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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287-3384

KIPA 조사포럼 2015년 3월 31일 발행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VOL. 12
|
Vol. 12 | 2015.03 | SPRING | www.kipa.re.kr

2015. 03
|
SPRING
시론
광복 70년 :
대한민국의
발전 단계와 정부의 역할
Global
전문가 칼럼

KIPA 행정통계로 본 광복 70년


광복 70년과 인사행정
The Korea Institute of 서울특별시 강남구 언주로 508 서울상록회관 10층
광복 70년과 지방행정계층 및 구역의 변화
Public Administration T. 02-564-2001 | F. 02-564-2006 | www.kipa.re.kr
한국 복지행정의 변화와 발전

Development
사회조사 동향과 이슈
사회조사 자료연계 기법 적용과 가능성

Issue

Professionalism

Statistics
한국행정연구원 사회조사센터는

공공정책 역량강화에 기여하는 공공부문 전문 통계조사센터를 비전으로

공공정책 관련 조사자료 및 통계의

효율적인 생산, 관리, 활용 업무 수행을

미션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통합 분야에 대한 조사와


공무원에 대한 조사 등 조사대상의 특수성은
우리 사회조사센터가 다른 공공부문 및 민간부문의 조사기관과
차별성을 갖는 부분이며,
이와 함께 조사연구를 통한 통계자료의 생산, 관리 및 활용 업무와
사회조사 관련 학술행사 및 교육에 대한 업무를 수행합니다.
C O NTENTS

인사말
04 조사포럼 인사말씀
이은재 한국행정연구원장

시론
06 광복 70년 : 대한민국의 발전 단계와 정부의 역할
안병만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전문가 칼럼
18 행정통계로 본 광복 70년(정부통계행정의 변천사)
최봉호 前 통계교육원장

26 광복 70년과 인사행정
이근주 이화여자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32 광복 70년과 지방행정계층 및 구역의 변화


홍준현 중앙대학교 공공인재학부 교수

40 한국 복지행정의 변화와 발전
양재진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사회현장 리포트
46 조사통계숫자 바로보기
박병일 한국갤럽조사연구소 상무

조사기관 소개
52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한국 아동·청소년 패널조사
이종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통계·기초연구실장

조사결과 소개
58 국민의 다문화사회에 대한 인식조사
고재권 한국행정연구원 초청연구위원

사회조사 동향과 이슈
66 사회조사 자료연계 기법 적용과 가능성
정미옥 통계개발원 조사연구실

발행처 한국행정연구원 | 발행인 이은재 | 편집위원장 강정석 | 편집위원 박중훈 김 신 이광희 권오성 김정해 채종헌 이환성 원소연 오윤경 | 간사 지규원 | 실무 진경애
통권 제12호 | 발행일 2015년 3월 31일 | 주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언주로 508 서울상록회관 10층 | 전화 02-564-2001 | 팩스 02-564-2006
홈페이지 www.kipa.re.kr | 디자인·인쇄 방형식디자인 02-2082-6388

● KIPA 조사포럼은 한국행정연구원 사회조사센터에서 발행하는 계간지입니다.


● 본지에 실린 내용은 한국행정연구원 사회조사센터의 공식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강남 바 00115 정기간행물 등록일 2012년 6월 26일
● KIPA 조사포럼에 바라는 점이나 새로운 의견, 게재하고 싶으신 글이 있으신 분은 지규원(간사), 진경애 연구원에게 연락 바랍니다.
● 전화 02-567-2157 팩스 02-567-2221 이메일 gajin@kipa.re.kr
조사포럼 인사말씀

04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KIPA 조사포럼 독자 여러분,

만물이 소생하며 봄의 시작을 알리는 3월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아름답고


KIPA 조사포럼이
힘찬 봄의 기운이 찬란히 빛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유익하고 알찬 정보를
한국행정연구원은 1991년 설립 이래, 국내 유일 행정분야의 대표적인 싱크탱크 전달하여, 정부의
(Think Tank)로서, 정부의 정책과 행정제도에 대한 시의적절하고 실효성 있는 정책을 널리 알리고
정책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우리나라 행정발전을 견인하는 국책연구원으로 성장
국민 소통의 장이
하였습니다. 특히 한국행정연구원 사회조사센터는 사회통합 국가승인통계를 비롯
될 수 있도록 많은
하여 국정현안 및 사회 이슈에 대한 조사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정책 이슈를
성원과 관심을
자체 발굴하고 현장에서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하여 계간지인 KIPA 조사
포럼을 발간하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이 KIPA 조사포럼은 시론과 전문가 칼럼을 통하여 국정 현안에 대한 창의적인


의견들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조사와 관련한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다양한 여론조사 관련기관 및 주요한 여론조사 결과를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더불어 사회조사 현장에서 일어나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 등에 관한
최신 동향을 소개하는 사회현장 리포트도 제공하는 등 다양하고 시의성 있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올해 2015년은 우리나라가 광복 7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입니다. 지난 70년의


역사가 앞으로의 70년 혹은 그 이상의 먼 미래를 만드는 토양이 되어야 할 것이며,
정부행정의 역사를 돌이켜보는 것 또한 미래의 정부행정을 설계하고 국민에게 더
잘 봉사하는 존재가 되기 위한 중요한 절차일 것입니다. 그래서 2015년을 여는
이번 조사포럼에서는 광복 70년과 각 분야별 행정발전에 관해 전문가의 의견을
모아보았습니다.

한국행정연구원 사회조사센터에서 발간하는 KIPA 조사포럼이 공직자와 학계를


비롯한 독자 여러분께 유익하고 알찬 정보를 전달하여, 정부의 정책을 국민들께
널리 알리고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창의적인 여론이 상호 연결되는 폭넓은 소통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많은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한국행정연구원장 이 은재

2015. 03 | VOL.12 | SPRING 05


T h e K o r e a I n s tit u t e o f P u b l i c A d m i n i s t r a ti o n

시론
광복 70년 :

대한민국의 발전 단계와
정부의 역할1

시작하는 말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올해로서 대한민국에는 10개의 정부가 세워졌고,


전쟁, 학생 혁명, 군사 정변, 민주 항쟁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처럼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난 국가적 시련을 거쳐 오면서 그 중심에는 대한민국의
정부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건국 당시 농업국가로 세계의 최빈국이었던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우리나라가 짧은 기간 동안에 세계의 선진국 수준에 접근하고 있다. 이처럼
안병만 세계를 놀라게 한 초고속 성장의 중심에도 대한민국의 정부가 있었다. 우리의
정부는 많은 정책상의 시행착오 속에서도 오늘의 우리의 위상을 갖추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본고에서는 우리 정부의 이와 같은 긍정적 역할에 초점을 두고 광복
70년을 개관하고자 한다. 즉, 국가 발전론적 시각에서 이승만 정부에 의한
건국, 박정희 정부를 중심으로 한 근대화, 김영삼 정부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해 오늘에 이른 민주화, 그리고 IMF 경제위기, 두 차례의 선진국발 재정
위기 등을 극복하고 이명박 정부로 연결된 선진화 과정을 검토하면서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각 정부의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건국

1945년 일제 강점기가 끝나면서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했다. 동년 12월


모스코바 3상회의에서는 미소 등에 의한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다.
1안
 병만, 「대한민국 역대 정부 주요
정책과 국정운영」 서문(서울 : 한국 이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되고 남한은 미군정이 장악하여 임시 통치
행정연구원, 2015년), 요약하여 재
구성함.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06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그러나 당시 가장 중심에 있던 민족 지도자 이승만과 김구는 함께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조선의 자주 독립 국가로의 즉각 이행을 주장하였다. 한편 북한 김일성
집단은 찬탁을 들고 나온 가운데, 미군정마저도 이승만 등의 반탁 주장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에 한걸음 더 나아가 1946년 6월 단정(남한만의
단독정부)의 불가피성을 들고 나왔다. 그의 단정 주장에는 당시 소련과 공산주의
추종자에 대한 불신이 바탕을 이루었던 것이다. 또한 미국이 언젠가는 한반도를
떠날 것이라는 대미 불신도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서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 위원회에서는 아무런 결정도 끌어내지 못했고 1947년 9월 미국은 종국적으로
한반도 문제의 관할권을 UN 총회에 넘기게 되었다. 이에 동년 11월 UN 총회는
UN 감시 하에 남북한 인구 비례에 의한 자유선거 실시를 가결하였다. 소련은 이를
전면 거부했고, 결과적으로 1948년 5월 남한 지역에서만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승만의 단정 주장이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정국의 주도권은
자연히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이 잡게 되었다.
우선 국회의장으로 이승만이 절대 다수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고 그의
주도 하에 헌법이 만들어졌다. 당시에 정한 국호 ‘대한민국’과 ‘대통령중심 정부
체제의 기본 골격’은 그동안 숱한 개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로 이어지고
있다. 1948년 7월 17일에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헌법이 선포
되고 7월 20일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8월 15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1948년
제주 4.3사건, 동년 10윌의 여수, 순천지역 무장 봉기사건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전국적으로 발생함으로써 이승만 정부는 극도의 체제불안을 경험했다.

1948년 7월 17일에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헌법이 선포되고 7월 20일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8월 15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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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미국은 동북아 지역 전략에 따라 우리 정부수립 후 1년 만에 주한 미군
철수를 완전히 마쳤다. 이로써 경무장상태의 한국군과 북한의 20만 대군은 심한
군사적 불균형 상태에 있게 되었고, 남한에서는 건국의 필수 요건인 치안과 국방을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군의 남침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은 3년간 계속되었고 엄청난 상처를 남긴 채 끝났다. 한민족 역사에
가장 큰 동족 상잔의 치욕을 남긴 전쟁이었다. 전후 이승만 정부는 전쟁 복구 면에서
그리고 안보 면에서 미국의 계속적인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1953년 10월
한미 방위 상호 조약을 맺는데 성공했고, 익년 11월에 조약이 구체적으로 발효되어
그 때부터 미국의 지원 하에 치안과 국방에서부터 전쟁 피해 복구, 경제 부흥에
이르기까지 전반에 걸쳐 국정 운영을 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대한민국이 민주 공화국임을 선포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민주주의
절차에 의해 정부를 운영해 나가지 못했다. 특히 정권의 유지 및 운영 과정에서의
불법성, 탈법성, 독재화는 민주체제 속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선례를 남겼고 이로
인해 이승만은 본인 의사와는 관계없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의 대한민국의 건국과 관련하여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한 일에
대해선 반드시 짚고 나가야 할 것이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체계적
지원에 의해 김일성 중심의 국가체제가 강력하게 등장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소련과의 협상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남한 내는 사분오열된
상태에서 혼란만 거듭되고 있었다. 이때 일민주의를 부르짖으며 단독정부를
세워서라도 남한만이라도 먼저 공산 체제가 아닌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던 당시 이승만의 주장은 오늘날의 대한만국 건설에 초석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정부수립 과정에서 위의 주장을 헌법 제정의 근간으로 삼았고, 정부수립
후에는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지주제를 타파하고 산업 자본주의의 기틀을 만들었으며,
전후에는 한미방위상호조약을 끌어내어 미국을 우방으로 삼아 우리의 안보와 국방을
굳건히 함으로써, 이러한 건국의 기본 틀이 오늘의 대한민국에 면면히 이어져오게
한 점 등은 꼭 지적해야 할 사항들이다.

2. 근대화

4.19 학생혁명의 결과로 이승만 정권은 무너지고 1960년 7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하고 장면을 국무총리로 하는 내각책임제 정부가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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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치와 경제발전이라는 큰 국정 과제를 가지고 출발한 장면 내각은 집권
내내 학생 집단의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엄청난 요구를 정치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정치·사회적 혼란만 가중시키고 말았다. 이에 더하여 민주당은 윤보선이 이끄는
구파와 장면 주도의 신파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분당됨으로써 민주 혁명
상황을 이끌어 가는데 실패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에
의해 1960년 8월 집권 이후 9개월 만에 정권을 내놓았다.
장면 정부의 민주화 노력은 군사 정부에 연결되지 못했지만 짧은 집권 기간
동안에 만들었던 경제 5개년 계획은 군사 정부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군사 쿠데타의 명분을 조국 근대화로 삼았다. 그리고 근대화의
핵심을 경제 발전에 두었다. 당시 한국은 일인당 국민 소득이 83달러 수준으로
최빈국 상태였기 때문에 1차 5개년 계획(1962~1966)은 노동 집약적 경공업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잘 살아 보세’, ‘할 수 있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이에 매진했던
시기다. 제2차 경제 계획에서 제4차 5개년 계획에 이르기까지 철강, 자동차, 화학
중심의 중화학 공업 정책에 더하여 기술 혁신, 능률 향상 등을 강조하는 계획 경제를
실행했다.
이러한 방대한 계획, 즉 농업 국가에서 산업 국가로 경제 체제를 바꾸는데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미국의 원조와 차관이 그 근간을 이루었고, 1965년 한·일
협정에 따른 보상금 및 차관, 1967년 월남 파병에 따라서 부수적으로 발생한 경제
효과, 1973년 오일 쇼크 이후의 중동 특수 등은 경제 계획을 현실화 하는데 주요
자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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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성장의 드라이브는 성공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근대화는 정치적 민주화를 제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내적으로는 근면, 자조, 협동을 내세운 새마을 운동을 1970년대에


전개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농촌 사회의 계몽 운동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빠르게
진행되는 도시화와 더불어 발생하는 도·농간의 소득 격차를 줄이는 운동으로서
역할을 했다.
경제 성장의 드라이브는 성공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박정희 대통령의 정권
말기인 1979년 현재로 국민소득은 1,600달러를 상회했고, 도시화와 함께 이루어진
경부 고속도로와 서울 지하철, 그린벨트 및 산림녹화 등은 당시의 근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근대화(modernization)가 산업화, 도시화 및 다른 사회적
변화를 통해서 개개인의 삶의 양식이 현대적인 모습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의미한
다면 박정희 정부에선 상당 부분 이를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는 정치적 민주화를 제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소위 개발 독재의 전형적인 경우에 해당된다. 결국 1979년 박정권에 반대하는
부마사태가 터졌고 그 진압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생을 마감했다.
뒤이은 전두환 정부는 12.12 군사 반란을 통해 신 군부가 세운 정부이다. 군부
독재를 통해 경제 성장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의 틀을 계승
하였다고 보겠다. 다만 전두환 정부에서는 기존의 국가 주도의 경제 정책을 상당
부분 자유 시장 경제에 맡겼다는 점에서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에는 국제적
으로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라는 3저 현상이 나타나 엄청난 경제호황을 누렸으며,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게임 유치까지 이루어져 국가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는 근대화와 더불어 형성된 국민들의 높은 민주화 의식,
그리고 이와 함께 등장한 정치참여에 대한 엄청난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한 채
오히려 이를 완전히 억누르고자 하는 철권정치를 펼쳐 나갔다. 이와 같은 노력은
모두 역사를 거스르는 무모한 행위에 불과했고 결국 군부 소수에 의한 권력독점
현상은 1987년 6월 민주시민 항쟁을 계기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10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3. 민주화

