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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메디컬 환생 1-151 完
(유인) 메디컬 환생 1-151 完
01. 서장
망한 삶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왕따.
‘그때 참 좋아했었지.’
더구나…….
“하아…….”
며칠 전 암 말기를 선고받았다.
빌어먹을 일이다.
***
“제기랄.”
욕설이 튀어나왔다.
“제기랄!! 빌어먹을!!!”
내가 죽게 되다니?
“해결? 웃기고 있네! 말이면 다 해결되는 줄 아나? 입만 산 놈. 이러니 마누라한테 이혼이나 당하지.”
아내와는 병원이 망한 후 이혼했다. 아픈 상처를 후비는 주둥이를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빚을 진 사람은 자신이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
“그, 그건……!”
결국 진현은 매달렸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지.”
“무, 무엇입니까?”
“간이…….”
“심장, 신장…….”
그들은 히죽 웃었다.
그들은 선심 쓰듯 말했다.
“모자라는 2,000 만 원은 우리가 특별히 에누리해줄게. 수술은 중국에서 할 거야. 요즘 중국에 수요가 워낙
많아서 말이지.”
“…….”
불행은 끝이 아니었다.
며칠 뒤 건물 주인이 그를 찾아왔다.
“당장 빼주게.”
“…지, 지금 말입니까?”
띠리링!
하필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여보세요, 진현이니?
“아, 네. 어머니.”
익숙한 염려.
“…네. 괜찮아요.”
“9 천 원입니다.”
“빌어먹을.”
성공하고 싶었다.
“김 선생님?”
“김 선생님 맞으시죠?”
“……?”
“오랜만이에요. 저 기억나세요?”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그런가요?”
“아……!”
그제야 진현은 기억했다.
연예인 같은 외모의 청년과 아가씨가 영화에서나 볼법한 커다란 검상을 입고와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난다.
“김 선생님을 뵈러 왔어요.”
“…저를요? 어째서?”
“‘씨앗’을 드리려고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말 그대로예요.”
“만나서 반갑기는 하지만, 저는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닙니다. 만약 다른 용무가 있다면 일 보도록 하십시오.”
“뭐하세요? 한 잔 주세요.”
‘모르겠다.’
“많이 힘드시죠?”
“…….”
힘드냐고?
“저는 어렸을 때부터 변변치 않았습니다. 학창 시절 성적은 하위권이었고, 왕따까지 당했었죠. 아버지가 위암에
걸려 돌아가실 때도 괴롭힘을 당했었습니다.”
취해서일까, 답답해서일까?
그의 입에서 지난 삶이 흘러나왔다.
‘제길.’
괜히 눈물이 흘러나왔다.
실패의 한이 서린 눈물이었다.
“…….”
‘취한 건가?’
“씨앗이 뭡니까?”
진현은 웃었다.
그래서 편히 말했다.
“네, 어떤 거라도.”
“네, 원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이것은 무엇입니까?”
“씨앗주예요.”
우스운 이름이었다.
“아……!”
“성공한 삶이요?”
그녀는 속삭였다.
# 2
02. 회귀 (1)
“진현아? 진현아?”
“진현아! 일어나야지!!”
“으… 응?”
웬 아줌마였다.
나이는 사십 대?
“뭐해? 빨리 아침 먹고 학교 가야지!”
분명 어머니였다!
진현은 눈을 쓱쓱 비볐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것인가?
‘꿈이 분명해.’
‘말도 안 돼! 어제 분명……?’
그런데 그때였다.
딱!!
“아악!”
“아, 아버지…….”
고 3 때 돌아가신 아버지였다!
“앉아라. 밥 먹자.”
“밥 먹자.”
“너 오늘 왜 그러니? 어디 몸이 안 좋니?”
“아, 아니에요.”
“응?”
“…사랑해요.”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니가 말을 더듬었다.
“너, 너… 정말 어디 아프니?”
아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아니에요. 정말 사랑해요.”
그는 항상 변변치 않은 삶을 살았다.
유급을 면하는 것도 어려웠고 원하는 전공은 지원도 못 하고 그나마 떠밀린 외과의로서의 삶도 실패였다.
이번 삶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
“네, 어머니.”
그는 서둘러 책가방을 챙겼다. 촌스러운 백팩이 정겹게 느껴졌다.
***.
진현은 놀랐다.
갑자기 책가방은 왜?
“진현아, 공부 많이 했냐?”
“…무슨 공부?”
“오늘 중간고사잖아.”
“…….”
진현은 말을 잃었다.
오늘이 중간고사라고?
“…네?”
“또 전교 꼴찌 하면 죽을 줄 알아라.”
그 말에 반 전체가 키득거렸다.
<육조 직계제 실시, 사병 혁파, 지방 8 도 개편, 지방관 파견과 연관된 인물은 누구인가?>
그나마 나은 것은 영어였다.
이런 것을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야, 시험 잘 봤냐?”
짝이 그를 쫓아와 물었다.
훗날 그게 얼마나 후회되던지.
“됐다. 난 집에 가련다.”
“집에 가서 뭐하게?”
“공부.”
뒤에 남은 짝은 입을 벌렸다.
***
‘하지만 어떻게?’
과거의 지식을 이용해 돈을 벌려면 투자할 종잣돈이 필요한데 중학교 3 학년인 그는 한 달에 만 원도 마련하기
어려웠다.
한국대 의대!
‘힘내자, 진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아니다, 됐다.”
“괜찮아요. 공부만 하기 지겨워서 그래요.”
“……?”
“무얼 말입니까?”
담임은 버럭 화를 냈다.
“……?!”
“선생님, 제가 아무리 학생이라도 막무가내로 화내는 것은 부당한 것 같습니다. 제가 커닝을 했다면 그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이 자식이……!!”
“……??”
# 3
03. 회귀 (2)
“네, 제가 푼 것입니다.”
“이 자식이 계속 거짓말을!!”
“뭐?!”
“화내지 말고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이 녀석 요즘 따라 태도가 왜 이러지?’
“선생님이 제가 커닝한 증거가 없듯이 저도 커닝을 안 했다는 증거를 보이진 못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뭘 어떻게?”
“다음 시험 때 성적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커닝을 한 게 맞는다면 다음 시험 때는 이런 성적을 받지
못하겠지요.”
합리적인 말이었다.
“그래, 네가 반에서 중간에만 들어도 컨닝 안 했다고 인정해 주마. 대신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각오해.”
***
진현은 미소 지었다.
“뭐냐?”
“절대 안 된다.”
“그러지 말고…….”
완강한 불허였다.
꼴찌인 애가 1 등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네, 어머니.”
***
“으… 이거 뭐야?”
***
“아, 아니……?”
담임은 입을 벌렸다.
“왜 그러세요, 이 선생님?”
영어 선생이 물었다.
“이거 잘못 인쇄된 거죠?”
“네……?”
“김 선생, 이거 어떻게 채점을 한 거야? 애들 성적이 얼마나 중요한데 실수를 하면 어떻게 해?”
“네? 그게 무슨 말이세요?”
“이거 다 잘못됐잖아.”
“…맞다고?”
[3 학년 2 반 23 번, 김진현 평균 97.3 점. 반 석차 1 등, 전교 석차 3 등]
성적표에 쓰여 있는 내용이었다.
***
“됐어.”
“왜?”
“공부할란다.”
그 말에 진현은 짝의 눈을 바라봤다.
이름이 황문진이었지?
소심하고, 자신감 없고, 다른 애들과 잘 못 어울리고, 싸움 못하고, 운동 못하고, 공부 못하고. 석차는 진현이
뒤에서 1 등, 황문진이 뒤에서 2 등이었다.
“문진아.”
“왜?”
미래는, 진현을 비롯한 아이들이 맞이할 사회는 수능 좀 잘 봤다고 장밋빛이 될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 도덕 시간 아닌데요?”
“왜 그러십니까?”
“……??”
“…….”
진현이 물었다.
“무슨 말이십니까?”
담임은 잠시 주저하더니… 말했다.
# 4
04. 회귀 (3)
“미안하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네, 맞습니다.”
진현은 잠시 고민했다.
진현은 짧게 답했다.
“정신 차렸습니다.”
***
꼴찌 김진현이 전교 3 등 했다!
“어, 어떻게……?”
“…너… 너?”
진현은 말했다.
“…그, 그래!”
“김진현?”
“왜 그러지, 반장?”
반장은 손을 내밀었다.
“1 등 축하한다.”
진현은 마주 손을 잡았다.
반장은 도전적으로 말했다.
‘만화를 너무 많이 봤군.’
“얼마든지.”
집도 난리가 났다.
진현은 당황했다.
진현은 속이 쓰렸다.
‘결혼 후 좋은 날이 없었으니.’
아버지도 크게 기뻐했다.
“푹 주무세요.”
“진현아… 고맙다.”
“……!!”
뭐가 고맙단 말인가?
***
여름 방학이 시작됐다.
“집에 가서 쉬어.”
“괜찮아요. 많이 쉬었어요.”
“내 아들이야.”
“뭐냐?”
“킥복싱은 왜?”
***
“오랜만이다, 진현아.”
“네, 관장님.”
“네.”
가운데가 벗겨진 대머리 때문에 당시 유행하던 게임인 철권의 캐릭터 같기도 했다.
“네, 그런 것도 있긴 한데…….”
“……!!”
“그게 무슨 말이냐?”
“네.”
“네, 알겠습니다.”
그 뒤로 하드 트레이닝이 시작되었다.
‘그 자식.’
일진이라도 그건 마찬가지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깡과 독기.
기본적인 운동 능력을 제외하면 깡과 독기가 승부를 결정한다. 진현은 그걸 키우는 중이었다.
그놈의 집은 부자였다.
상대적으로 낙후한 동네의 일신 고등학교가 아닌, 강남 8 학군, 아니, 재벌가가 모인 한남동 쪽이 어울릴 집안의
자제였다.
퍼억!!
샌드백이 터질 듯 출렁거렸다.
# 5
05. 회귀 (4)
“그래, 반갑다.”
진현은 반 안을 둘러보았다.
드르륵!
“자, 조용히 주목! 난 너희의 담임인 이문호라고 한다. 일신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을 환영한다. 우리 일신
고등학교는 역사가 깊은 전통의…….”
지금은 비록 입시 성적이 떨어졌지만 일신 고등학교는 과거 명문이었고 너희는 반드시 열심히 공부해서… 불라불라.
‘저 담임은 여전하구나.’
그런데 그때였다.
드르륵.
“……!!!”
까마득히 지각을 했음에도 입가에는 차분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미안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옅게 파마한
머리가 갈색으로 빛났다.
담임은 손을 떨며 분노했다.
“이상민입니다.”
“네, 맞습니다.”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역시 같은 반이구나.’
그는 이상민을 알았다.
그 웃음을 보자 속이 뒤틀렸다.
***
처음 며칠은 의외로 별일 없이 지나갔다.
“무슨 일이지?”
짧게 답했다.
“싫은데.”
“왜?”
“상민아, 뭐하냐?”
“쟤 알지?”
꼴찌에서 단숨에 전교 1 등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것도 그렇고, 당시의 고등학교 입학시험인 연합고사 입학 성적도
학년 1 등이었던 것이다.
김철우가 웃었다.
“깔까?”
“그러면?”
“주변부터. 그게 낫지 않을까?”
***
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고등학교 진도가 나가고 학년이 올라가면 현재의 성적을 유지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한국대 의대!
모든 입시의 정점에 위치한 곳으로 수십만 수험생 중에서 100 등 안에 들어야 한다.
그야말로 나귀 몸에 바늘귀였다.
“진현아, 쉬엄쉬엄해라.”
“괜찮아요.”
“…….”
“…진현아.”
“……!!”
그는 고개를 돌렸다.
“왜?”
“너냐?”
“뭘?”
“황문진 건든 것, 네 짓이냐고.”
“……!”
“어쩔 거냐고?”
퍼억!
# 6
06. 회귀 (5)
“…어?”
퍼억!!
“컥!”
우당탕!!!
어느 날 그렇게 울부짖었다.
-재미있으니까.
재미있단다.
퍼억!
퍽! 퍽! 퍽!!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
어퍼컷이었다.
“큭!”
다음엔 로우킥!
“이 개자식이!!!”
하지만 진현은 더 이상 당하지 않았다. 왼팔로 가드한 진현은 연달아 주먹을 날렸다.
퍼벅!!
“이 자식이!! 죽여 버리겠다!!!”
주룩 코피를 흘린 김철우는 곰처럼 외쳤다.
“커억…….”
그런데 둥글둥글 순하고 어려 보이는 얼굴에, 마냥 공부벌레인 줄만 알았던 김진현이 김철우를 꺾다니?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악바리 같은 의지에 필사적으로 연마한 킥복싱 기술이 얹어졌다. 질 이유가 없었다.
“……!”
저벅저벅.
“사과해.”
“……!!”
이상민은 이를 악물었다.
“닥쳐!!”
퍼억!!
“이익!!”
퍽! 퍽! 퍽!
“그, 그만…….”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사과해.”
“황문진.”
“어… 어, 어?”
“이리로 와라.”
진현은 물었다.
“…….”
“황문진에게 사과해.”
“…….”
“지금 당장!”
“미, 미안하다…….”
마지못한 목소리다.
“제대로 사과해.”
“하, 하지만…….”
“야, 이상민.”
땡! 땡!
그때 수업 시작 10 분 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 알겠어.”
이상민은 김철우를 데리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무단 조퇴해 수업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상민의 협박을 받아 진현을 외면하려 했는데, 진현은 오히려 황문진의 괴롭힘을 갚아주었다. 미안함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럼 언젠 친구 아니었냐?”
***
‘이상민 때문이군.’
“무얼 말입니까?”
그저 쉬쉬 모른 척할 뿐이었다.
“이, 이놈이……!”
진현은 의아했다.
“내가 말해줄 수는 없어. 하지만 어쨌든 이사회에서 난리야. 너한테 중징계를 내리라고. 그리고 오늘, 교감
선생님이랑 교장 선생님이 논의 끝에 너한테 정학 처벌을 하기로 결정했다.”
싸움 한 번에 정학이라니?
“그렇게는 안 된다.”
“그건…….”
담임은 답을 못했다.
“여러 규정이 있지만 일회성 싸움은 봉사활동에 해당되지 정학에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규정도 있지요. ‘타 학생을 의도적으로 괴롭히거나 따돌리려 할 경우 정학이나 퇴학의 징계를 받는다’. 이
규정에 따르면 정학을 당해야 하는 사람은 이상민입니다.”
# 7
“그만하십시오.”
“……!!!”
이상민이었다.
“그만하십시오, 선생님.”
“……!!”
담임은 눈을 껌벅거렸다.
담임은 펄쩍 뛰었다.
“무슨 생각이지?”
“뭘?”
“왜 나를 도와준 거냐고.”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
“나도 어려웠다.”
……
‘쉽지 않았어.’
“그렇겠지? 히히.”
그도 석차를 보고 있었다.
‘기분 나쁜 녀석.’
진현은 혀를 찼다.
***
아버지가 짧게 말했다.
“진현이는 날 닮았어.”
“그래, 고맙다.”
“진현아, 그거 알지?”
“뭘요?”
바로 자신의 손으로.
***
“…….”
“……??”
봉투에는 30 만 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
사실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위암은 말기에 발견하면 무조건 사망하지만 초기에 발견하면 높은 확률로 완치가 돼. 지금 검사 받아 발견하면
아버지는 살 수 있어.’
“됐다. 나는 검사 받을 생각 없다.
“……?!”
진현은 놀라 물었다.
“아니, 어째서요?”
진현은 속이 터졌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이전부터 남자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죠. 그렇지 않나요?”
“…그랬지.”
“네, 알겠어요.”
그 정도야, 뭐.
“좋겠어요, 효자 둬서.”
“크음. 필요 없다는데 그러네. 괜히 쓸데없이.”
당연했다.
***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오늘 검사 꼭 잘 받고 오세요.”
그렇게 등교를 하고, 정신없이 시계만 보며 오전, 점심, 오후를 보냈다. 그리고 종례 종이 치자마자 그는
아버지의 식당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는요?”
“응?”
“아버지 검사 결과는요?”
“아, 그거…….”
“별거 없다는데?”
“…네?”
진현은 반문했다.
“……!”
“왜 그러니, 진현아?”
“……?”
가능성은 두 가지다.
# 8
“김상민 씨?”
아버지의 함자였다.
“그런데 네가 보호자라고?”
진현은 말했다.
뚜뚜.
-여보세요.
그러나 진현의 말투와 태도가 너무나 확고해 어린애 대하듯 돌려보낼 수 없었다.
결국 전화기를 들었다.
“아들입니다.”
“정확히 어떤 염증 소견이었습니까?”
“뭐?”
“체부, 후벽 쪽도 보신 거죠?”
“그건…….”
의사는 흠칫했다.
‘내가 잘 봤던가?’
진현이 재차 물었다.
“……!!”
“그, 그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건 없었다.”
“저 학생. 이제 다음 환자 진료 봐야 하니…….”
“……!”
물론 진현이 말한 법령은 환자의 직계존속, 비속임을 증명하는 서류가 있어야 하지만, 그런 거야 동사무소만 가면
금방 떼올 수 있다.
“이리로 와서 봐라!”
진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모니터를 응시했다.
‘정말로 암이 없단 말인가?’
“뭐?”
“18 번 사진 말입니다.”
“그건 왜?”
“보여주십시오.”
“자, 봐라.”
“……!”
“이건… 이건 뭡니까?”
“응……?”
“이건… 위암 아닙니까?”
“……!”
“그게 무슨 헛소리냐?”
“이것 말입니다.”
“……!”
의사는 급히 둘러댔다.
“정말입니까?”
“그… 그, 그래.”
“정말로요?”
“…….”
“비정상적 위 주름 소견에 경계도 좋지 않고, 희미하지만 출혈까지 보입니다. 전형적인 IIc 형 위암인데…
염증이라고요?”
“……!!”
“그, 그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커다란 위암은 아무도 놓치지 않지만 저런 안 좋은 위치에, 작은 위암은 내시경 의사들도 놓칠 만큼 어려운
거라고! 이걸 어떻게 알아본 거야?!!’
그래 놓고 고등학교 1 학년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그래.”
일개 고등학생이 이런 의학 지식이라니?
“그럼 가보겠습니다.”
“……!”
맞는 말이어서 할 말이 없었다.
***
아버지는 짐짓 성을 냈다.
“어허.”
‘이곳이 한국대학병원.’
‘저건……?’
‘이상민? 그 녀석 차잖아.’
‘최대원 교수님…….’
기분이 묘했다.
“학생은?”
“보호자입니다.”
최대원 교수는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이 성인 보호자처럼 행동하자 기이한 눈빛을 보냈다.
“흐음…….”
“위암이 맞습니다.”
“아……!!!”
싱긋 웃은 것이다.
“저, 정말요?”
“위암은 초기와 말기로 나뉩니다. 말기 위암은 무조건 사망하지만… 초기의 위암은 치료하면 완치가 됩니다.
특히 남편분은 초기 중에서도 매우 빠른 편으로 치료하면 90% 이상 완치됩니다.”
“아……!!”
“우리 아들이 걱정된다고 내시경 검사를 받아보라고 해서요. 안 그랬으면 이이 성격상 평생 검사 안 받았을
거예요.”
아버지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
“그리고 이런 초기의 위암은 의사라도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내시경 검사를 했던 의사의 실력이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병원에서 의사는 단순히 염증이라고 오진했는데… 이 아이가 병원에 찾아가 내시경 사진을 보고
알아냈다니까요!”
# 10
“……??”
“네.”
“부작용은 없습니까?’
“저… 교수님.”
“왜 그러나, 학생?”
“……!”
“제가 따로 공부해 본 바로는… 내시경으로 치료하면 칼로 배를 가르지 않아도 되고, 부작용도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치료 성적도 위를 자르는 수술과 거의 비슷하고요.”
“물론 그렇긴 하다. 하지만 내시경 치료는 위암이 정말 얕게 위치한 경우밖에 적용할 수 없어. 그리고 너희
아버지는 내시경 사진상 주름이 끌려왔는데, 그럴 경우 위암이 점막 밑까지 파고들었을 확률이 높아.”
“주름이 얕고 병소의 크기가 워낙 작아 암의 깊이가 얕을 확률도 높다고 봅니다. 내시경 초음파로 깊이를
확인하고 CT 로 원격 전이를 확인한 후 내시경 치료를 시도해 보면 안 되겠습니까? 만약 깊이가 깊다면 이후에
수술적 치료를 다시 시도해도 되니까요.”
“……!!!”
“…공부했다고?”
“거참, 날 닮았다니까.”
그는 헛기침을 한 후 말을 했다.
“어쨌든 저도 아드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큰 수술은 피할 수 있으면 좋으니까요. 그러면 아드님의 말처럼
진행을 할 테니 입원을 하십시오.”
***
그 뒤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괜찮겠지, 진현아?”
그리고 2 시간… 진현에게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내시경 수술을 집도한 최 교수가 그들을 찾았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아니네.”
“……?”
그리고 며칠 뒤.
“좀 괜찮으세요, 아버지?”
“아니에요. 배를 칼로 째는 수술보다야 낫다지만 내시경 시술도 큰 치료니 몸 관리를 잘해야 해요. 그리고 저
여기서도 공부하고 있으니 성적은 걱정 마세요.”
최 교수였다.
“배에 통증 같은 것은 없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네?”
그는 주저하다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공부하는 중?”
“아… 네.”
“그래?”
최 교수의 눈이 깊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
“왜, 싫나?”
‘제자가 되라고?’
최대원이 말하는 ‘제자’는 단순히 의과대학 교수와 학생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전공으로 이끌어
도제(徒弟)로 그를 가르치며 키우고 싶다는 뜻이었다.
“뭔데?”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의사.
“피부과요.”
***
“지금 가고 있어요!”
씁쓸히 웃었다.
별빛 하나 없는 어둠을 보니 간만에 소주와 담배가 당겼다.
사수 끝에 의대에 들어가 이제 인생이 풀린 줄 알고, 모든 의사가 성공하는 줄 착각해 철없이 놀았고, 어려운
의대 공부에 적응 못할 때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과 담배를 했다.
그렇게 수년이 지난 후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쌓았고 국내 최고라는 대일병원에서 근무할
기회를 얻었지만 결국 실력과 무관하게 여러 외적인 요인에 의해 경쟁에 밀려 쫓겨났다.
이번 삶의 목표였다.
“응……?”
‘이상민?’
잘못 봤나 눈을 깜박거렸지만 분명했다.
‘이 시간에 여긴 왜?’
‘가족인가? 형?’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멀어서 정확히 대화 내용이 들리진 않았지만 간간히 고성이 오갔고, 형으로 추정되는 의사의 얼굴에는 분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퍼억!
진현은 깜짝 놀랐다.
‘뭐야?’
의사는 일갈했다.
“천한 놈!”
“…….”
# 11
***
“그냥, 뭐.”
전교 1 등 김진현과 전교 2 등 이상민이었다.
“이번에도 그놈 눌러줘.”
표정이 밝은 것이 못 보진 않은 것 같았다.
“우우…….”
다시 야유가 터졌다.
하지만 담임은 콧방귀도 안 뀌고 반 아이들의 성적이 등수 순으로 열거된 종이를 게시판에 붙이더니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오오, 찍은 것 다 맞았네?”
“봐! 또 1 등 했잖아!”
“그러냐?”
진현은 얕게 웃었다.
“너는 성적 잘 나왔냐?”
“응! 나 무려 23 등이야!”
“축하한다.”
“그래, 하면 다 된다.”
그러면서 진현은 다른 아이들, 아니, 이상민의 성적을 바라봤다.
-이상민 전교 2 등, 평균 97.8.
‘간발이군.’
‘이번에도 분해하겠군.’
하긴 매번 간발의 차로 2 등을 하면 열 받을 만도 할 일이다.
“1 등 축하한다, 김진현.”
“……!”
그놈, 이상민이었다.
“그래, 고맙다.”
‘무슨 생각이지?’
뭔가 가시가 있는 말이었다.
“…….”
“꼰대라니. 전교 1 등한테.”
“가자.”
“…뭐?”
“가자고. 게임방.”
“……!”
“진심이야?”
“……!”
김철우가 크게 비웃었다.
***
‘몇 년 만이지?’
김철우가 비아냥거렸다.
황문진이 말렸다.
“괜찮아.”
5, 4, 3, 2, 1……!
게임이 시작됐다.
‘황문진 먼저 공격하자.’
“아……!”
# 12
“크아악!!”
한 부대도 넘는 숫자로 이상민과 김철우의 부대는 졸지에 황문진과 새로 나타난 부대에 포위돼 버렸다.
설마가 아니었다.
김진현이었다.
진현이 짧게 말했다.
“어… 어어!”
그 뒤로는 일방통행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얼마든지.”
김철우는 이를 깨물었다.
‘두고 보자!’
상대가 안 되는 실력이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진현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생기겠지만, 초창기인 지금은 인터넷 최강급의
실력자라 할 수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약속. 지킬 거지?”
“이익!”
“한 번만 더 하자.”
뭐,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매번 간발의 차로 시험에서 뒤졌으니 만만해 보이는 게임으로라도 뭉개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 풀리니 성질이
나리라.
“얼마든지.”
그래도 살짝 감탄했다.
피해가 크겠지만 어차피 한 번만 막으면 승리였다. 그리고 이런 류의 전투는 진현처럼 정교한 컨트롤을 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말도 안 돼.”
김철우는 할 말을 잃었다.
“약속. 지킬 거지?”
“……!”
“쓸데없는 참견 말아라.”
하지만 진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약한 애들을 괴롭히는 모습이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었다.
그때 의외의 말이 들렸다.
이상민이었다.
“…왜, 왜?”
“……!”
김진현은 살짝 놀라 물었다.
“그 말 빈말 아니지?”
“그래.”
“…….”
왠지 쉽게 믿음이 안 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슨 말이지?”
“아… 아직 너는 무리 일려나.”
“뭘 말하는 거냐?”
“술 말이야. 마실 줄 아니?”
황문진이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무리겠지?”
진현은 실소했다.
“그래, 상민아. 범생이랑 무슨 술이야. 한 잔만 마셔도 픽 쓰러질 텐데. 그러지 말고 애들 불러서 우리끼리
마시자.”
“네가 낼 거냐?”
“…뭐?”
다들 진현의 말을 이해 못했다.
“술값 네가 낼 거냐고.”
“……!”
황문진도 말렸다.
진현은 피식 웃었다.
괜찮겠냐고?
***
“어디로 가는 거지?”
“테헤란로. 금방 도착해.”
“면허는 언제 딴 거냐?”
BMW 는 도로를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 속도로 돌진해 순식간에 테헤란로에 도착했다.
“네, 안에 방 남는 것 있죠?”
“네, 들어가십시오.”
지배인이 물었다.
“그, 그래.”
아, 개과천선했다는 말은 취소.
# 13
“……!”
어색한 건배를 한 그들은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물론 황문진은 콜라 잔이었다.
“크, 시원하군.”
“너희는 안 마시냐?”
“……!”
“허세 부리긴!”
“자, 더 마셔야지?”
“그래?”
“얼마든지.”
발렌타인 30 년산이다.
기가 찬 노릇이다.
“정말 마실 수 있겠어?”
“따르기나 해라.”
“언더 락? 스트레이트?”
“스트레이트.”
“무리하지 말고.”
딱!
“잘 마시네?”
“한 잔 더 줘라.”
빠르게 술이 돌았다.
“웁! 자, 잠깐.”
그러나 이미 혀가 꼬여 있다.
의대의 술 문화는 지극히 야만적으로 신입생 OT 때 20%에 육박하는 신입생이 응급실로 실려 가는 지방 의대도
있었다.
“크르륵.”
괴상한 신음 소리를 흘리며 뻗은 김철우를 옆 소파에 눕히며 이상민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잘 마시네?”
“너야말로.”
벌써 얼마나 마신지 모르겠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나도 취하는구나.’
이상민이 웃었다.
그 눈을 보자 오기가 솟았다.
딱!
다시 건배를 하고 술을 마셨다.
“괜찮아요. 안주 좀 더 가져다줘요.”
태연한 말투와 다르게 이상민의 안색은 창백했다. 힘들지만 의지로 버티는 것이 훤히 보였다.
진현도 죽을 맛이었다.
‘한계야.’
취한 진현은 물었다.
“하, 하나만 묻자. 왜 이렇게 나한테 이기려 드는 거냐? 어차피 1 등, 2 등이라고 해봤자 매번 두세 문제 차이로
큰 의미도 없는데.”
“우엑!!”
처음 보는 진실된 웃음이었다.
***
“으응……?”
“여, 여긴……?”
“일어났어? 몸은 괜찮아?”
“여긴……?”
“…고맙다. 여긴 어디지?”
최소 80 평은 될 듯한 집이다.
‘이 녀석 사는 곳이 주상복합의 펜트하우스였나?’
그때 이상민이 불렀다.
“라면 다 끓었어.”
“…그래, 고맙다.”
“먹을 만해?”
“먹을 만하다.”
솔직히 제법 맛있었다.
“그래, 잘됐네.”
“아, 나 원래 혼자 살아.”
“혼자?”
의외의 말에 반문했다.
“무슨 말이지?”
“……!”
그래도 말했다.
“힘내라.”
“……!”
“…고마워.”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나선의 변곡점(變曲點)이었다.
***
결과는 항상 아슬아슬한 1 등.
“그래, 그래.”
뭐, 아무렴 어떨까?
# 14
14. 수능 (1)
한기가 도는 고 3 교실은 조용했다. 코앞에 다가온 수능으로 모두 긴장된 얼굴이었다.
‘세상에 해서 안 될 게 없다더니.’
“그냥저냥 그래.”
“긴장돼.”
“한국대에는 안 되니까.”
전의 삶을 포함해 8 년째 주구장창 수능을 파고 있는 진현의 모의고사 성적은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아 최근에는
전국 50 등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진현의 말은 진담이었다.
“그런데 뭐 마셔?”
“여, 범생이.”
김철우가 손을 흔들었다.
면도를 안 해 수염이 덥수룩한 녀석은 고 2 말부터 정신을 차리고 양아치 짓에서 손을 뗐다.
참, 세상모를 일이다.
“공부는 잘돼?”
“잘되겠냐? 난 재수 확정이다.”
“어, 답답해서.”
“같이 가자.”
“왜? 또 간접 흡연하게?”
“공부 잘돼?”
이상민이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
이상민, 이놈은 확실히 한국대 의대에 입학할 것이다. 그것도 압도적인 성적으로.
문제는 진현이었다.
“돈 벌 거다.”
“뭐……?”
“…그래.”
이상민이 마주 인사했다.
“그래, 수능 잘 보고.”
옆의 김철우가 물었다.
“한방 차? 웬?”
“내 건?”
“이제 없어.”
“없어?”
“없어. 이제는.”
***
“아니, 아들 괜찮아?”
“괘, 괜찮아요.”
몸이 달달 떨렸다.
‘며칠 쉬면 낫긴 나을 텐데…….’
문제는 시기였다.
“진현아, 괜찮아?”
“괘, 괜찮어.”
‘도대체 뭐지? 감염성 장염? 아니야, 여름도 아니고 상한 음식을 먹은 적도 없어. 그냥 독감? 아니면… 설마
복막염? 위궤양?’
“진현아, 괜찮니?”
‘더 안 좋아졌어.’
물먹은 솜이 된 듯했다.
멍한 정신을 털기 위해 타이레놀 2 알, 진통 소염제도 한 알 먹었다.
‘왜 이렇게 배가 아프지?’
교무실에서는 혹시 전국 수석은 못하더라도 서울시나 구(區) 수석 정도는 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때 독감이라니!
“으…….”
“왜 이렇게 통증이…….”
뭔가 이상했다.
“열나고 배가 같이 아프다고?”
“네.”
“윽!”
그것만은 안 됐다.
재수를 할 수는 없으니까.
# 15
15. 수능 (2)
“저, 그냥… 해열제, 진통제, 위장 보호제, 항생제 처방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입원할 사정이 안 돼서…
….”
의사의 말이 옳았다.
수능을 못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현아, 정말 괜찮니?”
“네, 괜찮아요.”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위궤양 천공은 수능을 앞둬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인 수험생들 사이에서 꽤나 흔한 질환이기도 하다.
위궤양 천공은 말 그대로 위궤양이 악화돼서 생기는 질환이다. 평소에 위궤양 증상이 없었는데… 왜?
‘설마. 독약도 아니고. 한방 차를 먹고 간이나 신장이 나빠진 경우는 많아도 위궤양 천공이 생겼단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 모르는 사이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그럴 가능성이 높다.
고민했다.
위궤양 천공은 데굴데굴 굴러다닐 정도로 아픈 경우가 대부분인데, 진현은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엄청 아픈 정도?
진현은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곧 날이 밝았다.
운명의 수능 날이었다.
***
‘아… 추워.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았다.
요약집을 보는 학생도 있었고, 머리를 깨우기 위해 초코바를 먹는 학생도 있었다. 기도를 하는 이들도 종종
보였다.
“…괜찮습니다.”
“아니, 몸이 너무 안 좋아 보이는데…….”
“하, 하지만…….”
“네, 알겠습니다.”
과량 복용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분명 이번 수능은 언어와 수리영역이 전반적으로 어려웠어. 듣기도 어려운 문제가 있었고.’
도합 8 년을 넘게 수능 공부를 했다.
그걸 1 년이나 더하라고?
절대 못 한다.
‘할 수 있어. 힘내자.’
어머니가 챙겨준 도시락은 손도 못 댔다. 어차피 위에 구멍이 뚫려 음식이 들어가면 위 근처 복막이 제대로 상할
것이다.
같은 학교 아이들이 수능을 포기하고 병원에 가보라고 할 만큼 진현의 상태는 안 좋아 보였다. 창백한 얼굴이
시체 같았다.
‘큭!’
배가 아까보다 더 아파왔다.
‘균이 전신에 퍼지는 패혈증은 심하면 혈압이 떨어지는 위급한 상황이 될 수 있어.’
필사의 의지덕분일까?
팔딱팔딱 잘 뛰고 있었다.
“진현아, 괜찮아?”
“…….”
대답이 없었다.
“진현아? 김진현?!”
아이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진현이 책상에 엎드리며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앰뷸런스 좀…….”
“…!!!”
“빨리…….”
다섯 번의 수능 중 가장 고된 수능이었다.
# 16
16. 수능 (3)
‘여긴……?’
“윽…….”
‘이건?’
어머니였다.
“어머니.”
진현은 당황했다.
“어, 어머니……?”
“수능이야 다음에 보면 될 것을! 어쩌자고 이런 미련한 짓을. 네가 잘못되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죄송해요. 정말로.”
***
얼마 뒤 회진 온 중년의 의사가 진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위궤양 천공에 복막염까지 진행된 상태였어. 조금만 늦었으면 패혈증으로 큰일이 났을 거야. 젊어서 살았지…
….”
“네, 감사합니다.”
“그러게 말이다.”
진현은 문득 물었다.
못 본건가?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황문진은 자신이 시험을 망쳤을 거라 추측하고, 진현의 기분을 배려해 대답을 회피하는 것이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이상민, 김철우였다.
“몸은 어때?”
이상민이 물었다.
“그냥…….”
“아니, 그렇게 몸이 아팠으면 아무리 이 괴물이라도 수능을 잘 봤을 리 없잖아. 그리고 재수가 뭐 어때서? 수능
날 성적이 안 나오면 할 수도 있지.”
***
물론 형식뿐인 등교였다.
“그러니까.”
“그래도 이상민 학생이 있으니 기대해 봅시다. 그리고 진현 군도 내년에는 잘 보겠지요. 이런 불상사가 또
생기진 않을 테니.”
어느 날 아버지가 물었다.
“뭘요?”
“재수 말이다.”
“감사해요, 아버지.”
***
“아, 진현아!”
황문진이 뛰어왔다.
진현은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아니야, 다 네 덕분이지!”
“글쎄, 아버지랑 상의해 봐야지. 이렇게 잘 나올 줄은 몰라서. 히히. 가채점보다 7 점이나 올랐어.”
진현은 슬쩍 웃고 등을 돌렸다.
진현이 손을 들었다.
# 17
“이놈아! 이 예쁜 놈아!”
“……!!”
“지, 진현아……?”
진현도 놀랐다.
“정말입니까?”
‘내가 수석이라고?’
“김진현, 축하한다!!”
“이 장한 놈!!”
진현은 마주 손을 내밀었다.
“얼마든지. 그런데 이상민은?”
“그렇군.”
“왜? 아직 속이 다 안 나아서?”
***
아버지는 위암 치료 후 끊은 술을 다시 마셨다.
“다만?”
친구들이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나를 닮아서 그런 거야.”
중학교 때 꼴찌에서 단숨에 1 등, 그리고 위 천공이 있었음에도 의지로 버텨낸 점 등, 이야깃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비결이라… 한 가지 있긴 했다.
***
“환자의 몸과 마음을 다 같이 치료하는 참된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환자의 질환뿐 아니라 고통받는 마음까지
함께하는 의사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최대원 교수는 몇 년 전, 진현이 보여준 뛰어난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 자네는 잘할 것이라 믿네. 입학한 후 보게. 생명을 다루는 의사의 길에 입문한 것을 환영하네.”
‘잘못 찍힌 것은 아니겠지?’
***
“돈 벌 거다.”
그것도 할 수 있는 한 많이.
진정한 시작이었다.
***
심지어 이 기간의 성적은 향후 어디에도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미래의 고생을 미리 보상받고자 탱자탱자 노는
의대생이 많았다.
특히 지난 1 년간 진현은 지도 학생의 수준을 고려한 과외로 많은 학생의 성적 향상을 이끌어 강남 대치, 도곡동
일대에 인기 최고의 과외 강사였다.
‘7 시 50 분. 이제 끝낼 시간이군.’
“저… 음…….”
“뭔데?”
이 이야기를 위해 몇 주를 고민했던가?
진현은 짧게 답했다.
“나 영화 싫어한다.”
“어… 그러면 영화 말고…….”
진현은 피식 웃었다.
# 18
‘좀 늦을 수도 있겠는데?’
띠리링!
-진현아! 왜 안 와?!
“무슨 얘기냐?”
이혜미.
의대는 지극히 보수적인 면이 많아 여자가 학년 대표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녀가 얼마나
성격이 활달한지 알 수 있었다.
한탕 더 뛰어야 한다.
그라고 왜 가서 놀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뿐인가?
물론 그는 과거에 병원에만 틀어박혀 지내 시사에 비교적 약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눈만 돌리면 투자할
거리는 무궁무진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
“거의 다 왔다.”
‘좋을 때군.’
좋을 때다. 사회를 나가면, 아니, 졸업만 다가와도 이렇게 마음 편하게 젊음을 불태우기 쉽지가 않다.
진현은 혀를 찼다.
“많이 마셨냐?”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진짜야!”
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분명 진탕 마셨겠지.
“정들라고 웃는 건데?”
“퍽이나.”
‘집에 가서 쉬고 싶군.’
“넌 남자친구 안 사귀냐?”
“뭐?”
“남자친구 안 사귀냐고.”
그녀는 답했다.
“난 그런 것 안 키워.”
연예인 뺨치는 미모에 성격도 활달하고 좋아 그녀에게 달려드는 남자가 몇 트럭은 되었다.
라고 거절했다.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더구나 집안은…….
“오빠!”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진현도 익히 잘 아는 남자였다.
***
“그래, 마시자.”
“김진현, 재수 없는 놈.”
옆에 앉아 있던 이가 그에게 술을 따랐다.
“젠장.”
차석으로 한국대 의대에 입학한 그는 쟁쟁한 의사 집안의 아들로 아버지가 심지어 한국대 의대 교수였다.
“저런 놈 신경 쓰지 마.”
그들의 말처럼 진현은 교양이 주를 이루는 1 학년, 2 학년 과정 때 별다른 부각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2 학년, 의예과까지 성적은 폐기처분 돼 하나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신경을 안 쓴 탓이다.
# 19
종강파티는 4 차까지 이어졌고, 술자리가 끝난 후에도 아쉽다고 이상민의 오피스텔로 옮겨 술을 더 마셨던 것이다.
“혜미는?”
“그렇군.”
“다 끓었다. 먹자.”
“시험은 잘 봤니?”
“뭐, 글쎄.”
“잘 못 본 것 같다.”
“학교에 가야 해.”
“학교에는 왜? 종강했잖아.”
“나야 뭐…….”
이상민이 살짝 웃었다.
“죽었어.”
“죽어? 또?”
“응.”
“어, 잘 가.”
진현은 지하철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젖혔다. 술기운이 빠지지 않아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이후 몇 번을 갈아탄 끝에 진현은 지하철에서 내렸다.
“최 교수님 뵈러 왔습니다.”
“네, 교수님.”
“네, 건강하십니다.”
‘부담스러운데.’
“시험은 잘 봤나?”
“못 봤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저야…….”
단순했다.
오로지 과외!
“아르바이트 말입니까?”
웬 알바?
“그래, 내가 아는 사람이 이번에 제약회사를 그만두고 바이오 벤처를 차렸는데. 인력이 너무 모자라 단기간 일할
사람을 좀 구해달라고 해서. 어떤가? 돈을 떠나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은데.”
진현은 잠시 생각했다.
‘바이오 벤처라.’
지금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돈이었다.
“교수님…….”
“……!”
진현의 눈이 커졌다.
“그래.”
“하겠습니다.”
‘마인 바이오라고?’
모를 수가 없었다.
후에 국내 바이오 기업 1 위가 되는 곳이니까!
***
‘사장님은 여전할까?’
“무슨 일이니?”
회사에 도착하자 추레한 남방의 아저씨가 귀찮은 얼굴로 진현을 맞았다.
“최 교수?”
“아…….”
“사장님.”
“응?”
장익기 사장이었다.
창업 초창기라 힘든지, 이전 진현이 기억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는데 주름살에 고뇌와 피곤이 가득했다.
웬 학생이지?
“…얘가? 정말로?”
“그렇다는데요.”
중년의 남자, 장익기 사장은 추레한 남방의 아저씨와 진현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네, 그렇습니다.”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한데… 너… 몇 학년이니?”
“2 학년입니다.”
“네.”
‘아니, 보내기 싫으면 보내지 말 것이지. 이런 핏덩이를 보내? 그간 연이 있는데 날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건가?
그렇지 않아도 손이랑 돈 모두 모자라는데. 정말 너무하잖아.’
“너 일반 화학 실험은 해봤니?”
“해봤습니다.”
“네가? 빈혈 진단 키트 개발업무다.”
“빈혈이요?”
“너는 잘 모르고 있겠지만, 빈혈은 몸 안의 혈액이 모자란 것으로 많은 환자가 가지고 있는 질환이다. 원인도
여러 가지인데 각각을 구분하는 명확한 진단 키트가 없는 상태라 이번에 우리 마인 바이오가 첨단기술로 개발을
하려는 거다.”
“뭐? 페, 페리틴……?”
“그게 무슨 말이냐?”
장 사장은 눈을 껌뻑거렸다.
“페… 리틴이라고?”
빈혈의 원인이 얼마나 많은데 현대 의학 기술상 각각의 원인을 명확히 구별하는 키트를 개발하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이전에 없던 신선한 아이디어긴 하지만 이미 다른 간편한 방법이 있는데 개발해 봤자 그걸
누가 쓴다고? 직접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 의사가 없는 상태에서 개발을 하니 이런 문제가 생기지.’
소규모 개발 업체에 의사가 없는 경우가 많다 보니 개발의 디자인 자체를 잘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김 박사님을 불러와.”
# 20
“……!”
“빈혈 중 정확히 어떤 빈혈을 구별하는 것입니까? 모든 빈혈을 구별하는 것은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할 텐데…
….”
“뭐?”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돈만 되면 뭐든지 달려드는 다국적 제약 회사들이나 바이오 기업들이 정말 생각을
못했을까요?”
김 박사는 입을 다물었다.
“……!”
“당연히…….”
“그러면……?”
“피검사 한 번이면 됩니다. 일반적인 혈액 검사들과 체내의 철분 저장량을 반영하는 페리틴(Ferritin) 수치만
확인하면 빈혈의 대표적인 원인은 대부분 감별할 수 있습니다.”
김 박사의 입에서 교과서에나 나오는 희귀한 원인들이 주저리주저리 나왔지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빈혈들은 국내에 거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빈혈의 원인들은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일반적인 혈액들로
구별이 가능하고요. 철 결핍성 빈혈은 적혈구 용적(MCV), 적혈구 혈색소(MCHC), 페리틴만으로 구별이 되고,
거대세포성 빈혈은 혈액 도말 검사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만성 질병성 빈혈은 임상 상황과 페리틴으로
구별이 됩니다. 그리고 박사님께서 특수한 빈혈들을 이야기하셨는데, 그런 빈혈들은 진단 키트 하나 있다고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일반 혈액 검사에서 의심되는 이상 소견이 나올 때 특수 검사를 추가하는
게 더 정확하고 합리적입니다.”
환자를 보는 임상을 모르지만 나름 빈혈의 이해가 깊어 진현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7 만 원… 그리고 한 3 일…….”
“……!!”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천재라더니.’
그는 문득 최 교수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천재란 말을 이해했다.
“정말 고맙네.”
“혹시 염증 관련 진단 연구 아닙니까?”
장 사장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건 어떻게?”
“최 교수님께 얼핏 들었습니다.”
“프로젝트 내용을?”
‘도대체……?’
“……!”
장 사장의 얼굴이 다시 한번 변했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 그건 어떻게?”
“아이디어가?”
“조건?”
“만약 제 조언이 도움이 안 된다면 당연히 아무런 사례를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스톡옵션을 주십시오.”
“…스톡옵션이라고?”
“네, 어렵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대신 만약 도움이 된다면 단순한 조언뿐 아니라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때까지 계속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큰돈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일을 도와드리는 동안, 제 회사인 것 같은 마음으로 일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대략 4%의 지분. 그의 도움으로 RI84 프로젝트가 성공할 경우, 현 시점에서 1,500 만 원의 가치에 상당하는
주식을 행사할 수 있다는 내용의 계약서다.
1,500 만원.
2,600%, 26 배의 증가다.
‘어차피 내 도움이 아니라도 1 년 뒤쯤, 마인 바이오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내니까. 이 정도의 도움은
상관없겠지.’
기분 좋은 날이었다.
# 21
21. 의대 공부 경쟁 (1)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다양했는데 음주가무, 동아리 활동, 여행, 연애…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나름의 시간을
보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그런가?”
처음에는 단순한 조언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엔 구체적인 공정부터 해서 진현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그래도 겨울방학이 끝날 때까지 중요한 부분은 다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없어도 이후 부분은
진행에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그럴 수 있겠나?”
장 사장은 반색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진현은 생각했다.
골학(骨學).
***
“으… 추워.”
곧 시작할 골학(骨學)때문이었다.
“엄청 힘들겠지?”
“하아…….”
그 말에 이혜미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아, 진현이 얘는 골학을 빠져서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골학은 의대 공부에 가장 기본이란 말이야.”
“뼈만 배우나? 골학은 단순히 뼈를 넘어 여러 기본적인 용어와 기초 사항을 다 배우는 거라서 절대 빠지면 안 될
텐데.”
-여보세요?
“진현아! 정말 안 올 거야?
“야, 야! 김진현!!”
비꼬는 음성이다.
김강민이 재촉했다.
***
“아, 진짜 힘들었다.”
“난 밥도 거의 못 먹었어.”
정말 많이 배웠다.
“근데 이거 안 배워도 나중에 공부 따라갈 수 있나? 김진현, 그놈은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이상민. 골학 잘했냐?”
“뭐. 그냥.”
“그래, 잘해보자.”
***
“괜찮습니다.”
“정말 미안하네.”
‘이제 며칠 안에 끝나겠군.’
“말씀하십시오.”
“……?”
“왜 그러십니까?”
“무엇입니까?”
진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생각지도 않은 제안이었다.
나쁘진 않다.
지금이야 영세한 벤처지만 몇 년 만 지나면 무시무시한 성장을 거듭해 국내 최고의 바이오 업체가 되는 마인
바이오다.
# 22
22. 의대 공부 경쟁 (2)
“그런가?”
“네, 알겠습니다.”
-1 억 1500 만 원.
10 년 뒤면, 그의 돈은 10 배가 넘게 뛸 것이다.
마인 바이오에서 받은 스톡옵션까지 합하면 15 억이 넘는 거액이다.
-15 억.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
“밥 꼭 잘 챙겨먹고? 응?”
아버지의 음식점은 인테리어를 바꾸고, 메뉴를 개발하는 등, 진현이 여러모로 힘쓴 덕에 제법 매출이 올랐다.
진현은 미소 지었다.
“네, 아버지도 술 드시지 마시고요.”
속으로 생각했다.
본과 개강 첫날이었다.
끝없는 무한 경쟁, 끝없는 공부, 끝없는 시험, 스트레스… 수험생도 아닌 대학생 주제에 공부하다 자살하는
학생이 종종 나오는 게 치열한 단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꼭 그런 날이 오게 만들 것이다.
***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들 빨리 왔군. 의대는 강의실을 이동하지 않고 쭈욱 한 곳에서 수업을 들으니.’
“흥!”
“진짜… 난 몰라.”
“옆에 앉은 사람 없지?”
“왜?”
“너 말 많잖아. 시끄럽다.”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피부를 들어내고 시뻘건 근육과 힘줄이 보이는 사진을 빔 포인트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깨를 움직이는 회전근개(Rotator cuff)를 이루는 근육은… 인대와 힘줄은… 그걸 지배하는 신경과 이
부위의 혈액을 공급하는 동맥은…….”
뼈는 아예 설명도 없었다.
‘뭐, 뭐야 이게?’
이건 지옥처럼 느껴졌던 골학보다 심했다. 아니, 골학은 강압적이어도 그나마 알아들을 때까지 반복 설명이라도
해줬지 이건 알아들으라고 하는 설명이 아니었다.
“…….”
“그러게.”
‘절대 다시 못 듣지.’
문득 옆에 앉은 이혜미를 바라봤다.
“응? 왜?”
“아니야.”
“괜찮아.”
“어떻게 하지?”
끼이익.
“……!”
모형이 아닌 진짜 시체였다.
“아…….”
조교가 머뭇거리는 학생들에게 호통을 쳤다. 안으로 들어오니 매캐한 냄새가 화끈 눈을 찔렀다.
‘김강민이랑 같은 조군.’
“내가 먼저 할게.”
‘오랜만이군.’
과거의 그는 외과의사였다.
# 23
23. 의대 공부 경쟁 (3)
“지, 진현아?”
“아……!”
진현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면 네가 해볼래?”
“그래!!”
생각을 마무리한 진현은 김강민이 어깨를 해부하는 모습에 시선을 돌렸다 흠칫 놀랐다.
“잠깐!”
“왜?”
‘맙소사.’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
“이거 나중에 시험으로도 내야 하는데 이렇게 망가뜨려놔? 너희들 모두 장난하냐? 점수 깎이고 싶어?”
“죄송합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똑바로 해!”
조교가 눈을 부라렸다.
그때부터였다.
자로 잰 듯 근막을 다듬고, 뼈에 닿은 힘줄을 정교하게 잘랐다. 그리고 지방과 연조직에 파묻힌 혈관과
신경다발을 깔끔히 파냈다.
“……!”
마치 수공예 장인이 조각을 하는 듯한 장면이었다. 카데바(시체)의 어깨가 근육을 벗으며 해부학 정식 교재로
써도 손색이 없을 듯한 단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없습니다.”
“우리 조에도!”
그는 짓씹듯 생각했다.
***
학생들이 한탄했다.
“그러게. 아무리 과목이 많아도 그렇지, 1 년에 4 학기를 쑤셔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중간, 기말을 한 학기에 4
번이나 봐야 하잖아.”
돼지, 김강민이었다.
‘본과 1 등도 내 거야.’
“하루도 안 쉬어?”
“그러면 같이 놀지 않을래?”
“그래, 뭐… 마음대로.”
“약속한 거다?”
“술은 안 마시고?”
“술도 좀 마시고.”
그녀는 헤헤하고 웃었다. 가볍게 웃는 그 모습이 화보처럼 예뻤다. 모르는 남자가 보면 반해버릴 만큼.
보통 놀 땐 3 명이 같이 놀았다.
“퍽이나.”
“아잉. 진짠데?”
‘빌어먹을 놈!’
***
며칠 뒤 첫 시험이 시작했다.
“아, 이게 뭐야?”
의대 공부의 필수지침서인 ‘족보’, ‘야마’와 유사한 문제도 많았지만 황당한 난이도의 문제도 많았다.
‘흥, 이 정도는.’
