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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목차
1. 실험체
2. 실패작
3. Levi
4. 탈출
5. 마을
6. 선량한 기만자
1. 실험체
내 이름은 ‘이로’다.
어머니가 한국계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내 이름이 ‘일호’ 또는 ‘일오’였을 거라고 하지만 그런 추측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이로이고, 내 이름이 일호였는지 이로였는지 밝혀줄 부모님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상대적으로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하고 싶다. 부모님과 이름은 잃었지만, 적어도 달릴
수 있는 두 다리와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두 팔이 있었다.
세상이 망해가는 지금, 사지 멀쩡한 육신은 어떤 것보다 값진 자산이다.
실제로 내 이름을 추측한 친구, 원진은 오른쪽 귀와 왼쪽 손가락 하나가 없었다. Z 에게 물린 직후
절단했다고 한다.
“이것 봐.”
원진이 시험관을 두드리며 나를 부른다. 나는 창백하리만치 하얗고 기이한 생명체를 바라본다. 별 무리
같은 작은 기포들이 올라온다.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괴물이야, 괴물.”
어쩌면 무지개 동산을 꿈꾸고 있는지도 몰라- 따위를 상상하고 있는 내게 비수처럼 다가오는 말이었다.
오른쪽 귀가 없을뿐더러 흉으로 뒤덮인 모습인 원진이 오히려 ‘괴물’에 가까웠지만 나는 별말을 하지도, 그를
동정하지도 않았다.
요즘 세상에 이 정도 흠은 흔했다. 오히려 사지 멀쩡한 내가 유난히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진보다 상황이 낫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들이 모여 살던 요새가 함락당하고 일찍이 혼자 살았던 나와
달리 원진은 그야말로 제대로 된 가정에서 자랐다.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홀로 생존해야 했던 나와 달리, 최근에야 부모님을 잃은 원진이 훨씬 나은
케이스이다. 그러니 반쯤은 괴물 같은 몰골인 원진이 엄마의 얼굴도 잊어가는 나를 동정해야 마땅했다.
때때로 나는 원진이 부러웠다. 그는 나와 다르게 자신의 뿌리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도 원진의 시각에서는 유사 지옥이겠지만.
퉤 하고 침을 뱉은 원진이 묻는다.
“아직도 이 괴물한테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
“응.”
원진은 이것을 괴물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것을 괴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시험관에서는 정체 모를 공기 소리, 기포 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투명한 유리 벽을 톡톡 두드려 보았다.
태아처럼 눈을 감고 있지만 그것은 당장이라도 눈꺼풀을 열어젖히고 날 직시할 것 같다. 새벽이 물러가듯
얇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순간, 어떤 눈동자를 보게 될까?
“귀 모양을 봐, 이게 괴물 아니면 뭐야.”
원진이 가리키는 것은 사람과 달리 화살촉처럼 뾰족한 귀였다. 그것은 꼭 우리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이따금씩 움찔거리고는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걸로 괴물이라니. 귀 모양으로 괴물을 정의할 수 있다면 원진도 그다지
결백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원진과 내가, 그리고 Z 의 출몰 이후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악착같이 살아있는 생존 인류가 더 괴물에 가까울 것이다.
생존자들은 때로 짐승이 아닌 인간을 사냥했고, 인육을 먹었고, 타인을 고문했고, 그것을 즐기기도 하며,
살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인육까지는 취향이 아니었지만 나도 살기 위해 많은 짓을 저질러왔다.
변명하자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Z 출현 이후 정부는 무너졌고 지금의 인류는 수렵사회를 간신히 넘어서는 야만적인 수준으로 퇴보했다.
깨끗한 척하면 살 수 없다.
원진의 말로는 세상이 항상 이렇지는 않았다고 한다. Z 가 출현했을 때 갓난아이였던 나와 달리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원진은 과거를 꽤 자세하게 묘사할 줄 알았다.
‘식사 직후 트램펄린에서 뛰지 말아야 한다. 종종 그런 말로 혼나고 싸우기도 했어.’
원진이 제 추억을 묘사할 때마다 나는 멍하니 그걸 듣고 있어야 했다.
그런 세상이 존재했다고?
안 돌아가는 머리를 짜내 상상하려고 노력하면 원진이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을 보탰다. 그러나 한 번도 보지
못한, 혹여 봤다 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난해한 이야기였다. 기실 원진의 모든 이야기가 내게는
난해했다.
식사 직후 뭘 하지 말라고 해서 싸웠다고?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아마 요즘 부모도 비슷할 것이다. 살아있다면 말이다.
‘밥 먹고 절대 나가지 마라. Z 는 후각이 예민하니까, 식사 직후에는 체향이 짙어져서 잘못하면 Z 에게
단숨에 포착될 수 있다.’ 그런 말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반박하면 원진은 짜증을 내며 날 바보 취급했기 때문에 나는 굳이 말대꾸하지 않았다.
“이로. 이로!”
나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원진은 혀를 차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거기 너무 붙어있지 마.”
시험관의 유리에 손바닥을 대고 있던 나는 질질 끌려갔다. 원한다면 버틸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인생의 팔 할은 이런 식이었다. 매번 끌려가다 눈 떠보니 불모지에 홀로 서 있는 것. 그게 내
인생이었다.
원진의 말대로 두 걸음 물러섰던 나는 어떤 생각에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눈을 뜬 것 같았는데.
그러나 자세히 살펴본 그것은 아까와 다름없이 눈을 감고 몸을 옹송그린 채다. 지금은 내 신장의 반밖에 오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곧 순식간에 커질 것이다. 어쩌면 나와 원진보다 더 커질지도 모른다. 저번에 봤던 ‘
그것’ 역시 2 미터 가까이 되었으니까.
“하아.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방금 두 걸음 물러섰던 것 같았는데. 원진의 경고와 내가 물러섰던 것이 무색하게 어느새 나는 바짝 유리창에
코를 박고 있었다.
짜증을 내며 원진이 몸을 돌렸다. 실험실 문이 열리는 작은 소음이 귓가에 들려왔다. 나가면서 원진은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자꾸 그렇게 말 안 듣다가는 죽을 거야.”
나는 픽 하고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당장 밖에 나가서 살라 하면 생존에 특화된 것은 어느 면으로 보나
나였다. 원진은 온실 속 화초였다. 정확히는 연구소 시설 속 화초. 아주 어릴 적부터 혈혈단신으로 숲에서
홀로 생존해야 했던 나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원진은 가끔 이런 말을 했다.
‘공포영화에서 보면 꼭 제일 먼저 죽는 건 말 안 듣고 고집부리는 애더라.’
그 말을 듣자마자 내가 당장 떠올린 것은 내 모습이 아니라 원진이었다.
그러한 생각이 드러난 것인지 내 오묘한 표정을 본 원진은 짜증을 내고는 했다.
‘너 이야기하는 거잖아, 너! 그렇게 괴물한테 조심성 없게 굴었다가는 죽을 거라고!’
……아무리 봐도 나보다는 원진이 먼저 죽을 것 같은데. 뭐,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원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이것은 너무나도 온화하고 평온해 보여서, 그 안락함을 내 이기심으로 깨우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뿐, 괴물을 자극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안녕.”
원진이 말하는 괴물.
나는 이 괴물이 좋았다. 그래서 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인사를 건넸다.
원진이 실험실을 완전히 나가자 나는 아예 유리 벽에 바짝 붙어 섰다.
어서 눈을 떠주었으면, 눈을 뜨고 날 바라봐주었으면, 내게 반응했으면, 내 앞에서 살아있는 무언가가
되었으면.
설령 눈을 뜬 이것이 괴물이라고 해도, 나는 이것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팔다리를 원하면 줄 것이다.
이 세상 하나뿐인, 내 피를 이어받은 생명.
그것은 연구동의 유리관에 잠들어 있는 실험체였다.
그것을 만든 과학자의 말에 따르면, 사람도 Z 도 아닌 생명체라고 한다.
지금 유리관 안에 있는 것이 아닌, 비슷한 실험체를 직접 목격한 적이 있었다. 키가 거의 2 미터 가까이 되는
무언가. 그러나 그 실험체와 지금 유리 안의 이것은 아주 달랐다. 아마 비슷한 것은 기이하리만치 흰
피부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만났던 과학자는 저번의 그 실험체를 두고 실패작이라고 칭했다. 자신의 말을, 조물주라고도 할 수
있는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원진 말로는 이번 실험체도 아마 그럴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 나는 이번 실험체가 내 말을 듣든 듣지 않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는 죽은 목숨이었으므로.
실험실은 폐쇄되었고 식량은 얼마 남지 않았으며 주위에서는 Z 가 호시탐탐 우리의 냄새를 맡으며 추적해오고
있다. Z 는 우리가 숨어 지내는 실험실로 점차 접근해 오고 있었다.
“뭐 해?”
“아무것도.”
원진이 내 대답에 싱겁다는 듯 콧방귀를 뀐다. 그러고는 유리 벽 너머 그것과 그것에 홀린 나를 번갈아 본다.
원진이 이런 내 태도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내 신경은 온통
그것에게 가 있었다.
저번엔 눈을 뜬 것도 같았는데, 그것이 내 착각이었던 것처럼 오늘은 하루 종일 지켜보아도 눈을 뜨는 일이
없다.
나는 한숨과 함께 책을 꺼냈다. 성경과 코란이었다. 그것에게 책을 읽어주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여기에는
수많은 이름이 있어서 읽다 보면 그것에게는 어떤 이름이 어울릴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또 그거 읽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형성된 지 고작 일 주가 된 그것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어린아이에게는 책을 읽어줘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거의 어디서나 찾을 수 있는 흔한 책이기에 성경만큼 만만한 게 없었다. 작금의 상황에 책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사치였다. 성경은 모든 책이 같은 내용이니만큼, 읽다가 버리고 새로 주워 읽었던 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었다. 코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내게는 아주 신기하게도 어떤 지역에서는 널려 있는 코란이
어떤 지역에서는 자취조차 찾기 힘들었다.
내가 코란과 성경을 번갈아 읽어줄 때마다 원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냐고 물으면 그때마다 ‘그건 원래 따로 읽는 거야’라는 말을 남길 뿐이다.
따로 보는 책이라는 게 어디 있겠는가.
무시해 보지만 원진에게는 당연한 무언가가 내게는 아니라는 사실이 그리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웃긴 것은
원진도 기분 나빠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서로 달랐는데, 원진은 내가 괴물에게 책을 읽어주는 걸 소름 끼쳐
했다.
“내가 뭘 하든 신경 꺼.”
내가 이것의 발을 닦아주든 머리를 빗겨주든 제가 알게 뭐란 말인가.
내 말에 원진은 짜증을 내며 실험실을 나갔다. 맨날 이렇게 와서 내 속을 긁고 가는 원진을 뒤로하고, 고작
일주일 만에 어린아이만큼 성장한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작은 소리와 함께 올라가는 공기 방울이 그것의 얼굴을 가린 직후,
“……아.”
나는 그것의 샛노란 동공과 마주했다.
유리 벽에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간 채로 나는 탄성을 터뜨렸다.
그것은 작지만 희미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얼핏 보이는 동공은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호박색이었다.
생명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냐고? 내가 본 것은 단순한 수정체가 아니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노랗게 별이 터지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우주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놀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그것은 다시 눈꺼풀을 빗장처럼 닫아 잠갔다.
내가 그것의 눈을 본 것은 아마 몇 초가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몇 초라고도 할 수 없는 찰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마법과 같은 순간이었다.
나는 무서우리만치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때문에 가슴께에 손을 얹고 물러섰다.
언제쯤 온전히 눈을 뜨게 될까? 아니면 이미 늦었을까? 이것도 실패작일까?
내가 원진처럼 연구소 출신이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극히
적었다. 나는 오직 피만 제공했다. 그것도 내 유전자라든가 뭔가가 일치해서도 아니었다. 그것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사람의 혈액이 필요했는데, 원진은 역겨움을 숨기지 못했고 나는 딱히
상관없었기 때문에 어쩌다 보니 내 피가 들어간 것뿐이었다.
나는 숲이든 강가든 섬이든 어디에 떨어져도 잘 살 자신이 있었지만 이런 학문 분야에는 문외한이었다.
애초에 이곳도 원진의 제안으로 오게 되었고 이 실험도 그를 통해 알게 되었으니까.
‘탤러하시에 부모님이 아는 분의 연구소가 있어.’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했다.
* * *
내가 원진을 만난 것은 과거 어느 늦은 오후 또는 이른 밤, 그쯤이었다.
그날도 나는 사냥감을 찾기 위해 수풀이 우거진 도심 한복판을 걷던 중이었다.
원진은 콘크리트 벽에 깔려 신음하고 있었다.
“사, 살려줘.”
특이한 억양이라 뒤를 돌아봤을 뿐 그를 구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픈 척, 함정에 빠진 척 사람을 유인하고 사냥하는 건 흔한 생존법이었다. 한차례 당할 뻔한 적이 있었기에
나는 마체티(machete)에 묻은 Z 의 피를 털어냈다. 빨리 털지 않으면 굳어서 녹슬었다.
“살려줘, 제발! 널 해치지 않아! 못 믿겠다면 지렛대라도 건네줘!”
지렛대를 발음하는 억양도 특이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의 억양이 특이한 이유는 그가 청소년기에
미국으로 건너온 외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걸 몰랐기 때문에 그가 매우 신기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다가가 말을 받고 말았다.
“싫어. 지렛대에 뭘 했을 줄 알고?”
“젠장! 지렛대에 하긴 무슨 짓을 해! 뭐든 상관없으니 시발 빨대라도 달라고!”
“하하, 빨대래.”
웃긴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봐란듯이 하등 쓸모없는 얇은 나뭇가지를 건넸고, 그는 내가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욕을 쏟아냈다.
“조용히 해, Z 가 온다고.”
“[씨발!] 숨을 못 쉬어서 뒈지겠는데 Z 가 문제야?!”
그가 제 성질을 못 이겨 거의 죽어갈 때쯤 나는 쓸 만한 철근을 주었고, 그는 그렇게 살아났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원진은 연구소 출신이었다.
부모님도 유명한 과학자였다는 원진은 연구소가 폐쇄된 이후에도 소수의 생존자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Z 를 방어하기에는 조악한 그곳은 생존율이 높지 않았고 식량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대형 슈퍼마켓이나 백화점이 있는 곳에는 당연히 Z 들이 무리 지어 있었고, 살아남는 사람보다 죽는 사람이
더 많았기에 사기는 바닥을 쳤다.
그러던 와중, 라디오를 통해 부모님의 친구였던 연구자와 연락이 닿았고, 원진은 방공 시설에 식량까지
가득하다는 연구소로 홀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가는 길에 사고를 당했고, 그대로 질식사하거나 Z 에게
뜯겨 죽거나의 선택지를 남겨 둔 와중에 나를 만난 것이다.
그는 내게 제 계획을 털어놓았다.
빠듯하게 걸어도 이 주일이 걸리는 여정이었고, 연구소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던 원진과 달리 내내 혼자
살아왔던 내가 생존 능력에 있어서는 더 뛰어났다.
원진은 식량과 물품을 나눠 줄 테니 함께 가자고 제안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승낙했다. 살던 곳 근처에 Z
의 수가 점점 많아지는 것이 불길했던 탓이다.
그리고 한 이삼 주를 같이 보냈던가? 우여곡절 끝에 원진이 목적지로 설정했던 연구소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내 선택을 후회했다.
본래라면 검문이 있어야 할 연구동 입구의 초소는 진작 버려진 상태였다.
결국 이곳 또한 함락당한 누군가의 요새에 불과했다.
정문의 첫 검문소 철창과 벽의 표면이 다 벗겨졌을 만큼 Z 의 손톱자국이 난무했다. 혹은 지금은 죽었을
인간들의 마지막 사투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을씨년스러운 검문소 벽을 잠깐 보던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럼 안녕.”
“야!”
즉각적으로 발길을 돌리는 나를 원망하면서도 원진은 날 비난하지 못했다. 정신이 박힌 자라면 누구든
당시의 나와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다.
“……이로. 나는 들어갈 거야.”
“그러든가.”
그걸 왜 나에게 말하지? 나는 여기까지 오느라 진작 녹슬어 버린 마체티를 대충 버렸다. 근처에서 마침 더
나은 것을 주운 참이었다.
“그러든가, 라니. 그래도 같이 몇 주 보냈는데 너무 야박하다.”
나는 저런 말을 자주 듣는 편이었다. 무감각하다, 무심하다, 비인간적이다 등등. 그럴 때마다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나와 정반대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죽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생존 본능을 제외한 모든 것은 장애물일
뿐이었다.
“잘 가.”
멀뚱멀뚱 서 있는 내게 원진이 인사했다.
“고마웠어. 너는 말수도 없고 로봇 같지만 그래도 같이 있어서 나쁘지 않았어.”
“그래.”
돌아서는 내 뒤로 원진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말이 다 끝난 것 같으니 나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몇 걸음 떼지 않았는데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원진이 내 어깨를 잡아 왔다.
“이로, 저기 봐.”
원진이 가리킨 곳은 본관 왼쪽 끝의 한 창문이었다.
깜박 깜박.
깜박 깜박 깜박.
불을 껐다 켜며 신호를 보내던 남자는 우리가 봤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환희에 차서 두 팔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우리에게 들어오라는 듯 손을 흔들어 댔다.
“난 안 가.”
“왜!”
“저기에 뭐가 있을 줄 알….”
까지, 말했을 때였다.
나는 답하려는 원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싸움도 못하고 총이나 칼에도 소질이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예민했다.
기척.
몇 주의 여정 동안 원진은 혀를 내두르며, ‘초식동물도 그것보다는 덜 예민할 거야’라고 말하고는 했다.
나는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에도 잠에서 깨어났으며,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넘길 징조를 결코 대수롭게
넘기지 않았다.
“근처에 Z 가 있어.”
속삭이며 손을 떼자 원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리키는 곳으로 원진이 빠르게 움직였다. 원진은
나보다 키가 큰 편이었고 순발력도 나쁘지 않았기에 소소하게 도움이 되었다.
나는 단숨에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Z 가 모습을 드러내면 내리쳐 죽일 작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요즘은 전부 Z 라고 부르지만, 원래 사람들은 그걸 좀비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전에는 ‘돌연변이’, 또 그전에는 ‘신종 전염병 보균자’였다. 신종 전염병 보균자가 결국 Z 로 불리게 된
것은, 인간이 길고 긴 ‘신종 전염병 환자’라는 단어를 여유롭게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그 일말의 여유도 사라진 인류는 그냥 그걸 Z 라고 줄여 불렀다.
Z 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을 때, 계획대로 공격하려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외형이 특이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Z 인가? 하는 의문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내가 아는 Z 는 대부분 검붉은 색이었다. 또는 회색 아니면 시커멓게 죽은 파란색. 그것 말고 Z 를 묘사할 수
있는 색은 없었다. 특히, 흰색이라니. 흰색과 Z 는 전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인간이 Z 로 변화하기 전에 온몸이 피 칠갑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그러나 이 Z 는 달랐다. 분명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피부색과 머리 색이 달랐다. 저게 뭐지? 내가
목을 뺐을 때였다.
“죽이지 말게! 죽이지 마! 죽이면 안 돼!”
숲을 깨우는 외침.
저 씹……!
원진의 말에 따르면 나는 고래고래 소리치며 뛰쳐나온 남자의 목을 따버릴 기세였다고 한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Z 가 잔뜩 포진해 있을 이곳에서 저렇게 고함이라니.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소리를 질러본 경험이 없었는데.
당장 그 남자를 닥치게 하려고 칼을 던지려는데, 어느새 Z 가 바짝 원진과 남자의 앞에 섰다.
“흐악!”
놀란 원진이 뒤로 나자빠졌지만, 놀랍게도 Z 는, 아니, ‘그것’은 게걸스럽게 원진의 갈비뼈를 뜯어내
심장을 씹어 삼키거나, 목을 부러뜨리고 피를 빨아 대지 않았다.
그것은 가만히 원진과 남자 앞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조금의 기척도 내지 않고 숨어있던 나를 단번에 포착해
올려다보았다. 포식자의 안광. 화살촉이 뇌를 관통하는 것만 같았다.
위험해.
직감이 그렇게 속삭였고 굳어버린 나를 그것은 빤히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것.
남자는 그 Z 를, 아니, Z 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을 그냥 ‘그것’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남자는 우리에게 손짓하며 거침없이 제 손으로 연구소 정문을 열어젖혔다. 충혈된 눈을 가진 그것은
바짝 혈관이 솟아오른 팔로 이따금씩 땅을 파헤쳤지만 순한 말처럼 우리의 뒤를 따랐다.
“앤더슨 씨!”
내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남자는 원진이 애타게 찾던 바로 그 남자였다.
둘이 눈물겨운 상봉을 겪는 동안 뒤에서 멀찍이 선 나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기이할 정도로 창백한 피부에 잔뜩 충혈되어 붉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입술은 반쯤 열린 채였다.
괴기했고 꼭 흰 피에 젖은 시체 같았지만 그래도 움직이는 시체에 불과한 다른 Z 보다는 나은 꼴이었다.
“이건 뭐예요?”
둘이 근황을 전하고 서로 궁금했던 사람들의 안부를 묻고 나서야 나는 내가 내심 궁금했던 점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10 년 연구의 결과물이지.”
우리는 남자가 빛으로 신호를 보냈던 그 건물을 가로질렀다.
놀랍게도 을씨년스러운 건물 내에는 Z 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는 겁날 게 없다는 것처럼 발소리를
전혀 숨기지 않고 걸었다.
뚜벅뚜벅하는 소리가 복도를 울릴 때마다 나는 본능적인 무언가를 거스르는 것처럼 불편하고 더부룩한 감각에
잠식되었다.
“조심해, 지금은 물지 않지만 먹이가 없다면 물 테니까.”
“여기에는 왜 Z 가 없죠? 다른 사람들은요?”
내가 묻지 않아도 원진이 질문을 쏟아낸 덕분에 나는 주위를 관찰하며 듣기만 하면 됐다.
내가 처음에 본관이라고 생각했던 건물은 사실은 안내실 비슷한 것으로, 알고 보니 이 연구소는 플로리다가
아닌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질병 관리 연구소였고, 전 세계에서는 두 번째 규모를 자랑했다. 그만큼
규모가 컸기 때문에 우리는 한참을 걸어야 했다. 그동안 단 하나의 Z 도 마주치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걷는 동안 남자는 빠르게 설명을 이어갔다.
돌연변이가 마구잡이로 사람을 물어 좀비를 양산하고도 한참, 10 년을 버텼지만 결국 각국 정부가 속속들이
무너질 때 그들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백신을 찾아내 봤자 물려도 좀비로 변하지 않게끔 면역력을 얻을 뿐, 모든 좀비의 이빨과 발톱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좀비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고, 현재 인간은 모든 생존자에게 백신을 전달할
능력도, 좀비들을 모두 제거할 능력도 없다.
그러니, 백신이 아닌 좀비에 대항할 생물을 만들어내면 되지 않을까? 이미 Z 로 변한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인류는 계속해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발상에서 시작한 실험이었다.
Z 를 사냥할 수 있는 포식자, 인류도 Z 도 아닌 새 인종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고, 이후 본격적으로
연구에 돌입했다. 수십 년의 실패와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실험체, 그 결과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
“벌써 열여덟 번째야.”
앤더슨은 우리를 별관으로 안내했다. 여기저기 피가 묻어있긴 했지만 별관은 대체로 깨끗했고 잠금장치가
훌륭했다.
“하지만 이것도 실패작이지.”
앤더슨은 창백한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은 벽에 눌어붙은 핏자국을 보다가 긴 혀를 내밀어 싹싹 핥고
있었다.
“왜요?”
“제가 원할 때만 말을 듣거든. 배가 부를 때. 그리고-.”
앤더슨의 입가에 쓴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비슷한 표정을 여럿 본 적이 있었다. 대부분 제 실수나 후회를 떠올릴 때 짓는 표정이었다.
“좀비만 먹진 않아.”
사람도 먹는다는 뜻이다. 이곳에 앤더슨 말고는 인기척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당신을 먹진 않나요?”
“아직은.”
앤더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를 먹이 주는 사람으로 이해한 것 같거든.”
나는 그 말에 소름이 끼쳤지만 원진은 감동한 것처럼 아- 하는 소리를 냈다.
2. 실패작
이름을 정했다.
이제는 열몇 살의 소년처럼 보이는 그것은 평소와 다름없이 인공 양수 내에서 눈을 감고 있었고, 나는
마음으로 말을 걸었다. 나는 본래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다. 원진은 내가 이것에게 책을 읽어줄 때 가장 말을
많이 한다고 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혼자 살았기 때문에 입을 다무는 데 익숙했다. 어차피 들어줄 이도 없었고 괜히
소리를 냈다가 Z 를 맞닥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 버릇 때문에 나는 그것에게 말이 아닌 마음으로 말을 걸었다.
나는 성경을 폈다. 성경은 나오는 인물이 너무 많았고 관계도가 복잡해 그리 재미있는 책이 아니었다.
코란도 성경과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둘은 내용도 꽤 비슷했기 때문에 나는 둘 중 하나가 나머지 하나를
표절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장은 요한계시록이었다. 동화책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퍼즐을 푸는 것과 비슷한 재미도
있었다. 알 수 없는 기호 같은 말들에 나는 상상력을 덧붙여 세계를 만들고, 불을 뿜는 괴물을 그려보다가
잠이 들고는 했다.
출애굽기(Exodus)도 나쁘지 않았고, 레위기(Leviticus)도 재미있었다. 물론 내가 레위기가
재미있다고 하면 원진은 ‘그게 뭐가 재미있냐’ 하고 타박했다. ‘넌 진짜 재미있는 걸 몰라서 그래’라고
덧붙였다.
나와 다르게 영화와 책 등의 매체를 충분히 접했던 원진은 이런 식으로 나를 가끔 놀리고는 했다. ‘재미있는
걸’ 너무 봐서인지, 원진은 성경이 지루하다고 싫어했다. 하지만 내게 ‘재미있다’의 기준은 너무 낮았기
때문에 성경도 충분히 괜찮았다.
레위기는 나를 틀 안에 가두었고, 나는 감옥이 아닌, 성벽 안에서 제한 있는 자유를 맛보는 기분이 되고는
했다.
아주 어릴 적 말고는 아무도 내게 명령하지 않았다. 그래서 레위기 속에서 쏟아지는 규칙들이 신선했다. 이
책들은 뭐 이렇게 바라는 게 많지 하는 바보 같은 생각도 들고는 했다.
잠깐 딴생각에 빠졌지만, 나는 이내 그것의 이름을 골랐다. 레위기(Leviticus)에서 따온, 리바이
(Levi)였다.
성경을 덮고 양수가 가득한 시험관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네 이름은 리바이(Levi)야.
그것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내 말을 못 들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소리 높여 내뱉었다.
“리바이. 그게 네 이름이야.”
기포가 유리 벽을 타고 위로 사라졌다.
그것은 미동도 없었고 규칙적인 호흡에 따라 흉곽이 부풀다 꺼지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것이 내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그런 느낌이 생길 수 없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냥 내 상상과 헛된 희망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리바이. 네가 내 앞에 서게 되면, 그렇게 불러줄게.”
내가 나를 직시하는 호박색 눈과 마주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리바이라고 소리 내어 다시 한번 그것을 불렀을 때.
두 번째였다.
나는 한참이나 리바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
눈을 떴다.
그러니까, 눈을 떠서 유리 벽 너머의 날 본 것이다. 백일몽처럼 흐릿하게 눈꺼풀을 들었다 바로 닫은 것에
불과했지만, 나는 지평선 너머 드리우는 거대한 태양과 같았던, 강렬한 색의 홍채를 잊지 않았다.
원진은 내가 사람답지 않은 구석이 많다고 했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그것에게 끌린다면서. 하지만
살면서 나를 이렇게 자극한 것은 이- 아니, 리바이밖에는 없었다.
비록 리바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차가운 유리 벽에 이마를 댔다. 투명한 유리는 얇아 보이지만 사실은 손가락 마디 한 개보다 더 두껍다고,
지금은 죽은 앤더슨 씨가 말한 적 있었다.
“잘 자.”
어느새 리바이는 마치 뜬 적 없다는 듯 평온히 눈을 감고 있었다.
* * *
“먹이 주는 사람이요?”
우리는 앤더슨의 이야기를 들었다.
조용히 경청하는 나와 달리 원진은 반응이 좋은 청자였다. 원진은 제 이야기처럼 깊이 빠져들었고, 거기에
덩달아 앤더슨 역시 제 이야기에 심취한 듯 보였다. 분위기가 고조될수록 목소리가 커졌다.
“처음에 그것이 눈을 떴을 때였지. 한 달 만에 시험관 밖으로 나온 그것은 나오자마자 연구원의 팔목을
물어뜯으려 했어. 배가 고팠던 게지.”
그래서 앤더슨은 거기에 생포한 Z 를 밀어 넣었다고 한다. 앤더슨은 우리를 연구실 안으로 데려가 직접 실험
화면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나는 죽은 색의 화면에 집중했다. 화면 속에는 막 세상에서 깨어난 흰 그것이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것과 달리 Z 는 킁킁대며 그것에게 달려들었지만.
“대단하지 않나?”
분명 무력하게 쓰러져 있던 그것은 순식간에 Z 의 목을 분지르고 두 손으로 간단히 두개골을 깨뜨렸다.
뇌수를 핥아먹던 그것은 아직도 꿈틀거리는 Z 의 팔을, 몸통을, 허벅지를 물어뜯었다.
나는 화면 속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Z 의 피를 응시했다. 붉은 피. 저것도 예전에는 우리와 같았겠지.
“앤더슨 씨, 대단해요.”
원진이 감탄했다.
“우리는 그 이후로 계속 먹이를 밀어 넣었어. 당시에는 연구소 내에 군인들이 있었고 마취 총도 있었기에
어렵지 않았지.”
덕분에 연구소 근처의 Z 는 씨가 말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앤더슨이 말했다.
그것은 하루가 달리 커갔다고 한다.
한 달 만에 성인의 크기였던 그것은 Z 를 먹어 치울수록 더 커져 2 미터가 한참 넘게 자랐다.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악력도 거세졌고 쉽게 따라갈 수 없는 속도를 냈다.
거기까지는 과거의 열일곱 개의 실험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그것이 사람의 말을 배운다는 점이다.
연구진들의 몇몇 말을 알아듣는 것에 그쳤던 과거의 실험체와 달리, 이것은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성대의 구조가 달라 완벽히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 행동을 두고 앤더슨은 이렇게 폄하했다.
“악마가 인간에게 말을 걸려는 최초의 시도였지.”
처음에는 그저 알 수 없는 저만의 그르렁 소리를 냈던 그것은 점차 변해갔다.
힘이 세질수록 반항의 빈도수가 늘어갔다.
제어장치가 심어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제어장치는 단순히 살갗에 부착된 것이 아니라 시험관에 있을
때부터 심은 것으로, 그것의 척추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예민한 센서를 가진 제어장치는 그것이 손을 대기만 해도 강력한 고통을 주었고, 연구원은 제어장치를
원격으로 조종함으로써 그것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연구진은 그것을 연구소와 떨어진 한 병원에서 풀기로 하였다.
버려진 병원 내의 Z 를 모두 제거한다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많은 약품을 상비해 둘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순식간에 Z 수백 마리를 물어 죽이고 수십 마리를 먹어 치웠다. 배가 찰 때까지 Z 를 찢어 먹고
살점을 씹어 넘긴 것이다.
거기까지만 들어서는 해피엔딩에 근접한 전개였다.
그러나 갑자기 한숨을 내쉰 앤더슨 씨는 안경알을 닦으며 툭 내뱉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 맛을 본 거야.”
* * *
내가 태어난 곳은 캔자스였다. 사람들은 조금만 센티멘털해지면 내게 출신지를 물었다. 그곳에 대한 기억이
없으면서도 수도 없이 캔자스에서 태어났다고 대답해야 했고, 덕분에 캔자스라는 단어가 입에 배고 말았다.
고향은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고향이 어디라고 말하는 내 모습에만은 인이 박이다니, 부질없었다.
내가 캔자스 출신이라고 말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특히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나를 이렇게 놀려 댔다.
‘토토, 여기는 더 이상 캔자스가 아닌 것 같아.’ (Toto, I have a feeling we’re not in Kansas
anymore.)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오즈의 마법사라는 오래된 영화의 대사였다. 내가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고 하면
백이면 백, ‘뭐라고!’ 하고 놀랐다. 사람들이 그럴 때마다 나는 본 적도 없는 오즈의 마법사를 상상했다.
내가 만나온 많은 사람-종국에는 나를 죽이거나, 내 물건을 빼앗거나 나를 팔아먹으려 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중 대부분은 내게 열심히 설명해주려 했다.
황금빛 길과 겁쟁이 사자, 깡통 나무꾼, 마법의 여정.
나는 겁쟁이 사자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리바이에게 내가 들었던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도로시가 있어. 음, 개가 있고. 아마 사냥용이겠지.”
푸핫! 원진이 웃어 댔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도로시가 독이 든 사과를 먹어. 그리고 깨어나-.”
“그건 백설 공주야.”
나는 원진을 무시하고 꿋꿋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서 도로시가 말하지, 여기는 캔자스가 아닌가 봐. 그래, 거기는 캔자스가 아니었어. 마법 세계였던
거야.”
Z 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출현했다.
그러니까, Z 이전의 돌연변이이니 신종 전염병 감염자니 하는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발생한 일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눈을 떴을 때부터 인류는 멸종의 위기를 향해 전력 질주하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캔자스주의 위치타(Wichita) 내의 시민 보호시설 BF402 에서 자랐다.
엄마의 얼굴도 잊어가는 주제에 시설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거대한 장벽에 굵은 글씨로 B-F-4-0-2
로 쓰여 있어서였다. 나는 알파벳 B 근처에 살았고 학교는 숫자 2 바로 밑에 있었던 탓에 잊지 못한 것이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시설 내의 주말 학교도 다녔다.
한국계 미국인인 엄마는 나를 붙잡고 시민 보호시설에 오기 전의 이야기를 해주고는 했다. 아버지는 독일계
미국인이었고, 나라를 지키다 돌아가셨다는 말 등이었다.
캔자스의 마지막 보호시설이 함락되고 나서 생존자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 나는 다섯 살 하고도 반이었다. 생일을 몇 개월 남긴 차였다.
엄마가 해준 이야기를 모두 기억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쩌면 엄마가 더 자주, 반복적으로 해주었다면 더 많이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점이 아쉬웠고,
리바이에게 그 아쉬움을 풀었다.
“또 말해줄까? 도로시가 있어. 용맹한 개와 함께였지. 그런데 어쩌다 걔가 눈을 떴는데-.”
“폭풍에 휩쓸린다니까.”
원진이 나를 보며 타박했다. 그렇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다.
원진은 정이 많았다. 분명 그 정을 이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틀림없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정이 많은 이들은 남들보다 빨리 죽었다. 제 가족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희생한 것은 물론,
심지어는 생판 모르는 남에게 기대다가 대신 죽는 경우도 있었다.
나더러 매번 이상하다고 하면서 원진이야말로 생존자답지 않은 결벽함이 있었다.
다섯 살 이후로 사람들을 만나본 적은 있어도 같이 살아본 적은 없다는 내 말에 원진은 처음엔 불신했다가,
경악했다가, 이후에는 측은하게 날 바라보았다.
“도로시가 있어. 이 말을 했던가? 여자아이였지. 개를 데리고 있었어.”
“언제까지 반복할 거야?”
“열 번 채울 때까지.”
“어차피 유리 벽이 두꺼워서 들리지도 않을걸.”
나는 꿋꿋이 목표를 다 채우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앤더슨의 그것은 인간의 말을 흉내 내는 데에 그쳤지만
리바이는 다를 수도 있었다. 게다가 리바이에게는 그것이 누리지 못했던 기회가 있었다. 바로,
조기교육이었다! 연구실 내 육아 책은 조기교육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었다. 이 책대로라면
리바이는 더 빨리, 정확히 언어를 배우고 구사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생각을 원진에게 말해서는 안 됐다.
원진은 괴물에게는 괴물 대접이 어울린다고 말하고는 했다.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이름을
지어주는 것까지 치를 떨며 싫어했다. 내가 원진보다 강해서 다행이었다. 약했더라면 원진은 필히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날 막았을 것이다.
괴물.
처음에는 앤더슨을 따라 ‘그것’이라고 불렀던 원진은 앤더슨 씨가 죽고, 연구동에 수많은 Z 떼가
몰려다니고, 우리가 본관에 자발적으로 감금된 이후로 ‘괴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 * *
“악마가 말을 걸었네.”
사람의 언어를 흉내 내고 말을 이해하게 된 이후부터 그것은 달라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인육을 맛본 후에 그 변화는 급격한 물살을 탔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악마가 내게 말했지. 인간을 달라고.”
정확히 말하지는 않았어, 흉내에 가까웠거든. 그래도 뇌가 있다면 누구든 어렵지 않게 이해할 만한
행동이었지.
앤더슨은 그것이 거래를 청했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성도 성장한 그것은 연구진이 왜 자신을 외딴곳에 풀어놓는지를 알아챘다. 영악하고
사악한.
“인간을 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
반항하는 그것에게 제어장치로 고통을 주었지만 극한의 고통에 기절하는 시간은 점차 짧아졌다. 그러자
그것은 영리하게도, 불을 질렀다.
“우리는 정말이지 이만큼, 이만큼이 부족했어. 거의 다 왔었는데.”
그것은 강했고, 심지어는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주위의 Z 를 제어할 수 있는 듯 보였다고 앤더슨이
말했다.
연구소 근처의 Z 의 수는 감소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용기 내어 연구소 너머에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의약품이 풍부해졌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가공 음식들도 먹을 수 있었다.
Z 를 정복한 것이다! 라고 착각하기 좋은 순간이었는데, 그것은 건물에 불을 질러 연구진을 방해했다. 몇
달을 들인 확장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수십 명이 사망했다.
벌로 고통을 주었지만 그뿐이었다.
인간. 인간. 인간.
기이한 목소리로 그것이 더듬더듬 말했고, 심지어 Z 를 시켜 연구진을 물게 하기도 했다.
예상하지 못한 능력에 당황한 사이, 그것은 곧 기이하게 몸을 뒤틀며 검붉게 변해가는, 한때는 사람이었던
것을 가리켰다.
먹어. 이제. 돼. 지금.
무표정인 나, 경악과 환멸을 숨기지 못하는 원진 앞에서 앤더슨은 솔직히 털어놓았다.
연구소 내에는 고령자들과 장애인들이 꽤 있었노라고.
처음에 이 주에 하나를 요구했던 그것은, 일주일에 하나, 삼 일에 하나로 점차 잦은 요구를 해왔다.
그때쯤 그것을 죽이자는 목소리가 연구진 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연구소가 처음으로 도출해낸 가시적인 성과였다. 열아홉 번째 실험체를 만드는 데 박차를
가하면서도 이들은 유혹에 시달렸다.
사람 한 명을 희생하고 수백의 Z 를 죽일 수 있다! 누군가는 ‘싸게 먹힌다’고도 했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연구소 밖의 인류는 야생 들개보다도 못한 삶을 살고 있는데, 연구소
안에서 자연사하길 바라는 인간들이 욕심이 많은 건 아닐까?
인류의 재번영을 위해서 이 정도는 희생할 수 있지 않을까?
연구진은 선택을 했다. 하지만 그것의 요구가 얌전히 거기서 멈출 리가 없었다. 인육에 대한 욕심은 끝도 없이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고령자, 장애인, 불치병 환자.
하지만 이들의 수는 한정적이었다.
그것에게 바치는 제물의 기준이 점차 낮아지기 시작했다.
회복 가능성은 있지만 완치까지 오래 걸릴 부상자들, 몸이 약해서 노동이 힘든 사람들 등…….
연구소 내의 민간인들은 처음에 실종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루머를 들었지만 믿지 않았고,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도 불신에 휩싸인 상태였다.
그러나 아무리 입단속을 철저히 해도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연구소 내의 민간인은 대부분 연구원과
친인척 관계였기에 흉흉한 분위기는 더욱더 빠르게 퍼져나갔다.
“배가 부른 거지! 지금 당장 연구소 밖으로 나가보라고! 자네들도 알지? 제 새끼를 씹어먹고 사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불행히도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밖의 그런 무법지대와 달리 이곳은 연구소였고, 야금야금 사람들이 모이던 곳이었다. 모든 사람을
수용할 여유도 없고, 강간마, 식인마를 죄다 받을 수도 없으니 최대한 시설의 존재를 숨기고, 그 대가로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영위했던 이들에게 앤더슨의 행태는 최악의 배신이었다.
“반란이라니.”
앤더슨은 혀를 찼다.
커피를 마시겠나?
그가 물었고 원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거절했다. 출구는 여기서 멀지 않았다.
“군인은 제 가족을 쏘지 못했고, 나는 반란을 막지 못했지. 모두 떠나거나 죽거나, Z 가 되었어.”
원진은 앤더슨의 커피를 후후 불어 댔다. 몇 년 만에 마시는 커피인지 몰라요, 하는 순진해 빠진 소리를
내뱉으면서.
“그래도 그것이 매일 수백의 Z 를 죽이지. 비록 플로리다 전체 Z 중 0.01 도 되지 않겠지만, 그건 분명
중요한 변화일 거야.”
원진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라고 했지? 커피가 싫으면 차를 줄까?”
“아뇨.”
조금만 기다리면 열아홉 번째 실험체가 나왔을 텐데. 그게 성공이었다면 바로 제어장치로 그것을 죽이고
대체했을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앤더슨은 혀를 찼다.
“열아홉 번째요?”
앤더슨은 힐긋힐긋 원진을 확인했다. 뜨거웠기에 원진은 아직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였다.
“그래, 막 준비가 되었지. 딱 인간의 혈액만 주입하면 되는 완벽한 상태로. 어쩌면 이번에는 정말로
성공할지도 모르겠군.”
“인간의 혈액이요?”
“기존에는 Z 의 혈액을 넣었거든.”
그게 패인이었어. 방향을 잘못 잡았었지. 앤더슨이 흐뭇하게 웃었다.
“이로, 어디 가지?”
조금 전까지 앤더슨의 입가에 머물렀던 미소가 순식간에 증발한다. 나는 연구실을 나가던 참이었다.
“화장실. 아까 복도에 있길래.”
“거기는 고장 났어.”
“그러면 다른 데로 가게 카드키나 비밀번호를 줘.”
앤더슨은 아까 분명히 닦았던 안경을 재차 닦았다. 한참이고. 한참이고.
이상하다고 여긴 원진이 거들었다.
“없으세요?”
그제야 앤더슨은 카드키를 내밀었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마이크로카드를 받기까지 나는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낸 것 같았다. 그의 손에서 그것을 낚아채고 싶은 본능과 싸워야 했다.
그는 내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여기는 듯 보였다. 나는 자연스레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후루룩.
그 소리에 난 멈추어 섰다. 원진이 커피를 마시는 소리였다.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감이 좋지 않은 편이었지.”
* * *
지난 몇 주간 원진은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한다고 수백, 수천 번을 말했다. 그는 앤더슨이 그런 새끼인지
눈치채지 못했던 자신의 순진함을 저주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전혀 후회하지 않았고 그를 한심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의 순진함이 부러웠다. 크게 데인 일이 없기에
원진은 타인을 믿는 것이다. 깨지지 않은, 눈에 띄는 흠집 몇 개밖에 나 있지 않은 그의 과거를 나는 질투했다.
나의 것은 이미 산산조각 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내가 원진을 질투한다 해서 그의 마음을 찢을 생각이 있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원진을
이대로 보존하고 싶었다. 그 마음은 리바이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3 주가 지났다.
이제 리바이는 자주 눈을 떴다. 호박빛 눈을 볼 때마다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고양감에 사로잡혀 말을 잊고는
했다.
분명 유리 벽은 두꺼울 텐데도 리바이는 꼭 원진의 존재를 느끼는 것처럼, 그가 자리를 비울 때만 눈을 떴다.
리바이는 내가 이렇게 동화나 어디서 주워들은 옛날이야기를 해줄 때면 더 크게 반응했다.
원진은 내가 리바이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응시할 때마다, ‘네 피를 먹어서 그래’라고 말했다. 난 항상
똑같이 반응했다.
“먹지 않았어.”
주입이었다. 리바이는 날 먹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리바이가 날 먹는다고 해도 내가 리바이를 떨쳐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어쩌면 나는 바보같이 망연자실하게 서서는, 저 혼자 세워놓은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꼴을 보다가 그 돌무덤에서 죽어갈지도 모른다. 내 살과 뇌와 심장을 다 내어주고.
리바이, 리바이.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대었다. 눈을 감으면 리바이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고는
했다.
빨리 깨어나.
* * *
앤더슨은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말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그것이 뛰쳐 들어왔다.
사람을 그것에게 갖다 바치던 앤더슨은 이제 공물로 희생할 사람이 없어지자 이런 식으로 타 지역의 사람들을
유인했던 것이다. 그 덫에 원진이 걸려든 것이고.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원진을 나는 다급히 잡아끌었다. 나도 내가 그럴 줄은 몰랐다. 원래라면 오히려
그것에게 던져주고 달렸을 텐데.
“나를 이해하게! 자네의 희생으로 이것은 오늘 하루에도 몇백 마리의 Z 를 죽일 거니까!”
그러나 앤더슨의 패착은, 나를 너무 얕봤다는 점이다. 연구소 내 사람들이 감이 좋지 않고 순진하다던
앤더슨의 말은 그 스스로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늙은 그의 외로움.
차라리 Z 를 시켜 단숨에 먹게 했다면 당하는 건 우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늙었으며, 고독했고, 제
성과를 뽐내고 싶어 했다.
나는 앤더슨의 팔을 잡아 비틀었다. 4, 50 대도 아니고 70 대의 노인을 제압하는 건 무엇보다 쉬웠다.
“이로를 죽여!”
명령하며 앤더슨이 제어장치를 휘둘렀다. 그러나 다급해 잘못 눌렀는지 오히려 그것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것이 잠깐 몸을 허물어뜨렸을 때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앤더슨의 목을 꺾었다.
뚜득.
바닥에 몸을 대고 간헐적으로 떨고 있던 그것이 퍼뜩 눈을 들었다. 사람과 Z 를 잡아먹고 살았던 그것의 충혈된
눈이 작살처럼 날 찔러왔다. 두 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죽은 앤더슨을 그것 앞에 던져놓고, 나는 원진과 제어장치 중에서 전자를 택했다. 흥분한 앤더슨이 휘두른
탓에 장치는 그것의 근처에 떨어져 있었고, 나는 그것에게 잡히지 않고 제어장치와 원진을 둘 다 챙길 자신이
없었다.
내가 그것의 영악함을 실감한 때는, 그것이 앤더슨이 아닌 제어장치로 바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동시에 나는
자리를 박차고 복도를 내달렸다. 이윽고 그것의 발톱이 복도를 긁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내 척추를 달구었다.
아드레날린이 치솟았다. 평상시였다면 나보다 키가 큰 원진을 짊어지고 그렇게 빨리 달리지 못했을 테다.
