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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베리아연구

제19집 제1호

ISSN : 1975-0145(Print)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아무르에서 캄차카 반도까지

손성태

To cite this article : 손성태 (2015)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아무르에서 캄차카 반도까지, 한국시베리
아연구, 19:1, 21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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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구 / [한국 시베리아연구] 2015 제19권 1호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아무르에서 캄차카 반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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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성 태*

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1. 언어적 흔적
(1) 종족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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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명
(3) 생활용어
2. 풍습
3. 유물과 유적
(1) 반달 형돌칼
(2) 화살촉
(3) 고래사냥 그림
(4) 온돌
Ⅲ. 맺음말

* 배재대학교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214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국문요약>

본 연구에서는, 필자가 그동안 여러 연구와 저서를 통하여 밝힌, 우리민


족의 이동루트로서 만주-아무르-오호츠크해 연안-춥지·캄차카 반도에
어떤 우리민족의 흔적이 남아있는지 다루었다. 필자는 그 흔적을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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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습, 유물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다루었다. 먼저 언어 분야에서


는, 길약족의 종족 명칭으로 알려진 ‘길에께, 길래미, 질래미, 니부히’가
모두 우리말이고, 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매우 많은 우리말을 사용했다
는 증거를 다루었다. 특히 길약족은 다른 민족이 차용해 갈 수 없는 우리말
‘조사’까지도 사용했다. 오호츠크해 연안에 사는 에벤키족도 다양한 우리
말을 사용했다는 증거를 제시했으며, 춥지-코리약족의 언어에도 다양한
우리말들이 발견되고, 캄차카라는 지명도 우리말 ‘깜짝’에 ‘장소’를 의미하
는 고대 우리말 ‘간’이 합쳐진 말이라는 것을 밝혔다. 또 춥지족의 명칭은
그들이 자주 말했던 ‘춥지, 차브추어’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추운 그곳
자연환경을 반영한 우리말임을 밝혔다. 코리약이라는 종족 명칭도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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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을 가리키는 ‘고리’라는 말에 서술어 ‘~야’가 붙어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풍습으로는 부여-고구려의 고대 풍습으로 알려진, ‘형사취수,
데릴사위, 음란한 부인을 쉽게 죽이는 풍습, 나물 먹는 식습관, 고수레,
별자리에 대한 깊은 지식’ 등을 다루었다. 유물·유적과 관련하여서도, 고
대 우리선조들의 특징적 도구였던 반달형 돌칼, 전쟁용과 구별되는 뭉턱
한 사냥용 화살촉이 그 지역에서 사용되었음을 확인했고, 춥지-코리약족
의 순록 가죽에 그려진 고래 그림과 울산 반구대의 고래 암각화를 비교하
여, 두 그림이 고래의 생태 습관과 부구를 이용한 고래 사냥 방법에서
깊은 일치를 보인다는 사실을 다루었다. 우리민족이 아무르강 하류를 거
쳐 캄차카반도를 지나 알류산열도를 건너갔다는 무엇보다 중요한 증거로,
아무르강 하류에 19세기 말까지 있었던 온돌과 알류산 열도에 유적으로
남아있는 온돌의 구조가 정확하게 같다는 사실을 다루었다.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15

<주제어>

아무르, 오호츠크, 캄차카, 길약, 에벤키, 춥지-코리약, 언어, 풍습,


유적과 유물, 데릴사위, 고수레, 별자리 지식, 반달형 돌칼, 화살촉, 고래
그림, 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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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I. 서론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따르면, 우리민족은 기원후 3세기까지 북으로


는 아무르에 이르고 남으로는 요동에 이르는 만주대평원과 한반도를 차지
하고 살았던, 중국 북방에서 가장 크고 강한 민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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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0세기에 발해가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되었을 때의 우리민족의


영토와 인구는 주변 다른 민족에 비하여 갑자기 줄어 있었다. 영토는 한반
도 청천강 이남으로 줄어들었고, 인구수에서도 상대적으로 급격히 줄어든
약소민족으로 돌변하였다1). 그러나 이러한 우리민족의 급변 원인에 대하
여 지금까지 어떤 학자도 설명을 내놓지 못하였으나, 『우리민족의 대이동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민족이다』의 저자 손성태는 그 원인을 3세기부
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우리민족의 엑소더스 때문이라고 세계 최초로 밝혔
다. 그에 따르면, 우리민족의 본격적인 아메리카 대이동은 3세기경부터
시작되었고, 그 절정기는 아메리카로 갔다가 일부 사람들이 되돌아왔던
5세기 말부터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건국되었던 7세기 말까지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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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그가 밝힌 이동루트로, 우리민족은 아무르강을 따라서 북상한 후에
오호츠크해 연안에 도착하였고, 다시 해안선을 따라 더욱 북상하여 오늘날
러시아 캄차카반도에 도착하였으며, 거기서 배를 타고 해류를 이용하여
알류산열도를 따라 바다를 건너 캐나다 서해안에 도착한 후에, 아메리카
전 대륙으로 퍼져, 오늘날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민족대이동으로 말미암아 494년 부여가 갑자기 망했고, 고구려
도 문자왕의 통치시대였던 6세기 초부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점차 약화되어,
결국 수·당과의 전쟁으로 패망했으며, 698년 발해가 건국되었을 때는, 중국 역사
서가 전하듯이, 이미 만주대평원에 살고 있는 우리민족은 극소수로 줄어들었다.

1) 3세기에 기록된 『삼국지』위지동이전의 기록과 10세기에 기록된 『구당서』, 11세기에 기록된


『신당서』의 기록을 비교 분석하면, 만주대평원에 살았던 우리선조들의 숫자는 주변 민족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급격히 줄었다. 손성태(2014)의 (16쪽~25쪽)은 이 문헌들을 바탕으로 분석
하여 3세기에는 우리민족의 약 1/7에 불과했던 숙신족의 후예인 말갈족이 8세기에는 인구가
더 많아져서 만주대평원의 주인공으로 변했다고 했다. (손성태, 『우리민족의 대이동-아메리
카 인디언은 우리민족이다/멕시코편』, (코리, 2014))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17

우리민족이 북쪽으로 대규모 이동했다는 문헌적 증거로, 특히 554년에


쓰인 『위서(魏書)』에는 부여의 백성들이 물길(勿吉/숙신의 다른 호칭)
이 사는 곳보다 1천 리 거리 북쪽 지역으로 옮겨가서 잠시 ‘두막루’국을
건설하고 살았다고 다음과 같이 전한다.

为夫馀人后裔 夫馀亡后 其北部遗民渡那河(今嫩江)而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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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여인후예 부여망후 기북부유민도나하(금눈강)이거)


부여 후예들은 부여가 멸망한 뒤 북부 유민이 나하(지금의 눈강)을 건너가서
살았다.

豆莫婁國 在勿吉國北千里 去洛六千里 舊北扶餘也.


(두막루국 재물길북천리 거략육천리 구북부여야)
두막루국은 물길에서 천리 북쪽에 있었는데 옛 북부여이다.

또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우리민족은 계속해서 집단적으로 북쪽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구당서』 권 199는 요동 지역의 고구려인들이 6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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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도 계속 북쪽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高麗舊戶 在安東者漸寡少 分投突厥及靺鞨


(고려구호 재안동자점과소 분투돌궐급말갈)
안동에 살던 고(구)려의 옛 집안들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들은 집단으로 나
누어 돌궐이나 말갈이 살던 지역으로 이동했다2).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사학계는 오래전부터 중국 후룬베이얼(呼伦贝尔)


의 어원커족과 러시아 오호츠크해 연안의 에벤키(Evenki)족은 삼국시대
한반도 동해안에 거주하던 옥저(沃沮)라고 설명한다3).

2) 안동은 요동을 말한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한 후에,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으나,
우리민족의 저항으로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겼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요동은 당나라
말기에 안동이라고 불리었다.
3) 에벤키(Evenki)라는 말도 ‘어원커(鄂温克)’를 러시아 알파벳으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Wikipedia의 ‘Evenki’ 설명 참조하세요.
218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종합하면, 삼국시대 우리민족은 만주와


한반도 동해안에서 북쪽 아무르강으로 북상했음이 분명하며, 이를 아래와
같이 지도로 표시할 수 있다.

중국 문헌에 의한 우리민족의 이동 중국 문헌에 의한 옥저의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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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문헌을 바탕으로 우리민족이 북쪽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멕시코 고대 문헌을 바탕으로 우리민족이 알류산 열도를 건넜
다는 사실을 밝혀낸 손성태(2014)는 그의 저서 『우리민족의 대이동』에
서 아래와 같은 우리민족의 이동루트를 밝혀내었다.

