷△M&0M √ □N&N44NM

“대체…….”

무슨 수학 공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암호는 난해했다. 전체도 아니고 부분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렸지만


시몬은 암호를 펜으로 써가면서 추측을 이어갔다.

시몬은 말단 중의 말단이었으니 마주하는 조직원들이 간부일 리는 없었다. 그러면 이 암호는 클로버


안에서 통용된 걸 텐데, 조직원 대부분이 쓰는 암호라면 어려운 구조는 아닐 것이다.

아마 알파벳에 하나하나 대응하는 구조라 추측한 시몬은 일일이 문자를 넣어보았다. 그러나 너무 복잡했고
괴상한 단어들만 나오기 시작했다.

□N&N44NM

‘이거는 그래도 같은 글자가 좀 반복되는 단어인가 본데.’

시몬은 난이도가 낮아 보이는, 마지막 단어부터 해석해보기로 했다.

N 에 a 를 대입해 보고, b 를 대입해 보고, c 를 대입해 보고…….

시간이 끝도 없이 걸렸다. 시몬은 멍하니 있다가 내일이 뷔노를 만나기로 한 날이란 걸 떠올렸다.

‘왠지 불안해…….’

클로버가 시저에게 무언가를 하리라는 예감이 지워지지 않았다.

‘내일까지 암호를 알아내야만 할 것 같은데. 내일이면 만날 테니까.’

“내일… 내일, 내일……?”

시몬은 벌떡 일어났다.

TOMORROW(내일)

□N&N44NM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글자들이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시몬은 이 가정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몇


알파벳들이 확정되자, 한 단어가 더 풀렸다.

TWO

□MN

???M??

÷△M&0M

TOMORROW

□N&N44NM
‘둘… 내일… 둘… 내일…….’

시몬은 암호를 대조해 보면서 머리를 굴렸다. 다른 단어들도 풀어내려 노력했으나 풀리지 않았다.

“이것만 알아서 뭐 해…….”

내일 둘? 내일 뷔노와 나 둘이 만난다? 두 명의 조직원을 내일 더 뽑는다? 여러 가정이 떠올랐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밤새 암호를 뒤적거렸지만 시몬은 끝내 풀어내지 못했다.

시몬은 클로버에서 줬던 옷을 입은 채 뷔노를 만나러 갔다. 그 안에는 위치 추적기가 들어있었으나 천


사이에 들어간 구조라 시몬은 눈치채지 못했다.

‘WF 가 19 번지. 가장 큰 건물.’

시몬은 길을 잘 찾아갈 수 있을까 고민했으나, 실제로 WF 가에 도착한 이후로는 그 고민을 접었다. 수많은
건물들 사이에서 우뚝 솟은 건물 하나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건물 쪽으로 가자 문 앞에는 정장을 입은 여자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는 경호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여자는 시몬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별다른 긴 설명 없이 말했다.

“따라오시죠.”

뷔노가 미리 언질을 주었던 걸까. 그를 따라 긴 복도를 지나가자 두꺼운 콘크리트 벽으로 보이는 것이
나왔다. 벽은 사이에 얇은 금이 가 있었다. 그는 그 옆에 두꺼비집으로 보이는 물건을 열었다.

그러자 전선이나 버튼이 아닌, 열쇠 구멍이 나왔다. 열쇠를 꽂아 돌리자 금을 중심으로 회색 콘크리트
벽이 두두두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러자 안에 새로 지은 걸로 보이는 엘리베이터가 등장했다.

여자는 엘리베이터의 안에 탑승했고 시몬도 따라서 들어갔다. 머뭇거리던 시몬이 그에게 물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뷔노 님의 집입니다.”

시몬은 그렇구나, 하다가 엘리베이터의 층수가 로마자로 38 까지 적혀있는 걸 보고 물어보았다.

“이 건물 전체가요?”

“동생분들도 거주하고 계십니다.”

어쨌건 건물 전체가 집이 맞긴 맞다는 거다. 시몬은 작고 허름한 자신의 집을 떠올렸다.

‘정말 격차가 크긴 하구나.’

뷔노가 보기엔 형편없을… 아, 이건 안 좋은 징조였다.

별 이상한 걸 신경 쓰고 있었다. 자신은 뷔노의 애인도 첫사랑도 뭣도 아닌데 말이다.

‘그냥, 잠자리 상대만도 못한 사이…….’

어쩌면 대다수 로미오보다 못한 사이. 시몬이 시무룩해하고 있는 와중 엘리베이터는 8 층에서 멈추었다.

여자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았다. 시몬 혼자만이 내리라는 의미로 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보이는 광경에 시몬의 입이 떡 벌어졌다. 8 층에는 대저택의 입구에나 있을 것
같은 아주 커다란 대문이 보였다. 빌딩 안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어리벙벙하게 걸어가던 시몬은
정장을 입은 뷔노를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시나몬.”

“뷔노 님!”

생각한 것보다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헙, 시몬이 입을 막았다. 만난 지 꽤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그랬을 거로 생각했다.

“어째 피곤해 보이네.”

“아, 아니에요.”

사실 내내 알파벳을 대조하다가 잠든 탓에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졸려 보이는 건 싫었기에 시몬은 눈을


깜빡거렸다.

“오늘 피곤하면 안 되는데. 재밌는 놀이를 할 거라서.”

“놀이…요?”

다시 묘한 상상을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몬은 로미오들에게 들었던 적나라한 기술들을 상기해


냈다. 이 방향, 저 방향, 몇 번을 핥고 애무하는지 등에 관한 거였다. 공부는 했지만 적용할 수 있을까?
시몬은 속으로 생각했다.

‘모, 못할 것 같아…….’

뷔노는 시몬에게 말했다.

“뒤로 돌아.”

‘여기서 뭘 하시려고?’

시몬은 속으로 긴장하면서도 순순히 뒤로 돌았다. 저번처럼 손이 묶이는 건 아닌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나 붙잡는 손길은 없었다. 띠, 띠, 띠, 버튼을 누르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러자 대문이 덜컥 열렸고 뷔노가 말했다.

“이제 다시 앞 봐도 돼.”

단순히 암호를 누를 뿐이었다. 시몬은 머쓱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봤다가 까만 어둠 속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든 형체를 보고 기겁했다.

“헉!”

갈색 점박이 무늬를 가진 노란 형체가 시몬에게 달려들었다. 시몬은 기겁하면서 뒤로 엎어졌다. 맹수?

‘설마……. 이러려고 나를 부르신 건가.’

재밌는 놀이라고 했던 것도 그렇고 이미 스파이라는 걸 들킨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사유지에서 맹수의


먹잇감으로 던져주려고 데려온 것이다.

시몬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뼈까지 박히고 살을 뜯어낼 것이다. 잔뜩 긴장한 세포들을
자극하는 이 감각은…….

할짝. 혀에 난 돌기가 피부를 간질이고 있었다. 시몬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응?”

눈을 뜨자 뷔노가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양이도 무서워하는 거야?”

고양이? 고양이라고? 이렇게 큰…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다. 확실히 고양이치고는 크지만 맹수라 보기엔
어폐가 심한 크기였다.

“이리 와, 코르비나.”

한마디에 코르비나, 라고 불린 고양이가 뷔노의 어깨로 우아하게 뛰어올랐다. 뷔노는 고양이를 머리부터
등까지 쓸어주었다.

“천적은 무서울 법하지.”

그건 또 무슨 소리인지. 시몬이 얼굴을 옷에 푹 묻은 채 절레절레 저었다.

“아, 아니에요. 치…타인 줄 알고.”

“치타?”

뷔노가 눈을 몇 번 깜박거리다가 조소를 지었다. 시몬은 쥐구멍으로 기어들어 가고 싶은 감각을 느꼈다.


뷔노는 코르비나를 바닥에 풀어주며 말했다.

“물어.”

왕, 코르비나가 시몬에게 달려들었다. 시몬은 다시 눈을 질끈 감고 피하려고 했다. 시몬은 잠시 그


상태로 있다가 다시 눈을 떴다.

‘왜… 왜 피했지?’

뷔노는 피식 웃고 있었다. 코르비나는 발톱 하나 세우지 않은 채 시몬에게 몸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뷔노는 똑같이 겁먹은 시몬을 내려다보았다.

“어디 보자 코르비나가 제대로 숨통을 끊어놨나?”

상처가 났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목을 문질렀다.

“안 죽었어요…….”

시몬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코르비나는 시몬의 몸에서 내려와 바닥에서 몸을 쭈욱 늘렸다.

“얘는 사바나 캣. 한마디로 고양이야. 뭐 무늬는 치타와 비슷하지만,”

뷔노는 코르비나의 겨드랑이를 잡은 채 올려 얼굴을 보여주었다. 고양이 특유의 보석 같은 동그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멋쩍고 창피하다. 시몬은 하하, 웃더니 말을 꺼냈다.

“고양이를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고양이? 뭐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아, 그러시구나…….”

그러면 왜 고양이를 키우지? 시몬의 의문을 꿰뚫어 본 듯 뷔노가 답했다.

“예전에 스페이드에서 키우던 고양이거든.”

스페이드? 시몬은 코르비나를 훑어보았다. 그러면 원래는 뷔노의 고양이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집사를 죽였으니 대신 돌봐드리기라도 해야지.”

살벌한 내용에 대조되는 장난기 섞인 어조였다. 스페이드 조직원을 죽였다는 건 놀랍지 않았다.

다만 뷔노가 고양이를 신경 쓴다는 건 시몬에게는 꽤 의외의 정보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고양이 역시 같이


쏴죽일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시몬은 슬쩍 무릎을 세워 앉아 코르비나를 안아보았다. 코르비나는 시몬에게 쏙 안긴 채 갸르릉거렸고


시몬은 코르비나의 목 뒤를 긁어주었다. 꽤 잘 따르는 모습을 본 뷔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새로운 사람이 오니까 흥미가 일었나 보지?”

뷔노는 팔을 벌려 코르비나를 불렀다. 코르비나는 뷔노를 보고 눈치를 보는 듯했지만 결국 시몬에게


안겨있었다.

“워, 원래 동물들은 좋은 사람을 알아본대요.”

시몬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좋은 사람?”

뷔노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알아보는 재주가 있긴 하지.”

뷔노는 코르비나의 이마를 긁었다. 그러자 코르비나가 골골 소리를 냈다.

“나름 마더가 직접 이름을 내려준 조직의 간부야, 예우를 다해.”

“이름을요?”

코르비나. 그러고 보니 바에서 본 와인 명칭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코르비나도 와인의 한 종류였지.


코르비나를 몇 번 쓰다듬던 뷔노는 코르비나의 귀에 무언가를 살짝 속삭인 후 방 안에 들여보냈다.

“치타는 풀어두면 큰일 나니까.”

뷔노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뷔노가 등을 돌린 순간 시몬이 입술을 삐죽였다.

뷔노는 방에 코르비나를 넣어둔 뒤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몬도 따라서 들어가는데 차가운 대리석의
감촉이 발바닥에 느껴졌다.

긴 복도를 따라 쭉 걸어가자 커다란 내부와 달리 단출한 구조의 침실이 나왔다. 침대와 옆의 서랍장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
소녀는 밤하늘 속 별빛이 호수에 비치는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몬은 그 소녀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지금이 최적의 시기라고 생각했다. 시몬은 주머니 속에서 작은
정육면체 케이스를 꺼냈다. 그 안에 들어있던 얇은 물건을 검지와 엄지로 쥔 시몬이 소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소녀는 뒤돈 후 시몬의 손안에 들린 물건을 보며 말했다.

“이게 뭐야?”

“바, 반지…….”

소녀는 이리저리 반지를 든 채 살펴보았다. 은빛 고리 위에 보석 하나가 얹어진 단순한 구조였다. 보석은


암녹색에 붉은색 반점이 콕콕 찍혀, 피가 튄 것 같은 문양을 띠고 있었다. 소녀가 말했다.

“뇌물치고 그리 비싸 보이진 않은데.”

“뇌물 아니에요…….”

“알았어, 선물이라고 치고. 앞으로 뒤를 잘 봐주지, 친구.”

장난스럽게 쳐다보던 소녀는 반지 속 보석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시몬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타, 탄생석…….”

“탄생석?”

잘 모른다는 듯한 소녀의 말투에 시몬이 설명을 덧붙였다.

“탄생석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행운이 찾아온대요. …위험한 일이 많을 거 같아서요.”

“그래?”

소녀는 미신 같은 걸 잘 믿는 편은 아니었다. 시몬은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번에 3 월 15 일이 생일이라고 했잖아요?”

“그랬었나.”

일일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시몬이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

“3 월생은 혈석이 탄생석이래요. 그래서 혈석을 반지에 넣었어요.”

진심으로 탄생석 설화를 믿고 있는 듯 보였다. 소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 상술에 쉽게 넘어가네.”

“사, 상술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라도 선물을 주고 싶었던 건데.’

소녀는 시몬의 마음은 전혀 몰랐다. 시몬은 반지 속 보석을 가리키며 구구절절 말을 이어갔다.

“이 초록색 돌은 스테인드글라스를, 붉은 반점은 신의 피를 상징하는 거래요. 이 돌을 몸에 지니게


된다면 신의 가호를 받게 되는 거죠…….”

낭만적인 미소를 지으며 시몬이 고개를 옆으로 기댔다. 소녀는 시몬의 반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뭐야?”

“아, 이건 제 탄생석이에요. 진주.”

“자신의 행복을 비는 거야? 나쁘지 않지.”

남한테 주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시몬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 그건 아니고. 저는 수, 순결 반지로 쓰기로 했어요. 마침 진주가 순결이라는 의미가 있기도 하고…
….”

성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기 위해 반지에 맹세하기로 했다. 성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반지를 빼지 않겠다.


시몬은 구구절절 설명하다가, 힐긋 소녀를 바라보았다.

“나도 순결 반지로 쓰라고?”

소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시몬이 고개를 다급하게 저었다.

“아, 아니. 당신 건 축복을 비는 의미로…….”

“다행이네. 아예 못 낄 뻔했어.”

“으, 응?”

“한 번 하면 못 끼는 거 아냐?”

이미 오래전부터 못 꼈겠네. 소녀가 말을 이어갈수록 시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그렇죠…….”

소녀는 시몬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더니,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네 반지, 내가 빼줄까?”

시몬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뷔노는 시몬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몬은 하얀 진주가 달린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었다. 뷔노는


손가락을 책상에 두드렸다.

“은근히 괘씸하단 말이지.”

“네?”

“오늘은 게임을 할까.”

당연히 옷부터 벗어야 할 줄 알았던 시몬이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있었다.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내가 이기고 뒷면이 나오면 네가 이기는 거야.”

“…그게 다인가요?”

뭔가 더 있을 거란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긴장에 시몬의 목이 뻣뻣해졌다.


“벌칙이 없으면 게임을 하는 의미가 없지.”

“그…런가요?”

“당연한 거 아냐.”

뷔노는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진 쪽은 옷을 한 꺼풀씩 벗지. 그리고 상대가 뭘 해도 가만히 있기.”

가만히 있기, 라고 말하는데 무조건 대상은 시몬이 될 것같이 시몬을 응시했다. 시몬은 움찔 떨었다.

“어때.”

어때, 라고 하면 시몬은 좋아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들어?”

뷔노가 시몬의 턱 밑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묘한 느낌에 시몬이 목을 부르르 떨었다. 새 같네. 시몬은
뷔노의 중얼거림을 애써 무시했다.

“아, 대신. 넥타이랑 양말은 맨 마지막에 벗는 거야.”

“…네?”

순간 시몬은 넥타이와 양말만 입고 있는 본인을 상상했다. 그게 대체 무슨 볼썽사나운 차림이란 말인가.

“싫어?”

“아뇨!”

“뭐 또 그렇게 부정할 것까지야.”

시몬의 귀가 화르륵 타올랐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엄청 밝힌다니까.”

“아, 아…….”

아닌데. 시몬은 차마 부정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야 집히는 게 몇 개 있긴 했다.

“오늘은 가터벨트 입고 왔어? 그러면 한 겹 더 늘겠네, 좋겠다.”

“오, 오늘은 안 입고 왔어요.”

“흐음.”

새로운 시도를 해볼까 싶었는데. 뷔노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뷔노는 지갑을 뒤적거렸다.

“아, 동전이 없네. 귀찮아서 매번 안 받았더니. 동전 있어?”

“있을 거예요.”

있을 거예요, 가 아니라 무조건 있다. 얼마나 돈이 많으면 잔돈을 안 받지! 시몬은 경악했지만, 티 내지
않은 채 방긋방긋 웃으며 동전을 내밀었다.

가장 작은 동전을 뷔노에게 내밀자 뷔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거 말고. 더 무거운 걸로.”

대체 무게가 무슨 상관인지. 시몬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동전 주머니를 착실히 뒤졌다.

“이거 귀엽네.”

동전 주머니에는 귀여운 토끼와 당근이 자수로 되어있었다.

“아, 제가 한 거예요. 자수가 취미라…….”

시몬이 놓칠세라 얼른 말했다. 듣기로는 뷔노는 조신한 남자를 선호한다고 했으니 이런 취미는 플러스
요인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 자수하다 손이나 찔리는 일 없게 하고.”

그러나 뷔노는 시몬이 자수를 하든 말든 큰 관심이 없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거에 뷔노가 관심을 둘


리가 없었다.

눈치채지 못한 시몬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동전을 내밀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지름의 동전을
뷔노가 몇 번 던졌다 잡은 뒤 말했다.

“…그거면 됐어. 그럼 어디 한번 볼까.”

엄지와 검지 사이로 뷔노가 동전을 튕겨 올렸다.

휙, 날아오른 동전은 앞뒤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빠르게 회전했다. 두 손바닥으로 동전을 잡은 뷔노가
시몬에게 물었다.

“어느 쪽 면일 것 같아?”

“모르겠어요. 너무 빨리 돌아가서.”

“이번에 맞추면 한 번은 봐줄게.”

봐줄게? 뭔가 말투가 이상했다.

시몬은 생각했다. 어차피 뒷면이라면 자신은 벗을 필요가 없고 앞면인 경우에만 지는 거였다. 그러니
앞면이라고 대답하면 시몬은 손해 볼 일이 없었다.

“그러면 앞면에 걸게요.”

“어디 보자.”

뷔노가 위 손바닥을 치웠다.

“앞면이네, 축하해?”

진짜 앞면이 나왔다. 시몬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동전을 바라보았다. 뷔노는 그다지 놀란 눈치도 아니었다.

“그럼 이번 판은 없었던 걸로 하고, 한 번 더 던져볼까.”


뷔노는 다시 동전을 튕겼다. 튕긴 동전이 이번에는 테이블에 떨어졌다. 테이블 위에 뷔노가 손을 포갰다.

“이번엔 무르기 없기로.”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뷔노는 손을 치웠다.

“또 앞면이네.”

“…그러게요.”

확률은 4 분의 1.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다. 시몬은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하늘하늘한 셔츠와 쏙
들어간 허리선이 부각되는 검은 바지였다.

그제야 시몬은 오늘 그다지 걸친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셔츠랑, 바지, 그 다음은… 말을 말자.


거기까지 벗고 나면 후는 의미가 없었다.

뷔노는 의자에서 일어나 시몬을 소파에 넘어뜨렸다.

“아!”

뷔노가 시몬의 허리를 더듬었다.

“안에 별거 없네?”

더듬거리는 손이 청바지 윗부분을 붙잡았다. 당장이라도 끌어내릴 것 같은 손짓이었다.

“다음에는 위를 벗을 거야? 아래를 벗을 거야?”

“위, 위요!”

뷔노는 동전을 던졌다. 그 이면에는 어차피 벗은 걸 보리란 의도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이번엔 네가 잡을래?”

“예?”

그렇게 해도 된단 말인가. 이때까지 뷔노가 수작질을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의심을 하던 시몬이었다.

“공평해야지. 그치?”

뷔노가 시몬이 주먹을 쥐고 있던 왼손을 잡아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쳤다. 그리고 손바닥을 검지로 그림을
그리듯 문질렀다. 간질거리는 촉감에 기분이 묘해졌다.

퉁―

뷔노가 동전을 튕겨 올렸다. 누워있는 시몬의 왼손에 동전이 떨어졌다.

어떻게 보고 잘 잡아볼걸, 그냥 떨어지는 대로 받아버렸다. 아차, 하던 시몬이 오른손으로 동전을 가렸다.


별 의미 없는 시늉이었다. 시몬은 멋쩍어하면서 오른손을 뗐다.

“운이 좋네.”

8 분의 1 확률. 앞면이 나왔다.


“물론 내 운이.”

“이, 이건…….”

“벗어야지. 아니면 내가 벗겨줘?”

뷔노가 셔츠 밑에서부터 손을 움직여 끌어 올렸다. 가슴께까지 셔츠가 끌어 올려지고 나서야 시몬이


다급하게 말했다.

“제, 제가 벗을게요.”

양손을 이용해서 한 번에 셔츠를 벗자 하얀 배와 가슴이 드러났다.

“넥타이는 벗지 말고.”

검은색 넥타이가 상체에 걸쳐져 있었다. 그 광경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시몬이 불안해했다. 뷔노의
눈빛도 묘하게 바뀌어 시몬이 몸을 조금 뒤척였다.

“역시 넥타이도…….”

“놔둬.”

뷔노는 이 순간을 음미하겠다는 듯 가슴 사이와 배에서 갈라진 복근 부분을 검지로 훑어 내렸다. 그러다가
유두 부분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듯 만졌다.

‘여, 여기를?’

이런 부위를 건드릴 줄이야. 위아래로 긁는 손짓에 시몬이 움찔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으, 으읏… 아, 아파요.”

사실 그렇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고통인지 쾌감인지 알 수 없는 감각이 너무 자극적이었다.

“아파?”

뷔노가 유두를 중심으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럼 왜 이렇게 세우는데?”

아까 꼬집은 바람에 연분홍빛 유두가 새빨개져 있었다. 아니, 전체적으로 하얀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지속된 자극에 유두가 꼿꼿하게 서있었다. 그걸 확인한 시몬의 얼굴이 붉어졌다.

“거기 말고.”

뷔노는 시몬을 바닥에 눕힌 뒤, 허벅지 위에 앉았다. 그는 바지 위로 튀어나온 성기 부분을 잡아서 꾹


눌렀다.

“흐윽!”

시몬의 허리가 튕겨 올라왔다. 뷔노는 시몬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어깨를 다시 밀쳤다.

뷔노는 바지 위로 성기를 만지작거렸다. 위아래로 쓸다가 가끔 꼬집으면 읏, 소리가 터져나왔다.


“빠, 빨리. 동전 던져주세요.”

“보채기는.”

뷔노는 시몬의 어깨를 눌렀다. 일어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대로 있어.”

팅―

뷔노는 동전을 한 번 더 튕겼다. 이번에는 시몬의 배 위에 동전이 떨어졌다. 차가운 감촉이 배에 닿았다.

“뭐일 것 같아?”

누운 자세 그대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시몬이 몸을 끌어당겨서 배에 올라간 동전을 확인했다.

“앞면……?”

“정답.”

등에서 힘이 쭉 빠졌다. 시몬이 도로 뒤로 눕자 뷔노가 동전을 배에 대고 꾹 눌렀다. 배가 단단해서


동전이 들어가는 감각은 없었다. 뷔노가 피식 웃었다.

“저, 저!”

“왜?”

“이대로는 벗을 수가 없어요.”

뷔노가 시몬의 허벅지를 깔고 앉은 상태 그대로였다. 뷔노가 아, 소리를 내더니 뒤로 조금 물러났다.


시몬이 바지를 무릎까지 내렸을 때, 뷔노가 발을 내밀어 시몬의 중심을 문질렀다.

“아, 아!”

뷔노가 발로 시몬의 성기를 앞쪽으로 밀어붙였다.

“윽!”

빳빳하게 피가 몰려 한층 예민한 상태에서 수직으로 성기가 세워지자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뷔노는 발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시몬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비음을 계속 흘리기만 했다.

“흐읏, 흐, 응!”

시몬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그걸 본 뷔노가 발을 밀치는 걸 그만두고 발을 위로 쓸어 올렸다.

아프고 강렬한 자극에서 부드럽게 애태우는 것 같은 감각이 이어지자 시몬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하아…….”

명백하게 기분 좋은 걸 참는 숨소리였다. 뷔노가 발로 성기를 이번엔 짓뭉개듯 눌렀다.

“흣, 윽!”
사정없이 밀어붙였을 때와는 달리 약간은 힘 조절을 한 것이었다. 그 상태로 뷔노는 성기를 발바닥에 대고
비볐다. 시몬은 두 가지 의미로 성기가 터질 것 같았다.

“발로 해도 좋아?”

뷔노는 눈을 찌푸린 채 발을 돌연 멈췄다.

“끄으으윽, 흐으, 흐으윽…….”

“대답 안 하면 멈출 거야.”

“흐, 조, 좋아요.”

시몬이 힘껏 고갯짓을 했다. 그걸 보던 뷔노가 발을 멈췄다.

“으, 어, 왜…….”

분명히 대답했는데, 왜 발을 멈췄는지 알 수가 없었다. 뷔노가 씨익 웃었다.

“대답하면 계속 해준다고는 안 했는데?”

뷔노는 태연하게 다리를 거두고 말했다.

“동전 던지자.”

그 말에 시몬이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뷔노의 정장 차림은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는데, 자신은 이것까지
벗어 내리면 알몸이었다.

“도, 동전 말고 다른 거로.”

“뭐?”

‘어차피 또 앞면이 나올 텐데.’

벌써 5 번 연속 앞면이다. 이쯤 되니 확실해졌다. 뷔노가 무언가 술수를 쓴 건지, 동전의 회전을


파악하는 동체 시력과 그 타이밍을 정확히 노리는 반사 신경이 있는 건지는 몰랐다.

하지만 중요한 건 무조건 판은 시몬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앞면의 향연이 나올 수 있겠는가.

뷔노가 시몬을 응시했다. 짐승 같은 눈빛에 시몬이 움찔 떨었다.

‘아, 그냥 동전을 던지자고 할 걸 그랬나.’

속옷을 벗고 나면 뷔노가 제대로 만져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생각까지 드는 거 보니 제대로 미쳤나…….’

시몬을 보던 뷔노는 고저 없이 물어보았다.

“왜, 동전 던지기가 불공평한 거 같아? 다른 걸로 바꿔?”

그 태도가 동전 던지기가 모두 우연이었던 건 아닌가, 생각하게 할 정도로 덤덤했다. 시몬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그러면. 네.”

“그렇게 내가 벗는 게 보고 싶나?”

“네, 네?! 아, 아니, 그게.”

보고 싶다고 말할 수도, 보고 싶지 않다고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거야 자신만 벗는 게 창피하긴 했다.

‘벗을 거면 같이 벗는, 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시몬은 빨개진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머리 위에 뷔노의 손이 얹혀있었다. 한 번 머리를 쓸고


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뭐만 말하면 바로 홍당무가 되네, 시나몬.”

‘시나몬…….’

영 익숙지 않은 이름에 시몬이 멋쩍게 웃었다.

“가위바위보로 하자. 하는 법은 알지?”

“알아요.”

가끔 뷔노가 자신을 사람이 아니라 애나 개로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게 거의 사실에


가깝다는 걸 시몬이 모른다는 건 행운이었다.

뷔노가 손을 내밀었다. 시몬 역시 손을 내밀었다.

“가위, 바위…….”

어째 뷔노의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말이었다.

“보.”

둘이 동시에 손을 멈췄다.

나온 건 가위, 그리고 보였다.

“오!”

한쪽에서 탄성이 나왔다. 반대쪽은 말이 없었다.

“…….”

가위를 낸 건 시몬이었다. 순간 기쁨을 억제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시몬이 변명했다.

“그, 그게 아니라.”

시몬이 팬티를 벗지 않게 된 걸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뷔노의 눈치를 보았다.

“왜 눈치 봐.”

뷔노는 덤덤하게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졌다.


‘아, 뷔노는 남은 게 많지.’

뷔노는 셔츠 위에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이 추운 날씨에 셔츠 안도 맨몸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두 번 정도는 이겨도 되지 않을까.’

뷔노가 흘긋 시몬을 위아래로 훑었다. 시몬은 왠지 생각이 읽힌 것 같다는 감각이 들었다.

뷔노가 입을 열었다.

“뭐 해, 안 하고.”

“아.”

시몬이 쭈뼛하다 손을 내밀었다.

“아 참, 시나몬. 알려주는 걸 까먹었는데.”

시몬이 귀를 기울였다. 뷔노는 어딘가 위압적인 눈빛으로 시몬에게 말했다.

“난 계속 주먹만 낼 거야.”

“…네?”

‘이건 지라고 강요하는 건가? 그런 건가?’

그런 건가는 무슨. 당연히 강요하는 거였다.

“다시 하자?”

무언의 압박에 시몬의 손이 벌벌 떨렸다.

‘어, 어쩌지. 가위? 보?’

“가위, 바위…….”

둘이 손을 내밀었다.

“보.”

뷔노의 눈썹이 올라갔다.

“귀엽긴 한데.”

뷔노의 손은 뷔노가 말한 대로 주먹이었다. 그리고 시몬의 손 역시 같은 형태였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무승부야. 미적지근한 건 딱 질색이거든.”

뷔노의 손바닥이 크게 펼쳐져 시몬의 주먹을 감쌌다.

“다시 생각해.”

시몬이 침을 꿀꺽 들이켰다.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럴 거면 그냥 벗으라고 하지.’


뷔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시몬을 보고 있었다. 시몬이 하아, 숨을 내쉬었다. 숨마저 떨리고 있었다.

시몬의 등에서 식은땀이 나왔다. 이제부터가 관건이었다. 보를 낼 것인가, 가위를 낼 것인가.

분명 뷔노는 무승부가 싫다고 했으니 양자택일의 문제였다.

“가위, 바위, 보.”

소파에 거칠게 옷이 던져졌다. 던져진 건 검은 조끼였다. 시몬이 보를 내밀었다.

“잘하네?”

뷔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다시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가위 바위…….”

“잠시만요.”

“왜?”

“이긴 쪽이 뭘 해도 진 쪽은 가만히 있기로 했잖아요.”

시몬은 자신이 이 문장을 말하면서 한 번도 더듬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뷔노가 눈썹을 찡그렸다
풀었다.

“맞아. 뭘 하려고?”

“그, 그건 뷔노 님도 알려주시지 않았으니까.”

“비밀이라고?”

그 말을 하고 시몬이 눈을 내리깔았다. 뷔노의 손가락이 소파의 손잡이를 톡, 톡, 두드렸다.

크고, 길고, 투박하기까지 한 저 손이 제 머리카락을 잡아채거나 목을 조르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뷔노는 소파에 털썩 앉은 채 한쪽 다리를 반대 다리에 얹었다.

“그래, 해봐.”

비딱하게 앉은 자세는 벌칙을 수행하는 사람으로는 안 보였다. 하지만 시몬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엎어져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몬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양손이 뷔노의 머리 옆 벽에 닿았다. 시몬은 눈을 질끈 감았다.

뷔노의 뺨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쪽―

소리가 나자마자 후다닥 시몬이 떨어졌다.

“돼, 됐어요.”

“…그게 끝이야? 입도 아니고.”


사실 키스가 본래의 목적이 맞았다. 그저 막상 시도하려고 하니 부끄러움에 몸이 움직이질 않았을
뿐이었다.

뷔노가 시몬의 입술을 보았다. 벚꽃 같은 분홍빛 입술이 욕구를 당겼다.

“좋아, 게임 끝.”

“네?”

뷔노는 그대로 시몬을 소파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대로 뷔노 위로 넘어진 시몬이 벽에 손을 대고 버텼다.


뷔노는 그런 시몬의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 얼굴을 맞붙였다.

“자, 잠시만…….”

시몬의 말소리는 뷔노의 입술 안으로 삼켜졌다. 뷔노는 대번에 시몬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입술을 몇 번
가볍게 깨물더니, 뷔노의 혀가 시몬의 입술을 가로지르고 들어왔다.

“우, 우읍.”

뷔노는 먹어치우듯 시몬의 안을 침범했다. 탐욕스러운 움직임에 당황한 시몬은 속절없이 끌려갔다.
강하게 빨아들이는 힘은 약해져 살짝살짝 쓰다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애타는 감각에 시몬은 뷔노의 혀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러나 뷔노가 먼저 움직여주지는 않았다.

시몬은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뷔노의 치열을 훑었다. 뷔노가 호응하자 서툰 움직임이나마 적극적으로


해나가기 시작했다. 시몬은 뷔노의 혀를 감아올렸고, 둘은 서로의 타액을 훔쳤다.

“하아…….”

피처럼 붉은 뷔노의 입술이 젖어있었다. 아까의 감각에 젖어 시몬이 뷔노의 입술을 보았다.

‘내 입술도, 저렇게 부풀었을까.’

그러자 굉장히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하면 안 되는 걸 한 것 같았다. 시몬은 뷔노의 몸에서 자신의 몸을
떼고 옆에 앉았다.

뷔노는 시몬을 잠시 쳐다보았다. 새하얗고 부드러운 피부에서 뺨과 목, 귀만은 분홍빛이었다. 하얀


솜털까지 눈에 담은 뷔노는 셔츠를 벗어 던졌다.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

시몬이 놀라 감탄사를 뱉었다. 눈은 저도 모르게 뷔노의 몸을 살폈다.

구릿빛 피부의 상체는 운동을 자주 한 몸답게 균형이 잘 잡혀있었고 복근이 두드러졌다. 선이 뚜렷한 배
위로 시몬이 무심코 시선을 올렸다.

굴곡이 진 부위가 바로 보였다. 둥글고 도드라진 게 분명 자신의 몸과는 다른 곡선이었다.

뷔노가 바지, 그리고 속옷까지 벗어 내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스쳐 지나간
광경이 머릿속에 진하게 남았다. 처음으로 본 여자의 몸이었다.

‘거기로 바로 눈을 돌리다니.’

“시나몬.”
그 말에 시몬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탁탁. 뷔노가 제 허벅지를 두 번 두드렸다.

“이리 와.”

뷔노가 입술을 길게 늘여 웃었다. 시몬은 머뭇거리다 뷔노의 옆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뷔노가 시몬을
감싸 안고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자, 잠깐만요.”

앞뒤로 느릿하게 움직이자 시몬이 비음을 흘렸다. 비비적거리다 멈췄다 비비적거리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맞닿은 부분에서 액이 나와 미끈거렸다. 위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몸짓에 몸이 애달았다.

“흐응, 흐으, 흐.”

뷔노의 숨도 약간 가빠져 왔다. 왕복할 때마다 쾌감으로 몸이 달달 떨렸다. 닿은 채 비비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시몬이 뷔노의 쇄골 쪽에 입을 맞추었다.

시몬은 소파 쪽으로 걸어가 뷔노의 앞에서 고민하다 옆에 앉았다.

“주세요.”

“뭘?”

“넣게… 해주세요.”

나름 준비한 말이었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시몬이 뷔노를 올려다봤다. 최대한 가녀리고 먹음직스럽게


보이기를 바랐다.

그런데 정작 뷔노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시몬의 몸에서 일어났다.

“끼워.”

명령조의 목소리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시몬이 빠른 동작으로 일어나 바지 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콘돔 케이스에서 하나를 꺼내 껍질을 벗겼다. 서툰 솜씨로 끼우려던 그 찰나에 뷔노가
말했다.

“그거 말고.”

뷔노가 은색 고리를 시몬에게 던졌다.

“이거.”

소파에 앉은 뷔노는 TV 를 켰다.

“…뷔, 노 님?”

시몬이 뷔노의 앞에서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에 끼우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손에도 발에도 맞지 않을 링의 사이즈는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맞댄 정도의 크기였다.

‘설마 여기에?’

이게 맞을 만한 부위는 여기밖에 없었다. 시몬이 링을 든 채 우왕좌왕하자 뷔노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결국 시몬은 귀두 부근에 은색 고리를 잡아 끼웠다. 뷔노의 표정이 풀린 걸 본 시몬은 이게 정답임을


눈치챘다.

‘대체 뭐 하러?’

조금 밀어 넣자 성기에 링이 약간 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링이 정말 잘 어울린다, 달링.

TV 에서 결혼반지를 나눠 끼는 커플의 말소리가 들렸다. 시몬의 얼굴이 붉어졌다.

뷔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TV 만 보고 있었다. 시몬은 역시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성기를 죄어오는 압박이 갈수록 커져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좀 작지 않아?

―아냐, 정말 딱 맞아.

시몬이 제 것을 살짝 비볐다. 뷔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암묵적인 허락이기를 빌며 시몬이


제 성기를 흔들었다.

‘이럴 거면 옷은 왜 벗었어…….’

복근 자랑이었나. 시몬은 속으로 오열했다.

뷔노는 시몬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시했다. 자신이 투명 인간이라도 된 건지 정말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닐 텐데 동요 하나 보이지 않았다.

뷔노가 관심을 주지 않으니 행동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시몬은 제 성기를 힘을 주어 더 빨리


흔들었다.

‘한 번, 한 번만 가면 그만둬야지.’

그렇게 합리화한 시몬은 무아지경에 빠지듯 성기를 문질렀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던 절정으로 갈
수는 없었다.

“아, 으, 흑.”

그제야 시몬은 왜 뷔노가 자신이 자위하는 걸 멈추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링이 귀두에 걸쳐있는
바람에 사정을 못 하게끔 되어있었다. 옥죄는 링에 아파오기 시작했다.

“뷔, 뷔노, 흣, 님…….”

애타게 불러도 바뀌는 건 없었다. 성기부터 아랫배가 뻐근한 감각에 시몬이 링에 엄지를 댔다. 그러자
귀신같이 뷔노가 고개를 돌렸다. 시몬이 바로 손가락을 떼어냈다.

왜 이러는 걸까.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시몬이 뷔노에게 빌었다.


“아, 죄송, 흐, 해요, 잘못했어요. 제발, 빼주세요…….”

뷔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몸을 흔들어가면서도 시몬은 뷔노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애절하게


말했다.

“흐윽, 제, 제가 너무 서툴러서…….”

아무래도 정답이 아니었나 보다. 시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멋대로 넣어, 흑, 달라고, 해서!”

그 말에 뷔노가 시몬을 보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뷔노의 시선이 닿자 시몬의 손이 느릿해졌다.

“계속해.”

머뭇거리던 시몬이 손을 다시 움직였다. 골반과 허벅지가 움찔 떨리면서 목이 뒤로 꺾였다.

“으으, 윽, 으으…….”

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 링 때문에 원하던 감각까지 도달할 수 없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시몬이 뷔노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시몬이 자신의 뺨을 다리에 대고 비볐다.

뷔노는 시몬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목에 걸린 넥타이가 아래로 잡아당겨지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아!”

‘이 정도는 벌도 아닌데.’

고개를 숙인 시몬을 보며 뷔노가 생각했다. 이게 얼마나 관대한 처분인지 모르는 시몬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아, 앞으로는, 윽, 절대 안 그럴게요. 한 번만 봐주세요…….”

시몬의 성기에 피가 몰려 붉어지다 못해 힘줄이 잔뜩 솟아 팽팽했다. 투명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잘할게요……. 네?”

시몬이 뷔노의 한 손을 잡고 뺨에 대고 문질렀다. 뺨의 물기가 손으로 옮겨갔다.

동그랗게 뜬 눈과 긴 속눈썹까지 본 뷔노는 사정 방지 링을 빼주었다. 그러자마자 끝에서 희멀건 액이


흘러나왔다.

“흐윽! 흐, 아아아!”

시몬은 부들부들 떨었다. 사정감에 눈을 뜨지도 못할 만큼 쾌감이 몰려왔다.

“하아…….”

탈진한 채 시몬이 바닥에 몸을 늘어뜨렸다.

―언제 하나 했더니 이제야 하는구먼! 정말 축하해.

TV 에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좋았어? 혼자서 잘하던데.”

뷔노가 피식 웃었다. 시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한 번 더 할래? 이번에는 보고 있어 줄게.”

뷔노가 쪼그려 앉은 상태로 시몬과 눈을 맞추었다. 시몬은 고개를 저었다. 뭔가 결의에 차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동안 저, 저만 갔으니까.”

뷔노는 다리를 벌린 채 소파에 팔을 괴고 앉아있었다. 시몬이 뷔노를 올려다보았다. 뷔노는 아무 말 없이


시몬을 보고만 있었다. 시몬이 천천히 뷔노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시몬은 클리토리스를 조심스레 혀끝으로 핥아 올렸다. 아무런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걸 보고,


느릿하게 새끼 고양이가 하듯 다시 한번 핥아 올렸다.

시몬이 살살 눈치를 보며 핥아 올리고, 부드럽게 빠는 동작을 반복했다. 숨결 하나하나가 느껴질 만큼


느릿한 동작에 뷔노가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한 뷔노가 시몬을 보면서 말했다.

“왜, 너도 나 애태우게?”

그 말에 시몬이 더 느릿하게 혀를 쓰더니 헤실거리며 웃었다. 뷔노가 시몬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이게.”

너무 봐주니까 기어오르는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뷔노는 아플 정도로 움켜쥐지는 않았다.

머리카락을 잡은 걸 신호로 시몬의 혀가 빨라졌다. 위아래로 빠르게 혀를 놀리기도 하고, 소음순을 갈라


살짝 속살을 몇 번 찌르기도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안 왔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아래에서 위로 혀를 놀렸을 때 머리카락을


잡은 손이 시몬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이게 좋은 거구나.’

빠르게 눈치챈 시몬이 최선을 다해서 혀를 움직였다. 뷔노의 다리가 조금 더 벌어졌다.

아까 나왔던 애액을 포함해서 더 젖어 들기 시작했다. 뷔노가 허리를 한 번 휘었을 때 시몬이 전체적으로


힘을 주어 한 번 빨았다.

그러자 시몬의 머리칼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갑자기 빠졌다. 왈칵 흘러나온 애액을 시몬은 핥아
삼켰고 뷔노의 손에서 약간의 진동이 느껴졌다.

“하…….”

움찔 몸을 떤 뷔노가 깊게 숨을 내쉬더니 거친 손길로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시몬은 뷔노의 얼굴을


살폈다. 약간 혈색이 더 도는 것 같긴 했지만, 뭔가 큰 변화는 없어 보였다.

‘잘… 못한 건가?’

뷔노의 갈비뼈가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온몸이 저릿저릿해서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한동안
숨을 들이쉬고, 내쉬던 뷔노가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떴다.

뷔노는 돌연 일어나 시몬을 들고 소파로 갔다.

“앗.”

시몬을 안은 채 뷔노가 소파에 드러누웠다. 시몬이 뷔노의 몸 양쪽에 팔을 두고 가둔 모양새가 되었다.

‘뭐, 뭘 하려고.’

뷔노는 양손으로 시몬의 얼굴을 감싸더니, 분홍빛 뺨을 엄지로 꾹 눌렀다. 볼살이 그 사이로 삐죽
튀어나왔다.

“왜, 왜 그어에요?”

뭉개진 발음도 개의치 않은 채, 뷔노는 시몬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보았다. 뭘 찾기라도 하듯
열심히 살펴보는 것 같았다.

“흐음.”

몇 번 엄지로 뺨을 쓸던 뷔노가 시몬의 얼굴에서 손을 떼더니 머리를 소파 손잡이에 기댔다. 뷔노는


오른쪽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더니 손목시계를 힐긋 보았다.

‘놈들은 아직일까? 아니면 준비가 되어있을까?’

한 5 분간 뷔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시몬이 눈치를 보며 눈을 떼구루루 굴리던 와중, 뷔노가 입을 열었다.

“시나몬.”

“네.”

뷔노는 의자 밑을 뒤적거렸다. 그 밑에서 직사각형 형태의 각진 가방을 찾아 열자 많은 종류의 총과


총알이 있었다.

‘왜 의자 밑에 저런 게 있지?’

그 가방을 툭, 여는 뷔노를 보며 시몬이 얼어붙었다.

“총 써본 적 있어?”

“…아니요.”

왜 총 얘기를? 시몬이 긴장하는 걸 보고 사실이라는 걸 안 뷔노가 혀를 쯧 찼다.

“총 한번 안 쏴보고 뭐 했어.”

가방 안에 있는 총 중 가장 가볍고 형태가 단순한 걸 뷔노는 시몬의 손에 쥐여주었다. 시몬이 몸을 움찔


떨었다.

“이 방아쇠 쪽에 검지를 걸고. 아니, 조금 더 깊숙이.”

시몬의 왼손을 잡은 뷔노는 왼손의 손바닥을 오른손 밑에 두게 했다. 동시에 권총을 감싸서 지지하는
자세를 일러주었다.

“권총은 지지대가 없으니까 반대쪽 손으로밖에 반동을 줄일 수 없어. 조준하기 쉽지 않단 말이지.”


시몬은 저리 작은 총을 쏘는 게 어려울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을 읽은
뷔노가 눈살을 찌푸렸다.

“총을 잡아본 적 없는 사람이면 거리가 멀어지는 순간 거의 맞추지 못한다고 봐야 돼. 굳이 예시를 들자면


…….”

철컥―

뷔노는 총의 안전장치를 풀어버렸다.

“안전장치를 이렇게 풀고 나서.”

얼떨결에 사살 도구를 손에 쥐어버린 시몬이었다. 뷔노는 시몬의 손을 잡고 총구를 자신에게 겨누게 했다.
시몬이 질겁하며 손을 빼려 했으나 단단한 손아귀 힘에 빼기가 쉽지 않았다.

“너와 나 정도의 거리 이상이면 못 맞춰. 거의 맞닿은 정도가 아니라면 아예 쏘지 않는 편이 낫겠지.”

“저, 저 놔주세요.”

안전장치도 풀어버린 상태에서 실수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었다. 그걸 뷔노라고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뷔노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품 안에 감춰뒀다가 누가 널 위협하면 급소에 대고 쏴. 총은 쉽게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니까.”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놔주세요!”

뷔노는 시몬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쏴야 할 상황에는 머리, 심장, 골반. 이 셋 중에 하나를 노리는 거야. 머리는 되도록 뇌간 쪽에 쏴야
하고……. 뭐, 초보자가 맞추는 것 자체가 용하겠지만.”

뷔노는 시몬의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하나하나 겨누도록 하였다. 시몬은 아예 검지에 힘을 놓아버린
채 있었다. 뷔노는 피식 웃으며 시몬의 얼어붙은 얼굴을 훑어보았다.

“쏴, 야할 상황은 뭔가요.”

“네가 죽을 것 같을 때. 그 누구도 아닌 네가 위험할 때. 그거 아니면 쏘기는커녕 움직이지도 마.”

뷔노는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의외로 총으로 치명상을 입는다고 해도 움직이는 경우가 흔해. 적어도 자기를 죽인 사람에게 총을 쏠
시간 정도는 주어지는 경우가 많거든.”

시몬은 그 말에 뷔노의 머리와 목 부근으로 시선을 돌렸다. 흉터가 짙게 남아있는 귀나 목 옆에 동그란


곡선 부분은 가늘게 피부가 일그러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갈비뼈 부근과 배, 그리고 시몬은 모르는 머리의 흉터는 모두 과거 총격전의 흔적이었다.

“그 총,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어.”

“저, 실수로 쏠까 봐 불안해서 이런 건…….”

“가지고 있어.”
‘왜 갑자기…….’

시몬은 뷔노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돌려줄 수도 없고, 결국 총을 잡은 채로 어정쩡하게 앉아있었다.


비노는 그런 시몬을 옅은 미소를 띄며 보다 말했다.

“…잠깐 씻고 오지.”

‘씻고 온다는 건… 시간이 꽤 걸리는 거겠지?’

시몬은 일어나, 홀린 듯 뷔노의 방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는 종이를 들었다.

‘불안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어떤 작용을 할지는 전혀 몰랐다.

그러나 본능이 이끄는 대로 시몬은 펜을 잡은 채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담아두었던 기억을 토대로 펜이
움직였다. 단 하나의 순서도 틀리지 않고 점과 선이 이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시몬 역시 시몬 자신이 이렇게 움직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MN ÷△M&0M √ □N&N44NM

‘잠깐, 설령 이 암호를 해독해도… 내일이라고 적혀있으면 내일 일어날 일로 착각할 수도 있잖아.’