네 발로 박차던 그것은 이내 두 발로 추격해오기 시작했다.
앤더슨에게 가지 않고 우리를 사냥한 이유는, 아마 앤더슨은 나중에 돌아와서 먹을 수 있다는 영리한 계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본관과 별관을 잇는 스카이브리지 덕분에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연구소에 Z 가 없었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훌륭한 시설의 연구소는 일단 안에서 한번 잠그면 열기 아주
어려운 구조였는데, 이중, 삼중으로 문이 있었다. 다행히 나는 연구실에 들어올 때부터 앤더슨이 누르던
비밀번호를 외우고 있었고, 이제는 카드키도 가지고 있었다.
쿵-! 쿵!
그것이 두꺼운 문에 몸을 부딪칠 동안 나는 거대한 본관, 그중에서도 잠금장치가 가장 잘되어있는 메인
연구실로 들어갔다. 거기까지는 나쁘지 않은 선택인 듯 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당장 이곳을
벗어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것이 Z 를 제어할 수 있다 했던가. 상황실에서 CCTV 화면을 보고 나는 절망했다.
그동안 수없이 죽였다는 Z 가 어느새 연구소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가득.
내 설명을 듣고 원진 또한 절망했다.
그는 흐느끼고 미안해하며 빌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랩실을 하나씩 찾아보았다.
열아홉 번째 실험체는 어디 있을까?
* * *
리바이는 우여곡절 끝에 형성된 존재였다.
원진은 리바이를 두고 ‘마지막 희망’이라고 했다. 이곳에 갇힌 이후 주위는 Z 로 가득 차서, 우리가
안전하게 이곳을 빠져나갈 일은 요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바이가 성장하고, 그것처럼 Z 를 통제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오래
생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나는 내 생존과 관계없이 리바이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연구실에는 수많은 서적과 연구 자료, 연구 기록이 있었다.
대부분은 연구원 출신인 원진만이 이해할 내용이었지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서적들도 몇 권 있었다. 나는
성공한 것만 열여덟 개, 실패한 것은 백여 개에 달하는 모든 실험 기록을 살폈다.
처음에는 Z 그 자체에 불과하던 실험체는 실패를 거듭하며 달라져 갔다.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것이어서일까, 연구실에는 육아 서적은 물론 야생동물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원진은 당연히 후자를 택해 읽었지만 나는 대부분 육아 관련 자료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건 리바이가
형성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청소년기를 지나 이제는 완연한 성인의 모습을 한 리바이를 몇 주간 더 지켜보았을까, 나는 그날도 책을 읽고
있었다.
“너, 들떴어.”
원진은 그런 내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들떴다고? 내가? 나는 그게 무슨 감정인지도 모른다.
“책을 보면서 미소를 짓고 있잖아. 이상하다고. 정신 차려, 너는 아빠가 되거나 막냇동생을 갖게 된 형이
되는 게 아니야.”
어느덧 내 성격을 파악한 원진은 내가 읽던 책을 닫아버렸다. 노려보자 이렇게 말한다.
“넌 날 죽이지도 않을 거잖아.”
“왜 안 죽여, 나 너 죽일 수 있어.”
원진은 꼭 ‘웃기고 있네’라고 말하는 표정을 했다.
그때, 붉은 등이 깜박였다.
처음에 하나였던 경고등은 두 개, 세 개가 되어 이내 패널을 메웠다. 그게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이상이 생긴 것일까? 하고 몸을 일으켰던 나는 화면을 확인한 후 바로 땅을 박차며 달려갔다.
리바이가 형성된 지 한 달을 조금 넘긴 시점이었다.
밭은 숨을 내뱉으며 실험실 안으로 들어간 순간이었다. 붉은 경보가 시야와 귓가를 가득 메웠다. 그것은
송두리째 바뀔 내 삶에 대한 전조인지도 모르겠다고 난 생각했다. 그동안 내가 살을 찢은 칼날처럼 잘 벼려왔던
직감이 보내는 신호였다.
가라앉지 않는 숨을 몰아쉬며 시험관 앞으로 다가섰을 때였다. 경고음이 한층 거세졌을 때, 취이익 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물러섰을 때, 리바이를 담고 있던 시험관 밑으로 양수가 빠지기 시작했다.
완연한 성인의 몸을 한 리바이가 시험관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던 그 순간, 나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긴장일지,
두려움일지 어쩌면 흥분일지 나조차도 알지 못했다.
묽은 액체가 사라지고, 쿨럭, 쿨럭. 입 안의 액체를 뱉어낸 리바이에게 흡 하고 산소가 들어가서 그의 온몸에
활기를 전하는 것을, 그가 마침내 자의로 움직이는 생명체가 되는 순간을 목도했다.
원진은 초조하게 나를 살폈다.
앤더슨은 그것이 태어나자마자 연구원의 팔을 물어뜯으려 했다고 말했다. 그간 모든 실험 기록을
시청해보았지만 얌전한 실험체는 하나도 없었다. 원진은 리바이 역시 그럴 것이라고 했고 생명줄처럼
제어장치를 손에 쥐었다. 여차하면 바로 고통을 줄 생각으로.
나는 듣지 않았다.
고집쟁이의 말로가 죽음이라면, 죽으라지.
잔기침을 몇 번 더 한 리바이가 몸을 일으켰다. 팔이 후들후들 떨린다. 리바이는 힘이 빠진 맨몸으로 일어선다.
비척비척 발걸음을 옮긴 리바이는, 정확히 내가 서 있는 유리 앞으로 다가와 섰다.

그것은 리바이가 손바닥을 유리에 댈 때 나는 소리였다. 깜짝 놀란 원진이 뒤로 물러났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젖은 손바닥을 따라 유리창 위로 길게 점성 있는 액체 자국이 늘어졌다.

내가 오른쪽으로 움직이자 리바이가 몸이 왼쪽으로 돌아간다.
“공격하려는 거 아니야?”
겁먹은 얼굴로 원진이 물었다. 탕, 탕. 리바이는 항의하듯 유리를 두드렸다.
“어디 가, 이로! 어디 가!”
붙잡는 원진을 뿌리치고 발을 내디뎠다.
쏴아아 하고 바람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나는 벼랑 끝에 선 기분으로 리바이를 올려다보았다.
리바이는 후들거리는 발을 움직였다. 가까스로 발을 끌며 내게 다가왔다.
나를 물까? 내 살과 뼈를 분리하고, 내 피를 밟고 지나갈까?
리바이를 올려다보고 나는 손을 뻗었다.
내 코끝에 제 가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리바이는 쓰러지듯 날 껴안았다. 날 물거나 잡아 뜯지 않았다.
손을 움직여 닫혀있는 리바이의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흰 이가 건재했다.
“아. 흐, 으으.”
그것은 인간의 소리도, 내가 들어본 짐승의 울음소리도 아니었다. 괴기한 소음에 가까웠다. 그러나 나는
재차 몸을 떨었다.
아아. 나는 살아있었다.
실험 기록 영상에서 대부분의 그것들은 성체가 되어 깨어나는 즉시 허기를 느꼈다. 날 덮치듯 내 어깨에 팔을
걸고 기댄 그것을 등에 얹고 나는 유리창 앞의 원진에게 손짓했다. 그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상태였다. 나중에
하는 말이, 리바이가 날 먹는 줄 알았단다.
“먹을 걸 줘야지.”
리바이가 깨어나기까지 한 달이 걸린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리바이에게 줄 Z 를 미리 잡아 온 참이었다.
원진은 겁이 많았고, 긴장을 심하게 하면 사람들은 실수를 하기 때문에 Z 를 잡아 오는 것은 내 몫이었다.
빠르게 죽이지 않으면 소리를 듣고 Z 가 몰려올 수 있었기 때문에 꽤 까다로운 일이었다.
내 말을 알아듣고 원진이 냉동실에서 목이 없는 Z 의 몸뚱이를 가지고 왔다. 죽으면 Z 는 빠르게 부패하고 독성
포자를 남기기 때문에 얼려놔야 했다.
“으, 으아 아. 흐.”
리바이는 울음소리를 내며 내 등에 업히다시피 기댔다. 바로 귀 옆에서 리바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입맛을 다시듯 혀가 빠르게 입술을 축이는 젖은 소리도 생생했다. 배가 많이 고픈 듯했다.
문을 연 원진은 들어오지 않고, Z 만 던져서 넘겼다. 그러고는 빠르게 문을 닫았다. 원진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지금 바보 같은 상태가 아니라면 나도 아마 비슷한 태도를 보였을 테다.
“네 거야.”
괴기하게 꺾인 Z 의 몸을 가리켰다. 리바이에게 말했지만 리바이는 킁킁 몇 번 내 목 뒤 근처에서 냄새를 맡았을
뿐 Z 에게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먹어야지.”
킁킁.
이제 리바이는 내 뒷머리를 단단한 콧날로 파헤치며 냄새를 맡았다. 날 꽁꽁 감싼 손은 그대로였다. 원하는
대로 하게 두자는 생각으로 가만히 서서 나는 리바이의 손을 바라보았다.
앤더슨의 그것과 유사하게 리바이의 피부는 창백해서 핏줄이 다 비쳤다. 너무 하얗고 눈처럼, 아니,
대리석처럼 희어서 피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살짝 누르자 열심히 냄새를 맡던 리바이가 온몸을 굳힌다.
손을 떼자 다시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 들숨과 날숨이 느껴지는 코가 내 목 뒤, 등, 어깨 주위를 맴돈다.
먹어야 하는데.
저렇게 두면 Z 는 곧 썩는다. 어쩌면 죽은 Z 여서일지도 모른다. 힘들 테지만 죽이지 않고 생포해 올 수도 있을
테다.
나는 앤더슨의 그것이 처음에 엄청난 식욕을 느꼈던 것을 기억하고 우선 원진에게 육포를 부탁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리바이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슥 내밀어지는 원진의 팔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리바이가 딱딱하게 긴장한 듯해서 나는 그를 풀어내고 육포를 받아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리바이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마주 서서 입가에 대 주자 리바이는 허겁지겁 육포를 삼켰다. 드러난 이가 흉흉했다.
리바이는 육포 한 덩이를 몇 초 만에 끝내버렸다.
더 달라는 듯 이마를 들이미는 리바이에게 처음으로 무언가를 가르쳤다.
“이로. 이로.”
날 가리키며 말했다. 리바이는 눈을 몇 번 깜박였을 뿐 반응이 없었다.
“너는 리바이야.”
리바이는 빤히 날 바라보았다. 간혹 그가 눈을 떴을 때 보았던 호박색 눈동자는 요요하게 빛이 났다. 이렇게
마주 보니 더 비현실적인 안광이었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 안에는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가 숨어있을
것도 같았다.
“흐으, 으, 아으.”
재촉하듯 리바이는 콧등으로 내 이마를 밀었다. 더 달라는 뜻 같았다. 하지만 연구소에는 남은 식량이 많지
않았고, 그마저도 리바이가 더 성장할 때까지 우리가 버텨야 하는 시간을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여기서 기다려, 내가 Z 를 잡아 올게.”
주입하듯 말했다. 이런 말은 익숙지 않았다. 어딜, 왜 가는지 나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자세히 설명해 본
경험이 없었다. 원진은 내가 훅 가고 훅 돌아와서 처음에는 자신이 버려진 줄 알았었다고 했다.
“안 물린 거 맞아?”
실험실을 나오자마자 원진이 나를 살폈다. 내 팔다리를 모두 만져보고는 특히 내 목 뒤와 머리를 샅샅이
살폈지만 적어도 피가 나온 곳은 없었다.
“왜 안 물었지? 난 네가 미친 줄 알았어. 이로, 정신 차려 제- 어디 가?!”
“Z 잡으러.”
죽이는 거면 모를까, 생포는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먹이를 오래 찾지 못한 Z 는 휴면기에 돌입하는데,
무리를 짓고 자다가 하나가 깨면 전체가 다 깨어나기 때문에 특히 까다로웠다. 그래서 나는 휴면기에 있는 Z 가
아닌, 혼자 있는 Z 를 노렸는데, 그것도 생포해서 가져갈 생각을 하니 쉽지 않았다.
나는 마체티와 석궁, 덫을 놓을 도구를 챙겼다. 연구소 내에 남은 수면 총이 있진 않을까 했는데 한 달
동안이나 못 찾았으니 그걸 오늘 찾을 가능성은 더 희박했다.
내가 카메라에 대고 신호를 보내면 상황실의 원진은 내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의 스피커를 활성화했다.
그러면 휴면기에 있던 Z 는 물론 연구실 내의 모든 Z 가 우르르 몰려갔는데, 그때를 틈타 한 마리를 낚고 3 층의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됐다. Z 들이 다 깨어났다는 사실이 긴장되기는 하지만 어차피 일주일간 먹이를 찾지
못하면 또 휴면기에 들어갈 거였다.
생포한 Z 의 두 손을 간신히 묶었지만 물리지 않고 입을 막을 자신은 없었다. 우리를 보고 흥분한 Z 는 미친 듯이
이빨을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조금이라도 잘못됐다간 나를 물고는 목이 떨어져 나가도 놓치지 않으려 할 테다.
리바이가 있는 실험실에 오니 어느새 나는 땀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먼지에, 피에, 정체 모를 점액까지,
온몸에서 악취가 나는 듯했다.
“리바이. 먹어.”
땀을 닦으며 문을 열자 리바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리바이 쪽으로 Z 를 있는 힘껏 밀었다.
그러자 리바이는 나나 원진이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열여덟 개의 실험체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던 행동을
보였다.
덜덜 떨며 숨은 것이다.
그것도 내 뒤로.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표정 변화도 없었지만 리바이는 화들짝 놀란 것처럼 빠르게 내 뒤로 숨어든 뒤
덜덜 떨었다.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그와 한참이나 눈을 마주쳤다.
“먹어야지.”
내가 몇 시간을 공들여, 죽음을 무릅쓰고 힘겹게 잡아 온 Z 를 가리켰지만 리바이는 또 울음소리를 냈다.
“먹어야 할 것 아니야.”
리바이를 끌어내려 했지만 겁쟁이면서 힘은 아주 셌다. 뒤에 단단히 붙은 리바이를 떨쳐내고 앞으로 끌려 해도
오히려 내가 리바이에게 질질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리바이는 한층 크게 울음소리를 내며 오히려 날 끌어 벽에 딱 붙어 섰다. 저렇게 위험하고 괴기한 것이 있는데
왜 가냐는 것처럼 날 보고 크게 소리 내기도 했다. 그러고는 또 내 등에 착 붙어서 달달달 떨었다.
무서워하는 게 분명했지만 리바이는 날 희생양 삼거나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 보호하려는 것처럼 Z
에게 다가가려는 내 몸을 옭아맸다.
내가 발걸음을 떼려고만 하면 기겁을 하며 내게 엉겨왔다. 나는 리바이가 귀여워서 가늘게 떠는 볼을 직
늘이다가 등을 토닥였다. 그러다가 문득 리바이 뒤의, 실험실 유리를 마주했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놀랍도록 곰살맞았고 인간적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증오로 범벅이 된 눈을 한 원진이 있었다.
“실패작이야.”
“듣기 싫어.”
분명히 이야기했는데도 원진은 그만두지 않았다.
실패작, 실패작. 그 단어를 얼마나 들었는지 질리다 못해 환멸이 났다.
“저걸 봐. 저건 우리의 바깥세상 티켓이었어.”
원진이 가리키는 것은 아직도 진정되지 않아 덜덜 떨고 있는 리바이였다. 혐오의 표정을 숨기지 않았던 원진은
이내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억지로 나를 끌어냈다.
겁먹은 리바이가 날 따라오려 했지만 원진은 소리를 치며 그를 몰아냈다.
“쟤는! Z 를! 먹어 치웠어야 했다고! 하나도 남김없이 뼈까지 발라 먹었어야 했어!”
실험실 안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텐데도 리바이는 원진이 소리칠 때마다 움찔움찔 떨었다. 어쩌면 과격한
삿대질 때문인지도 모른다.
“쟤가 Z 를 죽이거나 통제하면 우리는 그 틈을 타서 나갔어야 했다고! 지금 저 멍청한 괴물이 하는 꼴을 봐!”
원진이 절망하는 순간에도 나는 두리번거리다가 날 하염없이 바라보는 리바이에게 정신이 팔렸다.
“듣기 싫다고 했어.”
“듣기 싫어?! 듣기 싫다고?!”
결국 원진은 내게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그의 왼쪽 뺨이 흉하게 부풀어 오르고, 원진이 쌍욕을
할 동안 나는 유리 너머로 리바이를 지켜보았다. 실패작이라니. 그건 리바이와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앤더슨의 그것과는 어울렸을지는 모르지만, 리바이와는 아니었다.
“아직 모르는 거야.”
그렇게 말하자 원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원진을 뒤로하고 실험실로 갔다. 온몸을 웅크리고 긴장한 채 있던 리바이는 내가 등장하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내게 달려와서 안기듯 제 몸을 내 품 안으로 구겨 넣었다. 안아주지 않자 끙끙대며 짐승의
울음소리를 냈다.
나도 피부가 흰 편이었지만 리바이에 비하면 상아색에 가까웠다. 리바이는 스스로를 억지로 구겨서 내게
맞추었다. 체격 차이가 컸기 때문에 힘들었다.
리바이 뒤에서는 아직도 Z 가 몸을 뒤틀며 기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런 것과 단둘이 남겨졌으니 겁을 먹을
만도 했다. 나는 칼을 들어 Z 의 목을 단숨에 내려쳤다. 이로써 냉동실행의 Z 시체는 두 구가 되었다.
축 늘어진 Z 를 처리하고 나서 나는 몸을 씻고 실험실로 돌아왔다. 연구실은 자가발전 기기와 더불어 식수 공급
시설까지 있었다. 빗물과 눈을 모아 저장하는 시스템인 듯했는데, 쓰는 사람이 앤더슨밖에 없어서였는지
매일 목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물이 충분했다.
“배고프지?”
리바이 전의 실험체들은 깨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식욕을 느꼈다. 제 식대로 배를 채워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고는 자다가 또 먹고 자는 사이클을 반복하며 성장해갔다. 실험실 유리 너머에는 원진이 없었다. 아마 한
대 맞은 것을 분풀이하러 갔거나 아니면 리바이가 꼴도 보기 싫다며 자리를 떴을 테다.
망설이던 나는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죽은 Z 도, 살아있는 Z 도 먹지 않는다. 동물은 먹을지 모르지만 한 건물 안에 갇혀있는 지금 우리가 사냥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내가 칼을 꺼내자 리바이는 펄쩍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게 무기라는 걸 알아서라기보다는 뭐든 처음 보는 걸
경계하는 것 같았다.
힘줄이 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손목을 그었다. 리바이는 뭐든 먹어야 했다.
Z 는 인간을 먹고, 살아남은 인간도 남은 인간을 먹고, 그런 인간을 구하기 위해 탄생시킨 그것도 Z 와 인간을
먹으니, 리바이도 인간을 먹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리바이가 죽을지도 몰랐다.
“자.”
‘그런데, 그것이 인간 맛을 본 거야.’
앤더슨의 말이 뒤늦게 생각나서 아차 싶었다.
리바이가 흥분해서 나와 원진을, 그리고 사람을 죽이고 다니면 어떻게 하나 싶었지만, 정신을 차린 내가
손목을 물리는 것보다 리바이가 내 손목에 입술을 대는 것이 더 빨랐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굴다니. 나로서는
처음이었다.
혀를 내민 리바이가 내 손목을 핥았다. 할짝 하는 소리가 나고, 피가 주르륵 흐르려던 차, 다급히 리바이가
내 손목에 입술을 묻었다.
피는 단 한 방울도 흐르지 못했다. 리바이는 게걸스럽게 피를 빨았다. 내 손과 팔꿈치를 단단히 잡고 숨도
쉬지 않고 피를 들이켰다.
‘인간 맛’이라는 앤더슨의 말에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피가 어느 정도 멎자 리바이가 입술을 뗐기
때문이다. 리바이에게는 내 상처를 더 찢어발겨서 피를 취한다는 발상조차 떠오르지 않는 게 분명했다.
호박색 눈이 몽롱하게 날 바라본다.
완전히 만족했는지는 모르지만 리바이는 약에 취한 것처럼 몽롱하게 날 바라보다가 피범벅인 제 입술을 열었다.
한층 붉어진 입술이 백치처럼 벌어진다. 리바이는 가늘게 눈을 뜬 채로 간헐적으로 몸을 떨다가 제 입술을
혀로 닦았다.
그리고 리바이는 내가 입술을 닦아주기도 전에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실험 기록에서 흔히 봤던 단계였다.
수면욕.
리바이가 과격하게 굴지는 않았지만 원진이 알아채면 또 난리가 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손목을 감추고 리바이의
입술을 여러 차례 닦았다.
피는 잘 지워지지 않아서, 리바이의 물통에 있는 물을 묻혀다 닦아야 했다.
리바이의 얼굴은 피와 체액으로 엉망이었다. 입술은 물론 턱까지 타액이 흘러있었고 점점이 핏물 섞인 타액이
가슴에 떨어져 있었다.
모로 쓰러진 리바이의 흰 가슴을 닦아주다가 나는 문득 이상을 알아채고 고개를 내렸다.
제 몸처럼 희지만 상대적으로 피부가 어두운 리바이의 성기에 힘이 몰려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나 됐더라.
그러고 보니 화장실이 어디인지조차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보다 몸집이 컸지만 리바이는 갓 태어난
생물이었다. 어쩌면 용변을 보는 것부터 가르쳐야 할지도 모른다.
리바이의 몸 위에 모포를 덮어주고 나는 몸을 내렸다.
손목이 지끈거렸고, Z 를 공수해 오느라 혹사한 몸이 피곤했다. 아주 잠깐만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3. Levi
나는 쪽잠이 익숙했다. 기척에 예민해서 한두 시간씩 자다 깨고 다시 잠을 청하고, 그걸 두세 번 반복하는 게
내 수면 패턴이었다. 오랜만에 나는 기척이 아닌, 다른 이유로 눈을 떴다. 축축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잠결에 볼을 슥 닦았다가 곧 또 들려오는 할짝이는 소리에 그게 리바이의 혀라는 걸 알아챘다.
정신을 차려보니 리바이가 나를 양팔, 한 다리로 칭칭 감아 끌어안은 채로 내 볼을 핥는 중이었다. 그것도
개처럼 내 볼은 물론 입술, 턱, 콧잔등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핥아 올려서 내가 깰 수밖에 없었다.
내 손목도 예외는 아니었다. 잠깐 자던 사이 어느새 피가 멎고 딱지가 맺혀있던 손목을 리바이는 제 혀로 싹싹
긁어서 딱지를 전부 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한두 방울 새로 스며 나오는 피를 핥아 마시지 않고 오히려
내버려 두었다.
이럴 거면 딱지는 왜 떼는 거지.
게다가 내 얼굴은 온통 침 범벅이었다. 내가 도리질 치자 리바이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물렸다. 그러면서
끙끙 소리를 냈다.
아직 사람의 말을 할 줄 모르는 리바이는 이렇게 끙끙대거나 그르렁거리는 것으로 제 감정을 표현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기분 좋을 때는 거대한 고양잇과 동물처럼 골골대기도 했다.
내가 희디흰 머리를 헝클이자 나른하게 눈을 감은 리바이가 고롱고롱 목울음 소리를 냈다. 아마 꼬리가
있었다면 기분 좋게 살랑댔을 것이다.
리바이의 반응은 즉각적이어서, 내가 손을 떼면 바로 눈을 번쩍 뜨고 입맛을 다셨고, 다시 손을 들면 내
손가락이 제 머리를 흩트리기도 전에 골골 울음소리를 냈다.
이런 반응을 보면 리바이는 확실히 인간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 기분 좋으면 자연스레 골골거리고
목을 울릴까. 그러나 인간과 짐승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정의하기에는 이 세상에 인간과 괴물의
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들이 많았다.
맘껏 리바이를 쓰다듬었으니 슬슬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리바이가 날 붙잡고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느낌 탓인가, 리바이의 눈동자가 진했다.
영상에서 본 실험체들은 대부분 배불리 먹고 한참을 잤다.
그러나 리바이는 딱 한 시간을 졸고 난 뒤에 바로 일어났다. 첫 반응부터 다른 실험체와는 달랐던 것이다.
어쩌면 배를 다 채우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나는 힘을 주어 리바이를 떼어낸 후 실험실을 나왔다.
남은 식량은 고작 한 달 치. 리바이가 Z 를 먹지 못한다면 더 줄어든다.
나는 상황실로 가서 카메라를 확인했다.
앤더슨의 사망 이후에 그것은 곧 사라졌다. 아마 나오지 않을 우리를 기다리는 것보다 나가서 직접 사람을
사냥하는 게 더 빠르다는 생각을 했을 테다. 대신 이곳에 Z 를 잔뜩 불러들였기에 층마다 Z 가 없는 곳이 없었다.
이 건물도 이렇지만 아마 연구소 전체로 보면 더 심할 테다.
아무리 생각해도 몸 성히 나갈 방법은 없었다. 헬기라도 있으면 모를 테지만 나는 살면서 그걸 딱 한 번 보았고,
이렇게 Z 가 많아서야 헬기가 내려앉기도 전에 다 죽을 거였다.
원진과 나는 식량을 정확히 반으로 나누었다. 원진의 몫이 따로 있고 내 몫도 따로 있으니 이제 이걸 어떻게
관리할지는 오로지 자신의 몫이었다. 배분한 식량을 식탁에서 함께 먹지 않고 가방에 넣은 나는 실험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리바이가 반짝 고개를 든다. 빠르게 다가와 킁킁대며 내 가방 쪽에 코를 들이밀려고 했다.
나보다 키가 한참 큰 리바이가 엉거주춤 고개를 숙이고 가방을 따라오는 모습은 꽤 웃겼다.
가방에서 열량이 높은 것들만 추려내 리바이에게 주었다. 나보다 한참 크고 근육도 많으니 열량 소모가 훨씬 클
테다.
지금 보니 바닥에 피가 다 지워지지 않은 곳이 있어서, 나는 리바이가 내 식량을 먹을 동안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다 닦기도 전에 식량을 먹어 치운 리바이는 어느새 내 뒤에 서 있었다. 영 배가 차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이제 더 없어.”
나는 리바이가 Z 를 먹지 못한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아쉬워졌다.
내 어려움을 해결해주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어쩌면 리바이가 단 한 번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없다고 손을 내젓자 킁킁 내 몸 여기저기 냄새를 맡아본 리바이가 포기했는지 또 엉겨온다. 사실은 내가 반쯤
리바이를 업고 있는 형국이다. 무겁고 버거워서 그리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더 기분이 안 좋은 것은 등 허리로 무언가 단단한 게 닿아온 탓이다. 리바이는 아무런 옷도 입지 않은
맨몸이었다. 떼어내고 아래를 보니 리바이의 성기가 약간 서 있었다. 나는 리바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
이전부터 실험체들에게는 화장실이란 게 없었다. 변기 옆에 물통이 있을 뿐으로, 그건 그야말로 괴물, 짐승
취급이었다. 감옥이라는 게 아직까지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감옥의 화장실이 더 인간적일 테다.
리바이가 이런 걸 써야 한다니 믿을 수 없다.
기분이 나쁜 나와 달리 장본인인 리바이는 아무런 생각 없이 새로 딱지가 진 내 손목을 츕츕 빨며 서 있었다.
실험실 너머로 눈이 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실험실 밖에는 우리가 쓰는 화장실이 있었고 지금 원진은 밥을
먹느라 바쁠 것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리바이를 데리고 나갔다가 리바이가 갑자기 이상행동을 보이거나 내가
상황을 통제하지 못할 경우도 있을 것 같았다. 원진과 마찰이 있을 수도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리바이가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이상행동을 보인다면 원진은 리바이를
진정시키기는커녕 되려 자극하고 화를 돋울 것 같았다. 일리 있는 우려였다.
결국, 리바이가 이상행동을 보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이 시설을 쓸 수밖에 없었다. 물통을
반대편으로 옮겨 놓은 것이 최선의 노력이었다.
물통 안을 확인해보니 마신 흔적이 없었다. 왜 마시지 않은 걸까.
고개를 갸우뚱했던 나는 컵으로 물을 퍼서 건넸다. 마셔. 입가에 대주기도 했다. 그러나 리바이는 멀뚱멀뚱
날 보기만 했다.
‘인간이 내 입술 앞에 뭘 갖다 대네.’
딱 그 정도의 감상인 것 같았다. 목이 마르지 않은 걸까? 그럴 리가 없다. 리바이는 기계가 아니다.
“마셔야지.”
컵의 가장자리가 입술에 닿았다. 리바이의 입에서 끄응 하는 소리가 난다. 물을 마시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컵을 조심스레 기울여주었는데, 리바이는 단단히 입술을 잠가버렸다. 애꿎은 물만 리바이의 턱을 타고
흘러내린다.
고민하던 나는 반신반의하며 손을 깨끗하게 씻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물을 펐다.
“리바이, 물을 마셔야 목이 마르지 않-.”
문장을 끝마치지도 못했다. 리바이가 허겁지겁 내 손목을 붙잡아 끌었다. 덕분에 두 손 가득 펐던 물이 반
이상 흐르고 말았다. 리바이는 타는 갈증에 시달렸던 사람처럼 내 손바닥에 코를 박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얼마나 갈급했던지 리바이의 코며, 물컹한 혀와 입술이 손바닥을 이리저리 가로지르고 찌르고 부딪혔다.
몇 초 걸리지 않아서 손바닥의 물은 동이 났다. 반 이상을 흘렸으니 당연한 이야기이다.
리바이는 내 손목을 타고 흐르는 물 한 방울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내 팔을 단단히 그러쥐고 혀로
싹싹 핥아 올렸다. 길고 붉은 혀가 맥박 뛰는 손목 안쪽부터 손등까지 길고 느릿하게 핥아 올라왔다.
그러고는 혀로 입술을 축인다. 부족한 것이 분명했다.
시험 삼아 다시 컵에 물을 담아주었다. 역시 리바이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내가 마시라며 눈앞에 들이밀자 내 강권을 이기지 못하고 흘끗 봐주기는 했다. 그러나 그 모습이 꼭,
‘응. 그래서, 이게 뭐?’
하는 무고한 표정이어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결국 손으로 물을 퍼서 입가에 갖다 대줄 수밖에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내가 퍼준 물만 마셔서는 안 된다.
나중에 나와 떨어지게 된다면 리바이는 어떻게 생존한단 말인가?
불안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리바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간의 시점에서 보면 신생아였기 때문에
적응하기 전까지는 내가 이렇게 곁에 두고 물을 줘야 할 듯싶었다.
내가 물통에 손을 넣자마자 끙끙대며 기대하는 기색이었던 리바이는, 물통 밖으로 내 손이 나오자마자 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바로 달려드는 몸에 부딪혀서 또 물이 반절 이상 흐르고 말았다. 이래서는 안 된다.
나는 바짝 몸을 붙이는 리바이에게서 손을 멀리 떨어뜨렸다.
“안 돼, 기다려.”
리바이는 기다려를 배울 필요가 있었다. 좀 진정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Z 가 군림하고 있고 인간은 그저
사냥감에 불과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깨끗한 이성과 차분함이다.
아무리 사냥과 생존에 특화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흥분해서 제 몸을 가누지 못하면 오래 살아남기 힘들다.
“기다려.”
끙끙대며 내 허리와 어깨에 손을 감는 리바이가 그악스러워서 결국 나는 한 손을 포기해야 했다. 옴폭하게
오므려 물을 담은 왼손은 멀리 들고 나는 오른손으로 리바이를 밀었다.
“그만, 그만.”
끼잉 낑 끙 끙
누가 보면 내가 리바이를 괴롭히는지 알 정도로 애처로운 소리가 리바이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만.
리바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진정시켰다. 오른손에 힘을 준 상태로 물을 담은 왼손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참지
못한 리바이가 달려들려 할 때는 오히려 멀리 떨어뜨리고 가만히 있으면 손을 가져다 댔다.
몇 번을 반복하니 리바이는 이제 알아차린 듯했다.
“기다려야지.”
끙끙대면서도 아까 했던 것처럼 필사적으로 덮쳐오지는 않았다.
다친 강아지처럼 가는 소리를 내는 리바이의 입술 앞으로 이제 왼손을 붙였다. 이 난리 통에 손에 남은 물은
얼마 없다. 한번 핥아 올리면 끝이 날 정도의 양이었다.
“마셔.”
허락하자 리바이는 다시 내 손바닥에 코를 묻었다. 젖은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리바이는 단순히 물을
마시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생명수라도 되는 것처럼 젖은 내 손바닥에 코를 부비고 입술을 내린 다음 물이란
물은 한 방울도 남지 않고 제 체액으로 손바닥이 반들반들해질 때까지 핥아 올렸다.
물 한 모금으로는 성에 찰 리 없으니 더 이러는 것 같았다.
나는 한참이나 물통에 손을 넣었다 뺐다 반복해야 했다. 그래도 이제 몇 번 했다고 리바이가 다짜고짜 코를
박는 일은 없었다. ‘기다려’의 뜻을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의미는 통한 것 같았다.
“착하네.”
손을 기울여 물을 흘려주자 리바이가 착실하게 목울대를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오늘만 해도 몇 번을
반복한 칭찬을 한 번 더 건넸다.
“갑자기 달려들지도 않고, 말도 잘 듣고, 착해.”
나는 리바이에게 최대한 많은 말을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리바이가 빨리 내 언어를 배워서 우리가 의사소통을
하면 좋겠다고 여겼다. 그러나 나부터가 말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종종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까먹고는
했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아니면 그동안 수분을 많이 섭취하지 못해서인지 리바이는 한참 동안 물을 마셨다. 물통이
거의 바닥이 날 정도였다.
이렇게 목이 말랐으면서 티도 내지 않고 물통에 가득한 물에 손 한번 대지 않았다니. 내가 직접 물을 먹여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피로 어느 정도 수분 섭취가 가능하다 해도 갈증이 있었을 텐데.
고집인지 무지인지, 리바이는 참 독보적인 성격을 가진 듯했다.
“다 마셨어?”
리바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일은 없었지만 잊지 않고 물은 나는 젖은 손을 대충 문질러 닦았다. 물을 먹이고
기다려를 가르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 보니 바닥에도 물이 흥건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걸레를 발로 잡고 슥슥 바닥을 닦는데 화장실로 시선이 갔다.
아, 이거였지.
리바이는 수분 섭취가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화장실도 가야 했다.
턱을 타고 물이 뚝뚝 흐르는데 닦을 생각도 하지 않는 리바이의 뒤로 바짝 다가섰다. 리바이는 당연하다는 듯
몸을 돌려 날 바라보려고 해서 단단히 리바이의 허리를 잡아 고정해야 했다.
나보다 마디 하나는 더 큰 리바이의 손을 내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제 성기를 쥐게 했다. 아마 배뇨감
때문이겠지, 리바이의 것은 약간 서 있었다.
그러나 소변을 보라고 해도 리바이는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전할 방도가 없으니 답답했다.
그러길 오 분여.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걸까. 리바이는 제 성기를 내줬으면서도 아까 내가 물컵을 입에 대줬을 때와 별반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내가 하는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한, 무해한 태도.
아, 설마, 이것도 내가 해줘야 하는 걸까?
“리바이, 소변봐야지.”
리바이는 고개를 돌려 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저 내가 뒤에서 자신을 잡고 서 있으니 서 있어주겠다는 얼굴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다가 내가 생존을
위해 리바이에게 기대는 게 아니라 리바이가 나에게 기대게 생겼다.
그게 딱히 거추장스럽거나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죽고 나서 리바이가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앞섰다.
죽음은 공평하다.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리바이의 수명은 모르지만 이렇게 Z 가 가득한 곳에 갇혀있는 내가 리바이보다는 더 빨리 죽지 않을까?
고민하던 나는 그래도 리바이가 화장실을 아예 가지 않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리바이의
손을 치우고 직접 내가 성기를 잡고 변기를 조준했다.
아직도 반쯤 힘이 들어간 상태의 리바이의 성기에서 물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설마, 배뇨 배설을 안 하는 건 아닐까?
아니, 기계도 아닌데 그럴 리는 없었다.
고민하고 기다리길 몇 분, 마침내 리바이가 화장실을 사용했을 때, 지금 내가 리바이의 성기를 쥔 우스운
꼴이라는 것도 잊고서 기분이 좋아지고 말았다.
다른 실험체들에게는 화장실은 하등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되는대로 배출하고 되는대로 살았고, 그건
짐승의 배설과 다름없었다.
나는 리바이가 그렇게 길가의 개처럼 살게 두지 않을 것이다. 인간과 짐승, 그 첫 번째 구분 선을 지은 것이다.
“잘했어. 앞으로 화장실은 여기서 사용하는 거야.”
마무리를 한 후 손을 닦고 리바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에 내가 머리를 쓰다듬을 때 표정 변화 없이 눈만
끔벅였던 리바이는 내가 여러 차례 머리를 쓰다듬자 허리를 굽히고 또 이마를 치댔다. 그 이마와 무자비한 힘에
나는 이리저리 밀렸다.
“그만. 리바이, 그만해.”
라고 했지만 내가 듣기에도 내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자꾸 날 이마로 밀어 대고 내 손에 제 머리를 들이대는
리바이 때문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음이 새어 나오다니.
나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이제 리바이는 화장실을 쓰면 칭찬이 온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나는 희미한 어린 시절을 되새겨봤다. 엄마와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 간절히 노력하는, 약간의 애정
결핍이 가미된 성격의 어린아이였다.
리바이를 보면 그때의 내가 생각났다.
나는 리바이가 자신의 기억을 돌아봤을 때, 주위가 온통 칭찬이라는 좋은 말로 가득 차서 아예 보람과 만족감에
파묻히길 바랐다. 나는 조금이라도 칭찬할 거리가 있으면 그냥 넘기지 않았다.
“잘 먹네.”
나는 내가 평생 들어본 것보다 더 많은 칭찬을 리바이에게 퍼부었던 것 같다.
아직 토라져서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원진을 뒤로하고 나는 내 저녁을 모두 실험실로 가지고 왔다.
원진이 조용해서 허전했지만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또 말을 하기 시작하면 내가 리바이에게 분에 넘치는
신경을 쓰고 있다고 할 게 뻔했다.
한 달.
나는 주머니와 가방에서 다른 것을 꺼냈다. 책이었다.
내게 허락된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리바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싶었다.
성경을 편 채로 나는 육포를 먹고 있는 리바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식사할 때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
리바이가 혼자 남은 상태에서도 굶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한 달 뒤에는 어떻게 될까. 저 문을 열고 나가면 Z 가 리바이도 공격하려 들까?
리바이를 포함해 모든 실험체에는 Z 에 대한 내성이 있어서 Z 로 변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적인
것은 아니다. 떼 지어 몰려든다면 나와 비슷한 꼴이 되어 산 채로 먹힐지도 모른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와 원진이 사라지고 난 뒤에 리바이라도 남아 살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다 먹었어?”
아직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리바이에게서는 대꾸가 없다. 이제 고작 만 이틀이 지났을 뿐이니 당연한 일이다.
리바이를 옆에 두고 나는 책을 읽었다.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나는 오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모르는 단어들을 넘기거나
더듬더듬 읽어가야 했다.
몇 장을 내리읽었을까, 어깨가 무거워져서 고개를 돌리니, 리바이가 육포 하나를 문 채로 조용히 잠에 빠져
있었다.
손에 쥔 육포를 살살 빼주려는데, 자면서도 이 육포가 뭐라고 손가락에 단단히 힘을 주고 있다. 포기하고 나는
마저 책을 읽었다.
이대로 리바이가 푹 잠들었으면 했다. 마음껏 먹고 마음껏 잤으면.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 리바이라도
그랬으면 했다.
오랫동안 나는 약탈자를 포함해 무리 지어서 생존자를 노리는 인간 사냥꾼, 노예잡이까지, 많은 이들을
경계하며 살아야 했고, 덕분에 동물들의 인기척에도 쉽게 깨고 잠들지 못했다. 덕분에 내 수면의 정의는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아주 어렸을 때는 힘들었던 것도 같은데,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어쩌면, 아주 어쩌면, 온전한 평화라는 것이
도래한다 해도 깊게 잠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리바이의 손에서 육포가 떨어진다.
이 육포는 내가 원진을 만나기 전, 그리고 만나고 난 후에도 틈틈이 비축해 둔 것이다. 이런 거라도 있으니 한
달을 살 수 있는 것일 테다.
맨몸으로 쿨쿨 자는 리바이를 두고 나는 실험실을 나왔다. 원진은 한참 복도를 가로질러 원래는 창고로 쓰였던
곳에 있었다. 아직도 볼이 땡땡 부어 있다.
“혹시 모르니 식량을 더 찾으러 가보자.”
원진은 저번에 우연히 발견한 건물 도면을 가지고 와서 펼쳤다.
지난 한 달간 우리는 이곳을 나가기 위한 모든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한곳으로 Z 를 유인할 동안
빠져나간다든가 하는 평범한 발상도 있었고, 폭파한다든가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한 달은
짧고도 긴 시간이었으므로.
주요 실험실인 이곳은 두 개의 메인 스카이브리지로 다른 건물과 연결되어 있지만, Z 의 수가 너무 많아 건너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상황실의 CCTV 만 봐도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복도에서 Z 가 어슬렁거리거나, 휴면기에
접어든 상태였다. 밖은 더 심각했고, 이들을 피해 이 미국 최대 규모의 연구실을 나갈 방도는 없었다.
대신 우리는 하나씩 방을 체크해가며 혹시 있을지 모르는 의약품, 식량, 생필품 등을 꾸준히 비축해왔다.
그렇게 하나씩 하다 보니 어느새 거의 모든 방에 X 표가, 혹은 들어가지 못한다는 표시의 Z 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원진을 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뭐랄까, 원진이라면, ‘저건 실패작이야, 우린 끝났어, 이런 식으로 연명해봤자 뭐 해’ 하는 말을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원진이 속으로는 나와 리바이를 희생시키고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포기하지는 않은 듯 보였다.
“내가 다녀올게.”
더 놀랍게도 원진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빤히 원진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바이와 시간을 보내야지, 라고 생각하는 내가 낯설었다.
어쩌면 그가 나가 있을 동안, 중문을 폐쇄하고 리바이를 실험실 밖에 발을 내디디게 할 수도 있을 테다.
나는 내가 몸을 누이던 연구소 내 서고로 들어갔다. 임시로 만든 침대가 있었다. 누운 채로 나는 내가 앞으로
겪지 못할 것들과, 분명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 고독한 거처를 떠올렸다.
‘세상은 원래 이렇지 않았어.’
내가 가진 것을 훔치고 날 팔아넘기려고 했던 어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쓸쓸하게 죽어갔다.
상상 속 그의 시체 앞에 앉아 나는 ‘이렇지 않은’ 세상을 그려보았다. 그러다 문득 잠이 들었는데, 꿈결에
리바이를 본 것도 같았다.
비록 우리에게는 한 달이라는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보고,
죽는다면 최선을 다해 싸우다 죽고 싶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리바이에게 Z 를 피하는 법을 우선적으로 가르치고 싶었다. Z 가 리바이에게 덤벼들지,
아니면 리바이가 나중에라도 성장하여 Z 를 사냥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리바이는 갓난아이 같은
상태였다. 비록 그 외형은 은사자와 비슷하다 하더라도.
“여기 봐, 리바이.”
널린 것이 캐비닛과 책장이었기에 나는 그것들을 리바이가 있는 실험실에 밀어 넣어서 작은 미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서랍이며 캐비닛이며 모두 열어두고 조심해서 걷지 않으면 물건이 떨어지도록 설계했다. Z 는 후각도
예민했지만, 특히 예민한 것은 청각이었기 때문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기척을 최대한 죽이는 연습이 필요했다.
자꾸만 내게로 손을 뻗는 리바이를 미로 끄트머리에 세워두고 물러섰다. 말을 아직 알아듣지 못하는 리바이는
내가 두 걸음 물러설 때마다 한 걸음씩 다가오려고 했기 때문에, ‘안 돼’를 오십 번 정도는 말해야 했다.
“안 된다니까.”
그러나 계속해서 리바이는 내가 뒤돌아서려 하자 바로 손을 뻗어왔다. 끙끙대는 리바이와 눈을 마주하며 나는
열 걸음 정도 물러섰다. 끙끙 소리가 거세졌다.
“기다려.”
적어도 기다려는 알아들으니 다행이다.
“알았지, 천천히 조심스럽게 와야 해.”
그리고 나는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우당탕탕탕.
깡통이며 책이며, 바인더가 이리저리 떨어졌다. 내 위로 덮쳐오는 리바이에게 깔린 채로 아물지 않은 손목을
쯉쯉 빨리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기다려’ 다음에는 ‘맘대로 해도 돼’가 잘못 입력된 듯 보인다는 점이었다. 갈 길이 먼 것 같았다.
하지만 절망하기에는 일렀다.
지금 생각해보니 시작부터 트랩이 너무 많았던 것 같다. 초심자에게 맞는 난이도 조절이 필요했다.
나는 캐비닛에 올려두었던 빈 깡통을 치우고 리바이 발치에 책 몇 권을 쌓아두었다. 미로는 나중에 리바이가
말을 더 알아듣게 되면 쓸 예정이었다.
리바이를 바로 앞에 두고 나는 다섯 걸음 물러섰다. 당연히 리바이는 따라오려 했다. 그러나 리바이의 맨발에
책등이 닿았을 때,
“안 돼.”
의미를 알아들은 것인지, 단순히 어조가 세서 그런진 모르지만 리바이의 발이 멈칫한다.
“안 된다니까.”
벌써 반쯤 넘어간 책을 다시 쌓아 올린 후 나는 리바이를 밀었다.
“이리 ㅇ, 안 된다니까. 안 돼.”
안 돼를 얼마나 했는지 나도 모르게 입에 밸 것 같았다.
나는 리바이의 맨발을 직접 쥐고, 그가 책등을 치지 않도록, 책 옆으로 발이 오게끔 했다. 그리고 리바이의
발이 실험실 바닥에 닿자마자 그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예뻐해 주었다.
분명 무표정이었지만 그의 머리 위에 뜬 물음표를 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것을 세 번쯤 했을까.
“이리 와.”
내게로 무작정 다가오던 리바이는 밑의 책을 발견하고, 발을 들더니, 슥- 책 옆으로 슬쩍 내려놓았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밝아졌던 것 같다. 리바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왔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리바이. 착해.”
이마를 들이대며 오는 그에게 나는 육포를 건네주었다. 리바이는 내 손에서 그것을 받아갈 생각도 하지 않고,
내 팔목과 팔꿈치를 쥔 채로 육포를 뜯어 먹었다. 유난히 날카로워 보이는 송곳니가 눈에 띄었다.
어린아이 가르치듯 하고 싶었는데, 점점 개 훈련하듯 변질하여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가르침의 방식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래도 처음으로 리바이는 책을 넘어뜨리지 않고 내게로 왔다. 나는
그를 한낮 짐승 보듯 바라보지 않는다. 그게 중요한 것일 테다.
“다시 해보자.”