우리민족 이동루트와 오늘날의 종족들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19

이 이동루트에 따르면 우리민족은 만주에서 아무르강으로 북상한 후에


강을 따라서 오늘날의 길약족이 거주하는 아무르강 하류에 도착하였고,
그 후에 오호츠크해 연안을 따라서 에벤키족과 에벤족이 사는 지역을 지
나, 캄차카 반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배를 건조하여 타고서 알류
산 열도를 따라서 북태평양을 건넜다.
고대 민족의 이동은 매우 느린 속도로 이루어져, 반드시 그 이동루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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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민족 고유의 흔적을 남긴다는 일반적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이동루트가


사실이라면 우리민족 고유의 흔적이 발견되어야 한다. 민족 고유의 흔적
이란 일반적으로 그 민족 고유의 ‘언어, 풍습, 유물’ 등을 말하므로, 이
지역에 우리민족의 이러한 것들이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아무르에서 캄차카반도까지 이르는 지역에 어떤 우
리민족 고유의 흔적이 남아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본고에서 다루는 내
용은 이 분야 최초의 연구이므로, 세밀하고 완벽한 연구는 앞으로의 추가
연구 과제로 남겨두기로 하고, 포괄적이고 대표적인 우리민족의 흔적을
언어, 풍습, 유물을 중심으로 간단히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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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민족 역사의 지리적 경계선은 언제나 아무르 강까
지였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우리민족의 지리적 영역을 캄차카-춥지 반도
와 알류산 열도까지 확대하게 됨으로서, 본고의 내용은 앞으로 시작될
이 지역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기초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II. 본론

우리민족이 알류산열도를 건너기 위해 만주대평원에서 지나간 지역에


오늘날 살고 있는 대표적인 종족들은, 위 지도에 표시되어 있듯이, 나나이
족, 길약족, 에벤키족, 에벤족, 춥지-코리약족, 알류산족 등이다. 그리고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춥지-코리약족 영토의 서쪽에 유칸키르
족이 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우리민족의 흔적을 찾으려면, 이 종족들
에게 우리민족 고유의 흔적이 어떤 형태로 남아있는 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220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오늘날 러시아나 중국학자들은 아무르강 유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매


우 여러 종족으로 세분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을 나나이족과 길약족으
로 크게 분류하겠다. 그 이유는 오호츠크해 연안에 거주하는 울치족과
길약족을 처음으로 구별한 것은 1842년 야킨프(Iakinf)였고, 그 이전에는
중국과 러시아의 모든 문헌에서 같은 길약(Gilyak)족이라고 기록하고 있
기 때문이다4). 또 길약족 남쪽에 사는 사람들도 오늘날 학자들은 나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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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y), 울치(Ul’chi), 오로치(Orochi), 오록(Orok)족 등으로 분류하지


만, 19세기 러시아의 유명한 인종학자이면서 언어학자인 쉬텐베르그
(Shternberg)는 이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을 난이(nani)라고 하는 것을
보고서, 이들은 모두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했 때문이다5). 바로 아래에서
보겠지만 ‘난이’는 ‘나나이’와 같은 말이다.

1. 언어적 흔적
역사적 교류가 없었던 어느 두 지역의 언어가 우연히 일치하는 법은
없다. 모든 언어는 음소라는 최소 단위가 그 언어의 독특한 음운규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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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결합하여 형태소를 만들고, 그 형태소들이 그 언어의 음운규칙과
문법규칙에 따라 결합함으로서 ‘의미’있는 어휘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어휘들은 그 언어 고유의 문법규칙에 따라서 문법소들(뜻이 분명하지 않은
어휘들: 조사, 접사 등)과 결합하여 구(句)를 형성하고, 구들이 다시 그
언어 고유의 문법규칙에 따라서 결합하여 문장을 이룬다. 따라서 겉으로
단순하게 보이는 어휘나 지명일지라도 매우 독특하고 복잡하며 정교한
음소와 음운규칙이 개입되어 형태소를 만들고, 이 형태소들이 규칙에 따
라 결합하여야 비로소 ‘의미’있는 어휘나 지명으로 만들어 진다. 이런 이유
로 우리민족과 역사적으로 어떤 교류도 없었던 어떤 민족의 언어에서 우리
말과 같은 말이 발견된 예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와 역사적으로
교류가 없었던 프랑스어나 러시아어나 독일어에서 우리말과 같은 어휘가
발견된 전례가 없다.

4) Levin, M.G. & Potapov L.P., The peoples of Siberia, (The University of Chicargo Press,
1956), p. 721.
5) Levin, M.G. & Potapov L.P., op. cit., p. 691.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21

그런데, 역사적 기록에는 없지만, 아무르에서부터 캄차카 반도에 이르


는 지역에는 우리말의 흔적이 뚜렷하게 발견된다. 이 언어적 흔적은 우리
민족이 그 지역과 매우 깊은 연관성을 가진 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증거이며, 서론에서 설명한 우리민족의 이동 방향을 봤을 때, 우리민족
이 그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흔적을
종족명칭과 일상생활 용어에서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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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족 명칭
먼저 아무르강 중하류에 살고 있는 나나이(nanai)족의 종족 명칭이다.
그들은 골디(Gol’di)라고도 불리었는데, 후자는 19세기 중엽부터 사용된
명칭이고, 원래 그들의 명칭은 나나이였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19세기 말 길약족과 그 주변 종족의 말을 처음으로 연구했던 러시아의
쉬텐베르그(Lev Shternberg)는 ‘나나이’라는 말은 ‘난이(nani)’와 같은 말
이라고 했다.
필자는 이 말이 ‘뛰어난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이라고 본다. 그 근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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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개의 종족명칭을 아래와 같이 형태소로 분석하면, 각 형태소의 ‘발
음’과 ‘뜻’이 정확하게 우리말의 그것과 일치하고, 각 형태소들이 결합하는
과정에 개입한 음운규칙도 우리말 음운규칙과 일치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이 두 명칭에서 대응되는 ‘아이’와 ‘이’가 모두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나나이(nanai) → nan + ai6)

6) 우리민족은 ‘종족(宗族)’을 가리키는 별도의 어휘가 없어서 ‘아이’라는 어휘를 폭넓게 사용했던
것 같다. 캄차카 반도 원주민에 대한 최초의 탐사 기록을 남긴 크라쉐닌니코프(Stepan
Petrovich Krasheninnikov)는 그곳의 원주민들은 각 지역에 거주하는 집단을 ‘~아이’라고
불렀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Krasheninnikov, Explorations of Kamchatka, north
pacific scimitar, (Oregon Historical Society, 1972), p. 199 참조.)
(1) Kooch강이라고도 불리고 Elovka 강이라고도 불렸던 강가에 살던 사람들을 구치-아이
(Kooch‐ai)라고 불렀다.
(2) 이런 식으로 된 종족 명칭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킥사-아이(kyksha-ai),
수아추-아이(suachu-ai)
코리약인들은 유카기르(ukaghir)족 사람들을 ‘애들(edel)’ 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종족을 이런 식으로 부르던 언어습관이 미국 인디언 부족 명칭에도 나타난다.
222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난 아이 → 난 사람, 뛰어난 사람
난이(nani) → nan + I
난 이 → 난 사람, 뛰어난 사람

이 분석에서, ‘난’은 순우리말로서 ‘뛰어난’을 의미하고, ‘아이/이’는 ‘사


람’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따라서 쉬텐베르그가 지적했듯이 이 두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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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같은 의미의 말임이 증명되었다. 우리말에서는 동사가 바로 뒤의 명사


를 수식할 경우에 ‘ㄴ’이 추가되는 음운 규칙이 있다. 아래에서 동사 ‘(뛰
어)나다’의 어근 ‘나’가 뒤의 명사 ‘사람/놈’을 수식할 때 ‘ㄴ’이 추가되어
‘난’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음운규칙은 오직 우리말에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나나이’와 ‘난이’에는 이 음운규칙이 정확하게 사용되었다.

(뛰어)나다 → 난 사람, 난 놈

우리말로 된 두 번째 종족 명칭은 아무르강 하류와 사할린섬 북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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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퍼져 살고 있는 길약(Gilyak)족이다. 길약족에 대하여 최초의 기록을
남긴 사람은 1413년 군대를 이끌고 아무르강 하류로 찾아왔던 중국 명나라
관리 이시하(Ishikha)였다. 그는 길약족(Gilyak)이 살던 아무르강 하류에
도착하여,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명나라 황실에 세금을 바치도록 강요
하고, 그 세금을 걷는 책임을 각 씨족의 최고 연장자들에게 맡겼으며, 아무
르강 하류와 암군(Amgun)강이 만나는 지점의 티르(Tyr) 절벽 위에 기념
비를 세우고, 중국어, 몽골어, 숙신어로 기록을 남겼다. 그 기념비에 의하
면 오늘날 길약족과 북부 나나이족은 모두 길래미(Gilyami) 또는 질래미
(Chiliami/Tzilyami)라고 불렸다고 한다7).

하바숲-아이(Hava-sup-ai)
왈랍-아이(Hualap-ai)
야밥-아이(Yapap-ai)
양크통-아이(Yank-ton-ai)
구턴-아이(Kuten-ai)
7) Levin, M.G. & Potapov L.P., Op.cit., pp. 767~768./ Margus Kolga, Igor Tonurist,
Lembit Baba, Juri Viikberg, The Red book of the peoples of the Russian Empire, (NGO
Red Book, 2001), p. 246.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23

그런데 ‘길약’이나 ‘길래미, 질래미’는 모두 우리말이다. 먼저 길약


(Gilyak)이라는 명칭은 원래 길에께(Kileke)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고, 그
들을 ‘길에께’라고 부르기 시작한 사람들은 만주대평원에서 북상하여 온
사람들이었다고 러시아 소수민족에 관한 문헌은 밝히고 있다8). 만주대평
원에 살다가 아무르강을 따라서 북상해서 아무르강 하류에 도착한 사람들
이 그곳에 이미 정착해 살던 사람들을 ‘길에께’라고 불렀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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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길에께를 형태소 분석을 해 보면 ‘길의 것’이라는 뜻의 우리말이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을 ‘것’이라고도 했다(예: 아랫것, 천한
것). 그리고 경상도 방언에서는 ‘것’을 ‘께’라고 했다(내것=내께). 따라서
다음과 같은 형태소 대응관계가 나타난다.

길약(Gilyak) ← 길에께(kileke) → 길(kil) + 에(e) + 께(ke)


길 의 것
→ 길의 것, 길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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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길(kil)은 우리말 ‘길’이다. 에(e)는 ‘의’이다. 우리민족의 언어 습
관에는 ‘의’를 ‘에’로 발음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예: 나의 삶→나에 삶).
그리고 위에서 설명했듯이 께(ke)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소 결합에 관여
한 우리말 고유의 문법규칙으로, 명사와 명사를 연결할 때 가장 자주 사용
되는 여격 접사 ‘의(에)’가 사용되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하여 형성된 명사
구 ‘길에께’가 ‘길의 것, 길의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이 되며, 동시에 ‘사람’
을 ‘것’이라고 했던 과거 우리말 습관을 담고 있다.
멕시코 고대 문헌에 남은 ‘이동 과정’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우리민족은
이동하던 도중의 수많은 곳에 머물러,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수십 년을
머물러 살다가 떠나기를 반복했고, 일부는 이동루트 중간에 머물러 정착하
기도 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길약족이 만주 어딘가에 살았던 우리민족
으로서 캄차카로 향하던 도중에 아무르강 하류에 남아 정착한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의 다른 명칭인
‘길래미, 질래미’라는 말도 우리말로 ‘길의 사람’을 뜻한다는 사실에 있다.

