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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쳉

Eugenia Cheng

세상에서 수학 공포증을 몰아내는 것을 인생의 사명으로 삼는 순수 수학자. 셰


필드 대학교 명예 선임 연구원이자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스쿨의 전속 과학

자로 있으면서 예술 대학생들에게 수학을 통해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

카고 대학교, 니스 소피아 앙티폴리스 대학교에서 박사 후 과정을 거쳤다. <스


콘에 들어갈 크림의 완벽한 양을 재는 방정식>, <완벽한 크기의 피자를 만들기

위한 수학 공식> 등 범주론을 베이킹에 비유해 논문을 발표했다. 이렇게 수학


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독특한 시점들은 2007년 유튜브를 통해 대중들

에게 공개되었고, 이를 통해 대중 수학자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논리의 기술The Art of Logic』(2018)은 쳉의 세 번째 저서로, 수학적 논리

를 이용하여 복잡한 현시대를 해부함과 동시에 비이성적인 논쟁에 휘말리지 않

으면서 인간을 이해하는 법을 특유의 통찰력으로 보여준다. 그 외의 저서로는


『무한을 넘어서Beyond Infinity』(2018), 『파이 굽는 법How to Bake Pi 』

(2015), 『x+y』(2020) 등이 있다. 『무한을 넘어서』는 2017년 왕립 협회 과학

서적상 최종 후보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정치인•기업•신문 기사•소셜 미디어•편견•남녀 차
별•댓글 논쟁
뒤죽박죽 엉켜 있는 인간사에서 사실은 쉽게 왜곡
되고 진실은 무의미해진다

우리는 더 명료하게 사고해야 한다


표지 디자인
열린책들 김유진

비논리적인 인간 세상에서
반박 불가한 명쾌한 논증을 구축하기 위해
탐험하고, 발견하고, 이해해야 할 논리의 세계!
순수 수학자의 실용적이고 영감 가득한 지침서
THE ART OF LOGIC
by EUGENIA CHENG

Copyright (C) Eugenia Cheng, 2018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C) The Open Books Co., 2020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Profile Books Limited in association with
Andrew
Nurnberg Associates International Limited through EYA (Eric Yang Agency).
논리와 직관을 가르쳐 주신 부모님께 이 책을 바칩니다.
서문

사람들이 모두 사실과 허구,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서 더 명확하게 생각

한다면 좋지 않을까?
하지만 진실이 뭔데?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일이 늘

그렇게 단순하기만 할까? 단순한 적이 있기는 했나? 단순하다면 어째서


사람마다 의견이 그렇게 제각각일까? 단순하지 않다면 어떻게 애초에 의

견이 일치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끔찍한 논쟁, 갈등, 불화, 가짜 뉴스, 피해 의식, 착취, 편견,


편협한 생각, 비난, 고함 소리가 난무하고, 사람들의 주의 지속 시간도 짧

기 그지없다. 고양이 밈meme이 살인 사건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끌면

논리가 죽은 것인가? 보도의 정확성 같은 것은 따지지도 않고 헤드라인이

순식간에 사람들의 입을 타고 퍼져 나가는 상황에서 합리성을 따지는 것


은 쓸데없는 짓인가? 온갖 일이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쉼 없이 경쟁을

벌이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사회에 무언가 영향력을 미쳐 칭송을 받아

보려고, 혹은 우리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보려고 단순하고 극적인

발언을 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하지만 지나친 단순화는 우리를 흑백 논리로 내몬다. 실제로 흑과 백

사이에는 다양한 명도의 회색이 있고, 세상은 정말 다채로운 색상으로 채

워져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온갖 독설과 의견 충돌 그리고 공

격이 끝없이 난무하는 잡음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희망은 없는 것일까? 우리는 편을 가르고, 자기 목소리만 메아리

로 울려 퍼지는 방 안에 갇혀 두 번 다시는 의견 일치를 이룰 수 없는 운

명을 타고났을까?

그렇지 않다.

현대 사회의 비논리성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구


명 튜브가 있다. 그 구명 튜브는 바로 논리다. 하지만 구명 튜브란 것이

원래 그렇듯이 사용 방법을 잘 알고 있어야 도움이 되는 법이다. 그저 논

리만 이해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감정도 이해해야 하고, 논리와 감정 사

이의 상호 작용을 이해하는 일은 더더욱 중요하다. 그제야 우리는 실제

인간 세상에서 논리를 정말 생산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수학이란 분야는 논리의 기술을 세밀하게 갈고닦아 왔고, 수학을 연구

하는 사람인 나도 그 기반은 논리에 있다. 나는 우리가 수학의 기술과 통


찰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고 믿는다. 수학이란 엄격한 논증을 구축한 다음

그것을 활용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수학은 그저 수

와 방정식만 다루는 학문이 아니다. 수학은 무언가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

하는 이론이다. 수학은 논증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틀을 제공해 준다. 이


틀이 어찌나 성공적인지 수학에서는 어떤 결론이 도출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결론이 모두 맞는다고 생각한다.

수학은 수와 방정식만 다루는 학문이고, 수학은 수가 등장하는 곳이 아

니면 쓸모가 없다는 잘못된 믿음이 널리 펴져 있다. 게다가 수학의 핵심

은 삶의 다양한 상황을 방정식으로 바꾸어 수학으로 그 해답을 찾아내는

것이라는 그릇된 개념 때문에 이런 잘못된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


이 수학의 한 측면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수학의 본질이 무엇이고 수

학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너무 협소하고 제한적으로 바라보는 시

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 수학은 <순수 수학 >이다. 순수 수학은 소수의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기호로 가득한 분야로서 실제 세상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오직 일련의 중간 단계를 거쳐야만 실제 세상과 상호 작용할

수 있다.
우리는 수학에 대한 이 협소하고, 직선적이고, 불완전한 관점에서 벗어

나야만 수학을 훨씬 더 광범위하게 활용할 수 있다. 학교에서 접하는 수

학은 대부분 수와 방정식에 관한 것이겠지만 그보다 더 수준 높은 수학은

생각하는 법을 다룬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면 수학을 수와 관련된 분야만

이 아니라 인간 세상 전반에 적용할 수 있다.


수학은 우리가 더욱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돕지만 무엇을 생각할

지는 말해 주지 않는다. 나 역시 이 책에서 그런 부분을 이야기해 줄 수는

없다.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수학에서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다.

대부분의 논쟁에서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세계관에 따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지는 감각이 중요할 뿐이다. 사람들의 의견이 엇갈

리는 경우가 언제인지 살펴보면 한쪽 편이 옳고 다른 한쪽 편이 그르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른 근본적 신념에서 비롯된 각기 다른 관점 때문

인 경우가 많다.

수학과 논리의 개념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추상적인 것이

라고 느껴진다면 당신은 제대로 느낀 것이다. 수학과 논리는 현실과 동떨

어져 있는 데다 추상적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추상적인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 추상성 덕분에 수학과 논리를 폭넓은
영역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학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 역시

그 나름의 목적이 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면 중요한 원리에

초점을 맞추어 더욱 명쾌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 그

원리를 가지고 뒤죽박죽 엉켜 있는 인간사를 다시 검토해 보면 된다.

우리도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나중에 다시 살펴볼 것이다. 성차별, 인

종 차별, 특권, 괴롭힘, 가짜 뉴스 등등 사람들 사이에서 분열을 초래하는

논란 많고 복잡한 문제들을 여기에서 분석하고 조명해 보겠다. 논리가 이

런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어떤 틀에서 그런 논의를 이끌어


가야 할지는 명확히 밝혀 준다. 따라서 나는 이런 논쟁이 어떻게 귀결되

어야 하는지가 아니라, 애초에 이런 논쟁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에 대

해 말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나는 논리의 힘뿐만 아니라 그 한계도 보여 줄 것이다. 그래

야 우리는 그 힘을 효과적이면서도 책임감 있게 사용할 수 있다. 1부에서

는 논리를 이용해서 반박 불가한 명쾌한 논증을 구축함으로써 진리를 입

증하고 확립하는 방법을 검토해 볼 것이다. 2부에서는 논리가 어디서 붕

괴하여 더 이상 우리를 도울 수 없게 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모든 도구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논리를 사용할 때도 그 한계 너머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마지막 3부에서는 우리가 논리를 대신해서 해야 할 것이 무

엇인지 알아보겠다. 감정을 함께 끌어들이는 것도 중요하다. 감정은 우선

논리로 들어갈 길을 열기 위해서 중요하고, 그다음에는 그 논리를 타인에

게 전달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논리는 우리의 논증에 엄격함을 부여하지


만 감정은 그 논증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소위 탈진실posttruth1 세계에

서는 진실이 논리보다는 감정으로 평가받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니 마치

탈진실이라는 것이 합리성의 기준에서 좋지 않은 것처럼 들리지만 나는

감정이 논리와 충돌하지 않고 함께 손을 잡기만 한다면 꼭 나쁜 것은 아

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감정과 논리가 꼭 적이 될 필요는 없다. 논리는 추상적인 수학 세계에

서 완벽하게 작동하지만 삶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삶에는 인간이 등장

하고, 인간은 감정을 지닌 존재다. 복잡하게 뒤엉킨 우리의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는 감정을 이용해서 논리를 뒷받침하고, 논리를 이용해서 감정
을 이해해야 한다. 감정과 논리를 함께 사용하고 그 각각이 자체의 강점

을 활용하면서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명쾌하게


생각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소통하며, 인간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나는 확고하게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논리의 기


술이다.
1장

어째서 논리인가

이 세상은 아주 거대하고 복잡한 곳이다. 이곳을 이해하려면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어떤 것을 더 단순하게 만드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의 일부를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예전에는 이해 불가능해 보였던 것

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더 똑똑해지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이해의


과정에서 논리가 맡을 수 있고, 또 맡아야 할 역할에 대해 다룬다. 세상을

더욱 명확하게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 논리가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도 살


펴본다. 이 책은 논리가 세상을 비추는 빛에 관한 책이다.

논리에는 무언가를 단순화하는 두 가지 방법이 모두 들어 있다. 세부


사항을 잊어버리는 것은 추상화 과정에 해당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한 상황의 본질을 찾아내어 잠시 그 본질에 집중한다. 중요한 사항은 절

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부분을 잊어버리면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단순화 과정은 임


시적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밑거름이 되어 줄 핵심에 다가갔다고 생각해

야 한다.

이 장은 무언가를 이해하려 할 때 논리가 그 든든한 토대가 되어 주는

이유 그리고 비논리적인 인간 세상에서 논리가 맡을 수 있는 역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겠다.

진리에 접근하기

모든 연구 분야와 학문 분야는 결국 세상에 관한 진리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그 연구 대상은 지구일 수도 있고, 날씨, 우주 외곽, 새, 전기, 뇌,


혈액, 수천 년 전의 사람, 수, 혹은 다른 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을

연구하느냐에 따라 무엇이 진리인지 결정하는 데 필요한 방법도 달라질

것이고, 당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는 방법도 달라

질 것이다. 누구든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바를 주장할 수 있지만, 어

떤 식으로든 그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마련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 주장

을 믿지 않을 테고, 믿는다 해도 틀린 주장을 믿는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대상이 달라지면 그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과학적 진리는 과학적 방법론을 이용해 결론을 도출한다. 과학적 방법

론은 무언가가 옳을 가능성을 결정하는 데 사용되는 명확하게 정의된 틀

이다. 보통 이론을 만들고, 증거를 수집하고, 그런 증거를 바탕으로 이론

을 엄격하게 검증하는 과정이 동반된다.


수학적 진리는 논리로 접근한다. 우리는 여전히 감정을 이용해서 그 진

리를 느끼고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지만, 진리를 검증할 때는 논리만을

이용한다. 이 차이는 미묘하면서도 중요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는

감정을 써서 수학적 진리에 다가가는 셈이지만, 논리로 그것을 입증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참으로 치지 않는 것이다.

의견 충돌이 일어나면 자신의 주장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 <논리>라는


단어를 던질 때가 있다. <논리적으로 보면 이것은 참일 수밖에 없어> 혹

은 <논리적으로 그건 말이 안 돼!> 혹은 <한마디로 논리적이지가 않잖

아!> 등등. <수학적으로>라는 단어도 이런 식으로 자주 사용된다. 「수학

적으로 보면 그들은 선거에서 이길 수가 없어.」 안타깝게도 이런 식의 표

현은 무의미한 경우가 많다. 빈약한 논증을 어떻게든 떠받쳐 보려는 최후

의 발악일 때가 대부분이다. 남용 때문에 이런 단어들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슬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낙관주의자니까 여기서 무언가 희망

적인 것을 찾아보려 한다. 나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사람들이 논리와 수

학은 반박이 불가능하니까 이것을 이용하면 논란을 확실히 종결할 수 있


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느낀다. 논리와 수학이라는 이름이 비록

헛된 시도일망정 상대방의 주장을 꺾는 데 쓰인다면 적어도 어떤 면에서

는 사람들이 그것의 힘을 인정한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나는 사람들이 논리와 수학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그저 한탄만 하기

보다는 언젠가는 그 힘을 좋은 목적에 활용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논리와 수학을 직접 다루어 보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도 바

로 그 때문이다.

논리를 사용하는 데 따르는 장점

진리를 평가하는 명확한 틀을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어

떤 주제를 두고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라면 덮어놓

고 반대하기로 작정한 듯한 세상에서 합의를 이끌어 낸다는 것은 너무 요

원한 일처럼 보인다. 스포츠 경기만 봐도 주심은 그저 합의된 규칙을 적

용했을 뿐인데 팬들은 주심이 내린 판단에 불같이 화를 낸다.

어느 해에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조정 경기를 관람


했던 기억이 난다. 보트들이 위험하게 충돌하자 케임브리지 조정 팀이 페

널티를 받았다. 케임브리지 학생이었던 나는 화가 났다. 내가 보기에는

옥스퍼드가 의도적으로 방향을 틀어서 들어온 것이니 분명 옥스퍼드의

잘못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주심이 옥스퍼드와 짜고 편파 판정을 내렸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음모론을 제기하며 욕하는 대신 대체 무

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이해하기 위해 전문가들의 해설을 찾아보았다. 그

리고 템스강을 따라 경주를 펼치는 동안에는 강 한가운데로 가상의 선이

그려지고, 각각의 보트는 자기 쪽 구역에서 우선권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

게 됐다. 이는 한쪽 팀의 보트가 굽이를 돌거나 할 때는 많은 공간을 남겨

두어 상대편 보트가 선을 넘어오도록 <유혹>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 유

혹에 넘어가 상대방 보트가 선을 넘으면 우선권이 있는 보트는 자기가 페


널티를 받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선을 넘어온 배 쪽으로 고의로 방향

을 틀어 충돌할 수 있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옳은가? 이것은 정말 누구의

잘못일까? 비난과 책임의 문제에 대해서는 5장에서 검토하겠다.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명확한 틀이라는 이런 개념은 의학적

진단을 내리는 방식과도 조금 닮았다. 의학 전문가들은 진단이 모호해지

지 않도록 그리고 의학 전문가라면 누가 진단하더라도 일관성 있는 진단

이 나오도록 정확한 체크 리스트를 만들려고 한다.

논리 역시 명확한 규칙을 마련해서 어떤 이가 결론을 내리더라도 모호

함 없이 일관된 결론이 나오게 한다는 개념을 가진다. 이론적으로는 아주

멋진 이야기다.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이론적으로>는 수학의 추상 세계

를 의미할 것이다. 수학은 진보를 일구어 내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철학

자 마이클 더밋 Michael Dummett은 『 수학의 철학 The Philosophy

of Mathematics』이라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수학은 꾸준히 진보를 거듭하는 반면, 철학은 시작부터 마


주했던 문제들도 해결하지 못한 채 끝없는 좌절 속에 허우
적거린다.

어째서 수학자들은 무엇이 진리인가를 두고 합의에 이를 수 있을까? 그

리고 왜 그것이 수천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진리로 남는 것일까? 다른

학문 분야에서는 자신의 이론을 지속적으로 다듬고 업데이트해야 하는데


말이다. 나는 그 해답이 논리의 강력함에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논리의 커다란 장점이다.

논리 세계에도 몇 가지 단점이 있다. 그중 하나는 그저 목소리만 크다

고 논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당신이 목소리를 키워

서 논쟁에서 이기려고 할 때만 단점으로 작용한다. 나는 그러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논쟁을 벌인다. 그래서 그들

은 논리 세계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또

있다. 바로 논리 세계에서는 나처럼 체구가 조그맣고, 목소리도 작고, 멋


도 없는 사람을 상대로 쉽게 이길 수 없다는 점이다. 논리 세계에서는 힘

이 우람한 근육이나 두툼한 지갑, 혹은 운동 능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힘은 순수한 논리적 지능에서 나온다.

논리 세계의 또 다른 단점은 더 이상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있지 못한다

는 점이다. 논리 세계는 실체가 있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아

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속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

단 여기에 익숙해지고 나면 아주 좋은 느낌이 든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

이 최초로 우주 공간으로 나가면서 고민했던 것처럼 다시 현실 세계로 되

돌아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저 추상 세계에서 재미로 둥

둥 떠다니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땅 위로 돌아와

강력한 논리 기술을 이용해서 매듭처럼 얽힌 이 사회의 실질적이고 긴급

한 논쟁거리들을 풀어내 볼 것이다. 우리는 논리적 추상 세계에 접근함으

로써 현실 세계를 더욱 깊숙이 파고들게 된다는 사실을 밝혀 보이려 한


다. 하늘로 날아다니면 실제 생활에서도 더 멀리,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

는 것처럼 말이다. 본질적으로 보면 이것이야말로 수학의 핵심이다.

수학인 것 그리고 수학이 아닌 것

수학에 관한 오해가 많다. 아마도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방식 때문

에 이런 오해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 학교에서는 수학을 정답을 얻기 위

해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의 집합으로 가르친다. 학교 수학에서 구하는

정답은 보통 수다. 그리고 마침내 증명을 해야 하는 문제가 등장하는 경


우에도 기하학의 형태를 띨 때가 많다. 기하학에서의 <논리적 증명>은 이
상한 수학적 사실들을 이용해 다른 무의미한 결과를 증명하기 위해 구성

된다. 예를 들면 서로 교차하는 여러 개의 선이 있을 때 여기 있는 각도와


저기 있는 다른 각도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식이다.

그러고 나서는 자기 앞에 닥친 시험들을 치러야 한다. 시험에서는 임의


로 정한 제한 시간 안에 이런 무의미한 연습 문제들을 풀어야 한다. 이러

한 역경을 다 겪은 후에도 아직 자기가 수학을 좋아한다고 믿는 사람은


수학을 계속 공부하려고 대학에 들어간다. 하지만 대학에서도 이 모든 과

정이 똑같이 반복된다. 내용만 어려워질 뿐이다. 이런 일을 다 거치고 나


서도 여전히 수학이 좋다면 박사 과정에 들어가 연구를 할 수도 있다. 그

럼 마침내 이때부터는 비로소 수학이 내가 생각하는 수학의 본질과 닮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뛰어넘어야 할 일련의 뜀틀도 없고, <정답>을 구하려
고 낑낑댈 필요도 없다. 탐험하고, 발견하고, 이해해야 할 세계, 바로 논

리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일부 사람들은 자기가 그때까지 <수학>에서 좋아했던 부


분이 뜀틀을 뛰어넘으며 정답을 맞히는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들은 쉽

게 정답을 구하는 능력을 좋아했던 것이다. 일단 이렇게 수학을 탐험하는


세계에 발을 들이면 이런 사람들은 도망가 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학교에서 수학을 배우며 안 좋은 경험을 하면서도 수학


에 대한 사랑을 놓치지 않는다. 결국에 가서 수학을 연구하는 길로 들어

서면 수학이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해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


다. 교육자 대니얼 핀켈 Daniel Finkel은 이것을 학교 수학 수업에 대비
해 맞는 예방 접종이라 한다. 나는 우리 엄마한테 그 예방 접종을 맞았다.
엄마는 수학에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음을 보여 주

었다. 어떤 사람들은 훌륭한 수학 선생님한테 예방 접종을 맞는다. 때로


는 한 선생님한테 딱 한 시간만 이야기를 들어도 예방 접종 효과를 본다.

그런 학생들은 그 수업 시간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고 또 그 수업 이후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수학은 제약이 없으며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추구하다 보면 매력적으로 다가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렇다면 연구를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이 <진짜 수학>은


대체 무엇일까? 수학이란 무엇일까? 수학은 <수에 대한 연구>라 생각하

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수학은 그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나는 시카고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대칭성을 가르치는 수업을 한 적이 있는데 한 꼬마 사

내아이가 수업이 끝나고 불평을 했다. 「수는 언제 나와요?」 그래서 나는


수학은 수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해 줬지만 그 아이는 이렇게 소리

질렀다. 「하지만 나는 수학이 수에 관한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과학적 발견의 규칙에는 실험, 증거, 재현 replicability 같은 것이 등

장한다. 하지만 수학적 발견의 규칙에는 이런 것들이 전혀 나오지 않는


다. 수학적 발견에는 논리적 증명이 따른다. 수학적 진리는 논증을 구축

함으로써 확립된다. 그게 전부다.


나는 수학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대상의 작동 방식에 관

한 연구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여느 낡은 대상의 작동 방식이 아니


라 논리적 대상의 작동 방식에 관한 연구이다. 그리고 이것은 논리적 대
상의 작동 방식에 관한 여느 낡은 연구가 아니다. 이것은 논리적 대상의
작동 방식에 관한 논리적 연구이다.

수학은 논리적 대상의 작동 방식을 논리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모든 연구 분야는 다음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1. 연구 대상

2. 그 대상을 연구하는 방법

이 둘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수학에서는 이 둘이 특별하게 순환적으


로 연관된다. 일반적으로는 무엇을 연구 대상으로 삼느냐에 따라 그 대상

을 연구할 방법이 결정된다. 하지만 수학에서는 대상을 연구하는 방식이


우리가 연구할 대상을 결정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론은 논리

다. 따라서 우리는 논리의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그 어떤 대상도 연구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체 어떤 것이 그런 대상에 해당할까? 이것이 이 책의 1

부에서 다룰 주제다.

규칙

게임이나 스포츠에는 저마다 누가 1등인지 논란 없이 확실하게 결정하


는 규칙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무 자르듯 분명한 규칙을 편하게 느낀

다. 예를 들면 결승선을 제일 먼저 통과한 사람, 제일 높은 가로대를 떨어


뜨리지 않고 뛰어넘은 사람 하는 식으로 말이다. 체조나 다이빙 같은 스
포츠 종목은 규칙이 더 복잡해 보인다. 이처럼 특정 기준에 따른 판단이

필요한 경우에는 혼란스럽고 모호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따라서 이 기


준은 인간의 주관적 판단을 배제하도록 헷갈리지 않게 명확히 설정되어

야 한다. 하지만 이 기준에 애매한 부분이 조금도 없다면 채점하는 심판


들끼리 의견이 엇갈릴 일도 없고, 애초에 심판단 자체가 필요하지도 않았
을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판단 기준이 분명해 보이는 스포츠 종목에도 온갖 규


칙이 따른다. 100미터 달리기나 높이뛰기 같은 종목도 자세히 들여다보

면 부정 출발과 금지 약물에 관한 규칙이나 여성 선수로 출전할 수 있는


자격, 신체 건강한 선수로 출전할 수 있는 자격에 관한 규칙 등이 존재한

다.
논리의 한 가지 문제점은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논리의 규칙도 거기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 아니고는 혼란스러워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내 경우에


는 미식축구의 규칙이 아주 헷갈린다. 미국 사람들은 내가 영국 사람이라

일반 축구에 익숙해서 그럴 거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사실 나는


일반 축구의 규칙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다. 발로 공을 굴리는 운동이라

는 것은 알겠지만 내가 이해하는 부분은 딱 거기까지다.


우리는 스포츠에 직접 참여하려면 그전에 그 규칙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논리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그전에 논리의 규칙을 익혀


야 한다. 그리고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논리도 앞으로 나아갈수록 우리는

그 규칙과 온갖 미묘한 부분까지 더욱 심도 깊게 이해해야만 한다. 노력


이 필요한 일이지만 논리의 밑바탕이 되는 원리를 더욱 깊이 깨칠수록 우

리도 더욱 훌륭하고 생산적인 논쟁을 벌일 수 있다.

논증을 위한 이론
인터넷을 보면 결함 있는 논증이 끝없이 넘쳐 난다. 비전문가들이 기후

과학이나 백신 등 전문가들이 합의한 내용을 엘리트 계층의 음모로 치부


해 버리는 경향이 점차 커지고 있어서 걱정스럽다. 그저 무언가에 대해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고 해서 거기에 음모가 숨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로저 페더러가 2017년 윔블던 대회 우승자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인정하

는 사실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


이 거기에 어떤 음모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의 의미는 윔블던 대

회에서 우승하는 법에 관해 아주 명확한 규칙이 존재하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그가 경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가 실제로 규칙에 따라 우승

한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과학과 수학의 문제점은 규칙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비전문가의 입장에서는 그 규칙을 정확히 따랐는지 입증하기가 더 어렵

다는 데 있다. 하지만 이런 이해 부족은 좀 더 기본적인 수준과 맞닿아 있


다. 바로 <이론>이라는 단어를 서로 다르게 사용한다는 점이다. 어떤 경

우에는 <이론>이 그저 무언가에 대해 누군가 제안한 설명을 가리킨다. 반


면 과학에서의 <이론>이란 명확한 틀에 따라 엄격하게 검증되었기 때문

에 옳을 가능성이 통계적으로 높다고 여겨지는 설명을 뜻한다(좀 더 정확


하게 이야기하면 설명이 옳지 않은데도 그런 결과가 일어날 가능성이 통
계적으로 낮다고 여겨지는 설명을 의미한다).

하지만 수학에서 <이론>이란 논리에 따라 참임이 증명된 일련의 결과


를 말한다. 여기서는 확률이 관여하지도, 증거가 필요하지도 않고, 의심
의 여지도 없다. 이 이론으로 우리 주변 세상의 모형을 어떻게 만들 수 있

느냐고 물을 때는 의심이나 의문이 등장하겠지만, 그 안에서 참인 결과는


논리적으로 반드시 참이어야 하고, 수학자들은 이 점에 모두 동의한다.

여기에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증명 속에서 오류를 찾아내야 한


다. 그저 목소리만 높인다고 그런 의심을 받아 줄 수는 없다.

수학자들이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참이 아닌지 놀라울 정도로 의견 일


치를 잘 본다는 점은 수학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아직 정답을 찾지 못한

미결 문제도 있긴 하지만, 2천 년 전에 나온 수학을 여전히 참으로 여기


고, 실제로 여전히 가르친다. 이것은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면서 계속 다듬

는 과학과 다른 점이다. 과연 2천 년 전 과학을 과학사 수업 시간 말고도


여전히 가르치고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 기본적인 이유는 수학에서 무언
가가 참임을 보이는 데 사용하는 틀은 논리적 증명이고, 이 틀은 모든 수

학자가 인정할 정도로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떤 음모가 도사리


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수학이 곧 삶은 아니라서 논리적 증명이 현실 세계에서 그리 잘
작동하지는 않는다. 현실 세계에는 뚜렷하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부분들

이 수학의 세계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수학의 세계는 그런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것이지만 그런 실생활의 복잡하고 미묘한
측면들을 그냥 무시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우리가 무시하든
무시하지 않든 그런 측면들은 여전히 거기에 존재한다.

따라서 현실 세계에서 무언가를 입증하기 위해 사용되는 논증은 수학


적 증명처럼 명확하지 않고,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의견을 엇갈리게 하는
한 가지 분명한 원인이다. 하지만 논증이 완전히 명백하지는 않다고 해도
수학적 증명과 확실히 공통점이 많을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논증을 두

고 어느 정도 의견이 엇갈리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진


짜 불확실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의견 충돌 중에는
피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리고 논리를 이용함으로써 그것을 피할 수 있
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초점을 맞출 부분이다.

수학적 증명은 보통 일상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일반적인 논증에 비해


훨씬 길고 복잡하다. 일상생활에서 논증을 제시할 때 한 가지 문제점은
상황이 급하게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서 복잡한 논증을 구축할 시간이 없
다는 데 있다. 그리고 설사 시간이 충분하다 해도 사람들의 주의 지속 시
간은 악명 높을 정도로 짧다. 단칼에 요점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 논증

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반면 수학에서는 증명 하나가 10쪽에 이를 정도로 장황하게 펼쳐지고,
증명을 구성하는 데 1년이 걸리기도 한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쓰는 동안
작업하고 있는 증명 하나는 기획을 시작한 지 벌써 11년이 지났고, 분량
도 내 공책으로 200쪽을 훌쩍 넘겼다. 수학자이다 보니 나는 길고 복잡한
증명을 기획하는 데 아주 잘 훈련되어 있다.
200쪽짜리 논증이라면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논증으로는 너무 긴 것이

거의 확실하다(물론 법원 판결에서는 논증이 이렇게 긴 경우가 그리 드물


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트위터의 280자는 너무 짧다. 일상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기란 간단하지 않아서 한두 문장으로 구성된 논증으로, 혹은 단순
하게 직관을 이용해서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나는 복잡

한 논증을 구성하고, 소통하고, 이를 따르는 능력은 지능이 있는 이성적


인간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능력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수학적 증명을 하
는 것은 운동선수가 기압이 낮은 높은 고도에서 훈련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훈련을 받고 정상적인 기압으로 돌아가면 훨씬 운동이 편하게 느

껴진다. 하지만 여기서는 육체적으로 몸은 단련하는 대신 논리적으로 정


신을 단련한다. 그리고 이런 훈련은 추상 세계에서 일어난다.

추상 세계

현실 세계의 존재들은 논리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고, 당


신도 그렇다. 내 컴퓨터도 확실히 그렇다. 아이에게 쿠키를 하나 주고, 또
거기에 하나 더 주면 아이에게는 쿠키가 몇 개 있을까?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미 배 속으로 들어갔을 테니까 말이다.

수학에서 상황에 대한 세부 사항을 일부분 잊어버리는 이유도 이 때문


이다. 그래야 논리가 완벽하게 작동하는 곳에 닿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는 <쿠키 하나에 하나 더>를 생각하는 대신 <쿠키>라는 측면은 잊어버리
고 <1 더하기 1>에 대해 생각한다. 그럼 쿠키가 논리에 따라 행동하는 측

면이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측면이 무엇인지만 조심하면 1 더하기 1에서


나온 결과를 쿠키에 적용할 수 있다.
논리는 세심한 추론을 통해 논증을 구성하는 과정이다. 일상의 삶에 이
것을 시도해 보면 다양한 결과가 나온다. 일상적인 생활 속의 것들은 논

리적인 정도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일상의 삶 속에 존재하는 것 중에 전


적으로 논리적인 것은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 완전히 논리적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때로는 감정 때문인 경우도 있
고, 때로는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너무 많아서, 때로는 빠진 데이터가 너

무 많아서, 때로는 무작위적인 요소가 끼어들어서 그런 경우도 있다.


따라서 어떤 대상을 논리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논리적
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막는 짜증 나는 세부 사항들은 잊어야 한다. 아이
와 쿠키의 경우 아이들이 쿠키를 먹게 내버려 두면 전체적인 상황이 완전
히 논리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따라서 아이들이 쿠키를 먹을 수 없다는

조건을 부여해야 한다. 그럼 이 대상은 별개의 덩어리로 분리된 것이기만


하면 꼭 쿠키가 아니어도, 먹지 못하는 그 어떤 것이어도 상관이 없다. 이
것은 다른 구분 가능한 특성이 없는 그저 <대상>에 불과해진다. 이것이
바로 1이라는 수의 정체다. 1은 명확하게 구분 가능한 <대상>이라는 개념

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사물의 현실 세계에서 개념의 추상 세계로 넘어왔
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추상 세계의 장점
추상 세계로 옮겨 왔을 때의 장점은 이제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논리적
으로 행동한다는 점이다. 추상 세계에서는 똑같은 조건 아래 1과 1을 반

복해서 더해 보면 항상 2라는 결과가 나온다(조건을 바꾸면 다른 답을 얻


겠지만 그 새로운 조건 아래서도 정답은 항상 똑같은 값이다).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면서 무언가 다른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면 미친
짓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논리란(아니면 적어도 논리의 일부는)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면 똑같은 일이 일어나리라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


다. 그래서 내가 컴퓨터 때문에 돌아 버린다. 나는 매일 컴퓨터로 똑같은
일을 하는데 내 컴퓨터는 주기적으로 와이파이와 연결이 끊어진다. 내 컴
퓨터는 논리적이지 못하다.

추상의 강력한 점은 일부 세부 사항만 잊어버리면 서로 다른 다양한 상


황이 모두 똑같은 상황으로 변한다는 데 있다. 사과 하나에 사과 하나 더,
혹은 곰 한 마리에 곰 한 마리 더, 혹은 오페라 가수 한 명에 오페라 가수
한 명 더 같은 사례를 떠올릴 수 있는데 추상 세계에서는 이 모든 것이 <1

더하기 1>이 된다. 일단 서로 다른 사물들이 어떤 면에서는 똑같다는 것


을 발견하고 나면 그것들을 동시에 연구할 수 있고, 그러면 효율이 훨씬
더 높아진다. 즉 그것들이 모두 공통으로 갖고 있는 부분을 연구한 다음

에 그것들이 각각 어떻게 다른지만 살펴보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상황 사이에서 여러 상관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예기
치 못하게 발견할 때도 많다. 예를 들면 나는 바흐의 피아노 서곡과 머리
카락을 땋는 방법 사이에서 상관관계를 찾은 적이 있다. 서로 다른 상황

사이에서 상관관계를 찾아내면 다른 관점에서 그것들을 이해하는 데 도


움이 되는데 근본적으로 이것은 또한 통합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는 차이
점을 강조할 수도 있고, 아니면 유사점을 강조할 수도 있다. 나는 수학에
서나 삶에서나 사물 간의 유사점을 찾아내는 일에 끌린다. 수학은 과학의
서로 다른 영역 사이에서 유사점을 찾아내는 데 사용하는 틀이며, 내 연

구 분야인 범주론은 수학의 서로 다른 영역 사이에서 유사점을 찾아내는


틀이다. 상관관계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6장
에서 살펴보겠다.
사물 간의 유사점을 찾으려 할 때는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엮고 있는 심

층의 구조에 닿기까지 그 겉을 층층이 둘러싸고 있는 세부 사항을 하나하


나 걷어 내야 할 때가 많다. 우리 인간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비슷해
보이지 않지만 뼈대만 남겨 놓고 보면 아주 비슷해 보이는 것과 유사한
이치다. 논증에서 겉을 둘러싸고 있는 층을 걷어 내거나 잔가지를 쳐내고

그 본질만 남겨 놓으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


고, 특히나 우리가 서로 의견이 엇갈리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추상 세계에서 특히나 유용한 특성은 당신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무엇이든 바로 그 자리에 존재하게 된다는 점이다. 당신에게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그것을 가지고 놀고 싶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놀 수
있다. 어디 가서 그것을 사올 필요가 없다(혹은 그것을 사게 돈을 달라고
부모님을 조를 필요도, 연구 장학금을 달라고 구걸할 필요도 없다). 저녁

식사도 내가 생각하자마자 바로 <짠> 하고 나타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하지만 저녁 식사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없다. 더 진지하게 들
어가면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대한 개념을 두고 사고 실험을 해볼 수 있
다는 의미다. 그럼 그런 개념을 얻기 위해 비현실적인 실험을 실제로 해

보지 않아도 논리적 함축을 따라가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해 보기


만 하면 된다.

추상 세계에는 어떻게 갈까

논리적 사고로 나가는 첫 단계는 추상과 논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다. 일상생활에서는 자기 주변의 세상에 대해 논리적으로 생각하겠다고
대놓고 그곳까지 갈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상황에
서 논리를 찾아내려 애쓸 때면 그 과정은 어김없이 그곳에서 작동한다.

런던 지하철에 최근에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됐다. 지하철 승강장 문이


열리는 자리에 초록색 표시를 칠해 놓은 것이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승객
들에게는 초록색 표시 바깥에서 기다려 달라는 안내가 나간다. 그래야 지
하철에서 내리는 승객들이 지하철에 타는 승객들에게 막히지 않고 내릴
공간이 생기니까 말이다. 이 시스템의 목적은 특히나 러시아워에 사람들
이 이동하는 흐름을 개선하고 끔찍한 혼잡을 줄이자는 데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 아이디어였는데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하던 이들
중 일부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아하니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통근하면서 지하철 문을 자세히 관찰한 결과 그 문이 어디서 열


릴지 알아 두었던 것 같다. 그 덕에 <경쟁상의 우위>를 점하게 됐는데 이
런 표시 때문에 그런 우위가 무의미해지자 화가 났던 것이다. 이제는 런
던에 처음 와본 여행객들도 지하철에 먼저 올라탈 기회를 잡게 되는 바람
에 이들은 짜증이 났다.

이런 불만은 결국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지만 나는 그 덕에 소수 집


단 우대 정책이 안고 있는 곤란한 측면 중 하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흥미
로운 통찰을 얻게 되었다. 사회적 혜택에서 소외된 사람에게 특정한 도움
을 주면 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들 중에는 자기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

다고 느끼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만 그런 도움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유로 화를 냈던 통
근자들처럼 이들도 자기가 애써 노력해서 얻은 <경쟁상의 우위>를 잃었
다며 짜증을 낼 만하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신의 노력을 통해

그것을 얻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을 수학적 사례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식으로 비유하
는 것이 수학적 사고의 본질이다. 수학적 사고를 할 때는 한 상황을 명확
하게 정리하고 다른 상황과 연관 짓기 위해 그 상황에서 중요한 특성에만
초점을 맞춘다. 사실 수학 전체를 비유의 이론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책 전반에서 우리는 비유를 이용해 겉보기에는 상관없어 보이는 상황들
사이에서 그네 타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13장에 가서는 비유의 역할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겠다. 비유를 찾아낼 때는 현재 고려하는 부분

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세부 사항을 걷어 내고 핵심부에서 그 상


황을 굴러가게 하는 개념을 찾아내야 한다. 이것이 추상화 과정이다. 이
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논리를 더욱 쉽고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추
상 세계로 들어가 그 상황에 담겨 있는 논리를 검토할 수 있다.

이 추상화를 잘 수행하려면 그 안에 내재한 속성과 우연히 나타난 속성


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논리적 설명은 일련의 사건, 혹은 개인적 판단이
나 취향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가진 변하지 않는 심오한 의미
로부터 나온다. 내재한 속성이라는 것은 주변 맥락에 의존하지 않고 그

속성만으로도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뒤에서 우리가 일상적


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항상 맥락에 의존한다는 점을 살펴볼 것이다. 똑같
은 단어라도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띨 수 있다. 일상 언어에서는 사람
들이 맥락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도 판단한다. 하
지만 논리적 설명은 이런 개인적 경험과 분리되어 독립적이어야 한다.

한 상황 속에서 내재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면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를 아주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즉각
적이고 피상적인 답변에 만족하지 않고 반복해서 <왜요?>라고 묻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처음부터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지가 명확해야 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논증은 대부분 사물이 실제로 가리키는 바를 풀어내는
문제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심오한 의미를 이
해해야 한다. 그래서 논증을 구축할 때는 결국 정의가 가장 중요해 보일

때가 많다. 만약 당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에 관한 논증을 만


든다고 해보자. 그럼 아마도 이 논증은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
지에 대한 논증으로 신속하게 변질될 것이다. 보통은 내가 실제로 존재한
다고 하는 정의를 고르는 편이 낫다. <아니, 나는 존재하지 않아>라고 말
하는 것보다는 이편이 더 쓸모 있는 답이니까 말이다.

논리와 삶
나는 이미 앞에서 실제로는 세상 그 무엇도 논리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주변 세상에서 논리를 어떻게 써먹을 수 있다는

말일까? 수학적인 논증과 정당화는 불분명한 구석 없이 강력하다. 하지만


이것을 이용해서 인간 세상에 대해 불확실성이 전혀 없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는 없다. 논리를 이용해서 실제 세상에 대한 논증을 구성해 볼 수는
있지만, 그 논증을 아무리 불분명한 구석 없이 구축한다고 해도 불확실한

개념에서 논증을 시작하면 그 결과에도 필연적으로 불확실성이 존재하게


된다. 집을 짓겠다고 극단적으로 안전한 건축 기법을 이용할 수는 있겠지
만 벽돌 자체가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져 있다면 결코 튼튼한 건물을 짓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수학적 논리를 이해하면 불분명함과 의견 충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은 의견 충돌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파악하는 데 도움
을 준다. 그리고 그 의견 충돌이 논리를 서로 다르게 사용해서 오는 것인

지, 아니면 기본 구성 요소 자체를 달리 사용해서 오는 것인지도 알 수 있


도록 돕는다. 만약 두 사람이 의료 보험에 대해 의견이 충돌한다면, 모든
사람이 의료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릴 수도 있고,
모든 사람에게 의료 보험을 제공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이냐를 두고 의

견이 엇갈릴 수도 있다. 이 두 의견 충돌은 유형 자체가 다르다.


만약 두 사람이 후자를 놓고 의견이 충돌한다면 의료 보험 체계를 평가
할 때 서로 다른 기준을 둔 것일 수 있다. 이런 기준의 예는 정부 부담 비
용, 개인 부담 비용, 보장 범위, 관리 결과 등으로 다양하다. 어떤 의료 보

험 체계에서는 평균 보험료가 상승하지만 더 많은 사람이 보험의 혜택을


누리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지만 그 기준을 바탕으
로 시스템을 서로 다르게 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개인이 부담하는 비용
을 평가할 때도 개인이 내는 보험료로 판단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치
료를 받은 후에 실제로 지불해야 하는 돈으로 판단하는 방법도 있다. 보

험료에 초점을 맞춘다고 해도 평균값, 중간값, 혹은 사회 극빈층의 부담


비용 등 그것을 평가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다.
두 사람이 문제 해결책을 놓고 의견이 충돌한다면 어떤 것을 해결책으
로 볼 것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을 해결책으로 볼 것

인지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그 해결책에 어떻게 도달할 것이냐를 두고 논


쟁을 벌일 수도 있다. 나는 논리를 이해하면 우선 의견이 충돌하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의견 충돌을 어떻게 정리할지 파악하

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이 책의 1부에서는 논증을 구축하는 원리로서 그리고 수학의 한 조각
으로서 논리가 무엇인지 검토하려고 한다. 2부에서는 논리의 한계가 무엇
인지 살펴보겠다. 그리고 3부에서는 이런 한계를 고려할 때 우리의 감정
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아보겠다.

세상을 비추는 논리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하는 목적은 세상을 비추어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논리를 지나치게 남용했다가는 자칫 그런 목적을 망각하고 도를

넘어설 위험이 있다. 그럼 현학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안타깝게


도 수학자와 극단적으로 논리적인 유형의 사람은 수학자가 아닌 이들이
나 덜 논리적인 이들로부터 현학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때가 많다. 여기서
나는 현학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위험과 자기 참조의 순환 논법에 빠질 위

험을 감수하고 현학적인 것과 정확한 것의 차이에 대해 밝혀 보려고 한


다. 나는 그 차이가 바로 세상을 비추어 깨달음을 주는지 여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현학이란 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요 이상으로 정확성을
따지는 것이라 특징짓고 싶다. 논증을 구축할 때 우선 정의부터 바로잡고

시작하는 것처럼, 정확성을 따지다 보면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해 주는 수


많은 척도가 존재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정확성을 따지는 것이 상황을 이
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현학이라 부르겠다.

따라서 자기 참조적인 이야기지만 내가 현학적인 것과 정확한 것을 구


분하는 방식 역시 그 자체로 현학이 아니라 정확성을 보여 주는 사례라
생각한다. 이것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현학적인 것과 정확한 것의 경계를 어디에 둘지는 사람마다 의견

이 다를 수 있다. 한 사람이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현학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정확성을 어디까지 추구
하고, 불분명함을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아이들은 세상에 대해 배울 때 언어의 불분명함에 대처하는 법을 몰라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다. 아직은 맥락을 이용해서 불분명함을 해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아직 미묘한 뉘앙스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
공을 키우지 못했다. 내 친구 하나가 자신의 어린 아들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아들이 봉지에 든 감자 칩을 먹다가 배가 부르다고 말했다. 그

래서 친구가 아들에게 <그럼 식탁 위에 그냥 놔둬>라고 말했더니 말 잘


듣는 아들이 봉지에 든 감자 칩을 식탁 위에 쏟았다고 한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 비유적인 말도 쉽게 알아듣게 되고, 생활을 꾸려
나가는 데 필요한 정확성을 따질 때도 좀 더 융통성이 생긴다. 이것은 사

물을 얼마나 정확하게 측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비슷하다. 나는 케이


크를 만들려고 설탕의 무게를 잴 때 10그램 정도는 틀려도 별 문제 없다
는 것을 안다. 하지만 마카롱을 구우려고 설탕 무게를 잴 때는 정량이 엄

청나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디지털 저울을 이용해서 최대한


정확하게 재려고 한다. 만약 누군가를 전신 마취 하기 위해 마취제의 용
량을 측정한다면 아주아주 정확해야 할 것이다. 사실 나도 무릎 수술을
받기 위해 전신 마취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마취과 의사가 내가 수학자
인 것을 알고는 예의 그 쾌활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와, 나 수학은
진짜 못하는데!」 수술을 앞두고 기운 나는 소리는 분명 아니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정확성을 두고 깐깐하게 굴 때가 더 많다는 사실

은 인정한다. 그래서 현학적이라는 비난도 받는다. 하지만 나는 내가 솔


직하게 그저 상황을 밝게 비추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

라 확신한다. 사실 나는 물리적으로도 밝은 빛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내


가 책상에서 쓰는 조명도 무척 밝은 편이고,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

는 햇살 밝은 날을 더 좋아한다. 사고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명

확한 것을 추구한다. 세상을 밝게 비추는 정확성을 얻으려면 더 오랜 시


간이 걸릴 때가 있다. 생각도 더 많이 해야 하고, 설명도 더 길어지고, 준

비 작업도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간결하고 강력한 한마디를 선

호하는 세상에서는 이런 장황한 설명이 용납되지 않는다. 무언가 진실된


것을 말하는 것보다는 영향력이 있는 한마디를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영향력을 줄이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보여


주고, 진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영향력을 미치는 방법이 분명 있을 것
이다. 그것이 바로 예측 불가능하고, 감정적이고, 아름다운 인간들의 이

복잡한 세상에서 논리를 이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나는 우리가 이해하려고 애쓰는 무언가를 비추기 위해 밝은 등을 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 등을 가까이 갖다 대면 밝아지긴 하겠지만 아주

좁은 영역만 밝혀 줄 것이다. 반대로 등을 위로 들어 올리면 더 넓은 범위


를 비추겠지만 그리 밝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 등을 너무 높이 들면

빛이 다 흩어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하지만 자기가 보고 싶은

것 위로 등을 바짝 들이대는 경우에도 보이는 것은 많지 않다.


논리와 추상은 사물에 등을 비추는 것과 같다. 추상적인 접근은 등을

높이 들어 올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럼 더 넓은 맥락을 볼 수 있지만 세부


적인 부분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넓은 맥락을 이해하고 나

면 나중에 세부 사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떤 경우든 목표는 일

종의 빛을 비추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빛이 필요하다. 그러고


나서야 그 빛을 어디에 어떻게 비출지 결정할 수 있다.
2장

논리란 무엇인가

초콜릿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까


초콜릿을 먹으면 나는 행복해진다. 이게 논리적일까?

무언가 불길한 것을 언급한 다음 나무를 만지면 기분이 나아진다. 항공

편으로 시카고에서 런던을 경유해서 맨체스터로 가면 그냥 같은 비행기


편으로 런던까지만 가고 더는 가지 않는 경우보다 더 싼 가격에 이동이

가능하다. 길거리에서 돈을 흘리면 아마도 누군가는 그 돈을 주워 갈 것


이다.

당신이 백인이라면 당신은 백인의 특권을 갖고 있다.


이런 진술들이 논리적일까?

<~이라면>이라는 해로울 것 없는 작은 표현 속에는 미묘하게 살짝 다

른 온갖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의미 중 전부는 아니라도 일부는 논증에서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를 압축하고 있다. 바로 논리적 함축이다.


논증은 당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실례를 통해 입증하거나 확인하는

방법이다. 실생활에서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할 방법이 여러 가지 존


재한다.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당신에

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멍청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당신이 옳음을 설득하는 방법으로는 그다지 좋지 못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단히 흔하게 쓰인다.


무엇이 진실인지 입증하는 과학적인 방법은 꼼꼼하게 증거를 수집하

고, 그것을 분석하며, 그런 다음 다른 사람도 똑같은 과정을 따르면서 재

현이 가능한 방식으로 그 전체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

해 당신이 틀렸음을 알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다.

수학은 과학의 핵심이면서도 과학과는 조금 다르다. 수학은 증거보다


는 논리를 이용한다. 수학은 무언가가 언제 진리인지 결정할 때도 논리를

사용하고, 무언가가 언제 틀렸는지 감지할 때도 논리를 사용한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과학에서 증거가 하는 일을 수학에서는 논리가 한다.

수학에서 논리가 하는 역할이 과학에서 증거가 하는 역할과 비슷하다


는 의미다. 하지만 논리와 증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증거와 달리 논리

는 무언가가 언제 진리여야 하는지 말할 때 인과관계도, 확률도, 관찰도

이용하지 않으며 그 대신 결코 변하지 않는 내재적인 무언가를 이용한다.

이 장에서는 논증을 구축하는 기본적인 방법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 함축을 활용하는 방법이다. 논리적 함축이란 하나의 참 진


술에서 또 다른 참 진술로 건너가는 방법을 가리킨다. 이것이 더 많은 참

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참인 것을 그전보다 더 많이 드러내 보

일 뿐이다. 논리적 함축은 논리를 이용해서 이것이 <참이면> 저것도 반드

시 <참이다>라고 말해 준다.

일상생활에서는 이것이 복잡해진다. 우리는 논리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도 <~이면 ~이다>라는 형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초콜릿을 먹으


면 행복해진다>라는 식으로 개인적 취향을 이야기할 때도 사용한다. <그

말 한 번만 더 하면 나 소리 지른다!>라는 식으로 협박할 때도 사용한다.

혹은 <나한테 비밀을 털어 놓으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라는 식으

로 약속을 할 때도 사용한다. <나 대신 개하고 산책을 해 주면 천 원을 줄

게>라는 식으로 합의를 할 때도 사용한다. <그 유리잔을 떨어뜨리면 박살

이 날 거야>라는 식으로 논리보다는 인과관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만 75

세 이상이라면 공항 보안을 통과할 때 신발을 벗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규칙을 표현하기도 한다. <네가 정말 나를 사랑했다면 그런 식으로 말하

지는 않았을 거야>라고 행동 규범에 관한 개인적인 의견을 표현하기도 한


다. 이것은 사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

니라고 생각해>라는 의미다. 또 다른 문제점은 우리가 <함축하다imply>

라는 단어를 일상 언어에서는 <암시하다insinuate>라는 뜻으로 쓴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지금 네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내가 멍청하다는

거지?> 같은 경우다. 이 장에서는 이런 사례들도 살펴보면서 이것과 진정

한 논리적 함축 사이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일상생활에서는 이런


차이가 조금 모호하지만 사례들을 들여다보면 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

을 것이다.

일상생활의 사례들

일상 언어는 수학적 언어보다 더 모호하고, 일상 언어에서는 <~이면 ~

이다 If~then~>가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따

라서 문장 안에 <~이면 ~이다>가 들어갔다고 해서 그것이 꼭 논리적 함

축이라는 뜻은 아니다.

형식적인 논리 언어와 비형식적인 실생활 언어 사이의 차이는 우리가

되풀이해서 마주하게 될 부분이다. 그 차이가 논리 세상과 실제 세상 양


쪽에서 많은 혼란을 일으키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일상 언어의 주요 목적

은 소통하는 데 있는 반면, 논리 언어의 주요 목적은 불분명함을 제거하

는 데 있다. 이 두 가지 목적이 상호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소통

할 때 최대한 모호하지 않게 말하려고 한다. 그리고 불분명함을 제거하려

할 때도 보통은 그 내용을 더욱 명확하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일상 언어는 맥락, 몸짓, 억양, 인간적인 이해 등등의 도움을 빌려 소통한

다. 논리 언어는 이런 것들로부터 득을 볼 부분이 없다. 논리 언어에서 <~

이면 ~이다>는 오직 한 가지 의미만을 갖는 반면, 일상생활에서는 이것의

의미가 상황마다 달라진다.

<~이면 ~이다>의 다양한 사용법이 완전히 다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비논리적 illogical(논리에 어긋나는)인 것도 아니다. 이


들은 논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다만 논리의 지배를 받지 않을 뿐이다. 우

리가 쓰는 언어에는 이런 것을 구분할 방법이 없어 보이는데, 그냥 <논리

적이지 않은 non-logical> 혹은 <무논리적alogical(논리를 벗어난)>이

라고 하면 될 것 같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시 지적할 부분이 있다.

비논리적이지 않으면서도 무논리적일 수 있으며, 비논리적인 것은 바람

직하지 않은 반면, 무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한 부분이고 때로는 득이 되거

나 대단히 중요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논리적 함축이 아닌 것에 대한 이야기는 이만하기로 하자. 그럼 논리적

인 것에 해당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당신이 백인의 특권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특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 함축이다. 내재적인 정의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백인의 특권은 특권의 한 구체적인 형태다. 다음의 문장은 이보다 더 논

란의 여지가 크다.

당신이 백인이라면 당신은 백인의 특권을 갖고 있다.

우리가 백인의 특권이 존재한다고 인정한다면, 내 생각에 이 문장은 논

리적이다. 이것을 참으로 유지하려면 그 맥락을 더 구체적으로 지정해 줄


필요가 있다.

당신이 유럽이나 미국에 사는 백인이라면

당신은 백인의 특권을 갖고 있다.

아니면 더 명확해지도록 이렇게 바꿔 본다.

당신이 백인의 특권이 존재하는 곳에 사는 백인이라면


당신은 백인의 특권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해체한 문장은 조금 무의미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정

확한 판단이다. 순수한 논리적 함축에 가까워질수록 그 진술은 점점 더

당연한 소리로 들리게 된다. 더 당연해 보이게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논증 속에서 논리를 찾아내는 목적이다.

어떤 사람은 마지막 진술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 진술은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백인의 특권이 자기한테는 해당되

지 않고, 부자인 백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기 때

문이다. 이들은 <백인의 특권>을 다르게 정의한다. 관계에 대해 다루는 6

장에서 모든 백인이 특권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일부 백

인은 다른 이유로 여전히 특권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


보겠다. 여기서는 언어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 언어는 아주 여러 가지 다

른 의미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반적인 일상 언어를 계속 사용한다면 완전한 논리를 추구하

는 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우리가 쓰는 단어들 자체가 완전히 논리

적으로 정의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분히 논리에 가까워질 수

는 있으므로 내가 보기에 이것을 논리적이지 못하다고 따지는 것은 논리

적 태도라기보다는 규칙에 너무 얽매이는 현학적 태도인 것 같다. 그럼

이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서로 다른 논증 속에 들어 있는 논리적 함축을


찾아보자.

사회 복지 제도
어떤 사람은 취약 계층의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사회 복지 제도를 확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예산을 아끼고 게으름이 조장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사회 복지 제도를 축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러한 양쪽의 주장에는 논리가 들어 있을까? 논리가 둘 중 어느 쪽 손을 들


어 줄까?

여기에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한 가지 방법은 이 논증들을 추상화해서


부정 오류와 긍정 오류라는 뼈대만 남기는 것이다. 이 경우 부정 오류는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도움을 못 받는 사람이 해당된다. 그리고 긍


정 오류는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도움을 받는 사람이 해당된다. 그

럼 다음의 함축이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


▪ 당신이 긍정 오류보다는 부정 오류를 더 염려하는 사람이라면
사회 복지 제도를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 당신이 부정 오류보다는 긍정 오류를 더 염려하는 사람이라면


사회 복지 제도를 축소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논증을 그냥 단순화한 것이지만 이런 단순화를 시행하는 과정

에서 두 입장 사이의 차이를 어느 정도 명확하게 알게 되고, 부정 오류를


더 염려하는 사람은 긍정 오류를 더 염려하는 사람과 의견이 절대 일치하

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핵심 원칙에 대해 누군가가 생각을 고쳐먹게 만드는 것이

다.
긍정 오류와 부정 오류는 사실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다른 많은 사례에

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경우 추상화는 논증을 명확하게


정리해 줄 뿐만 아니라 다른 논증과의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삶의 동기를 불어넣어 주는 이야기로 많이들 공유하는 <무언
가를 해보지 않아 그 결과를 모르는 것보다는 무언가를 해보고 실패하는

것이 후회할 가능성이 적다>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이 말은 우리에게 하


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하는 것(긍정 오류)이 했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부정 오류)보다 더 낫다고 독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나는 이렇게 한


탄하는 기도 문구를 더 좋아한다. 「우리는 했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
지 말았어야 할 일은 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는 부정 오류와 긍정 오류

가 모두 나온다.
이런 접근 방식은 내가 시차증에 대처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나는 정

신이 말똥말똥할 때 잠을 자는 것(부정 오류)보다는 피곤할 때 깨어 있는


것(긍정 오류)이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나에게 더 나은 시차
적응 방법은 여행에 앞서 잠을 부족하게 자는 것이다. 내가 목적지에 도

착했을 때 필요하면 깨어 있을 수 있고, 그럼 밤에는 너무 피곤해서 곤한


잠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사람은 긍정 오류에

그리 신통치 못하기 때문에 미리 잠을 푹 자두었다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더 많이 자는 편이 더 낫다. 이 논리적 함축은 다음과 같다.

▪ 피곤하지 않아도 잠에 드는 것보다 피곤해도 깨어 있는 것을

더 잘한다면 시간대를 가로지르기 전에 잠을 부족하게 자두


어야 한다.

▪ 피곤해도 깨어 있는 것보다 피곤하지 않아도 잠에 드는 것을


더 잘한다면 시간대를 가로지르기 전에 미리 잠을 잘 자두

어야 한다.

시차 적응 방법이 사회 복지 제도에 대한 논증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추상화가 가지는 강력한 측면 중 하
나다. 추상화는 겉으로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상황을 서로 연결해서 우리
뇌의 제한된 능력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해준다. 공리에 대해 다루는

11장에서는 추상화를 이용해서 우리의 밑바탕에 잠재되어 있는 개인적


신념을 더 많이 밝혀내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다.

논리와 발견

만약 한 진술이 순수한 논리로부터 따라 나온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참이 되어야 한다. 그 진술을 목소리 높여 말한다고 해서 새로운 정보가

추가되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통찰은 얻을 수 있다. 일상 언어에서 논


리적 함축이 조금 멍청한 소리로 들릴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각

적으로 나온 새로운 통찰이 지독할 정도로 당연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당신이 백인의 특권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특권을 갖고 있다>를 예로 들

어 보자. 이 진술에서 <당신은 특권을 갖고 있다>라는 부분은 자동적으로


참이 되어야 하는 논리적 결론이다. 이것은 그 어떤 새로운 정보도 보태

주지 않지만 똑같은 것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경우에는


서로 다른 유형의 특권에 대한 더욱 폭넓은 맥락이 그 새로운 관점에 해
당한다.

이렇듯 논리는 사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재


조명하는 역할을 한다. 어찌 보면 이것은 역사 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자

와 다를 것이 없다. 역사 유적은 이미 그 자리에 존재했다. 고고학자는 그


저 그 유적을 발굴해서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새로
운 통찰을 얻게 되지만 이것은 그저 우리가 그전에는 조금 무지했었기 때

문에 일어난 일이다. 만약 우리가 수백 년 전의 도자기나 건물의 토대를


발굴해 냈다고 해도 누군가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알

고 있던 사람이 죽은 지 오래됐을 뿐이다.


우리는 가끔 휴가를 내서 외국 여행을 갔다가 어느 뒷골목에서 아주 앙
증맞고 작은 카페를 <발견>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다른 누군가(그 카페 주인과 이미 그곳에 다니던 모


든 사람)는 그 카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새로운

카페다. 가끔 사람들은 자기가 놀라운 신인 가수를 <발견>했다고 생각하


지만, 알고 보면 신인 가수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만 유명하지

않았지,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두 곁눈질할 정도로 유명한 가수인 경


우도 있다.

논리적 결론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백인들이 자기가 <발견>했다고


생각하기 전에도 이미 아메리카 대륙은 항상 거기에 존재했었던 것과 마

찬가지로 논리적 결론은 사람이 알아차렸든, 못 알아차렸든 항상 참이었


다. <당신이 백인의 특권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특권을 갖고 있다>의 경

우 그 결론이 다소 뻔하지만 일련의 논리적 결론을 하나씩, 하나씩 이어


붙여 출발선으로부터 점점 더 먼 곳으로 나아가면 그에 따라 논리의 힘도

점점 더 강력해진다. 예를 들어 다음의 함축을 이어 붙일 수 있다.

1. 당신이 백인이라면 당신은 백인의 특권을 갖고 있다.


2. 당신이 백인의 특권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특권을 갖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백인이라면 당신은 특권을 갖고 있다>라는 함축

을 얻게 된다.
때로는 진실이 갑자기 드러난다. 마치 지루하게 삽으로 흙만 파고 있다

가 갑자기 삽 끝에 보물 상자가 걸리는 경우처럼 말이다. 때로는 점진적


으로 드러날 때도 있다. 종이 클립을 집으로 바꾼 놀라운 사람의 이야기

처럼 말이다.

작은 발걸음이 쌓이면
카일 맥도널드 Kyle MacDonald는 종이 클립을 집과 교환하는 엄청

난 과제에 도전해서 성공한, 인터넷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한 번에 교


환한 것은 아니지만 부당한 거래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과 일련의 교환

을 이어 가 결국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그가 처음에 교환을 시작한


종이 클립은 아주 큰 물건이었다(그리고 빨간색이었다). 사무실에서 흔히
보이는 평범한 종이 클립은 아니었다.

이게 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그는 기나긴 일련의 거래를 통


해 이를 해냈다. 각각의 단계에서 사람들은 교환하려는 물건 두 개의 가

치가 거래할 만큼 충분히 동등하다고 판단했지만, 결국 그는 그 과정에서


원래의 종이 클립으로부터 아주 먼 곳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종이 클립

물고기 모양의 펜

수제 조각 문 손잡이

캠핑용 버너

1천 와트 발전기

네온사인이 있는 맥주 통

스노 모빌

브리티시 컬 럼 비아주에 다녀올 수 있는 2인용 여행권

대형 수화물차

메탈웍스와의 음반 녹음 계약서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방 1년 전세

록 스타 앨리스 쿠퍼와 오후를 함께할 수 있는 이용권

전동 스노볼

코빈 번슨 영화의 배역 계약서

서스캐처원주 키플링에 있는 이층집

이런 거래들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 말고도 나를 사로잡은 질문이 하


나 있다. 왜 이 거래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의 거래가 공정하다고 생각
했을까. 맥도널드가 앨리스 쿠퍼와 오후를 함께할 수 있는 이용권을 스노
볼과 교환했을 때 온라인에서는 이미 그의 팔로어가 많이 생긴 상태였고,
이 거래에 실망한 사람들도 나타났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영화감독 코빈 번슨이 스노볼을


수집하니 그게 있으면 그와 성공적인 거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미리 계
산하지 않았을까?
마지막 거래는 키플링(인구 1천140명) 사람들이 자기네 마을 사람 중

에 영화에 출연한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일어났다. 그래서


그들은 맥도널드에게 그 마을에 있는 이층집을 내주었다. 듣자 하니 그와
그의 여자 친구는 2006년에 그 집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나를 매료한다. 인터넷이 모욕적인 언사

와 악플에 장악당하지 않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해준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매력을 느끼는 부분은 이 착시 현상의 정신
적 버전이다. 이런 착시 속에서는 별로 놀랍지 않은 작은 발걸음을 내딛
었을 뿐인데 결국은 출발점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놀라운 곳에 이르

게 된다. 논리의 작동 방식도 이렇다. 당신이 내딛는 각각의 단계는 논리


를 전적으로 따라야 한다. 즉 이 단계들은 어떤 정의를 풀어내는 것에 불
과하며, 다소 뻔하고 심지어는 시시해 보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단계를 연속으로 이어 붙이면 아주 새로워 보이는 어딘가에 다다를 수
있다. 출발점과 아주 멀리 떨어진 어떤 곳 말이다. 카일 맥도널드가 한 일

련의 거래를 보면 그는 정말 거래의 달인이었다. 논리적 함축을 길게 이


어 붙이는 것도 이런 달인의 경지에 오르게 해준다. 수학의 진전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뒤에서 나는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이성적인 사람이
갖추어야 할 필수 능력이라 주장할 것이다.

논리적 함축의 연쇄를 길게 구축해서 새로운 곳에 도달한다는 것이 논


리적 증명의 기본 개념이며, 수학에서도 논리적 증명은 이런 식으로 작동
한다. 실제의 삶은 수학이 아니지만 실생활에서도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
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논증을 만들어 내려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논증

속에 들어 있는 모든 단계는 논리적 함축이어야 한다.