민주시민 항쟁은 당시 정부당의 대표였던 노태우로부터 대통령 직선개헌과


지방자치제의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이끌어 내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의 정치가 민주화되는 변곡점(inflection)이 되었다.
동년 12월 여야 합의에 의해 제정된 신헌법에 의거한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의
분열로 여당의 노태우 후보가 비교적 용이하게 당선되었다. 그러나 익년 4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역사상 최초로 여소 야대의 선거 결과가 나왔다. 이를 계기로
다수의 야당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를
조사하기 위한 청문회가 실시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두환 前대통령은 결국 국회
증언대에 서서 준비해 온 발표문을 낭독하는 것으로서 증언을 마쳤지만 그 파장은
컸다. 국회의 권한은 커지고 군부의 세력은 서서히 쇠퇴하여 노태우 대통령은
타협과 회유의 전략으로 국정 운영에 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노태우 정부는 군정에서 민정으로, 권위주의 정치에서 민주주의 정치로
이행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민주화의 본격적 추진은 김영삼 정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정부의 명칭도
문민정부라 칭하고 일차적으로 전두환, 노태우가 이끌던 군대내 사조직 하나회를
숙정 작업을 통해 일시에 해체시켰다.
집권한 해 8월 12일엔 극비리에 진행되어 왔던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이로써 지하 경제를 파헤치고, 정경유착에 의한 부정부패를 근절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함과 동시에 민주주의가 우리 생활에 정착할 수 있는 경제
질서를 만들어 나가게 된 것이다.
또한 이에 근거하여 전직 대통령들의 불법 비자금을 밝혀낼 수 있었고 그들을
법정에 세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결국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은 사법 처리되었고,
군사반란에 가담했던 자들 역시 모두 처벌되었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군에 의한
정치 개입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6.29선언은 우리나라 정치가


민주화되는 변곡점(inflection)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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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지방자치 단체장을 모두 국민 직선으로 선출하도록 함으로써 김영삼
정부는 문민 정부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그러나 그의 경제 관리능력은 그의 정치
능력에 크게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집권 말기 외환위기를 맞아 국가 경제가 부도
위기에 처하게 됨으로써 IMF에서 긴급 차관을 들여왔고, 이를 계기로 우리 경제는
IMF 관리 하에 운용되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1997년 말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라는 역사적 큰 획을 긋게 되었다. 이는 물론 우리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올려놓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정부의 명칭도 국민의 정부라 칭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의 경제를 IMF 체제에서 벗어나 선진 경제로 이끌고
가야 하는 과제와 이를 통해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어야 하는 과업을
안고 출발하였다.
시작은 금 모으기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1998년 1월부터 4월 말까지 했던
금 모으기 운동은 전 국민의 열광적인 호응 속에 진행되어 크게 성공했다. 이에
힘입어 정부는 기업, 금융, 정부, 노동 등 4대 분야에 대한 강력한 구조 조정을
실시하였다.
정부는 재벌의 부당 내부 거래 및 상호 출자 제한, 재벌의 금융 산업 지배 규제,
변칙 상속 규제 등을 실시하고, 5대 그룹의 계열사를 크게 축소할 뿐만 아니라, 주력
업종별로 계열을 재편하는 사업구조조정(빅딜)을 단행했다.
한편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부실 금융기관의 재무 구조 건전화, 퇴출 금융기관의
예금자 보호 등에 활용함으로써 금융기관의 건전성 확보, 실물 경제 회복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노사정위원회를 만들어 정리해고 등 노동시장의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은 좋은 결실로 이어져 2001년에는 기대했던 것보다 3년
앞당겨 IMF 관리 체제를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 개혁 과정에서
중산층과 서민들이 가장 큰 피해자로 등장했다. 이를 계기로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 개념을 도입하여 건강보험 통합, 국민연금 도시 자영업자 확대 적용, 국민기초
생활보장법 등의 실시를 통하여 국민 복지를 대폭 향상시키는 일을 했다.
김대중 정부는 소위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과의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고자
노력했다. 이로써 북한의 도발, 계속되는 핵실험을 막지는 못했지만 금강산 관광
사업, 개성공단사업 등을 성취하는 효과가 있었다. 집권 말기에는 측근들의 비리가
드러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는 우리경제의 내실화와 국민
복지의 향상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는데
기여했다.

12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노무현 대통령에 의한 참여정부는 시민 참여에 의한 민주주의의 내실화, 국가의
균형 발전 등을 국정 목표의 중심에 두고 출발하였다.
대통령 당선 직후 인수 위원회에 국민참여센터를 설치하여 수집된 여론을
정책화했고, 취임 후에는 청와대 비서실에 국민참여 수석실을 신설하여 여론을
제도적으로 수렴함으로써 시민 참여를 통한 민주주의의 내실화를 추구했다.
2004년 3월에 국회에서는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을 개정하여 선거
공영제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유능한 인재가 선거비용 때문에 출마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게 하였다. 또한 선거 시의 비용 지출을 투명화하고 심지어는 유권자도
향응을 받은 경우 그 금액의 50배를 배상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정치자금법을
개정하여 법인이나 단체의 기부 행위를 금지시켰고 소액 다수 후원회 제도를 활성화
시켰다. 이로써 소위 금권, 관권 선거를 퇴출시키는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한편 국가균형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신행정 수도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는
2003년 지방과 수도권의 통합을 촉진시키는 차원에서 강력히 추진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행정중심 복합도시 건설을 확정하여 오늘의 세종시를 건설하게 되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국정운영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에서
표결을 통해 대통령이 탄핵 가결되는 일도 있었고, 또한 노무현 대통령 퇴임 후에는
친인척 비리가 터지고 이와 관련하여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수사를 받는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라 할 수 있는 시민들의 직접 정치
참여, 공정한 선거 룰에 의한 투표 참여 등 참여정치를 제도화한 점은 우리의 민주
주의를 또 다시 한 단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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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진화

우리나라는 건국 후 소위 신생국, 개발도상국가 또는 저개발국 등으로 분류


되었고, 실제로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중의 하나였다. 박정희 정부시절의
근대화 정책에 힘입어 가난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정권 말에는 아시아의
‘네마리의 용’ 중의 하나라는 별칭과 함께 신흥공업국으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1996년에는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10,000달러가 넘어서면서 김영삼
정부는 대부분 선진국들로 구성된 OECD 회원국에 가입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 그 뒤에 불어닥친 IMF 한파로 우리 경제는 곤두박질했고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멀어지기만 했다.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경제 위기가
극복된 가운데 세계경제의 호황에 힘입어 노무현 정부 말에는 국민소득 20,000달러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것도 경제의 내실화나 국민의 삶의 질적인 면에서 선진
국의 모습을 갖추었다 하기 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선진화’를 핵심 선거 공약으로 해서 출마한 야당 후보 이명박은 ‘민주화’를
내세운 정동영 후보를 대통령 선거사상 가장 큰 표차로 승리했다. 그러나 집권 초
불어 닥친 미국발 금융 위기는 세계의 경제를 크게 위축시켰고 우리의 경제도 크게
흔들렸다. 이에 더하여 그 후에 나타난 소위 그리스발 글로벌 재정 위기는 모든
선진국들의 신용등급을 일제히 하강시킬 만큼의 충격을 주었다.
‘선진일류국가의 건설’이라는 국정 목표를 내걸었던 이명박 정부는 집권 초기
쇠고기 파동을 경험했고, 뒤 이은 금융 위기 극복에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청와대의 비상경제상황실에서 대통령 주재로 거의 매주 위기관리회의를
개최하고 신속히 정책 결정에 임했는데 이는 결국 집권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기업인들 그리고 사회 각계각층에서도 빠르게 세계 변화에 대응했다.

14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이와 같은 범세계적 경제 위기에 대한 민첩하고도 치밀한 민관 대처는 결과적
으로 우리나라를 빠르게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2008년 금융
위기로 모든 선진국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가운데 유독 플러스 경제
성장한 나라는 OECD 국가 중 한국을 포함한 3개국이 전부였다. 2012년에 발표된
세계의 각국에 대한 신용 등급에서는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이 하향 조정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평가3사에서 모두
평가 등급을 상향 조정했고, 그 가운데 피치와 같은 평가기관은 우리나라를 일본
보다도 한 단계 높여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세계 속의 한국의 위상은 높아졌고 영향력 또한 커진 것이 사실
이라 하겠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고자 세계 경제 컨트롤 타워로서 G-20 회의가
조직되었는데 2010년에는 의장국의 자격으로 우리나라가 이를 주최했다. 2년 후
에는 핵안보 정상회의도 서울에서 개최했다.
2010년에 우리나라는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회원국으로 가입하여,
원조수혜국에서 원조공여국으로 전환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2012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이상에 인구 5천만 이상의 국가, 즉 큰 규모의 선진국을
의미하는 20-50 국가군에 세계 7번째로 포함되었다.
그런데 선진화란 경제분야만으로 평가될 일이 아니다. 외형적으로 나타난
경제적인 면 외에도 국민 생활면에서의 선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명박 정부
에서는 집권 이전부터 등장한 기후변화에 관심을 집중했다. 기후 온난화의 주범이라
알려진 석탄, 석유 등 에너지를 활용한 무분별한 각종 개발 사업, 그 후유증으로
나타난 공해 문제 등이 환경을 파괴하고 인간 생활을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을
중시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야기되는 물 부족 현상 등에서 우리나라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고 보았다. 집권 후 이의 해결책의 일환으로 내 놓은 것이 저탄소 녹색
성장 정책과 4대강 사업이라고 하겠다. 녹색성장 정책은 이에 관한 법제정과 함께
정책 기반을 마련하였고 4대강 사업은 2년 동안에 완료되었다. 양 정책의 효과는
시간을 두고 판별할 일이지만 특히 녹색성장 정책은 우리나라가 대부분의 선진국
들에 앞서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2008년 금융 위기로 모든 선진국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가운데 유독 플러스 경제 성장한 나라는
OECD 국가 중 한국을 포함한 3개국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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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화는 결국 국민들의 삶이 기존 선진국 국민들의 삶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에서 유사성을 띠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우리나라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다. 문화를 포함한 국민 생활과 국민 복지의 선진화, 기업 관행의 선진화,
국가 경영에 있어서의 선진화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들의
성숙도가 아직도 낮은 편이며, 긴 시간과 많은 노력이 요구되는 부문들이기도
하다. 이를 위한 국가적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 되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맺는 말. 통일 선진국을 향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에서 근대화, 민주화, 선진화의 과정에서 그 변화의 고비마다


우리의 정부는 중심에 있었고 관리자의 역할을 해 왔다. 지금의 시점에선 우리 민족의
비극인 분단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통일 선진국으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다. 이는 우리의 현대사에서 지금까지 극복해 온 그 어느
단계보다 더 어려운 발전의 최종 단계라 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통일 대박’이라는
정책 목표를 세워 놓았다. 이를 실천에 옮기려면 우선 대내적으로 통일 접근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고 북한과도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함께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변 강대국들과도 이해를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다. 정부로서의 탁월한 리더십이 필요하며, 합의된 국민적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은 이를 위해 매진해야 할 시기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에서 근대화, 민주화, 선진화의 과정에서


그 변화의 고비마다 우리의 정부는 중심에 있었고
관리자의 역할을 해 왔다.

16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전문가
칼럼

행정통계로 본 광복 70년
(정부통계행정의 변천사)
前 통계교육원장 최봉호

광복 70년과 인사행정
이화여자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이근주

광복 70년과 지방행정계층
및 구역의 변화
중앙대학교 공공인재학부 교수 홍준현

한국 복지행정의
변화와 발전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양재진

T h e K o r e a I n s tit u t e o f P u b l i c A d m i n i s t r a ti o n
전문가
칼럼

행정통계로 본 광복 70년
(정부통계행정의 변천사)1

T h e K o r e a I n s tit u t e o f P u b l i c A d m i n i s t r a ti o n

최근 행정에서의 큰 변화라고 한다면, 개인 또는 조직의 실적평가가 투입 또는


과정 중심에서 성과(결과) 중심의 평가제도로 바뀐 일이 될 것이다. 특히, 1990년
대 초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개발되어 민간 기업에서 많이 도입되었던 균형
성과표(Balanced Scorecard, BSC)에 의한 평가방법이 2000년대 후반에 거의 전
부처로 확산된 것이 성과중심의 평가제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균형성과표에 의한
평가의 핵심은 공급자 위주로 이루어졌던 종전의 행정이 이제는 수요자(고객) 중심
前 통계교육원장2
으로 바뀌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최봉호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안전행정부에서는 2005년에(근거기반) ‘정책품질관리
제도’를 도입하였고, 이를 통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통계청은 2007년에 통
계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통계기반 정책관리제도’를 도입·시행하기에 이르렀다.
‘통계기반 정책관리제도’란 각 부처가 법령의 제정/개정을 통해 시행하는 정책에
필요한 통계지표를 구비하도록 유도하는 제도이다. 즉, 각 부처가 법령의 제정/개
정을 위해 입법예고를 하면서 통계청에 평가요청을 할 때, 통계청은 정책별로 필
요한 통계지표를 제시하고 적합성을 판단해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제도이다.

계량화된 수치를 바탕으로 면밀하게 이뤄져야하기 때문에


그만큼 행정에서 통계의 역할이 커졌다고 할 수 있다.
1 이 글은 “유홍림·김경태, 우리나라
통계행정 60년: 제도적 변천과 주요
활동, 한국조직학회보, 제5권 제2호”
논문에서 상당부분이 참조되어 작성
되었음을 밝힙니다.
2 통계청 공로연수 중

18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그림 1] 정책품질관리제도와 통계기반 정책관리제도

정책구상 문제 현황
인식 분석
목표
설정
대안 대안
정책확정 발굴 분석
대안
선택
중간
집행 시행
평가
보완 후
시행
사후
평가 평가

통계생산 프로세스 통계의 활용


통계
- 조사통계
수요
기획 → 조사 → - 보고통계
분석/가공 → 공표 - 가공통계

이제는 행정도 즉흥적 또는 감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량화된 수치를


바탕으로 면밀하게 이뤄져야하기 때문에 그만큼 행정에서 통계의 역할이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광복 후 70년 동안 통계행정이 걸어왔던 길을 살펴보
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겠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3년간은 미군
정기로서, 사람은 넘치되 생활은 쪼들렸고, 경제적인 생산력이나 공급물량은 절대
부족했고, 사회나 국가를 제대로 경영할 사람도 절대 부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미군정청은 통계조직을 만들었는데, 1946년 3월 29일 군정청 통치기구를 부
처제로 전환하면서 서무처에 국(局) 수준인 통계서(統計署)를 설치한 것이다. 통계
서에는 통계관실과 서무, 인구정태, 인구동태, 가계, 노동력 등 5개 과에 약 800명
의 직원을 두었다.
이 조직은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1원(심계), 2위원회(고시 및 감찰), 국무
원 11개 부 및 4개 처(총무, 법제, 기획, 공보) 중 공보처 내의 통계국으로 바뀌게
되었다. 당시 통계국에는 통계관실과 서무, 기획, 국세(國勢)조사 및 인구조사의 4
개 과를 두었고, 직원은 약 1,000명 정도였다. 이를 계기로 미군정 시절 보건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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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는 우리나라 경제가 미국의 대외원조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다른 부문도 유사한 과정을 거쳤겠지만, 통계시스템의 개선 노력은
주로 ‘주한통계고문단’에 의해 주도가 되었다.