시몬은 고민하다 해독했던 부분을 펜으로 뭉갠 뒤, 로마자로 바꿔서 썼다. TWO 는 ⅱ로, TOMORROW 는
아예 오늘의 날짜를 적어놓았다. 그리고 종이의 끝부분에 클로버 문양을 그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걸 자신이 밝혔다는 걸 들켰다면? 정말 미친 짓이었다. 아버지를 잊은 게 아니고서야…….

어쩌면 뷔노와 관련된 계획이 아닐지도 몰랐다. 섣불리 배신했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오늘 일을 잘 해낸다면 빚을 지워준다고도 했잖아…….’

자신을 욕하던 시몬은 종이를 구겼다가 쓰레기통 안에 손을 넣은 채 가만히 있었다.

‘버릴까……?’

그러나 속에서 찝찝한 감정이 올라와 견딜 수 없었다.시몬이 갈등하는 도중이었다. 시몬의 등 뒤에서
뷔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해.”

그 말에 놀란 시몬의 손에서 톡, 종이가 쓰레기통 밑으로 떨어졌다.

“아, 아무것도…….”

전에 조직원 앞에서 거짓말을 했을 때보다도 뷔노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려니 잘 되지를 않았다. 시몬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방이 궁금해서 그랬어요. 좀 무례했죠? 죄송해요. 나, 나갈게요.”


“그래?”

흐음 소리를 내며 뷔노가 시몬을 쳐다보았다. 그때 코르비나가 뷔노의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배고파?”

뷔노가 허리를 굽혀 코르비나와 눈을 맞추었다. 코르비나가 야옹, 소리를 내며 울었다.

“보채는 거 보니 어지간히 급한가 보네.”

뷔노는 코르비나를 쓰다듬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여기 안에 사료가 있어서.”

시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러면… 저는 먼저 거실에 가 있을게요.”

시몬은 초조한 발걸음으로 나갔다. 뷔노가 코르비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해주고 싶었던 걸까.”

코르비나는 평범한 고양이는 아니었다. 마더가 직접 키웠을 때는 여러 번 독살 임무에도 사용되던


고양이였다. 뷔노는 코르비나가 맘껏 움직이도록 놔둔 채 코르비나를 따라갔다.

코르비나가 쓰레기통을 툭툭 쳤다. 뷔노가 눈썹을 하나 올린 뒤 쓰레기통 뚜껑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코르비나가 맨 위에 쌓여있는 종이를 물어 뷔노의 발치에 툭 떨어뜨렸다. 뷔노는 그 종이를 쭉 펼쳤다.

‘뭔가 찔리는 일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클로버의 암호를 찾아서 자기한테 주려 했던 줄은 몰랐다. 뷔노는 코르비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잘했어.”

뷔노는 가만히 눈동자를 좌우로 굴려대며 종이를 살펴보았다. 펜으로 하나하나 꾹꾹 눌러 쓴 흔적이 남은
종이를 보며 뷔노는 생각했다. 여전한 필체였다.

뷔노는 태연하게 품 안에 종이를 접어서 다시 쓰레기통으로 넣었다. 클로버의 암호를 해독하는 방법을
미리 익혀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호 일부분을 알아냈어. 지금 보내줄게.

뷔노는 하이직에게서 온 연락을 받은 후 팩스기를 통해 암호를 확인했다. 역시나 주고받은 암호 전체를


받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하이직이 팩스로 보내준 부분은 공교롭게도 시몬이 적은 암호의 뒷부분이었다. 이어지는 내용을
발견한 뷔노는 이게 가짜 정보가 아니라는 점에 눈썹을 찌푸렸다.

‘계획이 오늘이라는 건…….’

뷔노가 어두운 어조로 말했다.

“시나몬, 데려다주지.”

“…네? 네.”
어쩐지 평소와 다른 어조에 시몬이 당황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12. 총을 든 남자

시몬의 옷 안쪽에 붙어있는 추적기는 클로버에게 뷔노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뷔노의 차 앞에 뷔노의 부하들이 타고 있는 차량들이 달리고 있었다. 뷔노는 운전기사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뒤로 달리지? 중간으로 들어가.”

당연히 앞뒤로 엄호가 있는 쪽이 안전했다. 운전기사는 곤란한 목소리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다시 앞으로 가겠습니다.”

“엔진에 문제가 있는 건지 속도가 나지를 않네요.”

쿵, 뭔가 바닥에 있던 건지 자동차 바퀴가 걸린 듯했다. 차는 곧 멈췄고, 운전기사가 뷔노에게 말을


걸었다.

“보스, 타이어가 터진 것 같습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뷔노가 말했다.

“근처에 수리점이 있나?”

“네, 50 미터 정도 거리에 수리점이 있습니다.”

운전기사가 한 말에 뷔노가 말했다.

“…곤란하게 됐군. 시나몬, 잠시만 여기 있어.”

운전기사와 뷔노는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저, 뷔노…….”

시몬이 뷔노의 손을 붙잡았다.

“왜.”

“그, 그게…….”

시몬은 뭐라 핑계를 대지도 못하고 자신이 알고 있던 것들을 설명하지도 못했다. 뷔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금방 돌아올 거니까 안에서 절대 나오지 마.”

그 말을 듣고도 시몬은 걱정을 멈출 수 없었다.


‘…차 타이어를 망가뜨린 게 혹시 클로버가 한 일은 아닐까?’

무시하려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클로버는 처음보다도 더


상황이 안 좋아 보였다. 시저에게 선전 포고했던 클로버였으니 사정이 안 좋아진 게 누구 탓인지는 잘 알
수 있었다.

운전기사는 새 타이어를 구입하기 위해 수리점 안으로 들어갔다. 뷔노는 수리점 앞 인도에 서있었고
시몬은 그런 뷔노 주위의 사람들을 모조리 훑어보았다.

‘별로 이상한 사람은 없어 보이네…….’

노인부터 아이까지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길거리를 지나다녔다. 하지만 대부분 특별할 것 없는 차림에
뷔노에게는 그다지 관심도 없어 보였다.

뷔노는 손으로 무언가 만지는 듯하다가 별 동작 없이 인도에 서있기만 했다. 운전기사가 수리점에서
한동안 나오지 않자 뷔노는 무료함을 달래려던 건지 시가를 꺼냈다.

뷔노 주변을 살피는 시몬의 눈에 한 남자가 밟혔다. 베이지색의 긴 코트와 청바지를 입은 남자는 느긋하게
길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저녁이라고는 하지만 늦여름이고 춥지도 않은 날씨에 저렇게 긴 코트를?’

아직은 목적도 방향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몬은 그 남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뷔노는 여전히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남자는 뷔노와 약 서른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도달했다. 잠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기 위해 멈춘 남자는 다시 걸어갔다.

‘뷔노 쪽으로 향하는 건가? 아닌가?’

뷔노는 시가를 깊게 들이마시더니 마지막 모금을 마신 건지 불을 껐다. 남자는 언뜻 보면 자연스럽게 걷는


듯했다. 그러나 한 쪽 발의 보폭이 다른 쪽 보폭보다 짧았고, 도로의 턱을 내려가거나 누군가와 부딪칠
듯하면 코트 바깥을 한 손으로 가볍게 눌렀다.

코트 안에 무언가 들어있다는 건 확실했다. 시몬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과대망상이라고 할 수도 있는


생각들이 떠올랐다.

시몬은 뷔노한테서 받았던 총을 떠올렸다. 그걸 재킷 안쪽으로 숨긴 채 시몬은 바로 차 밖으로 나갔다.


시몬이 나가자마자 뷔노는 수리점 안으로 들어갔다.

시몬은 뷔노가 있는 수리점 쪽으로 가다가 남자가 가게 앞에서 멈춘 걸 발견하고 근처에 섰다. 남자는
가게 안을 딱히 보지는 않았다. 대신 손목시계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뷔노는 수 분이 지나도 나오지를 않았다. 남자는 오른쪽 다리를 몇 번 떨었다. 탁, 탁, 탁. 바닥에 발을


부딪칠 때마다 품속에 있는 물건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시몬은 혹시나 물건이 보일까 유심히 보았다.

그렇지만 품속에 꽁꽁 감춰둔 건지 물건은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때 남자에게 누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횡단보도를 건너 남자와


합류했다.

‘그냥 사람을 기다리는 거였나?’

시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 둘은 가게를 등진 채 그 앞에서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시끄러운 차도 앞에서 소리가 잘 들리진
않았지만 입모양으로 살짝씩 읽어낼 수 있었다.

‘세 명……. 타자기.’

‘더?’

비교적 무난하게 들리는 대화에 시몬은 긴장을 약간 푼 채 창밖을 주시했다. 둘은 코트를 몇 번


가다듬었고 그런 남자 둘을 시몬은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남자 둘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건가?

눈이 마주쳤다.

시몬은 순간적으로 목이 뻣뻣해진 걸 느꼈다.

그런데 둘의 시선이 약간 비껴간 곳을 향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약간 사선을 향해 있는 듯한.

시몬은 왼쪽을 쳐다보았다. 수리점에 있는 운전기사가 보였다. 운전기사는 검지를 두 번 까닥거렸다.


우연이었을까? 뷔노는 일이 끝난 건지 점원과의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다. 뷔노는 가게 밖으로 천천히
걸어 오고 있었다.

남자 둘은 코트를 열어 품속을 뒤졌고, 그 틈새를 시몬은 확인했다. 분명히 총이었다.

‘…어?’

그제야 시몬은 종이 속 암호 속 한 단어를 마저 해독할 수 있었다.

÷△M&0M

(GUNMAN) 총을, 든, 남자.

두 총잡이를 뷔노에게 보내라. 아마 암호는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그들이 뷔노에게 보낸 건 암살자였다.


시몬의 숨이 덜컥 멎었다.

시몬은 가게 안쪽을 쳐다보았다. 운전수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거였다. 그러나 시몬은 금방 관두었다.

‘운전기사 역시 한패일 수도…….’

아까 신호를 주던 걸 보면 믿을 수 없었다. 뷔노는 그걸 몰랐다. 시몬은 덜덜 떨었다. 어쩌지? 자신이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뷔노가 가게 문을 열고 나오려는 순간 남자 둘이 총을 꺼내 들려고 했다. 시몬은 가까운 곳에 서있던


남자를 뒤에서 팔로 잡아챘다.

덥석 달라붙은 시몬을 남자가 떼어내려 했지만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라 떼어낼 수 없었다. 총을 빼내는 건
무리로 느껴졌기에 절대 놔줄 수 없었다.

“뷔노!”

나오지 말란 의미로 시몬이 소리쳤다. 그러나 뷔노에게 닿기에는 약간 늦은 타이밍이었다. 시몬의 팔


힘이 약간 빠진 순간, 남자가 총을 품 안에서 빼냈다. 동시에 뷔노가 가게 바깥으로 나왔고 뒤에서
운전기사는 뷔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팔로 뷔노를 옭아맸다.

탕―!
총알은 총구를 통과해 약간 휘어진 궤도를 따라 발사되었다.

“…시몬!”

뷔노의 목소리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뷔노는 뒤에 있는 운전기사의 팔을 꺾어버린 다음, 기관총으로


뷔노에게 총을 난사하려던 남자의 양팔부터 쐈다.

“윽!”

그가 총을 못 쏘는 상황이 되자마자 뷔노는 뒤로 돌아 운전기사를 보았다.

“보, 보스…….”

운전기사는 양손바닥을 보이며 뷔노에게 애원했다.

“나,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협박당해서, 그래서…….”

운전기사는 말을 하던 도중, 벨트에서 칼을 꺼내 뷔노의 목을 향했다. 총을 쥔 오른손을 잡고 있었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었다.

뷔노의 목에 칼끝이 닿았다. 뷔노는 얼굴을 뒤로 해 피하려 했으나, 칼끝은 뷔노의 목을 긁고 지나갔다.
운전기사는 한 번 더 깊숙이 칼을 찌르려 했다. 그러나, 그는 칼을 찌르지 못하고 뒤로 고꾸라졌다.
뷔노는 시몬 쪽을 보았다.

몸을 뚫고 나온 총알은 피를 그득 머금은 채 빠져나왔다. 바로 등 뒤에서 발사된 총알은 척추를 완전히


관통했다. 배에 난 구멍에 손을 가져다 대보기도 전, 운전기사가 버티지 못하고 떨다가 눈을 까뒤집었다.

“끅, 끄윽, 꺼어…….”

신음과 함께 바닥에 피 웅덩이가 번져나갔다. 시몬은 허망하게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아, 아…….”

시몬은 자신이 사람에게 총을 쏘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메스꺼워 견딜 수가


없었다. 시몬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총을 너무 강하게 쥐느라 긴장으로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까까지
남자를 쏘던 총을 든 손이었다.

시몬은 오른손으로 들었던 총을, 남자의 등 뒤에 대고 쏘았던 것이다. 시몬은 믿고 싶지 않은 모습에서


눈을 떼고 앞을 보았다.

“뷔, 뷔노…….”

이토록 당혹스러운 얼굴의 뷔노를 마주한 적이 없었다.

“너…….”

눈을 찌푸린 뷔노가 시몬에게 단숨에 달려와 목을 끌어안고 몸을 숙였다.

탕―!

저 멀리에서 클로버 조직원이 사격했다.

‘더 있었군.’
오늘 완전히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저 혼자면 죽어줄 수 있었지만 시몬이 있으니 그럴 순 없었다.
뷔노는 시몬 끌고 숙임으로써 총알이 날아온 걸 한순간의 차이로 피했다.

아니, 사실은 뷔노가 시몬이 맞을 걸 몸으로 막은 것이다. 뷔노는 총알에 스친 팔이 아파왔지만 여전히
시몬을 감싸 안았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랬지.”

화가 역력히 난 목소리였다. 시몬을 향해 날아오는 총알이었다. 움직여 피하는 건 무리였다.

‘차 안이면 그나마 안전했을 것을.’

뷔노는 팔로 시몬의 얼굴을 감쌌다. 한 발을 더 맞고 나니 고통이 가중돼 움직임이 더뎌졌다. 눈이


가려져 상황 파악이 안 되던 시몬이 눈앞에서 흐르는 피에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뷔, 뷔노…….”

‘여기로 유도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뷔노는 속으로 혀를 찼다. 클로버를 위해 마련했던 피네와 부하들이 있던 곳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놈들이 선수를 쳐 타이어를 터뜨려 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뷔노는 밑에 다이너마이트가 없던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다.

‘운전기사는 언제 매수된 거지.’

아까 수리점 안에서 지원 요청을 했기에 시저의 조직원들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클로버, 시저,
한둘씩 사람이 늘어나며 총을 쏘는 대상과 맞는 대상이 늘어만 갔다.

뷔노는 시몬을 안은 채 하이직이 개조한 총 덕을 톡톡히 봤다. 소리가 요란해 타자기라고 불리는 기관총을
연달아서 쏘는 게 클로버의 수법이었다면, 연사는 안 되지만 명중률을 높은 총을 쓰는 게 시저의
수법이었다.

“시몬, 몸에 힘 풀고 딱 붙어있어.”

시몬은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어차피 뷔노도 대답을 들을 여력은 없었다. 시몬은 주위에 기척이 늘자
뷔노의 팔을 치우고 싶었지만 차마 뷔노의 방해가 될까 그러지 못했다.

시저의 조직원 몇몇이 뷔노의 옆에 붙었다.

“보스, 차까지 엄호하겠습니다.”

뷔노는 총을 들어 다가오는 클로버 조직원 하나를 쐈다. 엄호라는 건 한마디로 부하들을 방패로 써야
한다는 의미였다. 차까지 거리를 생각해 뷔노는 이 자리에 남아 한 발이라도 더 쏘는 걸 선택했다.

“빨리 쓰러뜨리는 편이 나아.”

그 말에 바로 부하들이 클로버 조직원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클로버 조직원의 기관총은 명중률이


형편없었기에 거리를 띄우면 띄울수록 유리해졌다. 시저 조직원들은 점점 거리를 벌려 나갔고, 클로버
조직원들은 총탄을 연발했지만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다.

“이대로 총알을 다 쓰게 만들도록 유도해.”

뷔노의 말과 동시에 탕― 총소리가 이어졌다. 시몬은 뷔노의 팔에서 총을 쏜 반동이 전해져 오는 걸


느꼈기에 뷔노가 쏜 총이라는 걸 알았다.
뷔노가 쏜 총에 벽 뒤에 숨어있던 클로버 조직원이 맞고 쓰러졌다.

시저 조직의 검은 차량이 차도를 점점 메우기 시작했다. 시저의 조직원이 클로버에 비해 압도적으로 수가


많았기에 초반의 열세는 금세 극복되었다. 차를 타고 도망간 클로버 조직원을 제외하면 거의 전원을 잡는
데 성공했다.

“살아있는 놈들 심문하고, 차 타고 가는 놈들은 쫓아.”

반드시 윗대가리도 이 기회에 잡는다. 뷔노의 명령에 조직원들이 차를 타고 클로버를 쫓았다. 그


모습까지 본 뷔노는 시몬을 팔에서 놓아준 채 주저앉았다.

“…오래 걸렸군.”

그건 종전의 의미와도 같았다. 시저 조직원들이 뷔노에게 달려왔다.

“보스!”

“보스! 응급 처치를…….”

아까 맞은 왼쪽 팔 뿐만 아니라 오른쪽 다리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배 같은 경우에도 몇 발 맞았다.


뷔노는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지만 충격을 완전히 흡수할 수 있는 건 아니니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뷔, 뷔노…….”

시몬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굳어있었다. 뷔노의 몸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검은 정장은 상처를 잘
짐작하지 못하게 했지만 바닥에 흐르는 피는 그 크기를 알 수 있게 했다.

“으, 흐, 흐윽…….”

시몬이 사색이 된 채 뷔노의 상처를 손으로 막아 지혈하려 애썼다. 뷔노는 근육이 찢어진 걸 느꼈지만,
최대한 평온한 말투를 유지하려 애썼다.

“…됐어. 오고 있으니까.”

오고 있다니 무슨 소리지? 시몬은 뷔노가 보는 방향을 보았다. 그쪽에는 삭발을 한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살기를 띤 채 달려오고 있었다. 양손에 든 무식하게 큰 기관총이 파르르 떨렸다. 옆에는 의약품 상자를
든 그의 부하들이 쫓아왔다.

“언니…….”

피네는 뷔노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꼼꼼히 상처를 살피는 눈은 어느 정도의 벌을 줘야 할지에 대한


견적을 내고 있었다.

“어떤 새끼야?”

뷔노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시체들을 힐긋 보았다.

“저 중 하나.”

피네는 총을 들어 시체들을 향해 난사했다. 정말 단순한 분풀이였는데 운이 안 좋은 사람이 있었다.


내리치는 총알들에 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윽…….”
그 소리에 눈이 뒤집힌 피네가 웃으면서 다가갔다.

“안 뒈진 놈이 있나 보네?”

“켈록켈록.”

피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동료들 옆에서 죽은 척하고 있으니 좋디? 겁쟁이 새끼.”

피네가 피를 흘리는 클로버 조직원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조직에 있어서 겁쟁이라는 건 최악의
평가였다. 그는 입에서 피와 침을 줄줄 흘린 채 피네에게 빌었다. 피네는 옆의 조직원에게 명령했다.

“저 겁쟁이 새끼 잡아둬. 내가 직접 심문할 거야. 보스 바로 차로 모시고.”

부하들은 피네의 명령을 곧장 수행했다. 불쌍한 남자는 꽁꽁 묶인 채 차에 실렸고 나머지 인력들은


뷔노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뷔노는 낮은 목소리로 옆의 부하에게 말했다.

“쟤도 데려와.”

쟤라고 하면 시몬을 얘기하는 거였다. 피네는 당혹스러움에 되물었다.

“뭐? 왜? 저놈이―”

“데려와.”

뷔노가 거친 목소리로 말하자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 피네는 시몬을 노려보다가 부하에게 명령했다.

“저 새끼도 실어.”

시몬은 뷔노의 옆 좌석에 앉게 되었다.

차는 급하게 달려 시저의 아지트이자 뷔노의 집인 그 건물로 향했다. 그 건물 안에서 개인 주치의가 있는


병실 쪽으로 뷔노는 이송되었다.

“네가 감히 어딜 들어가려고.”

시몬 역시 뷔노의 상태가 걱정되어 따라가려 했지만 피네가 용납하지 않았다.

“꺼져, 당장.”

“…….”

“총알을 네 머릿속에 쑤셔줘야 도네르타(규율)가 박힐까?”

피네는 목에 핏대까지 세운 채 시몬의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꾹꾹 미는 총구엔 살의가 진심으로 담겨있어
시몬은 경직했다. 그러나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뷔노 님은 괘, 괜찮으신… 건가요?”

“네가 없었더라면.”

피네는 쌍욕을 몇 번 한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맞는 말이라 생각했기에 시몬은 반박하지 못했다. 자신을 지키느라 뷔노가 총을 맞게 된 것이었다.
돌아가지도 못하고 떠나가지도 못한 채 시몬은 건물 앞 돌바닥에 쭈그려 앉아 기다렸다.

쏟아져 내리는 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셔왔다. 신발 속까지 물이 들어가 추위에 벌벌 떨었지만 시몬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

시몬은 울적한 마음을 지우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제 손가락에 끼워진 진주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진주에는 붉은 피가 점처럼 묻어있었다. 이건


뷔노의 피였다.

‘괜찮은 걸까.’

피를 그렇게 많이 흘렸는데. 시몬은 뷔노가 자신이 아니었으면 그렇게까지 다치지 않았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왜 이렇게 나를 신경 쓴 거지. 고민해 봐도 답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예전에 만났던 방독면을 쓴 소녀가 뷔노라는 것.

시몬은 그제야 힘없는 웃음이 나왔다.

“바보 같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잘 지내기는커녕 아버지의 치료비 하나를 감당하지 못했다. 주위 사람이 자신을
대신해서 고생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살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눈물이 빗물에 섞여서 흘렀다.

보란 듯이 더 의연하고 잘 살아야 한다고 그랬는데.

1 분, 1 초가 너무 느리게 흘러갔다. 금세 해가 지고 시간이 흐르는 것 같던 헤르게임 안이었는데 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졌다.

회색 먹구름이 하늘을 감돌고 흐르는 비는 찻길에 고여 찰랑였다. 그래도 시몬은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붙박아 놓은 양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었다.

‘클로버… 이제 나를 배신자라고 생각하겠지.’

이 일로 아버지가 죽을지도 몰랐다. 뷔노가 죽을지도 몰랐다.

시몬은 잠시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붙일 수가 없었다. 찬 바람이 쌩쌩 불고 몸에 한기가 돌았지만 어느


건물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뷔노를 놓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찬 밤에 고양이 울음소리가 타고 올라왔다. 시몬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해가 다시 올라올 무렵이었다. 밤새도록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졌다. 그 바람에 여름 특유의


화창한 햇빛은 볼 수 없었지만 후덥지근한 공기가 주변을 메웠다.

시몬은 흐려지는 의식을 부여잡고 건물 앞에서 계속 기다렸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이대로 굳으면 동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몬은 옆의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검은색 차량이 보였다. 선팅이 되어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뒤따라 오는
차들을 보니 뷔노의 차로 보였다.

‘뷔노 님……?’

벌써 나오게 된다는 건 무사한 걸까? 걱정되는 마음과 상태를 알고 싶은 욕망이 올라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시몬은 차갑게 굳은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다. 약간 휘청거렸지만 벽을 짚은 시몬은 차 속을 들여다보았다.


언뜻 스쳤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회색 눈, 날렵한 코, 곧은 입매… 그 특유의 카리스마 있는 분위기.

앉아있는 뷔노를 확인한 시몬은 생각했다.

‘다행이다…….’

적어도 뷔노는 살아있다.

무사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사실,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염치가


있다면. 시몬은 마비된 것 같은 다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당연히 이게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뷔노의 차가 시몬의 앞에서 멈췄다. 뷔노는 차 안에서 걸어 나와 시몬의 앞까지 왔다. 짧은 거리임에도
비가 거세게 내린 탓에 뷔노의 몸 역시 젖었다.

“…왜 여기 있어.”

뷔노에게서 두 번째 듣는 말이었다. 시몬의 얼굴은 밤새도록 비를 맞은 탓에 하얗고 창백하게 변해있었다.

화난 것 같은 목소리를 들은 시몬은 일어서서 뷔노의 검은 정장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물을 잔뜩 머금은


정장은 무거웠다. 팔 쪽에 감은 하얀 붕대에 빗방울이 떨어져 붉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시몬은 그 붕대를 따라 팔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붉은 얼룩에 손가락을 멈춘 채 시몬이 뷔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 때문에 생긴 상처였다. 시몬이 그걸 보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은 끌어 올리고 눈은 끌어


내린 얼굴이었다.

시몬이 뷔노의 목덜미를 손으로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축축한 머리카락이 만져졌다.

뷔노는 눈을 살짝 내리깔아 시몬과 눈을 맞췄다. 시몬의 입술이 부드럽게 뷔노의 입술에 닿았다. 둘의
입술이 겹쳤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시몬은 뷔노에게서 몸을 떼었다.

빗물에 식어 차가운 몸과 달리 입술에서 느껴지는 지나치게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뷔노가 눈썹을
찌푸렸다.

“…시몬?”

“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몬이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들린 두 글자에 시몬이 배시시


웃었다.
‘역시 맞잖아.’

시나몬이 아니었다. 사실은 첫 만남 때도, 아니, 첫 만남이라고 착각했을 때도 뷔노는 한 번 그를


시몬이라 불렀었다.

(검은 정장의 미학 2 권에서 계속)

13. 자매들의 마더

뷔노의 세상이 바뀐 두 번의 해가 있었다. 첫 번째는 그가 열여섯이 되던 해였다. 그해, 뷔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어쩌면 모든 부모가 마약 중독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

어쩌면 모든 부모가 자식을 때리거나 물건을 던지지 않는다는 점.

어쩌면 모든 부모가 자식이 도둑질을 제대로 못한다고 화내지 않는다는 점.

이걸 바꿔서 말하면, 어쩌면… 자신은 맞지 않아도 되고, 훔치지 않아도 되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가출한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탈출했다.

아주 위험한 선택이었다. 집을 나간다는 건, 곧 보호세를 내지 못한다는 것. 인신매매를 당할 확률이


아주 높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네엔 집을 나온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뷔노는 그 사이에서 이곳저곳 떠돌던 중


마음이 잘 맞는 세 아이를 만났다.

부모에게 버려져 뒷골목을 전전하던 피네.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고 겨우 피난 온 하이직.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다 탈출한 머스캣.

과거를 잊자는 의미에서 예전 이름은 버리기로 했다. 대신 쓰레기통에 굴러다니는 술병을 보며 서로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이름들이 와인병에 적힌 포도 품종들이었다는 건 지금 돌이켜 보면 조금 우스운
일이었다.

“포…도… 품… 뭐시기.”

“하이직이라고 써있네. 넌 하이직하자.”

“왜 하이직이야?”

“여기 그림 봐. 거품 그려져 있잖아. 스…파클링 와인이래.”


“오, 반짝반짝 빛날 거 같다.”

하이직이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금방 터져서 화내는 게 너 같아.”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서일까, 둘은 처음 봤을 때부터 티격태격 다투곤 했다.

“이건 피…노……? 피…네? 어떤 거지?”

“글도 제대로 못 읽으면서 더럽게 나대요.”

“아예 못 읽으면서 욕하는 놈보다는 낫지.”

“그래서, 그걸 내 이름으로 하자고?”

“요건 체리 그려져 있잖아. 네 머리가 찌그러진 게 체리 같아서.”

피네의 머리는 예전에 연장으로 얻어맞은 탓에 약간 찌그러진 모양을 띠긴 했다.

“뒈질래?”

머스캣이 와인병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했다.

“난 뭐로 할까…….”

머스캣은 글을 전혀 읽을 줄 몰랐다. 하이직이 황급히 다가왔다.

“너……? 너는 화이트 와인이 어울리겠다. 피부가 하야니까. 백설 공주 같아.”

“백설 공주가 뭐야?”

“어… 그러니까 하얗고 예쁜 공주? 사과 먹고 죽어. 근데 키스하고 다시 살아나.”

그 말에 머스캣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X 나 찰떡이네. 머스캣 어때?”

“…좋아.”

그 틈에 막내가 입을 열었다.

“언니는 뷔노 어때?”

“그건 그냥 와인이잖아. 이름도 아니고.”

“언니가 우리 대장이니까… 그렇게 부르는 거야.”

“…그래?”

막내의 한마디에 그가 금세 수긍했다. 막내에겐 모든 언니가 약했다.

“가족이 뭐야?”

머스캣의 질문에, 하이직이 세 명은 떠올릴 수 없던 답안을 떠올렸다.


가족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무슨 일이 있어도 편이 되어주고, 지켜주는 존재라고 했다.

좋아, 그러면 우리는 이제 가족이 된 거야.

가족이 된 그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양아치였다. 빈집이 있으면 빈집을 털고, 든 집이 있으면 든 집을
털었다. 도둑질을 하고, 소매치기를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돈을 뜯었다.

그 와중에 여러 번 맞았다. 주먹에도, 칼에도, 총에도.

무리 중에서 가장 체격이 크고 싸움을 잘하는 뷔노가 대장이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게다가 뷔노는
가장 나이가 많았다. 고작 한두 살 차이였지만 그 나이대 아이들에게는 큰 차이였다. 동생들은 뷔노에게
날이 갈수록 더 의지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흉터가 나야만 했다. 동생들을 감싸고 돈을 뜯어서 먹이고 도망쳐야
할 때는 도망쳐야 했다.

그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매는 새로 생긴 가족을 무척 아꼈기 때문이다. 다 같이 얻어터져서 앞니가


부러지든 피멍이 들든 그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 관계가 언제부터 변하기 시작했을까. 그건 헤르게임에 겨울이 찾아오고 더 이상 서로를 향한


애정만으로는 굶주림을 버티기 힘들 때였다.

경찰이나 여타 폭력 조직으로부터 보호받는다는 명목으로, 헤르게임에 거주하던 모든 사람들은


모순적이게도 폭력 조직에 보호세를 내야 했다.

뷔노를 포함한 네 자매는 당연히 먹고사는 것만으로 힘에 부쳤다. 보호세는 못 냈고, 조직들은 두려우니
한 장소에 머물지 못하고 돌아다녀야 했다.

바깥에 버려진 책상, 의자와 옷들을 기워다 만든 텐트. 몇 개 안 되는 짐. 그게 자매들이 가진 전부였다.

뷔노가 음식을 구하는데 허탕을 친 날이었다. 그는 동생들의 아지트로 돌아오다 멈춰 섰다.

악몽 같은 풍경이었다.

“…설마 설탕은 아니겠지.”

쭈그려 앉아있는 동생들은 새하얀 가루를 손바닥에 놓고, 코로 가루를 들이키려고 하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졌다.

뷔노는 처음으로 아이들 앞에서 힘을 썼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약. 이게 이렇게 증오스러울 수 없었다. 뷔노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자,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책상이
단번에 두 동강이 났다.

“미쳤어?”

열이 머리끝까지 뻗친 뷔노가 말했다.

뷔노의 부모가 마약 중독자였다. 원래는 꽤나 평범했던 사람들이었다.


“미쳤냐고.”

하지만 약이 그들을 어떻게 뒤바꿨는지 본 뷔노로서는, 그리고 이를 동생들에게 털어놓았던 입장에서는


동생들의 행동은 배신이나 다름없었다.

“이젠 대답도 안 해?”

뷔노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진 책상의 잔해를 발로 걷어차면서 소리 질렀다.

“돌았냐고!”

“…잘, 못했어.”

그 말에 뷔노는 정신이 돌아왔다. 피네가 하이직이랑 머스캣을 뒤로 한 채 팔을 뻗으며 빌었다. 부모


잃고 가진 것 없어 겁낼 줄 모르는 아이들이 떨고 있었다.

마치 뷔노가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방어하는 듯한 자세에 그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는 여태껏 한 번도


동생들을 때린 적이 없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피네는 그대로 굳어있었다.

잠시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정적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하이직이 조심스레 말했다.

“내, 내가 하자고 그런 거야.”

“왜. 무슨 정신으로.”

뷔노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하이직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고개를 숙여서 더 보이지
않았다. 하이직의 몸이 들썩였다. 대답을 잇지 못하는 하이직 대신 머스캣이 말했다.

“뷔, 뷔노 언니. 나도 좋다고 했어……. 미안해.”

“…나도.”

머스캣이 말한 뒤 피네가 조그맣게 덧붙였다. 하이직이 고개를 들자 눈이 새빨개진 게 보였다. 기가 찬


뷔노는 그제야 기세를 조금 수그러뜨리고 동생들을 훈계하기 시작했다.

“약이 어떤 건지 내가 한두 번 말했어? 언제 나 몰래 이런 걸 구했는지는 둘째치고,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이야기는 귓등으로―”

그때, 하이직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뷔노의 말을 끊었다.

“…배고파서.”

동생의 충격적인 대답에 뷔노는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다시 애써 말했다.

“뭐?”

“배고파서 그랬다고!”

목에 핏대를 세운 채 하이직이 소리쳤다. 그 말을 듣자 뷔노는 머릿속이 정지하는 것 같았다.

“약하면 안 배고프다잖아!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

세상이 빙그르르 돌았다. 입을 달싹였지만 말이 나오진 않았다.

그간 말을 못 하고 참았던 것처럼, 하이직의 말이 봇물 터지듯이 나왔다. 늘 뷔노가 없을 때 철없는


피네를 챙기고 소심한 머스캣을 보호하던 하이직이었다.

“빵에 묻은 흙도 털면 배가 덜 찰까 봐 털지도 않는다고! 약도 똑같이 가룬데 그걸로도 배가 차겠지!


그러다 부작용이 오면 뭐, 굶어 죽든 이래 죽든 다 마찬가지잖아!”

늘 맏이로서 동생들을 챙겨야 했던 뷔노에게 하이직은 가장 의지하는 동생이었다. 둘은 돌아가면서 리더의


역할을 맡았으니.

“그런데 언니는 맨날 이렇게 강압적으로 대하고! 우리가 언니 부하야? 왜 소리를 지르는데? 물건 부수는
것도 협박이라고! 어른들이랑 똑같아!”

뷔노의 작은 어깨에 모든 힘이 빠졌다. 분노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하이직, 그 뒤에서
무섭다는 듯이 떨고 있는 피네와 머스캣.

그간 맏이라는 이유로 일부러 더 나서서 궂은일을 하고, 더 위험한 역할을 맡고, 필요하면 제 음식도
양보했다. 모두 동생들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이 세상에서 뷔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이들
셋밖에 없었다.

뷔노는 처음으로 그간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보기 시작했다. 동생들을 보호해 왔다고 믿었는데, 실상
자신은 제 부모와 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죄책감이 가슴을 할퀴었다.

그는 눈을 살짝 크게 뜨고 그저 한마디 질문을 했다.

“…그렇게, 배가 고팠어?”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당연히 배가 고팠으니 마약을 쓰려 했겠지. 술병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부모님과 같이 살지 않으니 이제 이런 기분을 느낄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제야 하이직은 아차, 한 듯한 표정으로 뷔노를 보면서 말했다.

“아니, 내 말은…….”

뒷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귓가에 웅웅대는 소리만이 퍼져갔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몸이
저절로 뛰쳐나갔다. 뷔노는 동생들을 뒤로 한 채 전속력으로 달렸다.

‘…배고파서 그랬어.’

머릿속에 하이직의 말이 떠나가지를 않았다.

뷔노는 찬 돌바닥에 그냥 주저앉았다. 골목길은 어두워 그림자가 잔뜩 져있었다. 돌바닥을 손으로 살짝


훑자, 낙엽이 얼음과 엉겨 붙은 채 바닥에 내려앉아 있었다. 늦가을임에도 햇빛이 비추지 않는 골목이라
그런지 추운 모양이었다.

뷔노는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찬 바람이 뺨과 코와 귀를 스치는 데만 집중하고 있으면 잡생각이 들지


않았다.

뷔노는 엄지손톱으로 메말라 트다 못해 쩍쩍 갈라진 입술 피부를 손으로 뜯었다. 입술을 죄다 뜯어놓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강박적으로 손을 움직이던 뷔노는 입 안에서 피 맛을 느끼고 나서야 관뒀다.

‘어쩌지.’
막막한 질문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갈라지는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렸다.

“…어이, 친구.”

다 해진 옷과 모자가 보였다. 모자를 어찌나 푹 눌러썼는지 턱밑으로 내려온 수염을 제외하면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

“남는 얼음 없어?”

“얼음?”

갑자기 난데없는 얼음 얘기를 왜 꺼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다리를 팔로 감싸 안고 머리를 푹 묻더니


몸을 더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이 뭐가 묻어있는 것처럼 거뭇거뭇했다.

“조금만, 조금만 나눠줘도 되니까…….”

그 말에 얼음이 무얼 의미하는지 바로 알 수가 있었다. 그는 뷔노를 자신과 똑같은 마약 중독자로 본


것이다.

평소라면 저 남자의 발치에 가래침을 뱉었을 것이다. 누가 그딴 걸 할 것 같냐고, 욕설도 조금


섞어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하이직의 얼굴과 하얀 가루가 번갈아 가면서 떠오르는 지금.

얼어붙는 것 말고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이직이, 피네가, 머스캣이 손끝이 거뭇거뭇해진 채 벌벌 떨면서 골목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가
사라졌다.

‘잠깐.’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차라리 내가 마약 일에 뛰어들면.’

뒷골목에서 성공하려면, 노새(마약 운반책) 일이 가장 확실했다.

어렸을 적 뷔노의 옆집, 정확히는 옆집의 다락방에 얹혀살던 제리가 갈색 봉투를 들어 올리며 해준
얘기였다.

제리가 바로 귓가에 속삭이듯, 그 당시의 얘기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밤에 간판 없는, 철창이 많이 쳐진 가게를 찾아. 그중 시끌벅적한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십중팔구가 지하에 술집이 있는 거지. 술집 구석 테이블이나 가게 뒤편을 보면 이런 걸 들고 있는
노새들이 보여. 그 사람들한테 가서, 너도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 돼.’

‘그래, 애들을 먹이려면…….’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

배운 것도 없고 글조차 잘 읽지 못하는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쩐지 머리가 말끔해졌다.

뷔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의 남자가 뷔노의 옷깃 끝을 잡았다.


“저, 조금이라도, 없는 건가? 정말로?”

“없어. 앞으로 할 생각도.”

팔 생각은 있지만.

뷔노가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보자 남자가 힘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군……. 진작부터 손을 대지 않는 편이 좋지. 좋은 하루 보내, 친구.”

뷔노는 고개를 끄덕여주곤 제 갈 길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찾아가게 된 술집에서 뷔노는 제 앙숙을 만났다.

‘먹고 싶어요?’

소년은 뷔노를 보며 물었다.

‘대답 안 하네.’

그는 봉투를 거꾸로 든 채, 그대로 빵을 쏟았다. 무더기로 쏟아지는 빵에 뷔노는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소년은 빵 위로 걸어갔다. 뷔노의 발치에 바게트, 크림빵, 식빵 조각 등이 떨어져 굴러다녔다. 뷔노는


빵들을 몇 번 손으로 털고, 조심히 갈색 봉투 안에 담았다.

그건 정말 기분이 더러운 구원이었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뷔노는 아무 말 없이 약간 뭉개진 빵들을 동생들에게 건넸고, 동생들은 빵 봉투를 쳐다만 보았다.

“…미안해, 언니.”

“아냐.”

하이직이 사과했고 뷔노는 용서했지만, 어색한 기류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동생들이 조금씩 변한 게. 점점 더 자립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했던 건지, 특히 하이직의


변화는 더욱 두드러졌다.

더 적극적으로 훔치고 더 적극적으로 맞았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행위에 뷔노가 타박했지만


통하지도 않았다.

그런 위태로운 나날이 지나고 있을 때 결국 일이 터졌다.

자매가 다시 자리를 옮길 때였다. 짐은 항상 가벼워야 했기에 대수로운 것들을 들고 다니지는 않았다.

병이나 그릇, 여러 방면으로 쓰이는 칼, 몇 옷가지들이 전부였다. 그래야 했는데, 하이직이 검고 긴


물체를 옷가지들 속에 숨기는 걸 뷔노가 발견했다.

“하이직, 그거 어디서 났어?”

하이직이 옷에 숨기는 물건을 본 뷔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거 총이잖아.”
동생들이 자신 몰래 약을 구해왔던 날이 떠올랐다. 하이직은 뷔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길에서 주웠는데.”

“길에 멀쩡한 총이 그냥 버려져 있었다고?”

머스캣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떤 남자가 총들을 골목에 두고 가던데. 언니가 하나 가져왔어.”

머스캣의 별생각 없는 말 한마디에 하이직이 소리를 빽 질렀다.

“머스캣!”

“하이직, 소리를 지를 대상이 잘못된 거 같은데.”

뷔노가 낮은 목소리로 읊었다. 머스캣의 얼굴은 평소의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목을 바짝 당긴 채


움츠리고 있었다. 동생을 겁에 질리게 했다는 걸 안 하이직이 오므렸던 입술을 펴고 말했다.

“…미안.”

“총, 제자리에 두고 와.”

그 총의 주인은 일반인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조직원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처분하려고


내놓은 거면 괜찮겠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잠시 골목에 둔 거거나, 아니면 거래하려는 거였을 지도 몰랐다. 금세 떠오르는 가설들에 뷔노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하지만 하이직은 완고했다.

“싫어. 애초에 해체된 상태로 놓고 간 거 보면 버리려던 거야. 게다가 며칠 전 일인데, 돌려줄 수도


없잖아.”

‘며칠 전이라고?’

뷔노는 여전히 눈썹을 찌푸렸다.

“왜 진작 말 안 하고… 아니 애초에 왜 가져온 거야?”

“우리 네 명이 같이 다니면서 위험한 게 한두 번이야? 하나 정도 챙겨둬야 할 거 아냐.”

어린 여자애 넷은 눈에 띄는 조합이었다.

뷔노는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으나 더 큰 위험을 초래할 거라는 걸 알았기에 한숨을 쉬었다.

피네는 쯧쯧 혀를 차더니 말했다.

“위험한 거 좋아하시네. 그냥 넌 총 가지고 장난하고 싶은 거잖아. 예전처럼.”

“아냐.”

하이직이 꾹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피네가 귀를 후비면서 물었다.


“거기서는 조금 만지작거리다가 바로 버렸다면서? 지금은 왜 그래?”

거기는 하이직이 예전에 살던 나라를 의미하는 거였다.

“…거기는 무기를 갖고 있는 것만으로 반란군 취급을 받는다고. 그거랑은 다르잖아.”

하이직은 이를 바득 갈았다. 피네는 하이직의 이마를 툭툭 건드리면서 말했다.

“유세 떨지 마. 여기도 함부로 남의 무기를 훔치면 큰일 나는 곳이라고, 꼬맹아.”

“생일 몇 달 차이 나는 거 갖고 언니인 척하지 마. 전쟁 한번 겪어본 적 없는 주제에. 너야말로 뒷골목


좀 다니면서 맞은 거로 맨날 유세 떨지 말고.”

“너… 지금 ‘너’라고 했냐?”

“…뭐, 그게 뭐. 네가 하는 거랑 똑같잖아.”

“맞고 싶어?”

“그만.”

‘이 미운 열네 살들은 한 마디라도 평범하게 나누면 큰일 나나.’

뷔노는 금세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그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말했다.

“이미 가져온 건 어쩔 수 없고, 일단 자리를 옮기자.”

그 말에 하이직과 피네가 동시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뷔노는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시는 이런 거 가져오지 마.”

“…알았어.”

하이직의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뷔노는 머스캣에게 물었다.

“총 들고 있던 사람은 봤어?”

머스캣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차림새였어?”

“두꺼운 카키색 외투를 입고 갈색 구두를 신고 있었어…….”

별 도움이 안 되는 증언이었다.

“역시 어디 조직 사람이려나?”

피네가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하이직은 약간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뷔노를 보고 있었다.

뷔노는 총을 내려다보았다. 총이라, 길바닥에 버려두기도 곤란한 물건이었다.

뷔노는 쓰레기장을 발견하면 해체해서 버리리라 다짐하며 총을 꺼내 들었다.

“이건 내가 가지고… 뭐지, 이게?”


뷔노는 총을 옷가지 속에서 꺼내 들어 살피다 이상한 걸 발견했다. 살짝 개조된 흔적이 보였다.

“총에 뭔 짓 했어?”

하이직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떨리는 몸짓을 본 피네가 단언했다.

“거짓말이네.”

“후우…….”

하이직이 콧대를 손으로 한 번 만지작거리다가, 바닥을 보면서 말했다.

“…조금 만져봤어.”

뷔노는 총을 조심스럽게 들어 살펴보았다. 몇 부분에 쇠를 겹쳐서 씌운 것 같았다. 덕지덕지 붙어 손을


댔다는 게 티가 나긴 했지만 나름 정교해 하루 이틀 한 솜씨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아빠.”

하이직은 오른쪽 밑을 내려다보았다. 뷔노는 새삼 제 동생이 다르게 보여 눈이 살짝 동그래졌다.

‘그러고 보니 아빠가 무기 공급 업자랬지.’

하이직은 전쟁 때문에 국경을 넘어오는 수밖에 없었고, 가족들은 죽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을까.

뷔노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질문은 삼켰다. 자매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가정사를 지나치게 묻지 않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어떻게 바뀐 건데?”

뷔노가 총에 관심을 보이자 하이직이 눈을 반짝였다.

“이게, 발사하는 장치를 보조해 주거든. 그러니까 더 세게 나가게 한 거야. 지지대를 잡기는
불편했지만.”

“네가 총을 쏠 줄 아는 줄은 몰랐네. 몇 번 쐈어?”

그 말에 하이직이 뜨끔한 듯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세 번?”

“거짓말이래요.”

피네가 냉큼 말하자, 하이직이 피네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한숨 쉬며 이실직고했다.

“알았어. 쏜 횟수는 기억이 안 나. 아무튼 열 번 이하로 쐈어…….”

“지금 한 번 쏴봐.”

하이직은 곧바로 자세를 잡고 돌벽을 향해서 방아쇠를 한 번 당겼다. 탕, 총알 하나가 쭉 뻗어가 벽에


흠집을 남겼다.
그 와중에 뷔노는 조용히 하이직을 관찰했다. 하이직은 왼쪽 발을 표적으로 뻗고, 왼쪽 발과 맞닿았을 때
수직 방향이 되도록 두었다. 오른팔을 표적 쪽으로 향한 하이직을 보며 뷔노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기본자세야? 상체랑 하체가 반대 방향이라 불편한데.”

“어렵긴 하지만 정자세지.”

뷔노는 총을 다시 받아내고, 총과 방아쇠에 손을 걸쳤다.

“안전장치 안 했는데에…….”

뷔노의 심기를 염려한 하이직의 말끝이 늘어졌다. 뷔노는 벽에 걸려있던 담쟁이덩굴의 잎 하나를 눈으로
노려보았다. 뷔노는 하이직이 했던 자세를 그대로 따라했다.

“언니, 팔꿈치는 살짝 굽혀.”

‘생각보다 힘드네.’

쉽지만은 않은 자세였다. 뷔노는 총으로 담쟁이덩굴을 조준했다. 탕, 총이 발사되고 그 줄기를 맞췄다.


살짝 빗맞히기는 했으나 뷔노 입장에서 이 정도면 괜찮았다. 사실 초심자치고는 엄청 잘 쏜 것이었다.

안정적인 자세를 보고 하이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우와, 재능 있는 거 같은데, 잘한다. 사람이 이렇게 완벽해도 되는 거야?”

하이직의 아부성 발언을 듣고 뷔노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뭐 여차할 때 쓸모는 있겠네.”

“그러면 총 갖고 다닐 거야아?”

“바보야, 총알은 어디서 구할 건데?”

피네가 하이직에게 소리쳤다. 옷가지 몇 개에 총을 엮은 뷔노는 겉으로 봐서 잘 티는 안 나게 총을 숨겼다.


그리고 고갯짓으로 동생들을 불렀다.

“가자.”

늘 그렇듯 목적지는 없었고 길을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자매들은 되도록 음식을 쓰레기통에 통째로 버리는,
인심이 넉넉한 마을에 도착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걸어가던 도중 머스캣이 하얗고 짧은 손가락을 뻗었다.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반가운 표식이
있었다.

“…공중화장실.”

“무료네.”

하이직이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씻겠구만!”