길게 이어진 논리적 함축의 연쇄를 보여 주는 더 심각한 사례는 찰스
두히그 Charles Duhigg의 『습관의 힘The Power of Habit 』에 묘사된,
선천적 장애로 인해 고통받는 아기들에 관한 연구다. 선천적 장애는 엄마

의 영양실조에 의해 유발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임


신 기간 동안의 영양실조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영양이 결핍된
것이 문제였다. 장기적 영양실조는 영양 부족으로 일어난다. 영양 부족은
학교에서의 빈약한 과학 교육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빈약한 교육

은 수련 과정에서 과학적 배경 지식을 충분히 습득하지 못한 교사들에 의


해 야기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여기서 놀라운 결론이 나온다. 교
사들에게 높은 수준의 과학적 성취를 요구하면 결국에는 아기의 선천적
장애가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두히그가 적기를, 이 연구를 이끌었

던 이가 젊은 시절의 폴 오닐Paul H. O’Neill이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유명한 최고 경영 책임자가 되었다가 미국 재무 장관이 된 사람이다. 이
것은 평범한 삶 속에서 논리적 함축의 긴 연쇄를 멋지게 구축한 사례다.

함축의 형식
우리의 목표는 일상생활에서 더 나은 논리적 함축을 사용하려는 것이
지만 나는 이것이 수학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관해 조금 더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수학의 언어는 건조하고 형식적이다. 그래서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정이 안 가는 언어로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수학의


언어가 건조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모든 것을 애매하고 모호한 상태가
아닌, 분명하고 명확한 상태로 만드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상황을 더
간결하게 정리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럼 더 크고 복잡한 논증을 구축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옷가지를 집어넣고 진공청소기로 공기를 빨아들

여 작은 부피로 깔끔하게 포장해 주는 진공 포장 비닐봉지와 비슷하다.


<~이면 ~이다>를 <함축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따라서 <A면 B다>
라고 말하는 대신 <A는 B를 함축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수학자들은 <함
축한다>는 의미로 <⇒>라는 기호를 쓴다. 이 논리적 함축이 의미하는 바

는 A가 참일 때 B는 절대적으로 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A가 거짓


인 경우에는 이 함축으로부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예를 들어 <미국 시민인 것은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살 수 있음을 함축
한다>라는 진술은 누군가가 미국 시민이기만 하면 합법적으로 미국에서

살 수 있음을 말해 준다. 하지만 누군가가 미국 시민이 아닐 때 이 함축은


그 사람과 관련해서 그 무엇도 알려 주지 않는다. 그 사람은 합법적으로
미국에서 살 수도 있고(예를 들여 비자를 가지고 있거나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미국 시민이 아니

면 미국에 사는 것이 모두 불법이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 논리가 통하


지 않는다. 이 심각한 논리 오류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시 살펴보겠
다.
증명이란 기본적으로 일련의 논리적 함축을 이런 식으로 줄줄이 연결

해 놓은 것이다.

A⇒B
B⇒C

C⇒D

그럼 <A⇒D>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 이유는 A가 참이면 첫 번째


함축에 의해 B가 참이 되고, 다음에는 B가 참이면 두 번째 함축에 의해 C

가 참이 되고, 마지막으로 C가 참이라면 세 번째 함축에 의해 D가 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연쇄 효과는 A가 참이라면 (잠시 생각한
후에) D가 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잠시 생각한 후에>다. 연쇄적으로 이어진 함축

을 다룰 때에는 하나의 함축을 다룰 때에 비해 따라가는 데 더 높은 집중


력과 논리 구사 능력이 필요하다는 말인데, 사람들은 논쟁할 때 안타깝게
도 이런 능력이 결여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 기본적인 논리 구사 능력 이상의 수준이 되어야 따라갈 수 있는

더 긴 연쇄적 함축을 소개한다.

1. 당신이 여성은 열등하다고 말하면 그것은 여성을 모욕하는


것이다.
2. 당신이 <여성적이다>라는 말이 남성을 모욕하는 표현이라

생각한다면 당신은 여성이 열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3. 따라서 당신이 <여성적이다>라는 말이 남성을 모욕하는 표
현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여성을 모욕하는 것이다.

하나 더 살펴보자.

1. 당신이 괴롭힘을 당하는 소수 집단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당


신은 혐오자가 판을 치게 놔두는 것이다.

2. 당신이 혐오가 판을 치게 놔둔다면 당신은 혐오자와 공모하


는 것이다.
3. 당신이 무언가 나쁜 일에 공모한다면 당신은 그 나쁜 일만큼

이나 나쁜 사람이다.
4. 따라서 당신이 괴롭힘을 당하는 소수 집단을 지지하지 않는
다면 당신은 혐오자만큼이나 나쁜 사람이다.

당신이 소수 집단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이 결론은 참이지만, 당신이 소


수 집단을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함축 자체가 참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
하다. 내가 당신이 소수 집단의 강력한 지지자임을 모르고 당신에게 이렇
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괴롭힘을 당하는 소수 집단을 지지하지 않는다

면 당신 자체도 혐오자만큼이나 나쁜 사람입니다.」 당신이 개인적으로는


이런 편견과는 아예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내 진술 자체는 여전히
참이다. 이것은 논리적 함축이 가지는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특성이다. <
당신이 미국 시민이거나 영주권자라면 반드시 건강 보험에 들어야 합니

다>라는 진술은 당신이 실제로 미국 시민이나 영주권자든 아니든 상관없


이 참이다. 이 논리적 함축 자체는 누군가가 건강 보험에 들어야 할 사람
인지 여부를 말해 주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가 시민이거나 영주권자임을
이미 알고 있는 경우라면 그 사람이 건강 보험에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미국에 살든 살지 않든 세상 사람 누구나 미국 건강 보
험이 필요하다고 내게 말했던 보험 중개인에게는 이런 말이 통하지 않았
다).
논리적 함축을 이용해서 거대한 논증을 구축할 수 있는데 그 논증도 여
전히 이런 특성을 갖게 된다. 즉 앞에 나오는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만 결
론부 진술이 참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논증 자체는 우리에게
만약 앞에 나오는 조건이 충족된다면 결론부 진술이 참임을 말해 주며,

이 논증은 항상 옳다. 수학에서는 이런 정당화 과정이 바로 증명이다.


나는 논리적 함축의 연쇄를 길게 하나로 이어 붙이면 논리적인 힘을 갖
게 된다는 주장을 점진적으로 펼쳐 보일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카
일 맥도널드처럼 뻔한 것에서 시작해서 뻔하지 않은 복잡한 것을 향해 나
아갈 수 있다. 이런 복잡한 논증을 구축하고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

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은 사람의 뇌를 제대로 활용하는 데 대단히 중


요한 부분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단순한 동물이나 어린아이와
구분해 주는 속성이라 믿는다. 동물과 어린아이는 즉각적으로 필요한 것
이나 직접 관찰한 것만 상대할 수 있다. 길게 연쇄적으로 이어진 논리적

함축을 이해하려면 옷을 진공 포장 비닐봉지에 넣듯, 서로 연결된 수많은


개념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그것을 바탕으로 논리를 세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통찰과 더욱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증명은 어떤 모습일까
수학에서 증명을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 기초 작
업을 다져야 한다. 스포츠를 시작하기 전에 규칙을 먼저 정하듯이 말이
다. 여기에는 몇 가지 측면이 있는데 그 부분들을 고려해 보는 것이 이해
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많은 논쟁이 잘못 틀어
지는 이유는 논쟁 그 자체보다는 이 기초 작업에 문제가 있어서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생활에서 논쟁을 벌일 때는 한참 논쟁을 벌이다가 막바
지에 가서야 서로 다른 정의와 가정을 이용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1. 대화의 소재가 되는 개념을 신중하게 정의해야 한다.


2. 가정을 세울 때는 신중하게 진술해야 한다.

3. 증명하려고 하는 바를 모호하지 않도록 정확하고 신중하게


진술해야 한다.

수학에서 하는 가정( 假定 )은 실생활에서 하는 가정과는 조금 다르다. 수

학에서 세우는 가정은 우리가 어떤 조건 아래서 작업하기로 했는지, 혹은


어떤 조건 아래서 우리의 결과를 참이라 생각할지와 관련이 있다. 그러고
나서 결과를 적용할 때는 우리가 그 결과를 적용하려는 상황에 그 조건들

이 충족되고 있는지를 먼저 확인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구체의 표면 위에 살고 있다고 가정을 하고 그런 조
건 아래서는 무언가가 참인지 입증해 보일 수 있다. 우리가 실제로 구체
의 표면 위에 살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는
다. 그저 만약 우리가 구체의 표면 위에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이

런 일들이 참이 되리라는 것만 말해 줄 뿐이다.


실생활에서 하는 가정도 이와 비슷하게 작동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평균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돈벌이가
적은 이유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경우 가끔 사람들은 여성은 남성만큼 돈

벌이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일단 이런 가정을 세우고 나면


여성이 남성보다 돈벌이가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합리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이것은 가상의 세계에 불과하다. 그 결과를 실제 세상에
적용할 때는 우리가 세운 가정이 참인지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정말
여성은 남성만큼 돈벌이에 신경을 쓰지 않을까?

내가 사실은 이 논리적 함축을 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


하자. 설사 여성이 남성만큼 돈벌이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참이라
고 해도, 나는 같은 일을 하는데 여성에게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주는 것
이 합리적이라 보지 않는다. 그것은 착취다. 어쨌거나 우리의 가정이 무

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적어도 논증의 어떤 측면에 대해 우리가 동


의하는지 혹은 동의하지 않는지를 명확히 할 수 있다.
일단 기초 작업을 마치고 나면 실제 증명은 일련의 진술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각각의 진술은 이미 참임이 알려진 내용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뒤

따라 나온다. 참임이 알려진 내용은 가정일 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에 대해 알려진 진실일 수도, 혹은 증명에서 앞서 나왔던 진술일 수도 있
다. 이 일련의 진술이 출발점에서 종착지로 이어지는 논리의 연쇄를 만들
어 낸다. 여기서 출발점은 우리가 세우는 가정이고, 종착지는 우리가 증

명하려는 대상이다. 물론 이 연쇄가 가끔 붕괴하기도 한다. 특히나 일상


생활에서는 자주 그런다. 세상에 좋은 논증보다 나쁜 논증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런 실패는 크게 지식의 문제와 논리의 문제로 나뉜다.

지식의 문제
지식의 문제 때문에 논증이 붕괴되는 경우는 다음 중 하나일 수 있다.

▪ 가정을 진술하지 않은 경우, 혹은 진술된 가정을 부정확하게

사용하는 경우
▪ 정의가 부정확한 경우, 혹은 정의를 부정확하게 사용하는 경

진술되지 않은 가정을 이용하는 것은 당신이 무언가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는 한 가지 방법이다. 부정확한 정의를 사용하거나, 정의를
부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은 어려워야 할 논증을 더 쉽게 만드는 방법이다.
이것은 수많은 위증과 거짓 동치 논증2을 낳을 수 있다.
수학적 증명도 이런 식으로 틀어지지만, 실생활에서 벌어지는 논쟁도

이런 식으로 틀어질 때가 많다. 가정을 진술하지 않은 경우는 사회 보장


제도에 관한 논쟁에서 자주 나타난다. 사람들은 너무 게을러 일을 하지
않을 때에만 가난해진다고 은연중에 가정하는 경우가 그렇다. 혹은 낙태
에 관한 논쟁에서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사람만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다

고 가정하는 경우도 그렇다. 임상적 우울증에 관한 논쟁에서 우울증은 상


황에 의해 야기되므로 성공한 사람이 우울증에 걸릴 이유는 없다고 가정
하는 경우 또한 그렇다.

부정확한 정의의 문제는 이민을 둘러싼 논쟁에서 자주 발생한다. <이민


>을 모두 싸잡아 <불법 이민>이라 정의하는 경우가 그렇다. 일상생활에서
는 사실 아예 처음부터 정의를 하지 않고 논쟁을 하는 바람에 이런 문제
가 생길 때가 많다. 어떤 행동을 두고 <애국적>이냐 아니냐 논쟁을 벌일
때, 무언가가 <성차별>이냐 아니냐, 누군가가 <페미니스트>냐 아니냐, 무

언가가 <민주적>이냐 아니냐 등을 따질 때도 이런 일이 흔히 일어난다.

논리의 문제
증명에서 일어나는 논리의 문제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 논리 속 간극: 정당화 없이 한 진술에서 다음 진술로 뛰어넘는


경우, 혹은 그 사이에 있는 단계를 너무 많이 생략하는 경우
다.

▪ 부정확한 추론: 이것은 사실 부정확한 논리적 단계를 밟는 경


우다. 그럼 무언가로부터 다른 무언가가 유도된다고 말하지
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 얼버무리기: 논리를 진짜로 사용하지 않고 비유적으로 대충

얼버무려 옳다고 생각하게 만든 다음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다.
▪ 부정확한 논리: 논증에 부정확한 논리가 논리 오류로 미묘하
게 끼어들 수 있는 방법이 많다. 이 책의 2부에서 유명한 사

례들을 검토해 보겠다.

일상생활에서 얼버무리기는 논쟁을 벌이다가 목소리를 높이거나 모욕


적인 언사를 하면서 일어날 때가 많다. 누군가가 <머리가 반쪽만 남은 인

간이 봐도 이건 너무 뻔한 거지!>라는 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보통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그 내용을 어떻게 정당화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신호인 경
우가 많다.
부정확한 추론의 사례는 <과학자들이 서로 동의하고 있어. 이것은 뭔가

음모가 숨어 있다는 이야기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본 윔블던 대회 결과에 대한 반례처럼 이 결론(음모가 숨어 있다)
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서로 동의한다는 사실로부터 논리적으로 이끌어
낸 것이 아니다.
논리 속 간극을 보여 주는 사례는 무언가를 두고 한 사람을 비난하면서

다른 모든 요소를 무시해 버리는 경우다. 소위 스와팅swatting3의 비극


을 생각해 보자. 이럴 때는 거짓 신고를 받고 무장 출동한 경찰이 무고한
사람의 집 안으로 쳐들어가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럼 경찰에서는 장난으로 신고한 사람에게 모든 비난을 전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경찰 측에서 거의 아무런 증거나 이유도 없이 무고


한 사람을 쏘아 죽였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부정확한 논리를 이용하는 논증은 반박하기가 쉬워야겠지만, 그것도

당신이 논리를 잘 이해하고, 그 거짓 논리 뒤에 어떤 감정이 도사리고 있


는지 잘 이해하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 문제는 이 책 마지막 부분에
서 다시 살펴보겠다.

논리적 함축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이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 』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유명한 과학자가 우주론


에 대해 강연하는 것을 듣고 청중 한 사람이 그 과학자에게 가서는 이렇
게 말했다. 「당신이 한 말은 다 쓰레기요. 세상은 사실 거대한 거북이 등

위에 올라간 납작한 판이란 말이지.」 과학자가 그럼 그 거북이는 무엇을


밟고 서 있는 것이냐고 묻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거참 똑

똑한 양반이로구먼. 하지만 그 아래로도 온통 다 거북이란 말이지!」

우리가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거북이 대신 논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각각의 논증 단계를 무엇이 뒷받침하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 볼 필요

가 있다. 논리적 함축은 무언가를 다른 무언가로부터 연역하게 해줄 뿐이

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X면 Y다>는 X가 참일 때 Y가 참


임을 말해 줄 뿐이다. X가 참인지 아닌지는 전혀 말해 주지 않는다. X가

참임을 알기 위해서는 <W면 X다>처럼 X를 함축해 줄 무언가가 필요하


다. 하지만 W가 참이라는 것은 무엇이 확인해 줄까? V가 W를 함축해 줄
지도 모른다. 하지만 V는 무엇이 함축해 줄까?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대

체 어디란 말인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나는 이런 식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과

정이 자꾸만 <왜요?>라고 묻는 어린아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아이에

게 무언가를 대답해 줄 때마다 아이는 그 대답에 대해 계속 <왜요?>라고


묻는다. 아무래도 아이들은 무한한 호기심 그리고 똑같은 일을 끊임없이

반복할 수 있는 무한한 인내심을 갖고 있어서 계속 <왜요?>라는 질문을

이어 가는 것 같다. 어른이 짜증이 나서 멈추기 전에는 멈출 생각을 안 한


다. 개인적으로 나는 과학과 수학에 대해 시종일관 왜 그런 것이냐고 묻

다가 결국에는 추상 수학을 연구하게 됐다. 나는 아직도 <왜 그럴까?>라


고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세상에 책임져야 할 일도 있고

현실적인 문제도 생기기 때문에 <왜>라는 질문을 멈추고 무언가를 그대

로 받아들인 다음 일상생활을 이어 간다(뭐, 대부분은 그렇다). 우리는 우


리 모두가 여전히 내면에 무한한 호기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위키피디아가 그토록 인기를 끌고, 그토록 많은 사람이 위키피디아라는


웜홀로 빠져드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링

크를 클릭하며 더 많은 글을 읽고, 더 많은 것을 이해하려는 부류의 사람

들이 있다(나도 고양이 동영상 웜홀이라면 빠질 만큼 빠져 본 사람이다).

그럼 어디서 끝나는가
출발점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것은 결국 끝내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아는 문제로 귀결된다. 즉 <왜>라는 질문을 멈추고, 더

는 정당화하지 말아야 할 시점이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논리의

간극을 채우는 것을 멈춰야 할 때가 언제일까? 결국 우리는 때가 되면 위


키피디아의 링크를 그만 쫓고 다른 일을 하러 가야 한다. 결국 우리는 호

기심이 끝도 없는 아이에게 이제 그만 잘 시간이 되었다고, 혹은 학교에


갈 시간이 되었다고 말해 주어야 한다. 나더러 이렇게 <왜>라는 질문을

멈추고 일상으로 돌아갈 능력을 키우지 못한 사람을 상상해 보라면 먹지

도, 자지도, 돈을 벌지도 않고 끝없이 모든 것에 의문을 던지며 의미를 찾


아 나서는 고통에 빠진 철학가가 떠오른다. 나는 과연 존재하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어찌하여 세상에는 그토록 고

통이 많은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할까? 왜 사람


들은 서로를 아프게 할까? 할 일을 할 줄 아는 어른이 되려면 우리는 어느

시점에 가서는 이런 질문을 멈춰야 한다. 꼭 영원히 멈춰야 한다는 이야


기는 아니다. 적어도 일상의 어느 부분에서는 그래야 한다는 의미다.

논리에서도 우리는 어느 시점에 가서는 질문을 멈추고 일부 사실을 그

냥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어디에도 도달할 수가 없다. Y는 X가


함축하고, X는 W가 함축하고, W는 V가 함축한다는 식으로 계속 이어 갈

수도 있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기를 멈추고 이만하

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당신이 거슬러 올라가


기를 멈추는 곳이 당신이 더는 정당화하려 애쓰지 않을 기본 가정이나 믿
음이 있는 곳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그 시도를 영영 멈추리라거나, 다른

그 누구도 그 시도를 하지 않으리라는 뜻은 아니다. 그저 지금 당장은 이

것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고, 이것을 자신의 논리 체계, 혹은 신념 체계


의 밑바탕으로 삼겠다는 의미일 뿐이다.

논리학과 수학에서는 이것을 공리( 公理 )라고 한다. 공리에 대해서는 11

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논리에서는 출발점이 필요하다. 무언가가 있


어야만 그것으로부터 다른 무언가를 연역하기 때문이다. 무( 無 )로부터 무

언가를 연역할 수는 없다. 우리는 마술사가 아니다. 그리고 마술사라고

해도 실제로 무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들은 그저 우리


를 아주 성공적으로 속일 뿐이다. 만약 무로부터 무언가를 연역해 냈다고

주장하는 논리학자가 있다면 그 사람도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나는 내 신념 체계 안에서 공리, 혹은 출발점을 찾는 과정에서 나 자신

의 사고방식을 훨씬 분명하게 이해하게 됐다. 그 덕에 나는 다른 사람들

은 믿지 않는 나만의 기본 신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편견의 경


우, 나는 더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힘이 약한 사람을 향해 갖는 편견이

그 반대 방향의 편견보다 훨씬 더 해롭다는 근본적인 믿음이 있다. 이것


은 만약 내가 다른 누군가의 공리를 끝까지 추적해 들어가 그 공리가 나

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나는 우리가 논쟁의 출발점에서부터 이

미 의견이 엇갈렸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뒤로 이어지는 논쟁을 해소하려고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중요한 점은 논리를 완벽하게 적용한다고 해도 서로 다른 기본 신념에서


출발한다면 같은 사람이라도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따라
서 두 사람이 모두 논리적으로 완벽해도 무언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릴 수

있다.

논증에서 기본 출발점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일은 그 논증을 논리적으


로 분석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며, 의견 충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도 중

요하다. 논리는 모두 그 출발점에서 유도되어 나와야 한다. 다음 장에서

는 그 흐름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논리는 시간처럼 방향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 방향과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3장

논리의 방향성

기분이 좋으니까 초콜릿을 먹는 걸까


나는 초콜릿을 먹으면 바로 기분이 좋아진다. 고급 초콜릿이어야 하지

만, 먹을 때마다 백발백중 효과가 있다.

그런데 혹시 초콜릿을 먹어서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라 기분이 좋으니


까 초콜릿을 먹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완전히 다른 질문이다.

더 심오한 문제로 들어가 보자. 미국 시민이 된다는 것은 합법적으로


미국에 살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럼 합법적으로 미국에 살 수 있는 사람이

라면 필연적으로 미국 시민이란 의미가 될까? 이것 역시 완전히 다른 질


문이다. 합법적인 미국 거주자가 되는 방법은 미국 시민이 되는 것밖에

없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취업 비자나 영주권을 취득하거나

난민으로 인정받는 등 다른 방법도 많다.

시간과 인과는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논리도 그렇다. 방향을 혼동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앞 장에서 우리는 종이 클립에서 시작해 집 한 채로

끝난, 카일 맥도널드의 일련의 거래를 살펴보았다. 나는 가끔 이 거래가


거꾸로도 가능했을까 궁금해진다. 만약 맥도널드가 예를 들어 어떤 물건

을 스노볼과 교환했다가 생각이 바뀌어 거래를 무르고 싶어졌다면 원래

소유주가 그 물건을 다시 맞바꾸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앞 장에 나왔던 사례에서 나는 당신이 괴롭힘을 당하는 소수 집단을 지


지하지 않는다면 노골적인 혐오자만큼이나 나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거꾸로 뒤집으면 어떻게 될까? 당신이 노골적인 혐오자만큼이나

나쁜 사람이라면 당신이 괴롭힘을 당하는 소수 집단을 지지하지 않는다

는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괴롭힘 당하는 소수 집단을 지지하고 이로써

당신이 완전히 면죄되었다고 생각하더라도 혐오자만큼이나 <나쁜> 사람


이 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어쩌면 당신은 공개적으로는 그 사람들을

지지하면서 뒤로는 그들의 승진이나 임금 인상을 막고, 취업 과정에서 그

들을 떨어뜨리고, 그들을 위해 투표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요점은 이런 논리적 함축은 가능하지만,

괴롭힘 당하는 혐오자만큼이나



소수 집단을 지지하지 않는다. 나쁘다.

화살표 방향을 뒤집어서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혐오자만큼이나 괴롭힘 당하는



나쁘다. 소수 집단을 지지하지 않는다.
논리적 함축 기호 <⇒>가 화살표 모양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기호

는 논리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도록 채택된 모양이

다. 이 화살표를 거꾸로 뒤집으면 의미가 완전히 변할 수 있다. 앞 장에

나왔던 논리적인 특권 사례를 살펴보자. 원래의 형태는 다음과 같았다.

당신이 백인의 특권을 당신은 특권을



갖고 있다. 갖고 있다.

만약 화살표를 거꾸로 뒤집으면 이렇게 된다.

당신이 특권을 당신은 백인의 특권을



갖고 있다. 갖고 있다.

이것은 분명 참이 아니다. 백인이 아니라도 돈이 많거나 권력이 막강한

부모 밑에 태어나 누리는 특권을 비롯해 다른 유형의 특권이 많기 때문이

다.

그럼 이건 어떨까?

당신은 성차별을 경험한


당신은 여자다. ⇒
적이 있다.
위에 나온 문장은 <일상 속의 성차별 프로젝트Everyday Sexism

Project>4에서 내세우는 전제다. 모든 여성은 공공연한 것이 아니더라도

성차별을 경험한다는 말이다. 이런 성차별은 그냥 털어 버리고 넘어가야

할 미묘한 차별 micro-aggression5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런 형태의 성차별에 너무도 익숙해져서 더는 그것을 성차별이라 인식하

지도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슬프게도 우리가 그것을 삶의 일부로 당연

히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곧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

대로 그런 차별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제 화살표를 뒤집어 보자.

당신은 성차별을 경험한 ⇒ 당신은 여자다.


적이 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지만 안타깝게도 첫 번째 문제와 혼동될 때가

많다. 만약 당신이 <모든 여성은 성차별을 경험한다>라고 말하면 누군가

가(보통은 남성) 남성도 성차별을 경험한다고 항의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것은 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첫 번째 문제와는 논리

적으로 관련이 없다. 첫 번째 논리적 함축은 만약 당신이 여성이라면 성

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당신이 남성인 경우에 대해서는 아무

런 주장도 하지 않는다.6
이 모든 사례는 논리적 함축이 들어간 진술에서 화살표를 거꾸로 뒤집

으면 완전히 다른 진술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화살표를 거꾸로 뒤

집어서 만든 진술을 원래 진술의 <역(逆)converse>이라고 한다.

브로콜리와 아이스크림

내가 좋아하는 함축과 역의 사례 중 하나가 <브로콜리를 먹으면 아이스

크림을 먹을 수 있어>이다. 일상 언어로 표현하면 이것이 상당히 혼란스

럽게 느껴진다는 점은 미리 인정하겠다. 수학자들이 모든 것이 명확해지

도록 문자와 기호를 즐겨 사용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말로 풀어 보자.

말을 곧이곧대로 따지기 좋아하는 논리적인 아이가 브로콜리만큼은 정

말로 먹고 싶지 않다면 아이스크림을 함축하는 다른 음식은 무엇이 있는

지 묻기 시작할 것이다. 아이가 이렇게 나오면 어른들을 이것을 말꼬리

잡는 거라 생각해서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내가 지금 무슨

뜻으로 말하는 건지 알잖아!」 하지만 이 아이는 그저 모든 것을 명확하게

따져서 브로콜리를 먹지 않고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내려는 것뿐이다. (저

아이는 내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브로콜리를 좋아했다. 어쩌면 부모님이

브로콜리를 협박용으로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내가 브로콜리를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브로콜리를 좋아하니 부모님도 브

로콜리를 협박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아이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대신 생선을 먹으면 안 돼요?」 이에 대

한 부모님의 대답은 <안 돼, 브로콜리를 꼭 먹어야 돼!> 또는 <안 돼, 아이

스크림을 먹으려면 브로콜리를 먹을 필요가 있어>이다. 이것은 모두 역의

사례이지만 브로콜리 사례로는 그것을 파악하기가 좀 힘들다. 사실 이것

은 논리적 함축이라기보다는 브로콜리를 먹이기 위해 던진 미끼에 가깝

기 때문이다.

여기 부모님이 말한 두 가지 진술이 있다. 먼저 부모님은 이렇게 이야

기했다.

브로콜리를 먹으면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다.


(= 브로콜리를 먹으면 아이스크림을 먹기에 충분하다.)
브로콜리 ⇒ 아이스크림

이 말은 브로콜리가 아이스크림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보장

해 준다. 이것은 만약 아이가 브로콜리를 먹는다면 그것으로 아이스크림

을 획득하는 데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부모님은 이렇게 덧붙였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려면 브로콜리를 먹을 필요가 있다.


아이스크림 ⇒ 브로콜리
이 말은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얻을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부모에게 보장해 준다. 이것은 아이스크림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브로

콜리를 먹어야 하며 그것을 피할 길은 없음을 뜻한다. 이것은 첫 번째 진

술의 역이다. (이 화살표의 방향이 이상해 보인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라 생각할 수 있다. 「만약 나중에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그 아이가 분명 브로콜리를 먹었을 것이라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할 필요가 있다 only if>가 <~이면 충분하다 if>의 역


을 표현하는 방법임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역에서는 논리가 반대 방향으
로 흐른다. 아이와 부모에게 둘 다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으

로 다음과 같은 약속이 필요하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려면 브로콜리를 먹


을 필요가 있고, 또 그것으로 충분하다 if and only if.」 그런데 문제는 깐

깐하게 따지기 좋아하는 수학자가 아니고서야 굳이 이렇게 거추장스럽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애매하게 <~할 필요가 있다>라는 표현

이 <~할 필요가 있고, 또 그것으로 충분하다>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며 자라게 된다는 데 있다. 일상 언어에서 이것을 일일이 구분하는

것은 너무 까다로운 일이다. 뜻을 명확하게 하자는 취지를 넘어서는 일이


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부분을 구분하지 않다 보니 논리에 대해 형식

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혼란이 야기된다는 것이 문제다. 더 심각한 상


황에서는 이것이 더 심각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당신이 은행 강도 갱단을 쫓고 있는데 그 갱단이 모두 백인임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당신은 다음의 사실을 알고 있다.

당신이 갱단의 누군가와 마주친다면


그 사람은 백인이다.

이것은 다음의 말과 동치(同値)다.

당신이 만난 누군가가 갱단 소속이려면


백인일 필요가 있다.

그럼 백인을 찾기 시작하면 된다. 하지만 백인을 찾았다고 해서 범죄자


를 찾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역이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마주친 누군가가 백인이라면


그 사람은 갱단에 속한 사람이다.

백인인 것은 갱단 소속이기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7

이런 것들은 아주 헷갈리기 쉽기 때문에 일상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머


리가 빙빙 돈다. 이것이 바로 수학이 대상을 문자와 기호로 줄여서 표현
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렇게 하면 패턴이 훨씬 쉽게 눈에 들어오기 때문
이다. 이것을 화살표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 참: 갱단 ⇒ 백인
▪ 거짓: 백인 ⇒ 갱단

거짓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다.

화살표를 사용하면 도움이 된다


사람들이 수학을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수학 표기법이

다. 하지만 이런 표기법은 우리가 명확하게 생각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


다. 함축과 역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앞에서 다룬 내용을 일상 언어로 표

현하면 너무 헷갈린다. 문법의 유연성에 따라 단어 또는 절의 순서나 위


치를 뒤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브로콜리를 먹으면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다.

이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동일하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다, 브로콜리를 먹으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A가 참이면 B가 참이다>가 <B는 참이다, A가 참
이면>이라는 의미인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마치 논리의 흐름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문법상으로만 뒤집어 놓은 것이다.


화살표 표기를 사용할 때 좋은 점 하나는 화살표의 방향으로부터 논리

의 흐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A ⇒ B>의 역은 <B ⇒ A>이다.

하지만

<A ⇒ B>는 <B ⇐ A>와 동치다.


화살표가 종이 위에서 어느 쪽을 향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어디서 어
디로 향하는지만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그려 놓아

도 논리적인 의미는 똑같다(물론 정서적으로는 조금 의문이 들겠지만).


따라서 다음과 같은 가능성이 열린다.

이를 <이면 ~이다>를 다시 이용해서 표현해 보면 <A이면 B다>의 역은


<B이면 A다>이다.

새로 나온 진술은 겉으로 보면 이전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논리적으로


는 완전히 다르다.

벤 다이어그램의 도움을 받자

벤 다이어그램은 논리의 일부 측면을 그림으로 그려 보도록 도와준다.


나는 수학 연구를 할 때 그림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나는 종종 허공
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사실 그건 내 머릿속에서 그림들을

맞추느라 그렇다. 수학은 추상성에서 힘을 얻는다. 즉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물과 대상으로 이루어진 실제 세상과 떨어져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 그 대상의 정체가 무엇인지 감을 잡기가 힘들다는 데

있다. 여기서 도움이 되는 한 가지가 바로 자기가 생각하는 대상의 일부


측면을 담은 그림을 그려 보는 것이다. 이 그림은 비유와 비슷하다. 비유

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상하지 않지만 그것이 가지는 일부


중요한 측면을 압축해서 보여 준다. 그림은 건조한 논리와 우리의 느낌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준다. 트리스탄 니덤Tristan Needham은 『 눈으로


보는 복소 해석학 Visual Complex Analysis 』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이

렇게 말했다.

계산을 하는 것보다는 그림을 찾아내는 쪽이 더 많은 상상력과


노력이 필요할 때가 많지만 그림은 우리를 진실에 더 가깝게 데려

다 주기 때문에 찾고 나면 언제나 보람이 있다.

내 생각에 이 글은 너무 강한 주장이 아닌가 싶다. 어떤 사람은 실제로


그림보다는 기호와 단어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림에서
큰 도움을 받는다. 벤 다이어그램은 기본적인 상황에서 대단히 유용하다.

비난과 책임에 대해 다루는 5장에서는 상황이 정말 복잡할 때는 흐름도가


더 많은 가능성을 표현할 수 있어 유용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것이다. 집

합이 세 개를 넘어가면 벤 다이어그램이 너무 잘게 나뉘어 눈으로 확인하


기 어렵기 때문에 그다지 쓸모가 없다.
첫 번째 사례에서는 벤 다이어그램이 함축의 방향성을 확인하도록 도
와줄 수 있다.

이 논리적 함축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당신이 잉글랜드 출신이라면 당신은 영국 출신이다.

이런 식으로 잉글랜드를 영국 안에 그려 넣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잉글랜드 출신이라고 하면 당황한다. 내가 <잉글랜드


사람처럼 생기지> 않아서 그렇다. 하지만 영국 출신이라고 하면 별로 신
경 쓰지 않는 눈치다. 논리적으로 보면 사람들은 내가 영국 벤 다이어그
램에는 소속되어 있지만 잉글랜드 벤 다이어그램에는 소속되어 있지 않

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스코틀랜드 출신도, 웨일즈나


북아일랜드 출신도 아니다.8
함축에 대한 어떤 진술도 이렇게 도표로 그릴 수 있다. 지리적, 물리적
위치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어도 그렇다.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이 백인의 특권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특권을 갖고 있


다.

당신이 미국 시민이라면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살 수 있다.


이것을 일반화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A⇒B

이제는 이 원들이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 좀 불분명해졌다. 그래서 지


금 당장은 엄격한 도해라기보다는 도식적인 도해에 가깝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A는 B의 일부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개념을 잘
포착한다.

벤 다이어그램은 논리적 함축이 뒤로 거슬러 갈 수는 없다는 사실도 시


각적으로 자명하게 자동으로 보여 준다. 안쪽의 원과 바깥쪽 원(타원형)
은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A는 B의 일부라는 사실에서 벗
어날 수 없지만 B는 A의 일부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 A 바깥쪽에

B에 속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A가 B를 함축하더라도(A이면


B라고 해도), A가 거짓일 때 B가 여전히 참일 수 있다는 사실과도 잘 부
합한다. 다음에 나오는 버전은 수학적으로는 옳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왜냐면 합법적으로 미국에 살 수 없으면서도 미국 시민일 수 있는 방법

이 존재하고, 또 미국 시민이 아니면서도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살 수 있


는 방법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실제 상황은 이렇게
대칭적이지 않다. 오른쪽 영역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 함축은 대
칭적이지 않다.

놀랍고도 혼란스러울 정도로 유연한 우리의 언어


지금까지 똑같은 논리적 함축을 언어로는 온갖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
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다음의 함축을 언어로 말하는 서로 다른 방법을

모두 살펴보자.

A⇒B

여기에는 A를 앞세우는 구절과 B를 앞세우는 파트너 구절이 모두 포함

되어 있다.

▪ A는 B를 함축한다.
B를 A가 함축한다.

▪ A면 B다.
B다, A면.
▪ A는 B의 충분조건이다.
B는 A의 필요조건이다.

▪ A는 B가 참일 때만 참이다.
B가 참일 때만 A도 참이다.
사람들이 이 여덟 가지 진술이 모두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가 내게 책에 오류가 있다는 글을 써 보내지 않을까
상상하기도 한다(그래서 나는 오자가 생기지 않았나 다소 꼼꼼히 확인하
는 편이다). 마지막 진술이 가장 헷갈릴 듯하다. 여기 비극적인 사례를 하

나 소개한다.
근래에 있었던 사건으로 조지아주 코브 카운티의 한 경찰이 공황 상태
에 빠진 백인 여성에게 <우리는 흑인만 총으로 쏩니다>라고 말하며 안심
시키는 장면이 자동차 블랙박스 영상에 잡힌 적이 있다. 이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동치다.

우리가 당신을 총으로 쏘는 것은


당신이 흑인인 경우에만입니다.

이것은 다시 다음의 진술과 동치다.

당신이 흑인인 경우에만


우리는 당신을 총으로 쏩니다.

이것을 화살표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당신은 흑인이다. ⇐ 우리가 당신을 쏜다.


이것은 다음과 동치다.

우리가 당신을 쏜다. ⇒ 당신은 흑인이다.

혹은 이것을 말로 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우리가 당신을 쏘았다면


당신은 분명 흑인이다.

미국에서 차량 검문 중에 누군가 경찰에게 총을 맞았다는 뉴스가 나오

면 분명 그 사람은 흑인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9


이것이 내가 기호 사용을 더 선호하는 한 가지 이유다. 이런 방식을 쓰
면 더 빠르고 명확하며 이 여덟 가지 구절이 모두 똑같은 기호로 표현된
다. 그럼 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느라 소중한 뇌세포들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역의 오류
역의 오류는 한 진술의 역이 원래의 진술과 동치라고 잘못 생각할 때
일어난다. 어찌 보면 이런 실수를 하는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A는 B를

함축한다>라는 문장을 여덟 가지로 바꿔 말할 수 있고, 그 역을 말하는 방


법도 마찬가지로 여덟 가지나 되니까 말이다. 학생들에게 성적을 잘 받으
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때도 이런 일이 생긴다. 그럼 학
생들은 열심히 공부하면 자동으로 성적이 잘 나올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충분조건이 아닌 이유는 공부를 열심히 해도 올바른 방식으로 열

심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역의 오류에 빠진다.


사실 한 진술의 역은 원래의 진술과 논리적으로 독립적이다. 둘 사이에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도 없다는 말이다. 즉 둘 중 하나가 참이라고 해서
필연적으로 나머지는 참이나 거짓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참과 거짓의 조합이 모두 가능하다. 다음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1. 당신이 미국 시민이라면 당신은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살 수


있다. 이것은 참인 논리적 함축이다. 그 역은 <당신이 미국
에서 합법적으로 살 수 있다면 당신은 미국 시민이다>가 된

다. 이것은 참이 아니다. 영주권이나 비자가 있으면 미국 시


민이 아니어도 합법적으로 미국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2. 당신이 대학 학위를 갖고 있다면 당신은 똑똑한 사람이다. 나
는 이것이 사실이라 믿지 않는다. 학위가 똑똑하지 않은 사

람에게 수여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합격 점


수가 너무 낮기 때문이다. 이 진술의 역은 <당신이 똑똑한
사람이라면 당신은 대학 학위를 갖고 있다>이다. 이것 역시
참이 아니다. 나는 똑똑하지만 대학 학위가 없는 사람이 많
다고 본다. 대학 진학이 보편적이지 않았던 고령 세대는 특
히나 그렇다.
3. 당신이 편견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여성이다. 이것
은 참이 아니다. 남성 혹은 이분법적 성 구분에 해당되지 않

는 젠더 논바이러리gender non-binery도 편견을 경험할


수 있다. 아니, 젠더 논바이러리는 확실히 편견을 경험한다.
이 진술의 역은 <당신이 여성이라면 당신은 편견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이다. 당신이 이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에 대해 불만이 있든 없든 간에 이것은 참이라 생각한다.


4. 당신이 오바마 케어Obamacare를 지지한다면 당신은 부담
적정 보험법Affordable Care Act을 지지한다. 이것은 참
이다. 오바마 케어란 그냥 부담 적정 보험법을 비공식적으

로 부르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역도 마찬가지


로 참이라는 의미가 된다. 「당신이 부담 적정 보험법을 지지
한다면 당신은 오바마 케어를 지지한다.」 안타깝게도 이 둘
이 똑같은 것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담 적정 보험법은 지
지하면서 오바마 케어는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

런 사람들은 오바마와 관련된 것에는 무엇이든 강한 반감을


가져 오바마란 이름을 넣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반대의 대
상으로 삼아 버린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무언가를 어떻게 표현
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해서 아주 명확한 논리조차 그 앞에서
는 무력화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결론을 다음의 표로 요약할 수 있다.

원래 진술 역 진술
진술 1 참 거짓
진술 2 거짓 거짓
진술 3 거짓 참
진술 4 참 참

여기에는 진술과 그 역에서 등장할 수 있는 참/거짓 조합이 모두 나와

있다. 이는 새로운 진술에서 시작해서 그것이 참이나 거짓임을 발견한다


고 해도 그 역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론적으로
보면 여전히 그 역이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 동치
지금까지 진술을 그 역과 혼동하는 오류 그리고 한 진술이 참이라는 이
유만으로 그 역도 분명 참일 거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대해 알아보았다.
하지만 가끔은 진술과 그 역이 우연히 모두 참인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를 논리적 동치라고 한다. 즉 A가 B를 함축하고 B 또한 A를 함축한다면


A와 B는 논리적으로 동치라는 뜻이다. 그럼 A가 참일 때마다 B는 반드시
참이어야 하고, 또한 A가 거짓일 때마다 B도 반드시 거짓이어야 한다.
이것은 A와 B가 논리적으로 맞교환이 가능하며, 보통 똑같은 것을 그

저 관점만 달리해서 바라본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 둘이 완전히 똑


같다는 뜻은 아니다. 위에 나온 오바마 케어와 부담 적정 보험법의 사례
가 그렇다. 이 둘은 논리적으로는 똑같지만 감정적으로는 일부 사람들에
게 아주 다르게 다가간다. 이들은 <부담 적정 보험법>이라는 차분하고 연

민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을 가진 정책에는 찬성하지만, 오바마란 이름이


들어간 무언가를 지지한다는 것은 도무지 견딜 수 없다. 정반대로 반응하
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오바마란 이름이 들어가면 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두 개가 사실은 동치가 아닌데도 논리적 동치라 가정하는 것을

거짓 동치라고 한다. 이를 테면 학위를 취득한 것이 똑똑하다는 것과 동


치라 믿는 경우다. 이 거짓 동치의 논리적 오류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다. 하지만 오바마 케어/부담 적정 보험법의 사례는 <거짓 비동
치>다. 사실은 두 개가 논리적으로 동치인데도 동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다. 그래도 우리는 이것이 논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그냥 부정해 버

릴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감정적으로는 동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


고 그 부분을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이 문제는 감정에 대해 다루는 15
장에서 다시 알아보도록 하자.
두 가지가 논리적으로 동치일 때는 함축이 양쪽 방향으로 흐른다. 따라

서 <A⇔B>라는 기호를 쓸 수 있다. 언어로는 이것을 몇 가지 방법으로 표


현할 수 있는데 논리가 양쪽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대칭적으로 나타난
다.

▪ A가 참이려면 B가 참일 필요가 있고, 또 그것으로 충분


하다.

B가 참이려면 A가 참일 필요가 있고, 또 그것으로 충분


하다.

▪ A는 B의 필요충분조건이다.

B는 A의 필요충분조건이다.

▪ A는 B와 논리적 동치다.

B는 A와 논리적 동치다.

▪ A가 참이면 B가 참이고, A가 거짓이면 B도 거짓이다.

B가 참이면 A도 참이고, B가 거짓이면 A도 거짓이다.

마지막에 나온 쌍을 보면 <A가 B를 함축한다>가 A가 거짓인 경우에 대


해서는 아무것도 알려 주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해명해 준다.
A가 거짓이라는 사실로부터 무언가 추론하고 싶다면 그 역이 필요하다.

하지만 겉으로 볼 때는 역을 이용하면 A가 거짓이라는 사실보다는 B가


참이라는 사실로부터 무언가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 장에서
는 이 부분을 살펴보면서 무언가가 거짓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탐험해
보겠다.
4장

반대와 거짓

우리는 어떤 식으로 반대하는가


학교 토론 클럽에서 했던 토론 중에 기억나는 것은 딱 두 가지다. 하나

는 <저희는 마거릿 대처가 물러나야 한다고 믿습니다>였다. 이 주장이 특

히나 인상적인 이유는 대처가 토론이 있었던 날 오전에 실제로 사임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우리 쪽에서는 산딸기보다는 딸기가 낫다고 믿습니

다>라는 의미도 없고, 내용도 없는 고전적인 토론 주제였다. 이 토론에서


는 양측 진영 모두 똑같이 불가능한 논증 과제를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

다. 어떻게 딸기의 한 종류가 다른 종류보다 낫다고 논증할 수 있단 말인


가? <낫다>라는 것의 의미가 뭘까? 하지만 이런 유형의 토론에서 핵심은

토론자 측에서는 발의된 내용을 지지할지 아닐지만 결정하면 된다는 점

이다. 따라서 제안자는 딸기가 산딸기보다 낫다고 논증해야 하지만 반대

측에서는 제안자가 틀렸다는 사실만 논증하면 된다. 틀릴 수 있는 경우는


많다. 한 가지 경우는 실제로 산딸기가 더 나을 때다. 하지만 딸기와 산딸

기가 똑같이 좋을 때도 틀리는 경우에 해당한다. <낫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가 불가능할 때도 여기에 해당된다. 혹은 이 개념 전체가 바보 같은

개념일 때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논쟁은 토론 같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무언가가 참이라고

주장하는 누군가와 그것을 틀렸다고 말하는 반대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


들이 논리적 접근을 시도하는 중이라면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의 말을 정당

화하기 위해 그를 뒷받침할 논증을 구축하려 할 것이다. 그럼 두 번째 사

람은 첫 번째 사람의 논증 속에서 결함을 찾아내려 하거나, 그 사람이 틀

렸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줄 자신만의 논증을 구축하려 할 것이다.

논리학, 수학, 과학은 모두 무엇이 참인지 알아내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무엇이 참이 아닌지 찾아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기가 틀렸을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감지할 방법을 갖추는 것이 합리적인 인간이

되는 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나는 확신한다(하지만 내가 틀렸을 수도 있

다).

부정(否定)은 우리가 무언가를 반대하는 방식이다. 안타깝게도 일상생활

에서 우리는 이것을 아주 나쁜 방향으로 사용할 때가 많다. 논쟁이 모욕,

위협, 혹은 고함지르기 등으로 너무 빨리 퇴행하고 만다. 특히 온라인 토

론에서는 더욱 그렇다. 나는 모든 사람이 모욕하고 위협하고 고함지르기


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논지를 전달하지 못해 낙담해서 그러는 것

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나는 이런 낙관적 생각 때문에 논리에

대한 책을 쓰게 됐다. 모두들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믿고, 또 대부


분 그러기를 바란다고 믿기 때문이다. 혹여 그게 아니더라도 그러기를 바

라도록 설득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실생활에서 무언가를 반대하는 일이 그리 매끄럽게 이루어지지 않는

한 가지 이유는 서로 동등한 것이 무엇이고, 따라서 어느 것이 진정한 논

박인지 항상 제대로 알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일단 부정을 이해하고 나면

논리의 힘을 기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 중 하나는 똑같은 개념을 두고


존재하는 서로 다른 수많은 관점을 배우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서로에

게 동의하고 반대하는지 인식하는 것이다.

부정 vs 반대

교육 제도에 관한 토론을 상상해 보자. 누군가 툭하면 말하듯이 일부

사람들은 아시아의 교육 제도가 영국이나 미국의 교육 제도보다 낫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을 반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1. 신중하고 차분한 방법: 나는 아시아의 교육 제도가 낫다고 생


각하지 않아요.

2. 극단적이고 흥분된 방법: 말도 안 돼! 영국의 교육 제도가 낫

지!

감정적 어조를 빼고 생각하면, 이것은 원래의 관점에 반대하는, 논리적

으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이다. 두 번째 (극단적인) 방식은 우리가 일상 언


어에서 <반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논리적 반대가 아니

다. 논리에서는 부정을 할 때 원래의 진술을 가져다가 그냥 그것이 참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이것이 위에 나온 첫 번째 (차분한) 반대 방식이다. <

아시아의 교육 제도가 영국의 교육 제도보다 낫다>의 부정은 <아시아의

교육 제도가 영국의 교육 제도보다 낫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이다. 이것

을 더 자연스럽게 풀어서 이야기하면 <아시아의 교육 제도는 영국의 교육

제도보다 낫지 않다>이다. 딸기와 산딸기의 문제처럼 여기서도 아시아의

교육 제도가 <낫지 않을> 수 있는 경우는 다양하다. 어쨌거나 <낫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교육 제도가 목표로 하는 일은 무엇인가? 교육 제

도의 성취를 어떻게 측정할까? 우리는 교육 제도가 무엇을 성취하기를 바


라는가?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수학과 과학의 성취로 측정하려는 것 같

고, 어떤 사람들은 표준화 검사의 결과로, 또 어떤 사람들은 업무 현장의

투입 준비 정도로 측정하려 한다. 우리가 교육에 바라는 것이 이것밖에

없을까?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게 하고, 훌륭한 직원이 되도록 준비시

키는 것?

여기 <논리적 부정>과 일상 언어에서 사용하는 <반대>의 차이를 보여

주는 사례를 몇 가지 더 소개한다.

▪ 원래 진술: 나는 유럽 연합이 환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반대: 나는 유럽 연합이 끔찍하다고 생각한다.


부정: 나는 유럽 연합이 환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

은 유럽 연합이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

가 아니다. <끔찍하지> 않으면서 <환상적이지 않은> 것

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다 좋은데 몇 가지 결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언어 사용 방식과 관련된 까다

로운 부분이 존재한다. 어떤 말투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이것이 끔찍하다는 말을 비꼬는 것처럼 느낄 수 있기 때

문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논리적 부정이 아니라 언어의

변덕이라 해야 할 것이다.

▪ 원래 진술: 마거릿 대처는 최고의 수상이다.

반대: 마거릿 대처는 최악의 수상이다.

부정: 마거릿 대처는 최고의 수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최악의 수상도 아닐 수 있다. 두 번째로 나쁜 수상이거

나, 열 번째로 나쁜 수상일 수도 있으니까.

▪ 원래 진술: 기후 변화는 확실한 현실이다.

반대: 기후 변화는 확실한 허위다.

부정: 기후 변화가 확실한 현실은 아니다. 무엇이든 확실한


것이 있기나 할까? 하지만 이것이 확실한 허위라는 이야

기는 아니다. 기후 변화를 말해 주는 증거가 상당한 것을


보면 기후 변화는 현실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여기서

<현실>이라는 말은 과학의 엄격한 틀로 볼 때 과학적으

로 검증된 이론이라는 의미다.

▪ 원래 진술: 설탕은 몸에 좋다.

반대: 설탕은 몸에 나쁘다.

부정: 설탕은 몸에 좋지 않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먹는 것은

몸에 어떤 해도 미치지 않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몸에 나


쁘지는 않다. 많은 양을 먹을 때만 몸에 좋지 않은 작용

을 할 것이다.

▪ 원래 진술: 나는 남자다.

반대: 나는 여자다.

부정: 나는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여자도 아닐 수 있다. 전체

인구 중 1.7퍼센트로 추산되는 간성 intersex일 수도 있

다.

일반적으로 부정은 반대보다 더 폭넓은 진술이다. 반대는 정반대에 있

는 극단을 가리킨다. 북극의 정반대 극단은 남극이다. 하지만 이 양극 사

이에는 엄청나게 많은 세계가 펼쳐져 있다.


▪ 원래 진술: 버락 오바마는 흑인이다.

반대: 버락 오바마는 백인이다.

부정: 버락 오바마는 흑인이 아니다. 사실 그의 아버지는 흑

인이고 어머니는 백인이다. 따라서 그는 백인이기도 하

지만 흑인이기도 하고, 아니면 양쪽 다 아닐 수도 있다.

부정 대신 반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사물을 대단히 극단적이고 이분

법적인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의 경우 그를 백인이라 부


르면 대부분의 사람이 이상하다 생각할 것이다. 그는 어떤 면에서 보면
반은 백인이고 반은 흑인인데도 일반적으로 흑인으로 불린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를 백인이라 부르기보다는 흑인이라 부르는 게 더 말이 된다고


여겨질까? 실제로 그것이 말이 되기는 할까? 이것은 바로 회색 지대에 관

한 질문이다.

회색 지대
사람들이 회색 지대에 대처하는 일은 신통치 않을 때가 많다. 실생활에

서 벌어지는 논란을 보면 결국 극과 극의 대립으로 펼쳐지는 경우가 많


다. 두 사람이 콘서트를 갔는데 한 사람은 <완전 끝내줬어!>라며 열광하

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냐? 난 완전 끔찍했는데>라며


반박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면 보통 어떤 사람은 훌륭
한 결정이었다고 말하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끔찍한 결정이었다고 말한

다.
사람들은 어떤 지도자를 두고 좋은지 나쁜지 논란을 벌인다. 한편의 사

람들은 그 사람이 했던 온갖 좋은 일에 대해 떠들고, 반대편 사람들은 그


사람이 저지른 온갖 나쁜 일에 대해 떠든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한다. 사실 대부분의 일은 그 자체로 부분적으


로는 좋고, 부분적으로는 나쁘다. 더 논리적인 부정을 살펴보면, 누군가

가 한 지도자가 좋은 일을 조금 했다고 주장할 때 반대편에서는 그 지도


자가 좋은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고(아주 극단적인 상황) 주장하거나,

한편에서 한 지도자가 완전히 악하다고 주장할 때 다른 편에서는 그 사람


이 전체적으로는 악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좋은 일도 했다고 주장하는 것

이 논리적 부정에 해당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누군가를 당신이 전면적


으로 비난하지 않으면 논리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귀에는 마치 당신이 그

사람을 지지하는 것처럼 들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흑백 논리의 사고방식


이 갖는 문제점이다.

사람들은 회색 지대에 대처하는 데 별로 능숙하지도 않고, 사실 논리적


이지도 못하다. 이 부분은 뒤에 나올 12장에서 다시 살펴볼 테지만 지금
은 우선 회색 지대가 어딘가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의 일부를 무시하게 되니까 말이다.


공식적인 토론 상황에서는 회색 지대가 어디인지가 명확하게 설정된

다. 회색 지대는 반대에 속한다. 따라서 딸기와 산딸기 토론에서 발의된


내용은 딸기가 산딸기보다 <확실하게> 좋다는 것이다. 나머지 모든 회색
지대는 반대에 포함된다. 따라서 두 종류의 딸기가 대략 비슷하다거나,

때로는 더 좋을 때도 있고, 더 나쁠 때도 있다는 등의 의견은 모두 반대에


해당된다.

<좋다>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 회색(<보통이다>)은 <좋지 않다>에 포함


된다. 따라서 이것을 <나쁘다>와 한 덩어리로 묶는다. 유럽 연합이 끔찍
하냐 아니냐를 생각할 때 회색(<그저 그렇다>)은 <끔찍하지 않다>에 포함

되니까 <환상적이다>와 한 덩어리로 묶는다.


인종에 대한 개념과 백인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면 온갖 색조의 회색이

검은색과 함께 <하얗지 않은 색>에 포함된다. 20세기에 미국의 일부 지역


에서는 이런 개념이 법으로 제정되기도 했다. <검은 피>가 한 방울만 섞

여도 흑인으로 여긴 것이다. 선조 중에 흑인의 피가 8분의 1 혹은 4분의


1 정도만 섞여도 흑인으로 친다고 임의의 기준을 정한 경우도 있다.

우리가 흑인과 백인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위의 경우처럼 임의의


기준을 고른 셈이거나, 혼혈인, 아시아인, 아메리카 원주민 그리고 흑인

도 백인도 아닌 사람을 비롯해서 나머지 모든 이들을 우리의 논의에서 지


워 버린 셈이다.

논리에서는 이것을 <배중률(排中律)>이라고 한다. 이 법칙은 <참> 혹은 <

참이 아님>이 지금 우리가 다루게 될 오직 두 가지 선택 사항이라고 말한


다. 따라서 모든 유형의 <참이 아님>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것은 또한 만

약 무언가가 <참이 아님>이 아니라면 그것은 반드시 참임을 뜻한다. 이는


중간 부분을 버리거나 무시해서 배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중간 부분을
어느 한쪽에 포함시킴으로써 중간 부분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만든다

는 의미다.
여기 하얀색부터 검은색까지 나온 슬라이딩 스케일 그림이 있다.

하얀색과 검은색의 경계는 어디에 그어야 할까? 엄격하게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한 가지 방법은 <검은색>과 <검지 않은 색>을 고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똑같이 논리적인 또 다른 방법이 있다. <하얀색>과 <하얗지 않

은 색>을 고려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경계선이 반대쪽에 그어진다.


이런 접근 방식에서는 불만이 많이 나온다. 경계선을 어느 한 극단으로

밀어붙인 경우다. 인종 관련 문제를 고려할 때는 백인과 백인이 아닌 사


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생산적일지 모른다. 백인으로 간주되는 혼혈
인이 아닌 한, 백인의 특권이 혼혈인에게까지 확장되지는 않는 것 같으니

까 말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백인이 아닌 모든 이를 일종의 <나머


지>라고 부르는 것은 백인 우월주의의 표현으로, 백인들이 나머지 사람들

을 자기 사회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주저한다는 사실을 의미할 수도 있다.


경계선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적어도 양극단만 고려하고 회색

지대 전체를 아예 무시해 버리는 것보다는 논리적으로 옳다. 마치 중간


지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우리가 하는 말은 허위가 되니

까 말이다.
실생활에서 많이 일어나는, 덜 극단적이지만 덜 논리적이기도 한 접근
방법도 있다. 경계선을 중간 어디쯤에 임의로 그어 놓는 것이다.

또 다른 대안은 중간에 한 영역을 지정해서 <회색> 같은 것으로 부르는

방법이다.
물론 이 경우 역시 검은색과 회색, 회색과 검은색 사이 어딘가를 골라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한 극단에는 이성에게만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이 존재하고, 반대쪽 극단에는 동성에게만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이 존재한다. 그럼 그 중간에는 양쪽 모두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


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체 그 경계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까? 만약 누군가

가 이성에게 끌리지만 동성인 어느 한 사람에게도 끌린다면 그것만으로


양성애자라 부를 수 있을까? 동성에게 끌리지만 이성인 어느 한 사람한테

도 끌리는 경우는? 이런 경우는 동성애자가 아닌 것일까? 나더러 이 질문


에 답해 보라면 그것은 당사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하겠다. 동성애자

로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동성애자로, 이성애자로 불리기 원하는 사람


은 이성애자로 말이다. 하지만 인종에 대해 고려하는 경우에는 이것을 한

쪽 방향으로 몰고 가는 힘의 불균형이 저변에 흐른다. 저울이 대칭이 아


니다. 오랜 억압의 역사가 지난 지금도 흑인과 동성애자는 이런 분류 체
계에 더 많은 이해관계가 달려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낼 것

이냐 숨길 것이냐, 혹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보호할 것이냐, 모든 사람


이 누릴 자격이 있는 권력 공동체로 통합되어 들어갈 것이냐 등등 말이
다. 논리는 중요하지 않은 세부 사항을 무시함으로써 이런 상황을 단순화
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맥락에서 중요한 부분을 무시함으로써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12장에서는 이 부분을 다시 살펴보면서 중간 어딘가에 경계선을 긋는
접근 방식은 덜 극단적이고 적어도 회색 지대 전체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대신 다른 모순이 생긴다는 점을 확인할 것이다. 극단, 무시, 모순 등을

피하면서도 동시에 회색 지대를 더욱 미묘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알아


보자. 그런데 회색 지대를 다룬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문제는 아니다.
회색 지대를 어느 한편으로 흡수하면 단순화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틀
리거나 오류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반면 흑백 논리의 사고에서는 보통

회색 지대의 존재를 아예 무시해 버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벤 다이어그램
부정에 대해 어떻게 고려해야 할지 생각하기 위해 백인과 백인이 아닌

사람을 떠올려 보자. 다음과 같이 백인의 영역을 포함하는 사람들의 벤


다이어그램을 그릴 수 있다.
그럼 그 바깥 영역은 백인이 아닌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아래 그림에
서 회색으로 표현한 부분이다.

그럼 백인이 아닌 사람에는 흑인, 아시아인, 라틴계, 아메리카 원주민

그리고 백인이 아닌 다른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A는 참이다>라는 진술을 생각하면 다음과 같이 벤 다이어
그램을 그릴 수 있다.
이 경우 <A는 참이 아니다>에 해당하는 영역은 원 A의 바깥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회색 지대의 문제 그리고 우리가 배중률을 사용한


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부정은 원 밖의 모든 공간을 차지하고, 그 공간과

원 사이에는 아무런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집합과 벤 다이어그램의 언


어에서는 A와 완벽하게 이가 맞물리는 이 부분을 여집합이라고 한다. 만
약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면 이런 식으로 보일 것이다.

이제 우리가 떠올리는 개념이 <하얀색>과 <하얗지 않은 색>이라면 그


경계를 나누는 원은 그 중간에 그려질 것이다.
반면 우리가 <검은색>과 <검지 않은 색>을 생각한다면 경계를 나누는
원은 짙은 검은색이 시작되는 바깥쪽에 그려질 것이다.10
다음 장에서는 논리 진술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고려하면서 더 많은 집
합이 등장하는 벤 다이어그램을 살펴보자.

진릿값
수학자가 항상 모든 것을 더 복잡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 그들은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더 단순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하지만 단순화 simple와 과도한 단순화 simplistic 사이에는 중

요한 차이가 있다. 나는 이것이 깨달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도


하게 단순화하는 경우에는 깨달음을 주는 결정적인 세부 사항을 자칫 무
시하기 쉽다. 좋은 단순화의 핵심은 그 상황에서 중요한 깨달음을 주는
세부 사항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적어도 당분간은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

리는 것이다. 또 다른 핵심은 자기가 무엇을 잊어버리는지 항상 인식하는


것이다. 일기 예보 보는 것을 깜빡해서 우산도 깜빡하고 나오는 것이 아
니라, 일기 예보에서 날씨가 좋을 것이라 해서 일부러 우산을 집에 놓고
오는 경우와 비슷하다. 자기가 무엇을 잊어버리는지 인식하면 자기가 하

는 일의 한계도 깨달을 수 있고, 자기가 빠져들지 말아야 할 상황이 무엇


인지도 알 수 있다.
어찌 보면 배중률은 일종의 단순화다. 이것은 우리의 논리를 수정하지

않고는 제대로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의미임을 나중에 살펴


볼 것이다. 이 법칙을 보는 또 다른 방법은 진리를 <예> 혹은 <아니오>라
는 이진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수학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진리에 값을
부여한다. 만약 무언가가 거짓이면 0, 참이면 1이다. 수학자는 모든 것을

수로 바꾸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을 기억하


자. 수학은 그저 수에 관한 학문이 아니다. 수학은 다른 많은 것도 함께
다룬다. 하지만 수는 대단히 익숙하고 논리적으로 사용하기 편하기 때문
에 한 상황을 수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면 대단히 유용하다.

배중률은 0과 1 사이의 진릿값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당신은 말도 안 된다며 따질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중간을 통째로 내다
버리겠다는 의미가 아닌가? 어쨌거나 0과 1 사이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소수가 존재한다. 이것은 부분적 진리만 담으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무언가의 진릿값이 0.5라면 절반의 참이라는 뜻일까? 이런 접근 방


식을 취하는 <퍼지 논리>라는 논리 형태도 있다. 12장에서 회색 지대를
다루는 방법을 알아볼 때 여기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0과 1만 진릿값으로 사용하는 것은 법정에서 <예>와 <아니오>라는 대

답만 허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것은 법정에서 변호사가 누군가 자신에


게 불리한 진술을 하도록 압박할 때 즐겨 쓰는 도구다(적어도 드라마 속
변호사들은 그랬다). 논리와 법정에서는 모든 것이 간단하게 참이거나,
참이 아니다. 1이나 0인 셈이다. 너무 가혹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그
래서 <진실이 아니다>라는 말에는 모든 색조의 회색이 포함된다는 사실
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진술이 참이라면 그 부정은 반드시 거짓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무
언가가 거짓이라면 그 부정은 반드시 참이어야 한다. 이것을 작은 진리표

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A는 임의의 진술이고 <A가 아님>은 A의 부정


이다.

벤 다이어그램처럼 진리표도 논리를 요약하는 또 하나의 유용한 방법

이다. 진리표는 직관에서 조금 벗어날 때가 있는데, 이렇게 가끔 직관에


서 벗어나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하나는 논리적 두뇌를 더 잘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논리적 직관을 발달
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논리적 직관이라는 말이 모순으로 느껴진다면 사

과하겠다(이 문장은 <~이면 ~이다>라는 논리적 함축이 아니라 약속에 해


당한다).
마지막으로 진릿값에 한 가지 가능성이 더 존재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
가야겠다. 무언가에 대해서는 진릿값을 결정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역
설에 대해 다루는 9장에서 이 부분을 다시 살펴보겠다. 어떤 역설은 자기
모순을 일으켜서 모순을 야기하지 않고는 그 어떤 진릿값도 부여할 수 없

는 진술 때문에 발생한다. 그 어떤 진릿값도 가질 수 없다는 의미다. 이것


은 거짓이라는 말이 아니다. 진릿값이 불가지(不可知)라는 뜻이다.

여기 현재로서는 그 진릿값을 알 수 없는 몇 가지 진술을 소개한다. 하

지만 이것은 현재 인간의 지식에 한계가 있어서 생긴 결과지, 내적인 논


리의 문제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니다.