공기가 상쾌했다.
***
“뭐야, 이게?”
-김강민, 78 점, 2 등.
성적표에 적힌 내용이다.
“나 1 등 아닌데?”
“78 점.”
‘누구지?’
“알려주세요. 부탁이에요.”
“안 되는데…….”
“이거다.”
엑셀에는 위에서부터 내림차순으로 등수와 점수가 적혀 있었고 그와 이상민의 이름은 2 번째 칸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위에 칸에는…….
“……!”
# 24
24. 의대 공부 경쟁 (4)
김강민의 눈이 터질 듯 커졌다.
‘말도 안 돼… 이놈이?’
-김진현 90 점 1 등.
부동의 1 등.
그게 진현의 성적이었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인정할 수 없어.”
그는 김진현을 노려봤다.
‘두고 보자.’
***
“그래, 가봐라.”
“뭐?”
모를 리가 없었다. 지난 시험 1 등이니까.
“그렇진 않은데?”
뿔테 안경은 김진현을 떠올렸다.
시험성적뿐 아니라 실험 태도도 성실하고 리포트도 훌륭해 불량과는 거리가 우주 끝 정도로 멀었다.
“그렇지는…….”
“그렇긴 하지만…….”
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적당히 해도 만점을 줬는데, 가장 성실한 실험을 한 우등생의 점수를 깎으라고?
“안 된다. 그건 못 해.”
“형.”
“이제 곧 박사 논문 심사 있지 않아요?”
“……!”
뿔테 안경의 눈이 흔들렸다.
“부탁해요.”
***
그는 그 길로 ‘족보편찬위원회’에 찾아갔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그러니까.”
의대의 시험은 범위가 광범위하지만 막상 중요한 내용과 시험에 나오는 내용은 매년 크게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전에 출제되었던 기출문제집인 족보의 중요성은 굉장히 커 과목에 따라 적게는 30~50%, 많게는
80~90%가 족보의 내용을 응용해서 시험이 출제된다.
김강민은 공치사했다.
“이제 곧 새 족보 나오지?”
“정말로?”
김강민은 헛기침을 했다.
“무슨 부탁?”
“별건 아니야.”
“말해봐.”
“……!”
“김진현? 왜?”
“그냥.”
“그건 안 돼.”
“왜? 어려운 일은 아니야. 그 녀석, 학교에 남아서 공부하는 다른 애들과 달리 수업만 끝나면 곧바로 집에 가
공부하니 늦은 시간에 족보를 나눠주면 모를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냐.”
“……!”
경쟁이 치열한 정형외과에 붙여주는 건 어려워도, 훼방하는 건 간단했다. 그냥 안 좋은 이야기 몇 번이면 끝이다.
***
진현은 깊은 꿈을 꾸고 있었다.
깊은 어둠 속, 그는 이전 삶의 일을 떠올렸다.
과거 그는 푸른 꿈을 안고 일했었다.
환자의 생명을 위하는 게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몸을 돌보지 않으며 일하고 또 일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해고와 파산, 이혼뿐이었다.
그녀는 중매로 결혼한 남편과 가까워지려 나름 많이 노력했지만 일에 치여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거리를
좁힐 수는 없었고, 긴 외로움 끝에 둘의 관계는 냉랭해졌다.
그는 씁쓸히 생각했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말했다.
-그래도 사랑했어요.
“……!”
그 말과 함께 진현은 번뜩 눈을 떴다.
“안 좋은 꿈이군.”
애틋했던 결혼생활은 아니다. 오히려 사무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그런 관계가 된 것은 다
그의 잘못이었기에.
마지막, 한 방울 눈물을 흘리는 그녀에게 미안하단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자신이 망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외과의사로의 삶이 너무 바빴다.
‘아니, 다 핑계지.’
아무리 병원 일이 바쁘더라도 조금만… 조금만 그녀에게 신경을 써줬다면 이혼까지 하진 않았을 거다.
“아…….”
그는 급히 휴지로 코를 막았다.
이전 삶 때도 그는 참 열심히 살았다.
지치지 않는 게 이상했다.
# 25
25. 의대 공부 경쟁 (5)
어차피 범위는 많고 시간은 부족하니 중요한 내용이 집중돼있는 족보를 얼마나 깊게 이해하냐가 시험의 승패를
좌우했다.
-…어? 어. 진현이?
-…….
“그래?”
-…응.
-아, 아니.
“그래, 조심하고.”
“뭐지? 어디 아픈가?”
***
조직학, 생화학, 생리학, 해부학, 태생학, 신경해부학… 이름만 들어도 현기증이 나는 과목의 시험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진현아, 잘 봤어?”
아이들이 진현에게 물어봤다.
진현은 본인의 성적을 떠벌린 적이 없지만, 어떤 경로인지 그사이 그의 성적에 대한 소문이 쫘악 퍼진 상태였다.
“잘 모르겠다. 어렵던데.”
정말로 어려웠다.
‘성적이 나와 봐야 알겠군.’
‘이번 1 등은 내 거다.’
인체의 신비를 시험지로 밝히려는 듯, 가장 어렵게 나온 생리학은 이미 조교를 통해 문제를 입수한 상태여서
문제없었다.
‘건방진 놈, 코를 짓밟아주마.’
“……?!”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 됐죠?”
1 등인 내가 이런 성적을 받았다고.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 절대로!’
“……!”
“도와줘서 고마워.”
“괜찮아.”
“됐어. 너나 많이 먹어라.”
꽃보다 화사한 미소였고, 그 미소가 김강민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그에게 단 한 번도 저렇게 웃은 적
없었다.
“야, 김진현.”
“응?”
“왜? 무슨 일?”
김강민은 버럭 화를 냈다.
“…….”
“그야 너 따위가…….”
“……!”
“그, 그건…….”
“야, 김강민.”
“너 죽을래?”
“……!”
“……!”
턱.
진현은 으르렁거렸다.
“…그, 그건 어떻게?”
그리고 이후 생리학 실험 점수가 이상하게 나와 조교를 차분히 추궁하니 역시 추악한 전모를 밝힐 수 있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애초에 이런 무리한 일을 매끄럽게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김강민이 바보천치로, 사람이 찌질해도 이렇게 찌질할
수가 없었다.
“어머, 어떻게…….”
“그래.”
그녀의 눈이 차가운 분노를 띄었다.
“이건 이렇게 그냥 넘길 수준의 일이 아니야. 족보는 물론이고, 조교랑 결탁해 성적을 조작하다니. 정식으로
학교에 이야기하겠어.”
“……!”
김강민은 이를 깨물었다.
그녀는 등을 돌렸다.
이렇게 학생으로 재학 중이어서 그렇지, 그녀가 만약 환자의 신분으로 한국대 병원에 입원한다면 난리가 날 거다.
따라서 그녀가 직접 말하면 김강민은 중징계를 피할 수 없다. 최소 유급, 잘못하면 제적을 당할 수도 있다.
“멈춰!!!”
징계에 대한 공포, 진현에 대한 질투, 분노, 혜미에 대한 서운함이 이성의 끈을 잘라 버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다.
“이혜미! 멈추라고!!!”
“꺄악!!”
“놔! 이거 놔!!”
“이 자식이 정말……!”
퍼억!!!
메디컬 환생
지은이 | 유인
펴낸이 | 문상철
NEW EPISODE
교정 · 교열 | 정성훈
편집 · 제작 | 정성훈
표지일러스트 | stc
타이포그래피 | 기갈
브리드 BREATHE
등록 | 제 2015-000222 호
대표전화 | 02-3443-7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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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202-153-8(05810)
이 책은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 26
“악!!”
퍼억! 퍼억!
“괜찮아?”
“어, 어.”
진현은 혀를 찼다.
***
족보 빼돌리기! 성적 조작!
그리고 징계를 떠나, 원래부터 비호감이었던 김강민은 완전히 의대 학생들 사이에서 매장당했다.
“정말 대단하다.”
‘모르는 번호인데?’
-김진현 학생입니까?
“네, 김진현입니다.”
“……!”
“네, 지금 가겠습니다.”
노크를 하고 방에 들어가니 대학로를 넘어, 강북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창문 아래에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하얀 의사 가운을 입고 서 있었다.
의대의 부학장은 학장, 병원 고위 행정직, 병원장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코스였고, 실제로 애들 놀이터인
의과대학보다는 병원 내 권력이 주 관심사인 경우가 많았다.
“자네가 김진현 군인가?”
“네.”
“…….”
“아, 아닙니다.”
“……!”
“미, 미안하다.”
짜악!
“아닙니다.”
본인이 부단히 노력하면 만회할 수 있겠지만… 글쎄, 오만한 김강민 성격으로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네, 감사합니다.”
“아, 아버지…….”
“죄, 죄송합니다.”
“멍청한 놈!!”
“…….”
할 말이 없는 잘못이었다.
“김진현이라…….”
묘한 음색이었다.
***
물론 그래 봤자 토, 일요일? 짤막한 주말의 휴식이지만 이때는 진도를 나간 과목도 없고, 시험 예정도 없었기에
진정으로 맘 편히 쉴 수 있는 때였다.
“또 꿨네.”
‘몸이 허한가.’
‘오늘은 그냥 둘이 데이트해!’
세수를 하던 그는 문득 손을 멈췄다.
‘잠깐 이거 데이트인가?’
‘음… 괜찮나?’
“늦겠네. 빨리 나가자.”
“진현아!”
“여기까진 웬일이냐?”
“빨리 타. 누나 배고파.”
“오빠? 상민이?”
“아니, 범수 오빠.”
“아…….”
“응.”
“정말?”
“…예전에 해봤어.”
“언제?”
“자, 출발하자!”
끼이잉!
“아!”
***
모던한 분위기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먹고, 뮤지컬 공연을 본 후, 호젓한 삼청동 거리에서 커피를
마셨다.
“퍽이나.”
이런 생각까지 했었다.
“아, 좋다.”
“응!”
“좋네…….”
“그래.”
“올라갈까?”
“응!”
“와아…….”
진현도 감탄했다.
혜미는 천천히 창문으로 다가갔다. 낮은 햇살이 그녀의 하얀 원피스를 환하게 빛나게 했다.
“아…….”
“고마워.”
“뭐가?”
“나 여기 와보는 게 소원이었거든.”
“나 가족 없어.”
“응?”
“그런 것 없어.”
“……!”
“웃기지? 상관은 없다고 생각해. 엄마가 없고 아버지가… 그래, 아버지라 부르기 힘든 아버지를 가진 것 따위…
뭐, 흔하게 있는 가정 문제니까. 물질적으론 엄청나게 풍요롭기도 하고.”
말을 마친 그녀는 밝게 웃었다.
“…….”
“힘내라.”
“……!”
“…힘내라.”
“응, 고마워.”
# 27
하지만 이 모든 게 곧 있을 일에 비할까?
“커피 먹고 가자.”
“또?”
“목마르잖아. 먹고 가자.”
“그래, 사주마.”
“어서 오세요.”
“손님?”
“…….”
“진현아?”
“…….”
“진현아?!”
‘말도 안 돼.’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커피 나왔습니다.”
‘그래, 안 닮았어.’
165 정도 되는 키에 잔잔한 미소, 하얀 피부, 부드러운 이마, 조각같이 단아한 외모, 오른 눈 밑의 애교점,
왼쪽 아래 귀엽게 튀어나온 송곳니, 조용한 목소리… 그것 외엔 닮은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안 닮은 거다.
“손님?”
“진현아, 뭐해?”
“아, 아니.”
‘이름을 물어볼까?’
“진현아, 정말 괜찮아?”
“…아.”
“그래.”
진현은 집에 돌아가는 거에 동의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그냥 집에서 쉬는 게 낫겠다.
혼자 있고 싶었다.
***
끼이익!
재벌가들이 모여 사는 한남동.
이상민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도련님.”
“네, 오랜만이에요.”
“도련님.”
“그래요.”
“휘유, 여기는 올 때마다 느끼지만 참 넓네요. 한낱 방계(傍系)의 저택도 이런데 본가(本家)인 할아버지 집은
축구 경기장만 하겠어요.”
“어서 오십시오.”
“네, 오랜만이에요.”
노인은 그를 저택 안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곳에 ‘그’, 이상민과 이혜미의 아버지가 있었다.
“왔구나.”
“앉거라.”
“아니, 그냥 서 있을게요.”
“왜?”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이상민은 되물었다.
“그런데요?”
“……!”
“그래.”
이상민은 등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그가 문득 말했다.
“…….”
“……!”
남자는 혀를 끌끌 찼다.
이상민은 빙긋 웃었다.
그와 똑 닮은 배다른 형, 이범수였다.
“천한 놈!”
다른 자, 귀한 자.
자신은 천한 자.
부르릉!
멍! 멍!
“후우.”
멍! 멍!
끼잉?
끼잉!
그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강아지가 힘겨운 듯 낑낑거리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강아지가 괴로워할수록, 그의 미소는 더욱더 진해졌다.
뚝.
“하나 더 사야겠군.”
***
“진현아, 몸이 계속 안 좋은 것 같아.”
“아… 그래.”
한국어와 영어가 합쳐져 생성된 외계어에 학생들이 노곤한 표정을 지으며 꾸벅꾸벅 졸았다. 젊은 교수는 분필로
칠판을 쾅쾅 때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죄송합니다.”
“응?”
“나가보겠습니다.”
“응? 응? 진현 학생?”
“진현아?”
“남산타워요.”
“어서 오세요.”
그녀가 아니었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아…….”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사장님도 모르십니까?”
“글쎄요?”
애초에 주말 이틀만 단기로 일한 거였고, 계좌이체도 아닌 현금으로 당일에 수당을 지급해서 이름도 기억 못 하고
있었다.
“아… 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김진현 1 등, 이상민 2 등.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
회귀 후, 8 년 만이었다.
# 28
“야, 나 괜찮냐?”
-한국대 의대 김진현.
실습, 의사국가고시 준비, 인턴, 레지던트… 쭈욱쭈욱 앞으로 펼쳐질 고생길을 떠올리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꼭 피부과에 합격해야지.’
더구나 진현의 현재까지의 성적은 부동의 1 등으로, 특별한 이변만 없는 한 피부과 합격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좀 더 고생하자, 김진현.’
“진현아, 나 어때?”
“안 어울린다.”
진현은 슬쩍 웃었다.
“늦었다, 빨리 가자.”
“응.”
“우린 내과 실습부터지?”
“그래.”
“그래.”
진현과 혜미를 비롯한 조원들은 나무 책상과 커다란 슬라이드 모니터가 놓인 컨퍼런스 룸에 도착해 교수를
기다렸다.
“네.”
‘저 사람이 이범수…….’
단 이상민이 좋게 이야기하면 꽃미남, 나쁘게 말하면 기생오라비처럼 호리호리한 스타일이라면, 이범수는 우직한
훈남 스타일이었다.
이범수가 말을 이었다.
“길게 이야기하는 거 싫어하니 간단히 몇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이제 병원에서 여러분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조원 중 누군가 답했다.
“PK 실습생입니다.”
‘넌 아니? 알면 말해봐.’
“정답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몇 년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실제로 환자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죠.
초중고 때 열심히 영어공부를 해도, 실제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는 상황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죠. 따라서
무지한 지식으로 섣불리 접근하다 보면 환자를 잡을 수도 있어 Patient killer(환자 살인자)라 하는 겁니다.
물론 여러분은 실습생이니 관찰만 할 뿐 환자에 대해 전혀 결정권이 없어 실제로 환자를 잡을 일은 없겠지만…
주의는 해야겠죠. 모든 면에 있어서 겸손한 태도로, 배우는 자세로 실습에 임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너희가 실습생이니?”
“실습 나온 거 환영하고. 교수님 앞으로 병원에 환자가 입원하면, 실제 환자 진료는 여기 주치의 선생님이 하게
된다. 교수님들은 각 전문 분야에 대해 큰 의사 결정만 해주고 자잘한 부분들은 전부 주치의 선생님이 처리하기
때문에 병원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할 수 있지.”
“네.”
“그러니 너희는 여기, 병원에서 가장 많은 진료를 하는 주치의를 따라다니며 환자 진료하는 것을 배우면 된다.”
“저… 바쁜데요.”
“또 어디 가시게요?”
“담배 피러 간다.”
“……!”
“……?”
“……!”
그때 김진현이 나섰다.
“선생님.”
“…응?”
“뭐?!”
“지, 진현아.”
그는 자신의 실수는 생각도 않고, 고작 실습생이 하늘같은 선배에게 대들었단 사실에 분노했다.
“김진현이라고 합니다.”
“네, 왜요?!”
***
“괜찮다.”
“고마워.”
“늦어서 죄송합니다.”
“치프는?”
혜미가 답했다.
“네, 교수님.”
“아버님 몸은 괜찮고?”
최대원 교수는 이전 진현의 아버지를 치료해 준 위암, 그중에서도 내시경 점막 절제술의 대가로 소화기내과의
교수였다.
“네, 건강하십니다.”
“그때의 어렸던 자네가 벌써 이렇게 병원에 실습을 나오게 되다니. 세월이 참 빨라.”
기대 가득한, 부담되는 목소리였다.
# 29
“저를요?”
“그래, 스카우트 이야기도 있고 새로운 프로젝트 이야기도 있는 것 같은데… 자네 바이오 업체에 갈 생각이
있나?”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눈을 깊게 빛냈다.
마치 그 눈이, ‘자네 같은 인재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지. 내과나 외과 같은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
진현은 식은땀이 흘렀다.
진현이 도운 RI84 프로젝트로 한차례 도약한 마인 바이오가 유수의 다국적 제약회사인 헤인스와 같이 진행하는
신약 개발이다.
‘RI84 랑 다르게 TC80 은 진짜 대규모 프로젝트인데. 시장 가치만 최소 몇 백억 아닌가? 가만. 지금쯤 TC80
진행에 문제가 생길 때긴 한데… 설마 그것 때문에 연락한 건 아니겠지?’
“자, 회진 시작하지.”
“……!!”
‘어, 어째서……?’
“…….”
“너는?”
“…….”
“너는?”
“…….”
“먹는 약입니다.”
“어째서지?”
‘최 교수님에게 눈에 띄긴 싫은데…….’
‘아, 이건 기본적인 건데… 아무리 1 년차 초반이라도 왜 하나도 모르는 거야. 자꾸 최 교수님한테 주목받고
싶진 않은데…….’
“기간은?”
“그래, 그렇지.”
“알았나?”
“네, 네?”
“네, 네!”
“복강 내 농양이라…….”
“…….”
“…….”
“…….”
“정말로?”
“어째서?”
“그래, 그래!”
항상 마지막에 진현에게 질문의 화살이 날아왔고, 진현은 최대한 모른 척 대답을 회피하려 했으나 최 교수는
놓아주지 않았다.
‘난 피부과가 하고 싶다고…….’
“흐음… 임파선이라.”
“네, 문제는 이게 4 년 전에도 있던 임파선인데 큰 변화는 아니어도 조금씩,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흐음…….”
마치 조언을 구하듯-
‘안 돼. 더 이상은 절대 안 돼. 더 눈에 띄면 곤란해.’
“말해보게.”
“무슨 암을?”
“위암 환자니, 위암의 임파선 전파의 가능성이 있겠지만 원체 초기라 이건 사실 확률이 떨어집니다. 임파선의
위치도 위암이 처음 전이될 때와는 조금 다르고요.”
“그러면?”
“하지만 만약 수술을 했는데 암이라고 안 나오면? 불필요한 수술을 받은 환자의 고통은 누가 보상하지? 만약
수술이 잘못돼서 위험해지기라도 하면?”
“그렇긴 하지만, 놓쳤을 경우의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에 꼭 확인을 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꼭 메스로
배를 열지 않고 복강경 수술로 충분히 접근 가능할 거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네, 내과 해서 내 제자 될 거지?”
***
실습 시간이 끝나고 짐을 놔둔 강의실로 돌아온 혜미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그래? 내과 좋지 않아?”
감기만 본다는 일반인들의 시선과 다르게 종합병원에서 내과의 역할은 상상을 초월했다.
내과에서 다루는 심장, 폐, 간, 신장 등은 뭐 하나라도 장애가 생기면 생명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진현은 답을 할까 고민했다.
뭐, 이 녀석이면 괜찮겠지.
“피부과 하고 싶다.”
“에엑?!”
“왜?”
“피부과도 뜻 있는 과다.”
“뭔가?”
“아까운데.”
“뭐랄까. 가우스급 수학의 천재가 미술을 하는 느낌? 아니면 뉴턴급의 물리학의 천재가 신발 장사를 하는 느낌?”
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는 최 교수를 떠올렸다.
‘조심해야겠어.’
최 교수의 눈빛이 날이 갈수록 심상치 않아지고 있다. 이러다 정말 내과로 끌려갈 판국이다.
“참, 진현아.”
“응?”
“아까 고마워.”
“뭘?”
“뭘. 신경 쓰지 마라.”
“…아니야, 정말 고마워.”
평소답지 않게 의기소침하게 말하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딱하기도 해 진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30
진현은 놀라 물었다.
“아… 아… 아니야.”
그녀는 멍하니 말을 더듬다, 퍼뜩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옆의 가방을 서둘러 챙기더니 등을 돌렸다.
“어…? 자, 잠깐만.”
홀로 남은 진현은 중얼거렸다.
“왜 그래, 저 녀석?”
고개를 갸웃했다.
***
“어제 일 미안하다.”
“뭘?”
밤사이 진현은 왜 혜미가 그렇게 반응했을까 깊게 고민했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불쾌해서, 였다.
“혜, 혜미야?”
화난 게 아니라… 부끄러움에 가까운 표정이었지만 불행히 눈썰미가 원시인에 가까운 진현은 그걸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야…….”
그는 생각했다.
“귀여워서.”
진현은 당황했다.
“바보…….”
그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과제가 있다. 각각에게 환자를 배정해 줄 테니 그 환자의 상태에 대한 요약과 진단 방법, 향후 치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리포트에 써서 제출하도록 해. 점수에 들어가는 거니 열심히 하고.”
“네.”
“장염 환자니 장염의 원인과 감염성 장염일 때 치료를 위주로 정리하면 돼.”
어렵지 않은 주제다.
-강 O 연 남자 / 52 세
-동반 질환력 : 당뇨, 고혈압, 만성신부전증, 심방세동(Delta wave?, R/O WPW?), 심장 부전, B 형 간염,
간경화…….
“…….”
실제로 원인도 모르고 치료 방법도 모르고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는데, 어떻게 답을 구하겠는가?
실제로 이전 진현이 다니던 의대에서 내과 실습에서 C 를 맞아 1, 2 등을 다투다 단숨에 10% 밖으로 밀려난
학생이 있었다.
물론 과제 하나로 C 가 나오진 않겠지만 작정하고 깎으면 가능했다.
“잘해보라고.”
민호성이 비웃었다.
“왜, 왜? 못하겠어?”
“아닙니다.”
“주말까지.”
***
“뭐, 해봐야지.”
14 학점.
쿼터로 치면 한 쿼터 분량의 학점. 만약 C 정도의 성적이 나오면 지금까지의 공들여 쌓은 탑은 우르르 무너지고
말 거다.
‘피부과도 날아가겠지.’
혜미가 다시 말했다.
“내가 같이 도와줄게.”
“하지만…….”
“어디 가게?”
“중환자실.”
“아… 바로 과제 시작하게?”
“그래.”
***
“하아, 하아.”
“환자분, 환자분?”
“저기 누구세요?”
귀찮으니, 대충 보고 빨리 가란 말투다.
‘신체 검진 먼저…….’
‘폐 소리가 많이 지저분하군. 그런데 가래가 찬 소린 아니야. 폐렴이면 가래가 많아야 하는데… 폐렴은 아닌 것
같은데?’
주치의, 민호성이었다.
“잘하고 있어?”
네가 그거 보면 아냐? 란 표정이다.
“어… 어…….”
‘빵점을 주마.’
그리고 병동으로 올라가려는 그에게 진현이 물었다.
“저… 선생님.”
“왜?”
전신이 탱탱 부어 있는 것도 이상하다.
민호성이 성질을 낼 게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환자가 잘못된 치료로 점점 나빠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도 없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의 눈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맥박수가?”
‘어떻게 된 거지?’
그러나…….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 31
“네!”
“뭐? 델타 웨이브?”
진현은 급히 말했다.
“…….”
그때 간호사가 외쳤다.
“네!”
깜짝 놀란 진현이 외쳤다.
“안 됩니다!!”
간호사가 놀라 멈칫했다.
민호성이 버럭 화를 냈다.
‘아……!’
약을 준 후, 보통 금방 반응을 나타낸다.
그것도 최악으로.
“어……?”
채찍을 휘두른 듯 심장 리듬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노이즈처럼 심장 리듬이 엉망으로 요동을 쳤다.
“이게……?”
그와 동시에 혈압을 나타내던 모니터가 100, 80, 60, 40, 20… 으로 떨어지더니 0 에서 멈췄다.
1 초도 되지 않아 생긴 변화였다.
‘제길, 빌어먹을.’
‘이, 이게…….’
다른 간호사들이 10 초도 안 돼 전기 충격기를 가져왔다.
“선생님, 전기 충격을!!”
“어, 어…….”
‘이런 제길……!’
“차지(Charge)!”
찌이잉!!
“클리어(Clear)! 다들 떨어지세요!”
“쇼크(Shock)!”
“아…….”
그리고… 틱. 틱.
“하아…….”
“실습생입니다.”
“네, 실습생이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저, 선생님. 피검사나 다른 검사를 해서 원인을 찾는 것은 어떻습니까? 체내의 전해질 이상의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아… 아! 그, 그래.”
“죄, 죄송합니다.”
***
“네, 지금 가겠습니다.”
곧 병원의 교수실에 도착한 그는 다른 손님을 발견했다.
주치의, 민호성이었다.
“어제 일 들었네.”
“그래?”
“확실한가?”
“네.”
“그건 당시 그 자리에 의사가 민호성 선생님밖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전체적인 상황을 총괄하였고,
저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전기 충격을 줬을 뿐입니다.”
못나고 미운 놈이지만… 그도 저렇게 어리벙벙할 때가 있었다. 아니, 민호성과 진현뿐 아니라 모든 의사는
저렇게 미숙할 때가 있다.
“정말인가?”
“네.”
“네, 네?!”
“어제 수고했네.”
“……!”
‘다 알고 있구나.’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면 안 되지만… 의사는 어쩔 수 없이 환자를 통해 배우게 되지. 미안함을 잊지 말고, 끝없이 정진하게.
그건 환자를 보는 의사의 의무니까.”
***
“너… 혹시 담배 피냐?”
“지금은 안 피웁니다.”
“그래?”
“하아…….”
“선생님?”
“미안해.”
“……!”
진심이 담긴 목소리다.
“아니야, 지금까지 정말 미안했어. 나도 원래 그렇진 않은데… 바쁜데 학생이 나오니 짜증이 나서. 그리고 난
이전부터 공부 잘하는 애들을 싫어 했어서… 하여튼 정말 미안하다.”
그건 반가운 소리다.
“네?”
“너 어떻게 어제 그럴 수 있었지?”
진현은 순간 고민했다.
‘뭐라고 답하지?’
“책에서 배웠습니다.”
“정말로?”
“…괴물 같은 놈.”
‘아… 좋아졌구나.’
그는 다짐했다.
***
“흠, 피곤하군.”
젊고 유능한 그는 항상 일에 치여 있었다.
똑. 똑.
“네, 들어오세요.”
# 32
“네놈이 여긴 웬일이냐?”
이범수는 으르렁거렸다.
콰앙!!
“흐음.”
“뭐냐?”
“네에, 네.”
“심장마비라…….”
***
‘약속 장소가…….’
‘여기군.’
끼이익.
문을 여니 누군가 그를 불렀다.
“진현아, 여기야!”
멀대 같이 큰 키에 순둥이 같은 얼굴.
“오랜만이다.”
“그래, 이게 얼마만이야? 진현이 너는 하나도 안 변했네?”
“너는 키가 더 큰 것 같다?”
“그러니까! 좀 보자니까!”
“그런가?”
황문진은 실실 웃었다.
고 3 때 수능이 대박 난 그는 KTX 를 타고도 몇 시간은 걸리는 지방에 위치한 의대에 다니고 있었다.
“크, 좋다.”
“선배들이 워낙 야만적으로 퍼 먹여서… 마시다 보니 늘더라. 그런데 어떻게 지냈어? 여자 친구는 없어?”
‘무슨…….’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없다.”
“그래.”
“마법사?”
“그래, 이십 대 중반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된다는 말이 있잖아. 너 그러다 큰일 나. 대마법사가 될 수도 있어.
운석 떨어뜨리는.”
“곧 올 때가 됐는데…….”
진현은 슬쩍 웃었다.
“이상민은?”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피부과 할 거다.”
“에엑?”
“왜?”
황문진은 눈을 반짝였다.
“대일병원?”
“응.”
“넌 뭐 생각하고 있냐?”
“공무원?”
김철우가 버럭 화를 내었다.
***
“끄억, 한 잔 더 하지 않을래?”
“괘, 괜찮은데…….”
“그, 그래.”
‘한 잔 더 하고 싶긴 하군.’
‘혜미랑 마실까?’
터벅터벅 걸어 집에 도착했다.
“우리 아들 왔어?”
“네.”
집이 좁은 것은 둘째치고, 여기저기 가득한 곰팡이와 심심하면 튀어나오는 벌레들, 통풍이 안 돼 퀴퀴한 냄새,
쇳물 섞인 수돗물… 여러모로 최악인 집이었다.
‘집을 하나 살까…….’
***
진현이 도운 RI84 의 성공으로 기틀을 닦은 마인 바이오는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TC80 은 우울 증상에 작용하는 신약으로 이전까지 진행한 프로젝트들과는 규모자체가 달랐다. 이미 투자된 금액만
천문학적으로 프로젝트에 성패에 마인 바이오의 명운이 걸려 있었다.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장 사장은 성공을 확신하고 TC80 프로젝트에 마인 바이오의 모든 것을 투자했다. 외부에서 끌어들인 투자도
어마어마했다.
“왜 이렇게 이상 반응이 나오는 걸까요? 이렇게 이상 반응이 계속되면 프로젝트 자체를 백지화해야 할 수도
있는데…….”
그때 한 직원이 말했다.
“누구?”
“헤인스의 에이미입니다.”
“……!”
“안 좋은 일을 상의하고자 왔습니다.”
# 33
“……!”
장 사장은 급히 말했다.
“소화기 계통에 여러 차례 동일한 이상 반응이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복통과 설사가 심한데… 안정성을 시험하는
1 상에서 이러면 뒤에는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본사 차원에서 폐기를 검토 중입니다.”
장 사장의 머리에 지금껏 일궈온 마인 바이오가 무너지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건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곧
닥칠 현실이었다.
“저희 헤인스도 다방면으로 분석을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무리입니다. 이상 반응이 나타나는데 어떻게 해결을
하겠습니까?”
애초에 그녀는 이 프로젝트를 처음 추진했던 사람으로 이번 실패 때문에 경력의 상당한 흠집을 남기게 되었다.
“저도 어떻게든 TC80 프로젝트를 살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후에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지금이라도 폐기를 하는 게 상책입니다.”
“뭐라고요?”
천재.
“마음대로 하세요. 어쨌든 마음이 아프지만… 뾰족한 수가 안 나오면 저희 헤인스는 TC80 프로젝트를 폐기할
겁니다.”
***
띠리리.
-장익기 사장.
띠리리.
“네, 김진현입니다.”
“네, 오랜만입니다.”
진현은 생각했다.
‘술 마시잔 건가?’
그는 거절하려 했다.
“……!”
“……!”
‘안 돼, 부도가 나면.’
***
“에이미라고 해요.”
장 사장이 극찬한 김진현이란 남학생은 다른 일반적인 동양인 학생들보다도 더 어려 보였고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까칠한 재촉에 장 사장과 진현은 자리에 앉아 음식도 나오기 전에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이렇게 자네를 부른 이유는 TC80 프로젝트라고 우리가 헤인스와 합작으로 진행하는 신약 개발 때문이네.
최근 계속해서 이상 반응이 나오고 있는데 원인과 해결책을 알 수가 없어서 혹시나 자네에게 좋은 생각이 있을지
물어보려 만나자 한 거네.”
“네, 알겠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먼저 연구의 개요를 볼 수 있을까요?”
이대로 진행하면 TC80 프로젝트의 실패로 마인 바이오는 무너질 것이고, 그의 4 억은 공중으로 날아갈 거다.
“5-HT7 입니다.”
“5-HT7 의 메커니즘은…….”
“네?”
# 34
34. 다국적 제약회사, 헤인스 (3)
“시험하듯 물은 건 미안해요. 그러면 미스터 김은 TC80 이 어째서 이상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나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곳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반만 맞았습니다.”
“뭐라고요?”
“이 부분은 5-HT7 에 강력한 결합성을 보이죠. 그래서 다른 기존 약들보다 강한 효과가 기대되는 거고요.”
“그런데요?”
“……!”
‘어떻게 그 사실을?’
그런데 약리학, 생물학의 최고 전문가들이 혼신을 기울여서야 알아난 내용을 고작 분자식만 보고 유추하다니?
“……!”
“이전 실패한 약물들의 사례를 통해 짐작한 것입니다. 비슷한 종류 중 5-HT4 에 작용하며 이상 반응을 일으킨
약물들이 있었으니까요.
말이야 쉽지, 고작 분자식과 몇 사례 가지고 원인을 유추하는 건, 관련 분야의 대가가 아닌 한 불가능한 일이다.
“없습니다.”
“응?”
“……!”
‘한국대 의대생이라 했나? 앞으로 어떤 과의 의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지내서 나쁘지 않겠어.’
“없습니다.”
“아…….”
“……?!”
“그게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입니다.”
진현이 물었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에이미의 푸른 눈을 직시했다.
“억만 불까진 못 드려요. 하지만 정말로 TC80 을 살릴 수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어요.”
“2 억.”
“네?”
그의 말에 장 사장은 입을 떠억 벌렸다.
“지, 진현 군? 이게 무슨…….”
‘내가 다국적 제약회사인 헤인스에 무료 봉사를 할 이유는 없지. 그리고 훗날 확인된 TC80 의 시장가치를
생각하면 2 억은 헐값이나 마찬가지야.’
“…….”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당돌한 요구군요.”
“……!”
“지, 진현 군…….”
“물론 장 사장님과의 인연도 있어, 전 가급적 마인 바이오, 헤인스와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판단은
부사장께서 하십시오.”
똑딱똑딱.
“진현 김입니다.”
“실례지만 나이는?”
“한국식으로 24 살… 어리군요.”
에이미는 미소 지은 채로 말을 이었다.
“실제 아이디어의 가치완 별개로, 그 당당한 태도는 대단하군요. 나이를 떠나, 매력적으로 느껴질 정도예요.”
“알겠으니 빨리 말해보세요.”
장 사장도 귀를 쫑긋했다.
“일단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우울증 치료제 등의 신경정신약으로 TC80 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부작용이
심하기 때문이죠.”
“그러면요?”
“네, 맞습니다. TC80 은 우울 개선 효과뿐 아니라 다른 수용체에 작용해 복통과 설사를 유발시키죠. 그러면 그
수용체는 어떻게 복통과 설사를 유발시킬까요?”
“그야…….”
진현이 설명했다.
“장운동 기능이 지나치게 자극되어서 그렇습니다. 얌전히 있어야 할 장의 기능이 항진되어 무리하게 날뛰니
복통이 일어나고 설사가 일어나는 거죠.”
“장운동 기능을 지나치게 자극시킨다는 말은… TC80 이 소화기능 촉진제로도 사용할 수 있단 뜻 아닐까요?
그것도 강력한.”
“……!!”
“그, 그 말은……?”
“네, 이상 반응을 오히려 약으로 이용하잔 거죠. TC80 은 강력한 소화기능 촉진제가 될 것입니다. 특히 기존
약물에 반응하지 않는 난치성 변비 환자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녀는 한국 지사의 부사장이 아니라 사장으로 승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본사에 간부로 돌아갈 수도 있다.
“당신의 아이디어는 잘 들었어요. 하지만 치료약으로 쓰기에는 복통과 설사가 너무 심해요. 독약을 약으로 팔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신경정신계통에 작용하던 약을 소화제로 팔다가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지 모르고요.”
어려울 것도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35
“용량을요?”
“……!”
그 말에 에이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맞는 말이었다.
“제 제안이 어떻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네?”
***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헤인스의 한국지부 부사장 에이미는 TC80 이 소화 계통 약으로 거듭날 경우의 시장가치를 단숨에 파악해 강한
추진력으로 일을 진행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금전적 대가를 주고받았다 하더라도, 진현이 다시 한번 마인 바이오를 구한 건 엄연한 사실이라 장 사장은
연신 진현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진현은 과거 대일병원에서 헤인스의 TC80 의 3 상 임상 실험 진행을 도왔었다. 따라서 스터디 디자인을 완벽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것 보세요.”
“응? 이게 뭔데?”
“제가 번 돈이에요.”
“아니에요. 학생이 어떻게 리베이트를 받아요. 이번에 미국의 제약회사와 큰 프로젝트를 진행 후 받은 거예요.”
부모들은 프로젝트의 내용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아들이 리베이트 같은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단 사실에 안도했다.
진현은 웃었다.
진현은 몇 년 뒤 집값이 폭등할 동네, 그중에서도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를 위주로 매물을 알아봤다.
‘좋구나.’
세상 사는 게 뭐 있겠는가?
그게 그의 꿈이었다.
***
“괜찮다.”
“정말 괜찮다.”
“힘들면 바로 이야기하고.”
마치 연인을 챙기는 듯한 모습에 진현은 피식 웃었다. 하여튼 오버는.
‘옛날 생각나는군.’
수많은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안타깝게 놓치기도 했다. 욕을 듣기도 했으며, 감사하단 말도 많이 들었다.
“네, 다 왔습니다.”
“그래, 시간 없으니 바로 시작하자. 내과 실습은 다 돌고 왔을 거고… 너희는 외과와 내과의 차이를 아니?”
“네, 제가 김진현입니다.”
“네가 1 등이지? 내과에서 칭찬이 자자하던데. 그래, 너는 내과와 외과의 차이를 뭐로 생각하지?”
생각할 것도 없는 질문이다.
“수술입니다.”
“그래, 맞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외과는 수술을 하는 과지. 내과가 약으로 사람을 살리면, 외과는 수술로
사람을 살린다.”
그는 학생들을 훑어보았다.
“따라서 내과의사가 똑똑해야 한다면, 외과의사는 수술을 잘해야 한다. 즉, 손재주가 좋아야지.”
한국대 병원에서 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남기택은 성실성을 인정받아 후에 대일병원의 외과 교수가 되었었다.
치프 남기택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 외과 실습은 수술 위주로 돌아갈 거고, 지금까지의 공부와는 완전히 다를 거다. 그러니 김진현.”
“네?”
“공부 잘하는 거랑 수술 잘하는 거는 전혀 별개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수술장에 들어와. 너처럼 공부만 하던
애들이 수술장에서 적응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수술장에서 적응이라…….’
속으로 실소했다.
‘하지만 이젠 싫어.’
# 36
“진현아, 정말 괜찮아?”
“괘… 괜찮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
같은 조원 중 한 남자가 말했다.
“…괜찮다.”
“그나저나 진현이 너 수술장 계속 못 들어가서 어떻게 하냐? 너도 수술장에 들어가서 좀 배워야 할 텐데.”
“그러니까. 수술도 의학에 중요한 분야인데 들어가서 좀 배워야 할 텐데. 책으로 공부한 거랑 실제 수술은 아예
다르더라고.”
그도 학생 때 그랬다.
‘뭐, 다 한때지.’
“그래, 하긴. 김진현 너는 얌전하게 생겨 수술이랑 안 어울릴 수도 있겠다. 수술장에 들어가서 잘못하면 엄청
혼나니 그냥 여기서 쉬어.”
“그래, 너희 말이 맞다.”
“진통제를…….”
“뭐 드릴까요?”
“네, 잘 지냈습니다.”
대화를 하고 있으니 머리가 망치로 두드리듯 아파, 빨리 돌아가고 싶었으나 교수가 권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다.
“네, 감사합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네? 어째서입니까?”
“아…….”
“아닙니다.”
“그런가요? 좋은 친구라…….”
“네.”
‘이범수 교수라…….’
“너……? 김진현?”
“……!”
그렇지 않아도 지금까지 수술장을 한 번도 안 들어온 것 때문에 치프 남기택은 진현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방금 가셨습니다.”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응급 당직.
***
‘익숙한 공기구나.’
무리한 바람이었다.
띠리리.
회귀 후 처음이었다.
그는 고열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세수를 했다. 그리고 탈의실 문을 열고 수술장으로 들어갔다.
두근.
두근.
사실은 알고 있었다.
바로 그걸 느끼기 싫었다.
# 37
“왔어?”
목소리가 쌀쌀맞았다.
“네.”
“환자 마취 중이니, 손 닦고 들어와.”
“너 깨끗이 닦았어?”
“네.”
“깨끗이 닦았습니다.”
그렇게 입으면 균이 다 묻어 오염되기 때문에 철저히 무균적 원칙(Aseptic technique)에 맞춰 착의해야 했다.
“수술 가운 입는 법은…….”
“……!”
‘아…….’
“네.”
“그래? 정말로?”
“…네.”
젊은 여자 환자였다.
“네.”
늦은 밤이나 새벽에 응급으로 발생하는 담낭염 수술은 치프와 인턴 혹은 치프와 저년차 레지던트 둘이서 하는 게
보통이지만, 치프와 학생 둘이서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어차피 이런 수술은 특별한 문제만 안 생기면 집도하는 사람의 실력이 중요하지, 어시스트가 누구냐는 크게 안
중요하니까.’
“소독 다했어?”
“네.”
손을 소독하고 들어온 치프는 진현이 해놓은 양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너 정말 수술방 처음이야?”
“네, 처음입니다.”
‘조심하자, 조심.’
“급성 담낭염 환자로 담낭을 절제하는 수술을 할 건데, 우린 환자의 배를 메스로 열지 않고 복강경으로 진행할
거다. 복강경 수술이 뭔지 아나?”
“네, 알고 있습니다.”
복강경 수술은 배 안으로 망원경 같은 내시경과 기다란 집게발을 집어넣어 진행하는 수술을 뜻한다.
“네.”
전부 맞는 말이다.
‘배를 직접 여는 것보다 수술 난이도가 높다는 것 빼고는 여러모로 복강경 수술이 좋지. 특히나 담낭염 수술은.’
“자, 들고 있어.”
“이런…….”
‘큰일이군.’
환자는 이제 이십 대 중반이다.
‘잘해야 하는데…….’
찌잉! 찌이잉!!
“조심……!”
“응?”
파앗!
“……!”
남기택은 급히 외쳤다.
“석션(Suction)!”
곧 피가 다시 차올랐다.
“이, 이런.”
당황한 남기택은 신음을 흘렸다.
“저, 선생님.”
“응?”
“오픈(Open)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
‘안 돼.’
진현은 이를 깨물었다.
그때마다 어떤 응급 상황이 오더라도 외과의사는 차가운 이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환자를 잃지 않는다.
“선생님, 오픈(Open)을!”
“혈압 떨어집니다!”
“메스 주세요.”
메스. 오픈(Open)을 결정한 것이다.
찌익.
“석션(Suction)!”
“선생님, 혈압 더 떨어져요!”
“……!”
“어떻게 하지……?”
“선생님.”
“응?”
“뭐? 네가 뭘 안다고?”
“……!”
남기택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그, 그래.”
# 38
‘저기!’
뚝. 뚝.
“응?”
남기택이 멍하니 석션을 넘겨받자, 진현은 재빨리 혈관을 잡는 기구인 모스키토를 집어 들었다.
‘여기……!’
“너, 지금 뭐하는……?!”
철컥!
“혈압 올라갑니다!”
“……!”
“어떻게……?”
“…너…….”
‘말도 안 돼.’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이후엔 별일 없이 수술이 끝났다.
***
곤란한 일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진현은 급히 말했다.
“우연이었습니다.”
“…그래?”
“동영상으로 공부했다고?”
“…….”
“아닙니다.”
“몸은 괜찮나?”
“네.”
“그래, 내가 오해한 거구나. 하긴 너같이 성실한 애가 농땡이를 피우진 않았겠지. 내가 고깝게 생각해서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당직은……?”
“감사합니다.”
새벽 3 시.
“참, 너 무슨 과 지망한다고?”
“피부과입니다.”
“그래?”
“네.”
***
이전의 삶에서 저년차 때 실수로 환자를 잃은 그는 절치부심으로 노력했고, 그 결과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되어
많은 이의 인정을 받았다.
그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몇 시야?’
새벽 4 시 30 분.
한 시간밖에 못 잤다.
혜미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진현은 놀라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이범수 교수님이?”
“…뭐?”
진현은 반문했다.
그가 자살을 했다고?
***
마침 혜미가 밖에 나와 있었다.
“진현아?”
그녀의 눈이 커졌다.
“힘내라.”
“……!”
“힘내.”
그런데 자살 방법이 의사답게 독특했는데 본인의 혈관에 칼륨 약을 주사해 체내의 칼륨 농도를 높여 심장마비를
유발시킨 것이다.
‘믿을 수가 없구나.’
***
한편, 장례식장 뒤편에 검은 상복을 입은 한 매끄러운 외모의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상민이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돌아가라.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다.”
“벌레 같은 놈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국내 1 위, 대일병원.
부르릉.
지금과 다르게.
빛바랜 사진이었다.
# 39
경찰은 재계 1 위, 대일그룹의 손자였던 이범수 교수의 사망을 샅샅이 조사하였으나, 이상한 점은 찾지 못했다.
아플 만큼 텅 빈 목소리였다.
“진현아.”
“응?”
“너 우리 피부과 지망한다고?”
“네.”
“진현아, 뭐해?”
“괜찮습니다.”
회의실에는 이미 여러 피부과 레지던트들이 둘러앉아 커피와 도넛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제 말이지…….”
“아, 진현이도 왔네. 이리 와서 도넛 먹어.”
원래 환경이 사람의 성격을 만든다고, 다른 과들은 툭하면 욕설에 심하면 주먹이 날라 다니는데, 피부과 의사들은
어찌나 성격이 유한지 싫은 소리 하나 잘하지 못했다.
정말 천국 같은 과가 아닐 수 없다.
“……!”
“아, 아니? 갑자기 왜 전(前) 과장님이? 학장님으로 올라가셔서 요즘엔 행정만 보시지 환자 진료는 거의 안
보시잖아? 웬일이지?”
“오셨습니까?!”
당연한 것이 전(前) 피부과 과장이자, 현(現) 의대 학장인 김주흥 교수는 병원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핵심 권력자로 현재의 피부과 과장도 그의 밑 사람에 불과했다.
그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네.”
“피부과 실습 중인가?”
“네.”
김주흥 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본 순간, 진현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
‘어떻게 하지?’
회귀 후,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한 이유는 단 하나, 한국대 의대 피부과에 입성해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하지?’
‘김주흥 교수가 기침만 해도, 난 피부과에 들어갈 수 없어. 젠장. 내 잘못도 아닌데.’
‘젠장.’
그때도 그는 실력이면 실력, 논문 실적이면 실적, 모든 면에서 상대에게 우세했음에도 경쟁에서 밀렸다.
다 더러운 세상 때문이다.
***
“앉게.”
“네.”
“자네, 농담하나?”
“……!”
“자네같이 뛰어난 인재는 내과나 외과 같은 사람을 살리는 메이저 과를 해야지. 우리 피부과 같은 마이너 과가
아니라.”
-네가 감히?
“…….”
“하…….”
“하하…….”
“젠장.”
최악이었다.
***
끼이익!!
“오셨습니까, 도련님?”
“아버지는요?”
숲처럼 펼치진 정원을 지나자 인자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이상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이요.”
마음에도 없으면서.
“괜찮아요. 생각 없어요.”
“그래.”
그들은 꼭 필요한 용건이 없으면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용건은 대체로 불쾌한 것일 경우가 많았다.
“몇 가지 할 말이 있어서 불렀다.”
“뭔데요?”
# 40
“……!”
“이놈! 닥쳐라!!”
파창!!
주륵.
“네, 알겠습니다.”
“대일병원으로요?”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아들이 너 하나 남았다고 해서 네가 대일병원을 무조건 물려받을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마라. 최고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너한테 돌아갈 몫은 없어. 꼭 명심해라.”
***
“진현아, 어디 또 아파?”
“아니, 괜찮다.”
그렇게 설렁설렁 피부과 실습이 끝나고 의사국가고시를 준비하기 전 잠깐의 휴식 기간에 그는 의외의 전화를
받았다.
띠리리.
-여… 보… 세용?
“네?”
-여보세용?
‘이태원은 처음이구나.’
‘여행이나 다녀올까?’
‘성형외과를 지원해볼까?’
그런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건 또 싫었다.
‘모르겠다.’
회색 정장을 입은 푸른 눈의 백인 여인.
한국어로.
“안녕… 하… 세용?”
“…….”
“이, 이게 아닌가용?”
진현은 슬쩍 웃었다.
“……?”
***
“조금은 괜찮아요.”
“운동이요?”
“전 안 좋아합니다.”
“감사, 제안이요?”
“네.”
“……!”
“축하합니다.”
“저 때문이라고요?”
“네, TC80 때문에 승진한 것이거든요. 정말 고마워요. 미스터 김의 말대로 TC80 의 효과는 놀라워요. 1 상을
끝냈고, 이제 2 상에 들어가고 있어요.”
“네, 사실 저 TC80 의 실패로 회사 내에서 입지가 흔들리고 있었거든요. 미스터 김이 아니었으면 잘리거나 저기
베트남쯤으로 좌천됐을지도 몰라요. 정말로 고마워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네?”
“직급은 이사, 연봉은 2 억 5 천만 원,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때마다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 추가. 어때요?”
“……!”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진심입니까?”
“본사요?”
“…….”
“지금 당장 대답하기 어려우면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어차피 졸업할 때까지는 몇 달 남았으니. 기다릴게요.”
***
‘헤인스라.’
분명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외제차,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 빌딩… 크게 성공하면 그가 원하는 풍요로운 삶도 이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땡기지가 않았다.
“누구지?”
# 41
“맞습니다. 무슨 일이죠?”
“말씀하십시오.”
뭐지?
“대일병원이요?”
-네, 저희 대일병원에서는 각 대학의 최우수 졸업생 선생님들을 모시기 위해 새롭게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면 이에 대해 만나서 설명을 드리고자 하는데, 혹 생각이 있으신지요?
대일병원!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김진현, 이 바보 같은! 한국대 병원이 아닌 대일병원에서 피부과를 해도 되잖아!’
‘대일병원이면 오히려 한국대 병원보다 나아. 현재 병원 랭킹이 대일병원 1 순위, 한국대 병원 2 순위, 광혜
병원 3 순위, 기독 병원 4 순위니까.’
-저, 김진현 선생님? 혹시 관심이 있으신가요? 생각이 있으시면 따로 만나서 설명을 드릴까 하는데…….
***
“네, 안녕하세요.”
현 대한민국 제도에서는 무조건 의대, 인턴(수련의), 레지던트(전공의) 과정을 거쳐야 전문의가 될 수 있다.
그건 사실이다.
높기는커녕 엄청 낮다.
“어째서 저에게만?”
“…….”
감회가 새로웠다.
‘물론 전문의로 취직해 교수 자리를 다투던 그때와는 여러모로 다르지만. 이번엔 조용히 인턴 생활을 하다가,
피부과에 합격해야지.’
한편 진현과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대일병원 인사팀 직원은 운전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부르릉.
괴물인턴의 출현이었다.
***
“오랜만이다.”
-술 한잔할래?
10 시였다.
-늘 마시던 데서.
“대학로?”
-아니, 테헤란로.
“그래, 기다려라.”
‘처음 여기 온 것도 10 년 전이구나.’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옛날 생각?”
“자, 마셔.”
“그래.”
그렇게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이상하게 어지럽군.’
그때 이상민이 물었다.
“친구?”
“그래, 친구.”
“그렇구나…….”
“왜? 넌 아니냐?”
“진현아.”
“왜?”
“아니, 그냥.”
“친구끼리 그러면 친하게 지내지, 나쁘게 지내냐? 이상한 말 그만하고 술이나 먹자.”
“아…….”
“친구라…….”
파닥파닥.
***
10 년 동안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
“좀 쉴 시간도 안 주고.”
“뭐, 어쩔 수 없지.”
이런 일은 익숙해져야 한다.
“안 되는데.”
“뭐, 처음 몇 달 지나면 그래도 일주일에 1, 2 번 정도는 퇴근할 수 있겠지. 정말 많으면 일주일에 3 번까지도…
….”