피네가 반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옷가지도 빨고, 식수대에서 물도 받는 등 화장실에서는 할 게 많았다.


자매들이 들뜬 마음으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다 멈춘 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이 배신자 새끼!”

발을 쾅 구르는 소리와 망가진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피네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뷔노는 우뚝 멈춰선 다음 동생 중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팔로 막았다.

“쉿.”

손가락으로 입을 막은 뷔노는 천천히 뒤로 동생들을 보냈다. 뷔노는 통로 안에 남자 둘이 서있는 걸


발견했다.

한 명은 화장실 문 앞에 선 채 총을 들고 서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양손을 든 채 통로에 기대어 있었다.


당연히 유리한 건 전자였으나 어째 후자보다 더 바짝 긴장한 듯한 모습이었다.

“우리 사이에 입이 가벼운 쥐새끼가 숨어있었을 줄이야.”

“무, 대체 무슨 소리야?”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남자는 다른 남자의 이마에 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배후가 누군지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보스에게 알리기 전에.”

보스? 조직 간의 다툼인 건가? 그런 데에 끼면 뼈도 못 추릴 것이다. 뷔노가 동생들에게 피하자는 신호를


주려던 찰나였다.

“저기 뒤에…….”

머스캣이 뷔노에게 속삭였다. 뷔노는 공중화장실 뒤편을 쳐다보았고, 범상치 않은 무리를 목격했다.

검은 정장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오른쪽 팔을 몸에 딱 붙인 채 극도로


바른 자세로 서있었다.

역시나 풍기는 위험한 분위기에 뷔노의 마음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조용히. 천천히 뒤로 물러서자.”

뷔노는 고갯짓을 했고 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때 화장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협하는 말투였지만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다.

“대답을 안 하는 거 보니 어지간히 뒷배가 든든한가 보지? 간부 중에 있나?”

“…진정하는 게 좋을 거야. 내 친구들이 뒤에 와 있으니까.”

“뭐라고?”

세 걸음. 네 걸음.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안 뷔노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한 걸음 더 물러서려는 그때


뒤에 있던 하이직의 머리가 뷔노의 등에 부딪혔다.

“하이직.”
“실례해도 될까?”

더 뒤로 못 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장을 입은 무리가 피네와 머스캣 뒤로 줄지어 서있었다.

“지나가시죠.”

뷔노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한 뒤, 동생들에게 말했다.

“가자.”

뷔노는 머스캣의 손을 끌고 사람들을 피해 나가려 했다. 그러나 누군가 뷔노의 어깨를 슬며시 붙잡았다.

“재밌는 장난감을 숨겨뒀구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뷔노의 목이 굳었다. 낮으면서도 즐거운 듯 들리는 상대의 목소리는 위협적이었다.

‘누구지?’

뷔노가 뒤를 돌아보자 10 대의 표정과 20 대의 얼굴, 30 대의 분위기를 가진 여자가 있었다. 좀처럼


나이를 헤아릴 수 없는 그는 깃털이 달린 모자, 벨벳 질감의 옷과 통이 좁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디자이너나 귀부인의 옷차림 같았다. 그러나 당당한 태도와 조직원들이 물러서는 모양새는 우연히 끼어든
귀부인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그는 파이프를 몇 번 문 후 내뱉었다.

“직접 보여줄 생각은 없니?”

묘한 힘을 지닌 목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굳은 뷔노는 그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데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뷔노가 든 옷가지의 매듭에 걸쳐, 쭉 잡아당겼다.

옷가지가 풀리며 검은 총이 드러났다. 그걸 보자마자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자매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젠장.’

뷔노는 그들이 대체 저 옷가지 사이에서 총을 어떻게 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동생들을 쏴


죽일 것 같은 태세였다.

여자는 총을 들더니 흐음, 감탄사를 흘렸다.

“이건 우리 쪽으로 조달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총인데.”

뷔노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하이직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좌우로 기울여가며 보던 여자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소를 지었다.

“모양새가 꽤 귀여워졌구나.”

개조된 부분을 몇 번 만지작거린 여자가 말했다. 하이직의 얼굴이 새파래지다 못해 보라색으로 변하려고
했다.

뷔노는 자신들이 조직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던 와중, 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나쁜 아이들은 벌을 받아야겠지?”


여자가 총구를 바닥에 대며 조직원에게 곁눈질하니, 총을 든 사람 중 한 명이 하이직의 총을 멀리 걷어차
버렸다.

‘눈짓으로 소통이 되는 건가.’

뷔노가 그 광경을 어이없게 보던 도중,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뷔노는 동요하지 않고 눈을 마주치려


노력했다. 여자는 그런 뷔노를 흥미롭게 보는 듯했다.

그는 자매들을 훑어보다가 또각또각 걸어 나가면서 말했다.

“일단… 뭐, 손이라도 들고 있으렴.”

손? 왜 손을 올리라는 거지? 피네가 제일 먼저 손을 올렸다. 나머지 자매들은 서로를 보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한 손 말고 양손 다.”

옆의 정장을 입은 사람 중 한 명이 뷔노를 총구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아.”

자매들이 모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들어간 여자는 파이프를 뺀 채 안을


들여다보았다. 자매들 역시 시선을 돌려 그쪽을 보았다.

“…마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배신자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왔지.”

그 말에 남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까 프레드에게 연락해 두길 잘했지.’

“이놈을 잡는 걸 도와주십시오. 아까 보스를 살해할 것에 대한 논의를 나누는 걸 들었습니다. 배후를


잡아내서 뿌리부터 뽑아내야 합니다.”

“반갑다는 인사도 없이 일 얘기야? 서운해라.”

여자는 손가락을 제 뺨에 얹었다. 슬쩍 내려다보는 눈길은 권태로우면서 농염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홀려


잠시 멈칫했다가 말을 이었다.

“…마담, 이건 미룰 일이 아닙니다. 당장 보스에게 연락을 취해서 알려야 합니다.”

“그래?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총이 겨누어진 남자는 두려움에 떨며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마담! 저는 억울합니다!”

“억울? 억울 같은 소리 하네. 이놈의 행적이 이상해서, 며칠 전부터 통화하는 걸 엿들었습니다. 보스를


배신할 생각입니다!”

“…정말 그런 무서운 일을 꾸몄단 말이야?”

여자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굳은 표정을 지었다. 여자의 얼굴을 본 남자는 기사도의 정석 같은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쇼, 마담. 이놈이 마담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다만 이놈을 데려가는
걸 조금 도와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도와주는 수밖에 없겠네.”

여자는 손을 몇 번 흔들었고 옆의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붙잡아.”

“마담! 오해입니다!”

“그건 나중에 보스가 알아볼 일이지.”

여자는 차가운 얼굴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상대 쪽 남자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마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내심 총부림이 나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총을 가지고 싸운다는 건 가장 부상을 입기 쉬운 일이다.

여자는 남자가 검은 정장의 무리에게 잡힌 후에도 여전히 충격을 받은 느낌이었다.

“배신자라니, 설마 스페이드 조직에까지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그래도 마담의 보디가드 덕분에 잡아서 다행입니다. 보스가 보디가드를 붙여주신 보람이 있군요, 하하.”

남자는 이제야 크게 웃을 수 있었다.

“그래, 맞는 말이야. 당신, 혹시 다른 누군가한테 이 일을 알렸어?”

“아직 안 알렸습니다. 마담이 오기 전까지 놈은 제 입을 막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구나. 잘했어.”

진심이었다.

여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정장의 무리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수 있게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잡아.

검은 정장의 사람들이 천천히 남자를 에워쌌다.

“…마담?”

“배신자니 뭐니, 조직 안에서 안 좋은 얘기가 나오면 사람들이 불안해하겠지.”

“마담, 왜 이러십니까?”

남자는 뒷걸음질을 몇 번 쳤지만 뒤는 벽이었다. 여자의 보디가드, 가 아닌 여자의 조직원들이 남자의


팔을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남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그쪽이 배후였어?”


커다란 총을 든 남자의 손은 당장이라도 쏠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앞에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기에, 함부로 쏘지도 못했다.

총을 쏘는 그 순간 수많은 총알을 난사해 자신을 공격할 것이다.

“…이런 XX!”

스페이드의 조직원인 남자는 걸쭉한 욕을 뱉었다.

“정말로 마담이 배신자입니까?”

“내가 배신자라고? 그럴 리가 있나.”

남자는 여전히 긴장을 놓지 않은 채 여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충성한 적이 있어야 배신이 성립하는 거 아니니?”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동안 보스의 애인이라는 이유로 넘겼는데, 자세히 보니
기시감이 드는 외모였다.

그의 표정이 달라지는 걸 본 여자가 입을 열었다.

“도망치는 놈은 더 없었겠지.”

“예. 이놈이 마지막입니다.”

“…그래, 그러면.”

여자가 방심한 그 순간을 남자는 놓치지 않았다. 바로 뛰어가서 여자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총 내려놔! 여차하면 이 X 을 죽일 거야. 들려? 죽일 거라고! 둘 다 총 내려놔!”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여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겁이 많은 아이네. 자장가라도 불러줄까?”

자장가의 곡조가 여자의 입 사이로 흘러나왔다.

“닥쳐! 네가 감히 보스를…….”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소매에서 작은 권총을 꺼내 든 여자는 남자의 허벅지를 바로 쐈다.

“아악!”

남자의 무릎이 꺾인 순간, 여자는 팔꿈치로 그의 명치를 찍은 뒤 총을 연사했다.

탕, 탕. 총소리가 화장실 안을 울렸다. 난데없는 총소리에 밖에서 손을 들며 대기하던 아이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서로를 쳐다봤다.

무거운 것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조금 시간이 지나자, 여자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여자의 뺨에
살짝 묻은 피가 현장에서 일어났던 일을 대변했다.

뷔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옆의 부하가 손수건을 정중하게 건넸다. 여자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손수건으로
뺨을 닦았다.

“그래서 이 아이들을 어쩌면 좋을까? 중요한 얘기를 다 들어버렸네.”

여자가 손짓하자, 옆에 있던 부하가 바로 그의 손에 담배를 쥐여주며 불을 붙였다. 여자는 담배 연기를


훅 내뱉었다.

“저희는, 아, 아무것도 못 알아들었어요… 진짜예요. 믿어주세요.”

머스캣이 벌벌 떨면서 말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못 들었어.”

뷔노가 속으로는 동요했을지언정 겉으로는 차분하게 말했다. 여자는 얼굴을 기울였다.

“들어도 못 들은 거고?”

“여기 있었던 일 중 아무것도 말할 일 없어! 어차피 말할 사람도 없다고!”

피네가 다급하게 외쳤으나 여자는 그다지 반응이 없었다.

“난 대가 없는 약속은 믿지 않아.”

여자는 고개를 치켜든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입은 막아야겠지.”

꿀꺽, 자매들이 침을 삼켰다. 아까 그 남자도 ‘입막음’을 당했다.

뷔노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딴 곳에서 이딴 이유로 동생들을 죽게 할 수는 없었다. 뷔노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본인을 둘러싼 정장을 입은 사람들에게로.

‘왜 다들 오른쪽 팔만 허리에 딱 붙이나 했더니…….’

모두들 오른쪽 허리에 총을 매달아두고 있었다. 뷔노는 왼쪽에 있는 남자 한 명을 살펴보았다. 체격을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작은 편이었다.

고민은 짧았다.

뷔노는 남자를 어깨로 밀쳤다. 남자는 보기와 다르게 힘이 센 건지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미 뷔노는 남자의 총을 뽑아낸 상태였다.

철컥.

뷔노는 총을 든 다음, 여자를 총으로 똑바로 가리켰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이직이 했던 자세를
최선을 다해 흉내 내고 있었다. 부디 그는 자신이 명사수로 보이기를 바랐다.

수많은 총구가 바로 뷔노를 향했다.

“…우리를 보내줘.”

뷔노는 자신을 노리는 수많은 총구 앞에도 겁을 내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여자는 아까 조직원이


붙잡았을 때와 다르게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빡거렸다.

“이 나이에 인질을 다 세우고. 역시 애들은 안 좋은 건 빨리 배운다니까.”


“머스캣, 나가.”

뷔노는 이대로 한 명 한 명 차례로 보낼 작정이었다. 가장 바깥에 있는 머스캣에게 말했으나, 머스캣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언니…….”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은 머스캣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본 뷔노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내가 못 쏠 것 같나?”

뷔노는 여자의 귀 방향으로 총을 슬쩍 틀었다.

‘협박용으로, 한 발만…….’

손이 파르르 떨렸다. 뷔노는 왼손을 꾹 총 아래에 거머쥐며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긴장한 손에 땀이 배


미끄러워 조준이 힘들었던 그때.

“쏘렴.”

여자가 태연하게 말했다. 뷔노는 여유로운 척, 여자를 향해 비웃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틱, 틱. 총알이 나오지 않았다.

‘뭐지? 총알이 다 떨어진 건가?’

당황한 뷔노의 옆에 여자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그는 뷔노의 어깨를 쳐, 순식간에 총을 뺏었다.

뺏은 총을 놀리듯이 흔들며 여자가 말했다.

“블러핑도 좋지만, 안전장치는 풀어야지 않겠니?”

‘젠장…….’

하이직이 저번에 총을 넘겼을 때는 이미 안전장치를 푼 상태였다. 그것도 모르고 총을 겨눴으니 총을 잘


다룰 줄 모른다는 건 금세 티가 났을 것이다.

여자는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협박 조금 하고 보내려고 했는데, 보통 성질은 아니네. 이거 위협 몇 번으로는 안 될 거 같은데…….”

여자는 네 명을 천천히 훑어봤다.

“조그만 애들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곤란하구나.”

그는 한 번 더 휴, 한숨을 쉬더니 고저 없는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말했다.

“가둬놔.”

툭,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자매의 등을 떠밀었다. 자매들은 누군가 끌기 전에 순순히 움직였다.


“넌 손 똑바로 드는 게 좋을 거야.”

뷔노 뒤의 사람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총을 뺏긴 남자였다. 뷔노는 손을 하늘 높이 뻗으며


남자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그쪽이야말로 또 총 뺏기기 전에 조심하는 게 좋을걸.”

작은 목소리를 들은 여자는 앞장서며 남몰래 웃었다.

집만 한 곳이 없다.

―오즈의 마멉사

자매는 화려한 방을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차가운 지하 감옥에 꼼짝없이 갇히는 줄 알았는데, 끌려간


곳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휘장이 쳐진 침대, 목을 뒤로 쭉 당겨야 보이는 높은 천장. 조심스레 발을 들이자 바닥에서 올라오는


뜨끈한 온기가 밑에서부터 타고 올라왔다. 자매는 참지 못하고 눈을 굴려 가며 방 안을 살폈다.

‘뭐지?’

여자는 자매들이 방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 찾아왔다. 그는 문을 열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네 명이 옹기종기 잘 붙어있네.”

침대도 방도 넓은데 넷은 약속이라도 한 듯 침대 한구석에 모여 앉아있었다. 여자는 그런 자매를 보며


웃었다.

“일단.”

여자의 한마디에 네 명이 모두 긴장했다.

“씻을까?”

여자는 엄지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그 말에 눈을 껌뻑이던 자매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뷔노가 걸음을
옮기는 걸 보고 같이 갔다.

“한 명씩 들어가지 않고?”

여자의 말에 뷔노가 말했다.

“…다 같이 들어갈 겁니다.”

혹시나 자신이 들어간 사이에 동생들이 해코지라도 당하면, 아니면 반대의 경우가 있을 수도 있었다.
여자는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마음대로 해.”

그 말을 듣자마자 뷔노는 화장실 문을 꽉 닫고 잠갔다. 뭐지? 무슨 속셈이지?

도저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자매들은 한동안 화장실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한 채 굳어만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총 쏘고 그러는 거 보면 조직은 조직인데에…….”

하이직이 질문하자 피네가 답했다.

“저 사람 속은 도저히 모르겠네.”

잠시 욕실 안에서 정적이 흘렀다. 조금 배를 곯긴 했어도 대체로 평범하게 흘러가던 일상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총을 주운 게 잘못이었나? 말리지 않은 게? 더 자세히 살펴보고 알리지 않아서? 동생들을 잘 돌보지


못해서? 자매들은 각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한 자책을 하고 있었다.

뷔노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자책을 깊이 했다. 애초에 동생들에게 마약을 사게 놔둔 것부터 엇나가고


있었다.

평생을 이 화장실 안에 있을 수는 없었다. 뷔노는 고민이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다.

“…씻자.”

자매는 모두 불안했기에 믿을 사람은 장녀밖에 없었다. 그들은 뷔노의 말을 착실히 들었다. 마침 몸도


간지러웠고 확실히 씻기는 해야 했다.

욕조는 굉장히 넓어서 네 명이 들어가도 여유가 있었다.

‘욕조에 들어가 보는 건 처음인데.’

예전에 부모와 살던 집에도 욕조는 없었다. 낡고 허름해서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녹물만이 흘러나오는
샤워 부스가 있을 뿐이었다.

예전 집과 비교하면 이곳은 아주 호화로웠다. 뷔노는 속으로 자조했다. 조직에 납치당하고 나서야 욕조에
들어가 보다니 아이러니했다.

뷔노는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었다. 따스한 물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그런데 물이 몸에 닿자마자


머스캣이 파르르 떨었다.

“왜 그래, 차가워?”

“아니…….”

머스캣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욕조 안에 앉은 머스캣은 양팔 피부를 벌게질 때까지 긁었다.

“언니, 나 무서워…….”

“팔아넘기려는 걸지도 모르긴 하지.”

하이직이 말했다.

“도망칠까?”

피네가 말하자 하이직이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디로 도망칠 건데?”

“XX, 어디든지.”
“헛소리가 너무 심해졌어, 피네.”

하이직이 힘없이 웃으면서 한 말 이후로 모두가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피네랑 하이직은 자기 몸을 연신 씻어댔다. 뷔노는 짧은 제 머리는 뒤로 미뤄두고, 가만히 머스캣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그때 머스캣이 눈물을 흘렸다.

눈에 거품이 들어간 줄 알고 걷어내 주던 뷔노를 보면서 머스캣이 울먹이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머스캣은 코를 훌쩍였다.

“샴푸 향이 이렇게 좋은 줄 처음 알아서… 흐어어엉.”

머스캣이 눈물을 줄줄 쏟아내며 오열했다. 머스캣이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다 샴푸 거품이 진짜로 눈에
들어가 버렸다. 뷔노는 잠시 거품을 만들어내던 손을 멈췄다.

“눈 따가워어어……!”

뷔노는 재빨리 수도꼭지를 틀었다.

“빨리 헹궈.”

“…싫, 흑, 어.”

“왜?”

“라벤더 향이 너무 좋, 아서 씻기 싫, 흐어어…….”

“…푸핫.”

하이직이 웃음을 터뜨리자, 피네가 타박했다.

“너 왜 막내가 샴푸 처음 해봐서 기쁘다는데 비훗냐. 진짜, 후, 훗지 마라.”

머스캣이 팔에 턱을 묻은 채 조그맣게 말했다.

“피네 언니가 더 나빠…….”

“나쁜 언니가 머리 헹궈줘라.”

뷔노는 때를 놓치지 않고 머스캣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나 나쁜 언니 아니거든! X 라 좋은 언닌데!”

“X 라 좋은 언니, 행동으로 증명해.”

뷔노는 욕조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늘어뜨렸다. 뜨끈한 물이 몸에 스미는 게 기분이 좋았다. 호수나


개울의 물과는 달랐다. 이게 욕조를 쓰는 이유구나, 생각하며 뷔노가 눈을 감았다.

“까라면 까야지 뭐.”

피네는 사죄의 의미로 머스캣의 눈을 깨끗이 닦아줄 뿐 아니라 코까지 풀어줘야 했다.
“머리 큰 거 봐. 씻어도 씻어도 끝나질 않네.”

“…언니 손이 느린 거겠지.”

“어쭈, 안 지네.”

피네는 투덜거리면서도 샴푸를 처음 경험해 보는 머스캣을 위해 최대한 천천히 두피를 문질러 주었다.
머스캣은 느긋한 표정으로 두피 마사지를 받았다.

조직에 납치됐다는 사실도 잠시 잊을 정도로 아이들은 바짝 긴장한 몸을 풀었다. 하지만 그 꿈결 같은


시간은 금방 지났다.

“연다?”

옷을 다 입고 나서, 하이직은 문고리를 덜덜 떠는 손으로 잡았다.

“…….”

자매들이 모두 하이직의 손에 시선을 집중했다. 하이직은 문고리를 잡은 상태로 중얼거렸다.

“…죽어도 같이 죽으니까 괜찮겠지이.”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마! 빨리 열기나 해!”

“만약의 경우 그렇다는 거지…….”

하이직은 문고리를 확 돌렸다. 문을 열고 나자 거기엔 믿을 수 없는 풍경이 있었다. 최악이었다.

“…우리 팔려나가나 봐.”

머스캣이 허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그런 건가.”

뷔노는 따라서 말했다.

맛있는 음식 냄새가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찔렀다. 방 안에 있던 커다란 식탁에는 살면서 처음 보는


진수성찬이 놓여있었다.

“팔려갈 땐 팔려가더라도 이건 먹고 가야지.”

하이직이 욕실에서 튀어나와 식탁 앞에 앉았다.

“우리 먹으라고 둔 거 아니면 어떡해…….”

하이직은 눈앞에 놓여있는 주먹만 한 빵을 한입에 욱여넣고 말했다.

“우리 거 아니면 뭐겠어? 쩝. 설령 아니어도 감금당한 처진데, 쩝, 쩝. 식량 정도는 털어도 되는 거


아냐, 쩝.”

하이직이 평소의 늘어진 말투가 아닌, 빠르면서도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하나하나 다 틀림이 없이 참 맞는 말이었다. 자매들은 바로 식탁 앞에 가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처음에는 그나마 얌전히 나이프로 자른 후 포크로 찍어서 먹었지만 나중에는 손으로 뜯어서 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지.”

뷔노가 동생들이 볼 안에 음식을 가득 넣고 우물거리는 걸 보고 말했다. 오래도록 조금밖에 못 먹고


지내왔는데 갑자기 많은 음식을 먹으면 심하게 체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동생들은 말을 들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굶주린 짐승의 눈앞에 음식이 있는데 뷔노의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음식 섭취에 몰두한 셋을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뷔노 역시 음식을 먹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다음에는, 사람 몇 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저기요! 당신들!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러나 모두는 피네가 아무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건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짐을 나르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방 안에 놓여있는 책이나 장난감 등을 확인한 자매들이 더욱 혼란스러워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뭐야, 진짜?”

그렇게 호화로운 방에서 꼬박꼬박 음식과 물자를 제공받는 일상이 지속되었다. 끌려온 지 일주일이 지나자
아이들은 슬슬 살이 포동포동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 저들이 무슨 속셈으로 자신들을 가두고 있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진행했다.

“뭐야, 진짜로 무슨 속셈이지?!”

“헨젤과 그레텔 같은 건가? 살찌워서 잡아먹는……. 뭐, 현실에서는 장기 매매 같은 거겠지만.”

하이직의 답변에 피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파는 게 맞는 거 같아. XX, 얍삽한 놈들……. 판다고 하면 어디에 팔려는 거지?”

“고아원? 노예 시장? 경매? 인육 매매?”

“끔찍한 소리 하지 마! 특히 고아원 얘기는 꺼내지도 마.”

피네가 진절머리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

머스캣이 조심스럽게 둘의 대화에 끼었다.

“도망갈까……? 경비가 허술한 건 아니지만, 사람이 하는 건데 틈 정도는 있지 않을까 싶어.”

그 말에 하이직은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뭐든 다 갖다주니까, 도망갈 이유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평생 이 안에 갇혀 지낼 순 없으니까…….”

이에 계속 조용하던 뷔노가 한마디 했다.

“있어 보자.”
“왜?”

“거적때기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어. 아직까지는 늦가을이니 괜찮았지만 갈수록 추워지겠지. 이런 겨울


날씨에 집도 없이 밖에 우리끼리 있다가는 죽어.”

뷔노가 말하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낙엽이 가라앉고 계절이 바뀌어 가면서 모두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나도 조금은 더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머스캣이 조용히 대답했다. 의사 표현을 강하게 하지 않는 머스캣치고 직설적인 말이었다.

“확실히 헤르게임의 겨울은 추우니까. 여기는 지붕이라도 있지!”

“겨울 동안만 잠시 신세를 져도 되긴 하지이.”

겨울이 지난 다음에 어떻게 빠져나갈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뷔노는 속으로 살짝 안심했다.

사실 얼어 죽는 건 어찌 보면 가장 양호한 경우를 말한 거였다. 밖에 따 먹을 열매도 없고, 식당에 자주


나가는 사람도 없는 겨울. 쓰레기통에조차 먹을 게 없을지도 몰랐다.

‘아사하지 않게 해준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대체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 꿍꿍이가 뭔지는 몰라도, 뷔노는 전에 봤던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3 일이 더 지나고 나서야 여자가 찾아왔다.

“뺨에 다들 살이 토실토실 올랐구나. 불편한 건 없니?”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조금 답답해요!”

피네가 냉큼 대답했다. 반면 머스캣은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뷔노는 조용히 있다가, 수그러든
목소리로 여자에게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대체 무슨 생각, 입니까?”

여자는 가볍게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아무 생각 없는데.”

“가둬 놓는다고 하고…….”

“가둬 놓고 있잖니.”

“…….”

“걱정하지 않아도 계획이 끝날 때까지 너희를 풀어줄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얌전히 여기서 호의호식하며
지내렴.”

“계획이라고 하면 스페이드 보스를 죽이는 걸 말하는 건가요.”


뷔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이직은 그걸 왜 말하냐는 뜻의 눈빛으로 뷔노를 쳐다봤지만,
뷔노는 못 본 척했다.

“어차피 못 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시니 물어봤습니다.”

“…맞아. 단순히 거기서 끝나지는 않을 거지만, 너희는 거기까지만 알아도 되지.”

절로 궁금하게 만드는 화법이었다. 여자에게 피네는 손을 들고 물어봤다.

“계획이 언제 끝날까요?”

“글쎄, 몇 개월 걸리지 않을까. 생각보다 내 애인이 경계심이 많거든.”

애인?

뷔노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럼 저희는 몇 개월 동안 여기 안에서 지냅니까?”

“음… 싫으면 그냥 죽는 방법도 있긴 한데.”

“안에 있겠습니다.”

뷔노의 단호한 목소리에 여자가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야. 역시 답답하겠지?”

“저… 스페이드 보스를 죽여서 뭐 하실 거예요? 스페이드 보스가 되시려고요……?”

머스캣의 질문에 여자는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있지. 5 대 조직 안에 드는 게 우선이겠지만.”

5 대 조직? 여자는 자연스럽게 4 개의 조직 가운데 자신의 조직을 끼워 넣고 있었다.

저게 자신감일지 망상일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여자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자매 한 명 한 명의


눈을 바라보았다. 깜짝 놀란 머스캣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근데 너네 책을 전혀 안 읽더라, 왜 그러니?”

일부러 많이 준비해 놨는데. 그 또래 애들은 책을 좋아하잖아? 여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궁금증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이때, 뷔노와 머스캣의 양심선언에 여자는 처음으로 당황했다.

“글을 모릅니다.”

“…저도 몰라요.”

철자법, 문법 등 글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드문 건 아니었으나, 아예 모른다는 건 심각했다.

“…다 글을 몰라?”

“난 조금 알아요!”
“무기 관련 단어는 잘 읽는데, 나머지는 버벅여서 별로…….”

여자는 작위적인 미소를 지어냈다.

“이 세상에서 글을 모른다는 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데.”

그는 자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다들 몇 살이지?”

그간 얻은 호의로 딱딱했던 뷔노도 물렁해져, 순순히 대답했다.

“전 열여섯. 피네랑 하이직은 열다섯 살, 머스캣은 열네 살.”

“…전에 들었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이름을 혹시 너희끼리 지었니?”

뷔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이라면 포도 품종 정도는 외우고 다녔을 것 같긴 했다.

“네 이름은 뭔데?”

“…뷔노.”

“뷔노? 와인?”

여자는 갑자기 호탕하게 웃었다. 비웃는 것 같아 부끄러워질 법도 했지만, 워낙 시원한 웃음이었기에


뷔노는 그저 멀뚱멀뚱 서있었다.

충분히 웃은 여자는 고개를 숙여 뷔노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럼 네가 대장이구나.”

“열여섯 살에, 동생 셋이랑 다니고…….”

뷔노는 여자의 말이 연민을 드러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여자는 우연인지
인연인지 모를 기이한 만남을 신기해하고 있었다.

“…너네, 글 배울 생각 없니?”

글을 가르쳐 주겠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여자는 그 후부 자주 방에 들어와 글을 가르치곤 했다.

“그래도 머리는 좋구나.”

배우는 속도가 빠르니 가르치는데도 신이 났던 건지, 여자는 수준별로 책을 갖다줬다.

한 달 동안 있었던 일이었다. 고작 한 달이었으나, 시야가 확장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뷔노는 제가


보지 못한 세상이 이렇게 넓은 줄 처음 알았다.

단순히 책만 읽고 끝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구나 주고받을 법한 아주


평범한 이야기부터 밖에서 절대 얘기해선 안 될 아주 위험한 것까지.

“총을 쏠 때는 안전장치를 풀고 쏴야 돼. 그건 저번 경험에서 익혔겠지.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어. 그건


뭐냐면, 안전장치를 풀건 안 풀었건 사람에게 총을 대놓고 겨누면 안 된다는 점이지.”

여자는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든 채 뷔노의 이마에 겨누며 말했다. 뷔노는 그 손을 툭 쳐냈다.


“그럼 대놓고 아니고 몰래 겨누는 건 괜찮나요?”

“그건 괜찮지.”

반항심에 내뱉은 말인데, 여자가 너무 쉽게 수긍하니 뷔노는 다시 말을 잃었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말을 이었다.

“조직끼리 소통할 때 중요한 건 사이에 통역사를 두지 않는 점이지. 장물 거래를 하는 브로커도 통역사를


두지 않는데, 조직 간의 거래는 더 하지 않겠니?”

“사람에게는 미세 표정이라는 게 있어. 1 초보다도 훨씬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가는 표정을 말하는데, 피네


너는 볼 수 있을 것 같구나.”

여자가 그 방에 머무르는 시간은 갈수록 길어졌다. 뷔노와 여자 단둘이 남았을 때, 뷔노는 사뭇 경직된
태도로 말했다.

“정상은 아닙니다.”

“뭐가?”

“애 넷 감금해 놓고 가족 놀이하는 거.”

날카로운 말에 여자가 슬쩍 웃었다.

“가족 놀이라. 그냥 재능이 있어 보이는 분야를 조금 건드렸을 뿐이야. 나는 재능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거든.”

“쟤들은 어려. 어른이 조금만 관심을 쏟아부으면 진짜라고 믿는다고. 설령 그게 사탕발림과 가짜


애정이라고 해도.”

갑자기 격양된 뷔노의 말투에 여자가 한쪽 입꼬리를 웃으며 미소를 지었다.

“너도 어리단다.”

“…….”

“흔들리니? 진짜라고 믿어버릴까 봐?”

“미쳤군.”

뷔노는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이유를 말해. 경매에 내다 팔 건 뭘 하건 미리 아는 편이 낫겠지.”

여자는 슬쩍 웃으며 손가락을 뻗어 뷔노의 옷깃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어떤 남자가 있었는데, 매일매일 술만 마시면 아내와 애들을 때렸지.”

뜬금없는 이야기에 뷔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느 날 그 남자가 평소보다도 술에 취한 상태로 들어와 행패를 부리다, 자기 아내를 성폭행했는데.”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뼉을 짝, 소리 나게 쳤다.


“설마, 그 남자가 매독을 옮아왔을 줄이야.”

“…….”

여자의 말투는 연극을 연상시켰지만, 어쩐지 그 내용은 가짜가 아닌 것 같았다.

“둘은 매독에 걸렸지만 다행히 아내는 금세 죽었어. 대신 남자 쪽은 매독을 지독하게 앓았지. 눈과 코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가 흘렀단다. 그걸 본 첫째 딸의 나이는 열여섯이었어. 자, 그 애가 어떻게
했을까?”

뷔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뜻 모를 시선을 여자에게 던지며 예상 가는 뒷말을 기다렸다.

“그 애는 제 친부를 그 찬 골방 안에 놔두고, 여동생 둘을 데리고 집을 나갔지. 셋은 조금 배고파도


그럭저럭 밖의 생활을 해나갔단다.”

“…당신.”

뷔노는 입을 닫았다.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뷔노는 이것과 충분히 비슷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저 제 말만 이어갔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고, 그 여자애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였어. 원래 이야기는 주인공이 자리를 비울


때 진행되는 법이지.”

“…….”

“동생들은 큰 죄를 저지르지. 보면 안 될 걸 봤거든. 스페이드 조직원들이 배신자를 처리하는 모습이었어.


그들은 파이프에 맞아 온몸의 뼈가 너덜너덜해져 움직일 수 없던 남자를 돼지우리에 던졌지.”

유쾌한 목소리는 말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았다. 뷔노는 이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그렇게 잔인한 걸 동생들은 처음 본 거야. 당연히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겠지. 하지만 참지 못한 한


명이 비명을 질렀고.”

“…….”

“조직원들은 목격자들의 이마에 한 발씩 쏴. 남은 몸들 역시 돼지우리로 내던지지. 굶주린 돼지들은 피부


가죽부터 속살까지 다 벗겨 먹었고, 출생 신고도 안 되어있던 아이들을 알아볼 사람은 없었어. 그들은
모든 목격자를 없앴다고 믿었지. 완벽하게 입을 막았다고.”

여자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아래에 뜻 모를 감정을 담은 눈동자가


보였다.

“여자애가 돌아와 자신의 동생들이 죽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걸 몰랐던 거야.”

여자는 톡톡 침대의 나무 부분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뷔노는 그의 입술 끝이 살짝 경련하는 걸 발견했다.

“…뭐, 우여곡절 끝에 여자애는 여자가 됐고, 머리도 컸고 사람도 모을 줄 알게 됐지. 어느 날 스페이드


보스가 방문한다는 그날. 그날만을 기다렸던 여자는 살롱에서 노래를 불렀어. 그 길로 그놈은 사랑의
포로가 됐지. 자기가 마시는 게 와인인지 피인지도 모르는 멍청한 자식.”

많은 말이 생략된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뷔노를 이해시키기엔 충분했다.

“그건, 당신 얘기…입니까?”

“들은 얘기로 하지. 지금은.”


지금은. 뷔노는 여자를 보며 말했다.

“제가 그 여자애랑 겹쳐 보여서 동정했습니까?”

여자는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아직도 이리 나를 몰라서야. 동정 따위로 귀찮은 육아를 떠맡지는 않아.”

“그러면.”

“이 이야기의 교훈은 길거리를 떠도는 가장 하찮아 보이는 여자아이도 죽이지 말라는 거야. 혹시
모르잖니.”

여자는 뷔노의 미간 사이를 검지로 콕, 찍으며 말했다.

“너희들을 죽였다가, 내 목에 칼을 맞는 날이 오게 될지.”

여자는 제 목을 매만지다 웃었다. 그는 더 말을 하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침대에 앉아있던 뷔노가 손을 뻗었다 멈췄다. 여자를 잡는 대신 뷔노는 무릎 위에 주먹을 쥔 상태로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뭡니까?”

“그런 게 중요하니.”

여자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하며 문을 닫았다.

“나가도 돼.”

여자의 통보에 당혹스러워하는 건 자매들이었다.

“한 달밖에 안 지났는데요? 계획은 몇 개월쯤 걸릴 거라고…….”

여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너희가 무슨 짓을 해도 계획이 틀어질 일은 없어. 토대가 다 완성됐거든.”

여자는 짓궂게 웃었다.

“한 달이나 밖에 나가지 못한 소녀들이라고 동정을 사는 여론이 있어서, 빨리 풀어주기로 했지. 우리


조직에는 생각보다 여린 사람들이 많았나 봐.”

“이름이 뭡니까?”

“역시 본명을 묻는 거겠지?”

뷔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

“…이제 됐습니다. 들어가게 해주세요.”


“들어가게 해달라고? 나가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무슨 의미지?”

“조직에, 저희 자매를 조직원으로.”

여자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새끼손가락부터 검지까지 피아노를 치듯 유려하게 움직였다. 그건 그가


고민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왜?”

뷔노는 이게 들어가고 싶은 이유를 묻는 건지, 그들을 조직에 들일 이유를 묻는 건지 고민했다.

“하이직은, 뭐 아시다시피. 무기를 잘 다루고. 피네는 사람 표정이나 심리를 잘 읽고, 머스캣은


관찰력이랑 기억력이 좋으니까…….”

“괜찮은 솜씨긴 했지. 그런데, 그걸 물은 게 아냐. 왜 들어오고 싶냐는 거지. 멋있어 보여서? 재미로?”

마더의 눈빛이 번뜩였다.

“앞으로 먹고살 방법이 없을 것 같아서.”

“흐음?”

생사가 이유가 될 줄은 몰랐는지 마더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약 파는 것보다 이게 더 돈이 될 것 같아 그럽니다.”

“돈. 돈 때문이라… 이렇게 솔직한 경우는 오랜만에 봤네. 뷔노, 원래 이럴 때면 좋은 어른은 뭐라고
하는지 아니?”

그는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꼬맹이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험상궂은 분위기를 풍기던 그는 곧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난 좋은 어른이 아니지. 따라오렴.”

낮았던 목소리는 금세 노래를 부르는 듯한 음색으로 변했다.

“조직에 들어온 이상, 앞으로는 나를 마더라고 불러.”

“마더요?”

자매에겐 생소한 호칭이었다.

“원래 보스를 그렇게 부르나요?”

“아니. 너희가 내 딸처럼 느껴져서 그래.”

마더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가족 놀이는 아니고.”

“…그렇습니까?”
그 상태로 마더가 걸어갔고 뷔노는 마더가 세 걸음을 걸은 후에야 그 뒤를 따랐다. 동생들은 뷔노가 한
걸음을 걸은 뒤에야 그 둘을 따라갔다.

조직에 들어간 이후로도 갑자기 사람을 죽이거나 해야 할 일은 없었다. 마더는 자매들에게 주위


조직원들과는 확연히 다른 대우를 보였다.

“힘드니?”

“체력이 약한 편이라…….”

마더는 머스캣을 힐끗 보았다. 마른 몸이나 창백한 피부가 그의 건강 상태가 나쁘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몸이 건강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이걸 타보렴. 걷기보다 힘이 덜 들 거란다.”

마더가 준 건 자전거였다. 머스캣은 신기한 듯 양 핸들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철로 이루어진 손잡이,


이어진 몸체, 날씬한 구조는 자동차와는 차이가 났다.

자매들은 모두 신기한 눈으로 자전거를 보았다. 안장을 보던 머스캣은 주춤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왜 그러지?”

“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여자는 못 봤는데…….”

“그럼 네가 처음으로 하면 되겠구나.”

별 대수롭지 않은 걸 걱정한다는 말투였다. 머스캣이 안장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페달을 밟아. 어느 속도 이상으로 밟으면 안 넘어지니까.”

어떤 금기나 규율에도 얽매이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뷔노가 생각한 바를 마더에게 말하자
그가 웃더니 말했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말이 있지.”

“어떤 게 좋은 겁니까?”

“어디든 갈 수 있으면 천국도 갈 수 있다는 의미 아니겠어?”

잠시 고민하던 마더는 씨익 웃더니 그다운 말을 남겼다.

“그리고 천국이든 지옥이든 남들 위에 설 수 있는 곳이 좋단다.”

3 월 14 일. 스페이드 보스 사망 한 달 후.

아무도 마더를 모욕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새로 세운 규칙이었다.

과거, 시저 조직이 밀주업에 나서기 이전. 헤르게임에서 가장 흥행했던 건 ‘살롱’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살롱은 단순히 술만이 오가는 장소가 아니었다. 정보가 오가고 교류가 오가는 장소였다. 마을에 무슨
일자리가 어디 났는지, 어떤 정치인을 투표해야 하는지, 중요한 것부터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의
가십들이 다 살롱에서 퍼져나갔다.

수많은 살롱이 있었지만 살롱은 모두 남자들의 영역이었다. 그런 가운데 가장 대두된 가십은 분명했다.

스페이드 보스의 죽음.

헤르게임 스페이드 구역의 한 살롱. 위스키 한 잔을 시켰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있던 사람이 말을


꺼냈다. 그는 검은색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스페이드 보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예끼, 이 사람 소식이 느리구먼. 우리 동네 사람들은 벌써 실컷 한바탕 설전을 벌였지.”

수염이 희끗희끗하게 난 남자가 말했다. 그는 이미 술에 취한 듯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아, 그랬나.”

“‘마더’와 그 딸들 사진도 신문에 올라왔지 않는가. 뭐 뚜렷하게 나온 건 아니지만. 사람들 모두 한 달


내내 그들 얘기를 떠들었다고.”

“자네 외지인인가?”

다른 남자의 질문에 검은 모자를 쓴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스카프를 허리에 두른
사람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외지인인데, 신기한 게 보이는데? 저기 벽 쪽을 보면 도박한 흔적도 있네!”

한쪽엔 스페이드, 한쪽엔 시저라고 적혀있는 나무 판 두 개가 벽에 붙어있었다. 옆에 두꺼운 종이 뭉치는


누가 얼마나 냈나를 표기한 장부 같았다.

“근데 왜 시저의 배당률이 훨씬 높지?”

시저의 경우 배당률은 6 배에 가깝게 표기되어 있었다. 스페이드는 1 배를 소수점으로 조금 넘는 정도였다.

검은 모자의 말에 사람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그의 표정을 보고 푸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구만그려.”

“스페이드가 조금씩 수가 줄어간다고는 하지만… 그래 봤자 얼마나 가겠어? 명색이 스페이든데 보스가


죽었다고 수그러들 것 같지는 않아.”

“시저가 망할지, 스페이드가 망할지에 관한 도박이 아니라, 시저가 언제 망할지에 관한 도박이라고 봐도


틀림이 없지.”

“한마디로 도박에 미친 술꾼들만이 망하는 게임이다?”

스카프의 말에 흰 수염이 금세 수긍했다.

“이해가 빠르구만!”

가만히 있던 검은 모자는 지폐 다발을 꺼내서 도박장이 있는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나는 시저에 걸지.”

그 액수가 꽤 됐기에 코가 큰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방금 스카프가 좋은 표현을 해줬는데도 저렇게 말을 안 듣는다니까, 요즘 젊은이들이란.”

“놔두게.”

“남편도 없는데 애가 넷이라는 건, 그 짓을 얼마나 했다는 거야? 창녀가 아닌 이상…….”

구석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페이드 보스도 참 물러터졌나벼? 내 앞에 왔으면 고런 년은 한 방에 끝인디.”

흰 수염 남자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더니 낄낄 웃었다.

“진심으로? 1 달러만 받는다고 해도 자고 싶지 않은데.”

“맞아, 그렇게 거친 여자랑 하면 거시기가 뜯길지도 모르잖아?”

와하하하, 코 큰 남자의 유쾌한 말장난에 웃음소리가 살롱 안을 메웠다. 하하하, 특히나 크게 웃은 검은


모자가 천천히 코 큰 남자에게 다가갔다.

“거시기만 뜯기겠어?”

그는 남자의 목에 손날을 대면서 말했다.

“그 여자는 암사마귀 같은 여자라, 교미한 상대를 가만 놔두지 않지. 흔들 땐 실컷 흔들다가도… 확!”

기다란 손가락이 남자의 목을 잡아챘다. 서늘한 손가락들은 당장이라도 바짝 힘을 줄 것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모가지가 뜯기는 수가 있다고.”

“…이보게, 자네 선을 넘었어. 이런 장난은 별로 재미도 없구만.”

“그렇군. 기억해 두지. 별로 유머 감각이 없는 편이거든. 그쪽과 마찬가지로.”

모자를 쓴 사람은 제 오른쪽 허리에 손을 얹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주인장이 큰소리로 외쳤다.

“이봐, 거기 친구들.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람들 가지고 뭐라 했다고 화내는 거야? 우리 알 바 아니지
않나, 좀 유들유들하게 넘기게.”

“좋은 조언이군.”

그는 모자를 벗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눈도 깜빡거리지 않은 채 남자를 응시하는 그를 보며, 남자의


표정이 점점 변해갔다.

“…어디서 본 얼굴 같은…….”

남자가 모자를 쓴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보려 하자, 스카프를 두르고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이목을
끌었다.

“나도 참, 장난도 진지하게 모욕으로 받아들이게 되니 힘들지!”


그는 스카프에 감싸놓았던 총을 꺼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살롱의 그림 세 점이 쨍그랑, 떨어지고 유리가
바닥에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벽에 붙어있던 사람들이 기겁하며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유리 조각을 맞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까 가장 거친 언사를 보였던 남자들이었다.

“…저, 저거!”

바로 옆에 있던 코 큰 남자는 소리에 놀라 의자에서 미끄러져 뒤로 주저앉았다. 그 상태로 기어가려 했던


남자의 정강이를 피네가 발로 걷어찼다. 어찌나 세게 찼는지 정강이를 붙잡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자, 다들 가만히 계시고. 움직이는 사람부터 쏠 거야.”

사람들의 움직임이 멎고 정적인 상태가 계속되자 피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주인장? 아니, 친구!”

손짓 몇 번에 주인장이 나왔다. 그는 도살장에 끌려 나오는 동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검은 모자를 왼손에 쥔 뷔노는 천천히 그의 앞에 다가가, 아까보다 한결 누그러진 얼굴을 보였다.


오른손에는 그 어떤 것보다 강한 협상 도구를 쥐고 있었다.

“스페이드한테 보호세를 계속 내고 있었지?”

살롱의 주인은 제 심장을 향한 총을 의식한 채 고개를 힘겹게 끄덕였다. 힘줄이 솟은 목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두 가지 선택지를 주지. 하나는 세금 없이 살롱 일을 계속하는 것.”

살롱 주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스페이드의 보호를 받지 않고 장사를 한다는 건 나머지 조직의 표적이
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 그게… 술을, 구입할 수가 없는데.”

“당연히 시저에서 구입하는 거지.”

그는 뷔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나, 나머지 하나는 뭡니까?”

“여기서 죽는 거지.”

결국 어떤 걸 골라도 죽는 거나 마찬가지로 들렸다.

“그… 그… 보호세를 안 내는 건 무리입니다…….”

“돈 내는 게 좋아? 특이한 성격이네. 그럼 우리한테 세금 낼래?”

피네가 뒤에서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아니고, 스페이드가… 스페이드가 보복할 텐데…….”

“그래.”

뷔노가 주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우리 알 바가 아니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주인의 입매가 뻣뻣하게 굳었다.

“제, 발. 자비를…….”

“…이렇게 말하면 너무 박하겠지, 거래하는 사이에서 말이야. 나는 친구끼리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친구가 위험하다는데 설마 무시하겠어?”

뷔노는 입술을 열어 말했다.

“보호세가 없어도 보호해 주지.”

“…시저에서요?”

주인은 불안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친구 사이에서는.”

뷔노는 총을 주인의 가슴께에 대고 꾹꾹 눌렀다.

“하지만 한번 끊어진 연은 없었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지.”

“…시저랑 계속 거래하겠습니다.”

“좋아.”

피네는 주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면서 말했다.

“친구? 오래 가자구!”

그걸 잠시 보던 뷔노는 시가를 입에 물었다.

“자, 그러면…….”

뷔노의 시선은 한 명에게만 향했다.

흰 수염 남자의 앞에 서자 남자는 입도 열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었다. 뷔노는 딱히 무기도 들지 않고,


고개를 까닥였다. 그리고 뒤통수를 잡은 채 그의 얼굴을 벽에 내리쳤다.

쾅, 쾅, 쾅.

몇 번을 두들겼을까. 코와 이가 깨지고 얼굴에는 피멍이 가득했다. 벽에 피가 잔뜩 묻어나온 걸 확인한


뷔노는 뒷덜미를 잡아당겨 남자의 귀에 대고 말했다.

“네 앞에 왔으면 그년은 한 방에 끝이라고 했던가? 그년 앞에 서면 어떻게 될지 시험해 보지.”

뷔노는 한 손으로 옷깃을 잡고, 바닥에 질질 남자를 끌고 갔다. 별 힘도 들이지 않은 동작으로 보였다.
피네는 뷔노의 뒤를 쫓아갔다.

