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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클 대마법사 (완)
1서클 대마법사 (완)
1서클 대마법사 (완)
지 은 이 : 양 강
출 판 사 : (주)로크미디어
출판년도 : 2005 년 3 월 5 일
봉 사 자 : 박종란
<지은이 소개/양 강>
이 름 : 손 일 섭
생 일 : 1977 년 3 월 생.
출판작 : 시즈 SIZ
제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읽고 즐거울 수 있는
이야기. 이 모든 걸 전할 수 있는 진정한 이야기꾼이 되겠습니다.
작가의 말
작년 2 월, 시즈 SIZ 를 처음 쓸 때가 엊그제 같은 데 벌써 두 번째 글이군요. 솔직히
지금도 제가 작가라는 게 실감나지 않습니다. 바로 1 년 전까지만 해도 작가가
된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거든요. 어쩌다보니 시즈 SIZ 를 쓰게 됐고 부족한
글이지만 로크 미디어 대표님께서 선택해주셔서 출판까지 되었죠. 지금 생각하면
운이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작년 11 월에 시즈 SIZ 완결권을 출판사에 보내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특별히 이유는
모르겠는데 괜히 눈물이 나더군요. 단 몇 달의 기간이지만 정이 많이 든 작품이라서
그랬나 봅니다. 그렇게 마구 울고 나서는 글쓰기가 싫더군요. 그때 느낀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참기가 참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방황 아닌 방황도 해보고
외도도 했었습니다. 그러다 출판사에 보냈던 시즈 SIZ 가 출간되었죠.
작가가 아닌 독자의 눈으로 제 글을 천천히 읽었습니다. 세 번인가? 그렇게 시즈 SIZ
완결권을 반복해서 읽고 나니까 다시 글이 쓰고 싶어졌습니다. 끝냈을 때의
아쉬움보다 제가 제 글을 보고 느낀 즐거움이 더 컸거든요.
그래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참 많이 고민했고 로크미디어 대표님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설정, 스토리, 등장인물 등등. 정말 많은 가정을 하고
대입시켰습니다. 시즈 SIZ 보다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컸습니다. 그 결과물이
지금 이 책 <1 서클 대마법사>입니다.
<1 서클 대마법사>의 주인공 라한은 여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미 생이 다한
영혼인 라한에게 저승사자가 새로운 생을 준거죠.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상황.
이번만큼은 제대로 살고 싶은 그가 선택한 길은 그랜드 인첸터입니다. 인첸터로서
그 극에 도달하면 이룬다는 꿈의 경지죠. 당장은 허상으로만 보이는 경지이지만
라한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굴하게 살더라도 구차하게 살더라도 그랜드 인첸터만
될 수 있다면 자존심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죠. 라한이 만들어가는 황당한
사건들, 기괴하고 묘한 몬스터와의 대결, 여러분을 유쾌하?만들 거라고
확신합니다.
2005 년 3 월 9 일 양강
프롤로그
영계의 저승사자 중 예원계의 수장인 수영. 그는 요즘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 때문에 영계를 돌아다닐 때도 그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걱정거리가
있으니 얼굴이 펴지지가 않는 것이다.
수영. 요즘 무슨 걱정 있는가? 얼굴이 말이 아니구먼.
아닐세.
저승사자 수영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같은 서열인 판테아. 그의 말에도 수영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자신의 걱정거리가 남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서는 다 털어놓고 홀가분하게 지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말고 말해보게. 자네하고 나하고 어디 보통 사이인가? 이거 섭섭하이.
나한테도 말 못하는 비밀이 있을 줄이야.
그게, 휴. 잠시 따라와 보게.
수영이 판테아를 구석으로 끌고 갔다. 남들의 이목이 미치지 않는 범위까지 자리를
옮긴 것이다.
수영의 반응이 예상보다 심각하자 판테아도 얼굴을 굳혔다. 왠지 심상치 않은
사건에 휘말릴 듯한 불길한 예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혹시, 사고라도 친 건가?
내가 친 사고는 아닌데, 그게 좀.
물.
라한의 대답에도 로이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도 물에 전기가 잘 통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마법을 익히면서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다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위력은 자신의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저도 물에 전기가 잘 통한다는 건 알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런 위력은.
물이 조금만 있었으면 그런 위력을 내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보통의 지형이었으면
큰 효과도 없었을 거고. 그곳은 오래 전에 기사 학교의 연무장으로 쓰이던
곳이었어. 아니, 무기를 두는 무기고였지. 바닥에 철가루 같은 게 많은 수밖에
없어. 뭐랄까? 흙 자체가 철가를 함유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물에 철이 섞여
있으니 전기가 빠르게 통할 수밖에 없지.
라한이 장소와 시간을 함께 고려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로이나의 마법을 3 서클
이라고 생각하고 어렵게 만들어 낸 것이다. 그녀의 마법 실력을 좀 더 높게
잡았다면 굳이 장소를 택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그럼 사라들이 쓰러진 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
그거야 그놈들이 땅을 계속 집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놈들 성격에 분명히 쭈그려
앉아서 구경했을 거야. 그게 아니면 바닥에 주저앉아서 구경했거나. 껄렁한 놈들의
특징이잖아. 뭐, 나머지는 아까하고 같고.
아.
라한의 설명에 로이나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충의 상황은 이해한 모양이다.
류한님. 그런 건 어디서 다 알아낸 거예요?
도서관에 이필리에 종합학교에 대해 써 있는 게 있더라고. 거기서 알았지. 근데
로이나. 로브는 왜 그래?
라한이 로니아의 잘려나간 후드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로이나의 실력으로
로시퍼 따위에게 후드를 잘리다니.
뭐가요?
덮어 쓴 모자 말이야. 잘려 있네. 조금만 깊게 잘렸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라한의 말에 로이나가 후드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당시를 상상하자 지금도 아찔함이
밀려 오는 듯했다. 라한의 말처럼 조금만 깊었다면 큰 부상을 당했으리라.
그래도 안 다쳤으니 걱정 마세요.
이리와 봐.
아, 아니에요.
와 봐. 작은 상처라도 있으면 소독해야지. 잘못하면 흉터 생긴다고.
라한의 접근에 로이나가 뒷걸음질쳤다. 후드에는 그 누구도 손 댈 수 없다는 듯
강한 의지마저 엿보였다.
괜찮아요. 류한님. 저 괜찮으니까.
고집 피우지 말고. 이리와 봐.
괜찮.
로이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한이 후드를 벗겨버렸다.
평소에 눈만 드러내고 라한을 따르던 로이나. 그녀는 후드가 벗겨지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로, 로이나.
.
라한이 로이나의 얼굴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로이나가 보여 주는 얼굴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눈처럼 흰 피부와 푸른 눈동자. 허리까지 내려오는 찰랑이는 파란 머리. 동화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미모였다. 하지만.
로이나. 귀, 귀.
죄송해요. 속이려고 한 건 아닌데.
엘프였구나.
로이나의 귀는 이간으로 보기 힘들만큼 길었다. 책에서 본 엘프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라한도 그런 사실을 알았기에 로이나의 정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뭐, 어때? 로이나가 엘프면 어떻고 사람이명 어때? 그냥 로이나는 로이나인 걸.
라한은 로이나가 엘프든 뭐든 별로 개의치 않았다. 종족이 뭐가 됐든지 로이나는
자신을 지켜주는 경호원이자 수행원. 다른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고마워요, 류한님. 다른 사람은 절 이상하게 쳐다봐서.
이제야 아버지가 말은 높인 이유를 알겠다. 아, 그럼 나도 말을 높여야겠다.
라한은 필슨 백작이 로이나에게 말을 높였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말투
때문에 라한도 로이나를 대하기 힘들지 않았던가. 그때를 회상하자 로이나의 정체가
충분히 납득이 갔다.
아니에요. 그냥 놓으세요. 류한님. 전 지금 수행원이잖아요.
그래도 엘프면 나이가 아주 많은 텐데.
그래도 제가 수행원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요.
음, 그래. 로이나는 그냥 로이나야.
로이나의 말에 라한도 수긍해버렸다. 로이나는 그 정체가 알려 지기 전에도
라한보다는 나이가 많았다. 결국, 로이나의 정체가 밝혀지고 변한 건 나이 차이일
뿐이다. 열 살 차이가 날 때 말을 놓은 것과 백 살 차이가 나서 말을 높은 게 뭐가
다르겠냐는 생각이었다.
근데 얼굴이 왜 그래요?
뭐, 내 얼굴? 내가 어때서?
눈이 빨갛잖아요. 일주일은 잠을 못잔 사람 같아요.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급히 눈을 비볐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려는 일종의
발악이었다.
로이나가 오기 전까지 최대한 몸을 수습하려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광견보의
후유증이 쉽게 가라앉지 않은 것이다.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라한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 하하하하.
얼굴은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야.
로이나는 라한의 얼굴이 무척 지저분하다고 느꼈다. 머리에 묻은 물로 보면 분명
세수했음이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더럽게만 보였다.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알았어요. 뭔지 몰라도 그냥 넘어가 드릴게요.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비록 진실을 은폐시키기는 했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은 셈이다.
새로운 목표
다음날.
케른을 비롯한 그 일당 모두가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다. 뒤뜰에서 패싸움을
벌였다는 게 이유였다. 엄청난 폭발음과 쓰러져 있던 사람들의 모습. 학교 측은
그들이 서로 싸우다가 폭발음에 기절했다고 단정 지었다. 그런 결정에는 라한의
투서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류한님.
응?
일이 잘 되서 다행이에요.
후후.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미소로 답했다. 계획은 자신이 짰지만 실행에 대한 모든
부분은 로이나가 담당했다. 오히려 자신이 로이나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처지였다.
근데 불쌍하지 않으세요? 아직 열 살인데 학교에서 추방당했잖아요.
별로. 난 내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존재라면 지금보다 더 심한 행동도 할 수
있어. 넌 모르겠지만 난 정말 절실하거든. 그런 놈들 때문에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고.
그래도요.
어차피 케른 그 놈은 무리를 만들어서 우두머리 된 놈이야. 그런 놈은 어디를 가도
굶어죽지는 않아. 학교에서 그 정도 무리를 지을 정도면 다른 곳에서도 잘 살겠지.
라한의 대답에도 로이나는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라한의 절실하다는 말. 케른이
괜찮을 거라는 말. 이 모든 게 로이나의 지식 밖에 있는 얘기였다. 사람 사는
모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류한님이 그렇다면 그렇겠죠.
참, 로이나. 케른이 정말 귀족이라고 생각해?
라한의 물음에 로이나가 생각에 잠겼다.
라한은 케른이 귀족이 아니라는 말을 종종했었다.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막상 그 이유를 생각하려하자 떠오르지가 않았다.
류한님은 케른이 귀족이 아니라고 했었죠?
응.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지으세요?
로이나의 물음에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할 말을 나름대로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아주 잠간의 침묵 후에 라한이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의 말투가 가장 큰 이유야.
말투요?
응. 나처럼 막나가는 말투를 쓰잖아.
라한의 말에 로이나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류한님은 귀족이잖아요.
그건 내가 특이한 거야. 대부분의 귀족은 집에서 예의라는 걸 배우거든. 뭐,
배운다기보다 일상에 젖어 있다고 해야겠지. 태어나서부터 귀족들 사이에서 섞여
지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예의가 몸에 익게 돼. 그때는 귀족처럼 행동하지 않으려고
해도 안 돼.
라한도 귀족의 예법에 맞춰서 행동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남들과는 다르게 예법에
철저히 위배되게 행동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의 정체성이 어린 시절이 아닌
전생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라한에게는 오래 살아오다가 최근 십 년 정도 귀족
생활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케른은 달랐다. 겨우 십 년을 살아오면서 그 시간 전부를 귀족으로 보낸
것이다. 그런 아이가 귀족이 아닌 듯 행동했다면 그건 귀족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류한님이 특이한가요? 케른도 그 특이한 경우일 수 있잖아요.
흠.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가능한데 다른 사람이 불가능 하라는
법은 없었다. 자세하게 설명하려면 전생에 대해 말해야 했기에 말이 막힌 것이다.
아, 어제 싸움 어땠어?
할 말 없으니까 말을 돌리시는 거예요? 음. 어제 로시퍼라는 사람은 별로 강하지
않았어요.
라한이 말을 돌리자 로이나가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은 수행원의 입장이었다.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
근데 마법 도구를 쓰더군요.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 도구는 무척이나 귀한
물건이었다. 마법 도구 하나를 만드는 데 따르는 제약이 너무 많은 탓이다. 마법
도구는 거의 대부분이 일회용이다. 가끔은 영구히 사용할 수 있는 물건도 있지만.
헌데, 그런 일회용 도구라도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금액이 들어간다. 결국 막대한
금액을 들여서 단 한 번밖에 못 쓰는 일회용품을 만드는 셈이다.
마법 도구 말이야. 비싸지?
네. 아주 비싸요. 재료가 귀한 물건이라서.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다시 침묵에 잠겼다. 마법 도구에 대해서 읽었던 내용을
더듬는 중이었다.
재료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건가?
아녜요. 마법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연금술사가 필요하죠. 흠, 연금술사는 물건에
마법을 부여하는 사람을 의미해요. 일반 마법사와는 다르죠. 마법사들이 연금술을
겸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별개예요. 서로가 완벽히 분리된 분야라서
따로 공부를 해야 하거든요.
로이나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연금술사라는
직업은 엄청난 존재였다. 마법 도구만 마구 만들어 내면 마법사보다 더 뛰어난
존재라고 판단한 것이다.
멋지군. 연금술사가 마법 도구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마법사보다 더 강하겠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그렇죠. 캐스팅도 필요 없고 집중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에는 연금술사가 거의 없어요. 아마 인간 중에서는 아예 없을걸요.
로이나의 대답에 라한의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마법사보다
연금술사가 더 뛰어난 직업이었다. 미리 만들어두기만 하면 상대할 자가 없는
직업이 연금술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헌데도 연금술사가 없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모르겠군. 연금술사가 없는데 어제 그 삶이 사용했다는 마법 도구는 뭐야?
지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법 도구는 거의 대부분이 과거의 유산이에요. 수백 년
전에 존재했던 유물에서 가끔씩 마법 도구가 발견되거든요. 그런 물건들을 경매를
통해서 귀족이나 돈 많은 상인, 용병들에게 흘러들어가죠.
수백 년 전의 산물이라면 마법 물품의 가치는 금액으로 따질 수 없을게 분명했다.
유물이 아무리 많이 발견되어도 한계는 있는 법. 그런 귀한 물건이라면 힘 있는
사람이나 돈이 많은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을 터였다.
요즘에 못 만드는 게 혹시. 연금술에 대한 방법이 소실되어서?
그것도 이유 중에 하나죠. 지금 인간 세상을 뒤져도 연금술에 대한 방법은 찾을 수
없거든요. 하지만, 방법을 찾아도 힘들긴 마찬가지예요. 들어가는 재료가
엄청나다고 기록되어 있거든요.
재료가 뭔데?
그건 저도 몰라요.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소실된 방법이거든요.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사라진 방법이니 만들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모르는 것도 물론 당연했고.
그러 지금 세상에서 연금술이 가능한 존재가 전혀 없겠군.
있어요.
누구?
드래곤.
로이나의 대답에 라한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모든 마법의 종주인 드래곤.
그들이라면 연금술도 가능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이 인간을 위해 마법 무구를
만들어줄 리 없었다.
없다고 봐야겠군.
그렇죠.
대화를 마친 후에도 라한의 머리에는 연금술에 대한 내용이 계속 맴돌았다.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게 라한을 자극한 모양이다.
4 일 후.
학교 게시판에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충격적인 공지사항이 입소문을 타고 퍼진
탓이다.
1. 학교 북쪽에 위치한 외곽 창고를 류한에게 맡긴다.
2. 학교 북쪽에 위치한 외곽 창고와 그 주변 이십 미터는 류한과 그의 수행원 외에
그 어떤 사람의 출입도 금한다.
3. 위 사항을 어길 시에는 퇴학 조치한다.
4. 이 명령의 기한은 지금 이 시간부터 류한이 졸업하는 날까지로 한다.
파격적인 공지 사항. 이필리에 종합 학교가 생긴 이래 최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번 공지 사항에 대해 별 반응이 없었다. 어차피 버려진 창고였으니 누가
쓰던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대신, 이번 사건을 계기로 류한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공지 사항에 세 번이나 거론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공지 사항과 똑같은 내용의 서신이 라한에게 전달되었다. 그와 거래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서문이었다.
류한님. 저 모르게 무슨 일을 꾸미신 거예요?
어? 아, 그냥 선생님하고 사소한 거래 좀 했어.
라한의 대답에 로이나가 눈을 흘겼다. 자신 몰래 무언가를 했다는 게 심통이 난 듯
했다.
사소한 거래요? 이게 사소해요? 소문으로는 졌을 때, 학교를 그만둔다고
하셨다면서요? 근데도 사소한 거래예요?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말씀은 하셨어야죠.
로이나가 몰아붙이자 라한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나중에 해야지 하며 미루다가
이미 늦어버린 상황. 뭐라고 변명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라한은 약속한 점수에서 딱 1 점을 더 받았다. 67 점을 받은 것이다.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서는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선생들은 라한에게 창고를 주는 일에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그들에게도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미안. 이제 그만하자. 앞으로 그런 일 없을 테니까. 응? 로이나.
한 번만 용서해 드릴게요.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저도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알았죠?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하자.
라한의 저자세에 로이나가 웃고 말았다. 도무지 화를 내려고 해도 쉽지 않은 상대가
라한이었다.
근데 창고는 왜 얻었어요.?
가서 설명해줄게.
지금요?
새로 얻은 보금자리를 살펴보러 가야지. 어서.
로이나가 라한에게 이끌려 숙소를 벗어났다. 좀 전까지 라한을 몰아붙이던
로이나였지만, 지금은 가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딱히 그래야 한다는
이유보다 라한이 하자면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학교에서 내어준 창고는 의외로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창고에서 이십 미터
거리에는 작은 울타리까지 만들어진 상태였다.
스으윽!
좋군.
라한이 문을 열고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라한은 오랫동안 방치된 창고라서 문을 열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날 거라
예상했다. 허나, 문을 교체한 건지 수리를 한 건지 의외로 조용하게 열렸다. 학교
측의 배려를 세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깨끗하네요.
응. 좋은데.
창고 안은 단출했다. 꽤 큰 책상 하나와 의자 둘. 벽 쪽에 마련된 빈 책장.
어떻게 보면 허전한 구성이었지만, 라한과 로이나에게는 딱 들어맞았다.
공부방으로 쓰실 거예요?
공부방 겸 실습실.
실습실?
원래 라한은 이 창고를 공부방으로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본래 용도에
실습이라는 단어가 하나 더 붙였다.
응. 전에 말한 연금술 말이야. 내가 한 번 해보려고.
예? 저, 유한님. 연금술에 대한 자료는 거의 소실되었습니다. 아무리 류한님이
뛰어나다고 해도 연금술만큼은 좀 힘들지 않을까요?
라한도 힘들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아무런 성과가 없을지 모른다는
것도. 대륙에서 사라져버린 지식이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기하기는
싫었다. 열정적으로 매달릴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도 알아. 성과가 없으면 어때? 그냥 하는 데 의미를 두는 거지.
.
라한은 마법과 정령술을 포기한 이후 목표를 잃은 상태였다. 본래의 목표 대신
공부를 선택하긴 했지만 무언가 허전한 느낌을 계속 받았었다. 그런 그에게
연금술은 어둠 속의 빛이자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뭔 자료가 있어야 시작을 하지.
후후. 그러게 왜 힘든 길을 택하세요.
라한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아주 기본적인 자료조차 없으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로이나는 날 이해하지?
그럼요. 아참. 전에 제가 준 책 가지고 계세요?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품을 더듬었다. 그녀가 줬던 책이라며 정령술에 관한
책이었다. 이제 자신에게 필요 없으니 돌려줄 생각이었다.
아, 여기 있네. 자, 돌려줄게.
그것보다 저. 소환 한 번 해보실래요?
소환?
로이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라한이 의아한 듯 대꾸했다.
자신이 정령술과 인연이 없는 건 로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묻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예. 류한님은 1 서클을 부릴 수 있는 마나를 가지고 계세요. 또, 하급 정령을 부릴
만큼의 정령력도 있고요. 상당히 드문 일이죠.
그럼 뭐해. 마나 친화력이 없어서 더 이상 마나를 쌓는 게 불가능하잖아. 또, 정령
친화력이 없어서 내게 반응하는 정령도 없을 텐데.
라한은 아무런 수련 없이 1 서클 마나와 하급 정령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은
상당한 노력을 해야 쌓을 수 있는 힘을 선천적으로 받은 셈이다.
하지만 더 특이한 건 두 가지를 한꺼번에 가지고 있다는 거였다. 그 두 가지에
있어서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약점만 없었으면, 희대의 정령마법사가 될게
분명했다.
해 봐서 손해 볼 거 없잖아요. 일단 해 보세요. 혹시 알아요? 눈 먼 정령이라도
나타나 줄지.
훗, 그래. 눈 먼 정령이라도 나타났으면 좋겠다. 귀여운 녀석 키우는 재미를
느껴보고 싶거든.
류한님도 참.
라한도 로이나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지금까지 주인이라는 이유로 명령만
내렸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로이나가 시킨 대로 해주고 싶었다.
로이나가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기하학적인 문양을 여기 저기 새기며
어지럽게 문양을 그리던 로이나.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만큼 난해한
문장이었다.
로이나의 작업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무려 20 분이나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림을
다 그리자 로이나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 됐어요. 저 문양 중심에 앉으세요.
라한이 말없이 문양 중앙에 앉았다. 몹시 성스러운 의식이라는 느낌을 받은 듯했다.
이제 어쩌면 되지?
제가 줬던 책의 마지막 체이지에 써 있느 걸 읽으세요.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인 라한이 책을 펼쳐 들었다. 아주 작은 책이었기에 한손으로 펴들 수
있었다.
나는 태초 약속에 의해 이 땅에 태어났다. 신의 빛난 영광을 오늘에 되살려
물질계에 그 뜻을 실천하고 정령계에 그 뜻을 알릴지어다. 이에 내 뜻에 호응할
정령을 살피나니. 내 말을 들은 이는 부름에 응답하라.
라한의 차분한 음성에도 주변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역시나 정령 친화력의
부재가 이런 결과를 나은 모양이다.
다시 한 번 해보세요.
로이나.
류한님. 하 번만 더요.
알았어. 나는 태초에. 응답하라.
두 번의 부름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라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반면, 로이나는 체념의 빛을 띠우며 안쓰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류한님. 한 번만 더요.
로이나. 난 정령 친화력이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고.
한 번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해보세요.
후우, 그래. 알았어. 나는 태초에, 약속에 의해. 부름에 응답하라.
역시나 주변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세 번의 부름 모두 실패로 끝나자 로이나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담담한 라한의
반응과는 무척이나 대조적이었다.
로이나. 난 괜찮아. 오래전에 정령에 대한 미련은 버렸는걸.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로이나의 사과에도 라한은 웃음을 띨 뿐이었다. 그도 로이나가 자신을 위해 한
부탁임을 알고 있었다. 상대의 마음을 충분히 아는 그가 이 정도 일로 화를 낼 리
없었다.
난 괜찮다니까. 로이나. 나 진짜 괜찮.
우우우웅!
.
갑작스러운 대기 울림에 라한과 로이나가 동작을 멈추었다. 마치 시간을 멈춘 듯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양의 중심으로 시선을 던졌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었다.
로, 로이나.
정령이 반응했어요. 근데. 무슨 정령인지 모르겠어요.
우우웅!
대기의 울림은 예상보다 길었다. 정령을 몇 차례나 소화해 본 로이나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거 언제 끝나? 나, 나 무서워.
류한님. 침착하세요. 문양에서 벗어나시면 안 돼요. 가만히 계세요.
우우우웅!
대기의 울림은 커졌다 작아지기르 수없이 반복했다. 마치 사람이 숨을 쉬든
자연스럽게.
로이나. 무슨 정령이야?
그걸 모르겠어요. 물의 정령 같기도 하고 바람의 정령 같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불의 기운도 느껴지고. 소리는 땅의 정령이 소환될 때 소리인데. 도무지 짐작이 안
가요.
로이나의 불안한 말에 라한도 걱정에 휩싸였다. 지금 상황은 예원계에서 어이 없이
죽음을 맞던 때와 너무 비슷했다. 그때도 예상 못한 곳에서 황당하게 죽었지
않은가. 그는 이번에도 어이없이 죽음을 당할까 두려웠다.
로이나.
나왔어요.
로이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라한의 앞에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작은 몸체를 가진 인간 남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크기도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어른의 주먹 두 개 크기로 커졌다.
저, 아, 안.
부웅!
저, 저.
인사를 하려는 라한이 갑자기 부복하는 자세를 취했다. 나타나 전령이 기지개를
켜는 모습에 놀란 탓이다.
류한님. 뭐 하세요?
으, 으으.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고개만 슬며시 들었다. 로이나 곁에 있음에도 무서운
모양이다.
류한님. 느낌이 안 좋아요. 계약하지 않는다고 하세요. 그럼 돌아갈 거예요.
.
로이나의 말에도 라한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혹시 싫다는 말을 했다가
해코지라도 당할까 걱정된 것이다. 라한의 망설임에 조급해 진건 오히려
로이나였다. 혹시나 그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두려웠다.
류한님. 제가 아는 그 어떤 정령도 그런 느낌은 아 들어요. 심지어 정신계 정령도
저런 모습은 아니라고요. 빨리 돌려보내세요.
.
로이나의 다급한 말에 라한은 몸만 떨 뿐이었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극도의 공포감이 라한을 점점 나락으로 빠뜨리고 있었다.
류한님. 더 늦으면 정령이 의도한 대로 되지 몰라요. 빨리 거절하세요. 류한님,
제발.
로이나는 문양이 새겨진 그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정령 소환의 계약에서의해
계약자를 보호하는 장치가 작동한 것이다.
물론, 억지로 깨자면 깰 수도 있겠지만, 그건 계약자인 라한에게 너무 위험했다.
어쩔 수없이 말로서 충고르 해 줄 수밖에 없었다.
류한님. 제발.
계, 계약을.
라한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주먹 두 개 크기 밖에 안 되는 정령이 라한에게는
거인처럼 크게 다가왔다. 낯섦과 생소함이 공포를 만들어냈고, 그 공포가 라한의
판단을 흐리고 한 만든 것이다.
계약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계약자는 그 뜻을 명확하게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환물인 정령의 뜻대로 되기 때문이다. 즉, 계약자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면
계약에 대한 결정을 정령이 하는 것이다.
류한님.
로.이나.
주변으 돌던 검은색의 정령이 라한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이번 소환에 대한
계약 판단을 내리는 행위였다. 이건 라한의 의시결정이 늦었단느 의미도 되었다.
제발.
이번 계약은 이미 라한의 손을 떠난 상황이었다. 이에 로이나는 정령이 그냥
돌아가길 빌었다.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정령과도 다른 형태의 정령에게 라한을 맡길
수는 없었다.
주위를 맴돌던 정령이 문양 위에 섰다. 그리고 서서히 희미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정령계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행이다.
휴.
스팟!
사라진 줄 알았던 검은 정령이 빠른 속도로 튀어 올랐다. 아무도 예상 못했던 돌발
상황이었다.
류한님
피링!
검은 정령은 류한의 이마를 강하게 강타한 후 모습을 감추었다. 얼핏 보면 라한을
뚫고 지나간 듯 보였다.
위이이이잉!
막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리자 로이나가 라한에게 뛰어들었다. 그녀는 라한을 위험에
빠뜨린 사람이 자신이라는 생각에 죄책가미 사라지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으, 으.
로이나가 라한의 이마부터 살폈다. 만약 계약이 되었다면 각 정령의 속성에 맞는
물체가 묻어 있을 터였다. 물의 정령이라면 물기가 땅의 정령이라며 흙이. 어떤
속성의 정령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계약이 되었다면 그에 맞는 어떤 것이 묻어
있으리라.
이, 이런.
라한의 이마에 걸쭉하고 검지만 반투명한 액체가 묻어 있었다. 도무지 정체가
무언지 짐작조차 가지 않은 액체였다.
라한은 의식을 잃은 후, 밤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그는 밤새도록 그 정령에 대한
꿈을 꾸는지 몇 번의 경기를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로이나는 더더욱 죄책감에 휩싸였다.
으으윽!
정신이 좀 드세요?
로이나의 부드러운 음성에 라한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로이나가 눈에
들어오자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기 기절한 거야?
예. 몸은 좀 어떠세요?
로이나의 물음에 라한이 몸 여기저기를 꿈틀거렸다. 나름대로 자신의 몸을 살피는
모습이었다.
멀쩡하네. 좀 피곤하기는 한데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아. 근데 그 정령은?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 계약이 되어서? 아니면 안 되어서? 난 뭐라도 상관없는데.
실제로 라한은 계약 여부에 대해서 방관자적인 입장이었다. 로이나의 말대로라면
계약을 하지 않아야 했지만, 그리 내키지 않았다. 또, 계약을 하는 것도 로이나가
반대하고 있으니 약간은 꺼림칙했다. 결국, 계약을 해도 상관없고 안 해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해버렸다.
그 정령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았어요? 물이나 불, 바람, 땅. 이런 느낌 받은 적
있으세요?
몰라.
예?
난 그런 걸 전혀 못 느꼈다고. 근데, 뭐랄까? 그냥 힘 같은 건 느꼈어.
친숙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뭐, 그런 기운이었어. 라한의 대답에 로이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도 그 정령에게서 라한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아는
그 어떤 지식에도 속해 있지 않은 정령이 분명했다. 부디 좋은 정령이기를.
아,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부를 수 있는 거야? 전에 로이나는 정령을 엄청 쉽게
불러냈잖아.
혹시 부를 생각이에요? 부르지 마세요. 미심쩍은 건 피하게는 게 좋잖아요.
라한도 로이나의 말을 충분히 납득했다. 확실치 않은 사실은 일단 피하고 보자는
말. 그건 라한이 로이나에게 해준 말이었다. 헌데도 그 정령에 대한 미련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건 그렇지만 방법은 알아야지.
정령은 계약할 때 자신의 이름을 속삭여요. 당장은 기억이 안 나겠지만 조만간에
떠오를 거예요.
알았어.
지금은 검은 정령과의 계약이 두렵고 걱정스럽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어차피 계약에
의한 산물. 부르지 않으면 그만이었기에 걱정을 접기로 했다.
다음날 수업을 마친 라한은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읽을 책을 골라 창고로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세요?
어제 계약한 정령을 생각하고 있었어.
로이나는 어제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미안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어찌됐든
자신이 우겨서 계약을 시도했고 그 결과로 라한이 의식을 잃은 셈이었다. 자신
때문에 라한이 피해를 봤다는 생각이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다.
그 정령. 생각났죠?
응.
로이나의 물음에 이름을 떠올렸느냐는 말이었다. 대부분 정령과의 계약을 치르고,
하루가 지나면 이름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라한도 같은 절차를 거쳤으니 알게 됐을
게 분명했다.
이름이 뭐예요?
지금 말해도 돼? 이름 말하면 그냥 나오는 거 아닌가?
아니요. 부르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나와요.
아, 그렇구나. 테세르. 그 정령의 이.
위이잉!
라한이 이름을 부르기 주변의 미약한 대기 변화가 생겼다. 가까이 있는 로이나가
겨우 느낄 정도의 미약한 반응이었다.
류한님.
그, 그게. 나는 부를 생각이 아니었는데.
라한이 말을 끝나자 그의 어깨에 어제의 그 정령이 모습을 보였다. 어제의 짙은
검은 색에서 조금쯤은 투명해진 모습이었다.
흠, 이상하네요. 한 번에 부를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거기다가 저 정령은
마치 부르길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다니.
그런거야?
정령 테세르의 반으은 로이나의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대부분의 정령은 대기의 울림이 있은 후에 서서히 나타나는 게 보통이다. 헌데,
테세르는 대기의 울림과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돌려보내세요. 그냥 가라고 하면 갈 거예요.
응. 테세르. 돌아가.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떠나기 싫은 듯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갓난아기가 어미 곁을
떠나기 싫어하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빨리 돌아가.
위이잉.
한 번의 재촉을 더 하자 테세르도 곧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아쉬운 얼굴을 풀지 않았다.
말을 잘 안 듣는 정령이네요.
그래도 귀여운데.
라한은 도서관으로 가면서 로이나에게 정령에 대한 많은 걸 들었다. 정령왕의
존재와 단계의 구분. 그들의 힘까지. 정령에 대해 들을수록 라한의 얼굴은 호기심에
물들어갔다. 자신도 모르는 세계에 대한 동경심이었다.
도서관은 선생들과 학생들에게만 허용된 장소였다. 수행원의 출입이 금지되는
곳이기에 로이나 역시 밖에서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에 들어온 라한이 책을 하나씩 훑어갔다. 제목에서 연금술이 연상되는 모든
책을 수집하는 모습이었다.
물질에 대한 모든 것. 사물을 살피는 법. 물과 불의 상관관계.
더럽게 많네.
라한의 손에는 이미 십여 권의 책이 안겨 있었다. 그나마 추리고 추려낸 책이
이정도였다. 아직 도서관의 일부만 훑었으니 앞으로 더 많아질 게 분명했다.
이걸 어떻게 들고 가나? 돌겠네. 로이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라한이 팔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십여 권의 책을 들고
여기저기 누비고 있으니 힘들게 당연했다.
딱-!
아, 맞다.
손가락을 퉁긴 라한이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을 보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여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어떻게 학교라는 곳에 공부하는 놈들이 하나도 없냐?
시험 기간 아니면 사람도 없으니.
테세르.
위이잉!
라한이 테세르를 불렀다. 단 한 권만 들어줘도 지금보다 편해지리라는 생각이었다.
야, 이 책 좀 들어. 팔 끊어질 것 같다.
라한의 어깨에 앉은 테세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시킨 대로 해야 하느냐는
무언의 시위 같았다.
야, 테세르. 내 말 안 들려. 난 너와 계약한 계약자야.
파다닥!
테세르가 라한의 말을 싹 무시한 채, 도서관의 구석으로 날아갔다. 날개도 없는데
잘도 날아 다녔다.
저놈 날기도 하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야, 거기 안 서?
라한은 도서관 관리자가 들을까봐 음성을 낮춰야 했다. 희한하게 생긴 정령을
부린다는 게 알려지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저놈이.
한참 날아가던 테세르가 도서관의 구석진 곳에 내려앉았다. 허리에 손을 얹고
쳐다보는 모습이 라한을 놀리려는 의도 같았다.
오호라. 내가 우습게 보인다 이거지?
라한의 말에도 테세르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있는 곳의 책을 꼭
껴안은 채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돌아가! 너 때문에 시간만 낭비했다.
라한의 말에도 테세르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한 강한
의지마저 엿보였다.
이게 안 돌아가? 빨리 돌아가.
라한의 두 번째 말이 끝나자 테세르의 몸이 조금씩 희미해졌다. 정령계로 강제
소환되는 모습이었다.
탁-!
테세르가 사라지자 그가 안고 있던 책이 책장 앞에 떨어졌다. 떨어지는 순간에
테세르가 책을 당긴 듯했다.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다. 어서 나와라.
책이 떨어짐과 동시에 도서관 관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테세르 때문에 시간을
너무 많이 소모한 것이다.
우씨, 테세르 그놈 때문에.
이필리에 종합학교는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 맞춰서 출입을 통제했다. 해가 잘
들어오게 되어 있지만 어두우면 책을 읽기 힘든 탓이다. 이 때문에 도서관에서는
책만 고르고 읽는 건 숙소에서 하는 게 보통이었다. 라한도 지금까지 그래왔고 이
학교의 다른 학생도 그렇게 해왔다.
예. 나가요.
테세르가 당겼던 책이 책장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조금만 건드리면 떨어질 정도로
튀어나온 것이다.
덥석!
일단 가자고.
라한은 제목도 보지 않은 채로 책 한 권을 품에 안았다.
엄청난 양의 책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정령 테세르
밤새도록 책을 읽던 라한이 한숨을 쉬었다. 책에서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찾지 못한
것이다. 잠을 못 잔 피로와 심적인 부담감이 라한을 짓눌렀다.
후우우우.
라한은 창고가 아닌 기숙사에 있었다. 자신이 창고에 머무른다면 로이나도 그곳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밤에 남녀가 한 방에 있을 수는 없는 일. 어쩔 수 없이
기숙사에서 책을 읽어야했다.
어디보자. 꿈을 실현하는 법? 뭐야?
라한은 생소한 제목의 책에 의앙한 기색을 보였다. 자신은 책을 고를 때, 몇 번의
고민을 하는 성격이었다. 이 대문에 책 제목에 관해서는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러
그에게 꿈을 실현하는 법이라는 책은 처음 듣는 제목의 책이었다.
아씨, 아까 테세르 그놈 때문에 같이 들고 왔구나.
라한의 관심사는 연금술이었다. 이 때문에 물질에 관한 책이나 마법에 관한 책만
골라서 수집했었다.
하지만, 이곳은 마법 학교가 아니었기에 제대로 된 마법 서적은 단 한권도 없었다.
대부분 마법의 효능이나 무서움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설명되어 있을 뿐이었다.
연금술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라한이기에 이런 형식의 제목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전혀 별개의 제목이니 당연했다. 거기다 책 자체가 수십 년 동안 손때를
타지 않은 듯 더럽기 그지없었다. 사람에게 소외된 책이라면 내용 역시
보잘것없다는 게 라한의 생각이었다.
더 볼 책이 없네.
꿈을 실현하는 법은 라한이 고른 마지막 책이다. 다른 책을 목차와 주제에 대해
대충 훑어본 라한. 더 이상 책이 없자 짜증이 치밀었다.
아악!
탁-!
라하이 마지막 책을 던져 버렸다. 비록 하루지만 아무 소득도 없이 보낸 게 화난
듯했다.
툭, 툭툭툭!
응?
라한이 던진 책에서 둥글게 말린 스크롤이 굴러 나왔다. 책장 사이가 아닌 책의
풀칠하는 부분에 말려 있던 스크롤이었다.
스크롤?
라한이 스크롤을 집어 올렸다. 그리고는 겉부터 안까지 샅샅이 살펴나갔다. 뭔가
고민하든 이마를 두드리던 라한이 눈을 크게 떴다.
마법 스크롤이다. 분명해.
스크롤에는 깨알 같은 크기로 많은 그림과 글씨가 적혀 있었다. 지금 시대의 글이
아닌 듯 생소한 문자였다.
룬어. 확실해. 이건 룬어다. 벌써 수백 년 전에 사라진 언어일 텐데.
라한은 룬어를 정확하게 해석해냈다. 비록 쓰거나 말하지는 못해도 읽거나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묵주에게 받은 선물이 발휘된 결과였다.
이 스크롤은. 스트랭스?
라한은 자신이 잡은 스크롤이 마법 무구임을 직감했다. 스트랭스 마법을
스크롤만으로 시전 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스크롤의 겉면에는 스크롤을 사용하는 법과 그 효과가 적혀 있었다. 스크롤을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편의를 위해 적은 듯했다. 또, 안쪽에는 이 마법을 실현하기
위한 수많은 마법 언어와 도형, 공식들이 적혀 있었다.
스크롤에는 연금술이 아닌 인챈트라고 적혀 있다. 그럼 본래 이름이 인챈트라는
거겠지. 연금술이라는 말은 최근 2 백년 사이에 나온 말이니 인챈트가 정확한 명칭일
것이다.
스크롤을 살피던 라한이 몇 가지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의 지식과 스크롤의 언어를
조합한 결과였다.
이 정도의 복잡한 도형이라면. 인챈트가 사라진 건 당연한 일이다. 공식의 이론에
나오는 공식은 이것에 비하면 애들 장난에 불과해. 거기다 이 도형들. 이건, 이건.
q 고 그리라고 해도 못 그릴 정도다.
라한은 인챈터의 소멸을 그 난이도에 기인한다고 결론 내렸다. 공식의 이론
수업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은 자신도 이해 불가능한 공식들. 이 정도의 난이도라면
역사 속의 대현자라도 풀기 힘들 게 분명했다.
또 공부인가? 4 학년부터 미술 수업과 조각 수업이 교양 과목에 있던가? 그것도
배워야겠군.
라한은 인챈트하는 모든 과정을 자신의 힘으로 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복잡한
공식을 풀어낼 지식과 난해한 도형을 그릴 미적인 능력이 필요했다. 그 모든 걸
스스로 하자면 배우는 방법뿐이었다.
이필리에 종학 학교는 4 학년부터 교양 과목을 배울 수 있었다. 악기를 다루는
능력부터 대장장이 기술, 주조 기술, 목공 등등. 수많은 과목 중에 최대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교양에 포함된 과목은 거의 대부분이 평민의 생활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귀족들은 교양 과목 자체를 거부해왔고 종래에는
신청한 사람만 받도록 바뀌었다. 물론, 귀족들은 신청 자체를 하지 않았고.
다음날 창고에 들어간 라한이 로이나에게 달라붙었다. 어찌 보면 무리한 부탁을
해야 하는 라한. 미리부터 애교를 떠는 모습이었다.
류한님. 용건이 뭐예요? 빨리 말씀하세요.
헤헤, 역시 로이나한테는 안 통하네. 음, 정령 좀 불러줘.
정령이오?
라한의 부탁에 로이나가 의아한 빛을 띠었다. 의외의 부탁을 받아 조금은 놀란
것이다.
지금까지 라한은 로이나에게 꽤나 많은 부탁을 했었다. 하지만, 마법이나 정령에
관한 부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스스로가 좌절을 겪었던 분야라서 알아서 피하는
것이다. 헌데, 라한이 정령 소환을 부탁하다니. 좀 미심쩍은 생각과 의아한 생각이
교차했다.
응. 불러봐.
예. 그러죠. 실프, 운디네.
로이나의 부름에 실프와 운디네가 모습을 보였다. 예전처럼 귀여움과 아름다움을
뿌리는 자그마한 정령이었다.
정령이 있잖아. 한 번 계약하면 그 정령만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많은 하급 정령
중에서 그 정령만 나타나?
대부분은 그렇지만 예외도 있어요. 정령도 정령계에서 할 일이 있거든요. 살다보면
아주 바쁠 때도 있고요. 뭐, 그럴 땐 다른 정령이 대신 나타나기도 하죠. 근데
갑자기 정령은 왜요?
로이나의 질문에도 라한은 웃기만 했다. 곧 알게 될 테니 재촉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은 웃음이었다.
훗, 잠시만. 테세르!
어? 류한님! 그 정령은 부르지 말라니까요.
로이나의 만류는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다른 정령과 달리 소환과 동시에 나타나는
테세르. 일단 부른 후에는 소환 취소가 불가능했다. 일단 부른 후에 역소환시키는
것만 가능할 뿐이었다.
괜찮아. 어제 불러봤는데 나쁜 녀석같지는 않아. 테세르. 저기 보이는 정령들하고
인사해.
에휴, 류한님. 실프, 운디네. 너희들도 인사해라.
라한과 로이나는 그들의 정령이 서로 인사할 거라 생각했다. 비록 물질계는
아니지만 그들도 그들끼리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바. 인사를 시킨다면 친분을
쌓을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야, 테세르 뭐해. 인사 안 해?
실프, 운디네. 너희들 말 안 들을래? 빨리 인사해.
라한과 로이나의 재촉에도 세 정령은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오히려 테세르는
정령의 눈을 피해 라한의 등 뒤로 숨기 바빴단. 반면, 실프와 운디네는 테세르를
혐오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가까이 있기도 싫다는 의미가 물씬 풍길
정도였다.
얘들 왜 이러지? 원래 사이가 안 좋은가?
안 되겠어요. 얘들 인사 시키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는데요.
응. 테세르 돌아가!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평소에 머뭇거리다 억지로
사라지는 모습과 확연히 달랐다.
실프, 운디네. 너희들도 돌아가.
세 정령이 모두 사라지자 라한과 로이나 사이에도 침묵이 흘렀다. 라한은 정령들이
보인 반응에 대해 생각하느라 말할 겨를이 없었다. 반면 로이나는 자신의 정령들이
라한을 우습게 본 것 같아 미안해서 입을 다물었다.
흠. 물과 기름 같군.
예?
아니야.
라한은 실프와 운디네가 테세르를 무척 싫어한다고 결론 내렸다. 미움이나 증오의
감정이 아닌 혐오감. 어떤 면에선 전자의 감정보다 더 심각했다.
다음날부터 라한은 스크롤 하나를 해석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이곳에서 일정한
공식을 찾아낸다면 나머지 인챈트도 쉬울 거라는 판단이었다.
4 학년이 된 후에도 라한의 일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항상 듣던 과목에 미술
수업과 조각 수업이 더해졌을 뿐이다.
요즘 류한군은 어떻게 지냅니까?
아, 뭐 항상 똑같습니다.
성적은요?
여전하죠, 뭐.
학교 선생들 사이에서 라한은 최대의 관심거리였다. 정치학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거의 만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식의 이론마저 시험마저 4 학년 이후부터는
만점을 놓치지 않았다. 이필리에 종합 학교가 생긴 이래 최고의 천재가 탄생한
것이다.
류한군, 정치학은 여전합니까?
에고, 말 마십시오. 어떻게 다른 과목은 만점을 놓치지 않으면서 정치학만은 바닥을
기는지.
선생들 중에 유일하게 라한을 미워하는 사람이 정치학 선생이었다. 항상 전교
꼴찌를 놓치지 않으니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새로 신청한 수업은 어때요? 전에 보니 교양 과목을 신청 했던데요.
아, 미술 과목은 제가 가르치는 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주 세밀한 터치는
사람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잘하는데 미적 감각은 영 아니라서.
허허허. 저하고 같습니다다 그려. 제가 가르치는 조각수업을 배우는데. 티끌만한
작은 조각은 사람이라 보기 힘들정도로 정확하게 새기더군요. 근데 그냥 사물을
깎으라고 하면 영 아닙니다. 미적감각으로만 따지면 빵점을 줘야 할 정도죠.
미술 선생과 조각 선생의 말에 주변 선생들이 시선을 집중했다. 그들에게는 라한의
일상 하나하나가 관심을 모았다.
오, 류한이가 못하는 과목이 생기는 건가요?
꼭 그렇다고 보기 힘든 게 세밀한 조각이나 그림을 잘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아, 그래도 예술 과목은 미적 감각이 우선 아닙니까? 감각이 떨어지면 못하는
거죠.
선생들 사이에서 라한은 천재로 불렸다. 비록 정치학 점수가 바닥이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논란의 여지가 충분했다. 단순한 바닥이 아닌 빵점만 줄기차게 받아온
것이다. 왠지 자신을 낮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틀리는 것처럼 보였다.
저도 동의합니다. 아무래도 예술에 대한 재응은 별로 인 것 같습니다.
허허허. 이거 참. 어째 주변 선생들께선 이번 일을 즐기는 듯합니다.
하하하하. 그런가요?
실제 선생들은 라한에게도 틈이 있기를 바랐다. 선생과 제자의 관계를 떠나
인간으로서 약간의 질투심이 생긴 것이다.
하하하. 주변 반응들을 보니 유한이가 못하는 게 즐거운 모양이군요. 이거, 이거.
이래서 선생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하하.
선생들이 라한에 대해 말할 때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어쩌면 이필리에 종합학교
출신의 대현자가 나올지오 모르는 일. 그렇게만 된다면 그들 모두의 영광이 될
터였다.
그나저나 전 류한이가 신분 때문에 고통 받을까 걱정됩니다.
무슨 말씀인지?
교양 수업을 받고 있다는 건 류한이 귀족이 아니라는 얘기 아닙니까? 혹시 평민이라
하여 다른 귀족들에게 무시나 당하지 않을지.
선생들은 라한의 정확한 신분을 몰랐다. 출신 성분에 대한 비밀 엄수는 학생들뿐
아니라 선생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흥. 류한이를 무시하는 귀족이 있다면 내가 가진 인맥 전부를 동원해서라고
가만두지 않겠소.
허허허, 흥분하지 마세요. 그가 무시당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 아닙니까?
이제 4 학년인데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라한은 학생들 사이에 평민으로 알려졌다. 항간에는 고아라는 소문도 돌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의 친분이 너무 부족했기에 이렇게 알려진 것이다.
고풍스러운 서재에서 엘베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필슨 백작의 세력이 조금씩
커진다는 정보를 얻은 탓이다.
파론. 어떻게 됐지?
소문이 사실 인 것 같습니다. 수도 뿐 아니라 지방에 있던 상인들이 필슨 백작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의 인상이 더욱 일그러졌다.
생각 같아서는 사람을 풀어서라도 필슨 백작의 처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과
필슨 백작이 앙숙이라는 게 널리 알려졌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 필슨 백작을
죽였다가는 자신이 제 1 용의자가 될 건 불 보듯 뻔한 일.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다.
요즘 근황은 어떻던가? 아직도 지방 귀족이나 상인과 자주 회합을 갖던가?
얼마 전보다는 뜸해졌지만 지금도 종종 만나는 것 같습니다. 헌데 그 대상이
일정하지가 않습니다. 자주 만나는 귀족이라고 해봐야 두 세 차례가 전부이고 거의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필슨 백작을 처음 만나는 사람뿐입니다.
몇 번 만나지 않는다는 건 단 몇 번의 만남으로 상대를 완벽히 포섭했다는
의미였다. 필슨 백작의 정치 수완이 대단함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이에 엘베로의
인상이 심하게 구겨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컸군. 그 사이에 많이 컸어.
저, 엘베로님.
무슨 일이지?
라한이라는 꼬마 있지 않습니까? 필슨 백작의 아들.
잔뜩 찌푸려졌던 엘베로의 얼굴이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라한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미는 듯 했다.
그 꼬마가 왜?
벌써 3 년이 지났는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집에 들르지 않았다는 말이냐?
예.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갔다. 고작 열 세 살의 나이인 라한.
한창 집을 그리워할 나이에 집에 가지 않는다? 엘베로의 라한의 실종을 다른
방향에서 생각했다.
파론. 라한이라는 그 꼬마가 학교에 입학한 게 확실하냐?
예.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흠, 지난 3 년 동안 라한 녀석과 같은 학년 중에 학교를 그만둔 학생이 몇 명이지?
엘베로의 질문에 파론이 잠깐 눈을 감았다. 자신이 모았던 정보를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14 명입니다. 그 중에 11 명은 동시에 퇴학당했습니다.
흠, 보통은 몇 명 정도 되지?
보통은 두세 명입니다. 이번은 이례적으로.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필슨 백작의 세력 확장과
라한의 실종을 동일 선상에서 파악했다. 그의 판단이 정확하다면 지난 삼 년 동안
라한에게 완벽히 속은 셈이다.
당했군.
예?
꼬마 놈은 이필리에 종합 학교를 그만 둔 것 같다. 애초에 학교를 오래 다닐 생각
따윈 없었겠지. 내 눈만 속이면 되니까.
아.
엘베로의 말에 파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록 어린 꼬마지만 엘베로마저 골탕
먹였던 사람이 라한이었다. 거기다 자신의 미행도 눈치 챈 아이가 아니던가. 그
정도 아이라면 그러고도 남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슨 백작의 정치 능력으로 지방 세력을 그렇게 모을 수 없지. 분명 그 꼬마 놈이
밖에서 일을 벌이는 걸 거다.
하지만 아이가 하는 말을 믿어 줄까요?
그는 명목상이지. 그를 지방귀족들이나 상인들에게 보냄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신뢰를 얻을 테니까. 예.
엘베로의 명령에 파론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과거에 몇 차례나 명령 수행을
실패했던 파론. 이번만큼은 임무를 완수하고 싶었다.
그들의 라한에 대한 평가는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자신이 라한을 신경 쓰는 만큼
그쪽에서도 자신을 신경 쓸거라는 생각. 아주 기본적인 전제가 틀렸기에 계속
어긋난 판단만 해댔다. 라한이 신경조차 쓰지 않음을 알았다면 분노가 치밀어
이성을 잃을지도 몰랐다.
창고에서 스크롤을 살피던 라한이 기지개를 폈다. 그 곁에서 로이나가 라한이
가져온 책을 읽고 있었다. 창고에서만큼은 아무런 제약이 없었기에 로이나도 책을
읽는 게 가능했다.
끝났다.
예.
라한의 담담한 말에 로이나가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라한의 끝났다는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아는 까닭이다.
공식 다 풀었어.
정말요? 진짜 다 풀었어요. 그, 그 스크롤에 있는 공식을요?
라한은 지난 삼년 동안 스크롤 하나에만 매달렸다. 스크롤에 쓰인 공식이 그만큼
어렵고 복잡했기 때문이다.
이 스크롤에는 현존하는 가장 어려운 공식이 기본 공식처럼 쓰였다. 그 외의 수많은
공식이 지금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공식뿐이었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라한이라도 그 많은 공식을 단시간에 풀 수는 없었음이다. 물론, 이 모든 공식을
해석하는 밑바탕은 묵주가 준 능력에 기인했다. 그가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주지 않았다면 시작도 못했을 일이었다.
응. 이 작은 스크롤 하나에 쓰인 공식의 수는 모두 272 개. 같은 공식이 반복해서
사용했던 걸 포함하면 대충 2 천 번 정도의 공식이 들어 있어.
류, 류한님. 축하드려요. 이제 인챈터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로이나도 연금술이라는 말 대신 인챈터라는 말을 사용했다. 라한이 계속해서 쓰는
말을 옆에서 배운 것이다.
아니, 아직 아니야. 전에 로이나가 나한테 연금술에 들어가는 재료에 대해 말한 적
있지?
아, 예.
라한의 말에 로이나가 아차 싶었다. 연금술에 값비싼 재료가 필요하다면 인챈트도
마찬가지일 터. 방법만 알았지 아직 실현시키기에 무리가 있었다.
인챈트에 사용되는 자료가 뭔지는 잘 몰라. 근데 이 종이를 가지고 판단해보면
일반적이 물품으로는 무리일거야.
마나 말씀이에요?
로이나의 물음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난 삼 년 동안 공식을 풀면서
종이의 재료에 대해서도 함께 연구했었다.
라한도 처음에는 스크롤이 보통의 낡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만져도
조금의 때도 타지 않는 스크롤을 보며 생각을 바꿔야했다. 거기다 아주 미약하게
풍기는 느낌. 로이나는 이 힘을 마나라고 불렀다.
얼핏 보면 그냥 종이처럼 보이지만 뭔가 달라.
뭐가 다른데요? 제 눈에는 그냥 종이로 보이는데. 마나의 느낌이 조금 나기는
하지만 너무 미약하잖아요. 색이 누런빛을 띠는 건 낡아서 그런 거 아니에요?
로이나의 물음에 라한이 부드럽게 웃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오류를 로이나가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지금의 라한에게는 그런 상황마저 흥미로운 모양이다.
이 스크롤이 얼마나 됐을까?
룬어가 사라진지 팔 백 년 정도 됐으니 최소 그 이상 지난 스크롤이겠죠.
맞아. 최소 팔백 년은 지난 종이지. 근데 이 종이 색을 봐. 비록 많이 낡기는
했지만 팔백 년이 된 거라고 보기는 힘들지. 그렇다고 이 종이의 관리 상태가
좋았던 건 아니거든.
라한의 말에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낡아 보이기는 하지만 8 백년 된 스크롤로
보기는 힘들었다.
그럼 그 종이를 구해야겠군요.
까마득한 옛날이라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스크롤 형태로만 마법 무구가 존재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럼 단순히 종이가 중요한 건 아니라는 얘기지. 아마 이 종이가
가지는 어떤 특징이 마법 무구가 될 수 있게 만들었을 거야. 앞으로 그 특징을
찾아내야지.
라한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지금 존재하는 마법 무구는 스크롤이 아닌 다른 형태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지금의 마법 무구가 과거에서 내려온 산물이라면? 과거에도
스크롤이 아닌 다른 형태가 존재했단느 결론에 도달한다.
그럼 종이가 가지는 특징만 찾으면 되는 거예요?
일단 그 특징을 찾는 데 주력할 생각이야.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지. 공식을
안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건 아니거든.
그래요?
사실 내가 이 공식을 다 외우기는 했지만 대체 어떻게 배열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순서를 바꿔도 될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순서가 중요한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아직은 모르겠다.
라한은 이미 공식의 배열에 대해 대강의 감을 잡은 상태였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내용은 발설하지 않는 게 라한의 성격이었다. 미리 말해서 로이나에게 기대감을
심어줄 필요는 없었다.
그렇군요. 전 아무리 보도 무슨 공식인지 모르겠던데.
나중에 공식 정리해서 알려줄까?
싫어요. 대충 봐도 골치 아플 것 같은데요. 그리고 전 인챈터가 될 생각이 조금도
없어요. 류한님이나 많이 외우세요.
로이나는 라한이 쓰는 공식에 시선도 주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모양이다.
로이나도 공부하고는 담쌓고 지냈지? 솔직히 말해. 그치?
아니에요. 그보다 올해도 집에 안 가실 거예요? 그리 멀지도 않은데 집에 좀
들르시죠.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집안 얘기만 나오면 할 말이 없었다.
자신도 잘못하고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라한은 지난 삼 년 간 집에 들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일 년에 한 달은 집에 갈 수 있음에도 가지 않은 것이다. 대신 형인 레테아가
학교를 종종 방문했고, 라한의 소식을 집에 전했을 뿐이었다.
아직은 안되겠다.
류한님. 집에서 걱정하는 건 생각지도 않으세요?
알지. 알긴 아는데. 못 가겠어.
라한의 인챈트에 대한 집념은 목숨을 건 도박과 같았다. 자신의 마지막 인생을 이
하나에 모두 바친 것이다. 그런 라한이기에 부모님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약해질까
두려웠다. 이곳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 불안한 마음에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를 보내고 그자를 만나다
주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홀을 가득 매웠다. 라한이 입학한 지 벌써 8 년. 라한을
비롯한 그의 동기들의 졸업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최우수상은 누가 받을까?
당연히 류한이지. 1 등을 놓친 적이 없잖아.
그래도 정치학은 내가 더 잘했는데.
푸훗, 류한이보다 정치학 점수 나쁜 사람도 있냐? 헛소리 하지 말고 줄이나 맞춰.
졸업생의 얼굴에는 아쉬움보다 설렘의 감정이 더 강했다. 다른 여느 학교보다
엄격한 규칙의 이필리에 종합 학교. 이곳에서 8 년을 보내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홀로 가 쪽 관중석에 위치한 저학년 학생들의 얼굴에는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짧게는 일 년, 길게는 칠 년을 이곳에서 보내야 하는 스스로가 불쌍한 듯
했다. 누가 봐도 이곳은 감옥이나 마찬가지 아니던가.
모두 주목. 지금부터 이필리에 종합 학교의 졸업식을 시작하겠다.
와
지휘자의 말의 학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매 년 있어온 졸업식 때마다 듣는
함성소리였다.
조용. 조용! 먼저 현자 엘베로님의 축하 인사가 있겠다. 모두 박수!
와
짝! 짝! 짝!
학생들의 얼굴에는 현자를 직접 본다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평소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엘베로였기에 그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이를 본 라한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빌어먹을 늙은이. 죽지도 않냐?
엘베로의 등장을 반기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한 때 엘베로와 껄끄러운
만남을 가졌던 라한. 그에게는 그때의 앙금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엘베로만큼 신경
쓰지 않았다 뿐이지, 마음에 안 드는 건 같았던 것이다.
이필리에 종합 학교의 뛰어난 인재들을 보니 몹시 기분이 좋구먼. 허허, 그대들은
이제 혼자의 몸이 아닐세. 개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나라의 힘이 될 수도 또,
해사 될 수도 있는 큰 인물이 된 게지. 이제.
엘베로는 인사말을 남기면서도 주변을 끊임없이 두리번거렸다. 얼핏 보기에는
뛰어난 학생들을 인자하게 바라보는 듯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라한을 찾으려는 의도였다. 그가 용으로 자랐는지 아니면
지렁이로 끝났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리라.
흠, 저 녀석인가? 아닌가?
엘베로는 라한을 쉽게 찾아내지 못했다. 지난 8 년간 라한의 외모가 너무 많이 변한
탓이다. 물론 라한을 오랫동안 봐온 사람이라면 한 눈에 알아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엘베로가 라한을 실제로 본건 그가 아홉 살 때 잠깐 뿐. 찰나의 기억으로
라한을 찾아내야 했으니 쉽지 않았으리라.
엘베로는 필슨 백작의 뒷조사를 계속하면서 라한이 여전히 학교에 다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 들어가는 학비가 꾸준히 지출되는 걸 알아낸
것이다. 그때부터 라한이라는 존재가 또 한 번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라한에
대해서만큼은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디 루이나 왕국을 빛낼 인재로 자라주길 바라네.
긴 축하 인사를 남긴 엘베로가 자리로 돌아갔다. 라한을 찾지 못한 게 아쉬운지
연신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었다.
날 알아보지 못했군.
다음은 시상식을 거행하겠다. 호명하는 사람 앞으로. 두팔트, 큐이, 세바르미아, .
교장 선생이 호명한 사람은 우수상을 수상할 학생이었다. 그의 호명이 있을 때마다
큰 소리로 대답하며 나가는 학생들. 그들의 얼굴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드러났다.
끝으로 최고상을 발표하겠다. 흠, 류한! 앞으로!
교장 선생이 약간은 경직된 목소리로 호명했다. 이필리에 종합 학교 역사상 최고의
인재였던 라한. 그에게 상을 주는 자기 자신도 자랑스러운 듯했다.
위 사람은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서 실시한 시험에서.
라한이 강단에 서자 선생들 모두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졸업식이 끝나면 라한이
떠나야 한다는 게 안타까운 모양이다.
류한군,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 라한의 시상식을 끝으로 졸업식은 막을 내렸다. 라한을
찾으러 왔던 엘베로는 결국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가야 했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으리라는 그의 자만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팔 년이 흘렀음에도 필슨 백작의 저택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웅장하고
고풍스러움을 간직한 저택. 여기 저기 먼지 하나 없이 정돈된 모습이 가풍을 느끼게
했다.
집에 거의 다다른 라한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지난 8 년을 회상하고 앞으로의
일을 다짐했다.
오늘부터 수업에 대한 부담감은 사라진다. 하지만 인챈트 수련은. 후우우.
라한은 인챈트에 대한 많은 발전이 있었다. 과거에 확신하지 못했던 공식의 배열을
알아낸 것이다. 그리고 인챈트에 필요한 물품에 대해서는 거의 확신을 가질
정도였다.
재룐느 알겠는데. 재료를 구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이건 남한테 시켜서 구할
수도 없으니.
인챈트에 필요한 물품에 대한 건 라한만이 알고 있었다. 남한테 설명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물건이 아닌 탓이다. 결국 재료를 구하는 일은 라한이 직접 움직여야
가능했다. 어쩔 수없이 언젠가는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류하님. 뭐하세요?
인챈트에 대해 생각 좀 했어. 특히, 재료가 영.
라한이 파악한 인챈트 재료는 크게 두 가지였다. 생성 때부터 마나를 머금고
있지만, 마나를 흡수하는 성질이 없는 물건. 마나를 꾸준히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서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그것이었다.
이 중에 전자는 일회용품으로 한 번밖에 쓸 수 없었다. 한 번 마나를 사용해 버리면
마법 성질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지난 팔 년 동안 생각하고도 더 생각할 게 남았어요?
하하. 그런가? 가자.
라한의 외모는 과거와 비교해서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항상 창고에만 처박혀 지내서일까? 라한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얼굴 역시
귀엽던 과거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누가 보면 옆집 사는 총각 정도로 생각하기
딱 좋을 정도의 외모였다. 조금 잘생긴 옆집 총각 말이다.
로이나와 그는 오히려 그런 외모를 다행스러워했다. 뛰어난 겉모습이 타인의
경계심을 유발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집사! 집사!
누구시오?
저예요. 류. 아, 아니다. 라한이오.
라. 한?
이름을 되풀이 하던 집사가 라한의 이모저모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라한을
봐온 그도 구분하는 게 쉽지 않은 듯했다.
한참 생각과 살피기를 거듭하던 집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라한 도련님. 도련님이군요. 아이고. 이게 얼마만입니까? 집에 좀 들르시지
그랬어요?
죄송해요. 아버지, 어머니는 건강하시죠?
물론입죠. 마님께서는 조금 야위시긴 했지만, 건강에는 이상이 없으십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보게. 추운데 들어가시죠.
때는 12 월. 밖에서 오래 얘기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반가운 마음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뿐. 평소라면 이런 실수도 하지 않을 터였다.
우리 집은 여전하네.
그럼요. 근데 이제 졸업하신 겁니까?
저택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집사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라한이 반가운 듯했다.
응. 오늘 졸업했어.
어휴, 도련님. 졸업식이면 기별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제가 마중 나갔을
텐데.
라한은 집의 따뜻한 온정이 좋았다. 집사의 세세한 질문도 귀찮기보다 정감있게만
느껴졌다. 집이 이런 곳이구나 라는 느낌을 세삼 깨달은 시간이었다.
우리 학교는 집에 연락도 마음대로 못해. 아주 엄격하거든.
그렇군요. 아, 이분이 전에 도련님을 수행했던 그분입니까?
뒤늦게 로이나를 본 집사가 아는 척을 해왔다. 그에게는 라한을 무사히 수행해준
로이나가 고마운 존재였다.
반갑습니다. 로이나라고 합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우리 말썽꾸러기 도련님을 지켜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로이나가 집사의 환대에 미소로 답했다. 비록 로브로 가려져 입은 보이지 않지만,
눈만으로도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집사의 질문은 저택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너무 많은 질문 때문에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묻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라한은
그런 집사의 질문도 나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신을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련님. 백작님부터 만나셔야죠.
응. 그래야지.
짧은 대답을 끝으로 서로 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저택의 내관에 들어왔으니
하인들은 입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말을 리드하던 집사가 입을 다물었고, 라한도 그를 따라 침묵을 지켰다.
라한이 입학하고 1 년 쯤 지났을 때 누나인 루시아가 결혼을 했다. 지방 귀족인
엘타나 남작의 둘째 아들 레젠이라는 사람이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라한은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형편없는 얼굴에
더러운 성격을 가진 루시아.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그녀를 데려가겠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제 짝은 있는 법. 레젠에게는 굵은 루시아의 몸도
나쁜 삐뚤어진 얼굴도 예쁘게만 보이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는단 말이야. 뭐, 지방 귀족이니 중앙 진출을 위해
결혼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희생이 너무 크잖아.
실제로 지방 귀족은 중앙에 터를 잡기 힘들었다. 이미 자리를 굳힌 귀족들의 텃새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중앙에 진출하는 길은 엄청난 공을 쌓거나 중앙
귀족과 친분을 쌓는 길 뿐이었다.
라한은 레젠이라는 사람이 가문을 위해 희생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주 큰 희생.
가문을 위한 희생이라. 나하고는 맞지 않는 얘기지.
필슨 백작은 요즘 하루 거의 대부분을 응접실에서 보냈다. 처음에는 손님이 있을
때만 찾던 응접실이었다. 하지만, 손님을 맞는 횟수가 잦아지자 응접실 출입도
덩달아 많아졌다. 이런 일이 몇 년간 되풀이 되자, 요즘은 손님이 있든 없든
응접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아버님. 저 라한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너라.
팔 년만의 상봉임에도 필슨 백작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을 겪으며
스스로를 다잡는 방법을 파악한 것이다.
라한 역시 크게 서두르지 않았다. 그도 8 년의 시간 동안 스스로를 성숙시켰기
때문이다.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그래, 앉아라. 로이나님도 앉으십시오.
로이나는 본래 필슨 가문의 하인이 아니었다. 베르네 신관이 보냈기에 몇 년간
라한의 수행원이 되었을 뿐. 실제로는 무관한 사이였다. 이 때문에 필슨 백작도
존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그는 로이난의 실제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엘프인 걸 뻔히 아는 데 반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필슨 백작님. 건강해보이시는군요.
허허허, 감사합니다. 로이나님.
로이나와 필슨 백작이 서로 존대를 하자 오히려 라한이 어색해졌다.
지난 8 년 간 반말로 대했던 로이나에게 말을 높이는 게 쉽지 않았다. 실제로
로이나의 수행원 역할은 오늘로 끝이 났다. 더 이상 라한의 수행원이 아니니 상하
관계도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 말을 높이긴 높여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 오늘 졸업했습니다.
좀 전에 기별을 받았다. 네 어머니도 곧 올게다.
네, 아버지.
라한은 어머니라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지난 8 년간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라한. 그간의 불효를 생각하자 어머니에게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그래. 오늘 졸업했다니 성적을 말해주겠느냐?
예.
짧게 대답한 라한이 성적표를 내밀었다. 라한은 졸업식 때 최우수상을 받을 만큼
뛰어난 성적을 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기에 내미는 손에도 힘이 넘쳤다.
흠.
성적표를 살펴본 필슨 백작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정치학 점수를 본 탓이다.
필슨 백작은 라한의 다른 성적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정치학에
대한 점수만 볼 뿐이었다. 빵점이라는 전무후무한 점수 말이다.
정치학 점수가 형편없구나.
제가 정치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필슨 백작의 질책에 라한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런 상황은 이미 수백 번도 넘게
상상했었다. 그리고 이때 자신이 해야 할 말도.
소질이 없다고 하여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지. 조만간 정치학을 가르칠
선생을 붙여주마.
예? 하지만 아버지. 전 오늘 졸업했습니다. 어찌 쉴 시간도 안 주.
그만.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두 말 하지 마라.
필슨 백작도 나름대로 다급한 심정이었다. 정치적 세력을 모으고는 있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한 상태. 자신의 대에서 안 되면 라한의 세대에서라도 평민들을 위한
개혁을 성공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자신의 뒤를 이을 라한의 정치 능력이 뛰어나야
했다. 다른 능력 다 부족해도 오직 정치적인 능력과 식견만큼은 남들보다
뛰어나야마 하는 것이다. 라, 라한아! 라한아!
어머니!
일레나의 눈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무려 팔 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일레나는 그 긴 시간동안 드문드문 전해오는
소식만으로 그리움을 참아왔다. 긴 기다림만큼이나 설움이 치밀어 오르는지 눈물이
멈출 줄 몰랐다.
그래. 내 새끼. 어디 아픈 데는 없니? 많이 야위었구나.
야위다니요. 전 이렇게 건강한걸요.
예전과 비교하면 많이 말랐구나.
아이 참. 어머니도. 그땐 열 살 이었다고요. 젖살이 몸 구석구석 달라붙어서 통통할
때죠. 지금은 그런 젖살들이 다 빠졌으니 마른 거죠. 제 건강은 아무 이상 없으니
걱정 마세요, 어머니.
일레나의 걱정에 라한이 서둘러 변명을 해댔다. 어머니를 걱정시키지 않는 게
아들의 가장 큰 도리이리라.
실제로도 라한은 몹시 건강했다. 그는 인챈트에 대한 연구를 몰두할 때도
식사만큼은 꼬박꼬박 챙겨먹었다. 또, 밤을 지새울 때도 세 시간씩 반드시 잠을
청해야했다. 이 모든 게 로이나의 집요함에서 비롯되었다. 로이나는 라한을 위한
최소한의 규칙을 정해놓고 그에 따르지 않으면 가차 없이 무력을 행사했다. 폭력이
아닌 강제력의 실행이었다. 이런 로이나의 노력이 없었다면 라한은 지금 피골이
상접해 있을지도 몰랐다.
후후, 다행이구나.
어머니. 잠시만요. 아버지. 저 정치학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두 말할 것 없다. 내일 선생이 올 테니 배우도록 해라.
하지만 아버지.
라한의 말에도 필슨 백작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도 라한이 정치학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확한 연유는 모르지만
성적표만으로 판단해도 정도가 심각한 상태였다. 말로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니라난
걸 짐작한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차라리 강압적으로 명령하는 게 필슨 백작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참. 로이나님. 마을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여기.
어색한 분위기를 깬 건 어머니인 일레나였다. 그녀의 말에 라한과 로이나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됐다.
무슨 편지인가요?
직접 읽어보세요.
일레나의 말에 로이나가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평범했던 얼굴이
읽어갈수록 조금씩 어두워졌다. 편지에 쓰인 내용이 로이나의 기분을 쳐지게 한
듯했다.
필슨 백작님. 일레나님. 라한님. 마을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흠, 하긴. 우리가 너무 오래 붙잡아둔 것 같습니다.
우리 라한이 섭섭하겠구나.
필슨 백작과 일레나의 말에도 라한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눈물을 글썽이며
로이나만 바라봤을 뿐이다. 지금 얼굴이 기분을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라한님. 나중에 다시 볼 수 있을 거예요.
로.이나.
훗, 우는 거예요? 라한님. 남자가 눈물을 보이는 게 아니에요.
로이나의 핀잔에 라한이 팔로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이미 흘러내린 눈물은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번져 있었다.
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
그렇죠? 울지 않으실 거죠? 그럼 전 가볼게요. 마을에 중요한 일이 생긴 것 같아요.
그래. 가버려. 쳇.
짧게 말한 라하닝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더 이상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백작님. 라한님을 부탁할게요. 그럼.
라한은 자신의 방에서 로이나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라한만큼이나 우울한
기분일게 분명한 로이나. 그녀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기에 라한도 가는 건 말릴 수
없었다.
로이나가 떠난 뒤로 라한은 침실을 나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창밖만 바라보며
멍하게 지냈다.
도련님. 오늘 정치학을 가르칠 선생님이 온답니다.
알았어. 라한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로이나가 떠난 지 일주일이나 지났음에도
기분이 풀리지 않은 탓이다.
정치학이라. 정치.
설사 정치학을 배우다 하더라도 학교보다는 집이 나았다. 학교에서 빼앗기는 시간은
여덟 시간. 하지만 집에서 정치학을 배우는 1 시간만 빼앗기면 되기 때문이다. 무려
7 시간이 남는 셈이니 인챈트에 투자할 시간은 그에 비례해서 커질 수밖에 없었다.
휴.
정해진 정치학 수업이 다가오자 라한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정치학 수업 자체보다
아버지의 의도가 부담스러웠다. 얼핏 보기에도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한 듯 보이지
않은가. 지금으로선 아버지의 뜻을 꺾는 게 불가능해보였다. 에휴.
도련님! 정치학을 가르쳐주실 제스란님이 오셨습니다.
네. 들라하세요.
끼이익!
라한의 방에 들어온 사람은 지금까지의 여느 선생들과는 달랐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지 수레에 탄 채 바퀴를 굴려 들어온 사람. 검은 머리를 가진 매서운 눈매.
흡사 용병 일을 오래 하던 사람이 부상을 당하던 저런 모습이 될 터였다.
네가 카라한이냐?
네. 그냥 라한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라한의 시선이 제스란의 다리로 옮겨갔다. 하지만, 불구의 다리가 이상해서 본 건
아니었다. 단순한 바퀴소리가 들리자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을 뿐이다.
내가 다리를 쓰지 못하는 게 이상하냐?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를.
됐다. 앉아라.
제스란은 라한의 시선 정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없이
겪었던 일이 아니던가. 이미 적응될 대로 된 제스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첫 수업은 뭐.어? 어, 어.
고개를 든 라한의 시선에 제스란의 얼굴이 들어왔다. 수레가 주는 인상이 너무
강했기에 지금에서야 얼굴을 본 것이다.
무슨 일이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닙니다. 저, 그게.
후후. 혹시 구 년 전에 날 봤던 걸 기억하는 것이냐?
제스란은 레테아의 시합 때, 루시아가 재수 없어 하던 그 사람이었다. 필슨 백작을
비롯한 가족들은 단순히 다리를 못 쓰는 사람정도로 생각했기에 기억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라한은 달랐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과 뭔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던 사람.
때문에 그때 봤던 눈빛과 표정, 당시의 느낌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맞습니까? 그때 그.
보기보단 머리가 좋은 녀석이로군.
제스란은 진심으로 라한에게 감탄했다. 올해 열여덟 살. 9 년 전이라면 아홉 살
나이에 얼핏 본 사람을 기억한 셈이다. 자신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억력이었다.
그때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느낌? 내게서 무슨 느낌을 받았지?
제스란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보통의 선생이 보여줄 수 있는 눈빛과는
천지차이였다.
제스란의 눈빛에 라한이 식은땀을 흘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저런 눈빛은 결단코
처음이었다. 심지어 자신을 싫어하는 루시아조차도 저 정도로 차가운 눈빛은 지은
적이 없었다. 아니, 루시아는 저런 눈빛을 지을 수조차 없었다. 피를 알고 죽음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눈빛이 제스란의 눈빛이었다.
.
무슨 느낌이었지? 말해라.
그, 그냥 동질감이오. 저하고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보, 보통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느낌이오.
힘겹게 대답을 한 라한이 숨을 몰아쉬었다. 별 거 아닌 대답조차도 지금의
라한에게는 몹시 힘든 모양이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그, 그게 무슨?
모르는 모양이군. 묵주 그 자식이 내 얘기를 안 하던가?
제스란의 말에 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묵주라는 이름은 이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몰라야했다. 자신이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으니 모르는 게 정상적이었다. 헌데, 제스란은 그 비밀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입에 담았다. 자신이 누군지 다 안다는 듯이.
어, 어.
앉아라. 진짜 말 안했군. 빌어먹을 자식.
제스란의 눈빛이 더 차갑고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묵주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도 화가 치밀었다. 그가 묵주를 얼마나 증오하는 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저, 묵주님이 일을 잘 못하긴 해도. 그러니까 저. 그래도 제게 새 생명을 주신 분이
그 분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냐?
예? 아, 아닙니다. 그냥 말씀하십시오.
괜히 묵주를 옹호하려던 라한이 기죽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제스란의 살기 가득한
눈빛에 오금이 저렸다.
난 무령계에서 온 제승업이라고 한다.
제승업, 제승업. 아, 제승업.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묵주님께서.
닥쳐라! 다시 한번 묵주놈 이름 뒤에 님을 붙였다가는 네 놈 주둥아리를 갈아
마셔버리겠다.
예.
라한의 목소리가 좀 전보다 밝아졌다. 비록 겉으로는 분노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자신에게 큰 반감을 가진 건 아닌 듯했다. 이런 태도라면 자신을 죽이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묵주 그놈이 날 이곳으로 보냈다.
아, 그렇군요. 축하드립니다. 이곳에 왔다는 건 그. 뭐시냐? 운명의 굴레를
벗었다는 게 아닙니까?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알고 있는데요.
라한의 말에 제스란의 눈이 붉게 번뜩였다. 라한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음이다.
크크크. 그 빌어먹을 묵주놈이 날 그냥 보냈다면 이 정도로 분노하지는 않겠지.
근데 그 자식이,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자식이 내 다리를.
설마, 설마 다리를 못 쓰게 된 게 묵주님. 아니, 묵주놈이 한 일입니까? 왜요? 무슨
이유로?
영계에서 라한을 만났던 묵주는 곧 바로 제승업을 소환했다. 무령계 내에서 살업을
일삼던 제승업. 그는 묵주를 만나자 마자 살수를 펼쳤다. 무령계 내에서 당할 자가
거의 없었기에 묵주에 대한 공포도 없었으리라.
제승업이 눈을 번뜩이며 묵주를 노려봤다. 독수리가 먹이를 노릴 때보다 더 강한
눈빛이었다.
네 놈이 날 이리로 데려온 놈이냐?
그렇다고 해야겠군.
제승업의 날카로운 눈빛에도 묵주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제승업을
가소롭게 보는 듯 비웃음을 흘렸을 뿐이다.
크크크. 내가 누군지 똑똑히 보여주지. 하앗!
응?
제승업의 빠른 공격에 묵주가 한 걸음 옆으로 이동했다. 신법의 최강자. 살인의
귀신이라 불리던 제승업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버린 묵주였다.
이, 이.
내 차례군.
겉으로 태연한 묵주였지만 속으로는 약간의 놀람을 가지고 있었다. 제승업의
움직임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던 탓이다.
스핑! 팟-!
캑! 캑!
묵주의 손이 어느새 제승업의 목을 움켜쥐었다. 빠른 몸놀림만큼이나 빠른 눈을
가진 제승업을 너무도 간단히 제압해버린 것이다. 언제 움직였는지도 볼 수없을
만치 빠른 움직임이었다.
이 정도면 결과가 나온 건가?
털썩!
묵주가 손을 털어버리자 제승업이 구석에 처박혔다. 가벼운 손놀림에 비해 어이없이
날아가 버린 살귀 제승업. 그에게는 생전 처음 겪는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넌 누구냐? 날 왜 이리로 데려온 거지? 대체 목적이 뭐냐?
하나씩 대답해주지. 난 묵주다. 네가 살고 있는 무령계 저승사자의 수장이지.
저승. 사자?
작게 읊조리던 제승업이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저승사자는 사람이 죽었을 때,
만날 수 있는 자. 저승사자를 만났다는 건 자신이 역시 저 세상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후후. 널 이리로 데려온 건 너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기 위해서다.
새로운 생명을 준다고? 날 살려주겠단 말이냐?
제승업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주고 싶지 않은 건 모든 사람의 공통된
바람이다.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던 제승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뭐, 그런 셈이지. 근데 말이야. 널 네가 살던 원래 세계로 보낼 수는 없다. 넌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거든.
상관없어. 살게만 해줘. 목숨만, 목숨만 살려줘. 무슨 짓이든 다 할게. 제발. 제발.
제승업의 간절한 외침에 묵주가 비릿하게 웃었다. 아직 죽지도 않은 제승업을
너무도 쉽게 구워삶은 탓이다.
누구나 죽기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제승업에게는 그 의미가 조금은
남달랐다. 많은 사람을 죽이며 많은 죄를 지었던 제승업. 그에게 저 세상의 처벌은
혹독하고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자신의 죄를 누구보다 잘 아고 있었기에 그 처벌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널 살려주는 대신 너에게 두 가지 의무를 부여하겠다. 대시 두 가지 혜택을
약속하지.
끄덕끄덕!
제승업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저승사자의 수장이며 자신보다 훨씬 강한 묵주.
그가 부여하는 의무라면 예사롭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마음을 다
잡았다.
이런, 이런. 너무 긴장하는 군. 흠, 혜택을 먼저 알려주지. 첫째, 너에게 가해진
제약을 없애주지. 우린 이걸 운명을 굴레를 벗긴다고 하지.
운명의 굴레? 그게 뭐지?
나뿐 아니라 모든 신들의 이목에서 널 지워주겠다는 말이다. 사고로 죽거나 병으로
죽지 않는다면, 네 생명은 영원히 지속될 거다.
묵주의 말에 제승업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사람이 죽는 건 원래 사고사와
병사였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아닌 혜택으로 자신을 희롱하고 있으니 화가
났으리라.
제승업은 신들의 이목에서 지워지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몰랐다. 인간의 삶이
신에게 규정 지워져 있으며, 그들이 의도한대로 흘러감에도. 이 사실을 알았다면
신들을 저주함과 동시에 자신이 받은 혜택이 얼마나 큰지 알았으리라.
다음은 뭐지? 혜택이 두 가지라고 하지 않았나?
두 번째는 널 살려주는 거지. 알잖아? 넌 여기서 죽을 운명이라는 거. 다른
차원으로 보내주는 것이니 혜택 아닌가?
묵주의 비웃음에 제승업의 손이 꽉 쥐어졌다. 묵주가 자신을 놀리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다. 하지만 분노를 억누르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힘없는 약자였기에.
의무는?
첫째, 아까의 혜택과 같은 맥락이지. 네가 그 차원에 가면 차원 자체를 뒤흔드는
행동은 금한다. 알다시피 넌 신들 모르게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되는 거다. 네가
그곳에서 너무 많은 일을 했다가, 너의 정체가 신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 하거든.
뭐, 신과 싸우고 싶다면 네 녀석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겠지.
묵주의 말에 제승업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사람에게 새 생명을 주는 일. 그건
누가 봐도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자신이 다시 살아가는 그 자체가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니 신의 이목을 피해야 했으리라.
두 번째는?
후후. 그곳에 가면 다른 차원에서 넘어간 녀석이 한 놈 있을 거다. 그놈을 찾아라.
그리고는?
제승업은 묵주의 의도를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냥 찾으라니. 찾아서 뭘
하라는 건지. 그렇다고 꼬치꼬치 캐묻기도 뭣했다. 자신이 약자라는 걸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알아서 해. 죽이든지 살리든지.
흠.
아, 이런. 깜빡할 뻔했군. 캐테트라이아 마스리크!
묵주의 낮은 중얼거림이 끝나자 제승업의 다리에 빛이 감돌았다. 묵주의 검은
분위기에 어울리는 검푸른 빛이었다.
털썩!
이, 이게 뭐지? 무슨 짓을 한 거냐? 내 다리가. 내 다리가.
넌 너무 강하거든. 그래서 제약을 좀 줬지.
제발, 제발 내 다리를. 제발.
