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클 대마법사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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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서 명 : 1 서클 대 마법사 1

지 은 이 : 양 강
출 판 사 : (주)로크미디어
출판년도 : 2005 년 3 월 5 일
봉 사 자 : 박종란
<지은이 소개/양 강>
이 름 : 손 일 섭
생 일 : 1977 년 3 월 생.
출판작 : 시즈 SIZ
제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읽고 즐거울 수 있는
이야기. 이 모든 걸 전할 수 있는 진정한 이야기꾼이 되겠습니다.
작가의 말
작년 2 월, 시즈 SIZ 를 처음 쓸 때가 엊그제 같은 데 벌써 두 번째 글이군요. 솔직히
지금도 제가 작가라는 게 실감나지 않습니다. 바로 1 년 전까지만 해도 작가가
된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거든요. 어쩌다보니 시즈 SIZ 를 쓰게 됐고 부족한
글이지만 로크 미디어 대표님께서 선택해주셔서 출판까지 되었죠. 지금 생각하면
운이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작년 11 월에 시즈 SIZ 완결권을 출판사에 보내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특별히 이유는
모르겠는데 괜히 눈물이 나더군요. 단 몇 달의 기간이지만 정이 많이 든 작품이라서
그랬나 봅니다. 그렇게 마구 울고 나서는 글쓰기가 싫더군요. 그때 느낀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참기가 참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방황 아닌 방황도 해보고
외도도 했었습니다. 그러다 출판사에 보냈던 시즈 SIZ 가 출간되었죠.
작가가 아닌 독자의 눈으로 제 글을 천천히 읽었습니다. 세 번인가? 그렇게 시즈 SIZ
완결권을 반복해서 읽고 나니까 다시 글이 쓰고 싶어졌습니다. 끝냈을 때의
아쉬움보다 제가 제 글을 보고 느낀 즐거움이 더 컸거든요.
그래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참 많이 고민했고 로크미디어 대표님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설정, 스토리, 등장인물 등등. 정말 많은 가정을 하고
대입시켰습니다. 시즈 SIZ 보다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컸습니다. 그 결과물이
지금 이 책 <1 서클 대마법사>입니다.
<1 서클 대마법사>의 주인공 라한은 여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미 생이 다한
영혼인 라한에게 저승사자가 새로운 생을 준거죠.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상황.
이번만큼은 제대로 살고 싶은 그가 선택한 길은 그랜드 인첸터입니다. 인첸터로서
그 극에 도달하면 이룬다는 꿈의 경지죠. 당장은 허상으로만 보이는 경지이지만
라한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굴하게 살더라도 구차하게 살더라도 그랜드 인첸터만
될 수 있다면 자존심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죠. 라한이 만들어가는 황당한
사건들, 기괴하고 묘한 몬스터와의 대결, 여러분을 유쾌하?만들 거라고
확신합니다.
2005 년 3 월 9 일 양강
프롤로그
영계의 저승사자 중 예원계의 수장인 수영. 그는 요즘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 때문에 영계를 돌아다닐 때도 그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걱정거리가
있으니 얼굴이 펴지지가 않는 것이다.
수영. 요즘 무슨 걱정 있는가? 얼굴이 말이 아니구먼.
아닐세.
저승사자 수영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같은 서열인 판테아. 그의 말에도 수영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자신의 걱정거리가 남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서는 다 털어놓고 홀가분하게 지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말고 말해보게. 자네하고 나하고 어디 보통 사이인가? 이거 섭섭하이.
나한테도 말 못하는 비밀이 있을 줄이야.
그게, 휴. 잠시 따라와 보게.
수영이 판테아를 구석으로 끌고 갔다. 남들의 이목이 미치지 않는 범위까지 자리를
옮긴 것이다.
수영의 반응이 예상보다 심각하자 판테아도 얼굴을 굳혔다. 왠지 심상치 않은
사건에 휘말릴 듯한 불길한 예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혹시, 사고라도 친 건가?
내가 친 사고는 아닌데, 그게 좀.
물.
라한의 대답에도 로이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도 물에 전기가 잘 통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마법을 익히면서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다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위력은 자신의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저도 물에 전기가 잘 통한다는 건 알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런 위력은.
물이 조금만 있었으면 그런 위력을 내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보통의 지형이었으면
큰 효과도 없었을 거고. 그곳은 오래 전에 기사 학교의 연무장으로 쓰이던
곳이었어. 아니, 무기를 두는 무기고였지. 바닥에 철가루 같은 게 많은 수밖에
없어. 뭐랄까? 흙 자체가 철가를 함유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물에 철이 섞여
있으니 전기가 빠르게 통할 수밖에 없지.
라한이 장소와 시간을 함께 고려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로이나의 마법을 3 서클
이라고 생각하고 어렵게 만들어 낸 것이다. 그녀의 마법 실력을 좀 더 높게
잡았다면 굳이 장소를 택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그럼 사라들이 쓰러진 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
그거야 그놈들이 땅을 계속 집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놈들 성격에 분명히 쭈그려
앉아서 구경했을 거야. 그게 아니면 바닥에 주저앉아서 구경했거나. 껄렁한 놈들의
특징이잖아. 뭐, 나머지는 아까하고 같고.
아.
라한의 설명에 로이나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충의 상황은 이해한 모양이다.
류한님. 그런 건 어디서 다 알아낸 거예요?
도서관에 이필리에 종합학교에 대해 써 있는 게 있더라고. 거기서 알았지. 근데
로이나. 로브는 왜 그래?
라한이 로니아의 잘려나간 후드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로이나의 실력으로
로시퍼 따위에게 후드를 잘리다니.
뭐가요?
덮어 쓴 모자 말이야. 잘려 있네. 조금만 깊게 잘렸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라한의 말에 로이나가 후드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당시를 상상하자 지금도 아찔함이
밀려 오는 듯했다. 라한의 말처럼 조금만 깊었다면 큰 부상을 당했으리라.
그래도 안 다쳤으니 걱정 마세요.
이리와 봐.
아, 아니에요.
와 봐. 작은 상처라도 있으면 소독해야지. 잘못하면 흉터 생긴다고.
라한의 접근에 로이나가 뒷걸음질쳤다. 후드에는 그 누구도 손 댈 수 없다는 듯
강한 의지마저 엿보였다.
괜찮아요. 류한님. 저 괜찮으니까.
고집 피우지 말고. 이리와 봐.
괜찮.
로이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한이 후드를 벗겨버렸다.
평소에 눈만 드러내고 라한을 따르던 로이나. 그녀는 후드가 벗겨지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로, 로이나.
.
라한이 로이나의 얼굴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로이나가 보여 주는 얼굴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눈처럼 흰 피부와 푸른 눈동자. 허리까지 내려오는 찰랑이는 파란 머리. 동화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미모였다. 하지만.
로이나. 귀, 귀.
죄송해요. 속이려고 한 건 아닌데.
엘프였구나.
로이나의 귀는 이간으로 보기 힘들만큼 길었다. 책에서 본 엘프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라한도 그런 사실을 알았기에 로이나의 정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뭐, 어때? 로이나가 엘프면 어떻고 사람이명 어때? 그냥 로이나는 로이나인 걸.
라한은 로이나가 엘프든 뭐든 별로 개의치 않았다. 종족이 뭐가 됐든지 로이나는
자신을 지켜주는 경호원이자 수행원. 다른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고마워요, 류한님. 다른 사람은 절 이상하게 쳐다봐서.
이제야 아버지가 말은 높인 이유를 알겠다. 아, 그럼 나도 말을 높여야겠다.
라한은 필슨 백작이 로이나에게 말을 높였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말투
때문에 라한도 로이나를 대하기 힘들지 않았던가. 그때를 회상하자 로이나의 정체가
충분히 납득이 갔다.
아니에요. 그냥 놓으세요. 류한님. 전 지금 수행원이잖아요.
그래도 엘프면 나이가 아주 많은 텐데.
그래도 제가 수행원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요.
음, 그래. 로이나는 그냥 로이나야.
로이나의 말에 라한도 수긍해버렸다. 로이나는 그 정체가 알려 지기 전에도
라한보다는 나이가 많았다. 결국, 로이나의 정체가 밝혀지고 변한 건 나이 차이일
뿐이다. 열 살 차이가 날 때 말을 놓은 것과 백 살 차이가 나서 말을 높은 게 뭐가
다르겠냐는 생각이었다.
근데 얼굴이 왜 그래요?
뭐, 내 얼굴? 내가 어때서?
눈이 빨갛잖아요. 일주일은 잠을 못잔 사람 같아요.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급히 눈을 비볐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려는 일종의
발악이었다.
로이나가 오기 전까지 최대한 몸을 수습하려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광견보의
후유증이 쉽게 가라앉지 않은 것이다.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라한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 하하하하.
얼굴은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야.
로이나는 라한의 얼굴이 무척 지저분하다고 느꼈다. 머리에 묻은 물로 보면 분명
세수했음이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더럽게만 보였다.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알았어요. 뭔지 몰라도 그냥 넘어가 드릴게요.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비록 진실을 은폐시키기는 했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은 셈이다.
새로운 목표
다음날.
케른을 비롯한 그 일당 모두가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다. 뒤뜰에서 패싸움을
벌였다는 게 이유였다. 엄청난 폭발음과 쓰러져 있던 사람들의 모습. 학교 측은
그들이 서로 싸우다가 폭발음에 기절했다고 단정 지었다. 그런 결정에는 라한의
투서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류한님.
응?
일이 잘 되서 다행이에요.
후후.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미소로 답했다. 계획은 자신이 짰지만 실행에 대한 모든
부분은 로이나가 담당했다. 오히려 자신이 로이나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처지였다.
근데 불쌍하지 않으세요? 아직 열 살인데 학교에서 추방당했잖아요.
별로. 난 내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존재라면 지금보다 더 심한 행동도 할 수
있어. 넌 모르겠지만 난 정말 절실하거든. 그런 놈들 때문에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고.
그래도요.
어차피 케른 그 놈은 무리를 만들어서 우두머리 된 놈이야. 그런 놈은 어디를 가도
굶어죽지는 않아. 학교에서 그 정도 무리를 지을 정도면 다른 곳에서도 잘 살겠지.
라한의 대답에도 로이나는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라한의 절실하다는 말. 케른이
괜찮을 거라는 말. 이 모든 게 로이나의 지식 밖에 있는 얘기였다. 사람 사는
모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류한님이 그렇다면 그렇겠죠.
참, 로이나. 케른이 정말 귀족이라고 생각해?
라한의 물음에 로이나가 생각에 잠겼다.
라한은 케른이 귀족이 아니라는 말을 종종했었다.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막상 그 이유를 생각하려하자 떠오르지가 않았다.
류한님은 케른이 귀족이 아니라고 했었죠?
응.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지으세요?
로이나의 물음에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할 말을 나름대로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아주 잠간의 침묵 후에 라한이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의 말투가 가장 큰 이유야.
말투요?
응. 나처럼 막나가는 말투를 쓰잖아.
라한의 말에 로이나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류한님은 귀족이잖아요.
그건 내가 특이한 거야. 대부분의 귀족은 집에서 예의라는 걸 배우거든. 뭐,
배운다기보다 일상에 젖어 있다고 해야겠지. 태어나서부터 귀족들 사이에서 섞여
지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예의가 몸에 익게 돼. 그때는 귀족처럼 행동하지 않으려고
해도 안 돼.
라한도 귀족의 예법에 맞춰서 행동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남들과는 다르게 예법에
철저히 위배되게 행동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의 정체성이 어린 시절이 아닌
전생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라한에게는 오래 살아오다가 최근 십 년 정도 귀족
생활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케른은 달랐다. 겨우 십 년을 살아오면서 그 시간 전부를 귀족으로 보낸
것이다. 그런 아이가 귀족이 아닌 듯 행동했다면 그건 귀족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류한님이 특이한가요? 케른도 그 특이한 경우일 수 있잖아요.
흠.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가능한데 다른 사람이 불가능 하라는
법은 없었다. 자세하게 설명하려면 전생에 대해 말해야 했기에 말이 막힌 것이다.
아, 어제 싸움 어땠어?
할 말 없으니까 말을 돌리시는 거예요? 음. 어제 로시퍼라는 사람은 별로 강하지
않았어요.
라한이 말을 돌리자 로이나가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은 수행원의 입장이었다.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
근데 마법 도구를 쓰더군요.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 도구는 무척이나 귀한
물건이었다. 마법 도구 하나를 만드는 데 따르는 제약이 너무 많은 탓이다. 마법
도구는 거의 대부분이 일회용이다. 가끔은 영구히 사용할 수 있는 물건도 있지만.
헌데, 그런 일회용 도구라도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금액이 들어간다. 결국 막대한
금액을 들여서 단 한 번밖에 못 쓰는 일회용품을 만드는 셈이다.
마법 도구 말이야. 비싸지?
네. 아주 비싸요. 재료가 귀한 물건이라서.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다시 침묵에 잠겼다. 마법 도구에 대해서 읽었던 내용을
더듬는 중이었다.
재료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건가?
아녜요. 마법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연금술사가 필요하죠. 흠, 연금술사는 물건에
마법을 부여하는 사람을 의미해요. 일반 마법사와는 다르죠. 마법사들이 연금술을
겸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별개예요. 서로가 완벽히 분리된 분야라서
따로 공부를 해야 하거든요.
로이나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연금술사라는
직업은 엄청난 존재였다. 마법 도구만 마구 만들어 내면 마법사보다 더 뛰어난
존재라고 판단한 것이다.
멋지군. 연금술사가 마법 도구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마법사보다 더 강하겠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그렇죠. 캐스팅도 필요 없고 집중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에는 연금술사가 거의 없어요. 아마 인간 중에서는 아예 없을걸요.
로이나의 대답에 라한의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마법사보다
연금술사가 더 뛰어난 직업이었다. 미리 만들어두기만 하면 상대할 자가 없는
직업이 연금술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헌데도 연금술사가 없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모르겠군. 연금술사가 없는데 어제 그 삶이 사용했다는 마법 도구는 뭐야?
지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법 도구는 거의 대부분이 과거의 유산이에요. 수백 년
전에 존재했던 유물에서 가끔씩 마법 도구가 발견되거든요. 그런 물건들을 경매를
통해서 귀족이나 돈 많은 상인, 용병들에게 흘러들어가죠.
수백 년 전의 산물이라면 마법 물품의 가치는 금액으로 따질 수 없을게 분명했다.
유물이 아무리 많이 발견되어도 한계는 있는 법. 그런 귀한 물건이라면 힘 있는
사람이나 돈이 많은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을 터였다.
요즘에 못 만드는 게 혹시. 연금술에 대한 방법이 소실되어서?
그것도 이유 중에 하나죠. 지금 인간 세상을 뒤져도 연금술에 대한 방법은 찾을 수
없거든요. 하지만, 방법을 찾아도 힘들긴 마찬가지예요. 들어가는 재료가
엄청나다고 기록되어 있거든요.
재료가 뭔데?
그건 저도 몰라요.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소실된 방법이거든요.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사라진 방법이니 만들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모르는 것도 물론 당연했고.
그러 지금 세상에서 연금술이 가능한 존재가 전혀 없겠군.
있어요.
누구?
드래곤.
로이나의 대답에 라한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모든 마법의 종주인 드래곤.
그들이라면 연금술도 가능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이 인간을 위해 마법 무구를
만들어줄 리 없었다.
없다고 봐야겠군.
그렇죠.
대화를 마친 후에도 라한의 머리에는 연금술에 대한 내용이 계속 맴돌았다.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게 라한을 자극한 모양이다.
4 일 후.
학교 게시판에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충격적인 공지사항이 입소문을 타고 퍼진
탓이다.
1. 학교 북쪽에 위치한 외곽 창고를 류한에게 맡긴다.
2. 학교 북쪽에 위치한 외곽 창고와 그 주변 이십 미터는 류한과 그의 수행원 외에
그 어떤 사람의 출입도 금한다.
3. 위 사항을 어길 시에는 퇴학 조치한다.
4. 이 명령의 기한은 지금 이 시간부터 류한이 졸업하는 날까지로 한다.
파격적인 공지 사항. 이필리에 종합 학교가 생긴 이래 최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번 공지 사항에 대해 별 반응이 없었다. 어차피 버려진 창고였으니 누가
쓰던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대신, 이번 사건을 계기로 류한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공지 사항에 세 번이나 거론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공지 사항과 똑같은 내용의 서신이 라한에게 전달되었다. 그와 거래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서문이었다.
류한님. 저 모르게 무슨 일을 꾸미신 거예요?
어? 아, 그냥 선생님하고 사소한 거래 좀 했어.
라한의 대답에 로이나가 눈을 흘겼다. 자신 몰래 무언가를 했다는 게 심통이 난 듯
했다.
사소한 거래요? 이게 사소해요? 소문으로는 졌을 때, 학교를 그만둔다고
하셨다면서요? 근데도 사소한 거래예요?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말씀은 하셨어야죠.
로이나가 몰아붙이자 라한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나중에 해야지 하며 미루다가
이미 늦어버린 상황. 뭐라고 변명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라한은 약속한 점수에서 딱 1 점을 더 받았다. 67 점을 받은 것이다.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서는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선생들은 라한에게 창고를 주는 일에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그들에게도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미안. 이제 그만하자. 앞으로 그런 일 없을 테니까. 응? 로이나.
한 번만 용서해 드릴게요.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저도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알았죠?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하자.
라한의 저자세에 로이나가 웃고 말았다. 도무지 화를 내려고 해도 쉽지 않은 상대가
라한이었다.
근데 창고는 왜 얻었어요.?
가서 설명해줄게.
지금요?
새로 얻은 보금자리를 살펴보러 가야지. 어서.
로이나가 라한에게 이끌려 숙소를 벗어났다. 좀 전까지 라한을 몰아붙이던
로이나였지만, 지금은 가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딱히 그래야 한다는
이유보다 라한이 하자면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학교에서 내어준 창고는 의외로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창고에서 이십 미터
거리에는 작은 울타리까지 만들어진 상태였다.
스으윽!
좋군.
라한이 문을 열고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라한은 오랫동안 방치된 창고라서 문을 열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날 거라
예상했다. 허나, 문을 교체한 건지 수리를 한 건지 의외로 조용하게 열렸다. 학교
측의 배려를 세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깨끗하네요.
응. 좋은데.
창고 안은 단출했다. 꽤 큰 책상 하나와 의자 둘. 벽 쪽에 마련된 빈 책장.
어떻게 보면 허전한 구성이었지만, 라한과 로이나에게는 딱 들어맞았다.
공부방으로 쓰실 거예요?
공부방 겸 실습실.
실습실?
원래 라한은 이 창고를 공부방으로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본래 용도에
실습이라는 단어가 하나 더 붙였다.
응. 전에 말한 연금술 말이야. 내가 한 번 해보려고.
예? 저, 유한님. 연금술에 대한 자료는 거의 소실되었습니다. 아무리 류한님이
뛰어나다고 해도 연금술만큼은 좀 힘들지 않을까요?
라한도 힘들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아무런 성과가 없을지 모른다는
것도. 대륙에서 사라져버린 지식이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기하기는
싫었다. 열정적으로 매달릴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도 알아. 성과가 없으면 어때? 그냥 하는 데 의미를 두는 거지.
.
라한은 마법과 정령술을 포기한 이후 목표를 잃은 상태였다. 본래의 목표 대신
공부를 선택하긴 했지만 무언가 허전한 느낌을 계속 받았었다. 그런 그에게
연금술은 어둠 속의 빛이자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뭔 자료가 있어야 시작을 하지.
후후. 그러게 왜 힘든 길을 택하세요.
라한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아주 기본적인 자료조차 없으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로이나는 날 이해하지?
그럼요. 아참. 전에 제가 준 책 가지고 계세요?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품을 더듬었다. 그녀가 줬던 책이라며 정령술에 관한
책이었다. 이제 자신에게 필요 없으니 돌려줄 생각이었다.
아, 여기 있네. 자, 돌려줄게.
그것보다 저. 소환 한 번 해보실래요?
소환?
로이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라한이 의아한 듯 대꾸했다.
자신이 정령술과 인연이 없는 건 로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묻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예. 류한님은 1 서클을 부릴 수 있는 마나를 가지고 계세요. 또, 하급 정령을 부릴
만큼의 정령력도 있고요. 상당히 드문 일이죠.
그럼 뭐해. 마나 친화력이 없어서 더 이상 마나를 쌓는 게 불가능하잖아. 또, 정령
친화력이 없어서 내게 반응하는 정령도 없을 텐데.
라한은 아무런 수련 없이 1 서클 마나와 하급 정령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은
상당한 노력을 해야 쌓을 수 있는 힘을 선천적으로 받은 셈이다.
하지만 더 특이한 건 두 가지를 한꺼번에 가지고 있다는 거였다. 그 두 가지에
있어서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약점만 없었으면, 희대의 정령마법사가 될게
분명했다.
해 봐서 손해 볼 거 없잖아요. 일단 해 보세요. 혹시 알아요? 눈 먼 정령이라도
나타나 줄지.
훗, 그래. 눈 먼 정령이라도 나타났으면 좋겠다. 귀여운 녀석 키우는 재미를
느껴보고 싶거든.
류한님도 참.
라한도 로이나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지금까지 주인이라는 이유로 명령만
내렸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로이나가 시킨 대로 해주고 싶었다.
로이나가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기하학적인 문양을 여기 저기 새기며
어지럽게 문양을 그리던 로이나.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만큼 난해한
문장이었다.
로이나의 작업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무려 20 분이나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림을
다 그리자 로이나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 됐어요. 저 문양 중심에 앉으세요.
라한이 말없이 문양 중앙에 앉았다. 몹시 성스러운 의식이라는 느낌을 받은 듯했다.
이제 어쩌면 되지?
제가 줬던 책의 마지막 체이지에 써 있느 걸 읽으세요.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인 라한이 책을 펼쳐 들었다. 아주 작은 책이었기에 한손으로 펴들 수
있었다.
나는 태초 약속에 의해 이 땅에 태어났다. 신의 빛난 영광을 오늘에 되살려
물질계에 그 뜻을 실천하고 정령계에 그 뜻을 알릴지어다. 이에 내 뜻에 호응할
정령을 살피나니. 내 말을 들은 이는 부름에 응답하라.
라한의 차분한 음성에도 주변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역시나 정령 친화력의
부재가 이런 결과를 나은 모양이다.
다시 한 번 해보세요.
로이나.
류한님. 하 번만 더요.
알았어. 나는 태초에. 응답하라.
두 번의 부름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라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반면, 로이나는 체념의 빛을 띠우며 안쓰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류한님. 한 번만 더요.
로이나. 난 정령 친화력이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고.
한 번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해보세요.
후우, 그래. 알았어. 나는 태초에, 약속에 의해. 부름에 응답하라.
역시나 주변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세 번의 부름 모두 실패로 끝나자 로이나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담담한 라한의
반응과는 무척이나 대조적이었다.
로이나. 난 괜찮아. 오래전에 정령에 대한 미련은 버렸는걸.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로이나의 사과에도 라한은 웃음을 띨 뿐이었다. 그도 로이나가 자신을 위해 한
부탁임을 알고 있었다. 상대의 마음을 충분히 아는 그가 이 정도 일로 화를 낼 리
없었다.
난 괜찮다니까. 로이나. 나 진짜 괜찮.
우우우웅!
.
갑작스러운 대기 울림에 라한과 로이나가 동작을 멈추었다. 마치 시간을 멈춘 듯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양의 중심으로 시선을 던졌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었다.
로, 로이나.
정령이 반응했어요. 근데. 무슨 정령인지 모르겠어요.
우우웅!
대기의 울림은 예상보다 길었다. 정령을 몇 차례나 소화해 본 로이나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거 언제 끝나? 나, 나 무서워.
류한님. 침착하세요. 문양에서 벗어나시면 안 돼요. 가만히 계세요.
우우우웅!
대기의 울림은 커졌다 작아지기르 수없이 반복했다. 마치 사람이 숨을 쉬든
자연스럽게.
로이나. 무슨 정령이야?
그걸 모르겠어요. 물의 정령 같기도 하고 바람의 정령 같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불의 기운도 느껴지고. 소리는 땅의 정령이 소환될 때 소리인데. 도무지 짐작이 안
가요.
로이나의 불안한 말에 라한도 걱정에 휩싸였다. 지금 상황은 예원계에서 어이 없이
죽음을 맞던 때와 너무 비슷했다. 그때도 예상 못한 곳에서 황당하게 죽었지
않은가. 그는 이번에도 어이없이 죽음을 당할까 두려웠다.
로이나.
나왔어요.
로이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라한의 앞에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작은 몸체를 가진 인간 남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크기도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어른의 주먹 두 개 크기로 커졌다.
저, 아, 안.
부웅!
저, 저.
인사를 하려는 라한이 갑자기 부복하는 자세를 취했다. 나타나 전령이 기지개를
켜는 모습에 놀란 탓이다.
류한님. 뭐 하세요?
으, 으으.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고개만 슬며시 들었다. 로이나 곁에 있음에도 무서운
모양이다.
류한님. 느낌이 안 좋아요. 계약하지 않는다고 하세요. 그럼 돌아갈 거예요.
.
로이나의 말에도 라한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혹시 싫다는 말을 했다가
해코지라도 당할까 걱정된 것이다. 라한의 망설임에 조급해 진건 오히려
로이나였다. 혹시나 그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두려웠다.
류한님. 제가 아는 그 어떤 정령도 그런 느낌은 아 들어요. 심지어 정신계 정령도
저런 모습은 아니라고요. 빨리 돌려보내세요.
.
로이나의 다급한 말에 라한은 몸만 떨 뿐이었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극도의 공포감이 라한을 점점 나락으로 빠뜨리고 있었다.
류한님. 더 늦으면 정령이 의도한 대로 되지 몰라요. 빨리 거절하세요. 류한님,
제발.
로이나는 문양이 새겨진 그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정령 소환의 계약에서의해
계약자를 보호하는 장치가 작동한 것이다.
물론, 억지로 깨자면 깰 수도 있겠지만, 그건 계약자인 라한에게 너무 위험했다.
어쩔 수없이 말로서 충고르 해 줄 수밖에 없었다.
류한님. 제발.
계, 계약을.
라한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주먹 두 개 크기 밖에 안 되는 정령이 라한에게는
거인처럼 크게 다가왔다. 낯섦과 생소함이 공포를 만들어냈고, 그 공포가 라한의
판단을 흐리고 한 만든 것이다.
계약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계약자는 그 뜻을 명확하게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환물인 정령의 뜻대로 되기 때문이다. 즉, 계약자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면
계약에 대한 결정을 정령이 하는 것이다.
류한님.
로.이나.
주변으 돌던 검은색의 정령이 라한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이번 소환에 대한
계약 판단을 내리는 행위였다. 이건 라한의 의시결정이 늦었단느 의미도 되었다.
제발.
이번 계약은 이미 라한의 손을 떠난 상황이었다. 이에 로이나는 정령이 그냥
돌아가길 빌었다.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정령과도 다른 형태의 정령에게 라한을 맡길
수는 없었다.
주위를 맴돌던 정령이 문양 위에 섰다. 그리고 서서히 희미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정령계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행이다.
휴.
스팟!
사라진 줄 알았던 검은 정령이 빠른 속도로 튀어 올랐다. 아무도 예상 못했던 돌발
상황이었다.
류한님
피링!
검은 정령은 류한의 이마를 강하게 강타한 후 모습을 감추었다. 얼핏 보면 라한을
뚫고 지나간 듯 보였다.
위이이이잉!
막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리자 로이나가 라한에게 뛰어들었다. 그녀는 라한을 위험에
빠뜨린 사람이 자신이라는 생각에 죄책가미 사라지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으, 으.
로이나가 라한의 이마부터 살폈다. 만약 계약이 되었다면 각 정령의 속성에 맞는
물체가 묻어 있을 터였다. 물의 정령이라면 물기가 땅의 정령이라며 흙이. 어떤
속성의 정령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계약이 되었다면 그에 맞는 어떤 것이 묻어
있으리라.
이, 이런.
라한의 이마에 걸쭉하고 검지만 반투명한 액체가 묻어 있었다. 도무지 정체가
무언지 짐작조차 가지 않은 액체였다.
라한은 의식을 잃은 후, 밤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그는 밤새도록 그 정령에 대한
꿈을 꾸는지 몇 번의 경기를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로이나는 더더욱 죄책감에 휩싸였다.
으으윽!
정신이 좀 드세요?
로이나의 부드러운 음성에 라한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로이나가 눈에
들어오자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기 기절한 거야?
예. 몸은 좀 어떠세요?
로이나의 물음에 라한이 몸 여기저기를 꿈틀거렸다. 나름대로 자신의 몸을 살피는
모습이었다.
멀쩡하네. 좀 피곤하기는 한데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아. 근데 그 정령은?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 계약이 되어서? 아니면 안 되어서? 난 뭐라도 상관없는데.
실제로 라한은 계약 여부에 대해서 방관자적인 입장이었다. 로이나의 말대로라면
계약을 하지 않아야 했지만, 그리 내키지 않았다. 또, 계약을 하는 것도 로이나가
반대하고 있으니 약간은 꺼림칙했다. 결국, 계약을 해도 상관없고 안 해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해버렸다.
그 정령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았어요? 물이나 불, 바람, 땅. 이런 느낌 받은 적
있으세요?
몰라.
예?
난 그런 걸 전혀 못 느꼈다고. 근데, 뭐랄까? 그냥 힘 같은 건 느꼈어.
친숙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뭐, 그런 기운이었어. 라한의 대답에 로이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도 그 정령에게서 라한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아는
그 어떤 지식에도 속해 있지 않은 정령이 분명했다. 부디 좋은 정령이기를.
아,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부를 수 있는 거야? 전에 로이나는 정령을 엄청 쉽게
불러냈잖아.
혹시 부를 생각이에요? 부르지 마세요. 미심쩍은 건 피하게는 게 좋잖아요.
라한도 로이나의 말을 충분히 납득했다. 확실치 않은 사실은 일단 피하고 보자는
말. 그건 라한이 로이나에게 해준 말이었다. 헌데도 그 정령에 대한 미련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건 그렇지만 방법은 알아야지.
정령은 계약할 때 자신의 이름을 속삭여요. 당장은 기억이 안 나겠지만 조만간에
떠오를 거예요.
알았어.
지금은 검은 정령과의 계약이 두렵고 걱정스럽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어차피 계약에
의한 산물. 부르지 않으면 그만이었기에 걱정을 접기로 했다.
다음날 수업을 마친 라한은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읽을 책을 골라 창고로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세요?
어제 계약한 정령을 생각하고 있었어.
로이나는 어제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미안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어찌됐든
자신이 우겨서 계약을 시도했고 그 결과로 라한이 의식을 잃은 셈이었다. 자신
때문에 라한이 피해를 봤다는 생각이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다.
그 정령. 생각났죠?
응.
로이나의 물음에 이름을 떠올렸느냐는 말이었다. 대부분 정령과의 계약을 치르고,
하루가 지나면 이름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라한도 같은 절차를 거쳤으니 알게 됐을
게 분명했다.
이름이 뭐예요?
지금 말해도 돼? 이름 말하면 그냥 나오는 거 아닌가?
아니요. 부르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나와요.
아, 그렇구나. 테세르. 그 정령의 이.
위이잉!
라한이 이름을 부르기 주변의 미약한 대기 변화가 생겼다. 가까이 있는 로이나가
겨우 느낄 정도의 미약한 반응이었다.
류한님.
그, 그게. 나는 부를 생각이 아니었는데.
라한이 말을 끝나자 그의 어깨에 어제의 그 정령이 모습을 보였다. 어제의 짙은
검은 색에서 조금쯤은 투명해진 모습이었다.
흠, 이상하네요. 한 번에 부를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거기다가 저 정령은
마치 부르길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다니.
그런거야?
정령 테세르의 반으은 로이나의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대부분의 정령은 대기의 울림이 있은 후에 서서히 나타나는 게 보통이다. 헌데,
테세르는 대기의 울림과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돌려보내세요. 그냥 가라고 하면 갈 거예요.
응. 테세르. 돌아가.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떠나기 싫은 듯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갓난아기가 어미 곁을
떠나기 싫어하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빨리 돌아가.
위이잉.
한 번의 재촉을 더 하자 테세르도 곧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아쉬운 얼굴을 풀지 않았다.
말을 잘 안 듣는 정령이네요.
그래도 귀여운데.
라한은 도서관으로 가면서 로이나에게 정령에 대한 많은 걸 들었다. 정령왕의
존재와 단계의 구분. 그들의 힘까지. 정령에 대해 들을수록 라한의 얼굴은 호기심에
물들어갔다. 자신도 모르는 세계에 대한 동경심이었다.
도서관은 선생들과 학생들에게만 허용된 장소였다. 수행원의 출입이 금지되는
곳이기에 로이나 역시 밖에서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에 들어온 라한이 책을 하나씩 훑어갔다. 제목에서 연금술이 연상되는 모든
책을 수집하는 모습이었다.
물질에 대한 모든 것. 사물을 살피는 법. 물과 불의 상관관계.
더럽게 많네.
라한의 손에는 이미 십여 권의 책이 안겨 있었다. 그나마 추리고 추려낸 책이
이정도였다. 아직 도서관의 일부만 훑었으니 앞으로 더 많아질 게 분명했다.
이걸 어떻게 들고 가나? 돌겠네. 로이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라한이 팔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십여 권의 책을 들고
여기저기 누비고 있으니 힘들게 당연했다.
딱-!
아, 맞다.
손가락을 퉁긴 라한이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을 보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여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어떻게 학교라는 곳에 공부하는 놈들이 하나도 없냐?
시험 기간 아니면 사람도 없으니.
테세르.
위이잉!
라한이 테세르를 불렀다. 단 한 권만 들어줘도 지금보다 편해지리라는 생각이었다.
야, 이 책 좀 들어. 팔 끊어질 것 같다.
라한의 어깨에 앉은 테세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시킨 대로 해야 하느냐는
무언의 시위 같았다.
야, 테세르. 내 말 안 들려. 난 너와 계약한 계약자야.
파다닥!
테세르가 라한의 말을 싹 무시한 채, 도서관의 구석으로 날아갔다. 날개도 없는데
잘도 날아 다녔다.
저놈 날기도 하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야, 거기 안 서?
라한은 도서관 관리자가 들을까봐 음성을 낮춰야 했다. 희한하게 생긴 정령을
부린다는 게 알려지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저놈이.
한참 날아가던 테세르가 도서관의 구석진 곳에 내려앉았다. 허리에 손을 얹고
쳐다보는 모습이 라한을 놀리려는 의도 같았다.
오호라. 내가 우습게 보인다 이거지?
라한의 말에도 테세르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있는 곳의 책을 꼭
껴안은 채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돌아가! 너 때문에 시간만 낭비했다.
라한의 말에도 테세르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한 강한
의지마저 엿보였다.
이게 안 돌아가? 빨리 돌아가.
라한의 두 번째 말이 끝나자 테세르의 몸이 조금씩 희미해졌다. 정령계로 강제
소환되는 모습이었다.
탁-!
테세르가 사라지자 그가 안고 있던 책이 책장 앞에 떨어졌다. 떨어지는 순간에
테세르가 책을 당긴 듯했다.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다. 어서 나와라.
책이 떨어짐과 동시에 도서관 관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테세르 때문에 시간을
너무 많이 소모한 것이다.
우씨, 테세르 그놈 때문에.
이필리에 종합학교는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 맞춰서 출입을 통제했다. 해가 잘
들어오게 되어 있지만 어두우면 책을 읽기 힘든 탓이다. 이 때문에 도서관에서는
책만 고르고 읽는 건 숙소에서 하는 게 보통이었다. 라한도 지금까지 그래왔고 이
학교의 다른 학생도 그렇게 해왔다.
예. 나가요.
테세르가 당겼던 책이 책장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조금만 건드리면 떨어질 정도로
튀어나온 것이다.
덥석!
일단 가자고.
라한은 제목도 보지 않은 채로 책 한 권을 품에 안았다.
엄청난 양의 책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정령 테세르
밤새도록 책을 읽던 라한이 한숨을 쉬었다. 책에서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찾지 못한
것이다. 잠을 못 잔 피로와 심적인 부담감이 라한을 짓눌렀다.
후우우우.
라한은 창고가 아닌 기숙사에 있었다. 자신이 창고에 머무른다면 로이나도 그곳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밤에 남녀가 한 방에 있을 수는 없는 일. 어쩔 수 없이
기숙사에서 책을 읽어야했다.
어디보자. 꿈을 실현하는 법? 뭐야?
라한은 생소한 제목의 책에 의앙한 기색을 보였다. 자신은 책을 고를 때, 몇 번의
고민을 하는 성격이었다. 이 대문에 책 제목에 관해서는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러
그에게 꿈을 실현하는 법이라는 책은 처음 듣는 제목의 책이었다.
아씨, 아까 테세르 그놈 때문에 같이 들고 왔구나.
라한의 관심사는 연금술이었다. 이 때문에 물질에 관한 책이나 마법에 관한 책만
골라서 수집했었다.
하지만, 이곳은 마법 학교가 아니었기에 제대로 된 마법 서적은 단 한권도 없었다.
대부분 마법의 효능이나 무서움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설명되어 있을 뿐이었다.
연금술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라한이기에 이런 형식의 제목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전혀 별개의 제목이니 당연했다. 거기다 책 자체가 수십 년 동안 손때를
타지 않은 듯 더럽기 그지없었다. 사람에게 소외된 책이라면 내용 역시
보잘것없다는 게 라한의 생각이었다.
더 볼 책이 없네.
꿈을 실현하는 법은 라한이 고른 마지막 책이다. 다른 책을 목차와 주제에 대해
대충 훑어본 라한. 더 이상 책이 없자 짜증이 치밀었다.
아악!
탁-!
라하이 마지막 책을 던져 버렸다. 비록 하루지만 아무 소득도 없이 보낸 게 화난
듯했다.
툭, 툭툭툭!
응?
라한이 던진 책에서 둥글게 말린 스크롤이 굴러 나왔다. 책장 사이가 아닌 책의
풀칠하는 부분에 말려 있던 스크롤이었다.
스크롤?
라한이 스크롤을 집어 올렸다. 그리고는 겉부터 안까지 샅샅이 살펴나갔다. 뭔가
고민하든 이마를 두드리던 라한이 눈을 크게 떴다.
마법 스크롤이다. 분명해.
스크롤에는 깨알 같은 크기로 많은 그림과 글씨가 적혀 있었다. 지금 시대의 글이
아닌 듯 생소한 문자였다.
룬어. 확실해. 이건 룬어다. 벌써 수백 년 전에 사라진 언어일 텐데.
라한은 룬어를 정확하게 해석해냈다. 비록 쓰거나 말하지는 못해도 읽거나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묵주에게 받은 선물이 발휘된 결과였다.
이 스크롤은. 스트랭스?
라한은 자신이 잡은 스크롤이 마법 무구임을 직감했다. 스트랭스 마법을
스크롤만으로 시전 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스크롤의 겉면에는 스크롤을 사용하는 법과 그 효과가 적혀 있었다. 스크롤을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편의를 위해 적은 듯했다. 또, 안쪽에는 이 마법을 실현하기
위한 수많은 마법 언어와 도형, 공식들이 적혀 있었다.
스크롤에는 연금술이 아닌 인챈트라고 적혀 있다. 그럼 본래 이름이 인챈트라는
거겠지. 연금술이라는 말은 최근 2 백년 사이에 나온 말이니 인챈트가 정확한 명칭일
것이다.
스크롤을 살피던 라한이 몇 가지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의 지식과 스크롤의 언어를
조합한 결과였다.
이 정도의 복잡한 도형이라면. 인챈트가 사라진 건 당연한 일이다. 공식의 이론에
나오는 공식은 이것에 비하면 애들 장난에 불과해. 거기다 이 도형들. 이건, 이건.
q 고 그리라고 해도 못 그릴 정도다.
라한은 인챈터의 소멸을 그 난이도에 기인한다고 결론 내렸다. 공식의 이론
수업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은 자신도 이해 불가능한 공식들. 이 정도의 난이도라면
역사 속의 대현자라도 풀기 힘들 게 분명했다.
또 공부인가? 4 학년부터 미술 수업과 조각 수업이 교양 과목에 있던가? 그것도
배워야겠군.
라한은 인챈트하는 모든 과정을 자신의 힘으로 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복잡한
공식을 풀어낼 지식과 난해한 도형을 그릴 미적인 능력이 필요했다. 그 모든 걸
스스로 하자면 배우는 방법뿐이었다.
이필리에 종학 학교는 4 학년부터 교양 과목을 배울 수 있었다. 악기를 다루는
능력부터 대장장이 기술, 주조 기술, 목공 등등. 수많은 과목 중에 최대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교양에 포함된 과목은 거의 대부분이 평민의 생활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귀족들은 교양 과목 자체를 거부해왔고 종래에는
신청한 사람만 받도록 바뀌었다. 물론, 귀족들은 신청 자체를 하지 않았고.
다음날 창고에 들어간 라한이 로이나에게 달라붙었다. 어찌 보면 무리한 부탁을
해야 하는 라한. 미리부터 애교를 떠는 모습이었다.
류한님. 용건이 뭐예요? 빨리 말씀하세요.
헤헤, 역시 로이나한테는 안 통하네. 음, 정령 좀 불러줘.
정령이오?
라한의 부탁에 로이나가 의아한 빛을 띠었다. 의외의 부탁을 받아 조금은 놀란
것이다.
지금까지 라한은 로이나에게 꽤나 많은 부탁을 했었다. 하지만, 마법이나 정령에
관한 부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스스로가 좌절을 겪었던 분야라서 알아서 피하는
것이다. 헌데, 라한이 정령 소환을 부탁하다니. 좀 미심쩍은 생각과 의아한 생각이
교차했다.
응. 불러봐.
예. 그러죠. 실프, 운디네.
로이나의 부름에 실프와 운디네가 모습을 보였다. 예전처럼 귀여움과 아름다움을
뿌리는 자그마한 정령이었다.
정령이 있잖아. 한 번 계약하면 그 정령만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많은 하급 정령
중에서 그 정령만 나타나?
대부분은 그렇지만 예외도 있어요. 정령도 정령계에서 할 일이 있거든요. 살다보면
아주 바쁠 때도 있고요. 뭐, 그럴 땐 다른 정령이 대신 나타나기도 하죠. 근데
갑자기 정령은 왜요?
로이나의 질문에도 라한은 웃기만 했다. 곧 알게 될 테니 재촉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은 웃음이었다.
훗, 잠시만. 테세르!
어? 류한님! 그 정령은 부르지 말라니까요.
로이나의 만류는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다른 정령과 달리 소환과 동시에 나타나는
테세르. 일단 부른 후에는 소환 취소가 불가능했다. 일단 부른 후에 역소환시키는
것만 가능할 뿐이었다.
괜찮아. 어제 불러봤는데 나쁜 녀석같지는 않아. 테세르. 저기 보이는 정령들하고
인사해.
에휴, 류한님. 실프, 운디네. 너희들도 인사해라.
라한과 로이나는 그들의 정령이 서로 인사할 거라 생각했다. 비록 물질계는
아니지만 그들도 그들끼리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바. 인사를 시킨다면 친분을
쌓을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야, 테세르 뭐해. 인사 안 해?
실프, 운디네. 너희들 말 안 들을래? 빨리 인사해.
라한과 로이나의 재촉에도 세 정령은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오히려 테세르는
정령의 눈을 피해 라한의 등 뒤로 숨기 바빴단. 반면, 실프와 운디네는 테세르를
혐오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가까이 있기도 싫다는 의미가 물씬 풍길
정도였다.
얘들 왜 이러지? 원래 사이가 안 좋은가?
안 되겠어요. 얘들 인사 시키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는데요.
응. 테세르 돌아가!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평소에 머뭇거리다 억지로
사라지는 모습과 확연히 달랐다.
실프, 운디네. 너희들도 돌아가.
세 정령이 모두 사라지자 라한과 로이나 사이에도 침묵이 흘렀다. 라한은 정령들이
보인 반응에 대해 생각하느라 말할 겨를이 없었다. 반면 로이나는 자신의 정령들이
라한을 우습게 본 것 같아 미안해서 입을 다물었다.
흠. 물과 기름 같군.
예?
아니야.
라한은 실프와 운디네가 테세르를 무척 싫어한다고 결론 내렸다. 미움이나 증오의
감정이 아닌 혐오감. 어떤 면에선 전자의 감정보다 더 심각했다.
다음날부터 라한은 스크롤 하나를 해석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이곳에서 일정한
공식을 찾아낸다면 나머지 인챈트도 쉬울 거라는 판단이었다.
4 학년이 된 후에도 라한의 일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항상 듣던 과목에 미술
수업과 조각 수업이 더해졌을 뿐이다.
요즘 류한군은 어떻게 지냅니까?
아, 뭐 항상 똑같습니다.
성적은요?
여전하죠, 뭐.
학교 선생들 사이에서 라한은 최대의 관심거리였다. 정치학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거의 만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식의 이론마저 시험마저 4 학년 이후부터는
만점을 놓치지 않았다. 이필리에 종합 학교가 생긴 이래 최고의 천재가 탄생한
것이다.
류한군, 정치학은 여전합니까?
에고, 말 마십시오. 어떻게 다른 과목은 만점을 놓치지 않으면서 정치학만은 바닥을
기는지.
선생들 중에 유일하게 라한을 미워하는 사람이 정치학 선생이었다. 항상 전교
꼴찌를 놓치지 않으니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새로 신청한 수업은 어때요? 전에 보니 교양 과목을 신청 했던데요.
아, 미술 과목은 제가 가르치는 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주 세밀한 터치는
사람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잘하는데 미적 감각은 영 아니라서.
허허허. 저하고 같습니다다 그려. 제가 가르치는 조각수업을 배우는데. 티끌만한
작은 조각은 사람이라 보기 힘들정도로 정확하게 새기더군요. 근데 그냥 사물을
깎으라고 하면 영 아닙니다. 미적감각으로만 따지면 빵점을 줘야 할 정도죠.
미술 선생과 조각 선생의 말에 주변 선생들이 시선을 집중했다. 그들에게는 라한의
일상 하나하나가 관심을 모았다.
오, 류한이가 못하는 과목이 생기는 건가요?
꼭 그렇다고 보기 힘든 게 세밀한 조각이나 그림을 잘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아, 그래도 예술 과목은 미적 감각이 우선 아닙니까? 감각이 떨어지면 못하는
거죠.
선생들 사이에서 라한은 천재로 불렸다. 비록 정치학 점수가 바닥이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논란의 여지가 충분했다. 단순한 바닥이 아닌 빵점만 줄기차게 받아온
것이다. 왠지 자신을 낮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틀리는 것처럼 보였다.
저도 동의합니다. 아무래도 예술에 대한 재응은 별로 인 것 같습니다.
허허허. 이거 참. 어째 주변 선생들께선 이번 일을 즐기는 듯합니다.
하하하하. 그런가요?
실제 선생들은 라한에게도 틈이 있기를 바랐다. 선생과 제자의 관계를 떠나
인간으로서 약간의 질투심이 생긴 것이다.
하하하. 주변 반응들을 보니 유한이가 못하는 게 즐거운 모양이군요. 이거, 이거.
이래서 선생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하하.
선생들이 라한에 대해 말할 때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어쩌면 이필리에 종합학교
출신의 대현자가 나올지오 모르는 일. 그렇게만 된다면 그들 모두의 영광이 될
터였다.
그나저나 전 류한이가 신분 때문에 고통 받을까 걱정됩니다.
무슨 말씀인지?
교양 수업을 받고 있다는 건 류한이 귀족이 아니라는 얘기 아닙니까? 혹시 평민이라
하여 다른 귀족들에게 무시나 당하지 않을지.
선생들은 라한의 정확한 신분을 몰랐다. 출신 성분에 대한 비밀 엄수는 학생들뿐
아니라 선생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흥. 류한이를 무시하는 귀족이 있다면 내가 가진 인맥 전부를 동원해서라고
가만두지 않겠소.
허허허, 흥분하지 마세요. 그가 무시당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 아닙니까?
이제 4 학년인데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라한은 학생들 사이에 평민으로 알려졌다. 항간에는 고아라는 소문도 돌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의 친분이 너무 부족했기에 이렇게 알려진 것이다.
고풍스러운 서재에서 엘베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필슨 백작의 세력이 조금씩
커진다는 정보를 얻은 탓이다.
파론. 어떻게 됐지?
소문이 사실 인 것 같습니다. 수도 뿐 아니라 지방에 있던 상인들이 필슨 백작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의 인상이 더욱 일그러졌다.
생각 같아서는 사람을 풀어서라도 필슨 백작의 처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과
필슨 백작이 앙숙이라는 게 널리 알려졌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 필슨 백작을
죽였다가는 자신이 제 1 용의자가 될 건 불 보듯 뻔한 일.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다.
요즘 근황은 어떻던가? 아직도 지방 귀족이나 상인과 자주 회합을 갖던가?
얼마 전보다는 뜸해졌지만 지금도 종종 만나는 것 같습니다. 헌데 그 대상이
일정하지가 않습니다. 자주 만나는 귀족이라고 해봐야 두 세 차례가 전부이고 거의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필슨 백작을 처음 만나는 사람뿐입니다.
몇 번 만나지 않는다는 건 단 몇 번의 만남으로 상대를 완벽히 포섭했다는
의미였다. 필슨 백작의 정치 수완이 대단함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이에 엘베로의
인상이 심하게 구겨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컸군. 그 사이에 많이 컸어.
저, 엘베로님.
무슨 일이지?
라한이라는 꼬마 있지 않습니까? 필슨 백작의 아들.
잔뜩 찌푸려졌던 엘베로의 얼굴이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라한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미는 듯 했다.
그 꼬마가 왜?
벌써 3 년이 지났는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집에 들르지 않았다는 말이냐?
예.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갔다. 고작 열 세 살의 나이인 라한.
한창 집을 그리워할 나이에 집에 가지 않는다? 엘베로의 라한의 실종을 다른
방향에서 생각했다.
파론. 라한이라는 그 꼬마가 학교에 입학한 게 확실하냐?
예.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흠, 지난 3 년 동안 라한 녀석과 같은 학년 중에 학교를 그만둔 학생이 몇 명이지?
엘베로의 질문에 파론이 잠깐 눈을 감았다. 자신이 모았던 정보를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14 명입니다. 그 중에 11 명은 동시에 퇴학당했습니다.
흠, 보통은 몇 명 정도 되지?
보통은 두세 명입니다. 이번은 이례적으로.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필슨 백작의 세력 확장과
라한의 실종을 동일 선상에서 파악했다. 그의 판단이 정확하다면 지난 삼 년 동안
라한에게 완벽히 속은 셈이다.
당했군.
예?
꼬마 놈은 이필리에 종합 학교를 그만 둔 것 같다. 애초에 학교를 오래 다닐 생각
따윈 없었겠지. 내 눈만 속이면 되니까.
아.
엘베로의 말에 파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록 어린 꼬마지만 엘베로마저 골탕
먹였던 사람이 라한이었다. 거기다 자신의 미행도 눈치 챈 아이가 아니던가. 그
정도 아이라면 그러고도 남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슨 백작의 정치 능력으로 지방 세력을 그렇게 모을 수 없지. 분명 그 꼬마 놈이
밖에서 일을 벌이는 걸 거다.
하지만 아이가 하는 말을 믿어 줄까요?
그는 명목상이지. 그를 지방귀족들이나 상인들에게 보냄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신뢰를 얻을 테니까. 예.
엘베로의 명령에 파론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과거에 몇 차례나 명령 수행을
실패했던 파론. 이번만큼은 임무를 완수하고 싶었다.
그들의 라한에 대한 평가는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자신이 라한을 신경 쓰는 만큼
그쪽에서도 자신을 신경 쓸거라는 생각. 아주 기본적인 전제가 틀렸기에 계속
어긋난 판단만 해댔다. 라한이 신경조차 쓰지 않음을 알았다면 분노가 치밀어
이성을 잃을지도 몰랐다.
창고에서 스크롤을 살피던 라한이 기지개를 폈다. 그 곁에서 로이나가 라한이
가져온 책을 읽고 있었다. 창고에서만큼은 아무런 제약이 없었기에 로이나도 책을
읽는 게 가능했다.
끝났다.
예.
라한의 담담한 말에 로이나가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라한의 끝났다는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아는 까닭이다.
공식 다 풀었어.
정말요? 진짜 다 풀었어요. 그, 그 스크롤에 있는 공식을요?
라한은 지난 삼년 동안 스크롤 하나에만 매달렸다. 스크롤에 쓰인 공식이 그만큼
어렵고 복잡했기 때문이다.
이 스크롤에는 현존하는 가장 어려운 공식이 기본 공식처럼 쓰였다. 그 외의 수많은
공식이 지금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공식뿐이었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라한이라도 그 많은 공식을 단시간에 풀 수는 없었음이다. 물론, 이 모든 공식을
해석하는 밑바탕은 묵주가 준 능력에 기인했다. 그가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주지 않았다면 시작도 못했을 일이었다.
응. 이 작은 스크롤 하나에 쓰인 공식의 수는 모두 272 개. 같은 공식이 반복해서
사용했던 걸 포함하면 대충 2 천 번 정도의 공식이 들어 있어.
류, 류한님. 축하드려요. 이제 인챈터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로이나도 연금술이라는 말 대신 인챈터라는 말을 사용했다. 라한이 계속해서 쓰는
말을 옆에서 배운 것이다.
아니, 아직 아니야. 전에 로이나가 나한테 연금술에 들어가는 재료에 대해 말한 적
있지?
아, 예.
라한의 말에 로이나가 아차 싶었다. 연금술에 값비싼 재료가 필요하다면 인챈트도
마찬가지일 터. 방법만 알았지 아직 실현시키기에 무리가 있었다.
인챈트에 사용되는 자료가 뭔지는 잘 몰라. 근데 이 종이를 가지고 판단해보면
일반적이 물품으로는 무리일거야.
마나 말씀이에요?
로이나의 물음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난 삼 년 동안 공식을 풀면서
종이의 재료에 대해서도 함께 연구했었다.
라한도 처음에는 스크롤이 보통의 낡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만져도
조금의 때도 타지 않는 스크롤을 보며 생각을 바꿔야했다. 거기다 아주 미약하게
풍기는 느낌. 로이나는 이 힘을 마나라고 불렀다.
얼핏 보면 그냥 종이처럼 보이지만 뭔가 달라.
뭐가 다른데요? 제 눈에는 그냥 종이로 보이는데. 마나의 느낌이 조금 나기는
하지만 너무 미약하잖아요. 색이 누런빛을 띠는 건 낡아서 그런 거 아니에요?
로이나의 물음에 라한이 부드럽게 웃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오류를 로이나가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지금의 라한에게는 그런 상황마저 흥미로운 모양이다.
이 스크롤이 얼마나 됐을까?
룬어가 사라진지 팔 백 년 정도 됐으니 최소 그 이상 지난 스크롤이겠죠.
맞아. 최소 팔백 년은 지난 종이지. 근데 이 종이 색을 봐. 비록 많이 낡기는
했지만 팔백 년이 된 거라고 보기는 힘들지. 그렇다고 이 종이의 관리 상태가
좋았던 건 아니거든.
라한의 말에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낡아 보이기는 하지만 8 백년 된 스크롤로
보기는 힘들었다.
그럼 그 종이를 구해야겠군요.
까마득한 옛날이라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스크롤 형태로만 마법 무구가 존재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럼 단순히 종이가 중요한 건 아니라는 얘기지. 아마 이 종이가
가지는 어떤 특징이 마법 무구가 될 수 있게 만들었을 거야. 앞으로 그 특징을
찾아내야지.
라한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지금 존재하는 마법 무구는 스크롤이 아닌 다른 형태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지금의 마법 무구가 과거에서 내려온 산물이라면? 과거에도
스크롤이 아닌 다른 형태가 존재했단느 결론에 도달한다.
그럼 종이가 가지는 특징만 찾으면 되는 거예요?
일단 그 특징을 찾는 데 주력할 생각이야.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지. 공식을
안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건 아니거든.
그래요?
사실 내가 이 공식을 다 외우기는 했지만 대체 어떻게 배열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순서를 바꿔도 될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순서가 중요한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아직은 모르겠다.
라한은 이미 공식의 배열에 대해 대강의 감을 잡은 상태였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내용은 발설하지 않는 게 라한의 성격이었다. 미리 말해서 로이나에게 기대감을
심어줄 필요는 없었다.
그렇군요. 전 아무리 보도 무슨 공식인지 모르겠던데.
나중에 공식 정리해서 알려줄까?
싫어요. 대충 봐도 골치 아플 것 같은데요. 그리고 전 인챈터가 될 생각이 조금도
없어요. 류한님이나 많이 외우세요.
로이나는 라한이 쓰는 공식에 시선도 주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모양이다.
로이나도 공부하고는 담쌓고 지냈지? 솔직히 말해. 그치?
아니에요. 그보다 올해도 집에 안 가실 거예요? 그리 멀지도 않은데 집에 좀
들르시죠.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집안 얘기만 나오면 할 말이 없었다.
자신도 잘못하고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라한은 지난 삼 년 간 집에 들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일 년에 한 달은 집에 갈 수 있음에도 가지 않은 것이다. 대신 형인 레테아가
학교를 종종 방문했고, 라한의 소식을 집에 전했을 뿐이었다.
아직은 안되겠다.
류한님. 집에서 걱정하는 건 생각지도 않으세요?
알지. 알긴 아는데. 못 가겠어.
라한의 인챈트에 대한 집념은 목숨을 건 도박과 같았다. 자신의 마지막 인생을 이
하나에 모두 바친 것이다. 그런 라한이기에 부모님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약해질까
두려웠다. 이곳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 불안한 마음에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를 보내고 그자를 만나다
주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홀을 가득 매웠다. 라한이 입학한 지 벌써 8 년. 라한을
비롯한 그의 동기들의 졸업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최우수상은 누가 받을까?
당연히 류한이지. 1 등을 놓친 적이 없잖아.
그래도 정치학은 내가 더 잘했는데.
푸훗, 류한이보다 정치학 점수 나쁜 사람도 있냐? 헛소리 하지 말고 줄이나 맞춰.
졸업생의 얼굴에는 아쉬움보다 설렘의 감정이 더 강했다. 다른 여느 학교보다
엄격한 규칙의 이필리에 종합 학교. 이곳에서 8 년을 보내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홀로 가 쪽 관중석에 위치한 저학년 학생들의 얼굴에는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짧게는 일 년, 길게는 칠 년을 이곳에서 보내야 하는 스스로가 불쌍한 듯
했다. 누가 봐도 이곳은 감옥이나 마찬가지 아니던가.
모두 주목. 지금부터 이필리에 종합 학교의 졸업식을 시작하겠다.

지휘자의 말의 학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매 년 있어온 졸업식 때마다 듣는
함성소리였다.
조용. 조용! 먼저 현자 엘베로님의 축하 인사가 있겠다. 모두 박수!

짝! 짝! 짝!
학생들의 얼굴에는 현자를 직접 본다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평소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엘베로였기에 그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이를 본 라한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빌어먹을 늙은이. 죽지도 않냐?
엘베로의 등장을 반기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한 때 엘베로와 껄끄러운
만남을 가졌던 라한. 그에게는 그때의 앙금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엘베로만큼 신경
쓰지 않았다 뿐이지, 마음에 안 드는 건 같았던 것이다.
이필리에 종합 학교의 뛰어난 인재들을 보니 몹시 기분이 좋구먼. 허허, 그대들은
이제 혼자의 몸이 아닐세. 개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나라의 힘이 될 수도 또,
해사 될 수도 있는 큰 인물이 된 게지. 이제.
엘베로는 인사말을 남기면서도 주변을 끊임없이 두리번거렸다. 얼핏 보기에는
뛰어난 학생들을 인자하게 바라보는 듯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라한을 찾으려는 의도였다. 그가 용으로 자랐는지 아니면
지렁이로 끝났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리라.
흠, 저 녀석인가? 아닌가?
엘베로는 라한을 쉽게 찾아내지 못했다. 지난 8 년간 라한의 외모가 너무 많이 변한
탓이다. 물론 라한을 오랫동안 봐온 사람이라면 한 눈에 알아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엘베로가 라한을 실제로 본건 그가 아홉 살 때 잠깐 뿐. 찰나의 기억으로
라한을 찾아내야 했으니 쉽지 않았으리라.
엘베로는 필슨 백작의 뒷조사를 계속하면서 라한이 여전히 학교에 다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 들어가는 학비가 꾸준히 지출되는 걸 알아낸
것이다. 그때부터 라한이라는 존재가 또 한 번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라한에
대해서만큼은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디 루이나 왕국을 빛낼 인재로 자라주길 바라네.
긴 축하 인사를 남긴 엘베로가 자리로 돌아갔다. 라한을 찾지 못한 게 아쉬운지
연신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었다.
날 알아보지 못했군.
다음은 시상식을 거행하겠다. 호명하는 사람 앞으로. 두팔트, 큐이, 세바르미아, .
교장 선생이 호명한 사람은 우수상을 수상할 학생이었다. 그의 호명이 있을 때마다
큰 소리로 대답하며 나가는 학생들. 그들의 얼굴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드러났다.
끝으로 최고상을 발표하겠다. 흠, 류한! 앞으로!
교장 선생이 약간은 경직된 목소리로 호명했다. 이필리에 종합 학교 역사상 최고의
인재였던 라한. 그에게 상을 주는 자기 자신도 자랑스러운 듯했다.
위 사람은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서 실시한 시험에서.
라한이 강단에 서자 선생들 모두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졸업식이 끝나면 라한이
떠나야 한다는 게 안타까운 모양이다.
류한군,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 라한의 시상식을 끝으로 졸업식은 막을 내렸다. 라한을
찾으러 왔던 엘베로는 결국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가야 했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으리라는 그의 자만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팔 년이 흘렀음에도 필슨 백작의 저택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웅장하고
고풍스러움을 간직한 저택. 여기 저기 먼지 하나 없이 정돈된 모습이 가풍을 느끼게
했다.
집에 거의 다다른 라한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지난 8 년을 회상하고 앞으로의
일을 다짐했다.
오늘부터 수업에 대한 부담감은 사라진다. 하지만 인챈트 수련은. 후우우.
라한은 인챈트에 대한 많은 발전이 있었다. 과거에 확신하지 못했던 공식의 배열을
알아낸 것이다. 그리고 인챈트에 필요한 물품에 대해서는 거의 확신을 가질
정도였다.
재룐느 알겠는데. 재료를 구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이건 남한테 시켜서 구할
수도 없으니.
인챈트에 필요한 물품에 대한 건 라한만이 알고 있었다. 남한테 설명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물건이 아닌 탓이다. 결국 재료를 구하는 일은 라한이 직접 움직여야
가능했다. 어쩔 수없이 언젠가는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류하님. 뭐하세요?
인챈트에 대해 생각 좀 했어. 특히, 재료가 영.
라한이 파악한 인챈트 재료는 크게 두 가지였다. 생성 때부터 마나를 머금고
있지만, 마나를 흡수하는 성질이 없는 물건. 마나를 꾸준히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서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그것이었다.
이 중에 전자는 일회용품으로 한 번밖에 쓸 수 없었다. 한 번 마나를 사용해 버리면
마법 성질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지난 팔 년 동안 생각하고도 더 생각할 게 남았어요?
하하. 그런가? 가자.
라한의 외모는 과거와 비교해서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항상 창고에만 처박혀 지내서일까? 라한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얼굴 역시
귀엽던 과거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누가 보면 옆집 사는 총각 정도로 생각하기
딱 좋을 정도의 외모였다. 조금 잘생긴 옆집 총각 말이다.
로이나와 그는 오히려 그런 외모를 다행스러워했다. 뛰어난 겉모습이 타인의
경계심을 유발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집사! 집사!
누구시오?
저예요. 류. 아, 아니다. 라한이오.
라. 한?
이름을 되풀이 하던 집사가 라한의 이모저모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라한을
봐온 그도 구분하는 게 쉽지 않은 듯했다.
한참 생각과 살피기를 거듭하던 집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라한 도련님. 도련님이군요. 아이고. 이게 얼마만입니까? 집에 좀 들르시지
그랬어요?
죄송해요. 아버지, 어머니는 건강하시죠?
물론입죠. 마님께서는 조금 야위시긴 했지만, 건강에는 이상이 없으십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보게. 추운데 들어가시죠.
때는 12 월. 밖에서 오래 얘기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반가운 마음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뿐. 평소라면 이런 실수도 하지 않을 터였다.
우리 집은 여전하네.
그럼요. 근데 이제 졸업하신 겁니까?
저택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집사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라한이 반가운 듯했다.
응. 오늘 졸업했어.
어휴, 도련님. 졸업식이면 기별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제가 마중 나갔을
텐데.
라한은 집의 따뜻한 온정이 좋았다. 집사의 세세한 질문도 귀찮기보다 정감있게만
느껴졌다. 집이 이런 곳이구나 라는 느낌을 세삼 깨달은 시간이었다.
우리 학교는 집에 연락도 마음대로 못해. 아주 엄격하거든.
그렇군요. 아, 이분이 전에 도련님을 수행했던 그분입니까?
뒤늦게 로이나를 본 집사가 아는 척을 해왔다. 그에게는 라한을 무사히 수행해준
로이나가 고마운 존재였다.
반갑습니다. 로이나라고 합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우리 말썽꾸러기 도련님을 지켜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로이나가 집사의 환대에 미소로 답했다. 비록 로브로 가려져 입은 보이지 않지만,
눈만으로도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집사의 질문은 저택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너무 많은 질문 때문에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묻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라한은
그런 집사의 질문도 나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신을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련님. 백작님부터 만나셔야죠.
응. 그래야지.
짧은 대답을 끝으로 서로 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저택의 내관에 들어왔으니
하인들은 입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말을 리드하던 집사가 입을 다물었고, 라한도 그를 따라 침묵을 지켰다.
라한이 입학하고 1 년 쯤 지났을 때 누나인 루시아가 결혼을 했다. 지방 귀족인
엘타나 남작의 둘째 아들 레젠이라는 사람이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라한은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형편없는 얼굴에
더러운 성격을 가진 루시아.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그녀를 데려가겠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제 짝은 있는 법. 레젠에게는 굵은 루시아의 몸도
나쁜 삐뚤어진 얼굴도 예쁘게만 보이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는단 말이야. 뭐, 지방 귀족이니 중앙 진출을 위해
결혼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희생이 너무 크잖아.
실제로 지방 귀족은 중앙에 터를 잡기 힘들었다. 이미 자리를 굳힌 귀족들의 텃새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중앙에 진출하는 길은 엄청난 공을 쌓거나 중앙
귀족과 친분을 쌓는 길 뿐이었다.
라한은 레젠이라는 사람이 가문을 위해 희생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주 큰 희생.
가문을 위한 희생이라. 나하고는 맞지 않는 얘기지.
필슨 백작은 요즘 하루 거의 대부분을 응접실에서 보냈다. 처음에는 손님이 있을
때만 찾던 응접실이었다. 하지만, 손님을 맞는 횟수가 잦아지자 응접실 출입도
덩달아 많아졌다. 이런 일이 몇 년간 되풀이 되자, 요즘은 손님이 있든 없든
응접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아버님. 저 라한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너라.
팔 년만의 상봉임에도 필슨 백작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을 겪으며
스스로를 다잡는 방법을 파악한 것이다.
라한 역시 크게 서두르지 않았다. 그도 8 년의 시간 동안 스스로를 성숙시켰기
때문이다.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그래, 앉아라. 로이나님도 앉으십시오.
로이나는 본래 필슨 가문의 하인이 아니었다. 베르네 신관이 보냈기에 몇 년간
라한의 수행원이 되었을 뿐. 실제로는 무관한 사이였다. 이 때문에 필슨 백작도
존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그는 로이난의 실제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엘프인 걸 뻔히 아는 데 반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필슨 백작님. 건강해보이시는군요.
허허허, 감사합니다. 로이나님.
로이나와 필슨 백작이 서로 존대를 하자 오히려 라한이 어색해졌다.
지난 8 년 간 반말로 대했던 로이나에게 말을 높이는 게 쉽지 않았다. 실제로
로이나의 수행원 역할은 오늘로 끝이 났다. 더 이상 라한의 수행원이 아니니 상하
관계도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 말을 높이긴 높여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 오늘 졸업했습니다.
좀 전에 기별을 받았다. 네 어머니도 곧 올게다.
네, 아버지.
라한은 어머니라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지난 8 년간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라한. 그간의 불효를 생각하자 어머니에게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그래. 오늘 졸업했다니 성적을 말해주겠느냐?
예.
짧게 대답한 라한이 성적표를 내밀었다. 라한은 졸업식 때 최우수상을 받을 만큼
뛰어난 성적을 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기에 내미는 손에도 힘이 넘쳤다.
흠.
성적표를 살펴본 필슨 백작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정치학 점수를 본 탓이다.
필슨 백작은 라한의 다른 성적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정치학에
대한 점수만 볼 뿐이었다. 빵점이라는 전무후무한 점수 말이다.
정치학 점수가 형편없구나.
제가 정치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필슨 백작의 질책에 라한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런 상황은 이미 수백 번도 넘게
상상했었다. 그리고 이때 자신이 해야 할 말도.
소질이 없다고 하여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지. 조만간 정치학을 가르칠
선생을 붙여주마.
예? 하지만 아버지. 전 오늘 졸업했습니다. 어찌 쉴 시간도 안 주.
그만.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두 말 하지 마라.
필슨 백작도 나름대로 다급한 심정이었다. 정치적 세력을 모으고는 있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한 상태. 자신의 대에서 안 되면 라한의 세대에서라도 평민들을 위한
개혁을 성공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자신의 뒤를 이을 라한의 정치 능력이 뛰어나야
했다. 다른 능력 다 부족해도 오직 정치적인 능력과 식견만큼은 남들보다
뛰어나야마 하는 것이다. 라, 라한아! 라한아!
어머니!
일레나의 눈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무려 팔 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일레나는 그 긴 시간동안 드문드문 전해오는
소식만으로 그리움을 참아왔다. 긴 기다림만큼이나 설움이 치밀어 오르는지 눈물이
멈출 줄 몰랐다.
그래. 내 새끼. 어디 아픈 데는 없니? 많이 야위었구나.
야위다니요. 전 이렇게 건강한걸요.
예전과 비교하면 많이 말랐구나.
아이 참. 어머니도. 그땐 열 살 이었다고요. 젖살이 몸 구석구석 달라붙어서 통통할
때죠. 지금은 그런 젖살들이 다 빠졌으니 마른 거죠. 제 건강은 아무 이상 없으니
걱정 마세요, 어머니.
일레나의 걱정에 라한이 서둘러 변명을 해댔다. 어머니를 걱정시키지 않는 게
아들의 가장 큰 도리이리라.
실제로도 라한은 몹시 건강했다. 그는 인챈트에 대한 연구를 몰두할 때도
식사만큼은 꼬박꼬박 챙겨먹었다. 또, 밤을 지새울 때도 세 시간씩 반드시 잠을
청해야했다. 이 모든 게 로이나의 집요함에서 비롯되었다. 로이나는 라한을 위한
최소한의 규칙을 정해놓고 그에 따르지 않으면 가차 없이 무력을 행사했다. 폭력이
아닌 강제력의 실행이었다. 이런 로이나의 노력이 없었다면 라한은 지금 피골이
상접해 있을지도 몰랐다.
후후, 다행이구나.
어머니. 잠시만요. 아버지. 저 정치학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두 말할 것 없다. 내일 선생이 올 테니 배우도록 해라.
하지만 아버지.
라한의 말에도 필슨 백작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도 라한이 정치학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확한 연유는 모르지만
성적표만으로 판단해도 정도가 심각한 상태였다. 말로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니라난
걸 짐작한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차라리 강압적으로 명령하는 게 필슨 백작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참. 로이나님. 마을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여기.
어색한 분위기를 깬 건 어머니인 일레나였다. 그녀의 말에 라한과 로이나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됐다.
무슨 편지인가요?
직접 읽어보세요.
일레나의 말에 로이나가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평범했던 얼굴이
읽어갈수록 조금씩 어두워졌다. 편지에 쓰인 내용이 로이나의 기분을 쳐지게 한
듯했다.
필슨 백작님. 일레나님. 라한님. 마을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흠, 하긴. 우리가 너무 오래 붙잡아둔 것 같습니다.
우리 라한이 섭섭하겠구나.
필슨 백작과 일레나의 말에도 라한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눈물을 글썽이며
로이나만 바라봤을 뿐이다. 지금 얼굴이 기분을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라한님. 나중에 다시 볼 수 있을 거예요.
로.이나.
훗, 우는 거예요? 라한님. 남자가 눈물을 보이는 게 아니에요.
로이나의 핀잔에 라한이 팔로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이미 흘러내린 눈물은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번져 있었다.
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
그렇죠? 울지 않으실 거죠? 그럼 전 가볼게요. 마을에 중요한 일이 생긴 것 같아요.
그래. 가버려. 쳇.
짧게 말한 라하닝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더 이상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백작님. 라한님을 부탁할게요. 그럼.
라한은 자신의 방에서 로이나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라한만큼이나 우울한
기분일게 분명한 로이나. 그녀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기에 라한도 가는 건 말릴 수
없었다.
로이나가 떠난 뒤로 라한은 침실을 나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창밖만 바라보며
멍하게 지냈다.
도련님. 오늘 정치학을 가르칠 선생님이 온답니다.
알았어. 라한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로이나가 떠난 지 일주일이나 지났음에도
기분이 풀리지 않은 탓이다.
정치학이라. 정치.
설사 정치학을 배우다 하더라도 학교보다는 집이 나았다. 학교에서 빼앗기는 시간은
여덟 시간. 하지만 집에서 정치학을 배우는 1 시간만 빼앗기면 되기 때문이다. 무려
7 시간이 남는 셈이니 인챈트에 투자할 시간은 그에 비례해서 커질 수밖에 없었다.
휴.
정해진 정치학 수업이 다가오자 라한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정치학 수업 자체보다
아버지의 의도가 부담스러웠다. 얼핏 보기에도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한 듯 보이지
않은가. 지금으로선 아버지의 뜻을 꺾는 게 불가능해보였다. 에휴.
도련님! 정치학을 가르쳐주실 제스란님이 오셨습니다.
네. 들라하세요.
끼이익!
라한의 방에 들어온 사람은 지금까지의 여느 선생들과는 달랐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지 수레에 탄 채 바퀴를 굴려 들어온 사람. 검은 머리를 가진 매서운 눈매.
흡사 용병 일을 오래 하던 사람이 부상을 당하던 저런 모습이 될 터였다.
네가 카라한이냐?
네. 그냥 라한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라한의 시선이 제스란의 다리로 옮겨갔다. 하지만, 불구의 다리가 이상해서 본 건
아니었다. 단순한 바퀴소리가 들리자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을 뿐이다.
내가 다리를 쓰지 못하는 게 이상하냐?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를.
됐다. 앉아라.
제스란은 라한의 시선 정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없이
겪었던 일이 아니던가. 이미 적응될 대로 된 제스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첫 수업은 뭐.어? 어, 어.
고개를 든 라한의 시선에 제스란의 얼굴이 들어왔다. 수레가 주는 인상이 너무
강했기에 지금에서야 얼굴을 본 것이다.
무슨 일이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닙니다. 저, 그게.
후후. 혹시 구 년 전에 날 봤던 걸 기억하는 것이냐?
제스란은 레테아의 시합 때, 루시아가 재수 없어 하던 그 사람이었다. 필슨 백작을
비롯한 가족들은 단순히 다리를 못 쓰는 사람정도로 생각했기에 기억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라한은 달랐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과 뭔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던 사람.
때문에 그때 봤던 눈빛과 표정, 당시의 느낌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맞습니까? 그때 그.
보기보단 머리가 좋은 녀석이로군.
제스란은 진심으로 라한에게 감탄했다. 올해 열여덟 살. 9 년 전이라면 아홉 살
나이에 얼핏 본 사람을 기억한 셈이다. 자신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억력이었다.
그때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느낌? 내게서 무슨 느낌을 받았지?
제스란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보통의 선생이 보여줄 수 있는 눈빛과는
천지차이였다.
제스란의 눈빛에 라한이 식은땀을 흘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저런 눈빛은 결단코
처음이었다. 심지어 자신을 싫어하는 루시아조차도 저 정도로 차가운 눈빛은 지은
적이 없었다. 아니, 루시아는 저런 눈빛을 지을 수조차 없었다. 피를 알고 죽음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눈빛이 제스란의 눈빛이었다.
.
무슨 느낌이었지? 말해라.
그, 그냥 동질감이오. 저하고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보, 보통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느낌이오.
힘겹게 대답을 한 라한이 숨을 몰아쉬었다. 별 거 아닌 대답조차도 지금의
라한에게는 몹시 힘든 모양이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그, 그게 무슨?
모르는 모양이군. 묵주 그 자식이 내 얘기를 안 하던가?
제스란의 말에 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묵주라는 이름은 이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몰라야했다. 자신이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으니 모르는 게 정상적이었다. 헌데, 제스란은 그 비밀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입에 담았다. 자신이 누군지 다 안다는 듯이.
어, 어.
앉아라. 진짜 말 안했군. 빌어먹을 자식.
제스란의 눈빛이 더 차갑고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묵주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도 화가 치밀었다. 그가 묵주를 얼마나 증오하는 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저, 묵주님이 일을 잘 못하긴 해도. 그러니까 저. 그래도 제게 새 생명을 주신 분이
그 분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냐?
예? 아, 아닙니다. 그냥 말씀하십시오.
괜히 묵주를 옹호하려던 라한이 기죽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제스란의 살기 가득한
눈빛에 오금이 저렸다.
난 무령계에서 온 제승업이라고 한다.
제승업, 제승업. 아, 제승업.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묵주님께서.
닥쳐라! 다시 한번 묵주놈 이름 뒤에 님을 붙였다가는 네 놈 주둥아리를 갈아
마셔버리겠다.
예.
라한의 목소리가 좀 전보다 밝아졌다. 비록 겉으로는 분노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자신에게 큰 반감을 가진 건 아닌 듯했다. 이런 태도라면 자신을 죽이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묵주 그놈이 날 이곳으로 보냈다.
아, 그렇군요. 축하드립니다. 이곳에 왔다는 건 그. 뭐시냐? 운명의 굴레를
벗었다는 게 아닙니까?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알고 있는데요.
라한의 말에 제스란의 눈이 붉게 번뜩였다. 라한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음이다.
크크크. 그 빌어먹을 묵주놈이 날 그냥 보냈다면 이 정도로 분노하지는 않겠지.
근데 그 자식이,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자식이 내 다리를.
설마, 설마 다리를 못 쓰게 된 게 묵주님. 아니, 묵주놈이 한 일입니까? 왜요? 무슨
이유로?
영계에서 라한을 만났던 묵주는 곧 바로 제승업을 소환했다. 무령계 내에서 살업을
일삼던 제승업. 그는 묵주를 만나자 마자 살수를 펼쳤다. 무령계 내에서 당할 자가
거의 없었기에 묵주에 대한 공포도 없었으리라.
제승업이 눈을 번뜩이며 묵주를 노려봤다. 독수리가 먹이를 노릴 때보다 더 강한
눈빛이었다.
네 놈이 날 이리로 데려온 놈이냐?
그렇다고 해야겠군.
제승업의 날카로운 눈빛에도 묵주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제승업을
가소롭게 보는 듯 비웃음을 흘렸을 뿐이다.
크크크. 내가 누군지 똑똑히 보여주지. 하앗!
응?
제승업의 빠른 공격에 묵주가 한 걸음 옆으로 이동했다. 신법의 최강자. 살인의
귀신이라 불리던 제승업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버린 묵주였다.
이, 이.
내 차례군.
겉으로 태연한 묵주였지만 속으로는 약간의 놀람을 가지고 있었다. 제승업의
움직임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던 탓이다.
스핑! 팟-!
캑! 캑!
묵주의 손이 어느새 제승업의 목을 움켜쥐었다. 빠른 몸놀림만큼이나 빠른 눈을
가진 제승업을 너무도 간단히 제압해버린 것이다. 언제 움직였는지도 볼 수없을
만치 빠른 움직임이었다.
이 정도면 결과가 나온 건가?
털썩!
묵주가 손을 털어버리자 제승업이 구석에 처박혔다. 가벼운 손놀림에 비해 어이없이
날아가 버린 살귀 제승업. 그에게는 생전 처음 겪는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넌 누구냐? 날 왜 이리로 데려온 거지? 대체 목적이 뭐냐?
하나씩 대답해주지. 난 묵주다. 네가 살고 있는 무령계 저승사자의 수장이지.
저승. 사자?
작게 읊조리던 제승업이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저승사자는 사람이 죽었을 때,
만날 수 있는 자. 저승사자를 만났다는 건 자신이 역시 저 세상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후후. 널 이리로 데려온 건 너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기 위해서다.
새로운 생명을 준다고? 날 살려주겠단 말이냐?
제승업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주고 싶지 않은 건 모든 사람의 공통된
바람이다.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던 제승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뭐, 그런 셈이지. 근데 말이야. 널 네가 살던 원래 세계로 보낼 수는 없다. 넌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거든.
상관없어. 살게만 해줘. 목숨만, 목숨만 살려줘. 무슨 짓이든 다 할게. 제발. 제발.
제승업의 간절한 외침에 묵주가 비릿하게 웃었다. 아직 죽지도 않은 제승업을
너무도 쉽게 구워삶은 탓이다.
누구나 죽기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제승업에게는 그 의미가 조금은
남달랐다. 많은 사람을 죽이며 많은 죄를 지었던 제승업. 그에게 저 세상의 처벌은
혹독하고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자신의 죄를 누구보다 잘 아고 있었기에 그 처벌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널 살려주는 대신 너에게 두 가지 의무를 부여하겠다. 대시 두 가지 혜택을
약속하지.
끄덕끄덕!
제승업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저승사자의 수장이며 자신보다 훨씬 강한 묵주.
그가 부여하는 의무라면 예사롭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마음을 다
잡았다.
이런, 이런. 너무 긴장하는 군. 흠, 혜택을 먼저 알려주지. 첫째, 너에게 가해진
제약을 없애주지. 우린 이걸 운명을 굴레를 벗긴다고 하지.
운명의 굴레? 그게 뭐지?
나뿐 아니라 모든 신들의 이목에서 널 지워주겠다는 말이다. 사고로 죽거나 병으로
죽지 않는다면, 네 생명은 영원히 지속될 거다.
묵주의 말에 제승업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사람이 죽는 건 원래 사고사와
병사였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아닌 혜택으로 자신을 희롱하고 있으니 화가
났으리라.
제승업은 신들의 이목에서 지워지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몰랐다. 인간의 삶이
신에게 규정 지워져 있으며, 그들이 의도한대로 흘러감에도. 이 사실을 알았다면
신들을 저주함과 동시에 자신이 받은 혜택이 얼마나 큰지 알았으리라.
다음은 뭐지? 혜택이 두 가지라고 하지 않았나?
두 번째는 널 살려주는 거지. 알잖아? 넌 여기서 죽을 운명이라는 거. 다른
차원으로 보내주는 것이니 혜택 아닌가?
묵주의 비웃음에 제승업의 손이 꽉 쥐어졌다. 묵주가 자신을 놀리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다. 하지만 분노를 억누르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힘없는 약자였기에.
의무는?
첫째, 아까의 혜택과 같은 맥락이지. 네가 그 차원에 가면 차원 자체를 뒤흔드는
행동은 금한다. 알다시피 넌 신들 모르게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되는 거다. 네가
그곳에서 너무 많은 일을 했다가, 너의 정체가 신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 하거든.
뭐, 신과 싸우고 싶다면 네 녀석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겠지.
묵주의 말에 제승업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사람에게 새 생명을 주는 일. 그건
누가 봐도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자신이 다시 살아가는 그 자체가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니 신의 이목을 피해야 했으리라.
두 번째는?
후후. 그곳에 가면 다른 차원에서 넘어간 녀석이 한 놈 있을 거다. 그놈을 찾아라.
그리고는?
제승업은 묵주의 의도를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냥 찾으라니. 찾아서 뭘
하라는 건지. 그렇다고 꼬치꼬치 캐묻기도 뭣했다. 자신이 약자라는 걸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알아서 해. 죽이든지 살리든지.
흠.
아, 이런. 깜빡할 뻔했군. 캐테트라이아 마스리크!
묵주의 낮은 중얼거림이 끝나자 제승업의 다리에 빛이 감돌았다. 묵주의 검은
분위기에 어울리는 검푸른 빛이었다.
털썩!
이, 이게 뭐지? 무슨 짓을 한 거냐? 내 다리가. 내 다리가.
넌 너무 강하거든. 그래서 제약을 좀 줬지.
제발, 제발 내 다리를. 제발.
제승업에게는 다리는 단순한 이동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살귀라는 별명 자체가
뛰어난 신법 때문에 가능했던 터. 다리는 쓰지 못한다면 힘의 구 할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후후. 네가 갈 세계는 판트리아라는 곳이다. 그곳은 무령계와는 달라서 무력이 그리
강하지 못해. 네가 온전한 몸으로 넘어갔다가는 세상에 군림하겠다는 생각이
들겠더군. 그건 내가 원하는 재미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래서.
네 녀석이 다리는 쓰지 못해야 어느 정도 재미있는 상황이 되겠더라고. 뭐, 다리를
못 쓰더라도 강자 축에 들고도 남겠지만.
실제로 제승업은 무령계 최강자가 아니었다. 그곳에도 운명의 굴레를 벗은 많은
기인들이 숨어 있을 터. 그들과 비교하면 제승업의 실력은 어린 아이 수준에
불과했다.
또 그런 기인들이 아니라도 실력만으로 따지면 제승업보다 강한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신법만은 달랐다. 처음 제승업과의 격돌 때, 묵주마저 놀라게
했던 빠른 몸놀림. 저승사자가 놀랄 정도라면 판트리아에선 세상을 훔치고도 남을
속도였다.
제스란의 얘기를 들으며 라한이 고민에 빠졌다. 단순히 자신을 위해서 새 생명을 준
게 아님을 느낀 탓이다.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군요.
훗, 보기보다 영특한 녀석이군.
그래도 이해가 안 갑니다. 지금은 묵주가 우리를 볼 수 없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가지고 노는 건지.
라한의 물음에 제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한의 의문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몸짓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너처럼 생각했다. 묵주가 날 살려준 건 오직 날 위해서라고
생각했지. 다리를 못 쓰게 만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아니더군.
예? 묵주가 우리를 볼 수 있나요?
그렇진 않을 거다. 굳이 그런 거짓말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라한의 의문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에게는 묵주나 제스란이나 이해 불가능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럼요? 우릴 볼 수 없는데 왜?
그놈은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보고 싶어 하지 않아. 다만, 우리 때문에 이
세계가 혼란에 빠지게 되면 그걸 즐기려는 거지.
혼란을 원했다면 왜 다리를.
정도가 지나치면 안 되거든. 알다시피 묵주는 신이 아닌 저승사자다. 신의 눈치를
살피려면 약간의 재미는 포기해야겠지.
그제야 라한도 지금 상황을 이해했다. 묵주의 목적은 오직 재미. 하지만, 신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에 약간의 제약을 가했을 뿐이다.
서로 다른 차원의 두 존재가 새로운 차원에 떨어졌으니 범상치 않은 일이 생길 건
자명한 일. 묵주는 그때 생긴 사건을 즐기려 했음이다.
뭐,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우린 새 생명을 얻었으니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닌가요?
묵주가 원하는 사고는 우리가 터트리지 않으면 그만이죠. 안 그래요?
그게 쉽지 않더군.
제스란은 이 세계에 온 뒤부터 스스로의 화를 억눌러왔다. 화를 참지 못해 사고를
일으킨다면 좋아할 존재는 묵주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묵주가 잘 되는 건 죽어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화를 참느라 힘들었나보군요. 그래도 길지 않은 시간을 참다니. 대단해요.
후후, 처음에는 묵주가 싫어서 화를 참았다. 하지만 지금은 나 자신을 위해서
참는다. 살기 위해서.
살기위해서요?
몰라도 된다.
제스란의 짧은 대답에 라한도 입을 다물었다.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비밀은 있는
법. 제스란 역시 말하기 싫은 비밀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근데 어떻게 정치학 선생이 되셨어요? 온지 겨우 20 여 년 전도 밖에 안 되잖아요.
나? 선생 아니야.
예?
선생 아니라고. 여기는 너 만나려고 온 거야. 원래 선생이 되기로 했던 놈 손 좀
봐주고 대신 들어온 거지.
제스란의 말에 라한이 입을 떠억 벌렸다. 정치학 선생이라면 귀족일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낮은 귀족이라도 평민에게 당했다면 무사하긴 힘들 게 분명했다. 잘못하면
그 화가 자신에게까지 미칠지 몰랐다.
귀족을 능멸하는 게 얼마나 큰 죄인 줄 알아요? 병사들이라도 들이닥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귀족이라면 그렇겠지.
그럼 귀족 아니었어요?
내가 아무리 막 나가는 놈이라도 귀족을 죽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쳇, 다리만
멀쩡했으면 왕족도 가지고 놀 수 있을 텐데.
제스란의 말에 라한이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같은 조건ㅇ라면 평민을 다루는 게
더 쉬운 건 자명한 일이다. 굳이 귀족에게 해코지를 해서 사칭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근데 살귀로 불렸다고 했죠?
그렇게 부르더군.
그렇게 안 보여서요. 훗, 의외인가보군.
과거의 제스란은 말이 막히면 칼부터 휘두르는 성격이었다. 이런 급한 성격 탓에
많은 사람을 고혼으로 만들어버린 일도 종종 있어 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령계에서의 일. 지금의 제스란의 성격이 조금 급할 뿐. 스스로를 자제할 줄 아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곳 판트리아에 와서 여러 경험을 하면 성격이 바뀐 것이다.
그나저나 그 팔은 원래 그랬던 거예요? 묵주가 못쓰게 만든 건 두 다리라면서요?
묵주의 외팔은 팔꿈치 아래로 깨끗하게 잘려 있었다. 비록 두 다리를 못 쓰긴
하지만 묵주의 실력은 약하지 않았다. 그런 강자에게 저런 피해를 입히다니.
예사로운 사람은 아닐 게 분명했다.
몰라도 돼.
비밀이 참 많으시군요.
닥쳐!
제스란의 말이 끝난 후. 라한과 그의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특별한 이유도
없는 이상한 형태의 정적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정치학에 배정된 시간의 거의 끝날 무렵. 제스란이 짜증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야, 너 나한테 궁금한 거 없냐? 뭔 말 좀 해봐라.
제가 궁금한 건 정치에 관계된 건데요.
라한의 말에 제스란이 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진짜 정치학 선생이 아니었으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분명했다.
쳇, 뭐 저딴 놈이 다 있어?
제가 왜요?
제스란의 중얼거림에 라한이 짧게 대꾸했다.
라한은 지금 제스란과 사적인 얘기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로이나가 떠난 빈자리가
생각보다 크게 작용한 탓이다. 마음 속 한 곳이 빈 느낌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뭘 물어보겠는가. 마냥 로이나를 생각하며 멍하게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너 열여덟 살 아니냐?
맞아요.
열여덟 살이면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일 텐데, 왜 아무것도 안 물어보냐?
대체 뭘 물어봐야 하는 데요?
항상 공손하게 대답하던 라한이 좀 전보다 날카로운 말투로 대꾸했다. 제스란의
말도 안 되는 트집이 그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다.
난 네가 살던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에서 왔잖아.
그래서요?
그럼 내가 살던 세상에 대해서 궁금해 해야 정상 아니냐? 다른 나이도 아닌 열여덟
살 나이라면 분명히 궁금할 텐데.
제스란은 자신의 활약상을 떠벌리고 싶었다. 무령계에서 살귀라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었던 제스란. 그의 활약상이라고 해봐야 사람을 죽인 얘기뿐이었다. 하지만
제스란 스스로는 사람 죽인 얘기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사람 죽인 얘기는 별로 안 궁금해요.
이, 이. 좋아. 그건 그렇다고 치자고. 그럼 내가 왜 살귀라 불렸는지 안 궁금하냐?
사람 죽여서 살귀라고 불렸겠죠.
라한의 목소리에는 귀찮아 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스란이 하는 말 모든 게
자신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먼 얘기. 라한은 제스란이 그만 입을 다물어줬으면
싶었다.
흠, 그럼 내가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지.
사람 죽인 얘기는 싫다니까요.
그런 거 아니니까 잘 들어.
제스란의 다짐에도 라한의 얼굴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제스란은 이미 라한에게서 신임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라한의 시선을 잡기는 힘들었다.
.
쳇, 무뚝뚝하기는. 이곳은 마법이라는 게 있더군. 전에 한 번 겪어봤는데 엄청난
힘이었지. 하지만 내가 살던 무령계에는 이 마법보다 더 대단한 게 존재한다. 그건
바로.
바로까지 말을 한 제스란이 라한을 쳐다봤다. 라한의 얼굴이 호기심에 젖어 있기를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젠장. 저 놈 왜 궁금해 하지 않지? 내 얘기가 재미없나?
제스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라한의 얼굴은 이전과 똑같았다. 이에 제스란의 기대가
처참히 부서졌다. 그리고 스스로가 가지 무공에 대한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건 무공이라는 힘이다. 이곳의 기사들은 내가 살던 세계의 삼류 무사 수준밖에 안
돼. 그 정도 실력을 가지고.
시간 됐어요. 나가세요.
제스란이 한창 본론으로 들어가려 할 때 라한이 말을 끊어버렸다. 정치학에 배정된
시간이 끝났다는 얘기였다.
뭐, 뭐?
정치학 수업 시간 다 끝났어요.
우씨, 좋아. 네가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내가 네 아버지한테 다 말해야겠다.
제스란의 얼굴이 음흉하게 변했다. 끝까지 쓰지 않으려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나름대로 라한을 확실하게 휘어잡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뭘요?
네 출신과 저승사자 얘기 등등. 내가 너에 대해서 아는 것 전부 다 말해 버릴 거야.
그러세요.
라한의 담담한 대꾸에 제스란이 몸을 비틀었다. 나름대로 생각한 최후의 카드에
미동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저 놈 뭐야?
제스란은 그의 머리 구조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네 정체를 말해줘도 상관없다는 말이렷다?
풋, 말해봐야 누가 믿어줄까요? 오히려 미친놈이 정치학 선생으로 들어왔다고
쫓겨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라한의 말에 제스란이 고개를 숙였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라한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누가 봐도 라한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또, 생판 처음 보는 자신의
황당한 말을 누가 믿겠는가. 거기다가 정치학 선생을 사칭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추방 정도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젠장.
말 빙빙 돌려가면서 내가 말하기를 유도하지 말고 그냥 정중하게 부탁하세요. 그
부탁이 타당하면 들어줄게요. 우린 다른 차원에서 넘어왔다는 공통점이 있잖아요.
무리한 부탁만 아니면 들어줄 테니까 말해보세요.
라한의 타이르는 듯한 말에 제스란이 눈을 부릅떴다. 아직 어려 보이는 라한에게
훈계를 당한 게 분한 모양이다.
젠장. 좋아, 너!
예.
나한테 무공 배워라.
제스란의 말에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짐짓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라한이 눈을 감자 제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라한이 승낙할 거라고 확신했다.
이곳 판트리아에서 무공의 힘이면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힘. 열여덟 살 나이라면
힘에 대한 갈망이 클 테니 승낙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싫어요.
왜?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이 부족해요. 정치학 수업으로 허비하는 한 시간도 아까울
지경이라고요. 그리고 전 잡기술에는 원래 관심 없어요.
잡, 잡. 잡기술?
라한의 말에 제스란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익혀온 무공.
어쩌면 자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무공을 잡기술로 치부한 것이다.
아, 미안해요. 뭐 그런 걸로 화내고 그러세요? 잡기술이라고 한 건 사과할게요.
하지만, 전 정말 시간이 부족하다고요.
이, 이.
라한의 사과에 제스란도 할 말이 없었다. 화낼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차라리 화를
참지 않고 바로 표출했다면, 이런 우스운 꼴은 당하지 않았으리라.
저놈 . 강적이다.
제스란은 대화의 흐름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뭔가 확실하게 밀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자꾸만 주도권이 넘어갔다. 도대체 지금 상황이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좋아. 시간이 부족하다니까 정치학 수업 시간에만 배워라. 어때? 어차피 이
수업시간은 나한테 배정된 시간이잖아. 이 시간에 내가 뭘 하든지 내 마음이지. 안
그래?
말을 마친 제스란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말이라면 라한도 승낙할 수밖에
없을 터. 할 말이 없으면 라한도 곤란해 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네.
비틀!
제스란의 생각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라한이 제스란의 거래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라한은 조금도 곤란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당연하게 대답함으로써
거래를 건 제스란을 바보로 만들 뿐이었다. 말싸움으로 제스란이 라한을 이기기는
불가능해보였다.
미치겠군. 내 뜻대로 됐는데 왜 이렇게 불쾌하지?
쳇. 이상해.
이상하긴요. 그나저나 지낼 곳은 있어요? 꼴을 보아하니 옷은 본래 배정된 선생한테
빼앗아 입은 것 같고. 얼굴도 급하게 씻은 것 같기는 한데. 목 부분을 보아하니
원래는 안 씻고 살았군요.
뭐, 뭔 말이냐? 안 씻다니?
라한의 설명의 제스란이 당황하는 기색이 보였다. 라한의 추리가 정확했던
모양이다.
제스란님. 혹시 출신이. 거지?
컥!
맞구나. 에고, 제가 아버지한테 말해놓을 테니까. 우리 집에서 지내세요. 대체 여기
온지 이십 년이 지났으면서 그동안 뭐 한거예요?
라한의 질책 어린 말에도 제스란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잘못 대꾸했다가
라한이 한 말을 철회하기라도 하면 자신은 또 다시 길거리에서 지내야했다. 그런
상황은 극구 사양하고 싶었기에 잠깐은 숙이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잠깐 지고
들어가더라도 따뜻한 방에서 지내고 싶었던 것이다.
사부님
그날밤 자신의 방에 들어온 라한이 테세르를불렀다 처음에
는 로이나의 반ㅐ에 부딪혀 제대로 소환도 못했었다 하지만 지난
팔 년간 지내면서 소환 횟수는 늘어만 갔고 그에 비례해서 테세
르에 대한 믿음도 커졌다 잦은 만남이 친분을 돈독케 하는 건 인
간 사이의 이ㅣㄹ만은 아닌 듯했다
테세르
라한의 낮은 부름에 테세르가 주변을 날아다녔다 날개가 없어
도 잘도 날아다녔다
야 내가 지금까지 널 소환한게 백번은 족히 넘는다 근데 어
떻게 부를 때마다 산만하게 나타나는 건데 세상이 그렇게 신기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핀잔을 주려던
라한이 어색해질 지경이었다.
상대를 허무하게 하는 라한의 대화법은 테세르가 시초였다 뭔
가 핀잔주려고 잔뜩 열올려놓으면 허무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테세
르. 어쩔 때는 그것마저 감안해서 치밀하게 계획을 짜두면 정령계
로 돌아가 버리기 일쑤였다. 질 것 같은싸움은 애초에 피하는 모
습이었다.
"쳇, 로이나가 어디 있는지 좀 찾아봐. "
절레절레
라한의 부탁에 테세르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로이나에게는
절대 갈 수 없다는 강경한 의지마저 엿보였다.
"야, 너 자꾸 이럴래? 한 번 말하면 좀 들어라. "
절레절레.
라한의 두 번째 부탁에도 테세르는 거절한다는 표현을 할 뿐이
었다. 본래 로이나를 싫어하는 그가 부탁을 들어줄리 만무했다.
실제로 테세르와 로이나는 무척이나 사이가 안 좋았다. 로이나
는 테세르만 보면 인상을 찌푸리며 살기를 흘렸다. 그녀의 기준에
서는 생전 처음 보는 정령이 달갑지 않은 듯했다.
반면, 테세르는로이나를 피하기 바빴다. 그녀의 눈빛만닿으면
라한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에게 로이나는 공
포의 존재이자 기피 대상 1 순위에 지나지 않았다.
"널 믿은 내가 바보지. "
말을 마친 라한이 테세르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라한의 얼굴을
본 테세르가몹시 미안한표정을 지었다. 테세르는보기와다르게
마음이 여렸다. 강경한 자세로 나오다가도 라한의 슬픈 눈빛에 시
키는 대로 다 하기 일쑤였다. 이에 라한은 테세르의 이런 성격을 꽤
많이 이용해왔다. 그가 테세르를 관리하는 최고의 방법인 셈이다
절레절레.
하지만 이번만큼은 감정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라한에게 미안
한 표정을 잔뜩 지으면서도 로이나를 찾는 일 만큼은 끝까지 거부
한 것이다. 라한은 테세르가 로이나를 왜 그렇게 꺼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더욱 미안한표정이 되었다. 라한이 로이
나를 얼마나 따르는지 잘 아는 터, 라한의 말을 따르고 싶은 마음
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안 되는 일을 되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판트리아 대륵은 인간이 거의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
도로 인간의 성세였다. 어딜 가도 인간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때로는 몬스터들을 애완용으로 키울 정도였다.
하지만 인간에게 알져지지 않은 곳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레
비안산맥과로테라숲, 파마리스평원. 이 세 군데가그곳이다. 인
간들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시킬 만큼 위험한 곳, 인간들이 출입하
는 족족 의문의 실종을 당하는 곳, 그 어떤 정찰단이나 토벌대마저
철저히 죽음으로 내모는 곳이었다
그 중 한 곳인 레비안 산맥은 산세가 깊고 몬스터가 많기로 유명
했다. 이 때문에 웬만한 용병단은 출입마저 자제할 정도였다.
하지만 인간들 중에서는 웬만하다는 말로 불리기 힘들만큼 강한
조직이 많았다. 또, 역사적으로강하다고불리는왕국의 토벌대도
쾌 많이 조직됐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신비로 묻힌 레비안 산맥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인간들에 의해 도시까지 건설
되는가싶었다. 하지만, 그때 나타난거대한존재. 단한마리에 불
과했지만 막대한 힘으로 정착민들을 쓸어버렸고, 그곳을 지키던
용병들과 경비병들마저 일거에 녹여 버렸다. 결국, 현재의 레비안
산맥은 또 다시 신비의 지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 정착민과 용병단, 경비대 모두를 쓸어버린 존재. 물질계 최
강이라는 드래곤이 레비안산맥으로 모여들었다. 과거에는 단 한
마리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대충 봐도 오십 마리에 육박하는 엄청
난 수였다.
"로드님, 데리고 왔습니다. "
"레이시아나, 늦었구나. "
로드인 베르타라스가 낮은 음성으로 주위를 상기시켰다. 로드라
서인지 목소리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풍겼다.
"죄송합니다, 로드님. "
대답한 존재는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푸른 눈에 푸른 머리
를 가진 아름다운 모습. 그 어떤 남자라도 반하게 할 만큼 매력적
이었다.
"그래. 시험은 무사히 치렀더군. "
"감사합니 다. "
"로드님. 레이시아나는 시험을 변칙적으로 치렀습니다 "
레드 드래곤 로테마이어스가 말을 막았다. 현재의 그는 블루 일
족인 레이시아나와 경합을 벌이는 사이였다. 어떻게든 그녀를 떨
어뜨려야 자신이 로드가 되는 것이다.
로드에게 주어진 임기는 각 5 백 년. 그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로드
를 뽑아야 했다. 현재의 로드인 베르타라스가 로드가 된 지 벌써 489
년이 지났다. 최소 11 년 안에는 차기 로드를뽑아야 하는 것이다.
벌써 70 년 전.
베르타라스는 각 종족의 수장에게 후보 선출을 맡겼다. 후보 선
출 기간 5 년. 그 시간이 지나고 각 일족은 한 명씩의 후보자를 선출
했다. 속성을모두합해서 다섯 명. 이들중에서 드래곤로드가탄
생되는 셈이다.
드래곤 로드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시험은 의외로 간단했다.
물질계에 존재하는 열 개의 종족으로 몸을 바꾸어 생활하기만 하면
되는것이다. 하지만, 그기간에 자신이 드래곤임을드러내서는곤
란했다. 또, 드래곤이라는존재의 등장으로세상을혼란스럽게 만
들어도 탈락이었다. 오직 변한 그 종족의 모습만으로 5 년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뭐가 말이냐?"
"레이시아나는 경합에서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습
니다. "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베르타라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어
떤 점에서 레이시아나가 잘못을 했는지 자신도 궁금했음이다.
"말해보라. "
"그녀는 주어진 5 년이 아닌 8 년을 보냈습니다. 주어진 시간에 3
년을 더 허비했으니 인정할 수 없습니다. "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레이시아나가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분한
모습이 그의 성정을 말해주는 듯했다.
"경합에서 주어진 5 년에는 최대라는 단서가 붙지 않았습니다.
또, 드래곤 로드 경합에 이런 시험이 끼어 있는 이유가그들의 삶
을 이해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5 년이라는 단서를 단 것도 최
소 그 정도의 시간은 우리가 드래곤이라는 걸 잊고 지내야 그들의
생활을 이해한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전 5 년 이상만 되면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
레이시아나의 말은 또박또박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마치 이런 질
문을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보일 정도였다.
"레이시아나! 5 년은 그렇댜 치더라도 엘프로 보내야 할 시간을
인간 세상에서 보낸 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이번엔 너에게 주어진
임무는 분명 엘프의 생활이었을 텐데. "
"로테마이어스! 그래도 엘프가 없는 곳에서 숨어 지낸 너보다는
제대로 시험을 치른 게 아닐까? 그래도 난 다른 종족과 부딪히며
지냈으니까. "
레이시아나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기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드래곤들이
다른 종족의 모습으로 지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마법 능력이면 각 종족의 완벽한 모습으로 변화가 가능할 터. 들키
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엘프만은예외였다. 물질계에 존재하는모든종족가운
데 드래곤 다음으로 마나에 예민한 종족이 엘프였다. 이 때문에 경
합의 가장큰난관도 엘프가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엘프가드래
곤의 존재를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드래곤의 마법 능
력이면 자신의 마나도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5 년을 지내
다보면 실수도 하기 마련. 엘프는 그런 실수를놓치지 않았다. 아
주 잠깐의 실수라도 포착되면 바로 눈치 챌 만큼 예민한 존재였다.
"이 이."
"왜? 할 말 있나? 로테마이어스! "
로테마이어스는 5 년 동안 드래곤의 힘을 완벽히 숨길 자신이 없
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탓이다. 이 때문에 엘프 시험
때는 오히려 엘프 마을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니, 생명체
가 사는 마을 자체를 피해서 생활했다.
오지에 있는 절벽에 집을 짓고 엘프의 모습으로 지내긴 했지만
엘프들과 섞여 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오히려 레이시
아나의 시험이 더 정당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만. 로테마이어스! 레이시아나의 시험을 인정하지 않으면 네
가 치른 시험 역시 부정당할 수밖에 없다. 어찌하겠느냐?"
"이, 이인정합니다. "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이 처음보다 많이 어두워졌다. 레이시아나
에게 이길 자신이 없는 모양이다.
열 종족의 분신이라 불리는 이번 시험은 통과하기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각 종족으로 살아가되 그 살아가는 모습이 조금 더
자연스러울 때, 그만큼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다. 물론, 사고를 친
다면 바로 낙제 되겠지만.
로테마이어스의 점수는 그리 좋지 못했다. 물론 이미 떨어진 세
명의 후보들을 생각한다면 좋은 편이겠지만 레이시아나의 점수와
비교하면 한참 부족했다. 이 때문에 그는 이번에 레이시아나를 반
드시 떨어뜨려야 했다 마지막 남은 시험은드래곤으로서의 삶뿐.
본질이 드래곤이니 실수할 리가 없는 거였다. 헌데 이번 시험마저
레이시아나가 빠져나갔으니 자신에게는 승산이 없는 셈이었다.
"그래, 좀 늦었지만 레이시아나가 돌아왔으니 마지막 시험을 치
러야겠지 너희들은 내일부터 5 년간 드래곤의 삶을 즐걱야한다.
우리 드래곤의 본질이 무언지 잘 깨닫고 행동하길 바란다. "
"예. 로드시여. "
로드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다른
후보인 레이시아나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마치 무슨 생각
을 하는 듯 골똘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레이시아나! 할 말 있느냐?"
"저. 로드님. "
로드의 물음에 레이시아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을 꺼
내기 힘든 듯 벌써부터 진땀을 흘리는 모습이 역력했다
"말해보라 "
"전. "
말을 멈춘 레이시아나가주변을둘러봤다. 그녀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주변 드래곤들의 얼굴이 의문스럽게 변했다. 멀정하게 시
험을 잘 치르던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시험을 포기하겠습니다. "
"뭐?"
"뭐, 뭐라고 했느냐?"
"왜?"
레이시아나의 말은 주변 드래곤을 혼란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지난 70 년 동안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모든 시험을 통과했던 레
이시아나. 힘든 고비 다 넘기고 이제 쉬운 일만 남았는데 대체 왜.
레이시아나의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흠, 지금까지 잘 버텨왔지 않느냐?"
"죄송합니 다. "
레이시아나의 충격 발언으로 가장 이득을 본 드래곤은 로테마이
어스였다. 레이시아나가포기하면 후보는자신뿐. 결과를볼 필요
도 없이 로드 후계자가 되는 셈이다.
"흠, 이유를 말해줄 수 없겠니?"
"죄송합니 다. "
베르타라스의 말에도 레이시아나는 사과의 말만 연신 내뱉었다.
연유를 설명해줄 수 없다는 강경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니 어쩔 수 없구나. 로테마이어스! 이제
후보는너 하나뿐이다. 비록경쟁자는 없어졌지만, 시험을멈출수
는 없는 일.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란다. "
"에.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
"오늘 회의는 여기에서 마친다. "
로테마이어스는 단일 후보가 되었음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머지 세 명의 후보가 탈락된 건 이미 50 여 년 전. 그 후부터 레이
시아나와 계속 경쟁을 펼쳐온 로테마이어스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이없이 경쟁자가 사라졌으니 허무하기도 할 터였다.
"레이시아나! 왜?"
"미안 나 먼저 갈게. "
본래 로테마이어스와 레이시아나는 친한 친구였다 태어난 시기
가 거의 같고 부모의 레어도 가까웠던 터. 해출링 시기를 거의 함
께 보내다시피 했다. 이번에 후보로 둘중 한 명만올라왔다면 아
낌없이 응원해줄 수 있는 그런 사이였다.
서로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말 그대로 소꿉친구가 그들
이 었다.
'왜 저러지? '
로테마이어스를 뒤로한 채 레이시아나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
는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도 어두운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평소
에 차분하고조용하지만, 어둡지 않았던 레이시아나. 오랫동안함
께 지내온 로테마이어스에게 너무나 생소하게 다가왔다
정치학 수업 시간.
제스란이 경건한 표정으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호흡이 무척
이나긴특이한형태였다. 반면, 라한은따분한표정으로가스란이
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본래부터 무공에 관심이 없는 라한
그에게는 제스란이 잠을 자기위해 준비운동 하는 모습으로밖에 보
이지 않았다.
"날 들어서 바닥에 내려라. "
"그러죠. "
라한이 제스란을 수레에서 내렸다. 제스란은 다리를 쓰지 못하
기에 항상 수레에서만 지내왔다. 어쩌면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바
닥에 내려왔을지도 모른다
"너도 앉아라. "
"앉아 있는데요. "
"바닥에 앉으라고!"
의자에 앉아 있는 라한에게 제스란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는
바닥에서 라한을 올려다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스승, 라한은 제자이니 말이다.
"알았어요. "
"절 해."
"예?"
제스란의 짧은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절이 무엇을 의
미하는지 설명해달라는 의미였다.
"절 몰라? 고개 푹 숙이고 공손하게 인사하는 그런 거 몰라?"
"몰라요. "
"쳇. 이놈의 세상은예의란게 없어. 하여간막나가는세상이라
니 가. "
라한의 말에 제스란은 괜스레 세상 탓만 해댔다. 무령계와 다른
모든 예법과 행동이 그에게는 어색하게만 다가왔다. 그런 어색함
을 제스란은 나쁜 식으로 해석했고
"어떻게 하는 건데요?"
"고개를 깊이 숙이면서 하는 인사 같은 거야. 머리가 바닥에 닿
도록 하는 게 중요하지. "
제스란의 말에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제스란이 설명한 행동
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중이었다. 잠깐의 생각 후 라한이 눈을 떴다.
"싫어요. "
"뭐야 선생이 하라면 할 것이지 어디서 말대꾸야?"
"싫어요. 이곳 판트리아에는 그런 예법 없어요. "
라한은 제스란이 설명한 인사법을 비굴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비굴하고 구차하더라도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주저 없이 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무공에도흥미가 없고 별로중요해보이지도 않
는 예법으로 보였기에 거절해버렸다. 누가 뭐래도 그는 백작가의
후손이니 말이다.
"이놈이 근데 좋아. 그럼 이곳에서는 어떻게 하는데?"
화를 억누른 제스란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가 성질을 많이 죽
였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음, 이곳은말이죠.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렇게 합니다. "
라한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제스란에게 인사했다. 이곳의 학생
들이 선생을 만났을 때 하는 인사였다. 나름대로 최선의 예의를 보
인 라한. 하지만, 제스란에게는 버릇없게만 보였다.
"그게, 그게 사부한테 할행동이냐?거기다가안녕하세요, 선생
님?허, 참나. 여기가버릇없는세상이라는건 일찍이 알았지만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
"합리적이고 좋기만 하네. "
제스란의 황당한 표정에도 라한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제
스란을 분노하게 만들기 딱 좋은 표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제스란은 화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위장취업
이 하나만으로도 제스란은 화를 낼 수 없는 입장이었다.
라한이 이런 사항을 이용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후우, 그럼 너희 세상은 어떤데? 여기 말고 전에 네가 살던
그 예원계던가? 거기는 어떻게 인사하는데?"
"음, 기억이 잘안나요. 워낙짧은생을반복해서 살아서요."
"기억해봐, 이 자식아. 너 돌대가리야?빨리 기억해."
"아, 기억났다. 거기서는선생이 먼저 말을 꺼내요. 어서 오십시
오. 라한님. 이렇게요."
라한의 말에 제스란이 몸을 비틀거렸다. 선생이 제자에게 높임
말을 하다니 제스란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사고방식
이었다.
"학생은?"
"학생은 뭐, '수업 시작해' 라고 반말로 하죠. "
라한의 연이은 대답에 제스란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표정만으로는 당장 예원계로 날아가서 학생들을 모두 죽이
려는 얼굴 같았다
라한의 대답은 거짓이 전혀 섞이지 않은 진실이었다. 예원계는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곳. 이 때문에 과거의 선생들은 컴퓨터에 지
식을 입력하는 정도의 일만 했다
과거의 선생들이 가르치던 일을 컴퓨터가 대신하는 것이다. 컴
퓨터라는 기계 자체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으니 말을 높이는 건
당연했다. 그에게 인간이 반말을 하는 것도 당연했고.
"난 인정 못해. "
"못해도 어쩔 수 없어요. "
라한의 대답에 제스란이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강압적으로 안
된다면 구슬려서라도 라한을 제자로 삼고 싶었다.
제스란은 라한이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걸 잘 알았다. 또, 본래의
자신 성격이라면 라한을 어떻게든 죽이려 했을 거라는 것도
제스란이 라한을 제자로 삼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 있었다. 묵주
가 자신의 성격을 감안했다면. 자신과 라한의 격돌을 예상했을 것
이다. 제스란은묵주가 계획한대로움직이는 건 죽기보다 더 싫었
다. 할수만 있다면 묵주의 계획을 철저히 부숴 버리고 싶을 정도
였다. 이에 정 반대인 제자로 삼으려고 마음먹었다
'묵주놈. 내 성격이 바뀔 건 몰랐을 거다. '
"라한아. 넌 이 세상에서 꿈같은 거 없냐? 영웅이 되겠다거나 세
상에 정의를 실현하겠다거나 뭐 그런 꿈 없어?"
제스란이 짐짓 자상하게 말했지만 라한에게는 징그럽게만 들렸
다 하지만제스란은 현재 자신의 선생인 상황. 묻는 말에는 대답
을 해야 했다. 지킬 건 지키고 거절할 건 철저히 거절하려는생각
이었다
"제 꿈은딱하나. 오래 살자. 이것뿐이에요. 반드시, 반드시 이
곳 판트리아 대륙 역사상 가장 오래 사는 사람이 될 거예요. "
"오래 사는 법? 그거라면 무공이 최고지. 지금 내 나이가 몇으로
보이냐?"
"오십 살. "
제스란의 질문에 라한이 곧바로 대답했다. 처음 만났을 때, 생각
했던 나이를 말한 것이다.
"하하하하하. 놀라지 마라. 내 실제 나이는 일백하고도 열아홉
살이다. 무려 백십구 년을 살아온 몸이지. 어떠냐? 무공의 힘을 믿
겠지?"
"진짜예요?"
"내가 고작 네까짓 녀석한테 거짓말을 하겠냐?"
제스란의 대답에 라한이 눈을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아무리 봐
도 오십 살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십 살이라고 한 것도 겉
모습보다 조금은 많이 부른 게 아니던가.
'흠, 저 말이 진짜라면 무공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군, 하긴
뭐가 됐든지 한계를 넘어서면 수명은 길어지게 마련이지. '
제스란의 말은 결국, 라한의 뜻을 바꾸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라한이 생각하고 있던 가정, 한 분야에서 한계를 넘어서면 수명이
길어진다는 가정을 확실하게 하는 데는 도움을 주었다.
"그래도 무공은 싫어요. 한 가지에서 최고가 되려면 한 가지만
파고들어야죠. 무공에 눈 돌릴 틈이 없어요. "
거절 의사를 밝힌 라한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절대 하지 않겠다
는 의지를 온몸으로 표현한 것이다.
"못. 된. 놈. "
"어? 저, 저거 저거
라한이 고개를 돌리자 제스란의 수레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수레를 본 라한이 말을 더듬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여실히 드러낸 채였다.
"이놈이 미쳤나? 갑자기 왜 이래?"
"저, 저 수레 저 수레 재료. "
"뭐? 내 수레?"
말만 더듬던 라한이 손마저 마구 떨기 시작했다. 수레가 준 충격
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였다.
예 저 수레 어디서 났어요?"
"아, 저건 내가만들었지. 보통다리 없는사람이면 아무것도못
하겠지만 나는 다르거든. 손으로 모든
"재료 어디서 났어요? 저 저 수레 만든 재료 어디서 구했냐고
요? "
라한의 놀람은 정도가 점점 심해졌다. 처음은 긴가민가했던 게
확신으로 변한 것이다.
"저건 내가 이 차원에 떨어졌던 곳에 많았어. "
"거기가 어딘데요? 우리 왕국이에요? 멀어요? 저런 나무가 얼
마나 있어요? 나무 크기는 어땠어요?"
라한의 속사포 같은 질문에 제스란이 입을다물어 버렸다. 그에
반해 라한의 얼굴은 간절하다 못해 절실해 보이기까지 했다.
'오호, 저 나무가저 녀석한테 중요한건가?후후후. 좋아. 아주
좋아. '
"야, 라한. 절 해. "
"말 돌리지 말고 말해줘요. 저 나무 어디서 났어요?"
라한의 재촉에도 제스란은 빈정거리기만 했다. 라한의 약점을
제대로 잡았으니 최대한 이용해먹으려는 속셈이었다.
"절 해."
"예?"
"아홉 번 절하고 앞으로 날 사부님이라고 부르겠다고 약속해라.
그렇게 하면 저 나무가 어디서 났는지 말해주지. "
제스란의 말에 라한이 아차 싶었다. 나무의 출처는 말을 빙빙
돌려서라도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었을 터였다 재료를 발견했다
는 반가움이 성급함을 낳았고, 결국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문에 제스란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약점을 잡혀
버렸다.
'실수했다. 젠장. '
"좋아요. 아홉 번 절하면 되죠?"
"앞으로사부님이라고부른다고 약속을 해야지. 아, 아니지. 말
로는 안돼. 너 같은놈은약속을 어기고도남을놈이거든. 어디보
자 방법이 없을까 7"
신용이 없다는제스란의 말은정확했다. 라한은그상대가누구
라하더라도 배신할준비가 되어 있었다. 단, 자신의 이익을 심하
게 침해한다는 전제하에.
물론, 그도 신의가전혀 없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라한의 신의
는자신에게 이득을주는사람에 한해서 일 뿐. 이득과 피해를 비
교해서 피해가 크다면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라한이었다.
"절 못 믿어요? 제자 될 사람인데 못 믿으면 되겠어요?"
"다른 사람 다 믿어도 넌 믿을 수 없어. 흠, 금제를 가해야
겠다. 이리 와라. "
"금제?"
뭔지 모를 불길함에 라한이 조금씩 뒷걸음질쳤다. 확실치 않은
건 당하지 않는 게 오래 사는 길. 라한은 자신이 정한 철칙을 어기
고 싶지 않았다.
"도망가? 이 나무가 어디서 났는지 알 필요 없다는 거지?"
"아씨 알았어요. 알았어.금제인지 은제인지 맘대로해봐요."
결국 라한도 체념하고 말았다. 자신의 철칙을 어기면서까지 얻
어야 할 만큼 나무의 존재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시작한다. "
타탁!
팟- !
"음"
제스란이 라한의 등을 몇 차례 두드렸다. 겉으로 드러난 소리만
으로는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듯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큰 충
격은 없었다. 대신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빠질 뿐이었다.
묘한 기분의 라한은 자신이 느낀 기분이 해가 될지 이익이 될지
종잡을수 없었다. 제스란의 말로는 분명 해가 될 게 분명했지만,
기분이 너무 좋았다.
"뭔가 시원한 느낌을 받았을 거다. "
"이게 뭔데요?"
"이놈아. 내가말하면 그냥예라고짧게 대답하고끝내라. 되묻
지 말고. "
"알았어요. "
"예라고 하라니까. "
"예. "
라한과 제스란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도 자주 부딪혔다. 제자가
공손하기를 바라는 제스란과 궁금한 건 빨리 알아야 하는 라한. 정
반대 같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극과 극을 달리는 성격이었다.
"아무튼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면 금제는 성공했다. "
"이게 뭐냐고요?"
"이건 네가 허튼짓을 했을 때 언제든지 널 죽일 수 있는 힘이지. "
"죽, 죽어요?"
말을 더듬던 라한이 몸을 비틀거렸다. 죽음. 다시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단어였다. 헌데 이렇게 어이없이 죽음에 처하게 되었으
니 충격이 큰 게 당연했다.
"내가 지금 죽인다고 했냐? 내 말을 안 들으면 죽인다고 했지.
음, 안 보면 못 믿을 테니 잠깐만 보여주지. "
제스란의 말이 끝나자마자 라한의 몸이 서서히 굳어갔다. 발끝
에서부터 시작된 마비 증세가 점점 퍼져간 것이다.
"사, 사살려줘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선생님, 아니,사부님. 제발살려주십시오. 사부님."
"후후, 녀석. "
라한은 정말 필사적으로 빌고 또 빌었다. 아무리 비참해지더라
도 죽기만은 싫었던 것이다. 그에게 제스란의 금제는 치명적인 아
킬레스 건으로 작용했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알았다, 요 녀석아. "
제스란의 말이 끝나자마자 라한의 마비 증세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생길 때와 마찬가지로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돌아오는
감각들. 라한에게는 새 생명을 얻은 것과 맞먹는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 아니, 사부님. 정말 감사합니다. "
"그럼 아홉 번 절을 해야지?"
라한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처음 마비 증
상을 느꼈을 때, 죽음의 공포를 접했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비굴한수단으로 제스란에게 빌어댔다. 그는살기 위해
서라면 자존심이나 체면 따위는 훌러덩 벗어던질 수 있었다.
"사부님. 제자 라한 인사드립니다. "
"한 번. "
"사부님. 제자 라한 인사드립니다. "
라한이 한 번 인사를 할 때마다 제스란이 숫자를 세었다.
라한은 아주 사소한 것에 머리를 잘 굴렸다. 그런 라한이라면 절
을 한 번 정도 빼먹을 수도 있는 일.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위
해 애초부터 숫자를 세어버린 것이다.
'요놈아. 내가 네놈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다. '
실제로 금제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제자에게 금제를 가한
다는 것. 그건 곧 기를 운용해야 할 혈도에 어떤 조치를 취하는 일
이다. 무공수련에 치명적으로 작용할지 모르는 일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좀 전에 제스란이 두드린 건 일종의 타혈이었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굳어 있던 혈도를 푸는 심법의 준비운동인 셈이다. 이십 년
가까이 굳어 있던 혈이기에 잠깐 몸이 마비되는 느낌이 왔을 뿐,
몸에 좋으면 좋았지 나쁘건 조금도 없었다.
"그나저나 너 저 나무는 어디 쓰려고 하는 거냐?"
"사부님. 전 인챈트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물에 마법을
부여하는 능력이죠. 헌데, 그 조건이 몹시 까다롭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힘든 건 재료를 구하는 일입니다. "
"그러니까 네 말은 저 나무가 그 힘든 재료라는 말이지?"
"예. 사부님. "
라한의 태도는 아까의 티격태격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
다. 이렇게 공손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
다. 그렇게 유도했던 제스란마저 의아할 지경이었다.
"금제도 가했고 구배도 받았으니 위치를 가르쳐주지. "
"감사합니다, 사부님. "
제스란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묵주의 의도를 철저히 부셨
다는 생각에서였다. 거기다가 제법 똑똑한 제자마저 뒀으니 기분
도 무척 좋았다.
"지도를 가져와라. 대륙 전체가 그려진 지도였으떤 좋겠구나. "
"예, 사부님. "
말을 마친 라한이 종이를 들고 왔다. 일반 책 크기의 종이가 쌓
여 있는 뭉치 였다.
종이를 가져온 라한이 바닥에 깔기 시작했다. 그렇게 계속 깔자
사방 2 미터를 종이로 도배한 모습처렁 되었다.
"뭐하는 거냐?"
"판트리아 대륙에는 뛰어난 지도가 없습니다. 지도 그리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사람이 없거든요. 그렇다고 지도가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용병이나 상인들이 자신들의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종종 지도를 만들죠. 하지만 그런 지도들은 자신들이 다니던 길만
표시되어 있거나산, 강, 몬스터의 위치 같은중요한 것만표시하
고 있습니다. "
"그래서?"
"제가 본 지도들을 모두 종합해서 그려보겠습니다. "
말을 마친 라한이 바닥에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대
륙의 전도를 시작으로산맥, 강, 바다의 위치, 심지어는성의 위치
와 도시의 이름까지 적었다.
라한이 지금까지 봤던 수십 개의 지도 모두를 한 곳에 집대성 한
것이다.
라한이 지도를 다 그리는 데에는 근 이십 분의 시간이 소요되었
다. 지도의 명칭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나마 이 정도에서 그
칠 수 있었다. 다른사람이 지도를모아놓고그린다면, 그보다 열
배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터였다.
"놀랍군. "
"현재 이곳이 저희 필슨 백작가가 있는 곳입니다. "
제스란도 라한이 똑똑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금제를 가하기 전
까지 말로 자신을 철저하게 농락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정도로 뛰어난 머리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단순
히 지도를 합하는 일이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무척이나 힘든 작업.
이런 일을 이십 분 만에 끝내버리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부님 ! 사부님?"
"어? 어, 흠, 흠. 어디보자. 이 지점이 현재 위치니까 여기서
산을하나 넘었었고맞아. 여기 강이 있었지. 이 강인가보군. 그
리고 계속남쪽으로 내려왔으니까 지도에서는북쪽으로음, 대
충 이 지점이겠군. "
제스란이 최종적으로 가리킨 지역은 파마리스 평원이었다. 일명
하얀 죽음으로 불리는 불모지. 그곳에 들어가서 살아나온 생명체
가 없다는 인간의 금역이었다.
라한은 제스란의 말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사부님. 여기는 지도에 쓰인 것처럼 파마리스 평원이라 불립
니다. "
"나도 보고 있다. "
"이곳은 인간들이 들어가서 단 한 명도 살아나오지 못한 미지의
땅이기도 합니다. "
"아, 어쩐지 시체가많다했지. 썩은냄새가진동을하더군."
제스란은 그때가 떠오르는지 콧잔등을 잔뜩 찌푸렸다. 그 모습
이 영락없는 아이의 표정 같았다.
"나무를 찾은 곳이 시체보다 남쪽입니까? 아니면 북쪽입니까?"
"훨씬북쪽이었지. 다리 때문에 빠르진 않지만, 난웬만한 어른
들보다빨리 달렸거든. 뭐, 지금은팔하나마저 요모양요꼴이 뤘
지만. 아무튼, 그런 내가두달을달려야했으니 아주북쪽이지. 대
충 이 정도 되겠군. 시체는 여기고. "
지도에 표시된 점을 보며 라한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제스란의 말대로라면 나무가 있던 장소가 너무 깊숙했다. 시체
의 위치를 생각해볼 때, 인간의 대부분이 죽은 곳은 걱우 파마리스
평원의 초입, 자신의 힘으로는 가기 힘든곳임을 깨달았다. 아니,
대륙 그 누구도 갈 수 없는 곳이 미지의 땅. 파마리스 평원이었다
"그래도 사부님은 무사히 나오셨잖아요. 대체 어떻게 나오신 거
예요?"
그래 그게 말이지 나도 모르겠어
예 지도의 위치로 보면 파마리스 평원에서 보낸 시간이 최소
두달 이잖아요 근데 아무리 대책도 없이 그냥 움직였다고요
파마리스 평원의 입구에서 시체가 있는 곳까지는 성인이 달리는
속도로 보름이 걸리는 길이다 또 시체가있는 곳에서 제스란이
나탄난 까지 석달반 두다리를 못쓰는 제스란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시간을 반 이상 줄이지는 못했을터 결국 최소 두달 이상
을 파마리스 평원안에서 지낸 샘이었다
헌데도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했으니 라한도 답답했다
그게 설명하기 곤란하군 난 그냥 달려 나온게 전부거든 시체
가 엄청 널려 있었고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던데 난 그놈들이 왜
죽었은지도 모르겠어 시체 냄새가 짜증나고 바닥에 시독이
쌓여서 귀찮았지만 별로 힘들이지않고 나왔거든
.
라한은 제스란의 말을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설정으로 거짓을 말 할 만큼 제스란이 어리섞지는 않았다 거
짓말을 한다면 차라리 이리저리 꾸며서 앞뒤 맞도록 하ㅡㄴ게 정상
이리라
이유가 뭘까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무리 궁리해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라한은 제스란의
무식함에 대해 고민을. 제스란은 앞으로 가르칠 무공에 대한
고민으로 남은 정치학 수업 시간을 마쳤다 많은 의문과 궁금증만
을 남긴채
본격적인 수업
라한의 방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는 듯 표정은 어둡
기 그지없었다
완벽하게 똑같이 그렸는데도 안 되는군 역시 재료가 중요한
건가
라한의 왼쪽에는 예전에 구한 스트랭스 스크롤이 펴쳐저있었
다 그옆과 라한의 주위에는 온갖 종이가 어지럽게 널린 모습이
다 그의 목부분에는 테세르가 목만 내밀고 졸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좀 큰 바퀴벌레가 목에 앉은 것처럼 보였다