나는 리바이의 앞에 책더미를 두 개 올려두었다. 무슨 행동이든 반복이 중요하다고 했던가. 이제 리바이는
수월하게 책을 넘어뜨리지 않고 내게로 왔다. 그리고 칭찬하는 내게 당연하다시피 머리를 들이댔다.
보드랍고 가는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한 달이 이렇게
즐거워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흐으- 으- ㅎ로. 로.”
세 번째로 책더미를 지나온 리바이의 목 뒤를 쓰다듬는데, 희미하게 리바이의 입술에서 그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로. 이-로-라고 해야지. 따라 해 봐.”
“ㅎ, 으로. 로. 로. 흐로.”
아물지 않은 손목 대신 다른 손목을 가르고 그의 입술에 대주었다.
육포를 주었고, 내 몫의 음식도 반 이상 떼주었지만 몸집이 커서 그런지 그는 매번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두
손으로 내 팔과 손을 붙잡고 게걸스레 입술을 댔다.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겠다는 듯 그는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고 입술을 묻었다.
깊게 베지 않아서 얼마 나오지 않을 텐데도 리바이의 울대가 여러 차례 움직이며 작게 젖은 소리가 울렸다.
“오늘 잘했어. 정말로 잘했어, 리바이. 앞으로도 그렇게 하면 돼.”
리바이는 아직 대답하는 법을 모른다. 내 피를 마시는 데 열중한 리바이의 목 뒤를 쓰다듬었다. 그러고 몇
분을 기다렸을까, 나는 리바이가 혀를 꺼내 내 상처를 싹싹 핥는 것을 응시했다.
깊은 자상이 아니라지만 그래도 상처라 리바이가 이럴 때마다 고통이 조금씩 일었다. 그렇지만 별로 티 내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인 것은 리바이가 혀를 빼서 내 상처를 헤집고 억지로 피를 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흐으, 으, 로.”
내 피가 묻어서 한층 붉어진 입술로 리바이가 나를 불렀다.
“이로라니까. 이로. 이-로.”
원진을 포함해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이름이 발음하기 쉽다고 했다. 이국적인 이름이었지만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리바이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비슷한 소리를 내는 데 그쳤다.
구강 구조가 다른 걸까?
웅얼대는 리바이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벌렸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찔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손으로 가늠하다가,
상아처럼 흰 그의 치아와 혈색이 도는 잇몸, 물기에 젖은 혀를 차례차례 손으로 만졌다. 그리고 내 입 안을
매만지며 차이를 파악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리바이는 유난히 뾰족한 귀와 송곳니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인간과의 차이점이 없었다. 물론
외형적으로 리바이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핏줄이 다 보일 만큼 창백한 피부와 어둠 속에서도 빛날 것 같은
샛노란 눈동자를 볼 때마다 나는 근본적으로 태생이 다른 우리의 차이를 실감하고는 했다.
“이. 로. 따라 해 봐.”
내가 손가락을 빼자 리바이는 입술을 혀로 훔치며 따라왔다.
“물지 마. 빨지 마, 어- 하지 말라니까.”
리바이는 내 손을 붙잡고 자꾸만 제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혹시라도 깨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손을
빼려고 했지만, 이제는 내 손가락이 피를 흘리는 손목이라도 되는 듯 빨아 댔다. 아이가 젖을 빨 듯 쭙쭙 하는
귀여운 소리와 함께 질척하게 젖은 마찰음이 울리기도 했다.
“손 더러우니까 하지 마.”
엉겨드는 그를 피하려다가 아래로 시선이 떨어졌다.
아직도 옷을 입지 않아 맨살이 그대로 드러난 리바이의 하체가 반쯤 서 있었다.
화장실을 가야 하는 걸까? 치대는 리바이를 뒤로 돌려세우고 그를 화장실로 밀었다. 가면서 일부러 책더미를
두 번 쌓아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영특한 리바이는 가뿐히 책을 지나 화장실로 향했다.
“여기서 볼일 봐야지. 여기잖아.”
화장실 앞에 그를 세워두었는데, 리바이는 또 날 멀뚱히 바라볼 뿐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재촉하자 리바이는
멀쩡한 책더미와 나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리바이, 화장실을 가야 칭찬을 해주지.”
생각해보니 화장실에 대한 보상보다 책에 대한 보상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래도 화장실은 가야 했다.
“리바이.”
몇 번을 재촉해서 불러도 리바이는 이미 두어 차례 화장실을 갔던 것을 다 잊어버린 건지, 얌전히 서 있기만
한다.
“리바이.”
아래를 보자 오히려 아까보다 더 커진 것 같았다. 이 정도 반응하는 것을 보니 오랫동안 소변을 참은 것 같은데,
왜 화장실을 앞에 두고도 서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리바이, 화장실 가야지.”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리바이가 워낙 반응이 없어서 나는 리바이의 아래를 잡고 변기를 조준했다. 내 것이 아닌,
약간 힘이 들어간 그것이 손에 들어온 느낌은 매번 생경했다.
그런데 화장실을 가긴커녕 리바이는,
“로. 로오. 으, 로오.”
나를 부르며 몸을 바짝 붙여왔다. 그의 것이 완전히 발기했을 때 나는 리바이가 화장실이 급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충격에 순간 반응하지 못했다. 리바이의 등에서부터 그를 껴안고 그의 아래를 붙잡은 채로 그대로 굳어버린
것이다.
본능이 더 앞선 리바이는 내 손에 자신의 것을 추켜올렸다. 그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밀쳤다.
“흐으, 로. 로-!”
뒷걸음치던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실험실을 벗어났다. 발밑으로 책과 빈 깡통과 박스가 채여 굴러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허덕이는 숨을 내쉬며 실험실을 나간 나는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말도 안 돼.
리바이에게는 성욕이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다운, 그러나 인간을 가장 불완전하고 하등하게 만드는
욕구.
개를 키워본 적이 있다. 반려동물처럼 간질간질한 어감은 아니었다. 내가 접촉했던 많은 사람들이 개를
키웠었다. 사냥이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이든 각양각색의 이유로 키웠는데, 내가 처음 길러본 개는 한
노인이 죽고 남긴 것이었다.
내 가방을 가져가려고 했었는데, 거기에는 여분의 무기와 식량이 있었다.
한참을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내가 그를 죽이고 말았다.
충동이었는지 아니면 의도였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가 훔치려고 했던 게 옷가지였다 하더라도 죽였을 것이다. 어차피 그가 한 짓도 살인미수였다. 한겨울에
내가 모아놓은 식량을 그가 홀랑 털어가 버렸다면 아사든 객사든 어쨌거나 나는 죽었을 테니까. 그걸 알면서도
내 것을 훔치려 했으니 죽임이라는 처벌은 어쩌면 당연했다.
노쇠해 손등이 쪼글쪼글하게 말라붙은 노인의 손은 한참을 먹지 못한 듯 삐쩍 말라 있었다.
그의 마지막 숨이 꺼져가는 동안 그의 개는 묶인 채로 세상이 떠나가라 짖어 댔다. Z 들이 동물 울음소리에는
크게 반응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그가 완전히 숨을 거둔 것을 확인하고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줍는데 짖는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그 개는
거품까지 물면서 미친 듯이 짖어 댔다. 고정된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고 개가 날뛰며 달려들려 할 때마다
쇠사슬에서는 기분 나쁘게 차가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짝 마른 노인과 개에게 번갈아 시선을 주었다.
정말 필사적이고 힘들었으면, 저 개라도 잡아먹었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개는 약간 마르긴 했지만 노인처럼 피골이 상접한 꼴은 아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 나는 한숨을 쉬었다.
노인은 저 개를 죽이지 않고 내게 피해를 주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나는 미친 듯이 짖는 개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저 개는 쓸모없지만 노인이 일군 보금자리는 겨울을 나기에
적합해 보였다.
그렇게 개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너무 시끄러워서 죽일까 생각을 해보았다.
끄응 끙-
끙-
새벽이 오도록 개는 가냘픈 신음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한 내가 밖으로 나왔는데, 쇠사슬에 단단히 묶여있어야 할 개가 보이지 않았다. 들고 있는
몽둥이를 재차 그러쥐고 개를 찾았다.
개는 밤새 꽁꽁 얼어붙은 노인의 시체 곁에 있었다. 개집에 지붕과 모포도 있어 따듯했을 텐데, 개는 눈알까지
얼어붙은 사체 옆구리에 바짝 붙어 동그랗게 옹송그린 상태였다.
살아있는 것은 나일까 노인일까. 인간은 저 개일까 나일까.
아침으로 먹던 말린 고기 한 점을 툭 꺼내 시체 옆에 던졌다.
소리가 났을 텐데 개는 한쪽 귀를 올렸을 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얼어 죽을 요량인 듯했다.
“나는 아무런 잘못 없어. 알아? 네 노인이 먼저 내 것에 손을 댔다고.”
어제 그렇게 짖어 댔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개는 주둥이를 꾹 닫았다. 눈을 뜨지도 않았다.
“난 잘못 없어. 죽을 거면 맘대로 해.”
내가 몸을 돌려도 개는 결코 짖는 법이 없었다.
문을 닫은 채 한참을 기다렸다. 개가 고기를 먹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제길.”
이건 모두 그 노인의 탓이었다.
그러게 왜 남의 것에 손을 댄단 말인가?
그러게 왜 반항하고 왜 그악스럽게 내 것을 쥐고 뻔뻔하게 자신의 것인 것처럼 놓지 않았단 말인가?
그 노인은 끝까지 민폐였다. 죽고 나서도 내게 죄책감을 얹어놓았으니.
나는 문을 뻥 하고 발로 찼다. 개의 귀가 쫑긋 섰지만 그뿐이었다.
노인의 보금자리를 뒤져 삽을 꺼냈다.
그리고 사체 곁에 섰다.
“비켜.”
개에게 말했다.
“비켜, 묻어줄 거니까.”
안 움직이면 개도 같이 묻을 생각이었다. 저대로 두면 어차피 개도 얼어 죽을 게 뻔했다. 묻고 죽으나 죽어서
묻으나, 결과는 같았으니.
개를 발로 툭 밀자 그르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시하고 개를 발로 세게 민 다음 노인 바로 옆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겨울은 빌어먹게 시렸고 땅은 노인의 시체만큼이나 단단히 얼어있었다.
짜증이 났다. 뒈진 다음 바로 묻을걸. 그러면 노인의 시체를 웅크리게 해서 넣을 수 있으니 훨씬 덜 힘들었을
것이다.
노인의 바로 옆에서 판 이유는 완성되자마자 바로 시체를 굴려 떨어뜨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구덩이를 한참 팠을까, 어딘가 작은 소리가 귓가를 건드렸다. 옆을 보니 개가 내가 던진 고기를 씹어먹고
있었다. 질겅질겅.
처음 기른 개는 이름도 없었다. 내 개도 아니었다.
노인이 얼마나 곱게 키운 건지, 저 혼자 배를 채우고 오는 일도 없었다. 꼭 내가 먹이를 주기를 기다렸다.
개를 버린 이유는 내 생존조차 불투명한 상황에서 더 이상 식량을 나눠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이었는데 가끔 생각이 났다.
지금쯤 잘 살고 있을까.
아마 죽었을 것이다. 그 개는 야생에서 쉽게 살 만한 개가 아니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기르는 개보다 야생
들개의 수가 훨씬 많다는걸 감안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노인의 또 다른 과오는 그거였다. 자신이 완전히 책임지지 못할 것이라면, 혼자서도 생존할 수 있도록 길러야
했다. 얌전히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리바이에게 먹이를 주고 화장실 가는 법을 가르치면서 나는 단 한 순간도 그 개를 잊지 않았다.
나는 리바이를 책임질 자신이 없으니, 리바이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했다.
“로. 로오.”
아직 ‘이’ 자는 발음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리바이는 나름대로 나를 부르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문가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자 리바이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내가 개를 기르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리바이가 내 눈치를 본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내 생각에 리바이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가, 내 기분이 왜 이런가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리바이는 내 기분을 파악하는 건 누구보다 빠른 듯했다. 이유와 결과를
연결하지는 못하지만 원진도 때때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내 상태를 순식간에 알아낸 것이다.
“로오…….”
삐죽삐죽 다가오는 리바이는 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내 어깨에 이마를 대다가 슬쩍 눈을 들어 날 확인한다.
내게서 반응이 없자 또 죽어가는 목소리로 날 부른다. 로오오.
한숨을 쉰 나는 칼을 들었다. 손목을 긋자 빠르게 피가 새어 나왔다. 흐르는 것이야 어차피 리바이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핥을 테니 가만히 두는데, 어째 리바이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로오.”
또 나를 불러온다.
아.
깨달음에 나는 리바이와 눈을 마주쳤다. 리바이는 지금 ‘기다려’를 하는 중이었다.
“먹어, 괜찮아.”
로오! 로오오 로!
그런 외침과 함께 다시 젖은 소리가 울린다. 다시 손목을 빨리며 나는 리바이의 흰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래도, 몇 주는 이렇게 길러야겠지.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식량과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을 보이기 전 한
달 동안만.
내가 리바이에게 음식을 주고, 말을 걸고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칠 동안 원진은 지도를 들고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 때때로 수확이 있었다. 유용한 도구나, 의약품 같은 것들. 저번에는 아마 창을 깨는 용도로
사용했던 듯한 붉은 도끼를 가지고 온 적도 있었다. 그럴 때 그는 환한 미소를 지었고 내가 리바이에게 뭘
가르치거나 그를 아이 취급해도 별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땀과 먼지, 오물에 몸이 젖었음에도 별다른 수확이 없었을 때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원진은 리바이를
보고 짜증을 냈다.
쓸모없어. 의미 없어. 소용없어. 좌절할 때마다 그가 달고 사는 말이었다.
나는 일희일비하는 그 때문에 짜증이 났다. 만약 내가 내 주위에 일어난 일 하나하나에 모두 사활을 걸었더라면,
이리저리 휘둘리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실망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진작 자살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오늘은 원진이 짜증을 내는 날이었다. 그렇게 굴 거면 그냥 내가 갔다 오겠다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원진이 바닥의 책을 걷어찼을 때 나는 결국 그 말을 내뱉었다.
“그딴 식으로 굴 거면 때려치워. 내가 갈게.”
원진의 볼은 다 아물어있었다. 그는 나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쉬고 마음을 정비했다.
그가 몸을 씻으러 갈 때 나는 실험실로 되돌아갔다. 리바이는 내가 펼쳐놓은 책을 베개 삼아 자고 있다가,
실험실 문이 열리며 바람 소리가 쏟아지자 퍼뜩 눈을 떴다.
나는 품 안에서 옷가지를 꺼냈다. 불행히도 여기에는 리바이가 입을 만한 옷은 없었다. 리바이는 키도
키였지만 체격이 남달랐기에 우리의 옷은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간신히 찾아낸 것이 빅 사이즈의 티셔츠와
스웨트팬츠였다.
“이리 와.”
눈치를 보던 리바이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또 내게 들러붙었다. 그런 그의 위에 티셔츠를 씌우자 리바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비협조적인 리바이의 팔을 욱여넣고 어찌저찌 그에게 옷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도리질을 쳤던 리바이는 옷이 불편했는지 밑단을 죽 늘여 댔다.
“안 돼.”
몇 번 반복하자 리바이는 옷을 벗어 던지지는 않았다.
다만 바지는 더 힘들었다.
운동도 하지 않는데 근육이 잘 잡힌 다리는 내가 억지로 들려 해봐도 무거워서 잘되지 않았고, 겨우 들어도
리바이가 힘을 주어 다리를 옮기면 그만이었다.
나는 육포를 꺼냈다.
리바이에게 육포를 물리고 한쪽 다리를 끼워 넣는 데 성공했지만 리바이는 끙끙대며 다른 한 다리를 자꾸 피했다.
그것밖에 하지 않았는데 벌써 숨이 차올랐다.
벽에 기대앉으며 나는 바닥을 향해 손짓했다. 몇 번 두드리자 리바이가 날 따라 몸을 내렸다. 내 어깨에 찰싹
붙어서는 내 머리를 매만지는 데 정신 팔린 리바이의 다른 다리를 노렸다.
뒷머리가 침 범벅이 되긴 했지만 결국 나는 리바이를 어르고 달래며 바지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바지를 입히자마자 껴안고 칭찬을 해주자 눈치를 보던 그가 달려들었다.
피를 먹이고도 내가 아무런 말 없이 그를 떠났던 것이 마음에 쓰였던 게 분명했다. 리바이는 끙끙하는 울음소리
비슷한 것을 내며 내게 어떻게든 몸을 붙이려 애썼다.
“알았어, 알았어.”
억지로 내 팔을 벌린 리바이는 내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내 어릴 적을 떠올려보았다. 체구만 달랐을 뿐 어릴 적의 나와 그는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나는 적어도 대여섯 살까지는 보호자가 있었고, 친구도 있었고, 선생님도 있었다. 그러나 리바이는
어머니도, 친구도,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의 친구이자 선생님이자 보호자인 그 모든 역할을 하고 있는
거대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 내가 그를 밀어내고 떠났다는 게 그에게는 아마 큰 충격이었겠지.
한숨을 쉰 내가 그를 껴안고 등을 쓰다듬어주자 리바이는 더 크게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내 뺨을 주욱 핥아
올렸다. 리바이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떨어지지 않았지만 눈에 가득 맺힌 눈물을 보며 나는
그에게 나지막하게 사과했다.
그래서는 안 됐다고. 내가 잘못한 게 맞았다.
배고픔을 느끼는 것에 화내는 것이 불합리하듯, 욕구가 있기에 반응한 리바이에게 뭐라 하면 안 됐다.
그렇다고 그가 내게 억지로 뭘 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미안해.”
팔목을 내밀자 리바이는 단단한 콧대를 비비며 내 냄새에 취한 것처럼 나른하게 눈을 떴다. 왼쪽 손목은 거의
아물어가고 있었다. 상처 바로 밑에 새롭게 칼을 댔다. 혈향을 들이켜며 리바이가 입술을 묻었다.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그의 아래가 점차 부푸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피가 그에게 성욕을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그가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물어봐야지.
피를 마신 리바이가 입술을 혀로 축였을 때 나는 손목을 감추었다. 저번처럼, 소리를 내지 않고 기척을 죽이는
법을 계속해서 훈련할 셈이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치직 하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유리창 너머 보이는 것은 원진이었다.
[뭐 해.]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원진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리바이가 몸을 굳혔다. 목 뒤를 쓰다듬으며 달래자 잔뜩
긴장했던 그의 몸이 서서히 풀려갔다.
“아무것도 안 해.”
타이밍이 좋았다.
리바이가 내 피를 마신다는 것까지 알게 되면 원진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물지도 않고, Z 도 못 없앤다는
리바이를 ‘실패작’이라고 명명한 뒤 원진의 반감은 점차 노골적으로 변해갔으니까. 그렇다고 원래는 감정을
숨겼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과 다른 무언가를 항상 ‘틀리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와. 할 이야기가 있어.”
몸을 일으켰다. 리바이는 쪼그려 앉은 채로 나를 붙잡았다.
이렇게 건장한 체구와 단단한 몸을 가지고도 그가 맹목적으로 내게 기댈 때마다 나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온다는
겁쟁이 사자를 떠올렸다. 용기를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겁쟁이 사자. 그러나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아무
효과도 없는 가짜 약이었다.
“자야지, 리바이. 잘 자. 내일 봐.”
나는 리바이를 침구로 이끌었다. 그건 내가 남는 실험용 가운과 여분의 매트리스를 모아 만들어준 것으로,
제대로 된 침대라기보다는 둥지에 가까웠다.
“잘 자.”
다시금 말하자 리바이는 힘없이 누웠다. 나를 보는 그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내일 다시 올게.”
카드를 대고 실험실을 나가며 나는 손을 흔들었다.
“뭔데?”
원진이 꺼낸 것은 건물의 청사진이었다.
“여기 봐. 여기에 Z 가 있었어. 우리가 모르는 어느 길이나 뚫린 데가 있었나 봐.”
원진은 내게 새로운 Z 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나는 두어 걸음 떨어져서 방마다 표시된 곳을 보았다. X
표시보다 Z 표시가 더 많았다. 눈가를 쓸며 한숨을 쉬었다. 상황은 더 절망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남은
식량은 한 달 치 정도.
과연 그 식량을 다 소진할 때까지 이곳에 남는 것이 현명할까?
하나의 Z 라도 적을 때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러다 리바이를 떠올렸다. 당장 나와 원진이 이곳을 탈출할 가능성도 0%에 수렴하는데, 아직 조용히
걷는 법도 모르는 리바이를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그건 자살행위였다.
“어떻게 할까.”
원진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익숙한 절망감이 내려앉았다. 한참이나 종이를 내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남아 있자.”
“뭐?”
“지금 나가나 나중에 나가나 죽는 건 마찬가지야. 적어도 한 달 동안 우리가 찾지 못했던 방법을 찾을 수는
있잖아.”
“이로. 나가자.”
원진이 날 부른 것은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탈출하자고 말하고 싶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원진의 선택이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내가 오랫동안 홀로 생존해 왔다 해서 내 판단력이 원진의 것보다
나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래, 어쩌면 그가 맞을 수도 있었다.
우리는 그간 가능한 모든 곳을 돌아다녔고 거의 모든 방법을 강구해보았다. 이대로 한 달을 버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기껏해야 가본 방을 또 가고, 어쩌면 괜히 소란을 피워 Z 만 더 불러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리바이가 있었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겁쟁이.
“가야 돼.”
그런 내게 원진은 흔치 않은 단호함을 내비쳤다. 그가 꺼낸 것은 청사진이 아니었다. 푸른색 커버가 물에
젖었었는지 울어버린 종이가 두툼하게 잡혔다.
“이거 봐.”
그건 다름 아닌 일기였다.
“생각해봐, 여기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전부 어디로 갔을까?”
원진은 커버를 툭툭 털더니 종이를 파라락 넘겼다. 이윽고 그가 펼친 곳은 다급하게 잉크로 쓰인 메모였다.
“여기가 보금자린데, 다들 생각 없이 나가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야. 갈 곳이 있었을 거라고.”
아무리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 순진하다지만, 뭐가 득실거리는지도 모르는 연구실 밖으로 대뜸 나설 만큼
바보는 아니다. 내가 빠르게 글을 읽는 동안 원진은 참지 못하고 한 부분을 가리켰다.
“‘나는 어머니와 동생, 마들렌과 함께 마더랜드로 향하기로 했다. 그러니 에디, 이 글을 발견한다면 부디
신의 가호가 함께하여 우리가 그곳에서 재회할 수 있기를.’”
“마더랜드?”
“나도 간혹 들어본 적 있어. 어딘가에 아직 함락되지 않은 군사기지가 남아있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우린 왜 모르지?”
“알 방법이 없잖아, 뉴스도 없고 라디오도, 소셜 미디어도 없는데 어떻게 알겠어.”
소셜 미디어? 내가 갸웃하자 원진은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원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라디오를 듣지 않는다. 생존자 캠프가 있다며 사람들을 꼬여내 희생양 삼는 수법이 너무나 만연했고,
아직도 작동되는 라디오와 같은 통신기기 자체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더랜드가 있는 거야. 우리는 그리로 가야 해.”
일기장을 닫고 원진은 단언했다. 살아남아서, 그리로 가야 한다고.
“하지만- 하지만 리바이는?”
“리바이 소리 좀 집어치워!”
쿵 소리가 나며 종이가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원진은 여러 차례 마른세수를 한 뒤 초조하게 서성였다.
“이로, 네가 외로웠단 거 알아. 너는 혼자서도 잘 살 테지만, 그래도 내심 누군가를 바라왔다는 것도 알아.”
내 어깨를 붙잡은 원진은 타이르듯 내게 말했다.
“하지만 그 대상은 리바이가 아니야. 이로, 미안하지만 리바이는 괴물이야. 괴물이고, 실패작이고,
쓰레기라고!”
쓰레기. 리바이가?
“일기장에 보면 꽤 상세히 적혀있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연구소 사람들은 다른 보호소 사람들과
연락이 닿았었나 봐. 대략적인 위치랑 규모도 있어.”
원진이 말한 이야기는 너무나 이상적이라서 나는 그가, 그리고 내가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는
마을이 아닌, 작은 캠프가 아닌 거대한 도시에 대해서 말했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저마다 희로애락을
거치는 인간다운 일생.
“더 늦으면 안 돼, 뭐가 올지 모르잖아. 그때 앤더슨의 그 괴물이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있어? 그때는
정말로 기회가 없다고.”
만약 리바이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했었을까? 나는 그때도 이렇게 우유부단하게 주저앉아있었을까? 아니면
당장 짐을 꾸려 원진과 함께 이곳을 탈출할 방법을 찾았을까?
혼란스러웠지만 원진에게 내가 이만큼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다. 그를 설득해야 했다.
최대한, 적어도 리바이가 홀로 설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
“좋아.”
내 말에 원진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갈 계획을 세워보자. 식량을 모아 놔.”
큰 안도의 숨을 내쉰 원진은 나를 끌어안았다. 내 어깨와 등을 두드리며 좋은 선택을 했다고 믿었다. 정말로
그럴까? 지금쯤 웅크린 채로 잠이 들어있을 리바이가 떠올랐다.
“이것밖에 못 줘.”
내 음식을 반 이상 주었고 피도 주었지만 리바이는 아쉬워하며 여러 차례 혀로 입술을 쓸었다. 나보다
먹었다지만 체격이 크다는 걸 고려하면 아마 나보다 더 힘들 테다.
음식과 피로 나는 리바이에게 기척을 죽이는 법을 어느 정도 가르쳤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부르면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온갖 난리를 피우며 오지는 않는다.
부작용이라면, 조심스레 와도 내 위로 덮쳐오는 데에는 조금의 조심도 없다는 점과 노골적으로 보상을
바란다는 점이다. 보상이 물질적인 것이 아닌, 포옹이나 쓰다듬에서 그친다는 게 다행이었다.
리바이의 반듯한 이마를 쓸다가 실험실 유리 뒤로 원진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나를 보며 손짓했다.
우리는 최대한 Z 가 적은 곳으로 나가기 위해 루트를 짜고 있었고, 원진은 막 시찰을 다녀온 참이었다.
내가 일어나자 내 무릎 위에서 골골대던 리바이가 퍼뜩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실험실 밖으로 나가는 내 뒤로
바짝 붙는다.
“안 돼.”
카드키를 대자 문이 열렸다. 겁쟁이 주제에 나를 따라 실험실을 나오려고 해서 나는 단호하게 그를 밀어내야
했다. 개인적으로 리바이가 실험실을 나와도 별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원진은 기겁하고 리바이에게
화풀이를 하려 들지도 몰랐다.
끙끙대는 리바이의 어깨를 밀자 리바이가 두어 걸음 밀려났다.
“금방 올 거야. 착하지.”
머리를 쓰다듬자 리바이가 손바닥에 머리를 비벼왔지만 곧 손을 떼야 했다. 원진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땠어?”
“나쁘지 않았어!”
묻자마자 대답이 튀어나왔다.
탈출 계획을 본격적으로 세우기 시작한 이래 원진은 절망보다 희망에 찬 모습을 보였다. 상황은 전과 다르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단순히 구상에서 멈추지 않고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었고 그것 자체로
원진에게는 큰 힘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계획은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했다.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연구실 밖으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이곳을 중심으로 몇 마일 반경을 넘어가지 못한다면 수많은 Z 에게 쫓기는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여기는 Z 가 더 많아졌어.”
우리는 주로 환풍구를 이용하여 넘어갔다. 문 대부분은 단단히 잠겨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열 수 있는 문,
키나 비밀번호로도 열 수 없는 구분해 표시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Z 를 방에 몰아넣고 문을 잠그거나
위로 탈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생했어.”
“별말씀을.”
원진은 가지고 온 식량을 먹었다. 우리는 식량을 배분한 상태였는데, 양을 정확히 계산한 것이어서 아무리
배가 고프고 힘들어도 다음 식사 분량의 음식을 미리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게 철칙이었다. 처음에 원진은 그런
내게 짜증을 냈었지만 이제는 꽤 익숙해져서 잘 따르는 편이었다.
작은 방에는 원진이 크래커를 씹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가 몇 개를 먹었을 때였나, 나는 급작스레 음식
먹는 소리가 사라진 것에 고개를 들었다.
원진은 빤히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화급히 뒤를 돌았다. 열린 문 뒤로 무언가가 서 있었다.
리바이였다.
아차.
다급히 일어난 나는 주머니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있어야 할 작은 카드키가 없었다.
“저 괴물이-.”
“아니야!”
뒷걸음질 치는 원진을 말리고 나는 리바이에게 달려갔다. 리바이는 무해한 모습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이곳에 내가 있기에 왔을 뿐이라는 것처럼.
“어떻게 탈출한 거야?!”
“미안, 아마 내가 카드키를 떨어뜨렸나 봐. 소리치지마, 원진.”
“소리를 안 내게 생겼어?!”
원진의 목소리는 점차 커졌고, 멀뚱히 나를 바라보던 리바이의 표정에 불안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리 와, 아니야. 이리 와.”
원진은 이미 제어장치를 꺼내 들고 있었다.
난 그 장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가오려는 리바이의 손목을 붙잡고 그를 밖으로 이끌었다.
원진은 저 제어장치를 내게 절대 넘기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칼 같으면서 저 괴물한테는 안 그러잖아. 너는 저 괴물이 눈물 한 방울 흘리면 네 손으로
제어장치를 부술 애야!’
리바이가 나나 원진을 공격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다. 그때 그것도 앤더슨을 당장 잡아먹지는
않았으므로.
무엇보다 저 제어장치가 없었다면 원진은 내가 리바이 근처로 가는 것에도 거품을 물었을 것 같았다. 그에게도
스스로를 방어할 최후의 보루를 남겨두는 편이 모두에게 좋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실험실 밖으로 발을 내디뎌본 리바이는 내게 끌려가는 내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뒤를
따르면서도 책상을 만지고, 연필과 펜 등을 주워서 건드리려고 했다.
멀지 않은 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실험실에 도착하니 리바이의 손에는 펜과 열쇠고리와 인형이 한가득 쥐어져
있었다.
“안 돼.”
뺏으려고 하자 리바이는 손에 힘을 주고는 웅크렸다. 나는 한숨을 쉬고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펜과 같이 단단한
물건을 빼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열쇠고리와 인형만은 두었다. 이걸로 뭘 할 수 있겠는가?
“알았어, 안 뺏어. 너 가져.”
계속해서 알려주자 그제야 리바이는 손의 힘을 풀었다.
“저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쇠로 된 열쇠고리가 찌그러져 있었다. 나는 원진이 그걸 보지 못하도록 리바이의
열쇠고리를 침구 밑으로 밀어 넣었다. 쉿. 하고 입술에 검지를 대면서.
리바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곧 시무룩해졌는데,
“키는 줘야지.”
내가 리바이의 웅크린 품을 뒤져서 카드키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작게 코팅된 키의 촉감이 좋아서였는지
아니면 나갈 때 이것이 필요하다는 걸 인지하고 가져간 건지는 모르지만 리바이의 손에 맡길 수는 없었다.
“잠깐 자고 있어. 알았지?”
리바이의 일과는 먹고, 자고, 나와 잠깐 동안 시간을 보내는 게 전부였다. 아마 지루했을 테다. 리바이가 내
손목을 잡고 끌어서 나는 고개를 저어야 했다.
“원진을 보내고 다시 올게. 알았지? 약속할게.”
내 말을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리바이는 곧 내 손목을 놔주었다.
이번이 리바이의 첫 외출이었다. 정확히는 외출이라고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탄생 직후 작은 공간에
갇혀 살고 있는 리바이에게는 외출이라 느껴졌을 터였다.
그것이 이런 식으로 진행돼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원진이 없을 때 시간 내서 리바이를 적응시키려고
했었는데.
한숨 돌리고 실험실을 나가자마자 내가 마주한 것은 잔뜩 화가 나 있는 원진이었다.
“저 괴물이 어떻게 나온 거야?!”
“괴물이라고 하지 마.”
“넌 그게 중요해?”
“응. 난 중요해. 그리고 말했잖아, 아마 내가 떨어뜨렸나 그랬을 거야.”
원진은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질 못했다.
“넌 왜 그렇게 태평하냐? 저 괴물이 우릴 죽일 수도 있었어!”
“Z 를 보면 당장 벌벌 떠는데 대체 어떻게 우릴 죽인다는 거야?!”
사람들과 오래 섞여본 적이 없는 나는 대화나 언쟁 따위가 항상 피곤했다. 조금이라도 감정이 섞인 채로 말을
하면 진이 다 빠졌다. 정신적인 피로가 꽤 컸다.
“너 전에 앤더슨이 데리고 있던 괴물 벌써 잊었어? 저 괴물이 아니고 그 전 괴물이었다면 우리는 진작 죽은
목숨이었을 거라고!”
전 괴물이라.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지만 나는 리바이가 아니고 전의 ‘그것’이 여기에 갇혀있었다면 내가 카드키를 흘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것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것이었다.
원진이야말로 그것을 본 첫 순간을 잊은 듯싶었다. 원진은 그저 얼어있었지만, 그것을 보았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감탄이나 충격이 아닌 위기감이었다.
그러니 지금 저 안에 갇힌 것이 리바이가 아닌, 그것이었더라면 나는 진작 이곳을 탈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구구절절 내뱉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두어 번 반복한 다음 손을 내저었다.
원진은 씩씩대며 나를 스쳐 지나갔다.
잘 생각인가 싶었는데 방향이 달랐다. 그가 향한 곳은 내가 매일 발걸음 하는 곳이었다. 다름 아닌, 실험실.
마이크를 켠 그가 리바이를 재차 불렀다. 엄밀히 말하면 그건 부름이 아닌 비난이었지만.
“[괴물].”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리자 누워있던 리바이가 퍼뜩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던 리바이는 소리가
너무 컸는지 몸을 웅크렸다.
“뭐 하는 거야?!”
“기다려 봐, 너 지금 속고 있는 거야.”
나는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원진을 밀쳤다.
“내가 그렇게 멍청한 줄 알아? 아무런 생각 없이 무작정 저걸 싫어하는 줄 아냐고.”
“그럼 이유가 뭔데?! 정당화하려 하지 마, 넌 처음부터, 리바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저 괴물이 네가 없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나 알아?!”
삐익-
마이크 앞에서 언쟁을 벌이다가 소름 끼치는 이명에 나와 원진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마이크는 어느새 꺼져
있고, 실험실 유리 바로 앞에는 리바이가 서 있었다.
“너 속고 있는 거야, 저건 괴물이 맞다고!”
“소리 꺼!”
여러 차례 마이크를 끄려 했지만 원진은 작은 마이크를 움켜잡고 틈을 내주지 않았다. 내가 주먹을 들자 원진이
소리쳤다.
“그래, 쳐! 치라고! 죽이라고!”
나도 모르게 멈칫했던 순간, 그가 나를 거세게 밀쳤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등과 어깨가 거세게 벽에 부딪혔다.
저 새끼가 진짜.
망설였던 것이 무색하게 주먹을 쥐고 달려들려는 순간이었다.
쿵.
쿵 쿵.
무언가 실험실 벽을 두드려 댔다.
쿵.
원진의 멱살을 잡은 채로 나는 멈추어 서서 옆을 돌아보았다. 리바이였다.
리바이는 내가 원진을 때리려던 것보다 더 강하게, 어쩌면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분노와 절박함을 담은 채
실험실 유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유리가 깨지잖아!”
원진의 외침에 나는 바로 마이크를 켰다.
“[리바이, 그러지 마].”
그러나 리바이는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 크게 흔들리고 말았던 유리에 어느 순간 크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뭐라 설명하지 못할 꺼림칙한 소리와 함께 유리 벽에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화급히 그곳을
나가 실험실로 뛰어 들어갔다.
너무 당황해 중간에 카드키를 한 번 떨어뜨렸지만, 간신히 리바이가 유리창을 완전히 부수기 전에 들어올 수
있었다.
“리바이!”
거세게 유리창을 두드리던 리바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피가 묻어있는 손을 뻗어 날 끌어안았다.
“흐으- 으- 흐, 로. 로오.”
“난 괜찮아. 이것 봐.”
내 품에 들어오기엔 너무 벅찬 그를 끌어안고, 나는 조금만 더 지체했더라면 완전히 부서졌을 유리 벽 너머로
원진을 쏘아봤다.
괴물이라고?
리바이는 애정을 안다. 기호가 있고, 염치가 있고, 분노에 몸을 떨고 기쁨과 보람에 한껏 눈을 크게 뜬다.
“이리 와, 손 봐.”
더듬더듬 날 안으려는 리바이를 떼어내고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
그의 주먹 관절에는 분명 피가 묻어있었지만, 내가 살짝 닦자 곧 멀쩡한 살이 드러났다. 그럴 리가 없는데.
“로오. 로. 로.”
애달프게 날 부르는 리바이의 손등과 관절을 재차 살폈지만, 분명히 있어야 할 상처가 없었다. 이쯤 되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리바이는 내게 붙잡혀주지 않고 나를 꽁꽁 옭아맸다. 윽. 숨쉬기가 힘들었다.
“아니야. 난 안 아파.”
“흐으. 으.”
어떻게든 내게 마주 닿으려는 리바이의 품에서 녹을 듯한 감각에 감싸인 채 있노라니, 문득,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날 대신해 분노해주다니, 그런 존재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조금 밀쳐진 것 가지고 리바이는 유리창을 반쯤 부수려 했다. 그대로 두었다면 산산조각 난 유리를 밟고 원진과
나를 떨어뜨려 놨을 것이다. 멍도 들지 않을 충격에 불과했는데.
“난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더듬더듬 날 만지는 손길과 내 위로 떨어지는 무게가 이상하게 버겁지 않았다.
“원진, Z 에 대한 화풀이를 리바이에게 해서는 안 돼.”
소란이 끝나고, 리바이를 재운 다음 나는 원진을 찾아 그렇게 말했다.
원진은 탈출을 위해 배낭을 꾸리고 있었다. 식량을 넣던 원진은 날 쏘아봤다.
“믿기지가 않아.”
“뭐가.”
“네가 저것한테 홀린 게.”
벽에 대고 말해도 이것보다는 덜 답답할 것 같았다.
포기한 내가 몸을 돌리려던 차,
“속고 있는 거야. 정말로.”
하며 그가 쏘아붙였다.
이쯤 되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어떻게 속고 있다는 건지 말해봐.”
“넌 네가 없을 때의 괴물의 모습을 봤어야 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마치….”
원진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가장 끔찍한 악몽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고개를
저었다.
“힘도 못 쓰고 Z 도 못 죽이면서, 꼭 나는 먹잇감 보듯, 아니면 무생물 보듯 한다고. 나라고 시도를 안 해본 것
같아?”
배낭을 닫고 원진은 내게 물었다.
“난 저게 정말로 약한 건지, 아니면 약한 척을 하는지 모르겠어. 유리창에 한 짓을 봐.”
리바이는 태생적으로 우리와 악력이 다른 존재였다. 겁쟁이 사자지만 무시하지 못할 발톱과 송곳니를 가진
것처럼, 어쩌면 리바이가 원한다면 당장 우리를 해할 수도 있겠지. 중요한 것은 그가 그럴 의사가 없다는
점이다. 할 수 없는 일과 하지 않는 일을 원진은 왜 구분하지 못하는 걸까?
“눈이 소름 끼쳐. 내가 반대편 유리로 가잖아? 그러면 아무리 소리를 죽이고 가도, 심지어 내게 등 돌리고
있는걸 확인했는데도 어느 순간 내 앞에 와있어. 그리고 날 빤히 응시하지. 마치 어떻게 해야 탈 없이 날 없앨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고 네가 오는 걸 대체 어떻게 듣는지는 모르지만, 항상 네가 오기 바로
전에 자리로 돌아가 있어. 거기서는 네가 보이거나 들릴 리 없는데도.”
원진은 환멸과 거부감을 숨기지 못했다.
“난 저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소름 끼치는 쓰레기야.”
리바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나 역시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꼭 리바이가 아니더라도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니었던가?
내 눈이 가려지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그간 원진의 행동을 알아서인지 그의 말을 완전히 믿기는 어려웠다. 리바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혐오를
감추지 못했던 원진이다. 어쩌면 증오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원진에게 리바이는 작은 명분 하나를 쥐여 준
것뿐일지도 모른다.
리바이가 나를 속인다고? 왜?
속인다니, 당장 물컵을 갖다 대도 물도 마시지 못하는 리바이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리바이.”
나는 반 이상 금이 간 유리 앞에서 그를 불렀다. 정말로 원진 말대로 그가 나를 들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마이크가 켜지지 않은 걸 확인하고 나는 그를 불렀다. 리바이는 등 돌린 채 내가 두고 간 성경을
거꾸로 읽고 있었다. 그 위로는 찌그러진 열쇠고리가 놓여 있었다.
“리바이.”
불렀지만 반응이 없어서, 나는 크게 재차 그를 불러야만 했다.
어쩌면 유리 벽에 금이 가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내가 세 번을 내리 부르자 리바이는 주위를 두리번대다가
나를 발견했다. 그러고는 밝아진 얼굴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우리보다 청각이야 더 좋을 수는 있겠지만 지금 리바이를 보니 원진이 조금 과장한 걸지도 모른다.
원진이 내뱉는 ‘쓰레기’라는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금이 가지 않은 유리 벽 한편에 손을 얹었다.
넌 쓰레기가 아니야, 리바이.
언젠가 그가 날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궁금해하는 많은 것을 알려주고, 그에게 수많은
것들을 경험시켜주고 싶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내면의 우주를 공유하고 싶었다.
넌 나와 같다고. 사람이야.
고개를 갸웃거리던 리바이는 내가 손을 대고 있는 유리 위로 제 손을 올렸다. 나보다 한 마디 이상 차이가 나는
큰 손이었다. 내가 뭐라고 읊조리는지도 모르면서 리바이는 평소와 달리 입가에 힘을 푼 상태였다. 리바이는
하염없이 나를 응시했다. 샛노란 호박색 눈으로. 아늑하게 켜지는 주홍불 같은 온기였다.
인간됨이란 무엇일까.
나는 인간에게는 단순한 탄생 외에도 무언가가 더 있으리라 믿었다. 이치와, 논리, 이득과 상관없이 이성을
뛰어넘는 불길이 안에 타고 있노라고. 그래서 우리는 잔혹함 뒤의 자비를, 이기심 뒤의 희생을 보일 줄 알았다.
배양되었다고 해도 리바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감정을 느끼고 공감할 줄 알며 순간의 소중함을 아는 존재였다.
원진은 벌써 배낭을 꾸렸다. 내가 더 질질 끌 수 있는 기간은 이제 고작 며칠일 것이다. 리바이가 유리창을
거의 부수며 건재하다는 걸 입증했으니 어쩌면 곧 출발하자고 부추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전에 리바이와
함께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설령 그가 나와 함께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리바이가 당장 Z 의 손에 찢기지
않는 길을.
로. 로오오.
리바이가 입을 열어 날 불렀다. 동그랗게 열리는 모양 좋은 입술. 유리 벽에 막혀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나를 부르고 있었다.
* * *
리바이는 그날 이후로 실험실을 나오게 되었다.
물론 원진은 처음에 노발대발했지만, 리바이를 이 연구소에 두고 갈 예정이고, Z 에 대응할 수 있도록 실험실
밖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원진은 내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리바이를 데려갈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물러난 듯했다.
어떻게 나와 리바이를 떼어놓을지 고민하던 와중, 내가 먼저 리바이를 이곳에 남기고 가겠다고 하니 어느 정도
양보를 한 것이다.
유리창을 저 꼴 만든 것치고 리바이는 너무나 온순했다.
얌전한 게 원래의 성격인 듯싶었다.
리바이는 이제 내가 가리키는 곳에서 잘 기다릴 줄도 알았다. 캐비닛과 물건들을 끌어모아 만든 미로도
수월하게 빠져나왔다. 바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장애물을 피해와서, 나는 리바이가 아예 시작을 하지 않은
줄로만 알았다.
처음에는 잔뜩 경계하고 가시를 세웠던 원진도 리바이가 온순하다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할 정도였다.
내가 보기에는 변덕이 심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것은 리바이가 아니라 원진이었다.
리바이가 근처에만 와도 기겁을 하더니, 이제는 오히려 시비를 걸어 댔다.
짝!
“원진!”
날카로운 소리에 내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리바이는 제 손목을 쥐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원진의 손에는
크래커가 들려있었다.
나는 내 몫의 크래커를 전부 리바이에게 주었기 때문에, 아마 그는 자연스럽게 원진의 것에 손을 뻗었을 것이다.
당연히 원진이 자기 것을 나눠 줄 리 없다.
원진이 세게 후려친 리바이의 손등을 살폈다. 소리만 컸는지 붉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속이 상했다.
원진이 쏘아붙인다.
“이런 건 초기에 잡아야 해. 남의 음식에 손을 대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식량은 곧 생존이었고, 약탈자가 아니라 동등한 협업 관계라면 절대로 먹을 것에
손대서는 안 됐다.
내 뒤로 숨어드는 리바이를 붙잡고 나는 여러 차례 설명했다. 리바이는 요즘 말이 늘었고, 내 말도 꽤
알아듣는 듯 보였다.
“리바이, 잘 들어.”
잘 들어야만 했는데 리바이는 그냥 내 손에 붙잡혀 서 있는 것 자체가 좋은 듯했다.
“음식에 손을 대면 안 돼. 알았지? 절대로, 안 돼.”
“로. 로.”
“이리 와, 나 부르지 말고 가만히 서.”
“그래서 잘도 가르치겠다.”
“넌 조용히 해.”
나는 다시 리바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절대로 안 돼. 이해했어?”
이해했으면 고개를 끄덕여야지.
나는 리바이의 턱을 부드럽게 잡고 손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시켰다. 부드러운 인형처럼 리바이의 고개가
주억여진다.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리바이는 정말이지 순했다.
“다시. 음식에 손대면 안 돼. 알았지?”
끄덕끄덕.
물론 내가 억지로 시킨 거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됐다.
내가 웃자 리바이도 날 따라 입가를 움직였다. 어제부터 보이던 변화였다.
“이렇게 웃는 거야. 이렇-게.”
그의 입가에 손가락을 대고 나는 슬며시 리바이의 입꼬리를 올려주었다. 미려한 입술이 우스꽝스럽게
올라간다.
“이렇-게.”
여러 번 올려주자 리바이의 눈가가 풀어진다. 그러다가 괜히 좋은지 또 내게 안겼다.
“떼어놓고 이리 와, 이로. 할 일 해야지.”
“금방 가.”
원진이 말하자마자 리바이가 바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그에게서 날 숨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비잉
돌더니 날 감싸 안는다.
“지랄하네.”
원진은 그런 말을 남기고 갔다.
“사이좋게 지내야지.”
그렇게 이야기했다가 나는 곧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사이좋게 지낼 필요가 있을까. 곧 헤어질 텐데.
나는 한숨을 쉬고 리바이를 실험실 안까지 데려다주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실험실 밖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그래도 잠은 여기서 자야 했다.
“잘 자, 리바이.”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리바이가 로- 하고 날 불렀다. 그러더니 입가를 길게 찢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하.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 웃음소리 때문이었는지 리바이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나는 한참이나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매일이 즐거웠다. 동시에 리바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오면서 나는
점차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아직도 가르칠 게 많은데.