8) Margus Kolga, Igor Tonurist, Lembit Vaba & Juri Viikberg, Op. cit., p. 268.
224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길래미(Gilyami), 질래미(Chiliami/Tzilyami)’에 대한 분석은 다음과


같다. 먼저 길(gil)은 위에서 본 길(kil)과 같은 말이고, 질(chil/tzil)은
‘길’의 방언이다.

길래미(Gilyami) → 길(Gil) + 래미(lyami)9)


질래미(Tzilyami) → 질(Tzil) + 래미(ly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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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경상도 방언은 ‘길’을 ‘질’이라고도 한다. 필자는 여러 연구에서


우리민족 대이동 시기에 북만주 일대에 살던 일부 집단이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서 남하여, 오늘날의 동해안 경주와 남해안 가야에 정착했다고 설명
했다. 이것은 오늘날 경상도 방언이 북만주와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고리
족들의 언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10). 따라서 경상도 방언이 아무르강 하
류에도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길래미와 질래미의 ‘래미’도 순
우리말이다. 우리는 ‘아들래미, 딸래미, 며늘래미’와 같은 말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민족은 동북아에서 우리민족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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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약족의 또 다른 명칭으로는 니브히(Nivkh)가 있다. 이 명칭이 공식적
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다음과 같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시작된
스탈린 통치하의 러시아는 그동안 방치해 왔던 러시아 영토안의 소수민족
들을 등록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사용하기 시작한 호칭이라고 한다11). 그
런데 19세기 말 아무르강 하류의 길약족을 탐사했던 버솔드 로퍼
(Berthold Laufer)에 의하면 ‘니부히’는 원래 ‘니분(Nibun)’이라는 말이었
고, ‘분(bun)’은 ‘사람’을 뜻하는 말이라고 설명했다12). ‘사람’을 뜻하는

9) 우리말의 알파벳 표기에서 모음과 모음 사이에 사용된 자음 ‘L’은 두 개의 ‘ㄹ’로 발음되는


경향이 있다.
10) ‘여자’를 뜻하는 함경도 방언 ‘간나’와 경상도 방언 ‘가시나’의 유사성도 바로 이와 같이, 북만
주 일대에서 경상도로 이동한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11) Margus Kolga, Igor Tonurist, Lembit Vaba & Juri Viikberg, Op. cit., pp. 246 & 268./
Levin, M.G. & Potapov L.P., Op. cit., pp. 692~693, & 767. 이 두 문헌에는 나나이족과
길약족을 구별하지 않고, 같은 민족으로 보았다.
12) Lauffer, Betthold, "Preliminary Notes on Exploration among the Amoor tribes",
American Anthropologist Association, American Anthropologist, (AAA, 1900), 2권 2호,
p. 317.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25

‘분’은 우리말이다. 우리들은 ‘이분, 저분, 그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길


약어에서 ‘니(ni)’는 ‘나’를 뜻한다. 그들은 ‘니부히(Nivkh)’를 때때로 ‘나
부히(Navukh)’라고도 했다13).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니부히(Nivkh) → 니분(nibun) → 니 + 분
나(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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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사람, 나의 동족이나 친족

이상으로, 우리는 길약족의 종족 명칭으로 러시아 문헌에 기록된 ‘길에


께, 길래미, 질래미, 니부히’가 모두 우리말 형태소로 분석되고, 각 형태소
는 우리말의 해당 어휘와 정확하게 ‘발음’과 ‘뜻’에서 일치하며, 그 형태소
들이 결합하는 방식도 우리말의 음운규칙 혹은 문법규칙에 정학하게 맞으
며, 그렇게 형성된 명사구도 정확하게 우리말 명사구로 해석된다는 사실
을 확인했다. 19세기 말 쉬텐베르그가 처음으로 기록했고, 그의 제자 크레
노비치(Krenovič)가 1950년대 처음으로 발표했던 ‘길약족이 한국어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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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한다’는 말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가리키는 모든 종족 명칭
이 우리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
듯이, 역사적 교류가 없이는 언어의 일치는 불가능하다는 관점에서 볼
때, 종족 명칭이 우리말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우리민족의 후예이거나 우
리민족이 섞인 복합 민족이며, 적어도 우리민족이 아무르강 하류까지 북
상했다는 명백한 언어적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인류학자들은 오호츠크해 연안에 사는 종족들을 ‘에벤키
(Evenk)’라고 하기도 하고, 이들을 지역적으로 분류하여 남쪽에 사는 사람
들은 ‘에벤키’로,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에벤(Even)’이라고도 한다. 또
에벤족 중에서도 동쪽 지역에 거주하여 춥지-코리약족과 인접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유칸기르(Iukangir)족이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
종족들을 모두 에벤키로 보고, 이 명칭만 설명하기로 한다. 중국과 러시아
학자들에 따르면 에벤키족은 원래 한반도 동해안에 살던 옥저(沃沮)였다고

13) Shternberg, Lev, The social organization of the Gilyak, (The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1999), p. 21.
226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한다. 삼국시대 옥저는 북옥저와 남옥저로 갈라져 살았는데, 남옥저는 오


늘날 함경도 해안가에 살았고, 북옥저는 연해주 주변 지역 어딘가에 살았
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도 우리민족 대이동 시기에 북쪽으로 이동하여,
한 집단은 오늘날 아무르강 상류의 후룬베이얼(呼伦贝尔)에 살고 있는데,
어원커(鄂温克)어족이라고 불리고 있고, 다른 집단은 러시아 오호츠크해
연안에 살고 있는 에벤키(Evenk)로서, ‘에벤키’는 ‘어원커’의 러시아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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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음이라고 한다. 에벤키족의 말에 우리말이 남아 있음은 강덕수(한국외


대)에 의하여 밝혀진 바 있다. 이것은 생활어휘에서 다루기로 한다.
춥지반도에 살고 있는 춥지(Chukchee)족과 캄차카반도의 북쪽에 살고
있는 코리약(Koryak)족의 종족 명칭도 우리말이다. 춥지반도와 춥지족이
외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 코사크족 사냥꾼들에 의해서였다.
1648년 코사크족 사냥꾼 세미언 데즈네프(Semyon Dezhnev)가 처음으로
춥지반도까지 갔고, 뒤이어 다른 코사크족들이 짐승가죽을 구하기 위하여
춥지반도와 캄차카반도를 돌아다니며 원주민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춥지-코리약족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보고서는 1735년~1741
년에 캄차카 반도를 www.earticle.net
탐사했던 러시아 인류학자 크라쉐닌니코프
(Krasheninnikov)의 보고서이다. 그는 춥지족과 코리약족을 구별하지 않
고 하나의 같은 민족으로 취급했다14). 또 춥지족과 코리약족은 언어가
같아서 어떤 어려움도 없이 서로 의사소통을 했고, 알류산열도에 살고
있던 알류산족과도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했다고 한다15). 그런데 크라쉐닌
니코프에 따르면, 춥지족도 자신들을 ‘차브추브(Chavchv)’라고 했고, 코
리약족도 역시 ‘차브추브(Chavchv)’라고 했다고 한다16).
필자는 이것을 종족 명칭일 것라고 적은 것은 크라쉐닌니코프가 원주민

14) Krasheninnikov, S. Petrovich, Explorations of Kamchatka, north pacific


scimitar, (Oregon Historical Society, 1972), p. 208.
15) Margus Kolga, Igor Tonurist, Lembit Baba, Juri Viikberg, Op. cit., p. 216. 이 책에서는
춥지족, 코리약족 및 알레웃족이 자유롭게 말이 서로 통했던 원인을 오랫동안 서로 물물교환
을 하는 등의 접촉을 통하여 언어가 서로 비슷해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타당성이 없다. 알레웃인들과 접촉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캄차카반도의 해안지
역에 사는 극히 일부였고, 캄차카반도 내륙이나 춥지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알레웃족과 접촉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16) Krasheninnikov, S. Petrovich, Op. cit., p. 197.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27

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여 범한 오류라고 판단한다. 근거는 그들이 다음


과 같은 어휘도 함께 사용했기 때문이다17).

차브추밧(chavchuvat)
차브추브(chavchuv)
차워추워(chawchuw[tʃawtʃə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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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워추(chauchu)
차브차(chavcha [čavča])
춥자(chukcha)

앞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역사적으로 교류가 전혀 없었던 어떤


두 민족의 언어가, 매우 간단한 어휘일지라도 일치한 예가 없다. 우리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뜻을 결정해주는 어근(語根)에 다양한 형태소를 어미
(語尾)로 붙여서 다양한 뉘앙스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것을 국어에서는
활용변화라고 한다. 춥지-캄차카 반도에서 발견된 위의 어휘들은 근본적
으로 ‘춥다’는 뜻을 가진 www.earticle.net
우리말 어근에 다양한 어미를 붙여서 만든 활용변
화 형태들로서, 모두 ‘춥다’는 근본적인 뜻을 유지한 채, 어미에 따라서
다양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언어학적인 시각에서 볼 때, 전 세계 어떤
다른 언어에서도 볼 수 없고, 우리말과 가장 유사하다고 알려진 일본어에
서조차 볼 수 없는, 이러한 활용변화 형태를 춥지-코리약족이 가지고 있었
다는 것은, 그들이 우리민족의 후예이거나 우리민족이 포함된 복합민족이
라는 것을 보여주는 언어적 증거이다.
이러한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먼저 코리약족의 종족명칭 코리약
(Koryak)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코리약은 다음과 같은 우리말 형태
소로 분석될 수 있다.

17) 이 어휘들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Levin, M.G. & Potapov L.P., Op. cit., pp. 799~801./
Margus Kolga, Igor Tonurist, Lembit Baba, Juri Viikberg, Op. cit.,, p. 86./ Fitzhugh,
William W. and Crowell, Aron, Crossroads of Continents, (Smithsonian Institution,
1988), p. 31./ http://en.wikipedia.org/wiki/Chukchi_language
228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코리약(Koryak) → 코리 + 야 + k(음소)
코리 야
→ 코리야, 즉 ‘코리족이야’를 뜻함.