“진현아!!”
고등학교 때 친구 황문진이었다.
“오랜만이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그런데 황문진이 계속 이혜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자 진현은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가슴이 뭔가 살짝 불쾌한…….
‘뭐지?’
# 42
“대일병원에 취직한 걸 환영합니다. 의사로서 처음 일하게 되어 긴장도 되고 기대도 될 텐데요. 여러분은 앞으로
…….”
“여러분은 이제 인턴으로 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병원 내에서 인턴이 어떤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
“재단의 이사장님이 있고, 병원장님이 있고, 교수님들이 있고, 밑의 레지던트들이 있고, 간호사도 있고….
간호조무사도 있고, 미화원 분들도 있고… 이 중 어디에 있을까요? 어차피 곧 경험하면 알 테니 대답은
생략하겠습니다. 단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것은, 여러분은 이제 의사로서 가장 기본적인 업무들을 할 거란 것입니다.
기본적이지만 중요한 업무들로 의사로서 첫걸음을 내딛는다고도 볼 수 있죠. 이제 갓 졸업해 의사로서 처음 일을
시작하는 거니, 미숙하고 두려운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항상 노력하고, 환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일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황문진이 물었다.
“내과.”
“그래.”
“나도 내과다.”
“다 모였나요?”
“네.”
진현은 손을 들었다.
“저입니다.”
“너는 나를 따라와라.”
‘이윤성…….’
“수석이라고 자신은 남들과 다르단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은 금물이다. 병원의 업무와 공부는 전혀
다른 거니까. 네가 아무리 한국대 수석이라도 실제론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 꼭 겸손한 마음으로 일하고,
어려운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라.”
“네, 알겠습니다.”
그냥 달랑 장부에 써진 일을 하라니.
“네.”
탁!
‘간 보는 거군.’
의사이지만 밑 사람인 인턴은 병원 내에서도 참 애매한 위치여서 이렇게 간호사들이 처음에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옛 생각나는군.’
진현은 피식 웃었다.
복수 천자. 즉, 배에 찬 물을 뽑는 술기다.
“저, 저기요.”
처음 일을 시작한 인턴이 무리한 업무에 당황하면 나름 혼도 내고, 기도 죽이면서 일을 가르칠 생각이었던 거다.
“73 호실이요.”
일을 시킨 간호사도 급히 따라갔다.
그들은 병실 문을 벌컥 열었다.
쪼르륵.
“무슨 일입니까?”
“아, 아니.”
환자도 말했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무리하지 말고. 환자는 모형이 아니니 실수는 절대 용납되지 않아.”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
채혈, 소독, 동맥 검사, 간기능 검사… 처음 인턴 일을 시작한 신입 의사들에겐 어려운 일이겠지만 진현에겐
밥을 떠먹는 것만큼 간단한 일들이다.
나름 못하게 보이려 신경을 썼지만 남들이 보기엔 엄청나게 빠르고 정확한 일 처리였다.
그것만은 안 됐다.
이윤성이 물었다.
“김진현 선생.”
“네?”
“아닙니다.”
“그러면……?”
‘곤란해. 몸에 밴 것을 버릴 수도 없고.’
“대학 실습 도중 여러 번 해봤습니다.”
“이걸 실습 도중 해봤다고?”
“네.”
이윤성은 그게 말이 되나 고민했다.
“네, 여러 번 해봤습니다.”
“그래……?”
“더 일이 있습니까?”
“아, 아니요.”
# 43
“너는 일 할만 해?”
“내가 하도 못하니까. 위에 선생님이 화내면서 잠시 쉬고 오라고. 그래서 왔어. 하아, 어떻게 하지?”
의대 때 배웠던 내용이 탄탄한 기본이 되고, 애초에 너무 어렵거나 위험한 업무는 인턴에게 안 시키기 때문이다.
진현은 옆에 앉았다.
“할 만해?”
“…….”
“처음엔 다 그런 거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힘내라.”
“응?”
“고마워.”
“됐어.”
“응.”
“너희 둘이 사귀지?”
“뭐, 뭐? 아니야!”
“그래? 정말로?”
“응, 아니야.”
“저, 정말 아니야.”
“…….”
“아, 아니야.”
“응?”
안 유명할 수가 없었다.
“뭐?”
“고백해 봤냐고.”
“아, 아니…….”
“응?”
“나, 나 그런 것 잘 못해.”
“…….”
진현에게 고백하라고?
***
“어서 오십시오.”
“네, 오랜만이에요.”
방문을 하나 더 열고 들어가니 인자한 인상의 남자, 이상민의 아버지 이종근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왔느냐?”
“네.”
“그래, 일은 할 만하고?”
“그럭저럭이요.”
“그럭저럭 이라니. 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그럭저럭이 아니라 잘해야 해. 그것도 그냥 잘하는 것이 아닌,
누구보다도 잘해야 해.”
“네에, 네.”
아버지의 등 뒤에는 벽면을 다 차지하는 거대한 통유리가 있었고, 청담동을 포함한 서울 전체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사장이니 누릴 수 있는 전망이다.
“네.”
이종근은 혀를 끌끌 찼다.
“네.”
이상민은 미소 지었다.
“네.”
“가서 일봐.”
대일그룹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아니, 능가하는 헤인스도 이 어린 인턴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가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책상머리 공부와 실무는 완전히 다른 법이고, 의학은 특히 경험이 쌓이지 않으면 죽은 지식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저 공부만 탁월한 바보들과 달라, 환자를 보는 실무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일게 분명했다.
‘이상민, 그놈은 반드시 탁월한 능력을 보여야 해. 가문의 다른 놈들의 입을 막으려면 반드시!’
‘절대 가문의 다른 놈들의 사람을 병원 후계로 세울 수는 없어. 다른 놈들의 사람으로 후계를 세우면 차후 병원의
경영권이 그쪽으로 넘어갈 거야. 그러니 반드시 이상민을 후계로 세워야 해.’
***
“그러게. 전문의 자격증을 안 딸 수도 없고. 이 대한민국에서 의사로 행세하고 살려면 전문의 자격증은 필수니.
전문의 자격증 없어도 되는 나라도 많다는데.”
“그러니까. 하고 싶은 과를 해야지.”
“진현아, 너는 무슨 과 할 거야?”
“피부과.”
진현이 짧게 답했다.
“너 지금 뭐해?”
“책 봐.”
“책?”
“너는 어째 고등학교 때랑 하나도 변하질 않았냐? 중학교 때부터 항상 1 등만 하더니, 심지어 한국대 의대에서도
수석. 하여튼 괴물이라니까.”
황문진은 혀를 찼다.
미국은 성적 뛰어난 의사들이 흉부외과, 외과 같은 생명을 다루는 과를 많이 선택하는 반면, 한국은 성형외과,
피부과, 안과 같은 과를 많이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전부 다 돈 때문이다.
어쩔 수 없었다.
외과, 흉부외과 같은 과들은 의료 행위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해주는 보험수가가 인도(India)보다 낮게 책정돼
있고, 심지어 치료에 들어가는 재료비보다 보험수가가 낮은 경우도 있어 대우가 나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진현은 답했다.
# 44
“임대사업자.”
“…뭐?”
“어디가?”
“병동.”
“늦었는데? 아직 일 있어?”
“네, 교수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김시민 환자 때문이군.’
진현은 생각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정보로써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의견에 최대원 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
“…네.”
‘내가 언제?!’
“…….”
“그러면 잘해.”
김시민 환자분이었다.
“네, 소변 줄을 넣어드리겠습니다.”
위암 치료와 현재 상태는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치료를 받은 후 이렇게 됐으니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하긴 했다.
괴질이 따로 없었다.
“소변 줄을 넣겠습니다.”
그런데 튜브를 넣었는데,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피처럼 새빨간 오줌이 소변 줄로 새어 나왔던 것이다.
딸이 놀라 물었다.
“이건 피가 아니라…….”
“소변 줄 잘 넣었어?”
딸이 이윤성에게 물었다.
“네, 감사합니다.”
“피가 아닙니다.”
“네, 여기 쓰세요.”
‘김시민 환자분…….’
따라서 이전의 삶에서도 뛰어난 외과의사였던 그는 광활한 지식이 더해져 이전의 삶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
‘근육 융해증(다양한 원인으로 체내의 근육이 깨지는 상태)! 그래, 이거면 현재 환자의 상태가 모두 설명이 돼.
새빨간 소변도 설명되고.’
“선생님.”
“응, 왜?”
“응? 근육 융해증?”
웬 헛소리야, 하는 얼굴이다.
말을 하던 이윤성은 입을 다물었다.
“비슷하긴 하지만. 비슷한 증상을 가진 질환은 많고 무엇보다 너무 갑작스러워. 갑자기 그런 질환이 생길 이유가
없어.”
“피검사 한 번이면…….”
그때 이윤성이 버럭 화를 냈다.
“야, 인턴!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너 자꾸 나 귀찮게 할래? 공부자랑은 네 학교에나 가서 해!”
“…….”
더구나 김시민 환자의 담당 의사는 진현이 아니라 이윤성으로 환자가 나빠져도 모든 책임은 그의 몫이었다.
‘어쩌지?’
고민하던 그는 결정했다.
# 45
“피검사를 하러 왔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제 판단입니다.”
“네, 현재 환자 분에게 강하게 의심이 가는 질환이 있는데,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피검사가 필요합니다. 만약
검사에 동의하시면 검사를 진행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
진현은 살짝 놀라 물었다.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네.”
보호자는 웃었다.
“저, 선생님. 환자들이랑 보호자들은 진료를 받다 보면 다 알아요. 이 선생님이 정말로 나를 위하고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인지, 아닌지… 다 느껴져요.”
“…….”
그 말에 진현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가슴을 채우는 그 감정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면 검사하겠습니다.”
“누구세요?”
“근육 효소입니다.”
“얼마나 걸립니까?”
“급한 거예요?”
“응, 이게 뭐야?”
“이거 뭐예요?”
‘혹시 김진현?’
“야, 너 어디야?”
-검사실입니다.
역시 범인은 김진현이었다.
“네, 여보세요!”
-취소한다고요? 정말요?
이윤성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검사 제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5 만이 아니라, 5 만 이상이에요. 너무 높아서 검사기의 한계상 더 높은 수치는
측정이 안 돼요.
“…….”
근육 융해.
‘마, 말도 안 돼.’
“선생님, 처치를.”
“어, 어. 그래.”
그는 급히 처방을 내렸다.
최대원 교수였다.
“네, 교수님.”
-자네. 검사 결과 봤나?
“아… 네.”
“아… 그게…….”
이윤성은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생각해 낸 게 아니니까.
“정말인가?”
“그… 네.”
“……!”
“…네, 죄송합니다.”
“위암 치료 후 온 게 아닐까요?”
“……!”
‘쌤통이군.’
“아……!”
“그렇군, 스타틴이면 드물지만 근육 융해를 일으킬 수 있지. 가능성이 충분히 있겠어. 정말 대단해.”
아무리 고민해도 풀리지 않던 미궁을 풀어낸 진현에게 최 교수는 계속 경탄의 찬사를 했다.
진현은 손을 저었다.
진현에게 감사의 말을 표현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병원 홈페이지 고객의 소리 게시판에 감사의 편지를 올린 것이다.
이런 제목으로 시작한 감사의 편지엔 평소 진현의 친절한 태도, 불이익을 감수하고 검사를 시행해 목숨을 살린 일
등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평소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던 병원 홍보팀이 오랜만에 발견한 일감에 눈을 번뜩이며 번개처럼 움직였던 것이다.
“안 돼.”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친 사고(?)였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
외과.
김진현과 함께.
메디컬 환생
지은이 | 유인
펴낸이 | 문상철
NEW EPISODE
교정 · 교열 | 정성훈
편집 · 제작 | 정성훈
표지일러스트 | stc
타이포그래피 | 기갈
브리드 BREATHE
등록 | 제 2015-000222 호
대표전화 | 02-3443-7312
홈페이지 | www.breath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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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 blog.naver.com/breatheco
ISBN | 979-11-6202-153-8(05810)
# 46
“다르긴 뭐가 다르냐…….”
“그러고 보니 너 내과 한다며?”
“그게 무슨 큰일 날 소리냐?”
“…….”
“누구세요?”
혜미였다.
“무, 무슨 일이세요?”
아직 안 친한 둘은 서로 존대를 했다.
“아, 안에…….”
“왜? 무슨 일?”
“진현아, 너 오프지?”
“응, 그런데?”
“술은 안 먹고?”
“응, 바로 나가자.”
“나, 나도 오픈데.”
“응?”
“나도 가면 안 돼?”
“그래, 너도 같이 가자.”
진현은 아무 생각 없이 답했다.
“그러네요.”
“……!”
“…진현아?”
“잠깐!!”
“계단이 어디지?!”
“저, 저기?”
“지, 진현아!!”
‘어째서 여기에?’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분명 그녀였다.
‘어째서 대일병원에?’
대일병원은 35 층이다.
“진현아!!”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바보 같을 정도로.
***
쏴아아!
‘좋아하면 고백하라고?’
유일한 정신적 가족인 이범수마저 자살한 지금, 그녀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진현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이상민의 어머니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가 자살했을 때도, 그리고 아버지에게 어린 몸에 학대를 당할
때도 그녀는 항상 속마음을 숨겼다.
분명 진현도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처럼 친근하게 지낼 수는 없을 거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난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사랑해.”
그녀는 닿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
“아, 아닙니다.”
왠지 술과 함께 잡혀 들어갈 것 같았다.
대일병원 외과.
‘조심하자, 조심.’
“너희가 이번 달 인턴들?”
“네.”
“그래, 열심히 하고. 뭐, 난 인턴들한테 크게 바라는 것 없다. 어차피 이제 갓 의사가 된 너희들이 뭘 잘하겠냐?
단 하나!”
“네!”
“네, 저입니다.”
“……!”
“이상민은 누구냐?”
“네, 저입니다”
“너도 잘해라.”
그뿐이다.
이번 달 외과 스케줄인 인턴은 총 7 명.
“진현아.”
“응?”
이상민이었다.
“이번 달 잘해보자.”
“그래.”
***
“안녕하세요.”
“이제 왔어?”
“아, 벌써 4 월 1 일이구나.”
# 47
무기질의 벽도, 옆에서 일하던 다른 간호사도, 째각째각 흘러가던 시계도 모두 사라졌고, 진현의 망막에는
오로지 그녀만이 맺혔다.
“한 달 동안 잘 부탁드려요.”
“아…….”
“아, 아닙니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연희라고 해요.”
“……!”
“왜 그러세요?”
“아, 아닙니다.”
이연희.
이전 삶의 그의 아내의 이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었다.
“……?”
***
“저, 연희야.”
“네?”
“설마요. 오늘 처음 보는걸요.”
“에이, 아니야. 너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은데. 마치 이전에 헤어진 아내라도 보는 눈빛이야. 그리고 남녀
감정이 시간이 지나야 생기나? 첫눈에 보고 반할 수도 있지.”
“무슨… 아니에요.”
“아, 네!”
물론 간호사가 될 수도 있다.
홍콩의 나비가 날개 짓만 해도, 런던에서 태풍이 불 수 있거늘, 수많은 변수가 있는 인생에서 이전의 삶과
똑같은 직업을 가지란 법칙은 없으니까.
일진인 김철우가 경찰을 지망하고, 꼴찌인 황문진이 의사가 되었는데, 그녀가 간호사를 못할 이유도 없었다.
애써 생각했다.
‘그래도 사랑했어요.’
단아한 외모에, 차분한 태도, 부드러운 말투. 그와 결혼생활을 할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진현은 피식 웃었다.
‘집중하자. 집중해.’
하지만 병동이란 게 원체 좁아 그녀와 싫든 좋든 계속해서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그의
속도 모르고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
‘잘 웃는 것도 똑같구나.’
“아……?!”
김진현이었다.
“아… 가,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조심하십시오.”
“아니에요.”
“아, 아니라니까요.”
그런 그녀의 하얀 볼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
뭐 하나 나무랄 것이 없었다.
이연희였다.
“괜찮습니다.”
“바빠서…….”
“왜 저러지?”
그는 되뇌듯 중얼거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지?’
“빨리 소독해달라고! 진물로 다 젖었는데 언제 해줄 거야, 이놈들아!! 환자를 이렇게 기다리게 해도 돼?”
대충 보니 소독을 할 의사가 수술장에서 나오지 못해 벌어진 일로 보호자의 잘못도, 그녀의 잘못도 아니었다.
“아, 몰라! 그렇지 않아도 상처가 안 좋다면서, 이렇게 놔두면 어떻게 해? 빨리 처리해!!”
김진현이었다.
이연희는 놀라 말했다.
“단순 수술 후 상처가 아니라, 감염과 장액종이 심하게 겹쳐 선생님께서 소독할 수 없는 상처예요. 봉합을 다
풀어놔 내부 장기가 다 보이는 상태라 레지던트 선생님도 자신 외에 아무도 건들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하, 하지만…….”
“어차피 레지던트 선생님 수술 끝나려면 멀지 않았습니까? 진물에 다 젖었다면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상처에
좋지 않습니다.”
염려 가득한 목소리였다.
“괜찮습니다.”
“소독해 드리겠습니다.”
‘상처가 정말 안 좋긴 하군.’
그뿐 아니라 상처의 전장에서 샛노란 진물이 새어 나왔고, 고육지책으로 배를 열어놔 상처 뒤로 시뻘건 내장이
보였다.
“으…….”
# 48
“아, 네!”
“이렇게 검게 변해 괴사된 조직은 회복을 방해합니다. 가만히 놔두면 안 좋을 가능성이 높으니 제가 살짝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아프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 됐습니다.”
“네?”
“고마워요.”
“……!”
단둘이?
‘이런 젠장.’
***
“아, 네. 지금 가겠습니다.”
뭔가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김진현입니다.”
“왔나?”
“거기서 잠깐 기다려.”
난데없는 물음이었다.
“……!”
“저…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지?”
“네가 쓸데없이 잘못 소독해 놔서 내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 보호자랑 환자가 나한테 인턴보다 소독을 못하면
어떻게 하냐고 엄청 컴플레인(Complain)했어. 이제 의사 된 지 2 달도 안 된 놈이 소독에 대해 뭘 안다고 그딴
식으로 해놔?”
자존심 상한 목소리다.
‘컴플레인 들어 짜증났구나.’
“듣자니 칼로 죽은 조직도 쳐냈다고? 너 환자가 네 마루타인 줄 알아? 그러다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뭐하냐?”
치프 최수호가 턱을 만졌다.
“네, 제가 마저 혼내겠습니다.”
“잘했던데?”
“네?”
“야, 인마! 죽은 조직을 잘라야지, 그러면 그냥 놔둬? 썩어 들어가 감염 심해지면 어떻게 하려고!”
“……!”
“네가 지금까지 소독을 제대로 안 해서 상처가 그렇게 안 좋아진 것 아니야, 새 X 야! 그렇지 않아도 언제 날
잡아 한번 혼내려 했건만, 이놈이 자기 잘못도 모르고 헛소리를 하고 있네. 인턴이 너 대신 조직을 칼로 쳤으면,
부끄러워해야지 오히려 혼내고 있어? 네가 지금까지 소독을 어떻게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거지? 엉? 네가
그러고도 외과의사야?!”
“죄, 죄송합니다.”
“네, 네!”
“하여튼 복합 상처 소독이 참 어려운데… 김 선생의 소독은 완벽했어. 훌륭해. 한국대 수석이라 그런가?”
“아, 아닙니다.
“그래서 그러는데…….”
“네?”
“왜?”
진현은 고민했다.
“하하, 수술방이 처음부터 맞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수술방 힘들어. 그래도 다 좋은 경험이니 들어와봐.
그리고 김 선생 잘할 것 같은데?”
‘수술 방에 들어오라고?’
곤란한 일이었다.
***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사장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적통인 이범수가 죽어 이상민밖에 병원을 물려줄 자식이 없는 지금, 가문의 다른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반드시 병원에서 압도적인 두각을 드러내야 했다.
‘쯧, 이범수 그놈은 왜 자살을 해가지고. 그놈만 살아 있었으면 이렇게 신경 쓸 필요도 없을 텐데.’
호시탐탐 대일병원의 소유권을 노리는 형제들을 견제하기 위해선 후계자인 이상민이 완벽한 최고의 모습을 보여야
했다.
“김진현이란 인턴 선생님은요?”
“그래요?”
“네.”
“그거 참 김진현 선생한테 불행한 일이군요. 처음 수술장에 들어가는데, 강민철 교수 같은 까다롭고 힘든 집도의
(執刀醫)의 수술에 배치되다니.”
한국대 병원이든, 광혜 병원이든, 기독 병원이든, 어디를 둘러봐도 간이식 하나만큼은 강민철 교수가 최고였다.
# 49
***
“네, 좋아요.”
“아니에요. 하여튼 가급적 김진현 선생님이 외과를 전공할 수 있도록 잘 유도해 주세요.”
“네.”
***
“그래.”
“그래, 잘해보자.”
그의 의식은 부정하지만 몸은 본능적으로 이전 삶의 추억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살며시 떨리는 가슴이 그것을
증명했다.
“김진현 왔냐?”
“네.”
그 말에 진현은 놀라 되물었다.
“그래, 그렇게 배정이 됐어. 너도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겠지? 강민철 교수님은 인턴이라고 봐주지 않으니까
들어가면 무조건 잘해야 해.”
대학 병원의 수술은 집도의인 교수, 첫 번째 어시스트인 레지던트, 그리고 말단 어시스트인 인턴으로 진행하는 게
기본이었다.
간이식 분야 최고의 대가(大家)인 강민철 교수의 수술도 예외는 아니어서, 무조건 인턴 한 명은 말단 어시스트로
들어가야 했고, 자신이 배정되었다면 따라야 했다.
‘이전이랑 똑같구나.’
나도 예전에 저랬었지.
그렇게 준비를 끝내고 간호사가 긴장된 목소리로 강민철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교수님, 수술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
“준비 다 끝났나?”
“네, 교수님!”
“네.”
“네, 알겠습니다.”
***
“메스.”
“보비.”
절개와 응고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전기 칼을 쥐고 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찌잉! 찌잉!
“잘 잡어.”
“야.”
“……!”
“죄, 죄송합니다!”
기역자 모양의 ‘아미’는 복벽이나 장기를 잡아당겨, 수술 시야를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
집도의와 첫 번째 어시스트가 수술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시야를 확보하는 게 말단 어시스트인 인턴의 주요 업무였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이 중요했다.
턱.
놀라운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네, 처음입니다.”
자신은 숱하게 강민철 교수의 어시스트를 섰었지만 칭찬은커녕 욕만 산처럼 얻어먹었다. 심지어 얻어맞고 쫓겨난
적도 많다.
“너… 죽고 싶냐?”
“……!”
“제대로 집중 안 해?”
“네, 죄송합니다.”
“똑바로 해.”
국내 최고의 실력자답게 손놀림이 지나치게 뛰어나 그것을 따라가는 것부터 벅찼고, 조금이라도 박자를 못 맞추면
곧바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야! 너 나가!!”
한편 간호사들은 질끈 눈을 감았다.
“……!!”
“저 말입니까?”
“빨리 안 하고 뭐해?!”
퍼스트 어시스트 자리에 서자 수술 시야가 한눈에 들어왔고 얇은 동맥에서 울컥울컥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빨리 혈관 잡아.”
진현은 고민했다.
이걸 해야 하나?
# 50
“……!!”
이게 무슨?
“네?”
“거기서 잘 따라오라고.”
“……!”
“…….”
강민철은 한 치의 배려도 없이, 뚝딱뚝딱 수술을 진행했고 진현은 울며 겨자 먹기로 퍼스트 어시스트를 섰다.
그러나 못한다고 거부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렇게 했다간 주먹이 날아올지도 모른다.
“네.”
혈관을 잡으면 켈리(수술용 가위 형태의 집게)를 주고, 아미(시야를 확보하는 도구)로 사각을 밝히고, 포셉(
수술용 집게)으로 처치를 도우며, 피가 나면 지혈을 했다.
인턴이 저런 어시스트라니?
“김진현입니다.”
“인턴입니다.”
진현은 이를 깨물었다.
“저 교수님… 인턴인 저보다 다른 레지던트 선생님이 저보다 어시스트를 잘할 텐데… 손을 바꾸는 것은…….”
강민철은 딱 잘라 말했다.
실제로 충분했다.
그것도 한 걸음 앞서서.
‘어떻게 저럴 수가?’
‘옛날 생각나는군.’
“인턴입니다.”
“인턴? 인턴이라고?”
“…네?”
진현은 입을 벌렸다.
“……!”
***
“야, 너 그 인턴 소문 들었어?”
“뭐?”
“뭐? 그게 말이 돼? 인턴이 다른 사람도 아닌, 강민철 교수님의 퍼스트 어시스트를 섰다고? 거짓말하지 마.
강민철 교수님 어시스트는 치프 레지던트 선생님도 제대로 못하는데 고작 인턴이?”
“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외과로 꼬셔봐야겠는데?”
“좋겠네.”
“뭐가 좋으냐?”
“위 선생님들한테 인정받아서.”
‘내과 때처럼 외과를 한다는 쓸데없는 소문은 안 돌겠지? 이상한 소문 돌기 전에 피부과에 인사를 가야겠어.
언제쯤 갈까?’
그때 이상민이 말했다.
“뭘.”
뱀이 쥐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
“…네.”
강민철 교수는 간만에 마음에 드는 어시스트를 찾아 신이 나는 듯했다.
“…예?”
“괜찮습니다. 오늘 당직이어서…….”
강민철은 진현에게만 따뜻할 뿐, 이기성에겐 불처럼 혹독해 조금의 실수만 있어도 곧바로 벼락같은 호령을
떨어뜨렸다.
이기성은 이를 악물었다.
속된 말로 쪽팔림의 극치였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런 어시스트를?’
뭐랄까.
진현은 할 말이 없었다.
“…….”
동영상으로 공부했다고?
이제 유영수 교수가 손을 바꿔줄 테니 진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수술방을 나갈 준비를 했다.
“……!”
“교수님? 제가 들어오겠습니다.”
진현도 그 말에 동감했다.
‘날 그냥 놔달라고!’
물론 수술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다.
한때 삶의 모든 것을 바친 적도 있었으니까.
“…가르치신다고요? 인턴을요?”
# 51
“그래, 알겠네.”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그러고 보니 강민철 교수님의 심장이 문제를 일으킬 때가 되긴 했구나. 이맘때쯤 심근경색이 와 쓰러지셨다고
들었는데. 별문제는 없겠지?’
그때 강민철이 진현을 바라봤다.
“…네.”
***
현재 주니어 교수인 유영수가 강민철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들였던 노력을 생각하면 경천동지할 이야기였다.
“그래, 죽겠다.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인턴이 퍼스트 어시스트를 서는데, 윗사람인 나는 말단 어시스트를
서면서 구박이나 당하고…….”
그때 동료가 조언했다.
***
“그래.”
‘이놈이 괜찮을까?’
그것도 극도로.
긴장 속 수술이 시작되었다.
“네.”
“이름이?”
“이상민입니다.”
“그래?”
뼈가 담긴 말이었다.
사각사각. 찌잉!
짧은 목소리.
‘대단하구나.’
진현은 감탄했다.
강민철도 다소 놀란 눈치다.
“크윽……!”
진현은 놀라 물었다.
“괜찮습니까?”
“괘, 괜찮네.”
하지만 이전엔 성질을 내거나 흥분해야 증상이 생겼고, 잠깐 그러다 가라앉았는데 이번엔 달랐다.
“하지만…….”
“괜찮네. 그리고 환자의 배를 열어놓고 어디에 가겠나? 치료를 받으러 가더라도 수술을 끝내고 가야지.”
맞는 말이다.
‘괜찮으시겠지?’
그저 별일 없길 바랄 수밖에.
“왜 그러나?”
원래는 강민철 교수의 어시스트를 서야 하니 따로 수술을 진행할 수가 없지만, 최근엔 저 괴물 인턴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담을 해줘 유영수 교수가 할 일이 없었다.
“…….”
“자네가 어떻게 이렇게나 빼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동영상을 보고 연습했다는 자네
주장은 일단 말이 안 되고, 타고난 재능이라고 하기에는 여러 돌발 상황에서 연륜이 묻어 나오고… 아무리 봐도
자네 실력은 경험 많은 외과의사의 솜씨를 보는 것 같아.”
진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이제 인턴인 자네가 많은 경험을 쌓았을 리가 없지. 그래서 자네 실력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있네.”
“…무엇입니까?”
“……!!!”
***
진현의 눈 끝이 흔들렸다.
도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그의 말이 옳았다.
“교수님.”
확고한 목소리였다.
“저는 외과에 생각이…….”
“크윽……?”
“교수님?”
“크…….”
“교수님?!”
“안 되겠습니다. 빨리 치료를……!”
심근경색!
옆의 간호사들도 그를 염려했다.
“크윽!!!”
챙!
“교수님!”
진현은 급히 외쳤다.
“심근경색이라고?!”
외과의사의 눈이 심각해졌다.
‘괜찮으셔야 하는데.’
갑자기 심근경색이라니.
“…….”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 52
“유영수 교수님에게 연락해 주겠습니까? 강민철 교수님이 쓰러지셔서 이 뒤는 유영수 교수님이 집도해야 할
듯합니다.”
“네.”
“저 교수님, 7 번 수술 방인데요. 강민철 교수님이 갑자기 쓰러지셔서 교수님께서 뒤의 수술을 진행해 주셔야 할
것 같아 전화드렸어요.”
진현이 물었다.
“뭐라고 하십니까?”
“하필 다음에 현미경으로 혈관을 연결해야 할 차례라 교수님들 아니면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지금 간 학회
기간이라 유영수 교수님 말고 다른 교수님들은 병원에 없고요.”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유영수 교수 외에 수술을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그도 몸을 못 빼는 상황이다.
진현은 고민했다.
진현은 침을 삼켰다.
간호사도 발을 동동 굴렀다.
이상민이 물었다.
‘어떻게 하지?’
아니, 단 하나 있었다.
‘하지만…….’
진현은 짧은 순간, 수십 번도 넘게 갈등했다.
‘젠장.’
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한다.”
“뭐?”
“내가 집도한다고.”
“……!”
착각일까?
조롱이 섞인 듯한 목소리다.
“상민아, 너 내 친구 맞지?”
“…….”
“같이하자.”
“……!”
“……!”
“그래.”
간호사가 놀라 제지했다.
“네?!”
무리도 아니다.
“안 돼요. 그만두세요.”
“할 수 있습니다.”
백번 지당한 말이다.
똥개가 웃을 일이다.
‘나도 하고 싶지 않다고.’
지금까지 벌인 일로도 시끄러운데 현미경 혈관 문합술까지 성공시키면 무슨 후폭풍이 터질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차분히 말했다.
“이미 부산에서부터 오랫동안 지체된 간이어서 1 시간 30 분이나 기다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랬다간 간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
“그래.”
“하, 하지만…….”
“그러면 진행하겠습니다.”
두근.
십 년… 무려 십 년 만이다.
“여기를 잡아줘.”
“…….”
숨 막힐 듯한 침묵 속에 진현의 손이 움직였다.
“디바이스(Device)를.”
진현이 말했다.
Revascularization.
죽어 있던 간에 붉은 피가 흘러들었다.
“…….”
“…일 쳤다.”
그때였다.
“……!!”
‘제발! 조용히!’
“그래? 아까 분명 혈관을 연결해야 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부산에서 오래 보관 후 가져온 간이라 급하다고.”
“그래?”
‘다행이다.’
하지만 이미 친 사고.
# 53
‘나도 가볼까?’
아직 의식을 못 차렸을 가능성이 높지만 혹시나 의식을 찾고 수술의 경과를 물어보면 끝장이었다.
뭐랄까.
다음엔 이상민이었다.
“무슨 이야기?”
진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탈의실엔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었다.
“나가서 이야기하자.”
“나가서?”
“그래.”
치익.
“왜……?”
“비밀?”
“그래, 제발 부탁한다.”
“그건…….”
진현은 머뭇거렸다.
그때 이상민이 낮게 말했다.
“싫어.”
“……!!”
담배를 털며 말을 이었다.
“…그래.”
“진현아.”
“응?”
“우리 둘 친구 맞지?”
“그래, 우린 친구지.”
***
“진현아, 고생 많았지?”
“그냥, 뭐.”
“그래, 조심해야지.”
기본적인 업무만 수행하는 다른 근무처와 다르게 대학병원 응급실은 인턴이 일차적으로 환자를 담당한다.
“네.”
치프의 말대로였다.
이 정도면 굉장히 배려 깊은 스케줄이었다.
“네.”
“참, 네가 김진현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그래? 흠.”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내일 보자.”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
‘뭐지?’
혹시나 나쁜 소문이 돈 걸까 고민했지만 대일병원 내 진현의 평판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긴커녕 과도할
정도로 좋았다.
그때 혜미가 물었다.
“그래.”
“진현이는 뭐 마실래?”
“아무거나. 아이스로.”
시럽 타면 달달한 물이고.
“왜?”
“안 되는데?”
“아, 그래?”
“그래.”
‘한 번 보기로 했었지.’
‘그냥 빨리 밥만 먹고 들어오자.’
“아니다.”
마침 커피가 나와 쭈욱 들이켰다.
“가자.”
“미스터 김! 오랜만이에요.”
“아, 오랜만입니다.”
“헤인스에 큰 도움이요?”
그냥 돈 벌려고 한 일인데.
“……!!”
# 54
“아니, 스터디 디자인을 기획했다고? 인턴… 아니, 그러니까 그때는 본과 학생이지. 제대로 알고 있는 거요,
미스 엔더슨?”
“맞아요. 확실해요.”
“하, 정말이오?”
‘안 되겠다.’
***
천재.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창녀의 핏줄을 타고난 이상민이 가문의 반대를 이겨내고 병원의 후계가 되는 방법은 단 하나, 최고가 되는
것뿐이다.
“조사요?”
“알겠습니다.”
“응급실입니다.”
묘한 뉘앙스.
“네, 그렇습니다. 김진현 선생에게 중환자를 주로 배치시켜 실수를 유도할까요? 실수를 하면 그 빌미로 파면을…
….”
인턴, 레지던트는 인권침해에 가까운 과중한 일을 하면서도 학생처럼 피교육자의 신분을 겸하기 때문에 채용도 일
년에 단 한 번 협회에서 정해준 인원밖에 뽑지 못하고, 중간에 사표를 낼 시 충원도 거의 불가하다.
또한 의사 중 가장 밑바닥 직급이어서 부당한 대우를 수없이 당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전공의협의회
등 수많은 보호 장치가 존재한다.
“어째서입니까?”
왠지 중환자를 아무리 배치해도 별로 실수를 안 할 것 같았고, 오히려 중환자를 치료하는 인턴이란 거창한 소문만
퍼질 것 같았다.
대신 그는 다른 안을 생각했다.
“네, 알겠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술수였다.
‘빨리 치워버려야겠어.’
“민 비서.”
“네?”
“지금 바쁜가요?”
“안 바빠요.”
***
그는 수술이 좋았다.
이번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게 뭐 나쁜가?
노이즈가 일 듯, 세상이 흔들렸다. 그리고 가면이 바뀌듯 강민철의 얼굴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
진현은 눈을 크게 떴다.
-거짓말.
“…뭐?”
진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어쩌면 맞을 수도.’
“그래서? 그게 뭐가 문제인데?”
-……!
그 말과 함께 어둠이 걷혔다.
‘꿈… 개꿈이군.’
신경 쓸 가치도 없는 개꿈이다.
시계를 보니 벌써 응급실로 출근을 할 시간이다.
***
“응급실은 다들 처음이지?”
친절한 목소리였다.
“인계는 들었겠지만, 응급실 의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최초의 응급 처치를 하고, 필요에 따라 각 전문 과에
연결을 해주는 거다.”
“네.”
“너희 인턴은 채혈, 소변줄, 복수 천자 등의 기본적인 업무를 하면서 환자도 같이 볼 거다. 물론 안 좋거나
어려운 환자는 전부 우리가 보겠지만, 간단한 환자들도 너희 인턴에게는 쉽지 않을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환자의 안전이니 모든 결정을 할 때는 윗사람과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반드시다.”
“네!”
‘합리적이군.’
‘지난달보다 훨씬 편하구나.’
“앙앙!”
“감사합니다. 잘하시네요.”
“네, 감사합니다.”
“너도 잘 가고.”
“진현아, 시간 괜찮아?”
“응. 왜?”
‘양성 어지럼증(BPPV)이군.’
“귀의 평형을 담당하는 반고리관의 문제로 생긴 어지럼증입니다. 반고리관을 안정시키는 간단한 물리 치료로
호전되는 경우가 많으니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 55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말에 진현은 고민했다.
‘내가? 할 수야 있지만. 해도 될까?’
또 물리치료, 에플리 법은 어려운 치료가 아니어서 능숙한 인턴이면 가능하기도 한 술기다. 따라서 주목받을
부담이 덜했다.
“아, 좋아졌어요!”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진현아, 역시 대단해.”
진현의 말은 진심이었다.
***
또 그런 주제에 잘난 티는 전혀 내지 않는다.
표정이 좋지 않다.
‘무슨 일이지?’
“거기 앉아라.”
“무슨 일입니까?”
동기들이 계속 물어보다 보니 어쩌다 그렇게 진행된 것이고, 오히려 진현 덕분에 응급실의 환자가 훨씬 쾌적하게
정리됐다.
“…….”
“그렇지 않아도 죽을 것처럼 바쁜데 네가 지금처럼 수고해 주면 우리야 좋지. 앞으로도 이렇게 해줄 수 있겠니?”
계속 이렇게 하긴 싫은데?
“…알겠습니다.”
“어차피 인턴들이 보는 환자야 다들 간단해서 문제될 일이야 없겠지만, 만약 고민되거나 곤란한 문제가 있으면 꼭
나랑 상의하고.”
“네.”
“그러면 나가봐.”
“저 녀석에게 안 좋은 환자를 배치하라고? 그것도 임종 직전의 말기암 환자처럼 상태가 안 좋고, 회복이
불가능한?”
***
시간이 지나면서 초보 인턴들도 조금씩 응급실에 적응을 했다.
“가로수길?”
이연희였다.
“왜? 누구야?”
“아니…….”
어쩐다?
“아, 네.”
“미안한데…….”
“…말씀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무명]
신원미상.
보호자와 환자 둘 중 한쪽만 이름을 알아도 신원미상이 되지 않으니, 환자가 의식도 없는 중환이고 보호자도
존재하지 않는단 뜻이었다.
“그래, 고맙다.”
“미안하다.”
***
“이런.”
“으으…….”
상태 안 좋은 노숙자.
안 좋은 느낌이 진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곤란한데.’
“알겠습니다.”
‘잘못하면 이거 전부 뒤집어쓰는데.’
황달로 인한 샛노란 피부, 얇은 피부 밑으로 만져지는 커다란 간, 어마어마한 복수, 숨 쉴 때마다 퍼지는 썩은
오줌 냄새.
이 모든 것이 간성혼수를 시사했다.
“응?”
“너 초음파 볼 줄 알아?”
“너 어떻게?”
“학생 때 조금 배워서…….”
# 56
“이런… 이건.”
쪼그라들고 오돌토돌한 간.
“HCC(간암)…….”
간암.
‘이런…….’
뭔가 느낌이 안 좋았다.
***
“어째서입니까?
돈을 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내과 레지던트는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어쩔 수 없군.’
“봐야지.”
“응?”
진현은 말했다.
“입원이 안 되면, 내가 응급실에서 데리고 치료해야지.”
“하, 하지만…….”
***
“네.”
“무슨 일이십니까?
-그런 뜻은 아니지만, 100% 병원 손해란 것을 말씀드리려 전화한 것입니다. 어쩌면 김진현 선생님께 문책이 갈
수도 있습니다.
결국 약을 쓰지 말라는 뜻이다.
기가 찬 전화였다.
뚜우- 뚜우-
정말 곤란한 일이다.
‘제길.’
“으… 여긴……?”
“정신이 드십니까?”
진현은 놀라 물었다.
“으…….”
“사, 살려주세요…….”
“알겠습니다.”
***
“좀 쉬어야지, 진현아.”
진현은 눈을 비볐다.
“글쎄… 한 시간?”
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런 진현의 노력 덕분일까?
기적적인 일이었다.
진현은 미소 지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다.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요.”
“무엇입니까?”
“연락이 되는 상태입니까?”
“지난번에 한 번…….”
“온다고 했습니까?”
슬프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
하루, 이틀…….
회광반조(回光返照)란 말이 있다.
“김진현 선생님!!”
“……!”
그리고 그는 깜짝 놀랐다.
“꺼억, 꺼억…….”
“혈압은 어떻습니까?”
“50/30 이에요.”
“빨리 수액 투입해 주십시오. 혈액도 올려주시고요. 간암, 간경화에 동반된 정맥류 출혈 가능성이 높으니
SB(Sengstaken-Blakemore) 튜브와 혈관 수축제도 주세요.”
“수혈 빨리 해주세요.”
“네, 선생님!!”
그렇게 새벽 내내 매달린 덕분에 해가 뜰 때쯤 환자는 간신히 안정을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지금까지 병원 손해가 얼마인지 아세요? 더구나 이번 새벽에는 SB-튜브와 혈관
수축제에 수혈까지 하다니. 그게 전부 얼마인지 아십니까?”
“…….”
“잘 생각했습니다. 빨리 퇴원 수속을…….”
신용카드였다.
원무과장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얼마입니까?”
“네?”
“……!”
원무과장은 말을 더듬거렸다.
“모자라면 말씀하십시오.”
***
“김진현, 잠깐 좀 이야기하자.”
“……?”
“무슨 일이십니까?”
“그만해라.”
“네?”
“저 환자 치료 그만하라고.”
“……!”
“어차피 나빠질 수밖에 없는 환자야. 이렇게 병원에서 끌다가 사망하면 너한테 좋을 것 하나도 없어. 자의퇴원서
서약 받고 퇴원시켜.”
“하지만…….”
“…….”
그 말이 맞았다.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빨리 결정해.”
“…길거리에서 죽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뭐?”
“……!”
진현은 말을 이었다.
“저는 어쩌다 수능 대박이 나 점수에 맞춰서 의대에 왔습니다. 처음 의사가 되려고 한 이유도 단 하나, 돈을
벌기 위해서였죠.”
진현은 이전 삶을 떠올렸다.
“…….”
“……!!”
# 57
그리고 다음 날 오후에 노숙자, 김성민 환자는 의식을 회복 못하고 간기능 악화로 사망했다.
진현은 살짝 웃었다.
“괜찮다.”
“정말?”
“정말로.”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
민 비서는 대답했다.
“네.”
“아주 좋아요. 응급실에서 인턴이 진료 중 사망한 ‘사고’ 케이스니 자세히 조사해 봐야겠네요. 조사 팀을
꾸려보세요.”
“네, 지금 바로 착수하겠습니다.”
이전의 저명한 외과의사였던, 대일병원 외과의 과장, 병원장자리까지 역임했던 이종근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귀찮은 파리를 쫓을 수 있겠군.’
“수고해주세요.”
***
“그런데 이런 일은 흔한 일 아닌가?”
“꼼꼼히 검토해주세요.”
“알겠소, 민 실장.”
“흐음…….”
“간성혼수에 관장…….”
민 비서가 물었다.
“어떤가요?”
한 교수가 말했다.
“대단하군요.”
“네?”
“완벽한 처치예요.”
“……!”
“그건 그렇지. 하지만 인턴 선생님이 차트에 직접 기록했군. 다른 방법이 없고, 출혈에 주의해 최대한 조심히
시행했다고. 실제로도 의식이 깬 다음엔 곧바로 먹는 약으로 바꿨고. 허허, 이거 인턴 맞아? 무슨 인턴이 이렇게
노련해?”
“내시경을 안 한 게 아쉽군요.”
누군가 말했다.
“아닙니다, 외과 할 것입니다.”
“…….”
“없소.”
“네?”
“문제없다고.”
“그게 무슨……?”
“이보시오, 민 실장!”
“……!”
윤석호가 낮게 말했다.
“우린 이 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자들이오. 이사장님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없다고 판단하면
없는 거요. 알겠소?”
“……!!”
-무슨 일입니까?
-…알겠습니다.
***
민 비서는 당황했다.
“태도가?”
“아니면 중환자를 보는데 신경을 덜 썼다든지… 노숙인이라서 무시를 했다든지…….”
오형석은 짧게 답했다.
“없습니다.”
“네?”
“다시 한번 말하지요. 김진현 선생의 진료의 문제점을 알고 싶은가 본데, 없습니다. 오히려 윗사람인 제가
부끄러울 정도의, 오로지 환자를 위한 진료였습니다.”
“……!!”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가보겠습니다.”
“이이!! 저는 이사장님의 지시에 따라 온 거예요. 이런 식으로 대답하고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
***
‘그래, 의학적으로 문제는 없었지만 보호자도 없고, 가망이 없는 말기 암 환자한테 지나친 처치를 한 것 아닐까?
그것에 중점을 맞춰 문제를 만들어야겠다.’
그렇게 없는 죄를 머리에서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
“이게 뭐지?”
그녀의 모니터는 한 포털사이트의 메인 페이지를 띄우고 있었는데, 거기에 이상한 문구가 떠 있었다.
이게 뭐지?
[간암 말기의 노숙자 환자를 마음으로 치료한 의사가 있어서 세간에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기사의 내용을 살피니 노숙자 환자가 화장을 치르기 직전 품에 간직하고 있던 유서 겸 편지가 발견되었고, 그
편지에는 돈도 없고 보호자도 없는 자신을 마음을 다해 치료해 준 젊은 의사에 대한 감사가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한다.
[대일병원의 김진현 의사는 고인을 마음을 다해 치료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고인을 위해 모든
치료비를 자비로 부담하였다.
하지만 김진현 의사는 자신은 특별히 한 게 없다며, 일체의 인터뷰를 거절해 더욱 감동을 주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태도로, 각박한 요즘 세상을 따뜻하게 달구는
일화이다.]
이젠 수습불가였다.
# 58
‘안 돼!!!”
김진현이었다.
“아니야, 꼭 봐야 해!!”
이게 뭐야?
그는 그렇게 기원했다.
그렇게 진현은 두 달 사이에 대일병원 홈페이지 대문에 두 번이나 출현하는 인턴이 되었다.
모두 인터넷 기사 때문이다.
한숨이 나왔다.
‘그래, 이런 기사도 나중에 피부과 개업할 때 액자로 만들어 벽에 붙여두면 광고가 되겠지.’
진현은 애써 좋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더 자고 싶다.’
멍하니 생각했다.
다름 아닌 이전 삶의 아내인 이연희와.
이번 삶에서도 좋아하려나?
뭐, 싫어하진 않겠지.
예뻤다.
두근.
“너… 어디 가냐?”
“응?”
“소개팅?”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왜 그러냐?”
“잊어버리고 있었어?”
“응?”
“……!!”
“오늘이… 며칠이지?”
“5 월 27 일.”
“…무슨 요일이지?”
“목요일.”
진현은 자신의 멍청함을 한탄했다.
“…….”
“왜?”
“혜미야.”
“응?”
“……!!”
“아… 그, 그래?”
“…그래.”
눈물이었다.
진현은 놀라 말했다.
“혜, 혜미야?”
“자, 잠깐!”
진현은 손을 뻗은 채 굳었다.
“저 녀석 왜 이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욱씬.
그것은 아릿함이었다.
***
‘너무 빨리 왔나?’
‘가로수길은 진짜 오랜만이구나.’
회귀 후 한 번도 오지 않았으니 10 년이 넘었다.
압구정의 상권을 밀어내고 강남 최고의 번화가로 떠오른 가로수길은 어마어마한 사람들로 벅적댔다.
‘내 돈으론 무리겠지?’
진현은 피식 웃었다.
아니, 나이를 떠나 웬만큼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을 노력해도 만지기 어려운 액수였다.
진현은 혀를 찼다.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다.
그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환한 인사였다.
***
“죄, 죄송합니다.”
모형이 아닌 환자에게 행해지는 치료이기에 실수나 잘못된 판단이 없어야겠지만, 의사가 사람인 이상 완벽할 수
없다.
컨퍼런스 명단 중에는 이전 진현이 내과에서 진단했던 근육융해, 김시민 환자의 증례도 있었다.
김 O 민.
“그것 때문입니다.”
“응?”
“그래서?”
“…….”
“잘 들어.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은 윗사람이 지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아랫사람에게 던져놓는 게 아니라.
저런 문제 소지가 있는 환자는 인턴 혼자 진료하는 게 아닌 우리가 보는 게 맞았어.”
백번 옳은 말이다.
“네, 과장님.”
“그런데 저 인턴은 그냥 인턴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인턴이 어떻게 저렇게 깔끔하게 치료했지? 흠잡을
게 전혀 없어.”
다른 교수들도 말했다.
“아까 검토했던 근육융해 환자도 사실 저희가 아니라 그 김진현 인턴 선생이 진단한 거였습니다.”
“허? 그게 사실이오?”
“난 놓쳤을 것 같은데.”
진현이 내과를 할 거라고 떠들고 다니긴 했지만 사실 그가 자신에게 내과를 한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다.
그래도 말했다.
“그렇군. 좋아.”
“김진현 인턴 선생님께 조만간 나에게 인사를 하러 오라고 하게. 이런 뛰어난 인재는 무식한 수술과나 돈만 버는
피부과 같은 과 말고 우리 내과를 해야지.”
정영태.
***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아, 아… 괜찮네.”
“심장? 아… 그때 수술 중에…….”
“심근경색이었나?”
“김진현?”
만약 김진현의 추측이 없어 10 분… 아니, 5 분이라도 처치가 늦어졌으면 강민철 교수는 죽었을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구했단 아찔한 안도감과 김진현에 대한 감사가 가슴에 차올랐다.
이게 무슨 말이지? 혈관은…….
“…….”
***
‘왜 이렇게 귀가 가렵지?’
‘이쯤인데.’
‘아, 저기 있군.’
“저기 어떻습니까?”
“그냥…….”
모를 수가 있나.
“들어갑시다.”
***
나직한 중얼거림.
아니, 아니다.
정말 바보같이 서운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를 사랑한 건 나니까.
“괜찮아, 혜미야.”
띠리리.
‘혹시 진현이?’
정말 난 구제불능의 바보다.
“여보세요? 수연아?”
-혜미야, 지금 뭐해?
“특별히… 그냥 있어.”
-나 지금 가로수길인데 나올래?
“가로수길?”
“글쎄…….”
***
“그냥…….”
진현은 말끝을 흐리며 생각했다.
왜 이리 비싸?
대신 다른 쪽으로 이해했다.
“아, 저 생각해 준 거구나. 고마워요. 그래도 저 아무거나 다 잘 먹는데. 다음엔 우리 선생님 좋아하는 걸로
먹으러 가요.”
‘이전이랑 똑같구나.’
빵의 맛도, 음식점의 분위기도… 그리고 그를 보며 웃는 그녀의 모습도… 모두 똑같았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선생님은 집은 어디세요?”
일상적인 대화들.
“그러게요. 그런데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들까요? 마치 이전에 오랫동안 함께했던 것처럼…….”
“……!”
“착각입니다.”
# 60
“남산이요!”
“……!!”
진현은 놀랐다.
그러고 보니 있었다.
그녀와 만난 적이.
“아… 네.”
“왜 그러십니까?”
“그때 왜 그러셨어요?”
“네?”
“왜 그렇게 넋 놓고 저를 바라보셨어요?”
“…….”
“그, 그건…….”
그는 당황해 말을 더듬거렸다.
뭐라 할 말이 없다.
계속 장난이다.
“아니었습니다.”
“아쉽네요.”
“뭐가 말입니까?”
“지난번 병동에서 도와준 일로 고마워서 저녁을 대접하려 한 건데, 진현 씨가 워낙 맛없게 먹어서 이걸로는 제
마음이 안 차는데요?”
“아… 괜찮습니다.”
***
“혜미야, 이쪽이야!”
인턴 친구 김수연이었다.
“소주.”
“응?”
“밥은 됐고 그냥 소주.”
“어, 어…….”
이슬밖에 안 먹을 것같이 청초한 얼굴로 소주를 달라는 말에 김수연은 당황했다.
‘분위기는 좋네.’
‘진현이랑 이런 곳에 오고 싶었는데.’
“으, 응. 너는?”
“어, 어.”
“혜미야, 너 무슨 일 있어?”
특별한 일은 없다.
그냥 그녀가 바보 같은 것일 뿐이지.
얘 이름이 뭐였더라?
