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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_대한민국의 기원

1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관계
왕국과 민국을 이어준 대한제국
이 민 원* 장을 늦출 수 없는 변수가 상존하며, 선택에 따라 극한의 위기도 절호의 기회
도 될 수 있을 것이란 점이다.
이 점에서 지난 1백여 년의 역사가 참고된다. 조선은 1876년 개항한 뒤 청
국과 일본의 간섭, 개화와 척사의 갈등 속에 산업구조 전환이 지체되다가 청
일전쟁 발발과 함께 급전직하로 붕괴되어 갔다. 이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
여 대한제국을 선포했지만, 각종 시책은 러일전쟁으로 좌절되고 일본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했다. 그러나 식민통치하에 고통을 겪던 한국인은 제1차 세계
06 Ⅰ. 머리말 : 왕국에서 민국까지 반세기 대전 직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기회로 3·1독립만세운동과 함께 대 07

대한민국은 현재 유엔 산하 국제사회의 일원이자 명실상부한 자유민주국 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이어 제2차 세계대전 종결로 해방을 맞게 되
가이다. 헌법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대한민국은 민 자, 좌우대립의 혼란을 딛고 가까스로 대한민국을 출범시켜 오늘의 고도성장


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 을 이룩해 왔다. 기
대 획
사 온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국사에서 국민, 영토, 주권에 대한 규정이 이처럼 불과 반세기 동안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발생한 4개의 전쟁 중 청일전쟁, 특
광 집
장 헌법에 명문화되기까지는 많은 시련이 있었다. 그렇지만 국민에 대한 개념이 러일전쟁은 조선왕국과 대한제국의 붕괴로, 1차와 2차의 세계대전은 대한민 -

없거나 국가 주권 개념이 달랐던 19세기 말로부터 현재와 같은 민주공화제의 국임시정부의 수립과 대한민국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 모두 한민족이 국가 한


나라 대한민국을 건설하기까지 한국은 불과 반세기(1897-1948년)밖에 걸리 와 민족의 기로에서 택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두 번의 붕괴와 두 번의 건설은 의

지 않았다. 그동안의 시련은 가혹했지만,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신 어떠한 관계에 있을까. 국가 성립의 기본 요건을 구비한, 완성된 국가로서의 원

속하고도 성공적이었다. 대한민국 탄생은 1948년 8월 15일이다. 그러나 몇 단계 중요한 전사(前史)가


이렇게 빠르고 압축적이다보니,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좌와 우 등의 있다. 그중 하나가 대한제국이고, 다른 하나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이다. 그렇
가치가 충돌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최근 중등학교 역사 교재를 놓고 ‘종 다면 대한제국 등장의 의미는 무엇이고, 이전의 조선왕국과 이후의 대한민국
북’, ‘친일’의 논란을 보인 것이나,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해석을 놓고 의논이 과는 어떠한 관계인가.
분분한 것도 그중 일부이다. 때로 극단으로 치닫는 듯한 이런 현상이 과연 현
재와 장래의 한국에 어떠한 결과로 나타날 것인가 우려되는 점도 없지는 않지
Ⅱ. 전통시대 동아시아 세계구조와 조선왕국
만, 적어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질서가 존중되는 범위에서라면, 이 모두
유럽의 국제사회는 신성로마제국의 붕괴와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에 의
는 긍정적이고도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 거쳐야 할 과정으로 보고 싶다. 다만
해 만국이 동등한 주권을 갖는 평등체제, 즉 수평적 국제질서로 돌입하였다.
한 가지 미·중·일·러 등 강대국의 교차점에 위치한 한반도에는 여전히 긴
그러나 그로부터 2백여 년이 지난 19세기 후반의 동양 국제사회는 여전히 강

