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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
그 기억의 끝에
1 화. Nouveau Depart(1)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는, 그런 상투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어차피 언젠가 해야 할 일이었고 오히려
예상했던 것보다 늦기까지 했다. 다만 길었던 굴레에서 벗어나는 순간조차 내게는 아무런 선택권도 없다는 게
허무해졌을 뿐.
이리도 인자하게 말할 거면 적어도 표정만큼은 숨겼으면 했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마치 값어치
나가는 물건을 내다 파는 듯했으니. 신뢰가 있어야 할 장소에 야심만이 남았는데, 어떤 마음을 이해하면 좋을까.
“세진이 너한테 기대가 커. 너만 잘해주면 네가 우리 기업을 살리는 영웅이 되는 게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건 알고 있지?”
“……예, 아버지.”
“알아들었으면 그만 나가 봐.”
하지만 물어본다 한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기껏해야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조금 더 확실히 알게
되는 정도일까. 이럴 때일수록 현실은 적당히 회피하는 편이 신상에 이로웠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느리게 등을 돌렸다. 평소라면 예의상 안부라도 여쭐 텐데, 오늘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밤새 잠을 설친 탓에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어깨가 무거웠다.
바닥에 떨어진 약통이 데구루루 구두 앞까지 굴러왔다. 일부러 받지 못할 위치에 던졌으면서 아버지는
그거 하나 못 받냐며 혀를 끌끌 차기 바빴다. 허리를 숙여 약통을 줍는 와중에도 머리맡에선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제가 잠 못 자는 거 알고 계셨네요.”
“그럼, 내 아들인데.”
동그란 약통을 손안에 꼭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언뜻 성분을 표기한 글자가 보였다. 진정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한마디에 위로가 된다는 게 우스웠다.
살가운 미소를 머금자, 아버지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움이 피어났다. 주름이 자글거리는 눈매엔 자기
자신을 향한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 가보거라.”
***
지난해, 해신은행에서 출시한 애플리케이션이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가입자 90%의
개인정보가 유출됐고, 저장된 인증서는 백여 건이 넘게 악용됐다. 황급히 보안을 강화했지만, 이미 잃어버린
신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신금융 본사의 채용 비리가 고발된 것이다.
아버지는 곧장 관련 직원을 잘랐으나, 동시기 지원자의 자살 소동으로 논란은 점점 불거지기만 했다. 당연히
해신은 언론의 뭇매를 맞으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폭락한 주가를 1 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기업 이미지를 바꾼들 해신은
결코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없다. 늦으냐 빠르냐의 차이만 있을 뿐, 가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기울었다.
그런 시기에 회장님 아들인 내게 혼담이 들어온 것이다. 망조가 들어선 해신금융그룹과 사돈을 맺을
기업이라니. 그 수준이 어떨지,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하기만 했다.
넥타이를 매주던 직원을 밀어내고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내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김 실장이 직원을
피팅 룸 밖으로 내보냈다. 달칵, 문이 닫힌 뒤에야 목까지 차오른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예, 그렇습니다.”
“제 결혼 상대가 선호그룹이라고요?”
“예, 그렇습니다만…….”
모르다마다. 알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는 몇 살이고 외모는 어떻게
생겼는지. 하물며 뭐 하는 기업인지도 모른 채 대충 알파겠거니 짐작했을 뿐.
그러니 저토록 기막힌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을 빼놓고 말한 아버지나,
자세히 묻지 않은 나나. 남들이 보기엔 둘 다 어이가 없겠지.
“더 묻지 않으십니까?”
“뭐를요?”
순순히 대답했으나 김 실장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도리어 이번엔 소리까지 섞어 한숨을 내뱉는다.
얇은 안경알 너머로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동자가 보였다.
“둘 중 누구인지 안 물어보십니까?”
“아.”
“뭐하러 물어봅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
“…….”
권이도.
그의 이름은 질리도록 들어 봤다.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영향력 있는 100 인이자, 가장 주목해야 할
젊은 기업인 중 하나. 서른둘이라는 나이에 전무를 달고 선호전자 총책임자 자리까지 위임받은 사람.
“그건…… 의외네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
“더 궁금한 건 없으십니까?”
옷을 맞추는 내내 김 실장은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심사가 제대로 꼬였는지, 원래라면 직원을
말렸어야 할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조그만 심술의 대가로 긴 시간 직원이 건네는 립서비스를 받아
줘야 했다.
“정말 이런 색이 잘 받는 분도 드물거든요. 체형도 마네킹이랑 거의 흡사하시고……. 제가 본부장님 옷
맞춰 드릴 때마다 이 일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니까요.”
평소에도 살갑던 직원은 말리는 사람이 없자 한층 수다스럽게 진화했다. 재킷은 원 버튼보단 투 버튼이
낫다느니, 베스트는 조금 더 딱 붙어야 한다느니. 다리 길이가 어떻고, 피부톤이 어떻고. 매장에 있던 모든 옷을
입혀 볼 기세로 착의를 돕던 직원은 독특한 매듭으로 넥타이를 매준 뒤에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런가요?”
고작 약혼식 예복을 이렇게까지 열심히 고를 필요가 있을까. 듣자 하니, 언론에 공개하지 않고 집안끼리
조용히 치른다던데. 물론 추후 뒷말이 없으려면 가능한 한 꼼꼼히 준비해야겠지만.
“정세진!”
나를 발견한 남자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그 위협적인 태도에 옷을 봐주던 직원이 정중히 내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안 비켜?”
남자에게선 희미한 아로마 냄새가 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둘둘 감고, 밝게 염색한 머리를
완벽히 세팅한 상태였다. 어디서 관리라도 받고 왔나 보네. 그런 감상을 떠올리는데, 남자가 이죽거리듯 입매를
늘어뜨렸다.
“…….”
“제 동생입니다.”
“…….”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주변이 고요해졌다. 말을 잇던 직원도, 남자를 말리던 이들도, 장식처럼 서 있던
김 실장도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씨발, 그렇다니까.”
“……다들 나가 보세요.”
민재는 불만스럽게 인상을 구겼으나, 직원들을 내보내는 데에는 이의가 없어 보였다. 한참, 멍하니 있던
직원들은 내가 살짝 웃어 보인 뒤에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실례했습니다.”
“별것도 아닌 새끼들이…….”
“…….”
“김 실장님!”
“예, 도련님.”
2 화. Nouveau Depart(2)
“…….”
“얼굴 다 봤죠?”
흥,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못 배운 것들은 이래서 안 된다느니, 주제도 모르고 사람을 열받게
한다느니. 그가 뇌까리는 말들을 듣고도 김 실장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
어떻게 하면 좋을까. 주제를 바꾸는 건 쉽지만, 민재의 정신을 돌려놔도 김 실장은 명령을 잊어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꼼꼼한 일 처리가 이럴 땐 꼭 방해가 됐다.
“……아쉽게 됐네.”
하나하나 베스트 단추를 채우며 입을 열었다. 한창 불만을 표하던 민재가 매섭게 나를 노려봤다. 성난
시선에 가시가 돋고, 비틀린 입매가 차갑게 벼려졌다.
“왜, 뭐가 아쉬운데?”
민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무관심한 태도. 그래, 딱 얼굴만 아는 사람이 퇴사하는
정도의 아쉬움이 중요했다.
“…….”
어깨를 으쓱하며 마지막 단추를 채웠다. 베스트 밑단을 탁탁 털어 내자 민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쭉 내려왔던 입매가 움찔 달싹였다.
“또 얼굴 트기 귀찮은데…….”
반쯤 사실에 기반한 핑계였다. 적응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공간은 귀찮고
번거롭기만 했다. 민재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지,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며 혀를 찼다.
무어라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가볍게 마주 웃는 것으로 민재는 기분이 완전히 풀린 듯했다. 까딱, 까딱,
발끝을 움직인 그가 결심한 것처럼 고개를 쳐올렸다.
“김 실장님, 아까 걔들 그냥 둬요.”
거울 속 김 실장이 고개를 돌렸다. ‘예, 알겠습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답하면서 눈으로는 뚫어져라
나를 관찰한다. 새삼스럽게. 이게 뭐 드문 일이라고.
“그보다 여긴 무슨 일이야?”
“너 결혼한다며?”
“진짜야?”
얘도 모르고 있었나?
“결혼하는 거 맞아.”
재킷의 옷깃을 잡아 앞섶을 단정하게 여몄다. 김 실장이 구겨진 목 뒤를 똑바로 펴주었다. 새로 들어온
원단이라더니 몸에 감기는 감촉이 썩 나쁘지 않았다.
아직 학생 신분인 민재는 해신그룹 실무에 일절 관여권이 없었다. 원래는 외국에서 대학을 다녀야 했고,
지금 한국에 있는 것도 휴학을 빙자한 도주였다. 내 혼담을 몰랐을 수는 있지만, 그걸 확인하겠답시고 여기까지
찾아오는 건 이상했다.
“……사업?”
낮게 되물은 민재가 탁! 발을 굴렀다. 아드득 어금니를 맞무는 소리가 음산했다.
“미쳤네.”
그는 벌떡 일어나 공격적인 기세로 다가왔다. 눈높이가 엇비슷해서 그런지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민재는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비아냥거리듯 말꼬리를 늘였다.
“…….”
전자는 모르겠지만 후자는 확실히 아니었다. 권이도는 서른두 살로, 나와는 고작 세 살 차이였다.
오메가 맛이 궁금했는지는, 거기까진 내가 알 바 아니었고.
“…….”
“그 얘기 하러 왔어?”
“그럼, 내가 설마 너 보러 왔겠냐?”
“……뭐라고요?”
“…….”
민재도 알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렸는지. 그러니 저렇게 사색이 된 얼굴로 입을
다물었겠지.
거울을 보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진주, 라기보단 흰빛에 가까운 상아색 정장이었다. 행커치프를 색
있는 걸로 해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곁눈질로 민재를 살폈다.
“나 때문에 망칠 수는 없잖아.”
“…….”
민재는 한풀 기가 꺾인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까의 짜증은 온데간데없고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답지 않게 심각한 얼굴로,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도련님!”
“…….”
공기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민재는 물론, 그를 말리려던 김 실장까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분명,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의지와 달리 입술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뭐 결국엔 둘 다 벌리겠지만…….”
“…….”
민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씨발, 그렇게 지껄이는 목소리가 마구 떨리고 있었다. 목에 핏대가
선 걸 보니, 한마디만 더 하면 뻥 하고 터져 버릴 것 같다.
“……농담이야.”
“…….”
“형은 씨발…….”
물론 뒷말은 잔뜩 까칠했지만.
“그래?”
“저게 네 수준이지.”
“…….”
“이후 일정은…….”
“글쎄요.”
약혼식 날까지는 최소한 컨디션을 관리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아버지가 수면제까지 챙겨 줬으니,
가능한 잠도 실컷 자둬야 했고. 물론 수면제를 한 움큼 먹어도 숙면을 취하는 건 어렵겠지만 말이다.
김 실장은 의외라는 얼굴을 하면서도 순순히 내 휴식에 동의했다. 어딘가 안쓰럽단 눈으로 나와 민재를
번갈아 보기도 했다. 나는 무심코 시간을 확인하다 황급히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뇨.”
쉬는 걸 싫어하진 않지만, 뇌리를 스친 생각이 그 욕구를 막아섰다. 앞으로 일주일. 약혼식이 끝나고도
휴가를 쓸 일은 충분히 많을 테니.
그리고 어쩌면,
“인수인계를 미리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앞으로 평생, 쉬게 될지도 모르겠고.
***
“도착했습니다, 본부장님.”
“잠을 좀 설쳐서요.”
이렇게 말해두면 열에 아홉은 납득한 얼굴로 관심을 거두곤 했다. 유일하게 김 실장만은 ‘너도 사람이긴
하구나.’라며 동정의 시선을 보내 왔지만 말이다. 다행히 기사는 전자였는지, 무어라 묻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세진아.’
“…….”
‘세진아.’
“……그만 좀 불러라.”
그놈의 세진이. 아버지를 제외하면 나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건만. 대체 언제 봤다고 세진이,
세진이, 하며 친한 척 구는지 모르겠다. 거기다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금세 바뀌어 버리던 호칭까지.
‘정세진.’
피곤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잡념을 지우기 위해 웅웅거리는 기계음에 집중했지만, 도리어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만 더 뚜렷해졌다. 세진아.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는 어느 순간 더없이 싸늘한 어조로 뒤바뀌었다.
‘창부처럼 굴어야지.’
“…….”
“하아…….”
- 다음 화에 계속
3 화. Nouveau Depart(3)
‘세진아.’
사위가 어두웠다. 누군가 내 귓가를 어루만지고, 엄지로 뺨 언저리를 문질렀다. 살금살금 목까지 내려간
손길은 움푹 들어간 곳을 누르다가 서서히 멀어졌다.
‘세진아.’
또다.
또 그 남자였다.
‘정세진.’
‘…….’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미묘한 압박감이 나를
짓눌렀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 안개처럼 흐릿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창부처럼 굴어야지.’
그 말을 이해할 새도 없었다. 눈 깜박할 새에 다가온 살덩이가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투둑,
한계처럼 벌어진 입꼬리가 찢어질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으웁…….’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목까지 차올랐던 구역질은 혀뿌리를 누르는 감각에 막혀 버렸다. 느릿느릿
밀고 들어온 성기가 입천장을 긁으며 안으로 전진했다.
‘입 똑바로 벌려.’
‘정세진.’
남자의 부름은 마치 재촉과도 같았다. 어서 빨리 똑바로 빨라는 재촉, 울 시간에 조금이라도 성의를
보이라는 재촉. 내가 뭘 잘못했냐고, 나한테 왜 이러냐고. 그렇게 따져 물을 시간도 없었다.
‘우으…….’
목이 억지로 열리는 감각은 언제나 등골이 오싹할 만큼 생경하다. 고개를 뒤로 빼고 싶었지만, 머리채를
잡은 손은 약간의 퇴로마저 완벽히 차단한 상태였다.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 귀두가 안쪽 깊숙한 곳까지 제 영역을
넓혀 갔다.
‘후…….’
남자는 기어코 뿌리 끝까지 처박은 뒤에야 삽입을 멈췄다. 낮은 숨소리와 함께 그가 천천히 허리를 뒤로
물렸다. 찌걱, 반쯤 빠져나간 성기가 조금 더 가차 없이 목구멍을 꿰뚫었다.
‘욱……!’
코끝에 음모가 스쳤다. 갑작스러운 구역감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확 오므렸다. 머금고만 있던 성기에
앞니가 닿고, 남자가 움직임을 멈춘 채 내 머리채를 내던졌다.
‘……!’
깜박,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 나는 딱딱한 바닥에 누워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갑작스레 바뀐 상황에
당황하기도 잠시. 어디선가 고양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이런 건 또 처음인데…….’
‘아악……!’
끔찍한 통증이 파도처럼 범람했다. 좁은 입구를 파고든 성기는 마치 불덩이처럼 뜨겁게 내벽을 건드렸다.
뭉툭한 선단이 안쪽을 쳐올릴 때마다 내장이 마구 뒤틀리는 듯했다.
‘헉, 허억…….’
‘아, 흑…….’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감각이 지나치게 뚜렷했다. 앞으로 기어가려 했지만, 그는 자비라곤 없는 몸짓으로
나를 짓눌렀다. 모자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바닥을 긁는 손끝에 핏방울이 맺혔다.
‘허윽, 악……!’
‘페로몬도…… 후, 끝내주네.’
‘…….’
먹먹한 귓가를 파고든 음성은 마치 사형선고처럼 잔인했다. 나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자, 더없이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진작 이럴 것이지.’
그 후엔 익숙한 내용의 반복이었다. 남자는 아래가 너덜거릴 즈음에야 사정했고, 성기가 빠져나간
입구에선 주르륵 피 섞인 정액이 흘러내렸다. 스멀스멀 차오른 모멸감은 갈 곳 잃은 원망과 함께 존재감을 잃었다.
‘……흐.’
“……!”
번쩍, 눈꺼풀이 뜨였다. 뒤바뀐 풍경 너머로 익숙한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어 번 눈을 깜박이고,
차게 식은 손끝을 움찔거렸다. 참았던 숨을 크게 몰아쉬자, 그제야 주변 공기가 생생히 느껴졌다.
아, 꿈이었구나.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멈췄던 피가 도는 것처럼 굳었던 근육이 느슨하게
이완됐다. 더디게 고개를 돌린 곳엔 ‘1 회 1 정’이라고 쓰인 약통이 보였다.
“……언제 잠들었지.”
“…하다 하다 이젠…….”
성의 없이 약통을 밀어내고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켰다. 핑그르르 돌아간 약통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남아 있던 약을 모두 먹은 터라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텅, 텅, 공허한 소리가 났다.
“샤워부터 해야겠네.”
“……하아.”
‘창부처럼 굴어야지.’
“…….”
***
선호그룹과의 약혼식은 암암리에 조용히 진행될 예정이었다.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긴 했지만, 공식적인
발표는 훨씬 나중이었다. 듣자 하니 결혼식도 미정이라던데, 결국엔 다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
그 후엔 직원들끼리 소소한 실랑이가 있었다. 머리를 올리는 게 좋을지, 아니면 내리는 게 좋을지. 한참
논의하던 그들은 이마가 예쁘니 반은 넘기는 게 좋겠다며 저들끼리 원만한 합의를 마쳤다. 당사자인 내 의견을 쏙
뺀 결론이었으나, 김 실장마저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그냥 그러기로 했다.
“벌써 이러면 결혼식 땐 다섯 명쯤 붙겠네요.”
“긴장은 안 되십니까?”
“글쎄요.”
“아직 본 식도 아니고…….”
“…….”
“잘 모르겠습니다.”
김 실장은 잔뜩 복잡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적나라한 시선이 안경알 너머로도 따갑게 느껴졌다. 그럼
본 식 땐 긴장할 거냐고, 마치 그리 물으려다 관둔 것처럼.
“도착했습니다, 본부장님.”
“아…… 죄송합니다.”
꽃 내음이 났다. 고작 한두 송이가 아닌, 꽃밭에 있는 것처럼 화사한 향기가. 찬찬히 둘러본 내부는
가지각색의 꽃들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었다. 하얀색, 노란색, 분홍색에 보라색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생화였다.
직원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 짐작이 틀렸음을 알려 줬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안쪽에 놓인 테이블까지
가리켰다.
“…….”
“……꽃을 좋아하셨습니까?”
김 실장은 장지문이 닫히기 무섭게 대뜸 질문을 건넸다. 몹시 의외라는 말투였는데,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카드를 내려놓고 방울방울 흔들리는 꽃다발을 한 손에 쥐었다.
“예, 뭐…….”
“좋아하는 편입니다.”
“은방울꽃은 특히 더 좋아하고…….”
“말씀을 안 드렸으니까요.”
“…….”
사실은, 무의식중에 긴장하고 있던 모양이다. 고작 꽃다발 하나에 이토록 감성적인 기분이 되는 걸 보면.
이런 비즈니스로도 상대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 다음 화에 계속
4 화. Nouveau Depart(4)
“본부장님.”
“회장님께서 주신 겁니다.”
“…….”
“페로몬 향수입니다.”
“김 실장님이 고르셨어요?”
“…….”
손목에 찬 시계를 끌어 내려 혈관이 지나가는 윗부분에 향수를 뿌렸다. 지그시 양 손목을 맞대는 동안,
김 실장은 묵묵히 내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나는 향긋이 남은 잔향을 목덜미에 바르며 김 실장에게 물었다.
“더 뿌릴까요?”
“그…….”
“…….”
꽃향기가 이리도 자욱한데. 무뎌진 후각은 낯선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잡아챘다. 차분하고 온화한 향기는
오메가인 내게 결코 페로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글쎄요.”
“정세진 님, 준비하실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손목에 찬 시계를 정리하고 옷매무시를 똑바로 가다듬었다. 뒤쪽에서 대기하던 김 실장이 재킷 뒤쪽의
구겨진 부분을 펴주었다. 마지막으로 넥타이까지 손보자, 직원이 양옆에 있는 이들에게 눈짓했다.
“도련님.”
“걱정하지 마세요.”
장지문이 좌우로 열리기 시작했다. 좁은 틈새로 스며든 햇살은 눈가가 시큰거릴 만큼 따사로웠다. 시린
눈을 꾹 감았다 뜨자, 열린 문 너머로 널찍한 풍경이 펼쳐졌다.
“이제 도련님이라고 불릴 나이도 아닌걸요.”
그곳에 그가 있었다.
“…….”
“……정세진 씨?”
“권이도입니다.”
“…….”
“실물이…… 훨씬 잘생기셨네요.”
“정세진입니다.”
“…….”
“……확실히.”
커다란 손이 서서히 내 손을 그러쥐었다. 조금 강하다 싶을 만큼 붙잡았다가, 이내 깨지는 물건을 다루듯
힘을 풀어낸다. 서늘하기 그지없는 체온이 이상하리만치 포근히 다가왔다.
“실제로 보는 게 낫군요.”
“…….”
기시감이 들었다. 아니,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햇살이 지나치게 강해서, 아니면
권이도의 페로몬이 서글프게 넘어와서. 생전 처음 보는 내게 그가 이런 시선을 보낼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장난스레 대꾸했으나 권이도의 표정은 괜찮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억지로 유지하는 무표정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러한 위화감을 지적하기엔 장소도 상황도 썩 좋지 않았다. 우리는 약혼을 할 사이지만, 사실상
동등한 입장은 아니었으니. 그저 그가 나를 고까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거다.
“그거 압니까?”
“무슨…….”
***
약혼식은 마치 결혼식처럼 진행됐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예물을 교환하고, 두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케이크를 커팅했다. 오른편엔 부모님과 민재, 서영이. 그리고 왼편엔 선호그룹 일가족. 하객만 없을 뿐 그
형태는 결혼식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드물게 굽신거리는 얼굴로 선호그룹의 비위를 맞췄다. 민재는 묵묵히 식사만 이어 갔고, 그건
서영이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어머니만 평소와 같았는데, 그마저도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선호그룹 부회장이자 권이도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기업인의 얼굴을 하고 아버지를 대했다. 무리하게 과한
칭찬을 건네지도 않았고, 자만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겸손을 떠는 일도 없었다. 그저 으레 성공한 이들이
그렇듯 느긋하게 아버지의 아부를 받아쳤을 뿐이다.
권상미의 옆에는 그의 남편이 앉았고, 나란히 권이도의 누나 부부와 일곱 살배기 딸아이도 있었다. 저
조그만 아이가 그 드물디드문 여자 알파라던가. 형질 검사 결과가 나오던 날, 매스컴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기억이 있다.
“…….”
퍼뜩,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하필 멍하니 있던 터라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동그란 눈이 크게 뜨여지고, 꽉 다물었던 입술이 살짝 달싹인다.
“혜율이가 낯을 좀 가리죠.”
“……아.”
권이도였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던 건지,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나와 아이를 번갈아 봤다. 그래,
이름이 권혜율이었지. 선호재단이 소유한 미술관의 이름을 따 혜율이라고 지었다는 기사가 올라왔었다.
“제가 저희 세진이 데려와서 제 자식처럼 아주 살뜰히 키웠거든요. 이렇게 전무님한테 보내려니까 마음이
아프고 그럽니다.”
“…….”
먹먹한 귓가에 나직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권이도는 쓸데없이 발음이 좋았다.
페로몬이 실려서 그런지, 조금 오묘한 느낌이기도 했고.
아들의 배우자에게 하기엔 조금 과한 존대가 아닌가 싶다. 우스운 건, 그 모습에 아무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단 사실이었지만.
쟁그랑.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질적인 소리가 대화를 갈라놨다. 묵묵히 있던 민재가 포크를 접시에
떨어뜨리는 소리였다. 민재는 발개진 얼굴로 잽싸게 다시 포크를 쥐었다.
“죄송합니다.”
“아뇨, 이해합니다.”
두 번째, 아버지의 말이 끊겼다. 이번엔 상대가 권이도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입가를 떨며 온화한 표정을
유지했다. 권이도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 나긋한 동작으로 잔을 내려놨다.
순식간에 일곱 살 어린이와 동급이 된 민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대놓고 항의하진 못하겠는지,
분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여 버렸다. 물불 가리지 않는 그일지라도 이런 상황에선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을 쭉 훑어보곤 담담한 어투로
뒷말을 덧붙였을 뿐.
왜 아니겠는가. 이토록 그럴싸한 예식을 치르면서도 아버지가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가 있는 것을.
“말 나온 김에 조건이나 얘기하죠.”
- 다음 화에 계속
5 화. Nouveau Depart(5)
“조건은 두 가집니다.”
차분한 눈매가 여유롭게 모두를 둘러봤다. 기대에 찬 얼굴들을 지나 바로 옆에 앉은 나까지.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친 두 눈이 지금까지와 다른 부드러운 빛을 띠었다.
대답하라는 건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권이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는 금세 표정을 지우고 이번엔 아버지를 향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둘째.”
지금이야말로 민재가 말했던 미래가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생판 모르는 알파 새끼한테 다리나 벌리고 사는
것. 당장 집으로 들어오라는 이유도 아마 아이를 좀 더 쉽게 갖기 위해서겠지.
“…….”
“죄…….”
“글쎄요.”
둘이 논의하겠다는 말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자세한 계약 내용을 정하려면 히트나 러트 사이클 주기를
필히 공유해야 할 테니. 그러기 위해서는 여럿이 모인 자리보단 조금 더 사적인 공간인 게 낫긴 했다.
“…….”
아, 혹시 그런 건가.
간혹 있었다. 구시대적 사고로 배우자가 집에서 내조만 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나를 에스코트해 주려던
기사처럼 권이도도 나를 그런 식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흠흠, 전무님?”
눈빛은 강경한데, 얼굴은 생글생글 웃고 있다. 곤란함을 어필하면서도 권이도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게다가 원래는…….”
세 번째. 말이 끊긴 아버지가 입가를 파르르 떨었다. 무시당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그로선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 싶다. 그런 아버지를 뒤로하고 권이도는 나를 보며 물었다.
“아뇨.”
“…….”
희비가 교차했다. 권이도의 표정은 예상대로였지만, 아버지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뿌듯하게 웃을 줄
알았던 아버지는 왜인지 못마땅한 눈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의아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늘 내게 권력을 쥐여 준 걸 탐탁잖게 여겼건만. 본부장이라는 직급도 주변
시선을 의식해 달아 줬을 뿐, 언젠가 쓸모를 다하면 직접 거둬 갈 예정이었을 텐데.
“그렇다는군요.”
“정 회장님.”
네 번째. 아버지의 얼굴에 금이 갔다. 주름진 눈가가 딱딱하게 굳는 걸 보니, 이 자리가 끝나면 김
실장의 고생길이 열리겠구나 싶다. 그건 이어진 권이도의 질문으로 더 확실해졌다.
“…….”
가식적이고 친근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박살 났다. 아들의 독재를 막을 법도 하건만, 권이도의 가족은 그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동등한 입장이 아니니 당연한 결과일까.
“……!”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인내심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가까스로 표정을 갈무리하고
잔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내키지 않는단 얼굴의 가족들과 영 속을 알 수 없는 선호그룹 식구들. 불유쾌한 건배가 일방적인 협상의
성사를 알렸다.
***
“오메가 맞죠?”
시선이 느껴졌다. 선호그룹 식구들이 의아해하는 시선, 아버지와 어머니가 혀를 차는 시선, 민재의 그럴
줄 알았다는 시선과 서영이의 방관하는 시선까지.
“…….”
“다만 제가…….”
그런데 말을 이으려는 순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가 뒷말을 빼앗았다. 유일하게 시선을 보내지 않던
권이도였다. 권이도는 눈을 내리깔고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띠었다.
“게다가…….”
나는 멀거니 권이도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반듯한 눈썹뼈 아래, 그려놓은 것처럼 정갈한 콧대가 보였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얼굴.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냉랭한 얼굴이 자꾸만 다정해 보인다면
착각일까.
권이도는 그리 말하며 넌지시 동의를 구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벼운 물음엔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권이도의 누나 역시 남편과 시선을 교환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해결이었다. 애초에 큰 관심은 아니었는지 내게 쏠렸던 시선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아버지는 뿌듯한 미소(향수가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를 지었으나 나는 이게 아버지의 공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
이 사람은 왜 나를 도와줬을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인데…….”
“…….”
아, 내일.
“……별거 아닙니다.”
당장 내일 들어오라고 했던가. 하루아침에 거처를 옮기게 됐지만, 이렇다 할 불만은 생기지 않았다.
상대도 모르는 약혼식에 결혼보다 이른 동거. 비정상적인 과정이었으나 오히려 정상적인 과정이 더 드물었으니.
“자택으로 가시겠습니까?”
“집으로 가는 게 낫겠네요.”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정세진 씨.”
일부러인지, 권이도는 정확히 민재의 눈초리를 가로막고 섰다. 눈치를 살피던 김 실장이 입구에서
기다리겠다며 뒤로 물러났다. 정원을 밝히는 불빛이 어슴푸레하게 권이도의 얼굴을 비췄다.
“괜찮으시면 좀 걸을까요.”
***
“…….”
“…….”
타박, 타박, 돌바닥을 밟는 소리가 선명했다. 주변이 고요한 터라 조그만 풀벌레 울음까지 또렷이
들려왔다. 권이도의 구두를 한 번, 내가 신은 구두를 한 번. 느릿느릿 시선을 옮기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봄이 되면 더 예쁘겠어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평소와 달리 긴장이 됐지만, 그렇다고 실수할 만큼
미숙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사근사근 굴다 보면 적어도 나쁜 첫인상을 남기지는 않을 테니까.
“…….”
“아직은 조경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전부 완성된 건 아닙니다.”
“완성되면 한 번 와야겠네요.”
“오늘…….”
“꽃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거든요.”
장식된 생화는 몰라도 은방울꽃은 김 실장이 챙겨 뒀다. 원래는 집에 가져갈 예정이었으나, 거처를
옮기는 김에 함께 챙겨 갈까 고민 중이었다. 그래도 되겠냐고 허락을 받으려는데, 권이도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권이도 씨?”
“…….”
“정세진 씨.”
“…….”
우리는 당연히 내일도 만나게 될 사이였다. 내일뿐만 아니라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매일매일 얼굴을
보게 되겠지. 굳이 다음을 약속하지 않아도 결혼을 약속한 이상 그럴 터였다.
“정세진입니다.”
“……권이도입니다.”
“…….”
- 다음 화에 계속
6 화. Deja vu(1)
권이도는 보이는 것처럼 손이 차갑고, 그럼에도 간간이 상냥한 표정을 짓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에겐 안하무인처럼 굴더니 내가 곤란해지자 곧장 도와주는 것까지 그러했다. 다정한 건지, 아니면 냉정한
건지. 고작 하루로는 그 기준을 바로 세우기 어려웠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찾아온 김 실장은 어쩐지 초췌한 얼굴로 권이도의 소식을 알렸다. 눈 밑이
퀭한데 옷차림은 어제와 같은 걸 보니, 지난밤 아버지에게 온갖 신경질을 들은 게 분명했다.
“고생하시네요.”
“…….”
권이도의 집에 가져갈 짐은 조그만 캐리어 하나면 충분했다. 필요한 건 고용인을 시키면 그만이고,
애초에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그거였다.
“차는 몇 시쯤 온답니까?”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본부장님.”
음, 나 이제 본부장 아닌데.
“말씀하세요.”
“따로 뵙고 갈 분은 없으십니까?”
“뭐…….”
“어디 팔려 가는 것도 아닌데요.”
“아시잖아요.”
“…….”
“피할 수 있는 건 피해야죠.”
“죄송합니다.”
“…….”
“…….”
일순, 얼굴이 구겨졌다. 오늘만큼은 조용히, 그 작은 바람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상대를 발견했는지, 김 실장이 얼떨떨한 말투로 내뱉는 목소리도.
“……도련님?”
“야, 정세진!”
민재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왔다. 머리는 잔뜩 흐트러지고, 옷차림도 평소와 달리
수수하다. 뒤쪽에 주차된 스포츠카는 아무리 봐도 민재의 실력(주차선이 이상했다)이 분명한데, 운전도 못 하는
녀석이 왜 직접 차까지 끌고 왔을까.
“너 씨발…….”
“무슨 일이야?”
“…….”
“……너 지금 그 새끼 집 가냐?”
그 새끼라 함은, 아무래도 권이도를 말하는 거겠지. 아버지조차 높임말을 쓰는 상대에게 썩 버릇없는
호칭이었다.
혹시 연락을 했었나 싶어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그러나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 아래는 부재중
전화는커녕 메시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민재는 캐리어와 나를 번갈아 보며 삐딱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배은망덕한 새끼.”
“뭐?”
“넌 가족들도 안 보고 그냥 가냐?”
가족? 그렇게 되묻지는 못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은 그가 눈썹을 올리며 덧붙인 것이다.
“씨발,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버럭 소리친 민재가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렸다. 얼굴이 새빨간 걸 보니, 본인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단 걸 자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뒤에 있는 김 실장도 아는 사실인데, 아버지는 그런 걸로 서운해할 사람이
아니었다.
“민재야.”
어제, 나는 세 시간을 넘게 대기실에 있었다. 그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김 실장만이 유일하게 내
식사와 안부 따위를 물어 왔다. 아버지가 줬다던 작은 향수만이 일방적인 소통의 전부였단 말이다.
“…….”
“그거야 그 새끼가…….”
“…….”
“여기 계셨군요.”
“……권이도 씨.”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일이냐니.”
“그 차를 타고 왔으니 틀린 말은 아니군요.”
“……바쁘지 않으십니까?”
“바쁩니다.”
정말 바쁘다는 듯, 그는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찬 시계까지 확인했다. 언젠가 권이도가 찼다는 이유로 크게
화제가 되었던 그 시계였다.
“아버지한테 안부 전해 드려.”
“…….”
“형 갈게.”
이번에야말로 민재는 어금니를 악문 채 고개를 숙여 버렸다. 가늘게 떨리는 입매가, 조금이지만 안쓰러워
보였다.
***
“그렇네요.”
“잠을 못 잤습니까?”
“……?”
“……아.”
“…….”
“…….”
“그리고…….”
권이도는 느리게 서두를 꺼내며 보일 듯 말 듯 눈가를 찌푸렸다. 어쩐지 멋쩍은 표정이었는데, 뒷말을
듣는 순간 표정 따위는 상관없어졌다.
“……네?”
뒷말은 겨우겨우 목구멍 너머로 삼켜 냈다. 죄송합니다, 그 한마디에 권이도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그는 다시금 서류를 들어 올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
“내가 사과 듣는 걸 안 좋아해서.”
“……길이 많이 막히네요.”
“…….”
- 다음 화에 계속
7 화. Deja vu(2)
식사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대화는 없지만 어색하지 않았고 배고프지 않았음에도 요리는 입에 딱
들어맞았다. 너무 자극적이지 않게 준비한 메뉴들은 아침 겸 점심으로 빈속에 먹기에도 적당했다.
“……호화롭네.”
내가 이런 걸 좋아했나?
이제는 백수가 되어 버린 내겐 너무도 과분한 물건이었다. 아니, 원래도 이토록 비싼 액세서리엔 관심이
없긴 했지만.
“…….”
권이도의 말대로 입욕제를 풀고 몸이라도 담그고 싶은 욕조였다. 마침 날씨가 좋으니 하늘만 구경해도
시간은 참 빠르게 흐르리라. 아니, 반대로 비가 오더라도 물방울이 튀는 것조차 예쁠지도 몰랐다.
“……팔자 좋다.”
***
“…….”
“……다녀오셨어요?”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뜻 모를 시선을 보내던 권이도가 입술을 살짝 달싹였다.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기까지. 찰나의 순간이 억겁과도 같았다.
“왜.”
“…….”
“왜 나와 있습니까?”
“……?”
고용인에게 가방을 건네주는 모습이 어쩐지 불쾌해 보였다. 미묘하게 찌푸린 미간마저 그가 기분이
상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나는 왼손에 낀 반지를 응시한 채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최대한 살갑게 굴려고 했을 뿐이다. 우선은 약혼자이니 무언가 친근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고용인에게 언질을 해두었고, 권이도가 왔다는 소식에 방에서 나온 참이었다.
“불편한 건 아닙니다.”
“…….”
“불편하지 않아요.”
“네…… 뭐.”
지그시 시선을 맞추고 습관적으로 눈을 휘었다. 권이도는 한결 표정을 누그러뜨리곤 나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얼핏 보이는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 것 같다면 착각일까.
“정세진 씨.”
“네?”
새카만 시선이 내 몸쪽을 향했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살펴본 그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방에 있는 옷이 별로던가요?”
“그냥 입던 옷이 편해서요.”
“…….”
……어떻게 알았지?
“혹시 바쁩니까?”
“…….”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
권이도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샤워부터 하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내게는 편히 앉아 있으라고 말했는데,
이 넓은 방에서 편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나는 소파와 침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욕실이 잘 보이는
소파에 앉았다.
“페로몬…….”
권이도는 느긋하게 걸어와 내 대각선 소파에 앉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마자 들이마신 숨결에 여러 냄새가
섞였다. 페로몬은 우드 계열인데, 샴푸는 코튼 계열이라니. 썩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저녁은?”
“먹었습니다.”
고용인이 차려 준 식사는 역시나 내 입맛을 전적으로 고려한 메뉴였다. 한식 위주의 식단에 국물이
자작한 갈비찜이 있었고, 반찬의 가짓수도 많았다. 심심하게 무친 나물이나 달큼한 매실차도 웬만한 한정식집
버금가게 맛있었다.
“다행이네요. 걱정했는데.”
걱정?
권이도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조각처럼 완벽한 외모가 현실감을 앗아 갔다. 그건,
뒤이어 흘러나온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자 먹게 해서 미안합니다.”
“……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그의 입에서 나온 사과 때문에. 살다 살다 선호그룹
차남에게 미안하단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고작 식사를 혼자 했다는 이유로.
떠듬떠듬 입술을 움직였다. 손이라도 내젓고 싶었지만, 주먹을 꾹 쥐는 것으로 참아 냈다. 무표정한
얼굴이 조금이지만 시무룩해 보여서, 안 어울리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리하는 거 아닙니다.”
권이도는 단호한 대답과 함께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마중이 불편하지 않다던, 아까의 그 표정
같았다. 안 그렇게 생겨서, 혹시 부부 관계에 환상이라도 있는 걸까.
눈가를 찡긋하며 말하자 그가 선선히 되물었다. 아침?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 의아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
“…….”
말을 끝냈음에도 권이도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동자로 가만히 내 얼굴을 마주
봤을 뿐. 말실수했나? 그런 생각이 들 즈음에야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여전히…….”
상냥하군요.
“……그래요, 그럼.”
권이도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대화를 대충 마무리했다. 아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기뻐 보였다. 아무래도 배우자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게 분명했다.
“잠은 좀 잤습니까?”
“놓고 온 물건이라면…….”
“권이도 씨가 주신 꽃다발이요.”
살갑게 웃으며 말했는데, 권이도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그는 제 입가를 가렸다가 애매하게 고개를 돌린
채 눈가를 찌푸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예, 감사합니다.”
“책이라면, 어떤 걸?”
“그냥 소설책을…….”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네, 그거.”
“…….”
“좋아하실 것 같았습니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정말로 내가 좋아해서 기쁘다는 듯이. 질문의 성과를 내기엔 참으로 모호한
답변이기도 했다.
“네,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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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화. Deja vu(3)
이 결혼은 달콤한 사랑의 결실이 아니었다. 기업과 기업 사이의 약속이었고, 갑을이 분명한 계약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도 다정한 부부가 아닌 똑똑한 후계일 게 분명했다.
“제가 남자라 임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그래도 우성이니까 주기만 맞으면 괜찮을 겁니다. 마침 히트
사이클도 일주일밖에 안 남았고, 병 같은 것도 따로 없습니다.”
오메가의 임신 확률은 성별에 따라, 그리고 우열에 따라 달라진다. 남자보단 여자가 높고, 열성보단
우성이 높은 게 보통이었다. 나는 남자였지만 동시에 우성이었으니 하자는 있어도 임신엔 문제가 없을 터였다.
“정세진 씨.”
“…….”
“기분이 상하셨다면…….”
“아이를 좋아합니까?”
그러고 보니, 윤 대리 아들이 곧 유치원에 간다던데. 그 앙증맞은 모습을 떠올리자 입가가 느슨하게
풀렸다.
“…….”
혹시,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할 타이밍일까. 어차피 육아는 권이도의 역할이 아닐 텐데.
“……꽃 말씀입니까?”
“…….”
“좋아하잖아요? 꽃.”
“네…… 좋아합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볼까?
“설명이 부족했군요.”
“……예?”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그가 내뱉은 말 때문이 아니라, 온갖 감정으로 뒤섞인
시선 때문에.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눈빛은 그가 두어 번 눈을 깜박임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서류 정리가 끝나기도 전에 임신부터 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날짜에 맞춰 의무적으로 섹스하는 취미도
없고, 정세진 씨에게 그런 걸 바라지도 않아요.”
“정세진 씨.”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단순히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불호령이라도 들은 양 긴장이 됐다. 권이도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무미건조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
권이도의 말대로 결혼 자체는 일방적으로 한쪽만 유리한 승부였다. 선호그룹과 연이 닿은 것만으로 해신은
이미 충분히 이득을 본 셈이었으니. 그렇기에 대가가 따르리라 생각했고, 나는 그걸 ‘우성 형질을 낳되 언제든
팽할 수 있는 다루기 쉬운 오메가’라고 결론 내렸다.
“고작 후계자 따위를 원했다면 정세진 씨보다 좋은 조건의 오메가가 많았을 겁니다.”
“간단한 얘기예요.”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시선은 관찰과 경계, 혹은 약간의 미련마저 느껴졌다. 여태껏 친절하게 굴었으면서,
어조는 아버지를 대하던 모습처럼 거만하다. 고압적이고 오만한 태도는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당연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깨끗하게 정리됐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게 결국엔 부질없는 과거가
되리란 확신 때문이었다. 어차피 쓸모를 다 하면 권이도는 미련 없이 나를 버릴 텐데. 그의 의도를 파악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권이도는 지나치게 사무적인 어투로 대꾸했다. 말로는 다행이라고 하면서 표정은 전혀 달가워 보이지
않았다. 잠깐 눈을 내리깔았던 그가 별안간 조그만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장난감을 사주겠다는 듯 가벼운 어조였다. 내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는 너그러운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세 대보다 많아도 괜찮습니다.”
“그럼?”
“…….”
“대답은?”
“그…….”
“세 대는,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많다고요?”
최대한 권이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했다. 시선을 맞추고 눈을 휘며 살갑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상냥하게 웃는 것쯤은 숨을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
권이도는 나직이 침음하며 턱 언저리를 만지작거렸다. 고민하는 것처럼 가늘어진 눈매가 내 얼굴을
집요하게 훑어본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그가 느긋이 입매를 말아 올렸다.
“협상을 잘하는군요.”
여유로운 미소였다. 성과가 나쁘진 않구나. 나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굳었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별거하지도 않았는데 권이도와 있으면 자꾸만 긴장감이 들곤 한다.
권이도는 습관적으로 손목을 확인했다가 시계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눈가를 찌푸렸다. 상황에 맞지 않게
‘그’ 권이도도 실수를 한단 사실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입가를 가린 나를 보며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실소했다.
“……그만 일어납시다.”
***
그나마 알아낸 건, 그가 바라는 게 특이 형질로 태어날 후계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일까. 다리나 벌리고
살지 않아 다행인 건지, 오메가 구실마저 못하게 돼서 불안해해야 하는 건지. 어느 쪽이건 그다지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속을 모르겠네…….”
“…….”
***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비단 아침뿐만은 아니었다. 권이도는 매시간 칼 같이 퇴근해, 샤워를 마치고
나와의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식사가 모두 끝난 뒤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방에서 대화까지 나누었다.
‘오늘은 뭘 했어요?’
- 다음 화에 계속
9 화. Deja vu(4)
권이도는 오늘도 완벽한 차림으로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 앞에 섰다. 짙은 회색의 원단에 허리선이
높게 빠진 정장은 푸른빛이 감도는 넥타이와 무척 잘 어울렸다. 수려한 눈매를 살짝 찌푸린 모습마저 잘 찍어
놓은 화보처럼 보였다.
“……?”
“저 권이도 씨 번호 모릅니다.”
“……있겠군요.”
콩트도 아니고 도대체 무얼 하나 싶다. 내가 피식피식 웃자, 권이도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는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고 까딱 고갯짓을 보냈다.
“핸드폰 줘봐요.”
“핸드폰 주시면…….”
“…….”
“…….”
“…….”
“……권이도 씨?”
“010…….”
“네, 뭐…….”
“최대한 빨리 올 테니까 방에서 쉬고 있어요. 정 힘들면 내 방에 들어가 있든가 하고. 가능하면 온실은
가지 말아요.”
권이도는 대답을 바라는 것처럼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마음 같아선 알겠다고 해주고 싶었지만,
떠오르는 건 오직 의문뿐이었다.
“오늘 뭐가 있습니까?”
걱정. 그 단어를 말하고 나니 뒤늦게 알 것 같았다. 지금껏 권이도가 나를 돌아본 이유는, 미련이 아닌
걱정이었다는 사실을. 집 안에 있는 내게 그가 걱정할 만한 일은 단 하나도 없는데도.
“정세진 씨 오늘…….”
“네?”
“그게 무슨…….”
아, 그때 그거.
나는 담담히 대꾸하며 머리로 날짜를 가늠했다. 우성은 대체로 주기가 정확했고, 나도 예상 날짜를
벗어난 적은 없었다. 그 덕에 지난 몇 년간 미리미리 회사에 병가를 낼 수 있었고.
“이틀?”
그런데 권이도는 어딘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저 또한 우성이니 주기의 정확성을 모르지
않을 텐데, 비 내리는 풍경을 응시하는 시선이 영 개운치 못했다.
“……그렇군요.”
“…….”
음, 아예 멀진 않던가.
또,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괜스레 속이 갑갑했다.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권이도
없는 시간이 무료하게 느껴지는지. 아무리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이건 좀 과한 게 아닌가 싶다.
“얼마나 늦으려나.”
가능하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내일모레가 되어 히트 사이클이 오기 전에 권이도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으니. 내가 반편이 오메가라는 사실과, 그 또한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를 그러한 하자를.
***
“……어.”
“…….”
“…….”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로를 탐색하는 시선은 경계심과 호기심을 띠고 오랫동안 그 자리 그대로에
머물렀다. 어색한 공기 속,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나였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음…….”
“아휴, 이게 왜 이래…….”
“잠시만요.”
“예?”
“올 때는 어떻게 오셨어요?”
“이제 이거 쓰고 가세요.”
사장님이라. 고민의 흔적이 보이는 호칭이었다. 보아하니 베타 같은데, 남자가 남자의 약혼자라는 사실이
아무래도 영 어색하겠지.
“괜찮으니까 쓰고 가세요.”
“전 괜찮습니다.”
“아…….”
선한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창밖을 내다봤다가, 다시 우산을 살펴봤다가. 곧바로 우산을 돌려주지
못한 건, 손잡이가 지저분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
……사장님?
어버버 흐리는 말들은 잘 들리지 않았다. 사장님, 그 한마디에 한가득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마하니 나를 부르는 건 아닐 테고. 그러니까, 내가 부르면 권이도가 날 데리러 올 거라고?
“내 이미지가 어떻길래…….”
애초에 그들이 나를 피하는 모습은 무시보단 꺼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내게 무례를 저지르면 큰일이라도
나듯, 한껏 날을 세운 상태였단 말이다.
- 다음 화에 계속
10 화. Deja vu(5)
비는 그때가 되어서야 조금씩 그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던 빗줄기가 점점
가늘고 약해지고 있었다. 먹구름이 낀 하늘 역시 아까처럼 새카맣거나 흉흉하진 않았다.
「보고 싶어요!!!」
그간 함께 일했던 직원들의 연락이었다. 익숙한 이름도 보였고, 비교적 교류가 없던 이름들도 보였다.
내 퇴사 소식이 이제야 전해졌거나, 아버지가 새로운 본부장을 뽑아 자리에 앉힌 모양이었다.
“잘만 다닐 거면서.”
입맛이 없단 이유로 점심을 걸렀던 날, 권이도는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얘기했다. 정 귀찮으면 점심은
온실에 차릴 테니, 웬만하면 밥은 거르지 말라고.
“뭐, 직접 오진 않겠지만…….”
“…….”
‘정세진.’
“…….”
“흡…….”
“으…….”
왜, 갑자기?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은 금세 또 다른 감정에 뒤덮여 버렸다. 허벅지가 배배 꼬이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됐다. 바짝 조여든 아랫배는 점점 차오르는 욕정을 담고 움찔움찔 경련했다.
“아, 안 돼…….”
‘정세진 씨 오늘…….’
***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약해진 빗줄기가 다시 거세지고, 새카만 먹구름이 끊임없이
몰려들었을 즈음. 불덩이를 삼킨 듯 홧홧한 목구멍이 침을 삼킬 수조차 없이 바싹바싹 마를 즈음.
“하아, 하아…….”
심장은 쉴 새 없이 거친 소리를 내며 뛰었다. 아프도록 발기한 성기는 조금만 건드려도 사정할 것처럼
예민한 상태였다. 사방이 꽃으로 가득한 온실, 그것도 투명한 유리로 된 공간. 그런 곳에서 자위할 수도 없으니,
해소되지 못한 욕구는 마냥 쌓이기만 했다.
사실, 단순히 자위 정도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특이 형질, 그것도 우성의 사이클은 홀로 이겨 내기
버거운 짐승 같은 시기였다.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차오르는 욕구에 파묻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단 말이다.
“……전화…….”
‘하자품을 주워 와서…….’
드문드문 사고가 끊겼다. 힘없이 추락한 핸드폰이 바닥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쁜 숨을
토해 내며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병신 같은 놈. 너 같은 걸 주워 오는 게 아니었는데.’
“……흐…….”
“…….”
파혼당하면 어떡하지?
우습게도, 가장 두려운 부분이 그거였다. 권이도의 말을 무시하고 온실에 와버려서, 그가 나를 버리고
내칠까 봐. 그렇게 버림받고 돌아간 내게, 아버지가 또 한 번 쓸모없는 놈이라며 실망할까 봐.
분출되지 못한 성욕이 명치께에 고였다.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은 미처 삼키지 못한 채 손바닥에 짓눌렸다.
아래쪽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앞이고 뒤고 축축하게 젖어 엉망이었다.
나는 습관처럼 테이블 아래에 몸을 웅크렸다. 이런다고 숨어지지 않겠지만, 어떻게든 내 초라한 모습을
감춰 버리고 싶었다.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 눈을 감아 버리자, 뺨을 타고 뜨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아, 흐…….”
귓가가 먹먹하게 변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잘 들리던 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욕구를 해결하고
싶다는 충동 반, 남들 다 겪은 사이클 하나 견뎌 내지 못하는 나에 대한 자괴감 반. 그리고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정체 모를 두려움 조금.
“흑…….”
“…….”
“하…….”
“김 실장님……?”
“…….”
기분 탓일까.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내 페로몬으로만 가득하던 공간에 타인의 존재감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끊어질 듯 가느다란 숨결 속에, 묵직하고 그윽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권이도 씨.”
“…….”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죠.”
어딘지 모르게 자조적인 어조였다. 무어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나오는 건 색색거리는 작은 신음뿐이었다.
권이도는 재킷을 머리 위로 끌어올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아무래도, 내 얼굴이 제법 이상했나 보다.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으니 몰골이 초췌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푹 숙인 걸 확인하고,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전무님!”
“고개 들지 말라니까.”
“……어떻게…….”
“나중에.”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은 우는 아이를 달래듯 조심스러웠다. 서툴기 그지없는 위로엔 아버지조차 보여
주지 않던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 조금은 서늘한 체온도, 차분히 내려앉는 페로몬도, 그 모든 것들이 눈가가
시큰할 정도로 따사로웠다.
“…….”
“……흐.”
확실히, 우성은 우성이었다. 내가 조절하지 못하고 뿌린 페로몬도, 권이도의 페로몬에 조금씩 잡아먹혔다.
비를 맞은 나무처럼 묵직한 향기가 다디단 감미료라도 되는 양 끈적하게 얽혔다.
“억제제…….”
“알아.”
“아니…….”
“가지 말고…….”
기다란 손가락에 얼기설기 깍지를 꼈다. 가지런하고 곧은 손가락은 보이는 것보다 굵기가 굵었다. 맨살이
맞닿은 탓일까. 다시금 뜨거워진 몸뚱이가 눈앞의 알파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좀…….”
“정세진 씨.”
“하아…….”
“으응…….”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기분 좋은 키스였다. 비교적 서늘한 체온도, 서서히 뜨거워지는 입 안도, 모두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공기 중에 감도는 페로몬 역시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쾌감으로 다가왔다.
“……아!”
순간, 날카로운 송곳니가 내 혀를 깨물었다. 따끔, 느껴지는 통증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버렸다. 권이도는 달뜬 숨을 몰아쉬며 지그시 나를 내려다봤다.
“세진아.”
“…….”
가슴 언저리가 옥죄는 듯했다.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그 장면이 너무도 현실감 없어서. 그리고
정체 모를 기시감이 자꾸만 목구멍 안쪽을 건드려서.
“충동질하지 마.”
- 다음 화에 계속
11 화. Petit a Petit(1)
‘도련님 체질상…….’
주치의는 곤란한 얼굴로 내 체질과 억제제에 관해 이야기해 줬다. 총 다섯 가지 종류의 주사를 놨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고. 드문 케이스긴 하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말도 함께였다.
‘아마 발현 전이라 몰랐을 텐데, 페로몬 배출이 전혀 안 되는 몸이에요. 평상시엔 베타처럼 페로몬이
없다가 히트 사이클이 오면 갑자기 폭주할 겁니다. 억제제도 그래서 안 들을 가능성이 크고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아버지가 지어 보였던 표정만큼은 선명했다. 실망감, 그리고 배신감. 약간의
후회와 함께 떠오르던 혐오까지.
의사는 건강엔 이상이 없다고 말했지만, 아버지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주치의가 짐을
챙겨 물러난 뒤, 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이야기했으니.
‘하자품을 주워 와서…….’
페로몬 하나 조절하지 못하는 오메가는 완벽주의자인 아버지의 인생에 커다란 오점이었나 보다. 기껏 챙겨
둔 기회가 반쪽짜리라는 걸 깨달은 이상, 아버지가 내게 성의를 보일 필요는 없었다.
‘병신 같은 놈. 너 같은 걸 주워 오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모자란 하자품이라, 그래서 원래의 부모님에게마저 버림받은 낙오자라, 당연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는 것뿐이니까.
‘억제제를 안 먹는다고?’
‘별 수작을 다 부리는군.’
‘정세진.’
오래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모든 게 남자의 페로몬 때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조그만 벌레를 짓누르듯,
위압적인 공기가 무겁게 나를 내리눌렀다. 날카롭게 폐부를 난도질한 페로몬은 내가 끝내 구역질을 시작한 뒤에야
거둬들여졌다.
머리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듯했다. 바르작거리며 몸을 웅크렸지만, 괴로운 공기는 바뀌지 않았다.
억울함 반, 그리고 정체 모를 서러움 반.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여러 감정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자 어두운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높디높은
천장에 내 방과는 다른 방 구조. 어슴푸레한 여명이 비치는 공간은 조금 전 보았던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꿈?”
“아니…… 같이 누워 있는 쪽이 더 이상하지.”
‘세진아.’
‘충동질하지 마.’
“…….”
젖은 나무 냄새. 혹은 비를 맞은 흙냄새.
“알파는 다 이런가…….”
“…….”
우선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기다려야지. 날이 밝으면 온실에 들렀다가 권이도에게 사과의
말을 전할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상황을 설명하면…….
“……?”
“서재에 불이 왜…….”
홀린 듯 불빛이 스미는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슬리퍼를 신지 않은 맨발에 자꾸만 바짓단이 걸렸다.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영 거슬리는 건 사실이었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넘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다다른 문 앞에서, 잠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간에 불이 켜져 있다고 한들, 함부로 들여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긴 전부 권이도의 공간이고, 내게
허락된 건 내 방과 온실 정도였으니.
그 생각이 들자마자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갑작스레 떠오른 위화감이
아니었다면 나는 곧장 내 방으로 향했을 것이다.
‘서재에 불이 왜…….’
왜 여길 서재라고 생각했지?
“…….”
정체 모를 기시감은 평소라면 억눌렀을 호기심을 불러왔다. 예의가 아니라는 이성보다 사실을 확인하고
싶단 충동이 앞섰다. 판도라가 끝내 상자를 열어 버리고 만 것처럼, 본능이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불안한 기분이었다. 기대인지, 아니면 긴장인지. 빠르게 뛰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달칵, 문이 열리는 순간은 느리게 감기는 테이프처럼 더디게 느껴졌다. 문고리가 내려가는 감각, 굳게
닫힌 문을 밀었을 때의 느낌, 서서히 벌어진 문 틈새로 은은히 쏟아지던 빛줄기까지.
“…….”
“…….”
권이도였다. 무표정한 얼굴에, 무감정한 눈을 한 권이도. 눈조차 깜박이지 않아서 하마터면 환상이라고
착각할 뻔한 권이도.
“……정세진?”
“왜 여기…….”
“……그거.”
“진짜예요?”
***
달그락. 식기가 맞닿는 소리가 들렸다. 흘긋 바라본 권이도는 예의 그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부드러운 오믈렛을 입에 넣는 동작조차 잘 찍어 놓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권이도가 눈짓한 음료는 사과와 치커리 따위를 갈아 만든 것이었다. 썩 맛있어 보이는 생김새는 아니지만,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마지 못해 유리잔을 손에 쥐자 그가 조그만 한숨과 함께 식기를 내려놨다.
“정세진 씨.”
“…….”
권이도의 부름엔 미묘한 힘이 있었다. 시선을 피하고 싶어도 저절로 고개를 들게 하는 힘이.
그 말대로였다. 아침 식사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꾸만 입가가
내려가는 바람에 평소처럼 사근사근 말을 붙이는 일도 없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그는 단호히 대꾸하고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주말에도 출근하는 건가. 평소보다 이르게 식사를
시작했으니 그나마 여유는 있을 터다.
“내가 무서워요?”
짙은 눈동자는 새벽에 보았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공허하게 텅 비어 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생기가
또렷이 보였으니까.
“……아뇨.”
“권이도 씨가 아니라…….”
‘진짜예요?’
마침내 그러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얼어붙은 것처럼 숨을 멈춰야 했다. 그는 새카만 총을 서랍에
집어넣고 별반 대수롭지 않단 투로 덧붙였다.
‘총알은 다 버렸지만.’
- 다음 화에 계속
12 화. Petit a Petit(2)
“……진짜 총을 처음 보거든요.”
‘……맨발?’
때마침 서재 문이 닫히는 바람에 복도는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다. 가느다란 빛줄기에 의지한 시야는
권이도가 내민 손을 놓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자연스러운 행동에 내가 화들짝 놀라 버렸단 점이었다.
‘…….’
‘…….’
‘아, 그게…….’
심장은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뒷덜미가 오싹해서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어젯밤엔
분명 위로가 되었던 손길이, 그때만큼은 나를 위협하는 무언가로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여러모로 실례 많았습니다.”
“조심이라…….”
권이도는 그리 중얼거리며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있다가 가만히 입매를
당기기도 했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조심해서 해결되는 문제인지 몰랐군요. 정세진 씨 말대로 갑자기 찾아온 거면 달리 방법이 없을
텐데.”
갑작스레 들이닥친 사고를 막을 방법은 없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얘기였다. 물론 그의 입에서
이러한 말들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권이도는 금세 다시 식사를 이어 갔다. 내게도 먹으라며 권했는데, 이미 사라진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약지에 낀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가볍게 운을 뗐다.
“……억제제가 안 듣는 체질입니다.”