부가 담당하고 있던 인구동태조사가 통계국으로 이관되었다. 그 후 통계국 조직은


1950년 3월 직제개정으로 종전의 통계관실과 서무과가 폐지됨으로써 3개과로 축
소되고 직원 수도 600명 수준으로 줄었다. 한편, 통계국외에 다른 원, 부, 처 등 각
기관에도 총무과나 서무과 또는 문서과 내에 통계담당을 두고 소관업무와 관련된
행정통계를 담당토록 하였다. 민간부문에서는 1950년 5월에 한국은행법의 제정으
로 신설된 한국은행이 조선은행의 업무를 이어 받았고, 금융·재정에 관한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조사와 통계를 담당하는 조사부를 설치하였다.
이 당시의 주요 통계활동 중의 하나는 1949년 5월 1일 기준으로 총인구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의 6.25 동란으로 인해 특성별 인구현황은 집계하
지 못하고, 단지 도별 총인구수 정도를 파악하는데 그쳤다. 즉, 1949년 5월 1일 기
준 남한 인구는 20,188,641명(미군 제외 외국인 21,885명 포함)으로 집계되었다.
이외 출생, 사망 등에 대한 인구동태조사는 ‘인구동태조사령’을 근거로 1948년부터
조사되었다. 그리고 1950년부터는 서울 거주 120 근로자 가구를 대상으로 생계비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산업시설 및 근로실태조사, 자원 및 생산량조사, 정부기관
형태조사, 주택조사 등도 실시되었다.
이밖에 농업통계는 농림부직제에 의하여 장관비서실 조사통계과에서 경지면
적, 농가호구 수 등 농업기본통계를 담당하였으며, 농정과에서는 식량작물 생산량
을, 그리고 축정과에서는 가축통계를 담당하였다. 이와 함께 민간기관인 한국은행
에서는 금융, 물가, 임금관련 통계들을 중점적으로 작성하였다.
또한 통계부문에서 국제 활동도 처음 시작하게 되었다. 1952년의 경우에는 외
국으로의 출장이나 연수 받는 것이 매우 어려웠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통계부문
에서 모두 네 건의 해외출장이 있었다. 당시 상공부 수산국 제조과장이 FAO의 비
용부담으로 태국 방콕에서 6주간 개최된 ‘어업통계회의’에, 공보처 통계국의 인구
조사과장은 당시 ECAFE(현재 ESCAP)의 비용부담으로 일본에서 2개월 동안 개최
된 ‘인구 및 건강 통계 강습회’를, 농림부 농정국 및 경상북도 농무과에서 근무하는
기좌 2명은 FAO 비용부담으로 태국 방콕에서 6개월 동안 개최된 ‘농업통계 표본

20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방법 강습회’에 참가를 하였다. 그리고 공보처 통계국 기획과장과 한국은행 조사부
및 식산은행 조사부에서 근무하는 차장 2명은 1952년 9월 1일부터 9월 13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개최되었던 ECAFE 주관 “제2차 ECAFE 지역 통계 회의”에 정부대
표로 참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우리나라의 통계활동은 6.25 동란을 거치면서 일시 위축되었으나, 전후
부흥기인 1955년 2월에 정부조직이 바뀌면서 공보처 통계국이 내무부로 이관되었
다. 그러나 인원수는 600명에서 400명 선으로 줄어들었고, 그나마도 1957년 내무
부의 직제개정으로 통계인원은 정규직 58명과 임시직 195명 합계 253명으로 대폭
축소가 되었다. 이는 당시 정부의 재정적 어려움에 따른 정부기구 축소방침에 따
른 것으로 이해된다.
이 당시는 우리나라 경제가 미국의 대외원조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다른 부문도 유사한 과정을 거쳤겠지만, 통계시스템의 개선 노력은 주로 ‘주한통
계고문단’에 의해 주도가 되었다. 이 ‘주한통계고문단’은 미국 대외원조처(ICA)의
요청과 지원으로 스튜어트 라이스(Stuart A. Rice, 1899~1969)3 박사를 단장으로
3 라이스 박사는 1933년부터 1955년
1958년부터 5년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주한통계고문단’의 주 까지 미국 센서스국(통계청)에서 고
위직을 거쳤고, 정부에서 은퇴 후에
된 활동은 우리나라의 1960년 인구주택센서스 실시를 지원하였고, 국가통계 제도 는 조사 및 연구 회사(Survey & Re-
search Corporation)를 차려 1965년
및 발전에 대한 개선보고서를 마련하여 정부에 제출한 것이었다. 까지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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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1월의 첫 보고서에서 한국에서는 정부의 통계들이 각각의 기관에 따
라 중복적이고 일관되지 않게 작성되고 있으며, 따라서 중앙 정부의 강력한 권한
하에 ‘내무부 통계국이 각종 표본조사 및 센서스(인구·주택·농업)를 집중화하여
전담해야 한다’라고 건의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보고서들을 토대로 라이스박사의 주
한통계고문단은 그 후 한국의 통계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즉,
1962년 1월 15일 통계법이 제정되고, 통계국이 내무부에서 경제기획원으로 이관
되고, 각 부처에도 통계담당조직이 설치되고, 통계전담요원을 채용하고, 지정통계
항목이 설정되고, 민간의 자료를 국가가 획득할 수 있는 통계조사 권한을 갖게 되
는 것이다.
또한 통계위원회가 설치되고, 1962년에 확률표본 조사방식이 채택되고, 1963
년 3월에 대한통계협회라는 단체가 설립되고, 그리고 1962~1966년간 5개 대학교
에 통계학과가 창설된 것도 주한통계고문단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4. 이외 1963
년 3월 1일자로 한국표준산업분류를 제정하게 된 것도 주한통계고문단의 건의한
바에 따른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통계발전에 한 획을 그은 라이스 박사의
공로를 인정하여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3년 5월 10일에 개최된 제40회 내각 회
의의 의결을 거쳐 훈장을 수여한 바 있다. 라이스 박사 이외에도 외국의 여러 통계
4 1962년 동국대에 자연계로, 1963년
고려대에, 1964년 고려대 및 중앙대 전문가들이 우리나라 통계발전을 위하여 간헐적으로나마 꾸준히 기여를 하였다.
에, 1966년 연세대에 상경계열학과
로 통계학과가 처음으로 설치되었 1958년에는 미국인 ‘질라트(R. L. Gillatt)’씨가 당시 농림부 농업국의 농업통계 고
다. 그러다가 1971년 12월에는 한국
통계학회가 창립되기에 이르렀다. 문으로 임명되어 활동한 바 있다.

대외원조 의존시기를 지나고 본격적인


경제개발 시대를 맞이하여 통계국은
1963년 조사통계국으로 독립을 하였다.

22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1975년에는 과의 수가 10개로 늘어남과 동시에
8개 시·도에 지방통계사무소 조직을 갖추게 되어
조사통계국이 중앙통계기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한편 내무부 통계국외 타 부처의 통계활동으로는 농림부의 경우 과수준의 통


계업무가 지속되었고, 보건사회부에는 1961년 노동통계과가 신설되었으며, 상공
부에서는 조사과를 두어 수출입관련 통계와 산업생산에 관한 행정보고통계를 작성
하였다. 그밖에 문교부, 법무부, 교통부, 체신부 등에서도 필요한 통계를 행정보고
를 통해 수집·작성하였고, 서울·부산을 비롯해 각 도(道)에서도 상주인구조사를
비롯한 각종 조사와 행정보고통계를 생산하였다. 또한 한국은행에서는 전쟁시 중
단된 통계업무를 복원하기 위하여 1953년 산업조사과를 신설함과 동시에 기본적
인 산업조사에 착수하였고, 국민소득, 금융, 재정 등 경제 전반에 걸친 각종 통계
계열자료를 정비하였다.
이와 같은 대외원조 의존시기를 지나고 본격적인 경제개발 시대를 맞이하여
1961년 통계국은 내무부로부터 경제기획원으로 이관되었고, 1963년 12월에는 외
국(外局)인 조사통계국으로 독립을 하였다. 이후 1975년에는 과의 수가 10개로 늘
어남과 동시에 8개 시·도에 지방통계사무소 조직을 갖추게 되어 조사통계국이 중
앙통계기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농림업통계도 1971년에 기구가 과 수
준에서 국 수준으로 확대되면서 본부의 정원이 79명으로 늘었고, 그 동안 잡급직
신분이었던 조사요원 2,208명 중 1,349명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신분의 안정성
을 강화시켰다. 지방에서도 지역통계의 활성화를 위해 1968년 각 시·도의 통계계
를 통계과로 승격시켰으며 각 시·군에도 통계전담계를 신설하는 등의 노력이 있
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새로운 통계들이 개발되었다. 주민등록제도의
정비에 따른 인구이동통계, 과학적인 표본추출법에 따른 분기별 경제활동인구
조사(1962년) 및 농업기본통계조사(1968년), 임금기본조사(1966년), 어업생산조
사(1970)등이 조사통계국 및 각 부처의 통계담당조직에서 개발한 사례가 된다.
한편, 한국산업은행은 독자적으로 광공업생산량조사를 조사통계국과 공동으로는
광공업센서스를, 한국은행은 경제기획원 및 상공부와 공동으로 상업센서스를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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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였다. 1969년에는 한국은행, 한국산업은행, 중소기업은행, 경제기획원 조사통
계국은 공동으로 국민경제의 자산규모를 파악하는 국부(國富)통계조사를 실시하
였다. 특히, 1970년대는 1960년대의 생산물량 통계에서 동태, 수주착공, 이동, 계
층 같은 부문별 통계, 유통부문 통계 등 세분된 통계와 경기나 사회분야의 통계를
개발하여 작성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볼 때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정부통계가
양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정부통계가 양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그 후 1980년대에도 계속 이
어졌다. 그러다가 1990년 12월 30일자로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이 경제기획원 외
청인 통계청(1급 기관장)으로 승격하게 되어 청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우리나라는 1991년 9월 UN에의 가입, 1995년 12월 IMF에의 ‘데이터 공표기준’에
의 가입, 1996년 11월 OECD에의 가입, 1997년 12월 ILO의 ‘노동통계에 관한 협약’
비준 등을 거치면서 통계를 보는 시각이 국내적인 면에서 국제적으로 넓게 보게끔
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통계의 국제기준에의 부합성, 사전공표일정의 제시, 통
계의 품질관리, 통계작성의 전문성과 독립성 측면 등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변화에 따라, 1991년 9월에는 통계청의 소속기관으로 통계교육원
이, 2005년 7월에는 통계개발원이 설립되었고 그리고 통계청도 차관급 청으로 승
격되었다. 2007년에는 ‘통계기반 정책관리제도’까지 도입되어 중앙통계기관으로
서의 자리매김이 확실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나라의 통계수준은 양적으로나 질적
으로 거의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왔다고 할 수 있다. 공식통계를 만드는 기관만 해
도 390개나 되고, 이들 기관이 작성하는 승인 통계수도 935종이나 되고 있다.

[표 1] 우리나라의 통계작성기관 수 및 작성통계 수(2015년 1월 1일 기준)

작성방법
작성기관 수 작성통계 수
조사 보고 가공
통계청 1 58 41 2 15
중앙 부처 42 282 129 137 16
지자체 260 428 140 261 27
금융기관, 공사 등 87 167 104 44 29
계 390 935 414 444 77

이와 같이 발전된 통계인프라를 이용하여 우리나라는 과거에 통계기술 지원을


받았던 입장에서 해외개발원조(ODA) 사업을 통해 통계기술 제공국으로의 전환에
도 힘쓰고 있다. 특히, 2010년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가입을 계기로 우리나
라는 원조 받았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발돋움한 OECD 최초의 국가가 되었
는데, 통계부문도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08년 이후 2014년

24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까지 이집트,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몽고, 가나, 베트남, 카자
흐스탄, 미얀마, 스리랑카, 콩고 민주공화국, 에쿠아도르 등의 통계청에 통계기술
및 인적역량강화를 위한 프로젝트를 수행한 바 있다.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통계 선진행정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통계인들은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더 한층 전문성과 협업 정신을 살려 수
요자가 원하는 통계를 정확하며 시의성 있게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2015. 03 | VOL.12 | SPRING 25


전문가
칼럼

광복 70년과 인사행정

T h e K o r e a I n s tit u t e o f P u b l i c A d m i n i s t r a ti o n

올해는 해방 70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70년 동안 대한민국은 식민 수탈에 이


은 6.25전쟁의 빈곤국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후진국을 지원하는 ODA 공여국이 되
었다.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사례라고 한다. 같은 기간 동안 우리나라의 행정도
경제 사회적 성장의 원인과 결과로 많은 변화와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 중에서도
인사행정은 정치의 변화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이근주 1. 중앙인사조직의 발전

2015년 현재 국무총리실 산하 인사혁신처가 대한민국 정부의 중앙인사기구 역


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중앙인사조직은 정치적 격변의 물
결과 함께 빈번하게 변화였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끝난 1948년 대한민국의 첫 번째 법률(법률 제1호)인 정부
조직법이 제정되면서 탄생한 대통령 직속의 고시위원회와 국무총리 소속의 인사국
이 공무원 인사를 담당하는 최초의 조직이다. 대통령 직속의 고시위원회는 고등고
시와 보통고시를 통하여 공무원을 충원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국무총리 소속의
인사국은 고시위원회가 수행하는 기능을 제외한 공무원에 대한 인사관리를 수행하
였다.
하지만 이 체제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1955년 정부조직법이 개정되면서 첫 번
째로 개편되었다. 사사오입개헌으로 알려진 헌법개정이후 정부기구간소화 정책
을 반영한 것이어서 인사조직도 그 위상과 규모가 매우 축소되었다. 즉, 대통령 직
속의 고시위원회, 국무총리 산하 총무처 인사국이 폐지되고 두 기관에서 수행하
던 인사기능을 국무원 사무국의 고시과와 인사과 등 두 개의 과에서 수행하게 되었

26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다. 대통령 직속 조직과 국단위 조직에서 수행하던 기능을 1급 공무원을 장으로 하
는 사무국의 두 개 과에서 수행하도록 한 것이다.
대폭적으로 축소된 인사조직은 5년 후 1960년대 초반에 다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960년 의원내각제인 제2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인사조직은 국무원 사무처
의 인사국으로 승격된다. 동시에 인사책임자를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여 인사책임
자가 국가의 최고의사결정기구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바로 다음해인 1961년 7
월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국무원 사무처는 내각 사무처로 명칭이 바뀐다. 그로부
터 2년 후인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다시 중앙인사기구인
내각 사무처는 총무처로 개편된다. 총무처는 대통령의 통제를 받을 총무처 장관이
단독으로 관리하는 비독립단독형 기관으로 소청심사위원회와 인사위원회를 포함
하는 조직으로 설계되었다. 1963년 설치된 총무처는 이후 1998년까지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의 제5공화국, 노태우 대통령의 제6공화국 그리고 김영
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까지 모두 4명의 대통령이 통치하는 기간 동안 위상과 기능
을 안정적으로 유지하였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가 집권한 1998년 이후부터 중앙인사조직은 집권하는 대통
령마다 중앙인사조직을 개편하면서 다시 한 번 변화의 시기를 경험하였다. 1998년
정부조직법 개편으로 총무처와 내무부가 통합되면서 행정자치부가 탄생하였고 행
정자치부 내에 인사행정 전담기구로 인사국과 행정관리국 그리고 소청심사위원회
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바로 이듬해인 1999년 대통령 소속의 심의·의결기구로 중

대한민국은 식민 수탈에 이은
6.25전쟁의 빈곤국에서 시작하여
50여년 만에 후진국을 지원하는
ODA 공여국이 되었다.

2015. 03 | VOL.12 | SPRING 27


앙인사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중앙인사기구가 행정자치부와 중앙인사위원회의 이원
체제로 개편된다. 인사정책을 수립하고 인사행정 분야의 개혁 업무를 담당하는 중
지난 70년간의 앙인사위원회는 40년 가까이 큰 변화 없이 유지된 인사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다양
중앙인사기구의 한 정책 아이디어를 연구하고 제안하였다. 5년 후인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변화는 정치적 하면서 행정자치부와 중앙인사위원회로 분리되어 있던 중앙인사기능을 대통령 소


속의 합의형 기관인 중앙인사위원회로 통합하여 중앙인사기관으로 정하여 행정기
변화와 그 맥을
능의 대부분이 중앙인사위원회로 이관되었다. 이 시기의 중앙인사위원회는 대통
같이하고 있다.
령이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어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인사개혁을 제안하
고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현재 인사제도의 기본적인 틀과 대부분의 제도가 이 시
기에 제안되고 법제화되었다. 하지만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으로 인사조직
은 다시 한 번 축소된다. 중앙인사위원회를 폐지하고 신설된 행정안전부에 인사기
능을 통합하여 인사업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던 조직에서 일반행정, 지방자치, 전
자정부 및 국민안전 등 다수의 이질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조직의 일부로 인사기능
이 포함된다. 그리고 2012년 박근혜 정부로 바뀌고 세월호 사건의 발발로 인한 정
부조직개편과 함께 2014년 11월 국무총리 소속 인사혁신처가 신설되어 지금에 이
르고 있다.
지난 70년간의 중앙인사기구의 변화는 정치적 변화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해방이후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절, 정권과 정치체제가 바뀔 때마다 중앙인사
기구도 그 모습과 위상을 변화시켰다. 1960년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정권의 변
화가 없거나 같은 정치적 배경을 갖고 있는 대통령이 집권하는 기간 동안 총무처는
큰 변화 없이 안정적으로 그 위상과 기능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
후 진정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중앙인사기구는 또다시 격변기에 들어선다.