“기다려, 언니.”

둘이 살롱을 떠날 것 같자, 안에 있던 몇 명이 다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뷔노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피네에게 말했다.
“피네. 이놈은 본보기가 아냐. 본보기를 보여줘야지.”

“아, 그렇지.”

피네는 살롱 안쪽을 보면서 혼잣말을 되뇌었다.

“어디 보자… 누가 욕을 했던 놈이었지? 잘 기억이 안 나네. 어쩌지, 언니? 그냥 갈까?”

“너무 장난치진 말고.”

뷔노는 동생을 얼렀다.

“그래, 그럼. 창녀라고 맨 처음 말한 놈 한 발, 1 달러니 뭐니 내뱉은 거지새끼 한 발.”

마구잡이로 쏘는 것 같은 총이 한 발 한 발 급소에 명중했다. 코 큰 남자를 보던 피네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 저건 내가 찬 놈이니 정확히 기억이 나네. 넌 특별히 봐주지.”

탕, 유독 예술적인 한 발이 남자의 다리 사이로 날아갔다. 열 명 가까이 쏘고 난 피네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피네는 마지막으로 스페이드가 적힌 도박판을 쏘아 떨어뜨렸다. 쓰러진 물건들과 피가 낭자한 살롱 안을


보며 피네가 흡족하게 말했다.

“한결 깨끗해졌네.”

아무도 마더를 모욕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피로 세운 규칙이었다.

14. 그와 그의 아들

좋은 영감이 떠오른다면 당장 실행해라. 사과하는 것이 허락받는 것보다 쉽다.

―프로그래밍 언어 코볼의 창시자 그레이스 호퍼

‘젠장, 젠장.’

뷔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달려갔다. 그러나 파이프에 맞은 한쪽 다리는 어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잡아! 저게 잡힌 놈을 풀어줬어.”

“왜 아무도 침입을 몰랐던 거야?”

뷔노는 한쪽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가다, 나무 밑에 떨어진 방독면을 낚아챘다.

‘아직은 시저가 저지른 일이라는 걸 들키면 안 되니까.’

방독면을 뒤집어쓰고 달리자 안 그래도 차던 숨이 더 찼다. 뷔노는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저쪽이다!”

놓치지도 않고 잘도 따라오고 있었다. 뷔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언덕 쪽에 나무 펜스가 길게 둘러진


게 보였다. 저 너머로 건너가면, 왠지 놈들이 쫓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사유지일 것 같긴 한데.’

남의 집 경비한테 잡혀 맞는 편이 다이아 조직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뷔노는 안간힘을 다해 펜스를


향해 걸어갔다. 대단치 않은 경사였지만 다친 상태에서 올라가긴 쉽지 않았다.

손으로 나무 펜스의 윗부분을 붙잡은 뷔노는 생각보다 펜스가 높다는 걸 발견했다. 다친 다리로 넘기엔
무리라는 생각뿐이었다.

‘죽기보다 더하겠어.’

뷔노는 펜스를 잡은 상태로 그 틈새에 발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점프해 다음 틈새에 발을 끼운


뒤, 아예 몸을 내던졌다. 성한 오른쪽 다리에 힘을 주고 건너갔으나, 그 뒤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정해두지 않았다.

뷔노는 균형을 잃고 언덕 밑 쪽으로 굴러떨어졌다.

“안 보이는데!”

“저 너머로 간 거 아냐?”

펜스의 높이는 대충 보아도 3 미터는 훌쩍 넘어 보였다.

“다친 다리로 저길 넘진 못했겠지! 저쪽 길가로 갔을 거야.”

뷔노는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아니, 확인 정도는 해보는 게 좋겠어. 경비한테 물어보지. 둘로 나눠서 찾아본다.”

‘좀 대충 넘어가지, 치밀한 새끼들.’

꺾인 발목이 미치도록 아려오기 시작했다. 뷔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 보니 경비가 한 명 보였다.


아니, 옷을 보니 경찰인가?

뷔노는 양팔로 기어가듯 언덕 위를 가 나무 뒤로 몸을 숨기려 했다. 그러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눈치챈


사람이 있었다.

뷔노의 얼굴 위로 한 인영이 드리웠다. 책을 손으로 치켜든 채 그는 겁먹은 얼굴로 뷔노를 보고 있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팔은 파리 한 마리에게도 책을 내리치지도 못할 것 같았다.

“…저, 누, 누구세요?”

“…….”

이제 경비를 부르겠군. 뷔노는 방독면 속에서 피식 웃었다.

“잠깐만 숨겨줘.”

“네?”
“나쁜 놈들한테 쫓기고 있어서.”

‘나쁜 놈은 나지만.’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뷔노는 알고서도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러나 눈앞의 소년은 뷔노의 말에
흔들리는 듯 보였다.

“지금도 쫓아오고 있어요?”

“응.”

순진한 편인가? 조금만 달래면 속아 넘어갈 것 같은데.

그는 뷔노를 살펴보고 있는 듯했다. 옷은 수리공의 복장에, 얼굴은 방독면이고, 바지는 군데군데


찢겨있었다. 찢긴 틈새로 보인 다리에 소년이 당황했다.

“다, 다리가 엄청 부었어요.”

“결국 부러졌나?”

뷔노는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다. 아까 펜스를 올라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다리를 떼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부러졌다고요……?”

펜스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혹시 이쪽으로 넘어온 사람 없소?”

경비가 걸어가고 있는 걸 확인한 뷔노는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는 걸 알았다.

“저 사람들이에요?”

뷔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뷔노를 잠시 보다 어깨 사이에 머리를 넣고 부축했다.

“움직이기 힘든 건 알지만, 조금만 도와주세요.”

뷔노는 소년의 몸에 기댄 채 한쪽 발이나마 조금씩 움직였다. 사실상 소년이 거의 끈 거나 다름없었다.

땅만 보고 기운 없이 걷던 뷔노는 들고 있던 왼쪽 발에 뭔가 채는 걸 느꼈다. 불거진 나무뿌리였다.


고개를 들자 아주 커다란 참나무가 보였다.

“여기 뒤에 계세요.”

소년은 거기에 뷔노를 눕히고 뿌리 옆쪽에서 뭔가를 뒤적이더니 이불 같은 걸 뷔노에게 덮었다.

‘숨 막혀.’

방독면도 힘든데 이불을 얼굴까지 덮어두다니, 질식사시키려는 게 분명했다.

“답답해도 참으세요.”

“…그래.”
풀밭에 누운 뷔노는 팔을 조금 움직여 자리를 잡았다. 팔도 살짝 삐끗했는지 아파왔다. 소년은 어쩔
작정인 걸까.

‘아, 모르겠다.’

뷔노는 그냥 입을 다물고 이불 안에 숨어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이 떠나는 것


같았다. 이불 사이로 작게나마 목소리가 들렸다.

“…다는데, 혹시 사람 못 보셨습니까?”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그다음으로 이어진 건 소년의 청아한 목소리였다.

“아뇨, 아무도 못 봤어요. 이쪽으로는 안 넘어온 거 같아요.”

‘숨겨주는 건가.’

“흐음… 하지만 저쪽 길에서 찾았다는 연락이 아직 안 왔는데. 이 안을 제가 잠시 찾아봐도 되겠습니까?”

“예? 저택 안에 들어오는 건 안 돼요.”

“도둑이라서요, 집 안에 있는 중요한 걸 빼갔거든요. 부탁드립니다. 어쩌면 이곳도 노리는 걸지


몰라요.”

‘망했군.’

뷔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답니다, 도련님. 어쩌시겠습니까?”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목소리는 경비의 것 같았다.

‘도둑 얘기를 꺼내다니.’

뷔노는 다리를 움직였다. 도망칠 수 있으려나? 조금 힘을 준 순간 아릿한 통증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뛰기는커녕 기지도 못하겠군.’

잡히겠군, 잡히겠어. 뷔노는 머리를 풀밭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몇 번 대화가 오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지만, 뷔노는 그냥 제 귀를 손으로 막았다.

부스럭, 부스럭. 풀밭을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이불을 들추는 손길에 뷔노가 눈을 떴다.

“이, 이제 괜찮아요.”

“…뭐가?”

“그, 잡으려던 사람은 갔어요.”

“갔다고?”

뷔노는 멍하니 소년을 쳐다보았다. 밝은 달빛이 초콜릿색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바로 며칠 전에


보았던, 뇌리에 아주 깊이 박혀있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붉은 옷을 걸치고, 거리에서 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고 울던.


‘캐서린 줄리어스의 아들?’

금주법이 시행된 지 약 20 년째의 일이었다.

법은 점차 효력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갈수록 주법은 주류 업체의 끊임없는 로비 덕분에, 주류에


관대해지고 있었다.

몇몇 주에서는 길거리에 살롱이 대놓고 만들어질 정도였다. 금주법이 유명무실한 법이 되어가려 할 때였다.

쨍그랑 소리가 블랙리버의 한 살롱 안을 울렸다. 도끼를 들고 온 한 그는 살롱 안의 모든 술통을 무참히


깨부쉈다. 그 사건은 단순히 살롱 안의 가구들을 깨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해이해져 가고 있던 사람들의
경각심 역시 일깨웠다.

도끼를 든 사람은 캐서린 줄리어스. 아동과 여성의 권리의 대변자로 나선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칭송하고 누군가는 미쳤다고 욕했다. 분명한 건 온 국민의 관심이 한 명에게 쏠렸다는 거였다.

‘우리 모두는 안전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따뜻한 품에서 자라나, 안정된 가정에서 아이를 길러낼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술이 가정 폭력과 불화의 근간이다. 금주법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내세웠던 논리가 다시 대두되었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와 별개로 분명한 건 이 주장이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금주법이 제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가 제일 많이 벌어진 장소는 살롱
앞이었다. 살롱 앞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여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몇 정치인들이 금주법이 제대로 시행될 수 있게끔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런 태도에 누군가 위협을
느꼈던 걸까?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알려진 건 한 신문 기사를 통해서였다.

[캐서린 줄리어스, 죽음. 범인은 금주법 폐지 주장하던 테러범?]

소식은 순식간에 전국에 퍼져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추모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

뷔노는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마음이었다.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는 남의 이야기로 느껴졌으니까. 당장


중요한 건 마더의 명령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에 불과했다.

그날, 마더의 집무실로 들어간 뷔노는 몹시 당혹스러웠다. 마더가 울고 있었다. 정확히 눈에서 물이
흐르고 있는 건 아니었으나, 그 비통한 표정은 목 놓아 울고 있다는 표현 말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뷔노는 입을 다문 채 마더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무엇이 그를 울렸을까.

마더의 책상에는 신문이 펼쳐져 있었다. 신문에 그리 안 좋은 소식이 있던가?

뷔노가 신문 기사를 흘끔 훔쳐보려 하는데 마더가 입을 열었다. 그는 어느새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마더는 눈은 살짝 내리깐 채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손가락을 투두둑 두드리는 그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럴 때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됐다. 오랜 정적 끝에 마더가 입을 열었다.

“뷔노.”
“예.”

“임무 하나를 맡아주겠니?”

물음표로 끝난다고 다 질문인 것은 아니었다. 뷔노는 마더의 명령을 받들었다.

마더는 쪽지에 주소를 또박또박 적었다. 평소의 필기체와 달리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주소로 찾아가렴.”

[맥주, 아이도 어른도 같이 즐기는 음료. 맛있는 식사에는 언제나 JP 맥주!]

볼살이 통통하게 올라온 아이를 어머니가 안고 있었고, 옆에는 아버지로 보이는 남성이 광대뼈가 한껏
올라간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내밀고 있었다.

JP 회사. 아까까지 뷔노가 있던 저택 주인들의 사업이 그것이었다. 과거 이 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부유한 기업이었지만, 금주법이 시행된 이후로 사업이 심하게 침체 되었다.

‘유리 사업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바로 저 회사를 운영하던 가문이, 다이아 조직과 연줄을 이었다는 게 마더의 이야기였다.

그 관계를 파헤치고 될 수 있으면 다이아의 수장까지 몰아낼 것.

‘어려운 임무를 주시는군.’

광고 포스터를 힐끔 바라보던 뷔노는 마더가 정해준 거처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길거리를 떠돌아다녔다.

길에는 시끄러운 발걸음 소리와 뱃고동 같은 깊은 소리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남부 특유의 음악 소리였다.

‘장례식인가?’

누구의? 뷔노는 장례식 행렬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행렬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원뿔의 악기를
찾으면 그만이었다.

좁은 입구와 동그랗고 넓은 출구가 있는 이 악기는, 이 세상과 저세상을 잇는 통로로 불리곤 했다.


악사는 제 몸보다 더 큰 그 악기를 치켜들었다. 그가 악기에 숨을 불어 넣자 아까의 뱃고동 소리가 다시
울렸다.

“캐서린 줄리어스!”

한 남자가 이름을 외쳤다. 연분홍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남자는, 한 소년의 손을 쥐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소년은 남자의 얼굴과 쏙 빼닮아 누가 봐도 혈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치렁치렁한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유가족이라는 의미였다.

첫 번째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끝마치자 요란한 피리 소리가 막을 열었다. 가느다란 참나무 가지 다발을
다른 사람이 꺾고, 누군가는 붉은 흙을 뿌렸다.

사람들은 뿌린 흙을 차례로 밟아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열에 맞춰 서있던 사람들은 자리를 교체해


가며 춤을 추었다.
죽은 자를 위한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캐서린 줄리어스의 장례식이 오늘 열리는 거였나?’

과연 위인이라면 위인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장례식에 참여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캐서린 줄리어스!”

돌 옆에서 춤을 추고 유품을 태우며 이름을 부르는, 지방의 전통 장례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붉은 옷을 입은 소년이 그때 뷔노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는 춤을 추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만년필 하나를 조그마한 주머니에서 꺼낸 그는, 붉은 흙에


만년필을 묻었다.

슬픔에 잠긴 눈은 영롱하게 빛났고, 고개는 애통하게 떨구었다. 이목구비는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사람보다 예뻤지만 눈물에 젖어있었으며, 그럼에도 웃으려 노력했다.

“시몬, 이름을 세 번째 부르기 전에 어머니한테 인사하렴.”

그런 그와 똑 닮은 남자가 소년에게 말했다. 그는 숨을 한 번 들이켜고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마지막으로 보이는 얼굴이 우는 얼굴이어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이 보였다. 잔뜩 일그러진 웃음을 지은 채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그곳에서도 행, 복하고 편안하시기를…….”

새하얀 눈밭에 분홍빛 노을이 감돌고 있었다. 때마침 그 색과 꼭 닮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캐서린 줄리어스!”

세 번째로 이름을 부르면 망자는 제자리를 찾아간다. 소년은 더 이상 미소를 유지하지 못하고 입꼬리를
내렸다. 그는 옆으로 시선을 피한 채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눈물방울이 뺨을 따라 아롱지며 쉴 새 없이
흘렀다.

뷔노는 잠시 숨을 멈추고, 더 다가가지도 못한 채 소년을 지켜보기만 했다.

소년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뷔노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가슴에서 시작된 소름이 온몸으로
번져갔다. 망치질하듯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뷔노는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문질렀다.

“별…….”

뷔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하이직이 늘 조롱하던 ‘첫눈에 반하는 왕자 역할’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었나?

청년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많이 내려 무릎까지 차오를 정도로 깊이 쌓이던 겨울이었다. 이


동네에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저택 안까지 한기가 스며들 정도로 추운 계절이라는 의미였다.

‘수리공을 부르기 딱 좋은 때지.’


“어이, 뭔 수리가 이렇게 오래 걸려? 손이 너무 굼뜬 거 아냐?”

“지금 하는 중입니다, 선생님.”

공손한 말투와 다르게 깊은 목소리는 어조 없이 딱딱했다. 펜치 등 여러 수리 기구를 옆에 두고 있던


청년은 모자를 한 번 눌러썼다. 그는 세면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겨울이라 파이프가 얼어서 터진 것 같네요. 교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복도에서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시종장이 손을 휘휘 저었다. 주름진 눈엔 짜증과 불안이 그득


담겨있었다.

“한 군데만 이런 것도 아니고… 어느 세월에 이걸 고쳐. 곧 마님께서 오실 텐데.”

시종장의 눈치를 보던 사용인이 청년에게 말했다.

“뭐든 좋으니까 빨리 고치기만 하라고. 돈은 저분이 얼마든지 내줄 거야. 적어도 오늘 밤까지는 고쳐내.”

그는 청년의 어깨를 툭툭 치고선 자리에서 물러났다.

청년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펜치를 이용해서 파이프 관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조직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청년이 상자에서 이것저것 꺼내가며 수도관을 건드리는 걸 보다, 흥미가 떨어졌는지 이렇게 이르곤
사라졌다.

“수리되고 나면 말하게. 저 건너편 방에 있을 테니.”

“그러죠.”

청년은 고개를 끄덕인 뒤 남자가 사라지는 방향을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그가 떠난 걸 확인하자마자
펜치를 내려놓았다.

청년, 아니 뷔노는 천천히 일어나서 복도로 향했다. 사용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뷔노는 어눌해 보이는
말투를 연기했다.

“저, 목이 마른데 물 좀 주시겠습니까?”

“잠시 기다리세요.”

사용인은 별 의심 없이 말을 전했다. 뷔노는 그 상태로 복도에서 기다리며, 모자 속에 시선을 숨긴 채


남자가 들어가는 방을 보았다.

뷔노는 빠르게 주위를 샅샅이 뒤져보았다. 저택엔 방이 아주 많았다.

조직이 집 안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들이 믿는 건 대부분 변호사 사무실로
위장된, 어딘가의 회의실이었다. 법적으로 도청이 금지된 장소를 원하기 마련이니.

그러나 오래도록 다이아 조직의 ‘회의실’이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마더는 조사 결과 그들의 독특한
방침을 알아냈다.

여러 재벌들의 후원을 받아 맥을 이어가던 다이아는 대기업들의 뒤처리를 해주는 일을 하곤 했다.


그러므로 다른 조직 이상으로 그 뿌리를 들켜서는 안 됐다. 그들의 후원자이자 의뢰인을 잡혀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회의실이라는 구조 역시 신뢰할 수 없었던 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조직을 구성했다. 웬만한 다이아의
조직원은 물론 간부까지 다이아의 보스가 누군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대신 의뢰인과 직접 소통을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지.’

그러니 도청기를 설치해야 한다는 게 마더의 설명이었다. 전에 설치하려다 붙잡힌 조직원 역시 풀어줘야만
했다.

긴 복도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마주 보고 있는 방문들의 짝만 세어 보아도 열 손가락이


모자랐다.

사용인이 세밀하게 세공된 유리잔을 뷔노에게 내밀었다.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가 나열된 모양의 잔이었다.

“감사합니다.”

“뭘요.”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사용인의 옷을 보며, 뷔노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한테 도청기를 달기는 무리겠지.’

물을 꿀꺽 삼키던 뷔노는 컵에 살굿빛이 비친다는 걸 발견했다. 뒤에 사람이 서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가 싶어 잔을 치워보았다. 그러자 살굿빛의 정체가 드러났다. 뷔노의 바로 앞에 있는 벽에 유화가
걸려있었다. 뷔노는 물을 홀짝이며 그림을 관찰했다.

디오니소스와 데메테르

붉은 얼굴과 음영이 드리워진 술의 신 디오니소스. 그리고 책상에 걸터앉은 몸을 부자연스럽게 꺾고 있는


곡식의 신 데메테르.

데메테르의 어깨와 디오니소스의 손 사이에는 포도가 있었다. 마치 일부러 데메테르의 어깨에 포도를
걸치려고 한 것 같았다. 포도주를 쥐고 있는 데메테르의 왼팔은 디오니소스의 손이 슬며시 감싸듯
닿아있었다.

곡물의 신과 술의 신이 같이 그려진, 풍요를 상징하는 그림이었다. 반면 옆의 그림은 대조적인 것이


걸려있었다.

노아의 만취

노인이 된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만취해 알몸 상태로 뒹굴고 있는 그림이었다. 다른 아들들은 노아의
알몸을 보지 않으려 하고 옷을 덮어주었지만, 그중에서 막내아들은 노아를 비웃고 있었다.

술을 찬양한다고 하기는 미묘한 그림이었다.

‘…그냥 술 관련 그림이면 다 걸어둔 건가.’

뷔노는 그림 쪽에서 시선을 돌렸다. 뷔노는 다리를 두어 번 정도 바닥에 두들기다 발걸음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

‘조사해야 할 건 지하 창고뿐이라고 했지.’

뷔노는 지하에 이어지는 통로 쪽에서 이미 와인 냄새를 맡았었다.

‘어떤 소란도 피우지 말고 그 어떤 사람도 죽이지 않으며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고 돌아올 것.’

뷔노는 지금까지 어려운 협상과 임무들을 시도해 왔지만, 아무것도 건드릴 수 없는 거나 다름없는 참으로
까다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뷔노는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지하로 향했다.

계단이 약간 삐걱거린다는 건 아까 사용인이 걸어 다닐 때 알 수 있었다. 오래된 저택이니만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뷔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첫 계단은 다행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밟을 수 있었다.


뷔노는 한 발을 더 내디뎠다.

미약한 소리가 들렸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반응은 없었다. 뷔노는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에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꽤 넓은 공간이었는지 발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뷔노의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하지만 다행히 지하 부분의 바닥은 안정되어 있는지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어두운 지하 안은
나무 문이 몇 개 있었고 촛불 몇 개만이 켜져있어 어둑어둑했다.

그 초 중 하나를 꺼내 주위를 둘러보던 뷔노는, 흐린 빛 사이로 나무 판을 발견했다. 방문마다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방의 이름은 모두 유명한 술 브랜드의 명칭이었다.

방마다 자물쇠가 달려있었으나 뷔노에게 문제는 아니었다. 뷔노는 옷 속에서 얇고 기다란 핀 같은 걸 꺼내


자물쇠를 잘그락거렸다. 한 손이었음에도 금방 자물쇠가 열렸다.

묶여있는 조직원을 발견한 뷔노는, 그의 줄을 풀어주었다.

“…조용히 나가.”

그 말에 조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뷔노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고 생각하며, 전구 윗부분에 도청기를
꾹 눌렀다.

‘이쯤이면 발견은 못 하겠지.’

아무래도 와인 창고 안에서는 별 비밀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듯했다.

“저, 뷔노 님은 안 가십니까?”

“나는… 할 일이 조금 남아서.”

뷔노는 와인 창고가 두 개가 더 있다는 걸 떠올리곤, 그쪽에도 도청기를 설치하기로 마음먹었다.

“지하 계단에는 소리가 많이 나니, 조심해서 올라가고 2 층까지 올라간 후 뒤쪽 창문으로 나가. 그쪽에
경비가 없어.”

조직원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뷔노는 커다란 와인 창고 중 하나를 더 열어 도청기를 설치했다. 그리고
세 와인 창고 중 마지막 하나의 문을 열었을 때였다.

뷔노는 문을 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들어오는 빛 틈으로 와인 창고 안에 사람의 실루엣이 보인 것이다.

‘사용인이 있었나?’

뷔노는 바로 문을 닫고, 소년을 잡아채서 입을 막은 뒤 등에서부터 꽉 조이듯 안았다.

“조용히.”
뷔노가 귓가에 입을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 가운데 와 닿는 길고 찬 손가락이 말 이상의 위협을
전했다. 소년은 움칫 떨었지만 소리를 지르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뷔노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소년의 목을 잡은 채 천천히 움직였다. 뷔노는 소년의 목 위에서 긴 손가락을
조금 움직여 움켜쥐었다.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지만 당황한 소년이 몸을 빼내려 하기 전,

쾅―!

단숨에 뷔노가 방문을 닫았다. 그러자 방 안은 뷔노가 든 촛불 하나만을 빼면 빛 한 점도 없는 공간이


되었다.

뷔노는 소년은 한쪽 팔로 목을 끌어안다시피 하고, 방 안을 살펴보는 데 집중했다.

‘지금 당장 기절시킬까?’

하지만 그러려면 가방에 든 손수건을 꺼내 마취 용액을 뿌리고 코와 입에 덮어야 했다.

너무 복잡한 일이었다. 차라리 묶어두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한 뷔노는 소년의 두 손목을 팔로 잡아챘다.


옷 안에서 밧줄을 꺼내 능숙한 솜씨로 손목을 묶었다.

“잠시…….”

입까지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뷔노는 손을 묶은 소년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촛불이 앞에 드리워져 소년의
얼굴이 눈에 선명히 보였다.

‘이놈은…….’

잊으려야 잊기 쉬운 얼굴은 아니었다. 촛불이 격하게 일렁였다. 분홍색 눈동자는 동요를 가득 담고


있었다.

기분 더러운 구원.

은발에 은색 정장을 입은 소년은 벽에 기댄 상태로 앉아있었다. 왜 이런 시간에, 와인이나 보관해 둔


지하실에 있는 거지?

뷔노는 자신의 판단을 번복했다. 그는 지하실 안에 있는 게 아닐 것이다. 밖은 자물쇠로 잠겨있었으니,


그는…….

뷔노는 서둘러 얼굴을 가리려 했으나 그는 자신의 얼굴에는 관심이 없었다. 뷔노는 그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다. 촛불과 칼, 허리춤에 걸린 총.

물건 하나하나에 시선을 옮기던 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

“날 죽이러 왔습니까?”

“…….”

뷔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까지 들키는 건 위험 부담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만 알려주시죠.”

그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버지가 보냈습니까? 어머니가 보냈습니까?”


뷔노는 이번에는 정말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뷔노가 머뭇거리는 걸 보며 소년의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위에서 아래로 뷔노를 훑어봤고, 뷔노는 서둘러 촛불을 제 얼굴 앞에서 치웠다.

자신의 일은 부하를 빼내고, 벽 쪽에 도청기를 설치해 두는 거에 불과했다. 괜히 동요해, 목격자를


만들어버리다니.

뷔노는 그림자 뒤로 몸을 숨기고 주머니에서 총과 손수건을 꺼냈다.

‘…입막음은 어렵겠고.’

설마 이런 곳에서 재회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뷔노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뷔노는 자신의 총에 손가락을 대고 두드렸다. 소년의 표정이 굳는 것이 보였다.

보니 일꾼도 아니고, 이 소년은 보고받았던 이 집의 하나뿐인 아들임이 분명했다.

‘매수할 수도 없겠군.’

그렇다면 입막음은 쉽지 않다.

‘…죽일까?’

마더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경우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소년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거렸다. 뷔노는 자신의 입에 검지를 대고, 총을 든 채 소년에게


다가갔다. 시끄럽게 굴면 죽여버리겠다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그 동작에 소년이 살짝 긴장하는 듯했다. 그러나 소년은 침착하게 속삭였다.

“뭔가 찾고 계신다면 제가 도와드리죠.”

그는 여유로운 척, 계속해서 입을 놀리고 있었지만 조금 절박해 보였다. 그는 이게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굴고 있었다. 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빠르게 이어 말했다.

“뭘 원합니까.”

“…….”

“내일 할머님이 가시고 나면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찾는 게 있다면 말하십시오.”

할머님? 뷔노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기묘하게 박혔다.

“신뢰가 가지 않는다면 담보로 이걸 드리죠.”

그는 고갯짓으로 지하실 안의 책 하나를 가리켰다. 뷔노는 촛불을 들이밀었다. 책 내용이 어렴풋이


보였다. 책에는 줄줄이 이어진 다양한 숫자들이 적혀있었다.

“저희 가문 회사의 대외용이 아닌, 진짜 회계 장부입니다. 협박거리로 쓸 내용이 충분히 있을 겁니다.”

“무슨 속셈이지?”

뷔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한층 더 내리깐 목소리를 들은 그가 주춤 떨었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속셈은 없습니다. 거래를 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뷔노는 말해보라는 의미로 기다렸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갑자기 저택에 들어와 자기 입을 막은 사람이랑 무슨 거래를 하고 싶은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뭘 원하길래?”

“당신, 조직에서 왔지 않습니까?”

뷔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알아챘다는 듯 소년이 이어 말했다.

“술…….”

“뭐?”

‘그냥 술꾼이었나?’

확실히 술을 얻는 경로로는 조직이 최고긴 했다. 뷔노가 살짝 김이 샌 얼굴로 그를 보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순수 100% 농도의 알코올이 필요합니다.”

“…….”

‘100% 농도의 알코올이 필요하다고?’

“거래, 하시겠습니까?”

“…….”

뷔노는 고개를 기울였다. 못 줄 건 없지만 대체 어떤 용도로 쓰려는 건지가 찜찜했다.

“얼마나 필요한데.”

“한 병이면 충분합니다. 당신은 뭘 위해서 왔습니까?”

뷔노는 가만히 소년을 쳐다보았다. 도통 종잡을 수가 없는 상대였다.

“와인 보관고에 와인을 훔치러 왔지, 뭘 하러 왔겠어.”

“와인을 훔치는데, 도청기는 뭐 하러 들고 왔습니까.”

소년의 눈이 뷔노의 손에 가있었다. 아까 손바닥 안에 숨긴다고 숨겼는데 이미 본 모양이었다.

‘역시 죽일까.’

물론 여기서 이런 정치계 거물의 아들을 죽였다간, 사단이 더 크게 날 걸 알고 있었다. 뷔노의 고민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소년은 판에 대가를 더 얹었다.

“아버지에 관한 건 다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널 언제 기절시킬지 고민 중이니까. 굳이 입을 안 여는 편이 좋을 텐데.”


“…어차피 당신과 거래하지 못하면 전 다음 달쯤에 죽어있을 겁니다.”

“뭐?”

“아버지께서 흠을 참는 성격이 아니신지라. 저를 대체할 아이도 태어날 예정이니 바람 앞의 등불


신세입니다.”

흠이라고? 뷔노는 바로 눈앞의 소년이 아버지의 사생아일까, 의심했다. 사생아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상류층 집안도 제법 흔한 이야기였다.

사생아는 수명이 짧기로 유명했다. 대체로 사고사로 단명하니 말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명예를 깎아내릴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리죠.”

뷔노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와인 창고 안의 공기가 새삼스레 서늘하게 느껴지는


눈 맞춤이었다.

뷔노는 오랜 정적 끝에 입을 열었다.

“…당신 아버지가 재밌는 거래를 했다고 들었는데.”

“다이아 조직에 관한 걸 얘기하는 겁니까?”

뷔노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소년은 알 만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증거가 필요한 거군요, 이어져 있다는.”

불법적인 조직인 다이아와 소년의 아버지가 연결돼 있다는 증거를 말하는 것이었다. 뷔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이주 뒤 보름달이 뜨죠. 자정에 광장에서 뵙겠습니다.”

뷔노는 한 손에 손수건을 든 채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 전에.”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뷔노가 나가자마자 소년이 소리를 질러 도움을 요청할지.

‘도망갈 시간은 벌어둬야지.’

뷔노의 손수건으로 시선을 돌린 소년이 눈썹을 찌푸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그러던지.”

뷔노가 손수건을 내밀고, 소년이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얼굴을 가까이할 때. 뷔노는 그의 코와 입을


손수건으로 우악스럽게 막았다.

소년은 발버둥을 쳤지만 금세 기절했고, 소소하게 복수한 뷔노는 저택 밖으로 빠져나갔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침입자가 있던 걸 눈치챈 경비들이 뷔노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그 새끼, 2 층 창문으로 나가랬는데 1 층 창문으로 나갔군…….’

그렇게 들켜놓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뷔노는 이를 악물었다. 도중에 뛰다가 다리 역시


얻어맞았고, 익숙하지 않은 블랙리버의 지리 속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이대로 꼼짝없이 잡히는 줄 알았는데.’

“…저, 괜찮으세요? 움직이실 수 있겠어요?”

“아, 응.”

뷔노는 소년이 내민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말랑한 손은 자신의 손과 다르게 부드러웠다.

“이름이 뭐야?”

장례식에서 언뜻 들었으나 확실히 하고 싶었다. 시몬은 살짝 볼을 붉히며 말했다.

“제 이름이요? 저는 시, 시몬이에요.”

“시시몬? 독특하네.”

“시몬이요……. 그,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내 이름? 안 알려줄 건데.”

“…제 이름은 알려드렸잖아요?”

“그건 네가 멋대로 알려준 거지.”

시몬의 표정이 뾰로통해졌지만 그는 딱히 뭐라 하지는 않았다.

“저한테 기대세요.”

그는 다시 뷔노를 부축한 채 별채로 향했다. 기댄 몸에서는 풀 냄새와 꽃향기가 섞여서 났다.

“너, 꽃향기 나.”

“네, 네?”

화들짝 놀란 시몬은 금세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까지 꽃밭에 있어서 그랬나 봐요……. 거슬리세요?”

“나쁜 냄새는 아냐.”

손님방으로 꾸며 놓은 건지 내부는 아기자기한 가구들과 작은 침대가 있었다. 뷔노는 침대에 몸을 뉘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후…….”

“아프시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는 서랍장을 뒤적이더니 붕대와 약을 꺼냈다.


“바지, 잠시 들춰도 될까요?”

“응. 얼음찜질도 하면 좋을 거 같은데.”

“아… 금방 준비할게요.”

뻔뻔한 뷔노의 말에도 시몬은 자신이 놓쳤다는 듯 금세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

시몬은 피가 나는 부분에 톡톡 소독약을 묻혔다. 뷔노는 땡땡 부은 다리를 보며 빨리 낫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보고도 해야 할 텐데.’

막막한 상황이었다. 갑자기 다리에서 찌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윽.”

“다행히 뼈가 부러지진 않았나 봐요.”

시몬의 엄지손가락이 뷔노의 다리에 닿아있었다.

“그걸 알겠다고 지금 내 다리를 누른 거야?”

뷔노가 째려보자 시몬이 움칫 떨었다.

“그, 죄, 죄송해요.”

“…….”

또 순순히 사과하니 할 말은 없었다.

“그, 얼음찜질! 가져올게요.”

시몬은 뷔노의 눈치를 보다 집 밖으로 토도도 걸어 나갔다. 뷔노는 그 뒷모습을 잠시 뒤로 쫓았다.

‘이참에 확인이나 해봐야겠어.’

뷔노는 소년에게서 받은 책을 펼쳤다. 증거를 찾지도 못한 채 자신이 다른 조직에서 왔다는 것까지


들켰으니, 임무에 호되게 실패한 셈이었다.

어찌 됐건 임무의 실패도, 이 회계 장부도 마더에게 보고해야 했다. 뷔노는 무거운 마음으로 소년이 건넨
책을 펼쳐보았다.

“…하.”

‘Common Business-Oriented Language(코볼)’

이제 보니 이건 회계 장부가 아니었다. 이건 단순히 숫자가 나열된 프로그래밍 언어 책에 불과했다.

“젠장… 그 새끼.”

뷔노는 손으로 이마를 쓸어넘겼다. 어두운 지하실 안에서 일렁이는 촛불을 비췄을 때 이 책은 꼼짝없는
회계 장부였다. 그렇게 믿게 된 건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 당당한 소년의 태도도 한몫했다.

‘보기 좋게 속았군.’

책을 잡은 뷔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얼굴이 대판 구겨지려 할 때, 시몬이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얼음찜질… 가져왔는데요.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으세요? 많이 아프세요?”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온 뷔노가 말했다.

“얼음찜질하면 괜찮아질 거야.”

그 말에 시몬이 얼음이 가득 담긴 비닐을 뷔노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를 힐끔 보던 시몬이 말했다.

“저, 저기… 방독면 불편하지 않아요?”

입과 볼을 필터로 가리는 방독면은 이런 곳에서 쓸 물건이 아니었다. 눈과 이마 정도는 드러나 있었기에


대화하면서 크게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숨쉬기는 어려워 보였다.

“안 불편해.”

‘엄청 불편하지.’

방독면이 적당히 얼굴을 가려, 신문 기사 속 인물과 겹쳐 보이지 않길 바랐다.

‘기관지가 안 좋나.’

그 행동이 시몬에게 이상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건 물론이었다.

“너는 안 불편해?”

“네?”

“도둑이랑 한자리에 있는 거.”

“도둑 맞아요?”

시몬의 눈이 둥그러진 채 뷔노를 보았다.

“맞다면?”

시몬은 곤란한 표정을 짓다 웃었다.

“어쩔 수 없죠. 훔친 물건은 저한테 주세요. 제가 나중에 돌려드릴게요.”

“별로 신경 안 쓰나 보네.”

“돌려주면 되는 물건보단 다리를 다친 게 더 시급하니까요.”

“…그러면 돌려줄래?”

뷔노는 무릎 위의 프로그래밍 책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시몬은 그 책 표지를 멍하니 보았다. 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 정도 물건으로 사람을…….”

“지독한 세상이지. 나 같은 소시민은 살 방법이 없다니까.”

뷔노는 능글거리며 대답했다.

“나야 동생들이 잘살면 그만인데 말이지.”

상대 조직원들이 들으면 기가 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시몬의 머릿속에 저절로 동생을 먹여


살리려는 소녀 가장이 떠올랐다.

“동생분들이 계시는군요.”

“세 명. 입이 많지.”

‘그러니 일자리를 얻으려고 프로그래밍 책을 훔쳤구나.’

시몬은 저절로 측은한 마음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뷔노는 시시각각 바뀌는 시몬의 표정을 보며 속이 훤히
보이는 게 참 편하다고 생각했다.

“저희 집에도 프로그래밍 책 몇 개 있어요. 전 이미 다 봐서, 그, 버리려고 했는데. 드릴까요?”

시몬이 호의로 꺼낸 말에 뷔노는 그다지 반응이 없었다. 프로그래밍 책이야 뷔노도 다 본 지 오래였다.

“아니, 네 책을 가져갈 수야 없지.”

기계적인 대답이었다. 뷔노의 속마음은 모른 채 시몬은 조잘거렸다.

“하긴, 책을 가져가기 부담스러우실 수도 있겠네요…….”

‘선물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면 책 안 훔치지.’

뷔노는 속으로 생각했다. 쟤는 좀 지나치게 순진한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러면, 여기 계시는 동안 서재에서 보셔도 돼요.”

“…여기 있어도 된다고?”

“네, 다리가 나을 때까지는 편하게 계세요.”

시몬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뭔가 뷔노가 있는 게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떠오른


추측에 뷔노가 시몬에게 물었다.

“원래 이건 손님방이야?”

그 말에 시몬이 살짝 얼어붙었다.

“손님방이기도 하고… 가끔 어머니가 별을 볼 때 쓰시던 곳이에요. 그, 어머니는, 돌아가셔서…….”

어머니라고 하면 캐서린 줄리어스일 것이다. 뷔노는 시몬을 물끄러미 보았다. 얼굴에 슬픔이 묻어있었다.

시몬은 뷔노의 말이 멈추자 신경 쓰인 듯 목 뒤를 만지며 말했다.

“그, 신경 쓰라고 드린 말씀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뭐라고 부르죠? 이름을 모르니까… 어, 손님. 편한
대로 머무르셔도 돼요. 이제 빈집이니까…….”

그 후로도 뷔노의 시몬 등쳐먹기는 이어졌다.

자신에게 원하는 게 있는 건가 싶었던 시몬은 계속 일관된 태도를 보였다.

뷔노에게 아무런 신상 정보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먹을 것을 주고 치료를 해준 게 전부였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 그건 뷔노에게 있어 아주 생소한 대접이었다.

‘새로운 손님이 오셨다고… 들은 대로 독특한 차림이구나!’

그의 아버지도 시몬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조금은 의심하고 추궁할 만도 한데 둘은 뷔노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 만큼 사정을 묻지 않았다.

뷔노는 시몬의 아버지가 타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뭐 나한테는 좋은 일이지.’

뷔노는 시몬에게 팩스기를 빌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빌려주리라 기대를 하지는 않았는데, 흔쾌히
빌려주겠다고 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뷔노는 마더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시저 조직원을 풀어준 것과 그 집 도련님이 제안한 거래,
현재 머물고 있는 집 등등.

마더의 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당장 돌아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여기 머무르다 도련님이 제안한 거래에


응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팩스의 마지막 장에는 다소 걱정되는 얘기가 적혀있었다. 머스캣의 수술 날짜가 잡혔다는
내용이었다.

‘결국은…….’

앓고 있던 지병이 더 심해진 게 문제였다. 뷔노는 시저에 들어오는 게 조금 더 늦었더라면 어땠을까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머스캣이 죽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머스캣이 아직 죽지 않은 지금은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수술이 잘못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착잡한 마음이 드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맞는 건가?

하지만 가고 싶다고 해도, 머스캣이 치료받는 곳은 먼 해외였으니 이제 와서 찾아갈 수도 없었다.

뷔노는 별채의 창문을 손으로 쓸었다. 어느새 아주 깊은 밤이 와있었다. 그때 시몬이 밖에서 돌아다니는
걸 보였다.

‘잠도 안 자고 뭘 하는 거지?’

시몬이 다다른 곳은 초록빛 잔디와 소나무가 가득한 언덕이었다.

뷔노는 고민하다 밖으로 나왔다. 절뚝이며 겨우 걸을 수는 있는 수준이었다. 뷔노는 시몬을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리 높은 언덕은 아니었다. 거기서 밑을 내려다보자 호수가 보였다. 밤이 되어 새까만
거울처럼 변한 호수였다.

헤르게임에서 겨울에 유일하게 얼지 않는 호수였다.

시몬은 호수 앞 풀밭에 무릎을 세운 채 앉아있었다. 다리를 꼭 껴안은 그의 뺨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아픈 일이 있거나 잠시 마음이 울적해지곤 하면 어머니는 여지없이 시몬의 손을 잡고 이 호숫가로 오곤


했다. 특별히 위로를 해주거나 하소연을 길게 들어줄 필요도 없었다.

옆에 어머니가 있고 둘의 손이 이어져 있고 앞에 드넓은 호수가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그러나 지금은


옆에 아무도 없었다.

시몬은 풀밭에 무릎을 세운 채 앉았다. 까만 어둠, 춥고 서늘한 바람과 정적만이 가득했다. 따뜻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던 이곳이 너무 무섭고 낯선 장소처럼 느껴졌다.

시끄럽고 북적거리는 낮에는 들지 않던 생각들이 밤에는 모여드는 법이었다. 시몬은 여러 기억을 떠올렸다.

주로 어머니와 함께했던 따뜻한 기억들이었다. 기억들이 따뜻하면 따뜻할수록 지금 옆에 어머니가 없다는


현실과의 간극이 크게 다가왔다. 시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흐윽…….”

한번 흐느끼는 소리가 울리자 멈출 수가 없었다.

뷔노는 침 같은 잎이 솟아있는 소나무 뒤에서 이 모든 걸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뷔노가 볼 수 있던 건 내면은 아니었다. 그가 본 건 굴러떨어지는 눈물방울이나, 흩날리는 분홍빛


머리카락이나, 바람 때문에 붉어진 예쁜 뺨 같은 거였다.

“허, 헉.”

뒤에 뷔노가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시몬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우는 걸 들켜서 창피한가 보지? 이제야
알 정도로 눈치가 없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뷔노는 시몬을 보고 슬쩍 손을 흔들어줬다. 그러자 시몬이 입을 벌리고 얘기했다.

“어, 언제 오셨어요?”

“방금.”

“다리도 다쳤으면서!”

“이 정도는 괜찮아.”

뷔노는 시몬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대답했다. 시몬의 얼굴을 빨개졌다.

“누가 열심히 훌쩍거리길래 와봤지.”

시몬의 얼굴이 어둠에도 알 수 있을 만큼 창피함으로 물들었다. 시몬은 허겁지겁 눈물에 젖은 얼굴을 닦아


내렸다. 당혹감이 슬픔을 밀어낸 것이었다.

“울보네.”

“우, 울보 아니에요…….”
“맞지. 어른들은 밤에 호숫가로 와서 소리 내어 울지 않아.”

“…하지만.”

시몬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뭐, 뭐, 뭘 안다고… 킁.”

“뭘 안다고오, 크응.”

마지막에 코 먹는 소리까지 우스꽝스럽게 따라 하고 나자 시몬의 표정이 불퉁하게 바뀌었다.

“사, 사, 사람이 우는 걸 그렇게 놀리는…….”

“놀리면 뭐.”

“…….”

“어차피 울지 말라고 해도 울 거잖아? 그럴 바에야 놀려먹어야지.”

시몬은 몸을 웅크리더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혼자서 감정을 삭일 줄만 알았지 갑자기 괴롭힘까지 당할
줄은 몰랐다. 오늘은 정말 울적한 밤이 될 것 같았다.

뷔노는 소나무 뒤에서 몸을 일으켜 시몬의 옆으로 가 앉았다. 시몬이 슬금슬금 뷔노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런데 뷔노가 오히려 얼굴을 들이밀었다.

코가 서로 부딪힐 것처럼 가까이 다가오자 시몬이 주춤거리다 뒤로 넘어갔다.

“악!”

뷔노는 그걸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시몬은 창피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뷔노는 시몬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눈물을 닦으라는 건가?’

“흙투성이야.”

아까 엎어지면서 머리랑 얼굴에 흙이 조금 묻었나 보다. 뷔노는 얼굴 이곳저곳을 콕 찍어가면서 말했다.

시몬은 눈물 자국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손수건으로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시몬은 그 와중에 손수건이 젖어든 건 몰랐다.

“고, 고마워요.”

시몬은 뷔노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손수건을 내밀었다 다시 당겼다. 손수건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놓친
뷔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 이게 아니라. 빨아서 돌려줄게요.”

“…….”

뷔노는 시몬의 말을 듣지 못한 듯 그저 호수를 응시했다. 시몬은 젖은 손수건을 잡고 꼼지락거리다가


뷔노에게 슬쩍 물었다.
“아, 안 가세요?”

“…호수 보러 왔어.”

바람이 조금 더 거세게 불면서 호수에 잔물결이 흘렀다. 무너질 것 같았던 마음이 가만히 있는 뷔노를
보니까 이상하게도 조금 가라앉았다.

시몬은 잠시 숨을 골랐다. 가슴 속이 공기가 지나갈 때마다 따끔거렸다. 그래도 조금 마음이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방독면… 안 쓰셨네요?”

그 말에 뷔노가 시몬의 얼굴을 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서 살짝살짝 이목구비가 보이긴 하지만,
워낙 어두워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시몬에게 자신의 얼굴도 보이진 않을 것 같았다.

“뭐, 그냥.”

뷔노의 얼굴을 보던 시몬이 물었다.

“저, 혹시… 뭔가 힘든 일 있으세요?”

“뭐?”

시몬의 말에 뷔노가 의구심 가득한 목소리를 내었다. 울고 있던 건 저쪽인데 왜 그런 질문을 자신한테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런 꼬맹이가 알아봤자 뭘 알겠는가. 시몬의 나이는 뷔노가 본 것보다 두세 살은 더 많았지만 뷔노는


그걸 몰랐다. 동생이나 마더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아주 작은 소리로 흘러나왔다.

“…없진 않았나.”

뷔노는 시몬이 말을 들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시몬은 잠시 조용히 있었다.

“저, 저는, 힘든 일이 있어서 왔어요. 원래 좋, 아해서, 자주 찾던 곳이거든요…….”

뷔노는 시몬 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럼에도 시몬의 말에 묵묵히 귀 기울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근, 데. 혼자 온 건 처음…이에요. 이, 제, 는…….”

시몬은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 진정된 줄 알았는데,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저 사람은 자신이 무슨 상황을 겪고 있는지도 모를 텐데, 얼마나 바보처럼 보일까. 울보라고 대놓고 말도
했는데. 하지만 뭔가 변명을 하거나 설명을 덧붙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몬은 흐느끼는
목소리를 최대한 삼키고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머리로는 계속 멈추라고 명령하고 있었지만 몸이 고장 난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시몬은 정말 한참을


울었다. 나중에는 도저히 감춰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알고도 흐느꼈다.

그나마 떠있던 달까지 지고 아주 어두워졌을 때까지도 뷔노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너무 울어서 눈이 아프고 건조했다. 시몬은 고르지 않은 숨을 내쉬면서 최대한 머리를 비우려고 노력했다.

뷔노가 시몬을 보고 있었다. 뷔노는 시몬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누구랑 왔었어?”

“…어, 머니요.”

시몬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말과 말 사이에는 꽤 큰 시간의 간격이 존재했다.

“풀 내음이 섞인 시원한 밤공기를 맡고, 귀뚜라미 울리는 소리를 듣다 보면 낮의 일들을 잊을 수 있다고


어머니께서…….”