* 동아역사연구소 소장, 한국 근현대사, 《명성황후 시해와 아관파천》 등 다수 저서. 고한 중국 중심의 화이질서가 작용하였다. 사대교린체제, 봉공체제 혹은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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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예치체계라는 불평등의 수직적 국가 관계가 그것이다. 군사와 외교는 물론, 각종 의례와 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화이질서를 구체화한 것이 중국과 주변국 사이에 행해지는 책봉과 조 다른 한편 중국의 주변국들은 교린 관계를 유지했다. 동양 각국은 중국에
공이다. 중국의 황제가 주변 국가의 제후를 왕으로 책봉하고, 각국의 왕은 매 사대의 예를 갖추지만, 주변국 상호는 대소에 관계없이 형제관계를 유지해야
년 중국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여 사대의 예를 표한 뒤 황제의 하사품을 받는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요구가 그러했다. 출발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안보
형식이 그것이다. 정치, 군사, 외교, 학문 등 각 분야에 이 체제의 영향을 가 를 고려한 것이었다. 이런 형태는 명나라가 등장할 때 주변국에 반포한 홍무
장 강렬하게 받던 나라가 조선이다. 명·청의 수도 북경에 가장 가까운 점이 제의 황제 즉위조서에 잘 드러난다. 천하는 ‘사해일가’(四海一家)이니, 명 천
주요인이었다. 이렇게 형성된 화이질서의 기반은 막강한 중국의 힘이다. 그 하의 지배자인 황제에게 복종하고, 각국 제후(왕)들은 한 집안의 형제처럼 다
08 힘에 의해 사대의 의례가 정례화되면서 중국과의 종속관계가 고착되어 갔다. 툼 없이 지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은 섬나라 류큐왕국의 사절도 ‘대국’ 조 09

이 체제의 중심인 중국의 역대 군주는 모두 황제였다. 황제는 왕 중의 왕으 선에 대해 신하의 예 대신 ‘형제애’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로서 하늘의 황제 즉 황천상제(皇天上帝)의 아들이라 하여 천자(天子)라 불렸 그 결과 조선은 매년 중국에 사절을 보내 조공(朝貢)을 하였다. 하정사(賀

현 다. 이 지상의 천자는 황천상제로부터 천하를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논 正使), 동지사(冬至使), 성절사(聖節使), 천추사(千秋使)가 연례적으로 파견되 기
대 획
사 리였다. 황제는 중화 문명의 중심인 중국을 통치하고, 동서남북 사방에 위치 고, 진하사, 사은사, 주청사 등도 수시로 파견되었다. 조선은 중국의 달력(책 특
광 집
장 한 사이(四夷)의 땅은 천자가 임명한 제후, 즉 왕이 다스리는 구조였다. 이중 력, 冊曆)을 썼고, 연호도 단기(檀紀)가 아닌 중국 황제의 연호를 썼다. 국왕의 -

조선은 문명이 발달한 군자국, 동이(東夷)의 나라라 하였다. 교지나 각 가문의 족보·비문 등에 보이는 홍무·가정·순치·강희·옹정· 한


동양권에서 황제 칭호를 처음 사용한 인물은 진시황이다. 그는 춘추전국을 도광·함풍·동치·광서 등 명과 청의 연호가 그것이다. 의

제패한 뒤 군현제도를 통해 역사상 처음으로 중원 천하를 통일한 인물이다. 중국 중심의 질서는 나름의 기능이 있었다. 중국은 대국과 소국의 예(禮)를 원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통일 중국의 시조 격인 셈이다. 그는 삼황(三皇)과 오제 표방하여 주변국을 통제함으로써 국가안보를 도모했다. 각국도 반대급부가
(五帝)의 명칭을 합하여 황제(皇帝)라 칭하였다(B.C.246). 이후 한·당·송· 있었다. 중국에 도전하지만 않는다면, 대외 안보와 정권 안정을 보장받았다.
원·명·청 등 중국 역대 국가의 군주는 예외 없이 황제를 칭하였다. 현실적 게다가 조공무역의 실익과 앞서가는 문물의 혜택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중국
으로 이들 제국과 황제의 권력은 막강하였다. 그것은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하 과 주변국의 타협으로 출발한 사대교린체제는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동아
며, 각종 문물이 선진화된 중국의 힘에 비례한 권력이었다. 시아 국제관계의 기본 틀로 유지되어 온 것이다.
반면 조선의 경우 역대 군주는 왕이었다. 황제가 등장할 수 없던 이유는 막
강한 중국의 존재 때문이다. 동양 각국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중국
Ⅲ. 동아시아 국제관계 변동과 조선의 위기
중심 책봉체제하의 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군주는 황제의 책봉을 받
위와 같은 중국 중심의 질서가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한 것은 아편전쟁 이후
아 백성을 다스렸다. 왕이 즉위하면 황제에게 고하고 인신(印信)과 고명(誥命)
이다. 조선 측이 이를 매듭지은 것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였고, 청·일 양국
을 받았다. 직인(職印)과 임명장을 받은 셈이다. 이런 관계는 조선조 5백년간
이 공식적으로 상호 확인한 것은 1899년의 한청통상조약이다. 이 점에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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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제국 선포와 한청통상조약은 오랜 역사 속에서 조선과 중국이 평등한 관계 으로부터 나라의 자주권을 확립하자는 요구가 관료들 사이에 서서히 무르익
로 돌입한 출발점이라는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대한제국 등장은 전래의 중 어 갔다. 서구 각국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의 관료와 군주가 먼저 주권독
화체제를 완전히 탈피하여 현재의 세계체제로 진입한 획기였다. 립의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후 개화와 독립이 화두가 되면서, 고종은 개화파
대한제국이 등장한 역사적 조건은 무엇인가. 하나는 중국 중심 세계관의 변 를 후원하였다. 이때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쓰자는 주장도 대두하였다. 그러
화였고,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동이다. 전자는 조선 후기 이래 나 갑신정변과 거문도사건 이후 청국의 내정간섭이 강화되면서 그런 주장은
지속된 화이관의 변화였고, 후자는 청일전쟁의 결과 초래된 동아시아 국제관 사라졌다. 조선은 청국과 종속관계를 유지하면서, 서구 열강과는 평등관계를
계의 변화와 조선의 위기이다. 유지하는 불균형 상태에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베스트팔렌체제하의 만국
10 조선 사회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 요컨대 화이관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 공법(국제법)이 지배하는 세계질서에 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중심 11

