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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al of Contemporary Psychoanalysis

Winter 2023 Vol. 25 No. 1, 187-221.

분열분석(들뢰즈), 정신분석
그리고 헤겔 철학에 관한 비교 연구 III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에 대한
정신분석적, 헤겔철학적 관점에서의 비판적 고찰*

1)

홍 준 기
(경상국립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한글 초록>

이 논문은 헤겔 철학 그리고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특히 후기 들


뢰즈 철학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초기 들뢰
즈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정신분석을 취사선택적으로 수용했지
만, 특히 가타리와의 공동 저작인 안티 오이디푸스 이후부터
는 정신분석을 근본적이고 철저하게 비판하는 입장으로 전환한
다. 이러한 입장 변화는 들뢰즈 철학과 정신분석과의 관계에 관

* 이 논문은 2018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8S1A5B5A02036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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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한다. 전기 들뢰즈와 후기 들뢰즈의 정


신분석 수용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이며, 이러한 입장 변화
가 이론적, 실천적으로 설득력 있는지 등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국내외의 대부분의 연구가 이러한 문
제에 대해 체계적인 대답을 제시하지 않거나 대답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특히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을 중심으로 후기 들뢰즈의 존재론적, 철학적 입장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고, 특히 정신분석 및 헤겔 철학의 맥락에
서 후기 들뢰즈 이론이 갖는 이론적 실천적 문제점들에 대해 비
판적으로 탐구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는 정신분석
을 철저히 비판하는 쪽으로 선회하고 ‘분열증’을 특권화하지만,
이는 사실 정신분석적 개념, 그리고 정신분석적으로 재해석된
스피노자의 개념을 오히려 이용하는 자기 모순에 빠진다. 그리
하여 그는 천 개의 고원에서는 보다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비임상적 개념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본 연구는 이러한 쟁점을 재구성할 것이며, 더 나아가 들뢰즈가
물론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헤겔 철학을 오히려 더욱 헤
겔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음을 보일 것이다. 이를
통해 후기 들뢰즈, 헤겔 철학, 정신분석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재
구성할 것이며, 끝으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길을 열었던 후기
들뢰즈 철학이 갖고 있는 정치철학적 난점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 주제어: 헤겔, 정신분석,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


일관성의 평면, 사회적 국가, 분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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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분석(들뢰즈), 정신분석 그리고 헤겔 철학에 관한 비교 연구 III 189

Ⅰ. 문제의 제기

들뢰즈 철학에 대해 항상 제기되는 질문 중 하나는 전기 들뢰즈와


후기 들뢰즈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관한 것이다. 차이점에 대해서는 명
확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들뢰즈 연구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분
명한 한 가지는 반헤겔주의와 반정신분석주의이다. 이들에 따르면, 전
기 들뢰즈와 후기 들뢰즈의 차이점이 무엇이든 적어도 그 점에서는 전
후기 들뢰즈 간에 차이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트는 이렇게 말한
다. “(…) 들뢰즈 사유의 첨점에 서 있는 것은 헤겔주의에 대한 끈질기
고도 무자비한 포위공격이며, 부정적인 것에 대한 공격이다.”(Hardt
2004: 35). 이렇듯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헤겔에 대한 공격 또는
비난은 일관성이 있지만(부정성 등에 대한 공격), 정신분석에 대한 들뢰
즈의 수용은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기는 동안 상당히 또는 결정적으로
달라진다는 점도 중요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초기 들뢰즈는 상당히 긍
정적으로, 또는 자신의 관점에 맞게 정신분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지
만, 특히 안티 오이디푸스 이후부터는 정신분석을 철저하게 기각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들뢰즈의 입장 변화는 ‘사후적으로’ 정신분석을
헤겔 철학과 더불어 들뢰즈 철학의 핵심적 논박 대상으로 만드는 결과
를 낳았다. 거의 예외 없이 들뢰즈주의자들은 후기 들뢰즈의 이러한 변
화에 대해 철저히 사유하지 않은 채, 전기 들뢰즈는 정신분석을 일정 정
도 수용했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식의 ‘모호한’ 대답
을 내놓거나, 후기 들뢰즈 이론에 근거해 정신분석을 철저히 공격하는
‘일관성 있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이 경우 정신분석은 프로이트
뿐만 아니라 라캉, 클라인 등 핵심적 분석가들 모두를 포함한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반정신분석의 입장으로 철저히 선회한 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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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을 중심으로 후기 들뢰즈 철학을 비판적


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 저작들은 정신분석의 욕망 이론을 철저히
사회적 욕망 이론으로 대체하려는 시도,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집단적 욕망을 하나의 동일한 욕망으로 통합하려는 시
도인데, 이러한 이론적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존재론,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정치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분열분석
이론을 체계화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의 부제가 ‘자
본주의와 정신분열증’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들뢰즈와 가타리는
분열분석 이론을 체계화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내적 논리를 분석하
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실천적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했다. 분열분석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를 변형하고 그것의 한계를 넘어
서려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수립하려는 광범위하고 새로운 시
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갖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무엇
인가? 분열분석은 그 자체로 정합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론적 기반을 갖
기보다는, 특히 헤겔과 정신분석 비판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전략을 부당하게 활용하는 이론은 아닌가? 또한 들뢰즈주의자들도 이미
종종 지적한 바 있듯이, 안티 오이디푸스는 자본주의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 과정을 동전의 양면으로 간주하는 역설에 빠져 있다는 결정적
문제가 있다. 들뢰즈는 마르크스를 나름의 방식으로 수용해 자본주의가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동시에 진행시키는 사회구성체임을 보여주었는
데, 그렇다면 자본주의로부터의 진정한 도주로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
에 존재하는가? 들뢰즈가 제시한 가장 핵심적 대답 중 하나는 물론 분
열자의 욕망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구성체가 정신분열적 욕망 구조
와 동형적이라고 말하는 들뢰즈 이론에는 진정한 도주선이 존재하지 않
는다는 앞서 언급한 근본적 문제에 다시 직면한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갖고 있는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해 들뢰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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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말하는 분열증은 임상적 의미의 분열증과 다른 것이라는 대답을


제시했다. 들뢰즈 필요할 때마다 이러한 대답을 반복적으로 제시하지
만, ‘실제로는’ 분열증자라는 표현이 갖는 임상적 의미를 완전히 떨쳐내
지 않고 이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속박된 신경증자’를 가장 소외된 부정적인 인물로 간주한다는 것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하트나 네그리 같은 들뢰즈 연구자들이 안티 오이
디푸스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특히 천 개의 고원에서의 들뢰즈
의 이론을 더욱 중시하는 것은 안티 오이디푸스가 이러한 문제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천 개의 고원의 중심적인 문제는 배치의 문제,
특히 […] 배치의 문제이다. 사회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사회적 배치의
논리는 무엇인가? […] 권력 형성체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나
는 그것들이 욕망, 탈주, 탈영토화의 우위에 비해 눈에 띄지 않았다고
생각한다.”(Hardt 2004: 371)
필자는 본 논문에서 특히 사회정치이론에 관심을 갖는 후기 들뢰즈
(그리고 가타리)와 전기 들뢰즈의 차이점(그리고 유사점)이 무엇인지 비
판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먼저 의미의 논리에서 안티 오이디푸
스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전기 들뢰즈와 후기 들뢰즈의 차이
점이 무엇인지 논의할 것이다. 그 후 왜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
원을 집필했고, 그것과 안티 오이디푸스의 유사점과 차이점이 무엇
인지 비판적으로 재구성할 것이다. 미리 이 점에 대해 언급하면, 들뢰즈
는 천 개의 고원에서 일관성의 평면(plan de consistance) 그리고 내
재성의 평면(plan d’immanence)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분열증자라는 개
념이 갖는 임상적 함의를 완전히 떨쳐내려고 했다(그러나 그 이후에도
들뢰즈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비판하기 위해 정신분열증이라는 용어
가 갖는 임상적 의미를 여전히 재활용한다!). 일관성의 평면과 내재성의
평면 개념은 사실상 거의 동의어이지만, 전자는 정동과 감각을 더 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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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후자는 추상성을 더 강조하는 개념이다. 천 개의 고원으로 넘어


가는 과정에서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수용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에
도 주목할 것이며, 이와 더불어 라캉의 스피노자 수용과 들뢰즈의 스피
노자 수용의 근본적인 차이점에 대해서도 언급할 것이다. 필자는 본 논
문을 통해 들뢰즈 연구자들이 서술하지 못했거나, 모호하게 놔둘 수밖
에 없는 지점이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재구성할 것이다.