28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이념적인 지향이 다른 대통령들이 번갈아 집권하면서 중앙인사기구도 중앙인사위
원회와 같이 민주성을 추구하는 조직과 행정안전부 등 효율성을 추구하는 조직으
로 번갈아가면서 선택된 것이다.

2. 공무원 규모와 구성의 다양성

공무원의 규모와 구성도 중앙인사기관 만큼이나 사회 변화와 그 맥을 같이 한


다. 우선 전체적인 규모에서 볼 때 1953년 23만 명 정도였던 공무원 규모가 2013
년에는 약 99만 8천명으로 약 4.5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그림 1] 참조). 인구
대비 공무원 비중으로 환산하면 해방 이후 약 11%에서 2000년 이후에는 약 21%로
약 두배 증가한 것이다1. 전체적으로 지속적인 규모와 비중의 증가는 경제발전과
그로 인한 행정서비스에 대한 사회적인 수요 증가를 반영하는 결과이다. 전체적
으로 증가세를 보였지만 일부 시기에는 단기적으로 공무원 수의 감소현상이 있었
다. 첫 번째 감소는 1957년이다. 1955년 정부기구 간소화로 인한 정부조직 개편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두 번째 모습은 1980년대 초반이다. 전두환 정부 시절로 수
차례의 ‘숙정’과정을 거치면서 공무원 규모가 감축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감소는
1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해방 이후 우
1999년쯤이다. 이 시기는 IMF경제위기시기로 김대중 정부가 3차례에 걸친 정부조 리나라 인구는 약 2천만 명 정도였
으며 최근의 인구는 4천 8백만 명 정
직개혁을 통하여 약 6만 명의 공무원을 단기간에 감축하였다. 도로 집계되고 있다.

[그림 1] 대한민국 공무원 수 변화(1953년-2012년)

1,000,000

900,000

800,000

700,000

600,000

500,000

400,000

300,000

200,000

100,000

0
03
05
07
09
53
55

71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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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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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57
59
61
63
65
67
69

87
89
91
93
95
97
99
01

13
11
20
20
20
20
20
20
20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자료 : 통계청 한국통계연감, 행정자치부 정부조직통계, 행정자치부 통계연보 등 참조

2015. 03 | VOL.12 | SPRING 29


공무원 수의 변화에서 주의깊게 살펴볼 부분은 공무원 구성의 다양성이 커졌
다는 것이며 그 가운데는 여성공무원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다. 여성공무원은 1970
년대 초반 5만 명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으로 전체 공무원 중 15%정도를 차지하였
다. 이후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사회 참여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환경적
변화와 함께 1990년대 이후 여성공무원의 채용을 촉진하는 정책적 노력의 결과 여
성공무원의 규모가 2011년에는 42만 명, 전체 공무원 대비한 비중이 42%정도로
대폭적으로 증가하였다. 이 수치는 같은 기간 전체 공무원 수가 약 43만 명에서 98
만 명으로 약 1.2배 밖에 늘지 않은 것과 비교해볼 때 엄청난 증가이다. 특히, 우리
나라 사회가 전통적으로 남성 우위의 사회적 구조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공무
원의 성장은 그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림 2] 여성공무원 수 변화(1974년-2012년)

450000

400000

350000

300000

250000

200000

150000

100000

50000

0
20 0

20 2
20 3
20 4
20 5
20 6
20 7
20 8
20 9
19 5

19 7
19 8
19 9
19 0
19 1
19 2
19 3
19 4
19 5
19 6
19 7
19 8
19 9
19 0
19 1
19 2
19 3
19 4
19 5
19 6
19 7
19 8
20 9

20 1

12
20 1
19 6
19 4

10
0
0
0
0
0
0
0
0
0
0

1
7
7
7
7
7
7
8
8
8
8
8
8
8
8
8
8
9
9
9
9
9
9
9
9
9
9

20
19

자료 : 통계청 한국통계연감, 행정자치부 정부조직통계, 행정자치부 통계연보 등 참조

공무원 구성의 다양성은 장애인 공무원의 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91년


장애인 고용을 법제화한 이후 장애인 고용도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제도 도입
초기인 1990년대 초반에는 공공부문에 고용된 장애인의 수는 1,500명 정도로 전체
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0.5%에 그쳤다. 최근 들어서는 공공부분 장애인 고용의 규
모가 3만 명을 넘고 전체에서 차지는 비율도 약 2.2%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전
체 고용 가능한 장애인 규모를 생각해보면 아직도 낮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30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그림 3] 장애인 공무원 수 변화(1990년-2012년)

30000

25000

20000

15000

10000

5000

0
00

02

03

04

05

06

07

08

0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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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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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1
9

20

20

20

20

20

20

20

20

20

20

20

20

20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자료 : 통계청 한국통계연감, 장애인통계 등 참조

3. 소결

지난 70년 동안 인사행정은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였다.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조직, 공무원의 수와 구성의 모든 측면에서 지난 70년은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으
로 차원이 다른 변화와 혁신의 시절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해방 직후에는 예상도
못했던 것들이다. 대부분의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왔으며 또 예고도 없이 또 다
른 변화와 혁신으로 대체되었다. 많은 굴곡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인사행정은
분명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하였다. 앞으로 또 다른 70년이 인사행정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궁금하다.

2015. 03 | VOL.12 | SPRING 31


전문가
칼럼

광복 70년과 지방행정계층
및 구역의 변화
T h e K o r e a I n s tit u t e o f P u b l i c A d m i n i s t r a ti o n

1. 개관

1945년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배에서 해방되고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헌


법이 제정되어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제헌헌법은 제8장에 지방자치를 규정
하여 지방자치제를 도입하였으며, 이에 따라 지방행정의 기본틀을 구성하는 지방
행정의 구조는 1948년 11월 17일에 제정된 「지방행정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처음
중앙대학교
규정되었다. 이후 1949년 7월 4일에 지방자치법이 제정되었고, 1961년 9월 1일에
공공인재학부 교수
홍준현 는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 1962년 1월 27일에는 「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 그밖에 직할시 설치에 관한 여러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1972
년 유신헌법 제정에 따라 지방자치는 조국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유보되고, 다시
1980년 헌법 개정에서 지방의회의 재정자립도를 감안하여 순차적으로 구성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암흑기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 1988년 헌법 개정으로 지방자치
제가 부활됨에 따라 1988년 4월 6일 지방자치법이 개정되고, 「서울특별시 행정특
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지방행정구조가 새롭게 정비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지방행정계층의 변화

1948년 11월 17일에 제정된 「지방행정에 관한 임시조치법」에서는 지방행정계


층을 시, 도, 구, 부, 군, 도서(경찰서, 소방서), 읍면으로 나누고 있었고, 1949년 7
월 4일 지방자치법이 제정됨으로써 지방행정계층구조가 본격적으로 확정되었다.
이 때 지방자치단체는 광역계층으로 도와 서울특별시를, 기초계층으로 시, 읍, 면
을 설치하였으며, 종전의 부를 시로 개칭하는 이외에는 모두 종전의 체제를 답습

32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함으로써 사실상 조선시대의 것이 큰 변경 없이 계승되었다. 자치단체장의 경우
도지사와 서울특별시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시장, 읍장, 면장은 각각 해당 의회
에서 선출하도록 하여 주민직선의 체제는 아니었다. 그밖에 도에는 군을, 서울특
별시와 인구 50만 이상 시에는 구를 설치하도록 하였고, 시, 읍, 면, 구에는 동과
리를 두도록 하였다. 이 때 군수와 구청장은 임명제였으나, 동리장은 주민직선으
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중층의 지방자치단체 계층구조는 한동안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다
만 1958년 12월 26일 개정된 지방자치법에서 시읍면장과 동리장의 주민직선제를
임명제로 전환한 것은 주민자치적 측면에서 일정부분 후퇴한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그러나 1960년 11월 1일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도지사, 서울특별시장, 시장, 읍
장, 면장, 동리장 모두에 대해 주민직선제가 전격적으로 도입되었다.
1961년 9월 1일 제정된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으로 지방행정계층구조
는 크게 변화를 겪게 되었다. 도와 서울특별시가 광역계층인 것은 변화가 없으나,
기초계층은 기존의 시, 읍, 면 대신 시와 군으로 변경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읍과
면은 군의 보조기관으로 격하되었으며, 읍면장, 동리장은 모두 임명제로 전환되었
다. 또한 의회의결사항에 따라 도와 서울특별시는 내무부장관의, 시와 군은 도지
사의 승인사항으로 대체되어 사실상 지방자치는 폐지되어버렸다. 이후 1973년 3

1988년 헌법 개정으로 지방자치제가 부활되고, 「서울특별시 행정특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지방행정구조가 새롭게 정비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5. 03 | VOL.12 | SPRING 33


월 12일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개정되어 부산시가 광역계층으로 신설되
었으며, 인구 100만 이상의 대도시가 증가함에 따라 1981년 4월 4일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개정하여 광역계층의 종류를 도와 서울특별시 및 직할시로 변
경하였다.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은 1988년 4월 6일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폐지되
었으며, 개정된 지방자치법에서 지방행정계층구조는 광역계층으로 특별시, 직할
시, 도, 그리고 기초계층으로 시, 군, 구(특별시와 직할시 관할하의 구에 한함)로
대별되는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그러나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으로 금지되
어 있던 주민 직선에 의한 의회 구성과 자치단체장 선출의 효력이 부활되어 지방
자치가 명실상부하게 부활될 수 있었다. 또한 1994년 12월 20일 지방자치법 개정
으로 직할시라는 명칭이 지방자치에 보다 적합한 광역시라는 명칭으로 개칭되었으
며, 광역시 산하에 군을 기초자치단체로 둘 수 있도록 하였다.
2006년 1월 11일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지방행정계층구조는 광역계층에 특별
자치도가 포함되게 되어 제주도가 제주특별자치도로 출범하게 되었다. 특히 2006
년 2월 21일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의 제정으
로 제주특별자치도에는 자치단체인 시와 군을 두지 않도록 함으로써 시의회가 구
성되지 않고 시장 임명제인 행정시가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제주특별자치도의 자
치계층은 단층제이면서 행정계층은 중층제로 구성되어 지방자치법상 지방행정계
층구조의 예외가 인정되었다. 또한, 2011년 5월 30일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광역계
층에 특별자치시가 포함되게 되어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에 따라 세종특별자치시
가 출범하게 되었다. 특히 2010년 12월 27일 제정된 「세종특별자치시 설치 등에 관
한 특별법」으로 세종특별자치시에는 지방자치법에 규정된 기초자치계층을 설치하
지 않고 단층제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역시 지방자치법상 지방행정계층구조의 예외
가 인정되었다.

34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3. 지방행정구역의 변화

광역행정구역의 변화
광역행정구역의 경우 1949년 지방자치법의 제정으로 도와 서울특별시가 광역
계층으로 규정된 이후 서울특별시와 9개도로 행정구역이 정해져 있어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1962년 11월 21일 부산시 정부직할에 관한 법률의 제정으로 부산시
를 경상남도로부터 분리시켜 정부 직할로 둔 이후 인구 100만 이상 대도시가 속속
광역계층으로 지정되어 6개의 광역시가 도로부터 분리되었다. 2013년 세종특별자
치시의 출범으로 정부수립 초기 2개로 출발한 광역자치단체의 수는 총 17개로 증
가하였다.

[그림 1] 광역자치단체 수의 변화

10

0
20 0

02

20 3
20 4
20 5
2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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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9
1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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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5
1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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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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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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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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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0
0
0
0
5
5
5
5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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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
7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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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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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
9

9
9
9
9
9

1
1
1
20
19

19

19

특별시 광역시 도

주 : 도에는 특별자치도, 광역시에는 특별자치시가 포함됨


자료 : 안전행정부(2013). 지방자치단체 행정구역 및 인구현황

기초행정구역의 변화
기초행정구역은 정부수립 초기에는 시, 읍, 면이 자치구역으로, 군, 구, 동이
자치권이 없는 행정구역으로 출발하였으나, 1961년 이후에는 시, 군이 자치구역으
로, 구, 읍, 면, 동이 행정구역으로 설정되었고, 다시 1988년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자치구가 등장함으로써 시, 군, 자치구가 자치구역으로 규정되었다.
시의 경우 그 수가 1953년에는 19개에 불과하였으나 2013년에는 76개(2개 행
정시 포함)로 4배로 증가하였다. 반면 군의 경우 그 수가 1953년에는 135개였으나,
1995년에 그 수가 98개로 급감한 이후 줄곧 감소하여 2013년에는 84개로 38%나
감소하였다. 구의 경우 1953년 9개에 불과하였으나 2013년에는 102개(일반구, 자
치구 모두 포함)로 시보다도 그 증가 정도가 컸다.

2015. 03 | VOL.12 | SPRING 35


[그림 2] 기초자치단체 수의 변화

160

140

120

100

80

60

40

20

20 0

20 2
2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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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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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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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
9
9
9
9
9
9
9

1
1
1
19

19

시 군 구

주 : 구에는 자치구와 일반구, 시에는 행정시가 포함됨


자료 : 안전행정부(2013). 지방자치단체 행정구역 및 인구현황

이러한 증감 추이를 시대별 차이를 통해 살펴보면, 시, 군, 구의 수는 1950년


대에 전반적인 인구 증가에 따라 모두 약간씩 증가하였으나, 도시화의 진전에 따
라 읍이 시로 승격되고 대도시화의 진전으로 구가 신설됨에 따라 시와 구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특히 시의 수는 1980년대에 33개나 급증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도시화의 급격한 증가로만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정치적 의도에 의한 읍의 시 승
격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이후 시의 수가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
은 이를 반증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3] 시, 군, 구 수의 시대별 증감 추이

40

30

20

10

-10

-20

-30

-40

-50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시 군 구

주 : 구에는 자치구와 일반구, 시에는 행정시가 포함됨


자료 : 안전행정부(2013). 지방자치단체 행정구역 및 인구현황

36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반면, 군의 수는 1980년대까지 거의 변화가 없었으나, 1990년대에 46개나 줄
어들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1995년부터 시행된 도농통합 방식의 행정구역개편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까지 지속되어 왔던 읍을 군에서 분리시켜 시
로 승격시키는 행정구역개편의 방향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여, 분리되었던 시와 군
을 합쳐서 하나의 통합시로 개편하고 더 나아가 군을 시로 전환함으로써, 도농통
합시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여 현재는 52개에 달하고 있다. 이는 전체 시 숫자의
68%에 달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군의 수는 계속하여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그림 4] 도농통합시 수의 변화

60

50

40

30

20

10

0
00

02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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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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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0

20

20

20

20

20

20

20
19

19

19

19

19

자료 : 안전행정부(2013). 지방자치단체 행정구역 및 인구현황

현재 지방자치단체의 하부행정기관에 해당하는 읍, 면, 동의 경우, 도시화의


진전에 따라 읍의 수는 1953년 75개에서 2013년 216개로 2.9배 증가한 반면, 면의
수는 1953년 1,448개에서 2013년 1,198개로 17% 감소하였다. 이는 면이 읍으로 승
격되면서 전환된 측면도 있으나 인구가 감소한 면들을 통합한 것에 기인하는 것이
기도 하다. 특히 1970년대에 읍의 수가 급증하고 면의 수가 급감한 것은 1975년 지
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의 개정으로 종래 인구 2만 이상이었던 면의 읍 승격 기
준에 대해 군청소재지인 면에 대해서 인구가 2만 미만이더라도 예외적으로 읍으로
승격시킬 수 있는 단서규정을 신설했기 때문이다. 동의 수는 증가와 감소를 반복
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2015. 03 | VOL.12 | SPRING 37


[그림 5] 읍, 면, 동 수의 변화

2500

2000

1500

1000

500

20 0

20 2
20 3
20 4
2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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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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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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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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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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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0
19 3
19 7
19 9
1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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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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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0
19 1
19 3
19 4
19 5
19 6
19 7
19 8
19 9
19 0
19 1
19 2
19 3
19 4
95

20 1

20 2
13
20 0
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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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0
0
0
0
0
0
0
0
9
9
9
9
5
5
5
5
5
6
6
6
6
7
7
7
7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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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8
8
8
8
8
8
8
9
9
9
9
9

1
1
1
19
19

읍 면 동

자료 : 안전행정부(2013). 지방자치단체 행정구역 및 인구현황

[그림 6] 읍, 면 수의 시대별 증감 추이

100

80

60

40

20

-20

-40

-60

-80

-100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읍 면

자료 : 안전행정부(2013). 지방자치단체 행정구역 및 인구현황

광복 후 70년 동안 지속되어 온 중층제의 지방행정계층구조는


2000년대 들어서부터 끊임없이 도전을 받아왔다.