시몬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울었다.

“결국에는.”

“네?”

“결국에는 잊혀져. 무뎌지니까.”

투박하디 투박한 위로였다. 하지만 시몬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말이었다.

“무, 뎌지지… 않을 거 같아요. 어떻게 이 아픔을 잊을까요.”

시몬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내가 부모로부터 배운 게 딱 하나가 있지.”

“…….”

갑자기? 시몬은 뷔노를 훑어보다가 결국 대답하지 않았다.

“도둑질.”

뷔노는 시몬이 차고 있던 팔찌를 제 오른손에 쥐고 있었다.

자신이 울고 있어 정신이 없는 틈새에 저걸 뺏었다니 믿겨지지가 않았다. 저 위로도 자신을 정신 팔리게


하려고 말한 거였나?

“도, 돌려주세요!”

어머니가 십자가와 보석을 직접 엮어서 만들어준 팔찌였다. 시몬이 도로 가져가려고 내민 팔을 피한 채


뷔노가 빙빙 팔찌를 돌렸다.

“중요한 거예요. 빨리 돌려주세요.”

“어떻게 할까.”

“장난치지 말고!”

“장난?”

뷔노는 팔찌를 돌리는 걸 멈추고 팔찌를 꾹 쥐었다.

“가져간 지 한 시간은 됐는데 왜 이제 그래?”

가져간 지 한 시간이 됐다고? 정말 믿기지 않는 손놀림이었다. 멍하니 있던 시몬이 다시 팔을 뻗으면서


다급하게 이야기했다.
“그거야… 몰랐으니까 그렇죠!”

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몰랐어? 중요한 거라며.”

“그건 그렇지만, 생각하느라……!”

흐음, 소리를 낸 뷔노는 팔찌를 보다가 시몬의 손에 쥐여줬다.

시몬은 손바닥을 펴 물건을 확인했다. 손의 온기 때문에 따뜻해진 팔찌가 멀쩡하게 돌아와 있었다.
시몬은 허겁지겁 손목에 팔찌를 다시 채웠다.

“중요한 거여도 가끔 잊을 때가 생기겠지.”

의아함으로 가득 차있던 시몬의 표정이 억울함으로 물들었다.

“이,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이거랑은 달라요! 물건이랑, 어머니랑은…….”

“물론 다르지. 내가 말한 건 그냥 비유야. 진짜 부모 얘기를 예시로 들어줄까? 내 부모는 빚을 못 갚고,


클로버한테 결국 장기를 넘겨서 죽었거든.”

“…네?”

“집을 나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잠시 집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지. 그때 봤거든.”

“…뭘요?”

“클로버 조직원들을.”

뷔노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다. 묘사하면 도련님이 까무러칠 게 뻔했다.

“뭐, 그런 부모여도 없어지니까 아쉽긴 했는데, 금방 잊긴 잊었다는 거야.”

뷔노는 입을 꾹 닫았다가 시몬의 표정을 보았다. 미묘한 얼굴이었다.

“괜한 얘기를 했군. 네 어머니랑은 다르겠지.”

시몬은 그런 뷔노를 보면서 고민했다.

‘위로…하려 했던 건가?’

그 뒤로도 밤에 시몬이 호수에서 울 때면 뷔노는 옆의 풀밭에 같이 앉아있었다. 뷔노는 이따금 위로인지


놀림인지 헷갈리는 말들은 던졌고, 가끔은 그냥 옆에 있기만 했다. 낮에 둘은 퍼즐을 풀면서 놀거나
요리를 같이하기도 했다.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시몬은 차츰차츰 눈물을 조금씩 덜 흘리게 되었다.

도둑질을 했고, 지나치게 짓궂은 면도 있었지만 심성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둘이 꽤 서로한테


익숙해졌을 무렵이었다.
*

평화는 금방 깨졌다.

시몬의 집으로 도착한 팩스 속 암호를 확인한 뷔노는,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 머스캣의 수술이 끝났지만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표정이 바뀌거나 말투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뷔노의 감정 변화를 시몬은 금세 눈치챘다.

“저, 그, 딸기 타르트 같이 먹을래요?”

“이거. 재밌는 이야기 모음집인데, 읽어봐요.”

밤의 호수에서 시몬이 풀밭에 앉아있었다. 시몬은 울지 않고 있었다. 그는 옆에 뷔노가 다가오자 물었다.

“오늘은 왜 왔어요?”

“오늘 왜 왔냐고?”

뷔노는 입을 다물었다.

“울고 싶어서.”

아주 조그마한 말이었다. 시몬이 앞을 보고 있었다. 못 들은 듯했다.

“…너 놀리려고 왔지. 오늘은 안 울어?”

“진짜 너무해요. …뭐라고 부를지, 호칭을 알려주세요.”

“호칭?”

뷔노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그는 별안간 떠오른 이름을 말했다.

“론.”

론은 유명한 와인 생산지이자 종류였다. 기껏 떠오른 게 또 와인 관련된 거라니 자신이 내뱉고선 어이가


없었다.

“론.”

시몬이 맑은 목소리로 따라 말했다. 본명도 아닌데 묘하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저, 론. 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는데요.”

“뭔데.”

“울고 싶을 땐 울어도 돼요.”

“뭐?”

“그, 그냥 제 경험상 하는 말이에요. 혹시나 해서…….”

“…….”
“울적한 날에는 여기로 와도 좋고요. 저희 어머니가 하는 말인데, 밤의 호수는 슬픔을 집어삼킨대요.”

“조언 고마워, 울보.”

“울보라뇨!”

뷔노는 벌떡 일어나 별채 쪽으로 향했다.

‘못 들은 것처럼 굴더니.’

나중에 위로를 하고 있었다. 아주 질 나쁜 짓이었다.

“…저 녀석 나중에 괴롭혀야지.”

뷔노는 자신이 언제 마지막으로 울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운다고 상황이 나아진 적이 없다고
느꼈을 때 우는 걸 그만두었던 것 같다. 한 다섯 살쯤이었을까.

‘눈물을 흘리며 스트레스 수치가 낮아진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뷔노는 잠시 억누르고 있었던 머스캣에 대한 생각들을 떠올렸다. 많이 아플지, 괜찮은 건지, 살아날 수
있는 건지. 몇 초 지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주르륵 흐르는 눈물에 뺨이 조금 젖는 게 느껴졌다.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수분이 흘렀다. 뷔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러 눈물을 닦아냈다. 손을 옷에 문지른 뷔노는 숨을 한 번 내뱉었다.

‘별거 아니네.’

시몬의 어머니는 항상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위로도 도움이 된다고 하셨다.

“시몬, 이렇게 돈을 많이 써도 괜찮겠니?”

“…네.”

“그 소녀한테 줄 거지? 아주 푹 빠졌구나! 어디가 매력 포인트였니? 방독면?”

“…….”

시몬은 다음 날, 아버지와 상점에 들러 생필품을 사 왔다. 물론 다리를 다친 뷔노는 제외였다. 그때,


가게에서 눈에 띄는 상품들이 보였다.

‘…저거, 갖다주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시몬은 모아두었던 용돈을 전부 털어 물건 두 개를 사 갔다.

우여곡절이 조금 있었지만, 어찌 됐건 이 괴짜 손님이 온 이후로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덜 하고


있었다. 시몬은 그 보답을 하고 싶었다.

집에 돌아오자, 뷔노는 풀밭에 앉아 호수를 보고 있었다. 밤하늘 속 별빛이 호수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시몬은 그런 뷔노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지금이 최적의 시기라고 생각했다.

조용히 뷔노에게 다가간 시몬은 주머니에서 작은 정육면체 케이스를 꺼냈다. 안에 들어있던 얇은 물건을
검지와 엄지로 쥔 시몬이 뷔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미 시몬이 다가오고 있던 것을 안 뷔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가 눈앞의 물건에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뭐야?”

시몬은 귀에 열이 몰리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바, 반지…….”

뷔노는 이리저리 반지를 든 채 살펴보았다. 은빛 고리 위에 보석 하나가 얹어진 단순한 구조였다. 보석은


암녹색에 붉은색 반점이 콕콕 찍혀, 피가 튄 것 같은 문양을 띠고 있었다.

뷔노가 말했다.

“뇌물치고 그리 비싸 보이진 않은데.”

“뇌물 아니에요…….”

“알았어, 선물이라고 치고. 앞으로 뒤를 잘 봐주지, 친구.”

장난스럽게 대답한 뷔노는 반지 속 보석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시몬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타, 탄생석…….”

“탄생석?”

잘 모른다는 듯한 뷔노의 말투에 시몬이 설명을 덧붙였다.

“탄생석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행운이 찾아온대요. …위험한 일이 많을 거 같아서요.”

“그래?”

미신을 믿지 않는 뷔노는 가볍게 대답했다. 시몬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번에 3 월 15 일이 생일이라고 했잖아요?”

“그랬었나.”

일일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시몬이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

“3 월생은 혈석이 탄생석이래요. 그래서 혈석을 반지에 넣었어요.”

진심으로 탄생석 설화를 믿고 있는 듯 보였다. 뷔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 상술에 쉽게 넘어가네.”

“사, 상술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라도 선물을 주고 싶었던 건데.’

시몬은 아랫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제 마음을 몰라주는 뷔노가 괜히 야속했다.

맨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이 취급만 하니.

시몬은 반지 속 보석을 가리키며 구구절절 말을 이어갔다.


“이 초록색 돌은 스테인드글라스를, 붉은 반점은 신의 피를 상징하는 거래요. 이 돌을 몸에 지니게
된다면 신의 가호를 받게 되는 거죠…….”

낭만적인 미소를 지으며 시몬이 고개를 옆으로 기댔다. 뷔노는 물끄러미 시몬을 보다가 시몬의 반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건 뭐야?”

“아, 이건 제 탄생석이에요. 진주.”

“자신의 행복을 비는 거야? 나쁘지 않지.”

남한테 주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시몬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 그건 아니고. 저는 수, 순결 반지로 쓰기로 했어요. 마침 진주가 순결이라는 의미가 있기도 하고…
….”

성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기 위해 반지에 맹세하는 것이었다. 성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반지를 빼지


않는다. 시몬은 구구절절 설명하다가, 힐긋 뷔노를 바라보았다.

“나도 순결 반지로 쓰라고?”

뷔노는 얼굴을 찌푸렸다. 시몬이 고개를 다급하게 저었다.

“아, 아니. 당신 건 축복을 비는 의미로…….”

“다행이네. 아예 못 낄 뻔했어.”

“으, 응?”

“한 번 하면 못 끼는 거 아냐?”

이미 오래전부터 못 꼈겠네. 뷔노가 말을 이어갈수록 시몬은 허둥거리며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 그렇죠…….”

뷔노는 시몬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더니,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네 반지, 내가 빼줄까?”

시몬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그, 그런, 말은, 장난으로 하면 안 돼요!”

어버버, 말을 더듬는 시몬을 보며 뷔노는 새삼 이 순진한 도련님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여태까지 봐왔던


그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뷔노의 세계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순수한 소년.

“왜?”

“그, 신중하게 해야 할 일이니까.”

뷔노는 시몬의 뺨에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시몬이 입을 벌리더니, 잠시 뒤에야 말을 꺼냈다.


“…로, 로, 론!”

“장난 아니야. 언젠가 어른 돼서 찾아오면, 그 반지 빼줄게.”

짓궂게 웃는 뷔노를 보며 시몬이 얼굴을 붉혔다.

“장난으로 말하면 안 된다니까요…….”

시몬이 얼굴이 터질 정도로 붉어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은 뷔노는 시몬의 옆에 놓인 물건을 봤다.

“그건 뭐야? 그것도 내 선물인가?”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시몬은 챙겨온 다른 선물을 까먹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저… 심심하실까 봐!”

“응?”

뷔노의 얼굴을 살피던 시몬은 시집을 양손에 쥐어 뷔노에게 주었다.

시몬은 그 말만을 한 뒤, 슬쩍 뷔노의 눈치를 보았다. 어떻게든 대화의 주제를 바꾸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뷔노는 그런 시몬을 즐겁게 구경하며 물었다.

‘이쯤에서 봐줄까.’

“시집 좋아해?”

“네, 어렸을 때부터 즐겨 읽었어요.”

시몬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시몬과 달리 뷔노는 어렸을 때는 글을 몰랐기 때문에 책을 읽지 못했다. 책이란 인생이 지루하고 배가


부른 놈들이나 읽는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마더의 교육을 받은 이후로는 관점이 약간 달라졌지만, 여전히 시를 좋아하진 않았다.

“별난 취향이네. 시 같은 게 재밌어?”

뷔노는 책을 휘리릭, 넘기며 말했다.

“으음, 그건 아마도 감정을 언어화하는데 특출난 문학의 종류라서인 것 같아요.”

“그러면 뭐가 좋은데?”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려준달까……. 나 혼자만의 느낌인 줄 알았던 걸


저자도 느꼈다는 걸 알았을 때 공감받는 느낌도 들고요.”

“사전을 찾아보면 되는 거 아냐?”

시몬은 다정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음. 예를 들어봐도 될까요?”

“해봐.”
“전 당신을 사랑해요.”

시몬이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뷔노의 눈이 처음으로 등잔만 해졌다. 따뜻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니 뷔노는 손에 들린 시집을 떨어뜨린
줄도 몰랐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시몬은 재잘재잘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죠.”

“어, 어? …어떻게?”

“화롯가에 붙어있는 것처럼 따뜻해요. 처음에는 작은 촛불 같았던 게 활활 타올라서 점점 커져만 가요.


같이 있을 때는 안락하고 편안한 감정이 들지만 떨어지면 눈밭에 내쳐진 것 같죠.”

시몬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가듯 정리했다.

“게다가 그 마음을 나만이 느끼는 게 아니라 상대방도 느끼길 바라는 거죠.”

“아.”

그제야 다시 머리가 진정된 뷔노가 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긍정했다. 시몬이 기대감에 눈을 반짝거렸다.

“조금은… 알 거 같아요?”

“오르가슴 얘기군.”

뷔노는 겨우 깨달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시몬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타오르며 당혹감에 휩싸였다.

뷔노는 속으로 낄낄 웃었다. 이 소년의 최고의 장점은 얼굴인 줄 알았는데, 사실 놀려먹기 좋은


성격이었다.

“오르가슴이 뭔지 몰라?”

“아, 알아요. 물론 그것도 사랑의 일부…….”

“아냐, 사랑 없이도 충분히 얻을 수 있어. 너도 자위 정도는 해봤을 거 아냐.”

“안 했어요! 시, 신께서는 사랑의 결실 속에서만 쾌감을 얻어야 한다고…….”

“누가 샌님 아니랄까 봐.”

뷔노가 피식 웃자 시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뷔노는 시몬의 손에 깍지를 껴 잡았다. 시몬이 손을 빼지도
못한 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이건? 이건 신이 허락하는 정도인가?”

“아, 아… 됐어요!”

시몬은 별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뷔노는 그걸 보며 웃었다. 그것만으로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뷔노는 다음 날 아침, 머스캣이 깨어났다는 팩스를 받았다. 그리고 수술이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것도.
‘탄생석… 의외로 영험한 건가.’

뷔노의 표정이 한층 밝아진 걸 시몬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손님의


마음이 단번에 풀어질 정도로 좋은 일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뷔노, 우리 피크닉 하지 않을래요?”

“피크닉?”

“물론 다리가 아파서 멀리 가진 못하지만, 정원에서 저녁을 먹는 거예요. 기분 전환되고 좋지 않을까요?”

별생각 없었던 뷔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먹으면 기분 전환이 되겠지.”

간만에 피크닉을 한다는 생각에 들뜬 시몬은 피크닉 바스켓에 빵과 같은 것을 넣으며 뷔노에게 말했다.

“뷔노, 블루베리 잼 좀 꺼내줄 수 있나요?”

찬장을 흘깃, 본 뷔노는 그중에 잼 통으로 보이는 것을 꺼내 시몬에게 건넸다.

“아, 감사…….”

시몬은 통 속의 내용물을 보고 잠시 당황했다. 뷔노가 건넨 것은 샛노란 사과잼이었다. 눈치 빠른 뷔노는


바로 시몬의 손에서 통을 가져갔다.

“실수.”

그리고 옆에 있던 다른 통을 건넸다. 시몬은 얼떨결에 부탁했던 잼을 받고 잠시 머뭇거리다 바스켓에


넣었다.

뷔노는 풀밭에 돗자리를 깐 시몬의 옆에 가서 주저앉았다.

“춥진 않아?”

“아, 뷔노, 추운가요? 죄송해요,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아니, 난 괜찮아.”

“그, 그럼 다행이고요…….”

그렇게 말하고 시몬은 얼굴을 붉혔다. 뷔노가 다리를 쭉 펴며 편하게 앉자, 밤하늘에 쏟아질 듯 놓인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 위에 팔을 걸친 채, 뷔노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지하게 하늘을 살피는 뷔노의 모습은 왠지


평소와 느낌이 달라 시몬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식빵 자리네.”

“식빵이요?”

“몰라?”

“아, 처, 처음 들어요.”
“별 좋아한다더니.”

“그, 별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별자리를 다 아는 건 아니라서…….”

“뭐 만들어낸 별자리지만.”

“…….”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았던 예전 동생들과 함께 지었던 별자리. 뷔노는 혼자 말하고 혼자 웃었다. 뷔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자리에는 별이라고 하기엔 아주 침침한 불빛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 별 세 개요?”

“두 개 더 있는데.”

시몬이 눈을 가늘게 뜬 채 하늘을 보았지만 세 개를 제외하고선 근처에 아무 별도 볼 수 없었다.

“안 보여? 저 오른쪽에 있는 거. 이렇게 이으면 식빵 같이도 보이지.”

시몬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뷔노 눈에는 보여요?”

“내 눈 대신에 매 눈을 집어넣었거든.”

“네?”

시몬은 입을 벌린 채 뷔노를 보았다.

워낙 진지한 말투로 말하니, 아니, 말하는 사람 때문인지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안 웃겨?”

“하, 하하하.”

‘개그 센스는 없구나.’

시몬이 어색하게 웃자 뷔노는 입술을 끌어올렸다.

‘비웃는다…….’

“넌 눈에 띄어.”

“네?”

뜬금없는 말에 시몬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무, 무슨 뜻이지?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고요한 밤에 단둘밖에 없으니.

‘이건 마치 고, 고백…….’

“난 색맹이야.”

“네?”
“뭐 색이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니고, 대부분 회색으로 보이지만, 붉은색만은 눈에 들어오지.”

“아…….”

예상했던 거와 다른 얘기에 시몬이 당황했다.

“이 동네엔 노란 머리랑 파란 머리가 흔하잖아.”

“그렇…죠?”

“네 분홍 머리는 시선에 딱 잡혀. 붉은 계열이라. 아마 네가 보는 거랑 별반 차이 없을걸.”

“아…….”

“그래서 어디서 봐도 너밖에 안 보여.”

“…네?”

단순히 색맹인 자신의 시야에 대한 얘기였을 뿐인데 기묘하게 로맨틱하게 들렸다. 시몬은 제 뺨을
양손으로 가볍게 쳤다.

‘정신 차려!’

뷔노는 가만히 있던 시몬이 제 뺨을 후려치니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시몬은 뷔노의 반응을 못 본 척,


빵에 잼을 바르기 시작했다.

“호수 앞에서 울고 있건 뭘 하고 있건 머리만 둥둥 떠있는 것처럼 보이지.”

뷔노가 특유의 말투로 다시 묘했던 기류를 꺼뜨리려 했지만, 익숙해진 시몬은 그 짓궂음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색이 덜 보이는 대신 이런 건 민감하게 보인다고 해.”

“네?”

“뭐 별로 상관없잖아? 너는… 저기 오리온자리나 보고 있어. 저건 보이지?”

“오리온자리요?”

“이렇게 이어지는 거야.”

뷔노는 손가락으로 별을 이어 그렸다. 턱을 손으로 괴고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별을 봤다. 뷔노는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의외의 모습에 시몬이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별자리 좋아해요?”

“싫어하진 않지.”

아주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그때, 뷔노가 습관적으로 시가를 꺼내 입에 물려고 하자 시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몸에 안 좋은데!”

“…뭐?”
뷔노는 눈썹을 찌푸렸다. 살면서 처음 들어본 소리였다.

“화, 환자는 시가 같은 거 피우는 거 아니에요.”

“담배 냄새 싫어해?”

“예? 아, 좋아하진 않죠.”

뷔노는 시가를 케이스에 도로 집어넣었다.

“아, 안 피워요?”

“네가 피우지 말라며.”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별로 말 안 들을 것 같아서요.”

“나도 양심이 있긴 있어. 작긴 하지만.”

시몬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아, 아까부터 고민한 게 있었는데.”

“뭔데.”

“제가 생각하기에 뷔노는 색이 덜 보이거나 안 보이는 게 아니에요. 다르게 보이는 거죠.”

“그래?”

“네.”

“그래도 네가 보는 광경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네.”

그 말에 시몬이 헙,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아니, 이건 그냥 아무한테나 뱉는 뷔노 특유의 말투였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저도 언젠가 뷔노의 시선을 빌려서 보고 싶어요.”

“기특한 말을 하네.”

뷔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제 배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그 어떤 갑을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말을


하니 말이 편하게 나왔다.

“별자리 이런 건 다 내 마… 양어머니께서 가르쳐주신 거야.”

“그렇군요.”

“별자리 하나 모르는 무식한 걸 거둬들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별자리를 모른다고 무식한 건 아니에요! 저는 하나도 모르는걸요.”

“그래?”

“게다가 가르치는 재미도 분명히 있고.”


그 말에 뷔노가 시몬을 빤히 바라보았다. 뺨을 내민 뷔노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시몬, 입 맞춰 볼래?”

“그, 왜, 왜, 왜요?”

“내일이면 가니까, 아쉬워서. 내가 살던 곳은 뺨에 키스하는 걸 인사로 했거든.”

어떤 반응을 보일까. 수줍어서 싫다고 할까, 아니면 속아서 해줄까. 그러나 시몬은 예측한 반응 두 개를
모두 빗겨나갔다.

“저, 저번에 뽀뽀했던 게 설마 그것 때문이에요?”

시몬은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그러면 안 돼?”

“안, 될 건 없지만.”

시몬은 고개를 푹 숙였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결심을 굳힌 듯 시몬이 고개를 올렸다.

“이건 그냥… 인사예요.”

시몬은 조심스레 다가왔다. 숨결이 뺨에 닿는 시간이 꽤 길었다. 시몬은 망설이다 쪽. 쪼듯 입술로


건드리고 떨어졌다.

“잘 가요, 론.”

참지 못한 뷔노의 입술 사이에서 바람빠지는 소리가 났다.

“가르치는 재미. 있네, 있어.”

뷔노의 반응을 살피던 시몬이 말했다.

“…거, 거짓말이었죠?”

뷔노는 어깨를 으쓱였다.

“속는 쪽이 나쁜 거지.”

시몬이 입을 달싹이다 빽 소리를 치며 도망갔다.

“내, 내일 배웅 안 해줄 거예요!”

“배웅 안 해준다면서.”

“그, 그건…….”

뷔노의 시선을 피하던 시몬이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아, 론. 알아요? 이번 보름달은 1 년 중 가장 큰 보름달이래요.”

“화제를 아주 대놓고 돌리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유난히 동그랗게 보였다. 노란 달을 보고 시몬이 손을 내밀었다.

“뷔노, 춤출래요?”

“…울보랑은 안 춰.”

“오, 오늘은 안 울었잖아요? 어제도…….”

“바보랑도 안 추고. 애초에 달 좀 동그랗다고 춤을 왜 춰.”

냉소적인 뷔노의 태도에 시몬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가야 한다고 했으니까…….”

일주일 후면 떠나야 한다고 처음부터 못 박았던 그였다.

“꼭 춤을 춰야 한다는 건 아니고, 그냥. 가면 조금 섭섭할 것 같아서요. 추억이라도 남겨두고


싶었어요.”

뷔노는 시몬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진심으로 섭섭해하는 눈치였다.

‘이렇게 굴 줄은 몰랐는데.’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때, 시몬이 하늘을 보며 외쳤다.

“워, 월식?”

보름달에 검은 그림자가 생기고 있었다. 검게 변한 끄트머리를 본 시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단순히


놀란 게 아닌, 조금 꺼림칙해하는 말투였다.

“너답지 않게 싫어하네.”

“아, 그게… 월식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랑 헤어지게 된다고 해서…….”

시몬이 우물쭈물하다 말했다.

“그걸 믿어? 순결 반지니 뭐니 해서 아주 신실한 신자인 줄 알았더니, 미신쟁이네.”

“미, 미신쟁이…….”

시몬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 신경 쓸 일 있으면 이리 와봐.”

시몬은 순순히 뷔노의 앞으로 걸어왔다. 뷔노는 시몬의 뒷머리에 손을 넣어 쓸었다. 그 상태로 목을 받친
뷔노는 시몬에게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감촉이 닿은 건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몬에게는 영원과 같은 시간으로 느껴졌다. 쪽


소리가 나면서 입이 떨어지자마자 시몬이 입을 벌렸다.

“으, 어, 어어?!”

시몬이 제 입술을 손으로 만졌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뭐야, 혀도 넣어달라고?”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으악!”

시몬은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다가 균형을 잃고 언덕 밑으로 굴렀다. 호수에 떨어져 버린 시몬을 보며


뷔노가 미묘한 웃음을 짓다가, 결국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웃지 마세요…….”

“자.”

뷔노는 팔을 뻗어 시몬에게 내밀었다.

“잡아줄게.”

“…잡아준다고 하고 손 놓을 거잖아요.”

시몬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

시몬은 미심쩍은 얼굴로 뷔노의 손을 붙잡았다. 뷔노는 힘을 주어 몸을 끌어주다가 다시 손을 놓았다.


풍덩 소리와 함께 호수의 물이 튀었다.

“어푸푸, 안 그런다면서!”

“손이 미끄러졌네.”

뷔노한테도 물이 약간 튀었던 건지 손등으로 이마에 튄 물방울을 닦아냈다. 그 모습을 시몬이 유심히


보았다.

뷔노는 시몬을 보다 피식 웃었다. 뷔노는 시몬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뺨이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이 정도면 추억인가?”

시몬은 입을 오므린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 되면 다시 올게.”

빈말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소한 한마디에 시몬의 표정이 밝아졌다. 강아지 같은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보기 좋았다. 뷔노는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기다릴게요.”

광장으로 향한 뷔노는, 주위에 있는 시저의 조직원들을 살펴보았다. 조직원들은 평소와 달리 사복을 입고


위장해서 숨어있었다.

‘실베스트리스라고 했나.’

뷔노는 가방 안에 담아둔 술병을 힐끗 쳐다보았다.


‘제대로 된 걸 가져왔을지 모르겠군.’

실베스트리스가 증거를 가져왔다면 술병을 건네주고, 가져오지 않았다면 마더에게 그를 데려갈 예정이었다.

‘대체 마더께서는 무슨 생각이신 건지.’

뷔노는 광장 분수대에 서서 시가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시가였다.

뷔노는 피우지 말라고 난리를 치던 시몬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느꼈던 호수 근처의 물
냄새가 섞인 시원한 공기가 그리웠다.

‘나중에 집 근처에 인공 호수를 설치해야 하나?’

엉뚱한 생각을 하며 뷔노는 시가를 도로 집어넣었다. 또각또각 걸어오는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와주셨군요.”

“그래. 저번에 아주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가서 말이지.”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진짜 회계 장부가 옆에 있었더라면, 드렸을 겁니다. 와인


창고에서는 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을 뿐.”

그 말과 함께 그가 건넨 것은 서류와 녹취록이었다.

‘깔끔하네.’

뷔노는 실베스트리스가 제대로 된 증거를 넘겨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뷔노는 실베스트리스가
건넨 녹취록과 계좌 이체 정황을 확인하고, 옆의 조직원에게 넘겼다.

“이제 말해줄 수 있겠지. 어디에 쓰려는 거지?”

“약으로 쓰려 합니다.”

“약?”

금주법이 시행된 와중에도 약용 브랜디나 종교용 술 등은 허용되어 있었다. 뷔노는 이게 되도 않는


핑계라는 걸 눈치챘다.

“약과 독은 한 끗 차이니까?”

지하에 와인이 그렇게 많이 쌓인 창고가 있는데, 이제 와서 따로 순도 100%의 알코올을 찾을 일은 없었다.

실베스트리스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저는 요구한 걸 드렸습니다.”

“…….”

뷔노는 실베스트리스에게 가방을 넘겼다. 뒤돌아 걸어가려는 실베스트리스에게 뷔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하려는지 대충 알 것 같군.”

“…….”
“그런데 네가 굳이 손대지 않아도, 조금 있으면 처리할 사람들이 생길 텐데.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 말고
기다리는 게 어때.”

변덕스러운 호의를 담은 말이었다.

“오해하시는 게 있나 봅니다.”

그는 발끝으로 바닥을 두 번 정도 쳤다.

“제가 이렇게 일을 서두르는 이유는 제가 죽을까 봐가 아니라, 남이 제 일을 처리하는 게 싫어서입니다.”

“미친놈.”

실베스트리스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뷔노를 보며 모자를 빼서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끝까지 완벽한 예절을 구사한 채 그는 물러갔다.

뷔노도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조직원이 뷔노에게 말을 걸었다.

“뷔노 님, 방금 마더께서 연락하셨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지?”

“로미오를 투입했다는 걸 눈치챈 건지, 아주 단단히 화가 난 모양입니다. 우리가 부유층의 후원을 받아서
저지른 일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더의 팩스 번호를 추적하고 있던 모양인데… 최근 마더와 팩스를 주고받았던 팩스들의 전화국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팩스기를 갖고 있는 가정은 얼마 없으니… 금방 좁혀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뷔노는 조직원의 말을 듣다 이 동네에서 팩스기를 갖고 있는 집안이라면…….

“시몬…….”

시몬이 시저와 연관이 있다는 오해를 받을 것이다. 뷔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기를 바랐다.

“뒤에서 10 미터 이상 간격 벌리고 따라와.”

뷔노는 그렇게 말한 채 차에서 내렸다. 마더의 허락을 받지 않은 독단 행동이었으니 조직원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뷔노는 가방에서 방독면을 꺼내 얼굴에 뒤집어쓴 채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몬을 노린 것이다. 뷔노는
집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시몬의 부친은 없는 모양이었다. 시몬은 어디 있지?

‘서재겠지.’
시몬은 뷔노가 있던 별채로 올 때 빼놓고는 거의 서재에 있었다. 뷔노는 지체하지 않고 쾅, 문을 열었다.
눈앞에 보이는 놈만 셋이었다. 총을 든 사람들 앞에서, 시몬은 겁먹은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뷔노는 그 셋에게 주저하지 않고 총알을 날렸다. 시몬이 비명을 내질렀다.

셋 역시 뷔노를 발견하자마자 총을 쏘려 했지만 뷔노가 더 빨랐다. 골반 쪽을 맞춰서 쓰러트린 뷔노는


다른 놈들이 있나 없나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책꽂이 뒤에 숨어있는 놈이 있었다. 파이프로 뷔노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시몬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부르르 떨었다.

“하다 하다 별놈이 다…….”

탕―!

뷔노의 머리를 내리친 남자는 소리와 동시에 쓰러졌다. 뷔노는 자꾸 감기는 눈을 애써 떴다.

“로, 론! 괜찮아요?!”

“시끄럽다, 골 울려…….”

그는 잠시 옆으로 몸을 돌리더니 방독면을 벗었다. 정면까지는 아니었지만 옆모습이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아… 론?”

피 묻은 관자놀이, 땀에 젖은 머리카락, 피곤해 보이지만 매섭게 빛나는 눈매. 시몬은 숨을 멈췄다.


뷔노는 관자놀이를 만지더니 눈을 잔뜩 찌푸렸다.

손에 피가 가득 묻은 걸 확인한 후였다. 이마 부근을 소매로 꾹꾹 누르다 숨을 들이켰다. 방독면 안의


습하고 막힌 공기와 전혀 달랐다.

이제 좀 살겠네. 시몬은 중얼거리는 뷔노의 핏빛 입술을 보다가, 시몬은 총을 맞은 남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몸을 만지자 소름이 쫙 돋았다.

“…죽, 었…….”

피 묻은 손가락이 시몬의 입술 위에 올라갔다.

“조용히…….”

기어 들어갈 것 같은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턱 끝까지 스친 손가락은 붉은 자국을 남겼다. 그는 다시


방독면을 쓰고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

뷔노가 손을 떼고 걸어가고 나서야 시몬은 숨을 쉬었다. 입술에서 피 맛이 느껴지자,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사고가 정지된 듯 머리가 하얬다.

‘심하게 다쳤어…….’

시몬은 천천히 뷔노를 향해 다가가려 했다. 그때, 책꽂이 뒤에 숨어있던 한 명이 뷔노를 향해 총을


조준한 게 시몬의 시야에 잡혔다.

“뷔노!”
탕, 탕. 총알은 두 발이 끝이었는지 더 이상 날아오지는 않았다. 붉은색으로 물든 뷔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젠장.”

시몬의 등에 탄환 두 개가 맞았다. 흘러내리는 피에 시몬의 옷이 젖었다.

뷔노는 시몬을 들쳐 멘 채 뛰어나갔다. 시몬의 진주 반지에 피가 묻어있었다. 뷔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병원.”

시몬을 업고 뛴 뷔노는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지고 이마에는 피가 섞인 땀을 잔뜩 흘린 채, 차 앞으로


달려갔다.

“뷔, 뷔노 님?!”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이 그런 뷔노를 보며 기겁했다. 숨을 헐떡이는 뷔노는 조직원을 노려보다시피 하며


말했다.

“당장, 병원으로, 가.”

블랙리버에서 돌아온 뷔노는 머스캣의 방에 들렀다. 멀쩡한 동생의 얼굴을 뷔노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밤까지 머스캣의 얼굴만 보던 뷔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왜 밤중에 마더의 방에 찾아갔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이니?”

“머리가.”

뒤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입은 열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눈물이 고이지도 않았다. 그저 새하얗게 비워졌다. 마더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자기 침대를
툭툭 마더가 손으로 쳤다. 뷔노는 마더의 옆에 올라가 누웠다.

“그 애, 무사하다고 한다. 클로버에서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놈들 역시 모두 처리했고.”

“그렇군요.”

기계적인 대답이었다. 평소와 명백히 다른 모습에 마더는 입술을 비죽이며 웃었다.

“그리될 줄 알았지. 원래 첫 열병이 지독하단다.”

“전 아무렇지도 않은데.”

목이 따끔거리고, 가슴이 뜨겁고, 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 그런 건 없었다. 그저 무감각했다. 사실


무기력한 쪽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점은 애써 무시했다.

“겉으로 드러나면 그게 열병이 아니지. 사람 속을 갉아먹는 게 더 무서운 법이니까.”

마더는 뷔노의 손바닥을 검지 끝으로 갈작거렸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속이 텅 비어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 안 오면 자장가를 불러줄까?”

“절 죽이실 생각인가요?”

마더는 죽일 사람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다. 하하하, 마더가 호탕하게 웃었다.

“아니. 가족을 죽일 리가 없잖니.”

다정하기보다는 자신에게 되뇌는 듯한 말투였다. 어째 오늘따라 그 말투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내 자장가는 한 명에게만 들려주는 거였지.”

“누구에게?”

“사랑하는 사람.”

뷔노는 눈썹을 찌푸렸다. 마더에게 진짜 애인이 있었다는 건 딱히 상상되지 않았다.

“죽였나요?”

마더의 자장가는 죽일 사람에게 흥얼거리는 용도였다. 자장가를 불러줬다면 마더가 죽인 거겠지. 그 말에


마더가 웃는 듯 찡그리는 듯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제가 틀렸나요?”

“물론 맞았지. 하지만 ‘정상인’들은 죽었냐고 물어보지 죽였냐고 물어보진 않는단다.”

마더는 정상인, 이라고 말할 때 검지와 중지를 굽히며 강조했다.

‘그게 그거인 거 같은데.’

“아무튼 돌았다는 게 꼭 나쁜 건 아니지.”

“전 멀쩡…….”

“쉿, 잘 자렴, 아가. 칭얼거리지 말고.”

마더는 멋대로 자장가를 시작했다. 뷔노는 말을 멈추고 마더의 노래를 들었다.

조용히 하고 있으면 엄마가 앵무새를 사줄게

그 앵무새가 울지 않는다면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줄게

반지가 빛을 잃어버린다면, 거울을 사줄게

그 거울이 산산조각이 나면, 숫염소를, 숫염소가 쓰러지면

수레와 황소를, 수레와 황소가 뒤집힌다면

충직한 개를, 개가 더 이상 짖지 않는다면

잘 달리는 말과 수레를, 수레 끄는 말마저 넘어진다면.


마더는 노래를 멈추더니 말했다.

“네가 원하던 아이, 다시 갖다줄까?”

뷔노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자장가라도 한 번 더 불러줄까?”

“아뇨.”

“그럼 책이라도 읽어주지.”

마더는 멋대로 책을 펼쳤다. 펼친 책은 보나 마나 돈키호테일 것이다. 뷔노는 눈을 감았다. 싸라기눈처럼


서늘하게 내리깔린 목소리는 어쩐지 안정을 주었다.

“뷔노.”

이리 다정한 말투는 처음이었다. 머리를 한올 한올 넘겨주던 마더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1 년 사이에 너무 깊이 연관되고 말았지.”

“감사하게도.”

비꼬는 말투가 아니었다. 뷔노는 진심으로 조직에 일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감사히 여겼다. 어리다고
봐주거나 뒷전인 건 끔찍이 싫었다. 그는 최전선에 나간 지금 상황이 가장 기뻤다.

“널 당장 빼내는 건 무리겠지만, 시간을 들여 천천히 너를 잊히게 할 수는 있어. 외국에 보내면… 한 3 년


정도 걸리겠지.”

마더 나름의 배려였다.

“힘들다면 지금 포기할래?”

뷔노는 고개를 재차 저었다.

“그럴 리가.”

“실베스트리스, 매번 술을 마시자고 하면 고상하게 거부하던 네가 웬일로 먼저 제안을 하는 날이


오는구나.”

“저도 이제 슬슬 성인이니까요. 술을 즐길 줄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남자는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시종에게 명령했다.

“내 아들이 그렇다면. 가서 종류별로 와인을 가져와라.”

올라온 와인들은 다 최상급의 것들이었다. 그리고 모두 상당히 도수가 높은 와인들이었다.

실베스트리스는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에 아버지가 크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았다.

“술을 마시고 웃어른에게 예의를 지키는 법을 알아야, 그래야 성공할 수 있는 거지. 나처럼. 듣고 있는
거냐, 실베스트리스? 물론 약한 놈들을 밟고 일어서는 법…도 알아야 하고.”
그는 이미 술에 잔뜩 취한 상태였다. 실베스트리스는 계속해서 와인을 부어주며,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지혜를 받들어 성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이제야 네가 말이 좀 통하는 날이 오는구나. 언제 철이 드나 고민했단다.”

“그러셨습니까? 너무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실베스트리스는 뷔노에게서 받아든 술을 꺼내며 말했다.

“제가 특별히 준비한 술이 있는데, 드시겠습니까?”

“네가 직접 준비한 술이 있다고?”

“국회로 다녀가는 바지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귀한 술이라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바지꾼이란, 바지에 술병을 숨겨 들어가는 밀수꾼들을 의미하는 거였다.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금세


접혔다. 술에 취한 상태라 몽롱한 그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허허… 언제 거기까지 알게 됐는지. 그래 어디 한번 줘봐라.”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실베스트리스는 의자에 늘어진 남자의 옆자리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버지. 아버지?”

대답이 없었다. 실베스트리스는 슬그머니 아버지의 목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죽었습니까?”

맥이 전혀 뛰지 않는 걸 확인한 그는 남자를 살펴보았다. 인형처럼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게 참으로


힘없어 보였다. 그는 술잔에 술을 따라 들어 올렸다.

“더 드셔야죠, 아버지. 그렇게 좋아하시는 술 아닙니까.”

남자의 얼굴은 창백했고 옆에는 구토한 흔적이 묻어있었다.

실베스트리스는 남자의 입에 술을 들이부었다. 당연히 삼키지 못한 술은 입가를 따라 옆으로 줄줄 흘렀다.


그걸 본 실베스트리스는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이젠 술도 못 삼키시고, 침도 못 닦으십니까.”

이렇게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는데.

평생을 골머리를 썩이며 앓아온 문제가, 단번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실베스트리스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자신을 닮은 늙은 남자의 초라한 자태를 살폈다.

“…….”

실베스트리스는 마지막으로 그의 숨이 멈췄는지를 확인한 후, 방문을 열며 다급하게 외쳤다.

“아버지가 숨을 쉬고 계시지 않습니다! 얼른, 도움을!”

*
‘설마 그놈이 다이아 보스가 될 줄은 몰랐지.’

뷔노는 속으로 혀를 차며 생각했다.

다이아도 클로버도 거의 끝났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이아의


새로운 보스가 올라섰고, 그게 실베스트리스라는 점을 알게 됐다.

‘다이아의 보스 이름이 실버라고?’

본명을 숨기려는 시도라도 한 건지, 별 웃기지도 않는 가명이었다.

‘그놈이 어떻게 그 위치까지 올라갔지?’

사생아라고 천대받고 있었는데.

‘나이트라고 부른답니다. 체스에서의 그 나이트 말입니다.’

‘뭐를?’

‘정보원들입니다. 매 부서마다 한 명 이상의 나이트가 근무하고 있습니다. 회사 내에서는 다이아 보스


외에는 아무도 그 나이트의 명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나이트들이, 회사의 이사들을 모두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욕심이 많아 보이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평의회에서 다시 만나게 된 그는 뷔노를 반가운 듯 미묘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다이아의 보스와 시저의 언더보스로서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도련님이 많이도 변하셨군. 밀주니 뭐니, 안 하는 게 없다며?”

“원래 술을 팔던 집안에서 뭘 하겠습니까?”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그의 눈에는 한층 더 깊어진 야욕이 덧보였다. 어릴 때 보였던 망설임도


사라져 한층 단단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저가 불편하다면 밀주업 정도는 그만둘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돈을 어디서 벌려고?”

그는 싱긋 웃으며 말을 돌렸다.

“헤르게임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시작이 헤르게임이라고?”

“마약도, 술도, 도박도, 너무 불안정합니다. 사람이 그만두고 나라가 규제하면 그만이죠. 저는 안정적인
기반을 원합니다.”

안정적인 기반, 이라고 하는 건 일반인의 시각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그 사업이 어떤 사업인지, 한번 얘기해 보지.”

“이 나라에는 은행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의 은행이었다. 자칫해서 파산할 일 없도록 운용되는, 정교하고 단단한 하나의
은행.

그걸 들은 뷔노는, 실베스트리스가 자발적으로 헤르게임에서 손을 뗄 일이 절대 없을 거라고 믿었다.

“금주법은 머지않아 폐기됩니다. 길어도 10 년밖에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시저의 자금줄은
끊기는 셈인데, 현명하게 생각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정확했다.

9 년 뒤.

간만에 술집을 찾아 왁자지껄 신이 난 동생들 사이에서 뷔노는 생각을 정리했다.

‘의회에는 이미 안이 들어갔고, 1 년 후면 금주법이 폐지되겠군.’

이건 모든 조직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바였다. 치열하게 헤르게임 내에서 파이 경쟁을 하던 조직들은


더더욱 치열하게 싸울 필요가 생겼다.

시저의 자금줄이 끊기기까지 1 년. 1 년 남짓한 시간 안에 모든 조직을 합쳐야만 했다.

‘남은 기한이 1 년인데, 그 안에 세 조직을 통합해야 하니…….’

할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이었다. 잠을 제대로 잔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편두통이 수시로 올라오곤 했다. 뷔노는 이를 하루 한 잔의 와인과 정신력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클로버에서 미행을 붙인 지가 3 개월인 시점었다.

‘일부러 피하지 않고 있으니 조만간 저쪽에서 오겠지.’

클로버에서 뭘 꾸미건 시저에게는 당해낼 수 없다. 그는 조금 있으면 모든 일이 끝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건 시킨 적 없는데.”

“아, 이건. 저쪽 신사분께서 보내는 겁니다.”

“저쪽 신사분?”

뷔노의 질문에 공손한 종업원의 두 손은 익숙한 인영을 가리켰다.

그 순간, 10 년간 안개라도 낀 양 탁하고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시몬.’

예전보다는 키도 커지고, 골격도 바뀌었다. 더 성숙한 모습이었으나 속내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클로버가 보낸 스파이가 그일 줄은 몰랐다.

이건 뭔 잘못해서 다시 내 앞으로 왔을까?

빚? 인질? 아니면 복수?


자발적으로 오지 않았다는 건 분명했다. 저건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으니까. 어쨌건
상관없었다. 도덕이니 양심이니 버린 지 오래였다.

처음으로 클로버가 인생에 도움이 된 날이었다. 준비된 선물은 사양하지 않는 게 뷔노의 신조였다.

그리고 뷔노는, 그를 놔줄 생각도 없었다.

15. 씁쓸하고 달콤한

“클로버 간부들의 위치는 다 알아냈고, 보스를 찾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군. 이놈들을 어떻게 할까?”

뷔노를 노렸던 암살자들을 심문하자 시저에게는 길이 보였다. 그들은 어려운 임무를 맡은 만큼 확실히
클로버의 간부에게서 명령을 받은 게 맞았다.

몇 번의 심문과 해킹을 통해 시저는 클로버 조직의 보스는 아니지만, 클로버 간부들의 위치와 얼굴을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

레이라, 루시, 라이카 등 시저 조직의 쟁쟁한 저격수들은 위치를 알자마자 주저 없이 나섰다.

“저희가 처리하죠.”

저격수가 있는 조직은 흔하지 않다. 조직들은 저격수보다는 부하에게 기관단총을 넘겨주는 것을 더


선호했다. 별다른 사격 실력 없는 부하가 총알을 수십 발 날리는 것이 저격수를 고용하는 것보다 훨씬
값쌌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격수가 언제 총구를 돌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저격이라는 건 방어가 거의 불가능한 공격. 괜히
저격수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게 보통이었다.

그런 까닭에 소속된 저격수가 있는 건 모든 조직을 통틀어 시저뿐이었다. 은퇴한 군인인 레이라가 시저로
들어오고 나서였다.

‘저격수를 키워야겠어.’

헤르게임에서 가출한 청소년들의 선택지는 몇 개 없었다. 시저는 그러한 가출 청소년들을 받아주고


저격수로 훈련했다.

그들은 많은 보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시저에 감사한 마음 때문도 있겠지만, 떠돌아다니다 타 조직에
잡혀가 인신매매당한 친구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게 더 컸을 것이다. 조직들에 대한 강한 반발심. 그
반발심이 저격수들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옥상, 건물 창가. 각자 선호하는 장소는 달랐지만, 각자의 위치를 잡은 이 저격수들은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

탕.

명중한 총알들에 표적들은 속절없이 쓰러졌다.

[클로버 콘실리어리(자문) 루미노 제네르 사망]

[클로버 카포러짐(지부장) 레누스 드라쿤 사망]


[클로버 언더보스 카를 헤네슈타인 사망]

신문의 첫 장이 누구의 얼굴로 장식될지는, 저격수들의 총구가 어디를 향하는지에 달려있었다.

아직 덜 깨어 졸린 머리에 지저귀는 가지각색의 새소리가 울렸다. 시몬은 뜨거운 침을 삼키려 했지만,


목구멍이 따가워 힘겹게 숨을 넘겼다. 귓가가 징 울리는 느낌과 동시에 눈과 코가 매웠다.

에취, 시몬이 재채기를 하고 나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몸에 부드럽고 두꺼운 천의 감촉이 느껴진다


했더니 가운이 둘러져 있었다.

‘…내가 가운을 입고 잠들었던가?’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옆을 보자, 시몬이 누워있는 침대 바로 옆에 있는 의자에


뷔노가 앉아있었다. 빗자루 소리는 뷔노가 노트를 손으로 문지르는 소리였던 모양으로, 뭔가를
털어내려는 것 같았다.

“뷔노?”

왜 내 침실에 뷔노가 있지? 눈을 깜빡인 시몬은 이곳이 자신의 집도, 클로버의 거처도 아님을 깨달았다.