그도 그렇고, 황문진도 그렇고, 예쁘게 생긴 혜미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서 난리인 눈치였다.
이전부터 그랬다.
“어, 김진현이네?”
“……!!”
김진현, 그였다.
***
“네, 괜찮습니다.”
‘나쁘진 않군.’
십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방문한 추억의 장소는 그의 마음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조금 신난 표정이다.
연희의 눈이 커졌다.
“저도 좋아합니다.”
황문진이 말을 받았다.
“누구?”
혜미가 꽃처럼 청초하고 화사하게 피어오르는 아름다움이면, 저 여자는 그녀에게 없는 차분한 단아함이 있었다.
황문진이 말했다.
남자 동기가 답했다.
‘진현…….’
저릿.
“혜미야?”
다행히 거리가 멀고 손님이 많아 진현 자리에서 그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른 테이블의 소란 때문에 소리도 안
들렸다.
정말… 정말 다행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하니까.
***
“아, 같이 갈까?”
김수연이 물었다.
아직 시간이 일렀다.
혜미는 살짝 웃었다.
‘정신 차려, 이혜미. 뭘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 어차피 진현이와 나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야. 그러니 그가
다른 여자와 사귀든 무얼 하든 상관없어.’
웃는 건 제일 잘하는 거니까.
“……!”
진현이었다.
“혜미야? 여긴 어떻게?”
“안녕, 그냥 술 마시러…….”
“혜, 혜미야?”
“아…….”
“혜미야? 왜 그래?”
탁!
“혜미야!”
“혜미야!”
# 61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아닙니다.”
욱신!
‘왜 이러지?’
***
‘왜 이러지?’
혜미가 사과했다.
‘그냥 느낌이겠지?’
하지만 진현은 깊은 생각은 못했다. 조금 후 중요한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피부과 인사.
***
“네, 선배님.”
“네.”
“그래, 나도 한국대 병원에서 피부과를 못해서 여기 대일병원으로 왔지. 하여튼 반갑다. 병원 내 평판도 좋고,
한국대 수석이니 너 정도면 피부과에 합격하는 데 큰 문제 없을 거야.”
씁쓸하지만 현실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피부과 과장 민석형.
“네, 들어오세요.”
끼이익.
피부과 과장 민석형이었다.
“김진현 인턴 선생님인가요?”
“네, 반가워요. 김진현 선생님의 이야기는 그렇지 않아도 많이 들었어요. 한국대 수석 졸업에, 대일병원
내에서도 평판이 아주 좋던데.”
“감사합니다.”
“최대원 교수한테도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내가 한국대 졸업생인데 학창시절 최대원 교수의 동아리 선배였거든.
그런데 내과 지원 아니었나? 최 교수는 그렇게 이야기하던데.”
최 교수님 정말…….
“57 기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피부과 과장 민석형은 다른 과처럼 진현에게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괜찮아. 다 이길 수 있어.’
공정하게만 경쟁한다면 그는 누구에게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아니, 자신을 떠나서 무조건 이길 것이다.
“네, 감사합니다.”
“김진현이라… 곤란하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곤란하군. 곤란해.”
대일병원 이사장실.
짜악!!!
“한심한 놈.”
단 한 명, 김진현을 제외하면.
따라서 가문의 다른 형제들은 조금의 흠이라도 보이면 이상민을 하이에나처럼 찢을 것이고, 병원의 후계를
자신들의 사람으로 세운 후 궁극적으로 대일병원의 경영권을 뺏어갈 것이다.
이종근은 이를 갈았다.
“무슨 수를 써도 상관없어. 무조건 김진현을 밀어내라. 겨우 그것마저 못하면 넌 우리 가문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어.”
“민 비서.”
“네, 이사장님.”
민 비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말이 돼?! 간 혈관 문합도 그 녀석이 했다는 소리가 있어. 인턴이 그걸 해내는 게 말이 되냐고! 정말
내가 화나는 것 보고 싶어? 혼을 내줄까?”
그 말에 민 비서는 몸을 떨었다.
“김진현…….”
***
[이번 주에 시간 날 때 볼래?]
웬일이지?
‘신경과가 많이 바쁜가?’
라고 적혀 있었다.
‘왜 나한테 메일을?’
# 62
각설하고, 둘 다 이런 내용이었다.
‘보기 싫은데.’
강민철다운 급한 성격이다.
‘무슨 일이지?’
“네, 선배님.”
“네, 선배님.
“아, 네.”
***
“들은 대로다.”
“…….”
“…….”
고귀한 자, 로열(Royal).
교수의 직속 친인척이나 병원에 영향력이 있을 정도로 좋은 가문의 사람들을 뜻하는데, 피부과 핵심 교수의
아들이면 피부과 입장에선 로열 중의 로열, 그냥 성골이 아닌 왕족이라 할 수 있었다.
‘하하.’
예외는 없었다.
“신라대 의대 출신으로 인턴은 지금 신라대 병원에서 하고 있다더군. 학교 성적은 중간보다 못하고, 인턴 평판도
그저 그렇다 하지만 로열이니…….”
그 말에 진현은 맥이 빠졌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안하다. 혹시 피부과 말고 성형외과는 어떠냐? 네 스펙이면 성형외과도 무난할 것 같은데
…….”
“…네, 감사합니다.”
“젠장.”
정말 빌어먹을 일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네, 김진현입니다.”
“……!”
강민철이었다.
***
“다 나았네.”
“하지만…….”
“그래도 너무 무리 마십시오.”
“죄, 죄송합니다.”
“어쨌든 고맙네.”
“네?”
빈말이 아니었다.
만약 진현이 곧바로 심근경색을 추측하지 않았다면 그는 살아도 식물인간이 되었을 거다. 그만큼 상황이 긴박했다.
“아, 네.”
“응.”
“네.”
그는 코웃음 치며 중얼거렸다.
“흥, 내과 쫌생이들.”
강민철은 한강에서 이어지는 탄천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고, 진현은 무척 불편한 마음이 되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닐 거야.
“……!”
진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올 것이 왔다.
뭐라고 이야기하지?
‘내가 왜 그런 사고를…….’
“흠……!”
‘이젠 나도 모르겠다.’
“흐음!”
“됐네. 됐어.”
“……?”
“아닙니다.”
“단!”
강민철이 다시 눈을 빛냈다.
“자네 외과 할 거지?!”
“……!!”
“그건…….”
“뭘 그렇게 주저하는 거지? 수술을 좋아하지 않나?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 보람이 느껴지지 않나?”
“…….”
“……!”
진현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강민철 교수는 보통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현은 고민했다.
국내 간이식 최고의 권위자이자 대한이식협회 회장인 강민철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평범한 의미가 아니었다.
‘나쁘진 않지만…….’
피부과를 안 하면 무슨 과를 하지?
“외과 할 거지?”
“저는…….”
“……!”
하필 이때 최대원 교수를 만난 진현은 당황스런 마음이 들었다.
최대원 교수는 진현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짓다가 옆에 강민철 교수를 보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네는 여기 무슨 일인가?”
“흥, 내과 회의?”
“……!”
“형님께선 무슨 일이십니까?”
“아, 김진현.”
“……!”
강민철이 버럭 화를 냈다.
“아니, 형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아이는 외과를 할 것입니다.”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이 영감탱이가!
하지만 그렇다 해도 간이식 국내 최고의 권위자이자 대한이식협회 회장인 강민철도 이런 이야기를 들을 위치는
아니긴 하다.
지금 나를 놓고 뭐하는 거야?
“저…….”
# 63
“넌 가만히 있어!”
‘하하.’
진현은 웃음이 나왔다.
“외과지?”
진현은 살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답했다.
“피부과입니다.”
***
“그러면?”
“……!”
그래, 로열이든 금수저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10 년 동안 바랐는데.
물론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평균은 65 점 정도.
진현은 굳게 생각했다.
***
난장판이 된 교수 회의실을 떠나 병리과로 돌아온 진현은 서둘러 일을 마무리 짓고 지하에 위치한 숙소로 돌아갔다.
‘공부해야지.’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너 뭐하냐?”
“왜?”
“뭐 마시냐고?”
“아, 이거?”
대낮 근무 중에 술을 마시다니.
지난 삶을 통틀어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일이다.
“그래도 안 돼. 치워.”
“네에, 네에.”
“무슨 이야기?”
“앉아봐.”
진현은 의아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냐?”
“응, 나도.”
“진현아.”
“응?”
“너 의사 왜 한다고 했지?”
진현은 피식 웃었다.
이 녀석 왜이래?
“진현아.”
“응?”
“뭐??”
진현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반문했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
“진담인데?”
“……!”
진현은 낮게 말했다.
“야, 이 새끼야. 취했으면 그냥 들어가서 자. 멀쩡한 놈 거지 만들지 말고. 네가 부자면 다야? 내가 그렇게
거지같아 보여?! 어?!”
“김진현… 너는 정말…….”
그런데 그때였다.
“김진현이 왜?”
혜미였다.
“처음부터.”
“그래, 사랑의 힘이 대단하긴 한가 봐. 내가 진현이를 많이 좋아하긴 하지. 그런데 오빠, 아니, 이상민.”
“하나 경고할게.”
“뭘? 우리 동생.”
“……!”
“싫다면?”
“널 매장시키겠어.”
“……!”
“아버지가 원치 않을 텐데?”
“아아… 아버지? 결벽증에, 가정폭력에, 여자만 밝히며 비열한 그 남자? 물론 이 대일병원 내에서는 그 남자의
영향력이 절대적이긴 하지. 하지만 그룹 전체에서, 가문 내에서도 그럴까? 그 잘난 아버지가 너를 지켜줄 수
있다 생각해?”
“……!!”
“…….”
“그런데… 그거 알아?”
“…가까이 오지 마!”
“조용히 해.”
탁.
“이……!”
손톱만 한 작은 칼날이었다.
“조용히 해.”
“……!”
그러면서 그는 좀 더 힘을 주었다.
“이런, 힘이 더 들어갔네. 이러다 잘못해서 피부를 넘어 경동맥을 베면 어떻게 하지? 그렇지 않아도 우리 동생
말라 피부가 얇은데. 응?”
“응? 죽고 싶어?”
혜미는 벌벌 떨며 답했다.
“…그래.”
“뭐?”
“그래, 이 자식아! 차라리 죽여! 흑흑. 지금 나를 죽이지 않으면 언젠가 내가 너를 지옥에 떨어뜨릴 거야!
후회하기 싫으면 지금 죽여!!!”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이 악마 같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친오빠의 원수를 알고도 아무것도 못 하는 것도,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것도.
“재미없군.”
그는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너 앞으로 조심해.”
“하, 하.”
“흐흑, 흑, 흑.”
“웁웁, 흑흑.”
정말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죽고 싶을 만큼.
# 64
내과와 외과에서는 여전히 그를 꼬셨고, 피부과에선 지원해도 떨어뜨릴 것이라 했으며, 진현은 그냥 귀를 막고
시험공부를 했다.
욱신.
정말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항상 같이였는데… 항상.
그래…….
진현은 중얼거렸다.
보고 싶었다.
***
“이건?”
“뭘, 아니야.”
“그럴까?”
진현도 같이 웃었다.
“그래.”
“정말로 괜찮겠어?”
걱정하는 게 당연했다.
의사들이 외과, 내과, 산부인과 등 생명을 다루는 과를 기피하는 현상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1 년이 아니라 한 달에.
물론 강남에 개업한다고 꼭 성공하란 보장은 없지만, 최고의 최고를 달리는 진현 정도의 스펙이면 쪽박차기도
어렵다.
“…….”
진현은 살짝 웃었다.
“그럴 생각이야.”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과목으로 구성되는 선발 시험은 특히 외과가 지옥처럼 어렵게 나온다.
“그렇긴 하지.”
“됐다. 너도 공부해야지.”
내과, 외과는 물론이고 모든 과를 통틀어 최악에 꼽히는 업무량도 그렇지만 뭔가 자신과 잘 안 맞는 느낌이다.
“뭘?”
“아…….”
“그런 거 아니다.”
“혜미가? 그게 무슨 말이냐?”
“아, 아니야.”
“응?”
“뭐야, 실없긴.”
누구지?
“네, 김진현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알겠습니다.”
진현은 기가 차 반문했다.
분명 인턴의 업무는 맞지만 문제는 비행기를 타고 해외의 병원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현은 물었다.
“…….”
사고 좀 작작 칠걸.
“추가 수당이요?”
“……!”
큰돈은 아니지만 한 푼의 보상도 안 해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틀 이송의 보상으로는 굉장히 큰
대가였다.
‘별문제 없겠지? 하늘에서 문제가 생기면 손쓸 방법도 없는데. 상태가 안 좋은 환자를 비행기에 태워 보내진
않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나름 첫 해외여행이군.’
350 만 원 공돈이 생기니 면세점에서 부모님 선물을 사드리면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다면야.
그렇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이전 사고(?)들 때문에 그가 사람을 살리는 외과나 내과를 할 걸로 착각하고 있다.
초유의 대형 사고였다.
# 65
“여기가 인천 공항…….”
“…현아.”
“…….”
“…진현아!!”
“……!”
혜미였다.
“…….”
두근.
“잘 지냈냐?”
“그런데 여긴 어떻게?”
가장 친한 친구 둘이 같이 아랍에 가게 되다니.
“우연 아닌데…….”
“진현이, 너는 잘 지냈어?”
“나야 뭐. 그냥그냥.”
“써야지.”
“하고 싶은 과 해야지.”
“그래도…….”
“나도 잘 모르겠다.”
“……!”
익숙한 목소리.
우리 진현 씨.
***
“Hello.”
아랍에미레이트의 왕족인 환자는 퍼스트 클래스에 눕고, 이송 팀인 그들은 근처 비즈니스 클래스에 앉았다.
“저도 처음입니다.”
“……!”
“저도 처음이에요.”
“혜미야, 혹시 몸 안 좋아?”
“…….”
“응, 아니야. 피곤해서 그래. 어제도 병동에서 밤새고, 오늘 울산에서 올라오느라 몸이 안 좋네. 신경 쓰지
마.”
“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비행기가 궤도에 안정적으로 안착하자 스튜어디스들이 식사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아… 네.”
“아니,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드세요. 그나저나 이렇게 비즈니스 좌석을 타고 해외에 가다니, 환자 이송 중이라지만 좋네요.”
“혜미야?”
“…….”
“이혜미?”
“…왜?”
짧은 대답.
“몸 많이 안 좋아?”
“아니, 그냥…….”
***
“I am okay.”
라고 말할 뿐이었다.
석유 부자 나라들은 땅에서 어마어마한 수입을 얻기 때문에 힘든 직업인 의사를 아무도 안 하려고 한다.
뭐, 이 환자는 그런 것 같진 않지만.
‘다들 자나.’
‘혜미…….’
혼자 따로 앉아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안 좋았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손에 닿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이 흉터는 뭐지?’
혜미였다.
“……!”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가 왜 머리를 쓰다듬었지?
“아, 아… 응, 아, 목의 상처?”
“이, 이거 그냥 긁힌 거야.”
“긁힌 거라고?”
“응, 신경 쓰지 마.”
# 66
“네, 괜찮으셨습니다.”
“아닙니다.”
백인 의사는 싱끗 웃었다.
“아… 괜찮습니다.”
연희가 다가왔다.
“네, 다행입니다.”
연희가 눈을 반짝거렸다.
“어쩌지…….”
“이쪽으로 오세요.”
***
라운지에는 온갖 종류의 음식과 음료, 커피, 맥주, 와인 등이 비치돼 있었고, 안에는 샤워실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혜미, 너는?”
***
싸아아.
보고 싶었다. 정말로.
“나 너무 바보 같아.”
‘진현…….’
문득 아까 그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던 것이 떠올랐다.
“네.”
“저, 선생님.”
“네?”
“우리 진현 씨 좋아하시죠?”
“……!”
이연희는 방긋 웃고 있었다.
“무슨 말이죠?”
“…….”
“네, 역시 그런 것 같았어요.”
“어째서요?”
“티가 워낙 많이 나니까요. 그런데 어쩌죠?”
“혜미 선생님이 언제부터 진현 씨를 좋아했는지는 몰라요.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저도 절대로
양보할 수 없어요. 절대로.”
“…….”
“그래요. 알겠어요.”
“전 둘의 사이를 방해할 생각이 없어요. 아니, 잘됐으면 좋겠어요. 대신 하나만 부탁이 있어요.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무슨 부탁이죠?”
“……!”
연적에게 이런 부탁이라니?
그러니까 괜찮아.
***
‘이왕 쓸 거면 좀 더 쓰지.’
이쪽으로 피하면 이쪽에 살이 닿고, 저쪽으로 피하면 저쪽에 살이 닿는, 진퇴양난의 곤란이었다.
“진현 씨, 많이 불편하시죠?”
“…괜찮습니다.”
진현은 후회했다.
‘기회를 봐서 사과해야지.’
진현은 깜빡 잠이 들었다.
도착 시간보다 30 분 정도 연착 예정이었다.
“아, 네.”
“이혜미.”
“…….”
“혜미야?”
“무슨 일?”
“미안하다.”
“뭐가?”
“왜 쓰다듬었는데?”
물론 별 의미 없는 행동이란 것은 알고 있다.
왜냐고?
‘왜 쓰다듬었지?’
그도 모르겠다.
“왜 쓰다듬었는데? 대답해봐.”
“그건…….”
그런데 그때였다!
“뭐지?”
방송이 이어졌다.
-비상상황입니다. 긴급환자 발생으로 기내에 의사 선생님이 있으시면 비즈니스 클래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혜미가 물었다.
“어떻게 하지?”
“가봐야지.”
“무슨 일일까?”
# 67
“이런…….”
“방송은 했는데…….”
진현은 급히 끼어들었다.
“방송을 보고 온 의사입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 Doctor!”
“한국 국적의 승객인데, 방금 전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 저희도 정확히 모르겠어요.”
“언제부터 이런 것입니까?”
하지만 의식이 안 좋아지는 원인은 너무 많았다. 용의자를 오백 명쯤 놓고 수사를 시작하는 격이라 단서를 얻어
범위를 좁혀야 했다.
“승객 정보에 공무원이라고 되어 있는데… 아부다비에는 가족 방문으로 왔다고 되어 있고… 혼자 탑승한 거여서
그 밖의 사항은 저희도 전혀 모르겠어요.”
진현은 생각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일로 중동에 왔다가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귀국하는 중년의 공무원은 흔하지 않다.
“뭐라고요?”
수축기 혈압 50.
그는 급히 맥박을 측정했다.
‘낮은 혈압을 만회하기 위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상태. 하지만 맥이 너무 약해. 이러다 곧 심장마비가
오겠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심장마비가 오면 죽는다.
“목적지가 아닌 곳에 착륙하기는…….”
“네?”
“지금 고작 돈이 문제입니까? 조금만 지체하면 이 환자분은 사망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책임은 항공사에서 질
것입니까?”
“알겠어요.”
“심한 기상악화 때문에 기존의 항로를 벗어난 상태여서 중국도 빨리 도착할 수 없어요.”
‘시간을 벌어야 해. 비행기 안이라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해보자. 왜 쇼크가 왔지?’
최악의 원인이었다.
***
“진현아, 이것…….”
“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때 혜미가 말했다.
“약 때문은 아닐까?”
“약?”
“너 이 환자분 알아?”
“넌 이분 몰라?”
“모르는데?”
물론 대부분 문제가 없고 있어도 경미한 출혈이지만 극히 드물게 이렇게 심하게 오는 경우가 있다.
‘약에 의한 자발 출혈이야. 그것도 굉장히 심하게 왔어. 동맥 출혈이 분명해. 왜 하필 비행기 안에서 이런 일이.
어떻게 하지? 이대로 두면 죽을 텐데.’
“네!”
그런데 그때였다!
“꺄악!”
간질 발작!
혜미가 말했다.
“수술하자. 내가 집도할게.”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
“아, 안 돼. 이건 네가 아니라 강민철 교수님도 불가능한 일이야. 지금 가지고 온 도구는 정말 간단한 처치밖에
할 수 없는 도구들이란 말이야.”
“물론 네 말대로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 가장 좋은 것은 이대로 착륙해 병원에 가서 지혈을 시도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럴 수가 없고, 그때까지 이 환자는 못 버텨. 무조건 죽을 거야.”
“너무 무모해.”
메디컬 환생
지은이 | 유인
펴낸이 | 문상철
NEW EPISODE
교정 · 교열 | 정성훈
편집 · 제작 | 정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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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포그래피 | 기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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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알아.”
“그래도 해야 해.”
“…그게 문제야.”
“응?”
“그게 문제라고! 이 바보야! 네가 혹시 잘못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피부과 하고 싶다며? 피부과 해서
편하게 살고 싶다며!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을 안 사리는 거야?! 이 분이 누군지 알아? 잘못되면 그 책임을 어떻게
하려고?! 의사 가운을 벗는 것으로 안 끝나. 살인죄로 소송 당할 수도 있단 말이야!”
“혜미야…….”
“혜미야.”
“…….”
내키지 않는 승낙이었다.
“알겠어요.”
“환자를 옮겨주십시오.”
“네, 진현 씨.”
진현의 눈이 깊게 침잠했다.
‘어느 혈관일까? 혈관을 못 찾으면 절개를 넓게 하고 내부를 뒤져야 하는데… 환자의 상태가 나빠 기회는 많지
않아. 최대한 빨리… 가급적 한 번에 찾아야 해.’
‘한 번에 찾아야 해. 한 번에.’
혜미는 말했다.
“준비됐어.”
“진현아.”
“응?”
“하나만 약속해줘.”
“뭘?”
“그래, 약속할게.”
‘제발…….’
‘제발 도와주십시오.’
찌이익.
***
‘역시 복벽 출혈이야.’
“거즈를 주십시오.”
피를 빨아낼 석션(Suction) 도구가 없으니 수작업으로 피를 닦아내야 했다. 다행히 거즈는 넉넉했다.
‘하복벽 동맥…….’
‘제발……!’
그리고……!
“아!”
찾았다!
간절한 기도 때문이었을까?
한 번에 출혈 동맥을 찾은 것이다.
“하아…….”
“실을 주세요.”
“하아…….”
“바보…….”
물론 진현은 듣지 못했다.
“네.”
하지만 중요한 고비는 넘겼으니 비행기에서 적절히 수액 치료를 하고, 한국에서 정밀 치료를 받으면 회복할 수
있으리라.
뭔가 이상했다.
진현은 이를 깨물었다.
‘만약 피가 더 나고 있다면 이걸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 그 혈관도 지혈을 해줘야 해.’
그는 고민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메스 다시 주세요.”
“네?”
“출혈량에 비해 혈압이 너무 많이 떨어졌습니다. 복벽이 튀어나온 양상도 이상하고요. 배 안쪽의 출혈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때 혜미가 물었다.
“진현아.”
“응?”
신뢰가 담긴 말이었다.
“……!”
진현은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 그건 그렇지.”
“……!”
진현은 혀를 찼다.
“이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
# 69
69. 전공 최종 결정 (1)
“외과의사는 아닙니다.”
“그러면?”
“인턴입니다.”
“네?!”
“어? 어? 선생님?!”
***
“인터뷰는 안 할 것입니다.”
진현은 당황했다.
날 보러 내려온다고? 울산까지?
“치, 서운해요.”
“죄송합니다.”
“무엇입니까?”
“……!”
그녀는 듣고 있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5 미터쯤 떨어진 기둥에 기대서 스마트 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연희가 물었다.
“그것도 싫어요?”
“알겠습니다.”
“지금부터요.”
“아, 알겠어.”
“…그래.”
“혜미야?”
그녀는 진현이 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고개를 숙여 핸드폰에 열중 중이었다.
“이혜미?”
“왜?”
“나 간다.”
“응, 잘 가.”
“잘 지내. 두 달 뒤에 보자.”
“응.”
짧은 대답이었다.
“잘 지내라.”
“응.”
“…….”
혜미는 답했다.
“감정을 못 참을 것 같아서.”
“네?”
‘날씨 한번 진짜 꿀꿀하네.’
혜미는 생각했다.
정말 꿀꿀한 날씨였다.
정말로.
***
아랍 아부다비까지 비행기를 타고 왕복한 후 곧바로 울산에 내려간 진현은 몸이 부서질 듯 피곤했지만 곧바로
근무를 시작했다.
“괜찮아. 나 없는 동안 고생 많았어.”
“지, 진현아.”
“왜?”
“이리 좀 와봐.”
“……?”
‘서, 설마……?’
진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유력한 총리 후보이신 김창영 전(前) 대법관(大法官)이 금일 아부다비에서 인천으로 귀국하는 비행기 편에서
자발 출혈로 중태에 빠졌던 일이 있었습니다. 안소희 기자, 말씀 전해주시죠.
-네, 평소 청렴하기로 유명한 전 대법관은 개인적인 일이라 아무도 동행하지 않고 홀로 아부다비에 갔었습니다.
따라서 비행기 안에서 발견이 더욱 늦어져 상태가 안 좋았는데, 마침 우연히 같이 동승했던 외과의사가 응급
수술을 해 대법관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합니다.
여성 기자가 말을 받았다.
-대법관을 치료한 외과의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 아무런 답례도 바라지 않고 홀연히 사라져 더욱
감동을 줬는데요. 수소문한 결과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인가요?
‘이게 뭐야? 그 환자가 전직 대법관에 유력한 총리 후보라고? 아니, 내가 아무리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놈이라도 이건 좀 심하잖아?’
‘왜 나한텐 맨날 이런 일이?’
‘아무리 핸드폰이 꺼져 있어도 그렇지, 이런 기사를 내기 전엔 나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니야? 그리고
하늘의 외과의사라니? 난 피부과를 전공할 인턴이라고!’
‘이런 망할.’
***
“인턴?”
“아, 그 괴물인턴 김진현! 그런데 아무리 괴물이라도 인턴인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비행기 안에서 수술을 해
출혈 동맥을 잡다니.”
“그렇지 않을까? 이렇게 손재주가 좋은데. 원래 지망했던 피부과는 교수 아들을 뽑기로 한 상태니까.”
# 70
70. 전공 최종 결정 (2)
김창영 전 대법관은 구질구질한 사람들만 가득한 정치계에서 대중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아니야, 날 닮았어.”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다.
정말로 곧.
***
“네, 그런데요?”
“설사가 많이 심하십니까?”
“네, 배도 아프고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디서 소문이 퍼졌는지 총리 후보를 치료한 명의(名醫), 김진현 외과 선생님을 찾아 꾸역꾸역 환자들이 몰려든
것이다.
“들어오세요.”
무슨 일이지?
“무슨 일입니까?”
“아, 네. 괜찮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누구지?’
그였다!
“아…….”
“아, 아닙니다.”
“……!”
그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김창영은 슬쩍 웃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은혜를 잊으면 안 되죠. 그래도 김진현 선생님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사실 휠체어도 안
타도 되는데, 워낙 주변 사람들이 뭐라 그래서 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안위를 생각 않고 상관없는 자신을 구해준 진현에게 김창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김진현 선생님.”
“……?”
“……!”
그런 것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다.
“그저 그 자리에 제가 있었을 뿐입니다. 특별히 감사를 받고자 한 일은 아니니 정말로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진정한 참된 의사.
“네, 말씀하십시오.”
# 71
71. 전공 최종 결정 (3)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
“그래야겠지.”
“몸은 정말 괜찮으십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저도 나중에 저런 의사 선생한테 진료받고 싶더군요. 조사를 해보니 근무하는 대일병원 내에서도 평판이 아주
좋습니다. 나이와 경험을 초월한 천재에, 성품, 환자를 대하는 태도… 모두 최고의 평입니다.”
무슨 과더라?
“외과였던 것 같습니다.”
외과.
***
‘이상민… 됐어.’
이전의 일이 떠올랐다.
‘혜미에게 부탁해야겠구나.’
띠리리.
-진현아?!
‘오랜만이구나.’
‘아, 벌써 시간이.’
-싫어. 뭐 해줄 건데?
장난기 담긴 목소리다.
“밥 사줄게. 소고기.”
-…….
-피부과? 정말 괜찮겠어?
-…알았어. 대신 꼭 합격해야 해?
“그래.”
‘더 통화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안다.
그가 보고 싶었다.
***
‘이전 수능 생각나는군.’
7 년 전, 수능 때도 참 힘들었다.
‘할 수 있어.’
그는 피부과 합격을 위해 굳은 의지로 문제를 풀었다.
그렇게 4 과목의 시험이 끝난 후, 어린 의사, 인턴들은 불안, 초조, 기대, 후련함이 공존하는 얼굴로 시험장을
나왔다.
“진현아, 잘 봤어?”
“그냥… 잘 모르겠다.”
“맨날 또 그런다.”
“잘 봤을 거면서.”
“그냥 잘 봐선 안 되니까.”
그는 급히 말했다.
진현은 슬쩍 웃었다.
“그래, 고맙다.”
“오늘 우리 대충 일하다 술이나 먹으러 가자. 시험 친 날이니 병원에서도 오늘은 특별히 오프를 준다고 했어.”
병원마다 과마다 다르지만 적당히 근무를 빼주는 경우가 많고 진현과 황문진이 일하는 파견 병원도 그들에게 저녁
오프를 약속했다.
“내가 살게!”
***
해운대 해안가 뒤쪽에 위치한 유명한 암소갈비 집에 도착한 그들은 술잔을 기울였다.
“크… 쓰다.”
“진현아.”
“왜?”
“…….”
“할 말이 있으면 해라.”
진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글쎄.”
정말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
무려 11 년 동안이나.
“그래.”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
“진현아, 들었어?”
“뭐?”
“그래? 이상하군.”
그렇긴 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유행처럼 생기는 바이러스성 폐렴과 다중 충돌 사고들로 중한 환자는 넘치는데, 마침 의사 한
명이 사표를 냈다.
‘뭐, 예외적인 일인 것 같지만, 어차피 면접은 형식적인 거고. 인턴 인사평가로 대체해 주면 나쁠 것은 없지.
예상대로 합격이었다.
“축하한다.”
“응!”
“진현아, 너 확인해봐.”
“그래.”
결과 발표 화면이었다.
그리고…….
# 72
72. 전공 최종 결정 (4)
<김진현>
전공의 선발 시험 점수 : 48/50
석차 : 1/2987
50 점 만점에 총점 48 점!
“…….”
“너 피부과 쓴 것 아니었어?”
“피부과 쓴 것 맞다.”
“그런데…….”
“이거 왜?”
“……!”
진현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똑같았다.
“이, 이게 무슨……?”
-어, 진현아?
깜짝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어, 나도 확인해볼게!
‘이런.’
“응, 빨리 가봐.”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외과라니!
***
“죄송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야 당연히 선생님이 외과에 지원한
줄 알고…….”
최종적으로 외과로 전산에 접수가 됐는데, 담당자는 유명인인 진현이 당연히 외과에 지원하는 줄 알고 별생각
없이 넘겼단 거다.
말도 안 된다.
“이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그쪽에서 제대로 관리를 못해서 이런 문제가 생긴 것 아닙니까? 꼭 책임져서 조치를
취하십시오.”
고작 이런 일로 꿈을 꺾을 위기에 처하다니?
“일단 피부과와 이야기해서 최대한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김진현 선생님을 합격시키려면, 이미 합격한
다른 선생님을 불합격시켜야 해서…….”
“하하.”
“제길!”
빌어먹을 일이었다.
***
잘 해결될 리가 없었다.
그것도 웃겼다.
실제로 지난 삶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건만 결국 경쟁에서 밀리고, 개업 실패로 파산하지 않았던가?
물론 정 피부과를 하고 싶다면 이번 년도에 외과 합격을 포기하고, 다음에 피부과 재수를 하는 방법도 있다.
그냥 근거 없는 느낌이었다.
교육수련부를 포함한 레지던트 선발의 일련 과정에 손을 쓸 수 있는 인물이 개입했다면 모를까 아니면 불가능하다.
“하아.”
그런데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네.”
그 말에 진현은 깜짝 놀랐다.
***
“네, 잠깐 기다리십시오.”
“김진현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안녕히 지내셨습니까?”
“아, 네. 그런데……?”
“……!”
설마 여기까지 온 게?
“…….”
그러면서 그는 두툼한 상자를 내밀었다.
“이건……?”
“…….”
수술용 확대경인 루뻬는 수술 필드를 2.5 배에서 5 배 정도 확대해 보여주는 외과의사의 필수품이었다.
몇 십만 원짜리 보급품으로.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너무 고가의 선물이다.
“하지만…….”
“…….”
“…….”
그런데 그때였다.
“지, 진현아.”
“……!”
진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떨리는 목소리.
혜미였다!
진현은 놀라 물었다.
“어떻게 여기에?”
“너 보려고 급하게 내려왔어. 미안… 내가 접수한 후 제대로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
“괜찮아. 정말로.”
“하, 하지만……!”
“진현아?”
그가 갑작스레 가까워지자 혜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 순간 진현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지, 진현아?”
진현은 다시 말했다.
자신의 귀에 닿는 목소리에 혜미는 별이 명멸하듯 수천 가지의 생각이 떠올랐으나, 단 한마디의 말밖에 꺼내지
못했다.
“으, 응…….”
“…….”
뭔가 어색함이 더 깊어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런… 내가 때를 잘못 맞춰 온 것 같군.”
“……!”
# 73
73. 그 이름의 시작
“자네도 술 먹나?”
“아, 네. 교수님.”
“네?”
날 아시나?
“아…….”
아버지 이종근은 감춰온 여성편력과 폭력성을 숨김없이 드러냈고, 그녀의 어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린 끝에
자살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챈 그녀의 할아버지가 개입했으나, 몸과 마음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상태로 너무나
늦은 때였다.
그때 강민철이 물었다.
“아, 아닙니다.”
“…….”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표정이었다.
진현은 눈을 감았다.
“하여튼 어울리지도 않는 피부과를 한다고 그렇게 내 속을 썩이더니… 늦게라도 외과를 결정한 것 축하하네. 암,
자네 같은 사람은 피부과 같은 과가 아니라 우리 외과를 해야지.”
“응, 그게 무슨 말인가?”
“그게…….”
“네, 죄송합니다.”
‘화내시겠지?’
“잘됐군.”
“네?”
진현은 입을 딱 벌렸다.
“하, 하지만…….”
“그건…….”
진현은 답을 못했다.
좋아해서?
아니, 그건 아니다.
하지만 그게 뭐?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게 뭐가 나쁜가?
대신 설명했다.
“피부과 하면 편할 것 같아?”
“네?”
“…….”
“…….”
“그리고 자네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피부과 개업하면 하나도 안 편해. 결국 개인 사업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야 하거든. 휴가도 제대로 못 가.”
“…….”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외과가 별로 안 힘들다니.
“아, 물론 처음에 레지던트 과정은 무척 힘들지. 그리고 레지던트가 끝나고 자리를 잡을 때까지도 힘들고.
하지만 자리를 잡으면 별로 안 힘들어. 잘하면 돈도 잘 벌 수 있고.”
“…….”
“외과로 와. 너는 내가 끌어주겠다.”
“……!”
“……!”
진현의 눈이 떨렸다.
강민철은 간이식 분야 국내 최고의 대가이자 그 탁월한 실력 때문에 병원 내에서도 아무도 못 건드리는 인물이다.
***
‘외과라…….’
그 말이 옳았다.
그는 수술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띠링!
“하아…….”
찰싹찰싹.
‘넌 외과를 좋아하잖아.’
그 말이 다시 한번 가슴에 울렸다.
진현은 중얼거렸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
하지만… 정말로?
그래, 이 순간 그는 인정했다.
“…….”
찰싹찰싹.
바닷가에 고요한 파도가 들락거렸다.
이전 삶의 기억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이번엔 또 다른 기억이었다.
어쩌면 그가 피부과를 원했던 것도, 억지로 외과의 길을 외면했던 것도 이전 삶에서 각인된 트라우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김진현,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냐? 지난번 실패는 지난번 실패고. 이번엔 달라.”
그는 강하게 중얼거렸다.
‘그 과정만 버티면, 그래서 성공한 외과의사로 자리만 잘 잡으면 좀 나을 거야. 대학병원의 교수가 되면 어쩌면
개인사업자인 피부과 의사보다 더 나을 수도 있어.’
그런 거 뭐, 아무렴 어떤가?
그는 웃었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 기적 같은 이름의 시작이었다.
# 74
“네, 감사합니다.”
“앞으로 고생하겠네.”
“감사합니다.”
“오셨습니까?”
“오랜만이에요, 기획실장님.”
“네.”
당연했다.
이상민은 이종근의 친아들로 향후 빠른 속도로 대일병원의 후계자로 자리 잡을 자이니 미리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네.”
“그게…….”
송병수는 머뭇거렸다.
“괜찮아요. 말해봐요.”
“비슷합니다.”
무거운 목소리였다.
더구나 요즘엔…….
“이혜미 이사께서 특히 적대적이십니다.”
“흐음…….”
그는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요?”
김진현은 병원 내에서 굉장히 유명한 인물로 외과를 전공하게 될 시 필연적으로 이상민과 경쟁하게 된다.
이상민도 탁월한 실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김진현이 지금까지 벌인 일들을 살피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정말 규격 외의 괴물이었다.
‘만약 경쟁에서 밀리면 이사회에서 또 트집을 잡을 텐데. 차라리 피부과로 보내거나 불합격을 시키지. 왜?’
“…….”
“괜한 것을 물어 죄송합니다.”
망가뜨리려고.
“반드시 이기겠어.”
그는 나직이 말했다.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조심히 갔다 오십시오.”
“오프입니다.”
진현은 웃었다.
기한은 1 년.
‘갔다 오면 잘 가르쳐야지.’
그것도 천재 중의 천재.
‘조금만 기다려라.’
정말 상상도 못했다.
정말로.
***
“어, 어… 응.”
혜미는 말을 더듬었다.
“미안, 나는…….”
“…….”
“진현이 좋아하지?”
“…응.”
“당연히 알고 있어. 네가 진현이 좋아하는 것… 그래도 고백하고 싶었어. 앞으로 인턴 생활 끝나 전공이 갈리면
지금처럼 자주 보진 못할 테니까… 내가 아쉬움이 남아서.”
그는 밝게 웃었다.
“…응, 미안.”
혜미의 눈이 흔들렸다.
“그래도 괜찮겠어?”
그 고통을 알기에 그녀는 가급적 자신에게 고백한 사람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희망고문은 정말정말 나쁘니까.
“…응.”
황문진이 먼저 등을 돌렸다.
‘김진현, 이 나쁜 놈.’
가장 친하고, 둘도 없는 친구지만.
이번엔 그가 나빴다.
그가 잘못한 날이니까.
***
‘뭔가 이상해.’
‘그냥 느낌인가…….’
“괜찮습니다.”
‘이 보배 같은 녀석.’
이런 식으로 겸양했다.
“안 돼. 이번 달은 내 거야.”
# 75
1-2 주에 한 번 정도?
출근은 다음 날 아침 5 시까지.
공휴일?
그게 어느 나라 단어인가?
“그러니까. 믿음직스럽고.”
나쁘지 않은 일상이었다.
‘고영찬 교수…….’
***
“잘 지내나, 고 교수?”
“네, 이사장님.”
“아, 별건 아니고…….”
이종근은 잠시 뜸을 들였다.
“김진현이라고 아나?”
“아, 네. 압니다.”
당연히 안다.
‘왜 고작 레지던트 따위를?’
“……?”
“그렇지 않나?”
“네, 맞습니다.”
“네.”
“……!”
“네, 알겠습니다.”
그 말에 고영찬이 눈이 빛났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
정말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빌어먹을 놈들.’
결국 이종근이 내세울 수 있는 후계라고는 이상민밖에 없는데, 서자인 그가 가문의 인정을 받으려면 최고가
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노동착취로 부림받는 그들을 부당하게 해고할 시 전공의협의회 등을 비롯한 여러 단체가 들고
일어설 것이다.
뭔가 그럴듯한 핑계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지난 1 년 동안, 흠집을 잡기 위해 틱틱 건드려 보았으나 모두 김진현의 명성만 쌓아주는 용도로 쓰였을
뿐이다.
그의 생각처럼 이젠 달랐다.
김진현 본인은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만, 외과에 들어온 순간 그는 호랑이 아가리에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다.
***
“네가 김진현이지?”
“네.”
그는 과연 이렇게 입을 열었다.
“네가 대단히 뛰어나단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지난달 강석훈이랑은 성격이 좀 다르다. 넌 우리가
레지던트 수련을 받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레지던트를 하는 이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서 길을 걸어온 선배들 밑에서 배우기 위해서다.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1 년 차 때는 윗사람들 밑에서 열심히 배우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당연한 걱정이다.
‘나야 고맙지.’
“네, 감사합니다.”
“교통사고 수술 후 폐가 안 좋아져서입니다.”
“급성 폐 손상?”
“네.”
“…….”
“네, 알겠습니다.”
‘폐렴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불안해.’
***
“네, 교수님.”
옆에 서 있던 강형석이 대신 답했다.
“김수민 환자는?”
“그 환자는…….”
“강 치프.”
“네?”
“……!”
“죄, 죄송합니다.”
“주치의가 다시 설명해.”
“염증 수치는?”
“8.34 입니다.”
“백혈구 수치는?”
“13,400 입니다.”
“빈혈 수치는?”
“9.8 입니다.”
흠잡을 게 전혀 없었다.
“이성중 환자 JP 드레인(Drain)은?”
고영찬의 눈도 살짝 커졌다.
# 76
이사장 이종근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선 트집을 잡아야 하는데, 며칠 지켜본 이 녀석은 빈틈이 전혀 없었다.
‘쉽지 않겠군.’
“그러면 회진 시작하지.”
물론 별 성과는 없었다.
‘젠장.’
“네, 알겠습니다.”
***
그 말은 진리였다.
측정결과 92%.
‘안 좋아.’
진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
보호자의 눈이 흔들렸다.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져야 하는데…….’
이 환자가 그러했다.
***
새벽 3 시 30 분.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그런데 10 분 정도 지났을까?
띠리리!
전화벨이 울렸다.
“…김진현입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
-김진현 선생님!
연희였다.
그런데 평소의 나긋나긋한 음성이 아니다.
“……?!”
“하아, 하아…….”
“환자분 괜찮으십니까?”
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전력으로 오랫동안 달리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의 호흡 근육은 움직임에 한계가 있다.
“선생님, 여기 동맥 검사예요!”
“……!”
-pH7.2 O2 45 CO2 65
최악의 결과였다.
“기관 삽관 준비해주세요.”
“기관 삽관이요?”
연희가 놀라 물었다.
“네, 알겠어요!”
이럴 땐 1 분 1 초가 급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치프인 강형석이었다.
“이런…….”
“네?”
“이리로 와봐.”
“다음부턴 조심해.”
“…네.”
“……!”
강형석이 급히 말했다.
산소수치 73%.
“뇌는 1-2 분만 피가 안 가도 손상이 가. 그러니 다른 처치와 다르게 기관 삽관은 한번에, 신속히 성공해야 해.
안 그러면 큰 문제가 생긴다.”
“8.0 으로 주세요.”
특히 기관 삽관은 분초를 다투는 응급 상황에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잘 안 풀리면, 환자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후두덮개를 젖히고…….’
전혀 예상 못한 고난도 기도(Difficult airway)로 입에서 성대, 기도로 향하는 길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시커멨다.
‘이런, 젠장!’
그때 다른 간호사가 외쳤다.
50%!
***
‘젠장! 안 보여.’
간호사가 다시 외쳤다.
3 초에 10%씩 떨어졌다.
더 이상은 안 된다.
결단을 내려야했다.
식도와 기도!
특히 기도는 입 뒤쪽 천장에 접해 있으니 그쪽을 긁으며 밀어 넣으면 절반 이상의 확률로 성공할 수 있다.
“넣습니다!”
쓰윽!
‘제발!’
# 77
20%!
정말로 공기를 주입할 때마다 폐가 위치한 흉곽이 아니라 식도 밑에 위치한 윗배가 들썩거렸다.
아니, 30 초가 뭔가?
15 초 안에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다.
“제가 하겠습니다.”
“뭐?!”
“제가 하겠습니다.”
“야, 이걸 1 년 차인 네가……!”
“너……!”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진현의 간절한 눈빛에 강형석은 흠칫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망할!’
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2 번의 기회도 없다.
단 한 번 만에 해내야 했다.
0%!
진현은 곡선으로 휜 튜브를 일직선으로 폈다. 그리고 튜브를 고정하는 철사(Stylet)을 밀어 넣었다.
그 동작만으로 2 초가 흘렀다.
“꺄악! 심장 맥박 늘어져요!”
곧 Arrest(사망)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두근!
기회는 단 한번이다.
모든 지각을 잊었다.
‘제발!’
보호자의 말이 떠올랐다.
반드시!
진현의 손이 움직였다.
시야가 너무 안 좋아 튜브가 기도를 통과한 것인지 식도를 통과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푸슉!
띠익- 띠익-
0%.
1 초, 2 초, 3 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수치는 조금 늦게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전과 다르게 폐가 위치한 흉곽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4 초, 5 초…….
“아!”
누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현은 땀을 닦고 말했다.
“아, 그, 그래.”
“무슨 일입니까?!”
“환자는 어떻습니까?”
‘진현아.’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정말 다행이군요.”
“흠…….”
“1 년 차입니다.”
그 말에 내과의사의 눈이 커졌다.
그는 크게 감탄했다.
“네, 그렇습니다.”
즉, 모든 의사 중에서 폐를 가장 잘 본다.
중환자실 내려갈 채비를 하는 사이, 호흡기 내과의사는 간단한 설명을 들으며 사진을 봤다.
“여기 폐렴이…….”
“폐렴은 아닌데요?”
“네?”
“물론 X-ray 에서 정확히 구별할 수는 없지만 폐렴보다는 폐에 물이 찬 폐울혈 같은데요? 교통사고 후 스트레스
상황의 환자니 급성 폐 손상(Acute lung injury) 가능성도 있고요.”
치프 강형석의 눈이 커졌다.
폐울혈, 급성 폐 손상.
“아…….”
진현이 그 몰래 한 처치들이다.
“네?”
“수치는요?”
“압력은요?”
어떻게 알지?
내과 전문의는 살짝 미소 지었다.
“아니, 너무 잘 알기에 혹시나 해서요. 선생님, 괴물인턴으로 엄청 유명했잖아요. 우리 내과로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우린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 어려운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세요. 도와드릴 테니.”
“아, 네.”
“네, 지금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
“압력(PEEP)을 올려주십시오.”
“인공호흡기의 산소농도는요?”
“50%로 고정해주십시오.”
잠은 당연히 한 잠도 못 잤다.
‘해 뜨는구나.’
진현은 눈을 비볐다.
엄청 피곤했다.
그래도 그의 노력 덕분일까?
“김진현.”
“네?”
“고맙다.”
# 78
“……!”
“…….”
그는 급히 손을 저었다.
노골적 칭찬에 진현은 민망한 마음이 들었으나 치프의 말은 조금도 빈말이 아니었다.
이건 도저히 1 년 차의 것이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실력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미스터리지만 김진현, 이 괴물 놈을 상식으로 보지 말라는
동료들의 말이 옳았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었다.
‘도저히 모르겠군.’
괴물.
그때 진현이 말했다.
***
“원인은?”
진현이 답했다.
“급성 폐 손상?”
“그래?”
그건 치프 강형석이 대신 답했다.
“여기 주치의, 김진현 선생님 덕분입니다. 김진현 선생님이 적절히 조치한 덕분에 밤사이 호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마음에 안 드는 답변이다.
고영찬은 컴퓨터로가 전산을 켰다. 그리고 간밤의 처치와 차트를 꼼꼼히 살폈다.
모두 완벽했다.
아니, 오히려…….
***
‘어떻게 하지?’
‘젠장.’
언중유골(言中有骨).
등골이 서늘해졌다.
“빠, 빨리 처리하겠습니다.”
뭔가 수를 내야 했다.
‘한번 버텨봐라.’
‘사표를 안 써도 돼. 어차피 버티다 보면 언젠가 문제가 생길 테니. 문제가 생기기만 해봐라. 그땐 바로.’
고영찬은 칼을 갈았다.
“강형석입니다, 교수님?”
“네?”
치프 강형석은 놀라 반문했다.
“하지만 이제 1 년 차 초반인데…….”
“그렇긴 합니다만…….”
강형석은 그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이유일까?
지금까지 레지던트 업무 부담에 한 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위인이 갑자기 이러니 의문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진현은 지옥의 입구, 헬 게이트(Hell gate)라 불리는 응급실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
“내가 왜 응급실을?!”
응급실은 정말 지옥이었다.
의사에게나, 환자에게나.
“네가 제일 잘하니까.”
“…….”
‘젠장.’
“외과 힘들지?”
“응급의학과 하라니까.”
“오면 잘해줬을 텐데.”
응급실에 평생 살라니.
농담으로라도 싫었다.
응급실 시스템 자체가 최초 응급의학과에서 환자를 진료 후, 외과적인 문제가 있으면 진현에게 연락을 하는
프로토콜이기 때문이다.
“여기 도와주세요!”
“아악!”
절로 한숨이 나왔다.
# 79
“네.”
이종근은 턱을 쓰다듬었다.
이사장인 자신이 별것도 아닌 인턴… 아니, 레지던트 나부랭이를 언제까지 신경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기가 찰 지경이다.
“네, 이사장님.”
김진현이 뭐라고.
고영찬은 생각했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여도 의사의 실력은 임상 경험이 좌우한다.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실책을 할 수밖에 없어.
기다려라. 실수만 하면…….’
***
오히려…….
그야말로 완벽하다.
진현 본인이 너무 힘든 것이다.
‘죽겠다…….’
수도 없이 환자들이 오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제발 3 시간만 이어 잤으면… 아니, 근처에 기독병원도 있고 한국대 병원도 있잖아. 왜 여기로만 오는 거냐고!’
퇴근은 일주일에 딱 한 번.
***
“이게 아니야.”
걸인을 연상시키는 볼품없는 외양과 다르게 그는 국내 최고의 동양화가 중 한 명이라 꼽히는 당대의 화백(畵伯)
이었다.
그림이 텅 비어 있는데.
“서, 선생님?”
“어디 가시려고요?”
제자 이수훈은 혀를 찼다.
“별일 없으시겠지?”
***
‘풀리지 않아.’
‘아, 취하는군.’
뚝뚝.
하늘에서 비가 떨어졌다.
“이런. 내려가야겠군.”
하필 빗줄기도 점점 거세졌다.
‘뭐? 조심?’
“거기 조심하라고요!”
퍼석!
“……!”
“어, 어?”
***
구조대원들은 혀를 찼다.
길게 기른 수염과 누더기 같은 옷.
***
“으… 응?”
“그러면 10 분만…….”
1 분도 안 돼 전화벨이 울린 것이다.
응급실이다.
“네, 외과 김진현입니다.”
“무슨 환자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또 환자야?”
“응.”
“그래…….”
오늘 당직은…….
‘고영찬 교수님이군.’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
“이건…….”
“복부 검사를 해보니 장출혈이 심해서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머리에 뇌진탕이 있고 왼발에 미세한 골절이
있긴 한데… 다 급한 것은 아니어서.”
“흠…….”
“바이탈(Vital)은 괜찮습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 80
혈압 95, 맥박 130.
“혈액 수치는요?”
“빈혈 수치 9.3 이에요. 정상이 13 이니 굉장히 떨어졌어요.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더 떨어질 거예요.”
“저… 그게…….”
“왜 그러십니까?”
“추락 과정 중에 잃어버린 것인지 신분증이나 핸드폰이 없어서 신원이 확인이 안 돼요. 보호자 없는 노숙자
같기도 하고…….”
“경찰에는 연락했습니까?”
‘이런 어쩌지?’
그러나 고민할 사안은 아니었다.
대일병원의 시스템상 수술은 진현이 하는 게 아니라 당직 교수나 전문의가 나와서 집도를 해야 한다.
***
“아닙니다.”
“…….”
“죄송…….”
“괜찮으니 받게.”
“아닙니다.”
“아니야. 받아.”
“왜? 빨리 말해.”
“보호자한테 수술 설명 다했어?”
-그게…….
진현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보호자가 없습니다.
-등산 중 추락한 환자인데 신분증도 핸드폰도 다 없어서… 차림상 노숙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니, 자네 지금 제정신이야? 지금 나한테 보호자 동의도 없이 수술을 하라고 전화한 건가? 노숙자일지도
모르는데?”
-…….
“고영찬 교수.”
“네, 이사장님?”
“네?”
“신원 미상의 환자라며? 노숙자일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다 병원 손해야. 보호자를 찾고 수술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병원으로 보내라고 해.”
“하지만… 그러다…….”