라한이 테세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자신은 머리 터지게 고민
하는데 잠만 자고 있으니 심통이 난 듯했다
"야, 테세르. 잠만퍼질러 자지 말고생각좀해봐."
우우웅:
테세르는 라한에게 꿀밤을 맞았어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오히
려 이미 적응이 되었다는 듯 몸만 뒤척일 뿐이다
"넌 정령이 아니라 웬수다, 웬수! "
똑똑
테세르에게 본격적으로 구박을 가하려는 찰나. 밖에서 노크 소
리가들려왔다. 하인들에게는출입을 엄격히 통제해놓은라한. 헌
데도 누군가 방문했다면, 통제를 무시할 수 있는 가족 중 한 명인
듯했다.
"야, 테세르. 누구 왔다. 돌아가. 예! 누구세요?"
테세르에게 작게 명령한 라한이 밖을 향해 크게 외쳤다. 짐짓 다
급한 순간이지만 라한의 얼굴은 담담하기만 했다.
"야, 테세르. "
라한은 잠들었던 테세르가 돌아가지 않자 주머니에 구걱 넣어
버렸다. 마치 물건 취급하듯 막 대했다.
'네놈이 자처한 일이다. '
두 번째의 명을 한 번 더 내린다면 테세르의 강제귀환도 가능했
다. 하지만, 목을 간질이며 잠든 대가로 짐짝취급 해버렸다.
철컥!
"라한아! 오랜만이구나 "
"형님!"
방문객은라한의 형 레테아였다. 그는다른가족들과는달리 일
년에 한 번씩은 라한을 만났었다. 이필리에 종합 학교를 직접 방문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건강해 보이는구나. "
"하하. 그렇죠? 그런데도 어머니는 제가 야위었다고 걱정만 하
시는걸요. "
레테아는 라한을무척이나좋아했다. 그는루시아와는 달리 일
찍부터 철이 들었었다. 이 때문에 라한의 탄생으로부모님을 잃었
다는생각은조금도하지 않았다. 대신, 나이 차이가많이 나는동
생이 조카처럼, 그리고 아들처럼 귀엽게만 보였다
"형이 왔는데 앉으라고도 안 하는 게냐?"
"하하. 그게 방이 좀 지저분해서 . 그냥 적당히 앉으세요. "
라한의 말처럼 방에는 온갖 종이와 나무 조각들, 조각칼과 펜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침대가 아니면 앉아 있는 일 자체가 불가능
할 정도였다.
"하인들을 불러서 청소 좀 시켜야겠다. "
"나중에 할게요. 전부중요한물건이라서. 일단여기 앉으세요."
라한이 자신의 침대 한쪽을 두드렸다. 대충 둘러봐도 앉을 곳은
그곳뿐이었다.
레테아가 침대에 앉아 라한을 바라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말씀하세요. "
"흠, 아버지께서 걱정을 많이 하시더구나. "
"정치학 때문이죠?"
"그래, 아버지는 널 우리 필슨 백작가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계
신다. 나도 마찬가지고. 너라면 우리 가문을크게 흥하게 만들수
있으리 라 믿는다. "
각 가문의 작위는 한 명에게만 이어지게 된다. 자식 모두에게 이
어진다면, 그작위의 수가너무많아지기 때문이다. 필슨백작가문
의 후계자도 한 명밖에 될 수 없다. 레테아와 아버지인 필슨 백작
은 그 후계자로 라한을 점찍어둔 모양이다.
레테아는 기사의 작위와 아버지의 후광으로 남작이 되었다 이
미 결혼해서 슬하에 아들을 둔 아버지였다. 결국, 자리를 완벽히
잡은 셈이다. 거기에 아버지의 힘이 보태지면 자작 승진도 조만간
이루어질 듯했다.
"형님 전 제 길을 정했습니다 "
"길이라 이 형에게 말해 줄 수 있겠느냐?"
"그게 저
라한은 쉽사리 대답해줄 수 없었다. 대륙에서 사라진 지 이미 오
래된 인챈터. 힘들고 불가능해 보이는 길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설마 이 형에게도 비밀이라는 거냐?"
"죄송합니다, 형님. 하지만 전 제가 정한 길에 모든 걸 바칠 준
비가 돼 있습니다. "
라한의 의지가 담긴 대답에 레테아가 한숨을 쉬었다. 어릴 때부
터 한 가지 목표를 세우면 포기할 줄 몰랐던 동생이다. 그 모습을
오랫동안 봐 왔기에 말려봐야 소용없음을 잘 알았다
"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근데 그 길이 작위가 없어야
하는 길이냐?"
"죄송합니다. 형님. "
"그래도 아버지가 시키신 정치학 수업은 빼먹지 말아야 한다. "
라한의 고집이 대단하듯 필슨 백작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결
국, 레테아는 어느 쪽의 편도들어주지 못했다. 어차피 먼저 꺾이
는 쪽이 포기할 테니 스스로에게 맡기려는 생각이다.
"예. 그리고 형님. "
"말해라. 내가 도와줄 일이 있느냐?"
"용돈 좀 주십시오. 아버지는 제게 돈을 안 주십니다. "
라한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용돈을 받아보지 못했다
집 밖을 나간 적이 없으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 건 집을 나가겠다는 의미. 필슨 백작
이 허락할 리 없었다.
"얼마나 주면 되느냐?"
"최대한 많이요. 많이 "
"허허, 녀석. 지금가진돈이 이것뿐이니 이걸로만족해라. 다음
에 또 만나면 그때 더 주마. "
철렁-!
말을 마친 레테아가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얼핏 봐도 적지 않은
액수로 보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
"할 얘기가 끝났으니 가봐야겠다. 기사라는 위치라서 오래 비울
수가 없구나 "
"예, 형님. 몸조심하세요. "
라한의 인사를 뒤로하고 레테아가 방을 나섰다. 왠지 약간은 씁
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언제 터지느냐가 관건일 뿐. 라한과 필슨 백작의 충돌은 이미 정
해진 수순이었다. 레테아는그런 둘의 싸움이 안타까웠다. 아버지
의 뜻을 거스르는 라한과 자신의 길을 아들에게까지 권하는 아버
지. 레테아는 둘 모두가 답답하게만 보였다.
"테세르 뭐하니?"
라한이 자신의 주머니를 뒤졌다. 테세르를 찾으려는 행동이었지
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자는 듯 보였지만
주변 상황은 느낀 모양이다. 라한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큰 위기
를넘겼다. 형인 레테아는소드익스퍼트중급에올라있는기사, 기
운의 흐름에 민감한레테아가정령을못느낄 리 없었다. 결국, 테
세르가 제때 귀환하지 않았다면 곤란한 일을 당했을 게 분명했다.
제스란이 커다란 종이를 준비해왔다. 일반 서책에 쓰이는 종이보
다 훨씬 큰 크기였다. 필슨 백작에게 말해서 따로 주문한 듯했다.
"이 종이에 사람을 그려라. 달리거나 걷는 동작이 아닌 그냥 서
있는 그림을 그리면 된다. "
"예, 사부님, "
공손하게 대답한 라한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술을 배웠
던 탓에 사람을 그리는 것도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라한은 학교에서 미적 감각은 떨어지지만, 세밀한 묘사에 능하
다는평가를받았었다. 또, 미술을배운시간도무려 5 년. 그동안
놀지만은않았기에 그림에도꽤 능했다. 물론, 그림으로 먹고사는
화가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말이다.
"그만. 그 정도면 췄다. "
"예, 사부님, "
라한이 음영을 표현하려하자 제스란이 제지시켰다. 그에
게 필요한 그림은 사람의 겉모습이었다.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른
그림자나 음영은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제스란. 라한을 제지시킴
으로써 자신에게 딱 적합한 그림을 얻을 수 있었다.
"날 들 수 있겠느냐?"
"예. 헌데, 이 그림은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우둔한제 지식
으로는 이런 그림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
라한은 제스란에게만은 철저히 저자세로 일관했다. 어차피 자신
의 생명은 제스란에게 담보 잡힌 상태. 살기 위해서 이 정도 자존
심은 굽히자는 생각이었다.
"일단 들기나 해라. "
" 예. "
라한의 몸은 그리 약하지 않았다. 정령을 소환하는 자체가 정신
과 육체에 무리가 가는 일. 정령을 자유자제로 부리기 위해서는 나
름대로 운동을 해야 했다. 정령 테세르 소환에 대한 라한의 집념과
로이나의 조언. 이 둘이 합해지지 않았다면, 비실비실한모습의 라
한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끙- !
"헙!"
라한은 제스란을 드는 일에 쾌나 애를 먹었다. 두 다리가 멀정히
달려 있음에도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하는 탓이다. 한쪽이 축 처져
있으니 들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위로! "
"으, 으 예. "
라한은 끙끙거리면서도 제스란을 놓지 않았다. 자칫 제스란의
비위라도 거슬러 죽음을 맞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번엔 아래. "
" .예. "
처음에는 힘들어도 버틸 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
록한계에 부딪혀갔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다리가후들거렸다. 이
대로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른다면 제스란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빨리 좀 해라 '
"마지막이다. 왼쪽. "
"헉, 헉. 조금만 쉬었다가 하면
"왼쪽! "
"예. "
반론을 제기하려던 라한이 제스란의 한 마디에 입을 다물어 버
렸다.
지금 그에게는 가장 무섭고 껄끄러운 존재가 제스란이었다. 그
의 말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금제 때문이다. 이 금제만 없다면 오
늘도 제스란과 티격태격하며 한 시간을 보낼 게 분명했다.
"헉, 헉. 으, 으
"끝났다. 내려라. "
쿵- !
라한은 제스란을 내려놓자마자 드러누워 버렸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핑핑 돌지경이었다. 또, 목은왜 이렇게 타는지. 지금같아
서는 물 한 드럼도 다 따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놈이. 사부를 내동댕이쳐? 네 놈이 죽고 싶은 가보군. "
말을 마친 제스란이 손을 슬쩍 들어올렸다. 예전에 한 번 했던
금제를 발동시키는 모습이었다. 제스란의 행동을 본 라한이 경악
스러워했다. 전의 그 고통을 다시 겪기는 죽어도 싫었다.
"사부님. 헉, 헉. 살려주십시오. 제발. 죽을죄를지은건 알지만
너무 힘들었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테니 한번만용
서해주십시오. "
"좋다. 네놈에게서 반성의 기미가 보이니 단 한 번만 용서를 해
주마. 다시 날내동댕이치는 일이 벌어지면그땐 ., "
말을 마친 제스란이 오른 손으로 목을 스윽 그었다. 여차하면 죽
여 버리겠다는 걸 단 한 번의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
"이 종이를 벽에 붙여라. "
"fl. "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힘겹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막
상 일어나니 현기증이 더 심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흠, 내가봐도잘그렸군. 이 그림이 뭔줄아느냐?"
"제자 무식하여 알지 못합니다. 가르쳐주십시오."
라한의 심하다싶은 저자세에 제스란이 흐뭇해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바득바득 달려들던 라한. 금제 하나로 이 정도의 효과를볼
줄은 제스란 스스로도 예상 못했다. 그것도, 있지도 않은 금제로.
'좋군 진작 이렇게 할 걸.
"내가 그린 그림은 혈도 자리를 표시한 거다. "
"혈도? "
"그림에 점을 찍고 그 옆에 숫자를 써놓았다. 지금부터 넌 내가
부르는 숫자와 혈도 이름을 외워야한다. 머리가 좋으니 알아서 잘
외우리라 믿겠다. "
제스란의 말이 끝나자마자 라한이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준비 췄습니다. "
"너. 뭐하는 거냐? 내가 외우라고 했지 적으라고 했더냐?당장
집어넣지 못해?"
" 예 ! "
제스란의 대답에 라한이 허겁지겁 메모지를 집어넣었다. 아무리
배가 아파도, 아무리 화가 치밀어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일어서서 내가 부르는 번호를 가리켜라. "
" 예. "
짧게 대답한 라한이 그림 앞에 섰다. 정말 깨알보다도 작은 숫자
와 점이었다. 인챈트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다면 숫자를 알아보
지도 못할 정도의 크기였다. 이렇게 작은 숫자를 그 불안한 자세로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부르겠다. 1 번. "
"예. "
"따라 해라. 1 번. "
"예. 1 번."
짧게 대답한 라한이 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의 5 백여 개
에 육박하는 엄청난 개수의 점들. 이 사이에서 번호를 찾으려면 눈
을 심하게 굴려야 했다.
"그건 백회혈이라 불린다. "
"백회혈, 백회혈
제스란의 대답에 라한이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이렇게라도 하
지 않으면 외울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점이 하나뿐이라면 반복
해서 중얼거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개수였다.
이걸 다 외우려면 입이 부르트도록 중얼거리고, 머리가 터지도록
반복해야했다.
"2 번. "
"2 번. "
"이번은
제스란의 혈도 알려주기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수가 많은 것
도 이유였지만 라한이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게 더 큰 이유였다
외우지 못하니 어떻게든 시간을끌어야했고, 그 때문에 진행이 조
금씩 느려졌다.
제스란은 라한이 시간을끌고 있음을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자
신은 혈도를 모두 외우는 데 몇 달은 걸리지 않았던가. 자신에게
무리인 일을 남에게 시켰으니 그 정도는 감수하자는 생각이었다.
엄청난 수의 혈도를 부르고 나자 제스란마저 진이 빠져 버렸다.
실제로 힘이 없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감이 더 컸다.
"다 외웠느냐?"
입을 혀로 살짝 적신 제스란이 라한에게 물었다. 막상 시키면서
도 설마 외웠겠냐는 생각이었다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외운 것 같기도 하고 몇 개 놓친 것 같기
도 하고. "
라한의 말에 제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다 외우지 못했
다고 생각했다. 다 외우면 그게 괴물이지 인간이겠냐 싶었다
제스란은 라한이 총명하기를 바라면서도 은근히 평범하기를 바
랐다. 자신의 제자이니 총명한 게 좋긴 하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질투심이 생긴 것이다.
"차례대로 쭉 읖어봐. "
"네. 1 번 백회혈, 2 번. 87 번 견정혈, 88 번 135 번 합곡혈,
136 번 201 번 노궁혈, 202 번 315 번 거료혈
라한이 혈도를읖어가자제스란이 입을 떠억 벌렸다. 설마했던
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저놈, 저거. 괴물이잖아. 흠, 그러고보니 동물적인느낌도좀
나는 것 같고. '
". 421 번 오리혈, 422 번 마지막 488 번 신당혈. 휴. "
혈도를 모두 읖은 라한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쉬지 않고 혈도를
불러댔으니 힘든 게 당연했다.
라한의 혈도 읖기가 끝났음에도 제스란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
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시기심과 제자에 대한 뿌듯함이 마구 싸우
고 있음이다.
'똑똑한 제자를 둬서 좋다고 해야 하나? 쳇, 근데 왜 이렇.게 배
가 아프지?'
"잘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
"감사합니다, 사부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
"내일 다시 물어볼 테니 까먹으면 죽는다. 알겠지?"
"네, 사부님. "
라한이 방을 나간 후에도 제스란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자신이
본 라한의 천재성과 묘한 동물의 느낌. 그 둘의 관계를 생각했다.
'라한에게선 동물의 느낌이 난다. 그리 강하지는 않지만 분명
해. 근데 이게 무슨 동물이지? 야수의 느낌도 나고 뭔 곤충 같은
느낌도 나고, 한편으로는 맹수 같기도 한데
망각의 샘물은단순히 기억만 지우는용도가아니었다. 그 전생
에 대한 특징까지 모두 지워서 새롭게 살게 하는 지우개도 되는 셈
이다.
하지만, 라한에게는 망각의 샘물이 통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기
억은 물론이고 전생의 본능까지도 일부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서
나는 동물의 느낌은 잠시라도 살았던 모든 동물의 향기가 합쳐진
일종의 잔재였다.
대륙 서부의 일리아스 산맥.
대부분의 산맥은 왕국과 왕국의 경계선으로 작용했다. 이 때문
에 상인들과 귀족들에게 몹시 거슬리는 존재로 기억되는 경우가 대
부분이다. 또, 산맥에는드래곤이 둥지를틀기 마련. 이 때문에 산
맥이라는 곳은 인간의 출입이 힘들었고, 이에 몹시 껄끄러운 장소
로 기 억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일리아스 산맥만큼은 그 존재 자체가 로테샤 왕국
에게 큰 도움을 줬다. 서쪽에 위치한 데니아 사막의 열기를 막아주
고사막풍의 진입을산맥이 막은탓이다. 이 산맥이 없었다면로테
샤 왕국의 서부 일부지역도 사막으로 변해버렸을지 모른다.
일리아스 산맥에도 드래곤의 레어는존재했다. 하지만, 이곳에
둥지를튼드래곤은 인간을그리 꺼리지 않았다. 최소한의 구역을
레어로 정해놓고 출입을 막았을 뿐. 그 외의 어떤 지역에서도 통행
을 자유롭게 허용한 것이다
골드 드래곤 베르네미스. 인간에게는 정말 고마운 드래곤이었다.
베르네미스의 레어 안.
엄청난수의 베어울프 시체가바닥에 널려 있었다. 무언가실험
을 했는지 시체 주변은 피냄새보다 시약 냄새가 더 강하게 풍겼다.
"누구냐?"
"나다. "
베르네미스의 날카로운 음성에 푸른 머리를 한 아름다운 엘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등장에 베르네미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보다는 상위 서열인 듯했다.
"레이시아나님. 여긴 어쩐 일로?"
"물어 볼게 있어서 왔어, "
레이시아나의 말에 베르네미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보다
상위 서열이 왔으니 상석을 내주려는 의도였다.
"않으시지요. 헌데, 제게물어볼게 있다는말씀은
"네가 만나보라는 아이를 만났지. 8 년 정도 항께 지내기도 했고. "
레이시아나의 말에 베르네미스가 웃음을 머금었다. 레이시아나
는 과거에 로이나라는 이름으로 라한과 함께 지냈었다. 엘프의 몸
을 유지한 채로.
반면, 베르네미스는 과거에 신관으로 유희를 즐겼었다. 라한의
몸을 살펴본 바로 그 신관이었다. 그때 신성력 발휘를 위해서는 디
바인 마크를사용했다. 천여 년 전, 대륙 최대의 신전인 일레이네
아 신전에서 사라진 바로 그 신기였다.
라한의 심장 위치를 처음으로 알아본 베르네 신관. 그는 라한의
무사함에 의문을 품었다. 심장이 아래에 위치하면 대부분 죽음을
면치 못하는탓이다. 이에 유희까지 그만두고 레어로돌아와서 연
구를 시작했다. 레어 주변에 널린 베어울프의 시체는 실험의 결과
물이었다.
"훗, 처음에는 제 말을 믿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그랬지. 두 눈으로 보니 믿을 수밖에 없더군. "
레이시아나는 베르네미스가 이상한 아이를 봤다고 했을 때 믿지
않았다. 심장이 배꼽보다아래에 달려 있는데 어찌 살수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또, 네가 평소에 기괴한 행동을 많이 하는 것도 그런
생각을 거들었다.
하지만, 베르네미스의 추천으로 라한을 직접 본 후로는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그 까닭은 몰랐지만
"후후, 라한이는 아직도 살아 있죠?"
"응. 아주건강하다. 머리도좋고."
베르네미스의 물음에 레이시아나가 차갑게 대답했다. 라한을 지
컥주던 로이나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혹시 라한에게서 특별한 현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뭐든 좋
으니까 말씀 좀 해주십시오. "
"글쎄. 내가 본 류한은 .
"류한이오?"
"나하고 지낼 때는 류한이라는 이름을 썼다. 이필리에 종합 학
교에 입학했었으니까 새로운 이름을 쓸 수밖에 없었지. 뭐, 이제
라한이라고 부르지 . "
레이시아나의 대답에 베르네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루이
나 왕국에서 신관으로 지냈기에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대륙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 신분 감추기까지
"그래서 8 년이나 걸리셨군요. "
"흠, 내가라한을처음봤을때는 열 살이었지. 근데 열 살같지
가않더군 마치 늙은이 같았다. '가끔씩은역시 열살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긴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늙은이처럼 보이더
군. 외모 말고 말투나 행동이 그랬다. "
레이시아나의 대답에 베르네미스가 생각에 잠겼다. 심장이 아래
에 있는 것과 이런 행동이 관계가 있을까를 고민하는 모습이다. 결
론은 '관계가 없다'로굳어졌다. 신체 특징이 정신적인 면과 연관
된다는 말 자체가 자신의 가설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조숙했군요. 또 없습니까?"
"처음봤을 때, 동물적인 느낌이 강하더군. 무슨동물인지 모르
지만, 일반 인간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지. "
레이시아나의 말에 베르네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자신
도 느꼈던 그 느낌을 말하는 것이리라.
"저도 예전에 느꼈습니다. "
"세월이 갈수록 동물적인 느낌이 점점 약해지더군. 아니 약해
진다기보다 인간적인 느낌이 조금씩 강해졌다고 봐야겠지. 마치,
원래 있던 느낌 겉에 인간의 느낌이 덮인다고 할까?대충그런 느
낌이었다. "
베르네미스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생각한 가설은
심장 위치와동물의 느낌이 관계가 있다는 거였다. 즉, 심장의 위
치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동물적인 느낌이 강해졌다는 가설이었다.
헌데, 심장이 자리를 잡았는데 동물적인 느낌이 약해진다? 이건
자신의 가설이 잘못됐다는 얘기였다.
"또 없습니까 7"
"살려는 의지가 무척 강하다. 지금까지 수십 차례의 유희를 겪
어봤지만, 삶에 대한 집념이 그렇게 강한 인간은 처음 본다. "
"그래요?"
"마치 수십 번 죽음의 고비를 넘었던 사람 같았어 아니,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 같다고 해야 하나? 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다 할
것처럼 보이더군. "
베르네미스는 레이시아나가 하는 말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가설이 잘못된 지금. 새로운가설을세우려
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현재로서는 정보의 원천이 레이시아
나뿐이었으니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흠, 레이시아나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할 정도면 쉽게 볼 일이
아니군요. "
"베르네미스. 라한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지? 심장이 아래에 달
려 있는 게 그를 일찍 죽게 하는 건 아니겠지?"
레이시아나의 물음에도 베르네미스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
다. 지난 16 년간 연구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뭘 알아야말
해주지 않겠는가?
"그게 저도 잘 몰라요. 여기 시체들 보이시죠? 여기 있는 녀석들
전부 심장이 아래에 달려 있어요. 제가 마법으로 심장 위치를 바꿔
버렸죠. "
"결과는?"
입으로는묻고 있지만, 레이시아나도 대답을알고 있었다. 주변
에 널려 있는 베어울프가 시체로 남아 있는 게 이유였다.
"보시다시피 전부 죽었어요. 거의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죽더
군요. 그래도 생명령이 가장 질기다는 베어울프가 이러니 이거
야 원."
"라한은?"
레이시아나의 물음에 베르네미스가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대답을 해줘도 확신할 수 없는 탓이다
"그건 저도 잘 몰라요. 라한이 지금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여기
상황과 어울리지 않거든요. "
"베어울프 중에서 어린 녀석들을 골라서 실험 해본 적 있나?"
"해봤죠. 마찬가지였어요. 전부 하루를 못 넘걱요. 굳이 그 라한
만큼 심장 위치를 많이 내릴 필요도 없더군요. 본래 심장 위치에서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꼴까닥! 결론이 그래요. "
레이시아나의 표정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마치 라한이라는 사람
과 아무 관계없는 듯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오래 연구했으니 막연한 감은 있겠지. 확실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냥 네 느낌대로 말해봐. 라한의 심장 위치가 수명에 영
향을 미치나?"
"음, 제 생각을말하자면 전혀 상관없는것같아요. 지금까지 심
장 때문에 그 어떤 발작도 일으킨 적이 없잖아요. "
베르네미스의 대답을 들은 레이시아나의 표정에 안도감이 스쳤
다.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보이는 감정 표현이었다.
"훗, 다행이군. "
"이제 웃으시는군요. "
"내가 감정을 보이면 넌 내가 기분 좋은 쪽으로만 말했을 거잖
아. "
"그런가요? 하여간 로이나 누님은 못 당한다니까요. "
레이시아나의 표정이 바꿔자 베르네미스의 호칭도 바뀌었다. 그
에 따라서 둘 모두의 얼굴 표정도 좀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베르네. 연구 계속 할 거야?"
"모르겠어요. 아무리 해도 별 성과가 없을 것 같아서 때려치우
고 싶기도 하고. 지금까지 해온 게 아까워서 계속 하고 싶기도 하
고. 뭐 그래요. "
레이시아나와 베르네미스. 로이나와 베르네로 불리는 둘은 원래
사이가 무척 좋았다. 베르네의 기괴한 행동을 로이나가 모두 이해
한 탓이다.
다른 드래곤들이 베르네가 미쳤다고 손가락질 할 때, 로이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하는 행동에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
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의 둘은 떼려야 뗄 수 없을 만
큼 가까워져 있었다. 누나와 동생 사이로
"지금 당장은 좀 그렇고 나중에 시간 되면 라한이나 보러가자.
그 녀석 지금쯤이면 더 똑똑해졌을 거야.
"후후후후. 헤헤헤"
"왜 웃어?"
로이나의 말에 베르네가 미친 듯이 웃어댔다 마치 실성한 사람
처럼 보였다.
"아, 하하하. 누님 표정이 꼭. "
"꼭? "
"아들 자랑하는 것 같잖아요. "
"아들?호호호. 뭐, 그렇게 봐도 무방하지. 지난 8 년간은 내가
키우다시피 했잖아. "
로이나의 대답에 베르네가 살짝 미소 지었다.
평소에 차갑게만 행동해온 로이나. 베르네 앞이 아니면 웃음마
저 보이지 않는 드래곤이 로이나였다. 그런 그녀가 라한 011 게 따뜻
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니 베르네마저 기분이 좋아졌다.
"뭐, 시간 내서 한 번 가죠. 근데 자연스럽게 만나려면 다시 신
관이 되어야하나?"
"아니, 지금은만나지 않는게 좋겠어. 날너무의지하려고하더
군. 혼자서 좀 더 강해져야지. 나중에 시간되면 자리를 만들자고. "
로이나는 라한을 아들처럼 아꼈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
만 8 년간이나 물심양면으로 돌봐줬기 때문이다. 지금은 실제 아들
이 생긴다하더라도 라한에게 더 깊은 모정을 가질 지도 몰랐다.
"누님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죠. "
그날 베르네는 베어울프 시체를 치우는 일로 바쁘게 지냈다. 로
이나가 자신의 레어에서 한동안 지내겠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다른 드래곤은 몰라도 로이나에게만큼은 예의를 지키려는 베르네
였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힘들 때, 손을 내밀어준 드래곤은로이
나뿐이 었기 에 .
"베르네. 너 인챈트에 대해서 좀 알아?"
"인챈트요? 그건 거의 소실된 마법이잖아요. "
느닷없는 로이나의 물음에 베르네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갑자기
인챈트에 대한 말은 왜 꺼내느냐는 의미였다
"넌 인챈트에 대해서 공부 좀 했잖아. "
"제가 공부 안 한 분야가 어디 있나요?"
"그건 그렇지. 제대로 한 건 하나도 없지만. "
"누님 ! "
"후후, 사실인데 왜 그래?"
베르네의 말처럼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
공부했었다. 다른 드래곤이 마법 하나만 믿고 나태해지는 모습과
는천지차이였다. 하지만, 무언가를제대로 이룬분야는단하나도
없었다. 그 역시 천성이 드래곤인건 변함없는사실. 의욕적으로시
작했다가 시들해지기 일쑤였다.
"쳇, 그나저나 인챈트는 왜요?"
베르네가 본론을 꺼내서 말을 돌려버렸다. 로이나의 말이 모두
사실이니 대꾸할 말이 없는 탓이다.
"라한이 인챈터가 되겠다고 공부하기 시작했어. "
"헛, 그놈도 나처럼 좌절하겠군. "
베르네는 라한이 포기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나마 인챈트에 대
한 지식이 많은 자신이 포기했으니 인간이 어쩌겠냐는 생각이었다.
"글쎄. 난 라한이 인챈터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면 꿈의
경지인 그랜드 인챈터가 될 지도 모르지. "
"에이, 누님이 라한이를 아끼는 마음은 알지만, 솔직히 인챈트
는 좀 아니다. 우리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인챈트에 대한 지식은 그
렇게 많이 안 남았잖아요. 근데 인간이 어떻게 인챈터가 될 수 있
겠어요?"
인간들 사이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인챈트였지만, 드래곤에게는
아니었다. 아직도 몇 가지 구전되어서 알려지고 있는 주문과 지식.
과거에 존재했던 인챈트에 비하면 틱없이 적고 보잘것없는 수이지
만, 존재하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맞아. 쉬운 것만 남았지, "
"쉬운 거요?"
"응. 라한이가 인챈트에 대해 공부하는모습을봤어. 거기에 쓰
인 공식도 대충 봤지, "
"그래요?"
"응. 엄청나게 많더군. 우리가알고 있는 인챈트는정말쉬운공
식만 사용된 아주 단순한 것들뿐이었어. "
로이나의 대답에 베르네가 호기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로이나의 말에 의하면 라한의 공식 수준이 드래곤에게 남은 인
챈트 공식을 넘어섰다는 얘기였다. 드래곤들마저 책을 살펴보지
않으면 외우거나적용하기 힘든어려운공식들. 헌데, 라한은그보
다 더 어려운 공식을 알고 있으니 호기심이 이는 모양이다.
"대단하군요. 우리가 쓰는 공식을 넘겨줄까요? 그럼 공부에 도
움이 될 것 같은데
"훗, 아니. 전혀 도움이 안돼. 내가볼때 라한이가공부하는 인
챈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르거든. 오히려 우리가 도와주
면 혼란만 가중될 거야. "
인챈트는 책으로 전해지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도형의 복잡성
과 세밀함이 그 이유였다. 실제 인챈트를 하는 사람이 아니면 기록
도 못하는 희한한 학문. 대부분의 책이 보기만 하면 옳걱 적을 수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 때문에 인챈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퇴보하기만 했다. 대부분의 마법이나 검술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 점과는 정반대 상황이었다.
라한이 공부하는 인챈트는 거의 원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로 오래된 것. 이런 라한에게 드래곤이 알고 있는 최근의 인챈트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퇴보되고 간략화 된 인챈트로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는 까닭이다.
라한은 정치학 수업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인챈트에 투자
했다. 자신에게 무공은 제스란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익히는
힘일 뿐. 자신의 최종 목표는 인챈트뿐이라고 생각했다.
정치학 수업을 하는 방 안.
좀 일찍 도착한 라한이 인챈트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공식만 외
웠을 뿐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다. 재료가 있어야 실험을 해보고
잘잘못을 따질 게 아니겠는가? 실제로 인챈트를 해볼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수레를 달라고 할까? 더 좋은 수레를 만들어 준다고 하면 주겠
지? 그러다 미움이라도 사면 에고, 모르겠다. 모르겠어. '
라한은 제스란이 타고 다니는 수레가 몹시 탐났다. 어찌됐든 자
신이 발견한 최초의 인챈트 재료가 아니던가. 왠지 그 수레만 얻으
면 지금의 정체된 인챈트 실력을 한 단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한테 부탁해볼까? 음, 그게 좋겠다 '
"뭐하는 거냐 사부가 들어왔는데 인사도 안하고. "
뒤에서 들리는 제스란의 목소리에 라한이 벌떡 일어났다. 얼굴
가득 죄송하다는 표정을 가득 담은 채 였다.
"사부님 오셨습니까? 제자가 다른 생각을 하느라 사부님이 오시
는 걸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
"시끄럽다. 시간 없으니 빨리 시작하자. "
매번 이런 식이었다. 무슨 말만 하려면 시간 없다고 다그치는
제스란. 어째서 시간이 부족한지 지금의 라한은 짐작조차 할 수 없
었다.
"이제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겠다. "
"예, 사부님. "
'나 참. 어떻게 매일 본격적인 수업이라고 할 수가 있지? 아예
입에 달고 사는군. '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라한의 표정은 공손하기만 했다. 오히
려 황송하다는 듯 얼굴 가득 고마운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앉아라. "
" 예. "
"단전이 어디 인지는 전에 설명했지?"
"예, 사부님. "
지난 며칠 동안 제스란은 인간의 혈도와 부위에 대해 가르쳤다.
혈도의 경우에는 짚었을 때, 만들어내는효과를, 부위의 경우에는
통증의 정도를 설명한 것이다. 그 모든 수업을 라한이 쉽게 알아듣
자 몹시 뿌듯해했다.
"무공에서는 힘을 단전에 모은다. "
"저 사부님. "
"말해라. "
"전 심장 위치가 단전 위치와 거의 동일합니다. 그런데도 무공
을 배울 수 있습니까?"
라한의 말에 제스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장의 위치가 사람
의 왼쪽가슴에 있는 건 모두가아는사실. 헌데, 어찌하여 심장이
단전에 있다는건지 .
"이리와 봐라. "
"네, 사부님. "
라한의 몸을살피던 제스란이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도
처음 보는 라한의 신체에 놀란 듯했다.
"호오, 아주 특이하군. 네 녀석의 잔머리가 그 심장에서 오는 것
같군 "
"사부님. 제가 어찌 사부님 앞에서 잔머리를 굴리겠습니까?"
"네놈의 심장 위치가 특이하기는 하지만, 무공을 익히는데 방해
가 되지는 않는다. 무공에서 사용되는 힘은 기라고 불리는 힘
으로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또, 손으로 잡거나 형체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 "
제스란의 차분한 설명에 라한이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몸이 무
공을 익히지 못하는 몸이라면 이런 고생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
했다. 어찌 보면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제스란의 말처럼 심장 위치가 무공에 영향을 주지 않는 건 아니
었다. 아니, 상당히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심장 위치가바
픽면서 혈도의 위치 자체가 모조리 바꿔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원래 혈도 위치에 딱맞게 위치해 있기는 하지만, 원래의
효과와는 전혀 다른 혈도가 그 자리를 차지해서 엉뚱한 효과를 낸
다는 것이다.
건리혈을 두드리면 견우혈의 효과를, 백환유를 두드리면 수돌혈
의 효과가 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혈들이 이런 다른 효과를
내고 있었다. 제스란이 모르고 있을 뿐.
"형체가 없는데 어찌 담아둘 수 있습니까?"
"넌 지식을 눈으로 볼 수 없는데 어찌 기억하고 있느냐?"
"그건
"같은 이치다. 심장이 단전을감싸고 있기는하지만, 기를쌓는
건 아무 상관이 없지. "
제스란의 설명에 라한이 할 말을 잃었다. 정상적인 대화로는 처
음으로 제스란에게 눌린 셈이었다. 새삼 제스란이 이렇게 똑똑했
는가 싶었다.
"그럼 심장 위치가 무공수련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말입니
까?"
"글쎄, 수련 자체와는 거의 무관하지. 뭐, 어떻게 보면 도움 되
면이 더 많다고 할 수도 있겠군. "
제스란의 말은 라한의 의도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방해도 아
니고 도움이라니, 무공 익히기를 피할 방법이 영영 사라지는 듯 보
였다.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단전이라는 건 무공을 익힌 사람에게 약점과 같다. 그곳을 파
괴당하면 익힌 무공 전부를 잃기 때문이지. 그리고 십장 역시 파괴
당하면 죽는 건 마찬가지다. 단전과심장이 정상적인 위치에 있는
나같은경우에는두개의 약점을가지고 있는셈이지. 헌데, 넌 단
전이 심장과 겹치다시피 위치하고 있으니 약점이 하나뿐이지 않느
냐"
제스란의 말에 라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익히는 사람에
게 마나를 쌓아두는 심장은 최대 약점이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다면 무공 역시 힘을 담아두는 단전이 약점이리라.
툭- !
"이건
"내 독문심법이 담걱 있는 책이다. "
"아, 그렇군요. "
라한이 제스란이 던진 책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손끝을 미
약하게 떠는 모습이 소중한 보물을 대하는 듯했다.
툭- !
"거기에 쓰인 글씨는 네가 읽을 수 없는 글 일게다. 방금 던진 이
책에 내가 부르는 대로 써라. "
제스란이 두 번째로 던진 책에는 아무 글도 쓰여 있지 않았다.
처음 던진 독문신법을 필사하는 용도인 듯 보였다
"제령신공?"
"음?"
라한이 첫 번째로 받은 책의 표지를 읽었다 약간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아주 정확한 발음이었다.
"사부님도 제령신공을 익히셨습니까?"
"그 책을 읽은 거냐?"
제스란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는 라한이 책의 표지를 읽
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책에 쓰인 글이 무령계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묵주에게 받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 언어가 뭐가 됐든지
면 이해할 수 있고 보면 읽을 수 있는 능력이죠. 대신, 쓰거나 말하
지는 못합니다. 그건 습관에 따른 거라고 하더군요. "
"빌어먹을 묵주 녀석. 나한테는 이따위 제약이나 가하고 너한테
는 능력을 줘? 개자식. 어디 만나기만 해봐라. "
제스란의 분노한 표정에 라한도 함께 짜증스러워했다. 묵주 때
문이 아닌 제스란의 말이 그 이유였다.
개자식. 자신이 수십 번도 넘게 겪었던 생이 아니던가. 비록끝
이 광견병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한때나마 개였음은 분명
했다. 그것도수십 번이나
'자기는 뭐가 잘났다고. 인간이나 개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라한에게는 인간이나 개나 큰 차이가 없었다. 어차피 그 많은 생
을 살면서도 일 년을 산 적이 없었으니 딱히 하나에 애착이 가지 않
는 탓이다.
물론, 둘 중에 굳이 하나를 택하라면 지금 살고 있는 인간을 택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인간의 삶을살고 있어서이지
인간이 우월해서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 중심적인 사
고로 바픽겠지만 말이다.
혼자서 씩씩대는 제스란에게 라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사부님. 수업을 계속 하셔야죠. "
"수업은 무슨 수업? 너 그 책 읽을 수 있지? 내일까지 다 외워!
안 외우면 알지?"
제스란의 말에 라한은까무러치기 일보직전이었다 단순히 읽는
게 아닌 외우는 일을 하루 만에 해야 하다니. 눈앞이 깜깜해져 현
기증마저 느껴졌다.
라한의 무령계 언어는 무척이나 서툴렀다. 할 수 있는 일과 익숙
한 일의 차이였다. 비록무령계 언어를 읽을수는 있지만, 그속도
가판트리아 대륙어보다는 현저히 느릴 수밖에 없었다. 하루 만에
저 책을다 읽을수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물론, 시간이 오래 지
나 언어에 익숙해진다면 빨라지겠지만.
'미치겠군. 오늘 인챈트 공부 다 했다. '
"예, 알겠습니다. 사부님."
라한이 자신도 모르게 승낙의 대답을 했다. 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알기 때문이다. 이성보다본능이 먼저 반응한
모습이었다.
"라한아!"
"예, 사부님. "
"묵주한테 또 받은 거 없냐? 있는 대로 다 불어, "
"신법을 받았습니다. "
라한의 대답에 제스란의 눈이 반짝거렸다. 다른 무공도 아닌 신
법. 제스란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어떤 신법이지? 펼쳐봐라, 어, 그러니까 .음, 내가네 무공의
단점을 지적해주마. "
"예, 사부님 "
대답을 마친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하기 싫은 기색이 얼굴 가득 떠올라 있었다. 광견보를 펼치는
게 싫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내가 다시는 쓰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생각은 그러했지만 몸은 이미 펼치고 있었다. 잠깐의 망설임이
라한에게는 죽음이 될 수도 있는 게 제스란이라는 존재였다. 그의
앞에서 농땡이 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슥-! 우웅!
"으르릉!"
라한은 전과 달리 개의 으르렁대는 소리까지 냈다. 정상적인 소
리와는 조금 다른 으르렁대는 소리. 미친개가 적의를 가졌을 때 내
는 소리가 분명했다.
'전에는 이런 소리 안 났는데? 이거 왜 이래?
"으르르릉! 크릉:"
라한의 입에서는 생각과는 다른 소리만 흘러나왔다. 신법이 진
행 될수록 커져가는 거친 숨소리와 흐르는 침들. 그리고 붉게 충혈
된 눈빛. 두 손, 두 발 모두를 사용해서 펼치는 탓에 진짜 미친개
같았다.
"그만 옷 입은 미친개로군. 아주 잘 봤다. 푸하하하하!"
"헉, 헉! 감사합니다. 사부님. "
제스란의 비웃음에도 라한은 불평 한 번 터트리지 못했다. 아니,
그럴 정신조차 없었다. 흐르는 침을 닦고 정신을 수습하는 일만도
버거웠다.
"허허, 그놈 참. 아직 수련이 덜 된 모양이군. "
" 예?"
"네가 사용한 신법은 광견보라는 신법이다. 말 그대로
미친개 신법이지. "
제스란의 말에 라한이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그럴 거라고 생각
은 했지만, 실제로 듣자 기분이 더욱 더러워졌다. 그냥 견보라면
웃고 넘어가겠지만 광견보라니. 자신의 마지막 죽음이 떠
오르자 묵주가 죽이도록 미웠다.
"네 신법은우리 무령계에서는쾌 유명한신법이다. 후후후, 가
장 우스꽝스러운 무공 서열 1 위에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지. "
"그, 그렇군요. "
라한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아직도 흘러내리는 침과 붉
게 충혈된 눈은 여전했다. 어떻게든 제 모습을 찾고 싶은 마음뿐이
었다.
"광견보는 수련하면 할수록 개처럼 변한다. 으르렁대는 소리도
점점 커지지. "
"예. "
"하지만 수련 정도가 높아지면 신법 시전 후에는 바로 본래 모습
으로 돌아온다. 지금의 너처럼 신법시전 후에 침을 흘리는 일은 사
라지는 거지. "
제스란의 말에도 라한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십 년간 고대했던 신법 아니던가. 헌데 그 결과가 미친개 신법이었
으니 화가 날만도 했다.
"후우 "
"보아하니 수련 방법은 정확히 아는듯하니 뭐라 하지 않겠다.
너한테 다른 신법을 가르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군. "
"저, 사부님. 사부님! 필요가 없어지다니요? 무공은 많으면 많
을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라한이 무공에 흥미를 보였다. 자발적인 흥미는 이번이 처음이
었다.
라한은 다른 무공 다 안 배워도 신법만큼은 배우고 싶었다. 광견
보를 한 번 겪어봤기에 신법이 도망가는 데에는 최고라는 걸 아는
것이다. 세상 살다보면,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처할지 모르는
일. 도망치는 일 정도는 배워두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군. 필요한 무공만 익혀도 극에 다다르
지 못한다. 이것저것 손대는 건 독이 될 뿐이야. "
"하지만 사부님. 광견보는 멋이 없잖아요. "
제스란도 라한의 의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모습이 황당하리만치
훙한광견보였으니 자신이라도 피할 터였다. 하지만, 제스란은새
로운 신법을 가르쳐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너무 똑똑한 라한에
대한 일종의 보복 심리였다. 거기다 부족한 시간도 그런 결정에 한
몫했고.
"넌 무공을 겉멋 때문에 배우는 거냐? 그런 제자라면 필요 없다.
차라리 널 죽여서 새로운 제자를 찾고 말겠다. "
"아, 사, 사부님. 아닙니다 제가사부님을기쁘게 하기 위해 농
담을 해본 겁니다. 하하하. 이해하시죠?"
라한의 어색한 변명에 제스란이 웃음을 머금었다. 똑똑하기만
하고 버릇없는 제자지만, 이럴 때는 귀여운 구석도 엿보였다.
"시간 없으니 지금부터 그 책을 외워라. 내일 수업 때, 물어볼
테니 싹 다 외우도록 해라. "
"예, 사부님. "
대답을 마친 라한이 책을 펴들었다. 제스란의 성미로 봤을 때 다
외우지 못하면 정말큰일이 벌어질지도몰랐다. 어떻게 해서든 제
령신공을 모두 외워야했다. 설사 밤을 꼬박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녀석, 시간이 없구나. 서둘러야할게다. '
제스란의 눈에 슬픔이 담겼다. 그리고 아련한 느낌도.
떠나간 사부가 남긴것
데니아 사막의 한 가운데 위치한 로테라숲.
이곳은 데니아 사막이라는 엄청난 난관을 지나야 도달할 수 있
늘 곳미다- 끝 모르게 펼쳐진 모래와 그 위에 우뚝 선 로테라 숲.
지형적인 위치만으로도 인간들에게 버림받기 충분했다.
하지만, 이곳이 금지가 된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몇
몇 탐사대나 모험단이 로데라 숲에 파견되었지만, 모두 의문의 실
종을닫한 것이다.
그 후 수백 년간 인간들의 도전은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들어간
사람 거의 모두가죽임을 당했다. 몇몇 살아 돌아온 사람들도 다음
날이면 미쳐버리기 일쑤였다. 결국, 들어간 사람 중에 멀정하게 살
아 있는 사람은단한 명도 없는셈이다.
약 오백 년 전. 어쩔 수 없이 대륙에선 로테라 숲을 금지로
지정했다. 더 이상의 탐사대를 파견하지 않겠다는 정식 의사표현
이나 다름없었다.
인간들에게 이 선언은 상당히 뼈아프게 다가왔다. 대륙 전체에
서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곳이 또 한군데 생긴 탓이다. 이때부터
대륙의 금지로 불리던 레비안 산맥과 파마리스 평원에 로테
라 숲을 첨가해야 했다. 그리고 대륙의 2 대 금지를 3 대 금지
로 바꾸어 불러야 했다
로테라 숲의 중앙. 나무로 만들어진 멋들어진 집에 십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엄청난 마나의 파동과 힘의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
다. 금지로 규정된 곳에서 사람이라니. 대륙에서 알면 까무러칠
일이다.
"제이슨. 얼굴이 안 좋구먼.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겐가?"
"내가 지난 14 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알지?"
루시펠의 물음에 제이슨이 어두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다른 사
람도 아닌 루시펠이라면 지금 자신의 마음을 알 거라 생각했다.
"흠, 루이에 얘기군. 벌써 14 년일세.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
았나?"
"후후. 포기? 내 눈을 외눈박이로 만든놈이야. 운명의 굴레도
벗지 못한 주제에 감히 내 몸에 흠집을 내다니
제이슨은 수백 년 전에 운명의 굴레를 벗었다. 당시에는 더 이상
의 적수가 없어 고독하기만 했던 제이슨. 판테아와의 계약이 오히
려 반갑기만 했다. 굴레를 벗으면 자신만큼 강한 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얘기이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그 결정을몹시 후회하고 있었다. 어차피
거절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었지만, 덥석 승낙해버린 자신이 원
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많은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게 행복하다는 걸 그때는 왜 몰랐는지
"찾아서 뭘 어쩌겠는가? 어차피 자넨 여기서 나갈 수도 없지
않나?"
"젠장. 알지만, 알긴 하지만그 빌어먹을자식을죽이지 못하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고. 내 손으로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
백준의 기사베라스무스루이에. 한때 루이나왕국의 영웅이라
불리며 왕궁 근위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사람이다. 17 년 전 갑작스
러운 실종만 아니 었으면 여전히 루이나 왕국의 영웅으로 남았을 사
람. 그가 제이슨에 의해 언급되었다. 그것도 14 년이라는 말과 함
께. 17 년 전 루이나 왕국을 떠났던 그가 이곳을 들렀던 모양이다.
"난 이해가 안 가더군. "
"뭐가 말인가?"
"내가 루이에라는 자를 보지는 못했지만 자네 몸에 상처를 줄 정
도면 실력이 보통이 아닐 텐데. 왜 판테아의 낙인을 받지 못했을
까?"
판테아는 수명이 길어진 이들에게 일종의 낙인을 새겼다. 그리
고 로테라 숲을 자신이 새긴 낙인에만 반응하도록 힘을 주입했다.
일종의 결계였다. 낙인이 찍힌 자에게는 절대 나갈 수 없는 감옥과
같았다.
"어쨌든 그놈은 내 몸에 흠집을 냈다. 다른 게 더 필요한가?"
"하긴 그 정도면 죽일 이유로는 충분하지, "
본래 로테라 숲에는 사십 명이 넘은 기인들이 살았었다.
판트리아 대륙이 생긴 이후, 운명의 굴레를 벗은 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수가 열두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육백 년 전에
발생한 일종의 반란이 그들의 수를 줄인 것이다.
육백 년 전.
그들은 지루함이 극에 달해 미칠 것 같았다. 판테아에 갇혀 지낸
지 너무오래 된 것이다. 결국, 굴레를 벗은지 오래되는사람들의
분노는폭발했고, 결국 이곳을탈출하자는 결론을내렸다. 판테아
에 의해 죽은 사람이 없었기에 결계의 존재 여부에 대해 긴가민가
하는 마음도 이런 결정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그들은 뜻을 펴기도 전에 꺾이고 말았다. 숲을 벗어나지
도못한채 죽음을맞은 것이다. 너무나 허무한죽음이었다. 아무
런 반항도못하고공기 중에서 분해되다니. 시도했던 삼십여 명의
사람뿐 아니라 구경하던 열두 명에게도 경악 그 자체였다
"루이에, 루이에! 이놈! "
"진정하게. 제이슨. "
"이 분노를 어찌 풀어야 할 지 모르겠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죽
이고 싶은데. "
"행여나 뛰쳐나갈 생각은 하지 말게. 난 육백 년 전 그때만 생각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네. "
육백 년 전에 벌어진 소멸 사건은 남은 이들에게 충격이었다. 비
록 도주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남은 열두 명도 그들이 성공하길
바랬었다. 그들이 무슨 방법으로든 성공만 하면 자신에게도 기회
가 있으리라는생각에서였다. 헌데, 아무런 반항도못해보고 사라
지는 결과를 나았다. 도대체 어떻게 죽었는지 보지도 못한 채 허무
하게 말이다.
"실라이론! "
-안녕하세요, 제이슨님.
제이슨의 낮은 목소리에 바람의 상급 정령 실라이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에는 창을 걸치고 거대한 방패로 몸을 가린 전형적
인 전사의 모습이다.
"왜 불렀는지 알겠지?"
-네. 루이에라는 사람을 찾는 일이죠?
"그래. "
-그럼, 이만
실라이론이 모습을 감추자 제이슨이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실
라이론의 소환자체가자신에게는쉽지 않은 일. 헌데, 실라이론이
제이슨의 힘으로 하급 정령까지 불러냈으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제이슨은 상급 정령사였다. 대륙에 단 한 명뿐인 정령사의 최고
봉. 물론, 최상급 정령과 정령왕이 존재하지만, 그건 인간의 능력
밖으로 알려져 있었다. 결국, 인간이 오를수 있는 최고의 위치가
상급 정령사인 셈이다
"허허, 제이슨고생하게. 이럴 땐검사라는게 다행스럽다니까."
"으, 으 루시펠. "
로테라숲에 사는 열두 명의 기인 가운데 정령사는 제이슨뿐이
었다. 나머지는검사가일곱명, 마법사가네 명이었다.
비록 열두 명뿐이지만, 그들의 실력은 웬만한 나라 두세 개를 합
한 것보다 강했다. 대륙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소드마스터와 7 서클
유저가 아니던가. 그들이 나가기만 하면 대륙의 판도가 바꿔다는
얘기 였다.
제령신공을 익힌 지 석 달.
라한의 심법 수련은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예상보다는 빠른속
도였다. 하지만, 제스란에게는이런 성취속도도불만이었다.
라한은 머리를 쓰는 모든 일에서는 제스란을 경악하게 할 만큼
빠른 속도를 보였다. 그런 그가 무공에서는 약간 뛰어난 정도에서
그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시간이 별로 없다. 제발
제스란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두워져갔다. 라한 같은 제
자를뒀으니 얼굴이 펴질 만도한데 오히려 어두워져가는 얼굴. 이
에 대해 라한이 아무리 물어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신을 집중해라. 어디다가 한 눈을 파는 게냐?"
"죄송합니다, 사부님. "
제스란의 호통에 라한이 진땀을 흘렸다. 한눈을 판 사람이 제스
란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는 라한을 호통 쳤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답답하거나 짜증스러울 땐 라한만
들볶아대는 것이다.
"됐다. 이제 혼자 힘으로 해라. "
"예, 사부님. "
짧게 대답한 라한이 자리에 앉았다. 제령신공을 수련하기 위한
자세였다.
"후우우, 후. "
잠깐 숨을 돌린 라한이 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스란이 명령
한 일주천을 행하기 위해서였다.
라한이 모은 기는 아주 미미했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
지도 못할 정도의 기였다. 이 때문에 일주천을 할 때는한시도 방
심할 수 없었다. 자칫 중간에 기를 놓치기라도 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탓이다. 기의 역행에 따른 고통을 느끼면서 말이다.
'일단 회음이다. '
제스란은제령신공을 익히지 않았다. 그는본래 사파. 정종심법
인 제령신공과는 상극이었다. 또, 사파의 심법을 일정 수준 이상
올렸을 때, 제령신공을 구했으니 어차피 둘 중 하나는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때 제령신공을 포기했었다. 제령신공이 더 우위라는 건
알았지만, 이미 익힌 사파의 심법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한은 심법을 익힐 때, 제스란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했다. 어
차피 제스란도 익히지 않은 심법이 아니던가. 익히지 못했으니 도
움을 받기도 힘들었다. 결국, 자신이 책을 읽고 방법을깨달을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으 으
용천을 뚫어야 한다. 제발. '
라한은 발바닥에서 엄청난 통증을 느끼면서도 용케 참아냈다.
실패하면 죽는다는 집념이 만들어낸 승리였다.
힘들게 한 고비를 넘긴 라한의 기가 조금 강해졌다. 아직도 미약
하기는 했지만, 이전의 느끼기 힘들 정도의 약한 기는 아니었다
'강해졌다. 느낌이 강해졌어. '
제령신공에 쓰인 내용으로는 난관이 모두 열한 군데였다. 양쪽
발바닥의 용천혈 두 개와 손바닥의 장심혈이 두 개. 나머지는 허벅
지와 어깨, 얼굴 부위에 집중되어 있었다. 열한 개의 혈도를뚫어
야 사지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듯했다.
'휴, 휴. '
마음속으로 심호흡을 한 라한이 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고
비 넘었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가는또 다시 기의 역행이 일어
날 터. 그 전에 기를 제자리로 돌려놔야했다.
"하나를 넘 었군. "
제스란은 라한이 왼쪽 용천혈을 뚫었음을 느꼈다. 한쪽을 뚫었
으니 나머지 한쪽도 쉽게 뚫릴 터. 열한 개의 관문 중에 두 개가
뚫리는 셈이다. 실제 라한의 무공수련은 이상한 감이 없지 않았다.
쉽게 뚫려야할 혈도가오히려 오래 걸리고, 오래 걸려야할 혈도
가오히려 쉽게 뚫린 것이다. 제스란과 라한은몰랐지만, 이런 일
이 생긴 이유는 심장의 위치 때문이다.
"후우. "
길게 숨을 고른 라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마에는 땀이 마
근 흘러내리고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라한 자신은 볼 수
없겠지만, 머리끝에서 흰 연기도 피어올랐다. 뚫린 용천혈의 잔재
가 백회혈을 통해서 날아가는 모습이다.
"관문 하나를 통과했더군. "
"감사합니다. 사부님. 이 모든게 사부님 덕분입니다 "
"됐다. 제령신공에는 열한 개의 관문이라 쓰여 있겠지만, 실상
은 그렇지 않다. 용천혈이나 견정혈, 장심혈은 발바닥과 어깨, 손
바닥에 위치해있다. 모두두개씩이지. 하나만뚫으면 나머지 하나
도 어렵지 않게 뚫어진다는 얘기다. "
라한의 귀에는 제스란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하나를 뚫었
다는 성취감에 도취된 탓이다. 비록 이제 한 고비 넘었을 뿐이지
만, 세상을 모두 얻은 느낌이었다.
"사부님. 다시 운기합니까?"
"그래, 앉아라. 오늘은. "
말을 하던 제스란이 수레를 박차고 일어났다. 얼굴 가득 불신과
놀라움을 가득 담은 제스란. 무언가에 심하게 놀란 모습이었다.
"사부님, 무슨 일입니까?"
"상위를 벗고 등을 보인 채로 앉아라. "
제스란이 빠른속도로말했다. 여전히 차가운 얼굴이지만, 다급
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부님, 갑자기 왜?"
"앉아라. 시간이 없다. "
"예, 사부님. "
라한이 빠르게 상위를 벗고 앉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사부인 제스란의 표정으로 보면 서둘러야 한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금제 때문이 아니라 무공에 대한 애착이
생긴 라한이다.
파팟!
"컥!"
라한의 등 뒤에 있던 제스란이 등을 강하게 두드렸다. 예상 못한
사태에 라한이 신음성을 터트렸다.
"입 다물고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와라. 안 그러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
말이 끝나자 제스란이 라한의 등으로 내공을주입시켰다. 라한
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강한 기운이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라한이 혼란에 빠졌다. 자신과 티격태격하기
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에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쉽싸였다.
으으
제스란의 기운이 들어을 때마다 라한은고통에 휩싸였다. 맹세
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져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왜? 왜?'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라한은 입을 벌리지 않았다. 제스
란이 했던 입을 다물라는 말. 이유는 모르지만 그의 말대로 따라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주입하는 기를 단전으로 모아라. "
으 으
"빨리. 안 그러면 넌 죽는다. "
의식이 이미 혼미해진 라한이었지만 기를 조금씩 유도하기 시작
했다.
어떤 이유에서라기보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
으면, 죽는다는 말이 그의 생존 본능을 자극한 모양이다.
이필리에 시 외곽의 평원.
겨울이라 이미 말라버린 풀들 위에 두 남자가 마주섰다 황량하
게 불어오는 바람이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했다.
"빨리 찾아왔군 앞으로 십 년은 못 찾을 거라 생각했는데 후
후후. "
먼저 입을 꺼낸 남자는 수레에 타고 있었다 왼쪽 팔이 잘렸는지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 팔 하나와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제스란이었다.
"힘들었습니다. 설마 다시 이곳에 돌아왔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
거든요. "
흰머리를 가진 평범한 체구의 남자가 담담하게 답했다. 그에게
서는 그 어떤 투기나 살기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제스란
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후후후. 자네는 예전보다 더 강해졌군. "
"감사합니다. 제스란님은 많이 늙으셨군요. "
사내의 말처럼 제스란의 외모는 많이 늙어 있었다. 피부에는 검
버섯이 펴 있었고, 머리마저 하얗게 샌 영락없는늙은이의 모습그
대로였다.
본래 제스란은그렇게 늙은모습이 아니었다. 이곳으로오기 직
전에 내공을 모두 퍼주었기에 늙어버린 것이다
'위험한 결정이지만, 라한 널 믿는다. '
갑작스럽게 내공을 주입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꽤 많이 고민
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제령신공의 기운과 자신이 가진 기운이 상
극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한의 신체가남들과다른점에서 착
안. 그냥주입하기로결정해버렸다. 무척 위험한결정이었지만, 라
한이 잘 다스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 머리말인가?"
"전에는 검은 머리였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
"후후, 다늦어서 제자를하나뒀는데, 속을너무썩이더군. 아,
자네도 알겠군. 필슨 백작가의 아들이 내 제자일세. "
제스란이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었다. 앞에 서 있는사내의 담담
한 모습과는 너무 상반된 모습이 었다.
"그렇군요. "
"자네 이름이 루이에라고 했던가?"
제스란의 물음에 루이에라 불린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준의 기사 베라스무스 루이에. 루이나 왕국의 영웅으로 불리
며 널리 칭송받던 존재였다. 하지만 나타날 때처럼 갑작스러운 실
종에 루이나 왕국을 혼란에 빠뜨렸던 자. 루이나 왕국 모든 기사들
의 우상이었지만, 과거에 대해선 철저히 비밀에 붙였던 신비인이
그였다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는가?"
"말씀하십시오. "
루이에의 표정은 시종일관 담담하기만 했다.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나듯 냉담한 모습. 이미 한차례 겪었던 제스란마저 당황
하게 할 정도였다
"날 죽이려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너무 강합니다. "
루이에의 짧은 대답에 제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짐작했
던 내용을확인한절차일 뿐. 정말몰라서 물은 건 아니었다. 과거
에도 한 번 들었던 대답이 아니던가.
"두 번째 질문일세. 앞으로도 강한존재가 보이면 죽일 생각인
가?"
"예 "
루이에의 대답은 짧고 명료했다. 대답을 미리 준비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루이에는 정도 이상의 강한 사람이 보이면 모두 죽여 왔다. 마법
사라면 7 서클에 들어선 자, 검사라면 소드마스터에 오른 사람이 기
준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소드마스터에 들어선 이후부터 그
냥그들을살려둘수 없다는생각이 든 것이다. 어쩌면, 자신과비
등한 실력자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몰랐다.
"마지막 질문이네. 자네는 운명의 굴레를 벗은 존재가 아니더
군. 자네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는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운명의 굴레라는 말. 전 모르는 얘깁니
다. 저보다강한사람에 대해서는 저도잘모르겠습니다. 한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저만큼 강한 사람은 있습니다. 그것도 많이. "
루이에의 대답에 제스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루이에만큼 강한 사람이 있다는 말. 바꿔 말하면 라한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도 되었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라한
에게 정이 들었던 제스란이었기에 제자의 미래가 안타깝기만 했다.
"많다라 후후후. 내가 너무 자만했었군. "
"로테라 숲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수가 꽤 되더군요. 거기서 만
난 사람들은 모두 강했습니다. 또, 처음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면
제스란님에게서 받은 느낌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
제스란은 로테라 숲이 운명의 굴레를 벗은 자들이 사는 곳임을
직감했다. 자신에게서 풍기는 느낌과 비슷했다는 말은 그들만의
고유한 느낌일 터.
제자인 라한이 그곳만큼은 방문하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예전엔 내가강했지. 비록두다리를쓸수 없었지만, 자네에게
이길 자신도 있었어. "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히 측량할 수 없으리만치 강하더군요. "
"후후후. 자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먼. 하지만, 난 그 싸움
에서 졌네. 자네가 암수를 썼든지 매복을 이용했든지 그런 건 중요
하지 않아. 내가 졌다는 것과 그때 팔 하나를 잃었다는 게 중요할
뿐이지. "
루이에의 얼굴에 그려졌던 담담한 표정이 미안한 표정으로 바꿔
었다. 이곳에 온 뒤에 처음으로 보이는 감정 변화였다.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아닐세. 아까 말했듯이 내가 졌다는 게 중요할 뿐이지. "
잠깐 말을 멈추었던 제스란이 루이에의 아래위를 훌었다. 살짝
미소 짓는 모습이 다행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자네는 지난 이십 년 가까운 세월동안 많이 강해졌구먼. "
"제스란님은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
루이에의 표정이 다시 담담하게 변했다. 본래 감정의 변화가 거
의 없는 사람인 듯했다.
"맞네. 나는약해졌지. 몸도지쳤고마음도지쳤거든. 이곳판트
리아 대륙은 내가 살 곳이 아닌 것 같더군. 낯선 땅에 버려진 느낌
이었지. 내가 느낀 이방인의 느낌을 자넨 모를 걸세. "
"그렇군요. "
"허허허. 내가 말이 너무 길었군. "
창- !
제스란이 검을 뽑아 들었다 수레의 나무 사이에 교묘하게
감춰진 검이었다. 약간은빛이 바랜 검이었지만, 짙은피의 느낌이
강하게 전해졌다.
스릉!
루이에도 검을 뽑아 들었다. 평소에 검을 잘 닦았는지 아주 부드
럽게 뽑혔다. 겉으로 보이는 빛도 제스란의 검과는 천지차이였다.
윤기가 흐르고 짙은 푸른빛을 띠는 검. 얼핏 보기에도 괜찮은 검임
을 느낄 수 있었다.
"후후. 좋은 검이군. 하앗! 컥! "
공격 할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제스란은 자신의 가슴을 찔러 버
렸다. 자결을한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제스란의 행동에 루이
에도 몹시 당황스러워했다.
"왜 이런 결정을 내리신겁니까?"
"헉, 헉. 난, 나헉. 난이방인으로 사는 게헉, 헉. 힘들
었네. "
제스란은 숨을 연신 몰아쉬면서도 눈빛만큼은 웃고 있었다. 그
의 입장에서는 낯선 이 땅을 떠나는 게 즐거운 듯했다.
"츠그
"내, 제제자. 라, 라한을잘부탁하네."
힘들게 말을 내뱉은 제스란이 고개를 모로 떨구었다. 그가 그토
록 원했던 안식을 되찾은 것이다.
"본래 살던 곳에서 행복하시길
루이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읖조렸다. 제스란의 죽음이 소멸로
이어진다는 걸 알았다면, 이런 기도는 올리지 않았으리라.
제스란으로서는 자살이 최선책이었다. 어차피 내공 전부를 라한
에게 넘기지 않았는가. 설사 이번 싸움에 이긴다 하더라도 고통스
럽게 죽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또, 낮선 땅인 이곳사람에게 목을
내놓기는 싫었다. 루이에의 실력이라고 해봐야 무령계에서는 일류
무사의 실력에 불과했다. 절정 검사인 자신이 일류무사에게 죽는
다는 건 치욕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명
예를 지키고 싶었다.
"내가 잘 하는 짓일까 7"
잠시 중얼거린 루이에가 제스란의 시체를 바닥에 눕혔다. 그리
고 그가 남긴 검을 옆에 조용히 내렸다. 제스란을죽게 만들기는
했지만, 꽤존경했던 사람이었다. 가는그에게 마지막예를다하는
것이다.
"이건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
루이에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듯 말했다. 그의 죽음이 여
전히 믿기지 않은 모양이다.
제스란이 남긴, 라한이 인챈트 재료라고 했던 그수레가루이에
의 손에 넘어갔다. 귀한 보물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리 츤 H 벼쿳
If3 it)rr f
R 토여글 3 뗐효토 B 또쓰뚜

라한은 제스란에게 받은 기를 단전에 가두자마자 의식을 잃어버
렸다. 거의 본능적으로 기를움직이기는 했지만, 신체적인 한계에
도달한 탓이다
"으 으
몇 차례 신음을 흘리던 라한이 힘겹게 눈을 떴다. 하복부에서 전
해오는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후우. "
잠시 숨을 가다듬던 라한이 몸을꿈틀거렸다. 아래에서 전해오
는 통증에 조금쯤은 적응이 된 듯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왜?'
라한은 제스란의 의도를 종잡을 수 없었다. 그동안 정말 착실하
게 시키는 대로 잘 따라갔던 라한이다. 그동안 몇 차례 실수를 하
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었다. 헌데, 자신이 왜 이런 통
증을 겪어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끙! "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로좀 전의 상황을 회상했다. 몹시 다
급해 보이는 제스란의 얼굴. 자신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듯 계속
해도 주입하던 기.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정신을 집중하라고 다
그치던 모습. 그 모든 행동이 라한에게는 생소하게 다가왔다.
"왜 그랬을까? 내가 뭘 잘못했지? 내가 왜 이런 통증을 겪어야
하냐고!"
스스로를 돌아보던 라한이 꽥 소리를 질렀다. 억울한 심정을 이
렇게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한참발광하던 라한이 의식을 잃기 직전을 떠올렸다. 너무나 처
연한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했던 제스란. 그의 목소리가 너무 쓸쓸
해 보여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었다.
이유가 있다. 내게 숨긴 무언가가 분명히 분명히 있다 "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자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아
련하게 전해오는 하복부의 통증은 여전했다. 하지만, 적응이 된 탓
인지 이전보다는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응? '
라한의 시선에 작은 종이가 들어왔다. 책상위에 대충 던져놓은
종이였다.
라한이 책상으로 힘겹게 다가갔다. 한눈에 제스란이 남긴 무언
가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 편지에 자신이 왜 고통을 당해야 하
는지 적혀 있으리라, 왜 그렇게 다급한 표정을 지었는지도 적혀 있
으리라. 또, 마지막에 했던 미안하다는 말의 이유도'
라한아. 더 이상 널 가르칠 수 없을 것 같다. 시간만 넉넉했다면
내 기를 이용해서 네 난관을 뚫어주고 싶었건만. 시간이 없다
는 게 너무 가슴 아프구나. 내가 없더라도 제령신공 수련을 계속
해야 한다. 광견보를 수련하는 일도 계속해야한다. 언젠가는 네
생명을 지켜줄 게다. 계속 수련을 하다보면 네가 싫어하는 모습
은 사라질 게다. 부디,부디 오래 살거라,부디
편지를 다 읽은 라한은 좀 전보다 더 큰 혼란에 쉽싸였다. 뜬금
없이 떠나야 한다니. 대체 왜 이런 내용의 편지를 남겼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큭! "
라한이 갑작스럽게 몸을 비틀거렸다. 걱우 진정되는가 싶던 하
복부의 통증이 또 다시 시작된 것이다.
"빌어먹을. "
한 마디 욕설을 내뱉은 라한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의 통증
을 가라앉히는 유일한 방법은 심법의 운용 뿐. 아는 심법이 제령신
공 뿐이었으니 그거라도 운용해야했다.
'섞이지 않아. 조금도 섞려이지 않아. '
라한의 몸에서 미약했던 제령신공의 기운과 제스란이 주입한 거
대한사파의 기운이 충돌해댔다. 이런 결과는제스란이 이미 예상
했던 일이었다. 다만, 급한 마음에 도박하듯 주입시켰을 뿐이다.
"크 으 . 으 컥!"
입가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신음 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공을 가르쳐준 제스란이 저주스러웠다. 그가 기
를주입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무공을가르치지 않았다면, 이런고
통을 겪지는 않으리라.
"헉!"
몇 차례 고통을 겪던 라한이 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령신공
의 기운을 서서히 이끌어 강대한 기운과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마치 사람이 싸울 때, 그 둘을 말리듯 억지로 제령신공의 기운을
단전 밖으로 끄집어냈다.
막상기를끌어내기는 했지만, 지금부터가문제였다. 모든 기의
보금자리는 단전. 제령신공의 기운도 결국에는 단전에 보관해야
할 터였다. 헌데, 그 자리에 제스란의 기운이 머물고 있으니 이것
도 불가능했다. 함께 양립할 수 없는 두 기운이 아니던가.
'마나가 모일 수 있는 곳이라면 기도 가능할지 모른다. 심장.
만약 그곳이 안 되면 휴
생각과 동시에 제령신공의 기운을 서서히 움직여왔다. 아직도
단전으로 돌아가려는 기의 회귀력은 여전했다. 지금 상황에서 잠
시의 방심은 또 다시 고통으로 다가을 게 뻔했다.
'제발, 제발. '
라한이 제령신공의 기를 심장 쪽으로 이끌었다. 여전히 반발력
은 심했지만, 큰 무리 없이 이끄는 데로 따라왔다. 아직 제령신공
의 기운이 미약하다는 게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제발, '
"컥 !"
심장을 한 바퀴 돌던 제령신공의 기운이 강하게 튕걱 나왔다. 제
스란의 기운이 담긴 단전과 접해 있는 심장. 단순히 접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하게 반응한 것 같았다.
'대체 어쩌라고. '
라한은울고싶은심정이었다 그나마가능성 있는방법을 이용
했음에도 여전히 반발하기만 하는 두 기운. 이 기운을 다스리지 못
하면 단전이나 심장 둘 중 하나가 터져나가 죽을 것만 같았다. 그
전에 고통을 못 이걱 죽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심장 마나 심장 심장을 둘러
마나는 심장 안에 담기는 힘이 아니었다. 싱장 주변에 테두리처
럼 둘러져 마법 시전에 사용될 뿐. 실제로 심장이 마나를 담고 있
는 그릇은 될 수 없었다.
반면, 단전은 기를담아두는그릇. 이 두 가지를 같은맥락에서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어쩌면
라한의 몸 전체에서 땀이 비 오듯쏟아졌다. 입고 있던 옷은 땀
이 아래로 흐를 만큼 젖었고, 머리카락도 샤워를 한 사람처럼 축축
해져 갔다. 하지만 라한은 자신이 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
식하지 못했다. 겉모습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탓이다.
'이게 안 되면 난 죽는다 '
라한이 제령신공의 기운을 심장 밖으로 유도했다. 그로서는 최
후의 방법이었다 다행히 반발하던 기운도 라한의 뜻을 알았는지
서서히 따라주었다. 다른 무엇보다 시전자의 의지를 우선으로 하
는 도가 계열의 심법, 그 특징이 아니었다면 심장 밖으로 유도하는
게 실패했을 것이다.
'휴, 뤘다. 췄어. '
제령신공의 기운이 라한의 심장 주변에 자리 잡았다. 비록 미약
하기는 하지만 띠를 형성한 것이다.
걱우 살았다는 생각에서일까. 라한의 의식이 서서히 잠들어갔
다. 너무 많은 심신의 혹사로 한계에 도달한 듯 보였다.
요즘 엘베로는 하루도 편히 잠드는 날이 없었다. 정적인
필슨 백작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커졌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8 년
만에 나타나서 속을 종잡을 수 없는 라한까지. 할 수만 있다면 필
슨 가문 사람 전부를 고혼으로 만들고 싶었다.
"젠장. "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하십니까 7"
엘베로의 표정을 살핀 파론이 조용히 물었다. 엘베로의 심기가
좋아 보이지 않자 평소보다 더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엘베로는 대외 정보 수집을 위한 많은 정보원을 거느리고 있었
다. 그들모두를합해서 정보조직을만들어도 될 정도였다. 하지
만, 그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배후에 엘베로가 있는지 몰랐다.
그들과의 접선을 파론이 모두 도맡아서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나타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 "
요즈음 루이나 왕국에서는 대대적인 감사 작업이 한창이었다.
금전이나 권력에 의해 정치를 움직인 모든 자들에게 루이나 왕국의
국왕이 교수형을 명한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여러 차례 이런 식의 감사가 있어왔다. 5 년에 한
번. 거의 주기적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하지만, 그 감사를 전담하
는 사람이 귀족이었기에 감사 자체가 조용히 마무리 되는 게 대부
분이었다. 자신 역시 귀족이었고 정권은 어떻게 바필지 모르는 일.
서로가 몸을 사리자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감사는 예전처럼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국왕이
직접 감사를 이끌겠다고 선언한 탓이다.
"왕실은 아직도 시끄럽습니까?"
"네가 알 필요 없다. 용건이나 말해라. "
파론의 말에 엘베로가 짜증스럽게 답했다 요즘 왕실의 분위기
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럴 때 파론과의 대화가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현자로서의 인생은 끝장이었다.
"수도에 암살자 조직이 생긴 것 같습니다 "
"호오, 그래? 규모는?"
파론의 말에 엘베로가 호기심이 인다는 듯 말했다.
지금의 엘베로에게 가장 필요한 상대가 궂은일을 해줄 사람이었
다. 다크라이더가 모습을 감춘 뒤 눈만 열려있고 손이 꽁꽁 묶여
있지 않았던가. 새로 나타난 암살자 조직을 잘만 이용하면 새로운
수족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다크라이더보다규모는 큽니다. 헌데, 강자의 수는 조금부족
한 것 같습니다. "
"흠, 그렇겠지. 다크라이더가사라진 지 벌써 8 년이다. 그긴 시
간동안 눈치만 살필 정도라면 실력은 더 볼 필요도 없겠지. "
말을 마친 엘베로가 생각에 잠겼다. 그들을 어떤 식으로 포섭하
고 어떻게 부릴 지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일단 필슨 백작부터 손봐야겠지. '
"어떻게 포섭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
"무리한 확장으로 자금이 부족하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음흥한 미소를 머금었다. 벌써부터 필
슨 백작의 최후가 보이는 듯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다. 알아서 포섭해라. "
"예, 엘베로님. 그리고저
파론의 망설임에 엘베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파론이 말을 길게
끈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원래 말을 길게 끄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뭐든지 명확한
답변을 원했고, 말을 할 때도 길게 끄는 법이 거의 없었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라한이었다. 이제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도무지 그 속내를 짐작할수 없었다. 그에대해서 말할
때는 짐작과 추측밖에 나오지 않았다.
"말해라. "
"루이 에와 닳은 사람을 봤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
"뭐?"
쾅- !
엘베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얼굴에는 불신과 경악의 표
정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루이에라는 이름이 주는충격이 그만
큼 컸기 때문이다.
"그게, 저확실한 정보는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으
려고 했는데
"자세하게 설명해라 "
필슨 백작은 타고난 정치 능력으로 사람들을 포섭하는 유형이었
다. 포섭하는 범위도 지방 귀족과 부유한 상인에 국한되어 있었다.
애초에 수도권 권력가들은 배제한 것이다.
반면, 루이에는 자신이 가진 매력과 실력으로 모든 기사들의 우
상으로 떠올랐다. 루이에가 정적이 된다면 기사들을 동원하는 일
은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흰머리의 검사를 봤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
로는 루이에의 예전 모습과 상당히 흡사했다고 합니다. 하지

"하지만?"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왕궁 근위 기사단단장일 때는 항상 검
은 갑옷에 거대한 검을 쓰지 않았습니까? 흰 머리에 검은 복장이라
서 백준의 기사라는 칭호까지 얻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헌데, 이
번에 발견한 자는 일반 브로드소드 한 자루만 차고 있었답니다. 갑
옷도 없이 일반 평민 복장이었다고 하고요. "
백준의 기사라는 칭호는 국왕이 직접 하사했었다. 하얀 피부에
흰 머리카락을 가진 루이에. 얼핏 보면 여자처럼 보이는 그가 검은
옷과 검은 검을 사용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백준의 기사라는 호칭을 버린 건가? 내가 붉은 현자라는 칭호
를 버릴 수 있을까?'
엘베로는 국왕에게 붉은 현자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 항상 붉
은로브를쓰고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사람은그를붉은
현자라부르지 않았다. 루이에가 모든 기사들에게 백준의 기사라
불린 것과는 확연히 차이 나는 모습이었다.
"현재 그자의 위치는?"
"수도 외곽에 잠시 모습을 보였다가 바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
"잊어라. "
"예?"
엘베로의 말에 파론이 의문을 제기했다. 루이에라면 평소에 엘
베로가 가장 신경 쓰던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 자를 그냥 잊으라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루이에 본인이 맞든지 아니든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건 루이나 왕국에 아무런 애정도 없다는 거지. "
루이에는 백준의 기사라 불리게 된 복장을 버렸다. 그건 국왕이
하사한 칭호를 버렸다는 말도 되었다. 국왕이 하사한 영광을 버릴
정도라면 왕국에도 애정이 없을 터. 그런 루이에를 굳이 찾을 필요
가 없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
파론이 나가고서도 엘베로는 책상을 뜨지 못했다 한참 멍하게
앉아 있던 엘베로가 과거를 회상했다
과거 루이에는 담담한 표정으로 왕궁 문을 부수었다 왕궁의 최
대 실력자와 겨루고 싶다는 말만 남간채
일종의 침입과 같았기에 왕궁 근위 기사단은 곧바로 출동햇고
루이에는 그들 모두를 한 시간 만에꺾어버렸다 그 중에 단 한명
의 사상자도 없음을 감안하면 손에 사정을 둔게 불명햇다
휴 너무 강해 차라리 없은게 나아
기사를 모두 꺾어 버린 루이에은 국왕의 침소에 침입했고 그 자
리에 무릎 꿇어 버렸다 그리고 왕실을 지키는 방패가 되겠습니다
라고 했던 루이에의말 짧은 말이지만 국왕은 진정으로 루이에에게
감탄했고 그자리에서 기사 작위를 내려주었다 또 그때 했던 짧
은 말은 루이나 왕국 전체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말이 되었다
왜 떠났을까
엘베로는 루이에를 실제로 본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를 만
나기 위해 남부에서 서둘러 올라왔지만 그때는 이미 사라진 후였
다 정말 갑자스럽게 모습을 감춰버렸기에 그 신비감이 지독할
정도였다
가출 그리고 죽음
라한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무려 17 시간 동안
의식ㅇㅡㄹ 잃은 것이다 그의 평소 취침 시간을 생각하면 길어도 너무
길었다
으 젠장 몸이 말이 아니군
정신이 드십니까
라한의 푸념어린 말에 반응하듯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침식사를 위해 라한을 깨우러 온 듯했다
아 집사 여긴 왠일이야
식사 하셔야죠 그나저나 어제은 왜 그렇게 일찍 주무신 겁니

집사는 라한의 기절을 잠을 잔거라고생각했다 평온하고 긴 호
흡 때문이다 보통 몸이 안 좋아서 쓰러지면 동공이 풀리거나 호흡
이 거칠어지기 마련. 헌데, 라한의 호흡은길고도평온했기에 그렇
게 생각한 모양이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제령신
공을 운용한 결과였다.
"벌써 아침이야 7"
"예. 시간이 얼마안남았습니다. 준비하고내려오십시오."
대부분의 귀족은 아침에 일어나서 일상을 시작할 때까지 하인이
다 챙겨줘야했다. 그게 귀족의 권위이며 하인의 의무라는 자존심
때문이다.
하지만 라한만은 그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스스로가 비밀이
많은 만큼 남들과 섞이는 걸 피할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
문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에는 하인을 부르지 않았다. 또, 옷을 입고
씻는 일체의 행동에 대해서는 타인의 개입을 극구 거부했다.
"예. 곧 내려갈게요. "
라한의 대답을 끝으로 집사가 방을 나갔다. 평상시에 늘 이렇게
해왔으니 일말의 의혹도 품지 않았다.
집사가 완전히 나간 게 확인되자 라한이 침대 밑에 내려와 앉았
다. 어제 있었던 일은 우발적인 사고와 같은 일. 몸 상태를 확인해
야만 불안함이 풀릴 것 같았다.
라한은 복부 통증이 가라앉은 걸 확인했다. 다행한 일이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이내 그 기운을돌리기 시작했다. 제령
신공의 기운이 아닌 제스란이 준 기운이었다.
약 30 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제스란의 기운을 일주천할 수 있
었다. 기의 양이 많아서인지 어제보다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몸 자체에서 그리 나쁜 조짐을 느끼지 못하자
라한도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일단죽을고비는 넘겼군. 근데, 제령신공으로 이 기은을돌려
도 괜찮을까?"
일주천은성공했지만, 기분이 마냥좋기만한건 아니었다. 예전
에 제령신공을 돌릴 때와는 달리 약간의 찝찝한 느낌을 받은 탓이
다. 제령신공 일주천시의 상쾌한 기분과는 완벽히 반대되는 느낌
이었다.
"심장에 쌓은 기운은 어쩌지?"
라한은 원래 가지고 있던 제령신공의 기운을 어찌해야 할지 몰
랐다 이대로 심장에 두자니 제 자리가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단
전에 다시 넣자니 반발할까 두렵고. 그 어떤 선택도 라한에게는 꺼
려지는 일이었다.
"도련님! 식사 준비 끝났습니다. "
"아, 예. 내려가요."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라한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인챈트도 마찬가지겠지만, 무공 역시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일이
다. 의심을사지 않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에소홀함이 없어야했다.
거기다 제령신공에 대해선 뽀족한 수도 없으니, 머리라도 식히자
는 심정도 작용했다.
귀족들의 식사는 세 가지 정도의 주식과 열 가지 이상의 부
식으로 이루어진다. 최소 열세 가지의 음식인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올라온 음식 전부가 귀족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었다. 귀족들 역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음식이 있을 터.
실제로 먹히는 음식은 소수에 불과했다. 설사 음식 전부가 입에 맞
아도 두세 개의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는 게 귀족이었다. 음식을
남기는 게 귀족만의 권위라는 생각에서였다.
필슨 백작가의 식사도 여느 귀족과 큰 차이가 없었다. 스스로
평민 중심의 정치를 표방하지만, 그도 귀족임은 어쩔 수 없는 모양
이다.
'낭비야. 아무리 생각해도 낭비야. '
라한은 귀족이기는 하지만, 그 생활에 젖어 있지는 않았다. 귀족
이 아니었을 때의 기억이 귀족이었을 때의 귀족보다 더 많았기 때
문이다. 거기다가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서 보낸 8 년의 시간동안
귀족임을 잊고 살았으니 당연했다
"정치학 수업은 잘 되가느냐?"
"예? 하하하하. 그게 뭐, 그냥 그렇죠. 하하하. "
라한이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부모에게만큼은 거
짓말을 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오히려 필슨
백작의 화를북돋았다. 그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또는 '자신
있습니다' 와 같은 대답을 원했다.
"그게 배우는 학생이 할 말이더냐?"
"죄송합니다, 아버지. "
필슨 백작이 분노성을 터트리자 식당에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
다. 한 겨울의 북풍한설도 이보다는 따뜻할 듯 보였다.
"이번도 죄송하다는 말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내
가 이번 기회에
"백작님, 큰일 났습니다. "
갑자기 뛰어 들어온 집사가 필슨 백작의 말을끊어버렸다. 필슨
백작에게는 심히 기분 나쁜 일이었다. 하지만, 라한에게는구원의
손길을 뻗은 은인이 따로 없었다.
"무슨 일인가?"
"도련님의 정치학 선생이신 제스란님께서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
쨍그랑!
집사의 말에 라한이 수저를 떨어뜨렸다. 너무 큰 충격에 귀족가
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버렸다.
'어제 그 말이 이런뜻이었나. '
라한은 그제야 제스란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왠지 다급해보이던
표정과 초조해하는 얼굴. 그 모든 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사람의
행동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못된 생각만 했던 자신이 한
심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사망 원인은?"
"칼에 찔려서 죽었습니다. "
집사의 말에 식구들 모두가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좋아했
든 그렇지 않든 그는 필슨 백작가의 손님이었다. 그런 그가 칼에
맞아 죽었다는 건 필슨 백작가를 업신여기는 행위가 분명했다.
"시체는?"
"마당에 뒀습니다. "
"나가지 "
필슨 백작이 자리를 뜨자 라한도 몸을 일으켰다. 자신도 제스란
의 시체를 보겠다는 의지를 표한 것이다.
"도련님은 보지 않으시는 게
"라한아. 넌 나오지 마라. "
집사의 말을 필슨 백작이 거들었다. 그도 자신의 아들이 끔찍한
모습을 보는 건 싫었다. 아직은 아름답고 따뜻한 것만 볼 나이가
아니던가.
"하지만 아버지. 그분은 제 선생님이셨습니다. 마지막 가는 모
습도 지켜보지 못했는데, 시체라도 봐야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안 된다. "
짧게 대답한 필슨 백작이 식당을 나가 버렸다.
라한은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나을 때가 제일 힘들었다. 이성적
인 대화가 아닌 강압적인 명령. 대화가 안 통하니 라한의 지식도
아무 쓸모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등만 바라볼 수밖
에 .
라한은 2 층으로 올라가 먼발치에서 제스란의 시신을 바라봤다.
입구 쪽에 놓인 시신과 자신의 거리가 꽤 멀었기에 보이는 건 거의
윤곽뿐이었다. 그런데도 라한은 제스란이 웃고 있다고 느쪘다.
"도련님, "
"아! "
뒤에서 들리는 하인의 목소리에 라한이 놀란 목소리를 내뱉었
다. 평소에는주변상황에 무척이나민감한사람이 라한이었다. 제
스란의 죽음 때문에 넋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살이래요. "
"응? "
"도련님 정치 스승이셨던 제스란님이 자살한 거래요. "
하인의 말에 라한이 의구심을 가졌다.
자살 할 거라면 왜 그렇게 다급해했는지, 또, 마지막에 보였던
초조한 표정은 뭐란 말인가. 라한은 제스란이 자살했다는 걸 도무
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살일리가 없다 자살이라면 자살로 유도한놈이 분명히 있
겠지. '
타살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굳이 복수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스란은 제스란이고 자신은 자신. 자신을 대신해 죽은 사
람도 아닌데 굳이 복수할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또, 제스란마저 죽일 정도라면 실력도 예사롭지 않을 게 분명했
다. 그런 사람과는 대적하기보다 피해 다니는 게 상책이라생각했다.
제스란이 죽은 지 한 달.
스승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한의 일상은 큰 변화가 없었다.
정치학 수업 시간에 진짜 정치에 대해 배운다는 게 달라졌을 뿐.
나머지 시간에 인챈트를 연구하는 것까지 완벽히 일치했다.
"후우. "
길게 숨을 쉰 라한이 눈을 떴다. 제스란이 주입한 기를 일주천하
고 방금 깬 것이다.
제스란이 있을 때는 억지로 행했던 일주천. 지금은 인챈트에 대해
연구하다가 답답할 때면 한 번씩 돌리는 취미생활이 되어버렸다.
"미치겠군. 이럴 때는 괜히 사부가 그립다니까. "
라한은 지난 한 달 동안 정말 죽기 살기로 인챈트를 연구했다.
큰 성과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아주 약간의 성과와 눈에 보이는
무엇을 원했을 뿐이다.
헌데도, 결과는 완벽한 제자리걸음이었다. 저기다 제령신공의
구결로 돌리는 제스란의 기(눈)마저 조금도 늘지 않았다. 무공과
인챈트 두 분야 모두에서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라한은 제스란이 주입한 사파의 기운을 제란기라 불렀다. 한
때나마스승이었던 제스란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 심장을두
르고 있는 제령신공의 기운을 제령기라 칭했다. 이는 단순히
제령신공의 이름을 줄여서 부른 것이다.
라한은 두 기운을 서로 다르게 부르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관
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뚜렷한 해결책은 찾지 못했지만
말이다.
"사부가 있었으면 최소한 무공만큼은 무슨 해답을 줬을 텐데. "
무공 성취가 없어 답답할 때면, 괜히 제스란이 보고 싶었다. 이
럴 때는 야단치며 꾸짖던 모습마저 그리울 정도였다.
허나, 죽은 사람은 돌아을 수 없는 법. 어차피 라한 스스로의 힘
으로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겠어. 흠, 사부가 주입시킨 제란기는
본래 제령신공에서 나온 기운이 아니다. 애초에 제란기를 제령신
공의 구결로 움직인다는 게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다고 제령기를
제령신공의 구결로 움직일 수도 없다. 시작 지점이 단전에서 심장
으로 바러었으니, 흐르는 경로도 바뀔 수밖에 없지. 근데 어떻게?"
항상 하는 고민이었지만,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생각 같
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였다.
"인챈트도 재료를 구하지 못하면 더 이상의 성과를 보기 힘들다
젠장. 뭘 해봐야 잘못된 점을 찾지 "
차락!
라한은 오래전 혈도를 배우기 위해 그렸던 신체 그림을 펼쳤다.
자신이 제스란에게 처음 받았던 수업은 혈도에 대한 공부. 라한은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하나씩 살펴볼 생각이었다.
"혈도는 컥! "
갑작스러운 통증에 라한이 배를 움켜쥐었다 전혀 예상 못한 고
통이기에 그 놀람도 클 수밖에 없었다
'왜?'
잠시 의문을 떠올린 라한이 기를 되짚어갔다. 자신의 고통이 시
작되는 근원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미, 미친심장이잖아. 지금까지 이상없었는데.
라한은 심장 주변에 띠를 두른 제령기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
지 않았다. 기운 자체가 안정적이고 평온했기에 별일이야 생기겠
냐는 생각에서였다.
헌데, 이번 통증의 시작 지점은 심장 주변의 제령기가 있는 곳이
분명했다. 라한으로서는 방심하다가 뒤통수 맞은 격이었다.
"으, 허헉, 헉. 휴."
심장에서 시작된 통증은 그리 오래지 않아 가라앉았다. 하지만,
한 번 겪었던 통증의 불길함은 라한의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일단통증이 시작되었다면 언제 재발할지 모를 일이다. 어
떻게든 그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반쯤 미친 제란기도 멀정한데 왜 제령기가 말썽이지? 기운의
본래 성질이 다르다는 것 말고는 차이점이 없는데. "
총명한 라한에게도 이런 일에 대한 해결책은 없었다. 그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 아니던가 경험이 됫받침되지 않았기에 해결책을
떠올리기도 힘들었다.
"그럼 제란기가 멀정한 이유가 뭘까? 왜 이놈은 발작을 일으키
지 않은 거지? 흠. "
라한은 생각을 거꾸로 해보기로 했다. 제령기가 이상을 일으킨
것에서 원인을 찾지 않고, 제란기가 멀정한 이유부터 찾으려는 것
이다.
"휴. "
숨을 길게 내신 라한이 제령신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단전에
쌓인 제란기를 일주천하며 심신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제란기의 기운은 아주 부드럽게 라한의 몸을 돌았다. 지난 한 달
동안 하루에도 수차례씩 행했던 제란기의 일주천. 지금의 라한에
게는 식사를 하는 일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운공을 통해 기를 일주천하는 일은 몸에 노폐물을 제거해주고
심신을 편안하게 해준다. 기운이 돌면서 몸에 남아 있는 노폐물을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제령신공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제령기가 아닌 제
란기의 일주천이었지만 어느 정도의 효과는 나타났다. 물론, 본래
의 제령신공의 효과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지만.
일주천을끝낸 라한이 이마에 땀을닦았다. 한차례 고통을 겪어
서인지 더욱 상쾌한 느낌이었다.
"후우. 좋군. "
길게 숨을 몰아쉰 라한이 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몸은 개운했
지만, 앞일을생각하자눈앞에 깜깜해졌다. 이것저것 다포기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 개운하다. 이 느낌이 더 오래 지속해ㅆ으면 좋겠다. "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보며 라한이 싱긋웃었다. 지금생각
해보면 이전의 생에서 수없이 많이 죽었던 게 꿈처럼 느껴졌다.
"그나저나 제령기를 어떻게 처리하지? 이건 쓸모도 없는 게 심
장에만 달라붙어 있어서 그래도 제란기는 몸을 개운하게 만
들 때는 좋잖아. 근데 이놈의 제령기는 제령기는?"
누워서 중얼거리던 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가에 미소마저 감돌았다.
바닥에서 일어난 라한이 좀 전에 펴뒀던 그림 앞에 다가갔다. 혈
도를 공부하기 위해 그렸던 신체의 그림이었다.
"제란기가 통증을 주지 않는 건 아마 계속움직여서겠지. 그
런데 제령기는 심장 주변에 너무 오래 방치시켰다 실제로 아까 느
낀통증은무언가굳어가는느낌이었어. 결국, 제령기를움직일 방
법을 만들어내야 하는 건가?"
라한은 심장에서 오는 통증의 이유를 제령기의 정체로 설
명했다. 무엇이든지 고여 있으면 굳게 마련. 이 기운을굳지 않도
록 계속 움직이게 만들어야 통증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다.
"근데 어떻게?"
혈도를 아무리 살펴봐도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심장부터 시작
하는 일주천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방법이 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야
했다. 그의 가정이 정확하다면 제령기는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이 상태로 계속 뒀다가는 언젠가 심장 주변을 감싼 채로 굳어버릴
게 분명했다. 심장주변을감싼기가굳어버린다면, 심장까지 멈출
수도 일는 극히 위험한 사태가 발생할 터였다.
"본래 제령신공의 구결이라면 단전에서 나와 회음을 거쳐 움직
여야한다. 헌데, 심장에서 회음으로는 이어지는 혈도가 없다. 결
국, 완전히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건데 흠. "
방법은 없었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이 위기를 벗어
나고자하는 의지만 불같이 타올랐다.
"까짓것 잘 됐어. 내가 얼마나 독종인지 제대로 보여주지.
라한은 인챈트 연구의 정체로몹시 나태해져 있었다. 아무리 노
력해도 성과가 없었기에 반쯤은 포기했던 것이다. 그러던 찰나에
터진 제령기의 정체. 라한은 이번 일을 계기로 자기 자신을 채찍질
할 생각이었다. 자신을 그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사나
이로 재탄생시키려는 것이다.
"심장에서 나가는 길은 하나뿐이다. 여기서 어디로 돌려야 하
지?"
잠깐중얼거린 라한이 제령신공의 구결을 더듬었다. 그곳에 쓰
인 모든 글귀를 재해석해서 새로운 경로를 만들려는 의도였다. 그
렇게 생각을 더듬으면서도 눈은 혈도가 그려진 그림에서 한시도 떨
어지지 않았다.
왕실의 감사가 시작된 지 벌써 두 달.
처음의 의욕적이던 감사도 지금은 많이 시들해졌다. 하지만 그
두 달 동안 교수형 당한 귀족이 이십여 명이나 되었다. 지금까지
있어왔던 그 어떤 감사보다 파격적인 처벌이었다.
"파론! "
엘베로는 요즘 집 안에서만 기거하며 하루를 보냈다. 시들해지
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철수하지 않은 감사의 눈길. 그곳에서 조금
이라도 벗어나보려는 의도였다.
대신 파론과 은밀한 만남을 계속 유지했다. 지금은 정치 세력들
이 자중하고 있지만, 언제 대립할지 모르는 일이 아니던가. 정보수
집만이 미래를 위한 준비가 될 거 였다.
"네, 엘베로님. "
"결과는?"
"성공했습니다. 들어간 금액도 예상보다는 적었습니다. "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 비릿하게 웃었다. 파론의 대답이 그를
흡족하게 한 모양이다 파론은 암살자 길드를 포섭하기 위해 백방
으로 뛰어다녔다. 나타났다는 정보만 있지 접선 장소가 불투명했
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접선장소를알아낸후에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돈에 메말라 있던 암살자 길드와 돈으로 포섭하려던
파론. 그 둘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비밀유지는 확실하겠지?"
"물론입니다. 그는 제 얼굴도 모릅니다. "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 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처럼 파
론이 예뻐 보인적은 없었다.
'후후후. 포섭했으니 처음이자 마지막 임무를 맡걱야겠군 "
"예?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하심은
파론의 말에 엘베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엘베로가살인 명
령을 내릴 때에만 짓는 표정이었다.
크크크. 의뢰는 필슨백작. 이번 의뢰가끝나면 암살자 길드를
버린다 "
"헙!"
파론은 암살자 길드에 투자한 비용이 아까웠다. 예상보다 적게
들었지만, 개개인에게는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그런 큰돈을 투자한 암살자 길드를 걱우 한 번 쓰고 버리다니,
너무 큰 낭비였다.
명심해라. 내 정체는 물론이고 네 정체도 철저히 숨걱야한다. "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
파론이 물러나자 엘베로가 몸을 일으컸다. 그의 얼굴에서 약간
의 초조한 기색이 엿보였다.
자신의 숙적이자 정적인 필슨 백작. 그를 제대로 처리한다면 국
왕 아래 최고의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시간이 더 흐른다면 국왕까
지도
제령신공과 혈도 그림을 살피던 라한. 거의 하루가 지나서야 대
충 감을잡았다. 또, 아련한느낌으로 기를운용하는 심법까지 만
들어냈다. 무려 열아홉 가지의 방법이었다.
그동안 평온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두 번의 심장 통증으로 거
의 실신 직전까지 간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좌절하는 대신 의
욕을 불태웠다. 통증에 비례해서 심법을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일깨운 것이다.
"일단 만들어내기는 했는데 어쩌지?"
라한은 자신이 만들어낸 방법 중에 제대로 된 방법이 하나 정도
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꼭 있어야만 했다. 그가 만든 열아홉
개의 심법. 그건 심장에서 시작해서 심장으로 돌아을 수 있는 길
전부를총망라한 심법이었다. 이곳에 제대로 된 심법이 없다면 남
은 건 심장의 고체화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으로 이어질 것
이고.
"잘못된 심법이라면 엄청난통증을 받게 되겠지. 후우. 집을 떠
나야하나?"
라한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였다. 남의 이익을 철
저히 파괴하더라도 자신을 위한 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행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기주의에서 가족은 예외였다. 과거 수많은생을
반복했지만, 오랫동안사랑해준가족은유일하지 않은가. 그런 가
족에게 자신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내가 고통스러워 할 때, 누군가가 내 몸에 손을 대서는 위험해
진다. "
라한이 집을 떠나는 두 번째 이유였다. 단순히 고통을 보여주기
싫은 이유라면 가족을 떠나지 않아도 방법은 있었다 어차피 가족
이라면 서로를 아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자신이 심법을운용하고 있을때, 누군가가 건드려서는
위험했다. 그건 자신뿐 아니라 만지는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이곳을 떠나서 혼자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뭐, 어차피 인챈트 재료 때문에 한 번은 떠났어야 하니까. "
인챈트 재료는 라한이 집을 떠나는 마지막 이유였다. 제스란이
했던 말에 의하면 파라미스 평원을 넘어야 재료를 구할 수 있었다.
남부 지방인 이곳과는 거의 극과 극인 거리. 아버지의 권력으로 어
찌할 개재가 아니었다.
"오래 끌 필요 없겠지. "
생각을 마친 라한이 침대 밑을 더듬었다. 오래전에 형에게 받은
돈을찾기 위해서였다. 라한은 처음 레테아의 방문 이후로 계속해
서 돈을 모아왔다. 언젠가는 집을 떠나겠다는 생각을 한 탓이다.
하지만, 그때가 이렇게 빨리 찾아을 줄은 그 자신도 몰랐다
"막상 준비하려니까 별로 챙길 것도 없네. "
라한이 가진 돈은 상당히 큰 액수였다. 하지만 다른 여행 물품을
담을 가방이 없었다. 모든 여행의 기초가 되는 가방이 없으니 다른
물품은 포기해야만 했다.
"왠지 아쉽네. "
부모님께 남길 편지를 쓴 라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행동은
빠르면 빠를수록좋은 법. 시간도 딱 밤이었으니, 더 망설일 필요
가 없었다.
"어머니, 아버지. 건강하세요."
말을마친 라한이 저택을빠져나갔다. 이곳의 주인인 만큼 경비
원들이 서 있는곳도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교대시간을비롯한사
각지대까지 경비원들은나름대로 철통경비라고생각하겠지만, 라
한이 보기에는 허점투성이였다.
카를로는본래 용병이었다. 검보다창과활에능했던카를로. 그
는 자신의 실력을 바탕삼아 베센 왕국에서 쾌 유명해졌다. 베어울
프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막았고, 심지어는 직접 몬스터
소굴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
카를로는 자신의 실력과 경력이면, 최고의 용병이라는 혈전사의
칭호를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과 경력을 믿
은 탓이다.
하지만 혈전사와 직접 만난 후로는 그런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
다. 자신의 실력을 훨씬 상회하는 실력의 혈전사. 감히 대적할 엄
두조차 나지 않는 위압감에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 길로
카를로는 용병 생활을 그만뒀다. 그동안 모아뒀던 돈으로 장사나
하자는 생각이 었다.
하지만, 3H 년을 칼밥 먹고 지냈던 그에게 평범한 생활은 너무 힘
들었다. 답답함과지루함이 그의 한계를계속시험해댄 것이다. 결
국, 버티지 못하고장사마저 접어버린 카를로였지만, 다시 용병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혈전사가 있는 이상 최고가 될 수 없
는 분야 아니던가. 그때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가 암살자였다.
뷰나로즈 암살자 길드.
카를로는 스스로 최고라 부르짖으며 나타난 길드장에게 묘한 매
력을느꼈다. 자신이 젊었을 때, 가졌던 패기를 그에게서 느낀 탓
이다. 카를로는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암살자가 되겠노라 허락해
버렸다 길드의 제 3 단 단장 자리를 준다는 말도 그런 결정에 한몫
했다.
'쳇, 내가 멍청했지. '
카를로는 뷰나로즈 암살자 길드가 거대한 집단인 줄 알았다. 아
니 최소, 한 나라 안에서 손에 꼽히는 위치 정도는 될 거라 생각했
다. 헌데, 실상은너무초라했다. 수만많았지 오합지졸이 거의 대
부분인 암살자들. 자신처럼 용병 생활을 하다 암살자가 된 어설픈
자들. 규모에 비해 실속이 없는 길드였다.
하지만 이미 발을 담근 상태였다. 자신이 이곳을 그만둔다면 비
밀 유지라는 명목하게 자기를 죽일 게 분명했다. 이젠 발을 빼지도
못할 처지가 된 것이다.
스스슥!
'생각보다 많다. '
전방을 주시하던 카를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길드에서 내려온 이번 임무는 필슨 백작을죽이는 일. 헌데, 고
작 백작가에 불과하면서도 경비병의 수가 너무 많았다. 흡사 후작
가라 하더라도 이렇게 많지는 않을 듯했다. 그제야 길드장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비밀유지보다는 임무완성에 치중하라는 명령. 이
런 경비 속에서는 비밀 유지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게 길드장의 판
단이었다.
'필슨 백작이 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경비를
카를로는 베센 왕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쭉 자라왔다. 용병 생
활도 베센 왕국에서 할 정도였으니 타국 방문은 거의 처음인 셈이
다. 이 때문에 필슨 백작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아니, 정
보 자체가 거의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길드 내에서도 정보를 감추
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이번 일에 발탁되었
겠지만
'뭔가 이상해. 이번 임무에 투입된 다른 대원들 중에서도 루이
나 왕국 출신은 아무도 없다. '
어떤 임무를 맡든지 정보에 능한 사람이 한 명 정도는 필요했다.
헌데, 이번 임무에는그런 기본이 철저히 무시되었다. 아주세세한
명령과 행동 수칙까지 길드 내에서 모두 정해버린 것이다. 실제로
변수가 많은 암살행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은 계획이었다.
부웅!
'시작인가?'
멀리서 들리는 부엉이 소리에 카를로가 검을 움켜쥐었다. 그가
맡은 임무는 필슨 백작의 암살. 다른 대원들이 경비병들의 시선을
잡아둘 때 처리해야했다. 이 정도 경비라면 기회는 단 한 번뿐일
터. 자신의 실패는 곧 대원 서른아홉 명 모두의 주검으로 남을 게
분명했다.
'1 분에 끝내야 한다. 더 지체했다가는 나와 내 대원들 모두 죽는
다. '
마음을 다잡은 카를로가 팔다리에 힘을 가했다. 움직이기 전에
몸을 조금씩 풀어두는 행동이었다
땡! 땡! 땡! 땡!
"잡아라!"
"적이다! "
몇몇 경비원의 외침과 타종소리가 저택 구석구석 퍼졌다. 경비
원들의 수가 많아서인지 외치는 소리도 하늘을 울릴 정도였다.
'지금이다. '
경비원의 움직임을 확인한 카를로가 몸을 움직였다. 아주 조금
씩이지만 목표를 향해 정확히 다가갔다. 아주 은밀하게
"북쪽이다! "
"북쪽이다 저택 문을 봉쇄해라. "
카를로가 계속 움직일 때도 주변 경비원들의 외침은 끊이질 않았
다. 도대체 몇 명이 잠복하고 있었는지 짐작조차 안 갈 정도였다.
경비병의 외침이 늘어갈수록 카를로의 불안도 커져갔다. 이 일
이 생각보다 큰일임을 직감한 것이다.
'일반백작가에 이런 경비가가능할리 없다. 이건 뭔가있다 길
드장이 우릴 속였어. '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지금은 뽀족한 수가 없었다. 어차피 적진
깊숙이 들어온 상황이 아니던가. 목표를 빨리 죽이고 그 혼란을 틈
타 빠져나가는 게 최선이었다.
필슨백작은요즘 얼굴이 펴질 날이 없었다. 아들인 라한의 갑작
스러운 가출로 심기가 어지러운 탓이다. 거기다 부인인 일레나가
매일 눈물로 지새우는 것도 고문이었다. 자신과 일레나 모두 웃으
려면 라한을 빨리 찾는 게 급선무였다.
똑 똑
"무슨 일인가?"
"외부에 침입자가 있는 듯합니다. "
집사의 말에 필슨 백작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띠었다. 안 그래도
라한 때문에 고민인데 침입자까지 나타나다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수는 얼마나 되는가?"
"확실한 수는 모르겠지만 서른 명 안팔인 듯합니다. 지금 추격
중이니 조만간에 정체를 밝힐 수 있을 겁니다. "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아직 저택 안에서 이렇다 할 일이 없으
니 밖에서 발견한 것일 터. 요즘 매일 슬픔에 젖어 지내는 일레나
를 걱정시키지 않아도 되리라. 거기다사로잡아서 정보를 얻을수
만 있다면 배후 인물에 대해서도 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
고 그 배후인물이 엘베로라면 그의 세력을 단 한 번에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총 투입 인원은 사십 명, 헌데도 집사는 삼십 명밖에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의 경비에 허점이 있다는 증거였다.
'엘베로. 당신 짓이기를 빌겠소. '
"몇 명 놓쳐도상관없다. 우두머리만생포해라. 죽이지 않고 반
드시 생포해야한다. "
"예, 백작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
집사가 나가자 필슨 백작도 몸을 일으켰다. 창을 통해서 눈으로
확인해보려는 의도였다. 물론, 진짜 보일 리는 없겠지만.
"흠, 엘베로가 이렇게 성급한 인물이었나? 현자라는 칭호가 아
깝군. "
"필슨 백작님 . "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필슨 백작이 몸을 빠르게 돌렸다. 지금
방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뿐. 자신의 목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누구냐! 아무도
"입을 열지 마십시오. 필슨 백작님. "
필슨 백작이 사람을 부르려하자 나타난 자가 검을 들이밀었다.
사람 부르면 재미없을 거라는 일종의 위협이었다.
"용건이 뭔가? 날 죽이러 온 건가?"
"죽이러 온 건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용건이 하나 추가되었
군요. "
나타난 자는뷰나로즈 암살자 길드의 카를로였다. 정원에서 벽
을 타고 올라온 그는 집사가 문을 두드렸을 때, 방에 들어왔다. 백
작의 시선이 문을 향해 있을 때를 이용한 것이다.
"후후후. 죽인다고 말해놓고 용건이라 재미있군. 일단 말
해보게. "
필슨 백작을 대면한 카를로는 마치 거인을 대하는 느낌을 받았
다. 죽음 앞에서도초연한모습, 죽이러 온자신에게 막대하지 않
는 부드러움, 거기다 웃을 수 있는 여유까지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전 이번 의뢰를 누가 했는지 궁금합니다. "
"훗, 죽이러 온 사람이 오히려 내게 그걸 물으면 어쩌는가? 입장
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카를로는 이번 의뢰가 의아하기 그지없었다. 겨우 백작에게 딸
린 그 많은 경비병은 뭐란 말인가. 거기다 백작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의 뛰어난 인물 됨됨이. 이런 모습은 일국의 왕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 었다.
'모든 귀족이 이런 건가? 크크 3. 나 같은 평민과는 차원이 다르
군. 젠장. '
"그렇군요. 그럼 이만. "
푹- !
"큭! "
카를로의 검이 필슨 백작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완벽히 중심을
뚫지는 못했지만 죽음에 이르기에는 충분한 상처였다.
"죄송합니다. 다음 생에서는 암살자 없는 곳에서 태어나시기
흐즈 11
"크륵, 컥. 자, 자네는 다음 생에 크륵, 암살자로 태,
태어나지 말게. "
필슨 백작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아직 숨은 쉬고 있지만 오래
가지 못할게 분명했다. 아마오늘밤을넘기기 힘들거였다. 필슨
백작이 쓰러지자 카를로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남은 일은 탈출 밖
에 남지 않았다 진짜 위험한 일은 지금부터 였다
'찝찝하군. '
카를로가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아직은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아야 했기에 무척이나 조심스러됐다. 하지만, 필슨 백작의 죽음
이 알려지는 그 순간부터 자신도 전력질주를 해야 했다.
새로운 심법
시아나 지방
루이나 왕국 북부 지역중 치안이 엄격한 몇안되는 지방중 한
곳이다 북부 지방에서 이곳이 뚫리면 곧바로 수도까지 길이 열리
기 때문이다. 이곳은 지리적 여건 상 치안이 엄격할수밖에 없다
이곳의 엄격한 치안은 새로 부임한 영주에 의해 더욱 견고해졌
다 필슨 백작가의 장남인 레테아 필슨만작 아니 지금은 자작
이 된 그였다 레테아은 이곳의 영주로 임명받은 첫날 시아나에 있는
모든 범죄 세력을 소탕하겠다고 공고했다 그의 말처럼 그날부터
수많은 사람이 잡혀 들어갔고 그 대부분은 교수형에 처하거나 쫓겨
나야만 했다 몸을 수기는 데 탁월하다는 정보 길드나 암살나 길드
도 이 손길을 피 할수 없었다
하지만 레테아 필슨 자작이 숙청에만 열을 올린 건 아니었다
상인 길드와 용병 길드를 적극 장려해서 몬스터가 없고 상업이 부
흥한도시를 만든 것이다 이에 편승해서 매달한 번씩 선행을 많
이 행한 사람에게는 큰 상을 주기도 했다.
처음 숙청에 열을 올릴 때는 두려워만 했던 사람들도 레테아의
뜻을 이해했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가장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악에는 엄격하고 선에는 관대한 레테아의 성격이 이런 결과를 만들
어 낸 것이다.
"여기가 형이 있는 곳인가?"
라한이 시아나 지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필리에를 떠난 지 딱
십 일 째 되는 날이었다.
처음 집을 나온 라한은 여행 물품부터 챙겼다. 중간 크기 가방
두개를사서 허리의 앞뒤에 매고 그 안에 물건을 담은 것이다. 불
을 붙일 수 있는 성냥과 한 달을 먹을 수 있는 비상식량, 모포와 로
브가 그 물건이었다. 아직도 여행에 필요한 물품은 더 많겠지만,
당장 생각나는 게 없어서 이 정도밖에 사지 못했다.
"여기는 여관이 비어 있겠지?"
라한은 여기까지 오면서 한 곳의 마을을 더 들렀다. 하지만 심법
수련은다음으로 미룰수밖에 없었다. 여관에 방이 없어서 홀에서
밤을 보냈기 때문이다. 남의 손이 닿아서는 안 되는 심법 수련을
그런 곳에서 할 수는 없었다.
"이젠 심장이 굳어가고 있다는 게 뚜렷하게 느껴진다. 서두르지
않으면 심장 마비로 죽을지도 모르겠군. "
라한의 얼굴이 조금 초조하게 변했다. 이곳까지 오는 십 일 동안
일어난 발작의 횟수만 사십여 회. 회가 더할수록 발작의 간격이 점
점 좁아졌으니 서두르지 않으면 위험했다.
처음에는 죽음에 대해서만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발작 자체가
두려웠다. 발작이 일어날때 동반되는통증을버티는게 너무힘들
었기 때문이다. 통증에 시달릴 때면,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낫겠다
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멈추시오! 신분증을 제시하시오!"
"여기요. "
입구 경비병의 말에 라한이 용병패를 내밀었다. 이필리에를 떠
나기 전에 용병 길드에서 거금을들여 사둔용병패였다 그때만큼
은 여러 영웅들의 모험기를 읽어둔 게 다행스러웠다.
시아나 시에 들어온 라한이 여관부터 찾아나섰다. 어떻게든몸
부터 추슬러야 미래를 기약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라한에게 가장
급선무가 제령기를 움직이는 일이었다.
-바람의 쉼터,
여관의 간판을 본 라한이 슬쩍 미소 지었다. 로이나가 부리던 실
프가떠올랐다. 그에 따라로이나의 얼굴도함께
"좋군. "
딸랑- !
"어서 옵셔! "
라한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알림 종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소
리로 보면 꽤나 이름 있는 장인이 만든 종인 듯했다
"방 있는가?"
"혼자십 니까?"
끄덕- !
여관 주인의 물음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브를 푹 눌러쓴
탓에 무척이나 음침해 보였다. 라한은 상대가 자신을 업신여기는
걸 막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몸을 많이 가렸다. 자신에 대해 판단할
근거를 최대한줄이면, 시비 거는사람이 적을 거라는생각에서였
다. 그리고 그 생각은 딱 들어맞았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따라오십시오. 2 층에 전망 좋은 방이 있습니다. "
"구석방으로 주게. "
"아,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라한의 낮은 목소리에 여관 주인이 사람 좋은 표정을 지었다. 여
관업을 오래 했다는 게 한눈에 파악될 정도로 숙련된 표정관리였다.
'상업이 발달한 곳이군. '
라한이 방문한 바람의 슁터에는 손님이 무척 많았다. 그리고 그
손님들 옆에 쌓여 있는 짐과 짐을 둘러싸고 있는 무기 찬 사내들의
모습 한 눈에 상인과 그들이 고용한 용병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수의 상인들이 모여 있다면, 이곳이 장사를 위한 목적지
이거나 그곳으로 가는 길목일 터. 그게 무엇이 췄든지 이곳에 상업
이 발달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곳입니다 "
찰칵!
"고맙네. "
여관 주인의 열쇠를 받아든 라한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다른 객실과 동떨어진 곳에 위치한 방이
었다.
"식사는 어쩔까요?"
"나중에 내려가서 먹겠네. "
담담하게 대답한 라한이 객실문을 닫아버렸다. 몸 상태가 하루
가 다르게 악화되는 지금. 여관 주인과 노닥거리는 건 시간 낭비였
다. 조금이라도 서두르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아니
던가.
라한이 책을 펴 놓은 채 자리에 앉았다. 책에는 그 동안 알아냈
던 열아홉개의 심법이 깨알같이 쓰여 있었다. 인챈트를위해 공부
했던 미술을 이 책 한 권에 총동원한 것이다.
물론, 책에 쓰여 있는 내용을 외울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인 만큼좀 더 정확히 하자는생각
에서였다. 하지만, 심법 기록을무령계 언어로 하는 건 잊지 않았
다. 혹, 남에게 이 책이 들어가더라도 내용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한 번에 성공하면 좋으련만. "
잠시 중얼거리던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신이 생각해놓
은 심법을 운용하기위한 준비 동작이었다
라한이 시전하는 첫 번째 심법은 심장에서 심장으로 돌아오는
최단거리였다. 거치는 경로 역시 사혈과 대맥에 해당하는 중요한
혈도만 지나가는 심법. 어찌 보면 상당히 파격적인 방법이었다.
라한이 이 방법을 먼저 시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동선이 짧아서
였다. 짧은 만큼 시전시간도 줄어드는 탓에 결과를 빠르게 확인 할
수 있는 심법이었다. 서둘러야하는 라한에게는 가장 먼저 고려해
야 될 심법인 셈이다.
낮은 음성을 흘린 라한이 제령기를 서서히 움직여갔다. 기의 정
체화가 오래 지속된 탓에 제령기의 움직임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
다. 그렇다고포기할수는 없었다. 목숨과직결된 일이기에.
처음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던 제령기가 서서히 이동해갔다. 심
장 위치에서 복부로 그리고 가슴으로 하나의 혈도를 지날 때
마다 몸이 저릿저릿 했지만, 라한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손을
놓았다가 다시 심장으로 돌아가 버리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컥!"
제령기가 백회혈에 이르자 몸 전신에 전율이 일었다. 좀 전의 약
간 저릿하던 것과는 달리 엄청난 통증까지 동반했다.
'으, 으 .잘못됐어. 이, 이건 아니야.'
라한은 자신의 심법이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제령기가 지나온
혈도 모두에서 터질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상반신 거의 모든 부분
에서 전해오는 열기에 의식이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의식을 놓지 않았다. 이대로 의식을
놓았다가는 상체부터 얼굴까지 모든 부분이 타버릴 것 같은 느낌.
죽지 않으려는 집념으로 의식의 끈을 걱우 잡고 있었다.
제령기는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는 회귀성이 무척 강했다.
이 때문에 몇몇 개의 혈도 정도만 거쳐 왔다면 그 길을 따라 심장으
로돌아가려는행동을보이게 된다. 하지만, 라한은너무많은혈
도를 지나쳐왔다. 이미 머리 부분인 백회혈까지 제령기를 끌어당
긴 상태. 이곳에 손을 놓았다가는 길을 따라 가기보다 일직선으로
심장을 관통할 지도 몰랐다.
'헉, 제, 제발.'
치칙!
" 으 윽 "
라한이 제령기를 서서히 되돌렸다. 원래 왔던 길을 하나씩 되짚
어가는 모습이었다. 거쳐 왔던 혈도에 제령기가 닿을 때마다 닥쳐
오는 엄청난통증. 그 고통을참기위해 라한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신음성이 들렸다. 악다문 입술에선 피가흘러내렸고, 이미 붉게 변
해버린 이마에서는 땀이 증발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한이 제령기를 되돌리는 데는 쾌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백회혈
까지 정방향으로 돌릴 때보다 더 긴 시간이었다.
"헉, 헉, 헉!"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인지 제령기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처음
출발할 때의 심장 위치였다. 하지만, 심장주변에 가만히 앉아 있
지는 않았다. 한 차례 움직여서인지 가는 진동이 심장을 계속 압박
해댔다.
라한은 일이 급해졌음을 느꼈다. 이 압박이 계속된다면 심장에
큰 부상을 입힐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심장의 부상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 게 분명했다. 결국, 심장에 큰무리가가기 전에 심법을찾
아내야 하는 대위기였다.
"빌어먹을. "
라한이 욕설을 내뱉으면서 객실문을 나섰다. 여전히 심장에서
아련한 느낌이 전해졌다. 라한은 자꾸만 불길한 생각에 휩싸였다
여관 홀에 내려온 라한이 주인장 011 게 다가갔다. 좀 전에 입었던
로브를 벗어 던진 간편한 복장이었다.
"헉! "
"주인장. "
라한의 얼굴을 본 여관 주인이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라한의 얼
굴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라한의 몸은 머리끝부터 배 부분까지 검게 타 있었다. 여기저기
일그러진 모습과 흘러내리는 진물들. 누가 보더라도 끔찍한 모습
임에 분명했다.
"마, 마, 말씀하십시오. "
"왜 그러는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젠가?"
담담하게 묻던 라한이 흘의 한 곳으로 몸을 돌렸다. 홀을 조금
더 넓게 보이려는 의도로 놓아둔 거울 쪽이었다
"컥! 이, 이게이거 1
자신의 얼굴을 슬쩍 살피던 라한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모습이 자신마저도 혐오감을 가질 정도의 흥측한 모습으
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이렇게 변했을 거라고는 짐작
도 못했었다.
"저, 나으리. 원하는게 무엇인지요?.
라한과 같은 얼굴은 상대가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 위협을 주기
중분했다. 끔찍하다는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으로 벼하느
인간의 자연스러운 십리 때문이다.
여관 주인 역시 라한의 얼굴에 겁을 집어먹었다 이 때문에 말
투도 좀 전보다 더 공손해졌고, 호칭 역시 손님에서 나으리로 바뀌
었다.
"열흘 치 음식을 내 방으로 보내주게.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음식
이면 되니 맛에 신경 쓸 필요는 없네. 그리고 앞으로 열흘 동안 그
누구도 출입시켜선 아니 되네. 알겠는가?.
쨍그랑!
말을 마친 라한이 돈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열흘이 아닌 그 이상
의 숙박과 식사로도 충분한 금액이었다. 라한이 몹시 혼란스럽지
않았다면, 이렇게 돈을 과하게 쓰는 일은 없었으리라.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나으리
공손하게 대답하고는 있지만, 여관 주인의 얼굴은 그리 좋지 못
했다. 저런 끔찍한 면상의 손님을 열흘씩이나 여관에 두는 일 주
인의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손님은 손님 그것도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끔찍한 인상
의 손님을 박대할용기가 없었다. 돈이 없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서둘러주게. "
"예, 나으리. "
라한이 몸을 돌리자 그제야 여관 주인의 표정도 정상으로 돌아
왔다. 그는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이 무난하다 못해 평범하
다는 걸 진심으로 신께 감사드렸다
본래 라한에게는 충분한 식량이 남아 있었다. 처음 한 달 치 음
식을 샀고, 이제 십 일이 흘렀으니 이십 일 정도의 음식이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한은 여관 주인에게 음식을 주문해야 한다고 생각했
다. 그렇게 해야 자신이 나가지 않아도 의심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으차! "
여관 주인이 음식을 두고 나가자 라한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
했다. 책장으로문을막고 그 앞을 침대로 막았다. 혹시나자신이
신음성을 흘리더라도 출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유언이라도 써 놓을까?"
라한은 진심으로 유언에 대해 고민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자신의 죽음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상황이 절망적이니 죽음
에 대한 생각부터 먼저 떠올랐다.
"부질없는 짓이지, "
잠시 중얼거린 라한이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심장에서는 아련
한 통증이 전해졌다.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희박한 가능성이 더 사
라지는 결과를 낳을 터였다. 이럴 때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시작하
는 게 최선이었다. 또, 그렇게 해야 지금 가진 불안감을 조금이라
도 희석시킬 수 있을 듯했다.
한 번 움직였던 제령기라서인지 처음 시작이 무척 순조로웠다.
당장의 기분으로는 이번에 꼭 성공할 것만 같았다
'이제 백회혈이다. 이번에 실패하면
항상 백회혈이 문제였다. 심장에서 시작하는 기운의 반환점이나
다름없는 백회혈. 이곳만 무사히 지난다면 나머지는 그리 힘들지
않을 듯 보였다.
'으 큭! '
이번에는 엄청난 냉기가상체를 휘감았다. 역시나 백회혈에 진
입하는 순간부터 벌어진 일이었다. 살이 얼어붙는 고통에 라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콕, 콕!'
힘겹게 고통을 버틴 라한이 제령기를 서서히 되돌리기 시작챘
다. 한차례 경험이 있어서인지 좀 전보다 약간은 수월한모습이
었다 하지만, 심장에 도달한 이후의 제령기가 문제였다. 아까의
들끓는 기가 아닌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 라한은 심장이 얼어붙은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바, 바로 해야 돼. '
생각과 동시에 라한이 기를 움직여갔다. 벌써 세 번째 방법이
었다.
한 번 실패할 때마다 의식은 조금씩 약해져갔고, 몸의 힘도 조금
씩 빠졌다. 과도한 심력 소모로 기력을 소진한 탓이다.
라한은 열아홉 번의 심법 전부를 시전할 자신이 없었다. 그 전에
의식을 잃거나통증으로 미쳐버릴 것만같았다. 더 심하면 스스로
혀를 물어 자결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거기다가 심법은 뒤로 갈수록 길고 복잡해지지 않는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엘베로는 요즘 웃음을 달고 살았다. 숙적이었던 필슨 백작이 죽
었으니 상대가 없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한편으로는 이제 시작이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필슨 백작에게 포섭되었던 귀족들과 군소 상
인들을 포섭할 순서가 남은 것이다. 물론, 끝까지 반항한다면 처리
해야겠지만,
"귀족들은 문제가 아닌데 하찮은 상인들이 문제란 말이야. "
귀족들 대부분은 태어나면서부터 권력을목표로 삼게 된다. 출
생 자체가 귀족이라는 권력에 의해 가능했던 일이니, 그 힘을 놓치
기 싫은 탓이다.
하지만, 상인들은달랐다. 무슨 연유로 필슨백작에게 협조했는
지는모르지만, 그들은권력 자체에 무관심한자들이었다. 그들을
포섭하기 위해선 권력이 아닌 다른방법을찾아내야 했다. 그렇다
고 돈으로 포섭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었다. 돈이라면 엘베로보
다 더 많은 이들이 그들이 아니던가.
"후우, 대체 어떤 방법으로 포섭했을까? 분명 이유가 있었을
텐데. "
오래전에 엘베로는 필슨 백작의 상인 포섭에 대해 회의를 한 적
이 있었다. 필슨 백작에게 반기를들고 엘베로에게 협력하기로한
수도권 귀족들과의 회의였다.
당시 필슨 백작은 친 평민적인 정책과 상업 우대 정책을 표방했
다. 실제로도 왕궁 내에서 그에 대한 많은 건의를 한 것도 사실이
다. 결국, 필슨백작의 정책과상인들의 이권이 맞아떨어져서 서로
간의 뜻이 모인 것이다.
"그럴 리 없어. 그따위 녀석이 뭐가좋다고. "
하지만, 엘베로는 필슨 백작이 상인들을 포섭할 수 있었던 이유
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뚜렷한 근거에 의해서가 아닌 단순
히 자존심 문제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엘베로는 자신이 못한 일을 필슨 백작이 했다는 그 자체가 싫었
다. 이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필슨 백작의 공로를 깎고 싶었다
비록 이미 죽어 고인이 된 사람이었지만, 증오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똑! 똑!
"엘베로님. 저 파론입니다. 들어가도되겠습니까?"
"들어와라. "
파론의 등장에 엘베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엘베로는 파론에게 라한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조사해서 빠른 시일 안에 처리하기 위해서였
다. 지금 파론의 방문이 그 일과무관하지 않으리라는 건 쉽게 짐
작할수 있었다.
"엘베로님. 저
"말해라. "
"라한의 행적이 묘연합니다. "
"뭐 라? "
짧게 내뱉은 엘베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게 라한에 대
해서만큼은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과거 백치의 풀 셀베카를 이용한 암수도 실패, 그에 대한 미행도
실패. 이번엔 그의 행적마저 놓치다니 신이 그를돕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죄송합니다, 엘베로님. "
"좀 더 자세히 말해라. "
엘베로의 얼굴은 폭발 직전으로 보일만큼 붉게 달아올라 있었
다. 라한에게서 원인 모를 불안감을 느낀 탓이다.
"뷰나로즈 암살자 길드가 일을 치르기 열흘 전에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소문에 의하면 가출이랍니다. "
"이, 이 그놈은 우습게 볼 놈이 아니다. 어떻게든 찾아내라.
우리 정보력을 총동원해서라도 찾아내란 말이다 "
날카롭게 내뱉은 엘베로가 눈을 번뜩였다. 눈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라한은 이미 열 번은 죽은 목숨이리라
"알겠습니다. "
"찾는즉시 처리해라. 생포 같은 건 필요 없다. 그 자리에서 없
애버려라. "
"예, 엘베로님. "
파론은 아직도 엘베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뛰어난 기사도 아니
고 마법사도 아닌 라한. 그저 평범한사람일뿐인 그에게 엘베로가
왜 그렇게 신경 쓰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거기다 라한에 대해 얘
기가 나오면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난관을 그의 지혜 하나로 헤쳐오지 않았던가.
헌데, 라한에 대해서는 그 냉철한 지혜를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으아아아! "
엘베로는 파론이 나가자 한동안 발광을 해댔다. 서재의 책들과
각종 화분을 마구 던지며 분을 풀었다. 한참을 발광하던 엘베로가
벽을 주먹으로 마구 두드렸다. 그렇게 집어 던지고도 분이 덜 풀린
모양이다.
라한의 의식은 이미 반쯤잠겨 있었다. 또, 얼굴은 마구녹았다
얼기를 반복해서 사람으로 보기도 힘들
정도의 모습이었다. 눈,
코, 입 모두 제자리에 있다뿐이지 뼈를 덮고 있는 피부가 성하지
않은 상태였다.
무려 9 일. 그동안라한은수차례나기력이 다해 쓰러졌다. 하지
만, 심법을 운용하던 도중에 의식을 잃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가는 혈맥에 있던 제령기가 터져버릴 건 당연한
일. 라한의 지독한 의지가 그런 상황만큼은 피해간 것이다.
'후후후후, 죽는 일만 남았나?'
라한에게 남은 심법은 이제 두 개였다. 단순하고 쉬운 것부터 차
례대로 했으니 복잡하고 어려운 것만 남은 셈이다.
라한은 자신에게 별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확률적으로 90 퍼
센트에 가까운 심법을 시전해본 셈이었다. 나머지 10 퍼센트에 무
언가를맡기기에는확률이 너무 낮았다. 거기다몸상태도문제였
다. 숨만붙어 있었지 정신적으로는 이미 피폐해 있었다.
삶에 대한 애착과 집념 때문에 살아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그나
마도 놓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후후. '
너무 힘들었다. 이젠 사는 일보다 죽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했
다. 여기서 그만둬버리면 모든 게 편안해질 것만같았다. 이런 생
각들이 의식을 완벽히 지배하는 순간. 라한의 목숨도 끝날 것이다
"이제 두 번만 더 하면 편히 죽을 수 있겠구나. "
라한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남은 심법을 운용
하기 위해서였다.
쿵- !
라한의 이번 심법 운용은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심장을 나
와 거료혈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막혀버린 것이다 분명 이론상으
로 완벽히 뚫려 있는 혈도가 분명한데도 제령기는 도통 전진을 못
했다.
거료혈은 라한의 심장 바로 아래에 있는 혈도였다. 지금까지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몸 전체를 돌았던 심법이다. 그렇게 많은
시도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헌데, 이곳거료혈만은심장에서 가는길이 막혀 있었다 라한에
게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난관으로 작용한 셈이다.
쿵- !
제령기가 또 한 차례 거료혈을 때렸다. 라한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신에게 남은심법은 이제 두가지. 그중한가지를
시작하자마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쾅 쾅-!
두드리는 강도가 점점 강해졌다. 약간 뒤로 밀었다가 부딪히기
를수십 차례. 라한은복부에서 전해오는고통에 의식이 가물가물
해질 지경이었다.
'제발, 좀. 제발
라한은 수없이 부딪히기를 반복하면서 빌고 또 빌었다. 남은 방
법이 하나 더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 정신으로는 더 펼칠 여력조차
없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번 심법으로 어떻게든
결말을 봐야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쾅- !
쿠쿠쿠쿵!
복부에서 엄청난 통증이 전해오떤서 머리가 순간 아찔해졌다.
하지만, 라한의 기분은하늘을날듯이 기뻤다. 어찌췄든 거료혈을
뚫은 것이다.
'휴, 휴. 후우. '
복부에 통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또 다시 제령기를 돌리기 시
작했다. 귀가 멍멍하고 의식이 가물가물했지만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관 주인인 라프타는 기분이 찜찜했다. 벌써 13 일 전에 들어간
손님에게서 도통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손님이 기약했던 시간은 열흘. 나와도 벌써 3 일 전에 나와야 정
상이었다. 헌데도여관주인은쉽사리 문을두드리지 못했다. 다시
는 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얼굴이 이유였다. 그날 손님의 얼굴을
본 뒤 이틀이나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던가. 그 얼굴을 다시 볼 엄
두가 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
결국 라프라가 모진 마음을 먹었다. 손님이 넘치다 못해 객실까
지 부족했다. 오래전에 들어간 손님을 내보내야할 입장이 된 것이
다. 비록 꿈에 나타날까 두려운 상판이기는 하지만, 장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쾅쾅
"나으리! 나으리 계십니까?"
쾅쾅!
"나으리! "
계속해서 불러댔지만, 객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
았다. 라프타는 한편으로 다행스러우면서도 괜히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얼굴을 보지 않는 건 좋지만, 혹시 자살이라도 했다
면 생돈투자해서 장례를치러야하는거였다.
쾅 쾅
"나으리! 대답 없으시면 제가 문 열겠습니다. "
찰칵!
말을 마친 라프타가 객실문을 열었다. 하지만, 뒤에 무언가로 막
아 놨는지 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우씨, 빌어먹을. '
쿵! 쿵!
끼익!
몇 차례 몸으로부딪히자문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문에서
나는 소리가 라프타의 기분을 더욱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얼굴만큼만 문을 민 라프타가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일단
안이나 살펴보자는 의도였다.
"저, 저 손님! "
라프타의 눈에 쓰러져 있는사람이 보였다. 대충보기에도 침대
에서 자다 떨어진 모양새는 아니었다. 침대가 문을 단단히 막고 있
었으니 그럼 결과는 자살뿐이었다.
파삭!
"이런, 젠장. "
주인이 문을 거칠게 밀어붙였다. 이미 죽었다면 시신을 빨리 수
습해 다른 손님들에게 들키지 말아야 했다. 이런 일은 손님을 줄이
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또, 살아 있다면 빨리 치료해서 목숨을 건져야했다. 자신의 여관
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건 죽어도 싫었다. 물론, 후자라면
치료비를 두둑하게 얻어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손님! 손님!"
"이보세요, 손님! "
"으 으
라프타가 몸을 흔들자 라한이 신음을 흘렸다. 어떻게 보면 자다
일어난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죽기 직전의 모습 같기도 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하하하. 살아 있군. 하하하. "
깨어난 라한이 대소를 터트렸다 그는 꿈에서 자신의 소멸을 수
십 차례나 경험했었다.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었던가. 지금그에
게는 이 세상의 따뜻한 햇볕이 반갑게만 느껴졌다.
"저, 손님. 그게 무슨 얘기신지?"
"아, 아닐세. 하하하. 배가 고픈데 식사 준비 좀 해주겠는가?"
"아, 예."
여관 주인이 나가자 라한이 벽에 기대앉았다. 아직도 살아 있는
게 실감나지 않는지 눈만 멀뚱멀뚱 뜬 채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라한의 열여덟 번째 심법 수련은 엄청난 난관의 연속이었다.
혈도 하나를 지날 때마다 아려오는 통증과 서서히 멀어지는 의
식. 라한은도박하는심정으로제령기의 속도를높였다. 혈관이 전
부 터져나가도 상관없다는 듯 엄청난 속도였다.
보통 이런 방법은 주화입마의 지름길이기에 금기시하는 일이었
다. 제스란이 처음 심법을 알려줄 때도 기의 속도에 대해 반복해서
당부할 정도였다.
하지만, 라한에게는더 이상의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끝까지 하
지 못하면 죽는 건 마찬가지 아니던가. 그나마 의식이 완전히 잠기
기 전에 심법을 끝내려면 이 방법이 유일했다.
"위험했지. "
라한이 제령기의 속도를 올리자 지나간 자리가 붉게 타올랐다.
온몸을 전부 태워버릴 듯 뜨겁게 타오르는 혈도. 그런데도 라한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제령기가 백회혈에 이르렀을 때, 큰 통증이 전해왔다. 하지만,
큰 무리 없이 통과할수 있었다. 제령기가 가진 속도 때문인지 경
로가 제대로 된 것인지는 지금도 확실치 않았다. 확실한 건 백회혈
을 무사히 통과한 제령기가 심장으로 빠르게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속도가 주는 통증으로 의식을 잃기는 했지만 살아났으니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때부터 라한은 꼬박 삼 일을 기절해 있었다. 그 전에 쌓였던
피로와 혈관의 통증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여관을 나온 라한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여관 주
인의 얼굴이 생각난탓이다. 얼굴이 바뀌었다며 놀라던 얼굴. 그리
고 바람의 쉼터라는 이름의 여관. 라한에게는 쾌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듯했다.
라한은 예전의 얼굴을 되찾았다. 어떤 면에선 조금 더 나아 보일
정도였다. 평생 끔찍한 얼굴로 지낼 뻔 했던 라한에게는 천만다행
한 일이었다.
"흠, 거참 이상하군. 결과로보면 사부가말한환골탈태하고 비
슷한데 기는 거의 늘지 않았으니. 이거야 원. "
라한의 피부는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 좀 더 깨끗하고 뽀얗게
변한 것이다. 제스란은 이런 현상을 환골탈태라 불렀다.
이 경지를 넘어서면 무공이 진일보한 것이라는 말도 함께
헌데 라한의 제령기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예전보다 조금 나아
지기는 했지만, 거의 구분도 안 될 정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환
골탈태로 보기는 힘들었다.
.내 심장 위치와 그곳에 자리 잡은 제령기가 이런 결과를 낳았겠
지. 괜히 섭섭하네. "
말을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어찌됐든
살아나지 않았는가, 죽지 않고 살아서 걸을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
로도 행복감을 느꼈다
두두두두
" 이럇! "
"물러나라! 영주님. 행차시다. "
멀리서 들리는소리에 라한이 한 걸음물러났다. 이곳의 영주라
면 형인 레테아 일터. 로브를 눌러써서 신분을 감추는 일을 잊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라한의 생각처럼 레테아 자작 일행은 평소의 모습과 많이 달랐
다. 시정을 순찰하는 중이라면 천천히 움직이며 영지민들의 인사
를받아야정상이었다. 헌데, 레테아남작을비롯한 일행은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영주님, 행차시다. 물러나라!"
선두에 선 기사의 외침에 사람들이 일제히 뒤로물러났다. 엄청
난 속도로 질주해오는 수십 필의 말과 수행인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레테아 자작은 아침에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접했다. 아버지인 필
슨 백작이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처음에는 긴가
민가했지만, 이내 그 소식이 사실임을 알수 있었다. 필슨 백작가
에서 정식으로 보내온 소식을 받은 것이다.
이에 레테아 자작은 측근의 기사들만 대동한 채 수도로 달렸다.
지금의 그에게는 빨리 돌아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봐야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형 얼굴이 좀 조급해 보이네. 진짜 무슨 일이 벌어졌나?"
먼발치에서 형을 살피던 라한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웬만한 일
에서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형이었다. 그가 저런 표정을 보인다
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얘기였다.
"뭐, 알아서 하겠지. "
레테아의 모습이 멀리 사라지자 라한도 발길을 돌렸다.
그의 목표는 대륙의 북쪽 끝인 파마리스 평원. 대충 몸을 추슬렀
으니 인챈트 재료를 구할 차례였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동안은
혈도와심법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할생각이었다 여러 가지 심법을
대입해보면서 자신의 혈도가 실제 알고 있는 혈도와 다르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연구는자신의 몸에 대한 연구나다름
없었다.
]