한 것은 조선 후기이다. 17세기에 중국 대륙에 청나라가 등장하고, 청국을 거 의 책봉체제 굴레에 묶여 있었던 셈이다.
쳐 서학이 전래된 결과였다. ‘만주의 오랑캐족’이 한족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 이런 상황을 결정적으로 타개하게 한 것은 청일전쟁이다. 청국의 패배로 그

현 원을 차지하여 고도의 문물을 향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고도의 문명을 동안 청국을 중심으로 유지되어 온 동아시아 세계에서 힘의 중심이 서서히 일 기
대 획
사 누리고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서양에 존재한다는 사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 본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전쟁의 강화로 체결된 시노모세키조약에서 ‘청국은 특
광 집
장 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도는 한 개의 위성에 불과하다는 사실 등은 조선의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하고, 장래 조선의 청국에 대한 공헌 -

유자들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을 가져온 충격이었다. 조선의 지 (貢獻)·전례(典禮)를 전적으로 폐지한다’ 고 하였다. 이후 청국의 조선에 대 한


식인들에게 과연 내 나라 조선은 무엇인가라는 자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한 이전과 같은 간섭은 사라졌고, 조공의례도 마침내 폐기되었다. 의

이들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을 넘어 세계와 조선의 역사·지 이처럼 시모노세키조약은 청국과 조선의 사대조공관계를 청산하게 하였다 원

리·언어·사상 등 각 분야에 두루 관심을 기울여 갔다. 발해를 신라와 함께 는 점에서 조선 측에는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이 자주독
우리 역사의 정통으로 보아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함은 물론, 중국도 지구상의 립을 운위하기에는 몇 가지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청국의 조선에 대한 종주
한 나라이고 조선도 똑같은 나라라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동국(東國), 아방(我 권이 부인된 것 자체는 조선이 자주독립국으로 존재할 외적 조건이었다. 그
邦), 해동(海東)의 역사가 강조되고, 예술에서도 조선의 토속적 색채와 진경산 러나 자주독립은 여전히 허구적이었다. 동아시아의 패자로 부상한 일본의 압
수(眞景山水)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여전히 소중화(小中華) 의식 제로 내정이 파행을 겪고 군주의 신변이 극한의 위기에 처하는가 하면, 조선
이 팽배하였다. 청나라는 오랑캐 나라이고, 조선이 중화문명을 계승했다 하였 의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고 한 청국은 여전히 조선을 속방시
다. 이처럼 소중화 의식이 팽배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청국에 조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대신들도 청국을 상국(上國)으로 운운하기는
공을 하였다. 마찬가지였다.
이후 조선 지식인의 세계관이 또 한 차례 변화한 것은 문호가 개방되면서 게다가 더욱 심각한 것은 청국보다 더한 일본의 압제였다. 청일전쟁 초부
였다. 서구의 힘이 과학기술에 있음을 인지한 개화사상가들이 등장하고, 청국 터 고종과 조정의 대신들은 서울을 장악한 일본군의 인질로 전락했다. 혹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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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에 대항하는 조선의 집단과 인물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보복이 가해졌다. 대한(大韓)으로 결정하여 선포한 일련의 절차를 말한다.
일본군에 저항하던 전국의 동학농민군은 무자비하게 살육 당했고, 일본공사 그런데 당시 조선에서 청국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구태여 청국을 상대로
에게 맞서던 왕후는 일본의 공권력에 무참히 희생되었다. 이어진 단발령은 조 칭제건원까지 하여 ‘국권선언’을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
선 전국을 혼란에 빠뜨렸고, 군주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기의 연속이 도 이를 추진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칭제건원을 둘러싼 저간의 논의에 그 점
었다. 그야말로 조선의 운명이 막 일본에 삼켜지려는 상황이었다. 이 잘 드러난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이 처한 극한의 위기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비상 칭제건원 문제를 처음 거론한 인물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다. 그의
탈출하면서 가까스로 모면되었다. 그러나 난관은 지속되었다. 만주와 한반도 생각은 청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12 를 둘러싸고 러·일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조선의 국권이 급속히 실 실패와 청의 내정간섭으로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청일전쟁 당시 그리고 13