II. 스피노자적으로 재해석된 안티 오이디푸스의 핵심


개념들 : 기관 없는 신체, 욕망 기계, 독신 기계, 주체

1. 기관 없는 신체, 욕망 기계

안티 오이디푸스의 내용에 대해서는 국내외 연구자들에 의해 많


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에 대한 해설서나 글이 많기 때문에1) 여기에서
는 좀 더 직접적으로 본 연구의 관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
을 중심으로 비판적으로 서술하겠다.
먼저 기관 없는 신체에 대해 논의해보자. 의미의 논리에서 기관
없는 신체는 정신분석에 없는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즉 차이와 반
복에서 철저하게 제시한 바 있는 존재의 일의성 논제를 뒷받침하는 핵
심 용어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이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들뢰즈는
이를 스피노자 존재론 철학의 실체 개념에 상응하는 것으로 재정의한다.
기관 없는 몸은 “생산하기와 생산물의 동일성”(Deleuze, Guattari 1972:

1) 예를 들면 Bogue, R. (1995) 137쪽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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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일치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것은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내재적 실체”이다(Deleuze Guattari 1972:
542). 또한 흥미로운 점은 그가 기관 없는 신체를 스피노자적 실체로
간주하지만, 그것은 욕망하는 기계에 의해 “반생산”으로 생산되는 “충
만한 몸”(Deleuze, Guattari 1972: 43)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왜
그것은 반생산인가? 들뢰즈에 따르면 기관 없는 신체는 ‘등록의 생산’에
상응한다. 여기에서 등록이란 기관 없는 몸이 욕망하는 기계가 생산한
것들을 자신에게로 전유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기관
없는 몸은 생산이 아니라 “비생산”, 또는 “반생산”이다. 이제 우리는 들
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기관 없는 신체가 스피노자의 실체에 상
응한다고 말하지만, 이 저작에서 그는 스피노자의 실체를 강조하기보다
는 분열증적인 욕망하는 기계(또는 이것의 부분충동적 에너지, 힘)가 행
사하는 욕망 생산을 ‘진정한 진보적’ 모델로 설정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
요가 있다. 들뢰즈가 이전의 저작에서도 일정 정도 분열증자를 특권화
했지만, 종종 그는 도착증자에게도 못지않은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 점
에서 들뢰즈의 정신분석 수용 또는 비판은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었는
데, 이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본격적으로 분열증자를 특권화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는 처음부터 광기를 복권하고자 했던
푸코의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분열증자를 스피노자
존재론에 입각해 사회적 욕망이론 또는 사회적 기계 이론으로 재구성했
다는 점에서 푸코의 논의와 차이가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출간된
이후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이 저작을 긍정적으로 인용했고, 그후
들뢰즈도 천 개의 고원에서 푸코의 ‘배치’ 개념을 차용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기관 없는 신체는 반생산이며 자본이다. 판사장
슈레버가 자신의 몸이 신의 빛살을 끌어당겼듯이, 기관 없는 신체는 스
스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기계의 생산물을 자신에게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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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다((Deleuze, Guattari 1972: 40). 따라서 자본가의 충만한 기관


없는 신체는 전도가 발생하는 토양이다. 생산의 심급인 노동의 생산물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마치 자본의 생산물인 것처럼 전도되어 나타난
다. 여기에서 우리는 들뢰즈가 마르크스의 상품 물신성 개념을 신체 없
는 기관에 의한 등록(전유)이라는 개념을 통해 재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전도 현상, 즉 상품 물신성을 불러일으키는 기
관 없는 신체는 들뢰즈에 따르면 전체주의(또는 들뢰즈 분열분석에서
그것과 사실상 동의어인 자본주의)의 기체이며 이는 편집증적(망상증
적) 신체다((Deleuze, Guattari 1972: 34, 542).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즉 스피노자적 실체라는 ‘좋은’ 의미에서) 그것은 욕망 기계의 “질료”
라는 의미를 부여받는다.(Deleuze Guattari 1972: 542) 여기에서도 우
리는 들뢰즈 논의의 양면성 또는 모호성을 볼 수 있다. 기관 없는 신체
는 상품물신성을 낳는 ‘실체’로서 편집증적(망상증적)이지만, 동시에 그
것을 극복하는 욕망 기계의 질료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생산자인 분열적 욕망 기계는 기관 없는 신체와 부분대상이
라는 두 개의 “질료”를 갖고 있다. 전자는 “거대 분자”이고 후자는 “미
시 분자”다. 부분대상이 미시 분자인 이유는 욕망 기계는 부분충동들의
파편화된 유목적 흐름 그 자체에 다름 아니기((Deleuze Guattari 1972:
29) 때문이다. 이 흐름 속에서 접속되고 단절되며 재접속되는 부분대상
(구순적 대상, 항문적 대상 등등)은 미시적이다. 반면 기관 없는 신체는
욕망하는 기계가 생산한 에너지를 등록하기 위해 생산한 틀, “받침대”
다. 그것은 욕망하는 기계가 생산하는 “강도”의 다양한 등급으로서 “공
간을 언제나 채우고 있는 질료”(Deleuze, Guattari 1972: 542)이며,
“생산의 세계 전체가 등록되는” 거대 분자이다. 그러나 기관 없는 몸과
부분대상은 “하나의 같은 것, 하나의 같은 다양체”로서, 궁극적으로는,
즉 분열증자에서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편집증자에서는 이 둘이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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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Deleuze Guattari 1972: 34). “이 둘은 한데 어우러져 욕망의 분


자의 사슬의 두 끝에서 연속성의 관계를 이룬다.”(Deleuze Guattari
1972: 542)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들뢰즈에서 기관 없는 신체는 자본
가의 몸인 자본처럼 ‘전도’의 근거로서 편집증적 신체이기도 하고, 분열
증적 신체(스피노자적 의미의 실체)라는 상반되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점에서 들뢰즈의 논의 방식은 매우 헤겔적임을 알 수 있다(반대물의 직
접적 일치라는 점에서). 그리고 들뢰즈가 기관 없는 신체의 강도는 0(강
도=0)이며 “반생산”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일차적으로 바로 편집증적
신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칸트의 강도량(내포량)에 대한 설명
을 따라 강도의 증감은 강도=0을 출발점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강도들
은 그들 간의 복잡한 관계에 따라 […] 상승하거나 하락한다”(Deleuze,
Guattari 1972: 49)는 의미에서 기관 없는 신체는 강도 0이며 반생산적
이다. 강도=0이라고 칸트를 인용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들뢰즈에 따
르면 반생산으로서의 기관 없는 신체도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러한 한에서 이러한 반생산은 이미 생산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편집증적
인 자본과 욕망의 신체가 분열증화할 때 그것의 강도는 증가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마르크스
를 본격적으로 전유해 욕망 이론을 사회적, 집단적 욕망 이론으로 번역
하는 과정에서 기관 없는 신체를 스피노자의 실체에 상응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기관 없는 신체를 동시에 자본의 몸과 동
일한 것으로도 간주한다. 따라서 기관 없는 신체보다 더 ‘상위’의 개념
인 욕망 기계를 도입하고 이를 “생산의 생산”으로 정의한다.
그렇다면 욕망하는 기계와 그것의 질료들인 기관 없는 신체 및 부
분대상의 관계는 어떠한가? 욕망하는 기계는 하나의 유기체와 전체로
통합될 수 없는 부분대상들(구순충동, 항문충동 등 소위 부분충동의 대
상)을 통해 욕망의 충족에 도달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신분석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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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면, 욕망하는 기계는 파편화된 부분충동들 또는 욕망과 힘의 에너