제승업에게는 다리는 단순한 이동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살귀라는 별명 자체가
뛰어난 신법 때문에 가능했던 터. 다리는 쓰지 못한다면 힘의 구 할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후후. 네가 갈 세계는 판트리아라는 곳이다. 그곳은 무령계와는 달라서 무력이 그리
강하지 못해. 네가 온전한 몸으로 넘어갔다가는 세상에 군림하겠다는 생각이
들겠더군. 그건 내가 원하는 재미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래서.
네 녀석이 다리는 쓰지 못해야 어느 정도 재미있는 상황이 되겠더라고. 뭐, 다리를
못 쓰더라도 강자 축에 들고도 남겠지만.
실제로 제승업은 무령계 최강자가 아니었다. 그곳에도 운명의 굴레를 벗은 많은
기인들이 숨어 있을 터. 그들과 비교하면 제승업의 실력은 어린 아이 수준에
불과했다.
또 그런 기인들이 아니라도 실력만으로 따지면 제승업보다 강한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신법만은 달랐다. 처음 제승업과의 격돌 때, 묵주마저 놀라게
했던 빠른 몸놀림. 저승사자가 놀랄 정도라면 판트리아에선 세상을 훔치고도 남을
속도였다.
제스란의 얘기를 들으며 라한이 고민에 빠졌다. 단순히 자신을 위해서 새 생명을 준
게 아님을 느낀 탓이다.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군요.
훗, 보기보다 영특한 녀석이군.
그래도 이해가 안 갑니다. 지금은 묵주가 우리를 볼 수 없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가지고 노는 건지.
라한의 물음에 제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한의 의문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몸짓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너처럼 생각했다. 묵주가 날 살려준 건 오직 날 위해서라고
생각했지. 다리를 못 쓰게 만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아니더군.
예? 묵주가 우리를 볼 수 있나요?
그렇진 않을 거다. 굳이 그런 거짓말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라한의 의문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에게는 묵주나 제스란이나 이해 불가능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럼요? 우릴 볼 수 없는데 왜?
그놈은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보고 싶어 하지 않아. 다만, 우리 때문에 이
세계가 혼란에 빠지게 되면 그걸 즐기려는 거지.
혼란을 원했다면 왜 다리를.
정도가 지나치면 안 되거든. 알다시피 묵주는 신이 아닌 저승사자다. 신의 눈치를
살피려면 약간의 재미는 포기해야겠지.
그제야 라한도 지금 상황을 이해했다. 묵주의 목적은 오직 재미. 하지만, 신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에 약간의 제약을 가했을 뿐이다.
서로 다른 차원의 두 존재가 새로운 차원에 떨어졌으니 범상치 않은 일이 생길 건
자명한 일. 묵주는 그때 생긴 사건을 즐기려 했음이다.
뭐,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우린 새 생명을 얻었으니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닌가요?
묵주가 원하는 사고는 우리가 터트리지 않으면 그만이죠. 안 그래요?
그게 쉽지 않더군.
제스란은 이 세계에 온 뒤부터 스스로의 화를 억눌러왔다. 화를 참지 못해 사고를
일으킨다면 좋아할 존재는 묵주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묵주가 잘 되는 건 죽어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화를 참느라 힘들었나보군요. 그래도 길지 않은 시간을 참다니. 대단해요.
후후, 처음에는 묵주가 싫어서 화를 참았다. 하지만 지금은 나 자신을 위해서
참는다. 살기 위해서.
살기위해서요?
몰라도 된다.
제스란의 짧은 대답에 라한도 입을 다물었다.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비밀은 있는
법. 제스란 역시 말하기 싫은 비밀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근데 어떻게 정치학 선생이 되셨어요? 온지 겨우 20 여 년 전도 밖에 안 되잖아요.
나? 선생 아니야.
예?
선생 아니라고. 여기는 너 만나려고 온 거야. 원래 선생이 되기로 했던 놈 손 좀
봐주고 대신 들어온 거지.
제스란의 말에 라한이 입을 떠억 벌렸다. 정치학 선생이라면 귀족일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낮은 귀족이라도 평민에게 당했다면 무사하긴 힘들 게 분명했다. 잘못하면
그 화가 자신에게까지 미칠지 몰랐다.
귀족을 능멸하는 게 얼마나 큰 죄인 줄 알아요? 병사들이라도 들이닥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귀족이라면 그렇겠지.
그럼 귀족 아니었어요?
내가 아무리 막 나가는 놈이라도 귀족을 죽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쳇, 다리만
멀쩡했으면 왕족도 가지고 놀 수 있을 텐데.
제스란의 말에 라한이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같은 조건ㅇ라면 평민을 다루는 게
더 쉬운 건 자명한 일이다. 굳이 귀족에게 해코지를 해서 사칭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근데 살귀로 불렸다고 했죠?
그렇게 부르더군.
그렇게 안 보여서요. 훗, 의외인가보군.
과거의 제스란은 말이 막히면 칼부터 휘두르는 성격이었다. 이런 급한 성격 탓에
많은 사람을 고혼으로 만들어버린 일도 종종 있어 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령계에서의 일. 지금의 제스란의 성격이 조금 급할 뿐. 스스로를 자제할 줄 아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곳 판트리아에 와서 여러 경험을 하면 성격이 바뀐 것이다.
그나저나 그 팔은 원래 그랬던 거예요? 묵주가 못쓰게 만든 건 두 다리라면서요?
묵주의 외팔은 팔꿈치 아래로 깨끗하게 잘려 있었다. 비록 두 다리를 못 쓰긴
하지만 묵주의 실력은 약하지 않았다. 그런 강자에게 저런 피해를 입히다니.
예사로운 사람은 아닐 게 분명했다.
몰라도 돼.
비밀이 참 많으시군요.
닥쳐!
제스란의 말이 끝난 후. 라한과 그의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특별한 이유도
없는 이상한 형태의 정적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정치학에 배정된 시간의 거의 끝날 무렵. 제스란이 짜증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야, 너 나한테 궁금한 거 없냐? 뭔 말 좀 해봐라.
제가 궁금한 건 정치에 관계된 건데요.
라한의 말에 제스란이 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진짜 정치학 선생이 아니었으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분명했다.
쳇, 뭐 저딴 놈이 다 있어?
제가 왜요?
제스란의 중얼거림에 라한이 짧게 대꾸했다.
라한은 지금 제스란과 사적인 얘기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로이나가 떠난 빈자리가
생각보다 크게 작용한 탓이다. 마음 속 한 곳이 빈 느낌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뭘 물어보겠는가. 마냥 로이나를 생각하며 멍하게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너 열여덟 살 아니냐?
맞아요.
열여덟 살이면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일 텐데, 왜 아무것도 안 물어보냐?
대체 뭘 물어봐야 하는 데요?
항상 공손하게 대답하던 라한이 좀 전보다 날카로운 말투로 대꾸했다. 제스란의
말도 안 되는 트집이 그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다.
난 네가 살던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에서 왔잖아.
그래서요?
그럼 내가 살던 세상에 대해서 궁금해 해야 정상 아니냐? 다른 나이도 아닌 열여덟
살 나이라면 분명히 궁금할 텐데.
제스란은 자신의 활약상을 떠벌리고 싶었다. 무령계에서 살귀라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었던 제스란. 그의 활약상이라고 해봐야 사람을 죽인 얘기뿐이었다. 하지만
제스란 스스로는 사람 죽인 얘기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사람 죽인 얘기는 별로 안 궁금해요.
이, 이. 좋아. 그건 그렇다고 치자고. 그럼 내가 왜 살귀라 불렸는지 안 궁금하냐?
사람 죽여서 살귀라고 불렸겠죠.
라한의 목소리에는 귀찮아 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스란이 하는 말 모든 게
자신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먼 얘기. 라한은 제스란이 그만 입을 다물어줬으면
싶었다.
흠, 그럼 내가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지.
사람 죽인 얘기는 싫다니까요.
그런 거 아니니까 잘 들어.
제스란의 다짐에도 라한의 얼굴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제스란은 이미 라한에게서 신임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라한의 시선을 잡기는 힘들었다.
.
쳇, 무뚝뚝하기는. 이곳은 마법이라는 게 있더군. 전에 한 번 겪어봤는데 엄청난
힘이었지. 하지만 내가 살던 무령계에는 이 마법보다 더 대단한 게 존재한다. 그건
바로.
바로까지 말을 한 제스란이 라한을 쳐다봤다. 라한의 얼굴이 호기심에 젖어 있기를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젠장. 저 놈 왜 궁금해 하지 않지? 내 얘기가 재미없나?
제스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라한의 얼굴은 이전과 똑같았다. 이에 제스란의 기대가
처참히 부서졌다. 그리고 스스로가 가지 무공에 대한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건 무공이라는 힘이다. 이곳의 기사들은 내가 살던 세계의 삼류 무사 수준밖에 안
돼. 그 정도 실력을 가지고.
시간 됐어요. 나가세요.
제스란이 한창 본론으로 들어가려 할 때 라한이 말을 끊어버렸다. 정치학에 배정된
시간이 끝났다는 얘기였다.
뭐, 뭐?
정치학 수업 시간 다 끝났어요.
우씨, 좋아. 네가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내가 네 아버지한테 다 말해야겠다.
제스란의 얼굴이 음흉하게 변했다. 끝까지 쓰지 않으려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나름대로 라한을 확실하게 휘어잡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뭘요?
네 출신과 저승사자 얘기 등등. 내가 너에 대해서 아는 것 전부 다 말해 버릴 거야.
그러세요.
라한의 담담한 대꾸에 제스란이 몸을 비틀었다. 나름대로 생각한 최후의 카드에
미동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저 놈 뭐야?
제스란은 그의 머리 구조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네 정체를 말해줘도 상관없다는 말이렷다?
풋, 말해봐야 누가 믿어줄까요? 오히려 미친놈이 정치학 선생으로 들어왔다고
쫓겨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라한의 말에 제스란이 고개를 숙였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라한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누가 봐도 라한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또, 생판 처음 보는 자신의
황당한 말을 누가 믿겠는가. 거기다가 정치학 선생을 사칭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추방 정도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젠장.
말 빙빙 돌려가면서 내가 말하기를 유도하지 말고 그냥 정중하게 부탁하세요. 그
부탁이 타당하면 들어줄게요. 우린 다른 차원에서 넘어왔다는 공통점이 있잖아요.
무리한 부탁만 아니면 들어줄 테니까 말해보세요.
라한의 타이르는 듯한 말에 제스란이 눈을 부릅떴다. 아직 어려 보이는 라한에게
훈계를 당한 게 분한 모양이다.
젠장. 좋아, 너!
예.
나한테 무공 배워라.
제스란의 말에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짐짓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라한이 눈을 감자 제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라한이 승낙할 거라고 확신했다.
이곳 판트리아에서 무공의 힘이면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힘. 열여덟 살 나이라면
힘에 대한 갈망이 클 테니 승낙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싫어요.
왜?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이 부족해요. 정치학 수업으로 허비하는 한 시간도 아까울
지경이라고요. 그리고 전 잡기술에는 원래 관심 없어요.
잡, 잡. 잡기술?
라한의 말에 제스란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익혀온 무공.
어쩌면 자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무공을 잡기술로 치부한 것이다.
아, 미안해요. 뭐 그런 걸로 화내고 그러세요? 잡기술이라고 한 건 사과할게요.
하지만, 전 정말 시간이 부족하다고요.
이, 이.
라한의 사과에 제스란도 할 말이 없었다. 화낼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차라리 화를
참지 않고 바로 표출했다면, 이런 우스운 꼴은 당하지 않았으리라.
저놈 . 강적이다.
제스란은 대화의 흐름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뭔가 확실하게 밀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자꾸만 주도권이 넘어갔다. 도대체 지금 상황이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좋아. 시간이 부족하다니까 정치학 수업 시간에만 배워라. 어때? 어차피 이
수업시간은 나한테 배정된 시간이잖아. 이 시간에 내가 뭘 하든지 내 마음이지. 안
그래?
말을 마친 제스란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말이라면 라한도 승낙할 수밖에
없을 터. 할 말이 없으면 라한도 곤란해 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네.
비틀!
제스란의 생각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라한이 제스란의 거래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라한은 조금도 곤란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당연하게 대답함으로써
거래를 건 제스란을 바보로 만들 뿐이었다. 말싸움으로 제스란이 라한을 이기기는
불가능해보였다.
미치겠군. 내 뜻대로 됐는데 왜 이렇게 불쾌하지?
쳇. 이상해.
이상하긴요. 그나저나 지낼 곳은 있어요? 꼴을 보아하니 옷은 본래 배정된 선생한테
빼앗아 입은 것 같고. 얼굴도 급하게 씻은 것 같기는 한데. 목 부분을 보아하니
원래는 안 씻고 살았군요.
뭐, 뭔 말이냐? 안 씻다니?
라한의 설명의 제스란이 당황하는 기색이 보였다. 라한의 추리가 정확했던
모양이다.
제스란님. 혹시 출신이. 거지?
컥!
맞구나. 에고, 제가 아버지한테 말해놓을 테니까. 우리 집에서 지내세요. 대체 여기
온지 이십 년이 지났으면서 그동안 뭐 한거예요?
라한의 질책 어린 말에도 제스란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잘못 대꾸했다가
라한이 한 말을 철회하기라도 하면 자신은 또 다시 길거리에서 지내야했다. 그런
상황은 극구 사양하고 싶었기에 잠깐은 숙이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잠깐 지고
들어가더라도 따뜻한 방에서 지내고 싶었던 것이다.
사부님
그날밤 자신의 방에 들어온 라한이 테세르를불렀다 처음에
는 로이나의 반ㅐ에 부딪혀 제대로 소환도 못했었다 하지만 지난
팔 년간 지내면서 소환 횟수는 늘어만 갔고 그에 비례해서 테세
르에 대한 믿음도 커졌다 잦은 만남이 친분을 돈독케 하는 건 인
간 사이의 이ㅣㄹ만은 아닌 듯했다
테세르
라한의 낮은 부름에 테세르가 주변을 날아다녔다 날개가 없어
도 잘도 날아다녔다
야 내가 지금까지 널 소환한게 백번은 족히 넘는다 근데 어
떻게 부를 때마다 산만하게 나타나는 건데 세상이 그렇게 신기
해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핀잔을 주려던
라한이 어색해질 지경이었다.
상대를 허무하게 하는 라한의 대화법은 테세르가 시초였다 뭔
가 핀잔주려고 잔뜩 열올려놓으면 허무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테세
르. 어쩔 때는 그것마저 감안해서 치밀하게 계획을 짜두면 정령계
로 돌아가 버리기 일쑤였다. 질 것 같은싸움은 애초에 피하는 모
습이었다.
"쳇, 로이나가 어디 있는지 좀 찾아봐. "
절레절레
라한의 부탁에 테세르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로이나에게는
절대 갈 수 없다는 강경한 의지마저 엿보였다.
"야, 너 자꾸 이럴래? 한 번 말하면 좀 들어라. "
절레절레.
라한의 두 번째 부탁에도 테세르는 거절한다는 표현을 할 뿐이
었다. 본래 로이나를 싫어하는 그가 부탁을 들어줄리 만무했다.
실제로 테세르와 로이나는 무척이나 사이가 안 좋았다. 로이나
는 테세르만 보면 인상을 찌푸리며 살기를 흘렸다. 그녀의 기준에
서는 생전 처음 보는 정령이 달갑지 않은 듯했다.
반면, 테세르는로이나를 피하기 바빴다. 그녀의 눈빛만닿으면
라한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에게 로이나는 공
포의 존재이자 기피 대상 1 순위에 지나지 않았다.
"널 믿은 내가 바보지. "
말을 마친 라한이 테세르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라한의 얼굴을
본 테세르가몹시 미안한표정을 지었다. 테세르는보기와다르게
마음이 여렸다. 강경한 자세로 나오다가도 라한의 슬픈 눈빛에 시
키는 대로 다 하기 일쑤였다. 이에 라한은 테세르의 이런 성격을 꽤
많이 이용해왔다. 그가 테세르를 관리하는 최고의 방법인 셈이다
절레절레.
하지만 이번만큼은 감정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라한에게 미안
한 표정을 잔뜩 지으면서도 로이나를 찾는 일 만큼은 끝까지 거부
한 것이다. 라한은 테세르가 로이나를 왜 그렇게 꺼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더욱 미안한표정이 되었다. 라한이 로이
나를 얼마나 따르는지 잘 아는 터, 라한의 말을 따르고 싶은 마음
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안 되는 일을 되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판트리아 대륵은 인간이 거의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
도로 인간의 성세였다. 어딜 가도 인간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때로는 몬스터들을 애완용으로 키울 정도였다.
하지만 인간에게 알져지지 않은 곳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레
비안산맥과로테라숲, 파마리스평원. 이 세 군데가그곳이다. 인
간들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시킬 만큼 위험한 곳, 인간들이 출입하
는 족족 의문의 실종을 당하는 곳, 그 어떤 정찰단이나 토벌대마저
철저히 죽음으로 내모는 곳이었다
그 중 한 곳인 레비안 산맥은 산세가 깊고 몬스터가 많기로 유명
했다. 이 때문에 웬만한 용병단은 출입마저 자제할 정도였다.
하지만 인간들 중에서는 웬만하다는 말로 불리기 힘들만큼 강한
조직이 많았다. 또, 역사적으로강하다고불리는왕국의 토벌대도
쾌 많이 조직됐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신비로 묻힌 레비안 산맥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인간들에 의해 도시까지 건설
되는가싶었다. 하지만, 그때 나타난거대한존재. 단한마리에 불
과했지만 막대한 힘으로 정착민들을 쓸어버렸고, 그곳을 지키던
용병들과 경비병들마저 일거에 녹여 버렸다. 결국, 현재의 레비안
산맥은 또 다시 신비의 지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 정착민과 용병단, 경비대 모두를 쓸어버린 존재. 물질계 최
강이라는 드래곤이 레비안산맥으로 모여들었다. 과거에는 단 한
마리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대충 봐도 오십 마리에 육박하는 엄청
난 수였다.
"로드님, 데리고 왔습니다. "
"레이시아나, 늦었구나. "
로드인 베르타라스가 낮은 음성으로 주위를 상기시켰다. 로드라
서인지 목소리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풍겼다.
"죄송합니다, 로드님. "
대답한 존재는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푸른 눈에 푸른 머리
를 가진 아름다운 모습. 그 어떤 남자라도 반하게 할 만큼 매력적
이었다.
"그래. 시험은 무사히 치렀더군. "
"감사합니 다. "
"로드님. 레이시아나는 시험을 변칙적으로 치렀습니다 "
레드 드래곤 로테마이어스가 말을 막았다. 현재의 그는 블루 일
족인 레이시아나와 경합을 벌이는 사이였다. 어떻게든 그녀를 떨
어뜨려야 자신이 로드가 되는 것이다.
로드에게 주어진 임기는 각 5 백 년. 그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로드
를 뽑아야 했다. 현재의 로드인 베르타라스가 로드가 된 지 벌써 489
년이 지났다. 최소 11 년 안에는 차기 로드를뽑아야 하는 것이다.
벌써 70 년 전.
베르타라스는 각 종족의 수장에게 후보 선출을 맡겼다. 후보 선
출 기간 5 년. 그 시간이 지나고 각 일족은 한 명씩의 후보자를 선출
했다. 속성을모두합해서 다섯 명. 이들중에서 드래곤로드가탄
생되는 셈이다.
드래곤 로드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시험은 의외로 간단했다.
물질계에 존재하는 열 개의 종족으로 몸을 바꾸어 생활하기만 하면
되는것이다. 하지만, 그기간에 자신이 드래곤임을드러내서는곤
란했다. 또, 드래곤이라는존재의 등장으로세상을혼란스럽게 만
들어도 탈락이었다. 오직 변한 그 종족의 모습만으로 5 년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뭐가 말이냐?"
"레이시아나는 경합에서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습
니다. "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베르타라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어
떤 점에서 레이시아나가 잘못을 했는지 자신도 궁금했음이다.
"말해보라. "
"그녀는 주어진 5 년이 아닌 8 년을 보냈습니다. 주어진 시간에 3
년을 더 허비했으니 인정할 수 없습니다. "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레이시아나가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분한
모습이 그의 성정을 말해주는 듯했다.
"경합에서 주어진 5 년에는 최대라는 단서가 붙지 않았습니다.
또, 드래곤 로드 경합에 이런 시험이 끼어 있는 이유가그들의 삶
을 이해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5 년이라는 단서를 단 것도 최
소 그 정도의 시간은 우리가 드래곤이라는 걸 잊고 지내야 그들의
생활을 이해한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전 5 년 이상만 되면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
레이시아나의 말은 또박또박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마치 이런 질
문을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보일 정도였다.
"레이시아나! 5 년은 그렇댜 치더라도 엘프로 보내야 할 시간을
인간 세상에서 보낸 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이번엔 너에게 주어진
임무는 분명 엘프의 생활이었을 텐데. "
"로테마이어스! 그래도 엘프가 없는 곳에서 숨어 지낸 너보다는
제대로 시험을 치른 게 아닐까? 그래도 난 다른 종족과 부딪히며
지냈으니까. "
레이시아나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기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드래곤들이
다른 종족의 모습으로 지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마법 능력이면 각 종족의 완벽한 모습으로 변화가 가능할 터. 들키
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엘프만은예외였다. 물질계에 존재하는모든종족가운
데 드래곤 다음으로 마나에 예민한 종족이 엘프였다. 이 때문에 경
합의 가장큰난관도 엘프가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엘프가드래
곤의 존재를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드래곤의 마법 능
력이면 자신의 마나도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5 년을 지내
다보면 실수도 하기 마련. 엘프는 그런 실수를놓치지 않았다. 아
주 잠깐의 실수라도 포착되면 바로 눈치 챌 만큼 예민한 존재였다.
"이 이."
"왜? 할 말 있나? 로테마이어스! "
로테마이어스는 5 년 동안 드래곤의 힘을 완벽히 숨길 자신이 없
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탓이다. 이 때문에 엘프 시험
때는 오히려 엘프 마을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니, 생명체
가 사는 마을 자체를 피해서 생활했다.
오지에 있는 절벽에 집을 짓고 엘프의 모습으로 지내긴 했지만
엘프들과 섞여 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오히려 레이시
아나의 시험이 더 정당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만. 로테마이어스! 레이시아나의 시험을 인정하지 않으면 네
가 치른 시험 역시 부정당할 수밖에 없다. 어찌하겠느냐?"
"이, 이인정합니다. "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이 처음보다 많이 어두워졌다. 레이시아나
에게 이길 자신이 없는 모양이다.
열 종족의 분신이라 불리는 이번 시험은 통과하기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각 종족으로 살아가되 그 살아가는 모습이 조금 더
자연스러울 때, 그만큼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다. 물론, 사고를 친
다면 바로 낙제 되겠지만.
로테마이어스의 점수는 그리 좋지 못했다. 물론 이미 떨어진 세
명의 후보들을 생각한다면 좋은 편이겠지만 레이시아나의 점수와
비교하면 한참 부족했다. 이 때문에 그는 이번에 레이시아나를 반
드시 떨어뜨려야 했다 마지막 남은 시험은드래곤으로서의 삶뿐.
본질이 드래곤이니 실수할 리가 없는 거였다. 헌데 이번 시험마저
레이시아나가 빠져나갔으니 자신에게는 승산이 없는 셈이었다.
"그래, 좀 늦었지만 레이시아나가 돌아왔으니 마지막 시험을 치
러야겠지 너희들은 내일부터 5 년간 드래곤의 삶을 즐걱야한다.
우리 드래곤의 본질이 무언지 잘 깨닫고 행동하길 바란다. "
"예. 로드시여. "
로드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다른
후보인 레이시아나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마치 무슨 생각
을 하는 듯 골똘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레이시아나! 할 말 있느냐?"
"저. 로드님. "
로드의 물음에 레이시아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을 꺼
내기 힘든 듯 벌써부터 진땀을 흘리는 모습이 역력했다
"말해보라 "
"전. "
말을 멈춘 레이시아나가주변을둘러봤다. 그녀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주변 드래곤들의 얼굴이 의문스럽게 변했다. 멀정하게 시
험을 잘 치르던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시험을 포기하겠습니다. "
"뭐?"
"뭐, 뭐라고 했느냐?"
"왜?"
레이시아나의 말은 주변 드래곤을 혼란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지난 70 년 동안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모든 시험을 통과했던 레
이시아나. 힘든 고비 다 넘기고 이제 쉬운 일만 남았는데 대체 왜.
레이시아나의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흠, 지금까지 잘 버텨왔지 않느냐?"
"죄송합니 다. "
레이시아나의 충격 발언으로 가장 이득을 본 드래곤은 로테마이
어스였다. 레이시아나가포기하면 후보는자신뿐. 결과를볼 필요
도 없이 로드 후계자가 되는 셈이다.
"흠, 이유를 말해줄 수 없겠니?"
"죄송합니 다. "
베르타라스의 말에도 레이시아나는 사과의 말만 연신 내뱉었다.
연유를 설명해줄 수 없다는 강경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니 어쩔 수 없구나. 로테마이어스! 이제
후보는너 하나뿐이다. 비록경쟁자는 없어졌지만, 시험을멈출수
는 없는 일.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란다. "
"에.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
"오늘 회의는 여기에서 마친다. "
로테마이어스는 단일 후보가 되었음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머지 세 명의 후보가 탈락된 건 이미 50 여 년 전. 그 후부터 레이
시아나와 계속 경쟁을 펼쳐온 로테마이어스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이없이 경쟁자가 사라졌으니 허무하기도 할 터였다.
"레이시아나! 왜?"
"미안 나 먼저 갈게. "
본래 로테마이어스와 레이시아나는 친한 친구였다 태어난 시기
가 거의 같고 부모의 레어도 가까웠던 터. 해출링 시기를 거의 함
께 보내다시피 했다. 이번에 후보로 둘중 한 명만올라왔다면 아
낌없이 응원해줄 수 있는 그런 사이였다.
서로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말 그대로 소꿉친구가 그들
이 었다.
'왜 저러지? '
로테마이어스를 뒤로한 채 레이시아나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
는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도 어두운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평소
에 차분하고조용하지만, 어둡지 않았던 레이시아나. 오랫동안함
께 지내온 로테마이어스에게 너무나 생소하게 다가왔다
정치학 수업 시간.
제스란이 경건한 표정으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호흡이 무척
이나긴특이한형태였다. 반면, 라한은따분한표정으로가스란이
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본래부터 무공에 관심이 없는 라한
그에게는 제스란이 잠을 자기위해 준비운동 하는 모습으로밖에 보
이지 않았다.
"날 들어서 바닥에 내려라. "
"그러죠. "
라한이 제스란을 수레에서 내렸다. 제스란은 다리를 쓰지 못하
기에 항상 수레에서만 지내왔다. 어쩌면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바
닥에 내려왔을지도 모른다
"너도 앉아라. "
"앉아 있는데요. "
"바닥에 앉으라고!"
의자에 앉아 있는 라한에게 제스란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는
바닥에서 라한을 올려다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스승, 라한은 제자이니 말이다.
"알았어요. "
"절 해."
"예?"
제스란의 짧은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절이 무엇을 의
미하는지 설명해달라는 의미였다.
"절 몰라? 고개 푹 숙이고 공손하게 인사하는 그런 거 몰라?"
"몰라요. "
"쳇. 이놈의 세상은예의란게 없어. 하여간막나가는세상이라
니 가. "
라한의 말에 제스란은 괜스레 세상 탓만 해댔다. 무령계와 다른
모든 예법과 행동이 그에게는 어색하게만 다가왔다. 그런 어색함
을 제스란은 나쁜 식으로 해석했고
"어떻게 하는 건데요?"
"고개를 깊이 숙이면서 하는 인사 같은 거야. 머리가 바닥에 닿
도록 하는 게 중요하지. "
제스란의 말에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제스란이 설명한 행동
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중이었다. 잠깐의 생각 후 라한이 눈을 떴다.
"싫어요. "
"뭐야 선생이 하라면 할 것이지 어디서 말대꾸야?"
"싫어요. 이곳 판트리아에는 그런 예법 없어요. "
라한은 제스란이 설명한 인사법을 비굴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비굴하고 구차하더라도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주저 없이 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무공에도흥미가 없고 별로중요해보이지도 않
는 예법으로 보였기에 거절해버렸다. 누가 뭐래도 그는 백작가의
후손이니 말이다.
"이놈이 근데 좋아. 그럼 이곳에서는 어떻게 하는데?"
화를 억누른 제스란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가 성질을 많이 죽
였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음, 이곳은말이죠.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렇게 합니다. "
라한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제스란에게 인사했다. 이곳의 학생
들이 선생을 만났을 때 하는 인사였다. 나름대로 최선의 예의를 보
인 라한. 하지만, 제스란에게는 버릇없게만 보였다.
"그게, 그게 사부한테 할행동이냐?거기다가안녕하세요, 선생
님?허, 참나. 여기가버릇없는세상이라는건 일찍이 알았지만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
"합리적이고 좋기만 하네. "
제스란의 황당한 표정에도 라한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제
스란을 분노하게 만들기 딱 좋은 표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제스란은 화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위장취업
이 하나만으로도 제스란은 화를 낼 수 없는 입장이었다.
라한이 이런 사항을 이용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후우, 그럼 너희 세상은 어떤데? 여기 말고 전에 네가 살던
그 예원계던가? 거기는 어떻게 인사하는데?"
"음, 기억이 잘안나요. 워낙짧은생을반복해서 살아서요."
"기억해봐, 이 자식아. 너 돌대가리야?빨리 기억해."
"아, 기억났다. 거기서는선생이 먼저 말을 꺼내요. 어서 오십시
오. 라한님. 이렇게요."
라한의 말에 제스란이 몸을 비틀거렸다. 선생이 제자에게 높임
말을 하다니 제스란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사고방식
이었다.
"학생은?"
"학생은 뭐, '수업 시작해' 라고 반말로 하죠. "
라한의 연이은 대답에 제스란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표정만으로는 당장 예원계로 날아가서 학생들을 모두 죽이
려는 얼굴 같았다
라한의 대답은 거짓이 전혀 섞이지 않은 진실이었다. 예원계는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곳. 이 때문에 과거의 선생들은 컴퓨터에 지
식을 입력하는 정도의 일만 했다
과거의 선생들이 가르치던 일을 컴퓨터가 대신하는 것이다. 컴
퓨터라는 기계 자체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으니 말을 높이는 건
당연했다. 그에게 인간이 반말을 하는 것도 당연했고.
"난 인정 못해. "
"못해도 어쩔 수 없어요. "
라한의 대답에 제스란이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강압적으로 안
된다면 구슬려서라도 라한을 제자로 삼고 싶었다.
제스란은 라한이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걸 잘 알았다. 또, 본래의
자신 성격이라면 라한을 어떻게든 죽이려 했을 거라는 것도
제스란이 라한을 제자로 삼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 있었다. 묵주
가 자신의 성격을 감안했다면. 자신과 라한의 격돌을 예상했을 것
이다. 제스란은묵주가 계획한대로움직이는 건 죽기보다 더 싫었
다. 할수만 있다면 묵주의 계획을 철저히 부숴 버리고 싶을 정도
였다. 이에 정 반대인 제자로 삼으려고 마음먹었다
'묵주놈. 내 성격이 바뀔 건 몰랐을 거다. '
"라한아. 넌 이 세상에서 꿈같은 거 없냐? 영웅이 되겠다거나 세
상에 정의를 실현하겠다거나 뭐 그런 꿈 없어?"
제스란이 짐짓 자상하게 말했지만 라한에게는 징그럽게만 들렸
다 하지만제스란은 현재 자신의 선생인 상황. 묻는 말에는 대답
을 해야 했다. 지킬 건 지키고 거절할 건 철저히 거절하려는생각
이었다
"제 꿈은딱하나. 오래 살자. 이것뿐이에요. 반드시, 반드시 이
곳 판트리아 대륙 역사상 가장 오래 사는 사람이 될 거예요. "
"오래 사는 법? 그거라면 무공이 최고지. 지금 내 나이가 몇으로
보이냐?"
"오십 살. "
제스란의 질문에 라한이 곧바로 대답했다. 처음 만났을 때, 생각
했던 나이를 말한 것이다.
"하하하하하. 놀라지 마라. 내 실제 나이는 일백하고도 열아홉
살이다. 무려 백십구 년을 살아온 몸이지. 어떠냐? 무공의 힘을 믿
겠지?"
"진짜예요?"
"내가 고작 네까짓 녀석한테 거짓말을 하겠냐?"
제스란의 대답에 라한이 눈을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아무리 봐
도 오십 살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십 살이라고 한 것도 겉
모습보다 조금은 많이 부른 게 아니던가.
'흠, 저 말이 진짜라면 무공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군, 하긴
뭐가 됐든지 한계를 넘어서면 수명은 길어지게 마련이지. '
제스란의 말은 결국, 라한의 뜻을 바꾸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라한이 생각하고 있던 가정, 한 분야에서 한계를 넘어서면 수명이
길어진다는 가정을 확실하게 하는 데는 도움을 주었다.
"그래도 무공은 싫어요. 한 가지에서 최고가 되려면 한 가지만
파고들어야죠. 무공에 눈 돌릴 틈이 없어요. "
거절 의사를 밝힌 라한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절대 하지 않겠다
는 의지를 온몸으로 표현한 것이다.
"못. 된. 놈. "
"어? 저, 저거 저거
라한이 고개를 돌리자 제스란의 수레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수레를 본 라한이 말을 더듬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여실히 드러낸 채였다.
"이놈이 미쳤나? 갑자기 왜 이래?"
"저, 저 수레 저 수레 재료. "
"뭐? 내 수레?"
말만 더듬던 라한이 손마저 마구 떨기 시작했다. 수레가 준 충격
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였다.
예 저 수레 어디서 났어요?"
"아, 저건 내가만들었지. 보통다리 없는사람이면 아무것도못
하겠지만 나는 다르거든. 손으로 모든
"재료 어디서 났어요? 저 저 수레 만든 재료 어디서 구했냐고
요? "
라한의 놀람은 정도가 점점 심해졌다. 처음은 긴가민가했던 게
확신으로 변한 것이다.
"저건 내가 이 차원에 떨어졌던 곳에 많았어. "
"거기가 어딘데요? 우리 왕국이에요? 멀어요? 저런 나무가 얼
마나 있어요? 나무 크기는 어땠어요?"
라한의 속사포 같은 질문에 제스란이 입을다물어 버렸다. 그에
반해 라한의 얼굴은 간절하다 못해 절실해 보이기까지 했다.
'오호, 저 나무가저 녀석한테 중요한건가?후후후. 좋아. 아주
좋아. '
"야, 라한. 절 해. "
"말 돌리지 말고 말해줘요. 저 나무 어디서 났어요?"
라한의 재촉에도 제스란은 빈정거리기만 했다. 라한의 약점을
제대로 잡았으니 최대한 이용해먹으려는 속셈이었다.
"절 해."
"예?"
"아홉 번 절하고 앞으로 날 사부님이라고 부르겠다고 약속해라.
그렇게 하면 저 나무가 어디서 났는지 말해주지. "
제스란의 말에 라한이 아차 싶었다. 나무의 출처는 말을 빙빙
돌려서라도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었을 터였다 재료를 발견했다
는 반가움이 성급함을 낳았고, 결국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문에 제스란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약점을 잡혀
버렸다.
'실수했다. 젠장. '
"좋아요. 아홉 번 절하면 되죠?"
"앞으로사부님이라고부른다고 약속을 해야지. 아, 아니지. 말
로는 안돼. 너 같은놈은약속을 어기고도남을놈이거든. 어디보
자 방법이 없을까 7"
신용이 없다는제스란의 말은정확했다. 라한은그상대가누구
라하더라도 배신할준비가 되어 있었다. 단, 자신의 이익을 심하
게 침해한다는 전제하에.
물론, 그도 신의가전혀 없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라한의 신의
는자신에게 이득을주는사람에 한해서 일 뿐. 이득과 피해를 비
교해서 피해가 크다면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라한이었다.
"절 못 믿어요? 제자 될 사람인데 못 믿으면 되겠어요?"
"다른 사람 다 믿어도 넌 믿을 수 없어. 흠, 금제를 가해야
겠다. 이리 와라. "
"금제?"
뭔지 모를 불길함에 라한이 조금씩 뒷걸음질쳤다. 확실치 않은
건 당하지 않는 게 오래 사는 길. 라한은 자신이 정한 철칙을 어기
고 싶지 않았다.
"도망가? 이 나무가 어디서 났는지 알 필요 없다는 거지?"
"아씨 알았어요. 알았어.금제인지 은제인지 맘대로해봐요."
결국 라한도 체념하고 말았다. 자신의 철칙을 어기면서까지 얻
어야 할 만큼 나무의 존재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시작한다. "
타탁!
팟- !
"음"
제스란이 라한의 등을 몇 차례 두드렸다. 겉으로 드러난 소리만
으로는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듯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큰 충
격은 없었다. 대신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빠질 뿐이었다.
묘한 기분의 라한은 자신이 느낀 기분이 해가 될지 이익이 될지
종잡을수 없었다. 제스란의 말로는 분명 해가 될 게 분명했지만,
기분이 너무 좋았다.
"뭔가 시원한 느낌을 받았을 거다. "
"이게 뭔데요?"
"이놈아. 내가말하면 그냥예라고짧게 대답하고끝내라. 되묻
지 말고. "
"알았어요. "
"예라고 하라니까. "
"예. "
라한과 제스란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도 자주 부딪혔다. 제자가
공손하기를 바라는 제스란과 궁금한 건 빨리 알아야 하는 라한. 정
반대 같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극과 극을 달리는 성격이었다.
"아무튼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면 금제는 성공했다. "
"이게 뭐냐고요?"
"이건 네가 허튼짓을 했을 때 언제든지 널 죽일 수 있는 힘이지. "
"죽, 죽어요?"
말을 더듬던 라한이 몸을 비틀거렸다. 죽음. 다시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단어였다. 헌데 이렇게 어이없이 죽음에 처하게 되었으
니 충격이 큰 게 당연했다.
"내가 지금 죽인다고 했냐? 내 말을 안 들으면 죽인다고 했지.
음, 안 보면 못 믿을 테니 잠깐만 보여주지. "
제스란의 말이 끝나자마자 라한의 몸이 서서히 굳어갔다. 발끝
에서부터 시작된 마비 증세가 점점 퍼져간 것이다.
"사, 사살려줘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선생님, 아니,사부님. 제발살려주십시오. 사부님."
"후후, 녀석. "
라한은 정말 필사적으로 빌고 또 빌었다. 아무리 비참해지더라
도 죽기만은 싫었던 것이다. 그에게 제스란의 금제는 치명적인 아
킬레스 건으로 작용했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알았다, 요 녀석아. "
제스란의 말이 끝나자마자 라한의 마비 증세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생길 때와 마찬가지로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돌아오는
감각들. 라한에게는 새 생명을 얻은 것과 맞먹는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 아니, 사부님. 정말 감사합니다. "
"그럼 아홉 번 절을 해야지?"
라한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처음 마비 증
상을 느꼈을 때, 죽음의 공포를 접했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비굴한수단으로 제스란에게 빌어댔다. 그는살기 위해
서라면 자존심이나 체면 따위는 훌러덩 벗어던질 수 있었다.
"사부님. 제자 라한 인사드립니다. "
"한 번. "
"사부님. 제자 라한 인사드립니다. "
라한이 한 번 인사를 할 때마다 제스란이 숫자를 세었다.
라한은 아주 사소한 것에 머리를 잘 굴렸다. 그런 라한이라면 절
을 한 번 정도 빼먹을 수도 있는 일.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위
해 애초부터 숫자를 세어버린 것이다.
'요놈아. 내가 네놈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다. '
실제로 금제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제자에게 금제를 가한
다는 것. 그건 곧 기를 운용해야 할 혈도에 어떤 조치를 취하는 일
이다. 무공수련에 치명적으로 작용할지 모르는 일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좀 전에 제스란이 두드린 건 일종의 타혈이었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굳어 있던 혈도를 푸는 심법의 준비운동인 셈이다. 이십 년
가까이 굳어 있던 혈이기에 잠깐 몸이 마비되는 느낌이 왔을 뿐,
몸에 좋으면 좋았지 나쁘건 조금도 없었다.
"그나저나 너 저 나무는 어디 쓰려고 하는 거냐?"
"사부님. 전 인챈트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물에 마법을
부여하는 능력이죠. 헌데, 그 조건이 몹시 까다롭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힘든 건 재료를 구하는 일입니다. "
"그러니까 네 말은 저 나무가 그 힘든 재료라는 말이지?"
"예. 사부님. "
라한의 태도는 아까의 티격태격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
다. 이렇게 공손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
다. 그렇게 유도했던 제스란마저 의아할 지경이었다.
"금제도 가했고 구배도 받았으니 위치를 가르쳐주지. "
"감사합니다, 사부님. "
제스란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묵주의 의도를 철저히 부셨
다는 생각에서였다. 거기다가 제법 똑똑한 제자마저 뒀으니 기분
도 무척 좋았다.
"지도를 가져와라. 대륙 전체가 그려진 지도였으떤 좋겠구나. "
"예, 사부님. "
말을 마친 라한이 종이를 들고 왔다. 일반 책 크기의 종이가 쌓
여 있는 뭉치 였다.
종이를 가져온 라한이 바닥에 깔기 시작했다. 그렇게 계속 깔자
사방 2 미터를 종이로 도배한 모습처렁 되었다.
"뭐하는 거냐?"
"판트리아 대륙에는 뛰어난 지도가 없습니다. 지도 그리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사람이 없거든요. 그렇다고 지도가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용병이나 상인들이 자신들의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종종 지도를 만들죠. 하지만 그런 지도들은 자신들이 다니던 길만
표시되어 있거나산, 강, 몬스터의 위치 같은중요한 것만표시하
고 있습니다. "
"그래서?"
"제가 본 지도들을 모두 종합해서 그려보겠습니다. "
말을 마친 라한이 바닥에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대
륙의 전도를 시작으로산맥, 강, 바다의 위치, 심지어는성의 위치
와 도시의 이름까지 적었다.
라한이 지금까지 봤던 수십 개의 지도 모두를 한 곳에 집대성 한
것이다.
라한이 지도를 다 그리는 데에는 근 이십 분의 시간이 소요되었
다. 지도의 명칭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나마 이 정도에서 그
칠 수 있었다. 다른사람이 지도를모아놓고그린다면, 그보다 열
배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터였다.
"놀랍군. "
"현재 이곳이 저희 필슨 백작가가 있는 곳입니다. "
제스란도 라한이 똑똑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금제를 가하기 전
까지 말로 자신을 철저하게 농락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정도로 뛰어난 머리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단순
히 지도를 합하는 일이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무척이나 힘든 작업.
이런 일을 이십 분 만에 끝내버리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부님 ! 사부님?"
"어? 어, 흠, 흠. 어디보자. 이 지점이 현재 위치니까 여기서
산을하나 넘었었고맞아. 여기 강이 있었지. 이 강인가보군. 그
리고 계속남쪽으로 내려왔으니까 지도에서는북쪽으로음, 대
충 이 지점이겠군. "
제스란이 최종적으로 가리킨 지역은 파마리스 평원이었다. 일명
하얀 죽음으로 불리는 불모지. 그곳에 들어가서 살아나온 생명체
가 없다는 인간의 금역이었다.
라한은 제스란의 말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사부님. 여기는 지도에 쓰인 것처럼 파마리스 평원이라 불립
니다. "
"나도 보고 있다. "
"이곳은 인간들이 들어가서 단 한 명도 살아나오지 못한 미지의
땅이기도 합니다. "
"아, 어쩐지 시체가많다했지. 썩은냄새가진동을하더군."
제스란은 그때가 떠오르는지 콧잔등을 잔뜩 찌푸렸다. 그 모습
이 영락없는 아이의 표정 같았다.
"나무를 찾은 곳이 시체보다 남쪽입니까? 아니면 북쪽입니까?"
"훨씬북쪽이었지. 다리 때문에 빠르진 않지만, 난웬만한 어른
들보다빨리 달렸거든. 뭐, 지금은팔하나마저 요모양요꼴이 뤘
지만. 아무튼, 그런 내가두달을달려야했으니 아주북쪽이지. 대
충 이 정도 되겠군. 시체는 여기고. "
지도에 표시된 점을 보며 라한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제스란의 말대로라면 나무가 있던 장소가 너무 깊숙했다. 시체
의 위치를 생각해볼 때, 인간의 대부분이 죽은 곳은 걱우 파마리스
평원의 초입, 자신의 힘으로는 가기 힘든곳임을 깨달았다. 아니,
대륙 그 누구도 갈 수 없는 곳이 미지의 땅. 파마리스 평원이었다
"그래도 사부님은 무사히 나오셨잖아요. 대체 어떻게 나오신 거
예요?"
그래 그게 말이지 나도 모르겠어
예 지도의 위치로 보면 파마리스 평원에서 보낸 시간이 최소
두달 이잖아요 근데 아무리 대책도 없이 그냥 움직였다고요
파마리스 평원의 입구에서 시체가 있는 곳까지는 성인이 달리는
속도로 보름이 걸리는 길이다 또 시체가있는 곳에서 제스란이
나탄난 까지 석달반 두다리를 못쓰는 제스란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시간을 반 이상 줄이지는 못했을터 결국 최소 두달 이상
을 파마리스 평원안에서 지낸 샘이었다
헌데도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했으니 라한도 답답했다
그게 설명하기 곤란하군 난 그냥 달려 나온게 전부거든 시체
가 엄청 널려 있었고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던데 난 그놈들이 왜
죽었은지도 모르겠어 시체 냄새가 짜증나고 바닥에 시독이
쌓여서 귀찮았지만 별로 힘들이지않고 나왔거든
.
라한은 제스란의 말을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설정으로 거짓을 말 할 만큼 제스란이 어리섞지는 않았다 거
짓말을 한다면 차라리 이리저리 꾸며서 앞뒤 맞도록 하ㅡㄴ게 정상
이리라
이유가 뭘까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무리 궁리해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라한은 제스란의
무식함에 대해 고민을. 제스란은 앞으로 가르칠 무공에 대한
고민으로 남은 정치학 수업 시간을 마쳤다 많은 의문과 궁금증만
을 남긴채
본격적인 수업
라한의 방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는 듯 표정은 어둡
기 그지없었다
완벽하게 똑같이 그렸는데도 안 되는군 역시 재료가 중요한
건가
라한의 왼쪽에는 예전에 구한 스트랭스 스크롤이 펴쳐저있었
다 그옆과 라한의 주위에는 온갖 종이가 어지럽게 널린 모습이
다 그의 목부분에는 테세르가 목만 내밀고 졸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좀 큰 바퀴벌레가 목에 앉은 것처럼 보였다
딱
라한이 테세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자신은 머리 터지게 고민
하는데 잠만 자고 있으니 심통이 난 듯했다
"야, 테세르. 잠만퍼질러 자지 말고생각좀해봐."
우우웅:
테세르는 라한에게 꿀밤을 맞았어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오히
려 이미 적응이 되었다는 듯 몸만 뒤척일 뿐이다
"넌 정령이 아니라 웬수다, 웬수! "
똑똑
테세르에게 본격적으로 구박을 가하려는 찰나. 밖에서 노크 소
리가들려왔다. 하인들에게는출입을 엄격히 통제해놓은라한. 헌
데도 누군가 방문했다면, 통제를 무시할 수 있는 가족 중 한 명인
듯했다.
"야, 테세르. 누구 왔다. 돌아가. 예! 누구세요?"
테세르에게 작게 명령한 라한이 밖을 향해 크게 외쳤다. 짐짓 다
급한 순간이지만 라한의 얼굴은 담담하기만 했다.
"야, 테세르. "
라한은 잠들었던 테세르가 돌아가지 않자 주머니에 구걱 넣어
버렸다. 마치 물건 취급하듯 막 대했다.
'네놈이 자처한 일이다. '
두 번째의 명을 한 번 더 내린다면 테세르의 강제귀환도 가능했
다. 하지만, 목을 간질이며 잠든 대가로 짐짝취급 해버렸다.
철컥!
"라한아! 오랜만이구나 "
"형님!"
방문객은라한의 형 레테아였다. 그는다른가족들과는달리 일
년에 한 번씩은 라한을 만났었다. 이필리에 종합 학교를 직접 방문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건강해 보이는구나. "
"하하. 그렇죠? 그런데도 어머니는 제가 야위었다고 걱정만 하
시는걸요. "
레테아는 라한을무척이나좋아했다. 그는루시아와는 달리 일
찍부터 철이 들었었다. 이 때문에 라한의 탄생으로부모님을 잃었
다는생각은조금도하지 않았다. 대신, 나이 차이가많이 나는동
생이 조카처럼, 그리고 아들처럼 귀엽게만 보였다
"형이 왔는데 앉으라고도 안 하는 게냐?"
"하하. 그게 방이 좀 지저분해서 . 그냥 적당히 앉으세요. "
라한의 말처럼 방에는 온갖 종이와 나무 조각들, 조각칼과 펜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침대가 아니면 앉아 있는 일 자체가 불가능
할 정도였다.
"하인들을 불러서 청소 좀 시켜야겠다. "
"나중에 할게요. 전부중요한물건이라서. 일단여기 앉으세요."
라한이 자신의 침대 한쪽을 두드렸다. 대충 둘러봐도 앉을 곳은
그곳뿐이었다.
레테아가 침대에 앉아 라한을 바라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말씀하세요. "
"흠, 아버지께서 걱정을 많이 하시더구나. "
"정치학 때문이죠?"
"그래, 아버지는 널 우리 필슨 백작가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계
신다. 나도 마찬가지고. 너라면 우리 가문을크게 흥하게 만들수
있으리 라 믿는다. "
각 가문의 작위는 한 명에게만 이어지게 된다. 자식 모두에게 이
어진다면, 그작위의 수가너무많아지기 때문이다. 필슨백작가문
의 후계자도 한 명밖에 될 수 없다. 레테아와 아버지인 필슨 백작
은 그 후계자로 라한을 점찍어둔 모양이다.
레테아는 기사의 작위와 아버지의 후광으로 남작이 되었다 이
미 결혼해서 슬하에 아들을 둔 아버지였다. 결국, 자리를 완벽히
잡은 셈이다. 거기에 아버지의 힘이 보태지면 자작 승진도 조만간
이루어질 듯했다.
"형님 전 제 길을 정했습니다 "
"길이라 이 형에게 말해 줄 수 있겠느냐?"
"그게 저
라한은 쉽사리 대답해줄 수 없었다. 대륙에서 사라진 지 이미 오
래된 인챈터. 힘들고 불가능해 보이는 길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설마 이 형에게도 비밀이라는 거냐?"
"죄송합니다, 형님. 하지만 전 제가 정한 길에 모든 걸 바칠 준
비가 돼 있습니다. "
라한의 의지가 담긴 대답에 레테아가 한숨을 쉬었다. 어릴 때부
터 한 가지 목표를 세우면 포기할 줄 몰랐던 동생이다. 그 모습을
오랫동안 봐 왔기에 말려봐야 소용없음을 잘 알았다
"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근데 그 길이 작위가 없어야
하는 길이냐?"
"죄송합니다. 형님. "
"그래도 아버지가 시키신 정치학 수업은 빼먹지 말아야 한다. "
라한의 고집이 대단하듯 필슨 백작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결
국, 레테아는 어느 쪽의 편도들어주지 못했다. 어차피 먼저 꺾이
는 쪽이 포기할 테니 스스로에게 맡기려는 생각이다.
"예. 그리고 형님. "
"말해라. 내가 도와줄 일이 있느냐?"
"용돈 좀 주십시오. 아버지는 제게 돈을 안 주십니다. "
라한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용돈을 받아보지 못했다
집 밖을 나간 적이 없으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 건 집을 나가겠다는 의미. 필슨 백작
이 허락할 리 없었다.
"얼마나 주면 되느냐?"
"최대한 많이요. 많이 "
"허허, 녀석. 지금가진돈이 이것뿐이니 이걸로만족해라. 다음
에 또 만나면 그때 더 주마. "
철렁-!
말을 마친 레테아가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얼핏 봐도 적지 않은
액수로 보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
"할 얘기가 끝났으니 가봐야겠다. 기사라는 위치라서 오래 비울
수가 없구나 "
"예, 형님. 몸조심하세요. "
라한의 인사를 뒤로하고 레테아가 방을 나섰다. 왠지 약간은 씁
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언제 터지느냐가 관건일 뿐. 라한과 필슨 백작의 충돌은 이미 정
해진 수순이었다. 레테아는그런 둘의 싸움이 안타까웠다. 아버지
의 뜻을 거스르는 라한과 자신의 길을 아들에게까지 권하는 아버
지. 레테아는 둘 모두가 답답하게만 보였다.
"테세르 뭐하니?"
라한이 자신의 주머니를 뒤졌다. 테세르를 찾으려는 행동이었지
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자는 듯 보였지만
주변 상황은 느낀 모양이다. 라한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큰 위기
를넘겼다. 형인 레테아는소드익스퍼트중급에올라있는기사, 기
운의 흐름에 민감한레테아가정령을못느낄 리 없었다. 결국, 테
세르가 제때 귀환하지 않았다면 곤란한 일을 당했을 게 분명했다.
제스란이 커다란 종이를 준비해왔다. 일반 서책에 쓰이는 종이보
다 훨씬 큰 크기였다. 필슨 백작에게 말해서 따로 주문한 듯했다.
"이 종이에 사람을 그려라. 달리거나 걷는 동작이 아닌 그냥 서
있는 그림을 그리면 된다. "
"예, 사부님, "
공손하게 대답한 라한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술을 배웠
던 탓에 사람을 그리는 것도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라한은 학교에서 미적 감각은 떨어지지만, 세밀한 묘사에 능하
다는평가를받았었다. 또, 미술을배운시간도무려 5 년. 그동안
놀지만은않았기에 그림에도꽤 능했다. 물론, 그림으로 먹고사는
화가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말이다.
"그만. 그 정도면 췄다. "
"예, 사부님, "
라한이 음영을 표현하려하자 제스란이 제지시켰다. 그에
게 필요한 그림은 사람의 겉모습이었다.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른
그림자나 음영은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제스란. 라한을 제지시킴
으로써 자신에게 딱 적합한 그림을 얻을 수 있었다.
"날 들 수 있겠느냐?"
"예. 헌데, 이 그림은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우둔한제 지식
으로는 이런 그림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
라한은 제스란에게만은 철저히 저자세로 일관했다. 어차피 자신
의 생명은 제스란에게 담보 잡힌 상태. 살기 위해서 이 정도 자존
심은 굽히자는 생각이었다.
"일단 들기나 해라. "
" 예. "
라한의 몸은 그리 약하지 않았다. 정령을 소환하는 자체가 정신
과 육체에 무리가 가는 일. 정령을 자유자제로 부리기 위해서는 나
름대로 운동을 해야 했다. 정령 테세르 소환에 대한 라한의 집념과
로이나의 조언. 이 둘이 합해지지 않았다면, 비실비실한모습의 라
한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끙- !
"헙!"
라한은 제스란을 드는 일에 쾌나 애를 먹었다. 두 다리가 멀정히
달려 있음에도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하는 탓이다. 한쪽이 축 처져
있으니 들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위로! "
"으, 으 예. "
라한은 끙끙거리면서도 제스란을 놓지 않았다. 자칫 제스란의
비위라도 거슬러 죽음을 맞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번엔 아래. "
" .예. "
처음에는 힘들어도 버틸 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
록한계에 부딪혀갔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다리가후들거렸다. 이
대로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른다면 제스란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빨리 좀 해라 '
"마지막이다. 왼쪽. "
"헉, 헉. 조금만 쉬었다가 하면
"왼쪽! "
"예. "
반론을 제기하려던 라한이 제스란의 한 마디에 입을 다물어 버
렸다.
지금 그에게는 가장 무섭고 껄끄러운 존재가 제스란이었다. 그
의 말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금제 때문이다. 이 금제만 없다면 오
늘도 제스란과 티격태격하며 한 시간을 보낼 게 분명했다.
"헉, 헉. 으, 으
"끝났다. 내려라. "
쿵- !
라한은 제스란을 내려놓자마자 드러누워 버렸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핑핑 돌지경이었다. 또, 목은왜 이렇게 타는지. 지금같아
서는 물 한 드럼도 다 따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놈이. 사부를 내동댕이쳐? 네 놈이 죽고 싶은 가보군. "
말을 마친 제스란이 손을 슬쩍 들어올렸다. 예전에 한 번 했던
금제를 발동시키는 모습이었다. 제스란의 행동을 본 라한이 경악
스러워했다. 전의 그 고통을 다시 겪기는 죽어도 싫었다.
"사부님. 헉, 헉. 살려주십시오. 제발. 죽을죄를지은건 알지만
너무 힘들었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테니 한번만용
서해주십시오. "
"좋다. 네놈에게서 반성의 기미가 보이니 단 한 번만 용서를 해
주마. 다시 날내동댕이치는 일이 벌어지면그땐 ., "
말을 마친 제스란이 오른 손으로 목을 스윽 그었다. 여차하면 죽
여 버리겠다는 걸 단 한 번의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
"이 종이를 벽에 붙여라. "
"fl. "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힘겹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막
상 일어나니 현기증이 더 심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흠, 내가봐도잘그렸군. 이 그림이 뭔줄아느냐?"
"제자 무식하여 알지 못합니다. 가르쳐주십시오."
라한의 심하다싶은 저자세에 제스란이 흐뭇해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바득바득 달려들던 라한. 금제 하나로 이 정도의 효과를볼
줄은 제스란 스스로도 예상 못했다. 그것도, 있지도 않은 금제로.
'좋군 진작 이렇게 할 걸.
"내가 그린 그림은 혈도 자리를 표시한 거다. "
"혈도? "
"그림에 점을 찍고 그 옆에 숫자를 써놓았다. 지금부터 넌 내가
부르는 숫자와 혈도 이름을 외워야한다. 머리가 좋으니 알아서 잘
외우리라 믿겠다. "
제스란의 말이 끝나자마자 라한이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준비 췄습니다. "
"너. 뭐하는 거냐? 내가 외우라고 했지 적으라고 했더냐?당장
집어넣지 못해?"
" 예 ! "
제스란의 대답에 라한이 허겁지겁 메모지를 집어넣었다. 아무리
배가 아파도, 아무리 화가 치밀어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일어서서 내가 부르는 번호를 가리켜라. "
" 예. "
짧게 대답한 라한이 그림 앞에 섰다. 정말 깨알보다도 작은 숫자
와 점이었다. 인챈트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다면 숫자를 알아보
지도 못할 정도의 크기였다. 이렇게 작은 숫자를 그 불안한 자세로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부르겠다. 1 번. "
"예. "
"따라 해라. 1 번. "
"예. 1 번."
짧게 대답한 라한이 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의 5 백여 개
에 육박하는 엄청난 개수의 점들. 이 사이에서 번호를 찾으려면 눈
을 심하게 굴려야 했다.
"그건 백회혈이라 불린다. "
"백회혈, 백회혈
제스란의 대답에 라한이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이렇게라도 하
지 않으면 외울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점이 하나뿐이라면 반복
해서 중얼거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개수였다.
이걸 다 외우려면 입이 부르트도록 중얼거리고, 머리가 터지도록
반복해야했다.
"2 번. "
"2 번. "
"이번은
제스란의 혈도 알려주기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수가 많은 것
도 이유였지만 라한이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게 더 큰 이유였다
외우지 못하니 어떻게든 시간을끌어야했고, 그 때문에 진행이 조
금씩 느려졌다.
제스란은 라한이 시간을끌고 있음을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자
신은 혈도를 모두 외우는 데 몇 달은 걸리지 않았던가. 자신에게
무리인 일을 남에게 시켰으니 그 정도는 감수하자는 생각이었다.
엄청난 수의 혈도를 부르고 나자 제스란마저 진이 빠져 버렸다.
실제로 힘이 없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감이 더 컸다.
"다 외웠느냐?"
입을 혀로 살짝 적신 제스란이 라한에게 물었다. 막상 시키면서
도 설마 외웠겠냐는 생각이었다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외운 것 같기도 하고 몇 개 놓친 것 같기
도 하고. "
라한의 말에 제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다 외우지 못했
다고 생각했다. 다 외우면 그게 괴물이지 인간이겠냐 싶었다
제스란은 라한이 총명하기를 바라면서도 은근히 평범하기를 바
랐다. 자신의 제자이니 총명한 게 좋긴 하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질투심이 생긴 것이다.
"차례대로 쭉 읖어봐. "
"네. 1 번 백회혈, 2 번. 87 번 견정혈, 88 번 135 번 합곡혈,
136 번 201 번 노궁혈, 202 번 315 번 거료혈
라한이 혈도를읖어가자제스란이 입을 떠억 벌렸다. 설마했던
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저놈, 저거. 괴물이잖아. 흠, 그러고보니 동물적인느낌도좀
나는 것 같고. '
". 421 번 오리혈, 422 번 마지막 488 번 신당혈. 휴. "
혈도를 모두 읖은 라한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쉬지 않고 혈도를
불러댔으니 힘든 게 당연했다.
라한의 혈도 읖기가 끝났음에도 제스란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
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시기심과 제자에 대한 뿌듯함이 마구 싸우
고 있음이다.
'똑똑한 제자를 둬서 좋다고 해야 하나? 쳇, 근데 왜 이렇.게 배
가 아프지?'
"잘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
"감사합니다, 사부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
"내일 다시 물어볼 테니 까먹으면 죽는다. 알겠지?"
"네, 사부님. "
라한이 방을 나간 후에도 제스란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자신이
본 라한의 천재성과 묘한 동물의 느낌. 그 둘의 관계를 생각했다.
'라한에게선 동물의 느낌이 난다. 그리 강하지는 않지만 분명
해. 근데 이게 무슨 동물이지? 야수의 느낌도 나고 뭔 곤충 같은
느낌도 나고, 한편으로는 맹수 같기도 한데
망각의 샘물은단순히 기억만 지우는용도가아니었다. 그 전생
에 대한 특징까지 모두 지워서 새롭게 살게 하는 지우개도 되는 셈
이다.
하지만, 라한에게는 망각의 샘물이 통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기
억은 물론이고 전생의 본능까지도 일부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서
나는 동물의 느낌은 잠시라도 살았던 모든 동물의 향기가 합쳐진
일종의 잔재였다.
대륙 서부의 일리아스 산맥.
대부분의 산맥은 왕국과 왕국의 경계선으로 작용했다. 이 때문
에 상인들과 귀족들에게 몹시 거슬리는 존재로 기억되는 경우가 대
부분이다. 또, 산맥에는드래곤이 둥지를틀기 마련. 이 때문에 산
맥이라는 곳은 인간의 출입이 힘들었고, 이에 몹시 껄끄러운 장소
로 기 억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일리아스 산맥만큼은 그 존재 자체가 로테샤 왕국
에게 큰 도움을 줬다. 서쪽에 위치한 데니아 사막의 열기를 막아주
고사막풍의 진입을산맥이 막은탓이다. 이 산맥이 없었다면로테
샤 왕국의 서부 일부지역도 사막으로 변해버렸을지 모른다.
일리아스 산맥에도 드래곤의 레어는존재했다. 하지만, 이곳에
둥지를튼드래곤은 인간을그리 꺼리지 않았다. 최소한의 구역을
레어로 정해놓고 출입을 막았을 뿐. 그 외의 어떤 지역에서도 통행
을 자유롭게 허용한 것이다
골드 드래곤 베르네미스. 인간에게는 정말 고마운 드래곤이었다.
베르네미스의 레어 안.
엄청난수의 베어울프 시체가바닥에 널려 있었다. 무언가실험
을 했는지 시체 주변은 피냄새보다 시약 냄새가 더 강하게 풍겼다.
"누구냐?"
"나다. "
베르네미스의 날카로운 음성에 푸른 머리를 한 아름다운 엘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등장에 베르네미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보다는 상위 서열인 듯했다.
"레이시아나님. 여긴 어쩐 일로?"
"물어 볼게 있어서 왔어, "
레이시아나의 말에 베르네미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보다
상위 서열이 왔으니 상석을 내주려는 의도였다.
"않으시지요. 헌데, 제게물어볼게 있다는말씀은
"네가 만나보라는 아이를 만났지. 8 년 정도 항께 지내기도 했고. "
레이시아나의 말에 베르네미스가 웃음을 머금었다. 레이시아나
는 과거에 로이나라는 이름으로 라한과 함께 지냈었다. 엘프의 몸
을 유지한 채로.
반면, 베르네미스는 과거에 신관으로 유희를 즐겼었다. 라한의
몸을 살펴본 바로 그 신관이었다. 그때 신성력 발휘를 위해서는 디
바인 마크를사용했다. 천여 년 전, 대륙 최대의 신전인 일레이네
아 신전에서 사라진 바로 그 신기였다.
라한의 심장 위치를 처음으로 알아본 베르네 신관. 그는 라한의
무사함에 의문을 품었다. 심장이 아래에 위치하면 대부분 죽음을
면치 못하는탓이다. 이에 유희까지 그만두고 레어로돌아와서 연
구를 시작했다. 레어 주변에 널린 베어울프의 시체는 실험의 결과
물이었다.
"훗, 처음에는 제 말을 믿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그랬지. 두 눈으로 보니 믿을 수밖에 없더군. "
레이시아나는 베르네미스가 이상한 아이를 봤다고 했을 때 믿지
않았다. 심장이 배꼽보다아래에 달려 있는데 어찌 살수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또, 네가 평소에 기괴한 행동을 많이 하는 것도 그런
생각을 거들었다.
하지만, 베르네미스의 추천으로 라한을 직접 본 후로는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그 까닭은 몰랐지만
"후후, 라한이는 아직도 살아 있죠?"
"응. 아주건강하다. 머리도좋고."
베르네미스의 물음에 레이시아나가 차갑게 대답했다. 라한을 지
컥주던 로이나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혹시 라한에게서 특별한 현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뭐든 좋
으니까 말씀 좀 해주십시오. "
"글쎄. 내가 본 류한은 .
"류한이오?"
"나하고 지낼 때는 류한이라는 이름을 썼다. 이필리에 종합 학
교에 입학했었으니까 새로운 이름을 쓸 수밖에 없었지. 뭐, 이제
라한이라고 부르지 . "
레이시아나의 대답에 베르네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루이
나 왕국에서 신관으로 지냈기에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대륙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 신분 감추기까지
"그래서 8 년이나 걸리셨군요. "
"흠, 내가라한을처음봤을때는 열 살이었지. 근데 열 살같지
가않더군 마치 늙은이 같았다. '가끔씩은역시 열살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긴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늙은이처럼 보이더
군. 외모 말고 말투나 행동이 그랬다. "
레이시아나의 대답에 베르네미스가 생각에 잠겼다. 심장이 아래
에 있는 것과 이런 행동이 관계가 있을까를 고민하는 모습이다. 결
론은 '관계가 없다'로굳어졌다. 신체 특징이 정신적인 면과 연관
된다는 말 자체가 자신의 가설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조숙했군요. 또 없습니까?"
"처음봤을 때, 동물적인 느낌이 강하더군. 무슨동물인지 모르
지만, 일반 인간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지. "
레이시아나의 말에 베르네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자신
도 느꼈던 그 느낌을 말하는 것이리라.
"저도 예전에 느꼈습니다. "
"세월이 갈수록 동물적인 느낌이 점점 약해지더군. 아니 약해
진다기보다 인간적인 느낌이 조금씩 강해졌다고 봐야겠지. 마치,
원래 있던 느낌 겉에 인간의 느낌이 덮인다고 할까?대충그런 느
낌이었다. "
베르네미스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생각한 가설은
심장 위치와동물의 느낌이 관계가 있다는 거였다. 즉, 심장의 위
치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동물적인 느낌이 강해졌다는 가설이었다.
헌데, 심장이 자리를 잡았는데 동물적인 느낌이 약해진다? 이건
자신의 가설이 잘못됐다는 얘기였다.
"또 없습니까 7"
"살려는 의지가 무척 강하다. 지금까지 수십 차례의 유희를 겪
어봤지만, 삶에 대한 집념이 그렇게 강한 인간은 처음 본다. "
"그래요?"
"마치 수십 번 죽음의 고비를 넘었던 사람 같았어 아니,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 같다고 해야 하나? 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다 할
것처럼 보이더군. "
베르네미스는 레이시아나가 하는 말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가설이 잘못된 지금. 새로운가설을세우려
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현재로서는 정보의 원천이 레이시아
나뿐이었으니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흠, 레이시아나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할 정도면 쉽게 볼 일이
아니군요. "
"베르네미스. 라한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지? 심장이 아래에 달
려 있는 게 그를 일찍 죽게 하는 건 아니겠지?"
레이시아나의 물음에도 베르네미스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
다. 지난 16 년간 연구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뭘 알아야말
해주지 않겠는가?
"그게 저도 잘 몰라요. 여기 시체들 보이시죠? 여기 있는 녀석들
전부 심장이 아래에 달려 있어요. 제가 마법으로 심장 위치를 바꿔
버렸죠. "
"결과는?"
입으로는묻고 있지만, 레이시아나도 대답을알고 있었다. 주변
에 널려 있는 베어울프가 시체로 남아 있는 게 이유였다.
"보시다시피 전부 죽었어요. 거의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죽더
군요. 그래도 생명령이 가장 질기다는 베어울프가 이러니 이거
야 원."
"라한은?"
레이시아나의 물음에 베르네미스가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대답을 해줘도 확신할 수 없는 탓이다
"그건 저도 잘 몰라요. 라한이 지금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여기
상황과 어울리지 않거든요. "
"베어울프 중에서 어린 녀석들을 골라서 실험 해본 적 있나?"
"해봤죠. 마찬가지였어요. 전부 하루를 못 넘걱요. 굳이 그 라한
만큼 심장 위치를 많이 내릴 필요도 없더군요. 본래 심장 위치에서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꼴까닥! 결론이 그래요. "
레이시아나의 표정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마치 라한이라는 사람
과 아무 관계없는 듯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오래 연구했으니 막연한 감은 있겠지. 확실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냥 네 느낌대로 말해봐. 라한의 심장 위치가 수명에 영
향을 미치나?"
"음, 제 생각을말하자면 전혀 상관없는것같아요. 지금까지 심
장 때문에 그 어떤 발작도 일으킨 적이 없잖아요. "
베르네미스의 대답을 들은 레이시아나의 표정에 안도감이 스쳤
다.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보이는 감정 표현이었다.
"훗, 다행이군. "
"이제 웃으시는군요. "
"내가 감정을 보이면 넌 내가 기분 좋은 쪽으로만 말했을 거잖
아. "
"그런가요? 하여간 로이나 누님은 못 당한다니까요. "
레이시아나의 표정이 바꿔자 베르네미스의 호칭도 바뀌었다. 그
에 따라서 둘 모두의 얼굴 표정도 좀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베르네. 연구 계속 할 거야?"
"모르겠어요. 아무리 해도 별 성과가 없을 것 같아서 때려치우
고 싶기도 하고. 지금까지 해온 게 아까워서 계속 하고 싶기도 하
고. 뭐 그래요. "
레이시아나와 베르네미스. 로이나와 베르네로 불리는 둘은 원래
사이가 무척 좋았다. 베르네의 기괴한 행동을 로이나가 모두 이해
한 탓이다.
다른 드래곤들이 베르네가 미쳤다고 손가락질 할 때, 로이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하는 행동에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
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의 둘은 떼려야 뗄 수 없을 만
큼 가까워져 있었다. 누나와 동생 사이로
"지금 당장은 좀 그렇고 나중에 시간 되면 라한이나 보러가자.
그 녀석 지금쯤이면 더 똑똑해졌을 거야.
"후후후후. 헤헤헤"
"왜 웃어?"
로이나의 말에 베르네가 미친 듯이 웃어댔다 마치 실성한 사람
처럼 보였다.
"아, 하하하. 누님 표정이 꼭. "
"꼭? "
"아들 자랑하는 것 같잖아요. "
"아들?호호호. 뭐, 그렇게 봐도 무방하지. 지난 8 년간은 내가
키우다시피 했잖아. "
로이나의 대답에 베르네가 살짝 미소 지었다.
평소에 차갑게만 행동해온 로이나. 베르네 앞이 아니면 웃음마
저 보이지 않는 드래곤이 로이나였다. 그런 그녀가 라한 011 게 따뜻
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니 베르네마저 기분이 좋아졌다.
"뭐, 시간 내서 한 번 가죠. 근데 자연스럽게 만나려면 다시 신
관이 되어야하나?"
"아니, 지금은만나지 않는게 좋겠어. 날너무의지하려고하더
군. 혼자서 좀 더 강해져야지. 나중에 시간되면 자리를 만들자고. "
로이나는 라한을 아들처럼 아꼈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
만 8 년간이나 물심양면으로 돌봐줬기 때문이다. 지금은 실제 아들
이 생긴다하더라도 라한에게 더 깊은 모정을 가질 지도 몰랐다.
"누님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죠. "
그날 베르네는 베어울프 시체를 치우는 일로 바쁘게 지냈다. 로
이나가 자신의 레어에서 한동안 지내겠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다른 드래곤은 몰라도 로이나에게만큼은 예의를 지키려는 베르네
였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힘들 때, 손을 내밀어준 드래곤은로이
나뿐이 었기 에 .
"베르네. 너 인챈트에 대해서 좀 알아?"
"인챈트요? 그건 거의 소실된 마법이잖아요. "
느닷없는 로이나의 물음에 베르네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갑자기
인챈트에 대한 말은 왜 꺼내느냐는 의미였다
"넌 인챈트에 대해서 공부 좀 했잖아. "
"제가 공부 안 한 분야가 어디 있나요?"
"그건 그렇지. 제대로 한 건 하나도 없지만. "
"누님 ! "
"후후, 사실인데 왜 그래?"
베르네의 말처럼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
공부했었다. 다른 드래곤이 마법 하나만 믿고 나태해지는 모습과
는천지차이였다. 하지만, 무언가를제대로 이룬분야는단하나도
없었다. 그 역시 천성이 드래곤인건 변함없는사실. 의욕적으로시
작했다가 시들해지기 일쑤였다.
"쳇, 그나저나 인챈트는 왜요?"
베르네가 본론을 꺼내서 말을 돌려버렸다. 로이나의 말이 모두
사실이니 대꾸할 말이 없는 탓이다.
"라한이 인챈터가 되겠다고 공부하기 시작했어. "
"헛, 그놈도 나처럼 좌절하겠군. "
베르네는 라한이 포기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나마 인챈트에 대
한 지식이 많은 자신이 포기했으니 인간이 어쩌겠냐는 생각이었다.
"글쎄. 난 라한이 인챈터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면 꿈의
경지인 그랜드 인챈터가 될 지도 모르지. "
"에이, 누님이 라한이를 아끼는 마음은 알지만, 솔직히 인챈트
는 좀 아니다. 우리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인챈트에 대한 지식은 그
렇게 많이 안 남았잖아요. 근데 인간이 어떻게 인챈터가 될 수 있
겠어요?"
인간들 사이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인챈트였지만, 드래곤에게는
아니었다. 아직도 몇 가지 구전되어서 알려지고 있는 주문과 지식.
과거에 존재했던 인챈트에 비하면 틱없이 적고 보잘것없는 수이지
만, 존재하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맞아. 쉬운 것만 남았지, "
"쉬운 거요?"
"응. 라한이가 인챈트에 대해 공부하는모습을봤어. 거기에 쓰
인 공식도 대충 봤지, "
"그래요?"
"응. 엄청나게 많더군. 우리가알고 있는 인챈트는정말쉬운공
식만 사용된 아주 단순한 것들뿐이었어. "
로이나의 대답에 베르네가 호기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로이나의 말에 의하면 라한의 공식 수준이 드래곤에게 남은 인
챈트 공식을 넘어섰다는 얘기였다. 드래곤들마저 책을 살펴보지
않으면 외우거나적용하기 힘든어려운공식들. 헌데, 라한은그보
다 더 어려운 공식을 알고 있으니 호기심이 이는 모양이다.
"대단하군요. 우리가 쓰는 공식을 넘겨줄까요? 그럼 공부에 도
움이 될 것 같은데
"훗, 아니. 전혀 도움이 안돼. 내가볼때 라한이가공부하는 인
챈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르거든. 오히려 우리가 도와주
면 혼란만 가중될 거야. "
인챈트는 책으로 전해지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도형의 복잡성
과 세밀함이 그 이유였다. 실제 인챈트를 하는 사람이 아니면 기록
도 못하는 희한한 학문. 대부분의 책이 보기만 하면 옳걱 적을 수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 때문에 인챈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퇴보하기만 했다. 대부분의 마법이나 검술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 점과는 정반대 상황이었다.
라한이 공부하는 인챈트는 거의 원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로 오래된 것. 이런 라한에게 드래곤이 알고 있는 최근의 인챈트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퇴보되고 간략화 된 인챈트로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는 까닭이다.
라한은 정치학 수업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인챈트에 투자
했다. 자신에게 무공은 제스란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익히는
힘일 뿐. 자신의 최종 목표는 인챈트뿐이라고 생각했다.
정치학 수업을 하는 방 안.
좀 일찍 도착한 라한이 인챈트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공식만 외
웠을 뿐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다. 재료가 있어야 실험을 해보고
잘잘못을 따질 게 아니겠는가? 실제로 인챈트를 해볼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수레를 달라고 할까? 더 좋은 수레를 만들어 준다고 하면 주겠
지? 그러다 미움이라도 사면 에고, 모르겠다. 모르겠어. '
라한은 제스란이 타고 다니는 수레가 몹시 탐났다. 어찌됐든 자
신이 발견한 최초의 인챈트 재료가 아니던가. 왠지 그 수레만 얻으
면 지금의 정체된 인챈트 실력을 한 단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한테 부탁해볼까? 음, 그게 좋겠다 '
"뭐하는 거냐 사부가 들어왔는데 인사도 안하고. "
뒤에서 들리는 제스란의 목소리에 라한이 벌떡 일어났다. 얼굴
가득 죄송하다는 표정을 가득 담은 채 였다.
"사부님 오셨습니까? 제자가 다른 생각을 하느라 사부님이 오시
는 걸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
"시끄럽다. 시간 없으니 빨리 시작하자. "
매번 이런 식이었다. 무슨 말만 하려면 시간 없다고 다그치는
제스란. 어째서 시간이 부족한지 지금의 라한은 짐작조차 할 수 없
었다.
"이제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겠다. "
"예, 사부님. "
'나 참. 어떻게 매일 본격적인 수업이라고 할 수가 있지? 아예
입에 달고 사는군. '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라한의 표정은 공손하기만 했다. 오히
려 황송하다는 듯 얼굴 가득 고마운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앉아라. "
" 예. "
"단전이 어디 인지는 전에 설명했지?"
"예, 사부님. "
지난 며칠 동안 제스란은 인간의 혈도와 부위에 대해 가르쳤다.
혈도의 경우에는 짚었을 때, 만들어내는효과를, 부위의 경우에는
통증의 정도를 설명한 것이다. 그 모든 수업을 라한이 쉽게 알아듣
자 몹시 뿌듯해했다.
"무공에서는 힘을 단전에 모은다. "
"저 사부님. "
"말해라. "
"전 심장 위치가 단전 위치와 거의 동일합니다. 그런데도 무공
을 배울 수 있습니까?"
라한의 말에 제스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장의 위치가 사람
의 왼쪽가슴에 있는 건 모두가아는사실. 헌데, 어찌하여 심장이
단전에 있다는건지 .
"이리와 봐라. "
"네, 사부님. "
라한의 몸을살피던 제스란이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도
처음 보는 라한의 신체에 놀란 듯했다.
"호오, 아주 특이하군. 네 녀석의 잔머리가 그 심장에서 오는 것
같군 "
"사부님. 제가 어찌 사부님 앞에서 잔머리를 굴리겠습니까?"
"네놈의 심장 위치가 특이하기는 하지만, 무공을 익히는데 방해
가 되지는 않는다. 무공에서 사용되는 힘은 기라고 불리는 힘
으로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또, 손으로 잡거나 형체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 "
제스란의 차분한 설명에 라한이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몸이 무
공을 익히지 못하는 몸이라면 이런 고생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
했다. 어찌 보면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제스란의 말처럼 심장 위치가 무공에 영향을 주지 않는 건 아니
었다. 아니, 상당히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심장 위치가바
픽면서 혈도의 위치 자체가 모조리 바꿔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원래 혈도 위치에 딱맞게 위치해 있기는 하지만, 원래의
효과와는 전혀 다른 혈도가 그 자리를 차지해서 엉뚱한 효과를 낸
다는 것이다.
건리혈을 두드리면 견우혈의 효과를, 백환유를 두드리면 수돌혈
의 효과가 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혈들이 이런 다른 효과를
내고 있었다. 제스란이 모르고 있을 뿐.
"형체가 없는데 어찌 담아둘 수 있습니까?"
"넌 지식을 눈으로 볼 수 없는데 어찌 기억하고 있느냐?"
"그건
"같은 이치다. 심장이 단전을감싸고 있기는하지만, 기를쌓는
건 아무 상관이 없지. "
제스란의 설명에 라한이 할 말을 잃었다. 정상적인 대화로는 처
음으로 제스란에게 눌린 셈이었다. 새삼 제스란이 이렇게 똑똑했
는가 싶었다.
"그럼 심장 위치가 무공수련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말입니
까?"
"글쎄, 수련 자체와는 거의 무관하지. 뭐, 어떻게 보면 도움 되
면이 더 많다고 할 수도 있겠군. "
제스란의 말은 라한의 의도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방해도 아
니고 도움이라니, 무공 익히기를 피할 방법이 영영 사라지는 듯 보
였다.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단전이라는 건 무공을 익힌 사람에게 약점과 같다. 그곳을 파
괴당하면 익힌 무공 전부를 잃기 때문이지. 그리고 십장 역시 파괴
당하면 죽는 건 마찬가지다. 단전과심장이 정상적인 위치에 있는
나같은경우에는두개의 약점을가지고 있는셈이지. 헌데, 넌 단
전이 심장과 겹치다시피 위치하고 있으니 약점이 하나뿐이지 않느
냐"
제스란의 말에 라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익히는 사람에
게 마나를 쌓아두는 심장은 최대 약점이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다면 무공 역시 힘을 담아두는 단전이 약점이리라.
툭- !
"이건
"내 독문심법이 담걱 있는 책이다. "
"아, 그렇군요. "
라한이 제스란이 던진 책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손끝을 미
약하게 떠는 모습이 소중한 보물을 대하는 듯했다.
툭- !
"거기에 쓰인 글씨는 네가 읽을 수 없는 글 일게다. 방금 던진 이
책에 내가 부르는 대로 써라. "
제스란이 두 번째로 던진 책에는 아무 글도 쓰여 있지 않았다.
처음 던진 독문신법을 필사하는 용도인 듯 보였다
"제령신공?"
"음?"
라한이 첫 번째로 받은 책의 표지를 읽었다 약간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아주 정확한 발음이었다.
"사부님도 제령신공을 익히셨습니까?"
"그 책을 읽은 거냐?"
제스란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는 라한이 책의 표지를 읽
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책에 쓰인 글이 무령계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묵주에게 받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 언어가 뭐가 됐든지
면 이해할 수 있고 보면 읽을 수 있는 능력이죠. 대신, 쓰거나 말하
지는 못합니다. 그건 습관에 따른 거라고 하더군요. "
"빌어먹을 묵주 녀석. 나한테는 이따위 제약이나 가하고 너한테
는 능력을 줘? 개자식. 어디 만나기만 해봐라. "
제스란의 분노한 표정에 라한도 함께 짜증스러워했다. 묵주 때
문이 아닌 제스란의 말이 그 이유였다.
개자식. 자신이 수십 번도 넘게 겪었던 생이 아니던가. 비록끝
이 광견병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한때나마 개였음은 분명
했다. 그것도수십 번이나
'자기는 뭐가 잘났다고. 인간이나 개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라한에게는 인간이나 개나 큰 차이가 없었다. 어차피 그 많은 생
을 살면서도 일 년을 산 적이 없었으니 딱히 하나에 애착이 가지 않
는 탓이다.
물론, 둘 중에 굳이 하나를 택하라면 지금 살고 있는 인간을 택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인간의 삶을살고 있어서이지
인간이 우월해서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 중심적인 사
고로 바픽겠지만 말이다.
혼자서 씩씩대는 제스란에게 라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사부님. 수업을 계속 하셔야죠. "
"수업은 무슨 수업? 너 그 책 읽을 수 있지? 내일까지 다 외워!
안 외우면 알지?"
제스란의 말에 라한은까무러치기 일보직전이었다 단순히 읽는
게 아닌 외우는 일을 하루 만에 해야 하다니. 눈앞이 깜깜해져 현
기증마저 느껴졌다.
라한의 무령계 언어는 무척이나 서툴렀다. 할 수 있는 일과 익숙
한 일의 차이였다. 비록무령계 언어를 읽을수는 있지만, 그속도
가판트리아 대륙어보다는 현저히 느릴 수밖에 없었다. 하루 만에
저 책을다 읽을수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물론, 시간이 오래 지
나 언어에 익숙해진다면 빨라지겠지만.