3세기에 기록된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따르면, 우리 선조들의 최초


의 호칭은 ‘고리(高離)’였다. 그리고 고구려도 장수왕 때부터는 국명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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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 ‘고려(高麗)’라고 불렸다. 그리고 중요한 것으로 ‘려(麗)’는 나라 이름으


로 사용할 때에는 ‘려’가 아니라 ‘리’라고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18). 따라서
고려(高麗)의 고구려 시대 발음은 ‘고려’가 아니라 ‘고리’였다는 사실이
다19). 그리고 고대 우리 선조들은 모음 ‘오’와 ‘우’를 매우 혼용하여 사용했
다. 그 흔적으로 ‘사돈/사둔, 삼촌/삼춘, 나모/나무, 졸졸새다/줄줄새다,
폴폴날다/풀풀날다’ 등과 같이 매우 많이 남아 있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고대 명칭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고리(高離) → 고구려(高句麗)가 고려(高麗)로 개칭 → 왕건의 고리(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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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재 발음은 ‘고리’

따라서 우리민족의 고대 명칭은 모두 ‘고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20).


‘고리’는 곧 ‘코리’이다. 그렇다면 ‘코리약’의 ‘약’은 무엇일까? 즉 ‘야’와
‘k’음은 왜 사용되었을까? 이것을 설명하고자 연구한 문헌은 아직까지 없다.
필자는 ‘야’는 우리말 서술어이고, ‘k’음은 러시아어의 영향으로 첨가된
음소로 본다. 이러한 견해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먼저, 아무르강 유역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은 서술어 ‘~야’를 매우 많이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다. 19세기 말 아무르강 하류를 탐사했던 버솔드

18) 사마천의 『사기(史記)』, 권6편, ‘려음리(麗音離)’라고 기록하고 있다.


19) 필자는 이 점에 대하여 2014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열린 역사학회에서 질문한 적이 있다.
그 학회에 참석한 역사학자들은 ‘려(麗)’를 ‘리’라고 읽지 않고 ‘려’라고 발음하게 된 배경에는
조선시대 최세진의 ‘훈몽자회’라는 한자 발음 설명서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20) 1392년 건국된 우리의 마지막 왕조 조선(朝鮮)도 주변 민족은 ‘고리(高麗)’라고 인식했다는
증거가 있다. 1883년 조선 왕조가 발표한 태극기에 대하여, 중국 청(淸)나라는 ‘대청국속
고리국기(大淸國屬 高麗國旗)’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청나라가 우리민족을 ‘고리’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29

로퍼(Berthold Laufer)는 길약족의 전통문양으로 새겨진 닭을 그들이 ‘다


기야(Takiya)’라고 대답했다고 기록했다21). ‘다기야’는 ‘닭 +이 +야’라는
형태소로 구성된 우리말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오로치(Oroch)족의 우리말에도 남아 있다. 그들은 불의 신을 ‘부디야
(pudya)’라고 말했다고 한다22). 역시 우리말로서, ‘불 + 이 + 야’라는
형태소로 구성된 것이다. 이 두 가지 증거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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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기야(Takiya) → 닭 + 이 + 야
부디야(pudya) → 불 + 이 + 야

이 두 가지 예와 코리약(Koryak)을 비교해 보면, 마지막 ‘야’는 우리말


서술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코리약(Koryak) → 코리 + 야 + K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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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예문에서는 중간에 접사 ‘이’가 사용되었지만, ‘코리약’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이유는 ‘코리’의 마지막 음(音)이 ‘이’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접사 ‘이’는 앞 어휘가 자음 소리로 끝날 경우에만 사용된다는 것이 우리말
의 음운규칙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책 + 야 → 책 + 이 + 야 → 책이야
물 + 야 → 물 + 이 + 야 → 물이야
시계 + 야 → 시계야
컴퓨터 + 야 → 컴퓨터야

따라서, 아무르강 하류의 길약족의 ‘다기야’와 오로치족의 ‘부디야’, 그

21) Laufer, Berthold, Op. cit., p, 20.


22) Levin, M.G. & Potapov L.P., Op. cit., p. 756.
23) 우리나라의 명칭이 ‘코리아(Korea)’이다. 이 명칭은 고려시대 몽골의 대원제국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에 의하여 유럽에 알려졌다고 한다. 이 명칭도 필자는 ‘코리 + 야’로 구성된 말로
본다.
230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리고 코리약족의 종족 명칭 ‘코리약’을 동시에 비교해 보면, 우리말의 ‘이’


음운규칙이 아무르에서 캄차카 반도에 이르는 지역에서 정확하게 남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24).
여기까지 논의로서, 우리는 코리약(Koryak)의 명칭이 ‘코리 + 야’였다
는 것을 알 수 있다25). 이 분석을 지지해주는 중요한 증거로는 동시베리아
지역에 콜리마(Kolyma)라는 지명이 강이나 산의 이름으로 매우 여러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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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고, 특히 오호츠크해 연안 지역과 춥지-캄차카 반도에 많이 나오는


데, 우리민족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았던 멕시코에도 여러 곳에 나온다는
사실이다. 멕시코에서는 해석까지 전해지는데, 그 뜻은 ‘노인의 손’이라고
한다. 콜리마의 순 우리말 뜻에도 바로 이런 뜻이 있다26).
이제 마지막으로 이 명칭 끝에 사용된 음소 ‘~k’에 대해서 설명하기로
한다. 필자는 이것이 러시아어의 영향으로 붙여진 뜻 없는 음소로 판단한
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몇 가지가 있다. 러시아어로 기록된 춥지-코리
약족이 사용하던 우리말 표기에서 이 음소가 어휘의 마지막에 붙여진 경우
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그들이 ‘물고기’를 ‘마릭(marik)’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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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는 기록만 분석하기로 한다.
우리는 물고기를 세릴 때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라고 말한다.
따라서 ‘마리’는 물고기를 가리키는 어휘가 아니라 그것을 세릴 때 사용하
던 우리민족 고유의 숫자 단위이지만, 러시아인들이 원주민 말을 알아듣
지 못하여, 그 말이 물고기를 의미한다고 착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마리’를 그들은 ‘마리(mari) + k’로 표기하였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24) 이러한 필자의 설명을 받쳐주는 또 다른 증거가 캐나다 서해안에 남아있다. 캐나다 서해안
원주민들은 그들의 전통 종교와 관련된 토템 폴(Totem pole) 기둥을 ‘굿대야(kooteeya)’라고
불렀다. 굿대야는 다음과 같은 우리말 형태소로 분석된다.
토템폴(Totempole) → 굿대야(Koot eya) → 굿대 + 야 (굿하는 곳에 세운 기둥이야)
25) ‘고리/코리’의 뜻에 대하여 초기 러시아 사냥꾼들이 전한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그들은 ‘활’이
라고도 하고, ‘불’이라고도 하고, ‘순록’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원주민들
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발생한 오류라고 필자는 본다.
26) ‘고리/코리’가 ‘노인’을 뜻함은 우리말 ‘고리타분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마’가 ‘손’을 뜻함은,
손성태, 『우리민족의 대이동-아메리카인디언은 우리민족이다/멕시코편』, p. 453을 참조하
세요.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31

마리 → 마릭(marik) → 마리(mari) + k

필자는 이것이 17세기에 캄차카반도를 찾아왔던 코사크족 사냥꾼들의


언어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인한 오류 탓일 수도 있고, 그 당시의 러시아어
의 발음 원리 탓일 수도 있다고 본다. 러시아어는 어휘의 마지막에 음소
‘k’를 자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블라디보스크, 하바로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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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민스크’등에서 볼 수 있듯이, 러시아어는 지명(地名)의 마지막 음소로


‘~k’를 매우 빈번하게 사용하는 언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2) 지명
러시아의 지명을 보면 흥미로운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러시아 동부
지역, 즉 우리민족의 이동루트에 해당하는 동시베리아 지역의 지명에는
‘~칸(khan)’ 또는 ‘~카(kha)’로 된 명칭이 많지만, 서쪽으로 갈수록 이
지명은 점점 줄어들고, 우랄산맥을 넘어가면 거의 사용되지 않았음을 발
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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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는 ‘~칸’에서 받침소리 ‘ㄴ’이 탈락한 것으로 보인다. 1735년부터
6년간 캄차카반도를 탐사하고서, 캄차카 역사를 기록했던 크라쉐닌니코
프(Krasheninnikov)는 캄차카를 캄차카(Kamchatka) 또는 캄차칸
(Kamchatkan)으로 기록하고 있다. ‘~칸’은 ‘장소’를 뜻하는 우리말 ‘간’으
로 보인다. 우리말에는 ‘헛간 곳간, 장독간, 뒷간’ 등과 같은 옛 어휘들이
꽤 많다.
그런데 ‘캄차칸’은 그곳에 살던 원주민의 말에서 유래된 지명이지만,
아직까지 그 뜻이 무엇인지 연구한 기록은 없다. 캄차카는 그들 자신을
‘코리야’라고 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고, ‘코리’는 위에서 보았듯이 우리
민족을 뜻하는 말이다. 또 나중에 보겠지만, 코리약족은 고대 우리민족
고유의 다양한 풍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캄차칸’도 우리말이었을
것이다. 우리말에서 ‘칸’은 장소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지명은 다음
과 같이 구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232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캄차칸(Kamchatkan) → 캄차 + 칸

여기서 ‘캄차’가 무슨 뜻인가가 이 지명의 핵심이다. 지명은 일반적으로


그 지역의 역사나, 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 또는 그 지역의 자연환경을
반영한다는 특징이 있다. 필자는 이 지명이 우리말 ‘깜짝’일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주변 지역에 비하여 깜짝 놀라울 정도로 따뜻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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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내륙은 한 겨울 평균 온도가 영하 50도에 육박하