1. 우주는 유한하다.

2. 언젠가 우리는 모든 암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3. 운석이 공룡의 멸종을 야기했다.

함축을 부정하기

이제 부정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으니 그것을 더 복잡한 진술에


활용할 수 있다. 이를 함축의 진술에 적용해 보자.
우리는 앞에서 <당신이 백인이라면 당신은 특권을 갖고 있다>라는 함
축을 보았다. 그리고 그 역인 <당신이 특권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백인이
다>는 당신이 백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형태의 특권을 가질 수 있기 때문

에 참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했다. 예를 들어 남성, 부자, 이성애, 시스젠


더cisgender,11 신체 능력이 온전한 사람, 키 큰 사람, 날씬한 사람, 잘
배운 사람도 특권을 누린다.
함축을 부정하기는 까다롭다. 그냥 문장에 <아니다 not>라는 표현만

하나 붙여서 간단하게 부정을 만들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당신이 특


권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백인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 들겠
지만 이것은 참이 아니다. 당신이 특권을 가지고 있다면 백인일 수도 있
지만, 백인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면 이렇게 말해 볼 수도 있다. 「백인의 특권 말고도 다른 유형의 특

권이 존재한다.」 이것은 논리적 부정을 향한 훌륭한 발걸음이기는 하지만


<~이 존재한다>라는 표현에 대해서 그리고 이 표현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이는 7장에서 살펴보겠다).
그전까지는 사실 <함축한다>를 논리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함축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예를 들면 <특권을 갖


고 있다는 것이 당신이 백인임을 함축하지는 않는다>라거나, 아니면 그냥
<~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원래의 진술 뒤에 덧붙이는 식이다. 이
것은 <당신이 특권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이 백인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

다>라고 좀 부자연스러운 문장이 나오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지, 진술을


아주 확실하게 부정하는 방법이다.
이것을 기호로 나타낼 때는 그냥 함축 화살표에 줄을 하나 그어서 이렇
게 표현한다.
참이 아닌 논리적 함축이 의견 충돌의 뿌리인 경우가 많다.

잘못된 함축
여기 일부 백인들이 백인의 특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때 사용

하는 잘못된 함축을 소개한다.

일부 흑인은 나보다 더 잘산다.


따라서 나는 백인의 특권을 갖고 있지 않다.

일부 흑인이 당신보다 더 잘사는 것은 사실이다. 당신이 백인이라고 해

도 말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정말 특별한 사람이 아닌 한 버락 오바나나


오프라 윈프리가 아마도 당신보다 잘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것이 당신에게 백인의 특권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잘못된 논증이 어떻게 논의를 진행하려 하는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1. 일부 흑인은 나보다 더 잘산다. 내가 백인인데도 말이다.


2. 만약 일부 흑인이 당신보다 더 잘산다면 당신에게는 백인의
특권이 없다.

3. 따라서 나는 백인의 특권을 갖고 있지 않다.

논리적 함축으로부터 어떤 결론을 이끌어 내는 과정을 추론이라고 한


다. 이 추론 규칙은 논리를 사용하는 데 대단히 근본적인 것이어서 멋진
이름이 붙어 있다. 바로 <모더스 포넨스 modus ponens>다. <긍정 논법

>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다. 이것은 사실상 우리가 알려진 한 진리로부


터 또 다른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9장에서는 캐럴의
역설을 살펴보겠다. 캐럴의 역설은 우리가 이런 추론 규칙을 사용할 수
없는 경우에 빠져들게 되는 불가능한 상황을 탐험한다.) 모더스 포넨스는

만약 우리가 <A가 B를 함축한다>라는 사실을 안다면 다음과 같이 A로부


터 B를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한다.

1. A는 참이다.

2. A는 B를 함축한다.
3. 따라서 B는 참이다.

위에 든 사례에서 결론은 <나는 백인의 특권을 갖고 있지 않다>이다.

이제 결론이 거짓일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다. 하나는 <1>이 거짓인 경


우다. 그렇다면 당신이 모든 흑인보다 잘산다는 의미가 된다(아니면 당신
이 백인이 아니거나). 다른 하나는 <2> 자체의 함축이 거짓인 경우다. 우
리의 사례에서 일부 사람은 <2>가 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백인

의 특권이 무슨 의미인지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이는 허수아비 논증의 오


류다. 즉 한 논증을 똑같지는 않지만 무너뜨리기 훨씬 쉬운 다른 논증(허
수아비)으로 대체하고 그다음부터 적절한 절차에 따라 무너뜨리는 것이
다. (동치를 다루는 14장에서 허수아비 논증에 대해 다시 살펴보겠다.) 백

인의 특권은 모든 백인이 백인이 아닌 모든 사람보다 더 잘산다는 뜻이


아니다. 백인이 아닌 사람이 똑같은 상황에서 백인이었다면 사회에서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핵심은 <A>와 <A가 B를 함축한다>라는 진술이 함

께 작동해서 진술 B를 추론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따라서 진술 B가 참이


아니라면 그것은 A가 참이 아니거나, <A가 B를 함축한다>가 참이 아니라
서 생기는 일이다. 함축이 참이 아닐 가능성은 간과될 때가 많다. 다음 장
에서는 여러 요인이 함께 결합해서 결과를 만들어 내는 방식 그리고 때로
는 일부 요소가 간과되는 바람에 특정 사람이나 환경이 부당하게 비난의

초점이 되는 경우를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

대우
나는 논리적 힘의 상당 부분은 유연성에서 오며, 유연성은 서로 다른

사물을 동치인 관점에서 보는 능력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부정이 함축과


어떤 식으로 상호 작용을 하는지 이해하는 것도 그런 방법을 알려 준다.

위의 논증에서 다음과 같이 믿는 것은,

일부 흑인이 한 백인보다 더 잘산다면


그 백인은 백인의 특권을 갖고 있지 않다.

이렇게 믿는 것과 동치다.

당신이 백인의 특권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모든 흑인들보다 잘산다.

두 번째 진술은 첫 번째 진술과 논리적으로 동치다. 즉 두 번째 진술은

첫 번째 진술로부터 유도되어 나오지만, 첫 번째 진술도 두 번째 진술로

부터 유도되어 나오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대체가 가능하다는 의미다(하


지만 비논리적인 사람의 눈에는 두 진술이 강조하는 바가 살짝 다르게 느

껴진다). 예를 들어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이 외국으로 여행을 간다면 반드시 여권을 갖고 있어


야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동치다.


당신이 여권을 갖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외국으로 여행을
갈 수 없다.

하지만 이 두 진술이 감정적으로는 살짝 다르게 다가온다. 첫 번째 버


전은 여행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에 관한 진술이라면, 두 번째 버전은

여권이 없을 때 무엇을 할 수 없는지에 관한 진술이다. 이 둘은 논리적으

로는 동치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전하는 바가 조금 다르다.


이렇게 서로 동치인 논리적 함축의 쌍을 <대우( 對偶 )>라고 부른다. 다음

의 함축을 가지고 공식적으로 새로운 진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A⇒B

위 진술의 대우 진술은 다음과 같다.

B가 거짓이다. ⇒ A가 거짓이다.

이 진술은 원래의 진술과 논리적으로 동치다. 이는 원래의 진술이 참이

면 대우도 항상 참이고, 원래의 진술이 거짓이면 대우도 항상 거짓이라는


의미다. 이것을 역과 혼동하면 안 된다. 원래 진술의 역은 다음과 같다.

B⇒A
이 진술의 참/거짓은 원래의 진술과 논리적으로 독립적이다. A와 B를
각각 부정해서 얻는 진술과도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A가 거짓이다. ⇒ B가 거짓이다.

이것은 역의 대우다. 따라서 역과 동치다.

다음과 같은 진술을 볼 때 사람들은 흔히 A와 B를 각각 부정하는 오류

를 범한다.

당신이 미국 시민이라면
당신은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살 수 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바꿔 버린다.


당신이 미국 시민이 아니라면
당신은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살 수 없다.

마지막으로 대우를 부정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

이 진술은 위에 나온 그림 그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함축이 거짓

인 경우에는 논증이 망가졌다는 사실 말고 그로부터 다른 그 무엇도 추론

해 낼 수 없다.

증거
논리적 함축은 한 조각의 증거보다 훨씬 강력하다. 논리적 함축은 무언

가가 분명하게 참이라는 의미다. 반면 증거는 무언가가 참일 가능성을 높

이는 데만 이바지할 뿐이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다. 증거는 무언가가 참


이라는 논리에 기여할 수 없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논리적 정당화뿐

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모든 중국인은 수학을 잘한다고 생각한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나처럼 중국인으로 보이는 수학자를 볼 때마다 이것이 자신


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데 보탬이 된다고 여길 것이다. 그럼 당신은 다음
과 같은 함축을 떠올리는 것이다.

중국 출신이라는 것은 수학을 잘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중국인처럼 생긴 수학자를 만날 때마다 당신은 이것을 증거로 모은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확증 편향에 빠져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만 당신의 눈에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다. 한마디로 증거는 논리를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 대우

진술을 처리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이 생겼으니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확


인할 수 있다. 이 진술의 대우는 다음과 같다.

수학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은 중국 출신이 아님을 함축한다.

<증거가 논리에 기여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이것은 당신이 중국

출신도 아니고 수학자도 아닌 존재를 접할 때마다 그것이 자신의 이론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중국산 거위나 프랑스산


마카롱을 봤을 때 이것은 중국 출신 사람이 모두 수학을 잘한다는 당신의

이론을 뒷받침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동물이나


음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항의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

히 이것은 당신이 미국 가수나 영국 축구 선수를 만났을 때 그들이 중국


출신 사람이 모두 수학을 잘한다는 당신의 이론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미

다.

직관적으로 보면 이것은 중국 출신 수학자를 만날 때마다 당신의 이론


에 보탬이 된다는 이야기보다 훨씬 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양쪽 모두 똑같이 말이 안 된다.

과학에서의 부정

증거에 대해 생각해 보는 중이니 과학 실험에서 증거가 어떤 역할을 하


고, 이것이 부정과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하는지 헤아려 보는 것이 좋겠다.

결국 과학은 수학이나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무엇이 참인지 보여

주는 틀뿐만 아니라 무엇이 참이 아닌지 보여 주는 틀도 가지고 있다.


과학 실험은 보통 가설에서 출발한다. 가설이란 과학자가 참일지도 모

른다고 생각하지만 그 진릿값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진술을 말한다. 학


교의 과학 실험에서는 보통 과학자들이 아주 오래전에 밝혀낸 단순한 내

용을 가설로 삼는다. 그래서 나는 학생 시절에 항상 과학 실험이 억지스

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실험을 하고 싶은 열의가 없다 보니 내 과


학 실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차라리 과학 실험이 과학적 방법론을 탐

험하고 우리에게 진리라고 말해 준 내용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그래도 정말 괜찮았다고 기억하는 한 실험은 훅의 법칙에 관한 실험이

었다. 그 실험의 가설은 이러했다. 「스프링이 늘어나는 길이는 그 아래 달


려 있는 무게와 비례한다.」

그럼 과학자들(혹은 학생들)은 이 가설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아 나설


것이다. 이 경우 실험은 서로 다른 다양한 스프링을 고르고 거기에 서로

다른 다양한 무게를 달아 측정해 본 후에 데이터를 분석하는 과정을 거치


게 된다. 통계학 분야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가설을 증명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의 종류가 무엇인지를 다룬다. 적절한 종류의 데이터를 확보하게

되면 이런 형태의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95퍼센트 신뢰 수준에서
이 가설이 참이라 주장할 수 있는 증거가 충분하다.

만약 당신이 적절한 데이터를 확보하지 못하면 논리적 결론은 이 진술


의 부정이 되어야 한다.

95퍼센트 신뢰 수준에서
이 가설이 참이라 주장할 수 있는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은 가설이 거짓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과는 논리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거짓이라는 결론은 부정이 아니라 반대가 된다.


한 가설을 뒷받침할 증거가 불충분한 경우, 이것은 그 진릿값을 아직 알

수 없다는 의미다. 어쩌면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나은 실험이 필요할 수도 있다. 위의 사례에서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
한 것은 가설을 새로 다듬는 것이다.

최대 한계 부하 안에서 스프링이 늘어나는 길이는


그 아래 달려 있는 무게와 비례한다.

이것이 훅의 스프링 법칙이다. 일단 가설이 진리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확립되면 보통 법칙의 지위로 승격된다. 과학 법칙은 과학에서 용인하는


신뢰 수준 안에서 아마도 참일 것이라는 판단이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이것은 논리적 진리와는 다르다. 하지만 논리적 진리는 과학적 진리와 상

호 작용을 한다. 우리는 만약 법칙이 참이라면 그로부터 논리적으로 다양


한 것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하는 식으로 과학적 법칙에서 논리적으로 나

아간다.
가끔 사람들은 과학 실험에서 언급하는 퍼센트의 신뢰 수준을 지적하

며 이것은 과학 법칙이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다는 말이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적 방법론 그리고 통계와 확률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무언가가 50퍼센트의 확률로 참이라면 정

말 결론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것이 참 혹은 거짓


이라는 가정하에 행동에 나서지 않고 더 많은 데이터가 입력되기를 기다

리는 편이 현명하다. 하지만 무언가가 95퍼센트의 확률로 참이라면 여전

히 참이 아닐 확률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과학


자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바탕으로 퍼센트의 경계를 고른다. 이번에도 역
시 이것은 긍정 오류와 부정 오류의 문제다. 참이 아닌데 참이라고 말하

는 것이 더 안 좋을까, 참인데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안 좋을까? 약


물의 부작용처럼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는 높은 신뢰 수준을 사용하

지만, 논리 외의 영역에서는 절대적 확실성이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에

100퍼센트 확실하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100퍼센트 확


실해야만 활동에 나선다면 아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반면 무언가가 참일 확률이 1퍼센트라면 사실 이것은 거짓임이 거의


확실하지만 그래도 참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나의 훌륭한 수학

선생님인 머들 선생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전문 통계학자로 일

할 때 만약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할 적절한 데이터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


에 올바른 부정은 <이 가설을 뒷받침할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니 이 문제

를 더 추적해 보려면 더 많은 연구비가 필요하다>라고.


5장

비난과 책임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은 어떻게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2017년 4월 9일에 유나이티드 항공의 3411번 항공편이 초과 예약되

었다. 그래서 항공사에서는 특정 승객을 비행기에서 내리게 했으나 그 승

객은 자발적으로 순순히 내려가지 않았고, 보안 요원들이 그를 강제로 끌


어내리다가 그 과정에서 승객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공분이 일었

는데, 늘 그렇듯 누구의 잘못인가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서로 엇갈린


주요 관점은 다음과 같다.

1. 비이성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유나이티드 항공의 잘못이다.

2. 요청에 따라 자리에서 내리기를 거부한 승객의 잘못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주 많은 기여 요인이 작용했다. 한 가지 기여 요인


만 가지고 그것 때문에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인

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한 가지 이상의 요인으로 야기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한 가지 요인, 특히 한 사람을 지목해서 손가락질하며 비난하는

습성이 있다.

학생이 시험을 못 봤다면 그것은 학생이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

문일까? 교사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일까? 양쪽 모두 어느 정도


는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정말로 뛰어난 교사라면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

부해야겠다는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을 텐데, 이렇게 말하니 교사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소리 같다. 반면 정말 훌륭한 학생이라면 교사가 영감을

불어넣어 주지 않았더라도 알아서 열심히 공부했으련만, 이렇게 말하니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고 학생만 탓하는 소리 같다. 오늘날과 비교하며 <


좋았던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 만화가 있다. 좋았던 옛날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장면에서는 부모와 학생이 교무실에 들어와 있고, 교사가 시험을 못

본 학생을 혼내고 있다. 반면 오늘날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장면에서는 다

른 것은 다 똑같은데 이번에는 학생의 나쁜 성적을 두고 부모가 교사를

혼내고 있다. 어느 정도의 진실이 담겨 있는 만화다. 누구를 비난할 것인

가 하는 문제는 결국 누구의 책임이냐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비난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것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의미일까?


좀 더 보편적인 또 다른 사례는 인간관계가 틀어졌을 때다. 때로는 양

쪽 모두 서로의 잘못이며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는 데 뜻을 같이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정말 드문 것이 현실이다. 보통은 누군가가(사실

은 양쪽 모두) 상처를 받고,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을 비난한다. 하지만 많

은 경우(학대의 경우는 제외하고) 양쪽 모두 관계의 파탄에 어떻게든 기


여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고, 이렇게 틀어진 이유를 이해하는 핵심은 두

사람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었는지 그리고 각자가 기여한 부분이 어떻

게 엮여 관계가 파탄 났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경우에 우리는 그 요소를 전부 이해하고, 이런 요소들이 어떻

게 이어져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바로 이 장에서 살펴볼 내

용이다.

상호 연결

시험을 못 본 학생의 사례로 다시 돌아가서 그 상황을 설명해 줄 논리

를 찾아보자. 여기서 핵심은 학생이 기여한 부분과 교사가 기여한 부분이

결합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학생이 공부를 더 열심히 했으면

시험을 통과했겠지. 그러니까 학생의 잘못이야.」 누군가는 또 이렇게 주

장할 것이다. 「학생은 할 만큼 했어. 하지만 제대로 가르침을 못 받았으니


시험을 잘 볼 턱이 있나. 따라서 교사의 잘못이야.」 얼마 전, 옥스퍼드 대

학교를 나온 한 사람이 자기가 수입이 없다며 옥스퍼드 대학교를 고소했

다.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자기가 최고 학점을

받지 못하는 바람에 졸업 이후로 몇 년 동안 수입이 없었으니 이것이 모

두 옥스퍼드 대학교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지만 나중에 가

서 고소를 하는 것보다는 형편없는 교육을 해결할 더 나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두 가지 요인이 결합해서 한 가지 결과를 야기하는

경우, 두 요인 중 하나가 달라지면 그 결과도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둘 중 하나가 개별적으로 그 결과에 책임이 있다는 의미

는 아니다. 그 결과를 야기한 것은 두 요인의 결합이다. 이 상황에 적용되

는 논리는 접속의 논리다.

논리적 연결사 logical connective는 논리적 진술을 서로 연결해서 더

크고 복잡한 진술을 만들어 내는 방법이다. 수학의 보편적 원칙은 복잡한

무언가를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더 단순한 부분들로 쪼개면 더 쉽게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단순한 기본 구성 요소를 파악하고, 그것들을

한데 묶는 방법만 깨치면 된다. 논리적 연결사는 단순한 논리적 진술들을

더 복잡한 진술로 이어 붙이는 방법이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사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

다>를 예로 들어 보자. 여기서 연결하는 말은 <그리고 and>이다. 어떻게


했으면 학생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학생이 열심히 공부

를 했다. 또는 교사가 제대로 가르쳤다>라면 그랬을 것이다. 여기서 연결

하는 말은 <또는 or>이다. 이 두 가지 단어가 논리에서 가장 기본적인 논

리적 연결사다.

<그리고>와 <또는>은 해로울 것 없는 짧은 단어일 뿐이지만 곳곳에서

논리의 오류를 발생시키는 주범이다. 특히 함축 및 부정과 결합될 때 오

류를 많이 일으킨다. 수학에서 이들을 연결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서로 다

른 진술을 연결해서 새로운 진술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조각을 이어

붙여 낚싯대를 조립하는 일과 비슷하다. 수학자들은 작은 것으로부터 복

잡한 것을 구축하는 것을 좋아한다. 작은 조각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이

어 붙이는 단계를 이해함으로써 정말로 크고 복잡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는 개념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복잡한 상황을 파악하는 데 좋은 방법이

다. 그 상황을 작은 부분들로 쪼갠 다음 그것들을 이어 붙이는 방법을 깨

치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A와 B라는 두 개의 진술이 주어졌을 때 <그리고>

와 <또는>을 이용함으로써 두 가지 새로운 진술을 얻는다.

1. A 그리고 B가 모두 참이다.

2. A 또는 B가 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상에서 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법과 관련해서 문제

가 생긴다.

실생활에서는 <그리고>라는 단어가 문장 속에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지

만 그런 문장도 연결사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동등한 문장으로 고칠 수 있

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은 백인 남성이다>라는 진술은 <그 사람은 백인이

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남성이다(그 사람은 백인이고, 남성이다)>로 바꿀

수 있다. 그와 유사하게 <이것은 인종 차별적인 비방이다>는 <이것은 인

종에 관한 진술이다. 그리고 비방이다>라는 의미다. 일상 언어에서 무언


가를 진술할 때 이렇게 길게 늘여서 말하면 현학적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논리를 분명하게 해주기 때문에 논리에서는 이것을 현학적인 것이 아니

라 정확한 것이라 쳐준다. 때로는 일상 언어에서도 뜻을 명확히 할 필요

가 있다. 한번은 내가 미국에 갔다가 <그 사람은 검은 택시 운전사야 He

is a black cab driver>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웃기다는 표정


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내가 <그는 검은 피부의 흑인이고, 택시 운

전사야>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한 말의 뜻은

<그는 검은 택시의 운전사야>였다. (검은 택시라는 것은 미국에서 통용되

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를 넣어서 해석하는 것이 뜻을 더 분명

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내가 요크셔 <샤르도네 와인 식초 감자 칩

Chardonnay wine vinegar crisps>을 처음으로 한 봉지 샀을 때도 나

는 식품 성분표를 읽고 이것이 <샤르도네 와인으로 만든 식초>가 아니라


<샤르도네 와인과 식초>라는 의미임을 깨닫고 재미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또는>의 수학적 개념은 <그리고>보다 조금 더 까다롭다. 일상생활에

서 사용하는 용도와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홍차 또는 커피

를 드시겠어요?>라고 물어보면 홍차를 달라거나, 커피를 달라거나, 둘 다

됐다는 대답을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현학적인 수학자에게 이렇게 물어

보면 그는 <예> 혹은 <아니오>로 대답하기 쉽다. 그 이유는 수학에서 <또

는>은 두 진술 A와 B를 이어 붙여 새로운 진술인 <A 또는 B>를 만들어


내는 논리적 연결사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진술은 A나 B가 참이거나,
양쪽 다 참인 경우에 참이 된다. 이것은 일상 언어에서 일반적으로 사용

하는 용법과 다르다. 일상 언어에서 <또는>은 양쪽 모두 참일 가능성은


배제된 의미일 때가 많다. 만약 메뉴판에 음료의 가격이 적혀 있고 그 옆

에 <홍차 또는 커피>라고 적혀 있으면 둘 중 하나만 고르라는 말이지, 그


가격에 둘 다 마실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닐 거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차

이 때문에 <또는>은 논리적으로 불분명하다. 우리는 맥락을 통해 말의 정


확한 의미를 추론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비행기를 탈 때 수하

물이 너무 크거나 너무 무거운 경우에는 추가로 수하물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이 맥락에서 보면 수하물이 너무 크고 동시에 너무 무거운 경우에

도 추가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혼동할 일은 없다. 그래서 이런 상


황은 <홍차나 커피> 같은 상황과는 다르다.
그와 비슷하게 <당신이 부자이거나 남자라면(혹은 둘 다라면) 당신은

사회적 지위가 높다>, <당신이 레즈비언이나 게이나 양성애자나 트랜스


젠더나 퀴어나 간성이면 혹은 그중 한 가지 이상이라면(예를 들어 트랜스

젠더이면서 레즈비언) 당신은 성 소수자(LGBTQI)다>도 마찬가지다.


논리와 수학은 우리가 맥락에 의존해서 무언가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없도록 모든 부분에서 불분명함이 없을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렇게 <또는>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두 가지 방법의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

양쪽 모두가 해당될 가능성을 배제하는 <또는>은 <배타적 논리합>이라고


한다. 당신이 홍차 또는 커피를 제공하지만 양쪽 다 제공하지 않는 경우

의 <또는>이 배타적 논리합이다. 양쪽 모두 해당될 가능성을 포함하는 <


또는>은 <포함적 논리합>이라고 한다. 따라서 수하물이 너무 무겁거나,

너무 무거울 경우, 혹은 양쪽 모두에 해당할 경우에는 수하물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한다면 이것은 포함적 논리합에 속한다. 일상 언어에서는 이런

구분을 맥락을 통해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둘을 일


일이 따지면 정확하다는 소리보다는 지나치게 현학적이라는 소리를 듣기

쉽다. 하지만 논리에서는 맥락을 추측하지 않고 이런 구분을 명확하게 해


야 하기 때문에 이런 구분은 쓸데없이 현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확한 것이
된다. 따라서 <홍차 또는 커피를 드시겠어요?>라는 질문에 수학자가 <예>

라고 대답하면 그것은 <네, 홍차 또는 커피, 또는 둘 다 마시겠어요>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수학자가 너무 현학적으로 구는 경우라 말하
고 싶다. 실제로는 상황을 명확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더 애매하게 만
들기 때문이다.

수학에서는 <또는>이라고 하면 포함적 논리합을 의미한다고 초기에 설


정되어 있다. 곧 볼 테지만 이것이 논리적으로 더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

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또는>이 배타적 논리합으로 초기에 설정


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물론 <~ 아니면 ~>이라는 말로 배타적 논리합을
강조해서 표현하는 방법도 있다. 함축과 부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

고>와 <또는>도 벤 다이어그램을 통해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

벤 다이어그램
일반 대중보다 평균적으로 소득이 적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고 가

정해 보자. 이런 불이익으로 흑인도 고통받고 여성도 고통받지만 가장 큰


불이익을 받는 사람은 흑인이면서 여성인 사람이라고 치자. 그럼 이것을

벤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할 수 있다.


가운데 중첩되어 있는 부분이 두 가지 모두 참인 경우에 해당한다. 집
합론과 벤 다이어그램의 언어로는 이것을 교집합 이라고 하고, 이 경우는

흑인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신에 만약 최악의 불이익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소득 면에서 불이

익을 겪고 있는 사람을 고려하려면 흑인이면서 여성인 사람뿐만 아니라,


흑인이면서 여성은 아닌 사람과, 여성이면서 흑인은 아닌 사람도 포함시

킬 필요가 있다. 그럼 다음의 도표에서 보이는 영역이 나온다. 벤 다이어


그램의 언어로는 이것을 두 집합의 합집합 이라고 부른다.
이제 <그리고>와 <또는>이 부정과는 어떻게 관련되는지 알아보자.

<그리고>와 <또는>의 부정

두 가지 요인이 한 가지 결과를 야기하는데 사람들이 어느 쪽을 비난해


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상황을 이미 몇 가지 살펴보았다. 그런

데 문제는 결과를 일으키는 논리가 결과를 예방하는 논리와 똑같지 않다


는 것이다. 한 결과를 야기하는 데 두 요인이 필요하다면 한 요인만 바꿔

도 결과를 막을 수 있다. 논리의 맥락에서 보면 이것은 <그리고>를 포함


한 진술의 부정에 관한 이야기다.

예를 들어 만약 당신이 백인 남성이 아니라면 당신은 백인이 아닌 남성


일 수도 있고, 백인 여성(혹은 더 일반화해서 남성이 아닌 백인)일 수도

있다. <백인>과 <남성>이라는 부분을 양쪽 모두 부정하면 백인도 남성도


아닌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벤 다이어그램에서도 확인

이 가능하다. 교집합 바깥쪽에 회색으로 음영 처리된 영역이다.

이것은 세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1. 남성이 아닌 백인
2. 백인이 아닌 남성
3. 백인도 남성도 아닌 사람들

즉 백인이 아니거나, 남성이 아니거나, 또는 양쪽 다 아닌 사람들로 구

성되어 있다. 이것을 일반화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A 그리고 B>가 거짓이라는 의미는


A가 거짓이거나, B가 거짓이거나,
또는 양쪽 모두 거짓이라는 의미다.

우리가 포함적 논리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데 동의하면 <또는 양


쪽 모두>라는 말을 항상 할 필요가 없다.

<A 또는 B>는 어떨까? 다시 소득 불이익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당신


이 흑인이거나 여성이면 유럽과 미국에서 태어날 때부터 불이익을 받는

다는 문제다. 이런 특정 불이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흑인이 아니고, 여성


도 아니어야 한다(물론 그래도 가난하다든가 몸이 아프다든가 하는 다른

불이익이 여전히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벤 다이어그램의 바깥쪽 부분이다.

이를 일반화하면 이렇다.
<A 또는 B>가 거짓이라는 의미는
A도 거짓이고, B도 거짓이라는 의미다.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원래 진술: 당신은 흑인이고 여성이다.

부정: 당신은 <흑인 그리고 여성>이 아니다. 그럼 당신은 흑


인이지만 여성이 아니거나, 여성이지만 흑인이 아니거나, 또는
흑인도 여성도 아니다.

▪ 원래 진술: 당신은 흑인 또는 여성이다.


부정: 당신은 <흑인 또는 여성>이 아니다. 그럼 당신은 흑 인
이 아니고, 당신은 여성이 아니다. 더 자연스럽게 말하자 면 당
신은 흑인도 여성도 아니다.

<그리고>를 부정해서 <또는>이 되든, <또는>을 부정해서 <그리고>가


되든 간에 만족스러운 관계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또는>이 양쪽에서
모두 포함적 논리합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수학자들이 이런 종류의 <
또는>을 초기 설정값으로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래야 <또는>과 <그

리고>가 아주 깔끔한 관계를 이루기 때문이다.12


이런 벤 다이어그램들은 집합이 두 개(아니면 기껏해야 세 개)밖에 나
오지 않는 아주 기본적인 상황에서만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상황에는 더
많은 구성 요소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논리의 흐름을 도표로 그리는 작

업이 더 빛을 발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논리는 명제 논리라는 것이다. 이 논리는 명제
(혹은 진술), 연결사, 진릿값이 수반된다. 이것은 조금 단순한 논리이지만
그래도 비난이나 책임을 분석할 때는 인간과 관련된 문제에서도 상당히

효과적이다. 이제부터 그 부분을 확인해 보자.

비난
요인 A와 B가 한 상황을 야기한다면 둘 중 어느 쪽을 비난해야 할까?

이제는 <그리고> 진술을 부정하려면 개별 진술 중 어느 하나만 부정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말은 이 진술이 참인 데는 양쪽 요인 모두가
기여해야 하지만, 어느 한쪽만 부정해도 이 진술을 거짓으로 만들 수 있
다는 의미다.

만약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면 이는 다음의 두 가지 요인이 뒷


받침한 결과다.

A: 내가 유리잔을 떨어뜨렸다.

B: 바닥이 딱딱했다.
유리잔이 깨진 것은 이 두 가지 요인의 조합이다. 내가 유리잔을 떨어
뜨리지 않았다면 유리잔은 깨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또한 바닥이 그

렇게 딱딱하지만 않았어도 유리잔은 깨지지 않았을 것이다. 두 요인 중


하나만 부정해도 <A 그리고 B>라는 진술이 부정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요인 중 하나가 그 자체만으로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두 요인의 조합이 비난을 받아야 한다.

실제로 유리잔을 깨지게 한 요인은 다른 것도 많다. 유리잔이 약해서,


중력의 작용 때문에 등등. <그리고> 연결사를 이용해서 우리가 원하는 진
술을 마음대로 이어 붙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도 부정은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A 그리고 B 그리고 C 그리고 D>가 거짓이다.

이것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A가 거짓이거나, B가 거짓이거나,
C가 거짓이거나, D가 거짓이다.

즉 어느 한 가지 요인만 부정해도 진술 전체가 부정된다. 예를 들어 당


신이 돈 많은 이성애자 시스젠더 백인 남성이 아니라면 그 이유는 당신이
돈이 많지 않아서, 또는 이성애자가 아니어서, 또는 시스젠더가 아니어

서, 또는 백인이 아니어서, 또는 남성이 아니어서일 수 있다. 이 특권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잃는다면 당신은 이런 유형의 특권을 통째로 가질 수
없게 되지만, 당신이 실제로 그 모든 특권을 갖고 있다고 해도 어느 하나

가 다른 특권들보다 <책임이 더 크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일을 두고 비난해야 할 대상을 고려할 때 이것이 미묘하지만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학생이 시험을 못 본 이유로는 다른 많은
요인을 떠올릴 수 있다. 시험이 너무 어려웠거나, 시험 감독이 너무 깐깐

했거나, 통과 기준이 너무 높았거나, 학생이 마침 그날 아팠거나 등등. 이


가운데 하나만 바뀌었어도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란 이유로 그 요인 중 한
가지만 싸잡아 비난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그 결과를 야기한 것은 항
상 <그리고>라는 논리적 연결사로 이어진 그 모든 요인의 조합이다.

나는 소프트웨어 개발자 제시카 커 Jessica Kerr의 흥미로운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이것을 개인을 비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
템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따라서 비난을 개인에게 돌리려
논쟁하는 것보다는 시스템 안에서 이 모든 요소가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해

서 그런 결과를 야기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이런 사례 중 내가 좋아하는 하나가 J. B. 프리스틀리 Priestley의 희곡
『밤의 방문객 An Inspector Calls』에 나와 있다. 한 여성이 죽은 채 발견
되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문제나 직업적

인 문제에서 우연한 상호 작용에 이르기까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이들은 모두 진정으로 비난받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서로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그
리고>의 상황이다. 엄마와 아빠, 아들, 딸이 사회 그리고 온 세상과 더불

어 자기들끼리 그런 상황을 야기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시스템을 이해


해야 한다고 말했던 제시카 커의 의견에 적절한 사례인지도 모른다. 여기
서는 두 가지 시스템이 존재한다. 하나는 가족 그리고 가족 간의 상호 작
용(예를 들면 에릭은 이렇게 말한다. 「아빠는 아이가 자기한테 문제가 생

겼을 때 달려가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아빠가 아니에요.」)이고, 또 하나는


사회 그리고 사회가 가엾은 여인을 대하는 방식이다.

이혼
수학에 관한 책에서 이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리라고는 아마 예상치

못했을 테지만 인간관계가 파탄 나면 누구의 책임이며, 누가 비난을 받아


야 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때가 많다. 원만하게 헤어진 경우는
아마도 비난할 거리가 없는 탓일 것이다.
아주 단순하지만 고전적인 상황을 떠올려 보자. 어느 누군가가 바람을

피웠다. 이것이 자동적으로 관계를 파탄 내지는 않으니까 <바람은 이혼을


함축한다>는 완전히 논리적인 진술이 아니라 말하고 싶다. 하지만 한쪽이
바람을 피우고 상대방이 그것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결
국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알렉스와 샘이라고

부르자. 그럼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만들어진다.

A: 알렉스가 바람을 피웠다.


B: 샘이 알렉스를 용서하지 않는다.

X: 알렉스와 샘이 갈라선다.

샘과 샘의 친구들은 바람을 피운 알렉스를 비난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


면 알렉스(그리고 알렉스의 친구들)는 알렉스를 용서하지 않는 샘을 비난

할 수 있다. 바람을 피우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으


니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그 사람의 결점까지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물론 A와 B가 함께 작용해서 X를 야기한 것이지만 어쩌면 다른 요인들

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을 수 있다.

C: 두 사람이 부부 상담을 받기 거부했다. 또는……


D: 부부 상담을 받았지만 상담사가 별로였다.

하지만 알렉스가 애초에 바람을 피운 이유가 무엇인지도 물어볼 수 있


다. 어쩌면 알렉스가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
간인 데다 항상 천박한 욕망을 쫓는 인간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면

샘이 자기한테 너무 무관심해서 대단히 불행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샘은


왜 무관심했을까? 어쩌면 샘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너무 편안히 여기
고 원래 인간관계에 게으르고 무심한 사람이어서 그랬거나, 아니면 가족
의 비극을 겪어 비탄에 잠겨 있다 보니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알렉스
가 너무 냉정한 사람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럼 알렉스는 왜 그렇게
냉정했을까 등등으로 이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샘이 알렉스를 용서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물
어볼 수 있다. 어쩌면 샘이 비열하고 옹졸한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비합리적일 정도로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알렉스가 바람을 피운 방식 자체가 너무 가슴을 아프게 해서 도저히 용서
할 길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때때로 알렉스가 샘을 다른 면에서
도 워낙 안 좋게 대해 왔기 때문에 샘의 애정이 바닥나서 그랬을 수도 있
다. 하지만 그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등등으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일반적인 원리가 존재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한 사람이 스스


로 행복해지기 위해 무언가를 하면,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고통을 가한
다. 알렉스는 불행해서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바람을 피웠지
만, 그것이 샘에게 괴로움을 안긴다. 이것은 전형적인 제로섬 게임zero-

sum game이다. 제로섬 게임에서는 한 사람이 얻는 만큼 다른 사람은 반


드시 잃게 된다. 나는 수많은 해로운 인간관계가 결국 이 문제로 귀결된
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알렉스는 자기가 스스로를 위해 무언가를 하면 샘
에게 불만이 생기기 때문에 꼼짝 없이 갇혀 버린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

다. 샘이 자기를 아프게 했다며 알렉스를 비난하는 것이다. 하지만 알렉


스의 행복이 샘을 아프게 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이때의 진짜
문제는 바로 제로섬 관계다.
여기서의 결론은 극단적인 학대의 경우를 제외하면 그 상황을 만들어
낸 원인이 한 가지 요인으로 귀결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함축과 상호 의존으로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요소들이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시스템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경우 그 시스템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다.

교육 제도
내가 보기에는 교육 제도에 아주 문제가 많다. 자금 지원, 기대, 목적,

기준 등등에서 문제가 있다. 사람들이 수학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바로 이


교육 제도 때문이라 확신한다.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방식 때문에 많
은 사람들이 수학 공포증에 걸린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교사들을 비난하
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교사들의 잘못일까? 교사들은 자기에게

부과된 임의의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온갖 압박에 시달린다. 그리고


이 기준은 시간의 압박을 받으며 보는 시험으로 평가된다. 결국 교사도
시험 결과로 판단받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들 자신도 <시험>을 염두에
두고 학생을 가르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문제는 초등학교
교사는 보통 전 과목을 가르쳐야 하는 상황인데, 이 교사들이 학생 시절

에 특별히 수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흥미롭고 개방적인 형식으로 수학


을 가르치는 일에 신통치 않으리라는 데 있다. 그럼 일반 초등학교 교사
가 가르치기에 수학 수준이 버거워지는 고학년 시기가 되어도 여전히 전
문 수학 교사가 없다면 학생들도 수학에 관심을 잃게 된다. 정확히 말하
면 이것은 교사의 잘못이 아니다. 교사들에게 이런 부담을 안긴 시스템이
문제다.
수학을 향한 부모의 태도도 아동의 수학 공포증에 영향을 미친다. 지나

치게 수학 공부를 강요해서 그럴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이 수학 공포증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태도 역시 부모들이 경험한 교육 제
도에서 오는 것이라 믿는다.

유나이티드 항공 승객

서로 연결된 요인들에 대한 이런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유나이티드


항공 승객이 비행기에서 끌려 나갔던 끔찍한 사건을 분석해 보자.
제일 단순한 논증은 다음의 두 요인으로 귀결된다.

1. 비이성적으로 폭력을 사용한 유나이티드 항공의 잘못이다.


2. 요청에 따라 자신의 자리에서 내리기를 거부한 승객의 잘못
이다.

논증을 살짝 더 미묘하게 파고들면 폭력을 사용한 주체는 유나이티드


항공이 아니라 보안 요원이었으니까 그들의 잘못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애초에 승객들에게 자리에서 내리기를 요청하는 형편
없는 정책을 실시한 유나이티드 항공의 잘못이었다고 말한다. 사이먼 젱

킨스Simon Jenkins는 『가디언Guardian 』 에 글을 써서 여행을 다니는


모든 사람을 비난했다. 항공사의 부당한 대우를 참고 견뎌 온 우리 모두
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항공사들이 초과 예약 정책을 펴게 된 것
은 예약해 놓고 비행기를 놓치는 승객들의 잘못이기도 하다.

이 주장 중 일부는 다른 주장들보다 더 미묘하기는 하지만 사실 이번에


도 역시 이 모든 것이 기여 요소로 작용한다. 이 상황을 야기한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

1. 비행기 좌석이 예상치 못하게 초과 예약되었다.


2. 몇몇 승무원이 다른 비행기 편에 탑승해서 일을 하려면 루이
빌로 가야 했다. 그래서 항공사에서는 비행기에 탄 승객을
내리도록 지시했다.

3. 비행기에서 내리는 대가로 돈을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어느


승객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4. 유나이티드 항공에서 돈을 제공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5. 유나이티드 항공에서 특정 승객을 지목해서 비행기에서 내려
달라고 요구했다.

6. 승객이 그 요구를 거부했다.


7. 유나이티드 항공에서 보안 요원을 불렀다.
8. 보안 요원들이 극단적인 폭력을 이용해서 승객을 끌어내렸
다.
이 문제를 더욱 자세히 분석하기 위해 비행기 편이 그렇게 초과 예약된
이유에 의문을 가져 볼 수 있다. 주말 연휴였나? 항공사 측에서는 왜 그리

급하게 루이빌로 승무원들을 보내야 했을까? 직원을 배치할 때 충분히 여


유롭게 배치하지 않았나? 왜 돈을 준다는데 아무도 받겠다고 하지 않았을
까? 돈이 너무 적었거나, 사람들이 너무 욕심이 많았던 것일까? 유나이티
드 항공에서는 왜 더 많은 돈을 제시하지 않았을까? 너무 인색하게 굴었
나? 유나이티드 항공에서는 왜 하필 그 승객을 지목했을까? 그들 말로는

항공사 우수 고객인지 여부와 <다른 요인>을 바탕으로 지목한 것이라고


한다. 그 다른 요인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인종 차별을 한 것일까? 하필
아시아인 남성을 고른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승객은 왜 거절했을까? 그 승객은 자신이 의사이며 병원의 근무 교대

시간을 맞춰야 했다고 진술했다. 그럼 그에게 그런 근무 교대 시간을 지


정해 준 병원을 탓해야 할까? 하필 직장에 시간 맞춰 도착하는 것이 다른
많은 이들보다 더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의사를 고른 유나이티드 항공을
비난해야 하나?

왜 승무원들은 보안 요원을 불렀을까? 승객이 안전을 위협한 것일까,


유나이티드 항공이 과도하게 반응한 것일까? 그리고 보안 요원들은 왜 과
도한 폭력을 사용했을까? 사이먼 젱킨스의 주장으로 다시 주제를 돌려 보
면, 이것은 승객들이 초과 예약되고 유나이티드 항공이 의문스러운 정책

을 시행하는 이유를 밝히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 상황에서 논리적 연결과 흐름을 도표로 그려 볼 수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상황에 대해 신중하게 <왜?>라는 질문을 던져 보
면 복잡하게 얽힌 인과관계가 드러나고 한 가지 요인만 탓하는 것이 얼마
나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하게 한 가지 요소
만 비난하는 것과, 그 상황을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단순화하는 것이 똑
같지는 않다. 나는 중요한 요인을 찾아내는 것이 강력한 이성적 사고의

한 측면이라 생각한다. 그래야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 질문을 멈추

어야 할지 알고,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이 비행기에서 무슨 일이 일


어났고, 그런 일이 생기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작정하고 쓰면 아마 박

사 논문 하나 나오는 것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항공 산업에서


승무원들을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로 보내는 법을 비롯해서 비행기

좌석의 초과 판매에 관한 경제학과 통계학 그리고 이런 폭력적인 상황을

불러일으킨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파티에서 <내가 못 들어서 그런데 그 유나이티드

비행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라고 묻는다면 이런 분석 전체를 장

황하게 이어 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장을 시작


할 때 나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너무 길게 끌고 가거나, 사람들

이 원하는 것보다 너무 지나치게 자세한 부분까지 설명해서 상대방 눈이


저절로 감기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논리적이기는 해도 유용하지가 않다. 반면 지나치게 단

순화해서 기여 요인들을 누락하는 것 역시 별 쓸모가 없다.


온라인으로 토론할 때 보면 <팩트:>라는 단어가 앞에 붙거나 <그럼 간

단합니다>라는 말이 뒤따를 때가 많다. 하지만 사건이 그렇게 단순한 경

우는 드물다. 이런 식의 논리적 엉성함을 의심해 보아야 할 또 다른 문구


로는 <이야기 끝>이라는 말이 있다. 역시나 이번에도 그것이 이야기의 끝

인 경우는 드물다. 이 사건에 대해 이런 논평이 흔히 보인다. <하라는 대

로 하지 않은 그 사람 잘못이지. 이야기 끝!> 아니면 <비행기에서 끌려 나


가다가 부상당하고 싶지 않으면 내리라고 할 때 그냥 내리면 됩니다. 그

럼 간단합니다> 아니면 <팩트: 그 사람이 승무원의 지시를 따랐더라면 다


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상황보다 훨씬 더 복잡한 상황도 많다. 2016년 미국 대선 결과를 설

명하는 도표를 그려 보면 상호 연결된 요인들이 훨씬 복잡한 그물망으로


얽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내가 체중이 느는 이유를 도표로 그려 보면 훨씬 더 복잡해진다.


악순환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등장하는 도표에 점선으로 그려 넣

은 것이 악순환 부분이다.

어떤 일을 두고 누구를 비난해야 할지 토론할 때 보면 그 상황은 보통 <


그리고>의 상황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든 거기에 관여된 모든 사람이 상

황에 따른 자기만의 <그리고>로 연결되어 집단적으로 그 일을 야기한 것


이다. 그리고 보통 이들이 무슨 일을 했든 그것은 다시 시스템이나 사회
의 압력 등 다른 무언가에 의해 벌어진 것이다.
이 책 전반에서 나는 똑똑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되려면 그저 논리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유용하게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계속해서 강

조할 것이다. 우리는 <그럼 간단합니다>라는 표어에 <아니, 그렇지 않아


요>라고 대답하며 위에 나온 것처럼 상호 연결 관계를 보여 주는 커다란

다이어그램을 제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그냥 상황만 더

복잡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우리 주변의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는 데 중


요한 것은 그것을 더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요인을 무시하면서 단순화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무언가


를 더 쉽게 이해하려면 더 똑똑해지면 된다. 우리가 상호 연결성과 시스

템에 대해 더 잘 파악하면, 시스템을 알기 위해 그 시스템을 단일 요인으

로 환원하는 대신 시스템 전체를 어렵지 않게 하나의 단위로 인식하고 이


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은 논리적 진술처럼 명확하게 상호 작용을 하지는 않지만 그 상호


작용을 논리적 진술로 추상화해서 모든 일은 대체로 우리 모두의 책임이

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동굴에 혼


자 틀어박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아마도 지금

이 책을 읽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요인이나 한 사람을 손

가락질하며 비난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특히나 그럼으로써 자신이 책


임을 벗을 수 있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나는 시스템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라고 믿는다. 결과는 항상 시스템


전체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변화시킬 책임은 여전히 우리들

각자에게 달려 있다.
6장

관계

앞 장에서 우리는 사람이나 사건을 하나만 따로 떼어 생각하지 않고 상


호 작용이 일어나는 전체 시스템을 고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

보았다. 대상을 서로 간의 관계 속에서 고려한다는 개념은 현대 수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본 원리 중 하나다. 이런 부분이 항상 강조되어 온 것은


아니지만 20세기 중반 즈음부터 나온 상대적으로 새로운 연구 내용들은

이런 점을 전면에 내세운다. 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핵심은 사물


들과 사람들의 내재적인 특성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어

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것임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전


세계 국가들 간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에서, 어떤 관계 안에서 사람들 간

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다양한 수준과 규모의 일

에 모두 적용된다.

악순환
악순환은 상호 작용 조사가 중요한 상황 가운데 하나다. 이 부분은 앞

장에서 내가 체중이 느는 이유를 그린 도표에서 살펴본 적이 있다. 이 도

표의 작은 부분을 따로 떼서 내 감정과 체중 증가 사이의 상호 작용에 초

점을 맞춰 보자.

나는 분명 먹는 것으로 기분을 푸는 사람 emotional eater이다. 스트

레스를 받고 짜증이나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는 무언가를 꼭 먹는다. 하

지만 안타깝게도 과식을 하면 이것이 또 나에게 스트레스와 짜증, 화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악순환 고리에 빠지고


만다. 어떤 사람은 양쪽 화살표 모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분이 나쁘다

고 과식을 하지도 않지만, 과식했다고 기분이 나빠지지도 않는다. 한쪽

화살표가 문제가 되는 사람도 안타까운 경우이긴 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

원인이 결합되어 문제를 더 키우는 일은 없다. 두 화살표 중 하나를 깨뜨

리면 악순환을 막을 수 있다. 이 두 화살표를 <느낌>과 <행동>으로 분류

해 보자.
나는 이 두 화살표를 모두 깨뜨리려고 노력해 보았다. 나는 짜증이 나

면 먹는 것 말고 다른 일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내가 과식을 했다고 깨달

은 경우에도 그것 때문에 기분을 망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나는 전자보다

는 후자가 그래도 더 쉽다. 마감으로 정신이 없어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는 특히 그렇다. 먹는 것을 멈출 수는 있지만 그럼 일을 마무리할 수가 없

다. 하지만 나는 마감 기한을 맞춰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제때

원고를 넘기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악순환 속에는 더 많은 화살표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서로 필요로 하는


것이 조금 다른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가정불화가 그런 경

우다. 어쩌면 샘은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바랐던 반면, 알렉스는 존경받는

다는 느낌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알렉스는 존경받는다는 느낌이 들면 아

주 사랑이 넘치게 되는 반면, 샘은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들면 알렉스에게

커다란 존경심을 보여 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하면


다음에 나와 있는 악순환 고리를 따라 아주 빠른 속도로 문제가 커질 수

있다.

두 사람이 이 악순환 고리를 끊는 한 가지 방법은 이 화살표 중 어느 것

이 제일 깨기 쉬운지 살펴보는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화살표는 두 가

지 유형이 있다. 느낌과 행동이다.

느낌은 통제하기가 어렵지만 행동은 고칠 수 있다. 이 경우 문제 해결

의 열쇠는 알렉스가 존경받지 못한다고 느껴도 사랑을 보여 주거나, 샘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껴도 존경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이 악순환을 깨야 하는지를 두고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이 부

분을 따지다 보면 아주 억울한 기분이 들어 이 상황은 자기보다 상대방의

잘못이 더 크기 때문에 악순환을 먼저 깰 책임도 상대방에게 있다고 느끼

기도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두 사람이 함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노


력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좋은 방법은 내가 에머슨 에거리

치Emerson Eggerichs의 책 『그 여자가 간절히 바라는 사랑, 그 남자가

진심으로 원하는 존경Love and Respect 』에서 읽은 방법이다. 그 책에

서는 둘 중 누구든 더 성숙한 사람이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말한

다.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을 격앙시키는 사례가 있다.

미국 경찰이 흑인을 대상으로 보여 주는 잔인한 행동들이다. 이 악순환

고리를 아주 단순화해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단순화했지만 상황을 이

해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상황 자체는 아주 다르지만 질문은 비슷하다. 이 악순환 고리를 끊고

싶다면 어느 화살표를 깨뜨려야 할까?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느낌보다는


행동을 바꾸는 쪽이 더 쉬울까? 어떤 사람들은 흑인이 그냥 경찰이 지시

하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흑인이 경찰

의 지시를 잘 따르는데도 경찰에게 총을 맞은 사례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경찰이 공격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폭력적인 상황을 가

라앉히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구든 그 상황에서 힘을 가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이 악순환 고리를 끊을 책임이 있다는 관점도 있다.

일부 프로그램에서는 경찰과 지역 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발전시켜 양쪽

의 <느낌> 화살표를 바꾸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 모든 사례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이 순환 고리이며, 이 순환 고

리 자체가 근본 원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이런 상황을 야기한 하나의

근본 원인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임을 이해하는 것

이다.

범주론

범주론은 대상들 간의 관계를 주로 다루는 현대 수학의 한 분야다. 이

접근 방식에서는 우리가 어떤 대상과 관계에 초점을 맞출지 결정하는 일

부터 생각의 틀이 시작된다. 예를 들어 한 회사의 직원들을 떠올릴 때 우

리는 나이를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근무 기간, 혹은 회사에서의 직위

를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각각은 상호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서로 다

른 방식으로 그려 보게 하고, 그럼 우리는 이 서로 다른 색안경을 통해 어


떤 통찰을 얻을지 헤아려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높은 직위에 있

는데 나이는 어리면 반감이 생기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한다.

범주론에서 수학자들은 대상들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야

그냥 따로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음

을 알아냈다. 잠시 수로 돌아가 보자. 30의 인수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

다.

1, 2, 3, 5, 6, 10, 15, 30

여러 해 전 지루한 수학 수업에서 인수를 접했던 기억이 있는 사람은

인수의 <인> 자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질지 모르겠다. 사실 나도 수의 목


록을 일렬로 쭉 나열해 놓은 것을 보면 지겨워진다. 우리는 한낱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2차원의 종이 위에 1차원의 선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실제로는 더 높은 차원의 기하학을 갖고 있는 대상을 억지
로 1차원에 욱여넣어 생각할 때가 많다. 나는 내 책상 위 서류들을 깔끔하

게 정리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이 서류


들은 주제, 중요도, 연대 등등에 따라 맺어진 서로 간의 관계에 따라 그

자체로 3차원 공간 속에서 자연스러운 기하학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렇다.

30의 인수들 속에서도 또 어떤 것끼리 서로 인수인지 생각해 보면 그


안에 담긴 자연스러운 기하학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을 가계도 비슷하게
그려 보자. 그럼 이런 그림이 나온다.

이것은 정육면체의 구조임을 알 수 있다. 그냥 숫자 몇 개를 일렬로 나


열해 놓은 것보다는 훨씬 흥미로운 구조다. 그럼 이 수들의 위계를 그림

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제일 바닥에는 1이 온다. 그리고 다음으로 작은


인수 세 개가 온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작은 인수 세 개가 오고 그리고 가
장 큰 인수가 제일 위에 온다. 하지만 이렇게 배열한 이유는 수의 크기 때

문이 아니다. 어느 수가 소수인가를 기준으로 이렇게 배열했다.


두 번째 단계에 인수 2, 3, 5가 온 이유는 그 안에 1 말고는 들어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이들이 소수다(소수는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


어떨어지는, 1을 제외한 수를 의미한다). 그다음 단계에는 두 소수를 곱해

서 나온 수가 들어가 있다.
6=2X3
10 = 2 X 5
15 = 3 X 5

마지막으로 제일 위에는 세 소수를 곱한 값인3 0이 온다.

30 = 2 X 3 X 5

사실 이런 구조가 나오는 이유는 바로 30이 세 가지 서로 다른 소수의


곱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세 개의 소수를 곱해서 나오는 다른 수를 골

라 봐도 비슷하게 나온다. 그럼 위계가 수의 크기가 아니라 소인수와 관


련이 있음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42 = 2 X 3 X 7

42의 인수를 수의 크기순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2, 3, 6, 7, 14, 21, 42

이것을 위에 나온 그림처럼 배열하면 이렇게 보인다.


이제 1 바로 윗줄에 나온 수들이 그냥 수가 작은 순서대로 적은 세 개
의 수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 줄에는 세 개의 소인수 2, 3, 7이 온다. 6

은 7보다 작은 수지만 <6 = 2 × 3>이기 때문에 그 윗줄에 온다.


따라서 이 도표에 등장하는 위계는 수의 크기와 순서가 같지 않다는 사

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크기순으로 위계를 표현하려고 하면 도표를 이


런 식으로 비틀어야만 한다. 정육면체보다는 직육면체에 가까운 모양이

다.
이는 수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한 단계
더 추상적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다른 데에도 보다 폭넓게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확인한 내용을 보면 위계는 모든 수의 소인수로부


터 생겨난다. 각각의 수를 수 자체가 아니라 소수의 집합으로 표현하면

이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30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각각의 위치에 있는 수들을 곱하면 앞에서 실제 인수로 표시했던 도표

가 다시 나온다. 여기서 ø은 1의 소인수를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1은 어떤 소인수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13

42의 경우는 아래와 같이 나온다.

이 도표들을 비교하면 첫 번째 도표에 나왔던 5가 두 번째 도표에서는


모두 7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제 이 화살표들은 집합에서 원
소 하나를 누락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래서 {2, 3}에서 {2}로 화살표가

가면서 숫자 3이 누락되고, {2}에서 ø으로 화살표가 가면서 2가 누락되


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제 이 숫자들의 실제 값은 중요하지 않다. 이 도표는 임의의 세 대상


a, b, c로 구성된 집합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더 추상적으로 접근

하면 집합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도표가 나타난다.


이제 우리는 임의의 대상 세 개를 이 도표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여기서

부터는 이 틀을 아주 폭넓게 활용할 것이다.

특권
세 가지 유형의 특권을 생각해 보자. 부자, 백인, 남성. 앞에 나왔던 부

분 집합 도표를 따라 하면 다음의 관계 도표가 나온다.


여기서 강조를 하기 위해 온전한 설명을 덧붙일 수 있다. 남성을 비남
성, 백인을 비백인 그리고 부자를 빈민과 대비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과 같은 그림이 나온다.
제일 먼저 관찰해야 할 부분은 이것이 층별로 특권이 실제로 얼마나 큰
지 보여 주는 게 아니라 특권 유형이 몇 가지나 되는지 보여 주는 위계라

는 점이다. 따라서 제일 위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해당 특권 유형 가운데


세 가지를 모두 갖고 있고, 그 아래 줄은 두 가지, 또 그 아래 줄은 한 가
지를 갖고 있으며, 맨 밑에 있는 사람은 아무런 특권도 없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화살표는 각각 가리키는 한 유형의 특권을

직접적으로 상실했음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따라서 수직 화살표는 백인


에서 나머지 특성은 다 똑같은 비백인으로 옮겨 가면서 특권을 잃는 것에
해당한다. 이는 특권에서 중요한 측면이다. 모든 백인이 모든 비백인보다
더 큰 특권이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이 도표에서 부자 비백인 남성이

빈민 백인 비남성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사실 4장에서 이야기했듯이 어떤 사람은 미국에 있는 엄청나게 돈
이 많은 흑인 스포츠 스타를 보라고 지적하며 이것만 봐도 백인의 특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떠든다. 하지만 백인의 특권이


존재한다는 개념은 이 엄청나게 돈이 많은 흑인 스포츠 스타가 가난하고
집도 없는 백인 여성보다도 못산다는 뜻이 아니다. 그냥 그 스포츠 스타
가 똑같은 성공을 거두고 백인이기까지 하다면 사회에서 더 높은 지위를

누렸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이것은 앞에서 보았던, 흑인을 가혹하게 대하는 경찰의 사례와도 관련
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비극적인 죽음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그 희
생자가 흑인이어서가 아니라, 무언가 잘못된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주

장한다. 하지만 백인이 그와 똑같은(혹은 더 나쁜) 행동을 했는데도 총에


맞지 않았다면 이것은 백인의 특권이 작동한다는 증거다. 이런 경우에는
다른 상황은 똑같고 그 사람이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라는 차이밖에 없는
데도 더 나은 결과가 나온다.
이 도표에는 배울 수 있는 것이 더 많다. 42의 인수인 경우와 마찬가지

로 여기서도 이 도표에서의 위계 그리고 절대적인 특권의 양에 따른 위계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 도표에서 두 번째 줄을 살펴보면 여기에 속한
세 집단의 사람들이 사회에서 평등한 지위를 갖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
다. 예를 들어 부자 백인 여성이 부자 흑인 남성보다 사회적 지위가 더 높

고, 이어서 부자 흑인 남성이 빈민 백인 남성보다는 사회적으로 더 형편


이 낫다고(단지 빈부의 문제만이 아닌 다른 면에서) 많은 사람이 주장할
것이다. 결국 돈은 다른 문제점들을 완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에 비해 아직도 불리할 때가 많지만 백인 여성은 흑인보다는

훨씬 오래전부터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미국에서는 분명


그렇다. 그리고 이 역사가 사회에 남긴 유산은 아직도 계속 이어지고 있
다.
어쨌거나 우리의 목표는 불평등의 역사적 원인을 규명하자는 것이 아

니라 그 상황에 해당하는 논리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도표를 비틀면 두


번째 줄의 세 집단이 동등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세 번째 줄도 그렇지 않
음을 보여 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가는 것도 가능하다. 절대적
특권을 각각의 줄에서만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줄과 줄 사이에서도 비교

해 보는 것이다. 부자인 것은 비백인인 것, 비남성인 것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자 흑인 여성을 떠올려 보면, 이들이
빈민 백인 남성보다 아마도 형편이 나을 것이라 결론 내릴 수 있다. 극단
적인 예로 오프라 윈프리와 미셸 오바마를 돈 없고 직장도 없는 백인 남

성과 비교해 보라. 따라서 사실 도표는 아래 그림처럼 훨씬 더 틀어져 있


다.
이 도표는 상대적 특권을 측정하는 서로 다른 두 방법 사이의 갈등을
보여 준다. 하나는 화살표가 나타내는 특권 유형의 수이다. 그리고 또 하
나는 도표에서 높낮이로 표현되는 전체적 특권의 절대적인 양이다. 이 두
관점 사이에서 드러나는 불일치가 적대감을 조성한다. 특히 이것은 일부

빈민 백인 남성이 현재의 사회 정치적 분위기에 불만이 많은 이유에 대해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설명을 제공해 준다. 그 이유는 이들이 가진 특권
의 수(백인 그리고 남성)만 보면 특권을 누릴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
는 그들보다 적은 수의 특권을 가진 사람에 비해 오히려 형편이 좋지 못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불만에 반격해 화를 내는 것보다는 이런 불만의


뿌리를 이해하는 쪽이 더 생산적이다. 백인 남성 안에서 특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다른 집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자, 시스젠더, 이성애
자, 신체 건강자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특권을 가지지 못한 집단

은 누구나 여기에 해당된다.


상호 관계에 대한 도표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맥락에 초점을 맞추게
도와준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맥락을 바꾸게 하고, 또
그렇게 맥락을 바꾸는 것이 상호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납득하

게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부자, 백인, 남성> 대신 맥락을 여성으로 바


꾸어 <부자, 백인, 시스젠더>를 세 가지 유형의 특권으로 고려할 수도 있
다. 절대적 특권에 대한 질문을 잠시 접어 두면 다음과 같이 유사한 특권
의 정육면체가 만들어진다.
앞에 나온 특권 정육면체의 부자 백인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부
자 백인 시스젠더 여성이 제일 높은 곳을 차지한다. 이것은 주류 페미니
즘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여성 활동가들 사이에서 부자 백인 시스젠
더 여성을 향한 분노가 많은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부자 백인

시스젠더 여성은 자신이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다. 이들이


대부분 백인 남성으로 구성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경우라면 특히 그렇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들은 여성, 혹은 페미니즘의 맥락에서는 최대의 특
권을 누리는 사람으로 비친다.
이 질문은 여성들이 하나로 단결하는 것이 특권에서 제일 소외된 여성

들의 경험을 지우는 일인가 하는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일부 여성들이 겪는 더 큰 불이익을 고려하는 것은 진정 맞서야 할
대상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저 여성들끼리 서로 싸우게 하는 것 아니냐는
논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

범주론은 우리가 어떤 맥락에 대해 생각하는지 명확히 밝히는 것이 언


제나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세상 모든 사람이 어떤 맥락에서는 특
권을 누리고 있고, 어떤 맥락에서는 특권에서 소외되어 있다. 누군가는
스스로를 특권에서 소외된 피해자라는 맥락에서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

람들은 그들이 과도한 특권을 누린다는 맥락에서 바라보는 경우에는 적


대감이 쌓일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가 어떤 유형의 특권에서는 불이익을 당한다는 느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다른 유형의 특권에서는 이익을 얻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들의 느끼는 불이익을 부정해 버리
면 분노, 적대감, 분열, 변화에 대한 저항감 등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
다. 생산적인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이렇듯 맥락을 뒤집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은 비유에 대해 다루는 13장

에서 더 깊이 논의하겠다. 우리 모두가 특권을 누리는 관점과 특권에서


소외된 관점 양쪽으로 세상을 보는 데 능숙해지면 특권에서 소외된 사람
들의 몸부림을 이해하고, 악의적인 것이든 무지에 의한 것이든 심한 편견
과 압제를 불러일으키는 행동까지 더욱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7장

맞는 말 하는 법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스스로 더 정확해질 수 있다


사랑스러운 클레이 애니메이션 영화 「치킨 런Chicken Run」에서 말발

좋은 미국 수탉 록키는 교활한 세일즈맨 쥐들과 거래를 하면서 이렇게 말

한다. 「내가 이번 달에 낳는 달걀을 모두 너희에게 주는 것으로 값을 치를


게.」 쥐들은 교활했지만 닭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에 수탉은 알을 낳

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달에 록키가 낳은 달걀의 총


숫자는 0이 될 수밖에 없다. 록키가 자기가 낳은 <모든> 달걀을 주겠노라

고 한 것은 전적으로 거짓 없이 바른 말이다. 그 <모든> 달걀의 개수가 0


이었을 뿐이니까. 암탉들의 영웅적 지도자 진저는 격분하면서 록키가 정

직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록키가 쥐들이 오해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논리적인 면에서 보면 정직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암시나

감정이라는 측면에서만 부정직했을 뿐이다.