담담한 척 이야기했으나, 사실은 긴장한 상태였다. 가족들을 제외한 누군가에게 내 하자를 고백하는 건
처음이었으니. 아니, 가족들에게도 내 입으로 말한 게 아니니 그냥 처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군요.”
권이도는 생각보다 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고, 무언가 더 물어볼
생각도 없는 듯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은 약혼식 날 이 말을 하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누군가에게 들었건, 아니면 홀로 눈치챘건.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무척이나 많았으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신기한 일이죠.”
생뚱맞게도, 권이도는 나직이 중얼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가 어딘지 모르게
자조적으로 보였다.
걸림돌이라니? 그렇게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가만히 눈을 내리깐 그가 다시금 시선을 들어 올리며
이야기한 것이다.
반사적으로 이야기하자, 권이도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말하려다 내뱉기 직전에 삼킨 모양이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물어 왔다.
“왜?”
“그거야…….”
“……궁금해야 합니까?”
“그럼요.”
“…….”
“별로 상관없…….”
“……권이도 씨가 갈아입혔습니까?”
“…….”
“왜 다른 사람한테 안 시키고…….”
“번거로우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예의상 인사를 건넸으나, 권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여전한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들여다봤을 뿐.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쉰 그가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
“……정신이 없어서요.”
“정세진 씨.”
“…….”
“……잘 쓰겠습니다.”
“알아들었으면 잠깐 같이 내려가죠.”
“줄 게 있어서.”
***
중문 밖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곧장 지하에 있는 차고로 연결된다. 자주 쓰는 차 몇 개만 주차해
놨다는 공간은 내가 이 집에 들어와 단 한 번도 내려온 적 없는 곳이었다. 뭐, 내 방과 온실을 제외한 대부분은
들어가 보지 않았지만 말이다.
권이도는 나를 데리고 차고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널찍이 주차된 차들은 언론에 노출되지 않은 그의
개인 차량이었다. 자동차 수집이 취미라더니, 종종 아버지가 탐내던 한정판 모델들도 세워져 있었다.
“예, 기억합니다.”
차를 주려고 그러나?
“한 달이요?”
“정확히는 3 주 정도.”
“그 정도면…… 빠른 편 아닙니까?”
브랜드에서 새로운 차종이 나오면 적게는 반년, 길게는 2 년까지 기다리는 경우도 보았다. M 사 같은
경우엔 애초에 개수가 많지 않으니 예약을 걸기부터 쉽지 않을 거다. 아마 권이도의 이름으로 순번을 앞당긴 게
한 달이겠지.
“날짜만 보면 빠를지 몰라도, 차가 없는 상태에서 한 달은 길죠.”
정확히는 3 주라고 했으면서, 권이도는 마치 터무니없는 기간을 들은 사람처럼 눈가를 찌푸렸다. 계획이
어긋났단 사실에 유감을 표하는 듯했으나,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어 보였다.
“……네?”
“…….”
“…….”
“……감사합니다.”
“…….”
“아뇨…… 그건 정말 괜찮습니다.”
턱까지 차오른 한숨을 간신히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이게 무슨 억지냐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의 얼굴을
보면 반박할 마음이 사라졌다. 미묘하게 들뜬 눈빛이 어린아이의 것처럼 신나 보였기 때문이다.
“부담스럽습니까?”
“일주일.”
“…….”
- 다음 화에 계속
13 화. Petit a Petit(3)
생뚱맞은 제안이었다. 설마하니 이런 제안이 나올 줄 몰랐기에 나는 잠깐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권이도가 건넨 제안이 사실상 검토해 볼 가치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자동차 같은
걸 두 개나 받을 바엔, 내게 필요한 거 하나를 받는 쪽이 후처리가 편하기도 했고.
“금액대는 아예 무관한가요?”
“무관합니다.”
“그럼 대신…….”
“대신?”
“…….”
“예리한 면이 있네요.”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손가락이라도 걸까요?”
“…….”
“…….”
설마, 농담이겠지.
“어쨌든 일주일 동안은 임시로 쓰도록 해요. 정세진 씨도 외출하려면 차가 필요할 텐데.”
“네, 뭐…….”
“아, 그리고.”
“검사요?”
“몸에 변화가 오는 게 그리 긍정적인 신호는 아닙니다. 억제제가 안 들으면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 생길
텐데 히트 사이클 주기가 달라진 원인은 알아야죠. 정세진 씨가 집에만 있으면 모를까, 만약의 경우는 대비해야
하지 않겠어요.”
“…….”
“주치의 부를 테니까 페로몬 관련으로 간단한 검사만 몇 개 받아요. 병원이 편하면 병원으로 가도 됩니다.
어떻게 할래요?”
“질문?”
“……?”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토요일인데 고생하시네요.”
비서가 아니라 경호원?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예의상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본인을
이태성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감흥 없이 나를 살피곤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별로 특별한 것 없는
반응이었으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아…… 감사합니다.”
“수행원?”
“…….”
“저 잠시…… 전화 한 통만 하겠습니다.”
“진짜 똑같네…….”
-네, 권이도입니다.
-…….
-무슨 일 있습니까?
-……아.
나직이 터진 탄성은 안도와 깨달음 두 가지를 담고 있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목소리 역시
부드럽게 풀어졌다.
권이도가 눈앞에 없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 눈앞에 있었다면 지금의 황당한 표정을 그대로 들켜 버리고
말았을 테니. 의도하진 않았지만, 어이없단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봤을 게 뻔했다.
“…….”
덩치가 좋다 했더니, 운동하던 사람인가 보다. 게다가 팀장이라는 직책까지. 그렇게 좋은 인재를 왜
나한테 붙여 주냔 말이다.
도무지 말이 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웬만하면 누구 하나가 물러날 텐데, 나도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사람이 곁에 붙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오랜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감시?
“…….”
“……아뇨, 실언이었습니다.”
망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로는 이해한다면서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는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권이도 씨, 저는…….”
입이 딱 다물렸다. 분명 냉랭한 목소리였음에도 기분이 나쁘기보단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뒤이은
권이도의 말을 듣는 순간 더 뚜렷해졌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더니 말없이 쓰러져 있던 건 정세진 씨예요. 만약 내가 온실에 안 갔으면
종일 그러고 있었을 겁니까? 만약 온실이 아니라 정원에서 그랬으면, 그럼 정세진 씨가 나한테 연락했을 것
같아요?
“……권이도 씨.”
-네.
-…….
무심코 질문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주변에 숨소리만이 수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미미하게
들리던 부스럭 소리 역시 정지 버튼을 누른 양 뚝 끊겨 버렸다.
“……네, 뭐.”
-걱정하는 거 맞습니다.
뚝, 전화가 끊겼다. 뒤늦게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권이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뚜, 뚜, 이어지는
신호음이 멍한 귓가에 맴돌았다.
- 다음 화에 계속
14 화. Petit a Petit(4)
그리고 온실에 도착했을 때, 역시나 그는 입구에 선 채 더 들어오지 않았다. 바르게 뒷짐을 선 자세가
얼핏 문지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권이도가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는 몰라도, 저렇게 동상처럼 서 있으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팀장님도 들어오세요.”
“아뇨, 저는…….”
“앉으세요.”
“…….”
“서서 드실 겁니까?”
“전 괜찮습니다.”
“음…….”
“……예, 없습니다.”
“편하게 드세요.”
“…….”
“먹었습니다.”
“뭐 드셨는데요?”
“…….”
“일은 안 힘드십니까?”
“할 만합니다.”
외관으로 보면 30 대 초중반 정도려나. 권이도의 경호팀, 그것도 팀장을 맡을 정도이니 능력은 확실히
좋을 터였다.
“……이제 팀장 아닙니다.”
“…….”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팀장직을 내려놓은 게 나 때문이라서, 이렇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그러나 이태성은 여전히 심각한 말투로 이렇게 얘기했다.
“사고 치고 좌천됐습니다.”
“…….”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뭐, 굳이 따지면 틀린 말도 아니고.
“차 드세요. 식겠어요.”
“…….”
다시금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땅히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인데, 이번엔 이태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 물어보십니까?”
“뭐를요?”
온실이 따뜻했기에 찻잔엔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투명한 유리잔을 손으로 감싸 목련향이 남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태성은 내가 찻잔을 내려놓은 다음에야 주제를 꺼냈다.
“…….”
다행히 그는 눈치껏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고개를 돌린 채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조금 안도한 것 같기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껄끄러운 화제이긴 했나 보다.
“본부장님.”
“…….”
움찔, 어깨가 들썩였다. 분명 익숙한 호칭이었으나, 이 장소에서 듣기엔 지나치게 낯설었다. 느릿느릿
책에서 시선을 떼자, 아까처럼 무뚝뚝한 표정의 이태성이 보였다.
“……아뇨,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말씀하세요, 이 팀장님.”
“…….”
마치 욕지거리를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 앞에서 욕을 하진 못할 테니, 저게 최선이겠지만.
“아.”
“……이태성 씨가 그걸 왜 챙깁니까?”
“……아, 고맙습니다.”
‘걱정하는 거 맞습니다.’
부담스러워야 했다. 이상해야 했고, 또는 낯설어야 했다. 그에게 차 키를 받았을 때처럼 왜 이러는지
이해되지 않았어야 한단 말이다.
하지만 이 어색한 기분은, 아무리 숨긴들 결코 불쾌함은 아니었다. 만족감, 그리고 기대, 혹은 약간의
설렘이라면 모를까. 마치 내도록 그의 걱정을 바라고 있던 사람처럼.
뒤에서 이태성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나는 먼저 온실을 나서며 뒤숭숭한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머릿속엔 어제 나를 찾아왔던 권이도의 모습이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
새하얀 펄이 섞인 입욕제는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가 가미된 배스 밤이었다. 장미와 자스민을 합친 것으로,
무릇 플로럴 계열이 그렇듯 산뜻하면서도 포근한 향이 일품이었다. 이다지 좋을 줄 알았으면 진작 쓸 걸
그랬다고, 새삼 반성할 정도였다.
“…….”
“정세진 씨, 안에 있습니까?”
“잠시만요.”
“…….”
“……권이도 씨?”
“아.”
“……방금 씻고 나왔습니까?”
“…….”
그 질문에 대답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자, 권이도의 시선이 더욱 짙어졌다.
차분하게 내려온 머리 아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수려한 눈매가 보였다.
- 다음 화에 계속
15 화. Petit a Petit(5)
“그래요, 그래 보이는군요.”
눈에서 코로, 코에서 입으로, 그리고 입에서 턱으로. 차근차근 내려간 시선은 마침내 목덜미 아래까지
내려갔다. 가운을 잘 여몄음에도 불구하고 벌거벗은 것처럼 수치심이 일었다.
“왜 그러고 열었냐니…….”
오해하면 어쩌지?
순간,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머릿속을 웅웅거리며 울렸다. 냉정하게 뒤를 돌아 나가던 뒷모습 역시
바로 어제 일처럼 뚜렷하게 기억났다. 나는 다시금 목울대를 움직이고, 최대한 담담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
“잠시만 기다리시면…….”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여전히 긴장감이 들었다. 주변을 맴도는 페로몬이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권이도는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지만, 온몸이 그와 맞닿아 있는 것만 같았다.
“벌써 자나 싶어서 잠깐 왔던 겁니다. 얼굴 봤으니까 쉬어요. 늦었으니 이만 가보도록 하죠.”
달칵, 방문이 완전히 닫혔다. 소용돌이치던 페로몬도 일순간에 뚝 끊겨 버렸다. 바짝 긴장했던 어깨가
느슨하게 풀어지고, 막혔던 숨이 한순간에 탁 튀어나왔다.
“하.”
나는 무너지듯 제자리에 쭈그려 무릎에 이마를 묻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조차 없었다. 무릎 아래까지 길게 내려오는 가운이 애매한 부위를 절묘하게 덮고 있었다.
“……미치겠네.”
섰다. 사춘기 고등학생도 아니고, 무언가 야한 장면을 본 것도 아닌데, 권이도의 시선과 페로몬에
욕정하고 말았다.
“아…….”
“…읏…….”
“하아…….”
“흐…….”
어제는 히트 사이클 때문에 쉬웠던 걸까. 손을 움직이고 있는데도 모자란 기분이 들었다. 감질나게
스미는 권이도의 페로몬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매개체가 되어 주지는 않았다.
“……아…….”
이제는 앞뿐만 아니라 뒤까지 젖어 가는 게 느껴졌다. 줄줄 새어 나온 애액이 허벅지를 타고 길게
흘러내렸다. 허벅지를 바짝 붙인 채 손을 빨리했지만, 여전히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세진아.’
“……흡.”
그러나 우습게도, 나는 권이도의 목소리를 떠올리기 무섭게 사정감을 느꼈다. 귓가에 입을 맞추고,
상냥하게 속삭이는 음성이 마치 실재처럼 나를 절정으로 내몰았다.
‘가도 돼.’
“흣…….”
“……하아.”
“…….”
바닥에 흩뿌린 정액이 오줌을 싼 것처럼 부끄러웠다. 한차례 욕구는 해소했지만, 이제는 또 다른 문제와
직면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
여러 우려와 다르게 나는 평소처럼 깊은 단잠을 자고 일어났다. 악몽을 꾸지도 않았고 중간에 깨어나는
일도 없었다. 역시 수면제보단 권이도 페로몬이 낫구나. 새삼 자각한 안정감은 이미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 있었다.
눈가를 찡긋하며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 자신 있으니, 평소처럼
권이도를 대할 생각이었다. 내가 입만 다물면, 이 사람은 어차피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그러진 마세요.”
“…….”
순간, 권이도가 표정을 확 굳혔다. 어디서 기분이 상했는지, 시선이 가라앉은 듯했다. 이내, 그는 예의
그 냉랭한 얼굴로 물잔을 손에 쥐었다.
“뭐, 여러모로…….”
“정세진 본부장님.”
“…….”
애초에 본부장이라는 직급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성과가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줄 뿐, 아버지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을 거다. 권이도가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어도, 언젠가 압박에 못 이겨
내려왔을 자리였고.
“그렇군요.”
“…….”
“…….”
“……그렇군요.”
“…….”
음, 야망가라고 할걸.
“선호물산 아닙니까?”
그리 어렵지 않은 말이었는데, 머리가 이해하는 속도가 느렸다. 그가 내뱉은 첫 가정부터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호그룹이 왜 와해됩니까?”
선호그룹은 우리나라의 여러 대기업 중에서도 최고로 뽑혔다. 선호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정말 경제권을 꽉 쥐고 있는 독재자란 말이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예상할 사람은 충분히 예상했고, 실제로 집안에서도 몇 번 얘기가 나왔어요.
덩치가 그렇게 커졌는데 회장님까지 오늘내일하시니, 그룹 하나 쪼개지는 건 별로 어렵지 않죠.”
“그냥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
의뭉스럽게 말했지만, 결국엔 가서 전하라는 말이었다. 결국엔 본인이 부회장이 될 거라는, 자신만만한
근거들을. 그걸 아버지가 알게 되면 권이도에게 대체 어떤 이득이 있길래.
애초에 권병욱 회장이 별세해 권상미가 회장이 된다고 해도, 권이도의 위로는 형제가 둘이나 더 있었다.
형인 권이정은 둘째 치더라도 누나인 권이경은 호락호락하게 부회장 자리를 내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권이도의
주장대로 모든 걸 쉽게 얻어 낼 수 없다는 말이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사업은 정보 싸움이었지만, 오답보단 백지가 나았다. 확실치 않은 내용을 전하는 것보단 가만히 있는
쪽이 안전할지도 모른다.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가, 무언가 이상하단 생각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건 왜요?’ 이렇게 묻자
권이도가 한쪽 입매를 비스듬히 올렸다.
16 화. Petit a Petit(6)
“부탁?”
부탁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권이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지런한 눈썹이
삐쭉 올라갔다.
“아뇨, 그게 아니고.”
“서재를 좀 써도 될까 해서요.”
“……서재를요?”
오늘도 권이도가 출근하면 어김없이 이태성이 찾아올 터였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잔뜩 불편한 얼굴로
온실에 함께 가겠지. 그럴 거면 책을 두 권 챙겨 가는 편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서재…….”
“……네, 감사합니다.”
“아.”
“…….”
“슬슬 일어나죠.”
“정세진 씨.”
간혹, 미미한 기시감이 드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어, 바로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때라든가.
“……네?”
“이를테면, 총 같은 거.”
‘총알은 다 버렸지만.’
권이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서랍에 총을 넣고 잠그던 일련의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이군요.”
***
“……이게 뭡니까?”
“책이죠.”
“프랑스어예요.”
“……아아.”
“프랑스어도 하십니까?”
“미안하지만, 그건 다 읽었습니다.”
“압니다.”
“그럼 왜…….”
“그 책, 재밌는 편인데.”
“…….”
첫 챕터를 읽으며 한 시간. 그리고 읽었던 내용을 다시 살펴보며 두 시간. 마침내 점심시간이 되어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눈이 빠져라 책을 읽고 있는 이태성을 발견했다.
“볼 만하죠?”
“……네, 엄청.”
***
이태성은 고용인들과 점심을 먹고 돌아와 멀찍이 떨어져 산책하는 나를 따라다녔다. 명목은 분명 경호인데,
아무래도 감시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정말 인기척 없이 쫓아다녔다는 점일까.
“오늘은 뭘 했습니까?”
“서재는 봤고?”
대화는 아침에도 나누는데, 이상하게 저녁엔 항상 느낌이 색달랐다. 권이도가 정장을 입고 있지 않아서
그런가, 조금 더 거리감이 좁혀지는 것이다. 그가 편안한 표정으로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오늘은 무슨 책을 읽었어요?”
“<Origine du parfum>?”
“…….”
우아한 불어가 귓가에 부드럽게 감겼다. 몇 개 안 되는 단어긴 해도, 발음은 물론 악센트까지 완벽했다.
놀란 내가 눈을 커다랗게 뜨자, 권이도가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불어 할 줄 아십니까?”
“대충?”
고작 시선 하나 내렸을 뿐인데,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 말을 내뱉는 얼굴이 너무도 애달파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깨를 으쓱한 권이도가 다시 엷게 미소 지었다. 좀 전까지 보였던 그늘은 어느새 깨끗이 지워진
상태였다. 이거 봐, 이 사람이 김 실장보다 잘 웃는다니까.
“향수를 좋아해요?”
권이도가 웃는 얼굴은 화사한 꽃이 만개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냉랭해 보이는 얼굴이,
웃는 순간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흐르는 걸 느끼지 못할 만큼.
“잘 어울리는군요.”
“…….”
“페로몬 향?”
“…….”
누군가 사과는 빨가니까 먹지 말라고 하면 처음엔 그게 왜 먹으면 안 되는 이유냐고 물어볼 거다. 그러다
그 말을 세 번쯤 들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고. 그런데 만약, 왜 안 되냐고 이유조차 묻지 못할
상황이라면.
“정세진 씨가 하고 싶던 건 어느 쪽입니까?”
“저는…….”
아, 왜 이렇게 목이 메지.
아마 어린 시절의 나는, 이러한 것들을 직접 향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찰나의 감각을 놓치기
싫어서 가능한 한 오래 보존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 다음 화에 계속
17 화. Petit a Petit(7)
오늘 고용인이 준비한 꽃차는 달짝지근한 향이 풍기는 매화꽃 차였다. 송이송이 말린 매화가 유리로 된
찻잔에 두둥실 떠다녔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맞은편에서 어색한 질문이 들려왔다.
“……꽃도 먹습니까?”
풉, 웃음이 튀어나왔다. 비웃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 말이 너무 조심스러웠던 탓이었다. 나는 입가를
가린 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꿀꺽 삼켜 냈다.
하얀 꽃잎은 눈으로 보기에도 무척이나 예뻤다. 미관상 보기에도 좋으니 제 역할은 톡톡히 한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먹어 버리기엔 좀 아깝지 않나 싶다.
“내용을 알고 보면 재미없잖아요.”
“…….”
「사랑하는 이에게」
「나는 달 속에 있었다.」
“…….”
“어…….”
비가 오나.
“……본부장님?”
먹먹한 귓가에 이태성이 화들짝 놀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로 모자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까지. 하릴없이 넘어진 의자가 우당탕 정신없이 뒹굴었다.
“왜, 왜 그러시는…….”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아프십니까?”
“아…….”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냥 시집을 읽었을 뿐이고, 거기서 권이도가 써놓은 글씨를 발견했을
뿐이다.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인 구절도 없었으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쉬이 울어 버릴 만큼 감성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눈에 뭐가 들어갔다고요?”
“신경을 어떻게…….”
이태성은 크게 당황하며 테이블을 돌아 내 쪽으로 다가왔다. 휴지가 있나 찾는 듯했지만, 온실에 그런 게
있을 리가 만무했다. 괜찮다고, 그냥 책이나 마저 보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그가 먼저 불쑥 이야기했다.
“휴지 가져오겠습니다.”
“아뇨, 정말…….”
“정세진.”
익숙한 음성이 먹먹한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직이 감겨드는 음성은 내가 아는 한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꽃향기로 가득한 주변에 나무 냄새가 섞이고,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인기척이 성큼 가까워졌다.
“……전무님?”
“세진아.”
잔잔히 퍼지던 페로몬은 어느새 한 품에 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서늘한 체온이 내 손목을 감싸고,
그보다 억세게 얼굴을 가린 손을 떼어 냈다. 느릿느릿 눈을 깜박였을 때 보인 건, 권이도 특유의 짙은
눈동자였다.
“너 왜 울어.”
“…….”
“정세진 씨, 나 봐봐요.”
“…….”
“저 전무님, 여긴 어떻게…….”
“……예?”
“퇴근하라는 말입니다.”
이태성은 한 박자 늦게 빠릿빠릿한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권이도의 품에 갇혀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 허리까지 깊게 숙여 인사했을 거다. 묵직한 발걸음이 성큼성큼 멀어지고, 나는 그의 옷깃을 그러쥔 채
이야기했다.
“……저 괜찮습니다.”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확실히 울음기는 잦아들었다. 그제야 권이도의 페로몬도 차츰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내 등을 쓸어내렸다.
“아픈 건 아니죠.”
“……네, 안 아픕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럼 왜 울었을까…….”
“…….”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원래도 내게는 다정했던 사람이, 지금만큼은 정말 어린
아이를 대하듯 상냥하다. 이러니까, 자꾸만 내가 다리를 뻗는대도.
“……저 정말 괜찮습니다.”
“…….”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사르륵 쓰다듬는 손길은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야릇한
느낌이 있었다. 그는 양팔로 나를 꼭 끌어안은 채 가만히 내 머리칼에 뺨을 문질렀다.
“아뇨, 제가 읽은 건 이겁니다.”
“…….”
민망한 기분에 사과를 건넸는데, 권이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사과하지 말라는 등의
반응조차 없었다. 그저 무언가 놀란 눈으로 멍하니 시집을 바라봤을 뿐.
“……그걸 읽었다고요?”
“정세진 씨, 혹시…….”
혹시?
“……아뇨, 아닙니다.”
“…….”
“찻잔이 왜 두 개입니까?”
“…….”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 없이 정확하다. 대체로 안 좋은 기운을 감지하는 건 다른 무엇보다
본능이 빠른 법이었다.
그의 시선이 소설책과 시집을 번갈아 응시했다. 손끝으로 유리로 된 찻잔을 톡톡 건드렸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이내, 가볍게 코웃음 친 그가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시원스럽게 트인 눈매가 가늘게 길어졌다.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흘러나온 말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이름이 이태성입니까?”
“…….”
“알아야 하나요?”
“뭐, 사실…….”
권이도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기다란 검지가 움직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
- 다음 화에 계속
18 화. Petit a Petit(8)
“…….”
이태성과 함께하는 시간은 권이도와 보내는 시간이 비하면 무척이나 짧았다. 끽해야 오전 몇 시간을
함께할 뿐이고, 각자 책을 읽느라 말을 나누는 일도 드물었다. 그와 반대로, 권이도는 매일 밤 나와 두어 시간씩
대화하지 않던가.
“…….”
“그게 싫으시면…….”
“아뇨.”
“그렇게 하죠.”
“정세진 씨는 정말…….”
“상냥하다고요.”
장난스럽게 말하자,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한결 누그러진 분위기에 특유의 알파 페로몬이 잔잔히
감겨들었다. 누누이 생각하지만, 정말 상냥한 건 그쪽이라니까.
“네, 그런 건 없습니다.”
“…….”
“아, 그거…….”
“네, 그거.”
권이도가 만족할 만한 물건이면서, 나중에 뒤처리가 어렵지 않은 것. 책 따위를 말하기엔 서재가 너무도
넓으니 그가 말한 향수가 적당할 듯했다. 정확히 어떤 건진 모르겠지만, 먼저 이야기했다면 그의 눈에 찰 만한
물건일 테니까.
“똑똑하군요.”
“무슨 향수인지도 모르면서, 내 입에서 먼저 나왔으니 적어도 거절하진 않겠다고 생각했나 보죠.”
“…….”
움찔, 어깨가 들썩였다. 다행히 그가 책을 보는 중이었기에 동요한 티를 들키기 전에 자세를 바로 할 수
있었다. 그는 무척 의외라는 듯 의아한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아니라고 안 합니까?”
그는 시집을 내려놓고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재미난 말을 들었다는 듯 흥미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궁금하면 가져 봐야죠.”
“……한정판이었군요.”
“네?”
“…….”
“…….”
시선이 마주쳤다. 단순히 예시일 뿐이라기엔 권이도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다. 한껏 가라앉은 두 눈이
어떤 의미에선 가련해 보이기까지 한다.
“…….”
거기까지 말하니, 문득 분위기가 너무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실이 이리도 따듯한데, 대화는
이리도 삭막할 수 있나. 심각한 이야기도 아니고, 단순한 가정에 불과한 것을.
“……그렇군요.”
“그럼요. 아주 많이.”
“…….”
“음, 뭐…….”
픽, 웃음을 흘린 권이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것처럼 깔끔한 구둣발에 바닥에 떨어진 꽃잎이
납작하게 짓눌렸다. 아무리 봐도 고의라고밖에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다.
“…….”
“그만 들어가죠.”
***
권이도가 말한 대로, 오후가 되자마자 주치의가 찾아왔다. 자신을 심 교수라고 소개한 여자는
선호병원에서 특이 형질과 관련된 과를 담당하는 의사였다. 그는 피를 뽑아 이런저런 검사를 진행하고, 어디
불편한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결과는 정상. 원래부터 이상했던 부분을 제외하면 별다른 특이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페로몬
농도도, 이런저런 건강 상태도, 그 어느 때보다 정상치를 웃돌았다.
‘보통 각인한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간혹 페로몬 상성이 잘 맞으면 상대방한테 맞춰서 주기가
조금씩 당겨지는 일도 있습니다.’
퍽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결혼한 사이가 아닌데, 주기가 같아지면 어쩐단 말인가.
권이도의 목적이 2 세라면 반길 일이었지만, 그는 그런 걸 원하지 않는다고 진작 못 박아둔 상태였다.
심 교수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권이도의 시선을 피했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말을 들었던
날, 아버지가 보여 준 반응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주기를 계산하는 것도 소용없는데, 권이도는 나를
얼마나 쓸모없다고 생각할까.
‘다행이군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딱 한 마디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직한 목소리는 아버지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럼 됐습니다.’
안도하는 느낌이었다. 실질적으로 해결된 문제는 아무것도 없는데. 심지어 히트 사이클의 유일한 해답이
억제제가 아니라 권이도의 페로몬이라는 말까지 들었건만.
어쨌든 결과는 무탈했고, 권이도는 비서의 연락을 받고 다시 회사로 향했다. 오늘은 저녁을 혼자 먹어야
할 거라며 미련이 남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식사는 혼자 해도 괜찮다니까.
‘기다리지 말고 자요.’
솔직히, 모르고 있었다면 거짓말이다. 단순히 인정하지 못했을 뿐, 처음부터 그럴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었다. 도무지 계산이 맞질 않아 아닐 거라 부정하고 또 부정해서 그렇지.
사람은 여유가 생기면 가장 먼저 마음을 줄 상대를 찾는다고 한다. 고독의 끝은 외로움인지라 공간이
남을수록 여백을 채우기에 급급해진다. 내게는 한 톨만큼도 남지 않았던 여유가, 이 집에 들어오면서 그를 담을
만큼 커다래지고 말았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짐작 가는 부분이 많으니 오히려 정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뚜렷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
‘세진아.’
그러고 보니, 나를 세진이라고 불렀지. 키스는 자연스럽게 했으면서 우는 걸 달래는 손길은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귓가를 만질 땐 늘 있는 일인 양 능숙했고.
“세진이라고…….”
“네, 김 실장님.”
-본부장님. 접니다.
몇 번이고 들은 호칭이었다. 이제 본부장 아니래도. 하지만 그 사실을 지적하기 전에, 김 실장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 다음 화에 계속
19 화. Petit a Petit(9)
“본부장님.”
내 옆에 서 있던 김 실장이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괜찮으십니까? 그 질문에 나는 겨우겨우 담벼락
꼭대기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네, 괜찮습니다.”
“들어가죠.”
그날, 김 실장의 말을 듣고 속으로 얼마나 많은 상상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는 이유가
뭘까. 혹시 민재가 사고를 친 건 아닐까. 내가 필요 없다는 이유로 권이도가 나를 돌려보내려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러한 예상과 달리, 김 실장은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이야기했다.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나는 오랜만에 본가에 도착한 상태였다. 권이도는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하자마자
별일 아니라는 듯 이렇게 얘기했다.
‘데려다줄게요.’
장난처럼 건넨 말이었다. 가능하면 당일에 오고 싶었지만, 민재가 붙잡을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했다. 두
번을 다녀올 바에는 한 번에 해결하는 게 낫기도 했고.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나는 오랜만에 정장을 입었다. 드레스룸에 준비된 것이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사이즈가 내 몸에 꼭 들어맞았다. 셔츠에 넥타이, 거기에 재킷까지 걸치자 제법 본부장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도련님 오셨어요?”
커다란 대문을 지나 잘 조경된 정원을 지나면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권이도의 집만큼 커다랗진
않았고, 그렇다고 작은 크기는 아니었다. 나는 현관까지 마중 나온 노인을 향해 반갑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세진이니?”
어머니와는 항상 애매한 관계였다. 사이가 나쁘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았지만, 사이가 좋으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할 관계. 십몇 년을 함께 살았음에도 대화를 나눠 본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이걸 지금 주시겠다고요?’
‘네, 와인 싫어합니까?’
‘과분하다니.’
권이도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덧붙였다.
똑똑.
“아버지, 정세진입니다.”
“찾으셨다고요.”
“그래.”
“그놈은?”
“그놈이랑은 잘 지내고?”
“……네, 뭐.”
권이도의 앞에선 꼬박꼬박 존칭을 부르더니. 이제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놈’이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하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적대심이 가득 느껴졌다.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툭, 곧게 굴러간 골프공은 이번엔 정확히 홀 안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골프채를 어깨에 걸쳤다.
“2 세는 아직이냐.”
“…….”
“허.”
“그것도 아직이고?”
“……그거라면.”
“아버지.”
“얘기해.”
“……뭐?”
“그놈이 그런 말을 했다고?”
“…….”
“망할 놈이…….”
“……네.”
“이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모자란 것.”
“…….”
“이 바닥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알지? 소문이 나도 진작 났어야 하는데 업계고 언론이고 죄 쉬쉬하는
분위기야. 선호가 이렇게까지 완벽히 통제하는 이유가 뭐겠어, 응?”
“…….”
이제야, 아버지가 아이에 집착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해신과 선호를 잇는 연결고리가 갖고
싶은 것이다. 언론에 노출조차 하지 못한 이 시점에, 나와 권이도의 2 세가 그 역할을 해주리라 믿을 테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어. 후계도 아니고 돈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권이도가 너 따위 오메가를 어디에 쓰냔
말이야.”
“아버지.”
“선호전자의 보안 시스템.”
“우리 기업의 오메가를 넘겨주면 선호에선 애플리케이션에 도입할 시스템 권한을 준다고 그랬지. 뭐……
그 외에 건 네가 알 필요 없고.”
“……계약서는 없습니까?”
혹시나 해서 물은 것이었다. 사업에 증거가 남는 계약은 필수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사색이 된 얼굴로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
그 마지막 말에는 나조차도 머리가 식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머릿속에 그가 날 내치는 장면이 또렷이
떠올랐다. 냉랭한 눈동자나,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싸늘한 한마디까지.
‘너 따위를 믿지 말 걸 그랬지.’
“세진아.”
“이 애비 말 잘 들어.”
나직한 서론은 선택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는 듯, 너그러운 목소리로 나를
북돋웠을 뿐.
- 다음 화에 계속
20 화. Petit a Petit(10)
나는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말없이 응접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고,
어머니 역시 2 층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아마 집에 불이 나지 않는 이상 내가 있는 곳으로 내려올 일은 없을
터였다.
‘…….’
바닥은 계속해서 나를 잡아먹고 있었다. 깊은 웅덩이 빠진 것처럼 발목부터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아갔다.
어깨에 올라온 아버지의 손이 추를 매단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믿을 건 가족뿐이야.’
물어보고 싶었다. 그 가족에 나는 포함되는 거냐고. 영웅이 되지 못한 아들도 거기에 자리가 있느냐고.
‘……그럼요.’
권이도 당신에게 물을 걸 그랬다. 그러는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을 훔치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할
것 같냐고. 그랬다면 조금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텐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가랑비가 부슬비로 바뀌고, 울렁거리던 속이 간신히 진정될 즈음. 외출해
있던 민재가 집으로 돌아왔다.
“왔어? 일찍 들어왔네.”
“……너, 너!”
“너 왜 집에…….”
성큼, 가까이 다가온 민재에겐 희미한 아로마 향기가 났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는데, 금세 눈동자엔
이채가 떠오른다. 그는 왜인지 기대하는 얼굴로 대뜸 질문했다.
“파혼당했냐?”
“…….”
“염색했구나.”
“잘 어울린다.”
“…….”
가볍게 건넨 칭찬에 민재가 휙 고개를 돌렸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흠흠 헛기침을 내뱉는다. 귓가가
발갛게 물든 모습을 보는 건,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선물로 받았어.”
“선물? 누가…….”
“…….”
“…….”
당연한 일이지만, 같은 공간에 있어도 우리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새삼 근황을 묻자니
귀찮았고, 그렇다고 다른 주제를 쥐어짜기엔 체력이 부족했다.
“정세진.”
아, 이런 주제는 좀 곤란한데.
“권이도 성격 존나 더럽다며. 업계에 소문 다 났는데 너도 들었을 거 아니야.”
“음…….”
민재가 말하는 어른이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 이유는 아니었을 거다. 애초에 어른 취급을
해줬다면 아버지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을 거고.
“미친.”
민재는 초조한 얼굴로 꼬았던 다리를 똑바로 풀었다. 다리를 달달 떠는 걸 보니 어지간히 긴장한
모양이다. 생긴 건 어머니와 같은데 불안할 때 나오는 버릇은 아버지와 비슷했다.
엄밀히 따지면 결혼이 아닌 약혼이었다. 그마저도 우리가 정말 약혼자다운 하루를 보내는지는 미지수였고.
하지만 나는 그러한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적당한 선에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
민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순식간에 표정이 차가워졌다. 꽉 다물린 입술이
비스듬히 비틀리고, 콧잔등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씨발, 형 같은 소리 하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누가 봐도 화난 발걸음이었지만, 나는 굳이
그런 민재를 붙잡지 않았다.
***
“…….”
“본부장님.”
“저 이제 본부장 아닙니다.”
“도련님.”
“……말씀하세요.”
“……수면제 많이 남았습니다.”
“…….”
“요즘 먹을 일이 없어서요.”
창밖에 다시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이 길게 흔적을 남겼다. 김 실장은
와이퍼를 작동시키고 넌지시 물어왔다.
“돌아갈 곳은 있어야죠.”
“도착했습니다.”
“비 맞으면 감기 걸립니다.”
어차피 돌아올 곳이라면 처음부터 떠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다른 곳에 안주할
수 있으리라 꿈꾸지 말았어야 했는데.
“…….”
“……권이도?”
“…….”
“…….”
“……왜,”
“…….”
“왜 여기에 있습니까?”
권이도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어두운 와중에도 그의 생김새가 또렷이 뇌리에
각인됐다. 섬세하게 그려 놓은 눈매, 오뚝한 콧날과 굳게 다물린 입술까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그가
나직이 대꾸했다.
“그냥, 우연히.”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우산에 톡톡 부딪혔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는데. 이 사람의 우연은 지나치게
필연적이지 않나. 고의적으로 만들어 낸 무언가를 과연 우연이라고 칭해도 되는 걸까.
“지나가던 길이었습니다.”
“…….”
“조금 늦었네요.”
“……비 맞는 거 좋아해요?”
스르륵 눈꺼풀이 감겼다.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고, 권이도의 숨결이 바짝 가까워졌다. 온통 비 냄새로
가득하던 코끝에 향긋한 페로몬이 훅 풍겨 왔다.
- 다음 화에 계속
21 화. Raison d'etre(1)
한적한 도로는 지나가는 차 한 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늦은 데다, 비까지 내렸기 때문이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길게 늘어지고, 떨어지는 빗줄기에 자잘한 빛이 부서졌다.
아, 이거 되게 이상하네.
그런 생각으로 흘긋, 권이도를 바라봤다. 그는 드물게 운전석에 앉아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볍게 핸들을 쥔 손에 적당히 도드라진 핏줄이 보였다.
‘……비 맞는 거 좋아해요?’
조금 전 그와 함께한 일들이 몽글몽글 머릿속에 떠올랐다. 느리게 맞닿은 숨결, 코끝에 맴돌던 권이도의
페로몬, 기울어진 우산 그림자 아래 다가온 보드라운 입술까지도.
얼마나 오래 나를 기다린 건지. 그의 입술은 살짝 서늘한 감이 있었다. 아니, 원래부터 체온이 낮은
사람이라 그럴까. 그건, 뒤늦게 내 뺨을 감싸던 손길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뺨 언저리를 문질렀다. 깨지는 물건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검지로 귓가를
덧그리기도 했다. 얼굴을 다 가릴 만큼 커다란 손은 살금살금 내려와 내 목덜미까지 어루만졌다.
‘집으로 가죠.’
“와인 맛 안 나던데.”
“…….”
“농담이에요.”
“네, 뭐…….”
“네, 덕분에요.”
“근데 왜 안 자고 왔을까.”
“…….”
“……그 집이 작진 않죠.”
“작던데.”
도망이라는 표현에는 도무지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도망친 게 맞고, 그러다 문득 권이도와 마주쳤을
뿐이니까.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지극히 우연히도 말이다.
“비 맞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정말, 비를 맞으려던 건 아니다. 충동적으로 우산을 내려놨으나 그 또한 권이도가 직접 비를 막아 주지
않았던가. 그가 없었다면 얌전히 집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지낸 후 마음을 다잡았겠지.
물론 비를 맞지 못할 이유는 하나였지만.
“…….”
“……다행이네요.”
“……며칠이나 다녀오세요?”
“내일 출발해서…….”
권이도는 말끝을 흐리며 미미하게 눈썹을 움직였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매가 가느다랗게
길어졌다.
“일주일쯤.”
“…….”
“올 때 선물을 가져오죠.”
“갖고 싶은 건?”
하지만 그저 꿈같은 얘기였다. 약혼의 조건을 언급하고, 아버지와의 대화를 토로한 뒤, 네 의견이
어떠하냐고 묻는 것. 그러기엔 권이도와 내 사이에 부족한 게 너무도 많았으니.
“……협박하시는 겁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그사이 차고에 진입한 권이도가 능숙하게 차를 세웠다. 기어를 바꾸고 시동을 끌 때까지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이번에야말로 기분이 상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할 즈음에야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건 그냥 내 욕심이죠.”
“……욕심?”
“그게…….”
주문을 거는 것처럼, 그 말을 듣자마자 눈꺼풀이 내려왔다. 살포시 맞닿은 입술이 내려앉는 깃털처럼
무게감 없었다. 잠시 그대로 머물던 권이도는 가볍게 내 턱을 감싸 쥐고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
말캉한 혀가 조심스레 입술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허락을 구하듯 잇새에서 머물다가 내가 저항하지
않자 조금 더 깊게 영역을 넓혀 간다. 입 안을 파고든 감촉이 등줄기가 오싹할 만큼 선명했다.
머릿속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타액과 함께 넘어온 페로몬이 온몸의 긴장을 느슨하게 풀어냈다.
권이도의 혀가 내 혀를 옭아매고, 의자를 붙잡았던 오른손이 내 뒤통수로 올라온다.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칼을 헤집는 느낌은, 언제 겪어도 참 야릇한 것이었다. 뒤통수, 목덜미, 귀 뒤쪽과
귓바퀴까지. 섬세한 손길이 차례차례 손에 닿는 모든 걸 어루만졌다. 그대로 고개의 각도를 바꾼 그는 다른
손으로는 내 눈가를 덧그렸다.
“…….”
“정세진 씨.”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
***
“잠깐 손 좀 주세요.”
“손?”
권이도가 지그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래서?’ 그렇게 묻는 것처럼. 나는 소분한 향수를 권이도에게
쥐여 주고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 다음 화에 계속
22 화. Raison d'etre(2)
그다지 로맨틱한 의도는 아니었다. 권이도가 내게 했던 것처럼 그에게도 기억에 남는 무언가를 만들어
주고 싶었을 뿐. 나는 이 넓은 집에서 권이도를 기다릴 테니, 그 또한 나를 떠올렸으면 해서.
“…….”
“그건…… 큰일이군요.”
큰일? 그렇게 묻지는 못했다. 숨결처럼 흘러나온 한마디가 정확히 귓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일을 못 할 텐데.”
“…….”
가끔, 지나치게 부끄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농담이라곤 안 할 것 같은 얼굴로 저런 말이나 하다니.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이야기했다.
“다녀올게요.”
“……연봉이 올랐습니다.”
점심 식전 요리로는 차갑게 조리한 성게알과 오징어 따위가 나왔다. 조금 시큼한 감이 있었지만, 입맛을
돋우기엔 썩 나쁘지 않았다. 살이 통통한 새우를 납작하게 구운 전도, 심심한 듯 고소하게 간을 한 육회도, 모두
전적으로 내 취향을 고려한 메뉴였다.
“일주일이라…….”
“……왜 하필 이럴 때 집을 비워.”
왜냐고 물으면 그냥 직감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가 업무를 보는 장소, 내게 특별히 주의를 준 장소.
보통 중요한 자료는 그런 곳에 보관하기 마련이니까. 물론 나는 철두철미한 권이도가 낯선 약혼자가 있는 집에 그
어떤 것도 보관하지 않길 바랐지만.
“…….”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복도를 지나, 끝자락에 있는 서재에 다다를 때까지. 심장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더 빠르게 뛰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 덕에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잘하면 두근거리는 소리로 들킬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서재는 이미 잠겨 있었다.
***
세상엔 분명 노력으로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 한들 상황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았다. 예시를 꼽자면 수도 없이 많으니 굳이 한두 마디 덧붙일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멍청하고 무능한 아들이 될지언정 적당히 좋은 핑계였다. 아버지도 내게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터다. 권이도가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데, 대체 뭘 어쩐단 말인가.
-자고 있었어요?
“잘 도착하셨어요?”
“…….”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순간 멈칫했다.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서는, 굳이 몰라도 되는 부분까지
알아차리곤 한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동안 전화 너머에선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뇨, 어제는…….”
“네, 뭐…….”
“그보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가렸던 커튼을 활짝 젖혔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에 푸르른 정원이 묘하게
신비로웠다. 창틀에 걸터앉아 창문을 열자, 아직은 서늘한 바람이 살며시 스며들었다.
“자료라면…….”
“USB 말씀입니까?”
-전화 끊지 말고.
“……안 끊었습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가 뭘 알고 시키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권이도가 말하는 자료는 내가 찾는 자료와는 당연히 다른 종류일 테고.
핸드폰을 귓가에 댄 채 복도를 지나 권이도의 방으로 향했다.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나는 혹여나 숨소리가 들리진 않을까 바짝 긴장해야 했다. 문 앞에 다다랐을 땐, 습관적으로 노크를
하려다가 머쓱하니 손을 내리는 일도 있었다.
-아침은 먹었습니까?
달칵, 문이 열림과 동시에 권이도가 넌지시 물었다. 나는 훅 밀려든 페로몬을 만끽하며 느릿느릿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이요. 권이도 씨는요?” 그렇게 묻자, 나긋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곧 먹으러 가야 합니다.
-있습니까?
“이따 비서분께…….”
권이도가 무어라 하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귓가가 먹먹하게 변해서 삐 하는 이명이 들린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그럼 잘 부탁한다며 전화를 끊었고, 나는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
“……어디 불편하십니까?”
순간, 아차 싶은 마음에 억지로 미소를 그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안색이
그리 안 좋았을까.
“……하아.”
나는 명치 언저리를 꾹 누르며 2 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집 밖으로 나갈 기분은 아니었고, 묵직한
속은 점점 더 불쾌해졌다. 차라리 잠이라도 자면 좋으련만. 망할 불면증이 이럴 때까지 나를 괴롭힌다.
달칵, 방문을 닫았다. 이곳에 머문 지 얼마나 됐다고, 오로지 ‘내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가에
있던 방에서도, 스무 살부터 살던 오피스텔에서도, 이토록 아늑한 기분을 느낀 적이 없는데.
‘올 때 선물을 사 오죠.’
멍하니 테이블이 놓인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실과 분리된 오른편에 부들거리는 재질의 하얀 소파가
놓여 있었다. 권이도의 방과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구조. 나는 기다란 소파 대신 1 인용 소파에 앉아 가만히
테이블을 응시했다.
‘갖고 싶은 건?’
“…….”
“……적어도 이걸 주진 못하겠지.”
아버지가 바라던 자료였다. 정확히는 선호 전자에서 새로 출시하는 핸드폰과 관련된 보고서. 아버지가
권이도에게 받기로 했다던, 보안 시스템과 관련된 내용.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 종이 뭉치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들어 있는지는 몰랐다. 단지, 적어도
이걸 가져가면 최소한의 성의 표시 정도는 된단 사실을 알았지. 늘 모자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아버지가,
어떤 표정을 내보일지 생생히 그려졌다.
“…….”
‘쓸모없는 새끼…….’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그게 아버지건, 아니면 권이도건. 맨발로 눈길을 헤매던 그때처럼, 다시금 벼랑
끝에 내몰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믿을 건 가족뿐이야.’
“…….”
‘정세진 씨.’
원망의 대상이 잘못됐단 생각은 있었으나 이성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들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지독히도 끔찍한 악몽을 꿨다. 차가운 표정의 권이도가 아버지와 똑같은 눈으로 내
뺨을 때리는 꿈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23 화. Raison d'etre(3)
“내일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내일이요?”
“……음.”
“말씀하세요.”
읽던 책을 내려놓고 이태성과 시선을 맞췄다. 그는 큼직한 손으로 찻잔을 감싼 채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제가 본부장님을 경호하는 의미가 있습니까?”
“……음.”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내가 고용한 사람도 아니고, 권이도의 속내를
어떻게 다 안단 말인가. 경호 겸 잔심부름꾼이라는데, 경호의 의미가 없다고 하면 심부름을 시키라고 할 게
분명했다.
“저는 별로 아는 게 없습니다.”
악몽이 원래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것이던가. 아니, 모르는 남자에게 강간당하는 꿈보다는 권이도에게
냉대를 당하는 꿈이 훨씬 나으려나.
“…….”
‘정세진 씨.’
권이도가 나를 불렀다. 평소처럼 다정한 말씨는 아니었다. 그건 뒤이은 싸늘한 한마디도 마찬가지였다.
“…….”
“……배신이라.”
픽 헛웃음이 나왔다. 저버릴 신의가 없는데 감히 배신이라는 단어를 쓰다니. 자아가 비대해도 너무
비대한 것이 아닌가.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유리돔이 보였다. 약혼식 날, 권이도가 준 꽃다발을 예쁘게
꾸며 놓은 장식품이었다. 그 옆에는 풀잎 색 병에 담긴 향수도 보였다.
“…….”
이 결혼의 목적은 해신의 재기를 위해서인데, 나라는 사람의 쓸모를 이렇게라도 존재해야 하는 건 아닐까.
내 존재의 이유가 곧 아버지의 지시이니, 언젠가 돌아갈 가족의 울타리를 위해 힘써야 하지 않을까.
애써 이성적인 판단을 가능케 해놓으면 마지막에 마지막 즈음 외면하던 불안감이 발목을 잡았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마무리를 지어야지. 그런 생각으로 벌써 3 일이 흘렀다. 당장 행동하는 게 좋다는 걸 알면서도,
무언가 결론을 내릴 만한 엄두가 나지 않았다.
“…….”
***
그렇게 잠이 든 뒤엔, 자꾸만 지나치게 덥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더운 열기가 뿜어져
나와서,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뜨거웠다. 이렇게 더울 만한 날씨가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체온이 오르고
있었다.
꿈을 꾸는 건가?
‘세진아.’
‘정세진.’
남자는 내 양 손목을 그러쥔 채 머리맡에 단단히 고정했다. 나는 저항할 생각조차 없는데, 마치 조금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다른 손으로는 허벅지를 붙잡은 그가 억지로 다리를 벌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분명 비꼬는 말투였는데,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가슴께가 저릿했다. 변명을 내뱉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에게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그저 달뜬 숨을 몰아쉬며 가물가물 눈을 깜박였을 뿐.
‘……흐.’
‘……!’
‘아, 아파…….’
‘……아파?’
‘흐, 으……!’
아랫배가 결렸다. 한계까지 벌어진 다리가 비명을 지르고, 억지로 벌어진 내벽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런데도 이미 고조된 성감은 도무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병신 되고 싶지 않으면…….’
‘아흑, 흐……!’
‘힘, 빼는 게 좋을 텐데.’
“허억, 헉…….”
히트 사이클이었다.
***
“흐…….”
그러나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도 아직은 일주일 넘게 주기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물론 미리 예고하고 온다 한들 지금과는 별로 다르지 않았겠지만.
“아…… 으으…….”
“흐, 으…….”
본능적으로 아래를 만졌지만, 그럼에도 한참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손에 힘이 빠져서 자위를
하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았다. 헛손질을 하듯 몇 번 문지른 다음에야 개운하지 못하게 억지로 사정했을 뿐.
“……하아.”
‘하자품을 주워 와서…….’
“…….”
억지로 목구멍 너머로 신음을 삼켰다. 그 어떤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이불을 끌고 와 머리끝까지
덮어 버렸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어떻게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고 싶었다.
“……흐.”
‘다녀올게요.’
“…….”
깜박,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지 화면처럼 이어지던 풍경에 자그마한 변화가 생겼다. 문고리가 서서히
내려가고, 굳게 닫힌 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권이도 씨.”
권이도였다.
- 다음 화에 계속
24 화. Raison d'etre(4)
“…….”
“…….”
“권, 이도…….”
“다행이군요.”
“…….”
“이번엔 그게 내 이름이라서.”
“정세진 씨.”
“페로몬 좀…….”
“…….”
“힘듭니까?”
“…….”
“……나 좀.”
“제발…….”
“어떻게든…….”
“…….”
“……흐으.”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깃털처럼 스쳤다. 달큼하게 섞인 숨결이 머릿속을
녹진하게 녹여 내는 듯했다. 권이도는 한참 그대로 머물다가 시선이 마주침과 동시에 숨을 멈췄다.
“…….”
“…….”
“흐읍…….”
키스가 이렇게 아찔할 수 있는 거구나. 입 안쪽 예민한 점막을 건드릴 때마다 오싹 소름이 끼치는 듯했다.
벼랑 끝에 내몰린 것처럼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흣.”
이미 달뜬 몸뚱이에 비해 그의 손은 지나치게 서늘했다. 그가 닿는 순간순간마다 움찔거리며 어깨가
떨렸다. 한동안 빗장뼈 부근을 맴돌던 손은 감질날 만큼 느리게 아래로 내려갔다.
넓은 손바닥이 가슴 언저리를 매만졌다. 의도한 건지, 손가락 사이사이에 꼿꼿이 선 유두가 툭 툭 걸렸다.
두어 번 그렇게 장난을 치던 그는 이번엔 손등으로 제가 건드리던 부분을 느긋하게 쓸어내렸다.
“으응…….”
“……하아.”
“…….”
“……해도 돼요.”
“아니…… 해주세요.”
“…….”
“하고 싶어요.”
권이도와 자고 싶다. 더 닿고, 더 섞이고, 조금 더 체온을 공유하고 싶었다. 넘칠 것처럼 차오른 성감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단 욕구가 치밀었다.
“……하.”
그는 달뜬 호흡을 터뜨리며 내 귓바퀴를 콱 깨물었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고, 몽롱한 머리에 잠깐 정신이
돌아올 정도. 이내, 깨물었던 부분을 혀로 핥은 그가 뺨에 입술을 문지르며 이야기했다.
“내 이름 불러 봐요.”
“……권이도 씨?”
“아, 흣…….”
커다란 손은 망설임 없이 바짝 발기한 성기로 향했다. 나조차 잘 만지지 않는 부분을 그는 가볍게 그러쥔
채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별거 아닌 동작이었지만, 한참 전부터 흥분한 터라 성기는 금세 정액을 사출했다.
“흡……!”
“양이 적은데.”
“세진아.”
“흐으…….”
“…….”
“……이게.”
“왜.”
“…….”
“작을 줄 알았어?”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었다. 그리 묻는 목소리가 너무도 야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아무 말 하지 못한
채 넋을 놓은 사이, 그가 상체를 일으킨 채 옷을 벗기 시작했다.
“…….”
“여유 부리긴…….”
그의 시선은 앞섶이 다 벌어진 내 몸뚱이를 향하고 있었다. 아래쪽은 반쯤 가려졌지만, 상체는 벗느니만
못한 상태로 드러났다. 언제 이렇게 엉망이 됐지. 그런 의문을 가져 봐야 이제 와선 달라지는 것도 없다.
“앗…….”
“흐읍…….”
“……읏.”
발가락을 오므라뜨리며 어금니로 혓바닥을 깨물었다. 아주 잠깐 사그라졌던 성욕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사이 권이도는 내 골반을 만지다 말고 다른 손을 입술로 가져왔다.
“깨물지 마.”
“하으…….”
가슴이, 이토록 예민해질 수 있는 부위인지 몰랐다. 말캉한 혀가 스칠 때마다 찌릿한 쾌감이 명치께에
고였다. 골반을 건드리던 손은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와 여린 살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중이었다.
“흣…….”
“아…… 흐, 으…….”
“……흐으, 읏.”
“아흣!”
“잠까, 아, 흣, 흡…….”
“잠깐이 어디 있어.”
“……흐읍.”
넘쳐흐르던 신음이 목울대를 울리고 사라졌다. 권이도의 혀가 침입한 탓에 무언가를 깨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아래를 헤집을 때마다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되는데 혀와 혀를 문지르는 행동은 마냥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응…….”
“못 하겠으면 얘기해요.”
- 다음 화에 계속
25 화. Raison d'etre(5)
느릿느릿, 굵은 성기가 대가리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아래가 빠듯이 벌어지는 감각에, 나는 화들짝 놀라
권이도의 팔뚝을 붙들었다. 셔츠 자락이 손끝에 걸리고 그가 조금 더 깊게 허리를 움직였다.
“아, 아흑…….”
손가락을 넣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분명 충분히 풀어 놨을 텐데, 그럼에도 버겁단 생각이 든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밀고 들어온 귀두가 가장 굵은 부분만 넣은 채 움직임을 멈췄다.
“흐, 으, 아, 안 돼…….”
“으응, 잠깐…….”
나는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옆으로 뒤틀었다. 다리가 달랑 붙잡힌 탓에 멀리 도망가는 건 할 수
없었다. 물끄러미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권이도가 느른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뭐가 안 돼, 세진아.”
“잠깐, 흣…….”
눈물이 아롱아롱 눈꼬리에 맺혔다.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대로
내 허벅지를 단단히 고정한 채, 인정사정없이 아래를 꿰뚫은 것이다.
“……!”
너무 놀라면,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푹, 밀려 들어온 성기가 내벽을 빠듯하게 채웠다.
순식간에 뿌리 끝까지 삽입한 그는 상체를 납작하게 숙인 채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 좁아.”
“아…… 아, 읏…….”
“못 하겠…… 흐, 못 하겠는…….”
“못 하기는.”
“항상 잘만 해놓고.”
“……아흣!”
“흐…… 하으…….”
그래, 일단 참고는 하겠다고 했지, 빈말로도 멈추겠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자신은 끝까지 할 생각이니,
멈추고 싶으면 지금 이야기하라고도 했다. 그 말이, 그때를 놓치면 절대 그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였을까.
“이건, 너무…….”
풀풀 페로몬이 흘렀다. 내 것인지, 아니면 권이도의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제는 하나처럼 뒤섞인 향내는
입 안에 침이 고일 것처럼 달큼한 것이었다.
“……너무?”
“아, 너무…….”
벅차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겁다고 해야 할까. 안쪽이 열리는 느낌엔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간 꿔 온 악몽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이쪽이 더 견디긴 힘들었다.
“너무 큰, 데, 흐으…….”
“침대에서 그런 말을 해봤자…….”
“아……!”
“하읏!”
새된 신음이 목울대를 울렸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손가락으로 만졌던 그 부분.
내가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을 자극한 그가 허리를 크게 쳐올렸다.
“……아, 아!”
“그게…… 흣…….”
“아, 잠깐…….”
“흐, 읏, 흐응…….”
푹, 내리찧는 감각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스파크가 튀는 것처럼 찌릿한 희열도 함께였다. 호흡으로,
그리고 피부로, 열에 달뜬 페로몬이 나를 흥분시켰다.
“거기, 흣…….”
“……여기?”
나직이 되물은 권이도가 내가 느끼는 부분을 쿡 쿡 건드렸다. 사실, 굳이 거기가 좋다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여 주던 중이었다. 그는 어깨에 걸쳤던 다리를 내려 주고 푹, 내벽을 쳐올리며 상체를 숙였다.
“하으응……!”
“아아…… 흐…….”
“흐, 으읏…….”
살짝 고개를 저으며 권이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욱한 페로몬 틈에서 익숙한 은방울꽃 향기가
느껴졌다. 물을 탄 것처럼 말간 향기가 묵직한 나무 냄새에 섞여 폐부 깊숙한 곳에 스며들었다.
“하으…….”
“하으, 흐…….”
“세진아.”
“…….”
“숨 쉬어.”
“아, 흐…….”
“하…… 정세진.”
“아…… 귀, 그거…….”
“하지 마?”
“응, 흐, 읏…….”
“흐읏……!”
“으응, 흐, 응…….”
눈으로 보지 않아도 발갛게 자국이 남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입느니만 못한 가운을 손쉽게 벗겨
내던지곤 조금 더 편안하게 내 몸을 끌어안았다. 떡 주무르듯 엉덩이를 움켜쥐며 위에서 아래로 쾅 쾅
내리누르기도 했다.
“거기, 흣, 아……!”
“…….”
“……아흑!”
퍽! 굵은 성기가 배 속을 거칠게 내리찧었다. 언제 여유롭게 굴었냐는 듯, 허리 짓이 서서히 빨라졌다.
푹, 푹, 몇 번 더 삽입한 그가 귀두만 남기고 빼내었던 성기를 단숨에 밀어 넣었다.
“……!”
전립선이 길게 자극됐다. 찰방, 차오른 쾌감은 단숨에 파도처럼 내 온몸을 뒤엎었다. 이미 한계까지
내몰렸던 성감이 풍선이 터지듯 펑 하고 터지는 듯했다.
“……큿.”
“하아, 하아…….”
“후…….”