추되어 갔기 때문이다.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 당시 조선에 관해 체결된 ‘명성황후 시해’ 직후 조정에 재등장했으나 무산되었다. ‘조선은 자주독립국’
러·일간의 협정(웨베르-고무라 각서,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이 그 점 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일본이 조선의 내정을 독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고

현 을 잘 보여 준다. 러·일 사이에는 세력균형이 형성되어 평온해 보였지만, 조 종과 대신들은 반발했고, 사태를 인지한 열국 외교관들은 일본공사의 독주에 기
대 획
사 선으로서는 군주의 신변안전, 대신의 인사, 군사와 재정 등이 여전히 표류하 제동을 걸어 이를 무산시켰다. 특
광 집
장 고 있었다. 이후 조선 측의 주도에 의해 거론된 것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한 -

이렇게 군사·재정 기반이 무너져 가는 데다 관료조직은 와해되어, 나라 뒤였다. 이를 거론한 인사 중에는 홍종우(洪鍾宇)가 있었다. 프랑스 유학생 한


의 운명을 판가름할 국제정세가 어떻게 진행될지 한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웠 출신으로 불과 2년 전 상해에서 김옥균을 암살한 인물이다. 입헌군주제를 꿈 의

다. 이때 고종과 정부는 상징의 조성을 통한 자주독립 의식의 환기, 언론 및 꾼 김옥균이나 프랑스식 절대군주제를 꿈꾼 홍종우 모두 황제 즉위식이 필요 원

집회의 지원을 통한 국권 의식 고취로 대응을 하였다. 관료와 신지식인, 도 하다고 보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잠시 거론되다가 그쳤다. 군주가 외
시민 등이 호응하였다. 그 결과 나타난 일부가 독립신문 발간, 독립협회 창 국 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상황이니 환궁 이후로 미룬 듯하다.
립,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 조성 등이었다. 이 모두 세계정세를 국내에 알 이후 논의가 적극화되기 시작한 것은 고종이 경운궁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리고, 국권의 자주와 나라의 독립에 대한 의식을 환기하고자 한 것이었다. 같 였다. 시기적으로도 무난했다. 청일전쟁에 의해 청국의 간섭을, 아관파천에
은 시기에 정부 측에서 추진한 또 다른 대응책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대한 의해 일본의 간섭을 벗어난 상황이고, 환궁을 통해 나라와 군주의 체모도 어
제국 선포였다. 느 정도 수습될 시점이었다. 게다가 독립협회의 활약으로 국권 자주에 대한
관민의 인식도 고양되어 가고, 동북아에서 ‘러·불·독’ 대 ‘영·미·일’의 세

Ⅳ.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 력균형도 형성되던 때이다. 이런 내외의 상황이 고종과 정부 측 주도로 결정