감정-논리 역전 상황은 누군가가 감정적으로 폭발해서 이렇게 고함지

를 때 일어난다. 「남자들은 돼지 같은 성차별주의자들이야!」 모든 남자들


이 돼지 같은 성차별주의자란 의미일까? 이것은 너무 극단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그럼 대부분의 남자가 돼지 같은 성차별주의자란 이야기일까? 여

전히 좀 과장된 말로 들린다. 어쩌면 일부 남성이 돼지 같은 성차별주의

자라는 데는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비소로 참인 진술이 나왔지만


다소 맥 빠진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러고 보면 고함지르는 사람의 입

장에서는 극단적인 발언을 더 선호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아마 실제로는 이런 의미일 것이다. 「나는 성차별주의자인 남성을 만날

만큼 만나 봐서 이제는 성차별이라면 진저리가 나.」 말은 더 길어지지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지나치게 자세하기는 하지만 상황을 더 정확히 이해


할 수 있다. 이 말은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은 진저리가 난다는 감정

적 반응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하지만 진저리가 난다는 것을 표현할 때

<남자들은 다 돼지 같은 성차별주의자야!>라고 소리 치고 싶은 유혹을 느

낀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모든 남자가 돼지 같은 성차별주의자는 아니라

고 반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이 경우 당신은 진짜 감정을 드러내기

는 했지만 논리는 부정확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당신의 감정

을 달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의 논리를 반박하고 싶게끔 만들어 버린다.


이런 치명적인 형태의 감정 폭발은 배우자에게 <당신은 절대로 설거지

안 하잖아!> 혹은 <당신은 항상 부엌을 엉망으로 내버려 두잖아!> 같은 식

으로 비난할 때 나타난다. 이런 진술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는 쉬운 편이

다.
▪ 진술: 당신은 절대로 설거지를 안 한다.

부정: 한 번은 설거지를 한 적이 있다.

▪ 진술: 당신은 항상 부엌을 엉망으로 내버려 둔다.

부정: 한 번은 부엌을 엉망으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물론 이런 포괄적 진술은 말 그대로의 의미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아마도 이 의미일 것이다. 「 내가 느끼기에 당신은

설거지를 당신이 해야 할 몫보다 훨씬 덜 하고 있어. 너무 안 하니까 아예

안 하는 것처럼 보여. 그래서 나는 아주 실망스럽고, 항상 나만 일을 하는

것 같고, 노력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져.」 혹은 이런 의미다. 「당

신이 부엌을 엉망으로 내버려 둘 때가 너무 많으니까 부엌 청소가 나한테

는 큰 부담이 되고 청소하느라 너무 지쳐.」

지나치게 과장된 포괄적 진술로 말하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뿐만 아니라 더 생산적이다.

포괄적 진술

사람들은 포괄적 진술을 말하는 경향이 있다. 보라. 방금 내가 한 말도

포괄적 진술이다. 내가 한 말의 뜻은 무얼까? 모든 사람이 포괄적 진술을

말하는 경향이 있다는 의미일까? 일부 사람이 그렇다는 의미일까? 이것

은 분명 사실이지만, 힘 있는 진술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대부분의 사람

이 그렇다는 의미일까? 내가 아는 사람은 모두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 중 내가 만나 본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냥 이

렇게 말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은 포괄적 진술을 말

하는 경향이 있다.」 이제 내 진술을 더 다듬어서 덜 모호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논리를 이용해 수비하기도 더 용이해졌다. 나는 범위를 축소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범위를 세밀하게 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세상의 어떤 대

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정확하게 밝힌다는 말이다.

<모차르트 음악은 브람스 음악보다 따분해>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 포괄적 진술이다. 반면 <내 의견으로는 모차르트 음악이 브람스 음

악보다 따분해>는 그냥 자신의 취향에 관한 진술이기 때문에 여기에 논리

적으로 따지고 들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훨씬 더 정확해진


다. 「내 의견으로는 모차르트의 거의 모든 음악이 브람스의 거의 모든 음

악보다 따분해.」 아마도 나는 브람스의 한 음악 작품보다 덜 따분한 모차

르트의 음악을 한 가지 정도는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브

람스의 「교향곡 제2번」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모차르트의 「프리메이슨

장송곡 Masonic Funeral Music」은 좋아한다. 반면 이런 포괄적 진술은

할 수 있다. 「파리의 마카롱은 시카고의 마카롱보다 훨씬 낫다.」 이 말은

<내 경험으로는 내가 파리에서 구입했던 모든 마카롱은 내가 시카고에서

구입했던 모든 마카롱보다 나았다>라는 의미다. 가혹한 이야기지만 사실

이다. 그리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이것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도 불

가능하다.
<거의>는 <대부분>, <일부>, <어떤> 같은 연관어를 거느린 일종의 수식

어다. <내 경험으로 볼 때~>라는 말과 함께 이 수식어 중 하나를 써서 진

술하면 <거의> 틀릴 일이 없다(보았는가?). <어쩌면>, <아마도>, <~일지

도 모른다>, <~일 수도 있다> 등도 마찬가지로 효과가 있다. 이런 단어들

로 조심스럽게 수식해서 진술을 구성하면 정확도를 크게 끌어올릴 수 있

지만 헤드라인에 쓰기에는 그리 신통치 못하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언론

에서는 모든 것을 부풀려서 말하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연구에서 설탕

이 암을 유발하는 것으로 밝혀져! 」 신문 헤드라인은 이렇게 부르짖지만

실제로 그 연구를 들여다보면 설탕 소비와 암 발병 사이에 일종의 상관관

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증거가 나왔다는 말이다. <~으로

보인다>를 덧붙여 줄 수도 있다. 「 설탕과 암 사이에 일종의 상관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의 진술이 틀렸음을 깐깐하게 따지는 것보다는 그 진술 속에 담

겨 있는 진실을 찾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일 수 있다. 나는 이것이 <관용

의 원리>를 보여 주는 한 사례라고 믿는다. 관용의 원리란 항상 모든 사람

의 가장 좋은 부분을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적절한 수식어를 적용함으로

써 누군가의 포괄적 진술에서 진리를 찾아내면 그 사람이 말하려는 내용

이 무엇인지, 의견 불일치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종 요법14에 관한 전형적인 논란을 보면, 어떤 사람은 동


종 요법이 효과가 있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동종 요

법 처방을 받으면 기분이 더 나아진다고 고집한다. 이 두 진술 뒤에 숨어


있을지 모를 진리는, 동종 요법이 가짜 약보다 더 효과가 있음을 보여 주

는 과학적 연구 결과는 없지만, 동종 요법으로 몸이 나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플라시보 효과를 보고 있을 거라는 점이다. 가짜 약을

먹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입

증되었다. 따라서 동종 요법을 반대하는 사람은 동종 요법을 플라시보 효

과와 비교하는 반면, 동종 요법을 찬성하는 사람은 동종 요법을 아무 조

치도 하지 않는 것과 비교하는 것이다. <가짜 약보다 나을 것이 없다>라

는 진술은 <가짜 약이 아무 조치도 않는 것보다 낫다>라는 진술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는 논리적인 의견 불일치가 존재하지 않

는다. 다만 <그저> 플라시보 효과에 불과한데도 돈을 쓰는 것이 과연 가

치가 있느냐에 대한 감정적인 불일치가 존재할 뿐이다.

논리의 확실성

기본 논리도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경우에 비해 이런 미묘한 측면들을

다루는 데 별로 나을 것이 없다. 우리는 앞에서 회색 지대를 알아보면서

기본 논리가 우리로 하여금 모든 회색 지대를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밀어

넣도록 강요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수식하는 진술을 논리적으로 모호하

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1. 진술이 당신의 세계에서 모든 대상에 대해 참이다. 어쩌면 <

모든 수학자는 무뚝뚝하다.>
2. 진술이 당신의 세계에서 적어도 하나에 대해서는 참이다. 어

쩌면 <상냥한 수학자가 적어도 한 명은 있다.> (나는 이쪽이

었으면 좋겠다.)

다음의 두 진술을 비교해 보자.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비만이다


미국에서는 일부 사람이 비만이다.

기본 진술은 비만인 상태에 관한 것이다. <미국에서는>은 전 세계에서


미국만으로 범위를 좁힌다. 그리고 이어서 그 범위 안의 모든 사람에 대

해 이야기하는 것인지, 일부 사람, 적어도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인지 진술한다. 두 사람이 비만이어도 <일부 사람이 비만이다>는 여전히

참이다.
늘 그렇듯이 이것을 형식 언어로 고치는 일은 조금 까다롭다. 우리의

유동적이고 유연한 구어보다 더 엄격한 표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음


과 같이 <모든 ~에 대하여>와 <~가 존재한다>를 이용하면 이 두 유형의

진술을 형식적으로 다룰 수 있다.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 X에 대하여, X는 비만이다.


미국에는 <X는 비만이다>를 만족시키는 사람 X가 존재한
다.
이것을 일상 언어로 표현하니 끔찍하게 현학적으로 들리지만, 형식 수
학에서 조작하기는 훨씬 쉬워진다. <모든 ~에 대하여>와 <~가 존재한다>

를 수학에서는 양화사( 量 化 詐 )라고 부른다. 양화사는 우리가 하는 진술의

범위를 수량화한다.

록키의 달걀
록키가 자기가 낳은 달걀을 모두 쥐들에게 주겠다 약속한 경우를 보면

<모든 ~에 대하여>라는 조항이 충족되어 있다. 그 <모든>이 0이기 때문


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엄격하게 참이지만 사기로 보일 수 있다. 이

것을 <공허한 참>, 혹은 공허하게 만족되는 조건이라고 한다. 다음의 진


술을 생각해 보자.

방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코끼리는 머리가 두 개다.

이 진술은 터무니없는 진술로 들리고, 실제로 터무니없지만 지금 내가


들어와 있는 방에 대해서는 분명 참이다. 당신이 이 책을 동물원에서 읽

고 있는 것이 아닌 한 당신이 지금 있는 방에서도 참일 것이다. 방에는 코


끼리가 한 마리도 없고, 따라서 그 안에 들어 있는 0마리의 코끼리는 모두

머리가 두 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보면 거짓은 무엇이든 함축할 수 있


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자기가 억만장자라고 믿기 어려운 주장을 하
는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외칠 수도 있다. 「당신이 억만장자면 나는 대통
령이요!」 사실 이것은 당신이 문제의 그 사람이 억만장자가 아님을 절대

적으로 확신한다는 뜻이다. 거짓이 참이면, 참과 거짓이 똑같은 것이 된


다. 모든 것이 참이지만, 또한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의미다. 그리 쓸모

있는 상황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끔찍하지는 않다

이제 우리가 감정적으로 터뜨렸던 진술을 다시 살펴보자. 「남자들은 모


두 돼지 같은 성차별주의자다!」 이것을 기술적으로 따져 보면 <모든 ~에

대하여> 진술에 해당한다.

남성의 집합에 속한 모든 X에 대하여,


X는 돼지 같은 성차별주의자다.

따라서 이것을 반박하려면 남성의 집합에 돼지 같은 성차별주의자가


아닌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주면 된다. 따라서 이것은 위의 진

술에 대한 부정에 해당한다.

<X는 돼지 같은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다>를 만족시키는 X



남성의 집합 안에 존재한다.
이것은 돼지 같은 성차별주의자가 아닌 남자를 한 명만 찾으면 된다는
이야기다. 내 친구 그레그는 분명 돼지 같은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다(솔직

히 그 친구를 당신에게 직접 소개하지 않고는 이 점을 증명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수학 농담을 하나 소개한다.

세 명의 논리학자가 술집으로 들어간다. 바텐더가 묻는다. 「모

두들 맥주로 하시겠습니까? 」 첫 번째 논리학자가 답한다. 「 나는


모르겠소.」 두 번째 논리학자가 답한다. 「나는 모르겠소.」 세 번째

논리학자가 답한다. 「네.」

여기서 핵심은 바텐더가 <모든 ~에 대하여> 질문을 던졌고, 세 명의 논


리학자는 아무래도 논리학자다 보니 이것을 적절하게 입증하는 방법과

반박하는 방법을 둘 다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 A: 세 명의 논리학자 모두 맥주를 원한다. 아니면……


▪ A의 부정: 맥주를 원하지 않는 논리학자가 존재한다.

첫 번째 논리학자는 모르겠다고 했다. 이것은 자기는 분명 맥주를 원한


다는 의미다. 아니면 맥주를 원하지 않는 논리학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았을 테니까 <아니오>라고 말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 논리학자도 분명 맥주를 원하는 것이다. 아니면 그

사람도 맥주를 원하지 않는 논리학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자 세 번째 논리학자는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네>라고 대

답했다. 모든 사람이 맥주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수학에 관한 다른 많은 농담과 마찬가지로 이 농담 속에도 귀엽게 느껴
지는 진리의 요소가 담겨 있다. 나는 수학자들과 충분히 오랜 시간을 어

울려 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일상생활에서까지도 이런 정확성을 따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은 엄밀하게

따지면 정확한 대답이 아니어도 자기가 맥주를 마시고 싶으면 그냥 <네>


라고 말할 텐데 말이다.

모든 수학자는 무뚝뚝하다

포괄적 진술은 고정 관념에 가깝기 때문에 반례의 가능성에 열린 마음


을 갖고 있지 않거나, 눈앞에 닥친 상황을 본질 그대로 보지 않고, 포괄적

진술이 말하는 내용만 가지고 대응한다면 위험할 수 있다. 나는 대중문화


가 수학자를 묘사하는 것을 보면 불만스러울 때가 많다. 수학자를 사회적

관계에 신통치 못하고 제정신이 아닐 가능성도 높은 무뚝뚝한 남성으로


그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에 어떤 사람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맞

아, 하지만 수학자들은 정말 그렇잖아!」 나에게는 이런 끔찍한 소리로 들


렸다. 「모든 수학자는 무뚝뚝하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이 정말 맘에 들지
않았다. 나는 수학자지만 무뚝뚝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라

는 존재가 그 진술을 반박한다.

수학자 집합에 속하는 모든 X에 대하여, X는 무뚝뚝하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만나 본 후에 내게 <모든 수학자는 무뚝뚝해>라고

말한다면 그 말이 내 귀에는 내가 수학자가 아니라거나, 내가 무뚝뚝하다


는 의미를 함축하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내 존재와 다음과 같은 함축을

양립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학자임은 무뚝뚝함을 함축한다.

사람들은 나를 수학자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분명 내가 무뚝뚝할 거라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경우라면 나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아니면 나


를 무뚝뚝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라면 사람들은 분명

내가 수학자가 아닐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 경우도 나는 기분이 나쁘


다. 한 가지 가능성이 더 있다. 나를 수학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무뚝뚝하

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중으로 기분이 나쁘다.


과잉 분석으로 들리겠지만 현학적인 깐깐함과 정확성의 차이와 비슷한

이야기다. 분석과 과잉 분석의 차이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내게 이렇


게 말한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럼 나는 이렇게 받아치고 싶을 때가

많다. 「아니지. 네가 생각이 너무 없는 거야!」 나는 이런 차이가 바로 깨


달음라고 믿는다. 나는 분석을 통해 그것이 무언가에 도움이 되었다면 그
것을 과잉 분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경우는 사람들이 내게 수학자에

대해 이런 포괄적인 진술을 할 때 왜 그리 좌절감이 들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존재하지 않음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상상해 보자. 「 모든 여성 과학도는 윗사람에게

추근거림을 당한 적이 있다.」 실제로 나는 과학계 여성들을 위한 토론회


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당신이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지적하고 싶다고 해보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윗사람에게 추근거림을


당해 본 적이 없는 여성 과학자를 한 명만 찾아내면 된다. 나 같은 사람이

그런 경우다.
반면 내가 <어떤 여성 과학도는 윗사람에게 추근거림을 당한 적이 있다

>라고 말하고, 당신은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고 싶다고 해보자. 그럼


당신은 훨씬 어려운 작업을 해야 한다. 여성 과학도를 한 명도 빠짐없이
다 확인해서 아무도 윗사람에게 추근거림을 당한 적이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불가능하다.


첫 번째는 <모든 ~에 대하여> 진술을 부정하려는 경우고, 두 번째는
<~가 존재한다> 진술을 부정하려는 경우다.
그럼 다음과 같은 부정이 나온다.
1. 전 세계: 당대의 모든 여성 과학도
원래 진술: 모든 여성 과학도 X에 대하여, X는 윗사람에게 추
근거림을 당한 적이 있다.

부정: <X는 윗사람에게 추근거림을 당한 적이 없다>를 만족


시키는 여성 과학도 X가 존재한다.
2. 전 세계: 당대의 모든 여성 과학도
원래 진술: <X는 윗사람에게 추근거림을 당한 적이 있다>를

만족시키는 여성 과학도 X가 존재한다.


부정: 모든 여성 과학도 X에 대하여, X는 윗사람에게 추근거
림을 당한 적이 없다.

<그리고>와 <또는>과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 양화사는 부정으로 연결


되어 나란히 함께 다닌다. <그리고>와 <또는>의 경우처럼 어느 한쪽이 들
어 있는 진술을 부정하면 다른 쪽이 등장하는 진술이 나오는 것이다.
논리 언어에 양화사를 추가함으로써 우리는 술어 논리, 혹은 1차 논리
를 얻게 됐다. <술어>라고 표현한 것은 <명제 논리>와 구분하기 위해서

다. 명제 논리란 양화사가 없는 논리를 말한다. <1차>라는 표현은 더 높


은 차수의 논리와 구분하기 위해 썼다. 차수가 높은 논리는 양화사의 작
동 방식이 더 복잡하다.15

항상 옳은 말만 할 수 있다
자신의 진술을 아주 정확하게 수량화하면 무엇에 대해서도 절대 틀린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수학자인 나를 상대로 논
쟁을 벌일 때 짜증이 나기 쉬운 이유 중 하나다. 나는 양화사를 충분히 사

용하는 데 신중하기 때문에 틀린 말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이용해서 그렇게 하는 몇 가지 방법을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내 의견으로는……
내 경험으로는……

어쩌면 이런 표현도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때로는……
보아하니……
내가 보기에는……

나는 최근에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 인터뷰에서 나는 일부 수학 수


업은 수학 공포증 말고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남기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한탄했다. 학생들이 실제 수학은 많이 기억하지 못하고, 대부분이

수학에 대한 공포만 기억한다고 말이다. 이런 경우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


르치는 것은 시간과 돈의 낭비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실제로는 오히
려 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만약 학생들에게 아예 수학을 가
르치지 않았다면 더 나은 결과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영향이 없는 것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말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수학을 가르치는 것은 돈과 시간의 낭비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수학을
아예 가르치지 않는 편이 낫다>라고 말했다는 다양한 트윗이 나돌았다.
사실 내가 말한 내용은 일부의 경우에는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시간과 돈

의 낭비이고, 그런 경우에는 아예 수학을 가르치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


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양화사를 잔뜩 집어넣었다.
박사 학위 지도 교수님이었던 멋지고 현명하고 정확하며 깨달음까지
주는 마틴 하이랜드 Martin Hyland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에서 문장 앞

머리에 <어떤 맥락에서 보면~>이란 말을 덧붙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모


차르트 음악은 브람스 음악보다 따분하다>라는 내 포괄적 진술을 수정하
는 또 다른 방법은 <어떤 맥락에서 보면 모차르트 음악은 브람스 음악보
다 따분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 보면 수학을 가르치는
것은 시간과 돈의 낭비일 수 있다.」 이런 문장은 무언가가 참일 수 있는

맥락이 대체 어떤 것인지에 주목하게 하는 훌륭한 문장이다. 이것을 보면


수학에서 중요한 것은 그저 정답을 찾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무언가가 참
이 되거나 참이 될 수 없는 맥락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은 단순히 무언가가 참인


지 거짓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언가가 참이 될 수 있는 맥락
을 살펴보는 것이라 믿는다. 어떤 사람이 엄격하게 논리적인 의미로 무언
가가 참이 아니라 말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들은 사실 다른 이야기를

전하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안에는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강한 감정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똑똑하지만 감정은 없는 로봇
이 아니라 똑똑하고 감정도 있는 인간이니까 말이다.
8장

진리와 인간

진리는 어떻게 평가되고 전달되고 수신되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모호함이 없는 엄격한 정당화를 할 때 생기는 논리의

힘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논리의 한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논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마치 논리가 모든 것에 대한 궁극의 해답인 것처럼 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분명 논리가 궁극의 해답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알고 보니 하늘을 날지 못한다고 해서 자전거를 버려야 할까?


아니다. 자전거는 자전거의 한계, 혹은 거기에 딸려 오는 당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용하려 들지만 않는다면 대단히 훌륭한 기구다. 자전거를 타


고 고속도로를 달리거나,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려고 하면 만만치 않을 것

이다. 반면 차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은 내게는 끔찍한 생각

이지만 나보다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에게는 아주 훌륭한 방법일 수 있

다. 러시아워 같은 시간에는 오히려 자동차보다 빨리 갈 수도 있다. 더 힘


이 들기는 하지만 만약 체력 증진을 원하는 사람이나, 자동차 휘발유보다
는 자기 몸의 지방을 태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오히려 더 좋

은 일로 여길 수도 있다.

논리도 한계가 있다. 특히 얽히고설킨 인간의 아름다운 실제 세상에서

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논리가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논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논리를 그

한계 너머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보다는 그 한계를 파악

하고, 순수 논리의 범위를 넘어선 곳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논리의 한계는 무엇이고 왜 그런 한계가 생기는지 이해하

는 것이 2부의 주제다.
조금 불편한 부분에 대한 논의로 말문을 열려고 한다. 사실 심지어 수

학적 증명이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사회적 구성물이며, 따라서 실생활에

서의 논리적 정당화도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 말이 내가 지금까

지 수학은 완전히 논리에 뿌리에 두고 있다며 말한 모든 것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듯 보이겠지만 실제 상황은 그보다 더 미묘한 구석이 있다.

2장에서 우리는 논리가 아무런 출발점도 없다는 사실에서 논의를 시작

했다. 논리는 어딘가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그 출발점은 우리가 정당화


없이 가정한 어떤 진리가 되어야 한다. 이를 공리라고 하며, 이것이 논리

의 한계 중 하나다. 11장에서 우리는 이런 공리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공리는 논리가 아닌 다른 수단을 통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리의 또 다른 한계는 끝내는 데 있다. 무언가를 정당화하는

것을 언제 멈추어야 할까? 수학적 증명은 전적으로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것은 분명 논리를 위반하지 않는다. 다만 엄격하게 논리적인 증

명을 쓰는 것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 불가능하다. 논리적 증명에서 사용

하는 논리는 논리의 규칙에 의존하는데, 그 규칙들은 대체 어디서 온 것

인가? 애초에 논리를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논리의 일부 규칙을 가


정해야 한다. 다음 장에서 다시 이 역설에 대해 알아보겠다.

엄격하게 논리적인 증명을 쓸 때 또 다른 문제는 일단 우리가 논리의

기본 규칙들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더라도 어떤 수준의(낮은 수준의) 복

잡성을 넘어 완벽히 엄격하게 사용하기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그리고 설사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이해에 도움이 되지는 않

을 것이다. 그럼 대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수학자들이 자신의 논증

을 서로에게 어떻게 설득하는지 살펴보면 그 개념들을 확장해서 더 넓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

는지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논리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


리는 배심 재판과 조금 비슷한 일을 해야 한다.

배심 재판

논리는 충분히 강력하지 못할 때 한계에 도달한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경우 중 하나는 우리에게 정보나 시간이 충분하지 않고, 그래서

논리가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해서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 경우다. 이것이


10장에서 다룰 주제다. 하지만 논리가 충분히 강력하지 못한 또 다른 경

우가 있다. 우리의 논증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해야 할 때다. 논리는 진리

를 확인하는 아주 훌륭한 방법임이 밝혀졌지만 이것이 곧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설득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진리를 확인하는 것과 진리를

전달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수학자들은 먼저 엄격한 논리적 증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서로에게

설득하는 데서 출발한다. 긴 증명은 아주 작은 단계로 나누어 생각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보통은 먼저 큰 그림을 그려서 논증의 전체적인 개념이 작

동할 것 같은지를 확인한다. 논증 자체가 아주 짧은 경우에는 이런 과정

이 필요 없다. 누군가에게 간략한 이메일을 쓸 때는 먼저 글쓰기 계획을


잡을 일이 없다. 그냥 자리에 앉아서 바로 글을 쓰기 시작한 다음 해야 할

말을 다 하고 보내기 버튼을 누르면 된다. 하지만 책 한 권을 쓰는 경우라

면 제일 앞 장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장까지 단숨에 써 내려가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제일 먼저 3부로 나누어 큰 개념을

잡고, 그다음에는 각각의 장의 개념을 잡고, 장 안에 들어 있는 절의 개념

을 잡은 다음 각각의 절에서 다룰 주요 논지의 목록을 뽑았다. 일종의 쪽

거리(프랙탈 fractal) 접근 방식이다.

쪽거리는 모든 척도에서 자기 자신과 닮은 수학적 대상이다. 그렇다 보

니 이 대상의 작은 부분을 확대해서 보면 그 작은 부분도 전체와 비슷한

생김새로 보인다.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그 대상이 무한히 세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시점에 가서는 확대를 해도 더 이상 보이는 것


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 닮음 self-similarity>이라는 대

칭의 한 유형이다.

여기 쪽거리 나무의 그림이 있다. 각각의 단계에서 각각의 가지가 두

개로 쪼개진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로 가면 그 각각의 가지가 다시 두 개

로 쪼개진다. 이런 과정이 <영원히> 이어진다. 어느 특정 분기점을 확대

해 보면 그 위쪽 부분은 나무 전체를 복사해 놓은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이 나무는 증명의 작동 방식을 보여 준다. 밑바닥은 당신이 참임을 증

명해 보이려고 하는 대상이다. 5장에서 보았던 인과의 도표와 조금 비슷

하게 생겼다. 그 밑바닥으로 들어가는 가지 두 개는 논리적으로 그 가지

들을 함축하는 주요 요소다. (물론 두 개 이상의 주요 요소가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럼 각각의 점에서 두 개 이상의 가지가 뻗어 나오는 쪽거리 나무

가 되는 셈이지만,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기는 무척 어려우니까 여기서는


그냥 두 개짜리를 고수하겠다.)
그다음에는 각각의 주요 요소에 대해 생각하고, 그 요소들을 참으로 만

들어 주는 주요 요소는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럼 다음 단계의 가지가 뻗

어 나온다.

아직도 가지와 가지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따라


서 이 네 가지 주요 요소 각각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을 참으로 만드는 것

이 무엇인지 고려하면서 이 과정을 몇 번 더 반복하면 이런 그림이 나온

다.
여기까지 오면 가지들이 서로 충분히 가까워졌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간극이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제일 위쪽에서는 간극이 너무 좁아서 거

의 보이지도 않는다. 여기서 더 가지치기를 해봤자 거의 구분도 안 되기

때문에 실제로는 무한한 쪽거리 나무가 아니더라도 쪽거리 나무가 어떤

생김새인지 다른 사람한테 보여 주려는 목적이라면 이쯤에서 멈추는 편

이 낫다.

증명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어느 시점에 가면 더 이상 간극을 채우지


않기로 결정해야 한다. 더는 정당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도움이 안 된다
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생활에서 논쟁을 벌일 때는 상대방이 설득될 때

까지, 아니면 나와 상대방의 기본 출발점이 너무도 달라서 그 근본 신념


을 바꾸어 놓기 전에는 절대 서로를 설득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

달을 때까지 이런 과정을 계속 이어 가게 된다.


사실 수학적 증명은 배심 재판과 조금 비슷하다. 실험 과학에서는 동료

심사 peer review라고 하면 같은 과학계에 몸을 담고 있는 다른 동료들


이 당신이 한 실험이 재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판단하는 것을 가리킨

다. 그 동료 과학자가 실제로 그 실험을 재현해 볼 필요는 없다. 그저 재


현 가능성을 확신하는지에 대해서만 의견을 낸다. 수학에서는 동료 심사

가 수학계의 다른 동료들이 그 증명을 완전히 논리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이 그 증명을 엄격하게 형식적인

논리적 증명으로 바꾸어 볼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가지들 사이의 간극


중 일부를 채울 수 있는지 시도해 볼 가능성은 높다. 수학자가 그 간극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알지 못하면 의견이 엇갈릴 수 있는데, 그런 경우에


는 그 증명을 쓴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럼 회의적인 수학자를 설득

할 때까지 적어도 일부의 간극을 채워 넣는 책임은 원저자에게 돌아간다.


배심 재판의 핵심은 범죄를 자백하지 않는 한(그리고 자백했다고 하더

라도) 누군가가 그 범죄를 저질렀다는 명확한 증거가 발견될 가능성이 대


단히 낮다는 데 있다. 따라서 증명은 논리적 증명이 아니라 사회학적 기

준을 따른다. 당신은 배심원, 즉 무작위로 선별된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


다. 이것은 결함 있는 제도이기는 하지만 이상적이지 못한 상황에서는 훌

륭한 제도다. 결함이 있다고 하는 이유는 배심원을 맡은 사람들이 말 그


대로 사람인지라 감정에 휘둘리거나 혼란에 휩싸이기 쉽고, 따라서 법정

변호사가 그 상황을 설명할 논리를 제시하는 대신 이 배심원들의 감정을


동요시키는 일에 더 초점을 맞추기 쉽다는 점 때문이다.

동료 심사도 비슷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결함을 안고 있다. 증명을 심사


하는 동료도 인간인지라 저자의 명성 등에 감정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논문 심사는 익명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러기가 불가능하다. 이것은 학생이 세 명밖에 없는 학급
에서 1년 내내 학생들과 가까이 지내 온 선생님이 그 학생들의 시험지를

익명으로 채점하는 일과 비슷하다. 학생들이 시험지에 자기 이름을 적어


넣지 않았어도 선생님은 누구 시험지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아주 높은

수준의 수학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특정 사람들만 활동하는 연구 분야


에서는 연구자가 그리 많지 않고, 훌륭한 연구자는 자동차 출시 전에 도
로 주행 테스트를 해보듯 자신의 연구 내용을 학회에서 먼저 발표하는 경

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생활에서도 자기가 신뢰하는 사람의 말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향이 있어서 그 사람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는 반면, 미심쩍

게 여기는 사람의 말은 의심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든다. 이것은 정당


화될 수도, 정당화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부분은 뒤에서 더 살펴보겠다.
수학자들은 수학계 바깥에서는 수학이 안고 있는 이런 사회학적이고

인간적인 측면을 받아들이기 망설일 때가 있다. 자기 연구의 신뢰성을 사


람들이 의심할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엄격한 증명의 틀과 동료

심사가 바위처럼 견고한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


다. 하지만 나는 한 시스템의 성취를 과장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 믿는

다. 당신이 한 말의 일부분을 의심할 여지를 주어 오히려 그 말 전체를 의


심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수학을 무의미하고 지겹다고 무시하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너무 아프지만, 수학을 무결점의 절대적 힘을 가진


학문으로 치켜세우는 사람을 봐도 가슴이 아프다. 나는 우리가 수학을 있

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그 양 극단 사이 어딘가에 자리 잡은 존


재, 우리의 뒤죽박죽 인간 세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장소에 따

라서는 조금 뒤죽박죽 얽혀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 강력하고 의미도 있


지만 한계 또한 갖고 있는 존재로서 말이다.

수학적 과정이 가진 논리적 측면과 인간적 측면이 상호 작용하는 것을


보면 모든 인간의 담론에서 일어나는 상호 작용에 대해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감정에 대해 다루는 15장에서 이 부분은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
연구 논문에는 수학자들이 논리적 증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일부러 엄격하게 논리적이지 않은 자료도 포함시킨다. 이러한 도움은 비


유, 개념, 비형식적 설명, 그림, 배경 논의, 작은 테스트 사례 같은 형태로

온다. 이 가운데 그 무엇도 형식적 증명은 아니지만 이는 수학자들이 증


명의 논리와 맞아떨어지는 직관을 얻을 수 있게 돕는 과정의 일부다. 우

리는 논리 자체가 견고해도 그 결론이 사람들의 직관과 맞아떨어지지 않


으면 사람들은 여전히 의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회의적인 시선에 대

처하는 것은 수학적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합리적인 회의론


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재판에

서 <합리적 의심>이라는 개념과 유사하다.


하지만 합리적인 반대 그리고 직관을 바탕으로 한 비합리적인 반대는

종이 한 장 차이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동료 심사와 관중 투표


의 차이와 비슷하다.

합리적 반대
관중 투표로 우승자를 결정하는 대회는 때때로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

리고 <전문가>들은 비전문가 관중을 보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라며 비웃기도 한다. 크로스오버 가수가 <적절한 오페라

발성 기법>을 따르지 않고 한 오페라의 가슴 울리는 유명한 구절을 불렀


는데, 관중이 이 노래에 열광하는 경우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관
중 투표의 규칙에 의하면 관중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이 가수는 정정당

당하게 이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쥘 수 있다. 동료 심사와 달리 이것은 그


냥 투표이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투표하는 이유를 정당화해야 할 의무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동료 심사의 경우에는 반대를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하는 이유를 정당화해야 한다.
일부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면 일상생활에서는 우리가 논쟁을 벌일 때

동료 심사 위원으로 활동해 줄 명확하게 정의된 전문가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판에서는 배심원단이 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들의 판단은

논증의 논리보다는 목격자의 증언에 따른 감정적 반응에 더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어쨌든 배심원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판단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

다. 정치인의 경우 선거가 <동료 심사>에 해당한다. 이들이 옳은지 그른


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의 논증이 타당한지 타당하지 않은지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사람들이 그들에게 투표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투표자 역시 자신의 투표를 정당화할 의무가 없다. 투표

가 정치인이 제시한 논증의 타당함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선


거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기업의 경

우에는 돈이 <동료 심사>에 해당한다. 이들은 자신의 제품을 구입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하기만 하면 된다. 그 방법이 옳은지 혹은 논리적인지가 꼭

중요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물론 노골적으로 사기 행각을 벌인 경우에


는 법적으로 문제가 생기겠지만).
정치인, 기업 그리고 사람들의 의견을 흔들어 놓고 싶어 하는 이는 그

누구든 비논리적인 방법으로 감정을 통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


을 조종하려 한다. 우리는 여기에 휩쓸리기가 쉽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조종당하고 싶지 않다면 회의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대놓고 부정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적어도 어느 수준

의 정당화를 요구해서 이 수준을 달성하면 믿어 주고, 그렇지 않으면 믿


지 않을 준비가 될 수 있게 틀을 마련하라는 의미다. 이것이 합리적 회의

주의와 비합리적 회의주의의 차이다. 이 부분은 합리적인 사람이 되는 법


에 대해 이야기하는 16장에서 다시 살펴보겠다.

수학적 증명에 대한 합리적 회의주의는 두 가지 방식으로 등장한다.

1. 누군가가 당신의 논리에 간극이나 오류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2. 당신이 내린 결론이 누군가의 직관과 모순을 일으킬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의 반대는 단순한 논리적 반대이고, 단순한 논리적 방식으

로 대체할 수 있다. 논리를 더 채워 넣어 그 간극이 채워질 수 있음을 분


명하게 하거나, 오류로 보였던 것이 오류가 아님을 밝히면 된다.

두 번째 유형의 반대는 대처하기가 더 까다롭다. 이런 일이 내 연구 과


정에서도 몇 번 있었고, 정치에서는 항상 일어난다. 누군가가 자신의 경

험이나 자신의 강한 신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과학 연구를 믿지 않을 때


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 과학적 증거가 전혀 없음에도 백신을 맞으면
자폐증이 생긴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게 아니라고 증거를 들이대도 우주의 나이가 몇천 년에 불과하다거나, 지


구가 편평하다거나,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거나, 버락
오바마가 하와이 출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직관적 반대는 논리적 반대보다 대응하기가 훨씬 어렵다. 그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그 사람의 직관을 바꾸어 놓아야 하는데 그런 확실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증거를 되풀이해서 말해 봐야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분명하고, 멍청이라고 욕하는 것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부


분에 대해서는 15장에서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 이론적으로 보면 이런 유

형의 반대는 엄격한 수학에서는 자리 잡을 곳이 없다. 당신의 증명에서


오류를 찾지 못한다면 그 반대는 정당한 반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학적 연구도 결국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설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실


질적으로는 이런 아주 인간적인 유형의 반대도 문제가 된다. 자신의 연구
결과를 사람들에게 설득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하지도, 그것

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구축하지도,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내게 이런 종류의 반대를 하면 나는 직관과 모순을 일으키는 논리야말
로 우리가 애초에 논리를 사용하는 이유 중 하나라는 사실로 스스로를 위

로한다. 만약 논리가 항상 직관과 맞아떨어진다면 논리를 사용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 될 테니까 말이다. 결정적으로 나는 직관적 반대를 그냥
묵살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그것을 해결할 수 있게 그런 반대가 생겨
난 뿌리를 찾아내려 한다. 어떤 것이 한 관점에서 보면 직관적인데 다른

관점에서 보면 직관과 어긋날 때가 많다. 따라서 갈등을 해소하려면 그


사람에게 다른 관점도 인정하도록 설득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하지만 그
들의 관점이 정당하다는 사실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관점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

야 그들의 직관이 어디서 오는지 확인할 수 있다.


수학 논문이나 강연 원고을 쓰든 자신의 관점을 뒷받침할 논증을 개발
하든 회의적인 사람의 생각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원칙이
다. 그래야 이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 사람들의 합리적 회의주의를

한 발 앞서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회의적인 사람이 나와 논쟁하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 상대방
이 우리만큼 똑똑한 사람이라 상상해 봐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바보 심
사가 아니라 동료 심사라고 부르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들이 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굉장히 회의적인 태도로 바라본다거나,

내 증명에서 적극적으로 오류를 잡아내려 한다고 가정한다. 그래야 나올


수 있는 오류를 모두 내가 스스로 찾아낼 것이다.
머릿속으로 대단히 회의적인 사람이 자신과 논쟁을 벌인다고 그려 보
는 것은 실생활에서 자신의 논리를 검증할 때도 아주 좋은 방법이다. 그

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데 이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기술이며, 다른 사람과의 간극을 넓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간극에 다리를 놓아 주는 논의를 진행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다. 그리
고 무언가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에 눈뜰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나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르침으로써 나 또한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무언가를 가르치려면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 학생들에
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쓰는 동안에
도 나는 논리와 세상 사이의 상호 작용에 대해 계속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있다.
이미 자신과 뜻이 같은 사람들하고만 대화한다고 상상한다면 자신의
논증을 검증해 볼 필요가 전혀 없다. 더 심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는 물론 현실에서도 자기와 의견이 맞는 사람들하고만 이야기를

나눈다. 이것의 온라인 버전이 바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반향


실 효과>16다. 우리는 검색 엔진과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 안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이것을 피하려면 자기와 다른 관점을 찾아내서 그런 관점이 어
디서 오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는 가끔 내가 합리적인

글이라 생각하는 것을 읽은 다음, 온라인 댓글란에 무엇을 지적하는 반대


의견이 주로 달렸을지 추측해 보는 방식으로 나의 능력을 시험해 본다.
이런 의견 충돌은 근본 신념의 차이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이 부분은 11
장에서 다루겠다. 하지만 가끔은 그 의견들이 반사적으로 나온 반응이라

참일지는 몰라도 원래 글의 논증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개에 대한 글이 올라올 때마다 <중국에서는 개고기를 먹는다고 한다>라
는 식으로 특별한 관련이 없는 비난이 줄줄이 이어져 나온다. 이것이 우
리를 진리와 깨달음의 차이점으로 안내한다.

진리와 깨달음
중국 어딘가에서는 아마도 개고기를 먹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서 이 진술이 원래의 글과 연관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원래

의 글이 시카고에서 바쁜 개 주인과 개를 산책시켜 주는 프리랜서를 이어


주는 어플리케이션에 관한 것이었다면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가 된다. 진
실이라고 해서 모두 관련이 있거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리 또한
반드시 깨달음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또 다른 의미에서 논리가 한

계에 봉착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진리는 논리를 이용해서 평가할 수 있


지만, 깨달음은 그럴 수가 없다. 진리와 깨달음을 서로 착각해서는 안 되
겠지만 이 둘이 상호 작용하는 방식은 중요하다. 이번에도 수학적 진리라
는 렌즈를 통해 그리고 등식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통해 이
것을 검토할 수 있다.

등식이 모두 거짓말이라니? 반응을 이끌어 낼 만큼 적당히 자극적이었


는지 걱정이다. 사실 이것은 반응을 유도하려고 던진 미끼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등식은 모두 거짓말이다>라는 진술은 참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주장하는 바를 밝히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사실 뒤에서는 진리와 관심

끌기가 대체로 독립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볼 것이다)


여기 거짓말이 아닌 등식이 하나 있다. 1 = 1. 하지만 이 등식은 참이기
는 해도 전혀 깨달음을 주지 않기 때문에 사실 나는 이것을 등식으로 쳐

주고 싶지 않다. 따라서 이 책의 1부에서 배웠던 대로 내 진술을 새로 다


듬어야겠다. 그럼 <등식은 대부분 거짓말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것도 참이 아닐지 모른다. 어쨌거나 <x = x>의 형태를 띠는 참인 등식이
무수히 많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모든 수에서 등식이 하나씩 나온다.

1 = 1
2 = 2
3 = 3
4 = 4
·
·
·

이렇게 계속 이어진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거짓말이 아닌 등


식은 별 볼 일 없는 등식뿐이라, 깨달음 없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따라
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깨달음을 주는 모든 등식은 거짓말이다.

여기서 내가 정말로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 이 책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듯이 수학에 관해 사라지지 않는 잘못된 믿음 중 하나는 수학에서
는 수와 방정식17이 전부라는 생각이다.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진실이 아

니지만 수와 방정식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


게 나는 그런 등식(방정식)이 모두 거짓말이라 말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
하면 나는 <거짓말>이라는 단어를 이용해서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내
가 정말로 하려는 말은 이것이다. 등식 equation이라는 말은 양쪽이 동

등하다는 뜻인데 사실 모든 등식은 동등하지equality 않은 무언가를 숨


기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아주 엄밀하게 따지자면 등식은 등식이 아
니라는 의미다. 일례로 다음과 같은 등식을 생각해 보자.

10 + 1 = 1 + 10

아마도 이것을 덧셈의 교환 법칙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열


개를 가져오고 한 개를 더 가져오면, 한 개를 먼저 가져오고 열 개를 연이
어 가져온 경우와 똑같은 개수를 갖게 되리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린아이에게는 이것이 배워서 익혀야 알 수 있는 내용이


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의 수학 공부를 도왔는데 아이들
이 처음에 손가락을 헤아리며 덧셈하는 것을 배울 때는 덧셈의 교환 법칙
을 전혀 당연한 법칙으로 여기지 않는다. 아이에게 10 더하기 1을 물어보
면 아이들은 머릿속에서 10을 센 다음 손가락을 하나 더 꼽아서 11이라

고 대답할 것이다. 반면 1 더하기 10을 물어보면 머릿속에 1을 그린 다음


열심히 손가락으로 10을 헤아릴 것이다. 셈을 얼마나 능숙하게 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은 힘들게 숫자를 센 후에 정답을 맞힐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는 10 더하기 1은 1 더하기 10과 같은 과정이 아니다.


사실 고급 수학에서는 <1 + 10>이 <10 + 1>과 같은 것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덧셈의 교환 법칙이 정의가 아니라 법칙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 나온 등식이 깨달음을 주는 유용한 등식인 이유도 이 때문이

다. 이 등식은 10 더하기 1은 1 더하기 10과 다른 과정이지만 그래도 똑


같은 정답이 나오니까 아무거나 편한 쪽으로 고를 수 있다고 말해 준다.
아이가 일단 이해하고 나면 이를 손가락셈으로 덧셈을 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머릿속에 큰 수를 먼저 그리고 작은 수를 손가락으로 헤아리는 것

이 항상 더 쉽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등식은 진정한 등식이


아니다. 좌변과 우변이 완전히 똑같지 않다. 등식의 힘은 어떤 의미(과정)
에서는 양쪽이 서로 다르지만, 또 어떤 의미(해답)에서는 똑같다는 사실
에 있다.

우리가 수학에서 연구하는 모든 등식과 방정식은 이런 식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
는 두 가지를 보여 준다. 방정식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양
변이 정말 아무런 차이도 없다면 그 방정식은 참이지만 그 어떤 깨달음도

주지 않는다. 양변이 정말 아무런 차이도 없는 방정식은 다음과 같은 형


태를 띠는 등식이다.

x=x
그리고 이런 등식은 절대로 유용할 수가 없다.

사람들을 설득하는 법

우리는 논리적 진리가 항상 깨달음을 주진 않는다는 사실을 살펴보았


다. 실제로 우리를 설득하는 것은 논리가 아닌 다른 것일 때가 많다. 이것
은 논리가 증명을 시작하는 첫 작업에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
실과도 관련이 있다. 증명을 생각해 낼 때 우리는 본능, 막연한 의심, 직
감, 느낌 등을 이용할 때가 많다. 우리는 살짝 다른 것을 떠올리게 해주는

것을 찾아다니면서 영감이 번쩍이는 순간을 기다린다. 결국에는 논리를


이용해서 그 모든 내용을 채워 넣게 되지만 그것도 결국 그다지 논리적이
지 않은 수많은 과정을 거쳐 첫 개념을 확보하고 난 후의 일이다. 수학의
천재라는 잘못된 믿음이 생겨난 기원이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수학 작업

의 시초로 신비로운 영감의 요소가 등장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 후에 논


리를 구성하는 데 들어가는 고된 노력을 잊지 말자.
논리적 증명을 이해할 때도 역시 전적으로 논리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연구 논문에서는 논리적 증명에 <여기서의 개념은~>이라는 표현이 함께

따라붙을 때가 많다. 이 부분은 형식을 엄격하게 따르지 않지만 그 논리


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개념과 이미지를 불러일으켜 준다. 이것은 내
가 증명에서 간극을 채우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던 쪽거리 나무 같은 그림
일 수도 있다. 5장에서 나온 인과의 도표처럼 사물이 어떻게 맞물려 돌아
가는지 보여 주는 일종의 도표일 수도 있다. 또는 비유나 작은 사례일 수
도 있다.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는 딱히 논리적인 것이 아니지만 논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일단 이런 개념을 이해하고 나면 별 다른 도움
없이도 논리적 단계를 우리 스스로 채워 넣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수학

같은 추상적인 분야에서도 무언가가 참인 이유를 감으로 알게 되면 그것


이 논리적으로 참인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것이 왜 참인지
감을 잡지 못하면 논리적 단계를 모두 꼼꼼히 따라서 결론에 도달한다고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혼란스

러운 기분이 든다.
증명을 할 때 무언가를 논리적으로는 알겠지만 감정적으로는 알지 못
하겠는 경험을 겪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큰 슬픔에 빠졌을 때도 이런 일
이 벌어진다.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당신 내면의 감정은 그 사실을 아직 믿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다.


나는 이것이 무언가를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아는 것의 차이라고 생
각한다. 우리의 머리와 가슴이 항상 우리를 서로 다른 결론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그저 둘 사이에 가끔 시간 차가 생기는 것뿐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때도 이런 부분이 작동한다. 무언가를 배울 때

감정이나 개인적 경험을 끌어들이면 그것이 우리의 의식에 더 깊게 새겨


질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무언가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험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 이유가 경험으로 배우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느
낄 수 있고,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은 그것을 그냥 책에서 읽었을 때보다 우
리 내면 더욱 깊숙한 곳에 자리 잡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수학을 배울 때 암기의 역할에 관한 뜨거운 논란과도 관련이 있

다. 어떤 사람은 수학을 잘하려면 어느 정도 기계적 암기가 당연히 필요


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는 수학에서 그 어떤 것도 암기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나를 비롯해서 전문적으로 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가 많다. 사실 내가 항상 수학을 사랑한 큰 이유 중 하
나는 바로 그 어떤 것도 외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저 이해만 하

면 됐다. 하지만 자기가 수학에 흥미를 잃은 이유는 전적으로 암기가 싫


어서였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이 말에 공감한다. 나도 암기
를 해야 한다고 하면 흥미를 잃는다. 다만 수학에 암기가 필요하다는 말
에는 동의할 수 없다. 보통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가 이렇게 이

의를 제기한다. 「하지만 당신도 구구단은 외웠을 거 아녜요!」 어쩐 일인


지 항상 구구단은 그 누구도 암기를 피해 갈 수 없는 필수적인 것으로 언
급된다.
나는 분명 깜짝 놀랄 산수의 달인은 아니다. 다섯 자리 수를 암산으로

척척 계산해 내는 계산기 같은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기본적인 산


수를 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일반인과 비교하면 분명 평균 이상의
실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구구단을 외워 본 적이 없다. 나
는 암기 없이 더 미묘한 다른 방식을 통해 구구단을 깨쳤다. 굳이 외우지
않아도 내 이름을 아는 것과 비슷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나는 내 이름을
외운 것이 아니라 그냥 내면화했다.
논리, 수학, 과학은 감정적인 내용이 결핍된 것처럼 느껴져 내면화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감정이 개입하


지 말아야 할 부분은 정당화의 방식뿐이지, 그 내용을 소통하고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감정적인 개입은 논리적 진리를 설득력 있
게 만드는 훨씬 강력한 방법이다. 사실 감정적인 부분이 들어가면 논리적

이든 아니든, 참이든 거짓이든 무엇이라도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소위 <


인터넷 밈>18의 성공만 봐도 알 수 있다.

참이면서 깨달음을 주지 않는 경우가 있는 반면, 반대로 참이 아니면서


깨달음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인터넷 밈은 뒤에 나온 유형의 상황을 풍부
하게 찾아볼 수 있는 자료다.
나는 이번 주에 과학적 방법론에 관해 이야기하는 글을 하나를 보았다.
그 내용을 아래 소개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글의 요점은 과학과 정치 사이의 상호 작용이 이상
적이지 못한 상황으로 변질되어 정치가들이 자신의 소관을 넘어서 과학
자들이 담당해야 할 일까지도 넘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상>
이라는 제목으로 요약된 부분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과학자들이 <문제
가 있다고 99퍼센트 확신한다>라는 식으로 말한 다음 해결책이 무엇인지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정치인들은 그 해결책에 자금을 지원해


야 할지를 토론해야 하고, 이 토론은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을 때 어
떤 위험이 발생하는지, 과학자들이 이것을 얼마나 확신하는지 그리고 문
제 해결에 나섰을 때 비용과 성공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는 문제

로 귀결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


밈으로 만들기에는 글이 너무 장황해진다.
내가 최근에 보았던 또 다른 사례는 다음과 같다.
이번에도 역시 전체적인 요점에는 나도 동의한다. 이 글의 요점은 보편
적 의료 보장을 지지하는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이 밈이 참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분명 일부 사람들은 영국의 국민 건강 서비스를 파괴해서 민영


화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미묘하고 구체적인 부분까지 짜임새 있게 논증을 진행하면 유
행하는 밈을 만들 수 없다. 그보다는 간결한 한 줄짜리 문구가 밈을 유행

시키는 데는 도움이 된다(재미있는 그림과 함께라면 더욱).


이것 때문에 논리적인 사람들이 절망감에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로부터 배우는 것이
다. 아직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려면 항상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이해 가능하게 바꾸어야 한다. 상급 수학과 과학의


경우라면 그 내용을 단순화해서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필요한 수련
을 거치지 않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어떤 사
람은 이렇게 하면 해당 주제가 너무 손상되기 때문에 가치 없는 일이라

보고 과학을 굳이 <대중화>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논증을 단순화하면서

도 그 본질은 그대로 남길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밈이 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그들에게 재미를 주려 노력한다. 나
는 위에 나온 과학에 대한 밈을 보고 그 내용을 편집하고 싶었다. 미묘한
부분까지 모두 담아서 너무 장황해진 설명 그리고 효과적이지만 지나치
게 생략된 설명 사이에서 균형을 찾길 원했다. 그래서 이렇게 고쳐 보았
다.

요약하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논증을 설득하려면 논증만을 이용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방법도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논리가 한계에 부딪히는 다양한 경우를 알아보


고, 감정이 어떻게 그런 한계를 뛰어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살펴보

겠다. 감정을 논리와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 이 둘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


가 아니다. 이 둘이 함께하면 논리적으로 방어가 가능하면서도 믿음이 가

는 주장을 펼칠 수 있다.
9장

역설

논리가 모순을 야기할 때


나는 해야 할 일 목록을 아주 열심히 적는 사람이다. 이것은 조금 유용

하게 일을 미룰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다. 가끔 너무 지치거나 스트

레스를 받을 때는 내가 무언가를 했다고 쉽게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할 일


목록에 아주 쉬운 일들을 적어 놓는다. 예를 들면 <아침 먹기>, <이메일

확인하기> 등이다. 해야 할 일 목록에 <일어나기> 항목을 넣기도 했다. 그


럼 잠에서 깨자마자 그 항목에 줄을 그어 지울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

다 갑자기 내 목록에 <이 목록에 적혀 있는 무언가를 하기> 항목을 집어


넣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 항목에 바로 줄을 그을 수 있지 않겠어?

그런데 이것을 생각하다가 머릿속이 아주 복잡해졌다.

나는 이렇게 자기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 재미를 느낄 때가 많

다. 예를 들면 나는 돌아다니면서 모든 사람에게 남이 청하지도 않은 충


고는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이것 역시 청하지 않은 충고를 하

는 셈이 될까 봐 겁이 난다. 그리고 나는 집에 아이스크림을 놔둘 수 없


다. 왜나면 아이스크림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내가 바로 다 먹어 버려 집

에 아이스크림이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비자 신청을 위해

온라인으로 서류 양식을 채우다가 더 심각한 모순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양식에서는 내 이름을 생략 없이 전부 기입해야 하고, 그 이름이 여권에


적힌 이름과도 일치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내 여권에 적힌 가운데 이

름에는 하이픈이 들어가 있는데 온라인 양식에는 하이픈을 입력할 수 없

게 되어 있었다. 하이픈을 입력하면 <인식 불가능한 이름: 영어 알파벳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나왔다. 그래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

세가 됐다. 여권에 나와 있는 대로 내 이름을 전부 정확하게 써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자 신청을 했던 사람 중에 이름

에 하이픈이 있는 사람이 분명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포스트로피

나 악센트 부호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이런 순환 고리와 모순을 인생의 역설이라 생각한다. 역설은 논리

가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거나, 논리가 직관과 모순을 일으킬 때 생긴다.

양쪽 모두 엄격한 논리적 사고의 한계를 드러낸다. 첫 번째 경우에서는

우리가 논리, 정의, 생각의 범위를 설정할 때 신경 쓸 것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경우에서는 자신의 직관을 꼭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 직관이 대체 어디서 오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첫 번째 유형은 우리가 논리를 다루는 방식을 비춰 주고, 두 번째 유형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비춰 준다.


이 장에서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머리가 빙빙 도는 역설을 살펴볼 것이

다. 그중에는 유명한 수학적 역설도 있고, 내가 살면서 느꼈던 이상한 일

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역설이 때로는 큰 깨우침을 주어 수학 분야 전

체의 커다란 발전을 이끌기도 했다. 역설은 논리의 한계를 연구할 수 있

는 아주 흥미로운 분야다. 역설은 논리를 너무 강하게 추구하는 것이 오

히려 모순을 야기하는 기이한 상황이다.

거짓말쟁이의 역설

논리의 역설에 빠지기는 정말 쉽다. 그냥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라고 외치면 된다. 논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이 말을 하며 웃음을 터뜨

리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아이들이 역설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만약 이 말

이 참이라면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

고 있다면 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거짓말쟁이의 역설로 알려진

고전적인 역설이다. 내가 <내 충고를 듣지 마세요>라고 이야기해도 역설

이 일어난다. 당신은 이 말을 듣고 내 충고를 받아들여야 할까? 이 충고를


받아들이면 충고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충고를 받

아들이지 않으면 당신이 충고를 받아들였다는 말이 된다.

다음과 같이 하면 두 진술을 가지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설을 만들

수 있다.

1. 다음에 나오는 진술은 참이다.


2. 앞에 나온 진술은 거짓이다.

더글라스 호프스태터 Douglas Hofstadter가 『 메타매지컬 테마

Metamagical Themas』에서 언급한 신기한 문장도 있다.

Cette phrase en fran ais est difficile traduire en


anglais.

이것을 영어로 곧이곧대로 번역하면 이렇게 나온다.

This sentence in French is difficult to translate into


English.
(프랑스어로 된 이 문장은 영어로 번역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말은 더 이상 말이 안 된다.

이 시점에서 혹시나 이 책의 영어 원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할 사람이 있

다면 그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다. 다만 사과의 글을 적고 나니 번역이 더

어려워져 버렸다. 이 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가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캐럴의 역설

루이스 캐럴 Lewis Carrol은 아마도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의 저자로 제일 잘 알려져 있겠지만, 사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있었던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 Charles

Lutwidge Dodgson이라는 이름의 수학자였다. 그는 철학 학술지인 『마

인드 Mind 』 에 기고한 「 거북이가 아킬레우스에게 한 말 What the

Tortoise Said to Achilles 」 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논리적 역설에 대해

적었다. 이 글은 대화의 형식으로 쓰였고, 그 대화에서 거북이는 논쟁으

로 아킬레우스를 궁지로, 아니 무한한 심연으로 몰아붙였다. 그가 거북이

와 아킬레우스를 등장인물로 사용한 것은 우리가 곧이어 살펴볼 제논

Zenon의 역설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캐럴의 역설에서 그는 논리적 함축에 의해 논증이 구축되는 방식을 분

석한다. 앞 장에서 논리를 사용하려면 어떤 논리의 규칙을 가정하면서 시

작해야 하기 때문에 논리가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캐럴의 역설은 그것을 하지 않을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관한 것이

다. 그럼 우리는 끝없이 더 많은 논리적 단계를 채우기만 할 뿐 결코 결론

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쪽거리 나무를 그릴 때 충분히 채

워서 그린 그림에 만족하지 않고 진짜로 무한한 쪽거리 나무를 그리려고

덤벼드는 것과 비슷하다. 평생 해도 진정한 쪽거리 나무를 마무리할 수는

없다.

캐럴의 거북이는 아킬레우스에게 삼각형의 두 변을 비교해서 길이가

같은지 확인해 보자고 한다. 자를 꺼내 양변의 길이를 재어 보고 둘 다 5


센티미터임을 알아낸다면 양변은 길이가 서로 같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진술로 구성된다.


A: 삼각형의 양변의 길이가 모두 5센티미터다.

Z: 삼각형의 양변의 길이가 서로 같다.

거북이가 아킬레우스에게 Z가 A로부터 나온 것이냐고 묻고, 아킬레우

스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한다. 아마 당신도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거

북이는 A가 Z를 함축한다는 것을 아는 경우에만 이것이 참이 된다고 말

한다. 따라서 그 둘을 이어 주는 진술을 하나 더 집어넣는다.

A: 삼각형의 양변의 길이가 모두 5센티미터다.

B: A는 Z를 함축한다.

Z: 삼각형의 양변의 길이가 서로 같다.

이제 거북이가 아킬레우스에게 A와 B가 함께 Z를 함축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하지만 이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진술에 해당한다.

A: 삼각형의 양변의 길이가 모두 5센티미터다.

B: A는 Z를 함축한다.

C: A와 B가 Z를 함축한다.

Z: 삼각형의 양변의 길이가 서로 같다.


이제 거북이가 A, B, C가 Z를 함축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하지만 이것

은 새로운 진술이다.

A: 삼각형의 양변의 길이가 모두 5센티미터다.

B: A는 Z를 함축한다.

C: A와 B가 Z를 함축한다.

D: A, B, C가 함께 Z를 함축한다.

Z: 삼각형의 양변의 길이가 서로 같다.

이 이야기는 거북이가 그대로 그곳에 앉아 아킬레우스에게 중간 단계

의 진술을 모두 적게 하며 괴롭히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이것이 영원


히 이어질 거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무언가로부터 다른 무언가를 추론할 수 있을까? 아


니 혹시 우리는 사실 무언가로부터 다른 무언가를 올바르게 추론해 본 적

이 한 번도 없는 것이 아닐까? 그 해답은 4장에 나왔던 추론 규칙을 사용


해야 한다는 데 있다. 어떤 결론이든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이 규칙이 정

당하다고 반드시 가정해야 한다. 이 역설은 언제나 우리의 논리를 지배하


는 메타 논리의 수준이 존재하며, 따라서 이 수준을 따로 분리해야만 이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것은 5장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무언가가 일어나게 만든 모든 요인

을 찾아내려는 시도와도 비슷하다.


A: 내가 유리잔을 떨어뜨렸다.
B: 유리잔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A는 Z를 함축한다.

C: 바닥이 너무 딱딱하기 때문에 A와 B는 Z를 함축한다.


D: 중력이 개입했기 때문에 A, B, C가 함께 Z를 함축한다.

E: 내가 유리잔을 잡지 않았기 때문에 A, B, C, D가 함께 Z를


함축한다.

F: 다른 누구도 유리잔을 잡지 않았기 때문에 A, B, C, D, E가


함께 Z를 함축한다.

G: …… 때문에 A, B, C, D, E, F가 함께 Z를 함축한다.
·

·
·

Z: 유리잔이 깨졌다.

어딘가에서 이만하면 됐다고 결정하지 않는 한, 결코 아무런 결론도 도


출해 낼 수 없다.

제논의 역설
루이스 캐럴이 거북이와 아킬레우스를 이야기에 등장시킨 것은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제논에게 바치는 헌사였다. 제논은 이 등장인물들을 좀


더 구체적인 다른 역설에서 이용했다. 그는 거북이가 엄청나게 발이 빠른
아킬레우스와 달리기 경주를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 경주에서 거북이

는 아킬레우스보다 앞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어서 제논은 이렇게 주장


한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의 출발점까지 갔을 즈음 거북이는 조금 더 앞

선 지점 B까지 움직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킬레우스가 B에 도달했을 때


는 거북이도 조금 더 앞으로 나가 C에 도착했을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C
에 이르렀을 때는 거북이도 조금 더 앞으로 나가 D까지 다다랐을 것이다.

이런 과정이 영원히 이어지기 때문에 아킬레우스는 절대 거북이를 따라


잡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는 아킬레우스가 당연히 이 경주에서

이길 것을 안다.
제논은 기원전 5세기경에 살았던 그리스 철학자다. 몇몇 유명한 역설

이 그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등장한 많은 역설과 마찬가지로


이 역설도 어떻게 세상을 연구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측면을 이해하기 위

한 목적으로 사고 실험을 통해 도달한 역설이다. 이것은 세상을 이해하려


는 노력과는 다르다.

제논의 역설 중 가장 유명한 세 가지는 운동, 거리, 무한히 작은 것과


관련이 있다. 첫 번째 역설은 거북이와 아킬레우스에 관한 것이다. 두 번

째 역설은 혼자서 A에서 B까지 이동하는 것에 대한 역설이다. 제논은 먼


저 총 거리의 절반만큼 앞으로 가고, 그다음에는 남은 거리의 절반 그리

고 또 남은 거리의 절반 이런 식으로 계속 앞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이 영원히 이어지므로 절대로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보면 우리는 매일 원하는 곳까지 아무 문제 없이 이동하는
데 성공한다.

세 번째 역설은 허공을 가르며 나는 화살에서 나왔다. 제논은 화살을


어느 한순간만 놓고 보면 그 움직임을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것은 임의의 모든 거리에서 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화살이 날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는 사물이 움직인다는 것을 안다. 임

의의 한순간만 놓고 보면 그 무엇도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


도 말이다. 사진이 동영상과 달리 멈춰 있는 이미지인 이유도 이 때문이

다.
역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참된 역설이다. 이 경

우 논리는 잘못된 것이 없지만 논리가 우리를 자신의 세계관과 맞지 않는


상황으로 몰고 간다. 두 번째는 거짓 역설이다. 이 경우에는 논증 속에 논

리의 오류가 숨어 있어서 이상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제논의 역설은 거짓 역설에 해당한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직관이 아니

라 논리 속에 오류가 들어 있다. 하지만 이 오류는 워낙 알아차리기 어려


워서 수학자들이 이 역설을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 내는 데 2천 년이나 걸
렸다. 이것은 결국 <영원>을 어떻게 해석하고, 찰나의 순간을 모아 긴 시

간을 만드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사실 이 문제


는 결국 무한하게 작고 무한히 많은 것을 어떻게 이어 붙일지에 대한 문

제다. 미묘한 부분을 고려하지 않고 이것 역시 유한하게 작고 유한히 많


은 것을 더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가정하면 이런 이상한
역설이 생겨난다. 이것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바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

는 관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크고 무한히 작은 것을 다룰 때


는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한히 작은 것에 대해 주의하다 보면 4장에서 언급한 바 있고, 회색


지대를 다루는 12장에서 더 깊이 알아볼 슬라이딩 스케일과 회색 지대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무한히 큰 것을 신경 쓰다 보면 무한히

길게 이어져 있는 수를 더하는 것이 정당한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하는


질문이 따라온다. 인기 많은 <넘버필Numberphile> 동영상에서는 1, 2,

3 등등으로 영원히 이어지는 수를 모두 더한 값은 –12분의 1과 같다고


주장한다. 이 영상에서는 자기네가 <수학 수리수리마하수리

mathematical hocus pocus>라고 부르는 것을 이용해서 논증을 펼친


다. 사실 이것은 직관적으로는 의미가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결함이 있는

논리의 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수학 수리수리마하수리에서는 무한


히 긴 수열의 행동 방식에 대해 근거 없는 가정을 한다.