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들뢰즈는 “신적인 것은 차
라리 에너지 그 자체”라고 말한다(Deleuze, Guattari 1972: 40). 분열
증적 욕망 기계는 부분충동들을 하나의 전체로 통합하고자 하는 ‘유기
체’ 또는 ‘초월적 남근’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 욕망의 흐름(과 단절, 그
리고 재접속) 그 자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욕망 기계는 ‘결여’에 근거한
욕망이 아니라, 충만하며 생산적인 욕망을 생산하는 ‘최종심급’이며 따
라서 그것은 ‘생산의 생산’이다. 이에 덧붙여 우리는 들뢰즈가 기관 없
는 신체를 ‘생산물과 생산하기의 동일성’으로 설명하면서 바로 이 동일
성이 “제3항을, 즉 미분화된 거대한 대상을 형성한다”(Deleuze
Guattari 1972: 32)고 덧붙인다는 것이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이는 헤
겔의 변증법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으로 대논리학의 「존재론」에서 존
재와 무의 직접적 일치라는 관점에서 설명한 바 있다.

2. 들뢰즈와 라캉의 주체 개념 : 들뢰즈의 독신 기계와 라캉의 머


리 없는 주체

그렇다면 독신 기계란 무엇인가? 욕망하는 기계가 스피노자의 속성


에 상응한다면 그것은 양태에 상응한다. 독신 기계는 욕망하는 기계가
생산하는 에너지를 소비(향유)한다. 따라서 그는 독신 기계를 소비의 생
산이라고 부른다. 이 독신 기계가 들뢰즈적 의미의 주체다. “주체는 욕
망 기계들 곁에서 여분으로 생산된다.”(Deleuze, Guattari 1972: 47. 강
조는 필자) 물론 들뢰즈의 이러한 주체 개념은 라캉의 “머리 없는 주
체”(Lacan 1973: 278)와 무관하지 않다. 들뢰즈는 라캉으로부터 ‘여분’
이라는 개념을 차용해 사용했는데, 들뢰즈에서 그 용어는, 욕망 기계가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무한한 흐름의 어떤 단면을 취해 그것을 소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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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만 보자면 들뢰즈의 독신 기계과 라


캉의 머리 없는 주체 개념은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들뢰
즈는 이 개념을 자신의 존재론에 맞춰, 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부당한
방식으로 변형시킨다. 실재의 단면으로서의 어떤 에너지를 취하는 독신
기계는 ‘존재의 일의성’에 따라 전체를, 즉 “세계사를 단번에 소
비”(Deleuze, Guattari 1972: 53)하는 니체적 주체 또는 스피노자적 양
태이다.”2) 그리고 라캉에게서도 머리 없는 주체의 향유는 실재에 참여
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라캉이 종종 말했듯이 “실재는 늘 동일한 장소
로 […] 되돌아오는 것”(Lacan 1973: 82)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충동만
족은 ‘일의적’이다. 그러나 주체, 즉 머리 없는 주체는 “공백을 갖고 있
는 장치”라는 점에서, 그리고 “주체는 상실된 한에서의 어떤 대상의 기
능을 만들어”(Lacan 1973: 279)낸다는 점에서 들뢰즈의 독신 기계와
다르다. 라캉은 들뢰즈와 달리 일의성과 분리(또는 공백)의 관계를 변증
법적으로 사유한다. 따라서 팔루스적 향유에 고착되지 않은 충동 만족
또는 향유(예를 들면 여성적 향유)는 라캉이 후에 체계적으로 설명했듯
이 비전체이고, 들뢰즈의 여성되기는 ‘전체-되기’다. 단적으로 말하면,
위에서 상세히 언급했듯이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속성에 상응하는 욕망
기계, 그리고 양태에 상응하는 독신 기계(분열증자)를 개념적으로 구분
했지만, 그는 사실상 이 둘은 구분을 무화시킨다. 세미나 9권: 동일
화에서 라캉이 행한 위상학적 고찰을 연상시키듯 들뢰즈는 이렇게 말
한다. “기관 없는 몸 위의 분리점들은 욕망 기계들 주위에서 수렴원들을
형성한다. 그러면 기계 곁에서 잔여로서 생산된 것, 즉 기계에 인접한 부
속물 내지 부품으로 생산된 주체[즉 독신 기계: 필자]는 그 원의 모든
상태를 경유하고 한 원에서 다른 원으로 이행한다.”(Deleuze, Guattari

2) 같은 책,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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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51) 들뢰즈에 따르면 이 독신 기계는 어떤 자아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또는 독신 기계는 모든 자아를 소유하고 있는데, 이때 자아는 인격
으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기관 없는 몸”의 모든 “강도 지대들”의 상태를
생산하며 그것들과 “동일화”하는 비인격적 자아다(Deleuze, Guattari
1972: 52). “갑작스럽게 이성을 잃어 낯선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될 문헌학 교수 니체-자아는 없다. [기관 없는 몸의: 필자] 상태들의 계
열을 경유하는, ‘역사의 모든 이름이 나다…’라며 역사의 이름들을 이 상
태들에 동일화하는 니체-주체가 있다.”(Deleuze, Guattari 1972: 52)
그리고 “‘나는 나다. 따라서 이게 나다’라고 외”치는 분열자는 존재의 일
의성 논제에 따라 “단번에 세계사를 소비한다.”(Deleuze, Guattari
1972: 53) 또는 “호모 나투라”인 분열증자는 동시에 “호모히스토리아”
이다. “우리는 분열자를 호모 나투라로 규정하면서 시작했는데, 결국 분
열자는 호모히스토리아로구나”(Deleuze, Guattari 1972: 53) 그리하여
독신 기계, 욕망 기계, 기관 없는 신체라는 들뢰즈의 분열분석의 삼위체
는 다시 구분 없는 일자, 전체가 되며, (천 개의 고원의 핵심 용어로
표현한다면) ‘일관성의 평면’ 또는 ‘내재성의 평면’에서 하나가 된다. 존
재의 일의성 논제는 이렇듯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III. 들뢰즈와 라캉의 스피노자 그리고 헤겔

1. 어떤 의미에서 들뢰즈는 헤겔적이고 헤겔적이지 않은가:


비판적 고찰

이미 언급했듯이 들뢰즈 연구자들이 명확히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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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분석(들뢰즈), 정신분석 그리고 헤겔 철학에 관한 비교 연구 III 199