지만, 캄차카 반도의 동해안 지역은 평균 영하 9도밖에 내려가지 않는다.
적도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난류가 일본 열도와 쿠릴열도를 지나서 캄차카
반도 해안까지 올라오기 때문이다. 참으로 ‘깜짝 놀라울 정도로 따뜻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3) 생활용어
아무르강 하류의 길약족이 우리말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처음 밝힌 학자
는 1950년대 러시아 학자 크레노비치(Krenovič)였다. 그는, 1890년 러시
아 황제의 암살 음모에 www.earticle.net
가담했던 죄로 사할린 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살던 길약족의 언어를 처음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던 쉬텐베르그(Lev
Shternberg)의 제자로서, 스승과 그가 연구하던 길약족의 언어가 한국어
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혔다. 그 후 국내에서는 강길운과
김방한이 길약족의 말에서 다양한 우리말을 찾아내었다. 특히 강길운은
길약족의 언어가 어휘소(뜻이 분명한 단어)뿐 아니라 문법소(뜻이 불분명
한 조사같은 단어)까지 우리말과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면서, 길약어는 우
리말과 ‘쌍둥이 언어’라고까지 말했다27).
그러나 이들은 우리민족의 대이동 역사를 알지 못하여, 이러한 일치가
크레노비치의 견해에 따라서 차용(借用)으로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즉 과
거 어느 시대에 길약족이 만주에 거주하던 우리민족과 매우 가까이 가서
살았고, 그로 인하여 우리민족과의 교류로 인하여 어휘를 배운 후에 다시
북쪽으로 이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언어 차용에는 한 가지 제약이 있다. 여러 민족 사이에 교류로

27) 강길운, 『고대사의 비교 언어학적 연구』, (새문사, 1990), p. 342.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33

인하여 일어나는 언어 차용은 언제나 뜻이 분명한 어휘소의 경우에만 일어


나고, 문법소의 경우에는 차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오늘날 컴
퓨터가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컴퓨터와 관련된 명사 용어들, ‘컴퓨터, 마우
스, 프로그램, 윈도우’ 등과 같은 어휘소들은 세계 모든 나라에서 사용되지
만, 영어의 문법소에 해당하는 영어 전치사나 복수형 어미(~s) 등과 같은
요소들까지도 다른 나라 언어에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보고는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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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강길운이 밝힌 ‘우리말과 길약어 사이의 문법소까지 일치’는, 길약


족과 우리민족이 서로 다른 민족으로서 교류에 의해서 어휘가 차용되었다
는 설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민족의 북쪽 이동을
알지 못했던 강길운은 길약어와 우리말을 유사성이 단순한 차용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일치성을 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쌍둥이
언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의 ‘쌍둥이 언어’는 ‘같은 민족이 사용한 같은 말’로 해석한다.
강길운은 언어자료에 국한하여 연구했지만, 필자는 우리민족의 이동 역
사, 고고학적 유물, 민속학적 풍습 등 다양한 방면으로 종합적인 연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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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결과, 그들은 우리민족의 일파였고, 민족 대이동 시기에 아무르강 하류
에 잔류한 사람들이라는 증거를 다양하게 발표했다. 강길운은 길약어와
우리말의 공통점으로 수많은 어휘들을 증거로 제시했다. 여기서는 그가
밝힌 증거들 가운데 극히 일부인 문법 기능어들만을 보기로 한다.
아래는 강길운이 밝힌, 길약어와 우리말에서 일치하는 문법 기능어 예
들이다. 이 표에 따르면, 길약어와 우리말은 ‘주격조사, 방향격 조사, 호격
조사, 명령 서술어, 의문 서술어’ 등과 같은, 차용이 될 수 없는 문법소들이
광범위하게 일치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이 종족 명칭과 함께 그들이 우리
민족의 일파임을 증명하는 증거의 일부라고 본다.

우리말 예문 우리말 문법 기능어 길야크어 문법 기능어 일치 내용

철수가 안다. 가 아/가 [ɳa]


주격조사 일치
서울은/ 광주는 크다. 은/는 은/난 [n/ nan]

서울로/ 서울루 간다 로/루 로/루 [ro/ ru] 방향격조사 일치


234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우리말 예문 우리말 문법 기능어 길야크어 문법 기능어 일치 내용

이것아, 친구야,
아/야/여 아/야/에 [a/ ya/ e]28) 호격조사 일치
친구여
가라, 머거라, 라/거라/가야
라/거라/거야 명령 서술어 일치
머거야29) [ra/ kaya]

밥 먹었나?30) 나 나 [na] 의문 서술어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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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에서 밝힌 대로 길약족이 살고 있는 아무르강 하류를 지나 해안선을


따라서 북쪽으로 가면 에벤키족이 살고 있다. 에벤키족의 일상생활 용어
에도 우리말이 나온다. 아래는 러시아어 학자 강덕수가 밝힌 우리말과
일치하는 에벤키어 어휘의 예들이다31).

에벤키어 우리말

됼(дёл) 돌
듈(дюл) 둘
모(мо) 나무- 나모(고어)
무(му)
www.earticle.net 물
아미(ами) 아비
어니(эни) 어미
배(бэе) 배(사람)- 무뢰배(無賴輩)의 배(輩)

28) 이것을 호격조사라고 한다. 옛날 우리말의 호격조사에 ‘~에’라고 한 흔적이 있다. 771년에
경주에서 만들어진 성덕대왕 신종은 일명 ‘에밀레종’이라고 한다. 종을 만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아서, 어린아이를 쇳물에 넣어 만들었더니 소리가 났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엄마를 부르
는 소리’같아서 ‘에밀레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에밀레’라는 말은
‘에미(엄마)+ㄹ+에’로 구성된 말이다. 즉 마지막 ‘~에’가 호격조사로서, 오늘날 ‘~아, ~야’에
해당한다. 에밀레는 결국 ‘엄마야’의 뜻이 된다. 따라서 길야크어의 호격조사 ‘에[e]’는 우리
호격 조사의 고어(古語)에 해당한다. 멕시코 원주민의 호격조사도 ‘~에[e]’이다.
29) 언어를 비교할 때, 현대 표준어로 비교하면 안 된다. 15세기에 세종대왕이 우리 글자를 창제하
기 전에는 우리민족은 ‘글자’가 없었다. 오직 ‘말’만 있었다. 따라서 ‘먹어라, 먹어야’와 같은
표준어는 ‘머거라, 머거야’라고 소리 나는 대로 말했다. 이것이 과거의 우리말이다. 따라서
‘소리나는 형태’로 비교해야 한다.
30) 이 의문 서술어는 경상도 방언이다. 우리는 앞에서 경상도 방언과 길약어가 일치하는 예들을
보았다.
31) 자료 출처는 2010년 6월 8일 중앙일보 기사 ‘러시아 사하공화국에서 우리말 뿌리 확인’과
강덕수 교수가 직접 보내준 개인적 자료에 의함.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35

위의 예에서, 에벤키어의 배(бэе)가 무뢰배(無賴輩)의 배(輩)라는 그의


설명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아무르강을 따라 북상했던 우리민족은 지배계
층이 아니라 평민들이었다. 고려시대까지도 한자를 알았던 사람들은 극소
수의 지배계층과 왕족들뿐이었고, 평민들은 글자를 몰랐다. 따라서 ‘사람’
을 뜻하는 ‘배(бэе)’는 한자어 ‘배((輩)’가 아니라 순우리말 ‘패’일 것이다.
우리말의 ‘왈패, 깡패, 사당패’등에서 사용되는 ‘패’가 바로 이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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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에벤키족이 사는 지역을 지나 더욱 북상하면 도착하는 곳이 마침


내 춥지-캄차카 반도이다. 아래 표는 필자가 춥치-캄차카 반도에서 사용
되었던 우리말을 정리한 것이다32).

춥지-코리약족의 어휘 러시아 해석 필자 해석

춥지(chukchee/ chukchi) 33) 춥지


차브추밧(chavchuvat) 찹어 춥어
차브추브(chavchuv) 찹어 춥어
차워추워(chawchuw[tʃawtʃəw]) 전부 해석 못함 차워 추워
차워추(chauchu) 차워 추(어)
차브차(chavcha [čavča]) 찹어 차
춥자(chukcha)
www.earticle.net 춥제
딴이(tannit)34) 이방인, 낯선 사람 다른 사람, 이방인
루기 딴 이(lugi-tannit) 이웃 여기 다른 사람=이웃
려기 딴 이 땅(lygi tann ́ytan) 이웃 여기 다른 사람=이웃
딴 이 땅(tann ́ytan) 적, 외지인 다른 사람 땅, 적의 땅
아이(ai)35) 아이
사람
애들(edel) 애들
안갈인(an’kalyn)36) 안 간 사람
해석 못함
안갈이들(an’kalyt) 안 간 사람들
마릭(marik)37) 물고기(잡는 도구) 마리
코리약(koryak) 고리(족) 사람
추곳가(chukotka)
해석 못함 추운 곳, 추운 지역
추곳간(chukotkan)

32) 이 밖에도 우리말로 추정되는 많은 어휘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이텔맨족의 원래 옷은


팔이 없는 사각형의 옷이었다. 크라쉐닌니코프(Krasheninnikov)의 기록에 따르면, 코리약
족은 그 옷 모양을 보고서 이텔맨족을 ‘큰자로(Konchalo)’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말은 우리
말의 ‘큰 자루’로 추정된다. 팔 없는 사각형의 옷은 ‘자루’ 모양이기 때문이다. 또 개썰매를
코리약족은 '차워추-우에티(chauchu-uetik)'라고 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차워 추워, 우
에 타’라고 한 말로 추정된다.
236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2. 풍습
아무르강에서 춥지-캄차카 반도에 이르는 지역으로 처음 간 외지인은
러시아 코사크족 사냥꾼들이었다. 그들은 모피(毛皮)용 짐승을 사냥하기
위하여 1640년대부터 동시베리아로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최초로 아무르
강에 온 사냥꾼은 포야르코프(Poyarkov)로서, 그는 먼저 제야(Zeya)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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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후에, 보트를 타고 강을 따라 아무르강 입구에 도착한 후에, 오호츠


크해까지 갔는데, 시기는 1646년이었다. 이때부터 코사크족 사냥꾼들 사
이에 동시베리아 지역에 값비싼 모피를 구할 수 있는 많은 사냥감들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사냥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648년
춥지반도에 처음 온 사람도 코사크족 사냥꾼 데즈네프(Semyon Dezhnev)
였고, 1651년 캄차카반도에도 처음 온 사람은 역시 코사크족 사냥꾼들이
었다. 이들은 문맹으로서 지식인이 아니었다. 따라서 원주민을 처음 접한
그들은 원주민의 말을 그들 나름대로 짐작하여 해석했고, 그것을 다른
러시아인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캄차카 반도에 대한 본격적인 탐사는 1696년부터 러시아 탐사 팀이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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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하면서부터였고,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초기 캄차카반도 원주민에
대한 정보는 주로 크라쉐닌니코프(Krasheninnikov)가 남긴 기록에 의해
서이다. 그는 1735년부터 1741년까지 6년간 캄차카반도에 머물며 원주민
들의 풍습에 관한 다양한 관찰 기록을 남겼다. 아래 내용은 주로 그가
남긴 코리약족의 풍습에 관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38).