* * *
리바이를 재우고 돌아왔을 때 원진은 아직도 깨어 있는 상태였다. 손에는 모서리가 닳은 사진 한 장이
들려있었다. 답답해서인지 긴장해서인지 요즘 원진은 사진 보는 일이 잦아졌다.
내가 그의 옆에 앉자 원진은 삐친 티를 내면서도 자리를 비켜주었다.
원진이 부러웠다. 그가 몇 살이 되든 간에 그가 부모님의 얼굴을 잊을 일은 없을 것이다. 저 사진이 있는 한은.
“나갈 수 있겠지.”
사진을 보던 원진이 한숨 쉬듯 물었다.
“모르지.”
내가 최선을 다해 해줄 수 있는 답은 거기까지였다.
원진은 종종 내게 이렇게 기대고는 했다. 내게서 위안과 위로와 확신을 가져가고는 했다. 내가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에 놓였음을 때때로 잊는 것처럼.
“기대한 게 많아서 더 저 괴물이 싫어지나 봐.”
“무슨 기대. 괴물이라며 리바이가 나오기 전부터 싫어했잖아.”
“그래도, 조금만 버티면 쟤가 Z 를 조종해서 우리가 안전이 빠져나갈 수 있게 될 줄 알았어.”
“못 들어주겠네.”
나는 웅얼거리는 원진을 두고 내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원진은 정이 많다. 인간적이다. 욕심이 많은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감사할 줄도 알고 남의 것을 탐내지도
않는다. 아는 것도 많다. 리바이의 탄생에 내가 피로 0.01% 기여했다면, 99%는 연구진이 그리고 나머지
0.99%는 원진이 이룬 성과였다.
내가 그간 알고 있던 길이 야생에서 혼자 살아남는다는 선택지 하나뿐이라면, 원진을 통해 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선택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원진이 가끔 스스로를 안타깝게 여길 때 너무 짜증이 났다. 그야말로 구질구질하고 꼴 보기 싫었다.
“자려고?”
“어.”
“잘 자.”
원진은 속도 없이 그렇게 인사했다. 원진이 싫지만 완전히 밉지는 않았다. 좋지만 호감이 생기지는 않았다.
원진은 내가 내키면 쉽게 버릴 수 있는, 편한 동반자다.
나는 잠을 얕게 자는 편이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고, 심지어는 인기척이 없어도 새벽에 불현듯 눈을 뜨고는
했다.
오늘이 그런 때였다. 곧 목숨을 걸고 여길 탈출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불안감에 깬 걸지도 모른다.
이리저리 뒤척이는 건 시간 낭비였다. 마침 일어난 김에 계획을 한 번 더 검토하고, 빠뜨린 것이 있나 보는 게
나았다.
몸을 일으킨 나는 리바이를 확인할 생각으로 실험실로 향했다. 그러나 내가 실험실 문 앞에서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원진이었다.
이른 새벽, 원진이 일어날 시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곳에 볼일이 있던 것도 아니다.
“여기서 뭐 해?”
“저것도 체크하려고.”
내가 묻자 원진은 그렇게 말하고 날 지나치려 했다.
“체크? 무슨 체크?”
“저 괴물이 또 멋대로 나오는 건 아닌지, 갑자기 손톱이 자라면서 난동을 부리는 건 아닌지 체크했다, 왜?!”
방어적인 태도였지만 리바이가 유리를 저 꼴로 만들어 놨으니 원진의 말이 납득 가기도 했다.
원진은 별거 아닌 것 가지고 캐묻는다며 구시렁대며 날 스쳐 지나갔다. 바통 터치하듯 내가 실험실 안으로
들어가자 리바이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안 자고 있었는지 졸린 기운이 없었다. 평소와 달리 비척비척 일어난 리바이는 내가 실험실 문 앞에 섰을
때부터 꼬리를 흔들 기세로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로. 로.”
들어가자마자 날 껴안으며 리바이는 내 볼에 침질을 했다. 그런 리바이를 밀어내고 힘을 주어 팔에 상처를
내었다. 칼을 제대로 떼지도 않았는데 리바이는 재빠르게 내 팔로 달려들었다.
“위험하게.”
타박하며 그를 밀어 댔다. 내가 강경히 밀자 리바이는 결국 밀려났다. 그러면서 내 팔꿈치를 따라 흐르는 피를
안타까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며 끙끙댄다.
“기다려.”
칼을 갈무리하고 벽에 등을 댄 채 자리를 잡았다.
“아직 아니야. 기다려야지.”
리바이는 이제 하울링 비슷한 소리를 낼 줄도 알았다. 작게 키득키득 웃다가 팔을 내밀자 허락임을 알아챈
리바이가 와락 달려든다.
리바이는 바닥에 떨어진 내 핏방울까지 모조리 싹싹 핥아먹었다. 뭐, 그것까지는 괜찮다 치지만, 약간
걸리는 것은 자꾸만 내 허벅지와 허리, 다리에 비벼지는 리바이의 하체였다.
그는 아직 수치심이란 것을 몰랐다.
제대로 웃는 방법도 모르니 어쩌면 수치심이 없는 게 당연한 상태일지도 모르지만, 수치가 없어서인지 그는
자신의 욕구를 조금도 숨기지 못했다. 발기하면 당연히 발기한 것을 들이대고, 내 피를 빨고 몽롱하게 날
바라보다가 기분이 좋아졌는지 몸을 바짝 비볐다.
육체가 맞부딪치고 비벼지니 당연히 리바이의 그곳에도 자극이 갈 수밖에 없었다.
악순환이었다.
리바이는 끙끙대며 내게 몸을 붙여왔다. 바지를 입히긴 했지만 저렇게 불뚝, 눈에 띄게 서서야 안 입으니만
못하다. 다행인 것은 아직 리바이가 아무것도 알지 못해서, 허리도 추켜올리지 않고 그저 비벼대기만 한다는
점이다.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실험실 밖을 확인했다. 원진은 자기가 자던 곳으로 돌아간 상태였으니 우리 둘뿐이다.
나는 리바이가 원진의 앞에서도 이럴까 걱정이 됐다.
나야 그러려니 한다지만, 원진은 정말 길길이 날뛰고 온갖 혐오를 다 드러낼 것이다.
“그만.”
이제 리바이는 ‘안 돼’와 ‘그만’을 어느 정도 이해한 듯 보였다. 아니면 단순히 내 피를 마셔서 몽롱하고
들뜬 기분이 든 걸지도 모른다. 나를 따라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은 리바이는 가늘게 눈을 뜬 채로 제 입술을
핥았다.
“로오.”
그가 나를 부른다.
그럴 때마다 리바이의 아래가 한 번씩 들썩이고 저 혼자 난리도 아니었다.
리바이가 더 치대서 내가 더 부끄러워지기 전에 사태를 종식해야 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너 이러면 갈 거야.”
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자꾸 세워서 치대면 내가 간다- 라는 공식을 주입하고자 함이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리바이는 바로 따라 일어서더니 쫄래쫄래 내 뒤꽁무니를 따라왔다. 문을 열고 리바이를
밖으로 이끌었다.
이제는 루틴이 되어버린 훈련 일정을 다시 처음부터 밟았다.
장애물을 다르게 설치한 미로를 넘어오게 하고, -리바이는 펜 하나 떨어뜨리지 않았다- 기다려, 와 안 돼를
복습했다.
그리고 새벽 내 목이 말랐을까 물을 떠서 입에 대주었다.
처음보다는 많이 얌전해졌지만 리바이의 움직임에 팔이 이리저리 흔들려서 물이 흐르고 말았다.
혀를 차고 옷소매를 걷었다. 리바이의 손가락 모양으로 난 멍이 시야에 들어온다. 피 때문이든 물 때문이든
항상 리바이의 손에 붙잡히는 내 팔과 손에는 멍이 끊이지 않았다.
목울대가 세차게 움직이는 걸 보고 나는 재차 물을 떠주었다.
입가에 대고 리바이가 또 바로 입술을 누르길 예상하는데, 놀랍게도 리바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목을 다 축인
것 같지도 않았다. 물을 다 마실 때쯤 리바이는 항상 움직임이 느려졌으니 말이다. 조금 전에 코를 박던 거로
봐서는 네 번은 더 떠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 마셨어?”
갸웃거리며 물을 털어냈다. 그런데 리바이에게서는 변화가 없다. 얼마 전부터 이따금씩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했는데 말이다.
“다 마셨냐니까.”
물로 흥건한 바닥을 닦으며 리바이를 올려다보았다. 리바이의 시선은 다름 아닌 내 팔에 꽂혀있었다. 피를
갈구할 때와의 눈과는 달랐다.
“리바이?”
리바이의 턱을 잡아 날 보게 했다.
호박색 눈이 마주했을 때, 리바이의 미간이 좁혀지더니 은백색 눈썹이 불쌍하게 바닥으로 기울었다.
끄으응.
입술이 열리고, 긴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주 듣는 끙끙 소리와는 약간 달랐다. 제 무리를 찾는 늑대가
길게 하울링하는 것처럼 리바이가 내는 소리는 꼭 짐승의 애처로운 울음소리 같았다.
리바이의 시선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내 팔이다. 멍과 자상과 상처가 가득한 팔.
“대체 왜 그래.”
끄응 끙. 끙.
리바이가 내게서 떨어졌다.
떨어져, 저리 가, 안 돼, 일어나야지, 기다려 등의 말 없이 리바이가 자발적으로 먼저 몸을 일으킨 것은
처음이었다.
비척비척 내게서 멀어진 리바이는 내가 임시로 만들어준 잠자리로 가더니 털썩 몸을 눕혔다. 천에 얼굴을 묻은
채로.
“리바이. 왜 그래.”
내 상처를 봐서일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미안해하는 걸까?
고민하던 나는 주저하다가 결국 그곳을 나왔다. 불렀지만 리바이가 반응이 없기도 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나로서도 알 도리가 없던 탓이다.
“이로, 너 무슨 일이라도 당했어?”
실험실을 나오는데 원진이 나를 붙잡고 물었다.
“아니.”
“나가는 게 긴장돼?”
“아니.”
“그러면 무슨 일인데.”
“뭐가.”
“네 표정!”
나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잠깐 상심한 것뿐이겠지.
리바이가 미안해해도 어쩔 수 없다.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죽을 테다. Z 를 먹지도 못하고 식량이 충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나 원진을 잡아먹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리바이도 곧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겠지.
곧 털고 일어나리라 생각한 나는 원진과 함께 계획을 되짚는 데 전념했다.
예상과 다르게 리바이는 바로 밝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마셔.”
리바이가 내 피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준비는 거의 끝나서 이제는 막바지 단계에 달해있다.
리바이가 혼자 먹이만 구할 수 있게 훈련하면 되었다. 그런데 리바이는 내가 떠나기 전부터 굶어 죽을 계획인
듯싶었다.
“리바이, 먹으라니까, 흐르잖아.”
붉은 피는 팔을 타고 흘러 팔꿈치에 동그랗게 맺히고 바닥에 떨어져 흔적을 남겼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나는 애가 탔다.
내가 실험실 안으로 들어오자 반색하며 달려왔던 리바이는, 손목에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시들어가는
화초처럼 비실비실 구겨지더니 내게서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다니, 리바이가 내게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리바이, 왜 그래, 응?”
피가 아깝지만 안 마신다는데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부를 때마다 뾰족한 귀가 쫑긋쫑긋 섰다.
리바이는 온몸에 힘을 다 준 채 고집스레 내게서 등을 돌렸다. 힘을 풀면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오게 될
스스로를 억제하는 것처럼.
나는 리바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떠올려보았다.
“물 마실래?”
떠주자마자 리바이가 달려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 손바닥에 코를 박는 리바이의 동그란 머리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목을 축이던 리바이가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이코, 부딪힐 뻔.
머리를 피하는데 리바이는 아차 한 것처럼 몸을 웅크리더니 아까와 다름없이 비실비실 들어가 누웠다.
“대체 왜 이래, 너 이러면 안 돼.”
곧 이곳을 떠날 예정이었다. 리바이가 이래서는 안 됐다. 이러면…… 지금 이 상태로 나는 리바이를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원진이 문제가 아니었다. 원진은 동반자일 뿐으로, 내가 그와 함께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그걸로 될 일이다. 그리고 나는 원래 살던 대로 숲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Z 와 생존자를 피해서 사냥하며
그렇게 연명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리바이는 생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리바이야 Z 에게 물려도 변하지 않고, 어쩌면
인간과 생물학적으로 다른 리바이를 Z 가 공격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리바이가 조심성 없이 행동하거나 함정에 빠져서 내가 죽을 수도 있었다. 아니, 죽을 게
뻔했다.
만약 죽어야 한다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죽고 싶었다.
아니, 아니지.
원진에게 홀린 게 틀림없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 다시 처음부터 생각하기 시작했다.
곧 식량이 떨어진다.
그전에는 이곳을 나가야 했다.
그건 피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끄응, 끙.”
하지만 리바이를 두고 간다고?
그럴 수는 없었다. 리바이는 나와 함께 갈 것이다.
어떻게든 리바이가 나와 동행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했다.
“그런데 네가 이런 상태면 내가 어떻게 널 데리고 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곧 기력이 저하되어 위기 상황에 몰리거나 Z 를 물리칠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내
살점을 떼서 먹이면 먹였지 나는 나보다 한참 크고 무거운 리바이를 업고 다닐 자신이 조금도 없었다.
“일어나자, 리바이. 날 봐.”
옹송그린 리바이 앞으로 얼굴을 내밀자 이제 리바이는 눈까지 꾸욱 닫았다.
아.
연구실에서 읽었던 육아 서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리바이가 설마, 반항기인가?
……말도 안 돼. 에이.
일단 리바이가 쉬게 두기로 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니 나를 울먹울먹 바라보고 있던 리바이와
눈이 마주쳤다. 마주치자마자 리바이는 화들짝 놀라며 또 고개를 숨겼다. 거북이 같았다.
지금으로서는 리바이에게 시간을 주는 것 말고 방도가 없는 듯 보였다.
잡지며, 이제는 쓸모없어진 바인더와 종이며 하는 것들이 복도에 널려있었다. 원진이 그것들로 팔과 종아리
보호대를 만들던 중이었다.
“안에서 대체 뭘 하길래 표정이 그래.”
“뭐가.”
“너 요즘 수상해.”
“수상할 게 뭐가 있어.”
“대체 거기서 뭘 하는 거야?”
“알 거 없어.”
냉정한 내 말에 원진이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리바이가 저러면 귀여워서 온갖 걸 다 해주고 싶을 테지만
원진이 저러니 못생긴 붕어 같았다.
“네 것도 만들어야지.”
“알아.”
원진 옆에 주저앉아 보호대를 만들었다. 이것만 다 하고, 짐을 확인한 후에 한 번 더 실험실에 갈 생각이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두 시간이 지나있었다. 정말로 리바이는 뭘 먹어야 했다. 하루 종일 굶지 않았는가.
내가 몸을 일으키자 원진이 ‘또 가게?’ 하고 물었다.
“알 것 없어.”
그런 말만 남기고 나는 실험실로 들어갔다.
뭘 하고 있었는지, 등을 보인 채 앉아 있던 리바이는 내가 들어서자 벌떡 일어났다.
리바이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에 나는 멈추어 섰다. 그것은 분명한 미소였다. 이렇게 웃으라고 내가 몇 번이고
입꼬리를 올려주었는데 잘되지 않던.
뭐든 반복된 노출과 학습이 중요하다던 책 구절이 떠올랐다.
리바이는 웃음을 깨우친 게 아니었다. 그만큼 내가 그의 앞에서 수도 없이 미소를 보였음을, 그래서 그가 나의
미소를 배운 것임을 나는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리바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분명 안도였는데, 그런데 죽음의 위기를 넘긴 뒤에 느끼는 그런 안도와는 달랐다.
이 감정은 오히려 벼랑 끝에 몰렸을 때, 당장이라도 검은 Z 의 손톱이 내 살갗을 긁을 것만 같을 때 느끼는
위기감에 가까웠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온몸이 당장이라도 튀어 오를 것처럼 긴장한 상태.
그러나 잔뜩 수축한 몸의 근육과 달리, 내가 느끼는 것은 안도감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무슨
기분일까.
나조차도 알 수 없어서 그저 리바이의 이름을 부르기만 했다. 여러 차례. 몇 번이고.
“로. 로오오. 로.”
화답하는 것처럼 리바이가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우두커니 선 내게 다가와 이마를 비볐다.
손끝이 간질거렸다.
리바이가 내게 달려와 안기는 것은 이제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 되었다.
리바이가 이러면 나는 백사 같은 머리를 쓰다듬고, 내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스치는 것을 느끼고
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어쩐지 주저하게 되어서 나는 손을 여러 차례 접었다 펴길 반복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로오.”
리바이가 나를 길게 불렀고, 그를 마주 껴안으려던 차였다. 내 머리에 코를 비비고 나서 항상 그랬듯이
리바이의 코와 입술이 내 목을 따라 내려가려던 때, 갑자기 리바이가 나를 밀어냈다.
“리바이?”
영문을 모르고 그를 부르자 리바이는 갑자기 멀찍이 물러섰다. 또 저 얼굴. 아차, 낭패다 하는 얼굴.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리는 개가 가끔씩 하는 표정.
바짝 굳은 리바이는 내가 한 걸음 뗄 때마다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러고는 미간을 좁힌 내가 다가서자 펄쩍
뛰더니 또 제가 몸을 눕히는 잠자리로 잠수하듯 뛰어들었다.
리바이의 키는 6 피트 5 가 조금 안 됐다. 그런 리바이가 매트리스 위에 실험용 가운과 옷가지, 담요가
옹기종기 뭉쳐있을 뿐인 잠자리에 머리를 박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리바이 나름대로 내게서
숨는다고 숨은 것 같은데, 뇌가 날아가서 몸만 움직이는 Z 도 저건 발견할 테다.
“자꾸 왜 그래.”
슬슬 내 목소리에는 짜증이 서리기 시작했다.
좋아, 이래도 안 먹나 보자.
칼을 든 나는 숨을 고르고, 곧 있을 고통을 예상했다. 그리고 힘주어 눌렀다.
얼마나 세게 그었는지, 살을 벨 때 종이가 넘어가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세게 울릴 정도였다.
“아야…….”
조금 아팠다.
인상을 찌푸린 채로 나는 베인 팔의 주먹을 세게 쥐었다. 힘줄이 상하지는 않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세게
그었기에 피는 빠르게 배어 나와 곧 팔꿈치를 타고 바닥에 흘렀다.
가끔가다 핏방울이 떨어질 때는 똑똑 하는 소리가 울렸었다. 그러나 세게 그은 나머지 물을 흘리는 것처럼 젖은
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 때문인지 혈향 때문인지, 잠자리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리바이가 고개를 바로
치켜들었다.
“이리 와, 와서 마셔.”
내 말을 분명히 들었으면서도 리바이는 고집스레 움직이지 않는다. 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그 소리가 리바이를 압박했다. 초침처럼, 곧 터질 폭탄의 타이머처럼.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깊게 그은 상처가 쓰라렸다.
그의 고집이 선천적인지 아니면 상황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전자라면 아마 내 피에서 왔을 것이다.
고집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팔 밑으로 벌써 작은 피 웅덩이가 생겨있었다. 리바이는 내 피 한 방울도 허투루 남기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것까지 싹싹 핥아먹더니 지금은 저런다.
나는 다시 주머니를 뒤졌다. 들으란 듯 부스럭거리며 내가 꺼낸 것은 칼이었다. 먹을 때까지 베고 벨
생각이었다.
큰 도박이었다.
리바이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매일 같이 그어 대는 것치고 내 상처는 놀랍도록 빨리 아무는
편이었다. 원래는 이러지 않았다. 어쩌면 리바이의 체액 때문인지도 모른다. 확실하진 않았다. 연구 자료
어디에도 리바이의 체액에 치유 효과가 있다는 말은 없으니까.
하지만 내 팔이 나름 성한 것은 리바이가 매번 핥은 덕일 거라고 나는 혼자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리바이가 이번에도 내 피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상처는 빨리 아물지 않아 피 냄새가 날 것이다. Z 는 후각보다
청각이 뛰어났지만 피 냄새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한숨을 쉰 나는 칼날을 살갗에 댔다. 주욱 그을 생각이었는데,
“로! 로오, 이로! 이로!”
앗, 깜짝이야.
어떻게 알았는지 리바이가 튀어 올랐다. 그러고는 팔에 대고 있던 내 칼을 노려보더니 흐어엉 하는 소리를 내며
내게 안겼다.
정확히는 날 억세게 끌어안았다. 리바이의 체격으로 이런다면 어떤 각도로 봐도 내가 그를 안은 것처럼 보일
리는 없을 테다.
“이거 놔.”
리바이가 엉겨 붙어도 나는 칼을 든 손을 치우지 않았다. 그는 피범벅인 내 팔과 바닥의 작은 피 웅덩이를
번갈아 보더니 나를 애처롭게 내려다봤다.
그의 입가에 팔을 냅다 들이댔다.
“마셔. 마셔야 나랑 같이 가지.”
결국, 이긴 것은 나였다. 리바이는 내 피의 유혹을 참지 못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면서도 내가 손에 단단히 힘을 주고 풀지 않자 리바이는 내 팔에 입술을 묻었다. 그러고는 언제
거부했냐는 듯 게걸스레 빨고 핥기를 반복했다.
리바이에게는 수치나 자존심 그런 게 없었다. 뭐, 그거야 지금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다 비슷하겠지만 적어도
바닥에 떨어진 육즙까지 핥아 마시지는 않을 테다. 그러나 리바이는 그렇게 했다.
큰 몸을 바짝 낮추고, 들짐승처럼 코를 바닥에 댄 채 내가 흘린 피를 전부 핥아 마셨다.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그러고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리바이의 타액이 닿자 팔은 깊게 그은 것치고는 빠르게 지혈되었다. 그래도 고통은 여전했다. 아픈 팔의
소매를 내리고 나는 가만히 팔짱을 꼈다.
다 먹고 나자 슬슬 정신이 들었을까, 바닥에 몸을 낮춘 채로 리바이가 날 올려다보다가 스윽 시선을 피한다.
리바이는 입맛을 다시면서도 자꾸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안 되겠다, 더 먹여야겠다.
소매를 다시 올리고 나는 팔을 들이밀었다. 지혈이야 됐지만 혀로 몇 번 헤집으면 바로 피가 맺힐 상처였다.
이제 리바이의 기는 완전히 꺾였다.
고집부렸던 것과 달리 리바이는 순순히 입술을 열었다. 얌전히 숨을 몰아쉬며 젖병을 문 아이처럼 내 피를
마시는 리바이를 내려다보았다. 길고 흰 속눈썹이 조명에 물들어 은은히 빛이 났다.
나는 리바이의 뒷머리를 가만가만 쓸었다.
“많이 먹어야 네가 나랑 같이 가는 거야. 알았어? 아무 힘도 못 쓰면 데리고 갈 수 없어. 달리지도 못하잖아.
그러니까 많이 먹고 힘을 내서 나랑 같이 이곳을 나가자.”
“뭐라고?”
온몸이 펄쩍 뛸 정도로 놀란 나는 화급히 몸을 돌렸다.
기척을 감지하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던 나다.
하지만 리바이에게 얼마나 집중했는지, 온갖 바람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들어온 원진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팔려있던 것이다.
“아.”
낭패였다. 내 입술 사이로는 딱 그런 신음이 흘렀다.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원진의 손에는 제어장치와 연구소의 청사진이 들려있었다. 아마 저게 용건이었고, 제어장치가 있으니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너 요즘 이래서 그런 거였구나.”
원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았다. 다시 제대로 말하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원진의
얼굴에는 배신감과 경악이 가득했다.
그 표정이 한층 진해진 것은, 아직도 내 팔에 입술을 묻은 리바이를 그가 제대로 시야에 담은 직후였다.
“너…… 그동안 이 괴물한테 피를 먹였던 거야?”
나라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원진이 이렇게 내가 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과잉반응을 할
때마다 나는 조금 피곤했다.
아예 원진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런 방해나 잔소리 없이 리바이를 기르고 가르치고 훈련하고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겠지. 여유롭게, 리바이와 보내는 그 일 분 일 초를 모두 온전히 누리면서.
그런 의미에서 원진은 내 머릿속 한편에 남은 윤리의식과도 같았다.
아, 아니지.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원진이 없었더라면 이곳에 오지 못했을 것이고, 리바이가 태어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로, 너 왜 이래.”
차라리 평소처럼 크게 소리를 질렀으면 모를 텐데, 원진의 목소리는 잔뜩 떨리고 긴장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나를 어르고 달래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거기서 떨어져, 그만 먹여. 너 이러다 죽으면 어떻게 해.”
“이런 거로는 안 죽어.”
애초에 어느 정도 지혈되던 상처였으며 리바이는 피가 멎는다 싶으면 바로 입술을 뗐다. 내가 어지럼을 느낄
때까지 피를 마시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 선을 나보다 더 잘 아는 듯했다. 고통이 평소보다 강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은 내가 만류하기도 전에 벌써 물러서는 게 리바이였다.
나는 시범을 보이듯 손을 물렸다. 그러자 팔을 반사적으로 따라오던 리바이가 눈을 들더니 나를 확인하고
입술을 물렸다. 붉은 입술이 내 피로 젖어 한층 달아올라 있었다. 그 입술을 혀로 슥슥 핥은 리바이는 또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와 같은 미소였다.
“……너 이거 정상 아닌 거 알아?”
좀비가 가득해서 언제 뒈질지 모르는 세상에 정상 비정상을 찾다니, 대단한 사치였다.
“그리고 네가 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생각해봤어?”
사람 고기 맛을 보고 그것이 변했다던 앤더슨의 말이 떠올랐다.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녔다. 하지만
열여덟 번째 실험체와 리바이가 어떻게 같다는 말인가?
실험실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차이점이 더 많을 것이다.
“우리가 나갔을 때 얘가 사람 피를 찾아 사냥하면 어쩌려고?”
원진은 조용히 말을 쏟아냈다. 평소와 다르게 너무나도 차분한 어조였다.
“그리고……. 데리고 나간다고? 이 괴물을?”
“괴물.”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야가 텅 비는 듯한 환상에 빠졌다.
“괴물. 괴애-물. ㄱ, 괴물.”
괴물이라는 말을 반복한 것이, 원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로 입을 조금 벌렸다. 당장 거친 말이 토사물처럼 쏟아질 것 같았다. 그 더러운 말을
모두 원진을 잘난 얼굴에 새겨버리고 싶었다.
“괴, 괴물.”
그렇게 내뱉은 것은 리바이였다. 리바이는, 쉬운 내 이름조차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알려줘야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안 돼’부터 ‘기다려’까지, 몇 번을 반복해서 알려줬는지 모른다.
거듭 반복하고 나서야 리바이는 학습했다.
그런 리바이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아야.”
리바이는 원진이 붙잡고 있는 제어장치를 보고 중얼거렸다. 아야. 아야.
리바이의 긴 혀가 실수로라도 내 상처를 헤집을 때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고 리바이는
원진의 손과 제 목을 손짓하다가 중얼거렸다. 괴물. 아야. 아야.
온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분노가 갈 곳을 잃은 나머지 손이 아니라 팔, 관절, 그리고 알 수 없는 곳으로
기이하게 퍼져가는 듯했다.
“원진.”
내 부름에 원진이 두 손을 들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무슨- 뭘 의심하는지 아는데, 난 아니야.”
“로오-. 괴물. 괴물.”
“……리바이에게 괴물이라고 했어?”
“나는 고통을 주지 않았-.”
화급히 변명하던 원진이 눈을 크게 뜬다.
“내 앞에서, 리바이 뒤에서 어떤 호칭으로 부르든 신경 안 써. 하지만 적어도 앞에서는, 리바이에게는…
….”
내 목소리는 내가 느끼기에도 분노로 잔뜩 떨리고 있었다. 리바이는 앵무새처럼 ‘괴물’을 중얼거렸다.
“그렇게 부르는 것도 모자라 고통을 준 거야? 리바이가 뭘 했는데?”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라고!”
‘체크’를 한다며 내가 없을 때 실험실로 간 원진이 떠올랐다.
‘저 괴물이 또 멋대로 나오는 건 아닌지, 갑자기 손톱이 자라면서 난동을 부리는 건 아닌지 체크했다, 왜?!’
원진이 나왔을 때, 그답지 않게 힘없이 다가오던 리바이의 걸음을 보고 바로 알아차려야 했다.
“리바이가 널 위협했어?”
“너 지금 속고 있는 거야!”
“널 아프게 하고 죽이려 했어?”
“거짓말이야, 저 괴물이 널 속이는 거라고! 이로, 사람 말을 믿-.”
“대답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내가 소리치자 원진이 날 마주 보고 서서 악다구니를 썼다.
“저 괴물을 믿는 거야?! 사람인 내가 아니라?!”
“괴물이라고? 여기에 진짜 사람이 누가 있어?”
내 눈은 맨들맨들하게 막혀버린, 귀가 있어야 할 자리와 손가락 하나가 뭉텅 잘려 나간 원진의 손을 가리켰다.
원진은 고작 귀가 뾰족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리바이를 배척했다. 리바이가 자아를 찾기 전부터, 꼭 선을
그어서 리바이를 저 너머로 밀어내고 손가락질하는 것처럼.
“지금까지 리바이가 누굴 죽인 적 있어? 나나 너처럼?”
원진의 숨이 거칠어졌다.
“너 미쳤어……. 너 정말로 내가 아닌 저걸 믿는다고?”
“살아 보겠다고 리바이가 누굴 사지로 몰아넣은 적 있을까. 다른 사람의 것을 훔쳐서 제 것인 듯 쓴 적 있을까.
고문하거나 때리거나 빼앗거나 강간했을까. 아픈 사람을 보면서 내 일 아니라며 모른 척한 적 있을까? 응?
답해봐, 원진.”
그놈의 괴물. 그 빌어먹을 괴물이라는 말!
지긋지긋했다. 리바이는 괴물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게는, 리바이 스스로에게는.
“누가 괴물인데?”
“미쳤어.”
원진이 중얼거렸다.
“단단히 홀렸다고.”
너는 저것의 본모습을 모르는 거야.
원진은 저주처럼 그렇게 내뱉고는 제어장치를 들었다. 손가락이 버튼을 누르려 하고 있었다. 안 돼,
리바이는 잘못한 게 없다.
“저것의 본모습을 봐, 네가 볼 때가 됐어!”
“그만해!”
두 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버튼을 누르는 원진에게 바로 달려들어 그의 위에 올라탔다. 세게 바닥이 부딪친
원진은 신음을 내면서도 제어장치를 쥔 손을 풀지는 않았다.
“그거 놓으라고!”
“너나 놔!”
작은 기계 하나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몸싸움이 시작됐다. 밭은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부딪치다가 실수로
버튼을 누를 수도 있었다. 리바이가 고통에 찬 신음이라도 흘린다면 칼처럼 내 등에 내리꽂힐 것이다. 원진을
멈추게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손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원진의 위에 올라타 그의 어깨를 무릎으로 내리찍은 뒤 제어장치를 쥐고 있는 손으로 팔을 뻗었다. 순발력이든
힘이든, 원진은 그동안 항상 내게 밀렸다. 일평생을 연구소에서 살았던 원진과 내내 치열한 사투가 끊이지
않았던 내 삶을 비교하면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이런 힘이 나왔는지, 원진은 악다구니를 쓰면서
그것을 놓지 않으려 했다.
나를 부르는 리바이의 목소리에 힘이 빠지면 빠질수록 내게는 독기가 실렸다. 원진이 기어코 반항한다면 저
빌어먹을 손목을 잘라버릴 요량이었다.
마침내 원진의 손가락을 억지로 펼치고, 제어장치를 빼냈을 때였다.
“그만하랬지!”
무언가가 뒤통수에 내리꽂혔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내 몸이 고꾸라졌다. 뜨거운 피가 목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제어장치를 쥔 채로 나는 원진을 바라보고, 그의 다른 손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원진이 가지고 온,
모서리가 날카로운 바인더였다. 바인더 한구석이 움푹 구겨져 있었다.
“아.”
주춤주춤 그의 위에서 몸을 내린 나는 머리 뒤를 더듬어 확인했다. 붉은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날 죽일 셈이야?
라고 물으려던 차였다. 무언가가 내 앞을 쏜살처럼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 빨라서, 일순간 눈앞에 스친
백색의 머리카락을 봤으면서도 나는 바보같이 그게 늑대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포식자가 분명하다고.
거대한 목울음 소리와 함께 뛰쳐나온 것은 리바이였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내가 원진의 옆으로 몸을 물린 것과 리바이가 세게 달려들어 원진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멀리 밀려난 것, 그리고 그가 벽에 머리를 박는 순간 리바이가 그의 머리통을 당장 터뜨릴
것처럼 두 손으로 잡은 것.
“안 돼!”
이름을 부를 여유조차 없었다.
그가 뛰쳐나온 동시에 내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원진은 두개골이 산산조각 나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핏줄이 도드라지고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한 리바이가 멈칫했다.
조금만, 그러니까 딱 1 초만 늦었더라면 원진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리바이! 그만해!”
목 뒤가 피로 흥건했다. 한 손으로 상처를 꾹 누르며 나는 리바이를 불렀다. 털을 바짝 곤두세운 짐승처럼
리바이는 원진을 덮친 그대로 고개만 돌려 나를 응시했다. 뜨거운 숨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그의 입술 사이로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닌, 짐승의 위협과 야성이었다.
“이리…… 이리 와.”
머리가 어지러워서 나는 반쯤 주저앉았다. 원진이 제대로 박아버린 듯했다. 나는 리바이의 손아귀에 잡힌
원진을 확인했다. 처음 리바이가 덮친 충격에 원진은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리바이는 나나 원진보다도 더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직도 진정하지 못한 흉곽이 빠르게 부풀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이리 와.”
나는 힘없이 손을 뻗어 리바이를 불렀다. 팔에 힘이 풀렸지만 힘들게 빼앗은 제어장치만은 다른 손으로 단단히
붙잡은 채였다. 그걸 품에 숨기다가 양손이 피투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건 또 어떤 피인지. 아깝다.
분명 내 피일 텐데. 차라리 리바이에게 먹이면 이렇게 아깝지 않을 텐데.
내가 털썩 드러눕자 원진을 쥔 손을 놓은 리바이가 바투 다가왔다.
그르렁거리던 위협적인 소리는 이제 애처로운 낑낑댐으로 바뀌었다. 가냘프게 울며 리바이는 하울링 비슷한
소리를 냈다. 제 무리를 부르는 듯한 긴 울음소리.
“이로. 이로오. 로. 이로.”
애처롭게 자꾸 불러서 나는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리바이의 타액이 닿으면 빠르게 아문다는 것이 떠오른
탓이다.
“이리 와. 여기를 핥아줘.”
그러나 리바이는 바로 입술을 대지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손이 부산스럽게 내 이마며 어깨, 머리를 스쳐
갔다. 바르르 떨렸다. 곧, 그렇게 떠는 건 내가 아니고 리바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바이는 정신없이
나를 더듬거리며 울어 댔다. 몇 번이고 나를 부르면서 이마를 부딪치고 제 체취를 묻혔다.
“리바이.”
재차 부르자 그제야 리바이가 정신을 찾고 긴 울음소리를 냈다.
“여기를 핥아봐.”
생각해보니 리바이는 아직 핥는다는 단어를 모르는 것 같았다.
“마셔야지.”
말이 떨어지자 리바이가 길게 혀를 내밀었다. 뜨거운 숨이 목 뒤에 닿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대로 누워있어야 할 것 같았다.
“로. 로오오. 로.”
진정으로 야만적인 것은 리바이가 아니고 나와 원진인 듯했다.
내 피를 주식으로 먹으면서도 리바이는 평소와 달리 상처에 입술을 대지 않았다. 타액이 가득한 혀가 여러 차례
상처를 스쳐 갔다. 피를 마시려는 게 아니라 제 타액을 묻히고 날 치유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네가 원진보다 낫다.
진심을 그득그득 담아 작게 속삭였다. 리바이의 귀가 쫑긋한 것도 같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정신이 혼미했다.
“아까우니까 다 마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나는 까무룩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시야가 암전되는 와중에도 리바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가 크게 다친 나머지 환청을 듣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로, 잘 자. 잘 자.
그렇게 되뇌는 말은 평소의 리바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웠으므로.
그간 리바이의 입술이 내뱉은 것이 나를 따라 하는 일차적인 흉내였다면, 방금 그것은 분명한 언어였다.
눈을 떴을 때, 흰 실타래 속에 파묻힌 줄로만 알았다.
“리바이.”
웅크려 있던 리바이가 인기척에 삐죽 고개를 든다. 내 시야를 가리고 있던 게 다름 아닌 리바이의
머리카락이라는 것을 늦게 깨달았다.
“이로. 이로오. 흐으, 어, 으으.”
내가 정신을 차린 걸 안 리바이는 허겁지겁 내게 안겨 왔다.
“미안해. 놀랐지.”
리바이의 무게가 조금 버거워서 숨을 쉬기 힘들었다. 리바이를 마주 안고 달래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누워있는 곳은 다름 아니라 리바이가 매번 몸을 누이는 잠자리였다. 매트리스 위에 실험용 가운과 담요를
쌓아놓은 게 전부였는데, 막상 누워보니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리바이가 눕는 대로 길이 잘 들어있었다.
너른 등을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는 내 뒷머리를 더듬거렸다.
“어?”
손에 묻어 나오는 것 하나 없이 깨끗했는데, 머리카락을 헤집어도 피가 엉겨 붙은 곳조차 없었다. 정말로
리바이가 싹싹 핥아 상처를 깨끗이 한 듯싶었다. 피에 젖었던 티셔츠 목 부분을 확인했다.
이미 옷에 스며든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라붙은 피가 목덜미에서 부스스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옷만
아니었다면 피를 흘렸다는 것도 까먹을 정도로.
손으로 더듬거리며 가늠했다. 통증부터가 달랐다. 목이 계속 뻐근한 건 그대로였다. 경미한 뇌진탕이
아닐까 싶었다. 손가락으로 상처를 더듬어도 피가 묻어나지 않을 정도로 지혈이 된 상태였고 움푹 파인 살로
새살이 돋고 있는 듯 손가락 끝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착하다, 리바이.”
내 이름을 거듭 부르던 리바이는 내가 쓰다듬자 날 부르던 것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 며칠 칭찬해줄
일이 없긴 했다.
“착해. 너무 착해. 네 덕분이야. 고마워.”
“로오! 이로! 이로! 착해. 착해. 이로, 착해!”
이로가 내뱉는 말들은 대부분 내가 한 말이었다. 이로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말로 이런 단어밖에 찾지 못한
듯싶었다.
“고마워.”
나는 재차 말했다. 느리게, 그러나 또박또박 발음하자 리바이가 내 입술에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고마워, 리바이.”
“-워. 고마, 고마 워.”
“그거야. 잘했어.”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하하하.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아직도 뒤통수가 둔중하게 아려오는데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즐거웠다. 고맙다고 외치는 리바이나, 고맙다는
말에 고맙다고 화답하는 나나, 참으로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아 참, 원진.”
정신을 잃었던 원진을 떠올린 것은 내가 리바이를 한참 예뻐해 주고 난 뒤였다.
실험실을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을 때 바닥에 부딪혀 정신을 잃었던 원진이 떠올랐고, 그제야 그가 사라진 걸
깨달은 것이다.
어디 갔지?
날 이 꼴로 만들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예의로 원진의 몸을 확인할 생각 정도는 있었다.
원진의 행방에 관한 미스터리는 곧 풀렸다.
원진은 실험실 밖 복도에 몸이 U 자로 접혀 쓰러져있었다. 자의로 저런 불편한 모습을 할 리는 없었고. 분명
리바이가 아무렇게나 원진을 들어 종이 접듯 한 다음 휙 던져 놓은 게 분명했다.
저런 포즈로 계속 정신을 잃었다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한숨을 쉰 나는 원진의 몸을 펴주었다. 그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이로오.”
머리를 긁적이고 원진의 사지가 멀쩡한지 확인하려는데, 리바이가 뒤에서 나를 애타게 불러 댔다.
“이로…….”
돌아보니, 리바이는 놀랍게도 팔짱을 낀 상태였다. 그것도 비스듬하게 벽에 기댄 채로.
어딘가 익숙한 포즈- 아, 나구나.
내가 가끔 원진과 대치하거나 뭔가 일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 저런 포즈를 했던 것 같다. 사방이 유리인
연구실에서 거의 한 달간을 살다 보니 본의 아니게 평소에 내가 어떤 제스처와 포즈를 취하는지 알게 되고
말았다.
리바이는 내가 원진의 헛소리를 들을 때, ‘언제 끝나?’ 하며 짓는 표정과 몸짓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날 공격한 원진을 살피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아니면 내가 하는 행동과 관계없이 날 공격한 원진이
그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원진의 숨이 붙어있는 것만 딱 확인한 나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내 뒤를 리바이가 졸졸 따랐다.
“너는 가서 물 마시고 화장실 가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이로. 이로오……. 아니야.”
싫다는 말이다.
“들어가라니까. 가서 ‘기다려’ 해.”
“아니야.”
“빨리.”
“아니야아.”
그러면서 쭉 나를 따라와서 나는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원진과 함께 이곳을 나가려던 생각이 바뀌었다.
짐을 다시 정리해야 했고 계획도 차근차근 다시 짜야 했다.
리바이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방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곁에 있을 때마다 몸을 바짝 붙이고 나와 접촉한
상태를 유지했기에 불편함이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재정비를 마칠 때까지는 리바이가 실험실에서
쉬는 게 도움이 되었다.
“어서. 들어가.”
리바이는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들어갔다. 세상에, 난 저런 걸 가르친 적이 없는데!
리바이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원진을 덮칠 때의 리바이와 지금의 리바이는 꼭 다른 존재 같았다.
4. 탈출
원진은 내가 한창 짐을 다시 싸고 있을 때쯤 눈을 떴다. 그리고 쌌던 가방을 풀어 헤친 나와, 잔뜩 늘어진 도구,
연장, 무기, 그리고 연구실 청사진과 엉성하게 우리가 그린 지도 등에 차례대로 시선을 두었다.
“나와 같이 가고 싶지 않은 맘 이해해.”
원진이 말했고 나는 그 말을 차갑게 끊으며 내 할 말만을 했다.
“같이 만든 도구는 너 가져. 나는 식량만 정확히 분배하면 돼.”
“기어코 괴- ……리바이와 함께 나갈 생각이야?”
“응.”
“그래, 사람 대신 괴물을 택할 수 있어. 하지만 너는 정말로 속고 있다는 걸 네가 언젠가는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원진의 이런 화법이 싫었다. 하지만 대거리하며 시간 낭비하기는 더 싫었다. 내게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원진은 고개를 저었다.
식량을 확인하던 원진이 묻는다.
“언제 갈 생각이야?”
“너는?”
“계획했던 대로.”
“나는 그거보다 조금 늦게.”
식량이 완전히 동날 때까지 리바이를 더 훈련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연구소 가득한 Z 를 리바이가 따돌릴 수
있을 정도나, 위험을 감지하게 될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그래.”
원진은 그렇게 작게 내뱉었다.
탈출하는 과정에서 원진이 Z 를 몇 마리 더 불러올 수는 있겠지만 지금보다 배로 불어나지 않는 이상에야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이곳은 어딜 가든 Z 가 득실거렸고, 원진이 빠져나간 뒤에 Z 가 휴면기에만
접어들면 될 테다.
불편한 대화가 끝난 뒤, 나는 상황실로 들어가서 CCTV 를 확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Z 가 더 많아지는
느낌이었는데, 단순히 우리가 세지 못한 Z 가 많은 것이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몰려들고 있는지를 확인할
참이었다.
화면을 하나하나 돌리고 체크를 하던 나는 곧 기우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히려 화면에 잡힌 Z 의 수는 더
적었다. 문제는, 대부분이 휴면기에서 깨어났다는 것이다.
낭패였다.
교수형을 당한 사체처럼 가만히 서서 에너지를 최대한 비축하고 있던 Z 들이 대부분 깨어나 있었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휴면하는 Z 들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신만 바짝 차린다면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피 냄새가
짙거나 큰 소리가 난다거나 하는 자극이 없다면 Z 는 깨지 않는다.
그러나 휴면기에서 벗어난 Z 를 따돌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깨어난 Z 들은 모든 감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인기척이나 혈향, 심지어는 땀 냄새에도 반응했다.
이런 와중에 우리가 나갈 수 있을까?
카메라 화면을 전부 돌려서 휴면기에 있는 Z 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사실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상황이 좋지 않다. 원진도 알아야 했다.
그러다가 나는 검은색 화면이 두 개나 떠 있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원래는 잘 돌아갔는데,
카메라에 문제가 있는 건지 네트워크나 회로의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원진.”
상황실 너머로 그를 불렀지만 답이 없었다. 상황실이 쓸데없이 방음이 좋은 게 이래서 가끔 짜증이 났다.
“원진!”
문을 열고 다시 그를 부르는데, 픽-. 카메라 화면 하나가 더 꺼졌다.
“원진!”
“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부르자 원진이 짜증과 함께 나타났다. 뚜벅뚜벅, 가벼운 발소리. 그리고 그가
다가오는 와중에도, 화면은 하나둘씩 꺼져갔다. 벌집처럼 촘촘히 연구실 구석구석을 보여주던 카메라가 눈을
감듯 까맣게 물들어 가고, 마침내 스크린 전체가 온전히 죽어버릴 때까지.
“뭐야, 그거 왜 그래. 잠깐 비켜봐.”
일어서자 바통 터치하듯 원진이 마우스와 PTZ 컨트롤러를 차례대로 만져보았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뭐 만졌어?”
“안 만졌어.”
기계에 익숙한 원진과 달리 나는 간단한 것밖에 알지 못했다. 기껏해야 손전등을 고치는 정도일까. 내 지식은
딱 간단한 회로에서 멈추어있었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는 것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렇네, 뭐 잘못 만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러지.”
패드와 키보드, 버튼을 확인하던 원진이 초조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점차 불안이 서리고
있었다.
“여기도.”
곧이어, 다른 화면의 CCTV 도 꺼지기 시작했다. 푸른 회색으로 화면을 가득 메웠던 것들이 눈을 감듯 하나씩
꺼지는 장면은, 내게 끝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다가왔다.
“원진.”
바쁘게 패드를 만지는 그를 부르고, 나는 귀퉁이 하나를 가리켰다.
“저거 그거잖아.”
내가 검지로 짚어줘도 원진은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포착한 그것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내
순발력이 조금만 안 좋았더라도 나 역시 원진처럼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3 초 전으로 되감기 해서 화면을 정지시켰다. 아직도 알아보지 못하는 원진더러 잘 보라고 그의 턱을
화면에 고정했다.
푸른빛의 화면에서 유독 튀는 흰 살갗, 붉은 안광, 길게 뺀 손톱.
“열여덟 번째 실험체.”