도주

루이나 왕국은 남북으로 강대한 나라를 접하고 있었다


남쪽에는 베센왕국 북쪽에 케라스 왕국이 그들이다
먼저 베센왕국은 대륙 최남단에서 바다와 접하고 있었다 풍부
한 해산물을 이용한 경제 기반 확충이 가능한 셈이다 하지만 수
시로 출몰하는 해적들 때문에 원해 어업은 크게 발전하지 못
했다 베센 왕국의 약한 해군력이 가져온 결과였다
물론 왕국 측에서 해군력 증강의 필요성을 모르는 건 아니였다
그들도 해군력을 증강시켜서 해적들을 몰아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하지만 베센왕국 북부에 인접한 루이나 왕국이 문제였다
나라이 군사력이란 한계가 있는법 해군력에 치중하면 그만큼
지상군위 힘이 약화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결국 해군력 증강은
루이나 왕국과의 국경을 불안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수바에 없
었다.
루이나 왕국의 북부에 위치한 케라스 왕국.
이곳은 두 개의 산맥 사이에 위치해 있어서 농토가 부족했다. 그
렇다고 식량 조달을 위한 바다와도 인접해 있지 않았다. 지리적 여
건만을 두고 본다면, 망해도 오래전에 망했어야 할 나라였다.
이에 케라스 왕국이 선택한 방법이 몬스터 퇴치였다. 두 개의 산
맥에 무수히 쌓인 몬스터들을 퇴치하고, 그 몬스터에서 나온 포획
물을 타국에 파는 것이다. 이런 정책은 국민들 다수의 전투력을 향
상시켜서 왕국 자체의 국력 향상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지리적인
악조건을 오히려 기회로 활용한 경우였다.
케라스 왕국의 한 허름한 창고 안.
족히 마흔은 넘어 보이는 중년인이 천으로 검을 닦고 있었다. 눈
의 매서움이나 검을 닦는 모습이 평범한 사람은 아닌 듯했다.
"나와라!"
"예, 마스터. "
중년인의 낮은 음성에 어디선가 복면을 쓴 사내가 나타났다. 중
년인보다는 못하지만, 그의 눈빛도 매섭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됐지?"
"필슨 백작이 죽었답니다. "
"후후, 예상했던 일이지. "
중년인이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조용히 대꾸했다. 하지만 안타
까워한다거나 슬퍼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필슨 백작
을 알고는 있지만, 친분을 가진 사람은 아닌 듯했다
"헌데 엘베로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
"엘베로 쪽? 정보 조직을 움직이고 있는 건가?"
"예, 마스터 "
복면인의 대답에 중년 사내가 의혹을 제기했다. 정적을 이미 제
거했는데 비밀 조직을 움직인다? 중년 사내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목표는?"
"필슨 백작의 아들인 라한이라는 자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
복면인의 대답에 중년 사내가 생각에 잠겼다. 오래전에 엘베로
에게 받은 의뢰가 생각난 듯했다
중년 사내는 수년 전 이필리에에서 활동하던 암살자 길드의 길
드장 다크시안이었다. 엘베로와의 계약이 끝나자마자 이필리에를
떠났던 다크라이더 길드. 그들은그곳을 떠난후에도 엘베로에 대
한정보는 계속모아왔다. 그동안심하게 당했으니 언젠가는 앙갚
음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찰나에 터진 필슨 백작의 죽음. 이
사건을 계기로 엘베로가 권력의 중심에 선다면 복수는 영원히 요원
해질 터였다.
'그때도 그랬지. 고작 열 살밖에 안 되는 애를 죽이는데 나와의
약속을 쓰다니 이해가 안 돼, '
"라한이라는 필슨백작의 아들이 어디 있는지 찾아내라. 엘베로
쪽보다 먼저 찾아야한다. "
"예, 마스터. "
다크시안은 라한에게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현자라 불리는 엘베로가 찾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무언지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기는?"
"수량을 전량 다 맞추었습니다. 방어구 역시 수 일 안으로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복면인의 말에 다크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베로에 대한 일
만 제외하면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이런 속도라면 수 일 내로 충
분한 자금과 힘을 확보할 걸로 보였다. 그 후에 남은 건 케라스 왕
국의 적당한 지역에 자리 잡는 일 뿐이었다.
다크라이더 길드는 한 동안 암살 의뢰를 받지 않았다. 한 자리에
완벽히 자리 잡기 전에는 위험한 일을 피하자는 의도였다.
그렇다고 자리 잡을 때까지 마냥 놀 수는 없는 법. 이에 다크라
이더가 뛰어든 사업이 무기 재료 수집이었다. 케라스 왕국 주변 산
맥에서 살아가는 몬스터를사냥해서 재료를수집하는 일. 훈련과
금전 수입 모든 면에서 쾌나 쓸 만한 방법이었다.
몬스터의 뼈는 무기의 재료나 조각의 재료로 쓰인다. 또, 가죽은
각종 방어구나 방한 용품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드물기는 하지만
몇몇 몬스터는 뼈나 가죽보다 내장 기관이 더 비싸게 팔리는 경우
도 있었다. 이런몬스터가없었다면, 케라스왕국은오래전에 사라
졌으리라.
라한은 야음을 틈타 루이나 왕국의 국경을 넘었다. 또, 케
라스 왕국으로 진입 할 때도 몰래 잠입해야했다.
정말 꺼림칙했지만, 그때 사용한방법은광견보였다. 양국간의
사이가 몹시 나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칫 필슨 백작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인질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
았기 때문이다
케라스 왕국에 들어온 지 이틀
라한은 아직도 산을 벗어나지 못했다. 낮에만 이동하며 큰 길만
따라 움직였다면 지금쯤은 케라스 왕국의 남부 도시에 도착 했어야
했다. 밤에 지름길을 찾아 나선 게 화근이었다.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더니
잠시 푸념을 늘어놓은 라한이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오늘도 나
무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잠을 청해야 할 듯했다
"분명히 북쪽을 향해 가는 건 확실한데 왜 도시가 안 나오는 거
야"
짜증을 부리면서도 불안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몬스터를 미
리 발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라한의 단전에 쌓인 제란기는 돌리면 돌릴수록 오감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시간만 나면 제란기를돌
렸다. 이 때문인지 시력은 물론이고 청각과 후각까지 동물 수준으
로 발전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전생에서 개로 지낼 때보다 더 뛰
어난 감각처 럼 느껴졌다.
"일단 제령선공부터 돌려야겠다. "
라한은 제령기를 돌리는 심법에 제령선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운의 기질이 선하고 부드럽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면, 제란기를
돌리는 심법은 특별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아직 연구 중이기는 하지만, 라한은 제란기의 흐름이 부자연스
럽다는 걸 느꼈다. 어쩔 수 없이 빠른 시일 안에 새로운 심법을 만
들어내야 하는 입장이었다. 제란기를 돌리는 심법의 이름은 새로
운 심법을 만들어내면 그때 붙일 생각이었다.
"하, 좋다 "
제령선공을 수련하면 피로가 회복되는 효과가 있었다. 제란기를
돌릴 때는 오감이, 제령기를 돌리면 피로가 회복되는 멋진 조화였
다. 이 때문에 식사 시간 직전에 두 개의 심법을 차례로 돌리는 일
을 일상화 해버렸다.
"후우. "
두 가지 운공을 모두 마친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제란기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하는 길. 즉, 새로운 심법을 만들
기 위해 궁리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예전처럼 수많은 심법을 만들
어놓고직접 몸으로부딪히는방법도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그때
일로 고통을 받을 만큼 받았던 라한. 다시 그런 무식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이상한 혈도에 맞는 완벽하고 확실한 심법이
아니면 시작도 하기 싫었던 것이다.
"내 혈도는 분명히 다르다. 견정혈은 현추혈의 효과를, 연액혈
은 환도혈의 효과를 낸다. 그림의 혈도 위치에 내 혈도가 자리하고
는 있지만, 효과가 완전히 다르니 심장 위치가 남들과 다른 게
이유겠지. "
라한은 자신의 혈도 전부가 내는 효과를 알아내야했다. 그 효과
와 실제 위치를 정확히 따져서 심법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심법 역시 기존의 제령신공을 기반으로 할 거라는 건 말
할 필요도 없었다. 라한이 아는 심법이 그것뿐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제령선공을 두고 생각해보면 처음 시작은 통증을 주는 혈도로
가야한다. 그 다음은 가려움이겠지. 그럼 단전에서 회음혈까지는
동일하고 그 다음이 유도혈인가?"
라한은 혈도와 몸을 하나씩 짚어가며 심법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지금의 제란기가 언젠가는 폭주할 거라 생각했다. 어울리
지 않는 심법이 어울리지 않는 혈도를 따라 흐르고 있으니 무슨 사
단이 분명히 일어날 터. 그 전에 새로운 심법을 고안해내지 못하면
뒤를 기약할 수 없었다.
"까짓것 이젠 죽는 것도 안 두렵다. 젠장 "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생각을 멈추지는 않았다. 막히면 처음부
터 다시 생각하기를 수십 번. 지칠 만도 하건만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했다.
부스럭!
라한의 오감에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였다. 이 시간에 나는 소리라면 몬스터가 아니면 길 잃은
사람일 터. 그 둘 중 누가 됐든 라한에게는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
이었다. 어찌됐든 심법 연구는 멈출 수밖에 없기에
'기왕이면 사람이면 좋겠는데
라한의 전투능력은형편없었다. 심법만 익혔지 검술은 전혀 익
히지 않은탓이다. 그렇다고마법을배우지도 않았다. 유일한공격
수단이라고 해봐야 막 휘두를 실력밖에 안 되는 대거(Dagge,)와 정
령 테세르가 전부였다.
'이런 빌어먹을. '
라한의 눈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베어울프가 들어왔다. 무언가
냄새는 맡았는데, 대상을 찾지 못하자 몹시 혼란스러운 모양새였다.
'테세르를부르는순간 저놈은날발견할 테지 쳇, 이럴 줄 알
았으면 미리 불러 놓을걸. '
품속의 대거를 꽉 쥔 채 라한이 베어울프를 노려봤다. 기회는 단
한 번. 최대한가까이 왔을때, 테세르와대거를 이용해서 끝을봐
야했다. 한 번에 끝내지 못하면 남은 건 도주밖에 없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
베어울프가 다가올수록 라한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손
끝이 떨리고 허벅지에 경련이 일었다 너무큰 긴장이 신체에 대한
통제를 어렵게 만든 모양이다.
'젠장. 그래, 조금 더. 됐다. '
"테세르 저놈 잡아! 하앗! "
라한은 테세르를 부르자마자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짧은 대거였
지만 두 손으로 꽉 움컥진 라한. 대거를 베어울프의 목 부위로 힘
차게 찔러갔다.
테세르는 나타나자마자 베어울프에게 날아갔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빠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퍽-! 툭-!
테세르의 공격은빠르고 정확했다. 하지만힘이 없었다. 베어울
프의 몸에는 명중했지만, 아무런 부상도 입히지 못한 것이다.
'젠장, 저놈 정령 맞아?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군. '
퍽-!
"컥!"
라한의 공격도 테세르와 다를 바 없었다. 베어울프의 간단한 손
짓에 날아가 버렸다. 꽤 심한 타격을 입었는지 입가에서 피가 스며
나왔다.
"쿨럭! "
으르릉! 쿠왕!
쓰러진 라한에게 베어울프가 달려들었다. 손톱을 빼어든 모습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하지만라한도 이대로포기할수는 없었다. 지
금까지 참아온 고통이 얼마던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으려고 모질
게 살아온 인생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한 판 붙어보자. "
라한은 뛰어난 오성을 이용해서 손톱을 피해냈다. 거의 필사적
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몸놀림은 보통 사람의 그것이었기에 어
깨를 긁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테세르. 뭐해. 이놈눈좀막아."
라한이 베어울프의 허리 뒤쪽에 매달렸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
치기라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매달리고 나니 할 일이 없었
다. 악어가죽보다 더 단단한 피부에 이빨을 꽃아 넣을 수도 없는
일이다. 도대체 어떻게 공격해야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크어어엉!
베어울프는 허리 뒤쪽에 매달린 인간이 성가시기만 했다. 아프
지는 않은데 괜히 매달려서 귀찮게 하는 인간 어떻게든 떨쳐내려
했지만, 그것도쉽지 않았다. 그는난생 처음으로 인간이 지독하다
고 생각했다.
"테세르. 뭣 좀 해봐. "
라한의 외침에도 테세르는 멀뚱멀뚱 구경만 했다. 지금 순간만
큼은 베어울프와 라한이 동물원의 동물이 된 듯했다.
크어어엉!
"야이, 빌어먹을 정령아! 뭣 좀 해보라고. "
라한이 재차 외치자 그제야 테세르가 몸을 움직였다. 그래도 주
인이 죽는 건 싫었던 모양이다 라한이 떨어뜨린 검을 주어든 테세
르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한차례 주변을 빙 돌던 테세르가 라한에
게 눈을 깜빡였다. 누가 봐도 윙크가 분명했다.
'저놈의 정령이 미쳤군. '
테세르의 윙크는 베어울프에게도 이어졌다. 베어울프도 테세르
의 윙크에 정신적 충격을 받은 듯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목을 찔러. 베어울프는 목이 약해 "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베어울프의 목 부분으로 날아갔다. 좀 전
에 라한이 떨어뜨린 대거를 꼭 안고서.
푹- ! 툭.!
"또 찔러. 빨리. "
푹- !
라한은 찌르라는 명령을 계속해서 날렸다. 베어울프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을 때까지 계속된 명령과 테세르의 공격.
결국 대륙에서 가장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베어울프도 바닥에
몸을 뉘였다. 이미 죽었는지 작은 맥조차 뛰지 않았다.
"헉, 헉, 헉!"
베어울프의 옆에 라한이 벌렁 누워 버렸다. 어두운 하늘이 샛노
랗게 보이고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만사가 귀찮아져서 그냥 이 자
리에 쓰러져 자고 싶을 정도였다. 그 옆에는 테세르가 자랑스러운
듯 팔짱을 끼고 웃고 있었다 마치 내가 살려줬으니 앞으로 잘하라
는 표현 같았다.
"지랄. "
힘들기는했지만, 이곳에 계속 있을수는없었다. 이곳에서 풍기
는 피냄새를 맡고 다른몬스터가올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빨
리 이동해서 이곳과 멀어져야했다.
"테세르, 가자. "
테세르를 주머니에 챙긴 라한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
음 옮길 때마다 머리가 핑핑 도는 느낌이었다
베어울프의 시체가 있는 곳에 흰 머리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냄새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훗, 재미있는 녀석이군. "
나타난 사내는 백준의 기사라 불리는 루이에였다.
그는 이곳과 조금 떨어진 나무 위에서 라한의 싸움을 모두 지컥
봤었다 필사적으로 어깨에 매달리는 라한의 모습과 발광하는 베
어울프. 그때 루이에는 황당한 싸움 형태에 절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는 테세르를 보지 못했다. 밤에는 검은색이 더 안보
이는 법. 쾌 먼 거리에서 어둠을뚫고 테세르를볼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라한의 외침으로 정령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정령사라쾌오랜만에 보는존재로군. 재미있겠어 "
잠시 중얼거린 루이에가 라한이 사라진 곳과 반대되는 곳으로
사라졌다. 라한에 대한호기심은컸지만, 자신에게는해야할일이
있었다 잠깐의 호기심으로 일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다.
로테라 숲의 오두막 안.
정말 오랜만에 열두 명의 인물이 모두 모였다. 판테아에 의해 운
명의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었다.
그리 좁지 않은 숲에 여기저기 흩어져서 살던 열두 명의 기인들.
제각각인 성격 탓에 모이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들 정도의 능력자
들이 위험에 처할 리도 없거니와 이곳 로테라 숲에 방문자도 없었
기 때문이다. 사건이 없으니 모일 일도 없을수밖에 없었다.
"제이슨 말해보게. 갑자기 우리를 불러 모은 이유가 뭔가 7"
"실라이론이 재미있는 소식을 전해주더군. "
제이슨은 루이에를 찾기 위해 쉴 새 없이 실라이론을 소환했다
비록 상급의 정령사이기는 하지만, 하루 종일 부리는 건 쉽지 않
은 일. 이 때문에 하루에 한 번 정도 실신하는 건 거의 일상처럼 되
어버렸다. 실라이론에게 가끔씩 듣는 세상 얘기가 그나마 위안이
될 뿐이다.
"또 정령 얘긴가?쯧쯧, 우린 검사들과마법사들이네. 정령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지. 아, 하급 정령사인 델리온은 관심이 있을지
도 모르겠군. "
7 서클 유저 마법사인 잉글리아트의 말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마법이나 검에 평생을 바친 존재들.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가질리 없었다.
잉글리아트는 열두 명의 기인들 중 유일하게 동굴에 살고 있었
다. 그가그동굴에서 책 십여 권을발견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발
견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에 자리 잡은 후로 다른 곳으로는 옮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냥 책만 들여다보며 해석에 열을 올렸다.
성과는 전혀 없는 듯했지만.
델리온은 소드마스터이면서도 하급 정령을 부리는 특이한 존재
였다.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한가지에만매달려도 다 이루지 못하
는 일.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으면서도 물의 하급 정령을 부리
는 델리온이 대단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흠, 흠. 대륙 중앙에 있는 케라스 왕국 근처에서 라이칸이 죽었
다더군. "
"그게 뭐가 중요한 일인가?"
제이슨의 말에도 주변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질
책하는 눈빛도 언뜻 보일 정도였다.
"허허, 이 사람들참. 운명의 굴레를 벗은존재가우리 열두 명
뿐이 라고 생각하는가?"
"그거야 아니지. 인간들 중에서는 우리뿐이겠지만 다른 종족이
라면 설마, 아까 죽었다는 라이칸이?"
말을 이어가던 잉글리아트가 놀란 눈빛으로 되물었다. 운명의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 이들이 얼마나 강한지를 아는 탓이다.
운명의 굴레를 벗기 위해서는 거기에 걸맞은 지능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운명의 굴레를벗을수 있는종족은드래곤, 인간, 엘프,
드워프, 라이칸드로프. 이렇게 다섯종족뿐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은 운명의 굴레를 벗은 존재가 단 한 마리도 없었
다. 그들의 나태함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의 성장을 막은 탓이다.
또, 드래곤의 본래 힘이 타 종족 가운데 굴레를 벗은 존재들보다
강하다는 것도 나태함의 이유였다.
"사실이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번에죽은 라이칸은 굴
레를 벗은 녀석이 확실해. "
"말, 말도안돼. 그런 녀석이 대체 누구에게?"
드래곤을 제외한 네 종족 중에 인간은 드워프 다음으로 약한 축
에 속했다. 본신의 능력이 엘프, 라이칸드로프에 미치지 못하기 때
문이다. 강한 두 종족 중에서는 엘프가 조금 더 강한 편이다. 결국,
굴레를벗은존재끼리 싸운다면 엘프, 라이칸드로프, 인간, 드워프
순이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단 한 명에게 죽은 것 같더군. "
"그게 누군가? 대체 누가 있어 굴레를 벗은 라이칸을 죽일 수 있
단 말인가?"
주변의 질문에 제이슨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거기
까지는 조사가 되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 죽이지 않았음은 쉽게 짐작이 가능
했다. 죽은 라이칸의 주변에 싸운 흔적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제이슨, 어떻게든 알아내게. "
"후후, 이거 재미있어 지는군. 기왕이면 인간이었으면 좋겠어.
하하하하 "
주변의 잡담을 끝으로 회의가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은 먹구름이 낀 듯 어둡기 그지없었다. 굴레를 벗은 존재가 죽었
다는 건 자신들도 죽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비록 긴 생을 무료하
게 보내긴 했지만, 남에게 죽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엘베로의 서재 안.
파론이 허겁지겁 방으로 뛰어들었다.
항상조심해야만 하는 엘베로의 서재, 이곳에서 서두르는 모습
을 보인다는 건 촌각을 다투는 일이 발생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
었다.
"찾았나?"
"예, 엘베로님. "
파론의 자신감 있는 대답에 엘베로가 음흥한 미소를 지었다. 그
가 시켰던 라한을 찾는 일. 그것만 마무리하면 지금의 찝찝한 느낌
이 모두 사라질 것만 같았다.
"어디 있지?"
"케라스 왕국에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 고민에 빠졌다. 비록 이웃 국가이긴 하
지만 이곳과는 쾌 먼 거리였다. 그를 처치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또, 루이나왕국과 케라스왕국의 사이도 대립 관계인 상
황. 왕국의 동의를 얻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흠, 뒤에서 처리해야 하는 건가?'
"정보원들을 이용해서 처리해라. "
"예? 하지만 저희 정보원들은 전투를 위해 훈련된 자들이 아닙
니다. 전투 능력이 그리 탁월하지 않은데
엘베로가 정보 조직을 만든 건 이미 삼십여 년 전 일이다. 그가
루이나 왕국의 현자가 되고 딱 일 년이 되던 해. 그때부터 왕국을
발아래 두기 위해 미리 준비를 한 거였다.
하지만, 인원이 적지 않은 그들에게 검술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전투를 위해서 필수적인 무기 조달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
다 정적들의 시선도 자신을 향해 있을 터. 자칫 무기를 구입하다가
꼬리라도 밟히 면 곤란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정적이 죽었으니 조직을 좀 더 개편해도 되었
다. 빠른 시일 안에 중앙 귀족과 지방 귀족을 아우르고 권력의 핵
심에 설 터. 그때부터 정보 조직과 더불어 암살자 조직도 키워볼
요량이었다. 물론, 시간이 좀 흐른 후의 얘기겠지만.
"우리 조직에 있는 녀석들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지?"
"거의 대부분은 소드 유저 하급 수준입니다. 시정잡배들의 막
싸움보다 조금 강한 수준인지 라
파론은 정보 조직의 전투력을 언급하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
지 않았다. 어찌됐든 엘베로가 시킨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던가. 자신은 시킨 대로 했을뿐이라는 생각이었다. 또, 스
스로도 정보원은 정보수집 능력이 우선이라 믿었다.
"라한이라는 녀석은?"
" 에?"
"라한이라는 녀석과 우리 정보원들의 전투 능력을 비교해보란
말이다. "
"아, 그렇군요. "
엘베로의 다그침에 파론이 아차 싶었다. 엘베로의 말을 듣고서
야 상황을 파악한 거 였다.
"라한그 녀석은마법을배운적이 없다. 검술도마찬가지. 전투
능력만으로 보면 시정잡배보다 더 못한 녀석이 그놈이다. "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
사실이 그랬다. 라한은그어떤 검술도배운적이 없었다. 거기다
마법사와의 접선도 전혀 알려진바 없었다. 그들에게 라한은 전투
능력이 평범한귀족자제에불과한것이다. 아니, 필슨백작가의 아
들로곱게 자랐으니 평범한사람보다못할지도모른다. 그런 약해
빠진 녀석이라면 정보 조직의 능력으로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애들 풀어서 라한을 처리해라. 그리고 남은 여력은 필슨 백작
과 접선했던 상인들을 찾는 데 주력해라. "
"예, 엘베로님. "
엘베로는 요즘 필슨 백작의 흔적을 지우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
다. 또, 그 진행도 상당히 빨랐다. 필슨 백작에게 회유된 귀족 가운
데 이미 반 정도를 완벽히 포섭한 거였다. 나머지 귀족들을 포섭하
는 일도 빠른 시일 안에 마무리 될 걸로 보였다.
문제는상인들이었다. 금전으로회수하는게 불가능한집단. 그
렇다고 힘으로 제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자금이 충분한 존재들
이기에타국으로날라버리면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또, 그들정도
의 자금이라면 타국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터. 어떻게든 루이
나 왕국 내에서 해결해야하는 데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케라스 왕국 최남단 도시인 볼리마 시.
이곳은 산맥과 인접해 있어서 용병들이 무척 많았다. 산맥은 몬
스터들의 주 서식지, 즉, 사냥감이 널리 분포된 지역으로 알려진
탓이다. 대부분 용병들이 많은 곳은 사고가 많기 마련이다. 그들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거친 성격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만큼은 큰 사
고가 벌어질 수 없었다. 국경과 가장 인접한 도시였기에 병사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사고를 칠 사람보다 그들을 관리할 사람이 더 많
으니 스스로를 자제시킬 수밖에 없었다
라한은 에어울프를 죽인 지 삼 일이 지나서야 도시에 들어섰다.
다행히 그 이후로는 몬스터를 만난 적이 없어 무사히 들어을 수 있
었다.
"이야, 역시 몬스터에서 추출할 수 있는 물품이 많구나. "
볼리마 시장을 구경하던 라한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다른
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몬스터들의 뼈와 가죽. 희귀 물품에
속하는 재료가 널려 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오호, 이건 오우거 가죽이네. 근처 산맥에서 오우거가 사나?"
오우거는 육상 몬스터 가운데 두 번째로 강하다고 알려져 있었
다. 라이칸드로프다음으로강한몬스터인 셈이다. 하지만인간들
의 대대적인 토벌로 대륙에서는 보기 힘든 몬스터가 되었다. 물
론, 대륙의 오지나 왕국 사이의 국경 지역에는 수없이 분포하고 있
겠지만.
"한 달 치 간이식량 주세요. "
"육포로 드릴까요? 아니면 마른 빵으로 드릴까요?-
"적당히 섞어 주세요. 아무거나 잘 먹는 성격이라서. "
상점 아저씨의 사람 좋은 웃음에 라한이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웃는 얼굴에 침 뱉기는 힘든 일. 상인 아저씨는 자신의 웃음이 장
사에 큰 도움이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듯했다.
"음, 다음은 무기를 사야하나?"
라한은 자신이 가진 대거보다 좀 더 큰 무기를 구할 생각이었
다. 아무래도 대거만으로는 몬스터를 상대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서였다. 이미 베어울프와의 싸움에서 한 차례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떼 대거가 아닌 롱소드로 기습을 했다면 좀 더 쉼게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라한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련의 사내들이 주위
를 두리번거렸다. 주변을 살피는 모양새가 정당한 일을 하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사람이 너무 많군 좀 더 두고 보자.
"예 "
사내는모두 세 명이었다. 모두 서른은 넘어 보이는 외모. 날카
로운 눈빛이 누군가를 지켜보는 일에 익숙하다는 걸 짐작케 했다.
"움직인다. 가자. "
" 예. "
라한이 시장 밖을 벗어나자 사내가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차고
있는 검이 어색한지 제대로주체를못하는모습이었다. 검을차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왜 저놈을 죽이라고 하는 거죠?"
"그거야 우리가 알 필요는 없지. 우린 그냥 명령받은 대로 움직
이면 된다. "
대화를 나누면서도 라한에게서 시선을 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무려 이십 년 동안 이 짓을 해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저, 저
"젠장. 쫓아!"
그들의 목표가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미행을 해봤지만, 이런 일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뒤늦게 당황한 표정으로 빠르게 쫓기 시작했다.
라한은 시장에서부터 자신을보는눈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제
란기를 꾸준히 돌리면서 예민해진 감각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그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자신을 몰래 보고 있다면 좋은 목적으로 온 사람은 아닐 터. 어떻
게든 떼어내거나 처리해야했다.
"이 방법뿐인가?"
잠깐 중얼거린 라한이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상대는 세
명. 자신의 힘이 그렇게 강하지 않으니 도망가는 게 상책이었다.
"미치겠군. "
라한이 달리기 시작하자 상대도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이건 누가
봐도 자신을 쫓아온 게 확실했다.
"젠장. 대체 내가 뭘 어쨌는데?"
라한은 자신이 쫓기는 이유를 국가 간의 관계에서 찾았다. 루이
나 왕국과 케라스 왕국은 염연히 적국이 아니던가. 적국에서 몰래
넘어왔으니 걸리면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평소에 사이좋게 지내면 누가 잡아먹나. "
라한은도주를하면서도 쾌 여유가 있었다. 심법의 영향으로 피
로를 적게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은 둘의 속도가 거의 같지만 상대는 언젠가 지칠 게 분명했
다. 그때가되면 자신은 멀리 도망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설사상
대가 더 빠르더라도 자신에게는 광견보가 있었다. 빌어먹을 신법
이기는 해도 도망치기에는 최상의 방법이다.
"이제 슬슬 지칠 때가 헙! "
"쉿! 따라와라. "
라한이 골목 어귀를 돌았을 때, 구석에서 자라등껍질만한 손이
덮쳐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기습이었다.
"누, 누, 우
사내가 라한의 입을손으로 막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라한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상대가 하는 걸 지컥봐야했다. 뒤에서 손으로
입을 가리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따라와라. "
라한을 제압한 사내는 뒤에서 쫓아오던 이들과는 다른 패거리였
다. 어떤 면에서는 적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덜컥!
라한을 제압한 사내가 쓰레기통을 밀었다. 그러자 바닥에 아귀
같은 검은 통로가 나타났다. 얼핏 보기에도 비밀통로가 분명했다.
라한은 바닥에 보이는 통로가 짐승의 입 같다고 생각했다. 바닥
에서 스며 나오는 악취가 그러했고, 바닥에 널려 있는 음식물 쓰레
기가 그러했다. 마치 음식 먹다가 입을 벌린 짐승 같았다.
"들어간다. 바닥 조심해라. "
말을 마친 사내가 라한과 함께 뛰어 들어갔다. 약간 비스듬하게
아래로 향해 있었지만, 그리 깊지는 않은 모양이다.
끼이익!
"쉿! 손 치울 테니 입 열지마라, "
"헉, 헉! 숨 막혀 죽을 뻔
"쉿!"
라한은 자신의 지금 처지가 의아하기만 했다. 뒤에서 쫓아오던
사내들은 누구이며 자신을 도와준 사람은 누구인지. 모든 게 의문
스럽 게만 느껴졌다.
"대충 간 것 같군. "
밖의 동정을 잠깐 살핀 사내가 입을 열었다. 지금 보니 얼굴도
그리 험악하게 보이지 않는 사내였다. 오히려 선이 굵은 외모라 남
자답게 보일 뿐. 자신에게 해가 될 조짐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 궁금한 모양이군 "
"누구시죠? 절 왜 도와준 건지 그리고 밖에서 날 따라온 사람
들은 뭐예요? 처음에는 볼리마 시 경비대인가 싶었십데, 그건 아
닌 것 같고. "
"글쎄. 난 아까 그놈들이 널 왜 쫓아다녔는지 모른다. 널 도운
건 상부에서 널 도우라는 명령이 내려와서 도운 것뿐이다 "
사내의 대답에도 라한의 의문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의문이 더 많아졌을 뿐이다
상부라니. 그럼 개인이 아닌 어떤 조직에서 자신을 돕고 있다는
말인가. 자신은 그 어떤 조직과도 접촉한 적이 없으니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부라고 말하는 걸 보면 무슨 조직 같은데요. 무슨 조직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미안하군. 말해도 된다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어서 말이야. "
"그럼 절 쫓아온 녀석들은 정체가 뭐예요?"
라한의 물음에 사내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말해도 되는지 어떤
지를 고민하는 모양이다. 잠시 생각하던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가.
"루이나 왕국의 현자가 누군지 아느냐?"
"현자는 무슨 현자. 그늙은 영감탱이는속만좁아 터져서는
"훗, 아는모양이군. 널 쫓아온자들은 엘베로의 정보조직원를로들
이다. "
사내의 대답에 라한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와 만난 건 아홉 살 때 단 한 번. 만약 그때 일로 자신을 괴롭
힌 거라면 속이 좁다고 밖에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
라면 아버지와의 정적 관계 때문일 터, 어쩌면 사로잡아서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할지도 모른다. 라한으로서는 절대 잡히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생긴 셈이다.
"젠장맞을 영감탱이. 어디 두고 보자. "
"지금부터 우리 조직은 널 따르는 엘베로의 정보원들을 혼란시
킬 생각이다. 그때까지 어떻게든숨어라. 신분을감추어도좋고아
주 먼 곳으로 도망가도 좋다. "
"저기요. 도와줬으면 끝까지 도와줘야죠. 알아서 숨으라는 게
말이 되요?"
라한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한 번 도왔으면 끝까지 책임
져야 하지 않겠는가.
"어리석군.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에게 있다. 네 목숨을 남에게 맡기겠다는생각자체가 어리석다는
얘기다. 쯧쯧, 하여간 귀족가의 자식들은 어쩔 수 없군. "
사내는 자신이 할 말만 내뱉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마치 라한
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몇 번 차면서 말이다.
사내가 나가자 라한은 스스로를 자책하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던 라한.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겠다고 다
짐했던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나태해졌는지 자기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약해졌군. "
긴 한숨을 쉰 라한이 밖으로 나갔다.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 스
스로를 용서하기 힘든 듯했다.
라한은 자신의 적이 정보원이라는 게 신경 쓰였다. 정보를 모으
는 자라면 자신의 작은 버릇 하나까지도 기억할지 모르는 일. 신분
을 숨기려면 외모만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라한은 신분을숨긴 채로 여관에 투숙했다. 정체를숨기기 위해
로브까지 바꿔 입은 채였다.
"후우, 그래. 이래야재미있지. 그래 한번찾아보라고."
침대에 앉은 라한이 긴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자신이 걱정한다고 해서 엘베로의 정보원들이 봐주지는
않을 일이다.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면 좋게 생각하는 게 정신건
강에 좋을 거라 생각했다.
"테세르. "
라한의 부름에 테세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모습을 보였다. 용건
이 없으면 부르지도 않는 라한이 얄미운 모양이다.
하지만, 라한으로서도어쩔수 없는 일이다. 테세르는 엄연히 정
령. 그를부르는 일 자체가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니 마구 부를수
는 없었다. 물론, 지난이틀동안단한 번도부르지 않은건 미안
했지만,
"지금부터 두 시간 동안 내가 가진 버릇을 전부 찾아내라. "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뜬금없이 뭐 이런 명
령을 내리냐는 의미였다.
라한이 테세르를 부릴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두 시간. 그 시간을
이용해서 자신의 버릇을 고칠 생각이었다. 자주 하는 말투와 취하
는 표정, 손짓 하나까지 모두.
"내가 자주 취하는 손짓을 보이면 손 위를 탁! 때려라. 표정이
나오면 얼굴을 때리고 말투가 나오면 입을 때려. 알았지?"
라한의 연이은 설명에 테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음흥
한 웃음마저 머금은 채.
이번 일에 모종의 음모를 품은 게 분명했다.
테세르는 때린다는 말에 몹시 흥분했다. 지금까지 라한에게 온
갖 구박 다 받지 않았던가. 이번 기회에 그간에 쌓인 화를 다 풀 작
정이었다.
탁- !
"아, 살살좀 때려!"
테세르가 라한의 볼을 강하게 때렸다. 전혀 의식하지 못한 곳에
서 날아온테세르의 공격. 하지만, 라한은눈물을찔끔거리며 힘들
게 참아냈다. 자신이 시킨 일이니 뭐라 할 처지가 아니었다.
딱- !
"아!"
라한은 순간순간 비명을 지르면서도 맞은 부위와 그때 자신이
행한 것을 기억하려 애썼다. 차라리 지금 조금 아픈 게 낫다는 생
각이었다.
테세르에게 맞은 횟수가 거의 오십 회에 달했다. 라한 스스로도
자신에게 이렇게 많은 버릇이 있었냐싶을정도였다. 라한 앞에서
는 테세르가 음흥한 미소를 지은 채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라한의
버릇을 최대한 많이 찾아서 그만큼 때리고 싶은 모양이다.
'젠장, 저놈 정령 맞아? 정령은 조화의 존재라고 들었는
데, 조화는 무슨 빌어먹을 놈. '
딱- !
"아! !"
테세르가 라한의 눈을 발로 차 버렸다. 라한의 눈깜짝이는 습관
을 지적한 듯했다.
실제로 라한이 눈을 깜짝이는 습관은 상당히 심각할 정도였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파르르 떠는 일. 고민에 빠질 때마다 늘 행하
는 버릇이었다.
테세르의 구타 아닌 구타는 두 시간이 다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마지막 역소환 될 때까지 못내 아쉬운 눈빛을 지었던 테세르. 겉만
검은 게 아닌 속도 검은 듯 보였다.
"으, 안 아픈 구석이 없네. "
푸념을 터트린 라한이 지금까지의 버릇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일단 계속 기억하고 있어야 이런 행동을 안 하겠지. "
버릇이라는 건 계속 인지 하고만 있으면 고칠 수 있었다.
계속 인지하고 있는 게 힘들 뿐. 고치는 일 자체는 그리 힘들지 않
은 것이다.
"전에 내가 요추혈까지 살폈었나?"
잠시 중얼거린 라한이 벽에 상체를 기댔다 그리고 혈도와 자신
의 몸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라한은 요즘 혈도를 살피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혈도가 주는 효
과와그에 따르는후유증, 그리고 오묘하게 얽힌 혈도끼리의 상관
관계. 라한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정확
했다. 인챈트의 도형들과공식도 복잡하기는 했지만, 이건 도무지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공부를하면 할수록놀랄수밖에 없군. 이렇게 깊이 있는학문
은 정말 난생 처음이다. 이걸 학문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조차도
의문이라니. 대체 이런 무공은 누가 생각해냈을까?"
무공의 효용성에 놀라는 만큼 연구를 하는 일도 즐거워졌다. 만
약 이 무공을 인챈트의 기본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비록 지금
은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언젠가는 두 학문을 연결시키겠다고 마
음먹었다.
"혈도에 대한 조사만 끝나면 신법도 바꿀 수 있다. 새로 만들 수
는 없겠지만, 광견보가 보기 흥하지 않게 바꿀 수는 있을 것이다. "
라한이 행하는 혈도 연구의 모든 기초는 제령신공과 광견보였
다. 그곳에서 보이는특징이 자신과다른 점에서 착안. 둘의 차이
에서 혈도의 효과를 다시 고찰한 것이다.
그렇게 연구하기를 벌써 한 달, 그 동안의 성과는 쾌 대단했다.
거의 30 퍼센트의 혈도를 알아낸 것이다. 나머지 혈도에 대해서만
연구를 끝내면 심법과 신법을 탈바꿈시키는 일도 쉽게 이루어질 듯
보였다.
"그럼 남은 건 검술인데
원래 라한은 검법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인챈트와 심법에 대
한 연구만으로도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전 베어울프와
의 싸움 이후로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인챈트와 심법이
아무리 오묘하다고 해도 실전에선 아무 쓸모가 없음을 깨달은 것
이다.
이때부터 최소한 자신의 몸을 지킬 정도의 힘은 필요하다고 생
각했다. 물론, 인챈트가 일정 수준에 올라마법 무구를많이 가지
고 있다면 큰 문제가 될 게 없었다. 하지만, 인챈트는 아직 실험 한
번 못해본 미지의 학문. 여행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빌어먹을. 광견보가 흥하지만 않았어도 이 고생은 안 해도
되는 건데. "
라한은 광견보를 펼치는 일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에게 광견
보는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면 기억도 하기 싫은 신법
이었다. 만약자신을추적하던 자들에게 포위됐다면, 아니면 베어
울프가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였다면 주저 없이 광견보를 시전
했을 것이다
"검술은나중에 서점에서 적당한책 하나사야겠다. 뭐, 내가용
병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 시대에 검술서는 그리 희귀한 편이 아니었다. 정령사는 대륙
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존재. 거기다마법사의 수도 많지 않았으니
대륙에는검사가판을치고 있는것과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사
나 용병이 되는 수가 검을 잡은 수보다 적은 건 당연했다.
결국, 검을쓸줄은알지만, 기사나용병이 되지 못한자들은검술
서를 만들어 파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문하생을 많이 받아들여
서 수업료를 받던가. 물론, 최하급의 검술이기는 했지만
볼리마 시의 허름한 창고 안.
다크시안이 부하들 몇 명을 모았다. 며칠 사이에 벌어진 사건과
여러 정보를 듣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됐나?"
"일단 무사히 탈출시켰습니다 "
다크시안은 엘베로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무너뜨리고 싶었
다. 비록 세 가지 소원뿐이었지만, 지난 이십 년간 당해왔던 게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 간의 고통을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흠, 그 녀석은?"
,그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생각
입니다만
"말해라 "
본래 다크시안은 남의 생각에 대한 이야기를 싫어했다. 짐작이
나 예상, 추리.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무척이나 싫어하는 성격 때
문이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그의 생각에 대해 듣고 싶었다. 어차피
라한을 만나본 사람은 그뿐이지 않은가. 그의 느낌이 그렇다면 그
릴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그자는 자신의 아버지 필슨 백작이 죽은 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
흠, 이상하군. 여기까지 오는동안 여기저기 쾌 시끄럽게 떠들
었을 텐데. "
.저도 그게 이상하긴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모르는 게 확실한
것 같았습니다. "
이필리에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라한이 보낸 시간은 거의 한
달이었다. 필슨백작이 죽은 건 라한이 집을 떠나고 열흘후. 결국
이십 일 동안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못 들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필슨 백작이 죽었다는 소식은 현재 루이나 왕국의 최대 이슈였
다 어디를 가나 필슨 백작에 대한 얘기를 했을 텐데도 듣지 못했다
니. 눈 가리고 귀 막고 지내지 않은 이상 거의 불가능한 얘기였다.
라한은마을에 들어오면 여관에 들어가기 바빴다. 또, 여관에서
도 객실을 잡자마자 그 객실로 바로 들어갔었다. 심법에 대한 연구
를 할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식사도 객실 안에서 할
정도였으니, 소문에 둔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계속 주시하고 엘베로의 정보 조직원들을 철저히 교란시
키도록. "
"예, 마스터. "
"우리 다크라이더 길드는 다음 주에 케라스 왕국 중부로 이동한
다. 수도와 인접한 도시에 자리 잡을 생각이다.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
"예, 마스터. "
다크라이더 길드는 자금과 인원 모든 면에서 준비를 마친 상태
였다. 본래 소수 정예로 활동했던 길드가 규모마저 커진 것이다.
지금 다크라이더의 힘이면 케라스 왕국 수도에 자리 잡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곳에 이미 자리 잡은 길드보다 더 거대한 힘
을 소유한 다크라이더 길드.
조만간 케라스 왕국 전역에 그 명성이 퍼질 것이다.
드워프 칼라피안
5 백여 년 전분터 이종족은 인간들과 많은 충돌을 일으켰다 인
간들의 이종족의 대한 차별이 그 이유였다 엘프는 인간들을 피해
숲에서 나오지 않았고 드워프는 광맥을 아 자리 잡고서 인간들
의 출입을 막아 버렸다 라이칸드로프 역시 대륙에서 서서히 밀려
나 대륙의 오지나 외곽으로 쫓겨나 버렸다 그렇게 계속 시간이 흘러
다면 대륙은 인간들의 세상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오크의 반란
이 없었다면 말이다
오크는 라이칸드로프를 두러워했다 이건 서로의 강약을 떠나
태어나면서 가지게 되는 본능이었다 자신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또 자신들이 아무리 강해도 라이칸드로프만 만나면 오금이 저리
는 것이다
대륙에서 쫓겨난 라이칸드로프는 대륙의 동서남북 혹은 대륙에
있는 오지에 자리를 잡았다. 너무 많은 인간의 수를 당해낼 수 없
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서쪽과남쪽, 북쪽, 오지에 자리 잡은 라
이칸드로프는 기존에 자리 잡았던 이종족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했
다. 약간의 터를 내어주어 암묵적으로 불가침의 사이를 만든 것이
다. 하지만, 동부는 본래 수많은 오크들의 땅. 그들과는 본래가 양
립할 수 없는 관계였다.
라이칸드로프의 유입으로 오크는 조금씩, 조금씩 터를 잃어갔
고, 종국에는동부를떠날결심을하게 된다. 멀지 않은곳에 라이
칸드로프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겁에 질리는 데 어쩔 수 없
지 않은가, 문제는 대륙 동부를 떠난 그들이 인간의 땅을 밟았다는
거였다.
오크의 침입과그들을막으려는 인간들의 몸부림. 하지만, 애초
부터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인간들은 각 나라에 흩어져 있었
지만 오크는 대륙 동부에 모두 모인 상태였다. 거기다 갈 때까지
갔다는 오크의 발악도 크게 한몫했다. 그때 인간들이 내린 결론은
'이종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였다 비록 염치없지만 방법이 없는
인간들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이에 엘프와 드워프들은 인간들의
손을 선뜻 잡아주었다. 2 백 년 간 이어져온 인간의 횡포를 부드럽
게 포용한 거였다.
그때부터 시작된 십 년 간의 종족 전쟁, 결국 연합군은 오크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엘프, 드워프, 인간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오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과거에는 쉽게 발견
되던 오크가대륙에서 거의 사라진 것이다. 당시의 피해가 얼마나
큰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의 종족 전쟁 이후, 이종족들은 예전처럼 대륙에 와서 함께
지냈다. 또, 인간들도 엘프와 드워프를 차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는 경우도 많을 정도
였다.
수아나 왕-국은 이종족을 특히 많이 볼 수 있는 나라였다. 왕국
내에 숲이 많고 광맥을 가진 산맥과산이 많기 때문이다. 숲은 엘
프들의 쉼터였고 광맥을 가진 산은 드워프의 일터였다. 이곳에서
소일거리를 찾아 내려오는 엘프들이 항상 성시를 이루는 곳. 때문
에 이종족에 대한 각종 법률까지 새롭게 재정한 곳이 수아나 왕국
이었다. 이름마저 숲과산이 많다는 '수아나'라는 이름을쓸정도
였다.
라한은 케라스 왕국을 벗어나는 데 무려 두 달이나 허비했다. 멜
베로 정보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느
한곳을향해곧장가게 되면, 다음목적지도쉽게 유추할터, 상대
에게 다음 목적지를 들키기 않기 위해 정말 마구 돌아다닌 것이다.
두 달 간의 도주 아닌 도주를 치렀던 라한은 테로사 시에 들어와
서도 두 달을 허비해야했다. 집에서 가지고 온 돈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파마리스 평원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두 달은 걸리는 거
리. 또, 그곳에서 평원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도 마치려면 충분히
벌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여기도 끝이군. "
테로사 시에 대한 라한의 기억은 노동밖에 없었다. 이곳에 도착
해서 허름한 여관에 묵은 후, 각종 잡부로 일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
었다. 그 동안 했던 일을 떠올리자 괜히 자신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일단 여행 물품부터 사야겠는데 음식부터 사는 게 낫겠지?"
생각을 마친 라한이 식료품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두 달간 지내
는 동안 이곳의 지리는 이미 훤하게 꿰뚫은 상태였다. 그가 한 일
이 각종 배달과공사판 인부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또, 몇몇 상점
에서는 점원들과도 상당한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이야, 이게 누구야? 라한이 아냐? 오늘 여기를 떠난다면서?"
"응, 내일 아침에 떠날생각이야. 음식 좀준비해줘 한달정도
먹을 간이식량이면 좋겠는데. "
보르도는 식료품 상점 주인의 아들이었다. 이제 스물한 살의 나
이였지만, 아들까지 한 명 딸린 엄연한 가장이다. 그 때문인지 쾌
나 어른스럽게 행동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라한에게
모두 읽혔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디로 가는 거야?"
"글쎄, 루이나 왕국 쪽으로 가볼까?"
본래 라한의 목표는 파마리스 평원이었다. 루이나 왕국이라고
말한 건 혹시나 엘베로의 정보원이 있을까싶어서 거짓을둘러 댄
것이다.
"거긴 왜 가는 거야? 그냥 여행?"
"응. 그냥 여행 "
"음, 그렇군. 자, 여기 받아. 떠나는 마당까지 돈을 받을 수는
없지. 다음에 이곳에 오게 되면꼭들르라고. 알았지?"
브로드가 음식을 건네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서는 내심 섭섭하
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겨우 정들었는데 떠나는 라한이 아쉬운모
양이다
"고마워. 나 준비할게 많아서 가볼게. "
"그래, 몸조심해. "
라한이 브로드의 말을 뒤로하고 의류점으로 향했다
라한은이곳에 처음도착할때, 말그대로 빈털터리였다. 여관에
묵을 숙박비가 없어서 가지고 있던 옷마저 처분해야 할 정도였다.
그때 모두 처분해버린 옷 때문에 거의 매일 빨래를 해야 했다. 일
할 때 덜 마른 옷을 입고 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하지만, 여행을 갈 때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라한의 목적지는
북쪽지방. 올라갈수록 추위가 기승을 부릴 게 뻔하니 방한복을 준
비해야했다.
"길 좀 묻지. "
" 예?"
갑자기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라한이 몸을 움찔거렸다. 마치
지옥에서 들려온 목소리처럼 낮고 음침한 목소리였다.
"길 좀 물어보겠다. 이곳에서 가까운 의류상이 어디냐?"
"아! "
연 이은 사내의 목소리에 라한이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서 보지
못했던 이방인이 분명했다 흰머리를 허리까지 드리운 모습이 무
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의류상의 위치를 물었다. "
"아, 따라오세요. 저도 그쪽으로 가는 길이거든요. "
말을 마친 라한이 사내 앞에서 걸어갔다. 그러면서 품에 손을 조
용히 집어넣어 검을움컥쥐었다. 혹시나 뒤에서 무슨수작을부리
기라도 하면 냅다 찌르고 도망갈 생각이었다.
의류상 앞에 도착하자 사내가 라한을 빤히 바라봤다 입가에 살
짝 머금은 미소가 라한을 긴장시키기 충분했다.
"여기가 의류상이거든요. 저기 간판 보이시죠?"
"품속에 있는 건 검이로군. "
라한은 그때까지도 품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아직 상대의 정체
가확실하지 않은상황에서 마음을 놓을수는 없는 까닭이다. 물
론, 사내가 의류상 안으로 들어갔다면 마음을 놓았을 것이다.
"그, 그게
"내가 나쁜 짓 할 사람으로 보이더냐?"
사내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얼핏 보기에도 검을
꽤 쓰는실력으로보이는사내. 그와싸워서 득될 게 없었다. 안되
면 저자세로 나가는 게 생명을 부지하는 길이다.
"후후, 준비가 철저한 친구로군. 내 이름은 루이에다. 다시 볼
날이 있겠지. 후후후. "
"예, 그렇겠죠. "
말을 마친 루이에가 의류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라한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루이에
가 볼일을 다 보고 의류상을 벗어날 때까지 동상처럼 굳은 모습이
었다.
'루이에 백준의 기사 베라스무스 루이에? 설마, 이름만 같겠
지. '
루이에는 라한이 베어울프를 쓰러뜨릴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 악착같이 달라붙어서 집념 하나로 승리를 이끌어내는 모습.
루이에에게는 그런 모습이 무척이나 생소하게 다가왔다. 자신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철저히 준비한 상태에서 싸우는 성격이었
다. 그런 자신과 어떤 면에서 약간은흡사한, 그러면서도 전혀 다
른 라한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수아나 왕국의 중앙에 위치한 멜카투라 산
이곳은 산세가 험해 인간들은 꺼리는 곳이다. 온통 깎아지는 듯
한 계곡과 그사이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 잠시만 겪어도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멜카투라 산 깊숙한 곳의 계곡.
인간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작은 동굴에 숨소리가 거칠게 들려
왔다. 간간히 들려오는 기합소리와 어지러운 발자국소리. 그리고
금속음. 누군가가 싸우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헉, 헉. 이유가뭔가?왜 날죽이려고하는 거지?난 인간들에
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 . 왜?"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연 이는드워프였다. 그의 이마에서는 연심
땀이 흘러내리고 상체 곳곳에서는 가늘게 피가 스며 나왔다. 싸움
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간 듯했다.
"너무 강합니다. "
담담한 어조로 대꾸한 사람은 인간이었다. 그것도 과거 제스란
을 죽인 베라스무스 루이에. 바로 그였다.
드워프와는 달리 루이에의 몸에는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
만 이마에서 흐르는 땀과 파르르 떨리는 손끝이 꽤나 힘들다는 걸
짐작케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정확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너에게선 운명의 굴레를 벗은 자만이 풍기는 향기가 느껴지지 않
는다.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이런 실력이 가능하지? 어째서
루이에 앞에선 드워프. 칼라피안 에이피라타는 이해할 수 없다
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신은 운명의 굴레를 벗은 존재. 물질계에서
는몇 손가락안에 드는실력이었다. 헌데, 굴레를 벗지도 않은 인
간에게 이런 꼴을 당하다니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
지도 못했다.
"흠, 또운명의 굴레 얘기군요. 전그게 뭔지 모릅니다. 너무강
해서 죽이는 것 뿐. "
"자네 같은 실력자가 어떻게 굴레를 벗지 않은 건지 모르겠군. "
"말했다시피 전 그런 이아기는 모릅니다. 칼라피안님을죽여야
한다는 것만 알뿐이죠. 그럼. "
루이에가 다시 검을 치컥 올렸다. 좀 전의 담담한 모습이 순식간
에 사라진 루이에. 그에게선 명검을 연상케 하는 날카롭고 진중한
기운이 흘러넘 쳤다.
"후후후, 그렇군. 강해서 죽는거였어. 후후후후."
자조적인 웃음을 떤 칼라피안도 검을 들어 올렸다. 루이에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소검이 었다.
대부분의 드워프들은 도끼를 사용한다. 천성적으로 힘이 강한
이들에게 딱 어울리는무기인 셈이다. 칼라피안 역시 처음에는도
끼를사용했다. 하지만, 실력이 점점 오를수록도끼에는한계가 있
음을 깨달았다. 파괴력이 강한 만큼 휘두름에 있어 제약을 많이 받
은 것이다.
이때부터 칼라피안은 무기를 검으로 바꾸고 수련에 매진했다.
움직임을 극대화 하기위해 일반 장검보다 더 짧은 길이의 검을 잡
았다. 결국, 2 백여 년의 수련 끝에 소드마스터에 도달할수 있었
다. 그리고 판테아에게 소환되었고, 운명의 굴레를 벗었다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하앗!"
루이에의 선공으로 둘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빠른 공격으
로 상대의 혼을 빼놓는 칼라피안과 그 공격을 유유히 받아내고 반
격을 가하는 루이에. 둘 모두에게서 인간으로 보기 힘들 정도의 기
운이 흘러나왔다.
"헉, 헉, 헉."
"후우. "
둘의 거친 소리와 함께 절벽 곳곳에 검의 흔적이 새겨졌다. 나무
를 조각칼로 새긴 듯 날카로운 자국이 었다.
칼라피안은 이번 싸움의 결과가 자신의 죽음임을 직감했다. 처
음에 당한 기습에 옆구리를 다친 게 화근이었다. 계속적인 싸움으
로 흘러내리는 피는 점점 많아졌고, 그에 따라 힘도 조금씩 빠져나
갔다. 가히 절망적이었다.
반면, 루이에는 약간의 여유가 있어보였다 칼라피안의 히리 부
상을 염두에 둔탓인지, 공격에 열을올리지 않았다. 시간만끌면
자신의 승리가 눈에 보이니 느긋하게 방어에 치중한 것이다.
"헉, 헉. 왜 기습을택한거냐?네 실력이면 나와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텐데. "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
잠깐 대화를 나눈 이들이 다시 충돌했다. 이번에는 좀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양상이었다. 칼라피안은 과다한출혈로 힘이 거의
빠진 상태. 이를 본 루이에의 공격이 갑작스럽게 파상적으로 변해
갔다.
"콕! "
칼라피안의 어깨에 검이 스쳐지나갔다 검에 직접 맞지도 않았
는데도 피가 튀었다. 루이에의 마나 소드에 맞은듯했다. 이번 부
상은 좀 전의 잔부상과는 달리 치명적이었다.
"이, 이런, "
칼라피안은 이번에 당한 어깨 부상으로 팔이 멈칫거린다는 걸
느꼈다. 팔을 움직이게 하는 신경이나 힘줄이 손상된 것이리라.
칼라피안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죽이지는 않겠습니 다. "
스팟! 툭-!
루이에의 검이 기이한 각도에서 칼리피안의 팔을 잘랐다. 잘린
팔과 함께 떨어지는 칼라피안의 검. 무기를 쥔 상태에서도 힘들었
으니 이미 끝난 싸움이었다.
칼라피안은 자신의 팔이 떨어져나가자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더 이상의 반항은 비굴한 발악이 될 터. 차라리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 려는 생각이 었다.
스팟! 핑!
투두둑!
루이에의 검이 칼라피안의 남은 팔과 두 다리를 잘랐다. 일평생
검을 잡은 이에게 너무 가혹한 대우였다.
칼라피안을 조용히 바라보던 루이에가 또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은 칼라피안의 심장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소드마스터에 이
르면서 쌓아놓은 마나를 검으로 흩어버린 것이다. 일단 강제로 마
나가흩어지게 되면, 다시는 모을수 없었다. 가지고 있던 친화력
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콕, 그그냥 죽여주게. "
"살려주겠다고 말씀드렸습니 다. "
"이유가 뭔가?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이유가 대체 뭔가?"
"저 검을 제게 주신 대가라고 생각해주십시오. "
칼라피안은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이라 불리는 드워프였다. 그런
드워프들에게 신화이며 영웅으로 불렸던 칼라피안. 그의 검은 대
륙 최고 대장장이의 정화가 녹아 있는 명검 중에 명검이었다. 루이
에는 그 검을 얻은 대가로 칼라피안을 살려주는 것이다.
"크크크, 날 비참하게 만드는군. "
"죄송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살려주는 일 뿐이군요. "
루이에가 칼라피안의 떨어진 팔에서 검을 챙겨 들었다. 처음 봤
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검을 소매로 슥슥 닦던 루이에
가 칼라피안의 몸에서 칼집마저 떼어냈다. 멍하게 보고 있어야만
하는 칼라피 안에게는 고문이나 마찬가지 였다.
"명검이군요. 잘 쓰겠습니다. 그럼 이만. "
루이에가 쓰러진 칼라피안에게 고개를 잠깐 숙이고는 서서히 사
라져갔다.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홀로 남은 칼라피안이 눈물을 흘렸다.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잃어버린 검을 되찾고도 싶었
다. 하지만, 힘이 없었다. 눈물로자신의 비참함을달랠수밖에 없
는 처지였다.
"여기는 좀 시원하군. "
라한은 혈도에 대한 거의 모든 연구를 마친 상태였다. 지난 두
달간 테로사 시에 머물며 꾸준히 연구한 결과였다.
지난 두 달간의 성과는 제령선공에서도 나타났다. 이전의 제령
선공에 약간의 손질을 가해 완벽한 심법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때문에 라한의 피로회복은 예전과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스무 시
간을 강행군 하고도 삼십분의 심법으로 기력을 회복해버린 것이다.
"제령선공은 더 이상 손보지 않아도 된다. 남은 건 제란기를 돌
리는 법인데 원래의 제령신공을 바탕으로 하면 며칠 내로 완성될
것 같다. 근데, 빌어먹을 광견보는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네. "
혈도를 깨우친 라한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광견보를 살피는 거였
다. 어떻게든 네 발로 달리는 모양새와 침을 흘리는 모습만큼은 고
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침이 흐르는 걸 막는 방법은그리 어렵지 않아보였다. 아직 실
험 해보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연구하면 방법을 생각해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네 발로 달리는 모양새는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몸이 네 발로 달리는 것에 최적화 되어있다
는 느낌마저 받을 정도였다.
"미치겠군. "
제령선공을 한 차례 돌린 라한이 길게 호흡을 토했다. 제련선공
을한후에는항상느끼는포근함. 그런 느낌에 젖어 이대로잠들
고 싶었다.
라한은 멜카투라 산의 쾌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심법을
운용하는 데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초입부터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던 멜카투라산. 역시나 안으로
들어가자 간간히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산새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 좋다 "
라한은 사납게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괜히 좋았다. 사람들이 싫
어하는 을씨년스러운 소리라서 좋았고, 남들의 발길을 돌리는 소
리라서 좋았다. 어찌됐든 그에게 필요한 건 남들의 이목이 미치지
못하는 장소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 이곳은 라한이 찾던 최적의 장
소였다.
"희미하게 풍기는 꽃향기가 마음에 드는군. 음?"
라한은 꽃향기에 섞여서 묘한 피냄새가 섞여있음을 느꼈다. 제
란기를 꾸준히 돌리지 않았으면 느끼지 못할 만큼의 희미한 냄새
였다.
"피냄새? 어느 쪽이지?"
라한은 피냄새를 피해갈 생각이었다. 피냄새가 풍긴다는 건 맹
수나 몬스터가 아니면 살인을 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였다. 자신 역
시 그들에게 당할지도 모르는 일.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대체 어느 쪽이야? 테세르! "
라한은 피냄새가 풍기는 정확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좌우로 마
구 불어오는 계곡풍이 판단을 흐리게 한 탓이다. 거센 바람
의 영향으로 냄새가 많이 옅어진 것도 판단을 흐리게 하는 데 한몫
했다.
"테세르 피냄새가 어디서 풍겨오지?"
라한의 물음에 테세르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피냄새의 진원지를
찾는 모습이었다. 잠깐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테세르가 한쪽을 손
으로 가리켰다. 계곡의 입구 방향이었다.
"젠장. "
라한이 허리에 찬 검을 움켜잡았다. 볼리마 시에서 새로 구입한
장검이었다. 싸구려라서 볼품은 없었지만 라한에게는 유일한 무기
였다.
"테세르 아니면 죽었어. "
라한이 산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테세르가 입구 쪽에 있다고 했으니, 안쪽으로 들어갈 생각이었
다. 평소에 장난을 좋아하고 라한을 골탕 먹이기를 좋아했던 테세
르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믿고 싶었다.
적당한 계곡까지 달린 라한이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괜히 놀라
서 몸을 사리는 꼴이 우스웠다.
"후우. "
주변을 한차례 살핀 라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 자신
을 따라온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대체 자신이 왜 도망을 쳤는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자신의 오감에 희미하게 잡힐 정도라면 최
소 수백 미터는 되는 거리, 산에서 그 정도의 거리면 굳이 조심하
지 않아도 되는 거리였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람. "
부스럭!
갑자기 들려오는 돌 떨어지는 소리에 라한이 고개를 획 돌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도망쳤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했었다. 하지
만, 지금은 오히려 왜 더 멀리 가지 않았는지 자책하고 있었다
투두둑! 틱-!
"커, 컥!"
계속 사이에서 요상한 생명체가 굴러 떨어졌다. 쓰러지거나 걸
어서 나온 게 아닌, 굴러 떨어진 모습이었다. 그를본 라한이 컥컥
거리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라한이 본 생명체는 드워프였다. 그것도 팔다리 모두 잘린 몸통
뿐인 드워프. 머리가 달려 있기는 했지만, 온통 피에 젖어 있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저, 저, 저엄마야!"
"멈 .추게. "
발길을 돌리려던 라한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쇠가
걸리는 목소리가 라한의 가슴 속 깊이 공포심을 안겨줬다. 저런 모
습은난생 처음이었다. 아니, 전생을통틀어서도저런모습을본적
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저런 모습을 직접 경험한 적은 있었지만.
'빌어먹을. 내가 인간들 식탁에 오를 때 저런 꼴이었나?'
"누, 누구요?"
라한은 전생에서 누군가에게 사육되다가 죽은 적이 있었다. 이
유는 당연히 인간의 식사였다. 대부분은 이 년 정도 살다가 식사거
리가 되겠지만, 라한은 팔 개월밖에 살지 못하고 식탁에 올라야했
다. 살겠다는 본능이 식탐을 불렀고, 그 때문에 남들보다 살쪘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나, 날 살려주게. "
"당신을 어떻게 믿죠?"
"크크크. 내가 이 몸으로 너에게 무슨 해를 가할 수 있겠느냐?
날. 꼭! 살려주게. "
드워프는 몸을 꿈쩍일 때마다 신음을 토했다. 잘린 부위가 바닥
에 부딪힐 때마다 통증이 찾아온 모양이다.
라한도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상대가 누가됐든 팔 다리가
없는상태. 자신에게 어떤 해를 가할 입장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지만, 그를 이렇게 만든 존재는 경계해야했다. 만약 아직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자신에게도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당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이 근처에 있나요?"
"벌써 두 시간이 흘렀으니 또 다른 누군가를 죽이러 갔겠지 "
드워프의 말에 라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두 시간 동안 저런
모습을 보고 있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거였다. 정말 악취미를 가
진 사람이 아니라면 벌써 다른 곳으로 갔으리라.
"정말이죠?"
"내가 거짓말을 할 드워프로 보이 나! 나 칼라피안 에이피라
타. 살아오면서 거짓말을 한 적은 없다. 믿어도 된다. "
화를 내려던 칼라피안이 통증에 몸을 뒤척이다가 다시 말을 계
속했다. 지금의 몸 상태로는 화를 내는 일조차 힘겨웠다.
루이에에게 사지를 잘렸던 칼라피안. 루이에가 사라지자 그는
집념 하나로 여기까지 기어왔다. 몸만 이용해서 무려 두 시간 동안
꿈틀거린 결과였다. 그의 집념에 비하면, 라한의 살고자하는 집념
은 아이들 장난으로 보일 정도였다.
"흠, 힘드시죠? 제가칼라피안님 기분을잘 알죠. 눈앞이 까맣
다 못해 붉게 변하는 느낌이죠? 세상이 자신을 저주하고 미워하는
것 같죠? 누군가에게 당해서 그렇게 된 거니까 복수는 하고 싶은데
능력은 없고. 정말 미치겠죠. "
칼라피안은 눈앞에 있는 인간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
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목숨이 위태로운상태였다. 이대로 더 지
체했다가는 대신관의 신성력으로도 살아남지 못할 거였다. 헌데,
힘들게 발견한 인간이 설교만 하고 있으니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
었다.
"이 이
"내가 살려주지는 않고 말만 늘어놓으니까 짜증나시죠?"
"알면 치료해라. "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요?"
드워프는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로 알려졌지만, 실제 그들의 능
력은 대장장이 능력만이 아니었다. 조각, 공예, 미술, 목공술 등
등. 손으로 행하는 모든 생산 활동에서 단연 최고의 실력을 가진
존재가 드워프였다.
라한 역시 조각과 미술이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비록 미적 감각
이 떨어져서 아름답게는 못하지만, 세밀한 터치만큼은 단연 최고
였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드워프의 능력과 비교한다면 왠지 부족
하게 느껴졌다. 드워프들이 달리 대륙 최고가불리겠는가. 거기다
집에 있던 드워프가 만들었다던 조각품. 그건 라한이 감히 따라 할
수도 없는 실력이었다.
"원하는 게 뭐냐?"
"제가 가르쳐 달라는 것 다 가르쳐주세요. "
"제자가 되겠다는 말이냐? 크크크, 내가 인간 따위를 제자로 둘
것 같으냐?"
"제자는무슨제자. 그냥가르쳐 달라는 거지. 싫으면 그만두세
요. 나야 아쉬울 것 없는데 뭐. "
말을 내뱉은 라한이 몸을 돌려 버렸다. 약간의 아쉬운 기색도 발
견할수 없는완벽한외면이었다. 라한의 행동에 칼라피안이 얼굴
을찌푸렸다 자신의 부상은인간에게당한상처였다. 지금도인간
이라는 족속들 전부 갈아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헌데, 인간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가르쳐달라고 하다니. 칼라피안으로서는 절대
하락할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자신의 부상을 치료하는 게 급선무였다. 복수
가 됐든지 대장장이 일이 됐든지 몸이 나아야 윌 할 게 아니겠는가.
"좋다. "
"처음부터 이렇게 나왔으면 고생도 덜 했을 것을. "
탁, 타닥!
라한이 칼라피안의 몸 여기저기를 두드렸다. 얼핏 보기에는 사
지가 잘린 칼라피안을 구타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무, 무슨 짓이냐"
"가만히 있어요. "
라한의 구타는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는 칼라피안의 피를
멈추기 위해 혈도를 점하는 중이었다. 팔과 다리 모두 잘렸기에 두
드리는 부위가 많아졌고, 이 때문에 구타로 보였을 뿐이었다
"어때요? 피도 멈췄고 고통도 사라졌죠?"
"그, 그렇군. "
칼라피안은 라한이라는 인간의 능력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단
순히 구타로 생각했는데 두드릴 때마다 고통은 오히려 덜해졌기 때
문이다. 거기다 한참 두드리고 나서는 팔다리 어느 한군데에서는
피마저 멈춰버리는 모습. 칼라피안에게는 경이적이고 놀랍게만 느
껴졌다
"피는 멈췄지만 아직 나은 건 아니에요. 일단 적당한 데서 요양
좀 해야겠는데
"저기요, 아저씨. "
라한의 말에도 칼라피안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동안 쌓인 피로
와 정신적 충격으로 의식을 잃은 듯했다.
"미치겠군. 드워프라는 것만 생각했지 사지가 잘렸다는 건 잊
다니. "
칼라피안을 업은 라한은 산을 내려가면서 계속 한숨을 토해냈
다. 조각이나 미술을 배우려는 의도로 살려줬던 칼라피안. 헌데,
사지가 모두 잘린 상대가 뭘 가르칠 수 있겠는가. 괜히 머리 쓰다
가 짐만 늘어난 셈이었다.
라한은 칼라피안을 산 아래 작은 마을에까지 데려왔다 피는 멈
췄지만 부상이 완쾌되지 않았던 칼라피안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신관을찾을수 없었다. 산아래에 만든작
은 마을에 신전이 들어설 리 없는 거였다.
"으 으
"정신 좀 드세요?"
칼라피안은 이틀이 지나서야 의식을 차렸다. 라한이 생각했던
시간보다 더 긴 수면이었다.
겨우 의식을 차린 칼라피안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도 상
황파악이 안 되는 지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 여기가 어딘가?"
"아저씨가 있던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오. "
라한이 칼라피안을 살린 이유는 단순히 약속 때문이 아니었다.
어차피 죽어버리면 약속도 무의미해지는 상황, 굳이 약속에 얽매
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드워프라는 게 라한의 발목을 잡았다. 각종 보물
과 공예품, 무기 수집을 좋아하는 드워프. 그들에게라면 뭔가 값비
싼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살아 있는 건가?"
.처음에는 위험했어요. 피는 멈췄는데 그때까지 흘린 피가 너무
많았어요. 또, 부상도 심했고요. 막 달려서 마을에 왔는데 신관이
없는거예요. 얼마나놀랐는지 전 아저씨가죽는줄알았다니
까요. 다행히 약초를 잘 쓰는 분이 계셔서 걱우 목숨은 건졌어요. "
길게 설명한 라한이 칼라피안의 반응을 살폈다. 이 정도 했으면
고맙다는 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말만 나온다면 고마움의 증
표로 돈이나 보물을 뜯어낼 작정이었다.
"그렇군. 근데 아까 여기가 어디라고 했는가?"
"산 아래 마을이오. "
라한의 짧은 대답에 칼라피안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판테아에 의해 운명의 굴레를 벗은 존재였다. 그때부터 산의 계곡
을 빠져나갈 수 없도록 금제까지 받았던 터. 어떻게 무사히 나을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그게 사실인가? 여기가 마을이라고?"
"속고만사셨어요? 제가아저씨 업고 세 시간이나 달려서 간신
히 찾은 마을이라구요. 도와줬으면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라한의 말이 끝나자 칼라피안이 몸을 꿈틀거렸다 그는 직접 밖
으로 나가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 상황을 도
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움직이면 안 되는데. "
"나 좀 나 좀 일으컥주게. 직접 내 눈으로 봐야겠네. "
"고집도 참. "
라한이 칼라피안을들어올렸다. 원하는 바가 있으니 일단은순
순히 들어주자고 생각했다.
밖을 살핀 칼라픽안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잠시 후, 칼라피안의 표정이 분노로물들어갔다. 자신이 판
테아에게 완전히 속았다고 생각한 거였다 죽음이 두려워 계곡을
벗어날 생각조차 못한 자신이 한심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이, 이빌어먹을. 판테아. 감히 날속이다니. 날천 년씩이나
가두다니 으아"
"판테아?"
칼라피안의 외침은 라한에게 놀라움을 안겨줬다. 묵주의 주선으
로판테아, 수영과도함께 만났던 라한이다. 그 이름을똑똑히 기
억하고 있었기에 받은 충격도 클 수밖에 없었다.
"저, 저기 아저씨. "
"으아! ! "
라한의 부름에도 칼라피안은 절규만 터트리고 있었다 판테아에
게 속았다는 것 때문에 분이 풀리지 않는 듯했다.
판테아는 칼라피안을 속인 게 아니었다. 그가 저승사자 자격을
박탈당했기에 금제가사라졌을 뿐, 그가 여전히 저승사자였다면,
라한이 계곡을 벗어나는 순간 칼라피안도 소멸되었을 게 분명했다.
"아저씨! 판테아를 어떻게 알아요? 그는 어 그러니까 저승 .
사자인데. "
라한의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졌다. 마음속으로는 판테아가 저승
사자로 생각했지만,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다분했기 때문
이다.
"응? 네가 어떻게 판테아를 알지? 너 흠, 그러고 보니 너에게
도 굴레를 벗은 흔적이 보이는군. "
"아, 하하하. 뭐 저도 굴레를 벗긴 벗었죠. "
라한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를 본 칼라피안이
묘한 눈빛으로 라한을 살폈다. 그의 눈에는 라한이 조금도 강해보
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넌 특기가 뭐냐? 검? 창? 도끼? 아니면 마법? 뭘 잘해서 운명
의 굴레를 벗었지? 아무리 봐도 그런 기미가 없는데. -
"저요. 그러니까전죽는걸 엄청 잘했어요. 그래서 운명의 굴
레를 벗었죠. "
라한이 굴레를 벗은 이유는 너무 많이 죽어서였다. 그것도 빠른
시일 안에 엄청나게. 칼라피안을 비롯한 다른 존재들과는 전혀 다
른 이유였다.
"죽었다는 거야? 죽였다는 거야?"
"당연히 죽었죠. 제가 얼마나 잘 죽었는지 아저씨는 모를걸요
"히, 참나 판테아그놈이 말년에 정신이 나갔나보군. 춥다. 들
어가자. "
때는 11 월 중순. 상체를 벗은 칼라피안에게는 쾌 추운 날씨였다
방한복을 겹겹이 껴입은 라한에게는 일상적인 날씨겠지만.
라한과 칼라피안은 다시 방에 들어왔음에도 쉽게 입을 떼지 못
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게 이유였다
자신에 대해 말을 해도 되는지, 자신의 비밀을 상대가 알아도 되
는지를 탐색하는 모습이었다. 한참동안 이어진 침묵은 라한에 의
해 깨졌다.
"흠, 어쩌다가 그렇게 큰 부상을 당했어요?"
"인간에게 당했다. "
"그렇군요. "
라한의 대답을끝으로또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칼라피안은 라
한이 펼쳤던 점혈술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라한이 굴레를 벗은
이유가 점혈술일 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눈에 라한의 장점은 그것
하나뿐이 었으니 .
"전에 내 피를 멈추게 한 방법이 네놈 특기냐?"
"뭐, 그렇다고 할수도 있겠죠. 할줄 아는 사람이 저 뿐이거든요. "
칼라피안은 자신의 예상이 확실하다고 믿었다. 세상에서 할줄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이라는 말. 그 하나만으로도 굴레를 벗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렇군. 혹시 루이에라는 인간을 아느냐?"
"루이에?루이나왕국의 기사였던 사람이죠. 다른루이에도 있
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둘은 대화할 주제가 너무 없었다. 판테아에 대해서 얘기하려 해
도 윌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라한이나 칼라피안이나 판테아를 만
난 시간이 극히 짧으니 주제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날 살려준 이유가 뭐지?"
"전에 말했잖아요. "
잠시 기억을 더듬던 칼라피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뒤늦게 라한
이 가르쳐 달라고 했던 말을 기억한 것이다. 내키지 않지만, 약속
을 했으니 들어줄 수밖에 없을 듯했다.
"윌 배우고 싶으냐? 검술? 이 꼴로 검술을 가르쳐 줄 수 있으리
라 생각하는 거냐?"
"원래는 조각이나 미술을 배울 생각이었는데 안 되겠네요. 그냥
돈으로 계산하세요. "
라한의 대답에 칼라피안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굴레를
벗을 정도의 실력이면 돈이 궁하지는 않을 터. 헌데 돈을 달라고
하니 이해가되지 않았다. 차라리 무기나 방어구를 달라고 했으면
이렇게 의아하지는 않았으리라.
"진심이냐?"
"아까도 그러더니 또 이러시네. 속고만 살았어요? 왜 사람 말을
못 믿어요?"
"음, 돈은 없지만금은 있다. 금으로치를테니 날도와줄수 있
겠나?"
칼라피안의 말에 라한이 고민에 빠졌다. 칼라피안이 무얼 요구
할지 고민하는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결론은
쉽게 나왔다. 사지 잘린 사람이 원하는 게 하나밖에 더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돌봐 달라는 거죠?"
"눈치가 빠르군. 너도 짐작했겠지만, 난 걷지도 물건을 집지도
못한다. 심지어는 화장실 볼일도 혼자 볼 수 없지. "
"그럼 제가 아저씨를돌볼 사람을 찾아줄게요. 돈만충분히 주
면 평생 돌봐줄 사람을 찾는 일도 힘들지 않을 거예요. "
라한은 칼라피안이라는 짐 덩어리를 오래 데리고 있을 수는 없
었다. 자신의 목적지는 죽음의 땅이라 불리는 파마리스 평원. 살아
온 사람이 없다는 위험한 곳에 짐을 지고 갈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거절한다. "
칼라피안은 인간들을 믿지 않았다. 자신의 사지를자른종족이
인간이니 증오심마저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눈앞의 라한만큼은
믿고싶었다. 어찌됐든자신의 목숨을살려준사람이 아니던가. 그
런 상황에서 그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면 만약 그 사람
이 돈만 받아먹고 배신해버린다면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
였다.
"전 할 일이 있어서 오래 데리고 있을 수 없어요. "
"너에게 내가가진 보물을다주겠다. 날 데리고 다니면서 지켜
주기만 하면 된다. 필요한 게 있다면 더 구해줄 수도 있다 "
칼라피안은 어떻게 해서든 라한을 붙잡아야했다. 그가 만약 자
신을 버리고 가버린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보물까지는 필요 없어요. 몇 달 여행할 수 있는 자금 정도면 되
는걸요. 뭐, 그래도굳이 보물을주시겠다면 일단보물을보고판
단하죠."
"내 보물은 계곡 깊숙이 들어가야 찾을 수 있다. 날 일으컥라. "
"그러죠. "
칼라피안을 들쳐 업은 라한이 산을 다시 올라갔다. 집 주인이 자
신들을 찾을 거라는 건 전혀 생각지 않은 채였다.
라한이 칼라피안의 보물창고에 들어왔다. 들어을 때는 잔뜩 기
대를 품고 밝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창고에 들어서는 순간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창고가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반짝이는 물건이 가득 차 있을 거라는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진 것
이다.
"이, 이게 뭐예요? 이게 무슨 보물 창고예요?"
"우리 드워프는 명품을 많이 만들지 않아. -
칼라피안은 말을 하면서도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하지
만, 라한의 표정은오히려 점점 날카롭게 변해갔다 언뜻살기마저
비치는 모습이 었다
"오호, 그래요? 그래서 일평생 명품 하나도 못 만드셨군요
"멍청하기는, 쯧쯧, 저기 끝에조그만상자를 열어봐라. 검이 들
어 있을 거다. "
창고의 끝에는 한 뼘 정도의 단이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에는 길
쭉한모양의 상자가올려져 있었다. 이만한크기의 창고를차지하
기에는 너무 작은 상자였다.
상자에 다가간 라한이 조용히 열어젖혔다. 그 상자 안에는 라한
이 사용하는 검과 비슷한 길이의 소검이 담걱 있었다. 투박하고 평
범해 보이는 모양에 라한이 실망하는 빛을 띠었다.
"검이군요. "
"그렇지. 명검이다. 내 일생의 역작이지.-
라한이 칼라피안의 말을 들으며 검을 꺼내 들었다. 상당히 가벼
운무게였다. 검푸른 빛 때문에 무거울 거라생각했던 라한, 예상
이 깨지자 조금 의아했다.
"생각보다 가볍군요. 대거 정도 무게밖에 안 되네요
"당연하지. 그건 미스릴로 만든 검이다. "
" 예?"
칼라피안의 말에 라한이 검을 다시 살폈다. 검을 여기 저기 둘러
보던 라한이 입을 떠억 벌렸다. 칼라피안의 말처럼 미스릴로 만든
검이 확실했다. 그것도손잡이와힐트, 날까지 모두 미스릴만으로
만들어진 희대의 명검이었다.
"어떠냐?"
"놀랍군요. 미스릴을 여기서 보게 되다니. "
"후후. "
라한의 말에 칼라피안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만든 역
작을 인정받은 게 기뻤던 모양이다. 하지만, 라한은 단순히 검이
좋아서 놀란 건 아니었다. 재료가 미스릴이라는 것. 그건 이 검에
인챈트를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것도 일회용 마법이 아닌 계속
해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담을 수 있었다. 미스릴은 마나를 계
속 흡수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라한은 첫 번째 인챈트 실험 대상을 발견한 것이다.
"이 검 저한테 주시는 거죠?"
"날 데리고 다녀준다면 이 검을 주지. 그리고 매 5 년마다 내가
만든 물건들을 하나씩 주겠다. 어떠냐? 이 정도면 나쁜 거래는 아
닌 것 같은데?"
칼라피안의 말에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검만 살펴본다면 다른 물건 역시 미스릴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상당히 귀한 재료로 만들었을 터. 그런
재료를 생각하자 당장이라도 허락하고 싶었다.
하지만, 파마리스 평원을 가야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죽음의
땅으로 알려진 곳에 짐을 지고 가는 게 아무래도 껄끄러웠던 것이다.
"제 목적지가 어디인줄 아세요?"
"어디 지?"
"파마리스 평원이오. 거기가 죽음의 땅이라는 건 아시죠?"
"죽음의 땅이라고 불리는지는 모르지만, 거기 날씨가특이한 건
알지. 날씨 변화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면 죽을수밖에 없는 곳이다
칼라피안은 파마리스 평원이 금지로 지정된 사실을 몰랐다. 금
지로 지정되기 이전에 이 계곡에 갇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마
리스 평원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재료를 구하기 위해 대
륙 전체를뒤질 때 들렀던 탓이다. 물론, 끝까지 완주하지는못했
지만.
"아는군요. 근데도 같이 가실래요?"
"후후, 나 역시 파마리스 평원을제대로살피지는못했다. 날씨
변화를 예측하기 힘들더군. 하지만, 대륙에 있는 그 누구보다 그곳
에 깊이 들어갔었다. "
칼라피안의 말은 드래곤을 제외한 말이었다. 기후나 날씨 변화
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드래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제집처
럼 드나들 수 있는 곳이 파마리스 평원이었다. 그들 스스로가 껄끄
러워서 가지 않을 뿐이다.
"좋아요. 허락하죠. 5 년이라고 했죠?
약속 꼭 지키시길 바랍
니다. "
"그러지. "
라한은 귀찮음과 미스릴 사이에서 미스릴의 손을 들어줬다.
파마리스 평원을 찾아가는 일 자체가 재료를 찾기 위한 여행이
었다. 하지만, 그곳에 가는 일은 계획에 그칠지도몰랐다. 그만큼
위험한곳이기 때문이다. 지금 라한의 결정은불가능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즉, 불확실한 재료와 확실한 재료 사이에서 확실한 재
료를 택한 거였다.
마법검 세라 소드
나메라 왕국
이곳은 대륙의 중앙 최북단에 위치한 왕국이다 지형적인 크기
만으로는 대륙 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는 나메라 왕국 하지만 눈과
산맥으로 덮인 지역이 많아서 실제로 사람들이 사은 곳은 다른 왕
국과 비슷했다 거기다 대륙의 지붕이자 금지로 불리는 파마리스
평원도 나메라 왕국과 접해 있었다
파마리스 평원을 북쪽에 둔 탓에 북쪽 방비는 거의 할필요가 없
었다 몬스터도 없고 사람이 다니지도 못하는 파마리스 평원 생명
체의 활동이 전혀 불가능한 곳이었기에 아예 무시를 해도 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라한과 칼라피안은 나메라 왕국의 최북단 페사 지방에 도착했
다 아직 파마리스 평원에 이르지도 못했건만 매서운 한기가 옷을
파고들었다. 가히 대륙의 북쪽 끝다운 날씨였다.
라한의 등에는 칼라피안이 모포에 쌓인 채 업혀 있었다. 어머니
가 아기를 업은 딱 그 모양이었다, 그리고 양 어깨에는 끈이 매달
려 있었고, 끈의 끝에는 사람 두 명이 누울 수 있는 썰매가 눈 위를
미끄러지며 따라왔다. 터덜터덜 걷고 있기는 했지만 그리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휘이이 잉 !
"으 으 더럽게 춥네.
"벌써부터 추위를 느끼면 파마리스 평원은 어떻게 지나려고 하
는 게냐?"
라한과 칼라피안 주위에는 사람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
다. 침을 뱉으면 채 1 분도 안되어 얼어 버리는추운날씨. 거기다
음식마저 구하기 힘든 곳이니 사람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대체 어디까지 갔던 거예요?"
"여기서 북쪽으로 2 킬로미터 정도 더 들어갔었다. 파마리스 평
원에는 1 킬로미터 정도 들어간 곳이지, "
처음 라한은 칼라피안을 수레에 실고 밀고 다녔다. 힘을 적게 소
비하면서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페사 지방에 도착한 후부터는 칼라피안을 업고 다녔다.
서로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나누어야 수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대
신, 수레에는 엄청난 양의 식량을 실었다. 칼라피안의 강력한 주장
으로 사들인 거의 5 년 치는 되는 막대한 양이었다. 물론, 식량은
자리를 적게 차지하는 육포가 전부였다.
"미치겠군. 이런 곳이니 금지로 지정됐지.
"이쯤에서 자리를 잡아야겠군. "
"예? 아직 저녁도 안 됐는데 그만 가요?"
지금까지는 낮에는 계속 이동, 밤에는 땅을 파고 자는 방법을 이
용했다. 아무래도 밤이 낮보다는 더 춥기 때문에 이동을 자제한 것
이다. 하지만지금시간은이제 걱우오후두시, 쉬기에는너무이
른 시간이었다.
"여기서 기후 변화를 살펴봐야겠다. "
"기후 변화요?"
푸석! 푸석!
라한이 눈을 파헤치며 칼라피안에게 물었다
기후 변화에 대해서는 칼라피안이 오래전에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곳과 거리가 많이 남았기에 그냥 흘려들었었다.
하지만, 직접 매서운 추위를 겪고 나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나도 확실한건 아니지만, 이곳은 기후가 일정한 주기로 바꿔
다. 따뜻하게 되는 그 시기를 찾아내서 파마리스 평원에 들어가야
돼. 실수로 주기 측정을 잘못하면 너하고 난 얼음 동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
"그거야 바보들이나 그렇죠. 날씨가 좀 추워진다 싶으면 땅을
열심히 파면 되요. 땅속은 바깥보다 훨씬 따뜻하잖아요. "
대화를 나누면서도 라한은눈 파헤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잠깐
더 파고 나자 이내 땅이 드러났다.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은 땅이었
다. 라한이 허리에서 삽을 빼내서 파기 시작했다. 이미 몇 차례나
해본 일이라서인지 익숙한 몸놀림이었다.
"내가 들어간 파마리스 평원은 거의 입구 부분이었다 그곳에는
엄청나게 많은 시체들이 썩어가고 있었지 "
"그래서요?"
대부분은 얼음인 상태로 부패되고 있었지만, 몇몇 존재는 부패
가 진행되지도 않았더군. 근데 그 녀석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
나? 손에는 빵이 들려 있었고 입에는 씹다 만 빵 조각들이 그대로
있었다. "
칼라피안의 말을 듣던 라한이 땅을 파던 손을 멈추었다. 그가 한
말의 의도를 확실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빵을 손에 잡고 있고 입에 음식물이 남아 있었다는 말. 그건 먹
다가 죽었다는 얘기였다. 추위를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순식
간에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추위를 느꼈을 땐 이미 죽은 목숨
이었다.
"그 그럼 순식간에?"
,그래 내가 본 그들 모습은 순식간에 죽는 것이었다. 눈동자에
도놀라는 기색은 볼 수 없었지. 아무것도 모르고 한순간에 얼어
죽었을 거다. "
라한은 자신이 파마리스 평원을 너무 쉽게 봤음을 인정해야했
다. 자신의 지식을 믿고 만용을 부렸음이다. 칼라피안이 멍한 표정
의 라한을 보면서 혀를 찼다
,야, 라한. 그래서 기후변화를살피자고하는거다. 그놈들다
순식간에 얼어 죽었는데 나는 왜 살아 있었겠냐?"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었겠죠, "
.맞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기후가 되는날이 분명히 있을 게
다. 우린 그 날을 어떻게든 알아내야 돼. "
칼라피안의 말에 라한의 고개가 조금 끄덕여졌다. 사부였던 제
스란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온 길이었다. 비록 날짜를 찾는 게 쉽
지는 않겠지만, 그 날짜를 찾을 수만 있다면 제스란처럼 이동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앞으로 쾌 오랫동안 여기서 머물러야 한다. "
"혹시, 5 년 치 식량을 모조리 사들인 것도 그 이유예요?"
"당연하지. 내가 너처럼 대책 없이 움직이는 줄 알았냐?"
라한이나 칼라피안 모두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이곳에서 과연 몇
년을 버틸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나름대로 준비를 하
긴 했지만 스스로가 못미더웠다.
"에고, 5 년이라 뭘 하면서 보내지?"
"나한테 검술이나 배워라. "
라한은결국, 제란기를돌리는심법을완성시켰다. 몇 차례 시행
착오를 거쳐 자신의 몸에 딱 맞은 심법을 만들어낸 것이다. 라한은
그 심법을 제란마공이라 불렀다. 심장에서 시작하는 제령선공과
구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은 이름이었다.
멜카투라 산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 두 달 그 동안 라
한은 제령선공과 제란마공에 상당히 익숙해졌다. 그 뒤부터는 피
로도 쉽게 느끼지 않았고 오감도 동물 이상으로 발달 되었
다. 또, 힘도 이전보다 두 배 이상 강해졌고 몸놀림도 조금은 빨라
졌다.
칼라피안은 라한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내심
탐내고 있었다. 제자로 삼으면 자기 이상의 실력을 갖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루이에에게 복수도 할 수 있으리라
"팔도 없으면서 검술을 어떻게 가르쳐요?"
"내가 하나씩 설명해 줄 테니까 할 수 있을 거야 "
"음, 쉼지 않을 텐데, "
"야, 이놈아! 그럼 넌 몇 년 동안뭐 할 건데?눈 내리는하늘만
멍하게 보고 있을 거냐? 네가 말한 심법이라는 것도 하루에 세 번
씩만 돌린다면서?"
라한이 이곳에서 할 일이라고 해봐야 검에 인챈트를 새걱보는
일과 하루 세 번 시전하는 심법이 끝이었다. 어차피 남아도는 시간
이니 검술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팔이
없는 칼라피안이 검술을 가르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래도 팔이
"너 머리 좋다면서? 대충 설명 듣고 네 몸에 맞게 바꾸면 될 거 아
냐. 어차피 너하고 나는 종족이 달라서 똑같이 배울 수도 없는데 "
칼라피안의 말에 라한도 마음을 굳혔다. 남는 시간 소일한다는
생각보다는 연구한다는 게 더 마음에 끌렸다.
그는 검술을 자기 식으로 바꾸는 것과 인챈트와 혈도를 연구하
던 일을 같은 맥락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이 노력하는 만큼 얻
는 게 성과가아니던가. 또, 모든학문은그누군가에게서 시작되
었을 터. 그창시자가한 일을자신이라고못할 리 없다고 생각했
다. 여차하면 자신이 검술의 창시자가 되면 그만이었다
"근데 아저씨. "
"왜?"
"흰머리 생겼네. "
라한의 대답에 칼라피안이 눈을 여기저기 돌리기 시작했다. 팔
이 없어서 머리카락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라한이 칼
라피안의 흰머리를 눈앞으로 당걱주었다. 칼라피안의 머리가 대체
로 길었기에 이런 일도 가능했다.
"흰 머 리군. "
잠깐 생각하던 칼라피안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무언가
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약간 멍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를 쳐다보던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 렸다
"아저씨, 왜요?"
"아니다. "
라한의 대답에 칼라피안이 대답을 회피했다. 라한에게 말할수
없는무엇인 듯했다. 라한도 더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남의 머리
가 흰색으로 변한 것에 관심을 가질 만큼 라한 스스로도 여유가 없
었기 때문이다
베르네의 레어 안.
로이나는 정령과 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급 정령과 놀면
라한과함께 지낼 때가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한을찾으려
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라한이라면 스스로를 발전시
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 그를 지켜보며 느꼈던 절대적인 자신감이
이런 일을 가능케 했다.
"실프! 라한은 뭐하고 지낼까 7"
대답할 수 없는 실프였지만, 로이나는 혼자서 잘도 중얼거렸다.
이렇게 혼자서 말하기만 해도 괜히 즐거운 듯했다.
"누님! 로이나 누님! "
"어? 베르네 왔어? 생각했던 일은 잘 됐어?"
베르네는 마법물품을 구하기 위해 대륙에 나갔었다. 본체로 국
왕을잠깐 핍박해서 필요한물품을 얻는 행동이었다. 이번에 베르
네는 루이나 왕국을 방문했다. 라한에 대한 소식도 들어보자는 생
각에서였다.
"예. 수정구슬은 충분히 구했어요. 근데
"왜. 무슨 일 있었어?"
베르네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로이나가 다시 물었다. 베르
네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예사롭지 않은 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유희를 겪으며, 웬만한 일에는 무감각해지기
때문이다.
"그게 필슨 백작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
"무슨 문제?"
짧게 되물은 로이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슨 백작가라면 라
한이 몸담고 있는 가문. 그곳에 문제가 생겼다면 라한에게도 일이
생겼다는 판단이 었다.
"어제 필슨 백작가 사람들이 교수형 당했습니다. "
"뭐? 마, 말도 안 돼. "
로이나가 아는 필슨 백작은 충신이었다. 오래 겪지는 못했지만,
항상 국민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 왔던 귀족. 국왕에 대한 충성
심으로 정치에 대해 매일 고민했던 사람이 어째서 로이나는
베르네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거기다 필슨 백작가 사
람들이라면 라한도 포함될 터. 그의 생사가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
었다
"그, 그게 반역죄랍니다. 국민들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인데
아직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
"라한은? 라한이는 어떻게 됐어?"
"벌써 2 년 전에 집을 나갔답니다. 라한이의 형인 레테아 필슨이
라는 인간도 아들만 데리고 도주했습니다. 남쪽으로 도주한 것 같
은데 자세히 알아보지 않아서 잘 하지만, 왕국 추격대가 남쪽
으로 갔으니 거의 맞을 겁니다. "
베르네의 말에 로이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찌됐든 라한은
살아 있다는 얘기였다. 비록 떠돌이 생활을 할지라도 살아만 있다
면, 그거면 충분했다.
"누구지? 필슨 가문을 반역죄로 몰고 간 녀석들이 누구였어?"
로이나의 몸에서 엄청난살기가뿜어져 나왔다. 좀 전의 초조하
던 기색은 완벽히 사라진 드래곤 본연의 모습이었다.
로이나를 본 베르네가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자신도 드래곤이
기는 하지만 로이나의 힘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미약한 존재였다.
로이나의 살기를 드래곤으로서도 정면으로 버티기는 힘들었다.
"누, 누님. 고정하십시오. "
"누구지? 죽여 버리겠어. 라한이 아팠던 것 이상의 아픔을 돌려
주겠어. "
로이나의 살기는 주체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 상태로 루이나 왕
국으로 간다면 주동자만 처리할 리 없었다. 어쩌면 한 나라를 폐허
로 만들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누님. 복수는 라한에게 맡기죠. 2 년 전에 집을 나갔다니까 잡
히지는 않을 겁니다. "
"용서할 수 없어. "
누님. 이건 라한이 몫입니다. 누님이 복수를 대신한다고 그 녀
석이 좋아할 거라 생각합니다 누님! 제발!"
베르네의 연이은 설득에 로이나의 살기도 차츰 가라앉았다. 베
르네의 말처럼 부모의 복수는 자식의 몫이었다. 로이나가 복수를
한다고 해서 라한에게는 그 어떤 이점도 없는 것이다.
"라한의 형은 어디 있지?"
"찾아볼까요?"
찾아야겠어. 찾아서 도와야지. 라한이를두 번 아프게 할수는
없어, "
"제가 알아서 할게요. 누님은 여기서 쉬세요. 그럼. "
말을 마친 베르네가 레어를 벗어났다. 로이나의 화를 조금이라
도 가라앉히려면 어떻게든 레테아를 찾아야 했다 그가 또 다시 루
이나 왕국에 의해 죽는다면, 로이나의 화가 어디까지 미칠지 모를
일이다. 어떻게든 좋은 소식을 안걱줘서 안심시켜야 하는 입장이
었다.
드래곤의 물질계 개입은 종종 있어왔다. 때로는 나라 자체를 파
괴시키기도했고, 어쩔 때는순식간에 부강하게 만들기도했다. 하
지만그건 과거의 일이었다. 지금의 드래곤로드 베르타라스는드
래곤의 물질계 개입을극구반대했다. 아니, 벌써 몇 만년 전부터
물질계 개입을 반대했었다. 너무 강한 존재의 개입으로 인간계가
흐트러질 걸 염려한 결정이었다.
이때부터 드래곤의 인간계 개입은 유희로 한정지어졌다. 그 정
도의 개입만이 균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다.
칼라피안과 라한은 페사 평원 북쪽 끝자락에서 2 년을 보냈다.
그동안 라한은 제란마공과 제령신공 둘 모두에서 어느 정도의 성취
를 거두었다. 먼저 제란마공은 제란기를 검에 약간씩 담는 정도가
가능해졌다. 소드마스터의 마나소드에는 아직 못 미쳤지만, 조만
간그수준에 도달할걸로보였다 하지만, 검술은거의 진보가없
었다. 이에 칼라피안은 태어나서 본 모든 종족을 통 틀어 가장 자
질이 없다고 힐책했다.
제령선공에 있어서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제령기는 심장에 띠를 이루고 둘러싸고 있었다. 라한은 이 띠를
여러 개로 나누어 서클을 형성하려 했었다. 그렇게 하면 상위서클
마법을사용할수 있으리라는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제령기는본
질이 마나와 달라서 나누는 게 불가능했다. 이에 라한은 제령기를
두껍게 만들어서 띠 자체를굵게 만들어버렸다. 마법 주문을 전혀
몰라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마법을 사용한다면 강하게 사용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1 서클 마법뿐이겠지만.
슥! 슥! 스걱!
"야, 이놈아! 너 뭐하냐?"
땅 속의 벽에 기댄 칼라피안이 짜증스럽게 외쳤다. 그는 지난 2
년 사이에 부쩍 늙어보였다. 머리는 거의 희게 새어 있었고, 얼굴
여기 저기 에 주름도 많아졌다.
"밖에 날씨는 어때요?"
"밖은 여전하지. 그나저나 뭐하냐니까? 퀘 귀한 검에다가 흠집
을 내고 그래?"
라한은 칼라피안에게 받은 검 세라 소드에 조각을 하
고 있었다. 지난 2 년 동안 계속 시도해온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까지는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재질이 미스릴이라 그 강도와 경도
가 너무 뛰어났기에 불가능했던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분명히 조각을하고 있었다. 최근에 얻은제란마
공의 성취로 조각칼에 제란기를 맺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비록 1
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길이의 제란기였지만, 조각하기에는 충분
했다.
"보면 몰라요? 조각하고 있잖아요. "
"미친놈아! 누가 그 귀한 검에다 조각하라고 하던?"
"이 검은 오래전에 제 검이 된 걸로 아는데요. "
칼라피안은 계곡에 갇혀 지낸 천 년 동안 단 세 개의 물품만 만
들었다. 팔찌, 목걸이, 검. 이 중에 칼라피안이 가장 아끼는물건
은 단연 검이었다. 천 년의 시간 가운데 거의 반을 세라 소드에만
투자했으니 아끼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세라소드의 주인은엄연히 라한이었다. 세라소드
로 땅을 파든지 돌멩이를 다듬든지 칼라피안이 뭐라 할 입장이 아
니었다
"이, 젠장. 누가 조각칼을 그 따위로 잡으래?"
"제 방식이니까 뭐라고 하지 마세요. "
라한은 거의 다섯 시간째 조각을 하고 있었다. 검 구석구석에 새
겨진 미세한도형들과공식들. 얼핏 보기에도조각이 거의 막바지
에 이르렀음을 느낄 수 있었다.
"흠, 조각실력은 좋군. 그런 세밀한조각은 누구한테 배웠냐?
인간 중에서 그 정도로 새길 수 있는 놈들은 없을 텐데. "
라한은 칼라피안의 말을 깨끗이 무시한 채 조각에만 열중했다. 지
금 상황에서는 옆에서 뭐라고 떠들어도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이놈이 어른이 말하면 대답을
"아싸, 끝났다. "
라한이 조각칼을 내려놓고는 긴 숨을 토해냈다. 장장 다섯 시간.
그 동안 허리한 번 못 펴고 조각을 한 것이다.
"으차! "
길게 기지개를 켠 라한이 검 여기저기를살폈다. 자신이 조각을
한 게 제대로 됐는지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라
한이 밝게 웃으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검의 도
형이 멋있어 보인 모양이다.
실제로 세라 소드는 큰 변화를 찾기 힘들었다. 엄청나게 많은 공
식과도형을새기기는했으나, 그선이 너무가늘었다. 소드마스터
에 이른 칼라피안 조차도 자세히 봐야 알아볼 정도였다
"이놈아! 대체 뭐한 거냐? 그게 그 뭐시냐? 그 인챈트라고 하는
거냐?"
"인챈트에 대한 준비 과정을 마친 거예요. 이제 이 검을 활성화
시키는 일만 남았죠. "
"어떻게?"
"옆에서 지켜보세요. "
말을 마친 라한이 바닥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세라 소드에
그려진 것과 비슷한 그림이었다.
한참동안 그림을 그리던 라한이 세라 소드를 들었다. 그리고 그
림에 흠집이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천천히, 정신을 집중해서.
"전지전능한 만물의 힘이여. 그대의 힘을 빌려 이곳에 숨결을
토해내려 합니다. 그대의 깊은 숨결과 따뜻한 한 마디가 세라 소드
에 머물도록 해주십시오. 아메나 이티레이타 로토리아스 페베마
인챈트리아트!"
라한의 영창이 끝나자 바닥의 그림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왔
다. 칼라피안도처음보는생소한광경이었다. 바닥에서 나온빛이
세라 소드를 감싸더니 이내 흡수되듯 사라져버렸다.
"된 건가?"
"아까 뭐라고 외친 거냐? 아메가 뭐가 어쩌고 하던데. "
"인챈트 주문이 에요. "
라한의 대답에 칼라피안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라한의
말대로라면 세라 소드가 마법검으로 변모했다는 얘기였다. 자신이
만든 역작이 마법검으로 변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
작했다.
마법을 담았는데?"
"피닉스(4 서클)하고 파이어 실드(4 서클) 두 개 담았어요. "
피닉스마법은시전했을때, 불새가날아가는마법이었고, 파이
어 실드는 불의 장막을 주변에 둘러 공격을 막는 마법이었다. 피닉
스는 공격력이 강했지만, 폭발형이 아니었기에 범위가 넓지 못했
다. 또, 파이어 실드는 마법 공격을 막는 데 탁월했지만, 물리 공격
을 막는 힘이 미약했다.
"해봐! "
"나가죠. "
라한은 자신이 만든 인챈트가 성공할 걸 확신했다. 오랫동안 연
구하며 고민해온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였다
밖으로 나온 라한이 세라 소드를 슬쩍 들어 올렸다. 막상 자신이
만든 마법검을 시험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잠시 심호흡을 하던 라한이 전방을 향해 크게 외쳤다.
"피닉스! "
라한의 외침에 세라 소드 끝에서 직경 일 미터가 넘는 거대한 불
새가 쏘아져나갔다. 칼라피안에게는 경악을 라한에게는 감격을 주
는 모습이었다. 쏘아져 나간 불새는 거의 이십 미터 가까이 날아간
후에야 서서히 사라져갔다. 최소 전방 이십 미터에 일직선으로 선
적이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게 분명했다
"파이어 실드! "
라한의 외침과 함께 검 주변에 순식간에 불의 장막이 생걱났다.
라한을완벽하게 둘러싼모습이었다. 불의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
도 라한은 뜨거움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시전자를 보호하는 파이
어 실드의 특징이었다. 라한이 만들어낸 불의 장막은 십 분 정도
지속된 후에 사라졌다.
"멋지군. "
"하하하하. 아하하하하. 성공이다. 성공이야. 하하하하하. "
라한은 정말 띨 듯이 기뻤다. 지금까지 마음속으로 수십 수백 번
을 성공시켰던 인챈트였다. 한 번만 성공시키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한 적도많았다. 그만큼해보고 싶고 절실했던 인챈트. 그꿈
을 오늘에서야 이룬 것이다.
"그거 계속 쓸 수 있는 거냐?"
"아니요. 이론대로라면 두 번이 한계예요. 다시 사용하려면 하
루가 지나야해요. 그러니까 하루에 두 번씩이 한계예요. "
인챈트는 서클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공식과 복잡한 도형이 필
요했다. 이 때문에 서클이 높아질수록 인챈트 시키기는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라한이 현재 가능한최고의 인챈트는 5 서클. 하지만, 라한은안
전하게 4 서클만 인챈트 시켰다. 처음이기에 가능한 공식 중에서 한
단계 낮춘 것이다.
레테아는 의문의 강자에게 도움을 받은 후, 대륙의 동쪽으로 향
했다. 루이나 왕국의 추격자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 그
들의 눈을 피해 일단 목숨만은 연명하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딸린 자식이 없었다면 죽기 살기로 덤볐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에게는 당시 다섯 살이던 아들이 있었고, 그를 살리기
위해 구차한 목숨을 연명해야했다.
"휴. "
밭을 일구던 레테아가 이마의 땀을 쓸어 내렸다 그가 들고 있던
호미를 내리자 멀리서 아들 휴란트가 달려왔다. 올해로 여덟 살이
된 휴란트는 집안의 과거를 아는지 모르는지 밝은 표정이었다.
"아빠! "
"어이쿠! 우리 휴란트 왔구나.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레테아의 말에 휴란트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 젓는 모습에 레
테아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레테아는 엘베로의 대한 복수심을 뜨겁게
불태웠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 루시아. 그들의 얼굴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인 휴란트가 계속눈에 밟혔고, 결국 이곳
에서 범부로 살아갈 결심을 할수밖에 없었다. 집안의 정치 싸움
에 아무것도 모르는 휴란트까지 희생양으로 삼을 수는 없었기 때
문이다.
"아빠! 누가 목책을 마구 두드려!"
"목책을? 로이타 아저씨인가?"
"응. 맞아. "
휴란트의 대답에 레테아가 그를 어깨위에 올렸다 여덟 살이 되
어 그리 작은 몸집도 아니건만, 레테아에게서는 조금의 힘든 기색
도 찾아볼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한때 루이나 왕국의 뛰어난 기
사가 레테아 아니던가 지금 밭일을 하며 지낸다고 하여 과거의 실
력이 쉽게 사라질리 없었다.
휴란트를 어깨에 올린 레테아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직 해
야 할 밭일이 조금 더 남기는 했지만,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레테아가 있는 곳은 어느 왕국 소속이라고 보기 힘든 오지였다.
동으로는 인간들의 금지라 불리는 레비안 산맥이, 서쪽으로
는 라비라 왕국과 케밀턴 왕국의 경계선이었다. 드래곤의 성지로
알려진 레비안산맥과 인접한곳. 이 때문에 라비라왕국, 케밀턴
왕국의 관심이 끊어진 곳이었다.
좋은 점이라면 그 어떤 왕국에도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몬스터의 침입이 잦은곳이었기에 항상위험이
도사리는 곳이기도 했다.
왕국에서 버림받은 곳이기는 하지만, 이곳에도 쾌 많은 사람들
이 살고 있었다. 인간보다 차라리 몬스터의 위험이 덜하다고 생각
하는 이들이었다. 대략 삼십여 가구 백이십여 명.
그들은 서로 다른 고향을 가진 타인이었지만, 그 어느 곳보다 서
로를 아끼며 살았다. 왕국에서 버린 이곳까지 올 정도라면 인간에
게 정이란 정은 다 떨어졌을 터, 그들끼리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로이타아저씨!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또, 몬스터라도 쳐들어
온 겁니까?"
"아, 그건 아닐세. 자네한테 긴히 전해줄 말이 있어서 왔네. "
레테아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무척 경계 했었
다. 그들 대부분이 누명에 의해 도망쳐온사람들. 사람에 대한 믿
음이 그리 많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레테아는 이 사람들의 마음을충분히 이해했다. 또, 이
런 사람들은 한 번 마음을 열면 가족보다 더 따뜻하다는 것도 잘 알
았다. 레테아는 이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
다. 마을의 방책을 쌓을 때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했고, 몬스터
쳐들어오면 최전방에서 검을 들었다.
이런 일이 두 달 정도 이어지자 마을 사람들도 그를 인정하기 시
작했고 지금은 가족보다 퍼 따뜻한 사이가 되었다.
"로미타 아저씨! 얼굴 까맣다. "
"이놈, 휴란트! 로이타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느냐? 날 재수 없
로미타하고 혼동하다니 혼 좀 나야겠구나. "
휴란트를 호통 친 로이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휴란트는 마
을 사람들 모두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이곳에 아이가 휴란트
뿐이기도 했지만, 그의 외모나 행동이 너무 귀엽다는 게 더 큰 이
유였다.
"핏, 얼굴 시커먼 건 똑같으면서 뭐. "
"허허, 휴란트. 그만해라. 로이타 아저씨 아까하실 말씀이 있
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레테아의 말에 휴란트도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의 표정에서 입
을 다물어야 한다는 걸 아는 듯했다.
"허허, 깜빡했구먼. 내일오크마을을공격할생각일세.그 소식
을 전해주려고 방문한 걸세. "
"아, 그럼 가야죠.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
"그러세 "
마을 사람들은 방책을 넓게 쌓아놓고 그 안에서 모든 생계를 해
결했다 방책 밖은 방어가 힘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몬스터도 공격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이곳의 몬스터는 대부분오크. 지능이 있는몬스터였기에
자신들의 불리함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오래 두면 그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들의 번식력이 인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기 때문이다. 이
에 사람들은 가끔씩 오크 마을을 습격하기도 했다. 그들의 수를 계
속해서 줄여 후일 닥칠 큰 일험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휴란트! 들어가자. "
"응, 아빠!"
대륙 전체에서 오크를 발견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
족 전쟁 때 엄청난수의 오크가 떼죽음을당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곳 레비안 산맥 부근만큼은 쾌 많은 오크들이 살고 있었다. 드래
곤의 영역과 멀지 않아서 인간과 라이칸드로프의 접근이 거의 없었
기 때문이다.
레테아가 있던 집을 먼 곳에서 두 쌍의 눈이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머릿결의 여자와 금빛 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로이나 누님! 잘 살고 있군요."
"라한이만 찾으면 되는데. "
로이나와 베르네. 그들은 지난 3 년 간 수시로 레테아를 살펴왔
다. 그가 살아 있어야만 라한에게 조금이나마 덜 미안해서였다.
3 년 전, 레테아마저 죽임을 당했다면 로이나의 분노를 잠재울
방법은 사라졌을 게 분명했다. 결국, 루이나 왕국의 폐망까지도 이
어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베르네가 구한 셈이었다.
.근데 복수 같은 건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네요. "
"할 수 없는 거겠지. 아들이 있으니까. "
"그래도 대부분의 인간들은 부모를 죽인 원수를 용서하지 않잖
아요. 못 이긴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달려드는 종족이 인간 아니었
나요?"
베르네도 쾌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많은 유희를 해봤었다. 그가
본 인간은 복수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종족이었다 그럴 때면
과연 이성을 가진 존재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때로는 가슴을 억누르고 피눈물을 삼키더라도 참아야 할 때가
있어, 레테아라는 인간도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절실
할거야. 참을수밖에 없으니까, 참지 않으면 안되니까차라리 마
음속에서 지워버린 거지. 하지만, 휴란트라고 했던가? 그 아이에
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어 질 거야. 지금까지
참고 참았던 복수심이 다시 불타오를 테니까 "
베르네보다는 로이나의 유희 횟수가 더 많았다. 살아온 날이 두
배 가까이 차이 났으니 당연했다. 이 때문에 인간에 대해서도 베르
네보다 로이나가 더 잘 알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큰 모습이 아닌
소소한 마음까지도
엘베로는 예전의 저택을 버리고 더 큰 저택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의 권력이 상승함에 따라 그가 거주한곳도 함께 커졌기 때문이다.
새로 지은 거대한 저택은 이필리에 안에서 왕궁 다음으로 큰 크
기였다. 그의 작위 역시 공작이 되어 있었다. 현자로불리는각왕
국의 사람들 중 가장 높은 작위였다.
또, 저택을 지키는 사병은 왕궁 근위기사를 방불케 할 만큼 정예
병이었다 피로 올라선 위치인 만큼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는 게
무서웠으리라.
요즘 엘베로는 거의 매일 악몽에 시달렸다. 두 달 동안 시달린
이 꿈 때문에 얼굴마저 핼쑥하게 변해 있었다.
"파론! "
"예, 공작 전하. "
공작 전하라는 말에 엘베로가 슬쩍 미소 지었다. 그가 공작의 작
위에 오른 건 한 달 전. 그때부터 계속 들어온 말이지만, 들을 때마
다 기분이 좋았다.
요즘 내가 계속 악몽에 시달린다는 건 알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요즘 너무 많은 업무에 시달려서 그리 된
거라 생각합니다. 좀 쉬시는 게 어떨지요?"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가 생각한 악몽
의 이유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파론은백작의작위에올라있었다. 에체베라파론백작. 엘베로
가 공작의 작위에 오를 때 함께 받은 작위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의 작위에 만족하지 못했다. 과거에 엘베로의 부관으로 그의 바로
아래 지위이지 않았는가. 엘베로가 공작이 되었으니 자신은 후작
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음이다.
엘베로도 그의 뜻을 알고 있었기에 조만간에 후작으로 올릴 생
각이었다. 자신의 수족이 높은자리에 오르는건 자신의 권력 역시
강해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자신을
주시하는 귀족들이 너무 많은 탓이다. 오래지않아 정리되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왜 이런 악몽에 시달려야하는지. 그
리고 결론을 내렸지. "
"결론이라고하시면 . "
"내가 지금까지 하고자 한 일은 모두 성공했다. 단 하나만 빼고. "
엘베로의 말에 파론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가 무엇을 실패했
지 떠올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몇 년 전이었다면 실패의 의미가 라한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 동안 그에 대해 까맣게 잊고 지냈고, 자
신 역시 귀족의 생활로 나태해졌기에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공작 전하께서 실패하신 일이 있습니까?"
"있지 필슨 백작가의 잔당. "
"아! "
파론은 엘베로의 말에서 레테아를 연상했다. 라한은 그 이전에
기 억에서 지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테아라는 이름도 까맣게 잊고 지냈었다. 필슨 백작가
의 사람들을 교수형 시킨 그 날부터 기억 속에서 지운 이름이었다.
비록 그가 살아서 도주하기는 했지만, 혼자서 뭘 할 수 있겠냐 싶
었다. 지금힘은자신에게 있었고, 그는반역자 집안의 후손일 뿐.
그들이 복수를 꿈꾼다 해봐야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될 뿐이었다.
"파론! 라한을 찾아라. "
"예? 레테아가 아니라 라한이오?"
"레테아 그놈은 별 신경 쓸 것 없다. 찾아도 그만 못 찾아도 그만
이지. 하지만, 라한그놈은다르다. 전 대륙에 엄청난상금을걸어
서라도 반드시 죽여라. 우리가 키운 블랙 카이를 모조리 풀어서라
도 반드시 죽여야 한다. "
블랙 카이는 엘베로가 후작의 작위에 오른 후에 만든 조직이었
다. 이전의 조직이 정보 조직인데 반해, 블랙 카이는 전투조직이
었다. 왕궁 몰래 키운 이 조직은 대륙에 알려진 유명한 용병단을
흡수해서 만들어졌다. 그때부터 엄청난 자금과 지원을 아끼지 않
았고, 지금은왕궁근위기사단과거의 맞먹는조직이 되었다. 비록
개개인의 실력에서는 조금 부족하겠지만, 수가 두 배가 넘었으니
거의 비등한 조직이 된 것이다.
"알겠습니다, 공작님. "
대답을 마친 파론이 집무실을 나갔다. 그가 나간 후에도 엘베로
는 집무실을 쉽게 뜨지 못했다. 라한은 걱우 아홉 살 때 한 번 본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존재였다. 헌데도 그가 왜 이렇게 신경 쓰이
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라한에 대한 생각을 할 때마다
기분이 찜찜하고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들 뿐.
라한이 페사 지역에 머문 지 5 년하고도 석 달이 지났다. 세라 소
드에 인챈트를 성공시킨 날부터는 3 년하고 석 달이었다.
그동안 라한의 제령선공과 제란마공은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
이제는 스스로 그 기를 통제하고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검술만큼은 거의 제자리였다. 칼라피안의 말처럼 라한에게 검을
다루는 재능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야, 이놈아. 내가살다살다너처럼둔한놈처음봤다. "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요? 안 되는 걸 어쩌라구
요?
칼라피안의 호통에 오히려 라한이 짜증을 부렸다.
지금 가장 짜증나는 사람은 칼라피안이 아닌 라한이었다. 어찌
뤘든 5 년을낭비한게 아니던가. 비록, 남은시간에 인챈트공식을
다듬고 심법을수련했다고는 하지만, 검술에 매달린 시간이 더 많
았다. 차라리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일을 했으면 이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뒀을 게 분명했다.
틱! 부비!
테세르가 하늘을 빙빙 돌다가 라한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지난
5 년 동안라한은검술을, 칼라피안은검술지도를, 테세르는파마
리스 평원을 살피는 일을 했었다. 아무래도 날씨 영향을 적게 받는
존재가 테세르였고, 날수도 있었기 때문에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였다.
"날씨가 어때? 어제보다 더 추워졌어?"
끄덕끄덕!
라한의 물음에 테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약간의 추위를
타는 지 라한의 목 안으로 발을 슬쩍 넣은 모습이었다.
테세르의 대답에 라한이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지난 5 년 동
안의 기후 변화를 세세하게 적은 종이였다. 종이의 수치와 모양을
살피던 라한이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내일 새벽에 움직여야겠어요. "
"음, 때가 된 거로군. "
돌에 기대 있던 칼라피안이 파마리스 평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
다. 앞으로 얼마가 될지도 모르는 긴 여정을 저곳에서 보내야했다.
비록 기후 변화에 대해서 철저히 계산했다고는 하지만 불안함은 좀
처럼 가시지 않았다.
"준비해야죠. "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칼라피안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저도 몰라요. 확실한건 내일부터 다섯 달동안은추위가
버틸 수 있을 만큼 약해진다는 것뿐이에요. "
"그렇겠지. "
칼라피안도 라한이 파마리스 평원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건 알
았다 그리고 저곳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할만큼 위험하다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자신이나 라한이나 저곳에 갈수밖에 없었다.
칼라피안은 이미 삶의 목표를 잃은 상태. 라한이 가는 곳이라는 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반대로 라한은삶의 목표가파마리스 평
원에 있었으니 가야만 했다.
"정리하고 들어갈 테니까 먼저 쉬세요. 테세르! 아저씨를 안으
로 좀 옳겨줘. "
끄덕!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칼라피안을 들어 올렸다. 옷 끝을 잡고 들
어 올리는우스운모양새였다. 하지만 칼라피안은 전혀 개의치 않
았다. 지난 수년 동안 계속 있어온 일이니 반항은 오래전에 해본 것
이다. 그리고 그 반항이 아무런 효과가 없음도 오래전에 터득했다.
테세르는 예전보다 힘이 더 강해져 있었다. 라한의 단전에 쌓인
제란기가강해질수록 테세르도 덩달아강해진 거였다. 하지만, 심
장에 쌓여 있는 제령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테세르는오직
제란기의 강약에만 영향을 받는 듯했다.
주변 정리를 끝내고 여행 준비를 마친 라한이 길게 심호흡을 했
다. 제령기와 제란기의 정도를 스스로 느끼는 행동이었다.
라한의 제란기는 단전 크기의 반 이상을 채우고 있었다 제스란
의 말대로라면 단전을 가득 채웠을 때, 제대로 된 환골탈태가 찾아
올 터. 그때까지는 꾸준히 수련해서 기를 쌓는 게 최선이었다.
또, 제령기는 심장의 반 정도를 덮을만큼두꺼워져 있었다. 본
래 제령기는 제란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제란기는 제스
란에게 기를 받은 탓에 원래부터 강했기 때문이다. 이에 라한
은 제란기보다 제령기를 키우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였고, 지금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비등한 기운이 되었다. 제스란에게 기
를 받을 때, 거의 대부분이 소실되지 않았다면 아직도 제란기가 월
등했겠지만