'미치겠군. 오늘 인챈트 공부 다 했다. '
"예, 알겠습니다. 사부님."
라한이 자신도 모르게 승낙의 대답을 했다. 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알기 때문이다. 이성보다본능이 먼저 반응한
모습이었다.
"라한아!"
"예, 사부님. "
"묵주한테 또 받은 거 없냐? 있는 대로 다 불어, "
"신법을 받았습니다. "
라한의 대답에 제스란의 눈이 반짝거렸다. 다른 무공도 아닌 신
법. 제스란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어떤 신법이지? 펼쳐봐라, 어, 그러니까 .음, 내가네 무공의
단점을 지적해주마. "
"예, 사부님 "
대답을 마친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하기 싫은 기색이 얼굴 가득 떠올라 있었다. 광견보를 펼치는
게 싫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내가 다시는 쓰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생각은 그러했지만 몸은 이미 펼치고 있었다. 잠깐의 망설임이
라한에게는 죽음이 될 수도 있는 게 제스란이라는 존재였다. 그의
앞에서 농땡이 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슥-! 우웅!
"으르릉!"
라한은 전과 달리 개의 으르렁대는 소리까지 냈다. 정상적인 소
리와는 조금 다른 으르렁대는 소리. 미친개가 적의를 가졌을 때 내
는 소리가 분명했다.
'전에는 이런 소리 안 났는데? 이거 왜 이래?
"으르르릉! 크릉:"
라한의 입에서는 생각과는 다른 소리만 흘러나왔다. 신법이 진
행 될수록 커져가는 거친 숨소리와 흐르는 침들. 그리고 붉게 충혈
된 눈빛. 두 손, 두 발 모두를 사용해서 펼치는 탓에 진짜 미친개
같았다.
"그만 옷 입은 미친개로군. 아주 잘 봤다. 푸하하하하!"
"헉, 헉! 감사합니다. 사부님. "
제스란의 비웃음에도 라한은 불평 한 번 터트리지 못했다. 아니,
그럴 정신조차 없었다. 흐르는 침을 닦고 정신을 수습하는 일만도
버거웠다.
"허허, 그놈 참. 아직 수련이 덜 된 모양이군. "
" 예?"
"네가 사용한 신법은 광견보라는 신법이다. 말 그대로
미친개 신법이지. "
제스란의 말에 라한이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그럴 거라고 생각
은 했지만, 실제로 듣자 기분이 더욱 더러워졌다. 그냥 견보라면
웃고 넘어가겠지만 광견보라니. 자신의 마지막 죽음이 떠
오르자 묵주가 죽이도록 미웠다.
"네 신법은우리 무령계에서는쾌 유명한신법이다. 후후후, 가
장 우스꽝스러운 무공 서열 1 위에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지. "
"그, 그렇군요. "
라한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아직도 흘러내리는 침과 붉
게 충혈된 눈은 여전했다. 어떻게든 제 모습을 찾고 싶은 마음뿐이
었다.
"광견보는 수련하면 할수록 개처럼 변한다. 으르렁대는 소리도
점점 커지지. "
"예. "
"하지만 수련 정도가 높아지면 신법 시전 후에는 바로 본래 모습
으로 돌아온다. 지금의 너처럼 신법시전 후에 침을 흘리는 일은 사
라지는 거지. "
제스란의 말에도 라한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십 년간 고대했던 신법 아니던가. 헌데 그 결과가 미친개 신법이었
으니 화가 날만도 했다.
"후우 "
"보아하니 수련 방법은 정확히 아는듯하니 뭐라 하지 않겠다.
너한테 다른 신법을 가르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군. "
"저, 사부님. 사부님! 필요가 없어지다니요? 무공은 많으면 많
을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라한이 무공에 흥미를 보였다. 자발적인 흥미는 이번이 처음이
었다.
라한은 다른 무공 다 안 배워도 신법만큼은 배우고 싶었다. 광견
보를 한 번 겪어봤기에 신법이 도망가는 데에는 최고라는 걸 아는
것이다. 세상 살다보면,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처할지 모르는
일. 도망치는 일 정도는 배워두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군. 필요한 무공만 익혀도 극에 다다르
지 못한다. 이것저것 손대는 건 독이 될 뿐이야. "
"하지만 사부님. 광견보는 멋이 없잖아요. "
제스란도 라한의 의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모습이 황당하리만치
훙한광견보였으니 자신이라도 피할 터였다. 하지만, 제스란은새
로운 신법을 가르쳐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너무 똑똑한 라한에
대한 일종의 보복 심리였다. 거기다 부족한 시간도 그런 결정에 한
몫했고.
"넌 무공을 겉멋 때문에 배우는 거냐? 그런 제자라면 필요 없다.
차라리 널 죽여서 새로운 제자를 찾고 말겠다. "
"아, 사, 사부님. 아닙니다 제가사부님을기쁘게 하기 위해 농
담을 해본 겁니다. 하하하. 이해하시죠?"
라한의 어색한 변명에 제스란이 웃음을 머금었다. 똑똑하기만
하고 버릇없는 제자지만, 이럴 때는 귀여운 구석도 엿보였다.
"시간 없으니 지금부터 그 책을 외워라. 내일 수업 때, 물어볼
테니 싹 다 외우도록 해라. "
"예, 사부님. "
대답을 마친 라한이 책을 펴들었다. 제스란의 성미로 봤을 때 다
외우지 못하면 정말큰일이 벌어질지도몰랐다. 어떻게 해서든 제
령신공을 모두 외워야했다. 설사 밤을 꼬박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녀석, 시간이 없구나. 서둘러야할게다. '
제스란의 눈에 슬픔이 담겼다. 그리고 아련한 느낌도.
떠나간 사부가 남긴것
데니아 사막의 한 가운데 위치한 로테라숲.
이곳은 데니아 사막이라는 엄청난 난관을 지나야 도달할 수 있
늘 곳미다- 끝 모르게 펼쳐진 모래와 그 위에 우뚝 선 로테라 숲.
지형적인 위치만으로도 인간들에게 버림받기 충분했다.
하지만, 이곳이 금지가 된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몇
몇 탐사대나 모험단이 로데라 숲에 파견되었지만, 모두 의문의 실
종을닫한 것이다.
그 후 수백 년간 인간들의 도전은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들어간
사람 거의 모두가죽임을 당했다. 몇몇 살아 돌아온 사람들도 다음
날이면 미쳐버리기 일쑤였다. 결국, 들어간 사람 중에 멀정하게 살
아 있는 사람은단한 명도 없는셈이다.
약 오백 년 전. 어쩔 수 없이 대륙에선 로테라 숲을 금지로
지정했다. 더 이상의 탐사대를 파견하지 않겠다는 정식 의사표현
이나 다름없었다.
인간들에게 이 선언은 상당히 뼈아프게 다가왔다. 대륙 전체에
서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곳이 또 한군데 생긴 탓이다. 이때부터
대륙의 금지로 불리던 레비안 산맥과 파마리스 평원에 로테
라 숲을 첨가해야 했다. 그리고 대륙의 2 대 금지를 3 대 금지
로 바꾸어 불러야 했다
로테라 숲의 중앙. 나무로 만들어진 멋들어진 집에 십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엄청난 마나의 파동과 힘의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
다. 금지로 규정된 곳에서 사람이라니. 대륙에서 알면 까무러칠
일이다.
"제이슨. 얼굴이 안 좋구먼.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겐가?"
"내가 지난 14 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알지?"
루시펠의 물음에 제이슨이 어두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다른 사
람도 아닌 루시펠이라면 지금 자신의 마음을 알 거라 생각했다.
"흠, 루이에 얘기군. 벌써 14 년일세.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
았나?"
"후후. 포기? 내 눈을 외눈박이로 만든놈이야. 운명의 굴레도
벗지 못한 주제에 감히 내 몸에 흠집을 내다니
제이슨은 수백 년 전에 운명의 굴레를 벗었다. 당시에는 더 이상
의 적수가 없어 고독하기만 했던 제이슨. 판테아와의 계약이 오히
려 반갑기만 했다. 굴레를 벗으면 자신만큼 강한 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얘기이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그 결정을몹시 후회하고 있었다. 어차피
거절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었지만, 덥석 승낙해버린 자신이 원
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많은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게 행복하다는 걸 그때는 왜 몰랐는지
"찾아서 뭘 어쩌겠는가? 어차피 자넨 여기서 나갈 수도 없지
않나?"
"젠장. 알지만, 알긴 하지만그 빌어먹을자식을죽이지 못하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고. 내 손으로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
백준의 기사베라스무스루이에. 한때 루이나왕국의 영웅이라
불리며 왕궁 근위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사람이다. 17 년 전 갑작스
러운 실종만 아니 었으면 여전히 루이나 왕국의 영웅으로 남았을 사
람. 그가 제이슨에 의해 언급되었다. 그것도 14 년이라는 말과 함
께. 17 년 전 루이나 왕국을 떠났던 그가 이곳을 들렀던 모양이다.
"난 이해가 안 가더군. "
"뭐가 말인가?"
"내가 루이에라는 자를 보지는 못했지만 자네 몸에 상처를 줄 정
도면 실력이 보통이 아닐 텐데. 왜 판테아의 낙인을 받지 못했을
까?"
판테아는 수명이 길어진 이들에게 일종의 낙인을 새겼다. 그리
고 로테라 숲을 자신이 새긴 낙인에만 반응하도록 힘을 주입했다.
일종의 결계였다. 낙인이 찍힌 자에게는 절대 나갈 수 없는 감옥과
같았다.
"어쨌든 그놈은 내 몸에 흠집을 냈다. 다른 게 더 필요한가?"
"하긴 그 정도면 죽일 이유로는 충분하지, "
본래 로테라 숲에는 사십 명이 넘은 기인들이 살았었다.
판트리아 대륙이 생긴 이후, 운명의 굴레를 벗은 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수가 열두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육백 년 전에
발생한 일종의 반란이 그들의 수를 줄인 것이다.
육백 년 전.
그들은 지루함이 극에 달해 미칠 것 같았다. 판테아에 갇혀 지낸
지 너무오래 된 것이다. 결국, 굴레를 벗은지 오래되는사람들의
분노는폭발했고, 결국 이곳을탈출하자는 결론을내렸다. 판테아
에 의해 죽은 사람이 없었기에 결계의 존재 여부에 대해 긴가민가
하는 마음도 이런 결정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그들은 뜻을 펴기도 전에 꺾이고 말았다. 숲을 벗어나지
도못한채 죽음을맞은 것이다. 너무나 허무한죽음이었다. 아무
런 반항도못하고공기 중에서 분해되다니. 시도했던 삼십여 명의
사람뿐 아니라 구경하던 열두 명에게도 경악 그 자체였다
"루이에, 루이에! 이놈! "
"진정하게. 제이슨. "
"이 분노를 어찌 풀어야 할 지 모르겠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죽
이고 싶은데. "
"행여나 뛰쳐나갈 생각은 하지 말게. 난 육백 년 전 그때만 생각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네. "
육백 년 전에 벌어진 소멸 사건은 남은 이들에게 충격이었다. 비
록 도주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남은 열두 명도 그들이 성공하길
바랬었다. 그들이 무슨 방법으로든 성공만 하면 자신에게도 기회
가 있으리라는생각에서였다. 헌데, 아무런 반항도못해보고 사라
지는 결과를 나았다. 도대체 어떻게 죽었는지 보지도 못한 채 허무
하게 말이다.
"실라이론! "
-안녕하세요, 제이슨님.
제이슨의 낮은 목소리에 바람의 상급 정령 실라이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에는 창을 걸치고 거대한 방패로 몸을 가린 전형적
인 전사의 모습이다.
"왜 불렀는지 알겠지?"
-네. 루이에라는 사람을 찾는 일이죠?
"그래. "
-그럼, 이만
실라이론이 모습을 감추자 제이슨이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실
라이론의 소환자체가자신에게는쉽지 않은 일. 헌데, 실라이론이
제이슨의 힘으로 하급 정령까지 불러냈으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제이슨은 상급 정령사였다. 대륙에 단 한 명뿐인 정령사의 최고
봉. 물론, 최상급 정령과 정령왕이 존재하지만, 그건 인간의 능력
밖으로 알려져 있었다. 결국, 인간이 오를수 있는 최고의 위치가
상급 정령사인 셈이다
"허허, 제이슨고생하게. 이럴 땐검사라는게 다행스럽다니까."
"으, 으 루시펠. "
로테라숲에 사는 열두 명의 기인 가운데 정령사는 제이슨뿐이
었다. 나머지는검사가일곱명, 마법사가네 명이었다.
비록 열두 명뿐이지만, 그들의 실력은 웬만한 나라 두세 개를 합
한 것보다 강했다. 대륙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소드마스터와 7 서클
유저가 아니던가. 그들이 나가기만 하면 대륙의 판도가 바꿔다는
얘기 였다.
제령신공을 익힌 지 석 달.
라한의 심법 수련은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예상보다는 빠른속
도였다. 하지만, 제스란에게는이런 성취속도도불만이었다.
라한은 머리를 쓰는 모든 일에서는 제스란을 경악하게 할 만큼
빠른 속도를 보였다. 그런 그가 무공에서는 약간 뛰어난 정도에서
그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시간이 별로 없다. 제발
제스란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두워져갔다. 라한 같은 제
자를뒀으니 얼굴이 펴질 만도한데 오히려 어두워져가는 얼굴. 이
에 대해 라한이 아무리 물어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신을 집중해라. 어디다가 한 눈을 파는 게냐?"
"죄송합니다, 사부님. "
제스란의 호통에 라한이 진땀을 흘렸다. 한눈을 판 사람이 제스
란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는 라한을 호통 쳤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답답하거나 짜증스러울 땐 라한만
들볶아대는 것이다.
"됐다. 이제 혼자 힘으로 해라. "
"예, 사부님. "
짧게 대답한 라한이 자리에 앉았다. 제령신공을 수련하기 위한
자세였다.
"후우우, 후. "
잠깐 숨을 돌린 라한이 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스란이 명령
한 일주천을 행하기 위해서였다.
라한이 모은 기는 아주 미미했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
지도 못할 정도의 기였다. 이 때문에 일주천을 할 때는한시도 방
심할 수 없었다. 자칫 중간에 기를 놓치기라도 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탓이다. 기의 역행에 따른 고통을 느끼면서 말이다.
'일단 회음이다. '
제스란은제령신공을 익히지 않았다. 그는본래 사파. 정종심법
인 제령신공과는 상극이었다. 또, 사파의 심법을 일정 수준 이상
올렸을 때, 제령신공을 구했으니 어차피 둘 중 하나는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때 제령신공을 포기했었다. 제령신공이 더 우위라는 건
알았지만, 이미 익힌 사파의 심법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한은 심법을 익힐 때, 제스란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했다. 어
차피 제스란도 익히지 않은 심법이 아니던가. 익히지 못했으니 도
움을 받기도 힘들었다. 결국, 자신이 책을 읽고 방법을깨달을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으 으
용천을 뚫어야 한다. 제발. '
라한은 발바닥에서 엄청난 통증을 느끼면서도 용케 참아냈다.
실패하면 죽는다는 집념이 만들어낸 승리였다.
힘들게 한 고비를 넘긴 라한의 기가 조금 강해졌다. 아직도 미약
하기는 했지만, 이전의 느끼기 힘들 정도의 약한 기는 아니었다
'강해졌다. 느낌이 강해졌어. '
제령신공에 쓰인 내용으로는 난관이 모두 열한 군데였다. 양쪽
발바닥의 용천혈 두 개와 손바닥의 장심혈이 두 개. 나머지는 허벅
지와 어깨, 얼굴 부위에 집중되어 있었다. 열한 개의 혈도를뚫어
야 사지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듯했다.
'휴, 휴. '
마음속으로 심호흡을 한 라한이 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고
비 넘었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가는또 다시 기의 역행이 일어
날 터. 그 전에 기를 제자리로 돌려놔야했다.
"하나를 넘 었군. "
제스란은 라한이 왼쪽 용천혈을 뚫었음을 느꼈다. 한쪽을 뚫었
으니 나머지 한쪽도 쉽게 뚫릴 터. 열한 개의 관문 중에 두 개가
뚫리는 셈이다. 실제 라한의 무공수련은 이상한 감이 없지 않았다.
쉽게 뚫려야할 혈도가오히려 오래 걸리고, 오래 걸려야할 혈도
가오히려 쉽게 뚫린 것이다. 제스란과 라한은몰랐지만, 이런 일
이 생긴 이유는 심장의 위치 때문이다.
"후우. "
길게 숨을 고른 라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마에는 땀이 마
근 흘러내리고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라한 자신은 볼 수
없겠지만, 머리끝에서 흰 연기도 피어올랐다. 뚫린 용천혈의 잔재
가 백회혈을 통해서 날아가는 모습이다.
"관문 하나를 통과했더군. "
"감사합니다. 사부님. 이 모든게 사부님 덕분입니다 "
"됐다. 제령신공에는 열한 개의 관문이라 쓰여 있겠지만, 실상
은 그렇지 않다. 용천혈이나 견정혈, 장심혈은 발바닥과 어깨, 손
바닥에 위치해있다. 모두두개씩이지. 하나만뚫으면 나머지 하나
도 어렵지 않게 뚫어진다는 얘기다. "
라한의 귀에는 제스란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하나를 뚫었
다는 성취감에 도취된 탓이다. 비록 이제 한 고비 넘었을 뿐이지
만, 세상을 모두 얻은 느낌이었다.
"사부님. 다시 운기합니까?"
"그래, 앉아라. 오늘은. "
말을 하던 제스란이 수레를 박차고 일어났다. 얼굴 가득 불신과
놀라움을 가득 담은 제스란. 무언가에 심하게 놀란 모습이었다.
"사부님, 무슨 일입니까?"
"상위를 벗고 등을 보인 채로 앉아라. "
제스란이 빠른속도로말했다. 여전히 차가운 얼굴이지만, 다급
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부님, 갑자기 왜?"
"앉아라. 시간이 없다. "
"예, 사부님. "
라한이 빠르게 상위를 벗고 앉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사부인 제스란의 표정으로 보면 서둘러야 한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금제 때문이 아니라 무공에 대한 애착이
생긴 라한이다.
파팟!
"컥!"
라한의 등 뒤에 있던 제스란이 등을 강하게 두드렸다. 예상 못한
사태에 라한이 신음성을 터트렸다.
"입 다물고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와라. 안 그러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
말이 끝나자 제스란이 라한의 등으로 내공을주입시켰다. 라한
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강한 기운이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라한이 혼란에 빠졌다. 자신과 티격태격하기
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에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쉽싸였다.
으으
제스란의 기운이 들어을 때마다 라한은고통에 휩싸였다. 맹세
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져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왜? 왜?'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라한은 입을 벌리지 않았다. 제스
란이 했던 입을 다물라는 말. 이유는 모르지만 그의 말대로 따라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주입하는 기를 단전으로 모아라. "
으 으
"빨리. 안 그러면 넌 죽는다. "
의식이 이미 혼미해진 라한이었지만 기를 조금씩 유도하기 시작
했다.
어떤 이유에서라기보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
으면, 죽는다는 말이 그의 생존 본능을 자극한 모양이다.
이필리에 시 외곽의 평원.
겨울이라 이미 말라버린 풀들 위에 두 남자가 마주섰다 황량하
게 불어오는 바람이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했다.
"빨리 찾아왔군 앞으로 십 년은 못 찾을 거라 생각했는데 후
후후. "
먼저 입을 꺼낸 남자는 수레에 타고 있었다 왼쪽 팔이 잘렸는지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 팔 하나와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제스란이었다.
"힘들었습니다. 설마 다시 이곳에 돌아왔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
거든요. "
흰머리를 가진 평범한 체구의 남자가 담담하게 답했다. 그에게
서는 그 어떤 투기나 살기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제스란
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후후후. 자네는 예전보다 더 강해졌군. "
"감사합니다. 제스란님은 많이 늙으셨군요. "
사내의 말처럼 제스란의 외모는 많이 늙어 있었다. 피부에는 검
버섯이 펴 있었고, 머리마저 하얗게 샌 영락없는늙은이의 모습그
대로였다.
본래 제스란은그렇게 늙은모습이 아니었다. 이곳으로오기 직
전에 내공을 모두 퍼주었기에 늙어버린 것이다
'위험한 결정이지만, 라한 널 믿는다. '
갑작스럽게 내공을 주입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꽤 많이 고민
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제령신공의 기운과 자신이 가진 기운이 상
극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한의 신체가남들과다른점에서 착
안. 그냥주입하기로결정해버렸다. 무척 위험한결정이었지만, 라
한이 잘 다스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 머리말인가?"
"전에는 검은 머리였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
"후후, 다늦어서 제자를하나뒀는데, 속을너무썩이더군. 아,
자네도 알겠군. 필슨 백작가의 아들이 내 제자일세. "
제스란이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었다. 앞에 서 있는사내의 담담
한 모습과는 너무 상반된 모습이 었다.
"그렇군요. "
"자네 이름이 루이에라고 했던가?"
제스란의 물음에 루이에라 불린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준의 기사 베라스무스 루이에. 루이나 왕국의 영웅으로 불리
며 널리 칭송받던 존재였다. 하지만 나타날 때처럼 갑작스러운 실
종에 루이나 왕국을 혼란에 빠뜨렸던 자. 루이나 왕국 모든 기사들
의 우상이었지만, 과거에 대해선 철저히 비밀에 붙였던 신비인이
그였다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는가?"
"말씀하십시오. "
루이에의 표정은 시종일관 담담하기만 했다.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나듯 냉담한 모습. 이미 한차례 겪었던 제스란마저 당황
하게 할 정도였다
"날 죽이려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너무 강합니다. "
루이에의 짧은 대답에 제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짐작했
던 내용을확인한절차일 뿐. 정말몰라서 물은 건 아니었다. 과거
에도 한 번 들었던 대답이 아니던가.
"두 번째 질문일세. 앞으로도 강한존재가 보이면 죽일 생각인
가?"
"예 "
루이에의 대답은 짧고 명료했다. 대답을 미리 준비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루이에는 정도 이상의 강한 사람이 보이면 모두 죽여 왔다. 마법
사라면 7 서클에 들어선 자, 검사라면 소드마스터에 오른 사람이 기
준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소드마스터에 들어선 이후부터 그
냥그들을살려둘수 없다는생각이 든 것이다. 어쩌면, 자신과비
등한 실력자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몰랐다.
"마지막 질문이네. 자네는 운명의 굴레를 벗은 존재가 아니더
군. 자네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는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운명의 굴레라는 말. 전 모르는 얘깁니
다. 저보다강한사람에 대해서는 저도잘모르겠습니다. 한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저만큼 강한 사람은 있습니다. 그것도 많이. "
루이에의 대답에 제스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루이에만큼 강한 사람이 있다는 말. 바꿔 말하면 라한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도 되었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라한
에게 정이 들었던 제스란이었기에 제자의 미래가 안타깝기만 했다.
"많다라 후후후. 내가 너무 자만했었군. "
"로테라 숲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수가 꽤 되더군요. 거기서 만
난 사람들은 모두 강했습니다. 또, 처음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면
제스란님에게서 받은 느낌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
제스란은 로테라 숲이 운명의 굴레를 벗은 자들이 사는 곳임을
직감했다. 자신에게서 풍기는 느낌과 비슷했다는 말은 그들만의
고유한 느낌일 터.
제자인 라한이 그곳만큼은 방문하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예전엔 내가강했지. 비록두다리를쓸수 없었지만, 자네에게
이길 자신도 있었어. "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히 측량할 수 없으리만치 강하더군요. "
"후후후. 자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먼. 하지만, 난 그 싸움
에서 졌네. 자네가 암수를 썼든지 매복을 이용했든지 그런 건 중요
하지 않아. 내가 졌다는 것과 그때 팔 하나를 잃었다는 게 중요할
뿐이지. "
루이에의 얼굴에 그려졌던 담담한 표정이 미안한 표정으로 바꿔
었다. 이곳에 온 뒤에 처음으로 보이는 감정 변화였다.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아닐세. 아까 말했듯이 내가 졌다는 게 중요할 뿐이지. "
잠깐 말을 멈추었던 제스란이 루이에의 아래위를 훌었다. 살짝
미소 짓는 모습이 다행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자네는 지난 이십 년 가까운 세월동안 많이 강해졌구먼. "
"제스란님은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
루이에의 표정이 다시 담담하게 변했다. 본래 감정의 변화가 거
의 없는 사람인 듯했다.
"맞네. 나는약해졌지. 몸도지쳤고마음도지쳤거든. 이곳판트
리아 대륙은 내가 살 곳이 아닌 것 같더군. 낯선 땅에 버려진 느낌
이었지. 내가 느낀 이방인의 느낌을 자넨 모를 걸세. "
"그렇군요. "
"허허허. 내가 말이 너무 길었군. "
창- !
제스란이 검을 뽑아 들었다 수레의 나무 사이에 교묘하게
감춰진 검이었다. 약간은빛이 바랜 검이었지만, 짙은피의 느낌이
강하게 전해졌다.
스릉!
루이에도 검을 뽑아 들었다. 평소에 검을 잘 닦았는지 아주 부드
럽게 뽑혔다. 겉으로 보이는 빛도 제스란의 검과는 천지차이였다.
윤기가 흐르고 짙은 푸른빛을 띠는 검. 얼핏 보기에도 괜찮은 검임
을 느낄 수 있었다.
"후후. 좋은 검이군. 하앗! 컥! "
공격 할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제스란은 자신의 가슴을 찔러 버
렸다. 자결을한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제스란의 행동에 루이
에도 몹시 당황스러워했다.
"왜 이런 결정을 내리신겁니까?"
"헉, 헉. 난, 나헉. 난이방인으로 사는 게헉, 헉. 힘들
었네. "
제스란은 숨을 연신 몰아쉬면서도 눈빛만큼은 웃고 있었다. 그
의 입장에서는 낯선 이 땅을 떠나는 게 즐거운 듯했다.
"츠그
"내, 제제자. 라, 라한을잘부탁하네."
힘들게 말을 내뱉은 제스란이 고개를 모로 떨구었다. 그가 그토
록 원했던 안식을 되찾은 것이다.
"본래 살던 곳에서 행복하시길
루이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읖조렸다. 제스란의 죽음이 소멸로
이어진다는 걸 알았다면, 이런 기도는 올리지 않았으리라.
제스란으로서는 자살이 최선책이었다. 어차피 내공 전부를 라한
에게 넘기지 않았는가. 설사 이번 싸움에 이긴다 하더라도 고통스
럽게 죽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또, 낮선 땅인 이곳사람에게 목을
내놓기는 싫었다. 루이에의 실력이라고 해봐야 무령계에서는 일류
무사의 실력에 불과했다. 절정 검사인 자신이 일류무사에게 죽는
다는 건 치욕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명
예를 지키고 싶었다.
"내가 잘 하는 짓일까 7"
잠시 중얼거린 루이에가 제스란의 시체를 바닥에 눕혔다. 그리
고 그가 남긴 검을 옆에 조용히 내렸다. 제스란을죽게 만들기는
했지만, 꽤존경했던 사람이었다. 가는그에게 마지막예를다하는
것이다.
"이건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
루이에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듯 말했다. 그의 죽음이 여
전히 믿기지 않은 모양이다.
제스란이 남긴, 라한이 인챈트 재료라고 했던 그수레가루이에
의 손에 넘어갔다. 귀한 보물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리 츤 H 벼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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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토여글 3 뗐효토 B 또쓰뚜
출
라한은 제스란에게 받은 기를 단전에 가두자마자 의식을 잃어버
렸다. 거의 본능적으로 기를움직이기는 했지만, 신체적인 한계에
도달한 탓이다
"으 으
몇 차례 신음을 흘리던 라한이 힘겹게 눈을 떴다. 하복부에서 전
해오는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후우. "
잠시 숨을 가다듬던 라한이 몸을꿈틀거렸다. 아래에서 전해오
는 통증에 조금쯤은 적응이 된 듯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왜?'
라한은 제스란의 의도를 종잡을 수 없었다. 그동안 정말 착실하
게 시키는 대로 잘 따라갔던 라한이다. 그동안 몇 차례 실수를 하
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었다. 헌데, 자신이 왜 이런 통
증을 겪어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끙! "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로좀 전의 상황을 회상했다. 몹시 다
급해 보이는 제스란의 얼굴. 자신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듯 계속
해도 주입하던 기.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정신을 집중하라고 다
그치던 모습. 그 모든 행동이 라한에게는 생소하게 다가왔다.
"왜 그랬을까? 내가 뭘 잘못했지? 내가 왜 이런 통증을 겪어야
하냐고!"
스스로를 돌아보던 라한이 꽥 소리를 질렀다. 억울한 심정을 이
렇게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한참발광하던 라한이 의식을 잃기 직전을 떠올렸다. 너무나 처
연한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했던 제스란. 그의 목소리가 너무 쓸쓸
해 보여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었다.
이유가 있다. 내게 숨긴 무언가가 분명히 분명히 있다 "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자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아
련하게 전해오는 하복부의 통증은 여전했다. 하지만, 적응이 된 탓
인지 이전보다는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응? '
라한의 시선에 작은 종이가 들어왔다. 책상위에 대충 던져놓은
종이였다.
라한이 책상으로 힘겹게 다가갔다. 한눈에 제스란이 남긴 무언
가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 편지에 자신이 왜 고통을 당해야 하
는지 적혀 있으리라, 왜 그렇게 다급한 표정을 지었는지도 적혀 있
으리라. 또, 마지막에 했던 미안하다는 말의 이유도'
라한아. 더 이상 널 가르칠 수 없을 것 같다. 시간만 넉넉했다면
내 기를 이용해서 네 난관을 뚫어주고 싶었건만. 시간이 없다
는 게 너무 가슴 아프구나. 내가 없더라도 제령신공 수련을 계속
해야 한다. 광견보를 수련하는 일도 계속해야한다. 언젠가는 네
생명을 지켜줄 게다. 계속 수련을 하다보면 네가 싫어하는 모습
은 사라질 게다. 부디,부디 오래 살거라,부디
편지를 다 읽은 라한은 좀 전보다 더 큰 혼란에 쉽싸였다. 뜬금
없이 떠나야 한다니. 대체 왜 이런 내용의 편지를 남겼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큭! "
라한이 갑작스럽게 몸을 비틀거렸다. 걱우 진정되는가 싶던 하
복부의 통증이 또 다시 시작된 것이다.
"빌어먹을. "
한 마디 욕설을 내뱉은 라한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의 통증
을 가라앉히는 유일한 방법은 심법의 운용 뿐. 아는 심법이 제령신
공 뿐이었으니 그거라도 운용해야했다.
'섞이지 않아. 조금도 섞려이지 않아. '
라한의 몸에서 미약했던 제령신공의 기운과 제스란이 주입한 거
대한사파의 기운이 충돌해댔다. 이런 결과는제스란이 이미 예상
했던 일이었다. 다만, 급한 마음에 도박하듯 주입시켰을 뿐이다.
"크 으 . 으 컥!"
입가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신음 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공을 가르쳐준 제스란이 저주스러웠다. 그가 기
를주입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무공을가르치지 않았다면, 이런고
통을 겪지는 않으리라.
"헉!"
몇 차례 고통을 겪던 라한이 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령신공
의 기운을 서서히 이끌어 강대한 기운과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마치 사람이 싸울 때, 그 둘을 말리듯 억지로 제령신공의 기운을
단전 밖으로 끄집어냈다.
막상기를끌어내기는 했지만, 지금부터가문제였다. 모든 기의
보금자리는 단전. 제령신공의 기운도 결국에는 단전에 보관해야
할 터였다. 헌데, 그 자리에 제스란의 기운이 머물고 있으니 이것
도 불가능했다. 함께 양립할 수 없는 두 기운이 아니던가.
'마나가 모일 수 있는 곳이라면 기도 가능할지 모른다. 심장.
만약 그곳이 안 되면 휴
생각과 동시에 제령신공의 기운을 서서히 움직여왔다. 아직도
단전으로 돌아가려는 기의 회귀력은 여전했다. 지금 상황에서 잠
시의 방심은 또 다시 고통으로 다가을 게 뻔했다.
'제발, 제발. '
라한이 제령신공의 기를 심장 쪽으로 이끌었다. 여전히 반발력
은 심했지만, 큰 무리 없이 이끄는 데로 따라왔다. 아직 제령신공
의 기운이 미약하다는 게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제발, '
"컥 !"
심장을 한 바퀴 돌던 제령신공의 기운이 강하게 튕걱 나왔다. 제
스란의 기운이 담긴 단전과 접해 있는 심장. 단순히 접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하게 반응한 것 같았다.
'대체 어쩌라고. '
라한은울고싶은심정이었다 그나마가능성 있는방법을 이용
했음에도 여전히 반발하기만 하는 두 기운. 이 기운을 다스리지 못
하면 단전이나 심장 둘 중 하나가 터져나가 죽을 것만 같았다. 그
전에 고통을 못 이걱 죽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심장 마나 심장 심장을 둘러
마나는 심장 안에 담기는 힘이 아니었다. 싱장 주변에 테두리처
럼 둘러져 마법 시전에 사용될 뿐. 실제로 심장이 마나를 담고 있
는 그릇은 될 수 없었다.
반면, 단전은 기를담아두는그릇. 이 두 가지를 같은맥락에서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어쩌면
라한의 몸 전체에서 땀이 비 오듯쏟아졌다. 입고 있던 옷은 땀
이 아래로 흐를 만큼 젖었고, 머리카락도 샤워를 한 사람처럼 축축
해져 갔다. 하지만 라한은 자신이 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
식하지 못했다. 겉모습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탓이다.
'이게 안 되면 난 죽는다 '
라한이 제령신공의 기운을 심장 밖으로 유도했다. 그로서는 최
후의 방법이었다 다행히 반발하던 기운도 라한의 뜻을 알았는지
서서히 따라주었다. 다른 무엇보다 시전자의 의지를 우선으로 하
는 도가 계열의 심법, 그 특징이 아니었다면 심장 밖으로 유도하는
게 실패했을 것이다.
'휴, 뤘다. 췄어. '
제령신공의 기운이 라한의 심장 주변에 자리 잡았다. 비록 미약
하기는 하지만 띠를 형성한 것이다.
걱우 살았다는 생각에서일까. 라한의 의식이 서서히 잠들어갔
다. 너무 많은 심신의 혹사로 한계에 도달한 듯 보였다.
요즘 엘베로는 하루도 편히 잠드는 날이 없었다. 정적인
필슨 백작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커졌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8 년
만에 나타나서 속을 종잡을 수 없는 라한까지. 할 수만 있다면 필
슨 가문 사람 전부를 고혼으로 만들고 싶었다.
"젠장. "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하십니까 7"
엘베로의 표정을 살핀 파론이 조용히 물었다. 엘베로의 심기가
좋아 보이지 않자 평소보다 더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엘베로는 대외 정보 수집을 위한 많은 정보원을 거느리고 있었
다. 그들모두를합해서 정보조직을만들어도 될 정도였다. 하지
만, 그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배후에 엘베로가 있는지 몰랐다.
그들과의 접선을 파론이 모두 도맡아서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나타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 "
요즈음 루이나 왕국에서는 대대적인 감사 작업이 한창이었다.
금전이나 권력에 의해 정치를 움직인 모든 자들에게 루이나 왕국의
국왕이 교수형을 명한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여러 차례 이런 식의 감사가 있어왔다. 5 년에 한
번. 거의 주기적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하지만, 그 감사를 전담하
는 사람이 귀족이었기에 감사 자체가 조용히 마무리 되는 게 대부
분이었다. 자신 역시 귀족이었고 정권은 어떻게 바필지 모르는 일.
서로가 몸을 사리자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감사는 예전처럼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국왕이
직접 감사를 이끌겠다고 선언한 탓이다.
"왕실은 아직도 시끄럽습니까?"
"네가 알 필요 없다. 용건이나 말해라. "
파론의 말에 엘베로가 짜증스럽게 답했다 요즘 왕실의 분위기
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럴 때 파론과의 대화가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현자로서의 인생은 끝장이었다.
"수도에 암살자 조직이 생긴 것 같습니다 "
"호오, 그래? 규모는?"
파론의 말에 엘베로가 호기심이 인다는 듯 말했다.
지금의 엘베로에게 가장 필요한 상대가 궂은일을 해줄 사람이었
다. 다크라이더가 모습을 감춘 뒤 눈만 열려있고 손이 꽁꽁 묶여
있지 않았던가. 새로 나타난 암살자 조직을 잘만 이용하면 새로운
수족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다크라이더보다규모는 큽니다. 헌데, 강자의 수는 조금부족
한 것 같습니다. "
"흠, 그렇겠지. 다크라이더가사라진 지 벌써 8 년이다. 그긴 시
간동안 눈치만 살필 정도라면 실력은 더 볼 필요도 없겠지. "
말을 마친 엘베로가 생각에 잠겼다. 그들을 어떤 식으로 포섭하
고 어떻게 부릴 지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일단 필슨 백작부터 손봐야겠지. '
"어떻게 포섭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
"무리한 확장으로 자금이 부족하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음흥한 미소를 머금었다. 벌써부터 필
슨 백작의 최후가 보이는 듯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다. 알아서 포섭해라. "
"예, 엘베로님. 그리고저
파론의 망설임에 엘베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파론이 말을 길게
끈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원래 말을 길게 끄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뭐든지 명확한
답변을 원했고, 말을 할 때도 길게 끄는 법이 거의 없었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라한이었다. 이제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도무지 그 속내를 짐작할수 없었다. 그에대해서 말할
때는 짐작과 추측밖에 나오지 않았다.
"말해라. "
"루이 에와 닳은 사람을 봤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
"뭐?"
쾅- !
엘베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얼굴에는 불신과 경악의 표
정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루이에라는 이름이 주는충격이 그만
큼 컸기 때문이다.
"그게, 저확실한 정보는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으
려고 했는데
"자세하게 설명해라 "
필슨 백작은 타고난 정치 능력으로 사람들을 포섭하는 유형이었
다. 포섭하는 범위도 지방 귀족과 부유한 상인에 국한되어 있었다.
애초에 수도권 권력가들은 배제한 것이다.
반면, 루이에는 자신이 가진 매력과 실력으로 모든 기사들의 우
상으로 떠올랐다. 루이에가 정적이 된다면 기사들을 동원하는 일
은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흰머리의 검사를 봤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
로는 루이에의 예전 모습과 상당히 흡사했다고 합니다. 하지
만
"하지만?"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왕궁 근위 기사단단장일 때는 항상 검
은 갑옷에 거대한 검을 쓰지 않았습니까? 흰 머리에 검은 복장이라
서 백준의 기사라는 칭호까지 얻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헌데, 이
번에 발견한 자는 일반 브로드소드 한 자루만 차고 있었답니다. 갑
옷도 없이 일반 평민 복장이었다고 하고요. "
백준의 기사라는 칭호는 국왕이 직접 하사했었다. 하얀 피부에
흰 머리카락을 가진 루이에. 얼핏 보면 여자처럼 보이는 그가 검은
옷과 검은 검을 사용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백준의 기사라는 호칭을 버린 건가? 내가 붉은 현자라는 칭호
를 버릴 수 있을까?'
엘베로는 국왕에게 붉은 현자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 항상 붉
은로브를쓰고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사람은그를붉은
현자라부르지 않았다. 루이에가 모든 기사들에게 백준의 기사라
불린 것과는 확연히 차이 나는 모습이었다.
"현재 그자의 위치는?"
"수도 외곽에 잠시 모습을 보였다가 바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
"잊어라. "
"예?"
엘베로의 말에 파론이 의문을 제기했다. 루이에라면 평소에 엘
베로가 가장 신경 쓰던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 자를 그냥 잊으라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루이에 본인이 맞든지 아니든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건 루이나 왕국에 아무런 애정도 없다는 거지. "
루이에는 백준의 기사라 불리게 된 복장을 버렸다. 그건 국왕이
하사한 칭호를 버렸다는 말도 되었다. 국왕이 하사한 영광을 버릴
정도라면 왕국에도 애정이 없을 터. 그런 루이에를 굳이 찾을 필요
가 없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
파론이 나가고서도 엘베로는 책상을 뜨지 못했다 한참 멍하게
앉아 있던 엘베로가 과거를 회상했다
과거 루이에는 담담한 표정으로 왕궁 문을 부수었다 왕궁의 최
대 실력자와 겨루고 싶다는 말만 남간채
일종의 침입과 같았기에 왕궁 근위 기사단은 곧바로 출동햇고
루이에는 그들 모두를 한 시간 만에꺾어버렸다 그 중에 단 한명
의 사상자도 없음을 감안하면 손에 사정을 둔게 불명햇다
휴 너무 강해 차라리 없은게 나아
기사를 모두 꺾어 버린 루이에은 국왕의 침소에 침입했고 그 자
리에 무릎 꿇어 버렸다 그리고 왕실을 지키는 방패가 되겠습니다
라고 했던 루이에의말 짧은 말이지만 국왕은 진정으로 루이에에게
감탄했고 그자리에서 기사 작위를 내려주었다 또 그때 했던 짧
은 말은 루이나 왕국 전체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말이 되었다
왜 떠났을까
엘베로는 루이에를 실제로 본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를 만
나기 위해 남부에서 서둘러 올라왔지만 그때는 이미 사라진 후였
다 정말 갑자스럽게 모습을 감춰버렸기에 그 신비감이 지독할
정도였다
가출 그리고 죽음
라한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무려 17 시간 동안
의식ㅇㅡㄹ 잃은 것이다 그의 평소 취침 시간을 생각하면 길어도 너무
길었다
으 젠장 몸이 말이 아니군
정신이 드십니까
라한의 푸념어린 말에 반응하듯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침식사를 위해 라한을 깨우러 온 듯했다
아 집사 여긴 왠일이야
식사 하셔야죠 그나저나 어제은 왜 그렇게 일찍 주무신 겁니
까
집사는 라한의 기절을 잠을 잔거라고생각했다 평온하고 긴 호
흡 때문이다 보통 몸이 안 좋아서 쓰러지면 동공이 풀리거나 호흡
이 거칠어지기 마련. 헌데, 라한의 호흡은길고도평온했기에 그렇
게 생각한 모양이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제령신
공을 운용한 결과였다.
"벌써 아침이야 7"
"예. 시간이 얼마안남았습니다. 준비하고내려오십시오."
대부분의 귀족은 아침에 일어나서 일상을 시작할 때까지 하인이
다 챙겨줘야했다. 그게 귀족의 권위이며 하인의 의무라는 자존심
때문이다.
하지만 라한만은 그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스스로가 비밀이
많은 만큼 남들과 섞이는 걸 피할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
문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에는 하인을 부르지 않았다. 또, 옷을 입고
씻는 일체의 행동에 대해서는 타인의 개입을 극구 거부했다.
"예. 곧 내려갈게요. "
라한의 대답을 끝으로 집사가 방을 나갔다. 평상시에 늘 이렇게
해왔으니 일말의 의혹도 품지 않았다.
집사가 완전히 나간 게 확인되자 라한이 침대 밑에 내려와 앉았
다. 어제 있었던 일은 우발적인 사고와 같은 일. 몸 상태를 확인해
야만 불안함이 풀릴 것 같았다.
라한은 복부 통증이 가라앉은 걸 확인했다. 다행한 일이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이내 그 기운을돌리기 시작했다. 제령
신공의 기운이 아닌 제스란이 준 기운이었다.
약 30 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제스란의 기운을 일주천할 수 있
었다. 기의 양이 많아서인지 어제보다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몸 자체에서 그리 나쁜 조짐을 느끼지 못하자
라한도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일단죽을고비는 넘겼군. 근데, 제령신공으로 이 기은을돌려
도 괜찮을까?"
일주천은성공했지만, 기분이 마냥좋기만한건 아니었다. 예전
에 제령신공을 돌릴 때와는 달리 약간의 찝찝한 느낌을 받은 탓이
다. 제령신공 일주천시의 상쾌한 기분과는 완벽히 반대되는 느낌
이었다.
"심장에 쌓은 기운은 어쩌지?"
라한은 원래 가지고 있던 제령신공의 기운을 어찌해야 할지 몰
랐다 이대로 심장에 두자니 제 자리가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단
전에 다시 넣자니 반발할까 두렵고. 그 어떤 선택도 라한에게는 꺼
려지는 일이었다.
"도련님! 식사 준비 끝났습니다. "
"아, 예. 내려가요."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라한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인챈트도 마찬가지겠지만, 무공 역시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일이
다. 의심을사지 않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에소홀함이 없어야했다.
거기다 제령신공에 대해선 뽀족한 수도 없으니, 머리라도 식히자
는 심정도 작용했다.
귀족들의 식사는 세 가지 정도의 주식과 열 가지 이상의 부
식으로 이루어진다. 최소 열세 가지의 음식인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올라온 음식 전부가 귀족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었다. 귀족들 역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음식이 있을 터.
실제로 먹히는 음식은 소수에 불과했다. 설사 음식 전부가 입에 맞
아도 두세 개의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는 게 귀족이었다. 음식을
남기는 게 귀족만의 권위라는 생각에서였다.
필슨 백작가의 식사도 여느 귀족과 큰 차이가 없었다. 스스로
평민 중심의 정치를 표방하지만, 그도 귀족임은 어쩔 수 없는 모양
이다.
'낭비야. 아무리 생각해도 낭비야. '
라한은 귀족이기는 하지만, 그 생활에 젖어 있지는 않았다. 귀족
이 아니었을 때의 기억이 귀족이었을 때의 귀족보다 더 많았기 때
문이다. 거기다가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서 보낸 8 년의 시간동안
귀족임을 잊고 살았으니 당연했다
"정치학 수업은 잘 되가느냐?"
"예? 하하하하. 그게 뭐, 그냥 그렇죠. 하하하. "
라한이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부모에게만큼은 거
짓말을 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오히려 필슨
백작의 화를북돋았다. 그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또는 '자신
있습니다' 와 같은 대답을 원했다.
"그게 배우는 학생이 할 말이더냐?"
"죄송합니다, 아버지. "
필슨 백작이 분노성을 터트리자 식당에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
다. 한 겨울의 북풍한설도 이보다는 따뜻할 듯 보였다.
"이번도 죄송하다는 말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내
가 이번 기회에
"백작님, 큰일 났습니다. "
갑자기 뛰어 들어온 집사가 필슨 백작의 말을끊어버렸다. 필슨
백작에게는 심히 기분 나쁜 일이었다. 하지만, 라한에게는구원의
손길을 뻗은 은인이 따로 없었다.
"무슨 일인가?"
"도련님의 정치학 선생이신 제스란님께서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
쨍그랑!
집사의 말에 라한이 수저를 떨어뜨렸다. 너무 큰 충격에 귀족가
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버렸다.
'어제 그 말이 이런뜻이었나. '
라한은 그제야 제스란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왠지 다급해보이던
표정과 초조해하는 얼굴. 그 모든 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사람의
행동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못된 생각만 했던 자신이 한
심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사망 원인은?"
"칼에 찔려서 죽었습니다. "
집사의 말에 식구들 모두가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좋아했
든 그렇지 않든 그는 필슨 백작가의 손님이었다. 그런 그가 칼에
맞아 죽었다는 건 필슨 백작가를 업신여기는 행위가 분명했다.
"시체는?"
"마당에 뒀습니다. "
"나가지 "
필슨 백작이 자리를 뜨자 라한도 몸을 일으켰다. 자신도 제스란
의 시체를 보겠다는 의지를 표한 것이다.
"도련님은 보지 않으시는 게
"라한아. 넌 나오지 마라. "
집사의 말을 필슨 백작이 거들었다. 그도 자신의 아들이 끔찍한
모습을 보는 건 싫었다. 아직은 아름답고 따뜻한 것만 볼 나이가
아니던가.
"하지만 아버지. 그분은 제 선생님이셨습니다. 마지막 가는 모
습도 지켜보지 못했는데, 시체라도 봐야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안 된다. "
짧게 대답한 필슨 백작이 식당을 나가 버렸다.
라한은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나을 때가 제일 힘들었다. 이성적
인 대화가 아닌 강압적인 명령. 대화가 안 통하니 라한의 지식도
아무 쓸모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등만 바라볼 수밖
에 .
라한은 2 층으로 올라가 먼발치에서 제스란의 시신을 바라봤다.
입구 쪽에 놓인 시신과 자신의 거리가 꽤 멀었기에 보이는 건 거의
윤곽뿐이었다. 그런데도 라한은 제스란이 웃고 있다고 느쪘다.
"도련님, "
"아! "
뒤에서 들리는 하인의 목소리에 라한이 놀란 목소리를 내뱉었
다. 평소에는주변상황에 무척이나민감한사람이 라한이었다. 제
스란의 죽음 때문에 넋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살이래요. "
"응? "
"도련님 정치 스승이셨던 제스란님이 자살한 거래요. "
하인의 말에 라한이 의구심을 가졌다.
자살 할 거라면 왜 그렇게 다급해했는지, 또, 마지막에 보였던
초조한 표정은 뭐란 말인가. 라한은 제스란이 자살했다는 걸 도무
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살일리가 없다 자살이라면 자살로 유도한놈이 분명히 있
겠지. '
타살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굳이 복수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스란은 제스란이고 자신은 자신. 자신을 대신해 죽은 사
람도 아닌데 굳이 복수할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또, 제스란마저 죽일 정도라면 실력도 예사롭지 않을 게 분명했
다. 그런 사람과는 대적하기보다 피해 다니는 게 상책이라생각했다.
제스란이 죽은 지 한 달.
스승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한의 일상은 큰 변화가 없었다.
정치학 수업 시간에 진짜 정치에 대해 배운다는 게 달라졌을 뿐.
나머지 시간에 인챈트를 연구하는 것까지 완벽히 일치했다.
"후우. "
길게 숨을 쉰 라한이 눈을 떴다. 제스란이 주입한 기를 일주천하
고 방금 깬 것이다.
제스란이 있을 때는 억지로 행했던 일주천. 지금은 인챈트에 대해
연구하다가 답답할 때면 한 번씩 돌리는 취미생활이 되어버렸다.
"미치겠군. 이럴 때는 괜히 사부가 그립다니까. "
라한은 지난 한 달 동안 정말 죽기 살기로 인챈트를 연구했다.
큰 성과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아주 약간의 성과와 눈에 보이는
무엇을 원했을 뿐이다.
헌데도, 결과는 완벽한 제자리걸음이었다. 저기다 제령신공의
구결로 돌리는 제스란의 기(눈)마저 조금도 늘지 않았다. 무공과
인챈트 두 분야 모두에서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라한은 제스란이 주입한 사파의 기운을 제란기라 불렀다. 한
때나마스승이었던 제스란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 심장을두
르고 있는 제령신공의 기운을 제령기라 칭했다. 이는 단순히
제령신공의 이름을 줄여서 부른 것이다.
라한은 두 기운을 서로 다르게 부르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관
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뚜렷한 해결책은 찾지 못했지만
말이다.
"사부가 있었으면 최소한 무공만큼은 무슨 해답을 줬을 텐데. "
무공 성취가 없어 답답할 때면, 괜히 제스란이 보고 싶었다. 이
럴 때는 야단치며 꾸짖던 모습마저 그리울 정도였다.
허나, 죽은 사람은 돌아을 수 없는 법. 어차피 라한 스스로의 힘
으로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겠어. 흠, 사부가 주입시킨 제란기는
본래 제령신공에서 나온 기운이 아니다. 애초에 제란기를 제령신
공의 구결로 움직인다는 게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다고 제령기를
제령신공의 구결로 움직일 수도 없다. 시작 지점이 단전에서 심장
으로 바러었으니, 흐르는 경로도 바뀔 수밖에 없지. 근데 어떻게?"
항상 하는 고민이었지만,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생각 같
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였다.
"인챈트도 재료를 구하지 못하면 더 이상의 성과를 보기 힘들다
젠장. 뭘 해봐야 잘못된 점을 찾지 "
차락!
라한은 오래전 혈도를 배우기 위해 그렸던 신체 그림을 펼쳤다.
자신이 제스란에게 처음 받았던 수업은 혈도에 대한 공부. 라한은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하나씩 살펴볼 생각이었다.
"혈도는 컥! "
갑작스러운 통증에 라한이 배를 움켜쥐었다 전혀 예상 못한 고
통이기에 그 놀람도 클 수밖에 없었다
'왜?'
잠시 의문을 떠올린 라한이 기를 되짚어갔다. 자신의 고통이 시
작되는 근원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미, 미친심장이잖아. 지금까지 이상없었는데.
라한은 심장 주변에 띠를 두른 제령기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
지 않았다. 기운 자체가 안정적이고 평온했기에 별일이야 생기겠
냐는 생각에서였다.
헌데, 이번 통증의 시작 지점은 심장 주변의 제령기가 있는 곳이
분명했다. 라한으로서는 방심하다가 뒤통수 맞은 격이었다.
"으, 허헉, 헉. 휴."
심장에서 시작된 통증은 그리 오래지 않아 가라앉았다. 하지만,
한 번 겪었던 통증의 불길함은 라한의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일단통증이 시작되었다면 언제 재발할지 모를 일이다. 어
떻게든 그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반쯤 미친 제란기도 멀정한데 왜 제령기가 말썽이지? 기운의
본래 성질이 다르다는 것 말고는 차이점이 없는데. "
총명한 라한에게도 이런 일에 대한 해결책은 없었다. 그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 아니던가 경험이 됫받침되지 않았기에 해결책을
떠올리기도 힘들었다.
"그럼 제란기가 멀정한 이유가 뭘까? 왜 이놈은 발작을 일으키
지 않은 거지? 흠. "
라한은 생각을 거꾸로 해보기로 했다. 제령기가 이상을 일으킨
것에서 원인을 찾지 않고, 제란기가 멀정한 이유부터 찾으려는 것
이다.
"휴. "
숨을 길게 내신 라한이 제령신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단전에
쌓인 제란기를 일주천하며 심신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제란기의 기운은 아주 부드럽게 라한의 몸을 돌았다. 지난 한 달
동안 하루에도 수차례씩 행했던 제란기의 일주천. 지금의 라한에
게는 식사를 하는 일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운공을 통해 기를 일주천하는 일은 몸에 노폐물을 제거해주고
심신을 편안하게 해준다. 기운이 돌면서 몸에 남아 있는 노폐물을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제령신공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제령기가 아닌 제
란기의 일주천이었지만 어느 정도의 효과는 나타났다. 물론, 본래
의 제령신공의 효과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지만.
일주천을끝낸 라한이 이마에 땀을닦았다. 한차례 고통을 겪어
서인지 더욱 상쾌한 느낌이었다.
"후우. 좋군. "
길게 숨을 몰아쉰 라한이 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몸은 개운했
지만, 앞일을생각하자눈앞에 깜깜해졌다. 이것저것 다포기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 개운하다. 이 느낌이 더 오래 지속해ㅆ으면 좋겠다. "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보며 라한이 싱긋웃었다. 지금생각
해보면 이전의 생에서 수없이 많이 죽었던 게 꿈처럼 느껴졌다.
"그나저나 제령기를 어떻게 처리하지? 이건 쓸모도 없는 게 심
장에만 달라붙어 있어서 그래도 제란기는 몸을 개운하게 만
들 때는 좋잖아. 근데 이놈의 제령기는 제령기는?"
누워서 중얼거리던 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가에 미소마저 감돌았다.
바닥에서 일어난 라한이 좀 전에 펴뒀던 그림 앞에 다가갔다. 혈
도를 공부하기 위해 그렸던 신체의 그림이었다.
"제란기가 통증을 주지 않는 건 아마 계속움직여서겠지. 그
런데 제령기는 심장 주변에 너무 오래 방치시켰다 실제로 아까 느
낀통증은무언가굳어가는느낌이었어. 결국, 제령기를움직일 방
법을 만들어내야 하는 건가?"
라한은 심장에서 오는 통증의 이유를 제령기의 정체로 설
명했다. 무엇이든지 고여 있으면 굳게 마련. 이 기운을굳지 않도
록 계속 움직이게 만들어야 통증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다.
"근데 어떻게?"
혈도를 아무리 살펴봐도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심장부터 시작
하는 일주천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방법이 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야
했다. 그의 가정이 정확하다면 제령기는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이 상태로 계속 뒀다가는 언젠가 심장 주변을 감싼 채로 굳어버릴
게 분명했다. 심장주변을감싼기가굳어버린다면, 심장까지 멈출
수도 일는 극히 위험한 사태가 발생할 터였다.
"본래 제령신공의 구결이라면 단전에서 나와 회음을 거쳐 움직
여야한다. 헌데, 심장에서 회음으로는 이어지는 혈도가 없다. 결
국, 완전히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건데 흠. "
방법은 없었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이 위기를 벗어
나고자하는 의지만 불같이 타올랐다.
"까짓것 잘 됐어. 내가 얼마나 독종인지 제대로 보여주지.
라한은 인챈트 연구의 정체로몹시 나태해져 있었다. 아무리 노
력해도 성과가 없었기에 반쯤은 포기했던 것이다. 그러던 찰나에
터진 제령기의 정체. 라한은 이번 일을 계기로 자기 자신을 채찍질
할 생각이었다. 자신을 그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사나
이로 재탄생시키려는 것이다.
"심장에서 나가는 길은 하나뿐이다. 여기서 어디로 돌려야 하
지?"
잠깐중얼거린 라한이 제령신공의 구결을 더듬었다. 그곳에 쓰
인 모든 글귀를 재해석해서 새로운 경로를 만들려는 의도였다. 그
렇게 생각을 더듬으면서도 눈은 혈도가 그려진 그림에서 한시도 떨
어지지 않았다.
왕실의 감사가 시작된 지 벌써 두 달.
처음의 의욕적이던 감사도 지금은 많이 시들해졌다. 하지만 그
두 달 동안 교수형 당한 귀족이 이십여 명이나 되었다. 지금까지
있어왔던 그 어떤 감사보다 파격적인 처벌이었다.
"파론! "
엘베로는 요즘 집 안에서만 기거하며 하루를 보냈다. 시들해지
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철수하지 않은 감사의 눈길. 그곳에서 조금
이라도 벗어나보려는 의도였다.
대신 파론과 은밀한 만남을 계속 유지했다. 지금은 정치 세력들
이 자중하고 있지만, 언제 대립할지 모르는 일이 아니던가. 정보수
집만이 미래를 위한 준비가 될 거 였다.
"네, 엘베로님. "
"결과는?"
"성공했습니다. 들어간 금액도 예상보다는 적었습니다. "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 비릿하게 웃었다. 파론의 대답이 그를
흡족하게 한 모양이다 파론은 암살자 길드를 포섭하기 위해 백방
으로 뛰어다녔다. 나타났다는 정보만 있지 접선 장소가 불투명했
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접선장소를알아낸후에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돈에 메말라 있던 암살자 길드와 돈으로 포섭하려던
파론. 그 둘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비밀유지는 확실하겠지?"
"물론입니다. 그는 제 얼굴도 모릅니다. "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 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처럼 파
론이 예뻐 보인적은 없었다.
'후후후. 포섭했으니 처음이자 마지막 임무를 맡걱야겠군 "
"예?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하심은
파론의 말에 엘베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엘베로가살인 명
령을 내릴 때에만 짓는 표정이었다.
크크크. 의뢰는 필슨백작. 이번 의뢰가끝나면 암살자 길드를
버린다 "
"헙!"
파론은 암살자 길드에 투자한 비용이 아까웠다. 예상보다 적게
들었지만, 개개인에게는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그런 큰돈을 투자한 암살자 길드를 걱우 한 번 쓰고 버리다니,
너무 큰 낭비였다.
명심해라. 내 정체는 물론이고 네 정체도 철저히 숨걱야한다. "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
파론이 물러나자 엘베로가 몸을 일으컸다. 그의 얼굴에서 약간
의 초조한 기색이 엿보였다.
자신의 숙적이자 정적인 필슨 백작. 그를 제대로 처리한다면 국
왕 아래 최고의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시간이 더 흐른다면 국왕까
지도
제령신공과 혈도 그림을 살피던 라한. 거의 하루가 지나서야 대
충 감을잡았다. 또, 아련한느낌으로 기를운용하는 심법까지 만
들어냈다. 무려 열아홉 가지의 방법이었다.
그동안 평온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두 번의 심장 통증으로 거
의 실신 직전까지 간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좌절하는 대신 의
욕을 불태웠다. 통증에 비례해서 심법을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일깨운 것이다.
"일단 만들어내기는 했는데 어쩌지?"
라한은 자신이 만들어낸 방법 중에 제대로 된 방법이 하나 정도
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꼭 있어야만 했다. 그가 만든 열아홉
개의 심법. 그건 심장에서 시작해서 심장으로 돌아을 수 있는 길
전부를총망라한 심법이었다. 이곳에 제대로 된 심법이 없다면 남
은 건 심장의 고체화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으로 이어질 것
이고.
"잘못된 심법이라면 엄청난통증을 받게 되겠지. 후우. 집을 떠
나야하나?"
라한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였다. 남의 이익을 철
저히 파괴하더라도 자신을 위한 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행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기주의에서 가족은 예외였다. 과거 수많은생을
반복했지만, 오랫동안사랑해준가족은유일하지 않은가. 그런 가
족에게 자신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내가 고통스러워 할 때, 누군가가 내 몸에 손을 대서는 위험해
진다. "
라한이 집을 떠나는 두 번째 이유였다. 단순히 고통을 보여주기
싫은 이유라면 가족을 떠나지 않아도 방법은 있었다 어차피 가족
이라면 서로를 아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자신이 심법을운용하고 있을때, 누군가가 건드려서는
위험했다. 그건 자신뿐 아니라 만지는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이곳을 떠나서 혼자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뭐, 어차피 인챈트 재료 때문에 한 번은 떠났어야 하니까. "
인챈트 재료는 라한이 집을 떠나는 마지막 이유였다. 제스란이
했던 말에 의하면 파라미스 평원을 넘어야 재료를 구할 수 있었다.
남부 지방인 이곳과는 거의 극과 극인 거리. 아버지의 권력으로 어
찌할 개재가 아니었다.
"오래 끌 필요 없겠지. "
생각을 마친 라한이 침대 밑을 더듬었다. 오래전에 형에게 받은
돈을찾기 위해서였다. 라한은 처음 레테아의 방문 이후로 계속해
서 돈을 모아왔다. 언젠가는 집을 떠나겠다는 생각을 한 탓이다.
하지만, 그때가 이렇게 빨리 찾아을 줄은 그 자신도 몰랐다
"막상 준비하려니까 별로 챙길 것도 없네. "
라한이 가진 돈은 상당히 큰 액수였다. 하지만 다른 여행 물품을
담을 가방이 없었다. 모든 여행의 기초가 되는 가방이 없으니 다른
물품은 포기해야만 했다.
"왠지 아쉽네. "
부모님께 남길 편지를 쓴 라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행동은
빠르면 빠를수록좋은 법. 시간도 딱 밤이었으니, 더 망설일 필요
가 없었다.
"어머니, 아버지. 건강하세요."
말을마친 라한이 저택을빠져나갔다. 이곳의 주인인 만큼 경비
원들이 서 있는곳도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교대시간을비롯한사
각지대까지 경비원들은나름대로 철통경비라고생각하겠지만, 라
한이 보기에는 허점투성이였다.
카를로는본래 용병이었다. 검보다창과활에능했던카를로. 그
는 자신의 실력을 바탕삼아 베센 왕국에서 쾌 유명해졌다. 베어울
프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막았고, 심지어는 직접 몬스터
소굴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
카를로는 자신의 실력과 경력이면, 최고의 용병이라는 혈전사의
칭호를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과 경력을 믿
은 탓이다.
하지만 혈전사와 직접 만난 후로는 그런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
다. 자신의 실력을 훨씬 상회하는 실력의 혈전사. 감히 대적할 엄
두조차 나지 않는 위압감에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 길로
카를로는 용병 생활을 그만뒀다. 그동안 모아뒀던 돈으로 장사나
하자는 생각이 었다.
하지만, 3H 년을 칼밥 먹고 지냈던 그에게 평범한 생활은 너무 힘
들었다. 답답함과지루함이 그의 한계를계속시험해댄 것이다. 결
국, 버티지 못하고장사마저 접어버린 카를로였지만, 다시 용병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혈전사가 있는 이상 최고가 될 수 없
는 분야 아니던가. 그때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가 암살자였다.
뷰나로즈 암살자 길드.
카를로는 스스로 최고라 부르짖으며 나타난 길드장에게 묘한 매
력을느꼈다. 자신이 젊었을 때, 가졌던 패기를 그에게서 느낀 탓
이다. 카를로는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암살자가 되겠노라 허락해
버렸다 길드의 제 3 단 단장 자리를 준다는 말도 그런 결정에 한몫
했다.
'쳇, 내가 멍청했지. '
카를로는 뷰나로즈 암살자 길드가 거대한 집단인 줄 알았다. 아
니 최소, 한 나라 안에서 손에 꼽히는 위치 정도는 될 거라 생각했
다. 헌데, 실상은너무초라했다. 수만많았지 오합지졸이 거의 대
부분인 암살자들. 자신처럼 용병 생활을 하다 암살자가 된 어설픈
자들. 규모에 비해 실속이 없는 길드였다.
하지만 이미 발을 담근 상태였다. 자신이 이곳을 그만둔다면 비
밀 유지라는 명목하게 자기를 죽일 게 분명했다. 이젠 발을 빼지도
못할 처지가 된 것이다.
스스슥!
'생각보다 많다. '
전방을 주시하던 카를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길드에서 내려온 이번 임무는 필슨 백작을죽이는 일. 헌데, 고
작 백작가에 불과하면서도 경비병의 수가 너무 많았다. 흡사 후작
가라 하더라도 이렇게 많지는 않을 듯했다. 그제야 길드장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비밀유지보다는 임무완성에 치중하라는 명령. 이
런 경비 속에서는 비밀 유지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게 길드장의 판
단이었다.
'필슨 백작이 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경비를
카를로는 베센 왕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쭉 자라왔다. 용병 생
활도 베센 왕국에서 할 정도였으니 타국 방문은 거의 처음인 셈이
다. 이 때문에 필슨 백작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아니, 정
보 자체가 거의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길드 내에서도 정보를 감추
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이번 일에 발탁되었
겠지만
'뭔가 이상해. 이번 임무에 투입된 다른 대원들 중에서도 루이
나 왕국 출신은 아무도 없다. '
어떤 임무를 맡든지 정보에 능한 사람이 한 명 정도는 필요했다.
헌데, 이번 임무에는그런 기본이 철저히 무시되었다. 아주세세한
명령과 행동 수칙까지 길드 내에서 모두 정해버린 것이다. 실제로
변수가 많은 암살행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은 계획이었다.
부웅!
'시작인가?'
멀리서 들리는 부엉이 소리에 카를로가 검을 움켜쥐었다. 그가
맡은 임무는 필슨 백작의 암살. 다른 대원들이 경비병들의 시선을
잡아둘 때 처리해야했다. 이 정도 경비라면 기회는 단 한 번뿐일
터. 자신의 실패는 곧 대원 서른아홉 명 모두의 주검으로 남을 게
분명했다.
'1 분에 끝내야 한다. 더 지체했다가는 나와 내 대원들 모두 죽는
다. '
마음을 다잡은 카를로가 팔다리에 힘을 가했다. 움직이기 전에
몸을 조금씩 풀어두는 행동이었다
땡! 땡! 땡! 땡!
"잡아라!"
"적이다! "
몇몇 경비원의 외침과 타종소리가 저택 구석구석 퍼졌다. 경비
원들의 수가 많아서인지 외치는 소리도 하늘을 울릴 정도였다.
'지금이다. '
경비원의 움직임을 확인한 카를로가 몸을 움직였다. 아주 조금
씩이지만 목표를 향해 정확히 다가갔다. 아주 은밀하게
"북쪽이다! "
"북쪽이다 저택 문을 봉쇄해라. "
카를로가 계속 움직일 때도 주변 경비원들의 외침은 끊이질 않았
다. 도대체 몇 명이 잠복하고 있었는지 짐작조차 안 갈 정도였다.
경비병의 외침이 늘어갈수록 카를로의 불안도 커져갔다. 이 일
이 생각보다 큰일임을 직감한 것이다.
'일반백작가에 이런 경비가가능할리 없다. 이건 뭔가있다 길
드장이 우릴 속였어. '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지금은 뽀족한 수가 없었다. 어차피 적진
깊숙이 들어온 상황이 아니던가. 목표를 빨리 죽이고 그 혼란을 틈
타 빠져나가는 게 최선이었다.
필슨백작은요즘 얼굴이 펴질 날이 없었다. 아들인 라한의 갑작
스러운 가출로 심기가 어지러운 탓이다. 거기다 부인인 일레나가
매일 눈물로 지새우는 것도 고문이었다. 자신과 일레나 모두 웃으
려면 라한을 빨리 찾는 게 급선무였다.
똑 똑
"무슨 일인가?"
"외부에 침입자가 있는 듯합니다. "
집사의 말에 필슨 백작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띠었다. 안 그래도
라한 때문에 고민인데 침입자까지 나타나다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수는 얼마나 되는가?"
"확실한 수는 모르겠지만 서른 명 안팔인 듯합니다. 지금 추격
중이니 조만간에 정체를 밝힐 수 있을 겁니다. "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아직 저택 안에서 이렇다 할 일이 없으
니 밖에서 발견한 것일 터. 요즘 매일 슬픔에 젖어 지내는 일레나
를 걱정시키지 않아도 되리라. 거기다사로잡아서 정보를 얻을수
만 있다면 배후 인물에 대해서도 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
고 그 배후인물이 엘베로라면 그의 세력을 단 한 번에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총 투입 인원은 사십 명, 헌데도 집사는 삼십 명밖에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의 경비에 허점이 있다는 증거였다.
'엘베로. 당신 짓이기를 빌겠소. '
"몇 명 놓쳐도상관없다. 우두머리만생포해라. 죽이지 않고 반
드시 생포해야한다. "
"예, 백작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
집사가 나가자 필슨 백작도 몸을 일으켰다. 창을 통해서 눈으로
확인해보려는 의도였다. 물론, 진짜 보일 리는 없겠지만.
"흠, 엘베로가 이렇게 성급한 인물이었나? 현자라는 칭호가 아
깝군. "
"필슨 백작님 . "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필슨 백작이 몸을 빠르게 돌렸다. 지금
방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뿐. 자신의 목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누구냐! 아무도
"입을 열지 마십시오. 필슨 백작님. "
필슨 백작이 사람을 부르려하자 나타난 자가 검을 들이밀었다.
사람 부르면 재미없을 거라는 일종의 위협이었다.
"용건이 뭔가? 날 죽이러 온 건가?"
"죽이러 온 건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용건이 하나 추가되었
군요. "
나타난 자는뷰나로즈 암살자 길드의 카를로였다. 정원에서 벽
을 타고 올라온 그는 집사가 문을 두드렸을 때, 방에 들어왔다. 백
작의 시선이 문을 향해 있을 때를 이용한 것이다.
"후후후. 죽인다고 말해놓고 용건이라 재미있군. 일단 말
해보게. "
필슨 백작을 대면한 카를로는 마치 거인을 대하는 느낌을 받았
다. 죽음 앞에서도초연한모습, 죽이러 온자신에게 막대하지 않
는 부드러움, 거기다 웃을 수 있는 여유까지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전 이번 의뢰를 누가 했는지 궁금합니다. "
"훗, 죽이러 온 사람이 오히려 내게 그걸 물으면 어쩌는가? 입장
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카를로는 이번 의뢰가 의아하기 그지없었다. 겨우 백작에게 딸
린 그 많은 경비병은 뭐란 말인가. 거기다 백작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의 뛰어난 인물 됨됨이. 이런 모습은 일국의 왕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 었다.
'모든 귀족이 이런 건가? 크크 3. 나 같은 평민과는 차원이 다르
군. 젠장. '
"그렇군요. 그럼 이만. "
푹- !
"큭! "
카를로의 검이 필슨 백작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완벽히 중심을
뚫지는 못했지만 죽음에 이르기에는 충분한 상처였다.
"죄송합니다. 다음 생에서는 암살자 없는 곳에서 태어나시기
흐즈 11
"크륵, 컥. 자, 자네는 다음 생에 크륵, 암살자로 태,
태어나지 말게. "
필슨 백작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아직 숨은 쉬고 있지만 오래
가지 못할게 분명했다. 아마오늘밤을넘기기 힘들거였다. 필슨
백작이 쓰러지자 카를로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남은 일은 탈출 밖
에 남지 않았다 진짜 위험한 일은 지금부터 였다
'찝찝하군. '
카를로가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아직은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아야 했기에 무척이나 조심스러됐다. 하지만, 필슨 백작의 죽음
이 알려지는 그 순간부터 자신도 전력질주를 해야 했다.
새로운 심법
시아나 지방
루이나 왕국 북부 지역중 치안이 엄격한 몇안되는 지방중 한
곳이다 북부 지방에서 이곳이 뚫리면 곧바로 수도까지 길이 열리
기 때문이다. 이곳은 지리적 여건 상 치안이 엄격할수밖에 없다
이곳의 엄격한 치안은 새로 부임한 영주에 의해 더욱 견고해졌
다 필슨 백작가의 장남인 레테아 필슨만작 아니 지금은 자작
이 된 그였다 레테아은 이곳의 영주로 임명받은 첫날 시아나에 있는
모든 범죄 세력을 소탕하겠다고 공고했다 그의 말처럼 그날부터
수많은 사람이 잡혀 들어갔고 그 대부분은 교수형에 처하거나 쫓겨
나야만 했다 몸을 수기는 데 탁월하다는 정보 길드나 암살나 길드
도 이 손길을 피 할수 없었다
하지만 레테아 필슨 자작이 숙청에만 열을 올린 건 아니었다
상인 길드와 용병 길드를 적극 장려해서 몬스터가 없고 상업이 부
흥한도시를 만든 것이다 이에 편승해서 매달한 번씩 선행을 많
이 행한 사람에게는 큰 상을 주기도 했다.
처음 숙청에 열을 올릴 때는 두려워만 했던 사람들도 레테아의
뜻을 이해했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가장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악에는 엄격하고 선에는 관대한 레테아의 성격이 이런 결과를 만들
어 낸 것이다.
"여기가 형이 있는 곳인가?"
라한이 시아나 지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필리에를 떠난 지 딱
십 일 째 되는 날이었다.
처음 집을 나온 라한은 여행 물품부터 챙겼다. 중간 크기 가방
두개를사서 허리의 앞뒤에 매고 그 안에 물건을 담은 것이다. 불
을 붙일 수 있는 성냥과 한 달을 먹을 수 있는 비상식량, 모포와 로
브가 그 물건이었다. 아직도 여행에 필요한 물품은 더 많겠지만,
당장 생각나는 게 없어서 이 정도밖에 사지 못했다.
"여기는 여관이 비어 있겠지?"
라한은 여기까지 오면서 한 곳의 마을을 더 들렀다. 하지만 심법
수련은다음으로 미룰수밖에 없었다. 여관에 방이 없어서 홀에서
밤을 보냈기 때문이다. 남의 손이 닿아서는 안 되는 심법 수련을
그런 곳에서 할 수는 없었다.
"이젠 심장이 굳어가고 있다는 게 뚜렷하게 느껴진다. 서두르지
않으면 심장 마비로 죽을지도 모르겠군. "
라한의 얼굴이 조금 초조하게 변했다. 이곳까지 오는 십 일 동안
일어난 발작의 횟수만 사십여 회. 회가 더할수록 발작의 간격이 점
점 좁아졌으니 서두르지 않으면 위험했다.
처음에는 죽음에 대해서만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발작 자체가
두려웠다. 발작이 일어날때 동반되는통증을버티는게 너무힘들
었기 때문이다. 통증에 시달릴 때면,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낫겠다
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멈추시오! 신분증을 제시하시오!"
"여기요. "
입구 경비병의 말에 라한이 용병패를 내밀었다. 이필리에를 떠
나기 전에 용병 길드에서 거금을들여 사둔용병패였다 그때만큼
은 여러 영웅들의 모험기를 읽어둔 게 다행스러웠다.
시아나 시에 들어온 라한이 여관부터 찾아나섰다. 어떻게든몸
부터 추슬러야 미래를 기약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라한에게 가장
급선무가 제령기를 움직이는 일이었다.
-바람의 쉼터,
여관의 간판을 본 라한이 슬쩍 미소 지었다. 로이나가 부리던 실
프가떠올랐다. 그에 따라로이나의 얼굴도함께
"좋군. "
딸랑- !
"어서 옵셔! "
라한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알림 종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소
리로 보면 꽤나 이름 있는 장인이 만든 종인 듯했다
"방 있는가?"
"혼자십 니까?"
끄덕- !
여관 주인의 물음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브를 푹 눌러쓴
탓에 무척이나 음침해 보였다. 라한은 상대가 자신을 업신여기는
걸 막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몸을 많이 가렸다. 자신에 대해 판단할
근거를 최대한줄이면, 시비 거는사람이 적을 거라는생각에서였
다. 그리고 그 생각은 딱 들어맞았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따라오십시오. 2 층에 전망 좋은 방이 있습니다. "
"구석방으로 주게. "
"아,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라한의 낮은 목소리에 여관 주인이 사람 좋은 표정을 지었다. 여
관업을 오래 했다는 게 한눈에 파악될 정도로 숙련된 표정관리였다.
'상업이 발달한 곳이군. '
라한이 방문한 바람의 슁터에는 손님이 무척 많았다. 그리고 그
손님들 옆에 쌓여 있는 짐과 짐을 둘러싸고 있는 무기 찬 사내들의
모습 한 눈에 상인과 그들이 고용한 용병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수의 상인들이 모여 있다면, 이곳이 장사를 위한 목적지
이거나 그곳으로 가는 길목일 터. 그게 무엇이 췄든지 이곳에 상업
이 발달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곳입니다 "
찰칵!
"고맙네. "
여관 주인의 열쇠를 받아든 라한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다른 객실과 동떨어진 곳에 위치한 방이
었다.
"식사는 어쩔까요?"
"나중에 내려가서 먹겠네. "
담담하게 대답한 라한이 객실문을 닫아버렸다. 몸 상태가 하루
가 다르게 악화되는 지금. 여관 주인과 노닥거리는 건 시간 낭비였
다. 조금이라도 서두르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아니
던가.
라한이 책을 펴 놓은 채 자리에 앉았다. 책에는 그 동안 알아냈
던 열아홉개의 심법이 깨알같이 쓰여 있었다. 인챈트를위해 공부
했던 미술을 이 책 한 권에 총동원한 것이다.
물론, 책에 쓰여 있는 내용을 외울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인 만큼좀 더 정확히 하자는생각
에서였다. 하지만, 심법 기록을무령계 언어로 하는 건 잊지 않았
다. 혹, 남에게 이 책이 들어가더라도 내용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한 번에 성공하면 좋으련만. "
잠시 중얼거리던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신이 생각해놓
은 심법을 운용하기위한 준비 동작이었다
라한이 시전하는 첫 번째 심법은 심장에서 심장으로 돌아오는
최단거리였다. 거치는 경로 역시 사혈과 대맥에 해당하는 중요한
혈도만 지나가는 심법. 어찌 보면 상당히 파격적인 방법이었다.
라한이 이 방법을 먼저 시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동선이 짧아서
였다. 짧은 만큼 시전시간도 줄어드는 탓에 결과를 빠르게 확인 할
수 있는 심법이었다. 서둘러야하는 라한에게는 가장 먼저 고려해
야 될 심법인 셈이다.
낮은 음성을 흘린 라한이 제령기를 서서히 움직여갔다. 기의 정
체화가 오래 지속된 탓에 제령기의 움직임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
다. 그렇다고포기할수는 없었다. 목숨과직결된 일이기에.
처음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던 제령기가 서서히 이동해갔다. 심
장 위치에서 복부로 그리고 가슴으로 하나의 혈도를 지날 때
마다 몸이 저릿저릿 했지만, 라한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손을
놓았다가 다시 심장으로 돌아가 버리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컥!"
제령기가 백회혈에 이르자 몸 전신에 전율이 일었다. 좀 전의 약
간 저릿하던 것과는 달리 엄청난 통증까지 동반했다.
'으, 으 .잘못됐어. 이, 이건 아니야.'
라한은 자신의 심법이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제령기가 지나온
혈도 모두에서 터질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상반신 거의 모든 부분
에서 전해오는 열기에 의식이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의식을 놓지 않았다. 이대로 의식을
놓았다가는 상체부터 얼굴까지 모든 부분이 타버릴 것 같은 느낌.
죽지 않으려는 집념으로 의식의 끈을 걱우 잡고 있었다.
제령기는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는 회귀성이 무척 강했다.
이 때문에 몇몇 개의 혈도 정도만 거쳐 왔다면 그 길을 따라 심장으
로돌아가려는행동을보이게 된다. 하지만, 라한은너무많은혈
도를 지나쳐왔다. 이미 머리 부분인 백회혈까지 제령기를 끌어당
긴 상태. 이곳에 손을 놓았다가는 길을 따라 가기보다 일직선으로
심장을 관통할 지도 몰랐다.
'헉, 제, 제발.'
치칙!
" 으 윽 "
라한이 제령기를 서서히 되돌렸다. 원래 왔던 길을 하나씩 되짚
어가는 모습이었다. 거쳐 왔던 혈도에 제령기가 닿을 때마다 닥쳐
오는 엄청난통증. 그 고통을참기위해 라한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신음성이 들렸다. 악다문 입술에선 피가흘러내렸고, 이미 붉게 변
해버린 이마에서는 땀이 증발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한이 제령기를 되돌리는 데는 쾌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백회혈
까지 정방향으로 돌릴 때보다 더 긴 시간이었다.
"헉, 헉, 헉!"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인지 제령기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처음
출발할 때의 심장 위치였다. 하지만, 심장주변에 가만히 앉아 있
지는 않았다. 한 차례 움직여서인지 가는 진동이 심장을 계속 압박
해댔다.
라한은 일이 급해졌음을 느꼈다. 이 압박이 계속된다면 심장에
큰 부상을 입힐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심장의 부상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 게 분명했다. 결국, 심장에 큰무리가가기 전에 심법을찾
아내야 하는 대위기였다.
"빌어먹을. "
라한이 욕설을 내뱉으면서 객실문을 나섰다. 여전히 심장에서
아련한 느낌이 전해졌다. 라한은 자꾸만 불길한 생각에 휩싸였다
여관 홀에 내려온 라한이 주인장 011 게 다가갔다. 좀 전에 입었던
로브를 벗어 던진 간편한 복장이었다.
"헉! "
"주인장. "
라한의 얼굴을 본 여관 주인이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라한의 얼
굴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라한의 몸은 머리끝부터 배 부분까지 검게 타 있었다. 여기저기
일그러진 모습과 흘러내리는 진물들. 누가 보더라도 끔찍한 모습
임에 분명했다.
"마, 마, 말씀하십시오. "
"왜 그러는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젠가?"
담담하게 묻던 라한이 흘의 한 곳으로 몸을 돌렸다. 홀을 조금
더 넓게 보이려는 의도로 놓아둔 거울 쪽이었다
"컥! 이, 이게이거 1
자신의 얼굴을 슬쩍 살피던 라한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모습이 자신마저도 혐오감을 가질 정도의 흥측한 모습으
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이렇게 변했을 거라고는 짐작
도 못했었다.
"저, 나으리. 원하는게 무엇인지요?.
라한과 같은 얼굴은 상대가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 위협을 주기
중분했다. 끔찍하다는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으로 벼하느
인간의 자연스러운 십리 때문이다.
여관 주인 역시 라한의 얼굴에 겁을 집어먹었다 이 때문에 말
투도 좀 전보다 더 공손해졌고, 호칭 역시 손님에서 나으리로 바뀌
었다.
"열흘 치 음식을 내 방으로 보내주게.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음식
이면 되니 맛에 신경 쓸 필요는 없네. 그리고 앞으로 열흘 동안 그
누구도 출입시켜선 아니 되네. 알겠는가?.
쨍그랑!
말을 마친 라한이 돈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열흘이 아닌 그 이상
의 숙박과 식사로도 충분한 금액이었다. 라한이 몹시 혼란스럽지
않았다면, 이렇게 돈을 과하게 쓰는 일은 없었으리라.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나으리
공손하게 대답하고는 있지만, 여관 주인의 얼굴은 그리 좋지 못
했다. 저런 끔찍한 면상의 손님을 열흘씩이나 여관에 두는 일 주
인의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손님은 손님 그것도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끔찍한 인상
의 손님을 박대할용기가 없었다. 돈이 없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서둘러주게. "
"예, 나으리. "
라한이 몸을 돌리자 그제야 여관 주인의 표정도 정상으로 돌아
왔다. 그는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이 무난하다 못해 평범하
다는 걸 진심으로 신께 감사드렸다
본래 라한에게는 충분한 식량이 남아 있었다. 처음 한 달 치 음
식을 샀고, 이제 십 일이 흘렀으니 이십 일 정도의 음식이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한은 여관 주인에게 음식을 주문해야 한다고 생각했
다. 그렇게 해야 자신이 나가지 않아도 의심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으차! "
여관 주인이 음식을 두고 나가자 라한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
했다. 책장으로문을막고 그 앞을 침대로 막았다. 혹시나자신이
신음성을 흘리더라도 출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유언이라도 써 놓을까?"