38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4. 향후 전망

광복 후 70년 동안 지속되어 온 중층제의 지방행정계층구조는 2000년대 들


어서부터 끊임없이 도전을 받아왔다. 그 도전의 핵심은 도의 지위에 대한 것이었
다. 우리 국토의 교통망이 급속도로 발달함에 따라 일일생활권을 넘어서서 반나절
생활권도 가능해지고 있고 IT의 급속한 발전으로 행정서비스의 제공이 원스톱을
넘어서서 논스톱으로 진행되고 있는 환경변화에 따라 도의 기능이 과연 필요한가
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 왔으며, 이에 따라 국회에서 단층제로의 지방행정계층구
조 개편안이 다양하게 발의되었다. 또한 인구가 100만이 넘는 대도시권이 향후 계
속 생겨날 것이기에 기초계층에 있어서도 광역시에 버금가는 권한과 기능을 수행
하는 새로운 형태의 법적 지위가 신설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울러 기초생활권의 확대는 현재의 시, 군의 구역이 보다 광역화될 필요성
도 증가시키고 있어 2010년 「지방행정체제개편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다시
2013년에는 「지방분권 및 지방행정체제 개편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기초자치
단체간 통합을 촉진시키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진행 중에 있다. 특히 자치구의 자
치단체로서의 법적 지위를 폐지하고 단일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는 대도시권을 단
층제 구조로 전환하기 위한 시도도 계속되고 있다. 하부행정기관인 읍, 면, 동의
경우도 인구가 과소한 구역을 통합하려는 정책이 현 정부에서 추진되고 있다.
따라서 향후 우리나라의 지방행정계층구조는 보다 다양화될 가능성이 있으
며, 지방행정구역은 과거 분리 위주의 정책에서 통합 위주의 정책 전환을 통해 보
다 광역화되고 그 수도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2015. 03 | VOL.12 | SPRING 39


전문가
칼럼

한국 복지행정의 변화와 발전

T h e K o r e a I n s tit u t e o f P u b l i c A d m i n i s t r a ti o n

1. 서론

우리나라 복지행정의 역사적 근원은 구빈제도로서 창제(倉制)가 실시된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김동규, 2004). 그러나 근대적 의미에서 복지행
정을 논하자면, 국민 생활상의 위험에 대해 법으로 정해진 일정한 사회적 급부를
제공하는 국민국가(the Nation State)의 공공행정이 성립된 이후를 살펴야 할 것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복지행정의 역사는 엄밀하게는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양재진 이후, 멀리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 8월 15일 이후 대한민국의 초석이 만들어
진 시기까지 거슬러 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광복 70년을 맞이한
2015년에 바라본 우리나라 복지행정의 역사를 주무부처, 예산, 사회지출 그리고
사회보장제도의 도입과 변천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2. 복지행정 주무부처와 예산 그리고 사회지출의 변화

우리나라 복지행정의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1948년 대한민국정부의 성립


과 함께 사회부로 출범하였다. 1949년에 보건부가 분리되었다가 1955년에 보건사
회부로 통합되어 현재의 체제와 업무영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사회보장에 관한 사
무가 중요해지면서 1994년에 보건복지부로 개칭하였고 가족 업무를 관장한 2008
년에서 2010년까지 보건복지가족부로 이름이 잠시 바뀌기도 하였으나 현재까지
보건복지부란 이름으로 한국의 복지행정을 이끌고 있다. 한편 산업재해 예방 및
보상, 실업보상과 훈련 등의 측면에서 근로복지와 고용정책을 관장하는 노동부는
1948년 11월에 사회부에 소속된 노동국으로 시작되었다. 노동국은 1963년에 노동

40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청으로 확대 개편되었고, 1981년에 노동부로 승격되었으며, 고용정책 총괄 부서로
서 역할을 분명히 하기 위해 2010년 고용노동부로 명칭을 변경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림 1] 보건복지부 예산의 증가 추이


(조원) (조원)
200 25

180

160 20

140

120 15

100

80 10

60

40 5

20

0 0

20 3
20 5
20 7
09
19 1
19 3
19 5
19 7
19 9
19 1
19 3
19 5
19 7
19 9
19 1
19 3
19 5
19 7
19 9
19 1
19 3
19 5
19 7
20 9
20 1
0
0
0
0
6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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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7
8
8
8
8
8
9
9
9
9
9
19

정부예산 보건복지부예산(Y축 오른쪽)

자료 : 보건복지부·한국보건사회연구원(2010)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의 예산은 정부예산의 증가와 더불어 확대되어 왔다.


보건복지부 예산은 일반회계 기준으로 1961년 534억 원이었던 정부예산의 2.2%에
해당하는 11억 8천만 원에 불과했으나, 2010년 현재 200조 원에 달하는 일반회계 우리나라 복지행정의
예산의 9.7%인 19조 4천 3백억 원으로 성장하였다. 개발연대와 민주화 이후에도 역사를 주무부처,
보건복지부 예산은 다소 완만하게 증가하다가, 1997년 IMF경제위기, 2008년 글로 예산, 사회지출 그리고
벌 경제위기 시 그 증가폭이 가파라짐을 알 수 있다.
사회보장제도의
한편 고용노동부의 근로복지 예산과 국민연금, 건강보험 등 기금과 공단지출
도입과 변천을
형태로 나가는 사회지출을 모두 합하면 2012년 현재 OECD기준으로 122조 6천 5
중심으로 다루고자
백억 원에 이르러, GDP 대비 9.6%에 달한다. 이는 OECD평균 사회지출 수준인
GDP의 21.6%에는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하지만 OECD기준에 의해 사회지출
한다.

이 계산되기 시작한 1990년에 한국의 사회지출이 GDP의 2.8%였던 것을 감안하면


괄목할만한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 [그림 2]에서 확인되듯이, 한국의 사회지
출 증가가 경제발전 속도를 따라가지는 못하고 있지만 1990년 OECD평균의 20%
에도 못미치던 우리나라의 사회지출 수준이 최근에는 50% 가까이 다가서게 된 것
이다.

2015. 03 | VOL.12 | SPRING 41


[그림 2] 한국 경제와 사회복지의 OECD 따라잡기

(OECD 평균 = 100)
100

90

80

70

60

50

40

30

20

10

00

02
04
06
08
70
72

78
80
82

86
88
84

90
92
94
96
98
76

12
14
10
74

20

20
20
20
20
20
20
20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인당 GDP(% of OECD평균) 한국의 사회 지출(% of OECD평균)

자료 : OECD.STATExtract(http://stats.oecd.org/, 자료 검색일 : 2015.2.28.)

3.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도입 및 발전

보건복지부의 예산증가와 더불어 사회지출이 비교적 빠른 속도로 늘고 있는


것은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새로운 도입과 함께 적용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첫
번째 분수령은 5.16군사혁명세력이 “반공을 국시로 함”과 동시에 “시급한 민생고
의 해결”을 내걸고, 지난 정부들이 소홀히 해왔던 기초적인 사회복지법들을 재정
비하고 현대 사회복지제도의 핵심인 사회보험법을 새로이 제정한 시기가 1960년
대 초이다. 생활보호법(1961), 원호법(1961), 사회보장에 관한 법(1963), 아동복지
법(1961), 재해구호법(1962), 군인연금법(1963), 산업재해보상보험법(1963), 의료
보험법(1963), 공무원연금법(1960) 등이 이 때 제정되었다. 두 번째 주요 시기는 민
주화 이후 노태우 정부 하에서 복지국가의 가장 큰 사회보장프로그램인 국민연금
이 도입되고 의료보험이 전국민에게 적용된 1980년대 후반이다. 세 번째 결정적
국면은 1997년 경제위기 하에서 김대중 정부가 단행한 사회보험 적용사업장의 대
대적 확대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이다. 고용보험과 국민연금 그리고 산
재보험의 적용대상을 사회적 보호가 절실한 5인 미만 영세사업장까지 확대하고,
빈곤층에게는 근로능력여부를 불문하고 공적부조를 지급하기 시작하였다.
이후에도 복지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사회적 투자 관
점에서 공보육, 장기노인요양보험 등 사회서비스는 물론 근로장려세제(EITC) 등
새로운 프로그램들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양재진, 2008). 이명박 정부에서도

42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공보육만큼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복지확대
가 여·야의 합의과제가 되면서 박근혜 정부에서는 기초연금이 도입되고 무상보육
이 크게 확대되었다.

[표 1] 정부별 사회보장제도 도입 및 주요 개혁

정부 기간 연도 사건

1961 생활보호법 제정

1962 공무원연금 도입
최고회의 1961.5 ~ 1963.11
1963 군인연금 도입

1963 의료보험 제정

박정희 제 3공화국 1963.12 ~ 1972.9 1964 산재보험 도입

1973 국민복지연금 법 제정

1974 국민복지연금 시행 유보
제 4공화국 1972.10 ~ 1979.11
1975 사학연금 시행

1977 의료보험 적용 강제화

1986 국민연금법 제정
전두환 1980.9 ~ 1988.2
1986 의료보험 가입 범위 확대(5인 이상 사업장)

1988 국민연금 시행

노태우 1988.2 ~ 1993.2 1988 의료보험의 전국민화

1991 사내복지기금법 제정

1995 국민연금 가입 범위 확대(농어촌 지역)


김영삼 1993.2 ~ 1998.2
1995 고용보험 도입

1999 사회 보험 가입 범위 대폭 확대

김대중 1998.2 ~ 2003.2 2000 의료보험 통합 및 건강보험 확립

2000 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

2005 퇴직연금제도 도입

2006 근로장려세제(EITC) 도입
노무현 2003.2 ~ 2008.2
2007 장기요양보험 도입

2007 기초노령연금 도입 및 국민연금 개혁

이명박 2008.2 ~ 2013.2 2009 공무원연금 개혁

2013 0~5세 무상보육 도입


박근혜 2013.2 ~ 현재
2014 기초연금 도입

사회보장제도의 발전과 더불어 사회보험의 적용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은 1989년 전국민의료보험의 실시이후 명실공히 모든 국민을
커버하고 있고, 국민연금가입자는 1988년 443만 명에서 1998년 1500만 명을 넘
어서고 2013년 현재 2074만 명에 이르고 있다. 고용보험 가입자는 제도가 도입된

2015. 03 | VOL.12 | SPRING 43


1996년에 433만 명 가입에서 2011년 현재 가입자가 1068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공적부조 수급자는 경제발전과 더불어 그 숫자가 감소하다가 1997년 IMF경제위기
국면에서 도입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로 인해 수혜자가 194만 명까지 급격히 늘
었다가 이후 150만 명 수준에서 안정되고 있다.

[그림 3] 사회보장제도의 가입자와 수혜자 추이


(백만) (백만)
25 60

50
20

40
15

30

10
20

5
10

0 0
00

02

03

04

05

06

07

08

09
0

01

12
10

11
8

9
20

20

20

20

20

20

20

20

20

20

20

20
20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19

국민연금 고용보험 공적부조 의료보장(Y축 오른쪽)

자료 : * 의료보장 : 통계청(http://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350&tblId=TX_35001_A001&conn_path=I3, 자료 검색일 : 2015.2.24.)

* 국민연금 : 국민연금관리공단(1998, 2004, 2013)


* 공적부조 : 보건복지부(2010). 통계청(http://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17&tblId=DT_11714_N002&conn_path=I, 자료 검색일 : 2015.2.16.)
* 고용보험 : 근로복지공단(2011). 산재보험 실적 분석

4. 결론

1945년 광복이후 70년이 지난 현재, 대한민국의 복지행정은 주무행정기관의


기능확충과 예산의 증가 그리고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확대로 괄목할만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도 매우 우수한 보건 분야의 성과와는 달리, 한국
은 노인 빈곤, 소득불평등, 저출산, 자살율 등 복지국가의 많은 주요 지표에서 다
른 OECD국가보다 상당히 낮은 점수를 받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가 지난 70년간
이룩한 경제발전이나 민주주의의 성취에 비하면, 복지행정은 아직 저발전 되어있
다는 것을 뜻한다. 현재 시행중인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게 합
리화하여 증세로 인한 반감을 사전에 차단하고, 노인 등 소득보장의 취약집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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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서는 적정 급여를 제공하며, 인구감소에 대비해 고용과 출산을 지원하는 시스
템의 구축 등 복지행정을 합리화 하면서 동시에 외연을 넓히는 과제가 남아있다 하
겠다.

참고문헌

국민연금관리공단(1998). 국민연금 통계연보

국민연금관리공단(2004). 국민연금 통계연보

국민연금관리공단(2013). 국민연금 통계연보

근로복지공단(2011). 산재보험 실적 분석

김동규(2004). 한국 사회복지정책의 통사적 고찰. 「한국행정사학지」 15. 한국행정사학회

보건복지부·한국보건사회연구원(2010).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10년사

양재진(2008). 한국 복지정책 60년 : 발전주의 복지체제의 형성과 전환의 필요성. 「한국행정학보」 42권 2호

통계청.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 통계. 연도별 의료보장 인구 현황

통계청. 보건복지부 국민기초 생활 보장 수급자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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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현장
리포트

조사통계숫자 바로보기
T h e K o r e a I n s tit u t e o f P u b l i c A d m i n i s t r a ti o n

1. 들어가며

흔히 현대사회를 ‘정보화 사회’라고 한다. 즉, 정보가 아주 중요한 시대다. 그런


데 많은 정보들은 숫자로 요약되므로 ‘숫자 정보화 사회’라고도 한다.
숫자는 주로 2차 자료 가공, 행정보고, 설문조사 등을 통해 생산된다. 이 중에
서 대다수 숫자는 설문조사(Survey Research)를 통해 생산된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
상무 요즘 우리는 설문조사의 홍수 속에 묻혀 살고 있다. 어떤 주장이나 기사도 설
박병일 문조사결과를 요약한 숫자와 함께 제시하지 않으면, 설득력이 크게 없어 보인다.
이와 같은 설문조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사회 각 분야에서 아주 중요
하게 활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설문조사를 통해 생산된 통계숫자를 바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중요
포인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일반인들이 꼭 알아야 하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 위주로 설명하고자 한다.