앤더슨이 말해준 것보다 그간 우리가 과거의 연구 기록과 녹화본을 보며 알아낸 사실이 훨씬 많았다. 그것이
얼마나 거대하고 빠르며 파괴적인지 진정으로 실감한 것은 내가 모든 연구 기록을 몇 주에 걸쳐 확인했을 때였다.
앤더슨의 말대로 실험은 어느 정도 성공한 면이 있었다. 그 무기를 제어하는 데 실패했을 뿐, 이들이 창조한
열여덟 번째의 결과는 놀라우리만치 효율적이었다.
Z 를 포함한 모든 단백질을 섭취하니 먹이를 따로 공수할 필요도 없었고, 인간과 엇비슷한 지능이니 작전과
계획을 전달하기도 수월하다. 무엇보다, 그것은 Z 를 통제할 줄 알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병기였다.
문제는 인간이 발명한 무기로 인간이 종말을 맞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실험체의 입맛에 맞은 것이 Z 가 아니라 인육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 * *
스카이브리지 너머의 모든 카메라가 꺼졌다.
나와 원진은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긴장이 빠득빠득 갈비뼈 안에 들어찼다.
“이제 어떻게 하지? ……우리를 사냥하러 온 걸까?”
나라고 명쾌한 해답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표면적으로나마 동요하지 않는 나와 달리 원진은 크게 당황했다.
“분명히 아직 살아있는 생존자가 많을 거고, Z 를 먹을 수 있다면 허기도 채울 건데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먹으려 하는 거지?”
“아닐 수도 있지.”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는 스카이브리지 건너편만이 아닌, 우리가 갇힌 건물 안의 CCTV 에도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이 이 건물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우리가 한 달 동안 갇혀있던.
어떤 방법을 쓴지는 알지 못한다. 수많은 Z 를 사용해서 부쉈을 수도 있고, 어쩌다 키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
하나씩 하나씩 점차 꺼져가는 화면을 보며, 나는 왠지 열여덟째 실험체가 이러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굳이 내뱉지는 않았다. 원진이 알게 된다면 잔뜩 겁에 질릴 것 같았다.
우리는 독 안에 든 쥐였다.
“어, 어, 어떻게 해. 어떡하지.”
모니터는 총 세 대. 그중 두 대에서 보이는 것은 검은 죽음뿐이다. 나머지 한 대는 우리가 주로 있는 실험실과
그 주위 복도를 비춰 주고 있었다.
실험실에서 잠자코 열쇠고리를 가지고 노는 리바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우리가 죽고 난 후에, 리바이는
어떻게 될까.
그것이 포착되었던 몇 개의 화면을 되감기 했다. 한 달간 어떤 경험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충분한 학습을
거친 상태였다. 그러니까 카메라가 무엇이며 어떤 각도에서 자신이 보이고 보이지 않는지를 인지하는 듯
행동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교묘하게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었다.
정지화면 한 귀퉁이에 담긴 그것은 한 달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이렇게 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Z 와 인간을
잡아먹었는지 모를 일이다.
미간이 자연스레 좁혀졌다. 처음의 모습과 좀 다르단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이상 Z 도, 인간도
아닌, 도드라지는 체형과 외관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피나 인육을 갈구하는 듯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우, 우리 먹히는 거야? 어떻게 해야 하지?”
보고도 모르겠냐고 원진에게 쏘아붙이려던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를 잡아먹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었다.
몸을 일으킨 나는 상황실을 나왔다. 바짝 붙는 원진에게 가방을 메고 보호구를 찰 것을 권했다.
“빨리 움직여.”
그것은 인간 사냥을 하러 온 참이었다.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하등한 우월감을 맛보며 승리의 트로피를 취하기 위해서.
인간의 맛을 본 그것은 인간의 잔학한 습성도 학습한 것이 분명했다.
* * *
“리바이, 일어나.”
리바이의 손에는 작은 인형 하나가 들려있었다. 연구소 책상이었나 창가였나 어디선가 가져온 것이었는데
폭신폭신한 질감이 맘에 들었는지 리바이는 그걸 가지고 조물거리며 놀고는 했다.
“이로?”
“응, 일어나.”
다급하게 다가오는 날 보고 리바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물 마셔 둬, 곧 뛰어야 할지도 몰라.”
가방이며 식량이며 무기까지, 진작 준비를 마쳐놓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열여덟 번째 실험체의 방문은
고약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꽤 친절한 비극에 속했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갑작스러운 일의 팔 할은 물 마실
여유도 없이, 심지어는 가방을 꾸리거나 만반의 준비를 취할 틈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났으므로.
“물?”
“물.”
리바이에게는 짐이 없었다. 옷가지 하나가 전부였다. 고민하다가 물을 잔뜩 담았던 가방을 리바이에게 메게
해 보았다. 끄응대며 리바이는 불편한 티를 냈지만 내가 ‘아니야, 하고 있어’를 반복하자 불퉁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식수는 구하기 쉬웠지만 조금만 나가도 귀한 것이 식수였다. 물을 정화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기도
하고, 개울이나 계곡의 물을 잘못 마시면 배탈이 나서 곧 탈수로 이어지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무거워서 어쩔 수 없이 두고 가야 하지 않을까 했는데 체력이 강한 리바이가 들면-.
“아니다, 그거 내려놔 봐.”
가방을 벗게 시키자 아니나 다를까 리바이는 가방을 제대로 벗지 못했다. 낑낑대다가 애처롭게 날 바라봤다.
여차하면 가방을 바로 벗어 던지고 달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리바이에게는 족쇄가 될 것이다. 결국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리바이의 손을 붙잡고 실험실을 빠져나왔을 때 원진은 이미 준비를 갖춘 채였다.
기존에 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처음의 계획은 Z 들이 휴면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것만으로도 살아서 빠져나간다는 보장이 없었는데, 거의 모든 Z 가 깨어나고 실험체까지 등장한 지금은
더더욱 가능성이 희박했다.
실험실의 유리는 단단해서 어지간하면 깨지지 않았지만, 리바이가 저렇게 거미줄을 그은 거로 봐서는 그것도
Z 가 떼 지어 밀려들어 오면 얼마 버티지 못할 테다. 게다가 연구실의 모든 유리와 시설이 실험실에 비견될
정도로 좋은 것도 아니었다.
“문은 다 잠긴 거 맞지?”
원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실험체에게 카드키나 비밀번호가 있는 게 아닌 이상에야 물리적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위치를 노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환풍구로 가자.”
“잠깐만.”
원진이 막아섰다. 그는 아직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리바이를 가리켰다.
“……따로 가야 해.”
엄밀히 말해 원진이 내게 명령할 권리는 없었다. 그런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부도 체계도 없는 세상에서
물리적인 힘이 곧 법이자 권력이었다.
“쟤는 이리로 안 가는 게 나아.”
원진이 확언했다.
“이로. 너도 알다시피 실험체들은 면역이 있어.”
그렇다고 Z 가 실험체를 저들 무리의 일원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연구 기록을 보면 실험체가 Z 를
일방적으로 사냥하기는 했지만 Z 가 공격해오지 않은 것도 아녔다.
“Z 한 마리 잡아먹지 못하는 겁쟁이지만, 막상 상황이 닥쳐오면 어떻게 될지 몰라, 어쨌거나 힘은 세니까
알아서 살 수 있는 거 아냐?”
그러니까 리바이를 버리고 살길 찾자, 는 뜻이었다.
원진의 말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리바이 생성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가 앤더슨의 자리를 꿰차서
해야 할 것을 안 했다든가, 혹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다든가 그런 우를 범했는지도 모른다.
리바이만큼 차분하고 공격보다는 이성을 앞세우는 결과물은 없었다.
그래도 연구 결과가 결과이니만큼 어쩌면 리바이는 홀로 잘 살지도 모른다. 원진 말대로 막상 Z 들이 떼거리로
몰려오면 공격력을 내비칠지도 모르고.
하지만 원진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만약 아니라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두고 ‘그럴지도 모른다’라는 가능성 하나에 전부를 걸고 싶지 않았다.
쾅!
아래층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굉음과 동시에 나와 원진의 어깨가 퍼뜩 튀었다. 실험체가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책상 위로 올라선 원진은 까치발을 들어 환풍구를 열었다. 연구실의 천장은 꽤 높아서 원진조차 손에 도구를
들지 않으면 쉽게 열 수 없었다.
“원진, 너 먼저 가, 나는 리바이를 데리고 뒤따라 갈게.”
체격이 단단하지만 리바이가 비이상적으로 큰 것은 아니다. 충분히 들어가서 포복할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그런데, 환풍구 안으로 들어가서 날 내려다보는 원진의 표정이 이상했다.
“저 괴물이 따라오면 다 같이 죽은 목숨이야.”
하하.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원진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거센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이제는 계단을 넘어선 듯했다. 시간이 없었다. 나는 초조하게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안 돼. 이로. 살자. 우리는 살아남아야지. 우리가 데려가지 않아도 저건 살 거야.”
“멍청한 소리 하지 마. 리바이는 같이 갈 거야. 그렇게 싫으면 먼저 가라고, 우리 둘이 알아서 뒈질 테니까.”
만류하는 원진을 무시하고 도움닫기를 해 환풍구 입구에 매달렸다. 원진과 달리 나무를 타거나 벽을 넘는 일이
익숙한 나는 민첩하게 환풍구 안으로 상체를 반쯤 들이밀 수 있었다. 이제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데, 팔과
복부에 힘을 주었을 때 이마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저 괴물이 올라오면 어떻게 될지 몰라. 너만 오든가, 둘 다 오지 않든가.”
믿을 수 없어 멍하니 내 이마에 닿은 것을 올려다보았다. 총구였다. 심장을 얼리도록 차가운.
“하…….”
저도 모르게 탄식이 흘렀다. 대체 어디서 찾은 것일까.
누굴 탓할 것도 없었다. 리바이와 시간을 보내느라 내가 정찰을 나가지 못한 건 사실이다.
이 세상에 내 것, 네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먼저 찾는 사람이, 혹은 먼저 찾은 사람에게서 강탈한
사람이 소유권을 갖는다. 간단하고 직관적인 법칙이었다.
허탈한 웃음과 함께 나는 몸을 내렸다. 발이 가볍게 테이블 위로 닿는다. 환풍구에서 날 내려다보는 원진을
보며 바득바득 이를 간 나는 키를 꺼냈다. 환풍구나 유리문 말고는 나갈 길이 없었다. 그리고 패드에 키를
대는데,
삐-
작은 경고음만 들릴 뿐 문은 꿈쩍하지 않았다. 까드득, 까드득- Z 가 썩어가는 이를 가는 소음이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긴 발톱과 반쯤 잘린 다리가 아무렇게나 바닥에 부딪히고 저들끼리 타액과 피를 흘리며
몰려오는 죽음의 긴 나팔 소리.
“문은 열리지 않을 거야, 이로.”
자신 대신 ‘괴물’을 선택한 내게 원진은 그간 쌓인 것이 많았나 보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너에게 정신이 팔리면, 적어도 내가 도망칠 시간은 더 벌 수 있겠지.”
“최악이다, 원진.”
원진은 하! 하고 웃더니 거대한 해일처럼 몰려드는 굉음의 진원지, 복도 너머를 힐긋 보았다. 그 와중에도
날카로운 발톱이 바닥을 가르는 소름 끼치는 소음이 커져 갔다.
찰나의 침묵이 흐르고, 몸을 돌리다가 쌍욕을 내뱉은 그는 갑자기 환풍구 밖으로 팔을 내밀었다. 빠르게
종용한다.
정이 이긴 것이다.
“제길! 빨리 와, 혼자 올라오라고!”
원진은 정에 약한 인간이다. 마음을 정했으면 그대로 나아갔어야 할 텐데. 내가 정말 리바이를 버리고 저를
따라갔으면 어떤 보복을 할 줄 알고, 그새 마음이 약해져 손을 내민다.
이제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다시 테이블을 밟고 올라섰다.
까드득 까드득
최후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당장 내가 원진의 손을 잡고 작은 환풍구 안으로 몸을 밀어 넣으면, 그러면
어쩌면 다가오는 사신의 낫을 잠깐 피하게 될지도 모른다.
까드득
“이로! 올라와! 리바이는 안 죽을 거라고!”
안 돼.
“……이로?”
리바이가 멍하니 날 부른다.
나는 자문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득그득 쌓였던 압력이 마침내 터지고 그대로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실험실의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쓰나미 대신 몰려든 것은 괴성을 내지르고 달려오는 수십
마리의 좀비였다.
검게 물든 손톱이, 덩굴처럼 복도를 메우기 시작하는 좀비들이 떼거리로 복도로 쏟아지는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게 마지막인 것을 알면서도, 아니, 당장이라도 무릎을 굽히고 튀어 오르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면서도.
“이로! 나와! 지금 가야 해!”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할까? 리바이를 버리고?
유리 벽 너머 몰려드는 Z 를 보다가, 초점이 흐려지고 시야에 들어온 것은 유리에 비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내 뒤로는 리바이가 입가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우는 듯 웃는 듯, 제대로 공포를 표현할 줄도 모르는 리바이.
네게 웃는 모습만 가르쳐주고 싶었는데.
그때 나는 선택을 했다.
내게 뻗어오는 원진의 손을 무시한 채, 몸을 돌렸다.
“리바이!”
땅을 박찼다. 그대로 뛰어내려, 주저앉아있는 리바이를 불렀다. 내가 내뱉은 말은 그게 다였다. 리바이를
두고 가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로오…….”
몸을 돌리자마자 내가 발견한 것은 체념한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바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저 겁내고 그저 시키는 대로 순응하는 하찮은 생명, 내
피로 탄생했고 단숨에 내 세계를 구축한.
리바이를 껴안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 같이 죽어버리자.
쩌적 금이 가기 시작했던 유리 벽은 전력 질주하며 온몸을 부딪치는 거대한 좀비 떼를 버티지 못했다.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며 깨져버렸고, 소음이 나를 덮쳤다.
고막을 터뜨릴 듯한 굉음에 나는 내가 마주할 종말에 대비했다. 세상이 터져버린 듯했다.
이로…….
죽어가는 내 귓가에 들리는 것이, 리바이의 목소리여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거친 숨이 귓가를 메운다.
세상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온몸의 근육에 바짝 힘을 주고 있어서인지 어떻게 긴장을 푸는지 까먹을 것
같았다.
귓가를 가득 채우는 건 일정하지 못한 내 호흡과 나를 속삭이듯 부르는 리바이였다.
기이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뜬 나는 천천히 몸을 떼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리바이가 날 따라 고개를 들며 내 눈을
마주한다.
더듬더듬 내 몸을 확인했다.
죽은 걸까? 그래서 이렇게 말짱한 걸까? 웅크리고 있는 리바이를 어깨부터 발끝까지 차례대로 훑었다. 피가
묻어 나오는 곳이 없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아픈 곳이 있는지 확인했다. 일단 사지는 멀쩡히 다
붙어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방금 분명히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면서,
“읍!”
뒤를 돌았을 때, 우리를 빙 둘러싼 수십 마리의 Z 를 보고 나는 반사적으로 나올 뻔한 비명을 삼켰다. 그것들은
점성 있는 타액을 질질 흘리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핏발 선 눈에는 초점이 없다. 두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지 않았더라면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을 테다.
Z 에게는 이성이 없다. 본능만이 살아서 날뛰는 숙주에 불과하다. 그런 Z 가 나와 리바이를 바로 씹어먹지
않고 그저 위협적으로 둘러싼 이유를 모르겠다.
왜 공격하지 않는 거지?
Z 들이 휴면기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들이 세게 그르렁대며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들 듯 입가를 쭉 찢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Z 는 내가 먹잇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이를 부딪치고 그르렁대도 달려들지는 않고 있었다.
먹이가 바로 앞에 있는데 가만히 있다니. 아니, 엄밀히 말해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잔뜩 흥분한 Z 가
내뿜는 뜨거운 숨에 공기가 무거울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위협적으로 그르렁댈 뿐 다가오지는 않고 있다.
리바이와 내가 기댄 벽을 기점으로 반원형의 장벽이라도 생긴 것처럼.
내가 움직이면, 그러면 공격할까? 아니면 길을 터줄까?
얼떨결에 풀려있던 긴장이 발끝부터 다시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내디뎠다.
발밑으로 유리가 부서졌다. 뜨거운 숨과 듣기 싫은 소음만 제외한다면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이곳에서
유리 조각이 부서지는 소리는 천둥과도 같았다.
“이로! 아니야, 아니야.”
한 발자국을 더 내디디려는데, 리바이가 허겁지겁 나를 잡아다 끈다. 단 한 걸음을 갔을 뿐인데 리바이에게
이끌려 벽에 가볍게 부딪히고 말았다. 나를 언제 용감하게 잡아끌었냐는 듯 리바이는 몸을 웅크리고 오들오들
떤다.
내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나를 바짝 끌어 제 품에 안더니 또 오들오들.
품에 안긴 채로 눈만 깜박이자 그가 나를 자신의 품 안으로 세게 묻었다. 팔과 다리로 나를 칭칭 동여매는데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리바이, 일어나봐.”
“이로오. 아야. 아야.”
“아니야, ‘아야’ 안 해. 일어나 봐.”
내 말을 거세게 부정하는 것처럼 리바이가 오히려 힘을 주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대로 두면, Z 에게 잡아먹히거나 리바이의 품에 질식사하거나 명을 다하는 건 똑같을
거라고.
“리바이.”
내가 그를 부르는 와중에도 Z 는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발작적으로 긴 손을 쫙 폈다가 움츠렸다. 달려들 듯
입질을 하는 것에 깜짝 놀란 리바이가 내 품에 안긴다.
“리바이, 무서워하지 말고 나 봐.”
달달 떨고 있는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다가 부드럽게 종용하자 리바이가 얼굴을 든다.
“네가 이것들한테 다가오지 말라고 했어?”
아니면 그 실험체가 한 짓인가? 둘 중 하나였다. 그게 아니라면 Z 가 공격하지 않는 것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았다.
“리바이, 말해 봐.”
그러나 내뱉는 단어를 세는 데 열 손가락이면 충분한 상황에서 리바이가 이 사태를 논리정연하게 육하원칙에
맞춰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리바이를 어르고 달래서 일으켜 세웠다. 이럴 시간이 없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열여덟 번째 실험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본 카메라 화면에서는 유유히,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장면만이
찍혔지만 우리가 Z 의 손을 피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화면으로 대충 보았던 그것은 리바이보다도 한참 컸다. 나든 리바이든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우리를 찾기 전에 빨리 몸을 피해야 했다.
리바이를 일으키고 걸음을 떼자 놀랍게도 그것들은 주춤주춤하며 물러났다. 나와 리바이가 걷는 대로 길을
트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리바이가 이들을 제어하는 것 같다.
온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밟으며 난장판이 된 실험실을 나왔다. 복도까지 Z 가 가득했지만 섣불리
공격해오지는 않았다. 지금 내 등에 업히다시피 하는 리바이 때문인 거 같았다.
“무서워, 이로 아야.”
“…….”
힘들어서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리바이는 너무 무거웠다. 먹인 것도 별로 없고 좁은 실험실에서 운동을 시킨
것도 아닌데 골밀도와 근육량 자체가 남달랐다.
얼마 가지도 못했는데 숨이 점차 차올랐다.
빨리 도망가야 하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아서 뒤를 돌아보니 리바이가 아예 내게 기대고 발을 질질 끌고 있었다.
……때리고 싶었다.
“리바이!”
소리치자 그제야 화들짝 놀란 리바이가 똑바로 섰다. 짜증 난 티를 내자 내 눈치를 보며 빠르게 움직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여태 해온 훈련이 성과를 보이고 있어서 리바이가 큰 소음을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복도를 나와 중앙 계단을 내려갔다.
좀비들이 떼로 몰려온 연구실은 난장판이었다. 내 머리에 닿을 정도로 내려앉은 전등이 음산하게 꺼졌다
켜지길 반복했다. Z 의 거친 숨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쉬이…….”
리바이를 데리고 층을 내려온 나는 스카이브리지로 향했다. 리바이가 좀비를 막은 것 같지만 얼마 동안, 몇
마리나 통제할 수 있는 건지 아는 게 없었다. 괜히 뻗대면 좋을 게 없다.
스카이브리지를 넘어서니 황폐해진 연구실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난장판이었다. 그래도 앤더슨이 썼던
곳이어서 황량했을 뿐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었는데, 앤더슨이 죽고 우리가 다른 건물에 갇힌 이후 Z 의
보금자리가 되었던 이곳은 CCTV 로 보았던 것 이상으로 엉망이었다.
1 층부터 3 층까지 이어져 전면이 유리로 되어있던 세련된 건축물은 유리가 반 이상 깨져 비바람을 조금도
막아주지 못했던 것이다. 고작 한 달이었는데 나무가 로비 안까지 긴 뿌리를 뻗어오고 있었다.
을씨년스럽게 텅 비고 시체처럼 온기를 잃은 건물 로비는 우리가 내뱉는 숨소리조차 메아리쳐 들릴 만큼
적막했다. 너무나 고요해서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설 정도였다.
“이쪽이야.”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정문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잡초가 무성히 자란 로비를 막 지났을 때였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거칠고 날것 그대로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모골이 송연했다. 뒷덜미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척추까지 적시는 것을 알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깨어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구든 이 울음소리를 듣는다면 털을 바짝 세웠을 것이다.
실험체였다.
우리가 지나온 스카이브리지 너머에 있는 그것은 Z 가 우리를 포획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바짝 우리의 뒤를 추격해 올 테다. 지금 달려야 했다. 이곳 너머의 Z 를 맞닥뜨리는 것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어떻게든 저것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리바이! 달려!”
울음소리가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나와 리바이는 전속력으로 정문을 향해 질주했다.
방금의 매복으로 모든 Z 가 실험실로 몰려갔던 것인지 오히려 본 건물과 정문까지의 긴 산책로와 정원에는 Z 가
한 마리도 없었다.
긴장과 압박감, 물리적인 피로까지, 한계까지 몰린 육체가 비명을 질러 댔지만 살아야겠다는 위기감 하나로
아드레날린이 치솟았다. 뒤를 보지 않고 전력 질주하는데 나와 맞춰가던 리바이가 점차 나를 치고 올라가는
것을 발견했다. 다행이었다. 나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리바이를 지킬 자신이 없었다.
곧 정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다! 저기만 벗어난다면 적어도 실험실 내에서 지루한 술래잡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실험체 입장에서도 많고 많은 Z 와 생존자 중에서 나와 리바이를 부득불 추적해올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정문에 거의 다다라서 희망으로 밝게 빛났던 시야가 다시 어둠에 젖었다. 굳게 닫힌 정문은 너무나도
높았다. 아무런 도구 없이 쉽게 넘어갈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검문소가 있을 정도로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던
연구소는 Z 가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거대한 장벽을 세워놓았던 것이다.
당황에 잠깐 이성이 멈추었다. 이 정문을 어떻게 지나가기로 했었지? 원진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더라?
여러 겹의 펜스를 넘어간 뒤, 거대한 장벽을 앞에 두고 나는 잠시 멈추어 섰다. 키…… 아니, 카드키와
비밀번호는 전부 내부 연구소용이었다. 하지만 저번에 앤더슨이 어떻게 문을 열었던 것 같았다. 백발이
성성한 앤더슨 혼자서 이 거대한 문을 힘으로 열었을 리는 없다.
분명 방법이 있을…….
“잠깐만! 이로!”
장벽을 보고 있던 몸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저 멀리서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원진이었다.
“이로!”
그는 다급히 나를 부르고 있었고, 그런 그의 뒤에는,
“원진! 뒤!”
멀리서도 빛나는 붉은 안광. 뱀처럼 찢어진 새빨간 입술, 희열에 번득이는 눈알.
원진의 발꿈치 뒤로 바짝 붙어 추격해오는 실험체.
“이로!”
단말마.
그것이 원진의 마지막이었다.
“아.”
네 발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것이 원진을 한 손으로 낚아챘을 때, 나는 낫과 같은 손아귀에 얽매인 것이 내
육체가 아닌가 생각했다. 줄에 매인 꼭두각시를 단번에 들어 올리듯 원진의 신형이 사라지면서 그에게
고정되어있던 내 시야가 붕 떴기 때문이다.
착각이 아니었다. 원진에게서 멀어지며 온몸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일직선이었던 눈높이는 어느새 원진과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귓가를 가르는 바람 소리에 옆을 보았다. 한 손으로 나를 둘러멘 리바이가 장벽을 가뿐히 뛰어넘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어느새 시야를 가로막은 장벽에 원진의 모습이 가려졌다.
혼자서는 절대 넘지 못할 것처럼 거대한 장벽이었다. 그 웅장한 장벽을 가뿐히, 심지어 나를 업은 채로
뛰어넘은 리바이는 거친 숨 한번 내쉬지 않았다.
벽의 반대편에서 나는 리바이에게 업힌 그대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로.”
나를 조심스레 내려준 리바이가 눈을 끔벅인다. 모든 것이 현실감이 없었다. 이 장벽 너머 원진이 산 채로
뜯어 먹히고 있을 텐데.
“이로. 이쪽이야.”
‘이쪽’이라면서 리바이가 가리키는 곳은 없다. 그는 그저 가만히 나를 기다리며 서 있을 뿐이다. 리바이는
그저 출발할 때 내가 내뱉었던 말을 정확한 뜻도 모른 채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그래. 가야지.”
멍한 머리가 밝아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현실감이 없었다. 손발에서 감각이 사라진다. 나는 기계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왜 원진을 구하지 않았느냐고 나나 리바이를 비난할 수 있을까.
누구도 그러지 못하리라.
* * *
저것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져야 했다.
어떻게 나를 업고 뛸 생각을 했을까, 몸은 괜찮은지, 무리가 가지는 않았는지 그런 것들을 리바이에게 물을
정신도 없었다.
내 머릿속은 원진이 말한 마더랜드를 즉각적으로 떠올렸다.
해가 지는 곳을 직시하다가 별자리로 위치를 가늠했다.
팔이며 다리며 후들후들 떨려왔다. 도저히 계속 걸을 정신력이나 체력이 없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가야 했다.
“이로.”
“이쪽이야.”
내가 ‘마더랜드’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스쳐 지나듯 만났던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보고 디스토피아판 전설이라고 했다. 과거 아틀란티스와, 엘도라도
또는 하늘 섬을 믿는 것처럼 상황과 시대 할 것 없이 인간은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곳을 갈망하기 마련이라고.
그래서 사람들의 헛된 희망과 입담과 상상력과 그럴듯한 현실이 맞물려서 탄생한 것이 마더랜드라고 했다.
누군가는 마더랜드가 아메리카 대륙 저 끄트머리에 있다고도 했으며 누군가는 대서양을 건너야 한다고 했다.
마더랜드를 자처하는 여러 공동체도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한 풍력발전소 근저에 세워진 곳이었다.
풍력발전 자체가 큰 소음을 유발해서 인간이 내는 대부분의 생활 소음은 묻혔다. 그만큼 Z 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적었다. 문제는 풍력발전용 터빈이 돌아가는 것을 누구에게도 숨길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 공동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더 큰 공동체의 습격을 받았다. 일부는 노예가 되고 일부는 잡아먹히고 일부는
팔려갔다.
이런 일이 왕왕 있다 보니 나는 마더랜드를 잘 믿지 않는 편이었다. 한 사람이 말하는 마더랜드와 내가 말하는
마더랜드가 완전히 다른 것을 가리킬 수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마더랜드를 과거 ‘천국’의 대용어로 쓰고는 했으니 더더욱 말에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나처럼 외톨이였거나, 내가 잠깐 인연 혹은 악연을 맺었던 질 낮은 공동체 일원들 간에 있었던
일이다.
연구소는 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밀리에 정상적으로 운영되었고, 유지되었고 대단한 방어 체계를 가지고
연구소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했던 곳이다. 몇 년 전의 내게 다가와 누군가 이런 곳이 있다고 귀띔을 주었다면
나는 이 연구소의 존재 자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마더랜드로 향했다 하면 정말로 마더랜드로
향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문을 나오자마자 장벽을 오른편으로 끼고 한참을 돌아 깊은 계곡을 건넜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갇혀있던 곳과 더 가까운 곳이다. 하지만 연구소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꼭 정문을 거쳐야 한다. 지리적
단점이자 장점이었다. 연구소 뒤편은 절벽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손바닥으로 가려질 만큼 작아진 연구소를 보다가 나는 시야에 들어온 어떤 것에 가방을 뒤졌다. 정리된
가방에서 망원경을 꺼냈다.
앤더슨이 무언가를 창조했는지, 열여덟 번째 실험체를 어떻게 정의할지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정의가 인간은 아닐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로 그것은 순수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미간을 좁혀 집중했던 나는 연구소 뒤편, 피뢰침에 걸린 무언가를 확인했다. 기다란 신형, 희미하게 드러난
맨발.
걸려있는 것은 한때는 원진이었던, 지금은 거죽에 불과한 무언가였다.
나는 그것이 배고픔이 아닌 쾌락을 위해 사냥을 한다고 예상했고 그것은 들어맞은 듯했다.
원진은 그것의 전리품이었다.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가장 높은 곳에 진열해 둔 것까지, 인간의 잔악한 습성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이로?”
“……아니야.”
리바이가 걱정스레 날 바라보았지만 나는 렌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실험체는 그를 뼈까지 발라 먹었다. 미처 취하지 않은 살점이 팔과 정강이 밑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지만 흉곽을
찢어 열고 안의 장기를 깨끗하게 파먹었다.
물리거나 독성 포자에 감염된다면 Z 가 되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이렇게 Z 가 될 신체 부위 하나 남기지 않고
잡아먹히고 만다. 산 채로. 어떻게 보면 차라리 Z 가 되는 게 찢겨 죽는 것보다 나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원진의 말로는 참담했다.
“이로?”
리바이가 나를 재차 불렀다.
비정상적으로 열린 원진의 흉부와 텅 비어버린 안, 갈비뼈가 다 보일 정도로 발라낸 살점. 머리조차 성하지
않았다. 끔찍하고 참혹했다. 입고 있는 옷가지와 가방이 아니었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가자.”
망원경을 가방에 추슬러 넣고 나는 의연하게 발을 옮겼다.
가야 할 길을 걸으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원진은 정말이지 끔찍한 존재였다. 사사건건 날 방해했고, 내가 리바이를 가까이하는 것을 극도로 경멸했다.
나와 달리 그의 윤리관에는 분명한 선이 존재해서, 그 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날 기꺼워하지 않기도 했다.
그의 기준은 결벽증과 같은 구석이 있었다.
말도 많았고 내게 기댈 때가 더 많았으며, 도움이 될 때보다는 내게 도움을 바랄 때가 더 많았다.
지금 보니 짐덩이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그 구차한 마지막이라니. 날 배신한 것은 비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로? 이로오.”
멈춰선 나는 머리를 감싼 채로 눈을 감았다.
그가 죽어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솔직히 말하면 나는 소속감이 그리웠던 것 같다. 워낙 많이 속고 당하고 살아서인지 저들만의 공동체를 꾸리는
사람들을 믿지 못해서 들어간 적은 없지만, 항상 외로웠나 보다.
그래서 원진이 자연스레 내게 기대고 자연스레 날 제게, 저를 내게 소속시켰을 때, 무의식중에 기뻤던 것 같다.
성경책도 제대로 읽지 못할 정도로 배운 게 없는 나를 원진은 끈기 있게 가르쳐주었다. 그런 걸 왜 읽냐
타박하면서도 막상 답해주는 목소리에서 짜증은 없었다. 그는 나 같은 야만인에게 인간의 탈을 씌워주고 싶어
했다.
한참 상념에 빠져있는 내 옆으로 바스락거리는 것이 닿아왔다.
잔뜩 부서져서 반쯤 가루가 된 크래커였다.
리바이는 그것을 조심스레 내게 내밀고 있었다.
리바이는 먹을 것을 구한 적이 없다. 내가 준 크래커였을 테다. 가방도 없으니, 아마 자기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것일 거다.
“하하…… 너 먹어야지, 배고플 텐데. 나보다 몸집도 크면서.”
“이로오. 이로. 고마워, 고마워.”
내 우울에 리바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크게 당황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좋은 단어들을 죄다 선물하듯
던졌다. 이로. 고마워. 착해. 착해. 이로.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리바이의 사고는 단순했다. 제게 좋은 것이니, 내게도 좋으리라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물끄러미 크래커를 보다가 그나마 성한 반 조각을 입 안에 넣었다. 초조하게 눈치를 살피던 리바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로! 이로!”
나는 헛웃음을 내비쳤다.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다.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
생각해보면 끝이 없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아마 줄을 세우면 연구실을 채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심지어 내가 직접 죽인 사람도 아니고 나를 배신하고 도망갔던 이가 죽었는데 이런 기분이라니.
통쾌해야 했다.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해야 했다.
그러나 원진은, 원진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어떤 점에서 원진이 다른가 하고 물으면 감정 하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형용할 방도가 없었다.
그저, 그는 내게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리바이에게 정을 줘버린 나를 경멸하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해 치를 떨면서도, 마지막에 내게 손을 내밀었던 그
인간성을.
내가 리바이를 버리고 나서 그에게 어떤 짓을 할지도 모르면서. 우리의 우정은 이미 산산조각 나서 다시 이어
붙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러면서도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날 붙잡으려고 허우적대던 마른 손.
솔직하고, 비겁하고, 잔인하며 하찮은 정에 휘둘리고 쉽게 끓었다가 쉽게 가라앉는. 무채색의 내게 그건
강렬한 붉은 붓의 스트로크였다. 원진을 볼 때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질투에 시달리고는 했다. 원진은
사랑받고 자란 티를 너무나 내서, 그래서…….
“이로? 이로?”
리바이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분명 먹을 것도 받았으니 기뻐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서.
리바이, 넌 원진을 구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럴 마음이 있었을까? 널 비난하려는 게 아냐, 그냥 너를
둘러싼 것 중 궁금한 것들이 많아서……. 그러니까 원진은 분명 영악하게 우리를 배신했고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그리고 나는 원진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찰나 리바이에게로 내 시선이 향했을 때, 내가 발견한
무언가를 떠올렸다.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너무나 묻고 싶었다.
리바이, 너는 웃고 있었던 것이었느냐고.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의문을 삼켰다. 어차피 당사자는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고 죽은 원진은 이제 뼛조각과
살점에 불과했다.
인간의 말로는 이런 식이다.
5. 마을
얼마 갇혀있지 않았는데 찬 공기가 새삼 낯설었다. 완연한 겨울이었다. 아직은 눈이 쌓이지 않은 상태이지만
곧 폭설이 내릴 것이다.
원진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 이 땅 어떤 곳에는 눈이 전혀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사계절 내내 여름, 아니,
사계절이 없었다는데, 해마다 뼈를 얼리는 겨울을 버텨내야 했던 내게는 바로 상상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겨울이라서 해가 빨리 졌다.
얼마 움직이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해가 저물어있었다. 말라비틀어진 들풀과 낙엽을 밟으며 나와 리바이는
계속 움직였다. 손과 발끝이 차가웠다.
“하아…….”
하늘을 올려다보니 내가 내뱉는 입김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손끝과 발끝에 감각이 없었다. 낭패였다.
그동안 내가 겨울에 철저히 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비축 식량과 땔감을 부지런히 마련한 것도 있었지만, 계절이
천천히 진행됨에 따라 내 육체가 바뀌는 날씨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온도와 습도가 적정 수준을 유지했던 연구소에서 호사를 누렸던 육체는 빠르게 저무는 해와 급속하게 떨어지는
온도에 적응되지 않은 상태였다. 차가운 공기에 폐가 얼 것 같았다.
엄밀히 말해 초겨울이라 그리 춥지는 않을 테지만 육체가 적응하지 못해서 더 크게 반응하는 것도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나는 주위에서 몸을 녹일 곳을 찾았다. 우선 체온을 유지하고 휴식을 취한 뒤에 내일은 어떻게든
사냥을 해야 했다.
“리바이. 안 추워?”
주저앉은 나는 가방에서 얇은 담요 하나를 꺼냈다.
큰 도움은 안 될 테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게다가 계절에 조금도 적응하지 못한 리바이다. 나보다도
추위를 더 예민하게 느낄 거였다.
“리바이?”
모자의 챙처럼 삐쭉 튀어나온 바위를 발견한 나는 그 밑으로 리바이를 끌었다. 찬 바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리바이의 손목을 잡자마자 너무 뜨거워서 나는 잠깐 한쪽 눈썹을 들었다.
“열인가?”
흰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하지만 내 손이 차갑게 얼어있어서 확실하지 않았다. 한 손등을 내 입술에 대고
다른 손은 리바이의 이마에 얹은 뒤 체온을 가늠했다. 열이 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리바이의 몸은 찬바람에
오랜 시간 노출되어 식어버린 나와 달리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안 추워? 이거 안 덮어도 돼?”
묵묵히 나를 따라오던 리바이는 내가 발걸음을 멈추는 것처럼 보이자 이제 제 흥미와 궁금증을 억누르지 않기로
했나 보다.
담요를 든 내가 안절부절못할 동안 쪼그려 앉은 리바이는 나무 밑동에 쌓인 낙엽을 쓸어보고 있었다.
“이로. 이로.”
신기한가 보다. 그럴 만도 했다.
“낙엽이야.”
“낙엽. 착해.”
“그건 나무.”
“나무. 착해.”
아예 무릎을 대고 앉은 리바이는 바닥에 코를 댈 듯 몸을 낮추어 낙엽이 쌓인 곳을 괜히 헤쳐보고, 눌러보고
바스러뜨렸다.
“그건 건드리지마, 짐승들 배설물이야.”
“?”
“배설물. 똥이라고.”
“똥. 착해.”
“…….”
언젠가는 리바이가 ‘착해’를 어떤 의미로 알고 있었는지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럴 때가 아니야.”
기껏 바위 밑으로 끌어놨는데 리바이는 내가 이끄는 족족 개구쟁이처럼 튀어나가서 두리번거리고 뭐든 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눈여겨봐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이 왕성한 호기심을 몇 시간 동안 어떻게 참았나 싶었다.
아까도 피곤하긴 했는데, 지금은 더 피곤해 죽을 것 같았다.
다리를 질질 끌며 나는 바위 밑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몸을 넣자마자 찬 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여기에 불만
피우면 딱일 텐데, 괜히 피웠다가 무엇의, 누구의 이목을 끌 수도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추운데, 이대로 계속 가야 할지 아니면 겨울을 나고 천천히 날이 풀리면 가야 할지. 아무래도 후자가 생존율이
더 높겠지. 그렇다면 어디에 자리를 틀어야 할까.
“하암…….”
하품을 한 뒤에 가물가물한 눈에 애써 힘을 주었다.
지금 당장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보금자리를 만드는 건 힘들다. 결국 누가 쓰다 남은 것을 사용하거나 혹은
남들이 살고 있는 곳을 강탈할 수밖에 없겠는데.
“이로?”
두꺼운 나무껍질을 두드려보고 까보던 리바이는 내가 사라졌다는 걸 뒤늦게 인지한 듯했다.
“이로?”
초조하게 두리번대며 날 부른다. 대답하려는 순간, 다급한 부름이 리바이에게서 뛰쳐나온다.
“ ……이로! 이…!”
“나 여기 있어.”
울겠다. 이대로라면 온갖 짐승을 쩌렁쩌렁 불러 깨워 댈 것 같아 크게 대답했다. 리바이가 쪼르르 내가 있는
바위 밑으로 들어온다.
“이로! 이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나를 껴안고 제 이마를 비벼 댄다. 평소와 같은 기쁨의 ‘이로’가 아니라 원망이 실린 ‘
이로!’인 것을 보니 깜짝 놀라게 왜 말도 없이 이리로 들어갔냐 이런 식의 타박인 것 같다.
리바이는 제 체취를 묻히는 고양이처럼 나를 단단히 끌어안고 몸을 딱 붙였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몸을 맞댄
채로 내 머리에 코를 박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거나, 볼을 핥아 올리고 빨기를 반복했다.
“……내 볼 빨지 마.”
급박했던 리바이의 호흡이 점차 안정을 찾는다. 내 머리를 쯉쯉 물고 그러는 게 나름대로의 진정법 같았다.
그러고는 이제는 아물고 있는 목 뒤의 상처에 입술을 묻는다. 어쩌면 배가 고파서일지도 모른다.
“배고파?”
손목을 들었다. 저번에 그었던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아서, 딱지를 떼고 혀로 좀 헤집는다면 바로 피가 날
것 같았다.
리바이는 고개를 젓더니 나를 꽁꽁 껴안는다. 그의 품은 모닥불보다도 따듯했다. 뜨거운 것에 가까웠다. 찬
바람과 긴장에 식어있던 몸이 봄을 만난 고드름처럼 서서히 녹아내렸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자면 안 되는데.
실험체가 우리를 쫓아올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갈 수 있을 때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했다. 하지만 해가 저무니까 이대로 움직이는 것도 무리일 것 같긴 하다.
담요를 크게 펼쳐 나를 감싼 리바이 위로 덮어주었다. 얘도 사람인데, 춥겠지.
“이로?”
“졸려.”
“착해, 이로, 착하다.”
몸이 너무나 무거워서 눈꺼풀조차 제대로 들 수 없었다. 어깨를 비틀어 뒤척이자 이대로 딱 자면 편할 것 같은
최적의 자세가 되었다.
둥지에 파묻힌 것 같았다. 안락했다. 리바이가 조근조근 나를 부르는 것도, 이따금씩 들리는 바람 소리도,
리바이가 내 머리를 연거푸 쓰다듬고 내 볼을 아프지 않게 무는 것도.
이곳이 무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이 틀 때쯤 몸을 일으켰다.
숙면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몸이었기 때문에 자다가 짐승 울음소리나 어떤 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눈이
떠지고는 했다.
리바이에게 안긴 채로 눈만 뜨고 주위 소리에 집중한 것뿐이었는데 리바이는 내가 잠깐이라도 깬 것을 예민하게
알아챘다.
새소리에 번쩍 눈을 뜨면 달래듯 내 뒷머리를 쓰다듬고 비비적거리며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면 날이 섰던
감각이 녹은 버터처럼 뭉그러져서 나는 다 타버린 장작처럼 매가리 없이 그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완전히 눈을 뜬 것은 새벽이었다.
새벽이었지만 겨울이기에 이미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다시 움직일 때가 됐다.
“이로. 피곤해? 졸려?”
몸을 일으키고 구덩이에서 나와서 기지개를 피자마자 들은 질문이 저거다.
리바이가 배울 만큼 저 말을 반복했나 싶었다. 앞으로는 좋은 말 바른말만 가르쳐야…… 아니다, 리바이도
피곤하고 졸릴 때 표현할 필요가 있으니 조금만 자제해야겠다.
구덩이 바깥에서 손을 내밀었다. 리바이더러 잡고 나오라는 뜻이었는데, 리바이는 내 손을 멀뚱히 보더니
코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작은 짐승이 서로 인사하듯, 제 콧방울을 톡 내 손등에 대고 가볍게 비볐다. 하하,
작은 웃음이 터졌다. 항상 내 예상을 뛰어넘고는 했다.
“잡아야지. 잡고 나와야지.”
잡으라며 손을 여러 번 흔들자 리바이가 그제야 손을 잡고 바위 밑을 나왔다.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새벽이라
공기가 차가웠다. 아늑하게 녹아있던 폐가 찬 공기를 만나 바짝 긴장한다.
“이쪽으로.”
“이쪽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이쪽이래. 이리 와.”
담요를 가방에 넣으며 리바이를 타박했다. 잔소리하면서도 웃음이 실실 나왔다.
“배고프지는 않지?”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노숙이 습관이 되면 안 된다. 못해도 오늘이나 내일 해가 저물기까지는 이 겨울을
어디서 어떻게 보낼지 선택해야 했다.
“나무.”
“맞아, 나무.”
내 보폭을 맞춰 걸으며 리바이는 내가 가르쳐준 것을 잃지 않고 읊조렸다.
“나뭇가지.”
“그래, 나뭇가지.”
“낙엽.”
“맞아, 낙엽.”
“밤.”
“밤 말고 하늘.”
“밤 말고 하늘.”
“아니, 하늘이라고. 하늘.”
“하늘.”
“그래.”
“사람.”
“맞아, 사람.”
……사람?!
아무 생각 없이 대꾸해주다가 화들짝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릴 뻔했다.
“사람?! 어디!”
검지를 든 리바이가 쭈욱 하늘 쪽을 가리킨다. 시야가 손가락을 따라 올라갔다.
리바이가 가리키는 것은 바로 내 위였다. 큰 나무 위에 옹기종기 매달려서 달달 떨며 우리를 보고 있는 아이 둘.
* * *
아이들의 이름은 맥스와 라일리였다.
사람들의 발길에 닳은 길을 밟으면서도 맥스와 라일리는 말을 쉬지 않았다.
“진짜 많이 살았었는데, 갑자기 위이이잉 하는 경고음이 울리고 막 그러더니 막 Z 들이 막 몰려오더니요.”
중구난방이었지만 아이의 말을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나와 리바이에게 포착되어서 뀹 하는 이상한 숨소리를 내던 라일리와 맥스는 우리가 공격적으로 굴지 않고
어르고 달래자 곧잘 경계를 풀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공동체의 위치를 묻자 아무런 의심 없이 알려주기까지 했다.
라일리의 말에 따르면 몇백 명으로 이루어졌던 대규모의 공동체였다고 한다. 자급자족을 하면서 꽤 오랜 시간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말 그대로 부지불식간에 울타리가 뚫리더니 대규모의 Z 무리와 ‘흰
괴물’이 등장했다고 했다.
라일리가 말하는 흰 괴물은 열여덟 번째 실험체가 분명하다.
이야기하며 라일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리바이를 힐긋거리기까지 했으니 틀림없다.
어쨌거나, 공동체가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습격이었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Z 는 원래 군락을 형성하지 않는다. 되는대로 자극과 본능만을 따라 움직여 댔고,
거대한 무리를 형성해서 인간의 공동체를 습격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Z 를 통솔할 줄 알게 된 실험체가 등장했으니 사태는 달라진 것이다.
어쨌거나, 실험체의 존재를 모르고 있던 이들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공격을 당했고, 백 명이 넘던 구성원은
이제 열 명 남짓하게 남은 상황이 되었다. 그 정도 숫자라면 공동체보다는 한 가정에 가까운 규모이다.
“겨울이 오니까 혹시 모를 일에 대비를 해야 한다고 티나가 그랬어요.”
라일리는 밝게 말했다.
아이들이 경계를 빨리 풀었다는 건 좋은 소식이다. 아이들의 성향은 공동체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예시이기
때문이다.
“여기예요!”
공동체는 우리가 향하던 곳과 비슷한 방향에 위치해 있었다.
하늘을 보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겨울이지만 한참을 걸었더니 땀이 나서 이마를 닦았다. 리바이의
이마도 닦아주려 하는데, 땀 한 방울 없이 뽀송뽀송했다. ……불공평하다.
라일리는 공동체 정문을 가리켰다. 땀을 닦으며 낮은 펜스와 가시철조망을 넘어섰다. 정문 바로 앞까지 와서
보니 높은 나무로 세운 울타리가 무너져있었다. 막 보수를 한 듯 구멍이 메워져 있기는 했지만 안 하느니만
못한 땜빵식 대응이다.