라한은 진심으로 유언에 대해 고민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자신의 죽음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상황이 절망적이니 죽음
에 대한 생각부터 먼저 떠올랐다.
"부질없는 짓이지, "
잠시 중얼거린 라한이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심장에서는 아련
한 통증이 전해졌다.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희박한 가능성이 더 사
라지는 결과를 낳을 터였다. 이럴 때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시작하
는 게 최선이었다. 또, 그렇게 해야 지금 가진 불안감을 조금이라
도 희석시킬 수 있을 듯했다.
한 번 움직였던 제령기라서인지 처음 시작이 무척 순조로웠다.
당장의 기분으로는 이번에 꼭 성공할 것만 같았다
'이제 백회혈이다. 이번에 실패하면
항상 백회혈이 문제였다. 심장에서 시작하는 기운의 반환점이나
다름없는 백회혈. 이곳만 무사히 지난다면 나머지는 그리 힘들지
않을 듯 보였다.
'으 큭! '
이번에는 엄청난 냉기가상체를 휘감았다. 역시나 백회혈에 진
입하는 순간부터 벌어진 일이었다. 살이 얼어붙는 고통에 라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콕, 콕!'
힘겹게 고통을 버틴 라한이 제령기를 서서히 되돌리기 시작챘
다. 한차례 경험이 있어서인지 좀 전보다 약간은 수월한모습이
었다 하지만, 심장에 도달한 이후의 제령기가 문제였다. 아까의
들끓는 기가 아닌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 라한은 심장이 얼어붙은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바, 바로 해야 돼. '
생각과 동시에 라한이 기를 움직여갔다. 벌써 세 번째 방법이
었다.
한 번 실패할 때마다 의식은 조금씩 약해져갔고, 몸의 힘도 조금
씩 빠졌다. 과도한 심력 소모로 기력을 소진한 탓이다.
라한은 열아홉 번의 심법 전부를 시전할 자신이 없었다. 그 전에
의식을 잃거나통증으로 미쳐버릴 것만같았다. 더 심하면 스스로
혀를 물어 자결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거기다가 심법은 뒤로 갈수록 길고 복잡해지지 않는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엘베로는 요즘 웃음을 달고 살았다. 숙적이었던 필슨 백작이 죽
었으니 상대가 없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한편으로는 이제 시작이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필슨 백작에게 포섭되었던 귀족들과 군소 상
인들을 포섭할 순서가 남은 것이다. 물론, 끝까지 반항한다면 처리
해야겠지만,
"귀족들은 문제가 아닌데 하찮은 상인들이 문제란 말이야. "
귀족들 대부분은 태어나면서부터 권력을목표로 삼게 된다. 출
생 자체가 귀족이라는 권력에 의해 가능했던 일이니, 그 힘을 놓치
기 싫은 탓이다.
하지만, 상인들은달랐다. 무슨 연유로 필슨백작에게 협조했는
지는모르지만, 그들은권력 자체에 무관심한자들이었다. 그들을
포섭하기 위해선 권력이 아닌 다른방법을찾아내야 했다. 그렇다
고 돈으로 포섭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었다. 돈이라면 엘베로보
다 더 많은 이들이 그들이 아니던가.
"후우, 대체 어떤 방법으로 포섭했을까? 분명 이유가 있었을
텐데. "
오래전에 엘베로는 필슨 백작의 상인 포섭에 대해 회의를 한 적
이 있었다. 필슨 백작에게 반기를들고 엘베로에게 협력하기로한
수도권 귀족들과의 회의였다.
당시 필슨 백작은 친 평민적인 정책과 상업 우대 정책을 표방했
다. 실제로도 왕궁 내에서 그에 대한 많은 건의를 한 것도 사실이
다. 결국, 필슨백작의 정책과상인들의 이권이 맞아떨어져서 서로
간의 뜻이 모인 것이다.
"그럴 리 없어. 그따위 녀석이 뭐가좋다고. "
하지만, 엘베로는 필슨 백작이 상인들을 포섭할 수 있었던 이유
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뚜렷한 근거에 의해서가 아닌 단순
히 자존심 문제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엘베로는 자신이 못한 일을 필슨 백작이 했다는 그 자체가 싫었
다. 이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필슨 백작의 공로를 깎고 싶었다
비록 이미 죽어 고인이 된 사람이었지만, 증오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똑! 똑!
"엘베로님. 저 파론입니다. 들어가도되겠습니까?"
"들어와라. "
파론의 등장에 엘베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엘베로는 파론에게 라한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조사해서 빠른 시일 안에 처리하기 위해서였
다. 지금 파론의 방문이 그 일과무관하지 않으리라는 건 쉽게 짐
작할수 있었다.
"엘베로님. 저
"말해라. "
"라한의 행적이 묘연합니다. "
"뭐 라? "
짧게 내뱉은 엘베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게 라한에 대
해서만큼은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과거 백치의 풀 셀베카를 이용한 암수도 실패, 그에 대한 미행도
실패. 이번엔 그의 행적마저 놓치다니 신이 그를돕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죄송합니다, 엘베로님. "
"좀 더 자세히 말해라. "
엘베로의 얼굴은 폭발 직전으로 보일만큼 붉게 달아올라 있었
다. 라한에게서 원인 모를 불안감을 느낀 탓이다.
"뷰나로즈 암살자 길드가 일을 치르기 열흘 전에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소문에 의하면 가출이랍니다. "
"이, 이 그놈은 우습게 볼 놈이 아니다. 어떻게든 찾아내라.
우리 정보력을 총동원해서라도 찾아내란 말이다 "
날카롭게 내뱉은 엘베로가 눈을 번뜩였다. 눈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라한은 이미 열 번은 죽은 목숨이리라
"알겠습니다. "
"찾는즉시 처리해라. 생포 같은 건 필요 없다. 그 자리에서 없
애버려라. "
"예, 엘베로님. "
파론은 아직도 엘베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뛰어난 기사도 아니
고 마법사도 아닌 라한. 그저 평범한사람일뿐인 그에게 엘베로가
왜 그렇게 신경 쓰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거기다 라한에 대해 얘
기가 나오면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난관을 그의 지혜 하나로 헤쳐오지 않았던가.
헌데, 라한에 대해서는 그 냉철한 지혜를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으아아아! "
엘베로는 파론이 나가자 한동안 발광을 해댔다. 서재의 책들과
각종 화분을 마구 던지며 분을 풀었다. 한참을 발광하던 엘베로가
벽을 주먹으로 마구 두드렸다. 그렇게 집어 던지고도 분이 덜 풀린
모양이다.
라한의 의식은 이미 반쯤잠겨 있었다. 또, 얼굴은 마구녹았다
얼기를 반복해서 사람으로 보기도 힘들
정도의 모습이었다. 눈,
코, 입 모두 제자리에 있다뿐이지 뼈를 덮고 있는 피부가 성하지
않은 상태였다.
무려 9 일. 그동안라한은수차례나기력이 다해 쓰러졌다. 하지
만, 심법을 운용하던 도중에 의식을 잃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가는 혈맥에 있던 제령기가 터져버릴 건 당연한
일. 라한의 지독한 의지가 그런 상황만큼은 피해간 것이다.
'후후후후, 죽는 일만 남았나?'
라한에게 남은 심법은 이제 두 개였다. 단순하고 쉬운 것부터 차
례대로 했으니 복잡하고 어려운 것만 남은 셈이다.
라한은 자신에게 별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확률적으로 90 퍼
센트에 가까운 심법을 시전해본 셈이었다. 나머지 10 퍼센트에 무
언가를맡기기에는확률이 너무 낮았다. 거기다몸상태도문제였
다. 숨만붙어 있었지 정신적으로는 이미 피폐해 있었다.
삶에 대한 애착과 집념 때문에 살아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그나
마도 놓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후후. '
너무 힘들었다. 이젠 사는 일보다 죽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했
다. 여기서 그만둬버리면 모든 게 편안해질 것만같았다. 이런 생
각들이 의식을 완벽히 지배하는 순간. 라한의 목숨도 끝날 것이다
"이제 두 번만 더 하면 편히 죽을 수 있겠구나. "
라한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남은 심법을 운용
하기 위해서였다.
쿵- !
라한의 이번 심법 운용은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심장을 나
와 거료혈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막혀버린 것이다 분명 이론상으
로 완벽히 뚫려 있는 혈도가 분명한데도 제령기는 도통 전진을 못
했다.
거료혈은 라한의 심장 바로 아래에 있는 혈도였다. 지금까지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몸 전체를 돌았던 심법이다. 그렇게 많은
시도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헌데, 이곳거료혈만은심장에서 가는길이 막혀 있었다 라한에
게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난관으로 작용한 셈이다.
쿵- !
제령기가 또 한 차례 거료혈을 때렸다. 라한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신에게 남은심법은 이제 두가지. 그중한가지를
시작하자마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쾅 쾅-!
두드리는 강도가 점점 강해졌다. 약간 뒤로 밀었다가 부딪히기
를수십 차례. 라한은복부에서 전해오는고통에 의식이 가물가물
해질 지경이었다.
'제발, 좀. 제발
라한은 수없이 부딪히기를 반복하면서 빌고 또 빌었다. 남은 방
법이 하나 더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 정신으로는 더 펼칠 여력조차
없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번 심법으로 어떻게든
결말을 봐야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쾅- !
쿠쿠쿠쿵!
복부에서 엄청난 통증이 전해오떤서 머리가 순간 아찔해졌다.
하지만, 라한의 기분은하늘을날듯이 기뻤다. 어찌췄든 거료혈을
뚫은 것이다.
'휴, 휴. 후우. '
복부에 통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또 다시 제령기를 돌리기 시
작했다. 귀가 멍멍하고 의식이 가물가물했지만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관 주인인 라프타는 기분이 찜찜했다. 벌써 13 일 전에 들어간
손님에게서 도통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손님이 기약했던 시간은 열흘. 나와도 벌써 3 일 전에 나와야 정
상이었다. 헌데도여관주인은쉽사리 문을두드리지 못했다. 다시
는 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얼굴이 이유였다. 그날 손님의 얼굴을
본 뒤 이틀이나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던가. 그 얼굴을 다시 볼 엄
두가 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
결국 라프라가 모진 마음을 먹었다. 손님이 넘치다 못해 객실까
지 부족했다. 오래전에 들어간 손님을 내보내야할 입장이 된 것이
다. 비록 꿈에 나타날까 두려운 상판이기는 하지만, 장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쾅쾅
"나으리! 나으리 계십니까?"
쾅쾅!
"나으리! "
계속해서 불러댔지만, 객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
았다. 라프타는 한편으로 다행스러우면서도 괜히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얼굴을 보지 않는 건 좋지만, 혹시 자살이라도 했다
면 생돈투자해서 장례를치러야하는거였다.
쾅 쾅
"나으리! 대답 없으시면 제가 문 열겠습니다. "
찰칵!
말을 마친 라프타가 객실문을 열었다. 하지만, 뒤에 무언가로 막
아 놨는지 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우씨, 빌어먹을. '
쿵! 쿵!
끼익!
몇 차례 몸으로부딪히자문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문에서
나는 소리가 라프타의 기분을 더욱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얼굴만큼만 문을 민 라프타가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일단
안이나 살펴보자는 의도였다.
"저, 저 손님! "
라프타의 눈에 쓰러져 있는사람이 보였다. 대충보기에도 침대
에서 자다 떨어진 모양새는 아니었다. 침대가 문을 단단히 막고 있
었으니 그럼 결과는 자살뿐이었다.
파삭!
"이런, 젠장. "
주인이 문을 거칠게 밀어붙였다. 이미 죽었다면 시신을 빨리 수
습해 다른 손님들에게 들키지 말아야 했다. 이런 일은 손님을 줄이
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또, 살아 있다면 빨리 치료해서 목숨을 건져야했다. 자신의 여관
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건 죽어도 싫었다. 물론, 후자라면
치료비를 두둑하게 얻어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손님! 손님!"
"이보세요, 손님! "
"으 으
라프타가 몸을 흔들자 라한이 신음을 흘렸다. 어떻게 보면 자다
일어난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죽기 직전의 모습 같기도 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하하하. 살아 있군. 하하하. "
깨어난 라한이 대소를 터트렸다 그는 꿈에서 자신의 소멸을 수
십 차례나 경험했었다.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었던가. 지금그에
게는 이 세상의 따뜻한 햇볕이 반갑게만 느껴졌다.
"저, 손님. 그게 무슨 얘기신지?"
"아, 아닐세. 하하하. 배가 고픈데 식사 준비 좀 해주겠는가?"
"아, 예."
여관 주인이 나가자 라한이 벽에 기대앉았다. 아직도 살아 있는
게 실감나지 않는지 눈만 멀뚱멀뚱 뜬 채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라한의 열여덟 번째 심법 수련은 엄청난 난관의 연속이었다.
혈도 하나를 지날 때마다 아려오는 통증과 서서히 멀어지는 의
식. 라한은도박하는심정으로제령기의 속도를높였다. 혈관이 전
부 터져나가도 상관없다는 듯 엄청난 속도였다.
보통 이런 방법은 주화입마의 지름길이기에 금기시하는 일이었
다. 제스란이 처음 심법을 알려줄 때도 기의 속도에 대해 반복해서
당부할 정도였다.
하지만, 라한에게는더 이상의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끝까지 하
지 못하면 죽는 건 마찬가지 아니던가. 그나마 의식이 완전히 잠기
기 전에 심법을 끝내려면 이 방법이 유일했다.
"위험했지. "
라한이 제령기의 속도를 올리자 지나간 자리가 붉게 타올랐다.
온몸을 전부 태워버릴 듯 뜨겁게 타오르는 혈도. 그런데도 라한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제령기가 백회혈에 이르렀을 때, 큰 통증이 전해왔다. 하지만,
큰 무리 없이 통과할수 있었다. 제령기가 가진 속도 때문인지 경
로가 제대로 된 것인지는 지금도 확실치 않았다. 확실한 건 백회혈
을 무사히 통과한 제령기가 심장으로 빠르게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속도가 주는 통증으로 의식을 잃기는 했지만 살아났으니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때부터 라한은 꼬박 삼 일을 기절해 있었다. 그 전에 쌓였던
피로와 혈관의 통증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여관을 나온 라한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여관 주
인의 얼굴이 생각난탓이다. 얼굴이 바뀌었다며 놀라던 얼굴. 그리
고 바람의 쉼터라는 이름의 여관. 라한에게는 쾌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듯했다.
라한은 예전의 얼굴을 되찾았다. 어떤 면에선 조금 더 나아 보일
정도였다. 평생 끔찍한 얼굴로 지낼 뻔 했던 라한에게는 천만다행
한 일이었다.
"흠, 거참 이상하군. 결과로보면 사부가말한환골탈태하고 비
슷한데 기는 거의 늘지 않았으니. 이거야 원. "
라한의 피부는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 좀 더 깨끗하고 뽀얗게
변한 것이다. 제스란은 이런 현상을 환골탈태라 불렀다.
이 경지를 넘어서면 무공이 진일보한 것이라는 말도 함께
헌데 라한의 제령기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예전보다 조금 나아
지기는 했지만, 거의 구분도 안 될 정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환
골탈태로 보기는 힘들었다.
.내 심장 위치와 그곳에 자리 잡은 제령기가 이런 결과를 낳았겠
지. 괜히 섭섭하네. "
말을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어찌됐든
살아나지 않았는가, 죽지 않고 살아서 걸을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
로도 행복감을 느꼈다
두두두두
" 이럇! "
"물러나라! 영주님. 행차시다. "
멀리서 들리는소리에 라한이 한 걸음물러났다. 이곳의 영주라
면 형인 레테아 일터. 로브를 눌러써서 신분을 감추는 일을 잊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라한의 생각처럼 레테아 자작 일행은 평소의 모습과 많이 달랐
다. 시정을 순찰하는 중이라면 천천히 움직이며 영지민들의 인사
를받아야정상이었다. 헌데, 레테아남작을비롯한 일행은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영주님, 행차시다. 물러나라!"
선두에 선 기사의 외침에 사람들이 일제히 뒤로물러났다. 엄청
난 속도로 질주해오는 수십 필의 말과 수행인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레테아 자작은 아침에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접했다. 아버지인 필
슨 백작이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처음에는 긴가
민가했지만, 이내 그 소식이 사실임을 알수 있었다. 필슨 백작가
에서 정식으로 보내온 소식을 받은 것이다.
이에 레테아 자작은 측근의 기사들만 대동한 채 수도로 달렸다.
지금의 그에게는 빨리 돌아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봐야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형 얼굴이 좀 조급해 보이네. 진짜 무슨 일이 벌어졌나?"
먼발치에서 형을 살피던 라한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웬만한 일
에서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형이었다. 그가 저런 표정을 보인다
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얘기였다.
"뭐, 알아서 하겠지. "
레테아의 모습이 멀리 사라지자 라한도 발길을 돌렸다.
그의 목표는 대륙의 북쪽 끝인 파마리스 평원. 대충 몸을 추슬렀
으니 인챈트 재료를 구할 차례였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동안은
혈도와심법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할생각이었다 여러 가지 심법을
대입해보면서 자신의 혈도가 실제 알고 있는 혈도와 다르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연구는자신의 몸에 대한 연구나다름
없었다.
]
도주
얼음 골렘 슈라
이그니스
라한이 무려 일주일의 노력 끝에 소환 인채트 스크롤을 만들어
냈다 처음 예상했던 시간보다 이틀이 더 걸린 셈이다 생각보다
너무 난해한 공식과 도형이라서 어쩔수 없었다
대단하군 아무리 빨라도 보름 이상은 걸릴거라고 생각했은데
우리 주인을 어떻게 보고 그 따위 망발을 하는 거야 쉬엄쉬엄
해서 일주일이나 걸렸지 쉬지 않고 게속 했으면 삼일이면 끝냈을
거라고 주인아 맞지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백한 부정의 의미
였다
지금 라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눈은 움푹 들어가 있고 피부
는 몹시 거칠었다 또 수마가 몰려오는지 눈도 반쯤 감긴 상태였다
누가 보더라도 쉬엄쉬엄했다고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쯧쯧. 산송장이군. 인챈트하는 걸 끔찍히도 지겨워하면서, 이
상하게 일단 시작하기만하면 끝장을 보는군. "
"내 성격이라고 해두자고. "
소환 인챈트를 모두 끝냈을 때 라한이 투바와 프라하, 테세르를
불러 모았었다. 투바는 뱀파이어 로드와의 중재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기에 부를 수밖에 없었다. 프라하는 마계의 다크 나이트가
정말 강한지 확인해보고 싶다며 꼭 부르라고 했었다. 테세르는 뱀
파이어 로드가 인간 마법에 능하다고 해서 보려 했다.
"라한. 찢어!"
"잠시만, 슈라!"
라한의 부름에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들렸다. 진동이 사라졌을
때, 슈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본 투바와프라하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슈라를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음, 이건 너무 하는군. 주인. 아무리 그래도 한달에 한번은
불러줘야 하는 거 아닌가? 대체 얼마만이지?
"미안. 후후, 그럴 일이 있었어. "
-주인이라서 화도 못 내겠군.
슈라는 나타나자마자 불평부터 토했다. 그동안 단 한번도 부르
지 않았던 게 속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라한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종의 비밀 병
기로 그를 남걱뒀기 때문이다. 헌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8 서
클 주문은 모르지만 제령기가 8 서클 인챈트가 가능할 정도로 강해
졌기 때문이다. 또 곧 나타날 이그니스에게 8 서클 마법을 배운다는
것도 이런 결정에 한몫했다. 7 서클과 8 서클의 차이가 그만큼 크기
때문에 슈라를 비밀병기로 둘 필요가 없었음이다.
"라한, 저게 뭐지?"
"라, 라한. 저 저
프라하와 투바가 동시에 의문을 표해왔다. 프라하는 그냥 골렘
이려니 하며 담담한 반응이었다. 헌데 투바의 반응은 예사롭지 않
았다. 슈라의 힘이 상당히 강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야, 투바. 뭘 놀라고 그래? 보면 몰라? 골렘이잖아. "
"내가 알고 있는골렘은 저따위로 크지 않아. 그리고 저 기운도
골렘치고는 너무 강하잖아. "
투바는 마법진에 대해 공부하면서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 그 중
에 골렘에 대한 것도 있었다. 자신이 아는 골렘은 3 미터 정도 키에
소드 유저 상급 정도의 힘이었다. 헌데, 눈앞에 골렘은 7 미터에 육
박하는 키에 힘도 거의 소드익스퍼트 중급에 육박했다. 자신이 알
고 있는 것과 너무 달랐기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저게 무슨 골렘이야. 괴물이구만. "
"웃긴 놈. "
짧게 대꾸한 라한이 슈라와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 왜 그를 불렀
고,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말해준 것이다.
라한의 말을 다 들은 슈라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빛을 띠었다. 최
상급 마족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아는 탓이다.
-주인. 주인이 전보다 강해진 건 알겠는데, 좀 무모하지 않을까?
"그냥 믿어봐 그리고 앞으로 입 열지 말고 구경만 해. 실험 정
신이 무척 강한놈이라서 널 해부하려고들지도모르거든. 저기 있
는 저 녀석도 걱정되기는 하지만, 저놈은 어떻게 통제가 되겠지만
앞으로 나을 녀석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
라한이 투바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지.
대답을 마친 슈라가 라한의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위치에서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라한. 이제 해봐. "
"알았어. 소환 이그니스! "
시동어를 크게 외친 라한이 스크롤을 찢었다. 이에 스크롤에서
검은 연기가흘러나오며 공터를 가득 메웠다. 한치 앞도 살펴 볼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이 라한 일행을 덮쳤다.
-뭔 놈의 마족들은 나을 때마다 시커먼 걸 뿌리고 나온데
"훗. "
테세르의 말에 프라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두 번째 소환이
지만 지금까지는 항상 검은빛을 흘리며 소환되었다. 왜 마족들의
어둠의 종족이라고 부르는지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우우우우우우웅: 쩌저저적!
공기의 진동이 공터에 울려 퍼졌다. 그 뒤를 이어 공간이 갈라지
는 소리가 귀를 때리며 들려왔다. 투바가 소환될 때와는 또 다른
모습에 일행 모두가 이채를 발했다. 심지어 투바조차도 신기함에
눈을 번득였다. 그 자신도 같은 마족이 소환되는 모습은 처음 보는
탓이다.
부우우우응!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날아올랐다. 스크롤을 찢은 이후
처음 벌어진 물리력의 변화였다.
"쿨럭, 쿨럭! "
프라하가 기침을 하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라한의 앞에서 소환
되는 모습을 봤던 게 화근이었다. 그 때문에 라한이 뒤집어써야 할
먼지를 프라하가 전부 뒤집어쓰고 말았다. 또 가장가까이 있었기
에 먼지로 보기 힘든 굵은 돌멩이들의 습격도 받아야 했다. 상처를
입지는 않겠지만 낭패한 모습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연기가 서서히 걷히자 이 미터에 육박하는 꽤 큰 체구의 미남자가
모습을 보였다. 라한이 소환한 뱀파이어 로드 이그니스인 듯했다
쿠쿵!
"음 "
이그니스는갑작스러운소환에 어안이 벙벙했다. 소환될 때, 불
완전 주문이 아닌 완전 주문임을 깨달은 탓이다.
대체 누가 있어 완전 주문을 사용할 수 있는지. 그것도 최상급
마족인 자신을 완전 주문으로 소환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
었다. 또 이런 상황은 창조된 이후로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당신이 이그니스인가?"
라한의 목소리가 이그니스의 상념을 깨웠다. 인간의 건방진 말
이 이그니스의 사색을 방해한셈이었다. 이에 이그니스가눈을부
라리며 고개를 서서히 돌렸다.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로 라한을 노
려봤다.
"겁이 없는 놈이군. 네놈이 날 부른 놈이겠군. -
"그렇다고 볼 수 있지. "
라한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혀 겁먹지 않은 듯 긴장하
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라한은 몹시 놀라고 있었다. 상대의 기세가 너무
강했다. 이에 심장이 마구 요동치고 다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헌데도 겉으로는 태연한 모습을 유지해야 했다. 마족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 자체가 단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다 또투바에게 통했던 당당함이 이그니스에게도충분히 먹힐 거
라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놈이군. 날 보고 놀라지 않는 놈이 다 있다니.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볼까?"
말을 마친 이그니스가 서서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대기
가 무섭게 요동치며 회오리바람이 생걱났다.
프라하는 인상을 찌푸리며 진땀을 흘려댔다. 맹세코 이 정도로
강한 기운은 난생 처음이었다. 판테아가 더 강하긴 하겠지만, 그는
기세를 흘리는 짓은 하지도 않았다. 눈빛만으로 프라하를 제압했
으니 말이다 테세르는언제 돌아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강
제 귀환인지 자의로 돌아간 건지는 그 스스로만 알 거였다.
"흠. "
라한이 신음성을 흘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얼굴만
큼은 굳건한 의지가 엿보였다. 기세 자체는 버티기 힘들지만 심리
싸움에서는 지기 싫었던 것이다.
"훗, 역시 이놈은보통놈이 아니라니까. 삼촌! 그만하세요. 애
들 다치겠어요. "
"응? 도련님!"
투바를 발견한 이그니스가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공터를 메웠
던 기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완벽히 사라졌다.
기세가 사라지자 프라하가 급히 허리를 폈다. 좀 전에 낭패한 모
습을 보였던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삼촌, 오랜만이에요. "
"대체 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여긴 물질계입니다.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도련님이 계실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년
식을 치르기 전에는 그 어떤 소환에도 응해선 안 되는 걸 아실 테
죠?또, 이건 마계의 율법이기도합니다. 지금은부르마섬에서 유
배중이라고 들었는데 이런 곳에 오시다니. 마왕 루시퍼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그니스의 잔소리에 투바가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표정으로 봐서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놈 보기보다 말이 많은 놈이네. 좀 근엄한 놈인 줄 알았는데. '
솔직히 라한은환상이 깨지는 느낌을 받았다. 등장부터 거창했
고 그 뒤의 기세도 어마어마했다. 그런 존재가 저런 잔소리를 하다
니.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에고, 삼촌 알았으니까 그만하세요. 그리고 지금은 소환돼서
나온 게 아니던가요? 소환된 분이 소환의 주체에게 기세를 쏘아 보
내다니. 그게 말이나 될법한 소립니까?"
"아, 그렇군요. 하하하. 처음 있는 일이라서."
이그니스가 소환된 횟수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소환되었을 때
소환을 한 당사자가 살아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 때문에 최소
소환을 시행한 사람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줘야 한다는 걸 깜빡 잊
고 말았다. 만약 좀 전에 흘렸던 기세로 라한이 죽기라도 한다면
이그니스는 처별을 면하기 힘들었다. 소원을듣지도 않고 자기 손
으로 죽였기 때문이다
드래곤에게 맹약이 있듯 마족에게는 율법이라는 게 존잰했다.
'투바의 말에 의하면 소환을 한 내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는 모
양이군. '
라한은좀전의 기세를떠올리며 식은땀을흘렸다. 제령기, 제란
기 모두 동원해서 막았는데도, 힘겹게 버티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
던가. 그 상창에서 기세를 더 강하게 흘렸다면 주화입마에 빠졌을
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대단한 놈이군. 내 기세를 정면으로 받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다니. 인간 중에도 이런 놈이 있었나?"
"그런가? 칭찬이라고 생각해주지. "
라한이 담담하게 대꾸하자 투바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는 이
번에 라한이 좀 더 낭패한 모습을 보이길 바랐다. 그게 지금 투바
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지금까지 하찮은 놈들과 맞먹으면서 얼마나 비참했던가. 어떻게
든 상황을 역전시키고 싶었는데 씨도 안 먹히다니, 자신이 라한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음을 인정해야 할 듯했다.
'인간 같지 않은 놈. '
"그럼 일단소원을들어볼까?말해봐라.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이행해주지. "
"어떤 게 율법에 어긋나는지 물어도 될까?"
라한의 대꾸에 이그니스가 미소 지었다. 당당한 라한의 태도가
마음에 든 것이다. 강자존의 세계인 마계. 그곳에서 저런 배짱은
충분히 호감 가는 모습이었다. 건방지지 않으면서도 당당한그런
태도 말이다.
"후후, 율법이라 일단 마계의 비밀을 발설하는 일은모두 율
법에 어긋난다. 또, 물질계가 멸망에 이르는 길도 율법에 어긋나
고. 혼란 정도는 상관없지만. 크크크. "
이그니스의 웃음에 프라하가 소름끼친다는 듯 몸을 떨어댔다.
아무리 마족이라지만, 어떻게 저런 음침한 웃음을 터트릴 수 있는
지. 투바에게서 받았던 마족의 느낌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내 소원이 율법에 어긋나지는 않겠군. "
"말하라. "
"8 서클마법 전부를가르흠, 정정하지. 네가알고 있는마법
을 모조리 가르쳐달라. 그게 내 소원이다. "
뒤늦게 테세르를 떠올린 라한이 소원을 수정했다. 8 서클 같은
고위 마법은 테세르에게 무리겠지만, 2 서클 정도의 하급 마법은 테
세르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소원이 자신에게 국한되어 있으니, 자
신이 배워서 테세르에게 전해줘야겠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만
족했다
"마계 율법을 잊었나? 마계 마법 역시 마계의 비밀 중 하나다.
발설하는 그 자체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지. "
"마계 마법을 가르쳐 달라는 게 아니다. 물질계의 마법을 가르
쳐달라는 거지. 모른다고 할 텐가?"
라한의 대답에 이그니스가투바를 바라봤다. 그는 라한에게 일
러바친 게 투바임을 확신했다.
이에 투바가하늘만바라보며 돌부리만툭툭차댔다. 변명이 먹
히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럴 땐 그냥 모른 척 대답을
회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흥. 도련님. 그런다고 그량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
"아, 그게 있잖아 "
이그니스는그냥 넘어갈생각이 없었다. 그러다자칫 마계 모든
존재를 소환하게 될까봐 걱정되었다.
자신이야 투바와 친하기도 했고, 또 경험 자체가 많았기에 적당
히 대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중상급 마족들은 투바가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하는 입장이다. 지위에서 너무 큰 차이가나기 때문
이다.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일이 커질 걸 염려했음이다.
"도련님! "
"그게 난 가르쳐주기 싫었는데아, 맞아. 저놈이 머리가 엄
청 좋거든. 유도심문을 하더라고. 난 거기에 홀딱 넘어갔지 뭐야.
이야, 난 인간 중에서 저렇게 똑똑한 놈 처음 봤다니까. "
"도련님! 마계의 일을 발설하는 건 율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모르는 건 아니시겠죠?"
이그니스의 말에 투바가 움찔거렸다. 그도 스스로가 잘못했음을
아는 탓이다. 다만, 모르고 넘어가기를 바랐을 뿐이다.
"삼촌. 우리 아버지한테 말 안 할 거지?"
"에휴, 저도 처음 소환돼서 율법을 어겼으니 이번 일은 없었던
일로하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벌어지면, 마왕루
시퍼님께 알릴 수밖에 없습니다. 명심하십시오. "
"알았어.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투바가 율법을 어겼다는 걸 마왕에
게 이를 생각은 없었다. 그가 투바를 거의 키우다시피 했기에 차마
내칠 수 없었음이다.
"인간. 좋다. 네 소원을 들어주지. 헌데 흑마법을 배우려는 건
가? 아니면 그냥 마법?"
"둘 다. "
흑마법과 마계 마법은 분명 달랐다. 흑마법이 마계와 가까운 느
낌을풍기기는하지만, 물질계에 존재하는마법임은분명했다. 이
에 반해, 마계의 마법은 마법이라기보다 술법에 가까운 마족 전용
힘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배우지 못하는 그런 능력인 셈
이다.
"후후, 이제 1 서클로 보이는데, 어느 세월에 다 배우려고 그러
나?"
"그건 내 사정이고 이그니스 당신은 내가 알려달라는 것만 가르
쳐주면 돼. "
"후후, 그러지. 소원을 접수한다. "
말을 마친 이그니스가 공터를 서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라한
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낮은 주문을 읖조렸다.
라한도순간움찔하기는했지만, 별반응은보이지 않았다. 이그
니스가 자신을 해코지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 내일부터 시작하지. 오늘은 쉬고 싶군, "
"그러지. "
이그니스는 차원을 이동하느라 너무 많은 힘을 소모했다. 이 때
문에 피로가 몰려와서 눈이 감기기 직전이었다.
라한도 상황은 비슷했다. 인챈트를 하느라 며칠 동안 잠도 자지
못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라는마족. 그것도로드라는존재를본
다는 기대감에 억지로 잠을 참았을 뿐이었다.
다음날, 라한은 해가중천에 뜬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자신이 늦잠 잤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어색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기 위해 시선을 침대로 옮겼다
"허, 참나. "
때는 이미 정오가 지난 시각이다. 헌데도 자신 옆에 건장한 체구
의 미남자가죽은듯자고 있었다. 자신도늦잠을잔거지만, 자신
보다 더 한 녀석이 보인 것이다.
'뭔 놈의 마족이 늦잠이나 퍼질러 자고 난리야. '
마족이라고 늦잠자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괜한
환상에 젖어 늦잠이라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듯했다.
눈곱을 대충 땐 라한이 옷을 빠르게 주워 입었다. 그리고 음흥한
표정을 지으며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가다듬었다
'네놈이 최상급 마족인지 최상급 마물인지는 몰라도 여긴 내 땅
이야. '
생각을 정리한 라한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어 머리 위로 주먹을
들어 올리더니 힘차게 내뻗었다.
빡- !
"으악! "
라한의 주먹은 이그니스의 머리를 정확하게 강타했다 박 깨지
는 소리까지 들리는 걸로 봐서는 제대로 맞은 모양이다.
"애 일어나! 이게 뭐하는짓이냐?피곤하다고재워줬더니 늦잠
을 자? 여기가 네놈 안방이야?"
"이, 이 네놈이 감히 내 머리를
휘이잉! 빡- !
"으악! "
이그니스가 변명을 늘어놓으려 하자 라한이 주먹을 다시 휘둘렀
다. 이에 좀 전보다 더 큰 소리가 오두막에 울려 퍼졌다.
라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그니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최
상급 마족인 자신이 인간 따위에게 맞다니. 난생 처음 겪는 어처구
니없는 상황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빨리 일어나지 못해! "
라한의 외침에 이그니스가정신을차렸다. 곧 이어 자신이 인간
에게 맞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현실이었음을 인지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그니스가 눈을 부라렸다.
"네 이놈! 네놈이 정녕 죽고싶은모양이구나. 이, 이
"까불지 말고 일어나. 또 맞을래? 어쭈, 눈 부라리네. 마계 율법
을 잊은 거야? 나 멀정하게 살아 있다고. 네놈이 날 죽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라한이 무모한 행동을 한 이유는 율법에 기인했다. 자신이 그 어
떤 해코지를 하더라도 상대는 자신을 해치지 못하는 걸 이용한 것
이다 물론 이그니스의 목숨을 위협하는 행동이라면 어떻게 변할
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극한 상황까지만 유도하지 않는다
면 자신의 안전은 확실하다고 믿었다. 그게 마계의 율법이고 관례
였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두고 보자 내 네놈의 소원만 들어주고 나면 널 단매에 죽이
겠다 "
"맘대로 해. "
라한이 이그니스를 자극한 가장 더 큰 이유는 빠른 교육을 받고
싶어서였다. 자극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그니스도 가르치는 열의를
들어낼 테고 그럼 자신은 더 빨리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다 배운후가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소
원을 성취하고 나서 돌려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소환하는
것보다 돌려보내는 게 휠씬 쉬우니까 말이다.
"나가지. "
"그러던가 잠꾸러기 마족씨. "
라한의 도발성 언어에 이그니스가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
만, 지금 화를 낼 수는 없었다. =1 도 율법의 범위 011 서 벗어날 수 없
는탓이다. 그럼 결론은단하나. 최대한빨리 가르쳐서 죽여 버리
는 길 뿐이었다.
그날부터 라한은 이그니스에게 엄청난속도로 마법을배우기 시
작했다. 흑마법에서부터 통상 그냥 마법이라 불리는 것까지 총망라
한 넓은 분야였다. 또 8 서클에 국한되지 않고 1 서클 마법부터 차례
로 배웠다. 거기다 클래스 마법과 비클래스 마법의 구분을 두지 않
고 모조리 배웠다. 테세르에게 마법을 가르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라한은 흑마법을 배우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나의 운용
방법에서 기존 마법과 너무나 다른 까닭이다. 대체 왜 흑마법이 물
질계에서 배척당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로 마나를 다루는
방법이 다르다 뿐이지 완벽한 하나의 학문이지 않은가.
세간에서 어떤 평가를 내리든지, 라한에게는 배워야 할 대상에
불과했다. 뭔가 배우고 익히는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라한이기에
더 그러했다
처음 나메라 왕국의 엘퐁소 지방을 출발했던 로이나 일행. 지금
은 도착지에 거의 근접한 베루니아 왕국 외곽에 와 있었다. 무려
넉 달의 긴 여정이었다.
하지만, 그 긴 시간동안에도 마을에는 단 한번도 들어가지 못했
다. 세상에 이런 곳으로도 사람이 다닐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험한
곳만 골라서 다녔다. 그 과정에서 식량이 떨어지자 나무 열매로 배
를 채웠고, 그도 없을 때는 몬스터 고기로 주린 배를 부르게 만들
었다. 물론 모두 로이나의 작품이었다.
"이제 마을이군요. "
"멀리 보이는 성벽이 베루이나 왕국의 국경 입니다. "
시스마란의 말에 제라드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제라드의 음성에는 약간의 환희와 아쉬움이 함께 담걱 있었다.
그도 험난한 고생을 거치며 많은 실력 향상을 거두었다. 이에 아쉬
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환희의 감정은 넉 달 만에 마을을
발견했다는 데에서 오는 기쁨의 표출이었다.
"잠시만요. "
"예? 말씀하십시오. "
로이나의 부름에 시스마란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로이나는 그에게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검술을 가르쳐줬
기에 수많은 몬스터의 공격을 무사히 넘겼다. 또 로이나에게 배운
검술 그 자체로도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 스스로도 느낄 정도로 엄
청난 성장을 이루었음을 깨달은 탓이다.
"스카라트 산맥까지 가실 건가요?"
"물론입니다. "
"그건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
로이나의 물음에 시스마란이 당연하다는 듯 긍정을 표했다. 하
지만 제라드는 좀 곤란하다는 듯 말을 돌렸다. 실력을 향상시키기
는 했지만 다시 몬스터의 공격을 받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제 아
무리 강해져도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 실력 향상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그럼 제라드님은 베루니아 왕국에 남으시겠군요. "
"예. 한동안은 이곳에 남아야할것 같습니다. 너무많은시간
을 허비했습니다. "
"알겠습니다. 그럼 시스마란님은 계속 가신다는 거죠?"
"예. 당연하죠. 라한 형님을 찾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을 겁
니다. "
시스마란도 몬스터가 무서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실력 향
상과는 별개로목숨이 아까운건 제라드와같았다. 하지만, 라한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은인이자 유일한 친인이었으니 말
이다.
피곤에 절어 잠 들 때도 밤마다 라한의 꿈을 꾸곤 했다. 그가 몬
스터에게 당하는 꿈을 그 꿈을 꾸고 나면 라한이 더욱 더 보
고싶었다. 겨우 몇 달동안함께 지냈을뿐인데, 왜 그렇게 그리운
지는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다만 라한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이
해할 수 없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그럼 일단 마을에들어가면 잠시 헤어지죠. 재정비는 해야 하
니까요. "
"그럼 어디서 만날까요?"
" '눈의 꽃' 이라는 여관이 있습니다. 들어가서 동쪽으로 계속 가
면 나을 거예요. 그곳에서 만나기로 하죠. "
"알겠습니다, 로이나님. "
로이나는 시스마란에게 에펠 일행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이
에 시스마란은 계속 대답을 회피했다. 그 모습만으로도 그들 사이
에 무슨 관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로이나는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물어댔다. 그리고 에펠 일행
이 라한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되었다. 쿨샤크가 어떤 짓
을 했는지도.
'베르네를 만나야겠어 . '
지금까지는 일행과 항상 함께 지냈기에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아
무리 드래곤이라도 들키지 않게 베르네를 만났다가 대화를 하고 다
시 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때문에 그를 만나려던 계획을 계
속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기회가 왔다. 성에 들어가면 시스마란과 잠시 헤어져
야 하는 것이다. 로이나는 그때 베르네를 만나서 에펠 일행에 대해
서 들은 말을 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처분도 논의하
고 말이다.
처음 라한은 이그니스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서로으르렁대
는 사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수업을 받을 때만큼은 공손한 제자의
모습을갖추었다. 헌데 언젠가부터 토를달기 시작했다. 아니 이그
니스가 가르치는 주문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이놈! 내가 그렇게 가르치던? 어제는 다 외웠다면서. "
"다 외웠어. 이번에 시전한 건 네가 가르친 주문을 조금 바꾼 거
라니까. "
"누가 바꾸라고 했는데? 누구 허락받고 바꾸는 건데? 주문 잘못
바꾸다가 마나 폭주하면 어쩌려고 그래? 응?"
"자신 있으니까 바꾼 거지, 자신도 없는데 내 마음대로 바꿔겠
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
아마 처음 배울 때 라한이 이런 일을 벌였다면 이그니스도 쌍수
를 들어 환영했을 것이다. 그때는 라한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었
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를 가르치면서 제자에게 가지는 스
승의 마음가짐을 조금은 가지게 된 탓이다. 또 라한이 상당히 뛰어
난 제자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번이 아니면 언제 이런 제자를
둘 수 있겠냐 싶었다.
"이놈아! 말 하면 좀 들어라. 아무리 막나가는 제자라도 스승이
하는 말을 그따위로 씹어대진 않는다. "
"뭐, 그건 나도 인정하지만 가능해 보이는 걸. "
"이놈이 그래도
"알았어. 알았다고. "
이그니스의 호통에 결국 라한이 패배를 선언했다. 그의 표정에
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느낀 탓이다.
라한은 요즘 자신이 아는 마법에 흑마법을 대입시키는 일에 열
을올렸다 흑마법끼리의 조합도 재미있먼지만, 무관한두마법을
합치는 게 더 재미있었다.
물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이그니스는불같이 화를 냈다. 자
칫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기에 제지를 한 것이다. 라한은 그때마
다 패배를 시인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대답했었
다. 그리고 며칠 가지 않아서 다시 이런 일을 벌였지만.
"쳇. 나쁜 놈 같으니라고. "
"미안하다니까. 뭐 그런 일로꽁하고그러냐. 대충넘어가자."
"우씨. 젠장. 오늘부터 5 서클 마법에 들어간다. 근데, 이번에
도 공격 마법과 방어 마법, 치료 마법은 주문만 외우고 넘어갈 생
각이냐?"
"말했잖아. 난 그런 마법 못 쓴다고. 그런 마법은 클래스 마법이
라서 불가능해. "
이그니스도 라한의 특이한 신체에 대해서 들었었다 그리고 한
동안 호기심을 가지고 몸을 살피기도 했었다. 헌데 그 시간이 오래
되자 깜빡할 때가 많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보조 마법을 깨우치고
사용했기에 반쪽짜리 마법사라는 걸 잊곤 했다
"이번에도 흑마법부터 할까?"
고개를 짧게 끄덕인 라한이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깃틸
펜을 꺼내서 메모할 준비를 끝냈다.
"먼저 공격 마법부터 부를테니 적어라. 먼저 다크 캐논이다. 주
문은 세상을 이루는 근원 중 가장 고귀한 어둠이시여. 그의 힘을
빌러 이 세상에 파괴를 만들려 합니다. 이에 이게 주문이다. 그
리고 주문을 외울 때, 떠올릴 연상은 이런 장면이고. 의지를 강
하게 주입하지 않으면 힘든 마법이다. "
라한은 이그니스가부르는 마법 주문을 깨알같이 적었다. 웬만
한 사람은 읽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크기였다. 라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라한은 그 동안 엘퐁소 지방에 몇 번 갔다 왔었다. 부족한 메모
지를 보충하고 식량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텔레포트 마
법은 비클래스마법이었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또 아공간창출
마법이 있으니 짐을 들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다만 줄어가는 돈이
라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을 뿐이다.
베루니아 왕국에 있던 로이나가 베르네의 위치를 수소문했다.
물론, 바람의 정령왕인 실피드를 이용해서였다. 그렇게 알아낸 결
과 베르네가 현재 대륙 동부의 루나사 왕국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
했다. 이에 로이나가 루나사 왕국으로 순간 이동했다
드래곤끼리는 특별히 기척을 감추지 않는 한 서로의 위치를 알
아볼 수 있다. 서로의 유희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기운을 흘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알아보지 못하는 드래곤끼리의
고유 기운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 거리에 있어야 가능하지 너무 멀어서
는 곤란했다. 원래 로이나가 있던 곳은 대륙 북서부에 위치한 베루
니아 왕국. 대륙 동부에 있는 베르네의 기운을 느끼는 건 불가능했
다.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령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음, 기운으로 봐서는 곧 이곳을 지나치겠군. "
작게 중얼거린 로이나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부서진 나
뭇가지를 모으고 마른 풀을 한 곳에 모아 캠프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약 십 분의 시간이 흐른 후, 로이나가 모아둔 마른 풀에
불을 붙였다. 그 불은 나뭇가지로 빠르게 번지더니 이내 활활 타오
르기 시작했다. 딱, 그 시기에 로이나의 오른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네가 에펠 일행을 데리고 오는 소리였다.
"아, 누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베르네. 너야말로 여긴 웬일이야?"
서로 알고 왔음이 분명함에도 짐짓 모른 척 인사를 했다 조금의
거짓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연기였다 드래곤이 유희를 통해 얼
마나 많은 연기력을 쌓는지 가늠케 했다.
"오랜만입니다. 로이나님. 그간 어디 갔었습니까?갑자기 사라
지셔서 걱정했습니다. "
"흥 그랬나?"
로이나의 목소리에 냉기가 풀풀 흘렀다. 에펠 일행이 어떤 놈들
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라한을 배신한 인간. 그 말 하나만으로도
살려둘 가치가 없었다.
-로이나님, 무슨 일 있습니까?
-저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았다.
베르네가 메시지 마법으로 은밀하게 물어왔다. 이에 로이나도
자연스럽게 답했다. 이 정도 마법은숨 쉬듯할수 있는 드래곤이
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좀 쉬었다가 가죠. "
"예, 베르네님. "
로이나가 만들어둔 모닥불에 앉은 베르네가 말했다. 이에 에펠
일행도 모두 찬성을 표하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동안 그들도 꽤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하
지만 시스마란이나 제라드와 비교하면 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들은날이 뭉팅해진 검으로몬스터를 베지 않았던가. 예기가 남아
있는 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편하게 지내온 셈이었다.
-저들이 어떤 놈들입니까?
-라한을 배신했던 놈이다.
-그래요?
-응. 실피드가 전해준 라한의 행동과 내가 만났던 녀석이 해준
말. 그리고 이런저런 정황을 려어보면 거의 확실해.
로이나의 말이 끝나자 베르네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라한을 배
신했던 놈들을 보호하고 있었다는 게 화가 난 모양이다. 그 모습에
로이나가 눈짓으로 제지하며 그를 다독였다.
-그만해라. 아무래도 라한은 모든 사실을 알았던 것 같아. 그래
서 그들을 골탕 먹이려고 계획을 짰었고.
-근데요?
-우리가 방해했잖아. 내가 아는 라한이라면 단순한 보복 정도로
끝낼 리가 없거든. 아마, 그의 계획에 이들이 쫓기는 것도들어 있
었던 것 같아. 근데, 우리가 이들이 편하게 도주하도록 도와줬으
니. 에휴.
-그, 그렇군요.
로이나는 라한의 성정을 잘 알았다. 그의 성격이라면 보복이 가
벼울 리 없다. 한 대 맞으면 열 대로 갚는 게 라한아니던가. 그런
성격을 감안하면 아마도 에펠 일행이 쫓기는 것도 예상 했을 것이
다. 쉴새 없이 도망다니며 스스로를비관하게 될 에펠 일행,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잡혀 죽거나 할 터 였다.
헌데, 그런 상황을로이나와베르네가방해해 버렸다. 의도했던
바는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그렇게 된셈이다. 그렇다고지금이
들을 죽이는 건 말이 안 되었다. 편하게 죽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게 라한의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지금이라도손을 떼서 고
생하게 만들어야 했다.
-손 뗄까요?
-그래야지
"잠시 얘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
"네, 베르네님. "
베르네가 로이나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일행에
게서 조금씩 멀리 떨어졌다. 그렇게 그들의 시야에서 완벽히 사라
졌을 때 로이나와 베르네가 먼 곳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한참 달리
다 마나파동이 미치지 않는 곳에 이르러서야 로이나가 중얼거렸다.
"매스 텔레포트!"
로이나가 시동어를 외치자 그들의 몸에 푸른빛이 일렁였다. 동
시에 공기 울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는 가 싶더니 이내 완벽히 사라
졌다.
로이나와 베르네가 사라진 후에도 에펠 일행은 하루 종일 기다
렸다. 설마 자신을 버리겠냐는 생각에서였다. 자신들이 누군가를
배신했듯, 남도 그럴 수 있음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린 후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터벅터벅 걷는 힘없는 발걸음과 어두운 얼굴. 일견하기에는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보였다. 엄청난 원군이 한 순간에 사라져서 허무했
던 탓이다.
로이나는 에펠 일행을 보자마자 기분이 팍 상했다. 보는 것만으
로도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자신
이 시스마란을 키운 정도와 비교하면 한참 부족하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자신이 검술을 가르치며 성장시켰던 것과는 달리, 베르네는 함
께 싸우는 정도에 그쳤다 그들끼리만 싸운 게 아닌 함께 말이다.
이 때문에 실전경험을 쌓긴 했지만 아주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체계적인 검술과 실전을 함께 쌓은 시스마란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
했다.
"로이나님 ! 여기
"로이나님이라고부르지 마. 어색하니까. 그리고호칭은음, 나
중에 정하자. "
"예. 누님. 여기는 어디죠?"
"베루니아 왕국이야. 만날 사람이 있거든. 앞으로 함께 행동할
일행이기도 하고. "
로이나와 베르네는 베루니아 왕국 국경 부근 마을에 와 있었다.
시스마란과 만나기로 한 여관에 미리 숙소를 잡은 것이다
"만날 사람이오?"
"응. 일단 너 모습 좀 바꿔야겠다. "
"어떻게 바꿀까요?"
"마법사로 해. 네가만날 녀석 말이야. 아무리 봐도 검술보다는
마법이 어울리는 놈이야. "
"오호, 누님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보통 녀석은 아닌가보네
요. 후후, 일단 모습부터 바꿀게요. 폴리모프!"
베르네의 키가 조금씩 작아졌다. 또 머리카락도 금색에서 백금
발로바픽었다. 그리고 얼굴가득한주름과구부정한허리. 영락없
는 노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딱 좋아. 로브 같은 걸 입는 게 낫겠다 "
"알았어요. 아공간 오픈! "
베르네가 자신의 여행 물품을 넣어 둔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머리 위 공간에 만들어진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어서 로브를 꺼냈
다. 검은빛과 푸른빛이 묘하게 조화된 고풍스런 로브였다
"스태프도 하나 꺼내! "
" 예. "
베르네가작아진 자신의 키만한스태프를 꺼냈다. 얼핏 검은색
으로 보이지만, 빛에 비추면 금빛도 언뜻 보이는 묘한 스태프였다.
걸어 다니는 보물 창고라 불리는 드래곤. 그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
났다
"아주 좋은데 . "
"고맙습니다, 누님. "
로이나의 칭찬에 베르네가 히죽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의 칭찬
이 기분 좋은 모양이다.
실제 베르네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마법사였다. 그것도 엄청
나게 긴 시간동안 마법을 익힌 노마법사 말이다.
똑 똑
"로이나님, 계십니까?"
"네, 들어오세요. "
딸각!
문이 열리고 시스마란이 들어왔다. 마을에 들어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옷을 새로 샀는지 깔끔해 보였고, 얼굴에 가득한
먼지도 사라져 있었다.
"오셨군요. 근데, 정비를 못한 것 같습니다. "
"너무 피곤해서 먼저 잤습니다. "
"이런. 제가 주무시는 걸 깨운 건 아닌가요?"
"아니요. 어차피 일어날 시간이 됐으니 괜찮아요. "
로이나는 베르네를 만나고 오느라 정비를 하지 못했다. 그 때문
에 옷에 묻은 먼지도 여전했고, 머리카락도 푸석푸석한 상태였다.
시스마란이 본 건 로이나의 그런 모습이었다.
"다행입니다. 근데, 옆에 계신분은
"아, 인사하세요. 이곳에 와서 만난분입니다. 오래전에 절 많이
도와주셨죠. "
"허허허, 반갑구먼. 베르네라고하네."
베르네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에 시스
마란이 급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전 시스마란이라고합니다. 보시다시피
지금은 용병입니다. "
"후후, 젊은놈들치고는 인사성이 밝구먼. 난마법사일세."
" 예. "
"누 로이나양과는 아주 오래전에 만났었지. "
누님이라 부르려던 베르네가 급히 말을 바꾸었다. 이에 로이나
가 잠깐 긴장하는 기색을 보였다가 곧 마음을 놓았다.
실제 베르네가 이런 말실수를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냥
로이나라고 부르기가 너무 미안해서, 잠깐 실수하는 모습을 보였
을 뿐이다. 자신이 로이나에게 말을 놓는 게 힘들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였다.
-흥.
-누님, 제 마음알죠?후후, 어쩔 수 없는상황이니 이해하시리
라 믿습니다.
베르네의 사과에 로이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삼 자신과 같
은 드래곤이 얼마나 영악한 존재인지 깨달았다. 하긴 수천 년의 기
억을 가진 드래곤이 멍청하다면, 그게 더 우스운 일이다.
"저, 로이나님.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내일 아침에 길을 떠나기로 하죠. 여기 베르네 할아버지도 저
희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
-베르네. 꼬투리를만들어서 저 녀석한테 마법을 가르쳐봐. 주
문 같은 실질적인 것보다, 그냥 마법의 기초를 닦는 정도면 돼.
-누님이 원하신다면야.
로이나의 말이 끝나자 베르네가 시스마란을 찬찬히 살폈다. 그
의 무엇이 로이나의 호기싱을 자극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얼
핏 볼 때는 시스마란의 체질을 알아보지 못했다. 가지고 있는 마나
도 형편없었고. 헌데, 자세히 살피자 뭔가 달랐다. 엄청난 마나 친
화력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대마법사의 기질이 있는 녀석이 분명
런 존재를 얼핏 보는 정도만으로 알아봤음이다.
저 베르네님 저희 여정은 험난할지도 모릅니다 혹시나 사고
라도 당하시면.
허허 뭐가 그리 걱정인가 어차피 살만큼 산 늙은이가 아닌가
삶에 별 미련이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네 그리고 걱정을
받을 만큼 약하지도 않고 말일게
아 예
시스마란의 걱정에 베르네가 이채을 발햇다 그의 말투에서 진
정을 느낀 탓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걱정할줄 아는 사람 그건
라한에게 해코지 할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되었다
괜찮은 녀석이군
그렇게 다음 여행의 일행이 정해다 제라드가 빠지고 베르네
가 그 자리에 들어갔다 인원은 적지만 사상 최강의 파티가 그들이
리라
슈라의 변신
마법을 배우던 라한이 짬을 내서 투바를 찾았다 할 일 없이 빈
둥거리던 투바에게 반가운 손님이었다
여 투바
어 바쁘신 몸께서 여긴 왠일이셔
라한의 부름에 투바가 비꼬듯 대꾸했다
요즘 투바는 지루해 미칠 지경이었다 프라하는 도끼술 익히느
라 정신없지라한도 마법 배우지 그나마 놀만한 상대인 테세르마
저 혼자 마법주문 외우느라 자신과 놀아줄 상대가 업ㄱ었다 이 때
문에 심사가 많이 꼬여 있었다
녀석 삐쳤냐
내가 인간인줄 알아 삐지긴 누가 삐져
보니까 화났구만 소심하기는
"안 삐쳤다니까! "
투바가 버럭 소리 지르며 고개를돌려 버렸다. 그러면서도 라한
의 눈치를 슬쩍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정말오랜만에 찾아온 대
화 상대가 그냥 가 버릴까 걱정된 탓이다
그래. 알았다. 안삐쳤어. 됐지?"
"응. 난 안 삐쳤다. "
대답을 하던 투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뒤늦게 어리광
비슷한 추태를 부렸음을 깨달은 것이다.
'젠장. '
"너 요즘 심심하지?"
"뭐가심심해. 나도나름대로바빠. 왜 이러셔."
"그래? 그럼 안 되겠네. "
말을 마친 라한이 몸을 돌려 돌아가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에
투바가 다급한 얼굴로 라한의 앞을 막았다. 그리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짐짓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흠, 흠. 내가바쁘긴 하지만친구가부탁하는거라면 없는시간
이라도 내야지. 난 친구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훌릉한 마족이잖아. "
"후후, 녀석 꽤나 심심했나보네. "
"무슨 소리야. 나도 바빴다니까. 없는 시간조개서 도와주려고
했더니. 쳇. 가라. 가!"
투바의 외침에 라한이 싱긋웃었다. 투바가귀엽게 느껴졌다. 나
이만많지 숫제 아이와다름없지 않은가 마족이 잔인하다더니 투
바는 해당사항이 아닌 듯했다.
"뭐, 그럼 다른 사람한테 부탁을 해야겠.
"아, 진짜. 아무래도안되겠다 믿을놈이 있어야지."
라한의 말을 잽싸게 끊은 투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 심
심했던 모양이다.
"왜? 바쁘다면서. "
"뭘 부탁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녀석들은 불안하잖아, 내가
해 줄게. 인심 쓰지. "
"그래. 너 말고는 믿을 만한 놈이 없지. "
"그럼. 당연하지. "
라한이 투바에게 져 주기로 했다. 별일 아닌 일에 자존심 세우는
투바가 귀엽기도 했고, 자신 역시 투바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기 때
문이다. 아니, 투바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시간 날 때마다 슈라를 풀어줄게. "
"슈라? 그 덩치 큰 얼음덩어리?"
응
"그놈은 왜?"
"몸이 얼음이다보니 오래 소환할 수가 없더라고. "
라한의 말처럼 슈라는 오랫 동안 물질계에 머물 수 없었다. 몸체
가 얼음이라서 이내 녹아 버리기 때문이다. 걱우 두 시간 내외? 그
정도가 지나면 강제 소환 당했다. 그나마도 별 움직임 없이 가만히
있을 때에나 그 시간을 머물 수 있을 뿐, 급격한 움직임을 보이고
나면 시간은 더욱 단축되었다.
"뭐, 그거야 몸체가 얼음이라서 그런 거 아닌가?"
"응. 그래서 얼음을 다른 재료로 바꾸고 싶어서, "
"얼음골렘을 얼음이 아닌 다른 재료로 바꾸겠다고? 어떤 재료
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재료는 상관없어. 네가 알아서 몸체를 바꿀 수 있도록 좀 해주
라. 만들 때부터 얼음으로 만들어지도록 되어 있어서 쉽지 않네.
마법진에 능한네가아니면도와줄사람이 없다. 내 인챈트보다네
마법진이 이런 쪽에서는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
라한이 투바를 슬쩍 띄워줬다. 이에 투바의 얼굴도 활짝 펴졌다.
자신을 높게 봐 주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칭찬을 해준
사람이 인챈트의 대가인 라한이라는 점. 이 하나만으로도 마법진
에 대해 인정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알았어. 그 정도야 뭐. 후후후. "
"그리고 여기 "
라한이 아공간을 열어서 마나석 두 개를 꺼내서 건넸다. 오래전
마나의 유적에서 구했던 마나석이었다.
"오호, 마나석 멋지군. 탐나는데. "
"하나는 네가 가지고, 나머지 하나는 슈라의 몸체를 재구성할
때 주입 좀 시켜. "
"날 준다고?"
"응. 도와주는 대가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투바 네 지식은 이만
한 가치가 있잖아. "
투바의 얼굴이 황홀하게 물들어갔다. 지식을 인정해주는 걸로도
부족해서 이런 대가를주다니. 이 정도 마나석이면 상당히 강력한
마법진을 구성할 수 있을 듯싶었다.
"뭐, 이런 것까지. 이런 대가를바라고도와주는게 아닌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나석은 이미 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나석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단순하기는. '
"나 그만 가볼게. 늦으면 이그니스가 날 삶아먹으려 들 거야. "
"그래. 야! 슈라 불러주고 가야지. "
"아! 맞다. 슈라! "
라한의 부름에 슈라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났다. 이에 투바가 호
기심 강한 얼굴로 그를 찬찬히 살폈다. 벌써 두 번째 보는 건데도
신기하기 그지 없었다. 저 정도 덩치와 힘이라니
-흠, 주인. 이번에는 빨리 불러주는군.
"하하. 뭐 그렇지. 근데 어쩌나? 난 어디 가봐야 하거든. "
-가다니?
"앞으로 널 저 녀석한테 맡길 생각이야. 거부하지 말고 받아
들여. "
슈라가고개를 천천히 돌려서 투바를바라봤다. 이어 얼굴이 팍
찡그려지며 고개를 홱 돌렸다. 투바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슈라는 마족을 막기 위해 생성된 골렘이다. 비록 마족과 싸운 적
은 없지만, 마족이라는 그 자체에 거부감을 가졌다. 골렘을 만들던
창조자가 마족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인. 마족에게 날 맡기는 이유가 뭐지?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그런 건 아니야. "
-그럼 이제 내가 필요 없어졌다고 생각한 건가? 하긴 주인은
내가 필요 없을 만큼 강해지기는 했지. 휴, 그렇군.
슈라의 어두운 얼굴에 라한이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가 널 저 녀석한테 준다고 했어? 잠
깐 맡기겠다는 거 지. "
-아, 그렇군. 후후, 난 또 주인이 날 버리는 줄 알았다.
"미치겠군. 내 옆에 있는놈들은다왜 이런지 에휴, 앞으로 저
녀석이 네 몸체를 바꾸는 연구를 할 거야. 옆에서 하라는 대로 해
라, 말이 안통할테니 눈치보고움직이고. 알았지?"
-알겠다, 주인.
슈라의 얼굴이 좀 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자아졌다. 라한이 좋
아서인지 투바가싫어서인지는 알길이 없었다. 하지만지금 라한
에게 속한 골렘이라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럼, 간다, 투바. 부탁해! "
"알았어. "
-나중에 보자, 주인.
라한이 날듯이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늦었다가는 이그니스의 엄
청난 잔소리가 시작될 터,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지난 다섯 달 동안 슈라의 몸체가 얼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뀌
었다. 하지만돌이나 쇠 같은 지정된 물체는 아니었다. 주변에 어
떤 재료가 많으냐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가변 재료였다.
또 그의 몸속에 마나석 하나를 더 집어넣어서 오래 머물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아무 일 하지 않고 서 있기만한다면 하루 종
일 머물 수도 있을 정도였다.
또 라한은 그 시간 동안 7 서클 마법까지의 주문을 모두 적었다.
외우지는 못하고 적어 놓는 데에만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물론 그 마법을 사용할 때 필요한 마음가짐이나 마법의 이해에
대해 배우기는 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주문을 적는 일에 불과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래 걸려도 너무 오래 걸린 편이었다.
"더럽게 많군 내가 알고 있는 마법이 겨우 그 정도였다니. "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 가장 큰 이유는 마법의 수 때문이다.
라한이 알고 있던 마법도 적지 않았지만 실제는 그보다 수십 배나
많았다. 너무 많은 수의 마법에 라한이 치를 떨 정도였다.
"어제 그레이트 그로우를 끝으로 7 서클 마법은 모두 끝났다. 오
늘부터 8 서클마법을가르칠 생각이다. 근데, 자신은 있는거냐? 8
서클 마법은 7 서클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따나가 들어가는데. "
"뭐 까짓것 해보자고. 어차피 메모만 할 건데. "
라한도 자신의 기운이 8 서클 마법을 감당할 수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7 서클 마법을 사용하고도 넉넉하게 남았기에 가능하지 않
을까 하고 생각했다.
"네 녀석의 마나는 너무 해괴망측해서 도무지 측량할 수가 없다.
그 정도가 7 서클까지 가능한지 8 서클까지 가능한지 말이다. "
"한번 해 봅시다 그려. "
"무모한 놈. "
이그니스도 라한이 도전할 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황당한 짓
을 수없이 많이 한 라한 아니던가.
라한은 마법을 배울 때 절대 무리하는 법이 없었다. 마법 조합을
할때도 성공을확신하기 전까지는 시도조차하지 않았다 이그니
스가 미친 짓이라고 말했던 수많은 조합도 라한은 성공할 거라고
완벽히 화신한 마법이었다. 남에게 무모하게 보일지 몰라도 라한
은 안전하다고 믿었기에 시행했음이다. 그러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안 되는 마법은 기록하는 정도로 만족했다. 대부분 마법사가 마법
주문에 목숨 거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럼 시작한다. 잘 적어라. "
"응. "
그렇게 8 서클 마법에 대한 공부가 시작되었다. 헌데 교육이 진
행되면 될수록 라한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스스로의 힘으로 8
서클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아직은 무리로군. 어쩌지. '
또 다른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제령기를 늘일 수 없을 듯했다.
헌데 깨달음이라는 건 얻고 싶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어떤 특정
한 계기가오기 전까지는 주문을 외우는 정도로 끝내야 할듯했다.
뮬라 상단의 본점 안.
쿨샤크가 이방인의 방문을 받았다. 몸 전체를 검은 옷으로 도배
한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였다. 하지만 검을 차고 있지는 않았다.
뮬라 상단의 후계자와의 대담이기에 무기를 빼놓고 들어온 탓이다.
"그래, 무슨 일로 왔소?"
".의뢰를 포기할 생각이오. "
쿨샤크의 물음에 사내가 낭패한 기색으로 어렵사리 대답했다
쿨샤크가 의뢰한 건 에펠 일행의 죽음이었다.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나메라 왕국 최대의 암살자 길드에 의뢰를 넣은 것이다. 그렇
게 결과만을 기다린 지 벌써 오 개월. 그는 암살자 길드에서 좋은
소식을 전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에펠 일행의 실력에 비
해 암살자 길드의 세력이 월등히 강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쿨샤크의 물음에도사내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자기 길드
의 치부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내가 망설이자 쿨샤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돈이 부족해서 그러시오? 그 정도 금액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오. "
" 그럼?"
"휴, 우리 능력 밖의 의뢰였소. "
사내의 대답에 쿨샤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멍청한 용병 세 명을
때려잡는 일이 어째서 능력 밖이라는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세 놈의 실력은 그리 강하지 않다고 알고 있는데?"
"그놈들은 그리 강하지 않았소. 문제는 그들에게 조력자가 있었
다는 것이오. "
"조력자?"
"그렇소. 처음엔두명이었는데, 얼마전에는한명이더군. 헌데
그자의 실력이 너무 강하오. "
사내의 말에 쿨샤크가 미간을 좁혔다. 조력자가 누구인지를 고
민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용병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놈 중에서 강한 놈이 있었나? 이상
하군.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런 건 없었는데. '
쿨샤크도 나름대로 조사를 한 후에 의뢰를 맡겼다. 정도를 알아
야 의뢰금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조사한바에 따르면, 에펠 일행은형편없는놈들이었다. 용
병이 된 것도상단호위를하기 직전이었고, 실력도 걱우 C 등급을
받을 정도였다 B 등급을 돈으로 받았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도대체 그 조력자라는 자가 얼마나 강하기에 포기한다는 말이
오. 고작두 명 아니오. 그것도한 명은중간에 빠졌으니 이제 한
명밖에 안 될 텐데 어째서?"
"혈전사에 들어도 부족하지 않은 실력이었소. 헌데 내가 아는
혈전사 중에는 그런 자가 없소. 아마 그 녀석들이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놈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소. "
그들은 아직 베르네가 떠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베르네가 떠
나기 직전에 암살행을 중지한 탓이다. 아마 지금 다시 암살행을 시
작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혈전사? 그런 놈들이 어떻게 혈전사를 안다는 말이오?"
"그건 우리도 모르오. 그들에 대해 나름대로 조사했지만 알려진
바가 전혀 없소. 한 가지 확실한 건. "
"확실한 건?"
"엄청난 실력자라는 거였소. 그리고 그 말은 의뢰를 맡을 수 없
다는 말도 되오. "
사내의 대답에 쿨샤크가침음성을흘렸다. 혈전사라니. 어느하
늘에서 갑자기 떨어졌는지는 모르나, 일이 모하게 틀어지고 있음
은 분명했다. 그들을 죽이지는 못해도 그들이 가지고 간 보물은 반
드시 찾아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좋소. 그들을죽이라는 의뢰는 철회하겠소. 대신 그가 가지고
있는 반지를 가져오라는 의뢰는 지속시켰으면 좋겠는데 가능하
겠소?"
"거절하겠소. 여기! "
말을 마친 사내가 주머니를 내밀었다. 의뢰를 맡으면서 선금으
로 받은 금액이었다.
사내는 이번 의뢰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의 휘하에 있던 암
살자 백여 명을 잃은 것이다. 전체 인원의 3 분의 1 에 해당하는 엄
청난 수였다.
"젠장. 사람 죽이려고 만든 길드가 고작 용병 세 놈을 처리하지
못하다니 "
"미안하게 됐소. "
"흥 그런 허접스런 곳에 맡긴 내가 잘못이지, "
쿨샤크의 말에 사내의 이마에 혈관이 붉어졌다. 화났다는 표시
였다. 헌데도 쿨샤크의 폭언은 멈출 줄 몰랐다.
"그래서 대륙 5 대 암살자에 의뢰를 넣었어야 하는데. 시간만 낭
비했군. "
"음. "
사내가 이를 악다물며 어렵게 분을 삼켰다. 의뢰에 실패했으니
뭐라할말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속으로는수치스러움과분노에
머리가 돌 것 같았다.
"흥. "
"그럼 이만. "
말을 마친 사내가 방을 나왔다. 들어을 때보다 더 처진 어깨가
애처로웠다.
쾅- !
"빌어먹을! "
사내가 나가자 쿨샤크이 책상을 내려쳤다. 에펠 일행이 도주한 지
벌써 오 개월. 지금 다른 곳에 의뢰한다면 거리 때문에라도 더 큰
돈을 지불해야 했다. 누가 뭐래도 상단을 이끌어 갈 후계자인 쿨샤
크에게 돈 낭비는 짜증나는 일이었다.
" 데메크 "
"예, 쿨샤크님. "
쿨샤크의 부름에 집무실 옆 쪽문에서 데메크가들어왔다. 그는
예전과 같은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 얼굴의 음침함은
과거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오 개월 동안 어느 정도의 성취가 있
었던 모양이다.
"어쩌지?"
"다른 곳에 의뢰를 넣으십시오. "
"어디가 좋을까? 벌써 멀리까지 도주해 버려서 휴. "
"다크라이더 길드라는곳이 있습니다. 대륙북부에서는아주유
명한 곳입니다. 최근 십 년 사이에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죠. "
다크라이더 길드는 엘베로에게 치를 떤 다크시안이 이끄는 곳이
었다. 과거 라한을 한 번 도와주고 잠적했던
다크라이더 길드는 케라스 왕국에 본점을 두었다 위치로는 대
륙 중북부인 셈이다 그곳은 라한이 파마리스 평원에 들어갔을 때,
정식으로 발족했다. 그리고 어려운 의뢰를 많이 받아들였고, 그 모
든 의뢰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다크시안의 치밀한 사전 조사가
그런 일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곳에서 할 수 있을까? 거리가 보통 먼 게 아닌데. "
"다크라이더 길드는 대륙 5 대 길드에 들 정도로 뛰어난곳입니
다. 최근 십 년 사이에 그 정도로성장한거죠. 아마, 시간이 좀더
지난다면, 대륙 최고의 암살자 길드가 될지도 모릅니다. "
다크라이더 길드는 그야말로 눈부신 성장을 거두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암살자 길드 서열 5 위에 당당히 랭크된 것이다. 일 년 전
까지만 해도 걱우 10 위권이었음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빠른 성장이
었다. 이 속도의 반만 유지해도 조만간 최고가 되는 건 불 보듯 뻔
해 보였다.
"알았어. 데메크가 의뢰를 넣어줘, 무엇보다 스케일러 링은 꼭
찾아야 돼. 알고 있겠지?"
"저, 그 전에 허락 받을 게 있습니다. "
"뭐지?"
"다크라이더 길드는 정보 수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입니다.
아마 의뢰를 넣으면 그를 죽이려는 이유를 하나씩 다 설명해야 할
겁니다. 물론 정보 제공을 하지 않아도 되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엄청난 금액을 지불해야 합니다. "
데메크의 말에 쿨샤크가 고민에 빠졌다. 정보 제공이라는 말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정보를 제공하다보면 라한을 배신했던 얘기까지 꺼내야 했다.
또 결혼을 약속했던 카류나를 버린 이야기까지 함께 말이다. 그렇
게 모두 까발리고 나면 자신의 명예가 형편없이떨어져 버린다 쿨
샤크가 고민하는 부분이 그 대목이었다.
그놈들. 입이 무거운 놈들인가?"
다크라이더 길드에서 어떤 정보가 흘러나왓다는 에기는 듣지
못햇습니다
알앗어 데메크가 알아서 설명해
알겟습니다 그럼이만
엘퐁소 지방에는 다크라이더 길드의 지부가 없엇다 이곳의 너
무작은 지방이기 때문이다 결국 의뢰를 넣으려면 큰도시까지 가
야 햇다 빠른 말로 달려도 5 일은 걸리는 거리였다
다시 댜륙으로
라한은 8 서클 마법을 기록하는 정도로 끝냈다 아주 조금이지
만 8 서클 마법을 시전할 만큼의 제령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끝났군
그렇군 9 서클은 모르지
아직 본적이 없다
그렇군
이근;스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9 서클에 대
한 애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8 서클의 인간 마법이 있다는 사
실도 투바에게 처음 들었다
하지만 분명히 잇다
있어
응 어딘가 있을 거다 십만 년도 더 오래 전이지만 9 서클 마법
사가 있었거든 "
"말도 안 돼. "
라한은 이그니스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9 서클이라니. 마나 고
리를 아무리 살펴봐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마나가 만들 수 있는 고리는 아무리 얇아도 손가락 마디만큼은
되어야 한다. 그 정도는 돼야 마나가 공명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헌데, 이 굵기로는심장주변에 아홉개의 띠를만들수 없었다. 제
아무리 촘촘하게 만들어도 자리가 안 나왔다.
"놀랄 것 없다. 인간이 아니니까. "
"그럼 그렇지. 누구야? 드래곤?"
"아니. 마족이다. 내 조상이었던분이지."
"너희 가문은 인간 마법을 엄청 좋아하는군. "
라한의 물음에 이그니스가 실소를 머금었다.
"훗, 그렇게 보긴 힘들어. 그분 이후로 인간 마법에 손댄 마족은
내가 유일하니까. "
"그런가?"
"나도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인간 마법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인간 마법을 7 서클까지 익힌 후에 8 서클 마법에 대해 고민
하기 시작했지. 그렇게 근 천 년이 지난 후에야 내가 가르쳐준 8 서
클 마법을 만들어냈던 거고. 9 서클 마법은 만 년 이상 걸렸을 거다.
어쩌면 9 서클 마법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물질계에
서 9 서클 마법을 연구하다가 실종됐거든. "
라한은 이그니스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인간이 할 일을 마
족이 한셈이기 때문이다. 자신 역시 8 서클마법을 연구해서 만들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냥 이그니스라는 존재를 통해서 배우려
고만 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어차피 7 서클까지의 마법은 인간이 만든 거
니가 "
"그것도 드래곤에게 받은 지식으로 만든 거겠지. "
"얘기가 그렇게 되나? 후후. "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이 시작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처음 마
법 지식을 가르쳐 준 존재는 드래곤이었고 그 마법을 더 확장시킨
존재는 마족이었다. 인간은 드래곤이 준 마법을 약간씩 응용하는
정도에서 만족했다. 노력할 줄 모르는 인간. 공짜 좋아하는 인간의
성격이 이런 곳에서 드러났다.
"쳇. 엄청 잘난 척 하는 인간이 이 정도라니. 같은 인간으로서
솔직히 부끄럽군. "
"그럼 앞으로 9 서클은 스스로 연구해서 만들어봐라. 지금부터
하면 되지. "
"그래서 더 부끄럽다. 마음속으로는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도 혼자 연구해서 만들기는 싫거든, 어떻게든 9 서클 마법을 구하고
싶으니. "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 자체만으로도 반쯤은 성공한 거다. 나머
진 네 선택에 달렸지. "
라한은자신이 없었다. 심법을새로만들고, 제령기로마법을사
용하는 법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더 이상은 자신 없었다. 솔직히
심법도 혈도라는 기존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게 아니었던가. 그
러고 보면 자신이 시작해서 완성시킨 분야는 단 하나도 없는 상황
이었다.
"이제 내 임무가 끝났으니 마계로 돌아가야겠군. "
"꼭 그래야하나?"
"그게 소환이다. 소환의 목적이 달성되면 돌아가야 하는 거지. "
이그니스의 말에 라한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근데 이상하군. 내가소환을 했으니 뭔가 대가를요구해야 하
는 거 아닌가? 난 소환을 그런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
"대가? 물론 있지. "
"응? "
"도련님을 부탁한다. "
이그니스의 진지한 말에 라한이 실소를 터트렸다. 어이가 없어
서라기보다 그의 말에서 걱정이라는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
족도 인간과 같은 감정이 있는 종족이다.
헌데 아직까지 마족에 대한 차별을 버리지 못한 듯했다. 피도 눈
물도 없는 매정한 종족이라는 차별 말이다.
'나부터 고쳐야겠군. '
둘의 첫 만남은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칠 개월 동안 지
내면서 정이 많이 들었다. 가족이라고 부르기는 힘들겠지만 동료
정도까지는 발전한 것이다.
"다시 부르면 어떻게 되는 거지?그때 일행이 되어달라는 소원
을 빈다면?"
"한번 소환했으니 더 이상은무리다 이미 너와나의 인연은 이
걸로끝났다는거지. 뭐, 정 보고싶으면마계로한번놀러 와라."
"마계라
이그니스는 그냥 해본 말이겠지만, 라한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는 마계를 그리 어둡고 칙칙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에 한 번
가봤던 곳이라서 더 그런지 몰랐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인연이 되면 또 보겠지. 후후. "
"그래. 인연이 되면
이그니스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투바와 프라하에게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떠나려는 것이다.
투바는 어차피 나중에 만날 테니 인사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또 프라하와는 그리 큰 정이 들지 않았기에 만날 필요를 느끼지 못
했다. 테세르 역시 하찮은 정령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기에 인
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그니스가 사라지자 라한이 씨익 웃었다. 어차피 정이라는 감
정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성격이었다. 떠난 건 떠난 거고 남은자
신은 스스로의 행보를 정해야 했다.
"테세르! 프라하! 투바! "
라한의 목소리가 오두막 주변에 울려 퍼졌다. 목소리에 제란기
를조금담아서인지 엄청나게 큰목소리였다. 이에 주변에서 어지
러운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라한의 외침을 듣고 달려오는 모양
이다.
"무슨 일이야?"
"왜 부른 거지?"
-주인! 왜 그래?
거의 동시에 도착한 투바와 프라하, 테세르가 의아한 듯 되물었
다. 라한은 실눈을 뜬 채로 일행을 찬찬히 살펴봤다
'프라하 녀석 많이 강해졌군. '
라한은 한 눈에 프라하가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그에게서 풍기
는 기세가 부드러워졌다는 게 느껴졌다. 저칠어만 보이던 기운이
부드러워졌다는 것. 그건 스스로의 기운을 통제할 줄 안다는 얘기
였다.
"후후, 이제 나가야지. 언제까지 이 동네에 처박혀 있을 거야?
안 그래?"
"오, 이제 나가는 거야?흐흐흐흐, 인간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
까? 궁금한데. "
투바의 대답이었다. 그는 인간 세상에 나온 적이 단 한번도 없었
다. 누군가에게 소환된 게 라한이 처음이었으니 당연했다.
"언제 출발할 거야 7"
"때는 내일. 목적지는 엘퐁소 지방. 목표는 쿨샤크! 방법은. 후
후. "
"크크크. 그 재수 없는 자식은 내가 죽이지. "
프라하가 음침하게 웃었다. 그는 쿨샤크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
졌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굴레를 벗은 존재들 때문이기는 했지만
처음 시작이 쿨샤크였으니 그런 마음을 먹을 만도 했다.
도 서 명 : 1 서클 대 마법사 5
지 은 이 : 양 강
출 판 사 : (주)로크미디어
출판년도 : 2005 년 4 월 16 일
봉 사 자 : 박종란
쿨샤크의 실종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말을 마친 실피드가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직접 돌면서 라한을 찾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실피드가 사라지자 로이나의 표정이 아련하게 변했다. 이제 곧 있으면 만나게 된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자신을 알아볼까? 갖가지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유괴범을 찾아라
쿨샤크의 방에 들어온 라한이 주변을 찬찬히 훑었다. 유괴를 했던 자가 남긴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한참 돌던 라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미치겠군. 이번엔 또 뭐야?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라한의 말에 투바가 의문을 표해왔다.
또 바람인데.
또?
응.
실피드는 모르고 있었지만, 라한은 실피드의 방문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문자가 테세르와 같은 정령이었고 그에게서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넘어갔었다. 살기를 비롯한 나쁜 의도가 느껴졌다면 오래전에 한 판 붙었을 터였다.
찰칵!
로이나가 아공간에서 팔찌를 하나 꺼냈다. 전체적으로 은은한 푸른색을 띠는
고풍스러운 팔찌였다.
"이걸 착용해. "
"음, 위치 추적 장치인가?"
"응, 라한이 어디 있든지 내가 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팔찌야. 내 마나에만
반응하니까 다른 드래곤들은 그 팔찌를 이용하지 못할 거야. "
"알았어. "
짧게 대답한 라한이 팔찌를 착용했다. 마치 맞춘 듯 딱 들어맞았다.
똑! 똑!
라한이 팔찌를 살펴보려 할 때,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어지러운
발자국소리가 뒤따랐다.
"누구야?"
"레드리안일세. 좀 들어가도 되겠는가?"
"들어와, "
레드리안이 건장한 체구의 사내 한 명을 대동한 채 객방 안으로 들어왔다. 헌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지금까지 은밀히 따르던 호위무사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자네가 라한이라는 사람인가?"
라한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레드리안 옆에 있던 사내에게서 나왔다 마흔은 넘어
보이는 중년 기사였다. 딱 벌어진 어깨와 굵은 팔뚝이 쾌나 쓸 만한 실력을
갖추었음을 짐작케 했다.
"당신 뭐야?"
"흠, 자네가 대마법사라고 하던데 맞는가?"
"난 당신 정체를 물었는데?"
라한의 재차 물음에 중년 기사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짐짓 부드러운
음성으로 답했다.
"난 나메라 왕국 수도 기사단 단장인 사르비엘 후작일세. "
인스타노 사르비엘 후작. 그는 나메라 왕국에서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검 실력을
가진 강자이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무서움은 검 실력이 아니었다. 그 실력을
뒷받침하는 뛰어난 두뇌와 그 머리에서 나온 계획을 실행시킬 수 있는 배경, 이
모든 것이 사르비엘 후작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유괴사건이 있었더군. "
사르비엘 후작의 말에 라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겨우 상단의 후계자 한 명이
납치된 일에 수도 기사단이 동원된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가?'
라한은 이번 납치 사건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그렇다고 하더군. "
"이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뭐가?"
"자네가 이번 실종 사건에 끼어든 이유 말일세. "
사르비엘 후작의 물음에 라한이 사르비엘의 눈을 살폈다. 예사롭지 않은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반말에 신경 쓰지 않는 것도 범상치 않았다. 거기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물어오는 태도도 일반 귀족들과 달랐다.
'이런 귀족도 있긴 있네. 별일이야. '
"그 유괴범이 데려간 쿨샤크란 놈에게 볼일이 있거든.
"그게 뭔지 말해줄 수 있겠나?"
"없어. "
"그렇군. "
라한의 짧은 말에도 사르비엘 후작은 별반반응이 없었다. 심계가 깊다는 의미였다.