여기서 나온 결론을 당신도 터무니없다고 느끼길 바란다. 어쨌거나 우


리가 더한 그 모든 수는 무한을 향해 점점 커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1 + 2 + 3 + ……

상당한 단서를 달지 않는 한, 이렇게 이어지는 무한한 덧셈에 의미 있


는 정답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등식>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대단히 심오한 수학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 무한히 많은 수를 일일이 모

두 더하는 방식은 분명 아니다.


안타깝게도 이 영상에 수백만 명의 사람이 속아 넘어갔다. 넘버필 동영

상이 전반적으로 평판이 좋다는 점도 한몫했다. 어쩌면 이것은 밈이 논리


와 직관에 모두 모순되지만 그럼에도 인기와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

을 보여 주는 적절한 사례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수학이 조금은 터무니


없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믿음을 보여 주는 사례일 수도 있다. 아주 안타

까운 일이다. 무한히 큰 것이 어떻게 이상한 상황을 초래하는지 생각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이 <등식>이 어떻게 나와야 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힐베르트 호텔의 역설
힐베르트 호텔의 역설은 무한히 큰 것이 기이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 일

에 관한 사고 실험이다.
다비트 힐베르트 David Hilbert는 제논보다 거의 2천 년 후에 살았던
수학자였지만 그때까지도 수학자들은 여전히 무한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

고 있었다(지금도 마찬가지다). 힐베르트의 사고 실험에는 무한 호텔이


등장한다. 이 호텔에는 방 번호가 1, 2, 3, 4 등으로 영원히 이어지는 무

한 개의 방이 있다. 이 호텔의 방이 꽉 찼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무한히


많은 수의 사람도 함께 떠올려야 한다. 실제로는 무한 호텔도, 무한히 많

은 사람도 불가능하지만 지금 우리는 사고 실험을 하는 중이다. 이제 새


로운 손님이 한 명 도착했다고 상상해 보자. 호텔 방이 꽉 찼으니 새로운
손님을 받을 방이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객실의 모든 손님을 한 칸씩 옆

방으로 옮길 수 있다. 그러면 1번 방 손님은 2번 방으로, 2번 방 손님은 3


번 방으로, 이런 식으로 진행하면 된다. 방이 무한히 많기 때문에 모든 사
람이 새로 옮겨 갈 수 있는 옆방이 있다. 다만 원래 그 방이 있던 사람들

을 쫓아내야 한다는 약간의 번거로움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쫓겨


난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기 옆방 사람을 쫓아내고 새로운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하면 1번 방이 비기 때문에 새로 온 손님을 거기에


받을 수 있다.

여기서 생기는 모순은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 직관과의 모순이다. 실제


로는 호텔에 빈 방이 없으면 방을 같이 쓰게 하지 않는 한 사람들을 한 칸

씩 옮겨서 기적처럼 빈방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여기서 차이점은 실제 호


텔은 모두 유한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한에 대한 우리의 직관에 문제를

제기하는 참된 역설이다. 이 역설은 유한한 수에 관한 직관을 그대로 무


한한 수로 확장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무한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일
어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것일

뿐이다.
힐베르트 호텔의 역설을 확장하면 더 많은 새로운 손님이 도착하는 경
우, 심지어는 무한히 많은 손님이 새로 도착하는 경우까지 생각해 낼 수
있다. 그래서 무한을 평범한 수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수

로 연구하게 됐다.
이것은 실생활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일 수 있다. 실생활에서는 그 무엇
도 무한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아니, 무한할 수 있을까? 제논의 역설로
다시 돌아가면 우리도 실생활에서 무한히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 그럼

어떤 거리라도 점점 더 거리가 좁아지는 무한히 많은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말장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놀랍게도 이 말장난 덕분에 우리는 운
동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말장난이 우리 현대 사회의 자동화 문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사실상 무한히 많이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방


법이 있다. 공급이 무제한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힐베르트 호텔은 방이
무제한으로 공급된다. 그래서 언제나 사실상 아무런 추가 비용 없이 빈방
을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요즘 디지털 미디어의 상황과 비슷하다. 추가적

인 비용 없이 파일의 추가 복사본을 마음먹은 대로 생성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복사본을 실제로 무한히 많이 갖는 것은 아니지만 이 상황을 무
한한 공급이 이뤄지는 것으로 모형화하면 어느 정도는 말이 된다. 디지털
미디어의 가치가 0, 또는 0에 아주 가까운 값으로 곤두박질친 이유도 이
것으로 어느 정도는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해적판의 저작권 침해

문제와 관련이 있다. 어떤 사람은 공급이 무제한이 된 것은 해적판 때문


이니까 사람들이 디지털 콘텐츠를 훔치지 못하게 막으면 공급이 유한한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라 주장한다. 또 다른 관점에서는 디지털 콘텐츠를
복사하는 것은 사실 <도둑질>과 똑같지 않다고 말한다. 원래의 주인으로

부터 그 대상을 빼앗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힐베르트의 역설을


따라 개발된 무한의 이론에서는 무한에서 1을 빼도 그 값은 여전히 무한
이라고 말한다. 수학으로는 이 도덕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이것을 어떻게 하면 더 명확한 맥락에서 논의할 수 있는지는 보여

줄 수 있다.

괴델의 역설
역사적으로 보면 이 모든 역설은 결국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통한다.

쿠르트 괴델Kurt Gödel은 1906년부터 1978년까지 살았던 논리학자다.


1931년에 그는 수학의 한계에 대한 정리를 증명해 보였다. 당시 수학자
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겨 준 정리였다. 이 정리가 기본적으로 이야기하
는 바는 모순이 없는 논리 체계는, 작고 따분한 논리 체계가 아니고서는

증명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진술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다. 여기서 <무모순성consistency>과 <논리>라는 말은 형식적 의미를
갖고 있다. <논리>는 이것이 공리로부터 정확한 방식으로 구축되었다는
뜻이고, <모순이 없다>, 즉 <무모순성>이라는 말은 그 안에 어떤 모순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무언가가 참이면 거짓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물론 <작다>, <따분하다>는 형식과는 거리가 있는 단어이고, 주관적인
표현으로 들린다. 하지만 예를 들어 그저 정수의 산술을 표현할 정도로
크고 흥미로운 논리 체계라고 해도 이미 이런 불완전성의 속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다. 양화사가 없는 1차 논리는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사실 1차 논리는 모든 것이 참/거짓을 증명 가능하다는 점에서
완전성을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2차 논리는 그럴 수 없다.

러셀의 역설(다음 절에 나온다)과도 닮은 구석이 있는 이 역설은 결국


자기 참조 문제로 귀결된다. 진술이 스스로를 참조할 수 있게 허용하는
순간 이상한 순환 고리가 생긴다. 이런 순환 고리는 쪽거리나 컴퓨터 프
로그램 속의 무한 순환 고리 같이 아름다운 구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순환 고리가 우리를 골치 아프게 할 수도 있다. 더글라스 호프스


태터의 책 『나는 이상한 고리다 I Am a Strange Loop 』에서도 이런 점
을 언급한 바 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호프스태터가 앞서 펴낸 아름다운 책 『 괴델,

에셔, 바흐 Gödel, Escher, Bach 』에서도 광범위하게 다룬다. 이 책에서


호프스태터는 불완전성 정리뿐만 아니라 바흐의 음악과 에셔의 판화에서
나타나는 논리적 구조와 추상적 구조 사이의 온갖 환상적인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바흐와 에셔의 작품은 예술적으로도 대단한 만족감을 주
지만 그와 동시에 대단히 수학적이기도 하다.

불완전성 정리의 증명 과정은 자기 참조를 통해 역설을 만드는 진술을


구축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이 정리가 기발하고도 충격적인 이유는 본질
적으로 수를 이용해서 수학적 체계 안에서 완전한 형식을 갖추어 이것을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일상 언어로 증명이 불가능한 문장을 말하기는 아

주 쉽다. 예를 들면 <나는 행복하다> 같은 말은 증명이 불가능하다. 그것


은 <행복하다>라는 것이 논리를 이용해 증명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논리
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괴델의 정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실제 세계와 달리 수학의 세계는 모든


것이 증명 가능한 완벽한 논리의 세계라 믿는 수학자가 많았다. 그런데
괴델이 거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는 다음과 같은 문장
을 형식적으로 표현했다.

이 진술은 증명이 불가능하다.

우선 이 진술이 참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만약 이 진술이 거짓이


라면 이 진술이 증명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그럼 이 진술이 참

이라는 말이 되어 모순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 진술이 참이라는 사실은


이것이 증명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그것이 이 진술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당신도 나와 같다면 아마 지금쯤은 머리가 빙글빙글
돌 것이다.)

괴델은 산술의 언어를 이용해서 이런 진술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 줌으로써 산술을 포함하는 어떤 수학 체계도 불완전성을 가질 수밖
에 없음을 입증했다. 수학 체계보다 더 작은 완전성이 있는 수학 체계는
분명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수학 체계는 산술을 포함하지 않기 때

문에 수학이라 하기가 힘들다.


괴델의 역설은 참된 역설이다. 일부 수학자는 이 역설의 결론에 너무

분노해서 믿기를 거부했지만 이 역설 안에는 논리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전혀 없다. 이것은 수학이라는 논리 세계에서조차 결론이 이상하다는 느
낌이 들면 논리적으로 틀린 부분을 찾을 수 없음에도 수학자가 그것을 믿
기를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다. 이 역설이 우리에게 경

고하는 바는 수학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기대에도 한계를 두어야 한다


는 것이다. 지금은 수학자들도 그 충격으로부터 대체로 회복한 상태다.
사실 이런 충격이 있기 전에도 이미 수학의 근본을 뒤흔드는 위협이 존
재했다. 이 위협은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로부터 왔다.

러셀의 역설
내가 사람들을 만나서 수학자라고 말하면 때때로 조금 이상한 반응이
돌아올 때가 있다. 보통은 <우와, 나는 수학은 정말 못하는데>라는 반응
이, 좀 더 최근에는 <내가 수학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라는 반응이 온다. 사람들이 자기가 얼마나 수학을 못하는


지 곧바로 자랑하는 것을 보면 참 재미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수학을 잘 아는지 뽐내려고 한다. 한번은 결혼식장에서 곧바로 이
렇게 받아치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러셀의 역설은 수학이 실패작임을

보여 주는 거 아닌가요? 」 이것은 특히나 신기한 접근 방식이었다. 보통


러셀의 역설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수학에 해박한 사람이라면 러셀의 역
설이 수학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 이유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은 아마도 자신이 무능력하다고 느껴져서 나를 깎아내리고

싶었던 것일 테다.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다(그 외에도 다른
많은 일을 했다). 그의 역설은 1901년에 나왔고 이것 역시 수준을 따로
분리하는 것에 관한 의문이었다. 이 역설은 다음과 같이 비형식적인 언어

로 표현할 수 있다.
한 마을에 남자 이발사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 이발사는 그 마을에
서 스스로 면도하지 못하는 남자들만 면도를 해준다. 그럼 이 이발사는
누가 면도를 해줄까?

이제 이 이발사는 스스로 면도하지 못하는 모든 남자를 면도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만약 이 이발사가 스스로 면도를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
을 면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이발사가 스스로 면도한다면 그는 자신을
면도하지 않아야 한다. 아주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마을에 사는 임의의

남성 A를 떠올려 보자.

▪ 만약 A가 A를 면도한다면 이발사는 A를 면도하지 않는다.


▪ 만약 A가 A를 면도하지 않는다면 이발사는 A를 면도한다.

만약 A가 이발사라면 이것은 문제를 일으킨다. 여기서 A는 마을에 사


는 임의의 남성이기 때문에 이발사도 A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두 진
술은 다음과 같이 바뀐다.
▪ 이발사가 이발사를 면도한다면 이발사는 이발사를 면도하지
않는다.
▪ 이발사가 이발사를 면도하지 않는다면 이발사는 이발사를 면

도한다.

이 각각의 진술이 모순을 일으킨다. 이것이 러셀의 역설이다. 형식적으


로 다룰 때는 다음과 같이 집합을 이용해 이 역설을 진술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모든 집합의 집합 S를 생각해 보자. 이 집합은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는가? 만약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다면 이


집합은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
는다면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는다. 역설이 일어난다.
이 상황에서 문제는 논리 그 자체가 아니라 논리를 시작하는 바로 그

진술이다. 이발사의 경우 우리는 그냥 그런 이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다. 집합에서도 똑같이 해야 한다. 그런 집합 S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집합을 정의하는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결혼식장에서 만났던 그 남자의 주장과 달리 러셀의 역설은 수학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 역설은 수학적 집합을 정의할 때는


미묘한 뉘앙스를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부 기술 방식은 모순을 낳
는 집합을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가능성을 신중하게 배제해야 한
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합 이론의 공리화에 아주 신중을 기하게 되어 집
합은 단순한 <대상의 모임>이 아니라 <구성물의 특정한 목록을 통해 정의
할 수 있는 대상만을 포함하고 다른 것은 포함하지 않는 모임>이 되었다.
이 공리의 기술적 목표는 기본적으로 러셀의 역설을 피하려는 데 있다.
그 기본 개념은 집합에도 서로 다른 <수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논리에

서로 다른 <수준>이 존재하는 것과 비슷하다. 러셀의 역설은 자기 자신에


게 돌아오는 집합을 포함하는 진술 때문에 야기된다. 서로 다른 수준을
갖고 있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집합의 집합은 다른 수준에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있고, 그럼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진술이 나오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19
수학자들이 연구했던 많은 역설과 마찬가지로 이 역설도 다소 전문적
이고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사회에서 관용에 관
한 중요한 질문들을 일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관용
가끔 보면 사람들이 관용과 열린 마음에 대해 생각하다가 꼬이는 경우
가 있다. 사람은 관용과 열린 마음을 갖겠다는 포부를 품을 수 있고, 나는
이것이 아주 훌륭한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 미움이 가득하고, 관

용이 없는 마음까지도 모두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일까? 마음


이 닫힌 행동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이어야 한다는 의미일까? 나는 아니라
주장하고 싶다. 나는 이것이 미묘한 형태의 러셀의 역설이며, 우리가 사
용하는 양화사의 범위를 좁힘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관용을 <모든 것에 대한 관용>을 뜻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보다
는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용>이나 다른 단
서를 붙여야 한다고 본다.

나는 여기에는 두 번의 부정은 긍정을 만든다는 사실과 비슷한 구조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배가 고프지 않지 않으면> 나는 배고픈
것이다. <않다>를 더하는 경우, 하나의 <않다> 더하기 또 하나의 <않다>
는 0개의 <않다>가 된다.

나는 이것을 배턴버그 케이크 구조라고 부른다. 배턴버그 케이크와 정


말 닮았기 때문이다.20
이것은 곳곳에서 등장하는 수학적 구조다. 이것은 홀수와 짝수의 덧셈

을 떠올려도 나타난다.

또는 양수와 음수의 곱셈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이것이 관용과 비관용에 대해 생각할 때도 등장한다고 생각한다.

▪ 당신이 관용에 대해 관용한다면 그것은 관용이다.


▪ 당신이 관용에 대해 비관용한다면 그것은 비관용이다.
▪ 당신이 비관용에 대해 관용한다면 그것은 비관용이다.
▪ 당신이 비관용에 대해 비관용한다면 그것은 관용이다.

이것은 배턴버그 케이크와 이런 식으로 맞아떨어진다.


나에게 이것의 의미는 혐오, 편견, 너무도 해로운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용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나는 그런 사람들에 맞서 싸워야 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런 행동이 용납


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이 역설을 해소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수학자들이 서로 다른 수준
을 도입해서 러셀의 역설을 해결한 것을 흉내 내는 것이다. 여기서는 수

준이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1. 신중하게 정의된 대상들의 모임, 이것을 집합이라고 한다.


2. 집합의 모임, 이것을 거대 집합 이라고 부를 때도 있다.

3. 거대 집합의 모임, 이것을 초거대 집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


4. 초거대 집합의 모임, 이것을 초초거대 집합이라고 부를 수 있
다.
5. …… 등등.

관용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수준을 설정할 수 있다.

1. 대상.
2. 대상에 대한 개념.

3. 대상에 대한 개념에 대한 개념, 이것을 메타 개념이라 부를


수 있다.
4. 메타 개념에 대한 개념, 이것을 메타-메타 개념이라 부를 수

있다.
5. …… 등등.

이 경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개념에 대해서는 관용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판단할 수 있지만, 메타 개념에 대해서는 꼭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이들이 다른 사람의 개념에 비관용적으로 구는 것은 메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관용을 보일 필요성은 느끼지 않는다.

개념들을 서로 다른 수준으로 나누는 방식을 우리를 대상으로도 사용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식 공유의 경우를 예로 들

면 수준을 다음과 같이 설정할 수 있다.

1. 대상.

2. 대상에 대한 지식.
3. 대상에 대한 지식에 대한 지식, 이것을 메타 지식이라 부를

수 있다.

4. 메타 지식에 대한 지식, 이것을 메타-메타 지식이라 부를 수


있다.

5. …… 등등.
이것은 성범죄 혐의가 드러났을 때 나타난다. 특히 유명 인사를 상대로

그렇다. 안타깝게도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몇 년


동안 <모두들 알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경우를 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을까? 이것은 메타 지식의 수준

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피해자들이 하나로 단결해서 범법자를 끌어내리려


면 메타-메타 지식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래서 범법자들이 위협을 가하

고, 권력을 남용하고, 합의나 비밀 유지 계약을 하거나, 다른 형태의 보상

을 통해 피해자들 간의 소통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조작 행위를 막기 위해서는 지식과 모든 수준의 메타 지식의 공유가 중요

하다.
논리와 수학적 역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수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

는 관용과 열린 마음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이것이 논리적 사고가 삶의 모든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겨우 일부만 보여 준다고 여겨진다. 논리는 비논리적인 사

람과 개인적으로 교류할 때도 도움이 된다.


10장

논리가 도움이 안 되는 경우

응급 상황, 무지, 신뢰
심장외과의 스티븐 웨스터비Stephen Westaby는 『 연약한 목숨

Fragile Lives 』에서 심장이 멈추면 뇌와 신경계는 5분 이내로 손상을 입


게 된다고 적었다. 그래서 그가 수술을 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은
5분 이내인 경우가 많다. 이 정도 시간이면 완전한 논리 분석을 하기가 어

렵다. 기껏해야 가장 단순한 논증 정도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논리 분석


을 길게 해봐야 논리적으로 결론을 냈을 때 환자가 이미 뇌사 상태에 빠

져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 장에서는 논리가 큰 도움이 안 되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할까

한다. 앞에서 논리는 무언가를 가지고 출발해야 하고, 그 출발점 자체는

논리에서 나올 수 없음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논리는 기름이 떨어진 기계

처럼 어딘가에서 멈출 수도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논리에서는 보통


정보가 기름에 해당한다. 논리 기계를 채워 줄 정보가 충분하지 못하면

더 이상 나가지 못한다. 이것은 자원의 부족, 또는 시간의 부족 때문일 수


도 있고, 그냥 다른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고 행

동에 나설지 알지 못해 그런 걸 수도 있다.

그렇다고 논리에 반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제약이 주

어지면 논리에 의존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그 한계 너머에서는


전적으로 논리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끌어들여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감정, 직감 등이 중대한 마지막 도약을 도와줄 수 있다. 이것이 3부에

서 다룰 주제다. 마치 논리가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하기

보다는 논리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다줄 수 있고, 감정이 우리를 도와야

하는 곳은 어디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먼저 논리가 어디서


작동을 시작하는지부터 생각해 보자. 이것은 출발점을 찾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아야 가능하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부분에 해

당하는 것에서 시작하자. 바로 언어다.

언어

언어는 어느 정도의 논리적인 규칙을 가진다.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좌절하는 이유 중 하나는 기억해야 할 규칙의 양도 엄청나지만, 규칙에


예외도 엄청 많다는 것이다. 언어는 논리와 비논리가 교묘하게 조합되어

있다. 어떤 언어는 다른 언어보다 더 논리적이다. 나는 항상 라틴어의 논

리적 구조를 좋아하지만 라틴어에도 동사의 활용형 등 무작정 암기해야

할 것들이 존재한다. 영어는 적어도 그 점에서는 외워야 할 것이 별로 없

고, 명사의 성별도 외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발음 방법은 전혀 논리적


이지가 않아서 엄청나게 헷갈린다. 스페인어는 발음이 훨씬 더 논리적

(즉, 일관적)이지만 문법 규칙에는 예외가 상당히 많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언어의 어원을 추적해서 언어가 점진적인 변화,

다른 언어로부터의 차용, 때로는 오해 등을 통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

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논리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어느 시점에 가서는 설명할 수 없는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게 된


다. 영단어 중에는 오래된 독일어나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이 많은데 그럼

그 단어들은 또 어디서 유래했을까? 어원 사전을 보면 고양이를 뜻하는

<cat>은 라틴어에서 유래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언어

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역사상 어느 시점에서 왜 사람들은 <cat>이

작고 날렵한 털북숭이 네 다리 동물을 지칭하기에 좋겠다고 결정했을까?

어떤 단어들은 그 이유가 훨씬 분명해 보인다. 예를 들어 뻐꾸기를 가리

키는 <cuckoo>라는 이름은 그 새가 우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린다. 광둥

어에서 고양이를 의미하는 단어는 고양이가 실제로 내는 소리처럼 고음

의 <야옹> 소리가 난다. 어쨌거나 <cat>보다는 비슷한 발음이다. 이것이


언어의 출발점이며, 이들은 분명 한때 일종의 자유 연상, 혹은 무작위 연

상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어쨌든 모든 개념이 우리가 이름을 붙이면서

흉내 낼 수 있는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어려운 점 중 하나는 말을 시작하기 위해 배워

야 할 어휘의 양이 막대하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의 암기를 피하기는 어

렵다. 하지만 구구단을 배울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언어를 실제로 사용할


때는 암기가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말을 할 때는 머릿속에

서 동사 활용형을 검색해서 어느 게 맞는지 고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 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어떤 비논리적인 장소로 신속하게 접

근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국어를 논리적으로 배우지 않는다. 몰입,

따라 하기, 정서적 관계, 욕망 등을 통해서 익힌다. 아이들은 <엄마>, <아

빠>, <고양이>, <공>, <더 줘>, <내 거> 등 말하고픈 욕망이 가장 강한 것

부터 먼저 말하게 된다. 아이들이 때로는 언어에 논리적으로 접근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다 보면 안타깝게도 언어가 자기 생각처럼 작동

하지 않는다는 점을 학습하게 된다. 아이들은 동사의 과거형을 만드는 양

식을 알아차리면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 Mummy gived me ice


cream.」21
어쨌든 아이들은 어른들이 무언가를 가리키거나 건네주면서 반복적으

로 말하는 것을 듣고 단어를 배우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이 우유를 받을

때마다 <우유>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결국 그 두 개를 서로 연

관 짓게 된다. 그 소리가 어째서 그 개념과 맺어지는 설명할 수 없다. 이

것이 출발점이다.

번뜩이는 영감의 순간

창조적 과정에서 출발점은 번뜩이는 영감처럼 떠오른 생각일지도 모른

다. 그런 영감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아닌지 논란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나

에게는 번뜩이는 영감이라 할 만한 순간이 분명히 있었다. 그것을 밋밋하


게 <아이디어>라고 부르려니 좀 김이 빠지긴 하지만, 이런 아이디어는 어

디서 오는 걸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가장 확실한 분야는 미술과 음악이 아닐까 싶다.

나는 다작을 하는 작곡가도 미술가도 아니지만 평생 다양한 곡을 썼고(그

중에는 내 맘에 꼭 드는 곡도 있다) 가슴을 뿌듯하게 채워 주는 미술품도

몇 점 만들었다. 작품 활동을 할 때마다 어떤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떠올

랐다. 이런 아이디어가 어디서 왔는지는 나도 모른다. 내 음악 작품 중 일

부는 내가 시를 읽고 난 후에 쓴 노래인데 그 음악이 그냥 시와 함께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이것은 논리와는 상관없다. 음악을 계발하는

<논리적인> 방법도 있다. 위대한 작곡가는 이런 여러 가지 기법에 능통하

다. 이 기법들은 테마 개발, 화성 구조, 대위법 등과 관련해서 사용될 수

있다. 바흐와 쇤베르크 같은 유명한 작곡가는 대칭을 이용해 자기 작품의

일부를 새롭지만 연관된 음악으로 바꾸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작곡

가로서는 이런 기법에 전혀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음악이 내 머릿속으

로 흘러들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내가 작곡을 많이 못 하고,

내가 작곡한 곡들이 다소 길이가 짧은 이유는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바흐는 화성을 작곡할 때 대단히 엄격한 규칙을 지켰지만, 그래도 그런

규칙의 제약 내에서 그는 폭넓은 예술적 선택을 내렸다. 그와 마찬가지로


스포츠의 규칙도 그 규칙 안에서 무한히 많은 다양한 결과를 가져온다.

셰익스피어가 쓴 소네트의 구조적 규칙은 대단히 제한적이지만 그런 규


칙을 따르면서도 그가 채택하고 표현할 수 있는 여지는 대단히 폭넓었다.

규칙이 허용의 범위를 좁혀 놓는다 해도 소네트가 어떻게 펼쳐질지를 규

칙 혼자 결정하지는 않는다.

수학 역시 번뜩이는 영감이 출발점이 될 때가 많은 영역이다. 진리와

인간을 다룬 8장에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수학적 증명을 생각할 때 등장하

는 비논리적 과정의 한 측면이다. 일단 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나면

논리를 이용해서 진행해 나가지만, 논리는 이후 그 아이디어의 타당성을

검증하고 드러내는 단계에야 적용된다. 3부에 가서는 이것이 실생활에서


논증을 찾아낼 때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식임을 확인할 것이다.

실생활에서도 우리는 먼저 어떤 상황에 대해 직관적인 느낌을 받고 의견

을 정한 다음 그 안에 들어 있는 논리를 발견하려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저 모든 의견이 다 <사실>이라고 선언하는 것보다는 분명 훨씬 강력하

다.

논리의 종착점

논리의 출발점은 그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그럼 논리의 종착점은 어디

일까? 논리의 출발점, 즉 공리를 이해하고 무엇을 공리로 삼을지 결정했

다고 해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온전히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

지기도 한다. 식당에서 다음의 메뉴에서 음식을 골라야 할 경우를 상상해

보자.
3만 2천 원보다 비싼 것은 먹을 수 없고, 자기는 생선을 싫어한다고 판

단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따지면 선택지는 닭 가슴살


구이와 야채 타르트로 좁혀지지만 그 너머에서는 논리가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다. 이 시점에서 3만 2천 원이 넘는 타조 고기를 선택하면 능동적


으로 비논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닭 가슴살 구이를

선택하는 것이 완전히 논리적인 선택이라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완전히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이치에 맞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무언가를 결정하기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대부분의 경우 논리는 우

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좁혀 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논리적


으로 이치에 맞는 선택지가 하나 이상 남기 때문이다. 인생은 대단히 복

잡하고 알 수 없는 부분도 많기 때문에 논리가 우리를 대신해서 완벽하게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

유부단해지기 쉽다.
여기서 결정을 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있다. 이 시스템에

공리를 더 추가해서 논리적 선택지를 하나로 좁힐 수 있다. 예를 들어 마


지막까지 무언가가 더 좋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한 번도 들어 보

지 못한 음식을 먹어 보겠다고 결정할 수도 있다. 그럼 설탕에 조린 파인


애플을 먹겠다는 의미가 된다. 아니면 그중 제일 가격이 싼 음식을 먹겠

다고 결정할 수도 있다. 그럼 채소 타르트를 골라야 한다. 아니면 음식을


떠올렸을 때 입에 침이 더 많이 고이는 음식을 먹겠다고 결정할 수도 있

다. 아니면 동전 던지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때로는 남들은 다 주문했는데 자기만 마지막 순간까지 결정을 할 수 없

을 때가 있다. 여기서 더 버텼다가는 민폐만 끼치게 된다. 이런 시간적 압


박도 논리를 무시하고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는, 혹은 강요하는 요소 중
하나다. 논리는 너무 느리기 때문이다.

응급 상황
응급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논리적 추
론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달려드는 트럭에 납작하게 깔려 죽는다면 좀 더

논리적인 결정을 내리려고 노력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논


리에 반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약 집에 불이 난 경우에는 본능적으로 <여기서 나가야 해!>라는 반응


이 튀어나올 것이다. 이것이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라면 아마도 완
전히 논리적으로 처리해서 나온 반응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

논리적인 반응도 아니다. 이것을 일련의 논리적 추론으로 단번에 표현할


수 있다. 논리는 여기서 시작한다.

A: 불이 났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진다.

X: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 과정은 이렇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수학에 관한 안타까운 고정 관념은 접어 두더라도 불을 피해 도망쳐 나
오면서 <모더스 포넨스>라고 외칠 정도로 현학적인 사람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불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 중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모습은 그려 볼 수 있다. 어쩌면 아이가 아직 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수

있으니 또 다른 수준의 설명을 추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A = 불이 났다.
B = 그냥 여기 있는다.
C = 나는 불에 타 죽는다.

그럼 다음과 같이 전개할 수 있다.

A는 참이다.
A 그리고 B는 C를 함축한다.
C는 나쁜 것을 함축한다.
따라서 B를 확실하게 거짓으로 만들어야 한다.
즉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을 논리를 이용해서 표현하는 것은 좀 지나친 면이 있지만 불을 피


해 달아나는 것이 어째서 논리적인 것인지 본질적으로 보여 준다. 물론

당신은 이미 이 논리를 내면화해 놓았기 때문에 매번 이런 논리적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반면 다음의 내용이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동의하


리라 생각한다.

불이 났다.
그냥 여기 있는다.

때로는 어떤 것이 논리적으로 시작했다가 계속 반복되다 보면 그것이


우리 의식 어딘가 깊숙한 곳에 새겨져서 그다음부터는 논리적으로 생각

하는 과정보다 더 빠르게 그 결론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외국어를 배울


때 그냥 규칙을 이용해서 동사를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 동사의 활용법을 의식에 새겨 놓는 것과 비


슷하다). 그럼 그렇게 얻은 결론은 전적으로 논리적 방법을 통해 접근한

것이 아니어도 논리적 결론이라 할 수 있다.


논리가 우리의 감정 속에 아주 깊이 새겨져 있다가 나중에 논리가 아니

라 감정을 통해 그 논리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과정이 존재하는 듯하


다. 하지만 그 논리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다시 논리적 설명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감정을 통해 접근하는 것은 논리를 통해 접

근하는 것보다 빠를 때가 많다. 내가 논리를 감정으로 변환시키는 것이


대단히 논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라 생각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도를 그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을 만큼 길을 잘 모른다고 해도 그냥 느낌이나 본능만으로 도시에서

길을 찾아가는 것이 그런 경우다.

불충분한 정보
식당 메뉴나 응급 상황의 경우에는 정보가 충분하지 않아서 논리가 막

힐 수 있다. 메뉴의 경우 나는 칼로리가 제일 적은 것을 먹어야겠다고 생


각할 때가 많지만, 그것도 칼로리 정보가 있어야 논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정보를 추측해서 논리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응급 상황의 경우 필요한 모든 논리적 추론을 진행하거나, 필요한 모든

정보를 모을 충분한 시간이 없을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응급 상황에서 일


어나기도 하지만, 스포츠 경기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원칙적으
로 보면 날아가는 공의 궤적은 전적으로 물리학의 지배를 받는데 그 공을

받아 치려면 그 궤적을 측정해서 계산할 시간이 없다. 측정에 필요한 자


원이 없고 측정 자체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체스는 원칙적으로는 대단히 논리적인 게임이지만 가능한 수의 조


합이 방대해서 대단히 복잡하다. 그 결과 논리적으로 가능한 경우의 수를

모두 검토하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일기 예보도 원칙적으로는 전적으로 물리학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예보에 필요한 모든 데이터를 모으는 것이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처리할 데이터가 너무 많거나, 상호 작용하는 작은 변수가 너무 많아서


어느 부분에서는 <카오스>가 생기기도 한다. 카오스란 한 시스템의 행동
이 이론상으로는 전적으로 데이터에 의해 결정되지만 실제로는 아주 작

은 요동에도 너무 민감하기 때문에 예측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무작위나


마찬가지인 경우를 말한다. 이런 요동의 영향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정

확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기 예보가 틀


려도 기상청을 너무 욕하지는 말아야 한다. 날씨에는 논리의 범위를 사실

상 벗어난 영역이 있다.


복잡성과 불충분한 데이터 때문에 문제를 겪는 또 한 가지 사례가 있

다. 바로 경제다. 어떤 상황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경제학은 이론을 세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예

를 들어 어떤 이는 최고 소득 계층의 세금을 올려도 세수가 조금도 늘지


않을 것이라 자신 있게 떠든다. 제일 부자인 사람들이 나라를 떠나 버리
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런 가상의 상

황에서 실제로 어떻게 행동할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확실히 안다고 자


신하는 이들이 자신의 추측에 대해 불합리한 확신을 갖고 있을 뿐이다.
원칙상으로는 세상을 완전히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실
제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결코 그만큼 충분한 데이터를

모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반응에 따라 달라지는 일을 두고


펼치는 주장은 십중팔구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대한 추측
이다.
이것은 최다 득표자 당선 투표 제도에서 투표가 너무도 복잡해지는 이

유 중 하나다. 이런 제도에서는 제일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승리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로 선택된 사람은 고려되지 않는다. 영국의 총선거와 미국
의 대통령 선거가 이런 경우다.22 당신의 주목적이 당신이 정말로 싫어하
는 후보의 당선을 막는 것이라면 그를 이길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다른 모든 사람들이 누구에게 투표할지 추측해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많은 사람들 역시 똑같은 추측을 하려고 시도
한다면 상황이 혼란스러워진다는 데 있다. 특정 후보를 맹렬히 반대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누구에게 투표할지 미리 결정하는 것도 역시 까다롭다.

다른 사람들이 정말 약속한 대로 행동할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신뢰의


문제는 논리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신뢰 그리고 죄수의 딜레마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지에 관해 완벽한 정보를 모을 수는 없기 때

문에 추측에 의존해야 할 경우가 많다. 이것은 종종 신뢰의 문제가 된다.


우리는 누군가가 최선의 행동을 하리라 생각하며 추측할까, 최악의 행동
을 하리라 생각하며 추측할까?
과거의 경험, 혹은 그들이 과거에 보여 준 행동을 근거로 판단할 수 있

지만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은 어느 수준에서는 필연적으로 믿음의 도


약을 필요로 한다. 전에는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보였던 이도 나중에는
언제든 뒤통수를 칠 수 있다. 가끔은 누군가를 신뢰할지 아닐지를 그냥
본능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죄수의 딜레마는 논리와 신뢰의 문제를 알아보는 수수께끼다. 함께 범


죄를 저질러 체포된 두 명의 죄수를 떠올려 보자. 이들은 서로 상의할 수
없게 그리고 심리를 조종하기 쉽게 다른 방에 따로 수감되어 있다.
이 친구들도 알렉스와 샘이라고 부르자. 검사가 이 두 사람 각각에게

양형 거래를 제안한다. 검사는 주요 고발 건에 대해서는 유죄를 증명할


충분한 증거가 없다 보니 작은 고발 건에 대해서만 1년짜리 징역형을 이
끌어 낼 수 있는 상황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알렉스가 샘을 상대로 불
리한 진술을 해준다면 샘에게 더 큰 죄를 물을 수 있고, 그럼 샘은 10년

징역형을 살고, 그 대가로 알렉스는 풀려나게 된다. 만약 샘이 알렉스를


상대로 불리한 진술을 한다면 알렉스가 10년 징역형을 살고 샘은 풀려난
다. 만약 두 사람 다 서로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다면 두 사람은 각각 5년
의 징역형을 살게 된다. 만약 둘 중 한 명은 진술을 하고 나머지 한 명은

하지 않더라도 그때 가서 마음을 바꾸어 양형 거래를 받아들일 수는 없


다.
이제 그 둘이 서로에게 충성한다면 둘 다 1년의 징역형만 받게 된다.
하지만 당신이 알렉스가 되어 그 가능성을 따져 보자. 입을 다물고 있으

려면 샘도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고 있으리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만


약 샘이 당신을 집어넣고 자기는 빠져나간다면? 그런 가능성을 막으려면
당신도 진술을 하는 편이 더 안전할 것이다. 한편 샘도 똑같은 생각을 하
고 있다. 알렉스가 입을 열 경우를 대비해서 진술을 하는 편이 더 안전하

다. 그래서 둘 다 진술을 하고 5년 징역형을 받는다. 반면 그 둘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면 둘 다 1년만 살고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려면 신뢰가 있어야 한다. 당신은 상대방이 완전히 논리적이라고 신뢰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당신이 완전히 논리적이라는 사실을 상대방이 신
뢰하리라고도 신뢰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상대방이 완전히 논리적이라는

사실을 당신이 신뢰하리라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하고 등등으로 이어진다.


이러니 실제 인간에게 이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도 당연하다.
똑같은 기본 상황을 더욱 극단적인 버전으로 바꾸어 보면 생각을 더 명
료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악한 적수가 한 집단의 사람

들에게 그 집단을 배신하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만약 당신이


그 집단을 고발하면 당신은 200만 원을 상금으로 받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200만 원씩 벌금을 물게 된다. 만약 다른 사람이 집단을 고발하면
당신은 200만 원을 벌금으로 물겠지만, 당신도 집단을 고발하면 거기서

받은 상금으로 상쇄되어 합산은 0원이 된다. 하지만 아무도 고발하지 않


는다면 모든 사람이 100만 원씩 보상을 받게 된다.
그럼 당신이 받는 보상을 표로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기에 관련된 다른 사람이 당신의 제일
친한 친구 한 사람뿐인 경우라면 서로 잘 아니까 고발하지 않으리라 믿고

100만 원씩 받은 후 집에 가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


는 100명의 집단에 이 실험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도 집단을 고발하
지 않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나는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
래서 내 주머니를 털리지 않으려면 나도 고발을 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게임 이론의 논리에서는 배신을 하는 것이 정확한 의미에서는 논


리적으로 최고의 전략이라 말한다. 배신했을 때 어떤 결과가 가능한지 조
사해 보면 이 부분을 판단할 수 있다. 다른 사람(혹은 사람들)이 어떻게
할지 미리 알 수는 없으므로 각각의 가능성을 고려해 본 후에 배신을 할
지, 침묵을 지킬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위에 나온 표에서 세로줄을
차례로 검토해 보면서 두 가지 가능한 행동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는지 확인해 보자. 그럼 양쪽 경우 모두 배신이 자기한테 더 나은


결과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무도 배신하지 않는 경우에는
배신을 하면 200만 원을 벌 수 있어서 더 낫다. 누군가가 배신을 하는 경
우에는 배신을 함으로써 벌금을 물지 않고 본전이라도 찾으니까 더 낫다.

이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두고 작성한 모든 시나리오에서 배


신을 할 경우 더 나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임 이론에서는
이것을 우월 전략이라고 하고, 논리에 따르면 양쪽 시나리오에서 모두 당
신이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해 취해야 할 전략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협력해서 우월 전략과 반대로 행동할 수만 있


다면 모두가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신뢰와 협력이 영향을 미쳐 다양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또 다른 사례
로는 기후 변화의 문제가 있다. 기후 협약의 기본 개념은 모든 국가가 협

력한다는 것이다. 협력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들어가지만 그 혜택은 범지


구적으로 돌아온다. 만약 아무도 협력하지 않는다면 전 세계에 극단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하지만 한 국가가 협약을 탈퇴해서 협력을 거부한
다면 그 국가가 가장 큰 혜택을 얻는다. 이 국가는 탄소 배출 줄이기에 협

력하는 데 드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서도 나머지 세계의 기후 상황 개


선 노력에 따라오는 범지구적 혜택은 함께 받는다. 죄수의 딜레마 논리에
따르면 모든 주체가 배신을 하리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항상 상황이
그렇게 전개되지는 않는 것을 보면 마음에 위로가 된다.
안타깝게도 이런 상황과 죄수의 딜레마 사이의 한 가지 차이는 서로 다
른 주체들이 보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제로 어디까지 믿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기후 변화의 경우 어떤 사람들은 탄소 배출량을 줄여도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인간이 위험한 기후 변화에 기여

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막대한 양의 증거가 나와 있는데도 그것을 신뢰하


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증거를 믿는 경우라 해도 지구상의 다른
모든 국가가 탄소 배출량을 줄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으니 마지막
으로 남은 국가 하나가 거기에 참여하든 안 하든 범지구적으로는 별 차이
가 없으리라는 점을 간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럼 이 국가는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기반 시설에 투자할 필요가 없으니 돈을 절약하면서도 다른


모든 국가가 그런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서 생기는 보상은 온전히 받을
수 있다. 이것은 <공동 자원 딜레마>와 관련이 있다. 한 집단이 적당히 사
용할 만한 양의 공동 자원이 있는데 한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서 과다

한 사용으로 그것을 고갈시켜 버리면 그 사람을 포함한 집단 전체가 궁극


적으로 해를 입는 경우를 말한다. 공동 자원 딜레마는 진행 중인 상황 그
리고 혜택을 받는 서로 다른 시간의 척도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죄수의
딜레마는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논리와 의심의 특이한 조합에 초점을 맞

춘다.
어쩌면 인간관계나 공동체 내부에서의 신뢰도 수준은 죄수의 딜레마에
직면했을 때 구성원들이 어느 정도까지 협력할 수 있는가로 판단할 수 있
을지도 모르겠다. 공동체의 신뢰와 응집력이 게임 이론의 논리를 이길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지만 집단의 크기가 커질수록 그
신뢰는 취약해진다. 응집력과 취약성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개인적 인
간관계, 가족, 공동체, 국가, 전 세계 등 어느 수준에서라도 나타날 수 있
다. 나는 이것이 실제로 말하는 바는, 공동체 내부에 신뢰가 충분히 쌓여

있어서 이기적인 개인의 무리가 아니라 응집력 있는 하나의 전체로 행동


한다면, 그 상황에 대한 논리가 변해서 모든 사람이 몇몇 이기적인 개인
으로 인한 결과에 고통받기보다는 모든 사람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논리
가 된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은 비논리적인 행동이

논리적 행동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 논리만 신


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 존재한다. 우리가 더욱 인간적인
측면을 신뢰한다면 개인으로서나 집단으로서 모두 혜택을 보게 될 것이
다.

이 책의 마지막 3부에서는 논리의 범위를 벗어난 영역에서는 합리적인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해 알아본다. 논리가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고 결정할 수는 없음을 살펴보았으니 논리가 소용이 없을 때는 무
언가를 해야 할 것이다. 무논리를 논리인 척해서는 안 되겠지만 무논리를
나쁘다고 가정해서도 안 된다.
11장

공리

논리 그 자체는 출발점이 없다. 논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부터 추론을 이끌어 내는 방법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무엇이든 논리

적으로 추론하려면 어딘가에서 출발을 해야 한다. 한계라고 하면 보통 끝

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은데, 처음 시작할 때도 한계가 존재한


다.

모든 진리의 뿌리가 무엇일까 궁금해할 때 생기는 논리의 이러한 한계


에 대해서는 이미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단어를

생각해 내는 것과 비슷하게 논리를 이용해서 더 많은 진리를 찾아내려면


어떤 진리에서 출발할지 정해야 한다. 수학에서 그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공리라고 한다. 그리고 실생활에서는 우리의 핵심 신념이 공리가 된다.

공리는 그 시스템에서의 기본 규칙이다. 공리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다.

그냥 다른 진리를 만들어 내는 기본 진리로 받아들이거나 선택한 것이다.


수학에서 공리를 사용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나는 이것을 외

적 동기에 의한 것과 내적 동기에 의한 것으로 나누어 본다.


공리에 대해 생각하는 내적 접근 방식은 어떤 공리를 고른 다음 이것이

논리적으로 어떤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지 보는 것이다. 이 경우는 어떤

공리를 내세워도 정당하다. 그 시스템 안에서 그 공리를 참이라 가정하고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문제라면 공


리가 모순을 일으킬 경우 시스템 전체가 붕괴해서 텅 빈 시스템null

system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텅 빈 시스템에서는 모든 것이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다. 이것이 수학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시스템

안에는 합리적인 의미의 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를 이해하고

모형을 만드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일 뿐이다.


실제 세계에서는 이것이 사고 실험을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준

다. 예를 들어 성별 임금 격차가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 세계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아니면 성범죄자, 특히나 권력을 차지한 성범죄자에 대한 관용

이 없는 판타지 세계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성범죄를 신고하는 사람의 말

은 무조건 믿어 주는 세계를 그려 보면 유용하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

선 수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매일 당하는 성범죄를 신고하게 되리라

는 것을 의미한다(물론 남성이 피해자이고, 여성이 가해자인 경우도 있


다). 그리하여 수많은 남성들이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될 것이다. 그

빈자리는 여성으로 대체되기도 할 텐데, 그렇지 않고 다른 남성으로 대체

된다면 그 남성도 신고를 당할 위험이 커지게 된다. 어쩌면 남성들은 허

위 신고에 아주 겁먹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용주들이 행여 남성을

고용했다가 그 사람이 성범죄로 고발당할까 봐 걱정을 할지도 모른다. 어


떻게 이런 세상이 가능하겠느냐고 생각한다면 거꾸로 뒤집어서,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여성이 항상 성범죄를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는 사

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런 현실을 성범죄로 신고당할까 봐 두려워하

는 남성으로 바꾸어 봤을 뿐이다. 여성이 임신할까 봐 고용하기 꺼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자(이런 차별이 불법인 나라가 많은데도 그

렇다). 이것을 남성이 성범죄를 저지를까 봐 남성을 고용하기 꺼리는 회


사로 대체해 놓은 것이다. 뒤에서 비유를 이용해서 이런 식으로 서로 다

른 관점 사이를 그네 타기로 오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이런 새

로운 기본 공리를 갖는 세상을 상상한다고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한다

고 생각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물처럼 복잡하게 얽힌

관련 사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그런 세

상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들려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아울러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가 무엇

인지 깨달을 수 있다.

외적 접근 방식은 당신이 이해하려고 하는 세상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수나 도형, 관계, 면, 혹은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세상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을 공리화 한다는 것은 참인 다른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이끌어 내는 기본 진리를 찾는 과정이다. 유명한 공리화 중 한 가지 사례

가 유클리드의 기하학 공리화다. 그는 기하학의 다른 모든 규칙을 추론으

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다섯 가지 규칙을 고안했다.


외적 접근 방식과 내적 접근 방식의 차이는 기존에 있던 다른 나라로

이사를 가서 그곳의 법을 이해하려는 것과, 처음부터 새로운 나라를 세워

서 어떤 법에서 시작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의 차이와 비슷하다.

보통 똑같은 시스템이라도 공리화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이기 때

문에 어떤 공리 집합이 좋은지 고려해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공리는 분

명히 참인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공리는 기본적이어서 더 작은 부분으로

쪼갤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공리의 숫자는 최대한 적어야 바람직하지만

공리가 구조의 중요한 측면을 일부분 밝혀 주고 강조해 주면 더 좋다. 때

로는 공리의 집합을 더 작게 축소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럼 명료성이 조

금 떨어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불필요한 공리를 원치 않는다. 한 공리를 다른 공리들로

부터 연역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필요한 공리가 아닐 것이다. 오랫

동안 수학자들은 유클리드의 제5공리(평행성 공리)가 불필요한 공리가 아

닐까 의심하고 다른 네 가지 공리로 그 공리를 증명해 보려 했다. 하지만

결국 수학자들이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제5공리를 빼도 수학적으로 완벽

한 체계가 남는다. 다만 다른 유형의 기하학이 될 뿐이다.

수학에서 공리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핵심 신념과 유사하다.

우리의 개인적 공리는 어디서 오는가

자신의 삶에서 신념 체계를 공리화하는 것은 외부적 관점에서 수학 시

스템을 공리화하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먼저 자신이 진리라 믿는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다음에는 이것을 나머지 모

든 것을 유도할 수 있는 몇 가지 기본적인 신념으로 압축한다. 논리적 모

순을 야기하지 않는 한 무엇이든 가능하다. 논리적 모순이 야기되는 경우

가 생긴다면 신념 체계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물론 당신이 논리적인 인

간이 되고자 할 경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논리적으로 사는 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서로 모순되는 것을 믿으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논리적인 사람 두 명이 만나도 서로 다른 핵심 신념을 갖

고 있으면 의견이 엇갈릴 수 있다. 서로 다른 공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꼭 둘 중 하나가 비논리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럼 두 개의 질문이 나온다. 자신의 개인적 공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이 공리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자기가 믿는 아무 신념이나 골라 왜 그 신념을 믿는지 이유를 물어보면

자신의 근본적 신념을 알아낼 수 있다. 반복적으로 <왜?>라고 묻는 과정

은 무언가의 뒤에 깊숙하게 숨어 있는 논리를 밝혀내는 방법이다. 이것은

수학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물리 세계가 왜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지 물으면 그 질문은 과학이 답해 준다. 그리고 과학이 왜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지 물으면 그 질문은 수학이 답해 준다. 반면 인간 세계

가 왜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지 물으면 심리학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철학

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 신념에 대해 던진 <왜?>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어느 정도 논리적

으로 숙달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인식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연쇄적으로 길게 이어지는 논리적 함축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누군가의 공리가 무엇인지 알아내려면 논리적 숙달 말고도 공감 능

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논리와 좀 더 감정적인 무언가 사이에는 상호 작

용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개인적 공리는 크게 세 가지로 묶을 수 있다.

1. 친절: 나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다. 타인을 돕고, 사회에 기여하고, 교육과 평등과 공정성을


중시하는 것 같은 다른 신념은 여기서부터 추론되어 나온

다.

2. 지식: 나는 서로 다른 다양한 분야의 지식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가 설정해 놓은 틀을 신뢰한다. 그래서 나는 과학 연구

와 역사 연구 같은 것을 해당 분야에서 확립해 놓은 신뢰의

수준 안에서 믿는다.

3. 존재: 나는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는 삶을 영위해 나

가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 크다. 나는 이 부분은 그리 확신

할 수가 없고, 그 반대로 믿는다 해도 큰 차이는 없지 않을

까 생각한다. 그래도 나는 반대로 믿는 것보다는 이렇게 믿

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 믿음을 포함하기로 선택

했다.
두 번째 항목이 내게는 중요하다. 증거를 통해 타당하다는 판단이 들면

내가 그 내용을 신뢰하리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완전히 논리적

이지는 않다. 이 모든 결론을 논리적인 출발점까지 모두 추적해 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번째 공리를 여기 넣었다는 것은 내 공리

체계 안에서는 이 결론들을 완전히 논리적인 출발점까지 추적해 보았다

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나는 중력을 논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함에도 중력의

존재를 믿는다. 수학에서 중력을 제1원리까지 거슬러 추적할 방법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 개인적 신념 체계의 공리로 거슬러 추적할 방법은 안


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과학자들의 말이 옳으리라는 내 신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든 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논리 체계 안에서 어떤 출발점을 받


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수학에서는 물론 인생에서도 진리다.

중요한 것은 그 출발점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뒤에서 살펴보


겠지만 이것은 더욱 복잡한 신념도 확인할 수 있게 도와주고, 왜 다른 사

람은 더 복잡한 신념에 대해 자기와 의견이 엇갈리는지도 밝혀낸다.

우리의 공리는 어디서 왔을까


우리가 공리를 어디서 생각해 냈느냐는 질문은 더 철학적인 부분이긴

하지만 자기와 근본적으로 의견이 엇갈리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 신

념을 가정 교육, 사회, 학교 교육, 인생의 경험, 본능 등을 조합해 얻는다.


부모로부터 주입받은 내용도 있지만 우리는 대부분 부모와 의견이 완전

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분명 다른 무언가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다는 의미다. 교육은 사람들의 세계관을 확장해서 세상을 자기 부모와 다

르게 보도록 이끌 수 있다. 그리고 인생의 경험도 그렇다. 특히나 부모가


아주 다른 시대, 문화, 경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어떤 신념은 개인적 확신에서 왔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듯 보이지만 곰


곰이 따져 보면 그 개인적 확신이 어디서 왔는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

른다.
예를 들어 나는 올바름보다 친절함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냥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든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이 내 인생 경험에서


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행동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너무 크게 입은 사건 때문에 친절의 중요성을 더욱더 강하게 믿게 된 것


이다.

나는 교육이야말로 내가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


확신한다. 이것 역시 그냥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든다. 하지만 이런 느낌의

근원을 조사해 보면 부모님과 피아노 선생님이 내게 주입해 준 가치관과,


내가 의사는 적성에 맞지 않고(의대에는 암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전
쟁터에서 사람들을 구출할 만큼 용감하지도 않다(나는 다치는 것이 너무

무섭다)는 사실이 같이 결합되어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근본 신념을 추적해 보면 종교로 이어진다.

그래도 종교에 대한 이들의 신념이 어디서 왔느냐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


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가치관이 부모와 가정 교육을 통해 전달되고
교육에 의해 강화되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특정 시기로부터 왔

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어떤 비극이나 정서적 외상 이후에 그런 경우가


많다. 대단히 영향력이 큰 사람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서 그랬을 수도 있

다. 사람의 근본 신념이 무엇인지 이해하면 의견이 엇갈리는 근원을 찾는


데 도움이 되고, 이들이 그 신념을 어디서 얻었는지 이해하면 그런 신념
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된다.

거의 근본적인 신념

신념 체계를 공리화하는 한 가지 방법은 모든 신념을 하나하나 다 공리


로 삼는 것이다. 그럼 자신의 모든 신념을 논리를 이용해 공리로부터 유

도할 수 있다는 의미는 분명히 살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라자냐 요리의 요리법에 재료로 <라자냐>만 덩그러니 들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 공리화의 핵심은 한 시스템의 근원을 이해하고, 그


시스템을 하나로 묶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다.

모든 신념을 공리로 삼아 버리면 논리를 따를 필요가 아예 없어진다.


논리와 모순을 일으키지는 않으니까 이것이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잘 다듬어진 관점이라 보기는 힘들다. 이것은 다소 극단적인 상황이지만


우리는 실제로 자신의 특정 신념을 정당화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들은 꽤 복잡한 신념을 아무런 정당화도 없이 자신의 근본 신념으로 받


아들여 버린다. 일부 사람들은 약간의 정당화를 시도하기는 하지만 이는
별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 이렇게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동성 간
결혼을 반대한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 믿

기 때문이다.」 <때문이다>라는 말이 들어가 있어서 정당화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사실 이것은 처음의 신념을 다시 반복해서 말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근본 신념은 논리를 넘어선 무언가에 뿌리가 있다. 하지만 때로


는 추상화를 통해 우리의 신념 내부에 자리 잡은 더욱 근본적인 것을 찾

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2장에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조세 정책과 사회


복지 제도에 대한 내 신념이 부정 오류가 긍정 오류보다 더 나쁘다는 좀

더 근본적인 신념에 뿌리가 있음을 알게 됐다. 이 부분은 13장에서 다시


다루겠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모든 사람의 상황은 자신의 행동과


환경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라 믿는다. 나는 사람은 고립된 존재가 아

니며, 자기 주변의 공동체와 불가분하게 연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성공과


불행 모두 어느 정도는 집단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다시

나의 좀 더 근본적인 신념으로 귀결된다. 바로 개별적인 요소가 아니라


시스템의 측면에서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신념이다. 이것이 사람이
든, 상황을 야기한 요인이든, 수학적 대상이든 말이다. 후자는 내가 범주

론에서 수학 연구를 진행하는 이유다. 범주론은 사물 간의 관계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형성하는 시스템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는 분야다.

나는 우리가 서로를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는다. 개인적 책임이 어디서 끝나
고, 집단적 책임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확실히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나를 또 다른 좀 더 근본적인 신념으로 이끈다. 삶에는 수많은 회


색 지대가 존재하며, 그것을 무시하거나 강제로 흑백으로 나누는 것보다

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념이다. 이것은 회색 지대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우리가 완전히 논리적일 수는 없다는 의미일지도 모
른다. 다음 장에서는 논리가 회색 지대를 다루는 서로 다른 방법들을 살

펴보고, 그중 일부는 바람직하지 못한 면이 있어서 옳지 않다 싶은 방식


으로 우리를 극단으로 밀어붙인다는 점을 확인하겠다. 회색 지대를 지나

다 보면 틀은 똑같은데도 처음에는 똑같아 보였던 것이 점점 다른 모습으


로 바뀌어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13장에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

가서 비유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검토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똑같지


않은 것 사이를 그네 타기로 오가는 법에 대해 분석해 볼 것이다. 비유에

서 중요한 문제는 어떤 것을 좋은 비유로 보고, 어떤 것을 지나친 비유로


볼 것이냐는 것이다. 14장에서는 대상을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할 때는 언

제이고, 같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할 때는 언제인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


이다. 거짓 동치는 널리 퍼져 있는 논리적 오류지만 진정한 논리적 동치

와 거짓 동치 사이에는 어떤 면에서는 같은 것들로 이루어진 회색 지대가


있다. 우리는 그것만 찾아내면 된다. 15장에서는 이 모든 기법을 이용해

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사로잡고, 다른 사람과 의견을 일치시키


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겠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컴퓨터 같은 사람이
아니라 훌륭한 합리적 인간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훌륭한 합리적 논증은

어때야 하는지 알아볼 것이다.


12장

선 긋기와 회색 지대

조심하지 않으면 논리는 우리를 흑백 논리에 빠뜨린다


대학에서 첫 학기를 보내던 어느 날 밤에 한 신입생이 자정 바로 전에

주방에서 시리얼을 한 그릇 먹다가 발견됐다. 그가 설명하기를 자기 우유

가 유통 기한 때문에 자정에 상할 예정이라 지금 먹어 치워야 한다고 했


다. 우리는 마치 호박으로 변해 버린 신데렐라의 마차처럼 자정이면 우유

가 유통 기한을 정확히 지켜 갑자기 상할 거라고 믿는 그 친구를 보며 웃


음을 터트렸다.

안타깝게도 슬라이딩 스케일 위에 존재하는 것을 처리하려고 할 때는


더욱 심각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조심하지 않으면 논리는 우

리를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따라서 극단적인 입장으로 빠져들고 싶지 않

으면 좀 더 인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인간적인 접근은 더 미묘한 뉘앙

스까지 다룬다. 우리 뇌는 감지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회색 지대를 처리할


수 있다. 그 방식은 전적으로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의미가 통하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우리는 그렇게 통한 의미를 논리를 이용해서 몰아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논리를 찾아내야 한다. 서로 다른 논리적 해석에서

생기는 회색 지대를 대처하는 데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이 장

에서는 이 서로 다른 접근 방식들에 대해 그리고 달랑 경계선 하나만 긋

고 마는 단순한 접근 방식을 취했을 때 생기는 위험에 대해 알아보겠다.


불확실한 부분을 허용하면 불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극단으로 가지 않고, 변칙적으로 선을 긋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 』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엘리자베스가 미스터 다시에게 언제 어떻

게 자기에게 사랑에 빠졌는지 묻는 장면이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 토대가 되었던 시간이나 장소, 표정이나 말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어요. 너무 오래전 일이에요.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그 한가운데 빠져 있었죠.

그는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없었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 않은 것과 그

녀와 사랑에 빠진 것 사이 어딘가에 그 선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선


이 대체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그로서는 어느 시점에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었고, 훗날 어느 순간에는 분명 사랑에 빠져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점진적으로 자라나는 흐릿하고 모호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

아니오>와 분명한 <예> 사이에 수많은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


회색 지대는 인간의 경험에서 중요한 부분이지만 논리로는 다루기가

쉽지 않다. 논리에서는 모호함을 걷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배중률은 우

리로 하여금 회색 지대 전체를 흑백 둘 중 한곳에 몰아넣으라고 강요한

다. 이것은 회색 지대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흑백 논리

보다는 낫지만, 논리를 통해 융통성 없는 엄격한 결론을 내리려는 사람을

흑과 백으로만 생각하게 강요할 수 있어서 흑백 논리와 똑같은 효과를 낳


기도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점점 더 극단과 절대적 확신으

로 치닫는 것 같다. 사람들은 툭하면 <사상 최고(혹은 사상 최악)>라는 말

을 한다. 그리고 <모든 게 다 잘될 거야>라는 말로 나를 안심시키려고 한

다. 행사를 광고할 때는 <여러분은 《절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겁

니다!>라고 얘기한다. 솔직히 <여러분은 《아마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겁니다>라고 하면 맥 빠지는 것이 사실이다. 세상이 극단적인 확신

으로 빠져드는 것이 걱정이다. 그런 확신은 거의 확실히 결함이 있다. 우

리는 흑백으로 명확히 나뉘는 세상에 대한 헛된 약속을 기다리기보다는


회색 지대를 다루는 서로 다른 방식을 이해해서 그 미묘한 차이를 더 잘

다룰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케이크

나 자신도 극단적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 나를 쉽게 살찌우는

추론 과정을 소개한다.
▪ 케이크를 작은 조각으로 하나 먹는 것은 문제가 없을 거야.

▪ 내가 이미 아무리 많은 케이크를 먹었든 간에 겨우 한 입 더

먹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어.

안타깝게도 논리적으로 보면 이것은 한 번에 한 입씩만 먹는 한 아무리

많은 양의 케이크를 먹어도 괜찮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나

는 이런 짓을 잘한다.

이것은 엄격하게 논리적인 것이 전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는 또 한 가

지 사례다. 케이크를 무한히 많이 먹어도 좋다는 생각을 피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 케이크는 작은 조각이라도 절대 먹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

다. 나는 케이크를 조금 먹고 멈추는 것보다는 아예 입에 대지 않는 쪽이

더 쉽다. 그런데 문제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케이크 한 조각 정도는 괜찮

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황의 논리가 우리를 두 극단적 입장 중 하나로 몰아붙이는 사

례다. 여기서 두 극단적 입장은 다음과 같다.

▪ 케이크를 조금도 먹어서는 안 된다.

▪ 케이크를 무한히 많이 먹어도 괜찮다.


문제는 회색 지대다. 적당한 양의 케이크와 너무 많은 케이크를 나눌

수 있는 엄격한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케이크로 배를

너무 채우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선을 그으려고 들지만 아이들도 바보는

아니다. 그런 선이 임의적이라는 것을 아이들도 쉽게 눈치채고 계속 한

입만 더, 한 입만 더 밀어붙인다. 혹은 화장실을 다녀와야 한다는 둥, 장

난감을 치워야 한다는 둥, 물을 마셔야겠다는 둥 온갖 비논리적인 핑계를

대며 잠잘 시간을 2분만 더, 또 2분만 더 뒤로 늦춘다. 하지만 사실은 잠

자리에 들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비논리적이다. 이것은 잠자리에 들기에

<적당한 시간>과 <너무 늦은 시간> 사이의 회색 지대 안에 설정해 놓은

임의적인 선에 불과하다.

그냥 어깨를 으쓱하면서 논리적으로 무언가가 함축되어 있다고 해서

내가 꼭 그것을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이런 논리를 피해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추천할 만한 방법이 아니다. 온갖 다른 비논리

적인 생각도 허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

두 가지를 동시에 믿을 수도 있다.

자신의 다른 신념에서 나오는 모든 논리적 함축을 믿는다는 개념을 <연

역적 폐쇄성>이라고 한다. 진술의 집합이 연역적으로 폐쇄되어 있다는 것

은 그 집합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진술로부터 연역되어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이 그 집합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를 뜻한다. 따라서 내 신념의 집합


이 연역적으로 폐쇄되어 있기 위해서는 내 신념에서 나오는 모든 함축을
믿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논리적인 인간이 되는 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에서 이 부분은 다시 다루겠다.

그렇다면 합리적인 인간이 되려면 회색 지대에 대해 뭘 할 수 있을까?

너무 단순한 논리적 접근 방식은 내려놓고 좀 더 복잡한 것을 다루는 방

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선 긋기

회색 지대를 취침 시간 정하듯 다룰 때가 많다. 회색 지대 어느 곳에 임


의로 선을 긋고 그것을 규칙으로 삼는 것이다. 회색 지대 어디에 선을 그

을지는 극단을 취했을 때 얼마나 심각한 결과가 나오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한 극단에서 심각한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 중간에 완충 지대를 두기

위해 극단에서 멀리 떨어진 회색 지대 안에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롤러코스터는 안전을 위해 탑승이 가능한 최소한의 키를 설정한다.

키가 너무 작으면 안전 바가 몸을 제대로 잡아주지 못한다. 그 경우에는

아주 심각한 결과(부상이나 심지어는 사망)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안

전을 보장하려면 회색 지대에서 키가 더 큰 쪽에 치우쳐서 선을 그어야

한다.

케이크의 경우 나는 살이 찌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니까 회색 지대 중에

서 <살이 찌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확실치는 않은> 부분보다는 <살이 찌지

않을 것이 가장 확실한> 부분 어딘가에 선을 그어야 안심할 수 있다. 내가


선을 종종 넘어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특히나 그렇다. 그래서 안전한

쪽으로 약간의 완충 지대를 설정해 놓아야 한다.

내가 직업 때문에 처리해야 했던 논란 많은 선 긋기 분야가 있다. 바로

시험에서 학점의 경계를 어디에 그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영국의 교육

제도에서는 대학 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하는 학생들을 1등급, 상위 2등

급, 하위 2등급, 3등급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이 경계를 대체 어디에 그어

야 할까? 나는 이 부분을 두고 심사 위원 회의 시간에 사람들과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 왔다. 회색 지대 안 어느 곳에 선을 긋든 사실상 소용이 없


다. 선을 어디에 긋든 그 기준에 못 미치는 학생들에게 불공평하다고 주
장하는 누군가가 나서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선은 점점 더 아래로 내

려간다. 이 선을 그을 수 있는 논리적인 위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 생각


에 이 선을 없애는 논리적인 방법은 딱 하나, 그냥 전체 슬라이딩 스케일

위에서 평균 점수, 혹은 백분위 점수를 발표하는 것뿐이다.