권이도는 사정을 마치고도 곧장 성기를 빼내지 않았다. 이어지는 여운을 즐기듯 배부른 사자처럼 은근히
아랫도리를 문질렀을 뿐. 내 다리를 옆으로 내려 준 그가 한 손으로 셔츠 앞섶을 성의 없이 뜯어냈다.
투두둑 단추가 떨어졌다. 새하얀 셔츠는 잔뜩 구겨진 데다 내가 싸지른 정액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나는 흐려진 시야 너머로 탄탄한 상체가 드러나는 모습을 멍하니 관찰했다.
“…….”
“……그거 압니까?”
“한 번 하면.”
“……흐읏.”
“여기가, 잔뜩 젖어서…….”
“하으응……!”
“벌써, 후, 조일 줄도 알면서…….”
“아, 아……!”
“……흐읍.”
“천천히 할게.”
“아흐으……!”
“……세진아.”
권이도는 행위 중간부터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 대답을 바라는 게 아니라, 단순히 부르기만 했다.
내가 신음을 흘리며 매달리면 그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들러붙는 식이었다.
“정세진.”
그러다 그가 목소리를 내리깐 순간,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터졌다. ‘정세진’ 세 글자가 낯설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몰아치는 쾌감이 밖으로 흘러나온 거였을까. 어느 쪽이건 지독한 설움이 물밀듯
밀려들었단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흐으…….”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으며 뺨 언저리에 입술을 문질렀다.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은 권이도가 입술을
눈가로 옮겨 오면서 사라졌다. 한가득 맺힌 눈물을 핥아 낸 그는 나를 달래려는 것처럼 땀에 젖은 머리를 넘겨
줬다.
“흐윽, 흡…….”
“세진아.”
“…….”
“나 봐.”
“아흑!”
“내가 널…….”
“…….”
- 다음 화에 계속
26 화. Raison d'etre(6)
보편적인 특이 형질들은 사이클이 돌아오면 억제제를 복용하는 것으로 이겨 낸다. 열성의 경우 시판되는
억제제로 충분했고, 우성의 경우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알맞은 억제제를 복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짧으면 한 달, 길면 반년. 사이클이 찾아오는 주기는 형질의 우열에 따라 달랐다. 우성이면 우성일수록
더 자주 찾아오고, 열성이면 열성일수록 더 드물게 찾아왔다.
‘…….’
여유가 없다. 여러 의미가 담긴 핑계였다. 시간도 감정도 막연히 부족했으니, 이보다 더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 주는 것 역시, 체력과 정신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니던가.
히트 사이클을 제대로 보내기 위해선 단순히 관계를 맺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페로몬을 분출하고,
교류하며, 번식을 위한 조건이 모두 갖춰져야 한단 말이었다. 짐승 같은 과정이었을지언정 상대는 꼭 ‘알파’
여야 했다.
그러나 대개 특이 형질은 저마다 한자리씩 꿰찬 거물인 경우가 많았다. 베타보다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난
이들이 오랜 옛날부터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와 재산이 대물림하는 사회답게, 그들이 가진 형질 역시
아직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결국, 김 실장은 죄스러운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내가 걱정돼서 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지 못했다. 제아무리 선의로 건넨 말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일도 없다.
‘흐, 으읏…….’
임신할 가능성은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권이도가 노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걸로 모자라 중간
즈음엔 친히 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까지 제 손으로 해버렸고.
‘잠, 아, 흐응…….’
‘……하아.’
‘가만히 있어야죠.’
‘흣, 싫어…….’
‘아흐, 흐응…….’
‘그런데도 싫어?’
‘……흐.’
큼직한 손이 엉덩이를 좌우로 벌렸다. 엄지로 입구를 덧그리던 그는 엉덩이골에 귀두를 문지르며 다시
삽입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 없이 성기를 뿌리 끝까지 삽입했다.
‘……아흐응!’
‘흑, 아, 천, 천히…….’
‘……흐…….’
‘하아, 하아…….’
‘아, 안 돼, 안 돼…….’
‘쉬이…….’
‘……!’
아랫배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사정할 때와는 또 다른 쾌감이 매질을 당한 것처럼 온몸에 쏟아져 내렸다.
한가득 차오른 배뇨감이 찰방 흘러넘침과 동시에, 그의 손에 잡힌 성기가 줄줄 말간 액체를 흘리기 시작했다.
‘……흐.’
한 번 나오기 시작한 무언가는 억지로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았다. 정액도 오줌도 아닌 것이, 권이도의
손을 가득 적시고 침대로 흘러내렸다. 움찔, 움찔, 가늘게 경련하는 내게 권이도 특유의 나직한 음성이 전해졌다.
‘잘했어요.’
‘…….’
목덜미에 열이 오르는 듯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신음을 참는 동안, 권이도는 나를 꼭 끌어안고 어깨와
날개뼈 따위를 깨물었다. 마치 이갈이를 하는 짐승처럼, 온 피부를 잘근대며 드러난 모든 부위에 입술을 문질렀다.
‘욕 한마디 안 하는군요.’
‘……하.’
그렇게 고상한 목소리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얌전한 섹스를 하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토록
적나라하게 굴 줄은 몰랐다. 나는 헛웃음을 흘릴 기력도 없이 색색 소리를 내며 대꾸했다.
무어라 변명할 틈도 없이, 그가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무너지려는 나를 억지로 붙잡아, 무릎을
세우게 한 채 뒤에서 끌어안기도 했다. 커다란 손으로 아랫배를 덮은 그가 다른 손으로는 내 턱을 붙잡아 입을
맞춰 왔다.
‘으응…….’
이성은 얄팍한 종잇장보다 더 가볍게 날아가 버렸다. 그가 넘겨주는 페로몬에 화답하듯, 내 페로몬 역시
넘실넘실 흘러나왔다. 아래를 헤집는 걸로도 모자라 입 안까지 헤집던 그는 내가 흘리는 타액을 모조리 빠짐없이
받아 마셨다.
그렇게 이어진 행위는 밤이 늦을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어두운 정도가 달라졌으니,
시간이 뭉텅뭉텅 사라질 만큼 정신없는 섹스였단 말이다. 만약 체력이 떨어진 내가 잠들지 않았다면, 해가 뜰
때까지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세진아.’
의식이 날아가기 직전, 꿈과 현실의 경계가 애매한 가운데.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들이 나를 감싸고, 귀중한 것을 다루듯 온몸을 닦아 줬다. 중간중간 부드러운 입술을
내리누른 뒤엔 익숙한 체온과 페로몬에 둘러싸여 몸이 붕 떠오르기도 했다.
“…….”
서서히 돌아오는 의식이 하나둘 상황을 인식했다. 피부에 닿는 보드라운 이불이나, 흐리지만 익숙한 방
안 풍경 같은 것들. 분명 온갖 체액으로 엉망이 되었을 침대가, 이상하리만치 보송보송했다.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자, 또렷해진 시야가 그제야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곳이 권이도의 방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온몸에 스미는 페로몬도 권이도
특유의 묵직하고 관능적인 종류였다. 어제처럼 나를 흥분시키는 형태는 아니었으나, 잠기운이 남은 채로도
스멀스멀 만족감이 퍼져 나갔다.
지금이 몇 시인진 모르겠지만, 참으로 완벽한 차림새였다. 온종일 그토록 난잡한 행위를 해놓고 배덕감이
느껴질 만큼 빈틈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측면에서 보이는 얼굴도 어제와는 달리 우아하고 기품 있기만 했다.
권이도 씨. 그렇게 부르려던 나는 무심코 시선을 돌려 협탁을 바라봤다. 조명이 있는 조그만 테이블,
그곳에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것들이 놓여 있어서.
“…….”
“…….”
손끝이 차갑게 식는 듯했다. 눈앞이 캄캄하게 변하고, 변명을 내뱉어야 할 입술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들고 있는 서류, 구겨진 흔적이 남은 두꺼운 종이 뭉치. 영어로 빼곡한 한구석에 또렷하게 찍힌 선호그룹
마크까지.
“일어났어요?”
- 다음 화에 계속
27 화. Raison d'etre(7)
“…….”
“…….”
“정세진 씨.”
“……네.”
“이게 왜, 필요했습니까?”
“…….”
아버지가 시켰다고 하면 어떨까. 그런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권이도의 분노가 해신그룹을
향한다면 내 쓸모는 거기서 끝나는 것일 테니. 그냥, 탐욕스러운 약혼자가 되는 편이 차라리 나은 선택이 아닐까.
“……욕심이 나서 그랬습니다.”
핑계는 아무렇지 않게 나왔다. 목소리가 떨리지도 않았고, 표정을 무너뜨리는 일도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내게 권이도가 삐딱하게 되물었다.
“욕심?”
“……본부장을 관둔 게 아쉬웠거든요.”
떠오르는 내용이 고작 이런 것밖에 없었다. 권이도와 한 번 나눴던 대화들이 머릿속에 한가득 떠올랐다.
본부장이 적성에 안 맞는다고 했지만, 권이도가 부디 그쪽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랐다.
“아아, 출세욕.”
“이 자료의 원본입니다.”
“…….”
“…….”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았고, 그에게 시선을 떼어 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분명 화를 내리라 생각했던 권이도는 더할 나위 없이 너그러운 어조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달칵, 문이 닫힘과 동시에 막혔던 숨이 쏟아지듯 터져 나왔다. 뒤늦게 밀려든 현실감은 무심코 지나쳤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하.”
‘올 때 선물을 가져오죠.’
“…….”
***
‘저 오메가예요.’
그날, 남자는 지저분한 오메가를 주웠고 맘씨 좋은 재벌이라며 언론의 찬사를 들었다. 건강 검진을
빙자한 피검사가 형질 검사였다는 건, 아버지와 나, 그리고 주치의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나는 따뜻한 잠자리와
먹거리를 얻었으니, 이제 와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기회라고 해야 할까. 순간의 선택이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설령 그러한 상황이
온다고 해도 미래에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가능성은 적었다. 나는 두 번의 선택을 모두 만족했지만, 때로는
더 나은 결정이 있지 않았을까 돌이켜 보곤 한다.
‘이 자료의 원본입니다.’
김 실장은 늘 그랬듯 자연스럽게 뒷문을 열어 줬다. 고맙다는 뜻으로 눈인사를 건네자, 그가 어쩐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물었다.
“……밑에서 대기할까요?”
“본부장님! 이게 얼마 만이에요!”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정말요?”
“뭐…….”
“맞다, 윤 대리.”
그리고 문이 닫히기 직전, 나는 막 생각난 것처럼 윤 대리를 불러세웠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눈가를
찡긋하며 이야기했다.
‘3 일이 걸렸군요.’
‘…….’
‘왜 내가 준 차를 안 타고 김 실장이 옵니까?’
‘뭐…… 그래요.’
“…….”
“정세진입니다.”
“성공한 게냐?”
“…….”
“……아버지.”
“그래, 세진아.”
“…….”
“……뭐?”
언젠가, 권이도가 내게 해줬던 말이었다. 그룹의 덩치가 지나치게 커졌고, 회장님까지 오늘내일한다고.
아버지를 향한 선물 하나는 필요하지 않겠냐며 아무렇지 않게 해줬던 이야기들.
“권병욱 회장이 별세한 뒤엔 선호그룹이 해체될 거라는 경영주들의 의견도 정리해 놨습니다. 추가로
투자해서 이득을 볼 만한 계열사와 가망이 없는 계열사를 분리해서 문서화시킨 겁니다.”
나는 끝내, 권이도를 배신하지 못했다. 권이도가 내게 건네준 USB. 아버지가 간절히 원하던 자료는 차
키와 함께 그의 방에 놓아두었다. 그에게 받은 선물은 향수로 충분했기에, 배가 터지도록 받은 무언가는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옳았다.
“죄송합니다.”
- 다음 화에 계속
28 화. Raison d'etre(8)
“……허.”
지그시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퍽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별달리 충격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내게 가지고 있는 인식은,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 입 다물지 못해?”
버럭 소리친 아버지가 들고 있던 USB 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걸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몸체를 구둣발로
짓밟기도 했다. 시근덕거리며 숨을 몰아쉰 그는 까드득 어금니를 갈며 눈을 번뜩였다.
“…….”
“…….”
“아버지.”
“네까짓 게 감히 훈계 질을 해?”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을 인식하지 못한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왼뺨에서 알싸한
통증이 퍼져 나갔다. 살짝 달싹인 입술에선 비릿한 피 맛도 함께 느껴졌다. 한 번, 두 번, 눈을 깜박일 때마다
아득히 멀어졌던 현실감이 서서히 내게로 돌아왔다.
“…….”
뺨을 맞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에게. 감히 훈계 질을 했다는, 고작 그러한 이유로.
“쓸모없는 새끼…….”
“너 같은 걸 괜히 주워 왔지.”
“……가보겠습니다.”
‘쓸모없는 새끼…….’
***
“…….”
“……이게 뭡니까?”
봉지가 차갑다 싶더니만 넓적한 팩에 담긴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었다. 파란색 플라스틱 뚜껑이 달려 있고,
눈꽃이 그려진 겉면엔 ‘밀크셰이크’라고 쓰인 제품이었다. 나는 묵묵히 안전벨트를 매는 그를 보며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예.”
넘어졌다고 하면 믿을까.
“조심히 들어가세요.”
“……도련님.”
기시감이 들었다. 언제였더라. 약혼식 날이었던가. 장지문이 좌우로 열리던 순간에 그가 나를 불렀던
그때처럼.
“…….”
“이제 옵니까?”
“…….”
“왜 여기에…….”
“고개 들어.”
“…….”
흠칫, 어깨가 들썩였다. 모르는 척 그를 지나치려 했지만, 그보다 권이도가 더 빨랐다. 성큼성큼 내게
다가온 그는 우악스럽게 턱을 움켜쥔 채 내 고개를 억지로 들게 했다.
“…….”
“…….”
“정세진 씨.”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무서우리만치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누가 이랬습니까?”
“……길바닥에서 넘어졌습니다.”
“…….”
“울지 마, 세진아.”
“…….”
“……흐윽.”
“흡…….”
그러나 세상엔 애를 쓴다고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페로몬이 없다고 베타가 되는 게 아니듯, 한집에
산다고 내가 그들의 진짜 가족이 되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내게 보여 준 애정은, 고작 말 한마디에 사라질
만큼 부질없는 것이었다.
“……흐윽.”
- 다음 화에 계속
29 화. Quelques Fleurs(1)
“날이 많이 풀렸네요.”
“……주인공 죽습니까?”
“…….”
“안 죽습니다.”
깔끔하게 대답하자,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정말 몰입할 모양새라, 나도
멀거니 다시 온실 천장을 올려다봤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보이는 구름이 참으로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쓸모없는 새끼…….’
“…….”
‘울지 마, 세진아.’
‘왜 그랬어요?’
가족이 가지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어떨까. 그런 욕심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사람은 자신이 쥐지 못한
것에 미련을 갖기에, 내가 바라는 건 오로지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그에게 요구하진
못할 터였다.
그냥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함께 저녁을 먹고, 그의 방에서 대화를 나눈 뒤에,
내 방으로 돌아와 수면제 없이 잠이 들었다. 그가 내게 선사하는 평화가 마음에 들어서, 굳이 아버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MRI 부터 찍어보죠.’
그렇게 향한 선호병원에서 나는 과하게 친절한 의사에게 고막에 천공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권이도는
무섭게 표정을 굳혔으나, 사람의 고막은 생각보다 자연 치유가 잘 되는 기관이었다. 처음엔 종종 이명이 들리던
귀가, 며칠이 지나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멀쩡해졌으니.
‘……와, 심하네.’
‘얼굴이 왜 그러십니까?’
‘길바닥에 넘어졌습니다.’
‘…….’
‘조심하셨어야죠.’
덤덤히 대꾸하자, 이태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넌지시 물어 오기도 했다.
‘권이도 씨가 왜 나옵니까?’
‘그거야…….’
‘아닙니다.’
‘당분간은 좀 늦을 겁니다.’
“이태성 씨.”
“예.”
“만나는 사람 있습니까?”
“……예?”
이태성은 내 질문을 듣자마자 날벼락이라도 맞은 양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상처받은 눈빛이라 오해하지
말란 의미로 어깨를 으쓱했다.
뒷말은 립서비스였지만, 그렇다고 빈말은 아니었다. 표정이 좀 딱딱해서 그렇지, 이태성 정도면 무척
잘생긴 축에 속했다. 경호원이라는 직업답게 체격도 좋았으니, 인기는 제법 많을 터였다.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할 생각이었다. 그냥 호기심에 물어봤을 뿐이니 대답을 듣지 못해도
괜찮았다. 그런데 이태성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만나는 사람 없습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십니까?”
“……뭐, 그냥.”
“서운하지 않게 해야죠.”
“…….”
“남들만큼은 있습니다.”
그는 담담히 대꾸했고, 나는 무어라 더 물어보지 않았다. 더는 궁금한 것도 없으니 그와의 사담은 거기서
끝이었다. 사실, 원래는 책만 읽다 헤어지기에 오늘은 좀 친근한 하루에 속했다.
***
괜히 뚜껑을 열어 허공에 향수를 뿌려 봤다. 안개처럼 분사된 향수는 장미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가벼운
풀 냄새가 났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차츰 자연스럽고 희미한 향으로 변해 갈 거다.
“오늘도 늦으려나…….”
내가 한번 걸어 볼까.
-……정세진 씨?
“…….”
“……아, 네. 듣고 있습니다.”
“…….”
-무슨 일 있습니까?
“아뇨…… 아무 일도 없습니다.”
“핸드폰 보고 계셨어요?”
“…….”
-…….
-정세진 씨는 뭐 하고 있었습니까?
“…….”
집에도 잘 안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리도 잘 아는지 모르겠다. 괜히 주변을 둘러보는데, 권이도가 넌지시
물었다.
권이도가 뭐라고 했더라. 저와 공유한 적 없는 공간을 남과 공유하는 게 싫다고 했던가. 그래서 온실에
조명까지 달았는데, 정작 권이도와는 한 번을 가보지 못했다.
“이태성 씨가 저랑 동갑인 거 알고 계셨습니까?”
‘스물아홉입니다.’
“…….”
풉, 웃음이 나왔다. 이태성의 이름조차 모르는 권이도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역시,
이태성에겐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그 풍채가 20 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권이도 씨.”
-네.
“요즘 늦으시네요.”
-……지금 갈게.
- 다음 화에 계속
30 화. Quelques Fleurs(2)
“…….”
“……이게 대체.”
새빨간 장미와 안개꽃으로 만든, 화려하고 커다란 꽃다발이었다. 온통 생화였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온
순간 자욱한 꽃향기가 훅 풍겨 왔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사이, 권이도가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왜 여기까지 나와 있어요?”
“…….”
“저 주시는 겁니까?”
“…….”
“그…….”
“……예쁘네요.”
“그러게요.”
주방장은 갑작스러운 권이도의 퇴근에도 당황한 기색 없이 새 식사를 차렸다. 천혜향 소스를 넣은 새우와
조금 이른 감이 있는 여름 나물무침이었다. 본식으로 나온 오리고기는 속살이 부드러워서 그런지 식감이 꽤
마음에 들었다.
“이제 입 안 좀 괜찮습니까?”
밥을 절반쯤 먹었을 때, 권이도가 넌지시 물었다. 입 안이 터졌던 첫날, 식사를 하며 몇 번이나 인상을
찌푸렸던 걸 기억하기 때문일 거다. 나는 혀끝으로 다쳤던 부분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다행이군요.”
철없이 어리광을 부려서 권이도를 집으로 불러온 것만 같았다. 마침 퇴근할 시간이었다고 합리화하기엔
누가 봐도 나 때문에 돌아온 사람이었다. 손수 꽃다발까지 사 온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괜찮으면 잠깐 같이 내려가죠.”
“정세진 씨 차가 왔거든요.”
***
권이도가 내게 주겠다던 자동차는 M 사에서 새로 출시한 새하얀 세단이었다. 가장 인기가 많은 라인이었고,
자사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 살려 클래식하게 다시 뽑은 스테디라고 했다. 국내에 한정판으로 들여왔기 때문에
아마 몇 대 있지도 않은 걸 권이도가 가져왔을 터였다.
“……하하.”
“시승해 볼래요?”
차 내부는 온통 상아색에 가까운 베이지색 가죽이었다. 핸들과 콘솔, 그리고 천장과 카시트까지 같은
재질이었는데 핸들 너머에 있는 계기판까지도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나는 운전석에 앉고, 권이도는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늘 뒷좌석에 앉는 모습만 봐왔기에 참으로
낯선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안전벨트를 하고 의자 위치를 조정하는 동안,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잘 어울려서요.”
“면허는 몇 살에 땄습니까?”
“…….”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으세요?”
“한강이나 한 바퀴 돌고 오죠.”
“…….”
핸들을 쥔 손이 움찔 떨렸다. 권이도가 내가 생각한 장소를 그대로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원래부터
무난한 드라이브 코스긴 하지. 그리 생각함과 동시에 나긋나긋한 뒷말도 들려왔다.
“…….”
“……가보셨나 봐요.”
그래서 그냥, 가장 무난한 대답을 내놓았다. 막상 말하고 나니, 그의 과거를 질투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염려스러웠지만 말이다. 권이도는 아주 미미한 간격을 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한 번 가봤습니다.”
“……차가 정말 좋네요.”
운전하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한강에 다다르는 건 금방이었다. 노을이 지던 하늘이 어둠에 뒤덮였지만,
내게는 모든 게 찰나의 순간처럼 느껴졌다.
“…….”
“…….”
“아까부터 느낀 건데…….”
고요한 차 안엔 오로지 권이도의 목소리만 들렸다. 주변 소음이 모두 차단된 공간, 그와 나 둘뿐인 공간.
느껴지는 건 그를 닮은 페로몬뿐이었다.
그가 안전벨트를 풀었다. 느리게 뻗어온 손길은 부어오른 왼뺨이 아닌 오른쪽에 닿았다. 엄지로 살살
눈꼬리를 매만진 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뒤통수로 옮겨 머리카락 사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해도 됩니까?”
“…….”
“…….”
“…….”
“흣, 잠시만…….”
“왜.”
“하고 싶어서?”
“…….”
- 다음 화에 계속
31 화. Quelques Fleurs(3)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만 긴장의 끈을 늦추면 그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권이도는 내 말에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가 나긋나긋 이야기했다.
“왜 안 됩니까?”
“…….”
아, 설 것 같은데.
“새 차에서 뭐 하는 짓입니까.”
“…….”
“……야경이 예쁘네요.”
“그러게요. 예쁘네.”
“…….”
권이도와 한강이라. 이보다 더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 권이도는 차에서 강물을 구경하는 게 아니라,
명성호텔 최상층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매년 이맘때쯤 소식이 들려왔다. 선호그룹의 창립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열리는 기념행사.
관련 계열사에서도 고객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온갖 이벤트가 열렸다. 여태까지는 대체로 이런 기념식엔
아버지가 홀로 참석하곤 했다.
“…….”
아버지가 말하길. 권이도는 나와의 약혼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계약의 대가도 주지 않았고,
일방적으로 연락을 무시하고 있다고. 그런데도 내가 직접 협상을 시도하겠다고 말하자 원치 않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
“다르죠.”
그는 단호하게 대답하고 픽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어린아이 다루듯 상냥한 말투로 덧붙였다.
이 기분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목구멍에 조그만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들떴던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아서 종국엔 가슴 언저리가 차갑게 식었다. 나조차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급작스러운 변화였는데, 권이도는
엷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넌지시 묻는 말에는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권이도와의 약혼 사실을 알리는 것. 해신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내게는 번거로운 일임이 분명했으니까. 이번 창립 기념식에 갈 때도, 약혼자인 것과 아닌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일단 최선의 대답을 내놨는데,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번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잠깐 입을 다물었던 그는 이내 아무렴 어떠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권이도는 그건 너무 아름다운 포장이 아니냐며 픽 웃음을 흘렸다. 가만히 눈을 내리깐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자조적으로 보였다.
“이건 그냥 내 욕심이죠.”
“…….”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권이도가 그렇다면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아마 창립 기념식 때도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 모르는 척 있어야겠지. 아버지는 불만이 많겠지만, 적어도 마음대로 움직이진 못할 테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네?”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특유의 완고한 어투로 말한 그는 눈썹을 올리며 고개를 까딱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찬 시계와 자동차 따위엔 관심이 있을지 몰라도, 어디서 출발했는지는 관심이
없을 터였다. 가족들과 따로 도착한다고 해서, 크게 이상한 자리도 아니었고.
“…….”
“…….”
그가 삐딱하게 눈가에 힘을 줬다. 그럼에도 반박할 말이 없는지 미묘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이내,
나직한 숨을 토해 낸 권이도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요, 그럼.”
강물에 부서지는 야경이 그의 눈동자에 그대로 담겼다. 고요히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권이도는 침묵을
유지했다. 나는 한동안 그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느릿느릿 입술을 달싹였다.
“…….”
그러나 애매한 대답은 결코 긍정으로 들리진 않았다. 그 미묘한 뉘앙스에 미간을 좁히자 그가 대뜸 나를
보고 물었다.
“정세진 씨는 하고 싶은 게 있습니까?”
“하고 싶은 거요?”
“글쎄…… 출세?”
“취미라든가…… 승마나 레이싱, 아니면 뭐 요트를 띄워도 좋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얘기해 봐요.”
“……음.”
“…….”
알고 있었다. 그가 나쁜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다만, 그럼에도 양심이 콕콕 찔려 와서 그랬지.
“……향수?”
“…….”
“정답이었나 보군요.”
어떻게 해줄 거냐고, 나는 그렇게 묻지는 못했다. 곧장 안전벨트에 맨 권이도가 시간을 확인하며 눈가를
찌푸렸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대화를 종결시켰다.
“늦었는데 그만 돌아가죠.”
“…….”
나는 묵묵히 목까지 차오른 말들을 꿀꺽 삼켜 냈다. 그리고 곧 헤어져야 할 야경을 눈에 담았다. 여전히
가슴이 벅찰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그 잠깐 사이에 무척이나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분명 처음 와본 곳인데,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단 생각이 들 정도로.
***
날짜는 빠르게 바뀌었다. 권이도는 여전히 바빴고, 얼굴을 보는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나는 늘
그랬듯 별거 없이 나날을 보내다가, 이따금 먼발치에서 불 켜진 서재를 바라보곤 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의
반복이었지만, 다행히 악몽을 꾸지 않아 버틸 만했다.
“경호…… 말씀입니까?”
“뭐, 보좌씩이나…….”
“고생하시네요.”
“……아닙니다.”
느리게 흘러나온 대답이 아무래도 영 어색했다. 원래라면 특유의 무표정 뒤에 약간의 짜증이 묻어났으련만.
인제 보니, 그다지 귀찮은 기색도 아니었다.
“특별 수당 받습니까?”
“…….”
“복지가 좋은 직장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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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화. Quelques Fleurs(4)
사람을 다룰 줄 안다고 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고 해야 하나. 어느 쪽이건 결과는
비슷할 테니 권이도가 대단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이태성도 차마 부정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겠지.
“……특별 수당이 없어도 해야 할 업무입니다. 고생이라고 표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입에 발린 말도 하시는군요.”
“…….”
“재밌으십니까?”
“오후에 출발합니까?”
“……색이 너무 밝은 거 아닌가.”
“이걸 쓰는 날이 오긴 하네.”
“…….”
“…….”
핸드폰 너머에서 뭐라 뭐라 말소리가 들렸다. 아마 갑작스레 침묵을 유지하는 이태성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나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전화 안 합니까?”
“그 옷은…… 맞춤복입니까?”
가볍게 대답하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태성은 무언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출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권이도가 타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세단이
세워져 있었다.
“시간 빠르네…….”
“…….”
습관처럼 반지를 꼈던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걸리는 게 없으니 아무래도 영 허전했다. 버릇이
생기는 건 금방인데, 한 번 몸에 익은 것들이 사라지기까진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걸까.
‘당분간 얼굴 보는 일 없을 게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가슴 언저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끝없이 이어지던 잡념이 끊기고, 귓가가
먹먹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는 고막도 다 나았고, 음식을 먹는 것도 어렵지 않은데 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 해답은 없었다. 애초에 어떤 대답이 돌아오건 내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이미 일어난 일은 사라지지 않고, 아버지의 생각 역시 바뀌지 않을 테니.
상냥한 인상의 직원은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길게 내려온 앞머리를 정돈했다. 가르마를 타서 한쪽에
고정하고 스프레이를 뿌린 뒤 드라이기로 그 언저리의 볼륨을 살렸다.
“하하…….”
머리를 깔끔하게 세팅할 때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사이 나는 머릿결이 좋다는 말을 총
네 번 듣고, 두상이 예쁘다는 말을 세 번 들은 뒤에, 다음에 머리를 자를 때 제게 오라는 얘기를 두 번이나 더
들었다. 제 개인 번호까지 적힌 명함을 건네줄 땐 그 열렬한 직업 정신에 홀로 감탄해야 했다.
“……이게 뭡니까?”
밖에서 대기하던 이태성은 내가 내민 명함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내 머리를 물끄러미
보기에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덧붙였다.
“예, 더 들를 곳은 없습니다.”
“음…….”
나직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질문을 듣자마자 내 경호로 있던 사람들이 주르륵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보통, 곁에 두는 사람을 그렇게 모르던가.
“…….”
“…….”
마친 외부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외부인이 맞으니 단순히 비유로 표현하기엔 어폐가
있을 터다. 내가 저 사이에 껴있었다면 참으로 이질적이었을 텐데. 날 때부터 가족인 사람들과 노력해도 가족이
못 되는 사람 사이엔 많은 간극이 있다.
“왜 그러십니까?”
“……별거 아닙니다.”
“…….”
“…….”
이태성이 왜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파리했으니. 나름대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건 자신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티 나게 속을 드러내고
있었을까.
“후.”
그리고 핸드 타월로 물기를 제거하고 화장실을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문 바깥쪽 코너를 돌려는 찰나,
안으로 들어오던 누군가와 떡하니 마주쳤다.
“…….”
“…….”
“……아.”
권이경, 권이정, 권이도. 선호그룹 삼 남매는 권이정 혼자만 다르게 생겼다는 평가를 듣는다. 권이경과
권이도는 부회장인 어머니를 닮았으나, 권이정은 홀로 아버지를 닮았으니까. 바늘 하나 들어갈 데 없이 냉랭한
외모인 두 사람과 달리, 권이정은 웃으면 나름대로 온화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등줄기에 원인 모를 전율이 흐르는 걸 느꼈다. 등허리가 꼿꼿이 펴지고
뒷덜미에 오소소 솜털이 일어났다. 거부감, 혹은 또 다른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일순간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실례했습니다.”
……야?
- 다음 화에 계속
33 화. Quelques Fleurs(5)
“…….”
“…….”
“……아뇨, 알고 있습니다.”
“…….”
천천히 훑어보는 시선에 소름이 끼쳤다. 대놓고 품평하듯 나를 살핀 권이정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쩝,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그렇잖아요. 오메가면 남자를 만날 텐데, 괜히 옆에서 볼일이라도 봤다가 민망한
상황이 생기면 어떡해. 바지를 까는 건 좀…… 장소가 여기면 안 되지.”
“…….”
“아…… 아니면 그런 걸 기대한 건가? 우연히 알파라도 마주쳤으면 해서? 정세진 씨, 그래요?”
“…….”
“본부장님.”
“…….”
“……아.”
“……!”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일방적으로 몇 마디를 들었을 뿐이고, 내게는 그다지 화를 낼
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그냥 나조차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신경이 곤두서서 그랬지.
“…….”
“……후.”
“들었습니까?”
“…….”
“들었군요.”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뭐…… 상관없습니다. 별로 대단한 말도 아니었고.”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정세진?”
익숙한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미미한 아로마 향기와 헤어스프레이 따위의 인공적인 향. 불쾌한 종류는
아니었지만, 여러 인위적인 것들이 섞여 숨을 쉬기에는 조금 거슬리는 그 향기.
“정세진 너…….”
민재였다.
***
“…….”
이태성은 입구에서 대기했고, 우리는 호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중앙에 있는 라운드 테이블로 향했다.
다른 가족들도 있을 줄 알았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건지 덩그러니 빈 의자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중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고, 민재도 내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
“…….”
또 한참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참다못한 내가 그를 바라보자, 도리어 민재가 흠칫 놀라 시선을 피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꾸민 모습이 어머니와 똑 닮아 있었다.
“넌 그 옷 존…… 엄청 구려.”
“…….”
“뭘 하고 지내다니…….”
“왜, 무슨 일 있었어?”
그래서 넌지시 물었는데,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잘근거리며 시선을 내렸을 뿐. 그러다
내 손가락을 응시하곤 들릴 듯 말 듯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딴 게 무슨 약혼이라고…….”
아마, 약지에 엷게 남은 반지 자국을 발견했나 보다. 내 추측일 뿐이지만, 약혼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미리 언질도 들었겠지. 그게 어떤 방식인지는, 나를 제외한 가족들만 알고 있을 터다.
“…….”
반사적으로 주변 눈치를 살폈다. ‘망할 새끼’라는 어감이 지나치게 거칠었기 때문이다. 짓씹듯 내뱉은
민재는 더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다른 쪽으로 휙 돌려 버렸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구나.”
“……그래, 그럼 다행이고.”
“어머니는 잘 지내셨어요?”
“나야 항상 그냥 그렇지.”
이질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원래도 살갑던 사람들은 아니지만, 오늘은 무언가 조금 더 이상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가 하면,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원래는 나를 껄끄러워했다면 지금은 대하기
어려워한다고 해야 하나.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가장 궁금한 사실을 묻자, 어머니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눈가를 찌푸렸다. 쉰이 가까운 나이에도
주름 한 점 없는 얼굴이 지금껏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려 줬다. 잠깐의 침묵 끝에 어머니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버지는…….”
“…….”
선호그룹 일가족이었다. 부회장인 권상미, 그 자제인 권이경과 권이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권이도까지.
누군가 홀린 듯 중얼거린 말대로였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뇌리에 새겼다.
정확히는 그중 딱 한 명, 내 약혼자인 권이도를.
단조로운 색감의 검은 정장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별달리 특징 없는 정장에 베스트
단추만 색이 독특했을 뿐인데, 그걸 입은 사람이 권이도라는 것만으로 특별해 보였다. 어깨를 반듯이 펴고
당당하게 걷는 모습은 나와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
“…….”
- 다음 화에 계속
34 화. Quelques Fleurs(6)
“……뭐야?”
“누구 보는 거야?”
숙덕거리는 말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민재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와 권이도를 번갈아 보는 것도
느껴졌다. 어머니와 서영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나는 얕은 숨을 내뱉으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
“…….”
그러나 어머니와 동생들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어머니가 잠깐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마저도 잠시였다. 하기야, 오랜만에 아버지를 뵙는 나와 달리 그들은 한집에서 늘 얼굴을 봐왔을 테니.
“…….”
“세진이 너 따라오거라.”
그러나 아버지가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순간, 놀라울 정도로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 한데 모여 있는 서너 명의 사람들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으니.
“이런 데서 얼굴을 다 보네. 이쪽은 그래, 자네가 애지중지 키운다던 오메가 아들이지?”
“……정세진입니다.”
인자한 아버지 밑에서 훌륭하게 큰 자식 정도면 충분했다. 입양되었지만 구김살 없고,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처럼 살갑게 굴면 됐다. 누군가가 칭찬을 건네면 겸손을 떨며 나를 한 단계 낮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참으로 즐거워 보였다. 아버지는 내 자식을 누구에게 보내냐며 친근하게
내 등을 다독였다. 마음으로 낳은 자식이라 더 애달프다는 말엔 눈치껏 약지에 남은 반지 자국을 가려야만 했다.
***
으레 목적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저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논점을 빙빙 도는 대화를 나누곤 한다.
서로 끝없이 근황과 칭찬을 주고받고,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주제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의미 없는 대화를 한 시간쯤 이어가면, 자연스레 정신력이 달리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그렇죠? 역시 뭘 좀 아신다니까.”
아버지는 이미 한참 전에 최초의 목적이었던 회장과 담배를 피우러 사라진 뒤였다. 외국에서 들여온
시가를 피운다던가, 내게도 권했으나 눈치껏 뒤로 빠져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아, 이거 제 명함인데…….”
애초에 열에 아홉 정도는 예의상 건네는 명함이었다. 실제로 내게 연락이 오리라 기대하지도 않을 거고,
어설프게나마 얼굴도장을 찍어 둘 생각이겠지. 그러니 소속과 이름을 기억하는 것으로 내가 할 도리는 다한
셈이다.
“……어.”
“아이고, 이걸 어쩌죠.”
느물거리는 말투로 말하는 상대는, 아까 화장실에서 마주친 권이정이었다. 한 손엔 비어 있는 와인 잔을
들고, 다른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그는 제 손과 내 배를 번갈아 보곤 눈을 찡긋하며 미안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 네. 괜찮습니다.”
다행히 가까이에 있는 몇몇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기 바쁜 데다, 권이정은 그다지 친해져서 메리트가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야망 있는 사람의 대다수는 이미
저쪽 권상미의 근처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
“저는 정말…….”
“아, 손?”
“부끄러움을 많이 타네…….”
“…….”
“…….”
***
“보기보다 고집이 세네. 하긴, 정세진 씨처럼 생긴 애들이 오히려 성질은 더 하더라고요.”
“들어가요.”
“…….”
티 나지 않게,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리 구석진 곳이라고 해도 돌아다니는 직원이 하나도 없지는 않았다.
실제로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만 벌써 두어 명은 되었다. 게다가 모르긴 몰라도 이태성 역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터다.
권이정과 함께 화장실로 들어갈 땐, 밖에서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딱딱한 물체가 바닥에
부딪히는 것처럼 달그락거리는 소리였다.
“무슨 소리 나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권이정 대표님.”
권이정은 온유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한 발짝 더
뒤로 물러나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픽 웃기도 했다.
- 다음 화에 계속
35 화. Quelques Fleurs(7)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반말은 둘째치고, 그가 뿜어낸 페로몬이 지척까지 다가온
탓이었다. 호흡으로, 피부로 들러붙은 페로몬은 의도하는 바가 딱 하나밖에 없었다.
“…….”
나를 발정시키기 위한, 저급하고 지저분한 페로몬이었다. 덕지덕지 들러붙는 감각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낯선 것이었다.
머리가 생각을 정리하는 속도가 느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한데, 자꾸만 속이 울렁거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런 일을 예상치 못한 것도 아니건만.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 일들이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상대는 남자였고, 나도 남자였다. 권이정이 아무리 페로몬을 흘린다고 해도 나는 페로몬 분비가 되지도
않는 우성 오메가였다. 이 정도 자극 정도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무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지 마시고…….”
그런데도 자꾸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권이정에게 잠식돼 까맣게 타들어 갈 것 같단 공포심이
생겼다. 눈앞이 컴컴하게 죽는 것처럼 그와 가까워질수록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사내새끼 구멍엔 관심이 없는데, 권이도 그 새끼가 환장하는 거 보니까 한 번 맛이라도 봐
봐야겠거든.”
“…….”
“정세진.”
‘정세진.’
“너 어차피 도망 못 가.”
“…….”
“여기 원래 내가 쓰던 데라 아무도 안 온다고. 알아들어?”
“…….”
눈앞이 까맸다가 하얗게 점멸하길 반복했다. 권이정의 페로몬이 내 목을 움켜쥐고 사지 끝까지 내모는
기분이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처럼 체온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
억센 손길이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었다. 잘 세팅된 머리를 흐트러뜨린 뒤엔 뒤통수를 단단히 고정한 채
제 바지춤으로 끌어당긴다. 역겨운 페로몬이 더욱더 짙어지고, 바지 너머로 잔뜩 부푼 그의 성기가 보였다.
“성의껏 해, 성의껏.”
‘창부처럼 굴어야지.’
“…….”
무릎 너머로 딱딱한 바닥이 느껴졌다. 모욕적인 자세라는 생각보다 속이 뒤집히는 감각이 더 생생했다.
입꼬리가 투둑 찢어지던 느낌, 억지로 입 안을 파고들던 물건과 목을 비집고 영역을 넓히던 그 억겁의 과정.
“…….”
머리칼을 움켜쥐는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억지로 얼굴을 끌어당겨 바지춤에 문지르는 것도. 바지 너머
부푼 성기가 뺨에 닿고, 억세게 내 뒤통수를 잡아 고정하는 것까지도.
“뭐 해, 빨리 하지 않고.”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권이정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그를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감이
지독히 어그러졌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있는 상대가, 권이정이 아니라 내가 복종해야 할 다른 누군가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러한 기분은 잠시였다. 권이정이 양손으로 내 뒤통수를 붙잡은 순간, 그의 손이 거칠게 떨어져
나간 것이다. 내가 입을 뻐금거릴 새도 없이, 권이정의 페로몬이 훅 멀어졌다.
“……악!”
“…….”
“……권이도 씨.”
“…….”
권이정이 버럭 소리치는 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간 권이도가 멱살을
끌어당겨 다시 한번 크게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가고, 권이정이 쿨럭 피 섞인
침을 토해 냈다.
“…….”
“전무님!”
“그러다 죽습니다.”
“죽는다고?”
냉랭한 목소리에 차가운 페로몬이 한가득 쏠렸다. 그 분노의 대상이 나는 아니었지만, 나조차 움츠러들
만큼 강한 기운이었다. 권이정의 페로몬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협감에 나도 모르게 숨을 흡 들이마셨다.
“이 새낀 죽어도 쌀 텐데.”
“……권이도 씨.”
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간절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만하라고 말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이
진짜인지 가늠하기 위해서. 적당한 타이밍에 나타나 눈앞에 있는 권이도가, 진짜인지 아니면 환상인지 구분하기
위해서.
그런데 말을 하려다 보니,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나는 아무 짓도 당하지 않았고, 지금은 두려움도
들지 않는데. 권이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공포가 씻은 듯 깨끗이 사라졌는데도 말이다.
“…….”
“내 눈에 안 띄게 치워.”
“…….”
“…….”
“세진아.”
“늦게 와서 미안해.”
“…….”
온몸의 긴장이 쭉 빠져나갔다.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고, 차가웠던 손끝에 피가 도는 듯했다.
따사롭게 전해지는 온기가 그 어느 때보다 상냥해서,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미안.”
권이도는 내 머리칼에 턱을 문지르며 내게만 들릴 만큼 조그맣게 이야기했다. 나는 손을 들어 권이도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푹 얼굴을 묻자, 권이도 특유의 체향이 한가득 전해졌다.
“아…….”
그래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가, 향긋한 나무 냄새를 끝으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조심스러운 손길은 고슬고슬 머리칼을 만지다가 느낌도 나지 않을
만큼 가볍게 이마에 닿아 왔다. 얼굴의 생김새를 확인하듯 가장자리를 덧그린 상대가 눈꼬리를 살짝 문지르며
눈가에 맺혔던 눈물을 훔쳐 줬다.
그러나 따사로운 손길과 달리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심장을 칼로 얇게 저미는
것처럼 가슴 한편이 찌르르 아파 오는 듯했다.
‘씨발, 뭣도 아닌 오메가가…….’
장면은 계속해서 끝없이 바뀌었다. 아니, 이걸 장면이라고 이야기해도 좋을지는 모르겠다. 그저 끝없이
누군가 내게 속삭이고, 내 몸을 여기저기 만지며 지독히 나를 괴롭혔을 뿐이니까.
“……으.”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나직이 중얼거리는 말이 너무도 상냥해서, 조금 전까지 들었던 나쁜 생각이 사르르 지워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머릿속엔 이제 단 하나의 생각만 떠올랐다.
“자자…….”
“…….”
“일어났어요?”
“여기가…….”
“호텔이에요.”
“…….”
“더 잘 겁니까?”
“……아뇨.”
“졸려 보이는데.”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잠투정 비슷한 대답에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념식이 끝난 지가 언젠데.”
“…….”
- 다음 화에 계속
36 화. Quelques Fleurs(8)
허락이 떨어졌지만 오히려 잠기운은 더 멀어졌다. 기념식이 끝났다면 가족들에게도 연락을 넣어야 할 텐데.
이렇게 갑자기 사라져 한가로이 침대에서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픈 데는?”
“없습니다. 괜찮아요.”
“네, 다 멀쩡하네요.”
“…….”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태성 씨가 연락했습니까?”
“……나한테 할 말은 그게 답니까?”
“…….”
아예 몰랐다면 거짓말이지만, 거기까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남자고, 권이정도 남자라서,
쉽게 저항할 수 있으리라 방심했을 뿐이니까. 사실 권이정이 내게 무력을 행사하진 않았으니 진정
불가항력이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했다.
“거기까지 하죠.”
“…….”
흠칫, 어깨를 들썩였다. 음산한 목소리가 도무지 농담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형님?”
“그딴 게?”
“…….”
“악몽을 꾸는 것 같던데…….”
“어차피 아무 일도 없었고…….”
“…….”
“정세진 씨는 화도 안 납니까?”
“……글쎄요.”
상황에 맞지 않게 참으로 순수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대단한
권력인지도 모르면서.
“…….”
“…….”
“…….”
“더 잘 생각이 없으면 뭐라도 좀 먹어요. 보니까 종일 굶었을 텐데, 간단하게 준비하라고 하죠.”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환심을 사야 하거든요.”
“……환심?”
“못된 짓 안 하실 것 같은데요.”
“글쎄…….”
“이렇게?”
“약속할 수 있습니까?”
“더 자지도 않을 거고…….”
“…….”
“보니까 배도 안 고픈 것 같고.”
“따로 하고 싶은 건?”
“…….”
“권이도 씨 페로몬이…….”
“…….”
“되게…… 좋은 거 아세요?”
조용한 키스였다. 서서히 흥분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마치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차분하기만 했다.
가을비에 젖은 나무와도 같은 묵직한 향이 코끝을 아른아른 맴돌았다.
“잔향이…… 엄청 옅게 남나 본데.”
- 다음 화에 계속
37 화. Quelques Fleurs(9)
“붙어 있던 사람들이라니…….”
“태진건설 둘째라든가.”
“아!”
“……흣.”
“누가 저를 만져 댔다고…….”
“…….”
“그거야…….”
“관심이 없는 거였군요.”
“…….”
“날 생각하라고 준 향수 위에 다른 향을 묻혀 오면 안 되지.”
“…….”
내게 페로몬이 없는 탓에 도드라졌을 뿐, 그다지 짙은 페로몬도 아니었다. 그저 곁에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묻는 엷은 존재감 정도. 애초에 이제는 향수 냄새만 은은하게 남은 상태였다.
“그게 싫으면…….”
“…….”
“읏…….”
“잠, 흐…….”
큼직한 손이 성기를 마구잡이로 주물렀다. 단숨에 속옷 안쪽까지 침입한 탓에 하릴없이 자지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팔뚝을 붙잡은 채 신음을 삼키자 그가 요령껏 손바닥으로 귀두를 자극했다.
“흡……!”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권이도의 손안에 사정했다. 그의 유려한 손길과 파도치는 페로몬의 결과였다.
여유롭게 내 정액을 모두 받아 낸 그가 힘들이지 않고 바지와 속옷을 모두 벗겨 내 침대 아래로 던져 버렸다.
“벗기려고 사준 옷이에요.”
“…….”
“밝히긴.”
“……음.”
민망한 말이었으나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단연코 밝히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드러난 나신을 보는
순간 침이 꼴깍 넘어가고 말았다. 권이도는 애써 시선을 돌리는 나를 보며 흥미로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런 얼굴이라니…….”
“……실제로 몹쓸 짓을 하고 계시는데요.”
“혀 깨물지 말고.”
“…….”
“……바지는 안 벗으세요?”
권이도는 내 시선을 개의치 않고 느릿느릿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벌어진 바지 틈새로 새까만 속옷과
함께 불룩 튀어나온 부피감이 느껴졌다. 배꼽 아래, 은밀한 곳으로 이어지는 아랫배엔 도드라진 핏줄 따위가
있었다.
“빨아 볼래요?”
“맛있겠다는 듯이 보길래.”
“……빠는 거 말고.”
“말고?”
“만지는 정도라면…….”
“그럼 만져요.”
“…….”
“더 세게 쥐어야지.”
“이거…… 못 넣을 것 같은데요.”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하자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어이없다는 듯 차분히 반박한다.
“…….”
“…….”
바지와 속옷을 벗은 그가 나를 덮치듯 위에서 내리눌렀다. 맨 살결이 스치는 감각은 등줄기가 오싹할
만큼 기분 좋았다. 턱 언저리에 입술을 문지른 그가 곧장 가슴께로 위치를 옮겨 갔다.
“으응…….”
뜨뜻한 혀가 톡 튀어나온 유두를 짓눌렀다. 반대쪽은 길쭉한 손가락이 꼬집듯 장난을 치고 있었다.
간지러운 감각을 참지 못해 이불깃을 움켜쥐자, 그가 조금 더 세게 가슴께를 빨아들였다.
“……흐.”
“아, 흐으……!”
쪽쪽거리는 소리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 부근에 얼룩덜룩 자국이
남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또 병에 걸린 사람처럼 반점을 매단 채 며칠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권이도는 양껏 가슴을 희롱한 뒤에야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가슴 위편을 잘근잘근 깨물고 쇄골과 어깨
부근까지 빈틈없이 빨아들였다. 그러다 팔 안쪽에 다다라서는 여린 살을 콱 깨물어 잇자국까지 남겨 놨다.
“하아…….”
“그만 빨고…….”
“……빨리 넣어 달라고?”
다급히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내 성기를 한입에 물었기 때문이다. 뜨겁고 축축한
입 안에서 그의 혀가 귀두를 문지르는 게 느껴졌다.
“아……!”
“아, 안 돼…….”
“아, 아……!”
“흐으…….”
그리고.
“…….”
“여전히 맛은 없군요.”
- 다음 화에 계속
38 화. Quelques Fleurs(10)
“…….”
“나 말고 여길 누가 본다고.”
연달아 다리를 깨물던 권이도가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허벅지는 둘째치고, 상반신은
옷을 입으면 교묘하게 가려지는 위치였다. 느슨하게 파인 니트를 입어야 쇄골 근처가 좀 보이는 정도.
“……아흑.”
그래서 간절히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늘 서늘하던 피부가 지금은 뜨뜻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단단한
살갗을 콱 움켜쥐자 그가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까딱했다.
“정세진 씨.”
“…….”
“후우, 하고.”
“……!”
“큿.”
“아…….”
“……흐읍.”
“흐, 아파…….”
“응, 괜찮아.”
가벼운 입맞춤이 두어 번 입술에 내려앉았다. 부드럽게 뺨으로 향했다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입술로 닦아
주기도 한다. 이윽고 상체를 바로 세운 그가, 칭찬하듯 내 아랫배를 다독였다.
“잘했어요.”
“……흐으.”
“섹스를 좀 자주 해야겠죠.”
“……아흣!”
“흐으응…….”
찌릿찌릿한 쾌감이 척추를 따라 올라왔다. 온몸이 파르르 떨리고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는 기분이었다.
감전된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는 내게, 그는 자비 없이 다시 한번 허리를 쳐올렸다.
“하읏!”
그래서 안달이 났다. 이미 파도처럼 밀려드는 쾌감을 아는 몸이다. 첫 삽입은 버거웠을지언정 지금은
그에게 꼭 맞춘 것처럼 반응하고 있었다. 다리를 탄탄한 허리에 감고 칭얼거리듯 하반신을 비비적거릴 정도로.
“보채지 마, 여기 아직 덜 풀렸어.”
“아응, 흐, 거기…….”
“……여기? 응?”
쿡, 내벽을 건드린 그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그러더니 내리찧듯 성기를 깊숙이 삽입한다. 배꼽 아래를
길게 긁어내리는 감각에 그의 등 뒤에서 발목이 교차했다.
“아, 아……!”
“……아흣!”
“……하아.”
“아, 으으…….”
“여기?”
“잠, 아, 안 돼, 싫, 흐읏……!”
간절히 고개를 저었다. 몸을 뒤집으려고도 해봤지만, 그는 붙잡은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저 삽입할
때마다 배를 꾹꾹 누르며 터질 것처럼 아래를 자극했을 뿐.
푹, 푹, 안쪽을 꿰뚫는 감각이 너무도 선명했다. 지나치게 차오르는 희열에 다리를 허우적거리자, 그가
자세를 고치려는 것처럼 성기를 빼내었다. 잠깐 쉴 시간을 줄 줄 알았는데, 그는 나를 침대에 엎드리게 한 후 내
양 손목을 머리맡에 고정했다.
“……하으응!”
찌르르, 묵직한 쾌감이 피어올랐다. 양손이 고정된 탓에 주먹을 쥐었다가 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도망칠 곳이라도 있으면 몰랐으련만, 납작 엎드린 몸을 옴짝달싹하기도 쉽지 않았다.
“……흐, 으.”
“하, 씨발…….”
그는 으스러뜨릴 것처럼 나를 꽉 붙잡은 채 속도를 올렸다. 그가 내뱉는 욕지거리에 놀랄 틈도 없었다.
퍽, 퍽, 거칠게 이어지는 삽입 끝에 나는 또 한 번 이불에 묽은 정액을 질질 흘려야만 했다.
“하으…….”
동시에, 움찔거리는 내벽에 뜨거운 액체가 뿌려졌다. 아래를 바짝 밀착한 권이도가 내 안에 파정한
것이다. 내벽을 꽉 들어찬 성기가 꿈틀거리며 길고 진한 사정을 이어 갔다.
“…….”
“…….”
“힘들어요?”
“……하아.”
“……의견이요?”
“아…… 흣, 잠시만…….”
“……흐.”
“정세진 씨가…… 후, 편한 자세로 해야죠.”
“저는 그냥…….”
“……그냥?”
그는 대답을 재촉하며 내벽을 슬슬 문질렀다. 일부러 자극이 강한 부위는 미묘하게 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것이 지나치게 커다란 탓에 꾹꾹 눌리긴 했지만.
“그냥…….”
“…….”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깊숙이 성기를 밀어 넣었다. 푹, 들어온 성기가 경련하는 내벽을 거세게
자극했다. 그의 말대로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 나는 허리를 간헐적으로 떨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아…….”
“또 입 안 다치려고.”
“우으응…….”
기다란 손가락이 내 혓바닥을 잡아 빼내었다. 내가 숨을 헐떡이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권이도가 내 턱을 잡아 고개를 뒤로 돌리게 했다.
“……세진아.”
- 다음 화에 계속
39 화. Origine du parfum(1)
이미 정철호 회장의 입양아로 유명하던 나는 입학과 동시에 여러 유명세를 치렀다. 같은 학생들은 물론,
나를 맡게 될 선생들까지 내게 관심 어린 시선을 보낸 것이다. 물론 그 이유가 단순히 ‘재벌 가의 입양아’
라서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우성 오메가래.’
알파와 오메가의 비율은 전국적으로 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마저도 대다수는 열성이었고, 우성에
속하는 건 그중에서도 또 3%였다. 일반적으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수치가 아니었기에, 나를 신기하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부럽다, 나도 특이 형질 되고 싶어.’
무언가 잘하면 오메가라 그렇다는 평가를 받았고, 무언가 실수하면 특이 형질도 대단한 건 아니라는
힐난이 따라붙었다. 그래 봤자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있는 사람이라는 건 다르지 않은데, 마치
외계인이라도 보는 양 신기해하곤 했다.
‘쟤는 진로 걱정 안 해도 되겠네.’
“……향수 공방이요?”
‘정세진 씨는 하고 싶은 게 있습니까?’
“괜찮은 조향사가 있는데, 향수 공방에서 원데이 클래스 비슷한 걸 한다더군요. 정세진 씨만 괜찮으면
경험 삼아 다녀오는 것도 좋겠죠.”
“재미있겠네요.”
“…….”
“……아무래도 관심 있는 분야였으니까요.”
“…….”
“……그때 그건 실언이었습니다.”
“글쎄,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는 표현을 안 믿어서.”
안 어울리게 뒤끝이 길다. 감시를 할 거면 CCTV 를 달라는 말을 아직까지도 기억하다니. 멋쩍게 시선을
피하는 내게,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퍽 끌리는 제안이었으나 이래저래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그에게 미안하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고
그냥 막상 판을 깔아 주니 머뭇거리게 되는 정도.
뭐, 그렇다고 길게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내게도 퍽 흥미로운 제안이었고, 물질적인 무언가가 아니니
뒤처리가 곤란하지도 않다. 그의 말대로 감금당한 것도 아닌데, 가볍게 다녀와도 괜찮지 않을까.
다행히 권이도는 흔쾌히 승낙했다. 내가 거절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그 또한 짐작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마저 식사를 이어 갔고,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그와 관련된 주제를 꺼내지 않았다.
“혜율이라면…….”
“뭐…… 평범하게?”
“아뇨…… 그렇게까지는.”
배려는 고맙지만 그게 예의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비밀리에 약혼한 사이라 할지라도
머무는 집에 놀러 온 손님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도 늦으세요?”
이제는 정말 권이도가 출근할 시간이었다. 그는 고용인에게 가방을 건네받고 미안한 얼굴로 눈가를
찌푸렸다.
창립 기념식이 끝난 뒤에도 권이도의 바쁜 일상은 바뀌지 않았다. 그나마 나아진 건, 나와의 아침 식사를
다시 함께하기 시작했단 점일까. 언제 퇴근했는지도 모르게 집으로 돌아와서는, 날이 밝으면 아무렇지 않게
완벽한 차림으로 내려오곤 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나는 그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확인하고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권이도는 살짝 내게 손을 뻗었다가 뺨
언저리를 살짝 문지르고 멀어졌다. 어딘지 모르게 아쉽단 표정이었는데, 그럼에도 그 외에 다른 스킨십은 없었다.
“다녀올게요.”
“…….”
“……여전히 속을 모르겠네.”
이태성이 말하길, 사고가 있었던 화장실은 원래도 그런 용도로 사용하는 곳 같다고 했다. 권이정과 내가
들어가자마자 직원들이 출입구를 막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이태성을 저지했다고. 하는 수 없이 권이도를
불러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의 판단력을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권이정의 처사를 묻는 대신, 그 직원들의 처사를 물었다. 본능적인 촉이었는데, 권이도가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다 잘렸습니다.’
‘…….’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뭐 아무렴 어떻단 말인가. 깊이 고민해서 답이 나올 문제면 애초에
고민거리가 아니었겠지.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고, 지금까지 그랬듯 흘러가는 대로 두면 그만인걸.
***
“향수 공방 말씀입니까?”
향수 공방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자, 이태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씩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
“의견이라면…….”
가만가만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따뜻한 온기가 손가락 끝에서부터 차근히 전해졌다. 온통 꽃향기가
감도는 와중에 짙은 장미 향기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예?”
“그건 아니지만…….”
“…….”
“……그럼 한 번 다녀 볼까.”
- 다음 화에 계속
40 화. Origine du parfum(2)
“만약 가게 되면 언제 가십니까?”
잠이 잘 오는 향을 만들면 좋을 텐데…….
이태성은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내게 남은 수면제 개수를 헤아리며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조만간 김 실장에게 연락해야 할 듯했다.
***
“……잠을 못 잤습니까?”
“네, 뭐…….”
“좀 설쳤습니다.”
“조금 설친 게 아닌 것 같은데.”
권이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했다. 눈가를 살짝 찌푸린 채 가볍게 묻기도 했다.
“그냥…….”
“……오늘은 일찍 들어오죠.”
“예?”
“잘 생각했어요.”
“일정?”
“…….”
슬쩍 시선을 피하고 포크로 샐러드를 짓이겼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질 행동이었다.
그러나 권이도는 그저 간지러운 웃음을 흘리며 제 식사에 집중할 뿐이었다.
***
“고생하시네요.”
나는 가볍게 이야기하고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권이도와 함께 한강에 다녀온 이후 얌전히 주차만
해둔 새하얀 세단으로.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자 이태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 뽑으셨습니까?”
“아뇨, 받았습니다.”