2. 설문조사와 오차

설문조사결과는 통계적 기법을 적용하여 수치로 표현된다. 즉, 통계수치로 표


현된다. 그런데 “설문조사를 통해 생산된 통계수치가 사실”인 것일까? 설문조사를
통해 생산된 통계수치는 사실에 대한 추측일 뿐 사실 그 자체는 아니다. 설문조사
를 통해 생산된 통계수치에는 항상 오차가 있다는 얘기다.
모집단은 연구의 대상이 되는 집단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 설문조사
에서 모집단 전부를 조사하느냐, 일부만 뽑아서 조사한 후 전체를 추정하느냐에

46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따라 전수조사와 표본조사로 구분한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설문조사는 대부분 표
본조사로 이루어지고, 이 경우 반드시 오차가 있다. 따라서 설문조사에 의해 산출
되는 통계수치를 볼 때는 오차도 함께 고려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설문조사의 오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설문조사 과정을 이해하는 게 필수적이다.
설문조사 과정 및 절차를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설문조사할 필요성을 느끼면 설문조사 계획을 수립한다. 전반적인 설문조사
계획이 수립되고 나면, 표본을 추출하고, 질문지를 작성하고, 구체적인 현장조사
계획을 수립한다. 이후에 표본추출된 자료와 질문지를 가지고 현장조사를 실시한
다. 현장조사를 마친 설문지는 회수하여 검토와 검증과정을 거치고 이를 통과한
설문지를 가지고 자료처리를 실시한다. 자료처리는 통상 컴퓨터에서 SPSS나 SAS
프로그램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자료처리결과는 대부분 숫자로 표현된다. 분석가
나 연구자는 이를 가지고 분석 및 보고서를 작성하고, 필요시 언론 등에 공표한다.
설문조사과정에 생기는 전체오차(Total Error)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
이 크게 표본오차(Sampling Error)와 비표본오차(Non-sampling Error)로 구
분된다.

[그림 1] 설문조사와 오차

표본(추출들, 추출시 편향 등)
응답자
전체오차
(Total Error) = 표본오차
(Sampling Error)
+ 비표본오차
(Non-Sampling Error)
설문지
분석 / 해석
실사, 자료처리 등

표본오차는 단지 표본을 무작위로 뽑으면서 생기는 오차만을 말한다.


이와 달리 표본을 무작위로 뽑으면서 생기는 오차를 제외한 나머지 오차를 모
두 합하여 비표본오차라고 한다. 비표본오차에는 여러 가지 다양하게 있지만 대표
적으로 표본을 뽑는 틀이 잘못돼 있거나 뽑을 때 편향되게 뽑는 표본문제로 생긴
오차와 응답자 문제로 생긴 오차, 설문지 문제로 생긴 오차, 분석 및 해석시 생기
는 오차, 현장조사와 자료처리 과정상 생기는 오차 등이 있다.
표본오차는 몇 명을 조사했느냐에 따라 흔히 통계적으로 [그림 2]와 같은 공
식에 따라 자동적으로 계산된다.

[그림 2] 표본오차 공식

표본오차(Sampling Error) = ±1.96 2,500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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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언론보도를 보면 일반국민 천명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오차가 95% 신뢰
수준에서 ±3.1%라고 하고, 1,500명일때는 ±2.5% 오차가 있다는 보도를 많이 접
한다. 계산기를 가지고 [그림 2]의 공식에서 n에 1,000이나 1,500을 대입해 보면
±3.1%, ±2.5%라는 계산결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비표본오차는 수치로 제시가 불가능하다. 단지 대략 느낌상 어느 정도라고 추
정만 할 수 있다. 비표본오차 중에서 표본, 응답자, 설문지, 분석/해석 등은 밖에서
도 공표된 자료만 갖고도 대략 추정이 가능하다. 실사나 자료처리 오차 등은 전문
가적 입장에서 내부자료를 면밀히 검토해봐야 확인이 가능하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공표된 자료들을 중심으로 비전문가도 설문조사 오차를 대
략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표본의 대표성과 무작위성, 질문지, 응답자, 조사방식,
분석 및 해석 등에 따른 오차를 설명하겠다.

3. 설문조사의 뇌관

설문조사 결과를 볼 때 먼저, 표본의 대표성과 무작위성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


다. 대부분의 설문조사는 전체 중에 일부만 뽑아서 조사를 한 다음 그 일부자료를
가지고 전체를 추정하는 표본조사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 중에서 뽑은 일
부인 표본은 모집단의 축소판이 되어야 한다. 닮은꼴 축소판이 아니라 일그러진
표본은 모집단과 상이하게 다르다.
그러면, 실제로 표본이 대표성이 없어 크게 문제가 된 사건을 소개해 드리겠다.
1936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에서는 랜던 후보가 출마했고, 민주당에서는
루즈벨트 후보가 출마했다. 미국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사라는 잡지사는 천만 명의

설문조사 결과를 볼 때 먼저, 표본의


대표성과 무작위성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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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에게 설문지를 우송한 뒤 230만 명으로부터 회수한 응답을 분석했다. 그 결
과에 따라 이 잡지사는 랜던 후보가 루즈벨트 후보를 여유있게 누르고 당선될 것
으로 예측했으나, 실제 선거결과는 민주당의 루즈벨트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로 당 사람들에게 무엇을
선됐다. 무려 230만 명이나 되는 유권자들을 조사했는데도 이런 실수를 한 이유는 어떻게 질문할
무엇일까? 것인가는 이 과정을
바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표본이 모집단을 대표하는 닮은꼴 축소판이 되지
통해 원하는 정보를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잡지사는 잡지의 정기구독자와 전화번호부를 근거로 설문
얻기 때문에 설문조사에
을 보냈다. 그 당시 미국경제상황을 고려할 때, 잡지의 정기구독자나 전화보유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는 소득이 높은 계층에 속했었다. 더욱이 그 해 선거에서는 유권자의 후보선택이
사항이다.
소득수준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즉, 소득수준이 낮은 계층은 민주당을, 소득수
준이 높은 계층은 공화당을 특히 선호했다. 따라서 이 잡지사가 뽑은 표본 속에는
루즈벨트 후보 지지자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틀린 것이다. 이 실수는 미국
선거 여론조사 역사 속에서 가장 유명한 실수로 기록되고 있다.
대표성을 갖는 표본은 모집단으로부터 무작위로 뽑은 표본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무작위로 뽑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1948년까지 미국 대통령 선거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일관되게 민주당 후보의
지지율이 실제 선거결과보다 낮게 나왔다. 당시 일반적으로 공화당 지지자들이 여
론조사에 잘 응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조사원들이 가능하면 공화당 지지자를 표
본으로 추출한 결과, 일관되게 민주당 후보의 지지율이 과소 추정되는 경향을 보
였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는 이 과정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얻
기 때문에 설문조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조사결과
를 얻기 위해서는 질문지를 작성하는데 아주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질문지를 작성하는 과정은 매우 어렵고 힘든 경우가 많다. 조사목적은 물론,
응답자의 수준이나 상황, 조사방법 등에 따라 질문지를 작성해야 하고, 어떻게 묻
느냐에 따라 결과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질문결과는 어휘선택이나 보기문항의 순서에 크게 영향
을 받는다. 요즘 가끔 우리사회에서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유도성 질문이다.
질문에 중간범주나 ‘모르겠다’ 항목 포함여부도 우리사회에서 가끔 문제가 되고 있
다. 자세한 내용은 지면 관계상 생략하고 질문지 작성과 관련된 논문이나 서적을
참고하기 바란다.
다음은 응답자 측면이다. 설문조사를 하다보면 응답자는 항상 진실만을 얘기하
지는 않는다. 간혹 응답자는 자연스런 거짓말을 한다. 묻는 질문이 극히 사적일 경
우 심하다. 개인소득이 얼마인지, 음란잡지를 보는지, 성생활은 어떤지, 가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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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있었는지 등에 관한 물음에 속마음을 터놓고 응답한다고 가정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이 갖는 특성을 몇 가지만 언급하면 ‘심리
적 자기방어 기재’,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쪽으로 응답경향’, ‘아는 바가 없어도 안
다고 하는 경향’, ‘중간응답 경향’, ‘이중성’ 등을 보인다.
설문조사에서는 표본의 대상인 사람을 뽑는 것 뿐 아니라 뽑은 사람들로부터
어떤 방법으로 원하는 자료를 수집하는가가 중요하다.
대표적인 자료수집방법으로는 개별면접, 전화조사, 우편조사, 온라인조사 등
이 있다. 우선, 개별면접은 면접원이 응답자를 직접 만나서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
으로, 신뢰도가 가장 높고 상세하고 다양한 내용의 질문이 가능하나, 기간과 돈이
많이 들어간다. 전화조사는 면접원이 응답자에게 전화를 걸어 필요정보를 얻는 것
으로 짧은 시간에 적은 비용으로 가능하나, 짧고 간단한 내용만 가능하다. 선거조
사나 긴급 현안조사처럼 긴급하게 여론수렴이 필요한 조사의 경우는 대다수 전화
조사방식으로 실시한다. 우편조사는 설문지를 우편으로 발수신하는 것으로 비용
이 적게 들고 복잡한 내용도 가능하지만 응답률이 아주 낮고 응답자 통제가 불가능
하다. 마지막으로 온라인조사는 인터넷 등 온라인상에서 조사하는 것으로 비용이
적게 들고 복잡하고 다양한 방식이 가능하지만 표본 수 예측이 어렵고 응답자 통제
가 어렵다.
대표적인 조사방법만 간략히 설명했지만, 앞서 언급한 조사방식 중 특히 우편
조사와 온라인조사는 오차가 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면밀한 주의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요즘 정치여론조사에서 가끔 인용되는 ARS 방식은
오차가 아주 클 가능성이 많으므로 특별히 더 주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조사방식
이 조사대상 전체를 대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조사방식을 꼼꼼히 따져
봐야 한다.
이제 언론보도를 볼 때 유의해야 할 점에 대해 살펴보겠다.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숫자로 보여 지는 통계수치야 말로 객관적인 지표로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계를 잘못 해석하거나 아전인수식으로 악용될 경

통계를 잘못 해석하거나 아전인수식으로 악용될 경우에는


‘객관성’의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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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는 ‘객관성’의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일찍이 미국 통계학자 대럴 호프는 이 같
은 경우를 가리켜 “통계는 정보를 전달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을 바보로 만들 수
있다”라고 경고한바 있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일반인이라면 ‘숫자에 속을 수 있는
것’이 통계의 또 다른 얼굴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 동일한 통계수치라도 아주 상이
하게 해석이 가능하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언론에서 조사통계관련 보도시 오류를 범하는 몇 가지 유
형만 언급하겠다. 동일한 자료를 근거로 쓴 기사인데도 불구하고 보도내용이 언론
사마다 다르게 보도해, 조사의 실상을 잘못 전달하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똑같은
조사결과에 대해서도 신문사들 논조에 따라 긍정과 부정으로 크게 엇갈리고 있는
경우도 있다. 여론조사관련 신문보도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이 ‘중간항목’ 처리부분
인데, 언론사 입장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다.

4. 마무리하며

설문조사를 통해 생산된 통계수치를 대할 때 유념해야 될 부분을 간단하게 언


급하겠다.
가장 먼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지를 체크해야 한다. 더욱이 조
사에 드는 비용을 누가 부담했는지를 따져서 그 후원의 동기도 미루어 짐작해 봐야
한다. 다음은 표본이 적절한가를 생각해야 한다. 모집단의 정의, 표집방법, 응답
률, 그리고 표본의 크기 등에 있어서도 표본의 대표성이 유지되도록 주의를 기울
였는지를 체크해야 한다. 설문에 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봐야 한다. 모
든 질문에 응답자가 솔직히 응답한다고 보기 어렵다. 질문방식에 따라 크게 차이
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질문과 응답항목이 제시된 경우에는 직접 응답자가
되어서 질문에 응답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조사방식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
다. 조사방식 중 특히, 우편조사나 온라인조사, ARS 등은 더욱 세심하게 검토해야
한다. 끝으로 해석을 함에 있어서 구체적인 해석의 명확한 근거를 확인해야 한다.
특히, 해석이 이상한 느낌이 든다면 구체적인 결과수치들을 확인해야 한다. 숫자
와 제시된 결론 사이에 커다란 논리적 틈이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문조사 결과의 홍수에 묻혀 살고 있는 요즘에 유능한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
해서는 읽고 쓰는 능력 못지않게 숫자를 제대로 이해하는 능력도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2015. 03 | VOL.12 | SPRING 51


조사기관 소개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한국 아동·청소년 패널조사

1.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NYPI) 소개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National Youth Policy Institute)은 청소년 관련 기초


연구와 정책 개발을 통해 미래사회 국가발전 동력 창조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
로 설립된 국책연구기관이다. 1989년 체육청소년부 산하 “한국청소년연구원”으로
개원하여 1993년 “한국청소년개발원”으로 확대·개편되었고, 1999년 국무총리 산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통계·기초연구실장 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로 소속을 변경한 뒤 2007년부터 현재의 명칭을 사용하
이종원 고 있다.
주요 기능(사업)은 한국 청소년의 생활·의식 전반에 대한 기초조사, 국가 청
소년정책 관련 연구·개발 및 평가·자문, 국내·외 청소년 전문기관과의 교류·
협력, 청소년 연구·정책 관련 정보·자료 서비스 등이며, 이와 같은 기능 수행을
위한 조직으로 기획조정본부와 7개 연구(지원)실, 3개 센터, 5개 팀을 두고 있다.
조사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조직은 통계·기초연구실로서 패널조사, 지표조사,
국제비교 연구와 더불어 국가 승인 통계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한국 아동·
청소년 데이터 아카이브 운영을 통해 본원에서 수행한 각종 조사의 원자료를 일반
에 공개하고 있다.

2. 한국 아동·청소년 패널조사(KCYPS)

현재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추진하고 있는 조사사업은 “한국 아동·청소년


패널조사” “한국 아동·청소년 인권실태 조사” “다문화 청소년 종단조사” “학업중단
청소년 패널조사” 등이 있다. 이중 조사규모나 활용도 측면에서 대표적인 조사사업

52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그림 1]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조직도

원장 감사

연구・경영자문위원회 감사실

연구과제심의위원회

기획조정본부
연구・예산기획실

활동・역량연구실

보호・복지연구실

통계・기초연구실

현안정책전략실

경영지원실
동북아청소년 분석센터

연구・성과 기획팀

예산기획팀

학술・정보팀

청소년정책분석평가센터

학업중단예방・
대안교육지원센터

총무・인사팀

재무・회계팀

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아동·청소년 패널조사(Korean Children and Youth Panel


Survey, 이하 “KCYPS”)의 사업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사배경 및 목적
아동·청소년기는 인간의 생애단계에서 가장 많은 신체적·정신적 변화를 경
험하는 시기이다. 특히 청소년들은 급속한 신체 변화와 인지 발달, 생활 반경과 사
회 관계의 확대 등 변화된 상황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과 정서적 불안 등의 많은 문
제에 부딪치게 된다. 이와 같은 발달상의 문제에 직면하여 청소년들이 주어진 발달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건강한 자아상을 확립하도
록 돕는 일은 청소년 연구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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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YPS는 한국 아동·청소년 성장과 발달의 다양한 양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관련 학술 연구와 정책 개발의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아동·청소년의 성장·발달에 관한 경험적 조사연구는 그동안 다양한 학문분


과에서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왔다. 이들 연구는 대부분 특정 시점의 조사자료를 활
용한 횡단적 연구(cross-sectional study)로서, 패널 데이터를 토대로 한 종단적 연
구(longitudinal survey)는 드물었다. 동일 대상을 시차를 두고 반복조사하는 패널
데이터는 변인간 인과관계의 설명이 용이하고 시간 경과에 따른 개인·집단 변화의
동태적 분석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패널
조사는 그들이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어떤 성장과 발달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또한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문제들과 그 주된 요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많은 학문적·정
책적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다.
현재 국내에서 아동·청소년이 조사대상에 포함된 패널조사는 매우 드물고, 그
대부분이 후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거나 노동·교육 등 특정 영역과 주제에 국한
된 것으로서, 초·중·고교생을 포괄하는 아동·청소년의 성장과 발달의 전체상을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KCYPS는 한국 아동·청소년 성장과 발달의 다양한
양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관련 학술 연구와 정책 개발의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2010년에 표집된 3개 패널 총 7,071명의 청소년을 대상으
로 2016년까지 7개년에 걸쳐 추적조사를 실시할 계획이며, 매년 조사 데이터의 일
반 공개, 학술대회 및 대학원생 논문공모 사업, 데이터 분석 보고서 발간 등을 통해
연구성과의 사회적 확산을 위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조사모형
KCYPS의 조사대상은 2010년 기준 초등학교 1학년과 4학년, 중학교 1학년의
3개 패널로 구성되어 있다. 표본은 2009년 교육부 학교통계를 표집틀로 하여 층화
다단계집락표집 방식으로 총 7,071명(초1: 2,342명, 초4: 2,378명, 중1: 2,351명)을
선정하였다. 이들을 대상으로 2010년부터 2016년까지 7개년에 걸쳐 매년 추적조사
를 실시함으로써, 초1에서 중1(초1 패널), 초4에서 고1(초4 패널), 중1에서 대1(중1
패널)에 이르는 아동·청소년기의 성장·발달 과정을 파악하게 된다. 초1, 초4, 중
1의 3개 패널을 대상으로 7개년에 걸쳐 실시되는 한국아동·청소년패널의 종단조
사모형은 다음 그림과 같다.