중 하나가 ‘들뢰즈에게도 주체 개념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어떤


연구자들은 들뢰즈의 철학은 비인격성의 철학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주
체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들
뢰즈에게도 주체 개념이 존재한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우리가
들뢰즈가 정의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분열증자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상
당한 혼란을 야기하는 이러한 문제 상황으로부터 어느 정도 쉽게 벗어
날 수 있다. 들뢰즈에게는 분열증자만이 ‘진정한 주체, 즉 주체 아닌 주
체’인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안티 오이디푸스는 매우 모순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독신 기계 또는 분열증자라는
명칭 하에서, 정신분석 이론을 철저히 전유하면서도, 부당한 방식으로,
즉 모순적 방식으로 그것을 변형시켜 완전히 단절하는 분열증적 주체
이론을 심화시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정신분석 이론
을 나름의 방식으로 일정 정도 긍정적으로 수용했던 이전 저작과는 구
분되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분열분석 이론이 도입한 새로운 점이다.
들뢰즈는 라캉 이론을 전유해 다음과 같이 주체를 설명한다고 다시 정
리할 수 있을 것이다. 독신 기계는 여분의 향유를 누리지만 존재의 일의
성 논제에 따라 존재 전체에 참여한다. 반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신경
증자는 들뢰즈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갇힌 소외된 존재인데,
그가 소외된 인물인 이유는 ‘금지된 (성)행위를 욕망하기’ 때문이 아니
라, 오히려 금지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행위를 하지 못하는 자,
달리 말하면 존재의 일의성에서 이탈한 자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적 의
미의 주체, 즉 독신 기계는 금지 자체를 알지 못하는 주체다. 그에게는
부분과 전체가 일치하며, 나와 타자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들뢰즈에 따르면 나는 타자와 다른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타자 간에는 어떠한 갈등이나 금지, 금기, 모순이 존재하지 않으
며, 따라서 나와 타자는 하나이므로 언제든 접속, 분리, 재접속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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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바로 이것이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헤겔 철학과 관련해 들뢰즈의 분열분석의 논리에 대해 언급해보자.
‘같음과 다름의 직접적 일치’라는 헤겔적 논리를 자신의 방식으로 활용
한다는 것인데, 이는 필자가 다른 곳에서 논의했듯이 헤겔이 대논리
학의 「존재론」에서 논의한 바 있는 ‘존재와 무의 직접적 일치’, 또는
‘무매개적 일치’라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홍준기 2021: 188-192). 그러
나 헤겔과 들뢰즈가 달라지는 점은 들뢰즈는 ‘진정한’ 개체성을 결코 긍
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체, 주체의 설명을 위해서는 모순, 부정성,
매개 등의 범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어떠한가? 그에 따르면, 존재의 시원, 근원을 해명하기 위해
서는 무매개성, 긍정성, 그리고 순수 차이 등의 범주가 핵심적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또한 중요한 점은 헤겔에 따르면 순수차이도 부정성의
여러 의미 중 하나라는 것이다(따라서 이러한 부정성은 긍정성이다). 존
재의 “동일성”은 “부정”되어 타자가 되지만 이 타자성은 “자기 자신과
의 동일성”이다(Henrich 1981: 86). “무는 존재에서 출현한다. 그것은
존재로 이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존재로 이행했다.”(Henrich
1981: 87. 강조는 필자.)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강도의 첫 번째
특성”으로 “즉자적 비동등”(Deleuze 1968: 496)을 제시하는데, 이는
방금 언급한 존재의 시원에 대한 헤겔의 논리를 반복한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헤겔이 이러한 의미의 순수차이에 대해 논의했음을 간과 또는
외면했다. 사실 이는 놀랄 만한 일은 아닌데, 헤겔적 의미의 차이(즉 차
이로서의 부정성, 즉 긍정성)가 다름 아닌 들뢰즈가 말하는 강도의 특성
에 오히려 정확히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뢰즈와 달리 헤겔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존재 일반(이것이 헤겔적 의미의 존재의 일의성이다)
에서 개체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존재와 무의 직접적, 무매개적 일치)는
배후로 물러나고(완전히 사라지거나 그 중요성을 상실하지 않은 채)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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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 모순, 매개 등의 개념이 등장해야 한다. 그때만 주체의 개별성이


존재할 수 있으며, 주체와 타자 사이는 매개적 관계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개별성는 보편성과 대립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존재의 자
기관계적 부정성(자기와의 차이와 동일성의 일치)이 보편성의 토대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Henrich 1981: 99). 그러나 들뢰즈는
이러한 헤겔의 논리학의 섬세한 측면을 외면한다. 들뢰즈적 의미의 주
체인 독신 기계는 분열증자이며 그것은 개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
서 들뢰즈에 따르면 분열증자는 주체이며 동시에 주체가 아니라는 역설
적인, 달리 말하면 모호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었을 뿐이다. 반면 라캉
의 주체 개념은 존재론적 측면에서 볼 때 들뢰즈-스피노자가 아니라 헤
겔에 근접한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좀더 상세히 다시 언급할 것이다.
바디우는 존재의 함성에서 들뢰즈와 헤겔 철학의 유사성을 이렇
게 설명한 바 있다. “[…]내가 보기에 들뢰즈와 헤겔이 제시하는 진리
는 궁극적으로 기억이요, 자기의 현실화된 풍요로움을 존재에로 합체시
킴이자, 절대적인 과거이다. 다만 그들은 기억의 구조와 관련하여서 갈
라선다―이 점이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들뢰즈에게 있어서는 기억의
구조가 관계, 즉 잠재화들과 차이화인 반면, 헤겔에게 있어서는 기억의
구조가 그것이 단계들, 즉 피할 수 없는 거창한 모습들이기 때문이
다.”(Badiou 1997: 14) 이러한 바디우의 설명은 너무 단순하고 도식적
이어서 들뢰즈와 헤겔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설명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의 들뢰즈 비판의 논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식화하지 못
한다. 따라서 필자는 바디우가 “들뢰즈의 방법은 매개들에의 의존을 거
부하는 방법이며, 또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그의 방법은 본질적으로 반
변증법적 방법이다”(앞의 책, 1997: 89)고 말하는 부분에 더 주목하고
싶다. 바디우의 들뢰즈 비판 내용을 재구성하는 것은 본 논문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지만, 바디우 역시 ‘매개 철학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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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비판하기 때문에 그의 철학은 오히려 들뢰즈 이론에 근접한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바디우의 헤겔 비판도 헤겔과 들뢰즈
간의 진정한 쟁점이 무엇인지를 간과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쟁점 중 하나는 앞서 필자가 논의했듯이 들뢰즈의 스피노자
에 대한 재해석, 즉 주체 이론이다. 개체의 ‘우위성’ 논제이다. 이것 역
시도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의 해석과 유사하다. 이는 헤겔의 대논리
학의 3권인 「이념론」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의 일치로서의 개체성, 주체
(이 주체는 또한 실체이며 이념이다)에 대한 논의에서 발견된다. 헤겔의
이념은 칸트나 플라톤적 이념과는 달리 초월적 또는 규제적인 것이 아
니라 현실 속에 내재하고, 차이와 보편을 통일하는 “절대적 이념”(Hegel
1978a: 440), “순수이념”(Hegel 1978a: 442)으로 전개된다. 들뢰즈나
바디우가 알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는 척하는 중요한 것은 이념에 대한
헤겔의 그러한 설명이다. 무매개적인 통일인 “존재의 순수한 직접성”이
“이제 매개를 통해서”, 달리 말하면 “매개의 지양을 통해서 […] 이념
과 합치되”고 “자기동일성에 도달한[다]”(Hegel 1978a: 440. 필자가
조금 수정해 인용했음). 즉 헤겔의 이념은 ‘개념과 존재(또는 사유와 존
재)의 통일성’을 의미하는데, 헤겔이 말하는 이러한 통일성이야말로 들
뢰즈가 말하는 내재성의 철학의 핵심 개념들, 즉 존재의 일의성, 또는
내재성의 평면, 일관성의 평면 같은 핵심 개념들이 말하고자 하는 통일
성이다. 그러나 헤겔이 들뢰즈와 달라지는 점은 전자는 이러한 통일성
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매개를 경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
이다. 방금 제시한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헤겔은 ‘매개를 통해서’를
동시에 ‘매개의 지양’이라고 설명한다. 정확히 이 점이 들뢰즈와 바디우
가 헤겔을 오독하는 지점이다. 헤겔이 자신의 철학을 오직 ‘매개’에 입
각해 설명했다면 그의 철학은 결여, 부정성, 또는 초월 철학에 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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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 것이 될 것이지만, 이러한 매개가 다시 이념 속에서 지양되기 때문