“사… 콜록, 상처는 괜찮은 거예요?”

시몬은 잘 가누어지지 않는 몸을 일으켜 뷔노를 보았다. 뷔노는 흘긋 시몬을 바라보다가 노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열로 들뜬 정신 속에서도 시몬은 적잖게 당황했다.

‘지금 날 무시하신 건가?’

왜? 멍한 정신은 잘 돌아가지 않았지만, 불안감만은 짙게 남겼다. 뷔노는 노트를 몇 장 팔락였다. 그러다


넘기는 걸 멈추고 한 장에서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않았다.

“후우…….”

땅이 꺼질 것처럼 깊은 한숨 소리였다. 노트를 책꽂이에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넣은 뷔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의자에 앉았다.

“누워.”

“네?”

시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놀라서 갈라진 게 아니라 단단히 목이 상해서였다.

시몬이 어지러움을 느끼고 얌전히 누웠다. 뷔노는 시몬의 턱 끝까지 이불을 단단히 올렸다. 여전히
시몬과 눈을 마주치고 있지는 않았다.

왜 뷔노의 심기가 불편한 건지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시몬이 눈을 또르르 또르르 굴렸다.

아마 자신의 과거 행동이 문제였을 거 같은데, 머리가 정돈되지 않아 어떤 건지 추측해 낼 수가 없었다.


시몬은 가장 가까운 과거를 떠올려보기로 했다. 여기 오기 직전에는 뭘 하고 있었지?
‘…왜 여기 있어.’

시몬이 헙 소리를 내며 놀랐다.

‘이제 기억났다…….’

추적추적 내리던 빗속에서 입을 맞추고, 그대로 풀썩 쓰러져 버린 그 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럼 나를 데리고 뷔노가 자기 집으로 와준 건가.’

한데 저번에 방문했던 집과 같은 집이어야 할 텐데, 약간 다른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붉은빛이 많이


도는 갈색 나무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방 안은 현대적이기보다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뷔노는 말없이 시몬을 바라보았다. 시몬은 뷔노를 보기 위해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눈을 깜빡거렸다.

커튼을 닫고 다시 걷을 때처럼 어둠과 빛이 번갈아 가며 보였다. 햇빛이 비치는 얼굴이나 살짝 찡그린


눈썹, 굳게 다물린 입 등이 대단히 명료하지는 않아도 평소보다 화나 보였다.

‘그래서 더욱 퇴폐적으로 보이는…이 아니라, 나는 대체 이 와중에 무슨 생각을!’

시몬이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가라앉히려는데, 뷔노에게서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픈 게 좋아?”

걱정을 끼쳤던 걸까. 시몬의 표정이 눈치를 보던 표정에서 금세 미안한 얼굴로 변했다.

“아니요, 콜록, 콜록. 죄송해요. 콜록,”

시몬은 기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마디를 하면 두 번 기침을 해야 하는 이상한 등가 교환의 법칙이


생겼다. 뷔노는 시몬의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말하지 마.”

시몬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알아들었으면 앞으론 고개만 끄덕여.”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시몬.”

뷔노는 시몬의 목에 손가락을 걸친 채, 그러나 힘은 주지 않은 채 있었다. 시몬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시몬은 말은 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죽고 싶어?”

시몬이 고개를 다급하게 흔들었다.

“그런데 왜 죽으려고 했지?”

뷔노가 몸을 숙여 시몬의 눈을 마주했다. 시몬은 얼굴에 열이 더 오르는 걸 느꼈다. 고개를 젓다가


포기한 시몬은 입을 열었다.

“뷔, 뷔노. 콜록. 저 죽으려고 한 적, 없…….”


뷔노는 다시 검지를 시몬의 입술에 대고 눌렀다.

“조용.”

시몬이 입을 꾹 다물었다. 뷔노는 시몬이 반론을 할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밤새 비 맞으면서 기다린 거. 도대체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

“…….”

“내가 이틀 뒤에 나왔으면? 아니면 사흘 뒤라던가.”

“…….”

물론 기다렸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머릿속에 뷔노를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시몬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뷔노가 시몬을 노려보았고, 시몬이 움찔 떨었다.

“…하루하고 13 시간. 이게 무슨 시간인지 알아?”

시몬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가 잠들어있던 시간이야.”

그렇게나 오래 잠들어있었다고? 시몬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변했다.

“비 좀 맞았다고 사람이 그렇게 아플 수 있는 줄은 처음 알았어.”

감기조차 거의 걸려본 적 없는 뷔노로선 시몬이 이해되지 않았다. 매번 소동물 취급을 했더니 정말 그에


걸맞게 약해지는 건가.

죄, 송, 해, 요. 시몬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안 죽은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뷔노는 시몬의 이마에 손을 댔다. 펄펄 끓던 열이 뜨뜻한 정도로 줄었으니 낫고 있긴 한 거였다. 뷔노가


손을 떼려고 하는데, 시몬이 뷔노의 손목을 붙잡았다.

“죄송해요, 무심코…….”

뷔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 붙은 시몬의 머리카락을 조금 떼준 뷔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장으로 향했다. 그는 검은색의 찐득찐득한 액체가 들어있는 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쓴 향과 공업용 플라스틱 냄새가 섞인 기묘한 향이 올라왔다.

“입 벌려.”

뷔노는 병에 숟가락을 넣고 한술을 크게 떴다. 숟가락이 시몬의 입에 들어가자마자 시몬의 표정이


구겨졌다. 커피 원두를 통째로 씹어도 이것보단 나을 것 같다 생각이 들 정도였다. 써도 너무 쓴 약을
뱉어내고 싶은 강한 충동이 들었다.

“이… 쓰…….”
“삼켜야지.”

살짝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참는 바람에 시몬의 눈이 빨개졌다. 시몬은 약을 꿀꺽 삼켜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다 뷔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건 짓궂은 표정이었다. 자신이 괴로워하는
걸 보고 즐거워하는 저 악동한테 화가 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먹어야 하는 약이 한 종류가 더 있거든.”

그 말에 시몬의 기분이 바로 곤두박질쳤다. 뷔노는 서랍장에서 직육면체 케이스를 꺼냈다. 집게로 뭔가


꺼내는 것만 보이고 몽롱한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시몬은 입을 벌리고 다가올 고통을 기다렸다. 그러나 실제로 다가온 건 아까의 끔찍한 맛이 아닌, 달콤한
맛이었다.

‘각설탕?’

시몬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아까의 약과 비교하면 천국 같은 맛이었다. 시몬은 혀로 하얗고


정육면체의 고체를 입 안에서 굴렸다.

몸에 열이 있는 탓에 뺨과 입술에 평소보다 붉은빛이 돌았다. 뷔노는 시몬의 몸 위에 올라탔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몸과 체온에 시몬이 당황했다.

“어, 뷔, 뷔,노!”

“조용히 하라고 한 게 몇 번인데. 말을 안 듣네.”

그 상태로 고개를 숙여 시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시몬이 읍, 읍 소리를 냈다. 입을 맞춘 순간부터


몸에 열이 확 오른 걸 시몬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그대로 타버릴 것만 같았다.

뷔노는 개의치 않고 시몬의 입 안을 탐했다. 아직 덜 녹은 각설탕이 조금 남아있었다. 뷔노는 시몬의 입


안에 남아있는 각설탕을 실컷 혀로 짓누르며 맛봤다.

단맛이 서로의 입에 퍼져나갔다.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뷔노가 주는 감각에 집중하다, 자신이 환자라는
걸 깨닫고 뷔노의 어깨를 잡았다.

“읍, 뷔, 뷔노, 옮, 콜록, 아요…….”

시몬은 안간힘을 다해서 뷔노를 밀어내려 했으나 평상시보다도 체력이 더 떨어진 상태에서는 무리였다.

뷔노는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은 채 평소보다도 시몬을 더 몰아붙였다. 시몬의 어깨가 들썩이고 약하게


뷔노를 치는 손길이 느껴지자, 뷔노는 입을 뗐다.

“하아…….”

시몬이 살짝 원망스러운 눈길로 뷔노를 보았다. 뷔노는 시몬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대고 장난스레
웃었다.

“열이 많이 올랐네. 씻겨줄까?”

“아… 제가…….”

“쉿.”
시몬은 고개를 저으면서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그다음 오른쪽 검지를 들어 올려 1 을
표현하고, 양팔을 끌어당겼다.

‘제가, 혼자서, 할 수 있어요.’

이런 의미의 제스처였다. 시몬은 눈을 반짝이며 뷔노를 봤지만 뷔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해달라는 거지?”

뷔노는 시몬을 안아 올린 채 욕실로 향했다. 허리에 띠 하나만이 둘러져 있는 가운은 몸을 가리고 있다고
보기엔 부실했다.

뷔노는 묶여있던 리본을 단숨에 잡아당겨서 풀었다. 가운 사이를 지탱하던 끈이 풀리면서 시몬의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피부는 흉터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몸은 예술가들이 뮤즈로 삼을 만한 형상으로


보였다.

뷔노 역시 옷을 벗었으나 붕대 때문에 같은 분위기가 나오지는 않았다. 샤워기를 틀자 따뜻한 물이 시몬의


몸을 타고 흘렀다. 피부 위에서 물방울들은 피부 위에서 또르르 굴러가며 떨어졌다.

뷔노는 손에 바디 워시를 짜서 시몬의 목에 얹어 밑으로 문질렀다. 장인이 자기를 빚을 때 흙 틀을 만지는


것 같은 섬세한 손짓이 이어졌다.

피부 위를 따라 손이 움직이자 투명했던 액체는 우윳빛으로 변했다. 목부터 시작되는 거품들은 아래로


흘러 가슴 사이로 흘러내렸다. 손을 흉곽을 따라 돌린 뷔노는 척추뼈를 하나하나 짚듯 만졌다.

“흐읏…….”

허리를 몇 번 왕복한 손은 골반을 향했다. 골반을 약하게 짜듯 만지던 뷔노의 손에 시몬이 부르르 떨었다.

목젖으로 침이 넘어가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표를 내려 하지 않아도 움찔거리는 눈썹과 입꼬리 역시


계속해서 눈길을 끌었다.

“제가 할, 콜록.”

뷔노는 시몬의 말을 무시한 채, 성기를 움켜잡고 아주 느리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뷔노는 중심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거품 때문이라며 핑계를 댔다.

“미끄러워서 잘 닦이지를 않네. 어떻게 생각해, 시몬?”

“흣, 흐아…….”

“자꾸 소리를 내네.”

“이렇게, 윽, 만지면서, 어떻게, 흐, 소리를, 안…….”

뷔노는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더 세게 문질렀다.

시몬이 절정을 맞이하면서 흐른 정액이 뷔노의 발에 튀었다. 새하얀 액체가 묻은 걸 보고도 뷔노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시몬만이 뷔노의 발을 더럽혔다는 생각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제, 제가 닦… 켈록…….”

뷔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뷔노는 허리를 곧게 펴고 욕조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시몬은 욕조에 따뜻한 물을 틀어 얕게나마 찰랑이는 정도로 채웠다. 뷔노의 허벅지 반 정도 차있는 물
높이를 본 시몬은 물을 잠갔다. 욕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뷔노의 한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 모든 과정 하나가 경건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행동은 신실했다. 그는 말없이 뷔노의 발을 손으로


문질렀다. 딱딱한 굳은살이 시몬의 부드러운 손에 닿아왔다.

제대로 나을 시간을 주지도 못했는지 여러 방향으로 넓혀진 흉터 역시 볼 수 있었다. 시몬은 막 난


상처처럼 조심스럽게 발을 어루만졌다.

다리를 문지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행동 하나하나에 서두름 없이 시몬은 천천히 행했다. 마지막으로


손으로 따뜻한 물을 부어 헹궈냈다.

허벅지를 타고 올라간 손이 갈 방향은 한 군데밖에 없었다. 시몬은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뷔노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조그마한 목소리가 밑에서 타고 올라왔다. 시몬은 손가락으로 뷔노의 허벅지에 원을 그리며 물어보았다.

“뷔노, 제가 기분… 좋게 해드릴까요?”

“네가?”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시몬은 입술을 열어 뷔노의 유두를 아래에서 위로 핥았다. 한 번 핥아


올리자 유두가 살짝 솟아올랐다.

시몬은 뷔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언제나 그렇듯 순수하지만 강한 열망이 담겨있는 눈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도발이었다.

시몬은 왼손은 바닥에 짚고, 매달리듯 시몬은 뷔노의 유두를 입 안에 머금었다. 오른손은 음부를 파고든
채, 음핵에 대고 문질렀다.

“검지랑 중지 사이에 끼워서.”

손마디의 뼈가 음핵을 조이며 자극을 줬다. 시몬은 뷔노의 표정 하나하나를 살폈다.

“조금 더 빠르게.”

가슴 쪽에서 혀가 움직이는 감촉과 시몬의 손안에서 음핵이 마찰하는 감각이 섞이자 기분 좋은 느낌이
온몸에서 피어올랐다. 뷔노는 잘하고 있다는 의미로, 시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조금 자신감을 얻은 시몬은 손을 떼고 아래쪽으로 입을 옮겼다. 욕조 바닥에서 찰랑이는 물이 코로 들어가


숨쉬기 힘들었다. 시몬은 꾹 참고 혀로 핥아냈다.

‘이거, 로미오들한테 제대로 배워왔네.’

“참, 달라졌어.”

살짝 끊기게 말한 뷔노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감탄사나 다름없었다.

끊임없이 핥는 혀는 섬세하고 끈질겼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미묘하게 애태우는 것 같아, 밀어내고 싶을


정도였다.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쾌감에 뷔노가 시몬의 머리를 가끔 세게 잡았지만, 시몬은 아랑곳하지
않고 핥았다.

“더 빠르게.”

뷔노는 시몬의 머리카락을 꾹 잡았다. 살살 피어오르는 느낌이, 조만간 절정이 올 걸 알았다. 시몬은
뷔노의 만족 하나만을 생각하며 혀를 움직였다.

음핵의 단단한 부분을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리는 순간, 뷔노의 발끝이 곱아들었다. 아랫배에서 시작된
찌릿찌릿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쿵쿵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후…….”

뷔노는 숨을 몇 번 더 들이쉬고 내쉬었다. 갈비뼈가 올랐다가 내려갈 때마다 흥분감이 기분 좋게


퍼져나갔다. 뷔노의 반응을 본 시몬이 혀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 괜찮았나요……?”

시몬의 머리카락을 잡은 뷔노는 시몬이 음부에서 입을 떼게 했다. 시몬의 양 뺨을 손으로 잡고 입을


맞췄고, 곧바로 혀가 뒤엉켰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얼굴은 매혹적이었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 끝, 눈가와 뺨에 붉은 기가 돌았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듯 뷔노는 타액을 시몬에게 넘겼고 시몬은 곧바로 받아넘겼다.

뷔노는 시몬의 등을 쓸어내렸다. 시몬의 날개 뼈가 들썩였다.

욕실에서 나온 뷔노는 시몬의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뷔노는 사르륵 날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며
말했다.

“환자를 너무 괴롭힌 건 아닌가 모르겠네.”

뷔노는 천천히 시몬의 잠옷 단추를 채워주었다. 사락 비단이 스치는 감각이 더욱 예민하게 다가왔다.

탈진한 시몬은 가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온몸이 감기 기운으로 아파서만 도는 열은 아니었다.


뷔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열은 내렸겠지.”

“열이 더 오른 것 같아요…….”

“몸을 씻었는데 열이 더 올라?”

뷔노가 시몬의 이마를 만져보자 뜨끈했다.

“침대에 누워서 더 쉬어.”

뷔노는 옷을 챙겨 입고, 방탄조끼까지 걸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불안함이 확 든 시몬이 물었다.

“어디 가시게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클로버, 하트, 다이아. 최대한 빠르게 모든 걸 끝마쳐야 했다.


“위험한 거 아냐.”

침대에 누워있는 시몬을 보자 싱숭생숭했다.

‘애완동물을 두고 가는 주인의 마음이려나.’

뷔노는 시몬에게 신신당부했다.

“모르는 사람한테 문 열어주지 말고.”

“뷔노……. 그 정도는 알아요.”

시몬은 뷔노가 문을 열었을 때 외쳤다.

“기다릴게요.”

예전의 기다려달라는 말은 설렘과 기대가 섞인 말에 불과했다면 이번에는 달랐다. 와달라는 간절한


호소였다.

“그래.”

뷔노가 손잡이에서 손을 떼자 문이 쾅 닫혔다.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시몬은 문


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16. 푸른색 장미

카지노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사람은 카지노의 주인이다. 시저의 살롱이나 다이아의 마약 사업과 다르게


도박장은 나라에서 인정한 합법적인 사업으로, 꾸준한 수익을 내기 쉽고 좋은 수단이었다.

가장 체계적이고 다양한 도박장을 운영하는 조직은, 단연 하트였다. 하트의 수많은 카지노 중 뷔노가
방문한 곳은 HG 호텔의 카지노였다.

그곳은 헤르게임에서 가장 큰 도박장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은한 조명과 둥근 원형의 테이블,


그리고 여러 룰렛 머신들이 보였다.

뷔노는 눈에 띄도록 일부러 검은 정장을 입었다. 뒤에 검은 정장의 조직원들을 평소보다 훨씬 많이 배치한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였다.

뷔노가 입장한 순간부터 도박장의 분위기는 조용하게 바뀌었다. 다들 그들이 누군지 짐작한 것이다.

“이 안에서는 가상의 화폐가 사용됩니다. 달러를 칩으로 환전하고…….”

“1 만 달러.”

“네?”

“1 만 달러 바꾸겠다고.”

조직원이 직육면체의 가방을 내밀었다. 카드도 아니고, 현금으로 준비되어 있던 돈다발을 본 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만 확인 절차 있겠습니다.”

도박장 내부의 직원들 열댓 명이 모여 돈을 세는 도중, 뷔노는 한 명에게 말했다.

“VIP 룸은 어디지?”

“예약하셨습니까?”

“아니, 할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뷔노가 말했다.

“여기 주인이랑 같이 게임을 해보고 싶은데.”

직원이 곤란한 표정으로 잠시 있었다. 그는 뷔노의 얼굴을 봤다가, 돈 가방을 봤다가, 다시 뷔노의
얼굴을 봤다. 머릿속에서 판단을 내린 건지 직원은 몸을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일정상 가능하실지 모르겠지만,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잠시 뒤, 한 여자가 패션모델 같은 몸짓으로 걸어왔다. 그는 대놓고 옆구리에 총을 끼운 걸 보여주고


있었다. 가느다란 보랏빛 눈, 광대뼈에 사각 턱이 돋보였다.

그는 뷔노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더니, 입술을 길게 늘여 웃었다.

“나보다 큰 여자는 오랜만에 보네. 날 보러 왔다고, 허니? 나한테 관심이 생겼나?”

“키를 재려고 온 건 아니고.”

검고 붉은 칩이 봉지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카네포라는 그 양이 적어도 십만 달러는 된다는 걸


가늠했다.

“포커를 잘하나 궁금해서.”

“내 포커 실력이?”

카네포라가 아치형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는 별말 없이 검지 손톱을 까닥였고, 딜러는 카네포라 몫의


칩을 책상에 부었다. 뷔노의 양과 비슷한 양의 칩이 책상 위에 얹혔다.

“궁금한 게 있으면 답을 알아내야지. 나도 그렇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거든.”

딜러는 카드를 뷔노에게 건넸다. 확인을 부탁하는 절차였다.

“필요 없어.”

뷔노는 카드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고, 딜러는 카드를 반으로 나누어 섞기 시작했다.

“어떤 걸로 하지?”

“파이브 드로우 카드.”

“다섯 장 확인하면 끝나는 포커라… 단순해서 좋은 게임이지, 나도 즐겨 해.”

카네포라는 딜러에게 말했다.


“엔트리는 칩 한 개씩. 우린 둘 다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잭스 오어 베터 같은 부가 규칙은
집어치우자. 룰 간소화해도 괜찮지?”

카네포라는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칩 하나를 튕겨 넣었고 뷔노 역시 따라 넣었다. 딜러가 카드를 양 끝에


놓고 교차시키며 섞었다. 화려한 딜러의 손놀림이 끝나자 그는 다섯 장의 카드를 둘에게 분배해 주었다.

“올인.”

“카드 안 바꿔?”

“바꿀 필요 없어.”

뷔노는 무감하게 이야기했다. 카네포라는 고개를 저었다.

“잘생긴 얼굴로 무표정을 지으니, 블러핑인지 아닌지 확인을 할 수가 없네. 나는 접을게. 폴드.”

“올인.”

뷔노는 역시 패를 확인하자마자 말했고, 카네포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뷔노가 모든 칩을 건다면 카네포라


역시 포기하지 않는 이상 모든 칩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올인? 승부사 기질이 있으시네. 이번에는 나도 올인이야.”

둘의 칩이 가운데로 몰렸다.

“그러면 패를 확인하겠습니다.”

둘은 다섯 장의 카드를 공개했다. 카네포라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퀸 스페이드, 퀸 다이아, 퀸 하트.”

“킹 스페이드, 킹 트럼프, 킹 다이아.”

카네포라는 유심히 문양을 들여다보았다. 반짝이는 문양은 평소 보던 카드와 조금 달랐다.

“내가 졌네. 블러핑이 아니었던 모양이네, 자기?”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라.”

“의외로 유머 감각도 있고.”

카네포라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잘 길러 다듬은 손톱이 책상에 딱딱 두들기며 소리가 났다.

“내가 퀸 *트리플이고 자기가 킹 트리플이라… 이렇게 작은 차이로 질 줄이야.”

(*트리플: 같은 숫자인 패가 세 장이 나온 것. 포커에서는 스트레이트 플러시, 쿼드, 플러시, 풀하우스,


스트레이트, 플러시, 트리플, 투 페어, 원 페어 순으로 좋은 패이다.)

“…라고 말하면 되는 건가? 왜 사기를 쳤지?”

카네포라가 소매 속에서 칼을 뽑아 책상을 내리찍었다. 포커용 테이블에 큰 구멍이 생긴 채 칼이 박혔다.


딜러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내 애한테 셔플로 장난질을 치라고 시키는 용기에는 박수를 보낼게. 고작 이 정도 돈을 벌려고 나한테
사기를 친 건 아닐 테고. 단순히 나를 약 올리고 싶었던 걸까? 어떻게 생각해, 자기?”

뷔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도 카지노를 운영하는 사람을 상대로 사기가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

딜러는 뷔노의 말에 주춤거렸다. 이미 카드는 뷔노가 의도한 대로 셔플된 상태였다.

“카드를 조작한 건 맞아. 하지만 승부에 대한 견해는 다르다고 밝혀두지. 아무래도 우리 쪽과 이쪽


규칙이 다른 모양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카드 게임에서 퀸은 킹을 이긴다. 그게 우리 규칙이니까.”

카네포라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아리송하게 웃었다.

“…그러면 내가 이겼다는 말이야?”

“오늘은.”

“앞으로는?”

“동업자가 되면 좋겠는데.”

“뭘 하고 싶은 건지 똑바로 말해.”

짜증이 일기보다는 호기심 어린 말투였다. 뷔노는 박힌 칼을 꺼내 내리꽂았다. 옆의 보디가드들이 달려와


뷔노의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옆에 있던 시저의 조직원들이 총을 겨누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만.”

카네포라가 손짓하자 보디가드들은 물러났다. 시저의 조직원들도 총을 내려놓았다. 뷔노가 칼을 내리꽂은


건 트럼프 카드 뭉치였다.

하여튼 초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트럼프를 무너뜨린다. 그 굳건한 목표에는 어떤 변화도 없어


보였다.

“과격한 방식이지만 이해는 되네. 근데 트럼프 카드에는 하트도 있잖아? 우리 보고 자살을 하라는 거야?”

“하트가 굳이 계속 하트일 필요가 있을까?”

“미안하지만 시저와 다르게 우리는 자경단에서 출발해서 말이야, 전통이 깊거든. 함부로 이름을 바꿀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고.”

“그 좋은 전통 때문에 보스 자리를 못 물려받는 여자가 있다고 들어서 말이야. 능력도 없는 남자 형제들


사이에 낀 처지라지?”

뷔노의 말에 카네포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능력도 없는, 정도가 아니야. 뇌가 망가진 또라이들이지.”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앞으로 몇 명이 네 앞길에 방해가 될까?”


하, 카네포라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백팔십 명.”

“백 명은 우리가 맡지. 팔십 정도는 알아서 처리해.”

“대가는?”

“이름을 시저로 바꿔.”

“그것뿐?”

“그래.”

카네포라는 입을 다물었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불법적인 사업은 다 정리할 거야.”

“당연하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잘할 테니까.”

“아니, 음지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들 다.”

카네포라는 트럼프 카드에 꽂힌 칼을 뽑았다.

“협상은 결렬이야.”

“아쉽게 됐네.”

카네포라는 칼을 뷔노의 목에 들이밀었고 뷔노는 총을 카네포라의 이마에 가까이 붙였다.

둘은 잠시 숨을 죽인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 중 하나의 손가락만 움직여도 이 싸움의 판도가 흔들릴 것이다. 하등 도움이 될 게 없다는 걸 예상한
카네포라는 칼을 떼었고 뷔노는 총을 집어넣었다.

“…제안을 받아들일게.”

“현명한 판단이군.”

카네포라는 몇 번 킥킥대더니 말했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돼서?”

“아니, 우리 둘 다 하고 싶은 걸 이뤄낼 테니까.”

일방적인 관계 안 좋아하거든. 뷔노는 덧붙였다. 카네포라는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마음에 드네. 우리 조직에서 제일 마음에 안 들었던 게 그거거든. 시키기만 하고 주는 게 없는


거.”

“차고 넘치는 보상을 준다고 약속하지.”

“그 말, 지켜.”
아까의 흉흉한 기운은 어디 가고, 카네포라는 싱긋 웃었다. 그 모습에서 뷔노는 피네를 떠올렸다.
카네포라는 뷔노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자기야, 우리 사귈까?”

“난 여자한테 관심 없는데.”

“생기게 해줄게.”

자신감 있는 미소였다. 어떤 삶을 살았길래 저리 자신감이 넘칠까. 잠시 감탄하며 보던 뷔노는


카네포라가 들어본 적 없는 말을 답해주었다.

“연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꼬시는 게 나을 거야.”

“그런 사람들은 이미 다 넘어왔지.”

“그럼 감사하면서 살아.”

뷔노는 돌아서서 VIP 룸을 나섰다. 뜻밖에도 뒤를 쫓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카네포라가 따라온 것이다.

“연애에 관심이 없다면, 이건 어때? 줄 수 있는 게 하나 더 있을 것 같아서.”

“뭔데.”

“폭행 사주도 마약 사업도 유들유들하게 넘어가던 헤르게임에도, 유독 강하게 잡는 게 하나가 있지.”

뷔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걸 진짜 주겠다고?”

“어차피 같은 조직이 될 거라면, 조직을 키우는 편이 좋지 않아?”

카네포라는 싱그럽게 웃었다.

잠에서 깬 시몬은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걸 눈치챘다. 아마 앓았던 감기인지 독감인지 모를 것이 나은


모양이었다.

‘그 쓴 약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시몬은 거실로 향했으나, 뷔노는 보이지 않았다.

[피 대신 아이스티가 흐른다는 신인류 아이스티맨]

[잭파이, 윈터프로스팅과 공동 집필 의혹? 본인은 부정…….]

[블랙리버뱅크, 연이어 주가 하락세.]

거실 소파에서 신문을 보던 시몬은 무료함을 느꼈다.

‘별로 눈에 띄는 기사가 없네.’

집안을 둘러보던 그는 뷔노의 집무실 쪽에서 멈춰 섰다.


‘안에서 일하고 계신 건가?’

시몬은 집무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러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들어가도 되나요? 뷔노… 님?”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약간 걱정이 되었던 시몬은 문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아, 안 계시네…….”

시몬은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붉은 갈색의 원목 책상에 눈이 갔다. 집무실 책상에는 푸른 장미들이 가득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푸른 장미?’

벌써 블루 로즈 데이였던가? 시몬이 눈을 깜빡거렸다. 워낙 정신이 없던 터라 뭐가 오가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블루 로즈 데이. 그건 최근 생겨난 연인들의 날이었다.

헤르게임에서 단풍이 이어져 난 길은 예로부터 사랑의 길이라고 불렸다. 붉은 길을 따라서 걸으면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곤 했다.

봄부터 사귀었건 여름부터 사귀었건 중요하지 않았다. 연인이란 연인들은 가을이 되면 죄다 단풍 길을


따라서 걸었다.

연인이 없는 사람이라면 고백하고 싶은 상대에게 푸른색 장미를 선물한다. 푸른색 장미를 받고 같이 단풍


길을 걸으면 그 어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이루어진다, 하는 로맨틱한 풍습이 하나 덧붙여진 것이다.

꽃을 안 좋아한다던 뷔노였다. 정성스레 포장된 푸른 장미가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걸 본 시몬의


머릿속이 한 가지 망상으로 가득 찼다.

‘저거, 로미오들이 보낸 건가……?’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 장미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왜 받아주셨지? 설마, 내가 질려서…….’

장미는 선명한 푸른빛을 띠었다. 인조적인 느낌이 들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시몬은 장미를 손으로 건드렸다. 독한 향수에 식초 향이 약간 섞인 것 같은 미묘한 향이 났다.

“장미 향이 안 나네.”

몇 번 더 맡아봐도 마찬가지였다. 장미와는 거리가 먼 냄새가 풍겼다. 고급이 아닌 걸 거야. 시몬은


멋대로 눈앞의 장미를 깎아내렸다. 그런다고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그때까지 시몬은 대체 어떻게 하면 뷔노의 마음을 다시 자신에게 돌릴 수 있을까, 고민할 정신머리가


있었다.

향을 맡고 몇 분이 지나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균형 감각도 사라지고, 눈앞도


흐릿하게 보였다.

뇌 속 모든 회로가 다 끊기고 오직 하나의 길만 남은 것 같았다. 성욕으로 이어지는 길을. 온몸이


뜨거워지면서 피부에 닿은 옷, 바닥, 모든 게 지나치게 차갑게 느껴졌다. 다리 역시 주체할 수 없이
후들거렸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열이 단순히 돈다고 하기엔 너무나 기분이 이상했다. 시몬은 부엌으로 걸어가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흐른 물이 얼굴과 목가에 흘렀지만 개의치 않고 퍼마셨다.

‘…몸이 뜨거워.’

“…시몬.”

“뷔노!”

시몬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한눈에 봐도 이상한 시몬의 상태에 뷔노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주위를 둘러보자 푸른색 장미 다발이 보였다. 바로 상황이 파악된 뷔노가 한숨을 쉬었다. 푸른색 장미는
조사용으로 챙겨온 것이다.

시저는 최근 블루 로즈 데이가 다이아에서 만들어낸 날이었다는 걸 알아냈다. 그 푸른색 장미 안에 마약을


넣어 주고받기 위해서였다. 자연스럽게 고백인 척 비중독자에게 장미를 주기도 했다. 장미 향을 몇 번
맡다가 중독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최음제 효과를 내는 신종 마약을 넣는 때도 있었다. 그것 자체만으로는 중독성이 심하지 않다고


하나, 성범죄에 사용될 수도 있으니 이건 이것대로 문제였다.

“잡아 온 걸 기어코 맡았네.”

“아… 누가 줬어요? 장미?”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지 시몬은 이상한 얘기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뷔노는 시몬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완전 맛이 갔네.”

“…그, 래요?”

“남의 걸 건드리니까 좋았어?”

누가 좀, 이 열을 식혀줬으면……. 시몬이 흥분을 했을 때, 혹은 그 흥분을 해결했을 때. 이 두 가지


경험은 모두 뷔노와 연관되어 있을 때뿐이었다.

시몬은 본능적으로 뷔노를 향해 기어갔다. 의자에 앉아있는 뷔노는 눈썹을 찌푸린 채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시몬은 뷔노의 옷깃을 잡은 채 매달리듯 다리에 기댔다.

“흑, 읏… 빠, 빨리…….”

시몬은 뷔노의 상체에 팔을 감으며 엉겨 붙었다. 시몬의 뜨거운 숨이 뷔노의 목가에 닿아왔다.

눈가는 붉어지고 입술조차 도톰하게 붉은색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시몬은 견디기 힘든 듯 매 숨


하나하나를 고통스럽게 내쉬고 있었다. 그러나 뷔노는 가차 없이 시몬을 밀어냈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지?”

뷔노가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멋대로 들떠버린 자신의 탓이 컸다. 뷔노와 관계없는 일이니 혼자서 해결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시몬의
행동은 머리와 다르게 흘러갔다. 시몬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뷔노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하면 날 봐줄까?’

전에 했던 경험이 떠오르면서, 몸에 열이 확 달아올랐다. 시몬은 참지 못하고 상의 단추 두 개를 풀었다.


셔츠가 양옆으로 벌어지면서 새하얗고 아름다운 어깨가 드러났다.

“뷔노… 뷔노오……. 저 좀, 봐, 줘요.”

말끝을 잔뜩 늘어뜨린 채 시몬이 아양을 부렸다.

뷔노는 시몬의 페니스 근처를 발로 쓸어내렸다. 스쳐 지나가는 아주 작은 자극에도 시몬이 부르르 떨었다.
시몬의 성기는 이미 딱딱해져 속옷을 긁어 올리고 있었다.

시몬이 뷔노의 손을 붙잡았다. 동아줄을 잡듯 절실한 손길이었다.

“조, 조금 더…….”

“시몬.”

단호하게 이름을 부르는 뷔노의 말에 시몬의 정신이 살짝 돌아왔다.

“보, 보채려고 한 건 아니었…….”

저번의 일이 떠올라 시몬이 주춤거렸다.

뷔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건 싫었다. 성욕 하나 주체를 못 해서 뷔노가 자신을 경멸하게 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몸이 들뜨고 기분이 부자연스럽게 붕 떠 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시몬은 직접 자신을 달래지도 못하고, 뷔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못한 채 있었다. 그렇다고 상태가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갈수록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번엔 피부에 뭔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았다. 촉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진 탓이었다. 결국 버티지 못한


시몬은 셔츠를 벗어 던진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 하아… 하아…….”

그런 시몬을 보던 뷔노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경계하도록 버릇을 고쳐줘야 하는데. 뷔노의 반응을
살피던 시몬은 한숨을 쉬는 걸 보고 지레 겁을 먹었다.

“저, 차, 참을 수 있… 하, 어요. 참을게요. 미워하지 마세요.”

뷔노는 그제야 시몬과 눈을 마주쳐 주었다. 여전히 서늘한 말투였으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자업자득이야.”

“네, 네… 마, 맞아요. 제가 잘못한 거예요…….”

시몬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뷔노가 그 어떤 괴상한 말을 하더라도 뭐든지 수긍할 기세였다.


“이걸론…….”

시몬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참아야지. 아직 참는 법을 못 배웠어?”

“죄, 읏, 죄송해요.”

“…….”

“죽을 것 같, 흣, 목이 너무 타요…….”

시몬은 양팔을 뷔노의 어깨에 감싸고 입을 맞추려 했다. 뷔노는 눈만 찌푸리고 시몬에게 응해주지 않았다.
코끝이 닿기 직전에 거리에서 와주질 않으니 미칠 것 같았다.

시몬은 울상을 지은 채 뷔노를 보았다.

“제, 가 잘못했어요.”

시몬은 뷔노의 손등에 제 뺨을 댔다.

“하, 아, 하아, 뷔노, 읍…….”

뷔노는 망설이지 않고 시몬의 뺨을 쥐고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은 순간, 시몬은 자동으로 입을


벌리고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키스에 임했다.

평소보다 뜨거운 시몬의 입술을 베어 물던 뷔노가 혀로 은근하게 입천장을 훑자, 시몬이 몸을 크게 떨었다.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헐떡이며 애무를 받아먹으면서, 뷔노가 조금이라도 물러날 기미가 보일까
봐 애처롭게 매달렸다.

열기로 가득 찬 시몬의 머리는 평소의 수치심은 어딘가에 갖다버린 것처럼 온몸으로 뷔노에게 구애했다.

평소와는 다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뷔노는 시몬의 머리를 꾹, 누르고 뷔노의 바지춤에 얼굴을 묻게 했다.

“정성스레 벗겨봐.”

“…….”

시몬은 잠시 풀린 눈으로 뷔노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다가, 명령을 이해한 뒤에는 바로 손을 바지에 대려


했다. 뷔노는 시몬의 마른 손목을 잡고 낮게 말했다.

“입으로.”

“…흐, 으, 네?”

“입으로 벗기라고. 손 쓰지 말고.”

그 말에 시몬은 마치 처음 입질을 하는 강아지처럼 낑낑대며 바지의 단추에 입을 댔다.

가까스로 당겨서 단추를 풀어내자 이번에는 입으로 지퍼를 잡고 최대한 빨리 내리려 애썼다. 하지만
조급해하는 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았기에 흘린 타액이 바지를 적셨다.

“더럽히라고 한 적은 없는데.”

힘들게 여기까지 달성한 시몬은 열로 들뜬 정신으로 편법을 쓰기로 했다. 한 번에 바지와 속옷을 입으로
물고 끌어내리려 한 것이다.

옷이 무릎에 걸릴 정도로 내려가자, 뷔노는 무심하게 발로 남은 옷을 벗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못 참겠어?”

시몬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읏, 더 이상은…….”

뷔노는 서랍장에서 윤활유를 꺼내 시몬의 성기 위로 뿌렸다.

민트처럼 화한 느낌이 감도는 윤활유였다. 튜브에서 짜낸 윤활유가 닿자마자 시몬의 몸이 튀어 올랐다.

“뷔, 윽, 뷔노, 이건… 흐아…….”

“시몬, 남한테 의존하는 습관은 고쳐야지 않겠어?”

미끌미끌한 액체가 성기 위에서 흐르고 있었다. 시몬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의 손으로 성기를 잡고
문질렀다.

“윽!”

피가 몰린 성기는 아주 예민했다. 시몬이 제 손으로 성기를 한 번 문지를 때마다 강한 쾌감과 고통이


몰려왔다.

뷔노가 다리를 벌리자마자 시몬은 침대로 기어 올라가 엎드렸다.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양팔을 앞으로
뻗어 상체를 지지했다.

시몬은 혀를 살짝 빼물고 엎드린 자세를 취한 채 뷔노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마를 손으로 막은


뷔노가 말했다.

“허락.”

아무래도 약이 정신을 나가게 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말을 여러 번 해도 알아듣지를 못하는 걸 보니


말이다. 시몬은 풀린 동공으로 다급하게 말했다.

“아, 아, 제, 제발, 뷔, 뷔노… 핥게 해주세요.”

“핥으면서 가고 싶어?”

“네, 네.”

뷔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시몬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시몬은 정신없이 뷔노의 성기를 핥기 시작했다.
자신의 성기를 문지르면서 핥던 시몬은 머지않아 절정에 다다랐다.

“윽!”

시몬이 절정을 맞이한 후에도 몸을 움찔거렸다. 금세 다시 솟아오른 것이다. 뷔노는 그런 시몬을 보고


건조하게 웃으며 말했다.

“혀, 멈추면 안 되지.”

시몬은 계속해서 뷔노가 만족할 때까지 입을 움직여야 했다.


“으, 흑, 흐!”

뷔노가 세 번의 절정을 맞이한 후에야 시몬의 약효는 끝이 난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돼먹은 약이야.’

탈진한 시몬은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뷔노는 시몬의 엉덩이를 힘줄이 돋아있는 큰 손으로 찰싹 때렸다.
손바닥이 닿음과 동시에 탱탱한 엉덩이 살이 튕겼다.

“윽!”

성기 부분이 침대에 부딪혀 충격과 쾌감이 살짝 느껴졌다. 다시 한번 가볍게 간 시몬은 귀까지 빨개진 채
얼굴을 침대에 묻었다.

‘아, 약효가 아직 덜 가신 건가.’

“맞는 거로도 느끼는 줄은 처음 알았네.”

“아…….”

시몬은 아니라고 부정조차 하지 못했다.

“그동안은 만족 못 해서 힘들었겠어?”

엉덩이를 쓰다듬던 뷔노는 손바닥을 재차 강하게 내리쳤다. 시몬의 무릎이 꺾이며 종아리가 올라갔다.

“아흑!”

그럴 때마다 성기는 침대에 부딪히며 물을 내뱉었다. 뷔노는 수차례 엉덩이를 더 때렸다.

“뷔, 윽, 노!”

시몬은 이불을 손으로 꾹 말아쥔 채 쾌락을 견뎌내려 했다. 시몬은 입술을 악물고 버텼으나 금세 신음이
흘러나왔다.

뷔노는 꽉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놓았다, 몇 번 가볍게 때리기를 반복했다. 진한 분홍빛으로 물든 시몬의


엉덩이는 잘 익은 복숭아처럼 보였다. 꾹, 꾹, 눌리는 감각이 도저히 버텨낼 수가 없었다.

“흐윽!”

시몬은 한 번 더 절정에 이르렀다.

“하아…….”

시몬이 새빨개진 얼굴을 이불에 묻었다. 창피한 나머지 고개를 도저히 들 수가 없었다. 그런 시몬을 보며
뷔노가 놀리듯 말했다.

“네가 싼 거, 냄새라도 맡는 건가?”

“아, 아니에요!”

시몬이 상체를 일으키자, 침대 위에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되었다. 다리 사이의 이불을 보는 뷔노의 눈빛이
변했다.

“이 이불은 이제 못 쓰겠네. 이렇게 잔뜩 젖어서야.”


뷔노가 이불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질척거리는 액이 잔뜩 묻어난 이불을 보며 시몬이 낑낑거렸다.

“죄, 죄송해요…….”

시몬은 뷔노의 허리를 슬며시 안고 물었다.

“…제가 싫어졌어요……?”

“글쎄.”

뷔노는 시몬의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가는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글쎄라는 건 아니라는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한결 편안한 상황이 되자, 시몬이 가볍게 투정을 부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괴롭힐 리가 없어요. 첫 만남 때도…….”

시몬이 그 말을 하자마자 둘이 서로를 쳐다봤다.

첫 만남이라고 하면, 어떤?

두 가지 장면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시몬은 뷔노의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그, 제 귀걸이에 총 쏘았을 때, 말이에요.”

“아… 그랬었지.”

뷔노는 시가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시몬. 내 시가 향이 뭔지 아나?”

뷔노가 입을 살짝 벌린 채 손으로 시가를 피우는 흉내를 냈다.

“그건, 한번 맛, 봐야 알겠는데요.”

시몬은 조심스레 뷔노에게 입을 맞췄다.

“…바닐라 향이네요.”

“몰랐던 척하긴.”

뷔노가 손에서 시가 케이스를 놓았다.

“맞췄나 봐봐.”

시몬은 순순히 시가 케이스를 열었다. 시가 케이스에는, 갈색 겉지에 감싸여 있는 시가가 여러 개, 시가


커터가 하나, 그리고…….

“…이거.”

시가 케이스 안에는, 예전 혈석 반지가 보였다.

“아직 갖고 있었어요?”

뷔노는 말을 잇기 전에 입을 맞췄다. 시몬은 키스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언제부터 제가 시몬인 줄 알았어요?”

“언제부터겠어.”

뷔노가 뭐 당연한 걸 묻냐는 투로 답했다. 하긴 제 외모가 평범한 편은 아니었다. 시몬은 재회를


떠올리자 부끄러운 감정이 올라왔다.

‘제, 제 얼굴이 취향이시잖아요. 머리카락도. 에헤헤. 제, 제발 만나주세요.’

분명히 이 정도는 아니었으나, 시몬의 마음속 자신은 갈수록 왜곡되고 우스꽝스러워지고 있었다.

‘얼마나 별로였을까!’

시몬은 침대에 대고 이마를 몇 번 부딪혔다. 워낙 탄력 있는 매트리스라 그냥 이마가 부드럽게 튕겨


나오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10 년 만의 만남을 그런 식으로 하게 되다니.’

뷔노는 시몬이 이상 행동을 보이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뷔노, 저 다시 만났을 때 어땠어요?”

“너?”

뷔노는 곰곰이 생각했다. 어땠더라.

겁에 질린 호박색 눈동자를 본 순간 뷔노의 의식은 저절로 10 년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지금보다 미숙했던 자신과 훨씬 작았던 시저.

낭창한 팔다리, 분홍빛 머리카락, 여문 이목구비와 순수한 눈동자.

10 년이 지나면서, 완연한 성인이 된 그를 마주하자 오랫동안 눌러놓고 있던 감정이 다시 올라왔다.

‘내 거였는데.’

생각 이상으로 머리 안에 자리잡혀 있던 생각이 강렬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타인에 의해 억지로 빼앗겼던 과거를 돌려받고 싶어졌다.

“저건 내 거야.”

“네?”

“그냥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은데.”

“…그, 그랬어요?”

시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노골적인 욕망을 담은 뷔노의 언어는 언제 들어도 창피했다.

“그것뿐이었어요? 다른 마음은……?”

오랜만에 본 그는 꽤 성장했고, 피어난 미모는 여전히 제 취향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아예 못 알아보는


것 같아 꽤 괘씸했다.
“조금 괴롭혀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역시 그랬군요.”

“반갑기도 했어.”

“네?”

살짝 던진 한마디에 시몬의 눈이 둥그레졌다. 뷔노는 대화를 멈춘 채 밖으로 나갔다.

“어, 어디 가세요?”

“일하러.”

“아…….”

마음 같아서는 가지 말라고 붙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뷔노는 시몬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금방 돌아올 거니까.”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뷔노가 떠나고, 시몬은 약효가 덜 사라져 몽롱한 정신으로 발코니에 기대어 섰다.

“후우…….”

입에서 입김이 나왔다. 몸에서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열기 탓에 주위 공기가 서늘했다. 찬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고 옷 속까지 파고들었지만, 시몬은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뷔노는 어느새 건물을 빠져나가 텅 빈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시몬이 쳐다보는데, 뷔노 역시
시몬이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멈춰 섰다.

뷔노는 시몬이 있는 발코니 방향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입술을 길게 늘이고 각진 눈썹을 들어


올리는 특유의 미소는 언제 봐도 사람의 넋을 빼놓았다.

‘아, 이제는 진짜 안 될 것 같다.’

“…다녀오세요.”

시몬이 찡그리듯 웃었다. 빨개진 눈가와 억지로 지어내는 것 같은 미소를 본 뷔노가 잠시 멍하니
쳐다보았다. 꼭 처음 봤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17. 검은색 축제

검은색 자동차는 유리창이 온통 방탄유리일 뿐만 아니라, 옅은 갈색으로 보일 정도로 선팅이 진했다.


자동차는 절벽의 도로로 달리고 있었다.
노란 모래와 자갈만이 가득한 도로를 지나가는 내내 차는 덜컹덜컹 흔들렸다. 분명 위험한 길이었으나
차는 속도를 늦출 줄 모르고 더 빨리 가기만 했다.

앞에는 운전기사가 한 명, 뒤에는 못해도 70 대 후반으로 보이는 노인과 보좌인 남성이 한 명 앉아있었다.
클로버 보스와 그가 가진 초라한 아군이었다.

“간부들은 모조리 다 당했나?”

“연락이 되질 않은 거 보니, 시저 쪽에서 처리한 것 같습니다.”

시저 쪽은 충성스러운 저격수들을 데리고 있었다. 대부분 헤르게임 출신으로, 클로버 등 타 조직에


악감정이 큰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매수할 수조차 없으니 위치를 들킨 간부들이 자신을 보호하기란
불가능했다.

곧 자신 역시 추적당할 것이었다. 클로버 보스인 그는 아주 멀리, 시저의 손이 닿지 않을 해외까지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인원에, 위치까지 알아 내놓고 끝내질 못하다니! 젠장!”

클로버 보스는 쾅쾅 앞 좌석을 발로 차고, 주먹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후, 살아 돌아가? …그 일족은 뭐가 있는 게 분명해.”

“마더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스페이드에서 마더를 거의 반죽음으로 만들어놓았는데도 그 끈질긴 X 은 다시 살아 돌아왔으니까.”

현재 클로버 보스이자, 전 스페이드 간부인 그가 하는 말이니 사실일 것이다. 보좌는 흥미로운 눈길로
보스를 보았다.

보스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거울로 본 운전기사의 운전이 약간 격해졌다.

“이번에야말로 해치울 거라 믿었는데…….”

“시저 쪽에선 이미 저희를 추적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러니 가능한 한 빨리 도망가야지.”