대한제국 등장의 핵심은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국호(國號) 제정이다. 즉, 을 가능케 한 객관적 조건이었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광무(光武)라는 새 연호를 택하고, 조선이란 국호를 그렇다면 고종과 대신들이 칭제건원을 추진한 실제 의도는 무엇인가.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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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들이 다양한 논리를 폈다. 저간의 논의는 이렇게 요약된다. 호(尊號)를 변경하는 것은 짐승(금수, 禽獸)의 제도를 취하는 것”이며, “소중
화의 나라에서 칭제를 하는 것은 망령되이 스스로 높이려는 행위(妄自尊大)”
첫째, 皇·帝·王은 비록 글자는 다르지만 한나라를 자주하고 독립하여 의지하 라 비판하였다. 반면 윤치호는 “한 나라의 독립을 보장해 주는 것은 국가의 힘
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은 뜻을 지닌다. 帝位에 오른다 하여도 萬國公法상 조금도 구 이지 군주의 존호가 아니다. 외국 군대가 왕궁을 유린하고 국모를 살해하는
애됨이 없으므로 정부에서 의논하여 대책을 세우고 황제의 尊號를 올림으로서 尊 상황에서 황제칭호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서구 열강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君하는 輿情에 부응하고 문약·의부하는 습관을 깨뜨려야 할 것이다. 그 같은 행사에 재정을 낭비하기보다 국정을 개선하여 독립의 기초를 다지는
둘째, 갑오경장 이후 독립의 이름만 있고 독립의 실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이 것이 급하다”하여 실용주의적 비판을 보였다.
14 문약한 성품으로 의부하는 성습이 멀리는 이천 년, 가까이는 오백 년으로 이를 떨 이때 사례소(史禮所) 직원(直員) 장지연은 전자는 고루하고, 후자는 앞서 15

쳐 버려야 할 것이다. 간다고 보았다. 최익현 등의 주장에 “어리석은 자들의 망령된 주장으로 일고
셋째, 우리나라의 의관문물이 모두 明의 제도를 좇아 그 統을 이었으니 位號를 의 가치도 없다”고 했고, 윤치호 등의 논리에 “청·일 모두 황제·천황을 칭

현 바로 세우는 일이 불가할 것이 없다. 청이 우리와 동양에 처해 있는 것은 독일·오 하는데 우리만 왕을 칭하여 비하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보수적 유생과 서 기
대 획
사 스트리아가 로마와 인접해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구지향의 신지식인은 다른 관점에서 황제즉위 논거를 비판했고, 동도서기(東 특
광 집
장 넷째,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임은 만국이 공인하고 있는데 무엇이 두려워 못하 道西器)의 입장을 보이던 지식인들은 필요하다고 본 점에서 3자의 생각을 엿 -

는가. 우리나라 강토는 한·당의 옛 땅과 관계있고, 의관문물은 송·명의 제도를 좇 볼 수 있다. 한


았으니 그 계통을 접수하여 존호를 쓴다 해도 불가할 것이 없다. 정부 측이 택한 것은 장지연 등의 논리였다. 그해 8월 새 연호로 광무(光 의

다섯째, 혹자는 말하기를 왕이나 군은 한 나라를 다스림을 말하고 황제는 여러 武)가 확정되고, 황제즉위건도 가결되었다. 즉위식 행사는 11일에서 12일에 원

나라를 다스림을 말한다 하여 영토를 개척하고 백성을 늘려 여러 나라를 통합한 상 걸쳐 황제즉위를 경축하는 태극기가 물결치는 가운데 치러졌다. 장소는 ‘환
태가 아니면 황제 칭호 사용이 불가하다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三韓을 통합한 구단’, 서울의 회현방(會賢坊) 소공동계(小公洞契, 현재의 웨스틴조선호텔 자
것이고 육지강토는 4천리요, 인구는 2천만에 모자라지 않는다. 오늘날 폐하의 신민 리)였다. 황제즉위식은 내·외국인들에게 진기한 볼거리였다. 《독립신문》에
된 자 지존한 존호를 씀에 누가 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인가(《고종실록》 광무 원 서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년 9월과 10월 초의 기사).