에 헤겔 철학은 매개의 철학이 아니라, 매개와 비매개의 통일성의 철학
인 것이다.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뿐만 아니라 천 개의 고원에서
주체(화)라는 개념을 상당히 활용하고 있다(들뢰즈가 천 개의 고원을
통해 넘어서고자 했던 안티 오이디푸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후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헤겔(또는 라캉)과 들뢰즈가 달라지는 지점은 들
뢰즈는 주체라는 개념도 비매개적 연관성 속에서만 사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에서 주체, 예를 들면 독신 기계는 존재 전체와 비매개적
으로 하나를 이루며, 들뢰즈에 의해 천 개의 고원에서 재해석된 스피
노자의 양태도 존재 전체, 즉 일관성의 평면 또는 내재성의 평면과 비매
개적인 연관관계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들뢰즈의 주체는 존재 전체와
구분되면서도 구분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들뢰즈의
철학 구도 때문에, 그의 철학에도 주체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들뢰즈 연구자들 또는 철학 연구자 일반에게 상당한 혼란
을 야기했던 것이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제시한다. “다
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Deleuze 1980: 21) 왜 그러한가? 이를 달
리 표현하면 다양체(또는 ‘무수한 고원’ 또는 그가 재해석한 스피노자의
양태)가 곧 주체이며 객체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주체와 객체 간의
진정한 분할은 그의 철학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양체
는 하나인가 수적 다수인가? 들뢰즈 철학의 전제에 따라 다양체는 물론
수적 다수가 될 수 없고, 또한 하나도 아니다. 다양체는 “[…] 주체나
객체, 자연적 실재나 정신적 실재, 이미지와 세계로서의 ‘하나’와 더 이
상 관계를 맺지 않[는다].”(Deleuze 1980: 20-21. 강조는 원문) 다양
체가 ‘하나’가 아닌 이유는 그것은 “연결접속을 늘림에 따라 반드시 본
성상의 변화를 겪게 되”기 때문이다(Deleuze 1980: 21). 그러나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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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끊임없는 변화라는 ‘통일성’이라는 의미에서는 하나라고 할 수도 있


을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에 따르면 다양체는 끊임 없이 변화하기 때문
에 하나가 곧 타자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다수와
하나는 서로를 전제하기 때문에(또는 존재의 일의성 논제에 따라) 이 다
양체는 사실 ‘다수’도 아니어야 한다. 들뢰즈적 관점에서 양태들의 수가
다수가 아닌 이유는 각 양태(개체, 고원)가 존재 전체(또는 모든 양태들
또는 모든 양태들의 관계성 전체)를 표현하고, 전체를 표현하는 각 양태
간의 구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각 양태들의 관계가
표현하는 존재 전체가 곧 각 양태 그 자체이므로(부분과 전체의 무매개
적 일치) 들뢰즈 철학에는 하나 그리고 다수는 존재하지 않는다(그러나
그것을 들뢰즈는 다양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다수도 아닌 것, 달리 말하면 하나가 곧 다수인 것이다. 또는 하나이거
나 다수라고도 말할 수 없는 어떤 것, 흐름 자체, 변화 자체, 되기 그 자
체만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들뢰즈 철학에는 역설의 흐름만이 존재한
다.
이제 여기에서 필자는 헤겔의 대논리학의 존재론에서 언급한 바
있는 존재의 시원에 관한 논리가 정확히 이러한 들뢰즈의 존재-논리학
을 우선 정식화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존재의 시원에 관한 헤겔
의 ‘악명 높은’ 존재와 무의 통일, 또는 “존재와 비존재”는 매개에 의한
‘나쁜 의미의’ 부정성의 통일이 아니라 “직접적으로[무매개적으로] 합
일되어” 있다(Hegel 1978: 64. 강조는 필자). 이 시원은 “순수한 무가
아니라 그로부터 어떤 것인가가 발생, 발단돼야만 하는 그런 무”(Hegel
1978: 62)이다. 동시에 존재와 무는 “구별된 것으로 현존하는바, 왜냐
하면 시원은 이제부터 무엇인가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미 이것은 어
떤 타자를 지시하기 때문이다.”(Hegel 1978: 64. 강조는 필자) 앞서 언
급했듯이 존재와 무의 직접적 일치라는 명제 속에도 부정성이 내포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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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데, 이때의 부정성은 매개된 관계 속에 내재해 있는 부정성이 아니


다(이러한 의미의 부정성은 「본질론」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존재
와 무의 비매개적 일치’는 곧 ‘일자의 타자성’을 지시하는 비매개적 통
일성, 달리 말하면 타자 존재를 가능케 하는 ‘순수차이’로서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이제, 양태(개체)와 전체와의 관계에 대한 들뢰즈의 논의는 헤겔이
대논리학의 「이념론」에서 개별성을 특수성과 보편성의 통일로 파악
하는 것에서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다. “자기를 특정한 규정적인 것으로
정립하는 개별성은 결코 스스로가 외면적인 구별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
니라, 오직 개념의 구별로서 드러날 뿐이다. 따라서 개별성은 보편을 자
기로부터 배척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또한 이 보편은 개별성 자체의 계
기를 이루”기 때문에, “보편은 여기서 또한 못지 않게 본질적으로 개별
성에 관계한”다(Hegel 1978a: 91-92). 그렇다면 들뢰즈와 헤겔의 존
재론 또는 ‘추상기계’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 위 인용문에서도 암시되었
듯이 헤겔적 의미의 다양체, 이념, 보편과 특수의 통일로서의 개체, “절
대적이고 근원적인 개념”은 “자기 분할”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들뢰즈의 다양체 또는 이념과 구분된다(차이와 반복에서도 들뢰즈는
‘이념’이라는 용어를 오히려 존재의 일의성이라는 자신의 존재론의 핵
심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헤겔에 따르면 개체(개
별성)가 주체인데, 이 주체는 전체와 부정적이면서도 동시에 긍정적 관
계를 맺는다. 이것이 개념의 “자기 분할”인 것이다. 들뢰즈에서와 마찬
가지로 헤겔에서도 각 개체 또는 주체는 개별 주체들 전체의 관계 속에
존재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주체는 전체 또는 보편성과 변증법적 관계
를 맺고 있다. 그러나 헤겔은 동시에 이러한 개체 또는 주체가 ‘하나’의
주체로서 전체로부터 분할, 분리되었다는 것. 그러나 ‘나쁜 의미의’ 분
리, 부정성을 ‘좋은 의미에서’ 다시 부정함으로써 ‘진정한’ 주체화가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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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한다는 것을 말한다는 점에서 들뢰즈와 달라진다. 따라서 헤겔에서


주체는 존재 전체와 분리된 상태로만 존재하는, 달리 말하면 헤겔 철학
에서 주체는 다른 주체들 및 존재 전체(또는 각 주체들의 관계성의 총
체로서의 전체)와 분리된 상태로만 존재하는 ‘나쁜 의미의’ 부정성만을
갖고 있는 존재자가 아니다. 실재의 총체로서의 실체는 개체들을 초월
해 있거나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그것들에 내재한다. 바로 여기에서 우
리는 헤겔이 (물론 들뢰즈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 그리고 그와는 달
리, 그리고 그보다는 더욱 철저하게) 내재성의 철학임을 구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 부정적이거나 매개된 규정은 동시에
매개하는 규정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일단은 단순한 규정으로 취급
될 수도 있으나 그의 진리는 어디까지나 관계이며 상관관계를 이룬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정적인 것이면서도 역시 그것은 긍정적인
것의 부정자인 까닭에 바로 그 긍정적인 것을 자체 내에 담고 있기도
한 까닭이다. […] 오히려 이 규정은 다름 아닌 타자 그 자체이며 바로
타자의 타자인 것이다. 또한 이 규정은 바로 그 자신의 ‘타자를 자체 내
에 포용하는’ 가운데 마침내 그 자신이 모순을 이룸으로써 다름 아닌 자
기 자신의 정립된 변증법이 되는 것이다.”(Hegel 1978: 427. 작은따옴
표 강조는 필자) 헤겔에 따르면 개별자 또는 주체는 타자와 관련해 모
순 또는 갈등이 일어나도록 하는 ‘배타적인 이접적 종합’ 속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소외 상태에 있는 개체가 타자를
“포용”할 수 있게 될 때 모순은 모순이 아닌 모순으로 존재하게 된다.
위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주체를 근거 짓는 자기 분할 또는 부정성
은 타자 그 자체를 “포용”하는 “자기 자신의 변증법”, 즉 주체의 변증법
이 된다. 여기에서 도덕주의적으로 들리는 포용이라는 ‘비학문적’ 용어
는 들뢰즈가 중시하는 배타적이지 않은 이접적 종합’에 다름 아니다.
들뢰즈가 알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는 척하는 것은, 헤겔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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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분석(들뢰즈), 정신분석 그리고 헤겔 철학에 관한 비교 연구 III 207