54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그림 2] KCYPS의 종단조사 모형

1차 조사 2차 조사 3차 조사 4차 조사 5차 조사 6차 조사 7차 조사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초1 패널 초1
초2
초3
초4
초5
초4 패널 초4 초6
초5 중1
초6
중1
중2
중1 패널 중1 중3
중2 고1
중3
고1
고2
고3
대1

조사내용
KCYPS는 브론펜브레너(Bronfenbrenner)의 생태학적 관점에 기초하여, 아
동·청소년들이 자신을 둘러싼 주변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발달해가는 양
상을 파악할 수 있도록 조사내용을 구성하였다. 조사영역은 크게 개인발달 영역과
환경발달 영역으로 대별되는데, 각 영역별 주요 조사문항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표 1] KCYPS의 조사영역과 주요 조사문항

조사영역 주요 조사문항

신체 발달 체격, 신체변화, 건강, 건강문제

지적 발달 학업성적 평가, 성적 만족도, 학습습관(성취가치, 행동통제 등)

사회정서 발달 정서문제, 자아인식(자아존중감, 진로정체감 등)


개인발달
삶의 목표/만족도 삶의 목표, 삶의 만족도

비행 비행경험, 비행피해경험, 비행친구

생활시간 수면시간, 학업관련 시간, 여가시간

가정 환경 가족구성, 부모의 양육방식, 보호자 부재, 용돈

친구 관계 또래애착, 부모-친구관계, 이성친구

교육 환경 전학/결석경험, 학교생활 적응, 방과후 교육


발달환경
지역사회 환경 지역사회 인식, 다문화 수용

매체 환경 컴퓨터/휴대전화 이용, 사이버비행, 성인매체 이용

활동/문화 환경 체험/동아리활동, 여행/문화활동, 종교활동, 팬덤활동 등

배경변인 일반신상, 지역, 주거, 학교/학력, 직업/소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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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YPS의 조사내용은 아동·청소년의 생활·행동·의식·환경의 다양한 영역
을 포괄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다른 조사에 비해 문항 수가 많은 편이다. 따라서 모든
문항을 매년 조사하기 어렵기 때문에 문항별 특성과 중요도 등을 고려하여 매년 조
사, 주기 조사, 특정 시점 조사 등 조사주기를 다양화하여 조사하고 있다.

데이터 구축
패널조사는 동일한 조사대상에 대하여 주기를 두고 반복조사를 하는 특성 때문
에 추적조사 과정에서 조사대상자의 사망, 질병, 조사 거부 등으로 인한 표본 이탈
(sample attrition)이 발생하게 된다. 표본 이탈은 조사 차수가 거듭될수록 증가하게
되는데, 표본 이탈이 과다할 경우 조사결과의 대표성, 신뢰성에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조사 첫 해에 선정된 표본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원표본 유지율은 조사 과정과 결과의 신뢰도를 판단하는 지표로 간주되기도 한다.
KCYPS는 2010년에 확정된 원표본 7,071명을 대상으로 하여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추적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가장 최근에 데이터가 공개된 제4차 조사
(2013년)의 경우, 조사에 성공한 표본이 6,319명으로서 원표본 유지율이 89.4%(초
1: 90.5%, 초4: 88.0%, 중1: 89.7%)로 나타났다.

[표 2] KCYPS의 원표본 유지율(2010~2013년)

구분 전체 초1 패널 초4 패널 중1 패널

제1차 조사 원표본(명) 7,071 2,342 2,378 2,351

조사성공 표본(명) 6,808 2,264 2,264 2,280


제2차 조사
원표본 유지율(%) 96.3 96.7 95.2 97.0

조사성공 표본(명) 6,678 2,200 2,219 2,259


제3차 조사
원표본 유지율(%) 94.4 93.9 93.3 96.1

조사성공 표본(명) 6,319 2,119 2,092 2,108


제4차 조사
원표본 유지율(%) 89.4 90.5 88.0 89.7

기존 패널조사 사례를 보면 조사 2~3차년도에 표본 이탈률이 높고 그 이후부


터 안정화 단계에 접어드는 것이 일반적인데, KCYPS는 4차년도의 표본 이탈률이
2~3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초4 패널과 중1 패널의 상
급학교(중학교, 고등학교) 진학에 따라 조사대상 학교·지역이 전국 단위로 분산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조사 4차년도까지의 원표본 유지율은 국내의 다른 패널
조사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으로서, KCYPS의 표본 관리는 지금까지 비
교적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56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데이터 공개
KCYPS의 본조사는 매년 10월에서 12월까지 약 두 달간에 걸쳐 실시되며, 데이
터 입력과 에디팅, 클리닝, 횡단면·종단면 가중치 부여 등의 작업을 거쳐 다음 해
연말에 데이터를 확정하여 공개하게 된다. 현재 2014년 12월에 완료된 제5차 조사
결과의 데이터 클리닝 작업을 진행 중이며 7월에 학술대회 참가자를 대상으로 1차
잠정 데이터를 공개한 뒤 11월 경에 최종 데이터를 공개할 예정이다. 최종 데이터는
SPSS, SAS, STATA의 세 가지 포맷으로 제공되며, 코드북, 유저 가이드와 함께 한
국청소년정책연구원 데이터 아카이브 홈페이지(http://archive.nypi.re.kr)에서 내
려받을 수 있다. 아동·청소년 관련 연구자, 전문가, 대학원생 등 일반 이용자들은
연구논문, 학위논문 집필 등 비영리적 용도로 데이터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데이터 활용
KCYPS에 대한 학계의 관심과 데이터 활용도 증진을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서
2011년부터 매년 한국아동·청소년패널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KCYPS 데이
터를 활용하여 집필한 학술논문 발표 행사로서 지금까지 4회에 걸쳐 총 141편의 논
문이 발표되었는데, 올해에는 10월 23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컨벤션 센터에서 제
5회 학술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일반 연구자를 대상으로 한 학술대회와 더불어
대학원 석·박사과정 재학생을 대상으로 KCYPS 데이터 활용 논문공모 사업을 진
행하고 있는데, 2011년부터 지금까지 총 14편의 우수논문을 선정하여 시상하였다.
KCYPS의 조사결과를 활용한 자체 보고서로는 데이터분석 보고서와 리서치 브
리프가 있다. 데이터분석 보고서는 매년도 주요 조사결과를 정리·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보고서로서 지금까지 총 11종을 발간하였다. 리서치 브
리프는 분석결과를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작성한 리플렛 형태의 자
료로서 2014년까지 총 14종이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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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h e K o r e a I n s tit u t e o f P u b l i c A d m i n i s t r a ti o n

조사결과
소개
국민의 다문화사회에 대한
인식조사

1. 조사목적 및 방법

최근 전 세계적으로 국가 간 인력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는 추세에서 한국사회에


서도 취업, 결혼, 교육, 사업투자 등 여러 목적으로 외국인 이주민들이 급증하고 있
다. 특히 한국사회는 저출산·고령화로 인하여 노동력이 부족한 현실에서 고학력
인력의 중소기업 및 3D업종의 지원 기피로 인하여 특정 업종에 인력부족이 심각한
한국행정연구원
초청연구위원 상태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는 적극적으로 외국인 근로자의 유
고재권 입을 장려하고 있고, 또한 전통적인 순혈주의 문화적 특성이 다소 누그러지면서 국
제결혼을 통한 외국인의 이주가 증가하고 있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한국에 체류 중인 외국인은 매년 증가추세에 있다. 지난 10
년간 국내 체류 외국인 숫자의 증감을 살펴보면 2004년 한국에 체류 중인 외국인은

[그림 1] 국내체류 외국인 추이

1,800,000

1,600,000

1,400,000

1,200,000

1,000,000

800,000

600,000

400,000

200,000

0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58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약 75만 명이었으나 2013년 약 150만 명으로 두 배 급증하였다. 통계청은 외국인 인
구가 2020년에 250만 명, 2050년에는 400만 명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본 조사는 한국행정연구원 사회조사센터의 2014년 조사과제 중 하나이다. 조사
의 목적은 다문화사회에 대한 인식과 외국인 이주민 유입이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
향을 파악하고, 외국인 이주민 지원 정책의 방향에 대한 요구를 분석하여 기초 자료
를 생산하며, 외국인 이주민 지원 프로그램의 효과성에 대한 인식을 조사하여 효율
적 지원 정책 추진을 위한 정책 방안을 도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조사는 한국인과 외국인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한국인 400명과 외국인 이주민
450명 등 총 850명을 표본으로 선정하여 2014년 11월 3일부터 28일까지 실시되었
다. 한국인의 경우 전국에 거주하는 만 15세 이상 국민을 대상으로 지역, 성별, 연령
을 고려한 비례할당 추출방법을 이용하였고, 외국인의 경우 결혼이민자, 중국동포,
외국인 근로자별 비례할당 추출방법을 이용하여 일대일 면접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내용은 다문화사회에 대한 인식, 외국인 이주민 유입이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 외국인 이주민 지원정책의 방향, 외국인 이주민 지원 프로그램, 한국의 다문
화정책 등 크게 5가지 분야로 구성되었다.

본 조사는 다문화사회에 대한 인식과


외국인 이주민 유입이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고,
외국인 이주민 지원 정책의 방안을
도출하는 데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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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사내용 분석결과

첫째, 우리 국민들의 다문화사회에 대한 이해가 높은 편인지에 대하여 한국인


과 외국인을 대상으로 인식을 조사하였다. 한국인들은 응답자의 45.0%가 이해도
가 높다고 응답한 반면, 외국인 이주민들은 응답자의 65.1%가 이해도가 높다고 응
답하였다.

[그림 2] 다문화사회에 대한 이해도

70.0
65.1

60.0
55.0

50.0
45.0

40.0
34.9

30.0

20.0

10.0

0.0
이해도가 높음 이해도가 낮음

한국인 외국인 이주자

둘째, 외국인 이주민 유입이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경제활성화에


기여, 우수 인재의 영입으로 인한 국가발전, 저출산·고령화 사회의 문제 완화에 기
여, 정부의 공공지출 부담의 증가, 한국 고유문화에 대한 위협, 사회범죄 등 사회불
안 초래 등에 관하여 조사하였다.
우리 국민들은 ‘외국인 이주민들이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에 75.5%, ‘우
수한 외국인 인재들이 유입되어 한국의 국가발전에 기여할 것이다’에 59.0%, ‘한국

60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의 저출산·고령화 사회의 문제를 완화시킬 것이다’에 57.8%의 응답자들이 동의하
였다. 또한 ‘외국인 이주민들이 늘어나면 그들을 지원해야 해서 정부의 공공지출 부
담이 커질 것이다’에 75.3%, ‘외국인 이주민들이 늘어나면 한국의 고유문화가 위협
받을 것이다’에 63.7%, ‘외국인 이주민들의 증가는 민족, 종교, 문화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증가시킴으로써 사회범죄 등 사회 불안을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에 74.7%
의 응답자들이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림 3] 외국인 이주민 유입이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

75.5
경제활성화
24.5

59.0
국가발전
41.0

저출산/고령화 57.8
사회의 문제 완화 42.2

공공지출 부담의 75.3


증가 24.7

고유문화에 대한 63.7
위협 36.3

74.7
사회불안 초래
25.3

0.0 10.0 20.0 30.0 40.0 50.0 60.0 70.0 80.0

동의함 동의안함

셋째, 외국인 이주민 지원정책의 방향에 대하여 다문화가정의 자녀양육을 위한


더 많은 예산 사용, 외국인 이주민에 대한 의료보험 제공, 장기 거주 외국인 이주민
에 대한 투표권 부여,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한국국적 부여, 외국인 이주민에
대한 차별금지법의 제·개정, 외국인 이주민에 대한 한국어·한국문화 이해 증진
교육 강화 등을 조사하였다.
우리 국민들은 ‘다문화 가정의 자녀양육을 지원하기 위하여 정부가 더 많은 예
산을 사용하여야 한다’에 45.0%, ‘외국인 이주민에게 의료보험을 제공해 주어야 한
다’에 55.8%, ‘한국에 장기간 거주한 외국인 이주민들에게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에
56.2%, ‘부모가 한국국적이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한국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다’에 72.3%, ‘외국인 이주민에 대한 차별금지법이 제·개정되어 활성화
되어야 한다’에 79.0%, ‘외국인 이주민 자녀의 이중 언어 교육 등 한국문화 이해 증
진을 강화시켜야 한다’에 80.6%의 응답자들이 동의하였다.

2015. 03 | VOL.12 | SPRING 61


[그림 4] 외국인 이주민 지원정책의 방향

45.0
많은 예산 사용
55.0

55.8
의료보험 제공
44.2

장기 거주 외국인 이주자에 56.2


대한 투표권 부여 43.8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72.3


한국국적 부여 27.7

외국인 이주자에 대한 79.0


차별금지법의 제/개정 21.0

한국어/한국문화 80.6
이해 증진 교육 강화 19.4

0.0 20.0 40.0 60.0 80.0 100.0

동의함 동의안함

넷째, 외국인 이주민을 대상으로 한 지원 프로그램에 대하여 다문화가족지원센


터 운영, 언어영재교실, 시간선택제 일자리 창출 지원, 다문화가정 보육·교육비 지
원, 이중언어강사 양성 사업, 결혼이민자 참여 비영리단체 운영 사업, 외국인복지센
터 등의 만족도를 조사하였다.

[그림 5] 외국인 이주민 지원 프로그램

다문화가족지원센터
82.9
17.1

언어영재교실 72.0
28.0

시간선택제 일자리 73.8


창출지원 26.2

다문화가정 80.2
보육/교육비 지원 19.8

이중언어강사 73.8
양성 사업 26.2

결혼이민자 참여 69.8
비영리단체 운영 사업 30.2

외국인복지센터
82.0
18.0

0.0 20.0 40.0 60.0 80.0 100.0

동의함 동의안함

62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외국인 이주민들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운영 프로그램에 대하여 82.9%, 언어
영재교실 프로그램에 대하여 72.0%, 시간선택제 일자리 창출지원 프로그램에 대하
여 73.8%, 다문화가정 보육·교육비 지원 프로그램에 대하여 80.2%, 이중언어강
사 양성 사업 프로그램에 대하여 73.8%, 결혼이민자 참여 비영리단체 운영 사업 프
로그램에 대하여 69.8%, 외국인복지센터 프로그램에 대하여 82.0%의 응답자들이
도움이 된다고 답변하였다.
다섯째, 한국의 다문화정책과 관련하여 결혼이주여성과 다문화가정을 위해 필
요한 것과 외국인 근로자의 인권보호를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하여 조사하였다.