물론 이럴 경우 김진현의 잘못이 아니라 수술을 미룬 고영찬의 잘못이지만 그 정도는 조작해 덮어씌울 수 있다.
***
기가 찼다.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네?! 그러면?”
‘제길.’
-네, 기독병원인데요.
-잠시 기다리세요.
-저희는 다들 학회 중이에요.
날씨가 궂어서일까?
“……!”
진현은 급히 지시했다.
“수혈 더 해주세요. 수액도 급속 주입해 주시고요.”
더 시간을 끌 때가 아니었다.
-왜?
-보호자는?
“보호자는 아직…….”
-자넨 수술이 장난인 줄 아나? 신원 불명의 노숙자를 수술할 수는 없으니 책임지고 보호자를 구해와!
“…….”
진현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너무하는 것 아니야?
“수술 진행하겠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수술을?”
진현은 짧게 답했다.
“제가 진행하겠습니다.”
“네?”
누가 수술을 진행한다고?
하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
“하, 하지만…….”
그래도 이건…….
‘됐어. 그냥 내가 수술하겠어.’
그 말에 진현은 잠시 고민했다.
***
“바이탈(Vital) 괜찮나요?”
그리고 이른 아침, 이종근은 한남동 자택에서 출근하자마자 민 비서에게 김진현의 소식을 물었다.
“뭐라고요?”
이종근은 잘못 들은 듯 되물었다.
누가 뭘 했다고?
“…….”
이종근은 잠시 침묵했다.
그걸 직접 수술했다고?
이제 1 년 차 초반인 레지던트가?
‘도대체 이놈은……?’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그런데 김진현, 이놈은 경험이란 항목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
이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의학실력에 의문을 가지고 지난 1 년간 숱하게 뒷조사를 했으나 이상한 점은 없었다.
“…순조롭게 회복 중입니다.”
“조그마한 문제라도?”
“…….”
일순 이런 갈등이 생겼다.
“그러면 지금 그 신원 미상의 환자는 수술도 김진현 선생이 했고, 입원도 김진현 선생 앞으로 해 있는 건가요?”
“네.”
민 비서는 답했다.
***
“네, 김진현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역시였다.
“순조롭게 회복 중이라서 조만간 의식을 차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의식을 차리면 보호자와 연락이 될
겁니다.”
사람이 우선이니까.
확 짜증이 나 쏘아붙였다.
***
“여… 여긴?”
“아… 네. 병원입니까?”
-아, 네. 지금 가보겠습니다.
“아… 네. 여긴 병원인가요?”
“아프군요.”
“제가 했습니다.”
그는 놀랐다.
“네?”
“보호자라면?”
“아… 그렇군요.”
“김종현, 김종현입니다.”
김종현.
***
김진현을 어떻게 징계할 것인지 한창 고민하던 민 비서는 의아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네?”
이상하다?
그런데…….
“……!”
서, 설마… 아니겠지?
# 82
진현은 급히 사라졌다.
“그렇지?”
“이상하네요. 무슨 생각이지?”
“그러게.”
“아!”
“왜?”
“김창영 총리요.”
“뭐?”
“아! 그렇네?”
선배 기자도 떠올렸다.
한때 떠들썩한 이야기였다.
선배 기자가 눈을 빛냈다.
“뭐가요?”
“그래, 사실 단순히 김종현 화백이 다쳤단 이야기에 누가 관심 있겠어? 이 정도 스토리는 있어야 관심을
가지지.”
***
기사의 흥행을 위해 김진현이 이전에 비행기에서 총리를 구한 하늘의 외과의사란 사실도 깨알같이 적어놓았다.
“…….”
“이게 도대체…….”
“왜 이놈은 항상…….”
“괘, 괜찮을까요?”
“뭘?”
그것도 추악한.
“늦었지만 담당의사를 김진현 그놈한테서 다른 교수로 바꿔야 하지 않겠나? 퇴원할 때까지 김진현 혼자만 보게 할
수는 없으니까. 이제 자네가 진료하게.”
***
“여기 기사가…….”
‘이, 이게 뭐야……?!’
간만에 친 대형사고였다.
‘왜 맨날 이런 꼴이야.’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잠깐 볼 수 있나?
“네, 지금 가겠습니다.”
“무엇입니까?”
“김종현 화백의 진료는 앞으로 내가 담당해도 되겠나? 자네도 1 년 차 입장에서 VIP 환자를 보는 게
부담스럽지?”
“네, 알겠습니다.”
그는 고영찬의 뱀 같은 눈을 빤히 바라봤다.
“짧은 시간이지만, 김진현 선생은 참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더군요. 몇몇 다른 의사들과 다르게요. 그렇지
않습니까?”
“…….”
“…알겠습니다.”
***
‘다른 병원 가라고!’
“…네, 다행입니다.”
“선생님, 정말 이제 괜찮으세요?”
“응, 많이 좋아졌다.”
“그림도 그리시던데.”
제자 이수훈의 눈이 커졌다.
그런데 깨달음이라니?
“아야, 왜 때려요?”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 보니 느껴지는 게 있어서… 그러고 보니 선물로 준다는 걸
까먹었군. 네가 병동에 좀 가져다 줘라.”
“왜?”
“아니, 그냥…….”
김종현 입장에서야 그저 본인이 그린 그림에 불과할 테지만 그의 그림은 부르는 게 가격이라 그 금전적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게 뭐예요?”
“네, 그럴게요.”
그리고…….
“……!”
인물화였다.
김종현의 인물화는 그 전신사조를 극명히 담아 얼핏 봐도 의사가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절절이 느껴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 그림 어쩌죠?”
“그런데 이거 김진현 선생님인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그리고 김진현 선생님한테 개인적으로 준 선물은 아니잖아.
우리 병동에 준 것이니…….”
“그러면?”
“병원 행정과에 이야기해 1 층 로비에 거는 게 어때? 거기가 사람들 제일 많이 다니니.”
좋은 의견이었다.
병원 전체적으로도 좋은 일이다.
간호사들은 신 나서 이야기했다.
그렇게 진현을 모티브로 그린 듯한 김종현의 인물화는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로비에 걸렸다.
# 83
“그러게요. 그런데 김종현 화백이 자신을 진료했던 의사를 모티브로 저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김진현?”
“아, 그 천재!”
그뿐이 아니었다.
병원 홈페이지 메인에 대문짝만 하게 진현의 인물화를 찍어 올렸고 덕분에 대일병원과 연관된 모든 사람이 그
인물화를 보게 되었다.
김진현.
‘죽겠다…….’
“…안녕하십니까.”
세상과 격리된 채 수술만 하던 유영수는 김진현이 응급실에서 고생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자네 괜찮은가?”
“…….”
진현은 침묵했다.
“이제 2 달째입니다.”
“2 달? 그러면 다음 달은?”
“다음 달도 응급실입니다.”
물론 2-3 달 연속으로 응급실을 전담하는 게 없었던 사례는 아니지만, 이제 막 외과에 걸음마를 시작한 애한테
너무한 것 아닌가?
“…….”
“정말입니까?”
진현의 졸린 눈이 번쩍 뜨였다.
“감사합니다!”
***
물론 오프라고 하루 종일 쉬는 게 아니다.
“남자친구 안 만나?”
“아… 괜찮아?”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이게 다 김진현 때문이다.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그래?”
“진현이는 나 말고 다른 사람 좋아해.”
“그 이연희인가 하는 여우 간호사?”
“…응.”
“에휴. 남자란 것들은. 그런 불여시가 뭐가 좋다고. 그런데 김진현, 걔는 이연희랑 사귀는 거야?”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
그럴지도 모르겠다.
일하며 수도 없이 마주치겠지.
서로 마음이 있으니 지금쯤 사귀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뭐?”
“맞을 거야.”
“……!”
진현이 날 좋아한다고?
정말로 설마?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 그리고 너 이렇게 가슴만 졸이고 있을 거야? 나 같으면 고백이라도 해보겠다.”
“나 그, 그런 것 못해.”
“너 그나마 친구 사이도 멀어질까 봐 그러는 것은 아는데… 어차피 걔가 다른 여자랑 사귀어도 멀어져. 차라리
그럴 바엔 고백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아? 그리고 혹시 알아? 너랑 김진현이랑 둘이 사귀게 될지.”
“…….”
진현이랑 사귄다고?
혜미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귀 끝까지 붉어졌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엔 김진현이 너한테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아. 이 언니의 감은 꽤 정확한 편이니 믿어봐.”
“…….”
***
그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김진현 선생의 능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이러다 과중한 업무로 사고가 날 확률이 높습니다.”
유영수의 말은 모두 옳았다.
‘곤란하군.’
“유 교수.”
“네?”
이게 무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경고였다.
‘뭔가 있어.’
“그럴 수는 없습니다.”
“……!”
“뭐?”
“…말씀해 주십시오.”
“사실은…….”
***
‘뭐하지?’
‘진현이는……?’
‘더 말랐던데… 밥은 잘 먹나…….’
‘도시락이나 싸다 줄까?’
내가 해준 밥을 먹는 것을 보면 얼마나 행복할까?
‘고,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맨날 밥을 거르는 친한 친구가 불쌍해서 해주는 거니까…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진현이와 나는 그래도 엄청 친한 친구니까.’
# 84
지글지글.
“읍.”
다른 요리들도 마찬가지였다.
‘다 인스턴트잖아.’
***
늘 살다시피 하는 병원이지만 예쁘게 원피스를 차려 입고, 도시락을 들고 진현을 만난다 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여보세요?
-무슨 일인데?
진현의 눈이 커졌다.
“……!”
그녀는 더듬거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이렇게 급하게 가려고 그래? 오랜만인데 잠깐만 앉았다 가. 지금 당직실에 아무도 없어.”
두근.
당직실에 그와 둘이?
그녀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
익숙한 전경이다.
그게 끝이었다.
“왜?”
“아, 아니야.”
진현은 웃었다.
“너 오늘 이상하다.
“…….”
이 좁은 방에서 침대 위에 딱 붙어 앉아 있다니.
“그런데 웬 도시락이야?”
진현은 잠시 침묵했다.
“고마워.”
“응?”
“아니야. 정말 잘 먹을게.”
“맛있어.”
“거, 거짓말.”
“정말 맛있어.”
진심이었다.
그것 빼곤 다 맛있었다.
“농담하지 마. 다 인스턴트인데.”
진현은 웃었다.
“맨날…….”
맨날 해줄 수 있는데.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
이후에도 둘은 서로 말이 없었다.
***
“응급실 많이 힘들지?”
“…….”
“힘들어도 밥은 잘 챙겨먹고.”
“…….”
답이 없다.
툭.
그녀의 어깨에 딱딱한 감촉이 닿았다.
“……!”
그의 머리였다.
“지, 진현아?!”
그러나…….
“쿨…….”
“뭐야…….”
‘계속 못 자서 피곤하겠지.’
욕심이 들었다.
‘사랑해. 정말로.’
그런데 완전히 잠이 든 것인지, 그의 머리가 스륵 앞으로 미끄러지더니 그녀의 가슴을 스쳐 무릎으로 떨어졌다.
“…….”
‘좀 더 긴 치마를 입고 올걸.’
‘이 바보.’
7 년을 넘은 짝사랑이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있었다.
같이 있고 싶다.
“사랑해.”
깊게 잠든 진현은 깨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그리고…
“……!”
‘미, 미쳤어.’
***
시계를 보니 저녁 11 시였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또 보고 싶었다.
‘뭐, 뭐야.’
꽃처럼… 아니, 꽃보다 예쁜 얼굴, 수줍게 도시락을 건네는 모습, 하얀 뺨이 붉어진 모습.
‘설마 내가……?’
그런데 그때였다.
띠리리.
“네, 김진현입니다.
“아, 네. 교수님.”
-지금 잠깐 시간 괜찮나?
“아, 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지?
***
“하지만…….”
“아… 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뭔가 일이 있었다.
# 85
85. 친구 (1)
“싫어하진 않습니다.”
“모든 파트에서 김진현 선생 칭찬이 아주 자자해. 오늘 알아보니 동양화 쪽의 대가(大家), 김종현 화백도 네가
치료했다며? 수술은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
그건 할 말이 없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다.
-괴물 김진현이니까.
괴물 김진현이니까.
“모든 교수님이 너에게 거는 기대가 커. 지금도 벌써 이 정도인데 나중에는 얼마나 잘할지. 김진현 선생은
나중에 어떤 서브 스페셜을 전공하고 싶어?”
서브 스페셜(Sub special).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아직 1 년 차니까. 지금 정하기엔 빠르지. 간은 어때? 강민철 교수님은 김진현 선생을 무조건 간 이식
파트를 시킬 생각인 것 같던데.”
나쁘진 않았다.
이전 삶에선 두 개의 길을 팠었다.
“감사합니다.”
존경할 만한 윗사람이었다.
“네?”
“이사장님이요?”
“그렇지?”
“하아.”
“……?”
“……?!”
진현의 눈이 커졌다.
“……!”
***
진현은 입을 벌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주임교수님께 직접 들은 이야기야.”
왜 이사장이 나를?
그럴 이유가 있나?
“……?”
“네, 알고 있습니다.”
“이종근 이사장님은 한국대 의대를 졸업 후, 대일병원 외과 교수, 과장, 병원장의 과정을 빠르게 거친 후
이사장이 되었어. 이상민 선생이 외과에 들어온 것도 아버지와 똑같은 코스를 밟기 위해서야.”
그것도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게 저와 무슨……?”
“……!”
“…….”
김진현은 할 말을 잃었다.
“지금 강민철 교수님과 연락이 안 되는데… 어쨌든 나도 이래저래 최선을 다해볼 테니 김 선생도 몸을 사려.”
“…….”
뚝. 뚝.
***
“아… 아. 괜찮다.”
“아니, 괜찮다.”
하례식.
“나는 못 갈 것 같다.”
이상민의 아버지, 이사장 이종근은 전(前) 외과 과장으로 외과의 중요행사에 가끔씩 얼굴을 비췄다.
‘어떻게 하지?’
허탈이 생각했다.
이전의 삶에서 겪은 풍부한 임상 경험과 한국대 의대에서 쌓은 의학 지식의 소유자인 그는 대단히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사장이 그를 찍었는데.
기업으로 치면 회장이 계약직 사원을 찍은 것이다.
‘젠장. 난 왜 맨날 이런 식이지?’
회귀 후 정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뭐 하나 노력하지 않은 것이 없다.
편하게 쉰 날이 거의 없을 정도다.
천재지변 급이다.
‘하, 빌어먹을.’
화도 났다.
이전의 삶 때도 자신의 노력과 실력과는 상관없이 쫓겨나야 했는데, 이번 삶에도 그래야 한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
누구지?
“…누구십니까?”
“……!”
김철우라고?
고등학교 때 일진?
진현도 갑작스러운 만남이라 놀라긴 했지만 간만에 친구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나도 몰라. 아버지랑 난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의사가 수술해야 한다고 난리를 피워서. 방금 상담하고 온 거야.
아버지는 지금 CT 검사하러 가셨고. 잠시 담배 피우러 나왔는데 어떻게 딱 너를 만났네. 반갑다.”
“어디가 안 좋으신데?”
김철우가 물었다.
“터질 수도 있다.”
“뭐?”
김철우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대동맥이 터져?
거의 다 죽는다고 봐야 했다.
# 86
86. 친구 (2)
“뭐, 대동맥이 늘어난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그럴 일이 거의 없지만… 만약 많이 늘어났으면 위험이 올라가.
그래서 예방적으로 수술을 해야 해.”
“그래?”
“그래.”
진현은 근처에 위치한 응급실로 가 전산에 접속해 김철우 아버지의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
“왜? 뭐 안 좋아?”
“교수님께서 수술 언제 하자셔?”
“최대한 빨리 받는 게 좋을 것 같다.”
진현은 CT 를 보며 말했다.
‘크기가 너무 커. 5.5㎝만 넘어도 위험하다 하는데… 대동맥 직경이 8㎝가 넘어. 8㎝가 넘으면 50%가 넘게
터지는데.’
풍선만 한 것이다.
그것 말고도 안 좋은 점이 있었다.
대부분 죽었다.
딱히 주의할 것은 없다.
다만…….
“만약 갑자기 아파하시거나 이상한 점이 보이면 곧바로 응급실로 달려와. 늦으면 절대 안 돼.”
“바로?”
“그래.”
‘괜찮으셔 할 텐데…….’
‘괜찮겠지?’
***
“다음 주가 벌써 하례식인가요?”
“네, 이사장님.”
민 비서가 공손히 답했다.
“장소는 다 섭외했나요?”
이종근은 문득 물었다.
“…….”
워낙 잘 지냈기 때문이다.
실수는 무슨?
환자들의 만족도도 극히 높았고 심지어 천재 외과의사로 소문난 그에게 진료받으러 멀리서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천재 외과의사.
너무 뛰어난 탓이다.
이종근은 혀를 찼다.
***
“그러게. 술 한잔 줘야 하는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부산과 서울 거리도 아니고 이태원과 청담이니, 이사장이 수술팀이 출발하는 것을 아무리 훼방을 놓아도 최소 1
시간 안에는 도착할 것이다.
“네, 감사합니다.”
‘괜찮겠지.’
***
저녁 7 시 50 분.
후두둑.
있을 유, 비, 없을 무, 환자 환.
“아, 네. 네!”
“대충하고 가.”
“대신 내줄까?”
응급실이었다.
새로 환자가 온 것이다.
“네, 김진현입니다.”
“……!”
‘설마?’
***
“지, 진현아…….”
소생실 안에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고 그 가운데 핏기가 하나도 없는 피부로 의식을 잃은 채
헐떡거리고 있는 중년 남자가 누워 있었다.
김철우와 똑 닮은 얼굴.
그의 아버지였다.
“동맥류 파열이에요.”
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바이탈(Vital)은 어떻습니까?”
“응급 피 검사는요?”
“중심정맥관 잡고 있습니다.”
그만큼 급했다.
“…….”
“네… 네 말 듣고 바로 수술을 했어야 하는데… 크흑. 고집부리시더라도 억지로라도 수술을 시켰어야 하는데…
크흑.”
“살 수 있어.”
“저, 정말?”
지난 삶에서 한때 혈관 세부 전공을 했던 진현은 동맥류 파열을 집도한 경험들이 있었지만, 혼자의 몸으로는
진행할 수 없다.
‘지금 수술장에 들어가서 내가 절개를 넣고 기본적 처치를 하고 있으면 때에 맞춰 도착할 거야. 그러면 살릴 수
있어.’
메디컬 환생
지은이 | 유인
펴낸이 | 문상철
NEW EPISODE
교정 · 교열 | 정성훈
편집 · 제작 | 정성훈
표지일러스트 | stc
타이포그래피 | 기갈
브리드 BREATHE
등록 | 제 2015-000222 호
대표전화 | 02-3443-7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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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202-153-8(05810)
# 87
87. 친구 (3)
“응급 환자입니다.”
-무슨?
-……!
-저 김진현 선생?
“네?”
그런데 목소리가 이상하다.
굉장히 곤란한…….
“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어째서입니까?”
-그게…….
-취하셔서.
“네? 그, 그게 무슨?”
-교수님께서 좀 취하셔서…….
진현은 입을 벌렸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어서 아닐 것이라 생각은 하지만, 얼마 전 이사장의 시커먼 속내를 이야기한 유영수
교수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띠리링!
“네, 김진현입니다.”
“……!”
‘빌어먹을. 이게 정말로… 정말로 이사장과 이상민, 당신들 수작이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 절대로!’
“수술팀은 오지 않습니다.”
“네?! 그러면?”
그런데 어떻게?
“제가 하겠습니다.”
“네?”
“문진아. 회식 갔냐?”
-이제 나가려고. 왜?
-엥? 그게 무슨 말이야?
“철우야.”
“…….”
“…수술하면 살 수 있는 거야?”
진현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잔인한 설명이었다.
“……!”
거의 죽는단 뜻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철우야.”
“…응?”
“……!”
김철우의 눈이 흔들렸다.
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부, 부탁한다…….”
그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
그때 이사장 이종근은 이태원의 최고급 고깃집에서 민 비서가 챙겨온 로얄 살루트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앓던 이는 김진현이었다.
‘생각보다 너무 중한 환자가 와버렸어. 뒤처리가 번거롭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정리는
되겠군.’
물론 당직 교수의 회식 때문에 수술에 차질이 빚어져 환자가 잘못되면 그건 김진현의 책임이 아니라 수술팀의 연대
책임이었다.
사실 김진현이 책임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응급실 당직 레지던트로서 1 차적으로 진료를 완벽히 했는데, 교수가
안 와 수술을 못한 것이니까.
이종근은 술을 들이켰다.
‘대동맥 파열은 단순한 장출혈과는 다르지. 혈관외과의 전문의가 수술해도 사망률이 90%에 육박하는 중한 질환.
김진현 그놈이 아무리 괴물이라도 치료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좋군.’
로열 살루트가 꿀처럼 넘어갔다.
***
‘사망률을 낮추는 EVAR 를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상황도 안 되고, 해부학적으로도 어려우니. 개복 수술밖에
답이 없어.’
“대동맥류 파열이야.”
“하, 하지만…….”
황문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걸 1 년 차 2 명이서 진행하자고?
“문진아.”
“응?”
“안 하면 무조건 죽어. 김철우의 아버지야. 반드시 살려야 해. 나를 믿어줘. 우리 둘이서 살릴 수 있어. 아니,
반드시 살릴 테니 따라줘.”
불가능하다고.
“고맙다.”
“마취 끝났습니다. 외과 선생님, 그런데 정말 수술 진행할 건가요? 너무 안 좋은데… 아무리 선생님이 괴물이라
불리는 김진현 선생이라지만…….”
‘그만큼 안 좋으니까.’
# 88
88. 친구 (4)
수술 중 사망하는 것을 뜻한다.
안 하면 무조건 죽는다.
“네, 진행하겠습니다.”
“하아.”
“감사합니다.”
최대한 빨리.
모른다.
단 1 분도 못 버틸지도 모른다.
“시작합니다.”
찌익.
“배 열 것입니다. 혈압 확인 잘 부탁드립니다.”
“네.”
“엽니다!”
찌익.
파앗!
피 바가지를 뒤집어쓴 듯, 진현의 얼굴, 목, 몸이 환자의 피로 점철됐고, 모니터의 혈압이 쭈욱쭈욱 떨어졌다.
띠잉! 띠잉!
“혈압 괜찮습니까?”
“문진아!”
“으, 응?”
“어, 어?”
“이걸로 막아달라고.”
‘잘 따라줘야 하는데…….’
상황이 급하다 보니 그런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처음 대동맥류 수술을 접하는 황문진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수축기 혈압 60!
심각한 쇼크 상태였다.
“문진아.”
“으, 응?”
“으, 응!”
“미, 미안.”
진현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평소에도 수술장에서 손이 둔하다 교수님들께 구박을 심하게 받았었다.
중 교수 급이 1 명, 치프 급이 2 명이나 됐다.
찌직!
“이제 병원 안에 피 다 떨어졌어요!”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이게 정말로… 정말로……! 이상민, 네놈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절대로!’
그런데 그때였다.
기적이 일어났다.
드르륵.
수술장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온 것이다.
“……?!”
진현은 눈을 깜빡였다.
부드러운 목소리.
유영수 교수였다!
이젠 할 수 있었다.
“아니… 응급 수술팀 치프가 곤란해하는 걸 봐서. 당직인 김수현 교수님이 이사장님 때문에 완전 취해 있더라고.
그래서 어떻게든 나라도 도와주려고 뛰어왔지.”
“…가, 감사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어떤……?”
“……!”
진현의 눈이 커졌다.
“시간 없으니 한번만 더 물어볼게. 사실 난 간이식 전문이라 혈관 수술을 잘 몰라. 그저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온
거지. 할 수 있으면 네가 집도해. 만약 못하겠으면 나한테 넘기고. 어떻게든 내가 해볼 테니!”
“……!”
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겸양을 떨 때가 아니다.
1 년 차인 김진현이 집도의, 정식 교수인 유영수가 퍼스트 어시스트, 황문진이 세컨드 어시스트인 해괴한
조합이었다.
김진현, 유영수.
“클램프 주십시오!”
두르륵.
철컥!
“하아…….”
‘어떻게 이렇게?’
“…없습니다.”
유영수는 혀를 찼다.
‘정말…….’
하늘이 내린 천재.
아직 수술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해야 해. 대동맥을 집어놨으니 이 밑의 부분은 한 방울도 피가 안 흐르고 있어. 늦으면 다리, 척추,
내장… 전부다 썩을 거야.’
“김 선생이 해.”
“네?”
“하, 하지만…….”
진현은 말을 더듬었다.
“……?”
# 89
89. 친구 (5)
어쩔 수 없이 김진현은 전기 칼을 들었다.
***
아무도 안 믿을 이야기다.
‘강민철 교수님이 틀렸어. 이 아이는 다듬지 않은 최고의 원석이 아니야. 이미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존재야.
이런 하늘이 내린 천재를 쳐내려 하다니.’
“네, 감사합니다.”
“…….”
글쎄……?
유영수는 혀를 찼다.
“가서 좀 자. 내가 대신 볼 테니.”
“아닙니다.”
그 말에 진현은 당황했다.
“그러면 가서 쉬어.”
“…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
‘이상민…….’
***
지금 시각은 새벽 5 시 30 분.
“이상민?”
-왜, 진현아?
태연한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간신히 참으며 이야기했다.
-나 환자 소독해야 하는데?
“중요한 이야기야.”
-흐음, 바쁜데 꼭 지금 봐야 해?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진현은 핸드폰을 끊고 병원 뒤편의 정원으로 내려갔다.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이고, 시간도 일러 아무도 없었다.
‘담배가 땡기는군.’
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하냐? 암 검진이야 나중에 받으면 되지. 조기에 발견하면 거의 100% 치료 가능하고.’
당연하지. 그럴 수밖에.
가면 같은 미소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무슨 이야기?”
“어제 일.”
“어제?”
“수술팀 사정이 안 되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어? 그리고 어차피 너 잘하잖아. 친구인 네가 알아서 다 잘해낼
것이라고 믿었지.”
“친구?”
“응, 우리 친구잖아.”
“뭘?”
“아닌데?”
그는 손을 들어올렸다.
“아니라고?”
“응.”
진현은 낮게 물었다.
“응.”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퍼억!
***
“크윽?!”
콧잔등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그의 얼굴이 흔들렸다. 하지만 진현은 한 번으로 끝내지 않았다.
퍼억! 퍼억!
“놔.”
“뭐?”
“놓으라고, 김진현.”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왜 그랬냐고? 궁금해?”
“…….”
이상민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
“널 망가뜨리려 한 거지.”
“……!”
“이유가 궁금해? 간단해. 난 언제나 네 뒤였어. 그래서 항상 내 앞에서 걸리적거리는 널 망가뜨려 보고 싶었어.
철저히. 비참하게!”
“…….”
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무서워? 무서우면 내가 이전에 이야기했던 데로 100 억 받고 의사를 그만둬. 그러면 이전처럼 친한 친구로
널 대해줄게.”
퍼억!
“……!”
“절대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거야. 알겠어, 이 개자식아?!”
‘빌어먹을, 개자식.’
원래 이사장이 자신을 쫓아내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외과를 그만둘까 하는 고민도 했었다.
‘후회하게 해주겠어.’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
“그래, 김진현.”
치익.
# 90
“하, 그게 말이 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늘이 내린 천재.
가끔 인류사(人類史)를 보면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도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보이는 타고난 천재들이 있다.
“…….”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아니라 우길 수도 없고…….
“그러면? 또 무슨 일을 했는데?”
그 말에 또 외과가 뒤집어졌다.
췌담도 파트, 위 파트, 대장 파트, 육종 파트, 갑상선 파트, 유방 파트… 모든 과가 진현에게 눈독을 들였다.
“그게…….”
“교수님, 김진현입니다.
호의가 담긴 목소리였다.
-그래, 수술해야겠군.
“네, 수술 준비하겠습니다.”
-자네가 해.
“네?”
김진현은 반문했다.
뭐라고?
그러나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자네가 해.
“저… 제가 말입니까?”
“…….”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아니, 물론 담낭염 수술이야 어려울 것 없지만 1 년 차인 나한테 하라니?
-대동맥류 파열에 비하면 담낭염 수술은 애들 손장난이지. 그렇지 않나? 하여튼 잘 부탁하네. 어차피 나 병원
근처에 있으니 수술 중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하고. 10 분 안에 달려갈 테니.
“…….”
그게 시작이었다.
“장출혈? 위치가 어려운가? 에이, 어려운 부위도 아니네. 지난번에 해봤잖아. 그 정도는 그냥 김 선생이 해.
우리 집 병원 바로 옆이니 잘 안 풀리면 연락하고.”
“…….”
환자는 양질의 치료를 받아 행복했고, 응급의학과는 깔끔, 신속, 정확한 일 처리에 행복했고, 당직 교수는 몸이
편해 행복했다.
단 한 명, 김진현만 불행했다.
***
“빌어먹을.”
“고 교수.”
“네, 네! 이사장님.”
“…….”
“죄, 죄송합니다.”
이젠 손을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한다.
김진현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전엔 외골수 강민철 혼자만 김진현을 주목했지만, 지금은 외과의 교수 중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대낮이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네, 네!”
고영찬과 민 비서는 도망치듯 이사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이종근은 자신의 아들 이상민을 노려봤다.
“넘어졌어요.”
“한심한 놈.”
이종근은 혀를 찼다.
“…….”
모든 외과 교수들이 그를 주목하고 있는데 어떻게 무리한 수작을 부려 생트집을 잡겠는가? 아무리 이사장이라도
그건 무리다.
‘빌어먹을. 어디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놈이 나타나서…….’
사실 이종근이 이런저런 수작을 부리지 않았으면 김진현은 이렇게까지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유능한
레지던트 정도였겠지.
하지만 그의 수작들은 모두 김진현의 날개가 되어버렸고, 김진현은 레지던트 주제에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 91
만년 2 등에 불과한데.
“한심한 놈.”
“이기면 되는 거죠?”
“뭐?”
이기긴 뭘 이겨?
“…그래. 네가 할 수만 있다면.”
“네, 알겠어요.”
***
꽤 시간이 지났으나 예상과 다르게 이상민과 이사장 측에선 별다른 대응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아니야. 강민철 교수님이 올 때까지만 버티자고. 강민철 교수님이 오시면 아무도 너 못 건드려.”
유영수는 혀를 찼다.
‘몸이 안 좋으신가?’
그러고 보니 이전 삶에서 교환교수로 요양할 때 잠깐 세인트 죠셉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다.
“어차피 나 이사장 측과는 사이 안 좋아. 나뿐 아니라, 강민철 교수님 밑에 교수들은 다 안 좋을걸? 불순분자로
찍힌 지 오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정 일이 안 풀리면 때려 치면 되니까.’
“아, 네. 잘 먹겠습니다.”
“네.”
***
진현은 손을 내저었다.
김 교수님이라니.
곤란하기 짝이 없는 농담이다.
“입원 안 해도 되고?”
노티(Notify).
“무슨 환자인데요?”
“그게…….”
왜 저러지? 내가 무섭나?
하지만 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외국인?”
진현은 고개를 갸웃하고 외상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아니?”
“다쳐서.”
“아…….”
크게 넘어진 것인지 살이 형편없이 벗겨져 있었다.
“어쩌다 다치셨습니까?”
“…….”
“어쨌든 조심하십시오.”
“소독해 드리겠습니다.”
“아, 아야…….”
“좀 아픕니다.”
“잠깐 참으십시오.”
진현은 타박했다.
“다 끝났습니다.”
“네, 집에 가서 매일 소독하세요.”
“왜요? 계속 아프세요?”
“아니…….”
“……?”
“미스터 김.”
“네?”
“저 입원하면 안 돼요?”
“……!”
진현은 놀랐다.
“미, 미스 엔더슨?”
***
“전망이 좋네요.”
VIP 병실은 이사장실이 위치한 꼭대기 층 바로 밑에 있어 한강과 강북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습니까?”
그녀는 살짝 웃었다.
“…….”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은…….”
“……?”
띠리리!
응급실이었다.
“네, 김진현입니다.”
목소리가 다급했다.
“네,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아, 네.”
“하아.”
***
물론 이해는 했다.
‘김진현 선생이 응급실에 있으니 엄청 좋은데? 진짜 소문처럼 응급실 전담 교수로 발령을 내버릴까?’
이런 농담들을 서로 할 정도였다.
“하아, 도대체 이 응급실 스케줄은 언제 끝나는 거야? 설마 평생 응급실에 박아놓을 생각은 아니겠지?”
하지만 진현은 하도 수술을 해대고, ‘명의(名醫) 김진현 선생’을 찾아온 사람이 많아 입원을 마구 시키고
있었다.
‘나 이래도 되는 거야?’
에이미였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일은 잘 해결됐나요?”
“네.”
“다리는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살짝 웃었다.
“그렇군요.”
진현은 웃었다.
“며칠만 더 있다 가도 돼요?”
어차피 에이미는 상처가 심해서가 아니라 지친 심신을 달래러 휴가 차 입원한 것이니, 의학적으로 신경 써줄 것은
없다.
“……?!”
# 92
“네, 말씀하십시오.”
“미스터 김.”
“……?”
도대체 무슨 일이지?
“저 잘릴 것 같아요.”
“……?!”
진현은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무슨 문제입니까?”
“네?”
“……!”
“어려울까요?”
“기획서와 중간 보고서들이에요.”
“흠…….”
“천천히 봐주세요.”
물론 그녀도 진현이 아무리 천재라도 한 번 본 것만으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도 이전 TC80 프로젝트를 해결할 때의 천재성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희망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탁.
그런데 이십 여분 지났을 때 진현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네?!”
에이미는 깜짝 놀랐다.
고작 몇 분 보고 문제점을 파악했다고?
말도 안 된다.
“무엇인가요?!”
“그런데…….”
“……?”
“……!”
진현의 눈은 진중했다.
지난번엔 학생의 신분이라 2-3 억이란 헐값에 계약을 했지만 이번엔 그렇게 헐값에 해줄 수 없었다.
‘현 단계에서는 입증되지 않은 아이디어에 불과할 뿐이니 지분까지 요구할 순 없지만.’
‘그래도 최소 5 억은 받아야지.’
“드리겠어요.”
“…….”
당연한 말이다.
“1 상에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심장 부정맥 쪽으로… 대신 효과는 없고요. 용량을
30mcg 정도로 낮추고 식후가 아닌, 식전에 복용해 위의 산과 반응을 시키면 원했던 효과가 나올 것으로
봅니다.”
“……!”
“이 약은 분자구조식상 최소 30mcg 정도까지는 용량을 낮춰야 원하는 G protein 수용체에 작용할 것입니다.”
“…….”
물론 이상반응이 나왔을 때, 용량을 조정해 봤지만 30mcg 까지 파격적으로 용량을 낮출 생각은 못했다.
이유야 모르지만 지난 삶에 비교할 때 지금 프로젝트는 용법, 용량 면에서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어차피 인류의 인체 구조가 변하진 않았을 테니 지난 삶처럼 프로젝트의 내용을 바꾸면 기대했던 약 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
에이미의 요청에 진현은 핸드폰 시계를 봤다. 당장 급한 환자가 없으니 어려울 것은 없다.
몇 개를 못하겠는가?
더구나 그는 이미 답을 전부 알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발을 담그는 것이 아닌,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니, 어마어마하단 단어도 부족한 엄청난 실적이 될
것이다.
‘이상민.’
그렇다면 좋다.
실력으로 눌러주겠다.
무슨 수를 써도 건드릴 수 없게.
“네.”
가능성이 있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Lancet!
세계 3 대 의학 저널들.
탈탈 털어도 3 명?
그것도 1 저자로!
고작 첫걸음이란 것을.
# 93
93. 진현의 마음
진현은 피식 웃었다.
‘무슨 할 말이지?’
“아니.”
“그런데 무슨 할 말?”
“치. 빨리 먹어봐요.”
진현은 물었다.
당돌한 말이었다.
“왜요? 싫어요?”
“아니…….”
“치.”
“어떤?”
“……?!”
“연희야?”
“…어떤?”
이윽고 연희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좋아해요.”
“……!”
고백이었다.
“나, 나는…….”
진현은 침묵했다.
나쁘진 않았다.
왜냐하면…….
“미안.”
“……!”
“어, 어째서죠?”
“나는…….”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혜미를 좋아했다.
***
“시연이요?”
박시연.
7 살의 여아였다.
“혈우병(Hemophilia)?”
혈우병.
“네, 맞아요.”
“네?”
“굉장히 유별나요. 망상증 비슷한 증상도 있어 꼭 조심해야 해요. 교수님 중 고소당한 분도 여러 명이에요.”
“…….”
“……!”
어쩔 수 없었다.
“의, 의사선생님이세요?”
“응, 안녕.”
“괜찮아요.”
‘아직 어린데…….’
“누구세요?”
“레지던트? 몇 년 차?
“1 년 차입니다.”
“이 아이 무슨 아이인지 아세요?”
“네,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 김진현입니다.”
-…….
“교수님?”
“네?”
-정말 미안한데 잠시만 따로 볼 수 있을까?
“……?”
“무슨 일이십니까?”
“……?”
“그 아이 자네가 대신 봐줄 수 없을까?”
“……!”
“…네.”
진현은 입을 벌렸다.
오승태는 인품도 훌륭하고, 실력도 뛰어난 ‘좋은 의사’였다. 그런데 2 번이나 고소를 당했다고?
“…알겠습니다.”
‘어떻게 하지?’
그런데 응급실에 내려오니 박시연의 보호자가 진현을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아, 네.”
“……!”
그러나…….
생각해 보면 다 안 된 사람들이다.
# 94
지혈이 비교적 어렵긴 했으나 미리 응고인자를 충분히 보충해 놓아 큰 출혈은 생기지 않았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수술은 잘 끝난 건가요?”
환아의 어머니가 물었다.
그건 아니다.
“일단 수술 자체는 잘 끝났지만 시연이 같은 경우엔 혈우병 때문에 수술 뒤에도 출혈이 있을 수 있어 앞으로도 잘
봐야 합니다.”
“잘 봐주세요. 꼭.”
진현은 수시로 박시연 환아를 살폈고 그런 정성 때문인지 아이는 별문제 없이 차도를 보였다.
“의사 선생님이다.”
“이제 배 안 아프니?”
시연이는 밝게 웃었다.
‘아기라…….’
‘어떻게 해야 할까…….’
“선생님, 오셨어요?”
“아, 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진현은 손을 저었다.
“아, 괜찮습니다.”
“또 오시나요?”
“네, 조금 있다 뵙겠습니다.”
이상민이었다.
그는 셀프 회진을 돌고 있던 듯했다.
“유명한?”
“아직 잘 봐야 한다.”
“닥쳐. 입조심해.”
“재수없는 녀석.”
***
그날 밤, 응급실에서 진현은 또 의외의 사람을 만났다. 아니, 의외는 아니다. 같은 병원에서 근무 중이라 자주
보는 게 당연하니.
혜미였다.
“어, 안녕?’
“어… 어, 응.”
둘은 서로 어색하게 인사했다.
혜미는 검은 정장에 흰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평소와 다르게 이지적인 매력이 느껴졌다. 한 갈래로 묶은 머리도
지적인 느낌을 주었다.
맨날 보던 사이건만 진현은 괜히 설레었다.
“응급실에는 무슨 일?”
“아… 환자 보러.”
“그렇구나.”
“…응.”
이연희와 굉장히 가까운 사이인 그 간호사는 연희의 고백 결과를 다 알고 있었고 이렇게 말했다.
그때 진현이 말했다.
“혜미야.”
“으, 응?”
“지금 바빠?”
“아, 아니.”
“어… 응.”
‘정말 혹시……?’
“네? 증상이?”
“……!
“환자 안 좋아?”
“지, 진현아!”
“응?”
“…나중에 커피 사줘. 꼭. 기다릴게.”
그런데 그 마음은 병동에 도착하는 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생각보다도 시연이의 상태가 더 안 좋았던 것이다.
***
“가래는 안 나오니?”
“낮아요. 88%요.”
“병원성 폐렴입니다. 병원 치료를 받으며 확률적으로 걸리는 감염증으로, 복부의 담낭염 수술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곧바로 적절한 항생제가 투입되기 시작됐다. 빠른 조치 때문인지 폐렴은 더 악화를 보이진 않았다.
정상이 13 인데 9.
‘이런, 자발출혈!’
“아, 역시. 1 년 차한테 환자를 맡기는 게 아니었어! 아, 어떻게 하지? 당신! 시연이가 잘못되기만 해봐! 절대
가만 두지 않겠어!”
진현은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지혈을 하느라 보호자를 안정시킬 시간이 없었다.
“……!”
“……!
‘얼마나 힘들까?’
“네!”
그 뒤 전쟁 같은 밤이 이어졌다.
“……?”
진현은 보호자를 따라 나왔다. 인적 드문 복도에서 보호자가 말했다.
진현의 눈이 커졌다.
“저도 알아요. 선생님이 누구보다도 시연이를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시연이가 안 좋을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안정이 안 돼서… 모든 게 의심스럽고…….”
# 95
“저, 시연이 아프면서 남편과도 이혼했어요. 직장에서도 해고당하고. 치료비 때문에 집도 팔고…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 저한테 남은 것은 시연이밖에 없어요.”
“…….”
“선생님, 그거 아세요?”
“네?”
보호자는 웃었다.
***
이후에도 몇 번 고비가 있었지만 시연이는 잘 버텼다. 시연이와 보호자, 진현의 관계도 깊어졌다.
라뽀(Rapport).
“웅… 싫은데.”
“응, 왜?”
“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안녕. 잘 지내?”
“…그래.”
“그건 왜 물어보지?”
“뭐?”
“응.”
설마 놀리는 건가?
“그래, 고마워.”
독약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수혈은 하고 있습니까?”
-네, 3 분의 1 정도 들어갔어요.
이상하다? 오늘 아침에 수치가 그렇게까지 나빴던 것도 아니고, 수혈까지 추가로 하고 있는데 왜 피가 나지?
옳은 의견이었다.
“와, 의사 선생님이다.”
“선생님 오셨어요?”
망상증을 앓았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병동의 간호사들은 ‘김진현의 기적’이 보호자를 변화시켰다
감탄했다.
“다리에 피가 난다 해서 보러 왔습니다.”
“여기에요. 크게 나는 것은 아닌데…….”
진현은 시연이에게 들어가는 약을 일일이 체크했다. 시연이의 작은 몸에 주렁주렁 여러 수액이 매달려 있다.
당연히 항응고제 따위는 없다.
‘설마… 아닐 거야.’
“왜 그러세요, 선생님?”
하지만…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네?”
“……!”
항상 날 서 있던 그녀가 살짝 웃었다.
“…네, 감사합니다.”
시연이가 칭얼거렸다.
“응, 알았어.”
“응급이요?”
“네.”
“누구십니까?”
진현의 손이 떨렸다.
퍼억!
진현은 이를 바득 갈았다.
“네!”
갑작스러운 사고에 걱정으로 다시 몸서리를 치는 보호자를 간신히 안정시킨 후 진현은 어딘가로 향했다.
그는 이를 바득 갈았다
곧 도착한 곳은 14 층의 당직실.
“내려와.”
“응?”
“내려오라고.”
“무슨 일인데?”
“하나만 묻자.”
“뭘?”
“네 짓이냐?”
“그러니까 뭘?”
“박시연. 항응고제.”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일이야?”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럴 리가.’
“그래, 정말로?”
진현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냥은 못 가지.”
“응?”
이상민이 눈을 크게 뜨는 순간.
퍼억!
“크윽?! 너?”
차갑게 일갈했다.
“……!”
홀로 남은 이상민은 피식 웃었다.
***
“무슨?”
# 96
“……!”
“우리 랩에서 확인할 수는 있네. 다름 사람도 아닌, 자네의 부탁이니 해주겠네. 그런데 단 한 가지. 이거
잘못된 일에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지?”
“그 반대입니다.”
진현은 짧게 답했다.
***
‘이 빌어먹을 자식.’
“네? 그게 무슨?!”
“이게 뭡니까?”
“그런데요?”
“이 혈액을 맞고 갑작스런 응고 수치의 문제가 생겨 환아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국대
약학 연구원에 확인결과 혈액에 굉장한 고농도의 항응고제가 섞여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부서장은 몸을 떨었다.
그는 진현에게 매달렸다.
패닉에 빠진 목소리였다.
“그렇죠?! 이건 분명…….”
그때 진현이 말했다.
“그, 그러면……?”
‘기다려라, 이상민.’
진현은 응급실을 황문진 및 다른 동료에게 부탁하고 CCTV 에 매달렸다. 지금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티끌 하나 안 놓칠 집중력으로.
***
혈액에 혹시 지문이 남았나 확인도 해보고 은밀히 수사도 부탁하고, 여러 방법을 썼으나 모두 무용했다.
적절한 조치를 취한 진현에게는 뭐라 하지는 않았지만, 보호자는 병원 측에 크게 항의했고 덕분에 혈액원 직원이
부서장을 포함해 3 명이나 사표를 썼다.
“몰라! 안 가!”
‘이상민… 이 개자식.’
***
“네가 한 짓이냐?”
“뭘요?”
이상민은 반문했다.
“혈액원의 일 말이다.”
“네.”
“네.”
“최근 담낭 쪽으로 건강이 안 좋으시다더라. 조만간 대일병원에서 수술을 받겠다고 하시는데, 그 수술 너한테
주마.”
“……!”
“물론 집도는 우리 쪽 사람인 민성수 교수가 할 거고, 너는 퍼스트 어시스트로 들어가도록 해.”
퍼스트 어시스트에 불과하더라도 현(現) 총리의 수술에 참가하는 것은 대단한 명예로 항상 험담만 퍼붓는
이사회에도 한 방 먹일 수 있는 기회였다.
***
김창영은 이전 진현과 만났을 때 비해서 훨씬 건강해진 모습으로 소탈하고 겸손한 이미지는 그대로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 97
“……!”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하, 하지만 김진현 선생은 교수는커녕 아직 전문의도 아니고 수련 중인 전공의일 뿐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심이…….”
“담낭염 수술이 어려운 수술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알아보니 그간 김진현 선생님은 천재적인 실력을 통해 많은
수술을 훌륭히 해냈다고 하더군요. 저는 가급적 김진현 선생께 수술을 받고 싶습니다.”
아무리 담낭절제술이 레지던트들도 많이 집도하는 간단하고 기본적인 수술이라지만, 명색이 총리인데 유명한
교수에게 받아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이었다.
김창영도 다른 교수에게 수술을 받을까 고민했지만, 왠지 이전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김진현이 끌렸다.
그러나 그런 것도 아니고 김진현 선생도 대일병원 내에서 수술 잘하기로 유명한 천재 젊은 의사니 별 무리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애초에 김창영 총리는 이전 자신의 생명을 구했던 김진현을 염두에 두고 대일병원을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지긋지긋한 이름이었다.
***
그리고 며칠 뒤. 대일병원의 자금을 지원하는 대일 홀딩스의 본사에서 이사회가 소집돼 이종근의 속을 한 번 더
뒤집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리 대일병원이 그룹 차원에서 사회 환원을 목적으로 운영한다지만, 그래도 이런 경영은
곤란하지요.”
이사회 멤버, 즉, 가문의 친인척들의 공격에 온화한 미소를 띤 이종근의 얼굴이 씰룩씰룩 흔들렸다.
‘이 망할 것들이!’
그리고 늘 그렇듯 회의에 마지막에 이르러 병원의 후계자인 이상민의 이야기가 나왔다.
‘빌어먹을 년.’
이종근은 자신의 딸, 이혜미를 보며 주먹을 떨었다.
“…무슨 일이죠?”
“오빠요?”
혜미는 기가 찼다.
오빠? 그 존속살인범이?
“너, 너!”
이종근이 눈을 부라리며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저릿한 통증에 혜미는 비명을 질렀다.
“악! 놔요!”
“이사회를 움직이는 것 그만둬!”
“싫으면요?”
“뭐?”
“젠장! 빌어먹을!”
이대로는 안 됐다.
***
“…….”
많은 논의 끝에 집도는 김진현, 퍼스트 어시스트는 교수인 유영수, 세컨드 어시스트는 교수 발령을 기다리는
전문의 중 한 명이 맡기로 했다.
민망할 정도로 기형적인 팀 구성이었지만, 혹시라도 김진현이 실수를 할 시 곧바로 손을 바꾸기 위한 조치였다.
총리의 수술을 마치면 김진현 그놈이 또 얼마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과거 비행기 안에서 김창영의 목숨을 구해준 진현이 이번 수술까지 성공적으로 마치면 향후 총리의 전속 주치의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 98
“너… 설마?”
다만 부탁했다.
“이사장님.”
“……?”
이상민은 말했다.
***
그렇게 비교적 편한 나날들을 보내고 김창영 총리의 수술 전날, 응급실에서 의외의 연락을 받았다.
“네, 김진현입니다.”
-아, 진현아.
“혜미?”
혜미가 환자 문제로 접촉한 것이다. 뭐, 내과 의사인 그녀가 환자 문제로 외과 응급실 의사인 진현에게 컨택
(Contact)하는 것은 특별한 일은 아니긴 했다.
“지금 바로 가볼게.”
“응. 무슨 환자야?”
“응. 고마워.”
용무를 마친 혜미는 응급실 문 쪽으로 향했다.
“혜, 혜미야!”
“응? 왜?”
“그냥 가게?”
“그, 그냥 안 가면?”
하지만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탓일까? 이상하게 가슴이 뛰며 안정이 안 됐다.
“검은 물?”
두근.
“그래?”
“으, 응.”
논현동의 룽고(Lungo).
‘설마?’
“싫어?”
***
“그건… 없었지만.”
‘정말로?’
“어?”
“어? 어? 잠깐만.”
“뭐 입고 갈 거야?”
“그냥 이거…….”
“그러면?”
“이런 것을 입어야지!”
“괜찮아. 입어봐.”
“하지만…….”
“괜찮아?”
괜찮냐고?
김수연은 입을 벌렸다.
이슬을 머금은 듯 청순하게 아름다운 얼굴 아래, 블라우스 속에서 몸의 실루엣이 은은히 드러났다.
김수연은 중얼거렸다.
“어, 어.”
***
“문진아. 너 정장 있냐?”
“그렇지?”
“무슨 약속 있어?”
“어.”
“왜?”
황문진의 눈이 묘해졌다.
“누구?”
내가 바본가? 딱 보니 견적 나오는구만.
“그렇지?”
“그래.”
마음을 깨달은 후 지금까지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그녀도 자신에게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거니까.
“아, 하필 지금.”
***
“논현역으로 가주세요.”
“김진현.”
흐트러지는 목소리.
비틀린 애증이었다.
부르릉!
***
‘이제 곧 도착하겠지?’
보고 싶었다.
“논현역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10 분은 더 걸릴 텐데.’
‘빨리. 빨리.’
진현은 앞만 보고 걸었다.
카페 룽고는 숨은 명소답게 복잡한 골목을 통해야 도착할 수 있었다. 골목 안으로 들어갈수록 인적이 점점
없어졌다.
부앙. 부앙!
‘알아서 피하겠지.’
# 99
부르릉! 부아앙!
“어?”
고개를 들리자 시야 가득 들어온 정체불명의 검은색 스포츠카.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퍼억!
쿠웅!
치명상을 피할 수 없는 부상이었다.
***
‘연락이라도 한 통 주지.’
‘진현?!’
이상민이었다.
“이상민?”
“응, 잘 지냈어?”
‘뭐지?’
“여긴 무슨 일이지?”
“우연히?”
“응, 우연히.”
“저런. 너무한 것 아니야? 가문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내 뒷욕을 한다면서. 너 때문에 병원에서 쫓겨나게
생겼어.”
“……!”
혜미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상민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 이야기하려고 온 거야?”
이상민은 일어섰다.
“……?”
“뭐?”
‘설마?!’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설마. 아닐 거야.’
진현이었다.
‘아닐 거야. 절대로.’
“진현인?!”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말에 그녀는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안 돼! 진현아!’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
혜미는 울부짖었다.
뚜우- 뚜우-
“이상민! 안 돼!”
띠리링.
“하아.”
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혜미가 몇 번이고 뒤졌지만 진현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내팽개쳐졌던 자리에는 아무도 쓰러져 있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다음 날 오전 6 시 10 분.
“그래요?”
외과의사들은 발을 동동 굴렸다.
“네 짓이냐?”
“뭘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이종근 본인도 마찬가지이니 타박할 입장은 아니긴 하다.
다만 술집 여자인 이상민의 어머니는 정신병을 앓았을 뿐, 심성 자체가 나쁘진 않았는데 어디서 이런 성격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래, 그래야지.”