부러움 반, 그리고 아연함 반. 누구에게 받았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상대가 누군지 눈치챈
듯했다. 하기야, 이 정도 고가의 차를 선물할 상대가 권이도 빼고 누가 있겠느냐마는.
자연스럽게 운전석 쪽으로 향하자, 그가 차 앞에서 머뭇거렸다. 덩치가 커다래서 그런지 망설이는 모습이
지나치게 잘 보였다. 왜 저러나 싶어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예, 그럼 어디 앉습니까?”
“…….”
“안전벨트부터 하세요.”
“…….”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말했는데, 오히려 움직임은 더 딱딱해졌다. 꼿꼿하게 정면을 보는 모습이 참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얌전이 무릎 위에 주먹을 올려놓은 터라 조신하게 보이기도 했다.
“역시…….”
“맞아요. 잘 모릅니다.”
“이태성 씨, 그거 알아요?”
“모릅니다.”
“……양배추요?”
딸랑.
“어서 오세요!”
문에 달린 종소리와 함께 발랄한 인사가 들렸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봤다. 벽면엔
갈색 병에 담긴 향료가 줄줄이 세워져 있고, 테이블엔 시향 용지와 여러 가지 공병이 놓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나무로 이루어진 인테리어는 아늑하고 따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
“……아, 안녕하세요.”
“정세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네, 저도요.”
딸랑.
그가 가리킨 건, 마찬가지로 원목으로 된 의자였다. 입구를 기준으로 앞면에 바 형식의 테이블이 있고,
이희나와 내가 마주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나는 의자에 앉아 이희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배우러 온 입장이니 선생님이 적당할 것 같은데,
이희나의 의견은 그렇지 못했나 보다. 가늘게 침음한 그가 민망한 얼굴로 콧잔등을 찡긋했다.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이 참으로 해말갛다. 구김살 없이 서글서글한 걸 보니, 앞으로 함께할 시간이
불편하진 않을 듯했다. 그러고 보면, 권이도가 괜찮다고 표현한 사람(비록 이태성뿐이었지만)들은 정말 다
대하기 편했던 것 같다.
“이태성입니다.”
가만히 있던 나까지 민망할 만큼 딱딱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희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넌지시 제안했을 뿐.
- 다음 화에 계속
41 화. Origine du parfum(3)
첫 방문이었기 때문에 공방에서의 수업은 오리엔테이션에 가까웠다. 이희나는 앞으로 진행될 수업에 관해
설명해 주고, 내킬 때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며
“괜찮아요. 두둑이 받았거든요.”라고 눈을 찡긋하기도 했다.
“다녀오셨어요?”
“…….”
짙은 시선이 내 얼굴에 따라붙었다.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기울이자 그는 입가를 가린 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짓는다.
“진작 일찍 올 걸 그랬네요.”
권이도는 고용인에게 가방을 건네주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잔잔히 풍기는 페로몬 덕에 기분이 느슨하게
풀렸다.
“…….”
순간, 키스하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얼굴은 입술이 아닌 목덜미로 향했다. 주인을
맞이하는 개처럼, 킁킁 냄새를 맡은 그가 의아한 어투로 물었다.
“향수 뿌렸습니까?”
“아…….”
“향료?”
‘숙제를 하나 내드릴게요.’
“아, 향료…….”
“이름까진 몰라서.”
“잘 썼네.”
“네, 테이블에서…….”
“공부할 방이 하나 필요하겠군요.”
권이도는 홀로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공방에 얼마나 오래 다닐지도 모르면서 방까지 내어
줄 필요는 없을 텐데.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하려 했으나, 그가 주제를 돌리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이것도 그렇고.”
“…….”
“불면증에 좋은 향은 없습니까?”
“음, 있긴 한데…….”
“새삼스러운 말을 하는군요.”
“…….”
“……말씀은 감사합니다.”
“내 침대에서 자요.”
“……예?”
“…….”
“……같이 눕습니까?”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 과정이 지나치게 쑥스럽단 생각이 든다. 첫날밤을 치르는 신혼부부도 아니고,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도 아닌데 말이다. 함께 이불로 들어가야 한다는 게 이토록 의식되는 일일 줄은
몰랐다.
“…….”
“……정세진 씨.”
“무슨…….”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듯했다.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는 내 뒤통수를 고정한 채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하고 떨어진 입술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조금 더 깊게 맞물렸다.
“…….”
온종일 향긋한 향료와 있었는데도, 그에게 풍기는 페로몬이 가장 근사하단 생각이 든다. 숨결에 섞인
잔잔한 페로몬은 권이도 특유의 묵직함과 달큼함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으응.”
아, 곧 있으면 또 히트 사이클이겠구나.
이번엔 무어라 거절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자, 권이도도 만족스럽게 나를 놓아줬다.
온몸 가득 스며든 알파 페로몬이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아늑한 안정감을 안겨 줬다.
***
“…….”
“어리광은…….”
조그만 목소리였으나 귓가에 감기는 느낌이 참으로 또렷했다. 묵직한 음성은 중독될 것처럼 그 울림이
독특했다.
“내가 깨웠습니까?”
권이도는 섬세한 손길로 내 얼굴선을 살며시 덧그렸다. 이마에서 눈썹, 반쯤 감긴 눈꼬리, 뺨을 지나 턱
아래까지.
“…….”
“……안 주무셨어요?”
“그냥 뭘 좀 생각하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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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화. Origine du parfum(4)
“지금은 다 보셨어요?”
“아뇨, 아마 평생 봐도 다 보진 못할 것 같군요.”
“넥타이…… 제가 매드릴까요?”
“…….”
“원래 한 번 보고 잘 배워서요.”
“…….”
“푸는 것도 직접 해줍니까?”
***
“어서 오세요.”
이른 시간임에도 이희나는 반갑게 웃으며 나를 맞이해 줬다. 뒤이어 들어온 이태성이 입구에 뒷짐을 지고
서자, “태성 씨도 안녕하세요.”라며 살갑게 말을 붙이기도 했다.
“숙제는 다 해오셨어요?”
“네, 여기…….”
어차피 수업료에 다 포함된 거라고, 그는 앞으로 자신이 주는 키트는 다 개인적으로 사용하면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 본 그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네, 괜찮던데요.”
대화를 나누는 지금도 공방에선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천연 오일을 사용한다고 그랬던가. 그래서인지
거부감이 느껴지는 향은 아니었다. 페로몬과는 미묘하게 다르고, 보편적으로 파는 향수와도 미묘하게 다르다.
“세진 씨.”
그렇게 모든 수업이 끝나고, 짐을 챙기는 내게 이희나가 가볍게 운을 뗐다. 이태성은 내 쪽으로 다가와
익숙하게 노트와 향료 따위가 담긴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그럼요.”
퍽 뜬금없는 질문이긴 했다. 내가 잠깐 대답을 망설이자, 그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차분히 뒷말을
덧붙였다.
“…….”
“……어릴 때 꿈이 조향사였거든요.”
“아, 그건…….”
“자격증이요?”
“사실 자격증이 있어도 취업에 직접 도움이 되는 건 아닌데, 없는 것보단 낫더라고요. 어차피 제대로 된
실무는 입사 후에 배우고…… 아, 이건 세진 씨한테는 별로 상관없는 얘기겠네요.”
이희나는 멋쩍게 입매를 당기며 눈을 찡긋했다. 취업이라. 내게는 지나치게 낯선 단어였다. 민망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
“……잠을 또 못 잤나 보군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얼굴을 구긴 모습조차 반갑게 느껴졌다면 이상할까. 나는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피곤한 눈두덩을
문질렀다. 잠을 드문드문 자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권이도는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은 아침 식사 자리에서 하기엔 지나치게 민망한
것이었다.
“…….”
그리 말하는 얼굴이 참으로 개운해 보였다. 나는 젓가락으로 더덕무침을 가져오며 오늘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오전에 공방에 다녀오고, 오후엔 혜율이를 보다가, 공방에서 내어 준 숙제는 자기 전에
하면 될 듯했다. 권이도가 이르게 퇴근한다면 오늘은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일 무슨 일이 있습니까?”
“…….”
“세진 씨 오늘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3 층에서부터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조그만 인영이 나타났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난간을 꼭 붙잡고,
똘망똘망 동그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아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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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화. Origine du parfum(5)
“어…… 안녕.”
“…….”
“……왜?”
혹시 반말을 해서 기분이 상한 걸까. 그런 생각으로 되물었지만, 권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등지고 휙 몸을 돌렸을 뿐. 그리고 내가 붙잡기도 전에, 그는 뛰듯이 걸음을 옮겨 3 층으로
사라져 버렸다.
***
“…….”
“…….”
“……그, 혜율아.”
“삼촌은 다섯 시쯤 오신대.”
권혜율은 나와 식탁을 번갈아 보며 곤란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말을 거니까 불편한가 본데,
그렇다고 음식을 남기고 자리를 뜰 수는 없나 보다. 그 사실이 못내 미안했지만, 우선은 얼굴도장을 찍고 싶은
마음이 더 커다랬다.
“……맞아요. 또 그림 볼 거예요.”
“그림이면…… 고흐?”
“아니요.”
소위 권이도 컬렉션이라고 불리는 미술품엔 세계 각지에 있는 유명 화가의 작품이 포함돼 있다. 고갱,
샤갈, 피카소와 방금 언급된 모네까지도.
“네, 제일 멋있어요.”
좋아하는 그림 얘기가 나오니 대답이 시원시원했다. 문제는, 그 대답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푸르른 연못에 연꽃이 떠 있는, 밀도 높은 유화 하나가.
“…….”
“응, 알겠어.”
“쉿.”
“…….”
“정말…….”
정말로, 수련일 줄이야.
“이게 모네 그림이에요.”
팔을 좌우로 뻗은 것보다 더 커다란 그림이었다. 녹색에 가까운 파란 연못에 부평초와 연꽃이 유유자적
떠다니고 있었다.
“……왜요?”
“오빠도 모네 좋아해요?”
“……어?”
“그래서 모네 좋아해요?”
“진짜요?”
“…….”
“…….”
“……음.”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안 된다고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웬만하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해 주고 싶었다.
“…….”
“삼촌이랑요?”
“응. 삼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들어 보고, 그다음에 혜율이 생각도 얘기해 주자. 어때?”
미안합니다, 권이도 씨. 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매달 어린 조카와 놀아 주는 사람이니, 이
위기를 잘 헤쳐 나가는 방법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도무지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오빠 아니라니까…….”
“심심하겠다…….”
“혜율아, 혹시 꽃 좋아해?”
“여기 언제 생겼어요?”
“온실?”
권혜율은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고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양옆에 한가득 심은 꽃을 구경하다가 테이블과
천장에 달린 조명을 꼼꼼히 살펴보기도 했다. 마냥 신기해하는 줄 알았더니, 퍽 진지한 말투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꽃에 물 주기 힘들겠다…….”
“…….”
권혜율은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 코를 킁킁댔다. 나한테 어떤 냄새가 났나 싶어 손등을 코에 가져다 대자,
권혜율이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렸다.
“……꽃?”
향료를 만져서 그런가. 그렇지만, 오늘 배운 향기는 플로럴 타입이 아니었다. 의아함에 눈을 깜박이는
사이, 그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단적인 설명이었지만, 아마도 페로몬일 것이다. 앞선 두 사람은 둘째치고, 권이도에게 맡았다는 냄새는
단순히 향기 따위가 아니었다. 애초에 향수를 잘 뿌리지도 않지만, 뿌린다고 해도 우디한 계열을 사용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
히트 사이클이 얼마나 남았더라. 아마 조만간일 텐데, 날짜가 불규칙하니 가늠이 되질 않았다. 혜율이를
앞에 두고 몹쓸 꼴을 보일 수는 없으니, 바짝 긴장하고 있어야 할 터였다.
“…….”
대략 30 분쯤 지났을 때, 권혜율은 책을 다리에 얹은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배부르게 밥을 먹고
디저트까지 챙겼으니, 잠기운이 밀려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조심조심 그의 손에서 책을 빼내고, 곤히
잠든 혜율이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이…….”
“두 시간…….”
“……오빠?”
“안 돼, 삼촌 약혼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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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화. Origine du parfum(6)
잠에서 깨어난 건 바깥이 어두워질 즈음이었다. 오랜만에 개운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뜨자, 캄캄해진 방
안이 나를 맞이해 줬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옆으로 누웠던 몸을 뒤척여 천장을 향해 누웠다.
“…….”
흐린 시야로 높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팔은 이마에 얹고, 다른 쪽 팔은 배에 얹은 채로. 한참을
그렇게 천장만 바라봤다. 너무 푹 자고 일어난 탓에 현실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더디기만 했다.
여기가 어디더라. 내 방이라기엔 뭔가 미묘하게 분위기가 다른데. 결정적으로 이렇게 아늑한 페로몬이
느껴질 리가 없건만.
“…….”
“…….”
“깨웠나 보네.”
“깨어 있었어요.”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답했다. 타이밍이 좋았지. 눈을 뜨자마자 권이도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다니. 내 대답에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얼굴을 만지던 손을 거둬들였다.
시간이 그렇게 늦은 건가. 몽롱한 머릿속에 아까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공방에 다녀와 혜율이를 만난
것, 함께 그림을 구경하고 온실에서 차를 마신 것, 그리고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권이도의 침대에 누운 것까지.
“혜율이는요?”
“아까 집에 갔어요.”
권이도는 침대에 걸터앉아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다리를 꼬았을 뿐인데, 그
모습이 퍽 고고해 보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
멋쩍게 눈가를 찌푸렸다. 푸스스 실없는 웃음도 함께였다. 오빠가 아니라 삼촌이라니까. 끝내 호칭을
정정해 주진 못했다.
“그래요?”
“아저씨라니…….”
“혜율이도 눈이 있을 텐데.”
“…….”
“…….”
“더 자야지.”
“오늘도 바쁘세요?”
“…….”
“잠들 때까지만 옆에 있어 주시면 안 될까요.”
“…….”
“이리 와야지.”
“…….”
“…….”
***
잠결에 주변이 너무 덥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선선한 날씨에 해가 뜨기 전까지는 바람조차 차게
느껴지는데 말이다. 뜨거운 공기가 주변을 가득 채운 것처럼 숨을 쉴 때마다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하아.”
“하…….”
“……흐으.”
‘내일 무슨 일이 있습니까?’
“…….”
“어떻게…….”
권이도는 내 히트 사이클 주기를 알고 있다. 가정을 확신으로 바꾸는 증거는 충분했다. 나조차 예상하지
못하고, 의사마저 알 수 없다고 대답한 주기를 어째서인지 그는 정확히 꿰고 있는 것이다.
“흣…….”
간헐적으로 생각이 끊겼다.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에 관한 의문과 끝없이 차오르는 욕망이 서로 충돌했다.
그러다 끝내 승기를 든 건 후자였다.
“하아…….”
엉금엉금 몸을 움직여 이불을 끌어모았다. 그대로 품에 안자, 권이도의 페로몬이 한가득 밀려들었다.
나무처럼 고요하고 묵직한, 우성 알파 특유의 감미로운 페로몬. 비 오는 날 그와 입을 맞췄던 기억처럼, 잔잔히
감겨드는 차분한 향기.
“……흐.”
“아…….”
“…….”
“하아, 권이도…….”
“하아, 하아…….”
“…….”
“흐으…….”
“흣, 으…….”
나는 권이도가 그랬던 것처럼 내벽을 꾹꾹 문질렀다. 그러나 상상과 현실엔 좁히려야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단숨에 내가 느끼는 부분을 찾았던 그와는 달리, 나는 불편한 자세와 도무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손가락을 가지고 씨름해야 했다.
“……으.”
하나부터 열까지 죄 엉망진창인 행위였다. 분명 내 몸이 맞는데, 나조차 어디를 만져야 제대로 느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요령 없이 뒤를 풀어 주다가 혀를 내민 채로 헐떡헐떡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권이도…….”
이렇게 달뜬 몸도, 페로몬처럼 섞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권이도가 내 다리를
벌리고 깊숙이 삽입해 주면 바랄 게 없을 텐데.
“……하아.”
“흣……!”
“흐읏…….”
기다랗고 곧은 손가락을 떠올렸다. 여리여리한 생김새는 아니었으나 손톱 끝까지 단정한 모양이긴 했다.
그럼에도 뼈마디는 굵었고, 손등엔 볼록하게 핏줄 따위가 도드라져 있었다.
“으응…….”
그 손이 마구잡이로 나를 주무르는 장면을 떠올렸다. 톡 튀어나온 유두를 꼬집고 드러난 상체를 매만지며
아래로 향하던 손길을. 그리고 삽입을 위해 뒤를 풀던 그 감각까지.
손목을 움직여 안쪽을 넓혀 갔다. 다른 손으로는 침대를 더듬어 가며 권이도에게 연락할 수단을 찾기
시작했다. 전화하라고 했으니, 핸드폰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여보세요.
“…….”
명치가 확 조여들었다. 단순히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그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성감이 고조됐다. 나는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고 양손으로 발기한 성기를 감싸 쥐었다.
-……정세진 씨?
정액인지, 아니면 오메가의 애액인지. 미끄덩거리는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금방 갈 거예요. 지금 거의
다 왔고…….” 전화 너머로 권이도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 집중한 채 기둥을 살짝
쓸어내렸다.
“……흣, 네.”
“흐…….”
-……근데 정세진 씨.
기분 탓일까.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귓가를 파고든 음성이 심장을 콱 붙들고 흔드는 것만 같았다.
- 다음 화에 계속
45 화. Origine du parfum(7)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정신도 아니었고, 그가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뒤척였을 뿐.
“……흐.”
-…….
“하아…….”
-…….
“흣, 으응…….”
“……권이도 씨.”
-얘기해요.
“흣, 빨리…….”
“빨리 와요…….”
-…….
“……흐.”
“…….”
“…….”
“…….”
“……왔어요?”
그가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단정히 정리되었던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침대로 올라온 권이도가 나를 번쩍 들어 침대에 가지런히 눕혔다.
“이것도 재주지.”
“…….”
“얼른, 얼른 해요…….”
“빨리 넣어 줘…….”
“……하.”
“너 바로 못 넣잖아, 세진아.”
“아…….”
권이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즐거워서가 아니라, 차오르는 욕망을 참지 못해서. 짙은 눈동자가
음습하게 가라앉고 비틀린 입매에서 갈라지는 목소리가 나왔다.
“아흑……!”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듯했다. 그가 공들여 풀어 놔도 조금은 버겁던 행위였다. 그런데 내가 어설프게
준비한 상태에선 어떻겠는가. 내벽이 빠듯하게 벌어지는 감각은 통증과 함께 강렬한 쾌감이 수반됐다.
“…….”
나는 신음조차 흘리지 못한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덜덜 떨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탈색되는 순간,
상체에 묽은 액체가 터져 나왔다. 권이도는 무언가 가늠하듯 허리를 가볍게 튕기곤, 내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대충 벗겨 냈다.
“아, 아파…….”
“……엄살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그렇게 말하며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가지 말라는 의미로 허리에
다리를 감았는데 그는 애초에 뺄 생각이 없던 것처럼 거칠게 아래를 꿰뚫었다.
“하으응!”
“으읏, 흐…….”
“놔줘야 내가 움직이지.”
“힘 풀어.”
“흐읏…….”
“……아, 아흣!”
그런데 그러한 와중에도 나를 몰아붙이는 힘만큼은 자비가 없었다. 난잡하게 아래를 헤집던 그는 내가
유독 커다란 반응을 보일 때면 눈치 빠르게 그 지점을 놓치지 않았다.
“흣, 으응…….”
“하…… 진짜.”
“아으, 흣, 흐응.”
“흣, 옷이…….”
“세진아.”
집중하라는 듯,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무심코 마주친 시선은 나처럼 흥분에 잠식돼 있었다. 풀풀
풍기는 페로몬은 이제 내 온몸을 물들일 것처럼 한가득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집중해야지.”
“……아흣!”
“아, 아흐……!”
그는 내가 엄살을 부리는 건지, 아니면 정말 아파하는 건지 기가 막히게 알아냈다. 투정을 부리듯 고개를
저어 봤자, 속도를 늦춰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깊숙이 들어왔다가 반쯤 빠져나간 성기가 배꼽 아래쪽을 길게
긁으며 들어왔다.
“아흐……!”
“……후.”
“하으, 응, 좋아…….”
“흐으응…….”
“……흐.”
“하아…….”
나는 숨을 몰아쉬며 느릿느릿 권이도에게 물었다. 그때까지도 사정의 여운을 즐기던 권이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어깻죽지에 뺨을 대고 있는 모양새가, 그답지 않게 귀엽게 느껴졌다.
“그럼 한 번 해볼까요.”
“흣, 뭐를…….”
푹, 내벽이 거칠게 꿰뚫렸다. 어느 포인트에서 다시 흥분했는지 그에게선 열기로 가득한 페로몬이 한가득
느껴졌다. 물론, 내 페로몬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그만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그냥, 두려울 정도로 차오른 열락에 위기감이 들었을 뿐. 이러다 뇌가
잘못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하으, 흣, 으…….”
“더 해볼래요?”
“……흐읍.”
“…….”
“으응…….”
“하아…….”
“……흣.”
그럼, 다음에 급하지 않으면 하겠다는 말일까.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침대에선 왜 이렇게 천박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상처 내.”
“아, 흑!”
- 다음 화에 계속
46 화. Origine du parfum(8)
“…….”
내게는 늘 다정한 그였으나 이렇게 편안히 눈을 감은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긴장감이 사라진 표정은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목구멍이 간질거릴 만큼 미묘했다. 하염없이 멍한 눈으로 권이도의 얼굴을 구경해야 할
정도였다.
‘흣, 그만…….’
‘힘들면 자.’
‘그게…… 흐…….’
나는 한참이나 가만히 그 잘생긴 얼굴을 구경했다. 어제, 짐승처럼 몰아붙이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금욕적인 외모였다. 어떻게 자는 얼굴마저 이럴 수가 있는지. 딱히 얼굴을 밝히는 건 아니었는데, 가끔
권이도를 보면 그 생각이 뿌리째 흔들리곤 했다.
……그보다, 팔 저릴 것 같은데.
“…….”
풀썩, 그의 품으로 무너졌다. 두근거리는 박동이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졌다. 권이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크게 뜨자, 머리맡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고 아침부터 들리는 음성이 참 외설스럽게 느껴져서.
움찔거리며 어깨를 움츠리자 그가 팔과 다리로 내 몸을 꽉 옭아맸다.
“더 자, 세진아.”
참, 한가로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둘째치고 권이도는 일을 나가야 할 텐데. 지금이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어나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권이도건만.
“출근 안 하세요?”
“5 분만…….”
“…….”
“5 분만 이러고 있죠.”
“……숨 막히는데.”
“이러고 있는 게 부끄러워요?”
“…….”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내가 느끼는 민망함을 그는 정확하게 꿰뚫어 봤다. 은근슬쩍 시선을 돌리려는데
이번엔 그보다 더 수위 높은 말이 나왔다.
“……음.”
“저녁 먹기 전에 올 거예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순간을 아쉬워하듯 권이도도 그렇지 않을까 하고. 괜히 뻔한 질문을
하는 이유가 내가 잠드는 게 아쉬워서는 아닐까 하고.
“…….”
“……왜 그러세요?”
“아니…….”
“내 의견을 물을 줄 몰랐거든요.”
나직이 이야기한 권이도가 가만히 시선을 맞췄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물은 건데, 그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마치 내가 오랜 시간 갈등했단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언젠가 권이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실제로 조향을 배우고 있으니, 결국엔 그의 말대로 된 것이었다.
빈말을 하지 않는 그답게 지금 하는 말도 빈말은 아닐 터였다.
“……그렇군요.”
자격증을 한 번 따볼까.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아도 언젠가 지금의 경험을 추억할 거리는 될 듯했다. 그때,
권이도가 내게 그런 기회를 줬었지. 딱 그 정도면 남겨 놔도 가치 있지 않을까.
한창 그러한 생각에 잠겼는데, 권이도가 생뚱맞은 주제를 꺼냈다. 향수 사업? 그렇게 되묻기도 전에
그가 살짝 고개를 까딱했다.
“투자의 일종으로.”
“……투자 말씀입니까?”
그리 이야기한 권이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웃는 것처럼 휘어진 눈매가 왠지 모르게 의뭉스럽게 보였다.
이 얘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타이밍에, 이런 이야기를, 굳이 내게 꺼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목덜미로 내려왔다. 살금살금 맨살을 덧그리다가 티셔츠 옷깃에 가려진 뒤쪽 목뼈를
매만진다. 기다란 손가락이 닿는 감촉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원하는 향수를 만들어도 괜찮고…… 아니면 경영 쪽으로 일해도 되고. 마케팅 상품을 개발해 봐도
좋습니다.”
“직업 체험?”
“괜찮은 표현이네.”
“농담도…….”
“…….”
누군가 들었다간 논란거리가 돼도 이상하지 않을 말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뜨리자, 그가 티셔츠
위로 은근히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그런 게 아니라…….”
손길이 이상하리만치 농밀했다. 척추뼈를 하나하나 덧그리며 내려오더니, 옷자락 아래 드러난 허벅지를
부드럽게 움켜쥔다. 움찔, 다리를 오므리는 순간 그가 한쪽 다리를 내 다리 사이에 끼워 넣었다.
티셔츠 속으로 권이도의 손이 파고들었다. 허벅지 옆에서부터 골반을 따라 올라오더니 이번엔 손가락으로
간질간질 등을 지분거리기 시작한다. 찌푸린 내 눈가에 입을 맞춘 그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잠시만…….”
“뭐 하시는…… 흣.”
살랑살랑 페로몬이 풍겨 왔다. 다리 사이로 들어온 무릎이 지그시 중심부를 눌렀다. 본능적으로 그의
등을 끌어안자 그가 티셔츠 속에 있던 손을 내 가슴께로 옮겨 왔다.
“아……!”
그가 밤새 괴롭힌 탓에, 유두가 조금 부어 있었다. 예민한 살결이 스치자 따끔한 감각과 함께 신음이
흘러나왔다. 쪽, 쪽, 드러난 목에 입을 맞춘 그가 피아노를 치듯 갈비뼈 부근을 어루만졌다.
“안 돼요…… 더 못 합니다.”
“……읏.”
“어차피 거절 못 하는 거 알 텐데.”
“…….”
“취업이라니…….”
“…….”
47 화. Origine du parfum(9)
“…….”
“……이름은요?”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내, 느리게 움직인 입술이
하나하나 익숙한 알파벳을 읊조렸다.
“S, E, J, I, N.”
“…….”
“세진.”
“……허.”
“……권이도 씨.”
“얼마나 줄까요.”
“…….”
“일주일을 주죠.”
***
‘일주일을 주죠.’
‘차를 하나 더 줘야겠군요.’
이태성은 공방에 다니는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뒷짐을 진 채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이희나가 항상
앉으라고 권유했지만 매번 이게 편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온실에서 그랬듯, 중간부터는 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계속 무뚝뚝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렇게, 오늘로 공방에서의 모든 수업을 마치게 되었다. 2 주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향사라는 직종을
단적으로 배우기엔 충분했다. 애초에 원데이클래스 정도를 생각했으니, 이 정도면 오랜 시간을 함께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아…… 네, 그랬었죠.”
“이쪽 관련 일 하실 거죠?”
“네?”
“…….”
“아니었나요?”
“그 나이엔 뭐든 할 수 있어요.”
“하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운을 뗐다. 이희나는 데구루루 시선을 굴리며 언젠가를 회상하는 듯 보였다.
“아…… 힘드시겠어요.”
모르긴 몰라도, 꽤 큰 병이었던 모양이다. 이희나는 지금은 다 완치됐다고 덧붙이며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근데 최근에 공부를 다시 하신대요. 장애인 전형으로 고시를 치를 수 있어서, 지금부터 일하고 10 년
정도 뒤에 정년 퇴임하면 연금이 나온다나 봐요.”
“…….”
“……헛짓거리라뇨.”
황당함에 웃음이 터졌다. 적나라한 표현에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부드럽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
“생각은 해봤습니까?”
“자격증 따려고요.”
며칠간 틈틈이 생각했다.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새로운 걸 해본다는 사실이 염려스럽긴
했으니까. 긴 시간 고민하고, 권이도의 확답까지 들었으니 더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회사는…….”
“…….”
거절하지 못할 거라면 흔쾌히 받아들이는 편이 마음 편하지 않을까. 내게도, 그리고 권이도에게도 말이다.
“잘 생각했어요.”
“조건?”
“원하는 거라…….”
“…….”
“몸도 괜찮고.”
천천히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달큼한 음성이 요구한 한 가지가 지나치게 로맨틱했다. 권이도는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고상하게 턱을 당겼다.
“시간이 얼마가 걸려도 좋아요. 만약 금전적인 지원이 필요하면 나한테 얘기하고, 그 외에도 요구 사항이
있으면 들어주죠.”
“……그건 그렇지만.”
“대답은?”
자신이 없다고 해볼까. 그리 생각했다가 관두기로 했다. 내가 먼저 제안해 놓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게 옳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못 이기겠다는 듯 눈가를 찡긋했다.
“오래 걸릴 겁니다.”
- 다음 화에 계속
48 화. Bonheur quotidien(1)
“후…….”
빼곡히 채워진 장식품은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정확한 사이즈의 옷들, 이름
모를 보석이 박힌 넥타이핀, 내 손목에 꼭 맞는 손목시계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두까지.
“일을 하게 될 줄 몰랐지…….”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냥 조금 긴장이 된다면 모를까. 언젠가 처음으로 해신에 출근하던 그때처럼,
눈을 뜬 순간부터 미묘하게 비현실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
***
“…….”
“…….”
“……기분은 좀 어떻습니까?”
늘 권이도를 배웅하던 지금까지와 달리, 오늘은 둘이 함께 현관을 나서야 했다. 그때까지도 권이도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나는 괜히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기분이 안 좋은 건지, 그렇다면 왜
갑자기 안 좋아졌는지. 그러한 것들을 묻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
“왜 그러시…….”
“……!”
“…….”
“숨 쉬어.”
“…….”
“…….”
쪽쪽거리는 소리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그에게 몰입해 열심히 페로몬을 받아먹기
바빴다.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할 때는, 그가 내 허벅지 사이에 제 다리를 끼워 넣어 온몸으로 나를 받쳐 왔다.
“……흣.”
“으응, 잠시만…….”
“세진아.”
“그냥 집에 있을래?”
“…….”
“…….”
“어떻게 생각합니까?”
“……억지를 부리시네요.”
딱히, 상관없지 않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별다른 미련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권이도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
“……원래 방은 따로 쓰지 않았습니까.”
“잘 어울리네요. 옷 입은 거.”
“옷 사준 사람 센스가 좋아서요.”
자신이 투자하는 사업이면서, 권이도는 뻔뻔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반드시 저녁을 먹기 전엔
돌아오라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신신당부를 하기도 했다. 정말 바쁘게 일하던 게 누군데, 이제 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굴고 있다.
“이따 뵐게요.”
나는 그에게 가벼운 묵례를 건네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이태성이 뒷문을 닫아 주고 운전석에 오를 때까지
권이도는 못이 박힌 것처럼 제자리에 서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그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가 대표로 일하게 될 향수 회사는 엄밀히 따지면 향수 하나만을 다루지는 않았다. 우선은 선호와
연계해 여러 방향제 따위를 납품하고, 더 나아가면 코스메틱 브랜드로서 여러 화장품도 개발할 예정이었다.
지금은 스타트업 수준의 소규모 기업이지만, 선호의 투자를 받는 한 성장은 금방일 것이다.
며칠 전 권이도가 건네준 사업 계획서엔 이러한 내용들이 꼼꼼히 적혀 있었다. 나는 그가 제안한 최소
투자금을 듣고 놀랐다가, 손익 분기점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헛웃음을 흘렸다. ‘투자’의 기본은
수익률일 터인데, 이렇게 되면 권이도가 하는 건 그냥 기부가 되지 않는가.
“세진이라니…….”
“예?”
이태성은 퍽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내가 “그래요?”라고 되묻자 핸들을 돌리며 한마디 덧붙이기도
했다.
“날 위해 만든 것 같아서 그렇지…….”
그런데 모든 과정이 이 회사가 후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름부터 내용, 그리고 지나치게 좋은
조건까지. 마침 추진하던 사업에서 한자리 내어 준 게 아니라, 내게 한자리를 주기 위해 회사 하나를 통으로
차린 것처럼.
“본부장님.”
“…….”
- 다음 화에 계속
49 화. Bonheur quotidien(2)
말문이 턱 막혔다. 혹시 일부러 이러나 싶었는데, 이태성은 정말 괜찮은 호칭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도무지 반박할 말이 없어서 그냥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고 말았다.
“말씀하세요.”
“다른 게 아니라…….”
공방? 백미러로 이태성의 표정을 살폈다. 그냥 궁금할 수는 있어도,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내 일정을 궁금해하진 않았는데.
“…….”
핸들을 움켜쥔 손이 순간 움찔했다. 뒤이어 흐르는 침묵엔 잔뜩 어색한 기색이 가득했다. 한참이나
말없이 있던 그는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출 즈음에야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 사람 얘기가 왜 나옵니까?”
“그 사람이 누군데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묻자, 그가 핸들을 꾹 움켜쥐는 게 보였다. 자꾸 놀려 버릇하면 안 되는데,
반응이 재밌어서 괜히 건드리게 된다. 나는 소리 없이 웃음을 삼키며 넌지시 이야기했다.
“…….”
이태성은 이번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라고 잡아떼는 것조차 어느 정도 뻔뻔한 성미여야
가능한가 보다. 묵묵히 운전에 집중하는 모습이, 요령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전 연애 경험이 없어서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십니까.”
“제 말 안 믿으시네요.”
“예, 안 믿습니다.”
“뭐…… 딱히 눈이 높진 않은데.”
“…….”
그 말에는 그냥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하는 게 연애인가.’라는 의문과 ‘이태성은 이
약혼의 전말까지는 모르는구나.’라는 깨달음이 함께 찾아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권이도를 내 첫 상대라고 일컬을
리가 없으니.
“정세진 대표님?”
“정세진입니다.”
“윤 팀장이라고 불러 주세요.”
기존에 일하던 사무실도 나쁘진 않았지만, 역시 새로 지은 건물에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해신은 연식이
오래된 만큼 사내 시설도 많이 낡은 감이 있었다. 리모델링을 하자고 제안하고 싶었으나, 아버지에게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해서 굳이 입에 올리진 않았다.
“흠흠.”
내가 사무실 안에 들어서자 윤 팀장이 가볍게 헛기침해 주의를 끌었다. 아니, 딱히 시선을 끌 필요도
없긴 했다.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직원들이 한참 전부터 내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한가득 쏠린 시선은,
마치 처음으로 본부장 자리에 올랐던 그때를 생각나게 했다.
“정세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 시작하는 단계지만, 앞으로 회사가 더 성장할 수 있으면 합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으니 많이 배워
가도록 하겠습니다.”
대표님, 대표님. 아무래도 이 호칭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나 보다. 이태성은 둘째치고 회사 사람들이
부르는 것까지 막지는 못할 테니까. 아마 시간이 지나면 지금처럼 민망하진 않을 터였다.
윤 팀장이 안내해 준 방은 사무실과는 분리된 독립적인 공간이었다. 벽면은 불투명한 창으로 되어 있고,
벽면 가득 커다란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소파와 테이블, 책상과 책장. 기본적인 가구만 놓인 내부는 널찍한
창문 덕에 채광도 퍽 훌륭했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멀거니 창밖을 내다봤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경영기획팀도 10 층이었지. 그곳에서 보는 풍경도 이것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
때로는 사소한 일상이 현재의 만족감을 극대화시키는 계기가 되곤 한다. 그와의 저녁 식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한결 좋아졌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아들로 사는 몇 년간,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평온함이었다.
***
그리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을 무렵. 나는 하던 업무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날부터 늦게까지
일하면 직원들이 눈치를 살피느라 퇴근하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대충 집에 갈 채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타이밍 좋게 이태성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 어디 가십니까?”
“회식 안 하십니까?”
“……회식?”
“대표님, 벌써 들어가세요?”
“어…….”
***
-……술 마십니까?
“아뇨, 술은 안 마실 겁니다.”
음주를 즐기지도 않는 데다, 어색한 사람만 가득한데 마시고 싶지도 않았다.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몇 잔
마실 수는 있어도, 그 정도로는 취하지도 않았다.
“일찍 들어갈게요.”
가볍게 말했지만, 권이도는 긍정의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저 픽 웃음을 흘리며 집에서 기다리겠다고
대답했을 뿐. 빈말로라도 그러라고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정말 약혼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 이따 뵐게요.”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식당에는 이미 대부분의 직원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태성은 차에서 기다린다고
했기 때문에 식당으로 들어선 사람은 나 혼자였다. 일이 있으면 편하게 가도 된다고 했는데, 정작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대표님!”
잠깐 어디에 앉을지 고민하는 내게, 그나마 익숙한 얼굴의 윤 팀장이 알은체를 해왔다. 윤 팀장의
테이블엔 경영지원팀 직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인제 보니 각각 팀별로 친한 사람끼리 모여 앉은 듯했다.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윤 팀장이 슬쩍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대표님, 여기 금액대가…….”
“아.”
무심코 주변을 둘러봤다. 바짝 긴장한 직원들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메뉴판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아마 저 안에도 가격은 없을 터다. 나는 최대한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비어 있던 자리에
앉았다.
줄줄이 나오는 술과 고기를 보고 직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윤 팀장이 건네는 수저를 받으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얘기했다.
- 다음 화에 계속
50 화. Bonheur quotidien(3)
맨 처음, 팀원들을 이곳에 데려왔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었다. 다들 눈치만 살피고 메뉴는
고르지도 못한 채 바짝 긴장해 있던 것이다. 건물부터 고풍스러운 한옥 구조인 데다, 이래저래 쓸데없이 격식
있는 분위기를 풍겨서 그런 모양이었다.
“어어, 제가 구울게요!”
“……회식을 항상 이런 데서 하셨어요?”
“뭐…… 늘 그런 건 아니고요.”
장난스레 말하자 윤 팀장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서 여긴 얼마냐고 묻기에, 그냥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고만 대답했다. 나도 확실히는 몰랐고, 나를 대신해 내 카드로 계산했던 김 실장만이 정확한 금액을 알고
있을 것이다.
“대표님, 한잔 받으시죠.”
“대표님, 여기 너무 맛있는데요?”
“대표님! 저도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아, 저는…….”
“잠시만요.”
“대표님, 저도요!”
“제 잔도 받아 주십쇼!”
“대표님, 제가 쌈 하나 싸드릴게요!”
“G 사에서 나온 향수인데…….”
놀랍게도, 그들은 이름을 듣자마자 어떤 제품인지 알아차렸다. 마니아층에게 유명한 제품인지, 한 직원은
연도별로 컬렉션을 모았다며 사진까지 보여 줬다. 다른 한 직원은 가격이 너무 비싸 고민하다가 시기를 놓쳤다고
했다.
“어디 건 줄 알면 살 수 있어요?”
“당연히 못 사지.”
“봐봐, 근데 뭘 물어봐.”
나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저들끼리 키득거리며 대화가 마무리됐다.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는 모습이
무척이나 친해 보였다. 지금 친해진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시간이 너무 지체됐단 사실을 깨달았다. 차에서는 이태성이 기다리고,
집에서는 권이도가 기다릴 텐데. 이제는 슬슬 돌아가야 할 때였다.
“대표님 벌써 가세요?”
“조금만 더 있다 가세요!”
다행히 직원들은 곤란할 정도로 나를 붙잡지는 않았다. 계속 아쉬운 티를 내긴 했지만, 마지막엔 조심히
들어가시라며 꾸벅꾸벅 인사를 건넸다. 오늘 감사했다는 말을 끝으로, 나는 시끌벅적한 가게를 나와 바깥으로
향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제는 꽤 따듯해진 밤공기가 나를 맞이해 줬다. 웅웅거리던 소음이 사라진
터라 알싸하게 올랐던 술기운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얼굴이 홧홧거리는 것 같아서, 들고 있던
재킷을 굳이 입지는 않았다.
“후우…….”
뚜르르, 신호음이 울리는 시간은 평소보다 조금 더 길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지. 그리 생각할
즈음에야 길게 이어지던 신호음이 뚝 끊겼다. 그리고 전화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
멈칫, 몸을 똑바로 세웠다. 인상을 찌푸리며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자 ‘김 실장’이라는 이름이 나타나
있었다. 습관처럼, 이태성이 아닌 김 실장에게 연락한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도련님?
“아…… 김 실장님.”
-……술 드신 겁니까?
“…….”
“김 실장님.”
-예.
“회식을 했어요.”
-회식…… 말씀입니까?
-…….
가까이 다가온 이태성이 의아한 눈을 해보였다. 누구냐고 묻진 않았고 차에 있겠다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나는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며 어두컴컴해진 주변을 둘러봤다.
-…….
“습관이 참 무섭네요.”
-모시러 가겠습니다.
***
“그 말 오랜만에 듣네요.”
“…….”
‘모시러 가겠습니다.’
아까, 그렇게 말한 김 실장은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가만히
서 있다가, 이태성에게 다가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미안하지만, 데리러 올 사람이 있으니 오늘은 이만 퇴근해도
좋다고.
‘같이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김 실장이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이보다 더 어색할 수 없는 만남을 가졌다. 서로에게 아무런
인사도 하지 않았고, 그냥 나를 사이에 둔 채 시선만 교환했다. 나도 서로를 소개해 주진 않았기에 아마
이름조차 모른 채 스쳐 지나갔을 터였다.
‘……뒤에서 따라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김 실장님.”
“예.”
“대표…….”
“그리고…….”
나는 느리게 운을 떼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움직이는 밤 풍경이 아스라이 잔상을 남겼다.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보고 있노라니, 권이도와 함께 봤던 한강 풍경이 떠올랐다.
“김 실장님.”
“예, 도련님.”
“…….”
“저는…….”
“…….”
“……재미있는 말을 하시네요.”
픽 웃음이 나왔다. 취기는 물론, 잠기운까지 쏟아져서 머리가 생각을 이어 가는 속도가 느렸다.
“‘그렇게까지’라니.”
“…….”
“권이도 씨가 뭘 더 한 줄 알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중에는 괜히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재킷은 아까부터 입지도 않았고,
목이 갑갑해서 단추도 두어 개 풀어 놨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흠칫 놀라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야만 했다.
“…….”
“…….”
“늦었네요.”
- 다음 화에 계속
51 화. Bonheur quotidien(4)
“……왜 여기 계세요?”
“왜일 것 같습니까?”
“…….”
뒷덜미가 서늘하게 식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페로몬이 그의 기분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듯했다. 권이도는
대답 없는 나를 보고 상냥히 운을 뗐다.
“…….”
“…….”
“…….”
“대답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너그럽게 선택지를 주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고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똑똑해서 좋군요.”
“하하…….”
“권이도 씨 되게…….”
“바가지 긁는 남편 같네요.”
“…….”
“…….”
“안 그래요, 여보?”
“…….”
“왜 피합니까?”
“많이 안 마셨다면서요.”
“그래도 마신 건 마신 거죠.”
“……종일 밖에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씻고.”
“…….”
“씻고 올게요.”
그가 움직임을 멈췄다. 가늘게 길어진 시선에 불만스러움이 가득했다. 본인은 퇴근하면 늘 샤워부터
하면서. 내가 씻고 오겠다는 말에 뭘 망설이는지 모르겠다.
“씻으면서 하죠.”
***
“흣…….”
샤워기에서 떨어진 물이 자욱한 수증기를 만들었다. 뜨겁고 습한 공기 속에서 나는 너른 품에 매달려
연신 숨을 헐떡였다. 쏴아아, 물이 쏟아지는 소리에 질척질척 민망한 소리가 섞여 들었다.
“아……. 흐응…….”
굵은 손가락이 세 개까지 들어와 내벽을 넓히기 시작했다. 아래가 빠듯이 벌어지고, 간신히 서 있는
다리에 힘이 풀리길 반복했다.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신음을 흘리자, 권이도가 내 허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안이 엄청 뜨겁네.”
‘씻으면서 하죠.’
“씻고…… 읏, 씻고 하자니까…….”
“씻고 있잖아.”
“아흣……!”
“흐…… 그만…….”
“으응, 흐…….”
“전자는 아닌 것 같네.”
“……!”
푹, 굵은 성기가 뿌리 끝까지 삽입됐다. 준비를 할 시간도 없었고, 그렇다고 무언가 전조가 있지도
않았다. 아래에서 위로 거칠게 꿰뚫는 감각이 숨이 턱 막힐 만큼 묵직했다.
“아…….”
“흐…….”
“……착하지.”
“입 벌려 봐요.”
“……흐읍.”
맞닿은 입술에서 페로몬이 넘어왔다. 뭉텅뭉텅 전해지는 숨결이 성감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아팠던 감각 대신 찌르르한 쾌감이 그 빈자리를 채워 갔다.
“아흐응……!”
권이도는 귀신같은 눈치로 내가 괜찮아졌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긴장이 조금 풀리는 순간, 망설이지 않고
허리를 움직인 것이다. 가장 느끼는 부분을 툭 건드리는 바람에 자지러지듯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왜 안 돼, 응?”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간절히 애원하기도 했다. 이건 너무 힘들고, 자세도
불편하다고. 다리가 아프다고 우는소리를 하자 그가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하.”
“아흑……!”
뒤에서, 묵직한 물건이 단숨에 밀려 들어왔다. 이번에야말로 다리가 풀렸지만, 그가 양팔로 내 허리를
감싸 단단히 고정했다. 벽에 바짝 밀착한 채 도망가려고 하자, 그가 어림없다는 듯이 하반신을 빈틈없이 밀착했다.
“힘 빼야지. 배 결리겠네.”
“아흐으……!”
“아흐, 흣, 흐응!”
그런데 바닥에 무릎이 닿는 순간,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말았다. 벽면 가까이 밀착하는 바람에
도망칠 곳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허벅지를 세운 채로 다리가 벌어지고, 뒤에서는 권이도가 빈틈없이 나를
내리눌렀다.
양손으로 벽을 짚고 상체를 밀착했다. 권이도는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허벅지 안쪽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다른 손은 가슴께로 가져온 그가 꼿꼿이 선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문질렀다.
“하아, 흐, 으응…….”
“아흐, 흣…….”
그는 느릿느릿 성기를 빼내어 푹, 깊숙이 삽입했다. 아까처럼 빠르게 몰아붙이진 않았지만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묵직한 쾌감이 쏟아졌다. 뒤에서 어깻죽지를 깨문 그가 꾸욱 성기를 밀어 넣었다.
“흣……!”
“아, 흐응!”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늦어서건, 아니면 술을 마셔서건. 나를 못살게 구는 이유가
분명 있을 터였다.
“…….”
“하으…….”
“……세진아.”
“후응…….”
***
권이도와의 섹스는 무척이나 좋았지만, 하루가 지나면 체력이 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첫
출근을 앞뒀을 땐 구태여 그를 두고 내 방으로 가서 잔 것이었다. 일을 쉴 때야 늘어지게 잠을 잤다지만, 출근을
하는 이상 제시간에 맞춰 눈을 떠야 했으니까.
“…….”
그래서…… 지금이 대체 몇 시지.
“…….”
권이도는 나른한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했다. 문제는, 방이 이렇게 환할 정도면 슬슬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 정도.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속아 넘어가 주고 싶었다.
“숙취는?”
“그 정도로 안 마셨습니다.”
“그래요?”
“…….”
“생각을 해봤거든요.”
“…….”
어감이 참 미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 실장이 ‘다른 남자’라고 칭해질 상대는 아닌데 말이다.
권이도는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간지럽히며 넌지시 물어 왔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 다음 화에 계속
52 화. Bonheur quotidien(5)
“음…….”
가느다란 침음성을 흘리며 자세를 조금 더 편하게 바꿨다. 꾸물꾸물 다리를 움직이자, 이불 아래에서
하체가 겹쳐졌다. 그러다 문득, 주먹 쥔 손가락에서 무언가 딱딱한 금속이 느껴졌다.
“…….”
“……권이도 씨.”
“얘기해요.”
그런데 그의 의도를 파헤치는 게, 지금의 평화를 망치게 된다면 어떨까. 지금 이 찰나의 행복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면 어떨까. 우리의 관계가, 끝내 헤어짐으로 남아 버리면 어쩌면 좋을까.
김 실장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끝없이 떠오르는 가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난생처음 느끼는 다정함을
잃고 싶지 않아서, 굳이 내가 가진 의문을 해소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왔다면,
이제는 현실을 외면하며 그의 품에 안주하고 싶었다.
“…….”
“…….”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말하면 어감이 좀 그렇지 않나. 황당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가 가만히 입매를 말아 올렸다.
“농담이에요.”
짙은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얄팍한 눈꺼풀이 움직일 때마다 기다란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이 거리에서, 권이도를 본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렇게 편한 차림을 본 건 나밖에 없을
듯했다.
“꼭 비서라서 그렇다기보단…….”
“……그럼 나는?”
“…….”
단언컨대 질투는 아니었다. 유치하게 내 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심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언뜻 차분해
보이는 두 눈에 잔뜩 복잡한 감정이 가득했다.
“……그러게. 나도 그걸 모르겠네.”
***
“대표님, 오셨어요.”
회사에 출근했을 때, 직원들은 어제 고깃집에서 헤어질 때처럼 활달하게 나를 맞이해 줬다. 술김에 잠깐
친화력이 높아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오늘까지 유효한 친분이었나 보다. 나를 향한 경계심이 많이 사그라진 걸
보니,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체 브랜드인 ‘Sejin’은 올여름 론칭으로 기획돼 있었다. 현재 웬만한 제품은 개발이 끝난 단계였고,
디자인과 네이밍만 남아 있다고 한다. 선호 계열사의 백화점에 가장 처음 입점한다고 하니, 자본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는 부분이다.
“네,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레이블을 바꾸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디자인 로고까지 뽑은 상태에서 갑자기 일거리를
하나 더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아마 권이도도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예상했겠지.
나는 보고서를 내려놓고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점심 식사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끼니를
뭐로 때울까, 그리 고민하는 와중에 문득 출근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가지고 싶은 걸 사도 되고.’
지난 경험상, 권유가 아니라 강요였다. 진작 카드로 줄 걸 그랬다는 말을 들으니, ‘가지고 싶은 게
있냐.’라는 질문의 연장선인 게 분명했다. 그래, 그래도 이건 안 쓰면 그만이지.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권이도가
정확히 내 생각을 꿰뚫어 봤다.
‘…….’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래도 어제는 대표님 덕에 맛있는 걸 먹었다고 덧붙였다. 이태성에게 들으니,
그래 봤자 별거 먹지도 않았던데. 사실 양껏 비싼 걸 먹기에도 눈치가 보이긴 했을 거다.
***
“왔어요?”
“…….”
“왜?”
“아뇨, 그냥…….”
“동거인이 있는 게 좋긴 하네요.”
“…….”
“온실이요?”
온실에는 앞서 고용인이 준비한 복사꽃 차가 있었다. 미리 조명도 켜놓았기에, 은은한 색감의 불빛이
온실 내부를 예쁘게 밝혀 주었다. 진한 분홍빛의 꽃잎이 둥둥 떠 있는 찻잔에선 옅은 복사꽃 향기가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권이도가 주변을 둘러봤다. 왼손으로는 찻잔의 손잡이를 가볍게 쥐고 있었다.
곧은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조명의 불빛을 따라 반짝거렸다.
“일은 할 만해요?”
“카드?”
“쓰고 싶은 데 써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권이도는 어딘지 모르게 처연해 보였다. 분명 기분 좋은 얼굴로 웃고 있는데, 왜 그렇게
느꼈는지 모를 노릇이다. 짧은 찰나, 스쳐 지나간 표정을 보고 나는 테이블 너머 그에게 손을 뻗었다.
“…….”
***
권이도는 쉴새 없이 바빠진 나를 보고 이따금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 그렇게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는데 귀가가 늦을 때면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조금 그래 보였다. 그리고 그런 날엔,
예외 없이 밤이 깊을 때까지 침대 위에서 유독 집요한 괴롭힘을 받아 줘야만 했다.
이후, 또 한 번 찾아온 히트 사이클은 타이밍 좋게 정확히 주말과 겹쳤다. 권이도는 출근하지 않았고,
우리는 이틀 내내 짐승처럼 서로를 갈구했다. 그러다 겨우겨우 잠에서 깨어났을 땐, 나란히 눈을 뜬 권이도를
보고 진한 입맞춤까지 나누었다.
나쁘지 않은, 아니, 행복한 일상이었다. 그에게 느끼던 위화감을 굳이 캐묻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만큼.
그리고 해신금융그룹이라는 이름이 내 안에서 거의 지워질 만큼.
“좋은 아침입니다.”
“…….”
“…….”
그런데 어째서인지, 사무실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랐다. 늘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던 사람들이 조가비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것이다. 대체 왜 이러나 싶어 분위기를 살피는데, 직원 하나가 급히 노트북을 닫는 모습이
보였다.
“…….”
신기한 일이지. 그 사소한 행동이 정확히 눈에 들어왔다는 게.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는 것도. 평소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나는 빼앗듯 노트북을 가져와 화면을 열어 봤다.
“어어……!”
- 다음 화에 계속
53 화. Complete Strangers(1)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하리라고, 해신은 그러한 평가를 받았다. 주가가 그렇게 폭락했는데, 주주들의
민심이 좋을 리도 없었다. 이미 가라앉기 시작한 배였고 배 안에 차오르기 시작한 물을 빼낼 방법도 없다.
-오늘 아침 정철호 해신금융 회장이 구속됐습니다. 정 회장은 549 억여 원에 달하는 거액의 배임, 횡령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을 예정입니다. 현재 추가 탈세 혐의가 의심되는 상황으로, 내부 고발에 따르면…….
-현재 금융 당국에서는…….
“이태성 씨, 뉴스 꺼도 됩니다.”
“……예, 대표님.”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그리 좋지 못하던 어머니의 안색. 유독 까칠하던 민재와 한참이나 자리를 비웠던 아버지. 창립 기념식 날
보았던 흩어진 퍼즐 같은 장면들이 차츰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구나.’
제아무리 하루아침에 터진 일이라고 한들 내부에서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날 가족들의
안색이 이상했던 것도, 이러한 소식을 미리 들었기 때문일 거다.
‘세진이 너 따라오거라.’
그런데 왜, 내게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을까. 해신의 상태를 내게 언질조차 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많았는데, 아버지는 왜 나를 통해 권이도에게 매달리지 않았을까.
뒷덜미가 서늘하게 식었다. 민재가 했던 말이, 지금의 상황과 무관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권이도가 얼굴조차 못 볼 만큼 바빴던 게, 어쩌면 민재가 했던 말과 상관이 있지 않을까.
‘환심을 사야 하거든요.’
“…….”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빠르게 바뀌는 차창 풍경이 어지럽게 흐트러진 내 머릿속 같았다. 섣부른 추측은,
이로울 게 아무것도 없는데. 하지만 지금의 짐작들이 단순한 의심에 불과하지만은 않았다.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왔어요?”
심장은 놀라우리만치 차분했다. 긴장이 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화가 난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이미 한
번 겪어 본 일처럼, 이 모든 상황에서 데자뷔가 느껴졌다.
“……권이도 씨.”
“권이도 씨가 그런 겁니까?”
질문을 건네는 순간에는,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답을 듣기도 전에 내 예상이 맞았다는 확신이 생겨서.
여전히 올곧은 그의 시선에 미동조차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허무해져서.
“늦었네요.”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 않았다. 변명을 건네지도 않았고, 이유를 설명해 주지도 않았다. 모르는 척
잡아뗄 생각 따위 처음부터 눈곱만큼도 없었나 보다.
“……왜.”
“왜 그러셨습니까?”
“대체 왜…….”
“정세진 씨.”
아버지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던 걸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가늘게 흔들렸다. 파르르, 눈꺼풀을 떠는
내게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덧붙였다.
“…….”
‘……길바닥에서 넘어졌습니다.’
고작 그거 때문에?
“그게 무슨…….”
“…….”
“그래서 지금…….”
“…….”
권이도는 얄미울 정도로 당연한 말을 했다. 늦건 빠르건, 언젠간 무너질 기업. 친절히 그 사실을 되짚어
준 것이다.
“원망할 상대가 필요하면 기꺼이 되어 주겠지만, 정세진 씨도 날 욕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죠.”
“……하.”
작게 탄식이 나왔다.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앞니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기분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데,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세진아.”
그런데 문고리를 잡는 순간, 뒤에서 나직한 부름이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잠깐 걸음을
멈췄다. 가라앉은 음성이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전해졌다.
***
“아버지는요?”
“조사받고 계십니다.”
“증거가 확실해서 빠져나올 구멍이 없답니다. 금액적으로 다 물어내기엔 재정 상태가 좋지 않고, 최악의
경우 징역살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깔끔하고 간단한 설명이었다. 요컨대 이번엔 정말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 몸값 비싼 김 변호사가 포기할
정도면 이미 끝난 얘기였다.
“어머니는 괜찮으세요?”
나약한 사람은 아니지만, 사회적인 모욕엔 예민한 분이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심각하다면 정신적인
충격으로 쓰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배우자 신분으로 함께 조사를 받아야 할 수도 있었다.
“예, 회장님께서…….”
“…….”
“……지금 터진 기사 말고 더 터질 건 있습니까?”
“……김 실장님.”
“예, 도련님.”
나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는데, 무언가 자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냥, 우선은 가장 처음 궁금했던 부분을 묻기로 했다.
“왜 저한테 연락 안 하셨어요?”
“도련님이 하실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
“……죄송합니다.”
사과는 할지언정, 그는 변명을 덧붙이진 않았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다시금 한숨을 삼켰다. 답답한
만큼 한숨을 쉬었다간 정말 바닥에 구멍이라도 생길 것 같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창밖에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울렁거리는 속을 정리했다.
조금만 생각을 이어 가면 그 끝에 떠오르는 건 권이도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성격상 김 실장에게 우선적으로 지시했을 게 이거였다. 비리를 폭로한 사람이 누구인지,
제게 피해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 추려 내는 것. 아마 어떻게든 찾아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불이익을 줄 터였다.
“아뇨, 못 찾았습니다.”
“……못 찾았다고요?”
“……도련님.”
“네.”
백미러 너머로 김 실장을 바라봤다. 테가 가느다란 안경과 피곤이 묻은 눈매가 보였다. 그는 똑바로
정면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
“……그게 말이 됩니까?”
“……아니.”
- 다음 화에 계속
54 화. Complete Strangers(2)
“…….”
“하아…….”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갑작스레 몰려든 피로감은 뒷덜미를 빳빳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머리에
있던 피가 쑥 빠져나가듯이 아득한 현기증이 일었다.
“아마 큰 영향은 없을 겁니다. 상층부만 교체되고 구조는 지금과 비슷하게 갈 거라고 했습니다.”
예상할 수 있는 경우는 하나였다. 주요 임원들과 협상을 끝내고, 다른 직원들은 아무도 모르게 진행한 것.
어차피 크게 바뀔 건 없으니까, 이 안정적인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저는…….”
“…….”
우리는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피곤하면 한숨 자라는 말이 김 실장과 내 사이를
오간 마지막 대화였다. 내 불면증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김 실장은 기회만 생기면 어떻게든 내가 눈을
붙이길 원했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김 실장님…….”
다 죽어 가는 목소리였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소파 팔걸이 쪽에 삐쭉 튀어나온 발 두 개가 보였다.
앞코가 반질거리는 갈색 구두는 민재가 즐겨 신는 브랜드의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제가 말한 건 사 오신…….”
“미안.”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나는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가 소파 등받이 뒤에서 민재를 내려다봤다. 길게
누워 이마에 팔을 얹고 있던 민재가 더디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김 실장님은 밖에 계셔.”
“……!”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나를 발견한 민재가 소파에서 떨어진 것이다. 제법 아플 것 같은 소리에
흠칫 놀라자, 민재는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봤다.