십일일 밤 장안의 사가와 각 전에서는 등불을 밝게 달아 길들이 낮과 같이 밝았

요컨대 ‘우리나라는 자주독립국’, ‘황제가 없으면 우리에게는 독립도 없다’, 다. 가을 달 또한 밝은 빛을 검정 구름 틈으로 내려 비쳤다. 집집마다 태극 국기를

‘만국공법상 하등 문제가 없다’는 것 등으로 황제즉위 주장의 논리가 압축된 높이 걸어 애국심을 표하였고, 각 대대 병정들과 각처 순검들이 만일에 대비하여

다. 절도있게 파수하였다. 길에 다니던 사람들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십이일 새벽에 공

그러나 반론이 있었다. 최익현·유인석 같은 유생은 “서구의 예에 따라 존 교히 비가 왔다. 의복들이 젖고 찬 기운이 성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경사를 즐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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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는 마음에 젖은 옷과 추위를 개의치 않고 질서 정연히 각자의 직무를 착실히 하 로운 날이 될지라. 조선이 몇 천년을 왕국으로 지내어 가끔 청국에 속하여 속국대접

였다. …(중략)… 을 받고 청국에 종이 되어 지낸 때가 많더니…이달 십이일에 대군주폐하께서 조선

십일일 오후 두시 반 경운궁에서 시작하여 환구단까지 길가 좌우로 각 대대 군 사기 이후 처음으로 대황제 위에 나아가시고 그날부터는 조선이 다만 자주독립국

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었다. 순검들도 몇 백 명이 틈틈이 벌려 서서 황국의 뿐이 아니라 자주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으니…어찌 조선인민이 되어…감격한 생

위엄을 나타냈다. 좌우로 휘장을 쳐 잡인 왕래를 금하였고 옛적에 쓰던 의장등물을 각이 아니 나리오(《독립신문》, 광무 원년 10월 14일자, 논설).

고쳐 황색으로 만들어 호위하게 하였다.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고 지나갈

때에는 위엄이 웅장했다. 총 끝에 꽂힌 창들이 석양에 빛을 반사하여 빛났다. 육군 한편 황제즉위식과 함께 새 국호가 고종과 대신들 사이에 논의되었다. 고종
16 장관들은 금수로 장식한 모자와 복장을 하였고, 허리에는 금줄로 연결된 은빛의 군 은 “우리나라는 마한·진한·변한 등 원래의 삼한을 아우른 것이니 큰 한(韓), 17

도를 찼다. 옛 풍속으로 조선군복을 입은 관원들도 있었으며 금관조복한 관인들도 곧 대한(大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며, 조선은 옛날에 기자(箕子)가 봉(封)해
많이 있었다. 어가 앞에는 대황제의 태극국기가 먼저 지나갔고, 대황제는 황룡포에 졌을 때의 이름이니 당당한 제국의 명칭으로 합당하지 않다” 라고 하였고, 대


면류관을 쓰고 금으로 채색한 연을 탔다. 그 뒤에 황태자가 홍룡포를 입고 면류관 신들도 이에 동의하여 ‘대한’(大韓)이 새로운 국호로 결정되었다. 기
대 획
사 을 쓴 채 붉은 연을 타고 지나갔다. 어가가 환구단에 이르자 제향에 쓸 각색 물건을 특
광 집
장 둘러보고 오후 네시쯤 환어하였다.…(중략)… -
Ⅴ. 서구 열강과 청·일의 대한제국 승인 대
십이일 오전 두시 다시 위의를 갖추어 황단에 가서 하느님께 제사하고 황제위 한
대한제국 선포에 대한 열강의 초기 반응은 어떠했나. 각국은 내키지 않는 민

에 나아감을 고했다. 황제는 오전 네시반에 환어했다. 동일 정오 십이시에 만조백
다는 태도였다. 일본 측은 언론 등을 통해 조롱하였고, 프랑스나 러시아 등에 의

관이 예복을 갖추고 경운궁에 나아가 대황제폐하께와 황태후폐하께와, 황태자전하
서는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의 선포를 동전 한 닢 만큼도 못하게 여긴 원