얼음 골렘 슈라

루이나 왕국의 왕궁 회의가 끝나고 파론이 엘베로를 았다 그


간에 조사한 정보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파론의 독대 요청에 엘베로
도 혼퀘히 응햇다
그에게 맡긴 일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일인가
라한 이라는 녀석의 마지막 행적이 발견됐습니다
파론의 말에 엘베로가 상체를 약간 들었다 이야기에 관심이 있
다는 그만의 작은 반응이었다
실제로 엘베로는 파론에게 라한을 으라고는 했지만 큰 기대
는 하지 않았다 그가 루이나 왕국에서 사라진 ㅈ; 벌써 6 년이나 지
난 일었다 긴 시간이 흐른 만큼 그에 대한 행적도 환전히 사라
졌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보를 가져왔으니 혹할 수
밖에 없었다
"어디지?"
"나메라 왕국 최북단 페사 지방이랍니다. 엄청난 양의 식량을
사갔답니다. "
파론의 말에 엘베로가 생각에 잠겼다. 페사 지방이 파마리스 평
원의 입구라는 건 모두가아는사실이다. 거기다 엄청난 식량까지
사갔다면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쉽게 유추가 가능했다. 하지만,
왜? 무슨 이유로 그곳을 가려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게 언제 일이지?"
"5 년 전이랍니다. 아마 파마리스 평원으로 가서 얼어 죽은 게 아
닐까요? 그곳은 금지가 아닙니까? 지금까지 그곳에 가서 살
아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
"그곳에 갔다는 정보 자체가 우리를 속이려는 의도인지도 모른
다. 상금을 두 배로 올리고 그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아내라. "
"에. "
엘베로는 쉽사리 마음을 놓지 않았다. 죽을 게 뻔한 파마리스 평
원에 갔다는 그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엘베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파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엘베로님. 저, 시를로스 왕자님 말입니다. "
"시를로스 왕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시를로스 루이나. 그는 루이나 왕국의 제 1 왕자로 왕위 계승 서
열 1 위였다. 지금의 국왕이 죽으면 그 뒤를 이을 가장 확실한 후계
자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성격이 광폭하고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
이었다. 이 때문에 그를 모시는 시녀들은 시를로스 왕자의 손을 거
쳐 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 상당히 오만해서 귀족
이라 하더라도 우습게 보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시녀들이 보는 앞에서 서슴없이 치욕적인 욕을 퍼부었다.
"얼마 전에 엘레노아 공주의 궁전에서 생긴 소란 기억나십니
까?"
"기억난다 시를로스왕자가거기서 당당하게 나왔었지. 알려진
바로는 술에 취해서 궁전을 잘못 찾아갔다고 했던가?"
엘레노아 공주는 명실 공히 루이나 왕국 최고의 미녀 였다. 이제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를 본 타국 왕자들이 모두 탐낼
정도였다. 시중에 떠도는 노래에도 대륙 최고의 미녀로 등장하는
엘레노아 공주. 사가들은 그녀를 일컬어 대륙이 생긴 이래 최
고의 미녀라 칭했다.
"그게 저희 정보원들의 말에 의하면 시를로스 왕자가 엘레노아
공주를 덮친 거랍니다. "
쾅- !
"미친놈! "
파론의 말에 엘베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눈에 선 핏
발이 분노를 짐작케 했다 엘베로는 엘레노아 공주를 정략결혼 시
킬 생각이었다. 그녀 정도의 미모와지식이라면, 어느왕국에서도
마다하지 않을 터. 만약 그 대상을 강한 왕국의 후계자와 연결 지
을 수 있다면, 노력하지 않고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됐지? 설마 일이 벌어진 건가?"
"다행히 불행한 일은 생기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시를로스 왕자가 또 다시 일을 벌일지도 모릅니다. "
"흠, 일을빨리 진행시켜야겠군. 빠른시일 안에 시를로스왕자
에게 왕위를 넘겨주도록 하지. "
엘베로는 자신이 왕이 될 야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국왕을 죽이고 왕이 되어선 곤란했다. 지금 상황에서의 반란은 오
히려 반감만 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대신 모든 이에게 지탄받는 시를로스 왕자를 왕으로 추대할 생
각이었다. 그것도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반란에 의해
다른 사람이라면 후계자가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터였다. 어
차피 시간이 지나면 국왕이 될 수 있는데 반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
으리라. 하지만, 시를로스 왕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아버
지인 국왕에 의해 여자관계를 철저히 제약받는 지금, 그를 조금만
부추긴다면 반란도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게 분명했다
그가 왕에 오르고 폭정을 저지를 때, 엘베로가 반란을 일으킨다
면, 모든 귀족과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건 당연한 일이다.
엘베로는 그때를 위해 계속해서 계획을 짜고 시를로스를 부추겨
댔다.
"저, 엘베로님은 나서실 생각입니까?"
"아니. 내가 시를로스 왕자를 부추겼다는 게 알려져서는 곤란하
지 나중에는 내가그를눌러야하니까. 적당한귀족하나 내세워
서 시를로스 왕자를 지원해줘라. 거사가 시작되면 혼란을 틈타서
엘레노아 공주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소중한 보물을 그런
쓰레기한테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
"알겠습니다. "
엘베로의 표정이 점점 음흥하게 변해갔다. 한때는 현자라 칭송
받던 엘베로. 지금은 권력에 물든 승냥이의 모습만 남아 있었다.
라한이 파마리스 평원에 들어선지 벌써 넉 달이 지났다.
라한은 처음 파마리스 평원에 들어설 때만 해도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기후를 완벽하게 파악했다는 자신감의 발로
였다.
하지만, 그 생각이 오판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
이 걸리지 않았다. 비록여느날보다따뜻하다고는하지만, 여전히
엄청난 추위였고 감당하기 힘든 눈보라였다.
라한이 파악한 파마리스 평원은 특이하게 14 개월을 주기로 바꿔
었다. 그중에 4 개월 4 일만이 평소보다 덜 추울뿐, 나머지 9 개월
2f 일은 모든 게 얼어붙는 극한의 기후였다.
라한이 출발한 날은 정확히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첫날이었다.
벌써 4 개월 조금 더 흘렀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다시 얼음의
땅이 될 게 분명했다. 평원이 모두 얼어붙기 전에 어떻게든 따뜻한
곳을 찾아야했다.
"크크크, 라한. 너도 유언 같은 거 미리 해 놓는 게 좋지 않겠
냐"
"시끄러워요. "
칼라피안은 요즘 죽은 후에 대해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
언이나 소멸 같은
라한은 죽는다는 얘기 자체를 싫어했기에 그때마다 날카롭게 대
꾸했다. 왜 재수 없게 그런 얘기를 꺼내느냐는 의미였다. 라한이
날카롭게 대꾸할 때면 칼라피안도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잠시. 오래지 않아또다시 죽음에 대해 꺼내며 소
멸하면 어찌되는지 등에 대해 혼자 중얼거리기 일쑤였다.
"너도 우리가 곧 죽을 거라는 건 알고 있을 텐데, "
"그 재수 없는 입 좀 다물어요. 자꾸 지껄이니까 흔들리잖아요. "
라한의 기분도 거의 최악에 다다라 있었다. 계산대로라면 내일
이나 모래쯤 극한의 추위가 찾아을 터. 그때가 되면 자신의 죽음도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말의 희망이라도 어떻게든 붙잡
고 싶었다. 그 끈마저 놓아버리면 스스로가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
에서 였다.
"전에 네가 구하려고 한다는 나무. 아깝지 않나?"
"입 다물라고 했어요. "
라한의 몸에는 힘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테세르를 부르
는 일마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힘이 빠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등에 업힌 칼라피안이 계속 말을 하자 몸이 좌우로 마구 흔들렸다.
몇일 전에 라한은 자신이 원하는 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스
란의 수레에 사용되었던그나무였다. 하지만, 라한은시간을지체
할 수 없었다. 어차피 그곳에서 일주일 만에 돌아가는 건 불가능한
일. 어떻게든 계속 전진해서 운을 바라는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
신, 지나가는 길에 굵은 나무 몇 개를 베어오는 정도로 만족했다
'제발, 제발. '
라한은 묵묵히 걸으면서도 꾸준히 주변을 살폈다. 아주 작은 희
망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한참을 걷던 라한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마치 거대한 바늘
을 똑바로 세워 놓은 듯한 조형물이었다.
"아저씨! "
칼라피안은 라한의 등에서 자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편한지
하루에 열두 시간을 자고도 수시로 낮잠을 즐겼다. 라한은 그의 정
신세계가 이해되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칼라피안의 입장이었다
면, 수시로고개를돌려 주변을 계속살폈을 것이다. 그게 살기 위
한 몸부림 아니겠는가.
"아저씨! ! "
"음? 왜 불러? 눈에 발이라도 빠졌어?"
라한은 오래전에 썰매 모양의 수레를 버려야했다. 갑작스러운
눈사태로 엄청난 눈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수레를 건지
려는 라한과 그를 말리는 칼라피안. 둘의 실랑이는 칼라피안의 승
리로 끝났다. 라한도 수레를 되찾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기 때
문이다.
"저기, 저기 좀 봐요. "
"보긴 윌 어? 서, 설마 오벨리아?"
오벨리아는 전설에나 등장하는 신의 구조물이었다. 실제로 그
건물이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누가 만들어졌는지는 알려진바 없었
다. 다만, 이 대륙 어딘가에 오벨리아가서 있으며 그곳에 가면 신
의 이야기를들을수 있다는 소문만 퍼져 있었다. 그것도 이미 사
람들 사이에서 잊히어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얘기였지만
"저게 오벨리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이런 곳에 있으니까그렇게 생각해본
것뿐이지. "
라한도 칼라피안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했다. 오벨리아가 아니
라면, 이런오지에 저런 건물이 서 있는건불가능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오벨리아였기에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다
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을 뿐
베르네의 레어 안에서 로이나가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를 불러들
였다. 그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기에 결과를 듣기 위해서였다.
실피드의 모습은 인간과 거의 흡사했다. 얼핏 본다면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가진 힘은도저히 인간의 것이 아니었
다. 바람에 관해서는 드래곤마저 한 수 양보해야 한다는 거대한 존
재인 실피드. 만약그들이 물질계를 마구 휘저을수 있었다면, 물
질계의 계보가 뒤바뀌었을 게 분명했다.
-레이시아나. 무슨 일로 불렀지?
"전에 부탁했던 일이 있었을 텐데. "
실피드의 목소리는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상대가 비록 드래곤
이라고는 하지만, 소환되었다는 그 자체가 기분이 나쁜 모양이다.
-음, 그 라한인가 하는 인간을 찾아달라는 말이군.
"응. 어떻게 됐지? 찾았나?"
로이나는 지난 6 년 동안 정령들을 동원해서 라한을 찾았었다.
상급 정령부터 시작해서 최상급 정령에 이르기까지 속성별로 부르
지 않은 정령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라한의 행적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에 로이나는정령왕까지 부르기 시작했고, 결
과는 모두 '모른다'라는 말뿐이었다. 지금의 실피드는로이나가
부를 수 있는 4 대 윈소 중 마지막 정령왕이었다.
-흠, 그 인간이 살아 있기는 한 건가?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
던데.
"그 렇군 "
실피드의 대답에 로이나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다 정령도 이용해봤고 여기저기 다른 드
래곤에게물어보기도했었다. 하지만, 그누구도라한의 행적에 대
해 알지 못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드래곤이 인간 따위를 찾고 있는 게 이
해가 안 가는군.
"나도 모른다. 그냥 그냥 그가 궁금해. "
-훗! 뭐, 난 할 만큼 했으니 이만 가보지.
말을 마친 실피드가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나타날 때와는 다
르게 모래가 흩어지듯 사라져갔다.
인간들에게는 금지가 세 군데겠지만, 드래곤에게 금지는
단 한군데 밖에 없었다. 파마리스 평원. 드래곤에게도 접근하기 까
다로운지역이었다. 아니, 접근하기 찝찝하다는게 더 정확한표현
이리라,
인간들에 의해 규정지어진 금지 중 한군데인 레비안 산맥. 이곳
은 드래곤의 레어가 많아서 금지로 지정되었기에 본래 드래곤에게
는해당사항이 아니었다. 또, 로테라숲의 굴레를 벗은자들도드
래곤에게는 큰 위협거리가 못되었다 그들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걱우 열두 명에 불과했다. 그 정도 수를 처리하는 데에는 성룡 네
마리만 출동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마리스 평원은달랐다. 더 정확하게는파마리스 평원
안에 있는 오벨리아 팰리스. 이곳은 드래곤도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풍기는 지독한 마기가그 이유였다. 물론, 마
음먹고 간다면 못갈 것도 없겠지만, 가기가 상당히 찝찝한 곳이었
다. 이 때문에 지난 수만 년 동안 그곳을 방문한 드래곤은 단 한 마
리도 없었다.
이런 상황은 정령도 비슷했다. 로이나가 수없이 많은 정령을 대륙
에 풀었지만 정령들 스스로가 파마리스 평원은 피했다. 그곳의 지독
한 한기와 정령에게까지 찝찝하게 다가오는 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한은마기를전혀 느끼지 못했다. 정령 친화력과마나
친화력이 제로였기에 마기마저 못 느낀 것이다. 칼라피안 역시 루
이에에게 친화력을 잃으면서 마기를 느낄 감각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친화력이 남아 있었다면 감히 오벨리아 팰
리스에 갈 생각은 못했으리라.
두 달 전, 루이나 왕국의 시를로스 제 1 왕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어차피 시간만 지나면 국왕의 자리에 오르는데 반란이라니 국민
들은 시를로스 왕자의 섣부른 판단에 지탄을 아끼지 않았다
시를로스 루이나가 국왕의 보위에 오르고 두 달, 그 동안 엄청난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다.
먼저 그는 귀족가의 여식 삼십여 명을 강제로 왕실로 끌고 오도
록 명령했다. 나라의 중심인 자신이 외롭다는 게 이유였다. 그 때
문에 정치가 손에 안 잡힌다며 자신을 달래줄 귀족의 여식을 보내
라 명한 것이다. 물론, 귀족들의 엄청난 반발로 끝내 성사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때 일로 시를로스국왕은 귀족들의 눈밖에 나
버렸다.
그리고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또 다시 사건이 벌어졌다. 귀족
의 반발로 만족을 채우지 못하자 국민들로 타깃을 돌린 것이다. 대
왕녀 소실이라 불리는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시를로스 국왕은 평민들 중 여자는 18 세 때, 왕실에서 1 년을 보
내야 한다는 법을 제정했다. 그 1 년 동안 그녀들을 마구 가지고 놀
겠다는 노골적인 심보였다. 이 명령에 몇몇 귀족들이 반발을 하기
는했지만, 대다수 귀족들은묵과하는분위기였다. 어차피 대왕녀
소실은 귀족가의 여식을 건드리지 못하게 되자 내려진 명령이 아니
던가. 이 명령에 강하게 반발했다가 또 다시 귀족가 여식을 넘볼지
도 모르는 일. 두 번째 명령은 그냥 들어주고 조용히 넘어가자고
생각한 것이다
"엘베로님. 어떻게 됐습니까? 국왕께서는
"크크크, 그놈은 국왕이라는 자리가 신이라도 되는 줄 알더군. "
파론의 물음에 엘베로가 음흥하게 대답했다.
처음 사건부터 계속 이어진 국왕의 폭정 그 모든 것의 배후에는
엘베로가 있었다. 물론, 자기 자신은 철저히 숨긴 채 다른귀족들
을 이용했음은 당연한 일이 었다.
"이번에는 귀족들의 반발을 막기 힘들겠군요. "
"그렇지. 이번을 계기로 시를로스 국왕을 끌어내릴 생각이다. "
"아! 이제 다 끝나는 거군요. "
엘베로는 다른 귀족들을 이용해서 국왕의 마음을 조종하고 있었
다. 그에게 반대하는 모든 귀족들을 반역의 음모가 있다는 말로 슬
슬 구슬린 것이다.
또, 이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서는 그들의 재산을 줄일 필요가 있
으며, 그 일환으로 귀족가의 재산 10 퍼센트를 몰수하라고 명하도
록 부추겼다. 가히 귀족들의 엄청난 반발이 예상되는 명령이었다.
"준비는 어떻게 했지?"
"수도권 귀족들은 원래 엘베로님의 사람인지가 쉽게 포섭이 가
능했습니다. 그리고 지방 귀족들이나 작위 없는 귀족들도 엘베로
님을 따르는 세력이 휠씬 많습니다. "
파론은 엘베로의 명을 받아 계속해서 귀족들을 포섭했었다. 이
전에는 정치적안 권력에 한해서만 해왔던 포섭을 반란에까지 참가
하도록 확장한 것이다.
엘베로는 국왕을 뒤에서 조종하며 폭정을 일삼도록 이끌었고,
파론은 그런 폭정을 참고 넘기지 말자며 귀족들을 포섭하고. 멋진
팀플레이였다.
그러면서도 여러 무력단체들을 키웠고, 몇몇 거대 용병단체와
거래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반란이 일어나면 무력행산를 도와달라
는 거래였다.
"좋군. 후후후. 엘레노아 공주는 어떻게 지내지?"
"별장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비밀 유지를 위해서 저희
조직을 은밀히 배치시켰습니다. "
시를로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엘레노아 공주는 혼란을 틈타
도주했었다. 물론, 연약한엘레노아공주가자력으로도주했을 리
만무했다. 엘베로가 그녀의 도주를 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엘레노아 공주를 도주시킨 엘베로는 그녀를 자신의 별장에 머물
도록 지시했다. 어떻게든 몸을 피해서 시를로스 국왕에게 몸을 버
리지 않도록하기 위해서였다. 그때가이미 두달전의 일. 그기간
동안 시를로스 국왕에게는 철저히 비밀에 붙이며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번 거사가 끝나면 그녀를 수도로 불러야겠군. "
"생각을 정하셨습니까?"
"케라스 왕국의 후계자 루핀트 왕자와 정략결혼 시킬 생각이
다. "
루핀트 "에트마로 케라스 왕자. 그는 케라스 왕국의 제 1 왕자로
이미 오래전에 후계자로 지정됐었다. 검술에 능하고 지혜가 출중
한 루핀트 왕자. 세간에는 그를 케라스 왕국을 다시 한번 번영시킬
재목으로 꼽고 있었다.
그는본래 여자에는관심이 없는목석같은남자였다. 오직 검과
책만 파고들며 왕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8 년 전 엘레노아 공주를 본 이후, 루핀트 왕자는 거의 매
일을 한숨으로 보내야했다. 자신과 엘레노아 공주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케라스 왕국과 루이나 왕국. 이
두 나라는 오랜 숙적관계가 아니던가. 자신의 사랑이 왕국간의 관
계에 영향 받는 위치임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핀트 왕자는 엘레노아 공주를 포기하지 않
았다. 끊임없이 아버지를 설득하여 청혼할수 있도록요청한 것이
다. 그리고 3 년 전. 아버지인 케라스국왕에게 정식으로 허락을 얻
었고 루이나 왕국에 청혼을 했었다. 그리고 이어진 루이나 왕국 국
왕의 냉정한 거절. 케라스 국왕만 설득해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케라스 왕국이라면 저희와 전통적인 적대 관계이지 않습니
까? "
"내가 왕이 되면 케라스 왕국과 우호관계로 돌아설 생각이다.
우리 목표는 북쪽이 아닌 남쪽이거든. "
케라스 왕국은 루이나 왕국의 북쪽에 인접해있는 왕국이었다.
즉, 케라스 왕국과의 우호관계는 루이나 왕국의 향후 정책을 남진
으로 한다는 얘기와 같았다.
"아, 베센 왕국을 칠 생각입니까?"
"왕국의 민심을 잡고 귀족들의 시선을 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이지. 물론, 패해서는 곤란해. 반드시 승리하는 전쟁을 치러야
내 입지가 굳어지겠지. "
대륙에는 최근 60 년 간 평화가 지속돼었다. 그 이전의 엄청난 난
투극과 비교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엘베로는 어렵게 이루
어진 평화를깰생각이었다. 자신의 입지를굳히기 위해
"베센 왕국은 저희 왕국보다 강대한 왕국이라고 평가되고 있습
니다. "
"날 못 믿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
엘베로는 베센 왕국과의 전투를 오래전부터 염두에 뒀었다. 그
일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하고 조사해왔다. 설사 전투 국면이 루이
나 왕국에 불리하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크게 손해 볼 건 없었다.
자신에게는 케라스 왕국이라는 든든한 응원군이 있을 테니.
첨탑에 서서히 다가가던 라한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눈앞
의 광경이 믿어지지 않는 듯 계속해서 눈을 비볐다.
그가 처음 생각했던 단순한 첨탑이 아니었다. 그들이 오벨리아
라 불렀던 탑은 거대한 궁전의 일부에 불과했다 전체적으로 삼각
형의 모양을 가진 백색의 거대한 궁전과 그 꼭대기에 높이 솟은 탑.
멀리서 라한이 봤던 오벨리아는 위에 달린 탑에 불과했다.
"엄청나군요. "
"그렇군. 오벨리아가 이렇게 생긴 게 맞나?"
칼라피안의 물음에 라한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아는 게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 궁전이 대륙에서는 감히 상상조
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구조물임은 확실했다. 파마리스 평원이라는
엄청난 악조건을 지나지 않으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궁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지어졌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었다.
"시간 없다. 계산대로라면 몇 시간 남지 않았다. "
"아! "
외마디 비명성을토한라한이 궁전을향해 다가갔다. 이미 해는
검은빛으로 서서히 물들어 극한의 기후가 찾아을 징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안에 궁전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꼼짝없이 얼어 죽는 거
였다. 물론, 궁전에 들어간다고 해서 살수 있다는보장은 어디에
도 없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택이 이것 뿐이기에 궁전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가까이서 본 궁전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고개를 끝까지 들
어도그끝이 안보일 정도였다. 또, 얼음이 아닌 게 분명했건만희
미하게 빛나는 백색의 표면.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 보더라도 감탄
을 금치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
"저게 이름인가? 처음 보는 글자인데. "
등에 업힌 칼라피안의 말에 라한이 전면으로 시선을돌렸다. 그
의 말처럼 거대한 문 위에는 편액이 걸려 있었고, 멋진 글씨체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오벨리아 팰리스?"
"엥? 너 저 글자를 읽은 거냐?"
칼라피안의 물음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편액에 쓰인 글은
상고시대에 사용되었던 글이었다. 묵주에게 언어를 읽을 능력을
배우지 못했다면, 라한으로서도 읽는 게 불가능할 만큼 오래된 언
어였다.
"저게 대체 언제 사용된 언어지? 처음 보는 언어인데. 내가 살아
온 지 벌써 천 4 백 년이 넘었는데 저런 글은 맹세코 처음 본다. "
"저도 언제 쓰이던 글인지는 모르겠어요. "
대답을 마친 라한이 입구 쪽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가 다가갈
수록 문은 점점 거대하게만보였다. 문의 크기로 판단하면 인간이
드나들던 궁전은 아닌 듯했다
쿠루루루웅! 쾅-!
라한이 문에서 약 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 엄청
난 굉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곧 문의 왼쪽에 있던 석상이 서서히
움직였다.
"저, 저거 뭐야? 저
석상을 본 칼라피안이 놀란 마음에 말을 더듬거렸다. 전혀 예상
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존재의 등장이었다.
"골렘. "
"골렘?"
라한은 움직이는 물체가 골렘임을 한 눈에 알아봤다. 마법사의
저서를보며 수없이 봤던 그림이었다. 하지만, 책에서 봤던 것과는
크기가 너무 달랐다. 책에서는골렘의 크기를삼, 사 미터라고 설
명했지만, 라한의 앞에 있는골렘은 일견하기에도 칠 미터는 넘어
보였다. 거기다 돌이 아닌 얼음으로 만들어진 골렘이었다.
"근데 너무 커요. "
잠시 중얼거리던 라한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골렘이 전투자
세를 취하며 라한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분명 무생물체가분명한
골렘인데도 눈에서 살기가 비치는 듯했다.
"조심해라. 공격할 것 같다. "
부우웅! 쾅!
칼라피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골렘의 주먹이 날아왔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라한이지만 피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어야했다. 책에
서 봤던 골렘의 속도와 비교도 안될 만큼 빨랐기 때문이다. 라한이
책에서 본 골렘은 이런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른 세계에서
잠깐불러온듯, 정령처럼 시간 제약을 가진 것이다. 이런 골렘은
당장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언젠가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눈앞의 골렘은달랐다. 분명 실체를가지고 있었고, 다
른 누군가에게 힘을 제공받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곳에는 라한과
칼라피안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저 골렘은 자기 자신의 의지
로 움직인다는 말이었다. 힘의 원천도 자기 자신이었고
쾅- !
"콕! "
라한이 골렘의 주먹을 피하며 신음을 토했다. 몸이 온전한 상태
였더라도피하기 쉽지 않은크기와속도였다. 헌데, 이곳까지 오는
동안 지칠 만큼 지쳤으니 쉽지 않을수밖에 없었다. 또 다시 날아
오는 주먹에 랴한이 재빨리 옆으로 굴렀다. 바닥에 쌓인 눈 때문에
속도가 마음먹은 대로 나지 않았다.
"이놈아! 날 죽일 셈이냐?"
"헉, 헉!"
칼라피안의 호통에도 라한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곧 쓰
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지친 라한. 입을 열어서 정신이 흐트러
지기라도한다면, 주먹을 피할수 없을 것 같았다. 라한이 구르는
충격이 고스란히 칼라피안에게 옮걱갔다. 라한의 등에 꽁꽁 묶여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라한이 한 번 구를 때마다 칼라피안에게서 연신 비명이 터져 나
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상황의 위급함을 아는지 칼라피안도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쿠쿠쿵! 쾅-!
라한은 보통사람보다 빠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광견보를 조금씩 섞어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라한 자신은 몰랐지
만, 이미 그는 신법을사용한다는 개념을조금 넘어서 있었다. 지
난 5 년간 꾸준히 신법을 살피고 연습한 결과였다.
물론, 광견보를 집중해서 사용할 때와는 그 속도 차이가 현저히
차이가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보통사람과 비교가 안될 정도
로 빠른 것만큼은 확실했다.
"헉, 헉!"
"피닉스 마법이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세라 소드를 써보지. "
라한도 세라 소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를 대비해서 오른 손
은 세라 소드의 손잡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 거리에서 피닉스를 사용했다가는 제대로 된 성능을 기대하기 힘
들었다.
"헉, 헉! 몰라서 그러는 줄 헉, 헉 알아요?"
"그럼 왜 안 쓰냐?"
"우씨 ! "
입을 열면 열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 지친 몸으로 싸
우면서 말까지 하는 건 무리인 듯했다.
"테세르! "
라한이 테세르를 불렀다. 지금의 몸 상태로는 거의 도박에 가까
운 행동이었다. 힘이 빠진 상태에서 테세르를 소환하는 일. 그건
지친 몸을 더욱 혹사시키는 결과를 낳을 게 분명했다.
"저놈 핵 좀 찾아. "
라한의 말에도 테세르는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는듯했다. 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니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움직이지
않자 라한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야이, 빌어먹을놈아! 핵 찾으라고. 저놈몸에 특이하게 많은
마나가 포함된 곳이 있을 거야. 거기를 찾아. "
그제야 테세르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이은 자세한 설명
을 듣고서야 이해를 한 거였다. 테세르가 날아오르자 라한의 몸에
서 땀이 마구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땀은 혹한의 추위로 인해 하
얗게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다. 테세르. 제발.'
라한의 간절한 마음을 알았는지 테세르는 그리 오래지않아서 골
렘의 핵을 찾아냈다. 목과 가슴이 맞닿는 부분이었다. 테세르는 그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라한을 향해 몸을 마구 흔들었다. 거리가 쾌
되었기에 자신을 잘 알아보게 하려는 행동이었다.
'젠장. 너무 높다. '
라한은 멀리서 피닉스를 사용해서는 핵을 파괴할 수 없다고 판
단했다. 이정도 추위로 피닉스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파괴력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가슴 부근까지 접근해서 피닉스를
사용해야 했다. 키가 이 미터에도 미치지 못하는 라한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콰콰쾅!
"헉!"
갑작스러운 골렘의 다리 공격에 라한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는 그나마 주먹만을 사용했기에 근근이 버틸 수 있었다.
헌데, 발까지 사용한다면? 반격은 고사하고 피하는 일도 쉽지 않
을 게 분명했다.
"젠장, 파이어 실드!"
세라 소드를 치켜든 라한이 크게 외쳤다. 피할 수 없는 각도에서
날아오는주먹을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마법으로는주먹의
충격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다.
쾅- !
"컥! 울컥! "
라한이 파이어 실드가 펼쳐진 상태에서 성의 벽 쪽으로 날아갔
다. 주먹 자체가 주는 충격은 막았지만 휘두르는 힘에 의해 날아가
버린 것이다. 팍이어 실드가 마법 방어에 특화되어 있다는 것도 방
어를 제대로 못한 이유 중 하나였다.
한 움큼의 피를 토한 라한이 그 자리에서 굴러버렸다. 연이어 날
아오는주먹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잠깐의 충격으로 집중력을 흐
트러뜨렸다면, 라한의 몸은 짓눌려 터져버렸으리라.
오른손을 휘두르는 골렘의 왼쪽으로 피했던 라한. 그 각도 때문
에 골렘의 목 부분이 노출되었다
"피닉스! "
마법을 시전시킨 라한이 뒤로 두세 걸음 다시 굴렀다. 불안정한
자세에서 사용한 피닉스에 의해 뒤로 튕겨나간 것이다. 골렘은 갑
작스럽게 날아온 피닉스 마법을 상체를 약간 비트는 행동으로 피해
버렸다. 골렘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유연한 몸놀림이었다.
"빌어먹을! 테세르 돌아가! "
라한의 외침에 테세르가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의 임무는
골렘의 핵을찾는 일. 일단 임무를완수했으니 정령계로돌려보내
는 게 라한에게 유리했다. 그가 없어야 힘의 소모가 줄어들기 때문
이다.
콰콰쾅!
한차례 공격을 당해서인지 골렘의 공격이 파상적으로 변했다. 라
한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그 주변까지 주먹과 발길질을 마구 해댔다.
골렘의 행동패턴이 바픽자 라한이 좀 전보다 더 힘들어졌다. 힘
의 소모가 더 커진 탓이다.
"헉, 헉! 까짓것. 누가 죽나 해보자. "
한 마디 외친 라한의 손이 바닥에 닿았다. 광견보를 시전하기 위
한 준비 자세였다.
광견보 준비를 시작하자 라한의 눈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
했다. 광견보특유의 후유증이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침을흘리거
나 으르렁거리는 일은 없었다 지난 5 년 동안 광견보를 계속해서
다듬은 결과였다.
"너, 너 그 빌어먹을 자세를 또 취하는 거냐?"
칼라피안의 우려 섞인 말에도 라한은 입을 열수 없었다. 참을 흘
리지 않고 으르렁대지 않는 대신 말을 하지 못하게 돼 버렸다.
광견보를 시전하자 골렘의 주먹은 라한에게 미치지 못했다. 주
먹보다 몇 배나 빠른 움직임으로 피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광견보 시전으로 체력 소모는 훨씬 커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언제 극한의 추위가 덮칠지 모르는 일. 이래저래 빨리 처리
하지 못하면 죽음뿐인 싸움이었다.
스팟! 쾅-!
주먹을 이리저리 피하던 라한이 자세를 아래로 낮추었다 개가
뛰어오르기 위해 몸을낮추는자세와흡사했다. 골렘의 주먹이 라
한의 정면으로향했다. 하지만, 라한은그주먹을 피할생각이 없
는 듯 노려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골렘의 주먹이 라한의 지척에 닿
자 라한이 빠르게 뛰어올랐다.
쾅-! 착-!
골렘의 주먹은 땅에 꽃혔고 그 주먹위에는 라한이 올라서 있었
다. 광견보의 효용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칠 미터에 가까운 높이
를 뛸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밟고 도약할만한무엇이 필요
했다 라한은 발 구름 판으로 골렘의 주먹을 쓸 생각이었다.
부웅!
골렘은 라한이 올라선 팔을 마구 휘둘러댔다. 어떻게든 떼어내
려고애썼다. 이에 라한이 손목부분을두팔로안았다 라한의 손
에서는 어느 샌가 날카로운 손톱마저 나와 있었다. 이런 신체의 변
화는 라한마저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손톱? 진짜 개냐?'
생각은그렇게 했지만내심 다행스러웠다. 손톱이 없었다면, 골
렘이 휘두르는 팔에서 떨어졌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골렘의 팔목에 선 라한이 눈을 매섭게 치떴다. 이제 사용할 수
있는 피닉스의 수는 단 한 번. 완벽한 기회를 포착해서 끝을 봐야
했다.
부웅!
'지금이다. '
생각을 마친 라한이 골렘의 팔을 타고 빠르게 내달렸다. 어깨를
지나목에 다다른 라한. 재빨리 광견보를풀고, 세라소드를골렘
의 목을 걱누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마법을 구동시켰다
"피닉스! "
스팡! 쿠쿠쿠쿠쾅!
퍽-!
라한이 시전한 피닉스는 정확히 골렘의 목을 긴뚫었다. 단 한 번
의 기회를 완벽하게 잡아서 끝낸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휘두
른 골렘의 주먹은 라한의 몸을 격타했다. 이에 라한의 몸은 실 끊
어진 연처럼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쿨럭, 으
울컥!
라한의 피를 계속 토해내기 시작했다. 골렘의 주먹에 정확히 적
중당해서 내상을 입은 것이다.
"이놈아! 괜찮으냐!"
칼라피안의 말을 들으며 라한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 하늘의 변
화를살피기 위해서였다. 라한의 눈에 하늘의 한쪽이 어두워진 모
습이 들어왔다. 그 어둠은 빠르게 팽창하듯 퍼졌고, 이곳을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
아직 몸을추스르지도못했지만, 지체할시간이 없었다. 하늘의
어둠은 극한의 추위가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했다. 저 어둠에 쉽싸
이는 순간, 그대로 얼어 죽을 게 분명했다
쿵- !
라한이 오벨리아 팰리스의 거대한문 앞에서 반쯤 기댄 자세로
두드렸다. 다리가 마구 후들거렸지만 그런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
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는 것만큼은 절대 사양하고 싶었다.
"저기 왼쪽에 뭐라고 쓰여 있는 거지?"
칼라피안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그의 말처럼
주먹 크기의 글씨들이 짧게 나열되어 있었다 아마, 이 문을 여는
열쇠에 대해서 써 놓은 듯했다.
"수문장을 거두어라?"
"수문장? 그게 뭐냐?"
글을 읽은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이곳 오벨리아 팰리스에서 수
문장이라면좀전의 골렘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거두라는말
은 이해가 안 되었다.
"수문장은 아까 그 눈 덩어리를 얘기하는 것 같은데
"일단 가보면 알겠지. "
칼라피안의 말은 좀 전에 쓰러뜨린 골렘에게 가보자는 얘기였
다.
하지만, 라한은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죽기 살기
로 공격했던 골렘이 아니던가. 핵을 파괴했다고는 아직도 두려운
마음이 남아 있었다.
잠시 망설였던 라한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어차피 시간 안에
문을 열지 못하면 죽는 길밖에 없었다.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마
찬가지였으니 부딪혀보자는 생각이었다. 골렘 앞에 도착한 라한은
핵부터 찾기 시작했다. 일단 핵이 완전히 깨진 걸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게 네가 말한 핵이라는 건가?"
"예. "
라한이 골렘에 박혀있던 핵 조각을 쓸어 모았다. 이미 거의 반쯤
파괴되어 수십 조각으로 흩어진 핵이었다. 라한의 손에 의해 모인
핵은 따뜻했다. 주변을 둘러싼 추위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온
기 였다.
그리고 잠시 후, 라한에 의해 모인 핵들이 서서히 뭉치기 시작했
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약 이
핵들이 다시 뭉쳐서 골렘을 움직인다면? 생각을 마치자 이대로 가
만히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릉!
검을 뽑아든 라한이 핵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는 핵이 다시는 뭉
치지 못하도록 완전히 짓이길 생각이었다.
"잠시만. "
"왜요?"
"저 골렘의 표정 좀 봐라. "
라한이 검을 들어 올린 상태 그대로 고개만 돌렸다. 그의 눈에
애처로운 표정으로 라한을 바라보는 골렘의 머리가들어왔다. 분
명히 핵이 파괴되었음에도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아무래도핵을다시 만들어서 살아날것같다. 하지만, 저 표정
으로 보면 더 이상 우리를 공격할 것 같지는 않구나. "
"그래도 공격하면요?"
라한도골렘의 표정이 애처롭기는했다. 하지만, 핵이 뭉쳐진후
공격을 해버린다면 이전과는 달리 피닉스를 사용할 수 없기
에 꼼짝없이 죽을 터였다.
"그럼 넌 뽀족한 수가 있느냐? 곧 극한이 다가오는데 골렘을 죽
이고 나면 어쩔 건데? 그냥 얼어 죽으려고? 어차피 우린 이래저래
죽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차라리 그대로 두고 도박을 해보는 게
그나마 옳은 판단 아닐까?"
"그건 그렇지만. "
라한도 뚜렷한 대책이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을공격했던 골렘
이라서 반감이 생겼을 뿐. 죽여야만 하는 어떤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냥 두고 보자. "
칼라피안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한이 손을 놓고 가만히 있자 핵이 뭉치는 속도도 더 빨라졌다.
마치 그 동안 라한의 눈치를 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 후
핵이 모두뭉쳐지자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골렘의 몸
속에 빨려들 듯 사라져갔다.
쿵-! 쿵-!
몸을 서서히 일으킨 골렘이 라한에게 다가왔다. 그모습에 라한
은 자신도 모르게 세라 소드를 잡았다. 다시 싸우겠다는 생각은 조
금도 없었지만,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이 움직였다.
-슈라.
라한의 바로 앞에 다가온 골렘이 무언가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라한이 몹시 당황스러워했다. 골렘이 말을 하다니 영웅담
에서 본 골렘의 지식과 완벽히 어긋나는 모습이었다.
-슈라.
스스스슥!
다시 한번 중얼거린 골렘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라한의 몸을 감
싸듯 서서히. 골렘이 사라지자 라한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너무 놀라운 일을 결어서 다리에 힘이 빠진 것이다.
"라한아! 아까 그놈이 너한테 뭐라고 한 거냐? 슈라?"
"이름 같아요. "
칼라피안에제 짧게 대답한 라한이 문으로 다시 다가갔다. 좀 전
에 몰랐던 글귀의 의미를 이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슈라. 그 말에
해답이 있으리라.
문 앞에 선 라한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사 더릿속을
더듬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라한이 조용히 읖조렸다.
슈라의 주인이 문을 열어주길 바라노라
쿠쿠쿠쿵
라한의 생각은 정확히 적중했다 거대한 문이 조끔씩 밀려난 것
이다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칼라피안의 눈도 커질 대로 커졌다
정말 라한이 문을 열 줄을 생각지 목한 탓이다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띤 라한이 문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과 그 동안 쌓인 피로가 겹처서 현기증이 있
었다
라한이 문안으로 환전히 들어서자 문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
다 그리고 라한도 정신력으로 버터왔지만 이미 한
계 이상의 힘을 사용했던 라한이다 의식을 잃는 것도 무리는 아
니었다
오베리아 팰리스
루이나 왕국의 시를로스 국왕이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귀
족들에게 가진 재산의 10 퍼센트를 상납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
다 거기까지라면 어떤 개혁의 일환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었다 하
지만 친 시를로스 귀족세력에게는 재산 상납을 할 필요가 없다는
공포를 함께 해버렸다 결국 자신에게 반하는 세력만 공격하
겠다는 의도로박에 해석되지않았다 그리고 한달후 엘베로의
게획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국민의 원성은 하늘에 달했고
귀족들의 반감도 최고조로 올랐다 지금 반란을 성공시키기만 한
다면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을수 있으리라
준비는
배치를 마쳤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 주변을 훑었다 눈빛이 살아 있는 늑대
처럼 매섭게 빛났다. 그에게도 정말고대하던 일이 지금에서야 실
행되는 셈이었다. 물론, 이것 역시 자신의 원대한 계획의 일부에
불과하겠지만
"성 안은?"
"연이은 연회로 경비가 소홀합니다 그나마 왕궁 근위 기사단이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닙니다. "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그가 왕좌에
앉을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시작해라. "
"예. "
휘이 익 !
짧게 대답한파론이 길게 휘파람을불었다. 왕성을공격하기 위
한 신호였다.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여기저기서 낮은 발소리가 어
지럽게 퍼졌다.
챙-!
"콕! "
누군가의 검 소리를 시작으로 여기저기 산발적인 신음소리가 터
져 나왔다. 엘베로 세력들이 왕성에서 싸움을 시작한 거였다.
그리고 잠시 후, 루이나왕궁의 중앙 성문이 서서히 열렸다. 엘
베로의 세력이 성벽을 모두 장악한 듯했다.
"들어가지. "
"예, 공작님, "
엘베로의 주변에도 약 오십여 명의 사람들이 검을 움컥쥐고 있
었다. 엘베로를호위하기 위해 뽑고또뽑은정예들이었다. 아무리
거사가 성공하더라도 엘베로 자신이 죽어서는 의미 없는 일,스스
로를 보호하는 게 모든 공격의 우선이었다.
엘베로가 성문 안으로 사라지자 그 뒤를 따라서 수백 명의 사람
들이 따라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성을 탈취할 병력이었다.
그들이 들어가고 잠깐의 시간이 흐르자 좀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비명 소리는 조금씩 퍼지기 시작
하더니 급기야 국왕의 대궁전 앞에서도 들려왔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왕궁을 장악한 것이다
! 휘이이융! 쾅!
대궁전 앞에는 상당한 수의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어떻게
든 국왕의 신변만큼은 보호하려는왕궁근위 기사단이었다. 그들
의 얼굴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엿보였다.
"마법사를 보내라. "
" 예. "
파론의 대답이 있고 좀 지나자 하늘에서 거대한불꽃이 피어났
다. 마법사들이 대궁전의 중심을 향해 마법을 사용한 모습이었다.
마법이 사용되자 왕궁 근위 기사단원들이 몹시 혼란스러워했
다. 설마 왕궁 마법사들까지 반란에 가입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 이 누구냐? 누가 반란을 꿈꾼 것이냐?"
"흠, 루카스 후작이로군 "
엘베로가 전면을 향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이 이 모든 일의 주
동자임을 밝힘과 동시에 루카스 후작을 포섭하려는 의도였다.
"엘, 엘베로 공작 전하?"
"후작. 이런 입장으로 만나게 돼서 미안하구먼. "
루카스 후작은 엘베로가 주동자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누가 뭐
래도 루이나 왕국의 제 2 인자가 엘베로 아니었던가. 뭐가 아쉬워서
반란을 꽤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가 뭡니까? 왕이 되고 싶어서였습니까? 엘베로님이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물이었습니까?"
"루카스 후작 정말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하는 말인가? 시를
로스 국왕이 왕일에 오른 후, 국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
네. 정녕, 정녕 내가왜 이러는지 모르는 겐가? 아니면 자네도 국
왕 아래에서 호위호식 하는 일에 젖은 것인가? 말해보게. 지금 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느냔 말일세. "
엘베로의 절규어린 말에 루카스 후작이 할 말을 잃었다. 그도 시
를로스 국왕의 폭정을 보면서 너무한다 싶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
었다. 하지만, 그는국왕에게 충성을맹세한기사였다. 국왕이 아
무리 폭정을 일삼더라도 반란에 참가해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다.
그는 그렇게 배웠고 또, 후배 기사들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공작 전하의 뜻에 동조할
수는 없습니다. 전 기사니까요. "
"정녕 뜻을 꺾을 생각이 없는가?"
"죄송합니다, 공작님. "
말을 마친 루카스후작이 검을 빼 들었다. 그도 이미 대세가 기
울었음은 알고 있었다. 자신을 따르는 기사라고 해봐야 걱우 이백.
그나마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지금 이 자리에는 백여 명이 전
부였다. 헌데, 엘베로 후작이 이끄는 기사들은 어림잡아 천 명은
훨씬 넘어보였다. 거기다 그 뒤를 따르는무수히 많은 병사들. 도
저히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애석하구먼. 내 자네의 실력을놀이 사고 있었는데휴, 파론!
공격을 시작하게. "
"예, 공작 전하. 전원 돌격!"
파론의 외침으로 두 세력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거의
비등한싸움으로 보였다. 개개인의 실력에서 왕궁 근위 기사단이
월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궁 근위 기사단이 무너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콕! "
채챙!
"컥!"
왕궁 근위 기사 한 명이 쓰러질 때마다 루카스 후작이 피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고집 때문에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 같아 죄책감
마저 들었다
"잠깐! "
"그만! "
루카스 후작의 외침에 엘베로도 싸움을 중지시켰다. 루카스 후
작의 얼굴에서 그의 의도를 파악한 것이다.
엘베로가 싸움을 중지시키자 루카스 후작이 미약하게 고개를 숙
였다. 자신의 뜻을 이해해줘서 고맙다는의미였다. 싸움이 중지되
자 루카스 후작이 살아남은 기사들을 훌어봤다. 모두 자신이 아끼
고 사랑했던 부하들이었다 자신은 죽더라도 그들만큼은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공작님!"
"말하게. "
이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제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
루카스 후작의 말이 떨어지자 주변 기사들"에게서 원망어린 푸념
이 들려왔다 그들은 이미 죽음을각오한몸. 구차하게 사느니 차
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루카스후작. 그대는뜻을 꺾을 생각이 정녕 없는 겐가?허허,
애석하구먼. "
"죄송합니다. 공작님께서 저들을 용서해주리라 믿겠습니다. 그
럼, 루이나왕국이여, 영원하라!"
푹- !
"단장님!"
"단장님!"
말을 마친 루카스 후작이 자결을 해버렸다. 서서히 쓰러지면서도
부하들을 찬찬히 훌어보고 있었다. 그들을 남걱두고 먼저 떠나는
게 아쉬웠던 모양이다. 루카스 후작이 자결하자 엘베로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마 볼 수 없다는 걸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네 이놈! 단장님의 원수를 갚겠다. "
"용서할 수 없다. "
"그만! "
주변 기사들이 분노성을 토하자 뒤에 있던 근위 기사단의 부단
장이 그들을 제지시켰다. 이미 싸움은 끝난 상황. 애써 희생자를
늘일 필요는 없었다. 실제로 부단장은 이미 오래전에 엘베로에게
포섭된 인물이었다. 지금 나서서 제지시키는 행동 자체가 엘베로
의 계획 속에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부단장님 !"
"그만하라고 했다. 단장님은 자결하면서까지 너희들을 살리고
싶어 했다. 희생을 헛되이 할 생각이냐?"
"하, 하지만. "
부단장도블랑 백작의 말에 주변 기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처럼 지금 나서서 끝까지 싸운다면 루카스 후작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의 뜻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살아남아서
왕국을 위해 힘써야 했다.
"끝까지 살아남아서 루이나 왕국을 지키는 검이 되어라. 그게
단장님의 뜻일 거다. "
쨍그랑!
말을 마친 부단장 도블랑 백작이 검을 던졌다. 그를 바라보던 기
사들도 한두 명씩 검을 던지기 시작했다. 비록 루카스 후작의 죽음
에 분개하기는 했지만, 그들도 인간인 이상 죽기는 두려웠을 터.
도블랑 백작이 선두에 서자 너나 할 것 없이 검을 던졌다.
"허허, 고맙네. 도블랑 백작이라고 했는가? 정말 고맙네. 다행
히 기사들의 헛된 희생을 막을 수 있었구먼. "
"아닙니다. 공작님. 들어가시지요. "
왕궁 근위 기사단의 항복으로 엘베로는 루이나 왕국의 정점에
설 수 있었다. 시를로스 국왕은 술에 만취해서 반란도 모른
채 죽음을 맞았다. 그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국왕의 자리에 오른 엘베로는 서둘러 정치를 개편하고 정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별장에 있는 엘레노아 공주는 불러들이지 않았
다. 아직 불안정한 시국에 그녀가 등장했다가는 자칫 왕위를 넘기
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를 일, 왕권을 완벽하게 확립한 후에 그녀를
부를 생각이었다.
라한은 하루를 꼬박 자고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나마 무의
식중에 제령기와제란기를돌렸기에 빨리 일어난거였다. 이틀밤
을 꼬박 새고 쓰러질 정도로 몸을 혹사시킨 대가치고는 짧은 시간
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라한이 고개를돌리기 시작했다. 꿈쩍 않고하
루를 누워 있어서인지 몸에서 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 몸이 말이 아니군 "
"일찍도 일어났다. 너 호주머니에 음식 좀 남았지? 빨리 뱉어. "
칼라피안은 라한의 등에 묶인 채로 하루를 꼬박 보내야했다. 사
지를 못 쓰니 끈을 풀 수도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냥저냥 라
한이 깨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좀 살만하네. "
몸 여기저기를 풀던 라한이 긴 한숨을 토해냈다. 아직도 내상이
남았는지 속은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그래도 걷는 일 정도는 가능
했다.
"으차! 입 벌려요. "
칼라피안을 내려놓은 라한이 주머니에서 음식을 꺼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음식이었다. 그나마도 얼음 골렘 슈라와의 싸움에
서 짓이걱져서 완전히 뭉개져 있었다.
"모양이 엉망이군. "
"대충 먹어요. "
칼라피안에게 음식을 먹여주면서 라한도 조금씩 집어먹었다. 어
렵게 들어오긴 했지만, 무슨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오벨리아 팰리
스. 이곳을둘러보려면 기력부터 되찾아야했다. 음식을 대충 먹은
라한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몸을 다시 한번 추스르기 위해 제령선
공과 제란마공을 돌릴 생각이었다. 라한이 심법 수련을 하려하자
칼라피안도눈을지그시 감았다. 심법 수련은라한이 했지만, 곁에
있는 사람의 피로도 쾌 많이 풀리기 때문이다.
"아, 개운하다. "
심법 수련을 마친 라한이 칼라피안을 등에 메었다 그리고 세라
소드를 손에 꽉 쥔 채 서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가는 길은 아
무런 무의나도형도 그려지지 않은좁은통로였다. 약 백 미터 전
방문이 있는 걸로 봐서 오벨리아 팰리스가본래 이중문의 구조인
듯했다.
"후우. "
문 앞에 선 라한이 심호흡을 한차례 했다. 만약 위험이 있다면
이 문을 지나면서 만나게 될 터. 그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를 하는
것이다.
본래 라한은 오벨리아 팰리스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지
금 이 통로만 해도 추위를 충분히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
시 대륙으로 돌아가려면 9 개월 이상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야했
다. 헌데, 가지고 있는 식량은고작하루 이틀 정도를 버틸 양뿐,
어떻게든 안에서 허기 채울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다.
구우웅!
문의 크기 때문인지 열리는소리도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문을
밀었던 라한도 그 소리에 순간 멈칫하며 한걸음 물러났다. 단순히
문소리에 불과함에도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저벅!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간 라한이 주변을 슬쩍 훑었다. 빛이 들어오
는곳이 없어서 무척이나 어두웠다. 하지만, 라한은 그리 멀지 않
은 곳의 풍경은 구분할 수 있었다. 제령신공의 영향으로 오감이 발
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쩌죠?"
"뭐가 말이냐?"
칼라피안의 눈에는 가까운 곳의 사물도 보이지 않았다. 루이에에
게 마나가 흩어진 그는 평범한 드워프에 불과했다. 라한이 구분할
수 있는 사물마저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으니 그냥 되물을 수밖에.
"이 앞에 붙을 붙일 수 있는 게 있는데 붙일까요?"
"음, 일단 테세르를 이용해보는 게 좋겠다. "
칼라피안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섣부른 행동을 하느
니 좀 답답하더라도 안전한 길을 택하자는 의미였다. 라한의 성격
도 이와 비슷했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테세르. 이 성안을 돌아다니면서 생명체가 있는지 찾아봐 음
식이 있는지도 좀 찾아보고. "
고개를 짧게 끄덕인 테세르가 어둠 속 깊이 들어갔다. 본래 검은
색의 정령이라서 눈에서 사라지는 속도도 빨랐다.
테세르가 사라지자 라한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밖에서 본 오벨리아 팰리스의 크기는 사방 1 킬로미터를 능가하
는 거대한 크기였다. 테세르가 주변을 살피고 오는 데에도 오래 걸
릴 거라는 생각이었다.
"심법이나 돌려볼까?"
바닥에 앉은 라한이 또 다시 제란마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아
무래도 테세르의 움직 임이 제란기와 관계가 있기에 이 심법을 돌리
는 게 유리했다.
십여 분이 흐른후, 테세르가 라한앞에 도달했다. 그와동시에
라한도 심법 수련을 마치고 눈을 떴다.
"안에 생명체가 있어?"
라한의 물음에 테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한으로서는 생각지
도못한반응이었다. 막상명령을내리기는했지만, 생명체가 없을
거라는 걸 거의 확신했었다. 헌데, 생명체가 있다니. 의외의 반응
에 라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위험한 녀석이면 곤란한데.
라한의 내부는 정상이 아니었다. 골렘 슈라에게 맞은 내상에서
완벽하게 완쾌되지 못한 탓이다. 거기다 내상을 치료할만한 약도
없었다. 좀 더 시간을 들여서 심법으로 치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험한 녀석이야?"
테세르는 이번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에 라한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떤 면에서는 라한보다 겁이 많은 존재가
테세르였다. 그가 위험이 없다면 정말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
했다.
"아저씨! 불 켤까요?"
"그러지. 그나저나 생명체라
칼라피안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라한이 주변 휫불에 불을 붙이려
했다. 하지만, 이내 의아한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
양만 횃불의 형태이지 불을 붙일 그 어떤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즉 겉모습과는 다르게 횃불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어?"
"왜 그러느냐?"
"췻불이 아니네요. 음. "
잠시 침음성을 흘린 라한이 횃불 여기저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문스러운표정이던 라한. 곧, 표정이 묘하게 꼬이더니
놀란 표정으로 바픽 었다
"설마? 라이트! "
파, 파팍! 파팍!
라한의 중얼거림이 끝나자 횃불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처음 하
나만붙었던 횃불은 이내 옆으로 번지기 시작했고, 일정한간격으
로 불이 계속 커졌다. 그리고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라한의 시선
에 닿은 모든 곳에 불이 켜졌다. 근 삼백에 가까운 수였다.
"흠, 네가 한 거냐?"
"마법등이군요. 휴, 대륙을다 뒤져도 이렇게 많은등은
찾기 힘들 텐데. "
대륙에 존재하는 마법등은 채 백 개가 되지 않았다. 인챈트가 소
실되었기에 마법등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유적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면, 마법등 자체가 사라졌을 게 분명했다. 물론,
드래곤 정도라면 만들 수 있겠지만, 그들이 인간에게 만들어 줄 리
만무했다.
"내가 잘은 모르지만 라이트 마법은 1 서클 아니었냐? 겨우 1 서
클인데 왜 그렇게 놀라는 거지?"
칼라피안은 라한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4 서클의 마법
도 인챈트하지 않았던가. 그런 라한이 고작 1 서클 마법에 놀라다
니 비록 수가 많기는 하지만 4 서클 인챈터가 놀라기에는 부족하다
는 생각이었다.
"등에 사용된 재료 때문에 놀란 거죠. 대충 봐도 삼백 개는 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많은 마나석이라니. 아무리 하급 마나석이라
도 이 정도면 웬만한 도시를 사고도 남을 걸요. "
"그러냐? 별일이군. 근데 뭐하냐?"
"아! "
주위를 다시 훌던 라한이 입을 떠억 벌렸다. 주변 광경이 그를
놀라게 할 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라한이 들어선 곳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오벨리아 팰리스 크기의
대부분이 이 공동인 듯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공동에 펼
쳐진 모습이었다. 공동의 중앙에는 폭이 50 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거대한우물이 있었다. 그리고그주변에는 어린 아이의 얼굴크기
의 붉은 구슬 여덟 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마치 우
물을 둘러싸서 무언가를 하는 듯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드드래곤?"
드드드
구슬의 뒤에는 엄청난 크기의 드래곤이 뼈와 거죽만 남은 채 앉
아 있었다. 구슬의 수와 같은 여덟 마리의 드래곤이었다. 또, 그 드
래곤의 뒤쪽에는 인간이나 엘프 같은 이종족의 뼈 수백 구가 쌓여
있었다.
"라, 라한아!"
"아저씨. 진정하세요. 일단저들은전부죽은것 같아요."
"후우, 뒤에 있는 이종족들과 드래곤이 싸운 걸까?"
칼라피안의 물음에 라한이 뼈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갔다. 구
슬을 바라보고 있는 드래곤의 뼈들과 그 뒤에 흐트러진 채 쌓인 이
종족의 뼈들. 싸웠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저 구슬은 중앙에 있는 구멍과 관계 있는
것 같고음, 드래곤들은 저기 있는붉은 구슬에 무언가를 했던
것 같아요. 뒤에 있는 이종족은 드래곤을 도와서 뭘 했던 걸로 보
이고요. "
라한의 말처럼 드래곤과 이종족은 같은 목적으로 이곳에 모인
듯했다. 한결같이 드래곤의 등 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종족의 뼈들.
아마 드래곤의 등에 무언가를 했으리라.
"뭘까요?"
"응? "
"제 눈에는 이종족과 드래곤이 힘을 합해서 무언가를 했던 걸로
보여요. 그 강하다는드래곤이 이종족의 힘까지 빌려 무언가를했
다? 좀 이상하지 않아요?"
드래곤은오만하며 자존심이 강했다. 이 때문에 남들에게 도움
받는 행위 자체를 수치스러워하는 종족이었다. 그런 드래곤이 하
찮게 여기는 이종족의 도움까지 청할 정도라면 무언가 큰일
이 벌어졌으리라는 생각은 어렵지 않게 가능했다.
"흠, 그럼 저기 널린 게 전부 드래곤 본과 드래곤 스케일이군
크크크크. 저걸로 무기를 만들면 대륙 최고의 명검은 따 놓은 당상
이다. "
칼라피안은 본래 드워프인지라 드래곤이라는 존재 자체를 두려
워했다. 하지만, 이미 죽은시체임이 확인된 이상그들을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일단 두려움이 사라지자 드래곤 본과 드래곤 스케
일이 재료로만보였다. 또, 할수만 있다면 저 물건으로 대륙최고
의 물건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비록, 사지가잘려 꿈에 불과한얘
기겠지만.
"테세르! 생명체가 있다는 곳으로 안내해. "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홀을가로질러 날아갔다. 하지만, 중앙에
있는 거대한 우물만큼은 빙 돌아서 피했다.
라한은 테세르의 뒤를 따르면서도 주변의 뼈를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얼핏 보기에도죽은 지 한참은 되어 보이는 드래곤. 아
래쪽에 있는 뼈를잘못 건드렸다가무너지기라도 하면, 거대한 뼈
에 깔려 죽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중앙을 가로지르자 처음 입구와 비슷한 크기의 문이 나타났다.
하지만, 손잡이가 달려 있어서 특별한 조건 없이도 열리는 듯했다.
"합! "
끼이이익! 쿵- !
라한이 힘주어 밀자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크기가 크기
인지라 라한이 안간힘을 써야 걱우 열릴 정도였다. 하지만, 거대
한 크기에 비해서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열린 편이었다
문이 열리자 라한이 감각을 주변으로 확장시켰다. 생명체가 있
는곳이었으니 위험을 미리 감지하려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라한
의 감각에는 생명체로 보이는 그 무엇도 잡히지 않았다.
저벅!
라한이 들어선 곳은 서재였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책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어떤 책들은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기도 했
다. 대충보기에도천 권은족히 넘는듯했다. 책을대충스윽쳐다
본 라한이 테세르를바라봤다. 생명체가 어디 있냐는 의문의 눈빛
을 보낸 것이다. 라한의 눈빛을 받은 테세르가 서재의 한 곳으로
달려갔다. 책장과 책장 사이에 나 있는 작은 문이었다.
'흠. 느껴지는군. '
라한의 감각에 안쪽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 벽 외에
도무언가가 가로막고 있는듯뚜렷하게 잡히지는 않았다. 또, 그
리 강한 생명체가 아닌지 느껴지는 기운도 몹시 미약했다.
삐걱!
문 안에는 나무 십여 그루와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었다. 라한
이 느낀 생명체는 연못 안에 살고 있는 물고기인 듯했다.
"라한아! 저 나무가무슨 나무냐? 어디서 본 것 같기는한데
"저건 엘프리아라고 불리는 나무예요. 엘프들이 여행을 떠날
때, 항상 저 나무의 씨앗을 들고 다닌다고 하죠. 땅에 심고 엘프 마
법으로 빠르게 성장시키면, 비상식량이 된다고 하거든요. "
육식을 못하는 엘프들은 육포 같은 음식을 가지고 다닐 수 없었
다. 또, 신선한음식이 아니면, 큰 거부감을느끼는종족이 엘프였
기에 마른 빵 조각도 싫어했다. 엘프리아는 그런 까다로운 식성의
엘프를 만족시컥주는 나무였다. 열매가 나는 속도도 상당히 빠르
고 엘프들의 까다로운 식성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나 드워프 같은 다른 종족에게는 그리 반가운 열
매가 아니었다. 당도가 너무 높은 열매라서 적응을 못하는 것이다
"아, 맛 더러운 그 열매로군. "
"후후, 배고프면 먹을 수밖에 없어요. "
라한의 대답에 칼라피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의 말처럼 라
한과칼라피안은음식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식량이 거의 떨어
져가고 있었다 배고프면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칼라피안은과거에 엘프리아를한번 먹어봤었고, 그당
시의 끔찍했던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절로 인상
이 찌푸려졌다.
"빌어먹을. 아까 드래곤 뒤에 있던 이종족은 엘프였나 보군. "
"인간이나 드워프도 있는 것 같은데요. "
말을마친 라한이 연못을손으로 가리켰다. 얼핏 보기에도 엄청
난 물고기들이 마구 뛰어놀고 있었다. 밖은 혹한이었지만,
오벨리아 팰리스 안은 봄 날씨처럼 따스했다. 그런 기후가 유지되
었기에 물고기도 살 수 있었던 모양이다
"음, 그렇군. "
라한이나 칼라피안이 본 이 방은 식량 창고였다. 일정량을 쌓아
놓고 조금씩 소모하는 창고가 아닌,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영구
식량 창고였다.
"일단 굶어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
말을 마친 라한이 칼라피안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칼라피안은
잠깐 업혀 있었던 것도 피곤한지 눈이 거의 반쯤 감걱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 가는구나. '
"여기서 쉬고 계세요. 전 책 좀 볼게요. "
라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칼라피안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
는 요즘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수면을 취하며 보냈다. 노화가 급속
히 진행된 듯했다.
서재로 간 라한이 책 제목을 하나씩 훔기 시작했다 책의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일대기에 관한 책이었다.
'밖에서 죽은 이들의 일대기로군.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려는 자
연스러운 행동인가?'
제목의 거의 대부분을 살핀 라한이 중앙에 놓인 책에 시선을 고
정시켰다.
오벨리아 팰리스. 이 궁전의 이름과 똑같은 제목의 책을 발견했
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면 오벨리아 팰리스가 생긴 이유를 알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또, 홀에 있는 여덟 마리의 드래곤과 엄청난
수의 이종족이 무엇을 했는지도 알 수 있을 터였다.
책을 펴든 라한이 처음부터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
무 감정 없이 읽던 라한의 표정이 갑자기 돌변했다. 책에 쓰인 문
구가 라한의 시선을 고정시킨 것이다. 책을 끝까지 읽은 라한이 칼
라피안에게 뛰어갔다.
"아저씨! 아저씨! "
"음? 식사 시간이냐?"
칼라피안은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몽롱한상태였다. 하지만, 라
한의 표정을 슬쩍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라한이 저 정도로 놀란
표정이라면 무언가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게 아니라 오벨리아 팰리스가 뭐하는 곳인지 알아냈어요. "
"그래? 뭐하는 곳인데?"
라한의 말에 칼라피안도 호기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인간들의
금지라 불릴 만큼 혹독한 파마리스 평원. 그곳의 한 가운데에
이런 건물이 있다는그 자체가그에게는 신기한 일이었다. 또, 안
에서 본 드래곤의 시체들과 여기저기 널린 이종족의 흔적들. 이 모
든 일의 해답이 라한의 입에서 해결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대충 수만 년 전에 만들어졌어
요"
"흠, 그건 예상했다. 듣도 보도 못한 글씨들을 봤을 때 알아봤
지. 거기다가 드래곤이 뼈와 비늘만 남은 것도 까마득한 시간이 흘
렀다는 걸 증명하고 있지. 드래곤의 살은 잘 썩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
드래곤을 두려워하는 드워프인 만큼 그에 대해서는 쾌 많이 알
고 있었다. 드워프들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었으니 상대에 대한
정보는 필수였다.
"오래전에 마족들의 침입이 있었나 봐요. "
"그거야 각종 영웅담에 보면 자주 나오는 내용 아니냐? 흑마법
사가 마족을 불러서 물질계가 혼란에 빠지고 뭐 그런 얘기를 하
는 거냐?"
판트리아 대륙 역사에서 마족의 등장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
었다 흑마법사가 마족을 불러 물질계를 혼란에 빠뜨린 적이 많았
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등장한마족의 대부분은 영웅이나드래
곤에 의해 역소환 되거나 소멸을 맞았다.
"아니오. 아까 본 거대한 우물 기억나요?"
"응. "
"그곳은 팰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마계 통로래요. "
"마계 통로?"
칼라피안은 마계 통로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마계
와 물질계 사이에 길이 있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칼라피안의 멍한 반응에 라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마계 통로는 물질계와 마계가 연결된 통로예요. 그 통로를 통
해서
헤아릴 수 없이 오래전, 물질계가 마족의 침입을 받았다 이종족
보다 월등한 힘을 가진 마족. 그들의 등장은 인간을 비롯한 이종족
에게는 재앙으로 다가왔다
겨우 왕국을 형성했던 인간들은 철저히 부서져 피폐해져갔고,
숲에 있던 엘프들도숲을 잃었다. 산맥에 자리 잡고광을 캐던 드
워프들도 마족의 등장으로 목숨을 잃어갔다.
참다못한 드래곤은 마족과의 결전을 위해 드래곤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로드의 명에 따라 물질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드래
곤의 등장이 있기 바로 직전에 마족들은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드
래곤에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이었다. 좀 의아하기는 했지만,
마족들이 물러갔으니 드래곤은 다시 레어로 돌아가야 했다.
문제는 그때 발생했다. 드래곤이 레어로 돌아가기만 하면 마족
들이 등장한 것이다. 드래곤에게도 의외의 상황이었고, 인간을 비
롯한 엘프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드래곤 로드는 또 다시 수면 중인 드래곤을 깨워 소집했고 물질
계로나섰다. 하지만, 이번에도상황은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등장
하자 마족들이 모습을 감춰버린 거였다. 그 후로도 몇 차례나 이런
일이 반복되자 드래곤도 나름대로 조사를 시작했다
"마계 통로 팰리스라
무려 십여 년간 조사를 한 드래곤들은 이번 일의 원인을 찾아냈
다 마계와 물질계를 마음 놓고 오갈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한 것이
다. 언제든 오갈 수 있기에 드래곤이 등장하면 미련 없이 후퇴를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암울했겠군. "
"끝까지 들어보세요. "
드래곤들은 마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팰리스를 봉쇄시킬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어지간한 마법은 통하지도 않는 그들을 막는 건
쉬운 일이 아니 었다.
드래곤 로드는 팰리스를 막기 위해서는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
이상의 열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대륙을 뒤져 화염의
마나석을모았고, 팰리스주변에 소멸이 얼마남지 않은고룡들을
배치했다. 화염의 마나석에 고룡들이 가진 브레스의 기운을 더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힘이 많이 부족했다. 당장은가능하
지만, 이 열기를지속시킬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종족들이 끌려온 건가?"
"예. 끌려왔다기보다는자진해서 왔다고해야겠죠. 물질계가위
험하다는 건 그들도 절실히 느꼈을 테니까요. "
드래곤들은 이곳의 열기를 더하기 위해 주변의 열기를 빌려을
필요성을 느꼈다.
카라프라 컨트롤. 주변의 열기를 가져와서 이곳의 열기를 더하
는 고대 마법이었다. 하지만, 물질계를 위한 희생을 드래곤들만 질
수는 없는 일. 그들은 이 마법을 유지시키기 위해 인간을 비롯한
이종족 마법사 거의 대부분을 데려왔다.
"기후 변화가 그들 짓이었다니 휴, 이게 드래곤들의 힘인가?"
칼라피안은 라한의 말을 들으면서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라한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가 봤던 거대한 우물은 마계로 통
하는 길목이 분명했다 물질계에서 마계와 가장 가까운 곳이 오벨
리아팰리스인 셈이었다. 또, 순간의 감정으로구슬을가져오기라
도했다면, 마족과의 통로가다시 열릴 수도 있는 일. 그때를생각
하자 호기심을 잠깐이라도 참은 라한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이종족들은 드래곤을 도와서 팰리스를 막았어요. "
"그리고 그 힘이 다해서 죽음을 맞았다?"
" 예. "
이 대답을 끝으로 라한과 칼라피안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둘 모
두 이곳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한참이 흐른
후, 칼라피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홀에서 봤던 구슬은
"손대지 말아야겠어요. "
대답을하는 라한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고룡이 가진 기운
에 구슬이 담고 있는 화염이라면 그 기운이 극에 달할 게 분명했다.
그 구슬에 불 계열 인챈트만 한다면 대륙 최고의 무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대륙을 위험으로 몰고 갈
수는 없었다.
"아까 드래곤 본은 어쩔 거냐? 이미 수명이 다한
드래곤이라서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
"저한테는드래곤본에 무언가를새길 능력이 없어요. 미스릴에
조각하는 것도 힘든데 드래곤 본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
라한의 대답에 칼라피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서 가공하지
못하는 재료가 없다는 드워프에게도 드래곤 본은 쉽지 않은 재료였
다. 어쩌면 드워프 장인 수십 명이 평생을 바쳐야 겨우 하나 정도
만들어질 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다 다른 것도 아닌 조각으로 복
잡한 도형과 공식을 새기는 일이라면? 드워프들이 드래곤 본을 가
공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 게 분명했다.
"그래도 아쉽구나. "
"뭐, 어쩔 수 없죠. 그래도여기서 머물러야하는시간동안계속
수련할거예요. 그 기간안에 자를수 있는능력만된다면, 가지고
나갈 생각이에요. 지금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가능하지 않겠어요?"
드래곤의 비늘과 뼈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 점점 강해지는 물질
이었다 해출링의 뼈보다 성룡이 그것보다 고룡의 뼈와 비늘이 더
강한 것이다. 책에 쓰인 내용이 정확하다면 라한이 본 드래곤은
고룡 중에서도 최고령의 드래곤. 가공이 힘든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대신, 가공해서 만들기만한다면 최강의 무구가될 게 분
명했다.
"넌 이곳 오벨리아 팰리스가 쿨럭! 쿨럭! 으, 으 쿨럭! "
"아저씨! 왜 그러세요?"
말을하던 칼라피안이 기침을하며 몸을 떨어댔다. 그의 갑작스
러운 발작에 라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눈에 띄
게 약해지기는 했지만, 이런 식의 발작은 처음이었다.
"아아니다. 난 괜찮다. "
"정말 괜찮아요? 제가 옆에서 심법 수련 할까요?"
라한의 심법 수련은 칼라피안의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에 큰 도
움이 되었다. 심법을수련할때 주위를 감싸는 제령기와제란기가
칼라피안을 도운 듯했다. 라한의 심법이 쾌나 높은 경지에 든 이유
도 이런 칼라피안의 영향이 컸다. 그가몹시 피곤해보이거나 힘들
어 할 때마다 심법을 펼친 라한. 하루에도 몇 번씩 심법을 펼쳐댔
으니 성과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일단 주변을 좀 돌아보거라. 난 눈 좀 붙여야겠다. "
"예. 그럼 주무세요. "
칼라피안이 눈을 감자 라한이 눈물을 글썽였다. 요즘 들어 말하
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칼라피안이었다. 라한은 그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생을 고생만 하다 보낸다는 생각이 든 거였다.
'오래 오래 사세요. '
자리에서 일어난 라한이 서재로발길을돌렸다. 본래 책을좋아
하는 라한에게 이곳의 책은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 책의
대부분이 일대기라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다. 남의 일대기를살
피는 일만으로도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일단 일대기 외에 다른 책을 찾아야겠는데 '
일대기에도 호기심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 외의 책을 찾는 게 우
선이었다. 혹시, 뛰어난 마법서적이나 인챈트 서적을 발견하기라
도 한다면 라한이 파마리스 평원을 지나며 고생한 모든 대가
를 보상받는 셈이 었다.
'마나의 본질이라
라한은 새끼손가락 굵기 정도의 책을 꺼내 들었다. 오래된 책이
기는 했지만, 이곳에 무슨 장치가 되어 있었는지 조금도 낡아 보이
지 않았다.
책을 하나씩 넘기며 읽던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책의 내용
에서 무언가를 잊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무언지
정확하게 딱잡히는 게 없었다. 아마무심코 넘긴 어떤 것과책 내
용이 관계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클래스마법과비클래스마법이라 좋은이론이군 마나량
만 충분하면 서클이 낮아도 고서클 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
마나의 본질이라는 책에서는 마나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클래스 마법과 비클래스 마법. 이 두 가지는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
다르게 작용했다.
먼저, 클래스 마나는 마나량이 아무리 많아도 그 서클에 도달하
지 못하면 사용할수 없는마법이었다. 즉, 심장을둘러싼띠의 개
수에 의해 발휘되는 마법이었다.
대부분의 원소마법이 이 범주에 속했다. 파이어 볼이나 체인 라
이트닝, 윈드블레스트 같은 이 같은마법은그 해당 서클까
지 마법 실력을올리지 못하면 사용할수 없었다. 즉, 1 서클 마법
사는 마나량이 아무리 많아도 상위 클래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거였다.
비클래스 마법은 마법의 서클과 상관없이 사용할수 있는 마법
이었다. 대부분 복합 원소나 비원소 계열 마법이 이 계통이었다.
블링크, 아공간, 텔레포트등. 이런 마법은마나량만많으면 하위
서클의 마법사도사용할수 있었다. 즉, 하위 마법사들이 이 마법
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마법을 시전할 마나가 부족했기 때
문이다. 즉, 심장에 두른띠가 일정 개수 이상이 되어야하는마법
을 클래스 마법, 개수에 상관없이 마냐량이 충분해야 하는 마법을
비클래스 마법이라 부른 것이다. 모든 마법을 클래스 마법이라 생
각했던 라한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사실일까? 내 심장에 있는 제령기도 어떤 면에서는 마나라부
를 수 있는데
책에 언급된 이론의 가장근본은마나석의 존재에 있었다. 부족
한 마나를 마나석으로 충족시컥서 상위 비클래스 마법을 사용한다
는 이론인 셈이다. 현 대륙에는마나석이 거의 전무한상태였기에
알아도 사용할수 없는 이론이었다. 하지만, 라한은 심장에 가진
제령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마나석이었다. 띠를 나눌 수 없는 대
신, 하나의 띠가 거대하게 커져 있었고, 그 띠가고밀도로 농축된
것이다.
'일단 좀 더 찾아봐야겠다. '
생각을 마친 라한이 마나와 관계된 책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마나의 본질에서 언급된 내용이 사실이라면 자신도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물론, 클래스 마법은 1 서클밖에 사용할 수 없겠지만,
비클래스 마법은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양과 질로는 상위 마법사
수준까지 도달한 라한이 아니던가.
한참을 뒤적이던 라한이 일곱 권의 책을 꺼내 들었다. 제목에 마
나의 본질이 포함된 책 전부를 모은 것이다.
책을가지런히 쌓은 라한이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각각조금씩
은다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클래스 마법과 비클래스
마법의 존재만큼은 확실하게 언급되어 있었다.
'후우, 좋군. 마법사라 내가 다시 마법사를 꿈꿔도 되는 건
가?'
사실 라한은 인챈터의 한계를 느끼는 중이었다. 비록 그 자체만
으로는 엄청난돈을모을수 있는좋은 직업이었다. 하지만, 전투
에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고, 재료를 모으는 일도 극악이었다. 재료
가 없으니 실제로 사용하기가 힘든 거였다
'마나는 4 원소를 포함하는 정체된 기운이다. 4 원소를 포함하
는.
책에서 언급된 내용을보며 라한이 고개를갸웃 거렸다. 내용에
서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었지만 확실한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
이다. 무언가 알 듯 말 듯한 느낌에 인상이 마구 찌푸려졌다.
'마나가 4 원소 모두를 포함하는 기운인 건 확실하겠지. 마나로
불, 물, 바람, 땅계열 마법을사용할수 있으니까. 근데뭔가를
놓친 것 같은데
알 듯 말 듯한 기분이었지만, 라한은 생각의 끈을 놓아 버렸다.
앞에 널려 있는 수많은 책들을 읽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한 가
지 생각에 너무 매달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으리라. 라
한이 책을 뒤지며 마법 주문에 관련된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
만, 생각보다 그리 많은 책을찾을수는 없었다. 대부분이 일대기
에 관한 책뿐이었고 나머지도 이론적인 측면에 치우쳐 있었기 때
문이다.
'겨우 다섯 권. 쳇. '
책을 고르기는 했지만 읽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했다. 두 번의 책
고르기로 거의 열두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자신은 좀 참으면 되
겠지만, 늙어가는 칼라피안을 굶길 수는 없었다
테세르를 바꾸다
잠든 칼라피안을 보며 라한이 어둔운 표정을 지었다 얼굴 가득
한 주름과 하얗게 새버린 흰 머리카락. 거기에 얼굴 여기저기에 나
있는 겋은 반점들까지. 이젠 누가 보더라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
낄 정도였다.
"아저씨? 일어나세요.
.
라한의 부름에도 칼라피안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몇
번 몸을 뒤척일 만도 하건만 그런 작은 변화조차도 찾기 힘들었다
이에 라한이 놀란 얼굴로 재차 외쳤다.
"아저씨!"
칼라피안의 가슴에 머리를 댄 라한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심장
이 뛰지 않았다 비록 미약하고 불규칙적이기는 했지만 좀 전까지
만 해도 계속 뛰던 심장이 조금도 뛰지 않았다. 라한이 칼라피안의
등에 손을 올렸다.
'제발, 아저씨! '
라한이 칼라피안의 몸 구석구석에 제령기를 불어넣었다. 활력과
관계 있는 제령기라면 칼라피안을살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라한의 제령기 주입은 십여 분 동안 계속되었다. 시간이 흐를수
록 라한의 이마에는 땀이 맺히기 시작했고, 지금은 거의 흘러내리
는 수준이었다.
'제발, 제발
"음 으
라한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음인지 칼라피안이 신음을 흘리기 시
작했다. 아주 긴 잠을 자고 일어난 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어떤 면에
서는 파마리스 평원을 종단할 때보다 더 멀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흠, 후후후 내가 이제 때가 된 모양이구나. "
칼라피안은 늙어가고 있었다. 오래전 루이에와의 싸움에서 마나
가흩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노화를 막아주며 오랜 생을유지시켜
줬던 소드마스터의 경지. 그 경지에서 벗어나자 급속하게 늙어가
기 시작했고, 지금은 막바지에 도달한 셈이다.
"우씨, 놀랐잖아요. "
"후후, 라한아. 어차피 누구나태어나면한번은겪어야할일이
다. "
지금의 멀정해 보이는 칼라피안의 모습은 죽기 직전에 보일 수
있는모습. 일종의 회광반조현상이었다. 라한도알고 있었기에 슬
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저씨. "
"녀석 우는구나. "
라한이 손등으로 눈물을 스윽 훔쳤다. 그를 본 칼라피안이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비록 서로의 요구에 의해 동행했지만, 함께 있었
던 시간은 6 년이 넘었다. 그 긴 시간동안 티격태격하며 정이 들 만
큼 든 것이다.
"라한아, 네 꿈이 오래 사는 거라고 했느냐?"
"예. 전 절대 아저씨처럼 죽지 않을 거예요. 오래 오래 살아서
행복하게 살 거라구요. 제가 어떻게 살지 궁금하죠? 궁금하다고
말해요. 빨리! "
라한은 칼라피안이 그렇다고 하길 바랐다. 그렇게 해서 그에게
자신의 미래를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의 곁에 오래오래 두고

"라한아, 나는 네가 인챈트 능력만큼은 숨겼으면 좋겠구나. 별것
아니게 보일 수도 있지만, 왕국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게다. "
칼라피안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자신의 능력을
몇 가지는 숨기려고 했다. 무엇을 숨길지를 결정하지 못했던 상황
에서 그 대상이 인챈트로 정해졌을 뿐이다.
인챈트는 개개인에게는 그리 큰 무기가 아니었다 재료가 부족
한탓에 실제로쓸모가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라의 입장에서
는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만약 인챈터가 재료를 충분히 확보한다
면 . 아니면 다른왕국에 속해서 국가적인 입장에서 재료를 제
공 받는다면 인챈터를 섭외한 나라에는 엄청난 힘이 될 터였
다. 반대로 그 상대국에게는 엄청난 위협이 될 게 분명했다
"내가 네게 보물을 주겠다고 했던 말, 기억하느냐?"
끄덕 !
"기억나요. 보물을 아직 안줬으니 죽으면 안돼요. 아셨죠?보
물 주고 죽으란 말이 에요. "
라한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왔다. 감정이 복받쳐 턱밑까지 차
올랐다. 다른 존재의 생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던 라한. 생소한
느낌에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였다.
"세라 소드가 있던 상자를 돌리면 팔찌와 목걸이가 나온다. "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직접 줘야죠. "
"녀석. 내가 죽는 건 하늘의 이치다. "
칼라피안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미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을 감출 방법이 없어서였다. 꺼져가는 칼라피안에게 눈
물을 보이기는 죽어도 싫었다.
"루이에에게 복수는 하지마라. 그와의 싸움이 아니었다면 내가
널 만나지도 못했겠지. 어찌 보면 그가 있어서 우리가 만날 수 있
었던 게다. "
"아저씨. "
"울지 말거라. 난후회하지 않는다. 지난 천 4 백 년의 삶보다 너
와 보냈던 6 년이 더 행복했으니까. "
"엉, 엉엉죽지마세요. 아저씨! 나혼자 남겨 두지마세요. 제
발요. 아저씨
라한이 칼라피안을 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그에게는 심법을 가
르쳐줬던 제스란보다 칼라피안이 더 소중한 존재였다. 제스란에게
중요한 걸 배우기는 했지만, 함께 했던 시간은 겨우 몇 달에 불과
했다. 하지만, 칼라피안과는 6 년이 넘는시간이었고, 그시간도등
에 업고 지내며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다.
"내가 없어도 넌 잘 해낼 수 있을 게다 "
"아저씨, 엉엉. 아저씨!"
"이제 그만 날. 놓아 주겠느냐? 힘들구나, "
칼라피안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들었다.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
어 엉망인 얼굴이었다. 하지만, 칼라피안은그 얼굴도 사랑스러운
지 웃고만 있었다.
"아저씨. "
"행복. 하거라. "
조용히 읖조린 칼라피안이 눈을 감았다.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
를 띤 채.
칼라피안이 눈을 감자 라한이 그의 얼굴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거
칠고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라한에게는 한없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아저씨, 소원은못들어 줄 것 같아 난, 나는 있지. 루이에라
사람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거든. '
라한이 칼라피안을꼭 껴안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하지
만, 눈빛만큼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라한은그렇게 루이에에게
복수할 결심을 굳혔다.
루이나 왕국의 왕성 안.
국왕이 된 엘베로가 몇몇 대신들을 불러들였다.
요즘은 대대적인 개편기간이었기에 이런 모임도 상당히 잦았다.
할 일은 많고 인재는 부족한 형편. 지금 루이나 왕국의 상황이 딱
그러했다
주변을 한차례 둘러본 엘베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전과는
다른 근엄하고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케라스 왕국의 상황은 어떤가?"
"신, 드미트리가 아룁니다. 현재 케라스 왕국은 갑작스러운 베
어울프의 공격으로몹시 혼란스러운상태입니다. 하지만, 워낙강
한 나라라서 오래지 않아 수습이 될 듯합니다. "
케라스 왕국 뿐 아니라 대부분의 왕국들이 몬스터의 공격을 받았
다. 그 중 대륙의 외곽에 위치한 왕국은 그 피해가 심각할 정도였
다. 대륙의 외곽오지에서 엄청난수의 베어울프가 밀려왔기 때문
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륙 중앙에 위치한 왕국이 피해를 입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정도가 덜했을 뿐이지 산발적인 공격을 계속 받았다.
대륙 중앙의 왕국들 중 가장 큰 공격을 받은 곳이 케라스 왕국이
었다. 주변에 몬스터가 많은 산맥을 끼고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
다 하지만, 케라스 왕국 자체의 국력이 워낙 강했기에 오히려 피
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최근에 연이어 벌어진 몬스터들의 공격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무래도 라이칸드로프들이 개입한 것 같습니다. 베어울프들이
이 정도로 치밀하게 움직이는 건 사실상불가능합니다. 지능이 뛰
어난 라이칸드로프가 지휘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어디서부터 시작 된 말인지는 모르지만, 라이칸드로프가 베어울
프를 지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그 말은 신빙성을 얻고 있
었다. 베어울프의 지능으로는 이런 조직적인 움직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베어울프들이 대대적인 공격을 했을 때, 먼 곳에서
라이칸드로프를 봤다는 사람도 종종 나왔다 이런 일련의 정황들
이 겹치자 베어울프의 뒤에 라이칸드로프가 있다는 말은 거의 정설
이 되어버렸다.
"이런 일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 같은가?"
"그리 오래 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베어울프의 수가 많은 건 사
실이지만, 인간들의 수보다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
"허허, 참으로 답답한 소리를 하시오. 현재까지 알려진 수로는
인간이 베어울프의 두 배가 넘는 건 사실이지만, 죽임을 당한 수를
생각해보시오. 대륙 외곽에 있는 모든 왕국에서 베어울프에게 거
의 학살에 가까운 죽음을 당하고 있소. 헌데도 숫자만 생각한단 말
이오? 참으로 답답하오. "
"답답?클레포라후작. 답답이라니 그무슨망발이오."
한 귀족의 말로 시작된 말다툼이 대전 전체로 번졌다. 여기저기
서 상대의 건방진 태도와 오판을 지적하고 나섰다. 그런 대신들을
바라보던 엘베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쯧쯧, 왕위에 오를 때 도왔다는 이유로 너희들을 고위 관직으
로 앉힌 내가 바보였군. '
꽝 꽝
"그만. 국왕 전하 앞이오. 정숙하시오. "
엘베로의 인상을본파론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엘
베로가 국왕에 오른 후, 공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왕국 측에서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하지만, 그누구도이의를제기하는사람이 없
었다. 그가 엘베로의 측근 중에 측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케라스 왕국에서 엘레노아 공주를
데려갈 생각은 있다던가?"
"제가 사절단으로 갔을 때, 루핀트 왕자가 지대한 관심을 보였
습니다. 그리고 수개월 안으로 일을 마무리하고 직접 찾아오신다
는 말을 받아냈습니다. "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엘레노아 공주
는 현재 엘베로의 의녀로 알려져 있었다. 즉, 공주가루핀트
왕자와 결혼하면 엘베로는 장인어른이 되는 셈이다. 이 대륙에서
장인의 위치가 그리 높지 않다하더라도 무시할 위치는 아닌 터. 어
느 정도의 입김은 가할수 있었다. 또, 엘레노아공주에 한해서는
엘베로도 최선을 다해 행동했었다. 그녀가 루핀트 왕자와 결혼하
더라도 자신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올해 안으로 가능하겠는가?"
"예, 케라스 왕국의 저력이라면 수개월 내로 베어울프를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늦어도 10 월이나 11 월에는 정식 사절단이 오지 않
을까 사료됩니다. "
"좋군. 내일부터 대대적으로 병사를모집한다. 내년 3 월까지 준
비를 마치고 베센 왕국을 공격한다. 오늘 회의 내용은 극비에 붙일
것이며, 밖으로 새나갔을 때는 철저히 조사해서 정보 제공자를색
출하겠다. 이상. "
말을 마친 엘베로가 대전을 벗어났다. 더 이상의 어떤 반론도 허
용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였다
엘베로가 나가자 대신들 사이에서 또 다시 의견이 분분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언질을 받기는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전쟁 얘기가나
오자놀란모습이 역력했다. 어찌됐든국왕의 명령은 떨어졌다. 이
젠 병력을 최대한 많이 모아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밖에 없었다.
라한은 오벨리아 팰리스에 머무는 동안 마법수련에 열중했다.
그러면서도 제령기나 제란기를 돌리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벌써 4 개월. 지금의 라한은 1 서클 마법은 웬
만큼 사용할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마법에 제령기
를담아서 강하게 혹은약하게 하는 법은깨우치지 못했다. 딱, 그
단계에서 정체되어 있었다.
"아, 테세르!"
좀 전까지 마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던 라한이 테세르를 불러
들였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테세르
는 여느 때처럼 조용하지만 빠르게 나타났다. 다른 정령이 서서히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는 확실히 대조적이었다.
"야, 너 혹시혹시 있잖아. 그냥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 마나의 정령이야?"
라한의 물음에 테세르가 턱을 괴었다. 라한의 말이 자신을 지칭
하는 게 맞는 지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테세
르에게 라한이 재차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처음 불렀을 때, 네 몸에서 4 원소의 향기가 모두 느껴
졌거든. 근데 마나가딱 그렇단 말이야. 그래서 혹시나 하고 물어
봤어. "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고민에 빠졌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정체가 무언지 모르는 듯했다. 그런 모습을 본 라
한이 음흥한 미소를 띠었다
"내가 찾는 인챈트 재료가 마나를 담은 물질이라는 거 알아? 미
스릴, 드래곤본, 전에 봤던 나무 이 모든 게 마나의 기운을 담고
있단 말이야.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네 몸에서도 그 비슷한 기
운이 느껴지거든. "
라한의 대답에 테세르가 두세 걸음 됫걸음칠 쳤다. 그는 내용과
상관없이 라한의 표정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그 모습을 본 라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네가 마나의 정령이 맞는지 아닌지 궁금하지?"
라한의 질문에 테세르가 아주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
하기는 하지만 라한의 표정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후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
테세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태어난 이
후부터 계속 궁금해왔던 사항이 아니던가. 그 의문을 풀 수 있다면
라한의 음흥한 표정 정도는 무시할 수 있었다
"네 몸에 인챈트를 해보는 거야. 만약 인챈트가된다면 넌 마나
의 정령이 되는 거지. "
말을 마친 라한이 손을 빠르게 뻗어 테세르를 붙잡았다. 이 대답
을 들으면 테세르가 도망갈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역시나 테세르
가 고개를 마구 저으며 두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실험 대
상이 되는 건 극구 사양하고 싶은 테세르였다.
"뭘 놀라고 그래? 일단 정체가 뭔지는 알아야 하잖아. 안 그래?"
말을 마친 라한이 조각칼을 꺼내 들었다. 끝이 날카롭게 버려져
있어서 보기만 해도 섬뜩할 정도였다.
라한이 조각칼을 꺼내들자 테세르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그
는 자신의 몸에 칼이 들어오는 건 죽어도 싫었다. 하지만, 라한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의 몸에 도형과 공식을
새기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스팟!
"어?"
결국 테세르가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다. 라한의 손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이 었다.
"어쭈, 어디 해보자 이거지? 테세르! "
라한의 부름에 테세르가다시 모습을나타냈다. 하지만, 곧바로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다. 물질계로의 소환은 라한이 부른다면 어
쩔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돌아가는건 테세르의 의지였다.
"요놈 봐라. 야, 테세르! 튀어나와. "
라한의 부름에 테세르가 몸을 마구 웅크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
물질계에 나와서 라한의 얼굴을 보는 일 자체가두려웠다. 테세르
가 다시 정령계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라한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멈춰! 네가 정령계로 돌아가면, 다시는 널 안부를 테다. 정령
계에서 따돌림 당하면서 혼자서 외롭게 아~주 외롭게 살 생각이면
돌아가도 좋아. "
정령계로 돌아가려던 테세르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외로움이었다. 물질계에 나타날 때마다 라한을 괴
롭혔던 것도 그에 대한 반가움의 표시였다
"왜? 안 돌아가? 인챈트가 싫다면서?"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좌우를 왔다 갔다 하면서 고민하기 시작
했다. 라한에게 인챈트를 당해도 되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실제로 테세르는 인챈트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라한의 인
챈트 실력을 믿었고, 그가 인챈트를 한다면 성공할 거라고 확신했
다. 하지만,자신의 몸에 조각칼을대는건 너무끔찍했다. 비록통
증을 느끼지 못하는 정령이라도 몸에 칼 대는 걸 좋아할 리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테세르가 바닥에 벌렁 누워 버렸다. 얼굴에는
체념의 빛을 강하게 띄운 테세르.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의지가
엿보였다.
"야! 왜 누워? 정령계로 안 돌아가?"
라한의 물음에 테세르가 자신의 배를 퉁퉁 두드렸다. 마음 변하
기 전에 시작하라는 무언의 재촉이었다.
테세르가 승낙의 몸짓을 하자 라한의 표정이 음흥하게 변했다. 그
리고 그 표정을 본 테세르의 얼굴에는 공포라는 감정이 싹트기 시작
했다. 막상승낙을 하기는 했지만, 두렵긴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스윽!
"그럼 시작한다. "
짧게 말한 라한이 테세르의 몸에 칼질을 시작했다. 이에 테세르
는 눈을 꼭 감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테세르의 반응에 상관없이
라한의 조각은 쉴 새 없이 계속되었다.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조각을 끝마치기 위해서였다.
"야, 테세르. 움직이지 마라. 인챈트가완전히 끝나기 전에 움직
이면 칼질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되니까. "
라한의 조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테세르의 몸구석구석에 공식을 새걱 넣은 것이다. 심지어는 테세
르의 팔을 들어 올려 드러난 겨드랑이에도 무수히 많은 도형을 그
려 넣을 정도였다. 한참동안 조각을 하던 라한이 조각칼을 내려놓
았다.
"휴, 이제 끝났군. 게레테아에고시아니로 인챈트리아트!"
옅은 회색빛이 테세르를 조금씩 둘러싸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테세르의 얼굴에 공포심이 떠올랐다. 회색빛이 짙어질수록
라한의 이마에서도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번에 시전한 인챈트
가 상당히 상위서클에 속하는 인챈트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회색빛이 테세르에게 완전히 흡수되자 라한도 손을 거
두었다 쾌 많은 제령기를 사용했는지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후우, 끝났다. 아직 하나가 남았지만, 그건 나중에 해야겠군. "
라한의 말이 끝나자 테세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던 테세르. 그가 여기저기 새걱진 문양들을
손으로 스윽 문질렀다. 하지만, 사라져야할 문양들은 조금도 사라
지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새겨 있었던듯손에 밀렸다가도다시
복구되어 버렸다.
"야, 말해봐! "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라한이 한 말을 제대
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테세르가 어벙하게 서 있기만 하자 라한
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번에 사용한 인챈트는 에고리트라는 거야. 대상에게 자
아를주입하는 거지. 뭐, 실제로는 말 할수 있게 하는 것뿐이지만. "
"어, 크어어
라한의 말에 대꾸하려던 테세르가 기괴한 소리를 토해댔다. 지
금까지 단한 번도말한적이 없는테세르. 갑자기 입을 열려니 제
대로 나을 리가 떤었다.
"미치겠군. 너 우리말을 모르는구나. "
"크어, 어
테세르 자신도 답답할지 팔짝팔짝 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습이 귀엽기는했지만. 라한의 눈에는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데세르에게 말을 가르칠 생각을 하니 암담한 기분만들었다.
'괜한 짓을 했군.'
"앞으로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따라 해라. "
"아 마 드 라."
라한의 표정이 묘하게 로였다. 마법을 공부하기도 바쁜 지금 테
세르에게 말하기마저 가르쳐야 했다.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스
스로를 자책했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이 벌인 일이니 자신이 마무
리할 수밖에 없었다.
테세르와 슈라
라한은 테세르에게 말을 가르치고 마법을 수련하며 시간을 보
냈다 물론 제령선공과 제란마공의 수련도 계속했음은 당연한 일
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라한이 칼라피안 시신 앞에 섰다
아저씨 곧 아저씨를 떠나보낼수 ㅇㅆ을 것 같아요
칼라피안은 아직도 식량창고에 방치되어 있었다 밖의 기후가
죽음을 부를 정도로 추웠기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오늘 날씨가 풀
리면 밖에 묻어야겠지만.
하지만 라한은 아직 이곳을 떠날 생각이없었다 그는 스스로가
수련이 부족하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이에 날씨가 풀리면 밖에
서 마법을 마음껏 사용하면서 수련을 겠ㄱ할 생각이었다 오베리
아 팰리스 안에서는 마음대로 마법을 사용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오래전에 거두어 둘인 골렘 슈라도 소환해서 부러야했다 단 4
개월 안에 골렘과마법에 익숙해져야하는 게 현재 라한의 입장이
었다.
"시간 됐군. 테세르! 나가자. "
-그래, 주인아 나가자.
테세르는 뭐가 잘못된 건지 높임말을 전혀 쓰지 않았다. 라한이
높임말을 집중적으로 가르쳐줬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부라리
면 잠시 높임말을 쓰다가도 이내 반말로 일관했다. 그의 이런 태도
에 라한도 상당히 짜증스러워 했었다. 그래도 명색이 주인인데 반
말을들으니 기분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낸 시간이 4
개월. 이젠 라한도 적응이 됐는지 테세르의 반말에 무신경해졌다.
쿠쿠쿠쿵!
외부의 거대한문을 열어젖히자 크기에 걸맞은 큰 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라한이 밖의 날씨를조금씩 가늠하기 시작했
다. 예상대로 버틸만한 기후였다.
"슈라! "
라한의 부름에 대기가 미약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진동이 멎었을 때, 거대한 덩치의 얼음골렘이 모습을 보였다.
-흠, 오랜만에 부르는군.
슈라의 가슴 부위에서 묘한 언어가 튀어나왔다. 익히 알고 있는
대륙의 언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라한은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어
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묵주에게 받은 언어 능력이 발휘된 것이다
"말을. 하는군, "
-오호,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군. 마음에 드는 주인이야.
슈라의 음성에 라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거두어들인 소
환물 둘 보두가 반말로 일관하는지 스스로의 복 없음을 탓하
며 라한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쳇, 어떻게 만나는 녀식들마다 이따위인지야, 테세르! 이놈
이름은 슈라다. 보는 것처럼 덩치만 큰 얼음덩어리지. 인사해라.
슈라너도마찬가지, 이 녀석 이름은테세르다 뭐, 네 눈에도보이
겠지만 좀 까맣다. 때는 아니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
라한의 말이 끝나자 슈라가 고개를 살짝 낮추었다. 테세르의 크
기가 너무 작아서 잘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테세르 역시 고개를
위로 치컥들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야, 내가테세르다. 흠, 흠. 내가주인하고 먼저 계약했으니까
네가 형이다 불만 없지?
테세르의 말에도 슈라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테세르가 한 말
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슈라가 한 말은 라한이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불가능했다. 서로의 언어가다르니 당연한일이다. 하지만, 라한이
주인이었기에 그가 전하려는 의미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언어가 아
닌 언어를 전하려는 의지를 전한 것이다.
-주인, 저 녀석이 뭐라고 하는 거지?
"미치겠군. 이놈한테도 가르쳐야 하나?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꼬
이지,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라한과 슈라가 대화를 나눌 때, 테세르가 슈라 어깨에 내려앉았
다. 자신이 슈라보다우위의 위치임을알리려는의도같았다. 하지

팍- !
-깍!
슈라가 테세르가 앉은 어깨를 손으로 내려쳤다. 마치 귀찮은 파
리를 잡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이에 테세르가 헛바람을 들이
컥며 몸을 피했다. 하지만, 놀란 마음이 가시지 않는지 멍한표정
이었다.
"꼴좋다. 야, 슈라.둘이 사이좋게 지내라. 괜히 싸우지 말고."
-흠, 저 벌레 같은 녀석하고? 주인이 시키는 일이니 노력해보지.
테세르와 슈라가 좋은 사이가 되는 건 힘들어 보였다. 어떻게든
슈라의 위에 서려는 테세르. 반면에 주인인 라한이 아니면 아무도 인
정하지 않는 슈라. 둘의 싸움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야, 그만하고. 슈라! 넌 내가 소환하면 얼마나 머무를 수 있지?"
-주인의 능력에 달려 있지, 주인의 심장에 얼마나 많은 마나

"잠깐, 잠깐만. 마나가 아니면 안 되나?"
슈라의 말을 라한이 급히 끊었다. 그가 가진 마나량이 그 이유
였다 심장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마나가 아닌 제령기
였다. 마나는제령기에 밀려서 거의 구석에 처박혀 있다시피 했다.
슈라가 마나에만 반응한다면 소환할 수 있는 시간이 극도로 짧을
수밖에 없었다.
-뭐, 그렇지는 않지. 지금 난주인의 마나가 아닌 이상한 기운
으로 소환된 것 같으니까. 근데, 이 기운은 아주 좋군. 마나와 비
슷하면서도 강하다. 주인! 이 기운이 뭐지?
"제령기라는 기운이다. 좋다니 다행이군. 흠, 그럼 제령기와제
란기로 반응하는 녀석이 각각 하나씩 생긴 건가?"
라한은 오벨리아 팰리스에 들어온 후부터 제령기의 증가가 극도
로 빨라짐을 느꼈다. 아마도 오벨리아 팰리스 주변을 감싸고 있는
마의 기운이 원인이리라. 그렇지만 라한은 그런 현상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제령기도 중요하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테세르를 부리는 제란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령기에 반응하는 슈라가 나타난 이상 마음을 달리 먹
어야했다. 여건이 불리하더라도 제령기를 증가시켜 둘의 균형을
맞춰야했다.
"넌 언제 만들어졌지? 아니, 오벨리아 팰리스가 만들어진 건 언
저냐?"
-여기라 .글쎄, 정확하게 기억이 안나는군. 아무튼아주오래
됐다. 십만 년? 그 정도는 훨씬 지난 것 같군.
슈라의 말에 라한이 몇 달 전을 회상했다. 수련을 하던 라한이
답답한 마음에 홀을 어슬렁어슬렁 거렸다. 그러면서도 드래곤본이
있는 곳은 의도적으로 피해 다녔다. 자칫 깔리기라도 하면 마법이
고 뭐고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변을 돌다 이종족들의 뼈를 만졌을 때, 라한의 손에 닿
은 뼈들은 가루로 변해 바닥에 쌓였다. 어떤 뼈들은 옆을 지나기만
해도 가루로 변해버리는 일도 많았다. 드래곤만큼은 아니지만 쾌
나 단단하다고 알려진 엘프의 뼈가 가루가 됐을 때, 시간의 흐름을
예측했어야 했다.
"대륙력이 2 천 년도 되지 않았는데 십만 년이라니 내가 완전
히 잘못 짚었군. 슈라! 저쪽에 땅좀파줄래 내가들어갈수 있을
정도의 깊이면 되는데 "
알겠다 주인.
말을 마친 슈라가 손을 땅에 꽃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끌어 모으
듯 손가락을 굽힌 채 스윽 당겼다. 순식간에 상당한 깊이의 땅이
파여졌다. 추운 날씨로 얼어붙은 땅을 단 한 번의 손짓으로 파버린
슈라. 예사롭지 않은 힘이었다.
"멋지군. 테세르! 가서 칼라피안 아저씨 좀 데리고 와. 질질 끌
고 오면 죽는다. "
-알았다.
라한의 제란기가 강해지면서 테세르의 힘도 조금씩 강해졌다.
전에도 칼라피안을 들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한 손으로 가뿐하게 들
수 있게 되었다. 라한이 협박성 말을내뱉은건 이 때문이다. 한손
이 아닌 두 손으로 정중하게 옮기라는
"슈라! 넌 저기 멀리 떨어져서 마구 움직여라. "
이유를 물으면 안 되겠지?
"글쎄, 네 전 주인은 이유 같은 건 말 안 해주고 시키기만 했나보
군. 이유라네가마구움직여야내 힘이 소모되니까, 그게 내 수
련방식이야. "
라한의 말이 떨어지자슈라가 먼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땅의
울림이 라한에게 번지지 않도록 하려는 듯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
다. 그를본 라한이 은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테세르보다말을잘
듣는 부하가 생겨서 기쁜 듯 했다.
"일단 쉬운 것부터 해볼까. 매직 애로우! "
라한이 시동어를 외쳤음에도 주변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라한의 마법이 실패한 것이다. 이에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다
시 입을 열었다.
"주변을 감싸는 힘이여, 내 의지를 받아들여 화살을 만들라. 매
직 애로우 ! "
스핑!
라한의 주문이 끝나자 팔뚝 굵기의 화살이 손 위에 만들어졌다
쏘지는 않고 만들기만 했다.
손위를 슬쩍 바라본 라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매직 애로우! "
쾅- !
이번에는 외치면서도 날아가는 이미지를 계속 떠올렸다. 이미지
연상으로 마법이 나아가는 방향을 정한 것이다. 라한의 손을 떠난
매직 애로우가 먼 곳에 있는눈 더미에 부딪혔고, 곧 엄청난 타격
음이 터져 나왔다. 1 서클 마법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강한파괴력
이 었다.
"주문 없이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은 집중력이 부족한 건
가?"
눈을 감은 라한이 정신을 서서히 집중시켜갔다. 어떻게 해서든
지 주문 없이 시동어만으로 마법을 시전하고 싶었다 정신을 집중
시킨 라한이 손을 가슴 위로 쭉 뻗었다.
"매직 애로우! "
낮은 읖조림이 끝나자 라한의 손 위에 작은 매직애로우가 생성
되었다. 주문을 외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은 크기였다. 하
지만, 라한은이 정도_로도충분히 만족했다. 아직은 연습량이 부족
해서 일 뿐, 더 긴 시간을 열심히 수련한다면 강한 마법을 시전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챙-!
잠시 눈을 감았던 라한이 세라 소드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왼쪽
팔뚝에 갖다 댄 채로 슬쩍 그어 내렸다. 상처를 만들기 위한 행동
이 었다.
"콕, 젠장. 아프잖아. 워터 퓨리피케이션
! "
몇 번 심호흡을 하던 라한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정신 집중
을한상태로는 크게 외치는 것보다 낮게 읖조리는 게 더 나았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시동어를 크게 외치는 것과는 확실히 대조적
이었다.
마법 시전이 끝나자 라한의 오른손에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았
다. 정화마법이 오른손에 시전되어 맺힌 것이다. 라한은오른손을
왼 팔뚝의 상처부위에 대고 다시 한번 읖조렸다.
"워터 퓨리피케이션 ! "
시동어가 끝나자 상처 부위를 푸른빛이 감싸기 시작했고, 곧 상
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정화마법이 성공적으로 시전된 모
습이었다. 하지만, 상처가완벽하게 아물기 전에 푸른빛이 사라져
버렸다. 아직은 완벽하지 않은 마법 같았다.
"곧 나아지겠지. 워터 퓨리피케이션
! "
두 번의 시전으로 왼 팔뚝의 상처가 완벽하게 아물었다. 본래 상
처가 있었는지 확인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말끔한 상태였다.
정화마법이 끝나자 마이너 윈드 스텝, 마이너 스톤 스킨
, 라이트(1 서클) 같은 1 서클 마법을 연달아 펼쳤다. 역시나 이
마법들도 별 무리 없이 모두 성공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본래의
성능에는 한참 못 미치는 효과였다
케라스 왕국의 왕성.
왕궁 근위대 소속 기사 전부가 화려한 갑주를 걸친 채 도열했고,
그 뒤쪽으로는 수도 기사단의 반수 이상도 열을 맞추고 있었다. 그
리고왕성의 입구쪽에는루이나왕국의 근위 기사단 50 명이 입구
의 좌우에 도열한 채 부동자세를 취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갑옷과 그보다 더 빛나는 검을 갖춘 케라스 왕
국의 기사들. 또, 잿빛으로 강인함을 드러낸 루이나 왕국의 근위
기사들. 왕실 혹은 왕국의 큰 행사 때에만 갖춰입는 기사단 정복이
었다.
빰! 빠바빰! !
나팔소리가 들리자 기사들의 투구 덮개가 일제히 열렸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의 뒤에 위치한 귀족들의 고개가 입구 쪽을 향했다.
아마, 이번 행사의 주인공이 등장하기를 기다리는 모습이리라.
"루이나 왕국의 엘라 드루이탄 엘베로 국왕전하의 의녀이
신 엘레노아 드루이탄 엘베로님 듭시오. "
빠! 빰빰! 빰!
오늘 행사의 사회자인 쿨루미스 후작의 외침이 끝나자 나팔소리
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쿨루미스 후작은 케라스 왕국의 근위 기사단 단장이다. 소드익
스퍼트 상급인 그는 대륙 중부의 두뇌라 불릴 만큼 지략이 뛰어났
다. 얼마 전에 있었던 베어울프와의 전투에서도 수많은 전략을짜
내어 기사들과 병사들의 감탄을자아냈다. 물론, 그가 없었더라도
베어울프의 공격을 막아낼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케라스 왕
국의 저력은 엄청나니까. 하지만, 지금보다훨씬큰피해를 입었을
게 분명했다.
나팔소리가 끝나자 입구에서 흰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의 곁에는 십대 소녀 십여 명이 그녀를 에스코트 하
고 있었다. 흰 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루이나 왕국의 공주인 엘레노
아였다. 케라스 왕국과 루이나 왕국의 정략결혼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엘레노아 공주가 중앙의 단 위에 오르자 쿨루미스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케라스 왕-국의 제 1 왕자이자 후계자이신 루핀트 에트마로 케라
님 듭시오. "
쿨루미스 후작의 외침이 끝나자 입구에서 검은 정복을 입은 남성
이 걸어왔다. 엘레노아 공주처럼 느릿하고 부드러운 걸음걸이였다.
하지만, 그녀와는 달리 십대 소년들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었다.
신랑이 될 루핀트 왕자가 엘레노아 공주 옆에 섰다. 그들을 그윽
하게 바라본 궁중마법사 베르타가 입을 열었다.
"신랑 루핀트 왕자님은 시와 검을 좋아하고 국민을 아끼며, 대
륙의 평화를 위한
케라스 왕국의 궁정 마법사인 베르타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그
가 이번 결혼식의 주례를 맡은 것이다.
대부분 왕실의 결혼식은 왕국의 현자가 맡는 게 대부분이다. 그
가 가진 지식과 예지력으로 결혼을 하는 당사자를 축복하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오늘의 주례는 현자인 오스라가 아닌 궁정 마법사인
베르타가 맡았다. 오스라가 이번 결혼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루이나 왕국의 국왕인 엘베로를 싫어했다 자신과 같은 한
왕국의 현자였던 자. 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현자로 머물렀지만,
엘베로는 국왕으로 등극했다. 같이 시작했으나 자신보다 높은 지
위를 가진 게 못마땅했다.
"신부 엘레노아 공주님은 자수를 사랑하고 꽃을 아끼며, 케라스
왕국의 왕자비가 됨에 한 치의 부족함도 없는
베르타의 주례가 계속 되는 동안 왕궁 안은 묘한 분위기에 쉽싸
였다. 궁 안의 남자들이 엘레노아 공주의 미모에 멍해진 게 이유였
다. 이에 여자들은소리 없이 남자들을제지해야했고, 남자들은그
런 여자들의 은근한 제지를 받으면서도 엘레노아 공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가지고 싶은 게 당연지사. 자신들이 섬기는
왕국의 왕자임에도 괜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그나마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수련을 쌓은 마법사들과 기사들뿐이 었다.
이런 상황은 루핀트 왕자도 마찬가지였다. 곧 자신의 신부가 될
사람임에도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제 신랑 루핀트 왕자님과 신부 엘레노아님은 부부가 되셨습
니다. 키스해도 좋습니다. "
베르타의 주례가 끝나자 주변에 적막이 감돌았다. 몇몇 군데에
서 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릴 정도였다.
루핀트 왕자가 엘레노아 공주의 면사포를살포시 들었다 그리
고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서서히 가져갔다.
이에 엘레노아공주도눈을살포기 감았다. 그리고키스. 엘레노
아 공주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와! 와!"
"케라스 왕국이여 영원하라!"
"루이나 왕국이머 영원하라! "
"와! 와!"
키스가 끝나자 기사들의 우렁찬 함성소리와 함께 구령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주변 귀족들도 함께 함성을 질렀다.
아무리 질투가 나더라도 상대는 왕자비였다. 사사로이 욕심을 내
서는 안 되는 상대였다.
스팟! 콰쾅!
결혼식이 끝나자 왕궁 주변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마법사들이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쏘아올린 파이어 볼이었다.
폭음이 터지자 루핀트 왕자가 왕자비가 된 엘레노아를 데리고
왕자궁으로 걸어갔다. 함성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
되었다. 입가에는아쉬운듯자조적인 미소를띤 채로
라한이 1 서클 마법 모두를 시전한 후에야 테세르가 나타났다
두 손으로 칼라피안의 아래쪽에서 아슬아슬하게 떠받든 자세였다.
오벨리아 팰리스가 아무리 넓어도 이렇게 오래 걸린다는 건 말
이 안 되었다. 분명, 테세르가놀다왔거나 어딘가숨어서 라한을
욕하다 왔음이 분명했다.
"뭐 하다가 왔어?"
-무거워서 중간에 계속 쉬었지
"그래? 숨어서 내 욕한 건 아니고?"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몸을 움찔거렸다. 거짓말은 천성적으로
못하는 성격의 테세르였다. 그의 반응에 라한이 비릿하게 입 꼬리
를 말아 올렸다. 그는 지금 일을 오래오래 묵혀 뒀다가 나중에 화
끈하게 복수할 생각이었다. 비겁하게 보일수도 있겠지만, 라한의
성격이 그랬으니 어쩔 수 없었다.
'두고 보자고. '
"테세르! 아저씨를 저기에 넣어줘. 조심스럽게 넣어라. 쿵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라도 하면 넌 끝장이야. 알았어?"
어, 알았다. 주인.
테세르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슈라가 파 놓은 구덩이로 날아
갔다. 여전히 칼라피안을 아래에서 떠받친 자세였다. 날아가면서
도 라한의 눈치를 슬슬 보는 테세르. 뭔가 잘못한 게 있음이 분명
했다
구덩이에 들어간 테세르는 자신이 깔리기 직전이 되어서야 칼라
피안을 놓았다. 라한에게 약간의 흠이라도 잡히지 않으려는 노력
의 일환이었다.
칼라피안이 구덩이 속에 들어가자 라한이 그곳을 쓸쓸히 바라봤
다. 떠난 지 9 개월이 훌쩍 지났음에도 방금이라도 '라한아' 하고
부를 것만같았다. 괜스레 눈물이 핑 돌자 라한이 고개를돌려 버
렸다. 그리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슈라! 눈으로 저곳을 다시 묻어줘. "
-그러지.
쿠구구쿵!
슈라가 작은 손짓 한 번으로 구덩이를 메워 버렸다. 라한은 애써
눈물을 훔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눈을 뜬 채로 눈물을 말려보려는
스스로의 발악이었다.
잠깐 동안 마음을 가라앉힌 라한이 정신을 집중했다. 슬픔을 잊
기 위해서는 다른 어딘가에 집중하는 게 최선책, 마법수련을 다시
함으로써 칼라피안을 잊으려는 행동이었다 눈을 쾌 오랫동안 감
았던 라한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블링크.
스팟! 쾅-!
쿡, 쿠쿠쿠, 푸하하하하!
라한의 블링크는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방향이 문
제였다. 눈을 감고 시전하는 바람에 공중으로 이동되어 버린 것이
다. 그리고 추락! 그 모습을 본 테세르가 마구 웃어댔다. 좀 전까지
심각해보이던 라한의 꼴사나운 모습이 즐거운 듯했다.
"시끄러! 아우, 머리야. "
-이번에 만난 주인은 아주 재미있군.
"뭐야?"
슈라까지 놀려대자 라한이 눈을 매섭게 치떴다. 정말 자신이 저
들의 주인이 맞나 의심스러웠다. 한결같이 반말로 일관하는 테세
르와슈라. 주인이 떨어졌는데도 아프냐고묻지도 않다니 모
조리 분해 시켜서 분풀이를 하고 싶었다.
마법을 눈 감고 시전한다는 게 우스운 거지. 주인은 눈 안 감고
는 집중도 못해?
"테. 세. 르. 조용히 하라고 했다. "
-넵!
다시 마음을 가라앉힌 라한이 정신을 집중했다. 이번에는눈을
감지 않고 미간만 약간 찌푸린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법 시전. 하
지만, 좀처럼 마법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
는 데 너무 익숙해진 탓이다.
그래도 라한은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테세르의 말처럼
전투 중에 눈을 감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든 눈을 뜨고 마
법시전을 성공해야 했다.
로테라 숲의 오두막 안.
이번에도 역시 제이슨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자신을 포함해
서 걱우 열두명. 하지만이들을모으는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
이슨의 활발한 성격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이, 제이슨. 또왜 모이라고한거야?"
"재미있는 소식을 가져왔지. "
열두 명의 기인들 중에서 밖의 소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제이슨이었다. 상급 정령사가 그 한 명 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머지 열한 명의 기인들은 제이슨이 자신들을 부르기를 은근히 반
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도 알게 모르게 바깥세상을 그리워하고
있었음이다.
"무슨 소식이야? 전에 굴레를 벗은 라이칸이 죽은 것보다 더 충
격적인 소식인가?"
"글쎄, 한 편으로는 더 충격적인 소식일지도 모르지, "
제이슨이 가져온 정보는 거의 대부분 쓸모없는 정보였다. 하지
만, 그런 소식들도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는 충분했다. 긴 생 동안
가진 무료함을 달랠 유일한 돌파구였기 때문이다.
제대로 관심을 가지거 시작한 기인들이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재
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는 모습이었다.
"말해봐.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재미없으면 알지?"
"후후, 놀라지나 말라고. "
말을 마친 제이슨이 주변을 쭉 훌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의 이야
기를듣고놀랄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정령사라
기보다 이야기꾼이 더 어울렸다.
"빨리 좀 해. "
"어? 어. 벨라파 산맥에 있던 굴레를 벗은 엘프가 그 장소를 벗
어났다. "
제이슨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인들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일
어났다 인간들뿐아니라엘프, 드워프, 라이칸드로프들도판테아
의 결계에 갇혀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판테아가 굴레를 벗은 모든
존재를 물질계와 격리시켜버린 것이다. 이런 사실은 자신들뿐 아
니라다른종족의 굴레를벗은이들도다아는얘기였다. 헌데, 굴
레를 벗은 엘프가 결계를 벗어났다니
그들은 방금 들은 이야기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쓸모
없는 소식을 전할지언정 거짓 정보를 흘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제
이슨이었다. 기인들은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제이슨. 그 말이 사실인가?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지?"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확실한건 그 엘프는 누군가의 방문을
받았고 그 이후에 결계 안에서 사라졌다. "
제이슨의 말이 떨어지자 기인들 모두가 판테아를 떠올렸다. 그
가 아니면 결계를 벗어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결계가 이미 없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니
면 애초부터 결계가 없었던가.
"그게 있잖아. 만약에 결계가 없어졌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혹시 자기 몸으로 시험 해볼 사람 있나? 누군가가 시도해 본다
면 내가 형님으로 모시겠다. "
마법사 베네터의 말이었다. 그도 혹시나 하는 생각은 오래전부
터 했었다. 아니, 이곳에 온첫날부터 줄곧해오던 생각이었다. 하
지만, 도저히 시도해볼용기가나지 않았다. 오래전에 굴레를벗은
많은 존재들이 탈출을 시도했고, 그들은 대륙에서 완벽히 사라졌
다. 자신도 사라지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기는 싫은 것이다
"흠, 흠. 루나시언. 네가 한 번 해보는 건 어때? 넌 요즘 사는 게
지루하다고 항상 입에 달고 다녔잖아. "
"미친놈. 네가 해봐라. "
잉글리아트와 루나시언의 언쟁에도 다른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
관했다. 누가됐든지 아무나 시도를 해봤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
기는했다. 하지만, 그들도 결론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도시도
해보지 않는다는 결론 말이다. 도박을 위해 걸어야 하는 대가가 하
나뿐인 목숨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주목해봐. 일단 굴레를 벗은 엘프가 결계를 벗어난 건 확실한
거지?"
"물론이지. 루이에 그 빌어먹을 자식을 찾으려고 대륙을 뒤지다
가 알아낸 사실이다. 정령이 알려준 거니까 거짓은 없다. "
"제이슨. 일단루이에라는녀석을찾는건 잠시 미뤄라. 그엘프
가 어떻게 나갔는지 혹은, 누가 결계를 빠져나가게 도왔는지를
먼저 찾아봐줘. 우리가 나갈 수만 있다면 루이에 정도는 우습잖아.
안 그래?"
소드마스터 루시펠의 말에 다른 기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차피 그들 중에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사람은 없을 터. 차라리 정
령을 이용해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 게 나았다. 이런 생각은 당사
자인 제이슨도 별반다르지 않았다. 루이에를 미워하는마음이 크
기는 하지만 그를 찾는다 하더라도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은
갇혀 있고루이에는 밖에 있으니 차라리 결계를 벗어나는방
법을 찾는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
"좋아. 일단알아보지. 너무큰기대는하지 않는게 좋을것 같
군. "
"지금 굴레를 벗은 존재가 얼마나 남아 있지? 전에 누군가가 그
들을 죽이고 다닌다고 들은 것 같은데 "
루시펠의 물음에 제이슨이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알고 있던 원
래 수와 사라진 수를 빼고 있는 중이었다. 잠깐 동안 셈을 하던 제
이슨이 입을 열었다.
"인간은 알다시피 우리 열두 명이 전부다. 엘프는 열한 명인
데 뭐, 걔네들이야 어차피 산에 묻혀서 지내니까 신경 끄자고
드워프도 다섯 명 남아 있기는 하지만 엘프나 그놈들이나 마찬가지
지. 라이칸요놈들이 문젠데좀많이 남았군. 아직 열한마리 남
았다. "
제이슨의 대답에 기인들의 인상이 약간 찌푸려졌다. 자신들의
열세를직감한것이다. 라이칸드로프는본래 인간보다강했다. 지
능적으로는 비슷했지만, 육체적으로 월등히 강한존재였다 마찬
가지로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도 굴레를 벗은 인간보다 훨씬 강
했다. 라이칸드로프 7,8 마리면 이곳에 있는 기인 열두 명 모두를 상
대할 수 있는 실력이었다.
"나가면 그놈들 처리할 방법부터 찾아야겠군. "
"제이슨! 넌 결계를 벗어날수 있는 방법을찾아내라. 누군가의
도움이 됐든지 자력으로 나갔든지 어떻게든 알아내봐. 대신, 우리
는 라이칸 놈들을 상대할 방법을 강구할 테니까. "
"쳇, 방법이 뚝딱하고 나오는 줄 아나. "
막연한 예감뿐이었지만, 왠지 결계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랫동안 살아오고 수련하면서 쌓인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만약, 정말 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들의 가장 큰 적은 라이
칸드로프가 될 게 분명했다. 그들 외에는 상대할 가치도 없을 만큼
기 인들이 강한 탓이다.
라한은 오벨리아 팰리스 안에서 아침에만 제란기를 돌렸다. 반
면, 제령기에 대한 수련은 오벨리아 팰리스의 밖에서 아침, 점싱,
저녁 이렇게 세 차례 이루어졌다. 상대적으로부족한제령기를 메
우기 위해 수를 조정한 것이다. 나머지 시간에는 마법에 대한 수련
과 인챈트 공식을 되짚는 방식으로 하루를 보냈다
현재의 라한은 웬만한 마법을 모두 펼칠 수 있는 실력에 도달해
있었다. 1 서클 마법은 물론이고 고위 서클의 비클래스 마법을 포함
해서 하지만, 아공간 창출과 텔레포
트는 수련할 수 없었다. 파마리스 평원의
특성 때문인지 공간을 왜곡하는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은 것이다.
"거참, 이상하군. 블링크는 되는데 왜 텔레포트는 안 되는 거지. "
라한이 고민에 빠져 있는동안슈라와테세르도생각에 잠겨 있
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특별히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니 었
다. 주인이 하는 행동을 괜히 따라하는 것뿐이었다.
슈라와 테세르는 언젠가부터 라한의 행동을 따라하는 걸 즐겼
다. 시작은물론테세르였다. 라한이 하는 건 괜히 좋아보이는지
조심스럽게 따라한 것이다. 마법을 펼칠 때면 그 자세를, 식사를
할 때도 식사하는 모습을 따라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라한
의 눈치를 살핀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몇 달 전, 슈라가테세르의 행동을따라했다. 라한의 행동을그
대로 따라하고 있으니 왜 그러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문제는 그
때 벌어졌다. 테세르가 슈라에게 지기 싫다는 듯 완벽히 따라하려
고 한 것이다. 이때부터는 라한의 눈치를 살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아주노골적으로 따라하는테세르. 누가똑같이 더 잘따
라하는지 시합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야! 너희들저리 꺼져. 정신사납잖아."
-어, 어. 미안해,주인. 그래도내가더 똑같지?
"시끄러! "
라한의 외침에 테세르가 슈라의 등 뒤로 숨어 버렸다 아직도 그
에게는 라한이 두려운존재였다. 물론, 심심할때 가지고놀수 있
는 장난감도 라한이기는 했지만.
주인! 전부터 고민거리가 있는 것 같던데 말해줄 수 있나?
"어?"
슈라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슈라의 과거 주인은 이런 질문
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터라 라한이 주인이 된 후에도 묻기가 꺼려
진 듯했다.
-아, 아니다.
"별거 아니야. 텔레포트가시전이 안 되서 말이야. 블링크는 되
는데 왜 텔레포트만 안 될까?"
라한의 말에 슈라가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모습이었다. 그 행동을 테세르가 똑같이
따라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잠시 후, 슈라가 고개를 끄덕이
며 입을 열었다.
-기억났다. 주인, 여기서는 텔레포트가 안 돼. 상당히 넓은 범
위에 텔레포트를 막는 장치를 해 왔다.
"그렇군. 젠장. 근데 왜 이제야 얘기하는 건데?내가 이 고민을
언제부터 했는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전에 있었던 주인은 내가무언가를물어보는 걸 싫어했다. 명
령을 내리면 대답만 하도록 배웠지
슈라의 말에 라한도 체념어린 표정을 띠었다. 전 주인이 그랬다
는 데 뭘 어쩌겠는가. 그냥 그러려니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공간 창출은 왜 안 되는 거지?"
-그건 모르겠다.
"그렇군. 앞으로궁금한게 있으면바로바로물어봐. 알았지?
-그러지.
라한과 슈라가 대화를 하고 있을 때, 테세르는 그 둘의 모습을 따
라하기 여념이 없었다. 여기저기 폴짝거리면서 1 인 2 역을하는테
세르. 라한과슈라의 대화가끝나자 눈 속으로 잽싸게 몸을 숨겼다.
'아공간 창출은 서클이 높아서 안 되는 건가? 아니면 주문 자체
가 잘못 된 거? 모르겠군. 모르겠어. '
"테세르! "
-테세르 없다.
라한의 부름에 슈라의 발아래 눈 속에서 테세르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그는 라한이 부른 게 자신을 혼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괜히 무서운 마음이 들어서 나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빨리 안 나와? 셋, 둘. "
-여기 대령했습니다, 라한님. 갑자기 바쁜일이 생겨서
통하지도 않는 테세르의 변명에 라한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막
상 혼내려고 하다가도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면 그렇게 하기도 힘
들었다. 맞지 않기 위해 발악을하는테세르. 그를보고 있으면쌓
였던 화도 출리는 기분이었다.
"안에 들어가서 먹을 것 좀 가져와. 배고프다. "
-넵.
짧게 대답한 테세르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죄가 있으니
라한의 앞에 있는 것도 힘들었으리라.
테세르가사라지자 라한은 다시 마법을수련하기 시작했다. 안
되는 두 가지 마법이 아닌 오래전에 성공시킨 마법을 중점적으로
수련했다.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서였다.
루이나 왕국의 최남단 폴리탄 시.
이곳은 베센 왕국과의 국경지역이다. 이 때문에 국경을 수비하
는 병사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많다는
말 정도로는 부족할 정도로 병사수가 늘어났다. 베센 왕국과의 전
쟁을 위해 병사들이 은밀하게 이동된 탓이다. 원래 폴리탄 시의 병
사와 일반 국민의 비율은 1 대 2 였다. 헌데 지금은 거의 4 대 2 로 뒤
집혔다.
스풍! 쿠쿠쿠쿠쾅! 콰콰쾅!
"공격하라! "
"전군 돌격!"
동이 트기 직전인 새벽 4 시
베센 왕국의 국경 지역에 엄청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엘베로 국
왕의 명에 따라 루이나 왕국의 병력이 베센 왕국을 침략한 거였다.
"손에 사정을 두지 마라! "
"적을 벤 수만큼 포상하겠다! "
포상을 한다는 각 지휘관의 외침에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
를 듯했다. 이는 위험을 무릅쓸수록 포상이 커질 확률이 높다는 걸
의미했다 물론혼전 중에 자신이 벤 수를 기억할수는 없는 일이
다. 지휘관 역시 어떤 병사가 얼마나 베었는지를 일일이 기억할 수
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말하는것만으로도 병사들의 사기
를 높여주기는 충분했다. 그건 피가 난무하는 전투에서 통용되는
거짓말이며 진리 였다.
똑, 똑-!
엘프리안 나무 열매를 딴 테세르가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라한이 괜히 미웠다.
-쳇, 자기가 잘 나면 얼마나 잘났어? 나처럼 윤기 나는 검은빛
도 아닌 주제에
테세르가 열매꼭지를 양속에 하나씩 든 채로 홀을 가로질렀다
욕을 하더라도 도착 시간을 늦출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오늘 장
난을 많이 쳤는데 열매 배달까지 늦었다가는 또, 한 바탕 설교와
얼차려가 자신을 괴롭힐 게 분명했다.
-쳇, 설사자기가나보다잘났다고 쳐. 근데 나한테 해준게 뭐
가있냐고. 난음식 갖다주지, 피곤할때 어깨두드려주지, 세상에
나 같은 정령이 어디 있다고. 으앗, 뜨거!
툭- ! 떼구르르르!
열매를 옮기던 테세르의 몸이 화염의 구슬에 부딪혔다. 마계와
의 통로를 막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장치였다. 구슬이 굴러가자
테세르가 재빠르게 따라갔다.
-헉, 미치겠군.
외마디 비명을 토한 테세르가 구슬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구
슬이 굴러갔던 흔적까지 완벽히 지우면서
구슬을 원위치에 놓은 테세르가 주변을 빙빙 돌았다. 원래 구슬
이 있던 위치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별 상관없겠지.
테세르는 구슬의 아주 미세한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는 걸 몰랐
다. 그렇기에 이번 사건으로 봉쇄진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음도 알
턱이 없었다. 테세르는 라한에게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
각했을 뿐이 었다.
-쳇, 주인 성격이 조금만 좋았어도 내가 이런 실수를 했겠어?
이게 다 주인 성격이 나빠서 그래.
테세르는 여전히 투덜거리면서 열매를 옮겼다.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욕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오벨리아 팰리스의 외곽
문을 열 때까지 이런 식의 욕은 계속 되었다. 문을 여는순간아무
렇지 않은 듯 행동하겠지만.
루이나 왕국의 왕성 깊숙한 곳의 국왕의 처소.
엘베로 국왕이 고위 귀족과 측근들을 불러 모았다. 보통 정기 회
의라 하면 중앙 대전에서 귀족들의 참관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하
지만 몸이 악화되어 대전에 나갈 힘이 없었다. 아무리 좋은 약을
먹고 신관들의 축복을 받아도 나이를 속일 수는 없었다
"전쟁은 어떻게 됐는가?"
노쇠하고 작은 목소리로 엘베로가 물었다. 얼굴 곳곳에 검은 반
점이 나 있고, 주름 가득한 손에도 저승꽃이 피어 있었다.
"전하, 안심하십시오. 무로에 시를 점령했습니다. "
"전하, 심려 놓으십시오. "
무로에 시는 폴리탄 시와 인접해 있는 베센 왕국의 도시였다
즉, 베센 왕국 최북단에 위치한 국경 도시인 셈이다.
루이나 왕국은 철저한 준비와 기습을 이용해서 베센 왕국의 국
경을 무너뜨렸다. 이에 그치지 않고 무로에 시의 남쪽 20 킬로미터
까지 진출해서 공격의 교두보까지 마련했다 단 이틀 동안의 전투
를 통해서 베센 왕국의 근간을 뒤흔든 것이다.
"안심하기는 이르다. 베센 왕국은 강국이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케라스 왕국에서 정예병 10 만과 기사단 2 천
을 파견했습니다. 수일 내로 전선에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엘베로의 걱정스런 말에 대신들이 안심하라는 듯 자신 있게 말
했다. 그들도 자국의 힘만으로는 베센 왕국을 점령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았다 병력을 미리 이동시컥놓고 기습을 했기에 승기를 잡
았을 뿐. 베센 왕국에서 본격적으로 반격한다면 힘들 거라고 생각
했다.
하지만 케라스 왕국에서 지원군을 보내준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산맥으로 둘러싸여 꾸준히 몬스터와 싸워온 케라스 왕국. 그곳의
정예병 십만은 루이나 왕국 정예병 2 십만과 맞먹는 전투력이었다.
거기다 기사단 2 천까지 포함한다면 이번 전투는 큰 무리 없이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 믿었다.
"케라스 왕국을 너무 믿지 마라. "
"예? 전하. 그들은 저희와 결연을 맺은 왕국이 아닙니까. 헌데
믿지 말라는 말씀은
물론 결혼이라는 방법으로 케라스 왕국과 루이나 왕국이 물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개인 간의 일일 뿐. 국가간의 일은그
런 정도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루이나 왕국이 베센 왕국을 병합한다면, 한 나라가 너무 큰 힘을
가지게 된다. 이런 상황을 케라스왕국이 두고 볼 리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자국의 세력을 키우거나 루이나 왕국에 피해를 줘야 두 왕
국의 국력이 비등해지게 된다. 그래야 어느 정도는 안심을 할 테고.
"곧 알게 되겠지. 오늘은 이만물러들 가게. 파론공작! 왕자를
불러주게. "
"예, 전하. "
대신들이 물러나고 잠시 후, 쿠벨린 드루이탄 엘베로 왕자가 모
습을 드러냈다. 올해 스무 살이 되는 그는 엘베로 국왕의 아들이
다. 물론, 엘베로 국왕의 친자식이 아닌 데려다 키운자식이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그가 친자식이 있을 리 없었다.
엘베로 국왕은 쿠벨린이나 엘레노아에게 큰 정을 가지고 있지 않
았다. 단순히 목적을 위해서 그 두 명을 아들과 딸로 뒀을 뿐이다.
'내 야망이 성공하려면 네가 똑똑해야 한다 '
그가 루이나 왕국의 국왕이 된 건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였다. 남자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야망이자 욕심이었
다. 엘베로가 남들보다 좀 더 큰 집념과 실천력을 가졌다는 게 다
를 뿐이다. 대현자가 아닌 일반 현자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 나라에서라도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려면 국왕이 되는 길밖에 없는 셈이다. 이에 엘베로는 치밀하
게 계획을세웠고, 자신의 목적을이루어냈다. 루이나왕국이 남아
있는 한 자신의 이름은 역대 국왕의 한 명으로 기록이 될 것이니 말
이다. 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쿠벨린! "
"네, 전하. "
"후후, 단 둘이 있을 땐 전하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 "
"예, 아버 지. "
쿠벨린 왕자는 평범한 외모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청년이었
다. 하지만, 실제 능력은눈매에 한참못 미쳤다. 매사에 게으르고
실증을 잘 느끼는 성격이었다. 공부든 검이든 마법이든 오랫동안
꾸준히 해 온 게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이 때문에 할 줄 아는 건 많
지만,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 애비가 죽으면 네가 루이나 왕국의 왕이 된다. 이 나라를 잘
다스릴 자신이 있느냐?"
"맡걱만 주십시오. 대륙 최강의 나라로 만들겠습니다. "
쿠벨린 왕자의 대답은 엘베로가 원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는 좀
더 구체적이고현실적인 대답을원했었다. 헌데, 단순한호기로큰
소리만 치고 있으니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어떻게 대륙 최강의 나라를 만들 생각이냐?"
"그건 저 아버지께서 해 온대로 케라스 왕국과 우방 관계를
유지하고 주변 왕국을 하나씩 점령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두 왕국
이 힘을 합하면 한 왕국을 무너뜨리는 건 쉽지 않겠습니까?"
쿠벨린 왐자의 대답에 엘베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워낙 많은 주
름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치 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
었다. 한참을 눈만 감고 있던 엘베로가 약간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힘을 합치지 않을 것 같으냐?"
"힘을합치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케라스왕국은 척박한
환경 때문에 군사력이 무척이나 강합니다. 우리 루이나 왕국도 군
사력이 약하지는 않구요. 두 나라가 힘을 합하면 다른 나라에서 힘
을 합했다고 하더라도 쉽게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나가거라. "
" 예?"
"나가라고 했다. "
"예, 아버지. "
엘베로는 루이나 왕국의 미래가 밝지 못하다는 걸 직감했다. 신
하가 어리석으면 주군이라도 똑똑해야 하거늘. 쿠벨린은 현군
이 될 자질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신하가 똑똑한 것도 아니였
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서 뛰어난 신하들의 대부분을 내쳤기 때
문이다. 그들이 곁에 있으면 자신의 비리를 밝혀낼까두려워서 서
둘러 처리한 게 문제였다.
'이름을 알리기 위해 이 나라의 국왕이 되었거늘. 후우 그때 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
낮게 독백한 엘베로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요즘 들어 유독 잠이 많아졌다. 죽을 때가 가까워져서 그런
듯했다. 이런 식으로 잠을 자다가 언젠가는 영원히 깨지 못하리라.
로테라 숲의 기인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
다 얼마 전, 제이슨의 말이 시발점이 되었고, 그때부터 모임의 필
요성을느낀 것이다. 그때 모임을 가지고 벌써 열두 번째, 그동안
별 소득도 없이 시간만 흘려보냈다.
"제이슨. 특별한 소식 없지?"
"뭐, 그렇지. 이번에는 라이칸이 결계를 벗어난 것 같아. 젠장,
한 달에 한두 놈씩 결계를 벗어나는 데 우린 뭐야?"
제이슨이 인상을찌푸리며 짜증스러워했다. 지금까지 굴레를벗
은 존재들 중에 결계를 벗어난 이들은 스무 명에 가까웠다. 각 종
족 당 극소수 몇을 제외하면 모두 빠져나온 셈이다. 헌데도 인간들
중에 굴레를 벗은 열두 명은 아무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럼 우리만 나가면 거의 끝나는 건가?"
"그렇다고볼수 있지. 라이칸은한마리 빼고 다나왔고, 엘프
나 드워프도 얼마 남지 않았어. "
"결계를 나온 녀석들은 뭐하고 있어?"
소드마스터 베루아의 질문에 제이슨의 인상이 더 심하게 구걱
졌다. 눈 하나를 잃은 그가 인상을 찌푸리자 상당히 음흥한 모습
이었다.
"엘프나 드워프들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 것 같다. 거기서 작
은 집을 지어놓고 조용히 지내는 것 같더군 근데, 라이칸그놈들
이 문제야. 베어울프를마구모으고 있어. 원래 베어울프를지휘하
던 라이칸을 발아래에 두고 통치자의 위치까지 올랐다. "
"그 녀석들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 같아. "
"뻔하잖아. 인간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할 거야. 그놈들은 원래
우리 인간들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난 놈이었잖아. "
제이슨의 대답에 구석에 있던 마법사 베네터가 고개를 가로 저
었다. 제이슨의 의견을 인정할 수 없다는 표시였다. 그의 반응을
본 다른 기인들이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에게 어떤 생각이 있는지
말해보라는 재촉의 의미였다
"라이칸 놈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 자신들이 하나로 통일되
지 못하면 인간들한테 이기기 힘들다는 걸 알 테지. -
"그럼 설마?"
"아마 자기들끼리 전쟁을 펼칠 거야. 그렇게 해서 진정한 지휘
자를 가리겠지. 패하면 복종당하는 거고 승리하면 지휘자가 되고
뭐, 그렇겠지. "
베네터의 대답에 기인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차라리 산발적이
고 단합되지 않은 공격이 나았다. 인간들의 응집력이면 그들을 충
분히 막을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로뭉친다면, 그
래서 그 힘으로 인간들을공격한다면, 결과는불보듯 뻔했다. 인
간의 멸종.
"골치 아프군. "
"그들이 지휘자 선정을 위한 전쟁을 할 때, 굴레를 벗은 라이칸
이 최대한 많이 죽어야 돼. 큰 피해 없이 하나로 뭉쳐진다면 우리
가 나간다 해도 승산이 없어. "
베네터의 말이 끝나자 주변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들도 이미 짐
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개개의 전투력에서도 자신들보다 월등한
존재인 라이칸드로프. 수에서도 열한 마리였으니 거의 차이가 없
었다. 정면충돌을 한다떤 필패였다.
"방법이 없을까?"
"우리가 유리한 것도 있어. 그놈들은 서로 떨어져 있어서 서로
가누군지 몰라. 사이가좋지도 않지. 하지만, 우린 모두 뭉쳐 있
어. 응집된 힘에서는 우리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 녀석들은 우리 인간만큼이나 탐욕스러운 놈들이야. 싸운다면
한 쪽으로 쉽게 결정 나지 않을 거야. 어쩌면 그들끼리의 싸움에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어. "
베네터의 말이 끝나자 7 서클 마법사 토일렛이 자리에서 일어났
다. 또 다른 의견이 있음을 피력하는모습이었다. 주변을 한 차례
훌은 토일렛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라이칸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도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정령사가 없어서 우리 위치를 모를 뿐이지 그리고
지휘자를 뽑는 싸움에서도 서로의 피해가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거다. 그 놈들을 바보로 생각하지마라. "
"나도 토일렛의 말에 찬성이야. 라이칸은 어떤 면에서 우리 인
간들보다 더 뛰어난 놈들이다. "
"방법은 일단 이곳을 벗어나서 우리가 사람들을 이끄는 수밖
에 없어. "
크리퍼트의 말이 끝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모든 일의 기본적인 전제는 자신들의 탈출이었다. 그들이 이곳을
빠져나가야 라이칸드로프를 막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생긴다.
"맞아. 일단 우리가
말을하던 제이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와동시에 다른
기인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밖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기운
을 느꼈기 때문이다
기인들모두의 시선이 회의장 입구를향했다. 그들의 감각에 어
떤 존재가 다가옴이 느껴졌다. 천천히 하지만 규칙적인 속도