"이제 내가 묻지. 수도 기사단 단장이라는 사람이 유괴 사건을 조사하는 이유가
궁금하군. "
"이번이 아홉 번째 일세. "
"응? "
"이번이 아홉 번째 납치라는 말일세. 그렇게 납치해 간 사람에 대한 대가는 항상
마법 무구더군. 그것도 A 급 이상만. "
그제야 지금상황이 이해가되었다. 아마, 그 아홉 번째 중 최소 한 번은 왕실 사람을
납치한 것이리라.
'생각보다 거물이었군. '
"그게 끝인가?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모두 A 급만 원했었지. 우리 왕국에는 특급 무구가 없었거든. 근데
이번에 납치해 간 사람이 특급 무구인 스케일러 링을 원한다고 하더군. "
"그래서?"
"그가 원하고 있다면 이곳에 스케일러 링이 있다는 얘기겠지. "
그의 말은 스케일러 링을 찾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가능하면 유괴범에게 주지
않고 왕국에 귀속시키려 할 것이다. 특급 무구자체만으로도 왕국에 엄청난 힘이 될
테니까.
"근데 왜 날 찾아왔지? 나한테 그 반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닐세. 문제가 좀 심각해져서 그러네. "
문제라.
"그 유괴범은 얼마 전 우리 왕국의 왕자님을 납치했었네. 그때 원했던 건 일트레어
대거 였지. A 급일세. "
약 석 달 전, 유괴범이 나메라 왕국의 왕자를 납치했다. 그를 돌려주는 대가로
원했던 게 A 급 마법 무구인 일트레어 대거였다. 나메라 왕국의 국보로 여겨지던
일트레어 대거. 하지만, 왕자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기에 교환 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막상왕자를 찾고 나자 사라진 국보가 계속 걸렸다. 이에 유괴범에 대한
조사를 계속했고, 그의 유괴가 한 번이 아니라는 걸 알아냈다.
"제법이군. "
"제법 정도가 아닐세. 우린 일트레어 대거를 반드시 찾아야 하네. "
"스케일러 링도 구하면 가져갈 생각이겠지. "
부인하지 않겠네. 하지만, 그를 그대로 뒀다가는 대륙에 존재하는 마법 무구란
무구는 모조리 사라질지도 모르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겠군. 그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이는
녀석이라면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겠지. "
일리 있는 얘기였다. 한 나라의 왕자를 거리낌 없이 납치했던 사람이다. 다른
왕국의 왕자도 유괴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A 급 혹은 특급은 거의 대부분왕국에
소속되어 있는 상황. 헌데, 왕자를 대가로 보물을 요구한다면 보물이란 보물은 모두
유괴범이 가지게 될 수도 있었다.
"근데 나하고 무슨 상관이지. "
상단주가 자네 실력이 범상치 않다고 말하더군, 언뜻 듣기로는 6 서클 마법사라고
하던데.
사르비엘 후작이 말을 길게 끌었다. 실력에 대한 진위를 확실히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먼저 자네 실력을 보고 싶은데. "
"싫어. "
라한은 마법을 광대짓 하려고 배운 게 아니다. 힘이 필요해서 배웠고, 오래 살고
싶어서 배웠던 게 마법이다. 이 때문에 사르비엘 후작에게 마법 실력을 자랑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거기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사르비엘 후작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실력을 보여주면서까지 남을 도와줄 필요는 없었다.
"자네가 실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자네를 신뢰할 수 없네. "
"난 당신의 신뢰가 눈곱만치도 필요 없거든. "
"흠. 그렇군. 난 자네의 힘이 필요하네. "
"밖에 있는 부하들도 많으면서 나까지 필요한가 모르겠네. "
라한의 비꼼에 사르비엘 후작이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차마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한참 머뭇거리던 사르비엘 후작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사실 그자와 부딪힌 적이 있었네. "
"오호, 그래?"
"복면을 쓰고 있어서 외모는 보지 못했지만, 검을 나눠봐서 실력은 잘 알지. 그는
너무 강했네. "
"얼마나?"
"그는 우리를 가지고 놀았네. 그가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기사단 전체가 몰살
됐을지도 모르지. 헌데, 더 대단한건 그에게 죽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걸세.
단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우리 모두를 제압했다는 얘기지. "
사르비엘 후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기사단 전체가 단 한명에게 패한 게
수치스러웠다. 헌데, 너무 부끄러워서 왕국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단 한
명에게 당했다는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임무를 포기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었다.
'생각보다 강한 놈이군. 설사 굴레를 벗은 놈이라 하더라도 기사단을 가지고 놀
정도는 아닐 텐데. '
굴레를 벗은 존재라면 웬만한 기사단보다 강하다. 하지만, 강하다는 정도와 가지고
논다는 건 염연히 달랐다. 상대는 의도적으로 살수를 쓰지 않고 기사단을
패배시켰다. 그건 실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도 기사단을 꺾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프라하가 할 수 있을까?'
프라하의 실력이면 모두 죽이는 데에는 30 분이면 충분했다. 헌데, 상대를 죽이지
않고 모두 제압한다면? 힘들어 보였다. 아니, 불가능했다. 프라하의 능력을 한참
상회한 실력이라야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을 마친 라한이 로이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로이나. 그놈 실력이 어느 정도일까?
-글쎄. 드래곤도 불가능해. 물론 마법을 사용한다면 가능하겠지만, 검술만으로
기사단을 제압할 실력은 드래곤에게도 없어.
라한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만만치 않다는 생각에 겨정부터 앞섰다
"만약 그가 보물만 받고 도주해 버리면 잡을 방법이 없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 헌데,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대가를 주면 인질을 반드시
풀어줬었네. "
"현재 그자의 거취는?"
"모르네. 그때는 정말 운이 좋아서 발견했던 거지. "
라한이 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참가한다면 승산이 높아질 게 분명했다.
거기다 투바와 프라하가 가세한다면 필승을 장담할 수도 있었다. 헌데, 기사단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그 자체가 영 내키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을 좀 줬으면 좋겠군. "
"알겠네. 내일 다시 찾아오겠네. "
사르비엘 후작이 조용히 객방을 벗어났다. 그가 나가자 주변에 산재해 있던
기사들의 기운도 함께 사라졌다.
사르비엘 후작이 나간 후에도 라한은 입을 열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가문이 망했다는 소식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골치 아픈 사건에 휘말린 느낌이었다.
"대체 누구지? 굴레를 벗은 놈들 외에도 그런 놈이 있나?"
말을 마친 라한이 프라하와 로이나를 바라봤다. 혹시 아는 게 없냐는 의미였다.
이에 프라하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혹시 마족이 아닐까?"
-마족?
마족이라.
테세르와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드래곤도
불가능한 실력이라지 않은가. 육체적 능력에 서 월등한 마족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닐 거야. "
"마족은 아니야 "
로이나와 투바가 동시에 반론을 제기했다. 이에 라한과 테세르, 프라하의 시선이
그들에게 모였다. 시선을 받은 투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족은 물질계로 건너오면 힘의 대부분을 봉인 당하게 돼. 일종의 제약을 받는
거지. 그래도 보통 인간들보다 강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야. 마족이
물질계에서 이정도 실력을 가지려면 최상위 마족은 되어야 하는데. 내가 아는
최상위 마족 중에 물질계로 넘어온 마족은 아무도 없어. 얼마 전에 넘어왔던
이그니스 삼촌이 거의 유일하지. "
"맞아. 마족은 마족만의 고유 흔적이 남아. 다른 존재는 몰라도 드래곤인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물론, 아주 희미해서 자세히 살펴야 겨우 찾을 수 있지만. 어쨌든
우린 자세히 살폈잖아. 근데 마족의 느낌은 저기 있는 투바가 유일했어. "
투바의 말을 로이나가 받았다. 결론은 마족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라한은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짙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드래곤도 아니고 마족도 아니다? 그렇다고 굴레를 벗은 존재로 보기에는 너무
강하다는 말이지?"
딱- !
"아, 생각났다. "
라한의 물음에 로이나가 손가락을 퉁기며 말했다. 로이나의 반응에 라한과 프라하,
투바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로이나를 어려워하는 테세르까지 라한의 로브
안에서 한쪽 눈을 내밀었다.
"누구?"
"카이렌. "
"카이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최소 라한의 기억에는 없는 이름이 분명했다. 결국
만나본 사람은 아니라는 의미인 셈이다. 라한이 부가 설명을 해달라는 듯 로이나를
바라봤다.
"카이렌은 엘프야. "
"엘프? "
응. 한 4 천 년 전이던가? 그때 정말 희한한 엘프가 나타났어, 그는.
카이렌은 무려 4 천 년 전에 소드마스터에 오른 엘프였다. 마법이나 정령이 아닌
검으로 한계를 넘은 존재. 엘프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였다. 거기다 그는 조화나
평화라는 존재 의미에 큰 관심이 없었다. 먼저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공격당하면 몇 배로 보복을해야 직성이 풀렸다. 성격과 실력 모두 여타의 엘프와는
극과 극이었다.
"4 천 년? 용케도 살아 있네. "
"확실하지는 않아. 그가 정말 굴레를 벗었다면 그일 가능성이 다분해. 헌데, 굴레를
벗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봐야겠지. "
"흠, 로이나는 굴레를 벗은 존재를 구분하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럼 그에
대해서 아는 대로 설명해봐 "
라한의 물음에 로이나가 회상에 잠겼다. 카이렌이라는 존재에 대해 기억을 가다듬는
중이었다. 그렇게 잠깐 멍하게 있던 로이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엘프이면서도 엘프가 가지는 성격적 특징을 보이지 않았어. 그와 유희를 즐긴
적이 있었는데, 내가 드래곤이라는 걸 알면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더군, 배포도
크다고 봐야겠지. "
"엘프가 유괴라.별일이네. "
"어떤 면에서는 라한과도 비슷한 성격이야. "
"나? "
"응. 목적을 위해서 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거든. 또, 당하면 몇 배로
갚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도 비슷하지. "
로이나의 설명에 라한의 호기심이 더욱 짙어졌다. 꼭 만나보고 싶은 녀석이었다.
정말 그의 성격과 자신이 비슷한지, 자신처럼 오래 살려는 꿈을 꾸는 엘프는
아닌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궁금했다.
엘프라.
"카이렌이 굴레를 벗었는지 어떤지는 나도 몰라, 헌데, 그가 검을 익혔고 또, 그
검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건 확실해. "
"그의 위치를 찾을 방법은 없나?"
"그건 좀. 카이렌은 숨는데 탁월한 재주를 가졌어. 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게
가능한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카이렌이 숨으려고 마음먹으면 그
누구도 찾지 못한다는 것. "
"드래곤도?"
"응. 드래곤도. "
로이나의 대답에 주변 일행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하의 드래곤마저 찾지
못하는 상대라니. 과연 그런 상대가 존재할 수 있나 싶었다.
"일단 스케일러 링인가 뭔가 하는 것부터 찾아야겠군. "
"그래야겠지. "
로이나도 찾지 못한다면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뭔 대화를 하고
싶어도 만나야 할 수 있는 일. 나머지는 그 후에 결정해야 했다.
"로이나! 우릴 에펠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시켜줄 수 있어?"
"음, 괜찮을까?"
로이나는 자신이 하려는 행동이 물질계 개입인지 어떤지를 고민했다. 라한 일행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유희로 보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저들을
이동시켜주는 행동이 물질계에 어떤 해를 주는 것도 아니었다. 둘 사이의 적절한
기준이 없었기에 쉽사리 결정내리기가 힘들었다.
한참 고민하던 로이나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너희들이 내 정체를 알고 있으니까. 미안해. "
"그럼 나 혼자만 이동하는 건 어때? 그것도 안 될까?"
"라한 무슨 소리야! 너 혼자 가서 재미 보겠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도 갈
거야. "
"나도 당연히 갈 거다. 날 빼놓을 생각은 하지마라. "
라한의 말에 프라하와 투바가 제동을 걸어왔다. 재미있는 사건이 생길 게 분명한
곳에 빠질 수는 없었다. 거기다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력을 분산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었다.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누가 너희들 빼 놓는데?"
"그럼?"
"머리는 장식품이냐? 내가 인챈터라는 거 잊었어? 나만 갔다 오면 나머지는
스크롤로 가면 되잖아. "
"아, 맞다. "
"그렇군. "
라한이 쏘아붙이자 투바와 프라하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순간 라한이
인챈터라는 걸 깜빡한 듯했다.
일행을 대충 정리한 라한이 로이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로이나. 나 혼자 가는 건 가능해?"
"그 정도는 상관없겠지 . "
"그럼 가서 좌표 좀 알아와야겠다. 지금 좀 보내줘. "
"알았어. 매스 텔레포트!"
로이나가 마법을 시전했다. 이에 라한과 로이나의 몸에 푸른빛이 잠시 일렁였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라한과 로이나의 모습도 완벽히 사라졌다.
판트리아계에 속한 영계의 지휘부. 저승사자인 새턴이 동료인 트레이시를
불러들였다. 얼마 전 저승사자의 수장인 퓨리트에게 상황 보고를 했던 그들이었다.
"새턴.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부른 거야?"
"왜? 바쁜가? 요즘 차원에 신경 끊어서 시간 남잖아. "
"나도 여가 생활 좀 즐겨야지. "
"허허, 이 친구. "
트레이시의 대답에 새턴이 헛웃음을 흘렸다. 과거에는 저승사자들과 전혀 상관없는
말이 여유라는 단어였다. 영계 다스리랴, 판트리아계 다스리랴. 숨 쉴 틈 없이
움직였던 그때를 생각하자 지금의 여유가 꿈만 같았다.
"근데 대체 무슨 일인가? 자네가 날 부를 정도면 예삿일은 아닌듯한데, "
"아, 내 정신 좀 보게. 과거 판테아님이 관리하던 그 장소 기억나는가?"
"그 장소?"
"왜, 용마전쟁 이전의 유적 말일세. "
새턴의 말에 트레이시의 인상이 구겨졌다. 판테아가 영계 지옥에 갇힌 후부터
까맣게 잊고 지냈던 기억이다. 정말 귀찮은 일이었기에 기억하는 것 자체가
끔찍했다. 어찌됐든 기억은 떠올랐고, 어떤 결론을 내리든 스스로 마음의 결정은
내려야 했다.
"잊고 있었네. 후우, 그 유적들. 미치겠군. 자넨 어쩔 생각인가?"
"나도 결정을 못 해서 자네를 찾아 온 걸세, 퓨리트님에게 알릴까?"
"알린다면 그분이 어떤 결정을 내릴 것 같은가?"
"관리하라고 하겠지.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위험한 곳이니까. "
새턴과 트레이시의 걱정은 여기서 기인했다. 관리하기 싫다는 것. 웬만하면 그
유적과는 인연을 끊고 싶다는 것. 이 때문에 퓨리트에게 알리는 걸 계속 미루고
있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새턴의 물음에 트레이시가 고민에 빠졌다. 일의 경중으로 봐서는 분명히 알려서
조치를 취해야 했다. 하지만, 알려진 후에 자신이 바빠지는 건 너무 싫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끽하는 여유가 아니던가. 또 다시 귀찮은 일에 매달리는 건 내키지
않았음이다.
"난. 지금이 좋다네. "
"결국 그런 결정을 내렸구먼. "
"난 지금의 여유를 놓치기 싫다네. "
"후후후, 알겠네. 나 역시 요즘 느끼고 있는 이 여유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구먼.
그리고 퓨리트님이 수장이 된 후부터 지금까지 방치하지 않았는가? 여태 별일이
없었으니 괜찮을 걸세. "
새턴이 애써 스스로를 합리화 시켰다. 그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에
트레이시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마우이 "
"뭘 고마워하고 그러는가. 서로가 좋자고 하는 일인데. "
"어쨌든 고맙네. "
그들이 말한 유적은 새턴과 트레이시만 알고 있는 비밀이다. 과거에는 판테아와
함께 타인의 출입을 막았던 곳. 헌데, 판테아가 갇힌 후부터 그들만의 힘으로
막았었다. 셋이 하던 곳을 둘이서 관리했으니 힘든 게 당연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그곳에 신경 썼고, 어쩔 때는 영계의 일마저 뒤로 미루고 그곳을 살폈다.
그들에게는 고문과 같은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헌데, 퓨리트가 수장이 된 후, 그곳에서 신경을 끄고 지냈다. 스스로가 귀찮았던
이유와 퓨리트의 신경 끄라는 말을 충실히 이행한 결과였다.
잠시마나 신경을 꺼서일까? 다시 그곳을 관리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그럼 이 일은 우리 둘만 알고 있는 비밀일세. "
"당연하지 내 끝까지 입을 다물 테니 염려 말게. "
"그러세. "
그들은 그렇게 대륙의 크나큰 위험덩어리를 방치했다. 이 일이대륙에 어떤 영향을
줄지, 지금의 그들은 짐작조차 못했다. 저승사자에게도 미래를 볼 능력은 없으니
말이다.
로이나와 라한은 오래전에 레테아를 살피던 언덕에 도착했다. 물론, 로이나의
텔레포트를 이용해서였다.
"분위기가 이상하네. "
"그러게.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
라한의 감각에는 그 어떤 인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감이 뛰어난 라한에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근처에는 없다는 얘기였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저기 보이는 저 집이 네 형이 살던 집이야. 아들 이름이 휴란트라던가?"
"맞아. 내 조카가 되지. 나보다 열 살 정도 적었으니까 지금은 스무 살 정도
됐겠네. "
라한과 레테아의 나이 차이는 무려 열아홉 살이다.
이 때문에 레테아의 조카와 라한의 나이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열 한살차이. 레테아가 결혼을 늦게 해서 이 정도였다. 다른 이들처럼 20 대 초반에
했다면, 라한과 두세 살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았을 터였다.
"일단 여기 좌표 좀 확인해야겠다. 디텍트 로케이션! "
라한이 좌표를 확인하는 동안, 로이나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디텍트 로케이션. 텔레포트에 꼭 필요한 마법이다. 헌데, 판트리아 대륙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진 마법이었다. 심지어 드래곤도 이 마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용언으로는 좌표 확인이 가능하지만, 물질계 마법으로는 이미 오래전에 실전된
것이다.
'저 마법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대체 그 동안 라한이 뭘 하며 지냈기에 저
마법을 알고 있을까?'
로이나의 궁금증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 드래곤도 오래전에 잊어버린
마법을 아는 라한. 대체 어떤 경로로 고대에 사용 된 마법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끝났다. 돌아가자. "
"어? 어 매스 텔레포트! "
로이나는 끝내 의문을 풀지 못했다. 마법사에게 마법 서클과 기원을 묻는 건
실례되는 일이다. 라한 역시 마법사라고 생각한다면 이 점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실례를 범하면서까지 의문을 풀고 싶지 않았기에 의문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 시켰다.
라한은 뮬라 상단으로 돌아가자마자 인챈트 스크롤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로이나와 자신을 제외하더라도 이동해야 할 사람은 두 명. 그들이 왕복할 수 있게
도합 네 개를 만들어야 했다.
라한이 인챈트 스크롤을 만드는 그 시각. 레테아는 집과 꽤 멀리 떨어진 마을의
목책에 있었다. 그 위 fl 서 밖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쉬었다.
휴우, 죄를 짓는 건 아닌지.
"그런 소리 말게. 자네는 이제 우리 식구일세. 자네가 위험해 처했는데 우리가
구경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적 병력이 너무 많습니다. 이대로는 마을 주민들 모두가 화를 당합니다. "
"허허, 이 사람도 참. 만약 저들이 날 노리고 왔다면 자넨 어쩌겠는가? 자네도
우리처럼 도왔을 거 아닌가? 우린 이미 가족일세. 미안해할 필요 없네. "
"고맙습니다. 촌장님. "
목책 위에서 밖을 바라보던 촌장과 레테아의 대화였다.
목책 밖에는 근 오백에 달하는 병력이 도열해 있었다. 하나같이 군기가 가득한 것이
정예병임을 짐작케 했다. 이에 반해 마을 주민들 중 전투가 가능한 사람은 고작
백여 명이었다. 비록 방책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턱없이 부족한
수임에 분명했다.
"옵니다. "
"온다! 모두 준비!"
촌장의 외침에 목책 위에 있던 장정들이 화살을 화로에 담갔다가 뺐다. 불화살을
만든 것이다.
"모두 대기! "
"모두 대기! "
촌장이 외치자 중간에 있던 사람들이 명령을 전달했다. 이에 시위를 당기고 있던
사람들이 몸의 긴장을 살짝 풀었다. 그렇게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던 마을 사람들.
적이 어느 정도 가까이 오자 다시 몸을 긴장시키기 시작했다.
"발사! "
휘이익! 투두두둑!
촌장의 외침에 마을사람들이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이에 백여개에 달하는 화살이
달려오던 사람들에게 날아갔다.
"실드! "
"실드! "
화살이 날아가자 달려오던 적들 사이에서 마법이 시전되었다. 그들 사이사이에
마법사가 포진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마 법사들은 모두 2 서클 마법사였다. 폭발형 마법이 나오는 3 서클수준에 이르지
못했기에 백병전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 3 서클 마법사가 있었다면 첫 공격은
마법사의 파이어 볼이 되었을 것이다.
"으악! "
"겨!"
퉁! 퉁!
"쳐라! "
몇 명의 비명소리와 실드에 부딪히는 화살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공격 외침이
목책밖에 울려 퍼졌다.
쿵- !
선두에 있던 사람들이 목책에 부딪혔다. 그리고 단 한 번에 목책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무로 만든 목책이었기에 내구력이 부족했다.
"전원 근접 전투 준비!"
"근접 전투 준비!"
외침에 퍼지자 목책 위에 있던 사람들이 아래로 뛰어내려왔다. 성벽이 아닌 목책.
이 때문에 적들도 사다리를 준비하지 않았다. 어차피 몇 번 부딪히면 부서질 목책에
사다리를 세우는 건 무의미했다. 차라리 빠르게 부수고 들어가 난전을 유도하는 게
나았다.
"준비 !"
쿵- !
목책에 부딪히는 소리가 커질수록 마을 사람들의 등에 흐르는 땀의 양도 늘어갔다.
쿵-!
파직!
쿵! 쿠쿠쿠쿵!
기어이 목책 입구가 뚫리고 말았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무기를 꼬나 잡고 전방으로
달려갔다. 입구에 몰려 있을 때, 싸우려는 생각에서였다.
"와! "
"쳐라!"
채채챙!
촌장의 공격 명령에 마을사람들이 적을 맞아갔다. 하지만, 그들도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살아남은 적의 수는 최소사백. 자신들의 네 배를 넘은 병력이었기에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 때문일까? 짐을 휘두름에 있어서 뒤를 생각지 않는 공격
일변도의 검을 고수했다.
마을 사람들이 달려가자 레테아가 뒤를 슬쩍 바라봤다. 집의 모퉁이에서 휴란트가
활을 쏘는 게 보였다. 자신의 전처를 밟게 하기 싫어서 간단한 무기술조차 가르치지
않았던 아들 휴란트. 활을 들고 있는 모양새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너에게 뭔가를 가르칠걸 그랬구나. '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엘베로라는 인간을 너무 쉽게 봤음을 인정해야
했다.
'내 동생 라한이는 어디 있을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서였을까? 괜스레 동생 라한이 떠올랐다. 벌써 십 년도 더
오래전이건만 라한의 얼굴은 조금도 잊히지 않았다. 그만큼 동생을 아끼고
사랑해서이리라.
"하앗! "
마음을 다잡은 레테아도 전방으로 쏘아져갔다.
레테아의 위기를 짐작조차 못한 라한이 엘퐁소 지방의 뮬라 상단으로 공간 이동
해왔다.
"로이나. "
"응?"
"전에 부탁했던 것 좀 부탁해. 시간이 오래 걸려도 좋으니까 자세하게 알아봐줘. "
노력은 해보겠지만 장담은 못하겠다.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서 보낼 때 외에는 유희
해본지 오래됐거든. 특히, 인간으로 유희를 해본 지 너무 오래돼서 정보길드를 찾을
수나 있을지.
로이나가 자신 없다는 듯 말을 머뭇거렸다. 헌데도 라한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아무리 못해도 투바나 프라하, 테세르보다는 로이나가 휠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저 녀석들보다 나아. "
라한이 다른 일행을 슬쩍 살피며 대꾸했다.
투바는 물질계 자체가 처음이었다. 거기다 그의 여자밝힘증. 이건 도무지 해결책이
없었다.
프라하 역시 괜히 근엄한 척하는 성격과 욱하면 쓸어버리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혹, 프라하에게 맡겼다가 수틀리기라도 한다면 그 지역 전체가 쑥대밭이 될
공산이 컸다. 정령인 테세르는 라한과 일정거리 이상 떨어질 수 없으니 애초에 고려
대상에서 제외였다.
결국, 투바, 프라하, 테세르를 제외하면 로이나 밖에 믿을 이가 없는 셈이었다.
.
.
라한의 말에 프라하가 딴청을 피웠다. 로이나에게 지기 싫어하는 투바조차도 괜히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툭툭 걷어찼다. 스스로 가 생각해도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임을 깨달은 탓이다.
"알았어. 노력해볼게. 그럼. "
"미안해. 로이나. "
"미안은 무슨. 그럼 나중에 봐. "
말을 마친 로이나가 방을 나갔다. 약간 섭섭해 하는 눈빛이었다. 이에 라한의
얼굴에도 미안한 기색이 스쳤다.
'미안. 로이나. 나 하나보고 온 건데. 에휴, 다음에 잘 해줄게. '
마음을 다잡은 라한이 주변을 훑었다. 프라하의 얼굴이 좀 전보다 확연히 밝아져
있었다. 아니, 안도하는 기색이라고 봐야 정확했다. 스스로는 부인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드래곤이라는 존재에게 주눅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흠, 흠. "
"왜?"
"하루 정도만 칩거해야겠다. "
"인챈트하려고?"
라한의 말에 투바가 짧게 반문했다. 라한의 칩거 이유를 특별한 고민 없이도
짐작했음이다.
"응. 밤에 끝날 것 같기는 한데, 이동은 내일 아침에나 할 수 있을 거야. "
"그래. 하루 늦는다고 그놈들이 어디 가겠냐?"
"그 동안 말썽피우지 말고. 알았지?"
라한의 잔소리에 투바와 프라하가 눈을 부라렸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라한이
자신들을 애 취급하는 게 화가 난 듯했다.
"젠장. 저, 애 늙은이 같은 놈. "
"나도 찬성. "
"철없는 너희들보다는 낫지. 빨리 나가. 시간 없으니까. "
"알았다. 알았어. 어, 어. 밀지 말라고. 내 발로 나갈테니까."
끝까지 반항하던 투바도 결국 방밖으로 내밀렸다. 그들은 라한이 인챈트를 끝내는
밤까지 밖에서 보내야 할 터였다. 반면 테세르는 라한의 로브 속에서 밤까지 보낼
특권을 얻었다. 입 다물고 조용히 있었다는 게 그가 특권을 얻은 이유였다.
'녀석들이 눈치가 없어. 하긴, 나같이 뛰어난 정령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지. '
테세르는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국 남들과 달리
이득을 본 셈이지 않은가. 지금 순간만큼은 자신이 예언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테세르를 품속에 둔 라한이 인챈트 공식을 체계화 시켜나갔다. 한두 번 하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챈트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공식 한 번 잘못 새겼다가는 마법이 실패할 수도 있는 일이다. 정말 운 없으면
텔레포트를 하는 중간에, 공간에 갇혀 미아가 될 위험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습관적이고 반복적이더라도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섬세한 작업이
인챈트였다.
그곳 좌표가.
좌표 책을 꺼내든 라한이 공식을 서서히 만들어갔다.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라한을 두고 나온 투바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를 본 프라하가 짐짓 근엄한 척
입을 열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쳇, 친구는 개뿔이 친구야?"
"그건 무슨 소리야?"
"라한 말이야. 말이 친구지. 숫제 부하나 다름없잖아. 우릴 친구로 대해준 적이
있기는 있냐고. "
투바의 푸념에 프라하가 고개를 절래 저었다. 하지만, 투바의 말을 수긍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오래전 굴레를 벗은 존재들을 만났을 때, 라한이 했던 말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위험한순간에 친구라고 했던 라한의 말. 자신의 위험을 도외시하고 함에
공간 이동 했던 일. 프라하는 그때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었다.
"곧 알게 될 거야. "
"뭐가?"
"라한이 말한 친구의 진정한 의미 말이야. 라한을 좀 더 알고 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라고. "
"쳇, 둘이 사귀기라도 하는 거야? 왜 갑자기 편들고 난리야. "
투바의 황당한 말에 프라하가 슬쩍 미소 지었다. 물론, 사귄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그냥 지금 순간만큼은 투바가 귀여워 보인다고 할까? 딱 그런
기분이었다.
엘베로가 보낸 병력들에 맞섰던 레테아와 마을 주민들의 싸움은 이미 끝에
다다랐다. 마을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죽임을 당했고, 살아 있는 자들도 멀쩡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몸을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기사
출신이었던 레테아 정도였다.
채챙!
"큭! "
한 병사의 검이 레테아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팔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빌어먹을. "
욕설을 내뱉은 레테아가 뒤를 슬쩍 바라봤다. 휴란트가 겁에 질린 채 떨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서 몇몇 마을사람이 힘겹게 싸우고 있지만,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결정을 해야 해. '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가족이 교수형 당할 때 끝났을 목숨. 지금 죽는다
해도 손해 본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만큼은, 아들인 휴란트만큼은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가족의 죽음마저
외면하고 살리려던 상대가 휴란트 아니었던 가.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는 건
스스로가용서치 않았다. 또, 필슨 가문의 대가 이곳에서 끊어지는 것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 '
"레테아! "
레테아가 막 결심을 굳혔을 때, 마을 촌장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미 일 검을
허용했는지 옆구리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촌장님!"
"도망치게. "
예? 하, 하지만.
촌장의 말에 레테아가 몸을 움찔거렸다. 도망은 방금 막 생각했던 거였다. 헌데,
막상 촌장이 도망치라고 하자 오히려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괜찮네, 도망치게. 도망쳐서 복수해주게."
"촌, 촌장님. "
"부탁이네. 자네 외에는 믿을 사람이 없어. "
촌장은 레테아가 복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레테아가 이곳에 올 때
가족의 죽음을 외면하고 왔음을 알고 있었다. 가족마저 외면한 그가 고작 마을
사람들을 위해 복수를 결심할 리 없었다. 다만, 휴란트의 죽음이 안타까워서, 또
레테아의 죽음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뿐이다.
"촌. 장님."
"지체했다가는 늦네. 어서. "
채채챙!
다가오는 검을 쳐낸 레테아가 눈물을 글썽였다. 너무 미안했다. 자신 때문에 벌어진
싸움에서 자신이 발을 빼다니. 기사였을 때의 레테아였다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어서!"
죄송합니다. 촌장님. 부디. 부디.
레테아는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휴란트 에게 빠르게
다가가더니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휴란트!"
"아버지! "
"미안하다. 질책은 나중에 받으마. "
말을 마친 레테아가 휴란트의 손을 잡고 내달렸다. 목적지는 마을 뒤쪽에 있는
산이었다. 드래곤 산맥의 한 줄기인 인간들의 금지. 대륙에서 보기 힘든 오크들을
비롯한 여러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곳. 들어가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험지로 살기
위해 올라야 했다.
다음날 아침. 라한이 투바와 프라하를 불렀다.
"어이, 잘 잤는가?"
"다 모인거야?"
괜한 허전함에 라한이 다시 한번 주변을 훑었다. 며칠 함께 있지 않았음에도
로이나의 빈자리가 커보였다.
"인챈트는 끝난 거야?"
- 당연하지. 우리 주인은 어젯밤에 인챈트 끝내고 밤새 푹 잤다고.
테세르가 눈치 없이 라한 자랑을 해댔다. 이에 투바가 눈을 부라리며 테세르를
매섭게 노려봤다. 누군 밤새도록 밤이슬 맞으면서 보냈는데, 따뜻한 방에서 발 뻗고
자다니. 마왕의 아들인 투바로서 는 인정할 수 없는 행태였다.
물론, 라한 혼자였다면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었다. 인챈트라는 게 마법진을
그리는 일보다 더 힘들고 고단한 일이니 어느 정도 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헌데, 아무 상관없는 테세르까지 발 뻗고 편하게 잤다는 건 용납이 안 되었다.
"오호라, 그래? 시커먼 정령 너까지 발 뻗고 잤다는 말이지. "
-당연하지 위대한 정령인 나 테세르는 주인의 가호를 받고 로브 속에서 편하게.
퍽-!
"조용해! "
테세르의 입을 라한이 폭력으로 막았다. 그는 투바의 눈에 비치는 살기를 읽었다
힘이 많이 약해진 투바에게 지지는 않겠지만, 이길 자신도 없었다. 또, 자신이
친구로 인정한 투바와 싸우는 건 더더욱 싫었다.
"라한. 내 저놈을 그냥, "
"너도 그만해. 시간이 별로 없어. 빨리 그 자식들 찾아서 스케일러 링을 찾아야지.
"
"이, 이. 젠장. 테. 세. 르. 운 좋은 줄 알아라. "
-흥.
테세르가 코웃음 치며 라한의 로브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투바의 살기가 두렵긴
두려웠던 모양이다
내 저놈을.
"줬어. 자 받아. "
탁- !
라한이 텔레포트 스크롤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쾌나 정성스럽게 만든 듯
얇게 만들어진 스크롤이었다.
"이번 건 제법 스크롤다운데?"
"재료가 얼마 안 남았어. 아껴 써야지, "
"그런가?"
시간 없어. 빨리.
라한이 일행을 재촉할 때,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제 찾아왔던 사르비엘
후작이 재차 방문한 것이리라.
그렇게 잠시 후, 노크소리가 라한 일행의 귀에 들려왔다.
똑!똑!
"날세. 들어가도 되겠는가?"
"들어와. "
역시나 사르비엘 후작의 목소리였다. 어제보다 따르는 사람일적은 걸로 봐서 라한을
어느 정도는 신임한 듯했다.
"아침부터 납셨군. "
"급한 일이라서 그러니 이해해주게. 그래, 결정은 했는가?"
"그 결정이라는 게 유괴범을 찾는 일까지인가? 아니면 그를 잡는 일까지
포함해서인가?"
라한은 카이렌이라는 그 엘프와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일단 같은 굴레를 벗은
존재. 그러면서도 다른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 함께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또, 그에게 이길 자신이 없다는 것도 그런 결정에 크게 한몫했다.
글쎄, 후자였으면 좋겠는데 .
"그럼 거절하지. "
"흠, 좋네. 그럼 찾는 것만 도와주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보겠네. "
"무슨 수로?"
라한의 말투는 다분히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한차례의 격돌을 통해서 그의
힘이 기사단을 능가한다는 건 명백해진 상태였다. 헌데, 그가 카이렌을 잡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도움을 줄 사람이 생겼네. "
"도움이라 인원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그를 이길 수 있을까?"
"한 명일세. "
"한 명? 누구지?"
"미안하네. 말하지 않기로 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때 말해주겠네 "
라한의 얼굴에 약간의 놀람이 담겼다. 물질계의 그 누가 있어서 단신으로 카이렌을
상대할 수 있을까? 일단 떠오르는 상대는 없었다.
물론, 굴레를 벗은 존재라면 앞뒤가 들어맞는다. 하지만, 왠지 그건 아닌 듯했다.
다수가 모여 있는 굴 FP 를 벗은 존재들 중 단 한 명이 대등, 혹은 그 이상의
실력자를 상대한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누굴까? 곧 알게 되겠지. '
새삼 사르비엘 후작의 발이 넓다는 생각을 끝으로 고민을 접었다. 어차피 카이렌을
만나게 된다면 알게 괼 일. 미리 고민할 필요는 없었음이다.
"그럼 얘기는 끝난 거지?"
"아직. 대체 그를 어떻게 찾을 생각인가?"
"그건 내가할 일이야. 아, 깜빡할 뻔 했군. 내가 그를 찾아주면 당신도 나한테
뭔가를 해줘야 거래가 성립되는 거 아닌가?"
"흠, 원하는 게 뭔가?"
잠시 고민하던 사르비엘 후작이 어렵사리 대꾸했다. 알려지기로 6 서클 마법사인
라한. 그가 원하는 일이 간단할 리 없었다. 아직 말도 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나중에 말해줄게. 무리한 부탁은 안 할 테니까 미리부터 겁먹지 말라고.
기사도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어야 하네. 또, 우리 나메라 왕국의 국익에 해를
가하는 일도 허락할 수없네. 명심하게.
알았어. 그럼 이만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알겠네. 그를 찾으면 연락 주게.
짧게 인사한 사르비엘 후작이 객방을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투바와 프라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라한을 바라봤다. 대체 뭘 요구할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알 게 될 거야. 이제 가자고. 텔레포트!
대답을 미룬 라한이 마법을 시전했다. 라한이 사라지자 투바도 테이블에 있던
스크롤을 찢었다. 그 뒤를 이어 프라하도 스크롤을 찢으며 투바의 뒤를 따랐다.
텔레포트!
텔레포트!
혼자 남겨진 테세르의 몸이 서서히 희미해져갔다. 라한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져서
물질계에서 사라지는 현상이었다.
-말이나 좀 해주고 가지. 쳇.
잠깐 푸념을 토한 테세르가 정령계로 돌아갔다.
형을 찾아서
레테아의 집이 보이는 언덕 위.
라한이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군. 뭔가 이상한데.
주변은 어제와 비슷하게 황량했다. 간간히 들리는 바람소리와 풀벌레소리가
그러했고, 새소리가 또 그러했다.
스팟!
쿵-!
아이고. 이놈의 텔레포트는 당최 적응이 안 되는군.
프라하가 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쩔 수없이 함께 이동했던 걸
포함하면 벌써 세 번째 텔레포트. 헌데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지 나타날 때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착-!
"유후! 공기 좋구나. "
반면 투바는 아주 안정적인 착지를 보였다. 어떻게 보면 우아하기까지 한 멋진
모습이었다.
"조용히 좀 해봐. "
"왜? 무슨 일이야?"
"좀 이상하지 않아?"
"왜? 조용하고 좋은데. "
라한의 의문에 투바가 의아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라한의 인상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불안함과 불길한 느낌. 조금은 늦은 듯한 알 수 없는
애틋함. 갑작스럽게 엄습하는 기분에 모골이 송연했다.
"이상해. "
"대체 뭐가?"
"안 되겠다. 가보자. "
말을 마친 라한이 전방으로 쏘아져갔다. 처음 목적지는 멀리 보이는 레테아의
집이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어제와 분명히 달라진 듯 보였다.
"라한! "
"같이 가!"
투바와 프라하가 라한의 뒤를 따랐다. 엄청난 속도였다. 헌데도 라한과 그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신법을 모르는 그들이 평보에도 신법을 가미한
라한을 따라 잡을 리 만무했다.
"흠. "
레테아의 집에 도착한 라한이 침음성을 흘렸다. 집은 얼핏 멀쩡해 보이지만
구석구석이 부서져 있었다.
"형! 형!"
헉, 헉. 젠장. 더럽게 빠르네. 뭔놈의 인간이.
뒤늦게 따라온 투바가 불평을 토해냈다. 하지만, 라한의 표정을 본 후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어둡고 걱정스러운 라한의 얼굴. 잘못
건드렸다가는 경을 칠 것 같았다
헉, 헉. 헉. 젠장. 너.
"쉿!"
뒤늦게 도착한 프라하가 터트리려는 불만을 투바가 제지시켰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라한의 표정도 이상했고, 이 집의 분위기도 예사롭지 않았다.
"라한. "
철컥!
투바의 부름을 무시한 라한이 집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이거.
집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운을 미리 읽었기에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헌데, 집 안의 상황이 문제였다. 온통 파헤쳐져서 누군가 난리를 피운 듯했다.
"프라하. 주변을 좀 뒤져줘. "
투바. 넌.
"나? 뭐?"
말을 하던 라한이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 마족의 짓인지 아닌지 좀 알아봐줘, 난 주변 다른
곳에 좀 가봐야겠어 "
"난 또 뭐라고. 알았어. "
라한은 아직도 마족을 피의 상징이라 생각했다. 투바를 사귀면서 마족에 대한
선입견을 많이 버렸지만,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었다. 이 때문에 미심쩍은 일이나
잔인한 행동을 보면 마족부터 떠올렸다. 라한이 머뭇거린 건 이번 일로 투바와의
사이가 틀어질까 염려해서였다.
투바가 흔쾌히 승낙하자 라한이 오두막을 나갔다. 그리고 마을의 중심부가 있는
서쪽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라한이 떠나자 프라하도 오두막 주변을 살피러 나갔다.
혼자 남은 투바. 주변을 슬쩍 돌아보더니 이내 오두막을 나갔다 그리고 오두막 앞에
있는 우물 앞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중얼거렸다.
물의 권능. 힘의 상징 너의 힘을 이곳에 부르노니 나레브리안의 수장 투바에게 그
힘을 보여 다오. 움샤크리아 레브타!
투바의 외침이 끝나자 우물 안에 있던 물이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 후, 투바의
주변을 빙빙 돌며 뭔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였다
"후후, 아직 녹슬지 않았군. "
투바의 말에 주변을 돌던 물이 투바의 몸에 엉겨왔다. 흡사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애완동물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정령사가 물을 부리는 건 그곳에 깃든 생명체. 즉, 정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생명체가 없는 물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정령. 그들과의 친분을 이용해서 부탁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마족인 레브리안이 물을 부리는 건 정령사와 확연히 달랐다. 물 그 자체에
생명을 부여해 버리는, 그래서 그물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부하가 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비록 한 번에 하나의 부하밖에 만들지 못한다는 단점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물이 많은 곳이라면 엄청나게 강한 부하를 둘 수도 있는 방법이었다.
"어제와 그제. 이틀 동안 이 오두막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말하라. "
투바의 말에 물이 죄송한 듯 고개를 숙였다. 투바의 명령을 이행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투바가 부하로 만든 건 우물 안에 있던 물이다. 그 안에 갇혀 있던 그가 밖의
상황을 봤을 리 만무했다.
'골치 아프네. 그냥 오두막에 있던 물을 쥐어짜낼 걸 그랬나?'
"야! 그럼 이 오두막에 있었던 일을 알려줄 방법이 없는 거야?"
투바의 말에 물이 주변을 빙빙 돌았다. 마치 무언가를 고민하는 모습과 흡사했다.
그렇게 한참 빙빙 돌던 물. 드디어 생각을 마쳤는지 투바의 눈앞에 마주섰다.
"뭐야"
스르르륵!
물이 바닥에 서서히 가라앉았다. 땅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바닥에만 흥건히 고인
상태였다. 그 상태로 물에서 묘한 음성이 들려왔다.
-쥐새끼 같은 놈.
-샅샅이 뒤져라!
누군가의 욕설과 외침이 물에서 퍼져 나왔다. 아마 우물 안에서 들었던 누군가의
음성인 모양이다.
-도주한 것 같습니다.
-젠장,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필요하다면 마을주민들을 고문해도 좋다.
-예.
마지막 음성을 끝으로 어지러운 발자국소리만 들렸다 이곳 오두막에서 물러가는
소리인 듯했다.
"흠, 누군가가 여기 왔었군. "
"뭐, 뭐야?"
물이 전하는 목소리를 들은 건 투바만이 아니었다. 오두막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던 프라하도 그 목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곳에서 들리는 낯선
목소리. 프라하는 그 목소리가 들린 직후에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젖은 땅과 대화하는 투바를 발견했다.
"그 뒤로는 누군가의 방문이 없었나?"
투바의 질문에 바닥에 깔려 있던 물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리고 투바의 주변을 빙빙
돌며 아니라는 몸짓을 보여 왔다.
"흠, 그럼 누군가가 이곳에 왔었고, 아무소득도 없이 돌아갔다는 건가?"
"야! 투바! 저거 뭐야?"
"뭐가?"
"저 빙빙 도는 물컹물컹한 건 뭐냐고! "
"보면 몰라? 물이잖아. "
프라하의 놀란 물음에 투바가 능글맞게 답했다. 너무 담담해 보이는 표정이라서
오히려 프라하가 바보가 된 듯 보였다.
"우씨, 누가 물인지 몰라서 그래? 저 물이 왜 혼자 지랄 발광을 하는 거냐고. "
"내가 물을 다스리는 마족이라는 걸 잊었어? 내가 물을 부리는 방법이야. 우리
레브리안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물을 다스리지. "
"쳇! 누가 마족 아니랄까봐. 뭘 해도 이렇게 흉측하냐. "
실제로 프라하는 너무 크게 놀랐었다. 좀 전에 물이 빙빙 돌 때, 투바를 공격하려는
줄 알고 도끼를 잡기까지 했었다. 헌데, 투바의 표정이 너무 평온해보여서 잠시
참았을 뿐. 만약 투바가 약간이라도 움찔거렸다면 프라하의 도끼는 물을 갈랐을 게
분명했다.
"왜 놀랐어?"
"그럼 내가 이 꼴을 보고 안 놀라겠냐. 젠장. "
"녀석. "
투바가 프라하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만난 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다니. 새삼 '친구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한
기분이었다.
"이 손 좀 치워. 징그럽게. 근데 저 물컹이가 뭐라고 하던?"
"최근에 누가 이 집을 방문했던 것 같아. 그리고 누군가를 찾고 있던 모양이더군.
아마도 라한이의 형이라는 인간이겠지. 흠, 좋은 의도로 찾는 건 아닌 것 같던데. "
'정말인가?'
레테아를 바라본 카이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인간이었다. 거기다 전에
테세르가 취했던 모습과도 몹시 흡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전 레테아입니다! "
레테아의 연이은 외침에 카이렌이 결심을 굳혔다.
카이렌이 은신술을 풀었다. 하지만, 손은 왼쪽 허리에 차고 있는 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상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어서였다.
'그나저나 이놈의 라한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착- !
카이렌 앞에 프리미아와 레테아가 착지했다. 프리미아는 많은 경험이 있었던 듯
부드러운 착지였다. 반면, 레테아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기에 잠시 몸을
비틀거렸다. 하지만, 검을 오랫동안수련한 사람답게 넘어지는 꼴사나운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군. 넌 뭐지?"
"난 카이렌이다. 라한 친구지. "
프리미아의 물음에 카이렌이 자랑스러운 듯 답했다. 옆에서 대화를 듣던 레테아가
의아한표정을 지었다. 라한이라니. 자신의 동생 이름이 왜 이런 곳에서 언급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인간을 찾아왔다. "
"내가 라한 친구 카이렌이다. 날 라한이라고 생각해라. "
카이렌의 대답에 프리미아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지시받은 건 이 숲에 있는 인간에게 레테아를 전해주는 일이었다. 헌데,
인간은 없고 그 인간의 친구라고 주장하는 엘프만 남았다. 이 때문에 넘겨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쉽게 결정내리기 힘들었다.
"난 인간에게 전해주라고 명령받았는데. "
"아, 진짜 답답한 드래곤이네. 내가 라한 친구라니까 그러네."
카이렌은 자신이 라한의 친구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이유는 라한이 정규 교육을
받았다는 데 있었다.
카이렌은 어릴 때부터 검을 동경해서 엘프 마을을 떠났다. 이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이라고는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검술과 은신술도 정말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
기연으로 배웠을 뿐. 누군가에 게 정식으로 배운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셈이었다.
반면, 라한은 무려 8 년의 시간 동안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기간 동안 학교 교육 외의 다른 곳에 치중했지만, 교육을 받은 건 분명했다. 거기다
졸업도 수석으로 했다지 않은가. 카이렌으로서는 자신이 꿈꾸던, 동경하던 일을
멋지게 해낸 것과
같았다.
"네가 인간의 친구라는 걸 어떻게 믿지?"
"그게 음. 그거 꼭 증명해야 하나?"
"넌 엘프다. 내가 아는 엘프는 인간과 친분을 맺는 성격이 아니다. "
프리미아의 대답에 카이렌이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젠장할. 빨간 드래곤녀석. 전달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왜 라한얘기만 하고 내
얘기는 안 한거야? 쳇! 역시 제대로 배운 라한만 기억한다는 건가?'
순간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누군 배우기 싫어서 안 배웠겠는가. 검이 너무 좋아서 배움을 뒤로 미뤘던 게
이렇게 작용할 줄은 정말 예상 못했었다. 거기다 물질계 최강이라 자부하는
드래곤마저 정식 교육을 받은 라한만 기억하다니. 역시 사람은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며 슬픔을 억눌렀다.
"나! 카이렌! 라. 한. 의 친. 구. 맞. 다. "
"증명할 방법은 없다는 거로군. 휴, 네가 친구라고 주장하는 그 인간은 대체 언제
오는 거지?"
"곧 올 거다. "
프리미아의 물음에 카이렌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에 그들의 대화를 듣던 레테아가
조용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라한이라는 사람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입니까?"
"그래. 너하고 같은 검은. 응? 너 라한하고 무슨 사이지? 머리색이 똑같네. "
실제로 자신의 처지에 드래곤의 대화에 끼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동생의
이름이 거론되자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내고 말았다.
"제. 동생입니다. "
"뭐?"
레테아의 말에 카이렌이 놀란 음성을 토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오히려 짐작 못한 자신이 더 바보 같았다. 물질계
최강이라는 존재를 살려주고 구하려던 상대. 그 정도만으로도 라한의 가족임을
짐작했어야했다. 괜히 드래곤을 살려줬다고 화부터 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에고, 라한 오면 사과부터 해야겠네. 하긴, 제대로 배운 놈이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지. '
"제 동생이 확실합니다. "
"음, 검은 머리만 가지고 그렇게 판단해도 되는 건가? 이상하군. "
프리미아가 레테아에게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대답은 그녀도 1 미 알고 있었다.
대륙에서 검은 머리가 그리 흔치 않으니 말이다.
실제 검은 머리카락은 흔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희귀했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십여 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거기다 가문 대대로 검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는 집안은 대륙에서 필슨 가문이 유일했다.
검은 머리에 같은 이름, 그 정도만으로도 라한을 동일 인물로 봐도 무방한 것이다.
"제 동생은 어디 있죠?"
"아, 나하고 닮은 녀석 찾으러 갔는데 좀 늦네. "
"잠시만. 둘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대충 알겠군. "
"뭐가?"
"너와 이곳에 있던 인간이 친구였다는 거 말이다. 대화를 계속 듣고 있으니 친구가
맞긴 맞나보군. "
프리미아의 말에 카이렌이 활짝 웃었다. 자신을 라한의 친구로 인정해줬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기뻤다.
"하하하하, 당연하지. 난 라한의 친구다. "
"알았다. 알았어. 그럼 난 이만 가보지. "
프리미아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카이렌을 다시 살피며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카이렌은 굴레를 벗은 엘프의 마지막 생존자다. 프리미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약간의 적대감을 느껴야 정상이다. 실제로 다른 드래곤들이 그를 본다면
적개감이 아니라 살기부터 드러낼 거였다.
헌데 살기가 일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뭔가 자신이 실수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뭐지? 왜 살기가. 아, 그렇군 '
잠깐 생각을 해본 후에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입견과
너무 다른 카이렌의 태도가 원인이었다.
로테마이어스는 굴레를 벗은 존재를 물질계를 무너뜨릴 존재로 표현했다. 이 때문에
프리미아도 굴레를 벗은 존재를 나쁘게만 생각했었다.
가령 몸에서 살기가 풀풀 풍기고 날카로운 기세를 마구 흘리는 그런 상대 말이다.
헌데, 아니었다. 보통의 엘프보다 장난기가 좀 더 심할 뿐. 평범함 그 자체였다
어떻게 저런 치기어린 엘프가 물질계를 멸망시킨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이! 드래곤 친구! 잘 가라고! 다음에 봐!"
"흠. 텔레포트! "
다시 한번 침음성을 흘린 프리미아가 마법을 시전했다. 약간의 의구심을 가슴 속에
품은 채로.
프리미아가 간 후, 카이렌과 레테아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카이렌은 친구의
형님이라서 쉽게 말을 붙이기 불편했다. 어차피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태였다.
반면, 레테아는 상대가 엘프라서 말을 붙이지 못했다. 엘프와 인간이 전혀 동떨어진
존재는 아니지만, 그리 가까운 존재는 아닌터. 괜히 말을 붙였다가 인간에 대한
나쁜 감정을 심어주기 싫었음이다.
그렇게 한참의 침묵이 지나가고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기."
"저기."
현재 레테아와 카이렌의 사이는 마치 남녀 관계의 어색한 만남과 흡사했다. 아직
그들 스스로는 모르고 있지만, 제 3 자가 이곳에 있다면 딱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였다.
물론, 이런 얘기를 꺼냈다가는 카이렌에게 제대로 화풀이 당할게 분명했다. 하지만
현재 이곳의 분위기가 그런 쪽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먼저 말씀하십시오. 조화와 평화의 엘프시여! "
"하하하. 먼저 말해.라 인간. 네가 조금더 빨랐던 것 같다. "
말을 높일까 말까를 고민하던 카이렌이 결국 말을 놓았다. 친구의 형이기는 하지만
자신보다 까마득히 어린 나이의 레테아. 다른 건 몰라도 높임말을 쓰는 건 차마 할
수 없었다.
"예. 그럼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저, 성함이?"
"아까도 들었듯이 카이렌. 그게 내 이름이야. "
카이렌도 본래는 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릴 때 정령술과 마법을 포기하면서
가문에서 추방당했다. 그때부터 성이 없는 대륙 유일의 엘프가 되었다.
"그렇군요. 조화로운 엘프 카이렌님. 라한과는."
"그냥 카이렌이라고 불러라. 님이라는 호칭은 부담스럽군. "
"아, 예. 알겠습니다. 카이렌양."
빠직!
카이렌은 엄청나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 누가 봐도 여성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외모였다. 이 때문에 레테아도 카이렌을 여자 엘프라고 생각했다. 이름까지
여자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 그로서는 아주 당연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카이렌은 용납할 수 없는 단어였다. 카이렌양이라니, 친구의 형만
아니었다면 검부터 휘둘렀을 터였다.
"인간! "
"예, 말씀하십시오. 카이렌양."
"난! 남자다. 인간수컷! "
카이렌의 말에 레테아가 짐짓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어 카이렌을 보자 거짓말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어떻게
저런 얼굴이 남성체일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이에 반해 분노한 카이렌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더
아름답게 보였다. 그냥좀 전 같은 평온한 얼굴이었으면 납득시키기 쉬웠으련만,
카이렌에게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빌어먹을 '
'사실일까?'
각자 나름의 생각이 있었지만,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라한 일행과 물 덩어리는 근 하루를 레비안 산맥에서 보냈다.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가는 시간의 두 배를 보낸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아직도 목적지의 채 반도
오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미치겠군. "
라한이 뒤따라오고 있는 물 덩어리를 보며 불평을 토했다. 이렇게 오래 걸린 가장
큰 원인이 라한이 보고 있는 저 희한한 물건 때문이었다.
아무리 물이라지만 느려도 너무 느렸다. 라한과 투바, 프라하가 뒷짐 지고 걸어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계곡같은 물을 만났을 때, 신기에
가까운 속도를 보인다는 것. 그때는 빠른 게 아닌 거의 공간 이동과 흡사했으니
말이다
"이러다 언제 도착하지. "
"라한. 너무 그러지 마라 저놈도 나름대로 열심히 달리고 있다고. "
"저걸 그냥 죽여 버려?"
"안, 안 돼!"
라한의 말에 투바가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물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투바가 소환한 물 덩어리에게 충격을 가하면 그 통증이 고스란히 투바에게
전해졌다. 잘못된 소환이라서 그런지, 본래 그런 건지 는 확실치 않았다. 다만,
지금 저 물 덩어리를 소멸시켰다가는 투바 역시 거의 초주검상태가 될 거라는 것.
오직 그 사실만이 투바에게 중요했을 뿐이다.
"어휴! "
"물이다!"
라한이 푸념을 토했을 때, 선두에 가고 있던 프라하가 외쳤다. 정말 희소식이었다.
물을 만난다면 물 덩어리의 속도가 빨라질 터. 그 물길이 길면 길수록 도착하는
속도 역시 덩달아 빨라진다는 얘기였다.
"오호, 꽤 긴 계곡인데. "
"휴, 살았다. "
길게 늘어진 계곡물을 보자 투바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아직 라한의 눈에
깃들었던 살기를 잊지 못했다. 물 덩어리를 바라보는 그 섬뜩했던 시선. 자신을
향해 있지 않았음에도 몸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야! 물?"
스르르륵!
라한의 부름에 물 덩어리가 잽싸게 달려왔다. 그래봐야 원래 속도보다 아주 조금
빨라지는 정도였다. 하지만, 본래 속도를 감안하면 전력 질주나 마찬가지였다.
"알지?"
끄덕끄덕!
물덩어리는 라한의 말을 무척이나 잘 들었다. 아니, 거의 기겁하며 복종하는
수준이었다. 투바를 거의 가지고 놀다시피 하는 라한의 행동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라한에게 새겨진 악마의 낙인 때문일 수도. 그것도 아니라면 그 둘 다의
영향일지도.
"우리도 가지. "
라한이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물론, 투바와 프라하라는 애물단지가 있었기에
광견보를 최대로 사용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물 덩어리와 함께 다닐 때보다는
확실히 빨라진 속도임에 분명했다.
한참 달리던 라한이 계곡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급격히 몸을 세웠다. 그리고
계곡의 한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가 느껴졌다. 헌데, 그게 뭔지
정확하지 않았다.
"라한 왜 그래?"
"이상하군. 뭔가가 있긴 있는데. "
"있긴 뭐가 있다고 그래?"
라한이 바라보던 곳은 그냥 맨 벽이었다. 최소 투바와 프라하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뭔가있어. 테세르!"
-왜?
테세르는 라한의 로브 안에서 마법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라한이 무조건 외우라고
명령을 내린 탓이다. 머리 나쁜 테세르는 극구 거부했지만, 주인인 라한을 당할
수는 없었다. 크라이드리안과 싸울 때의 절박한 상황에서 주문을 까먹은 테세르.
라한은 테세르를 그냥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차라리 마법을 배우지 않았을 때라면 물리력이라도 행사했을 것이다. 헌데,
테세르는 마법을 배운 후부터 마법만 쓰려고 했다. 그런데, 주문도 못 외우다니.
전투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걸림돌과 다를 바 없었다. 테세르가 마법을
포기하거나 주문을 제대로 외우거나. 양단간에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할 수밖에
없었음이다.
"저기 뭐 없어?"
-어? 아무것도 없는데?
테세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했다. 하지만, 라한은 저 벽에 뭔가 있음을
확신했다. 그게 뭔지를 몰랐을 뿐. 예사로운 벽은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했다.
"거봐, 라한. 있긴 뭐가 있다고 그래. 너무 예민해진 거야."
"흠, 이상하군 "
라한이 보고 있는 절벽은 휴란트가 뛰어든 바로 그곳이다. 레비안 산맥에 사는 모든
드래곤이 발견하지 못했던 곳.
테세르도찾지 못하는곳. 에펠 일행과 프라하, 투바도 찾지 못하는 곳. 하지만
라한은 이곳에서 뭔가를 느꼈다.
레비안과 레이시드를 가둔 동굴에는 판테아의 장치가 되어 있다. 마나를 가진
존재는 이곳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런 장치였다.
만물의 근원이자 에너지원인 마나. 마법이 됐든 검이 됐든 수련을 거치면 마나를
가지게 된다. 이 때문에 프라하나 투바는 이 동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드래곤 역시.
뒤처리
다음날 아침
에테로가 닉스만을 대동한체 라한을 찾아왔다 그리고 뭔가 적
힌 쪽지 몇장만 내밀고 바로 사라졌다
흠 생각보다 많군
아홉명이네 그리고 여기서 멀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본 적이 있는 곳이라는 거다 운 나쁘
게 가 본적이 없는 곳이었으면 거기까지 뛰어가야 할 뻔했다
그렇군
라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반면 테세르는 아쉽다는 빛을 노
골적으로 보였다 라한을 타고 달리는 걸 엄청나게 좋아하는 테세
르 아니던가 가 본 적이 있어서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게 이렇
게 아쉬울 수 없었다
"슈라. 넌 어떻게 할래?그냥 여기 있을래?아니면 다른공간에
가 있을래?"
-난 그냥 여기 있겠다.
"그래라. "
슈라가 라한의 부름을 기다리는 다른 공간. 그곳은 온통 어둠뿐
이라 적막하기 그지없다. 전에는 그 공간이 싫은줄몰랐지만, 물
질계에 오랫동안 머무르자 그곳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밝은 햇살과 따뜻한 정에 익숙해졌다고 할까? 할 수만 있다면 이
곳 물질계에서 주인인 라한, 친구이자 동지인 테세르와 평생을 함
께 보내고 싶었다.
"변. 넌 여기서 슈라하고 놀아라. "
-크리릭!
"테세르. 넌
난 당연히 주인 따라가야지.
원래 라한은 테세르도 이곳에 두고 갈 생각이었다. 갖은 수다로
자신을 귀찮게 할 듯한 기분 때문이다. 또 머리 나쁜 테세르가 사
고라도 쳤다가는 그 됫수습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테세르. 그냥 너도 저 녀석들하고
-나 준비는 다 끝났어, 가자.
"아 그게
-뭐 해?시간 없잖아. 전부 열한명이라고. 서두르지 않으면휴
란트가 위험해져.
테세르가 라한의 말을 계속 끊고 서두르자고 재촉했다. 직감적
으로 자신을 떼어놓고 가려 한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그래. 가자. 이리와 "
출발.
테세르가 라한의 로브 안으로 들어가서 신나게 외쳤다
라한에게 이번 외출은 복수의 성패를 결정지을 만큼 중대한 일
이었다. 하지만 테세르에게는 단순히 놀러 가는 일 그 이상도 이하
도 아니었다.
"간다. 공간을 넘어서! "
라한이 간단한 시동어로 공간을 건너뛰었다. 예전과는 사뭇 다
른 시동어에 테세르도 고개를 갸웃했다.
라한과 테세르가 나메라 왕국의 남쪽 끝 엘퐁소 지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휴란트의 정체를 알아낸 사람이 이곳에서 머물고 있는
탓이다.
"감회가 새롭군. "
-그러게 말이야. 근데, 루이나왕국이 아닌 게 신기하다. 이 먼
곳에서 휴란트의 정체가 유출되다니.
"곧 알게 되겠지. "
라한이 엘퐁소 지방의 시내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테세르는
여전히 라한의 로브 속에서 고개만 달랑 내밀고 있었다.
-주인. 어디로 갈 거야?
"저쪽. "
라한은, 작지만꽤나 정갈하게 정리된 술집으로들어갔다 그리
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저자인가?"
라한이 품에서 에테로에게 받은쪽지를 꺼냈다. 그쪽지에는눈
썹이 짙은 40 대 사내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비슷한데.
"확인해 보자고. "
라한이 사내 앞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그 모습을
보며 아침을 먹고 있던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보쇼. 당신 뭐요?"
"혹시 부레이노씨 되십니까?"
"내 이름은 어떻게 아시오?"
"저랑 어디 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
라한의 말에 부레이노가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
다 그 상태로 왼쪽 발을 뒤로 빼며 싸울 채비를 갖추었다.
본능적으로 라한에게서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다.
"저하고 싸울 생각이십니까?"
"당신! 목적이 뭐야? 누구야?"
"곧 알게 될 겁니다. "
"하앗! "
라한의 대답을 듣던 부레이노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더니 라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기습이라 라한의 얼굴에도 놀
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척-!
단검을 든 부레이노의 손이 어느샌가 라한의 왼손에 잡혀 있었
다. 부레이노의 빠른 기습보다 더 빠른 라한의 대처였다.
"먼저 공격했으니 절 원망하지 마십시오. "
라한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부레이노의 손목에서 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빠직!
"으악! "
그와 함께 부레이노가 쥐고 있던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챙그랑!
"저도좀놀랐습니다. 이렇게 다짜고짜공격해 올줄몰랐거든요. "
"헉, 헉. 손손 좀
"아, 이런. 손목이 부러졌군요. "
라한이 부드럽게 왼손을 풀었다.
부레이노가 자리에 주저앉은 채 신음을 흘렸다. 정신 멀정한 상
태에서 타인에 의해 손목이 부러진 부레이노. 의식을 잃지 않은 게
용했다.
"당신 목적이 뭐야?"
"곧 알게 될 겁니다. 그럼 수면으로!"
라한의 수면으로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부레이노가 서서히 몸을
뉘었다. 라한의 신화력을 이용한 슬립에 당한 것이다.
"이분 식사비는 제가 내도록 하죠. "
라한이 부레이노가 앉았던 테이블에 2 실버를 내려놓고 나왔다.
나름대로 자신이 악당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테세르에게는 그런 행동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은 듯
했다. 이미 질린다는 눈으로 라한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주인. 진짜 악독하다.
부레이노는 휴란트의 정보를 처음 캐낸 사람이다. 라한으로서는
처리해야 할 대상 1 순위인 셈이다. 다른 사람 모두 사라져도 그가
다시 휴란트의 정체를 상부에 보고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술집을 나온 라한은 이번에는 엘퐁소 외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많은 곳을 어느 정도 지나오자 테세르가 라한을 조용히
불렀다.
-주인.
"왜?"
-아까 '수면으로' 라고 한 게 신화력을 이용해서 쓰는 마법 시동
어지?
"마법은 아니지만 시동어는 맞아. 그냥 내가 의지를 집중하기
편하게 부르면 되니까. "
신화력은 라한의 의지에 의해 발현된다. 하지만 그 의지를 실체
화할 어떤 연상 작용이 필요하다. 마법에서 파이어 볼을 사용할
때, 불의 형상과 열기를 상상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름 너무 대충 지은 거 아냐?
"그게 어때서? 내가 편하면 그만이지. "
라한은 이름을 짓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
자신만 연상에 도움이 되면 그만인 신화력의 발현. 괜한 이름 때문
에 고민하는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름은 뭐가 있는데? 아까 보니까 공간을 넘어서던가?
그것도 있던데?"
"공간으로, 불의 공, 뜨자, 수면으로, 고치기. 뭐 이런 식인데 "
-작명 센스가 진짜 엉망이군 이게 뭐니 이게? 뜨자? 고치기?
뭐든 건성건성
테세르가 라한을 나무라며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라한이 지은 이름은 하나같이 유치했다
"귀찮아. 그냥 이걸로 할래. "
라한은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미 자신이 생각해 둔 이름에
어떤 연상을 떠올리는 게 익숙해진 탓이다.
만약 지금 시동어를 바꾼다면 그에 따르는 연상을 다시 외워야
한다. 불필요한 일에 두 번 고생하는 건 죽어도 싫었다.
-쳇.
"저기군 "
라한이 어느 상점 건물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꽤 멀리서
멈추었기에 아직 라한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이 녀석은 어떻게 할 건데?
"지키고 있어. "
라한이 테세르를 남겨 두고 상점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어느 정
도 다가갔을 때 라한이 입을 열었다.
"투명해지기. "
라한의 말이 끝나자 모습이 서서히 희미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
라졌다. 인비져빌리티와 같은 투명화 마법의 시전이었다.
-저놈의 시동어. 하여간 유치 빤스다
약 10 분 후, 라한이 어깨에 갈색 머리의 말끔한사내를 걸치고
나타났다 10 분 만에 저택 안에서 사람을 납치해 온 것이다.
-빨리 끝났네.
"별별 장치를 다 해놨더군. 꼴에 죽기는 싫어 가지고. "
라한이 들어갔다 나온 집에는 특별한 장치가 없었다. 한데 주인
의 방 안. 그러니까 라한의 어깨에 있는 자의 방에는 마법 장치와
각종 물리 트랩이 화려하게 깔려 있었다.
-주인. 이 녀석들 왜 안 죽여? 데리고 다니는 거 너무 귀찮은데.
"쓸 데가 있어서. 가자. "
라한이 처음 사로잡은 사내와 이번에 데려온 사내를 양쪽 어깨
에 둘러멨다. 실제로는 부유 마법과 같은 띄우기를 사용해서 살짝
걸친 모습이었다.
라한은 엘퐁소 지방 외곽에 위치한 버려진 농가에 사로잡은 이
들을 가두었다. 그리고 테세르에게 지키라고 한 뒤, 목록에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납치해 왔파.
지금까지 모두 여덟 명. 폭력을 사용해서 기절시킨 사람이 반,
마법으로 수면에 빠지게 만든 사람이 반이었다.
"네 이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납치된 자들 중 한 명이 라한에게 눈을 부라렸다. 어이없이 이곳
에 끌려온 게 황당하고 화난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야! 조용해. "
"이, 이놈! 내 형님은 이곳 엘퐁소 지방의 유력한 부호이시다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헉, 그렇습니까?"
라한이 짐짓 놀란 듯 고함친 사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사내가 기가 살아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날 풀어주면 네놈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
"정말이십니까?"
"그렇다. 난한번한말은지킨다. 물론, 약간의 매질은피할수
없겠지만, 내가 선처를 부탁할 테니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거다. "
"오, 정말이십니까?"
라한의 태도가 계속 저자세이자 사내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마치 벌써 풀려난 듯 얼굴 가득 웃음까지 머금은 채였다.
"내 말하지 않았느냐? 난 한번 한 말은 지킨다. "
"흠, 그렇군. 근데, 내가 당신을 납치한 건 아무도 모를 텐데.
그냥 당신을 여기서 죽여 버리는 게 더 확실할 것 같아. "
"아, 아니다 날살려주면 매질도 하지 않을뿐 아니라돈도 두
둑하게 주겠다. "
"돈이라 . . "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뭔가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사내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돈에 약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법. 사내는 라한이 돈을 택할 거
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납치된 사람들은 라한이 장난치고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이보시오. 우릴 왜 납치한 것이오? 우리가 댁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소. "
"정말 몰라? 여기 납치된 애들 잘 살펴봐. 그래도 모르겠어?"
"흠. "
라한의 말에 납치된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아닌
척했지만 대충은 눈치 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알겠지?"
"나메라 왕국에서 눈치 챈 모양이군. 크크크. 그래, 우릴 고문할
생각인가?"
라한이 납치한 자들은 엘베로의 정보 조직원이다.
남의 나라인 나메라 왕국에서 활개 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때문
에 그들은 라한을 나메라 왕국의 조사원이나 순찰원쯤 된다고 생각
했다. 그에게 자신들은 자국에 침입한 스파이나 다름없었으니 말
이다.
"고문 7"
"훗, 해 봐야 소용없다. 아무리 고통을 줘도 우린 배후 인물을
밝히지 않는다. "
배후 인물이라는 말에 라한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베사 길드의 정보력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말로 비추어보면 나메라 왕국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은
듯했다. 또 설사 들키더라도 배후는 들키지 않도록 모종의 장치를
한 것처럼 보였다.
한데 베사 길드는 그 모든 걸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배후와 조
직의 연계 그리고 그들이 모은 정보까지
베사 길드의 뛰어난 실력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배후 인물? 엘베로 얘기하는 거지?"
"그, 그걸 어떻게
"다 아는 걸 새삼스럽게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시나?"
납치된 자들도 자신들이 정보를 캐고 있다는 게 들켰음을 눈치
챘다. 하지만 그 배후 인물이 엘베로라는 건 들키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그 누군가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또, 그런 낌새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보 조직보다 더 뛰어난 조직이 다크라이더 길
드에서 만든 베사 길드임을 알지 못했다. 또 그들 조직의 꽤 깊숙
하고 높은 곳에 베사 길드원 다수가 활동하고 있음도 몰랐다.
"됐어. 그냥 여기 찌그러져 있어라. 근데 올 때가 됐왔군. "
덜컥!
라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테세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람 크
기로 몸을 불린 테세르가 로브로 몸을 완전히 가린 모습이었다.
"늦었군. "
-아, 이놈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서 말이야.
쿵- !
테세르가 어깨에 걸친 사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라한은 그
사내의 얼굴을 살피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군. "
이제 끝이지?
"거의 그렇다고 봐야지 "
라한이 처리해야 할 사람은 모두 아홉 명이다. 이곳에 갇혀서 라
한과 대화를 나누던 사람은 모두 여덟 명 나머지 한 명을 납치하
기 위해 테세르가 떠난 거 였다.
-아까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 같던데.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이 녀석 얼굴이 왜 이래? 벌집을만들
어놨네. "
-말했잖아, 저항이 너무 거셌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테세르가 데리고 온 사내는 20 대 중반의 다부진 체격의 사내였
다 얼굴만 멀정하다면 미남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한데 지금 얼굴은 인간으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
다. 눈은 퍼렇게 멍이 들었고 볼은 잔뜩 부어서 얼마나 맞았는지
짐작하기 힘들 정도였다.
-저항이 너무 거셌다니까.
"알았다, 알았어. "
테세르가 사내를 완전히 망가뜨려 놓은 가장 큰 이유는 그 남자
의 외모 때문이다. 라한의 모습과약간닮았다는것. 그하나때문
에 테세르의 분노를 자극한 것이다.
물론 라한의 본래 모습이 아닌 폴리모프 반지를 사용해서 변한
지금 모습과 비슷한 거였다 30 대인 지금 모습이 10 년 정도 젊었을
때 가질 수 있는 그런 모습 말이다.
아마, 지금이 아닌 라한의 본래 모습과 흡사했다면 초주검이 아
니라 이미 시체를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뭐 하면 돼?
"서류를 찾아와야지. 넌 여기 지키고 있어. 혼자 갔다을 테니까. "
-얘들하고 좀 놀아도 되지?
"맘대로해. 대신, 죽이면 안된다. 알았지?"
-알았어
라한의 승낙이 떨어지자묶여 있던 여덟 명의 얼굴에 공포가 어
렸다
라한에게는 폭력을 당하지는 않았다. 납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맞은 사람은 있지만, 이곳에 갇힌 그 순간부터는 물리력에 당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테세르는 왠지 폭력을 행사할 것 같았다. 후드를 완전히
트리는 테세르. 일행은 라한이 이곳에 있어주기를 마음속으로 빌
고 또 빌었다.
"그럼 간다. "
-응 잘 놀다 와.
라한이 사라지자 테세르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헉!"
"크헉 ! "
묶인 여덟 명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온통 검은 테세르의 얼굴 때
문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처음 라한이 신화력을 익혔을 때에는 테세르도 백색이었다. 라
한의 신화력이 여과 없이 테세르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데 지
금의 테세르는 예전과 같은 검은색이었다. 라한이 신화력에 어느
정도 능숙해지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무서워?
"어, 어 어 억 ! "
여덟 명 중한 명이 놀란마음에 의식을 잃었다. 나머지 일곱 명
은 차라리 의식을 잃은 사람이 자신이기를 바랐다. 그럼 테세르의
공포스러운 모습은 보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이히히히. 놀아보자고.
테세르가 묶인 사람들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칼 모양으
로 생긴 펜을 꺼내들었다.
"살, 살려주십시오. "
"다 말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묶인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 자리에 머리를 묻고 목숨을
구걸했다. 테세르의 모습이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이다.
-아는 게 뭔데?
"뭐든 물어만 보십시오. "
-그냥 너희들이 알고 있는 걸 다 불어. 안 그러면
"예. 먼저 저는 21 년 전에
라한에게 엘퐁소 지방 영주의 동생이라고 했던 사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마구 털어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일곱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상 내력부
터 조직에 대해 아는 정보까지, 아는 정보를 모조리 털어내고 있으
니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호, 그래?
테세르가 라한이 두고 간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잡혀
있는사람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정보의 중요
성 같은 건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런 걸 가려낼 능력도 없
는 테세르였다
한편, 테세르를 남걱둔 라한은 루이나 왕국의 북부 지역으로 이
동했다. 1 년 전 제이슨과 드래곤 크라이드리안이 싸웠던 바로 그
장소였다.
"곧 지나가겠지. "
라한이 땅에 귀를 대고 청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두두두두두.
일반인은 들을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진동이 땅을 통해 전해져왔
다. 말 서너 필이 달려오는 소리였다.
"곧 오겠군. "
엘베로의 정보 조직은 정보를 통신 마법으로 전하지 않는다. 대
륙 곳곳에 통신 가능한 마법사를 보낼 만큼의 여력이 없는 탓이다.
이 때문에 정보가 들어오면 일단 서신에 기록해서 빠른 말로 보
내야 한다.
물론, 엘베로의 비밀이나 나라의 존폐가 걸린 중대한 일에는 통
신 마법을사용한다. 그만큼 시급한문제이기에 그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베사 길드는 거의 모든 정보를 통신 마법으로 주고받는다.
일개 길드가 한 나라의 국왕이 거느린 정보 조직보다 더 많은 통신
마법사를거느리고 있다는증거였다. 또, 엘베로의 정보조직 보다
더 방대한곳까지 퍼져 있으니 가히 베사 길드의 정보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투명해지기. "
라한의 모습을 감추고 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잠깐 기다리
자 빈 말 두 필과 사람이 탄 말 한 필이 라한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오호, 말 두필을 비우고 다니는군. 쾌나 치밀한데. '
말 두 필을 비운 건 갈아타기 위함이다. 라한도 한눈에 그런 상
황을 눈치 챘기에 감탄을 터트렸다.
"워, 워!"
말을 세운 사내가 라한이 있는 곳 부근의 나무 아래에 말을 묶었
다. 그리고 자신은 그 옆에 있는 나무에 등을 기대어 눈을 스르르
감았다.
때는 한여름. 나무 그늘에서 몸을 식히고 좀 쉰 후에 다시 출발
할 생각인 듯했다.
'어디 있을까?'
사내가 눈을 감자 라한이 묶어둔 말들을 향해 다가갔다. 신화력
으로 몸을 완전히 감싸서 예민한 말조차 라한이 다가오는 걸 느끼
지 못했다.
'대체 어디 숨걱놨지?
라한이 말에 묶인 가방을 조심스럽게 하나씩 살폈다. 한데 아무
리 살펴봐도 휴란트를 비롯한 후계자들의 정보가 적힌 서신을 발견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
라한은 결국 찾기를 포기하고 쉬고 있는 사내에게 걸어갔다.
" 이봐! "
"음냐. "
" 이! "
후다닥!
라한의 연이은 외침에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
리번거렸다.
"누구냐?"
"이게 어디서 반말이야? 너 몇 살이야?"
"이놈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라한의 앞에 선 사내. 이크샤트의 몸에서 매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단순한 정보 조직원이 가질 수 있는 기세가 아니었다.
"오호, 기세가 제법 사나운데?"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
언제 꺼내었는지 이크샤트의 손에 긴 시미터가들려 있었다. 아
주 자연스럽고 깔끔하게 검을 꺼내 든 이크샤트. 라한은 그 모습으
로 상대가 예사 정보 조직원과 다름을 눈치 챘다.
'좀 배우긴 했군 '
라한이 왼쪽 발을 뒤로 뺀 채로 손을 가슴 앞으로 두었다. 누구
나 알고 있는 전투의 기본자세였다.
뒤처리
f7
* SCAN0031.PCX *
"부질없는 짓이다. 하앗!"
이크샤트의 시미터가 라한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그리고 라한
의 목을 완전히 레뚫었다. 아니 레뚫은 것처럼 보였다.
분명 레뚫은 것처럼 보였지만 손끝에 닿는 감각이 없었다. 이 정
도의 움직임으로 피한 사람이라면 자신보다 윗줄이 분명했다. 거
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
이크샤트가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라한이 피했음
직감한 것이다.
"쾌나 빠른 출수였다. 또, 잘못됐다는 걸 알고 빠르게 주변을 훌
자세도 괜찮았다. "
라한의 목소리가 이크샤트의 뒤쪽 나무 위에서 들려왔다. 그 목
소리에 이크샤트가 고개를 들어 라한을 바라봤다.
하지만 쉽사리 다음 공격을 이어가지는 않았다. 라한의 차분한
표정과 담담한 목소리에서 자신보다 월등히 강자임을 직감했다.
이런 상대에게 계속 덤비는 행위는 명을 재촉하는 길밖에 되지 않
는다.
"넌 누구냐?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하나만 넘 겨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
"뭘 말이냐?"
"네가 가진 서신. 내가 필요한 건 그것뿐이다. "
"헛소리! "
외마디 외침을 토한 이크샤트가 다시 전투 자세를 갖추었다 목
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서신은 넘겨줄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
가 느껴지는 모습이 었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네. '
상대의 의지가 느껴지는 얼굴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마음에 들었음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서신을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미안하군. 묶어!"
라한의 말이 끝나자 이크샤트의 주변에 있던 나무들이 빠르게
가지를 뻗어 그를 묶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이크샤트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마법사?"
"보시 다시 피 . "
라한이 대답하며 이크샤트의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찾아도 서신 비슷한 걸 발견할 수 없었다
"야! 어디 있어?"
"차라리 날 죽여라. "
"이 자식을 그냥 아우, 빨리 내놔! "
"그런다고 내가 말할 것 같으냐? 죽음은 두렵지 않다. "
이크샤트의 강경한 태도에 라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저히
말로는 안 될 상대였다.
"생각 읽기! "
라한이 이크샤트의 눈을 바라본 채로 시동어를 외쳤다.
생각 읽기! 독심술과 흡사한 라한만의 마법이었다.
"더러운 놈!"
한참 이크샤트의 눈을 보던 라한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무, 무슨 소리냐?"
"쳇. "
라한이 이크샤트의 하의를 내려 속옷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
크샤트가 자신의 속옷 안에 서신을 숨겨둔 모양이다.
"으, 드러. "
라한이 이크샤트의 속옷 안에서 누런 봉투를 찾아냈다. 쾌 오랫
동안 안 씻었는지 땀 냄새와 그곳의 냄새가 섞여 상당히 묘한 향기
가 코를 자극했다.
라한이 봉투를 꺼내 들자 이크샤트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약
간 붉어진 얼굴
자신도 속옷 안에 서신을 숨긴 게 약간은 수치스러운 듯했다.
찌직!
"어디 보자. "
라한이 봉투를 찢어 안에 있던 서신을 꺼냈다. 모두 두 장이었
다. 라한은 그 중 첫 장에 쓰인 내용을 먼저 읽었다.
-오늘 드디어 나메라 왕국의 군사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이 정도
정보면 루이나 왕국과 협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루이나 왕국과 협상을 해?"
라한이 의문을 터트리며 이크샤트를 바라봤다. 그렇게 잠시 보
면서 품속에 있던 에테로의 쪽지를 꺼내들었다.
"다르네. "
에테로가 준 쪽지에는 서신을 전하는 사람의 몽타주도 함께 들
어 있었다. 한데, 그 몽타주의 얼굴과눈앞에 있는 사내의 얼굴이
완전히 달랐다.
"잘못 골랐군. 너 누구냐?"
"말할 수 없다. "
"너 루이나 왕국의 세작이 아니로군. 넌 대체 누구냐?"
"차라리 날 죽여라. "
"독한 놈이네. 계속 보면 알겠지. "
라한이 이크샤트에게서 시선을돌려 서신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래 내용은 나메라 왕국의 군사 정보입니다. 베센 왕국의 영
광을 위해서 미 한 목숭 바칠 각오가 래 있습니다. 그럼 띠만
밝은 달빛 아래에서 베센 왕국의 부활을 꿈꾸며
헤피에하 파을 올림
서신을 읽으면서 라한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헤피에타 파올.
한때 라한의 일행을 따라다녔기에 라한도 알고 있는 이름이다.
샤르비엘 후작이 라한을 감시하라며 보냈던 5 서클 마법사. 그가 베
센 왕국에서 나메라 왕국에 보낸 세작이라니 예상 못한 정보에
어안이 벙벙했다.
'재미있는 정보를 얻었군. 그래, 남부 지방의 방언을썼다는 얘
기를 들었을 때 의심해 봤어야 했어. '
현재 베센 왕국은 루이나 왕국에게 북부 지방을 내주고 세력이
약해졌다. 왕국이라는꼬리표를달고 있지만, 웬만한소국보다못
한 상태가 베센 왕국이었다.
"이봐. 뭔가 이상하군. "
"아무것도 묻지 마라, 난 대답하지 않는다. "
"베센왕국은 대륙중부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고. 근데, 나메라
왕국은 대륙 중북부 지방이거든. 베센 왕국에게 나메라 왕국의 정
보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 "
"멍청이로군. 루이나 왕국과의 협상에 쓸 정보다. "
"아, 그렇군 "
라한의 담담한 물음에 이크샤트가 되받아쳤다. 어차피 서신에
있던 내용을 그대로 읖은 정도이니 별 상관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이 정도 정보를 아는 걸로 봐서는 그 역시 단순한 정보 전달자는 아
닌 듯 보였다.
"흥. 넌 누구냐? 내가 알고 있는 나메라 왕국의 인물 중에는 너
같은 실력자가 없다. 넌 누구지?"
"뭐, 나메라 왕국 사람은 아니다. 풀어줘!"
짧게 대답한 라한이 좀 전에 시전했던 마법을 없앴다. 갑자기 주
어진 자유에 이크샤트가 의아한 빛을 띠었다.
"날 왜 풀어주지?"