에서의 논제(일자와 타자의 무매개적 일치)와 개념론에서의 논제(일자


와 타자와의 관계 사이에서 분열 또는 분할이 발생하고 그 분열을 극복
함)의 ‘원환적 결합’이야 말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배타적이지 않
은 ‘이접적 종합’의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헤겔이 들뢰즈와
달라지는 지점은 전자는 개념론에서 등장하는 ‘분할’ 또는 ‘분열’을 다
시 내재성 속으로 포함시킴으로써 ‘무매개적 통일과 매개적 통일의 통
일’이라는, 즉 ‘매끄러우면서도 동시에 홈이 패인’ 존재론적 구조를 완
성했다는 점이며, 이 점에서 그는 들뢰즈의 ‘무매개성 지상주의’에 대한
합리적인 해결책을 이미 제시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헤겔은 모순 범주
그 자체를 거짓 범주, 또는 ‘나쁜 범주’로 간주하지 않으며, 모순과 갈등
이 채워져 있는 현실과 주체의 모습을 비실재적인 것, 상상적인 것 자체
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헤겔의 존재-논리학은 들뢰즈의 협소한
존재-논리학보다 더 많은 현실 설명력을 갖는다. 물론 필자의 이 말이
우리가 전통적인 헤겔-맑스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찍이 세미나 10권: 동일화(1962)에서 라캉은 위상학적 은유를
통해 주체와 타자의 변증법을 설명하기 위해 원환면을 도입했으며, 이
로부터 내부의 8(huit-interieur)이라는 위상학적 도식을 제시한다. 그
리고 이를 통해 그는 주체와 실재의 관계가 보로매우스적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인다(여기에서 자세히 논할 여유는 없지만 필자가 보기
에 이러한 구조를 가진 원환면의 평면은 들뢰즈의 내재성의 평면과 본
질적으로 동일한 속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라캉에 따르면 기표 사슬을
통한 실재의 자르기는 동시에 실재 자신의 자신을 자르기이다. 우리는
“[…]자르기가 자신[자르기: 필자]은 닫혔으며, 다시 자신을 통과해 지
나갈 수 있다는 것[보로매우스적 구조를 갖고 있다는 의미―필자]을 알
고 있는데, 이는 기표와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실재는 동일한 것이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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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홍 준 기

문에만 가능한 일이다. 달리 말하면, 실재만이 그것[자르기]을 형성한


다. […] 하지만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듯이 자르기는 자기 자신을 잘
라야 한다. […] 자르기는 자기 자신을 자르는 선(trait)이다. 이 토대 위
에서 그것이 형성되고 난 후에야만, 그것은 자신을 자르면서 첫 번째 버
클 그리고 두 번째 버클로 있는 것 각각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실재―
실재는 [항상] 같은 것이다―를 만난다.”(Lacan 1961-62: 5월 30일 세
미나. Dor 1992: 445에서 재인용.) 항상 동일한 것으로서 실재는 자기
자신을 자르는 자르기에 다름 아니며, 이러한 바탕 위에서야 우리는 ‘더
복잡한 실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라캉의 설명이
앞서 논의한 헤겔의 존재와 개념의 변증법과 근본적으로 양립 가능한
또 다른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인용문을 필자의 관점에서 다시 설
명하면 다음과 같다. 실재 자체의 보로매우스적 구조가 기표적 자르기
를 가능케 하는데, 이러한 최초의 기표적 자르기는 실재가 자기 자신을
자르는 것에 다름 아니며, 그러한 이유로 그러한 자르기의 흔적은 지워
진다(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은 존재한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토대 위에
서 주체의 분열을 의미하는 기표적 분열이 등장한다. 라캉의 이러한 위
상학적 설명은 앞서 언급한 ‘매개와 비매개의 일치’ 또는 ‘무매개적 통
일과 분할의 일치’라는 헤겔적 변증법을 통해서만 더욱 잘 이해될 수 있
다. 헤겔적 의미의 내재성의 평면 또는 라캉적 의미의 위상학적 평면은
단순히 매끈한 평면이 아니라 ‘홈파인 매끈한 평면’인 것이다.

2. 스피노자를 둘러싼 정치철학적 쟁점

이제 윤리학적, 정치철학적 측면에서 스피노자 수용을 둘러싼 쟁점


들에 대해 좀 더 직접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라캉은 젊은 시절 스피노
자를 자신의 철학적 멘토로 여겼고,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스피노자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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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라캉은 이제 세미나


11권: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개념에서 충동과 욕망 개념을 설명한
후 정신분석의 윤리에 대해 재론하는 과정에서 스피노자적 관점에서 욕
망이론적 정치철학 또는 정신분석 이론을 재해석하는 것이 갖는 난점을
지적한다.

“부당하게도 사람들이 스피노자의 사상을 범신론이라 규정할 수 있


다고 믿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신의 장을 시니피앙의 보편성으
로 환원시켰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가 인간의 욕망에 대해 이례적으
로 보여준 평온한 초연함은 바로 거기서 생겨난 것입니다. 스피노자
는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라고 말하고 이 욕망을 신적 속성들의
보편성에 철저하게 종속시켰는데 이러한 보편성은 시니피앙의 기능
을 통해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는 철학
자로서 어떤 초월적인 사랑 속으로 합류할 수 있는 독특한 입장―이
입장을 구현한 자가 유대 전통에서 떨어져나온 한 명의 유대인이라
는 사실은 그냥 넘겨버릴 일이 아닙니다― 을 취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입장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며, 경험은 칸트가 좀
더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Lacan 1973: 414)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라캉은 궁극적으로 기표의 기능과 연결시킬


때만 스피노자의 욕망 이론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이
러한 스피노자 철학, 즉 “신에 향한 지적인 사랑”(Lacan 1973: 414)에
대한 요청은 감당할 수 없는 것, 즉 실천 불가능한 것이라고 논평한다.
여기에서 이러한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스피노자 철학은 충동의
철학인데, 왜 라캉은 스피노자 사상을 기표 기능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고 하는가? 이러한 반론은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네그리 같은 들뢰즈
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스피노자 해석을 살펴보면 라캉의 견해와 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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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그리는 윤리학이나 신


학정치론에서의 스피노자가 사회계약론(즉 욕망 및 기표 이론)의 입장
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하면서, 진정한 스피노자는 정치론을 저술한
스피노자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신학-정치론에”는 “계약론적인 테
마가 존재한다.”(Negri 1994: 62). 따라서 “나는 우선 정치론에서 계
약론적인 테마의 부재가 규정하고 있는 전망의 개념적 의미적 차이를
강조하고자 한다.”(앞의 책, 62) 네그리는 법과 계약, 달리 말하면 ‘기표
의 기능’을 중시했지만, 권력에 초점을 맞춰 사유한 정치론의 스피노
자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어떤 면에서는 라캉의 스피노
자 해석이 오히려 들뢰즈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스피노자 해석을 선취
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언급해야 할 더 중요한
점은 들뢰즈나 네그리는 헤겔이 국가를 사회계약론적으로 설명했다는
전제하에 항상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물론 헤겔이 계
약론자가 아니라 오히려 계약론을 넘어서고자 했고, 계약론의 한계에
대해 가장 체계적으로 사유한 최초의 철학자였다(이에 대해서는
Riedel: 1969: 64ff. 참조)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는 척한
다. 뿐만 아니라 들뢰즈와 네그리는 헤겔이 법철학에서 계약이론을
넘어서면서 사회적 국가(복지국가)에 관해 체계적으로 서술했다3)는 사
실도 외면하는데, 이는 무정부주의적 정치이론을 주창하는 이들의 입장
의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라캉은 물론 무정부주의적 관점을 옹호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상가들처럼 그도 헤겔의 정치철학에 대해서는 관심
이 없거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언급해야 할 또 하나의 점은 사실 스피노자 철학을 당연