삐걱!
문이 열리자소드마스터들이 마법사들의 앞을막아섰다. 엄청난
실전을 겪었던 그들이기에 자연스럽게 전투대형을 취할 수 있었다.
"여기 모여 있었군. "
나타난 존재는 20 대 후반 정도의 미남자였다. 허리까지 내려오
는금빛 머리와반짝이는금빛 눈동자. 그리고새하얀 피부 그누
가 보더라도 절세 미남이라고 칭송할 정도였다.
"누구냐!"
"알아맞혀 봐라. 너희들 정도면 내가 누군지 알 수 있을 거야. "
금발 미남자의 말이 끝나자 기인들이 그에게 기운을 보내기 시
작했다. 상대의 기운에 자신의 기운을부딪쳐서 힘의 정도를파악
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기인들이 경악한표정을 지었다. 상대
의 정체를 알아낸 듯했다.
"드래곤?"
"역시 알아보는군. 내 이름은베르타라스. 굴레를늦게 벗은놈
들은 나에 대해서 들어봤겠지. "
"드, 드래곤 로드?"
토일렛의 말에 기인들 모두가 한 걸음 물러났다. 상대에 대한 공
포심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기인들의 실력이 강한 건 사실이었다. 드래곤 한 마리 정도는 굴
레를 벗은 존재 둘이서 거의 백중지세로 싸울 수 있는 거였다. 하
지만, 드래곤 로드라면 얘기가 달랐다. 성룡과 비교도 할수 없는
힘을 가진 고룡. 그 중에서도 로드에 오를 정도의 실력이라면 기인
들 열두 명 모두가 덤빈다 하더라도 승산이 그리 크지 않았다.
"이젠 로드가 아니다. 얼마 전에 다른 녀석에게 물려줬지. "
"우리를 찾아온 목적이 뭡니까?"
기인들의 입에서 높임말이 흘러나왔다. 강한 존재에 대한 당연
한예우였다. 하지만, 다른 인간들처럼 무릎을꿇는다거나부복
하는 일은 없었다. 그건 스스로가 경지에 도달하고 생긴 자존심
이었다
"너희들을 이 결계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
베르타라스는 판테아의 결계가 오래전에 사라졌음을 알고 있었
다 물질계의 모든 존재 중에서 영계의 소식에 가장 밝은 존재인
드래곤 로드. 확실하지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짐작했던
것이다.
확실하지 않으면 실험해보면 되는 일. 베르타라스는 굴레를 벗
은 엘프를 강압적으로 결계 밖으로 밀었다. 그를 통해서 결계 유무
를 확인해보려는 의도였다.
엘프는 결계 밖으로 무사히 빠져나갔다. 혹시나 하고 예상했던
게 확실해진 것이다. 그때부터 굴레를 벗은 존재를 만나서 그를 밖
으로 내보냈다. 어떤 목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가가 뭡니까? 그냥 보내주지는 않을 텐데요. "
"눈치가 빠르군. "
베르타라스는 결계가 사라졌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미리 말
해줬다가는 조건을 걸 상황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숨길 수 있을 때
최대한 숨겨서 얻을 수 있는 걸 얻어내야 했다.
"말씀해주십시오. 무리한 부탁이라면 들어주지 못합니다. "
"훗, 받아라 "
쨍그랑.
베르타라스가 공간을 열어서 팔찌 열두 개를 꺼내 던졌다. 온통
금빛으로 만들어진 화려한팔찌였다. 하지만, 기인들의 눈은아름
다운 팔찌가 아닌 족쇄를 보는 듯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팔찌에서
마법적인 기운을 느낀 탓이다.
팔찌입니까?"
"서로를 죽이지 못하는 팔찌다. 아직 활성화시키지는 않았으니
지금은 상관없겠지 . "
베르타라스의 말에 기인들의 반응이 갈렸다. 일단 나가게 되면
서로가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 확실하지 않았다. 만약 적으로 만
나게 된다면 반드시 죽여야자신이 살수 있었다. 헌데, 서로를죽
일 수 없는 팔찌? 왠지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불쾌한감정을드러낼수는 없었다. 드러냈
다가는 서로를 죽이겠다고 공헌하는 셈이기에 다른 기인들의 공적
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기쁘게 받아들여야했다.
"혹시 그 대상에 다른 종족도 포함됩니까? 예를 들면 라이칸 같
"그건 아니다. "
기인들은 쉽게 승낙의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베르타라스의 정
확한 의도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 고민하지 않아서 결과
가 나왔다. 기인들은 로테라 숲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고, 무슨 수
를 써서라도 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설사 서로에게 제약이
가해지더라도 나가고 싶은 욕구를 누르기는 힘들었다.
"좋습니다. "
"저도 뜻에 따르죠. "
대답을 마친 기인들이 팔찌를 하나씩 차기 시작했다. 팔찌는 팔
목에 착용되자마자 작아졌고 결국 살 속에 거의 파묻혀 버렸다. 엉
지손톱 굵기의 팔찌가 겉으로는 가는 실을 착용한 것으로 보일 정
도였다
서로다른 곳으로보내주지 매스 텔레포트
베르타라스의 외침에 기인들이 차례로 모습을 감추었다 대륙의
어딘가로 강제 이동된것 이다 열 두명 모두를 이동시킨 베르타라
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좀 전의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어두운 모습니었다
내 잘못으로 시작했지만 내가 어찌 할수 없은 일이 됐군 막아
주게나 자네들 뿐이라네
작게 중얼거린 베르타라스가 모습을 감추었다 얼굴 어딘가에는
약간의 서글픈 감정이 남은 베르타라스 그의 의도가 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사고 수습
오벨리아 팰리스 밖에서 수련을 하던 라한은 잠을 청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왔다. 어깨 위에 테세르를 올려놓은 채 콧노래를 부르
며 들어가던 라한. 봉인을 위해 쓰인 화염의 구슬을 바라보며 고개
를 갸웃거렸다.
"테세르, 뭔가좀 이상하지 안아?"
-응? 뭐가? 아무 이상 없는데.
"이상해. 열기가 약해졌어. 전에는 화염의 구슬 근처에도 가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멀정하잔아.
원래 화염의 구슬 사이에 있는 거대한 구멍은 라한이 버틸수 없
을 만큼 뜨거웠다. 하지만 구슬을 중심으로 그 밖은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온도였다 물론 버틸수 있다는것이었지 열기가 느켜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구슬에서 십여 미터 가까이만 가도 이마에서 땀
이 마구 흘러내려 사우나를 방불케 했다. 헌데, 지금은 그런 열기
가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너무 약하게 느껴졌다. 지금 기분같아
서는 구슬 안으로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 무슨소리야. 멀정하잖아. 네가 너무 강해져서 열기가느
껴지지 않는 거야.
"아닌 것 같은데. "
라한은 테세르의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에 무언가 있음을 직감했
다. 속이 좁고 장난을 좋아하긴 하지만 거짓말을 못하는 테세르.
그가 저런 반응을 보인다면 무언가 실수한 게 있으리라.
아니 라니? 뭐가?
" 이상해. "
작게 중얼거린 라한이 구슬 안으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라한은 무언가가 잘못 됐음을 확신했다. 예상대로
열기가 훨씬 덜했다. 예전 같으면 몸 전체가 녹아 버려야 할 거리
에서 고작 땀을 조금 흘리는 정도로 그치다니. 잘못되어도 크게 잘
못되었음이 분명했다.
찌지직! 툭- !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간 라한이 소매를 찢었다 그리고 그 옷
조각을 구슬들 사이에 있는 홀의 중앙으로 힘껏 던졌다. 안의 온도
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홀에 떨어진 옷은 물에 스며들 듯 서서
히 사라졌다.
예전에도 라한은 이런 실험을 해 본적이 있었다. 이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 옷을 둘둘 말아 던져봤던 라한. 그때는 근처에도 가기 전
에 옷소매가 타버렸다. 지금처럼 스며들 듯 사라진 것과는 확연하
게 차이가 나는 모습이었다.
"봉인이 깨졌다. "
-주주인아, 그러니까 내가 내가 그러니까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우이씨, 분명히 제자리로옳겨 왔는데. 난 그러니까
우앙! 훌쩍, 훌쩍.
변명을 하던 테세르가 울음을 터트렸다. 누군가에게 심하게 당
했을 때에나 나을 수 있는 서러운 눈물이었다 화를 내려던 라한도
테세르가 울자 체념해 버렸다. 그의 말마따나 고의로 그랬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만 울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겠다. "
-미안해,주인. 앞으로말잘들을게 용서해줘
"용서해줄 테니까. 울지 좀 마라 "
테세르를 대충 달랜 라한이 서재로 달려갔다. 아직 그곳에는 읽
지 못한책이 많았다. 또, 읽은책 중에서도핵심 내용만 기억하고
흘려버린 책도 상당했다. 그렇게 넘긴 내용이나 책 중에서 방법을
찾아야했다 만약 찾지 못하면 자신이 소환한 테세르에 의해 물
질계가 멸망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계의 가장 높고 거대한 궁전 바하라.
이곳에는 마계의 통치자인 마왕 루시퍼 에일레르가 살고 있었
다. 모든 마족의 우두머리답게 항상 휘두르는 위치에 있는 루시퍼
모든 이의 정점에서 피를 부르고 공포를 내리는존재. 하지만, 그
에게도 골치 아픈 존재가 하나 있었다. 그의 아들인 투바 에일레르
가 그였다.
투바 에일레르는 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태어났다. 마계의 물을
떠받드는 수많은 마족의 실질적인 수장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존
재의 이유인 물보다 마법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마계에 존재
하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모아놓고 마법진만 연구한 것이다. 이에
아버지인 루시퍼가 본분을 지키라는 경고를 수차례나 했었다. 하
지만 투바는 '전 이게 좋아요' 라는 말만 반복해서 들려줄 뿐이었
다. 아버지의 말도 전혀 통하지 않은 거였다.
물론, 마법진을 조용히 연구해서 지식만 쌓는 거라면 그러려니
넘어갈수도 있었다. 그가 뭘 하든지 취미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
다. 하지만, 투바는마법진에 대한실험을항상궁에서 했고, 그실
험 때문에 궁전을수차례나폭파시켰다. 어떨 때는마법진에 엄청
난 운석을 불러와서 궁전이 사라질 뻔한 적도 있었다.
"투바! 네 죄를 알겠느냐?"
"미안해요. 아빠! 근데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녜요?
마족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
"실수? 궁전의 3 분의 1 을 가루로 만들어놓고 실수라고?"
루시퍼가 노한 표정으로 투바를 노려봤다. 차라리 죄를 뉘우치
는 기미라도 보이면 화가 덜 나련만. 투바는 도무지 반성하는 기색
이 없었다. 무슨 잘못을 저지르든지 이해해달라는 말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뭐, 다시 지으면 되잖아요. 요즘놀고먹는마족들도많은데 좀
부려 먹으세요. "
"네 이놈! 정녕 죄를 뉘우치는 기미가 안 보이는구나. "
루시퍼의 분노한 표정에도 투바는 머리만 긁적였다. 루시퍼가
자신에게 모질게 대할 수 없는 걸 아는 까닭이다.
"쳇, 아빠!그렇게 안봤는데, 아빠도속참~좁네요. 좋은면을
좀 보세요. "
"좋은 면?"
"예. 제가가진 마법진에 대한지식은마계 최고라구요. 이런 아
들을 둔 게 자랑스립지 않으세요? 내 아들이 마법진의 대가라면 매
일 춤추면서 웃고 살겠다. "
투바의 마법진에 대한 지식이 엄청난 건 사실이었다. 어쩌면 마계
역사상 마법진에 대한 최고 권위자가 투바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법진에 대한지식은마족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마족, 직
접 깨부수고 피를 부르는 걸 좋아하는 종족이었다. 마법진을 이용해
서 간접적으로 피해를 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종족인 셈이다. 그
들이 마법진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단 한 가지. 인간들에게 마법
진에 대한 지식을 알려서 자신들을 소환하게끔 하는 것뿐이었다.
"반성할 줄 모르는군. 일리마크! "
"예, 마왕님. "
"저 녀석을 부르마 섬에 유폐시키고 백 년 간 타인과의 접촉을
금하라. "
루시퍼의 명령에 일리마크를 비롯한 다른 마계 귀족들이 입을
떠억 벌렸다. 부르마 섬이 가지는 의미 때문이다.
부르마 섬은 십만 년 전. 마계의 물질계 침입 이후부터 금지로
지정된 곳이었다. 마족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그곳을 통해 물질
계로 가는 길을막은 것이다. 즉, 물질계의 오벨리아 팰리스와 연
결된 곳이 마계의 부르마 섭이라는 의미였다. 물질계에서는 마족
을 막기 위해 오벨리아팰리스를 세웠지만, 마계에서도 그곳을통
해 물질계로 가는 걸 금지하고 있으니 어쩌면 오벨리아 팰리스
자체가 필요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마왕님. 백 년 후면 투바님이 성인식을치르게 됩니다 아직 성
인이 될 교육도 덜 받았는데 백 년간 유폐를 시켜 버리면
"교육? 저놈의 망나니 근성을 고치지 않는 이상, 교육이 무슨 쓸
모가 있단 말인가?"
일리마크의 말에 루시퍼가 대노하며 외쳤다. 지금까지 투
바를 교육시키기 위해 수없이 설득하고 달래봤었다. 어쩔 때는 재
물로 구슬렸고, 때로는 화를 내며 다그치기도 했었다. 하지만, 투
바는 루시퍼의 노력을 깨끗하게 무시한 채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했다. 루시퍼로서는 할 만큼 했지만 결과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부르마 섬은 금지입니다. 그곳에
투바님을 가두는 건 아무래도 좀
"부르마섬을금지로 정한 건 나였다. 그러니 해제하는 것도 내
마음이겠지, 오늘부로 투바를 부르마 섬에 머물 수 있도록 정한다.
또, 다른 마족은 그 누가됐든지 부르마 섬에 들어갈 수 없도록 명
한다. 만약 내 명을 어기는 마족이 있다면 지옥의 불길이 얼마나
뜨거운지 몸소 겪게 될 것이다. "
과거 마족의 물질계 침범 이후, 마계는 판테아의 방문을 받아야
했다. 마족이 물질계를 침입한 것에 대한 처벌을 위해 온 거였다.
판테아는 마계의 반을 잿더미로 만든 뒤, 당시 마왕이었던 루시퍼
칸데리아를 소멸시켜 버렸다 그리고 앞으로 마족의 물질계 개입
은 물질계 존재들의 소환해 의해서만 가능하도록 정했다.
새로 마왕이 된 루시퍼 에일레르는 이전의 일을 상기시컥 부르
마 섬을 금지로 정했다. 눈에 보이면 가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아예 볼 수 없게 만들어 물질계로 나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려는 의도였다.
물론, 물질계에서 흑마법사가 소환한다면 기꺼이 나갈 용의가
있었다. 또, 물질계에서 즐거운유희를즐길 생각도 하지만,
부르마 섬의 홀을 통해서 나가는 것만큼은 절대 금했다. 이건 루시
퍼뿐 아니라 마계 마족 전부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마왕님. 투바님은 마왕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fl .
"일리마크! 한 번 더 내 말에 토를 달았다가는 너부터
녹여 버리
겠다. "
"예, "
놀란 일리마크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투바를 구하고 싶은 마음
으로 자신의 목숨을 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안타깝지만 처벌을 달
게 받도록 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당장 저놈을 부르마 섬으로 보내라.
" 얘. "
루시퍼와 일리마크가 대화를 할 때도, 루시퍼가 최후 명령을 내
릴 때도 투바는 입도 뻥긋할수 없었다. 루시퍼가투바의 입을 막
아 버렸기 때문이다. 마왕이 가진 힘은 마계에서 절대적인 것. 투
바는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른 채 입을 봉쇄당했다. 투바가
당한 함구의 언은 부르마 섬에 도착해서야 풀릴 터였다
라한은 서재에서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책을 뒤졌다. 어떻게 해서
든지 마계와의 통로를 막아보려는 나름대로의 발악이었다. 그렇게
7 일을 뒤지던 라한은 몇 가지 가능성을 발견했다. 결계를 다시 설
치하면 어느 정도는 막아진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물론, 이전보다
봉쇄 결계가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7 개의 화
염 구슬이 건재한 상황. 그 구슬을 적당히 배치한 후에 봉쇄진을
다시 발동시킨다면 무너지다시피 한 지금보다는 결계가 굳건해질
터였다. 하지만.
"미치겠군 도형을 다시 새기려면 마계에 갔다 와야 하는데. "
라한이 생각한 봉쇄진의 가장 큰 단점은 문양을 새기는 일이었
다. 이곳 오벨리아 팰리스만이 아니라 통로의 건너편인 마계에도
문양을새걱야하는 것이다. 물론, 봉쇄진을발동시킨다면 마계에
새걱놓은문양은사라질 터였다. 아니, 힘만남아 있고문양은마
나에 흡수되는 것이다. 하지만, 라한은 마계에 가야한다는 그 자체
가 영 내키지 않았다.
"드래곤한테 도움을 청해봐? 미친 짓이지. 말도 꺼내기 전에 죽
을 게 분명해. "
이전의 드래곤들은 강력한 힘으로 한 곳의 입구만을 막았다. 그
들이 가진힘이 엄청났기에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라한은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힘이 아닌 난해함으로 승부를 봐
야했다.
-주인아! 방법 찾았어?
"휴 우 "
-미안해. 주인, 내가 죽일 놈이야.
퍽, 퍽!
테세르는 미안한 마음에 주먹으로 자신의 얼굴을 마구 두드렸
다. 그렇게라도 해야 죄책감이 조금이라도사라지는모양이다. 하
지만, 라한은 입을꾹다문채 눈도돌리지 않았다. 그는자기만의
생각에 빠져서 주변 상황을 돌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 고민
하던 라한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가자! "
-어딜?
"마계에 가야겠어. "
라한으로서는 정말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영웅이 되고
자하는사람이라면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
지만, 라한은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부류가 아니었다. 그는 가늘
고 길게 살고 싶은 작은 꿈을 가진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했다. 그
길다는 의미가 너무 황당할 정도로 길었기에 파마리스 평원이라는
위험한 곳을 건너왔지만 말이다.
-마계? 거기 무섭다고 하던데. 사람들 보이면 마구 잡아먹는
다고 하던데. 가지 말자. 응? 라한 주인아! 가지 말자.
"나도 가기 싫어. 위험할지도모른다는 것도잘 안다고. 그렇다
고 나 몰라라 해버리면 대륙은 피에 물들게 될지도 몰라. 대륙에
마족들이 활개치고 다니면 나 역시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지. 그리
고 아직 마족들은 결계가 사라졌다는 걸 모르고 있어. 지금이 마지
막 기회야. "
라한이 이런 결정을 내린 가장 큰 이유는 아직 마족들이 모르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알게 되면 이미 늦다.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형편이었다.
나도 가야 돼?
"당연하지 따라와. 한시가 급해. "
말을 마친 라한이 대충 물건을 집어 들었다. 인챈트를 새기기 위
한 조각 도구와 마족이 덤볐을 때, 사용할 여분의 인챈트 스크롤이
었다. 라한은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인챈트 스크롤을 만들어 놨었
다. 오벨리아 팰리스로 오면서 몇 개 꺾은 굵은 통나무를 이용해서
만든 거였다. 하지만, 종이라고보기에는상당히 두꺼운스크롤이
었다. 라한에게 종이를만드는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충얇게
잘라서 도형과 공식만 새겨넣다보니 두꺼워 질 수밖"11 없었다.
"들어간다. "
끄덕!
"후우, 후우, 합!"
숨을 크게 들이켠 라한이 검은 홀로 뛰어들었다. 전에 소맷자락
이 그랬듯 라한도 물에 빠지듯 서서히 사라졌다. 다리부터 시작해
서 배, 가슴, 목 그리고 얼굴까지
황량한 평원에 제단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부르마 섬, 모든
마족의 금지로 불리는 곳에 푸른색을 띤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 벌렁 누운 채 땅만 벅벅 긁던 인형. 루시퍼에 의해 부르마
섬에 갇힌 투바였다.
투바는 아버지 루시퍼에 의해 갇힌 지 이제 3 일이 지랐음에도 좀
이 쑤셔 미칠 지경이었다. 대화할상대도, 아무도 없는곳. 거기
다 매일 연구하던 마법진을못 그리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앞
으로 백 년을 이곳에서 보낼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젠장. 이건 말도 안 돼. 그래도 아들인데. 마계 서열 2 위인 내
가 이런 곳에 갇혀 지내다니.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
투바는짜증을부리면서도제단근처에는가지 않았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루시퍼가마족의 접근을막는장치를 해놓았기 때문
이다. 물론, 마법진만사용할수 있다면 장치를뚫을자신도 있었
다. 하지만, 마법진을그릴 간단한도구조차 없으니 어찌해볼도리
가 없었다.
"심심하다. 마법가루라도 가지고 왔으면 가지고 놀기라도 할 텐
데. "
지난 3 일간 투바의 일상은 한결 같았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마
법진에 대한 고민, 그리고 취침. 이 세 가지만을 무한히 반복했다.
"제단에만 갈 수 있어도 심심하지는 않겠는데 답답하 응?"
제단을 멍하게 바라보던 투바가몸을 움찔거렸다. 제단에서 생
각지도 못한 반응을 발견했다. 공기의 일렁임이었다.
투바의 시선에 들어온 제단이 미미한 빛을 발했다. 뭐로 만들었
는지 모를 재료였지만, 이런 식의 빛을 발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최소한 지난 3 일간은 이런 변화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털썩!
"엉?"
투바의 시선에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호기심에 무의식적으로
달려가려던 투바가 급히 몸을 세웠다. 더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아
버지 루시퍼가 만든 마법에 걸리기 때문이다. 루시퍼의 성격이라
면 단순히 접근을 막는 정도로 끝날마법이 아닐 게 분명했다. 최
소 엄청난 고통이 동반 될 것이기에 몸을 세울수밖에 없었다. 아
무리 지루해도 고통을 애써 찾는 성격은 아니었다.
"어이! 이봐! 거긴금지야. 빨리 나와."
" 으
투바의 부름에도 상대는 신음만 흘릴 뿐 뚜렷한 답변이 없었다.
대충 보기에도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상대의 얼굴을 살핀 투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서 고통스
러워하는표정을뒤늦게본것이다. 역시 '아버지의 장치가대단하
긴 대단해' 라며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욕심을 부려 안에 들어가지
않은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홀로 들어갔던 라한은 무언가 물컹한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치 끈적끈적한물에 들어온느낌이었다. 어깨를짓누르
는 엄청난 무게에 저절로 엎드려졌고, 숨을 쉴 때마다 미칠 듯한
답답함이 몸을 감쌌다.
" 으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려던 라한은 말이 잘 나오지 않음을 느쪘
다. 물속에서 말을하면 왜곡되어 들리는 것과같았다. 가만히 엎
드려서 환경에 적응하려던 라한. 결국, 단순한시간의 흐름만으로
는 적응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미치겠군. 뭐가 이래?'
"크륵, 크르, 헉헉 매스 디스토션
잠깐 숨을 고른 라한이 마법을 시전했다. 자신의 중량을 낮추어
주변 환경의 영향을 적게 받도록 만들어주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라한의 마법은 깨끗하게 실패했다. 주변에 내리 누르는 압력 때문
에 정신 집중이 되지 않은 탓이다.
"후우, 매스 디스토션! "
두 번의 시전에도 마법은 성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지금의 라
한에게는 무리한 마법인 것 같았다
'젠장. '
"매스 디스토션 미니머제이션! (효과를 줄여 서클을 낮춘 마법) .
라한이 매스 디스토션의 축소판 격인 매스디스토션 미니머제이
션을 시전했다. 지금의 집중력으로는
본래의 마법을 시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정확히 적중했다. 라한은 미약한수준이기는 했지만
몸이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물론, 물질계에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지만 말이다.
"살았다. 테세르!"
철퍼덕!
라한의 부름에
테세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물질계에서
나타날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형체가완벽해지자 라한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었다. 버린 껌을 밟은 듯 바닥에 납작하게
달라붙은 것이다.
-으그므이아 즈으느 나즈 스르즈
"픗됐 "
납작하게 변한 테세르가 뭐라고 했지만, 라한은 도무지 알아들
을 수가 없었다. 테세르도 이곳의 특이한 환경에 의해 입도 벌리기
힘들 터.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무 생각 없이 말 했기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나와 버렸다.
"매스 디스토션 미니머제이션! "
보다 못한 라한이 테세르에게 마법을 시전했다. 자신에게 했던
것과 같은 무게 변화 마법이었다. 라한의 마법 시전이 끝나자 테세
르가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납작해진 몸도 서서히 예전처럼 정상
적으로 돌아갔다.
으크, 여기 뭐 이래?
"글쎄. "
짧게 대단한 라한이 가방에서 조각 도구를 꺼내기 시작했다. 짧
은 순간이지만 그가 느낀 이곳은 위험한 곳이었다. 이런 특이한 환
경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살아가는 종족인 마족. 이런 곳에 적응했
다면 육체적인 능력이 인간보다 월등할 게 분명했다. 또, 그들이
월등하다는 건 라한에게는 위험이 커진다는 의미와 같았다. 서둘
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주인. 저기 누가 있는데?
"흠. "
고개를 돌린 라한이 푸른빛을 은은하게 발하는 인형을 발견했
다. 그리고 곧 침음성을 터트렸다. 마계에 있는 존재라면 마족이
분명했다. 시작부터 일이 꼬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근데 구경만 하고 있네.
"그렇군. "
짧게 중얼거린 라한이 가방에서 스크롤을 하나 꺼내 들었다. 마
나 스캔을 인챈트 해놓은 스크롤이 었다
좌악!
위이이 잉 !
라한이 스크롤을 찢자 주변에 기이한 파동이 스쳐 지나갔다. 마
나의 정도를 시전자의 눈에 보이게 하는 반응이었다.
주변의 마나 밀도를 보던 라한이 입을 떠억 벌렸다. 도저히 인정
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마나 밀도였다. 형체가 없는 마나라도
이 정도쯤 되면 물체를 억누른 것도 가능한 일이다 자신이 이곳에
오자마자 느낀 엄청난 압력이 이런 고밀도의 마나 때문이리라.
-주인아! 어때?
"저쪽에 있는마족과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다. 막같은데 아
마 이것 때문에 오지 못하는 것 같아. "
-휴,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린 테세르가 상대방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자 용기가 생긴 것이다. 테세르의 황당
한 반응에 라한이 주먹을 움컥쥐었다. 그리고.
쿵- !
"정신 차려. 놀러왔어?"
테세르를 단 한 방으로 잠재운 라한. 조각칼을 들고 제단에 무언
가를 새기기 시작했다. 이곳과 오벨리아 팰리스의 연결을 원천적
으로 지우는 인챈트 공식이었다. 라한이 한창 공식을 새기고 있을
때, 밖에 있던 마족이 장막근처까지 접근했다. 라한이 새기는 공
식을 구경하는 모습이 었다.
"오호, 대단한데. 내가 모르는 공식도 엄청 많잖아. "
마족의 목소리에 라한이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몇 번 젓
더니 다시 조각을 시작했다. 상대가 가까이 온 것에 대한 경각심으
로 순간적으로 몸이 멈칫했었다. 하지만 장막을 넘어오지 못한다
는 생각이 들자 서둘러 조각을 개시했다.
"야! 너 누구야? 마족이야? 우리 마족하고 좀 다른 것 같은데
설마 인간은 아니겠지?"
마족의 물음에도 라한은 묵묵히 조각만 계속했다. 상대를 신경
쓸 시간에 한 글자라도 더 새기는 게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상대
가 옆에 있다는 건 여간 찝찝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
꾸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난 투바라고 해. 넌 이름이 뭐니?"
'투바? 이름 특이하군. '
라한의 장막 너머에 있던 마족은 투바였다. 아버지인 루시퍼의
명령으로부르마섬에 갇힌 마계 서열 2 위의 마족. 하지만, 라한은
상대의 이름에 조금도놀라지 않았다. 정체를모르니 놀라지 않는
게 당연했다.
"야, 너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냐? 내가 이름을 말했으면 대답을
해야 되잖아. 그게 예의 아닌가?"
-우리 주인 이름은 라한이야. 난 위대한 정령 테세르고.
라한이 대답을 하지 않자 테세르가 대신 대답했다. 라한은 테세
르를 돌보지도 않고 조각만 계속 해댔다. 심심해진 테세르가 대화
상대를 찾은 것이다.
"그렇구나. 위대한정령! 네 주인의 마법진 지식이 엄청나군 특
히 저기 파르부라타 공식을 쓴 건 정말 대단해. 이제 필크리아네스
공식이 나을 차례인가? 파르부라타 공식에 필크리아네스 공식이면
사라지는 마법 인가?"
투바의 말에 라한이 손을 멈추었다.
그 후, 고개를 서서히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공식을
알아본 첫 번째 인물이었다. 공식을 알아봤다면 파쇄 하는 법도 알
수 있을 터. 정말 그렇다면 이런 형식의 봉쇄는 무의미했다.
"이름이 투바라고 했나?"
"오호, 이제 대답하네. 난또 말못하는 귀신이라도붙은줄 알
았잖아. "
"마족이 전부 너처럼 인챈트에 능한가?"
라한이 말을건 이유가여기 있었다. 마족전부가인챈트에 능하
다면 미련 없이 물질계로 돌아가는 게 나았다 하지만, 마법진에
능한마족이 눈앞에 있는투바뿐이라면? 어떻게든 처리하고 인챈
트를 마무리할 생각이 었다.
"인챈트가 마법진에 대한 지식이라면 아니라고 대답해야겠군.
위대하신 이 몸이 아니면 그런 난해한 공식을 알아볼 수 없지. 너
도 알다시피 우리 마족들은 머리 쓰는 걸 싫어하잖아. 그러고 보면
혹시 너
"다행이군. 네가볼 때, 내 인챈트가 어때? 네가 하는 말대로라
면 마법진이라고 해야 하나?"
라한의 연이은 말에투바가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상대가 마
족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경
계심보다는 좀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더 강했다. 마계 전체를
통틀어서 열 명도 안되는마법진 연구자, 그중에 저런 난해한공
식을쓸수 있는존재는 오직 자신뿐이었다. 아니, 자신도 저렇게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너 인간이구나. 그렇군. 이곳이 원래 물질계와의 통로였지 흠,
뭐 상관없겠지. 너 나한테 인챈트에 대해서 좀 가르쳐주라. 내가
보기에는 네가 나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 "
"싫다면?"
라한의 너무나 짧은 대답에 투바가 몸을 휘청거렸다. 상대가 이
런 식으로 단번에 거절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최소한 인챈트의
최고를 꿈꾸는 자라면 자신만큼 호기심을 가질 거라 생각했다. 그
호기심이 서로의 대화를 이끌어내고 결국에는 함께 연구하는 . 대
충 그런 결과를 생각했었다.
인챈트좌마법진은 서로 다른 분야였다. 하지만, 공식을 이용한다
는점과도형이 필요하다는점이 일치했다. 또, 거기에 사용되는도
형과공식도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그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학문이었다
'아, 그렇군. '
"난 마계에서 마법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마족이야. 우리가 서
로 대화를 하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네가
완벽하지 않듯 나도 그렇거든. 계속해서 대화를 하면 우린 완벽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어때? 끌리지?"
"별로. "
말은 그렇게 했지만 라한도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최근에 마법
사로 전향한 듯 수련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인챈터였다.
무언가 막힌 듯 진보가 없었기에 마법이라는 분야로 외도를 한 셈
이다. 물론, 마법을수련하면서 스스로를강하게 만드는게좋기는
했다. 또, 대륙에 나갔을때, 인챈터가아닌 마법사로활동하기 위
해서 꼭 필요한 수련이었다. 하지만 필요에 의해 하는 것과 자신의
최종 목표와는 엄연히 달랐다.
"거짓말. 네 얼굴에 '나하고대화하고싶어요'라고뚜렷하게 써
있다고. 어때?"
"그런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난 마계에서 마음대로 생활할 만
큼강하지 않거든. 지금도몹시 힘들고말이야. 미안하지만거절해
야겠군 "
말을마친 라한이 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다. 투바를죽여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를 제외하면 자신의 인챈트를 알아볼 마
족이 없는터. 그만죽이면모든게 해결되었다. 하지만,자신과인
챈트에 대해 대화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투바였다. 그를 죽이
는 게 왠지 내키지 않았다.
"야! 근데 너 왜 반말을 하는 건데?"
"그럼 넌 왜 반말한 거지?"
느닷없는 투바의 말에 라한이 똑같이 되물었다. 분명히 반말을
먼저 시작한 건 투바였다. 라한이 대답하지 않을 때, 혼자서 반말
로 계속 말을 걸었다. 라한은 그 반말에 같은 반말로 대꾸했을 뿐.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거야 내가 지휘가 높으니까. 난 마계에서 엄청 높은 위치에
있다고. "
"그거야 네 사정이지. 난 이 동네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건 몰라.
그리고 나도 물질계에서는 쾌 높은 위치니까 같은 입장 아닌가?"
라한의 대꾸에 투바가 할 말을 잃었다. 이곳이 마계이긴 했지만
라한은물질계의 인간이었다. 거기다 지금 라한이 선 곳은마계라
고부르기도, 그렇다고물질계라고부르기도 애매한 경계선. 어느
한쪽의 위치만을 고집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뭐, 그럼 반말은 그렇다 치고 그럼 이건 어때?"
라한은 대답 없이 고개만 쳐들었다. 손은 가방에 들어 있는 상태
그대로였다. 언제든지 상대를 공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
추었다.
"내가 나를 소환할 수 있는 흑마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물질계에
가면나를소환해 줘. 대신, 네가하려는인챈트를도울수있는공
식을 하나 알려줄게.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줘야 너도 나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지. 안 그래?"
투바의 말에 라한이 갈등에 사로잡혔다. 급히 생각해낸 인챈트
라 처음부터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 부족한 점이
어쩌면 인챈트 자체의 비활성화를 이끌어낼 수도 있는 일. 최악의
상황이지만 그렇게 된다면 이곳까지 내려와서 인챈트 공식을 새긴
의미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좋아. 승낙하지. "
"역시. 내가사람을잘봤다니까. 여섯 번째 썼던 공식 말이야.
쿠루빌 레이트나르 공식. 그건 필크리아네스 공식과 같이 쓰면 안
돼. 서로상쇄되는공식이라서 사용한의미가사라진다고 필크리
아네스 공식이 사라지면 그것과 함께 쓰이는 파르부라타 공식도 제
역할을 못하게 되지. "
투바의 말에 라한이 아차 싶었다. 공식간의 상관관계를 무시하
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급한 마음에
도외시 했던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렇군. "
"그럼 내가부르는 걸 적어. 나를소환할수 있는방법이야. 나
중에 마나석 구하면 날 불러달라고. 어둠의 신과 통곡의 여신께 고
하나
투바의 말에 라한이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투바
가 공식을 부르자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어차피 그를 소환하고 말
고는 라한 자신에게 달린 일. 일단 적어놓고 부르지 않으면 그만이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 적었어? 다시 불러줄까?"
"됐어. 다 적었어. 이제 용건 끝났지? 그럼 좀 조용히 해줄래?
난 일해야 하거든. "
라한은투바를죽이려는마음을 접어 버렸다. 상대에 대해 가진
호감이 가장 큰 이유였다. 영웅 일대기나 역사서에서는 항상 피와
광기를부르는존재로대변되는마족. 하지만, 라한의 눈에는여타
의 인간과별 다를바 없어 보였다. 다만, 성격이 좀특이하게 보일
뿐이었다.
또, 자신이 투바를 죽일 자신이 없다는 것도 이런 결정에 한몫했
다. 시도했다가실패하기라도 하면, 그래서 다른마족들이 몰려오
기라도 하면 자신은목숨을부지하기 힘들었다. 성공률이 그리 높
지 않은 도박이라면 일단 피하고 싶었다
마지막 이유는 상대의 인챈트 지식이 자신보다 낮다는 데 011 있
었다. 라한은투바의 충고에 자신의 공식을다시 살폈었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공식의 상관관계를 계산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하
지만, 상관관계가잘못된 곳은한군데가아닌 세 군데였다. 투바
가 가르쳐준곳 외에도두군데나 더 있었다. 이에 라한은투바가
알아보지 못하는 공식이 상당히 많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알고
투바는 모르는 공식의 존재. 이건 상대가 자신의 인챈트를 깨지 못
한다는 걸로 귀결되었다. 애초에 그를 죽이려 했던 이유가 사라지
는 셈이다.
'이상하군. 마법 캔슬이 되지 않아. '
라한은 마계에 와서 중력 마법을 시전했었다. 그리고 그 마법의
지속시간은 겨우 10 분 남짓이었다. 10 분이 지나면 마법이 사라져
야 정상인 셈이다. 헌데, 도무지 마법이 사라질 생각을하지 않았
다. 주변에 짙게 깔린 마나가 마법이 계속 지속되도록만든 것 같
았다.
'어쨌든 다행이군. '
라한은 쉬지 않고 공식을 새겼다. 가끔 허리를 펴는 일 외에는
바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만 하루가 흐르고 라한이 자
리에서 일어났다. 양손으로 허리를 집고 길게 펴는 모습이 일을 마
무리 한 듯 보였다.
"끝났군. "
"우와! 정말 대단해. 거기에 사용된 공식이 대체 몇 개야? 대충
봐도 백 개는 넘겠는데?"
"백 개? 풋, 여기는 4 백 개가 넘는 공식이 사용했어. 도형까지
합하면 천 개는 쉽게 넘어가지. "
라한은 투바의 지식이 자신에 미치지 못함을 확신했다. 그러자
그를죽이지 않은 게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어찌됐든자신은 임
무를 완수했고, 투바 외의 다른 마족에게는 들키지 않았다. 오히려
실수할 뻔했던 공식을 새로이 다듬어서 인챈트가 더 완벽해진 상태
였다. 투바의 등장으로 많은 이득을 본 것이다.
"멋져 "
"그럼 난물질계로 가봐야겠다. 여긴 너무 힘들군. 그럼 다음에
보자고. "
"응. 마나석 찾으면꼭불러줘야돼. 알았지?잊어먹으면안돼!"
투바의 외침을 뒤로하고 라한이 제단의 꼭대기에 섰다. 그곳에
서 서서히 가벼워지는 마나의 무게. 그리고 라한의 몸도 공간 속으
로 서서히 사라졌다. 그렇게 라한은 물질계로 되돌아왔다.
라한이 사라지자투바가환호성을 질러댔다. 물론, 지금은마나
석이 없어서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라한이 자신을불러줄 거라 믿
었다. 그럼 엄청난 지식을 가진 라한과 마법진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을 터,
그때를 생각하자 여기서 겪는 지루함이 일거에 사라지는 느낌이
었다.
오벨리아 팰리스로 돌아온 라한은 갑자기 가벼워진 무게에 몸을
비틀거렸다 마계와 물질계의 마나 분포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라한은 한 동안 멍하게 서서 대기에 적응해갔다 그골게 어느 정
도적응이 되었을때, 매스디스토션 미니머제이션을해제했다. 그
리고 바닥에 인챈트 공식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마계와는 달리 움직임이 편한 물질계 이 때문인지 공식을 새기
는 일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마계보다 횔씬 많은 공식을
새겨야 했기에 실제 걸린 시간은 거의 비슷했다. 만 하루 이상의
시간 동안 공식을 새기는 일에만 매달린 것이다.
"으차! 끝났다. "
인챈트 공식을 찬찬히 훌어본 라한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쾌 오랜 시간 주문을 외우던 라한. 마지막으로 인챈트가 발동되자
홀 전체의 흐릿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예전처럼 화염의 구
슬도붉게 달아올랐다. 마계에서 하루, 이곳에서 하루. 이틀동안
심력을 쏟아 부어 만든 인챈트의 성공적인 활성화였다.
"테세르!"
-주인. 나 불렀어?
"앞으로 또 사고 치면 가만 안 둔다. 알았지?
-알았어. 이번은정말실수였다고. 주인도 내가 얼마나꼼꼼한
지 알잖아
테세르의 당당한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혼내는 건 다
음으로 미뤘다. 이틀 동안 정신을 집중한 탓에 현기증이 일었다.
마계의 특이한 대기 구성도 라한을 피로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지
금은 일단 잠부터 자는 게 최선이었다
"나 잔다. 사고치지마라. "
-응. 내가 주인을 옆에서 지켜줄게.
비틀거리며 서재로 간 라한이 자리에 쓰러져 잠을 청했다. 그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세상만사 모든 게 귀찮았다. 라한이 잠들자 테
세르가 그 옆에 팔짱을 끼고 섰다. 좀 전에 말한 것처럼 라한을 지
키려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일말의 죄책감은 느끼는 모양이다.
대륙으로
라한이 마계에 갔다온지 2 년 오벨리아 팰리스에 들어온지 3
년 9 개월 흘렀다
그 동안 라한은 1 서클 마법을 완벽하게 통제할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다 제령기의 투입정도를 정해서 강약을 정할 수준까지 다
다른 것이다 비클레스 마법역시 시행하는 것 만큼은 쉽게 할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전 처럼 굳이 눈을 감지 않고도 시행할수있
는 라한이였다 하지만 제령기를 조절해서 강약을 조절 할수 있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휴 시간이 많이 걸리겠다
잠시 중얼거린 라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오늘은 파마리스 평
원의 기후가 그나마 인간다워지은 날이였다 고ㅔ 오랜 시간을 이곳
오벨리아 팰리스 안에서만 보낸 것이다
"내 제령기가 강해졌으니, 슈라가 좋아하겠군. "
-쳇, 그 얼음덩어리는 불러서 뭐하려고? 힘만 센 무식쟁이 골렘.
말과 다르게 테세르의 얼굴에도 반가움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괜
히 트집을 잡아 못살게 굴었지만, 그도 슈라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슈라는 오벨리아 팰리스 안에서는 소환이 불가능했다 그의 창
조 이유가 오벨리아 팰리스의 외곽을 지키는 일. 그 일과 관련된
어떤 금제가 슈라의 소환을 막는 듯했다. 이 때문에 슈라를 부르는
일은 일 년에 4 개월이 고작이었다.
쿠구구궁!
"슈라! "
-반갑다, 주인
슈라가나타나자라한의 얼굴이 활짝펴졌다 오랫동안보지 못
했던 친구를 만났을 때의 표정이었다. 테세르의 표정도 별 다르지
않았다. 정에 목말라 있는 건 라한보다 테세르가 더 심하지 않은
가. 그가 슈라를 싫어할 리가 없었다. 괜히 심통을 부리는 것일 뿐.
-뚱보 얼음아! 이 형님은 보이지도 않아?
-저 검은 정령이 하는 말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가 없군.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음에도 둘은 재미있게 잘 놀았다. 때로는
눈싸움을 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달리기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시합을 하든지 결과는 항상 슈라의 승리였다. 이곳이 눈 덮인
곳이라는 게 그에게 이점을 준 듯했다.
'그만 나갈까?'
라한은 오벨리아 팰리스를 떠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집을 떠나온 지 벌써 10 년. 그의 나이 벌써 스물여덟 살이었다.
앞으로 석 달 후면 스물아홉 살이 된다. 그 동안 자신을 그리워했
을 부모님을 떠올리자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을 자상하게 살펴주
던 형 레테아, 질투심 많은 루시아. 그리고 8 년간 자신을 지컥준
로이나. 이들을 생각하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팰리스 안에 들어가서 짐 정리 좀 하고 있어라. 나가봐야겠어. "
-나간다고? 대륙으로? 이봐, 주인. 여기 좋잖아. 먹을 것도 있
고 사람도 없고. 굳이 나갈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어 . 아! 슈라는
얼음이야. 대륙에 나갔다가 녹아 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테세르는 다른 이들을 만난다는 게 두려웠다. 정령계에서 너무
많은 정령에게 따돌림을 받은 게 이유였다. 이곳에서는 라한이라
는 중재자가 있었기에 슈라나 자신이나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
지만, 밖에서 외부인을만난다면 그들에게 또 다시 손가락질
받을 걸 생각하니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슈라! 너 따뜻한 곳으로 가면 어떻게 되지? 녹아 버리나?"
-녹아 버리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시간이 흐르면 다시 재생될
테니까 대신 기후에 따라서 소환돼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정해질
거다. 더운곳일수록오래 버티기는 힘들겠지. 근데 주인! 이곳을
벗어날 생각인가?
슈라의 되물음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대륙으로 나가
서 타인과 부딪힌다는 게 걱정됐던 모양이다.
라한과 슈라가 대화중일 때, 테세르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제발 라한이 가기 싫다고 말해주길 빌고 또 비는 모습이었다.
"테세르! 짐 챙겨! "
틸썩!
-우웅, 알았다. 뭐.
테세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오벨리아 팰리스로 들어갔다. 오늘
따라 오벨리아 팰리스가 왜 이렇게 좁게만 느껴지는지
테세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슈라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테세르가 뭔가를 하고 있으니 자신도 뭔가를 하려는 의도였다. 헌
데 막상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괜히 눈을 두드리며 부지런한 척 하
고 있을 뿐이었다.
'은근히 귀여운 녀석들이라니까. '
라한이 몸을 조금씩 풀기 시작했다. 앞으로 쾌 오랜 시간동안 강
행군을 펼쳐야 하는 라한. 그때를 대비해서 준비운동을 하는 모습
이었다.
테세르는 오벨리아 팰리스를 십여 차례나 반복했다. 그 동안 말
려놓은 열매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테세르의 운반이 끝나자 슈
라가 음식을 오른손 위에 담았다. 거대한 손은 그 하나가 수레와
맞먹는 크기 였다.
"테세르, 슈라. 알아서 따라와라. "
라한이 앞장서서 걸어갔고 그 뒤를 슈라와 테세르가 뒤 따랐다.
라한의 얼굴에 기대 반, 아쉬움반의 표정이 교차했다. 마법을완벽
하게 만들지 못한 아쉬움과 반가운 사람을 만난다는 기대감이 그것
이었다.
테세르의 얼굴은무척이나 어두웠다. 이곳을 떠난다는 게 영 내
키지 않는 듯했다. 평소에는 테세르를 단 한 번도 태워주지 않았던
슈라도 오늘만큼은 어깨에 앉는 걸 허락했다. 그의 어두운 얼굴을
보자 거절할 용기가 나지 않은 모양이다.
대륙북부의 파마리스 평원의 입구 페사지방, 이곳은스카라트
산맥과 룩파트 산맥 사이에 위치한 구멍 같은 위치였다. 대륙 북동
부의 스카라프 산맥과 대륙 북서부의 룩파트 산맥 사이에 위치한
탓이다. 이 때문에 페사 지방을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파마리스 평원에 대한 동경과 여러 전설들이 겹쳐
져서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페사 지방의 서쪽이자 대륙 북동부에 위치한 스카라트 산맥.
이곳은 카르 왕국과 베루니아 왕국 두 나라를 북쪽에서 덮듯 위
치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사이가 전통적인 우호관계가 아니었다
면 또, 몬스터의 수가 많지 않았다면 일찍이 전장으로 변했을 게
분명했다.
4 백여 년 전, 카르 왕국의 후계자였던 헤밀턴 왕자는 모험을 몹
시 동경했다. 용병이 되고 싶어 했고 여행자가되고 싶어 했다 이
때문에 헤밀턴 왕자는 자신이 왕자라는 걸 가슴에 사무치도록 증오
했다. 왕자만 아니라면, 왕궁에 갇혀 있는 상황만 아니라면
그러던 어느 날, 헤밀턴 왕자는 왕성을 몰래 탈출하기로 마음먹
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모험다운 모험을 해보
고 싶었으리라. 왕성을 몰래 빠져나온 그는 스카라트 산맥으로 향
했다. 그 동안 쌓은 검술 실력과 용병으로서의 자질을 시험하기 위
해서였다. 이때의 가출로 카르 왕국의 왕성이 발칵 뒤집혔음은 두
말할 필요 없었다.
헤밀턴 왕자는 십여 명의 수행인만을 데리고 갔음에도 몬스터들
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개개인의 실력이 출중했기에 가능한 일이
었다. 하지만, 실력과달리 경험은 한참부족했다. 자신도 모르게
산맥 안으로 조금씩 들어가 버린 것이다.
결국, 베어울프와아이스 트롤의 연이은습격으로 수행원을 하
나씩 잃었고, 결국에는 네 명의 수행원과 헤밀턴 왕자만 남게 되었
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자칫하면 카르왕국의 대통이 끊어질
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 그때 그를 구한 사람이 베루니아 왕국의
후계자 보리스 왕자였다. 헤밀턴 왕자를 궁지에서 구해낸 보리스
왕자는 헤밀턴 왕자와 밤이 새도록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날 헤어질 때는 서로가 형 아우라 부르며 의형제를 맺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이 각각왕위에 올랐을 때, 두 나라는 영원
한 우방이 되었다. 둘의 우정이 국가 간의 관계까지 영향을 미친
셈이다.
"아~, 그렇게 된 거구나. "
"그리고 여기가 과거에 헤밀턴 왕자님과 보리스 왕자님이 만났
던 장소라고 하더군. "
두 그루의 거대한 나무 사이에 다섯 명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한명은로브를, 나머지 네 명은가죽갑옷을입은모습이었다. 가
운데 모닥불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손에서 무기를 떼지 않은 사람
들. 누가 보더라도 모험가나 용병으로 볼 모습이었다.
"그때부터 이곳 스카라트 산맥은용병들의 필수훈련소가 되었
지 베루니아 왕국하고 카르 왕국 부근에서 여기만큼 몬스터가 많
은 곳은 드물잖아 "
"그렇구나. 그럼 우리 말고 다른 사람도 있을 수 있겠네. "
"응. 서쪽으로 가면 카르 왕국에서 나온 기사수련생들이 있을
거야. 거기 사람들하고 우리하고 수련을 시작하는 날짜가 같잖아. "
카르 왕국과 베루니아 왕국은 기사 수련을 위한 장소로 스카라
트 산맥을 이용했다. 단순한 대련으로는 얻지 못하는 실전 감각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두 나라는 수련을 시작하는 날짜도 같
았다. 혹시나위험이 닥쳤을때, 서로를도울수 있도록날짜를맞
춘 것이다. 실제로도 갑자기 많은 몬스터를 만나면 서로에게 도움
을 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카르 왕국에서 나온 기사 수련생 일곱 개의 파티와 베루니아 왕
국에서 나온 일곱 개의 파티, 각 파티는 모두 다섯 명으로 이루어
져 있었다 기사 수련생 네 명과 그들을 지원할 마법사 한 명이 그
들이었다.
물론, 지금은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서로에
대한 의존을 막기 위해서 비밀을 엄수한 탓이다. 하지만 어느 한
곳에 위험이 닥친다면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지경에 처한다떤.
마법사를 통해 위험한 곳이 알려지게 되고, 서로는 최선을 다해 도
우러 가게 되어 있었다.
"근데 우리가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그 빌어먹을 자식들이 훼
방이라도 놓으면
"설마 여기서도 그러겠어? 정말 그런다면 나도 참지 않겠어. "
본래 기사 지망생은 대부분 귀족이다. 어느 정도의 재력이 갖추
어지지 않으면 입학조차할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사 지망
생인 베린, 카류나, 시스마란, "에펠은 평민이었다 3 년 전에죽은
기사 학교의 선생인 로이파트가 직접 데려와서 입학시킨 것이다.
처음 그들이 기사 학교에 입학 했을 때는 뭐라고 하는 사람이 아
무도 없었다. 검술 선생인 로이파트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이파트가베어울프와의 싸움에서 죽
자 상황이 돌변했다. 기사 지망생들은 그들을 노골적으로 괴롭혔
고, 심지어는학교 선생들까지도 대놓고무시하기 시작했다. 하지
만, 그들은로이파트선생을떠올리며 힘들게 버텨냈다. 졸업만하
면 무시를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대감도 한몫 했으리라.
"선생님만 계셨어도
"카류나! 약한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우린 스스로 일어서야
돼. 언제까지 선생님 그늘에만 머물러 있을 거야?"
그들이 이런 언쟁을 벌이면 2 서클 유저 마법사인 란은 항상 눈치
를살펴야했다. 이 중에 그혼자만이 귀족출신인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란도 이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몰락 귀족 출
신의 란. 거기다 그들의 부모들도 3 년 전 베어울프의 공격 때 목숨
을 잃었다. 천애고아라는 점과배경이 없다는 점이 다른 일행들과
같았다.
"그만해. 란도 우리 눈치 볼 필요 없어. 우린 우리를 괴롭혔던
귀족 녀석들이 싫은 거지 네가 싫은 게 아니니까. "
"베린의 말이 맞아. 란도 피해자잖아. 아직 2 서클 마스터가 되
지도 못했는데 여기 끌려 나왔으니 우린 한 배를 탄 처지라고. "
보통 기사 지망생을 보조하는 마법사는 2 서클 마스터가 되어야
했다. 그 정도 실력은 갖추어야 통신 마법을 원활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란은 이제 2 서클유저의 실력. 통신 마법을한
번 펼치려면 십여 분을 준비해야했다. 거기다 통신 마법을 펼친 후
에는 가진 마나가 거의 바닥나는 처지였다.
"에펠의 말처럼 우린 뭉쳐야 돼. 기사 지망생이면 누구나 지급
받는 텅티레아 검도 우린 받지 못했어. 우릴 죽이려고 노골적으로
머리를 쓴 거지. "
텅티레아는 쇠보다 단단하다고 알려진 무기 재료였다 가공하기
가 쉽지 않지만, 일단 만들기만 하면 내구성과 날카로움에서 몇 배
의 효과를 보는 텅티레아 기사 지망생의 졸업식 때 항상 주어지는
무기였다.
"반드시 살아남겠어. 살아남아서 그놈들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
어."
소외받는 사람들끼리는 잘 뭉치는 법이다. 그들은 서로의 처지
를잘 알고 이해했기에 그 어느 파티보다잘뭉쳤다. 응집력에 있
어서만큼은다른 지망생 파티보다 월등한 것이다. 하지만, 가진바
실력은그렇지 못했다. 평범한검술실력과마법실력. 거기에 다른
이들 다 받는 무기도 얻지 못한 그들이었다.
"이제 그만하고 자라. 첫 번째 불침번은 내가 설게. "
"알았어. "
모두가잠들자 에펠이 어두워진 하늘을응시했다. 올해 스물네
살의 에펠. 그는또래의 다른사람들보다어른스러웠다. 남들이 자
신을 손가락질해도 묵묵히 자기 할 일에만 매진했고, 선생들이 무
시할 때도 웃고 넘겼다. 그 모든 욕을 감수할 만큼 검술에 대한 애
정도컸다. 아니, 기사가되고나서 얻게 될 명성과부에 대한애정
이 컸다고 해야 옳았다.
그런 그가 텅티레아 검을 받지 못했다. 그 사실만큼은 참기 힘들
었다. 기사가 되기 위한과정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텅티레아
검, 기사가되는길을, 검술을 익히는길을더 이상찾을수 없다는
느낌에 좌절감을 맛봐야했다.
'복수하겠어. 너희들보다 위에 서서 마음껏 부려주겠어. '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으며 불침번에 임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던 에펠 일행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무언
가가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
도 눈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는 상황.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지 알 길이 없었다.
"이상하지?"
"응. 베린. 무슨 일 없었어?"
베린은 전날 밤의 마지막 불침번이었다. 혹시나 아침에 무슨 일
이 일어난다면 마지막 불침번인 베린이 발견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에펠의 질문에 베린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불침번으로 있을 때,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음이다.
"왜 이렇게 찝찝하지. 란! 무슨 반응 없어?"
"잠시만. "
란은 아까부터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
법사가 이런 일에 적격이었다. 한참 눈을 감고 무언가를 하던 란이
고개를 갸웃거 렸다.
"피냄새가 나. "
"피?"
짧게 되물은 일행이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끼
지 못했던 냄새가 미약하지만 약간씩 느껴졌다. 그들이 모르는 곳
에서 밤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음이 분명했다.
"어느 쪽이지?"
"주변 전부 다인 것 같은데. 사방에서 조금씩 풍기고 있어. "
에펠의 말에 일행들이 무기를 움컥잡았다. 란은 그들의 뒤쪽에
서서 주변을 계속 경계했다. 지금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
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 란이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저, 저기 저기 좀 봐. "
"뭐지?"
"몬스터?"
란의 말이 끝나자 모두의 시선이 한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넓
은 범위에 걸쳐 쾌나 많은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언가가 이
쪽으로 몰려오는 듯했다.
"젠장. 전투 준비!"
"무슨 소리야. 도망가야지.
"늦었어. 저길 봐. "
그들이 도주해야 할 장소에 거대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걱
우다섯마리의 몬스터, 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몬
스터였다.
"오크인가?"
"베어울프다. "
에펠의 낮은 음성에 일행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느 쪽으로
도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맞서 싸우기에는 그들의
힘이 틱없이 부족했다. 나름대로 독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건만,
막상 죽음과 맞닥뜨리자 어떻게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죽을 각오로 싸우자고. "
"그래, 까짓것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해보자 "
비장한듯 말하긴 했지만 얼굴은 몹시 어두웠다. 지난 8 년간의
기사 학교생활이 덧없이 느껴졌다. 왜 그렇게 고생하며 참기만 했
는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거면서 왜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왔는
지 괜히 스스로가 한심했다.
"란을 둘러싸고 최대한 버티자. 베린 넌 왼쪽을 맡아. 난

쿠콰콰쾅!
에펠이 일행들의 위치를 정해줄 때, 멀리서 엄청난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동시에 먼지를 일으키던 곳에서 거대한화염이 솟았
다. 대단위 마법을 터트렸을 때에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누가 있다 "
"살았다. "
"일단 집중해. 적인지 아닌지도 모르잖아. "
일행을 다독인 에펠이 전방을 주시했다. 침착한 그가 보기에도
경이적인 광경이었다. 최소 6 서클 이상의 마법이 작열해야볼 수
있는 엄청난 폭발음과 파괴력. 하지만, 상대의 정확한 의도를 모르
는 이상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드래곤이라도 나타났다
면 그들의 목숨도 부지할 수 없었다.
쿠쿠쿠쿠쾅!
또 한 차례의 폭음이 터져 나왔다. 몰려오던 몬스터들의 왼쪽이
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거의 터져나가듯 먼지 구름이 피어올랐다.
두 차례의 마법이 시전되자 몰려오던 몬스터가 뿔뿔이 흩어졌
다. 하지만, 일행들이 있는곳으로 오는몬스터는단하나도 없었
다. 시전자가 일행들이 있는 방향에서 마법을 쏜 듯했다.
쿵! 쿵! 쿵!
갑자기 들린 땅의 울림에 일행들이 고개를 돌렸다. 소리의 진원
지는 몰려오던 베어울프의 앞이었다. 덩치 큰 베어울프와 그보다
더 큰골렘. 그들의 싸움에 일행들모두가숨을죽였다 반면 마법
사인 란은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같은 마법사로서 엄청
난 마법을 뿌린 존재에 대한 동경심의 발로였다.
크왝!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베어울프의 왼쪽 팔이 뜯걱 나갔다. 하지만,
골렘이 있는곳에서 들려오는소리가 아니었다. 전혀 동떨어진 곳
에서 의미 없이 죽음을 맞은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에펠 일행들이 주변을 샅샅이 훔었다. 그
리고 그들의 눈에 검은 무언가가 들어왔다. 주먹 두개를 합쳐야 하
는 아주 작은 크기 였다.
쿠쿠엑!
또 다시 베어울프가 죽임을 당했다. 좀 전과는 달리 골렘의 주먹
에 완벽하게 깔려서 죽은 베어울프였다. 인간보다 월등히 강한 힘
을 가진 베어울프를 저런 식으로죽이다니 일행들은감히 상
상도 할 수 없는 힘과 파괴력이었다
두 마리의 베어울프가 죽자 다른 베어울프들이 도망치기 시작했
다. 그들의 힘으로상대할수 없는존재임을 깨달은듯했다. 그렇
지만 골렘과 검은 물체는 베어울프를 쫓지 않았다 일행이 있는 곳
의 상공을 바라보며 v 자를 그렸을 뿐이었다.
"수고했어. 슈라, 테세르!"
공중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마리스 평원을 넘어 온
라한이었다.
그는 남진하면서 길을 잃었고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서
쪽으로 치우쳐서 걸었다. 그 결과 페사 평원이 아닌 이곳 스카라트
산맥으로 넘 어오고 말았다.
갑자기 위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에펠 일행이 고개를 치컥들었
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위에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했었다. 이곳에 도착한 그 순간 주변을 샅샅이 뒤지지 않았
던가 밤에 불침번을 설 때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대체
어떻게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마법사님을 뵙습니다. 전 일행의 리더인 에펠이라고 합니다.
평민이라서 성은 없습니다. "
"대마법사님을 뵙습니다. "
"대마법사님을 뵙습니다. 란이라고 합니다. "
모두 공손하게 인사했지만 란은 정도가 심했다. 얼굴 가득 동경
의 빛을 띠우며 눈을 초롱초롱 빛낸 란. 자신이 가려는 길의 극에
달한 사람들 보자 절로 존경심이 일었으리라.
"대마법사푸풋, 그렇지. 하하하하. 내가나이가많은것 같으
니까 말 놔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앉으시지요. "
라한의 표정은조금 얼떨떨한상태였다. 자신의 마법이 이 정도
로 강할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눈이 쌓인 곳에 마법을 시
전한 게 전부였으니 위력을 몰랐던 게 당연했다.
반면, 에펠 일행의 표정에는 놀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라한의
외모가 20 대 초반으로 보인다는 게 이유였다. 실제로 라한의 나이
는 29 세. 그의 실제 나이를 알았다 하더라도 놀람은 가시지 않을
터였다. 대마법사로보이는 이가 걱우 20 대 후반이라니 어디
가서 말한다 해도 아무도 믿지 못할 게 분명했다.
블루 드래곤 로이나의 레어 안.
로이나는 필슨 백작가문이 반역죄의 누명을 쓴 후부터 라한을
찾고 있었다. 정령을이용하기도했고, 아는드래곤들에게 직접 찾
으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렇게 6 년. 이제 슬슬 지칠 때도
됐으련만 그녀는 포기할 줄 몰랐다.
"라한
로이나가 레어 안을 서성이며 어쩔 줄몰라 했다. 좀 전에 바람
의 정령왕 실피드가 다녀간 이후부터였다. 실피드는 로이나에게
뭔가 정보가 있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좀 더 조사해 본 후에
말해주겠다는 의미였다.
이제 걱우 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로이나는 초조해하며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던 얘기가 아니던가.
이젠 죽었을지도 모른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때에 들려온 소식이
었다.
그렇게 한시간이 더 흐른후, 로이나의 레어 안에 강한바람이
불어왔다. 정령왕 실피드가 물질계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징조였
다. 그 모습에 로이나가 바람이 불어오는 곳 가까이 다가갔다.
"어떻게 됐지?"
-확실치 않군.
실피드의 얼굴에 의혹이 가득했다. 자신이 가져온 정보에 스스
로가 믿음을 갖지 못한 것 같았다. 실피드의 그런 표정에도 로이나
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반쯤은 포기하고 있던 소식이었다.
자신이 오래전에 한 말을 기억하고 계속 알아봐준 것만으로도 고마
웠다.
"괜찮으니까 말해줘, "
-좀 특이한 인간을 발견하긴 했다. 네가 말한 대로 몸에서 미약
하지만 동물의 향기가 풍기더군,
"그, 그 말 정말이지?"
로이나의 다급한 표정에 실피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로이나가 하찮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신기했다. 처
음 라한을 찾아달라고 할 때도 궁금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었다.
유희 중에 알게 된 어떤 사람에 대한 정보를 캐려나보다 하고 생각
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흐른 시간이 얼마인가. 아
무리 시간이 남아도는 드래곤이라도 그 시간동안 한 사람을 찾아다
닌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 기뻐하지 마라.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까.
"괜찮아. 아는 대로 다 말해줘 "
-아까말한 대로 동물의 느낌이 풍기는 인간이었다. 우리 정령
계에서 이단아라불리는 변종 녀석과함께 다니더군. 너야 정령이
아니니 잘 모르겠지만, 그 정령은 우리 정령계의 수치다. 원소의
향기도 풍기지 않는 녀석이라니
실피드의 말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로이나가한 걸음다가갔
다. 변종 정령이라면 라한과 계약했던 테세르가분명했다. 동물의
느낌에 테세르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단 한 명.
라한밖에 없었다. 정말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람을드디어 찾은 것
이다.
"그 정령 이름이 테세르 맞지?"
아는군. 테세르 맞다.
"그럼 라한이 확실해. 그와 계약할 때 내가 있었는걸. "
-풋, 드래곤도 참 멍청하군. 테세르처럼 쓸모없는 정령과 계약
을 시키다니 뭐, 어쨌든 네가찾던 인간이 맞다니 다행이군.
근데 그 인간의 몸에서 이해할 수 없는 기운이 풍기더군.
실피드의 대답에 로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라한을
떠날 때만해도그에게는 별다른 기운이 없었다 가진 기운이라고
해봐야 미약한 정령력과 마나 정도? 하지만 정령친화력과 마나친
화력이 전무한 라한이었기에 기운의 성장이 불가능했다. 시간이
흐르나 흐르지 않으나 예전의 기운 그대로여야 정상이었다.
"기운이라면 어떤
-글쎄, 어떠게 표현해야 할까. 마나 같기는 한데 밀도가 너무
높더군. 너희 드래곤들이 가진 드래곤하트보다 밀도가 더 높았다
면 설명이 될까?
"말도 안 돼. 어떻게 드래곤하트보다
로이나가 입을 떡 벌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아는 인간은 드래곤하트만큼 마나를 집적시키는 게 불가능했다.
그건 현재 뿐 아니라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역사 이래로 드래곤
하트만큼 마나를 집중시킨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헌데 친화력
도 없는 라한이 마나의 밀도를 높일 수 있을까. 그녀는 불가능하다
고 생각했다. 그건 라한에 국한된 얘기가 아닌 드래곤을 제외한 물
질계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였다.
-오해가 있었나보군. 드래곤하트보다 밀도가 높기는 하지만 더
강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드래곤하트의 마나량과 비교하면 한참
부족하지. 내가 말한 건 마나의 밀도만 의미한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에게 그런 일이 가능한 일인가?"
로이나가 라한을 아끼기는 하지만 드래곤임은 분명했다. 라한에
대해 얘기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드래곤의 입장에서 말해 버렸다.
-지금까지 내가알고 있는 인간중에는그런 인간이 없었다 근
데, 그 인간의 마나집적 정도는 엄청나더군. 밀도가조금만 더 높
으면 마족이라 불러도 될 정도였어, 아, 이것도 밀도만 얘기하는
거지 양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오해하지 말라고.
"심장에 있는 마나가 그렇다는 건가?"
-글쎄, 심장을 직접 살펴보지 않아서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만
봤거든. 근데 인간들은 다 똑같지 않나?
마나는 4 대 원소가 뭉쳐 하나의 기운으로 변한 상태를 의미했다.
하지만, 인간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족들은 마나 그 자체의 밀도가
거의 동일했다. 오밀조밀하지 않고 자연 상태 그대로 심장에 모은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은 드래곤하트에 상당한 밀도로 마나를 뭉쳐놓고
있었다. 마나의 농도가 짙어진 것이다. 드래곤하트를마나의 저장
고 혹은 마나를 내려준 신의 선물이라 부른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리고 마족이 가진 마기도 본래는 마나였다. 그 밀도가 지나칠
정도로 높아 끈적끈적하고 그런 느낌이 타인을 불쾌하게 만들기에
마기라 부른 것뿐이다. 마나를 양이 아닌 밀도만 따지고 보면 마기
가가장높은셈이었다. 다음은드래곤하트, 일반마나순이었고.
"그가 지금 어디 있지?"
스카라트 산맥에 있다.
실피드의 짧은 대답에 로이나가 걱정스러운 빛을 띠며 되물었다.
"거긴 몬스터가 많은데. "
-쿠쿡, 넌 그 인간을너무모르는군. 내가본그 인간은웬만한
몬스터에게 부상을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좀 미심쩍은구석
이 있기는 하지만 6 서클 마스터 마법사 정도로 봐야겠더군.
"마법사? 마법사
로이나는 마법사라는 이름을 되뇌며 생각에 잠겼다. 쾌 오랫동
안라한을보지 않았지만그의 꿈은분명히 인챈터였다. 헌데 그의
꿈이 바꿔 건가?로이나는그럴 리 없다고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라한은 인챈터에 대한 집념이 엄청난 사람이었다. 물론,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서 그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단
한가지. 라한이 무언가에 매달리면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라한이 인챈터를 포기했다? 정말 꿈을
바꾼 거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반드시 있을 거라 믿었다.
-찾으러 갈 생각인가?
".아니. 난라한을믿어 "
로이나는 라한을 찾는 일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보고 싶다고 해
서 당장 달려갔다가는 자신의 정체를 의심받을 게 분명했다. 어떻
게든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것만큼은 들키기 싫었다. 좀 더 참고 참
아서 자연스럽게 만날 계기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야 의심
받지 않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카라트 산맥 안.
라한과 에펠 일행이 자리에 다시 앉았다. 에펠 일행은 라한에 대
해 궁금한 점이 많아서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라한 역시 대륙의 변
화를 듣기 위해 이들과 대화를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누구하
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라한은 대륙을 너무 오래 비워서 무
얼 먼저 물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작을못해서 입을 열
지 못한 것이다. 반면, 에펠 일행은 엄청난 실력의 마법사로 보이
는 라한에게 선뜻 말을 꺼내기가 불편했다 자칫 말실수라도 한다
면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걸 염려했음이다.
여섯 명이나 되는 일행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라한이 눈을 지그
시 감았다. 속으로는 오만가지 욕을 다하면서도 겉으로는 근엄한
표정을 유지했다. 벌써부터 대마법사의 풍모를 보이려하는 그의
노력이었다. 잠깐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라한이 입을 열었다
"흠, 흠. 에헴. 여기가어디지?"
"아, 예. 여기는스카라트산맥 남단입니다. "
대답은 에펠이 아닌 란에게서 나왔다. 대마법사로 보이는 라한
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기에 순간적으로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카르 왕국? 아니면 베루니아 왕국?"
"카르 왕국의 북쪽입니다. 저기 보이는 저 쪽으로 20 킬로미터
정도 가면 국경에 도달하게 됩니다. "
란의 대답에 라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본래 오벨리아 팰리스에
서 정남쪽으로 계속 이동하면 나오는 곳은 페사 지역이었다. 라한
의 목표 역시 그곳. 헌데 카르 왕국의 북쪽으로 나왔다는 건 길이
심하게 어긋났다는 의미였다. 남진 중에 만났던 폭설이 길을
잃게 만든 것 같았다.
"저기
"뭐야?"
"저 어떻게 부르면 되는지 위대하신 마법사님의 존함을 모
르고 있어서요. "
란의 조심스러운 말에 라한이 실소를 터트렸다 위대하신 마법
사라니 그는 자신이 이런 말을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
었다. 차라리 위대한 인챈터라면 오래전에 꿈꾸던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마나 친화력의 부재로 과거 자신은 마법사를 포기했었지
않은가. 그런 자신이 위대하신 마법사라 불리는 이 상황이 재미있
게 느껴졌다.
"라한. 그냥 그렇게 부르면 돼. 근데 너희들 여기서 뭐하고 있었
냐? 밤사이에 여기저기서 쾌 많은 사람이 죽은 것 같던데 말이야. "
"여기저기서 사람이 죽었다면 혹시, 저희처럼 야영을 하던 팍
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번에 되물은 사람은 에펠이었다. 아무래도 파티의 리더의 입
장이었기에 이런 일에 의문이 더 생기는듯했다.
"응 내가 여기 올 때 보니까 깨끗하게 먹혔더군.
"헉!"
"헛!"
라한의 대답에 주변 일행 모두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주변의 파
티라면 카스 왕국과 베루니아 왕궁에서 나온 기사 지망생일 터였
다. 그 중에 카르 왕국에서 나온 기사 지망생이라면 자신들과 쾌 오
랫동안 함께 지낸 사람임이 분명했다. 서로 으르렁대기는 했지만,
평소 얼굴을 맞대고 지냈던 이들이 죽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너희들이 살아남은 건 내가 도와줘서이기도 하지만 너희들 스
스로가 잘 해서 살아남은 거야. 다른 파티는 자기들의 실력을 믿은
건지 알람 마법을 비롯한 경계 마법과 주변 은폐를 전혀 하지 않았
더군, 자만이죽음을부른거지. 하지만너희들은주변을나뭇가지
로 대충이라도 가렸으니까 몬스터들이 늦게 발견한 거야. "
"그, 그렇군요. "
에펠 일행은 말을 더듬으면서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카르 왕국을 떠나 수행을 시작한지 벌써 한 달. 그 동안 몬스터들
의 공격이 거의 없어서 스스로 나태해져 있었다. 주변 경계와 은폐
를 하면서도 이럴 필요가 있냐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때 잠깐 마
음을 잘못 먹고 은폐에 소홀했다면 그들은 몬스터의 몸속에 있을
게 분명했다. 그때를 생각하자 몸 전체에 전율이 흘렀다.
"근데 너희들은 여기 왜 온 거냐? 대충 봐도 몬스터들 천지구만. "
"아, 저희는카르왕국기사학교학생입니다. 얼마전에 졸업하
고 경험을 쌓기 위해 수행을 나온 겁니다. "
"좋은 생각이군. 직접 싸우면서 경험을 쌓는 게 최고지. 좀 위험
해서 문제기는 하지만, "
그 말을 끝으로 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당최 사교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일행이었다.
카르 왕국은 대륙 북서부에 위치한 강국 중 하나였다. 베루니아
왕국과의 끊임없는 교역으로 내실을 튼튼하게 하고, 기사 양성에
전력을 기울여 국방력을 굳건하게 한 결과였다.
라한은 카르 왕국의 저력이 기사 수행에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나라들이 지방을 돌며 명성을 쌓는 것에 치중하는 것과는 대비되는
카르 왕국과 베루니아 왕국의 기사 수업. 실전으로 다져진 실력이
있었기에 뛰어난 기사의 배출도 가능한 것이리라
침묵을 견디다 못한 라한이 발길을 돌렸다. 밤에 충분히 쉬었으
니 다시 이동하려는 생각에서였다. 라한이 두 걸음쯤 걸었을 때,
뒤에서 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라한님. "
"응?"
란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라한이 짧게 답했다. 그가 본 란은 수줍
음이 많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다. 저런 성격은 남들과의 대인관
계가 그리 넓지 못해서 따돌림 당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남들의 따
돌림과 놀림 때문에 점점 혼자 다니게 되고, 결국에는 남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라한이 이필리에 종합 학교를 다
니며 수없이 많이 본 성격이었기에 쾌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
다 넓은 범주에서 보면 자신 역시 그런 부류이지 않은가.
"저기 그러니까. "
"말해봐. "
란이 계속 주저하자 라한이 부드러운 말투로 재촉했다. 저런 성격
의 사람에게 답답하다고 언성을 높였다가는 더 이상의 대답을 듣기
힘들다. 살살 구슬려서 말하기 편한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했다.
"따라가도 될까요?"
무슨 소리야? 내 목적지는 카르 왕국이 아니라고. 집에서 너희
부모님이 걱정할 걸 생각해봐. 키워준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그렇
게 말하면 안되지. 암, 안되고말고."
라한의 충고에 란의 표정이 오히려 밝아졌다. 예상 못한 란의 표
정 변화에 라한이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왠지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한은 혹이 달라붙을까봐 내심 불안했다. 제스란과의 만남도
죽음으로 끝났고 칼라피안과의 만남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 들었
던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쾌 오랫동안 한 구석이 빈 것 같은 느낌
을 받았던 라한. 또 다른 일행이 생기는 게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행을 만들고 싶기도 했다. 자신은 너무 오래
혼자 지냈다. 이젠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서로의 속내를 틸어 내
보고 싶었다. 정령이나 골렘이 아닌 인간과 말이다.
"저희 부모님은 3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우리 집안은 몰
락귀족 집안이라서 친척도 없어요. 아니, 친척들한테도 버림받았
어요. 힘이 없으니까 버려지더군요. "
란의 대답에 라한의 입이 다물어졌다. 어떻게 대답해야좋을지
몰랐다. 물론, 라한의 언변이면 그를 단념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
만그렇게 하는 게 영 내키지가 않았다. 란에게 측을한 마음이 든
것이다. 예전에 라한이 가졌던 성격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
다. 칼라피안과 함께 지내며 정이라는 감정을 배웠기에 이런 감정
도 느낄 수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라한님. "
털썩!
말을 마친 란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든 승낙을 받
아내겠다는 강경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런 식으로 무릎을 꿇자
라한도 할 말이 없었다. 이미 그에게 안쓰러운 감정을 가진 라한이
었다. 어쩌면 벌써부터 그를 데리고 다닐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어나. 까짓것 같이 다니자고. "
"감사합니다, 라한님. 말잘들을게요. "
란은 라한에게 마법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배움의 내용이
마법 주문이나 시동어, 연상 같은 마법의 실질적인 면은 아니었다.
그 동안 마법을 배워왔지만 스승에게 외면 받았던 란. 왠지 자신이
배운 마법이 원천적으로 잘못됐다는느낌을 받아왔다. 마치 스승
이 처음부터 다르게 가르친 것 같은 그런 느낌. 이에 란은 라한에
게 마법의 기본적인 개념부터 가져야할 마음가짐까지 모든 걸 배우
고 싶었다.
"저기 혹시 주변에 있던 파티가완전히 전멸한 겁니까? 생존
자는
"아, 그놈들 다죽었어. 좀 일찍 발견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애
석하게. 친구들이면 미안해. "
말을 마친 라한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겉으로는 그들을 살리
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몬스터들
의 발광 자체가 라한의 잘못이었다. 길을 잘못 들어서 여기저기 해
매다 몬스터의 마을로 가버린 것이다.
그때 라한이 사용한 마법이 피닉스였다. 세라 소드에서 뻗어나
간 피닉스는 고블린 마을의 정 중앙으로 향했고, 정말 공교롭게도
그곳의 족장을죽여 버렸다. 문제는그때부터였다. 도망가는라한
과 쫓아다니는 엄청난 수의 고블린. 그리고 쫓아가면서 건드린 베
어울프의 서식지까지 이 모든 일의 원흥이 라한인 셈이다.
"저도 따라갈 수 있을까요?"
"저도요. 저도. "
"따라가고 싶습니다. "
라한이 란을 승낙하자 다른 일행들에게서도 비슷한 말이 흘러나
왔다. 어떤 이는조심스럽게, 또 어떤 이는자신 있게 외치고는고
개를 숙여 버렸다.
에펠 일행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라한이 어리둥절해했다. 란은
고아니까 이해한다지만 저들은 대체 라한도 기사수업이 귀
족의 전유물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 눈앞에 있는 귀족 자제로 보이
는 기사 지망생들의 부모도 모두 죽었다는 말인가? 도무지 이 상황
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로서는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 기사 지망생의
파티가모두 전멸했고, 자신들만살아남았다. 천대받고 미움받는
그들이었기에 이대로 본국으로 돌아갔다가는 모든 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돌아다녀야할 입
장이었다
'뭐야? 몬스터가 왕국을 휩쓸고 지나가기라도 한 건가?'
"잠깐! 잠깐만. 뭐냐? 너희들 부모님도 몬스터한테 죽임을 당한
거냐? 뭔 놈의 나라가 몬스터에 의해 쑥대밭이 됐다냐. "
"뭔가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희는 귀족이 아닙니다. 저
기 있는 란만 귀족 출신이죠. "
에펠이 대표로 대답하자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민 출신
의 기사 지망생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기사는 집권층의 한
부류,
이 때문에 기사라는 위치는 귀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물론,
평민 출신의 기사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극히 드물었다. 헌
데도 평민 출신의 기사 지망생끼리 모여서 파티를 만들었다? 지금
시기에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임에 분명했다.
"웃기는 녀석들일세. "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귀족 출신의 기사들이 저희를 멀리 했
으니까요. "
에펠의 말에 라한이 한숨을 쉬었다. 란만 불쌍한 놈인 줄 알았더
니 에펠과 다른 기사 지망생도 비슷한 처지였다. 만약 라한이 집안
의 불운한 일을 들었다면 안쓰러움보다 동질감을 느꼈으리라.
"까짓것 그래. 너희들도같이 다니자. 내가뭐 귀하신몸이라고
사람까지 가리겠냐. 일단 이 자리부터 피하는 게 어패? 여긴 피냄
새가 풍겨서 말이야- "
예 라한님
형이라 불러
넵 형님
에펠은 기분이 몹시좋았다 어찌됐든 자신보다 월등하게 강한
사람을 형으로 두게 된 셈이다 거기다 라한이라은 사람은 귀족과
평민에 대한 편견도 없어보였다 기사 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처음
겪어보는 친밀한 느낌이었다
굴레을 벗은 라이칸드로프
라한과 에펠 일행은 산맥을 내려가면서 많은 애기을 나누었다
서로의 출신에 대한 애기부터 살아온 애기까지 라한은 자신
의 출신을 말해도 되는지에 대해 잠깐 동안 고민했었다 그리고 내
린 결론은 말하자 였다 언젠가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됐을 때 이
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하자 말을 안할수가 없었다 차라리 속 시
원하게 털어놓고 정 들기 전에 결정하는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하
지만 혹시나 가려고 마음이라도 먹은다면 이들의 목숨을 보장할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 라한의 출신을 들은 에펠 일행은 멍한 표정으로 눈만 껌뻑
거렸었다 하지만 이내 환하게 웃고는 라한을 받아들였다 신분보
다 사람이 더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귀족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약
간의 거리감을느낀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
았다. 하지만, 이때부터 라한이라는사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모르겠어요. 저희는 기사가 아니면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
란을 제외한 에펠 일행은 어린 시절부터 기사가 되기 위해 교육
받았다. 다른꿈을꿀만한경험이 거의 없는것이다. 이 때문인지
그들의 목표는 한결같이 기사가 되는 일이었다. 아니,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이런 면은 란도 마찬가
지였다. 기사가아닌 마법사라는게 다를뿐. 어린 시절부터 한가
지 목표를 위해 수련해온 건 그들과 같았다.
"나를 포함해서 마법사 두 명과 검사 네 명이라 딱 좋네. "
"뭐가요?"
"용병이 되자는 거지. 일단 내 목표가 루이나 왕국이라서 그곳까
지 갈생각이거든. 가는동안용병이나하자. 상단을호위하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어차피 먹고 살려면 돈은 벌어야 되잖아. "
라한은상단호위 외에는하고 싶은 의뢰가 없었다. 용병 일 중
에서 상단 호위가 가장 안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지금 그의
실력이면 웬만한 용병일은 모두 받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
만, 돈을 적게 벌더라도 좀 더 편한 일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잘 할 수 있을까요? 물론, 형님에서야 충분하겠지만 저
희가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방해는 무슨 방해. 너희들 여기 온 게 경험 쌓으려고 온 거 아니
었어? 용병일 하면서 경험이나 쌓자는 건데 뭐. 마음 편하게 먹어 "
"예 형님. 우리는형님이 하자는대로할게요."
에펠의 말에 다른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암묵적으로 라한
리더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그들의 말을 들은 라한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필슨 백작가에
서 지낼 때는막내라서 어른들만 있었던 형편이었다. 그런 라한에
게 처음으로 동생이라는 존재가 생기자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녀석들. "
"참, 형님. 아까베어울프하고싸운게 골렘 맞죠?그리고작은
건 뭐였어요?"
란의 물음에 라한이 머리를긁적였다. 어차피 이들과함께 다니
자면 슈라와테세르를소개시컥줘야했다. 하지만, 테세르가못내
마음에 걸렸다.
최소한 슈라는 남에게 따돌림 당하거나 미움 받지는 않았었다.
다른 이와의 접촉이 없었던 건 마찬가지였지만 하지만 테세
르는 정령계에서 너무 많은 고생을 했었다. 그를 다른 사람과 접촉
시켰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보자마자 숨을
까? 아니면 정령계로 역소환 해버릴까? 별별 생각을 다해봤지만
뚜렷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해보면 알겠지.
"테세르, 슈라. "
라한의 불음에 테세르가 즉각 모습을 보였다. 처음 나타나서 주
변을 두리번거리던 테세르. 이내 에펠 일행의 주위를 돌며 득의양
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에는 에펠 일행이 자신보다 약하게 보
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테세르가 그들 모두보다 강했다.
슈라는 큰 소리와 함께 라한의 뒤쪽에서 모습을 보였다. 얼음과
주변 돌이 적당히 섞인 특이한 모습이었다. 오벨리아 팰리스보다
따뜻한 곳이라서 몸체 구성이 완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몸의 빈
곳에 주변 돌이 섞인 듯했다. 하지만, 남아있는 얼음이 모두 사라
지면, 슈라의 소환은 불가능했다. 그의 본래 정체가 얼음 골렘이었
기 때문이다.
"우와! "
"형님. 골렘은 영웅 일대기 같은 곳에서 본 적이 있는데, 요정
같이 조그만 건 뭐예요?"
란의 물음에 테세르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자신을
요정과 비유한 게 마음에 든듯했다. 하지만, 라한은란의 표현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테세르의 심한 장난기 때문에 종종 고생
을 했던 라한. 그에 한해서만큼은 좋은 소리를 해주기가 싫었다.
"이놈은 정령이야. "
"형님, 마법사 아니셨어요? 정령도 소환할 줄 아세요?"
"형님. 제가알고 있는정령에 대한지식과는좀다르네요. 무슨
정령이죠?"
유일한 여자 일행인 카류나의 말에 라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
다. 왠지 이들과함께 있으면 자신이 위대한존재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란의 연이은 질문에는 당황하는 표정을 지어
야했다. 테세르의 정체에 대해서 미처 생각을 못한 것이다 너무
오랜 시간을 편하게 생활을 해 와서 그가 특이한 정령이라는 걸 깜
빡한 탓이다.
"어, 그게 이건 아, 잡종이야. 이것저것 다섞인 잡종. 그냥
테세르라고 부르면 돼. "
"예. "
란은 라한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잡종 정령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라한이라는존재에 대해
또 한 번 거리감을 느꼈다.
"테세르! 인사해라. "
-주인! 잡종이라고?
테세르는 에펠 일행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마나의 정령이
라는 좋은 말도 있는데 잡종이라 평하다니 자신을 잡종이라
부른 라한에게 꼭 해답을 들어야 고개를 돌릴 듯했다
"왜? 아니야? 너 불 속성 있지?
-그건
"물 속성도 있잖아. 바람도 있고, 땅도 있고. "
-그렇기는 하지만,
라한의 추궁에 테세르도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
기에 반박을 못한 것이다. 테세르가 말을 얼버무리자 라한이 용기
를 내서 한 마디 내뱉었다.
"잡종아! 인사해라. "
-이씨, 쳇.
짧게 내뱉은 테세르가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다. 당장 화는 치밀
었지만 말싸움으로 라한을 이길 수는 없는 일. 차라리 정령계로 가
서 좀 전에 들었던 말을 잊는 게 나았다. 그 말이 제대로 잊힐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그 녀석이 어울리지 않게 수줍음을 많이 탄다. 너희들이 이해
해라. "
"예. 형님. 그리고 저 골렘은
"아, 슈라라고 부른다. 저 녀석이 하는 말은 너희들이 못 알아들
을 거야. 그냥 그러려니 해라. "
"예. 형님, "
라한이 한 마디 할 때마다 에펠 일행은 그가 신기하게만 보였다.
마법만으로 부족해서 정령까지 부리는 라한. 거기다 골렘까지 소
환하다니 영웅의 일대기 그 어느 것을 뒤져도 이런 사람은 없
었다. 설사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유희를 즐기지는 않
을 거라 생각했다.
실피드를 보낸 로이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령왕 실피드
에게 라한의 생존을 들었으니 그를 봐야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후
다닥 나가서 만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우연한 만남을 가장해서
만나야 했다.
"어떻게 만나는 게 좋을까? 용병으로 만날까? 아니야. 너무 흔
해, 일단날 엘프로 알고 있으니까에휴, 라한이가숲으로들어
가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을 텐데. 지금 어디쯤
스팟!
로이나의 앞에서 금빛 광채가 터져 나왔다. 텔레포트를 할 때 터
져 나오는 빛이었다. 물론, 빛이 나오지 않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러려면 좀 더 많은 마나가 필요했다. 은밀한 이동이 필요할 때가
아니면 빛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아! 로드님. 여긴 어쩐 일로.
"레이시아나, 있었구나. "
나타난 존재는 골드 드래곤 베르타라스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
도 드래곤의 로드였던 존재. 하지만, 지금은 로드 자리를 물려준
고룡의 하나에 불과했다.
"로드님. 무슨 일이 생겼나요?"
"이제 로드가 아니니 로드라는 호칭은 좀 그링구나 "
"그렇군요. 습관이 돼서. 베르타라스님. 근데 무슨 일로
로이나의 물음에 베르타라스가 자리에 앉았다. 서서 얘기할 정
도로 가벼운 얘기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가 자리에 앉자 로이나도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로드가 아니
더라도 그가 일족의 원로인건 마찬가지였다 할 얘기가 있다면 들
어주는 게 로이나가 할 도리였다.
한참을 눈만 감고 있던 베르타라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가
고민하는 시간만으로도 일의 경중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레이시아나. 혹시 이번에 로드가 된 로테마이어스가 널 찾아
오지 않았느냐?"
"그가 왜요?"
로이나의 짧은 되물음에 베르타라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요즘 로테마이어스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들은 적이 있느냐?"
"아니오. 전 몇 년 동안 여기를 나간 적이 없어서 근데 무슨 일
"후우, 그가 드래곤들을 설득하고 있다. "
"좀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
로이나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다. 로테마이어스라면 자신과 쾌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친구였다. 물론 자신은 블루 드래곤이었고,
로테마이어스는 레드 드래곤이었지만 친하게 지냈던 건 사실이다.
로드 경합 때 잠깐틀어질 뻔한 적이 있었지만, 그건 로이나가 경
합을포기함으로써 무리 없이 마무리되었다. 결국, 지금도둘은그
렇게 틀어지지 않은 친구라는 얘기였다.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음, 용마전쟁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느냐?"
"대충은요. 마족이 어떤 게이트를 통해서 물질계에 대규모로 공
격을 가해왔고, 우리 드래곤들이 그들을 쫓아 보냈다고 들었습니
다. 자세한건 너무 오래돼서 잘 모르겠지만. "
로이나의 대답에 베르타라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차분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맞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지. "
"전부가 아니 라고요?"
"그래. 그때 마족을 쫓아 보내고 나서 우린 판테아라는 자의 방
문을 받았다. "
"판테아? "
로이나의 표정에 의문과 진지함이 함께 드러났다. 베르타라스의
표정이 밝지 않았기에 그리 좋은 얘기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얘기를 끊을 수는 없었다. 드래곤은 호기심의 동물이지 않은
가. 로이나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판테아는 스스로를 신의 사자라고 칭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
지. 헌데, 그의 힘을 보고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
"어떤 힘을 보였는데요?"
"후우, 우리 드래곤들이 몇 가지 종족인줄 아느냐?"
"그야블루, 블랙, 그린, 레드, 골드 일족, 이렇게 다섯 가지라
고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만 과거에는 여섯 가지 종족이었다. 네가 열거한
다섯 가지에 실버 일족이 추가되어 있었지. "
베르타라스의 얘기에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는 얼
굴 표정이 크게 바러지 않았다. 비록 실버 일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판테아라는 존재와 무슨 관계가 있으
리라는 짐작은 가능했다.
"그렇군요. "
"실버 일족은 .판테아에 의해 사라졌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실
버 일족 전부가 모습을 감추었지. 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방
법이 없었다. 대륙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지 못했으니까. "
그제야 로이나의 얼굴에 충격 어린 표정이 드러났다. 단 한 존재
가 드래곤 일족을 사라지게 하다니.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설사
마계의 마왕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불가능했다.
"왜? 왜죠? 그가 왜 실버 일족을 사라지게 만든 겁니까? 우리
드래곤들은물질계를살리기 위해서 끼어든 것이지 않습니까? 헌
데, 왜? 대체 왜?"
"그는 우리 드래곤들이 물질계에 깊이 관여하는 걸 반대했다.
드래곤의 물질계 개입은유희로 한정지었지, 헌데, 우리가마족과
싸울 때는 본체로 싸웠다. "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또 있다. 당시 실버 일족은욕심이 너무많았다. 물질계를도왔
다는 이유로 물질계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려했지. 그 때문에
몇몇 왕국을 스스로 통치하려고 했다. 이런 여러 가지가 겹쳐서 판
테아의 미움을 샀던 거지. "
베르타라스의 설명을 듣고서도 로이나의 표정은 통 풀리지 않았
다. 물질계 최강이라 자처했던 드래곤이 단 한 존재에 의해 사라지
다니. 그것도 손짓 한 번으로 일족 전체가 스스로의 자부심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레이시아나. 그 사건 이후로 로드들은 드래곤들의 물질계 개입
을 극도로 자제해왔다. 또 다시 판테아에 의해 사라질 수는 없으니
까. 그런데 로테마이어스가 우리 선조의 잘못을 되풀이 하려 한다. "
"그게 무슨 말이죠? 그가 무슨 일을 하는데요?"
"드래곤들을규합해서 물질계를공격하려고하더구나. 아니, 지
배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비록 고룡들 전부와 나이가 좀 있는 성
룡들이 거부하기는 했지만, 그를 따르는 드래곤도 적지 않다. 열
명은 넘는 것 같더군 우리 드래곤들 소수만 모여도 물질계를 뒤흔
들수 있다는건 너도알테지. 헌데, 무려 열 명이다. 그들이면물
질계를 뒤집고도 남지 "
베르타라스의 얼굴은 절실하다 못해 절박해보이기까지 했다. 그
만큼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어떻게 하죠? 직접 만나서 포기시키는 게 낫지 않나요?"
"해봤다. 인간들을 버러지로 생각하는 그에게는 아무리 좋은 말
을 해도 통하지 않더군. "
"그럼 어쩌죠?"
"그들을 막지 못하면 또 다시 판테아가 개입할 지도 모른다. 어
떻게든 그들이 물질계를 지배할수 없게 만들어야 돼. 헌데, 우리
조차도 개입할 수 없다. 우리가 인간들의 편에서 싸우게 되면 우리
역시 개입하게 되니까. 휴, 인간들이 그들을 막을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 "
베르타라스의 말에 로이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한 일이
었다. 드래곤 다섯 마리만 날아가도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기 충분
했다. 헌데, 다섯이 아닌 열 마리. 무려 네 배의 숫자가 대륙으로
날아간다면 살아남는 인간이 거의 없을 것이다.
"불가능해요. 인간들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그들을 막아요?"
"전혀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굴레를 벗은 존재에 대해서 들
은 적이 있느냐?"
베르타라스의 물음에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는 모
르지만 얼핏 들은 기억은 남아 있었다.
베르타라스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 었다.
"그들을 가두고 있던 결계가 사라졌더군. 아마 판테아가 결계
를 없앤 게 아닐까 싶다. 그들의 힘으로 드래곤들을 막으라는 의
미겠지 "
"그럼 . "
"그래. 그들은 대륙으로 풀려났다. 인간뿐 아니라 라이칸과드
워프, 엘프까지. 굴레를 벗은모든존재 중살아있는놈들모두가
결계를 벗어났지. 단 한 명만 빼고. "
"한 명이라면?"
"류카라한. "
베르타라스의 짧은 대답에 로이나가 입을 떡 벌렸다. 류카라한
이라면 한때 로이나의 연인이었던 사람이다. 아니, 로이나가 일방
적으로 짝사랑한 인간이 그였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춰
버려서 로이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사람. 그가 살아 있다는 얘기
에 로이나의 얼굴이 멍하게 변했다.
"그 .그가 살아 있었군요. "
"그래. 그는 다른 굴레를 벗은존재와같은 장소에 갇히지는 않았
다. 아마 같은 장소에 가뒀다가는 그들모두와싸우려 들었겠지. "
베르타라스의 대답에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류카라한은 소드마스터에 오른 이후 강자들을 찾아다녔다. 그리
고 그들과 대결을 했고, 상대를 죽였다. 단순히 승부만 내고 끝낼
수 있었음에도 반드시 죽여 버렸다. 지금 루이에가 하고 있는 행보
와 거의 흡사한 행동패턴이었다.
"그가 나가지 않나요?"
"그는과거 자신이 한짓을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시 강
자를 만나면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을 거라고 하더군.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
"상황을 설명해봤나요?"
"아니. 이 얘기는 인간들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이야기라
서 말하지 않았다. 레이시아나. 네가 애써줘야겠다. 그를 만나서
대륙으로 나가게 해라. "
베르타라스의 말에 로이나가 생각에 잠겼다. 그가 아직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를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어떻게 설
득할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버렸다. 지금은 자신의 사사로
운 감정을 앞세울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해서 대륙
으로 보내야 최소한의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것이다. 더 이상사랑
타령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셀리포 숲.
엄청난 수의 드래곤이 사는 레비안 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작
은 숲이다. 특히, 전 로드인 베르타라스의 레어와 가까워서 인간의
접근이 철저히 통제된 곳. 하지만, 이곳에는 인간이 살고 있었다.
판테아에 의해 굴레를 벗고 결계에 갇힌 류카라한이 그였다.
베르타라스와 헤어진 로이나가 셀리포 숲으로 이동했다. 이미
판테아의 결계가 걷힌 상태였기에 텔레포트에 장애가 될 건 없었
다. 좌표만 정확히 기억해서 이동하면 그 뿐이었다.
텔레포트를사용하기 직전까지도 로이나의 얼굴은 초조하기 그
지없었다.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인간 류카라한. 그를 다시 만난다
는 설렘과 자신을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혼란스럽게 려인 탓
이다.
"이곳인가?"
셀리포 숲에 들어온 로이나의 전면에 작은 오두막이 위치해 있었
다. 대체로 투박한 모습이었지만, 꽤나 견고하게 만들어진 듯했다.
로이나는 오두막의 문 앞에서 다시 한번 망설였다. 차마 그를 볼
용기가나지 않았다. 하지만, 로이나의 접근은오두막의 주인도 이
미 눈치를 챈 상태였다. 로이나가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기를 반복
할 때 문이 열렸으니 말이다.
찰칵!
"레냐 인가?"
로이나가 멍하게 서 있자류카라한의 입이 먼저 열렸다. 레냐는
로이나가 류카라한과 함께 다닐 때 사용했던 이름이었다. 레이시
아나라는 이름을 줄여서 애칭으로 레냐라고 부른 것이다.
로이나의 외모는 과거 류카라한과 함께 다닐 때와 비교해서 많
이 달랐다. 몇 번의 유희를 거치면서 그때마다 다른 외모를 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류카라한은로이나를 정확하게 집어냈다. 로이
나의 외모가 아닌 풍기는 기운으로 그녀를 판별해낸 것이다.
" 류한. "
"레냐가 맞구나. 후후, 들어와. "
류카라한이 먼저 들어가자 로이나가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단
한 마디의 대화를 했을 뿐이지만 로이나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맺
혀 있었다.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러웠기 때문이다.
"레냐. 넌 우는 것보다 웃는 게 더 예뻐. "
"류한. "
로이나는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
려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걱우 이름만 되뇌었을 뿐.
"근데 여긴 어떻게 왔지?"
"그게
"말해봐. "
"저
류카라한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로이나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의 멍한 표정에 류카라한이 실소를 터트렸다. 8 백년하고도 한
참이 더 지났음에도 그녀는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른사람에게
는 몰라도 자신에게는 한없이 나약하고 수줍은 여인에 불과했다.
"베르타라스가 보내서 왔군. "
" 예. "
"후후. 레냐. 내가나가면 또다시 피를부를지도몰라, 그건 내
마음대로 안되거든. 소드마스터나 7 서클마법사. 혹은그에 준하
는 실력자만 보면 저절로 싸우고 싶어진단 말이야. "
류카라한의 말에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류카라한의
그런 성격을 곁에서 수십 번이나 지켜봤었다. 주체할 수 없는 호승
심. 자신보다강한사람을그냥두지 않겠다는 이기심의 발로. 그
런 마음이 저절로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우는 걸 직접 겪었었다.
"그래도. "
"레냐. 아니, 레이시아나. 네가나가라고 하면 나갈게. 나도 지
난 8 백 년 동안 스스로를 많이 단련시켰어. "
류카라한은 처음 베르타라스가 찾아왔을 때, 이곳을 떠날 생각
을 굳혔었다. 하지만, 8 백 년 전에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선뜻 용기
가나지 않았을뿐. 정말나가야한다면 망설임 없이 나갈생각이
었다.
베르타라스가 현 로드인 로테마이어스의 행동을 말해줬다면 두
말없이 대륙으로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알아야하는내용
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말해주지 않았고, 이에 류카라한도 나가기
를 보류했었다. 대륙으로 나갈 계기가 부족한 셈이다.
헌데, 로이나가 나가라고 한다면 그 계기가 충족되니 마음 놓고
대륙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물론, 과거에 지은 죄는 그대로이기에
대륙에서의 삶은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 될 터였다.
"인간들의 멸종을 원하시나요?"
"아니. "
"그럼 나가세요. 반드시 나가야해요. "
"무슨 이유가 있어서인 것 같은데 물어봐도 말 안 해 줄 거
지?"
끄덕 !
류카라한의 물음에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류카라한
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이유가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
동안 지었던 죗값을 치르는 게 중요할 뿐. 그러자면 일단 대륙으로
나가야했다. 나가서 윌 하든지 대륙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행동할
생각이었다.
"그렁 날 데리고 나가줘 "
"알았어요. 매스 텔레포트!"
로이나의 낮은 중얼거림이 끝나자 둘이 모습을 감추었다. 아마,
대륙의 어느 곳으로 이동한 것이리라.
류카라한의 검술은 소드마스터를 한참 지난 실력이었다. 어떤
이유에서 판테아가 대륙에서 잠시 한눈을 팔았고, 그 과정에서 류
카라한의 굴레를 벗기는 일이 지체된 것이다.
대부분은 소드마스터가 되고 수 일 안으로 굴레를 벗는 게 대부
분이었다. 헌데, 류카라한은무려 11 년 동안마음놓고 대륙을 휘
젓고 다녔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왕국을 제국으로 만들고 그곳을
다시 무너뜨렸다. 그리고 수많은 기사들과 대결을 해서 그들을 불
귀의 객으로만들었다. 심지어 엘프나드워프, 라이칸드로프들중
에 굴레를 벗은존재에게 찾아가서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의
루이에와 거의 동일한 행보인 셈이다
스카라트 산맥을 벗어난 라한 일행은 베루니아 왕국으로 향했
다. 위치상으로는 카르 왕국이 더 가깝지만 일행이 그곳 사람이라
는 것 때문에 방향을 바꿔야만 했다.
라한의 일행들은카르왕국의 기사지망생들이다. 헌데, 그들만
수련 없이 돌아온다면 누군가가 의심을 할 수도 있었다. 만약의 사
태에 대비하려면 애초에 피해가는 게 상책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 라한이 일행에게 말했다.
"온다. "
"예?"
"몬스터로군. 고블린 같은데. 수는 여섯 정도. "
라한의 말에 에펠 일행이 긴장하는 빛을 띠었다. 수가 많든 적든
몬스터의 등장 자체가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누가 싸울래?"
" 예?"
"둘 정도만 나서도 충분할 것 같은데. "
라한의 말에 에펠 일행이 의아한 빛을 띠었다. 누가 싸우냐니,
몬스터가나타났으니 힘을합쳐서 싸우는 게 정상 아닌가. 아직도
라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형님. 그게 무슨
"고블린은 약한놈이잖아, 너희들 중 둘 정도만 나서서 처리하
라고. "
"하지만, 형님. 힘을 합하면 더 편하게 처리할 수 있지 않습니
까? 굳이 다른 사람을 놀릴 필요가 있을까요?"
"너희들 수련하러 온 거 아닌가? 그럼 수련을 해야지. 둘 정도만
나서봐. 죽지 않도록해줄테니까, 다치는거야어쩔수없지만."
그제야 라한의 의도를 이해했다. 하지만, 수긍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몬스터와 싸우는 그 자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서로 눈치를 살피며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시스마란이 입을 때
었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
"좋아. 다음. "
"저 혼자서 처리해보겠습니다. 형님을 믿습니다. "
라한은둘이서 상대하라고했었다. 헌데, 시스마란은혼자상대
하겠다고 나서고 있었다.
'저놈 미친 거 아냐? 아니면, 자기 실력을 너무 과신하고 있거
나. '
라한은 혼자 하겠다고 나선 시스마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
웅 심리에 들뜬 애송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라한은 영웅심을 가진
사람과 거리가 멀었다. 이 때문인지 영웅심에 물든 이들의 멍청한
행동도 함께 싫어했다.
"후회하지 않겠지?"
"예. 형님. 해보겠습니다. "
"맘대로 해라. "
라한의 말에 시스마란이 일행의 전방으로 걸어갔다. 그와동시
에 에펠 일행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라한보다 약간 뒤로 처져
서 몸을 사리는 모습이었다. 그들을 본 라한이 작게 물었다.
"저놈 원래 저러냐?"
" 예?"
"저놈 원래 잘 나서냐고. "
"기사도라는걸 너무믿고 있죠. 저희 꿈도기사지만, 저 녀석은
우리보다 더 심하거든요. 그래서 저흰 시스마란을 바른생활 사나
이라고 불러요.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동 자체를 싫어하는 녀석이
라서. "
"마음에 안 드는 놈이군 "
라한의 말은 에펠 일행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목소리가 너무 작
았기 때문이다. 거기다딱그 시기에 고블린이 모습을드러냈다는
것도 한몫했다.
'허, 그 멀리 있던 몬스터를 느꼈다는 말인가? 엄청나군. '
에펠 일행은 세삼 라한의 능력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접근을 알
리고 십 분 후에야 나타나는 몬스터들. 정녕 인간의 능력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하앗! "
시스마란이 검을 뽑아들고 전면으로 쏘아나갔다. 그의 공격에
고블린들이 좌우로 확 갈라졌다. 그렇게 시스마란을 사이에 두고
고블린이 포위한 형세였다
'쯧,쯧. 저런 멍청한놈. 싸우는방법도모르는놈이 잘난척하
더니. '
포위를 당하게 되면 제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한다. 앞, 뒤,
옆 모든곳에서 공격을받으면 손이 어지러워지기 때문이다. 헌데
도 시스마란은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용감
하다고했을행동이다. 하지만, 라한의 눈에는애송이가발악하다
가 함정에 빠진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덤벼라! 마물들. 하앗!"
짐짓 멋진 말을 내뱉은 시스마란이 전방의 고블린에게 검을 휘
둘렀다. 이에 고블린도몸을슬쩍 틀어 공격을 피했다 너무 정직
한 공격이 피할 여력을 주었음이다.
"쿠웩! "
묘한 비음을 터트린 고블린이 사방에서 시스마란을 공격해댔다.
이에 시스마란의 손이 점점 어지러워졌다. 1 대 1 대결에만 익숙해
져 있는 기사들의 전형적인 약점이었다.
"비겁하다. 마물들. 너희들은기사도정신도없단말이냐."
"푸훗! "
시스마란의 외침에 라한이 실소를 터트렸다. 뭐 저런 놈이 다 있
나 싶었다. 죽이지 못하면 죽어야 하는 싸움에서 기사도라니 황당
해서 말이 안 나왔다.
'저놈 진짜 미친놈이잖아. '
시스마란이 점점 궁지로 몰렸다. 애초에 협공에 대한 대비가 전
혀 안된 탓이다.
"이놈들! 내 죽어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
시스마란의 해프닝이 계속 될수록 라한의 표정도 점점 구걱져갔
다. 저런 놈이 자신의 일행이라는 게 수치스러웠다. 구제불능이었
다. 뺏속까지 기사라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그리 실감하지는
못했던 말이다. 헌데, 시스마란을보니 그 말을확실히 절감할수
있었다.
"콕! 비겁한
시스마란이 머리에 몽둥이를 얻어맞고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의식을 잃은모양이다. 그모습을본라한이 혀를끌끌찼다. 차라
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 바른생활 사나이의 입바른 소리
는 듣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매직 애로우! "
라한이 마법을 시전해서 고블린의 머리를 궤뚫었다. 다른 마법
사의 마법보다 훨씬 빠른 캐스팅이었다.
"쿠웩! "
남은 고블린들이 라한을 노려봤다. 그리고 살기를 서서히 드리
우더니 마구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리스!"
라한이 바닥의 마찰 계수를 줄이는 그리스를 시전했다. 이에 달
려오던 고블린들이 미끄러져 곤두박질 쳤다.
'저 멍청한 놈들한테 맞고 기절하다니. 에휴. '
의식을 잃은 시스마란을 일별한 라한이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매직 애로우! "
이번 마법은 좀 거대한 마법이었다. 단 한 번의 마법으로 남은
고블린 전부를 처리할 목적에서 기운을 집중시킨 탓이다.
쾅- !
"쿠웩! "
"크륵! "
외마디 비명을토한고블린들의 몸이 산산이 찢어졌다. 이에 에
펠 일행 중 유일한 여자인 카류나가 고개를 돌렸다 징그러웠던 모
양이다.
"야. 저놈 누가 좀 업어라. 가자. "
"예, 형님. "
에펠이 앞으로 나서서 시스마란을들쳐 업었다. 역시 의식만 잃
었지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머리에서 약간의 피가 묻어나왔다.
쾌나 강하게 맞은 모양이다.
라한 일행이 베루니아 왕국까지 하루를 남겨둔 곳에서 야영을
준비했다. 준비는 형님을 고생시킬 수 없다는 중론에 의해 라한을
제외한 일행들만 행했다.
"형님! 식사 준비 끝났습니다. "
"알았어 "
라한이 이들과동행한 지 벌써 5 일이 지났다. 그가보기에 에펠
일행은 꽤 괜찮은 놈들이었다. 검술이나 마법 실력이 아닌 성격이
그렇다는말이다. 눈치를많이 받고자라난탓인지 비위를상당히
잘맞췄다. 또, 자신이 필요로하는게 뭔지를알아채는능력도뛰
어났다. 후일 자신이 백작의 위에 오르면 부관으로 쓰기 딱 좋
은 타입이었다.
하지만, 시스마란. 이놈이 문제였다.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그게 뭐가 뤘든 거부하는 성격 탓이다. 이런 놈은 부관으로 쓰기
적합하지 않았다. 살다보면 꽁수도 쓰고 남을 속이기도 해야 하는
데, 저런 부관을 둔다면 남을 속이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다.
라한의 식사가 끝나자 란이 은근한 눈으로 바라봤다. 뭔가 바라
는 게 있을 때에나 지을 수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저기
"뭔데 그래. 뜸 들이지 말고 말해. "
라한의 재촉에 란이 숨을 크게 들이셨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입
을 열었다.
"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
"싫어. "
란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음에도 라한은 일언지하에 거
절해버렸다. 옆에서 보는 다른 사람들이 매정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왜, 왜요? 제가 마법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요?"
"네가소질이 있든 없든그런 건 상관없어. 내가 가르치기 싫어
서 안 가르치는 것뿐이니까. "
라한은 란을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요구를 해을 거라고 생각했
었다. 그리고 절대 허락하지 않을 생각까지도 오래전에 굳힌 상태
였다.
라한은 가르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에펠 일행과 동행이기는
하지만 진짜 친형제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생사를 함께 나는 동료
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다만, 그들과 자신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
져서 잠시 동행하는 것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자신의 마법이 누군가에게 가르칠 개재가 아니라는 것도 이
유 중에 하나였다. 자신이 심장에 두른 기운은 자신의 몸이기 때문
에 사용할 수 있는 심법이 아니던가 심장 위치가 정상인 다른 사
람은 배우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전에 기를 쌓는 걸 가르
치는 것도 말이 안 되었다. 그곳의 기운은마법과 전혀 상관이 없
으니까 말이다.
결국, 자신이 가르칠 수 있는 마법이라고는 마법 주문밖에 없는
셈이다. 헌데, 자신이 아는 주문도 1 서클 마법과 비클래스 마법
뿐. 란이 필요로하는 2 서클마법은 몇 개 되지도 않았다. 괜히 스
승이랍시고 몇 안 되는 2 서클 비클래스 마법을 가르칠 바에는 차라
리 가르치지 않는 게 나았다.
"형님. 아니, 스승님, 제발."
"싫어. "
짧게 대답한 라한이 눈을감고누워 버렸다. 더 이상아무말도
듣지 않겠다는 직접적인 표현이었다.
라한의 행동에 란의 얼굴이 서글프게 변했다. 무리한 요구라는
걸 알았지만, 혹시나하며 기대를했던 게 사실이다. 헌데, 재고의
여지도 없이 거절을해버리다니. 이런 식으로 거절을당하면 더 친
해진 후에도 부탁하기가 힘들 터였다.
'에고, 좀 더 친해지고 나서 부탁할걸. '
라한이 사용하는 마법의 근원을 알지 못하면 그의 행동을 이해
할 수 없으리라.
라한이 잠자리에 들자 에펠 일행도 각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울
상을 짓던 란도 그들틈에 끼어 잠을 청했다. 원래는불침번이 있
어야겠지만, 라한의 필요 없다는 말에 불침번 서는 걸 그만두었다
정령인 테세르가 있어서 필요 없다는데 어쩌겠는가

자정 무렵. 에펠 일행이 잠들자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행
들을 하나하나 살핀 라한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비테이션(Levitation 3 서클-비클래스 마법) ! "
부유 마법인 레비테이션을 시전하자 라한의 몸이 서서히 떠올랐
다. 라한이 마법을 시전했음에도 일행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
다. 심지어 마법사인 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과라한의 실력차이
가 너무 컸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일행의 수십 미터 상공까지 떠오르자 라한의 입가에 미소가 감
돌았다. 일행을 다시 한번 훌어본 후 작게 중얼거렸다
"플라이(Fly : 5 서클-비클래스 마법) ! "
플라이는 레비테이션의 강화판 격인 마법이다. 하지만, 레비테
이션과달리 5 서클이기 때문에 마나소모가쾌 심했다. 이런 소모
량 때문에 마나가 새어나가는 걸 줄이는 건 쾌나 힘든 일이었다.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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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AN0070.PCX *
물론, 라한의 지금 능력으로 불가능한건 아니지만 그만큼 많은
심력을 소모해야 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3 서클 레비테이션으로
어느 정도 거리를 벌인 후에 5 서클 마법을 사용하는 게 나았다. 두
가지 마법을 사용해야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그만큼 심력 소모
가 덜하기 때문이다.
라한이 일행에게서 2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내려섰다. 그리
고 눈을 감고는 주변에 마나를 퍼트렸다. 대강의 정찰을 하는 행동
이었다.
"없군 디텍트 로케이션! "
라한이 마법을 시전하자 바닥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걱지며 은
은한 금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조금씩 짙어지더니 주변을 환
하게 밝힐 정도까지 밝아졌고, 이내 팟! 하는소리와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디텍트 로케이션은 좌표를 확인하는 마법이었다. 이렇게 확인된
좌표를 이용해야 텔레포트가 가능했다.
현 시대에는 텔레포트에 쓰이는 좌표가 거의 소실되어 있었다
과거 용마전쟁 이후 마법이 급속하게 쇠퇴한 탓이다. 물론, 드래곤
은 대륙 곳곳의 좌표를 필고 있었다. 하지만 위대한 존재라는 드래
곤에게 좌표를물을수는 없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직접 대륙을
돌아다니며 좌표를 기록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벨리아 팰리스에는 6 서클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현시대에는 7
서클로 알려져 있는 텔레포트마법. 이 때문에 대륙에서 텔레포트
를사용할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대응마법진을 이용해서
하위서클 마법사 여러 명이 텔레포트를 하는 방법이 쓰였다. 쌍방
에 마법사가 포진되어 있어야 하는 조건이 있었지만, 7 서클 마법사
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디보자. "
라한이 확인된 좌표를 메모지에 기록했다. 그곳에는 이미 십여
개의 좌표가 기록되어 있었다. 파마리스 평원을 벗어난후부터 하
루에 한 번씩 기록한 것이다. 이런 행동은 에펠 일행을 만난후에
도 계속 이어졌다. 그들이 모두 잠든 자정 무렵에
'날씨 좋다. 시커먼 게 테세르하고 닮았군. '
스르륵
-주인 무슨 일이야 아참! 아까 란이라는 꼬마한테 마법 좀 가
르쳐주지 그랬어?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테세르를 부른 적이
있는지를생각하는모습이었다. 결론은 '부른 적이 없다'였다. 생
각한 적은 있지만, 입으로 그를 부른 적이 없었다. 자신이 부르지
도 않았는데 테세르가 나왔다? 뭔가 이상했다.
"야. 너 어떻게 나왔어?"
-응? 나 안 불렀어?
"너 부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나왔지?"
-이상하네. 난 주인의 호령에 이끌려 정령계를 나왔는데.
라한은 자신의 생각이 테세르를 불렀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렇다면 이건 꽤 대단한발견이었다. 굳이 입으로 부르지 않아도
정령을부릴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입이 누군가에 의해 재갈물
렸을 때에도 정령을 부릴 수 있다는 얘기였다
"정령계로 돌아가 봐. "
-아이 참. 불러놓고 왜 또 들어가라고 하는 건데.
"말대꾸 하지 말고 한 번에 말 좀 들어라. "
알았다. 알았어. 쳇, 주인만 아니면, 콱!
"뭐?"
-아, 아냐. 그럼 간다.
테세르가 사라지자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직 확실한 게
아니었기에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마음을 가다듬은 라한이 마음속으로 테세르를 불렀다. 최대한
간절하고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스르륵!
-짠! 또 왜 불렀어? 이번에도 용건 없이 부른 거면, 주인이고
뭐고 나도 막 나가는 수가 있어.
"역시 나왔군. "
-또 무슨 소리이야 주인 어디 아파?
마법사를 제압할 때, 가장 우선되는 과제가 입을 봉하는 일이다.
주문이나 시동어를 외치지 못하게만 하면 마법 시전을 못하기 때문
이다. 마법의 파괴적인 힘에 비해 육체적인 능력은 부족한 마법사
들. 마법만 막으면 평민보다 못한 존재가 그들이었다.
물론, 고대 유적에서 나온 마나 제압도구를 사용한다면 좀 더 확
실하게 제압할수있었다. 하지만, 대륙전체를통틀어도그리 많
지 않은 도구를 아무데서나 사용할 수는 없었다. 마법 무구가 너무
귀한 탓에 대부분은 재갈을 물리는 정도로 그쳤다.
"좋은 걸 얻었군, 쿠쿠쿠. "
-이상해. 우리 주인. 정신이 약간 미치면 약도 없다던데. 그
러고 보면 신법이라는 뜀박질도 정상적인 것과 거리가 멀고. 이거
참. 우리 주인 진짜 미친 거 아냐?
"후후후. "
라한이 실없이 웃기만 하자 테세르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혹시나 자신에게 미친병이 옳을까 하는 걱정이 든 탓이다.
-아이고, 하나밖에 없는주인이 미친놈이라니. 내 팔자가왜 이
모양이냐? 우아앙.
테세르의 반응에도불구하고 라한의 웃음은그치지 않았다. 얼
핏 보면 별것 아니지만, 라한에게는 엄청 소중한능력이었다. 제압
을 당하더라도 빠져나을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게 아닌가. 어찌 보
면 여분의 생명을 얻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럼 어디 슈라! '
쿠쿠쿠쿵!
-주인! 7 일만인가? 좀 자주 불러주면 좋겠군.
역시나 생각만으로도 슈라가 소환되었다. 소환이 성공하자 라한
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좀전에도밝았지만, 지금은그때보다
더 심했다. 혀를 반쯤 내놓은 채 이마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미소
를 지은 모습이 었다.
"히히히. 좋구나. 좋아. "
-이봐. 뚱땡이 얼음. 우리 주인이 아무래도 정신이 나간 것 같다.
-주인 왜 그렇게 웃는 거지?
슈라는 테세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라한의 표정
이 반쯤 실성한 사람의 표정이라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테세르처
럼 물러나지는 않았지만,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라한을 살폈다.
"됐다. 됐어. 테세르. 슈라. 그만 돌아가라. "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러지. 무리하지 말라고.
테세르와슈라가사라진 후에도 라한은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마음껏 기쁨을 표출할 뿐이었다
라한이 한참동안 몽롱하게 있을 때,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이 느
껴졌다. 아주강하고살기등등한 기운이었다. 어떤 존재가 라한이
있는 이곳으로 오는 중인 듯했다.
"뭐지?"
라한이 기운이 다가오는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
은 좀 전과 달리 진지하고 어두워져 있었다. 다가오는 존재가녹록
치 않은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쿠오오!
라한이 바라보던 곳에서 포효소리가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라한
이 몸을 움찔거렸다. 보통 인간이라면 주눅 들기 충분한 소리였다.
'드래곤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구지? 이 정도 피어를 울릴 존재라

라한의 전방에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가 4 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크기였다. 상체와 하체는 인간의 모습과 흡사했
지만, 얼굴만큼은 늑대의 그것과 닮아 있는 존재. 거대한 도끼를
든 라이칸드로프였다.
"빌어먹을. 라이칸이라니. "
일반적인 라이칸드로프라면 라한이 긴장할리 없었다. 라이칸드
로프가 강하기는 하지만, 라한은 그들을 가지고 놀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라한의 눈앞에 나타난 존재는 라한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네 녀석이 이곳에서 마나를 피어올린 건가?"
"그, 그렇다. 넌 누구지?"
잠시 말을 더듬던 라한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부라렸다. 이
길 자신은 없었지만, 도망갈 자신은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칸드로프가 라한을 찬찬히 살펴갔다. 그에게서 어떤 동질적
인 느낌을 받은 탓이다. 잠시 살피던 라이칸드로프가 비릿한 미소
를 띠며 입을 열었다.
"굴레를 벗은 인간이군. 오호, 심장 위치가 아주 특이해. 후후
후. 근데 마나의 고리가하나밖에 안보이는군 1 서클마법사가어
떻게 굴레를 벗은 거지?"
라이칸드로프가 확인한 고리는 제령기가 아닌 마나의 고리였다.
라한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1 서클의 마나 고리. 라이칸드로
프는 스스로의 능력으로도 제령기를 확인하지 못했다.
제령기는 라한의 완벽한 통제 하에 있는 기운이다. 이에 라한은
제령기를 감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 감추고 있는 상태였다.
라한은 설사 드래곤이 확인 하더라도 제령기를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마나로 제령기를 감싸기만 해도 충분하
기 때문이다.
"왜 놀랐나?"
,별로. 너 역시 굴레를 벗은 존재로군. 굴레를 벗은 존재라면

정도를 알아보는 건 쉽겠지. "
말을 마친 라한이 라이칸드로프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지금 거
리라면 공격마법을 세 번은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공
격마법은 당연히 1 서클. 이 때문에 시전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근데 이상하군. 이상해. 아까내가느낀 기운은 1 서클같은 약
하 기운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
,너무 많이 알려고 하는군 헛소리 그만하고 그냥 덤벼라 "
강하게 상대를 다그쳤다. 어차피 싸움은 기세가 중요한 일. 당당
하 태도로 상대를 다그친다면 상대는 싸움에 집중할 수 없을 게 분
명했다. 또 1 서클 마법사가 정도 이상의 힘을 발휘하면 혼란을 겪
을 터. 그런 상황을 잘 이용한다면 승리를 할 수도 있을 듯했다.
.크크크. 내 이름은 프라미트. 넌?"
"카라한."
보아하니 나이가 어린 것 같군. 먼저 공격해라
"그림. 매직 애로우!"
라한의 외침에 엄청나게 거대한 화살이 프라미트에게
다. 처음에는 사람 얼굴만 한 크기였던 게 프라미트에게
세 배 이상 커져 있었다. 라한이 제령기의 주입량을 늘인
"헛!"
쿠장!
놀란 프라미트가 옆으로 굴렀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한 모
습이 역력했다.
처음 매직 애로우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몸으로 튕걱낼 생각이
었다. 엑스마스터에 들어선 이후 하위 서클의 마법은
모두 무시할 수 있는 방어력을 믿은 것이다.
하지만, 매직 애로우는 생각보다 크고 빠르게 다가왔고눈앞에 이
르렀을 때는 6 서클 정도의 마나가담겨 있었다 아무리 엑스마스터
라도 이 마법을 그대로 맞았다가는 중상을 면치 못할 게 분명했다.
급히 몸을 굴려 마법을 피하기는 했지만, 낭패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우습게 봤던 상대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처지였다.
"제법이구나, 이제 내 차례다. "
"아직 멀었다. 그라운드 실드(1 서클마법) ! 매직 애로우! "
라한은 앞에 토담을쌓은후, 매직 애로우를다시 쏘았다. 방어
부터 견고히 한 후에야 공격을 하는 모습이었다.
"헛! "
쾅- !
급히 옆으로 구른 프라미트가 엄청난 속도로 쇄도했다. 지금 머
릿속에는 얄밉게 마법을 쏘아대는 라한을 죽이고 싶은 생각밖에 없
었다.
토담 앞에 도착한 프라미트가 도끼를 그어 내렸다. 자신이 가진
힘의 거의 대부분을 담은 엄청난 거력이었다.
쿠쿠쿠쿠쾅!
"젠장. "
라한이 쌓은 토담은 단 한 번의 도끼질로 무너졌다. 6 서클의 마
나를 담은 실드치고는 너무 허무하게 무너진 셈이다.
토담이 무너지자 라한의 얼굴에 다급함이 드러났다. 이렇게 한
번에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미 무너진 걸
아까워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 일단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
었다.
"하앗!"
"블링크! 플라이!
라한이 5 서클 비클래스 마법 두 가지를 연달아 펼쳤다. 당장 몸
을 피하기 위해 내린 적절한 마법 조합이었다. 하지만 블링크의 특
성상 그리 먼 곳까지 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당장 시아에 닿는 프
라미트의 뒤쪽 10 미터 상공까지밖에 못 간 것이다.
,흥 공중에 떠 있다고 못 죽일 줄 아는 모양이군 "
스륵
프라미트가 허리에 매여 있던 작은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손을
겨우덮을정도로작은도끼였다. 하지만, 라한의 몸과비교한다면
머리 두 개 크기는 되었다. 프라미트에게 작은 도끼가 라한에게는
거대한 도끼로 다가왔다.
라한을 노려본 프라미트가 도끼를 힘껏 던졌다.
"하앗!"
젠장. 다음에 보자. 텔레포트!"
라한이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자리를 이탈했다. 더 이상의 싸움
이 부질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상대가 너무 강했다.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라면 같은 경우
의 인간보다 더 강하지 않은가. 이제 걱우 6 서클의 힘을 쓸 수 있는
라한에게는 무리한 상대였다. 더 시간 끄느니 차라리 도망치는 게
나았다. 수치스러움?그딴 건 버린 지 오래였다. 아니, 이번 생을
시작한 이후, 그런 마음은 먹은 적도 없었다.
라한이 모습을 감추자 프라미트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하지
만 그의 시선 어디에도 라한의 흔적은 들어오지 않았다.
라한이 도망갔음을 깨닫자 프라미트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앉은
채로 숨을 헐떡이고는 슬쩍 미소 지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본 긴
장감에 몸이 달아올랐다. 비록 짧은 싸움이었지만 오랫동안 잊지
못할 듯했다. 또, 왠지 다시 만날 것 같은 느낌도 강하게 들었다.
"후후후. 하하하하. 좋군. 좋아. 하하하하. "
오랫동안 쌓인 체증이 다 가시는 느낌에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다시 한번. 꼭 다시 한번 붙어보고 싶은 상대였다.
판트리아 대륙을 다스리는 영계.
이곳은 어두운 느낌과 상쾌한 느낌이 함께 드는 묘한 장소였다.
주변 분위기는 어둡고 칙칙했지만, 그 사이사이에 놓인 상쾌함을
노력 없이도 느낄 수 있었다.
잿빛의 화려한 의자에 같은 잿빛 색깔의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존재가 앉아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는 스무 살이 되었을
까싶을 정도로 어린 소년이었다. 하지만, 외모와달리 이번에 판
트리아 대륙 저승사자의 수장이 된 존재였다. 퓨리트라는 이름을
가진 자. 신을 제외하면 대륙 내에서 절대 권력을 가진 존재인 셈
이다.
그의 앞에는 갈색 머리와 회색 머리를 가진 30 대 중년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외모로만 보면 퓨리트보다 더 윗선으로 보이지만 그
들은 판트리아 대륙의 일개 저승사자에 불과했다. 지위나 능력으
로 퓨리트보다 하위 존재인 셈이다.
중년 두 명을 차례로 살피던 퓨리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새턴! 성계와 마계, 환계의 상황은?"
별 무리 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개체의 수명이 잘지켜
져서인지 차원에 균열이 가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
"자세히 설명하라. "
예. 마계의 마족은 흑마법으로 소환하지 않는 이상은 물질계
진입을금하는분위기입니다. 아마, 전수장이었던 판테아께서 전
대 마왕을 소멸시컥버린 게 영향을 준 모양입니다. 성계도 마계가
물질계 진입을 하지 않으니, 자중하는 모습이고요. 환계 역시 환수
들끼리 서열을 정해서 잘 지내는 듯합니다. "
갈색 머리 저승사자 새턴의 대답이었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아는
지 무척이나 공손한 목소리였다.
대답을 들은 퓨리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회색 머리의 저승사자에게 고정시켰다.
"트레이시! 물질계와 정령계는?"
퓨리트의 물음에 저승사자 트레이시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수장의 명령에 대답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마음을 다잡은 트레이
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령계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좀 특이한 존재가 태어나기는
했지만, 규율에 위배되는 존재는 아닙니다. 헌데 물질계는
"물질계는 7"
"드래곤 로드의 행동이 수상합니다. "
"로드라면 로테마이어스라는 레드 드래곤을 말이냐?"
"예. "
퓨리트가 저승사자의 수장이 된 건 벌써 몇 년 전 일이었다. 하
지만, 차원을 좀 살피고 행동하기 위해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
다. 또, 전 수장이었던 판테아가 영계 지옥에 갇혀 있다는것도행
동을 주저하게 하는 데 한몫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대외적으로는 차원의 지나친 간섭으로
처벌받은 걸로 알려져 있었다. 라한과제스란이 다른차원에서 이
곳으로온 걸 알리지 않으려는 알라하파 신의 의도에서 비롯된 일
이다. 이 때문에 퓨리트도 섣불리 행동할수 없었다. 차원에 간섭
했다가 처벌 받을 걸 두려워 한 것이다.
퓨리트의 눈치를 살피던 트레이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로테마이어스가 드래곤 몇몇을 포섭하는 것 같습니다. "
"로드가 포섭을? 명령을 내리지 않고 포섭을 한다라 이상
하군. "
"아마, 로드로서 허락되지 않는 일을하려는 걸로보입니다. 퓨
리트님. 제재를 할까요?"
트레이시의 물음에 퓨리트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모습이었다. 하지만, 쉽사리 결정 내릴 수 없었다 그대
로 뒀다가는 차원에 문제가 생길 것 같고, 그렇다고 제재를 가하자
니 판테아처럼 처벌 받을까 두려웠다.
한참 고민하던 퓨리트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몇
번 젓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굴레를 벗은 존재가 있지? 전 수장이었던 판테아가 꽤 많은 녀
석들을 가둬둔 걸로 아는데. "
"예. "
"드래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모르지만, 대상이 이종족이겠
지. 인간일 확률이 가장높고 말이야. 그럼 그들을풀어서 알아서
대처하게 하는 게 나을 것 같군. "
"저기, 굴레를 벗은 존재들 중에 살아 있는 놈들은 전부 풀려났
습니다. "
"아, 판테아가 사라지고 결계가 사라졌나보군. "
"예. 그걸 파악한 전대 드래곤 로드인 베르타라스가 그들을 대
륙으로 풀어줬습니다. "
트레이시의 대답에 퓨리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굴레를
벗은 존재를 풀어주는 행위 자체도 물질계에 약간이나마 간섭하는
일이었다. 헌데, 자신이 할 일을 베르타라스가 대신 해준 셈이다.
본래 저승사자나그 수장의 임무는 개체의 사후에 국한되어 있
었다 죽었을때, 영혼을다스리는게 그들의 주임무인셈이다. 하
지만, 차원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이기 위해서는 개체의 수명을
맞춰야했고, 그과정에서 권력을남용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수십
만 년 계속 되자 이제는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을 뿐. 본래 판트리
아계에 가하는 행동 자체가 주어진 권력을 넘어서는 행동이었다.
"현재 물질계의 상황은 어떤가?"
"대륙중앙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조만간 대륙전쟁으로 번질
것 같습니다. "
"그대로 둬라. 어차피 그들스스로가 알아서 할 일이지. 앞으로
차원을 뒤흔드는 일이 아닐 때에는 차원에 간섭하는 행위를 금한
다. 이상. "
"따르겠습니 다. "
저승사자들도 차원에 간섭하는 일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영계
자체의 일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차원의 수명이 걸려있
고, 수장이 시키는 일이기에 어쩔 수 없이 했을뿐. 가능하다면 다
른데 신경 끄고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하고 싶었다.
'후후, 그나저나 그 녀석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다른 저승사자들이 물러가자 퓨리트가 영상을 만들어냈다. 판트
리아계의 일정 존재를 따라다니는 영상이었다.
퓨리트의 눈앞에 떠오른 영상에 에펠 일행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가 찾는 존재가 그들이 아닌 듯, 대상을 몇 번씩 바꾸며 계속 찾
았다. 에펠부터 시작해서 란까지 여섯 일행 전부의 주변을 살핀 것
이다. 하지만자신이 찾는존재는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들모두
가 잠들었을 때, 어딘가로 간 듯했다.
'첸, 굴레를 벗은 놈이라서 직접 살필 수가 없군. 이잉! '
라한은 하루 전에 좌표를 적어뒀던 장소에 도착했다. 하루에 한
번씩 좌표를 기록했기에, 원래 장소에서 벗어나면 이곳밖에 올곳
이 없었다. 다시 일행들과 합류하려고 해도 좀 전에 싸웠던 곳으로
다시 갔다가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치겠군. 그 자식 갔을까?"
푸념을 늘어놓은 라한이 바닥에 주저앉아 심법을 운용했다. 소
모된 제령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심법을 두 차례 운용한 라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대충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라한이 좀 전에 싸웠던 상황을 하나씩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한
참 고민하던 라한이 한숨을 쉬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능력
이 보잘것없는 것 같았다. 물론 보통 인간들과 비교한다면 몇 손가
락 안에 드는 실력이겠지만, 굴레를 벗은 존재와 싸운다면? 솔직
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련을 좀 더하고 나을 걸. 오벨리아 팰리스가
짜증나는 곳이기는 해도, 심법의 효과만큼은 뛰어난 곳이었는데. "
라한의 표정은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앞으로 그들과 부딪힐지
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굴레를 벗은 존재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볼 텐데. 그럼 그들
과부딪힐 일도많겠지. 에고, 미치겠네."
라한의 걱정은 자신이 굴레를 벗었다는 데에서 기인했다. 굴레
를 벗지 않았다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며 장수를 꿈 꿀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굴레를벗었기에 그것도쉽지 않았다. 우
연히 마주치더라도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게 되고, 결국 충돌을 피
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들을완벽하게 제압할자신이 있다면 얘기가다를 터였
다. 하지만, 지금 라한의 실력으로는아무래도 힘들었다. 그건 굴
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에 국한된 게 아닌 인간들도 마찬가지였다.
칼라피안의 말에 의하면 7 서클 유저와소드마스터 하급이 되면
굴레를 벗는다고 했다. 헌데, 자신의 능력은 6 서클 마스터에 불과
했다. 그것도 상위 서클의 클래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반쪽짜리
6 서클마스터. 이런 실력으로는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어떻게든
7 서클마스터. 혹은, 그 이상의 실력을갖추어야생명 연장의 꿈을
이어갈 수 있었다.
"경험만풍부했어도 이런 실수는 안했을 텐데. 젠장. 테세르와
슈라를 빼 놓고 싸우다니, "
라한이 반쪽짜리 6 서클 마스터이기는 했지만, 그에게도 이점이
있었다. 마나의 정령 테세르와 얼음 골렘 슈라를부릴 수 있는능
력이 그것이었다. 헌데, 급한마음에 그들을부르지 못했다. 아직
그의 싸움 경력이 일천했기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음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좋다고. 경험도 쌓고 7 서클 벽도 넘어야겠
어. 쉬엄쉬엄 수련할생각이었는데, 젠장!"
욕설을 내뱉은 라한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프라미
트가 갔다는 보장이 없으니 당장 이동하기가 곤란했다 라한은 이
곳에서 아침까지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설마 아침까지 그 자리
에서 자신을 기다리겠냐는 생각이었다.
케라스 왕국의 서쪽에 위치한 볼보나 산맥의 중앙.
누군가가 산다는 걸 알려주는 듯 작은 오두막이 세워져 있었다
굵은 나무를 베어 만든 듯 쾌나 튼튼하게 만들어진 오두막이다. 주
변에는 무릎을 간신히 닿을 정도의 낮은 울타리와 오두막 옆에 수
북하게 쌓인 장작. 그리고 울타리 안에 만들어진 텃밭이 이곳에 사
람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는 모습이었다.
오두막 안에는 휠체어로 쓰이는 수레 하나와 명검으로 보이는
소검, 거대한도끼, 망치 등등. 한사람이 사용했다고볼수 없는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후우, 무료하군. "
오두막의 벽 쪽에 만들어진 침대에서 30 대로 보이는 사내가 한
숨을 쉬었다. 흰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온 말끔한 인상의 사내. 백
준의 기사로 불리는 베라스무스 루이에였다.
그는 강자들을 찾아 대륙 곳곳을 누볐다. 하지만, 특별한 정보통
이 없었기에그리 많은강자를찾을수는 없었다. 겨우 열 명 남짓
한존재를 찾아 싸웠고, 상대를 죽였을 뿐이다.
그렇게 강자를 찾아다니던 루이에는 6 년 전, 라이칸드로프 한
명을 죽인 이후 이곳에 터를 잡았다. 더 이상 강자를 찾을 수 없어
서였다. 물론, 대륙곳곳에 쾌 많은강자들이 살고 있다는건 알고
있었다. 로테라 숲에 쾌 많은 수의 강자가 살고 있다는 것도 알았
다. 하지만, 열 명이 넘는존재와싸울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다른 존재를 찾아다니기에는 스스로가 너무 지쳐 있었다. 육체적
인 피로가아닌 정신적인 피로가누적된 것이다. 또, 검에 대해 스
스로가 회의를 느낀 것도 이곳에 은거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왜 검을 잡았을까? 내가 검을 잡을 자격이 있을까? 검술이라는
게 강자를 찾아서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 스
스로를 괴롭혔고 결국, 은거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름이 제스란이었던가? 그분이 내가 본 최고의 실력자였지.
드래곤이 아니면 그 누구도 그분을 꺾을 수 없을 정도로 강자였지. "
자신과싸운 다른존재의 죽음에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실력
이 없어 죽었다는 생각에 오히려 비난할 정도였다.
하지만 제스란에게만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꺾
기위해 루이나 왕국의 왕실 마법사 수십 명을 동원했고, 일만의 병
사를 이용했었다. 또, 천여 명의 기사들을 매복시켰다. 그만큼 제
스란이 강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른 상대는 꽁수를 썼
든기습을했든혼자만의 힘으로꺾었다. 하지만, 제스란을꺾기위
해서 엄청난 병력을 동원한 것이다. 그 일이 내내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렇게 갈 분이 아니셨는데. "
거기다 제스란은 마지막까지 자결을 택했다. 자신이 죽이지 못
했다는 생각과 자결을 하게 만들었다는 자책감. 이런 감정들이 뒤
여 머리가 복잡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루이에는 제스란이 죽
고 남걱진 수레를 오두막의 가장 안쪽에 보관하고, 매일 깨끗하게
닦았다.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에서였다.
"앞으로 다시는 검을 잡지 않겠다. 죽이는 검은 더 이상 잡고
싶지 않구나. "
루이에의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매일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다잡지만 어느 순간 다시 뛰쳐나가
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쳤다. 다시 나가서 강자들을 자신의 검으로
베어 버리고 싶은 욕구 말이다.
들켜버린 음모
라한은 다음날 오전이 되어서야 일행들과 합류할수 있었다 프
라미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움직인
것이다
라한이 갑자기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에펠 일행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라한이 자신들을 버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기다리면서 란을 꾸중하는 건 어쩔수 없
었다 잠들기 직전에 란과 어색한 분위기가 생겼다는 걸 일행모두
가 아는 탓이다 아마 오늘 이후로 라한에게 마법을 가르쳐달라는
소리는 절대 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어 미안 좀 늦었지
아니에요 시간 이 많이 지났는데 좀 쉬다가 점심 먹고 움직일
까요?
라한의 어색한 말에 에펠이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얼굴
에는 약간의 원망하는 빛이 남아 있었다. 반드시 필요한사람이지
만, 불편한 사람이기에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냥 가자. 서두르면 오늘 안으로 베루니아 왕국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
"예. 알겠어요. 얘들아.출발하자."
에펠 일행은 이미 떠날 준비가 다 되어 있는지 지체 없이 몸을
움직였다. 라한 역시 특별히 짐이라고 할 게 없었기에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후두둑. 툭,
점심을 간단히 과일 말린 걸로 때웠을 때,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
어졌다. 한바탕 크게 쏟아 부을 생각인지 하늘이 시커멓게 변해 있
었다.
"뭐야? 비? 하늘이 미쳤군. "
엄청나게 추운 이곳에서는 눈보다 더 보기 힘든 게 비였다. 일 년
에 한 번 내릴까말까할 정도였다. 헌데 여름도 아닌 겨울에 비라
니 푸념을 내뱉은 베린의 말처럼 하늘이 미쳤을지도 몰랐다.
"형님, 어쩌죠?"
일행 중 유일한 여자인 카류나의 물음에 라한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의 색으로 봐서는 쉽사리 그칠 비가 아닌 듯했다. 어쩌면 한
며칠 계속 내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가자. "
"예. "
"형님 기왕 갈 거면 좀 서두르
베린이 말을 하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 표정에 라한을 제외
한 일행 모두의 시선이 베린이 보던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둘러
그곳으로 다가갔다.
대충 주변을 살핀 나머지 일행의 표정이 베린의 표정과 동일하
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라한은오래전부터 발견했기에 별 반응이
없었다. 굳이 눈좋다고 광고할생각이 없었기에 아는 척 하지 않
았을 뿐이다.
"끔찍하군요. "
"구역질 날 것 같아. "
카류나와시스마란의 말이었다. 특히, 카류나의 표정은보기 안
쓰러울 정도로 찡그러져 있었다.
그들의 전방에 수십 구의 시체가 보였다 그들의 말처럼 온전한
모습으로 보전된 게 거의 없는 시체였다. 고블린의 시체는 팔 다리
가 어딘가에 뜯긴 듯 처참했고, 사람들의 시체도 별반 다르지 않았
다. 살이 마구 뜯긴 뼈가 많은 걸로 봐서 누군가가 시체들로 배를
채운 듯했다.
"베루니아 왕국의 기사 지망생 같은데요. "
"맞아요. 여기 봐요. 베루니아왕국의 문양이에요."
"며칠 전에 있었던 대규모 몬스터 공격 때 살아남았던 사람인가
봐요. "
라한은죽은사람들의 신분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
피 자신에게는 하등의 상관도 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대신 고블린의 시체들을 살피는 일에 집중했다.
다섯 명의 사람이 죽었고, 그 시체들이 방치되어 있다?그건 그
들이 전멸했다는 얘기와 같았다. 다섯 명의 사람이 도망도 치지 못
하고 죽었다면, 고블린의 본래 수는 시체의 수보다 몇 배는 많을
게 분명했다. 라한은 최소 백 마리가 넘을 거라고 추정했다.
'흠, 누군가가 대신 처리한 건가?'
라한은 백 여 마리의 고블린과 에펠 일행의 싸움을 가정해봤다.
그들의 실력으로 이십 여 마리의 고블린을 처리할 수 있을까? 아무
리 생각해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들의 실력으로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수는 걱우 두세 마리에 불과했다. 협동해서 싸운다는 이점이
아무리 크더라도 스무 마리까지 죽일 수 있으리라고 보기는 힘들었
다. 스무 마리의 고블린을 죽이는 게 아닌 부상 입힌 정도라면 가
능하겠지만
'엄청 큰 무기에 당했군. 제대로 당했어. '
고블린의 시체 중에서 하나는세로로잘려 있었다 이마에서 아
래로 내려져서 잘린 게 아닌, 귀 위쪽에서 허리를 거쳐 아래로 자
른 모습이었다.
'소드오러나 오러 블레이드로 잘랐다면 더 깨끗하게 잘렸을 테
니,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럼 힘이 무척 강한사람이 조금날카로운
검으로 자른 건가? 아니면
라한은 검이 아닌 다른 무기를 의심했다. 검처럼 날카롭지 않지
만 거대한 어떤 무기 그러자 범인이 누구인지 쉽게 예상이 되었
다. 자신과 싸웠던 파마리트의 도끼에까지 생각이 미친 것이다.
'베루니아왕국으로 간 건가? 미치겠군. 웬만하면 부딪히기 싫
은데. '
라한은 파마리트를 만나는 게 싫었다. 물론, 언제 어느 상황에서
만나더라도도망갈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자신보다강한누군가
를 만난다는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님! 죽은 지 한 시간 정도 지난 것 같습니다. "
파마리트와 라한의 이동에 한 시간의 차이가 있다는 얘기였다.
라한이 거의 일곱 시간을 기다렸다가 이동한 걸 감안하면, 시간적
차이가 너무 적었다. 아마, 그도 라한을쾌 오랫동안 기다린 모양
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둘의 시간 차이를 설명할 수 없었으니
세삼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움직인 자신의 조심스러움이 고맙게 느
껴졌다.
"알았어. 그만 가자. "
"예? 시체를 수습하고 가야죠. 기사를 꿈꾸는 저희가 이런 시체
를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
"형님. 금방 처리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
시스마란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파마리트와 자
신의 거리가 겨우 한 시간 차이인 게 꺼려졌다. 될 수 있으면 차이
를 더 두고 싶었기에 흔쾌히 승낙한 것이다.
"저기 에펠, "
"베린, 왜?"
"이거. "
시체를 수습하던 베린이 에펠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죽은 기사 지망생들이 가지고 있었으리라 예상되는 검이었다. 처
음에는 피와 시체가 뒤죽박죽이 되어 있어서 확인을 하지 못했었
다. 헌데, 시체를수습하면서 고블린들을한쪽으로 치우다보니 검
이 발견되었다.
베린이 내민 검을 보며 에펠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기사 지망
생이 되면서 받게 되는 텅티레아 검이었다. 자신들은 신분의 차이
때문에 이 검을받지 못했었다. 헌데, 이런 곳에서 이 텅티레아검
을습득하게 되다니, 비록, 카르왕국의 검은 아니었지만,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흠, 몇 개야?"
"네 개. 우리처럼 검사 네 명에 마법사 한 명이 파티였을 테니까. "
베린의 대답에 에펠이 란을 슬쩍 쳐다봤다. 우리끼리 가져도 되
겠느냐는 물음이 었다.
에펠의 시선에 란이 배시시 미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괜찮아. 난 마법사잖아. "
"고마워. 베린. 하나씩 가지자. "
"응. "
라한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텅티레아로 만든 검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별로좋은검 같지는않았다. 물론, 그전에 일행들이 가
지고 있던 철검보다는 좋았지만, 세라 소드와 비교하자 한참 떨어
져보였다. 거기다 세라 소드는 마법검이었고, 저들이
가진 텅티레아 검은 일반 검이었다. 서로 비교 한다는 그 자체
가 말이 안 되었다.
라한은 세라 소드에 대한 자부심으로 기분이 밝아졌다. 그런 기
분 때문인지 일행들에게도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에펠!"
"예, 형님. "
"그 검들 다 가지고 와봐. "
라한의 말에 에펠을 비롯한 일행 모두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
다. 라한이 자신들의 검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 표정을본 라한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자신이 저들에
게 이정도 밖에 되지 않았나 하는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
개를 젓고는 불쾌한 마음을 지워 버렸다. 자신이 저들에게 퉁명스
럽게 대해 왔으니 남을 탓할 개재가 아니었다.
'쳇. '
"뺏어 가려는 거 아니니까 내놔봐. "
"예? 아 예. "
에펠이 검을 모두 모아서 라한의 앞에 내려놨다. 라한은 바닥에
있는 검 하나를 들어서 찬찬히 살폈다. 빗줄기가 거세어져서 검신
을 마구 때렸지만, 확인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역시나 베루니아 왕국의 마크가 손잡이와 검신에 새걱져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라한은 이 마크를 없애고 새로운 걸 새걱 넣을 생각이
었다. 이 상태 그대로 들고 다니다가는 다른 기사들에게 의심 받을
수도 있는 일. 오해의 여지가 있는 건 없애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스링!
츠칵! 츠칵!
검에 새걱진 문양은 얕고 엉성했다. 뛰어난 장인이 만든 게 아닌
듯했다.
라한은 조각칼을 꺼내서는 베루니아 왕국의 마크를 깎아서 없애
버렸다. 그리고그 위에 일행의 이름을하나씩 새겨 넣었다. 그누
가 보더라도 저들의 것임을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다.
대략 삼십 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검에 이름을 새기는 일
을 마쳤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라한이 일행예게 검을 하나씩 던졌
다 이름에 쓰여 있는 사람에게 맞춰서 던진 것이다.
검을 받아든 일행은 처음 어리둥절해 있다가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했다. 자신이 가지고 싶던 검을 가졌고, 그 검에 자
신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갑작스러운 선물에 하늘을 날 듯 행복한
기분이었다.
"우와. 형님에게 이런 실
"그만 가자 늦었다. "
에펠의 말을 끊어버린 라한이 걸음을 재촉했다. 시체를 수습하
는 시간이었기에 이름을 새겼을 뿐. 시간이 남아도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최대한 서둘러서 베루니아 왕국에 들어가야 했다. 노숙에
익숙하다고는 하지만좋아하는 것과는 엄연히 달랐다. 이제 노숙
이라면 지긋지긋했다. 특히, 이렇게 비 오는날젖은옷을 입고 행
해야 하는 노숙이라면 더더욱 싫었다.
'그나저나 그 라이칸자식이 대체 어디로 갔을까? 라이칸의 몸
으로 왕국에 들어갔을 리는 없는데.
고, 에펠 일행은 카르 왕국 국민이라는 증표로 쉽게 들어갈 수 있
었다 물론, 약간 미심쩍다는눈빛을 보이기는 했지만, 별다른제
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라한은 여관을 잡자마자 샤워부터 시작했다 쾌 오랫동안 목욕
다운 목욕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세
상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에헤라, 좋구나. 테세르!"
응? 어 주인 괜찮아?
테세르는 소환 되자마자 라한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아직도
라한이 정신 나간 놈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너도 좀 씻어. "
-뭐? 주인 미쳤군. 정령이 씻는 거 봤어?
"내가 시키면 한 번에 할 수 없냐? 꼭 그렇게 토를 달아야겠어?"
-우리 주인은 도무지 말이 안 통한다니까.
말을 마친 테세르가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자 몸 구
석구석에 새걱진 문양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조각칼로 새긴 굴곡
을 따라 물이 흘러서 그렇게 보이는 듯했다.
"음, 멀정하군. 됐다. 그만돌아가라."
-알았다.
라한이 테세르를 부른 건 자신이 테세르에게 행했던 인챈트가
훼손되지 않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냥 볼 수도 있겠지
만 물이 흐른다면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기에 그 현상을 이용했다.
결과는 대만족이 었다.
"인챈트 실력도 더 높여야 되고 마법 실력도 높여야 하는데. "
라한의 현재 인챈트 실력은 7 서클까지 무난하게 할 정도였다.
과거에 4 서클에 머물렀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그건
제란기와 제령기가 쌓이면서 라한의 육체적인 능력이 상승된 것에
기인했다. 특히, 시력과 세밀한 손놀림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에
인챈트 실력까지 엄청날 정도로 올릴 수 있었다.
"7 서클까지는 될 것 같은데 8 서클부터는 어떡하지? 주문
을 알아야 뭘 하지. "
오벨리아 팰리스에 있는 책에는 7 서클까지의 마법 주문밖에 없
었다. 8 서클 이상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드래곤
이었다. 헌데, 그들은 어딘가에 흔적을남기는 걸 싫어했기에 8 서
클 마법부터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일단 7 서클부터 마스터 해놓고, 드래곤 레어라도 털어야지. "
반쯤은농담삼아한말이지만, 그 방법밖에 없어 보였다. 고대
의 이종족들도 7 서클까지밖에 사용하지 못했으니 드래곤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드래곤을 직접 찾아가서 가르쳐 달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봐도 절대 가르쳐주지 않을 터였다. 자신
도 란이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일언지하에 거절하지 않았
는가?물론, 자신이 가진 마법의 특수성 때문이기는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가르쳐주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래, 일단 7 서클이 먼저다. 인챈트까지 따라잡아야지 "
현재 라한의 인챈트 실력은 7 서클이었다. 이것 역시 8 서클의 주
문을 몰라서 그 이상 올리지 못한 것이다. 마법까지 7 서클을 만들
고 나면, 둘 다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상위 마법 주문을 알아내야
했다
생각을 마친 라한이 욕조에서 나와 대충 몸을 닦았다 그리고 침
대에 걸터앉아서 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현재 7 서클 마법의 장애물은 심장을 둘러싼 제령기의 부족이었
지만, 제란기를돌리는 일도 소홀히 할수 없었다. 제란기는마법
사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신체적 능력을 올려주지 않던가. 힘을
키우고 약점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두 기운 모두를 키워야
했다
로이나와 류카라한은 베루니아 왕국에 와 있었다. 그들의 조금
뒤에는 베르네가 투덜거리며 터벅터벅 걸으며 따랐다. 걱우 인간
따위에게 존경하는 로이나를 빼앗긴 게 심통이 난 듯했다.
'첸, 내가 아무리 막 살았지만, 그래도 드래곤인데
속으로 분통이 터졌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평소에 잘 대해주는 로이나이지만, 화가 나면 엄청나게 무섭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오래전에 그들이 각별한 사이였다는
걸 알았기에 참은 것이다.
"로이나. 세상은 바꿔 게 별로 없군, 예전 그대로야. "
"그렇죠. "
본래 류카라한은로이나를 레냐라고불렀었다. 하지만, 유희 중
인 지금은 로이나라는 이름을 쓴다는 말을 듣고 바로 로이나로 바
러 불렀다. 호칭을 바꾸는 과정에는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못한
듯했다.
류카라한이 로이나의 유희에 참가한 건 무려 세 번. 오래전 일이
기는 하지만, 그때를 기억하자 호칭 문제는 꽤나 자연스럽게 해결
되었다. 이미 몇 번 겪어본 일이 아닌가.
"베르첸 제국은 내가 무너뜨렸으니 아닐 테고. 지금 이곳은 어
느 나라지?"
"류한 여기는 베루니아 왕국이에요. 기억 안 나요?"
"아, 기억나는군. 베르첸 제국이 약해질 때, 여기 터를 잡았던
후작이 나라를 세웠던가?"
류카라한은 로이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면 자신이
베루니아 왕국의 건국 영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베르첸 제국의 근
간을 흔들어 여러 왕국이 생길 수 있도록 해준 사람이 자신이니 말
이다. 물론, 당시에 생긴 왕국들 전부를 다 기억할 수는 없었다. 너
무 많은 왕국들이 우후죽순 생걱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름을 들
으면 그 왕국이 어떻게 생걱났는지 정도는 기억할 수 있었다.
"예, 맞아요. "
"근데 여기는 왜 온 거지?"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
로이나는 류카라한과 라한을 만나게 해도 될까 많이 고민했었
다. 하지만, 라한도 만나보고 싶고 류카라한과도 떨어질 수 없었
다. 둘 다를 충족시키려면 그들을 만나게 해서 일행을 만드는 길
뿐이라는생각이었다. 물론, 드래곤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는한
도 내에서.
'굴레를 벗은 존재들을 만나면 보내야겠지. '
류카라한을 사랑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보내야 한다면 미련 없
이 보낼 생각이었다. 자신의 감정보다 드래곤 자체로서의 입장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게 드래곤이 남을사랑하는방
법이었다. 약간은 방관자적인 그런 사랑
'라한은 얼마나 성장했을까? 류카라한과 만나면 재미있겠
군. '
만약 라한의 실력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강해졌다는 걸 알았
다면, 이런 결정을내리지는않았을것이다. 과거 류카라한은강자
만찾아다니며 대결을 펼치지 않았던가. 만나면 충돌이 일어날 거
라생각할테니 당연히 피할게 분명했다. 또, 라한이 굴레를 벗은
존재라는 걸 알았다면 더더욱 만나지 않게 노력했으리라.
하지만, 굴레를 벗은 존재를 알아보는 방법은 굴레를 벗은 자의
느낌뿐이다. 로이나가 제 아무리 최강의 드래곤이라도 굴레를 벗
었는지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여기서 만나기로 한 건가?"
"아니오. 며칠 안으로 여길 지나갈 거예요. 그때 우연을 가장해
서 합류할 생각이에요. "
"드래곤은 아닌 모양이군. "
우연을 가장한다는 말은유희의 일부라는 말이었다. 자신의 신
분을 노출시컥서는 안 되는 유희 말이다
류카라한의 얼굴에 호기심이 어렸다.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생
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 같은 호승심이나 살기
가 일지는 않았다. 셀리포 숲에서 지내는 동안 정신 수양을 많이
한탓이다. 물론, 수틀리면 검을바로드는 성격도많이 고쳐졌다.
이제는 스스로를 다독여 관조할 줄 아는 존재가 된 셈이다.
"우선 여기서 며칠 쉬죠. "
"그러지. 베르네님. 여기서 며칠묵을생각입니다. "
"알았어. "
류카라한은 로이나에게 말을 놓았다. 아주 오래전에 로이나가
허락했기 때문이다. 반면 로이나는 류카라한에게 말을 높였