33) 이 어휘들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Levin, M.G., Op. cit., pp. 799~801./ Margus Kolga, Igor
Tonurist, Lembit Baba, Juri Viikberg, Op. cit., p. 86./ Fitzhugh, William W. and Crowell,
Aron, Op. cit., p. 31./ http://en.wikipedia.org/wiki/Chukchi_language
34) Fitzhugh, William W. and Crowell, Aron, Op. cit., p. 39./ Levin, M.G. & Potapov
L.P., Op. cit., p. 799.
35) Krasheninnikov, S. Petrovich, Op. cit., pp. 197 & 199.
36) Levin, M.G. & Potapov L.P., Op. cit., pp. 799 & 801./ Margus Kolga, Igor Tonurist,
Lembit Baba, Juri Viikberg, Op. cit., p. 86.
37) Fitzhugh, William W. and Crowell, Aron, Op. cit., p. 32.
38) 크라쉐닌니코프가 남긴 보고서에 의하면, 춥지-코리약족은 풍습과 언어가 같은 하나의 민족이
었다. 또 캄차카반도 가까운 알류산 열도의 섬에 거주하는 원주민들도 같은 민족이었다.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37

1) 종교 - 코리약족은 우상숭배를 많이 했다. 그들은 강이나 산에 신령한


신이 산다고 믿었고, 그 신을 두려워했다. 이에 반하여 이텔맨족은 신에
대한 개념이 매우 희박했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강이나 산뿐 아니라
모든 신령한 장소와 사물에 신이 있다고 믿었고, 많은 우상도 숭배했다.
2) 형사취수 - 형이 죽으면 형수를 부인을 삼았던 풍습을 형사취수라고
한다. 춥지-코리약족은 형수뿐 아니라 친척의 남자가 죽으면 그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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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자신의 부인으로 맞이하고, 그 자식들을 책임졌다39). 이러한


형사취수의 풍습은 북방민족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부여와 고구려
에도 형사취수의 풍습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3) 데일사위 - 코리약족에게는 고구려의 데릴사위제도와 같은 풍습도
있었다. 처갓집에 3년 또는 5년간 가서 함께 살면서 일을 해주고
환심을 얻어서 결혼했다40). 코리약족은 보통 부인이 2~3명이었다.
4) 음란을 싫어함 - 순록을 키우면서 유목생활을 하던 내륙의 코리약족
들은 부인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음란하면 쉽게 죽이는 풍습이 있었다41).
이 풍습은 『삼국지』위지동이전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부여의 풍습
과 일치한다. www.earticle.net

男女淫婦人妒皆殺之(남녀음부인투개살지)
남녀가 음란하거나 부인이 질투를 하면, 죽였다.

5) 나물 먹는 풍습 - 코리약족은 많은 야생풀을 뜯어 먹는 식습관이


있었다. 그들은 순록고기나 바다 동물(고래, 물개 등)의 고기를 삶아
먹을 때도, 야생 식물 뿌리를 넣어, 양념을 해서 삶았다42). 이것은
우리민족의 나물 먹는 풍습과 일치한다.
6) 고수레 - 음식을 먹을 때, 손으로 조금 떼어 불에 던지는 풍습이
있었다43). 이것은 우리민족의 고수레 풍습과 비슷하다.

39) Krasheninnikov, S. Petrovich, Op. cit., p. 291.


40) Krasheninnikov, S. Petrovich, Op. cit., pp. 291~292.
41) Krasheninnikov, S. Petrovich, Op. cit., p. 283.
42)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이 풍습이 있었다. (참조: Fitzhugh, William W. and Crowell, Aron,
Op. cit., p. 32.)
238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7) 별자리에 관한 지식 - 크로쉐닌니코프는 코리약족의 말에는 별자리


명칭이 많았다고 기록했다. 우리민족은 동북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
서도 별자리에 관한 관찰 및 지식이 대단히 일찍부터 발달했던 민족
이다. 평양 주변에서 발견된 고인돌에 새겨진 일부 별자리는 기원전
3000년의 것으로, 중국보다 무려 3800년 정도 앞섰다. 많은 고구려
구분 벽화에 그려진 천문도(天文圖)도 바로 이러한 우리민족의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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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지식에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8) 긴 축제 - 코리약족에게는 매년 한 달 동안 축제를 여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축제 풍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왜 하는지, 무엇
을 기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고, 크라쉐닌니코프는 기록했다. 『삼
국지』위지동이전에 따르면, 부여는 장례식을 긴 축제로 성대하게
열었는데, 거의 6개월을 지속했고, 이웃사람들이 이제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축제를 지속하는 것을 미덕(美德)으로 여겼다고 한다.
9) 성대한 장례식 - 그들은 장례식도 성대하게 치루었다. 먼저 사자(死
者)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힌 후에, 화장(火葬)을 하고, 그의 소유물도
불태워 주곤 했다44). 코리약족의 장례풍습은 캄차카반도 중부와 남
부 지역을 차지하고www.earticle.net
살던 이텔맨족의 장례 풍습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이텔맨족은 사체(死體)를 개 먹이로 주거나 목에 밧줄을 걸어서 집
밖으로 끌고 나가서, 움집에서 먼 곳에 두어, 짐승이 먹도록 했다45).
10) 코리약족은 아이를 업고 다녔고, 병이 나면 무당이 치료해 주었다.
고대 우리민족은 병이 나는 이유는 나쁜 귀신 탓이라고 여기어, 치료는
무당이 굿을 하거나 각종 부적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방법으로 하였다.
11) 주거 문화 - 춥지-코리약족의 주거 형태는 기본적으로 아무르강
하류의 길약족의 주거 형태와 같았다. 그들은 겨울에는 땅을 깊이
파고, 위는 무덤처럼 덮은 움집에 살았고, 여름에는 원두막같은 집
을 지어서 살았다.

43) Krasheninnikov, S. Petrovich, Op. cit., p. 289.


44) Krasheninnikov, S. Petrovich, Op. cit., p. 293.
45) 이 풍습은 연해주에 살던 숙신족의 풍습과 비슷하다. 숙신족은 가족이 죽으면, 그 사체를
담비의 미끼로 이용하여, 담비를 잡았다. 숙신족은 동이족 가운데 가장 기강이 없고 지저분
했다. 그들은 오줌으로 손과 얼굴을 씻었다. 이텔맨족도 숙신처럼 지저분했다. 이들은 개와
함께 같은 그릇으로 식사를 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숙신족은 이텔맨족과 관계있고, 북쪽에
서 남하한 집단으로 추정된다.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39

이러한 겨울집과 여름집의 주거형태는 『삼국지』위지동이전에 기록된


연해주의 주거형태와도 같다. 아래 그림 <1>은 18세기 말에 영국인 선장
쿡(James Cook)이 캄차카반도를 방문했을 때 본 코리약족의 겨울집과
여름집의 모습이다46). 겨울집은 겉모양이 무덤과 비슷하고, 가운데에 구
멍이 뚫려 있는데, 이곳이 문으로서, 사다리를 타고 출입하였고, 동시에
집안에서 피우는 불로 인하여 생기는 연기의 배출구 역할도 했다. 여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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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원뿔형 원두막이다. 여름이 되면 겨울집 내부는 덮고, 땅이 녹아서 습기


가 많으며, 집안에서 피우는 불로 인하여 연기가 자욱하여 생활하기 불편
했으므로, 원두막같은 여름집에서 생활했다.
특이한 점은 코리약족의 집은 둥근 원형 또는 타원형인데 비하여, 이텔
맨족은 주로 사각형이었다는 점이다47). 아무르강 하류의 길약족의 집터도
대부분이 타원형이었다. 우리민족의 선사시대 집터들도 둥근 타원형이
었고, 바닥 땅을 조금 파서 지은 움집이었다.

<그림 1> 코리약족의 겨울집과 여름집 <그림 2> 겨울집의 내부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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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물과 유적
(1) 반달형 돌칼
기원 이전부터 우리민족은 돌을 갈아서 만든 칼을 사용했다. 이 칼의
모양은 날이 반달처럼 둥글게 되어, 역사·고고학계에서는 반달형 돌칼이
라고 이름지었다. 반달형 돌칼은 고대 우리민족의 활동무대였던 만주대평

46) Krasheninnikov, S. Petrovich, Op. cit., p. 44.