"내가 찾는 녀석이 아니거든. "
"진짜 나메라왕국 놈이 아닌 모양이군. 넌 누구냐? 너 정도의
실력자가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
"신분을 묻기 전에 자기 신분부터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
이크샤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게 꺼려지는지 쉽게 입을 열
지 않았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나도 그리 궁금하진 않거든. "
"난베센왕국의 이르나백작이다. 이크샤트이르나. 그게 내 이
름이다. "
이크샤트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것보다 상대에 대해 알아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단 한 차례 충돌이었지만, 라한은 쉽게 볼 수 있는 마법사가 아
니었다. 특이한 시동어와 빠르고 정확한 마법 구사. 어쩌면 대륙에
알려지지 않은 대마법사의 탄생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먼저 하나만 더 묻자. 너 파올하고 친해?"
"파올은 내 직속 부하다. "
"그럼 내 이름을 들어봤겠군. 라한. 그게 내 이름이다. "
"라한? 헛소리. 내가 아는 라한이라는 자는 20 대 초반의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다. "
이크샤트는 라한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현재 라한의 외모가 30 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라한 역시 굳
이 폴리모프를 풀어서 확인시컥줄 생각은 없었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지만 난 라한이 맞다. "
"흠. "
이크샤트가 침음성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듣기로 라한은 루이나 왕국의 반역자인 필슨 가문 사람이다. 즉,
루이나 왕국에게 땅을 내어준 베센 왕국과는 한편이라고 봐도 무방
한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라한을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루이나 왕국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훗, 내가 당신 나라를 도왔으면 좋겠지?"
라한은 이크샤트의 표정과 뒤바펀 말투만으로 그의 의도를 알아
챘다.
누구나 핵심이 찔리면 뜨끔하는 법. 이크샤트도 자신이 말을 채
다하기도 전에 의도를 들키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렇소. 당신도복수할수 있고우리 베센 왕국도큰 힘을
얻으니 서로 좋은 것 아니겠소?"
"복수? 어떤 식으로?"
"잘하면 당신이 루이나 왕국 거대 영지의 영주가 될 수도 있소. 물
론 우리 베센 왕국이 루이나 왕국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았을 때 가능
한 얘기겠지만. 어찌 췄든 서로에게 좋은 일인 건 확실하지 않소?"
"하하하하하. "
이크샤트의 말에 라한이 대소를 터트렸다. 그 정도가 복수라니.
그런 식의 복수라면 지금 당장 엘베로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비
틀 능력이 라한에게는 있었다.
"왜 웃는 것이오?"
"비록 엘베로 때문에 가문을 잃었지만 나 역시 루이나 왕국의
국민이다. 내가 너희를 도와서 루이나 왕국에 해를 가할 것이라 보
는가?"
"그래도 루이나 왕국은 당신 가문을 망하게 하지 않았소? 내 국
왕 전하께 말해서 당신에게 백작의 작위를 부탁해 보겠소. 아니,
후작의 작위를 내려달라고 말할 수도 있소. 당신이 큰 공을 쌓는다
면 그 이상도 가능할 것이오. 어떻소? 우리 베센 왕국을 위해 힘쓰
지 않겠소? 서로에게 좋은 일인 듯싶은데. "
이크샤트의 말이 이어지자 라한도 슬슬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그 분노를 담아 이크샤트를 매섭게 노려봤다.
"이봐. 난루이나왕국의 국민이다 그 빌어먹을 엘베로 때문에
가문이 망했지만, 그래도 난 루이나 왕국의 국민이다. 내 나라가
제아무리 엿 같고 역걱워도 내가 태어난 땅이고 내가 살아가야 할
땅이란말이다. 애국심?그딴 건 나도잘모른다. 하지만 내 조국
에 해를 가해선 안 된다는 건 잘 안다. "
"그래도
라한도 루이나 왕국이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 있을뿐, 나라에서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으니 말
이다. 거기다 엘베로라는 원수가 왕국의 국왕으로 앉아 있으니 정
이 안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루이나 왕국을 다른 나라에 팔아먹을 수는 없었다. 제아
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이 루이나 왕국의 국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그래도는 개뿔이 너한페 베센 왕국을 배신해서 해를 가하라
고 한다면 넌 할 수 있어?"
"베센 왕국은 내 가문을 망하게 하지 않았소. "
"닥쳐라, 내 손으로 빌어먹을 루이나 왕국을 망하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 나라에 팔아먹는 일은 하지 않는다. "
"그래도
"야! 너 가! 여기서 그만주절대고빨리 꺼져. 마음바러면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
틱-!
라한이 뜯었던 서신을 이크샤트에게 던졌다. 그리고 살기를 일
으컥 이크샤트를 압박했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살기에 이크샤트가 서서히 됫걸음질 쳤다.
난생 처음 겪는 강한 살기에 살갗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가, 가겠소. 가겠소. "
이크샤트가 가까이 있는 말에 올라타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두
필의 말은 손도 대지 않고 달려가는 이크샤트. 살기에 눌려 미처
말을 다 챙길 수 없었음이다.
"빌어먹을. "
이크샤트가 멀어지자 라한이 욕설을 내뱉었다. 괜히 꿀꿀한 기
분에 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싶었다.
득프든프든프글!
그렇게 한참 돌부리에 화풀이를 하고 있을 때, 말발굽소리가 들
려왔다. 아직 쾌 먼 거리였지만, 말의 속도를생각해볼 때 그리 오
래 지나지 않아서 이곳에 도달할 성싶었다.
라한은 지금 달려오는 말에는 자신이 기다리던 이가 타고 있으
리라 생각했다.
"투명해지기. "
몸을 숨긴 라한이 좀 전에 숨었던 나무 그늘 아래에 몸을 기댔다.
히이이 잉!
"워워!"
라한의 앞부분에서 달려오던 사내가 말을 멈추었다.
라한이 있던 곳은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곳이라 쉬기 딱 좋았
다. 이 때문에 한여름에 말을 달리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이곳에
서 땀을 식혔다가 간다. 라한도 이 점에 착안해서 여기서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이번에는 정확하군. '
좀 전에 확인한 몽타주와 일치하는 사내였다. 이번에야말로 휴
란트에 대해 적힌 서신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이거로군. '
이크샤트와 달리 이번에 나타난 정보원의 서신 관리는 형편없었
다. 말 옆에 달린 가방에 단추도 채우지 않은 채로 어설프게 서신
을 넣어둔 것이다. 이크샤트가 좀 지저분하긴 했어도 정보원으로
서는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할 듯했다
'뜨자. '
라한이 부유 마법과 흡사한 방법으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여전히
'투명해지기' 를 취소하지 않은 상태라서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다.
공중에 떠오른 라한이 나무 수풀 사이에서 서신을 꺼내 읽었다.
네 명 남은 후계자 후보들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정보가 적혀 있었
다. 물론 휴란트가 필슨 가문의 후손이라는 얘기도 함께였다.
'맞군 이걸 어떻게 바꾸지?음카테슈?이거 좋군. 카테슈로
결정. '
라한이 휴란트의 가문 항목에 필슨 대신 카테슈라는 가상의 가
문을고쳐 넣었다. 신화력과 라한의 세밀한손놀림이 결합되어 거
의 완벽한 조작이 이루어졌다.
카테슈는 카라한, 테세르, 슈라. 세 명의 이름중 첫 글자만섞
어서 만든 가문명이다. 처음에는 카테슈가 아닌 '카슈'라는 가문
을 만들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말썽만 피우는 테세르가 못미더
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미운 정이 있어서 차마 테세르를 제외시키지 못
했다. 당장은 빼고 싶은 마음이 마구 용솟음쳤지만 억지로 끼워 넣
은 셈이다.
'테세르. 너 운 좋았다. '
라한은 서신을 완벽하게 수정하고 다시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
다. 그동안 정보를 전달하던 사내는 눈을 감은 채 코까지 골고 있
었다. 정보 보안에 신경 써야 하는 자신의 직무를 완전히 내팽개친
모습이었다.
'엘베로. 네가 키운 놈들은 네놈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구나. '
라한이 엘베로를 싫어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능력마저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힘으로 현자의 지위
에 올랐고 또 국왕이 되었다. 정치적인 수완만큼은 라한보다 휠씬
뛰어난 셈이다.
'얼마 안 남았다. 공간으로! '
결의를 다진 라한이 공간 이동을 감행했다. 서신을 가지고 있던
자는 라한이 사라지고 한참 후에야 눈을 뜨고 다시 이동했다. 라한
이 서신을 보고 고쳤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채로.
라한이 뿌듯한 얼굴로 인질을 잡아놓은 곳에 들어섰다. 라한의
등장에 테세르의 얼굴에는 아쉬워하는 기미가 가득했다.
반면, 인질들의 얼굴에는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라한이 없
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이도 시달린 모양이다.
"얼굴들이 왜 이래?"
-얼굴? 누구? 나?
테세르가 짐짓 모른 척하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라한의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이상하네. 폭력을 쓴 것 같지는 않은데
인질들의 얼굴은 깨끗했다. 라한이 갈 때 봤던 것과 똑같은 모습
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그들의 표정에 공포와 고마워하는 감정이
묘하게 려여 있다는 정도였다.
"너하고 저 사람들 전부 다. 표정이 왜 이래?"
-표정이 어때서? 아무 일도 없었는걸.
"네 얼굴은 마치 뭔가를훔친 사람 같은 얼굴이고 저 사람들은
마족에게 쫓기다가 영웅이라도 만난 얼굴 같잖아. "
대충 찍은 말이지만 라한의 말은 거의 들어맞았다.
인질들은 테세르의 검은 얼굴과 외모 때문에 그를 마족으로 판
단했다. 라한이 영웅이 아니라는게 다르기는하지만, 일단그들을
마족의 공포에서 건져줄 사람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주인. 그게 무슨 말이야? 주인이 영웅이라는 건 그렇다 치고
내가 마족이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저 사람들 얼굴이 꼭 그렇잖아, "
-우씨. 라한주인. 난정령이라고. 오히려 마족에 더 가까운건
주인이잖아. 투바도 마족이고 주인도 이마에 마족의 낙인이
"야! "
라한이 소리쳐서 테세르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나을 말 다
나왔으니 너무 늦은 셈이다.
"컥!"
"히억!"
역시나 테세르의 말을 들은 인질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와
동시에 얼굴도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어, 어 주인. 고의가아니었다. 그러니까어미안해. 주
인의 정체를 발설하면 안 되는 건데 진짜 그게
"너 그 입 안 다물래?"
-아, 입? 알았어.
테세르가 말을 하면 할수록 라한은 점점 마족으로 굳어졌다. 참
담한 기분이 었다.
신화력을 익히면서부터 라한은 스스로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
을 종종해 왔다. 스스로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의 한계를 넘어
섰다는 생각 패문이다.
그 후부터 라한은 의도적으로 인간의 도리라는 걸 지키려고 노
력했다. 나름대로 인간으로 남아 있으려는 발버둥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족으로 굳어지는 일까지 벌어지다니. 그 대상
이 테세르만 아니면 그냥 참고 넘어가지 않았을 터였다.
"이봐요. 설마 저 시커먼 놈의 말을 믿는 건 아니겠죠?"
라한이 인질들에게 슬쩍 물었다. 하지만 인질들중에 라한의 말
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몸을파르르 떨며 어쩔 줄몰라
하는 인질들. 죽음보다 더한 공포에 할 말을 잃은 모습이 분명했다.
'테세르 저 자식. 내가사고 칠 줄알았어. 그냥 카슈라고 적을
걸. '
짜증이 나자 테세르를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이 후회스러웠다. 다
시 그런 상황이 닥치면 또 그대로 할 테지만 어찌 됐든 지금
심정으로는 테세르가 괜히 원망스러웠다.
"말한다고 믿을 리도 없고. 에고 모르겠다. 테세르! 이 사람들
알아서 들쳐 업어. "
-아홉 명인데?
"알아서 업어. 문어처럼 몸을 만들어서라도 어떻게든 업어. "
-알았어.
라한이 인간이고 싶어 한다면 테세르는 라한이고 싶어 하는 경
향이 강하다. 팔두 개, 다리 두 개, 머리 하나. 이런 형태를유지
하는 걸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한데 아홉 명의 사람을 업고 가려면 사람의 형태로는 불가능하
다. 결국 괴물처럼 변해서라도 업으라는 얘기였다.
"빨리 안 해?"
-해. 한다고.
테세르의 몸이 옆으로 쭉 늘어났다. 그 몸에서 촉수 같은 것이
하나씩 나오더니 이내 문어 같이 난잡한모양으로 변했다. 머리가
없고 다리만 아홉 개 달린 묘한 괴물의 형상이었다
"으헉!"
" 크윽! "
테세르의 변한 모습에 그나마 이성을 찾고 있던 인질들도 모조
리 의식을 잃었다. 라한이 보기에도 괴물 같기는 괴물 같았다.
츠르르륵!
-다 들었다.
테세르가 의식을 잃은 인질들을 하나씩 들어올렸다. 아홉 개의
다리에 각각 한 명씩의 사람 거대한 옥토퍼스에게 당하는 어부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간다 다 함께 공간으로
라한이 광범위 매스 텔레포트와 흡사하게 신화력을 사용했다
순간 백색 빛이 터져 나오며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 빛이 사라지
자 라한과 테세르 인진들 그리고 이곳에 남겼던 따스한
온기마저 함께 사라졌다
로테마이어스가본 라한
로테마이어스의 레어 안
로테마이어스가 차가운 표정으로 주변 드레곤들을 부러 모았다
정보담당인 아카폴리안 감시와 전투을 담당하은 에스타리스 빌
리마니 등등 열마리가 넘는 드레곤들이 로테마이어스 앞에 도열
했다
아카폴리안
예 로드님
새로운 정보는
라한이라는 인간이 돌아왔습니다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이 착잡하게 변했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라한 애기만 나오면 이런 표정이 저절로 지어졌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라한이라는 존재를 두러워 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어디 갔다 왔는지는 파악췄느나?"
그게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가 쓰는 방법이 좀 특이해서 마나
의 기척을 감지할 수가 없습니다. "
"역시 그렇군. "
로테마이어스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던 내용이다. 자신조차
도 라한이 어떤 식으로 공중으로 떠서 달렸는지 모르는 터. 자신보
다 약한 아카폴리안이 라한의 방법을 알아낼 리 만무했다.
"추측되는 일은?"
죄송합니다, 로드님. 뚜렷한 단서가 없는지라 하지만 이
번에 사라졌다가 나타난 이후에 아홉 명의 인간을 데리고 나타났습
니다. 여러 정령들의 말을종합해 보면 인질로 보입니다만, 그 역
시 확실한 건 아닙니다. "
"흠. "
로테마이어스의 침음성에 주변 드래곤들이 몸을 움찔했다. 답답
한 마음에 자신들에게 화풀이할까 두려웠음이다.
.로드님. 오늘 이 자리에 저희들을 모이라고 하신 건
"카이렌. 그 녀석을 오늘 처리할 생각이다 "
.역시 그렇군요. 저기 로드님. 이번 일은재고해 주셨으면 좋겠
습니다 "
"재고? 무슨 말이지?"
아카폴리안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의문을 재기했다
예전 같으면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그 자체로 분노를 표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자기 자신도 이번 일에
막연한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아카폴리안의 정보력에
대한 믿음도 일조했다.
"카이렌 일행들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합니다 "
"무슨 함정이라도 파고 있는 건가?"
"그게 더 이상합니다. 너무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들도 로드님
이 찾아갈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도무지 어떤 행동을보이지 않습
니다. 그건 아무래도
"이미 모종의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겠지, "
아카폴리안의 말을 로테마이어스가 받았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다른 드래곤들은 이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은 로드 로테마이어스가 카이
렌 일행을 신경 쓰고 있다니. 그들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자
신들이 아는 로테마이어스라면 당장 찾아가서 그곳을 불바다로 만
들어야 정상이 었다.
"그래도 간다. "
"로드님. "
"아카폴리안! 넌 우리 로드께서 그 녀석들을 피하기라도 해야
한다는말이냐?로드님. 명령만내려 주십시오. 제가당장찾아가
서 깡그리 정리해 버리겠습니다. "
화이트 드래곤 에스타리스가 답답함을 그대로 표출했다. 하찮아
보이는 엘프 일행을 신경 쓰는 게 짜증 났던 모양이다.
"에스타리스. 이번 문제는 그리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
"닥쳐라. 넌 우리 드래곤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우린 물질계 최
강의 존재 드래곤이다. 고작 하찮은 엘프 놈 때문에
"그만. 난 너희들에게 이곳에서 싸우라고 허락한 적이 없다. "
둘의 싸움을 로테마이어스가 제지하고 나왔다.
요즘은 되는 일이 없었다 당최 어떤 생각을 하고 지내는지 종잡
을 수 없는 라한도 그랬고, 세력을 키우고 있는 카이렌 일행도 마
찬가지였다 또, 골렘이라는희한한마법 무구를준비한류카라한
일행도 별 다르지 않았다. 이래저래 일이 자꾸 꼬이는 느낌에 짜증
이 치밀어 올랐다
"죄송합니다, 로드님. "
"용서해 주십시오. "
"됐다. 에스타리스. 카이렌 일행을처리할자신이 있느냐?"
"맡겨만 주십시오. 그들의 목을 로드님 앞에 바치겠습니다. "
로테마이어스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은 대타를 보내는 거
였다. 혹시 모를 위험에서 몸을 빼고 카이렌의 실력도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빌리마니. 너도 같이 가라. "
"알겠습니다, 로드님. "
"로드님. 저 혼자서도 충분히
"그만. 난 마음을 굳혔다. "
"예, 로드님 "
로테마이어스의 확고한 말에 에스타리스도 뜻을 굽힐 수밖에 없
었다.
카이렌 일행의 문제가 정해지자 이젠 라한에 대한 문제가 남았
다. 그에 대한 얘기를 하기 위해 로테마이어스가 아카폴리안에게
시선을 던졌다.
"라한에게는 누가 가기로 했지?"
"리투미아와 벨라루스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
"리투미아, 벨라루스. 자신 있느냐?"
로테마이어스가 왼쪽에 선 드래곤들을 보며 물었다
"반드시 그 녀석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
"맡겨만 주십시오. "
리투미아와 벨라루스가 확신에 찬 대답을 해왔다. 그 말에 로테
마이어스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라한은 쉽게 다룰 수 있는 자가 아니다. "
"명심하겠습니다. "
로테마이어스가 다시 우려를 표했음에도 그들의 표정에는 걱정
하는 기색이 없었다.
라한이라는 존재 자체를 우습게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라한은 아니다. 됐다. 그만 가 봐라. "
"네. "
로테마이어스의 말이 떨어지자 카이렌 일행을 맡기로 한 에스타
리스, 빌리마니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그 뒤를 라한을 맡기로
한 리투미아와 벨라루스도 따라 나갔다.
걱정하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네 명의 드래곤. 로테마이
어스는 왠지 이번 일에서 큰 피해를 볼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카폴리안. "
"예, 로드님. "
"라한과 카이렌 일행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
"그 말씀은
"저들과 그놈들의 싸움이 불리하게 돌아가면 네가 그들을 데리
고 도주하라는 뜻이다. "
로테마이어스도 이런 얘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한데 너무
불안했다. 머릿속으로 계속 고민하다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그를 따르는 드래곤이라고 해 봐야 걱우 열둘. 그 중 넷을 한순
간에 잃는다면 세력의 3 분의 1 을 잃는 셈이었다. 거기다 패배의 충
격을 더하면 세력의 반 이상을 잃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떻게든
승리로 이끌어야 할 싸움이고, 패한다하더라도 피해는 어떤 식으
로든 최소화시컥야 했다.
"로드님. 전 로드님의 의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이냐?"
"현재 저들 세력 중 가장 강한 곳은 류카라한이 이끄는 곳입니
다. 카이렌 세력과 류카라한 세력이 서로 견제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상 카이렌이 가진 힘은 류카라한에게 한참 못 미칩니다. "
"그렇겠지. "
"한데, 류카라한이 아닌 저들에게만 신경 쓰는 이유를 모르겠습
니다. 또 류카라한과 카이렌의 싸움은 저희에게 이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상대적으로 저희가 강해질 텐데 왜
굳이 그들과 싸우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아카폴리안이 오래전부터 가졌던 의문점이다. 류카라한이 가진
세력은 새로 얻은 병력을 제외시키더라도 녹록지 않은 세력이다.
굴레를 벗은 존재만 무려 여덟 명. 개개의 능력이 드래곤에게 크
게 뒤지지 않으니 엄청난 힘을 가진 세력이라 볼 수 있다.
반면 카이렌 일행 중 굴레를 벗은 존재는 고작 두 명. 카이렌과
프라하뿐이다. 마족으로 알려진 투바와 뒤늦게 가담한 루이에를
포함하더라도 네 명밖에 없는 셈이다.
"카이렌은 단순히 굴레를 벗은 존재 한 명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강하다 "
"하지만 류카라한 역시 단순히 굴레를 벗은 존재 한 명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강합니다. "
"하하하하. 넌 카이렌에 대해 너무모르는구나. 하긴 그놈은네
가 태어나기 이전에 살았던 놈이니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흠, 류
카라한이라 그래, 그 녀석도 제법 강한놈이지. 하지만 카이
렌과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다. 류카라한 같은 놈 둘 정도는 덤벼
야 걱우 동수를 이룰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놈이 카이렌이다. "
아카폴리안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 정도로 강할 줄
은 생각지도 못한 탓이다.
아카폴리안도 카이렌과 류카라한의 과거 기록을 본 적이 있었
다. 그리고 그 기록들을 보며 카이렌과류카라한을 거의 같은 선
상에 두고 파악했다. 아니, 실제로는류카라한을조금 더 높게 보
는 경향이 강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크게 부풀리기를 좋아한다. 특히 강
자가 등장하면 그를 영웅시해서 실제 실력보다 더 강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엘프인 카이렌의 행적은 오히려 축소되어 기록되었다. 폭
력과 거리가 먼 종족인 엘프. 때문에 카이렌의 행적을 축소시키는
그 자체가 엘프의 치부를 감추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로드님. 카이렌의 실력을 십분 인정해 준다 하더라도 류카라한
의 세력이 더 크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머릿수에서 이미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데요. "
"그래. 실제 싸운다면 류카라한의 세력이 이기겠지. 하지만 류
카라한 그놈들은 내부가 결속되어 있지 않아. 모래로 지은 성과 비
슷한 거지.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허물어지게 될 거다. "
로테마이어스의 판단은 정확했다.
실제로 류카라한을 마음으로 따르는 이는 라이칸드로프인 이리
아나 케이플과 돈네리아 미스티크뿐이다. 아카폴리안은 이 현상을
강자를 숭상하는 라이칸드로프의 습성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이 역시도 확실한 건 아니었다.
반면, 잉글리아트를 비롯한 다섯 명의 존재들은 류카라한을 껄
끄러워했다 당장 드래곤과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류카라한을 무너
뜨리기 위해 궁리를 짤 그들이었다.
물론, 류카라한을 포함한 세 명의 세력이 잉글리아트 일행보다
더 강한 건 분명했다. 하지만 암습이나 기습을 랙한다면 승부를 장
담하기 힘들었다. 자칫하면 내부 분열이 공멸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아, 그렇군요. "
"하지만 지금 류카라한 놈들은 강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드래곤
들을 쉬이 싸움에 투입하지 못하는 거고. "
"알겠습니다, 로드님. 한데
로테마이어스도 이런 식으로 질질 끄는 싸움은 좋아하지 않는
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드래곤들을 대동하고 싹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지금 카이렌 일행과 류카라한 일행의 힘은 너무 강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이겨도 손해였다. 자칫 이기더라도 자신을 따르
는 드래곤의 반 이상을 잃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한데?"
"로드님의 판단으로 보자면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가 카이렌 일
행에게 간 건 너무 위험한 행동 아닙니까?"
"이기지 못할 게다. "
"그런데 왜?"
"그들은 카이렌이라는 존재를 너무 우습게 생각하고 있어. 몸으
로 느끼게 해 줘야지. "
로테마이어스는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가 카이렌 일행을 어떻
게 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았다. 한데도 그들을 보낸 건 두 가지 생
각에서였다.
첫째는 자신을 따르는 드래곤에게 상대의 힘을 깨닫게 해주는
것. 그래서 다시는방심해서 당하지 않도록하는 거였다. 물론운
나쁘면 두 명의 드래곤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죽이지 않고 살릴 수만 있다면 이번 일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클 게 분명했다. 어쨌든 앞으로는 상대를 우습게 보는 드래곤은 없
을 테니까.
둘째는 카이렌의 힘을확인할수 있다는 데 있다. 로테마이어스
조차도 확실히 파악할 수 없는 카이렌의 실력. 어쩌면 굴ㄹ 11 를 벗은
존재들과의 싸움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카이렌을 제대로 팍악할
수 있다면 나머지 싸움은 쉽게 해결될 거라 믿었다.
'문제는 라한 그놈인데. '
카이렌의 실력을 알아내더라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라한.
도무지 어떤 방법으로 힘을 쓰는지, 정말 마법사가 맞는지조차
의문투성이인 존재가 라한이었다. 그의 실력을 알아내기 위해 리
투미아와 벨라루스를 보내긴 했지만, 그들이 라한의 실력을 파악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카폴리안. "
"예, 로드님. "
"프리미아가 어디 숨어 있는지 찾았느냐?"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로이나님의 레어를 들른 후로는 흔적이
완전히 지워져서 죄송합니다. "
카이렌 일행을 떠났던 프리미아와 레테아는 먼저 로이나의 레어
부터 방문했다. 그곳에서 잡기에 능하다는골드 드래곤 베르
네미스를 만났고, 그에게 드래곤의 흔적을 없애는 도구를 얻어갔다.
그때부터 프리미아의 행적은 드래곤들의 이목에서 완전히 사라
졌다.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가 서로를 알아챌 수 있는 드래곤 고유
의 기운 한데 다른 드래곤들이 풍기는 기운을 프리미아만 풍기지
않고 있으니 찾아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드래곤이 근처에 나타났
을 때, 몸을 숨기면 그만이었으니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
는 한 찾는 건 요원해 보였다.
"베르네미스. 그놈 짓이겠지. "
"그런 걸로 보입니다. "
"베르네미스. 두고 보자. "
골드 드래곤 베르네미스. 그는 오래전부터 드래곤 사이에서 이
단아라 불렸다. 늘 사고만 치고 다녔고 별 희한한 연구 때문에 산
을 시끄럽게 만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로테마이어스만큼은그를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했다.
한데 지금 순간만큼은 베르네미스라는 존재가 성가시기 그지없
었다. 그만 없었으면프리미아를 일찌감치 찾았을테고, 그럼 카이
렌 일행과 함께 지내는 동안 얻어낸 단편적인 지식이라도 얻었을
터였다.
"계속 흔적을 찾고 있으니 곧 어떤 소식이 있을 겁니다. "
"됐다. 프리미아에게는 신경 끄고 카이렌 그놈들과 싸우기로 한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 그리고 라한과싸우기로 한 리투미아, 벨
라루스를 살려서 복귀시키는 데 최선을 다해라. "
"알겠습니다. "
예전에는 라한에 대한 정보를 캘 패 정령왕을 이용했다. 이 때문
에 라한의 행적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한데 얼마
전부터 정령왕들이 라한을 훔쳐보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 최상급 정령 역시 라한에 대한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라한에 대한 정보 수집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
래도 상급 정령을 이용한 정보 수집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한 탓이다.
무엇보다 정령왕들의 선언으로 가장 충격을 받은 이는 정보 담
당 아카폴리안이 아닌 로테마이어스였다. 안 그래도 실력을 종잡
을 수 없어서 신경 쓰였던 상대가 라한이다. 한데, 정령왕들마저
돕고 있으니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대체 왜, 그놈이 대체 뭔데
로테마이어스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하자 아카폴리안이 조심스
럽게 레어를 나갔다. 아무리 로테마이어스를 존경하는 그라도 괜
한 불똥에 화를 당하고 싶지는 않았음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라한은 인질들을 골방에 처박아 놓고 며칠
째 시간만 보냈다. 막상납치를 해 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처리할
지 결정하지 못해서였다.
-주인. 저놈들 그냥 둘 거야?
"왜?"
-밥만 축내잖아, 그냥 처리해 버리자.
"너 정령 맞아?"
테세르의 말을 라한이 황당하다는 듯 되받아쳤다. 어떻게 된 게
정령이라는 놈이 인간인 라한보다 더 죽이고 싶어 안달이니.
-주인답지 않게 왜 그래? 그냥 죽여 버리자.
" 시끄러 . "
라한도 요즘 행동이 평소의 자신과 많이 다르다는 걸 잘 알았다.
물론, 의도적으로 인간적이고 싶어 하는 라한의 마음이 반영된 결
과였다.
-그럼 어쩔 건데?
"생각 중이야. "
처음에는 저들의 기억을 일부만 지워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휴란트에 대한 정보가 그들에게는 단순한 정보 그 이상이 아니기에
지우는 것도 쉬울 거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테세르가 라한의 정체에 대해 묘한 소리를 하면서부터
일이 틀어졌다. 라한이 마족이라는 테세르의 헛소리가, 그들의 뇌
리에 충격적인 사실로 박혀 있을 터. 아무리 라한이라도 지우는 게
그리 쉽지 않았다
'골치 아프군. 그냥 강행해 버려?'
두 기억을 모두 지우는 것도 가능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실패 확률이 너무높았다. 설사 성공한다 하더라도완벽하게 지우
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평시에는 몰라도 꿈을 꾸거나 어
떤 계기가 생기면 지웠던 기억이 온전히 살아나 버리는 것이다.
'테세르의 말처럼 그냥 죽여 버려?'
라한도 인질을 처음 잡아왔을 때, 그냥 죽여 버릴 작정을 했었
다. 그렇지만이내 고개를젓고는한숨을푹푹쉬었다. 살인이라는
해결책이 내키지 않은 탓이다.
'방법이 없을까? 음 아! 그렇군. '
"테세르. "
-어?
"가서 에테로 좀 불러와. "
-어? 알았어.
테세르가 사람 크기로 몸을 불린 후 밖으로 뛰어나갔다.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은 채.
테세르는 근 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돌아왔다 거리를 생각하
면 상당히 빨리 온 편이었다. 테세르의 존재를 알고 있던 에테로가
그를 보자마자 달려온 듯했다
"돌아왔구먼. 그래, 일은잘해결됐는가?"
"돌아온 건 며칠 됐습니다. 일도 거의 해길됐고요. "
"날 부른 걸 보니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말해 보게. "
"그게 저 ."
라한이 인질을 데리고 오게 된 경위를 차례로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에테로가 의문을 품고 라한을 바라봤다.
"얘기만 들어서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 "
"저들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문젭니다. "
"그냥 죽여 버리면 될 것을 뭘 그리 고민하는가?"
에테로의 말에 라한이 그를 게슴츠레하게 쳐다봤다. 그 말 진심
이냐고 묻는 눈빛이 었다.
라한의 눈빛에 에테로가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허허허. 그눈좀풀게. 이거 부담스러워서 원. 미안하네."
"전, 절 시험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
"알겠네, 알겠어. 그러니 그눈에 힘 좀풀게."
에테로가 죽여 버리라고 말한 건 라한의 심성을 알아보기 위해
해 본 말이었다. 라한도 그 말을 바로 짐작하고 오히려 에테로를
압박한 것이다.
"그럼 해결책을 내주시죠. "
"그 눈빛이 무서워서라도 말해야겠구먼. "
"그래주시면 고맙죠. "
"그냥 저들을 우리가 데리고 가겠네 그럼 되지 않겠는가?"
에테로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너무 쉬워 보이는 단순
한 대답에 오히려 라한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며칠 동안
머리 싸매고고민했었는데, 저렇게 쉽게 대답해 버리다니. 며칠 동
안 고민했던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았다.
'빌어먹을. '
"데려가서 어쩌실 겁니까?"
"우리가 정보 길드라는 걸 잊었는가? 저들을 다시 교육시켜서
우리 정보원으로 쓰면 그만이지 뭘 그러는가? 잘하면 저들에게서
엘베로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도 있는 일이고. 이래저래 우
리에겐 좋은 일이지. "
막상 대답을 들으니 정말 간단한문제였다 어차피 저들은 정보원
으로 키워졌다. 그리고 정보를 팔아 돈을 번 사람들이다. 직장을 엘
베로 정보 조직에서 베사 길드로 바찐주면 그만인 문제였다.
물론 엘베로에 대한 충심이 남아 있어서 베사 길드에 오히려 해
를 끼칠 수도 있다. 하지만 라한에 대한공포심과 베사 길드의 철
저함이 적절하게 결합된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성싶었다.
"그렇 .군요. "
"그 문제 말고는 더 할 말 없는가?"
"예. 없 아,혹시 베센왕국에 대해 아십니까?"
"베센? 거긴 루이나 왕국에게 영토의 반을 잃은 나라 아닌가?
이미 세가 기울어서 약해진 곳일 텐데. "
베센 왕국의 몰락은 대륙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그 몰락이 루
이나 왕국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건 더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이고 지금 베센 왕국은 루이나 왕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까지 몰락했다
더 이상 대륙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인 베센 왕국. ell
테로는 라한이 왜 그 나라를 언급하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은 베센 왕국의 세작을 만났습니다. "
"세작?"
"예. 나메라 왕국에 세작을 보냈더군요.
흠, 역시 베센 왕국이 그리 쉼게 영토를 포기할 리 없지
다른 사람들은 베센 왕국을 이미 무너진 나라라고 평가했다 하
지만 에테로는 좀 다르게 판단했다.
순식간에 무너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통의 강호라고 할 수 있
는곳이 베센 왕국이다. 그런 나라가 자기 영토의 반 가까이를 잃
고 주저앉아 있을 리 만무했다.
.예. 땅을 되찾으려고 노력은 하더군요. 근데 방법이 잘못됐습
니다. "
.무슨 발법을 택했던가? 혹, 비밀리에 군사라도 키운 건가?"
.아닙니다. 루이나 왕국에 다른 나라의 군사 정보를 알려주고
거래를 통해서 되찾으려 하더군요. "
"멍청한
에테로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재고할 여지도 없이
잘못된 판단이었기에 저절로 나온 말이었다.
"예. 멍청한 판단이죠. "
.루이나 왕국이 타국을 점령해서 더 강한 힘을 얻으면 오히려 힘
들어지는 건 베센 왕국이거늘, 어찌 그런 멍청한 판단을 했는지.
쯧쯧. 이게 다 그 썩어빠진 류칸트 공작 때문이지. "
에테로의 입에서 낯선 이름이 거론되었다. 이에 라한도 약간의
호기심을 갖고 재차 물음을 던졌다.
"류칸트 공작이 누구죠?"
"베센 왕국 유일한 공작일세. 원래는 두 명이었는데 루이나 왕
국과의 전투에서 한 명이 죽고 이제 유일한공작이 된 놈일세. 현
재 베센 왕국의 실세라고 할 수 있지. "
"근데 그가 왜요?"
"전통적으로 베센 왕국에서 공작을 지냈지만 자국에 불만이 많
것 같더군 하긴자기 뜻대로안되니 화가났던 거겠지 "
"그가 원하는 게 뭔데요?"
"해군 통수권. "
류칸트 공작은 베센 왕국의 실세 중에 실세이다. 그를 따르는 귀
족이 왕국 귀족의 반이 넘으니 가히 엄청난 세력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그도 베센 왕국에서 갖지 못한 게 딱 하나 있다. 군사 통치
권. 이미 약해질 대로약해졌지만, 해군력만큼은대륙최강인 나라
가 베센 왕국이다. 이 나라의 해군 통솔권은 타국의 해군 통솔권과
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해군 통솔권?"
"그렇네. 베센 왕국의 해군은 대륙 최강이라불러도 과언이 아
니야. 대륙최강의 기사단을꼽을때, 카르왕국과베루니아왕국,
케라스 왕국. 이 세 나라가 경합을 벌이지만, 해군력은 베센 왕국
에게 견줄 만한 나라가 없네. 말 그대로 최강이라는 얘기지. "
"해군 통솔권을 달라고 했는데 허락을 받지 못한 거군요. "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베센 왕국의 해군 통솔귄은 전통적으로
왕실의 피가 섞인 사람이 맡아 왔거든. 제아무리 류칸트 공작이라
도 해군 통솔권을 얻어낼 수는 없었을 게야.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
에테로가 라한의 호기심을 조금씩 자극해 왔다 어차피 현재 라한
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었기에 에테로의 말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방법이 뭐죠?"
"베센 왕국이 무너지면 되는 거야, 좀 더 정확하게는 베센 왕국
의 왕조가 무너지면 되는 거지. "
"그럼 류칸트 공작이 배신을 한다는 말입니까?"
"아직 거기에 대한 정보는 없네. 하지만 캐려고만하면 그리 오
래지 않아서 캘 수는 있네.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테로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류칸트 공작의 배신. 그것도 적국인 루이나 왕국과 손을 잡았다
확신이 서 있었다
"에테로님의 말투를 들어보니 루이나 왕국을 의심하고 있나 보
군요. "
"그럴 수밖에 없지 최근그가펼친 정책들이 전부그렇거든. 전
쟁 중에 베센 왕국의 국왕이 죽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휘둘리지는
않았으련만. 안타깝군. 안타까워. "
베센 왕국의 전대 국왕은 루이나 왕국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
었다. 지금은 고작 나이 열두 살의 어린아이가 베센 왕국의 국왕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 물론 귀족들이라도 똑똑하면 그나마 정치
가 안정될 수 있겠지만, 현재 왕궁에 출입하는 고위 귀족의 반수
이상이 류칸트 공작의 편이다. 류칸트 공작이 정책을 마음대로 농
락할 수 있는 여건이 완벽하게 주어진 셈이다.
"류칸트 공작이라 에테로님. 그에 대해 조사해 주십시오. 그
리고 그를 돕고 있는 귀족 중에서 다른 나라와 선이 닿아 있는 자가
있는지도 함께 조사해 주시고요. "
"알겠네. 또 해줄 일은?"
"전에 말했던 검은 측과 회색 측. 그들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
는지 찾아봐 주십시오. "
"감시하는 측? 우리 말고 또?"
"네. "
"또 다른 세력이 있는 건가?"
"예. 그 세력이 누군지는 묻지 마십시오 들으면 기분이 별로 안
좋을 겁니다. "
"흠, 알겠네. "
라한이 생각하는 또 다른 세력은 물론 로테마이어스를 비롯한
드래곤들이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정보의 중요성을 알 터.
류카라한 일행과 카이렌 일행에게 나름대로 눈을 심어뒀을 게 분명
했다.
라한은 그들이 심어놓은 눈을 뽑아 버릴 생각이었다.
"절대 그들의 정체가 뭔지 캐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눈이 있
는지 알아봐 주시고, 있으면 그들이 각 진영에서 어떤 신분으로 있
는지만 제게 알려주시면 됩니다. "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도록 하겠네. -
상대는 드래곤. 제아무리 뛰어난 정보 길드라도 드래곤의 눈을
완벽히 속이는 건 거의 덜가능하다 자칫 라한의 눈과 귀가 될 베
사 길드가 드래곤에 의해 대륙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알아볼 정보가 또 있는가?"
"아닙니다 이 정도면 됐습니다. 매번 이런 번거로운 일만 시키
군요. "
"하하하. 아닐세. 어차피 이건 내가할 일이니 신경 쓰지 말게
뭐, 공짜고객이라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다크시안님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지. "
에테로가 라한에게 농담을 걸어왔다. 몇 번 보지 않았음에도 서
로가 어느 정도 친숙해졌다는 증거였다. 라한도 에테로의 그런 농
담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농담이 자신을 인간으로 인정해 주
는 것 같아 반길 정도였다
"하하, 공짜고객이라. 그러고보니 그렇군요. 나중에제가타국
에 가게 되면 선물이라도 사와야겠습니다. "
"그거 좋지. 대륙 서부의 밀리아노 왕국에 새로운 고대 유적이
발견되었다더군. 아마, 좋은마법 무구도 몇 구 나왔을 게야. 아,
그렇다고 그 마법 무구를 구해달라는 말은 아닐세. 하하하하하. "
"그럼요. 에테로님이 그런 황당한 요구를 할 리가 없죠. "
"이런, 그게 그렇게 되나? 하하. 그럼 이만 가 보겠네. 다음에
또 보세. "
"알겠습니다. "
라한이 에테로를 집에서 쾌 먼 곳까지 배응했다. 좀 어색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라한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군가를 배웅해 본 적이 거의 없었
다. 있어봐야 아주 어릴 적 아버지 필슨 백작이 왕국에 갈 때 정도
였다. 그런 그에게 에테로를 배웅하는 일은 꽤나 의미 있게 다가왔
다. 보통 사람이 된 그런 기분을 라한에게 선사한 것이다.
'보통사람이라. 그래. 나도보통사람이지. 보통사람이어야지.
보통의
언젠가부터 라한은 평범해지고 싶어 했다. 남들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 다른 사람이 겪기 힘든 일은 자신에
게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보통 사람. 스스로가 인간이고 싶어 하는
라한의 소박한 소망이었다.
그렇다고 오래 살고 싶은 욕구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래오래
살면서도 평범해지고 싶은, 소박하지만 조금은 무리한 요구였다.
인간 VS 드레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라한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자신의 집 부
근에서 낯선 존재의 기운을 느낀 탓이다
보통 사람이라는 거 내 욕심인가
라한이 착잡한 얼굴로 주변을 쭉 었다
둘이군
테세르 슈라 변 이리와라
어
주인 갑자기 왜 그러지
크릭
테세르는 라한의 부름에 잽싸게 달려왔다 그 역시 드레곤의 접
근을 느낀 탓이다 하지만 슈라와 변은 기감에 둔한 존재였기에 드
레곤의 접근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 ㄸ문에 라한의 갑작스런 부
름도 의아하게만 느껴졌다.
-왜는 왜야? 라한 주인이 오라면 빨리 올 것이지.
-그게 그렇지만
-크릭.
슈라와 변에게 테세르가 일침을 놓았다. 상황 파악 못하고 느릿
느릿 움직이는 게 답답했던 모양이다.
예전 같으면 슈라와 변도 라한의 부름에 잽싸게 뛰어왔을 터였
다. 과거에는 라한도 약간은 명령하는투였고, 슈라와 변도그 말
에 절대 복종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 라한은 테세르와 슈라, 변에게 자유를 선사해 줬다.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그들을 부르는 일 자체를 자제한 것이다.
"됐어. 내 뒤로 와. "
-어? 어.
테세르가 약간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라한의 너무나도
태연해 보이는 태도 때문이다.
상대는 다름 아닌 드래곤. 태연하게 상대할 만큼 약한 존재가 아
니다. 한데, 라한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봐! 그만 나오지.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거야?"
라한의 부름에도 드래곤들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다. 설마
자기들이 들켰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의 무반응에 라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의 침묵이 드래
곤 특유의 오만함 때문임을 아는 것이다
"야! 거기 둘! 빨리 좀 나와. 귀찮으니까. "
라한이 지붕 위 굴뚝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에
지붕이 몇 차례 들썩이더니 흐릿한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형체가 완전해지자 엘프 모습을 한 남자와 아름다운 인간 여성
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모습이었다.
"음- ! "
"흠 i "
나타난드래곤들이 일제히 신음을흘렸다. 자신들이 들킨 게 상
당히 의외였던 모양이다.
"나오라고 할 때 바로 좀 나오면 덧나나? 젠장. 왜? 너희들이 들
킨 게 신기해? 이해가 안 가?"
"어떻게 알았지? 그냥 감으로 찍은 건가?"
"풋, 하여간 너희 드래곤들은 항상 그런 식이지. 나 기분 엄청
안 좋거든. 용건이나 말해 봐. "
라한의 시비조에 드래곤들이 눈을 꿈틀거렸다. 하찮게 생각하던
인간에게 이런 식의 말을 들은 게 화가 치밀었음이다.
"네가 라한이냐?"
"알면서 온 거 아닌가?"
"역시 시건방진 놈이로군. 나벨라루스. 내 이름을걸고오늘널
죽여 버릴 걸 맹세한다. "
"벨라루스! "
골드 드래곤 벨라루스의 말에 함께 온 리투미아가 외마디 외침
을 토했다. 그가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는 대목 때문이다.
긴 수명과 엄청난 마법을 가진 드래곤. 수명과 능력만으로 따지
면 축복받은 생명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신은 모든 생명체에게 공평한 법.
드래곤에게 이런 축복만 선사핼을 리 만무한 일이다. 그들에게
긴 수명과 뛰어난 마법을 준 대신 이름의 가치와 대륙의 중재라는
엄청난 사명을 부여한 것이다. 이 탓에 드래곤은 맹세를 할 때도
심사숙고해야 하고, 이름을 걸 때도 조심해야 한다.
"리투미아. 내가 설마 저놈을 놓치기라도 한다는 말이야?"
"그런 말이 아니라 이름이라는 게
드래곤의 맹세는 생명보다 소중하고 드래곤의 이름은 그들이 가
진 마법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떠돈다. 함부로 맹세하지 않고 함부
로 이름을 걸지 않는 드래곤을 빗대는 말이다.
한데, 오늘 벨라루스가 자신의 이름을 걸었다. 성공 여부를 떠나
서 이름을 건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됐어. 저놈을죽이면 되는거야 리투미아. 런 저놈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만 해, 죽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
"그게 알았어. "
골드 드래곤을 지혜의 드래곤이라 부른다. 그건 그들이 탐구하
고 연구하기를 좋아하는 습성을 가져서였다. 그런 골드 드래곤 벨
라루스가 약간은성급한 일을 저질러 버렸다. 모든드레곤이 지혜
로운 건 아닌 모양이다.
"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모양이군. "
"져? 골드 드래곤인 나 벨라루스가 진다고? 하하하. "
라한의 말에 벨라루스가 대소를 터트렸다. 아직도 라한이라는
존재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싸워 보면 알겠지. 본체로 변해라. 시간을 주마. "
"애송이. 넌 이 몸으로도충분하다. 먼저 덤벼라 "
"난 기회를 줬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
라한도 두 번 권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권해 봐야 들
을 것 같지도 않았다. 또 굳이 불리함을 자처하고 싶지도 않았다.
"슈라, 테세르, 변. 내가말하기 전까지는 끼어들지 마라. 불의
공 "
라한의 공격에 벨라루스가 허리를 슬쩍 틀어 피했다. 너무 자연
스러운 회피에 라한이 이채를 발했다.
'싸울 줄 아는 놈이군. '
과거에 싸워봤던 크라이드리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상
당히 많은 전투 경험을 가진 게 분명했다.
"이번엔 내 차례다. 윈드 커터! 윈드 토네이도! "
"헛!"
라한이 다음 공격을 준비하려 할 때, 벨라루스의 마법이 날아들
었다. 너무 적절한 타이밍이라 라한은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을 뻔
했다.
"윈드 글라이 더 !"
수없이 많은 바람의 칼날이 라한의 눈을 어지럽혔다. 과연 바람
을 다스리는 골드 드래곤다운 공격이었다.
"아직 멀었다. 헬 파이어! 윈드 토네이도! "
"헛! 막기! "
불 마법과 바람 마법이 라한을 강타했다. 순간적으로 신화력을
이용해 막았지만 충격이 작지 않았다
"윈드 글라이더! 윈드 블레이드! "
벨라루스가 다시 윈드 글라이더로 라한의 눈을 어지럽혔파. 그
리고 그 사이로 거대한 바람의 검이 라한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공간으로! 막기 !"
라한이 뒤로 순간이동하며 몸 주변에 막을 씌웠다. 막기는 촉시
날아올지 모르는 마법을 미리 대비한 거였다.
"크크크, 인간의 힘이란고작그런 것이다. 이제 드래곤의 위대
함을 알겠는가?"
다행히 이번은 공격이 아니라 벨라루스의 말이었다. 라한을 언
제든 죽일 수 있는 상대로 판단한듯했다.
"그렇군, 지금까지 내가 건방지게 굴었던 것. 진심으로 사과.
바람의 칼날! 물의 소용돌이!"
라한이 사과하는 척하며 두 가지 공격을 퍼부었다.
처음 라한의 공격은 상대를 탐색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그래서
공격의 위력도 약했고, 방향도 그리 정확하지 않았다.
한번 벨라루스의 실력을 본 라한은 본격적으로 공격을 하기 시
작했다. 라한의 본신의 힘을 담은 신화력의 정화인 셈이다.
쿠루루룽!
"헛!"
먼저 땅의 흔들림이 가해지자 벨라루스의 발아래에서 지진이 시
작되었다. 다른 곳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오직 벨라루스가 디디고
선 발 바로 아래만 흔드는 방법이다. 라한의 세밀한 신화력 움직임
이 만든 결과였다.
"플라이!"
땅이 흔들리자 벨라루스가 플라이 마법으로 날아올랐다. 그로서
는 가장 자연스러운 대처법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처는 라한 역시
예상하고 있었다.
"엡솔루트 실드 "
라한의 다음 공격인 바람의 칼날이 벨라루스의 전신을 난자하듯
쇄도했다. 갑작스럽게 이어진 공격에 벨라루스가 몸 전신에 투명
한 막을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흐트러졌지만 용케도 마법 시전에 성공했다.
그러자 라한의 물의 소용돌이가 벨라루스가 만든 실드를 감쌌
다. 이 때문에 벨라루스의 시야가물로완전히 가려졌다.
"뭐, 뭐냐?"
"아직 멀었다. 불의 지붕! "
불의 지붕은 엄청나게 뜨거운 열기로 위에서부터 내리누르는 방
법이다. 보통 사람은 미처 닿기도 전에 숨이 막혀 죽는 엄청난 공
격법이었다.
이, 이놈이
"얼음의 물방울!"
라한이 벨라루스의 말을 깨끗이 무시하고 다음 마법을 시전했
다 이번 전투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의 발로였다.
얼음의 물방울.
불의 지붕과 반대로 바닥에서 위펄 얼음 덩어리가 튀어 오르는
방법이다. 얼음이 튀면서 엄청난 한기를 발산하기 때문에 웬만한
이는 의식하기도 전에 얼어 버린다
"허억! 으악! "
벨라루스가 비명을 질러댔다. 지금은 드래곤의 체면이고 뭐고
따질 때가 아니 었다.
상체는 뜨거운 열기에, 하체는 엄청난 한기에 휩싸여 미칠 것같
았다. 너무고통스러워 절로비명이 질러졌다. 맹세코태어나서
처음 겪는 고통이 었다.
"멈춰라!"
라한의 먼이은 공격에 벨라루스가 거의 유린당하듯 처참하게
개졌다. 이 모습을 보고 리투미아가 라한을 제지하고 나왔다.
"네 이름은?"
난 그린 드래곤 리투미아다. "
골드 일족보다 상황 판단이 빠르군, "
.먼저 저것 좀 어떻게 해 주지 않겠나?"
리투미아가 아직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벨라루스를 보며 말했
다.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벨라루스. 그 소리를 듣는 것만
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이제 그만. "
털썩!
라한의 짧은 한마디에 이전에 시전했던 모든 공격이 사라졌다.
벨라루스는 공격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그 자리에 쓰러져 의식을 잃
었다. 정말 허무한 패배였다.
"네 말대로 풀어줬다. "
"그, 그게
리투미아가 불안한 듯 말을 더듬었다. 이렇게 순순히 풀어줄 거
라 예상 못한 것이다.
,넌 어쩔 거지? 그냥 돌아갈 텐가? 아니면 나와 싸울 텐가?"
"그냥 돌아 .가겠다. "
말을 하는 리투미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당하게 왔다
가 이렇게 돌아가는 게 수치스러웠다.
"돌아가? 누구 맘대로?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 그냥 왔다
가 즐기고 가면 되는 줄 알았는가?"
"원하는 게 뭐지?"
리투미아가 어두운 얼굴로 라한을 바라봤다. 그가 무슨 요구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싸워서 담판을 짓고 싶었다.
한데 벨라루스를 단 10 분 만에 제압해버린 라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난 흠, 또 다른 손님인가?"
"뭐?"
"나오는 게 어떤가?"
"역시 로드님의 예상이 맞았군. "
라한의 집과 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금발의 엘프 여성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등장에 리투미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자아졌다
"아카폴리안!"
"리투미아. 꼴이 말이 아니군. "
"그게
아카폴리안의 말에 리투미아가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유독 고개를 많이 숙이는 리투미아였다.
"리투미아. 질책하려는 건 아니었다. "
"미안하다. 우리의 자만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
"알면 됐다. 라한. "
아카폴리안이 라한을 불렀다.
라한은 아카폴리안이 나타난 뒤부터 미간을 좁히고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카폴리안이 불렀을 때도 그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계
속 같은 표정 이 었다.
-주인. 저 드래곤이 부르잖아
-주인.
,야. 내가 저놈들 부하야? 저놈들이 부른다고 일일이 대답해야
7"
-그건 아니지만
지금 라한의 능력이면 아카폴리안과 리투미아 둘 모두를 처리할
수 있다. 설사 벨라루스가 의식을 잃지 않아서 셋을 상대해야 한다
고 해도 승리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로드인 로테마이어스에게는 불가능했다. 저들과는 비교
도 안 될 만큼 강한 존재인 로테마이어스. 지금 라한의 힘으로는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처리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커졌는데
라한. 오늘 우리를 돌려보내 주지 않으면 로드님께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잘 선택해라. "
아카폴리안이 또다시 말을 했음에도 라한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
다. 지금 그만의 고민에 빠져 다른 곳에는 신경 쓰고 있지 않았음
이다.
"그럼 다음에 보지. "
인사를 마친 아카폴리안이 쓰러진 벨라루스를 들치 업고 사라졌
다. 그 뒤를 이어 리투미아도 모습을 감추었다.
-주인! 뭐 해? 나쁜 놈들 다 도망갔잖아.
"어? 어,"
라한이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이마를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현기증이 몰려온 것이다.
'시간이 더 필요해. 아직은 아직은 무리야. '
겉으로는 라한이 벨라루스를 아주 쉽게 제압한 걸로 보였다 리
투미아도 그렇게 생각했고 멀리서 지켜보던 아카폴리안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라한으로서는 몹시 힘겨운 싸움이었다. 라한의 신화력이
벨라루스가 사용한 엡솔루트 실드를 간신히 통과한 것이다.
벨라루스의 실드를 간신히 통과했다는 것. 그건 로테마이어스의
실드에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얘기와 같았다.
'통해야 할 텐데. '
라한이 아카폴리안과 다른 드래곤을 놓아준 건 나름대로 복안이
있어서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라한의 성격으로 보면 드래곤들을
살려두는 그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설사 살려주더라도 크라이드리안에게 한 것처럼 모종의 장치를
해서 힘을 못 쓰게 하는 것. 그게 라한이 지금까지 보여 온 성격이
자 패턴이었다.
그런 라한이 지금까지와 다르게 드래곤들을 무사히 돌려보냈다.
이때 로테마이어스가 어떻게 생각할까? 라한은 이 점에 착안해서
드래곤들을 그냥 돌려보냈다. 어느 정도의 도박성이 깔린 행동이
었다
만약 로테마이어스가, 라한이 자신에게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다
면 더 지체하지 않고 라한을 공격할 터였다. 이건 라한이 도박에서
패하는 것이다.
하지만 로테마이어스가 라한의 의중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래
서 좀 더 오랫동안 고민한다면, 그건 라한이 도박에서 이기는 거였
다. 라한으로서는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말이다.
레어로 돌아간 아카폴리안이 로테마이어스의 레어로 급히 들어
갔다. 두 눈으로 확인한 라한의 실력을 직접 말해주기 위해서였다.
"로드님. 로드님!"
"왜 이리 호들갑이냐?"
"라한이, 라한이 "
아카폴리안의 입에서 라한이라는 이름이 거론되자 앉아 있던
테마이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한과 관련된 모든 얘기가
테마이어스에게는 현재 최대의 관심사였다
"리투미아와 벨라루스가 죽었는가?"
.아닙니다. 벨라루스는 현재 자신의 레어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리투미아는 밖에서 로드님이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
"벨라루스의 부상은 어느 정도인가?"
.목숨에는지장이 없습니다. 한데, 쾌 오랫동안 요양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다행이군. "
말을 하면서도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벨라루스는 부상을 당했지만 리투미아는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라한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본 라한
은 적을 살려둘 만큼 너그러운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마 라한이 졌다는 건가?'
"라한은 어떻게 됐지?"
생각과 동시에 로테마이어스가 물음을 던졌다. 드래곤들의 무사
귀환이 라한의 패배를 의미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라한은 무사합니다. 아무런 부상도 없습니다. "
"뭐라?"
"예. 그게 저
"말하라. "
로테마이어스가 아카폴리안을 재촉했다. 그로서는 라한에 대한
그 어떤 것도 놓칠 수 없었음이다.
하지만 아카폴리안은 상황을 그대로 얘기하는 게 수치스러웠다.
대륙 최고라 생각했던 자신들의 패배가 아니던가? 거기다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 로드인 로테마이어스의 이름을 팔았다는 것도 부끄
럽기 그지없었다
"리투미아에게 물어보심이 나을듯합니다. 전투의 앞부분은 전
혀 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
"리투미아를 불러라. "
실제로 아카폴리안은 라한과 벨라루스의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
지 다봤다. 다만, 전투의 초반부에는 엄청나게 먼 곳에서 봤기에
세부 사정을 알지 못했던 것뿐이다.
아카폴리안이 레어를 나가서 리투미아를 데리고 돌아왔다 리투
미아의 얼굴도 수치스러움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리투미아. 라한과 벨라루스의 싸움을 네가 본 그대로 말하라 "
"예, 로드님 처음에는 벨라루스가거의 압도하는싸움이었습니
다. 벨라루스가 공격할 때마다 라한은 속수무책으로 밀리기만 했습
니다. 하지만 그가속임수를 써서 벨라루스가궁지에 몰리기 시작
했습니다 그럴 때, 그를따르는골렘과정령 그리고 정체를 알수
없는 놈들이 라한을 돕고 나서는 바람에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
리투미아가 사실에 거짓을 더해서 대답했다. 들어오기 전에 아
카폴리안에게 어떤 언질을 들은 듯했다.
"속임수라 . ."
로테마이어스는 그들의 목소리만 듣고도 거짓을 상당량 섞었음
을 눈치 챘다. 긴 시간의 삶 동안 겪은 수많은 경험이 참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게 만들었다.
"예. 분명 속임수였습니다. "
"그가 압도할 때 사용했던 공격이 어떤 것이었느냐?"
"예. 처음에는땅의 흔들림이라는묘한공격이었습니다. 어스퀘
이크(지진을 일으키는 마법)와 흡사한 마법 같았는데, 벨라루스의 발
아래만 흔들렸습니다. 그때 벨라루스는
리투미아가 자신이 보고 들은 전투 과정을 차분하게 전했다. 물
론 중간중간에 슈라, 테세르, 변을 전투에 참가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야 자신들의 패배가 조금이라도 만회될 테니 말이다.
'어설프군. '
로테마이어스는 리투미아의 설명을 들으며 정령, 골렘, 정체불
명의 존재가 싸움에 참가하지 않았음을 눈치 챘다. 그들의 공격이
앞뒤가 맞지 않는 어설픈 공격이었기 패문이다.
'그래도 마법사는 맞는 모양이군. 방법은 특이하지만 마법으로
보이는 공격이었다. '
로테마이어스는 라한을 마법사로 단정 지었다.
검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정령과골렘이 전투에 참가하
지 않았으니 정령사나 골렙술사로 보기도 힘들었다. 설사 그들의
참가를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전투 가담 정도가 너무 낮았다
"시전 시간은 어땠나? 주문은?"
"그런 건 일체 없었습니다. "
"흠- ! "
로테마이어스가 리투미아의 설명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신음
을 흘렸다. 시동어 없이 사용했다는 게 충격을 던져준 것이다.
"어떻게 살아왔지? 라한 성격상 너희들을 곱게 보내줄 리 없는
데. "
"그게 저
"탈출했습니 다. "
리투미아가 말을 머뭇거리자 아카폴리안이 잽싸게 대답했다. 차
마 로드의 이름을 팔았다는 얘기는 할 수 없었음이다.
"아카폴리안 그 말 책임질 수 있는가? 맹세할수 있느냔뜻이
다. "
"그, 그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
로테마이어스가 맹세를 언급하자 아카폴리안이 그 자리에 부복했
다. 맹세가 가지는 무게를 생각하면 더 이상의 거짓말은 무모했다.
고작 처벌을 피하기 위해 드래곤임을 포기할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어떻게 빠져나왔지?"
"저, 그건 사실 로드님의 이름으로 그를 협박했습니다. 우릴 죽
이면 로드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
"라한의 반응은?"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아무 대답도못했습니다.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말도 못한 채 굳어 있었습니다. "
아카폴리안이 자신이 본 그대로 설명했다. 그 말에 로테마이어
스가 더한 의혹에 쉽싸였다.
"그게 사실이냐 정말 라한이 굳어 있었느냐?"
"예.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
이번에는 아카폴리안도 당당히 맹세했다. 이 얘기만큼은 조금의
가감도 없는 진실이라는 의미였다.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에 복잡 미묘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가 아는 라한은 겁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과 대치했을 때도
당당하게 마주했던 라한 아니던가? 그런 그가 겁에 질렸다는 걸 어
떻게 믿겠는가?
한데 아카폴리안이 맹세까지 한 걸로 봐서 라한의 모습이 겁에
질려 있었던 건 분명한 듯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럼, 그럼흠, 라한이 아카폴리안을
속인 거로군. 날 끌어들이겠다는 뜻인가?'
라한이 정말 겁에 질렸다면 로테마이어스는 그를 치기 위해 움
직이는 게 당연한 일이다. 반대로 로테마이어스를 끌어들이기 위
해 겁에 질린 척했다면? 로테마이어스가 라한에게 가는 건 그의 함
정에 빠지는 일이었다.
'라한. 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거다. '
로테마이어스가 마음을 굳혔다. 라한의 실력과 그가 판 함정을
완전히 파헤치기 전까지는 그를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있지도
않은 라한의 함정을
"아카폴리안. 라한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
지 말고 그에 대한 모든 걸 알아내라.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리투미아가 물러난 후에도 로테마이어스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과연 오늘 내린 결정이 제대로 된 결정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라한이 최근에 힘을 얻었으며 그 힘을 제대로 흡수하고 컨트를
하지 못한다는 걸 로테마이어스는 모르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
았다면 시간을 재촉해서라도 라한을 치러 갔을 것이다
베센 왕국은 이미 몰락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안과밖으
로 썩을 대로 썩은 베센 왕국. 몇몇 귀족들이 나름대로 살려고 발
버둥 치고 있지만, 몰락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하지만 베센 왕국에도 마지막 한 수는 남아 있었다.
카르노 숲.
이 천혜의 요지가남아 있는한, 더 이상루이나왕국에게 유린
당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카르노 숲은 베센 왕국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루이
나 왕국에게 공격당하기 전에는 왕족 대대로 사냥을 해 온 곳이 이
곳이었다. 이 때문에 이 숲에는 베센 왕국 선조들의 수많은 기록과
흔적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루이나 왕국의 국경으로 전락해서 몇몇 병사들
외에는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 돼 버렸다.
화이트 드래곤 에스타리스와 레드 빌리마니는 대륙의 남부에 위
치한 카르노 숲에 도착해 있었다. 카이렌 일행을 치기 위함이었다.
벨라루스와 라한의 싸움을 듣지 못한 그들. 이 탓인지 얼굴에는
일말의 걱정스러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기는 건 기정사실이고
어떤 방법으로 카이렌 일행을 죽일까만 고민하는 그들이었다.
"저쪽이던가?"
"누가 오는군, "
에스타리스의 말에 빌리마니도 걸음을 멈추고 한쪽을 바라봤다.
희미한 실루엣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미천한 라이칸드로프 프라하입니
다. "
"위대한 드래곤을 만나게 돼서 반갑다 난 마왕의 아들인 투바
라고 한다. "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비천한 엘프 카이렌 인사드립니다. "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가죽이려 했던 상대 세 명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프라하는 폴리모프를 풀고 라이칸드로프 본연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카이렌 역시 로브를 벗고 긴 귀를 드러낸 채로 공
손하게 인사했다. 오직 투바만이 뭔가 불만인 듯 인상을 조금 찌푸
렸다.
"너희들이 그들이로군 우리가 왜 왔는지 알겠지?.
네. 잘압니다. 그래서 죄를청하러 왔습니다. -
프라하가 대표로 대답했다 평소에 그들의 대표가카이렌이었음
을 생각하면 좀 이례적인 일이었다
"네놈 이름이 프라하라고 했나?"
"예. 위대하신 존재이시여. "
"우리가 왜 왔는지는 알겠지?"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의 눈에 언뜻 살기가 스쳤다. 그 모습을
본 프라하가 잽싸게 대답했다.
"위대하신 존재께서 원하신다면 저희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
다. 다만
"다만?"
"로테마이어스님을 뵙고 싶습니다. "
프라하의 말에 듣고 있던 빌리마니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비
아냥거림 가득한 목소리로 비꼬듯 입을 열었다.
"흥. 로드께서 그리 한가한 줄 아느냐? 너희 같은 하찮은 존재를
만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도는 분이 아니시다. -
"저희가 로테마이어스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분에 무릎 꿇고
사죄해야 도리일 것 같아서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니 부디 허
락해 주십시오. "
너무 처량한 목소리에 빌리마니의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생각해보면 프라하의 말대로 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무엇보다
죽이지 않고 생포해온다면 더 큰 공로를 인정받을 것 같기도 했다.
-에스타리스. 어떻게 생각해?
고민 끝에 빌리마니가 에스타리스에게 메시지 마법으로 도움을 청
했다. 그의 의견과 자신의 생각을 합쳐서 결론을 내릴 작정이었다.
-글쎄. 들어주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왜?
-저놈들은 영악한 놈들이야. 쉽게 믿을 놈들이 못 돼. 거기다
우리가 명령받은 건 생포가 아니라 사살이야 괜히 일을 크게 만들
필요 없잖아.
에스타리스는 카이렌 일행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특히 말을 줄줄이 쏟아내고 있는 프라하라는 놈은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가장 큰문제는 자신들이 상대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거였다.
상대의 실력도 얼굴도 그리고 그들의 경력도 그들에 대해 아
는 거 라고는 마족인 투바를 제외한 카이 렌과 프라하가 검사라는 정
도에 불과했다.
-그래도 에스타리스. 생각을해 봐. 원래 로드께서 가장아끼던
드래곤은 크라이드리안이었어. 근데 그 멍청한 놈이 저놈들에게
죽었지. 지금로드께서는딱히 총애하고 있는드래곤이 없다는 얘
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건 알지만
에스타리스의 마음도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빌
리마니가 쐐기를 박듯 한마디 던졌다.
-운 좋으면 우리들 중 한 명이 차기 로드가 될 수도 있는 일 아
니겠어?
-그래. 맞아. 리투미아나 벨라루스도 라한이라는 놈을 생포해
오지는 않았을 거야. 우리가 생포해 간다면 로드께서도 우릴 다시
보시겠지.
둘의 의견이 모아졌다.
생포.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애써 고개를 가로
저었다
"좋다. 너희들을로드께 데려가도록하지. 단, 영악한네놈들을
그냥 데려갈 수는 없다. "
"저희가 스스로 팔을 묶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프라하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를 본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벨리마니와 에스타리스가 얼핏 듣기로 카이렌 일행에게는 마법
사가 없다 즉 손만 묶으면 거의 완벽히 제압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카이렌, 투바 이리 와. "
프라하가 뒤에 선 카이렌과 투바를 보며 말했다. 그 말에 투바가
발끈하듯 외쳤다.
"정말 묶을 작정이야?"
"응. "
"빌어먹을. 그래 네 멋대로 해라. "
투바도 체념한 듯 팔을 늘어뜨렸다. 얼굴 가득 자포자기한 표정
이었다.
"미안해. 어쩔수 없어. 다음생에 다갚을게."
"젠장. 시끄러. "
프라하의 사과에 투바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묶여서 가기로
마음먹기는 했지만 못내 마음에 안 드는 모습이었다
"카이렌 너는?"
"그냥 묶어, "
카이렌은 순순히 두 팔을 내밀었다. 프라하가 팔을 파르르 떨면
서 카이렌의 팔을 묶었다.
"이제 다 묶었습니다. "
"너도 묶어야지?"
아시다시피 저희 중에는 마법사가 없습니다 스스로의 팔을 묶
을 방법이 없는지라 죄송합니다. "
"이리 와라. 내가 묶어주마. "
빌리마나가 활짝 웃으며 프라하에게 손짓했다. 프라하는 못내
발이 떨어지지 않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터벅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꽉 묶어 주십시오. 제가 딴마음을 품지 않도록.
크크크, 네놈이 딴마음을 품어 봤자 내 손바닥 안이다. 건방진
라이칸 같으니 ."
빌리마니가 한소리 내뱉고 프라하의 손을 잡았다 파르르하는
게 프라하의 손이 몹시 떨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스위핑 퍼
"하앗! "
빌리마니가 포박 마법인 스위핑 퍼슨(sweeping person)을 사용하
려 했다. 이때 프라하가 빌리마니의 턱을 향해 손을 쭉 내밀었다.
채챙!
쇄도하던 프라하의 손목 아래에서 날카로운 검이 튀어나왔다.
이 상태로 프라하의 손이 빌리마니의 턱을 가격한다면, 두말할 필
요도 없이 빌리마니의 사망이었다.
"허엇! 블링 콕! "
"그게 맘대로 되나?"
순간적으로 공간 이동을 감행하려던 빌리마니. 그의 시도는 불
발에 그쳤다. 갑작스럽게 그의 목을 조르는 손 때문이다
푸욱!
"커억!"
"하나 끝!"
빌리마니의 뒤에서 목을 조른 이는 카이렌이었다. 오래전에 이
곳에 와서 은신을 하고 있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빌리마니를 제압
한 것이다. 이 모든 게 카이렌의 머릿속에서 나온 시나리오였다.
그럼 앞에서 손을 묶였던 이는? 사실 손이 묶인 이는 카이렌이
아니었다 지금 카이렌 일행의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하프 엘프 헤
르만. 그가 카이렌으로 분장해 드래곤들을 속였다.
"빌리마니! 빌리마니! 이, 이놈들. 어?카이렌이 둘?"
지지직!
앞에 묶여 있던 카이렌이 얼굴에서 무언가를 떼어냈다. 가죽을
얇게 저며 만든 가면이었다
묶은 줄을 쉽게 끊어낸 카이렌, 아니 헤르만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위대하시고 위대하신 드래곤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하찮
게 생각하는 엘프, 라이칸드로프 그리고 저 하프 엘프에게 꼼짝없
이 당했습니다그려. "
"야! 헤르만 난 왜 빼놓는 거야?"
"아! 위대한 마족 투바님도 계셨죠. 죄송합니다. "
헤르만이 웃으며 말하자 투바도 웃음으로 말을 받았다 스스로
최강의 존재라 생각하는 드래곤 그들을 완벽하게 속인 것만으로
도 통쾌한 기분이었다
"흥. 빌리마니가 없어도 난충분히 강하다. 우리 드래곤은 지상
최강의 존재로
"그래. 드래곤은 지상 최강의 존재가 맞지. 근데 거기에서 넌 제
외시켜야 할 거야. 넌 죽은 목숨이거든. "
프라하의 비아냥거림에 에스타리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당장 뛰
어나가서 프라하의 목을 비틀어 버리려는 기세였다.
하지만 억지로 화를 억누르고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좀 멀리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진짜 카이렌, 앞에서 도
끼를 어깨에 멘 채로 살기를 풀풀 흘리는프라하.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에스타리스의 요모조모를뜯어보고 있는투바. 대충서 있
는 듯해도 진영이 너무 교묘해서 쉽사리 공격하기가 힘들었다.
'저 가짜 놈만 빼고는 전부 강한 놈들이다. 빌어먹을. 실수했군.
이렇게 강한 줄 몰랐건만 '
카이렌만 없다면 어떻게 대등한 승부를 펼쳐볼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실력을 종잡을 수 없는 카이렌이었다.
'마나를 전혀 안 풍기는데, 대체 저놈은?'
카이렌에게서는 그 어떤 마나도 풍기지 않았다. 아니, 풍기긴 풍
겼으되 그로서는 느끼기 힘들 정도로 미약했다. 그런 카이렌이 모
습까지 숨긴다면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에스타리스. 죽이지는 않겠다. "
"무슨 소리냐? 내가 네놈들에게 잡히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7-
카이렌의 말은 이미 다 이긴 승자들이나 하는 말이다. 에스타리
스가 그 말에 발끈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 에스타리스도 자신이 패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존심 패문에 어떻게 버티고 있을 뿐, 실제로 싸운다면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라한에 대한 모든 걸 조사해라. "
"라한? "
"내 조건은그 하나뿐이다. 라한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았으
면 어디 있는지 그리고 죽었다면 누가 죽였는지 밝혀내라. 네가 할
수 없으면 로테마이어스에게 도움을 청해도 좋다. 그것만 지키면
널 살려주겠다. 맹세하겠는가?"
프라하가 에스타리스에게 맹세하라고 재촉했다.
맹세, 즉 약속하면 어떻게든 라한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설사
로드가 허락하지 않는다 해도 혼자의 힘으로라도 라한에 대해 반드
시 알아내야 했다.
"라한이라? 후후후. 그는 이미 죽었을 거다. "
"무슨 소리냐?"
가만히 있던 카이렌이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경악하는 카이렌
일행을 보며 에스타리스가 고소를 지었다.
"라한에게 드래곤 둘이 찾아갔다. "
"그럼 라한이
"그래. 며칠 전에 찾아갔으니 이미 죽어 사라졌을 거다. "
틸썩!
에스타리스의 말에 프라하와 투바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너
무 놀라운 사실 때문에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에스타리스. 그 말 사실이냐?"
"내 눈으로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드래곤둘이 갔으니 이미 죽
었다고 봐야겠지. 그놈은 너희들처럼 여럿이 아니니까. "
"흥. 그럼 아직 확실하지 않은 거로군. "
"꼭 눈으로 봐야만 아는 건 아니지. 라한이라는 인간은 분명히
죽었다. 너희들은 우리가 오는 줄 알았지만, 그놈은 그것도 몰랐을
거거든. 아마,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우리 드래곤들에게 제대로 대
처도 못 하고 죽었을 게 분명하다 "
에스타리스의 말이 카이렌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다가왔다. 은
거하던 곳을 떠나서 떠돌던 카이렌. 그가 왜 이들과 함께 행동했겠
는가? 전부 라한이 좋아서였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
음이 지금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카이렌의 안타까운 말을 들으며 에스타리스가 천천히 앞으로 나
섰다. 그리고 굵은 나무가 있는 곳에서 한쪽 팔을 올리고 비스듬히
기댔다.
"크크크, 모두 사실 컥!"
에스타리스의 목에서 검이 삐져나왔다. 에스타리스가 부릅뜬 눈
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흰머리, 말끔한얼굴그리고매서운눈동자 백준의 기사루이에
였다.
"네놈 네놈은
"루이에, "
촤악!
털썩!
루이에가 에스타리스의 목에서 검을 뽑았다. 피가 분수처럼 쏟
아져 바닥에 흥건히 고였다
"루이에 왜?"
"너희들이 찾는 그가 누군지 난 모른다. 하지만 이 드래곤의 말
에 현혹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설사 그가 죽었다 하더라도 우린
바꿔지 않아도 되지. 어차피 우리의 적은드래곤이었고, 라한이라
는 인간을 죽였다는 존재 역시 드래곤이니까. 내 말이 틀렸나?"
루이에의 설교에 카이렌과 프라하, 투바가 주먹을 꽉 쥐었다. 드
래곤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모습이었다.
"루이에, 고맙다. "
"당연한 일이었다. 5 일 동안이곳에 숨어 있었더니 몸이 뻐근하
군. 그만 돌아가지 "
"한 마리가 도망갔다. "
"응? "
갑작스러운 카이렌의 말에 일행들이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들은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 외에 누구도 보지 못한 탓이다
"멀리서 우리를지켜보는드래곤이 있었다. 풍기는기운으로봐
서는 아카폴리안 같더군. "
"아카폴리안?"
"쾌나 영악한 놈이다. 그가 이곳에서 있었던 대화를 다 들었을
거다. "
카이렌이 섣불리 에스타리스를 공격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었
다. 멀리 있지만 다른 드래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 운 나쁘면 두
마리의 드래곤과 싸워야 한다는 게 그를 머뭇거리게 만들었음이다.
"그렇게 가까이 있었나?"
"저 끝에 있는 나무 위에 숨어 있었다. 너희들이 이곳에 나타나
기 전부터 지켜보고 있더군. "
"흠. "
카이렌 일행은 이번 계획을 시행하기 위해 꼬박 5 일을 허비했다.
카이렌과 루이에가 이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도 5 일, 헤르만이
카이렌의 모습으로 지낸 것도 무려 5 일 전부터였다.
처음 카이렌이 이렇게 하자고 했을 때, 프라하와 투바는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냥 싸우면 되지 뭔 꽁수를 부리냐는 의미
였다.
하지만 수장이 된 카이렌이 강력하게 요청했고, 루이에와 헤르
만이 찬성하면서 계획의 시행이 결정되었다. 가장 고생할 카이렌
과 루이에, 헤르만이 찬성하는데 다른 이의 반대가 무슨 소용이 있
겠는가?
만약 이때 카이렌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혹은 5 일이 아닌 하루
이틀 전에 준비했다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어쩌지?"
"로테마이어스의 귀에 들어가면 분명 뭔가 조치를 취할 거야.
일단 돌아가자. 대책을 논의해야겠어. "
"빌어먹을. 류카라한 그놈들도 짜증 나 미치겠는데, 이게 뭐야?"
"자 자,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가서 일단푹 쉬고 내일 얘기하자. "
카이렌이 일행을 다독이며 몸을 돌렸다. 가장 먼저 앞서 가는 카
이렌. 그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라한. 제발
아카폴리안과 리투미아, 벨라루스가물러난후, 라한은 하루하
루를 초조한 심정으로 보냈다. 로테마이어스의 선택 여하에 자신
의 목숨이 걸린 탓이다.
"오늘도 무사히 넘겼군. "
-주인. 무슨 소리야?
"아니다. "
아카폴리안이 돌아간 지 오늘로 3 일이 지났다. 이 정도 시간으
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방법을 정하는 데에
도 이 정도의 시간이 걸릴 수는 있는 문제였다.
-주인. 로테마이어스가
"왔나?"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온 정신이 로테
마이어스의 행동에 가 있기에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어? 오긴 뭐가 와?
"아, 아니군. "
라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렇게까지 긴
장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미치겠군.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
로테마이어스의 결정은 어쨌든 라한의 권한 밖이었다. 지금 라한
에게는 신화력을 완전히 흡수해서 완벽히 컨트롤하는 게 먼저였다
한데 로테마이어스 때문에 도무지 정신 집중이 되지 않았다. 초
조한 마음이 라한의 수련을 방해한 것이다.
쾅! 쾅-!
"라한, 있는가?"
라한이 자기 자신에게 짜증을 부리려 할 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테로의 목소리였다.
"에테로님이군요. 정말잘오셨습니다 들어오십시오."
"허허, 이거 날 너무 반겨주는구먼. "
에테로의 말마따나 라한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에테로를 반
겼다. 듣고 있던 에테로마저 너무 밝은 목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앉으십시오. "
"어? 그그래. "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나야 뭐, 그저 그렇지. 근데 왜 그러는가? 그날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그날이라니요?"
라한이 짐짓 모른 척 에테로에게 되물었다. 그를 보며 에테로가
길게 한숨 쉬었다.
"말해 줄 수 없는 일인가 보군 "
"알고 계셨군요. "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네. 급히 해야 할 말이 있어서 되돌아 왔
었네. "
에테로도 며칠 전 라한이 누군가와 싸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집 밖에서 안의 싸움을 보는 거라서 눈으로 보지 못했지딴, 풍기는
기세와 수시로 들리는 폭음으로 싸움이 벌어졌다는 건 확신한 상
태였다.
"그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건 모르겠네. 말했다시피 밖에서 잠시 서 있다가 돌아갔으니
까. 대체 왜 싸운 건가? 그리고 그들의 정체에 대해 말해 줄 수 있
는가?"
"에휴. "
라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한도 그날 에테로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집 밖에 있다가 사라진 에테로. 잘만 하면 그날
싸움이 있었다는 걸 숨길 수 있을 성싶었다.
물론, 라한이 에테로라는 인물을 너무 과소평가했음이다.
에테로는 누가 뭐래도 정보 길드의 수장이다. 일상에서 벌어지
는 사소한 것에도 귀를 기울이는 직업인 셈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눈여걱보는 라한의 일을 건성으로 넘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요 며칠 이곳을 찾아올까 말까 많이 망설였네. 어쩌면 그날 그
싸움으로 자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
"그렇군요. "
"만약 적이 남아 있기라도 하면 나까지 위험하지 않은가?하하
하. 이해해 주겠지?"
"이해합니다. "
에테로도 라한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다. 베어울프를 처리한 일
이나 결계를 만든 일 등등. 이런 일련의 사건만 가지고도 라한의
실력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라한이 자신의 집에서 누군가와 싸웠다. 보통 적을 집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거의 없으니 누군가가 라한을 찾아왔다고 봐야
했다. 또 당당하게 라한을 찾아왔다는 건 라한보다 강자일 수도 있
다는 의미였다. 에테로로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일
이었다.
"이겼는가?"
"그런 것 같습니다. "
"다친 곳은 없는가?"
"다행히 없습니다. "
"자네와 싸운 적은 어찌 됐는가?"
"도주했습니다. "
에테로의 연이은 질문에 라한이 바로바로 대답했다. 어느 정도
는 예상했던 질문이라 망설임이 없었다.
"또 올 수도 있겠군. "
"그럴 수도 있습니다. "
"그때도 이길 수 있는가?"
"그들만 온다면요. "
라한의 애매한 말에 에테로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들만' 이라는 말. 그건 다른 누군가가 등장할 경우 라한이 위
험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또 다른 존재가 있는가?"
"정말 알아야겠습니까?"
"말해 주면 좋겠네. 해 주지 않으면 우리 나름대로 자네 됫조사
를 할 수밖에 없네. 우리 정보력에 대해서는 잘 알겠지. "
"그렇겠죠. "
라한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표정이었
다. 라한은 베사 길드뿐 아니라 다크라이더 길드도 드래곤과의 싸
움에 끼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려면 아예 모르는 게 최선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정보를 얻는 일에 그들의 도움을 배제하고 싶었지
만, 라한의 여건상그건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정보는 얻지만실
질적인 싸움과 핵심 내용은 모르게 하고 싶었다.
"말해 주게. 이미 한배를 탄 처지 아닌가?"
"그들의 정체가 궁금하다고 했죠?"
"회색 측인가? 아니면 검은 측인가? 아니, 아니지. 회색 측은
자네와 친분이 있으니 그쪽은 아닐 게야. 그럼 검은 측?"
에테로가 나름대로 생각해 둔 얘기를 꺼내놓았다. 지난 3 일 동
안 이 일에 대해 고민한 듯했다.
"둘 다 아닙니다. "
"둘 다 아니다? 흠, 그럼 전에 자네가 언급한 제 4 의 세력이라는
말이군. "
"예. "
드래곤과 싸우던 그날
라한은 자신을 찾아온 에테로에게 카이렌 일행과 류카라한 일행
의 정보를 캐는 또 다른 인물을 찾으라고 했었다. 또 다른 세력이
있음을 에테로에게 말한 것이다.
이때에도 라한은 그 세력이 누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모
르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한 탓이다.
"그들은 얼마나 강한가?"
"그들의 정체만 알면 얼마나 강한지는 짐작이 가실 겁니다. "
"그들의 정체가 대체 뭐기에 그러는가?"
"그들은 그들은 드래곤입니다 "
라한의 대답에 에테로가 입을 떡 벌렸다. 생각지도 못한 얘기
였다.
드래곤이라니. 대륙 최강이자 물질계의 중재자로 알려진 그들이
아니던가?한데, 군림하는종족드래곤이 라한과싸웠다?또, 그
싸움에서 라한에게 패해 도주했다? 도저히 믿음이 가지 않는 얘기
였다.
"그,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가? 말하기 싫으면 관두
지. 에잉. "
"믿고 안 믿고는 에테로님 자유입니다. 대신, 제가부탁한 일은
포기하지 말아주십시오. "
"자네 그 말. 진짜로군. "
그제야 에테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라한의 말처럼 그
의 적이 드래곤인 게 확실했다.
"그냥 믿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
"그게 무슨 말인가? 이건 내 목숨뿐 아니라 우리 베사 길드와 다
크라이더 길드 전체의 존폐가 걸린 일일세. 자네 대체 어쩌자
고
"어쩌자고 위대하시고 또 위대하신 드래곤에게 죄를 지었느냐
이 말이죠?"
"그렇네. 드래곤은 대륙 최강의 존재일세, 그에게 대적하는 건 스
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과 다를 바 없는 일이라는 걸 정말 모르는가?"