하지만류카라한도 베르네에게는 말을높일 수밖에 없었다 자
신에게 말을 놓으라고 허락한 존재는 로이나였지 베르네가 아니었
기 때문이다. 그에게 베르네는 골드 드래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
었다. 이런 이유로 서로의 호칭에서 묘한 문제가 발생했다. 하지
만, 별로 개의치 않는듯보였다. 베르네와로이나는많은유희를
통해 사소한 일에 무뎌졌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반면, 류카라한은
성격 자체가 원래 그랬다. 자신의 이득과 직접 관계가 있는 일이
아니면,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었다.
이틀을 더 쉰 라한과 에펠 일행이 용병 길드를 찾아갔다. 용병일
을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에펠 일행의 신분보장이 더 큰 이유
였다. 베루니아 왕국을 벗어나면 카르 왕국의 국민이라는 게 아무
런 도움이 안 되는 탓이다.
물론, 용병 길드도 신분이 중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신분도 모르
고 아무나 용병패를 발급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적당히
돈만찔러준다면불가능도가능으로만들수 있었다. 단한번. 자
존심을 굽히고 돈을 주고 용병패를 받는다면 대륙을 다니는 내내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딸랑!
라한과 에펠 일행이 들어갔음에도 길드 안은 별 반응이 없었다.
카운터에 앉은 사람만 애송이 쳐다보듯 흘걱봤을 뿐이다. 실제로
외모만으로보면 애송이라봐도무방했다. 아니, 실력으로봐도라
한을 제외한 모두는 애송이나 다름없었다. 용병일은 단순히 실력
보다 경험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라한은 경험을 무시할
만큼의 실력이 있었으니 예외였다.
"무슨 일이우?"
"용병이 되려고 왔습니다. "
에펠의 말이 끝나자 카운터에 앉은 사내가 노골적으로 아래위로
살폈다. 아무리 봐도 용병 체질로 보이지 않는 듯 비웃음까지 띤
모습이었다. 특히, 라한과 란을살필 때는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기까지 했다. 그들을 제외한 일행은 어리게 보이기는 해도
수련의 흔적은보였다 헌데, 라한과란은그조차도보이지 않았
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댁두 용병이 될 생각이우?"
카운터의 사내는 란이 아닌 라한에게 시비조로 물었다. 란은 그
래도 지팡이라도 들고 있으니 마법사라는 생각은 한 모양이다. 헌
데, 라한은 허리에 평범한듯 보이는 검을 차고 있으니 가소롭게
보였으리라.
"훗, 전 이미 용병입니다. 여기 이 녀석들이 용병이 되려는 거니
까 용병패나 만들어 주십시오. "
"용병패? 실력들은 있나 모르겠군. 신분도 확실하지 않은 것 같
사내의 말에 에펠 일행이 라한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눈으로 묻는 듯 보였다.
라한은 실력으로 용병패를 받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도 일
행들의 실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란은마법사라서 가
능성은 있었지만,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적당히 한몫
잡게 해주고, 용병패만 받을 생각이었다.
스윽! 탁!
라한이 가방에서 스크를 두 개를 쥐고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오벨리아 팰리스에서 만들어둔 마법 스크롤이었다.
"이게 뭐시우?"
"스크롤입니다. 하나는 파이어 볼( 3 서클마법-클래스마
법)이고 하나는 윈드 배리어( 3 서클 마법-클래스 마법)입
니다. 알아서 만들어 주시죠. "
라한이 내민 스크롤은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잘모르는사람이
보면 스크롤이 라고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내가 알고 있는 스크롤과는 다른데 이거 마법 스크를 맞
수?"
"확인시켜드리죠. "
말을 마친 라한이 주머니에서 또 다른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1
서클 마이너 윈드 스텝이 담긴 스크롤이었다.
마이너 윈드 스텝( 1 서클 마법-비클래스 마법)은 발
걸음을 빠르게 하는 마법이다
지속시간은 대략 십 여 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위험에
서 벗어나기는 충분한 시간이다.
고위 서클이 든 스크롤을 확인용으로 쓰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
지만 1 서클 정도라면 상관없을 것 같았다. 라한이 세상 물정에 어
두워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찌지직!
스크롤을 찢자 미약한 빛이 생걱났고, 그 빛은 카운터에 앉은 사
내에게 다가갔다. 그는 순간 흠칫 거렸지만, 이내 마법을 자연스립
게 받아들였다. 용병일을 하며 쌓은 경험이 마음을 느긋하게 만들
어 준 것 같았다.
"어떻습니까?"
"오호, 좋군. 윈드 스텝? 맞수?"
카운터에 일어나 주변을 몇 걸음씩 걸어보던 사내가 감탄하며
말했다. 과거에 그는 스크롤의 형태가 아닌, 마법사에게 직접 이
마법을 받아봤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보자 대충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라한이 내려놓은 스크를 역시 잘못된 게 아
니 라는 생각을 굳혔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후후후. 그럼 잠시만기다리슈. 내 적당한등급을정
해서 만들어 줄 테니. "
마법 스크롤은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상당히 고가였다.
특히, 3 서클 마법이 담겨 있는 스크롤은 웬만한 평민들 집 몇 채를
살 수도 있는 가격이었다. 그런 스크롤을 두 개씩이나 내밀었으니
사내의 입이 귀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형님. 그 스크롤이 정말 마법 스크롤입니까?"
"그, 그거 어떻게 구하셨어요?"
"스카라트 산맥에 고대 유적이 있나요?"
"마법 스크를 더 있어요? 얼마나 있어요?"
사내가 사라지자 에펠 일행이 질문을 쏟아냈다. 만날 때부터 충
격적인 상황에서 만났지만, 지금은 정도가 더 심했다 어떻게 그
귀한 스크롤을 세 개씩이나 가지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
기다가 비록 1 서클이라고는 하지만, 하나는 시험 삼아그냥 써 버
리지 않았는가.
이건 단순히 돈 많은 부자라고 생각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돈
을 주고도 구할 수가 없는 게 마법 스크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크롤을 아까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이 가지고 있다? 그것도 믿
기 힘들었다. 세상에 스크롤이 남아돌아서 막 쓰는 사람이 어디 있
겠냐 싶었다.
"어디서 구했는지는 말하기 좀 그렇군. 하지만 스카라트 산맥에
서 구한 건 아니다. "
"우와! 형님 멋져요. "
"역시 우리 형님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
감격스러운 듯 말하기는 했지만, 달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크롤의 가격만으로도 달라고 하기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
만, 눈빛에 탐욕스러운 빛이 역력히 드러랐다.
물론, 라한이 주고 싶으면 그때 줄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마
음이 없을 때는 아무리 졸라도 주지 않을 사람이었다. 에펠 일행이
그동안 봐온 라한은 그랬다. 부탁이나 명령보다 마음을 얻어야 그
의 호의를 얻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용병패만 있다고 용병이 되는 건 아니다. 오늘은 귀찮아서 이
렇게 했지만, 앞으로직접 싸우면서 실전을쌓아라. 경험만큼소중
한 스승은 없으니까. "
"예, 형님. "
"예, 알겠습니다 "
라한은 파라미트와 싸우면서 경험이 중요하다는 걸 절실히 깨달
았다. 자신이 한 훈계를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로 삼은 셈이다.
'스크롤이 몇 개나 남았지? 한 스무 개?'
라한은 오벨리아 팰리스를 떠나면 인챈트에 대해 고민했었다.
파마리스 평원에 있는 나무 외에는 스크롤을 만들 수 없을까? 그
나무와 미스릴, 드래곤본 같은 고가의 재료에만 인챈트가 가능할
까? 마나가 담긴 또 다른 재료는 없을까? 많은 생각을 거듭했다.
결과적으로 별 해결책을찾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 가방에는스
크를 백 개는 거뜬히 만들 수 있는 통나무 두 개가 있었다. 거기다
스크롤로 가진 게 약 스무 개. 그 정도면 쾌 오랫동안 쓰고도 남을
거 라는 생각이 었다.
턱-!
"여기 있수. B 급 용병패로 만들었으니 그 정도로 만족하시우
그 이상은 내 능력으로 힘드니까. 근데 젊은 양반. "
"예?"
"스크를 더 있수? 있으먼 내가 사고 싶은데
라한은 용병 사내가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 짐작했다. 왜 안 그
렇겠는가? 그 귀하디귀한 스크롤이 아닌가? 돈으로 안 되면 힘으
로 구하려 들 게 분명했다.
"두 개 더 남았습니다. 제가 마법사라서 스크롤이 필요 없거든
요. 사실래요?"
"허허허, 마음에 드는 젊은이구먼. 어떤 마법인지 말해 주겠수?"
없다고 말하면 도둑을 가장해서라도 확인하려 들게 분명했다.
그럴 바에는차라리 몇 개 팔고 더 이상 없다는 걸 알릴 생각이었
다. 또, 당장 여행을 할 자금이 없다는 것도 이런 결정을 하는데 한
몫했다.
"여기요. 아까하고 비슷하지만 서클이 좀 낮습니다. 직접 확인
하시죠. "
스륵! 턱- !
"어디보자. 아쿠아 미사일( 3 서클 마법-클ㄹ H 스 마법)하
고 큐어(서클마법-클래스마법)이군. 잠시만 기다리시우 얀
델! 얀델!"
스크롤을 살피던 사내가 옆을 보며 크게 외쳤다. 흘에 있는 사람
이 아닌 건물 내부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듯했다.
잠시 후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지며 금빛 머리의 잘생긴 미남자
가 다가왔다. 왼쪽 허리에는 롱소드, 오른쪽 허리에는 스태프를 착
용한 모습이 상당히 언밸런스했다.
"케라민 아저씨! 부르셨어요?"
"이 스크를 좀 확인해보게, 아무래도 마법을 익힌 자네가 나보
다 잘 알지 않겠나?"
테이블 위의 스크롤을 바라보던 얀델이라는 사내가 테이블 위의
스크롤을 바라봤다. 그 정도로 안 되겠는지 손으로 들기도 하고 뭔
가를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스크롤을 내려놓고는 놀란 눈으
로 입을 열었다
"이, 이거. 이거. 마법 스크롤이잖아요. 3 서클 마법하고 2 서
클마법이라니. 후우, 이게 도대체 얼마냐?"
"얀델! 이게 비싼 거냐?"
말을 마친 케라민이 얀델에게 눈짓을 해댔다 최대한 가격을 낮춰
부르라는 표시였다. 그 눈빛을 본 얀델도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비쌉니다 3 서클은 3 백 골드?그 정도할겁니다. 2 서클은 2 백
골드 정도는 할 거고요. 두 개면 거의 5 백 골드네요. "
"헉, 그 그렇게 비싼가? 흠, 흠. "
얀델의 대답에 케라민이 말을 더듬거렸다. 그는 얀델이 가격을
조금도 낮추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아쉽지만 스크롤은 사야했고
가격은 불려졌다. 어쩔 수 없이 5 백 골드를 지불할 수밖에 없는 상
황이었다
"여기 있수. 5 백 골드. "
"고맙습니다. "
케라민이 주머니에서 백 골드 상당의 흑요석 다섯 개를 내밀었
다. 용병패를 만들어 올 때부터 스크롤을 살 생각을 굳혔음이 분명
했다. 라한은내심 그들의 행태가괘씸했지만, 내색하지는않았다.
지금은 돈을 빨리 구해서 여관비부터 충당해야 했다. 어제 묵은 여
관에서 돈을 지불하지 않은 것이다. 또, 용병으로 생활하려고 해도
당장 먹고살만큼의 돈은 있어야 했다. 의뢰비는용병 임무가끝
났을 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근데 생각보다 비싸군. 저들이 하는 짓으로 봐서는 그 두 배는
될 것 같은데. 휴, 세라소드가마법검이라는걸 안다면 난리가나
겠군. '
마법검 세라 소드가 세간에 알려진다면 난리가 날 게 분명했다.
또, 보물을 노리는 자들까지 자신을 괴롭힐 거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세라 소드의 겉모습이 평범하다
는 정도였다.
"더 용건 있수?"
"혹시, 이곳에서 남쪽이나동쪽으로 가는상단수행 업무 같은
거 없습니까? 기왕이면 베루니아 왕국을 벗어나서 다른 나라로 가
는 일이면 좋겠습니다 용병이 됐으니 일을 해 봐야죠. "
"어디보자. 아, 딱좋은게 있긴 있수. 근데 장거리 임무라서 별
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쩌겠수?"
"어디로 가는 건데요?"
"나메라 왕국. 카르 왕국 지나서 동쪽으로 쭉 가면 나오는 나라
인데 어떻게 하겠수?"
케라민의 말에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나메라왕국이라면 파마
리스 평원의 입구인 페사 지방을 가진 왕국이었다. 라한 역시 파마
리스 평원으로 가면서 들렀던 곳이다.
라한의 1 차 목적지는 사에나 왕국에 있는 멜카투라 산이었다.
정확히는 멜카투라산에 있는 칼라피안의 거처였다. 그곳에 있는
보물 창고에서 목걸이와 팔찌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나메라 왕국은 수에나 왕국의 북쪽에 인접한 왕국, 자신의 목적
지와 가까우니 괜찮은 임무 같았다.
"그 임무. 저희가 맡을게요. "
"맡을게요? 푸하하하하. 그 정도 장거리 여행을 할 때는 용병 수
만 2 천 명이 넘는다. 너희는그중에 일부일 뿐이야. 맡는다기 보
다는 끼어 간다고 표현해야지. 안 그래?"
금발 머리 얀델 비웃음에 에펠 일행들이 달려들 듯 몸을 들썩거
렸다. 이에 라한이 재빨리 그들을 제지했다. 이런 곳에서 괜한분
란을 만들어봐야 득보다 실이 많았다. 물론, 속으로는 화가 치밀었
다. 하지만, 겉으로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끼어 가도록 할게요. 출발은 언제죠?"
"여기 자세한 게 써 있수 가져가슈. "
"감사합니다. "
라한은 케라민이 내민 종이를 받아서 가방에 대충 넣었다. 그리
고는 서둘러 용병 길드를 나왔다. 그곳에 더 있다가는 에펠 일행이
사고를 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라한 일행이 나가자 케라민이 눈을 부라리며 얀델을 노려봤다.
아까 왜 그렇게 비싼 가격을 불렀는지를 질책하는 눈빛이었다.
"이놈! 내가 네 놈을 왜 불렀는지 몰라서 그런 걱? 5 백 골드? 네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
"참나, 난또 뭐라고. 그스크롤원래 시세가 얼만줄이나아세
요? 무려 3 서클과 2 서클이에요. 그것도 회복계 마법 중 하나인 큐
어가끼어 있는데, 그정도면싼거죠. 실제 가격은천골드를휠씬
넘는다구요. "
"그, 그래?"
"예. 잘간수했다가나중에 거대 상단들들어오면 파세요. 용병
들이 쓰기에는 너무 비싼 거잖아요. "
얀델의 말처럼 공격이나 방어 마법보다는 회복계 마법이나 보조
마법이 담긴 무구가 더 비쌌다. 현 시대에 회복계 마법이나 보조
마법을 익힌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각 서클의 마스터라고 해서 모든 마법을 다 사용하는 건 아니었
다. 각 서클에 존재하는 마법의 반 정도만 익히면 상위 서클을 배
울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원소간의 충돌도 중요했다. 물마법을
깊이 익히면 화염계 마법이 약해지는 그런 상관관계. 이 때문에 공
격계에 능한 불마법과 방어에 능한 땅 마법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
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자 지금은 힐링이나 큐어를 쓸 수 없는
마법사가 천지 였다.
여관에 돌아온 일행은 여관비를 치르고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상단이 출발하는 날짜는 앞으로 3 일 후였다. 라한은 그때까지 6
서클을 깨버릴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깨야겠어. 일을 시작하면 혼자 있을 시간이 별로 없
을 테니까. "
라한은 과거에 반쪽자리 환골탈태를 경험했었다. 뒤바꿔 혈도
때문에 가장 마지막에 뚫어야 했던 혈도를 먼저 뚫어서 생긴 변화
였다. 그때 이후로자신의 막힌 혈도를하나씩 뚫어 나갔고, 지금
은 단 하나의 혈도만 남았다. 이 혈도를 뚫으면 환골탈태를 할 수
있었다.
"잘돼야 할 텐데. "
라한이 혈도 하나만 남겨놓은 건 무려 1 년 전이었다. 그때부터
혈도 하나를 뚫지 못해서 완전한 환골탈태를 못한 셈이다. 헌데,
이번에는 느낌이 좋았다. 남은 혈도를 뚫기 위해 필요한 약간의 깨
달음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찰칵!
문을 잠그고 바닥에 앉은 라한이 제령기를 주변에 퍼트렸다. 그
리고 제란기를 자신의 몸에 둘러 오감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혹시
나 주변에서 심법을 방해할 존재가 있는지를 확인할 목적에서였다.
'심법은 다 좋은데, 운공 중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게 문제라
니가. '
여관 구석구석으로 제령기를 돌렸고, 마지막으로 옆방에 있는
에펠 일행의 방에도 퍼트렸다.
지금까지 심법을 운용하기 전에는 에펠 일행까지 살피지 않았
다 어느 정도 그들을 믿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오늘은그들의
방에도 살포시 깔았다. 이건 심법을 위해서가 아닌 순전한 호기심
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갑자기
궁금해진 것이다.
"베린 그게 무슨 말이야?"
에펠의 목소리가 라한의 오감에 잡혔다. 조금은 조심스럽고 다
급해하는 목소리 였다.
"형님이 가진 돈이 얼마라고 생각해?"
"라한 형님? 오백 골드 정도잖아. "
"그래 맞아. 근데 그게 끝일까?가진 게 다섯 개밖에없는데, 그
다섯 개를 모두 처분한 거라고 생각해?"
베린의 목소리가 누군가를 꾸짖듯 들려왔다.
라한은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걸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들의 대화중에 자신의 이름이 나온 것
이다. 자신과관계된 이야기를무시할수 없었다. 또, 그들의 목소
리가 마치 음모를 꾸미는 자들의 목소리 같다는 것도 계속 엿듣는
데 한몫했다.
"글쎄. "
"마법 스크롤은 무척이나 귀한거야. 우리 같은 기사 지망생은
잘모르겠지만, 란은그게 얼마나귀한지 알거야. 맞지?"
"응. 비싸. 아까용병길드에서는 반값도 못 받고 판 거라고 할
있어. "
베린의 말에 란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마 베린과 란은 이전
에 한 번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았다.
"그래? 내 이놈의 용병들을 그냥
"에펠. 발끈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봐. "
베린의 목소리가끝나자잠깐정적이 흘렀다. 일행 모두의 입에
서 쉽사리 말이 떨어지지 않은탓이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후, 베
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란이 알고 있는 가격을 라한이 모른다? 이상하지 않아? 라한은
란보다 상위 마법사잖아 "
"그건 휴, 그렇지. "
그들의 입에서 형님이라는 단어가 빠졌다. 그들끼리는 라한을
형님이라부르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또, 그들이 라한을형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도 되었다.
'이놈들 봐라. '
라한의 입꼬리가살짝말려 올라갔다. 에펠 일행에 대해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는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소리겠어? 스크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다는
얘기라고. 많으니까 그렇게 풀 수 있는 거지. "
"그렇군. "
라한도 마법 스크롤이 비싸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가격이 얼마인지는 감도잡지 못했다. 인챈트를 배울 때부터 장수
를 위해 배웠지, 돈 벌기 위해서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가외지 생활을많이 했다고는하지만, 본래 귀족출신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기에 시세에 어두
울 수밖에 없었다
'실수군. '
라한은 인챈트 스크롤을 너무 가볍게 처분해버린 자신을 자책했
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앞으로는 조심해야겠군. '
"베린. 그러니까 어쩌자는 거야?"
"우리가 라한을 죽여 버리자. 마법사니까 기습을 하면 어렵지
않을 거야. "
베린의 대답에 라한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
먹. 손등과손가락끝이 하얗게 변했다. 에펠 일행의 방안에도 침
묵이 감돌았다. 베린의 말이 그들에게도 충격을준 것이다. 쾌 오
랫동안의 침묵이 흐르고서야 에펠의 음성이 들려왔다.
"좋은 방법이 아니야. "
"왜? 알량한 자존심? 아니면 기사도? 그런 거라면 개나 줘버려.
우리가 카르 왕국에서 당한 걸 생각해봐. 그 자식들이 기사도를 가
지고 있었다고 생각해? 기사도를 가진 놈들이 그따위로 행동할 수
있냐고? 그건 우리가 힘이 없어서야. 돈이든 권력이든 무력이든.
뭐든좋아. 힘만있다면, 그래서 남을부릴 위치만된다면, 우린그
렇게 당하지 않았을 거야. "
베린의 절규에 또 다시 정적이 흘렀다. 그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
"기사도를 얘기하는 게 아니야. 라한이 가진 힘이 마법밖에 없
다고 생각해? 그에게는 정령이 있어 정체가 뭔지 모르는 시커먼
정령. 누구 그 정령의 능력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 있어? 없잖
아. 단순히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
" 그럼 ? "
"카류나. 네가 라한을 유혹해라. "
에펠의 말이 떨어지자 라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작 여자 따위
로 자신을 어찌 하려 하다니.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등신 같은놈. 카류나가 예쁘기라도하면 내가말을 안해. 쥐
뿔도 없는 애를 보내서 유혹은 무슨. '
카류나가 못생긴 편은 아니었다. 평범한 외모에 건강미가 더해
져 묘한매력을풍기는 여자였다. 하지만, 라한은로이나와 8 년을
함께 지냈다 드래곤이지만 엘프로 알려진 로이나. 그녀의 미모는
대륙 전체를통틀어도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헌데, 카류나
가라한을유혹한다? 있을수 없는 일이다. 단순히 오빠동생이라
면 몰라도 유혹의 대상으로는 힘들었다. 시간을 두고 성격에 반해
서 미래를 약속한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제, 제가 왜요?"
"그를 유혹해서 널 완벽하게 믿도록 만들어. 그리고 우린 수면제
나 독 같은 걸 준비해야겠다. 나중에 우리가 약을 주면 라한이
먹도록 만들면 돼. 라한을 정공법으로 상대하기는 힘들 테니까. "
"좋아. "
"나도 찬성. "
"저, 저도 해볼게요. "
카류나의 대답을 끝으로 그들의 회의가 막을 내렸다. 하지만, 라
한은 주변을 한 번 더 살펴야했다. 회의 자리에 시스마란의 기운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회의에 빠졌다면 다른 일행과 다른
생각일수도 있었다. 어쩌면 정말 자신을 진짜 형으로 생각하는 그

'그를 한 번 떠봐야겠군. '
라한이 떫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됐든 믿었던 이
들에게 배신당한 게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잔인한종족이 인간이
라는 말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반갑지 않은 일행
라한은 제령기와 제란기를 세 차례씩 돌린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
났다 보통 두번씩 하는 심법을 한 번씩 더 돌린 셈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라한이 침대에 걸터 앉았다 자신을 배신한 녀
석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고민하기 위해서였다
후후 좋군
테세르
음냐 주인 왜 불렀어 이제 미친병은 다 나았어
라한에게서 두 걸음 물러난 테세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
라한이 실없이 웃었던 때를 잊지 못하는 듯했다
이놈의 잡종 정령이.
화를 내는 걸 보니 제 정신이돌아온 모양이군 하긴 세상에
서 제일 무서운 신이 제정신이지
테세르의 말에 머리를두어 번 두드린 라한이 길게 한숨을 쉬었
다. 이럴 때 보면 누가주인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아랫것들 대하듯 말하지 않는가.
'이놈이 두고 보자고. '
"테세르. 지금부터 시스마란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해봐. 다른
놈들은 필요 없고 시스마란만 조사하면 돼. "
-시스마란이면 갈색 머리의 비리비리한 그놈 말이야?
시스마란의 몸은 무척이나 말랐다. 어떻게 저 몸으로 검술을 익
혔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나마 마른 몸 구석구석 붙은 근육과 거
친 손바닥이 검을 익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응. 아까보니까 에펠 일행이었던 놈들이 내 뒤통수를 치려고
계획을 짜더라고. 내가 죽으면 네가 어떻게 되는지 말 안 해도 알
겠지?
-오호, 그 허접한 것들이 주인을 우습게 봤단 말이야? 하긴, 나
도주인을우습게보고 있으니까, 충분히 이해가가는군. 그렇지만
위대한 마나의 정령인 나까지 우습게 봤다는 건 용서가 안 되는데.
테세르의 말에 라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실제로 테세르가 라한을 우습게 보는 건 아니었다. 오랫동안 함
께 지내서 허물이 없어졌을뿐이다. 라한도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두 귀로 듣는 건 기분 나빴다. 시간 내서 테세르를 철저히 교육시
컥야겠다는 생각을 굳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
"미친놈. 아무튼 시스마란의 됫조사를 좀 해야겠어, 그 자식들
이 계획을 꾸밀 때, 그 녀석은 빠졌더라고. 혹시 믿을 수 있는 놈인
가궁금해서 그래. 왠지 믿을수있는놈같아. 예전부터 마음에들
더라고. "
라한은 시스마란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너무 고지식하고 기사도
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너무 다른모습이라서 그런지도몰
랐다. 헌데, 지금은정 반대의 말을했다 과거 자신이 생각했던 바
를 완벽히 부정하는 말이었다.
-알았다. 그놈 실력이 형편없어서 내가 따라다녀도 모를 거야.
정령의 능력은 그 소환자의 능력에 비례한다. 특히 테세르처럼
급이 없는 정령은 정도가 심했다. 원소 정령은 하급이나 상급
이냐에 따라 최대 능력이 정해지지만 테세르는 그런 등급마저도
없기에 그어진 한계선이 없었다
"그럼 수고해, "
-응.
테세르가 사라지자 라한은 다시 바닥에 앉았다. 다시 심법을 돌
리기 위해서였다. 라한은 6 서클에 머물러 있은 지 너무오래 되었
다. 물론, 다른마법사들과 비교한다면 극히 짧은시간이지만, 라
한에게는그렇지 않았다. 5 서클까지 엄청난속도로 성장했기에 상
대적으로 6 서클의 정체가 길게 느껴진 것이다. 이 때문에 6 서클을
깨버리고 싶은욕구가너무강했다. 물론, 마나고리의 개수가아
닌 제령기의 양이라는 게 다른 마법사와는 달랐지만.
'조바심 내지 말고 천천히, 하지만 지속적으로
생각을 마친 라한이 심법을 서서히 돌리기 시작했다. 단전에 있
는 제란기를 돌리는 게 먼저였다.
제란기를 모두 돌리자 이제는 제령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천천
히 부드럽게. 하지만,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돌리면서 혈도를 조금
씩 자극했다
쿵- !
제령기가 막혀 있던 마지막 남은 혈도를 강하게 때렸다. 하지만,
철옹성처럼 단단한 혈도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이에 라한은 제
령기를 다시 부딪혀갔다. 충격이나 통증은 없었다. 다만, 무언가가
자신의 하복부를 두드린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쿵! 쿵!
몇차례 두드렸지만, 혈도는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애초부터 기
의 통로가 아닌 듯 보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수차례 두드리다보면 제령기는 심장으로 방향을 돌릴 것
이다. 그때가 되면 다음 심법 수련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쿵! 쿵!
이미 제령기의 반 이상이 심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혈도에 부
딪힌 반동으로 심장을 찾아가는 것이다.
쿵! 쿵! 쩌적!
'응? '
혈도에서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소리가울려 퍼졌다. 물론, 밖으
로 나는 소리가 아닌 몸 내부에서 들리는 미약한 소리였다. 하지
만, 라한은 이 소리를놓치지 않았다. 혈도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
켰기에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쿵! 쿵! 쩌저적!
'젠장. '
혈도에 금은 가고 있지만, 생각보다 잘 뚫리지 않았다. 거기다
남은 제령기가 두세 번 부딪힐 정도의 분량뿐이었다. 이 안에 해결
하지 못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똑, 똑!
"형님!"
똑, 똑!
"형님! !"
갑자기 들리는 큰 소리에 라한이 정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제령
기를 빠르게 심장으로 되돌려 심법을 마무리 지었다 혈도를 뚫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누군가가 부르는 외부의 소리가 너무 컸
다. 자칫 그 소리 때문에 정신이 흐트러지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었다. 심법을 끝낸 라한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짜증났다는 빛
을 노골적으로 비치고 있었다. 이 때문인지 목소리에도 짜증이 가
득 담겼다.
"빌어먹을! 누구야?"
"저 에펠입니다. 식사하십시오. "
에펠의 목소리에 라한의 얼굴이 더 찌푸려졌다.
미운 놈은 뭘 해도 미운 법이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 심법을 방
해받자그가 더 미워졌다. 아무래도 나중에 좀잔인하게 처리해야
할듯했다.
'그래, 넌 두 배다. '
"알았어. "
"그럼 내려가서 기다리겠습니다 "
옷을 대충 입은 라한이 방을 나섰다. 혈도를 뚫지는 못했지만,
심법을 수련해서인지 몸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이 맛에 심법을 돌
리는 것이리라.
식사를 마친 라한이 방으로 들어왔다.
"준비를 해 볼까? 크크크. "
음침하게 웃은 라한이 세라 소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세라 소
드를 내려놓고 검집을들었다. 이곳에 새로운 인챈트를하기 위해
서였다.
"참(5 서클 마법-클래스 마법)이 좋겠군. "
참 마법은 대상을 유혹해서 한 가지 의지를 심는 마법이다. 어떤
한 가지 일을 유난히 하고 싶도록 만드는 그런 마법.
참을 펼칠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드래곤을 제외하면
열 명도 채 안 될 정도였다. 상대의 정신력보다 몇 배 이상 월등해
야 가능한 것이다. 만약 어설픈 정신력으로 시도했다가는 오히려
스스로의 정신 붕괴를 낳을 수도 있었다.
"좀 위험해 보이기는 하지만. "
대부분 정신력은 나이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랜 경험과
경력이 축적되어 정신력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긴 생을 살지
않아도정신력이 강한경우는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삶을 통해서 뭔가 다른 경험을 한 경우였다. 그게 아니
면 한 가지 경험에 긴 사색을 통해 스스로 정신력을 강화시키던가.
"잘 될 거야. 이 정도는 모험이 아니라 자신감이지. "
라한은 스스로의 정신력이 강하다고 믿었다. 그것도 매우.
삶과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겼고, 죽음에 관한 많은 기억이 남
아 있기에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뭔가를 더 담아야겠는데. 5 서클 마법 하나만 담고 버리기에는
검집이 너무 크단 말이야. "
인챈트는 한 가지 물품에 하고 나면 바꾸는 게 불가능했다. 즉,
참 마법을 검집에 담았다면 다른 마법을 담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 번 인챈트 할 때, 필요한 마법을 모두 담는 게 중요했다.
그렇다고 한 물건에 무한정 많은 마법을 담을 수는 없었다. 크기
에 따라서 새길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딱- !
"그렇지, "
한참 고민하던 라한이 손가락을 퉁겼다. 얼굴 가득 떠오른 미소
가 음흥하게 느껴졌다.
스스슥! 슥삭! 끼끼릭!
조각칼을 꺼낸 라한이 세라 소드에 무언가를 새기기 시작했다
검집의 끝부터 힐트가닿는 입구 부분까지. 단 한곳도 낭비하지
않고 빼곡하게 새겼다.
라한의 조각은 밤늦게까지 계속 되었다. 참 마법을 새기는 건 금
방이었지만, 다른 마법을 새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 탓이다.
자정이 훨씬 지나 새벽 한 시쯤.
라한이 조각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긴 한숨을 쉬더니 몸을 일
으켜 허리를 몇 번 틀었다. 쾌 오랫동안 작업을 해서인지 허리가
뻐근했다.
"후우, 힘들군. "
라한이 새긴 다른 마법은 7 서클 소환 마법이었다. 그것도 마왕
의 아들인 투바를 소환할 수 있는 엄청난 마법.
처음 이 마법을 떠올렸을 때는 많이 망설였었다. 그래도 마족인
데, 소환을 해도 되는가에 대해 고민한 것이다.
결론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였다.
인챈트를해놓고, 내키지 않으면 안부르면그만이다. 어차피 인
챈트와 시전은 별개가 아니던가
"일단 준비를 해야겠지. "
라한이 방 주위를 마나의 막으로 감쌌다 이곳에서 사용되는 마
나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일을 마친 라한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전지전능한 만물의 힘이여. 그대의 힘을 빌려 이곳에 숨결을
토해내려 합니다. 그대의 깊은 숨결과 따뜻한 한 마디가 이곳에 머
물도록 해주십시오. 그레미에이다 움바티로 시프리케르 마라하비
트로 배스타마크!"
라한의 말이 끝나자 회색빛이 검집에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회색빛이 사라지자마자 칠흑 같은 검은빛이 검집 주위를 감쌌다. 검
은빛은 회색빛과는달리 검집을 계속 맴돌았다. 그렇게 빙빙 돌던
빛은 십 분이 지나서야 검집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뒤에 따라온 인
챈트와 앞선 인챈트의 서클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후우, 끝났군. "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은 라한이 몸을 비틀거렸다. 7 서클과 5 서클
마법을 함께 인챈트하자 피곤이 몰려왔다
하지만, 지금자리에 누울수는 없었다. 단전이 거의 텅 빈상태
였기 때문이다. 겨우 7 서클을감당할수 있는제란기로 7 서클, 5 서
클 두 개를 인챈트 했으니 비어 있는 게 당연했다.
"힘들군. "
자리에 앉은 라한이 심법을 운용했다. 이 정도로 텅 빈 단전이라
면 한두 번으로 채워질 것 같지도 않았다. 라한은 다섯 번의 심법
을 운용한 후에야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하고도 단전의 90 퍼센트를
겨우 채웠을 뿐이다.
라한은 첫 용병일을 하는 그 날까지 두문불출하며 지
냈다. 그 기간에 참 마법이 제대로 통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스카
라트 산맥에 수십 번을 왔다 갔다 한 것이다.
그 동안사용해본 결과, 오우거까지는 무난하게 유혹이 가능했
다. 그렇지만 라한은 트를 정도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오우거는 아
무리 정신력을 짜내도 두 마리 이상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는 십여 마리를 유혹할 수 있는 트롤이 훨씬 유용했다.
에펠 일행은 라한의 그런 행동을 조금도 미심쩍게 생각지 않았
다. 아니, 그럴 틈이 없었다. 자신들도독을구하느라바빴기 때문
이다. 특히, 라한모르게 일을 진행해야했기에 보이지 않는걸 오
히려 반길 정도였다.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제 이름은 A 급 용병인 제라드입니다. "
상단 호위 임무는 A 급 용병인 제라드가 지휘를 맡았다. 이곳에
모인 용병들 중 등급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제라드의 외침에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수습되었다.
제라드라는 이름이 주는 압박감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였다.
주위가 어느 정도 조용해지자 제라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단주님은 이미 마차에 타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번 호위는
이곳 베루니아 왕국을 출발해서, 카르 왕국을 거쳐 나메라 왕국까
지 가는장거리 호위입니다. 이미 알고 오셨겠지만, 가는 길에 많
은산맥과숲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쾌 위험한 여정이 될 겁니다.
혹, 지금이라도 두려운 사람이 있으면 빠져주십시오. "
제라드의 말은 의례하는 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지원하는
용병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의뢰를포기하는용
병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군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전원 출발! "
"출발! "
상단의 호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용병들이 주축이
된 팀과 상단 호위무사들이 주축이 된 팀.
헌데도 제라드가 전체 지휘를 맡은 건 용병들의 수가 상단 호위
무사들보다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또, 이곳에 모인 용병과상단
호위무사 중에 제라드가 최강자라는 것도 지휘권을 정하는 데 한몫
했다.
"저기요. 제라드라는 사람이 강한가요?"
라한이 옆에 선 덩치 큰 용병에게 물었다.
"엥? 이 사람초보용병인가? 허허, 참. 이런 장거리 호위에 초
보가 지원하다니. 쯧쯧. "
"아저씨. 좀 가르쳐 주시죠?"
"제라드는 이 근처에서는 엄청 유명한용병이다 너 같은 초보
가 아니면 다 아는 용병이지. A 급 용병이니까 실력은 소드익스퍼
트 중급 이상이고. 지금까지
라한과 에펠 일행 같은 초보가 아니면 다 아는 용병이 제라드였
다. 실력은소드익스퍼트중급으로 알려져 있었다. 원래 기사를꿈
핀으나 평민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해 용병이 된 케이스였다.
하지만, 검술은 기사의 그것처럼 무척이나체계적이다 아마그
에게 검술을 가르친 스승이 기사 출신인 모양이다.
체계적인 검술에 용병을 하면서 쌓은 경험이 더해져서 검술 이
상의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실패한 의뢰가 없다
는소문도 있었다. 이 상태로 몇 년이 더 흐른다면, 혈전사의 칭호
도 가능하다는 게 용병들의 중론이었다.
"아저씨! 그럼 혈전사는 뭐예요?"
라한의 물음을 받은 용병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 이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시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라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이 니
"혈전사는 용병들의 신이라 불린다. 실력이 강하고 경험이 많아
서 누구나가 인정하는실력자가 되어야 받을수 있지. 아마, 대륙
에 혈전사의 칭호를 받은 사람은 스무 명도 안 될 걸. 나도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모르겠군. "
말을 마친 용병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맞다. 혈전사가 되려면 소드익스퍼트 상급은 기본이야. "
"마법사는요? 마법사는 몇 서클이 되어야 하죠? 그리고 호칭은
혈법사 정도 되나요?"
라한의 물음에 용병의 대답이 궁해졌다. 마법사는 한 번도 생각
해보지 않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다 훌어봐도 마법사가 혈전사의 칭호를 받은 적은
없었다. 혈법사라는 말도들어본 적이 없었다. 된 적이 없으니 몇
서클인지 모르는 게 당연했다.
"어, 그게 마법사는 한 번도 없었는데
"그렇군요. 고마웠어요. "
말을 마친 라한이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상단 행렬은 이미 도시를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얘기를 하느라 라
한은 뒤로 쳐졌지만, 에펠 일행은 이미 도시를 빠져 나간상태였다.
인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몬스터의 위협에서 안전할 수 있
다. 참가하는 사람과 기존 행렬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셈이다.
도시를 빠져 나가고 하루가 지나자 상단 일행에도 인원이 조금
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규모 행렬에 껴서 위험 지역을 통과해보
려는 의도에서 모이는 사람들이었다. 적게는 한두 명에서 많게는
십여 명의 인원이 행렬에 참가했다
물론, 참가하는 사람들은 호위무사나 용병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몬스터의 공격을 받게 되면 상단 인원과 화물 보호가 최우선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곁에 있는것만으로도공격받는횟수를줄
일 수 있으니,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이득이 되었다.
"사람이 많이 느네요. "
"바보냐? 모일수록 안전해지는 건 당연하잖아. "
에펠의 물음에 라한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놈
이라서인지 부드러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빠! 몬스터 나오면 나부터 구해줄 거지?"
"응?어, 어당연하지. 우리 카류나부터 구해야지. 암."
카류나의 애교 섞인 말에 라한도 부드럽게 답했다. 그는 일단 카
류나에게만큼은 잘해줄 생각이었다. 최대한 잘해줘서 오히려 상대
방의 방심을 유도할 의도였다.
"역시 오빠밖에 없어. "
"내가 구해주지 않아도 넌 안전할 거야. "
"응?"
"넌 너무 예뻐서 누구라도 먼저 구해주려고 할 테니까. "
라한의 대답에서 기름기가 뚝뚝 떨어졌다. 스스로도 자신이 이
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할 수 있었나싶을 정도였다.
'내가 미쳤군, '
속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담담하고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마
치 평소부터 관심이 있었다는듯자연스럽기까지 했다.
"저기 오빠 있잖아. 내가
또 다시 애교를 떨던 카류나가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라한
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다른 쪽으로 가 있는 걸 본 탓이다.
라한은상단의 후미에 있는 곁다리 인원에게 가 있었다. 그러면
서 고개를 몇 번씩 갸웃거리는 게 뭔가 미심쩍은 일이 있는 듯했다.
"오빠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잠시만. "
짧게 양해를 구한 라한이 행렬의 뒤로 천천히 걸어갔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행렬의 후미와 만날 수는 있었다. 행렬은 계속 전진하
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라한은기다리기보다찾아가는길을택
했다. 한참 뒤로 간 라한이 로브를 쓴 어떤 남자의 곁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로브를 쓴 남자가 곁을 지나가자 라한도 그 옆을
따라 걸었다. 그러면서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어디서 느껴본 기운인데. 근데 말이 안 돼. 그리고
이건 분명 7 서클 정도의 마나인데. '
로브를쓴 사내에게서 7 서클의 마나가느껴졌다. 하지만, 몸속
에 있는 심장에서 풍기는 기운이 아니었다. 사내의 몸 전체에서 은
은하게 풍걱 나와 이상하게 생각했다.
'7 서클 마법을 시전하고 다니는 사람이라 이상해. 아무리 생
각해도 이상해. '
계속고민하면서도 그사내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이정도 되면
상대에게서 어떤 반응이 올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역시나 상대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후후. "
"응? "
조용히 웃던 사내가 로브의 모자를 벗었다.
파란색 머리칼을 가진 중년 사내였다. 곱게 늙은 듯 주름도 많지
않아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용케 찾아냈군. "
"절 아세요?"
라한의 되물음에 중년 사내의 입꼬리가말려 올라갔다. 얼굴 가
득 비웃음마저 띤 모습이었다. 마치 아직도 모르겠냐고 질책하는
듯했다.
"프라미트. "
"프라미트? 프라미트라 프라미트 프라미트 헉! 설마. "
이름을 계속 되뇌던 라한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와 동시에 빠
르게 중년 사내에게서 물러났다.
프라미트라면 자신과 싸웠던 라이칸드로프가 아니던가. 헌데 어
떻게 인간의 모습인지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한이 뒤로 물러나자프라미트가 왼손을슬쩍 들어올렸다. 그
의 약지에는 영롱한 푸른빛을 띠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마법 반지?'
"폴리모프( : 7 서클 마법-비클래스 마법)를 시전할 수 있는
반지다. "
폴리모프라면 모든 상황이 들어맞았다. 자신이 느낀 낯익은 기
운과 상대의 몸에서 풍기는 7 서클 마법의 향기. 이 모든 게 반지 하
나로 설명이 되었다.
"미쳤군. "
"너만 입 다물어주면 아무도 모른다. 7 서클의 마법을 느끼려면
6 서클은 돼야 하니까. "
프라미트의 말에 라한의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그의 표정과 말
투로 봐서는 싸우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싸운다고 해도 죽
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자신은 몸놀림이 더럽게 빠른 마법사가 아니던가. 소드마스터의
몸놀림에 비하면 틱없이 부족하겠지만, 소드익스퍼트의 몸놀림 정
도는 가능했다. 거기다 신법을 사용해서 도망친다면 소드마스터도
따돌릴 자신이 있었다 뭐, 그래도안된다면 텔레포트라는마법도
있으니
"바라는 게 뭐지?"
"입 다물어 달라는 거지. 너한테 해 끼칠 생각은 없으니까. "
프라미트의 말에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결론은 쉽게 나왔다. 자신만 입 다물면 괜한싸움을하
지 않아도 되었다. 거기다 잘만 설득하면 자신의 대련 상대가 될
수도 있을터였다. 지금가장절실히 필요한경험. 그빈구석을매
울 수 있는 적격자가 프라미트인 셈이다.
"조건이 있어. "
"경험을 쌓게 도와달라는 거지? 대련으로. 내 말이 맞나?"
끄덕끄덕 !
프라미트도 라한에게 경험이 부족하다는 걸 잘 알았다.
단 한 번의 싸움이지만 라한의 마법 운용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간파했다. 실력은 있으나 마법 조합이나 임기응변의 부재를 눈치
챈 것이다.
"도와주지. 나도 너하고 신나게 싸워보고 싶었으니까. 내가 세
상에 나온 이유가 너 때문이거든. 그나저나 네 녀석 이름이 라한이
던가?"
"라한. 그냥 그렇게 불러. "
프라미트는 라한의 반말에도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을 만큼수련이 되어 있었다. 그는 라한과함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그는 수백 년 동안 결계에 갇혀 지냈다. 이 때문에 그 긴 시간 동
안 제대로 된 대련 한 번 못해봤었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와 싸울
수 있는 기회가생겼다. 그것도 자신의 실력과큰 차이가 나지 않
는 상대였다. 비록 검사나 부사(도끼를사용하는사람)가
아니 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베루니아 왕국의 동부에 위치한 트루미 숲
이 숲은 북서부 최대의 숲이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나무
들과 허리를 덮을 만큼 울창한 잎사귀들. 이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이 때문에 트루미 숲은 엄청나게 어두웠다 울창한
나무로 인해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하루를 쉰다. 내일은 트루미 숲으로 진입할 생각이니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휘이 익 ! "
용병 제라드의 말에 다른 용병들이 휘파람을 불어댔다. 해가 떨
어지지도 않았는데 쉬는 게 기쁜 듯했다
"어둠의 숲이로군. "
"어둠의 숲이오?"
라한의 혼잣말에 카류나가 감칠맛 나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녀는 요즘 라한의 옆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라한 역시 그녀
의 접근을 꺼리지 않는 듯 보였다. 최소한 겉으로는 말이다
"우리 카류나가 궁금한 모양이구나. "
"응, 오빠. "
"트루미 숲의 또 다른 이름이 어둠의 숲이야. 나무가 너무 많아
서 하늘이 안보일 정도거든. 햇볕이 안들와서 엄청나게 어두운거
지, 항간에는 드래곤이 산다는 소문도 있는데, 봤다는 사람은 없
어. 몬스터가 엄청나게 많아서 드래곤이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
는 거겠지. "
라한이 어떤 책에서 봤던 트루미 숲에 대해 떠올렸다.
트루미 숲의 또 다른 이름은 어둠의 숲이었다. 또, 이곳에는 엄
청나게 많은 몬스터가 살고 있었다. 산맥이 아닌 숲으로 치면 대륙
최대 몬스터 서식지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몬스터. 이 때문에 드래곤이 산
다는 소문도 함께 돌았다. 드래곤이 사는 곳이 아니면 이렇게 많은
몬스터가 있겠냐는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드래곤을본사람은단
한 명도 없었다. 그냥 그럴 거라고 지례 짐작하는 것뿐이다.
"우와! 오빠는 정말 모르는 게 없네요. 헤헤, 고마워요. 오빠. "
"고맙긴. 우리 카류나가 궁금해 하는 건데 당연히 가르쳐줘야
지. 내 지식이 카류나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걸. "
라한은 징그러운 얘기를 하면서도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연
기의 달인 혹은, 사기의 달인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 짓도못할짓이군. 후후, 어쨌든첫 번째 사건은저 숲이 좋
겠어. '
"이보게. 라한. 나하고 얘기 좀 하세. "
"아, 프라하. 그러지, "
프라미트가 라한의 손을 끌었다 대련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프라미트는 라한과 합류하면서 프라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
에게 이번 여행은 일종의 유희나 마찬가지였다. 유희에는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얼굴을 가져야 한다는 게 그의 신조였다. 이 때문에
프라하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사람이 많군. "
"그러게. "
라한과 프라미트의 대련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들 모
두자신의 실제 실력을숨기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련
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처음 생각한 방법이 공간이동이었다. 적당한 장소로 이동을 해
서 대련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시행되지 못했다. 이동
할수 있는사람이 라한뿐이기 때문이다. 함께 이동할수 있는마
법인 매스 텔레포트(8 서클 마법-비클래스 마법)는 8 서클
마법. 지금 라한의 능력을 훨씬 상회하는 마법이었다.
"여기서 하지. "
"좋군. "
적당한 곳에 도착한 라한과 프라미트가 마주보고 앉았다. 그리
고 작은 나뭇가지를 하나씩 쥐고 눈싸움을 벌였다. 마치 실제 적을
앞에 둔 듯 랄카로운 모습이었다.
잠시 후, 라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위치는 여기. 네 위치는 여기. 내가 먼저 시작하지. 매직 애
로우! "
말을 마친 라한이 바닥에 선을 주욱 그었다. 매직 애로우가 날아
가는 경로를 땅에 그린 것이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9 라는 숫
자를 써 넣었다.
라한이 옆에 숫자를 써 넣은 건 제령기의 총량에서 몇 퍼센트를
사용했는지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검사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마
법사는 마나라는 힘의 한계선이 정해져 있다. 그 마나를 모두 사용
하면 무기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숫자를 적어서 자신
이 사용한마나를기록했다. 가진 최대 마나가천. 그중에 9 를사
용했다는 얘기 였다.
"여기서 왼쪽으로 한 걸음 비켜서자마자 지그재그로 달려간다. "
말을 마친 프라하 역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옆에 어떤
숫자를 기록하지는 않았다.
바닥의 그림을 잠시 바라보던 라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이쪽으로 블링크하고 다시 매직 애로우! "
라한은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선을그었다 매직 애로우가 직선
으로 뻗어가는 마법임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프라하는곡선의 공격을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라한이
매직 애로우를 휘어지게 쏘는 걸 실제로 봤기 때문이다. 그때 그가
얼마나 경악했던가. 아마 휘어지는 공격마법을 난생 처음 겪었으
리라. 이런 식으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도 라한뿐일 테고
"오호라. 괜찮은 각도군. 난 여기서 한 번 굴러야겠군. 그리고
손도끼를 이런 식으로 던질 거다. "
"실드를 비스듬하게 만들어서 손도끼를 빗겨가게 만들고, 매직
미사일로 여기서 이렇게 꺾이는 형태로 사용하지, "
처음 가상 대련을 했을 때, 라한은 마법의 부재로 어이없이 패했
다. 매직 애로우 한 가지로만 공격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라한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물론, 테세르나 슈라를 부
르면 되겠지만, 그건 싫었다. 대륙에서는마법사로만 알려져야하
는 탓이다.
그렇게 고심 끝에 만들어낸 게 마법의 변형이었다. 휘어지는 마
법, 급작스럽게 방향이 바뀌는 마법, 실드를 켠 상태로 달리거나
비스듬하게 실드를 만드는 법 같은 한 가지 마법을 여러 가지
마법처럼 사용하게 된 셈이다.
이 영향인지 처음 3 분짜리 게임이 지금은 30 분 이상의 장시간
게임이 되었다. 결과는 항상 라한의 패배로 이어졌지만.
로이나는 예전처럼 로브를 푹 눌러쓴 모습이었다. 라한에게 엘
프로 알려졌기에 현재 그녀의 모습도 엘프였다. 다른 사람의 이목
을 집중시키는 외모라서 로브를 눌러쓸 수밖에 없었다.
베르네 역시 신관복장을하고 있었다. 라한에게 베르네 신관으
로 기억되어 있을 터. 최대한 자연스럽게 만나기 위해 신관 복장을
고수했다.
로이나가 베르네와 류카라한을 급히 불러 모았다. 얼굴에 약간
의 조급한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로이나. 무슨 일이이?"
베르네와 류카라한이 차례로 물었다. 로이나의 얼굴에서 다급함
을 느낀 모양이다.
"라한이 방향을 바꿔어. "
"어디로?"
로이나의 대답에 베르네가재빨리 물었다 반면, 류카라한은관
심 없다는 듯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어, 실피드 말로는 카르 왕국 쪽으로 가
는 거라고 하던데. "
"아, 그럼 우리도 자리를 옮겨야겠군요. "
베르네가 당장이라도 달려갈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면
에서는 로이나보다 베르네가 더 다급해보였다.
"베르네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
"응? 무슨 일이지?"
베르네가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자 류카라한이 부드럽게 제지시
켰다.
본래 인간이 드래곤의 말을 막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드래곤의 입장에서 인간은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네는 별 달리 발끈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건
그가 별종 드래곤이라 불릴 만큼 트인 사고를 가지고 있어서였다.
또, 류카라한이 자신보다상위 드래곤인 로이나의 인정을 받았다
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서두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
"왜? "
"그의 집이 대륙의 중남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
어느새 로이나도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녀는 류카라한의 목소리 하나하나에도 몸을 미약하게 떨었다.
어지간히도 사랑스러운 모양이다.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갔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겠죠. 개인적
인 용무라면 그냥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누구나 개인 사정이라는
건 있는 거니까요. "
류카라한의 대답에 베르네와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리가있군. 로이나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럼 어쩌지?"
"여기서 좀 더 머물도록 하죠. 어차피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바
람의 정령왕으로 알아볼 수 있잖아요. 이동하는 건 우리 드래곤에
게는 식은 죽 먹기고요. "
어차피 그들에게 장소 개념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법의 종주가
둘씩이나 포함되어 있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라한이 포함된 상단 일행이 트루미 숲에 진입했다. 처음에는 그
리 느리지 않은 속도였다. 하지만, 숲 깊숙이 들어갈수록 속도가
점점 느려졌고, 지금은 사람이 걷는 속도의 반도 나지 않았다.
문제는 마차와 수레 였다.
숲에 나 있는 길은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밖에 되지 않
았다 수레와마차의 양 옆을 한사람이 호위하지도 못할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 상황이 이 정도이니 조심스럽게 이동할수밖에 없
었고, 지금은 거의 기다시피 할 정도였다.
한참 느린 속도로 이동하던 행렬의 선두에서 제라드가 손을 치
컥들었다.
"전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
"전투 준비!"
행렬이 길었기에 중간 중간에서 말이 계속 전달되었다 앞에서
끝까지 닿는 데만 네다섯 차례 외쳐야 했다.
외침을 들은 사람들은 곧바로 자신의 병장기를 들었다 그리고
상단 수레와 마차를 등진 채로 밖을 응시했다. 전투에 익숙해져 있
는 용병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적이다! "
누군가와 외침에 용병들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라한은 뒤로 물러난 채 전방을 응시했다. 느껴지는 기운으로는
백 마리를 훨씬 상회하는 숫자였다. 거기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용
병들에 비해 월등히 강한 기운이었다.
"트롤이다!"
"트롤이다!"
"서너 명씩 조를 짜서 트롤을 상대한다 "
파쿠차라는 용병이 주변 용병들을 다독였다. 그의 말에 라한과
에펠 일행을 비롯한 주변 용병 40 여 명이 대강의 조를 이루었다.
제라드가 전체 용병의 지휘를 맡았다면 파쿠차는 라한 부근에
있던 용병들의 지휘권을 쥐고 있었다.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그의 명성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는 B 급 용병이기는 하지만 경력이 15 년이나 되는 베테랑이었
다. 물론, 그 동안 실패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의뢰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기에 명성은 높아져만 갔다.
"이봐! 당신 뭐하는 거야?"
"전 마법사입니다. "
"아, 흠, 흠. 그렇군. "
라한의 대답에 파쿠차가 헛기침을 몇 번했다. 그리고 다시 전방
으로 눈을 돌려 매섭게 노려봤다. 라한은 로브 겉에 검을 차고 있
었다. 이 때문에 그를 검사라고 생각한 듯했다
'어디보자. 어떤 놈이 좋을까? 오, 저기 몰려 있는 놈이 좋겠군. '
트롤은 개인 생활을 하는 몬스터였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트를
을 한꺼번에 보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하지만, 트루미 숲에는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심지어 오우거
들도 수십 마리씩 때를 지어 다닐 정도였다.
두두두둑!
땅에 잔 진동이 계속 되었다. 트롤이 달려오는 발소리가 이런 진
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참! "
멀리 보이는 트롤을 보며 라한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
다. 바로 옆에 있던 란도 듣지 못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라한의 마법이 시전되자 중간쯤에서 달리던 트를 여섯 마리가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에펠 일행을 향해서 곧장 달려들었다.
"빌어먹을. "
"대열을 흩트리지 마라! "
"대열을 유지해라. "
트롤이 다가오자 용병들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제아무리
많은 경험 많은 용병이라도 이정도 수의 트롤을 보면 긴장할 수밖
에 없었다.
두두두두! 두두!
트롤이 상단의 50 미터근방까지 다가왔다. 지축을 울리는 트롤의
발소리가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마법사 공격 !"
"파이어 볼! "
"라이트닝 볼트!"
"아쿠아 애로우! "
누군가의 외침에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법을쏘았다. 천 명이 넘
는 용병 중에 마법사는 걱우 아홉 명, 라한과 란을 제외하면 일곱
명 밖에 없는 셍이다. 용병계에서 마법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여실히 증명되었다.
"전원 공격!"
"공격! "
용병들이 일제히 뛰어나가 트롤을 맞이했다. 에펠 일행도 자신
들에게 다가오는 트롤을 맞았다. 그들에게선 조금의 위축됨도 볼
수 없었다. 실전경험은 부족해도 수련은 제대로 한 듯했다.
"형님!"
"알았어. 매직 애로우! "
라한의 마법이 트롤에게 명중했다. 하지만, 치명타는주지 못했
는지 몸을 잠시 움찔거리기만 했다. 라한이 마법을 약하게 발현시
켰기 때문이다.
"태초에 내려온 마나의 힘이여. 나 그대에게바라노니. 그대
의 힘을 나를 통해 실현시컥라. 파이어 볼!"
란의 2 서클 마법이 에펠 일행의 앞에 있던 트롤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수련이 부족한지 트롤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데 그쳤
다. 그래도 폭발형 마법이라 어느 정도의 피해를 줄 수는 있었다.
쾅- !
"헉, 헉!"
란은 반쯤 누운 자세로 멍하게 앉아 있었다. 이미 마나가 바닥나
서 일어설 힘도 없었다.
"멍청하군 "
라한이 비웃듯 말했다.
란은 2 서클 유저 마법사였다. 2 서클 마법 몇 개를 사용할수는
있지만, 2 서클유저라고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실력이 낮았다. 그
런 그가 3 서클마법을 시전했으니 몸이 남아날 리 없었다. 의식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정도였다.
'저놈 진짜 바보 아냐? 이런 난전에서는 낮은 마법을 많이
쓰는 게 훨씬 유리한데. 쯧쯧. '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 라한도 그와 별 차이 없었다. 프라
하와 가상 대련을 펼치면서 깨닫게 된 사실 아니던가. 그가 없었다
면 자신도 1 서클 마법에 6 서클 정도의 제령기를 담아서 퍼부었을
게 분명했다. 그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으니
"혀, 형님. 저희 좀, "
"형님!"
에펠 일행이 라한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섰다. 그들에게 달라붙
은 트롤은 여섯 마리, 란의 마법에 트를 한 마리가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언제 치료해서 달려올지 몰랐다.
라한은 그들을 도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어디 한 번 고생해보
라는 의미였다. 그래야 자신의 위대함을 절실히 깨달으리라.
'좀 바쁜 척 해야겠군. '
"매직 애로우! 매직 애로우! "
라한이 마법을 사방으로 날렸다. 괜히 바쁜 척 해서 못 들었다는
분위기를 풍길 심산이었다. 라한의 마법은 에펠 일행 부근으로 단
하나도 날아가지 않았다. 가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비껴나가서 딴
곳을 맞췄다. 애초에 도울 생각이 없었음이다.
'귀찮네. '
라한은 옆에서 란이 멀뚱멀뚱 쳐다보는 게 상당히 귀찮았다 기
절 직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의식이 남아 있다는 게 문제였다.
어떻게든 자신이 하는 걸 보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 어어 ! "
"혀, 형님. 어 어, 어
팍- ! 털썩!
라한이 발을 헛디딘 듯 연기를 하며 란에게 넘어졌다. 그러면서
팔꿈치로 란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럴 땐 슬립 마법이 그립군. '
슬립은 3 서클 마법으로 클래스 마법이었다. 1 서클 마법과 6 서
클까지의 비클래스 마법을 사용하는 라한과는 거리가 먼 마법인
셈이다.
'본격 적으로 놀아볼까. '
"테세르! "
란이 의식을 잃었으니 걸림돌이 완전히 사라졌다. 크게 말한다
면 에펠 일행의 귀에 들어가겠지만, 그 정도는 목소리를 낮추면 해
결될 문제였다.
'생각보다 약한 녀석들이네. 벌써 비실비실 하잖아. '
라한이 보기에 에펠 일행은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직 큰
부상은 없었지만 그것도 얼마남지 않은듯했다. 한 명이라도부
상을 당한다면, 그 뒤는 볼 필요도 없었다
테세르! "
어, 주인. 무슨 . 어, 어어 이거 무슨 난리야? 뭔 괴물들이
이렇게 많아?
"그래서 무서워?"
-무섭긴. 정령계 마나 정령 중 최고 강자인 나 테세르를 어떻게
보는거야 저놈들은한주먹 감이야. 여기 봐봐. 근육보이지?저
녀석들의 물렁살하고 내 근육이 비교가 된다고 생각해?
테세르가 팔을 들어 보이며 짐짓 근육 자랑을 해왔다. 그의 말처
럼 엄청난 근육이 조각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라한은 테세르의 근육을 믿지 않았다. 겉모습을 마음대
로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정령 아니던가. 근육질 모습도 그런 모습
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정령계 통 틀어서 마나의 정령은 너 하나뿐이잖아. '
라한이 속으로 테세르를 마구 씹어댔다. 그는 저런 놈이 자신과
계약했다는 게 창피했다. 그렇다고 계약을 파기하자니 그것도좀
그랬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안 보면 보고 싶었다
"야, 헛소리 하지 말고. 저기 녀석들보이지?"
-어?오호, 저놈들무너지기 일보 직전인데. 내가 뒤에서 박살
내버릴까?
테세르의 표정이 음흥하게 변했다. 조화를 사랑한다는 정령이
맞나 싶었다.
"도와줘. "
-왜? 저놈들 배신자잖아.
"목소리 낮춰, 등신아. 듣겠다. "
-흠, 흠, 알았어. 근데 왜 도와주라는 거야? 저놈들이 그럴 가
치가 있나?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소곤소곤 되물었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
도들리지 않을 정도로작은목소리였다. 심법으로 오감이 발달하
지 않았으면 라한도 듣지 못했으리라,
.트롤을 처리하라는 게 아니라 적당히 다치지 않도록 도와주라
는 거야. 너무 빨리 죽어 버리면 재미없잖아. "
-오호, 그러니까 그냥 죽는 걸로는 화가 안 풀린다 이거지? 좋
아. 내 최선을다해서 도와주지.후후후. 히히히히.
요상하게 웃은 테세르가 에펠 일행이 싸우는 곳으로 달려갔다.
얼굴에 가득한 음흥함이 마귀를 연상케 했다. 계속 봐오던 라
한마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정령이 뭐 저래? 계약 파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군, '
테세르가 사라지자 라한은 또 다시 1 서클 공격마법을 퍼부어댔
다. 아쿠아애로우부터 쇼크, 매직 애로우, 그라운드웨이브등등
1 서클로주변을도배해버렸다. 하지만, 이 마법들 역시 에펠 일행
을 돕는 용도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트를 여섯 마리에게 합공당한 에펠 일행은 죽을 지경이었다. 그
들의 실력으로는 일행 전부가 달라붙어도 한, 두 마리가 고작이었
다. 헌데, 그 세 배가 넘는 트롤이 덤볐으니 버티고 있는 게 용했다.
"헉, 헉. 헙!"
트롤의 거대한몽둥이가 베린의 가슴을 노리고 들어왔다. 이에
헛바람을 들이켠 베린이 몸을 급히 비틀었다. 하지만, 너무 느린
반응이었다. 십여 분의 전투로 기력이 다 된 탓이다.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서 자포자기(흐론흐로)하는 심정이 되었고
이는 눈을 질끈 감아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 if! "
베린이 몽둥이에 맞기는 했지만, 생각보다통증이 덜했다. 의아
하게 생각한 베린이 한쪽 눈을 찔끔 떴다.
그의 가슴은 무언가 거대한 물체가쓸고 지나간흔적이 역력했
다. 입고 있던 갑옷이 찢어져 있었고, 드러난살은 벌겋게 달아오
른 상태였다.
'살았다. '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린 베린이 긴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에 테
세르의 모습이 보인 탓이다. 그제야 자신이 죽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테세르가 트롤이 휘두른 몽둥이의 방향을 바꿔놓은 걸
짐작했음이다.
에펠 일행이 트롤에게 맞을 때마다 테세르는 좋아 미칠 지경이
었다. 비록죽이지 못하는 게 안타깝기는하지만, 고통받는 것만
도 어디인가. 이 정도로도 쌓였던 감정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감히 우리 주인 목숨을 노려? 고생 좀 해봐라. '
평소에 티격태격 했지만, 테세르만큼 라한을 아끼는 존재도 없
었다. 긴 시간을 외톨이로 보냈던 테세르에게 빛이자 구원자였다.
또, 동반자이며 친구이기도 했다. 만약 누군가가 라한을 죽인다면,
소멸을 각오하고서라도 덤빌 게 분명했다.
부웅:
트롤이 에펠 뒤에서 그의 머리를 노리고 몽둥이를 휘둘렀다 하
지만, 에펠은 다른 트롤을 상대하느라 몽둥이가 날아오는 걸 미처
보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머리가 깨져 죽을 듯했다.
탁- !
날아들던 트롤의 몽둥이를 테세르가 툭 건드렸다. 이에 머리로
날아가던 몽둥이가 에펠의 어깨로 향했다. 그리고.
팍- !
"으악! "
에펠이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고통에 비명을 질러댔다. 어깨가
타는 듯한 느낌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에펠, 괜찮아?"
"에펠, 정신 차려. "
그래도 한 때 기사 지망생이라서인지 정신을 놓치는 않았다. 재
빨리 몸을 빼서 후속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몸을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또, 한쪽 어깨가말을
듣지 않으니 검을 휘두르는 것도 상당히 부자연스러웠다.
테세르의 역할이 대체로 이런 일이었다. 맞으면 죽는곳으로날
아가는 공격을 건드려서 죽지 않을 곳으로 향하게 하는 일 말이다.
이 때문에 에펠 일행 중에 죽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몸 성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시스마란 혼자만이 별 부상 없이 멀정한 상태
였다.
테세르는 지난 며칠 동안 시스마란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했었
다. 라한을배신한사람인지를조사하기 위함이다. 결론은믿어도
되는 사람이 었다.
시스마란은 소위 말하는 바른생활 사나이였다. 그것도 아주 오
래전부터 몸에 배일 정도로
이 때문에 에펠 일행도시스마란을포섭하지 못했다. 아니, 시도
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성정이라면 배신이라는 행위 자체에 거부
감을 느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한참 동안 1 서클 마법을 퍼붓던 라한이 주변을 슬쩍 훔었다. 상
단의 앞쪽부터 뒤쪽까지 차례로 그렇게 훌다가 마지막으로
에펠 일행을 바라봤다.
만신창이였다. 카르왕국의 마크는 지웠지만, 그래도 왜 멋있었
던 갑옷이 걸레가되어 있었다. 또, 팔혹은다리를다쳤는지 절뚝
거리거나 덜렁거리는 신체부위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도 피로 범
벅이 되어 있었고, 말끔하던 머리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베린은 허리에서 피가흘러나왔고, 에펠은 어깨에서 피를 흘리
고 있었다. 여자인 카류나는 얼굴이 부어올라 흥측했다.
"저놈은 뭐하는 거야?"
에펠 일행과좀 떨어진 곳에 프라하가보였다. 헌데, 그와싸우
는 트롤은 걱우 한 마리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트롤과 백중지세의
실력이었다. 하지만, 라한의 눈에는장난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
았다. 그의 본래 실력이면 트를 수십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할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난전에서 실력을 발휘한다면,
이곳을 공격한 트를 전부를 불귀의 객으로 만들 수도 있
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야겠군. '
"레비테이션! "
프라하에게서 시선을 돌린 라한이 레비테이션 마법을 시전했다.
공중에 떠오른 라한의 얼굴이 섬뜩하게 보였다.
"매직 애로우! "
1 서클 마법이지만 이전에 난사하던 마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라
한이 매직 애로우에 엄청나게 많은 제령기를 담은 탓이다.
스핑! 쾅- !
라한의 매직 애로우가상단의 전방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엄청
난 폭음. 매직 애로우가 부딪힌 곳에서 사방 2 미터의 크레이터가
생겼다. 6 서클 마법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파괴력이었다.
"파이어 애로우!"
단 한 번의 중얼거림에 파이어 애로우 수십 개가 생걱났다. 라한
이 의지를 담아 중첩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가라! 파이어 애로우!"
다시 한번 시동어를 외치자 파이어 애로우가 트롤을 향해 날아
갔다. 대부분은 직선으로 날아갔지만, 몇 개는 큰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마법도 보였다.
스핑! 쾅- !
"쿠웩! "
"! "
날아간 마법의 거의 대부분이 트롤에게 적중했다. 머리를 뚫은
마법부터 어깨, 복부, 다리 등. 빗나가는 마법이 거의 없었다.
"아직은 잘 안 되는군. "
라한이 노린 목표점은 트롤의 머리였다. 단 한 번에 뚫어서 모조
리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헌데, 머리를 정확히 핀뚫은 마법은 채
반도 되지 않았다. 아직 라한의 수련이 부족하다는 반증이었다.
"파이어 애로우! "
라한이 또 다시 파이어 애로우를 중첩 시전했다. 그리고 발사.
좀전과비슷한수의 트롤이 죽음을맞았다. 혹, 죽지 않았더라
도 그 트롤과 싸우던 용병들이 마무리 지었다
"이번은 요걸로 해볼까? 아쿠아 애로우!"
좀 전과 다른 하얀색의 화살 수십 개가 라한의 눈앞에 떠올랐다.
파이어 애로우 때보다 좀 더 많은 수였다. 파이어 애로우보다 아쿠
아 애로우의 마나 소모가 더 낮기 때문이다.
"가라! "
스핏! 팍-!
또 다시 수십 마리의 트롤이 죽음을 맞았다. 마법에 맞아 움찔거
릴 때, 용병들이 마무리를 해버린 것이다
백 마리를 조금 넘던 트롤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용병들의 수는
대략 9 백여 명이 남은 상태. 전투의 저울이 한 쪽으로 급속히 기울
기 시작했다.
"처리해라! "
"공격하라!"
원래의 힘으로도 트롤들을 처리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대규모
의 싸움으로 피해가 많이 나을 게 걱정 됐을 뿐. 헌데 트롤의 수가
반 정도로줄었으니, 싸움 결과는불보듯 뻔했다. 심지어 트롤마
저도 두려움에 됫걸음질 칠 정도였다.
"후, 힘들군. 어떻게든환골탈태를해야마법이 편해질 텐데."
라한은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며 두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그리
고 허리를 숙인 자세로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바닥에 주
저앉았다. 생각 같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후후. "
라한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에펠 일행을 발견했다. 위태위태하게
걱우 서 있는모습. 곧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모습이었다. 상거
지 꼴을 하고 있는 모습이 라한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혀, 형님. "
".0
미안하다. 괜찮으냐?"
흐르지도 않은 땀을 팔로 닦으며 라한이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
다. 얼굴 가득한 피로가 이번 싸움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느끼게 해
주었다.
라한의 얼굴을 본 에펠 일행이 길게 한숨 쉬었다. 라한도 자신들
못지않게 힘들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힘든 상황에서도 정령을
자신에게 보내주지 않았는가, 그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고마웠다.
"고맙습니다, 형님. "
"고마워요, 오빠. "
"형님. 근데 란은?"
뒤늦게 쓰러진 란을 본 베린이 물었다. 그가 잘못되지는 않았는
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라한을 배신하는데 앞장선 베린이
지만, 자신의 일행들에게는 정이 있는 듯했다.
"마나를 너무 많이 써서 쓰러진 것뿐이다. "
"아, 그렇군요. 형님은 괜찮으십니까?"
"좀 피곤하구나. "
라한이 대답할 때, 상단 행렬 여기저기서 부산거리는 소음이 들
려왔다.
"뭐해? 빨리 처리하고 이동한다. "
"서둘러! "
"상단주께서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어 하신다. 서둘러라. "
상단 행렬 주위에는 피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용병들도 이런 장면에 익숙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 누가 췄더라도 이런 곳에서 오래 머무르고 싶지는 않을
터 였다
"각자 한 명씩 맡아!"
"어서 서둘러. "
멀정한 용병들이 부상자들을 들쳐 업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죽은 사람의 물건 혹은, 부상자들의 물건들을 챙걱 들었다. 사람과
짐 모두를 한 사람이 담당하기엔 부피가 너무 컸고 무거웠다.
부상을 당했더라도 걸을 수 있는 용병은 혼자 힘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만큼 부상자가 많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우리도 가지. "
"베린, 괜찮아?"
끄덕끄덕.
란이 의식을 되찾았다. 라한이 웨이크 마법으로 그를 깨운 것이
다. 에펠 일행 중에서도 걸을수 없는사람이 있었다. 베린이 그였
다. 전투 중에 트롤의 몽둥이에 맞아서 허벅지 뼈가 부서진 탓이다.
"내가 업을게. "
말을마친 시스마란이 베린을들쳐 업었다. 그는그혼란스러운
전투 중에도 부상 하나 없이 멀정했다. 테세르가 특별히 배려를 해
준 결과였다.

상단 행렬은 격전지에서 한 시간 정도를 이동한후에야 멈추었다.
"전원 정지!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내일 새벽에 출발한다. "
이제 정오가 조금 지났으니 때 이른 휴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전투를 해야 할 용병들이 너무 지쳐
있었다.
"식사 준비해라. "
"예, 형님. "
라한의 곁에는 이미 프라하가 와 있었다. 그들의 논전은
항상 식사시간 직전에 시작했다. 그리고 식사 시간이 거의 끝날 무
렵에 마무리되었다. 그 때문에 에펠 일행이 미리 타놓은 음식으로
뒤늦게 식사를 했다.
오늘도 예외 없이 라한과 프라하가 상단 행렬을 벗어났다.
"오늘은 여기서 하지 "
"그러지. "
라한과 프라하가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사람들 눈을 의
식해서인지 행렬과 그리 많이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이런 곳에
서 멀리 갔다가는 오히려 의심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까 보니까 마법을 한꺼번에 사용하는 것 같더군. 우리가 논
전할 때는 한 번도 못 본 것 같던데. "
"풋, 비밀무기지. 비록너라고할지라도 내 힘을다보여줄수는
없거든.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꽤 많은 실력을 숨겼을 텐데. "
라한의 대답에 프라하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라한
의 말처럼 그도 힘을 숨겼음이다.
"그게 오래 사는 비결이지. "
"뭘 좀 아는군. "
"그럼 그거 말고도 나한테 숨기고 있는 실력이 있나?"
"그렇다고 해두지 . "
라한의 담담한 대답에 프라하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가 본 라한은 전투의 천재였다. 몇 번의 논전을 통해서 경험을
쌓자, 생각지도 못한공격을 해왔다. 이런 상태로 조금만 지나면
라한을 상대하기 힘들지도 몰랐다.
헌데, 보여준실력 외에도감추고 있는실력이 있다? 어쩌면 힘
든 정도가 아니라 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일까?'
프라하는 자신이 숨긴 실력과 라한이 숨긴 실력을 조심스럽게
비교해봤다. 뭔지는모르지만, 서로의 성격을 가지고 미루어 생각
한것이다. 결론은백중지세였다. 드러난실력은자신이 강하지만,
숨긴 실력은 자신보다 라한이 더 많다고 생각한 탓이다.
"시작하지. "
"후후, 그러지. "
라한이 숨기고 있는 실력은 생각보다 많았다. 프라하가 생각하
고 있는 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먼저 인챈트에 대한 실력을숨겼다. 그와 더불어 인챈트스크를
과 인챈트 된 마법 무구의 존재를 숨겼다
또, 슈라의 존재에 대해 숨겼다. 에펠 일행은슈라를봤겠지만,
프라하에게는 언급하지 않았다.
끝으로 마법 운용 능력을 상당 부분 숨겼다.
프라하가 알고 있는 라한의 마법은 휘어 들어가는 마법과 꺾어
들어가는 마법이 전부였다. 거기에 오늘 본 다중 캐스팅 정도.
실제로 라한은 알려진 것 외에도 많은 조합을 이루어냈다. 매직
애로우를 실드로 둘러싸서 물리 공격을 높인 것, 매직 애로우에 윈
드 스텝을 걸어서 날아가는 속도를 높인 것. 아쿠아 애로우와 쇼크
를 함께 묶어서 사용하는 것 등등. 상상도 할 수 없는 마법이 대부
분이었다.
식사를 마친 에펠 일행이 식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부
상자가 많아서 일의 대부분을 시스마란이 해야 했다
식기 정리를 끝내고휴식을 취하려 할 때, 세 명의 남자가다가
왔다. 호위대의 총 지휘를 맡은 제라드와 마법사로 보이는 40 대 남
자, 20 대 후반으로 보이는 말끔한 외모의 남자였다.
"흠, 흠. 이곳에 마법사가 있는가?"
"예? 누구시죠?"
제라드의 물음에 난이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얼굴에 약간의 의
구심을 담은 채 였다.
"자네가 마법사인가?"
"그렇습니다만 제게 용건이 있으신가요?"
"음, 상단주님, 이 사람인 것 같습니다. "
란의 대답에 제라드가 20 대 후반의 사내를 향해 말했다 공손하
지만 비굴하지 않은 당당한 목소리였다
"고맙소. 그만 가 봐도 좋소. "
"아닙니다. 저도 이들에게 볼일이 있어서요."
그들의 대화에 에펠 일행이 모였다. 그들도 무슨 일인지 궁금했
던 모양이다.
"저기
"아, 하하하하. 이런. 사람을 두고 뭐하는 짓인지. 하하하. 난
이 상단의 책임지고 있는 쿨샤크라는 사람일세. 아까 자네가 사용
한 멋진 마법을 보고 반했다네. "
뱁새눈을 가진 상단주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에게 호
감을 주기 충분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음흥함이 느껴
졌다.
"아, 저희 형님을 말씀하시는 모양이군요. 여기 란이 마법사이
기는하지만, 2 서클유저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까마법으로 트를
을 죽인 분은 저희 형님인데, 지금 여기 없습니다. "
"하하하. 그런가. 실수했구먼. 그래 형님이라는분은 있는가?"
시스마란의 말에 쿨샤크가다시 웃음을터트렸다. 하지만, 얼굴
에는 약간의 비웃는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웃음소리와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얼굴표정이었다.
"곧 오실 아, 저기 오시네요. "
"으응? "
시스마란의 대답에 쿨샤크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그곳
에는 로브를 입은 두 명. 라한과 프라하가 다가오고 있었다.
프라하는 허리에 검과 도끼를 함께 찼고, 라한은 검만 착용한 모
습이었다. 당최 누가 마법사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쿨샤크가 그 중에 한 명에게 다가가서 입을 열었다. 근거 없는
짐작으로 한 명을 찍은 것이다
"오, 자네가 마법사인가? 아까 마법은 정말 잘 봤네. 멋지더군. "
"난 마법사가 아니다. "
프라하의 싸가지 없는 대답에 쿨샤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반
말을 들은 게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자신은 그들의 고용주가 아니던가. 어떻게 보면 부하나 다름없
는 자에게 반말을 들은 셈이었다.
"난 이곳의 상단주인 쿨샤크라고 한다. "
"그래서?"
"난 너희들의 고용주라는 말이다. "
피식!
쿨샤크의 노한 말에 프라하가 비웃듯 콧바람을 내뱉었다. 그의
태도에 쿨샤크의 얼굴이 더 붉게 변했다 화를 참기가 힘든 모양이
었다.
"너, 이, 버릇없는새끼가감히
"이봐! 상단주! 프라하는용병이 아니야. 그러니까괜히 용쓰지
말라고. "
라한이 쿨샤크의 말을 끊고 대꾸했다. 이번에도 반말로 일관된
싸가지 밥 말아먹은 말투였다.
"이 이
"참으십시오. 쿨샤크님. 목적을 생각하십시오. "
옆에 선 마법사의 말에 쿨샤크가 얼굴을 풀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큼은화가다풀린 듯했다. 하지만, 부들부들 떨고 있는주
먹이 그의 화가 여전하다는 걸 드러냈다.
"자네가 아까 트롤을 죽인 마법사인가?"
"그런데?"
라한이 쿨샤크의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봤다. 왠지 어디서 본 듯
한 느낌이 들었다. 헌데도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상하군. 내가 기억이 나지 않는 놈이라면 엄청 오래전에 봤
거나, 지나가면서 본녀석일 텐데. 찝찝한이 기분은뭐지?'
떠오를 듯하면서도 기억나지 않자 짜증이 일었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흠, 자네 우리 상단에서 일하지 않겠나?자네 정도의 실력이라
면 후한 대접을 받을 걸세. 내가 아버님께 직접 말씀드릴 테니 날
따라오지 않겠는가?"
"싫어. "
라한이 단박에 거절해버렸다.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였다.
"이, 이. 보자보자하니까. 용병 나부랭이가감히 날
쿨샤크가화가 치민 듯소리쳤다. 이에 제라드의 얼괄에 불편한
기색이 드러났다. 자신도용병이 아니던가. 라한이 버릇없게 말하
기는 했지만, 용병 나부랭이라는 말은 듣기가 거북했다.
"얘가 왜 이래? 내가 싫다잖아. "
"이, 이놈. "
"쿨샤크님. 이만가시지요. 설득이 통하는놈이 아닙니다. "
"두고 보자. "
마법사의 말에 쿨샤크가 몸을 돌렸다. 돌아가면서도 어깨가 들
썩이는 게 화를 참기 힘든 모양이다.
쿨샤크가 쾌 멀리까지 사라지자 제라드가 앞으로 나섰다.
"자네가 아까 마법을 사용한 사람인가?"
"예. 그런데요. "
라한의 대답은쿨샤크를 대할 때와 천지차이였다. 그건 쿨샤크
를봤을때의 찝찝한기분이 원인이었다. 기억나지 않지만, 쿨샤크
에게서 몹시 불쾌한 느낌을 받은 탓이다.
"흠, 흠흠. 용병인가?"
"예. "
"등급을 물어도 되겠는가?"
"B 급인데요. "
제라드의 물음에 라한이 짧게 답했다. 굳이 숨길 얘기도 아니었
기에 꺼리는 게 없었음이다.
라한이 고분고분하게 대답하자 오히려 제라드가 어색해졌다. 하
지만 기분은좋았다. 자신의 명성이 라한을 공손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몇 서클인지 물어도 되겠는가?"
"1 서클이오. "
"흠. "
라한의 대답에 제라드가 침음성을흘렸다. 라한이 거짓말을 하
고 있다고생각했다. 그렇다고꼬치꼬치 캐물을수는 없었다. 검사
에게 검의 경지가 비밀이듯, 마법사에게도그건 마찬가지였다. 어
떤 면에서 서클을 물은 그 자체가 잘못된 태도였다.
"일행인가?"
제라드의 대답에 라한이 에펠 일행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에펠부터 한 명씩 차례로 바라봤다. 한 명씩 찍어서 바라보던 라
한. 시스마란에게 시선이 닿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일행입니다. "
라한은 에펠을 비롯한사람들을 일행이라고 말하기 싫었다. 그
렇다고 대놓고 아니라고 할수도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한 명씩
바라봤고, 시스마란에게 시선이 닿았을때에야긍정을표했다. 다
른 사람이 아닌 시스마란만 일행이라는 걸 마음속으로 표현한 것이
다. 물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알겠네. 다음에 또 보세. "
" 예. "
제라드의 얼굴에서 아쉬운 기색이 드러났다. 라한을 에펠 일행
에게 뺏겼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용병은 혼자 다니지 않는다. 그건 초보 용병이나 혈전사라 불리
는 뛰어난 용병이나 마찬가지였다. 최소 인원은 채워져야 야간 불
침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혼자서 매일 불침번 서며 밤을 샐 수는
없지 않은가.
제라드가 라한을 찾은 이유는 자신의 일행에 넣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일행이 있는사람을 데리고 올수는 없었다. 다른 일행에
게 미안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라드가 사라지자 라한과 프라하는 늦은 식사를 시작했다. 항
상 이 시간에 식사를 해왔기에 불편함은느끼지 않았다. 다만, 식
사가 차갑게 식었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이다.
식사를 마친 라한이 나무 등걸이 몸을 기댔다 그리고 주변의 동
태를 슬쩍 살폈다.
'테세르.
라한의 생각에 반응하듯테세르가모습을드러냈다. 하지만, 평
소와 달리 로브 안에 나타났다. 그곳에서 생기도록 의지를 부여한
것이다.
-푸, 푸. 주인! 이게 무슨 짓이야? 갑갑하게 왜 이런데서 부른
거야.
"시끄러. 그냥들어. 이 상단의 상단주가쿨샤크라는 이름을가
지고 있는놈이거든. 혹시, 그놈을본적이 있는지 한번 알아봐, 저
기 끝에 있는 마차 안에 있을 거야. "
-쳇, 맨날 부려먹기만 하고.
불만을 토한 테세르가 모습을 감추었다. 라한이 시킨 일을 처리
하러 간 것이리라.
잠시 후, 테세르가 라한의 로브 안에 나타났다.
"어때? 본 적 있어?"
-아니, 처음보는데, 근데, 그놈참음흥하게 생겼더군
테세르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그도 쿨샤크에
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테세르가 본 적이 없다면, 계약하기 전에 봤던 놈인가? 학교에
가기 전에는 계속 집에서만 지냈으니 아닐 테고. 그럼 학교라는 말
인데. 학교라면
"생각났다. 케른. "
-케른? 그게 누구야?
"아주 어릴 때부터 싹수가 노랬던 놈 있어.
-한 마디로 나쁜 놈이라는 얘기군.
상단주인 쿨샤크. 그는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서 케른이라는 이
름을 썼던 아이였다. 라한과 로이나에 의해 학교에서 퇴학당

쿨샤크는 너무 어릴 때와 비교해서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
때문에 라한도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었다. 헌데, 막상 알고나서
생각하면 그때의 얼굴이 많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한 번에 알아보
지 못했는지 스스로가 의아할 정도였다.
"좋군. 후후후. "
라한의 웃음에서 진득한느낌이 풍걱왔다. 상당히 음흥한웃음
이었다. 쿨샤크의 음흥함은 애교로 느껴질 정도였다.
케른을 만난 지 이틀이 지났을 때.
상단 행렬이 고블린의 공격을 받았다 천 마리가 넘는 엄청난 수
의 고블린이 었다.
이번에도 에펠 일행은 죽지 않을 정도로 고생해야 했다. 베린은
팔 하나와 다리 하나가 부러졌고, 에펠은 머리가 깨져서 붕대를 감
았다. 란은과도한마나의 사용으로쓰러지는게 생활이었고, 여자
인 카류나는 얼굴에 긴 상처가 생겨서 보기 흥하게 변해버렸다.
고블린의 공격을 받고 이틀 후, 상단 행렬은 트루미 숲을 빠져나
왔다. 숲을 빠져나와서 햇빛을봤을 때, 에펠 일행의 환호하는표
정이라니. 그 동안 그들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하고
도 남았다.
-주인! 그냥 저놈들 죽이자. 어차피 죽일 거잖아.
테세르는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정령인 그에게도 에펠 일행이
불쌍하게 보인 듯했다.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죽일 생각은 전혀 없는데. "
-그럼 저놈들을 살려줄 생각이야?
"응. 살려주긴 할 거야. "
라한의 대답에 테세르가 몸을 흠칫 떨었다. 라한의 표정은 인간
의 그것이 아니었다.
마치 아수라를 연상케 하는 얼굴이었다. 테세르에게는 전설 속
에서 악당으로 등장하는 마왕의 얼굴로 보였다
-주인은 나보다 더 심하군
"칭찬으로 생각하지 . "
테세르와라한이 대화를할때, 멀리서 물냄새가풍걱왔다. 멀지
않은 곳에 강이 있는 모양이다.
상단 행렬이 에샤르나 강에 도착했다. 수심은 그리 깊지
않지만, 폭이 엄청나게 넓은 강이었다.
강에 도착한 상단 행렬이 도강을 시작했다. 깊지 않다고는
하지만, 마차나수레가 건너기는 무리가 있는 깊이. 이 때문에 몇
몇 용병들과 짐꾼들은 마차와 수레를 통째로 들고 건너야했다.
"오늘 이곳에서 하루를 묵는다. "
제라드의 말에 짐꾼들이 수레를 한 곳으로 몰았다. 도난을 막고
침입을 방어하기 용이하도록 배치하기 위해서였다.
용병들은 젖은 옷을 갈아입느라 부산스러웠다. 용병이나 상단
수행원 중 마법사들은 이미 불을 피워놓고 옷을 말리고 있었다
도강한 사람 중 옷이 젖지 않은 사람은 단 두 명. 라한과 쿨샤크
뿐이었다. 쿨샤크는 짐꾼들이 자신이 탄 마차를 통째로 들었기에
젖지 않을 수 있었다. 반면, 라한은 강 건너편에서부터 날아와서
젖지 않았다
"빌어먹을 놈. "
"왜?"
프라하가 불만을 터트리자 라한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몰라. "
"싱거운 놈. 너 나 사랑하냐?"
"켁, 켁, 쿨럭! "
라한의 능글맞은 대꾸에 프라하가 사례 걸린 듯 기침을 해댔다.
엄청난 정신적 타격을 받은 모양이다.
프라하는 라한이 날아서 강을 건넌 게 불만이었다. 또, 남들 다
옷 말리느라 정신없을 때, 혼자서 놀고 있는 것도 짜증났다. 마법
사이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괜히 심술이 났다
"논전하러 갈까?"
"싫어, 임마. 나옷말리는거 안보이냐?"
"그럼 오늘 하루 쉬지 뭐. 난 좀 씻고 와야겠다. "
라한은 자기 할 말만 해버리고 강으로 가버렸다. 애초에 논전에
는 별 관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라한이 가버리자 프라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당장
심술이 나서 한말인데, 그냥 가버리다니. 괜히 자신만논전에 집
착하는 것 같았다.
"개자식. "
강가에 도착한 라한이 큰 바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하지만, 선뜻
손을 뻗어 세수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이 너무 차가울 것 같
은 느낑이 든 탓이다.
"깨끗하군, 테세르!"
-왜?
테세르는 이곳에 오기 한참 전부터 라한의 로브 속에 있었다. 그
곳에서 라한과 말동무를 하며 이동한 것이다. 이 때문에 라한의 부
름에 즉각 대답할 수 있었다.
"그릇! "
-또? 쳇. 정령을 세수대아로 쓰는 사람은 너 뿐일 거다
입으로는불평을늘어놓았지만, 행동은 이미 하고 있었다. 물처
럼 흐물흐물 해지더니 이내 세수를 하기 충분한 크기의 그릇으로
변한 것이다.
겉과 속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마구 새걱진 특이한 세수대아였
다 라한이 테세르의 몸에 새긴 인챈트 공식과 도형이 대아에 그대
로 남은 모습이 었다.
라한이 대아에 물을 담고는 손을 담갔다. 뼈를 얼릴 듯한 한기가
손에서부터 몸 구석구석으로 전해졌다.
"파이어! "
라한이 물에 담근 손 주변을 뜨겁게 달됐다. 그러자 대아에 담긴
물이 조금씩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세수하기 좋은 온도가 되자 라한이 손을 다. 그리고 시전 시켰
던 마법도 재빨리 흩어 버렸다.
-주인! 지금 세수할거지?
"응. 왜?"
-너무 깊이 담그지 마. 알았지?
"알았다. "
테세르의 입은 물이 담긴 대아의 안쪽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라한이 얼굴을 담그면 자칫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는 위치
였다. 전에도 이런 식으로 세수를 하다가 묘한 상황이 연출된 적도
있었다.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경고를 해준 것이다
어푸! 푸확!
으 더 러워.
라한의 얼굴은 별로 더럽진 않았다. 평소에 클리어 마법으로몸
을깨끗하게 유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법으로세수를하는건
개운한 맛이 없었다. 며칠에 한 번이지만, 이렇게 세수를 하는 이
유도 그런 개운함을 느끼기 위함이었다
"어따, 좋구나. "
-퍽도 좋겠다.
"피식!"
테세르는 이미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세수를 마치자
마자 더러운 물을 버리고 모습을 바꾼 것이다.
라한의 옆에 앉은 테세르가 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는 많은 정령들이 있어.
"그렇겠지.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져. "
-대부분 물이나 얼음의 하급정령이지만, 중급 정령도 있어.
"나도느끼고 있어. 어떤 속성인지는모르지만, 기운이 뭉쳐 있
는 건 느껴지거든. "
처음 라한이 캠핑 준비를 하지 않았을 때, 용병들이나 상단 호위
대에서 말이 많았다. 대놓고뭐라고하지는못했지만, 뒤에서 욕하
며 손가락질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그누구도불만을품지 않았다. 트롤에 이어 고
블린과 전투를 벌이면서 그의 실력을 직접 본 탓이다. 강자존의 법
칙. 확실하게 지켜지지는않지만, 어느정도는 인정되는곳이 용병
계였다. 그 때문에 다른 용병들도 라한을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다.
"근데 테세르. "
"왜, 중급 정령까지 이런 곳에 나타나지? 물살이 그렇게 강한 곳
도 아니잖아. 하급 정령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라한의 물음에 테세르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다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이곳의 물길이 자꾸 바뀌어서 그래
"물길이 바꿔다고?"
-응. 나도 잘은 모르지만, 이 강은 수명이 엄청 오래됐다고 하
더라고. 오랫동안 물이 흐르다보니까 물길이 조금씩 바꿔고 있어.
어느 정도는 상관없지만, 정해진 한계 이상으로 강의 흐름이 바꿔
면 안 되거든. 그래서 중급 정령이 크게 엇나가는 걸 잡는 거야.
"이상하군. 물살이 강한 것 같지도 않은데, 물길이 바픽다니. "
-때로는 강한 물살보다 끊임없이 흐르는 지속적인 힘이 더 크게
작용할 때가 있어. 여기가 딱 그런 곳이지.
테세르의 대답에 라한의 눈이 멍하게 바러었다. 뭔가 놓친 것에
대한 단서를 잡은 느낌이었다.
'강한 것보다 지속적인 어떤 것이 더 강하다. 강의 물길이 바꿔
다라 지속적인 건
"어쩌면 .테세르간다. 텔레포트!"
라한이 마법을 시전시켜 장소를 옮겼다. 며칠 전 상단 행렬이 머
물렀던 곳과 가까운 곳이 었다.
3 일 전. 라한은 프라하와 논전을 하기 위해 행렬을 벗어났고, 그
때 찾은곳이 이 동굴이었다. 한때, 고블린 가족이 살던 곳으로프
라하에 의해 주인 없는 동굴이 된 곳이다.
주인. 여긴 무슨 일이야?
"주변을 좀 지켜줘. 어쩌면 될 것 같아. "
라한은 테세르의 대답도 듣지 않고 심법을 운용해버렸다.
천천히 하지만, 지속적으로. '
이 말은 심법을운용할 때, 기본 바탕이 되는 조언이었다. 라한
도 이 바탕에 기인해서 심법을수련해왔다 헌데, 혈도를뚫을 때
는 이 조언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서둘러 뚫고 싶은 욕심에
과도하게 제령기를 돌린 것이다.
'이번은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지속적으로. '
전에 에펠에 의해 심법을 방해받은 후, 라한은 계속 심법을 수련
했다. 하지만,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전처럼 제령기를 계속부딪
쳐도 남은 하나의 혈도가 뚫리지 않았다. 무언가 금가는 소리가 계
속 나면서도 여전히 버티고 있던 혈도. 라한은 애초에 뚫리지 않는
혈도라고 결론 내 렸다.
'지속적으로, 지속적으로. '
같은 말을 계속 되뇐 라한이 심법을 한 바퀴 돌렸다. 그리고 마
지막으로 막혀 있던 혈도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이때, 제령기를 나눠서 부딪쳤었다. 부딪히는힘을 이
용해서 혈도를 뚫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냥조용히 혈도에 머물렀
다가 다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대신, 심장에 돌아온 제
령기를 이용해서 다시 심법을 운용했다. 심법을 펼치는 중간에 다
시 심법을 펼쳐버린 셈이다.
스르르륵! 스르르륵!
천 옷 흘러내리는 소리가 몸 구석구석에서 들려왔다. 그와 동시
에 약간따끔한통증이 전신 혈도에서 조금씩 전해졌다 마치, 원
래 있던 혈도가 조금씩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전신 혈도에 느껴지는통증이 막혀 있던 혈도까지 이어졌다. 그
리고 막혀 있던 그 혈도가 조금씩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뚫리는
게 아니라 열리는 느낌. 문을 열어서 제령기를 받아들이는 느낌이
었다
'됐다. '
마지막 혈도가 열리자 전신에 퍼져 있던 제령기가 빠르게 흐르
기 시작했다. 댐이 수문을 열자 물이 빠르게 떨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마지막 혈도를 빠져나간 기운은 다시 전신으로, 전신에 퍼져 있던
기운은 다시 마지막 혈도로 끊임없이 이동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이동하기를 수십 차례. 갑자기 몸 전신에 경련이 일기 시
작했다. 그와 동시에 심장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빠져나오는 느낌
이 전해졌다
"으 으으
몸 전신에 퍼지는 상쾌함에 저절로 입이 벌어지려했다.
심법의 기본은 입을 다무는 일. 라한이 입을 악 다물며 신음을
흘렸다. 고통에 내지르는 신음이 아닌 상쾌한 느낌에 터트리는 신
음이었다.
쾅- !
"쿨럭! "
이해할 수 없는 폭음과 함께 라한이 핏덩어리를 토했다. 이미 죽
은피인 듯 시커먼 색이었다. 그와 동시에 라한의 피부가 서서히 검
게 변했다. 피부 자체가 아닌, 피부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나와서
검게 보였다. 죽은피였다. 입만이 아닌 피부 전체에서 죽은피를 마
구 뱉어내고 있었다.
라한의 심법 수련은 자정이 휠씬 넘어서야 끝마칠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라한은 자신의 몸이 예전과 다르다는 걸 한 눈
에 알아봤다. 심장을 거의 덮다시피 한 농도 짙은 제령기와 몸 구
석구석에서 느껴지는 활력. 거기에 이해할 수 없으리만치 향상된
피부의 예민함에 스스로가 놀랄 정도였다.
"멋지군. 이정도 제령기면 7 서클 마법을 쓰고도 남겠어. 아니,
열 번은 충분히 사용하겠군. 푸하하하. "
라한이 7 서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 이유는 제령기의 부족이었
다. 헌데, 이번 심법 운용으로충분하다못해 넘칠 만큼의 제령기
를 쌓았다. 세상을 다 가진듯한느낌에 웃음을 참기 힘들었파.
"테세르!"
-어? 끝났군. 대체 뭐한 거야?
"왜?"
-주인이 심법 수련하는 걸 옆에서 보고 있었거든. 근데 어느 순
간에 갑자기 역소환 되어 버리더라고. 깜짝놀랐지 뭐야. 난주인
이 죽은 줄 알았어.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그때를 회상했다 테세르가 역소환 된 이
유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라한이 제령기를돌릴 때, 일정량의 기운이 단전을둘러쌌다. 라
한의 의도에 의해서가아닌 저절로그렇게 되었다. 아마도, 제령기
와는 사뭇 다른 제란기가 심법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막은 듯했다.
제령기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뭐, 그렇게 됐어. "
-얼굴 표정으로 봐서는 한 단계 발전한 것 같은데, 어떻게 나한
테 오는 기운은 똑같네.
"제란기는 그대로야. 이번에 발전한 기운은 제령기거든.
-쳇, 제란기도 좀 수련하는 게 어때?
"앞으로 그렇게 할게. "
라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허리를 몇 번 굽혔다 펴
고 팔을 빙빙 돌려서 몸을 풀었다.
"좋아. 아주 좋아. "
탄성 아닌 탄성을 지른 라한이 동굴을 나갔다.
-주인. 안돌아가?
"기왕 나온 거 마법수련이나 좀 하고 가지 뭐. 이론으로 생각해
둔 마법을 연습해봐야지. "
-그렇군.
테세르도 라한이 마법을 변형시키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때
로는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아이디어를 냈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쿠아 애로우!"
라한의 중얼거림에 마법이 직선으로 곧바로 뻗어나갔다.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그렇게 날아간 마법이 전방 백 미터 정도에서 멈췄고, 그 상태
에서 직각으로 꺾여 돌진했다. 상대의 방심을 노릴 수 있는 마법이
었다.
-오, 멋진데
"기본이지. 실드, 파이어!"
라한이 실드를 펼치고 그 앞을 불러 덮었다.
"가라! 실드파이어! "
실드가 불을 두른 상태로 빠르게 쏘아졌다.
-이 마법은 어디다가 쓸 거야? 파괴력이 별로잖아.
"길 낼 때 써야지. 겉모습에서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지잖아, 웬
만한 애들은 몸을 피할 수밖에 없을 거야. "
라한의 실드파이어는 운석이 직선으로 날아가는 느낌을 주는 마
법이었다. 하지만, 실제 파괴력은파이어 볼의 발끝에도미치지 못
했다. 그냥 겉모습만 위압감을 주는데 그쳤다.
아쿠아 애로우부터 쇼크, 실드, 파이어 등등. 라한은 1 서클 마법
전반에 걸쳐서 수련을 계속했다. 같은 마법을 여러 개 변형시키기
도하고, 서로다른마법을합치기도 했다. 때로는시간을두고공
격해서 방어가 곤란하도록 만드는 마법도 있었다.
라한은 아침이 되어서야 상단 행렬에 합류했다. 용병들과 짐꾼
들이 떠날 채비를 마쳤을 때였다.
"형님.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걱정했습니다. "
"생각 좀 하느라 어디 좀 갔다 왔다. "
짧게 대답한 라한이 에펠 일행을 뒤로하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
뒤를 프라하가 아무 생각 없이 따랐다. 괜히 그를 따라가면 재미있
을 것 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다.
"어디 가냐?"
"저기, "
라한이 손가락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한 때, 케른. 지금은
쿨샤크라는 이름을 가진 상단주의 마차였다.
"저기는 왜?"
"싹수 노란 놈한테 할 말이 있어서. "
"싹수 노란 놈? 쿨샤크라는 그 놈?"
"응. "
라한의 싹수 노랗다는 말에 프라하가 단번에 쿨샤크를 지목했
다. 그가 보기에도 그의 인물 됨됨이가 형편없게 보인 듯했다.
"멈춰라! 이곳은 이번 행렬의 총책임자이신 쿨샤크님의 마차다.
용건을 말
"시끄러. 나도 여기가 쿨샤크의 마차라는 거 알고 있어. "
라한의 대답에 앞을 막았던 남자가 눈을 치켜떴다. 반말을 들은
게 기분 나쁜 모양이었다.
"이, 이놈이
"쿨샤크한테 옛 친구가 왔다고 전해. "
"친구? 아, 알겠소. "
친구라는 말에 남자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는 일반 용병이 아닌
상단 소속의 호위무사. 상단주의 친구라는 사람에게 공손할 수밖
에 없는 위치였다.
"들어오시랍니다. "
들어갔던 용병이 다시 나오는 건 쾌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쿨샤크가 친구라는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던 탓이리라.
"수고해. "
라한이 지나가면서 호위무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치 자신의
부하를 대하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호위무사도 이런 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니, 뭔가 어색한 모습임이 분명했다.
똑, 똑-!
"누군가?"
마차의 문을 사이에 두고 쿨샤크가 되물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
가이곳에 없다는생각에 문조차 열지 않았다. 다만, 어떤 놈이 친
구를 사칭하는지 궁금해서 부른 것이다. 거기다 사칭죄를 적용시
컥서 크게 밟아줄 생각으로
"나다. "
".누구지?"
라한의 대답에 오히려 쿨샤크가 의아해했다. 상대의 태도가 마
치 진짜 친구에게 말하듯 당당하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대답할 줄
은 생각지도 못했다.
"류? "
이름의 한 자만 말한 라한이 잠시 뜸을 들였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그러다 상대가 조바심을 느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다시 입을 열었다.
"한. "
"한? 류 한 류한?"
" 오랜만이군. 싸가지 케른. "
벌컥!
라한이 음흉한 웃음을 터트렸을 때, 마차문이 강하게 열렸다. 급
한 마음에 발로 차서 연 것 같았다.
"너, 너 네가 류한이냐?"
"후후후. 머리 나쁜 건 여전하구나. "
라한의 능글맞게 대꾸하자 쿨샤크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라
한 때문에 쫓걱난 학교. 그 때문에 아버지에게 얼마나 혼이 났던
가. 그때를 생각하자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류한, 네놈이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모른 척 했으면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을. '
"반갑다. 이런 곳에서 널 만나게 되다니 놀라운데. 아, 내 정신
좀봐, 들어와. 이래봬도마차가꽤 넓다구."
쿨샤크의 입에서 생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얼굴마저 좀
전의 살기를 띤 모습은 완벽히 지워진 상태였다. 그의 이중성이 여
실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저놈 봐라.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될 놈일세. '
'대단한 놈이군. '
라한과 프라하의 머리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음흥한
놈. 그들은 서로를 그렇게 평가했다.
딸각!
마차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여덟 명이 다리를 뻗고 앉아도 자리
가 남을 정도였다.
"앉아. 근데, 본명이 라한이라고 했나?"
"응. 라한. 근데 너 출세했군 대!자작가의 후손에서 상단운용
다 하고 말이야. "
라한의 비꼼에 쿨샤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제야자신
이 예전에 했던 거짓말이 생각난 모양이다.
쿨샤크는 원래 용병대장의 아들이었다. 루이나 왕국에서는 쾌
알아주는 거대한 단체인 붉은 매 용병단. 그곳 대장의 외아들이었
기에 강한 수행인을 둘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고가의 인챈트
스크롤까지
"그때는 어린 마음에 거짓말을 했지. "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
겉으로는 친한 친구 사이의 대화였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많이 컸어. '
'두고 보자. '
라한이나 쿨샤크 두 사람은 상대를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왕이면 상대의 약점에 대해서
둘의 묘한 분위기에 프라하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의
속마음이 겉모습과 다름을 짐작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신경전이
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인간들의 희한한 대화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난 학교 졸업하고 여행을 다녔지. 쾌 오랫동안 집에 가지 못했
어. 그러는 넌?"
"난학교그만두고 아버지한테 검술을 배웠어. 아, 우리 아버지
는 쾌 큰 용병단의 대장이었거든. 검을 가르쳐 줄 사람은 차고 넘
쳤지. "
말을 멈춘 쿨샤크가 라한을 바라봤다. 자신이 신분을 말했으니,
너도 말하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뭐 저따위가 다 있어?'
쿨샤크의 시선에도 라한의 눈빛은 고요하기만 했다. 애초에 신
분을 말해줄 생각이 없었음이다.
"그러다가 11 년 전이던가? 그때 아버지께서 용병단을 해체시키
고 상단을 만들었어. 그 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장사를 시작한 거
지. 호위무사는 아버지 부하였던 용병들이 맡아서 했어. 호위무사
에게 들어가는 돈이 적어서 상단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고. 그러
다가 왕국에 변고가 생겨서 상단 본점을 나메라 왕국으로 옮겨야
했어. 뭐, 그때부터 우리 뮬라상단은 나메라왕국에서 쭉 지내오
고 있지. "
"그렇군. "
쿨샤크가 자신에 대한 얘기를 자세히 설명한 건 상대를 안심시
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방심을 노리겠다는 심산
이 었다.
"넌 어쩌다가 용병이 된 거야?"
" 어 쩌다보니 . "
라한의 대답은 무성의 그 자체였다. 그런데도 얼굴 표정이 부드
러우니 화를 내기도 애매했다. 기분이 무척 나쁜데도 화를 내지도
못하는 상황. 일단은 라한의 승리라고 볼 수 있었다.
"앞으로 여기서
"일행들이 기다려서 나가봐야겠어. 다음에 또 보자고. "
라한은 자기 할 말만 마치고 나와 버렸다. 그 뒤를 프라하가 묵
묵히 따랐다. 쿨샤크의 신경을자극하기 충분한행동이었다. 하지
만, 화를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둘의 얼굴에 공통적으로 미소가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쾅- !
"빌어먹을 자식. 류한. 라한이라고 했던가?죽여 버리겠다. 내
명예를 걸고 죽여 버리고 말겠다. "
라한이 마차를 나가자 쿨샤크가 분노를 터트렸다. 짧은 시간이
지만 쌓인 분노가 상상을 뛰어넘었다 검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쿨샤크에게서 이 정도의 진득한살기가 퍼져 나오다니. 주변에 어
린애라도 있었다면 질식사하기 딱 좋을 정도였다.
쾅쾅쾅!
"데메크! 데메크! "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쿨샤크가 누군가를 불렀다. 뭐가 그
리 급한지 마차문을 마구 두드리기까지 했다.
딸깍!
잠시 후, 예전에 쿨샤크의 옆에 있던 마법사가 마차 안으로 들어
왔다. 로브를잔뜩눌러써서 얼굴을확인할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풍기는 음흥한 기운만으로도 쿨샤크 못지않은 나쁜 놈
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부르셨습니다, 쿨샤크님, "
"좀 전에 나간 놈. 라한이라는 그 새끼를 조사할 수 있겠어?"
"조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파밀리어를 보내면 되니까
요. 하지만, 그와 싸우려는 거라면 참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
데메크가 쿨샤크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라한의 실력이 녹록치
않다는 걸 짐작한 것이다
"그놈이 그렇게 강해?"
"잘 모르겠습니다 제 눈에는 1 서클로만 보이더군요. 하지만,
그가 보여줬던 힘은 1 서클의 실력이 아닙니다. 그건 제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강자라는 얘기도 됩니다. 강자는 약자를 속일 수
있거든요. 그게 마법이라는 분야입니다. "
데메크는 5 서클 마스터의 마법사다. 어느 왕국에 가든지,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실력자. 헌데도 그는 왕국에 몸을 담지 않았
다. 아니, 담을수 없었다. 그의 성정이 너무잔인했기에 왕국에서
배척받은 것이다.
잔인한 마법사. 소문으로는 흑마법도 썼다고 소문났던 데메크.
악명 때문에 마법사의 탑에서도배척받았다. 결국, 오갈데 없어서
뮬라 상단에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실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해?"
"믿어지지 않지만, 6 서클이라고봐야합니다 하지만, 마스터에
는 이르지 못했을 겁니다. 잘해야 6 서클 유저 정도겠죠. "
데메크가갈라진 목소리로 차분히 대답했다. 이에 쿨샤크가 조
금은 놀란 표정을 띠었다. 라한이 대마법사라 불리는 6 서클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7 서클일 가능성은 없는 거야?"
"역사적으로 7 서클 마법사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나타났던 7 서클 대마법사들도 오래지않아 모습을 감추었죠. 나이
로 봐서도 7 서클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
"어느 정도의 지원병이 있어야 처리할 수 있지?"
"지금 저희가 데리고 있는 호쥐무사에 제가 더해진다면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용병입니다. 용병이 이유 없이 공격받
는다면, 다른 용병들이 참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죠. 또, 저
희는 지금 비싼 물품을 수송 중입니다. 만약 그를 처리하다가 용병
과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수송이 힘들어 질 겁니다. "
일단데메크는쿨샤크를말리고나섰다. 그렇지만, 라한을처리
하는 일 자체에는 찬성한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지금은 참고 일을
끝낸 후에 처리하자는 의미를 표한 것이다
"알았어. 일단 그 놈을 감시해줘. "
"알겠습니다. "
쿨샤크는 라한을 용서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설사 그가 전설
적인 영웅이라도 이런 마음은 변함없을 터였다. 그에 대한 분노는
참고 넘어갈수 있는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의 경중
은 따질 줄 알았다. 지금은 상단의 귀한 물품을 수송하는 중
이었다. 이 일이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마차를 나온 라한의 조소를 머금었다. 그는 쿨샤크가 애써 태연
한 척 하고 있음을 한 눈에 꿰뚫었다 그 모습은 과거 애들을 모아
서 군림하던 때의 모습과 비슷했다.
선생들 앞에서는 착한 척. 아이들에게는 악명이 자자했던 쿨샤
크. 과거의 모습과 지금 모습이 자꾸 겹쳐 보였다.
'넌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나한테 안 돼. '
"라한. 대체 아까 그놈한테는 왜 간 거야? 넌 그냥 갔다가 아무
것도 안 하고 나왔잖아. "
프라하의 물음은 일견 타당했다. 괜히 정체를 드러내서 상대의
경각심만 불러일으킨 게 아닌가. 차라리 신분을 숨기고 몰래 괴롭
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벌써 하고 왔어. "
"뭐 했는데? 마법이라도 쓴 거야?"
절레절레
프라하의 물음에 라한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방긋 웃으
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먼저 공격하도록 만들어야지. "
"응? 무슨 소리야?"
"명분도 없이 그놈을 건드릴 수는 없잖아. "
"그럼 명분을 만들었다는 거야?"
"응. 두고 보면 알아. 크크크. "
라한의 웃음이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프라하는 라한의 이런 웃
음을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놀라곤 했다. 엑스마스터에 이르러서
수양이 될 만큼 되었음에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상단 행렬이 출발하자 라한은 카류나와붙어서 지냈다. 쿨샤크
와 에펠 일행에게 특별한 사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오빠! 나. "
"왜? "
"나 있잖아. "
"녀석. 무슨 얘긴데 그래? 편하게 말"해. "
카류나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라한이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
줬다. 이에 카류나도 불안한 마음을 풀고 입을 열었다.
"나 얼굴에 흥터가 생겼는데, 그래도 좋아?"
"후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카류나는 그래도 예쁜걸. 그리고
난 카류나의 외모를 보고 반한 게 아니잖아. 외모는 껍데기일 뿐이
라고. "
"오오빠, "
카류나가 라한의 품에 안겼다. 얼굴에는 정말 감격했다는 빛을
강하게 띤 모습이었다.
하지만, 라한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세워둔 계획 때문에
잘 대해주긴 했지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또, 마음에 안 드
는 여자를 안아야 한다는 부담감까지.
'못해먹 겠네. '
"어이! 라한! 사랑놀이는 그만하고 가자. "
"응? "
프라하의 등장에 라한이 재빨리 카류나를 떼어냈다. 지금만큼은
곤경에 처한 자신을 구해준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오빠. "
"금방 갔다 올게, 다른 녀석들하고 놀고 있어, "
라한이 카류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그런 행동이었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카류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 역시 나름대
로 계획을 세워놓고, 이런 행동을하고 있었다. 계획만두고 생각
하면모든게 순조로운셈이다. 하지만, 여자는여자인지라부끄러
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라한이 사라지자카류나가에펠 일행을불러 모았다. 하지만, 이
번에도 시스마란은 제외시켰다. 그가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하지 않
았다는 생각에서 였다.
에펠, 란, 베린이 모이자 카류나는 자신과 라한의 사이를 말했
다. 또, 라한이 자신의 말이라면사족을못쓴다는얘기도. 이에 에
펠 일행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라한의 방심을 유도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라한과 프라하가 상단 행렬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로 이동했다.
어느 정도 떨어지자 라한이 주변을 대충 살폈다. 데메크의 파밀리
어를 찾는 행동이 었다.
라한은쿨샤크와만난 바로 다음 날, 자신을 보는눈이 있음을
짐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람의 미행이 아닌 파밀리어라는
것도 .
'저기 있군. '
라한은 파밀리어를 의도적으로 방치했다. 역정보를 흘려서 오히
려 상대의 방심을유도하려는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젠그럴 필
요가 없었다. 잘못된 정보도 흘릴 만큼 흘렸고, 더 이상 모른 척 했
다가는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었다.
남들에게도 쾌 대단한 마법사로 알려지지 않았는가. 그런 자신이
일주일 이상 파밀리어를 못 찾아낸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데메크가보낸 파밀리어는손톱크기 정도의 벌레였다. 상단행
렬이 움직일 때는 수레의 짐 속에서, 행렬에서 이탈했을 때는 나무
나 땅위를 기어 다니며 라한을 살폈다.
"어?"
파삭!
라한이 뒤늦게 발견했다는 듯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기
분 나쁜 표정을 지음과 동시에 벌레를 밟아 버렸다. 상대에게 지금
발견했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낸 모습이었다.
"가자. "
"너, 뭐한 거냐?"
"파밀리어였어. "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 지금까지는 일부러 살려준 거
아니었어? 근데 왜 지금 죽이는 건데, "
프라하도 파밀리어가 나타난 그 순간 바로 알아차렸었다. 라한
도알고 있으리라는생각에 아는척 하지 않았을뿐이다. 또, 자신
을 살피는 게 아니라는 이유도 손 놓고 구경한 이유 중 하나였다.
헌데, 라한의 표정으로 봐서는 지금에서야 발견한 듯 보이지 않
가. 자신이 라한을 너무 과대평가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중요한가? 앉아. "
"어? 어."
라한의 말에 프라하가 엉거주춤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에
라한이 실소를 터트렸다.
"아공간 오픈!"
"헉!"
라한이 아공간을 열자 프라하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는 라한은 분명 6 서클의 마법까지 쓸 수 있는 1 서클 마법
사였다. 좀 이상하긴 했지만, 단하나의 마나고리로 6 서클마법까
지 펼치는 특이한 존재였다.
헌데, 아공간창출은 7 서클마법. 라한과 거의 붙어 다녔음에도
7 서클에 올랐다는 걸 짐작도 못한 것이다.
"왜? 이상해?"
"언제부터 가능했지?"
"좀 됐어, 자, 하자고. "
말을 마친 라한이 바닥에 희한한 모양을 그렸다. 나름대로 숲이
라는상황을 표현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프라하에게는 난해하기
그지없는 요상한 그림일 뿐이었다. 세밀한 터치는 드워프 저리가
라 할 만큼 잘하지만, 예술적인 재능은 꽝이라서 이런 식의 그림이
나왔다.
"야! "
"그냥 좀 넘어가라. 귀찮다. "
라한은 굳이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숨겨야지'라는
생각이 아니라, 그냥 귀찮았다.
실제로 라한은 7 서클마법을 거의 사용해보지 못했다. 아니, 아
공간 창출 외에는 시전 해본 마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공간창출은마나파동자체가제로인마법. 하지만, 나머지 7
서클 마법은 마나 파동이 너무 심하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곳에서
7 서클 마법을 사용했다가는 당장 이목을 집중시킬 게 분명했다. 그
런 상황이 달갑지 않아서 미룬 것이다.