아이의 말대로 한때는 꽤 큰 규모였던 것 같다. 지금은 텅 비어있지만 3 층 높이의 초소도 있고, 울타리에
카메라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라일리는 그저 ‘갑작스러운 습격’이라고만 했지만 아직도 핏자국과 그때의
상흔이 다 아물지 않은 곳을 보고 있자니 한층 실감이 났다.
라일리가 나무 울타리 사이로 낮게 뚫린 개구멍을 가리켰다. 미처 보수하지 못해 아이들의 출입구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이리로 오면 돼요!”
나는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겨울이지만 꼭 공동체에 합류해야만 겨울을 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초겨울이니 지금이라도 부지런하게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식량을 비축해두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라일리의 말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도, 불신하는 것도 아니지만, 공동체 성격이 정확히 어떤지도 모르고
실험실과 만 하루하고 반나절 거리인 이곳에서 쉬어도 되는 걸까?
고민이 되었다. 사람을, 특히 무리를 형성한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내 천성이 다시 삐죽 고개를 든 것이다.
그냥 가던 길을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쪽으로 마음이 기운 참이었다.
“가자, 리바이.”
그리고 옆을 돌아보았는데,
“리바이?”
오른편에 잘 있던 리바이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로?”
퍼뜩 놀라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언제 거길 또 들어간 건지, 나무 울타리 사이로 리바이의 흰 피부가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해맑게 웃으며 리바이가 손짓한다.
어이가 없었다.
노인 하나에 남자 둘 여자 셋에 어린아이 다섯. 그게 이 공동체의 전부였다.
이곳의 새로운 리더인 여성은 자신을 티나 라고 소개했다. 외부인에 대한 거부감이 드러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어쩌면 거부감을 드러낼 여유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옆에서 울타리를 보수하다가 우리를
발견한 티나는 외부인의 도움이 절실해 보였다.
“보시다시피 난리가 난 상태예요. 간신히 목숨만 부지했어요.”
엉겁결에 리더가 된 티나는 한탄하듯 설명을 이어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지면과 색이 다른 곳이 군데군데
있었다. 땅을 파 시체를 묻은 곳이었다.
티나는 그것이 ‘백색 괴물’의 짓이라고 했다. 우리가 갇혀있을 동안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다녔던 것이다.
“또 올까요?”
“모르겠네요. 우리를 먹잇감으로 보고 공격한 거였다면, 아무리 겨울 준비가 잘 되어있다고 해도 이곳을
버리고 살길을 도모했을 거예요.”
그것이 실험체인지 모르는 티나는 불가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내장만 파먹었더라고요. 특식처럼.”
내장과 뇌가 텅 비어서 Z 로 변하지도 않은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며 티나는 조소했다.
몇 개는 머리와 목이 분리되어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멀쩡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티나는 간신히 흙만 덮은
임시 무덤을 가리켰다.
“메이슨이에요. 공동체 내에서 다음 리더로 유력했어요. 활도, 총도 잘 쏘고 사냥도 도맡아 했는데.
사람들이 사냥당하면 도망이나 갈 것이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용감하게 나섰더라고요. 카메라를
확인해보니 뒤에서 흰 괴물을 공격했었어요. 결말은 이거였지만.”
그것은 메이슨의 몸에 이를 대지도 않았다. 그저 가지고 놀았을 뿐이었다. 장난감처럼. 허공에 던지고
절규하는 메이슨의 사지를 찢었다. 그러고는 씨를 뿌리듯 메이슨의 살점을 여기저기 던져놓고 갔다. 조악한
짓이었다.
“둘도 괴물을 피해 다니고 있었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이라고 할 때마다 리바이가 고개를 들어서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손이 필요한 것 같은데.”
“둘은 쉴 곳이 필요해 보이고요.”
티나와 나는 간결하게 그런 말만 주고받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티나의 말대로 이들 공동체는 이미 겨울을 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구성원 대부분이 사망했기 때문에
외부인을 받아들일 만한 여유는 충분했다.
이런 상황에서 건장한 성인 남성 둘이 합류하는 것은 공동체의 생존에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성인
둘이서 열 명의 사람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서로 안심할 수 있다. 완벽한 밸런스였다.
나는 마음을 바꿨다. 곧 겨울이 온다. 여러모로 이곳에 남는 게 최선책인 것 같았다.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고 여기에 있을 수는 없었다. 실험체가 한 번 이곳을 공격했으니 또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도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길을 떠나는 것은 실험실로 돌아가는 것만큼이나 위험했다.
선택권이 별로 없었다.
“겨울 동안 잘 부탁합니다.”
티나가 희미하게 웃었다.
“저도요.”
그리고 티나는 우리를 비어있는 집 한 채로 이끌었다. 문 앞에 서서 집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연구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원진과 나는 몇 주 이상을 노숙해야 했다. 지붕이 제대로 붙어있는 집은 오랜만에 본다.
방문을 열고 꼭 풀어야 할 짐만 푸는데, 리바이는 결단코 내 방에서 나가지 않으려 했다. 네 방은 다른
방이라고 가리키는데, 리바이가 열심히 움직이는 내 팔에 홀린 듯 시선을 주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리바이?”
리바이의 시선은 소매 밑으로 자상이 살짝 드러난 내 손목에 가 있었다. 붉은 입술이 슬며시 열리고, 젖은
혀가 아랫입술을 진득하니 누르고 쓴다. 갈증 어린 시선이었다. 내 팔을 보며 입술을 축인 것이다.
그렇지, 피를 안 먹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나는 난처한 얼굴로 리바이의 아래를 힐긋거렸다.
내 팔을 두 손으로 붙잡고 코를 묻은 리바이는 목을 축이고 있었다. 목울대가 넘어가는 소리가 적막한 공간에
크게 다가왔다. 침대에 앉은 나와, 내가 내미는 팔의 위치 때문에 리바이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그래서 발기한 남성기가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기실 어떤 자세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리바이의 체격에
걸맞게 거대한 성기는 피가 흐르는 내 손목을 물 때 한층 더 흉흉하게 부풀었다.
“리바이.”
그를 부르자 가는 신음과 같은 숨을 쉬며 답한다. 끙끙대는 소리에 어느새 색욕이 섞여 있다. 스스로도 모르는
것 같지만 무아지경으로 내 피를 핥으며 속눈썹을 길게 늘어뜨린 리바이는 허공에 대고 추삽질하듯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얇은 신음도 함께였다.
성교육을 해 줄 때가 온 것 같다. 아이들도 있는데 우뚝 발기해서 숨길 수도 없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잖은가.
“끄응. 흐읍. 이로. 흐으.”
달뜬 신음에 귀가 달아올랐다.
“이제 그만.”
아쉽게 입술 축인 리바이가 고개를 든다. 무해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내 피에 어떤
마법의 힘이라도 담겨있는 걸까, 리바이는 매번 이렇게 혼몽에 빠진 모습이다.
목을 축인 리바이를 두고 침대에 누웠다. 가서 자라는 뜻이었는데 리바이는 내 곁으로 와 자연스레 눕는다.
잘 때 누군가 옆에 있는 게 익숙지 않다. 그러나 리바이의 품은 달랐다. 그는 나를 품에 이끌어 안고 내 머리를
조심스레 감쌌다.
스산한 바람 소리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선잠에 서서히 빠지는 내내, 내 머리를 조용히 쓸던 리바이가 고개를
들고 이마에 볼을 비비고, 만족스레 미소 짓다가, 조용히 웃길 반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애정에
잠식될 것 같았다. 언젠가는 이것도 익숙해지겠지.
티나는 나와 리바이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다음날 우리는 바로 연장과 함께 울타리 보수에
배정되었다.
사망한 ‘메이슨’과 다르게 울타리를 보수하는 남자들은 이 일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물어보니
원래는 식량 보급 담당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이런 일은 내가 더 솜씨가 좋았다.
연장을 들고 몇 번 움직이는 나를 유심히 보던 남자들이 반색하며 다가왔다.
“손이 빠르네요.”
“해본 적이 많아요.”
위치타의 보호시설에서 살 때 나는 주로 이런 잡일을 했고 보고 들은 게 많은 편이었다. 갓난아이와 당장
병상에 앉은 노인을 제외하면 모두 일을 했다. 거대해서 하늘을 반 이상 가리던 장벽 뒤로는 나무로 만든
울타리가 삼 중으로 있었다.
모든 시설에는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학교가 끝나고 배식을 받고 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작은 심부름이나
일에 투입되고는 했다.
남자들은 한 명씩 자기소개를 했다.
에이든, 코너.
이름을 외우는 것이 익숙지 않아 나는 이럴 때마다 여러 번 되뇌어야 했다.
“이로예요.”
“이로. 성은?”
“없어요.”
알았던 것도 같은데 희미했다. 아버지는 독일계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뭐 그런 성씨를 가지고 있었겠지.
미들네임은 한국식이었다. 어릴 적에는 분명 알고 있었는데, 잊고 산 날이 더 많아 어느 순간 완전히 잊게
되었다.
“반가워요, 이로.”
에이든은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포옹을 좋아하지도, 익숙하지도 않았지만 이것 가지고 과잉 반응할
필요도 없다.
에이든과 코너와 한 번씩 포옹을 나누었다. 이들은 시설 보수에 대해 정말로 아는 게 없어 보였다. 그동안
나는 혼자 살아왔기 때문에 보수, 개조 역시 홀로 도맡아 했었다.
내가 알려줄 것이 있어서 다행이다. 만약 나와 리바이가 생산성이 떨어지고 식량 비축에 짐만 되는 존재였다면
이들이 어떻게 돌변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곧 나는 리바이를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모르는 리바이가 에이든이 내미는 손을 마주 잡고 악수할
리가 만무하다.
에이든이 머쓱하게 손을 내리자 공기가 어색하게 가라앉았다. 에이든과 한참 이야기를 하느라 몰랐는데,
리바이는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콕 찌르면 펑 하고 터질 것처럼. 심통이 난 게 분명했다.
“왜 그래.”
둘을 떠나보내고 리바이를 불렀다.
내가 못, 망치, 와이어 등을 하나씩 가리키며 알려줄 때만 해도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좋아했는데.
‘어어, 손 조심해. 이건 내가 할게, 이것만 들고 있어 봐.’
‘이거?’
‘그래. 리바이 이제는 말 잘하네.’
‘착해?’
‘응, 최고야.’
이런 말을 주고받을 때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해서 콧대가 높아진 리바이였는데 말이다.
“리바이. 여기 잡아야지.”
누가 봐도 삐쳐 있는데 또 시키는 건 잘했다. 나무를 베 오는 것도 뚝딱 해오고. 그런데 볼만큼은
개구리만큼이나 부풀어있다.
“리바이. 화났어?”
“아니야.”
화났다. 화났어.
“왜 삐쳤는데.”
울타리를 얼마 고치지도 못했는데 해가 금방 저물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어두울 때 울타리
밖에서 일을 계속하는 건 무리였다.
왔던 대로 개구멍을 통해 들어오자 에이든과 코너가 손을 들어 반겼다. 이들에게 연장을 반납하자 아까 봤던
아이 둘이 먹을 것을 가지고 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규모 인원을 위해 겨울 준비를 했기 때문에 물품과
식량만큼은 차고 넘쳤다. 티나의 말로는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몸을 씻을 수 있는 호수도 있다고 한다.
가리키는 대로 호수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리바이를 재차 불렀다.
“왜 그래.”
“아니야. 피곤해.”
와우. 말이 빨리 느는 걸 보니 내가 리바이와 사회계약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일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대단하군. 싸가지도 같이 늘면 좋으련만.
주저앉아 흙과 녹이 잔뜩 묻은 손을 씻었다. 내 손에는 아까 티나가 건네준 작은 비누가 들려있었다. 비누는
간단하면서도 흔치 않은 사치이다. 비누 하나만으로도 삶의 질은 크게 향상된다. 세균을 없애니 질병이
발병할 확률도 크게 줄어든다.
아직도 뚱해 있는 리바이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내가 손 씻는 모습을 흘깃거리면서도 고집스레 나를 보지
않는 리바이의 손을 붙잡았다. 차갑게 식은 내 손에 그의 뜨거운 손바닥이 닿자 곧 녹을 것 같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비누를 이렇게 문질러서-.”
펼친 리바이의 손은 내 손보다 훨씬 컸다. 그렇다고 내 손이 특히 작은 것도 아닌데.
“거품을 내야지. 그래, 잘하네.”
뚱해 있는 리바이의 볼이 점차 수그러드는 것 같다. 리바이가 나보다 훨씬 크더라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칭찬은 리바이를 춤추게 했으니까.
“착하다. 리바이, 착해.”
비실비실 풀리는 리바이의 입가를 모른 척하고 손을 깨끗하게 씻었다. 내친김에 세수를 하려다가 아예 옷을
벗고 입수를 했다.
물이 당장 얼어버릴 것처럼 차가웠지만 위생은 곧 생존과도 연관된 일이다.
다 풀리지 않은 리바이는 고집스레 몸을 돌리고 나를 보지 않고 있다. 뭐, 프라이버시를 신경 써준다면 나야
다행이지.
빠르게 수건으로 몸을 닦고 새 옷을 갈아입었다. 젖은 옷을 짜며 리바이의 등을 툭 쳤다.
“이제 왜 화났는지 말해봐.”
“이로, 너는 망치랑 못, 사람들 와서, 나 피곤해.”
기다린 듯 말문 터진 거 봐. 안 물었으면 억울해서 어쩔 뻔했나 싶었다.
“안 피곤해. 무슨 말이야.”
“사람들. 이로가 나 피곤해…….”
“…….”
에이든과 코너가 오자 내가 자기를 피곤해하는 것처럼 뒷전으로 밀어뒀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런 거 아니야.”
리바이의 입에서는 슬슬 단어의 조합이 나오고 있었다.
아니라는 말에 점차 풀리고 있는 리바이와 별개로, 뿌듯함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괴물이라니. 원진은 왜 널 그렇게 폄하했을까.
“미안해. 안 그럴게.”
“응. 하지 마.”
“그래.”
확답을 해주자 옹골지게 뭉쳤던 울화가 완전히 풀렸다. 기분이 좋아진 리바이와 함께 티나가 알려준 집으로
향했다.
어두워져서 길을 가늠하며 걷고 있는데, 따듯한 무언가가 손목에 닿아왔다. 리바이였다.
“이로, 손.”
호숫가에서 젖어 식어버린 손가락.
굳은살과 상처가 가득한 손가락 사이를 책장에 마지막 책 한 권을 꽂듯, 너는 그렇게 자리를 찾아 손가락을
얽었다.
초겨울이었다. 리바이가 나를 다 태울 것처럼 뜨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추운 겨울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리바이를 태양이 작열하는 한여름에 만났더라도, 나는 기어코 리바이의 온기에 물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걷는 길마다 낙엽이 바스러졌다. 아무도 모르는 자국을 만들어냈을 테다.
새벽녘, 희미한 신음에 눈을 떴다. 분명 잘 때는 내가 품에 안겨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그 반대였다.
리바이는 너른 어깨를 움츠리고 내 품에 안겨있었다.
계속해서 들리는 거친 숨에 고개를 내렸다. 리바이였다.
“이로.”
허벅지에 단단한 것이 닿아서 나는 그 자세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리바이의 발기한 성기였다.
내 허벅지를 제 다리 사이에 끼고 있던 리바이는 잠결에 무언가를 느끼고는, 흐으 하는 작은 신음과 함께 제
다리를 단단히 조여 내 허벅지를 고정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제 발기한 성기를 아래위로 비비기 시작했다.
파도에 배가 흔들리듯 잔잔한 움직임이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거친 풍랑이 일고 있었다.
“아아……. 이로. 흐으, 아.”
탄식과 같은 신음이었다. 귀와 목덜미에 열이 올랐다.
리바이의 첫 몽정이었다.
깨워야 할까? 하는 고민은 얼마 가지 않았다. 내가 움직일 수 없도록 나를 세게 껴안은 리바이의 허리 짓이
거세졌다.
“리바이. ……리바이!”
목소리를 높이자 곧 리바이가 끄응 하며 눈을 떴다. 얇은 눈꺼풀 밑으로 드러나는 호박색 동공이 선연하다.
“일어나.”
“이제?”
“이제 말고 지금. 지금 일어나.”
리바이는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하품을 하는데 무해한 상반신과 달리 아래는 흉흉하다. 바짝 힘이 들어간
성기를 리바이는 뒤늦게 발견했다. 내가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리바이의 시선은 자연스레 제
아래로 향했다.
“이로. 이로오.”
어린아이와 같은 언어와 달리 그의 목소리는 그윽하다. 낮고, 귓가에 대고 속삭이면 심장까지 울려 퍼질 것
같다. 그런 목소리로 애달프게 나를 부르며 리바이는 내게 몸을 붙였다. 끙끙대며 속삭인다. 아프다고.
“자. 자라고.”
“아니야. 이제 일어나 했잖아.”
“취소야, 다시 자.”
영문을 모르고 단잠에서 깨버린 리바이를 두고 나는 등을 돌렸다.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매고 천둥을 무서워하는
아이처럼 옹송그렸다. 리바이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로, 나 봐. 나.”
저를 마주 보고 자라는 거다.
“시끄러워. 빨리 자.”
내가 두른 이불을 빼앗으려던 리바이는 내가 고집을 부리자 뭐라 웅얼대며 몸을 눕혔다.
아직도 뒷덜미가 화끈거렸다.
의식주가 해결되어서일까, 리바이의 다른 것이 고개를 든 것 같다.
초반 빼고는 덜하다 싶어서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지금 리바이는 내 피 한 방울이라도 입술로 떨어지면
아래를 키웠다. 입은 바지로는 발기한 남성기가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적당히 피를 마시고 나른하게 눈을 뜬 리바이가 나를 올려다본다.
리바이가 이럴 때마다 낯설었다. 신장 차이가 한 뼘 이상이라 거의 항상 내가 올려다보던 리바이는 피를 마실
때는 기꺼이 몸을 낮추고 제 취약한 모습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만족스레 피를 마시면, 이렇게 나를
혼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리바이의 눈빛과 태도를 보면, 꼭 내가 보잘것없는 한 명의 인간이 아닌, 위대한 무언가라도 된
듯한 착각이 인다. 그는 신을 영접한 광신도처럼, 자신의 꿈이 기적처럼 현실이 된 몽상가처럼 나를 응시한다.
“이로오…….”
그리고 천천히 정신이 들고 나면 리바이는 제 것을 쥐고는 애처롭게 눈꼬리를 내린다.
요즘 리바이의, 아니, 나의 골칫거리는 이거다.
무언가를 느꼈는지, 발기해서 거대해진 성기를 자꾸만 붙여오는 리바이. 가만히 두면 허락한 줄 알고 허리를
조금씩 흔들거나 허리에 힘을 주어 눌러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덩달아 내 숨이 거칠어졌다.
“이로. 아파.”
간결한 단어지만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호소하듯 말하면 기분이 오묘해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으면서 열기가
오른 귀만 두둥실 뜨는 듯하다. 나는 시선을 피했다.
아프다며 리바이가 바지춤에 손을 댔다. 그러잖아도 거대한 성기가 바지 안에서 발기하니 갑갑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미처 막기도 전에 아무렇지 않게 바지춤을 내렸다. 이제 단단히 솟아오른 기둥과 도홧빛 귀두를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만 발기가 벌써 몇 번째였지.
아무래도 해소하지 못하니 더 이러는 것 같았다. 고민하던 나는 리바이의 뒤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너른
등이 가슴에 벅차게 와닿는다.
“이로?”
의아해하는 리바이를 눈 딱 감고 무시하며 손을 뻗었다. 건드리자마자, 리바이의 몸이 펄떡 뛰었다.
“리바이.”
기둥은 손을 녹일 만큼 뜨거웠다. 잡자마자 리바이는 탄성을 터뜨렸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손을 움직이는 거야.”
리바이는 내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신음을 터뜨리기에 바빴다. 나보다 한참 큰, 외딴곳에
홀로 떨어져 있어도 굳건히 생존할 대단한 이가 내 손에서 그저 휘몰아쳐지며 이리저리 신음을 내뱉는다.
턱을 치켜든 리바이는 뜨거운 숨만 내쉴 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기교를 부리는 것도 아니다.
기계적으로 손을 아래위로 흔들 뿐인데,
“이로. 이로… 흑, 이로.”
곧 있으면 울음까지 터뜨릴 기세였다. 얼마나 흥분했는지의 그의 허벅지가 달달 떨린다.
기둥을 감싼 채로 조심스레 움직이길 반복했다. 남의 것을 만지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내 손짓은 서툴렀지만
고작 쥐었다가 힘을 풀기를 반복하는 것에도 리바이는 긴 신음을 내질렀다. 백치처럼 잇새로 뜨거운 숨을 토해
낸다.
“아, 이로, 나 아파, 아파.”
세게 쥔 것도 아니니 고통을 의미하는 게 아닐 것이다.
리바이는 그 단어밖에 모르는 것처럼 턱을 치켜든 채로 신음했다.
손안의 감촉이 조금 익숙해져서 그의 것을 관찰했다.
리바이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컸다. 신장과 탄탄한 몸, 넓은 어깨를 고려해도 유별나게 거대했다. 아무런
성적 접촉이 없던 기둥은 살색이 돌았고 끄트머리는 도홧빛이었다.
“리바이.”
포피를 밀어내자 예민한 첨단이 드러났다. 기둥이 바르르 떨었다.
몇 번 흔들지 않았지만 이런 자극이 처음인 리바이에게는 큰 쾌락이었을 것이다.
“이로. 이로, 이로…….”
예민한 기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백탁액을 내뿜었다. 길게 사정하며 리바이는 어떻게든 나와 눈을 마주치려
했다.
“아아… 이로!”
사정하면서, 리바이는 나를 시야에 가두려는 듯 필사적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조금 전과 다름없이
충동적으로 움직였다.
내 이름을 연호하는 붉은 입술에 내 입술을 누른 것이다.
입술이 부딪쳤다. 조금의 틈도 없이 맞물리고, 숨결이 오고 갔다.
마침내 리바이의 성기가 점액질 액체를 다 토해내고, 그가 밭은 숨을 터뜨렸을 때, 흐느끼듯 호흡하며
리바이가 입술을 뗐다. 한참이나 서로의 시선이 오고 갔다.
“이로. 이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은 리바이에게는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최선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듯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손바닥을 뒤집어 보는 것처럼 손쉬웠다.
그가 쾌락에 뜨거운 숨을 내쉴 동안 나는 열을 발산하는 그의 이마에 내 이마를 가져다 댔다. 그의 얇은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리바이는 극한의 쾌락에 잠식해 있었다. 그리고 쾌락의 여운을 느끼는 내내, 리바이는 나를 떠올리고 오직
내게만 집중했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내내 나의 이름을 읊조리고, 마침내 쾌락에서 벗어났을 때 그가
바라본 것은 나였기 때문에.
리바이와 이래도 될까?
하는 의문은 아주 잠시 동안만 고개를 들이밀었고 곧 사그라들었다.
일을 하는 내내 라일리는 옆에서 기웃거렸다.
“그건 어디다 쓰는 거예요?”
내가 뭐라도 하면 그게 뭐냐, 왜 그러냐 하며 질문을 쏟아내는 것이다. 나는 에너지를 보수에 반, 설명에 반
할애해야 했다. 라일리는 내 대답 하나하나를 경청하다가 무언가를 알게 되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까르르하고 풀숲을 울리는 웃음소리.
듣기 나쁘지 않은 목소리를 내며 라일리는 기웃거렸고, 리바이는 그런 라일리 옆에서 기웃거렸다.
라일리는 어떤 신기한 장난감을 갖고 있었다. 작은 공같이 생겼지만 버튼을 누르면 저 혼자 척척 움직이더니
손바닥보다 더 큰 경찰차 모양으로 변하는 그런 장난감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마법을 목격한 고양이처럼 리바이의 호박색 눈동자의 동공이 똥그랗게 확장되더니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리바이와 라일리의 정신연령이 얼추 맞지 않나 생각했다. 알지 못할 이유로 둘은 서로를 매우 싫어했지만.
“이건 내 거야, 안 줘!”
홀리듯 장난감에 시야가 고정된 리바이에게서 라일리는 그걸 주머니에 쏙 넣었다. 리바이의 투지가 살아나서
한참 말려야 했다.
“안 돼, 리바이. 저건 라일리 거야.”
“이로, 나도.”
“안 된다니까.”
저게 생존과 직결된 물건이라면 모를까, 애한테서 장난감을 강탈할 수는 없다.
“언제? 나 저거.”
“라일리가 주면 모를까, 안 돼. 뭐, 라일리가 줄 일도 없지만.”
“내가 손, 가져.”
“뺏지 마!”
이런 식의 대화가 주였다.
리바이의 윤리관은 라일리보다 못했다. 세상이 다 망했는데 윤리를 따지기 우습지만 적어도 흐릿하게만이라도
윤리관이 있어야 하는데 리바이에게는 그 틀 자체가 없었다. 정신연령이든 윤리관이든, 아이보다도 못했다.
그러나 정신연령을 차치하면 리바이의 육체는 완연한 성인이었다.
“이로. 이로.”
자위를 한 번 가르쳐 준 뒤로 리바이의 주의는 온통 그리로 향해있다.
주위에 사람이 있는데도 발기한 성기를 들이밀길래 한 번 크게 혼낸 이후로 리바이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꼭 확인하고 나서야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또 섰어?”
“응, 응.”
바지를 풀어 헤치는 리바이의 행동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리바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내 허벅지에 제 것을 비비며 나와 입술을 맞대는
것이다.
처음 키스를 했을 때 리바이의 호박색 동공이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리바이는 이제
자연스레 키스를 바랐다. 갈급하게 피를 마시던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아니, 그때보다 더 필사적인
몸짓으로 리바이는 입술을 부딪쳤다. 내 타액으로 환각과 쾌락의 세상으로 인도되는 것처럼.
입술이 맞물리는 즉시 리바이에게서 신음이 터졌다. 떨리는 목소리.
“이로…….”
“하아, 리바이…….”
내 타액이 리바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모른다. 어쩌면 피처럼 갈증을 채워줄지도 모르지.
리바이는 그렇다 치자. 나는 왜 그와 입술을 맞대고 있을까.
왜 거리낌 없이 리바이의 입술을 벌리고, 내 혀를 넣어 부드러운 점막을 혀로 쓸고 바르르 떠는 리바이의 등을
어루만지는 걸까.
“이로. 이로…….”
한참 키스를 했을까, 눈꼬리를 불쌍하게 내린 리바이가 아래를 내려다본다. 리바이의 것에서는 선액이
맺히다 못해 흐르고 있었다. 그가 흘린 액이 내 바지에 짙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가르쳐줬잖아.”
“아니야.”
“뭐가 아니야.”
자위를 가르쳐 줬으니 혼자 해보라고 시켰지만 리바이는 고집스레 고개를 흔든다. 내 손을 가지고 와서 기둥에
댄다.
“혼자 하라니까.”
“……아니야.”
아닌 게 아니다. 이러다가는 리바이가 발기할 때마다 손을 내줘야 하게 생겼다. 버릇을 들여야 했다.
그러잖아도 매번 발딱발딱 세우는데.
리바이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리바이는 울상이 됐다- 그리고 그를 이끌어 침대에 걸터앉게 했다. 그의 등에
내 가슴을 대고 뒤에서 껴안은 자세로 달랬다.
“못 참겠으면 이렇게 해야 한다니까.”
뾰로통한 볼을 콕 찔렀다. 솔직하고 직설적이고 체면과 자존심을 모르는 리바이. 아이 같은 태도와 전혀
그렇지 않은 몸을 가진 리바이의 손등을 감싸 그의 것을 쥐게 했다. 댓 발 나와 있는 입술이 즉각적으로 열린다.
“아…….”
부정할 수 없는 성인 남성의 목소리.
“이로.”
곧이라도 끊어질 법한 목소리로 리바이는 나를 불렀다.
“손. 움직여야지.”
그의 손을 감싸 쥔 채로 움직이지 않자 리바이가 서툴게 자위하기 시작한다. 시선은 내게 고정한 채로. 내가
단단한 고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게 비스듬히 기대서 나른한 숨을 내뱉는다. 옷감이 맞비벼져서 나오는 작은
소음. 질척한 귀두, 찔꺽거리는 소리와 점차 거세지는 숨.
“이로. 이로…….”
“리바이, 잘하고 있어.”
“나 착해?”
왜 움찔했는지 모르겠다.
일순간 답하지 못하자 리바이의 손이 우뚝 멈춘다. 나른하게 풀려있던 눈에 초조함이 서린다. 그의 눈에는,
그의 세상에는 온통 나밖에 없다. 내 세상은 온통 나였는데. 그의 세상엔 나뿐이다.
“이로?”
답하지 않자 저 혼자 끝까지 발기해서 꺼떡거리는 것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리바이가 몸을 돌린다. 내가
괜찮은지 확인하기 위해 머리부터 차근차근 나를 해부하듯 살핀다.
가끔, 그와 나 사이에 대화가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의미가 없을 때가 있다.
호박색 눈에 마력이 깃든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럴 리가 없으니까.
내 눈을 한참이나 살피던 리바이의 표정이 달라진 건 그때쯤이었다. 눈에 고정되어있던 호박색 동공이 밑으로
향한다. 다름 아닌 내 아래로.
바보처럼 나는 붉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손등을 들어 눈가에 댔다. 전혀 숨겨지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부끄러움에 온몸이 터질지도 모른다.
“이로. 이로!”
내 이름을 연호한 리바이는 잔뜩 흥분해 내게 달려들었다. 자세가 반전된다. 침대 밖으로 발만 내리고
누워버린 나와 그 위에 올라탄 리바이. 아까보다 더 뜨거운 숨을 내뱉은 리바이는 내 얼굴을 온통 침 범벅으로
만들 기세로 움직였다.
키스를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리바이는 애처롭게 내 볼과 제 볼을 비비며 숨을 내뱉기만 할
뿐이다. 뜨거운 숨이 귓가에 닿을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고 발끝이 짜르르하게 울렸다.
진정하지 못하는 리바이의 목을 잡아끌어 입술을 눌렀다. 그제야 리바이의 기세가 잠잠해진다. 아래와
다르게.
찔걱찔걱 하는 젖은 소리에 밑을 보니 ‘아니야’라고 한 게 무색하게 리바이는 제 것을 흔들고 있었다. 눈을
감고 내 키스를 음미하면서, 나를 두고 자위를 하고 있었다.
“하아……. 미치겠다.”
한 손을 내려 바지춤을 풀려 했는데 잘되지 않았다. 내 손이 떨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그때 알아챘다.
바지를 대충 내리고 어느새 완전히 발기한 내 것을 꺼냈다. 오랜만의 성적 자극이었다. 자위는 오랜만이고,
누군가에게 내 것을 이런 식으로 보인 건 처음이었다. 본능만을 따라 빠르게 제 것을 흔드는 리바이를 보며
손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기둥을 약하게 그러쥐었다. 무언가 낯설었다. 마지막으로 자위를 했던 것이 몇 개월 전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세게 잡은 것도 아닌데 아래위로 잘게 흔들기 시작하자마자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내 신음이 생경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가 뜨거웠다.
“이로…….”
그런 내 앞에서는 리바이가 이지를 잃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본능대로 손을 움직이고 치대던 것도 멈추고
초현실적인 무언가를, 거대한 기적이라도 목도한 것처럼 입술을 조금 벌린 채 나를 응시한다. 이성이 증발한
듯한 표정.
붉은 입술 사이로 젖은 혀가 길게 모습을 드러낸다. 의도한 것이 아니지만 본능에 충실하기 때문에 더욱
퇴폐적으로 보이는 치태다.
“이로…….”
입술이 닿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입맞춤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키스보다는 무작정 입술을 맞대는
것에 가까웠지만.
읏.
손을 흔들다가 갑작스러운 자극에 인상을 찌푸렸다. 신음 한 자락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올 때, 우연찮게
입술이 열린 그 순간 리바이의 혀가 부드럽게 내 안으로 들어왔다. 달아오른 입술을 성기처럼 가르고. 그리고
두꺼운 그의 혀에 파르르 떨리는 내 살덩이가 맞물렸을 때, 눈을 감고 나는 그의 것을 휘감아 올리고 세게
빨아들였다.
“……!”
초점 잃은 눈으로 내게 입술을 비볐던 리바이의 눈이 크게 뜨인 것을 목도했다. 색이 선명한 호박색 눈동자로
혼란에 빠진 내 모습이 비친다.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짐승도 사람도, 인간도 괴물도 아닌 그
어딘가의 존재에 홀려, 이렇게 나는 먹혀버리고 마는가.
제 몸을 더듬고 있던 리바이가 득달같이 내 머리칼을 움켜쥐고 그악스레 몸을 붙여온 것은 그때쯤부터였다. 내
자위를 보고 그가 이성을 잃었다면, 내가 혀를 부딪친 순간에는 여유를 잃었다.
“읍-, 읏, 리바, 흐읏.”
그악스러운 악력에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밀리고 쓸려서 신음을 내뱉는 나와 달리 리바이에게서는 거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배려라는 게 없었지만 그건 그가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냐, 그만.”
“이로, 이-.”
“그만! 리바이!”
하아, 허억, 흣.
진심을 다해 거부하자 리바이는 차가운 물을 맞은 것처럼 내게서 바로 멀어졌다. 즉각적으로 떨어졌지만 그의
눈은 집요하게 내게 집중해있다.
그의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뛰쳐나왔다. 뜨거운 신음이 이리저리 부딪힌다.
그는 때때로 나를 산 채로 해부하려는, 필사적이고 진득한 눈빛을 한다. 그 눈빛이 내게 어떻게 다가올까 하는,
그 쉬운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여유 없어 보여서 나는 때때로 리바이가 무섭다.
두렵거나 공포스럽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렇게 나를 보기 위해서, 이렇게 온 세상에 나밖에 없는 것처럼
내게 집중하기 위해서 필요한 감정의 총량은 얼마만큼인 것일까 하는 상상 때문이다. 가늠해보아도 답을
내리기 쉽지 않다.
나로서는 어려운 것 같다.
나는 리바이 같은 태도로, 그런 감정으로는 행동하지 못할 것 같다, 고 일순간 판단해 보았다. 그러나 호박색
눈 너머로 비치는 나의 모습은 리바이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의 눈 안에는 흥분에 떠밀린 숨을 내뱉으며 한없이 그에게 집중하는 내가 있다. 나는 그래서 리바이가
무서웠다.
내가 합류했기에 울타리 보수는 곧 빠르게 정리가 될 것이다. 곧 끝날 테지. 정리가 안 되는 건 내 복잡한
마음가짐뿐이다.
“이로오, 왜…… 이로, 나. 나-.”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응시하자 리바이가 불안감을 드러낸다. 아래는 흉흉하게 세워놓고서는, 조금 전까지
본능대로 제 것을 쥐고 흔들었으면서 두 팔을 벌린다. 내게 안기는 듯 나를 끌어안는다. 품은 내 살갗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뜨겁다.
“늦었다, 리바이. 이제 자야지.”
“이로.”
응답하듯 그는 나를 불렀다.
늦었다고 말을 돌리자 리바이는 더 이상 조르지 않고 가만히 나를 보며 미소 짓는다.
이제 리바이의 미소는 어색하지 않다. 입꼬리를 인위적으로 올렸던 것에 불과한 과거에 비하면 놀라운
발전이다. 나를 통해서 리바이는 웃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되짚을 때마다 내 가슴이 환희에 떨린다는 걸 리바이는 알까.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리는 침대에 누웠다. 척추를 짜르르하게 울렸던 흥분을 뒤로하고 몸을 빈틈없이
마주한 채로.
침대는 일인용이었다. 신장이 큰 리바이가 체구가 작지 않은 나를 어미 새처럼 끌어안고 누워있다 보니 침대가
가득 찼다. 그래도 불편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내내 이런 걸 바랐을지도 모른다. 속박이 사실은 이렇게
아늑하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아니, 내가 배울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리바이와 계속 배우면 될 일이다.
보수를 위해서는 가끔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공동체 밖이기 때문에 당연히 주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리바이가 입술을 눌러대거나 바짝 붙어 치대도 별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울타리 안에서는 달랐다. 생존자가 몇 명 없었지만, 사람이 부족했기에 오히려 더 똘똘 뭉치게 되는
것이다. 원래라면 각자 알아서 시간을 보내고 그랬겠지만 넓은 마을에 사람은 없다 보니 아침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다 같이 식사를 했다. 그 외의 잡일이며 자잘한 논의까지, 리바이와 보내는 시간만큼 다른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도 많아졌다.
사람들과 교류할 일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들 앞에서는 리바이를 조금 떨어뜨려 놓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 시선 자체보다는 우리가 붙어 다닐수록 사람들의 질문이 많아진다는 게 불편했다.
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질문만 던졌다.
개인적인 사정은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공동체 생활을 오래 했던 이들은 조금 달랐다.
질문을 하나둘씩 꺼내는 게 자연스러웠다.
내가 대답할 수 없거나, 사실대로 대답한 뒤의 결과가 우려스러운 그런 질문들이 주였다.
“왜 영어를 잘 못해? 내내 혼자 살았대?”
에이든은 라일리와 투닥대는 리바이를 가리켰다. 리바이의 언어는 어눌한 구석이 있었다. 말을 얼마나
알아듣는지는 모르지만 사용하는 단어는 한정적이었다.
그래도 요즘은 얼마나 말이 늘었는지 모른다! 나는 갑자기 자랑하고 싶어졌다. 이제는 단어 조합을 넘어
문장을 구사하는데!
“나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래? 아주 오래 같이 여행한 줄 알았어.”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만 했다.
“알비노인가?”
에이든 뒤로 티나가 와서 그런 질문을 했다. 나는 그게 뭔지 몰랐다. 입을 다물자 티나와 에이든이 리바이를
두고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눈은 빨갛지 않은데?”
“방사능 때문일 수도 있고.”
“근처에 원전은 없는데.”
“어디서 왔는지 우리야 모르잖아.”
“언어 장애일 수도 있어. 아니면 혼자 지내서 언어를 못 배웠나?”
대화에 끼지 못하고 완전히 제 3 자가 된 내가, 또 다른 3 자가 된 리바이가 대화의 주제로 아무렇게나
오르내리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이건 무슨 감정일까. 내가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기분이 전혀 좋지 못했다. 부글부글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당장이라도 티나와 에이든의 입을 막고 싶었다.
아니, 막는 거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에이든의 손이 아직도 라일리와 다투는 리바이를 가리킨다.
리바이는 아까 전부터 장난감을 두고 라일리와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비슷한 정신연령 대끼리 잘 어울렸다.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지만.
“나, 이거 내 손, 너는 다른 거.”
“아냐! 내 거란 말이야. 리바이는 다른 거 써.”
“아니야.”
“아니야!”
“나 더 아니야.”
“내가 더 더 세 배 네 배로 아니야!”
세 배 네 배라는 단어를 모르는 리바이는 꼬맹이에게 장렬히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함이 표정 가득히
드러난 리바이가 지원군을 찾았다.
“이로! 이로오.”
어떻게든 해달라는 눈치로 내게 와 안긴다.
“이로?”
바로 손을 벌려 저를 껴안지 않는 나를 리바이가 의아함을 담아 바라본다.
에이든과 티나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리바이가 곁에 있었는데도.
“지능 문제는 아닐까?”
“글쎄, 약간 다른 거 같은데.”
“어떤 느낌인데?”
“그러니까 말하자면-.”
“에이든.”
참을 수 없었다.
둘의 말을 끊고 나는 숨을 골랐다.
이럴 때는 더 이상 곁에 없는 원진이 부러웠다. 원진은 자신의 감정을 문제없이 풀어낼 줄 알았다. 때때로
내가 겪는 이유 모를 감정을 제가 설명해주기도 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화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에이든의 입을 닥치게 하고,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할
수 없다는 것도 짜증이 났다.
에이든의 이름만 부르고 나는 잠시 단어를 골랐다. 이들이 집단이 아니었고 에이든이 혼자였다면 나는 분명
손을 들었을 거다.
“이로, 미안해. 실수였어.”
내 표정을 보고 흠칫했던 에이든은 어려움 없이 사과했다. 공동체 생활을 오래 한 이들은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내 감정을 이해하는 듯했다.
“가자.”
“이로?”
리바이를 이끌고 나는 에이든과 티나를 뒤로한 채 발을 옮겼다.
“이로!”
나를 부르는 에이든을 무시하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저들은 모른다.
리바이가 내 이름을 제대로 내뱉기까지 내가 얼마나 이름을 반복해서 말했는지, 리바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오지 말았어야 했다.
저들의 식량과 보금자리에 기대면서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리바이, 라일리 물건 뺏으면 안 돼.”
집에 돌아와서도 화가 풀리지 않은 나는 우선 리바이를 가르쳤다. 내가 화나는 건 화나는 거지만 공동체
내에서는 분란을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아니야, 이로 나 저거 내가 만져서-.”
“리바이.”
엄하게 부르자 제가 내뱉을 수 있는 단어를 열심히 조합하던 리바이가 눈치를 본다.
“라일리가 버리거나 네게 주기 전까지는 안 돼. 남의 물건 뺏는 거 아니야, 알았지?”
“응…….”
“다음에, 내가 찾을 수 있으면 찾아볼게.”
리바이가 Z 를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겨울이 끝나고 쇼핑몰이나 큰 건물에 가볼 수도
있을 테다. 그런 곳일수록 오히려 물건들이 많다. Z 가 가득하기에 어지간한 대규모 공동체가 아니면 그런
곳에 침투해 물건을 확보할 엄두를 못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바이와 함께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남은 게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시도라도 해볼 수 있을
테다. 거기서는 리바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져도 되니까.
“알았지?”
“응.”
리바이를 끌어안자 자연스레 그가 내 머리 위에 턱을 얹는다. 익숙지 않은 무게감인데 나른한 햇살을 받는
고양이처럼 당연하다시피 내 머리에 기대서 나는 작게 웃고 말았다. 등을 쓰다듬자 골골골…… 작은 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는 너무 안기면 안 돼. 집에서나 둘이서 있을 때만.”
리바이를 붙들고 말하는데, 어째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리바이, 둘이 있을 때만 끌어안는 거야. 다른 사람 있을 때는 안 돼.”
반복하는 나에게로 리바이의 시선이 떨어진다. 그러다가 스윽 왼쪽으로 굴러가더니, 자연스레 스윽
오른쪽으로 옮겨간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챌 수 있다. 리바이는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리바이,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마.”
“아니야.”
“알았지?”
“아니야.”
또 아니야가 나왔다.
“안 된다니까.”
“왜?”
그렇게 물어보면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괜히 시선을 받아서 좋지 않다. 여기서 이들의 관심을 더 끌어서
좋을 것은 없다.
이 공동체는 실험체의 습격을 받아 파괴된 곳이다. 그리고 리바이는 실험체였다. 만에 하나라도 리바이의
정체가 드러난다면 이들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빗대봤을 때,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는 순간은 생존에 큰 위협을 받을 때다.
풍족하고 풍요로운 곳에서 이유 없이 사람을 착취하는 공동체는 많지 않다. 적대감과 배타심은 식량이 바닥을
보일 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한다. 나는 굳이 이들의 바닥을 보고 싶지 않았다.
겨울을 보내고, 서로 도울 수 있는 만큼 도운 뒤에 각자 갈 길을 가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쉬운 일을 굳이 망칠
일 없지 않은가. 잠시만 버티면 되는데.
“리바이, 말 들을 거지?”
“응…….”
울적한 얼굴로도 리바이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리바이에게 뭘 가르치기는 했는데, 약간 입력이 잘못된 듯하다.
사람이 있으면 치대지 말란 거였지, 사람이 없을 때는 꼭 입술을 누르라는 말이 아니었는데. 그러나 리바이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 싶으면 무조건 붙어왔다. 입술을 눌러 대는 건 예사도 아니었다.
심지어는,
“이로오.”
“안, 안 돼, 여기선 안 돼!”
공동체 밖으로 정찰을 나왔을 때였다. 노골적인 위협은 없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 나와 리바이가
주위를 돌고, 에이든과 코너가 안을 지키기로 한 상태였다.
다시 말하면 뭐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숲이라는 소리였다. 아무도 없으니 키스는 그렇다 쳐도 세워 대는 건
너무했다. 그런데 리바이는 세우는 것도 모자라 그 거대한 성기를 내 몸에 붙여오기까지 했다.
“읍, 리바이- 앗.”
내 부름은 건조하게 언 땅으로 떨어진 지 오래다. 리바이는 날 끌어안고는 입술을 붙이고, 무아지경으로 내게
입맞춤을 퍼부었다.
리바이의 키스는 단순했고 본능에 차 있었으며 기교랄 게 없었는데, 그래서 더 직설적으로 내 심장에
내리꽂혔다.
건조하게 말라붙은 나뭇가지 사이로 시린 겨울바람이 흘러왔다. 폭포처럼 내 머리카락과 리바이의 옆머리를
쓸었다. 옆구리가 차가워서 어깨를 움츠렸다.
잠깐만, 옆구리?
아래를 보니 리바이의 손이 내 옷 안으로 들어와 내 상체 이곳저곳을 헤집고 쓰다듬고 있었다. 내 손과 다르게
그의 손은 심장을 손에 쥔 것처럼 뜨거웠다.
“잠깐만- 여기서는 안 된다니까!”
“왜?”
밀쳐내자 젖은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진다. 리바이가 울상을 짓고 있다.
“둘이잖아, 이로. 아무도 없어.”
“Z 나 산짐승이라도 나타나면 어떻게 해. 위험해.”
아직도 내 갈비뼈 부근에 찰싹 붙은 리바이의 손을 떼 내고 나는 옷자락을 내렸다.
“없어.”
헤집어진 옷을 정리하는데 리바이가 툭 그런다.
“어?”
“없어. 안 위험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숲은 항상 그렇듯 조용했다. 겨울 숲이란 항상 이런 법이다.
“리바이, 그건 모르는 거야.”
당장 보이는 위협은 없지만 뭐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밖에서 이래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안전하지 않은
곳에서 이렇게 입술을 붙이고 내 정신을 빼먹는 일이 버릇될 것 같아 우려스럽기도 했다.
“아닌데.”
고개를 갸웃한 리바이의 귀가 쫑긋한다. 그의 눈가에는 일견 억울함까지 서려 있었다.
“안 위험해. 괜찮아.”
“아니라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위험하다는 건 알아?”
“안전하지 않으면 위험한 거야. 그리고 완벽히 안전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아.”
리바이가 고개를 재차 갸웃거린다. 아닌데, 아닌데를 중얼거린다.
“그럼 너는 어떻게 아는데?”
사람들이 걸어온 대로 길이 난 흙바닥을 걸으며 물었다. 입을 열 때마다 화한 입김이 안개처럼 솟다가 사라진다.
차갑게 가라앉은 날씨. 곧 눈이 올 것이다.
예전에 원진은 이 지역에서는 눈이 전혀 내리지 않는다고 설명해주었다. 고개를 한참이나 치켜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울창한 우림이 가득한 곳도 있었다고. 그러나 과거의 영광은 빛바랜 지 오래이다. 이제
이곳에는 눈이 내린다.