3) 헤겔의 근대 계약론 비판 및 사회적 국가(복지국가) 이론에 대해서는 필자의 피케티의


‘21세기 자본’과 사회적 국가(2016), 「5부: 피케티와 현대철학: 사회적 국가란 무엇인
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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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분석(들뢰즈), 정신분석 그리고 헤겔 철학에 관한 비교 연구 III 211

하게도 들뢰즈나 네그리 철학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특히 국내에서 매우


강하지만, 사실 이는 스피노자를 원용하는 정치철학이 반드시 들뢰즈주
의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국내외의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들뢰즈와 네그리 그리고 푸코 이론을 기존의 마르
크스주의와 구별하지 않고 ‘사실상’ 그것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동일한
이론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게 존재했다. 예를 들면 많은 이들이 마
르크스적 입장에서 혁명을 이야기하면서도, 양립 불가능한 들뢰즈( 네
그리) 이론 등을 마르크스주의를 위해 동시에 활용하는 모호한 방식으
로 논의를 진행해왔던 것이 단적인 예다. 심지어 스피노자주의적 마르
크스주의자인 발리바르도 이러한 경향을 비판한다. 네그리와의 대담에
서 발리바르는 네그리가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이 너무 협소하며, 그
런 관점으로는 지난 자본주의에서, 그리고 현재의 자본주의에서 일어난
노동 형태의 발전을 설명하지 못한다”(Commonspace 2012: 99)고 지
적한 것은 옳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네그리가 “[…] 모든 문제들
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한다”고 비판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네그리는
꼬뮤니즘을 형이상학적인 또 다른 극단으로 밀어”붙였고, 따라서 그에
게서는 “정치가 존재할 수 없”다(Commonspace 2012: 100). 여기서
발리바르가 말하는 들뢰즈의 형이상학은 필자가 다른 곳에서 발리바르
철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그 문제점에 상세히 논의한 바 있는 ‘존재의 일
의성’ 논제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들뢰즈가 천 개의 고원에서 스피노자 철학으로부터 약간의 거리
를 취하는 이유에 대해 좀 더 언급하면, 이는 앞서 논의한 스피노자 해
석론의 역사와도 관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 개의 고원에서 그
는 실체, 속성, 양태와 같은 스피노자 철학의 고유한 개념보다는 푸코의
권력 이론(예를 들면 배치 개념)을 더욱 철저히 활용했으며, 더 나아가
스피노자의 개념들 그 자체보다는 추상적인 개념(예를 들면 일관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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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 또는 내재성의 평면)을 체계적으로 도입했다. 앞서 필자가 들뢰즈


와 헤겔을 비교하면서 상세하게 논의했듯이, 그리고 후에 다시 언급하
겠지만 천 개의 고원에서의 들뢰즈의 많은 논의들이 스피노자보다는
오히려 헤겔 철학(또는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의 비판적 해석)에 근접하
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추상 기계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한데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겠다.

3. 분열증자는 누구인가: 도주선의 딜레마

안티 오이디푸스와 관련해 던질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질문 중


하나는 과연 자본주의로부터의 탈주로는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것이
었다. 들뢰즈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탈코드화된 흐름들 위에서 구성된
유일한 사회 기계”다. 따라서 “생래적 코드들을 화폐 형식을 띤 추상량
들의 공리계로 대체”(Deleuze 1972: 245)하는 자본주의는 전자본주의
와 철저히 구분되는 사회구성체이다. 전자본주의 사회구성체는 “욕망을
코드화하고, […] 탈코드화하는 흐름들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코드화”
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구분된다. 그러므로 하트가 지
적하고 있듯이 자본주의 내에서 진행되는 탈코드화와 탈영토화는 이미
그 자체로 자본으로부터의 탈주이며, 따라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것
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훨씬 더 탈영토화된 과정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고 말한다(Hardt 1993: 357). 그러나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미 제시된 바 있으며, 마르크스의 생각이기도 한 이러한 견해는 사실
‘역설적’이다. 자본주의 기계는 “자신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운동에 맞
서 온 힘을 다해 끊임없이 거역”(Deleuze 1972: 246)한다. 이 거대 기
계는 “생산의 생산들, 등록의 생산들, 소비의 생산들을 조직하는 욕망과
운명의 체계 전반에서, 사슬의 이탈들에 대응하고, 이로부터 각 성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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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여 몫이 결과하는 한, 흐름들을 재코드화한다.”(앞의 책, 248) 이러한


흐름들의 이탈에 대응하는 장치가 다름 아닌 국가이며, 따라서 자본주
의는 원시적 전제주의적 국가를 결코 폐지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코드화와 탈코드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가 공존하는 모
순적인 또는 역설적인 자본주의로부터의 도주로는 그다지 ‘매끄러워’
보이지 않는다. 들뢰즈는 자본주의의 이러한 이중성에 편집증(망상증)
과 정신분열증을 각각 대응시킨다. “현대사회는 자기의 자본들과 인구
들의 유동량을 탈코드화하거나 탈코드화하게 하는 한편, 세계적 규모의
독재, 지방의 독재자들, 전능한 경찰을 동원하여 온 힘을 다해 재코드화
한다. 의고주의와 미래주의, 신의고주의와 탈미래주의, 편집증과 분열증
사이에서. 현대사회들은 두 극 사이에서 흔들거린다.”(앞의 책, 437)
그러나 분열증자가 자본주의로부터의 도주를 수행할 수 있는 진정
한 ‘주체’일 수 있을까? 들뢰즈나 들뢰즈 연구자들이 자신들이 말하는
분열증은 임상적 의미가 아니라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러한 난점
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임상적 의미가 아닌 의미에서 정신
분열증(자)는 도대체 누구이며, 이를 어떻게 이론적으로 설명할 것인가?
들뢰즈가 천 개의 고원을 집필한 것은, 그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정신분석을 근본적으로 비판했지만 정신분석 이론을 전복시키려는 그
의 시도 자체가 이 저작에서 제시한 자신의 이론의 난점을 오히려 드러
내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그가 인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는 천 개의 고원에서 완전히 정신분석적 함의
로부터 벗어난 ‘거의’ 순수하게 철학적인 추상적 개념(예를 들면 ‘일관
성’의 평면, ‘내재성’의 평면 등)을 도입한다. 이는 또한 스피노자주의
핵심 개념들(실체, 속성, 양태)에 근거해 제시했던 분열분석 이론이 낳
은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자본주의가 탈영토화함과 동시에 재영토화하는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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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사회구성체라면, 이것으로부터의 탈주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임상적 의미의 분열증자가 아니라) 완전히 해
방된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분열증자’에 대한 새로운 형이상학적 설명
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들뢰즈는 이미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스피노자 재해석을 본
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들뢰즈는 실체를 양태 또는
개체로부터 독립된 유일 실체로 간주하는 스피노자 철학에 비판적 논평
을 가하면서, 실체와 개체(또는 양태)는 상호작용을 한다고 해석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체가 양태에 대해 독립적이거나 우위에 있지 않으
며, 오히려 양태가 실체보다 오히려 ‘더 근원적인 것’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모두가 스피노자의 제1원리, 즉 유일 실체와 모든 속성들이
라는 원리를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제3, 제4, 제5의 원리, 즉 유
일한 자연과 모든 신체들, 유일한 자연과 모든 개체들, 무한히 많은 방
식으로 변화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개체라는 원리 또한 알고 있다. 이것
은 이제 더 이상 유일 실체에 대한 긍정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신체들,
모든 영혼들, 모든 개체들이 존재하는 내재성의 공통 평면의 펼침이다.
이 내재성의 평면 혹은 일관성의 평면(plan de consistance)은 정신 속
에서의 구상의 의미로서의 평면, 즉 계획, 프로그램의 평면이 아니라,
기하학적 의미의 평면, 즉 단면, 교차점, 도표의 평면이다. 따라서 스피
노자의 환경 속에 있다는 것은 이 양태적 평면 위에 존재한다는 것[…]
을 의미한다.”(Deleuze 1981: 181-182). 강조는 필자. 연결의 평면을
일관성의 평면으로 수정해 인용했음) 또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스피
노자를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스피노자에게 신체와 영혼은 실체도, 주
체도 아니며 양태라는 것을 알고 있다.”(앞의 책, 183-184. 강조는 필
자). 천 개의 고원에서 들뢰즈는 이러한 사유를 더욱 철저히 발전시
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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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적이지만 완벽하게 실재적인 요소들”(Deleuze 1980: 482)은