클로버 보스는 손톱을 짓씹었다.

‘다이아는 오랜 친분과 신뢰를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며 실버가 했던 말을 클로버 보스는 잊지 않고 있었다.

‘물론 거래에는 대가가 오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요.’

“대체 어떤 걸 요구할는지. 쯧, 애송이가…….”

원래 다이아의 보스도 아니었던 주제에, 어느 새에 다이아를 삼켜버렸는지 모르겠다. 정치인과 사업가의


성격이 섞여 만들어진 그 느물거리는 성질은 좀체 대처할 수가 없었다. 클로버의 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제 아들에게 일단 실버에게 연락을 취할 것을 명령하긴 했다. 아직 보스 자리를 아들에게 넘긴 것도


아니니, 시저 조직이 나타나서 자신을 먼저 죽여버리면 큰일이었다.

내분이 일어나면 아들이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거나, 외부 조직이 이때를 틈타 클로버의 보스 자리를
뺏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의 노쇠한 심장이 긴장과 불안으로 쿵쿵 뛰었다.

“…정말 견딜 수가 없군.”

그는 약통에서 꺼낸 알약을 입에 몽땅 털어 넣은 뒤 물도 없이 삼켰다.

“다이아의 보스가 클로버를 요구하시면 어쩔 작정이십니까?”

“클로버를? 조직 전체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협잡꾼, 도둑도 안 할 사기다.”

“왜죠? 목숨과 부를 보존해 준다는데, 그 정도 거래면 손해는 아니지 않습니까?”

“클로버는 내 거야. 오래도록 일군, 내가 만들어낸 내 조직이란 말이다. 내 새끼를 돌보는 시간보다
조직에 신경 쓰던 시간이 많았다고. 그걸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애송이한테 넘길 수는 없지.”

스페이드에 빌붙어 조금씩 일을 떼오고, 야금야금 성장시켜온 조직이었다. 추악하다고 평가받을 짓도


수도 없이 했다. 조직전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4 대 조직 안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모두 그의 아집
덕분이었다.

“그렇군요. 욕심이 많은 인간이라는 얘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그가 정말 클로버를 요구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거절하시겠습니까?”

“거절? 거절은 안 하겠지. 그런 협잡꾼에게는 똑같이 갚아줘야 해. 클로버를 주는 척하며 놈의 뒤통수를


갈기고 장기를 긁어버릴 테다.”

노인은 눈을 깜빡거렸다.

이제 보니 그는 제 보좌가 아닌 것 같았다. 얼굴도, 생김새도, 목소리도 똑 닮은 것처럼 보였는데


기시감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분위기가 달랐다.

“…너, 누구냐?”

노인은 자신의 보좌라고 믿었던 남자를 보며 말했다.

“서, 서, 설마. 이럴 리가.”

“한 방향만 보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닙니다. 주위를 다 돌아보셔야죠.”

보좌는 얼굴에 쓰고 있던 고무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누구나 한눈에 반할 법한 단정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은색 머리카락과 연분홍빛 눈은 그의 신분을 증명했다.

“…실버! 왜 여기, 아, 아니.”

“친구와 함께 차에 타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기다리게! 실버, 방금 한 말은, 허세였어. 부하 앞이라고 생각해서 혀를 잘못 놀린 거라고.”

실베스트리스는 클로버의 보스가 변명하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는 실베스트리스가 그의 말을


기다리는 걸 보고 더욱더 지껄이기 시작했다.

“다, 다이아와 클로버는 친구이지 않나……?”

“유언이라고 하기엔 아쉽군요.”

덜컥, 잠금 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운전기사가 잠겨있던 문을 푼 것이다.


클로버의 보스가 앉아있던 뒷좌석의 문이 헐거워져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뒤의 낭떠러지는 끝을 알
수 없이 깊었다. 클로버의 보스를 발로 밀었다.

클로버의 보스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차 모서리를 잡고 절실히 매달렸다.

“으, 헉, 흐… 미, 안하네! 내, 내가, 클로버! 아니, 뭐든 주겠네! 전 재산이라도…….”

“괜찮습니다. 주지 않으셔도 가져갈 거니까.”

버티지 못한 보스의 손이 결국 미끄러졌다. 클로버 보스의 몸이 절벽으로 나동그라지는 걸 확인한 실버는


손짓했다. 운전기사는 문을 도로 닫았다.

“…사람들이 저걸 실족사라고 생각할까?”

운전기사, 아니 머스캣이 실버에게 물었다.

“실족사라니요. 그는 불행히도 시저 조직이 설치한 폭탄 때문에 죽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기억되길 바란다면.”

뚝. 무언가 끊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뭡니까?”

“신호를 보냈어. 네 부하들한테.”

“제 부하들과 연락을 했다고요?”

실베스트리스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머지않아 다이아의 조직원들이 왔다.


그들은 클로버 보스의 차 밑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 밑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터졌고, 전복된 차량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 광경을 천천히 지켜보던 머스캣은 자신의 차를 탔다.

“다음이 마지막 작전이군. 잘해.”

“맡겨만 주십시오.”

실베스트리스가 답했다. 머스캣은 말없이 문을 닫고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시저 조직 건물 앞, 머스캣의 차창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뷔노였다.

차 안에는 머스캣밖에 없었다. 머스캣은 차분하게 차에서 내린 뒤, 조직의 전통적인 인사를 했다. 보스인
뷔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머스캣이 말했다.

“돈 시저.”

자연스레 인사를 받은 뷔노는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며 물었다.

“어딜 바쁘게 다녀와?”

머스캣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푸른 장미의 뒤처리를 확인하고 왔어요.”

뷔노의 뒤에는 그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하이직이 서있었다. 뷔노는 하이직의 불을 받으며 말했다.

“그래? 보고해 봐.”

“푸른 장미는 계속 수거한 탓에 현재 거의 보이지 않고 있어요. 피네 언니 말대로 꽃을 태우는 문화를


만든 게 가장 도움이 됐어요. 노새들의 루트는 거의 봉쇄된 것 같아요.”

머스캣의 말에 뷔노는 피네가 뿌듯한 얼굴로 내세웠던 전략을 떠올렸다.

‘차라리 붉은색 축제에서 장미를 태워버리는 걸로 하지. 미신적인 걸로 시작된 거라면 미신적인 걸로
설득하는 거야. 푸른색 장미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 꽃을 받아 들면 연인의 결말이 어떻게
되겠어?’

피네의 주장은 그럴듯했다. 시저는 모아둔 장미를 온통 붉은색 축제에서 태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피네의 얘기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붉은 단풍들을 집어넣고 태우는 축제에서, 푸른색 장미 역시 던져넣기 시작했다.

태울 꽃에 마약을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약상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 모든 상황이 잘 풀려가고 있네. 거짓말처럼.”

뷔노는 머스캣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 시선을 받고도 머스캣은 흔들림이 없었다.

뷔노가 시가를 물자, 그 끝이 붉게 타오르며 연기를 자아냈다. 회색 구름을 뱉으며 뷔노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클로버의 보스는 찾았어? 누군가가 숨겨주지 않은 이상, 지금쯤이면 찾을 법도 한데.”

“아무래도 외국 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불법적인 루트로 빠져나갔을 것 같은데, 제가


찾아볼게요.”

머스캣은 뷔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얘기했다. 하이직이 둘 사이의 대화에 끼었다.

“네가? 최근에 일도 많이 했는데, 나한테 맡기는 건 어때.”

머스캣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정 그렇다면.”

뷔노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낮게 읊조렸다.

“머스캣.”

달라진 뷔노의 분위기에도 머스캣은 긴장하지 않았다. 맹수 같은 눈으로 뷔노는 머스캣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내 포식자 같은 미소를 입가에 걸며 말했다.

“요즘 얼굴을 잘 못 봤네. 힘든 일은 없고?”

“불편함 없이 지내고 있어요.”


하이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릴 땐 소심하게 떠는 것도 귀여웠는데 말이야.”

뷔노는 머스캣의 어깨를 다정하게 잡으며 말했다.

“힘든 일 있으면 말하고. 너만 믿는다.”

머스캣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예, 돈 시저.”

“시몬.”

“뷔노?”

금방 돌아온다던 약속대로 뷔노는 정말 금방 돌아왔다. 하지만 뷔노는 아직 일을 다 처리한 것이


아니었기에, 곧바로 본론부터 말했다.

“알려줄 게 있어. 네 아버지에게 장기를 이식해 줄 사람이 나타난 모양이야.”

“예?!”

시몬의 얼굴이 놀라움과 환희에 찬 표정으로 변했다. 그러다 뷔노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의문이
들었다.

‘역시 뷔노가 병원비를 내왔구나.’

시몬이 뷔노에게 물었다.

“혹시 수술비도 익명의 기부자 ‘M’이 내준다고 했나요?”

“뭐… 그런 셈이지.”

“솔직히 말해주세요, 뷔노.”

“뭘?”

“아버지의 병원비를 내줬던 건… 역시 뷔노죠?”

“내가 아니야.”

“…네?”

“마더가, 네 어머니께 보내려던 돈이 있었거든. 난 단지 그걸 썼을 뿐이지.”

나는 캐서린의 계획에 찬성한다. 금주법은 반드시 시행되어야 할 법이었다. 곧 만들어질 시저의 자금원을
위해서라면 말이다.

뷔노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일기장을 읽으면 읽을수록 몰랐던 사실을 다시 알게 되었다.

‘설마 둘이 친구였을 줄이야.’


이니셜을 M 으로 한 건 메이의 M 을 따온 것이었다.

“그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걸 병원비로 써주셔서, 저희 아버지가 산 거예요.”

시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시몬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훌쩍거리던 시몬은 눈물이
멎자, 손을 떼어내고 결심한 듯 말했다.

“저, 아버지께서 수술하실 때까지 곁에 있어드리고 싶어요.”

그 말에 뷔노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클로버가 시몬을 공격했을 때 뷔노가 그를 감쌌다. 그 정보는 이미


멀리 퍼져 있을 상태였다.

더 이상 다른 조직들이 예전처럼 시몬을 ‘뷔노의 노리개’ 아니면 ‘로미오 대체재’ 정도로 취급하진
않을 거란 의미였다. 그러나 뷔노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나랑 있었다는 걸 들킨 이상, 아주 위험할 텐데. 네 아버지가 타깃이 될지도 몰라.”

시몬은 10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자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수술이 잘못되면 마지막 시간이 될지도 모르니, 찾아가고 싶어요. 이기적일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시간이라. 뷔노가 씁쓸히 입맛을 다시다, 고개를 끄덕였다.

“피네랑 같이 가도록 해.”

“피, 피네 님이요?”

“싫어?”

“아, 아니에요.”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무서웠을 뿐. 시몬은 피네가 꺼지라며 자신에게 으름장을 단단히 놓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피네 님이랑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뷔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뷔노를 보던 시몬이 눈치를 보다 물었다.

“저, 뷔노, 10 년 전에… 왜 떠난 거예요?”

“임무가 끝났으니까.”

“…그런가요.”

“그리고 내가 함께 있으면 네가 위험해질 걸 알았으니까.”

시몬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때의 임무는, 네 어머니를 죽인 사람을 찾아내는 거였어.”

“네?”
시몬이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당시에는 뷔노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다이아와의 유착 관계를
찾아내려던 건, 그 남자가 캐서린을 죽였다는 확실한 증거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제 어머니를 죽인 사람은… 누구였나요.”

시몬이 입술을 꽉 깨문 채, 보기 드물게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마을에 살던, 블랙리버의 상원 의원.”

“…뭐라고요?”

‘예전, 생일 파티에서도 본 적 있는 사람이었는데.’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해놓고, 뒤에서는 그런 수작을 부렸다는 건가.

“왜, 죽인 건데요?”

“네 어머니가 자신의 지지율과 아내의 회사의 주가를 낮췄으니까.”

“…고작 그딴 이유로.”

“그딴 이유여도 조직은 돈이 되면 사람을 죽여.”

그 말에 시몬이 뷔노를 올려다보았다.

“그, 건… 시저도 마찬가지인가요? 돈 때문에, 사람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네. 술을 먹고 죽는 사람도 많이 있으니 말이야.”

그건 시저가 운영하는 술집에 관한 걸 얘기하는 걸까? 거기서 알코올 중독으로 죽은 사람들? 시몬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허망하게 느낄까 봐 설명하려고 하진 않았지만, 그 놈 끝이 좋진 못했어.”

뷔노는 죽음까지 이르는 상세한 과정을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다 말았다.

“그럼, 상원 의원은… 심장 마비로 죽은 게 아닌가요?”

예전에 시몬이 기사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심장 마비로, 갑작스럽게 죽었다고.

‘그 당시는 애도했었는데…….’

“그 남자는 살해당했어.”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걸 보니 전 선한 사람은 아닌가 봐요.”

“뭐 그 정도로. 가족의 원수야, 죽이고 싶은 게 당연…….”

뷔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시몬은 전에 얘기해 주었던 친부모님의 죽음보다 더 깊은 슬픔이 뷔노의 안에


있다는 걸 눈치챘다.

“시몬, 옷이 얇은 거 같은데.”

“네?”
“날이 추워졌거든.”

뷔노는 시몬에게 검은 재킷 하나를 가리켰다. 시몬은 묘한 표정으로 재킷을 챙겨 입었다. 뷔노는 검은


재킷에 달려있는 동그란 옷핀을 흘깃 보았다.

‘이 정도 장치는 해둬야겠지.’

“저, 뷔노, 그럼…….”

뷔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우물쭈물하던 시몬이 기습적으로 뷔노의 뺨에 키스했다. 눈을 꼭, 감은


채 마치 산들바람이 스쳐 지나간 것처럼 얕은 키스였다.

눈을 감아버린 시몬과 달리 뷔노는 눈을 뜬 채 이 모든 것을 지켜봤다. 그는 잠시 제 뺨에 남은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다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피아노의 건반이 묵직하게 내려앉으며, 장송곡이 울려 퍼졌다.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방문한
사람들의 수는 많았다.

“설마, 클로버의 보스가 죽을 줄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클로버의 보스마저, 겠지.”

“다음은 어딜까요? 역시 다이아?”

“쉿, 저기 왔어요.”

한 남자가 뒤에 하얀 정장의 사람들을 줄줄이 이은 채 걸어 들어왔다. 그가 장례식장에 발을 들인 순간


모두가 숨을 들이켠 채, 조용해졌다.

깔끔하게 정돈된 은발, 주름 하나 없는 검은 정장. 단정한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연분홍빛 눈동자가


슬픔에 젖어있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신께서, 그의 영혼을 올바른 곳으로 보내기를.”

새하얀 백합이 장갑을 낀 손안에서 약간 구겨졌다. 줄기가 미세하게 꺾인 꽃을 남자는 갈색 관 위에


올려두었다. 꽃잎 하나가 툭 떨어졌다. 그는 하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관 옆에 서있는 자는 클로버의 차기 보스이자 죽은 전 보스의 아들이었다. 충격이 심히 큰 건지, 그는 꽤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똑같이 하얀 장갑을 끼고 온 차기 보스의 손을 실버가 잡고 흔들었다.

“클로버를 잘 부탁합니다.”

“장갑을 끼고 온 건, 제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거군요.”

차기 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 클로버는, 다이아를 형님으로 모실 것입니다.”

4 대 조직 중 하나의 몰락이었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앞으로 다이아는 헌신적으로 클로버를 보살필 것을 약속하죠. 마치 동생과 같이.”

실버가 부드럽게 웃었다.


“예. 모든 건 오메르타(규율) 대로.”

실버는 차기 보스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클로버가 손안으로 들어왔으니, 나머지 둘이 들어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18. 불청객

무례하고 느닷없는 방문이었다.

이날 아침, 시저 조직의 건물 앞에 한 무리가 둘러쌌다. 뷔노는 눈살을 찌푸리며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내려갔다. 그는 그 사람들의 차림을 보고선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더의 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를 위해서 왔습니다.”

경찰, 아니면 경찰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한 문장에 주위 조직원들이 동요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나 뷔노는 눈을 가늘게 뜰 뿐이었다. 살인 사건 따위 신경 쓰는 헤르게임이 아니었다. 이 ‘경찰’


들은 누군가의 의지가 강렬히 반영된 게 분명했다.

“영장은? 영장 없이는 못 들어오지. 우리 구역.”

영장은 없어 보였다. 그저 그들은 뷔노를 찾고, 뷔노의 앞에 서서 이 말을 뱉기 위해 온 것 같았다. 정식


수사인지 아닌지 추궁하는 뷔노에게, 그들은 앵무새처럼 두 문장을 반복해서 말했다.

“당신은 용의자입니다. 마더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왔습니다.”

“내가 마더를 죽였다는 증거가 어디 있는데?”

그들의 수작이 눈에 훤히 들여다보였다. 조직에 분열을 일으켜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준비했던
물건을 들고 왔다. 꾹. 물건의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뷔노는 배신자야.

그 음성은 조직 모두에게 익숙했다. 옆에 있던 부하들이 모두 뷔노를 쳐다보았다.

“저게 뭡니까, 보스?”

―무슨 뜻이죠?

―마더를, 어머니를 살해한 게 그놈이라고.

―마더가 죽었다고요?

―사람들은 어머니가 보스 자리를 넘긴 줄로만 알지.

―그렇죠, 저도 계승식 자리에 있었으니까요.

―그건 협박이었어. 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머스캣.”

뷔노의 눈이 흔들렸다.

“하.”

“저희는 조직들을 조사하던 도중, 이러한 대화를 도청하게 됐습니다. 하여 당신을 마더 살인 사건 혐의


로―”

그때 뷔노의 등을 타고 불길한 예감이 확 올라왔다. 지금까지의 감정과 비교도 안 되는 불길한 감.

뷔노는 앞의 있는 모든 사람을 무시하고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경찰들은 이 말을 전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는지, 뷔노를 잡지는 않았다.

방 안으로 돌아온 뷔노는 전화기가 울리는 걸 발견했다. 뷔노는 전화기를 거칠게 들어 올렸다.

―보스? 드디어 받으십니까!

병원으로 따라갔던 부하의 목소리였다. 뷔노의 심장이 한층 더 빠르게 뛰었다.

“본론.”

―아, 예, 예! 큰일 났습니다. 피네 님께서 중태이십니다.

그 한마디에 머릿속에서 뭔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이유는?”

―그, 다른 조직으로 추정되는 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그 와중에 그… 애인 분도 납치된 모양입니다.

뚝.

뷔노는 연락을 끊었다.

뷔노가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병실에 도착했을 때, 피네의 병실 안에는 이미 하이직이 와있었다.

“에이 썅, 뒈질 뻔했네.”

“잘했네, 잘했어. 병실에서 싸우니까 바로 치료도 받고.”

“아파 죽겠는데 비꼬냐?”

침대에 누워있는 피네는 턱을 당겨가며 누운 상태로 제 배를 보기 위해 낑낑대고 있었다.

“어디, 어디?”

하이직이 피네의 배를 보더니 자지러지게 웃었다.

“왜 웃어?”

“끅, 왜 웃었는지 말하면 화내잖아.”

“빨리 안 말해?”
하이직이 꺽꺽 웃다가 대답했다.

“실험 쥐 배 가르고 꿰매면 딱 저 모양새라.”

하이직은 오른손으로 곡바늘을 움직이는 시늉을 했다.

“이 미친놈이!”

피네는 하이직을 걷어차려 했으나, 힘없는 발길질밖에 할 수 없었다. 하이직은 기분 나쁠 정도로


과장되게 피하는 리액션을 취했다. 피네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건 말건 하이직은 계속 웃어젖혔다.

“어떻길래, 나도 좀 보자.”

피네가 힘겹게 상체를 들어 올리고 보인 제 배에 혀를 끌끌 찼다.

“아씨… 봉합 자국 눈에 XX 띄게 남았네.”

힘이 빠진 피네는 뒤로 드러누웠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피네는 느껴지는 고통을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표현했다.

“피네.”

“보스……?”

뷔노가 천천히 피네의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

“몸은 어때.”

“괜찮아. 크게 다친 거 아냐. 나보다는 그, 시몬이 문제지.”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난 거야?”

“음, 그러니까. 수상쩍은 놈들이 들어왔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몬을 납치하러 온 것 같았어.
그놈들은 사정이라는 걸 봐주지 않더라고. 병원 안에서 총을 꺼내 쏘는, 그런 미친 짓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피네는 몇 명을 잡았고, 몸으로 막아섰다. 그 와중에 총알은 배에 맞았다. 총에 맞은 순간을 생각하자


고통이 밀려와, 그는 얼굴을 구겼다. 양손을 얼굴에 갖다 대고 잠시 말이 없던 피네가 탄식하며 말했다.

“XX… 미안해, 보스. 못 막았어.”

시몬은 피네가 총에 맞자마자, 그들 앞으로 뛰쳐나갔다.

‘얌전히 가겠습니다. 아무도 쏘지 말아주세요.’

이미 총에 쏘인 피네는 물론이고, 다른 환자나 아버지 역시 걱정하는 눈치였다. 피네는 욕을 몇 번 더


내뱉었다.

“예전에 걔한테 지 X 좀 했었는데, 조금 미안해지더라. 그나마 다행인 건 눈치가 아주 나쁘진 않은


모양이라.”

“어떤 면에서?”

“걔 코트에 위치 추적기 달았잖아. 내가 코트를 쳐다보니까, 눈치채고 냉큼 입고 가던데?”


그 말에 뷔노의 표정이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

“클로버 놈들인가?”

“클로버?”

“시몬을 잡아간 놈들은 꽤 거칠더라고.”

피네의 말을 들은 뷔노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이건 복수라고 할 수밖에……’

시몬을 잡는다고 클로버가 회생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뷔노의 입매가 굳었다. 다른 연락을 받은


하이직이 뷔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언니. 조직원들이 꽤 동요한 모양이야.”

단순히 경찰이 왔다는 이유로 마더 살해 의혹은 이미 기정사실이 됐다. 그 앞에서 뷔노가 차를 타고


도망가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애들이 우리를 위해 일해줄지 모르겠네. 마더가 구심점이었으니까. 그리고 다이아 보스 쪽 회사에서


유통되던 유리도 제공하지 않겠다고 선포했고.”

“아예 끝을 보겠다 이거군.”

“뭐 나간 조직원들이 조직 내부의 일을 나불거릴 일은 없을 거야. 오메르타 때문이라도.”

오메르타는 침묵의 계율. 명칭은 조직마다 달랐지만, 이 규율만은 모든 조직이 공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첫째 규칙은 그것이었다. 조직의 일을 발설하지 않는다.

“…아…면.”

피네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을 몇 번 뻐끔거렸다. 입모양을 읽을 수 없던 뷔노가 피네의 입으로 귀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아주 조용한 속삭임이 전해져 왔다.

“언니… 배후 알아내면…….”

뷔노는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을 본 피네가 말을 이었다.

“나 불러, 꼭.”

그 말을 하고 탈진한 듯 피네는 눈을 감았다. 뷔노는 피네의 앞머리를 넘겨주곤 자리에서 물러났다.

저 건너편 병실에는 시몬의 아버지, 그의 수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뷔노는 시가를 문 채 그쪽을 잠시
보았다.

‘성공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텐데.’

“언제쯤 깨어나지?”

주어가 없는 말이었지만 하이직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한 이틀 정도 후면 깰 것 같다던데. 그건 왜? 언니가 대신 옆에 있어 주게?”


하이직이 웃음을 머금었다. 벌써 그 정도 사이냐는 의미였다.

“생사를 오가는 어려운 수술인데, 일어나고 생판 남을 보고 싶을까. 아드님은 보게 해드려야지.”

카렌 렌드버그. 검은색 명패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뷔노가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앉아있던,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내가 메이를 죽인 사람을 상대해 줄 거라고 믿다니 대단하군. 당장 꺼져.”

뷔노는 예전의 기백을 잃지 않은 노장을 보며 생각했다.

‘이빨 빠진 사자는 아니군.’

“…장난은 그만 치시죠.”

“뭐어?”

카렌은 큰소리로 말하며 분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뷔노가 제 호통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카렌은 멋쩍게 입맛을 다시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들켰냐?”

그는 피식 웃으며 바퀴 의자를 굴렸다.

“놀리고 싶었는데 잘 넘어오지도 않고.”

그의 옆에는 갈색 단발을 한 여자가 카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농담은 좋지만, 시간이 지체되고 있지 않나요?”

“아, 그래. 이쪽은 제인이야. 내가 저번에 얘기했던.”

그 말에 뷔노가 제인 쪽을 쳐다보았다. 꽤 비범한 업적들과 다르게 아주 평범한 인상이었다.

“너무 쳐다보시니 쑥스럽네요.”

쳐다보지 말라는 얘기였다. 뷔노가 제인에게 물었다.

“일은 잘 풀린 건가?”

“네, 그렇습니다.”

확언하는 태도가 아주 자신만만했다.

뷔노는 마더의 일기장을 꺼냈다. 그 한 페이지를 펼쳐 책상 위에 두자 탄식이 흘렀다.

“카렌 님께 이런 일도 있었습니까?”

카렌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과거가 다 까발려지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저도 얼마 전에 느꼈습니다.”
“너 같은 경우는 가짜 과거 아니었냐?”

“뭐, 의도한 일이니까요.”

그 말에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영악해, 아주 영악해. 이 정도까지 하지 않아도 그놈은 헤르게임에서 손을 뗄 텐데.”

“확실한 편이 좋으니까.”

뷔노는 깔끔히 과거를 청산하는 걸 기대하며, 가방을 손에 넣었다.

“서류는 잘 받아 가겠습니다.”

뷔노가 물러가려고 할 때였다.

“그거, 함정 파놓은 거 쉬운 일 아니었습니다.”

제인이 흘리듯 말했다.

“실패하지 마세요. 당신이 실패하면 난 역대 최악의 인수 합병을 진행한 브로커로 소문날 겁니다.”

“참고해 두지.”

뷔노는 밉살스러운 말을 던졌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명함을 흘깃 보았다. J. 마이어.

“내 조직의 자문역으로 들어오게 되면 굳이 이름을 숨길 일도 없을 텐데.”

“끌리는 조건이네요.”

제인이 피식 웃었다. 일할 때 여자 이름을 쓰면 잘 고용되지 않았다. 그러니 약자인 J 만을 명함에 쓴


것이다.

“자, 꼬시는 건 그만하고. 네 부하로부터 애타는 전화가 온 모양인데.”

“전화?”

“전화가 걸려오더라고. 아까는 대화 중이라 무시하고 있었는데, 정확히는 네 부하가 말을 못 건 거지만.”

뷔노는 재빨리 전화를 받아들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상대를 알아챈 뷔노의 표정이 구겨졌다.

“실베스트리스.”

―곤란한 상황이시죠.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도와줘? 너희가 벌인 일을?”

하하, 전화기 너머에서 웃음이 울려 퍼졌다. 그가 소리 내어 웃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추궁하실 때가 아닐 텐데.

“…….”

―우리, 대화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19.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블랙리버뱅크, JP 컴퍼니와 인수 합병 진행]

[금주법 위헌 판결났다… 밀주업 좌절]

신문 기사를 훑어보던 실베스트리스의 눈이 두 기사에 멈추었다. 얼마 전, 그는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은행 블랙리버뱅크를 인수한 바 있었다.

24 시간 남짓한 시간 탓에 직접 방대한 장부를 다 확인하지 못했다는 불안감은 남아있었지만, 변호사들을


시켜서 정보를 검토했으니 괜찮을 것으로 판단했다.

‘무엇보다 J. 마이어가 인수 합병을 진행했으니.’

그 명성답게 J 는 블랙리버뱅크가 제시한 주가의 반을 깎아서 인수한 상태였다. 나라가 뒤집힐 문제에, 이
이상의 시간을 쏟을 수는 없었다. 금요일 종가로는 알 수 없었다. 조만간 주식 시장이 열릴 그때,
판가름이 날 것이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블랙리버뱅크를 인수했다는 소식이 퍼진 후였다. 실베스트리스는 살면서 조모의 환한 웃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실베스트리스의 아버지와 부인의 유일한 아이가 유산되고, 그의 조모는 어쩔 수 없이 실베스트리스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친부가 남긴 사생아인 그를 조모는 반긴 적이 없었다.

“경쟁도 심했을 텐데, 잘했다.”

조모의 한마디는 그동안의 노고를 다 녹여 내리는 것만 같았다.

블랙리버뱅크는 하락세긴 해도 명실상부 이 나라 5 대 은행 중 하나였다. 인수 과정에서 경쟁이 붙었지만,


결국 차지한 건 자신이었다. 실베스트리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클로버는 이미 손에 들어온 바 있고, 시저는 밀주업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 데다가 자신이 일으킨 마더


살인 의혹으로 휘청거렸다. 하트야 계속된 근친결혼으로 수뇌부들의 뇌가 멍청해진 지 오래니 간단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베스트리스의 기분은 아주 좋았다. 인생에 있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좋은 흐름을 타는 구간이 있다는데,
그에게 있어서 그건 요즘인 것 같았다.

“실버 님.”

“온 모양이군요.”

아마 이쯤이면 한계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실베스트리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안은 소리 없는 총성들로 가득했다. 다이아, 시저. 하얗고 검은 정장을 입은 양 조직원들 사이에


언제 공격을 시작할지 모르는 팽팽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오랜만입니다, 뷔노. 마음은 정하셨습니까?”

“정했으니 불렀지.”

“드디어 당신이 현명한 선택을 하는 날이 오는군요.”

뷔노가 현명하지 못했다고 대놓고 내리꽂은 것이었다. 시저의 조직원들은 실베스트리스를 향해 살기를
뿜었다.

그 가운데 두 사람만이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뷔노 역시 실베스트리스의 발언에 그다지 동요하지


않은 것이다.

“실버, 아니 실베스트리스. 미운 오리 새끼라고 불린다지?”

“이런, 뒷조사까지 하시고. 드디어 저한테 관심이 생긴 겁니까?”

말투는 태연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그러나 말을 시작하기 전 늘 띠는 미소가 잠시 지워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뷔노는 여유롭게 말을 이어갔다.

“재벌가의 사생아로 태어나서 아등바등 노력했나 봐. 아마 가문의 회사도 차지하고 싶었을 테고.”

“노력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이미 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네 것?”

뷔노는 오랜만에 시가 하나 입에 물지 않은 채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기어코 그 콧대 높으신 조모의 인정을 받아냈나 보지?”

그 말에 실베스트리스의 표정이 드디어 무너졌다. 굳은 입매, 올라간 한쪽 눈썹. 그걸 보는 뷔노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누가 그 소리를 했습니까.”

참으로 그답지 않았다. 평정심을 유지한 상태였다면, 정보의 경로보다 뷔노가 알고 있는 정보가
어디까지인지, 이 말을 하는 의중이 뭔지 고민해 대책을 세워내려 했을 것이다.

“더러운 피는 절대로 안 받는다고 공언하셨던데.”

“…그래 봤자 소용없습니다. 이미 제 수중에 넘어온 걸 어찌하시겠습니까?”

이미 실베스트리스가 아니면 회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나이트들은 손쉽게 회사를 장악했다.

“…일단 선물을 하나 주지.”

실베스트리스에게 뷔노는 아주 두꺼운 장부 하나를 건넸다. 실베스트리스는 아직 여유로운 가면을 벗지는


않았으나, 살짝 떨리는 손으로 장부를 열어보았다.

“예전에 네가 줬던 회계 장부가 있었잖아? 그걸 생각해서 다시 돌려주고 싶었지.”

하트의 도박장에서 다이아가 그동안 돈세탁 및 탈세를 해온 정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모든 범죄는 헤르게임 안에서 용인되었지만, 하나는 아니었다. 탈세.

연방 정부는 절대 세금을 내지 않는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장부의 숫자들은 단순한 블러핑도 사기도 아니고 진짜 회계상의 숫자들이었다. 기억력이 좋은 그가 놓칠
부분이 아니었다. 실베스트리스는 회계 장부를 살피며 생각했다.

‘나이트가 뷔노 옆에 계속 붙어있었을 텐데.’

머스캣은 물론이고 나이트까지 뷔노의 행적을 일일이 보고하도록 되어있었다. 실베스트리스는 다소


당혹스러운 얼굴로 뷔노를 마주했다.

“얼마 전에 인수했지. 블랙리버뱅크.”

급하게 처리한 일이긴 했지만, 분명 괜찮으리라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뷔노가 은행을 언급한 후로
불안감에 실베스트리스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네가 심어놓은 나이트들 덕에 이사들이 고생이 많은 모양이던데.”

“…….”

둘 중에서 조잘조잘 떠드는 건 실베스트리스의 일이었는데, 이제 그는 별말이 없어졌다.

오히려 뷔노가 오래도록 숨겨왔던 장난감을 자랑하는 아이같이 신나 하며 말하고 있었다.

“너만 다 알고 있는 건 너무 치사한 거 같아서 내가 수를 좀 썼지.”

“수?”

그 말과 동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띠디디― 띠디디― 띠디디―

정갈한 수신음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었다. 실베스트리스는 전화를 받기 위해 손을 뻗지 않았다.


뷔노는 친절하게 전화기를 들어 올려주었다.

“직접 귀로 듣지 그래. 제 귀로 들은 건 잘 믿잖아?”

뷔노가 내민 전화기를 그는 얌전히 받아 들었다. 귀에 대자 신임하던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다르게 잔뜩 떨리고 있었다. 실베스트리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비서의 말을 들었다.

“그렇습니까.”

실베스트리스는 전화기를 한번 꽉 움켜쥐었다.

“오늘 주당 20 달러로 떨어졌단 말입니까? 금요일에 주당 28 달러였던 주가가? 3 일 만에?”

그는 비소를 지으며 뷔노를 흘끔 보았다. 뷔노는 실베스트리스에게서 등을 돌린 채 제 조직원들에게


말하듯 읊었다.

“우리 막내가 일을 너무 잘해. 아직도 모르잖아.”

뷔노는 시가에 불을 붙이고 빨아들였다. 후, 뱉은 연기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흩어졌다. 실베스트리스는


그걸 가만히 쳐다보았다.

“꿈이었지? 이 나라의 은행을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게.”

‘이 나라는 은행이 쓸데없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실베스트리스는 제가 버릇처럼 중얼거렸던 말을 떠올렸다.

“과욕만 안 부렸으면, 아니 제 나이트들을 조금만 덜 믿었으면, 그랬으면 장부도 직접 확인하고


블랙리버뱅크가, 완전히 부실 자산이었단 것도 충분히 알 수 있었을 텐데.”

머스캣이 나이트와 실베스트리스 사이를 벌려놓았던 것이다.

‘신호를 보냈어. 네 부하들한테.’

‘제 부하들과 연락을 했다고요?’

부하들이 머스캣의 말을 들을 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언제부터…….”

실베스트리스는 말을 잇지 않았다. 제 자존심이 이런 질문을 하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머스캣은 내 동생이 아니었던 적이 없어.”

“머스캣…….”

물론 위장일 수는 있다고 처음부터 생각했다. 하지만 뷔노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려준 게 머스캣
아니었던가. 마더의 죽음뿐만 아니라, 나중에 뷔노를 죽이려던 클로버에 위치를 넘긴 것도 머스캣이었다.

‘그게 거짓이라고?’

뷔노는 실베스트리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실베스트리스의 손가락을 하나, 하나 천천히 펼쳤다. 그는


뷔노가 손을 펼치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바짝 경계하고 있는 실베스트리스를 보며 뷔노가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

뷔노는 짓궂게 웃었다. 실베스트리스는 아예 눈을 깜박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한 번


짓씹더니 왼쪽으로 눈을 굴렸다.

뷔노는 구두 굽으로 책상 다리를 툭 쳤다. 책상 위에 있던 화분이 흔들리면서 안에 있던 물이 진동했다.

그런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제 추정이 잘못됐다니.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뭐가 실책이었지?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었나? 사실, 마더가 살아있다든가.

수 초 만에 수백 가지 생각이 오갔다. 그는 동공을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움직였다.

“뭘 잘못한 건지 고민하고 있어?”

뷔노의 얼굴이 실베스트리스의 바로 앞에 있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회색 눈은 평소와 다르게 약을 한 직후처럼 동공이 확장되어 있었다. 양옆으로 쫙 찢어진
입술은 웬일로, 가감 없이 웃고 있었다. 순간 훅 소름이 끼친 실베스트리스 발을 굴러 뒤로 피했다.

“내가 내 목숨까지 걸 것 같지는 않았던 건가. 아니면 동생을 아끼니까? 그것도 아니면 마더
때문이었나?”
실베스트리스는 다급하게 숨을 쉬며 뷔노의 눈을 피했다.

“하, 흐, 하하하!”

숨넘어가도록 웃는 뷔노는 평소와 몹시 달라 보였다. 분명 제 손안에 쥐고 다룰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말과는 달랐다. 돌연 뷔노는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나보고 경주마 같다고 한 건 너 아니었나? 제 논리도 고수할 줄 몰라서야…….”

뷔노는 손가락을 관자놀이 옆에서 휘휘 저었다. 술에 취한 것처럼 마구 휘젓던 손가락을 실베스트리스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눈알을 금방이라도 찌를 것 같이 내민 뷔노는, 눈앞의 사냥감을 포획했다는 포만감에 미소를 지었다.

“난 너 하나만 봤는데 넌 자꾸 시선이 옆으로 새더군. 이왕이면 헤르게임도 갖고 싶고, 금융계도


장악하고 싶고, 가문의 인정도 받고 싶고.”

뷔노는 손가락을 옮겨 실베스트리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두 번 쳤다.

“나만 보지 그랬어.”

궐련을 들고 있는 그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실베스트리스는 코를 찡그리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궐련으로 부족해진 산소량을 채우는 것 같기도 했고, 깊게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실상은 그저
짜증이 났을 뿐이었지만.

‘아니면…….’

“클로버에 도움을 청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네가 클로버 보스를 죽였을 때의 녹취록을 그쪽에
넘겼거든.”

‘정말 퇴로를 하나도 주지를 않는군.’

“…….”

그는 의자의 뒷부분에 머리를 쿵쿵, 몇 번 부딪쳤다. 그러고는 몸에 힘을 쭉 푼 채 의자에 늘어진


시체처럼 있었다.

머릿속이 과부하가 온 것처럼 멍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에는 약했다. 어찌 약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지금까지 그의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그의 계획대로 일어났다. 가끔 그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계획의 일부분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오류는 진한 피로를 남겼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그 상태로 몇 분 동안 궐련을 만지작거렸다.


엄지손가락에 담뱃재가 잔뜩 묻을 때까지 끝부분을 손으로 문질렀다.

헤르게임이 자신의 모든 재력과 인력, 능력을 동원해서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할 가치가 있을까.

계산은 깔끔하게 떨어졌다.

그는 손에서 돌돌 말린 궐련을 바닥으로 던졌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헤르게임이건, 뭐건… 알아서 나눠 드시죠. 저는 빠질 테니.”


뚜벅뚜벅 걸어가는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도 사람이었다. 생각과 논리의 과정에 오류가 있는 법이다.

계획을 재정립하고, 다시 행동을 실행에 옮기면 된다. 실수는 만회할 수 있다.

긴 다리가 사람들 사이를 거침없이 빠져나갔다. 그는 방을 나가며 사람들의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았다.
괜한 자존심이었다.

“아악!”

아무런 예고도 경고도 없었다. 뷔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실베스트리스의 정강이를 찼다.

“대충 어떤 생각들이 머릿속에 흘러갔는지는 알겠는데.”

뷔노는 시가를 입에서 빼내어 바닥에 던지고, 빙긋 웃었다. 평소의 옅게 짓는 미소가 아니라, 예전에
마더가 지었던 것과 같은, 송곳니를 훤히 드러내는 미소였다.

“뒤처리를 알아서 하는 게 이쪽 세계의 수칙이지, 도련님.”

실베스트리스는 뷔노의 눈동자를 보고 흠칫하다 눈을 내리깔았다. 본인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지 못했다.

“돌아가도 받아줄 곳은 없어, 도련님.”

그 말에 실베스트리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준비한 선물이 있는데 말이야.”

뷔노는 탁자에 있는 꽃병을 발로 걷어찼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안에 있는 내용물이 바닥에
넘쳤다.

뷔노는 책상 위에 대신 주머니에서 다 구겨지고 시든 연분홍 장미를 던졌다.

“이젠 돌려줄 때가 된 것 같네.”

‘그대만이 내 마음을 아네.’

조롱조에 가깝게 보냈던 꽃이 다시 돌아왔다.

뷔노는 종이 두 장을 꺼내 실베스트리스의 앞에 들이밀었다.

“하나는 네가 부리고 있는 나이트들의 명단. 나머지 하나는 네가 회사를 인수했을 때 직접 찍은 계약서지.


이 둘이 일단 급한 불이지?”

“…당신이 그 계약서를 어떻게 갖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게 계획된 것이라는 사실에 실베스트리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교도소란 정말 별의별 인간이 다 오가는 곳이지.’

마더가 2 년의 교도소 생활을 청산하고 나서 한 말이었다. 그 교도소에서 수많은 자매를 사귀어온 그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지만.

마더의 교도소에서 의자매를 맺은 카렌은 일명 교도소의 제왕이었다. 그뿐 아니라 금융계의 거물이었는데,


그는 뷔노의 계획을 마음에 들어 했다.

실베스트리스의 넋을 빼놓은 사이에 부실한 회사를 떠넘긴다는 건 꽤 유쾌한 작전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실베스트리스의 목줄을 쥘 수 있게, 제인 마이어를 소개해 준 것도 그였다. 인수 합병을 취소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뷔노의 손에 달려있었다.

“그게 중요한가? 중요한 건 이 두 개가 내 손안에 있다는 점이지.”

“…….”

“실베스트리스, 이사회는 어느 쪽을 더 큰 실책으로 볼까? 어느 쪽이든 경영권을 잃기에는


충분하겠지만.”

뷔노는 양손에 든 종잇조각을 저울질하듯 이리저리 기울이며 말했다.

“…이미 이긴 것 아닙니까. 뭐 하러 이런 질문을 합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말투는 최대한 차분하게 했으나, 책상 위에 놓인 그의 손은 파르르 떨렸다. 그의 이마에 푸른 혈관이


살짝 솟아올라 있었다. 뷔노는 실베스트리스의 앞에서 종이 두 장을 흔들었다.

“네가 원하면 둘 다 찢어줄 수 있어.”

그 말에 긴장으로 실베스트리스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뷔노가 자신에게 선의를 베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건, 분명 더 큰 대가를 요구할 때의


태도였다.

“네 재산, 다이아의 지휘권, 회사의 경영권. 모든 걸 버려.”

“하하하하하.”

그가 소리 내어 웃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흥미로운 광경에 뷔노가 집중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버리면 제게 뭐가 남습니까?”

어처구니없는 요구였다. 실베스트리스가 자조했다.

“차가운 유치장 대신 지금의 고급 저택에서 남은 인생을 살 수 있겠지. 남들 보기 좋은 직함도 다 유지해


줄 거고.”

참으로 유혹적인 제안에, 그는 뒷말을 기대했다.

“대신 나를 섬겨.”

그야말로 모든 건 허울뿐이고, 실권은 뷔노에게 넘기라는 이야기였다. 실베스트리스가 아랫입술을 이로


꽉 깨물었다.

남들 밑에 있고 싶지 않았던 것, 정확히는 경멸하는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던 것. 단 한 가지 결핍에서


시작된 욕망이 그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뷔노가 실베스트리스의 턱을 붙잡았다.

“예쁜 입술을 깨물면 쓰나.”

실베스트리스는 반동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꽃병에서 흘러나왔던 물 탓에 머리가 축축하게 젖었다.

“네가 줬던 빵에 대한 보답은 이 정도면 차고 넘치리라 믿어.”


실베스트리스는 제 손등을 이마 위에 얹고 끅끅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신음을 흘렸다.

“당신 정말 끔찍한 거 알고 있습니까?”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실베스트리스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죽은 듯 누워있었다.

회사도 잃고, 후계권도 잃고, 모든 걸 잃고 볼품없어진 상태로 남을 수는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건


종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거에 발목 잡히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충고를 해줬던 당사자가 직접 발목을 잡았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업보가 돌아온 건가.’

만일 나이트를 이용해서 이사들을 쫓아내지 않았다면. 클로버 보스를 죽이지 않았다면. 머스캣을
이용해서 시저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면. 마약을 판매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뷔노가 그가 세운 것들을 무너뜨릴 방법은 없었다.

그는 그런 짓들을 저지르지 않고 제 것을 세우는 방법을 몰랐다. 그는 언제나 제 불안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일말의 죄책감도 갖지 않았다. 이게 그의 조모의 방식이고, 친부의
방식이자, 제 삶의 방식이었다.

아랫것, 하찮은 것으로 세상 모두에게 인지되는 건 공포스러웠다. 그거에 비하면 강자 한 명에게 무릎을
꿇고 복종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쳤군.”

누가 누구한테 고개를 숙여.

실베스트리스는 재킷 안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지금밖에 기회는 없었다. 상대가 여유를 부리며


낮잡아보고 있을 때.

그는 지금과 비슷한 수많은 상황을 겪어왔었고, 그때마다 그가 항상 재킷 속에 넣고 다니는 은빛 소총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총으로 뷔노를 쏘고, 저 계약서를 제 손으로 찢어내면 그만이었다. 밖의 충실한 부하들이 뷔노의 죽음을
없었던 일처럼 말끔하게 치워줄 것이다.

‘실베스트리스? 그건 보험이죠. 조만간 헤일리와 화해할 겁니다. 그때 둘의 피가 이어진 아들을 낳으면


그만인 문제입니다, 제가 실패하면? 하하, 아시지 않습니까. 여자는 약하다는 걸. 그녀도 언젠가는
지지하고 보호해 줄 남편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언제나 사람이 아니라 물건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조모는 자신을 경멸했고 어머니는 제게 무관심했지만,
저건 달랐다.

자신의 출생과 감정과 과거 모두를 중요하지 않은, 아무렇지도 않은 걸로 취급하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눈빛.

실베스트리스는 위를 쳐다보았다. 뷔노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문득, 뷔노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찾아왔을 때를 떠올랐다.

‘네가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해서 와봤어.’

가당치 않은 소리였다. 그딴 게 왜 궁금했을까.

‘별로 홀가분한 표정이 아니군.’

‘죄책감 같은 감정은 없습니다.’

‘죄책감이 남아있다고 한 적 없는데.’

‘그럼 뭘 말한 겁니까?’

‘네 친부.’

실베스트리스는 분명 그를 죽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는데, 마음속에서 지워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친부가 마음 한구석을 차지할 수 있도록 용납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

‘이젠 다…….’

지긋지긋해. 실베스트리스는 총에 닿은 손을 뗐다.

“그걸 쐈으면 정말 끝이었을 텐데, 운이 좋아. 실베스트리스.”

운이 좋다, 그건 그가 자주 들어본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운이 좋다는 말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넌 정말 운이 좋은 아이야. 내가 너를 죽이지 않았잖냐.’

‘운도 좋지, 부인이 관심이 없어서 사생아가 본가에서 사는 꼴을 다 보고.’

정말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모든 걸 무너뜨린 상대가 당신이어서.’

실베스트리스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다른 사람이면 그 비참함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밑바닥에서부터 지독하게 올라왔던, 도저히 열망을 놓지 못하게 했던 한 사람.

돌연 그는 얼굴을 가리던 손을 뻗어, 뷔노의 구두를 붙잡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보기 위해 뷔노가


때마침 시선을 내렸을 때, 그는 천천히 구두에 입을 맞췄다. 입술은 가볍게 구두에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그의 젖은 은빛 머리는 이마에 달라붙고 뺨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들끓는 분노와 묘한 만족감이


뒤섞인 알싸한 기분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면서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완벽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쁘게, 섬겨드리죠.”

뷔노는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미소를 지었다. 배부른 포식자의 미소였다.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뷔노의 마음을 읽고 부러 굴욕적인 충성마저 맹세하는 남자를 보며


뷔노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빨라서 좋네.”
만약 뷔노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저 남자는 상황을 역전시키는 데에 망설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누구보다 충직하고 유능하리라.

물론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뷔노가 저 남자에게 보일 약점은 없었다. 오직 둘 사이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신뢰였다.

과거, 머스캣이 잠입해 있었을 적이었다. 둘만이 있는자리에서 머스캣이 말했다.