에테로의 말에 라한의 인상이 구겨졌다.
대부분의 인간이 에테로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게 분명하다.
인간들에게 드래곤은 역사 속의 신수이며 공포의 대상으로 기억되
는 터. 드래곤에게 대적하겠다는 그 자체를 만용으로 여길 게 확실
했다.
하지만 에테로만은,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눈이 되어주고 있는
그만은 다르길 바랐다. 이게 인간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제가 죄를 지었다고요? 네. 죄를 지었습니다. 드래곤 한마리
를 제 손으로 반쯤 죽여 놨거든요. 하지만 제가 그를 처리하지 않
았다면 아마 전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설사, 그 싸움에서 요
행히 도망쳤다 하더라도 평생 그들의 그림자를 피해 다니는 겁쟁이
가 됐을 겁니다. "
"그렇다 하더라도
"제 적이 드래곤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그들이 그
렇게 무서워요? 그럼 이 일에서 손 떼십시오. 말리지 않겠습니다. "
그냥해보는말이 아니었다. 드래곤에 대한공포를 정녕 떨쳐버
리지 못한다면 이쯤에서 베사 길드와 연을 끊을 생각이었다. 필요
하다면 다크라이더 길드와도 연을 끊을 각오가 돼 있었다.
"미안하네 내가 너무과민반응을했군. 그래, 솔직히 얘기하겠
네. 난 드래곤들이 무섭네. 그 이름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일
세. 하지만이 일에서 손을떼고싶지는않네. 까짓것 사람이 한번
죽지 두 번 죽는가? 역사상 유례없는 큰 싸움을 한번 준비해 보세,
하하하하하. "
"진심입니까?"
"진심일세. 후후후. "
계속 어두운 표정이던 에테로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지
금까지 라한을 시험해 보느라 연기를 한 것 같았다.
"이거 제가 당한 겁니까?"
"당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알고 계셨군요. "
"아, 자네가 말한 제 4 의 인물이 드래곤이라는 거? 알고 있었네. "
라한이 이마를 부여잡고 꾹꾹 눌렀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
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 fl 게 완벽히 속은 것이다.
"이거 참.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속은 게 처음인 것 같군요. "
"자네가 많이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지. "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회색 측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네. 그 정보를 듣고 어느
정도 예상했지. 뭐 그게 아니라도 알아챘을 걸세. 전에 우리 마을
상공에 드래곤이 나타나서 한바탕 소란을 피운 적이 있지. 그때부
터 자네를 죽이려 하는 드래곤이 있다는 건 알았네. 하나를 생각하
니 나머지는 대충 짐작이 가더군. "
에테로는 라한과 싸운 상대의 정체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라한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연기를 했을뿐. 상대가
드래곤이든 신이든 그리 개의치 않는 존재가 에테로였다.
물론, 처음에는 드래곤에 의해 다크라이더 길드와 베사 길드가
피해를 입을까 몹시 걱정했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꽤 오랫동안
고민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고민해서 나온 결과는 '라한을 돕
자 ' 였다.
다크시안과는 달리 에테로는 어릴 때 버림받아 암살자로 키워졌
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세상에 대한증오를 배운 셈이다 그런 그
가 누군가와의 싸움을 두려워할 리 만무했다. 그에게는 삶 그 자체
가 투쟁이고 전투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보? 제가 말한 제 4 의 인물을 찾았군요. "
"그것도 찾았고 또 다른 정보도 있네. "
"그래요?"
"이틀 전에, 그러니까 자네가 드래곤과 싸운 바로 다음 날 드래
곤 두 마리가 회색 측을 공격했네 좀 더 정확하게는 회색 측의 핵
심 인물들과 싸웠다고 봐야겠지. "
말을 하는 에테로의 목소리가 밝았다. 그 말투 때문에 라한도 카
이렌 일행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목소리만으로 전투의 결과를
짐작한 탓이다.
"이겼군요. "
"뭐 이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네. 회색 측 핵심 인물들에게 놀아
났다고 봐야겠지. "
"그래요?"
"함정을 팠더군. "
에테로의 얼굴에 감탄의 표정이 스쳐지 나갔다. 처음 이 정보를
받았을 때 적잖이 놀랐던 모양이다.
"함정요?"
"회색 측의 우두머리. 예사로운 자가 아니더군. "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
"사실 싸웠다고 보기도 민망하지. 그때
에테로가 자신에게 들어온 정보 그대로 라한에게 하나씩 설명해
줬다. 라한은 에테로의 말을 들으며 가끔씩 감탄사를 터트리며 놀
라워했다.
"역시 카이렌이로군. 그놈 생긴 것하고 다르게 머리가좋다니까. "
"생긴 건 자네보다 나은 게 아닌가? 대충 그에 대한 정보가 들어
왔는데 엄청란 미모를 자랑하는 엘프라고 하던데. "
"예쁜 카이렌보다 멋진 제가 낫죠. 하하하하. "
"허허, 그거 참, 허허허. "
라한이 어색한듯크게 웃어 재꼈다. 뭐라토를달려고 했던 에
테로도 그냥 웃으며 넘어갔다.
'그러고 보면 라한도 잘생기긴 잘생겼어. '
에테로도 라한의 외모를 어느 정도는 인정했다. 뚜렷한 이목구
비. 특히 서글서글한 눈매가 남에게 호감을 사기 딱 좋았다.
'근데 저 얼굴은 가짜겠지. '
에테로는 라한의 본 얼굴이 어떤지 모른다. 하지만 다크라이더
길드의 길드장인 다크시안은 라한의 본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처음 라한과 대면한 후, 에테로는 다크시안과 쾌 많은 대화를 나
누었다. 제일 처음한얘기는물론외모였다 다크시안이 언급한사
람이 자신이 본 그가 맞는지를 확인하는 거였으니 당연한 절차였다.
'듣기로는 별로라던데. 너무 평범하게 생겨서 사람들 사이에 묻
힌다고 했던가?'
다크시안이 했던 말이다. 어쩌면 그가 라한을 만났을 때 아름다
운 로이나가 함께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다크시안의 기
억에 라한은 평범한 외모를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풍기는 기도는 남달랐다. 말 하나하나에도 사람을 압도
하는 분위기를 풍겼던 라한, 다크시안은 외모와 너무 다른 라한의
기도에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고민해야 했다.
"참, 전에 제가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습니까?,
"아, 내 정신 좀 보게. 양측의 세작을모두 발견했네. 근데 어
쩔 생각인가? 드래곤이 보낸 눈이니 어쩌면 그들도 드래곤이지 안
겠나?"
"처리해야죠. 일단 눈부터 끊어 버릴 생각입니다. -
"알겠네. 여기 그들의 외모애 대해 적혀 있네. 부디 조심하게.
"걱정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
에테로는 라한을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드래곤과의 싸움
을 재고하라고 말하지 못했다. 어차피 말한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게
분명한 라한. 괜히 말을 저내서 기분을 꿀꿀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고 생각했다.
라한이 모르은 세상
때는 한여름
인간 동물 할 것 없이 모두 짜증을 부릴 만큼의 무더위가 계속
되번다 거기다 벌써 석 달째 비 한 방울 내리지 많았다. 농사가 피
폐해짐은 물론이고 가난한 농부, 힘없는 몬스터들은 때 아닌 가뭄
에 하나씩 말라죽어갔다.
이런 가뭍으로 대륙 모든 나라의 경제가 바닥까지 내리달았다.
특히 루이나 왕국에게 국토를 잃은 베센 왕국은 그 정도가 타국과
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각했다. 전쟁의 패배로 매달 공물을 바
쳐야 했던 그들에게 이런 가뭄은 신의 저주처럼 느껴졌다.
과거 베센 왕국의 중남부.
현재 축소된 베센 왕국의 중북부에 라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쩍
쩍 갈라진 논토와 그늘에 늘어져서 굻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
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심각하군. "
라한의 눈에 보인 사람들은 모두 열한 명. 20 대 초중반의 꽤나
젊은 사람들이 었다
"젊은 사람이 일을 하지 못하니 어라?"
세상을 한탄하려던 라한의 코에 묘한 냄새가 포착췄다. 피 냄새
였다. 근원지는 청년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듯했다.
"웬 피 냄새? 물어보면 알겠지. "
라한의 코는 남들과 달리 예민했다. 수련을 통해 오감이 예민해
지기도 했고 전생의 마지막이었던 개의 후각이 조금 남아 있어서이
기도 했다.
"실례합니다. "
"엇!"
"으헉 ! "
라한이 갑자기 나타나자 쉬고 있던 청년들이 놀란 음성을 내뱉
었다 라한이 가까이 다가을 때까지 인식하지 못한 듯했다.
"이런, 제가놀라게 해드렸나보군요. 죄송합니다. "
"음 "
라한의 재차 인사에 청년들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중 한 청년이
라한의 몸 구석구석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의 눈이 라한의
허리에 있는 세라 소드에 닿았을 때, 아쉬워하는 눈빛을 보였다.
'기분 나쁘게 뭐 하는 짓이야?'
찝찝한 기분에 라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청년들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좀과도해 보이는 청년들의 행동에
라한의 의구심을 가졌다.
'왜 저러지?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저, 실례합니다. "
라한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년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가 라한에게 말을 건 것이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봐서
라한을 조금쯤은 두려워하는 듯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
"혹시 용병이십니까?"
"아, 이 칼때문에 오해하셨나보군요. 전용병이 아닙니다. "
"그럼 그 검은
"이거요? 그냥 장식용입니다. "
라한이 대충 둘러댔다. 라한의 직업은 용병도 아니고 기사도 아
니다. 또, 허리에 차고 있는세라소드를마지막으로 썼던 때도 미
스릴 창고에서 벽을부술 때였다 검 자체를 거의 쓰지 않으니 장
식용이라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럼 검을 쓸 줄 모른다는 말입니까?"
"검을 배우려고 해 봤는데 재능이 없다고 하더군요. "
"오호, 그래요?"
청년의 얼굴에 살기가 감돌았다. 갑작스러운 청년들의 태도에
라한이 슬슬 됫걸음질 쳤다.
'이거 뭐야?'
"얘들아!"
"예, 형님, "
"식사다! 쳐라!"
"흐흐흐. "
우두머리로 보이는 청년의 말에 다른 청년들이 자리를 털고 일
어났다 언제 꺼냈는지 손에는 쟁기와 낫을 챙걱 든 채였다.
"이것 보세요.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 이놈 베센 왕국 놈이 아니로군. "
"예. 전 이 왕국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이 나라에 무슨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제게 왜 이러시죠?"
라한이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말했다. 괜히 분노해서 무고한 생
명을 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청년들은 라한의 저자세를 겁에 질려서라고 판단했다.
그 모습에 더욱 짙은 살기를 뿌리며 기세등등 라한에게 다가왔다.
"어디 다른 나라 놈은 얼마나 맛있는가 볼까?"
"말해 뭐 합니까? 저 통통한 살 좀 보십시오. 흐흐흐흐. "
라한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인육을 먹는
잔인한 자들. 라한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돌아갔다.
'어찌, 어찌 이런 일이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라한도 이번 일에는 충격
을 크게 받았다. 동족을 먹는 그 행동 자체가 라한을 혼란스럽게
한 것이다.
물론, 라한의 전생에 동족을 먹는 종족으로의 삶도 없는 건 아니
었다.
하지만 이번은상황이 좀달랐다. 이성이 강한 인간. 불을다룰
줄 알고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에게 식인이라는 행위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동족을 먹다니
"얘들아! 뭐 하냐? 식사 식는다. "
"예, 형님. "
"너희들. 지금 풍기는 이 피 냄새도 너희들 짓이냐?"
다가오는 청년들을 보며 라한이 어깨를 확 폈다. 더 이상 상대에
게 예의를 갖추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놈 참 예민한 놈이네. 땅속에 묻은 지 벌써 다섯 시간이나 지
났는데 그 피 냄새를 맡다니. "
"역시 그랬군. 크크크, 그랬어. 하하하하하."
라한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젠 저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동족애 같은 어쭙잖은 감정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분노와 살기가
라한을 감싸기 시작했다.
"테세르!"
-기다리고 있었어.
"죽여. 최대한 잔인하고 처참하게, 완전히 뭉개 버려! "
-알았어.
테세르의 몸집이 조금씩 커졌다. 상대와 비슷한크기로 커진 테
세르가 청년들에게 다가갔다.
테세르의 등장에 청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듣도 보도 못 한
존재가 살기를 풀풀 날리며 다가오는 모습. 그 하나만으로도 청년
들의 공포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이, 이게 뭐야? 이게
"부디 다음 생에서는 좋은 일만 하면서 살아라. "
"이이
청년 중 하나가 라한에게 기습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보다 테세
르가 먼저였다. 테세르가 이미 그의 목을 잡고 옆으로 꺾고 있었다.
"크륵! "
목이 반쯤 꺾인 청년이 게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얼굴은 붉게 달
아올랐고 발은 이미 땅에서 약간 떠 있는 상태였다.
-주인 말 들었지? 다음 생에서는 내 부하로 태어나라.
테세르가 나머지 손으로 청년의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파삭!
청년의 머리가 수박 터지듯 깨졌다. 구역질 나고 지저분한 모습
에 라한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남은 청년들의 표정은 라한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
했다.
-두려우냐? 그럼 우리 주인한테 잘하지 그랬어?
청년들의 바짓가랑이 사이로 오줌이 줄줄 흘러내렸다. 너무 심
한 공포감에 신체에 대한 통제력이 떨어진 모습이었다.
"테세르! 서둘러, "
-알았어.
테세르가 한 명씩 돌아가며 상대의 목을 비틀었다. 청년들은 테
세르의 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하나씩 죽어 나갔다. 개중에 목
이 꺾이고도 죽지 않는 이는 머리를 터트리는 수고까지 더했다.
-주인 끝났어.
"돌아가자. "
-그냥 가려고?
"에테로님을 좀 봐야겠어. 공간으로! "
라한은 테세르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공간 이동을 시전했다.
라한이 사라지고 몇 시간 후, 농사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습
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은 테세르가 죽인 이들을 칼로 도려내서
먹기 시작했다. 인간으로서 차마할수 없는잔인한 짓이지만, 그
들에게는 일상사인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블리아드마을은 가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어쩌면 대륙
에서 유일하게 가뭄의 영향을 받지 않은곳인지도모른다. 라한이
수시로 물을 불러내고 비를 내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날씨를 변화시킬 수 있는 마법은 컨트를 웨더(Cont.of weathe.)가
유일하다. 그리고 이건 인간의 마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오직 드래곤의 용언으로만 가능한 마법인 셈이다.
하지만 라한은 용언으로만 가능하다는 컨트를 웨더의 시전에 성
공했다. 드래곤의 전유물을 라한도 공유하게 된 것이다.
라한의 이런 성장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곳이 블리아드 마을이
었다. 비가 필요할 때마다 라한이 비를 내리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곳 블리아드 마을은 한 달에 한 번 휴일을 가진다.
매달 11 일. 라한이 이곳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일종의 기념 일인 셈이다.
그리고오늘은 8 월 11 일. 블리아드마을의 전체 휴일이다. 이 때
문에 에테로가 머물고 있는 닉스의 술집도 문이 닫혀 있었다.
쾅쾅쾅!
"에테로님 ! "
쾅쾅쾅!
"에테로님 ! "
라한이 닉스가 운영하는 술집 문을 강하게 두드렸다. 너무 다급
해 보여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라한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 아닙니다. "
라한의 얼굴을 알아본 주민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라한은 그런
곳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빨리 에테로를 만나자신이 보고 겪
은 일을 확인해 봐야 했다.
쾅쾅쾅!
"에테로님! 닉스씨! "
삐걱!
"라한님 아니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문이 열리고 닉스가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자다 일어났는지
몹시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급한 일이 있습니다.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
"예. 들어오십시오. "
덜컥!
문이 열리자 라한이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라한이 사라지자
구경하고 있던 주민들도 하나둘씩 흩어져갔다.
다시 문이 닫히자 술집의 내실에서 에테로가 천천히 걸어 나왔
다 그 역시 자다 일어났는지 눈을 반쯤 감은 모습이었다.
"에테로님. "
"왜 이리 호들갑인가? 드래곤이 쳐들어오기라도 했는가?"
"확인해 볼 일이 있습니다. "
"말해 보게. "
에테로가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으며 자리에 앉았다. 라
한도 맞은편에 앉아서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가 어디 갔다 왔는지는 아시죠?"
"음,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지금쯤이면 드래곤들과 한판 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갑자기 드래곤이 무서워지기라도 했는
가"
"그게 아니라 제가 본 일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
"본 것? 말해 보게, "
"사실 제가
라한이 베센 왕국의 중북부 지방에서 겪은 일을 침통한 표정으
로 설명했다. 그 얘기를 듣던 에테로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 었다.
"자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군. "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대륙 전체에 가뭄이 심각할 정도일세. 블리아드 마을은 자
네 덕분에 물이 풍족하지만, 다른 곳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일세. "
"그게 제 얘기하고무슨상관이 있습니까? 가뭄 때문에 사람들
이 전부 굶어 죽기라도 했다는 얘깁니까?"
가뭄이 오면 농사를 망치게 마련이다. 대륙의 근본 식량은 농사
로 나오는 곡물류인 터. 라한도 가뭄이 식량 부족에 크게 일조한다
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 가뭄이 올해 처음인 건 아니었다. 최근 10 년 안
에는 없었지만, 그 이전에는 수없이 많이 겪은 일이 가뭄이었다.
한데 이번에만 아사자가 속출한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되었
다. 또 가뭄이 있을 때마다 인육을 먹는 이들이 우후죽순 생걱난다
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자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
"최근에 베센 왕국이 무슨 일을 져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그럼
답이 나을 걸세. "
"그야 루이나 왕국과의 전쟁 설마 그 전쟁 때문에 모아뒀던 식
량을 다 쓰기 라도 했다는 말입 니까?"
그제야 라한도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했다.
베센 왕국의 현 상황은 전쟁으로 인한후유증이었다. 당시 너무
많은 인원과 식량 차출로 평민들의 삶이 피폐해진 것이다.
"그 정도가 끝이라면 이런 상황까지는 안 왔겠지. 루이나 왕국
에게 매달 보내고 있는 식량이 더 큰 문제일세. "
"이제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식량을 매달 루이나 왕국
에게 빼앗기고 있으니 이런 일이 벌어진 거로군요. "
"그렇다고 볼 수 있네. 그 덕에 현재 루이나 왕국의 국민들과 귀
족들은 대륙 어느 왕국보다 편하게 가뭄을 나고 있지. "
침통한 라한의 표정이 복잡 미묘하게 변했다. 대체 누굴 탓해야
하는가? 자국을 위하는 루이나 왕국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힘이 없어 식량을 빼앗기고 있는 베센 왕국의 왕족들을
탓하기도 힘들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든 버티는 게 베센 왕국
이 할수 있는유일한일이지. 아, 루이나왕국이 식량을덜 가져가
도록 신에게 비는 것도 방법이라고 볼 수 있겠군. "
쉽게 말해 방법이 없다는 얘기였다.
'안 돼. 이건 아니야. '
라한의 표정에 결의가 떠올랐다. 당장은 수가 없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휴, 전그만가보겠습니다. 낮잠을방해해서 죄송합니다. "
"아닐세. 라한 너무 마음쓰지 말게. 어차피 세상이란다그런
거 아니겠는가? 위에서 군림하는 자가 있으면 밑에서 지배당하는
자도 있게 마련이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부하며 지내는 벌레 같
은놈들도 있을테고. 이번 일도마찬가지일세. 현재로써는루이나
왕국이 베센 왕국을 휘어잡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네. 힘이 없
으면 어차피 다 빼앗길 수밖에 없는 거지. "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
라한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닉스의 술집을 나왔다.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염두를 굴려 봐도 뚜렷
한 해결책이 없었다.
'그래. 힘이 있어야하는 거야. 당장 아부하고 잘보여 봐야 힘
없으면 말짱 꽝인 거야. '
베센 왕국이 사는 길은 단하나뿐이다 힘을 키우는 길. 허리띠
를 더 졸라매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은 힘을 키워야 했다. 루이나
왕국의 뒤통수를 후려칠 수 있는 그런 힘 말이다.
헬레나와 하울을 만나다
라한이 다시 베센 왕국의 중북부로 이동해 왓다 아까의 상황
을 재현하고 싶지 않아서 이동하기 전부터 투명하게 몸을 만든 상
태였다
저기로군
라한의 눈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휘두르는 모습이 들어
왔다 카이렌 일행의 세력ㅇ; 된 사람들이 훈련을 하는 모습이었다
어디 보자
라한이 주머니에서 에테르가 전해준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곳에는 상대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얼굴 그림이 괘나
상세하게 그러져 있었다
라한이 찾아야 할 이가 드레곤이라면 굳이 얼굴 그림을 확인할
필요는 없다 드레곤끼리면 알아볼수 있다는 특유의 기운을 라한
역시 구별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도 라한이 몽타주를 꺼낸 건 상대가 드래곤이 아니라는 생
각에서였다.
카이렌에게는 상대가 드래곤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능력이 없
다. 하지만 상대가 강한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있다.
드래곤이 힘을 감추더라도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는 정도는 알아내
는 것이다.
로테마이어스도 카이렌의 그런 실력 정도는 알 터. 그에게 드래
곤을 세작으로 보낼 리 만무했다. 말 잘 듣는 인간이나 세뇌시킨
인간을 세작으로 심었을 게 분명했다.
'수염 참 멋지네. 나도 수염이나 길러볼까?'
몽타주에 나타난 사람은 옅은 구레나룻과 긴 콧수염이 인상적이
었다. 사내다우면서도 미적으로 균형이 잘 맞는 조각 같은 얼굴이
었다.
'이걸 어떻게 찾는다?'
라한의 '투명해지기'는 거의 완벽하다. 누군가잘때 옆에서 몇
시간씩 구경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한데, 카이렌마저 속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몸을 숨기는 능력은 고금 최강인 카이렌. 그의 실력이라면 라한
을 감지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카이렌에게서 풍기는 기
운이 라한이 사용하는 신화력과도 어느 정도는 비슷한 터. 최대한
빨리 찾아서 떠나는 게 카이렌에게 들키지 않는 길이었다.
-주인.
로브 안에서 테세르가 작은 목소리로 라한을 불렀다. 라한은 그
말에 생각으로만 대답했다.
'어?'
-저기 프라하다
'알아. '
무기를 들고 휘두르는 사람들의 앞에는 프라하가 근엄한 표정으
로 서 있었다. 그가 사람들을 가리키는 교관 역할을 하는 듯했다.
-어떻게 보여?
'많이 강해졌군. '
프라하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예전보다 강했다. 그 기운도 거칠게
요동치는 게 아닌 차분하게 가라앉은 기운이었다. 라한은 프라하가
자신과 헤어진 후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음을 한눈에 알아봤다
-쾌 멋있어졌네.
'테세르. 아까 몽타주 봤지?'
-응
'찾아봐. 너라면 카이렌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야
테세르에게는 몸을 숨길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하지만 풍기는 기
운을완벽하게 감추는능력은가지고 있다. 즉, 모습만들키지 않
는다면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는 테세르였다.
-알았어,
테세르가 라한의 로브에서 나와 바닥에 내려왔다. 그 상태로 낮
게 날며 사람들 사이를 훔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라한은 테세르에게 몸을 더 작게 만들 수 없느냐고 물
은 적이 있었다. 몸만 더 작게 만들 수 있으면 천하제일의 스파이
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테세르는 라한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몸을 크게 불렸던 건 속
을 비워서 가능했을 뿐. 실제로 가지고 있는 몸체의 구성 성분은
어쩌지 못한다고 말했었다.
한참 후에 다시 날아온 테세르가 라한의 로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쪽 손으로 사람들의 왼쪽을 가리켰다.
'저쪽이야?'
응. 무지 잘생겼더라
'쳇. '
라한은 원래 외모에 무감각한 성격이었다. 외모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한데, 언젠가부터 외모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미소년에
가까운 투바와 엘프 남성 카이렌을 만나고 난 후부터였다. 주변 일
행들이 자꾸 그들과 비교를 하려 들자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생각이
었다.
-안 가?
'곧 끝날 것 같네. 끝나면 처리하지 뭐.
라한의 말처럼 프라하의 교육이 막바지에 들어선 듯했다. 프라
하가 자꾸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도 그러했고, 교육을 받는 훈련병
들의 지친 모습도 그런 생각에 확신을 더해줬다.
"자,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오후수업도 열심히 받길 바란다
이상. "
프라하가 큰 목소리로 훈련병들에게 말했다. 어찌나 큰지 거대
한 연무장이 떠나갈 듯했다.
프라하가 나가자 훈련병들이 저마다 그늘을 찾아서 휴식을 취했
다. 라한도 몸을 투명하게 한 채로 테세르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
갔다.
'이쪽인가?'
-저기 저자다. 수염 난 잘생긴 놈
테세르가 가리킨 쪽에 수염이 깔끔하게 자란 잘생긴 남자가 보
였다. 그는 일행들과 떨어져 혼자서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날기. '
라한이 몸을 살짝 띄운 채로 그에게 날아갔다. 그의 바로 앞까지
날아간 라한이 손목을 몇 차례 떨었다.
'오랜만에 하는 건데 잘 되려나 모르겠네, '
-뭐 할 건데?
'이거. '
퍽-!
털썩!
라한이 사내의 뒤통수를 세라 소드로 강하게 내려쳤다. 소리가
너무 커 때린 라한이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사내를 기절시키는 데
에는 성공했다.
'너무 강했나? 역시 잘 안 되는군. '
-쟤 머리 깨졌겠다.
'팔자라고 생각해야지. 가자. 다 함께 공간으로. '
라한이 사내 옆에서 공간 이동을 시전했다. 아무런 빛도 터져 나
오지 않는 은밀한 공간 이동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라한은 쓰러진 자에게 수면을 한 차례 더 선사했
다. 혹시나 자신이 없는 사이에 깨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후, 라한은 베센 왕국의 남부 지방으로 이동했다 바다가 멀지
않아서인지 아득하게 느껴지는 짠 냄새가 라한의 코를 자극했다
"음, 이게 바다 냄새인가?"
-뭔 냄새라도 나나?
정령인 테세르는 본질적으로 후각이 발달되어 있지 않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자극적인 향기가 아니면 느끼지 못하는 것
이다.
"가자. "
라한미 남쪽으로 걸음을 옳겼다. 다가갈수록 바다 향기가 점점
진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 이동하자 라한의 눈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부두가 가까워졌다는 증거였다. 이곳만큼은 가뭄의
피해가 닿지 않았는지 사람들의 얼굴에서 굻주림을 찾기 힘들었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먹는 건가?"
-바다는 거 대한 식량 창고라고 하잖아.
"그런 얘기가 있긴 있지. "
날이 갈수록 머리가 좋아지는 테세르를 보며 라한이 미소를 머
금었다. 버려진 돌도 다듬으면 옥석이 된다더니. 테세르가 딱 그
경우였다.
-거기다 불의 정령이 대륙에서 많이 활동할 때면 물의 정령은
바다에서 활동하는 게 서로간의 규칙이거든. 지금 가뭄이 심하니
까 바다가 활기를 띠는 게 당연한 거야.
"잠깐. 잠깐만. 그게 무슨말이야?네 말은가뭄이 정령들때문
에 벌어진 거라는 얘기야?"
-당연하지. 대륙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 현상은 우리 정령들이
만드는 거라고. 홍수도 마찬가지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가뭄도 마
찬가지지.
"그럼 정령왕들한테 말하면 가뭄을 없앨 수 있는 거야?"
-그건 안 되지. 정령왕들이 들어줄 리가 없어. 그들도 힘이 없
거든.
테세르의 말에 라한의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자신들이 하는 일
이라면서 그걸 바꿀 힘이 없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령들이 하는 일이라면서? 그럼 바꿀 수도 있는 거 아냐?"
-정령계에 가득한 자연의 힘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야. 다른 곳
에서 자연 활동을 하면서 그 힘을 얻는 거지. 그리고 주인도 정령
계에 가 봤으니까 알 거야. 정령계 지형이 이곳 대륙하고 완전히
똑같지?
"그랬던가? 지형은 유심히 보질 않아서. "
-뭐, 잠깐 가서 지형까지 파악하는 건 무리였겠지. 그럼 지금
알아둬. 정령계 지형은이곳과완벽하게 일치해. 다른점이라면 인
간이나 엘프, 드래곤 같은 이성체들이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바꾼
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정도지.
라한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조금 의외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근데 대륙하고 같은 모양이라는 게 내가 한 말하고 무슨 관계가
있지?"
-있지. 관계가아주 깊지. 정령들이 속성을가지지 않고 태어난
다는 얘기, 했었지?
"응 "
-그들 중에서 불의 정령으로 거듭나는 녀석들 말이야. 그들이
정령계의 판트리아 대륙 정도 되는 위치에서 불의 정령으로 바꿔고
있어. 그 때문에 판트리아대륙에 불의 기운이 엄청나게 강해지는
거지
"그럼 좀 섞여서 하면 되잖아. "
-이미 시작했기 때문에 그건 힘들어. 그리고 설사 시작되지 않
았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어. 거듭날 때는 같은 속성끼리 뭉쳐야
하거든. 가까이 모여서 힘을 교류하지 않으면 순수한 정령으로 태
어날 수 없어.
생소한 얘기였지만 라한의 관심사는 이게 아니었다. 어떻게 가
뭄을 없앨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자연재해를 최대한 막을 수 있
느냐? 라한의 관심사는 이것뿐이었다.
골치 아프군. 위치가 바뀌면 대륙은 홍수에 시달리겠지?"
-아마도.
"혹시 다른 정령들도 지금 거듭나고 있나?"
-물론이지, 땅의 정령은 대륙의 서쪽에서 바람의 정령은 바다
먼 곳에서 거듭나고 있어
"그럼 그들이 만든 영향은?"
-대륙 서쪽은 연일 지진이 일어나고 있고 바다 먼 곳은 거의 매
일 폭풍이 일고 있지
라한은 정령이라는 존재가 평화와 조화의 존재라고 생각해 왔
다. 한데, 오늘 얘기로그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결국, 자신들살
자고 대륙에 피해를 주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거듭남이라는 거. 안 하면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그럼 정령계가 무너질걸, 정령계가무너지면
이곳 판트리아 대륙도 사라지게 될 거야. 따뜻함도 차가움도 없는
곳. 흙이 없고 바람이 없는 곳. 그리고 빛과 어둠이 없는 곳이 될
거니까.
라한도 별 기대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홧김에 해 본
말일 뿐. 그도 정령계와 판트리아계가 서로 공생 관계에 있다는 정
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결국 인간의 힘으로 자연재해를 버틸 수밖에 없다는 말이네. "
-뭐 그런 셈이지.
"에고. 이건 나중에 생각해 봐야겠다. 가자."
라한이 사람들을 비집고 부두의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참
가자 '산상의 슁터' 라는 커다란 술집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그렇군. '
어느 정도 가까이 오자 라한이 은밀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곳
에서는 사람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냥 들어갈 거야 7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해 볼까?'
딸랑!
라한이 문을 열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문 위에서 울린 청량한 종
소리가술집 홀 안에 퍼졌다. 미리 와서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
이 잠깐 입구를 향했다가 사라졌다. 소리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자
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어서옵셔. "
종소리에 반응한 또 다른 사람, 술집 종업원이 라한을 맞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드는 그런 목소리였다
"괜찮은 포도주 있습니까?"
"외지분이시군요. 이곳은 마하트가 일품입니다 여기서 북쪽으
로 조금만 가면 우리나라 최고의 마하트 생산지가 있거든요. 저희
술집은 그곳에서 바로 만들어서 오는 최상급 포도주만 취급하기 때
문에 정말 끝내줍니다. "
마치 줄줄 왼 듯 읖는 종업원의 목소리에 라한이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로 달달 외울 정도라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 사람 전문가로군. '
전문가는 기술이나 마법, 검술을 익힌 사람만 되는 게 아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도 전문가가 될 수 있고, 집에서 가사를 돌보는
사람도전문가가될수 있다. 자기 일에 자부심을가지고끊임없이
노력하는 그 사람이 바로 전문가인 것이다.
라한은 종업원의 시원한 목소리와 유창한 말솜씨로 그가 전문가
임을 눈치 챘다.
"알아서 주십시오. 식사도함께 주시고요. 아, 설마외지 사람이
라고 바가지를 씌우지는 않겠죠?"
"이런,손님. 저희는바가지 같은 걸 씌우지 않습니다. 한번 손
님은 영원한 손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하는걸요. 혹시 압니까?
언제 다시 이 마을에 들르게 될는지요. 저희가 최선을 다하면 그때
도 저희 술집으로 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손님께서 발이 무
척 넓은 분이라면 입소문이라도 내줄 텐데 어찌 바가지를 씌우겠
습니까? 저희는 손님이 누가 됐든지 최선을 다합니다 아, 단 한
가지 경우는예외군요. 저희는공짜손님을받지 않습니다. 술값이
없으면 저기서 노래를 부르든가 춤이라도 추셔야 합니다. 하하하. "
종업원이 술집의 한쪽을 가리키며 웃음을 터트렸다. 쾌 그럴듯
한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크기도 서너 명이 함께 올라가 작은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하하. 술값은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
"가끔은 술값이 있는데도 저기에 올라가는 분들이 계신답니다. "
"그래요?"
"물론입죠. 스스로음유시인을능가한다고 생각하는분들이 널
리고 널렸는걸요. 또, 어떤 용병은 자신이 겪은 멋지고통쾌한 이
야기를 저기 서서 풀어놓기도 한답니다. "
종업원의 얼굴에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실제로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때마다 재미있는 얘기와 좋은 노래를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전 그런 재주가 없어서요. "
라한이 손사래를 치며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쾌 많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기에 손님이 많았음에도 몇 자리가 남아 있었다.
라한이 거절 의사를 표하자 종업원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기색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 모습에 라한이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서운 곳이네 그래도 마음에 드는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라좋은생각같아.'
대륙은 오랜 가뭄으로 인해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베센
왕국은 패전까지 겪어 그 정도가 심각할 정도였다. 한데도 이곳만
큼은 패전과 가뭄이 피해간느낌이었다. 술집 사장의 탁월한상술
과 종업원의 철저한 전문가 정신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그래. 살 방법은 있는 거지. 근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라
라한은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남에게 해 보고 싶었다. 삶이 자랑
스러워서라거나 신세를 한탄하려는 마음은 아니었다. 처음 해 보
는 일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과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 버리고 싶은
마음, 이런저런 생각들이 결합되어 나온 결과였다.
'에고, 아서라. 나하고 안 맞아. '
라한은 순간 먹었던 마음을 애써 지웠다. 지금 라한은 놀러 온
게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류카라한을 보는 눈을 제거
해야 했다. 아직은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니기에 함부로 나서는 건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
라한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있었다. 종업원의 시원한목소리
에 라한이 고개를 들었다.
"빨리 나왔군요. "
"예. 그렇다고음식을대충만든건 아닙니다. 일류요리사여섯
명이 항시 대기 중이라서 음식을 빨리 만든 겁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
"하하. 알겠습니다. "
라한이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라한이 식사를 시작하려 하자 종
업원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식사만큼은 수다를 듣지 않
고 편하게 해 주려는 그 나름의 배려였다.
'사소한 거지만 아주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어 사장이 누군지
궁금하네. '
호기심을 어떻게든 풀어야 하는 건 드래곤에 필적하는 라한이
다 이런 의문도 풀지 않고 넘어갈 리 만무했다.
'누가 좋을까?'
라한이 식사를 하면서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물어볼 사람을
물색하기 위함이었다
'저 사람이 좋겠군. '
라한이 술집 구석에서 술을 먹고 있는 두사람을 발견했다. 얇지
만 긴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남녀였다.
'다른 지방 사람인가?'
이곳은 어촌이라서 남녀가 입고 있는 것 같은 깨끗한 옷은 보기
힘들다. 또, 대륙의 최남단이라서 얇고짧은옷을선호한다. 그런
생각을 갖자 외모도 왠지 이곳 사람들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알려나?'
외부인으로 보임에도 라한이 그들을 찍은 건 그들에게서 느껴지
는 편안함 때문이었다. 이곳에 한두 번 온 사람은 저렇게 편하게
있지 못한다. 강인한 뱃사람의 시끌벅적함 속에서 어떻게 태연하
겠는가? 대부분은 괜한 위압감에 수저를 들기 힘든 게 정상이었다.
한데도 그들은 주변 얘기를 흘릴 대로 흘리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지. '
라한이 수저를놓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술병과잔을들
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
"무슨 일이죠?"
앉아 있던 사람중 여자가 바로 대답해 왔다 라한이 쳐다보고
있음을 일찍부터 느낀 모양이다.
"보아하니 외지에서 오신 분들 같은데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여자가 대답할 때 남자의 손이 테이블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아주 미약하게 착 소리가 들렸다. 라한의 예민한 청각이 아
니면 듣지 못할 소리였다.
'검?'
검을 잡는 소리가 분명했다 쓰지는 않지만 라한 역시 검을 가지
고 다니기에 익숙한 소리였다.
"같은 외지 사람 같아서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
"저희는 남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만돌아가주
시겠습니까?"
여자의 얼굴에서 강한 경계심이 드러났다. 라한의 말을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눈치였다.
"뭐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혹시 북쪽에서 오셨습니
까?"
"그건 왜 묻죠?"
"옷이 길어 보여서요. 아시다시피 이곳은 대륙의 최남단이라서
상당히 덥거든요. "
라한의 말에 여자가 자신의 몸과 일행인 남자의 몸을 한차례 돌
아봤다. 라한의 말대로 뭔가 어색한복장이었다. 귀족 여성이라면
몸을 가리기 위해 긴 옷을 입을 수도 있다 한데 남자마저 긴 복장
인 건 확실히 이상했다.
"그렇군요. 앉으시죠. "
"예? 아, 예. "
여자가 라한의 합석을 허락했다. 라한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여
자와 남자 중간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라한이 옷차림 얘기를 꺼낸 건 그들을 알고 찾아온 게 아니란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라한의 말에 여자도 어느 정도는 의심을 풀고
합석을 허락한 것이다. 물론, 아무런 자신이 없었으면 쉽게 허락
할 리 없었다. 아마 검을잡았던 남자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은 것
이리라.
'어디흠, 예상대로보통 실력이 아니로군. 조금만 더 강했으
면 굴레를 벗을 수도 있었겠어. '
라한이 본 남자의 실력은 이미 극한에 달해 있었다. 이 상태로
조금만 더 강해진다면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그 과정에 얻어야 하는 깨달음은 순전히 그 남
자 스스로의 몫이겠지만 어찌 됐든 그 남자의 실력이 굴레를
벗는 조건에 거의 근접해 있는 건 확실했다.
'저런 강자가 여기는 왜?'
라한은 두 명의 일행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런 것도 모른
채 남자가 손을 검에서 살짝 떼었다. 라한은 그 남자의 실력을 알
아봤지만, 그는 라한의 실력을 알아채지 못한 탓이다.
"보아하니 그쪽도 타지방에서 오신 모양이군요. 어디 출신인지
물어도 실례가 안 될까요?"
"전 특별하게 머무는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머물렀던
곳은 케라스 왕국이니 그곳이라고 해도 무방하겠군요. "
"그렇군요. "
여자가본격적으로 라한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의
심은 가셨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듯했다.
"두 분께서는 어디 출신인지요? 그런 복장은 본 적이 없어서요. "
"이 옷은 우리나라옷이 아닙니다. 저희는 이렇게 깨끗한옷을
만들지 못하거든요. "
라한은 두 사람이 입은 옷을 찬찬히 뜯어봤다. 그리 특별한 옷은
아니었다. 대륙 어디를 가나 흔히 구할 수 있는 그런 봄, 가을용 옷
이었다.
'저 옷이 뭐가 깨끗하다는 거지?'
바다 사람들의 거친 복색에 비하면 깨끗한 옷이 분명했다. 하지
만 대륙 내륙에는 저보다 더 깨끗하고 화려한 옷이 널리고 널렸다.
딱히 깨끗하다고 부를 수 있는 옷이 아닌 것이다
"그러시군요. "
"근데,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성은 있는지요?"
"그냥 라한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
"아, 그러시군요. "
라한이 일행 주변으로 은밀하게 막을 쳤다 라한이라는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라한의 건너편에 앉은 두
남녀는 라한의 그런 행동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사내가 강
하다고는 하지만 라한보다는 한참 아래 실력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도 이름을 듣고 싶네요. "
"아 저는 헬레나라고 하고 이쪽은
"하울. "
여자의 말을 받아 남자가 짧게 자기 이름을 말했다. 무뚝뚝함이
몸에 밴 듯 자연스러운 목소리였다
"레이디 헬레나와 하울님이셨군요. "
"그냥 헬레나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라한림. "
"그러죠. 헬레나. "
라한의 헬레나라는 호칭에 앉아 있던 하울이 몸을 움찔거렸다
얼굴에는 불쾌하다는 표정이 한것 떠오른 채였다.
헬레나가 하울을 눈으로 제지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저희에게 온 건 뭔가 물어보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아, 제가정신이 없었네요. 이 술집 주인이 누군지 너무궁금해
서 찾아왔습니다. "
착- !
라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울의 손이 다시 탁자 아래로 내려
갔다. 그리고 검을 잡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갑작스러운 태도에 라한이 의구심을 품었다.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 주인이 누군지는 왜 묻는지요?"
"별일은 아닙니다. 여기 종업원이 너무 친절해서 그를 누가 교
육시켰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
"정말 그것뿐인가요?"
"예, "
라한의 단호한 대답에도 하울의 손은 쉽사리 탁자 위로 올라오
지 않았다. 아직도 라한에 대한 경계가 풀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사실 우리도 이곳주인의 이름은잘모릅니다 이곳에 온지 얼
마 되지 않았거든요. "
"아, 그러시군요. "
대답을 하던 라한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가 힘겯게 끝맺었다. 아
주 익숙한 기운이 술집 안에서 느껴진 탓이다
'그녀가?'
.그럼 용건이 끝난 것 같으니 그만 돌아가 주시
헬레나가 말을 멈추고 시선을 한 곳으로 돌렸다. 라한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뒤로 돌렸다.
라한의 눈에 익숙한 이의 모습이 보였다. 푸른빛 머리카락이 어
깨까지 내려오는 아름다운 여자.
'그녀가 확실해. '
라한은 나타난 여자가 프리미아임을 확신했다. 모습이 조금 성
숙해지기는했지만, 귀엽던 그모습이 그대로날안 있었다. 또, 느
껴지는 기운도 당시에 느꼈던 프리미아의 기운이 확실했다.
챙-!
"하앗! "
하울이 값작스럽게 검을 뽑아 들고 프리미아를 공격했다. 프리
미아는 어깨를 살짝 틀어 하울의 공격을 피했다. 이미 공격을 예상
이라도 한 듯한 모습이 었다.
갑자기 싸움이 시작되자 술을 먹고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
나갔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이에 반해 종업원들은 차분하게 탁자를 옆으로 치우기 시작했
다.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한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라한이 혀를 내
둘렀다.
"야압! "
하울의 공격이 실패하자 헬레나의 공격이 이어졌다. 강하지는
않지만 빠르고 정확한 공격이 었다.
프리미아는 왼발을 축으로 한 바퀴 크게 회전했다. 그러자 헬레
나의 검이 프리미아의 오른쪽 허리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좋구나. 계속 해. "
"하앗! "
"야얍! "
쉬익!
채채챙!
언제 꺼내 들었는지 프리미아의 손에도 검이 들려 있었다. 그리
고 수차례 공방이 계속되며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하울의 공격은 빠르면서도 강했고 헬레나의 공격은 정확하고 날
카로웠다. 이에 반해 프리마아의 검은 빠르지도 강하지도 그렇다
고 정확하지도 않았다. 다만, 몸놀림이 드래곤답게 워낙빠른지라
공격을 모두 막아내고 피할 뿐이었다.
'비슷한데. '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하울과 헬레나의 검은 프리미아와 완전히
달랐다. 심지어 프리미아는 검술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라한의 눈에는 둘 사이에 뭔가 공통점이 있었다. 아니,
프리미아의 움직임이 상대의 공격을 모두 읽고 있는 느낌이라고 봐
야 정확했다. 마치 검의 다음공격 지점을 알고 미리 피하는느낌
상대의 발동작까지도 완벽히 레뚫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괜찮소?"
헬레나가 프리미아의 손바닥에 어깨를 맞고 쓰러졌다. 하울은
쓰러진 헬레나에게 달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걸로
치열한 공방전은 프리미아의 승리로 돌아간 셈이다.
"많이 발전했구나. "
"제자 하울, 스승님을 뵙습니다. "
"제자 헬레나, 스승님을 뵙습니다. "
하울이 헬레나의 어깨를 부축한 채로 함께 무릎을 꿇었다.
하울과 헬레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싸움을 구경하던 이들의 얼
굴이 멍해졌다 알고 싸웠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라한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나서야 좀 전에 느꼈던 막연한 느낌
을 이해할 수 있었다.
프리미아가 헬레나와 하울의 스승이라는 것. 그건 프리미아가
그들의 검술을 모두 레뚫고 있다는 점이나 다름없으니 미리 예측하
고 피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일어나라. 들어가자꾸나. "
-프리미아. 맞지?
라한이 프리미아에게 은밀하게 음성을 전달했다. 프리미아는 순
간 몸을 움찔하더니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예전의 방방 뛰던 성
급하던 성격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라한은 프리미아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머리를 두세 차례
긁적였다.
자신이 음성을 보낸 주인공임을 피력한 행동이었다.
라한인가?
-응.
-살아 있었군
프리미아가놀란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녀는 라한이 이미 죽었
다고 믿고 있었다. 라한의 갑작스러운 실종을 설명할 길이 그 방법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다.
"하울, 헬레나. 이 사람은 누구지?"
프리미아가 짐짓 모른 척 제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에 하울
과 헬레나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프리
미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손님이 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같이 들어가자고. "
말을마친 프리미아가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제자들의 입을 미
리 막아 라한이 들어오는 걸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라한님. 스승님께서 허락했으니 들어가시죠. "
"고맙습니다. 헬레나. 하울. "
살짝 고개를 숙인 라한이 먼저 프리미아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 뒤를 헬레나가 길게 한숨을 쉬며 따랐다. 하울은 라한의 등을
보며 눈을 매섭게 치떴다. 불청객인 라한이 마음에 들지 않모 모양
이다
재회 1
안으로 들어간 라한은 깨끗하게 단장된 객실로 안내되었다 그
는 머물게 된 객실에서 점심과 저녁 식사를 마쳤다 그 시간까지
프리미아가 방문하지 않은 것이다
똑똑
자정이 한참지난 시간
막 잠을 청하려는 하는 찰나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라한은 풍
기는 기운으로 방문객이 프라미아임을 짐작했다
들어와
프리미아가 안으로 들어와 라한의 얼굴을 뚫어지라 처더봤다
한참을 그렇게 처다보던 프리미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살펴봐도 라한이 아니라고 생각한듯 했다
내모습이 바뀌어서 놀란 모양이네
"라한 맞아?"
"맞아. "
"목소리가 비슷하기는 한데 얼굴이 너무 달라 풍기는 기운도
. 뭐가 뭔지 모르겠군, "
프리미아는 풍기는 기운이 너무 약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
녀에게 라한의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은 탓이다.
라한은 풍기는 기운이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프리미아와 자신 주
변으로 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기운을 폭사시켜 자신의 기운이 약
하지 않음을 보여줬다
프리미아는 라한의 들쑥날쑥한 기운 때문에 몹시 혼란스러웠다.
과거에도좀특이한기운이기는했지만, 이 정도는아니었다. 거의
없다시피 하다가 살이 떨릴 정도로 강해지는 기운이라니. 이런 힘
조절은 드래곤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라한이 맞는다면 강해졌군. "
"고마워. "
"그 얼굴은 뭐야?"
"이걸로 만든 거지 "
라한이 목에 차고 있는 목걸이를 내밀었다. 폴리모프가 가능하
도록 해 주는 인챈트가 된 목걸이였다.
"마법 무구로군. "
"응. "
"그래도 완전히 믿기는 힘들어. 네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그땐 믿어주지. "
프리미아도 라한이 내민 목걸이가 인챈트된 마법 무구임을 알아
챘다.
하지만 그 마법 무구가 어떤 종류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이 때
문에 라한이 하는 말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프리미아가 피해 다니는 존재는 다름 아닌 드래곤이다 로
테마이어스가 자신을 찾기 위해 보냈을 드래곤들. 그들을 경계해
야 하기에 확실하지 않은 건 쉽사리 믿을 수 없었음이다.
"미안하군. 이 얼굴은 한 번 되돌아가면 다시 6 개월 정도 걸리거
든 다른 방법으로 외모를 바꾸는 방법도 있기는 있지만 귀찮아. "
"그럼 난 네가 라한이라는 걸 믿을 수 없다. "
"대신 다른 걸 보여주지. 테세르!"
라한의 부름에 테세르가 로브 안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자
다 일어났는지 눈을 반쯤 감은 모습이었다.
"뭐 해?"
-음냐. 안녕.
테세르가 조금은 성숙하게 변한 프리미아를 보며 손을 어색하게
흔들었다.
"그때 그 버릇없는 정령이로군. "
"이제 내가 라한이라는 걸 믿을 수 있겠지?"
"훗. "
그제야 프리미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라한을
경계하느라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좀 앉지. "
"그래. "
프리미아가 앉자 테세르도 라한의 로브에서 나와 탁자 위에 섰
다. 탁자 위에서 몇 번 고개를 흔들어 억지로 잠을몰아내는 테세
르.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탁자에 대자로 엎어졌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왜 살아 있었으면서도 나타나지 않은
거지?"
"이놈 실수로 어디 갇혀 있었다. 나오는 데 한 20 일 걸렸던가? 그
렇게 고생 고생 해서 나오고 나니까혼자서 시간을보내고 싶더라고. "
라한이 테세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테세르는 뭔가
대꾸를 하려다 이내 포기해 버렸다. 대신 그는 말싸움보다 잠이 먼
저라는 듯 고개를 더 깊이 파묻었다.
"그랬군. 하긴, 예전부터 저 녀석은사고만치고다녔지 "
"너도 마찬가지였어. "
"그랬나?"
예전이었으면 발끈했을지도 모를 라한의 말도 프리미아는 웃음
으로 넘겼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이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변했군. "
"내가 7"
"응. 뭐랄까? 어른스러워졌다고 할까?"
"칭찬으로 들을게. "
프리미아의 말투 하나하나가 라한과의 공백을 느끼게 해줬다.
실제 헤어진 시간은 겨우 13 개월에 불과하다. 한데도 마치 10 년은
지난 듯했다.
'정말 많이 변했구나 그들도 변했겠지. '
프리미아의 변화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카이렌 일행이 떠올랐
다. 프라하를 먼발치에서 잠깐 보기는 했지만 대화는 해 보지 못했
다. 아마그와도 대화를 하면 13 개월의 공백이 느껴질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카이렌, 투바도 그만큼의 공백이 느껴지리라.
"이제 네 얘기를 할 차례인 것 같은데. 어쩌다가 여기서 술집 사
장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유희를즐길 때 만들어둔곳이야. 한 5 백 년쯤됐지. 그때
이곳에 술집을 차리고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물려줬어, 당시에 난
엘프로 유희를 즐길 때라서 5 백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나타나도 그
리 이상할 건 없지. "
"그러고 보니 귀가 길군. "
"이제 본 모양이네. "
"어. "
라한은 사람을 흘낏 봐도 쾌나 상세하게 파악할 줄 안다. 어릴
패 쫓겨 다녔던 기억이 라한의 성격을 치밀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
지만프리미아의 긴 귀는 지금에서야 발견했다. 프리미아의 외모
적 성숙함 때문에 다른 변화에 소홀했던 탓이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먼저 떠났던 네가 날 찾으러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고. "
"혹시 이 부근에서 류카라한 본 적 있어?"
"류카라한? 로이나님이 예전에 사랑했다던 그 인간?-
"뭐?"
"아, 아니다. "
라한은 로이나와 류카라한의 관계를 전혀 몰랐다. 얼핏 안면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사랑한 사이였다는 건 지금에서야 알게 되
었다.
'골치 아프네. '
류카라한의 요즘 행보는 위험 그 자체였다 자칫하면 인간이라
는 종즉 자체가 전 드래곤의 분노를 살 수도 있 는 일을 진행하고 있
은 터 지금은 아니겠지만 나중에 일이 마무리되면 그를 직접 처리
할 생각이었다.
그게 인간이라는 종족을 대륙에 오래 보전시키는 길이라는 판단
에서였다.
프리미아. 근데 왜 다른 일행들과 떨어졌지?"
로이나님이 우리한테 떠나라고 했어.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우
리, 아니 레테아의 안전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
.그러고 보니 형이 안 보이네 "
.레테아는 다른 곳에 있어. 이곳은 돈이 필요해서 잠시 수금하
러 온 것분이야."
"형이 있는 곳이 어디야
"부티아르 섬 ."
프리미아의 입에서 생소한 지명이 나왔다. 대륙 지도를 완전히
외워서 다시 그렸던 라한조차도 모르는 이름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곳인데. "
,넌 말해도 모를 거야. 대륙이 아니니까. "
"대륙이 아니라고?"
.응. 부티아르 섬은 대륙에서 남쪽으로 100 킬로미터 정도 떨어
진 곳에 위치한 섬이야. 아까 날 찾아왔던 녀석들은 그곳에 사는
원주민이 었지 . "
" 큭 "
라한이 이마를 짚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완전히 헛짚었다.
라한은 헬레나와 하울이 대륙의 북부 사람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조금은 더워 보이는 옷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실제로는 오히려 대륙의 한참 남쪽에 위치한 곳 출신이었
다. 그들은 너무 더운 곳에서 왔기에 이곳 날씨가 오히려 선선하게
느껴져 조금은 긴 옷을 입은 거였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옷을 입었
을 수도 있다는 걸 감안하지 못한 라한이었다.
'요즘은 실수투성 이로군. '
부티아르 섬은 대륙 남쪽에 위치한 거대한 섬이다. 그곳은 대륙
에 있는 웬만한 나라 두 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큰 크기를 가지고 있
다. 섬 안에 산,산맥, 강, 호수. 이 모든걸 가지고 있는곳이다.
"왜 그래?"
"아니야. 근데 아까 스승이라고 부르던데 검을 가르친 거아?"
"한 50 년 됐나?그때 부티아르 섬에 간 적이 있었어. 처음그곳
에 갔을 때는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신기하더군. 그
래서 나도 표류해서 떠밀려 온 척하고 거기 사람들과 섞여 지냈어. "
"드래곤이라는 건 숨기고?"
"아니. 그곳사람들은드래곤이 뭔지도몰라. 그들이 쓰는대륙
어도 내가 가르친 거야. 거기는 말만 있지 글이 없거든 "
"미개한 곳인가?"
라한의 반사적인 대답에 프리미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
에 라한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생각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한 건 없는 듯했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미개하다는 기준이 글이 없다는 거야? 아니면 드래곤이 뭔지
모른다는 거야? 생활환경이 달라 아는 범위가 다를 뿐이지 그들은
미개인이 아니야. "
"하지만 글은 모든 문명의 척도가
"그래, 글이라는 건 중요하지 기록을할수도 있고 업적을전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그들에게도 글 아닌 글이 있어. 바로 그림
이지.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남기고 싶을 때는 그림을
그려 "
"그래. 내가잘못했어, 미안해."
라한이 얼떨떨하게 잘못을 시인했다. 알고 보면 프리이마의 말
도 맞다 싶었다.
어차피 미개하다, 그렇지 않다의 기준도 이곳 판트리아 대륙 사
람들이 만든 거였다. 이곳의 기준으로 이곳을 높게 보는 말이니 바
탕부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약 부티아르 섬에 사는 사람들 기준으로 이곳이 미개하다면
판트리아 대륙에 사는 사람 전부가 미개인이 되는가? 그건 아니었
다. 미개하고 아니고를 나누는 기준. 그건 같은문화를 가진 사람
들끼리 그 문화를 공유하지 못할 때에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전
혀 동떨어진 문화의 사람끼리는 가려내기 힘든 문제였다
"됐어.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나도 화낼 자격이 없
는 거지. "
"그곳에 애착이 많은가 보네. "
"그곳에는 날 다른 종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사람이 없
거든, "
"이해가 간다. "
라한도 최근 심하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자신이 강하다는 이유
만으로 인간이 아닌 듯 떠받드는블리아드 마을사람들 또, 자신
이 강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을 죽이려 드는 로테마이어스
어차피 자신도 인간일 뿐인데 왜 그렇게 다른 종족 대하듯 하는지
답답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근데 아직 왜 왔는지 얘기를 안 했어. 류카라한이 왜?-
"로테마이어스가 류카라한 진영에 자신의 눈을 심어뒀더군. 그
걸 걷어낼 생각이야. "
"로드, 그와싸울 생각이군. "
"이미 싸움은 시작됐어. 이젠 내가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
니야. "
라한은 이미 로테마이어스와 싸울 생각을 굳혔다. 그런데도 아
직 싸우지 않고 있는 건 단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라한의 힘이 완전하지 못해서 승률이 반반이라는 것. 라
한의 성격상 이런 승률일 때는 일단 싸움을 피하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로테마이어스의 지위가 드래곤 로드라는 점에 기인한
다. 다른 드래곤의 분노를 사지 않고 당당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서 뒤끝을 남기지 않는 길, 그게 뭐가
됐든 드래곤 전체와의 싸움은 무조건 피해야 하는 탓이다.
"그렇겠지. 로드는 널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 거기다 크라이드
리안까지 죽어 버렸으니
"그 얘기는 됐어. 류카라한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로테마이
어스가 심어 놓은 세작이 어디 있는지는 알거든. 누군지도 알고. -
"그 일이 끝나면 어쩔 생각이야?"
"어?"
"로드와의 일이 다 마무리되면 어떻게 지낼 거냐고. "
"그게 어
라한은 거기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당장눈앞에 닥친 일이
많아서 생각이 미치지 않았음이다.
"할 일 없으면 일 끝나고 부티아르 섬으로 와. 몬스터도 있고 바
다 괴물들도 많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곳이야. 가족을 위해서 몬스
터와 맞서 싸우는 전사들. 그런 전사들이 싸우고 돌아오면 따뜻하
게 맞아주는 가족들. 그리고 그런 전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검을
연습하는 아이들, 그곳은 치열하지만 따뜻함이 가득한 곳이야. "
"내가 가도 될까?"
"물론이지. 언제나환영이야. 레테아도아주좋아할거야."
"응 일이 끝나면 꼭 갈게. 반드시. "
라한도 차별하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권력 다툼이 없고 자
신을 인간으로 대우해주는 곳에서 지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먹
은 터에 받은 제의라 더 솔깃했다.
"난 내일부터 식재료를 사 모아야 해서 그만 자야겠다. 쉴 만큼
쉬다 가도록 해. 종업원들한테는 미리 말해뒀으니까. "
부티아르 섬은요즘 연일 해일이 일어 식량이 부족했다. 테세르
가 말한 물의 정령의 거듭남 탓이다. 프리미아가 육지에 나온 것도
해일 때문에 부족한 식량을 사 가기 위함이었다
"아참 형한테는나봤다는얘기 하지 마. 걱정할거야."
"알았어. "
"낮에 그 녀석들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
"그러지. 근데 라한. "
프리미아가 방을 나가려다 고개를 돌려 라한을 불렀다
"왜?"
"네가 그 녀석들이라고 부른 사람들은 나이가 마흔이 넘는다.
부티아르 종족 특성이 노화가 느려서 어려 보이지만, 실제로 너보
다 나이가 많다. "
"그, 그래?"
응. 그리고 앞으로 나한테 너라고 부르지 말고 형수님이라고
불러라. 그럼 간다. 쉬다가가."
프리미아가 나간 후에도 라한은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리미아의 말이 머릿속에서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탓이다.
라한의 멍한 표정에 테세르가 라한을 쿡쿡 찔렀다. 프리미아가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를 듣고 깬 테세르였다.
-주인 왜 그래?
"아니야. "
-주인 이상해.
"그게 모르겠다. "
몹시 복잡한 심정이었다. 과거에 한 번 결혼했던 레테아였기에
형수라는 존재가 처음인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은
기분이 남달랐다.
마치 진짜 가족을 맞았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너무 생소한 느낌
에 머리가 복잡했다.
"특별한 일은 없었고?"
"모르겠어. 미스티크는 프라하에게 당한 건 아니라고 하더군, 프라하를 거의
병신으로 만들어놓고 이동했다고 하니까 틀린 말은 아닐 거야. "
"그럼?"
"뭐, 잉글리아트가 깨어나기 전에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지. "
결국 모든 열쇠는 잉글리아트가 쥐고 있었다. 그가 깨어나기 전에는 그들 사이에
오가는 그 어떤 얘기도 추측에 불과하다는 의미였다. 확실한 게 하나도 없는
상태이기에 찝찝한 기분이었다.
'프라하가.프라하가. 카이렌. 네가 한 일이었어. 감히 프라하를, 프라하를.'
라한이 주먹을 부르르 떨며 살기를 억눌렀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카이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이곳이 카이렌과 그 일행들이 만든 장소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물론 지금
라한의 실력이면 자신이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렇지만 이곳의
라한이 모르는 어떤 장치 때문에 도주해버린다면 곤란했다. 강한 자들이기에
작정하고 숨으면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어차피 카이렌을 죽일 기회는 앞으로 많을
테니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카이렌. 내가 죽일 때까지 죽지 말고 기다려라. 꼭.'
라한이 살기를 갈무리하며 카이렌을 노려봤다. 눈에 칼이 달렸다면 카이렌의 머리는
수십, 수백 번도 더 뚫렸을 정도로 강한 눈빛이었다.
"혹시 말이야. 혹시."
갑자기 생각난 듯 카이렌이 조용히 운을 때었다
"혹시 뭐?"
"너희들도 라한이 돌아왔다는 얘기는 들었겠지. 난 케이플의 실종이 그놈 짓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
카이렌의 말에 다른 이들이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잊고 지냈던 라한의 존재가
그들을 답답하게 만든 것이다.
"잠깐. 그건 아닐 거 같은데?"
"왜?"
"프라하가 가는 곳은 우리만 알고 있었잖아. 근데 라한 그놈이 어떻게 프라하에게
갈 수 있겠어?"
"그건 토일렛 말이 맞다. 정말 라한이 한 짓이라면 우리나 잉글리아트 일행 중에서
배신자가 있다는 소린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리고 프라하가 반병신이 된 걸
확인했다고 했지? 그럼 라한은 아니라고 봐도 될 것 같아. 라한 그 자식이 미리
알았다면 프라하가 그렇게 다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안 그래?"
크리퍼트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라한은 투바와 프라하만큼은
끔찍하게 아꼈으니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지. 라한에 대해 알아낸 건 없어?"
"없다. 케라스 왕국에 들어간 후에 완전히 사라졌어. "
"질긴 자식. 곱게 죽어주면 얼마나 좋아?"
라한의 뒷조사를 토일렛이나 잉글리아트가 직접 했다면 블리아드 마을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또 그곳에 라한의 은신처가 있음도 알아냈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 정도 위치에 있는 이들이 라한을 직접 찾아 나설 턱이 없었다.
부하들에게만 맡걱 놓으니 라한을 못 찾는 게 당연했다.
"용건 끝났으면 그만 헤어지자고. 이렇게 오래 모여 있어서 좋을 거 없으니까. 아,
그렇지. 크리퍼트. 넌 저 녀석들 관리 잘해라."
"걱정 마. "
"그리고 토일렛! 잉글리아트가 부상당했으니까 너도 좀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겠지?"
"뭐, 그럭저럭. "
"그럼 잉글리아트가 깨어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말해줘. 아무래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판도를 바꿔놓을 것 같다. "
"그러지,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크리퍼트. 지루해도 참아라. 후후. "
카이렌과 루이에가 라한이 있는 입구 쪽으로 나갔다. 그들이 자리를 뜨자 토일렛도
일어나서 반대쪽 입구로 걸어 나갔다. 반면 크리퍼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한숨만 쉬었다. 세간에 죽었다고 알려진 탓에 이곳에 숨어있어야 하는 듯했다.
'저놈은 처리해야겠군. '
모두 사라지고 크리퍼트만 남자, 라한이 숨죽이고 기다렸다 다른 일행들이 계단을
완전히 벗어나서 지상으로 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기다리던 라한이
크리퍼트에게 다가갔다. 넉넉하게 두 시간을 기다린 후였다.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던가?"
"누 누구냐!"
갑자기 들려온 말에 크리퍼트가 경악하며 외쳤다. 굴레를 벗은 존재답게 어느샌가
검을 뽑은 상태였다.
"이런, 이런. 날 잊은 건가?"
"라, 라한. "
"기억해줘서 고맙군. "
라한이 크리퍼트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입가에 감도는 미소가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를?"
"너 죽이러 왔지. "
원래 라한은 이곳에서 싸우지 않으려 했다. 앞으로 싸울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터.
굳이 장소적인 불리함을 끼고 싸울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울과 헬레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싸워야했다. 비록 티격태격하며 지냈지만 프리미아와의 인연을
모른 척할 수 없었음이다.
"하, 하나만 묻자. 로테마이어스와 싸워서 이겼다고 들었다. 본 실력이었나? 아니면
함정을?"
라한이 함정을 파서 로테마이어스를 이겼다면 크리퍼트에게도 한 가닥 희망은 있다.
적어도 라한의 실력이 로테마이어스보다 약할 테니 말이다. 반대로 라한이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이겼다면 로테마이어스보다 강하다는 뜻이었다. 고 말은
크리퍼트카 라한을 이길 가능성이 아주 없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군. 한 가지는 말해주지. 넌 여기서 죽는다.
죽었다고 알려진 놈이니 완전히 사라져야 제대로 된 거 아니겠어?"
"흐음. "
라한의 자신만만한 말에 크리퍼트는 본능적으로 초의 장함을 느꼈다. 또
로테마이어스와의 싸움에서도 본 실력으로 이겼음을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
"제안? 너한테 얻고 싶은 전 없는데. "
"너한테 어떤 정보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잉글리아트가 있는 곳은 모르고 있겠지.
날 살려주면 그들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겠다."
크리퍼트의 말에 라한이 귀를 쫑긋 세웠다. 솔깃한 얘기였다. 아무래도 하나 보다는
다수가 있는 곳을 아는 것이 더 유용할 게 분명했다.
"지금 잉글리아트에게는 8 서클 마법서가 있다. 날 살려준 대가로 잉글리아트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된다면 8 서클 마법서를 얻을 수 있을 거다 너한테 손해되는 장사는
아닐 텐데. "
크리퍼트가 쐐기를 박는 말을 해 왔다. 이에 라한도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물건이니 처리해야겠지. '
라한은 8 서클 마법서를 없앨 생각이었다. 8 서클 마법을 백해무익하다고 생각한
탓이다. 물론 가지고 있는 8 서클 마법서가 인간이 만든 물건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적어도 인간의 몸을 감안해서 그에 걸맞게 만들었을 테니까,
라한은 이그니스와 투바에게 들었던 8 서클 마법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억에
의하면 아직 인간 중에는 8 서클에 이른 사람이 없었다. 결국 잉글리아트가 들고 있는
8 서클 마법서도 이그니스의 선조 마족이 만들었을 게 분명했다. 인간의 몸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만든, 그래서 인간이 익혔을 때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할 수도 있는
위험한 물건이라고 볼 수 있었다.
"8 서클 마법서라."
"살려주면 바로 떠나겠다. 세상과 동떨어져서 혼자 살아갈 테니까 제발 살려줘. "
크리퍼트의 비굴한 말에 라한이 피식 미소를 터트렸다. 누구나 살고 싶은 건
마찬가지일 터. 크리퍼트의 비굴한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진 건 아니었다. 다만 예전
당당하게 자신을 압박하던 때와 비교하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고 할까? 묘한
기분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좋아. 살려주지. 대신단한번이다. 다시 내 눈에 띄면 그땐 죽는다는 얘기지. "
"고맙다. 정말 고맙다. "
"자, 이제 말해보실까? 먼저 잉글리아트가 어디 숨어있지?"
"그는. 잠깐. "
말하려던 크리퍼트가 급히 자기 입을 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라한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러지?"
"내가 말해줬는데 날 살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너 같은 놈인 줄 아냐? 입으로 내뱉은 말은 지킨다. "
"그래도. "
크리퍼트는 라한이 자신을 살려주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자기가 라한
입장이라고 생각해보자 살려줄 이유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라한은 크리퍼트의 말에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놈이 자신을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게 당연했다.
"믿든 말든 네 마음이다 하지만 이번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좀 전에 했던 거래는
없었던 걸로 생각하겠다. "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
라한이 협박하자 크리퍼트가 다급히 대답했다. 누가 뭐래도 지금 크리퍼트는
약자였다. 라한을 의심해서 거래를 길게 끌고 갈 입장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잉글리아트는 어디 있지?"
"루이나 왕국 수도에 있다 "
"이필리에?"
"엘베로가 국왕이 된 후 루이나 왕국의 수도는 루스티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
엘베로는 루이나 왕국의 국왕이 된 후 대대적인 체제 개편을 단행했다. 각 지역의
명칭을 바꾼 것도 그때였다. 수도의 이름을 비롯한 각 지방의 이름을 거의 대부분
바꾸었고, 기사단에 붙어 있는 명예 호칭도 일부 수정했다. 또, 세율을 낮춰서
국민들이 조금 더 편히 지낼 수 있게 만들었고 귀족의 수를 10 퍼센트 가량 줄여서
과도한 녹봉 지출을 막았다. 이 모든 게 국왕이 바뀌었음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셈이다.
"루스티아? 이름 좋네. 근데 크리퍼트. 루이나 왕국의 수도는 작은 곳이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야 할 것 같군. "
"엘타나 남작을 볼모로 잡아서 그 저택에 머물고 있다. "
"엘타나?"
엘타나 남작이라는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한데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누구더라? 어디서 들어보기는 했는데. '
꽤 오랫동안 고민했는데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들은 이름인 듯했다.
"이, 이제 가도 되나?"
"8 서클 마법서가 어디 있는지도 말해줘야지. "
"그건 나도 모른다. 난 잉글리아트가 숨기 한참 전에 죽었다고 알려졌어. 그래서
자세한건 잘 몰라. 그들이 숨어있는 곳도 토일렛에게 들어서 아는 거라고. "
"음, 좋아. 보내주지. "
고민을 거듭하던 라한이 결국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살려주기로 약속했으니
보내줘야 했다. 하지만 또다시 허튼 짓을 할 수도 있는 일. 어느 정도의 제약
장치는 만들어둘 생각이었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
"어디로 보내줄까?"
라한이 크리퍼트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이에 크리퍼트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라한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를 두렵게 만드는듯했다.
"괜, 괜찮아. 내가 알아서 갈게. "
"훗, 누가 널 위해서 보내준다고 한줄 아냐? 너 골렘 가지고 있지?"
"아! "
"골렘은 수거해야지. 어디가 좋을까? 아, 거기가 좋겠군."
말을 마친 라한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하울과 헬레나를 양어깨에 멨다. 아직 경량화
마법이 남아있어서 쉽게 들 수 있었다.
"어디로 갈 거지?"
"너도 잘 아는 곳. 공간으로. "
라한이 크리퍼트와 쓰러진 하울, 헬레나를 데리고 공간 이동 했다.
라한과 크리퍼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로테라 숲이었다.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수백 년 동안 은거하며 지냈던 곳. 라한이 투바에 의해 목숨을 구함 받은
곳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여긴 로테라 숲?"
"아는군. "
"네가 여길 어떻게 알지?"
"어쩌다 보니 알게 췄다. 자, 골렘을 불러보실까?"
라한의 말에 크리퍼트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조금 넓은 곳으로 이동해서 골렘을
부를 요량이었다.
"그럼 부르겠다. 세실리온!"
크리퍼트의 외침에 땅이 조금씩 울렸다. 에고가 공중이 아닌 땅속에서 생긴 듯했다.
"멍청하기는, 앞을 보고 불러야지. "
"별로 불러본 적이 없어서. "
"쳇. "
-으음, 오랜만이군. 크리퍼트. 웬만하면 좀 자주 불러주지 않겠나?
골렘마저도 땅속에서 만들어진 듯 바닥에 입이 들썩거렸다. 묘한 상황에 크리퍼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골렘마저 제대로 부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운 듯했다.
"미, 미안, "
-이번에도 전투를 위해서 부른 건가? 그럼 저 인간을 죽이면 되는군.
"아니, 아니야. "
-으음?
"사실 널 부른 건. 휴우, 너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싶어서 불렀어. "
한참 망설이던 크리퍼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자주 부르지는 않았어도 정이 든
모양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네가 죽지 않는 이상은 계약 파기를 하지 않는다.
"그럼 죽여야겠군. "
"무, 무슨. "
라한의 말에 크리퍼트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골렘의 한마디에 자신을 죽이려
하다니. 너무 놀라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설마 약속한 걸 어기겠냐?"
라한이 신화력을 일으켜 크리퍼트의 몸을 감쌌다. 그에게서 골렘에게 가는 계약의
고리를 신화력으로 막아버리려는 의도였다.
계약의 고리.
이름은 거창하지만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생명이 있어야 계약이 유지되는
골렘과 주인. 라한이 말한 계약의 고리는 크리퍼트에게서 전해지는 생명체의 반응이
골렘에게 가지 않도록 막아버리는 거였다. 실제 죽었든 그렇지 않듯 골렘에게만
죽었다고 인식되면 그만이었다.
-죽은. 건가?
"슈라. "
-흐음, 자주 부르는군. 난 이제 그 골렘과 막 친해졌. 또 다른 손님이 있는 것
같군.
"응, 데리고 사라져줘. "
-그러지.
슈라가 주인이 죽었다고 생각한 골렘을 데리고 사라졌다. 너무 쉽게 골렘 하나를
처리한 라한이었다. 골렘이 사라지자 크리퍼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한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라한. 대체 윌 한 거지?"
"골렘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서 말이야. 자, 이제 용건이 끝났다. 아까 있던 곳으로
데려다 줄까? 아니면 그냥 알아서 가겠나?"
"그냥 여기서 헤어지고 싶다. "
"목적지는?"
"서쪽. 이 대륙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갈 거다. "
"그럼 몸조심하라고. 대륙에서 나하고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후후, 공간으로.
"
라한이 공간 이동을 이용해서 모습을 감추었다. 가면서 슬쩍 신화력을 뽑아서
크리퍼트의 몸에 심었다. 그가 어디에 숨어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일종의 추적
마법이었다.
라한이 사라지자 크리퍼트가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라한의 강함만 생각하면
지금 당장 어딘가로 도망가야 정상이었다. 한데 카이렌과 대륙 정복에 성공했을 때
얻을 영광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일단 살고 보자. '
대륙 정복으로 얻을 영광보다 라한이 더 무서웠다. 그가 본 라한의 힘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드래곤 로드마저 이긴 라한이니 아주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정을 내린 크리퍼트가 좀 전에 말한 것처럼 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도
없는, 목표도 없는 여행을 시작하는 크리퍼트였다.
로테라 숲에서 사라진 라한이 에테로가 머무는 닉스의 술집에 나타났다. 하울과
헬레나 때문에 물덩어리 변을 구하려던 계획은 일단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양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숨어 다닐 수는 없는 까닭이다.
"으악! "
"에테로님! "
라한이 나타나자 에테로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느긋하게 저녁식사를 즐기다가
라한의 방문을 받았다. 그런데 나타난 곳이 하필이면 에테로의 바로 옆 의자였다.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이런 등장에는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휴우,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이보게. 라한. 제발 미리 말 좀하고 나타나게. 이
늙은이 놀라 죽는 걸 꼭 봐야겠는가?"
"죄송합니다. 에테로님. 식사 중일줄은 몰랐어요."
"아고, 됐네. 됐어. 같이 식사하겠는가?"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차에 잘됐네요. "
라한이 어깨에 짊어진 하울과 헬레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렸다. 에일린을 집어
던지던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누군가?"
"그냥 좀 아는 사람요."
"자네 요즘 부업을 하는군. "
"예?"
"아닐세. 그냥 요즘 인신매매로 돈을 버는 건 아닌가 싶어서 해본 말일세. "
"에테로님도 참. "
에테로의 농담에 라한이 웃음을 머금었다. 생각해보니 그런 오해를 살 만도 했다.
처음에는 어린 소녀를, 다음에는 남녀 한 쌍을. 하루에 세 명이나 업어 왔으니 그런
오해를 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음, 맛있는데요. "
"닉스가 덩치는 그래도 요리는 잘한다네. "
"이게 닉스 아저씨가 만든 요리예요? 놀라운데요. "
"후후, 나도 처음 닉스가 만든 요리를 먹고 자네하고 똑같은 반응을 보였지. "
라한과 에테로가 농담을 해가며 유쾌하게 식사를 마쳤다. 식사가 끝나자 닉스가
들어와서 식기와 남은 반찬을 가져갔다. 라한을 보고 놀란 기색을 보이기는 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갑자기 쳐들어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젠
그러려니 하는 듯했다.
"변은 구하지 않았군. 저들이 변보다 더 중요한 인물인가?"
"뭐,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확인해볼 게 있어서 데리고 온 거거든요. "
"말해보게. 언제나 그렇듯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다 말해주겠네. "
에테로가 차분하게 말했다. 식사를 하며 농담을 주고받던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말'하게. "
"크리퍼트가 살아있습니다. "
"흐음, 역시 그랬군. "
에테로가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를 보며 라한이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던 건 아닐세. 미심쩍은 부분이 좀 있어서 의심하고 있었지. "
"그렇군요. "
"그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체가 사라졌네. 카이렌 일행이나 류카라한
일행에게서 눈을 뗀 적이 없는데 사라졌으니 제 3 의인물이 나타났거나 스스로
걸어갔다는 결론밖에 남지 않더군. 우린 제 3 의 인물로 자네를 지목하고 있었네.
그런데 낮에 자네한테 말했을 땐 죽은 줄도 모르는 얼굴이었어. 자네가 아니면
제 3 의 세력이 끼어들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으니 스스로 걸어서 사라졌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더군. "
에테로는 모든 변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확실하지 않은 얘기였기에 라한에게
하지 않았을 뿐. 미심쩍은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재삼재사 조사하는
성격이었다.
"낮에 말씀해주시지. "
"의심하고 있기는 했지만 살아있을 가능성보다 죽었을 가능성이 더 컸네. 우리도
그의 시체를 확인했거든. 그래서 자네한테 말할 수 없었네. "
"에테로님 답네요. 아, 또 있어요. 도대체 프라하가 위험에 처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듣자 하니 류카라한 일행과 카이렌 일행밖에 모르는 것 같던데요. "
라한이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카이렌과 다른 이들의 대화를 엿들은 후부터
궁금했던 사항이었다.
"우리가 카이렌 일행에게 심은 정보원이 헤르만이라는 건 알고 있을 테지. "
"예. 전에 제가 알아맞혔죠. "
"근데 요즘은 카이렌이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고 하더군. 자네를 공격한
뒤부터 의심이 부쩍 많아진 게지 "
카이렌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도 직접 확인할 정도로 의심이 많았다. 심지어
자기 동료들에게도 등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할 정도였다. 그런 카이렌이라면
심복에게 중요한 정보를 말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 거 같더군요. "
"근데 헤르만에게 또 다른 조력자가 생긴 모양이야.
"또 다른 조력자요?"
"그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우리도 들은 바가 없네. 헤르만이 말해주지 않았거든.
아마 당사자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모양이야. "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핵심 구성원인 것만은 분명했다. 어쩌면 좀 전 011
협박했던 크리퍼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대체 누굴까? 왜 날 돕는 걸까? 누군지 알게 되기 전에는 내버려둬야겠군. '
라한은 굴레를 벗은 존재 모두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 카이렌에게 배신당하고
프라하가 죽은 지금.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이런 결심을 카이렌이나
칭글리아트 일행도 알고 있을 터. 그럼 알려지지 않은 그 조력자도 라한에게 죽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정보를 주는 사람을 미리 죽일 필요는 없었다. 아직 처리할 일이 남은 지금.
다른 이들을 먼저 처리하고 맨 나중에 처리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정보를 걸러서 들어야겠어. '
지금까지 라한은 에테로의 정보에 거의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그가 알려준 정보
가운데 잘못된 게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신뢰를 어느
정도는 접어야 했다. 특히 카이렌에 대한 정보는 반 정도의 신뢰와 반 정도의
의심을 함께 가져야 할 듯했다. 그 정보가 굴레를 벗은 존재를 거쳐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더 물어볼 게 있는가?"
"케이플이라고 아십니까?"
"알고 있네. 종족은 라이칸드로프. 도끼와 검 모두를 쓰는 상당히 강한 실력자라고
알고 있네. 그리고 이번 프라하를 처리하는 임무에 참가한 세 명 중 한 명이지. "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
케이플은 시스마란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의 겁파 마법에 거의 유린당하듯 허무하게
쓰러진 것이다. 그러나 라한은 시스마란의 등장을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케이플이
시스마란에게 죽임을 당한 것도 몰랐다.
"케이플이 죽었는가?"
"예. 제가 갔을 펀 이미 죽어 있더군요. 목이 깨끗하게 잘렸습니다. 검을 상당히 잘
쓰는 사람에게 당한 것 같기는 한데.검흔만 살펴보면 케이플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자 같아서요. 고렇다고 드래곤이 싸운 흔적은 없고. "
에테로는 라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약한 자에게 죽임을 당한다?
말뜻만으로는 분명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 검술 실력이 떨어지는 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니? 그럼
기습이라도 당했다는 건가?"
"아니요. 거긴 분지처럼 저진 곳이라서 기습은 거의 불가능한 곳입니다. "
라한이 프라하와 케이플이 죽은 곳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 말에 에테로의 의문이
더욱 커졌다.
"그럼 더 이해가 안 가는군. 어떻게 약한 자에게 죽을 수가 있지. "
"저도 그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검술 실력만 따지면 케이플보다 약한 자가
분명합니다. "
"그럼 다수에 의한 공격에 당했다는 말인가?"
"저 역시 그런 생각입니다. 약한 자에게 당하려면 그 방법뿐이죠. 근데 잉글리아트
일행도 아니고 카이렌 일행도 아니더군요. "
"그럼 제 3 의 인물?"
"아주 무시할 수 없죠. 어쩌면 아까 데리고 온 그 꼬마하고도 관계가 있을지
몰라요. "
라한의 대답에 에테로의 얼굴이 침중하게 변했다. 지금 국면은 무려 4 개의 세력이
싸우는 형편이었다. 라한, 드래곤, 잉글리아트, 카이렌. 그런 상황에서 또 다른
세력이 등장했다? 자칫 유리함을 점한 라한이 불리해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알아보겠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다시 변을 찾으러 갈 생각인가?
아니요. 오늘은 너무 늦었습니다.
캉렌의 진영에 만들어진 밀실은 기계 장치로 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하나가
그렇다는 건 다른 밀실도 같은 방식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건 직접 눈으로
찾아야 하기에 밤에는 힘들었다.
알겠네. 그럼 쉬게.
예. 에테로님도 그만 쉬십시오. 그럼
라한이 인사를 하며 하울과 헬레나를 양 어깨에 메고 밖으로 나갔다. 라한이 나가자
에테로가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또 다른 세력이 나타나서
좋을 게 없었다. 라한은 이미 승기를 완전히 잡은 상황. 변수가 생긴다는 그 자체가
불안한 일이었다.
마지막 인사
라한이 집에 도착하자 제라드가 반갑게 맞았다. 하루 종일 혼자 지내느라 심심했던
모양이다.
어이, 라한. 왜 이제 오는 거야?
형님. 미안해요. 심심했죠?
아니, 뭐. 꼭 그렇다기보다. 근데 갔던 일은 다 해결됐어?
원래 제라드는 슈라, 테세르와 잘 노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라한이 가끔
자리를 비워도 심심함을 느끼지 않았다. 한데 오늘 낮에 에일린이 오는 바람에 놀
상대가 없었다. 슈라는 라한이 소환하는 바람에 사라졌고 테세르는 에일린
괴롭히기에 재미가 들어서 제라드와 놀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중년이 다 된 나이에 에일린 괴롭히기에 동참할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는 상대를 위해 테세르를 말리기도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혼자서 고독을 씹으며 시간을 소일해야 했다.
"깨끗하게 해결되지는 않았는데 뭐 대충은 됐어요. "
"다행이군. 근데 라한. 너하고 싸우는 상대가 드래곤 말고 또 있었어? 난 드래곤
로드한테 이기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
제라드는 라한의 상대가 누군지 몰랐다. 라한이 말해주지 않았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라한도 굳이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알게 되면 깊숙이
관여하게 될 건 자명한일. 제라드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려는 라한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있어요. 골치 아픈 놈들하고 아주 야비한 놈들하고. "
"둘? 놈들?"