“너, 너……!”
“너 어떻게 여기……!”
“기사 봤어.”
아버지의 소식을 기사로 접해야 하다니. 그 말을 하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왜 내게 연락하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마 민재 또한 김 실장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답을 돌려줄 것이다.
“소식 듣자마자 김 실장님한테 연락해서 데려와 달라고 부탁드렸어. 오면서 무슨 일인지 대충 들었고.”
“…….”
“급한 거면 내가 말씀드릴게.”
“…….”
눈물을 참고 있는 거다. 여러 감정이 잔뜩 뒤섞여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운 게 분명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나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가 그러한 사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
“……민재야?”
……와인을 마셨나?
술을 못하는 민재가 유일하게 마시는 게 포도주류였다. 그것도 드라이한 건 안 먹고, 오로지 스위트한
종류로만. 아니나 다를까, 흘끗 살펴본 테이블에 술병과 와인 잔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여긴 왜 왔어?”
“뭐?”
“왜 왔냐니…….”
“기사 봤다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
이번에 인상을 찌푸린 쪽은 나였다.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히자, 민재가 짓씹듯 차갑게 얘기했다.
“…….”
아무래도, 근래에 내 얼굴빛이 지나치게 좋았나 보다. 창립 기념식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가 잘
지내고 있다고 가정하는 걸 보면.
“그런 게 아니라…….”
“민재야.”
우선, 차분히 민재의 말을 끊었다. 고작 이 정도 같잖은 도발에 발끈할 만큼 인내심이 모자라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권이도의 집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는 게 맞으니까. 다만, 이 지긋지긋한 말씨름을 반복해야 한다는
게 피곤해서 그랬지.
“…….”
기분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그냥, 모든 게 예정된 일처럼 느껴졌다. 정해진 수순에 따라 진행된
것처럼 매 순간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아버지가 구속되었다는 기사엔 충격을 받았지만,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대부분 익숙하기만 했다.
“…….”
“……가족?”
“호적에도 없는 네가 내 가족이라고?”
“…….”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갑작스레 밀려든 현실감이 간신히 유지하던 평온함을 마구 뒤집어 놨다.
민재는 지금껏 봐왔던 그 어떤 모습보다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야.”
“…….”
“너랑 나는 남이야.”
“이딴 게 무슨 가족이라고…….”
“민재야, 형이…….”
“…….”
아무래도, 술기운이 오르긴 오르는 모양이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빨개진 두 눈은 단순히 감정이
북받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피로와 취기가 섞여 만들어 낸 감정적인 얼굴이면 모를까.
“너 일부러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뭐만 하면 일부러 형 소리 하는 거, 그러면서 은근히 눈치
주는 거, 그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쉬어 빠진 목소리가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민재의 눈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어금니를 악문 채 그간 쌓아 놨던 설움을 토해 냈다.
“내가 너 좋……!”
“민재야.”
목소리가 차갑게 깔렸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입술 틈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까지 하자.”
“…….”
“내가 여기 있는 건 네가 내 동생이라서야.”
냉정하게 말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이게 민재에게 얼마나 잔인한 말로 들릴지도. 그러나 내가 그어
놓은 선이 엉망으로 지워지기 전에 한 번은 단호하게 밀어낼 필요가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55 화. Complete Strangers(3)
“…….”
민재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채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을 뿐이다.
그러다 끝내, 터져 나온 탄식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하…….”
나직이 욕지거리가 들렸다. 허탈함, 허무함, 그리고 사그라든 분노에 섞인 무력감까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민재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흘리며 조그맣게 읊조렸다.
“씨발, 진짜…….”
“……그만 가봐야겠다.”
“…….”
나를 향하는 시선에 미련이 득실거렸다. 직면할 자신이 없어 방치한 감정이 나도 모르는 새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조금 더 일찍 말렸다면 달라졌을까. 그리 생각한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형 갈게.”
“……이제 또 연락 안 받게?”
“…….”
멈칫, 발걸음을 멈췄다. 그 목소리가 떨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서. 내가 연락을
또 안 받다니. 생뚱맞은 말이었다.
“연락했었어?”
민재를 돌아보며 묻자, 그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민재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나한테 연락했었다고?”
나는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게 온 연락이 있나 확인했다. 그러나 시간이 나타난 화면엔 전화도
메시지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 몰라 통화 기록에도 들어가 봤지만, 그곳엔 권이도와 김 실장의
번호만 찍혀 있을 뿐이었다.
“전화 온 게 없는데.”
“……뭐?”
“…….”
핸드폰에서 팝송으로 된 컬러링이 흘러나왔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그와 똑같은 벨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불과 한 시간 전엔 김 실장과 통화도 했고, 지금도 신호가 잘 가는 걸 봐선 핸드폰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뭐야.”
“…….”
“이게…….”
“…….”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민재는 표정을 굳힌 나를 보고 말없이 눈치를 살폈다. 이명이 들릴 것처럼
멍한 귓가에 언젠가 권이도가 했던 말이 울리는 듯했다.
뒷덜미에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 뒤통수를 때린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아서, 나는 입가를 가린 채 손에 든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액정이 다 깨졌길래 새 걸 사 오라고 했어요.’
“……하.”
‘본부장님. 접니다.’
“……뭐야, 야, 어디 가? 야!”
뛰듯이 객실을 가로질러 문으로 향했다. 한 손에 핸드폰을 움켜쥔 채 민재의 부름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자마자 그 옆에 서 있던 사람이 퍼뜩 나를 바라봤다.
“도련님?”
“김 실장님.”
“예.”
“제 번호 어떻게 아셨습니까?”
“…….”
벌어진 입술이 딱 다물렸다. 아까 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참, 아무
말 않던 그는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딱 한마디만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내가 놓쳤던 부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김 실장에게 느꼈던 위화감, 그리고 차에서 본 무언가 숨기는
듯한 표정. 유독 김 실장을 신경 쓰던 권이도와 얼마 전 차에서 들었던 그 말까지.
‘단순히 계약으로 약혼한 거였으면 도련님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겠죠.’
“…….”
“……아버지가.”
“…….”
누군가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김 실장의 말대로 인복은 스스로 만드는 거였다. 저지르지 않은 비리를
뒤집어쓴 것도 아닌데, 이게 과연 원인을 타인에게 돌릴 일일까.
우습게도, 나는 궁지에 몰린 아버지를 보고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이 상황이 슬프지도 않았고,
그가 안타깝거나 동정심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통쾌한 기분이 든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방관자가 된
것처럼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사모님도 알고 계십니다.”
“어머니한테 가죠.”
***
김 실장은 빗길을 운전하는 내내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늘 건네던, 피곤하면 눈을 붙이라는 말조차
없었다.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와 이따금 섞이는 도로의 잡음만이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의 전부였다.
‘이혼할 계획이다.’
어머니는 해신그룹 사람이 아니었고, 민재와 서영이는 학생이었다. 기업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그들에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기다 이혼까지 한다면 피해는 오로지 아버지에게만 돌아갈 터였다.
부자는 망해도 3 대가 먹고 산다고 했던가. 그들의 생계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각자 가진 재산만 해도
죽을 때까지는 먹고 살 수 있을 터였다. 다만, 민재의 씀씀이는 조금 줄여야겠지만.
“…….”
“다시 여쭤볼게요.”
권이도에게 한자리 받기로 한 걸까. 그가 무얼 대가로 아버지를 배신했는지 궁금했다. 아니, 처음부터
신의가 없었을 수도 있으니, 그걸 배신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조건 없는 계약은 아무것도 없다. 김 실장처럼 꼼꼼한 사람이 단순히 협박을 당해 움직였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오는 이득이 무엇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손해는 안 볼 터였다.
김 실장은 어쩐지 착잡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리깔린 음성은 비가 내리는 하늘처럼 무채색이었다.
감정을 절제한, 정제된 말투가 오히려 마음을 안정시켜 줬다.
“불안하셨던 겁니까?”
“……예.”
가벼운 대답이었는데 오히려 그 말이 주는 무게감은 더 무거웠다. 아버지와 가까운 곳에서 비리를 도와야
했을 김 실장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는 처지였을 거다.
김 실장의 살길은 권이도였고, 어머니의 살길은 이혼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살길은 아마 나와 권이도의
약혼이었을 거다. 그 약혼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니, 아버지도 불안했겠지.
“…….”
김 실장은 이번엔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얘기했다. 나를 위한다고 말하는 게 양심에 걸리는지, 눈가를
살짝 찌푸린 상태였다.
“……음.”
“질책이라니…….”
“…….”
- 다음 화에 계속
56 화. Complete Strangers(4)
치열하게 살아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가로운 삶을 산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대부분을 해왔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
전부였단 말이다.
“……오피스텔로 모실까요?”
차가 사거리 신호에 걸렸을 때, 김 실장이 넌지시 물었다. 자연스레 권이도의 집으로 향하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건 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이런 상황에 권이도의 얼굴을 보는 건 좀 그럴지도 몰랐다.
“아뇨.”
“…….”
그러나 나오는 건 생각과는 모순되는 대답이었다. 다행히 김 실장은 그 이유까지 물어보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신호등을 따라 권이도의 집 쪽으로 차를 돌렸을 뿐. 매끄럽게 회전한 차체에 빗방울이 힘없이 미끄러졌다.
***
“들어가세요. 빗길 운전 조심하시고요.”
아마 김 실장은 가족들이 있는 호텔로 돌아갈 거다. 그곳에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필하며 이런저런
잡일들을 처리하겠지. 그리고 그가 가장 가까이에서 머물 사람은 다름 아닌 민재일 터였다.
“…….”
그는 알겠다는 대답 대신 침착한 시선을 돌려줬다. 가끔 이렇게 말없이 있으면 권이도 못지않게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제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
인연은 칼로 자른 것처럼 깔끔하게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마지막을 기약한들 기회가 생기면 닿을 터였다.
물론 그 기회의 순간을 앞으로 내 쪽에서 만들진 않겠지만.
“그럼 가볼게요.”
“……하아.”
“…….”
“…….”
“왜 그러고 있냐니…….”
“…….”
“……설마요.”
“제가 여기 말고 갈 데가 어디 있겠어요.”
그 갈 곳을, 그쪽이 없애 버리지 않았나. 애초에 돌아갈 곳인지도 확실치 않았지만,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졌다. 내가 남겨 둔 오피스텔, 그리고 권이도의 집.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고작 그 정도였다.
“화낼 줄 알았는데.”
“그런 걸로 화 안 냅니다.”
“미안합니다. 미리 말 안 해서.”
“식사하셨어요?”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내려오자 식탁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평소보단 가짓수가
적었고, 대체로 소화가 잘되는 부드러운 음식이었다.
“다정하군요.”
“…….”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얘기해요.”
“예전에…….”
“해신금융 윗대가리를 전문 경영인으로 갈아 치우고 사명을 변경할 겁니다. 정철호 회장을 포함한 주요
임원 10 여 명을 제외하면 정리 해고는 없을 거예요.”
“……너그러운 처사네요.”
그런 설명을 바란 게 아니라고, 그렇게 물으려다가 관두기로 했다. 그가 하는 말들은 대부분 들어 둬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권이도 씨가요?”
잠시 말을 멈춘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많이 있거든요.”
“…….”
기업이 돌아가는 일을 내가 이토록 몰랐을까. 아니면 권이도가 물밑 작업을 열심히 해놨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간에 예상치 못한 일임은 분명했다.
“인수가 끝나고 안정되기까진 시간이 꽤 걸리겠죠. 정철호 회장의 재판도 그만큼 길어질 거고.”
“…….”
“비록 불량이었지만.”
“……네?”
“…….”
“불량인 걸 알고 계셨습니까?”
“그게 중요합니까?”
“몰랐습니다, 처음엔.”
“…….”
양가감정이 들었다. 시기를 앞당긴 건 권이도지만, 그의 말대로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을 테니까. 이걸
권이도의 탓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의 탓이 아니라고 해야 할지. 나로선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어머니와도 연락하셨습니까?”
“…….”
권이도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못 들었냐는 듯이 말이다. 그러고는 픽 웃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현명한 사람이군요. 정 회장이랑은 다르게.”
“정 회장 외의 식구들을 건드리지 않는 대가로 정세진 씨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정세진 씨가 원하지 않는 이상 그쪽에서 연락이 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
“…….”
“정세진 씨.”
권이도는 느릿느릿 내 이름을 불러 왔다. 그 나직한 부름은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한 서론에 가까웠다.
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그가 지그시 내 눈을 들여다봤다.
“여기까지가 내가 한 못된 짓입니다.”
“…….”
배 속에 돌덩이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목구멍이 꽉 옥죄여서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하는 내게 사뭇 냉랭한 목소리가 이야기했다.
- 다음 화에 계속
57 화. Complete Strangers(5)
“…….”
“……학대라니.”
권이도는 그러한 사과마저 거리낌 없이 건넸다. 거북하다는 표현에 그제야 나오지 않던 헛웃음이 나왔다.
이 기분을 고작 불편함 따위로 정의해야 할까. 그러한 사실에 의문이 든 탓이다.
“……아뇨.”
“딱히 틀린 말도 아닌걸요.”
“권이도 씨 말이 맞아요.”
하지만 나라는 사람이 피해자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나는 따뜻한 잠자리를
얻었고, 질 좋은 식사를 받았으며, 남들이 보면 부러워할 학벌과 직위까지 생겼다. 부분적으로나마 충족된 게
있으니, 어쩌면 이건 배부른 소리가 아닐까.
눈을 내리깐 그대로 기계적인 목소리를 냈다. 머릿속이 텅 비었지만, 입술은 의지와 달리 저절로
움직였다.
“근데…….”
“…….”
“저에 대해 잘 아시잖아요.”
“…….”
“권이도 씨.”
“약속대로 할게요.”
“…….”
변명처럼 덧붙인 말들이 구질구질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향수를 건네준 다음엔,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걸까. 한낱 계약에 불과하던 약혼은 지금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권이도는 이런 내 대답이 그다지 달갑지 못한 모양이었다.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운을 뗀 것이다. 내가 시선을 들어 올리자, 씁쓸하게 입매를 당기기도 했다.
“내 방법이 또 잘못됐군요.”
“…….”
‘또’라고 이야기했다. 제 방법이 또 잘못됐다고. 위화감을 느낀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그동안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해 ‘Sejin’의 론칭을 준비했다. 최근엔 신제품 개발에 한창이었는데,
거기에 필요한 향료를 이희나의 공방에서 조달받기로 했다. 재료인 천연 오일이 꽤 마음에 드는 데다 이래저래
고생하는 이태성에게 그 정도 낙은 만들어 줘도 될 것 같단 생각에서였다.
“네, 부탁드립니다.”
“전 감기 같은 거 안 걸립니다.”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던데. 그리 말하려다가 너무 놀리는 것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그런데 이태성이
툭 내뱉는 게 아닌가.
“…….”
기분이 나쁘진 않았고, 그냥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태성은 진심으로 내가 감기에 걸렸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으니.
“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심해지기 전에 약이라도 드십쇼. 이희나 씨가 그러는데 조향사는 감기도 조심해야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 어색한 대화 이후에도 우리는 매일같이 식사를 함께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괜찮았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색하지 않았다. 그의 집에 들어와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반복된 것이다.
‘일을 좀 쉬는 게 어떻습니까?’
‘이 정돈 금방 나아요.’
솔직히 나쁘진 않았다. 막연히 느끼던 불안감이 눈 녹듯 녹아내릴 만큼. 모든 걸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그의 다정함으로 메워질 만큼.
사실 감기가 안 낫는 이유는 뻔했다. 원래도 심하던 불면증이 근래에 조금 더 심해진 것이다. 권이도의
페로몬만으로도 숙면을 취하던 나는, 이제 그가 없으면 쉽게 잠들지 못했다. 잠깐 잠든다 해도 금방 깨기
일쑤였고, 어쩌다 깊이 잠들면 발작처럼 눈을 뜨곤 했다.
‘내가 미쳤다고…….’
***
“오늘 늦으신다고요?”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권이도는 집에 있지 않았다. 타이밍 좋게 걸려 온 전화 한 통만이
그가 전해 준 소식의 전부였다.
“…….”
“……얼마나 늦으세요?”
-감기 기운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쉬고 있어요.
권이도 없는 저녁 식사는 재미없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지루하기만 했다. 국물이 많은 불고기는 적당히
달큼했고, 아삭한 연근무침 역시 내 입에 꼭 들어맞았는데 말이다. 블루베리 퓌레를 올린 우유푸딩은 두 입
먹자마자 그대로 내려놓고 말았다.
“…….”
멍하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투명한 창문 너머로 비 내리는 하늘이 한눈에 보였다. 빗방울이
통통 튀어 오르고, 저마다 한데 모여 힘없이 흘러내렸다. 멍하니 보고 있으면 제법 중독성 있는 구경거리였다.
“…….”
“…….”
권이도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놀란 표정의 권이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파르르 눈가를 떨던 권이도.
언제 퇴근한 건지, 언제부터 있던 건지. 그런 걸 물을 새도 없이 그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냥 가게요?”
- 다음 화에 계속
58 화. Complete Strangers(6)
“흣, 잠깐…….”
“아……!”
뜨겁고 축축한 무언가가 아래쪽에 닿았다. 말캉한 감촉이 민망한 부위를 길게 핥아 냈다.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자세를 무너뜨리자, 억센 손길이 내 골반을 붙들었다. 그러곤 엉덩이를 콱 깨물며 이야기한다.
“똑바로 서야지.”
권이도는 그 말만 하고 다시 그곳으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예민한 부위를 핥는 바람에 끙끙 앓는 소리가
나왔다. 혀를 세워 다물린 근처를 건드리던 그는 양손으로 엉덩이를 벌린 채 비좁은 입구를 파고들었다.
“아, 흐, 안 돼…….”
어쩌다 이런 자세가 됐을까. 야릇한 행위가 될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적나라한 절차를 밟을 줄은 몰랐다.
권이도가 하나하나 정장을 벗을 때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욕조에 들어왔을 때도 말이다.
“흐읍…….”
“흐으…….”
“왜, 이거 싫어?”
나지막이 물은 권이도가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미끄러지듯 뒤에서 앞으로 문지르더니 발기한
성기를 한 손에 그러쥔다. 퍼뜩 놀라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다른 손으로는 엉덩이를 꽉 움켜쥐기도 했다.
“아흐……!”
“흐응, 흣, 아, 아흐…….”
“흐응…….”
두툼한 귀두가 엉덩이골부터 회음부까지를 집요하게 문지른다. 삽입할 것처럼 입구에 틱 걸렸다가
미끄러지듯 허벅지 사이로 들어오기도 했다. 그 감질나는 감각에 신음을 흘리는 순간, 그가 단숨에 뿌리 끝까지
성기를 푹 처박았다.
“……!”
너무 놀라는 바람에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허리가 낭창하게 휘고, 아랫배가 납작하게 들어갔다. 큿,
신음을 삼킨 권이도가 으스러뜨릴 것처럼 나를 꼭 끌어안았다.
“쉬이…….”
그는 얼어붙은 나를 달래듯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벌어진 입술을 억지로 파고들어 손가락으로 혀를
꾹 누르기도 했다. 그가 내 아래턱을 내리누르는 바람에 턱을 따라 타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 아, 아흐…….”
생리적인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아니, 머리카락에 매달려 있던 물일지도 모르겠다. 모자란 숨을 헐떡이는
동안, 권이도는 입에 넣지 않은 손으로 내 상체를 매만졌다.
“반응만 보면 아파하는데…….”
“…….”
“후응, 흐, 흐웁…….”
타액과 온기가 입 안에서 정신없이 섞였다. 화사하게 피어난 페로몬은 비가 내리는 것처럼 내 온몸에
쏟아졌다. 말캉한 혀가 문질러지는 감촉, 그리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심장 박동과 느릿느릿 안쪽을 넓히는 허리
짓까지.
“으으응…….”
오늘따라 제법 입맞춤이 집요했다. 이갈이하는 어린 짐승처럼 간간이 혀나 입술을 깨물어 대기도 했다.
그러면서 성기는 빼내지 않고, 비비적거리며 여유로운 움직임을 이어 간다.
“……우응.”
“누가 할 소릴…….”
“아흣……!”
찌르르한 쾌감이 등허리를 울렸다. 그 가벼운 움직임이 그 나름의 예고였던 모양이다. 그는 언제 여유를
부렸냐는 듯 단숨에 속도를 올려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하읏, 흣, 아, 아, 흑……!”
“아흑……!”
“아, 흐, 싫어…….”
“너 나중에 배 아파.”
경고하듯 건넨 말은 이번에도 그다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절정에 다다르는 것만으로 체력이
빠지는데, 자세를 유지하는 건 더 힘들었다. 그러다 별안간 권이도가 성기를 쑥 빼내었다.
“아흐응……!”
첨벙, 물속에 몸이 잠겼다. 따뜻한 물이 목 언저리까지 차올랐다. 괜스레 무서운 기분이 들어서 그에게
매달린 채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에 권이도는 작게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내벽을 쳐올렸다.
“……하.”
“하아, 흐…….”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 와중에도 그의 품에서 떨어지진 않았다. 발가락을 잔뜩 오므린 채 허벅지를
움찔거리며 절정의 여운을 즐겼다.
“그대로 있어요.”
문제는, 그가 성기를 빼내지 않은 탓에 움직일 때마다 내벽이 자극됐단 점이었다. 팔을 놓자니 떨어질 것
같고, 그렇다고 그에게 매달리자니 고조된 성감이 잔뜩 예민했다.
“흣, 으으…….”
권이도는 침대에 다다른 뒤에야 나를 내려놓고 성기를 빼냈다. 벌어진 입구로 유독 흥건한 정액이
빠져나오는 게 느껴졌다. 느낌이 이상해서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젖은 입구에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었다.
“열이 있는 것 같은데…….”
“흣, 뭐 하는…….”
“……아흐.”
아까보단 느렸지만, 이번에도 자비는 없었다. 안쪽을 쿡 쿡 건드리곤 내 발목을 잡아 입으로 가져간다.
무얼 하나 싶었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발바닥에 쪽 입을 맞췄다.
“하읏…….”
“왜, 간지러워서?”
“으응, 흐…….”
그가 두 번째 사정하는 순간엔 정신이 아득히 멀어졌다. 과하게 밀려든 쾌감이 끝없는 절정에 나를 가둬
뒀기 때문이다. 배 속 깊이 차오른 충족감이 그에게 완전히 속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
“…….”
나는 그런 권이도를 살짝 밀어 내며 눈을 깜박였다.
“권이도 씨.”
“응, 세진아.”
“당신도 이제 내 방에 있는데…….”
“…….”
“내 건가?”
“…….”
“그럼…….”
“…….”
“우리 각인할래요?”
“…….”
- 다음 화에 계속
59 화. Le Bon Choix(1)
소문으로는 이러한 각인이 형질의 우열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 열성끼리의 각인은 거의 불가능하고,
반대로 우성은 상대방의 동의 없이도 찍어 누르는 게 가능하다고. 워낙 우성 형질이 드문 데다 대개는 고위층에
속해 있어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말이다.
‘우리 각인할래요?’
그러나 권이도는 내게 각인하지 않았다. 상냥히 건넨 입맞춤만이 그가 돌려준 대답의 전부였다. 마음이
맞았고, 몸을 섞었으나, 그 낭만적인 약속만큼은 해주지 않았다.
그래,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약혼 사실도 알리지 못하는 마당에 각인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빈말로나마 내 것이라고 말해 줄지언정 진심으로 속하는 건 어려울 수도 있었다.
실망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가진 감정은 그런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친절은 의무가 아니니
내가 그에게 바랄 수 있는 일도 한정적이었다.
‘정세진.’
당연히 나는 매일, 매일 악몽을 꿨다. 계절이 여름의 한가운데에 접어들고 ‘Sejin’의 론칭이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뉴스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이름에 더 이상 놀라지 않을 때까지. 그의 페로몬으로 모자라 내가
만든 향수까지 뿌렸음에도 함께 잠을 자던 권이도의 부재를 채워 주진 못했다.
솔직히 괴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꿈속에서 보는 그의 시선은 아버지가 내비치던 모멸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나치게 자기 학대적인 방법이었고, 이런다고 한들 바뀌는 게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이 또한 익숙해지지 않을까. 익숙해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무뎌지지 않을까. 내가
아버지의 아들로서 20 년을 살아왔듯 버티다 보면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니.
“감기는 다 나으셨습니까?”
지지부진 머물던 감기는 찾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멀어졌다. 이제는 기침이 나지도 않았고 열
때문에 나른한 기운도 없었다. 큰 열병이 되지 않아 다행인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오래 지속된 걸 탓해야 하는
건지. 당연히 좋아해 마땅할 일이었는데 왜인지 별로 상쾌하진 않았다.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
아무래도 비서가 적성에 맞는 모양이다. 김 실장이 내게 그랬듯 사소한 부분까지 챙기는 걸 보면.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온실 입구에 서 있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더 궁금한 게 있으십니까?”
***
“…….”
“……하아.”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그러나 내게는 권이도에 대해 알 권리가 없었다. 내 질문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라면, 마지막에
나올 게 행복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했다. 내게는 권이도가 전부지만, 그에겐 나를 제외한 많은 것들이 있으니.
그렇게 도착한 집엔 역시나 나보다 먼저 퇴근한 권이도가 있었다. 권이도는 다녀왔냐는 한마디만 내뱉고
씻고 내려오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조금 조용한 느낌이었는데, 저녁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내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
권이도는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며 입매를 당겼다. 특유의 여유로운 표정에 조금이지만 씁쓸한 빛이 스쳤다.
그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뭐.”
“내일이 제 히트 사이클입니까?”
“…….”
“…….”
한동안 식사 자리엔 정적만 맴돌았다. 간간이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빼면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체할 것처럼 무거운 분위기였으나, 근래엔 이게 보통이었다.
“정세진 씨.”
가만히 눈을 들어 그를 마주 봤다. 언제부턴가 이름이 불리면 미미한 긴장감이 들었다. 지금도 의도치
않았는데도 목덜미가 빳빳하게 굳었다.
“…….”
“잠을…… 영 못 자는 것 같은데.”
“…….”
“…….”
“내가…….”
“내가 사과하죠.”
“…….”
“뭘 사과하시는 겁니까?”
직접적인 질문에도 권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물며 시선을 피했을 뿐이다. 그 침묵이
긍정을 뜻하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런 건……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미안하단 말 듣겠다고 이러는 것도 아니고 권이도 씨한테 그걸
강요하지 못하는 것도 알아요.”
“…….”
권이도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가를 떨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가 느른하게 입매를
늘어뜨렸다.
“그럴 사이라…….”
“그럼 우린 무슨 사입니까?”
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묻는 건, 권이도가 아니라 나여야 했다. 그걸 정하는 사람은 권이도고, 거부할 수
있는 권한도 권이도에게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 내게 그런 걸 묻다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
- 다음 화에 계속
60 화. Le Bon Choix(2)
“…….”
“…….”
다음 날 아침. 권이도와 나는 요 며칠 그랬던 것처럼 고요한 식사를 이어 갔다. 권이도는 어제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고, 나 또한 별다른 사과를 건네지 않았다. 정확히는 몇 번 입을 열려고 했다가 도무지 내키지
않아 관둬야만 했다.
“……이제 나랑 말도 안 할 겁니까?”
느리게 흘러나온 음성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제야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권이도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에선 눈도 안 마주치던 주제에 뒤에서 내내 눈길을 보내고
있었나 보다.
“아뇨…….”
나는 길게 말꼬리를 늘이며 귓가를 매만졌다. 새삼스레 그의 걱정이 민망했던 탓이다. 이렇게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제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그나마 다행이군요.”
“……저녁에 뵐게요.”
“외람되지만…….”
“싸우셨습니까?”
“…….”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어야 했는데,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소한
충격을 받는 바람에.
“싸우다니…….”
“……그런 거 아닙니다.”
점심시간에는 또 권이도의 카드로 직원들의 식사를 챙겼다. 그렇게 많은 상황이 변했음에도 바뀌지 않은
것 중 하나였다. 그와 함께하는 식사, 그리고 자기 전에 가지는 대화 시간. 이미 버릇된 습관들은 일부러
그만두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표님 저희한테 돈 너무 쓰시는 거 아니에요?”
“이 정돈 괜찮아요.”
“……와, 아니 어쩜 좋아.”
“권이정 대표 실종됐대요.”
“…….”
권이정. 익숙한 이름이 귓가에 꽂혔다. 실종이 무슨 뜻이었더라. 순간적으로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더디게 조금 전 들은 말을 되짚는 사이, 다시 한번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
조향사 자격증 취득을 결심한 이래 처음으로 퇴근길에 학원을 들르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핸드폰으로 확인한 기사는 온통 선호그룹 이야기였고, 차에서 흘러나온 라디오에서도 그와 관련된 소식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한 단어 한 단어 모든 말을 놓치지 않고 전부 머릿속에 주워 담았다.
-오늘 새벽 권이정 호텔명성 대표이사가 실종됐습니다. 권 대표는 별장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산책을
나갔다가 봉변을 당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경찰과 소방관이 수색에 나섰으나 현재까지 행방은 묘연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권병욱 회장이 별세했다. 그것도 권이정이 실종된 바로 직후에. 마치 짠 것처럼 절묘한
타이밍이었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아니, 딱 한 명 예상한 사람이 있긴 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도착했…….”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언제부터 알았을까.
“…….”
“…….”
벌컥, 현관을 열고 들어갔을 때 역시나 권이도는 문 앞에 있었다. 아침과 똑같은 차림으로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면서.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느른하게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본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이 조금이지만 위태로워 보였다. 평소엔 여유롭다고만 느꼈던 눈빛이 지금은 지친
기색을 가득 띠고 있었다.
“…….”
“어떻게 아셨습니까?”
“존엄사라고 하죠.”
“…….”
울림이 독특한 목소리는 멍한 머릿속에도 또렷이 전해졌다. 발음이 명확한 탓에 귓가가 먹먹한 와중에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또 한 번 눈을 깜박인 그가 고개를 까딱했다.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아뇨.”
나는 무얼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권이정의 실종과 권병욱 회장의 죽음. 둘 중 어떤 것인지
짚어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권이도는 내가 어디에 의문을 가질지 예상한 사람처럼 망설임 없는 답변을
내놓았다.
“……권이도 씨.”
“같이…….”
그래서 온갖 위화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저절로 이 입술이 움직였다. 이대로 혼자 보내면 그가 돌아올
때까지 신경이 쓰일 거라는 생각 때문에.
“같이 가죠.”
***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권이도는 계속 일을 했다. 바쁜 건지, 아니면 집중할 거리가 필요한 건지.
입을 꾹 다문 채 서류만 들여다봤다. 그 모습은 약혼식 다음 날, 그가 나를 집으로 데려가던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날이 좋죠.”
“…….”
가만히 그와 시선을 맞췄다. 허공에서 얽힌 시선은 한참이나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나
싶어 가만히 있었는데,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네요.”
“……바쁘다기보단.”
참 바지런한 습관이었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무어라 잔소리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권이도는 보고
있던 서류를 허벅지에 내려놨다. 아무래도 더 일할 생각은 없는 듯해서, 나는 넌지시 그에게 이야기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내면에 착잡함이 보여서 건넨 말이었다. 권이도는 살며시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그냥 평범했습니다.”
“…….”
“뭐…… 딱히 슬픈 건 아니고.”
- 다음 화에 계속
61 화. Le Bon Choix(3)
“……괜한 말을 했군요.”
“…….”
맞닿은 온기는 한동안 떨어지지 않고 머물렀다. 우리가 약혼하던 그 날처럼, 그는 잔뜩 일렁이는 눈으로
그 손을 내려다봤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은 비단 권병욱 회장의 죽음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차가웠던 체온도 어느덧 미적지근하게 바뀌었다. 그때까지도 입을 다물고 있던
권이도는 손을 돌려 살며시 깍지를 껴왔다.
“정세진 씨.”
첫 만남에 약혼을 했고, 마음을 확인하기 전에 입부터 맞췄다. 함께 잠을 자는가 하면 대놓고 질투를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관계를 나타낼 단어가 없으니, 뒤죽박죽 엉망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
“연인.”
“…….”
“사실…… 잘 모르겠거든요.”
“…….”
“그게 가늠이 잘 안 돼서.”
“올라가죠.”
***
권병욱 회장의 장례식은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치를 예정이었다. 기자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됐고 식장
내외로 경호원을 배치해 놓는다고 했다. 가까운 친인척조차 부르지 않는다니 얼마나 조용한 장례일지 충분히 알
만했다.
<故 권병욱>
복도부터 줄줄이 놓인 화환, 그리고 벽면에 세워 둔 근조기. 그곳엔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국회의원과
온갖 기업 총수들의 이름으로 가득했다. 조문객은 없었지만, 수많은 꽃들이 권병욱 회장의 마지막을 추모했다.
나는 권이도와 시선을 교환한 뒤 향이 피워진 곳으로 다가갔다. 권병욱 회장의 사진은 수많은 국화에
둘러싸여 있었다. 분향은 하지 않았고, 절만 올리고 가족들이 서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곳에 권이정은 없었다.
“혜율이는?”
“신 서방이랑 쉬고 있어.”
“삼촌!”
권혜율은 권이도의 목을 끌어안고 나를 바라봤다. 곱다란 눈매는 역시나 권이도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권혜율을 따라 일어났던 신대웅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얘기했다.
“아…….”
“어린애들은 금방 잊으니까요.”
그리 말하는 신대웅은 무척이나 씁쓸한 눈을 하고 있었다. 잊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기억하는
사람은 괴롭기 마련이다.
“……상심이 크시겠어요.”
“오빠도 3 일 동안 여기 있어요?”
권이도가 한마디 거들자, 권혜율이 미간을 찌푸렸다. 인상을 구긴 얼굴이 제 엄마인 권이경을 똑 닮아
있었다. 신대웅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글쎄…… 잘 모르겠네.”
우선 따라오긴 했지만, 가족장을 치르는 데 내 존재는 방해일 것이다. 나는 가족도 아니고, 그들과
제대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아마 선호그룹 식구들은 나를 권이도의 계약 상대이자 집안이 망한 오메가
정도로 생각할 터였다.
“두 사람 식사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권이도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앉으라는 듯이 제 옆자리 의자를 빼준다. 하는
수 없이 옆에 앉자, 권혜율의 시선이 내게로 따라붙었다.
“오빠.”
그때 권혜율이 넌지시 나를 불렀다. 혜율이는 권이도의 무릎에 앉아 꾸물꾸물 자세를 똑바로 고쳤다.
너른 품에 편히 등을 기대는 걸 보니, 한두 번 저렇게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저기서 잘 수도 있어요.”
“응?”
“어…… 그래?”
“…….”
권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롱초롱한 시선이 뚫어져라 나를 바라봤다. 의식주가 해결되니 가지 말라는
얘기였을까. 곤란한 기분으로 눈을 굴리는 내게 권이도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
“정세진 씨가 필요해서.”
“…….”
그 부드러운 권유를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권혜율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시선을 교환하며 웃는 모습이 왜 그렇게 마음에 남았는지 모르겠다.
***
권혜율은 또박또박 제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했다. 권이도는 무엇이든 들어줄 것처럼 너그러운 얼굴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내가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는 와중에, 권혜율이 우려했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랬어?”
“그러지 말고, 나중에 혜율이 혼자 살면 삼촌이 거기다 걸어 줄게. 그때도 가지고 싶으면 다시
얘기하자.”
“음…….”
“약속할 거야?”
“그래, 약속.”
‘손가락이라도 걸까요?’
“…….”
왜 그런 간지러운 짓을 하나 했지. 조카를 대할 때처럼 장난을 걸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모르고 장단을
맞추겠다며 냉큼 손가락을 걸지 않았던가.
- 다음 화에 계속
62 화. Le Bon Choix(4)
그 후에도 혜율이는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 자신이 언제쯤 어디서 혼자 살지, 그때 가면 수련을 어디에
장식해 놓을지 따위의 내용이었다. 이 정도면 나중에 진짜 사 달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권이도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얼마나 수다를 떨었을까, 잔뜩 신났던 목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또랑또랑한 눈을 끔벅끔벅 감았다
뜨고는 권이도의 품에 폭 머리를 기댄다. 가물가물 감기는 두 눈이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응, 예쁘겠네.”
“……잠든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 정도면 퍽 훌륭한 아빠이지 않나. 암만 부모와 삼촌은 다르다고 해도,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 제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에겐 기본적으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권이도는 혜율이를 품에 안고 휴게실로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널찍한 휴게실엔 담요와 방석이 구비돼
있었다. 내가 이부자리를 봐주는 사이 그는 권혜율의 묶은 머리를 풀어 줬다.
자그마한 담요는 고작 일곱 살짜리 아이에겐 충분한 이불이 되었다. 옷이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크게 거슬릴 만한 차림은 아니었다. 권이도는 꼼꼼히 혜율이의 잠자리를 봐주고 휴게실 바깥을 눈짓했다.
“나가 있죠.”
어차피 조문객도 없을 테니 그가 빈소로 돌아갈 필요가 없긴 했다. 중간에 누군가 휴식을 취하러 오면
그즈음 바꿔 줘도 될 것이다. 물론 그 기다림을 술로 보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주도 드세요?”
“……그걸 그냥 드시려고요?”
“그럼?”
그의 시선이 옆에 놓인 술병으로 향했다. 병을 돌려 라벨을 살피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린다.
“…….”
게다가 그는 얼음 없이는 양주를 즐기지 않았다. 물론 이유를 물었을 땐 그냥 습관일 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말이다. 소주에 얼음을 넣진 못해도, 이렇게 무식하게 마시긴 좀 그렇지 않은가.
“…….”
“……왜 그러세요?”
“…….”
“…….”
“…….”
“……그냥.”
“…….”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그렇군요.”
마침내 권이도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긴장한 탓에 참았던 숨이 느리게 흘러나왔다.
권이도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종이컵에 담긴 술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
그렇게 마시지 말라니까.
“권이도 씨.”
“정세진 씨 되게…….”
그는 느리게 운을 떼며 술병을 내려놨다. 뒤이어 종이컵을 쥔 왼손엔 나와의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컵을 입가에 가져다 댄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잔소리하는 남편 같네요.”
“…….”
“…….”
“…….”
갑작스러운 주제에 나도 모르게 허리를 바로 세웠다. ‘총’이라는 단어가 유독 날카롭게 들렸기 때문이다.
권이도는 눈을 내리깐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스무 살 때였나. 생일이 되자마자 실탄이 장전된 총을 선물로 주시더군요. 기업을 잇고 싶으면 죽을
각오로 노력하라고, 사업엔 어느 정도 대범함이 필요하니 자신 있으면 집에 장식해 놓으라면서.”
권이경을 부르는 호칭과 권이정을 부르는 호칭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 누나와 이름의 차이는 아니었고,
그 안에 담긴 친근함의 무게가. 전자는 익숙해 보였지만, 후자를 말할 땐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렸으니.
“괴팍하긴 해도 현명한 분이시죠. 그대로 권이정이 가지고 있었으면 부하직원 한둘은 쏴버렸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실종되었다던 권이정은 어디로 갔을까. 눈앞의 권이도가 아무렇지 않아서, 잠깐 망각하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는 권이도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이 비슷했지만 말이다. 걱정하는 기색이 하도 없어서, 내가
들었던 뉴스가 착각인가 싶을 정도였다.
“궁금한 게 있는 표정이네.”
권이도는 의아한 표정으로 있는 내게 가볍게 물었다. 잠깐 권이정을 떠올렸던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 냈다. 장례식장에서 실종된 사람에 대해 묻다니. 지나치게 무례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그냥 목소리를 낮추고 그에게 물었다. 식당엔 아무도 없었지만, 혹시 몰랐으니까. 내 질문에
권이도가 입매를 길게 늘어뜨렸다.
“중요한 게 그겁니까?”
실없이 눈가를 찌푸렸다. 사실 불법이고 말고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그럴싸한 의문
하나를 제시했을 뿐. 돌아올 대답도 충분히 예상됐다.
“그러면 안 됐는데…….”
권이도는 전혀 취하지 않은 얼굴로 주정과 같은 한탄을 내뱉었다. 척 보기에도 취기가 오르지 않았는데,
이렇게라도 술의 힘을 빌리는 것 같았다. 조부님의 죽음이 그토록 마음에 남았을까. 안쓰럽다는 생각과 함께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실수라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쉽게 말하고 있지만 죄 어려운 것투성이였다. 어기는 건 눈 깜박할 새고, 지키는 건 평생을 다해도
모자라다. 타인에게 늘 칼같이 구는 이유가 있었다고, 내가 그리 생각하던 때였다.
“근데 그거 압니까?”
“…….”
“정세진 씨.”
“……네.”
말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비치던 감정을 억지로 지운 채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비록 그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지만 말이다.
“해신과의 계약은 더 이상 효력이 없고, 당연히 정세진 씨가 거기에 따라야 할 의무도 없어요. 더 이상
해신의 후계자가 아니니 계약의 범주에 묶기에도 구실이 부족하죠.”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그의 말이 이제는 약혼 생활을 끝내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내가 쓸모없어졌으니 그만 내 집에서 나가라고. 우리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
- 다음 화에 계속
63 화. Le Bon Choix(5)
“권리…….”
“향수를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다시 해신에 다니고 싶으면 그래도 됩니다. 정세진 씨 비서를 데려오는
것도 괜찮고, 막말로 지금 당장 집에 가버리는 것도 할 수 있어요.”
“…….”
“말씀은 감사하지만…….”
“…….”
“그거야…….”
“…….”
“…….”
“…….”
“…….”
‘……세진아.’
“…….”
“……정세진 씨?”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을 즈음, 수도꼭지를 꾹 눌러서 흘러나오던 물을 잠가 버렸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턱에 맺혔던 물방울이 세면대에 똑, 똑, 떨어졌다.
‘세진아.’
“……하.”
‘내가 미안해.’
권이도가 울고 있는 기억이었다.
***
그러나 그 기억이 권이도의 얼굴이라면 달랐다.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 모습은 그냥 넘어갈 수 없을
만큼 신경 쓰였다. 설령 그게 내 상상일 뿐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선명한 모습이 자꾸만 뇌리에 남았다.
“…….”
“찾았어?”
“……그래.”
“…….”
“……아.”
“다시 전화할게.”
“…….”
“들었죠?”
“네.”
“아아…….”
권이경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구겼던 얼굴도 금방 풀어졌다. 담배를 반으로 똑
부러뜨린 그가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그걸 버렸다.
“세진 씨.”
“걱정하시는 일 없게 하겠습니다.”
“…….”
“왜 그래요?”
“아아. 그런 말 많이 듣죠.”
적당히 무심한 태도로 대답했다. 유감을 표해야 할까 싶었는데, 그런 아부성 발언을 해봐야 좋을 게 없을
듯했다.
문득 빈소에서 보았던 그의 부모님이 떠올랐다. 권병욱 회장의 죽음에 슬퍼하는 듯 보였는데, 거기에
권이정을 향한 걱정은 없었던 걸까.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걱정?”
“이도는 걱정하던가요?”
“…….”
“거봐요.”
“아뇨…… 괜찮습니다.”
부드럽게 웃는 권이경의 얼굴이 다정해 보였다. 지금까지는 사무적인 느낌이 강했지만 ‘혜율’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우리 애한테 잘해 줘서 고마워요.”
“회사 일로 정신없으시겠어요.”
“뭐, 그렇죠.”
선호그룹 회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으니 얼마간 처리할 일이 많을 것이다. 부회장인 권상미가 회장이 되고,
부사장인 권이경이 차기 부회장 후보로 꼽히겠지. 명실상부 부회장은 자신이라던, 권이도의 이야기와는 반대로
말이다.
- 다음 화에 계속
64 화. Le Bon Choix(6)
“……왔어요?”
“오래 걸렸네요.”
“……누나를?”
“별 얘기 안 했습니다.”
아까, 부사장직을 내려놓겠다던 권이경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했다. 언젠가 권이도가
해줬던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지금 선호의 형태는 권병욱 회장이 생전에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기업 이념은 물론 그 체제와 권력,
그리고 대외적인 이미지까지. 잠깐이겠지만 그 공백으로 인해 선호는 피치 못하게 주춤할 것이다.
참으로 이상적인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는데, 다행히 권이경도 웃는 바람에 무안하지 않았다.
선호그룹이 100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는 10 정도의 계열사 열 개로 쪼개겠다는 말이었다. 그
지배 관계는 변하지 않을 테니 결국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가진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그 말씀을 왜 저한테…….’
‘왜겠어요?’
“부사장님이…….”
“둘 다 성격이 좋아서.”
꿈이라고 해야 할까. 장래 희망의 영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권이경이 씩 웃으며 물었다.
‘…….’
이 집안사람들은 말문을 막히게 하는 데 자격증이라도 딴 모양이다. 식사는 했냐는 듯 가볍게 묻고
있는데 그 내용은 두말할 것 없이 정곡이었다. 내가 말없이 입을 다물자, 권이경이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거기서 그만두면 다들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중간에 힘들어서 포기한 사람인 줄 알겠지.’
권이경은 어림도 없다는 듯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권가 특유의 여유로움과 제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실제로 그는 후계 싸움에서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그룹엔 관심이 없지만 능력이 없어서 졌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고, 이도는 주변 평가가 어떻건
제 손에 들어오면 괜찮다는 주의거든요.’
어떤 의미에선 권이도도 참 대단하다 싶다. 그 드높은 자존심에 거저먹는 권력을 거부하지 않다니. 아니,
어쩌면 그 또한 드높은 자존감에서 나오는 타협일 수도 있었다.
‘…….’
신기한 일이지. 일적인 이야기를 할 땐 냉철하기만 했는데, ‘동생’이라고 말하는 순간 느낌이 달라졌다.
나긋하게 내려앉은 페로몬이 권이경의 다정함을 보여 주는 듯했다.
아마, 권이경의 본론은 그 마지막 말이었나 보다. 제 계획의 완전한 성공을 위해 혹시 모를 불안 요소를
모두 배제하고 싶은 거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 줄 알고 그 리스크를 감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부탁 좀 할게요.’
“졸립니까?”
“난 잠깐 나갔다가 올 테니까…….”
“권이도 씨.”
내 의지로 무언가 선택하는 게 어떤 기분일까. 아무런 외압 없이, 그리고 아무런 강요 없이. 권이경이
그랬듯 제 앞길을 스스로 만드는 게 내게 감히 가당키나 할까.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
‘집에 가서 쉬고 있어요.’
푹신한 침대에 누웠을 땐 권이도의 얼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얇게 쌍꺼풀진 눈매, 짙은 눈동자와 높게
뻗은 콧날. 모양 좋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고 상냥한 목소리가 귓가에 감기는 것까지.
당연히 들어주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그렇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디까지 요구해도
될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자리를 내어 주면, 자꾸 다리를 뻗기 마련인데. 권이도는 오히려 그걸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사르륵,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와중에 익숙한 페로몬이
한가득 느껴졌다. 긴 손가락이 앞머리를 넘겨 주고 이마로 내려와 귀에까지 닿았다. 귓바퀴, 귓불, 그리고 턱선.
느릿느릿 이어진 손길은 조심스레 내 아랫입술을 어루만졌다.
“…….”
“응…….”
졸리다는 생각, 그리고 페로몬이 고프다는 생각. 쏟아지는 존재감이 점점 짙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
드문드문 현실감이 끊겼다. 아직 잠이 다 깨지도 않았는데 몽롱한 감각이 머릿속을 녹진하게 만들었다.
입술을 건드리던 손가락이 천천히 떨어지고 그다음엔 조금 더 보드라운 무언가가 닿았다.
“…….”
“…….”
“…….”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듯 주변 공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 가까운 거리에서 닿는
숨결, 그리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느껴지는 짙은 페로몬. 마지막으로 간간이 얼굴에 떨어지는 정체 모를
물방울까지.
“…….”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혹시, 아주 혹시라도 그 물방울이 눈물은 아닐까 싶어서. 그러나 가까운
거리에서 보이는 두 눈은 곱게 감겨 있을 뿐 울고 있지는 않았다.
“……언제 오셨어요?”
“아까…… 한참 전에 왔어요.”
“술 드셨어요?”
“……아니.”
“흣, 왜 갑자기…….”
“날짜가…….”
“…….”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 말의 내용이 아니라 속삭이는 음성이 지나치게 야해서. 그리고 귓가에 입을
맞춘 그가 뒤이어 내뱉은 한마디 때문에.
- 다음 화에 계속
65 화. Le Bon Choix(7)
위기감이라고 해야 할까.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숨이 막히는 이유가 그의 페로몬 때문인지, 아니면
내리누르는 체중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느리게 몰아쉬는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하아…….”
“…….”
“억제제를 어쩌다가…….”
“깜박했어.”
“…….”
깔끔하게 돌아온 대답에 해줄 말이 없었다. 그사이 나풀나풀 흘러나온 페로몬은 점차 나까지도 물들이고
있었다. 피부로, 숨결로 느껴지는 페로몬이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열기로 피어올랐다.
“……하아.”
“세진아…….”
“세진아, 흣…….”
“……권이도 씨.”
“응…… 얘기해.”
“안 해요?”
나는 억제제가 듣지 않지만, 먹어야 하는 타이밍은 알고 있었다. 권이도 정도의 우성은 타이밍을 놓치면
이미 요동치기 시작한 페로몬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도. 오히려 약 때문에 더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고 들었던 것
같다.
“…….”
“흐…….”
“……하.”
“세진아.”
“……그만 좀.”
“왜 피해?”
“……그래?”
마주친 두 눈에 초점이 없었다. 이 정도로 정신이 나가서야, 제대로 대화를 하기도 어려웠다. 그와
한마디 한마디 대화를 나누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피하지 마…….”
“……흣.”
“안 된다니까.”
“아!”
“……아, 흐……!”
“쌀 것, 같…….”
“……!”
“하으…….”
수치심, 그런 건 이제 들지도 않았다. 이성이 날아갈 것 같은 고양감과 쾌감의 여운이 찌르르 허리를
울렸을 뿐. 손까지 덜덜 떨며 아랫배에 힘을 주자, 권이도가 느릿느릿 입에서 성기를 빼내었다.
“…….”
“진짜…….”
“…….”
“…….”
진득한 시선이 내 몸을 꼼꼼히 살펴봤다. 알몸을 보이는 게 처음도 아닌데, 이토록 적나라하게
구경거리가 된 건 처음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올려다보는 동안, 그는 느릿느릿 제 가운의 허리끈을 풀고
있었다.
“…….”
“다 했으면…… 입 좀 벌려 볼래요.”
“……입?”
“뭐 하느…….”
“……읏.”
“…….”
“후…….”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혀를 움찔거렸다. 깊숙이 들어온 손가락이 혀뿌리를 지그시 눌렀다. 입술로 타액이
흐르는 순간에는 그가 미간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아.”
왜, 넣는 게 아니라 자위를 할까. 눈앞에 내가 있는데 구태여 제 손으로 해결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안 너어요?”
“…….”
“그러니까…….”
“…….”
“손가락 좀 빨아 봐요.”
“…….”
“……후우.”
“…….”
“……권이도 씨?”
“수면제…….”
“……수면제 같이 먹었어.”
말문이 턱 막혔다. 특이 형질, 그것도 우성의 억제제는 다른 약과 함께 먹으면 위험할 정도로 독했다.
이미 진정제 계열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수면제까지 먹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물었지만 권이도는 답하지 않았다. 내 손목을 붙잡아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을
뿐이다. 정신이 영 들지 않는지,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로 눈을 감은 뒤엔 다시 눈을 뜨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왜…….”
서운함이라고 부르면 적당할까. 차오르던 욕구보다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실망감이 더했다. 기분이 착
가라앉아서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고 말았다.
“권이도 씨 대체…….”
“세진아.”
“불안해서 그랬어.”
“…….”
“뭐가…….”
“…….”
“뭐가 그렇게, 불안하길래.”
“얘기해봐요. 괜찮으니까.”
“…….”
- 다음 화에 계속
66 화. Boite de Pandore(1)
그 안에서 나온 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재앙들이었다. 욕심, 원한, 시기, 질투를 비롯한 부정적인
감정들. 판도라는 황급히 상자를 닫았으나, 비통하게도 이미 돌이키기엔 늦어 버린 뒤였다. 제우스가 판도라에게
내린 저주는 다른 무엇도 아닌 호기심이었다.
이렇듯 호기심은 인간에게 결코 긍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득보단 실이 많고, 해소한다고 해서 상황이
해결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처럼. 때로는 적당한 외면이 진실과 마주하는 것보다 낫곤
했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알고자 하는 욕구를 최대한 억누르곤 했다. 어린 시절에는 그럴 자격이 없어서,
크고 난 이후엔 알아 봤자 좋을 게 없어서, 그리고 권이도와의 약혼 이후에는 왠지 모를 위기감 때문에.
그가 내게 숨기는 건 무엇일까.
그는 어떻게 나에 대해 알고 있을까.
그러나 나는 판도라처럼 그 상자를 열어 볼 용기가 없었다. 처음엔 자격이 부족했을 뿐이지만, 지금은
미지에서 오는 불안감이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게 했다. 권이도가 주는 아늑함에 빠진 채로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기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예라는 이름의 준비 시간을 갖고 내 나름의 계획을 세웠던 거다. 조금만 더 나중에, 내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 그의 말이 어떤 내용이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약 그게 지금의 평온함을 깰
무언가라면 내가 숨 쉴 구멍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니까.
“대표님, 이쪽 서류 결재 부탁드립니다.”
장례식장에 다녀오고 보름이 지났다. 권이정의 실종은 결국 실족사로 마무리됐다. 시체를 찾지는
못했으나, 들짐승에게 변을 당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원래라면 매스컴이 떠들썩해질 소식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권병욱 회장의 죽음과 겹치는 바람에 묻혀 버렸다.
갑작스러운 회장의 부재로 선호 측은 이런저런 일 처리에 여념이 없는 듯했다. 조만간 권상미가 회장으로
올라가야 했고, 그에 따른 구조 조정도 잇따를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때 떠들썩하던 해신금융그룹의 이야기는
이제 신문 말미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저…… 대표님.”
한창 서류를 훑는 와중에 직원이 넌지시 운을 뗐다. 이야기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들자, 그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아.”
“……그럼요. 저도 사람인데.”
부드럽게 웃어 보이자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게 중얼거리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기도
했다.
“그런가요? 그럼 다행이고요.”
“잠을…….”
“잘 잘 수가 없지.”
‘일어났어요?’
‘……어제 일 기억나세요?’
‘대충이라면 얼마나…….’
‘아예 안 나는 건 아니고.’
‘……아뇨.’
‘…….’
‘실수하신 거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미련한 일이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묻지 않았는데, 이제는 또 기분이 상할까 봐 묻지 못하고 있다. 호기심을
이기는 건 두려움이구나. 직면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게다가 대화도 결국엔 타이밍이라고 했다. 그날 아침에 묻지 못했더니 도무지 물어볼 순간이 오질 않더라.
권이도가 바쁜 건 둘째치고, 진짜 시간이 없는 건 그가 아니라 나였으니까. 함께 식사를 못 하는 날도
수두룩했으니 진지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올 리가 없었다.
“……애초에 말도 안 되고.”
“…….”
***
퇴근길엔 자격증 학원에 들렀다. 그간 일이 바빠서 나오지 못했지만, 앞서 부지런히 수강한 덕에 다음 주
즈음에 조향 시험이 예정돼 있었다. 계절 이미지에 맞는 향수를 조향하고, 간단한 필기시험을 치르면 드디어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다.
“일찍 들어왔네요.”
학원을 마치고 돌아간 집에는 권이도가 있었다. 예전 같으면 이른 시간도 아닌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얘기했다. 비꼬는 건 아니었고, 그냥 담담히 내뱉은 사실이었다.
“식사하셨어요?”
“아뇨, 아직.”
“……아직 안 드셨다고요?”
가볍게 물었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근래보다 좀 일찍 들어왔을 뿐, 원래라면 식사를 마쳐야 할
시간이었다. 옷까지 갈아입은 걸 보면 제시간에 퇴근했나 본데, 왜 아직도 밥을 안 먹었냔 말이다.
“…….”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역시나 식탁에 화려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날이 더워서인지, 대체로 찬기가
도는 음식에 새콤한 소스를 얹은 메뉴였다. 산미가 감도는 해산물 냉채와 통후추를 뿌린 양갈비, 간장 소스를
곁들인 민어찜이 그것이었다.
“어제도 잘 못 잤습니까?”
“그냥 좀 설쳤습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권병욱 회장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 나는 그에게 총 두 가지를 부탁했다. 하나는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고, 다른 하나는 의사를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권이도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묻기도 했다.
‘원래 먹던 약이 뭡니까?’
“불면증이 워낙 심해서요.”
“…….”
살면서 처음으로 최 교수를 제외한 누군가에게 솔직히 말한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아마 그 또한 차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겠지.
“……그렇군요.”
“……다음 주가 론칭이죠?”
“네, 그 주에 다 끝날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밥?”
만약 싫다고 하면 깔끔히 포기할 생각이었다. 중요한 자리라 구색을 갖추고 싶었을 뿐, 집에서 먹는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그쪽이 대화를 나누기엔 편할지도 몰랐고.
“식당은 제가 빌릴 테니까…….”
“…….”
“권이도 씨는 몸만 오면 됩니다.”
“기대해야겠네요. 첫 외식.”
자상한 목소리였다. 내 제안이 그다지 껄끄럽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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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화. Boite de Pandore(2)
“그럼요.”
우선은 거래처였기에 이희나에게도 진작 초대장이 갔어야 했다. 다만 개인적인 친분이 있고, 겸사겸사 할
말도 있어서 직접 찾아왔을 뿐. 잠깐 이태성을 통해 줄까도 고민했다가 이제는 구실이 필요 없을 사이라는 생각에
그만두기로 했다.
이희나는 특유의 발랄한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성격도 좋고, 일 처리도 잘하고, 그간 봐 온
바로는 이태성에게 제법 아깝지 않나 싶다. 물론 이태성도 어디 하나 빠지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우선 성격이 꽤
무뚝뚝했으니.
“희나 씨.”
“저 이번 주에 자격증 수료합니다.”
“세상에, 조향 자격증이요?”
“저는 이제 슬슬 가보겠습니다.”
이희나가 초대장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공방에서 나는 달큼한 향기에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섞였다.
이번 행사 이후에 출시될 라인엔 이희나에게 조달받은 향료를 사용한 향수가 포함돼 있었다.
“아, 그리고…….”
“……예?”
“그럼 내일 보죠.”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던 한 명의 남자도.
“…….”
“…….”
“오랜만에 뵙네요.”
“……예.”
그가 느리게 대답했다. 습관적으로 안경을 추켜올리더니 가만히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를 건넨다. 정중한
태도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비서를 뽑자니 번거로울 것 같고, 이태성 씨한테 계속 비서 일을 시키기엔 복지가 별로인 것
같아서요.’
이태성이 권이도의 사람이라면 김 실장은 해신의 사람이었다. 뭐, 이제는 해신의 사람이 아니었으니,
애매한 포지션이 되었지만 말이다. 다만 나를 정말 완전히 독립시킬 거라면, 내 주변에 있는 그의 사람들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들어주실 겁니까?’
“회사로 모시겠습니다.”
“…….”
“…….”
얼마나 철저히 준비해 놨던 건지, 그 치밀함이 아득할 지경이다. 아무리 서류상 남이라고 해도, 내게
아무런 불똥도 튀지 않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도련님.”
김 실장만큼 공과 사 구분이 철저한 사람이 있을까. 가끔은 AI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승진할 때면
꼬박꼬박 호칭을 바꾸고, 벌어진 상황에서 항상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뭐, AI 는 자의로 누군가를 배신하진
않겠지만 어쨌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역시나 김 실장은 내가 충분히 예상한 질문을 건넸다. 거기다 친절하게도, 자신이 왜 이런 질문을
건네는지까지 설명해 줬다.