[그림 6] 결혼이주여성과 다문화가정을 위해 필요한 부문

언어 및
문화적 적응
32.0

자녀양육 지원
8.4
20.7 경제적 자립
기반 조성
19.1
가정폭력 문제
등 인권 개선
19.8

사회적 편견 해소 등
사회적 인식 개선

외국인 이주민들에게 결혼이주여성과 다문화가정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을 조


사한 결과, 사회적 편견해소 등 사회적 인식개선이라는 응답이 19.8%, 언어 및 문
화적 적응이라는 응답이 32.0%, 가정폭력문제 등 인권개선이라는 응답이 19.1%,
경제적 자립기반 조성이라는 응답이 20.7%, 자녀양육 지원이라는 응답이 8.4%로
나타났다.

외국인 이주민들에게 결혼이주여성과 다문화가정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을 조사한 결과, 언어 및 문화적 적응이라는 응답이 32.0%,
경제적 자립기반 조성이라는 응답이 20.7% 등으로 나타났다.

2015. 03 | VOL.12 | SPRING 63


[그림 7] 외국인 근로자의 인권보호를 위해 필요한 부문

임금체불 금지
30.7

고용허가제 문제
7.6

고용주의
22.4 부당한 대우에
대한 처벌 강화
17.6
산재보험과
의료혜택

21.8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사회전반의 긍정적 시각

외국인 이주민들에게 외국인 근로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무


엇인지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임금체불 금지라는 응답이 30.7%, 고용주의 부
당한 대우에 대한 처벌 강화라는 응답이 22.4%,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사회전반의
긍정적 시각이라는 응답이 21.8%, 산재보험과 의료혜택이라는 응답이 17.6%, 고용
허가제 문제라는 응답이 7.6%로 나타났다.

3. 결론 및 정책적 시사점

2014년 설문조사 결과를 통하여, 국민의 다문화사회에 대한 인식조사를 통해


얻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국민의 다문화사회에 대한 이해도에 대하여 한국인들은 응답자의
45.0%가 이해도가 높다고 응답한 반면, 외국인 이주민들은 응답자의 65.1%가 이해
도가 높다고 응답하였다. 이는 외국인 이주민과 많이 접해본 한국국민들이 다문화
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외국인 이주민 유입이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우리 국민들은
전체적인 경제활성화에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우수한 외국인 인재로 인한 국가
발전 가능성에는 다소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반면, 외국인 이주민을 위한 정
부지출의 증가나 우리 고유문화의 위협, 사회불안 초래 등 부정적인 영향에 대하여
우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64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셋째, 외국인 이주민 지원정책의 방향에 대하여는 외국인 이주민에 대하여 의
료보험 제공 등과 같은 예산 지출의 확대에 방향은 다소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고,
반면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한국국적 부여, 외국인 이주민에 대한 차별금지법 우리사회가 건강한
의 제/개정, 외국인 이주민에 대한 한국어/한국문화 이해 증진 교육 강화에는 긍정 다문화사회로 나아가기
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직접적인 경제적 지원보다는 법률적인 신분 안정 위하여 다문화에 대한
과 사회적응을 돕는 간접적인 지원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해도를 높이는
넷째, 외국인 이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지원 프로그램에 대하여 외국인 이주민들
정부의 정책방향이
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운영, 외국인복지센터, 다문화가정 보육/교육비 지원과 같
요구되고 있다.
은 보편적이고 직접적인 혜택에 대하여 만족도가 높았으며, 반면 언어영재교실, 이
중언어강사 양성 사업, 결혼이민자 참여 비영리단체 운영 사업과 같이 부분적으로
혜택을 받는 프로그램의 경우 만족도가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다.
다섯째, 한국의 다문화정책과 관련하여 결혼이주여성과 다문화가정을 위해 필
요한 것과 외국인 근로자의 인권보호를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한 조사에서 결혼이주
여성에게는 언어 및 문화적 적응이 가장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고, 외국인 근로자에
게는 임금체불 금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나타났다.
설문조사 결과 아직 우리사회에서 다문화사회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해 보인
다. 우리 국민들은 다문화사회를 많이 경험할수록 다문화사회를 이해하는 강도가
높아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다문화사회에 대한 인식이 낮고 특히 외국인 이
주민의 증가가 우리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우리 고유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느끼고 또한 사회불안 요인으로 인식하는 측면이 강하다. 우리사회가 건강한 다문
화사회로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 국민들이 좀 더 다문화사회를 많이 접하게 하여 다
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정부의 정책방향이 요구되고 있다.
또한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 중인 다문화를 위한 정책프로그램에
대하여 많은 외국인 이주민들이 효과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외국인 이주민이 보다 접하기 쉬운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외국인주민센터 등과 같
은 프로그램이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났다. 반면 결혼이민자 참여 비영리단체 운영
사업과 이중언어강사 양성사업과 같은 프로그램은 다소 만족도가 떨어졌다. 따라
서 외국인 이주민을 위한 정책프로그램은 수혜대상자와 정책효과성을 고려하여 보
완되어야 할 것이다.

2015. 03 | VOL.12 | SPRING 65


사회조사 동향과 이슈 T h e K o r e a I n s tit u t e o f P u b l i c A d m i n i s t r a ti o n

사회조사 자료연계
기법 적용과 가능성

최근 1인가구의 증가, 정보보안 의식의 강화로 조사 현장에서 응답거부가


늘어나고, 인건비와 조사(항목) 수의 증가로 조사비용과 응답부담이 가중되는
등 현장조사 환경은 악화되고 있다. 반면, 기존 단일 목적의 통계를 넘어서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통계 생산 요구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특히 사람이 평생
을 살면서 겪었던 경험과 주변 환경 등을 통해 그 사람의 정신·육체적 건강,
의식형성 및 행동발달 과정들을 설명하려는 연구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통
통계개발원
조사연구실 계작성 환경의 변화와 시대적 요구에 의해 표본조사에 주로 의존하던 기존의
정미옥 통계작성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신규 통계작성에 필수적인 비용과 시간,
응답부담 없이도 기존에 수집된 자료를 이용하여 그 활용가치를 높이고 새로운
정보를 창출해낼 수 있기 때문에 행정자료·빅데이터의 활용, 자료 간 연계기
법 도입을 통한 2차자료 작성 등이 근래에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해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심층 분석을 위해
2011년에 사회조사(General Social Survey)시계열 자료와 국민사망(National
Death Index)자료를 연계하였고, 이는 다양한 사망원인과 사회적 환경 간의 관
계를 분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캐나다 통계청에서는 새로운 정보를
찾기 위해 추가적인 조사를 수행하기보다 가능하다면 자료연계를 권장하고 있
다. 그 중 하나의 사례를 보면, 캐나다 이민자의 시민참여와 같은 사회적 결과물
을 분석하기 위해 2008년 사회조사(General Social Survey)자료를 캐나다 이
민국의 종단 이민자자료(Immigrant Database)와 2013년에 연계하였고, 그 결
과를 캐나다 이민국의 이민 정책과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평가하는 데 활용했다.
한국 통계청의 사회조사는 국민의 삶의 질과 관련된 사회적 관심사와 주관
적 의식에 대한 조사로서, 그 결과는 우리 사회 삶의 수준과 변동을 파악하여,
사회정책 개발과 사회 각 분야별 연구에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조사부
문은 총 10개인데, 매년 5개 부문씩 나눠 짝수 해에는 보건, 교육, 안전, 가족,
환경 부문, 홀수 해에는 복지, 사회참여, 문화와 여가, 소득과 소비, 노동 부문

66 |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구조 상 동일 연도에 조사된 5개 부문 간에만
연관분석이 가능하여 심층 자료 분석에는 한계가 있다.
이에 통계개발원에서는 자료연계를 통해 사회조사 전체 10개 부문을 통합
함으로써 기존 자료의 활용가치를 높이는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연구를 수행하
였다. 연계대상 자료는 2012년과 2013년 자료인데, 사회조사 표본설계 주기가
인구주택총조사 주기와 동일한 5년이고, 큰 변동이 없는 한 표본 대상가구가 5
년 동안 유지될 수 있어 전년도와 동일인의 연계가 가능하였다. 자료연계는 크
게 두 단계로 진행했는데, 동일인을 찾아 연계하는 결정적 연계방법과 유사한
특성의 사람을 찾아 연계하는 확률적 연계방법을 순차적으로 적용하였다.
2012년 사회조사 자료를 기준으로 식별정보를 활용하여 2013년 자료와 결
정적 연계를 수행하였다. 사회조사의 표집단위는 가구이고, 조사단위는 가구원
으로 서로 단위가 다르기 때문에 결정적 연계도 2단계로 진행하였다. 먼저 가
구ID와 주소, 가구 구성원 정보를 기반으로 동일한 가구를 찾아 연계하였다. 그
런 다음 연계된 가구 내에서 이름, 나이 등을 이용해 동일한 가구원을 찾아 연
계하였다. 결정적 자료연계로 기준연도인 2012년의 총 응답가구원(36,888명)
중 21,251명이 정확히 연계되었고, 자료의 연계율은 약 57.6%이었다.

통계작성 환경의 변화와 시대적 요구에


의해 표본조사에 주로 의존하던
기존의 통계작성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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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자료에는 약 1년이라는 시점의 차이가 있어 그 사이에 여러 가지 변동사
항이 발생할 수 있다. 가장 큰 요인은 대상 가구(가구원)의 전·출입과 표본대
체이고, 연령증가로 인한 조사대상의 상태변화 또는 고령, 사망 등도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인구이동과 표본대체 요인이 많은 10~30대 남자, 미혼, 전월세
및 도시 거주자와 같은 특성그룹에서 연계율이 평균보다 낮게 나타났다. 반면,
조사 참여율이 높고, 정착기에 접어든 60대 이상, 자기 집 및 농어촌 거주자의
연계율은 높게 나타났다. 이처럼 특정한 특성그룹에서 연계율이 상대적으로 높
거나 낮다면, 결정적 연계자료는 분포의 왜곡, 편향 등의 문제점을 보일 수 있
다고 판단되었다.
이에 따라 전·출입, 표본 대체 등으로 동일인이 존재하지 않아 연계될 수
없거나, 식별정보가 정확하지 않아 연계되지 못한 15,637명의 자료들에 대해
확률적 자료연계를 추가적으로 실시하였다. 확률적 연계방법으로 범주형 변수
에 많이 사용되고 있는 각 항목의 중요도를 고려한 핫덱(Hotdeck)방법을 적용
하였다. 우선 지역, 성별, 연령으로 비교 대상을 제한하였다. 그리고 비교 대상
간 혼인상태, 교육정도 등의 변수 일치여부에 따라 변수별 가중값을 주고, 개인
별 가중값 총합이 가장 높은 대상을 연계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이때 변수
별 가중값은 결정적 연계자료를 이용하여 산출하였다.

확률적 연계방법으로 범주형 변수에


많이 사용되고 있는 각 항목의 중요도를 고려한
핫덱(Hotdeck)방법을 적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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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적 자료연계 방법의 직접 적용에 앞서 결정적 연계자료를 기준으로 확
률적 자료연계 방법을 평가해보고자 결정적 연계자료에서 일부(40%)를 랜덤
하게 추출하여 확률적으로 연계해보는 실험을 하였다. 실험 결과, 결정적 연계
자료 중 40%를 확률적 연계자료로 대체하더라도 연계자료 간 교차분석 결과의
전체적인 경향과 패턴 등 정합성은 유사하게 유지되며, 분석결과들도 동일하게
해석 가능함을 확인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확률적 연계자료 방법을 15,637명에
게 적용하였고, 결정적 연계자료와 결합하여 2012년의 모든 자료(36,888명)가
포함된 최종 연계자료를 구축하였다.
다음 그림은 최종 연계자료에 대한 2012년 사회조사의 보건부문(건강평가)
항목과 2013년 사회조사의 문화와 여가부문(주말이나 휴일의 여가활용 방법,
여가활용 만족도) 항목 간 교차분석 사례이다. 평소 자신의 건강에 대한 평가
가 좋은 경우 나쁜 그룹에 비해 정(靜)적인 활동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고, 동
(動)적인 활동의 비율은 높게 나타난다. 또한 건강평가가 나쁠수록 불만족하는
비율이 더 높아지며, 불만족하는 이유는 세 그룹 모두 경제적 부담을 첫 번째로
꼽았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로 건강평가가 나쁜 그룹은 ‘건강 및 체력 부족’을,
그 외의 그룹은 ‘시간 부족’을 꼽아 그룹 간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분석결과는
어찌 보면 충분히 예상 가능하고 당연한 결과겠지만, 한편으로는 연계자료가
정합성 있게 구축되었음을 방증하는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림 1] 건강평가별 주말이나 휴일의 여가활동

50.0

45.9
40.0

35.1
30.0
30.3

20.0

10.0 12.4
11.3
8.4 4.1 8.7 9.2 10.2 10.2 11.4 8.3
6.6 6.1 3.0 6.5 5.4
0
TV(DVD) 여행 문화예술 종교활동 휴식 사교활동
시청 스포츠관람, 스포츠활동

좋음 보통 나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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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기존 사회조사 자료만으로는 알 수 없었지만 연계된 자료를 활용하
여 사회·정책적 함의가 있는 다양한 2차 자료를 작성한다면 그 활용가치가 한
층 높아질 것이라 기대한다. 아울러 다른 조사자료 또는 행정자료와의 연계를
통해 더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향후 연계 가능한 자료 발굴에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림 2] 건강평가별 여가활동 만족도 및 불만족 이유

70.0

60.0
59.7
50.0 54.8 54.8

40.0

30.0 34.6
27.9 27.0
20.0 25.7
21.1 20.9
10.0
5.3 4.5 4.7 5.3
9.7 3.3 8.1 7.3 6.8
0.0
불만족 경제적 부탐 시간부족 적당한 취미가 건강, 체력부족 그외
없어서

좋음 보통 나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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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행정연구원 사회조사센터
2014년도 연구보고서
1. 사회통합실태조사
2. 공직생활에 대한 인식조사
3. 한국의 공·사조직 비교에 대한 인식조사

한국행정연구원 사회조사센터
2014년도 전문가조사
1. 규제개혁에 관한 전문가 조사
2. 민선6기 지방자치단체장의 중점과제에 관한 전문가 조사
3. 지방자치단체의 민간위탁제도 개선에 관한 전문가 조사
4. 사회복지 정책의 정부 간 분담에 관한 전문가 조사
ISSN 2287-3384

KIPA 조사포럼 2015년 3월 31일 발행


The Korea Institute of Public Administration

VOL. 12
|
Vol. 12 | 2015.03 | SPRING | www.kipa.re.kr

2015. 03
|
SPRING
시론
광복 70년 :
대한민국의
발전 단계와 정부의 역할
Global
전문가 칼럼

KIPA 행정통계로 본 광복 70년


광복 70년과 인사행정
The Korea Institute of 서울특별시 강남구 언주로 508 서울상록회관 10층
광복 70년과 지방행정계층 및 구역의 변화
Public Administration T. 02-564-2001 | F. 02-564-2006 | www.kipa.re.kr
한국 복지행정의 변화와 발전

Development
사회조사 동향과 이슈
사회조사 자료연계 기법 적용과 가능성

Issue

Professionalism

Statis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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