인종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더 논란이 많은 회색 지대가 등장한다. 이

것을 말 그대로 흑백의 문제라 부르지는 않겠다. 사실 사람의 피부색은


갈색과 분홍색 계열의 온갖 색조를 띠기 때문이다. 4장에서 다루었듯이

버락 오바마는 부모 중 한 명이 흑인이고, 한 명이 백인인데도 <흑인>으


로 불릴 때가 많다. 그를 백인이라 불러도 흑인이라 부르는 것만큼 정당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흑인>은 <백인이


아닌 사람>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이해하고 나면 오바마를 미국 최
초의 흑인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게 왜 말이 되는지 알 수 있다. 즉, 우리

는 그 말이 통하게 해줄 의미를 찾아낸 것이다.


흑인과 백인 사이의 경계선을 어디에 그려야 할까? 백인 쪽에 더 가깝

게 그린다면 이것은 진짜 백인처럼 보이는 사람만 백인의 특권을 누릴 수


있다고 인정하고, 백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나머지>로 배제하는 셈이

다. 그래도 백인과 비백인으로 나누는 것은 적어도 진정한 이분법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흑과 백으로 나누는 것은 가짜 이분법이다.

성범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대할 때는 특히나 더 선 긋


기가 어려울 수 있다. 당신이 상대에게 너그럽고 싶고, 남을 돕고 싶어 하

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을 당하기 쉽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럼 사람들은


선을 넘어서 당신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상황이 더 심각해지

면 미묘한 차별이나 성범죄 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잘못된 행동이


얼마나 심각해져야 어떤 조치를 취하거나 신고를 할 수 있을까?

악수 등 일부 형태의 신체적 접촉은 일반적으로 용인된다. 반면 몸을


더듬는 행위 같은 일부 행동은 분명 용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경계선
은 그 사이 어디에 그어야 할까? 어깨를 만지는 것은 적절한 행동일까?

등은? 허리는? 엉덩이는? 어느 부위를 만지면 친근함의 표시로 보고, 어


느 부위를 만지면 성범죄로 간주한다고 몸 위에 말 그대로 선을 그려 놓

아야 하나? 누군가의 행동으로 마음이 불편해 본 사람에게는 이것이 정말


어려운 딜레마다. 특히나 서열이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특
히나 그렇다. 누군가가 어깨를 만졌다고 신고하면 거의 분명 예민하게 굴

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럼 반응을 보여야 할 지점이 어디란 말


인가? 한 행동을 용인하고 나면 거기서 조금 더 수위가 높아져도 별 문제

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씩 높아지는 수위가 점점


쌓이게 된다.
사람을 조종하는 데 능한 사람들은 실제로 이런 점을 악용해서 친절하

고 잘 받아 주는 사람들을 이용해 먹는다. 당신이 일단 무언가를 눈감고


넘어가면 그들은 그 선을 조금씩 뒤로 밀어낼 수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

리고 이런 논리를 반복적으로 적용하면서 그 선을 얼마든 뒤로 밀어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당신이 어느 시점에서 단호하게 뿌리치면 그들

은 왜 그렇게 비합리적으로 과도한 반응을 보이느냐며 비난한다.


미스터 다시는 사랑에 빠진 시점에 정확한 선을 그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상처를 받는 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는 무언가가 언제


부터 자기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명백하게 상처를 받은 순

간이 언제인지만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부적절한 신체적 접촉이 강간으


로 바뀌는 경우다.

나는 안전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애매해지기 전, 확실히 안전하다


고 느껴지는 곳에 선을 긋는 것임을 알게 됐다. 이렇게 하면 회색 지대를

아우르는 완충 지대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완충 지대가 어디서 끝나고 위


험 지대가 어디서 시작하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아도 분명히 위험한 상
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인색한 태도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어디에 선을 긋


더라도 내가 상처를 받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약간의 여지가 남아 있

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여러 번 상처를 받다 보니 이제는


케이크의 경우처럼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완충 지대가 필요하다

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보호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이것을 꼭 인색한 태도라 볼 수는 없다. 5장에서 보았듯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를 부정하고, 심지어 상처를 주어야 하는 경우라면,

그로 인해 상대방이 상처를 받더라도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본


다. 그것은 시스템의 잘못이거나, 그런 제로섬 게임을 만들어 낸 비뚤어

진 인간관계의 잘못이다.

체질량 지수
체질량 지수 BMI는 건강을 측정하는 유용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결함

이 있다. 체질량 지수는 체중(킬로그램)을 재서 키(미터)의 제곱으로 나누


어 얻는다. 사람들이 이 지수를 반대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근육량이 얼마

나 많은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운동을 많이 한 선수들은 근육 밀도가


높아 체질량 지수도 덩달아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하지만 개
인적으로 나는 이런 주장은 그럴듯하지만 비논리적이라 생각한다. 자기

가 근육질의 운동선수라서 체질량 지수가 높게 나왔는지는 한눈에 봐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내가 근육질 운동선수가 아니

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캘리퍼스로 지방의 두께


를 재보지 않아도 내 몸에 지방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살을 옷

으로 잘 감추고 있어서 사람들은 내 몸에 지방에 아예 없는 줄 알고 있지


만 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체질량 지수로 볼 때 어느 것을 <건강한> 체중으로 볼


것이냐 하는 기준선을 임의로 정해 놓았다는 데 있다. 여성의 기준은 보

통 25로 잡는다. 하지만 당연히 이것도 슬라이딩 스케일이다. 체질량 지


수가 25인 사람은 뚱뚱하고 24.9인 사람은 건강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지침이고, 나는 이것을 지침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기쁘


다. 하지만 의사가 체중을 잴 때는 이것 때문에 우스운 상황이 펼쳐지기

도 한다. 나는 신발을 신고 있으면 체질량 지수가 25를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체중을 잴 때 신발을 벗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체

질량 지수가 25를 넘으면 컴퓨터가 자동적으로 검진 결과지에 경고 표시


를 한다. 의사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나는 기준선에 아주 가까우니까 걱정

할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체중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 아주 큰 노력


을 해왔기에 기준을 넘긴 것이 내 신발 때문이었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과체중으로 기록되는 것이 정말 짜증이 난다.


이런 문제점이 있음에도 아예 지침이 없이 예전에 내가 하던 짓을 계속

하는 것보다는 이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1년에 10킬로그램씩


체중이 불어나고 있는데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그냥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한 달에 몇 킬로그램 정도 찌


는 것은 별일 아냐. 걱정할 필요 없어.」 하지만 매달 자신에게 이렇게 이

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1년에 10킬로그램이나 늘어 있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가서는 한 달 후가 아니라 10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고, 결

국 임의적인 것이라도 어딘가에 선을 그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나는 체질량 지수 기준선에서 안전한 쪽에 선을 그으려고 한다. 그래서

25가 아니라 24 언저리로 기준을 정한다.


내가 한 행동은 선 그 자체를 흐릿한 경계로 취급한 것이라 해석할 수
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 흐릿한 범위를 벗어나 더 나은 쪽에 확실히 속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귀납법
조금씩 단계를 올리며 진행하는 이런 논증은 수학적 귀납법의 원리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작은 표본에서 얻은 결과를 큰 표본으로 일반화해서


적용하는 귀납법에 의한 논증과는 다르다. 예를 들면 <내가 살아온 동안
아침마다 해가 떴으니 내일도 해가 뜰 것이다>는 귀납법이다. 이런 귀납

법은 결함이 있다.
반면 수학적 귀납법은 논리적으로 확실하다. 이것은 계단 오르기와 비
슷하다. 아기들은 계단을 하나 오르는 법을 배운 후에 만약 이 과정을 반

복하면 계단 전체를 올라갈 수 있고, 어쩌면 하늘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


는 사실을 발견하고 기뻐한다. 누군가가 아기를 첫 번째 계단 앞에 데려

다 주기만 하면(그리고 누군가가 아기를 계단에서 떼어 놓지만 않으면)


된다.

수학적 귀납법에서는 1이라는 수에 대해 무언가가 참임을 알고, 거기


서 1만큼 올라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그것이 모든 정수에 대해 참임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작은 쿠키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쿠키를 한 개 먹는 것은 괜찮다.
▪ 쿠키를 어느 개수만큼 먹는 것이 괜찮았다면 한 개 더 먹어도
괜찮다.

따라서 쿠키를 임의의 수만큼 먹어도 괜찮다.


수학적 귀납법은 정수 n에 대한 진술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각
각의 수 n에 대해 P라는 속성이 참임을 증명하려 한다. 따라서 P(n)은 <n
개의 쿠키를 먹어도 괜찮다>라는 진술이 될 수 있다. 그럼 논증은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 P(n)이 참이다.
▪ P(n) → P(n+1)

그럼 수학적 귀납법의 원리에 따라 모든 정수 n에 대하여 P(n)은 참이

다.
이것은 정수의 경우에는 괜찮지만 사이에 있는 모든 수를 포함하는, 혹
은 가능한 모든 분수를 포함하는 슬라이딩 스케일을 다룰 때는 까다로워
진다. 우리가 계단식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최소의 단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거의 같은 크기로 보이는 일련의 쿠키에 이것을 적용해 볼 수 있
다. 거의 같은 크기라고 하면 서로 간의 무게 차이가 5그램 이내라는 의미
일 것이다. 50그램 쿠키가 52그램 쿠키와 거의 같은 크기이고, 그것은 다
시 54그램 쿠키와 거의 같은 크기라 생각하면 행복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몇 단계만 거치면 쿠키의 크기가 두 배가 된다. 나도 한 반


학생 스무 명에게 요점이 무엇인지 말해 주지 않고 이런 식으로 쿠키를
나누어 준 적이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옆 친구와 쿠키의 크기를 비교해
보라고 했고, 학생들은 쿠키의 크기가 거의 같다며 모두 만족했다. 하지

만 그러고 나서 첫 번째로 준 학생과 마지막에 준 학생에게 쿠키의 크기


를 비교해 보게 했더니 모두들 자지러졌다. 첫 번째 것은 아주 조그맣고,
마지막 것은 아주 거대했기 때문이다.

퍼지 논리
진리를 좀 더 미묘한 수준으로 나누면 이런 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쿠키 이야기에서 핵심은 먹어도 좋은 쿠키의 양이 그냥 <괜찮
다>와 <괜찮지 않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표현도 가능하

다. <괜찮다>, <조금 괜찮다>, <괜찮다고 할 수는 있지만 별로 좋지는 않


다>, <별로 좋지 않다>, <애매하다>, <의심스럽다>, <좀 많다>, <너무 많
다>, <많아도 너무 많다>, <터무니없이 많다> 등등. 4장에서 보았듯이 배
중률의 법칙이 적용되는 일반적인 논리에서는 <괜찮다>와 <괜찮지 않다>

외에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둘 중 하나로 몰아넣


어야 한다. 선을 그을 수 있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위치를 찾는 것이 불가
능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진릿값을 0과 1 사이의 눈금 위에 존재하는 어
떤 값으로 취급할 수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런 개념이 위험하기도 하

다. 진리가 협상 가능한 것이고,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진리라는 생각


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회색 지대에서는 이것이 진리라고
본다. 확률의 경우에도 진리일 수 있다. 확률에서는 무엇이 참인지 완전
히 확신하기란 불가능해서 몇 퍼센트까지만 확신할 수 있고, 나머지는 의

심스럽게 바라보아야 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백분율은 대상을 0과 1 사


이의 진리 눈금 위에 올려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 인간
은 이것을 이해하는 데도 별로 신통치 않을 때가 많아 보인다.

4장에서는 퍼지 논리에 대해 잠깐 언급했다. 퍼지 논리는 진릿값을 0


에서 1 사이의 값으로 취하는 형식 논리의 한 유형이다. 이것은 무언가가
참인지 아닌지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아니라 무언가가 참인 정도를 측정
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관이 있지만 똑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인터넷

으로 일기 예보를 보면 하루 동안 시간마다 강수 확률을 알 수 있다. 그럼


나는 보통 머릿속으로 이 정보를 합쳐서 비가 얼마나 올지 판단한다. 만
약 일기 예보에서 강수 확률이 90퍼센트라고 하면 나는 이것을 비가 많이
올 모양이라고 해석한다. 만약 강수 확률이 40퍼센트라고 하면 비가 조금

올 모양이라고 해석한다. 실제로는 이 확률이 일기 예보의 불확실성이 어


디서 오느냐 하는 문제 때문에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비가 오리라고 정
말로 확신할 수 있으려면 아주 강력한 폭풍이 이쪽을 향해 세차가 밀고
오고 있어야 한다. 비가 오리라고 확신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약한 비구름
이 흐지부지 소멸되거나 방향을 바꿀 가능성이 있는 경우다.

그와 비슷하게 시험이 단지 합격과 낙제로만 판가름 난다면 그 결과가


아주 명확할 것이다. 결과를 받아 들기까지는 시험에 붙었는지 떨어졌는
지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간당간당한 경계에 걸쳐져 있는 경우에만 그렇
다. 정말 시험을 잘 본 학생이라면 시험을 얼마나 잘 봤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합격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이번에도 역시 확신


과 무언가가 참인 정도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일단 불확실성이 제거되었다고 해도 무언가가 참인 정도는 여
전히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시험을 0점부터 100점까지 점수를 매겨

평가한다고 하면 71점을 받고서 선생님한테 이 점수가 좋은 점수인지, 나


쁜 점수인지 물어볼 수 있다. 그럼 이번에는 좋은 점수부터 나쁜 점수까
지의 척도가 통째로 등장하고 이제 불확실성은 우리가 모르는 데서 나오
는 것이 아니라 회색 지대에서 나온다.

퍼지 논리는 현재 수학보다는 응용 공학 분야에서 디지털 장치를 제어


할 때 회색 지대를 처리하기 위해 더 많이 사용된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전기밥솥이다. 전기밥솥은 수분 흡수 속도가 느린지, 다소 느린지, 다소
빠른지, 빠른지 등 살짝 모호한 조건에 따라 밥 짓는 과정을 조정한다. 이

것은 난방과 냉방 조절, 혹은 잠재적으로 변화하는 조건에 역동적으로 반


응해야 하는 그 어떤 것에도 활용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그러데이션이 무
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직 정의 내리지 못한 상태지만 완전한 참과 완전
한 거짓 사이의 진릿값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장치

를 더 섬세하게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중간값의 정리
완전히 논리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경계선과 회색 지대를 처리하는 또

다른 방법은 그 선이 회색 지대 어딘가에 있기는 한데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그 지대 어딘가에 경계선이 있
다는 사실만 안다. 분명 그 선보다 아래에 있는 지점과 분명 그 선보다 위

에 있는 지점을 지적함으로써 그 영역의 범위를 제한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모든 사람이 각자 만족할 만한 완벽한 크기의 쿠키를
한 번에 구워 낼 수 있다. 우선 너무 작은 것이 분명한 크기에서 출발한
다. 2그램 정도의 쿠키 반죽만으로도 시작할 수 있다. 그다음에는 점점 더

크게 만들면서 각각의 쿠키가 앞서 만든 쿠키와 대략 비슷하지만 알아차


리기 힘들 정도로 살짝 커지게 한다. 너무 큰 것이 분명한 쿠키가 나올 때
까지 이런 식으로 진행한다. 자기 얼굴 정도의 크기면 분명 크지 않을까
싶다. 다음에 나오는 사진이 내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 낸 쿠키의 집합이
다.
그 사이에는 사실상 모든 크기의 쿠키가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위한 완벽한 크기의 쿠키가 그중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


다. 이 경우에는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쿠키가 대부분의 사람이 좋아
하는 크기보다 작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하면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완벽한 쿠키의 크기가 어떤 건지 알지 못해도 나의

필요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다. 그 사이 어딘가에


모두를 위한 완벽한 크기가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은 중간값의 정리를 적용한 것이다. 이것은 수학과 학생들이 보통
학부 시절에 배우는 미적분학에 나오는 정리다. 이 정리에 따르면 함숫값

이 0에서 시작해서 어떤 수 a까지 이어지는 연속 함수가 있을 때 그 함수


는 반드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값을 취해야 한다. 여기서 <연속>이
라는 말은 다소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사이에 간
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내가 만든 쿠키는 모든 값을 취하지 않

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랬다면 무한히 많은 쿠키가 나와야 할 테니


까 말이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중간값의 정리에 대한 현
실적 근사치를 사용한다. 모든 것은 우리의 지각에 의해 결정되는 어떤
정확도까지만 참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몇 달 전에 나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스쿨의 한 미대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학생은 시각적 착시를 일으켜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지각을
탐험하는 중이었다. 그는 관람객들이 그 착시를 물리적 구조물이라고 믿
을지, 아니면 디지털 조작이라고 여길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문제는 사
람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정말 확신하지 못하게 할 최적의 지점을 찾아
내는 것이다. 나는 그가 중간값의 정리를 사용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물리적 구조물인 것이 분명한 것에서 시작해서 점점 모호해지다가 결
국에는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해서 디지털 조작임이 분명한 것까지 일련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양극단 사이에 놓인 회색 지대의 어느 곳


에 관람객들이 진짜인지 디지털 조작인지 확신하지 못할 지점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예술가는 그 지점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 필요가 없다. 그
리고 그 지점은 관람객마다 모두 다를 수도 있다. 예술가는 그저 그 지점
이 회색 지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초콜릿 회사에서도 자기네 초콜릿에 들어 있는 코코


아 함량을 이런 식으로 정한다고 할 수 있다. 회사에서는 코코아 함량을
다양한 비율로 생산해서 초콜릿 애호가들이 모두 자기에게 완벽하게 맞
는 비율을 어디선가 찾을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여러 초콜릿 회사에서 이

범위를 70퍼센트 근처에서 멈추어 버리는 게 아쉽다(사실은 72퍼센트에


서 멈추는 경우가 제일 많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비율이 포함되
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초콜릿 함량 회색 지대는 기분에 따라 80퍼
센트에서 100퍼센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이것은 인종을 점점 더 세밀한 그러데이션으로 나누었던 원리와 유사


한 원리다. 계몽되지 않았던 옛날에는 그냥 <백인>과 <비백인>만 있었다.
지금은 <유색 인종>에 대해 이야기할 뿐 아니라 혼혈인에 대해서도 이야
기한다. 혼혈인이라고 하면 암묵적으로 백인과 비백인 사이의 혼혈을 의
미할 때가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비백인과 또 다른 비백인 사
이의 혼혈인을 가리키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이를 테면 흑인과 아시아인
사이의 혼혈인을 <블래시안 blasian>이라고 부른다. 내 친구 하나는 멕
시코인과 필리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자신을 <멕시피노 Mexippino>

라고 부른다.
하지만 4분의 1은 아시아인이고 4분의 3은 백인인 사람(이 사람은 백
인으로 통할 가능성이 크다)과 4분의 3은 아시아인이고 4분의 1은 백인
인 사람(이 사람은 거의 아시아인으로 보일지도 모른다)에게 각각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할까? 이 장 전체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이런 것을 기술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하고, 그 각각의 가능성은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다. 간단하게 <백인>과 <아시아인>으로 부를 수도 있지만 그럼 정
확히는 양쪽 범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결과가 나온

다. 어딘가에 경계선을 긋는 바람에 대부분의 사람들 눈에 백인으로 보이


는 사람이 <유색 인종>으로 분류되는 기이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을 일일이 고려해서 점점 더 세밀한 범주를 설정할 수도 있지만
그럼 극단적으로 구체적인 범주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쏟아져 나
올 것이다. 그냥 인종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을 하나로 뭉뚱그려 우리는

모두 <인간>이라 선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인종에 관한


한 자신은 <색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래서는 사람들이 실제
로 경험하는 인종 차별을 무시하는 꼴이 된다. 내 생각에 우리는 무엇보
다도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더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간극 잇기
여기서 말하려는 바는 회색 지대와 논리에 대해 조심하지 않으면 결국
에 가서는 논리성을 유지할 방법이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밖에 남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점진적인 논리 단계를 이용하면 무슨 일
이 벌어지는지 본인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를 대단히 극단적

인 입장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 사람들을 이런 흑백 논리에 붙잡아 두면


불일치한 모든 의견을 점점 더 양극단으로 벌려 놓게 된다. 나는 모든 사
람이 여전히 논리성을 유지하면서 이런 입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터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퍼지 논리든, 확률론이든, 회색 지대 안에 알

수 없는 어딘가에 그어 놓은 선이든, 아니면 불확실성을 그냥 더 편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이든, 이런 것들은 우리의 미묘한 세상을 다루기 위한 아
주 미묘한 방식들이다. 회색 지대는 흑과 백 사이를 잇는 다리다. 실제 세
상에서는 흑백처럼 단순하게 구분되는 것이 거의 없다. 사실 우리는 모두

그 회색 다리 위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흐릿하고 불


확실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긴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런 점
을 인정하고 더 많은 다리를 짓는다면 세상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부도덕한 사람들이 회색 지대를 이용하려 들 때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
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회색 지대를 정의롭게 활
용한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

로 아주 조금씩 단계를 높이며 우리를 한쪽으로 움직여 가다 보면 출발점


에서 아주 먼 곳까지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를 단번에 일구
어 내려고 하면 도저히 엄두가 안 난다. 나는 항상 이런 심리적 트릭을 이
용해서 변화를 이끌어 낸다. 피아노에서 어려운 곡을 새로 배울 때도 이

런 방법을 쓴다. 처음에는 아주 극단적으로 느린 속도로만 피아노를 친


다. 그러다가 메트로놈을 이용해서 알아차리기 힘들게 조금씩 속도를 차
츰 높여 가며 연주한다. 처음에는 분당 40비트의 속도로 시작한다. 그럼
연주가 아주 쉽다. 그다음에는 분당 42비트로 올린다. 그럼 내 손가락은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다음에는 44비트로 높인다. 내 손가락은


여전히 그 차이를 눈치채지 못한다. 그럼 머지않아 속도를 두 배, 심지어
는 세 배까지 올려도 그 곡을 연주할 수 있다. <조금 더 늘려도 차이가 나
지 않는다>는 원리는 케이크를 먹을 때는 해롭지만, 과제를 수행할 때는
유익하다.

더 진지하게 들어가서 이 방법론을 이용하면 겉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을 이어 줄 다리를 찾아낼 수도 있다. 앞에서는 긍정 오류와 부정 오
류라는 측면에서 사회 복지 제도를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차이에 대
해 언급했다. 어떤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도와야 한다고 생

각한다. 그러다가 실수로 돕지 않아도 될 사람을 돕게 되더라도 말이다.


반면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란은 큰 분열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그 대신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기도 한다. 사회 복지 제도가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도


그냥 돈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큰돈을 펑펑 나누
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예를 들어 군 복무 중에 부상을 당한 병사 등 특히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상황이 그

렇다면 진짜 문제는 사람들을 도울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상황


에서 어디까지 도와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사람들을 회색 지
대에서 어디에 위치시키고, 그 회색 지대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
제가 된다. 이후에 나올 장에서는 우리와 의견이 달라 보이는 사람들을

아우르고, 그들을 회색 지대의 다리로 끌어들이기 위해 원리를 추상적으


로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기법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어려운 논증을 공통점이 있으면서 이해하기는 더 쉬운 논증과 비교해서
이해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비유에 대해 알아보겠다.
13장

비유

앞에서 추상화는 논리가 작동하는 세상에 도달하는 방법임을 살펴보았


다. 추상의 세계는 사물, 인간, 느낌 등이 얽히고설킨 실제 세상과는 거리

가 있는 아이디어와 개념의 세계다. 하지만 그렇다면 논리의 세계는 우리

가 실제로 사는 세상과 어떻게 상호 작용할까? 논리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만 한계가 있다. 추상의 세계는 우리의 실제 세상

에 빛을 드리워 주지만 실제 세상은 아니기 때문에 실제 세상으로 돌아올


때는 무언가가 어쩔 수 없이 상실되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 장에서는 추상적 아이디어가 비유라는 형태를 빌려 실제 세상의 상


황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비유가 어떻게 우리 세상에 대한 좋은 논

증과 나쁜 논증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지 그리고 우리가 비유를

끌어들일 때 위험한 부분은 무엇인지 알아보겠다.

추상화
이 책을 시작하면서 현실 세계에서는 사실 그 무엇도 논리에 따라 행동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따라서 논리를 이용해서 무언가를 연구하려

면 어떤 추상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즉 해당 상황에서 세부 사항을 일부

무시해서 모든 것이 논리를 따라 작동하는 개념의 추상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상황을 단순화된 버전의 모형으로 만드는 것, 혹

은 한 상황에서 특정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과 비슷할 때가 있다. 이

렇게 추상화를 하면 논리를 사용할 수 있지만, 추상화의 과정 자체는 논

리적이지 않다.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어떻게 단순화할지 선택해

야 한다. 앞 장에서 우리는 똑같은 상황이라도 그 추상 버전을 찾아내는


방법은 대단히 다양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렇다고 어떤 방법은 맞고,

어떤 방법은 틀리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추상화 방법이 달라지면 우리

도 다른 것을 보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추상화를 통해 잃는 것은 무엇

이고 얻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있어야 한다.

상황에 담긴 구체적인 부분을 잊어버리면 서로 다른 많은 상황이 똑같

아 보이기 시작한다. 추상화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상황이 가진 공통점

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방법이다. 6장에서 특권을 나타내는 정육면체와 직


육면체를 다룰 때 했던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서로 다른 다양한 상황의

측면을 직육면체 형태의 상호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추상화가 비유와 관련되어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비유란 서로 다른

두 상황 사이의 유사점에서 나오고, 추상화는 이런 유사점을 진지하게 받

아들여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상황인 것처럼 취급한다. 가장 기본적인


비유 중 하나는 두 개의 사과, 두 개의 바나나, 두 개의 의자 같은 대상 사

이의 비유다. 이런 상황들의 공통점은 <두 개>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이런 상황들의 유사한 점을 취해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개념으로 여김

으로써 생겨났다. 모든 수학은 이런 식으로 서로 다른 상황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개념들을

그 자체로 연구하면 그전보다 한 단계 더 추상적인 단계로 이동한 것이


다.

6장에서 대상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강조하는 효과에 대해 배운 대로

이런 상관관계를 그려 볼 수 있다.

여기서 화살표는 일반적인, 혹은 추상적인 무언가에서 구체적인 사례

로 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추상화는 무언가 공통점이 있는 서로 다른 상

황들 사이를 그네 타기로 오가는 방법이다. 사실 나는 추상화의 도표도

그네와 조금 비슷해 보이게 그려 놓았다. 2라는 수는 우리로 하여금 두 개

의 쿠키가 등장하는 상황으로부터 두 개의 다른 것이 등장하는 상황으로

그네 타기로 넘어갈 수 있게 해준다.


추상적 단계로 이동하는 것은 한 상황에 담긴 논리를 찾아내는 방법이

다. 그렇지만 비유를 통하면 대놓고 추상 세계를 거치지 않아도 그런 논

리를 찾아낼 수 있다. 보통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그 추상 버전이 무엇인

지 명확히 밝히지 않고도 비유를 활용한다. 추상적 논리를 제시하면 너무

현학적으로 보일 수 있는 현실 세계의 상황에서는 이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추상적 논리를 제시하는 것이 정확하기는 하지만 추상적 논리를 훈

련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상황을 이해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어린아이에게 셈을 가르칠 때도 우리는 보통 두 대상의 집

합을 반복적으로 보여 주면서 그 두 집단 사이의 유사점을 아이가 알아낼

수 있도록 이끄는 방식을 이용한다.


반면 수학에서는 추상 버전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으로부터 커다란 힘

이 생겨난다. 특권의 직육면체에서 보여 주었던 것이 그 예다. 그렇게 하

면 더 복잡하거나 미묘한 비유, 혹은 출발점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사례

까지도 아우르는 비유를 만들 수 있다. 이는 마치 나무에서 나무로 뛰어

넘어 갈 때 그냥 뛰지 않고 나뭇가지를 이용해 그네 타기를 하면 훨씬 멀

리 갈 수 있음을 발견한 원숭이와 같다. 사실 이것은 비유에 관한 비유다.

이제 비유 그 자체의 뒤에 숨어 있는 추상의 원리를 살펴보자.

비유를 위한 틀

수학자들은 자기가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마

다 그 상황을 대표하는 추상 버전을 찾으려고 한다. 나도 거듭해서 비유


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비유의 추상 버전은 대체 어떤 것일까? 상

황을 일반적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X라는 추상적 원리를 통해 개념 A와

개념 B를 비유한다. 그리고 X는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암묵적인 경

우가 많다. 이것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나뭇가지 사이로 그네 타기를 하는 원숭이처럼 우리도 어떤 수준의 추

상을 그네의 회전축으로 삼을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한 상황에서 세부

사항을 더 많이 무시할수록 더 많은 상황이 같은 상황으로 바뀐다. 수학

은 점점 더 추상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고, 사람들은 추상의 수준이 높

아지면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에 단계가 올라갈수록 차츰 사람들의 인기

를 잃고 만다. 숫자가 문자가 되는 순간 수학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추상화 그네의 회전축은 다음과 같이 표현

할 수 있다.
여기서 a와 b는 1, 2, 3이나 다른 수를 대표한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추상적인 수준이 있다. 그 수준에서는 덧셈과 곱셈 자체의 유사성을 밝히

고 <2진 연산>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2진 연산은 덧셈과 곱셈을 포함하지

만 다른 많은 것도 함께 포함한다. 여기 한 발 더 나아간 추상화 수준을

소개한다. 320페이지 기호 라는 기호는 +, ×, 혹은 다른 무엇인가가 될

수 있는 2진 연산을 상징한다.

첫 번째 수준에서는 <1 + 1>이 <2 + 3>과는 유사하지만 <1 × 2>와는

유사하지 않다. 두 번째 수준에서는 덧셈 그 자체가 곱셈과 유사하므로

이제 맨 아랫줄에 있는 모든 것을 유사하게 취급할 수 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제일 높은 곳이 가장 좋은 수준이지만,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중간 수준까지만 가야 한다.23

나의 박사 학위 지도 교수였던 마틴 하이랜드 선생님이 내게 가르쳐 준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상황에 맞는 적절한 추상화 수준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적절한 거리에서 전등을 비추는 것과 비슷

하다. 그래야 세부 사항까지 밝게 눈에 들어오면서 동시에 그 주변의 맥

락까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추상화의 경우 이것은 자기가 연구하려는

진리는 여전히 간직한 채 세부 사항은 최대한 많이 잊어버리는 것이다.


상황과 관련 있는 세부 사항을 잊어버리면 그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중요
한 부분까지 잊어버릴 수 있다. 세부 사항을 계속 잊어버리다 보면 결국

에는 모든 것이 똑같아진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생산적인 방


법이라 하기 힘들다. (그래도 나는 모든 인간이 그 뿌리는 모두 똑같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추상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더 많은 것과의 관련성을

이해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이 도표에 나오는 수에서 그런 일이 일어


난다.
<2개의 과일> 수준까지만 올라가면 <2개의 사과>와 <2개의 바나나>

사이의 유사성까지는 확보할 수 있지만 <2개의 의자>는 놓치게 된다. <2


개의 의자>를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한 단계 더 올라가서 <2개의 대상> 수

준까지 가야 한다. 6장에서 특권의 정육면체를 발견했을 때 이런 일이 발


생했다. 우리는 30의 소인수에 해당하는 정육면체와 42의 소인수에 해당

하는 정육면체에서 시작해서 이것이 똑같은 도형임을 알아냈다. 양쪽 수


모두 세 가지 서로 다른 소수의 곱인 <a × b × c>이기 때문이다. 이 비

유를 다음의 도표에 표현했다.


하지만 여기서 추상화 수준을 한 단계 더 올려서 이것을 부분 집합 {a,

b, c}의 정육면체로 생각하면 그 비유를 임의의 세 가지 유형의 특권을 비


롯해 더 많은 것에 적용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다음의 그림처럼 추상화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 것이다.

좀 더 추상적으로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면 구체적인 개념으로부터 더

멀어질 것처럼 보이지만(그림에서 수직으로) 사실 이렇게 하면 깜짝 놀랄


사실을 표현할 방법이 생긴다. 우리가 시작한 출발점에서 그네 타기로 더

멀리 오갈 수 있게 해줌으로써(수평으로) 더 구체적인 개념을 포함해 더


많은 개념을 아우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내가 수학에 대해 주장하는

것 중 많은 부분은 다음과 같은 나의 관점에서 나온다. 수학은 일상생활


과 조금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낮은 그네를 고르면 수학에서 별로 멀리

나가지 못해서 어쩌면 물리학 정도까지밖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관점이


다. 하지만 더 추상적으로 접근하면 수학에서 아주 먼 곳까지 그네 타기
로 넘어갈 수 있고, 우리의 비유를 아주 현실적인 실제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다. 아주 현실적인 상황의 예를 살펴보자.

여기서 나오는 질문은 아랫줄에 있는 사람들이 유사한 경험을 하는지


여부다. 이 질문에 뉘앙스를 담아 대답하자면, 그것은 추상화의 수준을

어디까지 올리느냐에 달려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논란으로 분열이 일


어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데 제일 유리한 추상화

수준을 선택하고 다른 수준도 정당할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


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추상화와 비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사실 이 책

은 추상화와 비유를 어떻게 신중하게 골라야 세상 속에서 오가는 우리의


논증을 해명할 수 있는지 다루는 것이 전부다. 여기 비유가 우리에게 도

움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몇 가지 알아보자.

공리 찾기

11장에서는 자신의 개인적 신념 체계의 공리, 즉 자신의 모든 신념의


뿌리가 되는 근본 신념을 찾아내는 것에 대해 설명했다. 비유를 생각하면

자신의 공리가 무엇인지, 혹은 다른 사람의 개인적 신념이 무엇인지 이해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2장에서 나는 긍정 오류보다는 부정 오류를 더 신경 쓰는 나의 공리를


찾아낸 일에 관해 썼다. 이것은 사회 복지 제도가 필요하다는 믿음에서

나왔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다양한 상황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비롯됐


다.

인종 문제와 관련해서 소수 집단 우대 정책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일 때


어떤 사람들은 유색 인종 중에는 부유한 집단 출신이라 혜택에서 소외된

백인보다 도움을 덜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소수 집단


우대 정책에 반대한다. 혹은 출신 학교에 따라 주어지는 대학 입학 관련

혜택에 관해 이야기할 때 어떤 사람들은 일부 사립 학교보다 더 많지는


않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혜택을 주는 국립 학교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데도 그런 사람들을 도와야 할까? 그래도 나는 유색 인종 그리고 특혜를


못 받는 학교 출신의 사람을 모두 도와야 한다고 믿는다. 그중에는 그런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암 검진에 대해 토론할 때 어떤 사람들은 이 검사가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아서 암이 없는 사람한테도 양성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


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불필요한 정신적 충격, 때로는 불필요한 치료까

지 받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걱정스러운 부분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암이 있는데도 너무 오랫동안 진단을 받지 못해 치료가 어렵거나 불가능

해지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한다.


성범죄에 대해 토론할 때 어떤 사람은 모든 고발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다면 무고한 사람까지도(보통은 남성) 성범죄자로 낙인찍혀 고통받게 될


거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성희롱, 성폭행, 심지어 강간 등의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 없이 살아가고 있고, 그 바람에 사회 전반에 성범죄가 만연해 있다

는 점이다.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성범죄자로 잘못 낙인찍히는 것 역


시 누구도 겪어서는 안 될 정신적 충격을 주겠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해
서 일어나는 성범죄 건수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고 믿는다.
이런 상황들은 삶의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에 걸쳐져 있지만 이 모든

상황 사이에는 무언가 유사성이 존재한다. 이 유사성은 암묵적일지도 모


르지만 나는 그것을 따로 떼어 내어 명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유용하다
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언뜻 보기에는 처음의 두 시나리오만 공통점이 있
는 것 같다.

두 번째 나오는 두 가지 상황은 다른 원리로 인해 이와 별도로 유사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추상화 수준을 한 단계 높이면 이 모든 시나리오를 다음과 같은


사실 속에 아우를 수 있다. 즉, 나는 긍정 오류보다 부정 오류를 더 중요
하다고 믿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다음 그림은 다른 수준의 추상화가 다
른 비유를 낳는 것을 보여 준다.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올라가 보면 내 신념을 뒷받침하는 사고 과정에서


본질을 추출함으로써 복잡한 사안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명확
하게 정리할 수 있다. 그러고 나면 그것을 더 많은 상황에 적용해서 남들

에게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고, 내 머릿속에 더 쉽게 담아둘 수 있기 때문


에 그것으로 더 나은 추론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실제로 그 수준의 추상화까지 올라가고 나니 나는 그 안에 또 다른 상
황도 아우를 수 있음을 깨닫게 됐다. 호주의 경우와 같은 총선거 의무 투

표제 개념에 관해서다. 나는 예전에는 이런 원칙에 동의하지 않았다. 민


주주의란 모든 사람이 투표의 권리를 갖는 것이지, 투표의 의무를 갖는
것은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들에게 강제로 투표
를 시키는 제도가 아니라고 설명하는 글을 읽게 됐다. 이것은 정부로 하

여금 모든 사람이 투표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투표자 억압24과 참


정권 박탈을 줄이는 조치를 취하도록 강제하는 제도다. 나는 그런 부분은
고려해 본 적이 없었고, 그 글을 읽는 즉시 생각을 바꿨다. 지금은 이것이
긍정 오류 대 부정 오류의 또 다른 사례임을 이해하게 됐다. 의무 투표제

가 없으면 부정 오류의 위험이 있다. 즉, 교통 문제나 어떤 비도덕적인 이


유(투표자 억압 등)로 인해 투표를 못 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 반면 의
무 투표제를 시행하면 긍정 오류의 위험이 있다. 즉, 투표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투표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에게도 투표용지를 백지로 내

거나 무효표로 만들 수 있는 자유가 남아 있다. 이것은 내가 부정 오류를


막는 데 가장 신경 쓴다는 것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상황이다. 누가 지적해
주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상황이 거기에 해당되는지 깨닫지 못했다.
새로운 정보가 생겼을 때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는 능력도 합리성을 보여

주는 중요한 신호라는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다.

원리 검증하기
비유를 이용하면 우리의 원리를 검증해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자기가

자기만의 어떤 근본 원리 때문에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데 그것이 정말 참이라면 그와 비슷한 상황으로 옮겨 갔을 때도 똑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그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면 이는 우리의 원리가 진정한 원리가 아니거나, 추상화 수준을 잘못 선

택했다는 의미가 된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고의적으로 이런 실수를 해


서 자신이 편견에 빠진 것이 아니라 강력한 근본 원리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거나 타인을 설득하려 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한 여성이 회사에 채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채용단이 성차


별을 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들은 성차별이 아니었으며 단지 그
여성이 경력이 충분하지 못해서 뽑지 않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
만 그렇게 말해 놓고 채용단이 경력이 더 모자란 남성을 뽑는다면 이 원

리가 실제로 작동하는 논리적 원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유사한 상


황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으면 이런 부분을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유사한 상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 볼 수밖에 없다. 힐
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가 각각 대통령 선거에 나왔을 때도 이런 의문

이 제기되었다. 클린턴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성차별주의자라고 비


난을 받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기가 클린턴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예를 들면) 그녀가 거짓말쟁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많은(어
쩌면 모든) 남성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하는데도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
그와 유사하게 버락 오바마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인종 차별 혐의를

받았다. 그럼 그렇게 고발당한 사람들은 자기가 오바마를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예를 들어 그가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들은 그보다 훨씬 경험이 부족한 백인 남성들을 지지하기도 한다.
도표를 이용하면 이것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A라는

사람이 여성임에도 자기가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원리를 보편적


으로 적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경험이 부족한 남성이 등장하는 비
슷한 상황에서도 추상의 원리를 이용해서 그네 타기를 할 수 있어야 한
다.
만약 경험이 부족한 남성이 더 많은 신뢰와 지지를 얻는다면 두 사람은

이 특정 원리에 따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뒤에


또 다른 원리가 숨어 있는지 검토해 봐야 한다.

<경험이 부족한 여성>이라는 중간 수준에 따르면 맨 아래 있는 두 항목


은 더 이상 유사하지 않다. 그 추상 버전은 다음과 같다.
만약 집단 A의 사람이 집단 B의 사람과 다른 대우를 받는다면 그것은
보편적 원리가 아니라 중간 단계의 원리가 작동했음을 보여 주는 징표다.
3장에서 이야기했듯이 미국에서 흑인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이것이 인종
차별이냐 아니냐를 두고 비슷한 주장이 반복될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난
다. 똑같은 상황에서 백인도 그와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될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X를 하고 있었다


는 사실에 따른 보편적 원리가 아니라 중간 단계 원리(그 사람은 흑인이
었다)가 작동했다는 신호다.
우리는 타인의 주장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검증할 때도 이런 원리

들을 사용해야 한다. 과학 대 종교의 논쟁에서도 내가 생각하기에 과학자


들이 불편하게 여길 비유가 존재한다.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적 증거가 없
는데도 책에 적혀 있거나 종교 지도자가 한 말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
이 그 내용을 믿고 있다며 종교를 폄하한다. 하지만 과학 역시 그와 비슷
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믿음을 강요한다. 과학적 발견을 뒷받침할 증거
가 존재할지는 모르지만 비과학자들에게 그 모든 연구 자료를 읽고 직접
검증해 볼 것을 부추기지는 않는다. 과학자들은 비과학자들에게 자기의
말을 믿거나, 책이나 학술지에 적혀 있는 내용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듯

보인다.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연설 혹은 성경이나 다른 성


전에 나온 내용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말이다. 당연
히 두 상황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하겠지만 이 추상화 수준에서
는 두 상황이 어느 정도 비슷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말을 그냥 믿어서는
안 된다>라는 논증은 과학에 유리한 설득력 있는 논증이 아니다. 도표를

다시 사용해서 논증을 제시해 보자.

하지만 이것이 보편적 원리라면 과학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과학자들이 과학은 종교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그

둘을 구분해 주는 좀 더 미묘한 중간 단계의 원리를 찾은 다음, 그 수준의


미묘한 원리까지만 올라가야 과학과 종교가 유사해지지 않는다.

이 미묘한 원리는 <재현 가능한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책과

스승의 말을 그냥 믿어서는 안 된다>일 수도 있지만 그 증거가 재현 가능


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성전은 지금은 진
위를 물어볼 수 없는 사람들이 남긴 목격자의 증언이라 볼 수 있겠지만,
일부 과학도 지금은 물어볼 수 없는 사람들이 남긴 목격자의 증언을 기반

으로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정글로 모험을 떠나 지금은 멸종되


어 사라진 생명체를 관찰한 과학자의 말이나, 달에 착륙해서 본 것을 보
고한 과학자의 말이 진실인지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상황은 그 상황을
둘러싸고 대부분의 주장을 통해 드러나는 것보다 더 미묘하다. 내 생각에
는 이렇게 해야만 많은 사람이 일부 과학자와 달리 종교인은 모두 바보라

생각하지 않고 종교를 믿는 이유를 더욱 생산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감정 개입
비유는 우리가 자신에게 더욱 공감이 되는 유사한 상황을 만났을 때 감

정을 개입시키는 것도 도와준다. 이것은 논리 자체로는 자신을 합리화하


거나 타인을 설득할 수 없을 때 논증을 뒷받침할 감정적 연결emotional
connection을 찾게 해주는 중요한 방법이다. 이것은 우리가 타인의 관
점을 이해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타인에게 설명할 때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남자들은 남성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거나, 공격적이라거나,


무감각하다거나, 여성을 상대로 한 남성의 성폭력이 문화가 만연해 있다
는 둥 남자를 모두 싸잡아 비난하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날 때가 있다. 나는
모든 남자가 하나 같이 다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것
이 지배적 집단(남성)을 향한 억압받는 집단(여성)의 외침이라면 용납되
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특권을 누리는 비슷한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이 상황을

더 큰 공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보통 옥스퍼드 대학


교 졸업생과 케임브리지 대학교 졸업생을 상류층 가정에 태어나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거저 성공한 금수저들이라 여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내가 그 성공을 거두기 위해 대단히 열심히

노력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나왔다는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은 상대적으
로 억울한 느낌이 들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 상황들 사이의 유사점 덕분에 남자들이 왜 억울해하는지도 헤아릴

수 있게 되고, 왜 옥스퍼드 대학교 졸업생들에게 사람들이 반감을 느끼는


지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이 비유는 권력관계라는 추상적 개념을 사용
한다. 이 권력관계를 다음과 같이 ▽라는 기호로 표시하겠다.
그럼 이것을 이용해서 내가 상위 집단인 상황과 내가 하위 집단인 상황
(각각의 상황을 굵은 활자체로 나타냈다)을 그네 타기로 오갈 수 있고, 그

를 통해 양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와 비슷하게 아시아인으로서 나는 억압 집단에 속한다.


비백인이라는 맥락 안에서는 (비백인들 사이에서는 아시아인이 더 특
권을 누린다 말할 수 있으므로) 특권 집단에 속해 있는 상황 사이를 그네

타기로 오갈 수 있다.

이 비유를 이용해서 그네 타기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인종 차별을 반대쪽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단

계 더 추상화하면 결국 모든 사람은 누군가보다는 특권이 적고, 다른 누


군가보다는 특권이 많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그럼 모든 사람이 그네 타기를 하며 상황을 양쪽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다.
6장에서 이야기했듯이 사람들은 자신만 특권이 적은 상황에 놓여 있

고, 남들은 특권이 많은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A 집단이


자신을 대하는 방식에는 불만을 표출하면서 동시에 Z 집단을 그와 비슷

하게 대하는 것은 화가 날 정도로 위선적인 행동이다. 백인 여성이 성차

별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면서도 유색 인종 여성을 무시하는 경우, 또는


백인 동성애자 남성이 동성애 혐오에 불만을 표출하면서도 유색 인종 동

성애자 남성을 무시하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자기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눈에 더 잘 들어오는 것은 이

해할 만하다. 당신에게 위협이 되거나 당신의 발전을 가로막을 확률이 제

일 높은 사람들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 나온 그네 타기를 몸


에 더 익혀서 자기가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모순이라거나 정당하지
못하다 생각하지 말고 자기보다 특권을 못 누리는 사람들이 있음을 깨달
을 필요가 있다.

극단적 사례로 일깨우기


비유는 자신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찾아냄으로써 감정을 개입시킬

수도 있지만, 원리를 극단으로 몰아붙여 충격을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원리가 전혀 근본적인 원리가 아님을 이해하게 할 수도 있다. 예를 들

어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고, 다른 이가 자신

의 의료비를 대신 내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보편적 의료 보장


은 나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말은 자신을 보호할 책임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 져

야 하니까 경찰도, 군대도, 대중교통도 없어야 한다는 말인가? 팀 스포츠


도 없애야 하나? 가족도? 도로 같은 기본적인 기반 시설도?

이런 원리를 도표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이런 원리에 따라 유사한 사례를 극단적으로 추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실제로 이들이 도로 건설이 필요하다고 믿는 경우, 보편적 의료 보장을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좀 더 미묘한 논증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그런 식으로 극단적으로 몰아가면 사정이 달라진다고 반

박할 것이다. 아마도 그럴 테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보편적 원리는 진짜

보편적 원리가 아니라 어떤 한계 안에서만 작동하는 원리가 된다. 그럼


사람들은 원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한계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는 것이

다. 아마도 그 원리에는 차츰 작동을 멈추는 회색 지대가 존재할 것이다.


의료 보장에 대한 질문은 사실 스스로를 돌보아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고,

사회와 정부가 돌보아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이다. 정치적

의견 차이는 결국 정부의 책임이 어디까지인가에 관한 기본 공리의 근본


적인 차이로 귀결될 때가 많다. 때로는 필수는 무엇이고, 선택 사항은 무

엇인가에 관한 것일 때도 있다. 이것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의료 보장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의료와 도로 건설은 다르다고 생각하

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의료 보장

이 선택 사항에 해당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논쟁을 벌일 수 있다. 이것은


또 다른 회색 지대다. 이 안에는 의료 보장의 어떤 측면을 필수로 보고,

어떤 측면을 선택 사항으로 볼 것인가에 관한 논증이 들어 있다. 성형 수


술, 성전환 수술, 비싼 암 치료, 체외 수정, 심지어 기본적인 임산부 진료

등이 여기에 포함되는 논란 많은 사안이다.

무언가를 극단으로 몰아붙이는 목적은 보편적 원리라는 것 중 상당수


(혹은 대부분, 혹은 전부)는 그 적용 범위에 한계가 있으며, 진짜 어려운

부분은 원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를 적용할 범위를 정하는 것임

을 알려 주기 위해서다. 이것은 의견이 엇갈리는 이유를 이해할 때 핵심


적인 부분이다. 원리 그 자체보다는 그 경계선을 정확히 어디에 그을 것

이냐를 둘러싸고 의견이 엇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회색 지


대를 이용해서 대립되는 의견 간의 차이가 흑백의 차이가 아니라 회색의

명도 차이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이다. 입장의 차이가 질적인 차

이가 아니라 양적인 차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수만 있다면 이미 대립되는


생각 사이의 간극을 잇는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적절한 비유 수준 고르기
나의 현명한 친구 그레고리 피블스가 말하기를 비유는 우리를 어디로

든 데려다 줄 수 있는 다리와 비슷하다고 했다. 따라서 다리를 고를 때는


신중해야 한다. 사실 아주 높은 수준의 추상화를 선택하면 사실상 모든

것을 유사한 것으로 아우르게 되어 우리가 전혀 원하지 않았던 것까지 포

함될 수 있다. 비유의 사용이 때로는 잘못 틀어져 더 나은 논증은커녕 더


나쁜 논증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논의에서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보통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당신이


진술 A를 주장하거나 설명하려고 한다. 당신이 이것을 더욱 매력적이거

나, 접근하기 쉽거나, 명확한 진술 B에 비유한다. 여기서는 암묵적으로

원리 X가 작동한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같다.

A는 B와 유사하다.
B는 참이다.
따라서 A는 참이다.

이것은 실제 논리적 동치를 사용할 때보다 훨씬 느슨하다.


A는 논리적으로 B와 동치다.
B는 참이다.
따라서 A는 참이다.

그 이유는 비유는 반드시 어떤 암묵적인 원리 X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

다. 여기서 말없이 진행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A는 원리 X 때문에 참이다.
B 또한 원리 X 때문에 참이다.
B는 참이다.
따라서 A는 참이다.

이제 이 논증에는 논리적 결함이 나타났다. B가 참이라고 해서 원리 X

가 참이라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는 오른쪽


화살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려고 하는 셈이다.
일상의 논쟁에서는 원리 X 자체에 대해 아예 언급이 없을 때가 많다는
점 때문에 문제가 더 커진다. 우리는 그냥 사람들이 진술 B로부터 그 원

리를 추론하게 내버려 둔다. 이것은 아주 큰 결함이다. X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원리가 대단히 많은데 그 원리들이 아주 다른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서로 다른 유형의 소수 집단 사례를 들어 그들의

경험이 서로 유사한지 아닌지에 대해 살펴본 적이 있다. 이것이 무엇을


용인되는 행동, 혹은 도덕적으로 용납되는 행동으로 볼 것인지에 관한 것

이라면 더욱 구체적인 논증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성 간 결혼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동성 간의 관계가 이성

간의 관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동성 커플도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해보자. 이들은 이런 보편적 원리를 이용한다.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만약 동성 간 결혼을 허용한다면 그다음에

는 근친상간도 허용하게 될 것이라고 우긴다. 이들은 실수로(혹은 고의


로) 다음과 같은 추상화 수준이 작동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 논증에서 의견이 불일치되는 지점은 A와 B의 원인으로 가정된 원리


X 속에 있다. 동성 간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원리가 <친척 관계가

아닌 남성과 여성>까지만 올라가기를 바란다. 그래야 이성 간 결혼과 동

성 간 결혼이 유사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논쟁의 상대방이 이보다 더 높은 수준의 추상화를 채택하면 이들은 상

상력, 혹은 두려움 때문에 상대방이 실제로 택한 수준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까지 올라간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 점점 더 터무니없는 논증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위계가 존재한다.

어떤 사람은 동성 간 결혼을 허용하면 소아 성애나 동물을 상대로 하는


수간까지도 아우르게 되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개념 뒤에 자리

잡은 추상적 원리들을 명확히 드러내면 아래와 같은 도표를 얻을 수 있

다. 각각의 화살표는 한 원리에서 그 원리의 한 사례로 가는 과정을 나타


낸다.

추상화 수준을 높일수록 더욱더 극단적인 사례들이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동성 간 결혼을 찬성하는 입장이라고 해서 그 사람

이 꼭대기까지 이어진 모든 원리를 꼭 다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아니다.


<친척 관계가 아닌 남성과 여성>보다 더 아래 수준도 존재했다는 사실
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전에는 백인과 비백인의 결혼을 금지했던 시절

도 있었다. <같다/같지 않다>보다 더 미묘한 논증은 이 도표에 나오는 삼

각형 좌변 중 어디쯤에서 멈추는 것이 적절한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한


수준을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하나 이상의 수준을 올라가게 된다는 주장

은 오류다.

암묵적 수준

이런 문제점 중 상당수는 실제 생활에서는 수학과 달리 자신이 어떤 추


상화 원리를 사용하는지 명시적으로 진술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하

지만 그 비유를 듣는 사람은 그 추상화 원리를 각자 달리 추론할 수 있고,

서로 의견이 다른 경우에는 특히나 그럴 가능성이 높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한 비유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추상화

원리는 <최소>라 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최소 공배수나 도표에서 화살표


들의 첫 번째 교차점 같은 것이다. 위의 사례에서 보면 더 높은 곳에 있는

교차점들은 너무 높이 있다. 이것들은 최소가 아니었고 동성 간 결혼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결혼 가능성을 <친척 관계가 아닌 2명의 성인>의 제


일 낮은 교차점 너머로 일반화해서 믿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비합리적이

다.

일상생활에서 비유가 애매한 이유 중 하나는 자기가 끌어들인 추상화


원리가 무엇인지 명백하게 밝히는 경우가 드물다는 데 있다. 결국 연습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직관적으로 호소해서 그들이 추상화 능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은 어떤 원리가

이용되는지를 추측해 내야 한다. 반면 수학에서는 추상화 원리를 명확하


게 밝히는 것이 사실상 전부다. 우리는 서로 유사한 상황 A와 B를 보고,

그것을 야기한 원리 X가 무엇인지에 관해 정확한 진술을 만들어 낸다. 따


라서 모호함이 있을 수 없다. 만약 A와 B가 모두 X의 사례이고, X가 참이

면 A와 B도 반드시 참이어야 한다.

동성 간 결혼에 대한 논쟁에서 보았듯이 비유에 대한 의견 불일치는 기


본적으로 두 가지 형태를 띤다. 의견 불일치는 누군가가 이런 형태의 비

유를 끌어들였을 때 시작된다.

하지만 보통 X는 명확하게 진술되지 않는다. 이제 누군가가 여기에 반

대한다. 반대의 이유는 둘 중 하나다. 우선 이 사람은 A의 뒤에는 더욱 구


체적인 원리 W가 작동한다고 보기 때문에 A와 B가 유사하지 않다고 생

각할 수 있다.
아니면 이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이 더 보편적인 원리 Y를 끌어들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다른 C까지도 유사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런 주장에 반대한다.

양쪽 경우 모두 그냥 무언가가 유사하다, 혹은 유사하지 않다 선언만

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작동하는 원리가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밝히는 편


이 서로 다른 사례들이 어떤 의미에서 유사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 유사

하지 않은지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백인이 흑인을 상대로 가하는 인종 차별은 흑인이 백인을 상

대로 가하는 인종 차별과 같은 것인가?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같고, 어떤

의미에서 다른지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이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 수준의 원리까지 올라가야 하느


냐는 문제다.

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좋은 추상화 수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정답

이 없다. 모든 비유가 어느 수준에 가서는 깨지게 되어 있다. 이것이 비유


의 핵심 요점이다. 비유는 원래의 상황과 똑같지 않다. 어느 면에서는 비

슷하지만 따라서 어느 면에서는 다르기도 하다. 비유가 어딘가에서는 깨

진다고 해서 그 비유가 나쁜 비유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그 비유가


우리의 논의와 관련된 측면에서 깨진다면 그 점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서로 다른 여러 수준을 탐색하면서 어

느 수준에서 비유가 생겨나고 깨지는지 알아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


게 하면 어떤 추상화 수준이 작동하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총체적 목표는

상황들이 어떤 경우에 동등하고 어떤 경우에 동등하지 않는지 더욱 잘 이


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음 장의 주제다.
14장

동치

같을 때와 같지 않을 때
수학에 관한 아주 오래된 잘못된 믿음 중 하나는 수학은 결국 정답을

구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은 그냥 옳거나 틀리거나 둘 중 하나

라고 본다. 널리 퍼져 있는 또 다른 잘못된 믿음은 수학은 결국 방정식이


전부라는 것이다.

이 두 잘못된 믿음이 모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


다. 학교 수학에서는 방정식이 많이 나오지만 수보다 더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등장함에 따라 방정식보다 더 흥미로운 주제도 함께 다룬다.


하지만 방정식의 핵심에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 존재한다. 방정식이란

결국 서로 같은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와 정말로 똑같은 것

은 자기 자신 말고는 없다. 8장에서 보았듯이 방정식은 <x = x>의 형태로

된 것 말고는 모두 거짓이다. 그런데 <x = x> 같은 방정식은 진리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것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반면 다른 방정식들은 거짓이

면서도 어느 정도 진리를 품고 있다. 따라서 양변이 같다는 것은 맞는 말


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맞지 않는 말이다. <10 + 1 = 1 + 10>이라는 방

정식에서 이것을 확인한 바 있다. 여기서 양변은 같은 답을 내놓는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기술적으로 서로 다른 과정을 기술한다는 점에서는 같

지 않다.
수학 방정식의 핵심은 어떤 면에서는 같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같은

두 대상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앞 장에서 보았듯이 두 대상의

같은 부분에 대한 감각을 이용해서 두 대상의 같지 않은 부분 사이로 그

네 타기를 하며 대상을 이해하게 된다. 이 개념은 연구 수준의 수학으로

도 이어진다. 이 수준에 오면 <같음>이라는 의미가 점점 더 미묘해져서


같음의 적절한 개념을 발견하고 설명하려면 점점 더 많은 양의 기술적 노

력을 투자해야 한다.

앞 장에서 비유란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는 같고, 필연적

으로 어떤 면에서는 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찾아내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러고 나면 둘이 같지 않은 점을 이용해서 그네 타기로 오가다가 논리적

으로는 유사하지만 감정적으로 설득력이 있거나, 더욱 극단적이어서 도

덕적 판단을 더 쉽게 내리게 해주는 장소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서로 다른 양의 <같음>으로 서로 다른 비유를 만들어 내는 다양

한 수준의 추상화가 존재한다. 그중 어느 것을 골라야 할까? 이곳도 항상

회색 지대가 등장하는 장소다. 대상들이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면에서 동

치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이 같은가, 다른가?>보다는 <이것이 어

떤 면에서 같고, 어떤 면에서 다른가?>라는 질문이 더 좋은 질문이다.


수학에서의 동치

우리가 처음 수학을 배울 때는 온통 수만 나온다. 그리고 수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고는 서로 같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방정식이 수학의

주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학의 단계가 높아짐에 따라 도형, 곡선,

면, 공간, 패턴 등 수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대상들


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런 것들은 당신이 얼마나 엄격하기 원하느냐에

따라 서로 닮은 방식이 훨씬 더 많이 나올 수 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서

로 다른 상황에서 서로 다른 수준의 같음에 꽤 익숙해져 있다. 예를 들어

두 명의 사람이 <a>라는 글자를 쓰면 모양이 똑같지 않겠지만 그래도 우

리는 두 글자를 모두 <같은 글자>로 인식한다. 하지만 이 두 글자가 다른

사람이 쓴 글자라는 것도 구분할 수 있다. 내가 <a>라는 글자를 몇 번에

걸쳐 쓰면 모두 살짝 달라 보이겠지만 필체 전문가는 이 글자들이 모두

같은 사람이 쓴 것임을 알아낸다.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손 글씨체의 한 가지 문제점은 자세히 살펴보면

<a> 자가 모두 다 정확히 똑같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손 글씨처럼 보여


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는 점이

다.

수학에서도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수준의 동치를 원하는 경우가 있다.

두 삼각형이 정확히 같은 모양과 같은 크기를 갖고 있으면, 즉 서로의 각

이 모두 같고 변의 길이가 모두 같으면 합동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 둘은 정확히 똑같다. 만약 각은 서로 같지만 변의

길이가 다르면 한쪽이 나머지 한쪽의 확대 혹은 축소 버전으로, 이 경우

는 닮음이라고 한다.

이 도형은 정확히 똑같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는 같다. 어찌 보면 두

번째 삼각형은 첫 번째 삼각형을 우리 눈에 더 가깝게 가져다 댔을 때 보

이는 모습과 같다. 그럼 이것은 어떨까?


이것은 첫 번째 삼각형을 그냥 수평으로 뒤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삼각형을 뒤집으면 다른 도형이 될까? 이것은 당신이 이 도형을 무엇에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이들은 글자를 배울 때 가끔 똑바른 방향으로

쓰지 못해 곤란을 겪기도 한다. 왜 그런지 이해는 간다. 우리는 아이들이

다음의 두 글자가 서로 같지 않다고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둘은 같은 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모든 동치와 같음은 당신이 무엇을 고려하고, 무엇을 무시하느냐

에 달려 있다. 다만 <x = x> 같이 엄격한 등식은 예외다. 이 경우에는 같

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수학은 대상이 같아지는 지점은 어디이고

달라지는 지점은 어디인지 찾아내는 것을 중심에 둘수록 점점 더 상급으

로 올라간다. 어떤 대상이 더 많은 차원을 가질수록 그것을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는 방식이 늘어나고, 그 대상도 더욱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최근에 해결된 가장 유명한 수학의 미해결 문제 중 하나는 푸앵카레 추

측이다. 여기에는 본질적으로 이런 미묘함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푸

앵카레 추측에서는 어떤 특별한 종류의 고차원 공간이 있을 때 크기뿐만


아니라 곡률과 뾰족함까지 달라도 나머지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도

형>이라 여긴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묻는다. 이것은 놀이용 점토 덩

어리를 가져다가 그 덩어리를 떼어 내거나 각 부분을 이어 붙이지 않으면

서 여러 모양으로 짓이겼을 때 그 형태가 모두 같다고 보는 것이라 생각

할 수 있다. 그 유명한 사례가 도넛과 손잡이 달린 커피 잔을 같은 것으로

치는 경우다. 여기서 도넛에 뚫려 있는 구멍은 커피 잔의 손잡이 구멍에

해당한다. 물론 이 점토가 고차원에서는 무엇에 해당하는지 이해하기 조

금 힘들지만 그것이 바로 수학에서 그것을 점토라 부르지 않는 이유다.


어쨌든 푸앵카레 추측은 이런 조건 아래서 어떤 공간을 같은 것으로 치

고, 어떤 공간을 같지 않은 것으로 치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 공간들이 똑

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이런 특정한 관점에서 보면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일 뿐이다.

이러한 유형의 같음(기술적으로는 호모토피 동치라고 한다) 아래서는

정사각형이 원과 같다. 하지만 당신이 바퀴를 만드는 중이라면 정사각형

은 분명 원과 같지 않다. 케이크를 만드는 경우라면 정사각형도 원형보다

못할 것이 없다. 다만 정사각형 케이크의 주물은 구석진 데가 있어서 원

형 주물보다 설거지하기가 더 힘들다(그리고 그 구석 부분은 다른 부분보

다 탈 가능성이 높다).

실생활에서는 두 대상을 두고 같다고, 혹은 같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

는 방법이 더 많이 존재한다. 실생활에서 생각하는 대상은 수학에서 생각

하는 대상보다 훨씬 더 미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두고 같다


고, 혹은 같지 않다고 그냥 단정 짓기보다는 대상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더 신중하게 말해야 한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흑백으로만

바라보고 그 사이에 놓인 회색 지대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음

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다.

두 대상이 가장 분명하게 같아지는 경우가 언제인지는 이미 살펴본 바

있다. 바로 그 둘이 실제로 똑같을 때다. 하지만 이것은 도움이 안 된다.

반대쪽으로 넘어가면 대상이 같지 않은 가장 극단적인 경우를 볼 수 있

다. 바로 거짓 동치다. 회색 지대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그 부분을 먼저


알아보겠다.

거짓 동치
아동의 옷과 장난감을 성에 따라 구분하는 것 gendering을 두고 걸핏

하면 논쟁이 일어난다. 한쪽에서는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자기가 원하


면 똑같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으며 공룡이 그려진 티셔츠는 남아용

티셔츠로, 꽃이 그려진 티셔츠는 여아용 티셔츠로 부를 이유가 없다고 지


적한다. 그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보통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해 불평하며 그냥 남자아이는 남자답고, 여자아이는 여


자다워야 한다고 단언한다.