민성수 교수를 집도의로, 그리고 이상민을 퍼스트 어시스트로 수술을 진행하면 해피엔딩이다.
“저… 이사장님.”
“왜요?”
“하지만…….”
“……!”
“네, 알겠습니다.”
“네.”
“오셨습니까, 이사장님.”
시계를 보니 6 시 35 분.
“어서 와요.”
그런데 그때였다.
“……!”
어떻게?
그런 사고를 당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더구나 몸 어디에도 부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살짝 파리하긴 했지만 다른 부위는 멀쩡했다.
“……!”
진현의 말이 옳았다.
그리고 그 순간.
“……!”
# 100
100. 징벌
“으, 응. 흐윽.”
다행이었다.
정말… 정말로.
***
“아닙니다.
“그러면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손기술이 그렇지만, 똑같이 복강경을 통해 담낭을 절제하는 수술이라도 수준의 차이란 게 있다.
그야말로 깔끔하고 완벽해 담낭절제술의 전문가인 민성수 교수, 아니, 그 이상의 손놀림을 보는 듯했다.
찌잉! 찌잉!
“…….”
유영수는 입을 벌렸다.
“끝났습니다. 수술 마무리하겠습니다.”
“그, 그래.”
배에 만든 포트(Port, 복강경 수술 기구를 넣는 통로) 밖으로 기구들을 꺼내고 간단히 마무리를 했다.
간이식에 비하면 간단하기 그지없는 수술이지만 상대가 워낙 VIP 니 긴장이 되었던 거다.
유영수가 눈을 크게 떴다.
“김 선생?”
하지만 답이 없다.
“김 선생?!”
쿠웅!
***
진현은 꿈을 꿨다.
깊은 어둠 속, 공허한 공간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몽롱했다.
깊은 잠에 침잠한 느낌이다.
‘설마 죽은 건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진현은 실소했다.
‘피곤해.’
그는 눈을 감았다.
그냥 쉬고 싶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는 안타까운 눈으로 진현을 바라봤다. 그녀는 천천히 진현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꿈속 세상이어서일까?
파앗!
그녀에게서 반짝이는 빛이 흘러나와 진현의 전신에 스며들었다.
이건 일종의 ‘징벌’.
“뉘우칠 때까지.”
과연 그는 뉘우칠까?
***
교통사고를 당한 게 맞긴 한 건가?
“크윽!”
얼핏 보니 오른쪽 무릎과 복부, 가슴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혹시 꿈 때문인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
“…….”
진현은 당황했다.
“…보.”
“응?”
그녀는 빼액 외쳤다.
“혜, 혜미야?”
“……?”
진현은 숨을 들이켰다.
“나 너 좋아해.”
“……!”
“좋아해, 혜미야.”
“난 너 싫어.”
“……!”
“누가 차였대?”
“응?”
“……!”
진현의 눈이 커졌다.
이 말은?
짝사랑하느라 맨날 아프고, 기대하고, 지치고, 걱정하고… 그 때문에 가슴이 몇 번이나 찢어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
“으, 응. 나도 사랑해.”
둘의 손이 수줍게 겹쳐졌다.
***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거 없고. 네 몸에 미안해해야지. 그러다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너 쓰러지고 얼마나 난리가
났는지 알아? 다시는 절대 그러지 마. 네 몸과 환자를 위해.”
“아… 다행이군요.”
사실 그때 뭐에 홀린 듯 제정신이 아니어서 자신이 얼마나 다친 것인지, 아니, 다치긴 한 것인지 정신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도와주듯.
“그래? 흠…….”
그가 나간 후, 곧 또 다른 방문자가 찾아왔다.
“몸 괜찮냐, 진현아?”
“그래, 고맙다.”
“그나저나…….”
“고마워.”
‘정말 잡을 수 있을까?’
진현은 입을 열어다.
“철우야.”
“응?”
“너 내 친구지?”
“당연하지.”
“뭐든지. 말만 해라.”
진현은 그에게 둘도 없는 친구이자 아버지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무슨 부탁이든 들어줄 수 있다.
# 101
그리고 며칠 뒤.
“으, 응.”
진현도 어색이 답했다. 맨날 고기 먹고 술 마시던 친구와 사귀니 민망했다.
그렇다고 싫냐고?
“어머니, 아버지는?”
“그렇구나.”
그들은 혜미와 더불어 하늘이 꺼질 것처럼 울며 진현의 곁을 떠나지 않다가 이제 진현이 안정이 되자 가게로
출근을 시작한 거다.
“모, 몰라.”
진현이 물었다.
“못 잤어.”
“하나도?”
진현은 혀를 찼다.
“여기 옆에 잠깐 누워.”
“네 옆에?”
“진짜 그런 것 아니지?”
“그래! 절대 아니야!”
‘잠 오네.’
“진현아.”
“응?!”
“나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뭔데?”
“뭔데? 말해봐.”
“……?!”
혜미는 또 한 번 고민했다.
“누군데?”
“이상민이야.”
“이상민이?”
“응.”
“역시 그렇구나.”
“……!”
혜미가 놀라 그를 바라봤다.
“내 말 믿어?”
묘한 답변이다.
명확한 증거가 없고, 범수의 원한은 그녀 개인의 일일 뿐 그와는 연관이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놈이 천하의 죽일 놈인 것은 알아.”
“……!”
진현은 혀를 찼다.
“……!”
진현은 경악했다.
그녀의 친오빠이자 친절한 한국대 의대 교수로 진현에게 커피를 사준 날 의문의 자살로 사망했다.
“…….”
‘이 죽일 놈을 어떻게 하지?’
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진현이 물었다.
“어떻게?”
“언젠가 반드시 증거를 찾아내 죗값을 물릴 거야.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언제 증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
“뭔데?”
“뭔데?”
“대일병원을 떠나줘.”
“뭐?”
그게 갑자기 무슨?
“여기에 계속 있으면 이상민은 널 다시 노릴지도 몰라. 물론 경계하고 의심하고 있으면, 이상민도 특별한 수를
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난 네가 이런 위험에 다시 처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걱정돼 참을 수가 없어.”
“…….”
그를 생각한 걱정이었다.
“그러면 너는?”
“난 괜찮아.”
그래,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진현이 없어도 이상민을 몰락시키는 것은 가능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낼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이사회를 움직이면 최소 대일병원에서 영원히 쫓아내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해.
‘이상민이 궁지에 몰리면 어떻게든 움직일 거야. 아마 이사회를 움직이는 나를 죽이려 들겠지. 그때 어떻게든
증거를 잡아내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
물론 위험한 일이었다. 증거를 잡지 못하고 당하기만 할 수도 있었다.
진현은 물었다.
“그 말 진심이야, 이혜미?”
“너는? 너는 괜찮고?”
마음에 안 들었다.
모두 마음에 안 들었다.
“…….”
“절대 안 돼.”
“진현아.”
진현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절대 안 돼.”
“하지만…….”
모르고 방심하다 당하니 무서운 거지, 이상민이 일을 저지를 거라 아예 가정하고 대비하고 있으면 무서울 것도
없다.
“그놈의 최종 목적이 대일병원을 승계하는 것이라면, 네 말처럼 그놈을 몰락시키는 것도 복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 나는 내 방식대로 그놈을 누르겠어.”
“어떤 식으로?”
진현은 답했다.
혜미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혜미가 말했다.
“뭔데?”
진현은 웃었다.
***
그 뒤 시간이 흘렀다.
승승장구(乘勝長驅).
이전에도 천재의사로 유명한 진현이었지만 총리 김창영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한 것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레지던트?
# 102
세인트 죠셉 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연락을 못 받다가 몸이 회복된 후 이사장의 수작과 진현에게 일어난 일들을
보고 받았다.
“오랜만입니다, 교수님.”
강민철은 굳은 얼굴이었다.
“미안하네.”
“네?”
“바빠?”
“닥쳐.”
“네?”
“닥치라고!”
“잘 갔다 왔냐고? 잘 갔다 왔지.”
강민철은 피식 웃었다.
강민철은 이를 갈았다.
“이봐, 이사장님. 아무리 아들을 밀어주고 싶다고 해도, 사람의 일에는 정도란 게 있어. 응? 정도! 그딴
일들을 저지르다니 당신 미쳤어?!”
“……!”
“네가 한 일들은 김진현을 떠나서 환자를 죽일 수도 있는 일들이었어! 당신이 그러고도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는
의사야?! 당신은 의사도 이사장도 아닌 살인미수범일 뿐이야!”
“빌어먹을! 빌어먹을!”
***
사실 말이 제자지, 이미 완숙한 수술 실력을 가진 진현이었기에 가르침과 더불어 주니어 교수나 다름없는 일들을
하게 되었다.
기업의 평가가 매출과 이익으로 매겨진다면, 의과대학을 비롯한 대학들의 평가는 학문적 성과로 매겨진다.
그리고 그러한 의과대학 병원 중에는 무려 국내 최고 명문인 한국대 의대와 있었고, 그 뒤를 잇는 명문인 신촌의
광혜 의대와 기독 의대도 있었다.
“자네도 모교를 빛내야 하지 않겠나? 마침 교수 자리가 있으니 레지던트만 끝나면 한국대 병원으로 오게.”
학생시절 발끝도 쳐다보기 어려웠던 한국대 병원의 외과 주임교수가 진현을 위해 직접 대일병원까지 내려왔다.
‘이상민…….’
마치 무기력증에라도 빠진 것처럼.
***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사생아인 자신을 구박하는 그녀가 미워 그랬던 것인데, 진실로 죽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이종근의 외도와 폭력에 심각한 우울증을 앓던 그녀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삶을 끊었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
모든 죄악을 알고 있는 눈동자.
“……!”
“웃기는군.”
이상민은 피식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네.”
“늘 마시던 걸로?”
그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런 그를 보며 바텐더가 물었다.
“요즘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아니요.”
바텐더가 말했다.
“이상민 선생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아닙니다.”
“그러죠.”
***
묘한 관계였다.
“뭐하고 있었냐?”
“자고 있었어요.”
“무슨 일이죠?”
“너 지금 병원에서 입지 알지?”
“…….”
술집 여자의 핏줄이란 사실 때문에 가문의 이사회에서 계속 배척당했고, 병원에 온 뒤에는 별다른 두각도
드러내지 못했다.
“원래 너를 위해서 준비된 교수 자리, 이사회에서 김진현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한국대 병원에서도 노리는
인재라 반대할 명분도 없어.”
“그런데요?”
# 103
김진현을 데릴사위로 삼아 후계로 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나 혜미와 벌어질 대로 벌어져 그럴 수가 없었다.
“네.”
***
하지만 해당 교수들이 자신의 논문에 이상민이 1 저자만큼 기여했다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딱히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간이식 국내 최고의 대가란 타이틀은 단순히 손재주만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그도 탁월한 논문 실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천재성을 아는 사람들은 포스트(Post) 강민철을 넘어 새롭게 최고의 대가가 탄생하는 것 아닐까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 비싼 여자인데?”
‘빌어먹을 놈들. 자신의 사람으로 후계를 채우려고. 다른 사람은 절대 안 돼. 이상민을 후계로 세워야 내가 은퇴
후에도 마음대로 대일병원을 주무를 수 있어.’
닥터 김진현?
“그런데 무슨 일이죠?”
-저희는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입니다. 닥터 김진현과 헤인스가 공동으로 투고한 저널의 기재
승인을 알려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인용지수(Impact factor)는 무려 53 점!
이공계 쪽 최고인 네이쳐, 사이언스가 30 점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얼마나 무지막지한 권위의 저널인지 짐작할 수
있다.
***
***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인용지수 : 31 점!
-란셋(Lancet)!
인용지수 : 28 점!
레지던트를 수료하기 전 인용지수 1-2 점짜리 국제학술지에만 논문을 기재해도 탁월하단 이야기를 듣는데, 진현은
벌써 143 점이다.
세계 3 대 의학 학술지에 1 년 사이 4 편이라니.
그렇다 해도 말도 안 되는 성과다.
“닥터 김, 헤인스에 취직할 생각은 없어요? 최소 부사장급 직위, 최고의 연봉을 보장하겠어요.”
헤인스 말고도 세계 각국의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그에게 접근했고 억 소리 날만큼의 연봉을 제시한 곳도 다수였다.
“김진현입니다.”
“네, 방송국이요?”
놀라 물었다. 방송국이 왜 날?
당연히 안다.
“……!”
답변은 간단했다.
-선생님이 더 유명하고, 더 대단하십니다.
“…….”
인턴의 신분으로 불가능한 일들을 성공시킨 것은 제외하더라도, 비행기에서 총리의 생명을 구한 일, 후에 김종현
화백을 구한 일, 대동맥 파열 수술 성공, 응급실에서 일으킨 수 없는 기적들… 금번에 학문적 성과…….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 104
대박을 확신한 정용식 PD 는 끝없이 진현에게 매달렸고, 결국 진현은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간이 안 좋은데…….”
외과 학회에서는 김진현이가 굳이 레지던트 과정을 4 년이나 수련할 필요가 있냐는 의견도 나와 역사상 전무후무한
레지던트 조기 수료를 검토했다.
“허어. 무슨 말이야.”
“음, 내 아들 바쁠 텐데.”
***
그리고 가을이 깊어지는 어느 날, 간이 안 좋은 환자를 응급실에서 치료 후 병실로 걸어가며 혜미와 통화를 했다.
그런데 그때, 커다란 선글라스를 낀 지긋한 나이의 노신사가 지팡이를 짚은 채 진현에게 말을 걸었다.
기자재실?
“저쪽이긴 한데 무슨 일입니까?”
“이쪽으로 오십시오.”
“응? 아니아니.”
진현은 놀라 말렸다.
“진현아!”
“아, 혜미야.”
“할아버지?!”
“할아버지!”
혜미도 같이 웃었다.
“……!”
진현의 눈이 커졌다.
재계 1 위 대일그룹의 전체 회장 이해중.
한국 경제를 한 손에 움켜쥔 자!
바보같이 왜 못 알아봤을까?
“김진현입니다.”
“아, 네!”
원채 하고 다니는 게 소탈해 실감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룹 회장인 이해중을 만나니 느낌이 확 와 닿았다.
‘잠깐. 나중에 혜미와의 만남 때문에 인사를 드리려면 이해중 회장을 찾아가야 하는 건가?’
-손녀를 주십시오!
***
“저 젊은 친구는 아는 사이니?”
“아,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그래, 난 가보마.”
“네, 할아버지.”
“혜미야.”
“네?”
“아, 김진현이에요.”
“그래, 그래.”
그러고 이해중은 이사장실 쪽으로 향했고, 중간에 회장을 놓쳐 혼비백산한 백실장이 달려오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
‘피곤해.’
3 일을 모두 합쳐 3 시간도 자지 못했다.
그의 품 안에 안겨 세상모르고 푹 자고 싶었다.
‘보고 싶은데.’
혜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파앗!
“……!
다행히.
***
“상민 씨,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요. 상민 씨는?”
‘이래도 되는 건지.’
문득 진현이 떠올랐다.
‘이제 괜찮아.’
“그래 보여?”
“빈말은. 아닌 것 알아요.”
이상민이 꾸는 꿈은 항상 똑같았다.
악몽은 아니었다.
김진현.
그가 떠올린 인물이었다.
***
“웬 스팸 메일들이…….”
대체로 미국의 대학에서 보낸 메일이 많지만, 프랑스어, 독일어 등도 있고 심지어 러시아어, 중국어도 있었다.
그때 그의 전화벨이 울렸다.
“네, 교수님.”
“아,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그래, 금방 보자고.
진현은 시간이 없어 메일들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하고 대충 훑어본 후 쓰레기통으로 보냈다.
# 105
유영수가 사람 좋게 그를 맞았다.
“김진현 선생.”
“네?”
갑자기 왜 저러지?
“네?”
오늘 따라 왜 이래.
유영수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교수님, 김 선생이 곤란해하지 않습니까? 교수님이 있으니 김 선생은 계속 대일병원에 있을 겁니다. 김 선생도
이해하게. 최근 자네에 대한 이야기가 워낙 화제여서.”
그럴 만도 했다.
한 편만 기재해도 가문, 아니, 의과대학 전체의 영광이라는 세계 3 대 의학 저널에 4 편이나 논문을 기재한
레지던트.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송영그룹의 김중국 회장이 간암에 생겼는데, Milan stage 에 Child C 로 간이식 수술을 받아야 해.”
“공여자는 있습니까?”
“……?”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간 학회 기간과 수술 일정이 겹쳐 유영수 교수는 수술에 참여 못해. 김진현 선생, 자네와
나 둘이서 수술을 진행해야 해.”
“……!”
“나도 그걸 권유했는데, 김중국 회장의 일정상 그게 안 된다더군. 유영수 교수도 원채 중요한 발표를 맡을
예정이라 학회에서 빠질 수가 없고. 무엇보다 김 회장 가족들이 김 선생, 자네에게 수술받는 것에 거부감이
없어.”
“저한테 말입니까?”
“아마 명의(名醫) 방송을 보고 감명을 받았나 봐. 김창영 총리를 치료한 의사한테 치료받고 싶다고 하던데?”
“알겠습니다.”
***
‘하필 이상민이라고?’
하지만 어시스트는 레지던트 일정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강민철 교수급의 높은 직위가 아니면 입맛에 안
맞는다고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었다.
이상민이 휘적 손을 저어 인사했다.
“그래, 수술 잘하자.”
고개를 털고 수술을 받을 환자를 만났다. 아니, 이 경우 간을 기증할 뿐 건강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니 환자라
지칭하기도 애매했다.
“김진현이라고 합니다.”
간을 기증할 송영그룹 김중국 회장의 딸은 온통 탕아인 다른 자식들과 다르게 아버지를 착실히 돕는 기특한
딸이었다.
“내가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김진현 선생의 수술 실력은 참으로 뛰어납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
“웬일이야? 이런 데를 다 오고?”
“나 돈 많아.”
“치이. 많기는.”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낮게 깔린 어둠 속으로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는 서울의 야경을 보며 혜미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은은한 조명을 머금은 그녀의 얼굴은 지극히 아름다워 고혹적이기까지 했다.
“퍽이나.”
‘어떻게 하지?’
‘좀 이른가?’
이십 대 후반, 사귄 지 1 년.
하지만…….
“응, 왜? 무슨 할 말 있어?”
‘진현이 프러포즈라니.’
그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다니.
“아, 아니야.”
“할 말 있으면 해도 된다니까.”
“아니야.”
“응.”
으이그, 이 쑥맥 바보!
“진현아.”
“응?”
“응? 그게 무슨?”
“들어갈게. 잘 쉬어.”
“응.”
“혜미야!”
“왜, 왜?”
지금 프러포즈하려고?
# 106
106. 더 높은 곳으로 (2)
“다음에 또 밥 먹자.”
“…응?”
그러면서 진현은 스카이라운지를 가리켰는데 다음엔 꼭 프러포즈를 하겠단 의지가 눈빛에서 일렁거렸다.
“됐어. 저기 비싸.”
“혜, 혜미야.”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상민…….”
프러포즈를 위해, 그리고 혜미와 그를 위해 확실히 처리해야 하는 일로, 이상민과의 수술을 준비해야 했다.
“네, 믿을게요.”
“네, 걱정 마십시오.”
김중국 회장은 강민철 교수가 집도하는 15 번 방으로. 딸, 김소현은 김진현이 집도하는 16 번 방으로 나누어
들어갔다.
“꼭 잘 받고 나와야 해.”
그러나 김중국 회장은 계속 이상한 기분이 드는지 딸이 사지(死地)에라도 끌려가는 것마냥 마음을 놓지 못했다.
“잘 부탁한다, 이상민.”
“시작하자.”
지잉!
간 절제술.
진현이 손을 내밀자 간호사가 초당 55,000 회 이상의 초음파 진동을 통해 조직을 자르는 하모닉을 건네주었다.
티딩! 티딩!
악기를 연주하듯, 물이 튀는 하모닉 특유의 소리와 함께 간이 조금씩 잘라졌다. 초음파 절제의 특성상 출혈도
심하지 않았다.
다만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중하자.’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탁!
그런데 그때였다!
“뭐가 안 좋습니까?”
“환자가 많이 안 좋습니까?”
“네, 빨리 오세요!”
시작부터 배의 봉합까지.
카 아웃(Car out).
확실히 카 아웃은 집도의가 아닌, 어시스트나 인턴의 역할로 단순히 환자를 옮기는 것이니 진현이 있을 필요는
없다.
강민철 교수의 수술방이 급해 보이긴 했지만, 이상민이 불안해서라도 환자가 회복실로 무사히 나가는 것을
봐야겠다.
“…….”
“카 아웃하려면 아직 멀었습니까?”
‘어떻게 하지?’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
“네에, 걱정 마세요.”
진현의 눈빛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 마취과 의사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이송 중에 잘 봐주십시오.”
15 번 방은 진현이 있는 곳의 바로 옆방이다.
“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네!”
“네, 교수님.”
메디컬 환생
지은이 | 유인
펴낸이 | 문상철
NEW EPISODE
교정 · 교열 | 정성훈
편집 · 제작 | 정성훈
표지일러스트 | stc
타이포그래피 | 기갈
브리드 BREATHE
등록 | 제 2015-000222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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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202-153-8(05810)
# 107
“……!”
심폐소생술.
강민철이 혀를 찼다.
‘설마?’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수술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카 아웃(Car out) 당시에 이상민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뭐야?!”
“……!”
쨍그랑!
그게 무슨?
***
“거기 가슴 압박 잘해!”
“에피네프린 주세요! 빨리!”
김중국 회장의 딸, 김소연 환자의 피부는 종잇장처럼 창백했는데, 이미 생명이 떠난 시체의 낯이었다.
아침만 해도 웃고 있던 얼굴인데!
“이게 무슨…….”
진현은 비틀거렸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모르겠어요. 환자를 이송할 때는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회복실에 와서 갑자기 산소 포화도가 떨어지더니 심장이
…….”
진현은 이상민을 염두에 두고 다급히 물었다. 그러나 마취과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는…….”
‘안 돼!’
“네.”
마취과 교수의 말처럼 아무리 가슴 압박을 해도, 심장을 살리는 약을 투여해도 반응이 없었다.
‘안 돼!’
20 분, 30 분…….
“……!”
천청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진현의 눈이 흔들렸다,
절망에 쌓인 진현은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이 덧없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1 시간… 1 시간 30 분…….
원인미상의 사망이었다.
***
정말 원인미상의 사망이었다.
수술 중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이상민의 수작일 거라 의심하고 이송 과정을 살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진현의 책임이 아니란 것은 진현과 의사들의 입장일 뿐 가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어려운 간이식 수술 끝에 회복된 아버지, 김중국 회장의 슬픔과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전후 과정을 살펴도 진현의 잘못은 없었다. 그러나 사망의 원인을 밝히지 못한 게 치명적이었다.
부검을 해도 뚜렷한 원인이 나오지 않았고, 가족들의 입장에선 그저 수술이 잘못되어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과실이라면 그 사람이 책임을 졌겠지만, 이럴 경우엔 원인을 떠나 총책임자가 죽음의 책임을 져야 했다.
“…….”
“진현아, 네 잘못 아니지?”
진현의 눈이 흔들렸다.
“내 잘못이 아니야.”
“그래, 난 너 믿는다.”
“…….”
‘내 잘못이 아니야.’
‘이상민……!”
그러나 어떻게?
부검까지 했음에도 특별한 원인이 발견되지 않았고, 이미 장례가 끝난 상태라 추가적인 조사도 불가능하다.
이상민의 수작이 맞는다면 그야말로 완벽히 처리된 범죄였다.
“…….”
“미안하다.”
“수술도 잘 끝났고 김 선생이 잘못한 것은 없어. 그저 원인미상의 사망일 뿐이야. 법원에서 자문이 오면 무죄라
강하게 어필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강민철은 말했다.
의료사고의 경우, 판사가 의학적 과실 여부를 판단할 능력이 없으므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네, 감사합니다.”
이번 사건은 일반적인 의료 사고와는 경우가 달랐다. 재계에서 꼽히는 송영그룹의 딸의 사망이기 때문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이대로는 안 돼. 이상민!’
“어, 진현?”
이상민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무슨 짓이야?”
“말해.”
“뭐?”
“생사람?”
“그래.”
“이이!”
“무슨 헛소리를…….”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이번만이 아니었다.
‘설마……?’
‘정말 공기 색전증?’
공기 색전증이면 모든 게 설명됐다.
특히 중심 정맥관은 직경도 커다랗고 심장까지 관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다량의 공기가 유입되면 단번에
심장마비가 올 수 있다.
또 약물을 주입하는 것도 아니고, 공기가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체에 증거가 남지 않아 완전 범죄가 가능하다.
CCTV 라도 있었으면 확인할 가능성이 있겠지만, 환자를 이송하는 수술장 통로에 CCTV 가 있는 병원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
“이상민!”
# 108
108. 더 높은 곳으로 (4)
“의료진의 소견상 그럴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다만 사망 원인을 아예 모르는 상황이라 과실이 없다고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좋지 않군요. 이런 종류의 의료사고가 생기면 의사 측에서도 과실이 없음을 입증해야 하니.”
하지만 이런 원인미상의 사망 사고의 경우, 실제로 의료사고 판례들을 보면 의사에게 억울할 정도로 불리한
경우가 많다.
사망률 80%의 패혈증이 동반된 상태에서 아기가 죽었는데, 부모가 ‘간호사가 주사를 놓다가 잘못해서 통증 쇼크
(Pain shock)’으로 사망했다고 소송한 경우.
따라서 이런 원인미상의 의료사고, 특히 사망사고의 경우에는 의사도 책임을 확실히 면하려면 잘못이 없음을
의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더구나 이번 사건의 경우엔 이런 의학적인 사항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망자가 송영그룹 회장의 딸인 것이
치명적이었다.
분노에 가득 찬 송영그룹의 회장이 필사적으로 로비를 하고 있어, 판사가 진현에게 유리한 판결을 할 확률은
굉장히 적었다. 아니, 사건에 비해 훨씬 과중한 처벌이 내려질 확률이 높았다.
“네, 더구나 피해자가 송영그룹 회장의 딸인 김소연 사장이어서 더 문제가 되는 듯합니다. 김중국 회장이 김진현
선생에게 무거운 형이 떨어지도록 로비를 하고 있습니다.”
비서가 답했다.
“흐음…….”
“정말 과실이 없다면 김진현 선생에게 억울한 것 같습니다. 재판을 담당할 판사에게 상황을 참작해 달라
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
<피고의 과실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살인죄는 성립하지 않음. 다만 수술 후 사망이란 측면에서 책임을 완전히
회피할 수는 없음.
땅땅땅!
“…….”
“이게 무엇입니까?”
“사표입니다.”
“아…….”
진현의 말이 옳았다.
“그래도 강민철 교수님을 비롯한 외과의 여러 교수님이 선생님의 파면을 반대했다고 알고 있는데…….”
직원은 진현의 사표가 안타까운지 말했다.
이사장 이종근은 이번 불미스러운 일을 핑계로 어떻게든 그를 병원에서 파면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외과 교수들의
역풍을 맞았다.
파면이야 면했지만, 6 개월이나 자격이 정지되면 레지던트 수료 자격을 충족하지 못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그렇게 사표를 내고 밖으로 나오는 중 혜미와 강민철 교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진현은
애써 외면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었다.
강민철 교수를 비롯해 진현을 아끼는 외과 교수들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후에 그가 대일병원 외과로 복귀하기를
바랐지만, 굳이 더러운 대일 병원이 아니어도 갈 곳은 많았다.
당장은 의사 자격 정지 때문에 스카우트 문의가 끊겼지만, 그의 실력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니 정지만 풀리면
오라는 곳은 많을 것이다.
‘이상민!’
진현은 이를 갈았다.
***
괜찮다고 마음을 다잡긴 했지만, 막상 부모님을 보니 마음이 무너졌다. 자신만 바라보며 기대가 많았는데
너무너무 죄송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도 말했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었다.
***
진현은 피식 웃었다.
손 놓은 지 오래됐지만 수석의, 수석의, 수석만 반복한 그가 다시 과외를 시작하면 구름같이 학생들이 몰려들리라.
난생 처음 갖는 휴식이었다.
‘씁쓸하구나.’
‘이상민.’
그런데 그때였다.
띠리링-
‘누구지?’
“네, 김진현입니다.”
-미스터 김? 저 에이미예요.
“아, 네. 무슨 일입니까?”
“……!”
진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봉 40 만 달러면 현재 환율상 한화로 5 억 정도다. 강남에 개업한 성형외과 의사면 모를까, 한국의 어떤 의사도
이 정도의 금액을 연봉으로 받진 못한다.
“지금 그 말 사실입니까?”
***
“네, 오랜만입니다.”
“네, 알아요.”
“그러면?”
“네? 어디서?”
이게 무슨 말인가?
“……!”
“세인트 죠셉 병원 아시죠?”
“당연히 압니다.”
세인트 죠셉 병원!
뉴욕 맨해튼 인근에 위치한 병원으로 존스홉킨스, 메이요, 엠디엠더슨, 메사추세츠 제네럴과 더불어 미국 최고
중 하나로 꼽히는 병원이었다.
# 109
그러나 면허가 없으면 의사로서 자격이 상실된 상태이기 때문에 지금은 거짓말처럼 제의가 없어진 상태다.
“그게 됩니까?”
“제가 엉클한테 물어보니 가능할 것 같다고, 우수인재 유치차원에서 특별히 배려해 주겠다는데요? 아, 물론
USMLE(미국의사시험)는 합격해야겠지만, 그거야 미스터 김한테 문제도 안 될 거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엉클이 누구기에?
“…….”
“실례지만 관계가……?”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건 아니에요.”
“그러면 어째서?”
“미스터 김.”
“네?”
“…….”
진현 덕분에 헤인스가 얻은 금전적 이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고, 덕분에 헤인스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에이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미스터 김과 함께한 프로젝트들을 의학 저널에 발표했을 때 미국 학회가 얼마나 요동을 쳤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김진현이란 이 동양인 청년이 도대체 누구냐고.
“뭐, 월반하면 되죠. 거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전례가 없었던 사례도 아니고. 제가 사례를 알아보니 이전에
다른 한국인도 미국에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월반한 적이 있어요. 닥터 원이었나? 그리고 사실 미스터 김한테
레지던트 수련 과정은 의미가 없잖아요?”
대일 병원의 교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리다. 단순히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영광스러운
직위였다.
“…감사합니다.”
“뭘요?”
분명 에이미가 많은 도움을 줬으리라. 그녀가 아니었으면 특별한 혜택들도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
그때 에이미가 말했다.
“산이요?”
“네, 산. 도봉 마운틴(Mountain).”
***
도봉 마운틴(Mountain), 즉, 도봉산.
“하아, 하아.”
“생각보다 산을 못 타네요?”
진현은 투덜거렸다.
“힘들어요?”
진현은 땀을 닦았다.
바람을 맞으며 삼매경에 빠져 있는 그녀의 모습은 화보 속 도도한 요정과도 같았지만, 손에는 소주병이 들려
있었다.
“…….”
“아…….”
“참 좋죠?”
“……!”
진현의 눈이 흔들렸다.
‘힘드냐고?’
그는 애써 괜찮다고 생각했다.
“……?”
“저게 뭔지 아세요?”
한강 너머 건물이 보였다.
“저건?”
“대일 병원이에요.”
이렇게 보니 참 조그만 했다. 강남의 다른 오피스 건물에 가려 잘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흔히 빅 4 라 불리는 한국 4 대 병원들이다.
“병원들은 왜……?”
“……!”
“국내 최고네 뭐네 하지만 이렇게 위에서 보면 저렇게 조그마해요. 옆에 오피스 건물들이랑 잘 구별도 안 될
정도로. 저 조그만 건물 안에서 다들 아웅다웅 다투고 하는 거예요. 네가 최고네, 내가 최고네 하면서. 그럴
필요가 뭐가 있나요?”
“무엇입니까?”
“저런 조그만 곳에서 잠깐 미끄러졌다고 낙담하지 마세요. 어차피 저런 우물은 당신이 머물 곳이 아니에요.
당신이 머물 곳은 저런 곳이 아닌, 세계에요.”
“……!”
“전 제가 아는 미스터 김을 믿어요. 당신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 세계에서 최고가 되어주세요.”
“무엇이죠?”
‘기다려라, 이상민.’
# 110
의사도 영어는 필수라 지난 삶부터 영어 하나만큼은 완벽히 구사했던 진현이기에 Step 1, 2 패스는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의사로 일하는데 자격 요건인 ECFMG certificate 를 얻었기 때문에 세인트 죠셉에서 일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세인트 죠셉에서 일하며 내년까지만 따면 된다.
“…….”
‘진담은 아니겠지.’
혜미와도 작별을 준비했다.
“응, 미안.”
“흐윽. 가서 바람 피지 않을 거지?”
“꼭 그렇게 해야 해? 응?”
“혜미야.”
“응?”
“……!”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선 진현이 그사이 세인트 죠셉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아야 한다.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혜미의 눈이 흔들렸다.
“뭐야, 이거…….”
“뭐야, 이게…….”
“바보, 진짜 바보.”
“싫어?”
***
“할아버지가 적적하다고 계속 들어와서 살라고 해서. 일단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려고. 그러면 위험하지 않을
거야.”
“응.”
‘이상민…….’
‘조금만 기다려라.’
반드시!
***
그렇게 반도를 벗어나 본 적 없는 그에게 뉴욕의 국제공항, 존 에프 케네디(JFK) 공항의 전경은 압박을 주기
충분했다.
다른 것보다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굳은 다짐을 하고 왔으나, 머나먼 이국땅에서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보니 긴장이 아예 안 될 수가 없었다.
‘괜찮아.’
‘혜미…….’
이상민.
“Korean? 비자.”
전문적인 지식으로 미국에서 일할 것임을 증명하는 H-1B 비자로 에이미의 도움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진현은 눈을 껌뻑거렸다.
“…김!”
“……?!”
“미스터 김!”
날 부르는 건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검은 머리의 푸른 눈을 가진 미녀가 진현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에이미였다.
“아, 미스 엔더슨. 어떻게 여기를?”
“오느라 고생했죠?”
에이미는 진현 덕분에 성공한 프로젝트들로 헤인스 뉴욕 본사의 이사로 승진한 상태다. 그런데 발령난 지 얼마 안
돼서 한창 바쁠 텐데?
“농담 마십시오.”
“농담 아닌데요?”
“네?”
***
“뉴욕은 처음이죠?”
“네.”
“글쎄요. 얼떨떨하군요.”
“금방 익숙해지실 거예요. 개인적으로 전 뉴욕보단 서울이 더 살기 좋더라고요. 유흥 문화도 좋고, 치안도
좋고.”
헤인스의 대표이사의 친척인 에이미가 한국 지부로 갔던 것은 본인의 지원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만큼 한국을
좋아했다.
“…….”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
뭐야?
“뉴욕도 이전보단 치안이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특히 미스터 김이 거주할 맨해튼은 뉴욕에서 가장 괜찮은 편이니
너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하지만 그래도 한국 서울처럼 생각하면 안 되고 꼭 조심은 해야 해요. 늦은 밤 인적
없는 골목길에 들어가는 것은 꼭 피하고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
“맨해튼이에요.”
맨해튼.
세계의 중심인 곳으로, 세인트 죠셉 병원은 그 맨해튼에서도 중심, 업타운(Uptown)에 위치해 있었다.
***
먼저 짐을 풀어야 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에이미는 병원 근처에 고층 건물로 진현을 안내했다. 낡은 건물이 많은 업타운 내에서 눈에 띄게 깔끔한 최신식
건물이었다.
“좀 작죠?”
“아닙니다.”
맨해튼의 월세는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업타운은 한국의 강남, 그중에서도 청담, 논현동 같은 곳으로 집세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 정식 교수도 아닌, 레지던트에 불과한 자신에게 작으나마 최신식 숙소를 얻어주다니. 엄청난
배려였다. 분명 에이미가 신경 썼으리라.
“네.”
아직 진현은 정식으로 세인트 죠셉 병원에 임용된 것이 아니었다. 이번 년도의 실적에 따라 채용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네, 감사합니다.”
“왜 그러십니까?”
“처음에 좀 힘들 수도 있어요.”
“네?”
그것도 이해했다.
그래, 괜찮다.
다 극복할 수 있으니까.
# 111
“…….”
그러면서 살짝 웃음을 흘리고 사라지는 그녀였다. 늘 그렇지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이 안 된다.
그도 문자를 보냈다.
[응, 나도 사랑해.]
[보고 싶어.]
***
병원 건물의 크기 자체는 대일병원과 큰 차이는 없었다. 오히려 외관을 보면 대일병원보다 낡은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그것은 낡음보단 역사와 전통으로, 실질적 내실은 대일병원과 비교하기 어려웠다.
병원장, 제임스는 당당한 풍채의 중년 백인 남성으로 활달하고 사교적인 인상이다. 얼굴선에서 얼핏 에이미와
닮은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감사합니다.”
물론 한국에선 진중한 태도와 세월이 담긴 깊은 눈빛 때문에 외모로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미국에선
지내봐야 알 일이다.
“뉴욕에는 처음이시죠?”
“네.”
어쩌다 자신이 의도치 않게 대단한 실적을 내긴 했지만, 세인트 죠셉은 세계 최고의 병원 중 하나이다.
“……!”
“존스 홉킨스나 메이요, 엠디엠더슨 등은 닥터 김의 이런 능력을 몰라요. 그래서 스카우트 제의를 하지 않았죠.
저도 처음 헤인스의 프로젝트 논문들에 닥터 김의 이름이 계속 실린 것을 보고도 큰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대부분을 헤인스가 처리하고 일부만 도와줘 이름을 올렸겠지, 라고 생각했죠.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긴
하지만요.”
맞는 말이다.
“그러면서 이런 의문이 들더라고요. 열악하기로 유명한 한국의 레지던트 환경에서도 이런 성과를 냈는데, 만약
좋은 자리를 잡는다면 어떤 성과를 낼까? 그런 생각이 드니까 굉장히 초조해졌어요. 존스 홉킨스나 메이요,
엠디엠더슨 같은 곳에서 채가면 안 되는데.”
그제야 어째서 세인트 죠셉이 엄청난 혜택을 주어가며 자신을 스카우트하려 한 것인지 알 수 있는 진현이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온갖 법률 용어가 난무하는 영문 계약서는 미 시민권자도 정확한 의미를 해석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제 변호사를
통해 꼼꼼히 살폈다.
“뭐, 다 봤겠지만 요지는 하나예요. 지금은 임시채용이고, 1 년간의 진료, 학문 실적을 통해 정식 교수 채용을
결정하겠다는 것. 약속된 40 만 달러의 연봉은 실적에 따라 변동할 거예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수고해 주세요. 개인적으로 닥터 김의 활약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답니다. 꼭 잘해 주세요.”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최선을 다할 것이다.
***
“제네럴 서저리에서 근무를 할 것이니, 체어맨(과장)께 인사를 드리도록 하세요. 제네럴 서저리의 체어맨도 같은
동양인이니 잘해주실 거예요.”
정길수.
진현의 모교인 한국대를 졸업 후 한국대 교수로 재직하다 탁월한 연구 실적에 스카우트를 받아 세인트 죠셉에 온
대가(大家)였다.
동양인은커녕 미 시민권자 흑인도 한 명도 없는 세인트 죠셉의 외과에서 과장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후우…….”
젠장.
“뭘요?”
“코리아에서 온 닥터 킴이요.”
세인트 죠셉의 외과는 애초에 레지던트를 선발할 때 미 시민권자, 그중에서도 백인이 아니면 받지를 않는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그러면 쫓아내야지.’
제임스의 눈이 가라앉았다.
‘미라클 김이라…….’
그의 조카 에이미는 닥터 김을 부를 때 종종 ‘미라클 김’이란 호칭을 썼다.
저 동양의 어린 청년이 정말로 미라클을 일으키는 ‘미라클 김’일지, 아니면 쭉정이일지는 지켜보면 알 일이다.
이사장 이종근을 떠올리니 기분이 나빠졌다. 재빨리 생각을 지우며 한국어로 인사했다.
“……!”
“한국에선 간 파트였다고?”
“네.”
나가보란 뜻이었다.
‘뭐야.’
‘뭐, 상관없지.’
“김진현이라…….”
# 112
112. 세인트 죠셉 병원 (3)
한국과 미국은 병원의 체계가 쌍둥이처럼 흡사했다. 애초에 미국을 모델로 세운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걸로 끝이었다.
시스템이 다르니 익숙해지기 전에 배우는 기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교수, 어느 파트에서 익히란
지시도 없었다.
‘곤란하군.’
‘알아서 해야지.’
이런 반응 따위 예상 못한 바 아니었다.
자리를 잡기 전 거쳐야 할 신고식이나 다름없었다.
‘터치 안 하면 나야 편하지.’
값비싼 의료비 덕분에 상상도 못할 숫자의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을 감안하면 마냥 좋은 시스템은
아니다.
‘사실 여러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공공성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시스템이 나쁘지 않은 편이긴 하지.’
“아직도 말입니까?”
-너 같은 동양 원숭이가 감히 어딜?
“뭘 말입니까?”
그 말에 진현은 기가 찼다.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아니, 미국의 문화의 특성상 저 오만한 백인은 실제 수술을 집도해 본 경험이 없을지도 몰랐다.
“뭐가?”
“그래도 제임스 병원장이 상당한 공을 써서 데려온 거라던데. 병원의 지주회사 중 하나인 헤인스와도 연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만약 내년에 정말로 정식으로 교수로 임용되면 우리보다 높은 직급이 돼.”
“어째서?”
***
‘하아.’
따돌림?
메타 분석(Meta analysis)!
지금까지 나온 발표된 연구 결과들을 고찰, 종합하여 작성하는 논문으로 인터넷이 되는 컴퓨터만 있으면
혼자서라도 작성할 수 있다.
단 기존 연구를 고찰, 종합해야 하기 때문에 각 분야를 아우르는 탁월한 식견, 패러다임을 넘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그러나 난 할 수 있어.’
의학 교과서와 가이드라인을 바꿀 만큼 워낙에 유명하고 대단한 연구들이라 지난 삶에서 숱하게 공부해 기억에
똑똑히 남아 있었다.
‘두고 보자.’
‘본때를 보여주겠어.’
-마이더스의 손, 김진현!
***
# 113
존이 물었다.
그런 메타 분석을 두 달 사이에 7 편?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미라클(Miracle).
***
“부르셨습니까?”
진현이 낸 논문들은 단순히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의학 가이드라인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파격적인 결과를 담은 연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믿을 수 없어.’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요.”
“네?”
상상도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임스라도 다른 병원의 동양인 레지던트 중 진현과 같은 성과를 낸 이가 있다면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며 스카우트
제의를 넣을 것이다.
‘절대 안 돼!’
문제는 진현과 세인트 죠셉이 맺은 계약이 임시 고용이란 것이다. 진현이 떠나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었다.
‘어떻게 하지?’
“치프 마이클입니다.”
“마이클 좀 이리로 불러주세요.”
“지금요?”
“무슨 일입니까?”
“치프 마이클.”
“네?”
“그, 그건…….”
“…….”
그러나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젠장.’
“죄, 죄송합니다.”
“그…….”
골수부터 백인우월자인 마이클은 머뭇거렸다.
제임스가 말했다.
“잘 안 들립니다, 마이클.”
“……!”
“미, 미안하다!”
“네, 알겠습니다.”
“아, 네.”
40 만 달러. 한화로 약 5 억.
그러나 필드에서 활동하는 잘나가는 의사들의 평균 연봉과 이번에 낸 실적을 고려하면 높은 액수도 아니었다.
분명 다른 병원에선 더 높은 연봉을 제시하리라.
‘일단 연구적 재능과 의학 지식은 만점 이상인데. 수술 실력이 걸리는군. 수술은 많은 경험이 없으면 완성될 수
없으니.’
제임스는 진현이 아무리 천재라도 차마 수술까지 완숙한 경지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뭐, 상관은 없었다.
특히 연구의 대가들에게 진료를 빼주고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환경상 미국에 이런 의사가 많은데
흠은 아니었다.
55 만 달러!
당시 환율상 한화로 7 억의 거액이다.
최고 수준의 연봉이었다. 미국이 아무리 의사의 천국이라 해도, 연구를 주로 하는 아카데믹 서젼이 이 정도의
연봉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
본격적 근무를 시작하기 전 주말, 진현은 모처럼 대낮에 오피스텔에 누워 한적히 시간을 보냈다.
13 시간 시차니 한창 자고 있을 때다.
‘문자를 보내볼까? 아니야, 자는데 깨울 거야. 그래도 문자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일어난 다음 봐도 되니
…….’
[사랑해.]
짧은 문자.
“…….”
차라리 병원에 나가서 일하면 쓸쓸함이 덜하련만, 미국은 노동착취 보호측면에서 레지던트의 시간 외 근무를
엄격히 규제했다.
# 114
“……!”
이게 무슨 말?
에이미였다.
***
“저희 집은 괜찮습니다.”
“…….”
아니, 그건 좀…….
“그게 뭡니까?”
“미스터 김.”
“네?”
“안 되겠어요.”
“자, 잠깐…….”
“소, 손은…….”
“빨리 오세요!”
***
“괜찮았나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관광의 마지막 코스는 맨해튼 서쪽에 위치한 미슐랭 3 스타의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이건 제가 내겠습니다.”
“하지만…….”
헤인스와의 프로젝트는 전부 에이미를 통해 진행했다. 마이더스의 김이라 불리는 그 덕분에 에이미는 회사에서
계속 고공행진 중이었다.
“그래도…….”
“마음 불편하면 다음에 사주세요. 얻어먹을 핑계로 미스터 김을 한 번 더 볼 수 있으면 저야 좋죠, 뭐.”
“…….”
“농담이에요.”
농담 맞아?
“괜찮습니다.”
그걸 본 진현의 눈이 커졌다.
“그건?”
소주였다!
“이거랑 같이 먹어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아니, 좋습니다!”
프렌치 음식에 소주라니, 해괴한 조합이었지만 진현의 향수를 달래는데 최고의 선물이었다.
“크. 좋군요.”
진현이 좋아하는 소고기 요리, 스테이크를 추가로 주문하고 한국에서처럼 주거니 받거니 소주를 마셨다.
“감사합니다.”
“뭐가요?”
부웅! 까앙!
탕! 탕!
“이건?”
“마피아예요.”
“네?”
“맨해튼의 클랜시 패밀리일 거예요. 내부가 시끄럽다더니 반기를 든 조직원들을 정리하나 봐요.”
이게 무슨 영화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
“네, 뉴욕에는 미국 최고의 마피아 중 하나인 클랜시 패밀리가 있거든요. 10 년 전부턴 당국과의 마찰 때문에
사채업, 포르노 사업, 카지노 등 합법적인 일만 주로 했는데 몇 년 전부터 다시 좀 시끄럽네요.”
일본의 야쿠자인 야마구치구미, 중국의 삼합회인 칠성회,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패밀리 등이 그러한 전통의
폭력조직이고 클랜시 패밀리도 그중 하나였다.
“새 대부(大夫)인 매리가 반기를 든 조직원들을 대하는 방식이 거칠거든요. 뭐, 너무 걱정 마세요.
자기들끼리만 저러는 것이지 일반인들은 절대 안 건드는 것이 클랜시 패밀리의 원칙이니까.”
온건하고 합법적인 성향의 클랜시 패밀리가 뉴욕의 밤을 장악함으로써 오히려 범죄율이 낮아지는 효과도 있어서
뉴욕시에서도 웬만한 일로는 클랜시 패밀리를 건들지 않았다.
“정말 가끔 서로 총 쏘는 것 외엔 사채, 포르노, 카지노, 매춘, 유흥을 다루는 일반 기업에 가까워요. 마약도
취급 안 하고, 주식 상장도 했을 정도인걸요. 매리가 대부가 된 후 주식이 계속 오르고 있으니 조금 사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걸요?”
진현은 혀를 내둘렀다.
“아, 매리는 여자예요. 그것도 젊은. 아, 참 귀엽고 예쁘게 생긴 아이인데 마피아의 대부(Godfather)… 아니,
대모(Godmother)가 되다니.”
뭔가 친근한 말투였다.
“아는 사이입니까?”
“…….”
뉴욕 주지사, 헤인스의 대표이사, 세인트 죠셉의 병원장… 그것도 모자라 마피아 두목도 친구라고?
“네?”
“매리 취향이 좀 독특해서 동양 남자를 좋아하거든요. 그것도 미스터 김 같은 지적인 느낌을 가진 동안(童顔)의
동양 남자를.”
“…….”
에이미는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뭐라고, 이 여자야?
***
“…….”
‘흥, 아무리 연구를 잘해도 환자를 보는 실력이 없으면 진정한 의사라 할 수 없어.’
간 파트의 교수 데이비드였다.
설사 레지던트의 의견이 맞는다고 해도 교수와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교수의 의견에 따라야 했다.
“그건…….”
진현은 피식 웃었다.
데이비드는 궁금했다.
기대도 들었다.
“닥터 김?”
“네?”
“내일 뭐하나요?”
교수 데이비드가 물었다.
“특별히는…….”
“……!”
진현은 살짝 놀랐다.
“옵저베이션(Observation)하도록 하세요.”
***
‘못 미덥긴 하겠지.’
더구나 미국 의사들은 툭하면 고소당하기 때문에 자신의 수술을 최대한 뛰어난 사람과 같이하고 싶어 했다.
물론 세인트 죠셉의 의사들은 병원장 제임스에게 진현이 한국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의사란 것을 전해 듣긴
했으나, 단순히 이야기를 들은 것과 믿고 수술을 맡기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수술을 안 하니 몸은 편하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미국에 왔는데 가만히 놀고 있기엔 손이 근질거렸다. 마치 벤치에 앉아 있는 축구선수가 된
기분이다.
‘기다리자.’
***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세인트 죠셉 위쪽에 위치한 맨해튼 끝자락의 음침한 골목에서 일단의 무리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래.”
이제 이십 대 후반, 삼십 대 초반?
정확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그녀는 화사한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장미와도 같은 고혹적 아름다움이
흘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실버 블론드의 머리가 찰랑거렸다.
“빨리 돌아가자.”
또 건방지게 보스인 그녀를 연모하고 있었다. 깍듯한 태도 뒤 일렁이는 그의 열망을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그는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 한잔하자.”
“네, 좋아하시는 보르도 산으로 준비하겠습니다.”
다른 조직원들이 끼어들었다.
다들 기분이 풀려 있었다.
시칠리아 마피아와 손을 잡고 조직을 배신한 배신자들도 다 처리를 했고, 시칠리아 놈들에게도 거액의 배상금을
받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마디로 축제날이었다.
클랜시 패밀리의 모두는 매사에 칼 같지만, 조직원들을 아끼는 이 어린 보스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탕!
“어?”
갑자기 배가 화끈거렸다.
다시 한번 소리가 울렸다.
탕!
“쿨럭?!”
“보스!”
저격이었다!
“저쪽이야! 잡아!”
로버트가 급히 지시했다.
“보스! 보스!”
“쿨럭! 쿨럭!”
“보스! 안 돼!”
“아, 아…….”
그리고 그는 외쳤다.
“의사 나와!”
프로젝트 하나하나의 가치가 상상을 초월하니 진현에게 얼마를 지불해도 아깝지 않았다.
“네, 말씀하십시오.”
“……?!”
진현은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소란인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
“……!”
응급실에 도착한 진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난장판이었다.
양복 입은 남자들 사이로 창백한 피부의 여인이 배에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다. 저 마피아 놈들이 환자와
보호자인 듯했다.
“제발!”
다들 한 여자를 중심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총을 든 남자는 이성이 마비된 듯 눈물까지 흘리고 있다.
저 여자가 누구기에?
“여기 닥터 왔어요!”
진현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이, 이게 무슨?”
“야.”
“네?
“너 직급이 뭐야?”
“치프…….”
“레지던트?”
“네, 네!”
“꺼져.”
“네?”
“꺼지라고!”
퍼억!
“꼭 잘 봐주십시오.”
데이비드는 그 말이 잘 못 보면 가만 안 두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크게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침을 꿀꺽 삼킨 그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재빨리 그녀를 진찰했다. 그리고 미리 시행해 둔 검사도 확인했다.
“어떻습니까?”
“…어, 어렵습니다.”
“네?”
“……!”