‘언니… 나한테 정보를 빼돌리라 할 뿐, 실베스트리스를 죽이라고 하지는 않네. 원한다면 거기까지도 할
수 있는데.’

머스캣은 자신이 신뢰를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뷔노는 그 점을 재빨리 부인하며 말했다.

‘안 되지. 그놈이 죽으면 어차피 다이아는 딴 놈 소유가 될 뿐이야. 확실히 뺏는 편이 좋지 않아? 게다가
…….’

뷔노는 자신이 뒤끝이 긴 편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자각하고 있었다.

‘난 실베스트리스를 죽이고 싶지는 않아. 그놈에게 나락을 뒹굴게 하고 싶을 뿐. 그리고 그때, 구원의
손길을 건네주는 거지.’

조금은 기분 더러운, 굴욕적인 구원의 손길을.

20. 회칠한 무덤

다이아를 잡은 후에도 시저에는 비상이 걸려있었다. 실베스트리스가 시몬의 행방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클로버 쪽에서 일방적인 원한으로 잡아간 겁니다.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클로버를 손에 넣었었잖아, 이 정도도 못 해?”

뷔노의 말에 실베스트리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제가 클로버를 조종하지 못하도록 수를 쓰지 않았습니까?”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니지. 네가 경찰을 동원해서 우리를 제압한 건 생각 안 하나?”

오메르타 중 두 번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공권력을 개입하지 않는다.’였다. 설령 라이벌 조직을


상대함에 있어도 말이다.

“그래도 당신이 넘긴 녹취록이 치명적이었습니다.”

클로버 보스를 죽일 때, 머스캣을 시켜 녹음해 두었던 음성을 클로버에게 보낸 게 뷔노였다.

설마, 애꿎은 시몬을 납치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거기까지는 하지 말 걸 그랬나.”


클로버 측에서 자신을 협박하는 연락이 올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시몬을 납치한 쪽에서는 아무런 후속
조치를 하지 않았다.

다행인 건 위치 추적기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시저는 계속된 추적으로 시몬의 위치가 끊임없이
변해 차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몬의 위치는 고정이 되었다.

“위치가… 하하, 이게 사실이면 조금 위험하겠는데요.”

“어디길래?”

“그 유명한 지하 경매장입니다. ‘그’가 들어간 물건을 판다는 소문이 있는.”

지하 경매장이라는 소리에 뷔노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그?”

“그 보석, 그 동물, 그 남자… 등등.”

한마디로 뭐든 다 판다는 의미였다.

“다행이라고 할까, 저는 지하 경매장 초대권이 있습니다. 이걸 이용해서 시몬을 구입하면 될 것


같습니다.”

“지하 경매장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그동안 지하 경매에도 참여했던가?”

뷔노는 실버를 다소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봤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뷔노가 말했다.

“네가 인성이 나쁘다 못해 사라진 인간이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인신매매까지 할 줄이야.”

“인신매매한 적 없습니다.”

“그러면? 애완동물이라도 구하러 갔나? 결벽증이 좀 나아졌나 봐.”

주위를 매번 소독하고 닦고 구겨진 것을 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그가 동물을 구한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수조에 있는 물고기 똥조차 견디지 못하고 피할 사람이었다.

“전 제가 수집하는 보석들만 사러 갔죠. 수집은 남자들의 사냥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진짜 상류 사회는 막대한 부와 명예, 사회적 지위로는 모자랐다. 넘치는 교양과 수집품 역시 그 수준을
결정하는 부분이었다.

“별게 다 사냥이군.”

뷔노는 코웃음을 쳤다. 실베스트리스는 뷔노에게 갈색 봉투를 넘겼다. 갈색 봉투 안에 들어있는 건 하얀


종이였다.

“경매는 어떤 방식으로 열리지?”

“경매는 품목을 나눠서 미리 진행하나 봅니다. 경매장은 물건을 나눠주는 행사에 불과하고요. 최고가
낙찰입니다.”

“최고가 낙찰?”

뷔노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경매 방식인지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저 하얀 종이에 상품과 그걸 구입하고 싶은 가격을 적으면 되는 거죠. 가격을 가장 높게 적은 쪽이
상품을 가져갑니다.”

“블라인드인가?”

“물론이죠. 자존심이 걸려야 돈이 올라갈 테니까요.”

낮은 금액에서 시작해 판돈을 올리는 것보다 복잡하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실베스트리스는 붉은 벨벳
질감의 겉지와, 하얀 속지로 연결된 팸플릿을 꺼냈다.

“시몬에 대해서는 뭐라고 설명이 되어있지?”

뷔노의 말에 실베스트리스가 팸플릿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오, 순위가 꽤 높군요. 시몬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공개되네요.”

“경매에선 가장 기대되는 물건을 마지막에 배치하지 않나? 마지막이 누구길래.”

시몬보다 인기 있는 상품이 있을 수 있나? 뷔노는 자신한테 원한을 품은 사람이 적지는 않을 걸 알고


있었다. 분명 시몬을 구입한다면 화풀이용일 것이다.

‘성 노리개일 수도 있겠지만.’

“블루 차우차우 스핑크스 고양이라네요.”

“…그게 뭐야.”

“요즘 인기인 파란색 털을 가진 고양이입니다. 머리 부분은 차우차우처럼 사자 갈기 같은 털이 났고,


몸통은 스핑크스 고양이처럼 아예 털이 없다고 하죠.”

“…….”

하얀 종이를 앞에 두고 뷔노의 관자놀이가 씰룩거렸다. 뷔노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돌리듯 문질렀다.

“간단한 거 아닙니까? 시몬을 어느 정도만큼 원하는지 종이에 적기만 하면 될 뿐이지 않습니까.”

뷔노는 잠자코 실베스트리스의 말을 들었다.

“애인이니 뭐니, 포장은 좋지만 다 결국 필요가 있어서 쓰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애정도야 돈으로 환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시몬의 가치는 얼마입니까?”

실베스트리스는 뷔노가 고민하고 있는 걸 즐겼다. 이 사람 역시, 간절히 원했던 걸 못 얻는 경험을 한


번쯤 해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최소한 갈팡질팡하며 혼란스러워한다는 것 자체가 흡족했다.

“이게 좋겠어.”

종이를 받아든 실베스트리스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백지군요. 뭡니까?”

“확실히 이런 숫자 놀음에는 나보다는 네가 능하지.”

“저보고 대신 결정해 달라고요?”

“종이 두 장을 찢어줬는데, 한 장을 못 적어준다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뷔노는 종이를 팔락거렸다.

“지금, 제가 돈까지 내라고―”

“거래의 대가는 성사된 순간 주고받는 거 아닌가?”

“…그렇죠.”

“그럼 성의를 보여야지, 실버.”

실베스트리스의 얼굴이 굳었다.

‘이게 정말 위치 추적기가 맞긴 한가?’

시몬은 자신의 재킷에 달린 핀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왕년 조직 스파이였다고, 시몬은 핀을 본


순간부터 의심했었다.

생긴 게 영 이상했기 때문이었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 걸 보면 조금 특이하게 생긴 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불안한 마음에 시몬은 손가락을 가만 내버려 두지 못하고 계속 떨었다.

‘수갑도 차고, 철창 안에 갇혀보는 건 처음이네… 아니, 처음이 아닌 게 이상한 거지만.’

차 안에서 계속 운반된 이후로는 독실에 갇혀있었다 안에서 들리는 대화를 종합해 보면 오늘 밤 열리는
경매에 본인은 상품으로 팔리는 듯했다.

그 때 문이 덜컥 열렸다. 시몬 혼자 있는 방 안에 사람 둘이 들어왔다. 시몬은 바짝 긴장했다.

“여기가 그 특별 상품이 있는 방인가? 진짜 예쁘네. 나도 경매를 노려볼까?”

“부자들만 모여있는 데서 네가?”

‘경매?’

아직 뭔가 결정되지는 않았다는 의미였다. 시몬은 두 손을 모아 제발 자비로운 누군가를 만나게 해달라


기도했다.

철창 밖에 관리인은 시몬을 보더니 히죽 웃었다. 그는 긴 혀를 내밀어 날름 입술을 핥았다. 그는


손가락을 철창 사이로 넣어 시몬의 볼을 쓰윽 쓸었다.

“진짜 빼돌리고 싶을 정도라니까. 피부도 야들야들하고.”

시몬은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렸다.

‘싫어……!’

“관둬라, 손톱자국이라도 나면 네 장기 다 팔아도 해결 못 해.”

“그건 그렇지. 킁. 아쉽네.”

관리인은 입맛을 다시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비열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흐흐, 키스 정도는 상관없겠지. 흔적이 남는 것도 아니고.”


그는 철창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시몬을 보았다.

“자, 아. 혀 내밀어 봐, 착하지? 흐흐.”

시몬은 철창 사이로 들어오는 축축한 그것을 보며 몸을 뒤로 쭉 뺐다. 침이 입 사이로 조금 흘러나오는 걸


본 시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신이시여, 이 고난을 이겨내게 도와주시옵소서.’

그 순간 시몬에게 한 줄기 빛이 내려오듯 영감이 떨어졌다. 시몬은 0.5 초 정도는 신의 계시를 의심했다.

‘…이, 이 방법밖에는 없나요?’

하지만 곧 그 명령을 수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몬은 몸에 힘을 푼 채 쓰러지듯 철퍼덕 주저앉았다.

“흐, 흐흐흐. 헤헤헤…….”

그는 고개를 기울이고 눈은 저 위로 향한 채, 짝, 짝 소리를 내며 박수를 쳤다. 계속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박수를 치는 시몬을 본 관리인이 저 멀리 떨어졌다.

“갑자기 왜 이래. 미쳤나 봐.”

‘미친 게 어느 쪽인데!’

억울했지만 시몬은 계속 박수를 쳤다. 연기라고 오해받지 않게끔 시선을 종잡을 수 없는 곳에 두는 것도


지속했다.

“무슨 일인… 헉.”

다른 쪽 관리인이 그런 시몬을 보자마자 표정이 구겨졌다.

“뭐야, 병이야? 발작?”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동공을 살피던 관리인이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시몬은 헤, 웃었다.

“갑자기 돌아버렸나 봐.”

“이대로 있다간 우리가 하자 냈다고 몰리는 거 아냐?”

“뭐?”

둘은 서로를 쳐다보다 동시에 말했다.

“튀자.”

같이 튀어나온 말에 둘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바로 달려 나갔다. 이 둘이 정말 우애


좋게 나쁜 놈들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휴…….”

시몬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마자 기분이 곤두박질치는 걸 느꼈다.


‘내 인권은 대체 어디로……?’

어차피 팔려나가면 이 짓도 소용이 없을 텐데. 시몬은 철창을 손톱으로 쭉 긁었다. 쇠가 끼기긱 긁히는
소리가 났으나, 흠집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입 안이 썼다.

“뭐야, 조용해진 거 같은데?”

“연기 아냐?”

두 관리인이 복도를 다시 걸어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시몬은 목에 힘을 쭉 뺀 채 다시 박수를 쳤다.

“…흐, 헤, 흐흐, 헤.”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에 두 사람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으음… 아냐, 그냥 다음 타임 애들이랑 교체하자.”

관리인은 시몬을 측은지심이 섞인 경멸의 눈빛으로 보더니 복도로 나갔다. 그냥 경멸보다도 더욱 기분이
나쁜 시선이었다.

“…후우우.”

시몬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깥에서는 상품을 소개하는 진행자의 말, 가격을 부르는 소리, 환호성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들렸다.
그러나 시몬의 차례는 꽤 늦게까지도 오지 않았다.

제발 자신이 착오로 빠진 거길 바랐다. 물론 현실로 이루어지지 못할 바람이었다.

“어디 보자… 시저에 원한 있으신 분? 캐서린을 경멸하셨던 분? 딱 추천해 드리는, 화제의 그 남자!
시저 보스의 현 애인 시몬! 원한이 없으셔도 탐낼 만한 미모와 재미있는 뒷배경이 있습니다!”

끼릭끼릭, 운반되는 철창 안에서 시몬은 힘없이 기다렸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무대 밑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눈길은 매서웠다. 모두
의자에 앉은 채, 시몬을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었다.

“…최고로 높은 가격을 적은 사람은… 무려 천만 달러의 가격을 적었군요!”

회장이 웅성거렸다. 시몬은 자신이 천만 달러에 팔렸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만 달러로 사갈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설마, 뷔노인가?’

미리 가격을 정해야 하니, 애초에 아무도 적지 않을 높은 가격을 적어서…….

만일 그렇다면 믿기지 않았다. 시몬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자, 천만 달러의 주인 분은 나와주시죠!”

쭉 뻗은 다리, 당당한 걸음걸이, 단정한 정장.

시몬은 입을 벌린 채 낙찰된 사람을 보았다.


“…어?”

위로 시선을 올리자 하얀 가면과 은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실베스트리스?’

가면을 쓰고 있는 실베스트리스가 무대 앞으로 나왔다. 시몬의 입에서 허망한 소리가 나왔다.

“이게…….”

가면을 쓴 건 신분을 숨기고 싶다는 의사의 표시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관중들은 실버를 알아보았다.

그럴 만하다는 듯 수긍하는 청중들과 대조적으로 시몬의 눈이 커졌다. 당연히 누군가 자기를 사 간다면
뷔노일 줄 알았다. 이 남자일 거라는 예상은 한 적이 없었다.

“집까지 배송해 드릴까요?”

“직접 가져가죠.”

그 말에 경매를 진행하는 사람이 싱글벙글 웃으며 철창문을 열쇠로 땄다. 그러나 수갑은 풀어주지 않았다.
시몬은 실베스트리스를 따라 나왔다.

“나, 나를 왜 사 간 거야? 복수하려고?”

시몬은 실베스트리스가 뷔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을 샀다고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조용한 한마디에
실베스트리스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시끄럽습니다. 당신이 매력적이어서 천만 달러씩이나 내고 구매한 줄 압니까?”

“아니, 그건…….”

실베스트리스는 한숨을 쉰 뒤 시몬을 쳐다보았다. 그는 혀를 끌끌 찼다.

“따라오시죠.”

시몬은 실베스트리스의 옆자리에 다소곳이 서게 되었다. 이 기묘한 상황에 시몬의 몸이 굳었다. 회장의
분위기 역시 둘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진행자의 경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여러분! 다음은 블루 차우차우 스핑크스 고양이의 차례였죠. 그러나 동물 보호 협회의 개입으로
인해 아쉽게도 고양이는 선보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에 야유가 회장에 퍼졌다. 진행자는 회장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다 말을 이었다.

“대신, 특별한 공연을 하나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만족하실 것 같습니다.”

붉은 커튼이 쭉 걷혔다. 드레스를 입은 인물들은 부채로 얼굴을 가렸고, 하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잔뜩


있었다.

시몬이 이 경매장에 마지막 순서로 나오게 된 건 이유가 있었다. 현재 이 지하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


대부분이 시저와 척을 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공연의 목적은 분명했다. 조롱.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마더!”
가녀리고 우스꽝스러운 목소리였다. 배우들은 계속해서 극을 펼쳐나갔다. 마더는 울었고, 스페이드
보스를 유혹해서 죽였다. 그 뒤로도 극에서 시저는 미인계만을 펼쳤다. 시저는 세력을 넓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제 극에서 시저는 망할 때가 되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배우가 커튼 사이로 나왔다. 극이 클라이맥스로 도달한 것이다. 그는 총 모형을 든 채


드레스를 입은 배우에게 겨눴다.

“이 어리석은 행색을 보아 넘길 수 없던 신은, 시저를 처단할 기회를 주시나니…….”

그는 주머니에서 장총을 꺼내더니 경매장에 있는 사람에게 겨눴다.

“겉은 멀쩡할지언정 속은 썩은 시체와 같아, 죄다 회칠한 무덤과 같다 전하시라 하셨다.”

모형 총이었어야 할 소품은 총알을 한 번 발사했다. 그러자 클로버의 보스가 쓰러졌다.

“뭐, 뭐야?!”

순식간에 사람들이 책상과 의자 밑으로 숨었다. 피네는 이빨을 보이며 입이 찢어질 듯 웃었다.

“다 지옥행인 거지 뭐긴 뭐야!”

하이직이 안에 동그란 공 같은 걸 던지자, 하얀 분말이 시야를 가렸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중 몇은 비상구 쪽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문은 이미 잠긴 지
오래였다.

짝, 짝, 짝―

겁에 질린 사람들 사이에서, 한 명의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회칠한 무덤이라, 맞습니다. 정확한 표현이군요. 이리 훌륭한 공연일 거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정장을 한 번 가다듬고,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손뼉을 쳤다.

‘…뷔노?’

시몬은 경매 공연장에 서있는 인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뷔노가 맞았다.

“뭣들 합니까, 다들 이 훌륭한 연기자에게 박수를 보내주지 않고.”

그 말 이후에도 사람들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무안해라, 다들 손이 없어진 건지, 원……. 설마 두려움에 떨어서 박수를 안 치는 건 아니겠죠?


아까까지 실컷 조롱하던 사람에 불과한데.”

중얼거리는 그의 앞에 뷔노가 걸어와 섰다. 뷔노는 몸을 숙여 실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 주둥아리가 쓸모가 있는 날도 오는군. 조금 더 지껄여 봐.”

실베스트리스는 미소를 지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우리 둘의 마음이 맞는군요.”

오메르타 그 셋째. 친구의 적은 적이다. 뷔노가 완벽하게 시저의 ‘친구’가 된 실베스트리스를 보며


웃었다.

그사이, 피네는 전에 봤던 얼굴들을 찾아 총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피네 언니… 시원해?”

“그럼! 우하하하!”

총을 쏘는 게 아니라 총 손잡이로 사람을 쳤다. 하이직이 피네를 걱정하는 눈으로 봤다.

“여기 경찰 오는 지역 아니었어……? 헤르게임이 아니라고오.”

“인신매매나 하는 곳인데? 경찰이 왔으면 일을 제대로 했겠지.”

“그건 그러네.”

“그리고 보스, 내가 감방에 진짜 갇혀도 보석금 대줄 거지?”

피네가 휙 고개를 돌려 뷔노를 봤다.

“이번에 경매에 낸 만큼은 대줘야지.”

피네의 표정이 밝게 바뀌었다.

“아싸! 그러면 XX, 배를 다 갈라놓아야지. 나만 실험 쥐 신세가 될 순 없어.”

피네가 신이 나서 난장판을 벌이는 동안 뷔노는 시몬에게 다가갔다.

“뷔노…….”

‘설마 살면서 진짜로 인신매매라는 걸 경험해 볼 줄이야’

시몬이 힘을 쭉 뺀 채 뷔노에게 몸을 기댔다. 뷔노는 목에 닿아오는 차가운 감촉의 손으로 시몬이 어찌나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뷔노는 시몬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시몬.”

“뷔노…….”

뷔노에게서 이렇게 따뜻한 대우를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시몬은 뷔노의 품에 쏙 안겼다. 뷔노는 뿌리치지도 않고 마주 안아준 채 시몬의 옷자락을 정리해 주었다.
시몬은 마음속에서 뭉클하는 감정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정확한 정황은 모르겠지만, 실베스트리스도 뷔노를 따르고, 클로버도 정리가 되었다. 이제 뷔노는 누가
뭐래도 명실상부한 헤르게임의 지배자였다.

‘분명 안 좋게 돌아가는 것 같았는데.’

이 상황을 돌파했다니 말도 안 되는 능력이었다. 그런 사람이 여전히 자신을 마주 봐준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가끔 보면 말도 안 되게 용기가 있는 거 같기도 해. 어찌 보면 만용인가?”

“제, 제가요?”
자신의 무얼 보고 뷔노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시몬은 눈을 깜박거렸다.

“피네를 구하려다가 잡혀갔다고 하던데.”

뷔노는 시몬이 이런 상황에 자발적으로 나와 납치될 깡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하긴 예전에 총을 대신 맞았을 때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지.’

몸을 쓰는 것도 아니고 던지는 데만 재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성가신 재능이라고 생각했는데, 덕분에


피네가 제때 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니 뷔노 입장에서 수천 번 감사할 일이었다.

“아니에요……. 구하러 와주셔서 감사해요.”

뷔노는 시몬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뒤, 그의 귀에 속삭였다.

“클로버 스파이였지만.”

“…네?”

시몬의 숨이 멎었다. 애써 모를 거야, 부정하던 추측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당혹스러웠다.

“어, 어, 언제부터…….”

“글쎄, 처음부터?”

시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러면 뷔노는 자신을 기억했던 것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스파이라는
걸 알았고, 그래도 받아줬다는 의미였다.

“어차피 네가 클로버에 도움이 된 건 조금도 없으니 봐줄게.”

“…그, 가, 감사합니다.”

길고 고된 여정이었다. 하지만 아직 마무리가 덜 되어있었다. 뷔노는 시몬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시몬, 가지.”

“…어디로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바로 시몬의 아버지가 계신 병실


앞이었다.

이제는 뷔노의 거친 운전에도 익숙해진 시몬은 차를 탈 때보다 긴장한 표정으로 문밖에 섰다.

“잘 이야기하고 와.”

뷔노가 고개를 저었으나, 시몬은 움직이지 않았다. 뷔노는 한숨을 쉬었다.

“왜.”

“같이 들어가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제,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알려드리고 싶어요.”

“…뭐?”
뷔노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고백을 이딴 식으로?”

“아, 앗! 고, 고백은 아니에요. 정식으로, 그, 다음에, 제대로, 다시 할게요.”

시몬이 숨을 가다듬더니 뷔노를 보며 말했다.

“난 연인을 만들 생각이 없어.”

그 말에 시몬이 눈을 두 번 깜빡였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뭔가를 강요할 생각도 없어요. 단지 아버지도 소중한 사람이고, 뷔노도 소중한 사람이니까.
소개드리면… 좋을 거 같아서요.”

“…….”

시몬은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그, 연인이 될 수는 없다고 하셨지만. 지금처럼 같이 있는 건… 안 될까요? 역시 욕심일까요?”

뷔노의 침묵에 시몬의 어깨가 처졌다. 아니나 다를까,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죄송―”

“마음대로 해. 들어가지.”

“…뷔노?”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었다. 뷔노는 무뚝뚝하게 내뱉더니 걸어갔다.

“들어가자고.”

병실에 도착한 시몬은 최대한 들뜬 것을 티내지 않으려 애쓰며,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저 왔어요.”

“…시몬?”

그는 눈을 몇 번 껌뻑이더니 떴다. 눈앞에 담긴 아들의 얼굴에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왔구나. 아들.”

그는 시몬을 보자마자 양팔을 벌렸다. 시몬은 수술한 부위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그에게 포옹했다.

“뒤의 분은 누구시니?”

“아, 이분은… 수술비도 대주시고, 그리고 저도 구해주신 분이에요. 자세히 말씀은 못 드리지만 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거든요. 아, 아주 위험한 건 아니고요!”

빈약한 설명에 뷔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못 들은 사실에 아버지의 표정이 이상하게 바뀌었다.

“아니, 수술비에, 또 뭐라고? 무슨 일이 있었… 지금 이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는 침대 밖으로 다리를 빼내어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뷔노가 바로 제지했다.

“일어나지 마시죠.”

“아니에요, 이런 일을 말로만 인사를 할 수는 없죠.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어?”

그는 휙 고개를 돌려 뷔노를 훑어보았다. 적나라하게 관찰하는 시선에 시몬이 당황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목소리가 익숙한데. 그러고 보니 체형도…….”

뷔노를 훑어보던 시선을 멈추고, 그가 입을 쩍 벌렸다.

“당신, 설마. 그때 그 방독면 아가씨?”

‘바로 알아본다고?’

뷔노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세상에, 이게 어쩐 일이야. 그사이에 이렇게 훌쩍 크다니. 잘 지내셨습니까?”

그는 뷔노에게 몸을 앞으로 내밀며 손을 뻗었다. 순수한 호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뷔노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잘 지냈습니다.”

그는 뷔노의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굳은살이나 흉터가 일반인이 지닐 법한 수준이


아니었다.

“…고생 많으셨군요.”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시몬은 한참을 몰라봤는데.”

“그거야 눈썰미가 없는 거고요! 목소리가 이렇게 똑같은데.”

그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제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뷔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경영합니다.”

조직 경영도 경영의 일환이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답했다.

“아이고, 어려운 걸 하네요. 신기하지 않니, 시몬? 예전에 알던 사람이 이렇게 다시 만나고. 아니, 그냥
아는 건 아니고, 첫사랑이었나?”

“아버지…….”

과거의 이야기를 떠올리자 뷔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병실 안에 있는 것만으로, 시몬이 다쳤을 때가


떠올랐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자간의 대화를 더 이상 방해하고 싶지 않군요.”

뷔노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절도 있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시몬의 아버지가 뷔노를
붙잡았다.

“잠시만요!”

“…왜 그러십니까.”

뷔노는 발걸음을 우뚝 멈춰섰다.

“저… 사실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 굳이 숨기실 필요 없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병실에만 앉아있다고 해도, 신문을 자주 챙겨보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시군요.”

뷔노가 딱딱하게 말했다. 방독면을 써서 얼굴을 감추던 옛날과는 달랐다. 어리다고 봐줄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이제 시몬과는 끝이겠군.’

뷔노가 그렇게 생각할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메이의 딸이 아닙니까.”

의외의 이름과 의외의 대답이었다. 뷔노는 고개만 살짝 돌린 채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예전에 캐서린과 메이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죠. 둘은 매일 집에서 토론을 진행했어요.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 지적 수준으로는 따라갈 수 없었거든요.”

그의 눈빛에는 아련함과 그리움이 담겨있었다.

“둘은 아주 현명하고, 또 올곧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다시 한번 시몬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뷔노 역시 고개를 까닥 숙였다.

21. 붉은색 축제

아름다운 5 월(May), 꽃들이 피어날 때 내 마음속에는 사랑이 싹튼다네. 아름다운 5 월, 새들이 노래할
때 나는 그대에게 고백한다네. 그리움과 갈망을.
―슈만, 아름다운 5 월에

헤르게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에서 마더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검은색 관은 왕의 관보다도 더 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큰 공간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그가 생애 가장 자주 입던 정장이 들어있었다. 사람들은


사람도 없는 관을 향해 몸을 한 번 숙이고, 꽃을 위에 얹었다.

뷔노는 검은색 관 왼쪽에 있었다. 그는 관보다는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을 부디 잊으시고, 저희의 충성으로 보스의 신뢰를 얻어내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클로버를 대표해 온 그는 실베스트리스가 죽인 전전대 클로버 보스의 딸이자, 뷔노가 죽인 전대 클로버


보스의 여동생이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뷔노의 손목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입을 떼고 뷔노와
마주치는 눈은 꽤 매서웠다.

“뭘 생각하는지 알 거 같군.”

“언니가 예전에 하던 생각이겠지.”

하이직의 말에 뷔노는 시가를 입에 물었다.

“곧 잊게 될 거야.”

카네포라는 흰 꽃이 아닌, 붉은 장미를 가져왔다. 그는 관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뷔노에게 곧장


걸어왔다.

“빈 관에 인사하는 건 좀 우스운 거 같아서. 나중에 마더께 가져다 드려주겠어?”

뷔노는 가시 하나 제거되지 않은 장미를 받아 들었다.

“…그러지.”

“멋지게 상황을 반전시킨 거 축하해.”

“고맙군.”

“노새들을 풀어준다는 소리가 돌던데, 사실이야?”

“굳이 정치인들과 척을 질 필요는 없지.”

정치인이 반대하지 않았어도 마약 일은 접게 만들었겠지만, 뷔노는 말하지 않았다. 카네포라도 정치인의


눈치를 본다는 건 그저 핑계라는 걸 눈치챘지만 묻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자신의 사업이었다.

“우리 호텔도 접게 할 거야?”

정확히는 호텔 로비에 있는 도박장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건 합법이니까 알아서 해.”

카네포라는 한껏 광대를 올리며 웃었다.

“사실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어. 약속을 잘 지켜서 마음에 들어, 자기.”


“진짜 장례식은 언제 할 거야?”

“내일.”

마더가 죽은 뒤 100 일이 되는 날이었다. 카네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시간 보내. 아, 이럴 때 쓸 말은 아닌가. 마음 상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

“알아.”

마지막으로 온 사람은, 실베스트리스였다. 그가 들고 온 건 백합이었다. 아주 고루할 정도로 전통적인


꽃이었다. 실베스트리스는 아주 슬퍼 보이는 얼굴로, 뷔노에게 허리를 숙였다.

“애도를 표합니다.”

“전혀 슬프지 않으면서.”

“알아도 넘어가는 사이 아니었습니까?”

실베스트리스는 살짝 고개를 든 채, 뷔노에게만 보일 미소를 지었다.

“진짜에 초대받지 못한 건 아쉽습니다. 이건 진심이에요.”

“네가 올 자리가 아니니까.”

“그렇긴 하죠.”

의외로 쉽게 수긍한 실베스트리스는 뷔노에게 말했다.

“잠시, 손을. 드릴 게 있습니다.”

그 말에 뷔노가 손을 내밀었다. 실베스트리스는 뷔노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기습적으로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장례식에 걸맞은 예법이 아니었다. 뷔노는 얼굴을 구기며 손을 뺐다. 기분이 나쁜 것도 나쁜 거였지만,
꽤 놀라운 일이었다.

“네가 설마 예의에 어긋나는 짓을 할 줄이야.”

“저는 이제 시저의 사람 아닙니까? 자리에 맞게 변하기로 한 것뿐입니다.”

“이런 순간까지 주둥이가 쉬지를 않는군.”

뷔노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그는 관을 향해 몸을 숙이고, 백합을 관 위에 올려두었다. 칼로 잰 듯 완벽한 각도와 예법이었다.

마더가 죽기 약 한 달 전 일이었다.

모두가 마더가 보스에서 내려오고 자문역을 맡게 된 건 자발적이었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뷔노의 눈 위부터 이마 끝까지 긴 상처가 나있었다. 뷔노는 눈 밑으로 흐르는 피만 손등으로 훑었다.

“보스, 괜찮아?”

“보면 알잖아.”

처음에는 깨어있는 시간 약 두 시간 정도만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마더는 흔들리는 촛불처럼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클로버가 마더의 거처를 알아냈을 때의 일이었다. 뷔노와 마더가 같이 있던 그 집무실 안으로 클로버의
용병들이 들어왔다.

당연히 시저의 조직원들 역시 곧바로 집무실로 와 전투를 벌였다. 총이 난사하던 그 와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없다는 건 기적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는 너무나 큰 손실이 있었다. 클로버의 조직원 중 중 한 명이 마지막 남은 힘으로 집무실
안 화병을 뷔노에게 휘둘렀다는 것이다. 그걸 뷔노가 맞았더라면 큰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둔기는 뷔노를 감싼 마더가 대신 맞았다.

마더는 죽지 않았다. 대신 기억과 지능을 잃어갔다.

충격이 누적된 것뿐만 아니라, 그동안 술을 워낙 많이 마셔온 터라 알츠하이머병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는


진단이었다.

뷔노는 대마를 마더의 입에 물렸다. 평소처럼 불을 붙이고 나자 마더는 익숙하게 대마를 빨아들였다.
대마는 마더를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효과를 보였다. 몇 번의 호흡이 오가고, 마더는 찬찬히 눈을
굴려 뷔노를 보았다.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했길래 얼굴이 그 모양이 됐을까.”

“딱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거짓말이구나.”

돌아보지도 않고 마더가 말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편이 낫겠어.”

마더가 말했다. 뷔노의 숨이 멎었다.

“농담이란다.”

“…….”

“너한테 자리는 물려주고 죽어야지.”

“그거면 된 겁니까?”

분명 바라는 게 많은 사람이었는데.

“네가 내 꿈을 이뤄줄 거잖니, 안 그래?”

연기를 내뱉자 대마 향이 주위에 확 풍겼다.


“예.”

겉으로 표는 안 났지만 참으로 불안정한 대답이었다. 사실 뷔노는 마더가 죽고 나서 살아갈 수 있기는 한


건지에 대한 감도 오지 않았다.

“넌 너무 다정해. 치매에 걸린 노인 같은 건 버려두고 가면 될 텐데. 내가 무르게 키웠나.”

잠시간의 정적 뒤에 뷔노가 대답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네요.”

“치매에 걸린 부모를 버린 자식 이야기는 신문에도 흔할 텐데, 아직 안 읽어봤니?”

뷔노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정하다는 소리 말하는 거 알잖아요.”

“그래? 내 딸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제대로 모르는 건 마더일 겁니다.”

“그렇지 않을 텐데, 이런 상황을… 무…무…….”

마더는 단어를 떠올리려다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게걸스러울 정도로 지식을 허겁지겁 삼키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 모든 게 손에 쥔 모래만 못할 정도로


빠져나가고 있어. 단어 하나하나 말하기 전에 목에 걸려. 이럴 거면 왜 이리 열심히 공부했는지.”

“…….”

“농담이란다.”

농담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마더는 절망하고 있었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에서 아무 판단도 못 하는
걸림돌이 되었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 시기 그는 증상이 심할 때건 약할 때건 우울해 보였다. 우울이라는 건 마더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뷔노는 맹렬히 다른 조직들을 쫓았다. 그러나 끝내 마더에게 조직을 통합하는 걸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

마더는 완전히 사고 능력을 상실하기 전, 뷔노에게 보스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결심했다.

그 계승식에서 마더는 그 누구보다도 정신이 맑고 또렷한 상태로 선언했다.

‘못다 이룬 내 꿈의 뒷장은, 나의 딸들이 이루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계승식이 끝난 후였다. 잠시 쉴 시간이 필요하다며 사람들을 물린 마더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대마초에 불을 붙여 연기를 훅 삼킨 뒤, 눈을 감고, 총을 제 턱 밑에 겨누고, 방아쇠를 한 번


당겼다.

총성을 듣고 가장 빨리 달려온 건 그 수많은 수하들 가운데서 하필 뷔노였다.

뷔노는 생에 그런 장면을 볼 거라 생각도 하지 않았고, 보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그는 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그가 총을 든 순간이었다. 뷔노는 실베스트리스의 하얀 옷자락이 복도를 스쳐 지나가는 걸 보았다.

그때까지는 실베스트리스가 방 안을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건 도박이었다. 언젠가는 마더의 죽음이 알려질 것이다. 그러면 이걸 어떻게 더 유용하게 활용할까?
뷔노는 머스캣에게 정보를 흘릴 것을 명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놈이야. 내가 총을 든 걸 봤다면, 마더를 죽였다고


착각하겠지. 그놈은 나한테 동질감을 갖고 있거든. 제멋대로일 뿐인 감정이지만.’

이건 치명적인 정보였다. 마더가 죽었다는 게 알려지면 조직은 금세 축소될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금주법이 폐지된 순간 밟아야 하는 수순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머스캣. 실베스트리스한테 가서 신뢰를 얻어낸 다음, 체스 나이트들에 대해 알아 와.’

마더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되어도 바로 활용할 놈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여유로운 위치에 있다는 걸


즐기며 최대한 협상을 시도할 것이다. 그거 하나만으로 시저를 삼키기는 어렵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놈이 경영권을 갖게 한 수단인 나이트. 그 나이트들만 빼면 그놈은 가진 게 없다. 주식, 계승권 하나


갖지 못한 허울뿐이었다.

뷔노는 그 여유를 틈타 허울을 뺏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마더의 진짜 장례식이 열린 날이었다.

본래 연둣빛이었던 잔디밭은 떨어진 단풍 탓에 붉은색 융단으로 덮인 것처럼 보였다. 흐르는 장송곡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더의 옛 친구들, 마더의 자매, 시저 조직의 사람들, 그리고 딸들까지 모두 긴
행렬을 이루었다.

“오셨군요.”

카렌을 보며 뷔노가 인사했다.

“조직들을 손안에 쥔 것, 축하하네.”

뷔노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카렌은 하늘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결국 내 마지막 자매의 장례까지 오게 됐군. 다들 명이 정말 짧군……. 애석할 정도로.”

사람들이 꽃을 들고 와서 그의 유골함 앞에 얹었다. 하얀색이 아닌, 붉은색 꽃들이었다. 장미, 튤립,


각각의 종은 다르지만 색채는 같은 꽃잎들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망자의 영혼을 불러오는 의식이었다. 머지않아, 자매들은
슬쩍슬쩍 고개를 들었다.

떠난 마더의 가족인 그들이었지만 붉은색 옷을 입진 않았다. 그들은 항상 즐겨 입던 검은 정장을 머리부터


양말까지 완벽하게 걸쳤다.

침묵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가을 햇볕 밑에서 사람들의 그림자가 늘어졌다.

뷔노는 유골함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천천히, 장엄한 음악 속에서 걸어갔다.
“마더께서 이런 분위기를 즐기실까?”

머스캣이 의문에 찬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마더는 늘 활기차고 장난스럽고 가벼운 걸 좋아했다.

“그래, 이제 칙칙한 건 관두고 놀지?”

피네가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라면 죽은 사람이 좋아할 걸 해줘야 했다. 그
말에 원뿔 피리를 든 남자가 악기에 깊이 숨을 불어 넣었다.

우우웅―

뱃고동 소리가 울리자마자 사람들은 손뼉을 쳤다. 축제 같은 활기찬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메이!”

“춤춰요, 뷔노.”

시몬이 뷔노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도회장에서 할 법한 춤 신청이었다. 뷔노가 피식 웃었다.

‘보름달이 떴던 날에는 춤을 추지 않았지만.’

뷔노는 시몬의 손가락 깍지에 제 손가락을 끼운 채 잡았다.

“양아치 무리에 웬 신사가 있군.”

뷔노는 시몬과 맞닿은 손을 잡은 채 뒤로 빙그르르 돌았다. 균형을 잃은 시몬이 휘청거리며 소리를 냈다.

“어, 뷔, 뷔노!”

“이런 건 그냥 느낌대로 해야지.”

휘청거리는 채로 뷔노는 시몬과 같이 돌았다. 그들은 발이 엉키고 스텝이 꼬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되는대로 돌았고 되는대로 춤췄다.

“메이!”

두 번째로 이름을 부르자, 화동이 꽃을 던졌다. 허공에 꽃잎들이 날렸다.

“메이!”

그리고 한동안 침묵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메이에게 인사를 전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위에
한둘씩 발걸음을 옮기자, 낙엽이 흩날리다 떨어졌다. 뷔노는 낙엽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붉네.”

봄도 여름도 다 지나가 버렸다.

“메이!”

이제는 진짜 끝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름을 부르면 망자는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뷔노는 마더에게서 받았던 시계에 왼쪽 손을 얹었다. 병이 진행되며 오른쪽, 왼쪽의 구분도 희미하던
마더는 무턱대고 떠넘기듯 그 시계를 뷔노에게 주었었다.
마더가 채워줬던 그 순간을 놓지 않기 위해서 뷔노는 마더가 오른손에 시계를 채워준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뷔노 자신이 일구어낸 지금이 마더가 살아있었더라면 행복해할 결과이길 바랐다. 그걸 기대하고 떠난 거일


테니까.

22. 마지막 장

신이시여, 제게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이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 역시 주소서.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임에서

뷔노의 마더에 대한 감정은 경외에 가까웠다.

담뱃대를 물고 의자에 걸터앉아 주위 사람에게 명령하는 태도가 태어나면서부터 그랬다는 듯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입 안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었다.

사람에 대해 무서우리만큼 잘 알고 있었고 모든 판단은 칼처럼 들어맞는 것 같았다. 그와 더불어


마더에게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와 있을 때면 뷔노는 넘지 못할 벽과 마주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건 비단 뷔노만이 그런 건 아니었다. 사람들을 끌고 절벽에서 뛰어내리자고 해도 그러겠노라 답하도록


만드는 그런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건 재능이 아니었다. 그저 그가 살아온 경험, 습득한 지혜, 끊임없이 사색해 온 결과였다. 그걸


한순간에 무너뜨렸다는 죄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더는 끊임없이 기억을 잃어갔고, 자신을 구축해 왔던 경험을 잃어갔다. 때로는 자매들이 누군지 물었고
사람을 착각했으며 그보다 더 심한 일도 했다.

노인에서 중년, 청년에서 소년. 그 행색은 갈수록 과거로 돌아가는 것처럼도 보였다.

갈수록 더해지는 건 자책뿐이었다. 모든 걸 안겨준 마더에게 모든 걸 앗아갔다는 것밖에는.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더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억이 사라지는 걸 인식하기 위해서였다.

일기 속 내용은 오락가락 마더의 세계처럼 여러 시공간을 오가는 듯했고 뷔노는 마더가 그 일기장을
자신의 머리에 던진 순간까지도 그것을 엿보지는 않았다.

‘제정신이 아닌 내가 너희를 죽이기 전에, 모든 게 이루어진 순간을 미리 보아야겠다.’

마더의 의지를 존중해 자매들은 계승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전통적인 자경단이 하던 방식 그대로였다. 둘은 조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모든 일을 진행했다. 마더와


뷔노는 엄지손가락을 찔러 나온 피를 문대며, 전혀 다른 서로의 피가 섞였음을 증명했다.

계승식 당일, 마더의 정신은 여느 때보다 또렷하고 맑아 보였다. 그 자리에서 마더는 말했다. 내 남은
꿈의 뒷장은 너희가 이루라는 명령이었다. 그 말을 하며 일기장을 뷔노에게 건넸다.
꿈의 뒷장.

뷔노는 마더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일기장을 펼쳤다. 한 장 한 장을 펼칠 때마다 억제하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치솟았기에, 매일 조금씩밖에 넘기지를 못했다.

초반부는 마더의 과거에 대한 기록, 오래도록 진행해 온 네 조직 간의 다툼에 대한 진득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꿈의 뒷장이라고 하면 그것이겠구나.

이게 마지막 뜨거움이다.

뷔노는 여느 때와 같이 일기장을 살펴보고는 조용히 표면을 쓸고, 고이 서랍장 안에 넣어두려 했다. 그때


일기장에서 빛바랜 종이가 사락, 뷔노의 손을 스치며 떨어졌다.

이게 뭐지? 뷔노는 종이를 주워들었다. 일기의 마지막 장에 풀이 말라붙은 흔적이 보였다. 그동안 일기의
마지막 장에 이 엽서를 붙여두었던 걸까. 무슨 엽서길래? 뷔노는 엽서를 읽어보았다.

DEAR MAY. 사랑하는 메이에게

늘 이 글귀를 마음속에 새기길.

맨 위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메이라는 이름과 빛바랜 종이의 노란색에서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나 예전의 이야기일까?

그것은 진정한 기사의 임무이자 의무,

아니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무적의 적수를 이기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돈키호테 속 글귀였다. 마더가 매번 읽어주었기에 알 수 있었다. 엽서의 내용은 이게 다인 걸까? 누가


보낸 엽서지?

뷔노는 다시 한번 엽서를 훑어보다, 뒤로 엽서를 넘겼다.

그리고 잘못을 고칠 줄 알며,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하는 것,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FROM MOTHER 엄마로부터

‘내 다 못 이룬 꿈의 뒷장은 너희가 이루어야 해.’


설마 꿈의 뒷장이라는 게…….

“있잖아. 이건 비밀이지만, 가끔은 나도 내 어머니가 그립단다.”

“마더의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신 지 오래야. 내가 16 살 때 어머니께서 돌아가셨거든. 그때 내 동생들을 데리고 가출했었지.”

전에 마더에게서 들었던. 익숙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단 이번에 그는, 자기 자신이 그 주인공이었음을


밝혔다.

“너랑 같은 나이였어. 그래서 너를 두고만 볼 수 없었지.”

“동생…….”

뷔노는 입을 다물었다. 옆에 없다는 건 죽었다는 의미일 테니까.

“자장가를 들려줬다던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였나요?”

마더는 빙긋 웃더니 조그마한 목소리로 뷔노의 귓가에 읊조렸다.

“어머니. 매독으로 많이 아파하셨거든.”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 이상 마더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온몸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도로 메워졌다.

죽기 전 자매에게 이루라고 했던 목표는, 네 조직을 무너뜨리라는 명령이 아닌, 삶을 온전히 살아가길


바라는 완곡한 열망이었다.

뷔노는 일기장과 노트를 서랍장 안에 다시 넣었다. 이제는 잃어버림과 잃어버린 이후의 삶을 받아들일
때가 됐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어느새 멎어있었다.

‘다른 지역에, 예전에 모든 조직들을 통솔하는 보스가 있었다고 해.’

모든 조직의 위에 군림하는 보스. 그게 가능하게 된다면 많은 걸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마더는 말하곤


했다.

뷔노는 창문을 내려다보았다. 높은 건물에서 밑을 내려다보자, 가득 켜진 도시의 불빛들이 점처럼 보였다.

시저, 하트, 다이아, 클로버, 모든 조직이 이제 뷔노의 손 안에 있었다.

‘마약은 일단 접었고.’

그 외에도 불법적인 사업들을 하나둘씩 정리해 갈 예정이었다.

동생들, 그리고 재수없어도 머리는 좋은 실베스트리스와 함께라면 합법적인 사업으로 수익을 낼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갈 길은 멀지만 조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감각 때문인지 조바심이 없어진


탓인지는 모르겠다.
뷔노는 자연스레 시가를 빼 들었다. 시가 케이스 안에서 혈석이 박힌 반지가 빛났다. 그런 뷔노의 손안에
있는 시가를, 한 사람이 뺏어갔다.

“시가는 금지라고 했잖아요.”

뷔노의 앞에 빙긋 웃고 있는 시몬이 보였다.

“아버지는 잘 뵙고 왔지?”

“말 돌리지 말고요.”

“…….”

“몸에 안 좋으니까 끊어요, 네?”

“아직 몸에 안 좋다는 게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도 아닌데.”

시몬은 노트 하나를 뷔노에게 내밀었다. 담배의 해로움에 대해 보도한 기사들을 모은 것이었다.

담배 회사가 언론사에 로비해 기사를 막아온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담배 회사가 돈이 떨어진 건지,
아니면 양심 있는 몇 언론인들이 드디어 보도하기 시작한 건지 담배의 위험성이 점차 알려지고 있었다.
애연가인 뷔노에게는 슬픈 소식이었다.

“담배 회사에 돈을 줘야 하나.”

“뭐라고요?”

뷔노가 입꼬리를 살짝 움찔거렸다. 피고 싶은데 못 피게 하니 금단 현상이 꽤 심했다.

“이를 어쩌나… 그럼 이렇게 할까요. 시가 향 맞추면 피워도 되는 걸로 하는 건요.”

조금 어이없는 제안이었다. 자신이 산 시가 향을 자신이 모르겠는가? 뷔노는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바닐…….”

쪽.

뷔노의 말은 시몬의 입 속으로 삼켜 들어갔다.

“바, 읍, 하…….”

아예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계속해서 입을 맞추고 있었다. 가쁘게 숨을 쉬던 뷔노는 시몬의 어깨를


떼어놓고 말했다.

“네가 시작한 거야.”

“네, 맞아요.”

시몬은 뷔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들어갈까요?”

“적극적으로 변했네?”
“뷔노가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마더가 제시했던 꿈은, 조직을 통합하는 것보다 수백 배는 어려운 일로 보였다.

아마 늙어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 겨우 문턱을 밟을 수 있을까 말까 하는 목표일 것이다.

아무런 대화도 나눌 필요 없었다. 시몬은 뷔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달뜬 숨, 체온이 오가는 과정은


전보다 능숙했고 수월했고 조금은 더 다정했다.

뷔노가 눈을 휘며 웃었다.

“가르치는 재미는 분명히 있어.”

시몬이 얼굴을 확 붉혔다. 뷔노가 달아오른 뺨에 만지며 소리 내어 웃었다.

순간이 지나면 녹아버릴 감정을 껴안는 것.

그런 건 뷔노의 고려 범위에 없었다. 항상 그의 인생은 죽음 혹은 생존, 뜨거움 혹은 차가움이었다.

사랑?

그건 육체적인 행위와 다르게 강렬하지도, 무감정하지도 않은 애매함이었다.

따뜻함은 뜨거운 불과 다르게 날을 벼릴 수도 없으며 차가움과 다르게 날을 식힐 수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날을 녹슬고 무디게 만들 뿐이었다. 그러나 마더는 뷔노에게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할 것을
명했다.

‘사랑이라…….’

뷔노는 시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그를 끌어안아 침대에 드러누웠다. 품 안에 바르작거리는


움직임이나 따뜻한 몸이 닿아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일단은 이걸로 충분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검은 정장의 미학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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