쿨샤크와 데메크가 마차에 모여 구슬을 보고 있었다. 라한이 하
는 행동을 파밀리어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컥! 쿨럭! "
라한이 파밀리어를 밟아 버리자 데메크의 입에서 피가 한움큼
뿜어져 나왔다. 파밀리어와 데메크 사이에 연결된 심령을 통해 고
통이 전해졌음이다.
"괜찮아?"
"쿨럭, 쿨럭! 괘, 괜찮습니다. "
말처럼 데메크가괜찮은 건 아니었다. 얼굴은하얗게 질려 있었
고, 뿜어진 피는 대아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후우, 휴, 아무래도파밀리어를눈치 챈 것같습니다. "
숨을 몇 차례 몰아쉬던 데메크가 힘겹게 대답했다. 부상은 당했
지만, 죽을 정도는 아닌 듯했다.
"그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였나?"
"아닙니다. 지금쯤 눈치 챌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알면서 파밀
리어를 방치했던 제 잘못이죠. "
"그렇군. "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데메크의 물음에 쿨샤크가생각에 잠겼다. 그의 어떤 면을노리
고 괴롭힐지를 고민하는 모습이 었다.
실제 그가 라한에 대해 알아랜 건 거의 없었다. 프라하라는 사람
과 이해가 가지 않는 논전을 벌인다는 것. 카류나라는 여자 용병과
각별한 사이라는 것. 걱우 그 정도였다.
"카류나라는 여자를 이용해볼까 하는데. "
"카류나라면 라한의 여자 친구 아닙니까?"
"어떻게요?"
' 크크크. "
데메크의 물음에 쿨샤크가 음침하게 웃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여자를 내 여자로 만들 생각이다. "
"예? 하지만, 쿨샤크님은 엘퐁소 남작가의 따님과 혼담이 오가
고 있지 않습니까? 이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쿨샤크는 귀족이 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귀족에게
자금을 대주기도 하고, 때로는 직접 나서서 유혹하기도 했다. 그
결과물이 엘퐁소 남작가의 장녀 프리지아 엘퐁소였다.
그루일란드 엘퐁소 남작은 나메라 왕국의 남부에 위치한 엘퐁소
지방의 귀족이었다. 하지만, 그의 형인 에케루니아폰엘퐁소가후
작이라는 게 중요했다. 이 때문에 단순히 남작이라는 작위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위치 였다.
또, 지방 귀족들 사이에 명망이 높아서 중앙 귀족들도 탐내는 인
재였다. 그의 성정이 권력 싸움을 싫어해서 중앙에 진출하지 않았
을 뿐.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진출할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알려지지 않게 해야죠. 어차피 라한 그놈을 괴롭히기만 하면
됩니다. "
"알아서 하시리라 믿습니다만, 조심하셔야합니다. 아시겠지만
파밀리어 마법은 흑마법입니다. 제가 흑마법사라는 걸 알았으니
미리 방비를 할 겁니다. 거기다 저희가 노리고 있다는 것도 알 테
지요. 이미 준비를 하고 있는 적은 상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걱정 마십시오. 라한을 직접 건드리는 게 아니니 눈치 채지 못할
겁니다. 또, 돈에 넘어오지 않는 여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 "
"후후후. "
쿨샤크의 웃음에 데메크도 함에 웃었다. 비웃음기가 가득 담긴
웃음이었다.
쿨샤크와 데메크는 성격이 비슷했다. 자신이 일어서기 위해서
남을 짓밟는다는 점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없앤다는
점. 둘이 함께 다니는 이유도 이런 공통점이 많아서였다 어찌 보
면 라한과도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라한이 조금 더 음흥하고 똑
똑하다는 정도?
라한과 프라하의 논전은 십 분도 안 돼서 끝났다. 프라하가 논전
에 집중하지 못해서였다. 논전을 하는 내내 라한의 7 서클 진입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조용한데서 수련 좀 해야겠다. 앞으로 한 동안은 논전을 못할
것 같군. "
"왜?"
"몰라서 물어? 넌 계속 발전하는데 난 제자리걸음이잖아. 화나
서 못 참겠다. "
"소심하기는. 그러던가. "
라한의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대답에 프라하가 눈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라한과 대화를 하면 자신이 밀리는 느낌을 받았다.
'빌어먹을 놈. 그래 너 잘났다. '
"쳇. "
혀를 크게 한번 찬 프라하가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얼굴
가득 심통 났다는 표정을 지은 채.
"갔군. 그럼 나도 가봐야겠군. 플라이! 텔레포트! "
프라하가사라지자라한도수련의 필요성을느꼈다. 또, 사용해
보지 못했던 7 서클 마법을 쓰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유적이라 쓰고 던전이라 읽는다
라한이 트루미 숲의 상공으로 이동해왔다 상단 행렬이
처음 트롤 무리와 싸웠던 그곳이었다
라한이 주변을 슥 훑으며 몬스터가 많은 곳과 없는 곳을 탐색했
다. 하지만, 숲이 너무울창해서 확인하는 게 불가능했다.
"라세르?"
-응. 왜 안부른나 했다.
"어떻게 됐머? 그놈들이 뭔 소리를 하디?
테세르는 쿠샤크의 마차부근에 숨어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
다. 오늘 파밀리어를 처리했으니. 뭔가 결정적인 계획을 세울 거라
는생각에서였다. 역시나 그들의 방향이 정해졌고, 테세르는자기
가들었던 내용을 라한에게 말해줬다.
-어떻게 할 거야?
"카류나를 꼬시겠다고? 그건 내가 원하던 바다. 키키, 근데 엘
퐁소 남작가의 장녀라 재미있겠군. 아주 재미있겠어. "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럴 땐 주인
인 라한이 너무싫었다. 마치 악당같지 않은가. 자신은 영웅을도
운 정령이고 싶었지, 악당을 도운 정령은 되기 싫었다.
-주인. 그 웃음 좀 어떻게 하면 안 될까?
"하하하, 내가 체통을 잃었군. 후후. "
-근데, 저기.
"응? "
테세르가 숲의 한 쪽을 가리켰다. 라한에게는 나무가 울창하다
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기서 마나가 풍겨 나온다.
"마나?"
-응. 주인보다는 내가 마나에 예민하잖아,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잠깐 생각을 거듭했다. 아주 찰나였지만,
별별 생각을 다해봤다. 라한이 생각을 마쳤을 때, 그의 얼굴에는
진한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가자. "
-그럼 그렇지. 주인이 이런 일에 빠질 리가 없지.
테세르의 말을 뒤로하고 라한이 몸을 움직였다.
플라이 마법을 시전한 상태 그대로 트루미 숲의 구석으로 날아갔
다. 보통 상인들이나 용병들이 다니는 길보다는 한참 안쪽이었다.
라한이 한참 날아가자 테세르가 그의 옷깃을 당겼다. 이에 라한
이 움직임을 멈추고 테세르를 바라봤다.
" 왜? "
-여기서 아래로 내려가.
라한은 울창한 나무를 뚫고 아래로 내려갔다. 테세르가 가리킨
바로 그 장소였다.
"여기서 마나를 느낀 게 맞아?"
-응
라한은 기운에 무척이나 예민한 존재였다 기감에 대해서만큼은
드래곤보다도 한 수 위로 봐야 할 정도였다. 헌데 그 어떤 기운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
-주인하고 나하고 같아? 난 마나의 정령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뭘 느꼈다
는 건지 알아야 수긍할 게 아닌가.
"어떻게 해야 되지?"
-음, 여기 이 바위를 들어 올려봐.
"뭐시라?"
-아, 미안, 이건 내가할일이구나
말을 마친 테세르가 바위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바위를
라한의 뒤쪽으로 던져 버렸다.
쿵- !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오며 부서진 파편이 날아올랐다. 엄청난
괴력이었다 마나의 정령이 아닌 힘의 정령이라 부르는 게 더 어울
릴지도 몰랐다.
으차!
쿠루루룽!
거대한 삽 모양으로 변한 테세르가 바위 아래를 파기 시작했다.
판 곳을 두드려 다지기도하고, 박힌 돌을 빼내어 가루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딱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통로를 만들어
냈다.
쿠르르릉!
테세르가 약 5 미터를 팠을 때, 라한의 기감에도 무언가 느껴지
기 시작했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미약
한 기운이었다.
슥삭 탁 탁
테세르가 다시 5 미터를 더 팠을 때, 라한의 기감에 확실한 기운
이 잡혔다. 세삼 테세르의 마나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다.
'역시 마나의 정령이라는 건가?'
팍 팍 팍
테세르가 거의 20 미터를 파내려갔다. 그곳에는 무언가 기형적인
문자가 새겨진 바위가 놓여 있었다 현 세상에서 라한만 읽을 수
있는 오래된 문자였다.
"윈드! "
라한이 바람을 불러일으컥서 바닥을 대충 청소했다. 문자를 좀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주변을 정리한 것이다.
"마나의 유적?"
-마나의 무덤이라고 쓰여 있어?
"응. 근데 황당한놈일세. 유적이라는 건 후세에 발견하면 붙이
는 이름 아린가?"
깨끗해진 바닥은 둥그런 원형이었다. 외곽 쪽에 은색 고리가 달
려 있어서 누군가 드나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손잡이의 크기로 봤
을 때, 그리 크지 않은 존재가 이동한 듯했다.
-들어 갈 거지?
"그래야지,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잖아. "
-알았어.
말을 마친 테세르가 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엄청난 힘을 발휘해
서 그 바위를 서서히 들어올렸다
크르르르릉!
탁- !
바위를 들어 올리자 안쪽에 계단이 나타났다. 사람의 걸음에 맞
춰서 만들어진 계단이었다. 이곳을 만든 존재도 인간 혹은, 유사
인간인 모양이다

계단 위쪽은 거의 수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조금씩
완만해지기 시작했고, 5 백 미터를 내려갔을 때는 거의 수평의 형
태였다.
"던전이 뭐 이래? 괴물도 좀 나와야 되는 거 아닌가?"
-던전? 그게 뭐야?
테세르의 물음에 라한이 망설이는 빛을 띠었다. 자신도 던전이
뭔지 몰랐다. 수많은 생을 살면서 언젠가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알수 없었다. 그냥 이곳에 왔을때, 던전이
라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그냥 던전이라고 있어. "
-쳇. 여긴유적이라고.마나의 유적. 자기가말해놓고도모르네.
"그게 그거지 "
라한과 테세르는 긴 통로를 지나면서 실없는 소리를 해댔다. 이
곳에서 풍기는 으스스한 느낌을 풀어보려는 의도에서였다.
-다 왔다.
"나도 느끼고 있어. "
라한의 앞에 거대한문이 나타났다. 기하학적인 문양과글씨가
마구 새걱진 문이었다.
이 문 만으로 판단하면 거인이 살았던 곳으로 봐도 무방했다. 지
금까지 지나온 작은 크기의 계단이 아니었다면, 라한도 그렇게 생
각했을 터였다.
-열까?
"잠시만. "
테세르를제지시킨 라한이 문에 새걱진 글을찬찬히 읽었다. 별
내용이 담긴 글은 아니었다. 라한의 조심스런 성격이 한 번 정도
주춤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열어, "
- 응.
침 삼키는 소리가 홀을 울렸다. 둘 모두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라한과 문을 번갈아 바라보던 테세르가 이내 문을 밀었다. 서두
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그그긍 팡!
문은 아주 작은 힘을 주입했음에도 활짝 열렸다. 마치 누군가 오
기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뚜벅!
문이 열리자 라한이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의 어깨에
는 테세르가 앉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라한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몸을 움찔 떨었다. 자신의 발자국소
리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한 것이다.
문 안은 공동이었다. 사람 수백 명은 능히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
로거대한크기였다. 하지만, 라한이 기대했던 괴물은그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벽에 가득새걱진 벽화와공동의 끝에 놓인작은상
자만이 라한을 반길 뿐이었다.
"허무하군. "
-그렇게 볼 건 아니지. 저 상자에서 엄청난 마나가 느껴져.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걸음 속도를 올렸다
꿀꺽!
상자에 도달한 라한이 침을 크게 삼켰다. 그도 이 상자 안에 엄
청난 마나가 있음을 느낀 것이다.
- 열자.
챙! 팍!
테세르가 상자의 자물쇠를 손으로 부수었다. 상자에는 조금의
흠집도 주지 않은 깨끗한 손놀림이었다.
끼익!
"헙!"
우와! 마나다. 마나
라한이 연 상자에는 열두 개의 검은색 보석이 놓여 있었다.
테세르가 감탄한 건 그 보석에서 풍기는 기운에 놀랐기 때문이
다 짙은마나의 향기. 너무 짙어서 라한의 제란기 혹은, 제령기와
흡사한 기운이 었다.
"대단하군, 마나석이라니. 생각지도못했는걸. 거기다공동에서
농도 짙은마나의 기운이라니. 엄청나군. 오벨리아 팰리스와 비교
해도큰 차이가나지 않을 정도야. 마나의 유적이라는 게 이 때문
인가 보군. "
-우와! 우와! 저거 나 줘. 나 저것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아.
응? 주인아! 줄 거지? 줄 거지? 그치?
보석에 대한 테세르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건 마
법사가 마법 서적에 열광하는 모습과 비슷했다.
현 시대에 마나석은 엄청나게 귀한 물품이었다. 하급의 마나석
만 해도 왕실이나 마법사의 탑이 아니면 보기 힘들 정도였다 헌
데, 앞에 있는 마나석은 등급을 나누기 힘들 정도로 강한 마나의
기운을 풍겼다. 대륙에 그대로 풀린다면 각 왕국에서 눈에 불을 키
고 달려들 게 분명했다.
'위험한 놈이군. '
"너 누워봐. "
-응?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게 있어. 네 몸에 인챈트할 때부터
그걸 생각하고 했었거든.
-뭔데?
테세르는 되물으면서도 시선만큼은 보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령에게서 보기 힘든 탐욕의 눈빛을 띤 채
"저 마나를 너한테 주입시컥줄게. "
주입? 혹시 인챈트?
라한이 긍정을 표하자 테세르가 슬슬 됫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또 다시 몸에 칼을 댈까봐 걱정스러웠다. 과거에는 마지못해 했지
만, 두 번 당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나, 싫어. 나저 보석 원래부터 싫어했어. 딱볼때부터 마음에
안 들더라고. 색깔도 칙칙하고 말이야. 주인 다 가져
"헛소리하지 말고 누워. 처음 네 몸에 에고를 주입할 때부터 생
각했던 거야. "
-주, 주인아. 왜 그러는데?
"스읍! "
-알았다. 힝.
억울한 표정을 지은 테세르가 상자 옆에 누웠다. 팔 다리를 쭉
편 모습이 밟혀 죽은 개구리를 연상케 했다.
라한이 테세르의 배 위에 마나석 하나를 올렸다. 이에 테세르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마 자기 눈으로 볼 수 없다
는 뜻이었다.
"시작해볼까. 마나의 힘이여 그대의 거처를옳기소서. 레메네이
크 이트리아나 마나리아프트 쿨리샤하. "
라한의 주문 영창이 끝나자 마나석에서 검은 빛이 조금씩 새어
나왔파. 그 빛은 테세르의 몸을 칭칭 둘러싸더니 조금씩 스며들었
다. 그에 비례해서 보석의 검은빛은 조금씩 옅어졌다.
십여 분의 시간이 흐르자 테세르의 몸을 둘러쌌던 검은 빛이 완
전히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보석은 투명하고 영롱한 빛을 띤 아름
다운 보석으로 바커 었다.
"끝났어. "
-어? 응.
"어때?"
-뭐가?
몸을 털고 일어난 테세르가 의문을 표했다. 라한이 한 말의 의미
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나한테서 제란기를 가져가지 말고 움직여봐. "
-그게 되나?
"일단 해봐. "
-그러지 뭐.
테세르의 허락이 떨어지자 라한은 새나가던 제란기를 끊어버렸
다. 테세르가 물질계에 머물도록 해주는 원천을 막은 것이다.
-어? 있네,
"후후, 내 제란기만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힘은 쓸 수
있을 거야. 그걸로 부족하면 내 제령기를 빼 쓰던가.
-알았으. 흐흐흐. 역시 주인밖에 없다니까. 난주인을 처음본
그순간부터 존경하고 있었어. 이런 멋진 일을해낼 줄알았지. 우
히히히.
테세르의 실없는 소리를 뒤로하고 라한이 벽으로 이동했다. 대
체 누가 이곳에 마나석을 뒀을까? 또, 왜 그 귀한 마나석을 이곳에
둔 걸까? 그리고 그 마나석을 어떻게 구했을까? 이 모든 의문에 대
한 답은 벽에 새걱진 그림과 글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라한은 벽을 천천히 돌면서 글을 읽어 나갔다. 역시나 이곳에 마
나석을 둔 이유가 적혀 있었다.
벽을 한 바퀴 돈 라한이 결론을 내렸다. 미친놈.
이곳을 마나의 유적이라 이름 지은 사람은 대륙을 피로 물들일
생각이었다. 그것도 마왕을 소환해서 그 힘으로 대륙을 무너뜨리
려 한 것이다.
-마왕을 소환하는데 이렇게 많은 마나석이 필요한가?
"뭐 꼭 그렇지는 않아 정확한 주문을 할 줄 알면 소모되는 마나
가 적어. 7 서클 마스터? 뭐 그 정도면 충분할 걸.
-근데 이건
"주문이 정확하지 않았던가. 마법 수준이 낮았겠지. 본신의 마
나가 부족하니까 마나석으로 대체하려 했던 거고. "
테세르도 대충 상황이 짐작되었다. 부족한 마나를 마나석으로
보충한다는 말. 그건 자신의 부족한 힘을 라한의 제란기에서 빌려
오는 것과 비슷했다.
-그럼 이 사람은 어디 갔지?
"마지막에 쓰인 글귀를 보면, 어떤 왕국으로 마나석을 구하러
갔던 것 같아. 이 정도_로도 마왕을 부를 힘이 부족했겠지. "
-가서는?
그거야 나도 모르지 나마석이 멀쩡한 걸로 봐서 죽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보다 훨씬 많은 마나석이 있었은데 마왕을
부루고 남은 거라고 볼수도있지
길게 설명한 라한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길게 숨을 쉬더
상자 뚜껑을 닫고 아 공간에 넣었다
뭐해
심법을 한번 돌릴 생각이야 마나석이 있던 곳이라서 그런지
마나의 밀도가 괘 높거든 이런 곳에서 심법을 돌리면 수련이 좀
도유리해지지
하긴
라한이 서서히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어 갔다 높은 밀도 탓인지
충만한 기분을 느낄수 있었다
라한이 심법을 운용하자 테세르은 몸을 불렸다 키웠다하며 이번
에 받은 힘을 시험했다 생각보다 큰힘을 받은 듯했다 물론 라
한에게서 제란기를 빌려오는 수준에는 한참 못 미쳤다 하지만
라한의 도움 없이도 물질계에 머물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했다
진정한 승자
라한은 상단 행렬을 따라가던서도 자정만되면 마나의 유적지
에 들어갔다. 좌표를 기록해두고 수시로 출입한 것이다 물론 입
구를 허물어 막았음은 당연했다.
그렇게 보낸 지 한 달,
상단 챙렬이 나메라 왕국에 진입했다 빠르면 십일 늦어도 보.
름 안에 이번 의뢰가 끝나는 셈이다.
"후우. 이제 거의 끝나가는군.
"그러게. 정말 지긋지긋하군.
용병들이 저마다의 푸념을 늘어놓으며 국경 지역을 통과했다
라한 역시 다른 용병들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다른 용병들과 사뭇 달랐다.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도 침묵하고 있는 쿨샤크 그의 진중함이
라한을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데메크라고 했나? 그 자식이 쿨샤크의 참모쯤 되겠군. '
상단 행렬은 그 동안 모두 일곱 차례의 공격을 받았다. 몬스터의
공격 여섯 번과 산적들의 공격 한 번이었다.
이 때문에 에펠 일행은 부상을 거의 달고 살았다. 팔다리가 부러
지는 건 다반사였고, 얼굴에는 흥터가 없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을만하면 또 다시 공격을 받아서 완쾌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나
마 쩔뚝거리지 않고 두발로 멀정하게 다니는 사람은 시스마란이 유
일했다.
현재 상단행렬은팔백여 명으로줄어 있었다. 그동안받았던공
격으로 수가 줄어든 탓이다. 그 중에 멀정하게 두 발로 걷는 사람
은채 반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라한이 있었기에 많은수를보
전한 것이다. 라한이 없었다면 지금의 반의반도 살아남지 못했으
리라.
"이곳에서 이틀을 쉰다. 필요한 물품을 보충하도록!"
"휴식 ! "
상단 행렬이 도착한 곳은 을핀 마을 안이었다. 도시라고 부르기
에는 작고 마을로 부르기에는 조금 큰 그런 마을이었다.
이곳은 상단의 이동이 많은 곳이라서 여관이 무척 많았다. 또,
그 여관들도모두한곳에 뭉쳐 있었다. 일명 여관거리라고불리는
을핀 마을의 남쪽이었다.
상단 행렬이 멈춰선 곳도 을핀 마을의 여관 거리였다. 대충 둘러
봐도 이십 여개의 여관이 눈에 들어왔다.
라한과 에펠 일행이 여관을찾아들어갔다. 꽃피는 집이라는 이
름의 작고 깨끗한 여관이었다.
"여기서 쉬고 있어. "
"형님 어디 나가시려고요?"
"응. 살게 있어서. "
라한이 숙소만 잡고 나가려하자 에펠 일행이 의문을 표했다. 하
지만, 실제로 궁금해 하는 기색은찾기 어려웠다. 그냥 예의상 해
본 말이 분명했다.
"그럼 저희는 들어가서 쉴게요. "
"응. "
라한이 여관을 나가자 에펠 일행이 한 방에 모였다. 라한을 처리
할 세부 계획을 짜기 위함이었다.
지금까지는보는눈이 많아서 라한을처리하지 못했다. 설사, 처
리한다 하더라도 유품 처리가 곤란했다. 정말 재수가 없으면 유품
을 다른 용병과 나눠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만간용병 임무가끝날터. 다른용병들과헤어지자마
자 거사를 진행하려면 미리 계획을짜야했다. 치밀하고 세밀한계
획 말이다.
거리로 나온 라한이 약품 상점을 찾아 나섰다. 그 옆에선 프라하
가 묘한 눈길로 따랐다. 그도 라한이 본격적으로 일을 꾸미려는 걸
안 탓이다.
"라한 뭐 살 거야?"
"약. "
"무슨 약?"
"먹으면 정력을 배출하지 않고 못 버티는 그런 약이 필요해, "
"정력이라
라한의 말에 프라하가 생각에 잠겼다. 그의 기억에 그런 약이
있는지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프라하가 손을 퉁기며
말했다.
딱!
"그게 좋겠군. "
"적당한 게 있어?"
"응. 에페테르라는약인데, 마시면주체를못하지 "
에페테르는 소위 말하는 춘약이다. 마시기만 하면 이성을 끊임
없이 요구하는 그런 약.
하지만, 냄새가너무고약하다는게 문제였다. 제 정신으로마실
수 있는 냄새가 아니었다. 또, 여자에게만 통하는 약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여자가마시면 남자를끊임없이 요구하게 되지만, 남자
가 마시면 그저 냄새가 고약한 물이라는 느낌 외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들은 기억이 나는군. 근데 구할 수 있을까?"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
똑, 똑-!
대화를 하던 라한과 프라하가 어느새 약품 상점에 도착했다.
상점 안에는 40 대의 중년 사내가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약에 대
한 책은 아닌 듯, 글보다 그림이 더 많은 책이었다.
"실례합니다. " '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무슨 약을 찾으십니까? 외상에 좋
은약, 두통에 좋은약, 설사, 복통등등 저희 약
품 상점에는 없는 게 없습니다. "
라한과 프라하의 등장에 중년 사내가 상인 정신을 발휘했다. 그
모습에 라한과 프라하가 재미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겉모습으로는 상점 주인과 라한은 아버지와 아들의 외모 정도로
큰 차이가 났다. 그런데도 고개를 숙였다는 건 그만큼 상인 정신이
투철하다는 얘기였다. 손님이 왕이라는 걸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
었다.
"에페테르가 필요합니다 "
라한의 말에 상점 주인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도 에페테르가 어
디 쓰는 약인지 아는 탓이다.
"흥. 우린 그런 물건은 취급하지 않소. 요즘 단속이 얼마나 심한
데, 그런 물건을 찾는단 말이오. "
에페테르는 약의 특성상 좋은 용도로 사용되기는 힘들었다. 효
과자체가강간의 용도밖에 쓰일 곳이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에
페테르는 각 왕국의 금지 물품으로 지정된 지 오래였다. 그래도 뒷
골목을 전전하는 불량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꾸준히 유통되고 있는
물품 중 하나겠지만
탁- !
라한이 5 골드를 꺼내 탁자위에 올렸다. 돈을 본 상점 주인의 눈
이 순간반짝였다. 하지만, 이내 평상심을되찾으며 차갑게 가라앉
았다.
"흥. 돈을 아무리 준다고 해도 에페테르를 줄 수는 없소. "
상점 주인의 말이 조금 바뀌었다. 없다는 말에서 줄 수 없다는
말로.
그건 있긴 있지만, 돈이 부족하다는 얘기와 같았다. 발각되면 문
닫을 각오를 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물건이니 돈을 더 달라는 무언
의 시위였다
탁- !
라한이 5 골드를 더 올렸다.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당장 떠나겠다
듯 담담한 얼굴이 었다.
상점 주인도 라한의 뜻을 이해했다. 여기서 더 버티다가는그나
마 올려놓은 10 골드가 사라진다는 것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쯤
에서 에페테르를 넘겨야 했다. 그래야 한다고 자신의 오랜 상인 경
험이 말하고 있었다.
"아, 진짜. 이러면 안되는데. 잠시만기다려보십시오."
말을 마친 상점 주인이 안으로 휑하니 들어가 버렸다. 상점 주인
이 사라지자 프라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책에서, "
"인간 세상에는 좋은 책이 참 많군. "
"나쁜 책이 더 많아. "
라한의 말에 프라하가 의문을 품었다. 나쁜 책? 그게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쁜 책도 있나?"
"그럼. 예를들면 음
'엄마 말 잘 들어야 성공한다' 라는 텍도
없는 얘기가 담긴 책도'있지. 또 '법을잘 지켜야오래 산다'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책에 쓰여 있어. "
"황당한 책이군. "
"그렇지. "
라한과 프라하가 사적인 농담을 하고 있을 때, 상점 주인이 나왔
다. 주변을계속살피는모습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살피다가 검은 병 하나를 라한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걸리면 큰일나니까 잘 간수하십시오. 그리

"걸려도 여기서 샀다는 말은 하지 말라는 얘기죠?"
" 예 헤헤헤. "
"걱정 마십시오. 그럼. "
라한은 약을 품속에 재빠르게 챙기고 약품 상점을 나왔다. 하지
만, 상점 주인과는 달리 눈치를 살피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기감으로 주변에 목격자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라한이 약을 사기 위해 여관을 비웠을 때, 쿨샤크가 그곳을 방문
했다. 시기적절하게 나타난걸로봐서는라한이 없다는걸 알고온
듯했다.
똑, 똑-!
진정한 승자
두 번을두드렸음에도 방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왔는데도 대답이 없는 것이다.
라한이 사라지자 에펠 일행은 그를 처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주 내용은 라한에게 독을 섭취하게 만드는 방법에 대한 모의였다.
하지만, 그 방법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다른 용병들의 이목이
없는 곳이어야 한다는 점. 라한의 의심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점.
무엇보다 프라하가 없는 곳이어야 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렇게 한참 심각한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린
것이다.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에펠 일행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
다. 그러다 리더 격인 에펠이 주저하며 대꾸했다.
똑, 똑-!
".누구시죠?"
"아, 계셨군요. 상단을책임지고 있는쿨샤크라고합니다. 전에
한 번 뵈었었죠. "
문을 사이에 두고 쿨샤크가 부드럽게 말했다. 최대한 자신을 낮
춰서 의심을 받지 않으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아, 들어오십시오. "
딸깍!
"감사합니 다. "
방 안에 시스마란을 제외한 에펠 일행과 쿨샤크, 데메크가 마주
보고 앉았다.
데메크가 풍기는 음습한 기운 때문에 에펠 일행은 선뜻 입을 열
지 못했다. 그들을 바라본 쿨샤크가웃으며 말했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악의를 가지고 온 건 아니니까요. "
"네. "
짧게 대답하고 나자 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에펠 일행은 그들 나름대로 쿨샤크의 방문 이유를 유추하고 있었
다. 문제는 왜 왔을까? 그것도 하필 라한이 없는 지금 방문한 걸까?
이에 반해 쿨샤크는 자신이 용건을 꺼낼 타이밍을 잡고 있었다
"흠, 흠. 용건이?"
"그 전에 카류나님을 밖으로 보냈으면 하는데요.
"예? 왜죠?"
"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남자들끼리 할 얘기라서 그렇습니다. "
쿨샤크의 대답에 에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류나를 향
해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에 카류나는불쾌한 기색을확드러냈다 하지만, 별 말은하
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
"남자들끼리 재미있게 얘기하십시오. 그럼.
"죄송합니 다. "
카류나가 나가자 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렇게 감돌던 정적
을 깬 사람은 쿨샤크였다.
"라한을 싫어하시더군요. "
쿨샤크의 조용한 말에 에펠 일행이 몸을 움찔거렸다. 정곡을 찔
린 듯한 느낌이었다.
"무, 무슨 소립니까? 저희가 형님을 싫어하다니요. "
"후후, 옆에 이 친구는 마법삽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윗줄의 마법사죠. 데메크!"
"예, 쿨샤크님. "
짧게 대답한 데메크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이에 반응하듯 은
은한 회색빛이 그의 손을 맴돌았다.
그 주문이 끝났을 때, 데메크의 손 위에 작은 벌레가들려 있었
다. 데메크가 파밀리어를 부른 것이다
"그게 뭐죠?"
"파밀리어. "
데메크의 대답에 란이 몸을 떨어댔다. 그는 데메크가 흑마법사
라는걸 알아봤다. 실력은낮아도마법사가아니던가. 파밀리어 마
법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흑, 흑흑마법. "
"크크크. 맞다. "
에펠 일행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설마 흑마법사를
만나게 될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버렸다.
데메크와 쿨샤크는 파밀리어를 통해 에펠 일행을 감시했었다.
라한을 감시함과 동시에 그들을 감시한 것이다 이 때문에 에펠 일
행이 원하는 바가 무언지 정확하게 핍뚫고 있었다.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온 건
아니거든요. "
"그럼 왜?"
"라한을 처리하는 일을 도와주겠습니다. "
쿨샤크의 대답에 에펠 일행이 눈을 매섭게 떴다. 정 안되면 치고
도망이라도 갈 생각이 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라한을 처리했을 때, 나오는 모든 물품을 여러분들께 드리겠습
니다. "
"상인이 이득 없는 장사를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
에펠 일행은 사회 경험이 일천했다. 학교에서 졸업한 지 얼마 안
되는 탓이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귀족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치만큼은 9 단의 경지에 오
른 지 오래였다.
"라한은 당연히 제 손에 죽습니다. 지금 상단 행렬이 저희 본점
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 부하들을 시켜서 처리할 생각입니다. "
그 1 럼. "
"하지만, 전그가죽는정도로만족할수없습니다. 비참하고처
절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거든요. "
쿨샤크의 눈에는 살기보다 더 짙은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풍걱
나왔다. 단순히 죽이는 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
주는 모습이 었다.
에펠 일행은 쿨샤크와 라한 사이에 무언가 있음을 눈치 챘다. 알
려진 것과 달리 단순한 친구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되죠?"
"일행 중에 카류나라는 여자 용병을 이용해야 합니다. 들어주시
겠습니까?"
에펠 일행은 고민에 빠졌다. 카류나가 그들과 뜻을 같이한 일행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쉽게 나왔다. 어차피 배신을통해
얻으려했던 부였다. 오히려 그녀를 이용해서 버린다면 좀 더
많은 몫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그녀를 버
린다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
말을 마친 쿨샤크가 조그만 병을 내밀었다. 회색 물약이 들어 있
는 병이었다.
"이게 뭡니까?"
"에페테르라는 약입니다. "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며칠 내로 제가 카류나라는 용병을 마차로 부를 겁니다. 4, 일
쯤 후가 되겠죠. 그리고 라한이 보는 곳에서 부를 생각입니다. "
"그리고는요?"
"제게 오기 직전에 이걸 카류나에게 먹이십시오. 약효가 십 분
쯤 후에 생기니까 약효가 발휘되기 전에 보내야 합니다. "
에펠 일행이 병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그들에게는 그냥 회색물
약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평범한 물약이었다.
그러다 약병을 코에 가져갔을 때, 자신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했
다. 지독한 악취가 코를 자극한 탓이다.
"냄새가 지독하군요. "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이걸 꼭 마시게 하십시오. 냄새가
너무 고약해서 웬만해서는 마시려들지 않을 겁니다. "
"그건 저희가 알아서하겠습니다. 근데 이것만 먹이면 되는 겁
니가?"
"예. 이 일만해주시면 라한을죽이는건 물론이고그가가진 모
든 걸 드리겠습니다. "
이 물약이 뭔지는 몰라도 꽤나 치밀한 계획을 짠 듯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 표정만 봐도 계획의 성공은 따 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헌
데도 선뜻 승낙하지 못했다. 라한의 실력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라한의 실력을 알고는 있습니까? 그를 죽이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
"후후후. 그가뛰어난마법사이기는하지만, 한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기습을 이용해서 합공을 한다면 충분히 처리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의 옆에서 기습한다면 작
은 부상이라도 입힐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에펠 일행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의 말처럼 다수의 합공
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거기다자신들의 기습이라면 아주작은생채기 정도는 낼 수 있
을 터. 작은 상처라도 합공을 받으면 상당히 큰 약점으로 다가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데메크라는 흑마법사의 존재. 그가 돕는다면
제아무리 라한이라도 어찌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좋습니다. "
"생각 잘 하셨습니다. 후후후. 그럼 이만. "
쿨샤크가 나가자 카류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얼굴에는 무슨 얘
기를 했는지 말해달라는 기색을 가득 드리운 채였다.
"말해줘! "
"야, 베린!
"류나야! 남자도 여자에게 말할수 없는 비밀이라는 게 있단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거라. "
베린까지 입을 다물자 카류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거기
다 남자끼리 할 얘기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도 남자에
게 말할수 없는 비밀이 있지 않은가. 대충 수긍하고 넘어갈수밖
에 없었다.
라한의 첫키스
라한의 목적지는 수아나 왕국에 있는 칼라피안의 거처였다 상
단 행렬의 목적지는 나메라 왕국의 남부인 엘풍소 지방 그 남쪽에
수아나 왕국 위치해 있으니 일단은 목적지가 같은 셈이다
언제 사용할 생각이야
조만간에
근데 그 약으로 대체 뭘 어쩌려는 건지 모르겠군 혹시 따먹기
라도 할 생각이야
뭐 따.뭐라고 참나 뭐 이런 나쁜놈이 다 있어 누가 늑대
인간 아니랄까봐 생각하는 걱도 그모양이냐
프라하의 대답에 라한이 불결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그 눈빛에 오히려 프라하가 억울하다은 표정을 지었다 나쁜 짓
은 자기가 다 해놓고 자신한테 나쁜 놈이라니 너무 억울하고 황당
해서 말이 안 나왔다.
"젠장. 그럼 도대체 그 약을 어떻게 먹일 생각이야 그게 맛이
뭐 같잖아. 뚜껑 여는 순간 난리가 날 텐데. "
"나도 그게 고민이야. 이걸 대체 어떻게 먹이지? 제 정신으로 먹
수 있는맛이 아닌데 말이야. 거기다냄새까지. 우웩!"
잠깐 약병에 코를 가져갔던 라한이 헛구역질을 해댔다. 하수구
에서 나온 물도 이 물약에 비하면 정화수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
큼 지독한 맛을 내는 약을 대체 어떻게 먹여야 할지. 도무지 방법
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나 술에 타면 안 될까?"
"넌 이게 술이나 차에 탄다고 희석될 거라고 생각해?"
"그런가?"
마법으로 맛을 없애는 방법도 생각해봤었다. 헌데, 그 방법은 마
나를 지울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란이 옆에 있으니 그 정도마나
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방법이 있지.
침대 구석에서 명상에 잠겨 있던 테세르가 입을 열었다.
그는 요즘 수시로 명상에 잠겼다. 뭘 하는지 물어봐도 도무지 대
답을 해주지 않았다. '애들은 몰라도 돼' 라는 말로 대답을 회피하
기만 할 뿐이었다.
"오, 테세르. 방법이 있다고?"
-그럼. 아주 멋진 방법이 있지.
테세르의 대답에 라한과 프라하가 조그리고 앉았다. 나름대로
테세르와 눈높이를 맞추려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맞
추어질 높이가 아니었지만.
"뭔데?"
-키스.
"키스?"
-응 에페테르라는 약은 남자에게 아무 효과가 없다면서. 그럼
주인이 입에 머금고 진한 키스를 한 방 날리는 거야. 그러면서 은
근슬쩍 약을흘리는 거지. 키스를 길게, 아주 길게 하면 맛이 없어
도 삼킬 수밖에 없을 거야.
테세르의 대답에 프라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테
세르의 의견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라한의 얼굴은 급격하게 찌푸려졌다.
키스라니. 그는 29 년의 삶 동안 키스를 단 한번도 해보지 못했
다. 이번이 첫 키스인 셈이다.
그런 소중한 키스를 이런 상황에서 하기는 싫었다. 거기다 자기
이미지에도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악취가 풀풀 풍기는 최악의 키
스를 첫 키스로 추억하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그건 안 돼. "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 의심 사지 않고 그 약을 먹일 방법이
있냐고? 그렇다고 마법으로? 우습지. 마법으로 만들어진 약에 마
법을 가했다가 효과가 사라지면 어쩌려고. 거기다 란이 허접한 마
법사이기는 하지만, 마법사라는 건 분명해. 마법을 사용했다가는
당장 눈치 챌 거란 말이야.
테세르의 말에 라한의 대답이 궁해졌다 자신도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너무 싫었다.
"쳇, 정 안 되면 슬립 마법으로 재워서라도
-주인 바보야? 약의 효과가 시작 되는 건 십 분이잖아. 재웠다
가 약 먹이고 또 깨우고. 그리고 쿨샤크한테 보내겠다고? 그것도
십 분 안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맞다 십 분안에 그모든걸 하는건 무리야. 그시간을어떻게
든 맞추려면 쿨샤크의 마차 근처에서 해야 하는데, 슬립을 시전 하
고 웨이크로 깨우면 데메크가 눈치 챌 걸. 그 녀석이 꽤 대단한 흑
마법사라면서?"
테세르와 프라하의 집중 공격에 라한이 의기소침해졌다. 키스가
싫어서 해본 말이었는데 이렇게 심하게 치고 나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알았어. 젠장. 한다, 해. "
"생각 잘 했어. "
-멋진 첫 키스의 추억을 만들겠군. 축하해.
프라하와 테세르가 축하 인사를 해왔다. 이에 라한의 얼굴이 붉
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계획에 의한 키스라지만 스물아홉 살 남자
의 첫 키스였다. 부끄러운 게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아름다운 첫 키스를 만들고 싶었는데. '
쿨샤크는 '베르네르의 아침'이라는 여관에 묵고 있었다. 을핀
마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여관이었다.
라한이 카류나를 데리고 쿨샤크가 묵고 있는 객실 앞으로 갔다.
쾅쾅!
"쿨샤크! 나다 라한. "
"오, 친구. 어서 들어와."
라한이 들어오자 쿨샤크가 반갑게 맞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오
만가지 욕을 다 퍼부었다. 라한이라는 인물을 만나는 그 자체가 싫
은 듯했다.
반면, 이게 웬 떡이냐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어차피 카류나
와 친해질 기회를 만들어야하지 않았는가. 이번을 기회로그녀를
사로잡을 생각이 었다
"반갑습니다. 카류나라고 합니다. "
"허허, 앉으시오. 아름다운레이디. 구면이니 너무거리를둘것
없소이다. "
쿨샤크의 말에 라한이 황당하다는 빛을 띠웠다. 그리고 속으로
는 느끼한 놈이라며 쿨샤크를 욕했다. 한때, 자신도 카류나에게 이
런 소리를 했음을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후후후, 꼬셔라. 카류나를 꼬셔라. '
라한은 쿨샤크가 카류나를 유혹하길 바랐다. 자신이 세운 모든
계획의 밑바탕이 그것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불쾌하다는 듯 쿨샤
크를 경 계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였다.
"아주 말을 잘하는군, "
"하하하 상단을 오래 이끌다보니 말하는 재주만 늘더군. "
라한의 불쾌하다는 눈빛에 쿨샤크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는 라한이 카류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 라
한의 표정으로 생각이 확신으로 변했다.
이런 상태에서 카류나가 자신의 여자가 된다면 얼마나 비참해
할까. 그는 라한이 스스로를 비관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음흥한 속
내를 키워갔다.
"근데 무슨 일로 여길 다 찾아온 거야?"
"왜?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온 건가?"
"아니, 무슨그런 말을. 지금껏 찾지 않다가온 게 신기해사 그
러지."
"이제 우린 화해했잖아.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뜻에서 찾아온
거야. 이 기회에 내 여자 친구도 소개시켜 주고. 뭐, 겸사겸사온
거지. "
잠시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라한도 겉으로는 웃고
있었고, 쿨샤크도 미소를 유지했다.
이에 편승해서 카류나도 함께 웃었다. 하지만속으로는쿨샤크
를 경계했다. 라한과 친구라면 자신에게는 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다른 애들한테 말해줘야겠어. '
카류나는 에펠 일행과쿨샤크 사이의 계약을몰랐다. 알았다면
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근데 언제 이런 아름다운 레이디를 사귄 거야? 부러운데. "
"부러우면 너도사귀면 되잖아. 돈많겠다, 인물그만하면 빠지
지 않겠다, 뭐가 문제야?"
"하하하. 물론 그냥 여자를 사귀는 거라면 어렵지 않겠지만 레
이디 카류나처럼 아름다운 분을 사귀는 건 불가능할 것 같군. "
쿨샤크의 기름기 활활흐르는 말에 카류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예쁘다는 말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는 법이다. 잠깐이지만 쿨샤크
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허허, 이거 참. "
똑! 똑!
한참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쿨샤
크를 찾아온 모양이다. 이에 쿨샤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일이야?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
"그게 저 라한님을 찾아온 분이 계십니다. 프라하라고. "
"응? "
문 밖에서 들리는 말에 쿨샤크가 라한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
느냐고 묻는 듯한 그 눈빛에 라한이 당황해하며 입을 열었다.
"이런, 깜빡했군. 매일 프라하와 수련을 하거든. 그걸 깜빡해 버
렸어. 너하고 오랜만에 함께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몰랐지 뭐야. "
"어허, 이런. 안타깝군. 급한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자주자
좀찾아오게, 아니, 아예 매일찾아오게. 어떤가?"
쿨샤크는 라한을 빨리 내보내고 싶었다 그가 용건이 있어서 사
라지고 없을때, 카류나에게 작업을걸 생각이었다. 그녀를꼬셔야
라한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이지, 앞으로 매일 찾아올게. 카류나. 충분히 쉬다가 가.
쿨샤크, 괜찮지?"
"당연하지. 이런 아름다운 레이디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
"그럼 갈게. 내일 보자고. "
짧게 인사말을 남긴 라한이 문을 나섰다.
일단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주는 건 성공했다. 이젠 쿨샤크가 카
류나를유혹하길 빌어야했다. 아니, 카류나가쿨샤크의 유혹에 걸
려들기를 바라야 했다.
'녀석이 잘 할 수 있을까? 그래야 다음 얘기가 진행되는데.
라한의 속마음도 모른 채, 쿨샤크는 열심히 카류나를 유혹했다.
갖은 미사어구를 섞어가며 카류나를 칭찬했고, 관심 있다는 걸 은
연중에 드러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지내면 평생 부유하게 지낼
거라는 것도 은근슬쩍 전했다.

프라하가 라한을 부른 것도 다 계획에 있던 일이었다. 일부러 라
한만 빠져나오게 만들 의도였다.
쿨샤크의 숙소를 나온 라한은 그 길로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종이를 한 장 펴서 무언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주인 뭐 해?
"다 됐다. "
라한이 무언가를 빼곡하게 적은 종이를 반듯하게 접었다
"그게 뭐야?"
"편지. "
"편지?"
"프라하. 너 용병 길드에 좀 갔다 와야겠다. "
라한의 말에 프라하와 테세르가 의아한 듯 바라봤다. 대체 뭘 하
라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왜?"
"가서 이걸 엘퐁소 남작 가에 좀 보내달라고 해, 보수는 두
배로 준다고 하고. 단, 빨리 전해야 돼 최대한 빨리. "
"알았어. 그렇게 전하지. "
용병들이 상단 호위나 몬스터 사냥만 하는 건 아니었다. 때로는
작은 물품을 직접 수송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미행하는 일도 했다
쉽게 말해서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직업이 용병이었다
라한이 말한 편지 수송은 직접 달려가서 전하는 게 아니었다. 내
용을 확인해서 통신 마법으로 직접 불러주는 일. 그게 용병 길드가
편지를 전하는 방법이었다.
"서둘러. "
라한의 말을 뒤로하고 프라하가 숙소를 나갔다. 아마 용병 길드
로 바로 달려가 편지를 전할 모양이었다
프라하가 나가자 라한은 앞으로의 일을 찬찬히 되짚었다. 자신
이 생각해도멋진 계획이었다. 절로웃음이 지어졌다. 음흉하고사
악한 웃음이 단, 키스만 빼고
다음날 상단 일행이 을핀 마을을 벗어났다. 이틀을 쉬어서인지
용병들과 짐꾼들 모두 활기가 넘쳤다.
그렇게 이동한 지 5 일.
그 동안 라한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쿨샤크의 마차를 방문했다.
당연히 카류나를 대동한 채였다.
처음 카류나는 라한의 연인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애매한 관계가 되었고, 지금은 쿨샤크의 연인인지 라한
의 연인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카류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라한에게 달라붙은 이
유가 돈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보다 더 큰 부를 쥘 수 있다는 생각
에 쿨샤크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라한은 그런 상황을 유도했기에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쿨샤
크 따위에게 지다니.
'원했던 일이야' 라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패배감을 완
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오늘이 던가?"
"뭐가?"
라한은 에펠 일행과 조금 떨어져서 걷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
이 하는 말을 에펠 일행은 듣지 못했다.
"쿨샤크가 거사를 진행한다고 했던 날이 오늘인가 싶어서. "
테세르는 마나에 예민한 정령이다. 물질계, 환계, 마계 전체를
통 틀어서 가장 예민한 존재가 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마나를 감추는 데에도 탁월한 재주를 가졌다. 그런 테세르
를 흑마법사인 데메크가 알아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테세르는 자신의 이런 재주를 이용해서 쿨샤크가 하는 말을 엿
듣고 있었다. 데메크가 부렸던 파밀리어보다 더 확실한 도청장치
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가 들었던 말은 라한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갔다.
-맞아. 오늘이었어
"그렇군. "
라한은시기가무르익었음을느꼈다. 하지만, 선뜻발걸음이 떨
어지지 않았다. 첫 키스가 못내 마음에 걸렸음이다.
라한의 생각을 읽었는지, 테세르가 라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힘내. 그런다고 총각딱지가 없어지지는 않잖아. 누가 뭐래도
주인은 숫총각이라고. 안 그래?
"맞다. 넌누가뭐래도숫총각이다. 내가보증하지."
테세르와 프라하가 라한의 염장을 질렀다. 주먹이 절로 떨리고
입이 악다물어졌다 죽이고 싶은 친구란 바로 이들을 두고 하는 말
이리라.
"나쁜 놈들. "
한 마디 내뱉은 라한이 카류나에게 다가갔다. 그를 본 프라하와
테세르가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잘해보라고 응원하는 듯했다
"카류나. 할 얘기가 있어. "
"아, 오빠. 뭐예요?"
"자리 좀 옮기자, "
"저, 오늘은 안 되겠는데요. 할 일이 있어서요. "
완곡하게 거절한카류나가품속에 있는물약을움켜쥐었다. 쿨
샤크가 에펠 일행에게 주고 간 에페테르였다.
며칠 전 에펠 일행은 카류나에게 에페테르를 넘겼었다. 이 약이
당장 냄새는 고약해도 남자의 음심을 자극한다는 말과함께. 실제로
는 정반대의 효과였지만, 카류나는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 쿨샤
크의 부인이 되고 싶은 강한 염원이 이런 오판을 불러온 것이리라.
"왜?"
"그게 저
"잠깐이면 돼. 저쪽으로 가자. "
라한이 카류나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쿨샤크가 탄 마차가 있는
방향이었다. 방향이 마차 쪽이자 카류나도 별 반항 없이 따랐다.
라한과 카류나가 쿨샤크의 마차 부근으로 다가갔다. 상단 호위
무사들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지난 며칠 간 매일 방문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마차에 근처에 도착한 라한이 주변을 훌었다.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일을행하는것에는상관없지만, 너무부끄러웠다.
'젠장. 일단 하고 보자. '
생각을 마친 라한이 신발 끈을 매는 시늡을 했다. 그러면서 아공
간에 있던 약물을 입 안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혀를 이용해서 뚜
껑을 열었다. 미리 뚜껑을 헐겁게 만들어놨기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미치겠군. '
지독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라한은 입을열지 않았다. 아니 열수 없었다. 입을여는순간악
취가 주변에 진동할 터. 좀 더 참아서 계획을 성공시컥야 했다.
'까짓것 해보자. '
고개를 들어 카류나를 바라봤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애틋한 감정
에서가 아닌 악취가 이성을 지배해 버리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카류나의 어깨를 잡은 라한이 갑자기 입술을 가져갔다. 피하고
말고 할 개재가 아니었다. 갑작스럽고 빠르게 다가간 입술이 카류
나의 입술과 겹쳐졌다.
"읍! "
"읍, 으읍!"
라한과 카류나가 키스를 하자 주변에서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갑
작스럽게 이런 곳에서 키스를할줄은 그누구도 예상못했다. 하
지만, 이내 그 이유를 짐작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한과 쿨샤크는 정적 관계. 주변 호위병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
다. 그들은 지금의 키스를 라한이 쿨샤크에게 보내는 경고문이라
고 생각했다. '나 이 여자와 이런 사이이니 집적대지 마라' 라는 경
고 말이다
라한과 카류나의 끔찍하면서도 구역질나는 키스가 계속 되었다.
숨 막혀서 약을 먹을수밖에 없도록 긴 시간을유지한 것이다. 대
략 십 분간의 키스.
카류나는 라한을 떼어내지 못했다. 라한의 검에 대한 감각이 형
편없을뿐이지, 신체만큼은검사뺨칠 정도가아니던가. 힘이 부족
해서 밀어낼 수가 없었다.
"후하! 학, 학!"
"우엑!"
라한이 입술을떼자카류나가헛구역질을해댔다. 이를본라한
이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얼굴에는 부끄럽다는 기색을 가득 드리
운 채.
라한이 어느 정도 멀어지자 카류나가 품에서 약을 어냈다.
에 키스를 했다는 사실은 완전히 망각한 듯했다.
좀전
'그래, 라한. 이번 키스가너에게 주는마지막선물이다. -
생각을 마친 카류나가 약물을 삼켰다. 고약한 냄새가 입안을 가
득 메웠다.
"서둘러야 해. "
약의 효과는 10 분 후에 나타난다고 했다. 약을 먹었으니 바로 쿨
샤크를 만나야 했다. 머뭇거렸다가 주변 호위무사의 음심이라도
자극한다면 지금까지 공들인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지도
모를 일이었다.
똑 똑
"누구지?"
"저 카류나예요. "
손으로 입을 막은 카류나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악취가 최대
한 퍼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아, 레이디. 어쩐 일로."
쿨샤크가 문을 열고 카류나를 반갑게 맞았다. 하지만 눈은 그녀
의 모습을 끊임없이 살피고 있었다. 그년가 약을 먹었는지를 확인
하려는 의도였다.
'알아볼 필요도 없겠군. '
카류나의 입에서 풍기는 악취가코를자극했다. 쿨샤크 자신도
냄새가 이 정도일줄 예상치 못했다.
카류나가 마차 한쪽에 앉자 쿨샤크가
조용히 시간을 기다렸다.
약효가 퍼지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잠시 후 카류나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그와동시에
지독하게 풍기던 냄새도 서서히 사라졌다. 약 효과가 시작되면서
냄새도 같이 사라지는 모양이다.
'됐군. '
'이, 이상해. 이게이게 아닌데.'
의식이 몽롱한 중에도 카류나는 자신이 변하고 있음을 깨달았
다. 앞에 선 남자가꿈에 그리던 왕자님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와 동시에 몸속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는 느낌을 받
았다
음7
'아, 안 돼. '
"학, 헉, 헉 "
생각과 달리 카류나는 이미 옷을 벗고 있었다. 입으로는 연신 신
을 흘리면서.
그 모습을 쿨샤크가 조용히 지켜봤다. 지금 상태라면 그녀가 모
든 일을 알아서 할 것 같았다. 역시나 카류나가 행동을 개시했다.
"학, 하악!"
사르륵!
카류나는 자신이 옷을 한 꺼풀씩 벗을 때마다 몸을 움찔거렸다.
이성만큼은 이래선 안된다는 걸 알고 있는듯했다. 하지만, 자신
도 모르게 풀어지고 있는 단추들과 옷을 매는 끈. 이성과 감성의
괴리감이 카류나를 지배했다.
마차와 한참 떨어진 곳의 공중에서 라한이 마차를 바라봤다. 조
금씩 흔들리는 모습이 일을 치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잘들 논다. 젠장. "
괜히 씁쓸한 기분에 욕설이 튀어나왔다.
"근데 왜 이렇게 안 오지?"
라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먼 곳에서 먼지구름이 일어나는 게 보
였다 무언가 꽤 많은 인원이 급하게 달려오는 것 같았다
"오는군. 딱 좋아. "
라한이 프라하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연기
를 할 때였다. 프라하와 함께 하는합동 공연이었다.
"준비 됐어?"
"나야 뭐. 깨부수는 일이라면 준비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
프라하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잊고 있었지만,
그는 라이칸드로프였다. 파괴의 상징이라불리는 종족. 드래곤과
오우거를 제외하면 가장 광폭한 종족이었다.
"가자. "
"그러지. "
-좋아!
라한과프라하의 걸음은무척이나느렸다. 그들이 한창 절정일
때를맞추기 위함이다. 또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는손
님들과의 조우 시간도 맞춰야 했다.
"이놈! 매직 애로우!"
마차까지 다가간 라한이 마법을 시전했다. 이에 엄청나게 거대
한 매직 애로우가 마차로 날아갔다.
실제로 크기만 크지 파괴력이 강한 마법은 아니었다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은 그대로 두고 마차 자체만 부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쾅- !
"뭐, 뭐야?"
"꺄악! "
"적이다!"
"무슨 짓이냐!"
마차 안에서 옷을 홀딱 벗은 쿨샤크와 카류나가 모습을 드러냈
다. 그와 동시에 주변 호위병들이 저마다 검을 뽑아들었다.
"네 이놈! 네놈이, 네놈이 감히 우리 카류나를 욕보인단 말이냐.
내 너를 친구로 여겼거늘. 이놈이. "
라한의 호통소리에 쿨샤크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승자가 패
자를 비웃는 그런 미소였다.
"후후후, 이거 어쩌나. 카류나는날 더 좋아하는 걸. 너도 알잖
아. 네가 남자로서의 매력이 없다는 거. "
쿨샤크의 비웃음에 라한이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최소 겉으로
는 그랬다.
" 이, 이놈이!"
라한과쿨샤크의 말다툼이 시작되자용병들이 서서히 몰려들었
다. 개중에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은 사람도 많았다.
'그 미소 얼마나 가는지 보자. '
"매직 애로우!"
라한의 머리 위에 십여 개의 마법 화살이 만들어졌다. 라한이 만
들어낸 위협성 마법이었다.
라한의 마법에 호위병들이 쿨샤크와 카류나를 둘러쌌다. 호위
임무에 무척 충실한 모습이었다.
"네 이놈! 카류나는 내 여자였다. "
"아니, 지금부터 카류나는 내 여자다. 넌 이 여자에게 버림받은
거지. 쯧쯧, 멍청한 놈. "
쿨샤크의 말에 라한의 표정이 한껏 찌푸려졌다. 그 모습에 쿨샤
크의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는 라한이 스스로를무척 비관하
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상황으로는 라한과 쿨샤크의 잔머리 대
결에서 쿨샤크가 승리한 듯했다.
"이, 이 말도 안 돼, "
"아직 이해를못했군. 이 여자는내 여자란말이다. 넌 남자로서
의 매력이 없어. 알아듣겠어?"
"그렇군요. "
쿨샤크의 말에 옥이 굴러가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
다. 그와동시에 호위병과용병들사이가쫘악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를 걸어 나오는 아름다운 여자. 프리지아 엘퐁소였다
"프, 프프리지아. "
"불결한 입으로 제 이름 부르지 마세요. "
쿨샤크의 놀란 말에도 프리지아는 냉담하기만 했다. 그가 했던
얘기를 모두 들은 탓이다.
프리지아 엘퐁소는 쿨샤크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았다. 용병
길드를 통한 통신으로 온 지급이 었다.
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아버지에게 알리지도 않고 달려왔다. 당
장 저택에 남아 있던 자신의 친위기사만 모조리 데리고서
하지만, 상단 행렬 안으로 마차를 몰고 갈 수는 없었다. 상단 외
곽에서 주변을 지키던 용병들에게 저지당한 탓이다. 이 때문에 호
위기사만을 대동하고 걸어와야 했다. 그렇게 천천히 걸어오면서
쿨샤크가 한 얘기를 모두 들었다.
"오해요. 모두 오
"쿨샤크, 더, 더요."
쿨샤크가 변명을 하려고 할 때, 카류나가 쿨샤크의 중요한 곳을
만졌다. 아직 홀딱 벗은모습인 쿨샤크와카류나. 그리고 그를바
라보는 라한과 프리지아. 상당히 묘한 장면에 정적이 흘렀다.
카류나는 한 병이 아닌 두 병의 에페테르를 마셨다. 이 때문에
남자를 요구하는 강도 역시 두 배로 강해졌다. 단 한 번의 거사로
는한 병의 약 기운만 사라지는 터 아직 몸속에 남은한 병의 약
기운이 카류나를 뜨겁게 달구며 더 많은 남성을 원했다.
"이 이. 흥."
"프리지아. 이건. 정말오해요. 내 말을모두들으면 날 이해할
거요. "
쿨샤크의 말은 프리지아에게 씨도 먹히지 않았다. 꼿꼿하게 서
있는 중요한 물건이 스스로도 흥분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상황
이 이러한데 그가 한 말이 먹힐 리가 없었다
"쿨샤크, 어서. "
프리지아와쿨샤크, 카류나. 그들사이의 분위기가묘하게 돌아
갔다. 한쪽은 뜨거운 열락의 기운을, 다른 한쪽은 차갑고 냉담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두 여인. 중간에 낀 쿨샤크만 죽을상이었다.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카류나가 저 정도로 밝힐 줄은몰랐는데, '
라한은 카류나가 에페테르를 두 병씩이나 마셨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에펠 일행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한 탓이다.
"이놈! 내 여자 친구와 그 짓을 해놓고도 발뺌이냐!"
셋의 묘한분위기를 라한이 깨뜨렸다. 주변에서 이 상황을구경
하던 사람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너무 흥미진진한 장면이었다.
벌거벗은 남녀와 그들을 노려보는 예쁜 귀족 여식. 이 세 명만으
로도충분히 재미있는상황이었다. 헌데, 대마법사급으로 보이는
라한까지 끼어 있으니. 돈 주고도 볼 수 없는 광경임에 분명했다.
"네 이놈! 널 친구로 믿었건만. 용서할 수 없다. 파이어 애로우!"
"실드! "
라한이 마법을 날리자 데메크가 급히 실드를 시전했다. 하지만
둘의 실력 차이가 워낙 커서 뒤로 쭉 밀려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흥. 파이어
탁- !
"그만하게. "
라한이 마법을 시전하려 하자 프라하가 조용히 만류했다. 고개
를 가로젓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프라하. 하지만, 저놈이. "
"휴우, 어쩔 수 없는 게야. 잊게. 저 여자를 잊고 저놈을 잊게.
내가 있지 않은가. 난 배신하지 않겠네. "
프라하의 말에 라한이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엄청난 분노를 억
지로 삼키는 모습이었다. 마치 연기가 아닌 진짜처럼 보였다.
'이놈 봐라. 잘못하면 나도 속겠네. '
프라하는 미리 짜인 각본이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 가슴이 철렁
하는느낌이었다. 라한의 연기가너무 리얼했다. 흐르는눈물과꽉
쥐어진 주먹, 붉게 상기된 얼굴. 어느 것 하나 연기로 볼만한 게 없
었다. 새삼 정말 무서운 친구를 뒀다는 생각이 들었다.
"쿨샤크! 카류나! 좋다. 난 이대로 널 떠나주마. 단. "
라한이 말을 끊자 주변에서 흥미진진한 듯 눈을 밝게 빛냈다. 개
중에는 귀에 손을 가져다대고 얘기를 듣는 사람도 있었다.
"단, 행복해라 빌어먹을. 행복하게 잘지내란말이다. "
말을 마친 라한이 몸을 돌렸다. 어깨가 수시로 들썩이는 모습이
울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게 몸을 돌리다 프리지아와 눈이 마주쳤다. 이에 라한이 순
간 몸을 움찔거 렸다.
'저, 저 여자 뭐야?'
망설임은잠시. 마음을다독인 라한이 다시 배역에 충실했다. 일
단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지금 라한의 역할이었다.
라한이 사라지자 프리지아에게 공격권이 넘어왔다.
"흥. 쿨샤크! 앞으로당신 가문의 뮬라상단은우리 엘퐁소에서
장사를할수 없을 거예요. 두분이서 잘 먹고잘사세요. 세르민!
돌아가요. "
프리지아가 친위기사를 대동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쿨샤크는 그녀가 몸을 돌렸음에도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동안 공들였던 모든 걸 잃었다는 생각에 힘이 빠졌다.
털썩!
쿨샤크가 주저앉자 카류나가 그의 몸에 올라탔다. 아직도 약 기
운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자리로 돌아온 라한이 짐을 꾸렸다. 물론, 짐이라고 해봐야 고가
품은모두 아공간에 있었다. 하지만, 겉보기만으로는 평범해야했
기에 옷가지 같은 값싼 물품은 가방에 들어 있었다.
그렇게 짐을 챙기면서 좀 전에 마주친 프리지아를 떠올렸다.
'이상해. 여리게 보이는 데 저런 힘을 감추고 있다니. 쳇.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
어차피 다시 볼가능성이 없는사람이 프리지아였다. 괜히 심력
을소모할필요는 없었다. 고민은나중에, 다시 만날 일이 있을때
해도 늦지 않았다.
"형님. 가십니까?"
"형님. 참으십시오. "
라한이 짐을싸자 에펠 일행이 그를 말리고 나섰다. 하지만, 라
한은 그들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쿨샤크 쪽에서 반응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상하군. 말리러 와야 하는데. '
쿨샤크는 애초부터 라한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건 라한도 이미 알
고 있는사실이다. 헌데, 지금분위기라면 라한을공격하기 힘들었
다. 안그래도안좋았던 인식이 더 나빠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
이 본점까지 데리고 가서 다른 용병들 모르게 죽이는 방법뿐이리라.
'방법까지 내가 알려줘야 하나?'
"형님. 저희는 어쩌고. "
에펠 일행도 다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라한을 죽이려면 반드시
본점까지 데리고 가야 했다. 근데 지금 그가 떠나버린다면? 지금
까지 해왔던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어떻게든 말려야 하
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내가 이런 수모를 받고도 여기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형님 참으
"멈춰라. "
에펠이 라한을 만류하려 할 때, 상단 호위병이 달려오며 외쳤다.
아마 쿨샤크나 데메크의 명령을 받고 온 것이리라.
"무슨 일이지?"
"떠날 생각인가?"
"그렇다면?"
"넌 갈 수 없다. "
라한은 반말로 일관했다. 상대에게 예를 갖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이다.
"왜지?"
"넌 용병이다. 그리고 이번에 맡은 임무는 우리 상회의 본점까
지 물건을 수송하는 일이지. 그건 네가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이곳
을 떠날 수 없다는 말도 된다. "
호위병의 말에 라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누군가가
말려주길 바라지 않았던가.
에펠 일행만으로는 그 강도가 약했기에 계속 짐을 쌌을 뿐. 용병
규칙을 들고 나온다면 마지못해 따라가는 모습을 취할수 있었다.
"이, 이좋다. 끝까지 가주겠다. 그 연놈들이 얼마나행복하게
지내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봐주지. "
"후후, 진작 그럴 것이지. "
비릿하게 웃은 호위병이 마차가 있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얼굴
가득 비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라한은 짐을 싸놓은 그 상태 그대로 상단 행렬을 따랐다.
위험 지역을 모두 벗어났기에 몬스터의 공격은 없었다. 또, 왕국
안에는 대규모 산적단이 없어서 지능적인 형태의 공격도 걱정할 필
요가 없었다.
전투한번 없는평온한이동. 하지만, 그누구도지루하다고생
각하지 않았다. 쿨샤크와 라한의 첨예한 신경전을 짐작한 탓이다.
지금 그들에게 라한은 거대한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상단 행렬이 엘퐁소 시의 거대한 상점 앞에 도착했다. 쿨샤크가
운용하는 상단의 본점이었다.
"다 왔군. "
"정지! 용병들은 왼쪽으로 모여라. "
"유후! "
"와! "
제라드의 외침에 용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남은 잔금만
받으면 이번 임무가 끝나게 된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퇴근 정도와
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기쁨이었다.
"쿨샤크님. "
"알겠네 "
말을 마친 쿨샤크가 옆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호위병들
이 주머니를들고용병들이 있는곳으로 다가갔다. 그들이 용병들
에게 잔금을 지불하는 절차였다
쿨샤크의 뒤에는 카류나가 조용히 서 있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자신은 쿨샤크의 여자가 되었다. 돈이 아주 많은 상단주의 부인.
"데메크. 알아서 준비하게. "
" 네. "
쿨샤크의 조용한 읖조림에 데메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이곳에 도착하기 며칠 전에 전투준비를 지시했었다. 지
금은 그 준비를 모두 마쳤을 터. 라한을 끌어들여서 처리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준비를 끝냈나보군. 따라줘야지. '
용병들에게 섞여 있던 라한이 뒤로 이동했다. 그를 따라 에펠 일
행도 뒤로 빠졌다.
라한은 쿨샤크가 움직이기 편하도록 제일 마지막에 잔금을 받을
생각이었다. 일단은 상대의 의도대로 움직여주되 나중에 확실하게
제압하면 되는 것이다
-자신 있어?
"당연하지. "
테세르의 중얼거림에 라한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스스로의 힘을 믿었다. 또, 프라하의 도끼 실력도 믿었다.
그 둘에 테세르와 슈라가 더해진다면 상단 하나쯤은 쉽게 부술 수
있는 전력이 었다.
-어느 정도로 할 생각이야?
"글쎄. 제대로 해야지. "
라한은 서클 정도의 힘만 쓸 생각이었다. 그 이상 드러내는 건
전혀 상관없는제 3 자의 이목을끌지도몰랐다. 물론, 라한에게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아직은 스스로의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하
는 라한. 힘을 모두 드러내는 건 자신에게 너무 위험했다.
-서클은?
"6 서클 정도. "
7 서클의 마법은 숨기자 그게 라한이 생각한 생존 방법이다. 실
력의 반 이상을 숨기는 그런 방법.
7 서클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을 때, 혹은 8 서클을 사용할
수 있을때 알릴 생각이었다. 또, 인챈트는 영원히 알리지 않을생
각을 굳혔다. 물론 인챈트된 물품은 사용하겠지만.
"다음. "
쨍그랑!
"고맙군. "
"흥 "
라한이 돈을 받으면서 잔금을 치르는 일은 끝이 났다. 돈을 받은
용병들은 저마다 아는 술집을 찾아 나섰다. 혹은, 여관을 찾아서
짐부터 푸는 사람도 있었다.
"나랑 술 한 잔 하지 않겠는가?"
라한이 돈을 받자 제라드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쿨샤크와 데메크가 심상치 않은 일을 꾸민다는 걸 짐작하
고 있었다. 오랜 경험이 그런 눈치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제라드씨. "
"흠, 위험할지도 모르네. "
"괜찮습니다. "
라한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불안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충고를
했던 제라드가 오히려 민망해질 정도였다.
"그래도. "
"라한님이십니까?"
제라드와 라한이 실랑이를 벌일 때, 저택 안에서 오십대 중년 사
내가 다가왔다. 실력이 제법 좋은지 탄탄한 근육을 가진 사내였다.
"무슨 일이지?"
"아, 맞나 보군요. 주인님께서 보자고 하십니다. "
"쿨샤크가?"
라한의 되물음에 중년 사내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
고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몇 번 가로저었다.
"잘못 아셨군요. 도련님은 저희 상단의 주인이 아닙니다. 아직
까지는 주인님께서 상단을 맡고 계시죠. "
"그런가?"
"예. 주인님께서 도련님의 실수를 들으시고 사과하고 싶답니다.
가시지요. "
"그러지. "
라한의 대답에 중년 사내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사내의 눈빛이
음흥하게 변했다가 사라졌다.
'집안 전부가 썩었군. '
'재미 있겠군. '
'역시 불길했어. '
사내의 눈빛 변화는 라한과 프라하 제라드 모두가 눈치 챈 사실
이다 그들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쌓았으니까 당연한 일인
지도 모른다.
라한이 사내를 따라가자 프라하와 제라드. 에펠 일행도 그들을
따랐다. 에펠 일행은 당연히 계획대로 움직인 거였고 제라드는 약
간의 안쓰러운 마음이 더해져서 라한의 동행을 자처했다
부상당하다
라한과 일행이 안내된 곳은 상단의 식당이었다 거대 상단답게
엄청나게 큰 식탁과 가지런히 세팅되어 있는 식사 도구들 거기다
벽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그림들과 구석에 놓인 석상 보통 사람은
보기만 해도 질릴 정도로 화려한 인테리어였다
쓸만하군
라한이 내린 평가는 단순하다 자신은 백작가의 아들이었다 이
정도로 눈이휘둥그레지질 바라는 건 무리였다
우와
죽인다
멋져
반면 라한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화려한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
다 심지어 라이칸드로프인 프라하까지도 입을 쩍 벌린체 연신 감
탄성을 토했다.
그들의 감탄을 들으며 라한이 손을 슬쩍 뻗었다. 시스마란의 어
깨를 향해서였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슬쩍 당겨 자신과 가까이 있
게 만들었다. 난전 속에서도 그만은 살리기 위함이었다.
시스마란은 결국 라한을 배신하지 않았다. 눈치가 없어서 에펠
일행이 꾸민 일을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배신을 꿈꾸지
는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만으로도 라한을 흡족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런 흡족함이 시스마란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도록 했
음이다.
"허허허. 앉으시오. "
일행이 주변을 둘러보며 놀라고 있을 때, 식당의 중앙 문에서 50
대 중반의 사내가 들어왔다.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모습으로 보아
그가 상단주임을 짐작하게 했다.
털썩!
"감사합니다. "
"반갑습니다. "
일행이 공손한 어투로 저마다 인사를 했다. 하지만 라한과 프라
하, 제라드는 일언반구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상대가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대에게서 호의를 찾아볼 수
없으니 좋은 말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얘기는 식사가 끝난 후에 합시다. "
"잘 먹겠습니다. "
식사를 앞에 둔 라한이 음식을 대충 살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정화 마법을 펼쳤다.
'후후, 독?'
라한의 눈에 독이 해독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다른 일행들
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프라하나 제라드도 마나가 유동하는 걸 봤
을 뿐, 독이 해독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쾌 강한독이군. '
라한의 마법으로도 독이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1 서클 정화
마법으로는 제대로 된 해독이 무리인 듯했다.
해독과 관계된 마법은 상위 서클의 클래스 마법이다. 비클래스
마법 외에는 아무것도 사용할수 없는 라한. 그에게는 이 음식을
해독할 능력이 부족했다.
'젠장. 배고파 죽겠는데. '
투덜거린 라한이 수저를 놓았다. 만독불침이 아니었기에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라한이 수저를 놓자 프라하와 제라드도 수저를 놓았다. 라한의
표정에서 뭔가 잘못됐음을 짐작한 듯했다.
"왜 음식을 먹지 않는 건가 7"
"미친 영감탱이 같으니. 너 같으면 독을 먹고 싶겠냐. "
"흠. "
잠시 침음성을 흘리던 중년 사내가 손을 들어올렸다.
챙-!
쨍그랑!
사내의 움직임에 반응하듯, 수십 명의 사람이 튀어나왔다. 검을
든 사람, 활을 든 사람, 아무것도 들지 않고 로브만 입은 마법사 두
명. 종류별로 다 모인 듯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벽 가 쪽에 딱 붙은 채로 앞으로 나서지 않았
다. 안쪽으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어떤 이유가 있는 듯했다.
"아주 쇼를 하는군. "
"조심하게. 실력이 만만치 않아 보이네. "
제라드가 라한의 앞을 막아섰다. 마법사를 먼저 보호하는용병
정신이 부지불식간에 발휘된 모습이었다.
"후후후, 자네가 대단한 마법사라는 말을들었지. 하지만쓸모
없을 걸세. 이곳에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거든. "
"젠장. "
중년 사내의 말에 프라하가 신음성을 흘렸다. 또 제라드는 욕설
을 내뱉으며 중년 사내를 노려봤다. 아무래도 이번 상황은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았다
중년 사내의 말에 라한이 제령기를 슬쩍 움직여 봤다. 정말 마법
을 쓸 수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잠시 제령기를 움직이던 라한. 이내 의아한 빛을 띠었다.
'뭐야? 별 이상 없잖아. '
중년 사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제령기의 움직임이 조금 뻑뻑했
다. 하지만 마법을 시전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하긴, 좀전에도정화마법을마음놓고썼었는데 뭐. 근데, 마
나가 응축된 제령기라서 그런가. 영향을 안 받네. '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마나 스캔으로도 잡히지 않는 게 제령
기와 제란기 아니던가. 마나를 봉하는 마법진에 영향 받지 않는 것
도 어쩌면 당연했다.
1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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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Ra? HUtaBC 촐
"후후후, 놀랐나보군. 쾌 많은 돈을 들였다네 비록 오늘 하루밖
에 사용할 수 없지만, 그 정도면 자네를 처리하는 시간으로는 충분
하겠지. "
피식!
"꼴값 떨고 있네. "
중년 사내의 자신 있는 말에 라한이 실소를 터트렸다. 혼자북
치고 장구 치는 모습이 재미있기까지 했다
"매직 애로우!"
라한이 머리 위에 매직 애로우를 만들어 냈다. 이십여 개에 육박
하는 엄청난 개수였다.
"어, 어떻게?"
"불량품을 썼나보네. 이를 어쩌나. "
라한이 마법을 시전하자 중년 사내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마법
을 시전할 수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라한의 마법에 에펠 일행이 눈짓을 해댔다.
그들은 자신들이 싸움의 물꼬를 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를 위
해서 라한을 기습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하앗! "
"하앗! "
잠시 눈빛을 주고받던 에펠 일행이 공격을 감행했다. 시작은 베
린이었다. 회심의 일격이었던 듯, 쾌 날카로운 구석이 엿보였다.
그 뒤를 이어 에펠이 검을 찔러왔다. 베린보다 조금 느리지만,
힘이 담긴 검이었다. 하지만.
챙-!
채쟁!
쾅- !
그들의 공격은라한에 의해 막혔다 공중에 떠 있던 매직 애로우
가 방패처럼 막아 버린 것이다.
에펠 일행은 라한의 생각지도 못한 마법 변형에 어안이 벙벙했
다. 공격 마법을 방패로 사용하다니. 듣도 보도 못한 방법이었다.
"프라하. 저놈들 대충 좀 처리해라. 죽이지는 말고. "
"흐흐흐흐. 그러지. "
말을 마친 프라하가 도끼를 꺼내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상단 행렬을 따라오면서 주로 검을 사용했다. 굳
이 주 무기인 도끼를쓸 만큼 위험한상황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
지만, 이번에는도끼를들었다. 이곳에 모여 있는모든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안걱주기 위해서였다
"저, 저리가, "
"상단주님, 저희를. "
에펠 일행의 간절한 요청에도 중년 사내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
했다. 라한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매직 애로우가 내심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검을 막느라 몇 개가 소모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반수 이상의 매
직 애로우가공중에 떠 있었다. 그 매직 애로우가눈앞에 왔다 갔
다 하니 쉽사리 공격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자. 막아봐!"
부웅!
채! 즈즈즈즈!
투캉!
프라하가도끼를 휘두르자 베린이 힘겹게 막았다. 하지만, 부딪
힘과동시에 검이 부러져 버렸다. 그리고 그의 손목도 심하게 꺾여
나갔다.
"한 번 더. "
부웅!
"이힉!"
베린이 급히 몸을피했지만, 완전히 벗어나지는못했다. 왼쪽허
벅지를 그대로 내준 것이다.
푸학:
프라하가 베린의 허벅지에 박힌 도끼를 뽑았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또 다시.
부웅!
"헙!"
쾅- !
프라하의 도끼가 베린의 어깨에 박혔다. 도끼를 빼내는 프라하
의 눈빛이 섬뜩하게 변했다. 순간적으로 라이칸드로프일 때의 살
기를 드러낸 것이다
"큭! "
"이놈은 끝났고. 다음은. "
프라하의 시선이 에펠에게 향했다. 담담하고 평온한 눈빛이었지
만 에펠에게는 사신처럼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부웅!
쾅- !
에펠은 막는 걸 포기하고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베린이 피하
지 못한도끼를 에펠이라고 피할수 있을 리 만무했다. 오히려 베
린보다 더 느린 사람이 에펠 아니던가.
프라하의 도끼에 복부를 내주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꾸웩! 헉, 헉!"
에펠의 배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수돗물을 틀어놓은 듯 엄청
난 양이었다.
"다음은, "
"내가 하지. "
라한이 프라하를 제지시켰다. 주변에 보이는 광경이 너무 잔인
했다. 아무리 정이라는 감정이 메마른 라한이라도 이런 모습을 좋
아하지는 않았다. 내심 좀 전에 프라하에게 지시했던 걸 후회하는
중이었다.
슥!

라한이 캐스팅 해둔 매직 애로우 두 발을 란에게 날렸다. 갑작스
럽고 빠른 공격이었다.
"헙!"
란은 간단한 실드조차 시전하지 못하고 마법에 맞았다. 복부에
한발. 어깨에 한발이었다. 둘의 실력차이가 이런 식의 압도적인
승리를 가져왔다.
"쳇. 맡긴다고 해놓고. "
'다행이군. '
라한은 에펠 일행이 죽지 않은 게 다행스러웠다. 또, 그들의 부
상이 불구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다행이었다. 애초부터 그들
을 죽일 생각이 없었음이다.
"매직 애로우! "
에펠 일행이 처리되자 라한이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좀 전에 만
들어둔 애로우를 많이 써 버렸기에 다시 만든 것이다.
라한 일행의 행동에 중년 사내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냐 싶었다. 아무리 1 서클 마법이라도 그렇지, 한
번에 스무 개를 만들다니. 그것도 주문 없이 시동어만으로 자
신이 상대를 너무 쉽게 봤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서클이 높아질수록 하위 서클 마법을 많이 만들 수 있는 건 당연
했다. 하지만, 많이 만들려면 주문을꼭 외워야했다. 시동어만으
로는 제대로 마나를 주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헌데 라한은 시동어만으로 1 서클 마법을 시전했다. 그것도 처음
과 비슷한 엄청난 수였다. 역사책에서도, 그 어떤 영웅담에도 볼
수 없는 엄청난 광경이었다. 이런 식으로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유
일한 존재는 단 하나. 드래곤뿐이었기에.
'저놈부터 처리해야 돼. '
어찌됐든 최종 목표는 라한이었다. 또,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상대도 라한이었다. 마음 놓고 마법을 시전하는 마법사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아는 까닭이다.
"라한. 계속 싸울 거야? 이게 아니잖아. "
라한이 전방을 주시하고 있을 때, 프라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원래 계획과 어긋난다는 걸 지적한 것이다.
라한의 원래 계획은 이들을 쓸어버리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존
재를 알려 섣불리 덤비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 또, 배신자
를가려내고, 시스마란만데리고사라지는것. 라한이 본래 의도한
건 이 정도였다
"알아. 근데 데메크라는 놈은 처리해야겠어. "
"어떻게?"
"불러내야지 . "
라한이 상대를 살려주려는 건 마음이 너그러워서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상단주를 비롯한 병력을 처리했다가는 왕국의 병사들이
쫓을 게 분명했다. 대륙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수배자가
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일단 좀 놀아보자고. 매직 애로우!"
스팡!
라한의 매직 애로우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죽으면 어쩔 수 없고,
피하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 마디로 마구잡이로
날린 것이다.
"제라드. 라한한테 달려오는 놈을 막아. "
프라하의 말에 제라드와 시스마란이 라한의 양 옆에 섰다. 상대
의 공격을 막겠다는 의도였다. 그들의 호위가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라한의 마법에 프라하가 전방으로 쏘아져 갔다. 그의 목표는 상
단주인 중년 사내였다. 머리를 잡으면 몸통은 저절로 통제될 터
지금은 상단주만 생포하면 나머지는 문제될 게 없었다.
쾅! 쾅-!
프라하의 도끼가 일련의 병사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몇몇은 도
끼를 막음과 동시에 뒤로 튕겨 나갔지만, 대부분은 끈질기게 막아
섰다. 그렇게 대여섯 명이 튕겨났을 때, 프라하의 걸음도 멈춰졌
다. 한손이 열손을 막지 못함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라한의 매직 애로우는 여섯 명의 사상자를 만들었다. 뚜렷한목
표 없이 마구 날렸기에 대부분이 피해 버린 탓이다. 그나마 맞은
사람도 죽을 정도로 큰 부상은 아닌 듯했다.
"곤란하게 됐군. "
라한은 한 번의 공격이면 중년 사내를 제압할 줄 알았다. 프라하
의 실력이면 충분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헌데, 결과는실패였다. 호위무사들이 저 정도로육탄돌격하듯
막아설 줄 몰랐던 것이다.
물론, 손에 사정을두지 않았다면 실패할 리 없었다. 헌데 라한
은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고, 그 때문에 프라하는 제 실력을 발휘하
지 못했다. 죽이지 않고 뚫고 가는 게 더 힘들다는 게 여실히 드러
났다.
"내가 나서 야겠군. "
생각을 마친 라한이 서서히 광견보를 시전했다. 그에 따라 눈빛
이 광포하게 물들고, 손톱에 핏기가 어렸다. 하지만 침을 흘리거나
눈이 붉게 변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라한이 광견보를 이 정도
수준까지 발전시킨 탓이다.
스팟!
"헛! "
"헉 ! "
라한에게 공격을 가하려던 호위병 여럿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갑자기 상대가사라졌다. 아니, 빛무리처럼 긴 잔상을남기고 어
딘가로 날아갔다.
"막아! "
쾅- !
"어어 어 ! "
'응? '
라한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호위병들이 슬로우비디오로 움직
인다고생각했다. 예전에는분명 이런 현상이 없었다. 광견보의 또
다른 효용? 그게 아니면 자신이 착각한 것이리라.
'나중에 다시 연구해 봐야겠군.
라한은 이미 중년 사내의 뒤에 도착해 있었다.
호위병들은 그 누구 하나 라한을 저지하지 못했다. 라한의 움직
임을 본 사람이라고 해봐야 프라하와 제라드 정도. 일반 호위병들
은 눈으로도 라한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했다.
"컥!"
라한의 손이 중년 사내의 목을 움컥쥐었다. 이에 중년 사내의 얼
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달아올랐다.
"컥, 컥!"
"애들좀말려라. 안그러면 영감이 죽어 "
라한은 검술 자체의 감각이 떨어져서 그렇지, 육체적인 능력은
검사의 그것을 능가했다. 중년 사내가 라한의 손아귀 힘을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상하군. 이 자가 쿨샤크의 아버지?'
라한은 쿨샤크의 아버지가 용병 대장이었음을 기억해냈다. 헌
데, 상대는 너무무기력하게 제압당했다. 검이라고는생전 익혀보
지도 못한 사람 같았다.
'속았군. 후후후. 까짓것 속아주지. '
중년 사내는 재정 업무를 보는 집사에 불과했다. 혹시 모를 위험
상황을 대가리들이 미리 피한 것이다.
" 크륵! "
"빨리 말해라, 영감. "
라한이 손에서 힘을 조금 뼁다. 이에 중년 사내가 숨을 계속 몰아
쉬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숨을 쉬지 못했던 게 힘들었던 모양이다.
"헉, 헉!"
"말해. 안 그러면 넌 죽어. "
라한의 오른손에는중년 사내의 목이 잡혀 있었고, 왼손에는 전
기 덩어리가 캐스팅되어 있었다. 쇼크 마법에 제령기를 집중시켜
크게 불린 것이다.
"멈, 멈춰라! "
"훗, 진작 그럴 것이지. "
중년 사내의 외침에 호위병들이 조금씩 물러났다. 하지만, 눈에
서는 여전히 살기가 뻗어 나왔다.
"무기를 버리라고 해라. "
"무기를 버려라. "
챙그렁!
쨍-!
중년 사내의 말에 호위병들이 무기를 버렸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태도였다.
'흠, 이미 이 상황을 예상했군. '
쿨샤크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꽤 대단한 사람 같았다. 호위병들
의 태도를볼때, 이런상황을미리 예상한것 같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의 즉각적인 태도도 미리 언질을 받은 듯했다.
'여차하면 깨끗하게 포기한다? 쯧쯧, 쿨샤크가 아버지를 반만
닮았어도. '
호위병들이 터준길을통해 라한과프라하, 제라드, 시스마란이
서서히 걸어 나갔다.
짝! 짝-!
그렇게 식당을 거의 벗어났을 때, 안쪽에서 날카로운 인상의 50
대 중반 사내가 걸어 나왔다. 붉은 머리카락과 얼굴에 나 있는 긴
검상, 다부진체격. 검과함께오랜시간을지낸사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내의 뒤로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둘과 쿨샤크, 데메
크가 모습을 보였다.
"대단하군. "
중년 사내의 중후한 음성에 라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집사를 옆으로 던졌다.
쿵- !
이제 주인공이 나타났으니 필요 없는 인질이었다. 어차피 모든
호위병들의 움직임은 새로 나타난 사람이 통제할 테니.
"어이쿠! "
"이런 우리 집사를 너무 막 대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우리 상
단에서는 무척 중요한 사람이라네. "
중년 사내의 말에도 라한의 표정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하지
만, 속으로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풍기는 기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프라하보다는 한참 떨어지겠지
만, 제라드보다는뛰어난것 같았다. 저 정도면 소드익스퍼트상급
이나 최상급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아, 내 소개가 늦었군. 못난 아들을 둔 레드리안이라고 하네
이 집 주인이지. "
"그런가? 근데 왜 나타난 거지? 설마 뒤에 있는 떨거지들을 믿
고 우리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라한의 톡 쏘는 듯한 질문에 중년사내 레드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도 자신들의 힘으로 라한 일행을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는가? 거래를 하고 싶어서 왔네. "
"거래라
라한이 상대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말을 길게 늘였다. 이에 레드
리안이 부가 설명을 해왔다.
"자네와 자네 친구들이 힘을 보태준다면 우리 상단에 큰 힘이 될
걸세. 보수는 후하게 쳐 줄 테니 우리와 함께 일해 보지 않겠는가?"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 녀석은 저와 프리지아를 갈
라놓은 놈입니다. 제가 귀족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 간
"닥쳐라! 아직도 철이 들려면 멀었구나. 그렇게 사사로운 정에
매달리지 말라고 했거늘. "
쿨샤크가 끼어들자 레드리안이 눈을 부라리며 대꾸했다.
"아버지! "
"닥치라고 했다 "
그는 아들인 쿨샤크가 못마땅했다. 아들만 아니었다면 이미 오
래전에 내쳤을지도 몰랐다.
단순히 무능한 정도로 그쳤다면 이 정도까지 화를 내지는 않았
을 것이다. 헌데, 무능하면서도 욕심이 많다는 게 문제였다. 거기
다 상대를 짓밟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악한 성정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재미있는 집구석이군. '
"거래라면 상단에서 일하라는 거겠지?"
"후후, 아닐세. "
"응?"
"물러가라. "
라한의 의아한 되물음에 레드리안이 주변을물렸다. 이에 집사
를 포함한 먼저 있던 모든 사람이 식당물 나갔다
모두물러나자남은사람은단세 명. 레드리안과쿨샤크, 데메
크뿐이었다.
"너희들도 물러나라. "
"아, 아버지. "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
"네. "
결국, 쿨샤크와 데메크도 식당을 나갔다.
그의 전격적인 행동에 라한이 의아해 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
려고 주변 모두를 물리는지 짐작 가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중요한 얘긴가?"
"그렇다고 볼 수 있네. 자네도 정말 믿는 친구가 아니면 물리는
게 어떤가?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을 걸 약속하지. "
레드리안의 말에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분위기만 봐도 중요한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 레드리안
의 얼굴에 떠오른 진지함과 걱정스러운 기색, 라한의 짐작에 확신
을 더해줬다.
"제라드씨! 시스마란!"
"알겠네. 난 빠지지, "
"저도 빠지겠습니다. 형님, 몸조심하십시오. "
제라드가한걸음물러나며 일에 불참을선언하고나섰다. 이에
시스마란도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라한을 다시 한번 바라보더
니 이내 식당을 벗어났다. 약간 주저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끝까지
고개를 돌리 지는 않았다.
"프라하!"
"난 낄 생각이다. "
프라하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프라하가 옆에
있는 게 안심되었다. 원거리 공격을 하는 자신에게는 근접해서 보
호할 존재는 필수였다. 오히려 프라하의 결정이 고마웠다.
"정해졌군. "
"날 따라오게. "
레드리안의 식탁의 한쪽 구석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기사들이
입는 풀 플레이트 갑옷이 진열되어 있었다.
레드리안이 갑옷의 검 손잡이를 몇 바퀴 돌렸다. 어떤 정해진 규
칙대로 돌리는 느낌이었다.
크르르릉!
미약한 소음과 함께 플레이트 메일이 옆으로 밀려났다. 그곳에
는 손잡이가 달린 작은 문이 달려 있었다.
끼이이이 익 !
레드리안이 손잡이를 당기자 문이 비명을 토하며 열렸다. 손질
을 거의 하지 못한문인 듯했다. 하지만, 열리는모양만큼은무척
이나 부드러웠다. 손질은 못했으나 종종 이용했던 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상단 본점에 비밀 문이라, 정체가 뭐지?
생각은 찰나. 일단은 문으로 들어갔다. 안은 어두웠다 입구에
서 들어오는 빛 외에는 그 어떤 빛도 보이지 않았다.
끼이이익! 쾅!
크르르릉! 쾅!
라한과프라하, 레드리안이 들어오자문이 닫혔다. 그와동시에
갑옷도 제 위치를 찾았는지, 기모한 소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라이트! "
라한이 눈앞에 빛 덩어리를 생성시켰다.
"마법사라 편하구먼. "
앞에 비스듬하게 아래로 향한 긴 계단이 보였다.
계단에는 먼지가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하지만 군데군데 남은
발자국이 버린 장소는 아니라는 걸 알려줬다. 레드리안이 이곳을
드나들 때 남긴 발자국이리라.
뚜벅! 뚜벅!
한참을 내려가자 사방 5 미터 정도의 방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놓인 작은 보석과 주변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문양.
라한은 그 보석이 마나석임을한눈에 알아봤다. 또, 주변에 새
겨진 문양이 무언지도 알아볼 수 있었다.
"이곳이 뭐하는 곳인지 알겠는가?"
"마법진. 흠, 텔레포트마법진같은데. 맞나?"
라한은 시종일관 반말을 유지했다. 아직 쿨샤크에게 쌓인 미움
이 가시지 않은 탓이다.
레드리안도 라한의 반말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 눈에 알아보다니. 역시 대단하군, "
"어디로 가는 길인지 물어도 될까?"
"가보면 알게 될 걸세. "
라한도 이번에는 선뜻 허락할 수 없었다. 이곳이 어디로 향해 있
는지 모르는 까닭이다. 어쩌면 식당에서보다 더 큰 함정을 설치했
을지 모를 일. 한번에 '오냐가겠다' 하는 건 라한의 성격과맞지
않았다.
"자네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걸세. 그건 내가 약속하지. "
레드리안의 얼굴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라한도 그 진심을 어
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기에 거부감이 느껴진 것
이다.
"후후, 못 믿겠는가보군. 그럼 날제압하게. 그상태로 데려가
면 믿을 수 있겠지. "
레드리안의 말에 라한이 세라 소드를 꺼내 레드리안의 어깨에
올렸다.
칼집에 들어 있을 때는 허름해 보이던 검이 검신을 드러내자 시
린 빛을 마구 뿌렸다 누가 보더라도 명검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목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에 레드리안이 몸을 살짝 떨었다. 그
리고 갑탄한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은 검이군. "
"들어가지 "
마법진 안에 들어가자 프라하가 도끼를 움컥잡았다. 이동해서
생길지 모를 기습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라한도 왼손에 쇼크를 뭉쳐놓았다.
"이동하겠네. 텔레포트!"
시동어를 외치자 미약한 빛무리가 마법진을 감돌았다. 그 빛이
사라졌을 때는 라한과 프라하, 레드리안의 모습이 사라진 후였다.
레드리안에 의해 쫓걱난 쿨샤크가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 얼굴
에 심통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말도 안 돼. 그따위 것 때문에 날 내보내다니. 이게 말이 된다
고 생각해?"
"쿨샤크님. 진정하십시오. 뭔가생각이 있으시겠죠."
데메크의 위로에도 쿨샤크의 화는 풀릴 줄 몰랐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와 사사건건 부딪혔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무능하다고 할 때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반박
했다. 욕심이 많다고 할 때는 남자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태도라고
대꾸했고, 사악하다고 할 때는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말
했었다. 그는 오히려 아버지의 야망이 적다고 비웃었고, 자신의 능
력을 알아볼 줄 모른다고 화를 냈다.
"젠장. 아버지라는 인간이 아들을 우습게 생각하니까 내가 이런
꼴을 당하지. "
"진정하십시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
데메크의 만류에 쿨샤크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얘기냐고 묻은
듯했다.
"먼저 카류나라는 계집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정
말 결혼하실 겁니까?"
"미쳤어? 내가 그딴 년하고 결혼을?푸하하하.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
쿨샤크는 애초에 카류나와 결혼할생각이 없었다. 라한을 비참
하게 만들기 위해 그녀를 가지고 놀았을 뿐. 일단 빼앗았으니 버릴
차례였다.
"그녀를 처리하게 되면 그녀와 일행이었던 자들도 처리해야 합
니다. "
"음, 그렇지. "
카류나와 에펠 일행의 속마음이 다르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일행이었다는 것, 같은곳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한데 묶어서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해를가하는 건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래도상단
주님께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
"그럼 어떡하지?"
데메크의 말에 쿨샤크가 걱정스러운 빛을 띠었다. 그도 이 정도
로 일이 복잡해질 줄 몰랐다. 일이 커지자 수습은 더 힘들어졌다.
"구실을 만들어서 내쫓아야 합니다. "
"에펠 일행을쫓는 거야그리 어렵지 않지만, 카류나는 쉽지 않
텐데. "
"방법이 있습니다. "
"방법?"
데메크의 말에 쿨샤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의 표정에서 묘책
이 있음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데메크의 머리에서 나온 방
법이라면 분명히 실효성이 있을 터였다
"스스로 나가게 하면 됩니다. "
"스스로 나가게?"
"예, 우리가 그들을 죽이려 한다는 얘기를 은근슬쩍 흘리면 됩
니다. 그리고 그때는 저택의 경비를 허술하게 만들어야겠죠. 아,
그때 저희 상단의 귀중품 몇 가지를 사라지게 하는 것도 도움이 됩
니다. "
"멋지군. 역시 데메크. "
데메크의 말에 쿨샤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듣기에도 정말
좋은 방법 같았다. 죽이려 한다는 데 이곳에 계속 머물 수 있겠는
가. 분명 알아서 도망갈 게 분명했다.
그 상황에서 귀중품이 사라진다면 추적대를 파견하기도 용이했
다. 상단 밖에서 그들을 처리할 수 있는 멋진 방법이었다.
"쿨샤크님. 추적대를 파견해서는 곤란합니다. "
"왜지?"
쿨샤크는 자신이 생각했던 일이 거부당하자 당황하는 기색이 엿
보였다.
"자칫 사로잡기라도 하면 힘들어지니까요. "
"그럼 외부 사람을 이용해서?"
"예. 그자가 용병이니 용병을 이용하는 것보다 암살자 길드를
이용하는 게 좋습니다 저희 상단은 이번 상단행에서 많은 호위병
을 잃었습니다. 상단주님도 별 말 없이 허락할 겁니다 "
데메크의 말에 쿨샤크의 표정이 음흥하게 변했다. 정말 이보다
좋은 생각은 없을 것 같았다.
암살자 길드라면 생포해 오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거였다.
물론, 용병을 이용하는 것보다 돈이 조금 더 들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의뢰비는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뮬라 상단의 후계자가 아닌가. 그에게 유리한 힘인 재력으로 거추
장스러운 혹을 떼어내는 멋진 방법이었다.
라한과 프라하, 레드리안이 이동된 곳은 동굴이었다. 꽤 넓은 홀
과 어딘가로 향해 있는듯보이는통로들, 또 여기저기 밝혀 놓은
횟불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잠시만 기다리게. 곧 모습을 보일 걸세. "
레드리안 대답이 끝나자 라한의 옆에서 미약한 빛이 새어나왔
다. 누군가 텔레포트 할 때 보이는 그런 빛이었다.
빛을본 라한이 서둘러 몇 걸음물러났다. 그렇게 마법을쓸수
있는 거리를 만든 것이다. 이에 프라하는 그 옆에서 도끼를 쥔 채
로 빛을 응시했다.
위이잉! 스륵!
빛이 사라졌을때, 몇몇 사람들이 모습을보였다. 모두세 사람
중년부터 노년의 외모까지 한결같이 라한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었다.
"음, 레드리안. 무슨 일인가?"
"아, 오셨군요, 제이슨님. 저기 저 사람을 좀 봐주십시오. "
레드리안의 말에 제이슨이라 불린 사내가 라한을 바라봤다. 그
리고는 의아한 빛을 띠며 레드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지? 그냥 마법사가 아닌가? 우리가 찾는 사람은 이들
이 아닌데. "
"예? 저 자는 1 서클 마법인 매직 애로우를 스무 개 넘게 만들었
습니다. 분명히 상위 마법사일 겁니다. "
레드리안의 말에 제이슨이 다시 라한을 바라봤다. 그의 옆에 있
던 다른 두 사람도 라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의아한 듯 다
시 입을 열었다
"굴레를 벗은 존재로군, 둘 다. 근데, 본 적이 없는 놈들인데,
이상하군. 우리가 있던 곳 말고도 굴레를 벗은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었나?"
나타난 세 명은 로테라 숲에서 나온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었다.
상급 정령사인 제이슨, 7 서클유저 마법사인 잉글리아트, 토일렛.
그들이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
'흠. '
라한과 프라하도 상대가 굴레를 벗은 존재임을 깨달았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손끝이 미약하게 떨려왔다.
특히, 프라하는 라한보다 더 심할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자신은
인간이 아닌 라이칸드로프. 굴레를 벗은 인간과는 상극의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셋이라 쉽지 않겠군. '
하나는쉽게 처리할자신이 있었다. 둘 정도도 이기지는못해도
버틸 수는 있을듯했다. 헌데 셋이었다. 거기다 레드리안까지. 승
산 없는 싸움이 될 게 분명했다.
"우리를 부른 이유가 뭐지 7"
"그전에 하나묻지. 너! 어떻게 굴레를 벗었지? 1 서클마법사가
대체 무슨 수로 굴레를 벗은 거지?"
라한의 물음에 잉글리아트가 오히려 되물었다. 마법사인 자신의
눈에 라한이 1 서클 마법사로만 보인 탓이다.
"그건 당신이 알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우릴 부른 이유가 뭐지?"
"자자, 그만. 우리가싸우자고모인 것도아닌데 시작부터 너무
그러는군. 일단자리를좀옳기지 "
말을 마친 토일렛이 홀 구석에 있던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잉글리아트와 제이슨, 레드리안이 따랐다.
"어쩌지?"
"일단 가보자. 해코지 할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
"내 정체를 잊은 건 아니겠지. "
"후후, 내가 네 친구라는 걸 잊은 거야? 정 안되면 도망이라도
가야지 "
라한의 말에 프라하의 인상이 조금은 펴졌다. 라한의 말은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자신을 진정한 친구로 생각한다는 뜻이었
다. 또, 인간들이 상대임에도자신의 편이 되어준다는말이 고마웠
다 종족마저 잊은 우정이라니.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녀석. '
프라하와 라한도 제이슨 일행이 들어간 입구로 따라 들어갔다.
라한과 프라하가 들어간 곳은 작은 방이었다. 원래 있던 흘의 반
정도 크기에 십여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먼저 우릴 부른 이유를 말해줬으면 좋겠군. "
"그게 순서겠지. "
프라하는 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의 본래 정체는 라이칸
드로프. 괜히 입을 열어서 종족의 기운이 풍긴다면 일이 복잡해질
공산이 너무 컸다.
"자네들 정체는 나중에 묻겠다. 먼저 우리는 보다시피 굴레를
벗은존재다. 레드리안은 저기 있는 제이슨의 후손이고. 어디부터
얘기를해야할까. 음, 우린 원래 로테라숲이라는곳에 갇혀 지냈
다 긴 시간이었지. 그러다가
처음 베르타라스에 의해 대륙으로 나왔을 때, 굴레를 벗은 존재
들은 대륙을 마구 활보했었다. 용병이 되는 사람도 있었고, 왕국의
기사단에 하급 기사로들어가기도 했다. 일종의 유희였다. 드래곤
들처럼 남의 인생을 살아보는 그런 놀이인 셈이다.
그렇게 마구 살던 그들은 일 년 전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쪘
다. 굴레를 벗은 존재 몇몇이 사라졌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에 그들의 행적을 조사하기를 한 달. 그들 대부분이 드래곤에
게 당했음을 알아냈다. 더 충격적인 건 드래곤이 직접 찾아와서 죽
였다는 사실이었다.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죽이다니.
그때부터 남아 있던 굴레를 벗은존재를모으기 시작했다. 하지
만, 살아 있는 존재는 걱우 여섯. 벌써 여섯 명이나 당해 버린 상황
이었다. 너무 늦은 대처였다.
"여섯 명이라면 당신들 외에도 세 명이 더 있다는 건가?"
"그렇지. 메시지를 남겼으니 곧 올 거다. "
잉글리아트의 대답에 라한과 프라하가 조급해졌다. 셋도 버거운
데 세 명이 더 온다지 않은가, 안 그래도 없던 승산이 더 적어졌다.
"우리가 드래곤보다 약하기는 하지만 셋 정도만 모여도 드래곤
한 마리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 물론 성룡 급에 한해서. 고룡 정도
되면 우리 권한 밖이지. "
"그래서?"
"다행히도 우리를 공격했던 드래곤은 모두 성룡 급이었다. 하지
만안심이 되지 않았지. 그래서 계속조사를했다. 그러다가그들
의 배후에 드래곤 로드가 있음을 알아냈다. "
로드라는 말에 라한과 프라하가 경악했다. 로드의 참가는 드래
곤 전부의 의견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드래곤 전부가굴레를 벗은존재를공격하다니. 이건 도저히 벗
어날 방법이 없었다. 도망가려 애쓰는그자체가마지막발버둥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나만 묻지. 혹시 드래곤들이 굴레를 벗은 라이칸도 공격을
하고 있나?"
질문은 프라하가 아닌 라한이 했다. 프라하가 궁금해 할 법한 물
음을 대신 해준 것이다.
"물론, 라이칸도 공격을 받았지. 아직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
지만, 생존자가 우리보다 적을 거라는 건 거의 확실하다. "
토일렛의 대답에 라한과 프라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방법을생각하고또생각해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방법이
없었다. 드래곤 전체와의 전투라니. 굴레를 벗은 존재 모두가 뭉쳐
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 혹시 드워프와 엘프는? 그들도 굴레를 벗은 존재가 있을 텐
데. "
"쩝, 그들은 이미 모두죽었다 멍청한놈들이지. 죽는 걸 운명
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인 것 같더군. "
"그들의 죽음도 성룡에 의해 이루어졌나?"
라한의 물음에 제이슨과 토일렛, 잉글리아트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한참 고민하기를 십여 분. 토일렛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
답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의 죽음은 거의 모두 성룡에 의해 이루어
졌다. 나머지 죽음도로드가직접 처리한걸로보이더군. 그럼."
"어쩌면 드래곤 전체의 의견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군. "
토일렛의 말에 제이슨이, 그 말에 잉글리아트가차례로 말을 이
었다. 좀 전보다 약간은 밝아진 모습이었다.
그들의 대화를듣던 라한의 표정 역시 조금은밝아졌다. 하지만
그 밝은 얼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 도착했던 홀 쪽에서
낯선 기운을 느낀 탓이다.
'셋인가?'
라한의 오른손이 프라하의 왼손을 움컥쥐었다. 그에게 경각심을
주기위한 의도였다.
라한의 행동에 프라하도 주변의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내
세 명의 낯선 기운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존재들과흡사하지만,
검사가 가지는 기운이었다.
'흠, '
'골치 아프군. '
낯선 존재가 다가오자 라한이 제령기를 서서히 돌렸다. 여차하
면 텔레포트를 이용해서라도 도망갈 생각이었다.
함께 이동하는 매스 텔레포트는 라한의 권한 밖의 마법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큰 부상을 입더라도 프라하
를 안고 이동하는 수밖에
텔레포트 마법은 공간을 왜곡시컥서 몸을 이동시키는 방법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마나를 일시적으로 대기로 돌렸다가 다시 받아
야 한다. 이 때문에 일반 텔레포트 마법으로 한 명이 아닌 두 명을
이동하는건 몹시 위험했다. 자신의 기운을다시 받을때, 남의 기
운을 더불어 받을 수도 있어서였다. 이질적인 기운의 침투. 그건
무공의 주화입마와 흡사한 마나 폭주현상의 전형적인 표본이었다
"이 친구들인가?"
"그렇네. 앉게. "
다가온 존재의 말이 천둥처럼 크게 다가왔다. 라한의 긴장감이
불러온 현상이 었다.
다가온 존재 셋이 이전에 있던 제이슨 일행의 옆에 앉았다. 그들
은 라한을 찬찬히 뜯어보고 실력을 가늠했다. 그리고 프라하를 보
면서 또 한 번.
'역시 강해. 소드마스터야 '
라한도 상대의 실력을 끊임없이 살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셋
모두 소드마스터 라는 사실이 었다.
"오호, 저 친구는엄청나게 강하군. 나하고는비교도안될 정도
야. 정확한실력을가늠하기 힘들정도라니. 근데, 옆에 있는저 친
구는 1 서클 마법사?"
새로 나타난 존재도 라한의 실력을 알아보지 못했다. 애초에 마
나라는 기운이 아니면 구분해 내지도 못하는 탓이다. 그들보다 강
한 프라하도 구분하지 못했던 라한의 실력을 그들이 구분해 낼 리
없었다.
"이런, 소개가 늦었군. "
"그러고보니 우리가소개를안했군. 허, 참. 내 정신좀봐,"
새로 나타난 사내의 말을 제이슨이 받았다. 라한과 프라하는 안
중에도 없는 듯 당당한 태도였다.
"난제이슨이다. 정령사지. 그리고 여기 이 친구는 잉글리아트,
그리고 저기는토일렛. 둘다마법사다. 새로온 친구들은왼쪽에
서부터 차례로 루시펠, 루나시언, 크리퍼트. 모두 검을 쓰지. 특
히, 루나시언은쌍검을구사하는특이한 친구고. 어때? 이제 너희
들이 소개를 해야 할 것 같은데. "
제이슨의 긴 소개에 라한이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괜히 말해
줬다가 이들과 엉키고 싶지 않았음이다.
"이런 말해주기 싫은 건가? 아, 혹시 우리와함께 하지 않으면
드래곤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 "
토일렛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라한이 뜨끔해 하는 기색을 보였
다. 시작부터 밀리는 느낌에 불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뭐, 우리 이야기를 모두 들었는데도 우리와 함께 하지 않겠다
면 죽음밖에 없지. "
토일렛의 말에 라한이 불안한 눈빛을 드리웠다. 이렇게 강경하
게 나을 줄 몰랐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이곳에 모인다는 게 드래곤의 귀
에 들어가면 곤란하거든. 아직은 힘을 모을 때라서 말이야. 남은
라이칸들을포섭할때까지는숨겨야할일이지. 아, 알려지지 않은
굴레를 벗는 존재를 찾는 것도 선행되어야겠군. 너희들을 보니까
우리 외에도 쾌 있을 것 같거든. "
"그리고 거기 라이칸! 너도 우리와 함께 하는 게 어떻겠나? 드래
곤에게 죽기 싫으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
잉글리아트의 말에 프라하가 몸을 움찔거렸다.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프라하의 정체를 알아본 건 아니었다 소
드마스터 급으로 보이는 데도 몸 전체에서 풍기는 7 서클 마나의 향
기, 거기에 인간과다른포악한눈빛. 이런 게 종합돼서 내린 짐작
에 불과했다.
"며칠 정도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나?"
"없다. "
라한의 말에 제이슨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오래 끌어서 좋을 거
없다는 생각에서 였다.
"단호하군. "
"어쩔 수 없으니까. "
-어쩔 거야? 저들과 함께 하고 싶으면 고개를 조금 끄덕이고,
아니면 가로저어라.
라한이 메시지 마법으로 프라하에게 말했다. 이에 프라하가 고
개를 조금씩 가로저었다. 그는 드래곤과 싸우려는 행동 그 자체를
만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도망가야지.
"흠, 우리가 꼭 필요한가. "
말을 하면서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프라하의 뒤를
왔다 갔다 하며 상대를 살폈다. 아직은 어떤 낌새도 눈치 채지 못
한듯했다
"당연하다. 너희뿐 아니라 강자들이라면 누구든 환영이다. "
"드래곤을 쓸어버릴 것처럼 말하는군. "
"가능하다면 이번 기회에 드래곤이라는 존재를 지워버릴 생각이
다. "
토일렛의 말에 라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무모하다는 생각
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라한은드래곤의 힘을 정확히 몰랐다. 아니, 모르는 게 당
연했다. 드래곤과 싸워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오벨리아 팰리스의 결계를 보며 드래곤의 힘을 간접적으
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방법도 없이 오직 힘만으로 마계와의
통로를 막아 버렸던 그 능력, 당시에 받았던 경이감을 생각하자 도
저히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미안하게 됐군, 텔레포트!"
프라하를 뒤에서 안은 라한이 마법을 시전했다. 순간 엄청난 빛
이 터져 나오며 라한과 프라하를 둘러쌌다.
"막아! "
"잡아! "
라한의 행동에 제이슨 일행 등이 쏘아지듯이 튀어나왔다. 하지
만 라한은 그들의 움직임까지 계산하고 실행에 옮긴 거였다. 이 때
문에 그들은 라한의 마법이 발동된 후에야 그 자리에 도착했다.
스팟!
"빌어먹을! "
"쥐새끼 같은 놈. "
예상 못한 상황에 제이슨 일행이 분통을 터트렸다. 이런 식으로
도망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함께 이동하는 건 8 서클 마법 아닌가?"
"그는 매스 텔레포트를 사용한 게 아니다. 뒤에서 안고 그냥 텔
레포트를 한 거지. "
제이슨의 물음에 토일렛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들은 라한을 단순히 1 서클 마법사라고 생각했다. 굴레를 벗은
건 마법과 다른 이유에서라고 판단하면서 말이다. 이 때문에 라한
의 마법에 대해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방심이 라한의
탈출을 거든 셈이다.
"그렇게도 이동할 수 있나?"
"죽진 않는다. 하지만부상은 면할수 없지. 어디로갔는지는모
르지만큰 부상을 당했을 거다. 마나 폭주를 면하기 힘들 테니까. "
"젠장. 부상을 당하는 것보다 드래곤과 싸우는 게 더 싫었다는
건가 7"
성격 급한 제이슨이 짜증을 부렸다. 그는 드래곤에게 겁먹고 도
망간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굴레를 벗었다는 녀석들이 고작
싸움을 두려워하다니. 자신의 기준에서는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차피 그는도망갔고, 이곳은 알려졌다. 앞으로 접선지를옳
겨야겠군. "
"그래야겠지 . "
그들은 머릿속에서 라한과프라하라는존재를 지웠다 괜히 고
민해봐야 해결책이 없음을 안탓이다. 어차피 죽었거나 패인이 됐
을 게 분명한 라한과 프라하. 그들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고 생
각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울창한숲.
휑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애처롭게 흔들어댔다. 코끝을 향긋하게
만드는 흙내음과 풀들의 향긋한 향기. 누가 보더라도 평화로운 숲
으로 보이는 곳이 었다.
그런 곳에 숲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투두둑!
"콕! "
평화롭기만 하던 이름 모를 숲에 이방인이 나타났다. 하늘에서
나무 가지를 부수며 어울리지 않는 인영이 떨어진 것이다.
침입자는 두 명이었다. 검은 머리의 이십 대 남자와 파란 머리의
말끔한 중년 남자였다. 그들의 등장은 고요하던 숲을 일깨우기 충
분할 정도로 요란했다.
후두둑!
난데없는 침입자의 등장에 벌레 소리가 멎었고, 곳곳에 있던 산
새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테.세르. "
나타난 침입자 중 검은 머리의 사내가 한 마디 내뱉었다. 그리고
기력이 다했는지 의식을 잃었다. 파란 머리의 또 다른 침입자는 이
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의식을 잃은 듯 미동도 없었다.
스으으윽!
검은 머리의 사내 옆에서 기괴한 존재가 나타났다. 몸 전체가 검
은색인 작은 크기의 정령이었다. 그는 빈 공간에서 저절로 생긴 듯
갑작스럽게 모습을 보였다.
-우리 주인 왜 저러냐? 미치겠군
한 마디 내뱉은 검은 정령이 쓰러진 두 존재를 끌었다. 덩치에서
워낙 큰 차이가 났기에 머리를 잡고 질질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지이이익!
두 존재를 평평한 곳에 눕힌 정령이 안쓰러운 듯 인상을 찌푸렸
다. 그리고그들을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
리 생각해도 정령인 그의 능력으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비장의 무기를 써야겠군. 힐링!
정령의 손에서 은색의 빛이 퍼져 나왔다. 그 빛은손에 잠깐 머
무는가 싶더니 이내 검은 머리 사내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
고 잠시 후, 옆에 있던 파란 머리의 중년 사내 몸도 둘러쌌다
-후우, 한계다.
길게 숨을 몰아쉰 정령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단 두 존재의 목숨은 건진 듯했다. 하지만몸의 부상이 너무
심해서 몇 달은 요양을 해야 할 정도였다.
약하지 않은 그들이 이 정도의 부상을 당했다면, 예사롭지 않은
싸움이 벌어졌을 터. 대체 누구와 싸우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궁금
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누굴까? 이들을 이 정도까지 만들 존재라면 역시 드래곤
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는 상대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
으면 처음부터 정령계로 돌아가지 말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
왔다.
쿨샤크와 데메크의 음모가 하나씩 진행되었다. 하지만 전에 생
각했던 계획에서는 조금 변경되었다. 라한이 사라졌다는 게 계획
변경의 이유였다.
라한이 사라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데메크가 내놓은 계획은
그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에펠 일행과 카류나를 죽이려는 상대
가 자신이 아닌 라한이라는 것.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잘 포장하자 제법 그럴 듯하
게 만들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라한을 죽이려고 했으니, 상대가 그렇게 나오
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쩌지? 라한이 오면 우린 죽어. "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이곳에 있으면 안전할 거야. "
베린의 말에 에펠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도 스스로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걸 잘 알았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스스
로를 다독였을 뿐이다.
"우리 도망갈까?"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 누가 뭐래도 호위병들이 있는 이곳이
안전해. "
카류나의 물음에 에펠이 다시 한번 제지하고 나섰다.
이곳에는 카류나를 비롯한 에펠, 베린, 란. 네 명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일종의 대책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희망적인 얘기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라한의 실력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는가. 그 실력을 생각하자 자신들이 무슨
행동을 하든지 하찮은 존재의 발버둥으로만 느껴졌다.
"카류나. 넌 어쩔 거야?"
"그게, 그게 흑, 흑. "
말을 하던 카류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 에펠
일행이 의아한 듯 바라봤다.
"무슨 일 있었어?"
"그 자식이, 쿨샤크 그 개자식이 나하고 결혼하지 않겠대,
"뭐?"
카류나의 대답에 에펠 일행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들이 상단에 머물 수 있는 건 카류나라는 존재가 있기에 가
능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카류나라는 연결 고리가 사라지면 자
신들에게는 든든한 보호자가 사라지는 셈이 었다.
"어디서 들었어?"
"쿨샤크하고 데메크가하는얘기를들었어 난그냥, 그냥라
한을 비참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대. 그냥 가지고 논거래.
엉 엉 엉. "
카류나의 말은 쿨샤크와 데메크가 의도적으로 흘린 얘기였다
그녀를 불러놓고 도착할 즈음에 일부러 그런 얘기를 한 것이다.
"너마저 흠, 어쩌지?"
"큰일이군. "
에펠 일행은 상황이 다급해졌음을 깨달았다.
연결 고리가사라졌으니 그들은 조만간 이곳을 나갈수밖에 없
다. 그렇게 되면 밖에서 기다리던 라한과만나게 될 테고 그럼 뒤
는 볼 필오_도 없이 죽음이었다.
"나가자. "
"뭐?"
"나가자고. "
"무슨 소리야? 아까는 네가 가지 말자고 했잖아. 여기가 가장 안
전하다며?"
이곳이 가장 안전하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에펠이었다. 그런 그
가 이곳을 떠나자고 했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일행들이 의아
해하며 되물었다.
"라한이 실종됐다고한 건, 어쩌면 부상을 당했다는 말일 수도
있어. 설사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은 이곳에 없는 게 확실하지. 그
의 실력에 호위병 따위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니까. "
"그래서?"
"시간 끌지 말고 도망가면 그를 피할 수도 있어. 이곳에 머물러
있어봐야 보호를 해줄 사람도 없고. 보호자가 없는 이곳은 오히려
우리의 행적을 드러내는 것밖에 안 되잖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
곳을 나가서 숨어 버리는 게 나아. "
에펠의 설명에 일행들이 침묵에 잠겼다. 가능성을 타진하는 중
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미 나와 있었다. 어차피 라한에게 호위
병이라는 존재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살려면 어떻게든 도주
해서 숨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 가자. "
"그래, 나가자. "
"잠시만. "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카류나가 그들을 제지시켰다. 그리
고 원망스런 표정으로 말을 이 었다.
"난 그냥 갈 수 없어. 쿨샤크 그 자식에게 뭔가 피해를 줘야 직성
이 풀릴 것 같아. "
"무슨 소리야?"
"쿨샤크의 방에 가면 비싼 물건이 많아. 특히 그 자의 서랍에는
그가 엄청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이 들어 있어. "
"그게 뭔데?"
베린의 물음에 카류나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도 그게 뭔지는 몰라. 하지만 엄청 귀한 물건인 건 확실해.
그게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쿨샤크 그 자
식에게는 귀한 물건이 분명하다고. "
"그걸 훔치겠다고?"
"응. 그냥은 못 가겠어. "
카류나의 강경한 태도에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
다.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에 에펠이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좋아. 쿨샤크가 뒤뜰에 있으니까 지금 훔쳐와. 서둘러야 돼. "
"응. "
말을 마친 카류나가 방을 나섰다. 그녀가 나가자 남은 사람들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카류나가 상단의 물건을 훔치는 건 자칫 적을 늘이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에펠로서는어쩔수 없는선택이었다. 어차픽 라한이
라는 강한 적이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그리고 그들의 목적도 싸우는 게 아닌 숨는 일이었다. 이럴 땐
적이 하나가 됐든 둘이 됐든 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들 모두의
이목에서 자신들을 감춰야 살 수 있는 까닭이다.
라한과 헤어진 제라드와 시스마란은 여관에 숙소를 잡았다. 라
한이 쾌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한 탓이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 후, 레드리안이 라한의 실종을 알려졌다. 스
스로의 이름을 걸고 해코지 한 적이 없다는 말도 함께 전했다. 물
론,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참을수밖에 없었다. 라한과프라하가
없는 지금은 그들이 명백히 약자였기 때문이다
"답답합니다. "
"그래도 어쩌겠는가, "
"만약 형님이
시스마란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괜히 불길한 상상을 했다가
는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시스마란의 비통한 표정에 제라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라한과 프라하라고 했던가? 그 두 명은 그리 약하지 않네. 자네
가 생각하는 것보다 횔씬 강한 사람들이지.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
니 기다려보세. "
" 예. "
시스마란은 자신의 동료였던 에펠 일행마저 버렸다. 그렇다고
특별히 저울질해서 라한을 택한건 아니었다. 다만자신의 생각으
로 에펠이 죄를 지었고 라한은 그렇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에펠 일
행을 버리고 라한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선택에 일말의 후
회도 없었다.
후다다닥!
제라드와 시스마란의 대화중간에 삼십 대 용병이 서둘러 뛰어
왔다. 제라드가 소식을 알아보라고 보낸 부하 용병이었다.
"무슨 일인가?"
"헉, 헉. 그놈들이 도주했습니다. "
"그넘들?"
제라드가 의문을 담아 되물었다. 상대의 말이 머리꼬리 다 자른
말이었기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예. 마란의 옛 동료 있잖습니까. 에펠하고 다른 꼬맹이들. 그놈
들이 상단에서 도주했습니다. "
"뭐?"
마란은 시스마란의 애칭이다. 제라드가그렇게 부르자 다른용
병들도 그렇게 불렀다. 긴 이름은 불편하다나.
그때부터 시스마란은 마란으로 불리게 되었다.
"왜? 왜 도주한 거지?"
"마란. 진정하게. 음, 그것보다 카류나라는 여자는 쿨샤크라는
놈하고 결혼할 사이 아니었나?"
제라드의 물음에 삼십대 용병이 숨을 헐떡였다. 좀 전에 달려와
서 찼던 숨이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한참숨을 고르던
용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
"더 큰 문제?"
"예. 그들이 상단에서 뭔가 엄청 귀한물건을훔쳐갔답니다. 그
리고 엄청난돈도 함께 훔쳐간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상단이 왈
칵 뒤집혔습니다. "
용병의 말에 제라드와 시스마란이 황당한 듯 입을 벌렸다. 그냥
간 것도 아니고 물건을 훔쳐서 달아나다니. 그들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시스마란의 충격은 제라드보다 더 심했다. 그래도 한때는동료
로서 서로의 목숨을 맡긴 사이가 아니던가. 헌데 배신으로도 부족
해서 도둑질까지 하다니, 지금까지 그들을 동료라 믿었던 자신이
한싱하게만 느껴졌다.
"상단의 반응은 어떤가?"
"일단 사람들을 사서 뭔가를 찾고 있는 모양입니다. 근데 그 물
건이 예사로운 물건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단순히 사람을 죽이기 위
해 쓴 돈치고는 너무 크거든요. 거기다 의뢰 내용도 이상합니다.
용병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지품을 가지고 오라고 의뢰했거
든요.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그 물건만 찾아오는 일인데도 엄청난
거금을 상금으로 내걸었습니다. "
"그 물건만?"
"예. 그들을 잡거나 죽이라는 의뢰가 아무 데도 들어오지 않았
습니다. 제 생각에는
말을 하던 용병 사내가 잠시 말을 끊었다. 나름대로 신중을 기하
는 모습이었다.
"말해 보게 괜찮네. "
"아무래도 암살자 길드를 이용한 것 같습니다. 정확한 정보는
아닙니다만, 그쪽으로 접선을 시도한 기미가 보입니다. "
"흠, 암살자 길드라 마란, 자넨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라드의 물음에 시스마란이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래도 한때나마 일행이었다는 정이 있어 막말을 못하는 듯했
다. 그렇게 잠시 주저하던 시스마란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죽어 마땅한 놈들입니다. "
"괜찮은가?"
"예. 한때나마 동료였다는 게 수치스럽습니다. 그러고도 기사가
되기를 꿈꾸다니 . "
시스마란의 말에 제라드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가 말했던 기사
얘기가 그를 웃게 만들었다.
시스마란은 기사도에 충실한 사람이다. 겨우 기사 지망생으로 지
냈을 뿐이건만, 왜 그렇게 기사도를 중시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어찌 보면 태어날 때부터 기사가 되려고 했던 사람 같기도 했다.
어찌됐든 지금 그의 기사도 정신은 제라드의 호감을 사는데 큰
몫을 했다. 또, 그 기사도 정신은 라한의 호감도 이끌어냈다. 의도
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좋은 작용을 했다는 게 중요할뿐이었다
"대장님. "
"아, 그쪽에는 신경 끄게. 앞으로는 라한 그 친구를 찾는 일에만
전력을 기울이게, "
"알겠습니다. "
용병이 나가자 제라드가 생각에 잠겼다. 시스마란도 그 옆에서
입을 다물었다. 둘의 생각은 거의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운 좋으면 살 수 있겠지. '
'운 좋으면 이번에 죽겠군. '
라한과 프라하가 쓰러진 이름 모를 숲.
테세르는 그들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간호에 열을 올렸다. 먼
곳에서 물을 떠와서 입에 넣어주기도 하고, 열매를 따서 그 즙을
흘려 넣기도 했다. 그렇게 하고도 힘이 남으면 힐링 마법으로 둘을
치료했다.
그렇게 이틀.
프라하가 몸을 꿈틀거리며 신음을 토했다. 몹시 고통스러운지
이마에 주름이 가득 잡혀 있었다.
으 으 If
-이봐. 늑대씨! 정신 좀 들어?
" 으 으"
테세르의 부름에도 프라하는 신음만 계속 흘렸다. 의식은 차렸
지만, 말을 할 만큼 회복된 건 아닌 듯 보였다.
야! 늑대!
" 으 으 "
-아씨, 야이 똥개야! 빨리 안 일어나!
테세르의 호통소리에 프라하의 눈이 조금 떠졌다. 그의 커다란
소리에 놀라서 무의식중에 눈을 뜬 것이다.
"흐흑! 여기가
-일어났군. 난 이번에도 안 일어나면 팰 생각이었는데, 눈치 하
난 더럽게 빠르네
테세르의 말을 들은 프라하가 눈을 매섭게 치떴다. 얼굴에는 노
기가 가득했다. 언제 정령에게 이따위 소리를들어봤겠는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게 천추의 한이 될 지경이었다.
"이, 이놈이. "
-아 근데 라한은 왜 아직도 못 일어나는 거지?
테세르의 말에 프라하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의식을 잃은 라
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상태가 심각한지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는 모습이 었다.
"라한은? 라한은 어때?"
-나도 몰라, 주인이라고 하나 있는 게 왜 이렇게 비리비리한지
지지리 복도 없지. 아이고, 내 신세야!
"크윽! "
몸을 일으키려던 프라하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의식만 있
을 뿐,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 자리에 앉은 프라하가 몸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머리부
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대충살펴본자신의 몸은 엉망이었다. 멀정히 머물러 있어야할
마나가마구들끓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조금만 더 심했다면, 마
나 폭주로 이어졌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다행이군. '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어디더라? 나도 모르겠는데. 날씨가 따뜻한 걸로 봐서
는 남쪽 같기도 하고, 밤에 추운 걸로 봐서는 북쪽 같기도 하고.
테세르는 이곳이 어디인지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게으르고 머리 나쁘고, 사고 잘 치고. 그게 테세르의 성격이자특
징이었다. 그런 그가 괜한 수고를 할 리가 없었다.
그가 이곳을 돌아다닌 건 딱 한 번. 물을 찾을 때뿐이었다. 라한
과 프라하가 쓰러진 직후에 있었던 일이다.
그는물을찾기 위해 주위를잠시 살폈고, 이곳에서 십여 분 떨
어진 곳에서 시냇물을 찾아냈다.
그때부터는 물을 가져을 때에만 두 곳을 왕복했을 뿐, 다른 곳은
거의 가보지 않았다. 나무 열매도 지척에 널려 있으니 움직일 필요
가 없었다.
"그럼 내가 쓰러진 지 얼마나 지났지?"
오늘이 이틀째야, 내가 이틀동안 너희들 먹여 살리려고 얼마
나고생한줄 알아?물 길어 오고 열매 따서 입에 넣어주고. 어휴,
생각만해도삭신이 쑤신다. 아이고, 허리야.
테세르가 짐짓 힘든 듯 허리를 두드려댔다. 노인들이 허리 아플
때 두드리는 딱 그런 모양새였다.
'보면 볼수록 특이한 정령일세. '
"그나저나 라한은 어때? 내가 깨어났으니 라한도 깰 때가 된 거
아닌가?"
-몰라. 깰 때가 된 것 같기는 한데, 나도 잘 모르겠다.
테세르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주인인 라한의 건강이 걱
정되기 시작했다.
프라하는 지난 이틀 동안 몸도 뒤척이고 신음성도 흘렸었다. 그
렇게 이틀이 지나서는 의식을 되찾았다.
헌데 라한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숨도 미약하게 쉬고 그나마
도몹시 거칠었다. 또몸 상태로 봐서는 고통이 심할 텐데도 아파
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건 고통조차 느끼지도 못할 만큼 심각한
상태라는 뜻도 되 었다.
"일단 기다려보지. 내가 깨어났으니 곧 깰 수도 있잖아. "
-에휴.
프라하의 얼굴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그도 라한의 상태가 심상
치 않음을 느낀 탓이다
로이나, 베르네, 류카라한이 묵고 있던 여관 안.
로이나가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를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라한
의 현재 위치를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상하군. 사라졌어.
"사라지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실피드의 대답에 로이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실피드가 자신이
부탁한 일을 대충 처리했다는 느낌을 받은 탓이다.
로이나는 블루 드래곤이다. 그녀와 딱 맞는 친화력은 바람의 정
령이 아닌 물의 정령인 셈이다. 이 때문에 물이 아닌 다른 정령왕
들은 종종 로이나를 속이곤 했다. 또 가끔은 시킨 일에 딴청을 부
리며 게으름을 피우는 일도 많았다. 친화력에서 정령왕을 겨우 부
를 정도에 그쳤기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이번에도 자신의 속성이 아니었기에 게으름을 피웠다고 생각했
다. 자신이 골드 드래곤이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는가 싶었다.
-흥분하지 마라. 레이시아나. 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언제부터 였지? 언제 사라진 거야?"
-나메라 왕국의 남쪽 엘퐁소 지방에서 사라졌다. 그곳에서 텔레
포트를 한 것 같은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
실피드의 대답에 로이나가 생각에 잠겼다. 그곳에서 라한이 텔
레포트 할 이유가 있는지를 고민했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라한
이 급하게 이동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이동했다는 건가. 누가? 왜?'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라한은 오랫 동안 실종
되었다가 나타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누군가와 원한 질 일이 있겠
나 싶었다. 라한의 모난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이지
만, 로이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소 로이나는 말이다
"그가 사라지고 계속 찾아봤어?"
-찾아봤지. 없더군. 뭐, 너도 알다시피 우리 정령들도 가지 못
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그리고 허락받은 정령들만 출입이 가능한
곳도 있고. 아마, 그런 곳 중에 한 곳이 아닐까 싶군.
실피드의 대답에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다
분했다. 죽었다면 시체라도찾아내는 게 정령이었으니. 바람의 정
령왕이 찾을 수 없는 곳이라면, 그런 곳뿐이었다.
"알았어. 그만 돌아가 봐. "
-행적을놓친 건 내 잘못이니 계속 찾아보겠다. 찾으면 연락주지
말을 마친 실피드가 서서히 사라졌다. 실피드가 사라지자 순간
적으로 방 안에 바람이 불어왔다.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바
람이었다.
로이나가 실피드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류카라한은 시장 거
리를 헤매고 있었다. 새로 나온 무기나 방어구가 없는지 찾아보기
위해 나온 것이다.
"별 차이가 없군. 세월이 꽤 흐른것 같은데도그대로야. 실망이
라고 해야 하나?"
말과는달리 약간은다행스러웠다. 무기나방어구의 발전. 그건
곧 그 무구들을 사용하는 주체의 약화와 일맥상통한다 스스로의 힘
이 약해졌을 때 도구를 강화시키는 건 인간들의 습성이었으니까.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군. 로이나에게 부탁을 해볼까?"
잠시 중얼거리던 류카라한이 고개를 홱 돌렸다. 무언가 친숙한
기운을 느끼고 그곳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류카라한의 눈에 갈색 머리 사내가 들어왔다. 다부진 체격을 가
진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소드마스터?'
그가 보기에 상대는 소드마스터였다. 그것도 굴레를 벗은 존재.
로이나의 말처럼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대륙으로 나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뚜벅뚜벅!
류카라한이 상대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이에 상대도 류카라한에
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도 류카라한이 자신과 같은 동류임을 깨달
은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다가오던 두 존재가 마주섰다. 잠시 노려보는가 싶더
니 류카라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벗은 존재로군. "
"후후, 맞군. 나하고 같이 가지 않겠나?"
갈색 머리 사내의 말에 류카라한이 잠시 머뭇거렸다. 상대는 자
신과 같은 굴레를 벗은 자. 자칫 위험을 초래하는 일이 될 수도 있
었다.
"고민하고 있군, 두려운가?"
피식!
류카라한은 강했다. 눈앞에 서 있는 상대라면 삼십 분 안에 처리
할수 있는실력이었다. 이런 실력이 없었다면, 애초에 다가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갈 텐가?"
"가지. 앞장서라. "
갈색 머리 사내 크리퍼트가몸을돌렸다. 등을 보이는 게 위험
할수 있을 텐데도 전혀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역시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얘기였다.
상대의 당당한 태도에 류카라한은 다시 망설여야 했다. 너무 겁
이 없어 보였다. 마치 '공격할 테면 공격해 봐'라는 태도 같지 않
은가. 절대적인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우습군. '
마음을 다잡은 류카라한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들의
한참 뒤에는 제이슨과 루시펠이 천천히 뒤따랐다. 오래전부터 류
카라한을 지켜본 게 분명했다.
류카라한이 안내된 곳은 과일 가게의 허름한 창고였다. 하지만
꽤나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어서 불쾌한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창고의 구석에 세 명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류카라한은 한 눈에
그들이 굴레를 벗은 존재임을 알아봤다. 상황만으로 보면 무척 불
리한 입장에 처한 셈이었다.
'해 보자고. '
류카라한은 겉으로 태연함을 유지했다. 기세에서 지고 들어가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앉으라는 말도 안 하는군. "
"아, 이런 실수를했군. 앉게."
사내의 말에 류카라한이 조용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러
면서 상대를 끊임없이 살폈다. 자신을 안내한 사람을 합해서 소드
마스터 둘에 7 서클 마법사 둘이었다.
'골치 아프군. '
덜컥!
류카라한이 난감한듯속을태울 때, 창고의 문이 열렸다. 그곳
에서 또 다른 굴레를 벗은 존재가 모습을 보였다. 제이슨과 루시펠
이었다.
'대륙에 굴레를 벗은 존재는 다 모인 것 같군. '
"대단하군. "
처음 입을 연 사람은 기존에 앉아 있던 7 서클 유저 토일렛이었
다. 항상 일행의 대변자 역할을 해왔기에 이번에도 그가 나섰다.
"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 "
"하하하하. 대단하군. 자네가 류카라한인가?"
"그렇다면?"
류카라한의 대답에 굴레를 벗은 존재 몇이 잠깐 술렁였다. 류카
라한이라는 이름이 주는 충격 때문이다.
류카라한은 이미 8 백 년 전에 대륙을 질타하던 영웅이었다 그리
고 그 이름은 검을 처음 배울 때 귀가 따갑도록 듣던 이름이기도 했
다. 그만큼 검을 익히는 모든 사람의 우상 같은 존재가 그였다.
이런 상황은 굴레를 벗은 존재들도 마찬가지였다. 8 백 년보다
이전에 굴레를 벗은 존재들은 아니겠지만, 그 이후에 벗은 존재들
에게 류카라한은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새삼, 이렇게 만났다
는 게 자랑스러웠다.
"영광입니다. "
"저도 영광입니다. "
"그런 소리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텐데. 용건만 말해줬으면 좋겠
군. "
류카라한이 주변 사람들의 인사치레를 끊어 버렸다. 부담스럽다
기보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의 대답에토일렛 일행들이 잠시 소곤거렸다. 그러다 토일렛
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우린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다. 대륙에 몇 안 남은 존
재라고 할 수 있지, 헌데 우리가 살아가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존재가 있더군. "
"그런가?"
류카라한의 대꾸는 무미건조했다. 별 관심 없는 내용을 억지로
듣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미 감정을 감출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가 다른 굴레를 벗은 존재들보다 더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
도 되었다.
"드래곤이다. 그들이 우릴 죽이려 하더군. 뭐, 처음에는우리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토일렛의 말은라한에게 했던 것처럼 꽤나장황했다 하지만, 다
른 굴레를 벗은 존재들의 반응은 좀 달랐다. 몇몇이 입구를 막고
조금씩 포위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건 라한과 프라하라는 존재가 도망쳤기
때문이다.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미리 조심하
는 게 손해를 보지 않는 길이었다.
류카라한은 한참 동안 토일렛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그의 표
정은 말이 시작됐을 때나 지금이나 별 변화가 없었다. 그 태도에
오히려 토일렛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반응이 이상하군. "
"그런가?"
"뭐, 상관없겠지. 어떤가? 우리와 뜻을 같이 하겠는가?"
토일렛의 말이 끝나자 창고에 정적이 감돌았다. 마치 전투 직전
의 고요함과 비슷한 분위기 였다.
지루하게 이어질 듯하던 정적 속에서 류카라한이 입을 열었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다. "
"확인? 뭐든 물어봐라. 아는 거라면 다 말해 주지. "
"너희들에게 확인할 내용이 아니다. "
"그럼 확답도 하지 않고 이곳을 나가겠다는 건가?"
토일렛의 말에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무기를 꼬나 잡았다. 마법
사들은 마법 주문을 외웠고, 정령사인 제이슨은 바람의 상급 정령
인 실레스틴을 불렀다.
"기분이 좋지는 않군. 근데, 난 여기를 나가겠다고 한 기억이 없
는데?"
" 그럼?"
"부르면 되지. 로이나! "
류카라한이 팔목의 팔찌에 손을 올리며 로이나를 불렀다. 그의
말이 끝나자 창고 한 곳에 은은한 빛이 어렸다. 텔레포트를 사용했
을 때, 나타나는 그런 빛이었다.
푸른빛의 영롱한 빛이 사라지자 로이나와 베르네가 모습을 드러
냈다. 그와동시에 류카라한의 신형이 그들에게 쏘아져 갔다. 일단
일행과 합류해서 위험을 줄이려는 의도였다.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로이나와 베르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주
위의 살벌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드래곤인 자신에게 살기를
드러낸 게 쾌나 불쾌했던 모양이다.
"류한. 무슨 일이에요?"
"로이나. 왔구려. 베르네님
"허허, 어찌 이리 진한 살기를 풍기는 것이오? 신께선 모두의 생
명을 중히 여기라 했거늘, 어찌 사람이 사람을 상하게 하려는지. "
베르네의 표정은 그리 호전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유희 중이라고 생각한 탓이다. 현재 신관의 복장을 하고 있으니,
신관의 행동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베르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로이나의 모습은 그렇지 못했다. 류카라한이 이들에게
핍박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거기다 자신과 류카라
한, 베르네를 향해 풍기는살기까지. 예전 성격이었으면, 벌써 한
바탕 크게 휘저었을 것이다.
"누구지?"
토일렛과 굴레를 벗은 다른 존재들이 로이나 일행을 응시했다.
텔레포트라니. 생각지도못한마법이었다 현재 이런 식의 텔레포
트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법진을 통한
텔레포트만 가능할 뿐이다.
'미치겠군. 대응 마법진 없이 텔레포트라니. '
"토일렛. 어떻게 이동한 거지?"
"잉글리아트. 대체 저들이 어떻게 이곳으로 온 거지?"
주변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토일렛과 잉글리아트에게 물었다. 7
서클 유저 마법사이니 뭔가 알지 않을까히-는 생각에서였다.
현 대륙에서 텔레포트의 필수적인 요건은 대응 마법진이다. 출
발 지점과 도착 지점에 마법진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 중에서
더 중요한 건 도착 지점의 마법진이었다. 출발 지점의 마법진은 부
족한 마나를 보충하는 역할을, 도착 지점의 마법진은 정확한 좌표
로의 이동을 성공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라한이 텔레포트로 이동해 간 것도그런 맥락에서 이해했다. 자
신이 모르는 어떤 곳에 대응 마법진을 그려 놓았다고 스스로를 납
득시킨 것이다.
"나도 모르겠네. 대체 저들이 누구지?"
"나 역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모르겠군. "
"흠. "
토일렛과 잉글리아트가 차례로 대답하자, 주변에서 침중한 음성
을 흘렸다. 그리고 왠지 모를 불안함이 싹트고 있음을 깨달았다.
토일렛의 머릿속에는 마법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
게 가능했는지, 자신이 모르는무슨 마법이 있는 건 아닌지, 궁금
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나타난 존재는 마법사 한 명에 신관
한 명으로 보였다. 파란 머리 여자는 걱우 5 서클 마법사로, 금빛
머리의 신관은 마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곳은 대응 마법진조차 그려져 있지 않은 곳. 대체 무엇이 그들을
이동할 수 있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정체가 뭐지?"
'혹시?'
토일렛은 자신의 생각에서 결론을 지었다. 대응 마법진이 없는
이곳으로 이동할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드래곤. 그들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 겉으로보이는 5 서
클 마법사의 모습과 7 서클 마법인 텔레포트. 자신보다 상위 마법을
사용한듯보였다. 한마디로서클을속였다고볼수 있었다. 그리
고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존재라면 오직 드래곤뿐이었다.
"이제야 깨달은 것이냐? 미천한 인간들아. "
"아, 이거 참. 이번유희는시작하자마자끝이네."
라한은 텔레포트 마법을 6 서클로 생각했다. 오벨리아 팰리스에
서 6 서클로 사용할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
륙에서는 7 서클로 알려져 있었다. 심지어 드래곤조차도 텔레포트
마법을 7 서클로 이해할 정도였다.
"로이나, 베르네님. 잠시만. 먼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습
니다. "
류카라한이 로이나와 베르네를 제지하고 나섰다.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했던 말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꿀꺽!
굴레를 벗은 다른 존재들은 눈만 뜬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등장. 그것도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존재의 등장에 오금
이 저렸다. 그렇다고 겉으로 약세를드러낼 수는 없었다. 기세 싸
움의 패배는 실제 전투에서의 패배를 낳는다는 걸 알았음이다.
그들 정도의 실력자라면 웬만한 성룡의 힘은 느낄 수 있다. 그들
이 실력을 감추더라도 본 실력을 알아볼 능력이 되는 것이다. 헌데
로이나와 베르네의 실력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건 그들의 실력이
자신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얘기였다.
로이나는 고룡에 속하는 최강자 중 한 명이었다. 또, 베르네는
성룡이기는 하지만, 고룡에 들기 직전의 상태. 굴레를 벗은 존재들
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 건 일견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 머물던 고요함을 깬 건 로이나였다.
"뭔가요? 류한. "
"저들이 말하기를, 드래곤들이 물질계의 파멸을꿈꾼다고 하더
군. 진위를 확인하고 싶어서. "
그제야 로이나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류카라한
을데리고나온이유가여기 있지 않았던가 상황이 대충확인되자
품었던 노기마저 서서히 옅어졌다.
"그렇군요. 제가 류한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어요. 스스로 알아
보기를 바랐었죠. "
"그럼 저들의 말이 사실이야? 드래곤이 정말 물질계를 무너뜨리
려는 건가?"
로이나와 류카라한의 대화에 베르네가 호기심어린 빛을 띠었다.
자신 역시 몰랐던 내용이었다. 단순히 라한을 만나려고 따라 나왔
으니 말이다.
호기심이 많아 정말 희한한 일을 많이 저질렀던 존재가 베르네
였다. 그런 그에게는 지금의 대화는 그 자체가 재미있는 흥밋거리
였다. 조용히 류카라한을 응시하던 로이나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저들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
지만, 약간 확대 해석한 것 같군요. "
"그럼 정확한 내용을 말해줄 수 있나?"
류카라한의 물음에 로이나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얘기를 해
줘도 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렇게 잠시 후, 로이나가 결정을 내렸다.
"후우, 원래 드래곤인 제가 개입해서는 안 되지만, 말해드릴게
요. 알고 있는사실을조정해 주는 정도는괜찮을듯하네요. 그들
은물질계의 멸망을 원하는 건 아니에요. 지배를 원하는 거죠. 그
리고 드래곤 전부의 의견도 아니랍니다. "
"지배? 드래곤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일을 한다는 거지?
그리고 드래곤 전부의 의견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의 드래곤이 개
입되어 있는 거야?"
"제가 알기로는 로드와 그를 제외한 성룡 아홉이에요. 모두 열
명이죠. 하지만 더 있을 수도 있어요. 제가그들과뜻을함께하지
않은 이상, 그들에 대해 많은 걸 알 수는 없었거든요. "
로이나의 대답에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신들이 생각한 것보다 세력이 약했다. 역시나 승산이 적은 싸움
이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높아진 것만은 분명했다.
반면, 류카라한의 안색은 침중하기 그지없었다. 드래곤 열 명이
라니. 강해도너무강했다. 특히 로드가끼어 있다면, 자신을포함
한 굴레를 벗은 존재 전부를 합해도 이길 수 없는 강자였다. 애초
에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너무 많군. "
"예, 많죠. "
"그럼 로이나가 나를 데리고 나온 건?"
"저들을 도우라는 의미였어요. 아니, 굴레를 벗은존재 전부의
힘을 합치라는 의미였죠. 그렇지 않으면 이길 수 없거든요. "
로이나의 대답에 류카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고개를 끄
덕이며 긍정의 뜻을 표했다.
그도 자신 외에 굴레를 벗은 존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각
종족에 떨처진 그들을 모두 합하면 근 오십여 명에 달할 터. 그들
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거기다 드래곤은 개인적인 성향이 강해서 몰려다니지 않는다.
다수의 힘으로 소수를 처리하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렇군. 그들을 모두 모은다면, 해볼 만한 싸움이 되겠어. "
"잘못 알고 있습니다. "
류카라한의 말을 받은 건 토일렛이었다. 그들의 대화에서 잘못
된 점을 발견한 탓이다.
토일렛의 말에 베르네와류카라한, 로이나가 의아한 빛을 띠었
다. 왜냐는 의문을 강하게 품은 채.
"굴레를 벗은존재가 다죽었기 때문입니다. 제가조사한바로
는 인간 중에서 굴레를 벗은 존재는 여기 있는 일곱 명과 며칠 전에
저희에게서 도망친 한명 뿐입니다. 헌데, 그한명은무리한마법
을시전해서 아마죽었을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마법 정도
는 잃었겠죠. "
"서, 설마. 그들이 모두드래곤에게?"
"예, 맞습니다 "
류카라한의 놀란 음성에 토일렛이 조용히 답했다. 일말의 동요
도 찾아보기 힘든 평온한 음성이었다.
토일렛은 더 이상라한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가죽었거나불구
가 됐다고 생각한 탓이다.
불가능한 마법의 시전은 마나의 충돌을 불러을 터. 라한 역시 마
나의 충돌로마법을 잃었을 거라고생각했다. 또, 그와함께 이동
해 간 프라하 역시 라한의 마나에 의해 충격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십중팔구는 본신의 실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골치 아프군 이봐, 인간!"
"말씀하십시오, 위대하신 존재시여. "
로이나의 대답에 토일렛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는 로이나가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드래곤이 아님을 깨달은 후부터 존대어를 썼
다. 괜히 밉보여서 적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다른 종족은 어떻게 됐지?"
"라이칸은 세 명 남았습니다. 헌데 그 한 명은 좀 전에 말한 인간
과 함께 도주를 해서 이제 두 명 남았다고 봐야 합니다. "
토일렛의 대답에 로이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비관적인 상황임
을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책이 없었다.
로이나의 표정을 살핀 토일렛이 다시 말을 이었다.
"드워프는 전멸했습니다. 그리고 엘프는 한 명이 살아 있는 듯
보입니다 헌데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
굴레를 벗은 엘프의 생존은 어제 알아낸 소식이다. 드래곤이 엘
프 한 명을 찾지 못했음을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엘프가 무려
사천 년 전에 살았던 엘프라는 것도함께 알아냈다. 아마, 굴레를
벗은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연장자가 될 거였다
"로이나, 좀 도와줄 수 없나?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힘으로는 무
리일 것 같은데. "
류카라한의 말에 토일렛 일행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어쩌면 엄
청난 응원군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의 최대 난관이 로드
이지 않았는가. 다른존재는 각개격파로 어찌한다 하더라도 로드
는 그마저 불가능할 정도로 강했다. 헌데 로이나가 합류한다면, 그
래서 고룡으로 보이는 그가 힘이 되어 준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
했다.
"류한, 불가능해요. "
"왜지? 로드만 어떻게 해주면 되잖아. "
"안 그래도 로드인 로테마이어스는 한 번 만나볼 생각이에요.
하지만 싸움은 안 돼요. 그건, 에휴, 이유는 말해줄 수 없지만 물질
계 개입만큼은 절대 불가능해요. "
로이나의 대답에 주변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엄청난 실망감
을 자신들도 모르게 표출했다.
로이나의 대답에 베르네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로이나님.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전 잘.
-하긴, 아직 고룡이 되지 않은 넌 모르겠지.
로이나는 말을 해주면서도 약간 망설였다. 자신의말에 약간의
거짓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드래곤의 비사는 고룡이 아닌 로드만 알아야 하는 내용이
었다. 최소 몇 년 전까지는 그랬다.
헌데 로테마이어스가 로드가 된 후로 묘한 움직임을 보였고, 이
에 전 로드였던 베르타라스가 다른 고룡에게 알려 버렸다. 로이나
를 포함해서 고룡 전부에게.
이 때문에 본래 의도와 다르게 고룡 전부가 아는 사실이 되어 버
렸다. 결국 로이나는 거짓과 진실이 반쯤은 섞인 걸 온전히 진실인
듯 말한 셈이다.
-로이나님. 제가 알아서는 안 되는 얘기입니까?
-곧 고룡이 될 테니 괜찮을 거야. 사실 우리가 개입했다가는 드
래곤이 사라질 수도 있다.
로이나의 말에 베르네의 의문이 더욱 커졌다. 물질계에 개입 좀
한다고 해서 사라지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얘기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주 오래전 마족의 침입이 있었다. 그때 우리 드래곤은 인간
을위해 그들과싸웠지. 하지만신은우리 일족중한종족의 소멸
을 당했어. 지금은 멸종한실버 드래곤이 희생양이 된 거지. 그때
부터였다. 우리 드래곤이 물질계 개입을유희로 한정 지은 건. 물
론, 우리의 레어를방어하기 위한목적이나 역사를흩트리지 않는
선에서 행하는 파괴라면 상관없겠지. 하지만 저들을 돕는 건 이곳
판트리아계의 역사를 크게 어긋나게 만드는 일이다.
로이나의 대답에 베르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떤 고서에서 실버 드래곤이 존재했음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신에 의해 멸종되었다는 것도 확인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물질계에 깊이 관여해서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 그렇군요.
"우린 일단 류카라한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다. 우리와 뜻을 함
에하겠는가?"
토일렛의 물음에 류카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드래곤과 싸워야
할 일이었기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류카라한이 침묵을 지키자 굴레를 벗은 존재들은 애간장이 다
탔다. 그가 거부하면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드래곤 둘이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 어쩌겠는가. 그가 가려고 하면 보내줄 수밖에,
쾌 오래 고민하던 류카라한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결정
을 내린 듯했다.
"너희들의 뜻에 따르지. "
"잘 생각했다. "
"단, 너희들의 힘이 물질계 혼란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이 되면
난 바로 떠나겠다. "
"물론이다. 우리도 물질계에 어떤 수작을 부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우리 목표는 생존. 그러기 위해서 드래곤과 싸울 뿐이다. -
말을 마친 토일렛이 로이나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드래곤과 싸
운다는 대목이 비위를 거스르게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로이나는그의 말에 별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류카라한
을 데리고 나을 때부터 이런 일을 예상하고 나온 거였다. 약간씁
쓸한 마음은 남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드래곤 로드인 로테마이어스의 레어 안,
이곳에는 주인인 로테마이어스와 열둘의 성룡이 모여 있었다.
로이나의 예상보다세 명의 성룡이 많은셈이다.
주위에 모인 성룡을 쭈욱 훌어본 로테마이어스의 시선이 제일
왼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됐지?"
"드워프는 모두 처리한 것 같습니다. "
"같습니다?"
"아, 처리했습니다. "
불투명한 대답에 로테마이어스가 되묻자, 호명 받았던 성룡이
서둘러 대답했다. 로드가 불확실한 대답을 싫어 한다는 걸 깜빡한
모양이다. 로테마이어스가 시선을 오른쪽으로 조금 돌려 다음 질
문을 던졌다.
"엘프는?"
"한 명 남았습니다. 워낙 재빠르게 움직인 터라 처리하지 못했
니다. "
대답은좀 전의 성룡바로 옆에 있던 이가 해왔다. 드래곤 개개
인이 각 종족을 맡아서 보고 하는 듯했다.
"카이렌이군. "
"예, 로드님. "
"그놈이라면 쉽게 처리할 수 없는 게 당연하겠지 너희들보다
오래 산 놈이니까. "
굴레를 벗은 엘프 중 가장 연장자가 카이렌이었다. 나이는 무려
4 천살. 일반 엘프에 비해 네 배 이상의 삶을살아온셈이다. 드래
곤과 비교해도 고룡에 들기 직전의 나이였다. 또 베르네와 비교해
도 삼백 년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인데 이곳에
모인 2 천 살 전후의 드래곤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로드님, 맡겨만 주시면 제가 찾아서 처리하겠습니다. "
"어림없는소리. 그가너희들보다약하다고는하지만, 도망가려
고 마음먹으면 너희들이 잡기 힘들다. 다른 굴레를 벗은 존재와 동
격으로 생각하지 마라. "
"저, 그럼. "
"일단 행적을 파악해라. 대신, 그 어떤 무력도 행사하지 마라
자칫 상대에게 경각심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 "
"알겠습니다, 로드님. "
대답은 했지만 주변 성룡들은 불만어린 표정이 역력했다. 걱우
엘프 따위와 비교된다는 게 창피했음이다. 하지만 로드인 로테마
이어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오래전 카이렌을 겪어봤던 로드는 그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았
다. 검술과 정령술도 뛰어나지만, 특이하게 은신술의 대가가그였
다. 그 때문인지 숨는 일에는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마음먹괴 숨는다면, 설사 자신이라도 찾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다음. 라이칸은?"
"셋 남았습니다. "
"빠른 시일 안에 찾아서 처리해라. "
"예, 로드님. "
드래곤의 대답을 끝으로 로테마이어스가 생각에 잠겼다. 다음
순서는 인간. 헌데, 물어보는 일 자체가짜증이 치밀었다. 제일 만
만하게 생각했던 녀석들이 제일 골치를 썩였다.
"인간은 어떻게 됐지?"
한참 고민하던 로테마이어스가 어렵게 물었다. 그 물음에 대답
을 해야 할 성룡이 약간 망설이는 빛을 보였다. 보고를 하는 자신
도 송구스러웠다.
"아직 일곱 모두 건재합니다. 헌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
"문제?"
"예. 그 일곱중에 하나가레이시아나님과함께 있습니다. 그 옆
에는 베르네미스님도 함께 있어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
습니다. "
로테마이어스가 고민에 빠졌다. 레이시아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에 대한 고민이었다.
로테마이어스에게 로이나는 죽마고우나 다름없었다. 친구라는
존재가로이나였다. 어릴 때부터 거의 함께 자라온사이가그들이
니 말이다. 이 탓에 그녀와 부딪히는 일 자체가 내키지 않았다.
또, 드래곤의 로드라하더라도손대기 껄끄러운존재는 있기 마
련. 레이시아나가딱그러했다. 오랫 동안함께 지내서 서로의 장
단점을 너무 많이 알았다. 자칫 손대려 하다가 도리어 당하기 십상
이었다. 또 패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로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
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음, 일단그 인간들을주시하기만하고손대지 마라. 레이시아
나와 베르네미스의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
"예, 로드님. "
"다음 아카폴리 안!"
로테마이어스의 부름에 제일 오른쪽에 있던 성룡이 앞으로 나섰
다. 블랙 일족인지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 인상적인 미남자였다.
"예, 로드님. "
"보고하라. "
"예. 일단대륙에는 이렇다할강자가 없습니다. 그대로둘더라
도 물질계에 혼란을 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헌데 루이나 왕국에
서 시작된 전쟁이 대륙 전쟁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운 나쁘면 엘프
나 드워프들도 참가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물질계의 균형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
아카폴리안은 대외 정보 담당이다. 다른 드래곤들이 굴레를 벗
은 존재를 죽이기 위한 손이라면, 그는 로테마이어스의 눈인 셈이
다. 이 때문에 로테마이어스도 아카폴리안에게만큼은 각별하게 대
했다. 일의 시작과 끝이 정보에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대륙 전쟁이라골치 아프군. 아카폴리안! 아직 이렇다할강
자가 없다고 했나?"
"예. 아직은그렇습니다. 얼마전에 소드마스터 한 명이 사라졌
다는 얘기는 있지만, 아직 은신처를 찾지 못했습니다. 루이나 왕국
에 있던 루이에라는 인간인데 그를제외하면 특별한강자는보
이지 않습니다. "
"그의 실력은?"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 거의 동급이거나 약간 상위라고 생각됩
니다. "
"찾아라. 찾아서 죽여라. 기존에 있던 놈들과힘을합하면 신경
쓸 일이 많아진다. 그리고 일단은 대륙에서 신경 꺼라. 그놈들만
처리하면 전쟁 정도는 큰 문제가 안 된다. "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아카폴리아에 길게 읍하며 물러났다. 알았
다는 표시를 그 나름대로 표한 것이다.
그는 아직 라한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만약 알아차렸다면,
골치 아픈 인간을 일곱이 아닌 여덟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를 죽이기 위해 성룡도 하나 파견되었을 테고.
"물질계의 혼란은 물질계의 절대자인 우리가 막아야 한다. 다들
알고 있겠지?"
"예, 로드님. "
"늙다리 고룡들이 하는 얘기는 무시해라. 우린 물질계를 위해
묵묵히 일하는 파수꾼이다. "
"예, 로드님. "
자신의 하은일에 자긍심을 갖도록
로테마이어스의 말을 끝으로 회의가 끝났다 이에 성룡들이 레
어를 나와 각자 맡은 임무를 행하기 위해 떠났다
로테마이어스의 목표는 물질계 지배가 아니였다 물질계에 혼
란을 가중시키는 굴레를 벗은 존재를 처리하는 일에 불과했다 한
때 팡테아가 했던 일을 자신이 하려은 것이다 대신 가두는 게 아
닌 죽음이라는 게 달렸지만
마족 투바
라한은 외딴 숲에 떨어진 지 보름이 지나도록 의식을 되지 못
했다 고통이 있다면 몸이라도 꿈틀거릴 텐데 그런 작은 미동조차
없었다 숨만 쉬고 있다 뿐이지 반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쓰러진 라한을 보던 프라하가 짜증을 터트렸다 라한이 깨어나
지 못한다는 데에 화가 치밀었다
젠장 왜 안께어나는 거야 미치겠군 대체 뭐가 문제지
야 똥강아지 조용 안해 누군 기분 좋은 줄 알아
테세르의 도발에도 프라하는 별 반응이 어ㅄ었다 라한의 얼굴만
계속 바라보며 답답해 할 뿐이다
테세르의 호칭은 지난 보름동안 계속 다투어 온 일이었다 그
누가 똥강아지라 부르는데 좋아하겠은가 하지만 테세르에게 해를
가할수는 없었다 힐링을 쓸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테세르였고
라한은 그 힐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벌써 보름이야. 보름이라고. "
-씨끄러, 머리 어지러우니까 물이나 좀 떠와.
테세르의 말에 프라하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래도 물을 뜨러
가는 걸 보면 성질이 많이 죽긴 죽은 듯했다
현재 테세르와 프라하는 어떤 오두막집에 와 있다. 누가 언제 만
들었는지는 아는 바 없었다. 숲 구석구석에 오두막집이 지어져 있었
고, 그 수도 열한 채나 된다는 것. 그리고 라한을 편하게 눕히기 위
해서는 그 오두막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중요할뿐이었다.
덜컥!
프라하가 나가자 테세르가 턱을 괴었다. 라한을 살릴 방도를 생
각하는 모습이 었다.
'그 방법밖에 없는 건가?'
테세르는 마법사나 신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헌데, 어딘지
도 모르는 이곳에서 그들을 찾기는 요원한 일이다.
턱-!
"가져왔다. 시커먼 정령 놈아. "
-야, 똥강아지!
"또 뭐 시키려고?"
테세르의 부름에 프라하가 고개를 홱 돌렸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똥강아지라는 말에는 도무지 적응
이 되지 않았다. 싸우기 지쳤기에 무시하고 있을 뿐 생각 같아서는
확 뒤집어 버리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너 소환 한번 해볼래?
"소환? "
-응 우리 주인이 차고 있던 검집이 소환을 가능하게 하는 마법
검집이거든. 시동어만 외치면 나머진 알아서 될 거야.
프라하가 의구심을 가득 담아서 테세르를 바라봤다. 그 말이 진
실이냐고 눈빛으로 묻는 모습이 었다.
그를 본 테세르가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뭔 놈의 똥강아지가속고만살았나. 왜 사람말아니, 정령
말을 못 믿어?
"네가 믿음을 주긴 했냐?"
-시끄러, 할 거야? 말 거야?
프라하는 대답을 행동으로 했다. 이미 세라 소드의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댄 것이다.
우웅! 팍-!
"으악! "
묘한 소리가 터져 나오며 검집을 잡았던 프라하가 뒤로 튕걱 나
왔다. 손에서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나고,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진동했다. 세라 소드, 혹은 그 검집에 모종의 장치가 된 듯했다.
-어, 뭐, 뭐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이 빌어먹을 정령아! 너 나 약 올리려고
이딴 거 시킨 거지?
-무, 무슨 소리야. 나도 몰랐다고.
대답을 마친 테세르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세라 소드에 저런
장치가 있었던가. 그 자신도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이상하네, 전에 내가 잡았을 때는 멀정했는데. 검집에만 무슨
장치가 된 건가?'
오벨리아 팰리스에서 라한은 테세르에게 별별 심부름을 다 시켰
다. 그 중에 세라 소드를 가져오라는 심부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자신은 분명 아무 이상이 없었다. 헌데 왜 프라하에게만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쩔 거야? 소환은 물 건너간 것 같은데. "
-좀 참으면 안 될까? 소환은 금방 끝날 텐데.
"불가능해. 조금만 지체했다가는 나도 감전사할 거야. "
프라하는 세라 소드의 검집을 잡았을 때를 떠올리며 몸을 흠칫
거렸다. 그때 느꼈던 아찔함이라니. 생각만해도끔찍했다.
-그럼 어쩌지. 소환을 해야 되는데.
"대체 뭘 소환한다는 거야 이유나 알자. "
프라하의 물음에 테세르가 머뭇거렸다. 대답해주면 길길이 날
뛸게 뻔했다. 그렇다고 아무 말 안 해주는 것도 무리일 듯싶었다.
물어보지 않았으면 모르되, 지금 대답을 피했다가는 더 큰 의심을
부를 것 같았다.
-어, 그게 마족이야.
"마, 마족?너 미쳤구나. 아무리 그래도그렇지. 마족이라니."
-전에 한 번 만나봤는데, 괜찮은 마족 같았어. 라한을 살려줄
수 있을 거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마족은 항상 피를 갈구하는 놈들이
야. 만나본 적은 없지만, 엄청난살귀들이라고. 그런놈들을불렀
다가는 너나 나나 다 죽는 수가 있어. "
프라하가 절대 불가를 표방하자 테세르도 방법이 없었다. 저런
상대에게 어떻게 검을 잡으라고 하겠는가. 평범한 검도 아니고 엄
청나게 반발하는 검을
한숨을 길게 쉰 테세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어쩔 거야?"
-내가 해 볼 거야.
"멈춰! 검을 잡기만 해봐, 내가 가만 안 놔둘 거니까.
프라하는 마족이 무서웠다. 아니, 세상 누구라도 무서워 할 존재
가 마족이었다. 물질계에는 공포의 존재로 알려져 있으니까,
하지만, 테세르로서도다른방법이 없었다. 지금떠올릴수 있는
유일한 대책이 마족 소환이었다. 이 길이 아니면 라한을 살릴 방법
이 없어 보였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맘대로 해라. 쳇.
테세르가 빠르게 세라 소드를 잡았다. 검집이 아닌 검의 손잡이
만 잡은 것이다. 프라하가 방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
로 하지만.
팍- !
-으악! 뭐, 뭐야?
테세르 역시 세라 소드에 의해 튕걱 나왔다. 전혀 예상못했던
상황이다. 과거에는 숱하게 잡았던 검이었는데, 어떻게
테세르는 이해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 정신이 멍해졌다.
'뭐야? 검집만 그런 게 아니고 검도? 돌아 버리겠군. 뭐가 어떻
게 된 거야?'
"풋, 푸푸푸, 푸하하하하, 꼴좋다. "
-닥쳐! 똥강아지!
"하하하, 내가튕걱 나오는걸 보고도달려가다니. 너도참한심
하다. 머리가 나쁜 거냐? 아니면, 무모한 거냐?"
테세르는프라하의 말에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세라소드에 대
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다.
한참 고민하던 테세르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라한이 의식을 잃어서 그렇구나. 그때는 라한이 허락했기 때문
에 내가잡을수있었고. 에고, 미치겠네.'
-어쩌지?
"뭐가?"
-마족을 소환하지 못하면, 라한은죽을지도 몰라. 열매즙과물만
먹고 언제까지 살수 있을 것 같아? 저대로 두면 굶어 죽을 거라고.
테세르의 말에 프라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제야상황 판단
이 된모양이다. 사람이 물만먹고살수는 없다. 열매즙이 그나마
영양을 공급하겠지만, 인간이 살기에는 틱없이 부족했다. 음료수
만 먹고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차라리 열매 자체라면 모르겠지만.
"마족 소환 말고는 방법이 없나?"
-너도 생각좀 해라. 뭔 개자식이 머리는닭대가리냐? 개면 개
정도의 지능은 갖춰보란 말이다.
테세르의 호통에 프라하는 뜨끔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평생
머리 써 본 일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막상 머리 나쁘다는
소리를 듣자 화가 치밀었다. 알고 보면 테세르도 머리 나쁘긴 마찬
가지 아닌가. 머리가 나쁘다는 걸 스스로가 인정하고 안 하고의 차
이일 뿐. 둘 모두 머리가 나쁜 건 마찬가지였다.
"젠장. 소환하면 될 거 아냐?"
-진작 그럴 것이지
"쳇. "
혀를 크게 한번 찬 프라하가 세라 소드 앞에 섰다. 하지만 막상
그 앞에 서니 손이 가지 않았다. 아직도 좀 전에 받았던 충격이 남
아 있는 듯했다.
-야! 뭐야? 겁먹은 거야?
"누, 누가?"
테세르의 조롱에 프라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세라 소드의 검집의 손잡이를 움컥쥐었다.
우웅!
"으, 으으뭐, 뭐라고하면 되지?빠, 빨리. 으윽!"
-그냥 소환 투바! 라고 하면 돼!
"으으으, 으악!"
쨍그랑!
프라하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검을 떨어뜨렸다 벌겋게 달아오
른 손이 그가 받은 고통을 말해주는 듯했다.
"헉, 헉."
-뭐야? 그 정도도 못 참고 떨어뜨리다니. 실망인데.
테세르의 도발을 들은 프라하가 분을 삭이지 못했다. 하지만 손
에서 전해지는 통증 때문에 뭐라고 대꾸하지도 못했다.
그 딴에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버틴 거였다. 자신이 가진 본신의
마나로 손을 겹겹이 둘러쌌는데도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삐쳤냐? 사내자식이 뭐 그 정도 일로 삐치고 그러냐? 에휴, 그
나저나 이제 어쩌지?
짐짓 미안했던지 테세르가 너스레를 떨었다.
"젠장. 그래 나 삐쳤다. 어쩔래?
-칫, 이제 정말 어쩌지? 방법이 없는데.
"너도 한번 해보지?"
-고통스러울 게 뻔한데 내가 바보냐?
테세르의 말에 프라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신은
고통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시도하지 않았는가, 한 마디로 자신이
바보라는 얘기 였다.
"이, 이놈의 자식이 "
-시끄럽고. 라한이 검을 잡도록 하자.
프라하의 말을 테세르가 절묘하게 끊었다. 화낼 타이밍을 완전
히 잃도록 만든 것이다.
탁-! 스르릉!
테세르가 세라 소드를 발로 툭 찼다. 그러자 검 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검이 누워 있던 라한 옆에 멈추었다.
"야! 너, 너 뭐하는거야?"
-보면 몰라? 라한이 직접 잡도록 하려는 거잖아.
"이, 미친놈. 그러다 라한도 고통을 받으면 어쩌려고? 안 그래
도 다 죽어가는 애인데, 확인 사살 할 일 있어?
-원래 검 주인인데,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설사 그렇다 쳐도
뭐 어때? 원래 죽어 가는 사람한테는 전기 충격이 최고잖아.
테세르는 도무지 말싸움에서 지려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
이든 아니든 프라하는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덥석!
라한의 손을 잡은 테세르가 서서히 날아올랐다. 그리고 잡은 손
을 세라 소드 위에 올려놨다.
꿀꺽!
테세르의 행동을 본 프라하가 침을 삼켰다.
탁-! 우웅!
라한의 손에 잡은 세라 소드가 미약하게 공명했다. 하지만, 테세
나 프라하에게 하듯 강한 전류를 흘리지는 않은 듯했다. 최소 손