47) Michael, Henry N., The Archaeology and Geomorphology of Northern Asia,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64), p. 269.
240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원과 한반도, 그리고 요동과 요서 지역 및 중국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출토


되고 있어서, 고대 우리민족의 특징적 돌칼로 설명되고 있다. 이 돌칼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대략 청동기시대 이전부
터 사용했고, 철기시대인 초기 삼국시대에도 민간에서는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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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반달형돌칼

그런데 이러한 반달형 돌칼이 우리민족의 이동과 함께 북동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캄차카반도와 알류산열도에
서 발굴되었다. 아래는 외부에서 철기가 들어온 19세기에 캄차카반도 원
주민들이 쇠를 이용하여 만든 반달형 칼과, 알류산열도 원주민들이 외부
로부터 철기가 유입되기www.earticle.net
이전에 돌로 만든 반달형 돌칼의 사진이다. 이러
한 반달형 칼은 우리민족이 캄차카반도까지 북상한 후, 알류산열도를 지
나갔다는 증거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춥지족의 반달형 칼48) 알류산열도의 반달형 돌칼49)

48) Valentina Gorvatcheva & Marina Federova, The Peoples of the Great North Art and
Civilization of Siberia, (Parkstone Press, 2000), p.77.
49) Waldemar Jochelson, Archaeological Investigations in the Aleutian Islands, (The
University of Utah Press, 2002), pp. 63-65.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41

아래는 오늘날 에스키모인들이 사용하는 쇠로 된 반달형 칼이다. 그들


은 외부로부터 쇠가 들어오자, 돌 대신에 쇠를 이용하여 반달형 칼을 만들
어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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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살촉
우리민족의 북상 흔적은 반달형 칼 이외에도 토기나 창날 혹은 화살촉의
모양에서도 발견된다. 비록 유물 사진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동북 시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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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 지역 고고학적 유물을 조사했던 여러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코리약족의 토기는 아무르강 남쪽의 토기와 닮았다50). 춥지-코리약족의


창날은 아무르 유역의 것과 비슷하다51).

또 춥지-코리약족이 사용하던 활촉은 두 가지 모양이었다. 춥지-코리


약족뿐 아니라 알류산열도에 살던 원주민들과 캐나다의 에스키모들도 전
쟁용 화살촉과 사냥용 화살촉의 모양이 달랐다. 전쟁용 화살촉은 끝이
날카롭고 길었지만, 사냥용은 끝이 뭉툭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런데 고구
려의 화살촉이 전쟁용과 사냥용이 달랐다. 아래는 에스키모의 활과 사냥
용 화살촉이다.

50) Michael, Henry N., Op. cit., p. 293.


51) Lopatin, Ivan A., The cult of the dead among the natives of the amur, (Mouton &
Co., 1960), p. 21.
242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에스키모의 사냥용 화살촉>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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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에서 에스키모의 사냥용 화살촉의 모양이 날카롭지 못하고, 끝


이 뭉툭하게 생긴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냥용 화살촉을 우리는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아래 그림은 4세기 말에 축조된 무용
총의 수렵도의 인물화이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활촉의 모양이 에스키모
인들의 그것과 거의 같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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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의 화살촉>

(3) 고래사냥 그림
고래는 거대한 바다 동물로서, 배가 작고 어업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는 잡기 힘든 동물이었다. 그런데 울산 대곡리의 반구대의 암각화

52) Powell, J.W., Eighteenth annual report of the Bureau of American Rthnology to the
secretary of the Smithsonian Institutions, 1896-97, (Washington Government
Printing Office, 1899), p. 159.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43

(巖刻畵)에는 고래와 같은 바다동물과 멧돼지나 순록과 같은 육지 동물이


빼곡하게 조각되어 있다.
우리에게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떼를 지어 헤엄치거나 새끼를 등에 업고
가는 헤엄치는 장면 그리고 작은 배에 여럿이 함께 타고서 작살로 고래를
찍은 후에 긴 밧줄로 고래를 따라가는 장면이다.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고래의 생태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고래를 어떤 방법으로 사냥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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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고 있다.
아래는 반구대 암각화(巖刻畵)의 전면도이다. 왼쪽에는 주로 고래가,
오른쪽에는 순록들이 새겨져 있다. 아래의 오른쪽 두 개의 그림은 반구대
암각화에서 ‘새끼를 업은 어미 고래’와 ‘줄이 달린 작살에 맞은 고래와 사람
들이 탄 배’의 모습을 확대한 것이다.

<울산 반구대의 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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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춥지-코리약족에게도 이와 같은 그림이 있다. 아래 그림은 순


록 가죽에 그려진 춥지-코리약족 유물인데, 떼를 지어 헤엄치는 고래들의
모습, 새끼를 등에 업고 헤엄치는 어미 고래의 모습, 그리고 작살을 맞은
고래와 긴 밧줄로 이어진 여러 사람들이 탄 작은 배의 모습 등이 울산
반구대의 바위그림과 매우 흡사하다 (오른쪽 확대 부분 참조).
244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춥지족의 고래사냥 그림>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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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의 암각화와 춥지-코리약족의 그림에는 고래 사냥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오른쪽 각 그림에서 배와 작살 맞은
고래를 연결한 선 가운데에 타원형의 그림(붉은 원 안)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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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부구(浮具)라는 도구로 일종의 공기주머니이다. 이것은 작살을 맞은
고래가 바다 속으로 잠수하려는 것을 막고 힘을 빼어 지치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도구이다. 부구는 고래와 같은 크고 힘센 바다 동물을 잡는데 필수
도구이다.
고대부터 고래를 사냥하던 민족은 동북아에서도 우리민족 외에 알려진
민족이 없다. 몽골인은 물론 중국인들도 기원 이전에 고래를 알지 못했고,
고래고기도 먹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부구를 이용한 고래 사냥 방법도
몰랐다. 주변 민족과 비교되는 이런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고, 위 두 그림에
나타난 세 가지 공통점, 그리고 부구를 이용한 고래 사냥 방법까지 일치한
다는 사실은, 춥지-캄차카 반도의 순록 가죽 그림이 고래를 사냥하고 고래
고기를 식용으로 먹던 우리민족의 북쪽 이동을 증명해주는 증거일 것이다54).

53) Fitzhugh, William W. and Crowell, Aron, Op. cit., p. 309.


54) 반구대 암각화는 선사시대(先史時代)의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춥지-코리약족의 그림은
19세기의 것이다. 그러나 춥지족이 17세기까지 신석기시대적 생활을 했다는 점과 19세기까지도
매우 원시적인 생활을 유지했다는 점, 그리고 반구대 암각화도 선사시대라고는 하지만, 실재로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45

(4) 온돌
온돌은 우리민족의 고유 난방 방식으로, 방의 바깥 아궁이에 불을 때어
뜨거운 열기가 방안 밑의 구들로 지나, 아궁이의 반대편에 있는 굴뚝으로
연기가 빠져나가게 하여, 집안을 데우는 방식이다. 방안의 구들은 여러
갈래이지만 굴뚝이 있는 벽 가까운 곳에서 모두 하나로 합쳐지도록 되어
있다. 오늘날 온돌 유적이 발굴되는 곳은 우리 선조들이 기원전부터 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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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까지 주로 활동하던 지역으로, 북으로 만주와 아무르강 상류에서부터


남으로는 한반도, 서로는 중국 북부지역의 허베이 산시성까지, 동쪽으로
두만강 연해주까지이다.
우리민족의 온돌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6세기 초에 편찬된 중국의 『수
경주(水經注)』라는 문헌이고, 10세기에 편찬된 『구당서(舊唐書)』 권
199에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冬月皆作長坑 下燃熅火以取暖 (동월개작장갱 하연온화이취난)


겨울에는 모두 긴 구들을 만들고, 밑에서 뜨거운 불을 피워 난방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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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에 따르면, 우리민족은 고구려 시대에 이미 모든 사람들이 온돌
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민족이 북상하여 아무르강 하류를 거쳐 캄차카반도를 지나
알류산열도를 건넜다는 고고학적 증거로 온돌도 있다. 2007년 알류산열
도의 아막낙(Amaknak) 섬에서 영국인 고고학자 릭 크넥(Rick Knecht)은
아래와 같은 온돌 유적을 발굴하여, 한국인의 온돌이 왜 알류산 열도에서
있는가, 고대 한국인과 알류산열도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밝혀야 한다
고 주장했다.

는 주변 지역에 선사시대 유물은 발견되지 않고 삼국시대 유물만 발굴되어, 삼국시대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대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또 동양에서 배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것은 기원전 11세기, 주(周)나라가 산동반도의 은(殷)나라를 공격할 때였다. 따라서 반구
대 암각화도 이후의 시기에 그려졌을 것이다.
246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아막낙 섬의 온돌 유적

아궁이 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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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

이 유적을 보면, 땅을 어느 정도 파서 지은 집터로서, 우리선조들의


주거형태였던 움집 집터와 같다. 가장자리를 돌로 쌓고, 집안의 오른쪽에
바닥을 파서 두 개의 아궁이와 골(구들)을 만들고, 골 양쪽에 납작한 돌을
쌓고 그 위에 역시 납작한 돌을 덮었다. 이것은 우리민족 온돌의 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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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조 방식이다. 두 개의 구들은 벽 가까운 곳에서 하나로 합쳐진 후에,
벽 밑으로 난 구멍을 통하여 굴뚝으로 이어져 있다55).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온돌 유적이 발굴된 북만주와 알류산열도의 중
간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아무르강 하류에도 이와 같은 온돌이 있었다는
19세기 말 탐사팀의 기록이 있다. 아래는 미국 고고학자 제라드 포우케
(Gerard Fowke)가 보고한 아무르강 하류 지역에서 온전한 형태로 발견된
온돌에 대한 보고서이다56). 원문과 필자의 간략한 해석을 함께 싣는다.