"예. 두 집단이에요. "
"누군지 몰라도 실수했군. 너하고 맞서다니. 쯧쯧. "
제라드가 아는 한 대륙 최강자는 라한이었다. 최고라 불리는 드래곤 로드를
꺾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라한은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의 사자가 있는 한 영원히
최고가 될 수 없는 라한. 대륙을 마음대로 들었다 놨다. 하지 않는 이유도 조용히
자중하고 있는 신의 사자들을 의식해서였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강한 건 아니에요. "
"겸손도 지나치면 예의에 어긋나는 법이다. 넌 이미 최고야. "
"형님도 참. 아까 짜증 부린 거 미안해요. "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았다. 너한테 사정이 있었겠지. 근데 어깨에 멘 건 뭐냐?
요즘 인신매매에 재미 들였나?"
"아니요. 그냥 아는 사람들이에요. 들어가죠. "
"그러지. "
라한이 방으로 들어가자 테세르도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이 가까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주인. 일은 잘 끝났어?
"그럭저럭 그 꼬마는?"
- 매달아 놨는데.
테세르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이에 라한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뭐?"
라한이 테세르에게 에일린을 맡긴 건 단순히 귀찮아서였다. 아직 에일린이 적인지
아군인지, 혹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황. 그녀를 적으로 규정짓지
않은 이상 괴롭히라고 명령할리 없었다. 옆에서 이것저것 알려고 애쓰는 에일린
때문에 신경이 분산돼서 맡겨놨을 뿐이다.
-뒤뜰에 묶어 놨어.
"가자. "
라한이 서둘러 뒤뜰로 향했다. 제라드도 약간 놀란 얼굴로 뒤를 따랐다. 괴롭히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매달아 놓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뒤뜰에 가자 기진맥진해 있는 에일린이 눈에 들어왔다. 큰 나무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이 시계추를 연상케 했다.
"테세르. "
-응?
"풀어. "
-왜? 재밌잖아.
"풀라고 했다. "
라한이 낮은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그 말투에 테세르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풀게. 푼다고.
테세르가 공중으로 날아가서 에일린을 묶은 줄을 잘랐다. 줄이 잘리고 에일린이
떨어지자 라한이 손을 슬쩍 휘저었다. 신화력을 일으켜서 떨어지는 에일린을 받은
거였다.
착- !
에일린이 안전하게 착지하자 라한이 그녀를 조용히 바라봤다. 기진맥진한 에일린이
눈앞에 있는 라한을 매섭게 노려봤다. 자기가 이렇게 된 게 모두 라한 탓이라도
되는 듯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내가 미운가 보군. "
"이, 이. 악마 같으니. "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가 이러니 사과해야겠군. 미안하다, 꼬마야. "
"흥. "
라한의 사과에도 에일린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당한 고통이
얼마던가? 말 몇 마디로 화를 풀기에는 서러운 게 너무 많았다.
"그래도 화를 안 푸는군. 테세르!"
-어, 주인 왜?
라한이 테세르를 부르자 에일린이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다. 테세르라는
이름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는 듯했다.
"에일린을."
"잘, 잘못했어요. "
라한의 입에서 이름이 호명되자 에일린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다시
괴롭히라는 말이 나올까 봐 지레 겁먹은 것이다.
"얘가 왜 이래? 테세르. "
"잘,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
"이거 참. "
라한이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좀 전까지 독기를 풍기던 그
에일린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테세르. "
"제발 살려주세요. 어엉, 엉어어엉."
라한이 다시 테세르를 부르자 에일린이 울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되자 보고 있던
라한이 민망한 기분이었다.
"알았어. 누가 죽인대? 테세르. 씻겨라. 형님, 가요."
"그, 그래. 근데 라한. 테세르한테 또 맡겨도 될까?"
제라드의 입에서 라한이라는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러자 에일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라한? 오빠가 찾는 사람인가?'
시스마란은 라한의 이름을 거의 입께 달고 살았다. 항상 입이 마르게 칭찬하며
멋있다며 정의의 사도라며 떠받들었다. 그래서 에일린도 라한이라는 이름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시스마란은 라한을 정의감 넘치는 멋있는
마법사라고 말했다. 한데 눈앞에 있는 라한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에 지나지
않았다. 시스마란이 말한 라한과 눈앞의 라한,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동일인으로
보기 힘들었다. 아니, 거의 극과극의 인물이었다. 정의의 사도와 악마이니 말이다.
'이름만 같을거야. 이름만. 근데 너무 강하다. '
세상이 넓다 보니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도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엄청난
강자끼리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시스마란이 말한 강한
마법사와 눈앞에 있는 강한 실력자, 이름까지 같으니 아무래도 같은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테세르. 또 괴롭히면 내 손에 죽는다. 알았지?"
-칫, 줄 때는 언제고 그새 빼앗아 가냐. 치사한주인 같으니라고.
테세르가 투덜거리며 에일린을 잡아 어깨에 멨다. 이미 인간의 크기로 몸을 키운
상태라서 에일린을 업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발버둥을 치는 에일린 때문에 시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놔! 놔! 이 괴물아! 날 놔줘!"
-조용히 좀해. 이 그냥아가씨야. 너 떠들면 우리 주인이 화낸단 말이야.
"놔! 이 괴물! 차라리 날 죽여라. "
우씨.
"놔! 이. 우웁!"
참다못한 테세르가 에일린의 입을 막았다. 더 떠들었다가는 라한에게 꾸중 들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형님, 가죠. "
"그래. "
라한이 제라드와 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테세르는 에일린을 씻기기 위해 예전 변이
머물던 연못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모두 사라지자 슈라도 평소 자신이 쉬는 넓은
공터로 사라졌다.
방에 도착한 라한이 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어라?"
라한이 구해온 하울과 헬레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치 엄청난 죄라도 지은 듯
고개까지 떨군 채였다.
"은인을 뵙습니다. "
"은인인 건 좋은데 이거 뭐 하는 겁니까?"
"생명의 은인에게는 생명으로 갚아야 하는 법. 저희들의 생명을 구해주셨으니
이제부터 저희 생명은 당신 것입니다. "
하울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면이 있어서 구하기는 했지만 이런
지경이 올 줄은 몰랐음이다.
"이봐요. 저 모르겠어요? 예전에 만났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라한, 성격은 더럽지만 친인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성격. 실력은 드래곤조차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함. 당시 드래곤 로드와 적대
관계에 있었음. 그리고 최근 드래곤로드 로테마이어스를 꺾고 대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음. "
"젠장,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했습니까?"
"스승님이 그렇게 말해줬습니다. "
하울의 대답에 라한이 미간을 찡그렸다. 하울의 스승이라면 프리미아가 분명했다.
성격 더럽다는 주관적인 평가도 그녀가 말해준 것이리라.
'망할 프리미아 철 좀 들었나 했더니. '
"제가 라한인 것도 맞고 그 성격 더럽다는 것도 다 사실이라고 칩시다. 근데 전
부하를 두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거든요. "
"생명의 은인에게 생명을 바치지 못하면 있으나 마나 한 생명이겠죠. 은혜를 갚을
수 없으니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습니다. "
하울이 주먹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당장 목숨을 끊겠다는 게 허언은
아닌 듯했다
"망할. "
퉁- !
라한이 신화력을 일으켜 하울의 주먹을 막았다. 그러자 하울이 '왜?' 라는 의문을
담아 라한을 바라봤다.
"망할, 프리미아. 그년이 시켰죠? 이렇게 하라고 사주한 거죠?"
"말할 수 없습니다 "
"사실대로 말해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프리미아가 시킨 거 맞죠?"
" 예. "
라한이 받아들이겠다고 하자 하울도 순순히 실토했다. 라한이 받아들였으니 이제
하울과 헬레나는 라한의 사람이었다. 스승인 프리미아보다 라한의 말을 우선적으로
들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망할. 갔다 와서 봅시다. 공간으로. "
라한이 사라지자 하울과 헬레나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울의 말처럼 생명의
은인에게 생명을 바치는 관습이 그들의 섬에 있는건 사실이다. 하지만 부하가 되는
건 아니었다. 언제고 한번은 그의 목숨을 살려주는 게 그곳의 관습이었다.
하지만 프리미아가 그들에게 라한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그의 부하가 되든 친구가
되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어떻게든 그를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는 명령이었다.
에일린이 씻고 나오자 테세르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점수를 매기듯
야시시한 테세르의 눈빛. 에일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야이, 괴물아. 뭘 보는거야?"
-보, 보긴 뭘 봤다고 그래? 난 그냥 깨끗하게 씻었는지 확인한거라고.
"흥. "
당황하는 테세르를 보며 에일린이 코웃음을 쳤다. 이미 그녀에게 테세르는 변태,
치한으로 낙인찍힌 상태였다.
-야, 꼬맹이. 그 눈빛은 뭐야?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믿어. 믿지. 근데 대체 당신 정체가 뭐야?"
에일린은 낮에 테세르를 봤을 때부터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시스마란에게 슈라나
테세르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 탓이다.
시스마란과 지낼 당시에 라한은 슈라와 테세르에 대해 말하는 걸 꺼려했다.
시스마란도 그런 라한의 의도를 알고 있었기에 에일린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 내 정체?
"그래. 이 괴물아. 넌 누구야?"
용기를 얻은 에일린이 만용을 부렸다. 아직 어려서인지 아니면 개념이 없어서인지,
테세르의 무서움을 완전히 잊어먹은 모습이었다.
'요거 봐라. 재미있네. '
에일린의 당돌한 말에 테세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놀이를
발견했을 때 짓는 테세르 특유의 표정이었다.
-난 사실 인간이었다.
"뭐?"
-지금 내 몸이 이렇게 된 건 모두 우리 주인에게 저주를 받아서. 흑,흑. 너도
나처럼 되지 않으려면 우리 주인한테 잘해야 돼.
"라, 라한이라는 그 사람이 이렇게 만든 거라고?"
-그래, 나도, 나도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런데. 엉엉 엉.
급기야 테세르가 울음을 터트렸다. 너무 서러워서 듣고 있던 에일린도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울, 울지 마. "
-우리 주인. 무서워. 조심해
"그럼 돌로 뭉쳐진 커다란 그것도 나쁜 주인이 한 짓이야?"
-흑, 흑, 말 안 듣는다고 이렇게 만들어 버렸어. 말 잘들으면 나중에 원래 모습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하는데, 정말 해줄지도 의문이고. 엉엉.
테세르의 말에 에일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제야 라한의 무서움을 깨달은
듯했다.
-오늘은 저기 있는 빈방에서 자라. 그리고 내일 우리 주인이 부르면 제발 대들지 좀
마. 네가 대들면 우리한테까지 화가 미친다고.
"알았어. "
에일린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테세르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공간 이동 했던 라한이 예전에 방문한 적이 있는 베센 왕국의 술집에 도착했다.
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가는 모습이 화가 단단히 난듯했다.
쾅- !
"야! 나와!"
"손님. 오늘 영업은 이미 끝났습니다. "
"시끄러. 여기 주인 나오라고 해. "
종업원의 만류에 라한이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상황이 이쯤 되자 곳곳에서
청소하던 종업원들도 하던 일을 멈췄다.
"손님. 주인께서는 아무나 만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다시 찾아오셔서 정식으로
통보해주십시오."
"머리 파랗고 실실 웃는 그년 나오라고 해. 안 그러면 여기 내버린다. "
"손님. 자꾸 이러시면 저희도 무력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무력? 까짓것 해보자. 누가 이기나 보자고."
말을 마친 라한이 팔을 걷어붙였다. 여차하면 정말 다 때려 부술 기세였다
"호호호, 머리 파랗고 실실 웃는 그년이 나를 의미하는 건가?"
라한이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외칠 때, 안에서 프리미아가 걸어 나왔다. 여전히
귀엽고 깜찍한 얼굴이었다.
"그래. 이 망할."
"형수한테 그렇게 심한소리를 하면 안 되지 형수님하고 불러봐."
"너 죽을래?"
라한이 성큼성큼 걸어가서 프리미아의 멱살을 잡았다. 부릅뜬 두 눈이 그가
분노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라한아. 그 손 놓거라. "
"누. 형님?"
차분한 레테아의 목소리에 라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테아가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원래 라한 정도의 실력이면 프리미아뿐 아니라 레테아가 이곳에 있다는 것도
알아채야 정상이었다. 한데 너무 화가 나서 미처 기운을 퍼트리고 살펴보지 못했다.
알았다면 그래도 형수라고 할 수 있는 프리미아의 멱살을 잡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라한아. 형수 멱살이나 잡는 몰상식한 행동은 누구한테 배운거냐? 내가 그렇게
가르쳤더냐?"
"아, 아니요. "
라한이 프리미아의 멱살을 놓고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얼굴 가득 당혹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들어가서 얘기하자꾸나. "
"예. "
레테아의 말에 라한이 공손한 표정으로 따라 들어갔다 이 상황을 가장 흥미 있게
지켜보는 이는 프리미아였다 항상 자신을 놀렸던 존재 라한. 말과 실력, 모든
면에서 단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프리미아의 통쾌한 첫 승리였다.
안에 들어간 라한과 레테아가 마주 보고 앉았다. 프리미아는 레테아의 뒤 011 서 혀를
날름거리며 라한을 놀려댔다.
'망할 프리미아. 내가 이래서 드래곤을 싫어한다니까. '
"라한아. 드래곤 로드한테 이겼다는 얘기를 들었다. 장하구나. "
"뭘요. "
"하지만 난 네가 걱정된다. 너 역시 허황된 야망으로 대륙을 어지럽힐까 걱정돼서
하루도 편히 잘 수 없구나 "
레테아의 말에 라한이 공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이놈의 대륙을 가질 생각은 조금도 없거든요. "
"남자라면 야망을 품을 줄 알아야 하지. 하지만 그 야망을 자제할 줄 아는 것도
남자가 가져야 할 도리란다. 부디 지금의 네 생각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예. 형님 말씀 명심할게요. "
라한이 대답하자 레테아가잠시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야 본론을 꺼낼 생각인
듯했다.
"형님. 말씀하세요. 동생한테 못할 얘기가 뭐가 있어요?"
"로드가 죽었으니 대륙이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것 같구나. 맞느냐?"
"거의 그렇죠. "
"그럼 우리와 함께 돌아가지 않겠니? 그곳에서 마음 편하게 지내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느냐?"
레테아는 라한이 걱정되었다. 야망을 품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는 일. 자칫 라한을 오해하고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런 시기 질투가 커지면 음모가 되고, 결국 라한이 그 음모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죄송해요, 형님. 이번 말씀은 따를 수 없을 것 같아요. "
"왜? 대륙을 정복할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근데 왜 돌아갈 수 없다는
게냐?"
"대륙 정복은 아니지만 제게도 꿈이 있어요. "
"휴우우, 네 생각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겠구나. 그럼 언제쯤 네 꿈을 이룰 것
같으냐?"
레테아가 착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라한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게 그를 답답하게
만든 듯했다.
"안 그래도 형님을 찾아뵈려고 했어요. 전 조만간 대륙을 떠날 생각이거든요. "
"대륙을 떠나? 어디로?"
"목적지는 없어요. 그냥 떠나야할 것 같아서. 앞으로 형님을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라요. 미리 인사드릴게요. "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깊이 숙였다. 형에게 행하는 마지막 인사였다.
"꼭 떠나야 하느냐?"
"예. "
"네 생각이 그렇다면 말리지 않으마. 판트리아 대륙 남쪽 섬에서 널 기다리는 이
형이 있음을 명심하거라. 네가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리마. "
"예, 형님. "
레테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다시 동생을 볼 수 없다는 게 그를 서글프게
만든 것이리라.
"그럼 가볼게요. 형님, 행복하세요. 공간으로. "
라한이 서둘러 공간 이동 했다. 더 머물러 있다가는 형에게 눈물을 보일 것
같아서였다.
다음 날 오전 늦게 일어난 라한이 마당으로 나왔다. 라한이 나오자 제라드와 슈라,
테세르 그리고 에일린이 마당으로 모두 모였다.
"라한아. 피곤했나 보구나, "
"좀 늦었죠?"
-에이, 제라드씨가 잘 몰라서 그러나본데, 우리 주인 원래 늦잠 잘 자요.
테세르가 비꼬자 옆에 있던 에일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테세르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허리를 슬쩍 꼬집었다.
-왜?
"조심해. 더 괴물같이 만들면 어쩌려고 그래?"
에일린이 작은 목소리로 테세르를 일깨웠다. 그제야 테세르도 어제 자기가 했던
장난을 기억해냈다.
"꼬마야. 그게 무슨 말이야? 괴물 같이 만들다니?"
에일린은 소곤소곤 말했지만 듣지 못할 라한이 아니었다. 오감에 있어서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라한. 에일린의 작은 목소리도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귀신같은 라한의 예민함에 에일린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아, 아니에요. "
"뭐가 아니라는 거야?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어제 하던 얘기나 계속해보지, "
"예?"
"너! 정체가 뭐야? 네 실력으로 텔레포트하는 건 불가능할 테고. 그럼 누군가가 널
강제로이동시켰다는 얘긴데, 대체 누구야?"
라한이 에일린을 처음 만났던 장면을 떠올리며 물었다. 라한이 입을 열자 테세르와
슈라, 제라드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오빠요. 오빠가 절 강제 이동 시켰어요. "
"그래?"
라한은 에일린이 고분고분하게 대답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 살기를
흘리면서 물었는데도 버텼던 에일린이지 않은가? 오늘도 당연히 모른다며 버틸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에일린의 입에서는 너무 쉽게 대답이 나왔다. 얼굴도
어제와는 다르게 공손한 표정이었다.
'거짓말인가?'
너무 쉽게 대답해주자 오히려 지금 대답이 거짓말 같았다. 이렇게 쉽게 말해줄
거라면 어제 그렇게 버틸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오빠가 누군데?"
"저, 저기 그 전에 여쭤볼 게 있어요. "
'여쭤봐? 흐음. '
어제는 반말 일색이었던 게 에일린의 말투였다. 그런데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투가 높임말이었다. 그것도 극존칭.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라한의
의심을 가중시켰다.
"말해봐. "
"혹, 혹시. 시, 시스마란이라고 아세요?"
"시스마란?"
"시스마란?"
에일린의 말에 제라드와 라한이 동시에 대답했다. 둘 모두에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예. "
"시스마란이라. 넌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지?"
"시스마란이 제 오빠예요. 어제 절 강제 이동 시켰던 사람도 시스마란 오빠구요. "
에일린의 대답에 라한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의 말이 거짓말이라 생각한 탓이다.
라한이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시스마란은 고아였다. 당연히 가족도 없었다.
여동생이 등장한 그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또, 시스마란은 몇 년째 연락이
끊어졌던 사람이다. 이렇게 공교로운 때에 처음 보는 여자가 여동생을 자처하고
있으니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거기다가 시스마란은 마법사가 아닌 검사였다.
검사가 마법을, 그것도 8 서클에 버금가는 텔레포트 아더를 사용했다는 건 믿음이
가지 않았다.
"오호, 그래? 시스마란이 오빠라고?"
"예, 우리 오빠가 당신 얘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라니까요. "
"오호, 그래? 테세르!"
계속 듣고 있던 라한이 테세르를 불렀다.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였다.
'감히 내 과거를 건드리다니. '
시스마란은 라한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당연히 지금도 만나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한데 누군가가 나타나서 시스마란의 여동생을 사칭하고 있었다.
라한의 과거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셈이다.
-주인, 왜?
"데리고 놀아라. "
-어? 시스마란하고 아는 사이라고 하잖아. 시스마란이면 전에 그 바른생활 사나이
아냐?
"테세르. "
-아, 알았어. 야! 꼬맹아. 가자. 으차!
테세르가 에일린을 어깨에 들쳐 메고 사라졌다. 에일린은 영문도 모른 채 테세르에
업혀 이동되었다.
테세르가 사라지자 제라드가 조심스럽게 라한을 불렀다
"라한아 "
"예, 형님. "
"시스마란은."
"시스마란은 검사였습니다. 기억하시죠?"
라한이 제라드의 말을 끊고 해명했다. 그 말에 제라드도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군. 그럼 저 꼬마가 사기를 친 건가?"
"예. 어떻게 시스마란의 이름을 알았는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용납할 수 없네요. 제
과거 속 인물 중 몇 안 되는 호의적인 인물이었거든요. "
라한은 과거에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대륙을 종횡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또 헤어졌다. 만난 사람 모두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난 사람 중 몇 명은 아직도 라한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특히 호의적으로 만나서 호의적으로 헤어진 이들은 잊히지가 않았다. 그런 사람들
중 대표적인 이가 시스마란 과제라드, 다크시안이었다. 때문에 누군가가 그들과의
기억에 흠집 낼만한 행동을 하면 그만큼 심한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세상 참 무서워졌군. 저 어린 것을 이용해서 널 속이려고 하다니. "
"누군지 몰라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
"그래, 이번 일은 나도 화가 나는군. 시스마란은 내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으니까. "
제라드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그 역시 분노를 느꼈다는 증거였다. 그 모습을
보며 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래서 내가 형님을 인정했지. '
평소 제라드는 무척이나 부드러운 성격이었다. 그래서 누구라도 그를 보면 만만하게
보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제라드도 한번 화가 나면 무서울 정도로 변했다.
혈전사. 그 호칭에 걸맞은 진정한 피의 전사로 변하는 제라드였다.
카이렌은 3 일이 지나서야 크리퍼트가 사라진 걸 알았다. 그동안밀실에 들어가지
않은 탓이다. 3 일째 토일렛이 잉글리아트의 소식을 가져왔고 그래서 밀실에
모이기로 했다. 만약 이 모임이 없었다면 크리퍼트가 사라진 걸 깨닫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터였다.
"크리퍼트는 어디 있지?"
"글쎄다. 그냥 놀러 간 거 아닐까? 여기가 좀 답답하잖아. "
카이렌의 물음에 루이에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크리퍼트는 이전에도 조용히
외출했다 돌아온 적이 몇 번 있었다. 때문에 루이에는 이번에 사라진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토일렛. 어떻게 됐어? 모이자고 한 걸로 봐서
잉글리아트가 깨어난 것 같은데?"
"맞아. 잉글리아트가 깨어났다. "
"누구한테 당한 거지?"
" 라한. "
토일렛의 짧은 대답에 다른 이들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라한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였다.
"그 자식. 정녕 끼어들 생각이군. "
"이게 모두 너 때문이지 않은가? 그 전에만 해도 라한은 우리 일에 관심이 없는
놈이었어. 드래곤하고는 수시로 부딪친 것 같았지만 우리하고는 아무런 충돌이
없었단 말이야! 한데 네가 암습을 가하는 바람에.
기습을 당하기 전의 라한은 이번 일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는 알게 모르게
많이 개입했지만, 겉으로 드러난 라한의 움직임이 없었다. 드래곤과 몇 번 충돌한
게 알려졌을 뿐. 류카라한 진영과 카이렌 진영에는 그 어떤 간섭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망할. 그래서 어쩌라고? 지금 라한을 찾아가서 빌까? 아니면 내가 가서 목을
내밀어? 내가 죽으면 너희들이라고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림없는 소리. 그놈은
우리 모두가 죽기를 바라고 있을 거다. "
"잠깐, 잠깐. 지금 이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니다. "
카이렌의 짜증 가득한 말을 루이에가 제지했다. 평소에 말이 별로 없는 그였기에 단
한마디만으로 토일렛과 카이렌의 시선을 모았다.
"루이에. 그게 무슨 소리지?"
"프라하가 가는 곳은 우리밖에 모른다고 했지?"
"그렇지. "
"근데 라한은 프라하가 있는 곳에 나타났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크리퍼트가
사라졌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루이에의 말은 명백했다. 라한에게 정보를 전해준 인물로 크리퍼트를 꼽은 것이다.
"에이, 설마. 크리퍼트는 그렇게 간 큰놈이 아니잖아. 검술 실력은 뛰어나지만
모험을 시도할 만큼의 담력은 없는 놈이야 "
"맞다. 루이에. 내가 크리퍼트를 받아들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
"하지만 잘 생각해봐라. 프라하의 위치를 라한이 알고 있었다. 그건 우리 중의 한
명이 라한의 끄나풀이라는 얘기밖에 안 돼. "
루이에의 말에 카이렌도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라한에게 정보를 전해준 자가 있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사라진 크리퍼트.
우연으로 보기에는 상황이 너무 절묘했다.
"크리퍼트가 의심스럽군. "
"그렇지 "
"그래도 섣불리 결정할 수는 없다. 만약 며칠 안으로 크리퍼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땐 확실해지는 거겠지. "
일단 크리퍼트에 대한 의심은 보류하기로 했다. 상황이 딱 들어맞기는 했지만 그가
지금까지 해온 일이 너무 많았다. 그간의 공로를 생각해서라도 어느 정도 기회를
주고 싶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잉글리아트가 다른 말은 안 했나? 가령 라한의
실력이라든가, 아니면 프라하의 생사에 대한 것. "
"프라하는 죽었다. 잉글리아트가 불타고 있는 프라하를 봤다고 하더군. 아마
프라하가 죽고 나서 라한이 나타난 모양이야. "
"라한의 실력은?"
"휴우우. "
카이렌이 다시 묻자 토일렛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라한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으로 답답함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꺾을 방법이 없는 상대였다.
너무 강해서, 자신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강자라서.
"강한가 보군. "
"잉글리아트는 라한에 대해 딱 한마디로 정의하더군. "
"한마디?"
"응. "
토일렛이 카이렌과 루이에의 얼굴을 차례로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슬쩍 흔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절대자. "
"절.대자. "
"예전에도 강했지. 그때 카이렌 네가 암습을 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아 "
루이에와 카이렌의 얼굴도 착잡하게 변했다. 예상은 어느 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듣게 되자 기분이 더 엉망이었다.
"내가 잉글리아트가 아니라서 뭐라 말하기 힘들군. 아무튼 잉글리아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또 뭐라더라? 맞서 싸우는 게 자살 행위라던가?"
"흐음. "
"망할. "
잉글리아트가 한마디 할 때마다 루이에와 카이렌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이미
한 번 격돌해봤고 당시에도 정식 대결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라한이었다. 그러나
그땐 절대자라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비면 어떻게
상대할 수도 있었던 게 라한이었다. 그랬던 그가 더 강해져서 나타났다. 카이렌과
루이에가 절망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카이렌. 네 생각을 묻고 싶다. 어쩔 거지? 만약 라한이 이곳을 공격해 온다면?"
"정면 대결로는 이길 수 없겠지. 하지만 내게도 방법이 있다."
"은신술 말이군. "
"그래. 너희들이 시간을 끌고 시선만 잡아둔다면 누구라도 죽일 자신이 있다. "
카이렌이 짐짓 당당하게 말했다. 이렇게라도 용기를 얻고 싶었던 모양이다.
카이렌의 말에 루이에와 토일렛이 침묵에 잠겼다. 그들은 카이렌의 말대로 하면
승산이 있을까를 타진해보고 있었다. 한참 고민하던 토일렛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능성은 있겠군. "
"가능성? 훗, 내 은신술은 판트리아 대륙 역사상 최고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상대가 라한 아닌 라한 할애비라도 죽일 자신 있어! "
카이렌이 눈을 빛내며 서서히 살기를 일으켰다. 그 모습을 토일렛이 흐뭇하게
지켜봤다. 카이렌의 은신술을 믿는 모습이었다.
라한은 3 일 정도 아무 생각 없이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를
만끽하고 싶어서였다.
4 일째, 라한이 옷을 챙걱 입고 나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테세르. 에테로님은?"
-곧 올 거야. 저기 왔네.
라한은 옷을 입기 전에 테세르에게 일러 에테로를 불렀다. 그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에테로님. 저 꼬마 좀 맡아주세요. "
라한이 에일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 여정에는 테세르, 슈라도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 에일린을 돌볼 사람이 없었기에 에테로를 부른 것이다.
"어디부터 갈 생각인가?"
"잉글리아트부터 봐야겠어요. "
"조심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네. 언제까지 돌아올 수 있는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
라한의 담담한 말에 에테로가 웃음으로 대담했다. 그 누구에게서도 긴장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테세르. 이리로 들어와. "
라한의 말이 끝나자 테세르의 몸이 원래의 작은 크기로 변했다. 그러자 에일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테세르가 작게 변하는 걸 처음 보는 에일린이었다.
"저, 저게."
"형님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
"나도 가겠네. "
"형님. "
"내가 비록 너보다 약하지만 그래도 혈전사라고. 천하의 혈전사가 상대가 무서워서
떨면 되겠어?"
제라드의 말에 라한이 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당당한 말에서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그래요. 같이 가요. "
"그래야 내 동생이지. "
제라드가 라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정한 형제 같은 모습에 보고 있던 에테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기 좋군. "
"훗, 에테로님. 그럼 저 꼬마 좀 부탁합니다."
"잠시만요. "
라한이 사라지려 할 때, 하울과 헬레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등장에 라한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무슨 일이죠?"
"말씀 놓으십시오. 이제 저희는 라한님의 부하나 마찬가지입니다. "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러지. 여기 무슨 일로 온 거지?"
"저희는 주인님의 부하입니다. "
하울의 말에 라한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나름대로 생각해둔 말이 있다는 증거였다.
"후후, 그러니까 주인인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가겠다는 건가?"
"예. "
"그럼 주인인 내가 시킨 일도 해야겠군. 너희들은 부하니까. 맞지?"
"물론입니다. "
라한의 진한 미소에 하울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라한에게 복안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럼 여기 남아서 블리아드 마을을 지켜라. 그리고 재능 있는 자들을 뽑아서
검술도 전해주고. "
"예?"
"왜? 싫어? 내가 너희들 주인이잖아. 시키는 대로 해야지.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
"그럼 하는 거지, 잘 부탁한다. 공간으로!"
"수고하게, "
사라지는 라한과 일행을 보며 에테로가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봤는지 라한과
제라드도 마주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에테로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안 남은 것 같군. '
라한 일행이 사라지고 가장 좋아한 사람은 에일린이었다. 그래도 에테로는 인간으로
보인 모양이다.
"할아버지 아까 그 사람. 대체 왜 그래요?"
"에잉? 무슨 뜻이지?"
"아, 아니에요. 할아버지도 한통속이었지. 쳇. "
에일린이 말을 얼버무리자 에테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하려던 말을 모를
에테로가 아니었다. 한데 그 말이 당돌하면서도 귀여워서 도무지 화를 낼 수
없었다.
한편 라한의 명령 때문에 남은 하울과 헬레나의 얼굴이 마구 찌푸려졌다. 이런
식으로 떼놓을 줄은 몰랐는지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시킨 일이니 해야겠지. 저기 어르신.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십시오. "
"따라오게. 내가 촌장을 소개해주겠네. 라한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의심하지는 않을 게야. "
"감사합니다. "
에테로가 하울과 헬레나, 에일린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한동안
북적이던 라한의 거처가 휑하게 변했다.
라한와 일행들이 루이나 왕국의 수도 루스티아 외곽에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좋군. 테세르. 너도 여긴 오랜만이지?"
-그렇게 좋아?
"뭐, 그냥. 그래도 고향이잖아. "
고향에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괜히 기분이 들떴다. 라한도 알게 모르게 향수병을
앓고 있었던 모양이다.
-난 인간들이 고향을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그게 인간이지 아무리 강한 척해도 정이라는 감정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거든. "
-쳇, 저 아저씨는 또 잘난척하네. 자기가 오래 살면 얼마나 오래 살았다고.
제라드의 말에 테세르가 딴죽을 걸었다. 자기가 모르는 걸 남이 알고 있다는 게
심통 난 모습이었다.
"어쩌다 보니 또 잘난 척했군. 미안하네. 까만 정령. "
-테세르라니까. 자꾸 까만 정령이라고 부를래?
"난 너보다 머리가 나빠서 이름도 못 외우는군, 똑똑한 네가 이해해야지.
어쩌겠어?"
제라드의 말에 테세르가 씩씩거렸다. 얘기가 길어질수록 자꾸 당하는 느낌에 화가
치밀었다.
"테세르. 그만 해. 형님도 그만하세요. 싸울 놈이 없어서 저런 멍청한 놈하고
싸워요?"
"허허, 라한. 그게 무슨 소린가? 우리 까만 정령님께서는 너무 똑똑해서 세상을 다
굽어 살필 수 있다네. "
"푸홋, 형님. 그만 하세요. "
제라드의 비꼼에 테세르의 볼이 터질 듯 부풀었다. 화는 치미는데 대꾸할 말은
생각나지 않고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라한. 근데 어디로 갈 생각이야? 바로 그, 잉.뭐더라? 잉글리아트? 아무튼 그자를
공격할 거야?"
"아니요. 여긴 내 고향이잖아요. 예전 살던 곳이나 한번씩 가볼까 생각 중이에요.
그놈들은 어차피 도망 못 가거든요. "
라한은 잉글리아트와 그 일행들이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해 놓은 게 많으면
포기하기도 아까운 법. 그들은 류카라한을 전복시키고 지금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그렇게 투자한 게 아까워서라도 쉽사리 도망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럼 어디부터 구경할 생각인데?"
"집요. 가자. "
라한이 앞장서서 걷자 테세르가 그의 로브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많은 곳을
지나갈 것이기에 알아서 숨은 거였다.
한참 동안 걷던 라한이 어느 저택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서글픈 표정과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예사 저택이 아님을 짐작케 했다.
"여기가 어디야?"
-여긴 예전에 라한 주인이 살던 집이었어.
"여기가 필슨 백작가로군, "
제라드도 라한의 성이 필슨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또, 필슨 가문이 엘베로에 의해
멸문했음도 잘 알았다. 용병들의 수장이랄 수있는 혈전사. 정보 습득에 있어서도
예사롭지 않은 존재였다.
"알고 있었군요. "
"내가 혈전사라는 걸 잊었나?"
"훗, 혈전사라는 호칭이 자랑스러운가 봐요. "
"혈전사는 용병들의 꿈이다. 난 그 꿈을 이룬 거지. "
제라드의 얼굴에 자부심이 어렸다. 용병들은 대부분 혈전사라는 꿈을 위해 평생을
바친다. 제라드 역시 혈전사 하나만 바라보고 평생을 용병으로 지낸 사람이었다. 그
꿈이 이루어졌을 때 세상을 다가진 기분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근데 전 혈전사를 처음 봐요. "
"후후, 아마 앞으로도 나 외에는 혈전사를 보기 힘들 거다. "
"왜요?"
"혈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돼. 일단은 경력이 중요하지. 일정
수준 이상의 용병 수행 횟수가 되지 않으면 혈전사가 될 시험조차 치를 수 없거든.
"
제라드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물은 건 왜 혈전사를 볼 수
없느냐에 대해서였다. 한데 제라드는 뜬금없이 혈전사가 되는 조건을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물었던 내용과 동떨어진 대답이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형님. 제가 물은건."
"알고 있어. 혈전사를 볼 수 없는 이유가 혈전사가 되는 조건에 있거든. "
"그래요?"
라한이 벽에 몸을 기대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제라드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을
준비를 갖춘 모습이었다. 라한이 벽에 기대자 제라드가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입을
열었다.
"응. 아까 어디까지 했더라? 아, 용병 수행 횟수까지 했지. 일단 용병 수행 횟수가
충족되면 다음은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해. 그 실력을 확인하는 방법은 용병의 탑에
있지. "
"용병의 탑?"
"그래. 베루니아 왕국 북부에 있는 곳이지. 용병의 탑에는 수많은 기관장치가 되어
있어. 그 기관장치들을 모두 뚫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비로소 혈전사가 될 수 있는
거야. "
"그렇게 해서 혈전사가 되는 거구나. 전 처음 듣는 얘기예요. "
라한도 용병패는 가지고 있었다. 어릴 때 루이나 왕국을 떠나오면서 돈을 주고 산
거였다. 하지만 단순히 통행증 대용으로 쓸 생각이었기에 용병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당연히 용병의 탑이라든지 혈전사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문제는 그 꼭대기에 있다. 꼭대기에서 혈전사의 칭호를 받으면 한 가지 임무가
주어지거든. "
"한 가지 임무? 그거 말해주면 안 되는 거죠?"
혈전사에게 임무가 있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럼 그 임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비밀일 게 분명했다.
"뭐, 사실 비밀이기는 하지만. 너한테는 말해주마, "
"괜찮아요. 궁금하기는 하지만 형님을 곤란하게 만들면서까지 알고 싶지는 않은
걸요. "
"사실 너한테 도움을 청하고 싶어서 말해주려는 거다. 도움을 받으려면 이유는
알아야지. "
"도움?"
제라드는 라한과 함께 다니면서도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했다. 웬만한
일은혼자서 하려고하고,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받더라도 나중에 그에 준하는 일로
반드시 보답해줬다. 스스로의 자존심이 남의 도움을 거저 얻는 걸 용납 못 하는
것이다.
그런 제라드이기에 도움이라는 말이 특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쉽지
않은 도움이 될 테지만 말이다.
"그래. "
"말해보세요. 들어 드릴게요. "
"미리 대답하지 마라. 듣고 나서 신중히 생각하고 대답해라. "
라한의 성급한 말에 제라드가 제동을 걸었다. 행여나 섣부른 판단으로 후회할 일을
할까 걱정되었음이다.
"알았어요. 들어보고 판단할게요. 뭐예요?
"혈전사의 임무는. 휴우우. "
제라드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동생이 된 라한에게 말하기 곤란한듯했다.
제라드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라한이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제라드의 눈을 보며 방긋 웃어 보였다.
"형님. 아니, 형. 절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편하게
말해요. 동생이잖아요. "
"그래. 동생이지. 에휴, 사실 혈전사의 임무는 신대륙을 찾는 일이다. "
"흐음."
제라드의 대답에 라한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런 임무일 줄은 예상치 못한 탓이다.
라한은 기껏해야 어딘가로 가서 누군가와 싸우라는 임무인 줄 알았다. 그게
혈전사다운 임무라 믿었다. 한데 실제 임무는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신대륙
발견. 라한도 순간 당혹감을 느꼈다.
"무리겠지?"
"지금까지 혈전사들이 모두 신대륙을 찾기 위해 사라진 거예요?"
"아니, 꼭 그렇지는 않아. 감시하는 사람이 없거든, 그냥 임무만 받아놓고 마음대로
지내는 사람도 있지. "
혈전사가 된 사람들이 모조리 대륙을 찾아 떠났다면 혈전사에 대한 전설은 없어야
정상이다. 사라진 그들이 전설을 만들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혈전사에 대한 무수한 전설이 존재했다. 때로는 혈전사가 용병들을 규합해서 왕국을
공격한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그럼 형님은요?"
"모르겠다. 신대륙을 찾으러 떠나고 싶기는 하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지금까지
신대륙을 찾아 떠난 혈전사들이 수없이 많았는데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만큼 위험하다는 얘기지. "
"그렇겠죠. "
"문제는 신대륙을 떠나는 첫 시작이 레비안 산맥이라는 거야. 그곳을 넘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지. 너도 알다시피 드래곤 산맥이잖아. 인간이 건너가는데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 "
실제로 신대륙을 찾아 떠난 혈전사의 거의 대부분은 레비안 산맥에서 목숨을
잃었다. 드래곤에게, 혹은 엄청난 수의 몬스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어쩌면
혈전사의 신대륙 찾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레비안 산맥일지도 모른다.
"형님 근데 신대륙 찾기를 꼭 동쪽에서 시작해야 돼요?"
"아니, 꼭그런 건 아니야. 어디로 가든 상관없어. 근데 남쪽은 바다라서 배를
몰아야 하는데 둘이서 배를 몰고 갈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불가능하고. 서쪽은 사막이라서 너무 위험해. 그 끝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사막에 뛰어들 수는 없지. 그리고 북쪽은 너도 알다시피
파라리스와 페사가 있지. 엄청나게 추운 곳이라서 들어가면 곧바로 얼어 죽는다고
하더군. 가장 위험한 곳이지. 레비안 산맥도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나마 그곳이
가능성이 높아. "
제라드의 긴 설명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보니 가장 적당한 곳이 레비안
산맥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라한이 없을 때의 얘기였다. 이미 파라리스
평원과 페사 평원을 지나 오벨리아 펠리스로 가본 라한에게는 오히려 북쪽이 쉬운
곳이었다.
"형님. "
"훗, 녀석. 거절해도 괜찮다. "
"까짓것 갈게요. 제 일을 끝마치면 같이 가죠. 뭐. 어차피 저도 이놈의 대륙을 떠날
생각이었거든요. "
"라한아. 그렇게 무리할 필요 없다."
"아니요. 정말 여길 떠날 생각이었어요. 대신 레비안 산맥을 넘지 말고 북쪽으로
가죠. "
라한은 오래전부터 대륙을 떠날 결심을 하고 있었다. 테세르와 슈라만 데리고
조용히 사라지는 게 이 대륙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차피 떠나려고
마음먹었던 라한. 오히려 제라드라는 든든한 동료가 생겨서 다행스러웠다.
"라한아. 북쪽은 너무 위험해. "
"걱정 마세요. 이미 가봤으니까. "
"가봤다고?"
"예. 완전히 일주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가봤으니까 도움이될 거예요. "
라한의 대답에도 제라드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쉬운 길을 놔두고 왜 힘든 길을
택하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미 드래곤 로드를 꺾은 라한. 레비안 산맥을
지나가는 데 걸림돌이 없을 게 분명했다. 라한이 끼어있는 일행에게는 레비안
산맥이 가장 쉬운 셈이다.
"어차피 넌 드래곤 로드를 꺾었잖아. 레비안 산맥이 더 쉬울 텐데 왜 다른 길로
가려는 건지 모르겠다. "
"레비안 산맥은 지난 수천 년 동안 드래곤 산맥이라고 불렸어요. 드래곤들의 상징이
된 거죠. "
"그래서?"
"제가 로드를 꺾어서 안 그래도 드래곤들은 자존심이 많이 뭉개진 상태예요. 그런데
제가 드래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레비안 산맥을 지난다면 드래곤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아마 죽기 살기로 달려들걸요. 그들에게는 마지막 자존심이니까. "
라한은 드래곤들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뭉개고 싶진 않았다. 그 일이 드래곤과의
전면전을 의미하는 걸 잘 아는 까닭이다.
"로드가 다시 덤빌까?"
"아니요. 로테마이어스의 성격상 로드 직을 때려치웠을 거예요"
"뭐? 로드 직을 때려치워?"
"예. 로테마이어스는 자존심이 엄청 강한 놈이거든요. 그놈 성격에 드래곤 로드를
계속하고 있을 리 없어요. "
드래곤들은 대부분 로드가 되기를 바란다. 어찌 보면 인간의 권력욕과 비슷한
셈이다 하지만 그 이유에 있어서 인간과 확연히 달랐다.
인간은 권력을 누리기 위해 지위를 바라지만 드래곤은 단순히 새로운 경험을 위해
로드가 되려 한다. 호기심 강한 드래곤들 무엇이든 겪어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격이 로드라는 지위에 대한 집착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로드도 너한테 덤비지는 못할 텐데. "
"혼자 덤비지는 않겠죠. "
"아, 그렇군. "
제라드는 드래곤이 당연히 1 대 1 싸움을 할 거라고 생각해왔다. 지금까지 드래곤이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싸우는 걸 보지도 듣지도 못한 탓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다수가 모여서 싸움을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역사서에 따르면
마족과의 싸움에서는 그런 경우가 몇 번 있었으니 말이다.
"얼어 죽지 않도록 해줄게요. 북쪽으로 가요. "
"그래. 알았다. "
제라드가 흔쾌히 승낙했다. 어차피 라한이 없었으면 어디로 가든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었다. 북쪽으로 간다 하더라도 혼자서 레비안 산맥을 건너는 것보다 안전할 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들어가 볼까?"
라한이 예전에 살던 집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망설여지는
모양이다.
"어? 아, 이거 참. 얘기 하느라 집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군. 들어가 볼래?"
"그냥 누가 사는지는 궁금하네요. "
"그럼, 가보자. "
제라드가 앞장서서 저택 문으로 향했다 라한은 좀 더 주저하다가 어렵사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에 살던 집에 다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착잡한 듯했다.
"실례합니다. "
제라드가 저택 문 경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경비가 제라드의 위아래를 훑고
인상을 찡그렸다. 한눈에 제라드가 용병임을 알아본 눈치였다.
"무슨 일이냐?"
"이 집의 주인을 뵙고 싶은데 들어갈 수 있을까요?"
제라드의 말에 뒤에서 듣던 라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고, 내가 경비라도 안 들여보내 주겠다. '
생판 처음 보는 용병이 집주인 보고 싶다는데 들여보내 줄 경비가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그 주인 된 자가 귀족이라면 더더욱 불가능한 얘기였다.
"허허, 이거 참 요즘 용병들이 겁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
역시나 경비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라한의 예상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전 제라드라고 합니다. 들여보내 주십시오. "
"당신이 제라드인지 제기랄인지 그딴 건 모른다. 썩 꺼져라. "
"주인께 알려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전 혈전."
"라한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이 집 fT 살던 사랍이니 주인께 말해보십시오.
귀족이라면 제 이름을 알겁니다. "
라한은 대륙 횡단으로 엄청난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다 벌어진 드래곤 로드와의
싸움. 그리고 승리. 그때부터 라한이라는 이름은 대륙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눈앞의 경비 역시 라한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다.
"라한? 푸훗, 요즘은 개나 소나 다 라한이라네. 나도 라한이다. 나도 라한이야!"
"예?"
"허허, 라한아. 네 이름이 꽤나 유명해졌나보구나."
"그런. 가 봐요. "
라한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라한이 한때 정체를 드러내고 다닌 건
명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로테마이어스에게 도전장을 내밀 목적으로 정체를
드러내고 다닌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얻을 명성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라한아. 그냥 실력을 약간 보여주는 게 빠를 것 같다. "
"에고. 남에게 보여주려고 배운 게 아닌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불의 벽!"
라한이 짧은 언어로 신화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라한과 경비 사이에 불의 벽이
만들어졌다. 열기가 전혀 없는 무의만 불의 벽이었다.
"으헉 !"
경비가 놀란 음성을 토했다. 이런 변화를 처음 겪은 듯했다.
이 정도면 제가 라한이라는 게 증명이 됐나요?
잠, 잠깐 기다리시오.
경비가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일단 저택의 주인에게 알릴 생각이었다.
라한이 일으킨 불의 벽도 경비를 완전히 믿도록 만들지는 못했다. 라한이라는
이름이 너무 유명했기에 설마 자기 앞에 나타나겠냐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생성된 불의 벽으로 혹시? 하는 생각은 가지게 만들었다.
오랜 은원을 정리하다
요즘 파론은 기력이 없어서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누워서 보냈다. 엘베로보다
나이가 적었지만 그 역시 늙은 건 분명했다. 오늘도 누워서 하루를 소일하려던
그에게 경비병이 달려왔다. 뭐가 그리 급한지 숨까지 몰아쉬고 있었다.
공작님! 공작님!
왜 그리 호들갑이냐?
저기 그러니까.
막상 달려오긴 했지만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확실하지 않은 사실을 알리는 게
그를 주저하게 만든 듯했다.
뜸들이지 말고 말해라. 저기 그러니까. 라한.
라한?
라한이라는 말에 파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힘에 부치는지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게 그러니까. "
"쿨럭, 쿨럭. 뜸들이지 말고 말해라. 라한이 뭐가 어쨌다는 말이냐?"
"스스로를 라한이라고 부르는 자가 문 앞에 와 있습니다. 어쩔까요?"
"뭐시라?"
파론의 눈에 경악이 담겼다. 라한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낀 듯 보였다.
"웬만하면 쫓아 보내려고 했는데 이상한 마법까지 쓰는 통에. 죄송합니다. "
"그럴 리가, 설마 그럴 리가."
파론이 허둥지둥 침대 아래에서 뭔가를 꺼냈다. 정보 조직을 통해 입수한 라한의
몽타주였다.
"이, 이 그림 속 인물이더냐?"
"아, 맞습니다. 똑같습니다. "
"휴우우. "
경비병의 대답에 파론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날이 언제고 찾아올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죽기 전에는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게 자기를 위하는
길이며, 자기 후손들을 위하는 길이라 믿었다.
"지금 밖에 있느냐?"
"예. "
"그래도 발버둥은 쳐봐야겠지. 넌 이 길로 성으로 들어가서 폐하께 알려라. 이
반지를 보여주면 성에 들어가는 데 별문제 없을 것이다. "
"예? 아, 예. "
파론의 반응으로 경비병도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런 파론의 놀란 표정과
다급한 얼굴을 처음 접한 경비였다.
"뭐 하느냐? 빨리 성으로 들어가라. "
"예, 공작님. "
경비병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파론이 밖을 보며 외쳤다.
"밖에 누구 없느냐? 경비 대장. 경비 대장! "
"공작님. 경비대장은 지금 연무장에서 부하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파론의 부름에 집사가 대신 들어와서 대답했다.
경비대장이 이곳에 있었다면 경비병이 파론에게 직접 말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명령과 보고에도 체계가 있는 법. 먼저 경비 대장에게 보고했다면 그가 대신
파론에게 보고했을 터였다.
"지금 당장 경비대장에게 가서 전 병력을 연무장으로 모으라고 전하라. "
"예?"
파론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집사가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파론의 반응이 그를
놀라게 한듯했다.
"뭐 하는가? 어서 경비대장에게 전하지 않고. "
"알겠습니다, 공작님. "
집사가 얼떨떨하게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일단공작이
시킨 일이니 이행할 수밖에 없었다. 집사가 나가자 파론이 힘겹게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지팡이를 짚은 채로 침실을 나섰다.
제라드와 담소를 나누던 라한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저택 내부의 어수선함이었다. 마치 대적이라도 찾아온 듯 여기저기 사람들이
배치되고 있었다. 그 다음엔 뒷문 쪽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느껴졌다. 대부분
여자와 아이들인 듯 미약한 기운들이 끊임없이 저택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형님. 뭔가 심상치 않죠?"
"글쎄다. 난 잘 모르겠는데. "
"사람들이 배치되고 있어요. 그리고 아까 보고하러 들어갔던 경비병하고
어린아이들, 여자들이 뒷문으로 빠져나갔어요. "
라한의 말에 제라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필슨 백작가의 저택이었지만 실상
이곳은 공작가의 저택보다 더 큰 규모였다. 왕성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곳이
이곳이었다. 당시 루이나 왕국의 양대 실세였던 필슨 백작과 엘베로. 그 세력
구도를 이런 곳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한데 라한은 이 럴은 곳의 후문에서 생기는 변화까지 알아챘다. 제라드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예민한 기감이었다.
"그게 느껴져?"
"형님도 참. "
"근데 정말 네 말이 맞는다면. 이곳의 주인이 너하고 관계가 있다는 얘긴데. "
"그렇겠죠. "
라한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다급해하는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자네와 적이라면 먼저 치는 게 좋지 않을까?"
"병력을 배치하고 있기는 한데 기습할 때 사용하는 배치하고는 달라요. 뭐랄까?
정식으로 맞을 준비를 한다는 느낌? 뭐 그러네요. "
"정식으로 맞을 준비를 한다고?"
"예. 기다리면 우릴 맞이할 사람이 나을 거예요. "
라한은 서두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상대에게서 도주 의사를 느끼지 못한 탓이다.
설사 도망간다고 해도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도망가 봐야 그리 멀리 가지는
못할 터. 그때 따라가도 늦지 않았다.
"나오네요. "
한참 기다리자 흰머리가 드문드문 나있는 중년 사내가 문으로 다가왔다. 라한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듯 두려움이 담긴 얼굴이었다.
"당, 당신이 라한이오?"
"제가 아니라 이쪽입니다. "
라한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은 집사였다. 파론의 명령을 받고 라한을 데리러 나온
것이다.
"흐음. 따라오시오. "
집사가 앞장서서 걸어가자 라한과 제라드가 뒤따랐다. 걱정이나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평온한 얼굴을 한 채였다.
라한과 제라드가 연무장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에는 백여 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좌우로 포진해있었다. 라한이 다가가자 반대편에서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
나왔다. 비틀거리는 모습이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혹시 했는데 역시 당신이었군요. "
"날 알고 있었군. 일단 앉게나. "
파론의 말이 끝나자 병사 중 한 명이 의자를 가져왔다. 제라드까지 배려한 듯
양손에 의자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이름이 파론이던가요?"
의자에 앉은 라한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자 파론이 착잡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심 라한이 자신을 모르길 바랐던 모양이다.
"알아봐 주니 고맙구먼. "
라한은 파론을 본 적이 없었다. 몇 번 부딪칠 기회가 있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묘하게 어긋나기만 했다. 하지만서로의 얼굴은 알고 있었다. 라한은 베사 길드의
정보망을 통해, 파론 역시 자신의 정보 조직을 통해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것이다.
"별말씀을. "
"자네에게 정보를 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었지. 아마 우리 조직보다 더
정확하고 빠른 정보였을 게야. 맞는가?"
"아마 그럴 겁니다. "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자네에 대한 정보만큼은 묘하게 늦었거든. 가끔은 잘못된
정보도 있었고. "
에테로가 수장으로 있는 베사 길드는 단순한 정보 길드에 불과했다. 라한에게 베사
길드만 있었다면 파론의 정보를 흐리는 일은 불가능했을 터였다. 하지만 라한에게는
베사 길드와 더불어 다크라이더 길드도 도움을 주고 있었다. 암살자 길드가 라한의
정보를 쥔 타 정보원을 수시로 암살했기에 라한에 대한 정보만큼은 항상 늦게, 혹은
잘못된 정보가 들어간 것이다.
"저도 모르는 도움을 많이 받았나 보군요. 나중에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해야겠습니다."
"후후, 그래. 인사를 해야될 게야. 한두 번이 아니거든. "
"알겠습니다. "
라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겉모습만 보면 서로 적이라는 걸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자네는 전혀 긴장하지 않는군."
"여기 모인 사람들을 믿고 하시는 말씀이라면 긴장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네요.
"
"그렇겠지. 자네는 드래곤을 이긴 사람이니까. 하지만 만만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
"훗. "
파론의 말에 라한이 뭔가를 깨닫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는가?"
"시간을 끌 생각이시군요. 가족들을 도망가게 한 건가요?"
라한이 핵심을 짚어내자 파론이 침중한 음성을 내뱉었다. 의도를 들킨 이상 가족을
살릴 길이 더 희박해졌음이다.
"어디로 가라고 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내가 말해줄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럼 질문을 좀 바꿔보죠. 루이나 왕국입니까? 아니면 다른 왕국입니까?"
라한이 재차 질문을 던지자 파론이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걸었다. 당연히 가족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말해줄 리 만무했다 이 정도 이치를
라한이 모르지는 않을 터. 한데 라한은 너무나 뻔한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내가 자네를 과대평가한 건가? 내가 대답해주지 않을 거라는 건 자네도 잘 알
탠데."
"그럼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그들이 루이나 왕국이 아닌 다른곳으로 간다면
해치지 않겠습니다. 단,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면요. 하지만 다시 루이나 왕국으로
돌아온다면, 아니면 지금 도망간 곳이 루이나 왕국 영역 안이라면, 그땐 그들의
목숨을 거두겠습니다. "
라한의 말에 파론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웃음이었다.
"날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파론님이 제 가족들을 모두 죽인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당신과 같은
전철을 밟으라는 보장은 없죠. "
"하하하하.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
"믿든 안 믿든 사실입니다. 루이나왕국만 아니라면 살려 드리죠."
라한이 재차 강조하자 파론의 눈빛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말 믿어도 되는가?"
"전 피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파론님도 지금 루이나왕국을 떠난다면
쫓아가서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
라한은 가급적 살인을 자제하려 했다. 특히 복수의 대상을 가족에게 전가하는 일은
무조건 피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원수들에게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생각해낸 소박한 복수 방법은 추방이었다.
엘베로와 파론은 루이나 왕국외 지도자 격인 존재였다. 긴 시간동안 해놓은 걸도
많고 얻은 것도 만은 엘베로와 파론. 그들에게 추방은 그동안 해온 모든 노력을
무로 돌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단순한 추방이지만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만드는
셈이다.
"왜지? 난 자네 원수가 아닌가?"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요. "
"내 가족은. 내 가족은. 루이나 왕국을 벗어날 걸세."
파론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가족을 살리겠다는 의지가 담긴 말이었다.
"파론님은요?"
"난 어차피 생에 여한이 없네. 이미 살 만큼 살았지 않은가? 자네에게 죗값을
치러야지. "
파론도 자신이 라한에게 큰 죄를 지었음은 알고 있었다. 스스로의 야망 때문에 지은
죄를 애써 무시했을 뿐이다.
"그럼 저들은?"
"내 가족을 살려주겠다고 했으니 저들은 물리겠네."
"고맙습니다. "
파론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인사였다.
만약 파론이 저들을 앞장세워 공격한다면 더 많은 수밖에 없었다. 가급적 피를 적게
보려는 라한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되는 셈이다.
"헤롤드 집사, 로이킨 경. 고향으로 돌아가게. "
"공작님. 그럴 순 없습니다. 저도 공작님과 함께하겠습니다. "
"맞습니다. 공작님. 저 역시 평생 공작님의 은혜를 받고 살았습니다. 죽음으로 갚을
수 있다면 기꺼이 목숨을 던지겠습니다. "
파론의 말에 헤롤드 집사와 경비대장 로이킨이 눈물을 글썽였다. 그들을 보며
파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내 뜻을 모르겠는가? 부디 떠나게. "
"그럴 순 없습니다. 공작님. "
"제발 내 말대로 하게. 저 아이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게야. "
파론의 말에 듣고 있던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그의
말에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라한은 아직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그 말이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한번 피를 보면 자칫 계속 피를 볼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공작님.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저희들이 모두 덤비면."
"자네들의 섣부른 행동이 루이나 왕국에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네. 제발 돌아가게.
"
"그, 그. 휴우, 알겠습니다. "
파론의 계속된 말에 집사도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그 역시 파론 밑에서 많은
일을 해온 경험 많은 사람이었다.
"집사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알겠다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로이킨 경. 공작님의 뜻대로 하게. "
"하지만. "
"로이킨 경! "
참다못한 헤롤드 집사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로이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집, 집사님. "
"로이킨 경. 병사들을 물리게. 이유는 나중에 설명해주겠네."
헤롤드 집사가 먼저 연무장을 벗어났다. 그러자 로이킨도 어쩔 수 병사들을
수습해서 연무장을 나갔다.
모두 나가자 라한이 팍론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좋은 부하들을 두셨군요. "
"난 좋은 부하들을 뒀지만 저들은 주인을 잘못 만났다고 봐야지 "
"안타깝군요. "
"한 가지만 물어보겠네. 날 죽이고 나면 왕성으로 갈 생각인가?"
파론의 질문에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원래 이곳을 방문한 건 파론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순히 예전에 살던 집에 누가 사는지 궁금해서 와봤을 뿐이다.
정말 우연찮게 파론을 만난 것이다.
한데 일단 파론을 만났으니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파론에 대해 전해진다면
엘베로가 무슨 짓을 꾸밀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골치 아픈 일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겠군. '
"아마 왕성으로 바로 갈 듯합니다. "
"그분에게도 나와 같은 기회를 줄 건가?"
"아마도요."
파론이 말한 기회는 라한이 준 기회를 의미한다. 루이나 왕국을 떠나면 굳이
찾아가서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 좀 전에 라한이 파론에게 준 기회였다
"그러지 말게. 그냥 목숨을 거두게. "
"왜죠?"
"그분은 한 나라의 국왕이시네. 그분에게 모멸감을 주지는 말라는 뜻일세. "
파론도 라한이 기회를 주는 이유가 피를 보고 싶지 않아서라는 건 알고 있었다. 또,
기회를 주는 게 모멸감을 주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자신은
살려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모멸감을 느꼈다. 그 의도가 어찌 됐든 모멸감을 느낀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알겠습니다. "
"고맙네, 고마워. "
파론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목숨을 거둬 가라는 의미였다.
파론의 행동에 라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
"라한아, 힘들면 내가하마. "
"아니요. 제가 해야 합니다. "
파론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파론이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정말."
라한이 손에 신화력을 살짝 일으켰다. 그러자 손에 하얀 오오라가 번져 나왔다
라한이 손을 거두자 파론의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죽음이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절 용서하십시오. 땅의 이글거림!"
라한이 신화력을 이용해서 파론을 묻었다. 어두워진 얼굴이 그의 심경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괜찮아?"
"좀 씁쓸하네요. "
"좋게 생각해라. "
"에휴, 그래야죠. "
라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엘베로를 방문할 차례였다.
잉글리아트가 분주하게 짐을 챙겼다. 아직 부상이 다 낫지도 않은 잉글리아트. 이런
움직임도 부상 회복에 치명적이었다.
"도망가야 돼. 올 거야. 어떻게든 찾아서 올 거야. "
라한은 잉글리아트 일행이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해온 노력에
미련이 남아서라도 포기하지 못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라한의
오판이었다. 자기 실력과 풍기는 기세를 너무 가볍게 여긴 것이다.
"다른 놈들은 몰라. 라한 그놈은. 그놈은 괴물이야."
최근에 라한과 마주친 적이 없는 이들은 라한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명으로
안되면 두 명이, 그래도 안되면 그 이상모여서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잉글리아트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한 번 부딪쳐보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달은 것이다.
"어디로 가지? 로테라 숲? 아니야. 거긴 그놈도 알 거야. 그럼 어쩌지?"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라한의 정보력에 대해모르고 있다는 게
이런 문제를 야기했다. 정보력을 모르니 라한이 어디까지 쫓아올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일단 여긴 떠나야 돼. "
잉글리아트가 등에 큰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간단한 행동에도
현기증이 일었다.
"크윽!"
아직 부상이 낫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부상만 없었다면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도망갈 수 있으련만. 그게 안 되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휴우우 "
잉글리아트가 길게 심호흡을 해서 심신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비밀 통로를 이용해서
은밀하게 저택을 벗어났다. 목적지는 없지만 일단 이곳은 무조건 벗어날
생각이었다.
잉글리아트가 조용히 루스티아를 벗어난 날, 라한은 루이나 왕국의 왕성에
도착했다. 이미 언질을 받은 탓인지 왕성 곳곳이 몹시 분주했다. 파론의 저택과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병력이 배치되어있었고, 지금도 계속 병력이 추가되는
중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지?"
"그러게요. 이런 상황은 달갑지 않은데 "
라한이 답답한 속내를 드러냈다. 이런 상태라면 피 보는 걸 피할 수 없게 된다.
병사들을 방패막이로 삼는 엘베로.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라한에게는
짜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피를 봐야겠지. "
"어쩔 수 없죠. 형님은 뒤로 물러나 계세요. 제 일이잖아요."
죄 없는 병사들을 죽이는 그 자체가 죄를 짓는 일임에 분명했다. 때문에 라한은
제라드를 이 일에서 제외시킬 생각이었다. 죄인은 자기 하나로 충분하니 말이다.
"라한아. 내가 형이 맞긴 맞는 거냐?"
"예?"
"형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도 이 싸움을 거들 수 있도록 해야지. 형 된 입장에서
동생만 죄를 짓도록 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제라드의 말에 라한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감격한 듯 눈물마저 글썽인
채였다.
"형님!"
"왜?"
"너무 멋있는 말 아녜요? 쳇. "
머쓱해진 라한이 괜히 농을 걸었다. 이렇게 해서 울컥해진 마음을 추스르려는
의도였다.
"하하하. 내가 좀 멋있지? 그럼 내가 먼저 시작해볼까?"
챙-!
제라드가 검을 뽑고 왕성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라한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형. "
"어? 왜?"
"잠시만요. 그래도 기회는 줘야죠. "
라한의 말에 제라드가 한 걸음 물러났다. 라한의 의도를 눈치 챈 행동이었다.
제라드가 물러나자 라한이 전면으로 나섰다.
"현자 엘베로님! 듣고 계십니까? 듣고 있으면 제게 그 귀한 얼굴 좀 보여주시죠. "
라한이 왕성을 보며 크게 외쳤다. 이에 왕성 위에서 갖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국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있으니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무엄하다. 감히 대 루이나 왕국의 국왕 폐하의 대명을 부르다니. 네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
"흥, 명성 좀 얻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
갖가지 욕설을 들으면서도 라한은 웃음으로 잃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
탓이다. 자기라도 누군가가 자기 아버지를 욕한다면 저렇게 나을 터였다. 아니,
당장 가서 모가지를 비틀어 버렸을 게 분명했다.
"엘베로 영감님! 계시면 좀 나와보시죠. 기습 같은 치졸한 짓은 안 할 테니까.
얘기나 좀 나눠봅시다. "
라한이 다시 외쳤다. 역시나 이번에도 왕성 위에서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시장통을
방불케 할 만큼 듣기 민망한 욕들도 종종 섞여있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왕성
위에 고요가 감돌았다.
"세자님이시다. "
"세자님이 나오셨다. "
라한의 조카인 휴란트가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휴란트?'
'라한 삼촌?'
라한과 휴란트가 서로를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라한은 깜빡했다는 듯
자책하는 표정이었다. 이에 비해 휴란트는 '대체 왜?' 라는 의문 가득한
얼굴이었다.
'근데 저건 누구지?'
라한이 휴란트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의 모습에 또 다른 영상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주름 가득한 얼굴과 백발, 얼핏 봐도 노인으로 보이는 모습이 휴란트와
묘하게 겹쳐 있었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
"형, 돌아가죠. "
"뭐? 돌아가?"
파론을 죽일 때 마음이 흔들려서일까? 휴란트가 엘베로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었다면 여기에 찾아오지 않았어야 했다. 그래야
휴란트가 정상적으로 왕위를 물려받고, 그가 왕이 된 루이나 왕국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세자가 된 저놈이 제 조카예요.
"진, 진짜야?"
-예.
라한이 신화력에 의지를 담아 메시지 마법처럼 의사를 전했다. 제라드는 놀란
표정으로 라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에휴,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면 의심할거야. 대충 싸우다가 도망가는 게 낫지. "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제라드가 라한에게 바싹 다가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경험을 바탕 삼아
나름대로 해결책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피를 적게 보는 게 좋겠지. 내가 배신을 하마. "
"예?"
"그냥 이번 기회에 죽으라는 말이다. "
"죽, 죽다니요. 그게 무슨."
라한은 세상에서 죽는다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별별 걸 다
겪어본 라한이지 않은가? 처음 심법이라는 걸 만들어 낼 때에는 혈맥이 터져 나가는
고통을, 인챈트 재료 구하러고 폐사 평원을 지날 때에는 몸이 얼어붙는 추위를,
무리한 텔레포트를 감행한 후에는 마나가 꼬이는 아픔을 그리고 미스릴 창고에
갇혔을 때에는 굶주림을, 카이렌에게 기습당했을 때에는 죽음의 공포를.살고 싶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이 모든 걸 견뎌낸 라한이었다.
"놀라기는, 정말 죽으라는 얘기가 아니고 죽음을 가장해보라는 말이야. "
"아, 그 말이었구나. 근데 제가 죽는 연극에서 죽이는 사람은 형님이겠죠? 저
사람들은 의뢰를 받은 용병이 저를 죽였다고 생각할 테고. 맞죠?"
"그렇지. "
"형은 검사라서 불가능해요. 형이 암습해서 죽였으면 시체가 남아야 하잖아요. "
"그런가?"
제라드가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보니 자기가 라한을 죽이는 건 무리가
있는 연극 같았다.
"그냥 적당히 싸우다가 사라지죠. "
"어쩔 수 없지. 그럼 나부터 시작하마, "
"웬만하면 살수는 피하세요. "
"알았어. 하앗!"
제라드가 먼저 성벽으로 쇄도해 갔다. 그러자 성벽 위에서 화살과 마법이 마구
쏟아졌다.
"방어의 힘. "
라한이 신화력을 일으켜 제라드의 위쪽에 막을 만들었다. 물론, 제라드의
실력이라면 화살이나 마법에 쉽게 당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사람도 눈먼 화살에 맞을 수 있는 법.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미리
방어막을 만들어둔 것이다
라한과 제라드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싸우다가 몸을 피했다. 라한은 별 부상이
없었지만 제라드는 팔과 다리에 작은 부상을 입은 채였다.
"형님. 괜찮아요?"
"뭐, 이 정도야. "
제라드가 팔과 다리를 툭툭 털었다. 아무 이상 없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모르니까 치료하죠. 치유의 힘!"
라한이 제라드의 몸에 손을 대고 신화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여기저기 나 있던 작은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동시에 미약하게 느껴지던 통증까지 완전히
사라졌다
"오고, 마법 치료하곤 좀 다르군. 어떻게 한거야?"
"쓸 만하죠?"
"그렇군. "
보통 마법으로 하는 치료는 상처를 봉합하는 데 유용하다. 이에 비해 신성력을
이용한 치료는 통증을 없애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 많이 쓰인다. 한데 라한의
치료는 두 가지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통증도 사라지고 상처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거기다 계속 흘린 피로 인해 쌓였던 노곤함도 말끔히 사라졌다.
"형님. 근처 여관에서 좀 쉬고 계실래요?"
"뭐 하려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거 아닌가?"
"그건 맞지만 시간을 좀 단축시켜야겠어요. "
엘베로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의 죽음도 머지않았다고 볼 수 있다. 가만히 있어도
휴란트가 왕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라한은 자기가 대륙을 떠나기 전에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직접 죽일 생각이군. "
"예. "
"조심해라. 오늘 한바탕했으니 경비가 삼엄할 거야. "
"이러면 어때요?"
제라드의 걱정에 라한이 은신술을 사용했다. 카이렌을 능가하는 완벽한 사라짐에
제라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게 뭐야? 마법이야?"
"아니요. 인비져빌리티하고는 좀 다르죠. 그러니까 걱정 말고 기다리세요. 금방
갔다 올게요. "
"그래, 알았다. "
제라드가 근처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라한은 그가 들어가는 여관을 확인한 후에
다시 왕성으로 발걸음을 옳겼다.
라한이 다녀간 후, 엘베로가 대신들을 급히 소집했다. 당연히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였다. 다섯 시간의 긴 회의. 하지만 아무런 해결책도 마련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다음 날 다시 회의를 하기로 하고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들이 돌아가고 엘베로가 힘겨운 걸음으로 침소에 도착했다. 남은 삶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건 엘베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죽음에 초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데 아니었다. 막상 라한이 나타났다는 얘기를 듣자 불안함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게 삶에 대한 집착이었구나. "
엘베로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침소에 들었다. 긴 회의를 해서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샤라락!
엘베로가 막 잠에 들려는 순간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엘베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누구냐!"
"좋은 책이 많군요. 영감님. "
들려온 목소리에 엘베로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침대 옆 책상에 앉아있는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누, 누구냐? 여긴 어떻게."
"그러고 보니 제 목소리를 모르고 계시는군요. 빛의 공!"
목소리의 주인이 주변을 밝혔다. 라한이 책 한 권을 편 채로 책상에 앉아있었다.
"라한?"
"오랜만입니다. 엘베로 영감님. 아, 나 역시 루이나왕국의 국민이니 전하라고
불러야 하나요?"
"후후후, 역시. 역시 왔구먼. 기다리고 있었다. "
순간 당황했던 엘베로가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그리고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매복이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
"확인해볼까?"
엘베로의 침소에는 그 어떤 매복도 없었다. 심지어 기관장치나 마법 도구조차
전무했다. 한데도 엘베로는 무언가 있는 듯한 인상을 계속 풍겼다. 현자 출신의
국왕다운 행동이었다. 무언가 있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 라한이 스스로 물러가게끔
하려는 것이다.
"엘베로님, 제가 그렇게 어리석어 보였습니까? 절 오랫동안 조사했다고 들었는데,
너무 과소평가하고 계시는군요. "
"흐음. "
"허세를 부려봐야 통하지 않습니다. 아참, 이 방에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밖에는
들리지 않을 겁니다. 한번 실험해볼까요? 여봐라!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라한이 주변을 돌아보며 마구 소리쳤다. 한데도 밖에선 들어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 방 주변을 신화력으로 감싸고 있었기때문이다.
라한의 행동에 엘베로도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자기 허세가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임을 깨달았다.
"강해졌군. "
"엘베로님은 많이 늙으셨군요. "
"세월은 속일 수 없는 게지. "
"무엇이 엘베로님을 집착하게 만든 겁니까? 권력? 부? 대체 뭐가 가지고
싶었습니까? 우리 가문을 멸문시키면서까지 가지고 싶었던 게 대체 뭡니까?"
라한의 절규에 엘베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유라. 나도 모르겠네. 왜 그렇게 국왕이 되려고 애썼는지, 왜 세상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때는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거든. 그게 내
길이라고 믿었지. "
"야망. 이 었군요. "
"뭐라고 말해도 좋네. 지금은 지금은."
엘베로가 말을 잇지 못하자 라한이 끼어들었다.
"지금은요?"
"지금은 모든 게 허무하다는 걸 깨달았네. 어차피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게
사람이거늘. 내가 어리석었지. "
엘베로의 음성이 미약하게 떨렸다.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듯 한 목소리였다.
"너무 늦으셨군요. "
"자네는 나보다 어린데도 일찍 깨달은 것 같군. "
엘베로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자기 행동의 덧없음을 깨달았다. 그 이후부터 베센
왕국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다. 인생무상이라고 할까? 웃고 살아도 짧은 생을 왜
그리도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지금 생각하면 후회만 가득 남은 삶이었다.
"엘베로님보다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
"응?"
"아닙니다. 그냥 제가 엘베로님하고 너무 달라서라고 생각하세요. "
라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수많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픈 기억, 슬픈 기억,
행복한 기억 등등. 거기다 엘베로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수많은 죽음을 겪었다.
그 많은 경험들과 기억들이 라한에게 권력의 덧없음을 가르쳤는지 모른다.
"세 가지만 묻겠네. 파론은 잘 갔는가?"
"예. 조용히 눈감았습니다. "
라한의 대답이 끝나자 엘베로가 회상에 잠겼다. 파론과 함께했던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화도 참 많이 냈었는데. 끝까지 자신을 따랐던 걸 보면 정말
충신이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를 죽인 게야. '
길게 한숨을 쉰 엘베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루이나 왕국을 무너뜨릴 생각인가?"
"루이나 왕국은 엘베로님의 왕국이기도 하지만 제 나라이기도 합니다. "
"끝으로 하나만 더 묻겠네. 세자를."
엘베로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라한이 다시 끼어들었다.
"세자를 죽일 생각이냐고 묻는 것 같군요. "
"아닐세. "
"그럼?"
"휴란트가 자네 사람인가?"
"흐음. "
이번에는 라한이 침음성을 흘렸다. 엘베로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카이렌이 진행한 일이지만 흠잡을 데 없는 계획이었다. 자신이라도 휴란트를 미리
알지 못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정도였다.
"맞구먼. 역시 맞았어. 후후후_"
"알고 계셨군요. 근데 왜 그를 세자로 삼은 겁니까?"
"지금은 내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있네. 아까 말했듯이 후회밖에 남지 않더군. 필슨
백작가에 죄를 청하고 싶었어. "
엘베로의 진실한 말에 라한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엘베로는 죄를 뉘우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 방편으로 자신의 후계자를 휴란트로 삼은것이다. 또, 반역을
저질렀다는 필슨백작가의 누명도 벗긴 상태였다.
"하지만. 너무 늦으셨습니다. "
"후후, 알고있네. 죽음이라는 거, 대수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군.
자네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기꺼이 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두려워. "
"죽음이라는 건 그런 거죠. "
"이제 괜찮네. 자네 손으로 날 죽여주게. "
엘베로가 고개를 내밀었다. 허리에 차고 있는 칼로 자신의 목을 단번에 베어 달라는
의미였다. 이에 라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
"세자에게 시킬 생각인가? 그건 아니 될 말이네. 세자는 아직 어려. 또, 날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다가는 세자가 왕좌를 잇는 일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네.
그러니 자네가 날 죽이게. "
라한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엘베로의 죽음은 라한이 아닌 휴란트의
몫이었다. 그러니 그 일로 겪을 시련이나 고통도 그가 넘어야 할 과제에 불과했다.
"죄송합니다. 오늘 제가 온 건 경고하려고 왔던 겁니다. 근데 그럴 필요가
없었군요. 죽음을 준비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
"라한. 그냥 날 죽이게. 제발. 세자에게."
"죄송합니다. 공간으로. "
라한이 다른 곳으로 공간 이동 했다. 그러자 엘베로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자에게. 세자에게 짐이 될 수는 없어. '
결심을 굳힌 엘베로가 서랍을 열어 작은 검을 꺼냈다. 그리고 검을 목에 가져다
대고 힘껏 찔렀다.
푸욱!
"커억!"
엘베로의 몸이 옆으로 서서히 무너졌다. 루이나 왕국의 기반을 마련한 희대의 효웅
엘베로. 그는 자결을 통해 화려하지만 후회 많았던 삶을 마감했다.
로테마이어스의 레어 안.
며칠 동안 로테마이어스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자신이 카이렌을 처리해도
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리고 오늘 어느 정도 결론을 내렸다.
"아카폴리안. "
"예, 로드님. "
"오늘 이 시간부로 로드 자리를 레이시아나에게 넘긴다. 나와 함께 로드 시험을
치렀으니 자질을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
"로, 로드님, "
로테마이어스의 폭탄선언에 아카폴리안이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이런 결정을
내릴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이미 결정한 일이다. 그리고 카이렌은 내가 처리하겠다. 고룡들에게 내가 말한
그대로 전해라. "
"로드님. 이 일은 고룡들과 상의해보고 나서 결정하는 게 어떨지요? 드래곤 전체의
대표자인 로드를 바꾸는 일입니다. 이런 큰 일을 어찌 통보만으로."
"며칠 전 모임 때 고룡들에게 내 뜻을 밝혔다. 넌 그냥 내 결정을 그대로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 "
로테마이어스의 뜻은 확고했다. 더 이상 로드라는 자리에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자존심 상하고 너무 부끄러웠다. 인간에게 패한 주제에 어찌 드래곤을 대표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드래곤 로드자리를 물러나는 게 다른 드래곤들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하오나. "
"난 지금 카이렌을 처리하러 가겠다. 어쩌면 내가 죽을수도 있지. "
"로드님. "
"레이시아나에게도 내게 했던 것처럼 충성을 다하여라, 텔레포트!"
로테마이어스가 아카폴리안에게 한 번 더 당부하고 공간 이동했다.
로테마이어스가 로드 자리를 미리 물려준 건 카이렌과의 싸움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만약로드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로 카이렌과 싸워서 패한다면, 드래곤이라는
절대자의 위치가 흔들리게 된다.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로드가 한 명도 아닌 두
명에게 각각 패했으니 말이다.
물론 예전이라면 이런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카이렌과의 싸움에서 자신이
패할 거라는 가정 자체를 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라한에게 패한 후로 자신감을
많이 잃었다. 이젠 누구와 싸워도 이긴다고 자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쩌지?'
로드가 사라지자 아카폴리안이 고룡들을 찾아 나섰다. 어차피 로드인
로테마이어스가 내린 명령이었으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테마이어스의 말처럼 단순히 통보만 할 생각은 아니었다. 로드를
잡아달라고, 진정한 로드는 로테마이어스뿐이라고 고룡들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로테마이어스의 변화
한편, 시스마란과 베르네는 카이렌의 은거지를 찾는 데 성공했다. 대략적인 위치만
들은 터라 찾는 데 이틀이나 걸렸다. 이곳을 찾은 뒤에 베르네가 먼저 카이렌을
살펴보고 돌아왔다.
스승님. 카이렌이라는 엘프가 안에 있습니까?
있기는 있는데 너 싸우지 마라.
예?
베르네의 말에 시스마란의 의아한 빛을 띠었다.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빨리
처리하자고 서둘렀던 베르네였다. 한데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 못 이겨.
에이, 스승님도 참. 라한 형님이 아니면 저보다 강한 자가 없을 거라면서요.
"그래, 그렇게 말한 적이 있긴 있지. 한데 내 실수였다. 카이렌은 너보다 강해. "
사실 베르네는 카이렌의 실력을 제대로 탐색하지 못했다. 카이렌이 사용하는 기운도
라한의 신화력과 비슷한 힘이었다. 베르네가 느낄 수 없는 기운이었기에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상대의 기운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 그건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거나 특이한
능력을 사용한다고 봐야 했다. 물론 특이한 능력이 반드시 시스마란보다 강하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상대를 파악할수 없다는 게 베르네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자칫하면 제자인 시스마란이 죽을 수도 있는 일. 확실하지 않은 일에 시스마란을
내몰 수는 없었다.
"다행이에요. "
"뭐가?"
"그래도 형님이 약한 자한테 부상당한 게 아니라서요. "
시스마란의 말에 베르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꽤 오랫동안 함께 지내왔지만
저런 말을 할 때마다 저놈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네놈 머릿속에는 라한 밖에 없냐? 어떻게 뭔 일만 생기면 전부 라한하고 연관을
짓고 그러냐?"
"그, 그지야. 제 기억에 라한 형님이 가장 정의감 넘치는 분이였으니까요. "
시스마란의 눈에는 라한이 최고로 보였다. 정의감 가득하고 기사도를 지키는 진정한
영웅. 사랑하는 여인을 남에게 빼앗기고도 눈물로 슬픔을 이겨낸 사람.
시스마란에게는 라한이 인생의 기준이자 본보기였다.
"어허, 이놈아, 내가 전에도 말했지? 라한은 그런 놈이 아니라니까. 이런저런
소문을 들어보면 천하에서 가장 악독한 놈이."
라한에 대해 욕하던 베르네가 입을 다물었다. 시스마란의 눈에서 살기를 읽은
탓이다
"어, 그.그게. 그러니까. "
"라한 형님을 모독하는 일은 제가 용서하지 않습니다. "
"젠장. 그래도 내가 네놈의 스승이다. 스승한테 그런 눈초리를 보내는 건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을 죽이고 나서 저도 자결할 생각이었습니다. "
시스마란은 진심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라한에 대한 욕만큼은 들어줄 수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스승을 죽이고 그 죗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놓을 생각을
한 거였다.
"됐다. 됐어. 그래, 라한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놈이다. 망할. "
"라한 형님이 훌륭한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형님에 대한 욕은
자제해주십시오. "
"썩을. 잘났다. "
라한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결론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베르네는 라한이 해온 일에
대해서 들은 게 있으니 영웅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반면, 시스마란의 눈에는
라한이 항상 멋있게 보였으니 욕을 들어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근데 스승님. 이제 어쩌죠? 카이렌이 제가 상대할 수 없는 강자라면 먼저 라한
형님을 찾아야 하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요. "
"글쎄다. 아카폴리안 그놈을 만나서 다시 한번 닦달해볼까?"
"그런다고 말해주겠습니까?"
"근데 너 에일린 걱정은 안 하냐 7"
베르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그 말에 시스마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
"어차피 카이렌하고 싸우지 못할 지면 에일린이나 찾아보는 게 어떠냐? 지금 당장은
딱히 할."
베르네가 말을 끊고 먼 곳을 응시했다 그곳에서 친숙한 기운을 느낀 탓이다.
"스승님. 왜요?"
"로드가 왔다. "
"로드라면 라한 형님에게 패했다는 그?"
"그래. "
베르네가 침중한 표정을 짓자 시스마란이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스승님. 근데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로테마이어스가 카이렌과 힘을 합칠까 봐 그런다 아무리 라한이 강해도 둘이 힘을
합치면 감당하기 힘들 거야. "
그제야 시스마란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라한의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게
시스마란이었다. 라한의 안위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이니 심각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가서 물어봐야겠다. "
"스승님. "
"괜찮아 난 드래곤이거든. 내가 아무리 미워도 대놓고 공격하지는 않을 거다. "
베르네가 성큼성큼 로테마이어스의 기운이 느껴진 곳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얼굴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로테마이어스의 분노가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이다.
베르네가 다가오자 그를 느낀 로테마이어스도 마주 걸어왔다. 모른 척 지나갔다면
굳이 찾아가서 만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베르네가 자신을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면 만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로드를 뵙습니다. "
"베르네미스로군. 무슨 일이지?"
베르네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베르네가 마음에 들지 않은
얼굴이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
"물어볼 말이라. 내가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다. 프리미아에게서 드래곤의 향기가
풍기지 않더군. 아카폴리안은 네가 한 짓이라고 하던데 맞는가?"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베르네가 침을 삼켰다. '올 것이 왔구나'하는 표정이었다.
로테마이어스의 말처럼 프리미아에게서 드래곤의 향기가 풍기지 않는건 베르네의
작품이었다. 그는 연금술, 그러니까 인챈트를 연구하다가 우연하게 한 가지 물건을
만들어냈다. 드래곤의 향기를 숨겨주는 물건이었다. 베르네는 자신이 만든 물건을
프리미아에게 선물했다. 그가 레테아와 함께 몸을 피하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프리미아는 그 물건을 가지고 다님으로써 로테마이어스의 이목에서 완벽하게
사라졌다.
"아이고, 로드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게는 그런 물건을 만들 재주가 없습니다.
만약 제가 그런 물건을 만들 수 있었다면 로드님이 절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