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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번 기록 (문서 B)

"희망"이란 무엇일까?

"희망"은 곧 "의지"의 목적이자 근원이다.

그리고 그 "의지"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인간적인 생활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삶을 연명할 수 있게 해주는
동기가 되어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의지를 빛내며 삶을 이어나가는 가운데 슬프게도 특히나 우리 나라에는 이 의지력을
전부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리거나 박살나고 산산조각이 나버려 극단적인 선택을 해버리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이 삶을 유지하겠다는 보편 본능적인 "생존의지"를 역행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특이하게도 이러한 자발적이고 자해적인 선택과 행동은 인간이나 돌고래 등 지능지혜가 높은
생물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가는 수의 생물이 바로 인간이다.

자살을 고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100 명 중 16 명, 실제 자살을 기도한 사람은 100 명 중 3 명이라고


한다.

1 년간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10 만 8000 명이나 되고 2010 년도 국내에선 1 만 5566 명 정도의 꼴인


것이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해도 피부로 그닥 와닿진 않겠지만, 참 많이들 죽는다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이겠는가.

대한민국이 자살 왕국이 된 이유 즉 원인, 사실 알 만한 사람들은 잘 알것이다.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은 "자살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물론 그러한 극단적인 "선택"을 두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필자 본인은 그 선택에 동의하지 못하지만,
이해하고 존중할 수는 있다.

자기 목숨을 끊겠다는 생각은 생물체로서 섣불리 하기 힘든 것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해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그 의지가 생물체로서의 기본적인 프로그래밍을 역행할 정도라면 대체 그들이 얼마나 심각하고
극단적인 상황에 놓여있을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윤회사상을 배제하면 인간에게 죽음이란 모든 것의 끝이다.

죽음을 각오할 정도의 의지를 지닌 사람에게는 위협이나 압박이 먹히지 않는다.

그 순간 그 사람은 초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것이 바로 잃을 게 없는 사람들, 또는 지킬 것이


있는 사람들이 두려움의 대상인 이유이다.

죽음을 각오하겠다는 의지만으로 인간은 상상을 초월한 "무시무시한 힘"을 얻는다.

인간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수치감, 두려움, 자존심, 공포, 타인의 시선 등 온갖 상념을 가만히
지켜보라.

육체적인 능력이 약하다면 "의지"를 다지고 운동하고, 지적인 능력이 약할 때도 "의지"를 다지고 독서를
하거나 연구를 하는 등 공부하면 된다.

필자가 굉장히 좋아하는 '토비 폭스(toby fox)'의 명작 인디 게임인 '언더테일(Undertale)'에서는 이


"의지"가 주요 개념인데, 이를 통해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의 "의지"를 예측 및 분석하고 고찰해보기도
하는 것이 엄청난 매력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가 모르고 살았음에도 사실 우리의 주 원동력은 바로 "의지"이고 "꿈"이자 "희망"인데,


심지어 지금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는 것 마저도 그런 행동을 하겠다는 미세한
의지에서 비롯된다.

'어차피 죽을 건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범죄나 테러를 저질러볼까?'라고 생각하라는게 아니다. 이는


차라리 중 2 병이 낫다 싶을 정도로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물론 무슨 생각을 하든 각자의 자유인건 변함없는 것이 어차피 각자의 목숨이고, 그 목숨을 에너지로


불태우겠다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가진 것 없고, 못생기고, 가방끈도 짧고, 체력도 저질이고, 나는 똥 싸는
기계일 뿐이야."

이렇게 자학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죽음을 각오한 순간 어떻게 될까? 가진 게 없는 사람이라도, 못생긴 사람이라도, 못 배운


사람이라도 죽음을 각오한 순간 이 세상의 모든 걸 가진 사람이 된다.

물론 유감스럽게도 유서 한 장 달랑 남겨두고 목을 매달면 그 가치는 먼지가 되어 사라지겠지만.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순간, 인간의 가치는 측정 불가가 된다.

9.11 테러를 저지른 사람의 사례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의 상황도 충분히 존재한다.

죽을 각오를 하고 의지를 다진 뒤 무언가 하나에 몰두한다면 적어도 무언가 성과가 분명히 남을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아쉬움을 경험한 그는 이후 미친 듯이 글을 썼고, 그 결과 전 세계 모든


이들이 기억하는 대문호가 됐다.

죽음은 우리 내부에 있는 "절박함"의 끝을 보여준다.

죽음을 각오했다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최후의 순간에 놓인다 할지라도 "그래? 까짓 거 죽어버리면 그만이지, 뭐가 걱정이야?"라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이 힘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 힘의 존재를 알지만 진정한 위력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죽음을 각오할 의지를 가진 순간 인간은 세상 어느 사람보다 강한 초인이 된다.

그러한 사람들은 지금 못 할 일이 없다.


그들은 평소 꿈꾸던 모든 걸 "시도"해볼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이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급히 떠나버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부디 억울해하는 영혼들이 평안한 휴식을 취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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