55) 2014년 9월 우석대학교에서 열린 국제온돌학회에서 이 온돌에 대하여, 김준봉교수는 굴뚝


부분을 아궁이이며 동시에 공기 흡인구로 설명했다(2014년 11월 KBS 다큐공감, 『한반도에서
알래스카까지, 고래의 길을 가다』편 참조). 그러나 제라드 포우케의 보고서에서 보듯이 그곳
은 굴뚝이고, 불은 집안에서 때었다. 우리민족 일반 평민의 옛 가옥에도 부엌은 언제나 집안
한쪽에 배치되어 있다. 즉 아무르와 아막낙섬의 움집 형태 속의 아궁이가 점차 발전하여
근세의 평민 가옥 형태의 부엌으로 발전했다고 보아야 한다.
56) Gerard Fowke, "Exploration of the Lower Amur valley", American Anthropologist
Association, American Anthropologists, 1889년, 2권 4호, (AAA, 1889), p. 280.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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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구석에 불자리가 돌로 만들어져 있는데, 둥근 돔 모양이다.> 밑에


땔감을 넣을 구멍을 하나 만들고, 꼭대기에 하나 만들어 여기에 쇠솥을 놓는다.
이 불자리(아궁이) 난로에서부터 연통(구들)이 집 주변으로 이어져 벽까지 간다.
각 구들은 납작한 돌들을www.earticle.net
평행으로 두 줄로 세로로 세우고, 그 위를 평평한
돌로 덮어서 만든다. 만약 평평한 돌이 없으면 큰 자갈을 사용한다. 아궁이와
구들의 모든 작은 틈새는 진흙으로 매꿔진다. 집이 큰 경우에는 이런 구들이
3~4개가 된다. 또 다른 화로(아궁이)가 맞은편에 만들어지기도 한다. 모든
구들은 끝에 가서는 하나로 합쳐진 후에 벽을 뚫고 나가서 15~30피트(4~9m)
가서 굴뚝으로 이어진다. 굴뚝은 통나무를 여물통처럼 파고, 열린 부위는 나무
판을 붙여서 만든다. 아니면 나무판으로 아예 만든다. 보통 3~4m높이이다.
구들들 위는 모래와 고운 자갈로 덮어...평평한 바닥을 만든다. 그리고 그 위에서
전 가족이 실내에 있을 때 생활한다. 아궁이에 불이 있을 때는 그곳은 따뜻하다.”

이 기록을 보면, 움집 안에 아궁이를 설치하고, 그 아궁이에서부터 뜨거


운 연기가 지나가는 구들을 벽까지 이어지도록 만들었으며, 움집이 큰
경우에는 아궁이를 여러 개 설치하고, 각 아궁이로부터 시작된 구들이
굴뚝이 있는 벽 근처에서 하나로 합쳐져 밖의 굴뚝으로 이어졌으며, 굴뚝
은 통나무를 파서 만들어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집안을 아궁이와
땔감, 살림도구를 놓는 부엌에 해당하는 부분과 사람들이 주거하는 부분
248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으로 나누고, 주거하는 부분은 구들 위에 흙과 자갈로 덮어, 부엌 부분


보다는 약간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민족의 전통 가옥도 방은
부엌보다 높았다.
아무르강 하류의 온돌에 대한 기록은 ‘시베리아 소수 민족의 역사’를
쓴 제임스 포시스(James Forsyth)의 저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57). 그는
울치(Ulchi)족의 거주지에서 온돌을 발견했는데, “집안의 진흙이 발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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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로는 바닥 밑에 나 있는 관(고래, 구들)에 연결되어 있고, 그 관은 벽


가까이에 마련된 좀 높은 편평한 자리 밑으로 지나서 밖의 굴뚝으로 이어
졌다. 사람들은 그 평평하고 약간 높은 자리에서 잠을 잤다”라고 기록
하여, 제라드 포우케가 설명한 온돌 구조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
는 앞에서 울치족은 원래 길약족의 일파였고, 1842년 야킨프(Iakinf)가
처음으로 구별했다고 언급했다.

III.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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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은 중국 북쪽의 북방민족들 가운데 가장 크고 강한 민족이


었고, 차지했던 영토도 만주대평원을 비롯하여, 요동과 요서 그리고 한반
도를 아우르는 큰 민족이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건국된
8세기부터 만주와 요동·요서 지역에 살던 우리민족의 수는 주변 민족들에
비하여 급격하게 줄었다. 6세기에 집필된 중국 문헌 『위서』나 10세기에
집필된 『구당서』에는 우리 선조들이 북쪽 아무르를 향하여 집단으로
떠낫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008년 필자는 멕시코 고대 문헌을 연구
하여 ‘우리민족이 삼국시대 대거 아메리카로 건너왔고, 그 이동루트는 만주
-아무르-오호츠크해 연안-춥지·캄차카 반도-알류산열도라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4년 그동안의 연구를 종합하여 『우리민족의
대이동-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민족이다/멕시코편』을 출간하였다.

57) James Forsyth, A history of the Peoples of Siberia, Russia‘s North Colony 1581~1990,
(Cambridge, Uni Press, 1992), p. 210.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49

만약 이 주장이 옳다면, 우리민족의 이동루트에는 우리민족 고유의 흔


적이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한다. 민족의 이동은 언제나 그 민족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는 필자가 밝힌 이동루트에 우리민족 고유의 흔적이 매우
다양하게 남아있었음을 기초적으로 다루었다. 아무르강 하류의 길약족,
오호츠크해 연안의 에벤키족, 그리고 캄차카반도의 코리약족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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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언어, 풍습, 유물에는 우리민족 고유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음


을 다루었다. 먼저 언어적 측면에서 길약족의 다양한 종족 명칭이 모두
우리말이라는 것을 형태소 분석과 우리말 음운 및 문법규칙으로 확인하였
고, 그들의 생활 용어에도 수많은 우리말이 사용되었음을 강길운의 연구
를 원용하여 밝혔다. 에벤키족의 생활 용어에서도 강덕수의 연구를 원용
하여 그들이 우리말을 사용했음을 밝혔고, 춥지-코리약족의 경우에는,
우리말의 고유 특징인 활용변화형을 춥지족의 생활 용어 ‘춥다’와 관련된
말에서 찾아내어, 그것이 우리말임을 증명하였다. 또 그들이 사용했던 그
밖의 다양한 일상생활 용어에서 우리말을 찾아내었다.
풍습적인 측면에서는 www.earticle.net
캄차카반도 원주민들에게 다양한 부여-고구려 풍
습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들에게는 형사취수 풍습, 데릴사위 풍습,
음란한 부인을 쉽게 죽이는 풍습, 나물 먹는 식습관, 고수레, 별자리에
대한 깊은 지식 등과 같은 고대 우리민족의 흔적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유물 · 유적과 관련하여서도, 고대 우리선조들의 특징적 도구였던 반달
형 돌칼, 전쟁용과 구별되는 뭉턱한 사냥용 화살촉이 그 지역에서 사용되
었음을 확인했고, 순록 가죽에 그려진 고래 그림은 고래의 생태와 고래
사냥 방법을 상세하게 그려서, 마치 울산 반구대에 있는 그림의 복사판이
라고 할 정도로 유사하다는 사실도 밝혔다. 특히 부구를 이용하여 고래를
사냥하는 모습은 그 시대의 지식으로는 우연의 일치로 볼 수 없는 놀라운
일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르강 하류와 알류산 열도에서 발견된
우리민족 고유의 온돌은, 그곳으로 우리민족이 지나갔다는 증거들 가운데
백미일 것이다.
본 연구에서 필자는 지면의 한정으로 인하여, 길약족에게서 필자가 발
견한 무수한 우리말을 소개하지 못했고, 또 고대 우리민족의 종교, 특히
250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태양신 신앙이나 고대 우리선조들이 매우 많이 사용하던 특징적 문양에


대하여도 다루지 못했다. 우리민족의 태양신 신앙은 길약족, 코리약족,
알류산 열도의 원주민들,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남아 있고, 특징적 문양도 역시 그렇게 남아, 그들이 우리민족의 후예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 러시아 및 미국의 여러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아무르에
서 캄차카반도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견되는 토기의 파편들은 그것이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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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강 남쪽, 즉 만주 지역과 연관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


이러한 유물까지는 공부하지 못하고 있다.
본 연구는 아무르에서 캄차카반도에 이르는 우리민족의 흔적에 대한
최초의 것으로, 이 연구를 계기로 이 분야에 관한 보다 많은 후속 연구가
시작된다면 그것으로 본 연구의 의의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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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51

<참고문헌>

강길운, 『고대사의 비교 언어학적 연구』, 새문사, 1990.


강덕수, "러시아 사하공화국에서 우리말 뿌리 확인" <강덕수 교수가 직접
보내준 개인적 자료에 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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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舊唐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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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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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태, 『우리민족의 대이동-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민족이다/멕시코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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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demar Jochelson, Archaeological Investigations in the Aleutian
Islands : The University of Utah Press, 2002.
우리민족의 이동 흔적 ∙ 253

<Abstract>

Evidences of Korean ancestors exodus


-From the Amur to the Kamschat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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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 Seong-Tae

According to ancient Chinese books, the Korean nation was the


greatest nation in population number among nations that occupied
territory north to China. They inhabited a vast territory including
Manchuria, Li odōng and the Peninsula Han. But the Koreans lost
Manchuria after the 10th century, because their population
decreased in number in comparison with other nations. S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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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cient Chinese documents wrote down the reason: The koreans
of Manchuria and Li odōng left toward the Amur.
In 2007, Prof. Son Sung Tae found in ancient Mexican documents
that the Korean ancestors had lived in Mexico before the Discovery
of the New World by Colombus in 1492. He got to know that So
many number of korean ancestors of Manchuria came to America
during the period from the 3th to the 7th century. Owing to some
ancient mexican document saying that the Mexican native's
ancestors came across many islands located in a line, he found that
the route of the Koreans exodus was Aleutian Islands. It means
that the exodus route is Manchuria-the Amur- seaside of the Sea
of Okhotsk- the Peninsula of Kamschatka.
In present study I present many evidences that the Korean
ancestors passed through the territory from the Amur to the
Kamschatka. First I present lingual evidence that many tribes of
254 ∙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1호

the route used Korean words for their tribal names and in
conversation of daily lives. Second I present evidences that the
natives of the route kept customs identical to that of ancient
Koreans. Finally I present archaeological evidence that the Koreans
ancestors lived some times in many places on the route. The
evidences consists of semi-lunar stone knives, arrowhead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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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mpy point, pictures of whales and Ondol-the Korean traditional


heating system.

<Key Words>

Amur, Okhotsk, Kamschatka, Gilyak, Evenki, Chukchi, Koryak,


Language, Custom, Relics, Ruins, Son-in-law, Kosure(throwing
away a bit of food), Constellation, Semi-lunar knife, Arrowh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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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tures of whales, Ondol(Korean traditional heating system)

논문 접수일 : 2015. 4. 21.


논문 심사일 : 2015. 5. 07.
게재 확정일 : 2015.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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