다름 아닌 “개체”다. 실재적인 요소들, 즉 “이 궁극적인 부분들은” “그
것들이 겪게 되는 속도의 정도와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따라 특정한 개
체에 귀속되는데, 이 개체 자신은 더 복잡한 또 다른 관계 속에서 다른
개체의 부분이 될 수 있으며 […].”(앞의 책, 482. 강조는 원문)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들뢰즈의 ‘추상 기계’ 또는 ‘다이어그램적 기
계’, 배치(물) 같은 매우 추상적인 용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또한
잘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이 추상 기계는 또한 전쟁 기계이기도 하다.
이는 알튀세르가 칸트로부터 인용해 종종 언급했던 “형이상학은 […]
전쟁터이다”(Kant 1787: 181. 싸움터를 전쟁터로 수정해 인용)라는 말
을 연상시킨다. 칸트와 알튀세르에 따르면 개념의 작용은 전쟁이다. 후
기로 갈수록 들뢰즈는 특정한 철학자들이나 그들의 개념에 너무 의존하
기보다는 추상적인 또는 위상학적인(기하학적인) 개념들을 사용해 존재
구조를 해명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안티 오이
디푸스에서 제시되는 임상적 함축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스
피노자적 분열증자를 철학적으로 재서술하고자 했던 것이다. 천 개의
고원의 핵심 개념들은 따라서 추상적이어야 하며, 이러한 추상적 개념
들 자체가 이미 실재, 권력, 전쟁인 것이다. “그래서 각 개체는 하나의
무한한 다양체이며, 전체 자연은 다양체들이 완전히 개체화된 다양체이
다. 자연이라는 일관성의 평면[고른판을 일관성의 평면으로 수정해 옮
겼음]은 하나의 거대한 추상적인 기계와도 같은데, 추상적이긴 해도 어
디까지나 실재적이고 개체들이다. 이 기계의 부품은 다양한 배치물들
또는 개체들이다.”(Deleuze 1980: 482. 강조는 필자) “우리는 추상 기
계를 기능도 질료도 더 이상 없는 순간으로, 그러한 국면으로 정의한
다”. 또한 추상 기계는 “그것이 구체적인 배치 속에서 작동한다고 하더
라도 메커니즘이 아니며, 다양한 배치들의 가능성을 그것이 실행시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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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라 가정되는 어떤 기계를 고려하여 평가할 수 있도록 한다고 해도


추상 기계는 플라톤적 이데아가 아니다.”(앞의 책(프랑스어판): 176.
Villani, Sasso 2003: 479에서 재인용). 추상 기계 혹은 다이어그램적
기계는 (…) 도래할 현실, 다른 종류의 실재를 건설한다(앞의 책, 479에
서 재인용). 기계들의 이러한 추상적 속성들은 이미 안티 오이디푸
스에서 공리계라는 용어에서도 어느 정도 모습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IV. 결론을 대신하여:


후기 라캉과 후기 들뢰즈―분석의 끝과 도주선

지금까지 들뢰즈, 정신분석, 헤겔 철학 간에 존재하는 핵심 쟁점 중


몇 가지를 살펴보았으며, 들뢰즈가 천 개의 고원에서 어떻게 자신의
철학을 보완하는지 설명했다. 끝으로 들뢰즈와 정신분석(그리고 헤겔
철학) 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교차점으로서 분석의 끝에 관한 라캉의
논의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라캉이 분
석의 끝에서 산출되는 주체의 상태를 “주체의 궁핍”이라는 용어로 설명
한다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분석의 끝에서 경험하는 주체의 궁핍은
결여가 아니라 존재, 탈존재(désétre)가 아니라 존재라는 점이 중요하
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체적 궁핍은 탈존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 존재를 만든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일이다.”(Lacan 1970:
21. 홍준기 2005: 32에서 재인용) 라캉의 대상 a를 결여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와는 달리, 라캉은 세미나 제15권: 정신분석
적 행위에서 분석적 행위를 통해 분석주체는 “대상 a의 즉자성(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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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i”으로 “환원된다”고 말한 바 있다(Lacan 1964-68: 18). 라캉의 이


러한 설명은 라캉의 대상 a를 결여의 관점에서만 파악하고 이를 비판하
는 들뢰즈적 독해의 오류를 적절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들뢰즈가 말하
는 탈주체화는 흥미롭게도 분석의 끝에서 산출되는 라캉적 주체와 그다
지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점도 흥미롭다. 들뢰즈적 의미의 탈주체화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개별자가 주체로 구성될 때 취하는 소외의 형태
를 폐지하는 것, 예속 상태를 배제하는 작용으로서 오히려 주체화에 이
로운 작용”(Villani, Sasso, 2003: 417). 라캉이 말하는 분석의 끝에서
의 주체적 궁핍에 관한 내용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헤겔도 이념의 단계에서 자유를 획득한 주체가, 또는 실체이자 동
시에 주체인 절대적 이념이 이러한 존재성을 획득한다는 점에 대해 이
야기한다. “존재의 순수한 직접성이 이제는 매개를 통해서, 다시 말하
면 바로 이 매개의 지양을 통해서 이념과 합치되는 자기 동등성에 다다
른 이념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자기 관계로서의 존재”, 그
러나 또한 “충족된 존재”이며, “자기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개념이며,
또 구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전적으로 내포적인 총체성으로서의 존
재”(Hegel 1978a: 440)이다. 이로써 우리는 분석의 끝과 절대적 이념
에 대한 이러한 논의가 들뢰즈의 은폐된 라캉적 헤겔적 뿌리 중 하나임
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홍준기 (2020). 「분열분석(들뢰즈), 정신분석 그리고 헤겔 철학에 관한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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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홍 준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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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홍 준 기

[Abstract]

A Comparatative Study on the Schizoanalysis,


Psychoanalysis and the Philosophy of Hegel III
from the Perspective of the Psychoanalysis, the
Philosophy of Hegel, focused on the Deleuze’s
Anti-Oedipus and Thousand Plateau*

Hong, Joonkee
(K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Institute for Human Studies)
4)

This paper aims to examine critically the philosophy of later


Deleuze from a viewpoint of the philosophy of Hegel and the
psychoanalysis. Although earlier Deleuze accepted the psychoanalysis
in accordance with his need in the arbitrary way. However,
especially from Anti-Oedipus on he changed his position and
began to criticize the psychoanalysis thoroughly and harshly. But the
studies on Deleuze in Korea and abroad have not tried to explain
the change of the position of Deleuze and could not give the

*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Ministry of Educ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NRF-2018S1A5B5A02036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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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tematic answer of it. Therefore, this paper tries to examine


critically the later philosophy of Deleuze, especially the
ontological philosophical position of Anti-Oedipus and Thousand
Plateau, and to consider more systematically the Deleuzian
acceptance and criticism of psychoanalysis. Furthermore, this
paper tries to show that in Thousand Plateau Deleuze accepted
the philosophy of Hegel more in the Hegelian way, therefore
self-contradictorily, without making known the philosophical
source of Hegel and the theoretical relationship between Hegel
and Deleuze himself. Lastly, this paper goes on to reconstruct
critically the problems of his political philosophy that has been
deduced from his ontological position and his criticism of the
psychoanalysis and the philosophy of Hegel, and also tries to
show what the Hegelian alternative of the political theory in the
modern capitalistic societies was and will be.

▶ Key Words: Hegel, psychoanalysis, Anti-Oedipus, Thousand


Plateau, plane of the consistence, social state,
schizophrenia

논문 투고 일자: 23.01.15.
심사 완료 일자: 23.02.07.
게재 확정 일자: 23.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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