내 기억에는 항상 그랬다. 폭설이 내리는 때도 있었고 눈이 빵조각처럼 바스러지고 쌓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원진이 말했던 울창한 수풀도 다르지 않다. 어떤 곳은 사막이, 어떤 곳은 불모지가, 어떤 곳은 인간의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인류에게 가혹한 자연이 되고 말았다.
“거봐, 너도 모르지? 그러니까 위험한 거야.”
“아니야, 난 알아.”
리바이가 제 귀를 검지로 톡톡 두드린다.
“어떤 게? Z?”
“응.”
그럴 리가 없다. 사실이라면 연구실에서 리바이는 그 많고 많은 Z 들이 몰려오는 것을 진작 알아챘어야 했다.
아니지, 그때의 경험 때문에 Z 의 인기척이나 특유의 울음소리를 알게 된 걸 수도 있다. 그런 경우라면 가능할
것도 같다.
“정말? 산짐승은?”
“짐승?”
“늑대, 이런 거.”
리바이는 아직 늑대를 본 적이 없다. 무스나 버팔로와 같은 거대한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구경시켜
주고 싶다.
“몰라. 위험해, 알아. 이로, 나 알아.”
“위험하면 안다고? ……들린다는 소리야?”
“응. 나는 위험하면 알아.”
리바이가 말할 때마다 뜨거운 입김이 바스러졌다. 자박자박 걷는 소리만이 조용히 들려왔다. 그러니까,
리바이는 자신이 Z 든 짐승이든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일지 아닐지는
모른다. 리바이가 여태 본 짐승이라고는 토끼 몇 마리와 인간이 다이기 때문에.
그리고 위험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Z 보다 비슷하게 위험한 것은, 아니 어쩌면 더 위협적인 것은 인간이다.
리바이가 다른 모든 인기척을 감지하고, 또 내 인기척을 구별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모르는 거야.”
내가 고집스레 주장하자 리바이가 아랫입술을 죽 내민다. 그러면서도 고개는 끄덕였다. 착하지. 리바이를
쓰다듬으며, 나는 그래도 이게 어딘가 하는 생각을 했다.
리바이의 주장대로 그가 Z 나 짐승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리바이와 더 평온한
나날을 즐길 수 있다. 매 순간순간 퍼뜩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내 웃음소리가 너무 클까 두려워
입을 틀어막지 않아도 된다. 눈길을 끌까 하는 걱정 때문에 불을 끄지 않아도 된다. 그런 삶인 것이다.
“이로?”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리바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러니까, 희박한 확률이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이로? 아파? 왜?”
그렇다면 너무 쉽지 않은가.
나를 걱정스레 살피는 리바이를 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리가 없다. 내 삶이 그렇게 편할 리가 없었다. 삶은 내가 악착같이 싸워 쟁취하는 전리품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끊임없이 경계하고 싸우고 버텨야 한다.
그 모든 방식에서 갑자기 등 돌릴 수 있다고? 말도 안 돼. 방심은 곧 죽음이다. 리바이의 청각이 내 청각보다
예민할지는 모르지만,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표정을 갈무리하자 리바이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뒤를 따른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고 평소처럼 대하기 시작하자 리바이 역시 서서히 표정을 풀었다. 정적에 가득했던
숲은 다시 내 목소리와 리바이의 대꾸로 간간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내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 리바이가 빨리 말을 배웠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내 목소리에 힘이 실리면서 축 처졌던 리바이도 나를 따라 살아났다.
호기심도 되살아난 것은 약간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도토리.”
짧은 정찰이 끝나고 –어차피 울타리 바로 근처를 도는 것뿐이다- 정문으로 가는 길에 리바이가 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웠다.
“어, 다람쥐가 어디서 동면하나 봐.”
“둥지.”
나뭇가지 사이로 얹어진 둥지. 내 눈길도 끌지 못할 것들을 어떻게 이렇게 잘 포착하는지. 아직 리바이에게는
모든 게 신기한 것이다.
“이거 다음 이로, 어디 우리 해?”
“이거 다음에 우리 어디로 가냐고?”
“응.”
에이든과 코너가 어제 맡았던 울타리로 가봐야 한다. 한번 봐 달라고 코너가 부탁해왔기 때문이다.
“응, 울타리 보러. 싫어?”
“아니, 좋아. 둘 좋아.”
“나도. 우선은 울타리 보고, 점심 먹으러 가자.”
“응. 점심 좋아.”
“너는 어떤 음식이 제일 좋아? 아무래도 말린 고기보다는 사냥한 다음에- 리바이, 그게 뭐야!”
아무렇지 않게 말하다가 무심코 옆을 보았던 나는 리바이의 손 가득 들린 도토리를 보고 기겁했다.
“도토리.”
한 줌도 아니었다. 리바이의 손은 나보다 컸는데, 그 큰 손이 다 가득 찰 정도로 도토리가 많았다.
“언제 이렇게 많이 주워온 거야?”
내가 리바이와 평범한 대화를 할 동안 리바이는 도토리를 온통 쓸어 담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어디서 주워온
거지? 다람쥐 집을 몇 채나 턴 것일까. 얼마나 가득 쓸어 담았는지, 뒤를 돌아보니 리바이가 미처 줍지 못한
도토리 두어 개가 우리가 걸었던 길에 듬성듬성 떨어져 있다.
“하하, 이게 뭐야. 이거 꼭 헨젤과-.”
일순간 말문이 막혀 나는 눈을 굴렸다. 헨젤과 또 다른 누군가가 마녀와 싸웠는데 빵을 떨어뜨렸다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애초에 헨젤이 맞았던가?
“그레텔.”
“그래, 헨젤과 그레텔. 어?”
기억해? 하고 묻자 리바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풀숲에 멀리 던지며 나는 갑자기
볼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언제더라, 언제 내가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를 해주었던가. 아마 리바이가
아직 시험관에 있었을 때 같다.
“기억한다고? 나 처음으로 보기 전을 말하는 거야. 그때 내 목소리가 들렸어?”
자신이 모아온 도토리를 뿌듯하게 보고 있던 리바이는 내 질문에 나를 바라본다.
“시험관에 있을 때 내 목소리가 들렸어?”
리바이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이로 들렸어. 목소리. 항상.”
그러니까,
우리는 만난 것이 아니었다.
두 개의 작은 돌풍이 만나 하나가 된 것이 아니었다.
리바이에게 있어 나는 탄생 그 자체인 것이다. 탄생한 뒤의 세계가 아니라.
“이로 좋아.”
한참 후에, 나도라고 답하는 내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그의 탄생은 나였지만, 나의 탄생은 그일 수 없다. 그 사실이 분하고 안타까웠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이렇게까지 후회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내 죽음만이라도 리바이이길.
공동체로 돌아와서 마지막으로 울타리 점검을 나서기로 했다. 잠깐 에이든과 코너가 보수를 잘했는지만
확인하고 점심을 먹을 예정이었다.
티나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자 에이든과 코너가 머리를 맞대고 뭘 하고 있었다. 그러던 둘은 나를 보고
반색해서는 달려온다.
“이로, 여기 좀 봐 줘. 이거 바깥에서 해야 해?”
“이로.”
에이든과 코너는 힘은 좋았지만 요령이 부족했고 이 방면에 경험이 거의 없었다.
“이로오.”
공구도 목재도 다 있으니 보수 능력이 좋은 사람만 있으면 바로 끝낼 일을 저 둘이 하고 있으니 이렇게 오래
걸렸던 것이다.
“이걸 왜 이렇게 했어.”
“에이든 저 자식이 이게 맞다고 고집부리길래.”
“야, 내가 언제! 네가 이로가 이렇게 하는 거 봤다며!”
“이로오오.”
엄밀히 말해서 울타리 바깥으로 나갈 일은 아니다. 그냥 다 뜯어내고 다시 하면 될 일인데, 그러면 오늘은
해가 질 때까지 이 일에만 매달려야 할 테다.
오늘은 리바이에게 낚시를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그리고 집에 있으면 사람들이 자꾸 찾아오기도 했고.
나는 바닥에 떨어진 공구와 자재를 챙겼다.
“어, 아니야, 이로 가르쳐줘도 돼. 우리가 다음에는 잘할게!”
열의 넘치는 모습은 좋지만, 맡겼다가 일이 두 배가 되는 건 내가 사양이었다.
양손에 공구를 들고 몸을 일으키자 코너가 자재를 들어 올린다.
“우리가 들어줄게!”
“미안, 이로.”
저번 일로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에이든이 중얼거리며 내 손에서 공구를 받아간다. 울타리 너머로
가져다주겠다는 의미이다.
“괜찮아. 그러면 다음 우리 차례 때 보초만 대신 서줘.”
“물론이지!”
이 정도면 내가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니었다.
자재와 공구를 든 에이든과 코너가 앞장을 섰고 나는 이 둘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리 와, 리바이.”
“…….”
조금 전의 도토리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리바이를 보자마자 눈썹을 들었다. 리바이의 붉은 입술이 댓 발 나와
있었다. 겨울이 아니었다면 벌에 물린 줄 알았을 거다.
“왜 그래.”
“이거 다음 둘이라면서. 둘 좋아.”
“하하. 내가 언제 둘일 거라 그랬어, 울타리 보러 간다고 했지.”
“이로 이로 이로, 내가 세 번 했어.”
“그랬어? 미안해. 잘못했어.”
에이든과 코너가 워낙 투닥거리고 시끄럽다 보니 듣지 못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아까 길게 이로오오 하고
리바이가 날 불러서 대답하려 했던 게 떠올랐다. 막 입 열려던 차에 누가 말을 걸어서 대꾸하지 못했다.
리바이가 뚱해 있자 나는 앞장선 에이든과 코너를 확인했다.
“쟤들은 짐만 들어줄 거야. 쟤네 가면 둘이야.”
아래로 향했던 리바이의 고개가 바로 치켜 올라간다.
“……진짜?”
“응.”
이렇게 둘을 좋아해서야. 돌이켜보니, 라일리와 맥스를 따라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을 때 리바이는 그게
공동체에서 생활한다는 의미인 것을 몰랐던 것이 아닐까?
알았더라면 리바이는 절대로 이 울타리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것 같다.
* * *
“정말 고마워, 이로.”
“우리만 믿어, 보초 말고 정찰도 한 번 우리가 더 할게.”
“고마워.”
공구와 자재를 건네받고 나는 울타리 앞에 섰다. 이쪽에서 손만 조금 보면 에이든과 코너가 했던 것을 다
뜯어낼 필요는 없을 테다. 빨리 끝내고 낚시를 가르쳐 줘야지. 생존에 있어서 아주 유용하다.
에이든과 코너가 사라지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허리를 굽혔다.
“리바이, 여기에 목재를 대- 읍!”
바깥이라 긴장을 풀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속절없이 끌려갔다. 항상 그랬듯이. 지금이라고 다를 것도
없었다.
“이로.”
나는 어느새 엉거주춤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였다. 리바이가 그런 내 위로 다가왔다.
항상 그를 올려다보는 것은 나였다. 그러니 내가 그에게 피를 줄 때와 그가 내게 기꺼이 무릎을 굽힐 때가
낯설어야 했다. 그런데 내 위로 다가오는 리바이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낯설게 다가왔다.
원래는 이러지 않았는데, 요즈음의 나는 그가 다가오기만 하면 몸을 굳힌다. 두려움보다는 다른 이유로.
“이로.”
조금 전까지 말끝을 길게 늘이던 리바이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짧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 저음. 내
위로 드리워지는 몸. 그림자. 불꽃이 형형한 눈동자.
리바이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젖은 입술 사이로 혀가 드러난다. 입맛을
다시듯 아랫입술을 훔치고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핀다.
“그렇게…… 보지 마.”
약한 소리가 나온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말을 내뱉고도 정작 놀란 것은 나였다.
“밖에서 이러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듣기에도 나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지고 떨리기까지 했다.
손등으로 눈가를 가리고 태양처럼 나를 비추는 리바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숨 돌릴 틈도 없이 나를 한입에 삼켜주었으면 좋겠다. 발가벗겨서 게걸스럽게 주둥이를 박고, 아드득
하는 뼈 소리가 나도록 잔인하게.
이게 무슨 감정일까.
원진이라면 알았을까? 티나, 에이든 혹은 공동체 내에서 내게 답을 알려줄 사람이 있을까?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공금 ≡(:D)┿━<
* * *
보수를 끝내고 돌아오니 마을의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티나를 붙잡고 무슨 일이냐 묻자
늑대가 나타났다고 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울링이 들려왔다. 티나는 보지 못했지만 리바이의 뾰족한
귀 한쪽이 움찔하고 반응한다.
근력과 지구력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리바이는 청력도 남달랐다. 리바이의 오른쪽 귀가 마치 소리를 찾듯
강아지의 귀처럼 움직였다.
“울타리 보수도 끝냈으니 정문만 잠그면 되는 거잖아.”
티나가 고개를 젓는다.
“아직 에이든과 코너가 오지 않았어.”
오늘 나는 몸에 열이 후끈하게 오른 상태이다. 늑대 무리가 무섭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왠지 다 맨손으로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로?”
주먹을 불끈 쥔 내 옆에서 리바이가 작게 불렀다. 그러나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울타리를 보수보다는 입술을 맞대는 시간이 더 많았다. 내 근거 없는 자신감과 고양감은
거기서 왔을 테지. 어쨌거나, 나는 두렵지 않았다.
늑대는 좋은 단백질원이다!
성과가 있었다.
에이든과 코너는 정말로 늑대에게 쫓기고 있었다. 사슴 두 마리를 사냥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던 둘을 보고
늑대들은 아주 좋아라 했을 것이다.
나는 활을 잘 쐈지만, 그 실력을 보일 필요도 없었다. 리바이를 보자마자 늑대들은 꽁무니를 뺐고, 도망가는
무리에서 뒤처진 하나를 티나가 창으로 맞혀 죽였다.
그리고 울타리 문을 단단히 잠근 뒤 우리는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마을 정중앙의 모닥불에
모였다.
사냥해온 사슴을 손질하고 고기를 구웠다. 이런저런 말이 오고 갔다. 별거 아닌 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지난
몇 달간 원진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타박하거나 혹은 날 선 말을 내뱉던 게 주였기 때문에 나는 이런
분위기가 신기하면서도 좋았다.
에이든은 조용히 와서는 내게 사과를 정식으로 건넸다. 아까 그렇게 눈치를 보더니 사실은 사과하고 싶었나
보다. 티나는 내게 사과하지는 않았지만 앉아 있는 내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나는 별말 하지 않았다. 화가
사라진 지는 오래다.
뭐랄까, 에이든과 티나의 입장에 한번 서보았다. 이들은 리바이를 모른다. 그래서 그런 실수를 한 것이지만,
리바이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떠올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에이든이었다면 리바이를 보고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러지 못했을 테다. 리바이가 특별하기 때문에. ……가 아니라, 낯설기 때문에.
그러나 에이든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에게 큰 호감이 생기는 건 아니다. 그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딱히 라일리를
대하는 것처럼 살갑게 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에이든이 리바이와 친한 친구가 된다면 모를 일이지만.
리바이에게 단단히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리는 내 어깨 위로 작은 무게감이 느껴진다. 나를 휘어잡은 리바이였다.
얇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불씨를 담고 있었다.
은사처럼 매끄러운 빛을 내며 내 어깨로 쏟아진다. 별 무리 같았다. 이따금씩, 갑자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 아무렇게나 풀 바닥에 누우면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질 것만 같은 별들.
“이로.”
“응.”
타닥타닥 불이 타오른다. 리바이가 불렀고 나는 대답했지만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가끔 우리 사이에는
대화가 필요 없을 때가 있었고 나는 그 공감의 순간이 손에 꼽을 만큼 좋았다.
“이로!”
코너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나를 일깨웠다.
“싫어…… 둘 좋아.”
이렇게 작게 중얼거리며 리바이가 내게 기대던 몸을 일으켰다. 며칠간의 학습이 효과가 있는 셈이다. 불퉁한
표정만큼은 관리하지 못했지만.
코너 뒤로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있었다. 가장 연장자인 그는 할당된 일을 하느라 바쁜 젊은 구성원을 대신해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공동체 내에서는 어린이들부터 노인까지 항상 주어진 일이 있다. 병들거나 큰 부상을 입지 않는 이상 죽을
때까지 맡은 일을 해나가야 하는 게 공동체 구성원의 의무였다.
보수를 훌륭히 끝냈다며 이들은 하나둘씩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걸 보고 있던 티나가 몸을 일으킨다.
“벌써 자리를 잡은 지 꽤 됐지만 정식으로 소개할 때인 것 같지?”
불 주위로 앉은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박수 소리를 듣다가 내가
어정쩡하게 따라치자 리바이도 일단 날 따라 박수를 쳤다.
티나는 멋모르고 일단 박수를 치고 있는 나를 일으켰다.
“이로, 네 덕분에 울타리를 성공적으로 보수할 수 있었어. 우리끼리 했다면 이렇게 멋지게 고치지 못했을
거야.”
다시 박수가 쏟아진다. 티나는 고기로 손을 뻗고 있던 리바이에게도 손짓했다. 그러나 먹을 것에 정신이 팔린
리바이가 그 손짓을 보지 못해서 리바이의 근처에 있던 에이든이 그에게 다가갔다. 에이든의 손이 리바이의
어깨에 닿으려던 차, 리바이의 귀가 움찔했다.
“리바이!”
서 있는 날 발견한 리바이는 내가 잡아끌자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리바이도 곁에서 도와줘서 고마워. 오늘은 너희들이 정식으로 우리 일원이 되는 날이야. 너희가 얼마나
이곳에 머물지는 모르지만, 언제라도 너희들이 돌아오면 우리는 환영할 거야!”
박수 소리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나는 혼란에 빠졌다. 아무도 보지 못했을까? 정말로?
에이든의 손이 닿으려던 차, 입술 사이로 리바이의 송곳니가 드러났다. 찰나이긴 했지만, 아무리 박수
소리에 묻혔다지만 그을린 듯한 울음소리와 흉흉하게 번들거렸던 눈빛을 사람들은 정말로 느끼지 못했나?
“너희들을 우리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이런 기쁜 날에 술이 빠져서는 안 되지!”
“와! 술! 맥주!”
누군가 쟁반 가득 음료를 가지고 왔다. 노인이며 아이며 할 것 없이 좋아한다.
“애들은 적당히 몸 데울 만큼만 마시고! 오늘 보초 누구지?”
티나 옆에 선 채로 나는 리바이를 살폈다.
찰나였지만 리바이의 미간이 움찔했었다.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아니, 어쩌면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연구소 때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당장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여러 번 있었다.
원진의 거부감이 심한 나머지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실수로 리바이에게 닿은 적도 있었고, 크래커를 넘본다며
리바이의 손을 원진이 때린 적도 있다. 그때 리바이는 바보같이 당하기만 했는데.
정말로?
내 안의 누군가가 물었다. 화창하게 맑은 하늘이지만 곧 폭풍우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는 직감처럼, 무언가가
의문을 제기했다.
어쩌면 당시 원진에게 제어장치가 있어서? 그것도 아니라면,
“이로와 리바이를 환영합니다!”
……내가 원진을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로.”
상념에 빠진 날 깨우는 건 항상 그렇듯 리바이다.
“어?”
리바이의 손에는 유리잔이 들려있었다. 노랗고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걸 보아, 들어 있는 것은 맥주일 것이다.
“나 이거 먹어?”
“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술을 마신다. 이미 몸이 불보다 뜨거운 리바이는 그럴 필요가 없다.
하지만 꼭 모든 것을 필요에 의해 결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 입만 마셔볼래?”
“응.”
리바이는 해맑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저 무해하고 눈보라가 친 다음 날의 들판처럼 흰 리바이.
내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아니, 애초에 이 생각이 맞나?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원진의 말대로, 오랫동안 긴장 상태로 살았던 나는 가끔 과대 해석하거나 걱정이 많은 구석이 있었으니까.
“…….”
맥주를 한 입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리바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하고 기묘하고 알쏭달쏭한 표정이
되어 날 바라본다. 혀가 젖은 입술을 여러 차례 쓴다.
몇 번 입가심을 하더니 시간 차를 두고 입가를 일그러뜨린다. 그리고 나오는 감상평.
“혀 아파.”
하하.
그 모습을 보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내가 웃음을 터뜨릴 동안 리바이는 계속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아하하! 표정 봐봐. 맛없지? 많이 별로야?”
“…….”
리바이는 잔을 멀찍이 치웠다.
“물 마실래?”
고개를 끄덕인다. 물잔을 주자 단숨에 비운다. 끝 맛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는지 떫은 표정은 그대로이다.
“이거 뭐야?”
“맥주.”
“맥주 싫어.”
하하하! 나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리바이가 이렇게 호불호를 강하게 표현한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리바이는 제 모습을 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보고 뚱하게 볼을 부풀렸다.
“나도 맛있지는 않지만, 겨울에는 좋아.”
리바이가 남긴 잔을 들자, 리바이가, ‘안 돼, 이로, 혀 아야!’라고 만류했다. 대꾸도 못 하고 웃다가 나는
잔을 비웠다.
“아니야, 혀 아파. 이로, 안 아파?”
맥주 특유의 맛 때문에 ‘아파’라는 단어가 나온 것 같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프지 않아.
나는 아프지 않아. 너와 있으면 아프지 않아.
내 입가에 물을 대주는 리바이의 어깨에 기댔다.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큰 소리와 환호, 웃음소리에
익숙지 않은 내 몸은 안절부절못한다. 습관은 무섭다. 습관처럼 나는 불안에 빠진다. 이래서는 안 된다며
마구 경종을 울려 댄다.
그러나 내 이성은 말한다.
즐거워해도 좋다고.
뜨겁게 타오르는 불 앞에서 어디선가 음율이 들려온다. 코너가 무언가를 찾아 들고 왔다. 기타. 간혹가다
폐가에서 보곤 했던 것이다. 부서지지 않고, 줄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의 악기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코너의 손가락이 기타 줄을 건드린다. 날카로운 가시를 시험 삼아 건드리는 것처럼 깔짝이다가, 이내
거침없이 손가락을 놀린다. 리바이의 귀가 움찔거렸다. 놀라 일어선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멍하니 기타를 응시했다.
그간 내게 소리는 절대로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였다. Z 에게 발각될 수도 있고, 인간 사냥꾼이나
포식자에게 발각될 수도 있기 때문에.
내가 소리와 연관 짓는 것은 대부분 불길하고 암울한 것들이다. 울음소리, 절규, 비명. 그러나 기타에서
나오는 것은 소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귓가에 부드럽게 감겼다가 찌르르 내 몸을 울리고 퍼졌다.
맥스가 기타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나도 어릴 때 들어본 적이 있던 노래였다. 지금은 가사를 듬성듬성 까먹었지만. 놀랍게도 맥스는 가사를 전부
알고 있었다. 조금도 막힘없이 즐거워하며 불렀다. 아이에게는 이것이 흔한 경험인 것이다.
우리가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게 맞나?
그런 질문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공동체를 꺼렸던 이유는, 내가 수많은 신뢰 끝에 수많은 배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풍요로울 때가 아닌, 빈곤할 때의 사람들을 겪었기 때문이다.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취해오던 사람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운이 나빴던 것이 아닐까? 내가 그동안 피해왔던 행운은 리바이 너를 만나고 나서야 활짝
만개하는 게 아닐까?
나는 다시 리바이의 어깨에 기댔다. 노랫소리에 눈을 감았다. 시린 겨울. 나는 춥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리바이를 불렀다.
“응, 이로.”
“우리 여기 있을까?”
불꽃이 타닥타닥 튀었다. 맥스를 따라 라일라 또한 노래를 불렀다. 티나도 함께였다. 사람들은 나와서 춤을
추었다. 눈을 감고 나는 너울거리는 불을, 분주하게 흙을 밟는 춤을, 선율을, 활기를 느끼며 물었다.
“겨울이 지나도, 그냥 여기 있을까?”
“이로! 나랑 춤춰야지!”
리바이의 답을 듣기 전, 무언가 내 손을 당겨왔다. 반사적으로 뿌리치려다가 라일리인 것을 확인하고 몸에서
힘을 뺐다. 나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이로 나랑 춤춰! 이렇게!”
라일리는 내 손을 위로 잡아 들더니 그 상태 그대로 갑자기 빙글 돌았다. 어어? 내가 고드름처럼 바짝
굳어있자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로 봐! 70 년 된 내 관절 같군!
이로! 석상이 됐어!
하하하하!
내 뺨과 귀가 달아오른 건 불의 열기 때문이 아니다.
“이로, 이렇게! 나 봐봐!”
라일리가 해맑게 웃으며 내 손을 잡는다.
행복했다.
* * *
작은 파티가 끝나고 티나는 집으로 돌아가려는 우리를 멈춰 세웠다.
“이로! 리바이!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티나가 우리를 이끈 곳은 다름 아닌 새집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완전히 ‘새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와
리바이에게는 새로웠고, 티나는 우리에게 선물이라고 했으니 새집으로 여길 생각이었다.
“내 동생인 켈리와 켈리의 남편이 같이 쓰던 곳이야. 그동안 틈틈이 짐 정리를 했어.”
원래 티나가 우리에게 배정한 곳은 작았다. 사람의 흔적도 없었다. 여행객에게 내주거나 임시 거처로 쓰는
용도였던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 티나가 소개해 준 곳은 달랐다.
가구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흔적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 냄새가 났다. 원래 누군가의 보금자리를 뺏어 쓰는
데 익숙한 나에게는 익숙한 냄새였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뺏지 않았다.
“그동안 불편했지? 여기를 쓰면 돼.”
방은 두 개로 그대로였지만 부엌은 물론 벽난로까지 있었다.
“고마워, 티나.”
“천만에.”
취기가 올라온다는 말과 함께 티나는 손을 벌렸다. 나는 가볍게 티나를 포옹했다.
“당장 옮길 필요는 없지만 곧 눈보라가 칠 거 같아. 원래 이맘때 그랬거든.”
“눈보라? 얼마나?”
“그리 길지 않아. 마을 내에서는 어떤 문제도 없을 거야.”
티나는 천천히 짐 정리를 하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술 빨리 깨고 새벽에 보초 서야 해. 내 차례거든.”
“그다음은 나와 리바이지?”
“잘 아네. 그전까지 푹 쉬고.”
티나가 건네주는 열쇠를 받았다.
뒷정리를 돕겠다며 사라지는 티나에게 손을 흔드는데, 왼쪽 볼이 뜨거웠다. 아까 데이기라도 했나 하고
돌아봤던 나는 단단히 화가 나신 리바이를 발견했다.
팔짱까지 낀 리바이는 –저건 어디서 배운 건지- 누가 봐도 골이 난 얼굴로 사라지는 티나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리바이, 티나를 째려보면 어떻게 해. 고마워해야지. 이것 봐.”
리바이를 데리고 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티나가 신경 써 준 덕에 벽난로에는 불이 있었다. 한편에는 장작이
쌓여 있었다.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여기 봐. 크지? 침대도 커.”
리바이는 자신을 이끄는 나를 이기지 못해 끌려다녔다. 물론 침대에 흘깃 시선을 주기는 했다.
얘가 왜 이러나 했지만 생각해보니 삐칠 이유가 좀 있던 것 같다. 나는 뒤늦게 리바이를 끌어안고 쓰다듬어
주었지만 골골거리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정확히는 기분 좋지만 리바이가 억지로 무심한 척하는 거였다.
골골… 흥.
처음에 배정받은 곳에서 얼마 없는 짐을 챙긴 뒤에도 리바이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리바이.”
씻으러 우물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등을 돌린 리바이는 내 부름에 어깨를 굳혀놓고도 고집스레 뒤돌아보지
않는다.
“리바이.”
사슴뿔을 연필처럼 들고 슥슥 흙바닥에 그림을 그린다.
내가 반응이 없자 슬쩍 날 보더니, 눈을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앞으로 고정한다.
“리바이. 왜 화났어.”
“화 아니야.”
“안 났어?”
“안 났어.”
“화 진짜 안 났어?”
“응.”
“났잖아. 왜 화났어.”
“안 그럴 거야 이로가 말했잖아. 미안해 잘못했어 했었어. 세 배 네 배.”
“……세 배 네 배는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야.”
웃으면 안 된다. 나는 평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정확히 뭐 때문에 그래. 춤? 아니면 어떤 거?”
원진과는 언쟁이 자주 있었다. 본래 언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피곤함을 느꼈던 나지만 리바이와의 대화는
달랐다. 분명 피곤해야 했는데, ‘질투할 때 말을 제일 잘하네’라는 생각이나 하는 걸 보면 참 이상했다.
“알았어, 안 그래. 미안해, 정말로.”
다음에도 그러면 나한테 바로 이야기해. 삐치고 그러지 말고. 그러면 내가 바로 멈출게. 알았지?
새끼손가락을 들었다.
이게 뭐냐는 표정의 리바이가 단단히 내 손가락을 붙잡는다. 가는 나뭇가지를 잡듯 내 새끼손가락을 덥석
움켜쥐는 것에 예상치 못한 웃음이 터졌다.
내가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자 리바이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나를 따라 입꼬리를 순하게 올린다. 내가 웃자
순식간에 기분이 나아진 리바이에게 약속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리바이는 새끼손가락을 얽는 그 행동을 꽤 마음에 들어 했고 한바탕 웃은 나 역시 집으로 들어올 때쯤 표정이
한결 풀려 있었다.
“그래도 오늘 재미있었잖아.”
옮긴 짐을 풀며 말하자 리바이가 갸웃한다.
“맥주는 싫었지만. 하하. 또 좋았던 거나 싫었던 거 있어?”
“라일리 싫어.”
리바이의 답은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왔다.
“하하, 왜 싫어.”
“티나 싫어. 에이든 싫어. 사람 싫어.”
그리고 리바이는 덧붙였다.
“둘 좋아.”
“아직 네가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래. 더 알아가다 보면 감정이 생기지 않을까?”
“아니야.”
나뭇가지를 단숨에 부러뜨리듯 단호한 어조였다. 예상하지 못한 단언에 내가 머뭇거리자 리바이의 어조가
한층 부드러워진다.
“아니야. 익숙해지는 거 싫어.”
“싫은 게 어떤 건진 알아?”
웅얼거리다가 입술을 삐죽인 리바이가 픽 하니 고개를 돌린다. 아랫입술이 부루퉁하게 나온 채로 리바이는
여러 차례 중얼거렸다. 둘이 좋다고. 우리 둘이.
옷을 개다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울림이 있었다. 로맨틱한 말이란 것은 들어본 적도, 내뱉어본 적도 없는 나이지만, 저 말은
직관적이어서 더 마음을 자극했다.
나는 볼을 붉혔고, 그 변화를 발견한 리바이는 바로 내게 달려와 입술을 내렸다.
둘이 좋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재차 생각하지도 않고서 화답했다. 바보같이. 응,
리바이. 나도 둘이 좋아.
리바이는 제 말이면 백치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내 입술로 제 입술을 내렸다. 뜨거운 숨. 아아, 리바이는 나를
녹여서,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나를 파괴한 다음 주물에 붓는다. 그러면 나는 리바이가 원하는
단단한 이상이 되어 단단한 새 생명을 만끽한다.
“이로, 이로……. 하, 이로.”
리바이는 제 흥분을 숨기는 법을 모른다. 나라고 체면을 아는 건 아니다.
리바이의 바지춤을 풀었다. 흥분에 온몸이 가늘게 떨려서 몇 번이고 손을 고쳤다. 어두운 방 안에서 그의
바지춤을 풀기 위해 앞섶을 더듬거릴 때마다 리바이는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아, 이로, 으…….”
실수로 단단히 선 리바이의 것을 스치기라도 하면 그는 당장이라도 내 뼈를 부러뜨릴 수 있을 만큼 어깨를 세게
쥐었다가, 곧장 손에 힘을 풀었다. 이성이 뒤늦게 돌아온 것처럼.
간신히 풀고 손을 넣었다. 제 성기에 내 맨손이 닿자 움찔했던 리바이가 허리를 반사적으로 추켜올린다.
제대로 감싸 쥐고 움직이려는데,
“이로. 이로, 하아, 이로오….”
내 손을 만류한 리바이가 나를 번쩍 들어 침대로 눕힌다. 어어 하는 사이에 벌써 바지가 벗겨져 있다.
반 이상 선 내 것을 리바이는 노골적으로 입맛을 다시며 보고 있다.
완벽한 어둠에 휩싸여도 리바이의 안광을 숨기지는 못할 것 같았다. 노골적으로 비치는 성욕에 내 눈가를
가렸다.
그동안 주위에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거부당했었던 리바이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노리고 있던 것 같다.
감상하듯 내 아래를 한참이나 보던 리바이는 곧 손을 뻗었다.
“읏. 아파.”
“이로, 이로……. 미안해, 이로.”
악력에 놀라 말하자 리바이가 바로 힘을 푼다. 적당히 힘이 빠진 손이 내 것을 감싼다. 피부를 벗겨 발갛게
드러난 귀두를 한참이나 바라본다. 거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내 온몸은 열이 올라 울긋불긋 달아올라
있을 테다.
“아아……! 리바이!”
예민한 귀두가 습하고 뜨거운 무언가로 빨려 들어갔다. 놀라 아래를 보자 리바이가 내 것을 입 안 가득 머금고
있었다.
끄응 끙. 구음을 하는 건 자기면서 리바이는 제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끙끙 가냘픈 신음을 흘린다. 리바이의
것에는 이미 선액이 길게 늘어져 있다. 어떻게 할 줄을 몰라 무작정 세게 빨아들이다가 핥아 올린다.
“흣…!”
신음이 샜다. 습관적으로 손등을 깨물자 리바이가 내 손목을 잡아 내린다. 내 두 손목을 잡아 구속하고 내
것을 되는대로 끝까지 목 안으로 삼킨다.
“아…… 아, 기분 좋아, 리바이.”
누군가 입으로 해주는 건 처음이다. 아니, 누군가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내 몸에 닿는 게 처음이었다. 나는
그동안 그 흔한 키스 한번 해보지 않았으니까. 발끝이 곱아들었다.
분명 숨이 막힐 텐데 리바이는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반사적으로 눈꼬리에 눈물이 맺혀있으면서도
꾸역꾸역 목 안으로 쑤셔 넣는다. 이러다가는 입꼬리가 찢어질지도 모르는데, 제 것을 만질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내 쾌락을 위해 움직인다. 내게 흥분을 주는 건 그런 점이었다. 리바이 안에는 자기애가 없어서,
그에게는 나뿐이라서.
나는 그게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하…! 리바이! 리바이!”
가릴 것이 없어서 나는 그의 시야에서 발가벗겨진 채로 절정까지 올랐다. 어차피 나에게도 리바이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평할 수 있었다.
“이로, 이로…… 이로, 이로. 이로 착해.”
역할 텐데 리바이는 결단코 목을 물리지 않았다. 나는 속절없이 그의 품에서 굴려지다가 그가 이끄는 대로
절정까지 치솟았다. 리바이의 목 안으로 질질 싸며 나는 길게 신음했다. 리바이는 끝까지, 그악스레
빨아당겼다.
“이로, 더…… 더.”
그걸로도 모자라 서서히 힘이 빠지는 내 물건을 계속해서 핥고 자극하려 했다.
나는 사회에 덜 길들여진 리바이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좋았다. 덜 다듬어진 사회성, 모난 인성 같은 것들.
둥그렇지 않아도 된다. 몇 번이고 내 무릎을 찧고 멍을 남겨도 좋으니 원래 모습 그대로를 유지했으면 싶다.
* * *
오늘 점심은 스튜였다. 이 공동체에서 가장 연장자인 폴은 발군의 요리 실력을 자랑했다. 뭘 넣었냐고 묻자
폴은 내게 장난스레 윙크했다.
“향신료와 노하우 그리고 약간의 숙취면 이런 음식이 완성되는 거라고!”
그 말에 티나가 킬킬대며 웃었다.
보초를 선 몇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얼굴이 핼쑥했다. 술에 취해 내내 자다가 막 깬 사람도 있었다.
리바이와 나는 큰 그릇에 스튜를 잔뜩 받아 모닥불 곁의 긴 야외 식탁에 앉았다. 날씨가 더 추워져서
정오임에도 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원래는 이 식탁을 몇 개를 설치해야 간신히 비집고 앉을 수 있었는데.”
스튜를 먹던 코너가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고 툭 내뱉었다. 그의 말에 공기가 가라앉자 티나가 그의 등을 세게
때렸다.
“10 인용 식탁 하나라도 놓을 수 있는 걸 감사히 여겨. 다 죽을 수도 있었어.”
틀린 말은 아니다.
분위기가 적당히 환기되자 티나가 물었다.
“겨울이 끝나면 다시 길을 떠날 거야?”
“어.”
“일, 이 주간은 온몸이 꽁꽁 얼도록 추울 테지만 그것만 지나면 곧 풀릴 거야.”
원래 겨울이 없었던 이곳은 과거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짧고 강한 추위만이 휘몰아친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비하면 날이 빨리 풀렸다. 고개를 끄덕이자 티나가 묻는다.
“어디로 갈 건데?”
“리바이, 후추 더 넣어 봐, 맛있을 거야.”
리바이 몫의 스튜에 소금과 후추를 적당히 넣어주고 나는 티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말을 골랐다. 솔직히
말해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괜한 비웃음을 사거나 잘못된 정보로 경로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내뱉었다.
“마더랜드.”
“아하. 너도 그런 부류구나.”
비웃음은 아니었지만 티나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자주 듣는 것처럼 자연스레 내 말을 넘겼다.
“나 같은 사람 많았어?”
“여행자? 마더랜드? 많았지. 도중에 포기하거나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건너 건너 들었지만 실제로
도착했다는 사람들은 못 들어 봤어.”
원본은 원진의 가방 안에 있을 테지만 원진이 찾았던 마더랜드의 대략적인 위치와 묘사 등은 내게도 있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그런 정보는 원진과 내가 둘이서 공평하게 필사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그것이 정말로 유효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직접 가봐야 알 테니까.
“3, 4 년에 한 번꼴로 그런 말이 도는 것 같아.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한번 무슨 말이
들리면 그게 알음알음 퍼져서, 너처럼 마더랜드로 가겠다는 사람이 우후죽순 생기다가 또 잠잠하고.
그러다가 또 소문이 돌면 여행객이 생기고, 그런 거지 뭐.”
“정말로 뜬소문이었어?”
“글쎄. 뭐든 시발점이 있겠지마는, 나는 가끔 누가 지어낸 무용담이라도 내뱉었다가 그게 와전되고 와전돼서
마더랜드가 되는 게 아닐까 하거든.”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닐 테다. 그러나 셀 수 없이 많은 자갈 속에 다이아몬드가 존재하듯, 뜬소문과 허무맹랑한
이야기, 지어낸 전설 속에서 하나쯤은 진짜이지 않을까? 나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 가서 뭐 하려고? 거기는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거래?”
티나의 말에 답하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네. 그 생각을 깊게 해보지는 못한 것 같다. 마더랜드. 거기는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걸까.
“일단 안전하겠지. Z 나 습격의 걱정이 없을 테고.”
“그리고?”
“규모가 클 거야. 시답지 않은 일로 죽는 일도 없을 거야.”
“또?”
“학교도 있겠지. 가족들이 있을 거고. Z 이전의 삶을 흉내 내지 않을까?”
“Z 전의 삶? 그게 어떤 건지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최초의 기억. 그때부터 이미 세상은 충분히 흉흉했다.
“이로.”
티나는 그새 점심을 해치우고 술래잡기를 하는 라일리와 맥스를 가리켰다.
많은 이들이 죽어서 텅 비어있지만 그만큼 채울 공간이 많은 마을을.
“그 대단한 마더랜드의 털끝도 따라가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살 만한 데 아냐?”
티나가 하려는 말이 짐작이 갔다. 스튜를 떠서 먹고 있자 방방 뛰는 아이들을 향해 티나가 고개를 뒤로 뺀다.
“밥 먹고 바로 뛰지 마! 체해!”
아……
탄식이 흐르고, 하하 하는 건조한 웃음이 입 밖으로 나온다.
마더랜드는 내 고향이 아니었다. 작은 오아시스를 두고 나는 신기루를 좇는 걸까?
어느새 스튜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숟가락을 내려놓자 리바이가 빵을 건넸다. 리바이의 입은 이미
빵으로 가득하다. 한가득 입 안에 물고 있지만 체격에 비해 리바이는 많이 먹는 편은 아니었다. 내 피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마워, 리바이.”
빵을 건네받는데, 리바이의 귀가 움찔하고 섰다.
“리바이?”
그것은 무언가를 포착한 들짐승의 귀였다. 귀가 바짝 선 리바이의 시선이 향한 쪽은 다름 아닌 정문이다.
“무슨 일인데?”
리바이의 고개가 정문으로 향한다. Z 와 짐승이 다가오면 알 수 있다던 리바이의 말이 바로 떠올랐다. 어떤 것
때문에 리바이의 귀가 반응한 걸까?
“리바이, 어떤 거야. 늑대 같은 거야? Z?”
속삭이자 리바이가 갸웃한다. 정문에는 아무것도 없다. 정문 양옆의 감시 초소에 선 사람들도 큰 반응이 없다.
울타리 사이사이로 언뜻 보이는 숲은 조용하기만 했다.
“이로, 리바이, 왜 그래?”
나와 리바이가 정문을 바라보자 티나 역시 우리를 따라 시선을 돌린다. 아니라며 대충 고개를 젓고
리바이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리바이? 묻자 그가 작게 답한다.
“아니.”
또 고개를 갸웃했던 리바이가 내뱉는다.
“사람.”
나는 식탁을 둘러싼 이들을 빠르게 세었다. 감시 초소에는 둘, 정찰도 둘. 아이들은 모두 있고 나머지는 모두
식탁에 둘러앉아 있다. 리바이가 말하는 인기척은 외부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몇 명? 알 수 있어?”
“몰라.”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리바이가 덧붙인다.
“많이.”
식탁 주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목소리,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속삭였기에 티나는
우리의 말을 듣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대체 뭔데? 하고 물어왔다. 대답할 수 없다. 적어도 감시 초소에서 먼저
신호가 오기 전까지는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인간의 청력으로는 모를 기척을 리바이는 잡아내지 않는가.
불필요한 이목을 끄는 일이다.
나는 식기를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리바이, 다 먹었어?”
“응.”
“이리 와.”
리바이를 데리고 식탁을 벗어났다. 빠르게 집으로 향하자 따라오던 리바이가 묻는다.
“티나 말 안 해?”
“안 돼.”
많이라니. 무해한 방랑자면 좋겠지만 떠돌이들은 크게 무리 지어 다니지 않는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왜?”
설명하기에는 너무 길었고 리바이가 전부를 이해할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사람인지는 어떻게 알았어? Z 아닌 거 확실해?”
“Z.”
리바이가 사람 다리를 흉내 내듯 검지와 중지를 든다. 벽에다 대고는 질질 발을 끄는 Z 처럼 느릿느릿하게
움직인다. 그러다가 토도도도독 빠르게 검지와 중지를 굴린다.
“사람.”
리바이가 손끝으로 규칙적이게 벽을 두드린다. 일견 인간의 발걸음으로 들린다.
이렇게 설명할 정도니 아마 인간이 맞을 것이다.
“리바이, 잘 들어.”
방으로 들어와 나는 어제 대강 정리했던 짐을 다시 싸기 시작했다.
“티나에게도 누구에게도 네가 연구소에서 왔다는 걸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연구소?”
“흰 괴물을 봤다고 해서도 안 돼.”
“흰 괴물? 괴물?”
리바이가 스스로를 가리킨다.
“너는 괴물이 아니야!”
참지 못하고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원진. 그의 죽음이 안타깝다가도 나는 이렇게 분노를 느낀다.
“아니야, 원진, 나, 내가 아파하면 나 괴물이라고 했잖아.”
“리바이.”
옷가지를 돌돌 말아 가방에 넣다가 나는 갑자기 치미는 감정에 그걸 거칠게 쑤셔 넣었다.
“절대로,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알았어? 너는 괴물이 아니야.”
“그러면?”
“너는 인간이야. 너는 사람이야.”
너를 만든 누구보다도 너는 더 인간적이다. 형형색색으로 물든 너는 무미건조한 회색의 괴물이 아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짙을 뿐이다.
“알았지?”
“응.”
리바이가 착실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를 두고 필수품을 챙겼다. 물병과 비누 조금, 담요.
뭐든 철저히 준비해야 했다.
그저 방랑객이라면 좋겠지만 규모가 크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 마을이 원래의 규모를 유지했다면
조금의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마을은 너무 크고 마을을 방어할 만한 인력은 터무니없이
적었으며, 사람 수에 비해 우리는 분에 넘치는 식량과 보금자리, 물품을 가지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진다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습격이 일어난다면 차라리 물건을 챙겨서 도망가는 게 가장 현명한
길이다. 아이들과 이곳의 사람들이 눈에 밟히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사로운 정은 불필요하다. 생존과
감정은 때때로 극단적으로 다른 선택을 하게 한다.
내게는 리바이만 있으면 된다.
“너도 짐 챙겨야지.”
말 그대로 혈혈단신이었던 연구소 때와 다르게 지금의 리바이에게는 조금이나마 짐이 생긴 상태였다. 나는
가방 하나를 더 꺼내 리바이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이거 말고.”
헐레벌떡 오는 리바이의 두 손에는 장난감과 도토리, 열쇠고리가 가득하다.
보지도 않고 내가 치우려 하자 리바이의 어깨가 축 처진다.
“꼭 필요한 거 말이야.”
“이로.”
“난 여기 못 들어가잖아.”
리바이의 어깨가 더 내려간다.
아직 리바이에게 짐을 싸게 하는 건 무리인 것 같다. 나중에 천천히 가르쳐줘야겠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가방 안에 물통과 담요, 육포, 칼을 넣었다. 원래 내가 가지고 온 것들이었다. 습격이 일어난다면 난리 통에
식량 저장고에서 몇 개를 빼 올 수 있겠다.
옷을 넣고 가방을 단단히 잠갔다.
“메지 말고 여기 두고 있어.”
끄덕끄덕하는 리바이에게 외투를 하나 입혔다. 곧 눈보라가 친다.
“사람들은 얼마나 왔어?”
음- 음…….
리바이는 거리를 표현할 방법을 모른다. 시간의 개념도 잘 모른다. 설명하기 힘들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리바이. 무슨 일 생기면,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울타리 뛰어넘을 수 있지?”
마을 규모가 워낙 커서 울타리 전체를 포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정문이나 후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넘어가면 상대적으로 안전할 테다.
“응.”
“알겠어. 착하지.”
리바이와 내 가방을 나란히 방 앞에 세워두고 잊은 것은 없는지 확인했다. 리바이의 가는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나는 마음을 달랬다. 별일 아닐 수도 있어. 괜찮을 거야.
내게로 안겨드는 리바이를 끌어안자 빠르게 뛰고 있던 심장이 안정감 있게 원래대로 돌아온다.
“하아…….”
그를 세게 껴안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리바이만 다치지 않으면 된다.
6. 선량한 기만자
외부인의 정체는 곧 드러났다.
마을 내에 경보가 울렸다. 습격일까 하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미는데 이미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리바이와 함께 모닥불로 향하는데 둥글게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언뜻 누워있는 인영이 보였다.