그래서 솔직히 대답하자, 김 실장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카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그게 답니다.”
“…….”
김 실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층 고요해진 분위기는 아까의 어색함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정확히는 공허함이라고 해야 하나. 둘 다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근데 도련님.”
“……처음 듣는 얘기네요.”
“예, 처음 말씀드렸으니까요.”
그 신중한 성정에 입양을 쉽게 결정할 리가 없었다. 하물며 물건을 사도 고민하는데 한 생명을 데려오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
“아뇨, 그건 아닙니다.”
“…….”
68 화. Boite de Pandore(3)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무척이나 다르다. 간신히 유지하던 가족의 울타리가
무너진 그 날, 나는 김 실장과의 인연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예전 같은 관계는 될 수 없으리라고, 홀로
결론 내렸단 말이다.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김 실장님 말씀 이해했어요.”
“…….”
“…….”
“…….”
도련님이었던 호칭이 다시 대표님으로 바뀌었다. 아마 당분간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으리라. 그게 그다지
서운한 기분은 아니라서 나는 픽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
‘드디어 내일이군요.’
권이도는 달큼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건네준 초대장을 살펴봤다. 안에 든 시향지를 흔들어 냄새를 맡아
보곤 느른하게 입매를 당기기도 했다. 특유의 여유로움이 듬뿍 묻어나는 동작에, 괜히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말을
덧붙였었다.
“대표님.”
“……아.”
“아뇨…….”
“들었습니다, 일정.”
“그만 나가보죠.”
“……긴장되십니까?”
연회장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김 실장이 넌지시 물었다. 내 표정이 굳은 게 그에게도 보였나 보다.
그렇게 걱정스럽게 물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굳이 부정하는 대신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그간 매스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내 이야기를 쏙 빼놓고 기사를 내보냈다. 정철호 회장의 구속 사실과
이혼 소식은 알렸지만, 그의 오메가 양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리지 않았다. 아마 권이도가 손을 썼으리라고
나는 막연히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
우리가 행사를 열 연회장은 선호그룹 창립 기념식 때보다는 작은 크기였다. 명성호텔에 속한 디자이너가
내부 인테리어를 담당했고, 직원들과 함께 향수 배치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논의했다. 우리가 주력으로 내놓을
제품과 호불호가 갈릴 법한 제품을 구분해 내부 동선에 맞춰 장식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향수를 판매하는 만큼 행사장 내부 향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입구를 포함한 곳곳에 은은한 디퓨저를
놓아두고 장식품이 있는 근처에는 작은 향초도 켜 놨다. 샘플로 놓아둔 향수와 그에 맞는 시향지도 구비해 놓되
향들이 섞이지 않도록 간격 조절에 공을 들여야 했다.
나는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향수 샘플과 카 디퓨저였다)을 확인하고, 포장에 하자가 있지는 않은지
꼼꼼히 살펴봤다. 벽면에 일정 간격으로 걸어 둔 엽서는 향수를 구매하는 분들이 함께 골라 포장에 넣을 수
있도록 장식한 것이었다.
‘인사는 못 할 수도 있습니다.’
“대표님, 계단 조심하십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모였다. 일부러 자유로운 분위기의 행사를 기획했지만, 우선은 최소한의
과정을 밟아 시작해야 했다. 가령 내 인사라든가, 간단한 제품 설명 같은 것들. 앞서 대본을 준비해 놨던 터라
별반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저는 대표 정세진입니다.”
“저희 ‘Sejin’에서는…….”
그러나 홀 내부를 아무리 돌아봐도 권이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오겠다고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지. 웬만하면 눈에 띌 사람이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대표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시끌벅적한 말소리가 잔뜩 취한 것처럼 들렸다. 누구는 발음이 샜고, 또 누군가는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지 못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비틀거리며 꾸벅꾸벅 인사하는 직원들을 향해 나는 최대한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Sejin’의 론칭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직원들과 함께한 회식 자리까지 마무리가 됐다. 특별한
날이니만큼 늘 가던 소고깃집 대신 코스 요리가 나오는 일식집을 다녀왔다. 회를 포함한 해산물을 잔뜩 먹은
직원들은 마찬가지로 사케 역시 한가득 마시고 얼큰하게 취한 채로 일식집을 나섰다.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
어두컴컴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간판에 들어온 불빛들이 잔상처럼 눈에 남았다. 조금 전까지
시끌벅적하게 있었던 탓인지, 차 안이 유독 조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태성 씨.”
“예.”
나는 눈을 깜박이며 느릿느릿 이태성을 불렀다. 론칭 행사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예상했던 것보다 예약된
향수도 많았다. 새로 출시된 향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으며, 농담으로라도 나쁜 말을 하는 손님도 없었단 말이다.
“별건 아니고…….”
그런데 왜 이리 기분이 착잡할까. 공허한 기분과 함께 물밀듯 허무함이 밀려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사실은 원인이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권이도 씨, 오늘 보셨습니까?”
분명 온다고 했는데, 권이도가 끝까지 오지 않았다. 인사는 건네지 못한다고 해도 얼굴은 내비칠 줄
알았건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행사장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군요.”
언제부터 이렇게 서운함이 쉬워졌을까. 의도하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유치하게 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울컥 억하심정이 들었다. 무리하겠다는 말을 하지 말지.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달큼하게 웃지라도
말지.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들이 자꾸만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 차는 집으로 향했다. 애써 잡념을 떨치려고 노력해 봤지만, 집에 도착할 때까지
별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기분만 더 나빠져서 막상 차에서 내릴 땐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늦었네요.”
예의 그 우아한 목소리가 나를 맞이해 줬다. 시간이 늦었음에도 정장을 입고 있었고, 머리도 아침에
세팅한 그대로였다. 혹시 지금까지 일을 했던 걸까. 그리 생각하면서도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바쁘셨나 봐요.”
“바빴죠.”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곤 고개를 까딱했다. 왜일까, 아래로 내리깔린 시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얼 얘기하는지도 모르면서, 권이도는 담담히 덧붙였다.
“갑자기 일이 생겼거든요.”
- 다음 화에 계속
69 화. Boite de Pandore(4)
“……미안합니다.”
“…….”
“…….”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시선은 상대방에게 고정되어 있는데, 그 시선이 좇는 건 서로가
아니었다. 그의 사과가 거짓 같지는 않았으나, 진짜 속내는 감추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
“다 권이도 씨 덕분이에요.”
“…….”
“그러게.”
그런데 권이도는 영 알 수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나직이 가라앉은 음성은 긍정적인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정적이었다. 느릿느릿 두 눈을 깜박인 권이도가 들릴 듯 말 듯 이야기했다.
“정세진 씨.”
“……네.”
왜 못 주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장미를 어떻게 했냐고, 그렇게 묻지도 못했다. 권이도는 특유의
여유로움을 가장한 채 부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끝마쳤다.
***
‘오늘 늦을 겁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권이도가 평소와 달랐다. 오늘
아침. 정확히는 어젯밤부터 내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 정확히 어디가 이상한지 모르니 왜
그러냐고 묻기에도 애매했다.
이희나와 비슷한 이미지의 강사는 모든 시험이 끝난 내게 상냥히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고생했다며
언젠가 학원 홍보를 해달라는 장난스러운 말도 덧붙였다. 나는 그와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고, 미리 챙겨 두었던
향수 샘플까지 선물한 뒤에야 비로소 완전히 학원을 나섰다.
계절이 여름의 한가운데였기 때문에 밖으로 나왔을 땐 후텁지근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구나. 그걸 가장 적나라하게 느끼는 게 계절이 아닌가 싶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요.”
“아직 갈 길이 멀었더라고요.”
“김 실장님.”
“예, 대표님.”
“5 년 조금 넘게 일하셨습니다.”
“5 년이라…….”
“도착했습니다, 대표님.”
집으로 향하는 길은 마냥 짧기만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눈 깜박할 새에 차고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이태성과 김 실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월요일에 보자고 말한 뒤 집으로 올라왔다.
“언제 오려나…….”
목욕을 다 하면 온실에서 책이나 읽으며 권이도를 기다려야지. 조명을 달아 놨으니 어두울 때 가더라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한두 시간만 머물다가 돌아오면 권이도도 퇴근하지 않을까. 즉흥적인 계획이었으나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내가 온실에 다녀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권이도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세진아.’
잠결에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정하다면 다정한 그 목소리는 내가 대답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왜 부르냐고,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그리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세진아.’
나는 이 악몽이 근래에 더욱더 심해진 그 내용이라는 걸 알았다. 약혼식을 앞뒀던 날, 꿈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 누군가 내 머리채를 붙잡고 거칠게 뒤로 젖히던 그 감각.
‘창부처럼 굴어야지.’
수치심을 비롯한 모멸감은 그동안 이미 익숙해진 것이었다. 벌어진 입술 틈새를 억지로 파고드는 살덩이도
이제는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물론 상황에 적응이 되었다고 해서 그 고통까지 익숙해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으웁…….’
‘입 똑바로 벌려.’
‘정세진.’
목구멍을 억지로 벌리는 그 감각은 마치 현실처럼 선명한 것이었다. 목울대가 불룩 튀어나올 것처럼 깊이
삽입된 성기가 마침내 뿌리 끝까지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반쯤 빠져나갔다가 가차 없이 목구멍을
꿰뚫는다.
‘욱……!’
나는 이다음에 어떤 장면이 이어질지 알았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오므리는 바람에 두꺼운 성기에 앞니가
닿는 순간. 움직임을 멈춘 상대가 거칠게 내 머리채를 잡아당겨 내던지는 것까지.
“……허억!”
번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리멍덩하던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새것
같은 구두 앞코가 아닌 높디높은 방의 천장. 그리고 피부에 닿는 건 칼로 저미는 듯한 페로몬이 아닌 포근하고
보드라운 이불.
“하아, 하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차갑게 식은 이마를 매만지며 찬찬히 주변 풍경을 돌아봤다. 권이도가 선물한
향수와 은방울꽃, 그리고 내가 만든 향수병과 소설책 두 권까지.
“……언제 잠들었지.”
“…….”
아, 퇴근했구나.
“…….”
“…….”
권이도가 있었다. 수려한 외모에 기품 있는 페로몬이 느껴지는 권이도. 방금 퇴근한 것처럼 정장을 입고
있는 주제에 평소와 달리 머리는 조금 흐트러진 권이도.
“……안 잤습니까?”
그는 다급히 책상에 내려놨던 무언가를 서랍에 넣었다.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철컥 서랍 잠그는 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 그가 방금까지 만지고 있던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총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뭐 하세요?”
“…….”
“……권이도 씨?”
“발이 찬데.”
“…….”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반대쪽 발에도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아무리 여름이어도 맨발로 다니지 말라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건네기도 했다. 그러는 저야말로 맨발로 무릎을 꿇고 있으면서. 남들이 보면 기함할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기다릴까요?”
“…….”
권이도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봤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느릿느릿 눈을 깜박인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 없는 풍경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찼다.
“……아뇨.”
그러나 권이도는 나를 바라본 그대로 느리게 대꾸했다. 나직이 내려앉은 음성이 차분히 뒷말을 이었다.
“오늘은 안 되겠군요.”
그날은, 서재로 향하기 전에 꾸었던 것과 이어지는 내용의 꿈을 꿨다. 누군가 나를 억지로 바닥에
엎어뜨려 제압하는 꿈. 바르작거리는 몸을 내리눌러 개처럼 다루던 끔찍한 꿈.
‘너 같은 걸 믿는 게 아니었는데.’
- 다음 화에 계속
70 화. Boite de Pandore(5)
그런데 자꾸만 꿈에 권이도가 나왔다. 그저 꿈이라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한 장면들이었다. 당연히 그
여파는 현실까지 이어졌다.
“……출근하셨다고요?”
온실에는 고용인이 준비한 수국 꽃차가 놓여있었다. 계절을 고려해 차가운 차였는데, 파란 색감의 꽃잎이
무더운 여름날과 퍽 잘 어울렸다. 보이는 것과 달리 쌉싸름한 맛 때문인지, 이태성은 한입 머금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뭐…… 퇴근 후에 만날 수도 있죠.”
“그보다 이젠 아닌 척도 안 하시는군요.”
“…….”
그리고 오랜만에 반지를 꼈다. 은색의 링 가운데 하얀 보석이 박힌 권이도와 내 약혼반지. 이제는 자국도
모두 지워진 터라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낯설게 느껴졌다. 새삼스러운 기분에 반지를 만져 보던 나는 문득 다
늦은 의문 하나를 떠올렸다.
“…….”
“……이것도 물어봐야겠네.”
기분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내가 품은 의문과 그에게 물어야 할 것들. 그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정리됐다. 오랜 시간을 준비해 왔으니 말을 더듬거나 떨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자신이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향수까지 뿌렸다. 권이도가 선물한 향수를 손목에 뿌리고, 목
뒤에 가만히 대고 있다가 떼어 냈다. 그럼에도 좀 허전한 기분이 들어서, 그 위에 내가 그의 페로몬을 본떠 만든
향수까지 한 겹 덧씌웠다.
“후…….”
오늘이 지나면, 권이도와 내 사이가 어떻게 바뀔까. 권이도는 과연 내가 물어보는 것들에 솔직히 대답해
줄까. 만약 답하지 않는다면 그다음에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
“길이 많이 막히네요.”
‘한강이나 한 바퀴 돌고 오죠.’
“…….”
둘과 혼자의 차이일까. 반짝이며 부서지는 조명에 별다른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1 분 1 초가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권이도 없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렇게 권이도를 기다리길 15 분. 그는 약속 시간 딱 5 분 전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웨이터를 따라 들어오는 권이도의 모습이 보였다.
“…….”
“……아뇨.”
“…….”
“알아주니 고맙군요.”
“중요한 날이라니…….”
권이도와 내 잔이 모두 채워지고 곧이어 주방장이 요리를 내어 왔다. 설명을 최대한 간략하게 해달라고
요구했기에 메뉴마다 간단히 이름과 재료만 소개해 줬다. 물론 요리에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답게 그마저도 긴
편이긴 했다.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근사한 식사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잘 먹을게요.” 그리 말하는 목소리
역시 달큼하기 짝이 없었다. 이 자리가 성공적으로 끝나리라고, 그런 환상을 가지게 될 정도로.
이름깨나 있는 레스토랑답게 요리는 굉장히 맛있었다. 우리는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 갔고,
그사이 와인을 두 잔 정도 비웠다. 권이도는 ‘Sejin’의 론칭을 축하하며 간략히 앞으로의 계획 따위를 물어
왔다.
“그래서 기획팀이…….”
“…….”
“……혹시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뇨, 그냥…….”
역시나 그는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비스듬히 입매를 당기며 눈가를 찌푸렸다.
“아, 어제…….”
“……늘 비슷합니다.”
“잘 못 잤다는 뜻이군요.”
“…….”
“무슨 꿈을 꾸는 겁니까?”
“……음.”
딱히, 대답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 질문을 듣자마자 입이 간질거렸다. 입 안에 한가득 이야기가 담겨서
툭 내뱉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그에게 모든 걸 묻기 전에, 나부터 솔직해지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엔 놀라울 정도로 담담한 기분이었다. 언젠가, 선호 측에서 나를 정신병자 취급할
거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가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권이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서서히 입꼬리가 내려오더니 이내 입매를 딱딱하게
굳힌 채 나를 응시한다. 그래서 노파심에 괜히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
“……상대가 나뿐이라고요?”
“제가 다른 사람 얘기를 한 적이 있던가요?”
- 다음 화에 계속
71 화. Boite de Pandore(6)
“아무튼 그래서…….”
“……권이도 씨?”
“…….”
“…….”
“……아뇨.”
더디게 대답한 권이도가 시선을 피했다. 그러더니 왼손을 들어 제 눈가를 덮는다. 그대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자조적으로 들렸다. 불안정하게 일렁이는 페로몬이 피부로 느껴졌다. 내가 우성이
아니라면 몰랐을 미미한 변화였는데, 가까이 붙어 앉은 게 아님에도 그의 페로몬엔 예민하게 반응했다.
“…….”
“권이도 씨.”
“혹시 어디 안 좋으면…….”
“……정세진 씨.”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면접을 보는 사람처럼 등허리를 곧추세웠다. 본능적인 긴장감이 어깨를 바짝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겸사겸사 할 얘기가 있다고 했지. 내가 이날을 기다렸듯, 그 또한 무언가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말씀하세요.”
권이도는 내 허락이 떨어진 다음에야 입술을 달싹였다. 말이 잘 나오지 않는지, 눈가를 찌푸리며 와인을
한 모금 마시기도 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목울대에 시선을 고정하자, 매끄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투자만 했고, 그 과정엔 손댄 게 없어요. 시작을 정세진 씨가 하진 않았어도 이제는 정세진 씨가
일구어 낸 회사가 맞죠.”
약혼식 날, 그에게 들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본부장으로 계속 일하고 싶냐고 너그럽게 물었던 그 목소리.
그렇다고 하면 선뜻 그러라고 할 것처럼 기회를 주었던 그 질문 말이다.
그 당시엔 내가 해야 할 대답이 정해져 있었다. 이렇다 할 미련도 없었고, 딱히 그에게 밉보일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이번엔 정말 내가 바라는 대답을 해도 되지 않을까.
“……네.”
“…….”
“……말씀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
“갑자기 그 집에 들어와서 여러모로 힘들었을 거 압니다. 내가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정세진 씨한테
곤란한 일도 많았을 거고.”
“정세진 씨.”
“……예.”
“결혼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툭, 튀어나온 말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한 주변에 이명까지 들렸다.
내가 미처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내 우려하던 현실이 이렇게 뒤통수를 때릴지 몰랐다. 아버지가 잡혀갈 때부터 걱정했던 문제. 내내
품고 있었으나 미처 해소하지 못한 의문.
이 근사한 식사는 우리의 약혼이 끝나는 자리였나 보다. 그제야, 나는 앞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권이도의 왼손에 나와의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
“…….”
“…….”
배신감. 그 단어를 떠올린 건 집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우리 관계를 정의할 자격은 나한테 있다고
했으면서. 이 약혼은 계약이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의 혼사라고, 그렇게 선을 그었으면서. 나는 을이 아니니
권리만 취하면 된다고 달큼한 말을 속삭인 주제에.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기도 했다. 손끝이 차게 식는가 하면 금방이라도 비명이 터질 것처럼 명치가 옥죄였다.
그래서 나는 차고에 도착하자마자 권이도를 둔 채 집으로 올라왔다. 계단을 뛰듯이 올라 방으로 돌아왔고,
드레스룸을 뒤져 내가 가지고 왔던 캐리어를 꺼냈다. 식사를 위해 차려입었던 옷들을 성의 없이 벗어 버린 뒤엔,
내가 챙겨 온 옷가지 중 하나를 골라 갈아입었다.
“하.”
“아…….”
“…….”
‘불안해서 그랬어.’
그러나 그의 방문을 열려던 순간, 왠지 모르게 싸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나는 복도를
가로질러 그 끝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 불빛은 스며 나오지 않았지만, 이 안에 권이도가 있으리란 확신이 생겼다.
“…….”
“…….”
“…….”
역시나 서재에는 권이도가 있었다. 그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책상에 살짝 걸터앉은 채로. 멍하니
서랍이 있는 쪽을 보며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다.
“인사라도 하러 왔나 보죠.”
그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지그시 나를 향하는 시선에 흔들림이라곤 없었다.
나는 서재의 문을 닫고 한 발짝 더 그에게 다가섰다.
“……아뇨.”
“…….”
잠깐 잊어버렸던 분노가 다시금 차올랐다. 울컥, 솟구친 감정은 억누를 새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성적으로 질문을 건네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아직 향수를 만들어 주지 못했고 우리의 약속은 끝나지 않았다. 관계를 정의할 권리가 내게 있다면
관계를 끝낼 권리도 내게 있어야 했다. 이렇게 쫓겨나듯 도망칠 게 아니라, 이해가 될 때까지 그에게 따져
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까는 무의미한 약혼이라고 했으면서. 권이도는 순순히 다른 대답을 꺼내 놨다. 문제는, 그 대답이
아무런 설득력이 없었단 사실이다.
“그거랑 이건 다릅니다.”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
따지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생각 따위 이제는 들지도 않았다. 이 지저분한 기분을,
그리고 배신감을, 그에게 낱낱이 고해야겠다는 충동만 들었을 뿐.
“…….”
“…….”
“근데 이제 와서 나를 버리겠다고?”
단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는 미래를 권이도가 꿈꾸게 했다. 단 한 번도 선택해 본 적 없는 것들을
선택하고, 바라본 적 없는 것들을 바라게 됐다. 만약 이럴 거였다면 내게 그런 달큼한 것들을 안겨 주면 안
되었다.
“……버리는 게 아니라.”
“왜.”
“…….”
- 다음 화에 계속
72 화. Boite de Pandore(7)
“……너.”
권이도는 떠듬떠듬 멍한 목소리를 냈다. 그답지 않게 당황한 듯했고, 얼빠진 모습은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초점 잃은 두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너 기억…….”
“기억?”
“…….”
“권이도 씨.”
“…….”
“또 그냥 입 다물고 있을 겁니까?”
그런데 이제, 그를 떠나가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이 집에서 나가라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는 미래를 약속하지 않을 테니, 무의미한 관계를 끝내자고. 내게는 그게 잔인한 이별 통보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놓아줄 때가 됐다고?”
“…….”
“놓아주긴, 씨발…….”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스르륵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조금만 방심했다간 속에서부터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세진아.”
“세진아, 내가…….”
“변명할 거면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작게 물어보며 마른세수를 했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고 억지로 입매를 말아 올리기도 했다. 권이도는
여전히 소리 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
왜, 차라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지. 네가 필요 없으니까 꺼지라고 그렇게 말했으면 포기했을
텐데.
그러니 이건, 단순한 화풀이에 불과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어리광과 애정을 갈구하기 위한 최후의
발악이었다.
“…….”
“다 자기만족이라고, 지금.”
권이도는 그 말에는 반응을 보였다. 눈가를 움찔하며 입술을 달싹인 것이다. 자괴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 내면에 엿보이는 감정이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내가 멍청했죠.”
“…….”
“……너는.”
권이도는 그제야 천천히 운을 뗐다. 시야가 캄캄한 터라 목소리가 유독 잘 들렸다. 이윽고 흘러나온
한마디는 지금까지와 달리 억울함이 서려 있었다.
기분 탓일까, 그 또한 감정이 격해졌단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거기서 풍기는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랐다. 늘 여유롭고 당당하던 권이도가 지금만큼은 한없이 초라한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
“이젠 내가 있는 날이 없을 텐데.”
“…….”
“잘 지내봐요, 한번.”
그러나 문이 열리는 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열렸던 문이 닫혔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권이도가
주먹으로 문을 쾅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자욱한 페로몬과 함께 싸늘하게 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내보라고?”
“……흡.”
“세진아.”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끝내, 권이도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게 만들었다. 소유욕과
집착으로 얼룩진 눈빛이 소름 끼치도록 기분 좋았다.
“……흐.”
그리고 전희라고 부르기엔 거친 행위가 연달아 이어졌다. 짐승처럼 내 상반신을 깨물고 빤 그가 아무런
전조 없이 아래쪽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직 젖지 않은 곳이었으나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건 금방이었다.
“권이도…… 흣…….”
“아흑……!”
“허윽, 흐, 아……!”
“……하.”
“흑, 흐윽…….”
그러다 어느 순간부턴 나도 모르게 울고 있던 모양이다. 줄줄이 흐르는 눈물이 가뜩이나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가렸다. 몸이 잘못된 것처럼 심장이 뛰는데, 그의 품에 안기면 이다지도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세진아, 정세진.”
“아흐, 흐윽…….”
“아흑……!”
깊은 삽입과 함께 배꼽과 가까운 곳에서 권이도의 성기가 크게 부풀었다. 안 그래도 빠듯하던 내벽이
찢어질 것처럼 압박됐다. 나는 그의 등에 손톱을 세우고, 울컥 참았던 정액을 사출했다. 온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뜨거운 페로몬을 쏟은 그가 내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
찌릿, 오묘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숨이 턱 틀어 막히고 심장이 멈춘 것처럼 아득한 감각이
몰아쳤다. 머릿속이 새카맣게 죽었다가, 다시 새하얗게 변하길 반복했다.
“아, 아……!”
묶였다고,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히트 사이클도 아닌데 그에게 반응하듯 향긋한 꽃 냄새가
피어올랐다.
‘정세진입니다.’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장면들이 있었다. 성대하고 요란한 결혼식, 그리고 새하얀 정장을 입은 내 모습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권이도. 함께 손을 잡고 걸었던 웨딩로드와 그 끝에서 터져 나온 박수
소리까지.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 다음 화에 계속
73 화. Hiver Rigoureux(1)
“헉, 허억…….”
부모님은 처음부터 없었다. 왜 없었는지는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이 함께였고, 정신을 차렸을 땐 항상 매를 맞고 있었다. 남자 새끼가 웬 오메가냐며, 제 어미를 똑 닮아
여우 같은 년이라며 온갖 욕지거리를 들었다.
그러나 도피처라 생각했던 집 밖은 사실은 혹독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길거리는 너무 넓었고 피부로
느껴지는 계절은 춥다 못해 아프기까지 했다. 이제 발에는 아무런 감각도 없어서 돌멩이에 스쳐 상처가 났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세상에, 쟤 뭐지?”
“애가 혼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차갑게 식은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내 착각일지도 몰랐다.
시야가 흐릿하게 변하는가 하면 드문드문 정신이 끊기기까지 했으니.
죽을지도 모른다고,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납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서 옮기는 걸음을 멈추지는 못했었다.
“저쪽으로…… 야!”
“……뭐야, 이건.”
“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그 끔찍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깊이 고민하지 않았음에도 튀어나오는
말이 있었다.
“저 오메가예요.”
“……오메가?”
***
남자는 나를 데리고 오자마자 커다란 병원으로 데려가 피를 뽑았다. 키와 체중을 재고 이런저런 검사를
시킨 뒤에 오메가가 맞느냐며 의사에게 세 번이나 확인했다. 오메가가 확실하다는 말에는 혹시 하자가 있는지 잘
보라며 두 번쯤 더 닦달했다.
그리고 데려간 곳은 고개를 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집이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데만 한참이
걸렸고, 신발을 벗는 현관은 내가 있던 집보다 훨씬 커다랬다.
“당신 왔어요?”
얼굴이 하얗고 입술이 빨간 여자는 연신 걱정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부모는 어떻게 할 거냐며,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섣불리 결정을 내리냐며 계속해서 따져 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나는 정철호 회장의 입양아로서 지내게 됐다. 식사 예절에서부터 화술, 심지어 한글까지 새로
배우고 어디서 어떤 말을 듣건 동요하지 말라며 여러 훈련도 받았다.
“……안녕.”
“잘 부탁해, 민재야.”
그리고 이듬해 어머니가 아이를 가졌다. 열 달이 지나 서영이가 태어났고, 아버지는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로 매일 이른 시간에 퇴근했다. 화목한 가정, 그리고 부족함 없는 완벽한 집안. 이물질처럼 끼어든 나를
향한 관심은 고작 이런 거였다.
“발현은 아직이냐?”
***
“본부장님! 결혼하신다면서요?”
내가 결혼한다는 사실은 하루아침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선호그룹 측에서 기사를 뿌리고, 우리의
결혼을 낙인찍은 탓이었다. 나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알파가 내 비밀스러운 연애 상대이자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로 탈바꿈돼 있었다.
민재는 틈만 나면 나를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모르는 알파 새끼에게 다리나 벌리며 살 거냐고, 오메가
구실도 못 하는 게 무슨 결혼이냐고.
새하얀 예복, 그리고 단정히 넘긴 머리. 은방울꽃으로 만든 부케와 비슷한 디자인의 부토니에까지.
“역시 내 아들이라니까.”
“씨발, 존나 안 어울리네.”
나 또한 동의하는 말이었다. 외모가 어떻다는 게 아니라, 내게는 과분한 차림이라는 점에서. 대놓고
보여 주기 위해 꾸민 모양새가 이토록 어색할 수가 없었다.
“이 애비가 믿는 거 알지?”
“……예, 아버지.”
습관적인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그제야 조금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품에서 조그만 립스틱 크기의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그러는 김 실장도 베타가 아니냐고, 그리 묻지는 못했다. 이런 건 효과가 없다고,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었다. 나로선 그냥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향수를 뿌리는 게 최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돌리러 갔다. 모르긴 몰라도, 온갖 유명 인사를 다 초대한
모양이다. 김 실장까지 자리를 비운 탓에, 텅 빈 대기실엔 나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
“권이도라…….”
결혼 상대가 권이도라고 했던가. 나보다 세 살이 많은 그는 나와는 평생 인연조차 닿지 않던 상대였다.
외모 좋고, 사업 수완 뛰어나고, 공과 사 구분이 철저하며 절대 웃지 않는 사람이라고.
사람들도 순진하지, ‘그’ 권이도가 연애결혼 따위를 할 리가 없는데. 아니, 정략결혼임을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 축하를 건넨 걸 수도 있었다. 그에겐 결혼조차 사업을 이끌어 나갈 수단이라는 걸, 그 누가 모르고
있겠느냔 말이다.
바라는 게 있다면 사소한 것들이었다. 손버릇이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고, 침대 위에서 폭력적이지
않았으면 했다. 어차피 다리를 벌려야 할 운명이었으니, 그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기만을 바랐다.
한참 생각에 잠긴 와중에 드르륵, 장지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굳이 그쪽을
바라보진 않았다. 김 실장이거나, 아니면 민재. 둘 중 하나일 게 분명했으니까.
타박, 타박,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 발걸음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건, 근처에서 향긋한 나무
냄새가 풍겨 올 즈음에야 깨달았다. 목덜미를 스치는 은은한 페로몬은,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진짜 알파의
것이었다.
“…….”
“…….”
“정세진?”
나직이 흘러나온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울림이 독특한 음성은 내 이름을 내뱉는 발음마저 남다르게
느껴졌다. 짙은 눈동자가 내 얼굴에 머물렀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봤다.
“정세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괜찮은 오메가라더니…….”
“얼굴 빼곤 봐줄 게 없군.”
- 다음 화에 계속
74 화. Hiver Rigoureux(2)
“하하…….”
“그래서 여긴 무슨 일로…….”
“얼굴은 한 번 보고 가려고요.”
“…….”
“폐 끼치는 일 없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정중히 이야기하자, 권이도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미미한 변화였으나 왜인지 만족스러워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곤 무심히 이야기했다.
권이도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는 대기실에서 정원으로 이어지는 장지문을
눈짓했다.
“뭐, 굳이.”
사근사근 웃으며 말했는데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굳이 편하게 할 필요가 있냐는 의미가 아니라
구태여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겠다는 의미였다.
“식이 끝나면 우선 내 집으로 갈 겁니다. 얘기 들었겠지만 그쪽은 당분간 거기서 살 거고.”
“……네?”
“…….”
권이도가 떠난 후에도 대기는 끝나지 않았다. 중간중간 직원들이 들어오긴 했지만, 그들은 말없이 내
옷과 머리만 확인했다. 예복이 구겨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듯해서, 나중에는 소파에 앉지도 못한 채 서 있어야
했다.
“정세진 님, 준비하실게요.”
“…….”
장지문이 좌우로 열리기 시작했다. 손에 든 부케가 괜히 무겁게 느껴졌다. 문 틈새로 스며든 햇살은
눈물이 날 것처럼 따사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시큰거리는 눈을 감았다가 뜨자, 널찍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
“…….”
깜박,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서서히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 입을 맞추는 순서가 있었지. 나는 그런
생각으로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보드라운 입술이 닿을 땐, 사실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떨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불쾌하지도 않았다.
손은 차가운 사람이, 그래도 입술은 따뜻하구나. 딱 그 정도 생각을 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
***
결혼식은 자칫 방심했다간 하품이 나올 만큼 지루했다. 그나마 괜찮았던 건, 권이도가 성혼 선언문을
낭독하는 순간이었다. 발성을 따로 배우는 건지, 목소리가 웬만한 배우 못지않게 듣기 좋았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제가 저희 세진이 데려와서 제 자식처럼 아주 살뜰히 키웠거든요. 이렇게 전무님한테 보내려니까 마음이
아프고 그럽니다.”
“…….”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말문이 막혔을 뿐이지만, 남들이 보기엔 슬픔을 참는 모습으로 보이길 바랐다.
그래야 자꾸만 내려오려는 입꼬리가 민망하지 않을 테니.
“말조심해. 여기 지금 듣는 귀 많아.”
권이정은 키득키득 웃으며 권이도의 어깨를 두드렸다. 먼 거리에서 보면 사이좋은 형제처럼 보일 터였다.
진득한 눈으로 내 목덜미 따위를 훔쳐본 권이정이 목소리를 낮춘 채 한마디를 보탰다.
“…….”
“정세진.”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엔 민재가 있었다. 밝게 염색한 머리를 깔끔하게 정돈하고
넥타이 없이 단정한 정장을 입은 채였다. 어머니를 꼭 닮아 곱상한 얼굴에 그득그득 지저분한 감정이 가득했다.
“너 씨발…….”
“…….”
“배은망덕한 새끼.”
“……뭐?”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걸 민재에게 비난받을 이유는 없었다. 갑작스레 몰려든 피로감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나는 어제 채 5 분을 자지 못했고, 오늘은 한 끼도 먹지 못한 채 온종일 긴장한 상태였단
말이다.
“형 걱정해 주는 건 알겠는데…….”
“…….”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잔뜩 토라져 가버릴 민재를 알았기 때문이다.
형과 가족. 민재의 역린이 그 두 개라는 걸 모르지 않았으니.
“하, 씨발.”
“……아.”
낭패였다.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걸 보여 줄 필요가 없었는데. 민재가 움찔하며 눈치를 살피는 사이,
권이도는 여전히 관심 없는 얼굴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 재미없는 대화 더 할 겁니까?”
“…….”
“더 할 거여도 가죠.”
“…….”
“형 갈게.”
- 다음 화에 계속
75 화. Hiver Rigoureux(3)
“…….”
“…….”
권이도는 아까의 대화를 어디까지 들었을까. 길게 대화를 나눈 건 아니지만, 곤란할 부분이라면 있었다.
가령 ‘그딴 알파 새끼’ 같은 부분.
“어디서부터 들으셨습니까?”
“…….”
“죄송합니다.”
“…….”
너그럽게 말하는 주제에 권이도의 표정은 전혀 너그럽지 않았다. 민재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남
일이니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단조로운 평가를 끝으로 우리 사이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쥔 채 창밖을
내다봤고, 권이도는 더는 내게 일말의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손에 낀 결혼반지가 괜히 갑갑하게 느껴졌다.
***
내게 방을 안내해 준 고용인은 사무적인 말투로 이런저런 것들을 설명해 줬다. 가령 내게 허락된 공간이
내 방과 주방 정도라는 것, 집에서는 가능한 한 조용히 지내고 친구나 가족을 데려오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된다는 것.
골방을 준 것도 아니고 딱 생각한 그대로의 방이었다. 크기가 좀 작고, 가구라곤 달랑 침대가 전부여서
그랬지. 뭐, 내게 필요한 건 옷가지 정도였으니 더 넓은 공간은 사치에 불과했다.
“인사를 해야 하나…….”
“…….”
***
권이도와의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는 염려했던 일은 아무것도 생각지 않았다. 가령
내게 손찌검을 하는 권이도라든가, 침대에서 다리를 벌리는 일이라든가, 혹은 매일같이 듣는 모욕적인 말 따위들.
‘……왜 여기 있습니까?’
나는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하단 한마디에 권이도가 더 불쾌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같다. 물론 착각으로 치부해도 좋을 만큼 짧은 찰나였지만 말이다.
그 말엔 권이도가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고용인에게 가방을 건네주고 미간을 좁혔을 뿐이다. 약간의
간격을 둔 뒤에야 그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그래서 순순히 말했는데 이번에도 권이도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방으로
올라갔고, 그날은 더 이상 권이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비?”
“그 사람 페로몬 같네…….”
앞으로 이틀, 그 이후엔 내 휴가도 끝이었다. 월요일엔 다시 회사에 나가야 했고, 본부장으로 복귀해
그간 못 했던 업무를 해야만 했다. 물론 높은 확률로 병가를 써야겠지만, 그 전에 권이도에게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억제제가 안 듣는다고…….”
“…….”
‘하자품을 주워 와서…….’
한창, 생각에 잠긴 와중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점심을 먹으라는 고용인의 호출이었다. 식사는 잘
챙겨 주겠다던 약속대로 주방장은 내가 요구한 한식 위주의 식단을 꼬박꼬박 챙겨 줬다.
“네, 나갑니다.”
“……?”
“윽……!”
“……안 돼.”
“……흐으…….”
나는 기듯이 몸을 웅크린 채 이마를 바닥에 가져다 대었다. 갑작스럽게 몰려든 욕구가 이제는 아프게까지
느껴졌다. 대체 왜, 어째서 더 빨리 찾아온 건지. 그런 것들을 고민할 새도 없이 아래가 축축하게 젖었다.
“하아, 하아…….”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런 미래가 또렷이 그려졌다.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몸은
도무지 일으킬 수가 없었다. 넘치도록 차오른 욕구가 터질 것 같아서 입가로 침이 줄줄 새는 것도 막을 수 없었다.
“흐윽…….”
“억제제를 안 먹는다고?”
내 방으로 들어온 권이도는 침대 위 풍경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고용인이 무어라 대답하자
짜증스럽게 깊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언뜻 풍기는 페로몬에 숨을 헐떡이는 내게, 조소 어린 한마디가
내려앉았다.
“별 수작을 다 부리는군.”
“정세진.”
“허억…….”
“……흐.”
당연히, 주사된 억제제 역시 내게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나는 그로부터 꼬박 하루를 히트 사이클로 더
앓았고, 과하게 복용한 억제제 탓에 몇 번이나 속을 게워 내야 했다.
- 다음 화에 계속
76 화. Hiver Rigoureux(4)
“하아…….”
지독한 회의감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히트 사이클이 끝나면 항상 느끼곤 하는 감정이었다. 자괴감 비슷한,
그런 원망들이 대상을 찾지 못해 속에서 맴돌았다.
그래도 이번엔 일찍 끝났으니 다행일까. 보통은 꼬박 일주일을 앓곤 했으니. 그보다 문제는 주기가
갑자기 왜 앞당겨졌냐는 건데…….
나는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애매하게 점심에 가까워진 시간이니 지금 찾아간다고
해서 딱히 무례하진 않을 것이다. 괜히 옷매무새를 한 번 더 가다듬고, 지저분한 페로몬이 남았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권이도는 2 층 서재에 있다고 했다. 원래는 주말에도 출근하지만, 오늘은 집에서 업무를 본다고 했다.
나는 2 층 끝자락에 있는 방이 서재라는 것과 그가 주로 그곳에서 업무를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똑똑.
약간의 간격을 두고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문고리를 붙잡아 내리는 순간엔 이유 모를
긴장감까지 들었다. 권이도가 내게 보였던 차가운 표정이 눈앞을 아른거리는 기분이다.
총이었다. 새카만 몸체에 주둥이가 은색으로 반짝이는 기다란 총. 그 무게감과 정교함이 도무지 가짜로는
보이지 않는 물건.
라이터인가?
“무슨 일입니까.”
“…….”
“괜찮으시면 잠깐 시간을…….”
“…….”
“……왜 그러십니까?”
그의 시선이 찬찬히 내 온몸을 훑었다. 저렇게 보는 건 습관인가. 전처럼 평가하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깊이 생각에 잠긴 것 같긴 했다.
“씻었나 보군요.”
“페로몬이 전혀 안 남았길래.”
“……아.”
“네, 씻고 왔습니다.”
“얘기해요.”
그는 펜을 내려놓고 양손을 포개 책상에 올려놨다. 여전히 눈가는 찌푸린 상태였고 시선도 못마땅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눈을 내리깐 채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알면 됐습니다.”
“……그.”
그래서 변명을 위해 차분히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에게 조건을 듣지 못했지만, 대략적인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아버지가 말한 ‘오메가 구실’이 무엇일지 모르고 있지 않았으니까.
머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가웠다. 당황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주절주절 늘어놓듯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사실을 말하듯 담담히 이야기하고, 그러니 최대한 말씀하시는 조건에 맞추겠다고 할 생각이었단 말이다.
“그러니까…….”
몸이나 판다는 부분에선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민재에게 들었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 서늘한 시선이, 딱딱하게 굳은 입매가, 정말 나를 혐오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인정이 빠른 건 편하군요.”
“안 나갑니까?”
그러고 보니 그랬지. 일상생활을 마음대로 하라고 했었다. 그게 자유를 주는 게 아니라 사실은 방치에
불과했나 보다.
“바쁘신데 실례 많았습니다.”
꾸벅, 인사를 건네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앞으로 그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그런 것들을 대략 알
것 같았다. 살갑게 구는 건 바라지도 않을 테니, 주제 파악만 제대로 하면 될 듯했다.
“아.”
“…….”
***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휴가가 지나는 동안, 회사엔 별달리 변화라고 할 게 없었다. 경영기획 본부는
여전히 바빴고, 내가 해야 할 일은 산더미같이 많았다.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김 실장과 함께 출근하자,
직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쾌활하게 나를 맞이해 줬다.
“본부장님한테 신혼 냄새 나는 것 같아요.”
나는 잔뜩 관심을 내비치는 그들에게 늘 그랬듯 살갑게 웃어 보였다. 그 삭막한 집보다는 회사에 나오는
게 훨씬 기분이 좋았다. 에너지가 넘친다고 해야 하나. 권이도와의 결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반지 너무 예뻐요.”
윤 대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본부장님 정도면 농땡이를 좀 피워도 된다며
짓궂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픽 웃음을 흘리고 직원들을 쭉 훑어보며 이야기했다.
“…….”
한적한 복도가 지나치게 넓게 느껴졌다. 방문을 여는 순간엔 목 언저리가 콱 옥죄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날들이 대체 며칠이나 반복될까. 그러한 의문은 억지로 머리에서 지워 냈다.
***
‘간혹 있는 일인데, 상대가 너무 우성이거나 페로몬 상성이 잘 맞으면 주기가 당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련님 같은 경우엔 형질 차이는 아닐 거고,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크겠네요.’
요컨대 권이도와의 상성이 좋아서 각인한 것처럼 몸이 반응했다는 말이다. 최 교수는 부부 사이엔 좋은
일이라며 축하했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웃기만 했다. 주기가 들쑥날쑥해지면, 곤란한 건 오로지
나뿐일 테니까.
‘고생은요.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
‘아이고, 꽃 같은 데 관심 있으세요?’
나로선 감사한 일이었다. 권이도가 출근한 주말엔, 온종일 그들과 함께 있어야 했으니. 나를 고깝게
여겼다면 그 시간마저 껄끄러웠을 터였다.
“…….”
“…….”
출근을 앞두고 주방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평소라면 이미 일을 나갔을 권이도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빈틈없이 완벽하게 차려입은 모습은 어쩌다 마주칠 때마다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냥 앉죠.”
그런데 등을 돌리는 순간, 나직한 음성이 나를 붙잡았다. 우아한 동작으로 식사를 이어 가던 권이도였다.
그는 내 쪽을 보지도 않은 채 명령하듯 이야기했다.
- 다음 화에 계속
77 화. Hiver Rigoureux(5)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
“…….”
음식을 절반쯤 비웠을 때, 권이도가 식기를 내려놓으며 운을 뗐다. 내가 고개를 들자, 그는 살짝 찌푸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모양 좋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
의외의 말이었다. 저 말을 하려고 앉으라고 했던 건가.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권이도가 고개를 까딱했다.
시위라니.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는 입장이던가.
“아뇨.”
“…….”
“그렇게 안 보였습니다.”
잠깐 표정 관리가 안 될 뻔했다. 뭘 어쩌라는 건지, 황당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권이도는 어쩐지
불쾌함이 서린 눈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죄송합니다.”
“…….”
하나 권이도는 정작 내 사과를 듣고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을 뿐. 그리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나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리고…….”
“…….”
“……식사요?”
“아아.”
“급한 일입니까?”
권이도에게 얘기를 해야 하나. 일일이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하룻밤을 자고 온다면 말하는 게
좋을 듯했다. 권이도는 내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없이 사라지는 건 얘기가 다를 테니.
“네, 부탁드립니다.”
어느 쪽이건 부디 조용히 넘어갈 수 있길. 적어도 지금의 생활을 더 나쁘게 만들 용건만은 아니길. 내가
바랄 수 있는 건 고작 그 정도였다.
***
그리고 종종 민재에게 전화가 왔었다. 별 쓸데없는 용건들(“넌 씨발, 결혼하고 얼굴도 안 비치냐?”)
이었는데, 목소리를 들어 보니 대부분 술에 취한 듯싶었다. 문제는, 민재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하필 권이도와
마주쳤다는 것 정도.
‘……얼른, 집에 들어가야지.’
‘…….’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눈 깜박할 새에 아버지와 약속한 날이 되었다. 나는 약속된 시간에 맞춰 김 실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권이도의 집을 나섰다. 오후에 비 소식이 있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청명하기만 했다.
‘본가?’
‘내가 출장 가기 전날이군요.’
‘…….’
뭐랄까. 일부러 그런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부를 드러낸 것처럼 알 수 없는 수치심이 확 밀려들었다.
그런 날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사실, 화제가 안 돌아갔던 모양이다. 민재의 말 따위 상관없다고 대답해 놓고 사실은 기분이 나빴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말이 괜히 가시 돋친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겠지.
“도착했습니다, 본부장님.”
집으로 들어가자 문 집사가 나를 맞이해 줬다. 뒤늦게 어머니가 나왔고, 그는 아버지가 서재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줬다. 나는 고용인에게 와인을 건네준 뒤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서재로 향했다.
“아버지, 정세진입니다.”
“찾으셨다고요.”
***
“오피스텔로 가주세요.”
“……수면제는 안 필요하십니까?”
“아.”
내게 선택권이 있다면 그게 수락과 거절은 아닐 것이다. 단지 기꺼이 알겠다고 할지, 아니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지의 차이일 뿐.
‘훔치라는 게 아니야, 그냥 좀 빨리 보자는 거지.’
‘…….’
‘믿을 건 가족뿐이야.’
“도착했습니다.”
“들어가세요. 고생하셨습니다.”
“…….”
시간이 늦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누군가 보았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멀쩡히 정장을
차려입고 주차장에서 비를 맞는 젊은 남자라니. 내가 생각해도 꽤 구질구질한 장면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곳에서 내리는 비를 맞았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온몸이 차갑게 식고, 아버지가 했던
말을 수없이 반복할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그 명령을 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속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 다음 화에 계속
78 화. Hiver Rigoureux(6)
‘역시 내 아들이야.’
딱 사흘을 감기로 앓았다. 그럼에도 꼬박꼬박 회사에 나갔는데, 아버지는 매일 나를 회장실로 불렀다.
평소엔 하지도 않던 안부 인사를 건네며 이미 받아야 할 자료였으니 너무 괘념치 말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끝내 내 좋지 못한 몸 상태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
“…….”
***
뭐, 구역질의 이유가 체기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전자의 이유조차 후자가
원인이겠지만, 나는 애써 그 모든 사실을 외면했다. 현실과 직면하는 순간, 버틸 수 없으리란 두려움 때문이었다.
“본부장님 정말 괜찮으세요?”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비를 왜 맞으셨어요!”
“하하…….”
***
“흐으…….”
“흐, 흡…….”
온갖 억울함이 몰려오는 와중에도 욕구는 끊이지 않았다. 아플 정도로 발기한 성기에선 이미 프리컴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앞이고 뒤고 죄 젖는 바람에 나를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수치심이 들었다.
“김 실장님……?”
“…….”
“감기에 걸렸다더니…….”
“흣…… 그게 마음대로…….”
그냥 나가 버렸던 지난번과 달리,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은 나를 관찰하는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에게서 풍기는 페로몬에 실낱같던 이성이 점점 날아갔다는 것 정도.
“으응…….”
의외로 그는 내가 붙잡는 대로 손가락을 내어 줬다. 서늘한 손바닥에 입술을 문지르자, 비웃듯 코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맨 살결에서 풍기는 페로몬은 녹진하게 풀린 이성을 아득히 멀어지게 했다.
“흐, 좋아…….”
“꼬시는 게 아주 자연스럽군요.”
“정세진.”
“흐으…….”
“나랑 자고 싶어?”
“……으응.”
“바라는 게 그냥 씹질인가…….”
“…….”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큼 커다란 성기였다. 단정하고 금욕적인 외모와 달리 핏줄이 도드라진 모양새에
긴장감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망설일 틈도 없이 그가 명령처럼 재촉했다.
“얼른.”
“……흐웁!”
“입으로 받아 본 적은 없나 보지.”
“……흡.”
“관두죠.”
“……아래로는, 흣…….”
“…….”
“넣을 수 있…….”
“제발, 흐으…….”
“정세진.”
“……잠, 깐.”
순식간에 바지와 속옷이 한 번에 벗겨졌다. 드러난 맨살에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굳게 닫힌 입구에
무언가 툭, 닿아 오고 큼직한 손이 억지로 엉덩이를 벌렸다.
그리고 푹.
“……!”
비명조차 내뱉지 못할 만큼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기도 했고, 내장이
납작 짓눌리는 기분이기도 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암전될 만큼 충격적인 감각에 숨이 턱 틀어막혔다.
“……아흑!”
“……아윽!”
“움직일 수가 없잖아.”
“아흐으……!”
“……하읏!”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이 아찔할 정도의 쾌감이 일었다. 내가 아랫배를 납작하게 집어넣자, 권이도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나왔다. 그리고 또 한 번 그가 같은 부분을 크게 쳐올렸다.
“헉, 으, 흐윽, 아……!”
“하윽……!”
「정민재」
-야, 정세진.
“…….”
-씨발…… 대답 안 하냐?
“…….”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제발 전화를 끊어 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권이도는 전화를 끊는 대신 오히려
내 가까이로 가져왔다.
“……하응!”
푹, 깊이 삽입된 성기가 안쪽을 건드렸다. 하릴없이 터진 신음이 전화 너머로도 또렷이 전해졌을 거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그는 또 한 번 같은 행동을 반복할 뿐이었다.
-…….
“하으, 흐, 우응…….”
-…….
“더 들을 생각 없으면 끊어.”
“하으으……!”
- 다음 화에 계속
79 화. Hiver Rigoureux(7)
‘……하, 씹.’
아무리 내게 비교 대상이 없어도 이게 정상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이렇게 아프고 힘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을 만큼 쾌감이 일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아래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데, 그가
깊숙이 들어올 때마다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으…….”
“……아.”
“……실례하겠습니다.”
내 앞에 식사가 차려지고,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였지만,
권이도와의 식사는 이게 보통이었다. 딱히 대화거리도 없는 데다 내가 먼저 살갑게 구는 건 그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예?”
“…….”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지.
“아.”
순간, 탄성이 나왔다. 그가 어떤 의도로 말했는지 뒤늦게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바람
빠지듯 웃음이 나왔다.
“……화대처럼 말씀하시네요.”
“……욕조?”
권이도는 그렇게 되물으며 눈가를 찌푸렸다. 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제 방엔 욕조가 없거든요.”
“…….”
“고용인한테 말해 놓죠.”
그런데 권이도는 흔쾌히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고개를 까딱하기도 했다.
“하늘은 못 보겠지만.”
또 한동안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내 입맛에 꼭 맞는 음식이 지금은 모래알처럼 꺼끌꺼끌하게 느껴졌다.
겨우겨우 한 입씩 삼키는 와중에 권이도가 내게 물어 왔다.
“아…… 비를 맞았습니다.”
“어디서?”
“……그냥, 뭐.”
구체적인 상황을 꼭 말해야 하나. 혼자 청승을 떨었다고 하기엔 아무래도 영 민망했다. 그래서 그냥,
대화를 끝내고자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걱정시켜 드렸다면…….”
“걱정이라니.”
그렇게 돌아온 방에는 지난밤의 흔적이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침대 시트도 새것이었고 어지러이
흐트러졌던 옷가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유일하게 남은 거라곤 아주 미미하게 느껴지는 그의 페로몬 정도.
***
‘조심히 다녀오세요.’
“……하잖아.”
늘 그랬듯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차고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그 앞에서 누군가
전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굳이 가까이 가지 않더라도 그게 권이도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일순, 권이도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고,
그는 딱 한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 연락할게.”
“안 탑니까?”
“정 회장한테 가서 말할 생각입니까?”
“……아뇨.”
“…….”
“들었다는 얘기군요.”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듣고말고. 그 거리에선 속삭이는 소리까지도 들렸을
텐데. 게다가 차고는 원체 소리가 울리는 공간이 아니던가.
“죄송합니다.”
“사과하라고 한 얘기 아닙니다.”
“……권이도 씨.”
뜬금없는 제안이라는 걸 안다. 우리는 그만큼 친하지 않았고, 내게는 이런 말을 건넬 자격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꺼낸 건, 따끔거리는 양심이 자꾸만 그를 붙잡으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이었다.
“…….”
권이도가 보기엔 분명 보잘것없는 풍경일 터다. 강물에 비치는 야경 따위를 이 사람이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그게 뭔 개소리냐고. 그리 거절당할 준비를 하는 와중에, 그가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물어 왔다.
“운전 잘합니까?”
“……예?”
그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그의 약지엔 나와의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왼
손목을 가볍게 턴 권이도가 나를 보며 고개를 까딱했다.
***
“……차가 정말 좋네요.”
“…….”
“…….”
“……바라는 거라면.”
“…….”
나는 고개를 돌려 가만히 정면을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담담한 척 있었지만,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애써 무시하고 있던 양심의 가책이 뱃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내려앉았다.
“저는…….”
“…….”
정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회사에서 한자리 꿰차고 싶지도 않았고, 권이도에게 빌붙어 한몫
챙기고 싶은 야망도 없었다. 그냥 아들로서의 인정. 그리고 안정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울타리. 딱 그 정도를
바라고 평생을 살아왔단 말이다.
“죄송합니다.”
“…….”
울림이 독특한 음성은 평소보다 조금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차라는 밀폐된 공간에 있기 때문일까, 바로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만 돌아가죠.”
- 다음 화에 계속
80 화. Hiver Rigoureux(8)
‘그만 돌아가죠.’
‘……네?’
함께 아침을 먹는 와중에 권이도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뜬금없는 주제였고, 그답지 않게 자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사람 다음 말을 듣지 못했다면 더 좋았을 거다.
그리고 주말 오후. 홀로 정원을 산책하던 때였다. 원래는 늘 방에만 있었지만, 날씨가 좋아서 잠깐
바람이라도 쐴 생각이었다. 마침 화단을 정리하던 정원사가 나를 보고 살갑게 알은체를 해왔다.
“산책하시나 봐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정원사가 화단에 쭈그려 앉았다. 주섬주섬 장미와 작약 따위를 꺾더니 손이 다치지
않도록 가시를 깔끔하게 다듬어 한 뭉텅이를 만든다. 잘 자라던 꽃을 꺾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가 민망해할까
싶어 말없이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울긋불긋한 꽃들이 화사하고 예뻤다. 향긋하게 풍기는 꽃내음이 가라앉은 기분을 한층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냥 손에 들고 있는 것만으로 입매가 부드럽게 풀릴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화병을 부탁드려야겠어요.”
나는 정원사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다시금 감사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왔다. 꽃향기가 솔솔
느껴져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꽃다발을 좋아하나. 그리 생각하며 계단을 오르던
때였다.
“…….”
“언제 들어오셨어요?”
그의 시선이 뚫어져라 내 얼굴을 향했다. 뒤이어 움직인 입술에선 “방금.”이라고 단조로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내 느릿느릿 눈을 내린 그가 물끄러미 내 손에 들린 꽃다발을 바라봤다.
“어…… 좀 드릴까요?”
“선물로.”
“……선물?”
아, 단어 선택을 잘못했다.
결국엔 이 꽃도 권이도의 소유일 텐데. 남의 물건으로 생색을 낸 기분이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접어 웃었다.
“예쁘잖아요.”
“…….”
“누가 줬습니까?”
“정원사분께서 주시더라고요.”
“꽃을 좋아해요?”
“어쩐지…….”
그러고 보니, 매년 이맘때쯤 소식이 들렸다. 나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몇 번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아마 이번엔 내가 그의 파트너로 참석해야 할 거다.
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또다시 가슴 언저리가 뭉치는 듯했다. 아까는 향긋하게 느껴지던 꽃향기가 지금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
창립 기념식은 명성호텔 리브라홀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기념식 당일이 되자마자 나는 권이도가 준비한
샵에 들러 옷과 머리를 세팅했다. 나란히 차를 타고 호텔에 도착한 뒤엔 우선 자연스럽게 그에게 팔짱부터 껴야
했다.
넓은 식장에서 내 자리는 당연히 권이도의 옆이었다. 권이도의 식구들도 근처에 있었지만, 그들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유일하게 딱 한 명 권이정만이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은 채 내게 추파를 던졌을 뿐이다.
권이도는 느릿느릿 이야기하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서영이를 번갈아 봤다. 내가 느끼기에도
위압적인 시선이었기에 세 사람 모두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이윽고 그 냉랭한 시선이 닿은 곳은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민재였다.
“…….”
민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주먹을 꾹 움켜쥔 채 말없이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한참을
그대로 있던 민재는 별안간 아무런 말 없이 휙 몸을 돌려 자리를 떠버렸다.
이미 예정된 결과가 성큼 다가온 기분이었다. 가까스로 무시하던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와 내 발목을
붙잡을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걸음을 옮기다 보면 언젠가 크게 넘어져 다치는 날이 오고 말 테다.
“…….”
“…….”
순간 참고 참았던 감정이 확 밀려들었다. 그건, 토기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자괴감이었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상체를 확 웅크리자, 권이도가 앞좌석과 연결된 인터폰에 대고 이야기했다.
“차 세워.”
차가 갓길에 멈춰 섰다. 괜찮으니 출발하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조금만 방심하면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게 눈물인지, 아니면 구역질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으.”
“멀미라도 해요?”
“…….”
“……죄송합니다.”
“그 죄송하단 말은…….”
“고쳐요. 나쁜 버릇이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목구멍이 확 조여들었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지끈거리는 통증이 온몸에
일었다. 언젠가 그가 페로몬을 쏟을 때 그랬듯, 호된 매질을 당하는 것 같기도 했다.
“……출발하셔도 됩니다.”
“…….”
“괜찮아졌습니다. ……죄송합니다.”
***
순간의 선택이 미래를 망쳤단 사실을 알아도, 그 선택을 돌이키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과거를
바꿀 수 없으니 현재를 바꿔야 하는데, 그럴 만한 기회가 찾아오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막연히
외면하다 보면, 어느 틈엔가 출구 없는 수렁에 목까지 잠겨 버린 나를 발견하고 만다.
그렇게 숨죽여 지내는 와중에 권이도의 조카인 권혜율이 놀러 왔다. 긴 머리를 양쪽으로 땋은 아이는
베이지색 멜빵 바지에 품이 넓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처음엔 낯을 가리기 바빴으나, 함께 권이도가 가진
그림을 구경하다 보니 경계를 허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빠?”
“…….”
저무는 노을이 권이도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매끄러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노을은 짙은 눈동자에
선명하게 고였다. 그가 다정하게 눈을 접는 모습, 머리를 넘겨 주는 손길, 그리고 사근사근 속삭이는 목소리까지.
“잘 놀고 있었어?”
- 다음 화에 계속
81 화. Hiver Rigoureux(9)
“뭐 하고 놀았어?”
“재미있었겠네.”
“……그래?”
“응!”
권혜율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아이 특유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권혜율을 한 번, 나를
한 번 돌아본 권이도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그제야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이도가 돌아왔으니 이제 방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애초에
권혜율과 놀아 주고 있던 것만으로 꽤 주제넘은 짓이니까.