내가 보기에 이런 사람들은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똑같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다>라는 주장을 남자아이를 여자같이, 여자아이를 남자같
이 바꾸어 놓고 싶어 한다는 주장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것

이 거짓 동치다.
한 진술을 그와 동등하지 않은 또 다른 진술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은

기만적인 전략이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다른 사람이 한 말을 비틀어서


그 사람이 하는 합리적인 주장을 그보다 못한 주장으로 바꾸어 놓은 다음

거기에 대고 비난을 가하는 셈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논쟁이 점점 더 극


단으로 치닫는다. 이것은 틀린 논리를 적용해서 논리적으로 동치가 아닌

두 대상을 동치라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논리 오류다.


12장에서는 회색 지대를 다루는 훌륭한 논리적 방법에 대해 언급했다.

거짓 동치는 회색 지대를 제대로 다루지 못할 때 생길 수 있다. 우리는 상


황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우

리 적이 되는 거야.」 하지만 완전히 그들을 편들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완전히 그들을 반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하는 행동

은 지지하지만,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은 지지하지 않을 수 있다. 이들 중


에는 거짓 동치의 버전이 들어 있을 수 있고, 일부는 거짓 부정에서 그 뿌

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일부는 앞 장에서 설명했듯이 결함이 있는 비


유일 수도 있다. 추상화 단계에서 너무 높이 올라가서 자신의 진술이 어
떤 터무니없는 진술과 유사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모두 공

감보다는 분열을 가져온다.


사실 내가 예시로 든 남자아이의 옷과 여자아이의 옷에 관한 이야기도

논쟁을 극단으로 몰고 간 경우다. 가능한 한 최악의 시각에서 반론을 보


여 주기 위해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논쟁 중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
장 덜 민감한 사례를 골랐다. 실제로는 성 고정 관념gender stereotypes

과 성 압력gender pressure에 대한 더 복잡한 논쟁이 물밑에서 벌어지


고 있다. 다른 누군가가 갖고 있는 관점에 아주 불편한 마음이 들 때는 그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밝혀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


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내용일 수도 있고, 대단히 개인적인 내용일
수도 있다.

개인적 취향

개인적 취향을 밝히면 다른 사람이 불쾌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내가


<나는 토스트가 싫어>라고 얘기할 때(실제로 그렇다) 그 옆에 토스트를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분이 상할 수 있다.


토스트를 사례로 들어서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내가 <나는 모

차르트 음악이 지루해>라고 말하면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사람은 모욕으


로 받아들일 수 있고, 내가 <나는 재즈를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하면 재

즈를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자신을 비난했다고 여길 수 있다. 아니면 내


가 <나는 뚱뚱해지기 싫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내가 뚱뚱한 사람을 욕

했다고 믿는다.
나는 이런 경우들이 거짓 동치라 생각한다. 누군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

를 들었다 치자.
나는 토스트가 싫어.

그는 이 문장이 다음 문장과 동치라 생각한다.

나는 토스트를 좋아하는 사람이 싫어.

이것은 거짓 동치다. 두 진술은 논리적으로 동치가 아니다. 당신이 토


스트를 좋아해도 나는 당신이 좋다. 그냥 어쩌다 보니 토스트를 싫어할

뿐이다. 이는 다음의 진술과는 차이가 있다.

나는 훔치는 것이 싫어.

왜냐하면 실제로 나는 훔치기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기 때문이다. 다

음의 두 진술 역시 거짓 동치다.

나는 뚱뚱해지기 싫어.
나는 뚱뚱한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해.

이것은 논리적으로 동치가 아니다. 이것을 추상화 버전으로 만들면 다


음과 같다.

나는 X가 되기 싫어.
나는 X인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해
만약 X가 <의사>라면 이것은 분명 거짓 동치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지
는 않지만 의사가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어쩌다 보니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을 뿐이다. 반면 X가 <끔찍한 인간>이라면 두


번째 진술이 첫 번째 진술을 설명해 준다. 나는 끔찍한 인간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끔찍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이 오류가

일종의 역의 오류임을 보여 준다. 이것을 다음과 같은 진술로 표현할 수


있다.

A: 나는 X가 되기 싫어.

B: 나는 X인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해.

이 함축은 그리 논란이 될 것이 없다.

B⇒A

하지만 내 말에 기분이 상하는 사람들은 그 역이 참이라고 잘못 생각하


는 것이다.

A⇒B
만약 역이 참이었다면 A와 B는 논리적 동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짓 역은 거짓 동치를 만들어 낸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거짓 동치가 있다. 내가 <나는 매일 몸무게를 재>

라고 말하면 누군가가 이것을 <나는 모든 사람이 매일 몸무게를 재야 한


다고 생각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 몸무게를 재지 않는

사람이라면 기분이 상할 수 있다. 이번에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나는 매일 X를 해.
나는 모든 사람이 매일 X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예를 들어 X가 <피아노 연주하기>라면 어떨까? 나는 분명 매일 피아노

연주하는 것을 즐기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만약 X가 <칫솔질하기>라면 어떨까. 나는 매일 칫솔질

을 하고, 또 모든 사람이 할 수만 있다면 매일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다.
상황에 대한 논리는 이 정도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이것은 내 진술을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나 자신에 대한 포부로 국한함으로써 언제나 옳


은 말만 하게 해주는 사례다.

하지만 내가 살찌기 싫다고 하면 사람들이 불쾌하게 느낄 때가 많고,


내가 이렇게 논리를 설명해 줘도 화가 풀리는 경우는 드물다. 다음 장에

서 감정적 반응을 무시하려는 시도에 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겠지만 거


짓 동치를 밝혀내는 것이 그런 불쾌감 뒤에 자리 잡고 있는 논리를 이해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은 여기서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사람들

은 내가 뚱뚱해지기 싫어하는 것을 내가 뚱뚱한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받아들인다. 이런 논리에 좀 더 인간적으로 접근하려면 인간
의 언어가 논리와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언어는 논리에는

없는 함축적 의미가 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살찐 사람들


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면 내 의견을 다른 식으로 표현할 방법을 찾아봐

야 한다. 아니면 내 마음 한구석에는 정말로 그들을 비판하는 마음이 조


금 있는데, 그 진술을 나에 대한 진술로 포장해서 논리 뒤에 그 마음을 숨

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는 선동적인 관점을 표출하면서도 자기는 악마의 변호사25

역할을 했을 뿐이라 주장할 때처럼 말이다.

비난
거짓 동치가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사실과 달리 그들의 어떤 측
면을 비난하는 것처럼 여기게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또 다른 경우

를 살펴보자. 거짓 동치가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비난하게 하는 경우다.


이렇게 하면 급속도로 적대적인 논쟁에 빠져들게 된다. 서로 의견을 일치
시키려 하기보다는 상대방을 더 불리하게 깎아내리며 의견 차이를 더욱
벌려 놓는 논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나는 살이 찌는 게 싫어서 먹는 것을 조심한다고 말하
면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받아칠 수 있다. 「너 지금 살찐 사람들을 모욕하
는 거야? 그 말은 다분히 여성 혐오적이야.」 나는 살찌기 싫어한다는 이

유만으로 여러 비난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흔히 듣는 말 중 하나다. 보


아하니 살이 찌기 싫다고 하면 자동적으로 여성 혐오자가 되나 보다. 갑
자기 논쟁이 여성 혐오에 대한 논쟁으로 바뀌고 말았다.
누군가가 <기본적으로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의 의미는~>이란 문장으로

대화를 시작한다면 거짓 동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징후다. 이것은 당신


의 말을 다른 의미로 왜곡하려 한다는 신호다. 당신이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보자. 「나는 어떤 사람은 상속받은 돈으로 평생 돈 걱정 없이 살고, 또
어떤 사람은 빈털터리로 태어나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해.」 그럼 누군

가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지금 네 말의 의미는 누구든 사


람이 죽으면 그 재산을 물려주지 못하게 몰수해야 한다는 뜻이야.」 하지
만 이것은 내가 말하려는 바가 전혀 아니다. 불평등이 세대에서 세대로
계속 이어지게 방치하는 것과 사람이 죽으면 그 재산을 강제로 몰수하는
것 사이에는 수많은 다른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중간에 있는 주

장은 아주 복잡하다. 삶의 모든 단계에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


야 한다거나, 빈털터리로 태어난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 자손에
게 무언가 물려줄 것을 가질 수 있게 도와야 한다거나 등등. 보통 그 중간
에 있는 주장은 고함이 오가며 정신없이 진행되는 토론이나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논란에 등장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거짓 동치에 이끌려 가는 적대적 논쟁은 이런 식으로 진행
된다.

당신은 A라 말하고 있다.


A와 B는 동치다.
B는 나쁘다.
따라서 당신은 아주 몹쓸 인간이다.

이런 논증의 논리는 두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B가 사실은


나쁘지 않거나, A가 사실은 B와 동치가 아닌 경우다. 물론 양쪽 지점에서
모두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 이상하게도 여러 지점에서 문제가 있는

논리에 반론을 펼치려면 헷갈릴 수 있다. 너무 많은 변명을 늘어놓을 때


나 너무 많은 것에 반대할 때와 비슷하다. 이것을 보여 주는 한 사례는 당
신이 학교에서의 성교육을 지지하는 경우다. 그럼 어떤 사람은 그것이 혼
외정사를 용납하는 것과 동치이기 때문에 사악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성

교육을 하는 것이 혼외정사를 용납하는 것과 동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 혼외정사가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거짓 이분법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장난감에 대한 논쟁에는 또 다른 측면이 존재


한다. 이것은 사실 거짓 이분법이다. 논쟁을 하는 사람은 두 가지 선택밖
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A: 어떤 장난감에는 <남아용>, 어떤 장난감에는 <여아용> 딱지


를 붙인다.
B: 남자아이를 여자같이, 여자아이를 남자같이 바꾼다.

이분법은 가능한 방법이 두 가지밖에 없어서 선택 A와 선택 B로 명확


하게 나뉘는 경우에 해당한다. 거짓 이분법은 선택이 A와 B로 완전히 명
확하게 나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다. 그 결과 A와 <B의
부정>이 동치이고, B와 <A의 부정>이 동치라고 오해하게 된다. 이것이 거

짓 동치의 사례인 이유다.


위의 논증에서 이 사람은 B가 A의 부정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냥 장난감에 붙은 <남아용>, <여아용> 딱지만 떼어 내도 A의 부
정에 해당한다. 남자아이는 여전히 남자답고, 여자아이는 여전히 여자답
게 남아 있으면서도 모두들 자기가 원하는 장난감은 무엇이든 갖고 놀 수

있다. 나는 거짓 부정을 믿는 사람들이 회색 지대에 대한 어떤 깊은 두려


움을 밖으로 표출하면서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짚어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더 간단한 사례를 알아보자. 만약 당신이 누군
가에게 <네가 말랐다고는 못 하겠어>라고 말했는데 그 사람이 눈물을 터

뜨리며 <그럼 내가 뚱뚱하다는 거구나!>라고 통곡을 하는 경우다. 이 사


람은 다음과 같은 거짓 이분법으로 뛰어들었다.
A: 나는 말랐다.

B: 나는 뚱뚱하다.

아마도 여성은 말라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에서 나온 두려움 때문일 것


이다. 이것은 거짓 이분법이다. A도 아니고 B도 아닌 것이 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뒤에 나오는 그림들로 표현할 수 있다. 이 그림들은 서로 다른
진술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 준다. 진짜 이분법은 다음과 같다. 원이 완벽
하게 A와 B로 나뉘는 경우다.

거짓 이분법은 두 가지 방식으로 생길 수 있다. 우선, 마른 것과 뚱뚱한


것의 경우처럼 양쪽 다 아닌 것이 참이기 때문에 거짓 이분법이 될 수 있
다.
그리고 동시에 양쪽 다 참이어서 거짓 이분법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도 동시에 양쪽 다 참이 아닐 수 있다. 두 번째 유형에 해당

하는 거짓 이분법의 사례를 지금 확인해 보자.


다이어트

나는 다음과 같은 이분법 때문에 때때로 사람들과 문제에 휘말린다.

A: 어떤 사람은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다이어트가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B: 어떤 사람은 다이어트를 하지 말아야 한다(다이어트가 건강


을 해치기 때문에).

나의 경우는 다이어트가 분명 도움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우리는 자기에게 제일 좋은 방


식이 무엇인지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가 A라고 말하면 사
람들은 내 말이 B의 부정이라 생각한다. 그러고는 화를 내면서 그런 사람
들은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의견이

다른 게 아니다. A와 B가 모두 참인 경우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그리고 나


는 양쪽 다 참이라고 확신한다).
B의 진짜 부정은 <모든 사람이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라는 훨씬 극단
적인 진술이다. 따라서 다소 온건한 나의 원래 진술을 이런 극단적 진술

과 거짓 동치로 엮은 것이 잘못이다.
6장에서 개념 사이의 관계를 도표로 그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거짓 이분법을 도표로 그려 볼까 한다. 아래 나오는 도표에서
내 주장은 왼쪽 위에 있는 것이고, 여기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반박은
오른쪽 아래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둘은 서로 엇갈리는 다른 의견이 아니
다.

이 논증에서 정말 재미있는 부분은 이것이 보통 우리의 의견이 엇갈리

는지 아닌지에 대한 메타 논증으로 바뀐다는 데 있다. 나는 우리 둘 다 같


은 말을 하고 있음을 짚어 주려고 하는데 상대방은 보통 그렇지 않다고
고집을 부린다. 내 생각에 상대방은 먹는 것에 주의하면서 다이어트를 하
지 않는다고 내가 자기를 비난했다고 느끼는 것 같다. 원래는 아래와 같

이 양립 가능하고 합리적인 두 개의 주장이었다.

A: 어떤 사람은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B: 어떤 사람은 다이어트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어리석고 적대적인 주
장으로 갈아타고 만다.

A: 모든 사람이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B: 아무도 다이어트를 하면 안 된다.

이것은 도표에서 반대쪽 대각선에 해당한다.

나는 이것이 A라는 선택을 내리는 것과, 나머지 다른 선택은 다 정당하


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거짓 동치로 엮는 또 다른 사례라고 본다. 내가 A
를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모든 사람이 A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무언가 다른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

는 것(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위해 음식을 가려 먹는 것)을 선택하면 사람


들은 내가 자신의 선택을 비난하는 것이라 가정할 때가 너무 많다. 사람
들이 자기와 다른 선택을 내리는 이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극
단적인 거짓 이분법에 빠져 있는 것만 아니면 꼭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허수아비 논증
거짓 동치는 허수아비 논증의 근원이다. 허수아비 논증에서는 한 논증
을 무찌르기 훨씬 쉬운 논증(허수아비)으로 슬쩍 바꿔 놓은 다음 한방에
날려 버리는 수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새로운 논증이 원래의 논증과 동치
가 아니라면 당신이 한 일이라고는 아무도 주장하지 않은 논증을 무찌른

것밖에 없다.
<STEM(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수학
Mathematics)> 과목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창의성 역시 중요하다는 점
을 근거로 이를 비판할 때가 있다. 이것은 과학과 창의성 사이에 거짓 이

분법을 만들어 낸다. 아마도 이는 다음 두 가지 사이에 존재하는 더욱 근


본적인 이분법으로부터 생겨났을 것이다.

A: 창의적인 것

B: 논리적인 것

가끔 창의적인 사람들은 이것을 이용해 비논리적인 것을 정당화하거


나, 논리적인 사람이 되기를 거부한다. 창의성과 예술 사이에도 거짓 이
분법이 존재하고, 논리와 과학 사이에도 또 다른 거짓 이분법이 존재한
다. 예술과 과학 안에는 둘 다 논리와 창의성이 있다.

따라서 창의성을 논거로 삼아 STEM 중시 교육을 비판하는 것은 허수


아비 논증이다. 과학을 깎아내리지 않으면서도 예술 교육을 옹호할 정당
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일상적으로 목격하는 가장 악의적인 허수아비 논증은 <흑인의 생


명은 소중하다 black lives matter>라는 주장에 대해 <모든 생명은 소중
하다 all lives matter>고 반론하는 것이다. 나는 이 안에서 허수아비 논
증을 목격한다.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슬로건이 실제로 가리키

는 바는 <흑인의 생명도 다른 생명만큼이나 소중하지만 현재는 마치 그보


다 소중하지 않은 것처럼 취급받고 있으니 우리는 이런 부당함을 고치기
위해 무언가 할 필요가 있다>라는 뜻이다. 물론 이렇게 장황해서는 슬로
건으로 적당하지 않다.
허수아비 논증에서는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를 <흑인의 생명은 소
중하지만 다른 생명은 소중하지 않다>라는 의미로 의도적으로 곡해한다.

이렇게 의미를 왜곡하고 나면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말로 쉽게 반


박할 수 있다. 이런 논증은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 무언가를 반박하는 논
리적 오류는 차치하더라도 우리를 좌절시키는 또 다른 측면을 갖고 있다.
반박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논증을 반박하려면 <어떤 생명
은 소중하지 않다>라고 주장해야 한다. 비난받아 마땅한 일부 극단주의자

를 제외하면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소해 보이는 사례


였던 다이어트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과정도 도표로
나타낼 수 있다. 엄격하게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
다>와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진술 사이에는 그 어떤 불일치도 존재

하지 않는다. 하지만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를 동치가 아닌 허수아비


논증인 <어떤 생명은 소중하지 않다>로 대체해 버리면 첫 번째 도표에 나
와 있는 〈불일치 없음〉 대각선이 두 번째 도표의 〈쓸데없는 적대감〉 대각
선으로 떠밀려 간다.
논리적인 논쟁을 벌이려면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에 반대하는 사람

에게 <흑인의 생명도 다른 생명만큼이나 소중하지만 현재는 마치 그보다


소중하지 않은 것처럼 취급받고 있으니 우리는 이런 부당함을 고치기 위
해 무언가 할 필요가 있다>라는 진짜 논증을 반박해 보라고 설득해야 한
다.
이것은 <그리고>로 연결되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A: 흑인의 생명도 다른 생명만큼이나 소중하다.


B: 흑인의 생명은 현재 마치 다른 생명보다 소중하지 않은 것처
럼 취급된다.
C: 이런 부당함을 고치기 위해 무언가 할 필요가 있다.

그럼 이런 논증이 만들어진다.

A 그리고 B 그리고 C

이를 반박하려면 그냥 셋 중 하나만 반박하면 된다. 만약 이 논증에 반


대하는 사람을 설득해서 자기가 의견을 달리하는 하나(혹은 그 이상)가

무엇인지 시인하게 한다면 그 사람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
만약 반대자가 A와 의견을 달리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뼛속까지 인

종 차별주의자라는 판단을 할 수 있다. 만약 반대자가 B와 의견을 달리한

다면 나는 그 사람이 세상 물정에 무지하거나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고 결


론 내리고 싶다. 만약 반대자가 C와 의견을 달리한다면 이 사람은 자기는

흑인 탄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니까 적극적인 인종 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흑인 탄압을 물리치기 위해 노력하지 않
는 사람도 그 탄압의 공범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이런 점만 분명히 알아

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B, C와 왜 의견을 달리하는지 더 생산적


으로 조사해 볼 수 있다. 이 사람은 흑인들 스스로 그런 화를 자초하고 있

다고 여기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보호해 줄 의무

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첫 번째 경우 나 같으면 그들을 설득해서


사회 체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시키고 싶다. 사람들은 자신을 그러

한 상황으로 몰고 간 사회 체계와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이 경우

에는 학대와 탄압의 역사 전체가 문제라고 말이다.


두 번째 경우에는 교착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타인을 돕는 것의

가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공리부터 나와 근본적으로 차


이가 있다.

반대자가 비논리적이지만 감정적으로는 타당한 의견을 전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들이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에 반대하는 이유는 이


운동이 분노, 공격성과 연관되어 있어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

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5장에서는 논증에서 논리적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이는데도 감정적 이유를 밝혀내는 것이 중요한 이유를 알아보겠

다. 그럼 이 특정 사례에서는 다음에 관해 논의해 보아야 할 것이다.

1.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이 실제로 분노, 공격성과 연

관되어 있는지

2. 분노와 공격성이 합리적인 때가 언제인지


추상화로 그네 타기를 한 다음 회색 지대 다리를 만들면 공격성이 합리

적이지 않은 상황(예를 들면 무언가를 사러 가게에 갔는데 상품이 다 팔

린 경우)도 있고, 공격성이 합리적인 상황(예를 들면 누군가 당신을 죽이


려 들어서 당신이 공격적으로 맞서 싸워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경우)도 있

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 그럼 여기서 문제는 미국에서 흑인을 대하는 방


식이 누군가 자기를 죽이려 들어서 공격적으로 맞서 싸워도 용서받을 수

있는 상황과 충분히 비슷한지 따지는 것이다.

물론 이런 분석을 소셜 미디어에서 진행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하지


만 안타깝게도 이런 논쟁의 상당수는 소셜 미디어에서 일어난다. 분노나

두려움으로 흥분한 사람들과 진행하기에도 너무 복잡하다. 복잡한 논증

을 진행하려면 어느 정도 냉정함이 필요하다. 이것은 수학도 마찬가지다.


증명하려는 결과에 대해 내가 지나치게 흥분해 있으면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 그리고 마감 시한이 닥쳤다거나 강연할 시간이 다가와서 시간 부족


으로 공황 상태에 빠진 경우에도 증명을 못 할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을 상대로 허수아비 논증을 하지 못하게 막고 싶다면 자

신의 입장을 정확하게 진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5장에서는 상황을 야


기한 요인을 모두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만약 자신의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아서 허수아비 논증에 취약한 상태로 내버려

둔다면 우리도 허수아비 논증의 공모자가 되는 셈이다. 누군가가 우리에


게 반박하기로 작정하고 의도적으로 우리의 뜻을 곡해해서 허수아비를
세운 경우라고 해도 말이다. 정교하게 논증을 펼치려면 캐치프레이즈 슬

로건을 사용하는 경우보다 글이 더 길어진다. 이것은 밈과 트위터 280자

메시지의 세계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16장에서는 미친 듯이 빨리 돌


아가는 세상에서도 느린 논증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다시 살펴보겠다.

비유

지난 장에서는 비유를 통해 논증을 펼치려 할 때 복잡한 거짓 동치 상

황이 생길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것은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다. 비유가


논증에서 항상 엄격하게 논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보다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설득하는 감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런 거짓


동치는 논리적 오류라기보다는 회색 지대에 존재하는 좀 더 미묘한 무언

가라 할 수 있다.

거짓 동치의 논리적 오류는 다음과 같은 논증을 시도할 때 종종 나타난


다.

A는 B와 동치다(실제로는 동치가 아님).


B는 참이다.
따라서 A는 참이다.

진술 B가 참임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 해도 B가 실제로는 A와 동치가

아니면 A가 참이라는 사실은 전혀 증명되지 않는다. 실생활에서는 이런

형태로 나타날 때가 많다.


A는 논리적으로 B와 동치다(실제로는 동치가 아님).
B는 좋다/끔찍하다.
따라서 A는 좋다/끔찍하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이런 보편적 상황은 허수아비 논증에서도 일어

난다. 예를 들어 보자.

아동용 옷에서 성별 딱지를 제거해야 한다. (A)

이 말은 논리적으로 다음의 말과 동치다.

여자아이는 여자답고, 남자아이는 남자답기를 원치 않는


다. (B)

B는 끔찍한 일이다.
따라서 A는 끔찍한 일이다.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동치를 그네로 사용하는 것보다 더 미묘한 방법

이다. 여기서는 A와 B 사이의 논리적 동치를 주장하는 대신 어떤 원리 X

를 동원하는 비유를 끌어들인다. 앞 장에서 이 원리를 이런 유형의 도표


로 나타냈다.
그럼 이 원리를 감정적으로 더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황 B에 적용함

으로써 누군가를 설득하려 해볼 수 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은 추상화 원


리 X의 수준에서는 A와 B가 동치라는 점이다. 이 사례가 원리를 정당화

해 주지는 않지만 그 원리를 느끼게 도와줄 수는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여기서 문제는 추상화의 수준, 즉 A와 B가 실

제로 어디까지 닮았는지 따지는 것이다. 결국 충분히 높은 추상화 수준으

로 올라가면 모든 것이 똑같아지지만 그래서는 논증을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제기해야 할 질문은 <A와 B가

동치인가?>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A와 B가 동치인가?>여야 한다.


다음 도표에서 A와 B는 X 원리를 따르면 유사하지만 Y원리를 따르면

유사하지 않다. 누군가가 A와 B가 유사하다고 말하면 단순히 그것이 거

짓 동치인지 아닌지 말할 수가 없다. 여기서는 적절한 원리가 어떤 것인


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상황이 등장하는 사례로는 <맨스플레인mansplain>에 관한 논쟁

을 들 수 있다. 나는 <맨스플레인>이란 용어를 쓰면 적어도 한 명 정도는


흥분하는 사람(보통 남성)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나는 대

체로 이것이 이 용어를 계속 사용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 주는 더 큰 증거

라 생각한다.
맨스플레인은 그저 남성이 깔보는 듯한 태도로 여성에게 무언가를 가

르치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거짓 동치이기도 하다. 맨스플


래인은 남성이 여성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 들 때, 특정 사례에 의식적으

로 여성을 아래로 보는 편견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사실 여성이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는데도 남자가 여자보다 더 많이 안


다는 사회적 가정을 한 채로 그 증거를 무시하는 것이다. 나한테는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어떤 남성은 내가 무한에 관한 책을 썼는


데도 나에게 무한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내용을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자기가 한 남성에게 해당 주제에 관해 책을 쓴 적

이 있다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그 남성이 그녀의 책에 대해 자기에게 설명


하려 드는 것을 보고 이 용어를 만들어 냈다. 이 남성은 자기가 말하는 책

이 그녀가 쓴 책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그런 행동


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이 그녀의 책일 가능성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
나 보다.

가끔은 누군가가 당신의 전문 영역에 대해 당신에게 가르치려 들 때가


있다. 이 경우 당신에게 그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증거는 당신이 그 분

야의 전문가라는 사실에 있다. 하지만 때로는 당신이 이미 그 내용을 말

했다는 사실이 그 증거가 되기도 한다. 여성이 무지하다는 가정은 단순히


여성을 전반적으로 깔보는 태도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남성

이 여성의 기여를 낮게 평가하거나 무시하는, 사회에 폭넓게 퍼져 있는


패턴의 일부다.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에는 이런 사회적 맥락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런 정의를 여성의 행동에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런데 때때

로 <여자도 맨스플레인을 한다>라는 허수아비 논증이 등장한다. 이 경우


에는 맨스플레인에 대한 논쟁을 그저 남성이 깔보는 듯한 태도로 불필요

한 것들을 설명하는 내용이라 곡해하는 것이 허수아비 논증에 해당한다.

내 경험으로 볼 때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은 거의 항상 남자들이지만 그것
이 핵심은 아니다. 핵심은 남성들의 그런 행동은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여성에 대한 그릇된 가정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는 점이며, 그 때문에 화


가 나는 것이다.

<여자도 맨스플레인을 한다>라고 믿는 사람들은 맨스플레인이라는 단

어가 여성을 깔보는 남성을 기술하기 위한 용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음의 도표에서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이것은 실제로 여성이 남성을

깔보는 것과 유사한 것이 된다. 하지만 이 추상화 수준은 너무 높다.

거짓 거짓 동치
맨스플레인 사례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거짓 동치 때문에 정당한 논증

이 꺾일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거짓 동치에 대한 거짓 비난도 역


시 그럴 수 있다.

고등 교육의 교육비를 정부가 지출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을 떠올려

보자. 한 사람은 고등 교육은 선택 사항이고 고등 교육 과정에 진학할지


말지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므로 이 비용을 정부가 지원한
다면 정부의 지출을 개인이 결정하는 셈이라는 것을 근거로 이것을 반대
한다.

반면 어떤 사람은 그 점은 의료 보장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정부에

서 의료 보장 비용을 지원할 때도 의사에게 갈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이므로 이것도 본질적으로는 개인이 정부의 지출을 결정하는 것이라

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논증은 정부가 의료 보장 비용을 지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효과가 없을 테지만 만약 정부의 고등 교육

비 지원을 반대하는 사람이 정부의 의료 보장 비용 지원은 지지한다면?

이것은 모순일까?
당신이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모순을 비난하면 그 사람은 <그건 경우가

다르지!>라고 목소리를 높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든 비유


를 반박하려 할 때 흔히 튀어나오는 말이다. 물론 비유는 서로 똑같지 않

다. 결국 비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측

면이 아니라 결정적인 측면에서 비유가 깨지는지 여부다.


사람들은 의사를 찾아가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아프니까

찾아가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반면 사실 나는 의사를 찾아가는 것과

고등 교육 과정에 진학하는 것이 유사한 수준의 결정이라 생각한다. 사람


마다 서로 다른 시점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결정을 내린다. 나는 이것이 <

건강 염려증이 있냐, 없냐> 그리고 <아픈 사람이냐, 건강한 사람이냐>처


럼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아래의

표처럼 흑백 논리 체계라 믿는 것 같다.


반면 나는 이것이 퍼지 논리 체계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아예 의사를 찾아가길 거부한다. 뇌리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는 윌 부스트Will Boast의 회고록 『에필로그 Epilogue 』에는 응급 버


튼을 누르지 않고 길가에 세운 자동차 안에서 죽어 가던 아버지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아버지는 의학의 도움을 받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의학적 도움을 구해야하는 상
황이 생긴다. 이를 테면 갈비뼈가 모두 부러졌다거나 3도 화상을 입은 경

우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의사를 찾아가고 어떤 사람은 찾아가지 않을

상황도 존재한다. 지독한 감기에 걸리면 의사를 찾아가 항생제를 달라는


사람이 있다. 항생제는 바이러스에 아무런 효과가 없는데도 말이다. 반면

나는 감기에 걸리면 침대에 올라가 위스키를 한잔 마신다.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때도 우리는 선택을 내린다는 말이다.

이것을 고등 교육과 비교해 보자. 고등 교육 진학 여부를 완전히 자유

로운 선택이라 말하기는 힘들다. 요즘에는 대학 학위가 없으면 접근 자체


가 불가능한 직업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은 예를 들어 의사나 과

학 연구자가 되려는 경우가 아니면 대학 가는 것을 사치로 여겼던 50년

전 상황과는 아주 다르다. 그때만 해도 대학 학위가 없어도 은행원, 공무


원, 교사가 될 수 있었다. 지금도 대학에 가고 안 가고는 개인의 선택이지

만 대학에 가지 않으면 아마도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저임금 일자리밖


에 얻지 못하거나 개인 사업을 꿈꾸어야 할 것이다. 일부 분야에서는 직

업과 관련된 도제 제도가 여전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요즘에는 예술가들

에게도 학위가 요구된다.


이 서로 다른 두 가지 관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한 사람은

교육과 의료는 유사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원리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 둘이 유사하다고 믿는다. 이런 원리를 적용하기 때문이

다.

나는 대학이든 의사든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이 미래의 삶에 중요하다


고 인식하기 때문에 찾아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수준의 인식은 주

관적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필연적이고 중요해 보이는 일이 다른 사


람에게는 여유로운 선택 사안으로 보일 수 있다. 일부 예외가 있을 수 있

다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그저 재미를 위해 대학에 진학하는 부자들은


졸업장에 매달려야 할 일이 평생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별 이유도 없이

의사를 찾아가는 건강 염려증 환자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럼 이 상황들은 동치인가, 아닌가? <거짓 동치>라는 주장 자체도 정

당화가 필요하다. 단순히 무언가가 같지 않다고 말한다고 해서 어떤 중요

한 측면에서도 그것이 동치가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조종
거짓 동치와 거짓 이분법은 일반적으로 거짓 논증으로 이어지고, 또 실

제로는 의견이 다르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분열을 조장한다. 정치인,

언론 그리고 통합보다는 분열을 통해 얻을 것이 더 많은 사람이 이런 부


분을 악용할 수 있다.

파벌 정치에서는 이런 것이 특히나 문제가 된다. 파벌 정치는 오로지

반대만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그럼 좌익 정당이 더 많은 표를 얻기 위


해 중도 쪽으로 이동하면 반대파는 더 격렬하게 그에 반대하기 위해 훨씬

더 극우 쪽으로 움직인다.
개개인도 사람, 의견, 정책을 나쁘다고 여겨지는 어떤 것과 거짓 동치

로 엮어서 그런 것들을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할 수 있다. 어떤 주장

을 <비애국적인 것>이라 단언하면 애국심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로부


터 강력한 감정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영국인은 유럽 연합
에 남는 쪽에 투표하는 행위가 <비애국적>이라거나, 국가가 연주되는 동

안에 무릎을 꿇는 행동이 <비애국적>이라 목소리를 높인다.

이 논증을 더 세밀하게 파고들어 가보려면 <애국적>이라는 것의 정확


한 정의가 무엇인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아마도 애국심은 자신의 국가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무언가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 연합의 가치

를 믿는 것이 영국을 사랑하지도 않고 지지하지도 않는다는 뜻인지 토론


해 볼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영국이 잘되기를 바라고, 또 유럽 연합에 남

는 것이 영국이 잘되는 길이라면? 그럼 이 문제는 결국 무엇이 영국을 위


한 최선인가 그리고 그저 욕만 할 것이 아니라 논쟁의 주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논증으로 돌아온다.

국가의 문제도 비슷하다. 어떤 사람은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당신이 무


릎을 꿇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국가를 사랑하지도 않고 지지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신이 조국이 잘되기를 빌고, 또


조국이 잘되기 위해서는 인종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믿으며, 국가가 연주

되는 동안 무릎을 꿇는 행동이 이러한 대의에 대한 인식을 고취하고 사회

적 연대를 보여 주는 방법이라 확신한다면?


거짓 동치 논증은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최악

의 경우에는 실제로 파괴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람

들 중에는 동성애와 소아 성애가 연관되어 있다거나, 심지어는 동일한 것


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사

람들은 트랜스젠더를 변태 성욕자와 엮어서 생각한다. 이런 혐오증들은


명백한 거짓 동치이고, 통계를 통해 거짓임을 입증해 보일 수도 있다. 하

지만 이런 거짓 동치는 혐오를 퍼뜨리는 사람들에 의해 여전히 사회에 퍼


져 나간다.

이런 사례들은 감정적 수단에 의해 사람들을 조종하는 가장 파괴적인


방법이다. 이런 조종 기법들은 우리가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만

큼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논리

보다는 감정이 훨씬 더 힘이 세기 때문에 충분히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


하거나, 일단 감정이 격해지고 나면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 많다. 다음 장에서는 감정과 논리 사이의 상호 작용이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지 알아보자.


15장

감정

논리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감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감정을 절대 틀리는 일도 없다. 만약 당

신이 무언가를 느낀다면 분명 느끼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그

런 느낌은 정당화할 수 없다고 말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자


기는 완전히 다르게 느낀다고 얘기하는 것도 소용없다. 여전히 당신이 그

렇게 느끼는 데는 언제나 이유가 있고, 그런 면에서 보면 감정에는 항상


어떤 종류의 논리가 담겨 있다. 우리는 감정을 부정하거나 억누르는 대신

그것을 이해하고 설명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감정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감정은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동안

에도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엄격한 수학을 할 때도 감정을 사용한

다. 따라서 실생활에서 논리적으로 논쟁을 할 때도 감정을 활용해야 한


다. 감정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와 컴퓨터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
이다. 감정은 우리의 논리 생활에 도움이 되고, 더 나아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

우선 감정은 우리가 정말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도움을 준

다. 수학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증명하기 전에 무엇이 논리적으로 옳은지


추측하게 도와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 직감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면밀히

분석해 보면 감정은 우리가 논리적 정당화에 도달할 수 있게 도와준다.

유용한 논리적 과정의 그다음 단계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설득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감정을 활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논의

해 보려고 한다. 하지만 감정이 논리를 대체해서는 안 된다. 감정은 논리


를 강화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논리와 과학적 증거만을 써서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고 주장한다. 하지만 논리와 증거로는 설득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면 어

떻게 할 것인가? 논리와 증거로는 설득이 안 되니 논리와 증거를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럼 감정을 이용해야 한다.

어찌 보면 이것은 감정이 논리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다른 그 어떤 정

당화 기법보다도 훨씬 설득력 있다는 의미다. 만약 무언가를 느낄 때 그


느낌 자체를 부정할 방법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을 부정하기보다

는 이런 강력한 힘을 좋은 방향으로 써서 감정으로 논리를 뒷받침해야 한

다.

논리와 감정
감정적이라는 것이 꼭 비이성적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다. 나는

이것은 거짓 동치라고 본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거짓 이분법의 형태를

띤다.

A: 감정을 이용하기

B: 논리를 이용하기

나는 이것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이 가능한 유형의 거짓 이분법이

라 생각한다.

감정을 이용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며, 논리를 이

용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비감정적인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은 감정을 쓰는

것을 믿고, 한 사람은 논리를 쓰는 것을 믿는 것은 실제로 의견의 불일치

가 아닌데도 허구의 불일치로 내몰릴 수 있다. 양쪽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 뿌리로 내려가면 이것은 지능과 공감에 관한 쓸데없는 적대감으로


바뀐다.
감정적이지 않고 논리적이지 않은 것도 가능하고, 감정적이면서 동시

에 논리적인 것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벤 다이어그램의 모든

부분이 가능하다고 여긴다는 이야기다.

왼쪽에는 논리적으로 아주 엄격해야 할 수학적 측면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고, 무


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기 위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막연하게 도약해

보는 시작 부분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증명 내용을

글로 정리하는 끝 부분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제시한 이론이 물 샐 틈

없이 철저한지 확실히 하기 위해 모든 논리적 단계를 꼼꼼히 증명하는 중

요한 중간 부분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는 자신의 느낌, 혹은 무언가가 참

이기를 바라는 감정 등에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논리만으로 이론을 떠받칠 수 있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오른쪽에는 감정이 모든 것을 이끌고 가도록 놔두는 것이 즐겁고 오히

려 이롭기도 한 시간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감각적 경험을 누리면서

자신의 마음을 예술에 펼치는 시간일 수도 있고, 어려운 시기나 특별히

기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다른 사람을 응원하는 시간일 수도 있다. 누군

가가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는 어떤 논리를 적용해도 소용없는 경

우가 많지만, 그저 함께 옆에 앉아 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만으로

도 오히려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내가 볼 때 아무런 쓸모가 없겠다 싶은 부분은 바깥쪽이다. 이 부분(어

쩌면 걷기, 칫솔질 같은 자동적인 행동 또는 반사 작용 같은 무의식적 행

위도 포함시켜야겠지만)은 감정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반면

가장 강력한 부분은 논리와 감정이 공존하는 가운데 부분이라 주장하고

싶다. 이 둘은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서로를 강화해


주기도 한다.
논리의 세계에만 너무 푹 빠져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기가 어려

워진다. 사람들은 보통 전적으로 논리적인 행동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면 감정 세계에만 너무 푹 빠져 있으면 감정적인 만큼 세상에 대처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세상은 논리적으로 움직이고 서로 상호 작용

하는 요소와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의 세계에

주로 머문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비논리적으로 행동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논리보다는 감정에 더 의지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복잡한

세상에 대한 복잡한 추론을 따라갈 능력이 없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아이들은 주로 감정의 세계에 사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감

정이 대단히 강력하고 정당하게 느껴질 뿐 아니라 더 복잡하고 긴 논증을

이해할 능력도 없다. 아이스크림만 줄곧 먹는다면 결국에는 건강에 좋지

않다거나, 눈밭에서 뒹굴고 놀면 재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옷이 젖어 추레

한 꼴이 되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슬처럼 길게 이어진 인과와 논리를 이해할 능력

을 키우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점이 드러나는 한 가지 구체적 사

례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나, 순간의 만족을 위해 살지 않고

장기적 이득을 위해 단기적 이득을 희생할 줄 아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

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것이 개인적인 공리 중 하나다. 그 반대쪽 극단에

는 오직 순간을 위해 살거나, 오로지 감정에만 충실하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어른이 감정의 세계에 발을 단단히

딛고 살아간다고 해서 꼭 그 사람이 논리의 세계를 무시한다는 의미는 아


니다. 나는 나 자신이 양쪽 세계에 모두 아주 단단히 발을 딛고 살고 있다

고 생각한다. 나는 내 감정을 존중하고 신뢰하지만 항상 그 감정을 설명

할 논리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래야 감정이 <그저> 감정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둘은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다.

논리를 압도하는 감정

논리를 뒷받침하지 않고, 심지어 논리를 부정하는 감정적 반응을 이용

하는 방법은 아주 많다. 강력한 전략 중 하나는 충격과 두려움을 주는 것


이다. 일단 누군가가 겁을 먹으면 자기가 겁을 먹은 대상이 실재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공포 영화는 실제 상황이 아닌데도 여전히 무섭

다. 클릭을 유도하는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캐치프레이즈 슬로건도 논리


가 아닌 감정에 호소한다. 그래서 논리가 버티지 못할 때가 많다. 자극적

인 헤드라인은 그 기사의 실제 내용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는 경우가 대


부분이다. 그 기사 자체는 논리적인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최근에는 이

런 기사 제목을 읽은 적이 있다. 「사법 심사에서 50번 조항Article 5026


을 언급하는 글을 불법으로 선언」, 이 제목을 읽고 나는 깜짝 놀랐다. 하

지만 기사를 읽어 보니 실제로는 은퇴한 한 의사가 50번 조항을 언급하는


글을 불법이라 판단해서 사법 심사를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제목

과는 아주 다른 내용이다. 영국 사람이 아니고, 50번 조항을 두고 벌어진


소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사법 심사에서 X를 불법으로 선언
했다>가 <은퇴한 한 의사가 X를 불법이라 판단해서 사법 심사를 주장하

고 있다>와 같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캐치프레이즈 슬로건은 듣기에는 좋지만 말이 안 되거나 아무런 내용

도 없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몸무게는 숫자일 뿐!>, <나이는 숫자일


뿐!>이란 말을 즐겨 하지만 숫자는 올바른 방식으로 취급하기만 하면 대

단히 많은 정보를 준다. 내 몸무게는 내가 배 속에 담고 다니는 지방의 양


과도, 내 몸에 맞는 옷의 치수와도 아주 큰 상관관계가 있다. 어떤 의학적

위험도는 체중 및 나이에 비례한다. 그럼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


다. 「의학적 위험도는 숫자일 뿐!」 아니면 심지어 위험할 정도로 체온이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도 <체온은 숫자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


르겠다.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논리를 무시하게 된다. 응급 상황에서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논리를 무시하게 하려고 두려움을 생성하

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두려움은 의도적으로 사람을 조종하는 수단으


로 사용되지 않더라도 대인 관계에서 방해물로 작용할 수 있다. 사람은

공격을 받는다고 느끼면 논리를 무시하거나, 논리를 사용할 수 없게 된


다. 아니면 자신이 실제로는 지지하지 않는 입장에 너무 강하게 매달리게
된다. 생산적인 논쟁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의 입장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래야 구석에 몰려서 한 가지 입장에만


매달리지 않고 그 다리를 건널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 중에는 열린 마음
으로 자신의 의견을 고칠 생각이 있다고 해도 옷을 갈아입을 때처럼 아무
도 보지 않는 곳에서 그러는 사람이 많다.

이제 감정을 이용하는 중요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먼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시작하자.

설득력 있는 감정
10장에서는 언어의 출발점을 논하면서 일부 기본 단어는 어렴풋이나

마 언어가 논리적인 방식으로 발달하기 전에 어딘가에서 생겨났다는 사


실을 살펴보았다. 이 단어들은 사람에게 강력한 감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수학자들은 새로운 수학 개념에 사용할 단어를 고를 때 자기가 유


발하는 감정적 반응이 어떤 것인지 고심하는 경우가 많다. 셰익스피어의

줄리엣은 <장미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사람들은 거기서 달콤한 꽃향기


를 맡을 거예요>라고 했지만 이름 속에도 무언가가 담겨 있다. 물론 줄리

엣은 가슴 아플 정도로 순진한 여인이었다. 만약 갑자기 장미의 이름을 <


설사>라고 새로 붙인다면 그래도 진지한 마음으로 장미의 꽃 냄새를 맡아

볼 수 있을까? 아마도 어느 정도 정신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최근에 비행기에 탑승하면서 단어의 논리와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아메리칸 에어라인에서 탑승 절차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서로 다른 <우선순위 그룹>들을 먼저 태우고 1번 그

룹을 태웠는데, 이제는 그 대신 이 우선순위 그룹들을 1번 그룹부터 4번


그룹까지 새로 번호를 매기고, 제일 먼저 타는 원래 1번 그룹의 이름을 5
번 그룹으로 변경했다. 이것 때문에 온갖 혼란이 야기됐다. 사람들이 안
내 방송을 귀 기울여 들을 수도, 탑승권 안내문을 읽을 수도, 혹은 그렇게

바뀐 방침의 논리를 이해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논리


적으로 보면 이렇게 해도 구조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승객들이 여전히 똑같은 순서로 탑승하기 때문에 그룹의 이름을 플래티


넘 그룹으로 부르든, 골드 그룹으로 부르든, 레드 그룹, 블루 그룹, 바나

나 그룹, 개구리 그룹, 1번 그룹, 2번 그룹으로 부르든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보아하니 일부 사람들은 자기가 더 이상 <우선순위 그룹>에 속하

지 않는다는 사실에 아주 화가 났나 보다. 이 사람들에게는 단어가 정말


중요한 문제다. 이것은 논리적 영향이 아니라 감정적 영향을 일으킨다.

우선순위 그룹에 속하지 않아서 화가 난 사람들은 실제 탑승 과정이 아니


라 단어 때문에 분노한 것이다.

언어를 둘러싼 이런 실수 중 훨씬 더 심각한 버전에 해당하는 연구가


있다.27 젊은 남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는 이들이 강압적인 섹

스 는 강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연구에 따르면 자기가 누군가를 강간한 것이 아니라 강압적으로 섹스를
한 것이라고 보는 남자가 더 많은 것으로 나왔다. 이것을 남자들이 합의

없이 이루어진 섹스가 강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여기는 <거짓 비동치>의


상황이라 부를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연구는 합의에 의한 성관계를 가

르치는 교육이 얼마나 가야 할 길이 먼지 비극적으로 알려 주는 경우다.


언어가 갖고 있는 감정적 함축을 의도적으로 악용할 수도 있다. 3장에

서 살펴보았듯이 미국에서 부담 적정 보험법을 오바마 케어라는 별칭으


로 부르는 것이 그런 경우다. 부담 적정 보험법은 지지하지만 오바마 케

어는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책을 장점이 아니라 이름


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것
은 이번에도 역시 <거짓 비동치>의 상황에서 언어의 힘을 보여 준다. 이

것은 모두 감정적인 것을 이용해서 논리와는 상관없는 방식으로 사람의


생각을 유도하고 심지어 조종하는 사례다.

조종 manipulation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느낌이 든다. 만약 누군가를


사람을 조종하는 데 능하다 manipulative고 표현하면 좋은 이야기가 아

니다. 세상은 항상 우리를 조종하려 든다. 특히 기업, 정치인, 언론이 그


렇다. 우리 세상에 넘쳐나는 온갖 조종을 견뎌 내기 위해서라도 더욱 명

확한 사고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다른 감정적 도구와 마찬가지로 조종이 우리 삶에서 맞닥뜨리

는 문제점들을 극복하게 도와준다면 감정을 조종하는 힘을 사용하지 않


을 이유가 없다. 감정을 조종함으로써 나는 비행기 탑승의 두려움을 이겨

냈다. 통계만으로는 이것이 불가능했다. 논리는 감정의 상대가 되지 못했


다. 살을 뺄 때도 감정의 개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만이 건강에 미치

는 영향에 관한 통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병적 비만에 빠질


위험에 본능적으로 겁을 먹고 나서야 살을 뺄 수 있었다. (이것을 다른 사
람에게 살을 뺄 동기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뚱

뚱한 사람을 모욕하는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가끔 사람들은 회색 지대를 이용해서 우리를 조종하지만 우리도 회색

지대를 이용해서 자신을 조종할 수 있다. 나는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하


고, 마음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일을 질질 끄는 것을 멈추기 위해 나 자신

에게 감정적인 기술을 사용한다. 어쩌면 내가 좀 더 논리적인 인간이었다


면 절대 동기가 결여되는 일도 없고, 마음의 장애물도 생기지 않고, 일을

질질 끌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내가 아는 가장 논리적인 사람인 우리 엄


마도 절대 일을 뒤로 미루는 법이 없다. 하지만 그런 수준의 논리는 내게

는 언감생심이다. 나 자신을 아무리 질책해도 더 논리적이 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을 질책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자신의 감정적인 부분

을 다룰 때는 자신과 타인을 감정적인 방식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


<탈진실> 세계에서는 감정이 사실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

들은 느낌을 사실과 뒤섞어 놓는다며 다른 사람들을 비난한다. 특히 사람


들이 논리나 증거가 아닌 다른 것으로 설득당하는 것을 보며 이런 비난을
할 때가 많다. 그리고 실제로 개인적 경험,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 하는

말, 또래 압력, 동족 의식, 두려움, 사랑 등으로 설득당하는 사람이 많다.


광고와 마케팅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 중 상당 부분을 이끌고 있다.

마케팅의 핵심은 자기네 상품이 더 좋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상품이 나머지 다른 상품들과 실질적으로는 비슷비슷하더라도(혹은 더

못하더라도) 사람들이 그 상품을 더 좋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설득하는 이런 방법이 모두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개인적 경험을 통해 더 현명해진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정당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반적으


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카리스마 넘치는 교사는 아주 훌륭한 교육을 하
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래 압력과 동족 의식은 나쁜 쪽으로 변화하

는 데 기여할 수도 있지만, 좋은 쪽으로 변화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시민권 운동이 그 예다. 사람들이 담배가 건강에 나쁘다는 증거가 아니라

또래 압력 때문에 흡연을 포기한다면 그래도 금연의 효과는 본 셈이다.


하지만 두려움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인생에 부정적으로 접근

하는 방식이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두려움을 바탕으로 한 선


거는 불쾌한 기분이 들게 하고 국민을 분열시켜 놓는다.

어떤 분야는 감정을 끌어들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설득하는


데 특히나 탁월하다. 종교 지도자, 대중 연설가, 일부 교사, 광고 전문가,

예술가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과학 분야는 자신의 결론을 전달하는 데


증거와 논리만을 이용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곤란을 겪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비현실적인 믿음이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모든 사람에게

증거와 논리만으로 설득되어야 한다는 점부터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미 증거와 논리로는 설득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증거와
논리만을 이용해서 그 일을 해낼 것인가? 결국 그렇게 하면 러셀의 역설
비슷한 것으로 끝나게 된다.
더군다나 사람들을 논리만으로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은 비현실적이
다. 사실 이것은 위선인 경우가 너무 많다. 과학자 자신도 과학계에서 여
성의 위치 같이 논란이 많은 주제에 대해서는 개인적 경험이나 감정을 바

탕으로 결론을 이끌어 낸다. 과학자라고 해서 그런 편견에서 자유로운 것


은 아니다.
더욱 엄격한 담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폄하하는 대신 감정에
담긴 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 담긴 논리를 찾아내려고 해야 한다.

감정 속에 담긴 논리
느낌은 사실 fact이 아니다. 아니, 사실이 맞나? 그것은 우리가 의도한
의미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내가 <1 + 1 = 3>이라고 <느껴도> 이것은 보

통의 삶에서는 참이 되지 않는다(이것이 참인 수학의 세계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건 다른 문제다). 그와 비슷하게 내가 범죄 혐의로 체포된 누군
가를 유죄라 <느껴도> 그것이 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느낌이 사실이 되는 중요한 측면이 존재한다. 느낌은 언제나 참
이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를 느낀다면 당신이 그것을 느낀다는 사실을 논

리로 반박할 수가 없다. 누군가가 그냥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면 그 사람


에게 그것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은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
다. 감정은 강력하게 논리를 압도한다.
좀 더 생산적으로 토론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뒷받침하는 것을 설명하

고, 그 논리와 당신이 전달하려는 논리 사이의 차이점을 밝혀내어, 감정


의 도움을 빌려 그 간극을 메워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논리와 감정을
맞붙이는 대신 그 상황 속에 담겨 있는 감정과 논리를 분리해서 논리는
논리와 맞붙이고, 감정은 감정과 맞붙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잘 구성된

수학 교육 과정도 바로 이런 식이다. 학생이 정답을 맞히지 못했을 때 그


냥 정답을 설명해 주어 도움이 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먼저 그 학
생이 왜 오답을 냈는지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오답에 이르기까지의 사고
과정을 이해하고, 그보다는 나의 사고 과정이 더 타당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감정이 막강한 이유를 추적해 보면 어떤 근본적인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을 때가 많다. 하지만 두려움은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두려
움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설득하는 데 효과적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

할 때도 있다. 기후 변화에 관한 증거를 믿는 사람들은 보통 지구의 미래


에 대해 아주 두려워하기 때문에 당장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낀다. 반
면 그 증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보통 기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
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충분히 두려워하게 해

서 기후 변화에 맞서 무언가를 하도록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면


왜 어떤 사람들은 난민들이 총을 소지한 백인계 미국인보다 더 위험하다
는 증거가 없는데도 난민에 대해 그렇게 쉽게 광란의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일까? 왜 어떤 사람들은 총기 폭력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가, 적어도

더 강력한 총기 규제를 요구할 만큼은 무서워해야 하지 않는가?


이런 것을 놓고 보면 정치적 관점이 두려움에 좌우된다는 것은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니다. 모든 경우에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유이

기는 하지만 추상화의 수준이 잘못되었다. 이런 상황들 사이에서 더 나은


비유는 행동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기후 변화의 경우 거기에 맞서서
어떤 행동을 취하려면 개인적인 희생이 필요하다(자원을 효과적으로 활
용하려면 돈이 더 많이 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총기 사용에 반대하는 행

동을 취하려면 일부 사람들의 개인적 희생이 요구된다(자신의 총기를 포


기해야 한다). 반면 난민의 경우에는 난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우에 오
히려 개인적 희생이 따른다. 그들을 공동체로 받아들여 돌보는 데 필요한
자원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논쟁을 주도하는 것은 두려움

보다는 희생에 대한 개인적 믿음일 수도 있다.


이런 상상 속 논쟁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끌어들이는 핵심적
기술을 이용했다. 바로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감정을 끌어들이는 비유

13장에서 우리는 추상화를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수행한 결과


나타나는 비유에 대해 그리고 그 비유가 하나의 발현에서 다른 발현으로
그네 타기를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주 간단한 수준에서 말하면
비유란 당신이 정말로 논의하고 있는 상황과 어떤 공통점이 있는 상황을

가리킨다. 하지만 나는 비유가 대단히 강력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


각한다. 바로 사람들이 한 상황에 대해 아주 다른 느낌을 받게 하는 방법
이라는 것이다. 비유의 힘은 상황과 관련된 논리를 당사자가 얼마나 이해
하고 있는지에 호소할 필요 없이 감정을 통해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추상화와 논리를 이미 숙달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아닌 한, 이런


접근 방식이 당신에게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비유를 하는 한 가지 방법은 사람들이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하는 어떤
상황에서 그네 타기를 해서 사람들이 강력한 감정적 반응을 느끼는 상황

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백인 여성을 인종 차별 문제에 더 관심


을 갖도록 설득하려면 그 상황을 성차별에 비유해서 그들의 감정을 일깨
워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이런 기법 전체가 논리의 세계에서 감정의 세계
로 이동하는 좀 더 추상적인 수준의 그네 타기라고 할 수 있다.

비유를 찾아내는 것과 관련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좋은 비유를 떠올

릴 때는 심오한 논증을 발견하기 위해 추상적으로 생각한 다음 그것을 또


다른 상황에 창의적으로 적용해서 누군가의 감정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럴 때 나의 뇌를 대단히 수학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
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벌이는 논쟁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이
런 수학적인 방식으로 생각할 필요 없이 내 주장의 요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추상화와 논리 능력의 수준이 모두 다 제각각인 세


상에서는 추상화 그리고 논리를 우회해서 세상을 설명할 방법을 알아내
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학생들이나 수학 비전공자들에게 수학을 설명할
때는 비유를 대단히 많이 쓰고, 수학 세미나에서 이야기할 때는 비유를

잘 쓰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제 앞선 세 개의 장에서 다루었던 주제들을 한데 끌어모아서 권력관
계에 대한 편견과 관련해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끌어들일 때 어떻게 비유
를 활용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다. 앞에서는 일반적으로 사회 안에서 남성
이 여성보다 높은 권력을 장악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

은 이를 두고 남성이 여성에 대한 무례한 농담을 하는 것이 여성이 남성


에 대한 무례한 농담을 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의미라 주장한다. 혹은
이것을 더욱 극단으로 밀어붙여서 남성이 여성을 성폭행하는 것이 여성
이 남성을 성폭행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의미라 주장한다. 반면 어떤

사람은 양쪽이 똑같은 행동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정답도 오답도 없지만 이 두 진술이 같다고 할 수 있는 측면
도 있고,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같아지는 측면은 둘 다 <사람
이 다른 사람을 학대하는 행위>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이 추상화 수준에

서는 양쪽이 동치다.
하지만 이것은 해당 상황에 대한 수많은 세부 사항을 무시하고 있다.
그 대신 우리는 사회의 권력관계가 어떤지 이미 알고 있기에 이를 <권력
이 있는 사람이 권력이 없는 사람을 학대하는 행위>로 추상화할 수 있다.

이 수준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학대하는 것이 백인이 흑인을 학대하는 것


과 동치인 반면, 여성이 남성을 학대하거나 흑인이 백인을 학대하는 것과
는 동치가 아니다.

이제 중간 수준의 추상화가 적절한지 아닌지, 즉 권력의 차이가 유의미


한 요인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되었다. 나는 이것이 유의미하다고 믿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고집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무언가가 분
명하게 느껴지는 좀 더 명확한 사례를 들어서 일반적인 권력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압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추근거리는 교사를


떠올려 보라. 여기에는 분명한 권력 차이의 문제가 존재한다. 성인과 미
성년자 사이의 성관계가 불법인 것처럼 일부 국가에서는 교사와 학생 간
의 성관계가 합의에 의한 것이어도 불법으로 규정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
다. 성인과 미성년자의 경우 아동은 합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절대적으
로 부족하다는 점이 문제가 되지만, 교사와 학생의 경우 학생은 합의에
의한 성관계가 가능한 나이를 넘었어도 특정 권력관계 안에서는 합의 능
력이 여전히 없는 것으로 고려된다.

다음과 같은 비유가 가능하다(사실은 유사한 비유다).

부디 교사가 학생에게 추근거리는 것과 학생이 교사에게 추근거리는


것이 동치가 아니라는 데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기 바란다. 권력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와 유사하게 직장 상사가 직원을 유혹하려 하는 것과

직원이 직장 상사를 유혹하려 하는 것도 다른 상황이다. 상사가 직원에


대해 갖고 있는 권력 때문이다.
권력의 차이가 적어도 가끔씩은 일부 명확한 사례에서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데 동의한다면 이 논쟁은 어떤 권력 차이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어떤 권력 차이가 그렇지 않은지 그 경계를 어디에 그을 것인가 하는 회
색 지대를 둘러싼 논쟁이 된다. 백인은 정치, 경영, 연예 등의 모든 권력
수준에서 그리고 영향력이 있는 모든 자리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
기 때문에 백인이 흑인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갖는 지위는 상사가 직원들
을 상대로 갖는 지위와 비슷하다고 사람들을 설득해 볼 수 있다.

그래도 동의하지 않는다면 개인이 직접적인 권력을 갖는다는 개념(직


원에 대한 상사의 권력)과 집단 권력이 존재한다는 개념(흑인에 대한 백
인의 권력)에서 집단 권력이 개인에게로 전이되는지에 관한 문제로 귀착
될 수 있다. 이것은 구조적인 인종 차별의 문제다.

이 책을 쓰면서 이런 논쟁들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하고 논리를 층층이


벗겨 내어 그 관점에 담긴 추가적인 추상화와 논리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나는 이런 논쟁 중 상당수는 결국 개인이라는 개념과 집단이라는 개념 사
이의 긴장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개인의 책임인가, 집

단의 책임인가 하는 개념에도 적용된다. 어디까지가 개인이 스스로 책임


져야 할 부분인지, 혹은 집단의 돌봄이 필요한 부분인지에 관한 문제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사회가 집단을 대하는 방식이 개인을 대하는 방
식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여부와도 관련된다. 이것은 개인이 가진
기본 공리의 차이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이 경우라면 사람들에게

공리를 바꾸도록 설득할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비유를 이용해서 개인의 공리를 밝히는 부분에 대해 이야
기했다. 하지만 비유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 공리를 밝혀 그들
이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가 논리를 다르게
사용하는 바람에 남들과 의견이 엇갈린다면 논리로 풀 수 있지만, 서로
다른 근본 원리 때문에 의견이 엇갈리는 것이라면 감정을 끌어들이지 않
고는 그런 원리를 바꾸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왜 어떤 사람들은 과학적 증거를 들이대도 설득하기가 그리


어려울까? 아예 믿지 않겠다고 단단히 작정하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이 경우 증거를 산더미같이 들이밀어도 소용없을 것이다. 이들의 마음가
짐을 바꾸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들에게 왜 증거를 믿지 않느냐고 질책
하기보다는 그들이 증거를 믿지 않는 이유를 바닥까지 파헤쳐 보여 주는

것이 더 낫다.
일단 의견 불일치의 뿌리에 자리 잡고 있는 공리를 찾아내고 나면 그것
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고민해 볼 수도 있다. 만약 이런 공리가 아주 깊
이 뿌리내리고 있다면 고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경험이나 사람과의 교

류, 교육, 공감 등을 통해 생각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단, 이 경우에는


모두 감정적으로 그들을 끌어들임으로써만 고칠 수 있다. 분석을 한다고
해서 그 일을 어떻게 할지 알아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를 이해하고 나면 그냥 그들이 멍청해서 그렇다고 치부하는

경우보다는 더 나은 위치에 있는 셈이다.


감정과 직관을 논리보다 더 설득력 있게 느끼는 사람이 많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수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직관적인 아이디어들
을 그냥 경멸해 버려서는 안 된다고 믿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실 내 연

구 분야인 범주론은 수학적 직관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거의 전적으로 우


리의 직관을 이용해 계산을 하면서도 그것이 엄격한 논리와 맞아떨어지
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만드는 분야라 보면 된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는 엄격한 정당화 과정이 뒷받침되는 한 직관

을 사용해서 수많은 수학적 업적을 달성했다. 그래서 나는 직관과 감정이


일상생활에서도 아주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한다. 논리로 뒷받침
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안타깝게도 거의 모든 사람이 감정을 느끼는 반
면, 모든 사람이 복잡한 논리를 따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좀 더 논리적인 사람들이 감정적인 수단을 활용해서 논리적인 생각들을


확실히 전달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다
룰 주제다.
16장

지능과 합리성

비논리적인 세상에서 논리를 사용하는 법


지금까지 논리의 힘과 한계 그리고 감정의 힘과 한계에 대해 살펴보았

다. 이제 논리와 감정을 잘 통합해서 유용하고 설득력 있는 막강한 이성

을 갖춘 사람이 되는 방법을 알아보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 볼까 한다. 그


저 논리의 규칙만 잘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논리를 이용해서 감정적인 인

간의 세계를 밝히는 사람이 되어 보자.


먼저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논리적 행동에 포함되는 것은 무엇이고,

포함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요약을 하고자 한다. 좀 더 구


체적으로 말하자면 단순히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라는 것의 의

미가 무엇인지 이야기하겠다. 그리고 다음에는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생

각하는 막강한 논리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한다. 막강한 논리는 그냥 기본

적인 논리 규칙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고급 기술을 활용해서 복잡한 논증


을 구축하고 조사해서 이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논리적이라고 해도 여전히 논리적으로 의견이 엇

갈릴 여지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런 의견 불일치가 어떤 양상을 보이고 논증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지 내가 생각하는 바를 설명할 부분이다. 나는 모든 논쟁이 이런 형태였


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아무런 감정도 이용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나는 논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보여 줄 것이

다. 나는 모든 사람이 지능적으로 논리적인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

는 그러기 위해서는 그냥 논리적이기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논리를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려면


논리적 기술과 감정을 대립시키지 않고 조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

는다. 나는 지능이란 이런 것들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다음의

도표에 요약할 수 있다.


나는 논리가 인간 지능의 핵심이라 믿지만, 논리가 단독으로 효과를 나

타내는 것은 아니라 본다.

논리적 인간이란 무엇인가

논리적 인간은 논리를 이용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용해야 할

까? 지금까지 논리가 한계에 부딪히는 온갖 인간적인 상황을 살펴보았다.


자신을 스스로 논리적인 인간이라 부르려면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논리를 활용하되 그 선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논리의 한계

를 지적하며 논리를 사용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늘을 날지 못한다며 자전거를 버리는 것과 비슷한 이야

기다.
나는 논리적 인간은 논리를 이용하지만 이런 사람도 정당화되지 않은

핵심 신념을 필연적으로 갖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신념이 논리의 출발점

이다. 그럼 이 사람이 믿는 모든 것은 논리를 사용해서 그 핵심 신념으로

부터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사람은 자신의 핵심 신

념으로부터 논리적으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을 믿어야 하며, 그 신념들이

어떤 모순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11장에서 보았듯이 핵심 신념이라는 개념은 수학에서 공리의 역할과

유사하다. 자신의 핵심 신념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유도되는 모든 것을 믿

는 것은 12장에서 이야기했던 연역적 폐쇄성이라는 논리적 개념과 상응

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들이 모순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는 개념은 9


장에서 이야기했던 <무모순성>이라는 논리적 개념과 그 뜻이 통한다.