“소독약 가지고 와!”
라일리가 움직이자 곧 들것을 가지고 에이든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올리비아가 활에 맞았어.”
답해준 것은 엠마였다. 엠마의 어깨와 배 부근에 피가 흥건했다. 정찰을 나갔다가 활을 맞은 올리비아를
데리고 온 것이다.
“너는 괜찮아?”
“나는 멀쩡해. 애초에 우릴 죽이려던 것도 아니었을 거야.”
들것에 실려 병동으로 향하는 올리비아를 보며 엠마가 중얼거린다. 엠마는 피가 말라붙은 손으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접힌 종이였다.
“티나.”
“젠장, 폴! 여기서 당신이 아니면 누가 수술을 해!”
폴에게 화를 내던 티나가 짜증을 낸다.
“손이 떨린다고? 그게 변명이라고 생각해요? …엠마, 나 지금 바빠!”
“티나, 이것 봐.”
수술은 폴이 아닌 에이든이 하는 것으로 결정 났다. 짜증을 내며 몸을 돌렸던 티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엠마가 건네는 종이를 받았다.
“평소처럼 걷고 있었는데 어디서 화살이 날아왔어. 그게 나에게로 향할 수도 있었고 우리 둘을 다 죽일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어. 이것 때문인가 봐.”
화살에 매여 있었다던 종이를 티나가 펼쳐졌다.
[자정까지 식량을 전부 바쳐라. 굴종 혹은 죽음.]
이 근방에는 다른 공동체가 없다는 말을 티나가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신생 공동체 아니면 노마드일 것이다.
한곳에 자리 잡지 않고 떼 지어 몰려다니며 약탈하는 것으로 생존하는 노마드.
하필이면 리바이가 가리킨 ‘많은 사람’은 노마드였다.
쪽지를 읽자마자 티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절망스러울 만하다.
노인 하나에 남자 둘, 여자 셋, 어린아이 다섯. 나와 리바이가 합류하여 남자가 넷이 되었지만 대단한 전력은
아니다. 올리비아가 부상을 입었으니 결국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여섯이 전부이다. 성인 여섯 명이 이
공동체를 지킬 수 있을까.
“식량을 전부 바치라고?! 우리더러 죽으라는 소리잖아! 티나, 우리는 싸워야 해!”
코너가 외쳤다.
“적이 몇 명 안 될 수도 있어.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많을 거야.”
코너의 말에 불쑥 내가 끼어들었다.
“그걸 이로 네가 어떻게 알아?”
리바이가 감지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논리적으로 봤을 때 몇 안 되는 사람을 데리고 다른 곳을 침략하려 하진 않을 거 아냐. 적은 우리가 Z 의 습격을
받아 규모가 줄어들었다는 것도 몰랐을 텐데.”
내 말을 대신 받은 것은 티나였다. 티나가 괜히 이곳의 리더가 된 것이 아니었다.
“총이 얼마나 있지? 화약은?”
“많지 않아. 보급품을 찾으러 숲 밖으로 나간 지 오래되었잖아.”
“남은 건 석궁이랑 활 정도인가?”
티나는 코너에게 무기를 확인하라 일러두었다. 코너가 사라지자마자 라일리가 외쳤다.
“티나, 나 할 수 있어! 나도!”
맥스도 끼어들었다. 아이 어른 가릴 때가 아니었다.
“라일리, 맥스, 애들 데리고 코너에게 가서 석궁 들 수 있는지 확인하고 와. 들 수 있으면 쏘는 법도
배우고.”
“네!”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 아이들이 사라지고 에이든과 코너도 사라지자 결국 남은 것은 폴과 나, 리바이, 엠마,
티나가 전부였다.
티나가 한숨을 쉴 동안 나는 쪽지를 거듭 읽고 있었다.
싸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식량을 전부 바쳐라.
전부.
간결히 쓰인 쪽지를 계속해서 곱씹었다.
전부라고? 그게 전부인 건 어떻게 확인하려고?
저들은 이곳을 그냥 놔둘 생각이 없다. 핏물 배인 발자국을 남기고 들어와서는 창고가 텅텅 빈 것을 확인하고
갈 요량이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승산이 없는 싸움이다. 우리를 살려둘 생각은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노마드의 노예나 잡일꾼으로 전락할 테다. 여유가 있을 때 도망가는 게 최선이었다.
“티나.”
“나도 알아.”
입을 열자마자 티나가 일갈했다.
“말하지 않아도 돼, 이로. 나도 알아. 알고 있으니까. 내가 어릴 적에도 이런 일이 있었거든. 그동안 우리
규모가 커서 지켜냈을 뿐이지.”
같은 경험이 있는 엠마가 무거운 숨을 내쉬며 고개를 주억인다.
“어차피 뺏기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거야. 이곳이 터전이기도 하고. 우리한테는 방법이 없어. 애들
다섯을 데리고 눈보라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아이들을 버리면 되잖아.”
내 말에 티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곧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게 오래 살아남은 사람들의 방식이긴 하지.”
오래 살아남은 사람들의 방식이라. 옳은 말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리바이가 조금의 해도 입지 않기를 바랐다. 개입하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차라리 Z 를 발견한 것이라면
모를까.
리바이가 아니었더라도, 내가 혼자였더라도 나는 비슷한 답을 내렸을 테다. 비난과 명예는 중요치 않다.
그런 것들은 시체와 함께 썩어 문드러지기 마련이다.
“……갈 거야?”
엠마가 묻는다. 나는 쪽지를 신기한 눈으로 살피는 리바이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응.”
“……그래, 알겠어.”
티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에는 식량 저장고 열쇠가 있었다.
“자정까지는 시간이 좀 있어. 먹을 것을 줄게. 가지고 가.”
“열 명 몫을 줘.”
“뭐?! 이로!”
엠마가 새된 목소리로 외친다.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호수로 이어지는 강을 따라 상류로 갈 거야. 장소를 알려줘. 거기다가 식량을 묻을 게.”
이들이 살아남는다면, 도망치기로 한다면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을 테다.
“리바이와 나는 발이 빨라. 적어도 두 곳에 나눠서 식량을 묻을 수 있을 거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제안이었다.
* * *
눈은 곧 그쳤다. 우리의 흔적이 남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리바이와 내 가방에 식량을 잔뜩 넣었다.
반반씩 나누어 묻을 예정이었다.
“사람들에게 인사는 하지 않아도 돼?”
티나가 물었다.
만약 이 공동체의 주인이 나와 리바이였고 이들이 객이었다면, 우리가 남아 싸운다고 했을 때 티나는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며 떠났을 것이다.
우리의 선택을 이해했기에 티나는 우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갈 것을 권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사투를 벌일 사람들.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 무거운 짐을 들고도 리바이는 어렵지 않게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울타리를 넘어 돌아보니, 모든 것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기계적으로 발을 옮겼다.
“이로. 밤.”
“맞아, 해가 저물고 있어.”
더 추워질 텐데, 어디서 지내야 할까. 숲은 너무 넓고 가혹하다. 겨울에는 특히 그랬다.
얼마 걷지 않았음에도 빽빽한 나무 때문에 벌써 울타리가 보이지 않았다. 마른 나무 사이로 몸을 움직였다.
낙엽이 바스러지고, 내 안의 무언가도 조금씩 바스러졌다. 죄책감은 아니었다. 익숙하고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그러므로 이건 아쉬움이라고 봐야 했다.
노마드가 아니었다면, Z 나 열여덟 번째 실험체가 아니었다면 내게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을지도
모르는 마을.
“이로, 추워?”
조금씩 떠는 날 보며 리바이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내게 추운 건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을 벗어나는 데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 정신이 다른 곳으로 빠졌다.
“리바이.”
“응.”
“사람 많았지?”
“응.”
“총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어? 쾅 하는 거.”
“몰라.”
아직 리바이는 총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아무리 리바이의 청력이 짐승 못지않다고 해도 노마드의 전력이나
특별한 뭘 감지할 수 있는 건 아닐 테지.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해는 빠르게 저물었고, 어둠이 몰아쳤다.
입김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바람이 세차게 불며 낙엽을 쓸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리바이의 귀는
이따금씩 쫑긋거리며 움직였다.
마을의 호수가 강과 이어지는 상류에 도착했을 때, 티나가 말한 거대한 바위를 찾을 수 있었다. 가방을 뒤져
도구를 꺼냈다.
바위 밑으로 차갑게 언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돌덩이와 다름없는 땅을
파는 건 쉽지 않았지만 리바이가 나를 도와서 수월하게 구덩이를 팔 수 있었다.
“이로, 아파?”
리바이에게는 피로의 흔적이 없었다. 남은 이들에 대한 동정심이나 하는 감정도 전무했다. 리바이에게는
나밖에 없었다. 마음이 편치 않은, 앞으로의 일이 막막해서, 마더랜드로 꼭 향해야 할까 하는 의구심에
점철된 나.
“아니, 안 아파.”
식량을 반 이상 덜어냈다. 흙으로 덮은 다음 죽은 나뭇가지를 가져와 위에 쌓아두었다. 지금이야 밤이라
구별하기 어렵지만 파낸 흙과 표토의 색이 다를 것이기 때문에 주위의 흙을 긁어와 재차 덮었다.
리바이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빠르게 식량을 묻지 못했을 것이다.
짐을 크게 덜었기 때문에 가방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마음이 조급하다 보니 무게가 줄어들었음에도 자꾸
숨이 거칠어졌다.
내 몸은 흙과 땀으로 벌써 엉망이었다.
바로 몸을 일으키려는데 리바이가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사람.”
사람이라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낮추었던 나는 가방을 고쳐 메고 바위 뒤로 몸을 붙였다.
많이? 하고 속삭이자 리바이가 평상시와 다름없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이라니.
안 될 일이었다. 왜 사람들이 호수에, 그것도 상류 부근에 있단 말인가. 노마드는 이곳이 아니라 마을 주위에
진을 치고 습격할 준비를 해야 했다. 아직 자정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서일까?
“피해서 가야겠다. 어디쯤인지 알려줘.”
리바이가 이들의 기척을 잡아내니 큰 문제는 없을 거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나는 마을이 있던 곳을 뒤돌아봤다.
저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성공적으로 도망칠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러나 마을은 워낙 규모가
크고 저들은 이 주위 지리에 빠삭하니 가능성이 전무한 것은 또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이들이 마을을 빠져나온다면, 강을 향해 상류 쪽으로는 와선 안 된다.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다.
상류 쪽으로 향해서는 안 된다고, 딱 그 말만 전할까? 식량만 가지고 방향을 틀라고, 그렇게만 말할까?
“이로.”
자정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리바이, 너 여기 있을 수 있지?”
울타리를 돌아가서 말만 전해주면 된다. 아니면 돌에 쪽지를 묶어서 이야기하면 된다. 굳이 넘을 필요는 없다.
나만 혼자 가면 된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리바이는 이곳에 두고,
“안 돼, 이로.”
일어서려는 날 리바이가 단단히 붙잡았다. 힘을 주었지만 풀리지 않았다.
“이로.”
그의 어조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단호했다. 나는 불을 본 야생동물처럼 리바이의 선연한 안광 아래 꼼짝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리바이는 단언했다.
“같이.”
“안 돼, 위험하잖아. 너는 여기 있으면 피할 수도 있으니까…….”
횡설수설하는 내게 리바이가 털어놓는다.
“이로, 나 무서워…….”
아.
“밤 무서워. 혼자 무서워. 이로 나 혼자 싫어.”
지금 보니 날 붙잡은 리바이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리바이가 너무 강해서, 예상외로 잘해주고 잘
따라와 줘서 그에게는 거의 모든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잊고는 한다. 내게는 당연한 것이 그에게는 그렇지
않고, 내게는 익숙한 것이 리바이에게는 아니라는 점을.
리바이는 나 없이는 망망대해에서 홀로 서게 되고, 의지할 곳도 없이 자신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태로 표류하게 된다는 것을.
“이로, 미안해. 잘못했어. 나 혼자 싫어. 무서워.”
덜덜 떨며 리바이가 내게 안겨 든다. 오들오들 떨리는 몸이 익숙하다.
나는 고민했다. 자정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고 우리는 오래 길을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리바이, 우리 잠깐만 돌아가자. 말만 전해주고 오자. 쪽지만.”
덜덜 떠느라 리바이는 답하지 못했다.
“리바이, 나 봐봐.”
내게 허겁지겁 안기려는 그를 떼어놓고 눈을 마주쳤다. 희미하지만 리바이에게는 충격의 기운이 아직도 서려
있다.
“자정까지는 시간이 남았어. 괜찮을 거야.”
“이로오…….”
나를 길게 부르던 리바이는 재차 물었다.
“이로. 아파?”
리바이의 질문에 나는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아니.”
고민하는 눈치였던 리바이는 곧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안 아파 해 줄게.”
“안 아프게 해 준다고? 응, 너만 믿을게.”
실없이 웃으며 나는 가슴께를 가리켰다.
여기 불어줘야지.
그러자 리바이가 후우, 후우- 내 상체에 바람을 분다.
죽음은 대개 이런 것과 함께 찾아온다. 혹시나 하는 희망, 만에 하나라는 희망, 괜찮을 것이라는 낙관주의.
나와 같은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항상 조소했다.
만에 하나라는 건 없어. 네가 도와주면 바뀔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에 구덩이로 빠지는 거야.
그 말은 족족 맞아 들었다. 틀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예감이 나쁘지 않았다. 아마 죽은 사람들 대부분 그딴
소리를 했겠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에서 기이하리만치 근거를 알 수 없는 낙관론이 피어올랐다. 그건
리바이가 내게 심어준 희망이었다.
“가자.”
마을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람이 왔다는 리바이의 말에 내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깨졌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자조였다.
내게는 완벽한 해피엔딩도, 안전가옥도, 뿌리내리는 삶이라는 것도 없으니 이제 그만 순응하라고.
촘촘히 퍼져가는 비극의 그물망을 피해 도망가 본다. 나는 비극이 눈여겨볼 가치도 없을 정도로 작고
보잘것없어서 운 좋게 그물 사이를 여러 번 벗어났다. 그러나 이제 나는 무럭무럭 자란 상태이다. 리바이의
어설픈 말을 듣고, 내가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만족감을 게걸스레 먹어 치워 거대해진 것이다.
다시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쪽지를 휘갈겨 쓴 다음 돌멩이에 묶었다.
“리바이. 티나 어디쯤에 있어? 아니, 이렇게는 모르겠지, 마을 사람들이,”
“저기.”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았는데도 리바이는 거침없었다. 놀랍게도 리바이는 익숙한 인기척을 일일이 구별할
수 있었다.
리바이가 가리키는 곳은 울타리 한참 너머였다. 돌을 던져서는 턱도 없고 티나가 발견할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가 다시 돌아온 곳은 울타리 사이가 막혀있어서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옆으로 빙 돌아 울타리
사이사이로 안을 확인하기에는 여유가 없다.
“들어가자.”
리바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숨에 나를 끌어안고 울타리를 넘었다.
우리가 돌아온 곳은 마을의 서쪽 부근이었다.
마을은 해가 지면 모닥불이 있는 중심과 정문을 제외하고는 항상 조용했다. 아직까지 사람이 살던 흔적이
남아있는데도 정작 인기척은 없으니 을씨년스럽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을의 중앙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준비로 바빠야 할 마을이 너무나도 고요했다.
“티나가 어디 있어?”
“불.”
모닥불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티나가 마을 중앙에 있다고 하기엔 너무나 조용했다. 리바이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을 텐데. 나는 우선 리바이를 믿고 빠르게 달렸다가 급작스레 멈추었다. 나를 따라 인기척도 숨기지
않고 달려왔던 리바이도 끼이익 멈추었다. 넘어질 듯 휘청거리는 리바이를 붙잡고 재빨리 옆으로 끌었다.
리바이의 말대로 티나는 마을 중앙에 있었다. 티나뿐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거기 있었다.
포박된 상태였다는 게 문제지만.
눈을 홉뜬 나는 리바이를 되는대로 창고 뒤로 끌어 몸을 숨겼다.
‘그걸 이야기 안 하면 어떻게 해! 노마드가 이미 들어왔다는 걸 말 안 하면 어떡…!’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아서 리바이의 어깨를 잡고 탈탈 흔들었다.
“이로 안 물어봐서.”
환장. 그걸 이야기 안 하면, 아니! 아니! 너 진짜!
나는 격렬히, 그러나 고요히 리바이를 탈탈 털어 댔다. 내가 털면 털리고 흔들면 흔들리는 대로 리바이는
무해한 낯으로 나를 본다.
네가 안 물어봤으면서 왜 나한테 그래, 라는 얼굴이다.
나는 리바이를 걸레 짜듯 쥐어짜고 비틀었다.
“아야, 이로.”
그랬다가 빨리 손을 뗐다.
아니, 여기서 이렇게 리바이를 족칠 시간이 없다. 족치는 건 나중에 하고.
일단 다시 울타리 밖으로 나가야겠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자정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아있었다. 아, 그래, 노마드가 자정을 기약처럼 지킬 이유는 없었다. 자정
전이든 후든 저들이 준비가 되면 습격을 해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진작 습격해오지 않았을까, 왜 친절하게 식량을 달라고 화살을 쏴서…….
아.
나는 이마를 감쌌다.
쪽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올리비아에게 화살을 쏜 뒤 미행해 공동체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그래, 이거였다.
그제야 상황이 맞아떨어져서 나는 숨을 내쉬었다.
모닥불 주위로는 티나, 에이든, 엠마 등 싸울 수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묶여 있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위에는 겨울을 대비해 단단히 무장한 노마드가 있었다. 얼핏 봐도 우리보다 인원이 많았다.
강의 상류에도 사람이 있다고 했으니 규모는 훨씬 클 테다. 승산이 없었다.
이들은 집 안의 가구를 부숴 땔감으로 쓰고 있었다. 원래도 불의 규모가 작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화형식이라도
벌일 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주위에는 벌써 이들이 창고에서 꺼내온 식량이 널려 있다.
노마드들은 낄낄 웃으며 약탈을 자축했다.
계속 보고 있을 자신도, 이유도 없었다. 몸을 돌리려던 차에,
“라일리 안 돼!”
“안 돼~ 안 돼~ 하하하! 묶여서 안 된다고 외치면 뭐가 달라져?”
이들이 아이들을 하나둘씩 끌고 가고 있었다. 티나를 비웃고 떠들며 발을 구르고 저항하는 아이들을 단단히
팔에 가둬 제압한다.
소강상태였던 분위기가 반전된다. 생존을 건 싸움에서 패배한 순간 패자는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
굶주림이든 폭력이든 멸시든 중요하지 않다.
강자는 빼앗고 약자는 빼앗긴다.
그게 지금 세계를 관통하는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부당한 처사를 호소할 곳도 없고, 호소해서도 안 되는 약육강식의 전장. 그러니 이들이 패배한 생존자들을
가지고 일꾼으로 삼든 착취를 하든 그건 오로지 승자의 권한인 것이다.
너울거리는 불꽃.
그래, 그건 승자의 권한인 게 맞았다. 나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내가 마을 사람들을 뒤로하고 떠났을 때부터 나는 이들이 패배했을 경우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꽃이 크게 타올랐다.
라일리가 비명을 지른다. 필사적인 외침이 귀를 때리고, 나는 무력해진다. 보호소가 무너진 뒤 홀로 남았던
그때와 나는 다르지 않다. 무력하고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낼 수 없다.
불 너머, 너울거리며 퍼지는 불이 거울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홀로 남은 어린아이를 바라본다. 혼자서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던 어린아이. 보호소가 무너지고 나는 나무 위에서 울면서 선잠을 자다가 찬 이슬을
맞으며 깨고는 했다.
막 모든 세계가 무너져서 혼란에 차 있던 때였다. 첫새벽이었다. 너무 높이 올라와 있어서 어떻게 내려가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일견 내가 기댈 수 있는 성인
남성들처럼 보였다. 어린아이도 몇 있었다.
고민하다가 나뭇가지를 밟고 내려오는데,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며칠간 먹은 게 전혀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밟았던 나뭇가지가 뚝 부러졌다. 다급히 기둥을 잡아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남자들은 날 알아채지 못했지만 한 여자아이가 나를 발견했다. 도와줘, 라고 외칠 생각이었다. 이들에게
합류하면 되겠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런 생각이었다. 사람이니까, 우린 Z 라는 같은 위협을
마주하고 있는 동류니까.
입을 열려던 차, 여자아이가 검지를 들어 입가에 댔다.
쉬잇-.
손끝이 다 상해버린 어린아이. 그제야 남자들과 어린아이들의 행색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가 날 조용히 시킨 이유를 나는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알아야 했다.
입을 틀어막으며 나는 나무 위에서 숨을 죽이고 반나절을 버텼다.
아프다는 말이 숲을 울렸다. 나는 입을 틀어막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 같았다.
“이로.”
바로 도망가야 할 찰나에, 정신을 놓고 있었다. 번져가며 둔탁해졌던 소리가 돌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렇게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나는 리바이를 보았다.
“라일리를 놔 줘! 안 돼, 에디!”
이들은 여아 남아 할 것 없이 아이들을 죄다 끌었다. 잠겨있는 집 문을 되는대로 부수고 들어가며 발악하고
소리치는 아이들을 끌고 갔다.
“입 닥쳐, 다음은 네년 차례니까!”
티나의 뺨을 후려갈기고 노마드는 아이들을 하나씩 집었다.
“이로.”
응…….
가야지. 도망가야지. 맞아, 그래, 그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이야, 리바이.
“아파?”
“……응.”
그런데 조금 아팠다. 많이는 아니었지만.
“돌아가자.”
나는 몸을 돌렸다. 울타리 쪽으로 다시 향했다. 모든 소란을 뒤로했다.
세상에는 내가 어쩌지 못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너무나도.
어두운 마을을 지나쳐 리바이와 넘어왔던 울타리로 향했다. 달려가는 내내, 괜히 돌아왔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애초에 와서는 안 됐다. 리바이와 함께여서 괜한 낙관주의에 차 있던 내 잘못이다. 조금 전까지의
모든 희망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소리를 죽여 걸음을 빨리하는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리바이?”
어두운 마을에서 내 숨소리만이 울렸다. 추위가 아닌 두려움으로 몸이 가늘게 떨린다.
“리바이?”
긴장에 허덕이는 숨을 내쉬며 나는 모닥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바이가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이리로 온 것을 못 본 것일까? 마을 사람들이 묶여 있던 곳으로 달려가는데,
“아아아악!”
절규가 울려 퍼졌다.
거칠어져 있던 숨구멍이 턱 막힌 듯했다. 피가 끓는 듯한 비명. 티나나 아이들의 높은 외침이 아니었다. 성인
남성의 것.
리바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안 돼, 제발, 리바이만 아니면 돼. 리바이만, 리바이만……!
* * *
기척을 숨기지도 못하고 본능적으로 달려갔던 나는 거대한 벽을 마주한 것처럼 우뚝 멈추어 섰다.
그곳에 리바이가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거나, 절규하는 것이 아닌,
노마드를 살육하고 있는 리바이가.
“리바이!”
“아아악! 괴물! 괴물이야!”
오로라를 본 적이 있다. 찰나였지만. 그때가 언제였던가. 쿵 하는 거대한 굉음이 들렸다. 순간 나는 드디어
거인이 내가 밟고 있는 땅을 짓밟고 섰구나 하는 바보 같은 상상을 했었다. 그리고 오로라가 펼쳐졌다.
원래라면 볼 수 없었지만 지구가 뒤죽박죽되고, Z 가 창궐하며 기존의 모든 상식과 논리가 뒤엎어졌기에 내
눈앞에서 펼쳐졌던 기적.
나는 멍하니 장엄한 광경을 눈에 담기만 했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내가 오로라를 보았던 그때처럼,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을 앞에 두고서 멍하니 섰다.
데구루루.
아래를 보았다. 내 바짓단에 피가 묻어있었다. 고통스러운 표정이 그대로 박제된 머리가 굴러다녔다.
괴물이야를 외치며 노마드는 혼비백산 도망쳤다. 몇 명은 화살을 쏘았지만 헛수고였다. 그 무의미한 시도를
비웃듯 리바이는 가볍게 이들을 하나하나 잡아 생명을 꺼뜨렸다. 어느 순간에는 너무 빨라 눈이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
리바이는 괴물이 아니다.
‘절대로,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알았어? 너는 괴물이 아니야.’
아니었다.
시야가 캄캄하게 암전되었다가 타오르는 불에 정신이 돌아오고, 다시 시야가 멀어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럴 때마다 내 눈은 무표정으로 이들을 살육하는 리바이와, 끔찍하게 찢긴 사체와, 경이가 경악으로 물드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이들의 표정에서 나는 원진을 볼 수 있었다. 원진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리바이와 사람을 제멋대로
갈라놓는 엄격한 기준에서 숨 쉴 것이고, 내가 리바이의 목줄을 채우려 할 때마다 나를 비웃는 이성으로 부활할
테다.
이 전투가, 이렇게 어린아이 대하듯 쉬울 줄 누가 알았을까.
“리바이.”
모든 것은 아주 빠르게 끝이 났다. 내 숨이 다 진정되기 전에 모든 것들이 끝나있었다.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걸을 때마다 눈과 피에 젖은 흙이 질척거리며 신발 밑창에 달라붙었다. 걸을 때마다 핏자국이 남았다.
“이로.”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으로 리바이는 내게 왔다. 그리고 내 표정을 한참이나 지그시 바라보았다. 피
칠갑을 한 리바이의 손에는 누구 것인지 모를 심장이 있었다. 심장에서 진득한 피가 질척거리며 떨어졌다.
“아직도 아파?”
이것으로 화가 풀리지 않냐는 듯한 얼굴. 내가 바로 칭찬을 해 주지 않아 의아해하는 표정.
고개를 갸웃한 리바이는 겁에 질린 티나와 실신한 아이들을 가리켰다.
“아파? 더?”
피 묻은 손이 그들에게로 향한다.
“리바이!”
티나의 눈이 홉뜨인다.
“응?”
아찔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까지도 그저 질린 상태였던 티나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놀라움이 경악으로
변하고, 경악이 혐오로 화한 순간이었다.
내 말 한마디면 리바이가 이곳의 모든 사람을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도륙할 것을 자각했기 때문에.
그동안 공유했던 순간과 모든 대화는 그에게 하등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리바이는 이들에게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리바이에게 이들은 낙엽과 같은 존재였다. 이파리가
벌레가 잔뜩 먹었든,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리바이에게 이들은 딱 그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호숫가를 가리켰다. 피 때문에 리바이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가서…… 피 닦고 올래?”
“응.”
“옷도 갈아입고. 가방에 있어.”
“응.”
장난감 인형을 던지듯 리바이는 손에 들린 심장을 아무렇게나 떨어뜨렸다. 살점과 피, 뼛조각이 묻은
리바이는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리바이가 나를 스쳐 가고,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들에게 다가갔다. 칼을 꺼내 이들을 구속하고 있는
로프를 잘랐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한 명씩, 한 명씩 로프를 잘라 주었다. 대부분은 끔찍한 모습에 정신을 잃었고, 실신하지 않은 이들은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리바이는 열여덟 번째 실험체와 달랐다.
결과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이들을 죽이는 리바이에게서는 조금의 쾌락도 느껴지지 않았다. 리바이는 내가
아픈 게 싫었을 뿐이다. 끝도 없이, 차라리 그 실험체가 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아니면 그 이상으로
잔인하긴 했지만.
나는 어떤 생명체든 인간의 목을 산 채로 비틀어 뽑을 수 있는 악력이 존재할 수 있는지 몰랐다. 그건 머리를
몸에서 뜯어내는 것에 가까웠다.
“괴…… 괴물이야.”
모두의 마음속에 있던 단어를 기필코 꺼낸 것은 에이든이었다. 에이든은 덜덜 떨며 외쳤다.
“괴물이야! 괴물이잖아! 너는 괴물을 데리고 있었어!”
실신한 아이들을 구속하고 있던 밧줄도 잘라 주었다.
“그때도 너였지!”
쓰러져있는 라일리를 앉히고 남은 사람들의 수를 셌다. 하나가 비었다. 누구였더라. 익숙한 얼굴들을
떠올리다가 수줍게 웃었던 아이를 기억해냈다. 맥스가 없었다.
맥스는 젖은 흙바닥에서 죽어 갔다. 손에는 석궁이 있었다. 눈을 뜨고 죽어간 맥스를 봤을 때 심장이 쿵
떨어졌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아이의 가슴 정중앙을 뚫은 화살을 보며 나는 안도인지 한탄인지 모를
신음을 흘렸다.
적어도 맥스는 리바이를 모른 채로 죽었을 것이다. 잔인한 리바이, 자신이 얼마만큼 비인간적일 수 있는지 그
바닥을 자랑하듯 사냥했던 그 모습을 모르고 라일리와 옥신각신하던 그 모습만 기억하겠지.
“그때 여기를 습격한 것도 저 괴물이었지! 너였어! 여기를 습격하고 우리 틈에서-!”
“닥쳐!”
내 외침은 에이든의 목소리와 다름없이 절규에 차 있었다.
“리바이는 괴물이 아니야! 아니라고!”
분노에 몸이 가늘게 떨려왔다. 나는 허튼소리를 하는 에이든의 입을 찢어놓고 싶지 않아 칼을 든 손에 힘을
단단히 주었다. 비명에 화가 났다. 이들의 반응이 증오스러웠고 내 목소리에는 그 배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괴물이라고? 널 살린 게 괴물이라고?!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은혜도 모르고 감사한 줄 모르는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저런 소리를 들으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이곳으로 온 게 아니었다. 내게 일 순위는 리바이였지만 그래도
이들이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 날 묶어두는 제약은 조금도 없었음에도 달려왔다. 그런데 듣는 말이 이런
거라고? 리바이는 이런 말을 들을 짓을 하지 않았다.
“눈이 박혀있으면 제대로 봐! 날 똑바로 보고 말해! 리바이가 괴물이야?!”
겁에 질려 멍청한 소리만 해 대는 에이든 위에 올라타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온 힘을 다해 목을 졸랐다.
리바이는 괴물이 아니다. 분명 방금 이 학살은 필요 이상으로 잔인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살린 건
리바이가 아니었던가……?
내 조급한 추궁에 떨리는 목소리로 에이든이 되물었다.
“그러면…… 리바이가 인간이야……? 저게 인간이야?”
“이곳을 습격한 건 괴물이야. 리바이가 아니야. 다른 존재라고. 나도 한 번밖에 보지 못했어. 아는 건 그게
다야.”
붉은 얼굴로 간신히 숨을 토해내는 에이든을 보며 나는 뒷걸음질 쳤다. 커헉 컥! 숨을 몰아쉬느라 에이든은
대꾸하지 못했다.
거짓말.
나는 위선자였다.
에이든의 외침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곳이 맥스가 목숨 걸고 지킬 만한 가치가 정말로 있었는지 모르겠다. 원래는 그럴 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죽은 노마드가 어떤 형태를 하고 있든 간에 리바이는 사람들을 구했다. 그게 중요한 건데,
노마드의 사지가 찢겨지든 깔끔하게 목이 잘려 죽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를 따듯하게 맞아주던 이들이 리바이에게서 등을 돌린다.
인간의 진정한 모습은 급박한 상황에 나타난다고 한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기로에서 인간은 본성을 드러낸다.
마을은 풍족했고 내가 머물 만한 자리가 있기에 나는 이곳이 완벽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나는 또 잘못된
곳을 택한 것이다. 도망치다가 몸을 돌려 손에 피를 묻히고 구해줬는데. 왜 이들은 리바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이곳에 멀쩡한 정신으로 서 있을 자신이 없어서 나는 리바이를 찾았다.
호숫가로 갔을 때 나는 발에 차이는 무언가에 걸음을 멈추었다.
시체들이 즐비했다. 모닥불 주위로 널린 사체와 달리 온전한 상태로 죽어있어서 나는 이것들이 시체인 것을 한
박자 늦게 알아챘다.
우리가 상류에서 마주칠 뻔했던 노마드였을 것이다. 외침이나 경보를 듣고 오던 중이었을 수도. 모두 시체가
되어 내게 설명해줄 만한 생존자는 없으니 다른 진실이 있다 해도 나는 평생 알지 못할 테다.
모두 깔끔하게 목이 꺾여있었다. 마을 중앙의 시체와는 대조적이다. 위화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리바이.”
“이로.”
흐릿한 달빛 아래로 리바이의 흰 육체가 언뜻 보였다. 그는 호수 안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피로 목욕을 한
듯한 몰골이었기에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바위 위로 리바이가 던져둔 옷을 들었다. 피를 흠뻑 머금은
옷가지. 다시는 입지 못할 옷이었다.
어쩐지 리바이는 즐거워 보였다.
얼어버릴 정도로 물이 시릴 텐데 리바이는 그런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물살을 가르고 온몸을
적시고, 일어나서는 살갗을 깨끗하게 닦아 내렸다.
한결 가뿐해 보이는 리바이와 다르게 나는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너는 괴물이 아니야, 알았지?”
에이든의 외침이 너무 커서 리바이라면 호숫가에서도 그 비난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 위로였다.
리바이는 피가 씻겨 나간 머리를 털며 호수에서 나왔다. 피를 머금어 분홍색으로 물들었던 머리가 다시
매끄러운 은사가 되어 투명한 물을 흘렸다.
“알았지?”
“이로, 나 안 아파.”
가방에서 새 옷을 꺼내 건넸다.
“에이든, 티나, 사람 말 안 아파. 나 아파. 이로가 말 아파.”
주는 대로 옷을 다 입은 리바이는 젖은 머리를 대충 털며 내게 몸을 붙여왔다. 한겨울에 호수에 몸을 담가도
전혀 식지 않는 몸.
그는 기어코 나를 녹여 제 입맛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다시 식어버린 나는 원래의 형체를 잃어버렸다.
“이로는?”
바람이 불어왔다. 땀이 식고 흥분과 긴장이 가라앉은 몸은 겨울바람에도 크게 반응했다. 부르르 떨기도 전에
리바이가 나를 끌어안았다. 내가 식은 그를 따듯하게 해줘야 하는데, 대부분은 반대다. 리바이는 항상 나를
따듯하게 한다.
“나도. 나도 에이든 말은 안 아파. 나는 네 말에만 아파.”
“음…… 티나?”
“마찬가지야.”
“라일리? 엠마? 폴?”
한 명씩 이름이 쏟아졌다.
“올리비아? 드니스? 에디?”
교류할 기회가 없어서 나는 확실히 외우지 못한 이름을 리바이는 전부 정확히 외고 있었다. 고개를 쭉 흔들기만
하자, 리바이가 마지막으로 묻는다.
그의 눈이 번들거리며 빛났다.
“원진은?”
실없이 웃고 있던 내 입꼬리가 살짝 굳었다.
허가 찔려서라기보다는 다른 이유에서.
“당연히 아니지.”
원래 원진이 툭 툭 내뱉는 말은 내게 어떤 무게도 갖지 않았다.
리바이가 눈을 뜨기 이전에도 우리는 사사건건 부딪쳤다.
원진은 나더러 생존 기계 같다고 했다. 기름만 제때 들어가서 동력만 유지된다면 만족하는, 모든 것에
무감각한 기계. 원진은 다혈질인 구석이 있어서 화가 나면 되는대로 쏘아붙이고는 했다. 그러나 어떤 막말도
내게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나는 다만 리바이가 원진의 이름을 댄 것이 의아했을 뿐이다. 지금 돌아보니 모든 것에 어떤 기시감이 들어서.
“착해, 이로.”
내게 칭찬을 하면서 리바이는 되려 자신을 칭찬해 달라며 내 볼에 제 머리를 비볐다. 가볍게 비비는 것보다는
나를 칭칭 옭아매고는 제 머리와 몸을 되는대로 치대는 것에 가까웠다.
뭐라 말하려다 갑자기 쏟아지는 무게와 체온에 나는 정신이 없어졌다. 갑자기 원진은 왜 나온 것인지 그런 걸
물으려 했는데, 뺨이며 귀며 목덜미나 콧등에 닿는 리바이의 온도가 내 모든 질문을 묻어 버렸다.
“간지러워.”
키득키득하는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까지도 나는 시체 더미 위에 있었다. 더 무뎌진 기분이 들었다.
* * *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마을이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
수많은 시체와 살점과 쓰레기처럼 내던져진 사지를 한곳에 몰아 매장하기 위해 생존자들은 구덩이를 팠다.
나는 거기에 끼지 않았다. 이따금씩 창문 밖으로 이들이 단합해 새로운 날을 살기 위해 애쓰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이다.
호숫가든 어디든 리바이가 죽인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아서 모두 모여 구덩이를 팠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또 시체를 수습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맥스는 마을 내의 공동 묘지에 묻혔다. 아이는 자신만의 묘지를 가질 자격이 있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모든 것을 덮었다.
이곳으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또 홀로 남았다.
아, 이번에는 둘이었지.
평온한 일상이었다.
뎅뎅뎅- 종이 울리고 사람들은 이제 실외가 아닌 실내에서 모여 다 같이 밥을 먹었다. 식사 때마다 마을
가운데의 공용 부엌의 굴뚝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났다.
“에이 비 씨 디…….”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리바이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리바이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에이 비 씨 디 엘 엠 엔 오 피…….”
가사가 조금 이상했다.
“리바이, 그거 다시 해 봐.”
“응? 에이 비 씨 디 엘 엠 엔 오…….”
뭐가 중간에 잔뜩 빠졌는데.
“E 부터 K 는 어디 있어.”
마룻바닥에 누워 종이에 알파벳을 쓰고 있던 리바이가 나를 올려다본다. 충격으로 크게 뜨인 눈. E 부터 K
까지의 알파벳의 존재를 상상도 못 했다는 얼굴이다.
“다시 불러야지.”
A, B, C, D, E, F, G…….
몇 번 가르쳐 주자 리바이는 헷갈리지 않고 곧장 읊었다.
에이든이 리바이의 지능을 운운한 적이 있는데 내가 봤을 때 노출된 환경이 극도로 제한적이었고 경험이 없을
뿐이지 리바이의 지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날카로운 통찰력에 내가 놀랄 때도 있다.
어떤 책에서는 인간 역시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여러 종(Species)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아는
인간은 단 한 종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갈래는 아주 다양하다고.
과거의 부족민과 현대 문명이 정점에 달했던 인류를 비교해봤을 때 아주 조금의 생물학적인 차이도 없다고 했다.
짐승과 별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던 야만인을 그대로 떼어다 현대 사회에 데려다 놓아도 어릴 적부터
학습시키고 가르친다면 자연스레 녹아들고 적응했을 것이라고.
내게 리바이는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문명의 멸절 상태로 떨어진 현대인이었다.
우리는 분명 같은 존재이지만 리바이는 운이 없어서 이렇게 남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하나씩 부러
습득하고 익혀야 하는 것뿐이다. 리바이는 언어를 모르는 것이지 지능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리바이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 Z 출몰 이전의 사람들이 우리를 재단할 수 없고, 한
공동체의 일원이 그 규율을 방랑자에게 적용할 수 없듯이.
“이로.”
리바이가 적고 있는 건 내 이름이다.
Ee-ro
“잘 썼는데?”
빈말이 아니라 진심 어린 감탄이었다. 몇 번밖에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삐뚤빼뚤했던 알파벳이 벌써
유려해졌다. 큰일이다. 이렇게 빨리 습득하면 안 될 텐데.
알파벳을 다 떼고 나와 문해력이 비슷해진다면 리바이를 어떻게 더 가르칠 수 있을지 막막했다. 게다가 나는
철자에 특히 약했다. 어려운 책도 잘 읽지 못했다. 더듬더듬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이는 게 내 최선이었다.
어쩌면 지금 내 문해력은 라일리와도 비슷할 테다.
“네 이름도 써 봐.”
Leevi
“하하, 아니잖아. E 하나를 빼야지.”
Lebi.
“장난치지 말고.”
타박하자 리바이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어? 하는 나를 제 몸에 올리더니 골골골…… 길게도 기분 좋다는 소리를 냈다. 리바이는 내가 머리를 쓰다듬고
목덜미를 긁다가 특히 척추를 따라 등허리를 긁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가끔은 야릇한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아니야, 나 몰라.”
“알잖아.”
“아니야, 나 몰라. 바보야.”
이로가 있어. 그럼 바보 아니고 없으면 바보야. 없으면 무서워.
그 말에 나는 속절없이 떨려오는 숨을 내쉬었다.
리바이를 섣불리 정의해서는 안 됐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교류와 새 환경에 대한 노출과 학습이었다.
반복하고 반복한다면 리바이도 언젠가는 사람들 틈에 어울리는 법을 배울 테다. 나 외의 사람들의 눈치를
봐서는 안 되겠지만, 주어진 규칙을 따를 줄도 알고 때로는 순응하고 때로는 항거하며 사회의 일원이 될 테다.
특히 그는 나나 다른 평범한 인간들보다 생존의 가능성이 높고, 리바이의 삶은 이제 막 시작했으니 뭐든 하나씩
배워가면 될 일이다.
규칙적으로 부풀었다 꺼지는 리바이의 상체 위에 엎드려 누워있다가 나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낯선 풍경처럼 느껴졌다. 내가 왜 밖을 보고 착잡해 했더라. 모를 일이다.
벽난로에 장작을 넣었다. 화르르 타오르는 불을 보다가 벽난로 앞의 카우치에서 꾸벅꾸벅 잠들고 다시 깨기를
반복했다.
한번은 자다 깼는데 다리가 저렸다. 찌르르 한 감각에 아래를 보니 리바이가 내 허벅지에 제 머리를 베고 잠에
빠져 있었다. 벽난로 앞에서 자거나 방에서 자면 될 일인데 꼭 이렇게 나와 붙어있어야만 성에 차는 것 같다.
다리가 저렸지만 나는 리바이를 깨우지 않고 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얼마 안 가 다시 깼는데, 시야가 달라져 있었다. 내 무릎을 베고 자던 리바이가 없었다. 이상해서 고개를
들려는데 내가 앉아있던 카우치가 이상했다. 그러다가 내가 카우치가 아닌 리바이 위에서 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제 무릎에 앉히고, 나를 아이처럼 어르며 안고 있던 것이다.
신경 써서 안아 들었을 테지만 그래도 누가 나를 번쩍 들어 제 위에 올리는데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니, 놀랄
일이다.
“리바이.”
아직까지 뜨겁게 타오르는 벽난로 덕에 집 안은 훈훈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잠이 깨지 않아 혼몽한 기운에
리바이를 부르는데, 뜨거운 숨이 귓가에 닿아왔다.
나는 자세를 고쳐 리바이의 너른 품에 편히 기댔다. 슬슬 다시 힘이 빠진다. 완전히 그에게 기댄 채로 잠이
들려는데, 몸이 가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지금 보니 숨소리가 평소보다 더 뜨거웠고 더 강했다.
“리바이?”
고개를 들어 리바이를 확인했다. 리바이도 마찬가지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잠결에 나를 고쳐 안으며 리바이가 팔에 힘을 준다.
“아.”
허벅지 사이로 뭐가 걸려서 나도 모르게 탄식 같은 숨이 흘렀다. 단단히 발기한 리바이의 성기였다. 리바이는
나른한 숨을 내뱉으며 내 몸에 불뚝 선 제 하체를 세게 비벼온다.
“이로……. 하아…….”
그가 내쉬는 숨이 귓가에 부딪혔다. 나도 덩달아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리바이는 항상
나를 원한다. 나는 그런 그를 원하고. 하지만 내가 경험이 없어서인지 아는 게 없어서인지, 뭘 해야 할지
모를 순간만 가득하다.
우리가 언젠가는 섹스를 하겠지만 그것 이상으로 무언가를 더 하고 싶은데 그런 게 있나 싶었다. 그냥 내
열망인 걸까.
리바이와 맨살을 맞대고 비비고 섹스를 하고 나면 이 갈증이 해소될까? 아니면 그 이상을 더 강하게 원하게
될까.
“읏!”
리바이가 갑자기 허리를 추켜올렸다. 하필이면 섹스를 상상하느라 반쯤 서 있던 내 것이 힘을 받는다. 눈을
질끈 감았다. 리바이는 이제 나를 끌어안고 몸을 비비고 있었다. 자기가 그러는지도 모르는 듯 나른하면서
진득한 움직임이다. 깨워야 할까? 발끝이 곱아들어서 망설이는데,
“으으…….”
맞붙은 몸이 뜨겁다. 리바이는 이런 내 난처함도 모르고 이제 뜨거운 숨을 흘리며 잠결에 자꾸만 붙여온다.
이러다 깨우면 또 내 손을 제 것에 가져다 대고 해 달라, 만져 달라, 쓰다듬어 달라 칭얼거릴 텐데.
볼이 미비하게 달아오른 리바이를 보다가 매끈하게 뻗은 목덜미로 시선이 떨어졌다. 홀린 듯 다가가 리바이의
턱선을 따라 입술을 내렸다.
흐응…… 아, 이로…….
웅얼거리는 신음에 이미 내 아래는 바짝 선 상태이다. 별것 하지도 않았는데 내게는 자극이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옷 너머, 단단히 심지가 선 두 개가 맞부딪치다 비껴 스치길 반복했다.
“리바이…….”
리바이의 콧대는 날렵하면서도 높아서 가끔 그가 내게 치대면 콧대가 살갗 이리저리 뭉개지고 콧방울이
느껴졌다.
“이로…… 나 좋아……. 읏.”
유난히 붉은 입술을 머금자 리바이의 허리가 튄다. 허덕이며 아랫입술을 빨자 리바이의 신음이 점차 거세진다.
“이로, 나 여기, 이로, 이로.”
어느새 정신이 든 리바이가 아직 잠기운이 묻은 목소리로 제 아래를 붙여온다. 내 손바닥을 펼치고는 제 것을
다 감싸도록 이끈다. 내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자 칭얼거리며 보챈다.
약은 짐승. 나밖에 모르는, 영악한, 무해한, 순진한, 교활한, 맹목적인…….
이, 흐읏! 이로!
리바이의 귓바퀴를 잇새로 물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흥분에 나는 힘 조절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내
욕심을 채우겠다며 그의 목덜미를 세게 빨아 자국을 남기다가 이를 세웠다.
아! 아아! 이로! 아읏!
리바이는 고작 그것에 무너졌다. 내 숨통을 틀어막을 만큼 거세게 끌어안더니, 내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라고 느낄 때쯤 큰 교성과 함께 온몸의 힘을 뺐다.
아래가 따듯하게 젖어왔다. 면바지 위로 리바이의 흔적이 짙게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이로. 더 해줘…….
그의 흰 목덜미에 내 식대로 흔적을 남겼다. 얇은 옷을 조금만 들춰도 내가 남긴 붉은 화인이 보일 것이다.
그는 내 것이었다.
[다음 권에 계속.]
겁쟁이 사자 1 권
2020 년 11 월 14 일 초판 발행
지은이 | JaneM
편집 | 비올렛편집팀
제작 | 비올렛제작팀
표지 디자인 | 려미
펴낸곳 | 뷰컴즈
등록번호 | 492-88-01088
주소 | 서울시 서초구 동광로 1 길 99 4 층
전화 | 070-778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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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495-6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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