께와 황태비전하께 크게 하례를 올리니 백관이 즐거워들 하더라(《독립신문》, 광무


다”는 등 냉소적 언급도 보였다. 이처럼 각국의 태도는 환영하는 모습이 아니
원년 10월 14일자, 논설).
었다. 이유가 있었다.
고종의 황제즉위와 제국 선포에는 중국에 대한 과거의 사대 종속 관념을 탈
이상의 황제즉위식은 동서의 양식이 일부 혼합된 모습이었다. 한편으로는 피하자는 것 외에도 보다 현실적인 목표가 있었다. 우선, 청일전쟁 이후 더욱
만국공법 질서 하의 자주독립한 나라라는 근대적 의식,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 실추된 군주의 권위와 권력을 회복시키자는 뜻이 있었다. 다음으로 일본과 러
라의 정통을 우리 스스로가 이었다는 ‘주체적 중화의식’이 뒤섞여 있었다. 이 시아 등 모든 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나라의 자주권을 행사하자는 뜻도 은연
로써 취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한국사상 최초로 국제사회에 공인된 황제국이 중 표현되고 있었다. 이 점은 독립신문의 언론 계몽운동, 독립협회 활동, 독
탄생하게 되었다. 《독립신문》에서는 이렇게 보도했다. 립문 건립 과정 등에 잘 드러난다.
이중 독립문은 1896년 서재필 등의 발의로 건립이 추진되기 시작하여 대
광무 원년 시월 십이일은 조선사기에서 몇 만년을 지내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
한제국이 선포된 다음 달인 1897년 11월 하순에 완공되었다. 독립문의 건립
기획 특집_대한민국의 기원

1 결정에는 고종의 뜻이 반영되어 있었고, 거기에는 청국으로부터의 독립만이 안하여 세계의 추세를 따라 대한제국을 인정하고 새로이 한국과 관계를 조정
아니라 일본, 러시아 그리고 구주 열강 모두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하고 있 하자 하였다.
었다. 이런 견해 차이는 공친왕이 사망한 뒤 황실에서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
임으로써 조정되었다. 대한제국 선포 2년 뒤인 1899년 대한제국과 대청제국
우리는 오늘 국왕이 서대문 밖 영은문 터에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정했다는 사실 사이에 양국 황제의 이름으로 한청통상조약(韓淸通商條約 1899.8.17)이 체결
을 경하한다. …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되었다. 멀리는 한, 당, 송, 원, 명 이래, 가까이는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구주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The 고,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국에 굴욕적인 항복을 한 이래, 더 가까이는 조미
18 Independent》, 1896년 6월 20일, 논설). 수교·임오군란·갑신정변 등을 겪으면서 총독(總督)같은 행세를 하는 원세 19

개의 위세 하에 조선이 청국의 속방이라는 현실을 절감한 이래 처음이었다.


독립문은 청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룬 것을 상징하는 기념물일 뿐만 아니라 이 조약은 1882년 조선과 청국 간에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

현 일본과 러시아 등으로부터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자는 의미의 기념물이었다. 民水陸貿易章程 1882.10.4)’과 대조된다. 이 장정은 ‘조선은 청국의 번봉(藩 기
대 획
사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도 대외적으로는 독립문, 독립협회, 독립신 封)’으로 시작하는 내용으로 ‘종속관계(宗屬關係)의 문증(文證)’이라고도 평가 특
광 집
장 문 등의 취지와 맥락이 같았던 것이다. 되었다. 그에 비해 한청통상조약은 종래의 종속관계를 청산하여 한국과 중국 -

사정이 이러했으니 각국의 반응은 냉랭했다. 그러나 대한제국 선포 자체는 모두 상대국을 대등한 객체로 인정한 ‘권리장전’과 같았다. 원세개와 같은 20 한


각국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었고 명분도 없었다. 직접 이해가 작동하는 사안 대의 무장이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의 직함 의

도 아니었다. 결국 서구 각국과 일본은 내면의 태도는 각기 달랐지만, 공식적 을 띠고 실제로는 ‘감국대신’(監國大臣)으로 한반도 삼천리의 국정을 좌지우지 원

으로는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를 승인하고 축하하였다. 특히 프랑 했던 불과 5년 전 청일전쟁 이전의 상황을 돌아볼 때 극적 변화였다.
스와 러시아는 황제의 이름으로 고종에게 축하의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하였
고, 미국과 영국도 시간을 두고 소극적이나마 의사를 표하였다. Ⅵ. 맺음말 : 왕국과 민국을 이어준 가교
대한제국 선포에 충격을 받고 냉담했던 것은 청국이다. 고종이 황제즉위를 1897년 10월 12일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로 조선왕국은 사라졌
꾀한다는 소식을 접한 때부터 대한제국이 선포되기까지 청국 측은 매우 불쾌 다. 서양인들과 국내의 식자들은 ‘조용한 혁명’이자 의미심장하고도 기대에 부
하게 여겼다. 앞서 언급했듯이 청국 조정은 조선의 칭제건원 논의에 대해 ‘망 푼 변화라 하였다. 이후 대한제국은 황제체제에 준하는 의례 정비와 함께 각
령되이 스스로 높이려는 일(妄自尊大)’이라 하였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 종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으로 모든 것이 좌절되면서 외
도 한동안 승인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다. 황실 측에서는 청국의 속방 교권을 잃고, 끝내 주권을 강탈당했다. 불과 13년 만이었으니 한국사상 가장
이던 조선이 감히 제국을 칭하여 맞서려는 것이 괘씸하다는 반응이었다. 반 단명한 나라가 되었다. 대한제국은 분명 한국사 속의 한 나라였다. 국체와 정
면 조정의 대신들은 청국의 상인들이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실정 등을 감 체 면에서 대한민국과 구분되듯이, 조선왕국과도 구분을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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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처럼 차별성이 있지만, 국가사의 입장에서 볼 때 대한제국은 앞의 조선 참고문헌