“어디 갑니까?”
“저녁이나 먹죠.”
“오빠도 밥 혼자 먹는 거 싫어한대.”
혜율이는 나와 있을 때 나눴던 대화를 미주알고주알 권이도에게 설명했다. 딱히 비밀은 아니었지만,
민망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권이도는 관심조차 없을 텐데 조카가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나에 관한
사소한 정보를 알게 되는 것일 테니.
“불어를 잘합니까?”
“……네, 뭐. 어느 정도는.”
권혜율이 가지고 싶은 그림이 파리에 있다기에 나온 말이었다. 자기는 프랑스어를 잘하고 싶은데, 아직
기본적인 인사밖에 못 한다며. 오빠는 잘하냐고 묻기에 이런저런 인사말을 알려 줬었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그 그림이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게 가지고
싶냐고, 상냥하게 물은 권이도는 우선은 기억해 두겠다며 대답을 보류했다. 곤란한 질문을 회피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맞아, 그리고…….”
***
“……흣.”
“권, 이도…….”
“정세진 씨.”
우습게도, 나는 그 부름을 듣자마자 가능성을 엿봤다. 그가 처음으로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불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랑 자요.”
“…….”
“아무것도…….”
“…….”
“아무것도, 안 줘도 되니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를 잡아당겼다. 피부로 전해지는 페로몬이 이다지 유혹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내가 가진 페로몬을 보여 주며, 이 모든 걸 내어 줄 테니 나를 안아 달라고 애원했다.
“제발, 흣…….”
“흐읍…….”
“……뭐?”
“거길 왜, 손으로…… 흐읏…….”
“아, 아흣!”
한 개였던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나고, 어느덧 세 개까지 여유롭게 삼키게 됐다. 이따금 가장 느끼는
부분을 건드리는 바람에 앞을 만지지 않았음에도 줄줄 새어 나온 정액이 배꼽 아래에 고였다.
“……아흑!”
그래서 더, 그에게 매달렸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해놓고 사람의 온기가 느끼고 싶었다. 그저
성욕을 해소하는 걸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거기, 읏, 흐응…….”
“……하.”
“정세진.”
나직한 부름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려고 했다.
애교를 부리듯 목덜미에 얼굴을 문지르자, 큼직한 손이 내 뒤통수를 감싸 왔다.
“……흐으, 흣!”
맨살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 이따금 내뱉는 짜증스러운 욕설과 억눌린
신음까지.
***
“……좋은 아침입니다.”
“잠을 못 잤나 보군요.”
“직장인이면 다들 한 번씩 겪잖아요.”
“쉴 때 좀 자둬요.”
***
“얘기해요.”
“저 총…… 장식 맞죠?”
끽해야 라이터일 텐데, 자꾸 진짜처럼 보였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총구가 반짝여서일까, 혹은 몸체가
정말 묵직해 보여서일까.
“아뇨.”
“…….”
“……아.”
장난이었나?
“뭐…… 그렇겠죠.”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나, 그는 오싹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
“비서가 왔다는 얘기도 못 들었으니, 전서구라도 보내지 않는 이상 외부와의 소통은 없었겠죠.”
“이거 읽어 봐요.”
“…….”
<Origine du parfum>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제목을 읽자, 권이도가 무심히
표지를 살폈다.
“발음이 좋네.”
“저자는…… 샤를?”
“……네, 샤를.”
“이것부터.”
“…….”
“…….”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은 권이도가 다리를 꼰 채 다섯 번째
시를 펼쳤다. 사랑에 빠진 기분을 여러 방면으로 써놓은 서정시였다.
“이거, 적어 봐요.”
“…….”
“…….”
“……무슨 뜻입니까?”
의도하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낮게 내리깔렸다. 길게 늘어진 말꼬리가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깜박,
눈을 감았다가 뜬 그가 무언가에 홀린 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 현실감.”
스르륵, 눈꺼풀이 감겼다.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코끝에 숨결 섞인 페로몬이 스쳤다. 서서히
얼굴이 가까워진다고 느낄 즈음, 입술에 보드라운 감촉이 내려앉았다.
“…….”
“…….”
- 다음 화에 계속
82 화. Hiver Rigoureux(10)
‘아무리 그래도…….’
그와의 입맞춤은 다소 충동적인 경향이 있었다. 우리는 다정한 연인이 아니고,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도 아니다. 밖에서는 살가운 관계를 연기할지언정 집에서는 남보다 못한 사이였단 말이다. 그런데 불어를
가르쳐 달라니.
‘정세진 씨.’
‘…….’
그래서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정말 필요로 한다면 마땅히 거절할 구실도 없었으니까. 권이도는
그제야 만족한 듯, 드물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 최 교수가 말한 상성의 문제일 것이다. 나는 권이도의 페로몬에 안정감을 느꼈고, 특유의 묵직한
존재감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와의 섹스 후에 원 없이 잤던 것도, 체력을 다 써서가 아니라 페로몬
때문일지도 몰랐다.
도피라고 해야 할까. 아니, 회피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양심을 좀먹히는 통증이 싫어서 나중엔 아예
생각 자체를 죽여야만 했다. 다행히 권이도를 눈앞에 두면, 그를 제외한 다른 건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내부는 삭막하리만치 깔끔했다. 가구는 최소한으로 놓여 있었고, 인테리어에 쓴 색채도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활감 없는 모습조차 권이도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앉아요.”
“졸려 보이는군요.”
“아뇨, 졸린 건 아닙니다.”
“요새는 잘 잡니까?”
“네, 뭐…….”
“그래요. 오늘 배울 건 뭡니까?”
“아, 오늘은…….”
간단한 불어를 가르쳐 달라는 말대로 나는 그에게 기본적인 스펠링과 읽는 법 따위를 알려 줬다. 대학
시절의 기억이 흐릿한 탓에 그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는 나 또한 공부를 해야 했다. 그래서 낮 동안엔 개인적으로
책을 보고, 오후가 되면 그날 익힌 내용을 바탕으로 그를 가르쳤다.
“…….”
“……정말이네.”
뭐가 정말이냐고 묻지는 못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권이도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것이다.
관찰하듯 나를 꼼꼼히 살피고는 별안간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정세진 씨.”
“네.”
장난…… 아니, 진담인가. 지난번에도 들었던 말이 지금은 도무지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
“궁금해하는 것 같길래.”
“……아.”
“……대단하시네요.”
“……신기하네.”
권이도는 한참이 지나서야 단조로운 감상을 내뱉었다. 느리게 깜박이는 두 눈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신비로웠다.
“……무서워해야 하나요?”
권이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픽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
“…….”
그 취급을 받고도 그럴 생각이 드냐며, 권이도는 단조롭게 물었다. 내 취급에 문제가 있었던가. 그
부분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정말 나한테 바라는 게 없습니까?”
“저는…….”
갑갑한 마음이 든다고 해서 사실을 고백할 수는 없었다. 내게는 확신이 부족했고, 권이도처럼 문제와
직면해 스스로를 다잡을 용기도 없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로선 최선이었다.
“…….”
“…….”
내가 지금, 이 상황에 설레도 되는 건가. 두근거리는 심장이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이 시간대에 입을 맞추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 누구 하나 이유를 묻지 않고,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는 그런
스킨십이.
“…….”
“자고 가, 세진아.”
***
관계를 바꾸는 전환점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곤 했다. 잘 만나던 연인과 헤어지거나, 혹은 연락도
없던 친구가 다르게 보인다거나. 혹은 권이도와 나처럼 하루아침에 부쩍 가까워진다거나.
‘으응, 흣…….’
‘세진아.’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계절, 우리는 평범한 감정을 공유했다. 권이도는 더 이상 고압적으로 굴지 않았고,
이따금 나를 보며 미소 짓는 일도 있었다. 히트 사이클이라는 구실 없이 몸을 섞었고, 그 행위는 더 이상 배설이
아니었다.
길고 길었던 휴가가 끝나던 날, 일기 예보에선 장마 소식이 들렸다. 여전히 아버지에겐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고, 나는 불안함을 넘어 그 불안을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면 내가 두려워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그런 착각이 들 정도였다.
“너무 쉬어서 적응하려면 좀 걸리겠어요.”
“……잘하실 겁니다.”
“…….”
그런데 그렇게 도착한 사무실은 김 실장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직원들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는 데다, 어딘지 모르게 내부도 어수선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낯선
얼굴의 남자들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정세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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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화. Hiver Rigoureux(11)
난생처음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그새 소식을 듣고 몰려든 기자들이 건물 앞에서 내 사진을 마구잡이로
찍어 갔다. 기업 비리를 뿌리 뽑겠다는 생각이었는지, 퍼포먼스와도 같은 연행이었다.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으나, 돌아온 건 알 만하다는 시선이었다. 이따금 들리는 소곤거림은 ‘은혜도
모르는 놈’ 따위가 주된 내용이었다.
“정세진 님 담당 변호인입니다.”
뒤늦게 도착한 변호사는 아버지의 전담 변호인이 아니었다.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변호사는 나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러 갔다. 나는 하염없이 내 무죄가 증명되길 기다렸으나, 돌아온
변호사가 해준 말은 고작 이따위였다.
“……예?”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 얌전히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정세진 님을 도와줬다간 기업 이미지가 나빠질
거라면서…….”
딱딱하게 굳은 머리가 끼긱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친아들이 아니라는 불안감에 욕심이 생겼을 뿐이라고,
변호사는 그런 식으로 동정표를 얻자고 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잡아떼라거나, 누명을 벗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한다거나 하는 내용도 없었다.
“저, 그리고…….”
***
하루를 독방에 갇혀 있어야 했다. 아무도 날 찾아오지 않았고 들리는 거라곤 정체 모를 기계음이
전부였다. 핸드폰을 압수당한 탓에 연락 수단조차 없었지만, 설령 있다고 한들 도와 달라고 부탁할 사람도 없었을
거다.
날이 어두워질 즈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방울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장마였다.
눅눅한 공기에 쇠 비린내가 섞이고, 들이마신 숨결엔 비 맞은 아스팔트 냄새가 느껴졌다.
‘세진아.’
어쩌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들켰을 잘못을 이런 식으로 모르는 척할 수 있을 테니.
비록 그에겐 최악의 사람으로 남겠지만 이렇게라도 도망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 수도.
“따라 나오세요.”
“…….”
“하여튼 돈 많은 것들은…….”
“거기 계속 서 계실 겁니까?”
“정세진 님?”
열린 문으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나이는 30 대쯤 되어 보였고, 끼고 있는 얇은 안경이 김
실장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내 쪽으로 다가와 명함을 한 장 내밀며 이야기했다.
가장 먼저, 선호그룹 마크가 보였다. 이름과 직급, 연락처 따위가 적힌 명함은 도무지 가짜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전무님’이라고 부를 사람은, 내가 아는 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
「죄송합니다.」
“…….”
당신도 알고 있었을까. 일이 이렇게 되리란 것을. 그래서 출근길 내내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 잘하실 거라던 말은 어쩌면 구치소를 뜻했던 건 아닐까.
우습게도, 그중에 가족들의 연락은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민재와 서영이까지도. 내가
하루아침에 검찰에 구속됐는데, 이미 다 알고 있던 것처럼 하나같이 입을 닫아 버렸다. 제대로 된 변호인조차
없이 죗값을 치르고 나오라며 절벽으로 등을 떠민 것이다.
나는 영웅이 아니라 아들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고작 희생양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누군가는 실제로
저질렀을 비리를 내게 다 뒤집어씌우고 잘라 낼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장기말로서 수명을 다했으니 꼬리를
자르듯 내다 버린 것이다.
“……하.”
“괜찮으십니까?”
권이도의 비서는 사무적인 얼굴로 내 안위를 살폈다. 불편하면 부축해 드리겠다며 조심스럽게 내 팔을
붙잡았다. 정말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기에, 그를 밀어 낼 생각도 못 한 채 엘리베이터 밖으로 내렸다.
“……정세진?”
그런데 몇 발짝 떼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를 어두운 색으로 물들이고, 답지 않게 수수한 옷차림을 한 사람.
“정세진 너……!”
“분명 아버지가…….”
“자리 피해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여긴 왜 왔어?”
“……왜 왔냐니.”
“그거야 네가 잡혀갔다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머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생각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성이 날아간 건 아니었다.
다만 무언가 망가진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서 문제였지.
“…….”
“야 씨발, 너 말을 그따위로……!”
“정민재.”
지금의 상황이 아버지의 독단적인 행동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해자가 있으면 조력자가 있기 마련이고,
조력자가 있으면 방관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 커다란 집에 있는 식구들은 나를 제외한 모두가 한 편이나
다름없었다.
“…….”
“알아들었으면 집에 가.”
“씨발, 정세진!”
“너 진짜 그따위로밖에 말 못 하냐?”
“너 씨발 지금……!”
“…….”
“형은 무슨…….”
“민재야.”
“…….”
“내가 여태 널 봐준 건 네가 내 동생이라서야.”
“근데 이젠 아닌 것 같다.”
밤새, 생각이 정리된 모양이다. 그 처참한 눈빛을 받으면서도 씁쓸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게
메마른 것처럼 내내 고요한 기분이었다. 어차피 이런 마지막을 맞이할 텐데, 대체 뭘 그렇게 노력한 걸까.
“갈게.”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게 정말 민재와의 마지막 대화라는걸. 나는 그대로 민재에게 등을 돌렸고, 민재
역시 나를 붙잡지 않았다. 20 년간 이어진 인연은 딱 거기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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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화. Hiver Rigoureux(12)
빗줄기는 계속해서 거세졌다. 본격적인 장마의 시작인 건지,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
낀 먹구름 탓에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이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
그리고.
나직이 가라앉은 음성이 귓가에 감겼다. 습기 가득한 공기에 짙은 나무 냄새가 섞여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인 건,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와 수려한 이목구비.
“정세진.”
“…….”
“왜 이러고 있습니까?”
“……아.”
“몸이 찬데…….”
“왜…….”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데도 갈증이 났다. 목을 축이고 싶다는 충동과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이
함께 찾아들었다. 몸이 이렇게나 젖었는데, 반대로 목은 바짝바짝 말라 갔다.
차라리 그냥 두지. 그랬다면 민재를 마주칠 일도, 권이도의 얼굴을 보고 괴로워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염치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양심을 쥐어짜는 것처럼 이토록 괴로운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으니까.
큼직한 손이 내 뒤통수를 감쌌다. 젖은 머리칼을 헤집는 손길이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은 그가 차분히 눈을 내리깔았다.
울컥, 감정이 북받쳤다. 뒤늦게 밀려든 억울함이 미처 막아낼 틈도 없이 터져 나왔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눈두덩이에 뜨겁게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흑…….”
“흐윽…….”
“……흡.”
“…….”
“……흐윽.”
너무 미안하면 미안하다는 말도 안 나오는구나. 정말 미칠 만큼 죄책감이 들어도, 그걸 사과하는 것마저
용기가 필요하구나. 내 잘못을 고하고 용서를 비는 행위가 사실은 그 무엇보다 어려운 것이었구나.
“흡…….”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을 거부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래서 고백할 수 없게 됐다.
혹시라도 그가 한순간에 나를 내칠까 봐, 나라는 사람에게 차갑게 등을 돌려 버릴까 봐.
“흐읍, 흑…….”
속으로 얼마나 많은 고해 성사를 했는지 모르겠다. 미안하고, 그리고 또 미안하다고. 당신을 실망하게
만들 것 같아 너무 면목이 없다고. 내가 이렇게 너의 품에 안겨 있는 게, 정말 양심 없는 짓이라 해줄 말이
없다고.
“울지 마, 세진아.”
나는 그의 품에서 내리는 비처럼 끝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권이도는 한참이나 나를 안아 줬고, 나긋나긋
부드러운 페로몬을 흘려보냈다. 나를 달래는 음성, 이름을 발음하는 목소리, 등을 다독이는 손길까지 전부
녹아내릴 것처럼 상냥했다.
***
냉랭한 공기가 서재 내부를 한가득 채웠다. 분명 서늘한 날씨가 아니었는데도 손끝이 차갑게 식을 만큼
차가운 기온이 느껴졌다. 드러난 목덜미가 따끔거리는가 하면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
평소엔 풍부했던 음색이 지금은 바닥을 기듯 가라앉아 있었다. 얼핏 무뚝뚝한 목소리였으나 그에게 제법
익숙해진 나는 알 수 있었다. 내 눈앞의 남자는 지금, 머리끝까지 차오른 화를 간신히 내리누르고 있다는 걸.
“그쪽이 그랬습니까?”
“……죄송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말밖에 없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할 수 없어서 서재에 들어온
순간부터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권이도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무슨 눈으로 나를 보는지, 그런 것들을
도무지 확인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죄송하다고…….”
픽,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는지 권이도는 그다음 말을 내뱉을
때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괴로울 정도로 긴긴 침묵 끝에 그가 딱 한마디를 더 물어봤다.
“언제 그랬습니까.”
“권이도 씨가 출장 갔을 때…….”
“그때 전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
사업은 아주 조그만 일로 틀어지곤 했다. 개발에 필요한 건 자원이기에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면 필히
적자가 나는 구조였다. 선호는 매년 새로운 상품을 내놓았으니, 이번 일로 연 단위 스케줄이 어그러지는 경우도
있을지 몰랐다.
“정세진 씨.”
권이도의 손에서 서류가 떨어졌다. 어지럽게 널브러진 서류들이 마치 지금의 내 심정과도 비슷했다. 팔랑,
날아온 서류 한 장은 정확히 내 발치에 안착했다.
“왜 그동안 안 말했습니까?”
그가 느낄 감정을 알고 있다. 입을 맞추고 감정을 나누는 동안, 자신을 속였단 사실에 화가 나겠지.
우리가 섞은 건 비단 몸뿐만은 아니었는데, 그 안에 불순물이 섞여 있었단 사실을 견딜 수가 없을 거다.
“…….”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억눌린 목소리였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계획이 제대로 망가진 모양이었다. 한
번 더 죄송하다고 말하려는 순간, 아까보다 훨씬 싸늘한 부름이 흘러나왔다.
“정세진.”
“…….”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저 원망 따위가 가득할 줄 알았던 얼굴에 여러 감정이 엿보였다. 가령 배신감과 후회, 그리고 허무함과
쓸쓸함 따위의 것들이. 심지어는 지저분하게 얼룩진 애정과 그 끝에 피어오른 작은 상처까지도.
“협박이라도 당했어요?”
“……협박 같은 거 안 당했습니다.”
짝, 가벼운 파열음이 들렸다. 따끔한 감각과 함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돌아갔다. 내가 한참이나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건, 그 통증이 지나치게 미미했기 때문이었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내게, 아까보다 한층
싸늘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바라는 게 없다더니…….”
“…….”
“너 같은 걸 믿는 게 아니었는데.”
권이도는 그 말만 내뱉고 표정을 지워 냈다. 아까의 상처받은 표정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사무적인 태도로 딱딱하게 나를 보며 고개를 까딱했을 뿐.
“정세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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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화. Hiver Rigoureux(13)
계절이 하루아침에 바뀌듯 권이도와 내 사이도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따사로운 바람이 불던 시선에선 이제
더 이상 나를 향한 열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날씨는 아직 여름에 머무르는데, 그와 내 사이에만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정세진.’
망가진 관계를 고치는 건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보다 어렵다. 감정을 쌓는 계기는 보잘것없었는데
부서진 감정을 잇는 데엔 많은 품이 필요했다. 그와 나눴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에도 처음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몇 번이나 해야 했다.
그날도 나는 2 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권이도를 기다렸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하염없이
그 자리에 머물렀다. 운이 좋으면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겠지. 그런 생각으로 막연히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얼마나 그렇게 기다렸을까. 발소리가 들려왔다. 타박, 타박, 계단을 밟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 뒤로 몸을 숨겼다.
“…….”
어디 아픈가?
“…….”
“…….”
“…….”
“……이젠 헛것도.”
“권이도 씨.”
“…….”
그가 멈칫, 걸음을 멈췄다. 권이도는 물론, 그의 이름을 부른 나조차도 놀라고 말았다. 그대로 가만히
서 있던 권이도는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뒤를 돌아봤다.
마주친 시선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드물게 당황한 얼굴은 머리보다 먼저 가슴에 남았다.
이게 얼마 만에 마주 보는 얼굴이지. 고작 마주 보고 있을 뿐인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그게…….”
그 말을 얼마나 곱씹었는지 모른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실망한 모습을 보면서 오해를 풀었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후회했다.
“대단하네요.”
그런데 권이도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대단하다니. 긍정적인 말로는 들리지 않았다.
멍한 시선을 보내는 내게,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한 어투로 내뱉었다.
“…….”
“이제 와서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
“그러니까 한 번만…….”
“……뭐든지 하겠다고?”
“…….”
“…….”
“…….”
“제 생각이 짧아서…….”
“…….”
아니라고 대답해야 했다. 아버지는 몰라도, 해신의 영광은 내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나는 그저, 그
누구에게도 버림받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고.
“거기에 나는 없고.”
“세진아.”
커다란 손이 느릿느릿 내 귓가를 어루만졌다. 엄지로 뺨 언저리를 문지르고 살금살금 목까지 내려간다.
어린 짐승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손길이었다.
우습게도,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그 손길을 갈구했다. 눈앞이 흐려지는 이유가 그의 페로몬 때문인지,
아니면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본능적으로 얼굴을 문지르자 귀 아래 움푹 들어간 곳을
누르던 손이 확 떨어졌다.
“정세진.”
“…….”
“…….”
“…….”
“뭐든지 하겠다니…….”
“…….”
“그쪽이 할 수 있는 건 몇 개 없는데.”
“…….”
머리채가 붙잡혔다고 느꼈다.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감싸던 손길은 이내 억센 것으로 바뀌었다. 하릴없이
넘어간 고개 탓에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창부처럼 굴어야지.”
“으웁…….”
“입 똑바로 벌려.”
“정세진.”
“우으…….”
“후…….”
“욱……!”
“……!”
힘없이 상체가 옆으로 무너졌다. 목을 부여잡고 캑캑거리는 동안 권이도는 제 페로몬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온몸을 덜덜 떨며 널브러진 내게, 싸늘한 목소리로 이야기했을 뿐.
“흐…….”
차라리 다리를 벌리겠다고 할까. 처음엔 죄책감으로 가득하던 마음이 이제는 서러움과 분노로 얼룩지고
말았다. 심장을 칼로 저미는 것처럼 어딘가 망가진 기분이었다.
“……하.”
모자란 숨을 몰아쉬는 사이, 다시 뒤통수가 붙잡혔다. 눈물로 뒤덮인 얼굴에 그가 제 성기를 문질렀다.
뺨을 툭 건드리곤 꾹 닫힌 입술에 다시 귀두를 가져다 댄다. 억울함에 눈을 들어 올리자, 권이도가 가만히
시선을 맞췄다.
“……욱.”
“흐웁…….”
“……하.”
마침내, 그는 내 목구멍 깊숙한 곳에 사정했다. 꿀렁이며 넘어온 정액에 페로몬이 한가득 섞여 있었다.
권이도는 내가 모든 걸 삼킬 때까지 그대로 머물다가 성의 없이 나를 놓아주고 옷차림을 갈무리했다.
“콜록, 콜록…….”
- 다음 화에 계속
※ 본 회차에는 강압적 성관계 등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소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 이용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86 화. Hiver Rigoureux(14)
그나마 유일한 기대는 그에게 내게 아직 쓸모 있을지도 모른단 것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끝까지 사용했듯
권이도도 그때까진 나를 두고 볼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때까진 이 집에서 나가지 않아도 된단
말이겠지.
“권…….”
권이도 씨.
“…….”
권이도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먹은 게 올라올 것 같았다. 가슴 언저리가 무겁게
내려앉고 속이 잔뜩 뒤집혔다.
“흐윽…….”
“흑, 흐읍…….”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현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할 거다. 멍청하고 무능한 머리로는 무엇 하나 바꾸지 못하겠지.
“……흑, 흐윽.”
대놓고 드러내는 적의보다 불확실한 감정이 두렵단 걸 처음 알았다. 시간이 흐르고 흐르는 바람에
권이도와 나눴던 감정들조차 흐릿해졌다. 다시는 가질 수 없는 따뜻함이라는 걸 알기에 더 뼈를 발라내는 것처럼
괴로운 기분이 들었다.
“……허윽.”
“흡…….”
히트 사이클이었다.
***
“허억, 헉…….”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으니, 아마 상대는 권이도일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몸을 일으켰다.
“……하아, 하아.”
아마 누군가가 보면 멍청한 짓이라고 말했을 거다. 내가 그에게 가려는 이유는 차라리 다리를 벌리겠다고
애원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영영 외면받을 바에는, 그런 방식으로나마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가 받을 게 있어서…….”
그런데 현관으로 향했을 때, 집으로 들어온 사람은 권이도가 아니었다. 권이도와 마찬가지로 새카만
정장을 입고, 고용인을 향해 짜증스럽게 지시하던 사람. 회장인 권상미가 아닌, 그의 남편인 이석인을 닮은 남자.
“어?”
“…….”
“…….”
“……흣.”
“와, 페로몬이…….”
“아…… 그런 거였어?”
“흐, 이거 놓으…….”
“하아, 하…….”
“흣, 아, 안 돼……!”
“씨발, 뭣도 아닌 오메가가…….”
“악!”
머리채가 붙잡혔다. 권이도가 붙잡았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권이정이 나를 휙 넘어뜨려 몸으로 내리눌렀다.
“싫다는 소린 아까 걔들 있을 때 했어야지.”
“안 돼, 싫어…… 아흑…….”
“하, 이런 건 또 처음인데…….”
권이정이 내 허벅지를 더듬기 시작했다. 벌레가 기어가듯 미끄러진 손길이 간신히 오므렸던 양다리를
좌우로 벌렸다. 그리고 동시에 아래쪽에 무언가 닿아 왔다.
“아악……!”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긴장으로 인해 수축된 내벽을 굵은 성기가 억지로 파고들었다. 내장이
뒤틀리는 것처럼 끔찍한 고통이었으나, 권이정은 내 사정을 봐주지 않고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이도가 비슷하게 삽입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적당히 페로몬에 취해
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히트 사이클이 왔음에도 전혀 몸이 열리지 않았으니까.
“캑…….”
알파의 완력은 기본적으로 성인 남성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권이정은 우성이 아니었지만, 오메가인
나와 비교할 바는 못 되었다. 폐가 쪼그라드는 것처럼 숨이 막히는 바람에, 손톱으로 그의 손목을 확 긁어내는
순간이었다.
“……!”
짝! 커다란 파열음이 울렸다. 눈앞이 번쩍이며 점멸하고 머릿속이 울리는 기분이었다. 권이정이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어마어마한 힘으로 내 뺨을 갈긴 탓이었다.
“아…….”
“별것도 아닌 게, 씨발.”
억지로 욱여넣었던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 자꾸만 머리가 어지러워서 눈에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권이정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나를 뒤집고는 날개뼈 사이를 꾹 누른 채 다시 삽입했다.
“악……!”
“헉, 허억…….”
벌어진 입으로 타액이 줄줄 흘렀다. 바닥에 떨어진 침에는 역시나 새빨간 피가 섞여 있었다. 내 머리통을
붙잡아 바닥에 처박은 권이정이 귓가에 역겨운 숨결을 흘렸다.
“아, 흑…….”
“괜히, 헉, 힘이나 빼게 만들고…….”
쾌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아프고, 괴로워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저 멀리 보이는 핸드폰을 향해 기어가려고 했으나 권이정은 별반 힘들이지 않고 나를 짓눌렀다.
“허윽, 악……!”
“페로몬도…… 후, 끝내주네.”
끝내, 위장이 뒤집히는 것처럼 헛구역질이 나왔다. 먹은 게 없어서 나오는 것도 없었지만, 시큼한
위액이 목으로 역류했다. 토할 것처럼 몸을 들썩이는 나를 보고도 권이정은 익숙하게 허리를 움직일 뿐이었다.
“욱, 우욱…….”
“…….”
“……아.”
“진작 이럴 것이지.”
“아, 흑, 윽…….”
“하아, 씹…….”
목덜미에 코를 문지르는 감촉이 생생했다. 원래라면 소름이 끼쳤을 텐데, 지금은 그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권이도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에, 모든 게 끝났다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했을 뿐.
“흐윽…….”
심장을 통으로 들어내면 이럴까.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무너지는 기분이 더 끔찍했다. 눈물이 쉼 없이
흘러서,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숨조차 쉬어지질 않았다.
“……크흑.”
“하아…….”
“……흡.”
천천히 빠져나간 성기가 엉덩이에 문질러졌다. 찢어졌을 게 분명한 입구에선 주르륵, 묽은 정액이
흘러내렸다. 가물가물 흐려진 시야로, 허벅지에 흘러내리는 피가 또렷이 보였다.
“……흐.”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핸드폰으로 기어갔다. 다 찢어진 옷가지가 자꾸만 무릎에 걸렸다. 핸드폰은
액정이 깨져 있었지만 다행히 전화를 거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뚜르르, 신호음이 흐르는 동안 속으로 몇 번이나 빌었는지 모르겠다. 제발 전화를 받길.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나를 도와주길.
-……도련님?
“아…….”
“저 좀…….”
-……
“저 좀 도와주세요.”
- 다음 화에 계속
87 화. Hiver Rigoureux(15)
“……근무 시간 아닙니까?”
“근무 시간 맞습니다.”
“…….”
“……죄송합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들어가세요. 감사했습니다.”
“…….”
“가보겠습니다.”
“……아, 맞아.”
꿈에선 계속, 계속 악몽이 반복됐다. 권이정에게 붙잡혔던 순간이 떠올랐다가 정신을 차리면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가끔은 배경도 바뀌었는데, 그중엔 권이도가 그 모습을 구경하는 악몽도 있었다.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는데, 망가진 마음이 시간으로 나을지 모르겠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을
때도 이런 기분이 아니었건만, 그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무기력한 몸뚱이를 침대에 늘어뜨린 채, 이대로
굶어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수면제를 먹고 죽는 게 아니니, 이 정도면 거짓말도 아니지 않은가.
‘저 오메가예요.’
쾅!
쾅!
쾅!
“…….”
드디어, 쿵쿵거리던 소리가 멈췄다. 먹먹한 귓가에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타박타박,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는 과연 꿈일까, 현실일까.
“……정세진.”
“…….”
뚝, 잡념이 끊어졌다. 머릿속을 울리던 웅성거림이 싸늘한 침묵으로 바뀌었다. 가만히 숨을 죽이는 내게,
다시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집을…… 아직도 남겨 놨을 줄이야.”
어떻게 들어온 걸까. 금방이라도 날 일으켜 세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권이도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페로몬에 속에서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흐.”
그래서, 나도 모르게 흐느끼고 말았다. 무척이나 조용한 소리였지만, 권이도의 귓가엔 똑똑히 들렸을
거다. 동시에 그는 내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휙 걷어 냈다.
“…….”
“…….”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완벽한 차림새의 권이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온통 새카맣게 차려입은 그는 어딘지
모르게 잔뜩 지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서서히 굳어 가는 표정은 나조차 흠칫 놀랄 만큼 냉랭했지만.
“……권이정?”
“그 새끼 페로몬이 느껴지는데.”
“…….”
“정세진.”
“왜 오셨어요?”
그래서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눈꺼풀을 한번 감으면 다시 뜨는 데까지 한참이나 걸렸다. 시간을 느리게
감은 것처럼 입술을 움직이는 속도 역시 더디기만 했다.
나는 그에게 사과를 건네고 겨우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약 기운에 눈앞이 핑핑 돌았지만 가까스로 침대
아래에 발을 딛고 설 수 있었다.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지. 그런 생각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몸이 크게
휘청였다.
“……아.”
“아…… 감사합니다.”
“죽으려고?”
질문을 이해하는 속도가 지나치게 느렸다. 아무래도 물을 마신다고 차려질 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여전히
머릿속은 몽롱하고 몸에선 기운이 쭉쭉 빠졌다.
“……아뇨.”
“…….”
“자려고 먹은 건데.”
정신이 왜 이렇게 없지.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사고가 이어지질 않았다. 머리가 자꾸 한쪽으로 쏠려서
문고리를 잡은 채로 권이도에게 물어야 했다.
“안 가세요?”
“뭐?”
“정세진.”
아까보다 차분해진 음성이 나를 불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권이도는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내뱉었다.
“이럴 거 예상 못 하신 것도 아닐 테고.”
“보이는 그대로예요.”
“정세진 씨.”
“……이혼이라니.”
“…….”
“……부족하면 한 번 더 하겠습니다.”
“…….”
“그러니까 이혼합시다.”
“아…… 씨발.”
날카로운 욕지거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권이도는 한 손으로 제 눈가를 덮었다가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다.
“세진아.”
“…….”
“아윽……!”
“허억…….”
“정세진.”
“하아, 하읏…….”
저항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갑작스레 밀려든 성감이 본능적으로 그의 페로몬을 갈망했다. 그런데도 그는
벗어날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단단히 붙들었다.
비웃듯 건넨 말에 애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는데, 가슴 언저리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자욱한 페로몬이 그의 것과 섞여서 비를 맞은 나무가 꽃을 피운 것만 같았다.
“……하으윽.”
“……흐.”
“……!”
“아, 아파…….”
“……아파?”
목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신음처럼 흘린 말에 권이도는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웃음을 흘린다.
“하…….”
“흐, 으……!”
아픈데, 아픈 만큼 쾌감이 일었다. 다리가 한계까지 벌어지고 아래가 찢어질 것처럼 뻐근했는데도 말이다.
마음과는 달리 몸이 반응해서, 나조차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병신 되고 싶지 않으면…….”
“아흑, 흐……!”
“힘, 빼는 게 좋을 텐데.”
“권이정이 박아 줬을 때도 이랬어?”
- 다음 화에 계속
88 화. Hiver Rigoureux(16)
“…….”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화가 안 났는데, 이번엔 조금 모욕감이 들었다.
다른 모든 부분을 욕해도, 그것만큼은 권이도가 욕할 부분이 아니건만. 눈이 확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왜.”
“…….”
쾅! 내리찧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권이도가 무리할 정도로 안쪽을 꿰뚫은 탓이었다. 항상 봐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정말 닿으면 안 될 곳까지 닿은 기분이다.
“너 따위를 믿지 말 걸 그랬지.”
그 후엔 분노할 기회조차 없었다. 베개에 얼굴이 처박히고, 그의 체중에 온몸이 납작하게 짓눌렸다.
손을 뒤로 해 그를 밀어 냈지만, 권이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팔을 잡아 등 뒤에 고정한 채 퍽, 퍽,
허리를 움직일 뿐.
“그만, 흑, 악……!”
“하윽……!”
“……하.”
퍽! 깊게 삽입한 권이도가 몸을 웅크렸다. 배꼽과 가까운 곳에서 권이도의 성기가 부풀기 시작했다.
주먹처럼 커다랗게 부푼 귀두는 평소라면 닿지 않을 곳에 덜컥 걸렸다. 숨도 쉬지 못한 채 꺽꺽거리는 나를
권이도가 꾸욱 내리눌렀다.
“세진아.”
“……!”
폐가 한껏 쪼그라들었다. 내장이 뒤틀렸다가 다시 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억지로 쥐어짜인
페로몬샘에서 마구잡이로 페로몬이 터져 나왔다.
“아, 악……!”
“흐윽……!”
“…….”
“……아으윽.”
마음이 통하지 않은 탓일까, 나는 그의 감정과 기억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난생처음 느끼는 통증에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전원이 나가듯 픽 쓰러질 때까지, 권이도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
특이 형질의 각인은 보통 결혼한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영혼과 영혼을 묶는, 보다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방법. 서로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고 오로지 상대방의 페로몬만 느끼게 되는 마법 같은 약속.
그에게 각인을 당하고 눈 깜박할 새 몇 개월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그 몇
달간은 히트 사이클조차 오지 않았다. 권이정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지만 목덜미를 깨물린 흔적은 흉터처럼 남았다.
그러다 가을,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계절. 갑작스럽게 차가워진 날씨 탓에 몸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시름시름 앓는 내가 이상했던지, 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심 교수가 찾아왔다. 그는 내 팔뚝에서 피를 세
병이나 뽑으며, 제발 밥이라도 잘 먹으라고 내게 애원했다.
“이러다 정말 죽습니다.”
이럴 거면 각인을 왜 했지.
“세진아.”
계절은 겨울에 가까워졌는데, 권이도의 겨울은 끝나는 모양이었다. 각인의 여파로 마음이 풀린 걸까.
언제부터인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가만히 눈을 감은 내게 천천히 다가와 가끔은 이렇게 속삭이기도
했다.
“…….”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 테니까…….”
무릎을 꿇어 보라고 할까. 그리 생각했다가 관두기로 했다. 뒤늦게 깨달은 건데, 그 말을 하던 권이도는
나를 용서해 줄 생각이 없었을 거다. 그저 화풀이처럼 욱하는 마음에 내뱉었겠지.
“세진아.”
이름을 부를 거면 적어도 눈을 뜨고 있을 때 불렀으면 했다. 왜 내가 깨어 있을 땐 한마디도 못 하다가
잠이 들 즈음에야 찾아오는 건지. 내가 자고 있지 않다는 걸 몰라도 이상했고, 이미 알고 있어도 이상했다.
“임신하셨네요.”
“식사는 꼭 하세요.”
“…….”
‘……무슨 뜻입니까?’
그때, 입을 맞추지 말걸. 아니면 차라리 사실대로 이야기해 볼걸. 그랬다면 혹시라도 그와 내 사이가
조금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느릿느릿 총구를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어디가 정확한 위치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어림잡아 그
언저리를 겨누었다. 혹시 불발될 가능성도 있었으나, 그런 경우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괜찮은 오메가라더니…….’
“……권이도.”
“…….”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열어 두었던 문틈으로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왔던 상대방이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정세진?”
인사를 할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다.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껏 멈춘 것처럼 살아왔던
날들이 이제 와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괜한 억하심정에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안 돼…….”
권이도가 숨결처럼 속삭였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가슴에 총구를 바짝 들이밀었다.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오므라드는 순간, 그제야 그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정세진!”
“안 돼, 안 돼…….”
“세진아…….”
딱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온전한 사랑을 받아 봤으면 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다면, 누군가
방법을 알려 주길 바랐다.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너그럽게 넘어가 주길. 그리고 이번엔 버림받지 않는 삶을
살길.
“안 돼, 제발…….”
추운 겨울이 지나 눈이 녹듯, 차디찬 눈동자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상황에
맞지 않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우는 건, 나를 잃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지난날에 대한
허무함 때문일까. 적어도 그게, 내게 남은 감정 때문이라면 좋았을 텐데.
그때, 구급차 소리를 들었던가. 아니면 그 소리가 들리기 전에 세상에 어두워졌던가. 단 하나 확실한 건,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권이도가 나를 놓지 않았다는 것 정도.
“허억…….”
“이게 대체…….”
“……세진아.”
- 다음 화에 계속
89 화. Muguet du Bonheur
시간을 돌리는 게 가당키나 할까. 이미 한 번 지나온 순간을 다시 마주하고, 잘못된 선택을 돌이킬 수
있다는 게. 곧 다가올 미래를 대비해 내게 닥칠 위험을 미리 방지한다는 게.
‘세진아.’
‘……왜 그랬어요.’
‘왜…….’
‘……미안해.’
‘…….’
‘미안해, 세진아.’
권이도는 내 손을 붙잡고 제 얼굴에 가져다 댔다. 마지막에 보았던 그의 얼굴처럼 짙은 눈동자에 처연한
빛이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고개를 숙인 그가 숨결처럼 속삭였다.
‘내가 너무 큰 잘못을 했어.’
‘내가 너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느껴졌다. 모자란 거 없던 권이도가 사실은 누구보다
두려운 눈을 하고 있다는 것. 늘 여유로워 보였던 그가 사실은 누구보다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
‘너를 망쳤어.’
각인으로 전해지는 기억은 어렴풋이 데자뷔를 느끼는 정도였다. 사물에 대한 부정적 감정, 혹은 좋은
느낌, 그런 것들을 모두 합쳐 기억으로 뭉뚱그린 것이다. 그가 아팠다는 사실은 알아도, 왜 아팠는지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보낸 게 아니야.’
‘나는 정말 널 사랑했어.’
‘…….’
‘결국 날 또 버릴 거면서…….’
그 말을 했을 때도 권이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온전히 전해지는 마음이 내게도 저릿저릿한 통증을
안겨 줬다. 그가 내 말에 상처를 받고 있다는 게,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길게 늘어진 말꼬리가 울음을 참으려는 것처럼 들렸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
또한 그러지 못했으니 원망할 수 없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그 어떤 말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게
만들었으니까.
간간이 내비치던 애틋함이 그런 종류였을까. 다가올 듯 다가오지 않았던 그 미묘한 선은 권이도 스스로
만들었던 방어 체제일지도 모른다.
‘…….’
‘세진아.’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왜 그리 애원처럼 보였는지 모르겠다. 말로는 자신을
떠나라고 하면서,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애원.
‘…….’
‘…….’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당신을 많이 좋아했어요.’
‘…….’
이렇게 아픈 감정을 알려 줄 거라면 나와 각인하지 말았어야 했다. 감정의 전염성이 이토록 강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조금 더 신중할 걸 그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억을 되찾은 걸 후회하진 않았지만.
“……정말 괜찮으십니까?”
“예?”
이번엔 아버지를 배신해 놓고 왜 과거엔 그러지 못했을까. 권이도는 그러한 과거를 알면서도 왜 선뜻 김
실장과 손을 잡았을까. 내가 도와 달라고 연락한 뒤에 김 실장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물어보면 안 되는 겁니까?”
“아뇨, 그걸 답해 줄 상대도 대답을 모를 거라서.”
“…….”
김 실장은 내가 말하는 병원을 듣고도 한참을 침묵했다. 차를 돌리긴 했지만 납득 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내게 한마디를 물었다.
괜히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수갑이 채워졌던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히 떠올랐다. 그럼에도 예전처럼
무섭지 않은 건, 그 후로 또 많은 기억이 쌓였기 때문이겠지.
“…….”
김 실장은 이번에야말로 묵묵히 운전에 집중했다. 내 표정을 보고 거짓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는 가만히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것도 끼우지 않은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
“……이 집이 작진 않은데.”
권이도가 뭐라고 했더라. 도망치기엔 적당한 장소가 아니라고 그랬던가. 그가 여길 어떻게 알았는지, 그
문을 어떻게 열었는지, 그런 것들은 좀 물어볼 걸 그랬다.
넓은 거실과 주방, 그리고 침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둘러본 뒤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로지 나
혼자만 남은 공간. 그 정적인 침묵 속엔 여태껏 잊고 있던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별거 없네.”
반대로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마치 긴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오랜
꿈을 꾼 것처럼 그동안 일어났던 일이 모두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왜 이번엔 히트 사이클이 안 왔을까. 권이정이 집으로 찾아왔던 날은 권병욱 회장이 별세한
날일 텐데. 날짜까지 겹치는진 모르겠지만, 그 언저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만약 건너뛰지 않았다면 권이도의
러트 사이클과 겹쳤을 거다.
“몸이 기억하나…….”
‘세진아.’
“……하아.”
계속 생각이 깊어지는 바람에 무작정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앉아 있다간 권이도의 감정에 동화되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선 캐리어부터 열어서 가지고 온 옷을 몽땅 꺼내 드레스룸에 정리했다.
‘저게 네 수준이지.’
“…….”
‘회장님께서 주신 겁니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또, 권이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조금만 멍하니 있으면 떠오르는 게 온통 그와의
기억이었다. 원래는 하나여야 할 시간이 두 개가 되는 바람에 내가 곱씹어야 할 순간까지 늘어나고 말았다.
나는 차오르는 한숨을 삼키며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는 와중에 문득
시야에 무언가 걸렸다. 공병 옆에 가지런히 놓인 무언가가.
「정세진」
「다시 찾은 행복」
“…….”
“……하.”
“흑…….”
- 다음 화에 계속
“고생하셨어요, 대표님!”
“조심히 들어가십쇼!”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온통 어두컴컴해진 하늘엔 덩그러니 뜬 달 하나만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밤이라 그런지 서늘한 기온 탓에, 나는 코트 깃을 여미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수고 많았어요.”
직원들은 꾸벅꾸벅 인사를 건네고 저마다 택시를 타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처음엔 낯설어하던
소고깃집도 이제는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고기가 정말 맛있었네, 오늘 술이 잘 받았네, 다음엔 뭘 먹어야겠네,
하는 말들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아뇨, 집에 가서 자려고요.”
나는 느릿느릿 이야기하며 가만히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따듯한 내부와 달리 차갑게 식은 창문이 바깥
공기를 그대로 담고 있는 듯했다.
김 실장은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출발했고, 조용한 귓가엔
윙윙거리는 기계음만 들렸다.
“…….”
반짝이는 야경이 창밖을 스쳤다.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가 뜨자, 뽀얗게 김이 서린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씨가 더 추워지면,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Sejin’의 겨울 컬렉션을 내놔야 한다.
‘당신을 많이 좋아했어요.’
‘정말 괜찮으십니까?’
사실,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조금만 멍하니 있으면 죽는 순간이 떠올랐고, 끝내 마지막에
보았던 권이도가 그려졌다. 모든 게 지난날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따금 헤아릴 수 없는 공허함이 내 모든 걸 앗아
가는 기분이었다.
‘정세진 님, 들어오세요.’
그래서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했다. 부하직원들의 대화(아내가 산후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는다고 했다)를
듣고 알아본 것인데, 반복적인 상담이 생각보다 도움이 된단다. 상담과 약물 치료를 병행하다 보면 정신적인
문제도 감기처럼 나을 수 있다고 했다.
당연히 괜찮은 의사를 만날 때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섣불리 동정하지 않되, 너무 말이 많지 않고,
적당히 거리감 있는 태도가 중요했다. 내 이야기를 너무 캐묻지 않는 대신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경험도 필요했다.
상황은 나아졌지만, 악몽은 아직까지도 꾸곤 한다. 불면증도 완전히 낫진 않았고, 그럼에도 전처럼
수면제를 몇 개씩 씹어 먹는 일은 없었다. 우울증 약을 먹는 건 좀 귀찮았는데, 먹고 나면 몽롱하게 고양되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결핍된 부분이 있고, 그걸 어떻게 채워 나가는지에 따라 상황이 바뀌기 마련이다. 석 달은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소한 부분을 바꾸기엔 또 충분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죽을 때의 통증을 떠올리면 지금이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와, 이게 무슨 일이야.”
“에이, 그런 걸로 안 떨어져요.”
“……아침부터 난리네.”
‘…….’
처음엔 어땠더라. 조금은 통쾌한 기분도 들었던 것 같다. 그 완벽해 보이던 사람이 끝내 나를 놓치고
후회한다는 게, 내게는 마냥 이기적인 만족감으로 돌아왔다.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어떤 생각이건 오랜 시간을 떠올리면 마침내 고민이 된다고
했다. 생각이 더 깊어져서 고민이 되기 전에, 적당한 선에서 잡념을 떨쳐 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정말 널 사랑했어.’
“…….”
‘세진아.’
두근거리는 박동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의 영향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오로지 권이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감정과 기분이 전해진다고 해서 두근거림까지 전염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건, 반
정도는 내 몫이라는 거다.
“……권이도.”
***
“…….”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아침엔 우중충하던 권이도의 기분이 지금은 조금 괜찮아 보였다. 적어도 지금 당장 눈물을 쏟을 것처럼
처참하지는 않았다. 근 몇 달간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반대로 내 기분은 조금 가라앉았다.
“실례합니다.”
문밖에서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억지로 입매를 가다듬으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차가 나오면
그거나 마시면서 속을 진정시켜야지. 그리 생각하며 “네.” 하고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
나무 냄새가 났다. 은은하고 묵직한 향기가 들이마신 숨결에 섞여 들었다. 예민해진 촉각이 그 모든
공기를 받아들이고, 마침내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
“…….”
“……아.”
- 다음 화에 계속
“…….”
“…….”
“……왜.”
왜 여기 있습니까?
“…….”
권이도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미팅 상대가 선호그룹 사람이긴 해도, 그게 권이도 정도의 거물은
아니었단 말이다. 고작 투자처와의 미팅에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낼 이유가 뭐란 말인가.
환상이 아니었다. 눈앞의 권이도는 분명 현실이었다. 가늘게 흔들리는 눈도,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도,
이따금 깜박이는 눈꺼풀까지도 모두 진짜였다.
“……권이도 씨.”
“…….”
나직이 가라앉은 음성이 권이도다웠다. 그 시간 동안 목소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고, 뒤이은 말은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정세진…… 대표님하고.”
“미팅이라니…….”
“앉아도 됩니까?”
그 질문엔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권이도가 착석을 허락받는 상황이 올 줄이야.
“안 된다고 하면 서 계실 겁니까?”
“……앉으세요. 우선.”
자리에서 일어나진 않았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을 뿐. 정갈한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온 그가 내 맞은편 좌석에 앉았다.
“…….”
“…….”
“드세요.”
온통 조용한 와중에 음식은 차례차례 꾸준히 나왔다. 의선당은 내가 좋아하는 식당인데, 이런 상황에서
먹으니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잘하면 밥만 먹다가 갈 수도 있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 즈음에야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대 수익과 반응을 정리한 보고서입니다. 예산과 관련된 내용도 함께 정리해 놨습니다.”
“…….”
“미팅하러 오셨다면서요.”
“…….”
“……아.”
“그 부분은…….”
이번에도 마땅히 설명할 부분은 아니었다. 나는 이어서 그와 관련된 것들도 설명을 시작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권이도가 손가락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여기도.”
“…….”
이 사람이 지금 뭘 하는 거지.
“아뇨.”
“…….”
“……이상입니다.”
“그래…… 그렇군요.”
“…….”
“더 설명할 건 없습니까?”
“그냥…….”
“…….”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아서.”
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속에서 여러 감정이 뒤섞이는 바람에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눌러야 했다. 이렇게 동요하면, 그 또한 내 감정을 읽을 텐데. 쉽게 진정이 되질 않았다.
“미팅을…… 하러 오셨다면서요.”
권이도의 목적이 미팅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 정돈 진작 눈치챌 수 있다.
그럼 그는 왜 이 자리에 나왔을까. 나는 그 이유가 딱 하나라고 여겨졌다.
“미팅을 하러 왔죠.”
“…….”
“정세진 대표님이랑.”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권이도가 다시 시선을 맞춰 왔다.
“내가…….”
“…….”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를 마주친다고 해서 예전처럼 두려운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와의 각인은 이미
다른 기억으로 뒤덮였고, 그를 향한 원망은 피어오르기도 전에 불씨가 사그라드는 중이었다.
“……그래도 이런 식은 좀 곤란하군요.”
“할 말 끝나셨으면 전 가보겠습니다.”
***
일상이 흔들리는 계기는 가끔 아주 사소한 데에서 오곤 한다. 가령 손가락을 베여서 타자 치는 게
어렵다거나, 발목을 삐어서 계단을 오르기 어렵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게 아니면 상한 음식을 먹고 탈이 난 후에
같은 음식을 못 먹게 되는 것처럼.
권이도와 만나고 난 이후, 평화롭던 일상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심각한 건 아니었고, 그냥 평소와
조금씩 달라지는 정도. 여전히 일과는 비슷했는데 아주 사소한 것들이 무의식중에 나를 괴롭혔다.
“……그러지 말 걸 그랬나.”
그중 하나가 바로, 가끔씩 떠오르는 그 날의 권이도였다. 조금 수척했던 얼굴, 흔들리는 시선,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고 나왔던 그 모습까지.
시간이 미화하는 기억은 퍽 아름다워서 나빴던 순간보다 좋았던 순간들이 도드라졌다. 나를 매몰차게
외면하던 모습은 다정함에 뒤덮이고, 그 위에 눈물을 흘리던 얼굴이 그려졌다.
‘세진아.’
“대표님.”
“저 말입니까?”
밖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직원들이 그렇게 많은데 굳이 나를 찾는 걸 보면. 의아함에 눈을 깜박이는
내게, 그는 조금 얼떨떨한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이유를 묻지도 못하고 김 실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권이도가 찾아왔다니. 그 사람이 여기까지 올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애써 의식적으로 외면한 탓에 어느 순간부터 권이도의 감정이 달라졌단
사실 역시 눈치채지 못했다.
“…….”
“……전무님.”
“…….”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두 번째, 권이도와 마주하는 것이었다. 지난번엔 석 달 만이었으나 이번엔
고작 며칠 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번보다는 나았으나, 역시나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최대한 담담한 척 물었는데, 권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제 발로
찾아온 주제에 망설임이 길었다. 그가 왜 입을 열지 못하는지, 그런 건 지금 느껴지는 기분만 봐도 알 수
있었지만 말이다.
“……투자자로서 온 겁니다.”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였다. 누가 봐도 거짓말인 허울뿐인 구실. 아니, 겉으로는 무표정했으니 남들이
보기엔 진짜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
그래, 바쁜 사람이 단순히 내 얼굴만 보자고 찾아오진 않았을 거다. 그건 너무 자아가 비대한 짐작이었다.
투자자로서, 지난번 미팅 때처럼 구실이 있긴 할 터였다.
“바쁩니까?”
“……네, 바쁩니다.”
“……그러죠.”
권이도는 아쉬운 기색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대답했다. 본인은 본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차마 그의 눈을 볼 자신이 없어서 눈을 깜박이는 척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
정말 공적인 일이구나. 그 사실에 허무함을 느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머리가 이상해지지 않고서야
왜 이런 기분을 느낀단 말인가. 나는 애써 사적인 감정을 배제한 채 권이도에게 물었다.
“…….”
“그리고 일종의 상징성이죠. 해신금융을 우리가 인수한 게 결코 좋은 그림은 아닐 테니, 정세진 대표님과
손을 잡아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좀 탈피할 생각입니다.”
“게다가 그 말대로 일방적인 이득이라면 더더욱 정세진 대표님이 거절할 부분은 아니군요. ‘Sejin’은
패키지에 씰 하나만 추가하고 이득만 보면 될 테니까.”
“그래도 갑자기…….”
“……원래 재단 일에 관심 없으셨잖아요.”
나는 대표고 그는 전무였지만, 그 위치는 기업의 크기만큼이나 달랐다. 권이도는 누구보다 자신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었고, 자그마한 회사의 한낱 대표 따위를 직접 만날 리가 없었다. 이렇게 나와, 나란히, 응접실에
앉아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솔직하지 못해서 어긋났고, 끝내 침묵하는 바람에 헤어졌다. 그 멍청한 실수를 반복해 마침내
맞이한 결말이 그따위였다. 기적이라는 이름이 모든 걸 돌려놨지만, 이미 깨져 버린 관계를 붙이지는 못했단
말이다.
“…….”
권이도는 내 말을 듣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숨을 멈추기도 했다. 이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숨결 같은 목소리가 속내를 털어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손끝이 저릿해서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꾹 움켜쥐어야 했다.
억눌린 목소리에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권이도는 말을 고르려는 것처럼 가슴께를 들썩였다. 미미하게
흐르는 페로몬은 그의 기분처럼 음울한 빛이었다.
“…….”
“근데 숨을 못 쉬겠어.”
“…….”
“아무것도 손에 안 잡혀.”
“…….”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지,
머릿속이 온통 백지였다.
“그냥 3 주만…….”
“…….”
나는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도장이 대표실에 있을 텐데……. 그리 중얼거리는 말에는 권이도가 눈가를
움찔했다. 그 모습이 참, 겁먹은 강아지 같아서. 한숨을 삼키며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부턴 약속 잡고 오세요.”
***
“조심히 들어가세요.”
“…….”
“여기…….”
“속눈썹이 붙었길래.”
“아, 감사합니다.”
“또 올게요.”
“…….”
직원들이 저마다 시선을 교환했다. 수군거리는 목소리 역시 지나치게 잘 들렸다. “얼굴에 뭐가 묻어서
그랬나?”라든가, “아무리 그래도 좀…….” 따위의 대화였다. 그중 직원 하나가 용기 있게 질문했다.
“…….”
그래서 최대한 담담히 대꾸했는데, 다들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잔잔한 야유를 흘리며 손짓,
발짓까지 동원해 질문한다.
“아까 무슨 한 폭의 그림처럼…….”
나는 머릿속으로 일정을 계산하며 대표실로 향했다. 컨펌이 빨리빨리 돼야 할 텐데. 씰 하나만 추가하는
게 말이 쉽지,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재단 측과도 연락해야 했고, 프로젝트팀도 다시 꾸려 봐야
한다.
“…….”
“……권이도 씨가 또 오신다고요?”
그렇게 들어선 응접실 안에는 오늘도 향긋한 원두 냄새가 풍겼다. 미미하게 느껴지는 그의 페로몬도
함께였다. 권이도는 나와 각인했으니, 이 페로몬을 느낄 수 있는 건 이제 오로지 나뿐일 거다.
“전무님.”
“빨리 왔네요.”
“…….”
고작 하루 만에.
또 말로 설명해 달라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권이도는 진지한 눈으로 서류를 훑어봤다. 그때처럼
장난을 걸 생각은 없는지, 몇몇 부분을 짚어서 착실히 피드백도 덧붙였다. 나는 긴장감을 좀 누그러뜨리며 그가
말한 부분을 볼펜으로 표시했다.
모든 미팅이 끝나고, 권이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유로운 행동이었으나, 시간을 확인하는 모습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핸드폰에 부재중 기록이 잔뜩 찍혀 있을 거다.
“…….”
설마, 메일을 권이도에게 직접 보내야 하나. 그런 생각으로 물었는데 권이도는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 느릿느릿 이야기한 것이다.
“…….”
“……내일도 오실 겁니까?”
***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자료를 주고받을 수 있는 21 세기에 대면 미팅을 선호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피차 바쁜 입장에, 한쪽은 주말도 없이 일해야 하는 대기업 전무라면.
‘……또 오셨습니까?’
‘바쁘지 않으세요?’
‘이 정도 시간은 있습니다.’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때 권이도의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무심코 지나간 한마디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 몰랐다. 그 말을
한 바로 다음 날부터 그의 비서가 명성호텔에서 직접 만든 케이크를 종류별로, 인원수에 맞춰 배달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전 쿠키 종류도 좋아요.’
간단한 브리핑이 끝나자 권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이언트가 까다롭게 굴지 않으니 프로젝트는
막힘없이 척척 진행됐다. 처음엔 시간이 부족할 줄 알았는데, 이제는 오히려 남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일을 잘하는군요.”
“……예?”
“그거, 며칠 내내 손을 안 대길래.”
“…….”
“……권이도 씨.”
“…….”
“디저트도 사 오지 마시고요.”
“……아직 기획이.”
“이러시는 거 부담스럽습니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보답도 해줄 수 없었다. 간신히 되찾은 평온함에 균열이 생기는 것도 싫었고,
그렇다고 권이도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어영부영 일상에 스며들기엔 우리는 너무 가혹한 이별을 하지
않았던가.
“…….”
“…….”
약속이라면 진작 많은 것들이 깨지지 않았던가. 내가 향수를 선물해 주기로 했던 것도, 이제는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고.
“…….”
내가, 그를 끊어 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이거였다. 권이도를 눈앞에 두면 자꾸만 마음이 약해져서.
처연하게 내리깔린 두 눈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드는 바람에. 은연중에 그를 기다리다가, 그가 떠나간 뒤에 아쉬운
기분을 느끼는 나를 발견했으니까.
그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봤다. 당연히 물어보라고 할 줄 알았는데, 대답은 한참이나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슬쩍 시선을 피한 그가 느릿느릿 대꾸했다.
지금…… 나한테 심술을 부리는 건가. 조금 전까지 한껏 심각했는데, 분위기에 맞지 않게 황당한 웃음이
나오려 했다. 나는 어이없는 기분을 내리누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
“물어봐도 됩니까?”
“……얘기해요.”
“왜 날 방치했어요?”