총알이 지나간 경로 안에 든 장기가 모조리 찢어지고 터지기 때문이다. 손상된 장기는 모조리 자르고 새로 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부위들은 사실 수술하면 큰 문제가 안 되지만 대동맥이 손상된 것이 치명적입니다. 내부에서 파편이
터지는 양상의 총알은 아니지만, 일부 조각이 대동맥 하부를 찢었습니다. 이럴 경우 수술해도 가망이 거의
없습니다. 수술해도 죽고, 안 해도 죽습니다.”
대동맥이 다친 것.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 116
“아니야.”
“네?”
“……!”
“꺄아악!”
“닥쳐!”
“닥쳐! 너 먼저 죽고 싶어!”
데이비드는 벌벌 떨었다.
“하, 하지만…….”
그러나 10%도 안 되는 희박한 확률이고, 아무리 세인트 죠셉이라도 혈관 파트의 전문가가 항상 대기하고 있진
않는다.
데이비드도 당직만 아니면 코빼기도 안 비쳤을 것이다. 아니, 이야기를 듣자마자 도망갔을 것이다.
타앙!
“꺄악!”
“살려주세요!”
“……!”
“…너는?”
로버트가 물었다.
진현이 답했다.
***
“다, 닥터 김?”
-저 어린 의사가 미쳤나?
그것도 총 든 마피아에게.
“…….”
응급실의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저 흉악한 마피아가 건방진 동양 청년을 어떻게 죽일까 고민한다고
생각했다.
“너…….”
간절한 목소리.
진현은 답했다.
“살릴 수는 없습니다.”
“……!”
“당연히 무조건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걸 원하면 병원이 아니라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해야겠지요. 이런 부상의
경우, 통계학적으로 수술하면 10% 살고, 90%는 죽습니다. 즉, 치료해도 죽을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
“하지만 손 놓고 있으면 무조건 죽습니다. 일말의 확률일지라도 환자를 살리기 위해선 수술을 해야 합니다.
수술에 동의해 주십시오.”
“……!”
의대생처럼 보이는 얼굴로 대동맥 수술을 많이 해봤다고?
사실 진현도 많이 떨렸다.
“뭐지?”
“총 집어넣어 주십시오.”
“……!”
폭력배들이 폭력으로 의료진을 위협하면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 없다. 확실히 선을 그어야 했다.
“여기는 환자가 치료받는 응급실입니다. 그러니 총을 집어넣어주십시오. 그리고 총을 들고 있으면 저희가 치료에
집중할 수 없으니 환자에게도 안 좋습니다.”
로버트는 엉거주춤 총을 집어넣었다.
진현은 말했다.
“…뭐라고?”
로버트의 눈이 다시 흔들렸다.
“저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당신은 밖에서 기도해 주십시오. 교회에 가도 좋습니다. 어쨌든 기도해 주십시오.”
***
원체 상태가 중해 라이브 영상까지 찍는, 최고의 시설이 준비된 수술장 1 번 방으로 옮겼다.
‘내, 내가 왜!’
“닥터 김. 난 이 수술 반대예요.”
“어째서입니까?”
“…….”
옆집 똥개가 죽어도 의사에게 책임을 물리려는 미국인데, 무려 마피아의 대모다. 그 끔찍한 후폭풍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
“저도 이런 부담되는 환자 싫습니다. 편하고 확실히 좋아질 쉬운 환자만 보고 싶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의사가 된 게 죄이지요.”
누가 좋겠는가?
진현은 말했다.
“…….”
간당간당한 쇼크 상태였다.
‘살릴 수 있을까?’
의사는 신이 아니니 환자를 치료하는 데 한계가 있다. 진현도 지금껏 많은 환자의 생명을 놓쳤었다.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장장 16 시간에 걸친 대수술이 시작됐다.
***
“그 말 그대로입니다.”
신문에 날 대형 사고였다.
“왜 이런 일을 이제야 저한테?”
Shit!
제임스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어제 금발의 샌디와 너무 열정적인 밤을 보낸 것 같다. 취해서 전화도 못
받을 정도로.
“큰 부상은 아니었나요?”
“큰 부상이었습니다. 죽을 정도로.”
“어느 정도의?”
“네, 살아 있습니다.”
“어떻게?”
미셸은 설명하기보다 영상으로 보여주기로 했다. 그녀도 처음에 믿기지 않았으니까.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나을
거다.
“수술장이 마피아에 점거돼 상황을 알 수 없어 카메라로 내부를 봤는데…….”
애초에 세인트 죠셉의 우수한 수술 실력을 라이브로 방송하기 위해 마련한 최고 시설의 수술방이기 때문이다.
“보십시오.”
전산에 접속해 암호를 넣으니 병원장실의 대형 브라운관 화면에 치지직 수술 장면이 떠올랐다.
“이건……?”
“저, 저건?”
미셸이 입을 열었다.
단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셸은 말했다.
“한국의 닥터 김입니다.”
한국의 닥터 김.
# 117
117. 한국의 닥터 김 (4)
세인트 죠셉의 모든 의사가 진현의 수술을 바라봤다. 당연했다. 마피아의 대모 매리의 수술이니까.
“팀, 보고 있어?”
“뭐가?”
“왜?”
“이런, 크레이지(Crazy)!”
“아니야.”
“한국에서 온 닥터 김이야.”
“닥터 김?”
“미라클(Miracle)… 말도 안 돼.”
미라클(Miracle).
***
한편 진현은 자신의 수술이 병원 내부의 전산으로 방송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영상 카메라는 외부에서 조작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수술에만 집중했다.
‘얼마나 지난 것이지?’
피곤했다.
외부의 모든 것을 잊었다.
밖의 로버트의 기도 덕분일까?
진현이 홀로 수술하게 했다는 죄책감에 자신이 집도하려고 들어왔다 진현의 솜씨에 압도당해 어시스트를 서고
있는데 경악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괴물 같은…….’
물론 좋은 컨디션 덕분인지 지금은 평소보다도 탁월한 실력을 보이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도 노력으로 탄생한
그의 실력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철컥!
피를 쏟던 마지막 혈관이었다.
“후우.”
‘고비는 넘겼어.’
“Great!”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때 영상으로 수술을 보고 있던 세인트 죠셉의 의사들은 진현에게 박수를 쳤다.
***
“미라클! 말도 안 돼!”
동양의 어린 의사로 무시하던 시선은 완전히 사라졌다. 세인트 죠셉의 의사 모두가 진현을 설명 불가의 괴물로
바라봤다. 대일병원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아닙니다. 다 당신 덕분입니다.”
“응?”
어쨌든 다행이었다.
그 말에 진현은 생각했다.
그 뒤에도 매리는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고, 그때마다 진현은 필사적으로 그녀를 살렸다.
그리고 일주일 뒤, 그녀는 극적으로 호전돼 중환자실을 벗어나 일반 병실로 옮기게 되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후우.”
“고마워요, 닥터 김.”
“네?”
“……?”
데이비드는 말을 이었다.
“……!”
“뭐야, 갑자기?”
“아, 네.”
처음엔 퍼스트 어시스트를 시키다 금방 그의 솜씨를 확인하고 본인의 참관, 감독하에 집도를 주었고, 역시
마찬가지로 멋진 솜씨에 단독 집도까지 주었다.
‘이력만 보면 나도 참 대단하구나.’
하지만 이력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는 대단했다. 본인이 자신의 가치를 정확히 모르고 있을 뿐이지.
어떻게 된 일인지 뉴욕 타임즈의 기사가 한국으로도 나가 혜미와 가족들에게 한바탕 곤욕을 치른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걱정되는 마음에 진현을 질책했다. 그는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하고서야 부모들의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저녁이요? 그건 왜?”
“초청하려고.”
“……!”
“보스의 초청이야.”
보스.
# 118
118. 환각
이태원과 한강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스위트룸에서 모델처럼 매끄럽게 생긴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김진현…….”
“상민 씨, 무슨 생각해요?”
“씻었어?”
“네, 무슨 생각해요?”
“그냥…….”
“여기 커피 마셔요.”
“뭘요? 술?”
“아니, 너.”
“뭐예요, 그게.”
“이리로 와봐.”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왜?”
“우리 결혼할래?”
“……!”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나 싫어?”
“그건 아니지만…….”
알고 있었다.
“……!”
“아니에요. 그건…….”
그런데 왜일까?
“저도 한 캔 주세요.”
남산 터널을 지나가는 차들이 반짝반짝 불빛을 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치는 광경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재미없군.’
-뚝. 뚝.
피가 떨어진다.
과거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렸다.
‘재미없어.’
계속된 환각 때문일까?
***
진현은 매리의 초청을 이리저리 피했다.
당연했다.
“얼굴만 보고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인사 안 해도 되는데…….”
“자, 타.”
“반갑습니다, 닥터 김.”
“네.”
“……?”
진현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로버트가 말했다.
“다 왔어. 내려.”
“하지만 여긴?”
우리 집인데?
“저기야.”
“저기가 우리 아지트야.”
“아, 그 레이드가 우리 거야. 우리 클랜시 패밀리의 상장 기업 이름이 레이드거든. 우리 보스가 CEO 고.”
“…….”
로버트가 씨익 웃었다.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게 뭐야!
건물로 들어와 보니 대기업 뺨치는 규모의 화이트 컬러 노동자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니, 우리만 그래. 전대 보스가 이렇게 바꿨어. 피 없는, 그러나 세계적인 마피아가 되자고. 뭐, 그 과정
중에 암살당하고 지금은 대모 매리가 열심히 그 뜻을 잇는 중이지. 결과는 성공적이고. 여기가 마피아인지,
기업인지 정체성에 혼란이 있는 게 좀 문제이지만. 그래도 마피아스러운 일도 안 하는 것은 아니니까.”
“…….”
착한 마피아든, 나쁜 마피아든 마피아는 마피아이니 얼굴만 보고 곧바로 돌아갈 것이라 진현은 다짐했다.
띠잉.
“…….”
“가자. 보스 기다린다.”
“왔습니다, 보스.”
***
그러나 아무리 나쁜 마피아는 아니라고 해도, 마피아 보스가 권하는데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몸 성히 보내주길
바랄 뿐.
“아, 네.”
“다행이네요. 에이미에게 고기를 좋아한단 이야기를 듣고 특별히 준비했어요.”
버섯을 얹은, 산채와 발사믹 소스의 감미로운 어쩌구… 이런 식의 이름만 특이한 샐러드 따윈 거의 보이지도
않았고, 주로 고기요리였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정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치료한 것은
아니니 개의치 않아도 됩니다.”
“네, 괜찮아요.”
“워낙 부상이 심했던 상태라 아직은 무리하면 안 됩니다. 장을 이어 붙인 후유증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꼭
주의를 하십시오.”
“고마워요.”
‘특이한 남자네.’
그녀도 자신의 부상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들어서 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살려준 게 바로 저 어린
의사였다.
‘매력적이야. 아주.’
“준비한 것을 가져와.”
“네, 보스.”
# 119
“스위스 은행에 닥터 김의 명의로 계좌를 하나 개설했어요. 250 만 달러를 넣었으니 원하는 대로 쓰도록
하세요.”
“……!”
진현은 입을 벌렸다.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닙니다.”
“그러면요?”
물론 그도 돈이 좋다.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그래,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가지고 왜 특별한 대가를 받는단 말인가? 물론 정해진 보수는 받아야겠지만.
“닥터 김의 뜻은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네?”
“……!”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닥터 김이 안 쓰겠다면 그 250 만 달러는 허공에 날아가겠네요. 스위스 은행만 좋겠어요. 저희는 그 돈에
신경을 끌 거고, 닥터 김도 안 가진다면… 이제 250 만 달러는 스위스 은행 것이지요, 뭐.”
“…….”
“제가 병원 일이 바빠서…….”
“…….”
‘싫다고!’
일단 생긴 게 자신의 타입이었다. 동양의 동안(童顔) 청년, 인텔리적인 이미지. 독특한 자신의 취향에 딱
맞았다.
더구나 자신의 생명을 구했을 뿐 아니라 대화를 나누며 나오는 성격도 진솔했다.
‘한번 꼬셔볼까?’
“아니요. 그냥요.”
그러고 그녀는 고혹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와인을 머금은 입술이 장미처럼 물들었다.
***
“후우.”
“즐거우셨던 것 같습니다.”
“납치해 올까요?”
매리는 큭큭 웃었다.
“그럴까?”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담배 좀 줘.”
“로이드.”
“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흐음…….”
“당시에 의심 가는 자는 없고?”
“의심 가는 자는 없지만…….”
“없지만?”
“누구?”
“그래, 그렇군.”
“그렇습니다.”
“한국이라고 했지? 혹시 그쪽에 우리와 끈이 있는 곳이 있나?”
“가능합니다.”
“내 생명을 구해준 남자의 일이니 탈탈 잘 조사해 봐. 당시 상황뿐 아니라 이사장한테 구린 구석은 없는지,
비리는 안 저질렀는지. 모두.”
***
“왠지 귀가 가렵군.”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김진현.
세계 3 대 의학 저널에 5 편이라니.
‘제기랄.’
물론 이제 김진현, 그 눈엣가시와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애초에 이상민 때문에 그놈을 적대시했던 것이니까.
“고 교수.”
“네, 이사장님.”
“네, 맞습니다.”
이종근은 곧바로 세인트 죠셉의 정길수 과장에게 김진현에 대한 메일을 작성해 보냈다.
구구절절 거창하게 썼으나 내용을 요약하면 간단했다. 적당히 잘 처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백중현 실장이?”
“들어오라 하세요.”
질책하는 말투였다.
# 120
“그렇긴 하지.”
“그러면 늦기 전에 간 이식 준비를…….”
“수술하다 잘못되면?”
“네?”
“혹시라도 수술하다 잘못돼서 죽으면 그때는 수술한 사람 목으로 끝나지 않아. 나나 자네나 다 옷 벗어야 해.”
그게 문제였다.
고영찬의 말이 옳았다.
“……!”
이종근은 고영찬의 말뜻을 이해했다.
고영찬은 씨익 웃었다.
이종근은 손을 쳤다.
“원체 어려운 수술이니 간 이식은 미국의 손꼽히는 병원에 가서 받는 게 좋겠다고 하면 되겠군. 그런데 어느
병원을 추천하지?”
***
“사장님, 오셨습니까?”
“아버지는?”
“안에 계십니다.”
이동민은 고용인을 따라 커다란 방으로 들어갔다.
이동민이 깜짝 놀라 말했다.
“아버지 보러 왔죠.”
“무슨?”
“그게 무슨 말이냐?”
하지만 지극한 효자인 그는 아직 아버지를 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니, 아직 아버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대일 IT 의 사장이자 대일병원을 지원하는 이사회, 대일홀딩스의 최고 대주주인 이동민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든 보답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
세인트 죠셉의 모두가 진현의 이야기만 나오면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그만큼 진현은 뛰어난 1 년을 보냈다.
-연구 능력은 아이큐 500 의 외계인, 수술 능력은 마스터 서젼(Master surgeon)급. 한마디로 언빌리버블
(Unbelivable), 미라클(Miracle) 김!
진현은 마피아 보스 피의 매리를 수술한 것을 계기로 여러 수술을 집도하기 시작했고, 모든 수술을 훌륭한 솜씨로
성공시켰다.
대접도 최고가 되었다. 상식을 초월하는 능력을 몇 번이고 보여준 진현을 대우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승승장구하던 중 이런 일도 있었다.
“네, 주지사님의 조카인 에이미 양이 극구 칭찬을 해서요. 뭐, 탈장 수술이 큰 수술도 아니고 관련 교수님들이
마침 학회라 일정도 안 맞고요.”
“Great!”
진현은 손을 저었다.
그것 하나는 확실했다.
# 121
어쨌든 진현은 그렇게 무탈… 아니, 승승장구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병원장 제임스에게서 전화가 왔다.
-닥터 김? 잠시 볼 수 있을까요?
“아, 네.”
무슨 일이지?
미라클 김.
최근 들어 진현이 가진 별명이다.
세인트 죠셉의 의사들은 진현의 실력을 새로이 볼 때마다 크게 감탄했고, 그 외계인 같은 연구 실적과 최고의
수술 실력에 경의를 표해 진현에게 미라클 김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아…….”
“이사회와 상의했는데 지금까지의 미라클한 실적을 고려해서 조건을 더욱 상향했습니다. 이리저리 세부 조건이 더
많지만, 간단히 말해 연봉 70 만 달러, 맨해튼 내 사택 제공. 어떤가요?”
미국이 아무리 의사의 천국이라지만 이 정도 연봉과 대접을 받으며 지내는 의사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게…….”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필드에서 최고 수준의 서젼이 연봉으로 150 만 불까지 받는 것을 고려하면 70 만 달러도 많다고 할 수 없었다.
‘이런 어쩌지.’
‘그건 절대 안 돼!’
“…….”
‘더 올려볼까?’
물론 그건 겸양의 말이었다.
‘어차피 이제 돈 많아.’
진현이 말했다.
“교환교수요?”
“네, 제가 정합니다.”
“다음 번 대일병원으로 갈 교환교수는 저로 지명해 주십시오. 대일병원 측에서 어떤 반대를 하더라도. 반드시!”
저 멀리 그들이 있을 것이다.
이상민, 이종근.
***
“네, 김입니다.”
‘무슨 일이지?’
곧 방에 도착하니 수북이 쌓인 논문 서류 사이로 날카로운 인상의 정길수가 보였다. 희끗희끗한 머리가 정길수의
연륜을 보여줬다.
“부르셨습니까?”
“영어.”
“네?”
“아, 죄송합니다.”
진현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간만에 한국인을 만나 자신도 모르게 한국어로 이야기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몇 가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네. 앉게.”
“왜 그렇게 했나?”
“네?”
“논문 말이야.”
“……!”
‘그거야 관례적으로…….’
“예의상 그런 것은 아는데, 그건 좋은 관례가 아니야. 공동 저자는 논문에 기여한 사람으로 적어야지. 앞으로는
이러지 말게.”
“네, 죄송합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
‘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아, 아닙니다.”
“원래 이런데 나와서 한국인들끼리 챙기고 뭉치는 건 좋지 않아. 그래도 계속 이야기는 듣고 있었네. 믿을 수
없는 연구 실적들, 탁월한 수술 솜씨. 정말 잘했고 수고했네. 딱히 한국에 애정이 없는 내가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내가 자네와 같은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러울 정도로 잘했어.”
뭔가 뭉클해지는 말이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무엇입니까?”
“이종근이 자꾸 자네를 세인트 죠셉에서 파면시키라는 등, 미친 소리를 계속해서 말이야. 이종근 알지? 그
인간쓰레기 이종근.”
“원래 처음 세인트 죠셉에 왔을 때부터 자네를 처리 해달라고 나한테 연락을 했는데, 다 무시하고 있었거든.
메일이 오면 스팸 처리하고.”
“…….”
“그런데 어제 또 연락이 오더라고.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아나?”
“…….”
“왜 그런 표정 짓나? 잘했지?”
# 122
“받게.”
“이건……?”
정길수가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
미국이 좋은 점은 밤새 일하면 휴식을 보장해 준다는 점이다. 내일은 오랜만에 늦잠을 자기로 결심했다.
‘차를 사야 하는데.’
진현의 드림카인 포르쉐보다 몇 배는 비싼 차의 창문이 스르륵 열리며 실버 블론드에 벽안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에요, 닥터 김.”
“…여긴 무슨 일입니까?”
“그야 닥터 김 보러 왔죠.”
“그러니까 왜 절 보러 오는 겁니까?”
오늘뿐이 아니었다.
코앞에 살면서 이리저리 피하는 것도 한계여서, 식사를 몇 번했는데 어느 날 그녀가 천청벽력 같은 말을 했다.
-우리 사귈래요, 닥터 김?
-……!
어쨌든 덕분에 세인트 죠셉에는 진현이 마피아 보스의 애인이라는 웃지 못할 소문도 돌았다.
“…하나도 안 쓸쓸합니다.”
“그러지 말고 타세요. 닥터 김이 좋아하는 한식 소고기 집 예약해 놨어요.”
그런데 그때였다.
빠앙!
“에이미?”
“에이미,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싫어해? 누가 그래?”
매리가 적극적으로 들이대자 에이미도 자극을 받은 것인지 진현에게 열심히 작업을 걸었다.
아무리 클랜시 패밀리의 기업이 잘나간다고 하지만 세계에서 손꼽히는 다국적 제약회사인 헤인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저기 나는…….”
“미스터 김은 가만히!”
“…….”
그냥 빨리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고 싶었다.
***
서울의 한남동 한가운데 위치한 그 저택은 어마어마한 크기와 호화로움, 그리고 삼엄한 경호로 대일 그룹의
넘치는 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진현이 미국으로 떠난 후, 할아버지인 이해중 회장의 저택에 들어와 생활하는 중이었다.
‘수술 중인가?’
그래, 그가 보고 싶었다.
“사랑해… 정말 보고 싶어…….”
문득 그런 걱정이 들었다.
그를 믿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모르는 것이다. 이국땅에서 쓸쓸히 지내는데 누군가 접근하면 흔들리지 않는단
보장이 없었다.
‘사랑해…….’
그런데 그때였다.
“아가씨!”
“……!”
무슨 일이지?
“……!”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아가씨! 회장님이!”
혜미는 사람들을 헤치고 이해중 회장에게 다가갔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그녀도 치프급의 내과의사로 응급처치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삐보! 삐보!
***
“간성 혼수요?”
“네, 원래 간은 몸의 노폐물을 해독하는 기관인데, 그 간의 기능이 악화되면서 해독 능력이 떨어져 노폐물이
몸에 쌓이면서 생기는 혼수입니다. 간성 혼수 자체는 치료하면 되는데… 문제는 회장님의 간이 결국 한계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간과 더불어 콩팥의 기능도 같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
“네… 간 기능도 최악의 상태고, 콩팥도 같이 나빠지고 있는데… 이럴 경우 보통 일주일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
“이렇게 간 기능 자체가 안 좋아지는 경우는 현대 의학으로도 방법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런……! 말도 안 되는!”
옳은 말이다.
# 123
이동민이 물었다.
“무엇입니까?”
“오래 사셨지.”
이동민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
“미국으로 갑시다.”
“……!”
“어차피 여기에 있어도 죽는다지 않습니까? 미국 최고의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봅시다. 미국에서는 혹시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미국 어느 병원으로?”
“지난번 보니 미국 내 간 파트는 뉴욕의 세인트 죠셉 병원이 랭킹 1 위더군요. 그쪽으로 갑시다.”
그러나 회장 본인이,
“일단 살아야 나중에 노여워라도 하시죠. 어차피 아버지는 지금 의식이 없으니 제 말대로 합시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곧 이해중 회장을 태운 전용기가 하늘을 날았다. 세인트 죠셉 병원이 위치한 뉴욕을 향해.
***
전용기 안에서 이동민은 초조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하늘 가득한 구름이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어쩔 수 없지요. 꾸물대다가는 그 돈만 아는 놈들이 미국으로 떠나게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테니까요.”
다들 자신의 앞으로 떨어질 재물에만 관심 있지, 아무도 이해중 회장의 소생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요.”
“네, 세인트 죠셉의 병원장 라인으로 연락을 해놨습니다. 회장님의 상태에 대해선 대일병원에서 전부 자료를
보내놨고요. 간 파트의 주임교수는 부재중이지만, 최고의 의료진으로 대기해 놓겠다고 합니다.”
“다행이군요.”
***
뉴욕에 도착한 이해중 회장은 병원 측에서 미리 마련한 앰뷸런스를 타고 곧바로 맨해튼 세인트 죠셉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런…….”
“어떻습니까?”
“일단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후 억겁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최악의 상태였다.
“좋지 않군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간 이식을 해야 하는데 나이도 고령이고 환자분의 췌담관 해부학적
구조에 기형이 있어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게 간이식을 시행하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
그는 데이비드의 손을 붙잡았다.
털썩!
데이비드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일어나십시오!”
“하아…….”
“네, 저보다 훨씬 뛰어난 의사입니다. 몇 번이고 기적을 선보인 의사이니 어쩌면 방법을 찾을지도 모릅니다.”
데이비드는 말했다.
“한국의 닥터 김이라고 합니다. 저희 세인트 죠셉 병원에서는 미라클 김이라 부르는 세기의 천재이지요.”
“……!”
***
“한국의 닥터 김입니다.”
“……!”
“김진현이라고 합니다.”
“아니…….”
일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진현을 알고 있었다.
‘저 청년은 대일병원에서 천재로 불리다 의사면허가 정지된 그 의사잖아. 아무리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해도
의사면허가 정지된 적이 있는 돌팔이를 소개해?’
삐딱한 말투였다.
“네,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어쩌면 방법을 찾을지도 모릅니다. 닥터 김, 여기는 한국 국적의 환자로
간경화가 악화돼…….”
“그만두십시오.”
“네?”
“닥터 김이 왜요?”
“사과하십시오.”
“뭐라고?”
“……!”
# 124
그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한국의 강민철 교수님도 이 사실을 알기에 수술을 포기했겠지. 하지만 정말 방법이 없을까?’
이전 삶에서 그 환자가 죽은 후 진현은 깊은 실의에 빠졌었다. 반드시 살리고 싶었던 환자였기 때문이다.
보호자들은 최선을 다한 진현에게 오히려 감사를 표했지만 이후 진현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었다.
“……!”
모두 진현의 말에 깜짝 놀랐다.
명을 살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니까.
“어떻습니까?”
오히려 애송이가 뭣도 모르고 소중한 아버지의 몸에 실험적 시도를 하려고 한다는 느낌만 받았다.
“……!”
“네, 사장님.”
***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네, 사장님.”
‘하필 왜 지금 눈보라가!’
“선생님, 혈압 떨어져요!”
“간 기능 악화로 인한 증세입니다.”
“좋아질 수는 있는 것입니까?”
데이비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
“워낙 고령이고 어려운 테크닉이라 성공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아니,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그러나…
….”
“……!”
이동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
그 말에 이동민은 먼 옛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런 효심에 이해중은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물론 뛰어난 능력이 뒷받침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럴까요?”
조카 이혜미였다.
“어, 혜미야.”
“괜찮다. 괜찮으셔.”
-흐윽. 네, 작은아버지.
-……!
-왜, 왜요?
***
-김진현? 최고입니다.
-최고 중의 최고이지요.
최대원의 답이었다.
방법은 단 하나.
첫 번째 이유는 보호자인 이동민이 환자의 소생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
“물론 수술해도 안 좋아질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그래도… 환자분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 보고 싶습니다.”
“…….”
“…아버지를 살릴 수 있습니까?”
“잘… 꼭 잘 부탁합니다.”
# 125
이식을 위한 매칭(Matching) 검사는 이미 대일병원에서 완벽히 끝내놓은 상태여서 진행에 문제는 없었다.
간을 받을 이해중 회장의 수술은 ‘미라클 김’이 담당하고, 간을 줄 이동민의 수술은 데이비드가 담당하기로
했다.
이동민이 말했다.
“만약 아버지만 살려주신다면 어떤 보답이라도 하겠습니다. 설사 한국의 대일병원의 병원장 자리를 원하신다 해도
드리겠습니다.”
***
“얼마든지.”
‘잘할 수 있을까?’
진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수술장 천장 너머로 있을 하늘을 바라봤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작합니다.”
초고난도의 수술이었다.
***
이동민은 어스름한 빛에 깨어났다.
“으윽! 아버지는?!”
“아직 수술 중입니다.”
백중현이 답했다.
“수술 시작 후 13 시간째입니다.”
“13 시간이요?!”
이동민은 깜짝 놀라 외쳤다.
“그러면 수술은…….”
“네.”
보다 못한 백중현이 말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회장님이 돌아가면 다른 형제분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 겁니다. 사장님이
확고히 경영권을 확립하지 않으면 대일 그룹은 끝입니다.”
“사장님.”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습니다.”
“네?”
“수술장에 가봐야겠습니다.”
“하, 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어차피 수술장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사장님은 지금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거기 비켜주세요!”
‘수술은?!’
“……!”
“잘됐습니다.”
“네?”
“오래 걸리긴 했지만 다행히 잘 끝났습니다. 물론 정확한 경과는 아직 지켜봐야 알 수 있겠지만 수술 자체는
성공적입니다.”
“……!”
“…감사합니다. 정말로…….”
***
그런 그의 정성 때문인지 이해중 회장의 상태는 조금씩 조금씩… 하지만 확실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순히 실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환자를 돌보는 정성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도 합병증이 생길까 많이 걱정했는데 큰 문제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사장님의 효심 덕분인 것 같습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해중 회장이 정신을 차려도 간 이식까지 하고서 일선으로 복구할 수 있을 확률은 적었다.
그 말에 이동민은 입을 다물었다.
‘꼭 은혜를 갚아야지.’
“네, 수고하십시오.”
“참 좋은 의사죠? 실력이면 실력, 친절이면 친절, 환자를 위하는 마음이면 마음.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어요.
왜 진즉 저런 의사를 못 만났을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백중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흠… 무슨 문제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 126
“무슨 말입니까?”
“수술이 잘되긴 했어도 이해중 회장님이 일선으로 복귀하는 데는 무리가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옳은 말이었다.
“……!”
하지만 이해중의 의식만 돌아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동민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경고라면?”
“좋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최근 주가가 안 좋던데 이왕이면 언론사를 통해 그룹 회장의 건재를 알리도록
하세요.”
-다행이군요.
-네,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수술이 굉장히 성공적이어서 곧 의식을 회복할 것으로 보입니다.
-놀랍군요. 누구인가요?
-김진현, 이곳 미국에서는 미라클 김이라 불리는 천재 외과의사입니다. 김진현 의사는 이전 비행기에서 김창영
총리를 치료한 적도 있습니다.
***
이해중 회장이 안 좋을 때는 코빼기도 안 비치고 재산 싸움만 준비하던 형제들이, 그가 상태가 회복하니 하나둘
얼굴을 드러냈다.
“그만됐다.”
“네?”
“……!”
“됐다. 다 돌아가라.”
“몸은 어떠십니까?”
이해중이 빙긋 웃었다.
하여튼 이해중이 깍듯이 고개를 숙일 때마다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말려도 이해중은
요지부동이었다.
“제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럽니다. 이렇게 불편해서야 좋아지던 간도 다시 나빠질 것 같은데요? 그러니 저를
생각해서라도 보답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대일 IT 의 사장 이동민이었다.
“그래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네?”
애도 아니고, 이게 무슨…….
“무엇입니까? 원하는 것은 뭐든지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제일 사랑하는 손녀딸을 달라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
이해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이기에 그렇습니까?”
하지만 멀지 않았다.
***
“그렇지?”
“그런데 몸은 정말 괜찮으십니까?”
원채 고령에 시행한 간 이식이고 면역억제제를 사용 중이기에 이해중 회장의 몸 상태는 이전에 비해 훨씬 쇠약해진
상태다.
죽을 운명에서 벗어났는데.
“미라클 김 말입니까?”
“세인트 죠셉 놈들은 어떻게 저런 보배를 뺏어갔지? 원래 우리 대일병원의 의사지 않더냐. 이종근 이 자식은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없어.”
“하지만…….”
“……!”
더구나 진현은 단순히 수술 실력을 떠나 학술적인 면에 있어서도 메이요의 오영수나 엠디엠더슨의 오스틴 김을
능가할 재능을 가진 외계인급의 천재이다.
***
메디컬 환생
지은이 | 유인
펴낸이 | 문상철
NEW EPISODE
교정 · 교열 | 정성훈
편집 · 제작 | 정성훈
표지일러스트 | stc
타이포그래피 | 기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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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
“이 주제를 말입니까?”
“네, 현재 간암의 병기가 바르셀로나를 따르긴 하지만 오쿠다 등 확립이 안 되어서 정립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요.”
연구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 뒤에도 진현은 단순한 미래의 지식이 아닌, 자신의 아이디어로 연구를 구상하여 발표했다.
그렇게 진현이 세인트 죠셉에 머무는 2 년 동안 이룩한 학문적 업적은 기함할 정도였다.
***
“상민 씨? 상민 씨?”
“상민 씨!!”
“……!”
“아… 아니야.”
“담배 좀.”
“줘.”
“안 된다니까요.”
“주라고.”
“……!”
“병원? 맨날 출근하잖아.”
“내가?”
“걱정돼서 그래요.”
“걱정하지 마.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환각(Hallucination)… 정신증(Psychosis)…….’
지난 죄악에 대한 징벌일까?
‘재미없군.’
‘재미없어.’
그는 실없이 생각했다.
그는 문득 피식 웃었다.
김진현.
왜일까?
오늘따라 그가 보고 싶었다.
***
빠아앙!
“아버지는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용인이 그를 맞았다.
이종근이 버럭 화를 내었다.
“…….”
“왜 부르셨어요?”
“2 주 뒤에 특별히 하는 일은 없지?”
“고영찬 교수가 본인 연구를 네 이름으로 발표했어. 발표 파일과 대본도 다 준비해 놨으니 넌 몸만 가서 발표하고
와.”
***
고영찬은 자신의 연구 때문에 참석한 것이고 이종근은 최근 답답한 마음에 휴가차 갔다.
‘한심한 놈.’
“네.”
그때 고영찬이 물었다.
“B 구역의 오후 2 시 30 분입니다.”
“B 구역…….”
오늘만 7 회의 발표.
중간에 이상민의 조잡한 발표가 끼어 있긴 했으나 진현의 굵직한 발표에 가려 몇 명이나 관심을 가질지 모를
지경이었다.
“여긴 내 자리요!”
A, B, C, D 4 구역 중 B 구역이 가장 미어터졌다.
이종근과 고영찬은 엉거주춤 간이의자에 앉았다. 이사장 체면에 그나마 계단에 안 앉아서 다행이었다.
‘도대체 이 무슨…….’
“세기의 천재라잖아.”
“일본인인가?”
“아니야. 한국인이라는데?”
“뭘, 그래 봤자 지금은 반은 미국인인걸. 내가 세인트 죠셉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한국에서 쫓겨나듯 세인트
죠셉으로 온 것이라 던데?”
“말씀하십시오.”
짝짝짝!
‘젠장.’
1 년 전 이해중 회장을 치료할 때 시도했던 방법으로, 그 아이디어에 감명한 데이비드가 같은 환자를 만날 때마다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킴스 메소드(Kim’s method).
진현은 자신의 이름을 붙일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학회에서 지식을 공유하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Oh, my God!”
“지저스(Jejus). 어떻게 저런 방식으로?”
“무엇입니까?”
정확한 지적이었다.
수술법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어야 가치가 있지, 일부의 뛰어난 사람만 사용할 수 있으면 가치가 없다.
“……?”
“많은 발표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이상 질문이 없으면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 마치기 전에.”
다름 아닌 이상민이 앉아 있는 쪽이었다.
진현의 눈이 깊어졌다.
“거기 한국에서 오신 의사 선생님은 따로 질문 없으십니까? 계속 말없이 계시던데.”
“……!”
“질문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진현은 짧게 말했다.
“조만간 봅시다.”
“……!”
마지막 말은 한국어였다.
항상 1 등과 2 등.
***
다시 날씨가 싸늘해졌다.
세계의 중심 뉴욕.
맨해튼 센트럴 파크 인근에 위치한 뉴욕 최고의 병원 세인트 죠셉에서 병원장 제임스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결국 제임스가 항복했다.
“알겠습니다. 너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대신 교환교수 기간이 끝나면 곧바로 돌아와야 합니다. 알겠죠?”
“네, 감사합니다.”
***
특히 그를 후계자로 여기며 아꼈던 강민철의 상심은 상상을 초월해 한동안 술독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잘됐어. 정말 잘됐어.”
강민철은 기뻐 중얼거렸다.
더구나 단순한 금의환향 정도가 아니라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대가가 되어서 돌아오는 것이다.
청출어람.
***
모두들 진현의 인품과 환자를 향한 마음, 그리고 그의 뛰어난 실력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일 그룹의 전체 회장인 이해중과 확고한 후계자 이동민은 김진현, 그놈을 은인으로 여겨 거액을 들여서라도
대일 병원으로 스카우트하고 싶어 했다.
# 129
고영찬이 살짝 당황했다.
이종근은 버럭 화를 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크윽!”
고영찬이 놀라 다가왔다.
“이사장님!”
“크윽…….”
“괜찮으십니까?”
“그래도 혹시 다른 병이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막내 동생인 이동민이 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승계받기 시작한 뒤로 그룹 내에서 대일병원을 바라보는 시선이
심상치가 않다.
“어쨌든 세인트 죠셉 측에 말해. 김진현, 그놈은 절대 안 된다고. 만약 반발하면 앞으로 교수 교류를 끊겠다고
전해.”
어차피 교수 교류야 학문적 상징성이 있을 뿐, 병원 전체에 큰 영향을 주는 사안이 아니므로 교류를 끊어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
***
“대일병원에서 거절했다고요?”
“네, 닥터 김.”
그래도 막상 자신들의 소중한 보물이 대일병원에서 거절당하자 본인이 거절당한 것처럼 기분이 나빴다.
‘이종근…….’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일병원이 이런 식으로 강경히 나온다면 세인트 죠셉 측에서도 진현을 보내줄 방법이 없다. 아니, 별로 보내주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 같고.
‘어떻게 하지?’
진현은 자신의 교수실에 돌아왔다.
센트럴 파크와 맨해튼 서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교수실은 혼자서 쓰기엔 지나치게 넓고 호화로웠다.
***
다른 교수가 답했다.
“네, 맞습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72 기면 까마득히 어린 후배이다.
“어땠나?”
“학생일 때도 천재였습니다. 그때도 최고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성장해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접촉이라 하면……?”
좋은 생각이었다.
“그래, 민 교수가 책임지고 최대한 빨리 연락해 보라고. 광혜병원이나 기독병원에서 채가면 곤란하니까.
***
단순히 NEJM 몇 편 기재… 이런 게 아닌, 의학적 패러다임을 바꾸는 저널을 몇 편이나 쓴 것인지 모른다.
“가겠습니다.”
“명의(名醫) 후속 편을 찍고 싶다고요?”
-네, 선생님.
명의는 한국의 고명한 의사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으로 의사에 대한 미화가 장난이 아니라 지난번 방송을 찍고
나서 얼마나 민망했던지 모른다.
-미국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 어떤 한국 의사보다 한국을 빛내고 있지 않습니까? 선생님의 자랑스러운 업적을
한국인으로서 소개하고 싶어서 그러니 제발 부탁합니다.”
진현이 지금까지 해낸 일이 너무나 많아 객관적인 사실만 담아도 방송 시간이 모자랄 걱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KBC 방송국에서 스탭들이 뉴욕으로 날아와 진현의 업적을 카메라에 담았다.
왜 없겠는가?
# 130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진현이 학계에 몇 년간 남긴 업적들, 마피아 두목을 치료한 이야기, 뉴욕의 명사들을 수술한 이야기, 그리고
대일 그룹의 회장인 이해중의 목숨을 살린 이야기…….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판타스틱한 이야기들이 주르륵 펼쳐졌고 반응은 예상대로 대박이었다.
-김진현 교수는 기회만 된다면 귀국해 한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한국 대일병원에 교환교수로
오려 했으나 병원 사정상 결렬되어 안타까워했습니다.
***
한국의 수많은 사람이 그 방송을 보았다.
“동민아.”
“네, 아버지.”
“…아니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왜 거절을 해? 종근이, 그놈이 거절한 건가? 도대체 왜? 거금을 주고 모셔 와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해중은 혀를 찼다.
“네, 아버지.”
“물어볼 게 있다.”
“……!”
“그, 그건…….”
이종근은 말을 더듬었다.
대답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기분 나쁜 놈이어서, 라고 답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내가 예전부터 세인트 죠셉의 김 교수를 협력 교수로 초빙하자고 이야기했지? 그건 왜 소식이 없어? 김 교수가
거절한 거야? 아니, 연락을 해보긴 해본 거냐?”
그는 떠듬떠듬 변명했다.
그의 언성이 점차 올라갔다.
“지금 당장 돌아가서 세인트 죠셉 쪽에 연락해. 교환교수로 김 교수를 파견해 달라고. 그리고 김 교수가 오면 꼭
협력 교수 계약을 맺어. 어떤 조건을 제시해도 좋으니! 알았느냐!”
“아, 알겠습니다.”
“가봐.”
“네, 네.”
이동민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참 못난 형이었다.
***
“그래.”
그런데 이제 와서 파견 보내달라니?
“크윽!”
“이, 이사장님.”
스트레스가 심해저서인지 두통의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한참을 괴로워한 뒤에야 두통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종근은 고개를 저었다. 뇌에 종양이 있지 않는 한, 이런 류의 두통은 검사한다고 원인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해중과 이동민이 김진현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대일병원이라도 선물로 줄 기세였다.
이종근은 말했다.
“…네.”
잘못은커녕 그처럼 훌륭한 의사도 찾기 어렵다. 못난 이종근 혼자 찌질하게 못 잡아먹어 안달일 뿐이다.
스타 의사가 제 발로 온다고 했는데 거절할 때는 언제고, 다시 와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다니. 세인트 죠셉이
얼마나 역정을 낼지 막막했다.
‘젠장, 때려 칠 수도 없고.’
한참을 주저하던 고영찬은 전화를 들었다. 그리고 최대한 조심스럽고 친절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세인트 죠셉은 잔뜩 짜증을 부렸고, 고영찬은 전화기 너머로 굽신굽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
오랜 친우, 이상민이었다.
“반가운 소식?”
“친구요?”
이연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친구라고?
‘혹시?’
“친구라면… 혹시?”
“응, 김진현이야.”
‘진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게 차인지 벌써 몇 년의 시간이 지났건만 왜 또 그의 이름에 가슴이
반응하는 걸까?
“왜? 무슨 할 말 있어?”
“네.”
“뭔데?”
“……?”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오래됐어요.”
“그래?”
“네.”
“거짓말하지 마요.”
연희는 그의 손을 잡았다.
“연희야.”
“네?”
“우리 결혼할까?”
“……!”
“말 돌리지 마요.”
“말 돌리는 것 아닌데.”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내는 다른 여자를 선택했고, 지금 함께하고 있는 연인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자신의 마음도.
그의 마음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와 자신 모두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이란 것이다.
정말 바보 같은 일이었다.
***
-그래, 언제 온다고?!
“한 달 정도 있다 봄 되면 갈 것 같아요.”
“1 년 정도 쭉 있을 것 같아요.”
혜미였다.
-…….
잠시 혜미는 말이 없었다.
“혜미야?”
-…좋아서.
울먹거리는 목소리.
“아니. 바보 같지 않아.”
그러면서 말했다.
# 131
“죄송합니다.”
“소주? So…ju?”
“네,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그렇게 데이비드는 거한 술자리를 예약하고 사라졌고, 얼마 뒤 핸드폰이 띠링하고 울리며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국으로 가기 전 만날 수 있나요?
에이미와 피의 매리.
***
주말 늦은 저녁에 진현은 맨해튼 중심가에 위치한 음식점에 도착했다. 미슐랭 3 성의 스테이크 집으로 진현이
좋아하는 소고기 요리점이었다.
“…….”
이 여자가 지금.
바빠 죽겠는데.
“…??”
“일단 식사 먼저 하세요. 샐러드는 또 안 먹나요?”
“5 년에 한번 받죠, 뭐.”
스테이크를 먹으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였다. 스테이크가 바닥을 드러낼 쯤, 에이미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무엇입니까?”
“첫째는….”
“네?”
“…!!!”
“정확한 사정이야 모르지만… 그래도 만약 누군가 괴롭히면 헤인스의 이름을 파세요. 대일 그룹도 최근 대규모로
투자하는 생명공학, 바이오 쪽을 포기할 생각이 아니면 우리 헤인스의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맡는 프로젝트마다 대박이 터지니 헤인스는 진현을 마이더스의 손처럼 귀하고 고맙게 여겼다.
“두 번째 이야기는 별건 아니고….”
“……?”
“좋아해요.”
마치 ‘날씨가 좋네?’라고 말하는 듯한 말투여서 진현은 말뜻을 이해 못했다. 아니, 이해는 했는데 머리에서
받아들이질 못했다.
진현의 말을 더듬었다.
“에, 에이미?
“왠지 한국에 다녀오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범죄가 될 것 같아서 미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좋아해요.
진심으로.”
“대답은요?”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정말로.”
***
“오랜만입니다, 닥터 김.”
“네, 다들 오랜만입니다.”
“제 집은 반대방향입니다.”
“…….”
얘네들이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라 진현은 잠자코 있었다. 적당히 드라이브를 하면 집에 보내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선물입니까?”
“아… 받으세요.”
“이게 뭡니까?”
“열어보세요. 지금.”
“…이게 뭡니까?”
“한국에 가서 쓰시라고요.”
“…총을 말입니까?”
“…….”
“장난이에요. 장난.”
“…재미없습니다.”
“이번엔 뭡니까?”
“받으세요.”
“아니에요. 받으세요.”
“하지만…”
“이거 안 받을 거면 총이라도 받으세요.”
빼곡한 서류뭉치였다.
“이건?”
***
인천국제공항.
“좋은 여행 되십시오.”
단정한 스튜어디스가 승객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였고,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인사를 받았다.
“네, 감사합니다.”
한국에 돌아왔다.
드디어!
입국 수속 후 캐리어를 찾고, 게이트를 넘으니 바글바글 보이는 한국인들이 고향에 돌아왔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좋구나.’
“지, 진현아?”
“…!!!”
고개를 돌린 진현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에 비해 수척해진 얼굴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
진현은 입을 열지 못했다.
한걸음. 한걸음.
“잘 지냈어?”
“…아니.”
“왜?”
“나도…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
그녀가 울먹거렸다.
진현은 약속했다.
***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우람한 체구, 반백의 중년 남자가 서있었다. 간 이식 파트의 대가이자 진현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강민철이었다!
저 멀리서 캐쥬얼 차림에 온화한 남자, 유영수 교수가 고개를 흔들며 다가왔다.
“잘 지냈어, 김 선생?”
“아… 유 교수님.”
강민철과 유영수는 대일병원 외과 내에서도 가장 바쁜 사람들인데 제자가 온다는 이야기에 만사 제쳐두고 공항까지
달려온 것이다.
“김 선생, 자네 온다는 이야기에 강민철 교수님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 오죽했으면 수술이 한 가득
밀려있는데 다 제쳐두고 여기까지 왔겠어?”
“감사…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네, 정말 감사합니다.”
# 132
132. 대가(大家) (1)
반가운 마음에 강민철이 낮술을 달리려는 것을 간신히 말리고, 공항에서 간단한 식사만 한 그들은 유영수의 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했다.
“조만간 꼭 술 한잔 먹자고.”
“병원에 먼저 가겠습니다.”
진현은 짧게 답했다.
부아앙!
***
“김 교수님이 머물 곳은…….”
“무엇입니까?”
“아, 아… 네.”
“알겠습니다.”
꼭대기 층에 위치한 이사장실에 도착하니 고혹적인 인상의 미녀, 민 비서가 진현을 맞았다.
“네, 오랜만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는 우리 대일병원 외과의 과장 고영찬 교수라고 합니다. 업무나 일정은 고 교수와 상의하면 됩니다.”
“……!”
이전처럼.
***
“큭!”
“이, 이사장님.”
‘빌어먹을.’
***
업무를 조율하는 고영찬이 그를 불편해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교환교수라는 직위 자체가 학문적 교류에 의의가 있는
것이지, 업무를 부려먹으려는 것이 아니어서 그렇다.
가족들과 회포를 풀고, 강민철과 술을 먹고, 그를 아끼던 사람들과 재회를 하고, 그리고 혜미와 못다 한
데이트를 하고…….
“크… 이렇게 돌아와서 정말 기쁘다. 정말로! 네가 그렇게 미국으로 갔을 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어쨌든
성공해서 돌아온 거지?”
“뭐, 그냥.”
“아버지께서는 건강하시고?”
“철우야.”
“응?”
“너 내 친구지?”
“자식이, 그런 걸 왜 묻냐?”
그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
“고맙다.”
***
그 꿀 같은 휴식은 금세 끝이 났다.
이런 내용의 글이 인터넷 환우회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고, 진현은 계속해서 몰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저… 선생님.”
“무슨 일입니까?”
“강연이요?”
뜻밖의 부탁이었다.
“네, 사실 김진현 교수님이 미국에서 쓰신 논문들을 보고 감명받은 레지던트가 많아서… 꼭 강연을 듣고 싶다고
의견을 모아 이렇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아, 네…….”
“네, 감사합니다!”
대표 김은성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연한다고, 김 선생?”
“네.”
“잘됐네. 나도 가서 듣지.”
“네?”
뭔가 이게 아닌데?
# 133
“심포지엄요?”
“그래, 그렇지 않아도 내가 회장으로 있는 간이식 학회에서 김 선생 강연 안 하냐고 자꾸 연락이 왔거든. 기회가
되면 초빙해서 강연 듣고 싶다고. 그냥 그러지 말고 아예 대일병원 컨벤션 센터를 빌려서 심포지엄을 열지?”
유영수도 신 나서 말했다.
“간이식 학회에는 제가 공지하겠습니다. 이거 몰려올 사람들 숫자를 생각하면 병원 내 컨벤션 센터가 좁을지도
모르겠는데요?”
“…….”
이런 공지문이 간이식 학회, 간 학회, 대한 외과 학회에 전달되었고 전국의 의과대학 및 병원에서 문의 전화가
쇄도했다.
***
그렇게 진현이 드넓은 창공으로 끝없이 날아오를 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네.”
“…네.”
“…….”
“네.”
“잘됐군.”
“…예?”
“네, 그렇습니다.”
“그렇긴 합니다.”
이종근이 말한 주제는 진현이 지난번 발표한 연구로 기존 학설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내용의 주장이어서 많은
논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렇진 않았다.
그 주제에 대한 진현의 논문은 향후 3 년 뒤 5,000 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다기관 대규모 선행 연구로 진실이
밝혀지는, 시대를 앞선 주장이었으니까.
“그렇지?”
“네.”
“네?”
“기존 학설과도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이잖아. 자네가 그 문제를 지적해서 망신을 줘보게.”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학계에서 명성의 관점으로 세인트 죠셉의 김진현과 그를 비교하면 태양과 반딧불 정도의
차이가 났다.
강민철 정도 되는 간이식의 대가면 김진현의 주장에 면박을 주는 언급을 할 수 있다. 물론 상대의 주장에
김진현도 순순히 당하진 않겠지만.
하지만 고영찬이 괜히 어설프게 면박을 줬다간? 반대로 톡톡한 망신만 당하고 말 것이다.
‘미치겠군.’
“…….”
‘이게 무슨…….’
짝짝짝!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강민철을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간이식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그에게 모두들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
논문의 핵을 찌르는 날카로운 지적도 많았으나 지난 2 년간 수많은 학회를 다니며 미국의 대가들과 논쟁과 토론을
거듭한 진현이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좀 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해, 현재 세인트 죠셉과 엠디엠더슨, 홉킨스가 연계해 다기관
선행 연구(Multicenter prospective study)를 진행 중입니다. 파일럿 스터디(Pilot study) 결과,
현재 예상과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대가(大家).
그래, 대가였다.
바로 강민철 같은.
‘나도 한때 저런 것을 꿈꿨는데…….’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세파에 찌들고 스스로의 무력함을 깨달으며 권력만 탐하는 인물로 변해갔다.
‘김진현…….’
가슴이 쓰렸다.
이유 없이.
***
지금까지는 그저 막연하게만 느껴졌다면 이제는 확고한 대가로 모두의 가슴에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위상을 다시 한 번 높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백중현입니다.
짧은 소개.
건강문제로 경영권은 막내아들 이동민에게 대부분 할양된 상태지만, 막대한 입김은 여전했다.
“의료진이요?”
-네, 지금 교수님도 훌륭하시지만 회장님께서 세인트 죠셉에서 온 김진현 교수님의 진료를 받고 싶어 하셔서요.
김진현 교수님의 진료로 변경해 주십시오.
# 134
134. 몰락 (1)
“……!”
대일그룹… 아니, 대한민국 최고의 경제 권력자 이해중 회장의 주치의가 김진현으로 변경되는 순간이다.
***
이해중 회장은 통행이 통제된 검사실에서 최고 수준의 검사를 받고, 최고층에 위치한 VIP 병실로 이동했다.
과거의 사례를 보면 이해중 회장은 절대 은혜를 잊지 않아, 크든 작든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준 의사에게 큰 사례를
했었다.
당시 1 주일간 입원했을 때 담당 교수는 물론, 수발을 들은 간호사, PCD 소독 담당 레지던트, X ray 를 촬영한
방사선사… 모두 수천만 원 상당의 사례를 받았었다.
간단한 폐렴조차 그랬는데 불가능하다 일컬어진 간이식 수술을 성공해 목숨을 살려준 김진현이다.
“우리 병원에 병원장 자리가 의미가 있나? 어차피 이종근 이사장이 다 해먹는데.”