왕국, 뒤의 대한민국과 연속선상에 위치한다. 중화체제하의 왕국에서 유엔체 광무개혁연구반(1992), <‘광무개혁’연구의 현황과 과제>, 《역사와 현실》 8호.

제하의 민국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는 두 단계 과정을 거쳤다. 하나는 대 권석봉(1984), <청일전쟁 이후의 한청관계연구 1894-1898>, 《청일전쟁을 전후한 한국과 열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제국의 등장,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다. 대한제국은 국가
김명섭(2011), <대한제국의 역사적 종점에 관한 재고찰>,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2집.
의 대외적 주권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내적으로 국민의 주권을 확립했다.
김종원(1966),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에 대하여>, 《역사학보》 32집.
전자는 국민, 영토, 주권의 국가 성립 요건을 구비하였지만, 후자는 해외에 김철수(1993), 《헌법학개론》, 박영사.

수립된 임시정부였다는 제약이 있다. 그러나 그런 역사적 경험이 1948년 대 송병기(1972), <소위 삼단에 대하여 -근대 한청관계사의 한 연구->, 《사학지》 6집.

20 신복룡 역(1979), 《Hulbert 대한제국사 서설》, 탐구당. 21


한민국을 출범시킨 정신사적 바탕이자, 국가의 전사(前史)였던 점에서 매우
이광린·신용하 편저(1984), 《사료로 본 한국문화사》, 일지사.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구용(1985), <대한제국의 성립과 열강의 반응>, 《강원사학》 1집.
대한제국 등장이 갖는 당대의 중요한 의미는 중국 중심의 책봉체제 탈피를 이민원(1988), <칭제논의의 전개와 대한제국의 성립>, 《청계사학》 5집.

국가 차원에서 선언하고 이를 실현한 점에 있다. 소중화 의식에 젖어 있던 대 ______(1989), <대한제국의 성립과정과 열강과의 관계>, 《한국사연구》 64호.
현 기
대 ______(1995), <대한제국의 성립과 ‘광무개혁’, 독립협회에 대한 연구 성과와 과제>, 《한국사론》 획
사 다수 전국의 유생과 일반에게 국가의 주권과 독립의식을 환기했다는 점도 그 특
광 25권. 집
장 러하다. 아울러 국권이 잠식되어 가는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안으로 군주에게 -
이양자(1999), <청의 간섭>,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39》, 국사편찬위원회. 대
권력을 집중하고, 밖으로 모든 나라로부터 자주권을 확립하자는 뜻을 선언한 한
전해종 외(1988), 《중국의 천하사상》, 민음사. 민
張啓雄(1991), <中華世界帝國與秩琉球王國的地位-中西國際秩序原理的衝突>, 《第三屆中琉歷史 국
데 의미가 있다. 독립문에 내포된 상징성과 맥락이 같다. 의
關係國際學術會議論文集》, 台北:中琉文化經濟協會. 기
비록 1910년 일제의 병탄에 의해 대한제국의 주권은 빼앗겼지만, 대한제국 원
張存武(1987), <十九世紀末韓國雙重外交體制的建立>,《第一回韓國學國際學術會議論文集》, 仁荷
국가 구성원 대부분과 영토는 한반도에 그대로 존재하였고, 해외에서는 독립
大學校 韓國學硏究所.
운동단체와 임시정부가 결성되어 대한의 혼과 정신을 이어갔다. 현재의 대한 黃枝連(1992, 1994, 1995), 《天朝禮治體系硏究》 (上)·(中)·(下), 中國人民大學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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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계승하였다는 점에서 한국사의 연속선상에 있다. 식민통치로 인한 국 1898)”, Korean Studies, Vol.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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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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