- 다음 화에 계속
94 화. Retour des Saisons(5)
“…….”
권이도는 말문이 막힌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설마하니 이런 질문이 나올 줄 몰랐던 모양이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그는,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날 너무 무서워해서.”
“네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어.”
“…….”
“각인했으니까.”
“…….”
“그래서 다 느껴졌어.”
“미안.”
“…….”
“미안해, 세진아.”
“……그만 일어나죠.”
***
심 교수와 무척이나 닮은 의사는 이런저런 질문을 건넨 뒤 차트에 간략한 기록을 남겼다. 잠은 잘 잤는지,
식욕에 이상은 없는지, 기분은 좀 어떤지 따위의 것들이었다. 다행히 별다른 부작용은 없었기에 복용하는
약들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왜 날 방치했어요?’
사람의 감정은 지나치게 복합적이라 하나의 이름으로 획일화시킬 수 없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괜찮지
않았고,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종종 떠올랐다. 이게 원망인지 슬픔인지 서운함인지도 모른 채,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지도 못하고 속에 쌓이기만 했다.
“…….”
“……아, 선생님.”
***
‘더 손 볼 건 없겠네요.’
“와, 드디어…….”
“대표님……!”
“……그렇게 힘들었어요?”
나는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직원들을 쭉 둘러봤다. 조금 빠듯한 일정이긴 했지만, 가능하면 야근은
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말이다. 역시나 직원들은 금세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헤실헤실 웃었다.
한마디씩 건네는 말들이 살갑기 짝이 없었다. 대표님은 좀 쉴 필요가 있다는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을 찡긋했다. 쉬기 싫어서 더 열심히 한 건데, 그게 어떻게 보였을지는 모를 노릇이다.
“대박, 회식 좋다!”
뭐,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니 사기를 북돋기 위한 회식도 좋을 듯했다. 가볍게 식사만 한 뒤에 들어갈
사람들은 들어가라고 하면 되니까. 혹시 소고기가 질렸을까 싶어 메뉴를 물어보는 와중에, 문득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회식?”
“전무님,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술 마십니까?”
권이도는 많고 많은 사람 중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애초에 대화를 나누는 건 항상 나밖에
없긴 했다. 술을 마시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고 답하려다가, 주변 시선을 의식하고 말을 고쳤다.
“……그렇군요.”
‘늦었네요.’
“…….”
“……회의실로 모시겠습니다.”
***
“…….”
“…….”
시끌벅적한 내부는 온통 직원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눈앞엔 해산물이 종류별로 세팅돼 있고, 날것을 못
먹는 이들을 위한 익힌 대게 따위도 있었다. 랍스터 회에, 복어 회에, 단체로 먹기엔 값비싼 음식들이
테이블마다 줄줄이 차려졌다.
“전무님,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무님!”
‘……예?’
‘……바쁘시지 않습니까?’
단조로운 말이었으나 직원들이 환호성을 내지르기엔 충분했다. 저마다 건배를 한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간 권이도가 사 오는 디저트에 익숙해진 탓일까, 누구 하나 사양하거나 빼지 않았다.
“대표님 정말 고생하셨어요.”
“전무님, 저도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권이도는 의외로 겉돌지 않고 잘 어울리는 중이었다. 술을 따라주면 받기도 했고, 무언가 수다를
늘어놓으면 묵묵히(절대 대답은 하지 않았다) 들어 주기도 했다. 그 모습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마냥 지켜보던
이들도 슬쩍 한두 마디씩 끼어들었다.
“전무님, 저도……!”
“저도 한 잔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진짜 너무 잘생기셨어요.”
- 다음 화에 계속
“맞아, 맞아.”
“대표님 한 잔 더 드릴까요?”
“대표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그건 무슨 이미지예요?”
나는 애써, 필사적으로 권이도의 시선을 모르는 체했다.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눈이 마주칠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양 직원들만 바라봤다. 누군가 발라 준 대게 다리 살을 한 입 먹고, 또 다른 직원이 따라 준
술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저 진짜 ‘Sejin’에 뼈를 묻을게요…….”
그러다 대뜸, 한 직원이 감격한 얼굴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양손에 얼굴을 묻곤 입사하길 잘했다며
벅차오른 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 역시 회식을 하다 보면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장난처럼 대꾸했다.
“진짜라니까요, 대표님!”
“그래요, 믿을게요.”
알겠다는 의미로 직원의 어깨를 다독였다. 푸근한 체형을 가진 직원이 우는 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폭 안긴 게 아니었음에도 품이 가득 차는 듯했다.
“대리님 또 이러시네.”
“그런 거 받아 주지 마세요.”
“…….”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권이도의 감정이 전해졌다. 조금 전부터 내리막길을 타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대리님 진상이에요!”
“사케 좋아하세요?”
“전무님, 술 더 안 드세요?”
“……아, 잠깐 전화 한 통만 하고 오죠.”
마침내 권이도는 누군가 말을 건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쪽으로 사라지는 권이도를 보고,
뒤늦게 빳빳하게 긴장했던 어깨가 풀리는 듯했다. 암만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이 중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게 권이도였으니까.
“근데 저희 너무 먹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이게 돈이 얼마람.”
맛있는 거 사주는 사람이 최고라는 법칙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얼핏 보기에도 권이도를 향한 직원들의
호감도가 쑥쑥 자라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원래는 좋은 분이었다면, 이제는 착하고 배려심 넘치는 분 정도로.
“…….”
“그런 거 말로 하지 말라면서요…….”
때마침 돌아온 직원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원래 권이도가 앉아 있던 자리로 향했다. 한결 울음기가 가신
얼굴이었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휙 시선을 피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흘긋흘긋 눈치를 살피는 게, 왜인지 잔뜩
고양된 표정이었다.
“대표님, 왜 그러세요?”
“대표님 사케 더 드실래요?”
직원이 술병을 내밀었다. 기분이 자꾸만 이상해서 나는 한 손으로 술잔을 가린 채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배 속이 간질거리는 이유는, 아무래도 술기운 때문인 게 분명했으니까.
“저는 이제…….”
“…….”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언뜻 경계하는 것 같기도 했고, 더 깊이 들어가면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향수도 뿌리지 않은 내게, 그 비슷한 향이 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괜찮은 겁니까?”
권이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끈, 가슴 언저리가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간신히 그에게서 눈을
돌리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네.”
“…….”
‘페로몬샘이 많이 안정됐네요.’
“……그럼 다행이고.”
“김 대리님, 저 한 잔 더 따라 주세요.”
***
눈앞이 자꾸만 뿌옇게 변했다. 몸이 계속 한쪽으로 기울고,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기분이 들뜨고 있었다.
입매가 느슨하게 풀리는 바람에, 직원이 한마디 할 때마다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하하…….”
“진짜, 그때 장난 아니었어요.”
직원이 하는 말은 반 정도만 이해됐다. 무언가 웃긴 얘기를 하고 있는데, 정작 말을 하는 직원도 혀가
잔뜩 꼬부라졌다. 너 나 할 것 없이 취한 와중에, 나는 스르륵 옆에 앉은 사람에게 몸을 기댔다.
“그러게요. 웃겼겠다.”
내가 웃으며 맞장구를 치자, 누군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기대어 있던 벽이 움직인단 생각이
들었는데, 금세 자세가 편안해졌다. 나는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가 뜨며 고개를 살짝 털어 냈다.
“헉, 속 안 좋으세요?”
“아뇨, 그건 아니고…….”
“심장이…… 너무 뛰는데.”
“……그래요?”
“그럼요.”
“또 재미있는 얘기 없어요?”
익숙한 페로몬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알딸딸하게 취한 머리는 이미 이성적인 판단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술이 들어간 속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워낙 기분이 좋으니 다 괜찮았다.
“대표님은 대학 때 어떠셨는데요?”
“저는 뭐 그냥 공부하고…….”
나는 느릿느릿 대꾸하며 오른손으로 의자를 짚었다. 자세가 무너지는 것 같아서 나름대로 몸을 바로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주섬주섬 손을 움직이자, 약지와 소지가 옆에 앉은 이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어디더라, 프랑스였나…….”
동시에, 서늘한 손길이 손등에 닿았다. 조금 다급히 붙잡힌 손은 금세 자유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
감촉에 문득 입을 다물자, 직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프랑스요?”
손을 빼내지 않은 건, 그 손길이 지나치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큼직한 손도, 나와는 달리 서늘한
체온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은은하게 전해지는 페로몬까지.
붙잡힌 손이 의자에 내리눌렸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듯이. 영 불편해서 빼내려고 했는데,
역시나 취한 몸뚱이는 말을 듣지 않았다.
“…….”
“……대표님?”
“네, 불어 잘하세요?”
“하하…… 그 정돈 아니에요.”
“한 잔 더 드릴까요?”
“……아뇨, 이제 그만 마시려고요.”
술을 마시길 잘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빨개진 얼굴을 들켰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 내가 가만히 있는 것에
대해 그 어떤 핑계도 대지 못했을 테니. 아니, 애초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이 되지 않았으려나.
손가락에서도 맥박이 뛴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다. 뜨겁게 달아오른 열기는 권이도의 체온으로도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손 역시 서서히 온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이렇게 좋아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들 만큼 기분이 좋았다. 이게 이상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냥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이건 다 술기운 때문이라고, 애써 그렇게 변명까지 해가면서.
- 다음 화에 계속
“괜찮으십니까?”
차에서 대기하던 김 실장은 회식이 끝나자마자 나를 데리러 왔다. 내 어깨에 외투를 걸쳐 주고
비틀거리는 나를 정중히 부축했다. 권이도의 비서 역시 그를 데리러 왔는데, 권이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2 차 갈 사람?”
직원들이 인사하는 소리가 몽롱하게 멀어졌다. 찬바람이 뜨거운 얼굴을 조금 가라앉혔지만,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나는 가만히 김 실장에게 기댄 채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술 많이 드셨습니까?”
알딸딸한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내뱉는 숨결에 알코올 향이 섞이는 건 조금 별로였지만 말이다.
오른손으로 입가를 가리자, 권이도의 페로몬이 잔잔히 느껴지는 듯했다.
“차로 모시겠습니다.”
“잠시만요.”
“전무님.”
“…….”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가게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아마 절반은 노래방을 가고, 절반은 집으로 돌아갈
터였다.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이지, 실컷 놀고 휴일에 푹 쉬고 월요일에 출근하면 되었다.
“혹시…….”
“이후에 일정 있으십니까?”
“바쁘면 뭐…….”
“아뇨.”
“…….”
“안 바쁩니다.”
거짓말은.
“얘기해요. 안 바쁘면?”
“별건 아니고…….”
의사가 그랬다. 술을 마시면 수면제는 먹지 말라고. 이렇게 많이 마셔도 된다고는 안 했지만, 어쨌든
양심상 그 부분만큼은 지킬 생각이었다.
“…….”
“어떻게 할래요?”
“나는 괜찮지만…….”
“괜찮겠어요?”
“……뭐가요?”
“정세진 씨 내일…….”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그런 생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권이도는 여전히 담담한 눈으로
딱 한마디를 덧붙였다.
“…….”
“너 억제제 안 듣잖아.”
“…….”
“……조금.”
“싫으면 관둬요.”
“싫다고 안 했습니다.”
***
“흣, 으응…….”
덜컹, 현관문이 닫혔다. 커다란 손이 내 뒤통수를 감싸고 다리 사이에 단단한 허벅지가 끼워졌다. 나를
문으로 밀어붙인 권이도가 고개를 기울인 채로 빈틈없이 입술을 맞물렸다.
“흡…….”
“……흐으.”
‘도착했습니다.’
‘……페로몬 나온다니까.’
“하아…… 흐읍…….”
생각이 자꾸만 뚝뚝 끊겼다.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권이도가 단단히 붙잡은 덕분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권이도의 목에 팔을 감은 상태였다.
“하으…….”
그래, 그냥 뜬금없이 불이 붙었다. 눈이 마주쳐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서로의 페로몬이
진득이 얽혀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든 번호 키를 누르고 들어왔을 땐, 이미 갈구하듯 그가 나를 탐하기
시작했으니.
“……흣, 잠깐.”
“…….”
그의 시선이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권이도가 흥분했다는 사실이 눈으로, 피부로, 그리고 연결된
감정으로 느껴졌다. 내가 그를 느끼는 만큼, 그 또한 나를 느낄 텐데. 그 사실을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우리 아직 이럴 사이 아니잖아요.”
“……아직?”
“세진아, 나는…….”
권이도는 거리를 넓히지 않고 그대로 내게 얼굴을 문질렀다. 높은 콧대로 뺨을 건드리고 목덜미로 입술을
미끄러뜨린다.
“…….”
“……권이도 씨.”
“그럼…….”
머리가 팽팽 돌았다. 이대로 본능에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반,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반. 품에 안긴
권이도가 안쓰러운 반면에 울컥 솟구치는 낯선 감정도 있었다.
“…….”
권이도가 양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힘없이 움켜쥔 손길이 그토록 조심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대로
자세를 낮춘 그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
가늘게 흘러나온 음성은 권이도답지 않게 기죽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입을 맞추던 상대에게 무릎을 꿇어
놓고, 그 높은 자존심에 흠조차 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내 손에 이마를 문지르고, 더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겠지.
가만히 현관문에 뒤통수를 기댔다. 조용한 와중에 덜컹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현관에서 무릎을
꿇은 그의 모습이, 미처 들지 못하는 고개가 마음 한구석을 따끔하게 만들었다.
“하라는 대로 다 할게.”
“…….”
“그러니까…….”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건지, 아니면 용서를 해달라는 건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바람만큼 이루기 어려운 것도 없건만.
“뭐든지 하겠다니…….”
비이상적인 욕구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시험하고 싶었다. 나라는 사람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가엾게
느껴지는 만큼 원망스러웠다. 이럴 거면 그러지 말지. 갈 곳 잃은 분노가 삐뚤어진 방향으로 표출됐다.
“……권이도 씨.”
벨트가 풀렸다. 뒤이어 그는 앞니로 지퍼를 물어 내렸다. 얇은 속옷 너머로 뜨거운 숨결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중심을 잃을 것 같아서 문에 등을 기대자, 권이도가 이번엔 속옷을 끌어 내렸다.
“……흣.”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을 때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발기하지 않은 성기를 입에 물었다. 뜨겁고 축축한
입 안이 예민한 부위를 섬세하게 자극했다. 혀로 기둥을 감싸는 감촉에 목덜미가 홧홧 달아오르는 듯했다.
“아…….”
성감이 확 고조되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권이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뒤통수를 가볍게 그러쥐었다. 아랫배가 뻐근하게 조여드는 감각과 함께, 권이도의 입 안에서 성기가 점점
커다래지기 시작했다.
“하아…….”
“……흡.”
아, 이건 좀…… 위험한데.
“……읏.”
“하아, 흣…….”
“하아, 하아…….”
“…….”
“아…….”
- 다음 화에 계속
“…….”
“……그걸 왜.”
“그냥.”
“…….”
“맛있을 것 같아서.”
“얼굴에 싸는 게 좋아요?”
“…….”
“흣…….”
“그만…… 그만 해요.”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의도치 않게 머리채를 움켜쥔 꼴이었으나, 권이도는 전혀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왜 말리냐는 듯이 아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왜?”
“왜냐니…….”
“하아…….”
머리가 어질어질 정신이 없다. 이제 깨달았는데, 권이도는 눈까지 풀려 있다. 아까 입을 맞췄을 때처럼
몽롱하게 흐려진 눈동자에 정욕이 가득했다.
“……세진아.”
“흣…….”
아랫배가 납작하게 들어갔다. 권이도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좁은 입구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내벽을
더듬으며 파고드는 손길에 머리카락을 붙잡았던 손에 힘이 풀렸다.
“……하.”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내 성기에 입술을 문질렀다. 빳빳하게 발기한 기둥을 아래에서 위로 핥고는
반질거리는 귀두를 입 안에 머금었다. 키스라도 하듯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뗀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라는 대로 다 해줄게.”
아…… 그냥 될 대로 되라지.
***
어떤 정신으로 침대까지 갔는지 모르겠다. 바닥에 옷가지가 툭 툭 떨어졌고 정신을 차렸을 땐 권이도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린아이 들 듯 나를 달랑 들어 올린 권이도가 입을 맞춰 가며 나를 침실로 데려온 것이다.
“하아, 흐…….”
“…….”
“너무, 뛰는데…….”
그가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나치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자욱하게 쏟아진 페로몬도 그랬고, 뜨겁게
달아오른 체온도 그랬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온전히 전해지는 감정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고양된 상태였다.
“흣, 흐…….”
말랑한 입술이 가슴께를 간지럽혔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살짝 깨물었다가 톡 튀어나온 유두로 위치를
옮긴다. 잘근잘근, 앞니로 장난을 치던 권이도가 다른 손으로는 내 허벅지를 문질렀다.
“하아…….”
그가 닿을 때마다 온몸이 움칠거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권이도가 그 무엇보다 커다란 기대가 되었다.
유독 질척거리는 애무까지도 앞으로 이어질 행위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아, 그만…….”
그런데 온기가 멀어지는 찰나의 순간, 벼락처럼 뇌리를 강타하는 기억이 있었다.
“…….”
“허윽…….”
“…….”
“……미안.”
심장이 터질 것처럼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조그맸다. 죄책감으로
물든 얼굴이, 그리고 덜덜 떨리는 시선이, 나보다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미안해, 세진아…….”
그는 내 다리를 놓아주고 느리게 내 품으로 무너져 내렸다. 뜨거운 열기가 으스러뜨릴 것처럼 나를 꼭
끌어안았다. 온몸을 감싸는 온기는 페로몬과 함께 따사롭게 나를 덮쳐 왔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턱을 간지럽히고,
목덜미에 새근거리는 숨결이 닿았다.
“내가 잘못했어.”
“…….”
“내가 미안해…….”
“미안…….”
“……하.”
“……흑.”
“아…… 흐윽…….”
‘너 같은 걸 믿는 게 아니었는데.’
“왜…….”
“…….”
“왜 그랬어요, 나한테.”
한 번 살아난 불씨는 걷잡을 수 없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화르륵 타오른 감정이 오로지 권이도를 향해
쏟아졌다. 속이 마구 끓는 기분이라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어…….”
나한테 그러지 말지. 가슴이 썩어 문드러지는 기분이었다. 여태껏 외면하고 있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밖으로 튀어나왔다. 삐쭉삐쭉 날이 선 가시들이 내가 막아낼 새도 없이 권이도를 공격했다.
“권이정이, 흑, 박아 줬을 때도 그랬냐고?”
“…….”
“하, 씨발…….”
“…….”
“…….”
“내가…… 무슨 죽을 죄를 지었길래.”
“나라고 훔치고 싶어서 훔친 게 아니란 말이에요. 나도 당신한테 말하고 싶었어. 미안하다고, 그냥,
아버지가 시킨 거라고…… 흐, 근데 그게 너무…….”
“…….”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러나 다시금 시간이 돌린대도 그날의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터였다. 버림받을까 무서워서 몸을 사린
채 최후의 순간이 올 때까지 숨죽이고 있겠지. 그게 나를 얼마나 좀먹을지 하나도 모른 채로, 등신같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거다.
“……미안해.”
“흑…….”
“미안해, 세진아.”
“…….”
“미쳐서 그랬어.”
“…….”
“……내가 잘못했어.”
떼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사과를 건네는 권이도조차 목소리가 젖어 있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서럽게 토해 낸 감정은 내가 아닌 권이도까지 적시고 있었다.
“흐윽, 흑…….”
따뜻한 입술이 눈두덩을 문질렀다. 그대로 아래로 내려온 그가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누구 맘대로
입을 맞추냐고 화를 내려는 순간, 권이도가 내 뺨에 가만히 제 뺨을 가져다 댔다.
“미안해, 세진아.”
“흐끅, 흐…….”
“…….”
“…….”
“……으응.”
“하아…….”
“……하.”
“아, 흐응…….”
“아프면 얘기해.”
“아, 거기…….”
“하아, 응, 흐…….”
- 다음 화에 계속
‘더 자지, 왜.’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는 당신은 안 잔 거냐고, 그리 묻지도 못했다. 무어라
말을 꺼냈다간, 금방이라도 지금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깨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조심스러운 손길에 마치 그와 약혼했던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우리가 평화롭게 마음을 나눴던 그때로. 물론 그 당시 권이도의 심정이 어땠을지, 거기까진 알지 못했지만.
“좋은 아침입니다.”
주말이 지난 월요일. 나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간밤 잠을 설친 김에 만들던 향수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늘 일찍부터 대기하는 이태성이 나를 회사에 데려다줬고, 김 실장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출근했다.
딱 마지막 확인만 남아서일까, 작업은 생각보다 이르게 마무리됐다. 완성된 샘플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올
즈음엔 어느새 출근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하나둘 출근하는 직원들은 금요일 밤 회식이 끝나고 귀가하던
때와는 달리 표정들이 영 좋지 못했다.
“그렇게 힘들어요?”
“네, 뭐…….”
다행히 직원들은 나와 권이도 사이의 이상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해 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딱 한 명, 내 옆자리에 앉았던 대리만이 유독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글쎄…… 잘 모르겠네요.”
나는 직원들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대표실로 들어왔다. 오전에 있는 회의를 제외하면 권이도가 오기까지
별다른 업무는 없었다. 이틀 만에 보는 권이도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니 또 속이
갑갑했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우려하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평소라면 권이도가 도착했을 시간.
그 시간이 훌쩍 넘어서까지 그는 회사로 찾아오지 않았다.
***
“…….”
째깍째깍,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벽면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향수병을 톡톡
두드렸다. 읽고 있던 서류는 내려놓은 지 오래였고, 왠지 모를 초조함에 기분은 점점 하향세를 그렸다.
어느덧 권이도가 올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원래라면 이쯤 명분뿐인 미팅을 끝냈을 텐데, 오늘은 아직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물론 매일 올 필요는 없지만, 앞서 3 주 동안은 빼먹지 않고 들르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
“대체 뭘 하길래…….”
“…….”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만지작거리던 향수를 놓고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원래는 번거롭다고 생각하던 주제에 이제는 더
나아가 너무 많은 것들을 바라고 있었다. 그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도 정하지 못했으면서 무작정 시계만
바라보고 있으면 어쩌냔 말이다.
“하아.”
일에 방해가 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소소하게 마음이 들썩이는 정도임은 분명했다. 간신이 유지하던
평온함이 권이도가 끼어듦으로써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평온함을 안겨 준 게 결국엔
권이도였지만 말이다.
지잉, 지잉.
“…….”
「권이도」
“…….”
순간, 핸드폰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머리털이 삐쭉삐쭉 서는 기분이라 전화를 받는 것도 한참이 걸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대는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여보세요?”
전화 너머에선 약간의 웅성거림만 들려왔다. 누군가 이야기하는 소리, 달칵거리는 잡음, 도로에서 들리는
마찰음과 그 끝에 들린 익숙한 음성까지.
-아, 정세진 씨.
“…….”
그저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옥죄였다. 덕지덕지 묻었던 찝찝함이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그를 향한 불만은 눈 녹듯 녹아내리고, 대신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좀 늦을 것 같아서 연락했습니다.
“……아.”
“……얼마나 늦으세요?”
-글쎄…… 그게 좀 애매한데.
권이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서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많이 바쁜가. 그리 생각하는 순간, 이어진 뒷말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차 사고가 나서.
“…….”
사고라니.
“……사고요?”
손끝이 차갑게 식는 바람에 핸드폰을 반대쪽으로 바꿔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권이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대답하기까지 고작 3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거리는 내게,
한 타이밍 늦게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세진아.
-괜찮으니까 진정해.
“…….”
그제야, 뒤늦게 숨이 쉬어졌다. 맥이 탁 풀리는 바람에 하릴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심장은 아직도
벌렁거렸지만, 다정한 음성이 그런 나를 상냥히 달래 줬다.
-다치진 않았는데 병원은 다녀올 생각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고 한 거예요.
-그럼 우선 끊을 테니까…….
“하…….”
“……권이도.”
***
언제부터였을까.
“늦어서 미안합니다.”
“그리고 자선 행사는…….”
각인이 참 별거 없지. 이런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그가 긴장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지만, 왜 긴장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또한 내가 왜 갑자기 마음을 추슬렀는지
모르고 있을 거다.
감정은 자각과 동시에 부풀기도 하지만, 어떨 땐 오히려 편안해지기도 한다. 원인 모를 감정보단 이름을
아는 감정이 낫기에, 쓸데없는 고민을 해소하는 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바로 지금, 내가 그에게
흔들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놀라우리만치 차분해진 것처럼.
나는 그제야 넌지시 안부를 물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지만 교통사고는 후유증을 가장 조심해야 하니까.
문제가 있다면 입원을 했겠지만 왠지 권이도라면 입원하지 않고 회사로 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 과실이에요?”
“운전자가 초보인 데다, 아이가 아파서 급히 병원에 가다가 그랬다더군요. 수리비는 안 받았고, 병원에
좀 데려다주느라 늦었어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
“농담이에요.”
- 다음 화에 계속
“……곧 3 주가 끝날 텐데.”
갑작스레 던져진 화두에도 권이도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뒷말을
기다렸을 뿐. 이 미팅이 시작되고부터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돌아온 대답은 분명 장난이었다. 권이도 역시 픽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그가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이야기했다.
“…….”
“……권이도 씨 속을 모르겠어요.”
“미안하다고 말은 하면서 용서해 달라고는 안 하고, 매일 회사로 찾아오긴 하는데 그렇다고 나한테 만나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
“이러면 뭐가 달라집니까?”
“용서를…….”
“…….”
그러나 이 또한 용기가 필요한 문제였다. 먼저는 용서가 필요했다면, 이번엔 관계를 이어 갈 확신이
필요했다. 과연 우리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확신하고 도전할 용기.
“……네가 그걸 원하면.”
“…….”
“그렇게 해야지.”
“……그래요, 그럼.”
“오늘은 이쯤 하죠.”
***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오늘, 고대하던 선호재단과의 콜라보 제품이 론칭됐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행사장에 도착해 직접
관계자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었다. 밤새 권이도에게 할 말을 정리하느라 잠을 설쳤지만, 컨디션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이번 재단과의 콜라보 제품은 수익금 일부가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기부되는 형태로…….”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바쁘게 내부를 돌아다니며 여러 일을 처리했다. 방문객에게 제품을 소개해
주고, 몇몇 협력 업체 직원들과 간단한 안부 인사도 나눴다. 그러면서 면밀히 주변을 살폈으나, 안타깝게도 내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표님, 고생하셨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직원들은 저마다 시원섭섭한 얼굴로 행사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준비는 길었는데 결과는 참
한순간이라느니. 3 주가 이렇게 짧을 줄 몰랐다느니 하는 이야기들도 들려왔다.
“대표님?”
“……아.”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집으로 모실까요?”
김 실장이 그렇게 물었을 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고, 그냥 울컥
짜증이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이, 다 끝나 가는 하루가, 그리고 여전히 담담한
감정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뇨.”
권이도가 오지 않았다.
어쩌면 또 홀로 마지막을 기약한 건지도 몰랐다. 내게 약혼의 종결을 알렸던 그때처럼. 나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저 홀로 결론을 내려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내 눈앞에서 영영 사라지기로. 내가, 그를
귀찮아하지 않도록.
“집 말고 다른 데로 가주세요.”
“…….”
“……권이도?”
“……아.”
“…….”
“뭐를?”
“세진이 너를.”
“……그럼 오늘은요?”
느리게 권이도에게 물었다. 그날은 그렇다고 쳐도, 오늘은 왜 오지 않았는지. 일이 생겨서 늦었다고
말했지만, 권이도 역시 그게 설득력 있는 변명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거다.
“오늘은…….”
권이도는 앞서 대답했던 것보다 더 망설이는 듯했다. 표정이 워낙 차분해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이내 마음을 다잡았는지, 그가 담담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미련이 생길 것 같았거든요.”
“…….”
“거의.”
“…….”
멍하니 권이도를 바라봤다. 전해져 오는 감정은 무척이나 담담했고, 그건 뒤이은 한마디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다 버렸어.”
“다행이네요. 거의 다 버려서.”
“……잘 가요.”
“…….”
“이제 다신 볼 일 없겠죠.”
“…….”
“…….”
“…….”
“……아.”
“미안.”
- 다음 화에 계속
“…….”
너무 당황하면 정말 아무 말도 안 나오는구나. 권이도는 이미 얼굴을 가렸지만, 나는 좀 전에 본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눈물만 쏟아 내던 그 장면을.
“아니…….”
“이래서…….”
“…….”
“그게 무슨…….”
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지니 깨달은 건데, 내쉬는 숨결에 엷게 울음이 섞여 나왔다.
두 눈으로 똑똑히 봤음에도, 도무지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왜 울어요?”
“그쪽이…… 아니…….”
“나 봐봐요.”
“…….”
“……세진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미안해.”
목이 메는 모양이다. 늘 발성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흐릿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내 양팔을 붙잡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러니까…….”
“가지 마.”
“…….”
“……미련 다 버렸다면서요.”
“…….”
“권이도 씨.”
“나 봐봐요, 빨리.”
“…….”
“얼른.”
“고개 안 들면 저 집에 갈 겁니다.”
“…….”
“…….”
“……정말 미련 다 버렸어요?”
“아니.”
“하나도 못 버렸어.”
“……미안.”
“…….”
“미안해, 세진아.”
“나한테 이럴 자격 없는 거 아는데…….”
“…….”
“근데 안 될 것 같아.”
“제발 가지 마…….”
“그만 울어요.”
“…….”
“……하.”
“…….”
“그랬으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요.”
나는 그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이야기를 꺼냈다.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에 시선을 두고, 이따금 달싹이는
입술을 가끔 구경하면서. 금방이라도 그에게 뻗고 싶은 손을 애써 주먹을 쥐어 참아 가면서.
“……권이도 씨.”
천천히 그의 이름을 곱씹었다. 머리로는 하나둘 날짜를 되짚으면서. 우리가 헤어졌던 계절, 과거의 내가
죽었던 시기. 막연히 이맘때라고 생각했던 날짜를 차근차근 떠올렸다.
“……하.”
“어떻게…….”
“…….”
“……아니라고 해요.”
“…….”
“아니라고 하라고요.”
“……미안.”
“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언제였더라. 그가 나와의 약혼을 끝냈던 그 날처럼. 갑작스레 밀려든 실망과
배신감을 막아낼 길이 없었다.
“왜 맨날 그런 식이에요? 혼자 결론 내리고, 혼자 끝내고,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내가 그에게 화낼 자격이 있을까. 그런 의문은 모르는 척했다. 눈앞이 캄캄하게 물드는 것만 같아서
짓씹듯 쏘아붙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당신이 죽으면 내가 기뻐할 것 같아요? 귀찮은 사람이 없어졌다고 좋아할 것 같았어? 그렇게 각인이
풀리면, 그럼 내가 잘 살 줄 알고?”
“…….”
“…….”
그런데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릴없이 구겨진 얼굴이 아까 울음을 참던 것과
비슷했다. 느릿느릿 내 손목을 붙잡은 권이도가 억눌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
“나랑 자고…… 그리고 내일은 나한테 웃어 주지 않을까. 또 내일은 괜찮아졌다고 해주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다시 예전처럼…….”
“근데 아니잖아.”
“…….”
“너 마음 정리 다 했잖아, 세진아.”
“너 없이 살 자신이 없어.”
그렇게 말하는 권이도는 자괴감으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싫다는 듯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원망도 떠올랐다.
“…….”
“정말…….”
“정말 바보 같네.”
“권이도 씨.”
“…….”
“…….”
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목까지 차오른 한숨을 꿀꺽 삼키고, 집에서 챙겨
나온 상자를 꼭 움켜쥐면서.
“…….”
“시간도 늦었고…… 겸사겸사 줄 것도 있으니까.”
- 다음 화에 계속
나는 행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권이도와의 식사를 위해 이곳을 예약해 둔 참이었다. 그가 기념식에 참석해
나와 대화를 나누리라고 확신했었으니까. 설마하니 코빼기 하나 내비치지 않다가 주차장에서 그렇게 펑펑 울 줄은
몰랐지만.
“…….”
“…….”
“주방장이 눈치 보던데.”
“……입맛이 없어서.”
그렇게 울었는데 입맛이 있으면 그거야말로 이상하지. 게다가 여전히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고.
“…….”
나는 살짝 식기를 내려놓고 멀거니 창밖을 내다봤다. 창가 쪽 테이블은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아름답게
펼쳐진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하늘에 수놓은 별처럼 반짝이는 불빛들은, 적어도 지난번에 왔을 때보단
아름다웠다.
“…….”
“올 초에…….”
“정 회장이 나를 찾아왔어.”
권이도가 말하길, 아버지는 선호카드가 제휴 맺을 은행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라고 했다. 어디서
들린 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사실과 무관하진 않았다고. 아버지는 본인 기업의 오메가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권이도는 그 협상을 받아들였단다.
“아마 나한테 필요한 게 후계라고 생각했나 본데, 나는 계속 들어오는 혼사를 막을 구실이 필요했어.
후계야…… 별로 급하지 않으니까.”
“…….”
“제휴를 맺을 생각은 없었지만, 연결 고리를 만들어 놨다가 흡수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부부로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울 테니까.”
처음부터 해신을 잡아먹을 생각이었구나. 나는 아연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던
권이도의 말이, 설마 어차피 해신을 흡수할 예정이었다는 말일 줄은 몰랐다. 아버지와 협상할 단계면, 아직
겉으로 망조가 드러나지도 않았을 텐데.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
“…….”
“…….”
“……그럼.”
그러나 권이도는 더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담담한 대답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자조 어린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
“또 궁금한 건?”
내 성격이 진짜 나쁘긴 나쁜가 보다. 그렇게 꾸준히 정신과 치료를 받는데, 어쩜 효과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저 무표정한 얼굴이 다시 일그러지길 바라는 걸 보면.
“……권이정이 그러던데.”
“그 선물이…… 설마 나는 아닐 테니까.”
“……고소할 자료.”
느릿느릿 말하던 권이도가 말꼬리를 흐렸다. 이내, 마른침을 삼켰는지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아니, 그냥 다 변명이지.”
“…….”
더 궁금한 부분은 없었다. 그를 심문할 생각이 아니니 무언가 더 묻기에도 애매했다. 그래서 권이정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떠오른 사실을 입에 올렸다.
“…….”
“……우리 애였어.”
“…….”
“너랑 내 아이.”
“…….”
“……이거.”
그래서 우선, 테이블 구석에 놓아두었던 상자를 가져와 그에게 내밀었다. 아까 외투 주머니에서 꺼내
올려 둔 물건. 내가 집에서부터 챙겨 나와 내내 만지작거리던, 내 지난 몇 달을 담은 권이도에게 주기 위한 선물.
권이도는 여전히 의아한 눈으로 상자를 바라봤다. 약속이라고 말했음에도 곧장 떠오르는 게 없나 보다.
나는 상자를 슥, 권이도 쪽으로 밀며 눈을 내리깔았다.
“…….”
“…….”
헛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느리게 들어 올린 시선엔 서서히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발간
입술을 달싹이며 나직이 내뱉는 한마디도.
“……그게 무슨.”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자,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하늘이 아니라 권이도의
눈에서. 예의 그 수려한 눈매가 다시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세진아.”
“아직도 네 방을 못 치웠어.”
“근데 이런 걸 또 주면 어떡해.”
아…… 뭘 오해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향수를 끝으로, 내가 정말 자신을 떠나는 줄 알았나 보다.
모든 궁금증을 해소하고, 약속까지 지켰으니. 이제 정말 우리 헤어지자고.
“……권이도 씨.”
“손 좀 줘볼래요.”
“……우리 연애할래요?”
“…….”
“……아니, 왜 또 울어.”
“그만 울어요.”
“…….”
“……내가 잘할게.”
“그래요. 믿을게.”
우리가 헤어졌던 가을.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시기. 먼 길을 돌아 다시 똑같은 계절을 맞이했다. 봄이
오기 전까진 시린 추위가 이어지겠지만, 이번 겨울은 그다지 외롭지 않겠지.
- 다음 화에 계속
“아…….”
나는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며 창문에 등을 기댔다. 손끝으로 창문을 긁는가 하면 미치겠다는 듯 뒤통수를
유리에 비비적거리기도 했다. 한 손으로 어깨를 밀어 냈지만, 그 역시 큰 효과는 없었다.
“그만, 흣…….”
뜨거운 입 안이 성기를 뿌리 끝까지 머금었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귀두를 조이고 혀로 기둥을
부드럽게 감싼다. 벼랑 끝에서 뚝 추락하는 듯한 쾌감에 다급히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으.”
아, 이거 맛 들일 것 같은데.
나는 그리 생각하며 가물가물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깔끔하게 세팅한 머리칼과 반듯한 이마 따위가
보였다. 내리깔린 속눈썹은 퍽 단아했으나 높게 뻗은 콧대 아래 발간 입술엔 민망한 물건이 물려 있었다.
움찔거리는 허벅지는 이미 큼직한 손에 잡힌 상태였고, 내가 밀어 내려고 하면 할수록 움직임만 더 집요해졌다.
“흡……!”
부드러운 점막이 성기를 뜨겁게 감쌌다. 찌릿찌릿 전기가 오르는 듯해서 창문에 콩 뒤통수를 부딪쳤다.
눈을 꾹 감은 채로 아랫배에 바짝 힘을 주고, 혀를 꾹 깨물었다.
“……!”
“흐…….”
100m 달리기를 한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렸다. 귓가가 발개질 만큼 수치심이 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가 부를 정도로 만족감이 들었다. 느른한 숨을 내뱉으며 몸에 힘을 빼자, 권이도가 그제야 내 성기를 입에서
빼내었다.
“양이 많네.”
“한 번 더 해줄까?”
“……됐거든요.”
“아, 바지 구겨졌네…….”
“…….”
***
그사이 ‘Sejin’은 선호재단과 본격적인 전속 계약을 맺었다. 콜라보 제품의 반응이 무척 좋았던 데다,
그해 후원금이 예년보다 많아졌기 때문이다. 처음엔 권이도의 제안으로 맺은 계약이었으나, 그 이후엔 내가 직접
권이경에게 연락을 넣었다.
‘세진 씨, 오랜만이네요.’
장례식장에서 받은 명함으로 연락했을 때, 권이경은 의외로 흔쾌히 나와의 만남을 수락했다. 실종된
권이정 대신 명성호텔을 소유하게 된 그는, 복지재단과 문화재단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제 관심사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된 덕일까, 다시 만난 권이경은 지난번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다.
그는 권이도와 내 사이에 관해서는 묻지 않았고, 진지한 얼굴로 내가 제안한 프로젝트만 검토해 봤다.
한껏 집중한 모습은 역시나 권이도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렇게 모든 설명을 들은 뒤엔 그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난 세운 걸 빼준 죄밖에 없는데.”
“그랬나?”
“익숙해지니까 괜찮더라고.”
“조심히 들어가세요.”
“연락할게요.”
스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덜컹거리며 닫힌 승강기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한 다섯
층쯤 내려갔을까. 나는 애써 떨어지지 않는 발을 돌려 사무실 쪽으로 향했다.
“…….”
“…….”
나는 최대한 표정을 가다듬고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여전히 따끔거릴 정도로 많은 시선이 쏟아졌다. 차마 무시할 수 없는 눈빛이라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향해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일 안 합니까?”
“대표님!”
“하하…… 그랬나?”
“봐봐요, 지금처럼!”
그들은 사춘기 중학생처럼 권이도와 내 관계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일하기 싫은 와중에 즐거운
가십거리가 생긴 게 분명했다. 그럴 줄 알았다느니, 누가 먼저 고백했냐느니, 잔뜩 들뜬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들려왔다.
“당연히 고백은 권 전무님이 하셨겠지. 대표님한테 한눈에 반한 게 분명하다니까?”
“만나자고는 제가 했습니다.”
“……와.”
“두 분 진짜 잘 어울리시긴 해요.”
직원들은 적당한 타이밍에 그 주제를 마무리했다. 나쁘게 보는 사람은 없는 듯했고, 과하게 장난을 거는
사람도 없었다. 역시, 직원 하나는 잘 뽑아 놨다니까. 나는 그리 생각하며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자 이제 일합시다, 다들.”
***
“세진아.”
“그래서 먹고 싶은 건?”
“글쎄…… 배가 별로 안 고픈데.”
“그래도 먹어야지.”
나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나와 헤어질 생각을 했을까.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온몸에 선연히
느껴졌다. 살랑살랑 풍겨 나온 페로몬은 내 것과 섞여 이미 차 안을 가득 채운 상태였다.
“의선당으로 갈까.”
- 다음 화에 계속
“……집?”
“괜찮겠어?”
“걱정은…….”
나는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눈을 찡긋했다. 사업을 할 땐 그렇게 대범한 사람이, 나와 관련된 일에는
왜 이렇게 소극적으로 구는지 모르겠다. 괜찮다고 말해 봤자 듣지 않을 것 같아서, 그의 손을 기어 위에 올려
주고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
“물건은 전부 가져가려고?”
그런데 내 얘기를 듣자마자 권이도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수려한 눈매가 살짝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고, 나는 혹시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설마 버렸어요?”
“아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대답은 칼같이 돌아왔다. 흘긋, 백미러를 살핀 권이도가 핸들을 돌리며 느릿느릿
운을 뗀다.
“버린 게 아니라…….”
“내가 좀 썼어.”
“…….”
“차를?”
“아니.”
“…….”
“향수를.”
“……향수를?”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밀고 그의 냄새를 맡았다. 옅은 페로몬에 섞인 묵직한 향기는 우리가 사귀게
되었던 날 내가 선물한 것이었다. 설마 이걸 말하는 건 아닐 테고, 그 외에 떠오르는 향수는 두 개였다.
아무래도 G 사에서 출시한 은방울꽃 향수를 말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출장 가는 권이도에게 공병에
조금 덜어 줬던 기억이 있다. 혹시 그때 써보고 마음에 들었던 걸까.
“…….”
멍하니 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동자 위로 도로의 불빛이 조금씩 비쳐 보였다. 잠이
안 와서 뿌리고 잤다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도 다른 이유였다.
“……그래서 잠은 잘 잤고?”
“뭐…….”
못 잤구나.
애매하게 돌아온 대답이 퍽 난감해 보였다. 살포시 찌푸린 눈매는 권이도답지 않게 멋쩍은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푸스스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왜일까, 그 담담한 대꾸에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요새는 그럴 시간이 없긴 하지. 향수를
뿌리는 게 아니라 매일 서로의 페로몬에 범벅 돼서 잠이 드니까.
“너 밥부터 먹고.”
갑작스럽게 찾아왔음에도 주방장은 익숙하게 두 명분의 식사를 내어 왔다. 호화롭게 차려진 식사는
의선당에서 먹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얼핏 듣기로는 유명 호텔의 수석 셰프로 있던 사람이라는데, 왜
개인이 그런 인재를 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
기분이 이상했다. 그건, 권이도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슬쩍 돌아본 권이도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내가 이 방에 들어와 있는 게, 그리고 권이도와 함께 있다는 게, 모든 게 참 낯설게 느껴졌다.
“이 방에 자주 들어왔어요?”
“……아니.”
“…….”
“내 방에.”
“……방에?”
“…….”
향수병을 들어 올리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무게가 가벼울 때부터 이상했건만, 절반…… 아니 그보다
더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나도 몇 번 사용하지 않은 향수를 대체 얼마나 쓴 건지.
“……몇 번 뿌렸다더니.”
픽, 웃는 와중에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느샌가 가까이 다가온 권이도가 살그머니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귀 뒷부분에 코를 문지른다.
“다시 사줄게.”
간지러운 숨결이 닿아 왔다. 가끔, 그가 하는 행동이 어린 짐승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지금처럼 애교를 부리듯 비비적거리거나 할 때.
“이 방을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사줄게.”
“응? 세진아.”
“…….”
“자고 갈 거지?”
***
“흐, 잠깐…….”
“으응.”
“……하아.”
히트 사이클도 아닌데 정신이 혼미했다. 머릿속이 녹진하게 풀려서, 오로지 권이도 하나만 바라게 됐다.
언제부터였더라. 자고 가라는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던 그때였나. 아니면 권이도가 나를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을 때였나.
“아……!”
“흐응…….”
“앞이고 뒤고 다 젖었네…….”
“……으응, 아, 거기…….”
“흐읏……!”
“……하아, 얼른.”
“보채지 말고.”
“……하아.”
“아, 흡…….”
“……큿.”
둘레가 조금만 작았어도 이렇게 버겁진 않을 것이다. 그의 페로몬에 취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중인데도
그가 내 안을 파고드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두툼한 귀두가 좁은 내벽을 억지로 벌리고, 가장 굵은 부분을
지나자마자 빨려 들어가듯 쑥 삽입됐다.
“아, 흐……!”
미끄러지듯 들어온 성기는 내가 느끼는 부분을 긁으며 안쪽 깊은 곳까지 꿰뚫었다.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찌릿찌릿한 쾌감에, 사정감이 팡 하고 터지고 말았다. 내가 덜덜 떨며 정액을 배출하는 동안 권이도는 느른한
숨을 뱉으며 내 얼굴을 구경하고 있었다.
“……흐으.”
“항상 생각하지만…….”
그가 손바닥으로 내 가슴께를 문질렀다. 질척거리는 정액이 피부에 뭉개졌다. 깊이 삽입한 그대로 허리를
둥글게 돌린 그가 흥분에 젖은 눈을 깜박였다.
“잘 느낀다니까.”
“……하읏!”
“착하지…….”
“아아, 흐…….”
권이도는 나를 끌어안은 채로 느릿느릿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크게 움직여 놓고, 그다음엔
감질날 만큼 느린 움직임이었다. 아마 아직 몸이 덜 풀려서 그러나 본데, 그 때문에 오히려 더 미칠 지경이었다.
칭얼칭얼 그에게 애원하며 매달렸다. 내가 먼저 하반신을 들썩이고 그의 허리에 다리를 꾹 감기도 했다.
그가 빠져나가는 게 너무 아쉬워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바짝 몸을 밀착했다.
“……후.”
“으응, 거기…….”
하지만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 아닌가.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긴 했지만, 그 당시엔 무척이나
좋았으니 말이다. 지금도 더 빠르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그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아, 자기야…….”
“…….”
- 다음 화에 계속
104 화. A La fin de La Memoire(3)
“아……!”
“못 걸으면 내가 안고 다닐게.”
“그게…… 힉!”
“……흑, 아, 으, 하읏!”
철퍽거리는 소리가 외설스럽게 울렸다. 그는 내 종아리에 뺨을 문지르며 다짜고짜 속도를 높였다. 다리가
붙잡힌 탓에 도망칠 수조차 없었고, 그저 상체를 비틀며 앓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흐으…….”
“자기야, 라며.”
“……흣, 으.”
반쯤 들어온 성기가 둥글게 움직였다. 그대로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오더니, 비비적비비적 내벽을
헤집는다. 배가 결리는 것 같아서 몸을 웅크리자, 그가 내 눈가를 살짝 혀로 핥았다.
“울지 말고.”
어느샌가 생리적인 눈물이 맺혔던 모양이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당겨 어리광을 부리듯 키스를 졸랐다.
혀를 내어 그의 입술을 핥자 권이도가 내 혀를 앞니로 살짝 깨물었다.
“으응…….”
“……하.”
“하, 씹. 진짜…….”
“아, 아……!”
“……큿.”
“흐…….”
“하아, 흐읍…….”
섹스가 좋은 건, 행위의 쾌감뿐만 아니라 온전히 느껴지는 애정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 권이도가
벅차오르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내게 입을 맞추는 것처럼. 사랑받고 있다는 감각을 마음껏 만끽하자, 풍선이
부푸는 것처럼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
“……하아.”
느리게 떨어진 입술에 길게 실타래가 늘어졌다. 나는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고 일부러 쪽 소리가
나게 빨아들였다. 별안간 아랫입술이 잡아당겨진 권이도가 눈가를 찌푸린 채 헛웃음을 흘렸다.
“체력이 남나 보네.”
“조금……?”
사실은 거의 바닥났지만, 부러 여유를 부리며 장난을 쳤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서 가물가물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말이다. 그는 귀엽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곤 땀에 젖은 머리를 조심조심 넘겨 줬다.
“잘됐네요. 내일 주말이니까.”
“으…….”
굵은 성기가 빠져나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들어올 때보다 더 이상한 느낌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아래를
바짝 조이고 말았다. 아직 발기가 풀리지 않았던 기둥이 제자리에 문득 멈춰 섰다.
“빼지 말라고?”
“아니…….”
“…….”
“반만 싸면 좋을 것 같은데…….”
“……?”
그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대충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자, 싱겁다는 듯이 시선을 돌린다.
문제는 여전히 젖어 있는 입구에 이번엔 손가락 두 개가 쑥 들어왔단 것이었다.
“……잠까, 안…….”
찌걱찌걱, 손가락이 안쪽을 헤집었다. 몸을 돌려 도망가려고 했으나, 발목이 단단히 잡히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오히려 나를 엎드리게 한 권이도가 양손으로 엉덩이를 벌리고 엄지를 밀어 넣었다.
“흣, 내가 이거 싫다고……!”
“싫어도 해야지.”
주르륵, 정액이 흘러내렸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바들바들 허리를 떨었다. 무릎을 세우고
엉덩이를 들어 올린 자세는 지나치게 무방비한 기분이 들었다.
“안에 두 번 싸면 배부르잖아.”
특유의 우아한 음성이 이토록 얄미울 수 있을까. 단조롭게 말한 권이도가 구석구석 정액을 긁어냈다.
이미 말랑해진 내벽을 손가락으로 꾹꾹 문지르며 제 흔적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굳이 그걸 눈으로 볼 필요는 없을
텐데. 어떤 이유를 붙여도 이게 반쯤은 그의 취향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진짜.”
변태 새끼도 아니고.
귓가가 홧홧 달아오르는 듯했다. 아무것도 싸지 않으려고 노력해 봤지만, 그럴수록 뻐끔거리는 구멍만 더
잘 보일 뿐이었다. 기어코 그는 모든 정액을 빼낸 다음에야 느릿느릿 손가락을 거둬들였다.
“흣…….”
“……권이도 씨.”
“응.”
“……하아.”
호기롭게 무릎을 세우고 앉은 것까지는 좋았다. 손을 뒤로해서 그의 성기를 고정하고 귀두에 입구를 맞춘
것까지도 괜찮았단 말이다. 위에서 하겠다는 말에 권이도가 멈칫하는 순간 알아야 했는데. 설마 이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흣…… 크기 좀, 작게 못 줄여요?”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아흑……!”
“흐, 잠시만…….”
“세진아, 내가…….”
“……아, 흡!”
“흐으, 흣…….”
“하아, 흐, 흐응…….”
“……하.”
나를 붙잡았던 손은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상체로 옮겨갔다 튀어나온 유두를 손톱으로 튕기더니 손가락
사이에 끼고 은근히 문지른다. 잡을 것도 없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주무르는가 하면, 갈비뼈를 지나 배꼽 근처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내가…… 후, 말했던가.”
“……흣, 뭐를?”
“……키스해 줘, 얼른.”
“흡, 흐응…….”
“……흐.”
“아, 흣, 그, 아……!”
“……아, 아……!”
“쉬이…….”
“……!”
발기가 풀린 줄 알았던 성기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내가 아래를 바짝 조이자, 그 또한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사정했다. 서서히 배가 부르는 느낌과 함께 성기 끄트머리에서 울컥, 물이 터져 나왔다.
“……흐.”
“…….”
“잘했어.”
“……진짜 변태 새끼.”
“침대에서 하는 욕은 애교라니까…….”
“……흐읏!”
다시금 안쪽에서 성기가 부풀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대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를 어떻게든 해보고자
쇄골까지 깨물었으나, 오히려 그 행동이 자극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하으, 흡, 아…….”
깨물어도 된다는 게 아니라, 깨물라는 말처럼 들렸다. 마음껏 상처 내도 된다고 너그럽게 허락했던
그때처럼.
“……하, 세진아.”
권이도와 만난 이후, 나는 수면제를 완전히 끊었다. 상담은 아직도 다니고 있지만, 횟수는 세 번에서 두
번으로 줄어들었다. 의사는 호전되는 속도가 현저히 빨라졌다며 조만간 그 외의 약도 끊어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권이도와 헤어졌던 시기, ‘Sejin’에서 출시한 향수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선호의
힘일까, 평소보다 홍보 효과 역시 뛰어났다. 자연스레 만족할 만한 수익이 뒤따랐기에, 기껏 투자한 권이도에게
누를 끼칠 일이 없어 다행이었다.
‘이번엔 꼭 갈게.’
나는 간단한 인사말을 마무리하고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돌려줬다. 초대장을 배부해 초청한 기업인이 반,
그리고 추첨을 통해 선정한 일반인이 반. 그중에 아직 권이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쯤 오려나…….
“누구 찾으세요?”
“……아.”
“이건 향이 되게 세진 씨 같네요.”
“그 향수요?”
“……아, 그거.”
작년이라는 말에 생각나는 향수가 있었다. 권이도와 헤어졌던 시기에 온종일 만들곤 했던 나무 냄새가
나는 향수. 이희나에게 조언까지 구했던 터라 그 또한 기억하고 있나 보다.
“그건 주인이 따로 있어서요.”
권이도에게 선물한 향수는 아직까지도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원래는 출시할 예정이었으나, 나는 조용히
그 제품을 묻어 두기로 했다. 그냥 사소한 이유였는데, 다른 이들이 그의 페로몬을 아는 게 싫어졌기 때문이다.
어쭙잖은 독점욕이었을지언정, 내게 그 향수의 주인은 오로지 권이도뿐이었으니.
“청첩장 드릴게요.”
“……와.”
“축하해요. 꼭 시간 낼게요.”
“세진 씨 덕분이죠.”
그는 자세한 건 나중에 식사를 대접하고 이야기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걸음을 옮기기 전, 입구에 서 있던
이태성에게 남몰래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어디선가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미미한 변화였으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라 또렷이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을 바라보자, 사람들 틈에서 새빨간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서서히 차오르던 기대감이 한순간 파도처럼 넘쳐흘렀다. 표정이 부드럽게 풀리고,
동시에 심장이 기분 좋게 뛰기 시작했다. 먼 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설렘 역시 고스란히 전해졌다.
“…….”
“…….”
“정세진 대표님.”
기품 있는 목소리가 부르는 이름이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내게 가까이 다가온 권이도는 넌지시 장미꽃을
내밀며 시선을 맞춰 왔다. 두근, 두근, 누구 것인지 모를 심장 박동이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어색한 웃음은 긴장을 푸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모두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것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을 것 같은데. 그런 걸 신경 쓰지 못할 만큼 기분이 들뜨고 있었다.
“꽃을…… 사 오실 줄은 몰랐는데.”
“향수 설명 좀 해줄래요?”
갑작스럽게 등장한 권이도는 행사장 내부에 있던 사람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절반 정도는 말이라도
한 번 붙여 보기 위해 기회를 노렸고, 나머지 절반은 연예인 보듯 먼발치에서 지켜봤다. 워낙 유명 인사인데다
그 외모가 뛰어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표님 고생하셨어요!”
“두 분 조심히 들어가세요!”
“생일 축하드려요!”
“……?”
생일? 그렇게 물을 시간은 없었다. 그 축하를 시작으로 줄줄이 다른 직원들까지 한마디씩 거든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요!”
나는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멀거니 눈을 깜박였다. 날짜가…… 벌써 그렇게 됐던가. 까맣게 잊고 있던
생일이 그제야 떠올랐다. 그래서 곧장 반응하지 못했는데, 그런 내 반응을 보고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일 생일 아니세요?”
평소에도 그러긴 했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럴 때마다 해신에서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생각났다. 그 사람들도 나조차 까먹는 생일을 항상 기억하곤 했다.
“에이, 다 아는 수가 있죠.”
“왜요?”
“싱겁긴…….”
“데려다줄 거죠?”
***
“한잔할까?”
“술을?”
“와인이 있었나?”
“아마 찬장에…….”
“한잔하고 자면 되겠네.”
“……자다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
“한 잔 받으셔야죠, 대표님.”
“졸려?”
“으응…….”
와인을 모두 비운 뒤엔 그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욕조에 몸을 담그게 해줬다. 그의 집에선 전부
고용인이 해주던 건데. 권이도가 직접 수발을 들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는 가벼운 손장난과 함께 샤워를
마쳤고, 나란히 가운만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권이도 씨.”
“내가 전에 알려 줬던 불어 기억나요?”
“불어?”
“그러니까 지금처럼…….”
“너 취했어.”
입술이 깃털처럼 스쳤다. 간지러운 감각에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그의 말대로 취기가 오른 상태였고,
알딸딸한 정신이 몽롱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쪽 소리를 내며 이야기했다.
“자기도 같이 마셨으면서.”
“또 자기라고 하네.”
“자기야.”
“…….”
“내가 아홉 살 때…….”
- 다음 화에 계속
“깼어?”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는 반쯤 눈이 감기고 있는데, 여전히 말끔한 얼굴의 권이도가 보였다.
어두운 와중에도 그가 자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안 잤어요?”
“자다 깬 거야.”
“팔 저리겠다.”
“이대로 다시 자.”
“…….”
“그냥, 잠이 안 와서.”
“향수라도 뿌려야겠어요.”
“…….”
“…….”
한동안 숨소리만 들렸다. 잠들기 딱 좋은 환경이었는데, 오히려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다. 따듯한 체온이,
이따금 전해지는 두근거림이, 그리고 무언가 심란해 보이는 권이도가 신경 쓰였으니까.
“그래서 대답은?”
“…….”
권이도는 단조로운 음성으로 뒷말을 이었다. 그가 말하길, 김 실장은 다짜고짜 그에게 연락을 넣어
무작정 애원했단다. 내가 그런 게 아니니까 제발 빼달라고, 나중에 사례는 제대로 하겠다면서 말이다.
“…….”
김 실장은 처음부터 아버지를 배신할 생각이었구나. 아니, 어쩌면 신의를 가지고 있던 적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내렸던 결론이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모든 걸 버릴 각오였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팀장은…….”
“경호원이 뇌물 먹을 게 있어요?”
“…….”
“운명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지.”
당신이 말하는 운명엔 우리 사이도 포함되어 있을까. 과거에도, 지금도, 같은 관계가 된 건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물론 그 끝은 다르겠지만, 이 또한 운명이라면 운명이었다.
“또 궁금한 게 있어?”
“……각인이 안 풀려서.”
그런데 권이도는 아주 천천히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뱉었다. 이마를 콩 부딪치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뜨기도 했다.
“…….”
“……힘들었겠네.”
“힘들어야지.”
“…….”
“……권이도 씨.”
“그 사람한테…… 손을 썼어요?”
“죽이진 않았어.”
“……그게 뭐야.”
“그냥 잊어버려.”
“…….”
“네 몫까지 내가 기억할게.”
“응…….”
“…….”
“…….”
“세진아, 우리…….”
“결혼할까.”
“…….”
“내가…….”
“…….”
“…….”
“반지 있어.”
“…….”
“네 생일 선물도 있고.”
“태어나 줘서 고마워.”
“…….”
“……그거 알아요?”
돌이켜 보면, 그때에도 같은 선물을 받았었다. 비록 기분은 지금과 달랐지만, 불러올 상황만큼은
비슷했을 테니.
“작년 생일에도…….”
“……직원들도 전부 부를래요.”
그를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억지로 품에 얼굴을 묻었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른 나를, 권이도는 굳이
확인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저 나를 품에 안은 채 숨을 죽였을 뿐.
“…….”
축의금은 받지 말자고 해야지. 장소는 영빈관이어도 좋지만, 장식은 조금 달랐으면 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겐 꽃과 향수를 선물하고, 우리에겐 좋은 기억만 남기길 바랐다.
“그래.”
“…….”
“그렇게 결혼하자.”
“세진아, 내가…….”
- 외전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