이런 것들이 논리적이기 위한 기본 원리라면 비논리적이라는 것은 무

슨 의미일까? 「넌 너무 비논리적이야!」 자기를 이성적인 사람이라 생각하

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감정을 내세우는 사람들(혹은 그냥 자기와 뜻이 다

른 사람들)을 반박할 때 흔히 하는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논리적이라

도 자신의 논리 체계를 따라 이르는 곳이 서로 다르면 의견이 엇갈릴 수

있다. 감정을 내세워 논쟁을 이끄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어떤 면에서

논리적인지 정확히 표현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것이 그 사람이 비논리적

이라는 뜻은 아니다.

비논리적이라는 것은 논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거나, 논리적 모순을 일

으키는 행동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나는 자신의 신념 체계 안에


서 모순을 일으키는 경우에만 진정한 논리적 모순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한 사람의 논리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아주 멍청한 논리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넌 너무 비논

리적이야!>라는 고함 소리도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위에서 내린 논리적인 사람의 정의를 바탕으로 사람을 비논리적

이라 판단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1. 자신의 신념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거나

2. 자신의 근본 신념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유도할 수 없는 것을

믿거나

3. 자신이 믿는 것에 자신이 믿지 않는 논리적 함축이 담겨 있거

첫 번째 사례는 부담 적정 보험법은 지지하지만 오바마 케어는 지지하

지 않는 사람들이다. 앞서 보았듯이 이것은 모순을 일으킨다. 부담 적정

보험법과 오바마 케어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똑

같은 것을 지지하면서 지지하지 않는 모순을 보인다. 두 번째 사례는 사

람들이 <그냥 느낌이 그래>라고 말할 때다. 예를 들면 그냥 인간관계가

잘 풀릴 것 같지 않은 느낌이라거나, 그냥 진화 이론은 옳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라거나, 그냥 자기 아이가 자폐증이 생긴 것은 분명 예방 접종 때

문이라는 느낌이라거나 하는 경우 등이다. 세 번째 사례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치료비를 대신 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임산부 진료는 여성만을 위

한 것이기 때문에(임산부 진료 보장이 여성을 통해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

게 도움이 되는데도) 의료 보험에서 임산부 진료까지 보장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남성들이다. 그런데 이런 남성도 전립선암은 보장해 주어야 한다

고 여긴다. 그것은 남성만을 위한 것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의료 보험이라는 원리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자기는 아프

지 않아도 돈을 내는 거 아닐까? 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치료비를

대신 내서는 안 된다>라는 진술은 <나는 의료 보험의 가치를 믿지 않는다


>라는 논리적 함축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문제의 그 남성이 여

전히 의료 보험의 가치를 믿는다면 그는 이 세 번째 항목에서 비논리성을

보이는 것이다. (물론 비유의 그네 타기를 해보면 그가 마음속 깊이 믿는

원리는 여성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는 남성이 돈을 내면 안 되지만,

남성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여성이 돈을 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으로 밝혀질지도 모른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다른 누군가의 논리와

모순을 일으킨다고 해서 당신이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집에서 만들어 먹으면 재료비로 8천 원밖에 안 들어갈

음식을 식당에서 8만 원이나 주고 사 먹는 것은 수학적으로 논리적이지

않아.」 이것은 그 사람의 신념 체계 안에서는 참일 수 있지만 직접 요리하

지 않고 누군가 나를 위해 만들어 준 음식을 즐기는 호사를 누리는 대가

로 돈을 지불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나의 신념 체계 안에서는


참이 아니다. 게다가 이 경우는 식료품 가게로 식재료를 사러 갈 필요도

없고, 식사 후에 설거지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내가 비논리적이라는 의

미가 아니라 그저 우리의 공리가 서로 다르다는 의미일 뿐이다.

다음으로 지적할 부분은 근본 신념에 대한 질문은 회색 지대라는 점이

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자기주장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달 착륙은 실

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믿는다고 가정해 보자. 어쩌면 이들은 이것을

하나의 근본 신념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아주 근본적인 신념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것은 결국 사슬처럼 이어진 긴 추론을 따라갈 수 있는 능력에 관한 문
제로 귀결된다. 누군가가 이렇게 얘기하는 사례를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

다. 「나는 동성 간 결혼을 반대한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루어져


야 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혼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

루어져야 하는 것>을 근본 신념으로 볼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이것


을 구성된 신념이라고 보기 때문에 정당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와 비슷하게 누군가는 자신이 정말로 믿는 사람에게만 투표를 해야 한


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것을 공리라고 여기는 반면, 다른

사람은 이것이 정당화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투표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지만,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한 신념이 공리로 봐줄 수 있을 만큼 근본적인지 묻는 질문은 공리가


비합리적이냐는 질문과는 아주 다른 질문이다. 바로 뒤에서 살펴보겠지

만 이런 질문 중 칼로 자르듯 명확한 것은 없다. 심지어 당신의 근본 신념


중에 <내가 참이라고 느끼는 것은 모두 참이다>라는 신념이 있다면 그냥

느낌만으로 무언가를 믿는 것도 정당화할 수 있다. (이것은 느낌 자체는


항상 참이라는 말과 아주 비슷하게 들리지만 그와는 아주 다른 이야기

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공리가 함축하는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는 점도 회

색 지대에서는 우리에게 골칫거리를 안겨 줄 수 있다고 지적하고 싶다.


12장에서 말했듯이 가차 없이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회색 지대를 지나 바

람직하지 못한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양을 아주 조금씩 늘


리면서 먹는다면 논리적으로는 케이크를 아무리 먹어도 괜찮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미묘한 방식으로 회색 지대를 이해하는 능력은 막강한 논리의


한 측면이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여기서의 가장 큰 교훈은 <비논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의 차이


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합리적 인간이란 무엇인가

내가 당신의 근본 신념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면 나는 당신을 비


합리적인 사람이라 판단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당신이 논리와 모순을
일으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우리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의견 불일치

가 있다는 의미다. 만약 두 수학 체계가 서로 공리가 다르다면 이는 불일


치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저 서로 다른 체계일 뿐이다. 그럼 여기서 우리
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주어진 상황에서 어느 체계가 더 나은 모형인지 논
의하는 것이다.

무엇을 <합리적인> 근본 신념으로 볼 것인지는 회색 지대에 있는 문제


이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사회학적 개념임을 인정해야 한다. 문화에 따라

합리성의 기준이 다르다. 하지만 나는 <합리성>의 핵심 요소는 검증과 조


정을 가능하게 하는 틀이 존재하는 것이라 믿는다.
만약 당신이 달이 치즈로 만들어져 있다는 핵심 신념을 갖고 있다면 재

미있는 소설 소재는 될 수 있겠지만(클레이 애니메이션 「월리스와 그로밋


Wallace and Gromit」의 <화려한 외출 A Grand Day Out>에서처럼)

나로서는 이것이 합리적인 신념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이


렇게 생각하게 만든 틀은 무엇일까? 우선 첫째는 논리적인 논거에 의한

것이다. 치즈는 우유로 만드는 유제품이고, 우유는 동물에게서 나온다.


어떻게 그 많은 유제품이 궤도에 올라가 지구 주변을 돌 수 있다는 말인

가? 둘째는 증거에 의한 논증이다. 사람들이 달로 가서 그곳의 흙을 가지


고 왔는데 치즈가 아니었다.

물론 달 착륙은 거짓이었고, 달 착륙의 증거도 모두 거대한 음모의 일


환이라 우기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이것 역시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과학적 증거가 나의 핵심 신념 중 하나라고 믿기 때문이다. 뒤


에서 합리적 의심과 회의주의에 대한 문제를 다시 살펴보겠다.

앞으로 더 나가기 전에 합리적일 필요가 없는 공리도 존재한다는 점을


짚고 가야겠다. 이런 공리는 개인적 취향에 더 가깝다. 우리는 어떤 음식
을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으며, 어떤 음악을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취향도 때로는 추가적인 정당화가 가능하

다. 나는 내가 토스트를 싫어하는 것이 그냥 나의 기본 공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도 자주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지금 나는 바삭거리

는 음식은 좋아하지 않고, 그 이유는 바삭거리는 것을 씹으면 왠지 폭력


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고 좀 더 근본적으로 설명한다. 당신은 내가

정말 터무니없다고, 혹은 말도 안 되게 예민하다고 치부할지도 모르겠지


만 무언가 바삭거리는 것을 씹을 때의 느낌을 좋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합리적인 인간으로서 나의 권리의 범주 안에 속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노골적인 모순을 제외하고 무엇을 합리적인 신념으로 칠 것인지 이야

기하다 보면 십중팔구 상대주의의 공간에 갇혀 떠다닐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군가의 신념을 내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합리적이라 보고, 그 사람도

자신의 것에 비해 내 신념을 상대적으로 비합리적이라 볼지 모른다는 걱


정이 들 수도 있다. 실제로 수많은 논쟁이 상대방을 비합리적이라 부르는

무익한 형태로 진행되기 때문에 진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인적 취향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내가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게 해
준다고 생각하는 합리성의 기준이 있다. 그리고 그 단서는 <합리적>이라

는 단어 안에 들어 있다. 당신의 신념은 합리적인 추론에 열려 있는가?


즉, 변화에 열려 있는가? 당신은 신념을 바꿀 때가 언제인지 파악하는 틀

을 갖추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이 신념을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존재하는


가?
내가 『맥베스 Macbeth 』에서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맥더프가 맬컴

에게 유배지에서 돌아와 스코틀랜드의 왕좌를 두고 맥베스와 싸우라고


설득하는 부분이다. 맬컴은 이것이 자신을 위험으로 몰아넣으려는 함정

인지 가려낼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끔찍한 인


간으로 그리며 자신이 얼마나 잔혹하고 사악한 왕이 될지 묘사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맥더프의 지지가 이성적인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

었다. 만약 이성적인 것이라면 맥더프는 맬컴의 고백을 듣고 자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이다. 만약 그가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맬컴은 그의

지지가 이성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작품 속에서는 맥더프가 절망에 빠져 이렇게 울부짖는다. 「오, 스

코틀랜드여, 스코틀랜드여!」 그리고 자신의 지지를 철회하고 스코틀랜드


를 영원히 떠나겠다고 마음먹는다. 맥더프가 맬컴이 왕의 자리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지 말해 주는 새로운 증거를 마주하고 맬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기 때문에 맬컴은 맥더프가 자신을 이성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새로운 증거 앞에서 자신의 결론이나 공리를 바꿀 수 있는 개방성

이야말로 이성의 중요한 징표라 생각한다. 만약 추가적인 증거가 계속 나


오는데도 어떤 사람이나 개념, 혹은 어떤 독트린을 계속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그 지지가 이성적 지지가 아니라 맹목적 지지라는 신호다.


충성과 맹목적 지지는 다르다. 그리고 건강한 회의주의와 과학에 대한 거

부도 다르다. 나는 이것이 퍼지 논리의 사례라 본다. 충성한다는 것은 자


잘한 문제를 두고 자신이 지지하는 바를 바꾸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맹

목적 지지란 큰 문제, 혹은 그 어떤 문제가 등장해도 절대 자신의 지지를


바꾸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어떤 것을 큰 문제로 보고, 어떤 것을

자잘한 문제로 볼 것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몇 년 동안 나도 생각을 바꾸었던 경우가 있다. 의무 투표제에 대해서

는 13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제 나는 리버럴 아츠liberal arts(기


초 교양) 교육에 찬성한다. 이런 교육이 비공식적으로(내가 받은 교육에

서처럼) 혹은 공식적으로(미국 시스템에서처럼)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더 적극적인 형태의 페미니즘도 지지한다. 수

동적인 형태로는 내가 원하는 변화가 달성되지 않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


다. 나는 (마지못해)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을 추구하게 됐다. 아마도 호

르몬 때문인지, 그것이 살을 빼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이다. 그리고 나는 그저 타인을 위한 일보다는 자신을 위한 일이 가치 있

다고 믿는다. 나 자신을 무시하면 타인을 도울 능력도 줄어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내가 논리의 조합, 증거, 감정 등을 바

탕으로 공리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여기에는 일종의 틀이 존재한다.


수학과 과학에서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일지 결정할 때 쓰는 틀에 대해
서는 앞서 이야기한 바 있다. 수학에서는 논리가 그 틀이다. 실험 과학의

경우에는 증거를 찾는 것이 틀이다. 이것은 통계를 기반으로 한다. 과학


자들이 이론을 높은 수준의 확실성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증거를 찾
아야 한다는 의미다. 만약 새로운 증거가 등장해서 그 확실성의 수준이

뒤집히거나, 심지어 다른 방향을 가리킬 경우 과학은 그에 따라 이론을


바꾼다. 이것은 왠지 그럴 것 같은 느낌이 와서 꾸며 내는 <이론>과는 아

주 다르다.
뉴스 리포터의 틀에서도 비슷한 부분을 검토해 볼 수 있다. 리포터들은

어떤 책임의 틀에 따라 자신의 이야기를 뒷받침할 정보를 모은다. 이 틀


은 과학에서보다는 덜 엄격하게 정의되지만 그래도 교차 확인을 하고 뉴

스 출처의 신뢰성을 묻는 등 관련 기준을 갖고 있다. 이 경우도 역시나 누


군가가 그냥 꾸며 낸 <뉴스>와는 아주 다르다. 양쪽 모두 뉴스가 틀린 내

용으로 밝혀질 가능성은 있지만 첫 번째의 경우는 그 뉴스가 오보( 誤報 )임

을 발견하면 철회할 절차가 있는 반면, 두 번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것이 오보와 <가짜 뉴스>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안타깝게도 일부


사람들이 <가짜 뉴스>라는 용어를 도용해서 <내가 동의하지 않는 모든 것
>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만약 신문사에서 자기네 뉴스의 출처가 잘못된
정보를 주었다거나 신용할 수 없는 정보라서 기사를 철회하면 어떤 사람

들은 <가짜 뉴스>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적어도 신문사에서는 자기네 뉴


스를 검증할 틀과 절차를 갖추고 있다. 무언가가 발표된 후에 틀린 내용
으로 밝혀지는 것은 항상 안타까운 일이지만 과학보다 엄격함이 떨어지
고 시간적 압박도 많은 뉴스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이성적인 사람들이 이런 틀을 거쳐서

만들어진 진술과 그렇지 않은 진술을 가려낼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는 것


이 대단히 중요하다.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고 싶은 유혹이 들기는 하지
만 논리를 신중하게 따라가 보면 무엇이 사실인지 확실히 가려내기 어렵
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잘 정의된 틀에 따

라 검증된 진술을 얻어 내는 것 그리고 그 틀에 의해 그 진술이 나중에 틀


린 것으로 밝혀지면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순환 고리에 붙잡힐 위험에 빠져들었다. 틀도
합리적인 틀과 비합리적인 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합리적>이란

것을 <합리적 틀>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실제로 어떤 전진이


있을까, 아니면 그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환적 정의를 내리게 될까?
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합리적인 것으로 보고, 무엇을 비합리적인 것으
로 볼지에 관해 의견이 그리도 엇갈리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 생각한다.
무엇을 정당한 수학적 증명으로 볼 것이냐는 개념이 사회학적인 것으로

밝혀졌듯이, 무엇을 합리적인 틀로 볼 것이냐는 개념 역시 사회학적인 것


이기 때문이다. 한 집단의 사람들은 과학적 방법론이 가장 합리적인 틀이
라고 생각하는 반면, 또 다른 집단의 사람들은 과학적 방법론을 음모라
생각한다. 한 집단에서는 성경을 가장 합리적인 틀로 여기는 반면, 또 다

른 집단에서는 그것을 허구의 이야기라 여긴다.


내가 비합리성의 징표라고 보는 몇 안 되는 기준 중 하나가 무언가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을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경우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은 영웅 숭배의 형태로 찾아올 때가 많다. 나는 이

것이 이성적 사회를 큰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라 믿는다.

영웅, 슈퍼스타, 천재라는 신화


회의주의는 이성에서 중요한 부분이고, 충성심은 인간성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극단으로 치달으면 위험할 수 있다. 맹목적


회의주의와 맹목적 충성심은 어떤 조건에서도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 하
거나, 생각을 바꾸는 조건이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사실상 그런 조건이 존
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때 생긴다.

예를 들어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사람이 지구의 평균 기온이 1년에 섭


씨 10도씩 오르면 지구 온난화를 믿겠다고 말했다 치자. 이것을 두고 생
각을 고쳐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열려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마치 <
좋아, 해가 서쪽에서 뜨면 지구 온난화를 믿을게>라고 얘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진화를 부정하는 사람은 진화를 뒷받침하는 증


거가 아무리 많이 나와도 아마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과학
자들도 증거를 들이대면서 그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은 그만 포기하고 감
정을 이용해 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맹목적 충성심은 또 다른 면에서도 위험할 수 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어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지지하는 경우에는 그 사람을 슈퍼스타나 <천
재>로 떠받드는 종교 집단 같은 상태가 될 수 있다. 조건 없는 지지는 고
귀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사실 다른 수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일종의 회색 지대 안에 들어 있다. 누군가가 대체 얼마나 나쁜 짓을


해야 당신이 그 사람에 대한 지지를 거두어들일까? 부모는 자식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 준다고 여겨질 때가 많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 대
량 학살 살해범이 된다면 이런 조건 없는 사랑도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

다.
이것은 극단적인 경우지만 우리는 자신의 힘을 부당하게 이용하는 사
람들을 통해 그보다 덜 극단적인 경우를 항상 주변에서 목격한다. 누군가
가 자기를 일종의 <천재>로 숭배하는 사람들로부터 조건 없는 지지를 받

고 있다고 느끼면 그 사람은 추종자들의 맹목적 충성심에 기댈 수 있음을


알고 나쁜 행동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이것은 과학, 학계, 음악, 텔레비
전, 영화, 외식 산업 등 어떤 분야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은 착취와
학대가 만연한 문화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이런 것
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기준을 어디로 잡아야 할까? 이것


은 결국 <자잘한> 문제와 <큰> 문제의 차이라는 질문으로 돌아오지만, 이
것 역시 또 다른 회색 지대에 해당한다.

합리성의 회색 지대
회색 지대는 이 책 여기저기에서 되풀이해서 튀어나왔다. 회색 지대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듯 보인다. 나는 우리가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고 거기

에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성적이기 위해서는 무언가 다소


모호한 것도 받아들여야 함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많
은 것들이 그저 이론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렇다고 그것들 모두가 똑같이
신뢰할 만하거나, 똑같이 미심쩍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이론을 확립

하는 데 어떤 종류의 틀이 사용되었느냐에 달려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더 많은 사람, 혹은 더 많은 정보원의 의견이 서로 일치한다고 해서 그것
이 꼭 거기에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럴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이번에도 판단 기준은 역시 그런 의견

의 일치를 가져오는 데 어떤 틀이 사용되었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론, 출처, 전문가, 증거에 대해 다양한 수준의 신뢰와 회의주
의를 드러낸다. 이것은 그저 누군가를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
가 아니다. 그 사이에는 거대한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

우리는 과학 <전문가>를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한 극단의 사람들


은 과학자들이 공모해서 서로 다 짜고 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 다른 극
단의 사람들은 과학을 절대적인 난공불락의 진리로 본다. 과학에 반대하
는 사람들은 과학을 믿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며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모든 것을 회의적으로 바라본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결국 틀린 것으


로 판명이 난 과거의 과학 이론들을 들먹인다. 과학에 호의적인 사람들은
과학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비이성적이며 논리 대신 감정을
이용한다고 말한다. 양쪽 집단의 사람들 모두 상대편을 멍청하다고 여기

기 쉽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 도움이 되는 상황이 아니다.


나는 사방 곳곳에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야 한
다고 생각한다. 회의주의만 해도 건강한 회의주의와 맹목적 회의주의 그
리고 그 사이에 온갖 다양한 정도의 회의주의가 존재한다. 나는 건강한

회의주의와 건강한 신뢰는 역시나 이번에도 증거와 논리가 포함된, 잘 정


의된 틀에서 오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맹목적 신뢰와 맹목적 회의주의는 겉보기에는 건강한 버전과 아주 비
슷해 보일 수 있다. 두 버전 다 똑같이 열렬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군
가가 자신의 신뢰나 회의주의를 여러 단계에 걸쳐 정당화할 수 없다면 그

것은 맹목적인 것이라 여긴다. 나도 과학에 대한 나의 믿음을 끝까지 정


당화할 수는 없지만(끝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 단계에 걸쳐 한동안은 계
속해서 정당화할 수 있다. 내가 과학적 틀을 믿는 이유는 견제와 균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자기반성적이고 자기비판적이다. 과학은 최

종적인 결과가 아니라 계속 진행 중인 과정이다. 과학은 자체적으로 업데


이트하는 틀을 갖추고 있고 자체의 오류를 발견하고 수정한 사례도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을 나약함의 징표로 보거나,
생각을 고쳐먹는 것을 우유부단함의 징표로 본다. 하지만 나는 이 두 가

지 모두 자신의 신뢰와 회의주의에 적용하는 틀을 갖고 있음을 알려 주는


중요한 징표라 생각한다. 내 입장에서는 이것이 더욱 강력한 형태의 이성
을 말해 주는 신호다.
막강한 이성
이성은 출발점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비논리적인 부분은
피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아무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 마치 여행
에서의 안전을 위해 그 어느 곳도 여행하지 않는 사람처럼 말이다. 이것

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안전하게 여행하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강력하


게 이성적이라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논리를 사용하고 논리적 모순을 피
하는 것만이 아니라, 논리를 사용해서 복잡한 논증을 구축하고 새로운 통
찰을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막강한 이성에 기여한다고 생각하는 논리적 기법


과 과정을 이야기했다. 이것은 추상에서 시작한다. 애초에 우리가 더 나
은 논리를 이용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추상화다. 나는 이것이 세 가지 주
요 요소를 갖고 있다고 본다. 사슬처럼 길게 이어진 논리로 만들어진 경

로, 새로운 복합 단위로 구성된 개념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꾸러미, 그리


고 추상화의 여러 수준을 이용해서 기존에는 단절되어 있던 장소를 다리
로 연결하는 그네가 그것들이다.
추상화는 관련이 있는 세부 사항을 관련이 없는 세부 사항과 구분하고,

한 상황 뒤에 실제로 자리 잡고 있는 원리를 알아내어 논리에 적용하는


분야다.
그다음에는 앞뒤 양쪽으로 긴 추론의 사슬을 추적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스크림 안 주면 소리 지를 거예요!>라고 외치는 아
이처럼 논리를 한 단계 이상 발전시키지 못해서는 곤란하다. 앞쪽으로 논
리를 추적하는 것은 한 사람의 생각에 따른 모든 결과를 이해하기 위함이
고, 뒤쪽으로 논리를 추적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복잡한 정당화를 구축하
고 이해하기 위함이다. 여기에는 그저 대상을 믿으니까 믿는 것이 아니라

한 체계를 아주 근본적인 신념까지 공리화하는 능력이 포함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신념을 이해하는 능력도 포함된다. 긴 논리의 사슬을 위쪽으
로 거슬러 올라가며 추적할 수 없으면 자기가 믿는 거의 모든 것을 근본
신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꼭 비논리
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다지 통찰력 있는 방식도 아니다. 그리고 생산적인

논의를 진행할 수 있는 가능성도 거의 사라져 버린다. 「왜 그렇게 생각하


는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는 막강한 이성이란 자신의 추론을 몇 개
안 되는 핵심 신념으로 분석해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라는 질문에 아
주 심도 깊은 수준까지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을 수반한다고 생각한다. 수

학자들이 자신의 증명을 쪽거리 도형처럼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쪼개서


채워 넣을 능력을 갖추어야 하듯이 우리도 자신의 신념에 대해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연관되어 있는 개념들을 합성해서 복합 단위를 구축하는 것은 논

리에서 중요한 힘의 원천이다. 대상의 집합을 하나의 단위로 생각하는 것


은 우리가 매일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다. 우리는 가족, 팀, 동물의 무리
등 여러 개체로 이루어진 집단을 하나의 단위로 본다. 학교(그리고 학교
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 회사, 극단 같은 대상을 하나의 단수로 여긴
다.
복잡한 시스템을 하나의 단위로 포장하는 것은 그 시스템이 여러 개체
로 구성되어 있음을 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막강

한 이성을 갖춘다는 것은 개인들이 서로 연결되어 전체 시스템을 구성하


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을 포함한다. 인과 관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거
대한 도표를 보고 나면 상황이 복잡해도 너무 복잡하다고 절망할지도 모
른다. 하지만 논리의 힘을 키워서 그런 복잡한 시스템을 하나의 단위로

이해하고 추론하게 되면 상황은 더 이상 복잡하지 않게 된다. 복잡한 시


스템에 대한 이 개념은 회색 지대를 망라한다. 복잡한 시스템은 단순한 <
예> 또는 <아니오>라는 답 대신 서로 관련된 온갖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
는 상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가지 결과가 아니라 서

로 다른 다양한 결과가 다양한 확률로 나타나는 상황과 비슷하다. 하나를


예측하기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워 보일 수 있지만, 막
강한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냥 포기하고 단순한 개념에 기대기보다
는 더 어려운 개념을 이해할 능력을 키울 것이다. 회색 지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두고 하나의 원인 혹은 하나의 답을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복잡한 상황에서 하나의 원인만 찾아내려면 그냥 다른 원인
들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사람들을 복잡한 상황에서 한
개인을 비난할 때 이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하나의 원인을 찾아내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시스템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그것을 <하나의 원인
>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더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고, 다른 수준의 추상화로 이동

도 가능하다. 13장에서는 추상화를 이용해서 다른 상황으로 그네 타기를


하면서 비유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길게 이야기한 바 있다. 나는 막강한
이성에는 서로 다른 추상화 수준을 오가며 서로 다른 종류의 그네를 만들
고, 서로 다른 맥락 사이를 오가며 여러 가지 관점을 확인하는 능력이 필
요하다고 믿는다.

막강한 이성에는 공리를 함축하고 분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논리를 감정으로부터 분리하는 능력과도 연관이 있다. 이는 어느 한쪽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한 상황에서 각각이 어떤 역할을 맡고 있고, 각각
이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논리적 정

당화를 찾아내거나 감정적 사실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포함된다. 그리


고 이것은 이성의 훨씬 더 중요한 측면으로 이어진다. 바로 이성을 인간
의 상호 관계에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나는 막강한 이성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능적으로 이성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그저


막강한 이성만 갖춘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이용해 세상을 돕는 사람이다.
최고의 슈퍼 영웅이 자신의 초능력으로 세상을 돕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
고 내가 보기에 이 막강한 힘을 이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세상이 분열

을 극복하게 돕고, 분열을 야기하지 않는 배려 있는 대화를 나누도록 분


위기를 조성하고, 공동체가 하나의 공동체로 연결되어 작동할 수 있게 만
드는 것이다.

지능적인 이성
인생에서 승리하는 방법이 꼭 다른 누군가가 패배해야만 하는 제로섬
게임이 될 필요는 없다. 인생을 제로섬 게임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이길 수 있겠다 싶은 사람들을 조종하려고 든다. 너무 낙관적인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기보다는 더 큰 공공의


선을 위해 협력한 사례는 아주 많다. 이것이 팀워크와 공동체의 본질이며
어쩌면 인간성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동굴 속에서 따로따로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가족, 동네, 학교, 회사, 도시, 국가 그리고

더 나아가 운이 좋다면 국가 간의 협동체 등 서로 다른 다양한 규모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나는 카를로 치폴라 Carlo M. Cipolla의 책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기본 법칙The Basic Laws of Human Stupidity 』에 나오는 지능 이론
을 살짝 변형한 버전을 믿는다. 그는 자신과 타인에게 돌아가는 이득과

손실에 따라 어리석음과 지능적임을 정의했다.


자신에게는 이득을 주면서 타인에게는 해를 입히는 사람은 <강도>다.
그리고 그는 타인에게는 이득을 주면서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혹은 자신
이 손해를 보는) 사람은 <불행아>라고 칭했다. 나는 이를 <순교자>라고

부르고 싶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인생을 제로섬 게임으로 만든다. 반면


죄수의 딜레마에서처럼 타인과 자신에게 동시에 해를 입히는 사람이 있
다. 치폴라는 이것을 <어리석음>이라 정의한다. 이제 남아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은 자신과 타인에게 동시에 도움이 되는 경우다. 치폴라는 이렇게


상호 이익을 이끌어 내는 것을 <지능적임>이라 정의 내렸다.

이것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지능의 정의다. 지식, 업적, 성적, 자격증,

학위, 수상 경력, 재능, 능력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나는 이런 정의


가 마음에 든다. 내가 지능적 이성을 묘사할 때 쓰는 지능도 이런 형태를
말한다. 지능적 이성이란 그저 논리만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논리를
막강하게 이용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사람을 돕기 위해 인간관계 속에서

논리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서로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돕고,


타인과 자신을 동시에 돕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의 주장을 꺾
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만 논리를 쓴다면 이것은 강도 버전의
지능이 되고 만다.

지능적 이성은 사람 사이의 상호 작용에 논리를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


에 논증을 뒷받침하려면 내가 앞서 설명했던 모든 방법을 이용해서 반드
시 감정을 끌어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기와 의견이 엇갈리는 사
람과 서로 이해하게 될 가능성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믿는다. 역으로 지능

적 이성은 그저 감정은 틀린 것이라고 배척하기보다는 자신은 물론 타인


의 감정적 반응 속에서도 논리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미국 시카고로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제안받았을 때 나
는 당혹스러웠다. 이성적으로 보면 그것이 나에게는 최고의 선택임이 분

명했지만 감정적으로는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이런 부조화를 이해하기


위해 나는 그런 선택을 내렸을 때의 장점과 단점을 목록으로 적어 보고
내가 혼란에 빠진 이유를 알아냈다. 시카고로 옮기면 정말 커다란 장점이
몇 가지 따라오지만, 소소한 단점이 엄청나게 많이 따라오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소소한 단점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에 감정적으로 압도되어

버렸던 것이다. 일단 내 두려움의 원천을 발견하고 나니 그것을 줄일 수


있었고, 결국 나는 망설임 없이 선택을 내렸으며 후회도 없었다.
또 다른 사례는 내가 아이스크림을 너무 많이 먹으면 나중에 몸이 안
좋아질 것을 알면서도 너무 많이 먹는 것이었다. 내가 그냥 비논리적인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더 미묘한 측면이 있었다. 나는 중


기적인 고통보다 단기적인 쾌락(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더 우선시했던 것
이다. 이것은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일 뿐이다. 일단 이 점

을 이해하고 나자 가끔은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게 됐다.


혼자서 추론하며 속으로 논쟁을 벌이는 것은 훌륭한 첫 번째 단계이지
만 타인과 논쟁을 하는 것은 어떨까? 자기와 의견이 엇갈리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왜 논리적인 사람들끼리도 의견이 엇갈릴까

논리적인 사람들끼리도 의견이 엇갈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이 중요하다. 이것은 어느 한쪽이 비논리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어쩌면 양쪽 모두 비논리적일 수도 있다. 이것

은 또한 두 사람 다 어리석다는 얘기도 아니다. 논리적인 사람들도 서로


다른 공리에서 출발하면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은 타인을 돕는 일이 가치 있다고 믿고, 또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이 자기 앞가림을 스스로 해야 한다고 믿을 수 있다. 이것은 기


본 신념이 서로 다른 것이지, 어느 쪽도 비논리적이지는 않다. 사실 나는

이것이 거짓 이분법이라 말하고 싶다. 나는 모든 사람이 자기 앞가림은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자원으로 특권


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자기보다 특권을 누리지 못

하는 사람들을 도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논리의 한계 때문에 논리적인 사람들도 의견이 엇갈릴 수 있다. 일단

그런 한계에 봉착하면 논리가 효과를 잃었을 때 우리가 어떤 수단을 선택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나갈 방법이 여러 가지 존재한다. 회색 지대를 처

리하는 다양한 방법 중에서 하나를 고르거나, 회색 지대 안에서 임의로


선을 그을 지점을 고르는 경우일 때가 많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논리

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논리가 한계에 부딪혀서 두 사람 모

두 전적으로 논리적이지는 못한 경우일 수 있다.


나는 기본적 논리의 수준을 벗어나는 데 필요한 측면 중 하나는 이런

의견 불일치의 근원을 찾아내는 능력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능력을

갖추려면 논리를 더욱 막강하게 사용해서 더 좋은 논쟁을 벌일 수 있어야


한다.

좋은 논쟁

나는 세상에서 좋은 논쟁을 더 많이 보고 싶다. 무슨 말이냐고? 나는 좋

은 논쟁은 논리적 요소와 감정적 요소를 가지고 있고, 이 둘이 함께 작용


한다고 생각한다. 잘 쓰인 수학 논문은 증명 과정도 물 샐 틈 없이 완벽하

면서 좋은 해설까지 함께 들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 좋은 해설은 사람들


이 논리를 단계별로 차근차근 이해하면서 그 개념들을 피부로도 느낄 수

있게 잘 묘사한다. 좋은 논문은 또한 논리적 상황이 우리의 직관과 모순

을 일으키는 역설적인 상황도 꼼꼼히 설명하고 넘어간다.


의견 불일치에서 중요한 첫 번째 단계는 의견 불일치의 진정한 근원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 원리에 아주 가까운 것이어야 한다. 자신

의 주장과 상대방의 주장 양쪽 다 긴 논리의 사슬을 추적해야 한다. 그리


고 비유를 통해 철저히 조사해 볼 수 있도록 그것을 최대한 일반적인 원
리로 표현해야 한다.

다음에는 서로 다른 입장 사이를 이어 줄 일종의 다리를 구축해야 한

다. 추상화와 그네 타기의 힘을 최대한 활용해서 우리가 똑같은 원리의


서로 다른 회색 지대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 줄 맥락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감정을 끌어들여 상대방의 감정까지 확실히 끌


어들이고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이해해서 우리가 함께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천천히 유도해야 한다. 여기에는 그들이 생각을 고쳐먹게 설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일도 포함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합


리적이며 우리 역시 마음을 열고 자신의 입장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할 부분이니까

말이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의 관점을 이해하게 된다면 전에는 몰


랐던 것을 발견해서 우리도 입장을 바꾸고, 더 나아가 생각을 고쳐먹을

수도 있다.
나는 좋은 논쟁이란 그 뿌리로 들어가 보면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

람을 이해하는 것을 가장 큰 목적으로 하는 논쟁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런 경우가 실제로 얼마나 될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논쟁은 다른 사람을


모두 꺾으려는 목적으로 시작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옳고 나머지

는 모두 틀렸음을 입증해 보이려 한다. 나는 이것을 주목적으로 삼는 것

은 생산적이지 않다고 본다. 나도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이런 점에서는 죄


를 짓고 살아 왔지만 결국 토론이 꼭 경쟁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
게 됐다. 만약 모두가 나머지 모든 사람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서

로의 신념 체계가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한쪽은 옳고, 한

쪽을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의 신


념 체계와 모순을 일으키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자신의 신념 체계와 모순

을 일으키는 사람들하고는 다른 부분이다. 안타깝게도 공격과 방어의 악


순환으로 빠져드는 논쟁이 너무도 많다. 좋은 논쟁에서는 아무도 공격받

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의견에 위협을 느끼지 않

고, 그저 관점만 다른 것일 경우에는 논쟁을 비판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만약 모든 이가 지능적으로 막강한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든 스스로 이런 부분을 책임질 것이다. 이를


이루어 내려면 모두가 안전하다고 느낄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지능적으로 될 때까지는 지능적인 사람들이 모두가 공격받는 느낌을 받

지 않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나는 사람들이 분열될 가능성이 있는 상황


에서는 최대한 스스로 이렇게 상기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경쟁이 아니

라고 말이다. 왜냐면 실제로도 결코 경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논쟁은 감정을 끌어들이지만 이것은 상대방을 위협하거나 업신여


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좋은 논쟁은 사람들이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기

위해, 논리가 그들의 머리뿐 아니라 그들의 가슴으로도 흘러들어 가는 길


을 만들기 위해 감정을 끌어들인다. 이것은 서로에게 가시 돋친 말을 쏟

아 내며 토론을 끝장낼 최후의 한방을 노릴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린

다. 나는 이것이 옳은 방향이라 생각한다. 앞에서 논리가 응급 상황에서


효과적이지 못한 이유를 확인했듯이 논리는 원래 느리다. 응급 상황이 아
닐 때는 천천히 논쟁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자꾸만 모든 것을 더

빠르게 몰고 가는 성향이 있다. 게다가 주의 지속 시간은 점점 짧아져서

트위터 280자, 혹은 재미있는 그림 옆에 붙일 짧고 간결한 문구, 혹은 한


줄짜리 문장으로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그래야 사

람들을 〈뿅〉 가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미묘한 부분들을 다

룰 수 있는 여지가 거의 남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면에서 의견이 일


치하고, 어떤 면에서 의견이 엇갈리는지 알아낼 수가 없다. 다리를 이을

시간도 남지 않는다.
나는 우리 모두가 자기와 의견이 엇갈리는 사람들에게 다리를 놓아 줬

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다리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로 의견이 엇갈리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메타 문제다.


먼저 사람들이 그런 다리를 갖고 싶어 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수학에 대

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 희망을 가지려면 사람들로 하여금 수학을 배워 볼

까 하는 마음이 들게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의 공동체에 속한 우리 인간에게는 서로 간의 연결 관계가 우리가

가진 전부다. 만약 우리가 모두 고립되어 혼자 사는 은둔자였다면 인류는


결코 지금의 위치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의 연결 관계는 보통

감정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수학은 보통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봐서 인

간성과도 거리가 멀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나는 수학과 논리를 감정과 강


력하게 결합된 상태로 활용한다면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연민 어리고 보
다 나은 연결 관계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확고하게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미묘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흑백 논

리가 분열과 극단적인 관점을 불러온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거짓


이분법은 생각과 생각,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분열을 야기하기 때문에 위

험하다. 논리와 감정도 그러한 거짓 이분법 중 하나다. 우리는 이 지구 위

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다른 사람들과 헛된 대결을 벌일 이유


가 없다. 그리고 논리가 승산이 없는 헛된 싸움에서 논리와 감정을 대결

시킬 이유도 없다. 논리와 감정의 관계는 대결 관계가 아니다. 경쟁 관계


도 아니다. 이것은 협동의 예술이다. 논리와 감정이 함께 손을 잡으면 우

리는 더 나은 생각을 할 수 있고, 따라서 세상에 대해, 서로에 대해 크나

큰 이해를 얻을 수 있다.
감사의 말

제일 먼저 열렬한 지지를 보내 준 앤드루 프랭클린과 프로파일북스

Profile Books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라라 하이머트, TJ 켈러


허 그리고 베이직북스 Basic Books의 모든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

린다. 나를 믿고 저자로서 소양을 키울 수 있게 채찍질해 준 출판사를 대


서양을 가로질러 양쪽에 두었다는 것은 정말 큰 영광이다. 이 책의 경우

에는 뛰어난 편집으로 도움울 준 닉 시린에게 특별히 감사해야겠다.

나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스쿨의 학생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그


들의 지적 에너지와 사회적 양심은 내가 추상 수학을 점점 더 사회적 문

제에 적용하도록 이끌었고, 그것이 이 책으로 직접 이어지게 됐다. 학교

관계자 여러분들에게도 감사드리고 싶다. 내 연구의 모든 측면을 높이 평

가해 주는 교육 기관에서 일을 하는 것은 하나의 계시였다.


부모님, 여동생 그리고 어린 조카 리암과 잭의 지지가 없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조카들도 이제는 내가 이전의 책에

서 고마움을 표했을 만큼 어리지는 않다.


수많은 통찰과 일화 그리고 토론으로 내가 더욱 명확한 사고를 할 수

있게 재촉하고, 나의 생각을 좋은 일에 쓸 수 있게 자극해 준 훌륭한 친구

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보낸다. 내가 이 책에서 특별히 그 생각을 언급

했던 친구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박사 학위 지도 교수님이었던 마틴


하이랜드, 영어 선생님 마리스 라킨, 수학 선생님 앤드루 머들, 그리고 윌

부스트, 올리버 카마초, 대니얼 핀켈, 제시카 커, 샐리 랜들, 바바라 폴스

터에게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내 머릿속이 안개처럼 흐려질 때마다 변함

없는 등대가 되어 준 사라 가브리엘에게도 언제나 감사한 마음이다.

13장은 나와 공감 어린 최고의 논쟁을 벌여 준 그레고리 피블스에게


바친다.
옮긴이의 말

<땅 부자>, <알부자>, <흥 부자>, <벼락부자>, <딸부자>……. 세상에는

좋은 부자도 많건만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갈등 부자>인 것 같다. 정치


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 각계각층 간에 참으로 갈등이 많다. 인터넷

의 발달로 이제는 예전과 달리 공중파나 신문 매체 등의 힘이 약해지고


유튜브 같은 개인 소통의 창구가 힘을 얻다 보니 굳이 기득권 언론을 통

하지 않고도 자기 목소리를 낼 기회가 늘어났다. 언뜻 보면 이런 소통 창

구의 발달 덕에 서로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어 갈등이 줄어들 것 같은데,


귀는 트이지 않고 입만 더 트이다 보니 오히려 사회가 더 소란스러워졌

다.

하지만 이런 소란스러움은 우리 사회의 역동성과 활력을 보여 주는 증

거이기도 하다. 가끔씩 싸우기도 하는 부부가 금슬이 더 좋다. 갈등은 결


국 소통 욕구의 발현이니까 말이다. 이런 소통의 기회를 잘 활용하면 갈

등은 오히려 화합을 위한 창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그 기회의 창을 열어 줄 논리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의 목적은

소통을 돕는 것이지 논쟁에서 승리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


에 완벽한 논리로 무장해서 온라인에서 상대방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신묘한 논리적 기술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트인 입을 세련되게 다듬어 줄 논리의 기술을 다루지만, 오히려 서로에게

닫힌 귀를 열어 줄 감정적인 접근 방식에 더 큰 방점을 찍고 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갈등을 치유해 줄 핵심 열쇠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논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논

리를 이용해서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명쾌한 논증을 어떻게 구축하는지

살펴본다. 저자는 사회적 쟁점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눈치 싸움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사례를 예시로 들면서 양화사, 벤 다이어그램, 진리표, 함축


의 부정, 동치, 퍼지 논리 등을 동원하며 논리의 힘에 대해 설명한다.

2부에서는 논리가 한계에 부딪히는 지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논리는 1

분, 1초가 긴박한 비상 상황이나 논리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모두 갖추지 못한 경우에는 한계에 부딪힌다. 논리에 진정으로 강해지기

위해서는 논리의 한계를 잘 알고, 그 선을 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3부에서는 논리 너머의 것을 다룬다. 아무리 훌륭한 논리로 무장을 했

어도 결국 상대방이 그 논리에 귀를 닫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어찌 보


면 상대방이 마음을 닫아 버린 상황이야말로 논리가 가장 큰 한계에 부딪

히는 경우다. 논리가 상대방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서려면 먼저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공감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의미다. 논리와 감정은

서로 정반대인 것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음양의 조화처럼 함께 어울려야

완전해지는 존재다.
저자는 단순히 논리적인 사람과 지능적으로 논리적인 사람을 구분한

다. 지능적으로 논리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검증과 조정을 가능하게

하는 틀을 갖고 있어야 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의 주장도 회의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옳고 그름은 흑과 백으로 분명

하게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넓은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는 사실

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항상 논리적으로 돌아가지는 않은 이 세상에서도


올바르고 합리적인 논리를 이용할 수 있다. 부디 이 책이 우리를 냉철한

이성과 따듯한 감성이 어우러진 사회에 한 발 더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되

었으면 한다.

2020년 가을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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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뉴스 7, 11, 429
갈등 7, 179, 215, 451, 452
감정 끌어들이기 406, 409, 410, 411, 414, 415, 440, 444, 445
감정의 한계 417
감정의 힘 417
감정적 반응 184, 213, 365, 399, 402, 410, 441
거래 58, 60, 61, 78, 183, 269
거짓말쟁이의 역설 231
거짓 동치 70, 99, 289, 290, 360~367, 369, 372, 374, 375, 377,
381, 383, 384, 386, 391~393, 396
거짓 부정 361, 369
거짓 비동치 99, 403, 404
거짓 역설 238
거짓 이분법 368~372, 374, 375, 391, 396, 442, 447
건강한 회의주의 427, 433
고정 관념 193, 264, 361
공동 자원 딜레마 274
공리 16, 55, 75, 76, 204, 243, 248, 260, 262, 279~285, 287, 325,
342, 379, 399, 414, 415, 419, 422, 423, 424, 425, 427, 428, 436,
438, 442
공집합 174
과도한 단순화 117
과학적 방법론 20, 130, 132, 225, 430
과학적 증거 214, 333, 395, 415, 425
과학적 진리 20, 132
관용의 원리 187
괴델의 역설 243
교집합 142, 144
교환 58, 60, 78, 98, 220, 221
귀납법 302
규칙 22, 23, 25, 27~30, 49, 53, 67, 205, 212, 233, 241, 256, 259,
265, 279, 282, 296, 417
그네 타기 39, 281, 289, 317~319, 323, 331, 337~340, 355, 380,
409, 410, 422, 438, 443
긍정 논법 123, 263
긍정 오류 53, 54, 55, 132, 288, 313, 325, 327~329
기여 요인 134, 158
기하학 25, 170, 281, 282


논리 구사 능력 64
논리 속의 간극 71, 72
논리 언어 50, 196
논리적 연결사 137, 138, 140, 149
논리와 감정 8, 395, 398, 402, 407, 417, 447, 453
논리의 한계 11, 16, 42, 201, 203, 204, 231, 417, 419, 442, 452
논리의 힘 11, 15, 17, 57, 103, 203, 417, 437, 452
논리적 동치 99, 100, 290, 382
논리적 모순 241, 283, 420, 435
논리적 반대 104, 214, 215
논리적 부정 104, 105, 108, 121
논리적 사고 37, 108, 230, 254
논리적 오류 70, 99, 289, 376, 381
논리적 인간 419
논리적 정당화 128, 204, 395, 438
논리적 증명 25, 27, 31, 32, 61, 205, 206, 209, 211, 222
논리적 진리 132, 222, 225
논리적 함축 37, 47, 49~53, 55, 56, 61~63, 65, 66, 68, 72, 73, 78,
79, 81, 82, 89, 92, 93, 96, 119, 122, 123, 126, 128, 233, 284,
295, 421


단순화 8, 19, 54, 113, 117, 118, 158, 162, 168, 169, 227, 316
대우 124, 126, 127, 128, 129
대칭성 27
동치 16, 70, 84, 87, 94, 95, 98, 99, 124~127, 289, 344, 354~369,
372, 374, 377, 381~384, 386, 391, 392, 396, 403, 404, 411, 413,
452


러셀, 버트런드 246
러셀의 역설 243, 246~249, 252, 406


막강한 논리 417, 424
막강한 이성 417, 434~438, 445
맥도널드, 카일 58, 60, 61, 66, 78
맨스플레인 384~386
맹목적 회의주의 431, 434
명제 논리 147, 196
모더스 포넨스 123, 263, 264
모욕 61, 64, 71, 102, 362, 366, 404
무논리 51, 275
무논리적 51
무모순성 243, 419
밈 7, 225~227, 240, 381


반대 70, 101~104, 106, 108, 131, 212, 214, 215, 217, 288, 325,
341, 346, 350, 351, 361, 366, 368, 378, 379, 387, 391, 409, 423,
433
반향실 효과 217
방정식 8, 9, 10, 219, 221, 354~356
배신 271~ 273
배심 재판 205, 209
배중률 109, 115, 118, 293, 305
배타적 논리합 141, 142, 147
배턴버그 케이크 구조 250, 251
범주론 36, 169, 170, 182, 289, 415
벤 다이어그램 88~90, 92, 113, 115, 117, 119, 142~145, 147, 397,
452
부정 99, 102~104, 106, 107, 113, 115, 119, 120, 121, 124,
126~131, 133, 138, 142~144, 146~148, 182
부정 오류 53~55, 132, 288, 313, 325, 327~329
부정확한 논리 71, 72
부정확한 정의 69, 70
부정확한 추론 71
분노 181, 182, 245, 366, 379, 380, 403
불분명함 41, 43, 50
불완전성 정리 243, 244
불화 7, 166
불확실성 32, 40, 306, 312
비난 7, 15, 23, 42, 44, 72, 89, 108, 124, 134~136, 143, 147~153,
155, 158, 159, 162, 184, 299, 330, 336, 361, 362, 365, 366, 373,
374, 376, 386, 387, 405, 437, 443
비논리성 8, 422
비논리적 20, 51, 125, 158, 213, 254, 258, 260, 261, 263, 275,
283, 287, 295, 301, 375, 379, 396, 398, 417, 420, 422, 424, 435,
436, 441, 442
비유 16, 39, 44, 71, 81, 88, 117, 182, 211, 222, 281, 289,
314~316, 318, 319, 322~325, 327, 329, 333, 336~338, 340, 343,
344, 349, 350, 352, 353, 355, 361, 381, 382, 387, 408~412, 414,
422, 438, 443
비이성적 134, 154, 395, 433


사고 실험 37, 237, 240, 280
상관관계 36, 54, 187, 244, 317, 401
상호 연결 136, 159, 162
선 긋기 16, 291, 296, 298
설득 8, 12, 20, 48, 103, 205, 206, 209, 210, 213, 215, 216, 222,
225, 228, 330, 333, 336, 355, 378, 379, 381, 383, 395, 401,
405~408, 410, 413~415, 417, 426, 431, 444, 446, 453
설득력 12, 225, 333, 355, 395, 401, 415, 417, 453
성범죄 254, 280, 298, 326~328
성차별 11, 70, 80, 81, 184, 191, 330, 340, 410
수수께끼 269
수학 공포증 153, 154
수학에서의 가정 67
수학적 귀납법 302~304
수학적 농담 192
수학적 언어 50
수학적 증명 32, 33, 70, 204, 205, 209, 214, 260, 430
수학적 진리 21, 27, 218
순수 수학 9, 10
순환 고리 165, 167~169, 230, 244, 430
술어 논리 196
슬라이딩 스케일 109, 117, 239, 291, 297, 301, 304
시험 25, 104, 135, 136, 138, 149, 153, 210, 217, 296, 306
실생활에서의 가정 68
실험 과학 209, 428


악순환 159, 165~169, 445
양화사 190, 196~198, 243, 249, 452
얼버무리기 71
엄격한 논증 8
여집합 116
역 81, 82, 83, 85, 86, 88, 95~98, 100, 120, 126, 127, 364
역설 16, 120, 123, 196, 205, 229~233, 235~238, 240~249, 252,
254, 406, 443
역의 오류 95, 364
연역 73, 75, 282, 295, 419
연역적 폐쇄성 295, 419
오류 31, 53~55, 63, 70, 71, 93, 95, 98, 99, 113, 124, 127, 138,
214~216, 238, 289, 329, 349, 361, 364, 376, 381, 434
오일러 도표 90
우월 전략 272
위계 171~173, 177, 178
위협 72, 102, 132, 156, 246, 254, 340, 445
유클리드 281, 282
음모 22, 30, 31, 72, 425, 430, 433
응용 수학 9, 10
의견 불일치 187, 188, 312, 350, 372, 396, 415, 418, 424, 443
의견 충돌 8, 21, 32, 41, 42, 76, 122
이야기 끝 159
이혼 150
인종 차별 11, 81, 85, 95, 139, 156, 311, 330, 333, 339, 352, 378,
392, 410, 414


자기 닮음 207
자기 참조 43, 196, 244
적대감 180, 182, 374, 377, 396
정답 25, 26, 31, 35, 198, 220, 221, 239, 352, 354, 408, 411
정당화 9, 40, 66, 71, 74, 75, 85, 95, 102, 203~205, 208, 210, 212,
213, 225, 288, 375, 383, 391, 394, 395, 415, 419, 422, 423, 425,
434, 436
제논의 역설 236
제로섬 게임 152, 300, 439
조종 190, 213, 254, 309, 391, 393, 401, 404
좋은 논쟁 443~445
죄수의 딜레마 268, 269, 273, 274, 439
주의 지속 시간 7, 446
중간값 42, 307, 309
증거 20, 31, 48, 72, 105, 128~131, 133, 178, 187, 188, 209, 214,
215, 269, 273, 285, 327, 328, 333, 335, 384, 385, 395, 405, 406,
408, 415, 425, 427, 428, 431, 433, 434, 451
지능 16, 24, 396, 417~419, 438, 439, 440, 445, 453
직관 5, 33, 119, 129, 211, 212, 214, 215, 220, 230, 238~241,
260, 350, 415, 416, 443
직관적 반대 215
진리표 119, 452
진릿값 117~120, 130, 131, 147, 305, 307
집합론 142
쪽거리 206~208, 222, 233, 244, 436


착취 7, 68, 432
참된 역설 238, 245
책임 11, 15, 23, 62, 74, 89, 134, 135, 137, 147, 149, 150, 155,
162, 166, 167, 169, 209, 256, 288, 289, 313, 340, 341, 342, 414,
429, 445
추론 규칙 123, 235
추상 세계 23, 24, 33, 35~37, 39, 316, 318
추상화 과정 19, 39, 315, 316
충분조건 85, 93, 95

캐럴의 역설 123, 232, 233


탈진실 12
텅 빈 시스템 280
특권 11, 47, 51, 52, 56, 57, 79, 90, 110, 120~123, 125, 149, 175,
177~182, 298, 316, 318, 322, 323, 336~340, 352, 412, 442
틀 428~430, 433


판단 기준 29, 433
팩트 159
퍼지 논리 118, 304, 305, 307, 312, 388, 427, 452
페미니즘 80, 181, 428
편견 7, 65, 76, 81, 96, 117, 182, 252, 292, 330, 352, 384, 407,
411
포괄적 진술 185~187, 193, 198
포함적 논리합 141, 145, 146
프랙탈 206
피해 의식 7
필요조건 85, 93, 95
필요충분조건 100

학대 136, 153, 379, 411, 412, 432
함축 49, 57, 61~66, 73, 75, 81, 82, 86, 89, 90, 92, 93, 95,
98~100, 120~124, 126, 128, 129, 138, 142, 150, 153, 190, 194,
207, 234~236, 263, 264, 295, 364, 365, 403, 423, 438, 452
함축의 형식 62
합리성 7, 12, 16, 329, 417, 424, 426, 430, 432
합리적 반대 212
합리적 의심 212, 425
합리적 인간 290, 424
합집합 143
핵심 신념 279, 282, 283, 419, 424, 425, 436
허수아비 논증 124, 374, 376, 380, 382, 385
확증 편향 128
회색 지대 85, 107, 108, 111, 113, 115, 118, 188, 239, 289, 291,
293~297, 299, 305, 307, 310~313, 342, 343, 355, 360, 361, 369,
380, 381, 404, 413, 422~424, 431, 432, 433, 437, 442, 444, 453
훅의 법칙 130
흑백 논리 8, 291, 293, 312, 388, 447
흐름도 89
힐베르트 호텔의 역설 240

1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이나 개인적 신념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 ─ 옮긴이주.

2 거짓 동치(거짓 등가 false equivalence)란 완전히 반대되는 두 논


증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마치 논리적으로는 동치인 것처럼 보
이는 논리적 오류를 말한다 ─ 옮긴이주.

3 거짓으로 살인, 인질극, 폭탄 위협 등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고 신고해 무장 경찰이 출동하게 하는 것 ─ 옮긴이주.

4 영국의 페미니즘 작가 로라 베이츠 Laura Bates가 성 불평등 경험


담을 공유하는 <일상 속의 성차별Everyday Sexism>이라는 웹 사
이트를 만들었다.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비교적 가벼운 성희롱이나
성차별부터 성폭력, 강간에 대한 이야기까지 게시물은2년 만에 10
만 건이 넘었다. 이 프로젝트는 이후 동일한 제목의 책으로도 발행
되었고 국내에도 번역되었다. 『일상 속의 성차별』(안진이 옮김,
2016, 미메시스). ─ 옮긴이주.

5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무의식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는 차별─


옮긴이주.
6 남성도 성차별을 경험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결국 성차별을 어
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편견에 대한 일부 이론
에서는 성차별과 인종 차별은 체계적 억압이라는 보다 큰 그림과 맞
아떨어지는 경우에만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담긴 개념
은 억압받는 집단이 압제자에 대해 편견을 가진 경우는 압제자가 통
제의 한 형태로 억압받는 집단에 편견을 가진 경우와 다르다는 것이
다. 이런 정의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나는 억압받는 사람과 압
제자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주제는
비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13장에서 다시 다루겠다. 이것을 이런 추
상적인 용어로 생각하면 그 차이에 대한 혼란이 사라진다. 그것에
이름을 붙여 주면 그것에 관해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7 만약 갱단 사람이 모두 다섯 명이고 그 나라에 백인이 정확히 다섯


명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백인을 찾아 나서는
접근 방식이 말이 된다. 그 나라에 백인이 정확히 열 명이 있음을 알
고 있는 경우에도 합리적인 접근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백인을 다섯 명만 모아 놓으면 그중 일부는 실제 범인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나라의 백인 인구의 수가 많아질
수록 이런 접근 방식은 논리성이 떨어지고 점점 더 인종 차별에 가
까워진다. 실제로는 이런 접근 방식이 유색 인종을 대상으로 적용되
는 경우가 많다. 소수 집단이 속한 국가나 도시 인구 집단의 크기가
얼마나 커야 이것이 합리적인 접근 방식에서 인종 차별로 바뀌는 것
일까? 이것은 12장에서 다시 살펴볼 회색 지대에 관한 질문이다. 우
리는 점증적 논증 이 선입견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해 주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8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여기 나온 도표의 경우 엄밀하게 말
하면 <벤 다이어그램>보다는 <오일러 도표 Euler diagrams>로 불
러야 맞는다고 한다. 벤 다이어그램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해당 집합
들의 가능한 논리적 조합을 모두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여기 나온
도표는 이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다. 한 원이 다른 원 안에 완전히 포
함되어 있기 때문에 작은 원에 포함되면서 큰 원에는 포함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바로 이 특정 도표가
의도하는 부분이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 벤 다이어그램과 오일러
도표를 굳이 구분하려 들면 정확한 사람이라는 말보다는 현학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계속 이 도표를
벤 다이어그램이라 부르려고 한다. 벤 다이어그램이라는 용어가 사
람들에게 더 친숙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9 이 진술들이 논리적으로 동치라고 해서 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도


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이 진술
들이 논리적으로 보면 모두 같다는 말일 뿐이다. 차량 검문을 비롯
한 여러 상황에서 백인들도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다만 흑인
들이 더 많이 죽느냐, 그리고 이것이 인종 차별 때문이냐 하는 문제
는 그보다 훨씬 복잡한 다른 문제다.

10 첫 번째 도표(안쪽에 원을 그려 넣지 않은 것)에서 착시가 보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도표를 보면 A 바깥으로 하얗게 빛을 내는
원이 존재하고 그 중심부는 더 회색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이것
은 착시다. 이 중앙 부분 전체가 사실은 하얀색이지만 우리 눈은 그
바깥쪽 고리를 더 하얗다고 해석한다. 아마도 이 부분이 회색과 가
까이 붙어있어서 그럴 것이다. 나는 여기서 비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우리는 머릿속으로 하얀색과 하얗지 않은
색으로 가르는 경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색이 슬라이딩
스케일로 점진적으로 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특히나 백인들 사이
에서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 문제는 인종
에 대한 편견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11 개인적인 성 정체성이 타고난 생물학적 성 정체성과 일치하는 사


람.

12 배타적 논리합을 부정하려면 <둘 다이거나, 둘 다 아니거나>가 나


와야 한다. 예를들면 세상에는 홍차나 커피를 좋아하지만 둘 다 좋
아하지는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럼 그 나머지 사람은 홍차와
커피를 둘 다 좋아하거나, 둘 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 아니면 ~>은 꽤 자연스러운 개념이지만 <둘 다 맞거나, 둘 다 아
니거나>는 조금 이상해 보인다.

13 ø은 공집합을 나타내는 표준 기호다. 1을 <없는 소인수의 곱>으로


고려하는 데는 기술적인 이유들이 존재한다.

14 질병과 비슷한 증상을 일으키는 물질을 극소량 사용하여 병을 치


료하는 방법 ─ 옮긴이주.

15 기본적 양화사는 집합을 대상으로만 수량화한다. 즉 <한 특정 집합


안에 포함된 모든 대상에 대하여>라고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
상의 집합에 대해서는 수량화할 수 없다. 이것은 고차의 표현 능력
이라서 자기 참조의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조금 기
술적인 면이 있지만9 장에서 역설에 대해 논의할 때 다시 살펴볼 개
념이다.
16 방송에서 필요한 반향 효과를 내기 위해 만들어진 방으로, 같은 성
향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의견을 주고받다 보니 점점 고립되고 특정
성향만 강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 옮긴이주.

17 여기서는 <equation>을 문맥에 따라 <등식> 또는 <방정식>으로


혼용해서 번역했다 ─ 옮긴이주.

18 인터넷에서 이미지, 동영상, 해시태그, 유행어 같은 형태로 급속도


로 확산되어 사회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은 소셜 아이디어, 활동, 트
렌드 등을 말한다 ─ 옮긴이주.

19 러셀의 역설에서는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모든 집합의 집


합 S>가 평범한 집합이 아니라 <메타 집합>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 다음의 두 진술이 정상 집합인 A에만 적용되고 메타 집합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 A가 집합 A의 원소라면 A는 집합 S의 원소가 아니다.

▪ A가 집합 A의 원소가 아니라면 A는 집합 S의 원소다.

S는 메타 집합이기 때문에 A가 S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할


수 없다. S는 집합 A의 정당한 사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논리의 붕괴를 피할 수있 다.

20 내가 앞서 펴낸 책을 읽은 사람은 이 그림을 알아볼 것이다. 나는


배턴버그 케이크를 정말 좋아한다.

21 엄마가 아이스크림을 줬다고 말할 때, 〈give〉는 불규칙 동사라 과


거형이 〈gave〉이지만 규칙 동사로 생각해서 〈gived〉라는 과거형을
사용한 것이다 ─ 옮긴이주.
22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경우 현재 모든 주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주에
서 선거인단 투표에서 선거인단을 뽑을 때 최다 득표자 당선 투표제
를 사용한다.

23 덧셈과 곱셈이 유사하지 않은 한 가지 경우는 <역(逆)inverse>을


생각할 때다. 어떤 수를 더한 것은 항상 뺄셈으로 역을 취할 수 있다
(무효로 만든다). 하지만 어떤 수를 곱한 것은 항상 역을 취할 수 있
는 게 아니다. 0을 곱한 것은 역을 취할 수가 없다. 0으로는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0을 곱하면 출발점이 어디든 항상 0이 나오기 때문
에 그 과정을 역전시키려 해도 어떤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할지 알아
낼 방법이 없다. 반면 덧셈에서는 그 출발점을 언제나 찾을 수 있다.

24 특정 집단 사람들의 투표를 방해해서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


는 전략 ─ 옮긴이주.

25 열띤 논의가 이루어지도록 일부러 반대 입장을 취하는 선의의 비


판자 ─ 옮긴이주.

26 이것은 유럽 연합의 리스본 조약에 들어 있는 조항으로 자발적으


로 유럽 연합을 나가고자 하는 국가가 취해야 할 단계들을 설명한다
─ 옮긴이주.

27 Edwards Sarah R., et al., “Denying Rape but Endorsing


Forceful Intercourse: Exploring Differences Among
Responders”, Violence and Gender, Vol. 1, No. 4(New
York: Mary Ann Liebert, Inc., 2014), pp. 188~193.
논리의 기술

옮긴이 김성훈 경희대학교 치과 대학을 졸업, 경희의료원 치과 병원 구강


내과에서 수련을 마쳤다. 치과 의사의 길을 걷다가 어린 시절부터 꾸었던
과학자의 꿈을 나눌 공간을 찾기 위해 과학 도서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현재 출판 번역 및 기획 그룹 <바른번역>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유지니아
쳉의 전작 『무한을 넘어서』를 비롯해 『이상한 수학책』, 『인간 무리, 왜 무
리지어 사는가』, 『공부하는 뇌』, 『운명의 과학』, 『이 문제 풀 수 있겠어?』,
『세상을 움직이는 수학개념 100』, 『글자로만 생각하는 사람 이미지로 창
조하는 사람』, 『신의 설계도를 훔친 남자』, 『도살자들』, 『구름 읽는 책』,
『엑시덴탈 유니버스』, 『암연대기』, 『우주의 통찰』, 『선과 의식의 기술』,
『지지 않는 마음』, 『신이 사라진 세상』 등 다수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늙어감의 기술』로 제36회 한국 과학 기술 도서 상 번역 상을 수상했다.

지은이 유지니아 쳉
옮긴이 김성훈
발행인 홍지웅·홍예빈
발행처 주식회사 열린책들
주소 경기도 파주시 문발로 253 파주출판도시
전화 031-955-4000 | 팩스 031-955-4004
홈페이지 www.openbooks.co.kr

발행 2020년 10월 20일 초판 1쇄


전자책 발행 2020년 10월 20일
ISBN 978-89-329-6787-5 05170
전자책 정가 15,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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