“자네들은 그거 모르나? 요새 대일그룹 내에서 이종근 이사장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많아. 대일그룹의 경영권을
승계 받은 이동민 사장이 이종근 이사장에게 이를 갈고 있다던데?”
물론 김진현은 세인트 죠셉 소속의 의사이고, 대일병원에는 교환교수로 온 것이니 시간이 지나면 미국에 돌아갈
것이다.
병동 하나의 크기만 한 그 병실은 최고급 인테리어로 장식되어 있는데, 병실이라기보단 동남아 호화 리조트의
스위트룸 같았다.
“오랜만입니다, 김 선생님.”
“네, 안녕하셨습니까?”
‘이종근이야… 이미 연을 끊은 가족이니.’
어린 시절 혜미를 포함한 자식들을 어떻게 학대했는지 알고 있는 진현은 그를 혜미의 아버지 취급해 줄 생각이
없었다.
“다행이군요.”
“네, 괜찮습니다.”
“면역억제제를 복용하면 감염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중간에 고열이 나거나 하면 곧바로 병원에 연락을
주십시오.”
“네, 말씀하십시오.”
“……?”
“김 선생님은 늙은이들이 얼마나 궁금증이 많은지 모르는 모양입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계속 궁금해했습니다.
도대체 나중에 무슨 부탁을 하려고 그러나. 내가 아끼는 손녀딸이라도 달라는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김 선생이
한국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궁금증을 푸나 했는데… 계속 아무런 말씀도 없고. 궁금해죽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때 찾아 봬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정신분열병(Schizophrenia).
이제는 조현병이라 이름이 바뀐 이 질환은 망상, 환각을 보며 와해된 언어나 행동, 정서적 둔마, 무논리증,
무욕증 등이 나타나는 질환으로…….
‘재미없군.’
환각(Hallucination).
여상이 생각했다.
‘재미없군.’
그래, 재미없었다.
고난도의 췌장암 수술, PPPD 를 집도하는 대일병원의 오기수 교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민 선생?”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걱정 감사합니다.”
그리고 따분한 표정으로 자신의 환자를 살피는데, 외과 중환자실 B-zone 에 위치한 다른 환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게 김진현이었으니까.
“…….”
“…….”
저벅.
CCTV?
저벅.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으으…….”
“김진현…….”
“으으…….”
흠칫!
김진현이었다!
이상민이 말했다.
“왜 멈추지?”
# 135
135. 몰락 (2)
“뭘?”
“몰라서 물어?”
김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래, 뭐.”
어째서?
도발이었다.
진현은 피식 웃었다.
“김진현…….”
***
“많이 기다렸어?”
“특별한 일은 없었어?”
특별한 일.
아무리 이상민이 범죄의 천재라도 경계를 곤두서고 신변을 주의하고 지내면 어쩔 방법이 없었다.
그래, 정말 멀지 않았다.
“어디 갈 데가 있어서.”
“어딜?”
부르릉.
“너도 잘 아는 곳이야.”
“어딘데? 어디 가려는데?”
혜미는 볼을 부풀렸다.
눈치챈 것이다.
“진현아, 설마 지금?”
“응.”
진현은 답했다.
***
그룹 전체의 비서실장인 그가 마중 나온 것만으로도 이해중 회장이 진현의 방문을 얼마나 반기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아가씨?”
“아… 백 실장님.”
“왜 아가씨가 김 선생님과……?”
“그게…….”
‘보기 좋은 커플이군.’
“어서 오십…….”
“아… 작은 아빠…….”
“……!”
***
“김 선생이 우리 손녀딸과…….”
생각지도 못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대기업의 총수라 해도 손녀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진 않으니 혜미가 누구와 사귀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당연했다.
최고의 신랑감이다.
“크흠, 그게 아니라…….”
그건 아니다.
김진현이 왜 마음에 안 들겠는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주었을 뿐 아니라, 미국 의학계를 뒤흔들 정도의 천재 의사에, 인품도 요즘 젊은이들답지 않게
훌륭하다.
다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녀딸이다.
이해중은 입을 열었다.
“김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할아버지.
특히 이동민이 신이 나서 술을 권했다.
‘취하면 안 되는데.’
“네,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 이종근의 여성편력으로 어머니가 자살했고 어머니 없이 자라며 가정폭력에 시달렸다.
그 사실을 이해중이 눈치채 손을 쓰기 전까지 그녀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유일하게 가족으로 여겼던 이범수의 죽음까지. 그녀의 과거는 슬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래, 잘 부탁하네. 그리고 혜미가 아버지와 사이가 무척 안 좋지만 그래도 아버지니 가서 인사를 드리게.”
“회장님.”
# 136
136. 몰락 (3)
“그건…….”
***
진현이 이해중에게 인사를 올린 후, 며칠의 시간이 지났다.
이동민이 다가왔다.
“동민아.”
“네?”
이동민은 입을 다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어떻습니까?”
“뭘?”
“김 선생 말입니까?”
이해중은 투덜거렸다.
그래도 핏줄이라서 이사장 자리에 앉혀놓고는 있지만 이종근 그놈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병원에 무슨 혁신?”
“대일병원은 너무 정체되어 있습니다. 그룹의 지원금으로 국내 1 위 자리를 지키곤 있지만, 들어가는 돈에 비하면
별다른 발전도 없는 상황이지요.”
“그래서?”
“그런데 이런 상황에도 이종근 이사장은 자신의 아들이란 이유만으로 이상민을 병원의 후계로 지목했지요.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병원을 지휘해도 모자랄 판에 말입니다.”
이상민은 혜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손주이긴 하지만, 마음에 드는 손주는 아니었다. 태생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그룹의 병원을 외부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지 않느냐? 핏줄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지, 한국대 차석
졸업자이기도 하고. 후에 경험이 쌓이면 잘하겠지.”
“새로? 그게 무슨 말……?”
이동민이 눈을 빛냈다.
“아직은 연배가 어리지만 조금만 더 경험을 쌓으면 그보다 훌륭한 적임자는 없습니다.”
“그래, 내 생각도 그렇긴 해. 한번 고민해 봐야겠군. 그런데 손녀사위가 대일병원의 병원장 자리를 맡으려 할까?
세인트 죠셉 병원에서도 스타 대우를 받으며 의학자로서 최고의 길을 걷고 있는데.”
***
‘빌어먹을.’
“누구 마음대로?”
이종근은 이를 갈았다.
“누구?!”
“…김진현 교수입니다.”
이 순간 제일 꼴 보기 싫은 놈이었다.
“무슨 일인데?!”
“긴히 할 말이 있다고…….”
“들어오라고 해.”
“…네.”
“거기 앉으십시오.”
짙은 커피 향이 방 안에 맴돌았다.
“이사장님.”
“……?”
“저에게 혹시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
“잘 모르겠다고요?”
이종근이 버럭 화를 내었다.
“그게 뭐요?”
“한번 읽어보십시오.”
“바쁜데 자꾸 이러면…….”
그가 내민 서류.
그것은 매리의 클랜시 패밀리가 진현을 위해 심혈을 다해 마련한 선물로, 지난 10 년간 이종근의 죄악이 모조리
담겨 있었다.
병원에서의 직위, 재산을 잃는 것은 물론, 수없는 시간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지도 몰랐다.
“모든 죄를 인정하고 스스로 대일병원의 이사장직에서 물러나십시오. 그리고 대일병원과 대일그룹에 관련된 모든
지분은 이혜미에게 할양하고, 부정으로 축재한 재산은 전부 사회에 환원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이 서류를 경찰에
넘기지 않겠습니다.”
“……!”
“제 솔직한 마음으론 당신이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처벌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요.”
# 137
137. 몰락 (4)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자신이 사랑하는 혜미를 낳은 아버지이기에 일말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기다리겠습니다.”
곧 괴성이 터져 나왔다.
***
와장창!
진현은 이사장실 밖에서 고가의 장식품들이 깨져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비웃음을 지었다.
‘추해.’
이종근.
‘내 제안을 받아들일까?’
상관없다.
‘이걸로 끝이 아니야.’
그 다음은 이상민이다.
이상민.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이다.
***
어떻게 입수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모든 증거가 김진현 손에 있어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크윽!”
와장창!
민 비서가 덜덜 떨며 그를 만류했다.
“닥쳐!”
짝!
“꺄악!”
눈이 시뻘개진 이종근이 애꿎은 민 비서의 따귀를 날렸고,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
이종근이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 주진 않았지만, 간간히 내뱉는 욕설만으로도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종근의 죄악은 그 혼자만의 죄악이 아니라 심복인 고영찬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끝장이구나.’
지난 세월 어떤 삶을 산 것인지 모르겠다.
‘김진현…….’
“제기랄! 빌어먹을!”
이종근은 이를 악물었다.
‘수를 써야 해. 어떻게 해서든.’
하지만 어떻게?
‘꼬리라도 자를까?’
‘병원 자금 횡령과 리베이트 건만 무마하면 돼. 나머지는 그룹 형제들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
거야.’
그래도 그나마 천만다행인 점은 리베이트를 받을 때 모두 고영찬의 손을 빌렸고 3 국에서 자금을 세탁해 어떻게든
덮어씌울 수 있다는 것이다.
“고 교수?”
“네?”
“크흠, 그게…….”
“네?”
“그건 이사장님께서……?”
“…….”
‘하…….’
“나보고 다 덮어쓰라고?”
‘뭘 위해 산 것인지… 허무하구나.’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 네. 금방 가겠습니다.”
복강경 담낭 절제술.
나름의 천재라 불리고, 병원의 후계로 꼽히지만 아직 그가 집도할 수 있는 수술은 이런 간단한 종류들밖에 없었다.
이상민뿐 아니라 다른 재능 있는 외과의들도 전공의, 전문의 시절 충분한 경험을 쌓은 후에야 고난도 수술을
집도할 수 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진현.
그 재능과 연륜, 경험을 아득히 초월한 천재는 외과의 수술 중에서도 가장 초고난도로 꼽히는 간이식 수술을
수없이 집도하고 있었다.
“수술 시작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네, 수고하셨습니다.”
임상강사, 전문의 탈의실은 교수들과 공동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레지던트 시절보다 훨씬 넓고 쾌적했다.
김진현이었다.
“…….”
“김진현…….”
“김진현…….”
손만 뻗으면 목에 닿을 거리.
“…….”
숨 막힐 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움직인 그 손은 진현의 경동맥 근처로 향했고, 조금만 움직이면 개미를 눌러 죽이듯,
숨을 끊을 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멈칫.
“김진현…….”
그리고 그는 등을 돌렸다.
“왜 그냥 가지? 좋은 기회 아닌가?”
진현이었다.
# 138
138. 몰락 (5)
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래.”
“뭐, 어쨌든 좋아. 너같이 미친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바 아니니까. 그래도 한 가지는 명심해.”
“…….”
“얼마든지.”
“김진현…….”
무채색 통로의 끝으로 시선을 옮기니 늘 보이는 환각들이 그에게 비명을 지르며 저주를 퍼부었다.
***
‘막아야 돼. 무조건!’
김진현의 자료가 이해중과 검찰에 넘어가면 그가 평생을 걸쳐 이룩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아니야. 동민이 그놈이 나를 도와줄 리가 없어. 오히려 눈에 불을 켜고 나를 감방에 넣으려고 하겠지. 그러면
다른 형제들은?’
이동민에게 밀려 그룹 내에서 별다른 영향력도 없었고, 형제가 위기에 빠졌다고 손을 내밀어줄 위인들이 아니다.
오히려 박수를 치며 기뻐하면 기뻐했지.
‘제기랄.’
사실 이혜미와 그는 거의 의절한 것이나 다름없어 부녀간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사이였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종근은 그런 사실 따위는 까마득히 잊고 생각했다.
‘혜미는 예전부터 착했으니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혜미가 부탁하면 그놈도 한발 물러설 거야.’
이종근은 버럭 화를 냈다.
“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뭔 말이 많아! 지금 당장 알아봐!”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후에는 최대원의 뒤를 따라 소화기내과 분과를 선택했고, 한창 내시경 수련에 열중
중이었다.
“이혜미는?”
“네?”
드륵.
하지만 그뿐.
“이혜미.”
이종근이 딸을 불렀다.
하지만 묵묵부답.
오히려 혜미는 비수면 내시경을 받는 환자에게 친절한 설명을 하였다.
‘이년이!’
당장에라도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부탁을 해야 하는 처지라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혜미야, 아비다.”
아비.
이종근이 다시 한 번 딸을 불렀다.
쓱쓱.
“뭐?!”
“그리고 관계자 외에는 검사실에 들어올 수 없는데, 어떻게 들어오신 거죠? 검사에 방해되니 나가주세요.”
“혜미야!”
“그깟 검사라고요?”
“그래! 그깟…….”
“……!”
‘빌어먹을! 빌어먹을!’
내시경 검사가 끝났는데 이혜미의 검사 방에 새로운 환자가 입실하더니 다시 검사를 시작한 것이다.
“꺄악! 뭐 하는 거예요?!”
탕!
“이리로 와!”
“꺄악! 놔요!”
“놔, 놔요.”
할아버지가 그 사실을 깨닫고 개입한 후에는 학대에서 벗어났지만, 그때의 트라우마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크음, 흠.”
하지만 너무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스트레스 때문일까?
두통도 그렇고, 원래도 참을성이 없는 성격이었지만 최근에는 더욱더 감정을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진현이는 왜요?”
당연히 안다.
이종근은 이를 갈았다.
“…….”
“…무슨 말이요?”
“제가 왜요?”
# 139
139. 몰락 (6)
“뭐?”
황당하다 못해 화가 났다.
“…전혀 기억하지 못하나 보군요. 당신이 저에게 어떤 일들을 저질렀는지. 하긴, 당신한테는 별것도 아닌
일이었을 테니까요.”
일 초라도 더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잠깐!”
“놔요.”
“때린 거요?”
“그래, 그때 일은 내가 미안하다.”
“그래요. 사실 그건 별일 아니죠. 다 지난 일이기도 하고.”
“어머니는요?”
“뭐?”
이종근과 결혼한 그녀의 어머니는 그의 여성편력과 가정폭력 때문에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혜미야. 사랑하는 내 딸.
그렇게 딸만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버티던 어머니는 시간이 지날수록 생기를 잃었고, 결국 이종근이 이상민과 술집
여자인 그의 어머니를 집에까지 끌어들여 바람을 피우자 극단적 선택을 하였다.
배다른 오빠인 이범수가 그런 그녀를 정신적으로 지탱해 주었지만, 그마저 이상민 때문에 고혼이 되어버렸다.
혈육에 대한 정은 이범수의 죽음이 이상민 때문이란 것을 깨닫고, 이종근이 그 사실을 자신의 욕심 때문에
외면하려고 할 때 바닥나 버렸다.
“못 나가.”
“놔요.”
“이이……!”
“꺄악!”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김진현이었다.
진현은 우연히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다급한 사정을 목격한 혜미의 동료에게 연락을 받고 온 것이었다.
“그렇습니까?”
‘인간 쓰레기…….’
진현은 이를 갈았다.
“……!”
오랜 죄의 대가를 치를 때였다.
***
민 비서가 놀라 막았다.
“……!”
경찰 배지였다!
민 비서는 말을 더듬었다.
거친 인상의 사내, 김철우는 그녀를 비켜 지나가 벌컥 이사장실의 문을 열었다.
“당신들 뭐야?!”
“경찰입니다.”
이종근은 급히 말을 끊었다.
“알지.”
“나 대일그룹의 이해중 회장의 아들이야! 나한테 이러고도 너희들 말단 경찰들이 무사할 것 같아……?!”
“…뭐?”
갑자기 그게 무슨?
“늦었습니다, 이사장님.”
“…고영찬 교수!”
“제가 다 자백했습니다.”
십 년은 늙은 듯한 얼굴, 고영찬이었다.
지난 삶의 모든 것이 덧없었다.
“고영찬 이 자식아……!”
흠칫 놀란 이종근이 뒤로 주춤 물러섰다.
이종근은 모르고 있었지만, 과거 김철우의 아버지는 대동맥 파열로 응급실에 왔을 때 이종근의 수작으로 죽을
뻔했다.
김철우가 으르렁거렸다.
***
“이게 정말인가?”
이동민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아, 아버지!”
“이종근, 내 이 자식을……!”
***
“뭐?!”
대한민국 경제계를 넘어 정계, 법조계에도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일그룹의 힘이면 아무리 큰 죄라도
흐지부지 없앨 수 있었다.
“동민아!”
“도, 동민아?”
“아버지가 손녀사위가 될 김진현 선생께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아들을 못나게 키워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부질없는 부르짖음이었다.
***
“피고의 죄는…….”
# 140
‘이렇게 끝나는군.’
“가지, 김 선생.”
“네.”
이종근은 바득 이를 갈았다.
저놈 때문이다!
분노가 극에 달한 이종근이 어디서 온 힘인지, 놀라운 괴력으로 경찰을 뿌리치더니 수갑을 찬 채로 진현에게
달려든 것이다.
“컥!”
“죽어! 죽으라고!”
비뚤어진 분노로 몸의 잠재된 힘을 모두 끌어낸 것인지 요지부동이었고, 진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죽어! 죽어!”
그런데 그때였다.
“아……?”
“아, 아…….”
“뭐 하는 거야, 이놈아?!”
‘동공이!’
동공이 풀려 있는 게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단순한 실신이 아니라 머리, 뇌(Brain)쪽에 갑작스레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
“원래부터 감정 억제를 조절하는 전두엽 쪽에 뇌종양이 있었는데, 이번에 출혈성 경색을 일으켰습니다. 뇌내압이
높고(IICP), 범위가 커서 당장 대뇌 절제술을 시행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종근은 대뇌절제술을 받았고, 목숨은 건졌으나 눈을 깜빡거리는 것 외에는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는
전신마비 상태가 되어버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
차에서 내리자마자 미리 연락을 받은 것인지 나이 지긋한, 호텔의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진현을 맞이했다.
“아, 네.”
마치 극빈이라도 맞는 듯한 예의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쉬고 있습니다.”
“컨디션이?”
“네.”
“그래, 심란하긴 하겠지. 아무리 못났어도 아비가 그렇게 됐으니. 착한 아이니 더 그럴 거야.”
이동민의 말대로였다.
부녀의 연을 끊고, 원망만 가득 아버지였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네, 감사합니다.”
“술이나 한잔 받지.”
“식사는 했나?”
“큰일이요?”
“그래, 큰일.”
“그게 무슨 말입니까?”
“김 선생.”
“네.”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스카우트제의라니?
“종근이 형이 그렇게 된 것은 하늘의 벌이라 생각하지만… 대일병원이 곤란하게 됐네. 종근이 형을 대신해 누군가
병원을 맡아줘야 하는데… 당장 마땅한 사람이 없거든.”
진현의 눈이 커졌다.
“지금 그 말씀은…….”
“참고로 이건 나 혼자만의 의견은 아니야. 아버지도 기꺼이 찬성한 일이네. 우린 자네가 대일병원을 맡아줬으면
좋겠어.”
“……?”
“누구보다도 뛰어난 실력, 세계를 울리는 학문적 성과, 더구나 이제 조만간 결혼식만 올리면 우리 가문의 사람도
될 거고.”
“하지만 전 너무 어립니다.”
“물론 자네 나이가 지나치게 어리단 점이 걸리긴 하지만 그것 빼고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 않은가?”
이동민도 진현의 나이가 걸리긴 했으나, 그거야 시간이 지나면서 극복될 문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네는 외모 말고는 그 나이대로 보이지가 않아. 나이 많은, 연륜 깊은 의사를 보는 것 같네.
이건 내 생각만은 아니야.”
“우린 자네가 그냥 맡아줬으면 좋겠는데. 이종근 형님이 이렇게 되어서 당장 병원을 맡을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혜미한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진현이야 세계적 명망을 가진 의학자로 대일병원의 대표가 될 자격이 있었지만, 혜미는 상황이 달랐다.
그저 뛰어난 수재일 뿐 상대적으로 평범한 그녀가 대일가문의 일원이란 이유만으로 대일병원을 맡으면 반발이
보통이 아닐 것이다.
어린 여자인 점도 큰 단점이었고.
“추천할 분이 있긴 합니다.”
“누구인가?”
“현재 대일병원에서 일하고 계신데 누구보다도 환자에게 헌신적이고, 대일병원을 위해 일하실 분입니다.”
이동민은 다시 물었다.
진현은 짧게 답했다.
***
강민철은 투덜거렸다.
실력이면 실력, 연륜이면 연륜, 환자를 위하는 마음이면 마음, 병원을 위한 헌신…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강민철은 다시 한 번 투덜거렸다.
그 취임연설이 시작이었다.
대일병원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 141
단 하나,
“글쎄? 이종근 이사장도 그렇게 됐는데 나가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분위기 보니 차후 병원은 김진현 교수가
물려받게 될 것 같은데.”
그는 그저 미소 지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전문의, 임상강사는 레지던트, 교수와는 다르게 굉장히 짧은 기간을 단위로 계약을 한다.
시간이 지나면 계약을 갱신하며 교수 발령을 기다리는 것으로 원래 그는 최소한의 시간만 채우고 대일병원의 정식
외과 교수가 될 예정이었다.
“그동안 수고했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즉, 반발을 해도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나마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김진현을 불의의 방법으로 제거하는 것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상민은
지난번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
그때 이상민이 말했다.
“한마디만 묻겠습니다.”
“뭔가?”
“제 해고는 김진현 선생님의 뜻입니까?”
“……!”
충분한 답변이었다.
“김진현…….”
“김진현…….”
의미심장한 목소리.
그의 연인, 이연희였다.
***
“오래 기다렸어?”
“아니요. 식사했어요?”
“아니, 아직.”
“왜, 안 먹었어요?”
“그냥. 생각 없어.”
이유가 짐작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보고 싶어서요.”
“응?”
“고맙네.”
“아니야. 나도 너 보고 싶었어.”
“피이, 거짓말은.”
“응, 알지.”
“상민 씨.”
“응?”
“힘내요.”
“…뭘?”
그래, 잘 모르겠다.
“당신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에요. 솔직히 말해… 원래는 안 그랬지만… 어느덧 그렇게 됐어요. 그러니…
당신이 기운을 냈으면 좋겠어. 대일병원에서 나가면 어때요? 어차피 일할 데는 많고, 정 안 되면 저와 같이
병원이나 차리면 되니 힘내요.”
“…….”
그 뒤로 잠시 대화가 끊겼다.
“왜 그렇게 봐요?”
“연희야.”
“왜요?
“여행이요?”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왜, 싫어?”
마지막?
그의 눈이 깊게 침잠했다.
“김진현.”
***
‘오늘까지 이 일을 처리하고…….’
띠리링.
‘이 번호는?’
“여보세요?”
“……?”
그런데 목소리가 이상했다.
-아… 아, 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흐윽! 크윽.
“……?!”
진현은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 말입니까?”
무언가 겁에 질린 듯한…….
‘설마?’
설마가 아니었다.
‘이상민?’
-…….
“알겠습니다. 지금 어디입니까?”
정확한 상황은 모르지만 공포에 질린 듯 떨리는 목소리를 볼 때 무언가 협박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다리던 바다.
뚜뚜.
김철우였다.
-여보세요?
“철우야, 나 진현이다.”
진현은 짧게 말했다.
“지난번에 내가 했던 부탁 기억하지?”
# 142
‘이상민…….’
쥬피르.
처음으로 그와 술을 마신 장소.
‘쓸데없는 기억이지.’
진현의 눈이 무거워졌다.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혼자 갔다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과거에 저지른 죄악을 밝히지 못한다 해도, 그녀를 인적 드문 곳으로 데려와 협박하는 것만으로도 콩밥을 먹이기
충분했다.
‘무슨 꿍꿍이지?’
부릉.
이곳이었다.
“이상민.”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연희는?”
“안에서 자고 있어.”
“자?”
“응, 푹 자.”
잔다고?
“약을 썼나?”
“그래, 왜 나를 부른 것이지?”
“뭐?”
“무슨 헛소리를…….”
“……!”
진현은 흠칫 놀라 그를 바라봤다.
“글쎄?”
***
“한잔 받아.”
“…….”
“일단 마셔.”
‘갑자기 무슨 꿍꿍이지?’
“그래, 좋아.”
만약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지금쯤 근처에 잠복했을 김철우를 비롯한 경찰들이 들이닥칠 것이고.
가슴을 태우는 듯한 위스키 특유의 독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진현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질문.
진현은 불쾌한 얼굴로 답했다.
“발렌타인 30 년산.”
진현은 침을 삼켰다.
그의 손이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이것을 사용할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이 미친놈이 발작을 안 한단 보장이 없으니 불의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그거 알아?”
“뭘?”
“난 네가 거슬렸어.”
“……!”
“물론 넌 나에게 의미가 있는 유일한 친구이긴 해. 술집 여자의 아들이라 나와 어머니는 가문에서 개돼지 같은
취급을 받았고, 그 스트레스 때문인지 어머니가 정신분열병으로 미쳐 삶이 참 지긋지긋했거든. 그때 날 그나마
마음을 담아 위로해 준 것은 네가 유일했지.”
진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
“……!”
진현의 눈이 커졌다.
“…말해봐라.”
“철없던 어린 시절, 가문에서 개돼지 취급당하면서 어머니가 모진 구박으로 스트레스로 미쳐 정신분열병에 걸렸을
때 한 결심이 있지. 최고가 되자고. 최고가 되어 저들을 처참하게 눌러주자고. 넌 내가 안 보이는 곳에서 얼마나
피 터지는 노력을 했는지 모를 거야.”
“…….”
이상민은 담배를 입에 물고 치익 불을 붙였다.
그때 진현이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미워 혈우병 환자의 수혈팩에 항응공제를 섞고, 날 교통사고를 위장해 죽이려 하고, 송영
그룹 회장의 딸을 공기색전증으로 죽인 거냐?”
“……!”
진현은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무슨 꿍꿍이지?”
“마지막이니까.”
의미심장한 목소리.
“뭐?”
그러나 한발 늦은 대처였다.
철컥.
“그 만년필. 총이지? 바보가 아니면 호신용 총 같은 무기를 가져올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귀엽게 생긴 걸
가져왔네.”
진현은 이를 갈았다.
“내가 왜?”
“이……! 미친놈!”
“닥쳐!”
“뭐?”
“……!”
“이… 개 자식……!”
“왜? 너한테 압도적으로 유리한 제안이야. 다섯을 셀 때까지는 절대 너를 쏘지 않겠어. 아, 물론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이 가까워지면 당장 너를 쏘겠지만. 경찰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너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면
잠시 가만히 있는 게 좋을걸?”
“……!”
진입을 시도 중인 경찰하게 하는 경고였다.
“이 미친놈! 왜 이런 짓을?”
“5.”
“……!”
진현의 눈이 흔들렸다.
“4.”
“3. 착한 진현 씨. 이건 너한테 주는 기회야. 그나마 나한테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었던 친구한테 주는 기회.
정말 안 쏠 거야? 죽는다?”
“……!”
그는 유혹하듯 말했다.
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이 개자식!’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2.”
이상민이 2 를 세었다.
이제 2 초도 안 남았다.
1 초.
억겁 같은 시간이 째각 지났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 후.
타앙!
총성이 울려 퍼졌다.
# 143
“김 선생, 이제 괜찮나?”
“아… 괜찮습니다.”
괜찮다.
납치, 총기 협박!
진현에게 했던 자백을 근거로 이상민은 지금까지의 죄악들을 조사받았고, 그는 자신의 범죄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재판 결과는 무기징역.
“이제 끝났어. 잘됐어.”
진현은 중얼거렸다.
이종근은 하늘의 심판을 받아 식물인간이 되었고, 이상민은 평생을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마지막 순간…….
‘시간이 없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리고 그때 마지막에…….’
늘 가면 같은 미소 뒤에 숨어 있던 게 저 얼굴이었을까?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그날 날 부른 것이……?’
그것 외에 중요한 것은 없었다.
정말로.
***
혜미와의 결혼식이었다.
‘그녀와 처음 만난 지 벌써 12 년째구나.’
시간이 정말 빨랐다.
12 년이라니.
‘상부(上府)의 비(婢).’
실패의 실패 끝에 죽음을 목전에 두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상부의 비라는 여인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벌써 회귀 후 16 년이다.
“김 선생, 정말 축하하네.”
모두 그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로 그들이, 그들의 축하가 진현의 삶의 가치를 증명해 주었다.
“범생이, 정말 축하한다.”
이전 삶에서 지독한 악연이었던, 이제는 누구보다도 진현을 소중한 친구로 여기는 김철우가 큰 웃음을 지으며
축하를 던졌다.
진현의 아버지를 치료한 위암의 대가, 어느덧 흰머리가 부쩍 늘어난 최대원이 잔잔히 웃었다.
강민철뿐이 아니었다.
“닥터 김, 정말 축하합니다.”
“닥터 김, 저도 결혼 축하드려요.”
“그래도…….”
“…….”
“제가 와서 싫으세요?”
“아닙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
누구지?
“아……!”
“정말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니, 저분은?”
“저분도 결혼식에?”
진현의 눈도 커졌다.
부드러운 목소리.
“어떻게 여기까지?”
“하하. 정말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만약 진현이 단순히 실력만 뛰어난 의사였으면 이렇게 하객들이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네.”
“쩝. 뭐, 강민철 교수님도 훌륭하긴 하지만. 그래도 오래는 못 기다려 줘. 5 년! 5 년만 미국에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
뭐, 긴 주례가 뭐가 필요하겠는가?
아, 그리고 뽀뽀 타임.
“사랑해.”
16 년.
회귀 후 진현의 삶이 담겨 있는 사진이었다.
# 144
“마지막까지.”
***
유럽인들이 최상의 허니문 장소로 꼽는 세이셀 군도는 아프리카 인도양 서부 마다가스카르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랑해.”
“응.”
“피곤해?”
“아… 응.”
“도착까지 한참 남았으니 좀 자.”
호텔방처럼 변한 퍼스트 클래스가 고요히 잠겨 들었고, 장기간 비행 끝에 그들은 세이셀 군도에 도착했다.
***
그리고…….
“혜미야?”
“이혜미?”
침실을 벗어나 거실에 나가니 흐릿한 실크 커튼 너머 발코니에 가녀린 몸매의 여인이 서 있었다.
“…….”
하지만 역시 답이 없다.
못 들은 것은 아닐 텐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혜미야?”
먼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던 것이다.
“…….”
“무슨 생각했어?”
“……!”
“아…….”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뿐이랴?
“…….”
진현은 그런 혜미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혜미야.”
“…응.”
고작 몇 마디 말로 그 아픔을 감쌀 수는 없다.
다만…….
“……!”
혜미의 눈이 다시 흔들렸다.
“애기?”
12 년.
찰싹찰싹.
***
‘좋구나.’
“응.”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
‘저 남자는?’
“아니, 너는?”
마치 못 볼 사람이라도 만난 표정.
“강민 씨, 아는 사람이에요?”
“누군지 알아?”
“강민……?”
“에엑? 그 돼지 김강민이라고?”
돼지 김강민!
“살 많이 빠졌네…….”
“그러게.”
“응.”
진현이 웃었다.
“응?”
빈말이 아니었다.
“그야 그렇지.”
“어떤?”
“비밀이야.”
“응? 그게 무슨 비밀이야.”
“뭐야, 궁금하잖아.”
그런데 그때였다!
파라솔 옆 수영장이 갑작스럽게 시끄러워졌다.
‘아니, 무슨. 신혼여행 중에 심장마비 환자야! 내가 아무리 내공이 안 좋아 뒤로 넘어져도 환자가 나빠지는
사람이라지만!’
“컴프레션(Compression:가슴압박)!”
“제세동기 좀 가져와주십시오!”
‘어떻게 하지?’
“아아, 제발 살려주세요!”
‘이런.’
“……!”
익숙한 한국어.
김강민이었다!
더욱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래, 부탁한다.”
“차징(Charging)! 쇼크!”
퍼억!
다시 맥이 돌아왔다.
“하아… 다행이다.”
3 명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고, 다행히 환자는 헬기를 타고 병원까지 무사히 이송할 수 있었다. 모두 그들
덕분이었다.
혜미는 지친 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
“…잘 지냈냐?”
“…응.”
확실히 잘 지낸 것 같긴 하다.
다다다.
“다 도착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가자, 혜미야.”
“잠깐, 김진현!”
김강민이었다.
“응……?”
“그때… 미안했다.”
“……!”
진현이 눈이 커졌다.
“혜미, 너도 미안하고.”
“아, 아. 응.”
그런데 왜일까?
이상민.
그도 바뀔 수 있었을까?
‘됐어. 의미 없는 이야기야.’
그때 김강민이 말했다.
“참, 나도 외과 선택했다. 지금 한국대 병원에서 레지던트 중이야.”
그건 정말 의외였다.
“왜 외과를?”
“글쎄?”
“너야, 김진현.”
“…뭐?”
진현은 입을 벌렸다.
이게 무슨 황당한 이야기?
악수 신청이었다.
“…그래.”
성공한 삶.
그중에서도 최고의 산부인과 의료진이 달려들었음에도 아이와 산모, 둘 모두 생사를 장담하기 어려운 난산이었다.
‘제발……!’
째각째각.
“자기야. 우리 애기야.”
“잘 키우자. 행복하게.”
“응. 꼭.”
몇 년의 시간이 더 흐르고, 아이가 걸음마를 떼고, 말을 하며, 재롱을 떨기 시작할 때 진현은 자신의 의학
업적에 획을 그을 전기를 마주했다.
“닥터 김, 이것 좀 봐주시겠어요?”
“무슨 일입니까?”
“원인 불명의 발열(Fever of unknown origin)로 치료 중이고, 장폐색이 심하게 왔어요. 간 수치도
이상하게 높고… 혈소판도 낮고… 뭔가 이상해요.”
그 말에 진현은 고민했다.
‘발열, 장 폐색…….’
“여행력이라니?”
“……!”
남아프리카 공화국.
점점 느낌이 안 좋아진다.
테노포 바이러스.
테노포 바이러스는 원인불명의 발열과 장 폐색이 나타나는 질환으로 악화 시 장이 썩어 들어가며 사망하게 된다.
‘과거 대유행한 사스(SARS)와 비슷한 경우지. 사스(SARS)도 중국 광동성 사향고양에 서식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체에 감염돼 대유행 한 경우니까.’
사스(SARS)를 일으키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숙주가 사향고양이인지 박쥐인지는 논란이 있었지만, 의학계 역학자
(Epidemiologist)들 일부는 사향고양이를 숙주로 생각했다.
사향고양이를 요리하는 요리사가 사스(SARS)에 감염 후, 그 환자를 진료한 광동성의 의사가 홍콩에 학회에 참여.
“테노포 바이러스?”
당연했다.
아직까지 테노포 바이러스는 미생물 전공, 그중에서도 저명한 바이러스 학자(Virologist)가 아니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질환이니까.
하버드의 웨슬리 박사는 테노포 바이러스의 존재를 입증한 업적으로 대유행이 끝난 후 노벨 생리의학상의
수상후보가 된다.
“테노포 바이러스는…….”
“흠… 생소한 질환이긴 하지만… 계속 발열의 원인을 못 찾는 불명열(Fever of Unknown Origin) 환자니
확인해 볼 필요는 있겠어요. 닥터 김의 말대로라면 충분히 의심해 볼만 하고.”
# 146
테노포 바이러스의 유행이 끝나갈 무렵에 발표된 논문으로 전공 외과 분야는 아니었지만, 워낙 중대한 질환의
발표라 기억이 났다.
‘RNA 바이러스를 타겟으로 하는 항바이러스제의 일부가 테노포 바이러스의 증식 억제에 효과가 있었다는
내용이었지? 장의 괴사로 진행도 막아, 사망률 감소에도 도움이 되었고.’
그 논문의 내용이 정말로 사실이면 앞으로 발생할 사망자를 극적으로 낮출 수 있겠지만… 신빙성이 떨어졌다.
마침 오랜 파트너이자, 이제는 친한 친구처럼 지내는 에이미 엔더슨의 헤인스도 해당 약제를 생산, 판매한다.
-미스터 김? 무슨 일이에요?
***
과거 진현에게 마음을 주었지만, 지금은 깨끗이 정리한 모습으로 독신인 그녀는 성공을 향해 박차를 달리고
있었다.
“잘 지내셨어요?”
“네, 오랜만입니다.”
마치 그의 별명인 미라클(Miracle)처럼.
“테노포 바이러스요?”
에이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듣는 바이러스다.
진현은 말을 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분명 말씀하신 바이러스라면 분자구조식상 저희 회사의 RNA 바이러스를 타깃으로 한 항바이러스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군요. 물론 임상연구를 해봐야 알겠지만. 실제로 효과가 있으면 치사율도 낮출 수 있겠고요.”
헤인스는 수익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제약회사, 그곳의 이사인 그녀로서는 시장성을 생각 안 할 수가 없다.
진현은 입을 열었다.
“지금은 시장성이 크지 않지만… 의학적 가치는 굉장히 크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시장이 커질지도
모르고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시장이 커질 수도 있다니?
몇몇 사례에서 도움이 되었다지만, 실제로 그 약이 테노포 바이러스 치료제로 사용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
“……!”
“괜찮겠습니까?”
“사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이번 제안은 거절하는 게 맞죠. 수익이 날지도 모르고, 성공할지도 모르니. 아니,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은데.”
“감사합니다. 정말로.”
“뭐, 그걸 떠나 마이더스의 손이라 불리는 미라클 김의 제안이잖아요. 이번에도 잭팟이 터지겠죠. 미스터 김의
말대로 의학적 가치가 크기도 하고. 새로 약을 개발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스터디 디자인해서 임상 시험만 하면
되니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장가치가 적을 뿐이지 의학적 가치는 컸고 기존에 개발된 약을 사용하는 것이니 헤인스 입장에서 큰돈이 들 것도
없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과거처럼 테노포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획득하면, 단순히 시장이 커지는 수준이 아닐 것이다.
유행이 끝날 때까지 헤인스의 모든 공장을 항바이러스 약제를 생산하는데 돌려야 할지도 몰랐다.
테노포 바이러스의 존재를 입증한 바이러스학의 대가, 하버드의 웨슬리 박사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웨슬리 박사는 커다란 돋보기안경을 낀 머리가 하얀 노인으로 전형적인 학자 형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분명 RNA 구조상 효과가 있을 수도 있겠군요. 물론 임상실험을 해봐야 알 수 있겠지만, 만약 성공만 한다면
치사율을 크게 낮출 수 있겠습니다.”
“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형 병원들과 연계하여 환자군을 모은 후 약효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가능하면 다른
남아프리카의 대형병원도 섭외하고요. 환자군이 많을수록 연구의 신뢰도가 높아지니.”
물론 남아프리카 공화국 말고는 인프라가 열악해 얼마나 참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긴 하다.
“네.”
진현은 이런 대규모 연구를 진행한 경험이 숱하게 있었고, 남아프리카측도 치사율 30%의 테노포 바이러스의
치료제의 연구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치프 디렉터.
자신은 사실 바이러스 감염과 상관도 없는 외과의사이고, 테노포 바이러스의 존재 자체를 웨슬리 박사가 증명하지
않았으면 시도도 못해볼 연구였기 때문이다.
“저도 치프 디렉터 자리가 탐나긴 합니다. 그래도 이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는 온전히 닥터 김의 것이고, 진행에도
가장 큰 몫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제가 치프 디렉터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감염내과 의사도 아니고, 사실 바이러스와 상관없는 외과의사인데 이런 대규모 연구의 치프를
맡기엔…….”
웨슬리 박사는 테노포 바이러스의 존재를 규명한 것만으로도 노벨 생리의학상의 후보자가 되었다.
# 147
서른 중 후반.
몇 년만 지나면 마흔을 바라볼 그때, 그는 응급 간이식 수술을 끝내고 지친 몸을 달래러 세인트 죠셉 병원 근처의
센트럴 파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시간이 참 빠르구나.’
‘잘 살고 있는 거겠지?’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회귀를 했을 때가 떠올랐다.
“김진현 선생님?”
차분한 한국어.
이연희였다!
그녀가 왜 여기에?
어쨌든 미국에 올 일이 없을 텐데 왜?
“아…….”
인연.
뭐,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네, 앉으십시오.”
“네.”
연희가 물었다.
“선생님은 잘 지내셨어요?”
“저야 뭐 똑같죠.”
“혼자 왔어요.”
그 말에 진현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저 혼자 지내거든요.”
“아… 네.”
의외의 일이었다.
“네.”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
“……!”
“못 들었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이상민과 만난 적이 있습니까?”
“…….”
“……?!”
진현은 깜짝 놀랐다.
“…….”
“아, 네. 좋은 여행되십시오.”
“고마워요.”
“…….”
평소와 다를 것은 없었다.
전혀.
***
이후 다시 시간이 흘렀다.
헤인스의 항 바이러스제는 테노포 바이러스의 감염을 예방하진 못해도, 감염된 사람에서 바이러스의 체내 증식을
억제했고, 그것은 치사율의 극적인 감소로 나타났다.
물론 2%도 높다.
과연 몇 년 뒤, 테노포 바이러스는 돌연변이를 획득해 유행을 일으켰지만 진현의 이전 삶처럼 치명적 피해를
일으키지 못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사무총장이 직접 진현에게 감사를 표했으며, 세계의 수많은 단체, 사람들이 진현의 공로를
치하했다.
그의 지난 삶에서는 하버대의 웨슬리 박사가 노벨 생리의학상의 후보자가 되었지만, 단순히 바이러스를 발견한
것보단 치료의 방안을 발견한 것이 당연히 더 뛰어난 업적이다.
웨슬리 박사와 진현 모두 공동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의 후보자가 되었고, 단순한 학문적 업적이 아닌 수없이 많은
생명을 구한 업적이니 사람들은 그들이 머지않은 시일에 노벨상을 수상할 것이라 생각했다.
***
자신들의 자랑인 진현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에 세인트 죠셉의 모두가 펄쩍 뛰었다.
“하아, 닥터 김… 너무 아쉽군요.”
진현도 제 2 의 보금자리가 되어준 세인트 죠셉을 떠나기 아쉬웠으나 결정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해중 전 회장의 사후(死後) 대일그룹의 회장이 된 이동민이 계속해서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다.
와서 제발 대일병원을 맡아달라고.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
왜 안 그러겠는가?
다년간 대일병원의 원장으로 활약하던 강민철은 완전히 은퇴 후 유유자적 삶을 즐기고 있었다. 메스는 손에서
놓았지만, 여전히 정정했다.
‘이곳에서 지낸 지도 벌써 10 년이 넘었구나.’
정신없이 지낸 세월이었다.
‘어쩔 수 없지.’
왠지 직접 하고 싶었다.
그런데 늦은 밤이었다.
끼익.
“자주 오겠습니다.”
“정말이죠?”
미라클 김.
“네.”
# 148
148. 종장 (1)
“지나친 말씀이십니다.”
그런 이가 자신을 존경한다니.
“…….”
더없는 극찬이었다.
“그러니 닥터 김.”
뭐라고 해야 할까?
진현은 답했다.
***
대일병원의 지분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대일병원의 교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건 그녀가 거절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이제 완연한 노교수가 된 최대원이 진현을 보고 반가운 인사를 했다.
‘참… 정말 다시 살고 볼 일이야.’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강민철 교수와 더불어 그를 아꼈던 간이식 파트의 유영수 교수가 진현에게 물었다.
그는 현재 대일병원의 외과과장이었다.
‘진료 스케줄이라.’
진현은 고민했다.
이사장의 주 업무는 병원경영이었다.
진현은 말했다.
“진료도 같이 병행하겠습니다.”
“힘들지 않으시겠습니까?”
중등도가 떨어지거나 중요도가 떨어지는 질환의 환자들은 다른 간 파트의 교수들이 대신 진료를 봤지만, 그렇게
해도 상당한 숫자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 그의 업보지.
덕분에 그는 환자 진료보라 이사장의 업무를 수행하랴,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레지던트처럼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른 교수들이 최대한 분담을 해줘, 진료를 전담하는 의사들만큼 환자를 많이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사장의 일과 겹치니 압사할 것 같은 업무량이었다.
“응, 미안.”
“아, 네.”
다름 아닌 이연희였기 때문이다.
“간암 말입니까?”
“5㎝의 간암인데 간정맥 침윤이나 원격 전이는 없는데 위치가 중앙이고 대동맥에 가까워서 수술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고주파 치료는 크기가 커서 안 되고… … .”
“흠…….”
예상했던 대로 쉽지 않아 보였다.
“어려운가요?”
“아예 안 되는 건가요? 수술을 못하면 어차피 원격 전이나 간 부전이 진행해 사망할 텐데…….”
그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옳은 말이다.
“그건 아니에요.”
“그러면? 친구?”
“하아, 상민 씨예요.”
“……!”
이상민이라고?
“회의가 늦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
벌써 저녁 11 시가 훌쩍 넘어, 넓은 집은 불이 꺼진 채 조용했다.
“우웅…….”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
말없이. 그저 고요히.
# 149
149. 종장 (2)
끼익.
“초등학교에는 잘 적응해?”
“한번 시간 내볼게.”
혜미는 미소 지었다.
“자기야?”
“응.
“혹시 무슨 일 있어?”
“……!”
“괜찮아. 별일 없어.”
“정말?”
“그래?”
“혜미야.”
“응?”
“양평엔 왜?”
“일이 좀 있어서.”
“사랑해.”
***
그리고 주말.
회귀 후 삶의 목표 중 하나가 포르쉐였다.
돈이 없어서 못 산 것은 아니다.
한 시간여를 달린 후에야 진현은 양평, 그중에서도 북쪽에 치우친 한적한 외곽에 차를 멈추어 섰다.
-효원 정신병원.
끼익.
“무슨 일이세요?”
“네, 상관없습니다.”
“누구요?”
“지금 면회 가는…….”
“무슨 일이에요?”
“면회 오셨어.”
“누구요?”
“19 호실.”
“여기 열쇠요.”
“네, 감사합니다.”
끼익.
‘난 이곳에 왜 온 걸까?’
두근.
이유 없이 심장이 뛰었다
“…….”
당연했다.
“이상민.”
정서적 둔마, 무감동, 무언증, 무욕증… 음성증상을 앓는 정신분열병 환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상민.”
“…….”
갑자기 맥이 딱 풀렸다.
“도대체 뭐야.”
“…….”
“도대체 뭐냐고…….”
지난 세월 누굴 증오했던 것인지.
“…….”
당연히 답은 없다.
그래도 착각일까?
“사실 지금도 늦은 감이 있고 위험하다. 그래도 지금 수술하면 완치의 가능성이 있으니 의사로서 난 네가 수술을
받았으면 좋겠어. 간에 생긴 암을 그냥 놔두면 넌 얼마 버티지 못한다.”
왜 안 그러겠는가?
***
됐다.
티딕. 티딕.
“이사장님 혈압 떨어집니다!”
“…보비(Bovie:전기소작기).”
툭.
“수고하셨습니다, 이사장님.”
“마무리해주게.”
“네!”
당연한 일이다.
뭐, 대화를 안 해도 신체 검진과 피 검사만으로 상태를 확인하는데 문제는 없었기에 상관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대화를 안 하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퇴원 전, 마지막 날.
진현은 입을 열었다.
답이 있을 거라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다.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다.”
재회 후 처음 듣는 목소리.
“……!”
대신 한마디를 했다.
“잘 지내라.”
***
# 150
150. 종장(3)
그래도 성공한 삶보다 중요한 것이 주변의 가족이란 것을 알기에 진현은 일부러 노력하여 가족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밥 됐어. 식사하자.”
“음…….”
진현은 수저를 입에 가져간 후, 신음을 흘렸다.
“왜?”
“그냥…….”
“아니야. 맛있어.”
바로 혜미의 요리솜씨.
“경태는?”
“안 먹는대.”
“왜?”
“몰라. 속이 안 좋대.”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혹시 엄마 밥이 맛없어서 안 먹는 것은 아니겠지?
그도 먹기 싫었으니까.
“응, 왜?”
“경태를?”
당연히 찬성이다.
***
무려 국내 1 위 병원의 이사장, 그것도 세계 최고의 대가로 인정받는 진현의 봉사활동이니 적당히 홍보해도
엄청난 광고효과가 있을 게 분명했다.
봉사를 하면 상대보다 봉사자가 더 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는 이야기처럼 진현은 마음의 위안을 얻고 돌아오곤
했다.
대일병원을 위해서는 충분히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이런 마음의 휴가까지 홍보로 연결시키고 싶지 않았다.
“날씨 좋네.”
“네 아들 경태도 같이 가는 거야?”
“응, 의사가 되고 싶다 더라고.”
황문진은 갑판 앞쪽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진현의 잘생긴 아들을 보며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현은 웃었다.
그 말에 진현은 웃었다.
황문진도 쿡쿡 웃었다.
다 추억으로 남은 옛날 일이다.
“뭐?”
“발렌타인 30 년.”
진현은 미소 지었다.
바닷바람이 싱그러웠다.
이번 봉사활동은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다.
***
봉사활동은 2 박 3 일로 진행됐다.
첫날에는 섬의 가장 큰 마을 회관을 빌려 진료를 했고, 둘째 날에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직접 방문해 진료를
했다.
“힘들진 않니?”
“괜찮아요.”
아빠라서 하는 생각이 아니라 잘생기고, 남들과 달리 말썽도 안 피우고, 생각도 깊으며 성적도 좋다.
“괜찮아요.”
꿈이 아버지를 닮은 의사라는 경태는 진현의 진료를 하나, 하나 눈에 담았고, 진현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쿨쿨…….”
“조금만 걷다 들어가자.”
찰싹찰싹.
“응?”
진현은 눈을 크게 떴다.
“사람이 사는 곳인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
진현은 깜짝 놀랐다.
“…….”
‘기분이 상했나?’
그럴 수도 있다.
“뭐야…….”
“이전에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인가?”
그럴 리가.
***
“봉사활동은 어땠니?”
“좋았어요.”
“그래? 왜?”
“그냥…….”
“그냥… 아빠 같은 삶을 살고 싶었어요.”
진현은 눈을 크게 떴다.
“아빠 같은?”
“네.”
“어르신.”
노인은 이빨 없는 입으로 답했다.
“응?”
“이 상처 혹시 치료받은 적 있으세요?”
“의사요?”
“동쪽 바닷가요?”
“…….”
진현은 입을 다물었다.
“아빠.”
“응?”
“왜?”
“다음에 꼭 같이 마시자.”
“그래, 그래.”
“꼭!”
***
‘이제 떠나니까.’
# 151
151. 종장 (4)
“이런… 내일 떠날 수 있을까요?”
‘곤란하구나.’
“선생님!”
“무슨 일입니까?”
“……!”
‘하필 이럴 때 교통사고를!’
“이런…….”
심각했다.
급히 진료를 해보니 다른 부위는 크게 다치지 않았는데, 우하복부에 큼직한 상처가 벌어져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었다.
사고 당시 무언가에 찍힌 듯했다.
“선생님, 제발 살려주세요!”
출혈이 심하긴 했어도, 위치상 간이나 췌장, 비장, 대동맥 등 중요장기가 지나는 부위는 아니었으니까. 아마
대장과 소장만 다쳤을 것이다.
‘출혈만 지혈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수술은 아니야. 출혈 동맥과 정맥만 찾아서 지혈하면 되니까. 그 뒤는
병원으로 옮겨서 처치하면 돼.’
‘빨리 손을 써야 하는데.’
“선생님,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기적이 일어났다.
“……!”
그는 저 괴인이 싫었다.
“…….”
“……!”
“…….”
괴인은 답이 없었다.
‘출혈이 심해.’
스윽.
“……!”
“감사합니다.”
“…….”
여전히 답은 없었다.
쉽지는 않았다.
“혹시 외과의사십니까?”
“…….”
‘혹시……?’
순간 진현의 머릿속에 혹시나 하는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수술에나 집중하자.’
모두 괴인의 조력덕분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
“경태야, 집에 가고 싶지?”
“네.”
왜 자꾸 그가 떠오르는 것일까?
‘문진이한테 새로 한 병 사줘야지.’
찰싹찰싹.
그 괴인이었다.
“…….”
-이 괴인이 정말 그일까?
직접 물어보면 되니까.
“혹시…….”
물어보면?
그리고 왜일까?
괴인이 손을 내민 것이다.
“……!”
“술을 잘 마십니까?”
“…그냥 조금.”
잔뜩 갈라진 음성.
처음 듣는 괴인의 목소리였다.
“그렇습니까?”
좋아하는 술…….
“더 마시겠습니까?”
“혹시…….”
그는 이런 질문을 하려 했다.
-당신은 혹시…….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