에서 살타는 냄새는 나지 않으니 말이다.
-어때?
"다행이기는 한데, 이제 어쩔 거야? 소환은 검을 잡은 사람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게 말이야. 이제 어쩌지?
프라하와 테세르가 세라 소드와 라한을 번갈아 보면서
빠졌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뽀족한 수가 없었다.
고민에
"골치 아프군. "
-야!
"왜?"
-너 혹시 마나 움직이는 법 좀 알아?
테세르의 물음에 프라하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는 테
세르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답했다.
"마나움직이는 거야당연히 알지. 내가 엑스 마스터라는 거 잊
었어? 오라 블레이드 맺히게 하는 게 바로 마나 움직이는 법이야. -
프라하의 표정은 스스로가 대견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넌
그런 것도 할 줄 모르지' 라는 의미를 강하게 담은 채였다.
그의 표정에 테세르가 혀를 차며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딴 거 말고. 남의 마나를 움직일 수 있냐는 말이다.
"남의 마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딴 게 가능할 리가 없잖
아. 자기 마나도 아닌데 어떻게 움직여. "
이 대륙에서의 마나는 어떤 경로를 이용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
었다. 다만, 자신의 마나에 의지를 집중해서 한곳으로모으는 것
일 뿐. 어떤 특별한방법이 없기에 남의 마나를움직이는 건 불가
능했다.
-넌 그래서 똥강아지라는 소리를 듣는 거야. 첸.
"그럼 남의 마나를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야? 어떻게?
-음, 그건,
말을 하던 테세르가 잠시 머뭇거렸다. 방법을 알려줘도 되는지
에 대해서 결정을 못한 탓이다.
'에고, 우리 주인이 화내면 곤란한데. '
테세르가 알고 있는 마나움직이는 법. 그건 라한이 알고 있는
법이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읖는다던가. 지금 테세르가
딱 그러했다. 라한이 마나움직이는 법을 연구할 때, 옆에서 계속
봐왔기에 어렴풋이나마방법을알고 있었다. 물론, 정확하지는않
았지만 그 정도로도 잘난 척하기에는 충분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종이 좀 가져와.
"종이는 왜?"
-어떻게 넌 한번에 재깍재깍 움직이는 법이 없냐? 시키면 바로
바로 좀 움직여라. 짜증난다.
방금 테세르가 한 말은 라한이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었다. 테세
르가 자꾸 토를 달아서 이런 말을 종종 했었다. 지금 프라하와 테
세르의 사이가 라한과 테세르의 사이처럼 역전되었다는 의미도 되
었다.
"알았어. 깨끗한 종이면 되지?"
-어.
테세르의 말에 프라하가 인상을 찌푸리며 가방을 열었다. 그리
고 가방에 들어 있던 지도를 꺼냈다. 프라하가 꺼낸 지도의 앞면에
는 대륙 지도가 어설프게 그려져 있었지만, 됫면은 깨끗했다.
"이 정도면 되나?"
-응, 펜 좀 줘봐.
"자. "
프라하에게서 펜을 받은 테세르가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
다. 오래전 라한이 한 번 그린 적이 있는 인체 지도였다.
한참후, 테세르가 허리를 쭉 펴며 종이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자신이 그린 그림을 자랑스러운 듯 스윽 훌었다.
-이 정도면 됐군
"이, 이게 뭐야? 왜 사람 그림에 점을 찍은 거야?"
-인체 지도다.
테세르가 그린 그림은 꽤나 자세했다. 사람의 전도에 찍어놓은
접 육십여 개 원래 혈도개수에 한참못미쳤지만, 이 정도만해도
충분했다. 라한이 중요하다고 동그라미 쳤던 혈도는 모두 표시했
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래 라한이 가지고 있던 혈도 지도와 비교
하면한참부족했다. 일단그림의 세밀한정도에서 엄청나게 큰차
이가 났다 거기다 혈도의 이름도 모조리 빠져 있었다. 테세르가
무령계 언어를몰랐기에 이렇게밖에 할수 없었다. 물론 테세르의
머리가 이게 한계라는 것도 어설픈 인체 지도에 한몫했다.
"놀랍군. 이게 인간의 몸이라고?"
-너희 똥강아지들하고는 좀 다를지도 몰라. 그러니까 너하교 안
맞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어차피 우리 주인 몸에 있는 마나를 움
직이는 거니까 상관없겠지.
테세르의 대답을 들은 프라하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새삼 라한
이 가진 특이한 실력의 원인을 짐작할수 있었다. 마나수련을움
직이는 길을 따라서 수련하다니. 그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
었다.
"이거, 이거. 우리 라이칸들도 가능한 건가?"
-몰라. 나중에 우리 주인 깨어나떤 직접 물어봐.
"아, 알았어. 근데, 이제 어쩌면 되지? 이것만가지고는 라한의
가나를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데. "
프라하의 말에 테세르가 펜을 들었다. 그리고 좀 전에 그렸던 그
림에 복잡한 선을 그렸다. 마나가 움직이는 길을 선으로 표시했다.
-내가 방금 그린 선 잘 봐둬.
"이건 왜?"
-저 선을 따라서 마나를 움직이면 돼. 정확한 게 아니라서 나도
뭐라고는못하겠지만, 일단 마나가 손으로 갈 수 있도록 했거든.
"그래서?"
-내가 라한의 몸속으로 들어가면, 날 저 길을 따라서 움직여.
"뭐, 뭐? 너를 움직이라고? 정령이 뭘 하겠다고. "
프라하가 당황스러운 듯 말을 더듬었다. 몸속에 들어가겠다는
말이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가놀라는 건 당연했다. 테세르가마나의 정령임을몰랐기 때
문이다.
-잔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 해. 그럼 시작한다.
테세르가 라한의 배 위에 섰다. 라한의 심장이 있는 그 위치였
다. 테세르의 움직임에 프라하도 라한의 곁으로 다가왔다.
-합!
기합을 터트린 테세르가 서서히 흐물흐물해졌다. 그리고 라한의
몸에 스며들 듯 서서히 사라졌다. 마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라한의 몸에 깃든 것이다.
테세르가 스며들자 프라하가 라한의 배위에 손을 올렸다. 미약
하게 뛰는 맥박이 손에 잡히자 흠칫 몸을 떨었다. 라한의 심장 위
치가 이상하다는 걸 지금에서야 발견한 것이다.
'이럴 시간이 없어. '
마음을 다잡은 프라하가 테세르를 서서히 움직여갔다. 이미 마
나로 변해서 자력으로 움직일 수 없는 테세르. 프라하의 유도에 의
해 길을따라서서히 움직였다. 심장에서 등으로, 그리고정수리를
거쳐 어깨, 팔꿈치, 마지막으로 손까지.
테세르가 라한의 손에 다다르자 무언가 공명하는 소리가 들렸
다. 그와 동시에 누구인지 모를 목소리가 서서히 들려왔다
-소환 투바!
시동어를 외친 목소리는 분명 테세르의 그것이었다. 움직임은
제약 받았지만, 말을 할 수는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말에 반응하
듯 세라 소드가 서서히 진동했다. 정확히는 세라 소드의 검집이 진
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된건가?"
스르르륵!
-쿨럭! 젠장. 못해먹겠군
세라 소드의 검집이 진동을 일으키자 테세르도 라한의 몸에서
나왔다. 임무를 마치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마자 푸념을 터
트렸다 남의 몸속에 들어가는 일 자체가 찝찝한 일이었음이다.
"왜 아무 반
부우웅!
프라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검집이 서서히 떠올랐다. 공중
에서 빙빙 돌던 세라 소드의 검집. 그곳에서는 무언가 찝찝한 기운
이 마구 흘러나왔다.
스팟!
순간 검집이 검은빛을사방으로 토해냈다. 그와동시에 테세르
와프라하가눈을 질끈감았다. 검은빛에 눈이 부시다니. 생전 처
음 겪는 기현상이었다.
위이이 잉 !
검은빛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이 완전히 사라
졌을 때에는 복잡하고 난해한 도형이 새걱져 있었다. 바닥과 천장,
심지어 허공에까지
"테, 테세르. 이거 제대로되고 있는거 맞아?"
몰라, 임마. 그냥 구경이나 해.
테세르도 얼굴 가득 수심이 가득했다. 그도 처음 보는 희한한 모
습이었다. 어쩌면 라한조차도 이런 모습을 상상하고 만든 건 아닐
지도 모른다. 투바를 소환하는 주문의 출처가 라한이 아니었기 때
문이다.
위이이이 잉 !
쾅- ! 쨍그랑!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프라하와 테세르가 뒤로 튕걱 나갔다.
하지만 튕걱 나가는 그 순간에도 라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아아암! 좋다. 드디어 불러주는군. "
테세르와 프라하의 귀에 남자의 미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들
의 눈에 미의 화신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미남자의 모습이 들어
왔다. 검은눈과검은머리카락, 우유처럼 흰 피부, 붉은 입술. 남
자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불러주는 건 좋은데, 왜 자고 있을 때 부르고 지랄이야. "
-너, 너 누구지?
눈앞에 선 남자는 투바가 아니었다. 최소한 테세르가 봤던 그 모
습은 절대 아니었다. 저 정도의 미남자를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
다. 테세르는 소환주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엥? 너 그때 그 정령이로군. 오랜만이야. "
-누, 누구?
남자가 아는 척을 하자 테세르가 공황상태에 빠졌다. 자신은 명
백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헌데 상대가 어떻게 자신을 아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야? 벌써 날 잊은 거야? 아, 이 모습 때문이군. "
정말 투바가 맞아? 확실해?
그들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프라하는 눈만 멀뚱히 뜨고 있었
다. 자신이 알고 있던 마족의 이미지와 너무 달랐다
마족이라면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잔인한 눈을 번뜩여야 한다. 또,
몸에서 피냄새가 진하게 진동하고 무언가 제물이 될 만한 것을 찾
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려야 한다. 그게 프라하가 알고 있던 마족
의 이미지이다.
헌데, 눈앞에 서 있는 예쁜 남자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았
다. 오히려 장난기가 좀 많은 개구쟁이 같은 얼굴에 당황스러웠다.
"나투바맞아, 이 외모는음, 어떻게 설명해야 되지?대외적인
외모? 이 정도로부족하겠군. 그러니까어, 마족은물질계로 넘어
올 때 외모가 바뀐다. 바꾸고 싶다고 바꿔는 게 아니라 그냥 저절
로 바뀌는 거야. 지금 내 모습은물질계에서 내가 가지게 될 외모
가 되는 거고. "
-그 말, 믿어도 되는 거야?
투바의 설명에도 테세르는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원래 모습과
너무다르다는게 그이유였다. 거기다저 아름다운외모. 괜한질
투심에 믿기가 싫어졌다.
"야, 너도생각을해봐라, 우리 마족들은마계에서 다리가 열두
개 달려 있기도 하고, 눈이 스무 개씩 달려 있기도 해. 태어날 때부
터 가지는 모습이지. 그런 마족이 물질계에 나타났다는 얘기 들은
적 있어? 없지? 없을 거야. 이쪽으로 넘어올때는 이곳에 사는종
족하고 엇비슷한 모양으로 넘어오거든 "
-젠장. 더럽게 멋있네, 정령보다마족이 백 배 낫구만.
"그거야당연하지. 그나저나왜 이렇게 늦게 부른 거야? 너희들
가고 얼마나 기다렸는데. 부르마 섬에서 심심해 죽는 줄 알았다고. "
-맞다 우리 주인좀어떻게 해봐라. 부상을당한것 같은데, 뭐
가 뭔지 모르겠더라. 너라면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말을 마친 테세르가 손으로 라한을 가리켰다. 투바가 소환되면
서 벽으로 튕걱 나갔는지, 구석에 꼴사납게 널브러져 있었다.
"첸, 그럼 뭐야? 저놈이 다치지 않았으면 부르지도 않았을 거잖
아. 실망인걸. "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이미 라한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얼굴에
약간의 다급한 표정을 머금은 채.
라한을 쭉 살피던 투바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테세르를 향
해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이놈.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 마나가 완전히 엉켰네. 충격을
두 번이나 받은 것 같아. "
-두 번?
"두 번?"
투바의 말에 테세르와 프라하가 동시에 되물었다. 두 번이라는
말이 호기심을 자극한 듯했다.
"응 두 번. 한번은 어디 보자오, 저놈마나하고려여 있군.
간섭받았다고 할까? 뭐, 그렇고 한 번은 최근에 당했군. 아니,
이건 금방 당한 거잖아.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최, 최근이라니? 무슨 말이야?
"누군가가 이 녀석 마나를 마구 헤집고 다닌 것 같은데. 대체 어
떤 몹쓸 자식이 이딴 짓을 했지?"
투바의 말에 테세르가 몸을 흠칫거렸다. 최근에 헤집었다면 자
신밖에 없었다. 의도야 어찌됐든 주인을 상하게 한 건 자신이라는
얘기였다. 찝찝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 몰랐다.
'우리 주인 깨어나면 경을 치겠군. 투바 저놈하고 프라하 입을
어 떻게든 막아야겠는데, '
테세르의 최대 적은 프라하도 투바도 아닌 라한이었다. 오직 그
만이 테세르의 약점을 쥐고 있다.
테세르의 가장 큰 약점은 소환이 안 되는 것. 라한이 강제 귀환
시컥놓고 부르지 않는 그 자체가 테세르에게는 최대의 공격이었다.
"고칠 수는 있나?"
"당연히 고 야! 넌 뭔데 반말이야?"
프라하가 말을 놓자 투바가 인상을 찌푸렸다. 라한과 그 똘마니
에게 반말을 듣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생판 처음 보는 놈까지
말을 놓다니. 그의 고향인 마계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실력은 아니지만, 서열만큼은 마계 2 인자가 아니던가. 모르긴
몰라도 아버지 마왕 루시퍼가 알게 된다면, 프라하의 척추를 롭으
라고 명할 게 분명했다.
"그, 그건. "
"죽을래? 이게 어디다 반말지거리야? 앞으로 형님이라고 불러.
말도 꼬박꼬박높이고. 알았어?"
프라하를 바라보는투바의 기세가 거세졌다. 그와동시에 오두
막 안에 엄청난 기운이 오동치기 시작했다.
엑스 마스터인 프라하조차도 버티지 못할 정도의 거대한 기세였
다. 처음은그런대로 버티는가싶던프라하, 결국, 무릎을꿇고말
았다. 투바의 거센 마기에 굴복당한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
"진작 그럴 것이지. 앞으로 조심해. "
" 예. "
-야! 주인 좀 고쳐보라니까.
"너도 말조심해. 라한 쫄따구라고 오냐오냐 했더니, 아무 데서
나 반말이야. 죽고 싶어?"
투바는 급기야 테세르까지 걸고넘어졌다. 평생 거의 듣지 못했
던 반말이 거슬리긴 거슬렸던 모양이다.
투바의 말에 테세르가 눈을 부라렸다.
-뭐, 뭐야? 이게 널 부른 게 누군데 감히 나한테
"오호라. 죽고 싶다. 이거로군. "
아까보다 좀 더 강한 기세가 테세르를 향해 뻗어갔다. 이어 테세
르의 팔다리를 꽁꽁 묶더니 바닥에 마구 내쳤다. 그리고 들리는 쾅
쾅거리는소리. 테세르의 머리가바닥에 부딪히는소리였다. 어떤
공격수단 같지도 않은데도 테세르는 멍하게 당하고만 있었다.
-야, 그, 그만. 아프잖아. 살려줘.
"이놈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쾅! 쾅-:
-살려주십시오, 투바님.
"진작 그럴 것이지. "
말이 끝남과동시에투바의 마기가사라졌다. 하지만, 테세르는
아직 멍한표정만 짓고 있었다.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듯했다
테세르가 당하자 프라하가 고소하다는 듯 혀를 날름 내밀었다.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저, 투바님. 이제 라한을 고쳐주시죠. "
"그렇지. 나이를 먹다보니까 가끔 깜빡깜빡 한다니까. "
말을 마친 투바가 라한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마기를 주
입시켜서 제령기와 제란기를 툭툭 건드렸다.
"역시, 쉽지 않군. "
손을 땐 투바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금만큼은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성자의 모습과 흡사했다.
"&"'&# % &rr"
우우우웅!
투바가 무언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마족만이 할 수 있
는 어떤 주문으로 보였다. 그 주문이 끝났을 때 대기가 미약하게
진동하는 느낌이 모두에게 전해졌다. 진동이 거의 극에 달했을 때
투바가 프라하와 테세르를 바라봤다
"이제 시동어만 남았다. "
-뭐 하는 건데요?
투바의 물음에 테세르가 불만을 가득 담아 되물었다. 아직도 투
바에게 말을 높이는 게 불편한 모양이다. 하지만 약자의 힘은 미약
한 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투바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악마의 낙인을 찍을 생각이다. "
-악마의 낙인?
투바의 대답에 테세르가의문을표했다. 처음듣는말이었다. 거
기다 악마라니. 뭔가 불길한 느낌에 쉽싸였다.
테세르의 의아한 표정에 투바가 설명을 이었다.
"내게 라한을 치료할 능력은 있어. 근데 내 힘이라고 해봐야 모
두 마계에서 온 힘이야. 일반 인간들에게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
는 거지. "
-그런데?
"그래서 어떻게?"
테세르와프라하가무의식중에 반말로 반문했다 히나, 투바는
그 말에 별 반응이 없었다. 자신도 그들의 반말을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마계의 힘으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마족이 되
어야 한다는 거지. 악마의 낙인은 사람을 마족으로 만들어주는 방
법이야. 뭐, 그렇다고라한이 진짜마족이 된다는건 아니고, 그냥
그런 낙인만 찍어둔다는 거야. 마계의 힘으로 치료할 수 있도록
투바의 대답에 테세르와 프라하의 표정에 묘하게 찌푸려졌다.
마족이라니. 한 명으로도 부족해서 라한까지 마족으로 만들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반대하기도 좀 그랬다. 지금 라한을 살릴 방법이
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저기, 악마의 낙인을 찍으면 나빠지는 거 없어? 예를들면 인
간들이 라한을 마족으로 본다거나, 모습이 바뀐다거나, 뭐 그런 거
없냐는 말이야.
"인간들이 라한을마족으로 보는 일은 없을 거야. 진짜마족이
되는 건 아니거든. 마족에게만 있는 낙인을 찍어서 마기를 받아들
일 수 있도록 하는 정도로 끝나니까. 근데, 문제가 딱 하나 있어
잠시 말을 끊은 투바가 프라하와 테세르를 다시 바라봤다. 그리
고 입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렸다.
원래 라한을 치료할 방법은 이 외에도 있었다. 아니, 그냥 의식을
잃은 상태로 십 일 정도만 더 지나면 저절로 깨어났을 터였다. 투바
가 라한의 제란기와제령기를 건드리기 전에는 말이다. 헌데 투바
가 라한의 두 기운을 툭툭 건드리면서 몸이 더 악화되었다. 의도적
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어찌췄든 지금 라한으로서는 악마의 낙인
을 찍어서 투바의 치료를 받는 법외에는 살아날 방도가 없었다.
"문제라니 무슨 말이지요?"
"신관의 신성력을 받지 못해. "
"신성력?"
"앞으로 다쳤을 때, 신관의 치료를 받는 건 포기해야 한다는 거
지. 또, 신전으로들어가는것도웬만하면자제하는게 좋아. 설사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라도 라한의 몸에 새걱질 악마의 낙인은 알
아보지 못하겠지만, 신은 다르거든. "
투바의 말을 끝으로 일행들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들이 대
화를 하는도중에도 라한의 몸주변에서는 계속해서 진동이 일고
있었다. 투바가 시동어만 남걱놓은 마계 마법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고민하던 테세르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해. 까짓것 그 낙인인가 뭔가를 새걱 버려, 똥통에 빠져 살더
라도 죽는 것보다는 나아. 그게 우리 주인의 지론이었어. 악마의
낙인이 똥통보다 괴롭겠어? 해 버려.
"그렇게 결정내릴 줄 알았다, 까만 정령. 후후후, 반말은 이번만
용서해 주지. "
테세르를 날카롭게 쳐다본 투바가 다시 라한의 곁에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손을 을린 채로 다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
작했다.
""&%$5 악마의 낙인 ! "
투바의 말이 끝나자 라한의 몸을 검은 연기가 휘감았다. 그 상태
로 허공에 서서히 떠오르더니 이내 빙빙 돌기 시작했다.
라한의 변화가 계속되고 있을 때, 투바의 이마에서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더 지나자 이젠 비 맞은 사람처럼
땀을 줄줄 흘려댔다. 악마의 낙인이라는 마계 마법이 투바에게도
쉽지 않은 마법인 것 같았다.
부우웅!
팍- !
주변을 울리는 소리가 멎고 라한이 바닥에 내려졌다. 그와 동시
에 투바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숨을 헐떡였다. 몸에서 풍기는 기
세가 한층 줄어 있었다. 라한의 이마에 묘한 그림이 그려졌다가 사
라졌다. 잠깐 나타났던 그 그림이 악마의 낙인인 모양이다. 하지만
프라하와 테세르는 그 낙인을 보지 못했다. 하필이면 투바의 몸이
딱 그 위치에 있어서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끝난 건가요?
"이제 다 된 겁니까?"
투바가고개를끄덕였다. 이제 힘든고비는지났다. 아직 라한을
치료하는 일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한두 시간 쉬고 나서 다시하면
되는 일이다. 또 치료할 때 사용할 마계 마법은그리 어려운마법
도 아니였다 실제 악마의 낙이은 마계에서만 할수있는 마법이였
다 마족의 마기를 엄청나게 소모하기 때문에 물질계에서는 할수
없는 것이다 헌데 투바는 무리를 해서 이곳으로 해냈고 그 때문에
엄첨난 힘을 소모했다
그가 악마의 낙인을 찍기 전에 테세르와 프라하의 반말을 제지
한것도 이때문이다 악마의 낙인을 찍고 나면 자신은 저들과
비슷하거나 조금 부족한 실력으로 떨어질터 시간이 지나 힘을 회복
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위에 설 자신이없었다
라한은 왜 안깨어나지.요
아직 치료 안햇다 악마의 낙인만 찍은 거지 몇시간 쉬었다
가 다시 할 생각이니까 그렇게 알아라
알겠습니다
대답은 프라하에게서 나왔다 그것도 아주 공손한 어투로
어쩌면 진정으로 투바에게 고마운 마음이 생긴지도 모른다
누가 뭐래도 유일한 친그이자 라한을 살려줄 그였으니까 말이
다 마족은 마족이고 은인은 은인이었다
나 두시간만 잘테니까 떠들지 마라
그러,지요
알겠습니다 쉬십시오
투바가 바닥레 드러눕자 테세르와 프라하가 밖으로 나갔다 좁
전보다는 한결 밝아진 얼굴이었다
라한의 부활
류카라한을 포섭한 굴레을 벗은 존재들은 왕국을 포섭하기 시작
햇다 각 왕국에 직접 서신을 보내서 드래곤의 계획을 알린 것이다
물론 드레곤들의 본래 의도에서은 한참 어긋난 내용이였다 하
지만 왕국측에서는 굴레을 벗은 존재들의 말을 믿었다 개중에는
자국으ㅐㅣ 영웅이었던자도 있지 않은가 그의 말을 무시하기에는 그
들의 이름이 너무 무거웠다
또 한편으로 굴레을 벗은존재들 중에 남은셋 엘프 한명과 라
이칸드로프 둘을 기 위해무진 애를 썼다 용병을 사용해 보기도
하고 각 상단이나 정보 길드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은 존재
는 둘 라이칸드로프 이리아나와 케이플과 돈네리아 미스티크였다
하지만 아직 그들과 접촉하지는 못했다 소문만 무성하고 정확
한 거주지를 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이칸드로프를 포섭할 수 있을까?"
크리퍼트의 물음을 못 들었는지 제이슨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
었다.
그는 좀 전부터 계속 이런 상태였다. 고개를 가로젓기도 하고,
뭔가 분노한 표정을 짓기도 하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몇 번 부르면 정신 차리는 듯했다가도 다시 멍해지기 일쑤였다.
"이보게. 제이슨!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겐가?"
"어?아, 아닐세 뭐라고했는가?"
"라이칸드로프를 포섭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재차 묻자 제이슨이 짐짓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곧 약간 미안
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거야 모르지.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는
거겠지. "
"난 우리가 그들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게 아닐까 싶네. 그들은
본래 인간보다 뛰어난존재들이었어. 헌데 우리 둘이서 그를당해
낼 수 있을까?"
크리퍼트의 물음에 제이슨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이런
고민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다로 결론
을내렸다. 라이칸드로프가강하기는하지만, 자신들둘을 이기기
는 힘들다고 생각한 탓이다.
물론, 라이칸드로프 둘이 한 장소에 있다면 분명 무리가 있었다.
아니 그 둘로는 턱없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헌데 알려진 둘의 위치
는 엄청난 거리가 아니던가. 정령사인 자신과 검사인 크리퍼트가
힘을 모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전에 우리한테도 도망쳤던 라이칸 기억나는가?"
"기억나지. 뭐, 지금은 반병신이 되었거나 죽었을 거라고 생각
하지만, "
"그때 그 라이칸과실력 비교를 해보면 되겠지. 그는분명 강했
다. 일대 일로는우리가상대도안될 정도였지. 헌데,둘을상대하
기는 분명 힘든 실력이었다. 거기다 검사인 자네와 정령사인 내가
서로 공조해서 싸운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거야. "
제이슨의 말에 크리퍼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이슨이 너무
쉽게 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한 크리퍼트가 조용히 물었다.
"얼마나 싸워야 이길 수 있을 것 같던가?"
"글쎄다. 대충 두세 시간? 그 정도면 이길 수 있지 않겠는가?"
"라이칸이 혼자 다니던가?"
크리퍼트의 말에 제이슨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주변에 베
어울프가 많다는 걸 깜빡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떻게 이 중요
한 걸 잊었는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멍청하고 섣부른 결정이 분명
했다.
"도움을 청해야겠군. "
"일단 루시펠이 오기로 했네. 휴,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군. "
루시펠 역시 소드마스터에 이른 검사. 설사베어울프가 곁에 있
다고 하더라도 그들 셌이면 충분했다. 최소 실력만으로는 그랬다.
헌데도 크리퍼트의 인상은 도무지 펴지지 않았다.
"또 뭐가 문젠가? 루시펠까지 오면 충분할 것 같은데. "
"그렇지, 일단실력으로는충분하지. 헌데, 그가도주하면 어쩌
겠는가? 베어울프를 방패막이로 삼아서 우리를 벗어난다면? 자네
는 그를 따라갈 자신이 있냔 말일세. "
제이슨의 얼굴도 크리퍼트의 얼굴처럼 어두워졌다. 싸운다는 생
각만 했지 도주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물론 그들의 목표는 싸움이 아닌 포섭이었다 한손이라도 더 필
요한상황이 지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포섭을 거부한다면, 그래
서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죽이는 수밖에 없었
다. 어떻게든 드래곤의 귀에 들어가는 건 막아야 하는 게 지금 그
들의 입장이었다.
"그걸 깜빡했군. 그래도 조심하면 도주를 막을 수는 있을 것 같
은데. 안 되면 막다른 골목으로 슬슬 몰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겠지. 정말운좋으면도주로를차단할수도 있네. 헌데 그
가 죽기 살기로 싸우면 어쩌겠는가?"
"후후, 설마 우리가 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7"
"우린 이기는 정도로 끝나선 안 된다는 걸 잊었는가? 우린 이기
면서도 부상을 당하면 안 되네. 아무런 피해 없이 상대를 꺾어야
한다는 말이지. 그를 포섭하러 가서 부상이라도 당하면, 우리 세력
이 오히려 줄어들 수도 있는 문제일세. "
실제 그들로서는 동원 가능한 인원 전부를 데려온 것이었다. 나
머지 인원은 각 왕국에 흩어져서 그들을 포섭하고 있는 중이었다.
더 이상 여력이 없으니, 어차피 그들의 힘으로 마무리 지어야 했다.
"어쩔 수 없지. 그들이 반항 없이 합류하기를 비는 수밖에. "
"혹시 말이야. 혹시
크리퍼트의 조심스러운 말에 제이슨이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또, 무슨 소리를 해서 사기를죽이려는지. 그가 입만 뻥끗하면 괜
히 걱정부터 앞섰다.
"말해 보게. 또 뭐가 문젠가?"
"혹시 루이에라는 인간에 대해 아직도 반감을 가지고 있는가?"
크리퍼트의 물음에 제이슨이 뜨끔하며 눈을 치떴다.
좀 전에 멍해 있던 제이슨. 그는 그때 루이에를 생각하고 있었
다. 그 때문에 수시로 분노의 표정을 짓기도 하고 고개를 가로젓기
도 했음이다.
"그건 왜 묻는가?"
"우리에게 힘이 필요하다는 건 알겠지?"
"그래서 그를 포섭하기라도 하자는 말인가?"
"그렇네. 자네만 허락하면 그의 손이라도 빌릴 생각일세. "
크리퍼트의 말에 제이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직도 그
에게 당한눈에서는 통증이 몰려오는데, 그 때문에 남은 긴 생을
외눈으로살아야하는데, 그를자신의 편으로끌어들이다니, 그로
서는 절대 허락할 수 없는 얘기였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자네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가네. 하지만 지금은 힘을 모을 때야.
그를 포섭해서라도 우리 힘이 강해진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일
세. 자네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큰일을 그르칠 수는 없지 않은가. "
제이슨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과 감성이 자꾸 따로 놀았
다.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이성과 죽이고 싶다는 감성 말이다.
"하지만 휴, 알겠네. "
제이슨의 입에서 어렵사리 긍정의 말이 튀어나왔다. 끝까지 고
집을 피울 수는 없었으리라.
자칫 눈 하나에 대한 대가를 찾으려다가 인간 전체의 멸망을 불
러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의를 생각한다면 스스로의 복수를 포
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가세. "
"자네 루이에 그 인간의 거처를 찾았군. "
제이슨의 놀란 물음에 크리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드래곤의 음모를 알게 된 그 순간부터 루이에를 찾아 다녔
다. 물론, 대륙에 있는정보 길드를통해서였다. 그리고그결과를
며칠 전에 보고 받았다. 케라스 왕국 주변에 있던 산맥에서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정보를 얻은 것이다.
"케라스 왕국에 있네.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며칠 돌아간
다고 생각하면 찾을 수 있을 걸세. "
"알겠네. 자네 뜻에 따르지. 대신, 그가 도주하려 한다면, 혹 그
런 낌새가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그를죽일 것이네 반드시 내 손
으로. "
"알겠네. 그 정도는 양보하지. "
그렇게 그들의 행보가결정되었다. 하지만, 크리퍼트는 내심 불
안함이 엄습했다. 제이슨이 그를 봤을 때 '참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두 시간만 자겠다던 투바는 거의 열 시간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그 동안 테세르와 프라하가 초조해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왜 이제야 일어나십니까?"
-쳇. 두시간이 언제부터 열 시간이 됐냐?
프라하와 테세르의 말에도 투바는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명백
히 자신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심
력이 소모된 탓이다.
악마의 낙인이라는 마계의 마법. 아니 술법에 더 가까운 마법을
처음으로 써 봤기에, 이 정도로 힘들 줄은 짐작지도 못했다.
"알았어. 잘못 했으니까. 좀 물러나 있어라. "
"네. "
프라하가 물러나자 투바가 라한의 곁에 섰다. 그리고 몇 번 숨을
몰아쉰 후 라한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마계의 힘, 마족의 권능. 마왕의 명령으로그의 몸을되돌린다.
다크니스 베스티아 ! "
우우웅!
투바의 주문 영창이 끝나자 라한의 몸이 검게 물들었다. 어떤 연
기나 빛이 생기는 게 아닌, 몸 자체가 검게 변해 버렸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자 라한의 몸이 서서히 원래 몸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이윽고 라한의 본래 몸과 완벽히 같은 모습이 되었다.
"끝난 겁니까?"
-우리 주인은요?
그들의 물음에 투바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잘 됐다
는 표시를 몸으로 드러냈음이다
그의 몸짓에 프라하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테세르 역시 바닥
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하는 일 없이 기다리기
만 하는 건데도, 심력 소모가 꽤 컸던 모양이다.
'웃기는 놈들이네. 라한이 저놈들한테 뭐라고 저런 표정이지?'
투바는 저들의 행태가 이해가 안 되었다. 끈적끈적한 정이 무언
지, 우정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마족은 어디까지나 힘의 논
리에 의해 움직이는 종족이 아니던가. 그들은 우정이고 자시고 힘
만 강하면 장땡이 었다.
'괜히 민망해지네. '
투바가 라한을 살린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가진 지식이었다. 자신
과 조금 다른 분야이기는 하지만, 어찌 보면 흡사한 분야가 인챈트
와 마법진이었다. 그의 지식을 토대로 삼는다면, 자신의 마법진 지
식은 일취월장할게 분명했다. 마찬가지로 라한의 인챈트 역시 발
전하겠지만.
어찌췄든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를 살린 것이다.
"언제 깨어나죠?"
프라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투바가 라한의 안색을 살폈다. 그
리고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얼마 안 있어서 깨어날 거다 하지만 다시 자야 하니까 많은 대
화는 자제해라. "
"알겠습니 다. "
그 대화를 끝으로 그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세 명 모두의 시선은 라한에게 향해 있었다. 확실히 전에 보여줬
던 모습과는 달랐다. 눈을 꿈틀거리기도 했고, 호흡도 한층 안정되
어 있었다. 또 혈색도죽은자의 그것이 아닌 산자의 그것처럼 활
기가 돋았다.
그렇게 한참 라한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때, 라한이 신음을
흘렸다.
으 으
"라한. 나 기억하겠어?"
아직 눈도 뜨지 않았건만 프라하가 조급하게 물어왔다. 그의 그
런 모습에 테세르와 투바가 동시에 눈을 부라렸다. 환자가 안정을
취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음이다.
그들의 시선을 받은 프라하가 찔끔하며 고개를 숙였다. 거칠 것
없던 프라하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그를 따르던 베어울프나
다른 라이칸드로프들이 본다면 황당해서 눈을 비빌 모습이었다.
"으, 으윽! 여기가 어디지?"
"후후, 이제 정신이 들었군. 나 알아보겠나?"
-주인아! 나 알아보겠지?
라한이 입을 열자 투바와 테세르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얼
굴에선 마치 자신을 먼저 알아달라는 듯 보채는 기색이 역력했다.
"썩을 놈들. 내 머리가 돌이냐?"
-주인! 멀정하군.
"나도 알아 본 건가?"
라한은 아직도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헌데도 그들을 정확히 구
분해냈다. 테세르와 프라하에게서 풍기는 기운으로 알아본 것이
다. 또 투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봐, 마족! 아무래도 네가 날 살린 것 같군. "
"그렇다고 볼 수 있지. "
"나 좀 더 잘 테니까. 말썽피우지 마라. "
할 말을 마친 라한이 서서히 고개를 꺾었다. 수면에 들었다는 신
호였다.
라한의 마지막 말에 투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말썽이
라니. 마계의 바하라 성에서 숱하게 듣던 말이라서 그런지 정말 듣
기 싫은 말이었다. 그 짜증나는 단어를 물질계에서까지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으리라.
'빌어먹을 놈. 저놈은 마족 무서운 줄을 몰라. '
투바가 속으로 오만상 투덜거릴 때, 테세르는 정 반대의 생각으
로 기쁨에 차 있었다.
'역시 우리 주인. 마족마저 발아래 두는구나. 크크크. '
테세르는 자신이 라한 바로 아래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즉
투바가 라한보다 아래가 되면, 최하 자신과 동급이라고 생각했다.
라한이 서열 자체에 관심 없어 하는 걸 전혀 감안하지 않은 자기 멋
대로의 생각이었다.
라한은 만 하루를 잔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테세
르였다. 팔짱을 낀 채로 한쪽 다리를 까딱거리는 게 무진장 거만해
보였다.
'저놈은 정령이 아니었으면 필시 불량배였을 거야, 행동 하나하
나가 불량스러워. '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눈물을 글썽이는 프라하였다. 폴리모
프를 풀지 않은 파란 머리 중년의 모습이었다.
'웃기는 놈일세, '
라한은프라하의 행동이 이해가되지 않았다. 인간의 모습을 저
렇게 좋아하다니. 인간이 오크나 트롤의 모습을 하는 것과 뭐가 다
르겠냐 싶었다.
그렇게 눈을 돌리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사람은 엄청난 미
남자였다. 라한은 한 눈에 그가 투바임을 알아봤다. 그에게서 풍기
는 기운이 과거에 겪어봤던 그 기운과 일치하는 걸 깨달았기 때문
이다. 기감에 예민한 라한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투바로군. "
"역시 날 알아보는군. 어떻게 알아본 거지? 분명 모습이 바커었
을 텐데. "
"모습은 변했어도 느껴지는 기운이 같으니까. "
"역시 특이한 놈이야. "
투바는 진정으로 라한에게 감탄했다. 그때 잠깐 겪었던 기운을
기억한다는 말이 아닌가. 아니, 누군가의 기운을 구별해 낸다는 그
자체가놀라운 일이었다. 라한은거기에 한술 더 떠서, 기운하나
하나를구분해서 기억했다는 거였다. 설사 최상급 마족이라도 그
리 쉬운 일이 아니 었다.
-주인아! 몸은 좀 어때?
"몸이라
잠시 중얼거린 라한이 기운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제령기부터
시작해서 제란기까지. 일단 느껴지는 기운은 상쾌했다. 부상당한
사람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였다.
헌데 구석구석에서는아직도뭉쳐 있는 기운이 느껴졌다. 또 약
간씩 꼬여 있다는느낌도들었다. 완전히 완쾌되려면 스스로가 심
법을 수련하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이 정도면 양호하군. "
말을 마친 라한이 손으로 침대를 짚었다. 그리고 손을 밀어 상체
를 일으켰다.
" 으윽
"몸이 굳어 있어서 움직이기 힘들 거야. 무리하지 마. "
투바의 조언에도 라한은 고집을 꺽지 않았다. 기어이 손을 쭉 밀
었다. 막상상체를 일으키고 나자좀 전의 고통은사라졌다. 라한
이 가지고 있는 제령기가 굳은 몸을 풀었기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으차! "
기합을 넣은 라한이 다리를 뼜고, 침대 아래로 내려서려고 애썼
다. 보름 이상 누워 있던 사람이 바로 일어서려고 애쓰는 무식한
행동이었다.
비틀!
역시나 중심을 잡지 못했다. 굳은 몸은 풀렸어도 잃었던 균형 감
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름대로 물리 치료를 하며 시간이 보내야
할듯했다.
"쉽지 않군. "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다. 넌 무려 이십일 가까이 누워 있었
어. 당장 걸어 다니면 그게 인간이냐? 드래곤이지. "
물리적 제약에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가 드래곤이었다. 수백 년
동안 자고 일어나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유일한 존재인 드래곤
겨우 이십일도 안 되는 시간으로 몸이 굳을 리 만무했다.
"고생 좀 해야겠군. "
"그렇겠지. 아, 그리고 아니다. "
"뭔데?"
"나중에 얘기해줄게. 지금은 때가 이른 것 같다. "
투바의 말에 라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과 투바는 겨우 두 번째 만난 사이였다. 뭔가를 재촉
할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친해져서 스스럼없이 대할수 있다면 이런 애매한 상황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겠지만
다음날부터 라한은 걷기 위한수련에 돌입했다. 이에 대해 투바
는 최소 삼 일은 걸릴 거라고 했었다. 인간의 몸이라는 점을 감안
해서 그 정도 시간을 말한 것이다.
헌데 라한은하루만에, 그것도 네 시간만에 통과해 버렸다. 라
한의 제령기가몸을 풀어주고, 제란기가 육체의 감각을 높여줬기
에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했다. 투바는 이런 두 기운의 효능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말이다.
일단 걷고 나자다음은뛰는수련을 시작했고, 이 역시 그날안
으로 끝내 버렸다. 걷기와뛰기를하루 만에 끝낸 셈이다. 라한의
이런 행동에 투바는 괴물이라며 놀라워했다. 마족도 못하는 일을
했다는 감탄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라한이 의식을 되찾은 이틀 째,
이때부터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하기로 했다. 굳은 기를 주물러
주고 꼬여 있는 기운을 푸는 심법 수련이었다.
"투바, 테세르, 프라하. "
"어?"
-말해, 주인.
테세르의 물음에 세 명이 거의 동시에 대답해왔다. 그들의 이런
행동에 라한이 몹시 짜증난다는표정을 지었다. 마치 어미 오리와
새끼 오리 사이 같지 않은가 왜 자신의 뒤만졸졸 따라다니는지
귀찮아 미칠 지경이었다.
"너희들 왜 자꾸 따라다니는데. "
-나야 주인이 가는 곳을 따라가는 게 당연하지.
테세르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테세르
는 원래 자신을 따라다녔던 존재였다. 지금 행동도 오래전부터 해
온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너는?"
"나야 소환됐으니 당연히 따라다니는 거지. 소환 목소리가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분명 라한 네가 소환한 거잖아. 소환했으니 책
임져!"
투바의 말에 라한이 난감한표정을지었다. 책임지라니. 징그럽
게 예쁜 얼굴만 보면 정말 마음에 드는 말이지만, 분명히 남성체였
다. 같은 남성체인 라한에게는 징그럽게 다가을 수밖에 없는 언어
선택이었다.
"미치겠군. 그럼 넌 왜 자꾸 따라다니는데? 도끼 수련 안 해?"
"어, 그게 그러니까. "
프라하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했다. 뭔가 바라는 게 있는 듯한
데, 선뜻 입이 열리지 않는 모양새였다.
"빨리 말해, "
"마나 움직이는 법 좀 가르쳐 줄 수 없을까?"
프라하의 말에 테세르와투바의 시선이 홱 돌아서 그에게 향했
다. 투바는그게 무슨소리냐는강한의문을담은 얼굴이었다. 반
면 테세르는 왜 그딴 소리를 해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느냐는 의
미를 담은 얼굴이었다.
"마나를 움직이는 법이라 테세르! 네가 한 짓인가?"
-아, 그게 있잖아. 내가말해주고 싶어서 한게 아니고. 주인의
몸이 너무 위험해 보여서그러니까, 어아, 맞다. 주인살리려
고 그런 거야.
테세르의 더듬거리는 대답에 라한이 한숨을 쉬었다. 정보를 알
려준 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자신을 살리려다가 그랬다는데 어쩌
겠는가. 그냥 참을 수밖에 없었다.
"에휴, 이번 한 번은 참는다. 테. 세. 르. "
-당연하지. 내가 주인 허락 없이 뭐 하는 거 봤어? 내가 움직이
는모든건주인의 허락이 있어야하는거라고. 암, 당연하지. 그렇
고말고.
"잠깐, 잠깐만. 마나를움직이는 법이라니?그게 무슨말이야?
단순히 의지를 집중시컥서 자신의 마나를 모으는 뭐, 그런 식은
아닌 것 같은데. "
투바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신이 모르는 지식이 왔다 갔다 하
고 있으니 궁금했던 모양이다. 역시나 호기심 많은 투바다웠다.
"미치겠군. 잘 들어. 내가 마나를 움직이는 법을 아는 건 사실이
야. 근데 내 몸이 다른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야. "
찌익!
말을 하던 라한이 상의를 찢고 가슴을 내밀었다.
"내 심장이 어디 있는지 잘봐. 투바! 너라면 한번에 알아볼수
있겠지?"
"알고 있다. 널 치료하려고할때 알아봤지. 쳇. 난못익히는거
로군. "
투바가 체념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 쉬었다. 무언가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게 안타까운
듯했다.
"프라하! 넌 어때? 배우려면 심장을 요 위치까지 끌어내려야 하
는데. 해볼래? 죽어도 나 원망하지 말고. "
라한이 배꼽 아래를 손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할 테면 해보라는
듯 당당한 목소리 였다.
라한의 말에 프라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포기하지, "
-이야, 우리 주인 말 잘한다.
"시끄러! "
라한의 호통에 테세르가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역시나 라한이
제일 무서운 테세르였다.
-칫, 주인 칭찬했는데.
"난 일단 몸부터 추슬러야겠다. 테세르! 내가 심법 운용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통제 잘해라, "
-알았어.
라한이 말한 통제는 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거였다. 심법 운
용중에 자칫 방해 받았다가는주화입마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테
세르는 라한의 심법 운용을 수십, 수백 번 봐왔기에 거의 습관처럼
사람을 통제했다.
오두막의 구석으로 간 라한은 제령기보다 제란기를 먼저 돌렸
다. 제란기의 뭉친 정도가 제령기에 비해 조금 나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기운이 섞여 꼬인 것도 제령기에 비해 한결 양호했다. 쉬
운 것부터 시작해서 몸을 회복시키려는 의도였다
라한이 몸을 한창 회복시키고 있을 때, 제이슨 일행은 케라스 왕
국 인근에서 루이에를찾고 있었다. 중간에 루시펠이 합류해서 일
행은 세 명으로 늘어난 채였다.
"이 근처던가?"
"아까 그 사냥꾼이 제대로 보긴 본 거야? 있긴 뭐가 있다고. "
그들은 이곳에 오기 전에 사냥꾼 일행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
고그들에게 이쪽에서 연기가오르는 걸 봤다고들었다. 또그 연
기가 한 두 번이 아니라 고정적으로 오른다는 얘기도. 그 말을 믿
고 무작정 이곳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여정은그리 수월하지 않았다. 사냥꾼이 말한곳
이 절벽의 꼭대기 위였다. 올라갈 길 하나 없는 깎아지는듯한 절
벽.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살풍경한 곳이었다.
그들은 절벽을 오르기 위해 제이슨의 중급 정령을 불렀다. 한 명
씩 오르는데도 엄청나게 몰아치는 계곡 풍 때문에 떨어질 뻔한 적
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생고생해서 찾아왔는데, 아무것도찾을
수 없었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내 그놈의 사냥꾼 놈들을 찾아

"쉿! 저기. "
루시펠의 화를 잠재운 크리퍼트가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사냥꾼이 말한 흰 연기였다. 저 정도 연기가 오른다면 산불이 난
건 분명 아니었다.
"가 보자. "
"응. "
의견 일치를 본 그들이 조금씩 걸어 들어갔다. 뒤에서는 연신 바
람소리가들리고, 앞에서는흰 연기가피어올랐다. 대체 어떻게 이
런 곳에서 살 수 있는지. 그들에게는 신기함 그 자체였다.
한참 걸어가자 아담한 오두막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쾌나 정들
여서 만든 듯 상당히 견고해 보이는 오두막이었다.
"저기겠지?"
제이슨의 말에 루시펠과 크리퍼트가 검을 움컥잡았다. 상대는
굴레를 벗지 않았지만, 제이슨의 눈을못쓰게 만든존재. 쉽게 생
각할 상대가 아니 었다.
그들이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리뗘 천천히 걸어갔다. 그렇게 오
두막에 거의 다다랐을 때, 바람 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스슥!
사라락!
갑작스럽게 들리는 소리에 제이슨 일행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리고 전투 자세를 취하며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헌데 그 어디에도
바람을 일으킨 원인이라 보이는 물체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글쎄다. "
아주 느리게 한걸음 다가갔다. 옆 동료의 숨소리마저 귀에 들릴
정도로 조용한 걸음이었다. 그렇게 오두막의 문 앞에 도달했을 때,
또 다시 예의 그 소리가 들려왔다.
스스슥!
사라락!
하지만 이번에는 그들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주변의 기척에
조금 더 신경 썼을 뿐, 손은 이미 손잡이를 잡아가고 있었다.
덜컥!
문을 조용히 열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문에 어떤 장
치가 된 건지, 손잡이만 살짝 돌렸음에도 문이 활짝 열려 버렸다.
예상 못한 변화에 제이슨이 주변을 빠르게 훌었다. 그리고 열린
문 안을 살피며 어떤 존재가 있는지 파악해갔다
"없군 "
"어디 간 거지?"
서로 잠깐 의견을 주고받고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횅했다. 분명 어떤 물체가가득놓여 있던 방같은데, 모두 걷어
갔는지 보이는 게 전혀 없었다. 남은 거라곤 침대와식기도구뿐이
었다.
"어떻게 된 걸까?"
"여기 좀 봐. "
"음, 검이 있던 자리군. "
한쪽 벽에는 검 모양으로 약간 밝은 색의 벽이 들어왔다. 원래
검을 걸어뒀다가 최근에 가지고 간 듯했다.
"여기도 있어. "
"흠, 여긴 방패 모양이군, "
그러고 보니 방 곳곳에 그런 곳이 보였다. 수레가 있었음직한 곳
도 있었고, 검, 방패 같은도구가있었던곳도보였다. 지금은이미
가지고 갔는지 흔적만 남아 있었다.
"젠장. 놓쳤군. "
"어떻게 눈치 챈 거지?"
"약삭빠른 놈. "
각자 한 마디씩 내뱉은 그들이 몸을 돌렸다.
오두막 안에 숨을 만한 곳이라도 있었으면 찾아보기라도 하겠지
만, 너무 휑했다. 당최 뭔가를 감출 만한 장소가 없었다.
스핑!
스팟!
피 리리 링 !
그들이 오두막을 막 나섰을 때, 뭔가 날아오는 듯한 파공음이 들
려왔다. 예상 못한 기습이었다.
큭"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대부분이 날아오는 암기를 이미 벗어난 것이다. 허나 제이슨은그
렇지 못했다. 원래 몸을 수련하는 검사가 아니었기에, 움직임이 느
릴 수밖에 없었다.
암기를 피한 크리퍼트와 루시펠이 주변을 훔었다. 헌데도 보이
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오두막의 양쪽끝에 있던 나무에
무언가 매달려 있음은 볼 수 있었다. 암기를 발사하는 장치인 모양
이다.
"젠장. 장치에 당하다니. 제이슨, 괜찮아?"
"팔, 내 팔. "
제이슨의 팔에서 엄청난피가흘러나왔다. 놀란마음에 몸을웅
크리고 왼손으로 얼굴을 감싼 모양이다. 그래서 암기의 대부분은
그의 왼손에 박혀 있었다. 죽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잘못하면
손을 못 쓰게 될 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잠시만 참아. "
말을마친 크리퍼트가제이슨을들쳐 업었다. 최대한빨리 벗어
나서 신관의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헌데.
"빌어먹을. 이 절벽을 어떻게 벗어나지. "
"미치겠군, 제이슨. 정령 불러낼 수 있겠어?"
루시펠의 말에 제이슨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아직 의식
을 잃지 않았으니 어쩌면 가능할 듯싶었다.
"실라페. "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헌데도 정령은 그 말을 들었는지 서
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를내려줘. 헉, 헉!"
제이슨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당장 의식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출혈이었다. 헌데도꿋꿋하게 참아냈다. 의식을 잃으
면 죽는다는 절박함이 이런 기적을 만들어냈다.
이번을 계기로 제이슨과 루이에 사이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게 분
명했다. 예전에 눈을 잃게 했고, 지금은 팔까지 부상 입혔으니 말
이다.
라한은 이전의 몸을 완벽히 되찾았다. 오히려 몸에 대해 고민하
면서 혈도에 대한 더 큰 이해를 얻기도 했다 큰 차이는 안 나겠지
만, 약간은 자연스럽게 기를 운행할 수 있게 되었다.
-주인 뭐해? 투바가 찾던데.
투바가 찾는 이유라면 단 하나밖에 없다. 인챈트와 마법진의 비
교 분석.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제대로 된 대화를 못했기에 속이 탈
게 분명했다.
"내일부터 지겹도록 대화해 준다고 해. 오늘은 꼭 할 일이 있어. "
-그래?그렇게 전하지. 근데 주인. 요즘 얼굴이 왜 그래?몸다
회복됐잖아.
요즘 라한의 얼굴은썩 좋지 못했다. 단전의 확장이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느리긴 했지만, 꾸준히 늘고 있었던 제란기와커지고 있
던 단전. 그것들의 정체로 인해 라한의 기분은 최악에 다다랐다.
"아니다. 가 봐라. "
-칫, 알았다.
테세르가 사라지자 라한은 또 다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단전
을 확장시킬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가 아무
리 뛰어난 인재라도 몸의 일부분을 인위적으로 크게 만들 수는 없
는 노릇이다.
'방법이 정녕 없는 건가?'
라한이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뒤에서 발자국소리가들려왔
다. 가볍고 규칙적인 소리였다. 이 정도로 일정한 보폭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라면 단 하나 투바뿐이다.
"야! 네 얼굴이 그렇게 비싸? 얼굴 한번 보기 왜 이렇게 힘든데?
응? 마계에서 내 말을 거역하면 아휴,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
"무슨 일이야?"
투바의 긴 말을 라한이 한마디로 일축시켰다. 더 이상듣기 싫
다는 의미도 강하게 포함해서였다.
라한의 그런 반응에 오히려 투바가 민망해졌다. 괜히 자신만 열
낸 꼴이 아닌가. 그렇지만한편으로는화도났다. 그 정도로불렀
는데도 안 왔다면, 미안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게 예의 아닌가 싶
었다.
"참나. 대체 뭔 고민을 그렇게 하기에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건데?
"네가 말 한다면 아냐?"
라한의 버릇없는 대꾸에도 투바는 할 말이 없었다. 말해도 모르
는 게 사실이었다. 속으로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도 뭐라 할 수가
없으니 답'급해 미칠 지경이었다.
"젠장. 네놈 걱정해서 왔더니, 뭐라?말한다면 아냐고?에라이,
싸가지 밥 말아 처먹은 재수 옴 붙은 자식아! 네가 그러고도 인간
이냐?"
"아니. 이젠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힘들지. 악마의 낙인을 찍었
으니까. "
라한이 계속 퉁명스럽게 대꾸한 가장 큰 이유가 악마의 낙인 때
문이다. 회복 되고나서 악마의 낙인에 대해 들었을 때, 얼마나놀
랐던가,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의식이 있을 때 그랬다면 이 정도로 화가 나지는 않을 거
였다. 그래도 자신의 의사라고 할수 있으니 말이다. 헌데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을 때 자기들끼리 쑥덕대고 다 해 버렸으니 화가 치
밀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가 자신을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난 또 뭐라고. 아직도 그 일로 꿍해 있냐? 사내자식이 속이 왜
그렇게 좁아? 널 살리려다보니 어쩔 수 없었잖아. "
"뭐?"
라한이 화를내는두 번째 이유였다. 분명 화가치미는데,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은데, 자기 목숨때문이라서 화도못낸다는것. 이
런 답답한 상황이 라한을 짜증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아, 미안. 그나저나 대체 뭣 때문에 고민하는 거야? 얼굴이 말
이 아닌데. "
"말해도 모를 거면서 묻기는 왜 묻냐?"
"그래도 말해봐. 혹시 알아? 내가 멋진 해결책을 제시해줄지. "
"단전이 더 이상 안 늘어나서 그런다. "
"단전? 그게 뭔데?"
"기를 담아두는 그릇 같은 거다. 심장 말고 단전이라는 곳에도 기
를 담아둘 수 있거든. 기는 너희가 알고 있는 마나하고 비슷하고. "
라한의 말에 투바가 잠시 회상에 잠겼다. 라한의 몸을 치료할 때
를생각하는모습이었다. 그렇게 잠시 후, 투바가조용히 운을 떼
었다.
"기억나는군, 그때 넌 기를 배꼽 아래에 모아두고 있었어. 심장
이 아닌데도 그곳에 모아두더군. "
"내 몸을 치료할 때 봤나보네 "
"근데 이상하군. 거기에 그릇이 어디 있다는 거지? 넌 그냥 그곳
에 기를 뭉쳐두기만 한 것 같던데. "
"물론, 너희들은 그릇을 보지 못하겠지. 그건 기의 주인인 나

뭔가 말을 하려던 라한이 급히 입을 닫았다. 무언가놓쳤던 걸
알게 된 듯했다. 이에 라한은 투바가 했던 말을 빠르게 다시 되새
겼다.
'그릇이 없었다? 나만 그릇으로 생각했다는 건가? 그렇지, 그릇
은원래 없는 거였어. 내가그곳을단전이라고 생각했기에 그곳에
모아뒀을 뿐. '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자 머리가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
다. 투바와의 대화에서 실마리를 찾은 셈이다.
"뭐냐? 말 하다가 말고 그래?"
"투바! 고맙다. 이 은혜는 나중에 꼭 갚을게. "
말을 마친 라한이 어딘가로 빠르게 달려갔다. 발걸음에 광견보
가 려여 있어서 인간으로 볼 수 없는 빠른 속도였다.
라한이 사라지자 멀뚱이 서 잇던 투바가 머리를 긁적였다
라한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투바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
숭을 푹푹 실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결국 자신이 목표한 일은 하나 "
도 이루지 못했다. 죽쒀서 남준상황이었다.
흔적
오두막에서 한참 달려온 라한이 조용한곳을 기 시작했다 너
무중요한 일이었기에 일행마저 믿지못하고 나왔다 조만간 테세
르는 라한의 위치을 찾아오겠지만 최소 프라하와 투바의 눈은 피
할수잇을 성 싶었다
그렇게 한참 두리번거리던 라한이 작은 동굴을 발견했다 인공
적인 분위기가 약간 가미된 작은 동굴이었다
이런 곳도 있었나 시간 나면 천천히 뒤져봐야겠다
라한은 인적이없는 곳을 찾기위해 괘 많이 날아왔다 중간에
계곡도 한번 건너뛰었고 바위산도 건넜다 이정도 위치라면 테
세르가 찾아오는데 몇시간은 걸릴 거리였다
여기가 좋겠군
바닥에 앉은 라한이 동굴 안으로 제령기를 퍼트렸다 혹시나 모
스터라도 살고 있다면 낭패였기에 미리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굴을 살피던 라한. 이내 제령기를 거두고 심법 수
련 자세를 취했다. 다행히 동굴 안에서는 그 어떤 인기척도 발견되
지 않았다.
.어차피 단전이라는 곳은 모든 기의 시작 부분에 불과하다. 시작
이 그곳이기에 단전에 기를 모았을 뿐. 어차피 별 의미는 없는 거였
어. 제령기를 심장 주위에 두를 수 있었다면 단전도 가능하겠지. "
라한의 결론은 단전의 무의미성이었다. 물론, 단전이라는 곳 자
체가 없는 건 아니었다. 기를 응집시켜 모아둔다는 그 자체만으로
도 무척 중요한 곳이다.
하지만 단전이라는 곳에만 기를 모을 필요는 없었다. 심장에 모
을 수 있다면 다른 곳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라한의 깨달음은 여
기서 출발했다.
"어디든 가능하다 다만 단전이 더 편하다. "
그렇게 결론내린 라한이 예전처럼 서서히 제란기를 돌리기 시작
했다 하지만, 그도착지점은예전과분명히 달랐다. 제란기를 뒀
던 단전이 아닌 그 주변이니 말이다.
대신, 기존 제란기와의 연계를고려해 항상 이어지도록할생각
이었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제령기와제란기처럼 완전히 동떨어
진 기운이 될 수 있었다.
로이나와
류카라한이 굴레를 벗은 존재들의 그룹에 참가하자,
베르네는 그를 떠나왔다. 드래곤이 개입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
에 손을 뗀 거였다.
로이나는 떠나을 때, 류카라한에게 몸조심하라고 신신당부 했었
다. 그러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드래곤답지 않았다. 그 모습
에 베르네는 팔뚝에 난 닭살을 손톱으로 쥐어뜯어야만 했다.
"로이나님. 이제 어쩌죠? 라한이를 찾을까요?"
"우리가할수 있는 게 없으니까 일단 레어로 돌아가자. 정령을
이용해서 찾아봐야지. "
라한이 굴레를 벗은 존재라는 걸 알았다면, 굳이 정령을 이용해
서 찾지도 않았을 거였다. 어차피 찾아봐야 류카라한과 같은 전처
를밟을 거라고 생각할테니까. 허나, 로이나와베르네는그걸 몰
랐고, 그 때문에 지금도 계속 찾고 있었다.
"로이나님. 그냥좀돌아다니죠. 우리 유희를해본지도오래 됐
잖아요. "
"풋, 오래는 뭐가 오래 췄어? 아직 백 년도 안 지났는데. "
드래곤에게 몇 십 년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최소 백년은 지나야
'좀 뜸했구나' 라고 생각할 존재가 드래곤이었다.
"에이, 굳이 시간으로 따질 필요 있나요? 하고 싶으면 하는 거
fl. "
"그래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후후, 하자. "
"모습은 바꿔야죠. "
"그래야지. "
말을 마친 로이나와 베르네가 주변을 대충 살폈다. 그렇게 자신
을 보는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역시나 한밤중이라서 그런지 인적이 없었다. 특히 이곳이 마을
주변의 야산이라 더 그랬다.
"없군. 폴리모프!"
"폴리모프!"
로이나와 베르네의 모습이 조금씩 변하더니 이내 완벽한 모습을
갖추었다.
로이나의 모습은 푸른머리카락을 가진 건장한 모습으로 변했
다. 근육을 우락부락하게 붙은 강인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베르네 역시 로이나와 비슷했다. 머리카락과 눈빛이 금색이었
고, 성별이 남자라는 게 다를 뿐. 똑같이 근육질 모습이었다.
뭘 할까요?"
"음, 글쎄, "
베르네의 물음에 로이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을 안 해봤는지를 고민하는 모습이 었다.
로이나가 생각에 잠걱 있을 때, 베르네 역시 최근에 어떤 일
그도 최근에 해보지 않은 일을 찾는 듯했다. 같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로이나와 베르네.로 얼굴을 마주
보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용병 !"
"용병 ! "
.우히히히, 역시 로이나님과 전 잘 맞아요. "
건가?"
후후, 그러게. 이번은 그럼 용병으로 정해진
"넵!"
그렇게 로이나와 베르네는 용병이 되었다.
그들은 이번 유희에서 마법을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용병과 마
법이 그리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A 급 정도의 용병으로 알려져서 이름을 떨쳐볼까 생각했다.
그에 걸맞는 검실력은 수많은 유희를 겪으며 익혔으니 문제될 게
없었다. 오히려 과도한 힘을 쓰지 않도록실력을조절하는노력이
필요할 뿐이 었다.
라한은 제란기를 단전 가 쪽에 차근차근 둘렀다. 서두르면 오히
려 화를 부를 수 있기에 시간도 상당히 오래 걸렸다. 하지만 어느
정도 둘러서 띠를 만들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길이 난 곳에 무언가를 담는 건 쉬우니까.
그렇게 동굴에서 보낸 지 삼 일.
라한은 단전에 띠를 두르는 걸 성공했다. 하지만 심장을 두르고
있는 제령기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었다 고리가 단전 안에서 시
작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스프링처럼 완전한 원의 형태가 아닌 안
에서 밖으로 서서히 휘어져가는 그런 원형이었다.
"휴우우우. "
길게 숨을 내쉰 라한이 이마에 땀을 닦았다 몸은 개운했지만 신
경을 많이 써서인지 머리가 터질 듯 아파왔다.
"잠을 자긴 자야겠는데. "
아직은 잘 때가 아니었다. 고리를 만들기는 했지만 아무런 실험
도 못해봤다. 만약, 고리의 제란기가 단전의 제란기와 동조를 못한
다면, 그래서 전혀 따로돌아야한다면, 오히려 이런 고리는 방해
만 될 뿐이었다.
"테세르!"
-어, 주인.
테세르는 라한이 심법 수련을 시작하고 세 시간 후에 나타났다.
소환체인 탓인지 주인인 라한의 위치만큼은 귀신같이 찾아왔다.
"밖은 어때? 몬스터 같은 거 혹시 없어?"
-아니, 깨끗한데. 난 이렇게 몬스터 없는숲은 처음봤어 누가
싹 쓸어서 씨를 말린 것 같다니까.
테세르의 말은 일견 당연했다. 이 숲이 원래 굴레를 벗은 존재들
이 살던 곳이 아닌가. 그런 실력자들이 위험을 옆에 두고볼 리 없
었다. 처리해도 예전에 처리했을 터였다.
"그럼 어쩌지. 테세르! 그냥 내 제란기를마구 사용해 봐. 동굴
을탐험해도좋고, 밖을마구날아다녀도좋아, 어떻게든마구사
용해. "
-우히히. 좋아. 음, 어디서부터 시작할까?밖은 지겨우니까안
으로 가 볼까?
말을 마친 테세르가 몸을 서서히 불렸다. 라한의 제란기를 사용
하기 위해 몸까지 크게 만들었다.
그의 몸이 커질수록 라한의 제란기 소모도 커졌다. 몸을 유지하
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힘을 소모하는 듯했다.
"멋지군, 지금까지는 한 번도 못 봤는데. "
-그럴 필요가 없었잖아. 그럼 안으로 들어가 볼까?
테세르의 몸은 라한과 거의 비슷한크기가 되어 있었다. 라한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그 정도 크기를 유지한 거였다. 하지만, 동굴
이 그렇게 크지 않았기에 더 이상 덩치를 불리는 건 무리가 있었다.
"앞장 서. "
-응.
그렇게 커진 테세르가 동굴 안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갔다. 그 뒤
에는 라한이 뒷짐을 진 채로 따라 들어갔다.
동굴은 생각보다 깊었다. 제령기를 퍼트릴 때 느끼기는 했지만
실제로 겪고 나자 놀람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대단하군. "
분명 인위적인 느낌이 나는 동굴임에도 인간이 만들었다고 믿기
힘들만큼 깊었다. 이 정도파려면 드워프수십 명이 몇 년은고생
해야 할 듯했다.
그렇게 한참 들어갔을 때, 테세르가 라한의 앞을 막았다. 그리고
전방을 주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주인, 앞에 뭐 있다.
"나도 느꼈어. 근데 살아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
그들이 느낀 건 무언가 삐거덕대는 소리였다. 바람이 불지 않는
이곳에서 소리가 난다면 생명체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헌데 라
한의 감각에는 생명체의 반응이 잡히지 않았다. 이런 묘한 상황이
오히려 라한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주인아! 내가 먼저 갈게. 조심해서 따라와.
"어. "
테세르가 손 형태를 조금 바꾸어 창을 만들었다. 그 모습에 라한
이 신기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미있는 능력이네. '
-주인, 여기 봐!
테세르의 목소리가 라한의 상념을 깨웠다. 이에 라한도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그제야 좀 전에 난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
었다.
"뭐야? 뼈잖아. "
라한의 시선에 뼈로 만든 책꽃이가 들어왔다. 대체 누구의 작품
인지는 모르나 독특한 취향인 건 확실했다. 책꽃이를 뼈로 만들다
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인, 텅 비었는데.
"알아. "
책꽃이는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먼지의 자국으로 봐
서는분명히 꽤 많은 책들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자국들
위에도 남아 있는 얕은두께의 먼지들. 책이 사라지고 최소 몇 년
의 시간이 흘렀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주인아! 이 책꽃이 무너지겠는데.
라한의 앞에 있는 책꽃이는 엄청나게 거대했다. 세로 높이만 근
십 미터에 달했고, 넓이도 오 미터는 족히 넘어 보였다.
또 너무 많이 낡았는지 책꽃이가 계속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원
래 영구히 보존토록 된 것이 누군가 책을 가져가면서 랄기 시작한
모양이다.
-나가자. 주인. 저거 무너지면 골치 아파.
"일단 뒤로 나와 봐. "
-응.
테세르가 뒤로 나오자 라한이 책꽃이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
다. 혹, 책꽃이의 재료인 뼈가귀한재료일까염려되었음이다
하지만 평범한 뼈였다. 아니, 이제 쓸모없는 뼈였다. 손만 대면
곧 무너질 것 같은 뼈를 어디 쓰겠는가 싶었다.
"쳇. 아깝군. 매직 애로우!"
쿠루루룽!
퍼석!
라한이 마법을 시전해서 책꽃이를 무너뜨렸다. 미련이 남는 건
눈앞에서 없애 버리는 게 나았다.
-우리 주인 터프하네.
"나가자. "
-응.
아쉬움을 뒤로하고 동굴 입구로 서서히 걸어갔다. 하지만 머릿
속은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분명 어떤 책이 있던 곳이다. 또 저 정도 뼈로 만든책꽃이에 있
던 책이라면 범상한 책은 아닐 것이다. 오두막의 주인을 찾는다면,
아니 이 숲에 살던 존재들이 누군지 알아낸다면, 저 책을누가 가
져갔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동굴 밖으로 나오자 테세르가 마구 뛰어놀기 시작했다. 제란기
를소모시키기 위해 마구움직이라고 라한이 지시한 일이었다. 테
세르는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야이, 빌어먹을자식아! 이제 그만하라고.-
라한은 이미 제란기의 거의 대부분을 소모했다. 충만해 있던 단
전을 거의 비운 것이다. 현재는 단전 안에 있던 제란기를 넘어서
주변에 고기를 두르고 있던 제란기까지 소모하고 있었다.
이제 라한이 생각했던 게 가능하다는 걸 알았으니 그만 움직여
도되었다. 헌데도 멈출생각을하지 않았다. 하복부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통증이 테세르에 대한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야! 이제 그만 좀 움직여!"
-크게 말해줘! 잘 안들려! 근데 주인! 너무좋다. 주인도 날아
봐! 공기가 너무 좋아.
테세르는 라한의 말을 깨끗이 무시한 채 마구 날아다니기만 했
다. 그간 쌓인 게 많았는지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빌어먹을 놈. 후회하게 해주지, "
-뭐라고? 주인! 잘 안 들려
"두고 보자. "
라한이 흘러 나가는 제란기를 한 순간에 끊어 버렸다. 그와 동시
에 테세르에게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주이이이인! 이런 법이 어딨어어어어어어!
퍽-!
엄청 높은 곳까지 올라갔던 테세르가 바닥에 추락했다
본래 테세르는 라한과 비슷한 크기였다. 헌데 떨어지면서 급격
하게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바닥에 떨어졌을 때는 개구리만한크
기가 되어 있었다. 추락해서 납작하게 되어 버린 개구리 말이다.
"어? 테세르 어디 갔지? 소리를 듣긴 들었는데. "
콱- !
라한이 짐짓 모른 척하며 테세르를 밟았다 테세르가 못 들은 척
했던 것에 대한 복수였다.
-주, 주인. 나 잘못
찌익!
"이상하네. 어디서 소리가 들리긴 들렸는데. "
테세르가 입을 열자 라한이 그대로 한 바퀴 돌았다. 한쪽발로 테
세르를 밟은그대로. 이에 납작해져 있던 테세르의 몸에 소용돌이
무의가 생겼다.
-주
"에이, 없네. 그냥 오두막에 돌아가야지. "
라한이 마지막으로 발을 한 번 더 비틀고는 오두막으로 달려갔
다. 테세르가 어찌되든 관심도 없다는 태도였다.
라한은 오두막으로 달려을 때, 기존에 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다. 플라이 마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다리에 광견보를 약간 섞
어 속도를 높이기도 했다 괜한 호기가 치밀어서 마구 달렸다.
"오두막이 한 채가 아니군. 음. "
라한이 발견한 오두막만 해도 열한 채였다. 거기다 지금은 흔적
만 남은 집터를 포함하면 근 오십 채가 넘었다.
"이렇게 넓은 숲에 오두막 한 채만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겠지. 근데 마을을 이루지 않고 이렇게 떨어져서 지내다니. 이해가
안 되는군. "
스팟!
-헉, 헉! 나쁜 주인 같으니.
라한이 한 허름한 오두막에 와 있을 때 테세르가 나타났다 쫓아
오기 위해 쾌 애를썼는지, 숨을 계속헐떡이고 있었다. 숨을 쉬지
않는 존재가 숨을 헐떡이다니. 라한과 다니면서 쓸 데 없는 것만
배운 듯했다.
"저기 봐! "
-어? 집이네. 저쪽에도집 있던데.
테세르가 숲의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라한이 봤던 것보다 더
많은 오두막이 있는 모양이다.
"이상하지?"
-뭐가?
"집은 있고 사람은 없잖아. "
-다른 곳으로 이사갔나보지.
"그래, 이사 간 것 같더군. 근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이사를
가기 전에도 모여 살지는 않았어, 몬스터가 없다고는 하지만, 사람
이 모여 사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거든. "
라한의 말에도 테세르는 의아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인간의 행
동패턴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 표정에 라한이 설명을 덧
붙였다.
"인간이 모여서 사는 건 서로 힘을 합해야 살기 편해서야. 먹고,
자고, 입고. 이 모든걸 한사람이 하기는힘들거든. 또, 몬스터가
없다고 하더라도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건 인간의 당연한 심
리거든. 그러기 위해서라도 모이는 게 정상이고. "
-주인도 오벨리아 팰리스에서 혼자 지냈잖아.
"거긴 위험이 전혀 없었으니까. 최소 그 안에서만큼은 그 누구의
위험도 없었거든. 또 난 내가 필요로 하는 걸 만들 능력이 있었어. "
-여기 사람들도 그럴 능력이 있었나보지.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곰곰이 생각해봤다.
멀정한 집 열한 채. 라한이 발견했던 동굴과 포함하면 열두 채였
다. 이곳의 공통점은최근 몇 년 사이에 인적이 사라졌다는 것. 모
여 있지 않지만오두막사이에는 길이 나 있다는 점. 집 주인은서
로 떨어져 있음에도 종종 만났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그 주인
들은 몇 년 전에 거의 동시에 사라졌다는 결론도 함께 내려졌다.
"여긴 전에 봤던 그놈들이 살던 곳 같아. "
-그놈들?
"응. 그때 널 부르지 못해서 아마 보지는 못했을 거야. "
-아, 굴레를 벗은 어쩌고 하는 그놈들?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라한이 본 여섯 명의 존재. 대화를 통해 그들이 원래 열두 명이었
음을 알 수 있었다. 일단 인원수에서 이곳의 오두막 수와 일치했다.
또 갑자기 나타난 엄청난 강자들. 만약 그들이 계속 대륙에서 활
동했다면 그 정도로 알려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결국 어딘가에 있
다가 동시에 나타났다고 봐야 했다.
갑자기 나타난 열두 명의 존재, 엄청난 실력, 전혀 알려지지 않
은 세력. 아무래도 이곳의 본래 주인들이 그들 같았다.
"가자. "
-어쩔 거야?
"일단 가서 얘기해봐야지 알아서 따라와라 "
말을마친 라한이 원래 있던 오두막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그러
면서 제란기의 통제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힘들면 제란기를 빌려
서 써도 된다는 의미였다.
테세르도 그 뜻을 알아듣고 힘을 조금씩 얻어왔다. 본신의 힘만
으로는 라한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로이나와 베르네가 엄청나게 큰 나무의 꼭대기에 섰다. 숲이 많
은 곳이라서 이렇게 올라오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충분
했다.
주변을 슬쩍 살핀 로이나가 정령을 불러냈다
"실피드. "
-또 불렀군.
실피드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아무리 드래곤이지만 자신
을 너무 자주 부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소환당하고 있지만 정
령계의 왕이 아니던가.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게 기분 좋을 리 없
었다.
"라한 소식 좀 알 수 있나 싶어서. "
-그 꼬마를 아직도 찾고 있군. 찾으면 내가 먼저 알려주겠다고
말했을 텐데.
"아, 그렇지. "
실피드의 말에 로이나가 짐짓 미안한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같
은 속성의 정령이 아니 었기에 거 리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로이나의 저자세에 베르네가 눈을 부릅떴다. 자신은 바람과 친
숙한 골드 드래곤이다 실피드가 자신이 존경하는 로이나를 막 대
하는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정령이 죽고 싶어 환장했어? 로이나님에 무슨 말
버릇이야?"
-후후, 베르네미스로군. 기분상했다면 이해해라. 난바람의 정
령이라 어쩔 수 없다. 레이시아나가 골드 일족이었다면 이런 식으
로 말하진 않았겠지.
"이놈이 그래도. "
"그만해, 베르네. "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아래쪽에서 인기척이 들리기 시
작했다. 미약하지만 거친 숨소리마저 섞여 있는 게 쫓기는 듯했다.
"로이나님. "
"나도 느꼈다. 내려갈까?"
"그럴 필요 있을까요? 귀찮은데 무시하죠. "
-그때 그 인간들이로군.
갑작스러운 실피드의 말에 로이나와 베르네가 의아함을 드러냈
다. 그때 그 인간? 어떤 인간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전에 네가 찾으라고 했던 인간과 일행이었던 인간이다. 근데
두 명이 빠졌군
아래에서 다급하게 쫓기던 인물은 에펠 일행이었다. 원래 일행
중 마법사 란이 죽고 시스마란이 일행에서 빠져나갔기에 이제는 세
명뿐이었다. 카류나, 에펠, 베린. 쫓아오는사람에 비해 월등이 부
족한 수임에도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실피드 돌아가. "
-그럼 다음에 보자고.
"후후, 그럼 참가하죠. "
라한의 일행이었다는 말에 로이나가 서둘러 실피드를 보냈다.
그리고 에펠 일행을 도울 결심을 굳혔다. 만약 그들이 라한을 배신
한 자들임을 알았다면 이런 결정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하압! "
"유후! "
로이나와 베르네가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에펠 일행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두 명 때문에 헛바람을 들이켰
다. 그들은주변에서 아무런 인기척도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쫓기
고 있는 상황이었더라도 주의를 늦추지 않았는데도 느끼지 못하다
니. 그들보다 훨씬 상위의 실력임에 분명했다.
"허 엇! "
"안녕! "
짧게 인사한 베르네가 전방으로 쏘아져 갔다. 언제 꺼내 들었는
지 손에는 이미 검이 쥐어져 있었다.
베르네가 달려가자 로이나는 011 펠 일행의 곁에 머물렀다. 그리
고 그들을 찬찬히 살펴서 특이한 점이 있는지를살폈다. 일단큰
부상은 없어보였다. 하지만싸움이 잦았는지 잔부상과 아물어 버
린 상처의 흔적이 많이 보였다
"하앗! "
채챙!
" -f-! "
로이나가 에펠 일행을 살펴볼 때, 전방에서 금속음과 신음소리
가 들려왔다. 베르네가 작품을 만드는 소리였다.
스핑!
챙-!
"하앗! "
가끔씩 들려오는 파공음에 로이나가 이채를 발했다.
저 정도의 파공음이라면 화살이나 암기가분명했다. 대체 에펠
일행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렇게 체계적으로 공격해 온 걸까. 또
에펠 일행의 실력이 얼마나 되기에 저런 준비를갖췄을까. 의아하
기 그지없었다
로이나가 느긋하게 바라볼 때, 에펠 일행은 무수한 갈등을 겪어
야 했다. 새로이 나타난 두 명이 너무 강하게 보인 탓이다.
만약 그들이 적이라면 어떻게든 기습을 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게 녹록지 않았다. 상대가 단순한 기습에 당하지 않을
정도로강해 보인 것이다. 기습을했다가실패라도한다면, 그래서
오히려 상대의 순수한 호의를 깨는 결과를 낳는다면, 스스로 위험
을 자초하는 길밖에 되지 않았다. 끊임없이 눈으로 대화를 나누면
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압! "
"콕! "
누군가의 비명을 끝으로 정적이 감돌았다. 베르네가 주변 정리
끝낸 듯 보였다.
주변 시체를 쭉 훌던 베르네가 몸을 돌려 걸어왔다. 은빛이던 검
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옷에는 핏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새삼 그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누님! 끝냈습니다. "
"수고했다. "
"근데, 이놈들 암살자들 같은데요. 암살자가 왜 이런데서 칼질
한 거죠?"
베르네의 물음에 로이나가 시선을 돌려 에펠 일행을 바라봤다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이 그들에게 있다는 의미였다.
"안녕하십니까? 전 일행의 리더인 에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친구는 베린, 그리고 여기는 카류나입니다. "
"반갑군요. 헌데 쫓기는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로이나의 물음에 에펠 일행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자신들
을 쫓는 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저희는 보시다시피 용병입니다. "
에펠의 말에 로이나와 베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장에서 그
들이 용병이라는 게 쉽게 짐작되었다
"저희는 비밀리에 누군가를 호위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그를 따
르고 있었습니다. 헌데 목적지에 거의 도달했을 때 공격을 받았습
니다. 이미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도저히 방법이 없더군요. 그래서
제 의뢰인과 제 동료들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희는 운이
좋아서 살아나을 수 있었지만 먼저 간 동료들 생각만 하면
말을 하던 에펠이 눈물을 글썽였다. 그들 옆에 있던 카류나와 베
린도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에펠이 한 말은 모두 지짓말이었다. 의뢰를 맡았다는 것
도 그 의뢰인이 죽었다는 것도 모두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했다. 동
료라면 란이 죽었기에 반쯤은 사실이지만.
로이나도 뭔가 미심쩍은 기운을 느꼈다. 그의 목소리에서 진실
보다 거짓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음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거짓
말하지 말라고 추궁할 수는 없었다
"그렇군요. "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니었으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
"별말씀을요. "
그렇게 얘기를 마친 로이나와 베르네가 상대를 다시 살폈다
그들이 본 에펠 일행은 엄청난 경험을 치른 듯했다. 몸 전신에
나 있는 부상의 흔적과 날카로운 기세, 또 주위를 끊임없이 살피는
조심성까지. 저런 사람이라면 본래 실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 마
련이다
그들의 몸에 난 상흔의 반은 라한이 만든 거였다. 몬스터와의 싸
움에서 그들을 내몰면서 말이다. 나머지 반은 라한과 헤어진 후 새
로 생긴 흔적이지만. 또 날카로운 기세와 조심성은 쫓겨 다니면서
어쩔 수 없이 터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미 오
래전에 죽었을 게 분명했다.
"목적지가 있나요?"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저희를 쫓은 자들의 집요함으로 볼
때, 어딜 가더라도 입을막기 위해 찾아올겁니다. 그래서.
"그래서요?"
"조용한 산을 찾아가서 숨어 지낼까 합니다. "
에펠의 말에 로이나가 웃었다. 이번 말에서는 진실이라는 갑정
이 느껴졌다.
에펠 일행은 진정으로 숨고 싶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제풀에 지
쳐 쓰러질 듯했다. 로이나에게 사실대로 말한 건 일종의 도박이었
다 숨을 수 있을 때까지만 자신들을 지켜주길 바라는 간절한 도
박. 그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떠날 것 같았다.
"숨는다는 건 그리 좋은 판단이 아닙니다. 하지만 뜻이 그렇다
면 저희가 숨을 곳을 찾을 때까지 보호해 드릴게요. "
"감사합니다. 근데 저 어떻게 부르면
"로이나라고 부르세요. "
"난 베르네 "
"네. 감사합니다, 로이나님, 베르네님. "
에펠을 비롯한 베린과 카류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신이 자
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곳에서 응
원군을 만났겠냐 싶었다.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어떤 아이와의 인연 때문에 도운 거니
까요. "
"어떤 아이라면?"
"후후, 아닙니다. 그럼 가시지요. "
"예. "
로이나가 앞장서자 에펠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베르네는 제일
뒤에서 그들을 살펴보며 걸었다.
베르네는 에펠 일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한과의 인연 때문
에 돕기는 하지만 탐욕스럽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저런 녀석들
이 어떻게 라한과 일행이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쯧쯧 라한이놈.똑똑하다고하더니 순허풍이잖아. 아직 사람
볼 줄 모르는군. '
로이나도 베르네와 비슷하게 생각했다. 그 역시 라한을 생각해
서 돕기는 하지만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라한이
라면 저런 인물들과 친분을 나눌 리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실피드가 거짓을 말할 리 없으니 믿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에휴, 라한이가 왜 저런 놈들하고. '
에펠 일행은 예전에 비해 많이 변해 있었다. 일단 눈빛이 달라다
다. 과거에도 순수한 눈빛은 아니지만 지금은 탐욕이라는 빛이 지
워지지 않았다. 또 몸 전체에서 피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단순히
피가묻어서 나는 향기가 아닌, 죽일 때 망설임 없는자만이 풍길
수 있는 그런 향기였다. 환경이 사람을 바꾼다더니 딱 그 꼴이었
다. 계속쫓기며 칼부림 당하다보니 저절로그렇게 변해갔다.
라한이 오두막으로 돌아오자 투바가 가장 크게 기뻐했다. 이제
야 인챈트와 마법진을 비교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투바, 잠시만. "
투바를 제지시킨 라한이 프라하와 테세르, 투바를 차례로 훌었
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이곳은 굴레를 벗은 존재가 살았던 숲 같다. "
"굴레를 벗은 존재?"
"정말이야?"
투바와 프라하가 차례로 물었다. 투바는 굴레를 벗었다는 게 무
슨 의미인지 몰랐기에 이렇게 되물었다. 반면 프라하는 라한이 말
하려는 의미를 알았기에 약간 놀란 모습이었다.
"응. 아마 전에 만났던 그놈들이 살았던 곳 같아. "
"여기가 로테라 숲이었군. "
"여기가 로테라 숲이야?"
라한도 이곳이 로테라 숲이라는 건 몰랐다. 이 숲을 완전히 벗어
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숲의 끝까지 가봤다면 사막을 봤을 테
고, 사막 한 중간에 있는 숲이라는 근거 하나만으로도 이곳이 로테
라 숲임을 알아봤을 것이다.
"그런 것 같아. 나도 전에 판테아에게 얼핏 들었는데 굴레를 벗
은 인간들은 로테라 숲에 모여 산다고 했었어. "
"로테라 숲이라
라한이 지도에서 봤던 로테라 숲을 떠올렸다. 숲을 둘러싼 엄청
난 넓이의 사막, 그리고 그 사막과 대륙을 막고 있는 일리아스 산
맥. 걸어서 이동하기 쉽지 않은 난코스였다.
'골치 아프군. 이곳에서 어떻게 나가지?'
"투바! 너 텔레포트 할 줄 아냐?"
"공간 이동? 아니, 난 그런 거 못하는데. 몇 가지 마계 마법을
알기는하지만, 난그쪽이 전공이 아니라서 알잖아, 내 전공은마
법진이라는 거. "
"그럼. 너 마법진으로 여러 명 이동시킬 수 있어?"
"그거야 대응 마법진에 달렸지. 누가 가서 대응 마법진만 설치
한다면 쉽잖아. "
투바의 말에 라한이 답답한 듯 눈을 찡그렸다. 대응 마법진이라
니. 라한의 능력을 훨씬 상회하는 경지였다.
대응 마법진의 설치 자체가 3 서클 마법사부터 가능했다. 1 서클
마법과 비클래스 상위 마법을 사용하는 라한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었다.
'내가 가는 건 대응 마법진이 안 되고, 다른 놈들은 이동할 수조
차 없고. 미치겠군. '
실제로 라한만 나가는 거라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면 되는 일이다. 헌데 프라하와 투바를 생각하자 앞
이 깜깜했다. 얼핏 마법사로 보이는 투바가 텔레포트도 못하다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젠장. 또 인챈트 해야 하나? 귀찮은데. '
라한이 가진 스크롤은 모두 여섯 개였다. 헌데 그 중에는 텔레포
트가 인챈트된 스크롤이 없었다. 인챈트가가능한나무를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스크롤로 바꾸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일행을
텔레포트 시키기 위해서는 또 다시 나무를 가공해야 했다. 그에게
는 무척 귀찮은 일이었다.
"아, 맞다. 투바!"
"어, "
"만약에 1 서클을 아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와 1 서클
마법이 인챈트 된 스크롤을많이 가지고 있는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갑자기 생각난 듯 라한이 투바에게 의문을 제기했다. 그가 어떤
대답을 할지 뻔했지만, 그냥 한번 물어봤다.
"그거야 물론 스크롤을 가진 사람이 이기지 딜레이 없이 마구
쓸 수 있는데, 당연한 거 아냐?"
"후후, 나도원래 그렇게 생각했어. 오래전에인챈트하나만보
고 달라붙을 땐 말이야. 근데, 이젠 생각이 바꿔었어. "
"설마 마법사가 이길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푸하하하, 바보
아냐 7"
투바의 도발에 라한이 눈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예의 날카로
운 눈빛을 유지한 채로 라한이 대꾸했다.
"그럼 내가 1 서클 스크를 만들어줄 테니까 나하고 싸워볼까? 난
상위 서클 비클래스 마법 전혀 사용 안 하고 1 서클 공격 마법과 방
어 마법만 사용하지. 어때?"
"후회하기 없기다 "
"너나 후회하지 마라. "
라한의 당당한 태도에 투바가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그가 저
정도로 자신만만하게 나오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번 내뱉은 말을 철회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
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크롤을 가진 사람이 유리해 보였다.
라한이 아공간을 열어 나무를 꺼냈다. 오래전에 보관해 둔 통나
무 두 개였다. 그 중 한 개를 반으로 잘라 다시 아공간에 보관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조금 남긴 것이다.
챙-!
"지겹긴 하지만, 한번 만들 때 끝장 봐야지. "
라한이 세라 소드를 이용해서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원래 결
을 따라 한 겹씩 자르면 통나무 하나로 스크를 50 개는 가능했다.
헌데 그렇게 만들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대충 세라 소드로 가늘
게 잘라 버렸다. 이렇게 하면 원래의 반 정도밖에 만들지 못하지만
그만큼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쓱! 탁-!
라한은 먼저 텔레포트 스크롤부터 만들었다. 텔레포트 할 수 없
는 일행이 늘었기에 열 개 정도를 텔레포트에 투자한 것이다. 그
후에는 플라이 마법을 담은 스크롤을 두 개 만들고, 나머지는 1 서
클 공격 마법과 방어 마법에 치중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저거 마법사 맞아?'
-역시 우리 주인은 못하는 게 없다니까. 히히.
라한의 검술 실력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세밀한 검 휘두르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의 섬세하고 세밀한 작업에 투바
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투바는 라한을 보면서 괴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1 서클 마법사가 분명함에도 고위 서클 비클래스 마법
을쓰질 않나, 검사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질 않나. 거기다저런 섬
세한 검 휘두르기까지, 도무지 정상적인 게 없었다
라한의 스크를 작업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끝났다. 그나마
테세르가 잡일을 많이 도와줬기에 이 정도에서 그칠 수 있었다. 테
세르가 없었다면, 혹은작업을좀 더 세밀하게 했다면, 최소 일주
일은 걸릴 일이었다.
-주인 괜찮아?
"안 괜찮아. 잠 와서 미치겠다. "
-좀 자. 대련은 나중에 하면 되잖아.
"괜찮아. 아직은 버틸 수 있으니까. 가서 투바불러와. 제대로
박살내주지. "
라한은 언제고 투바를 한번 눌러줄 생각이었다. 마족이라는 오
만함을 씻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아니라고 하지만, 스스로 오만함이 많은 이가 투바였고,
이 때문에 남의 위에 서려는 경향이 강했다. 잠시면 상관없지만 오
랫 동안 일행이 되려 하는 데에는 큰 장애가 될 요소가 다분했다.
그 생각을 이번 기회에 뜯어 고쳐줘서 서로 거리낌 없이 얘기할 수
있게 만들 생각이었다.
"오호, 다 만든 거야?"
"응. 저쪽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
"한숨 자는 게 어때? 몸이 피곤해서 졌다는 핑계는 듣기 싫은데. "
"그딴 소리 안 할 테니까 따라오기나 해. "
라한이 오두막을 벗어나 공터로 나갔다. 누군가가 수련을 했던
곳인지 쾌나 넓은 곳이었다.
라한이 공터의 한 곳에 서자 투바가 그 반대쪽에서 라한을 바라
봤다. 평소에 멍하던 눈동자에도투지가 넘쳤다. 새삼 '과연 마족
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테세르! 여기 있는스크롤투바한테 넘겨줘. 모두삼십 개니까
충분할거야, "
-알았어.
테세르가 스크롤을 옳기는 동안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상대를
어떻게 상대할지를 고민한 것이다. 그렇게 한참 후 라한의 입에 미
소가 감돌았다. 투바를 상대할 마법 조합을 생각해낸 듯했다
"어이! 라한! 시작할까?"
"먼저 해. "
"너 고위서클 마법 쓰면 반칙인 거 알지?"
"알았으니까. 시작해. "
"그럼 간다. 매직 애로우!"
투둑!
라한이 만든 스크롤을 부러뜨리며 투바가 외쳤다. 이에 마법 화
살 하나가 라한에게 빠르게 날아갔다.
"매직 애로우! "
쾅- !
투바가 날린 매직 애로우는 라한이 날린 매직 애로우와 정확히
부딪혔다. 곧이어 큰 폭음이 터져 나오며 두 마법 모두 상쇄되었다
라한의 실력이면 매직 애로우를 이십여 개 이상 만들 수 있었다.
헌데 1 서클 수준만 사용하기로 했기에 단 하나씩만 만들어서 상대
했다.
"아쿠아 애로우!"
"아쿠아 애로우! "
투바는 라한에게서 받은 인챈트 스크롤을 잡히는 대로 사용했
다. 그리고 라한은 그가 사용한 마법에 대해서 똑같은 마법으로 대
응했다. 상대를 철저히 누르기 위해서였다.
"쇼크 1 "
"쇼크 "
"빌어먹을! 파이어 애로우: "
"파이어 애로우!"
라한은 담담하게 마법에 대응했을 뿐 어떤 공격적인 의도도 보
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태도가 투바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딜레이 없이 계속 사용하는 데도 다 막아내는지. 아니 똑
같은 마법을 사용해서 자신의 마법을 상쇄시킬 수 있는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실제로 마법으로 상대를 맞추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
지만, 날아오는 마법을 같은 마법으로 맞춰 없애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만큼 마법을 포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헌데도 라한은 모든 마법을 같은 마법으로 상대했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춰서 없앴다.
"매직 애로우! "
"매직 애로우! 이제 내가 공격해볼까?"
말을마친 라한이 옆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광견보를 전혀 섞
지 않은 본신의 달리기 속도였다.
"첸, 몸으로 싸워서는 나한테 이기기 힘들지, "
라한의 움직임에 반응하듯 투바도 라한에게 달려 나왔다. 이른
바 육박전을 할 속셈으로 보였다.
'그렇게는 안 될 거다. '
"매직 애로우! "
라한의 매직 애로우가 투바에게 날아갔다. 이에 투바가 한걸음
옅으로 이동해서 매직 애로우를 피해 버렸다. 하지만.
"으헉! 실드! "
쾅- !
라한이 시전한 매직 애로우는 투바를 스쳐 지나가는 듯하더니
이내 방향을 선회해서 다시 날아왔다. 투바가 처음 겪는 유도 마법
인 셈이다.
"이것도 막아봐. 아쿠아 애로우! "
"젠장. 실드! "
투바가 실드를 시전하자 아쿠아 애로우가 실드 바로 앞에서 멈
춰 버렸다. 그리고 그상태 그대로투바주위를맴돌았다. 실드를
없애기만 하면 돌진하겠다는 모습이 었다.
"이, 이게 뭐야?"
"보면 몰라? 아쿠아 애로우잖아. "
실드 마법은 지속시간이 정해져 있다 어떤 마법에 의해 깨지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라한이 시전한 아
쿠아 애로우는 그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실드가 사라지기만 하
면 바로 공격하려고.
"젠장. "
한 소리 내뱉은 투바가 아쿠아 애로우를 향해 쇄도해갔다
쾅- !
실드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기에 둘 모두가 상쇄되어 사라
졌다. 하지만자세히 보면상당히 특이한모습이었다. 방어 마법으
로 공격 마법을 때리다니. 대륙 어디에서도 이런 싸움은볼 수 없
을 터였다.
"또 막아봐! 파이어 애로우!
"빌어먹을. 해봐! 실드!"
실드 인챈트를 찢으며 투바가 라한을 째려봤다. 그의 희한한 공
격이 짜증을 유발시켰다.
"실드! "
라한도 실드를 시전했다. 헌데 몸 주변에만 머무는 투바의 실드
와는 달랐다. 앞으로 쏘아져 가더니 파이어 애로우 앞을 막아 버린
것이다.
"이, 이건 또 뭐야?"
"그럼 안녕! "
라한의 실드가 투바의 실드와 거세게 부딪혔다.
쾅- !
그 폭발의 뒤를 이어 파이어 애로우가 투바의 목에 멈추었다. 재
차 실드를 시전하고 말고 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다.
시간차 공격이라고 할까. 투바는 제대로 대처도 못하고 패하고 말
았다
"이이
"졌지?"
"반칙이다. 이런 게 어딨어? 1 서클 마법사가 어떻게 이따위로
마법을 쓰냐고. 넌 제대로 된 1 서클 마법사가 아니니까 이런 공격
이 가능한 거잖아. 안 그래?"
"후후후, 내가 내 힘을 다 썼으면 이렇게 질질 끌지도 않았을 거
다. 파이어 애로우! 실드! 쇼크!"
라한이 마법 세 개를 연달아 펼쳤다. 처음 이십여 개의 파이어
애로우가 생겼고, 그 주변을 그와 비슷한 수의 실드가 감싸듯 둘러
버렸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쇼크가 자리 잡아 눈을 어지럽혔다
"아까는 좀 뛰어난 1 서클 마법사의 힘이었다. 그리고 이건 1 서
클 대마법사의 힘이다. "
라한의 말이 끝나자 허공에 떠 있던 마법이 구석의 바위로 날아
갔다. 하지만 서로가 약간의 거리 차이를 둔 상태여서 막기가 까다
로운 배치였다. 거기다 바위로 날아가던 마법중 반은 주변을 빙빙
돌며 견제만했고, 나머지 마법들은 바위의 눈을 어지럽히려는듯
전진 후퇴를 반복했다. 투바를 상대할 때의 조합과는 엄청난 차이
를 보였다.
"어, 어떻게 그런
"노력이지. 만족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돼. "
말을 마친 라한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오두막으로 서서히 걸어
갔다.
콰콰콰콰콰쾅!
라한이 어느 정도 거리를 벌였을 때, 엄청난 굉음이 연달아 들려
왔다. 좀 전에 시전했던 마법이 바위를 강타하는 소리였다.
그소리에 투바가괜히 몸을움찔거렸다. 그리고자신이 인챈트
와 마법진을 너무 믿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또 인간이라는 존재를
너무 하찮게 봤다는 사실도.
실제로 라한의 본 실력은 투바의 본 실력에 비해 조금은 떨어쩠
다. 헌데도 이번에 라한이 승리한 건 서로에게 제약이 있었기 때문
이다. 라한이 1 서클 마법사라는 제약이 있었다면, 투바는 1 서클 인
챈트 스크롤이라는 제약이 붙은 것이다. 마법을 주로 사용했던 라
한에게 스크를 사용이 어설픈 투바가 지는 건 당연했다.
라한의 본래 실력은 프라하에 비해서도 한 수 아래였다. 테세르
와 슈라의 힘을 모두 사용한다면 이길 수는 있겠지만, 그 역시 그
렇게 압도적인 승리를 취하기는 힘들었다. 어찌 보면 약한 실력을
인챈트라는 꽁수를 이용해서 숨긴 것과 진배없었다.
오두막에 돌아온 라한이 투바와 프라하를 불러들였다. 한 번 패
해서인지 투바에게서도 반항적인 기미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대 련을 봤던 프라하도 마찬가지 였고.
반면 테세르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히죽거렸다. 주인의 승리가
곧 자신의 지위 상승이라는 망상에 빠저 있는 탓이다.
주위를 훌어본 라한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인챈트 수련을 해볼까 해. 투바! 네가 가진 마법진 지
식이 나한테도 많은 도움이 될 거야. 내가 가진 지식도 너한테 도
움이 될 거고. "
"알았다. "
투바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본신의 실력을쓰지 못했지만,
패한건 패한 것이다. 마계에서 패배는오직 복종뿐. 이 때문에 패
배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프라하! 넌 도끼술 수련을 더 해야 할 거야. 그놈들이 우리를
찾고 있는지 어떤지는모르지만, 또부딪히게 될지도몰라. 그때를
생각해서라도 실력을 쌓아놔야 돼. 그리고 정말 재수 없으면 드래
곤하고 부딪힐 수도 있어. 무슨 뜻인지 알지?"
"응. 노력해봐야지. "
프라하의 얼굴에 의지가 깃들었다. 라한이 마족에게 승리를 거
두는 모습에 고무된 탓이다. 그가 할 수 있다면 자신이라고 못할
게 있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또 힘과 속도만이 아니라 그 힘과 속
도를 부리는 능력의 중요성도 새삼 깨달았다.
"테세르! "
- 응
"넌 나대지마. "
-주, 주인. 그게 무슨 말이야?
테세르가 당황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설치지 말고 조신하게 지내라고. 그리고 전에 보니까 마법을
배우는 모양이던데. 맞나?"
-어떻게 알았어?
"내가 바보냐? 벽보고 명상하는 모습을 봤을 때 눈치 챘지. 열심
히 해."
테세르가 마법을 익히고 있음은 오래전에 깨달았다. 그 때문에
이곳에서 의식을 잃기 직전에 테세르를부른 것이다. 혼자빨빨거
리며 돌아다닐 수 있고,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서였다.
"근데 분위기가 왜 이래?"
-주, 주인. 서열을
테세르의 얼굴이 잔뜩 기대에부풀었다. 라한이 투바를 꺾었으
니 자신이 위에 설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서열은 무슨 서열. 프라하!"
"응. "
"넌 내 친구다. 맞지?"
"어? 어."
"친구끼리는 서열 같은 게 없어. "
라한의 말에 프라하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그도 나름대로 서
열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다. 물론 겉으로는 감히 표하지
못했었다. 투바에 대한 두려움으로
"투바! "
" 으크으 "
"너도 내 친구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
"진짜? 진짜 우리가 친구야? 정말이야?"
"응. 넌 친구다. 아까대련은 잊어. 내가잘은모르지만마계에
는 힘의 율법이라는 게 있다면서? 그건 마계의 일이고 여긴 그딴
거 없으니까 그냥 친구 먹어. "
투바의 얼굴도 눈에 띄게 밝아졌다. 라한에게 패한 이후 계속 앙
금이 남았던 것 같았다.
반면 테세르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라한은주인. 투
바와 프라하는 주인의 친구 결국 자신의 위치가 가장 낮아진다는
결론이 나왔다.
"테세르! "
라한의 부름에 테세르가 침을 꼴깍 삼켰다. 괜히 식은땀이 흐르
고 입이 바싹 말랐다. 긴장이 되긴 하는가 보다
"테세르! "
-어, 주인.
"넌 나한테는 소환물이야, 하지만 이젠 친구 이상이라고 볼 수
있어. "
-그, 그래서?
"너도 친구 먹자. 대신. "
말을 잠시 끊은 라한이 테세르를 매섭게 노려왔다. 상대를 꿰뚫
어버릴 듯한 날카로운 눈매였다.
"나한테 까불면 죽는다. 알았지?"
어? 알았어. 그럼 있잖아. 나하고 프라하하고 저 투바는 서열
이 어떻게 돼?
테세르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저렇게
서열을좋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누군가의 위에 서
고 싶을까. 하지만 일단 물어왔으니 대답은 해야 했다.
"너나 프라하나 투바나 나한테는 소중한 친구들이야. 서열 그런
건 없어. "
-후후, 알았어.프라하!투바!들었지. 넌나하고동격이야.
테세르의 말에 프라하의 표정도 밝아졌다. 라한이 의식을 잃었
을 때 테세르에게 거의 쥐여살지 않았던가. 같은 서열만으로도 충
분히 만족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투바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마왕의 아들인 자신이 정
령 따위와 같은 지위라니. 마계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뭐라고 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자신을 꺾
은 라한이 지정해 준 서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라한과 투바는 인챈트와 마법진 연구에 매진했다. 프라
하는 도끼술 수련을 시작했고 테세르는 마법을 수련했다.
에펠 일행과 합류했던 로이나와 베르네는 엄청난 혈전을 치러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암살자들이 공격해 왔다. 이해할수 없을 정
도의 횟수에 로이나와 베르네는 다시 의구심을 가졌다. 단순히 목
격자를 처단하려는 의도라고 보기에는 너무 저돌적이었다. 숫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으로 보였다. 이런 경우는 단 하
나. 엄청난 의뢰비를 받은 의뢰밖에 없었다.
"베르네. "
"알았어요, 누님. "
주변의 흐름을 느낀 로이나가 베르네를 불렀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나며 에펠 일행과떨어졌다. 이에 베르네도한 걸음물러나며
에펠 일행이 싸울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에펠 일행이 먼저 싸우도록 유도했다. 그 때문에 에펠 일
행은 알게 모르게 실전경험을 쌓고 있었다. 또, 어색했던 검술도 점
점 자연스러워져갔다. 물론 생명에 위협을느낄 상황이 되면 전투
에 참가해서 죽지 않도록 만드는 건 로이나와 베르네의 몫이었다
어찌 보면 라한이 그들에게 했던 일과 비슷한 일을 하는 셈이다.
물론, 그들도 에펠 일행의 실력을높여 주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드래곤으로서, 인간들보다상위 존재라는자존
심 때문에 먼저 싸우지 않았을 뿐이다.
"옵니다. 조심하십시오. "
"고맙습니다. "
챙! 챙! 챙!
로이나의 경고에 에펠이 가장 먼저 검을 뽑았다. 그 뒤를 이어
베린과 카류나도 검을 뽑으며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나와라! 너희들이 있는 거 다 알고 있다. "
에펠의 외침에도 암살자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당황해서 섣
불리 움직이지 못하는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자신들의 정체가
발각됐다는 걸 믿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들켰다니까. 어이!암살자들. 그냥덤벼 봐."
"빌어먹을! 하앗!"
휘이이 익
누군가의 욕설과 함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에펠 일행도
서로 등을 마주 댄 채로 상대를 맞아갔다.
에펠 일행이 처음부터 이렇게 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처음암살
자가나타났다고했을때, 얼마나놀랐던가. 헌데, 막상싸우고보
니 할 만한 싸움이었다. 죽을 위기에 처하면 베르네와 로이나가 구
해준다는 걸 안 것이다.
다치지 않고 마음놓고싸울수 있는 전투. 이런 형태의 수련이
멀마나큰 도움이 되는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요즘
은 암살자들의 등장이 반갑기까지 했다.
에펠 일행과 암살자들이 한참 싸우고 있을 때, 로이나와 베르네
는 근처 바위에 올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손에 단검 하나씩 쥔
채로 말이다. 여차하면 단검을 날려 일행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누님. 저들 좀 이상하죠?"
"응. 단순히 목격자들을 처리하기 위한 거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 "
로이나의 말에 베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했던 의
문과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베르네의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그리고 저들이 목격자라고 하는데, 뭘 알리려는 노력도 안 합
니다. "
"응. 용병 길드조차들르지 않더군. 용병이 맞는지도 의심스러
워. "
둘의 의견이 일치하기 시작하자 의구심이 점점 강해졌다. 이제
는 그들의 신분부터 시작해서 한때 라한과 함께 다닌 게 맞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거짓을말하지 않는 정령이 한말인데도 의심이 좀
처럼 가시지 않았다.
" 에휴. "
"너만 저 녀석들하고 다닐래?"
"예? 왜요?"
"저들하고 다녀서는 라한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아무래도 직
접 돌아다녀 봐야지. "
로이나의 말에 베르네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고개를 몇 번 가
로젓더니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알았어요. 일단 저 녀석들은 제가 지켜줄게요. 나중에 라한이
를 찾으면 그때 저한테 오세요. "
"그래. 그럼 난 가 봐야겠다. 수고해. "
"예, 누님. "
로이나가자리에서 일어나바위 뒤로슬쩍 돌아갔다. 남의 시선
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게 바위 뒤로 간 로이나가 주변을 쭉 훌었다. 자신을 보는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서자 이내 마법을 시전했다.
"텔레포트! "
은은한 푸른빛과 함께 로이나가 사라졌다.
로이나가 다른 곳으로 갔다는 확신이 서자 베르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에펠 일행을 지켜줄 존재가 자신뿐이기에 마냥 마
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 귀찮게 싸워야겠군. 쳇, 고룡만 되어도 이런 일은 없
는데 . "
로이나와 베르네의 가장 큰 차이는 실력이었다. 나이에 따라 실
력이 좌우되는 드래곤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특히 베르네는 검사
로서 지냈던 유희 횟수가 너무 부족했다.
로이나는 혼자서 느긋하게 있더라도 에펠 일행을 구해줄 실력이
되었다. 헌데 베르네는 마냥 넋 놓고 있다가는 희생자가 속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실력이 부족한 탓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베르네와 헤어진 로이나는 엘퐁소 지방으로 텔레포트 했다. 라한
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이라서 여기서부터 찾기로 마음먹었다.
"흠, 어디로 가야 하나? 용병 길드부터 가 볼까?"
대부분 정보라면 정보 길드가 가장 빠르고 정확하다. 하지만 라
한처럼 한때나마 용병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라면, 용병 길드가 더
유리할 수도 있었다. 로이나도 이 점에 착안해서 용병 길드를 먼저
찾기로 마음먹 었다.
"여기던가?"
로이나가 작지만 깔끔하게 단장된 건물에 들어섰다. 꽤 많은 유
동이 있는지, 발자국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
"어서 오십시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카운터에 앉은 사내가 로이나의 아래위를 쭉 훌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로 이채를 발했다. 거침
속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현재 로이나는 탄탄한 근육을 가진 거친 외모였다. 하지만 맑은
눈동자와 뚜렷한 이목구비가 본래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걸 알려
줬다.
카운터에 앉은 사내는 그런 로이나의 숨은 아름다운을 발견한
것이다 물론 탄탄한 근육이 여성스러움을 많이 감소시켰지만 사
람을 상대하는 그였기에 한 눈에 로이나의 아름다움을 간파해냈다.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
"엥? 용병이 아닙니까 7"
"용병은 맞습니다만, 이번은 사람을 찾으러 온 겁니다 "
로이나의 대답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이라고 해서 의뢰를 받기만 하고 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
도 없다. 실제로도 용병이 용병 의뢰를 맡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
다. 물론 의뢰를 맡는 것보다는 맡기는 게 훨씬 적은 횟수이기는
했지만,
"그래,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아, 사람에 따라서 의뢰비가 달라
지는 건 말 안 해도 알겠죠?"
"사람만 찾아주시면 사례는 충분히 해드리죠. "
말을 마친 로이나가 금화 하나를 테이블에 올렸다 이백 년 전에
유행했던 오래된 주화였다. 골동품적인 가치로 보더라도 오십 골
드는 족히 넘을 값비싼 물건이었다.
"헤헤헤. 누굴 찾으십니까? 우리 길드가 작긴 하지만, 뛰어난
용병을 많이 데리고
"라한! "
로이나가 사내의 말을 끊으며 짧게 말했다. 그대로 뒀다가는 길
드 자랑이 길어질 듯해서 끊을 수밖에 없었다.
"라 .한? 저 혹시 외모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지고 있고,
약간 앳된 외모를 가진 남자 맞습니까? 대충 이십 대 초반으로 보
이지만, 실제 나이는 올해 서른이 되는
사내의 말에 로이나가 이채를 발했다. 저 정도로 인상착의를 읖
을 정도라면 자신 외에도 의뢰자가 있다는 의미였다. 자신 외에도
라한을 찾는 사람이 있다? 그건 그 의뢰자가 어떤 식으로든 라한과
관계가 있다는 말도 되었다. 또 악의가 췄든 호의가 췄든 로이나가
반드시 만나야 되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인상착의는 대충 맞는 것 같습니다만, 저 외에도 의뢰를 맡긴
분이 있군요. 만날 수 있을까요?"
"그 전에 저기 혹시 라한이라는 사람을 찾는 이유를 물어도 될
까요?"
사내의 물음이 끝나자 주변에 있던 용병이 검을 잡는 게 보였다.
살기를 흘리지는 않았지만, 언제든지 검을 휘두를 준비를 갖추는
듯했다.
'의뢰자가 이 길드라는 건가? 재미있군. '
"라한은 제 친굽니다. 아주 오래전에 루이나 왕국에서 지낼 때
부터 친구였죠. 이 정도면 대답이 됐나요?"
로이나는 사실대로 말하면서 상대의 의중을 살폈다.
먼저 검을 잡았던 용병들이 조용히 검을 놓는 걸 발견할 수 있었
다. 라한을 찾는 이유가 악의 때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또눈앞에 선 사내 역시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 역
시 라한을 호의로 찾는 것임을 짐작케 했다.
"그러시군요. 일단 만나볼 사람이 있습니다 "
"라한을 찾는 의뢰를 맡긴 장본인이군요. "
"맞습니다. 저희 길드 사람은 아닙니다만, 저희가 워낙 존경하
는 분이라서. 만나보시겠습니까 7"
"그러죠. "
어차피 로이나도 만나보고 싶었다. 그도 상대가 왜 라한을 찾는
지 궁금했다.
로이나는 길드의 손님방에서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다. 라한을
찾는 의뢰를 맡긴 사람이 쾌 멀리 있었던 듯했다. 그렇게 지루함에
졸음이 몰려을 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들어오세요. "
철컥!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관록 있는 용병 제라드와
신출내기 용병 시스마란이었다. 먼저 제라드가 로이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로이나라는 분이십니까?"
"그렇습니 다만
"안녕하십니까. 제라드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 이 친구는 시
스마란이라는 친굽니다. 용병이죠. "
간단히 인사를끝낸 제라드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로이나를 찬찬히 뜯어보며 상대의 실력을 탐색했다.
'놀랍군. A 급 용병이라니. '
제라드가 본 로이나는 A 급 용병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로이
나가 딱 그 정도의 기운만 남기고 모두 숨겼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로이나라고 합니다. "
"대단하군요. A 급 용병이라 헌데, 로이나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A 급용병의 이름은 거의 다 아는데 쟁
소한 이름입니다. "
"실력이 있다하여 꼭 A 등급 용병패를 받으라는 법은 없죠. 용병
일 자체를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받지 않았습니다. "
"그러시군요. "
로이나의 말처럼 제 실력보다 낮은 등급으로 다니는 용병도 있
었다. 하지만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다. 용병이라는 직업 자체가
이름으로 먹고산다고 해도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름이 널
리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비싼 의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위험은 더 커지겠지만.
"이름이 제라드라고 하셨나요?"
"네. "
"라한이를 왜 찾으려는지 물어도 될까요?"
로이나의 말에 제라드와 시스마란이 안심하는 빛을보였다 로
이나의 말투에서 따뜻항을느낀 탓이다. 아니 최소 적대관계는아
니라는 걸 느꼈다.
"라한과 친한 모양이군요. "
"어릴 때, 8 년을 함께 지냈습니다. 열 살 때부터 열여덟 살 때까
지죠. "
"그렇군요. "
"아직 제 물음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만. "
로이나의 재촉에 제라드가 턱을 괴었다. 그리고 시스마란을 슬
쩍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보기에 믿을 만한 사람이라
는 걸 간접적으로 알렸다.
제라드의 긍정적인 반응에 시스마란이 입을 열었다.
"라한 형님과 전 스카라트 산맥에서부터 함께 왔습니다. 다른
용병들의 확인이 필요하다면 확인시컥줄 수 있습니다. 함께 이동
한 인원이 적지 않았으니까요. "
"믿겠습니다. 그런데요?"
"그렇게 이동하다가 쿨샤크라는 놈을 만났습니다. 라한 형님파
오래전에 친구였다고 하더군요. "
"쿨샤크?"
시스마란의 대답에 로이나가생각에 잠겼다. 헌데, 아무리 생각
해봐도 쿨샤크란 이름은 생소하기만 했다
"예. 뮬라 상단의 후계잡니다. "
"들어본 적이 없군요. 그리고 나메라왕국에 라한이 아는사람
이 있다니. 그건 더 이상하군요. "
"아, 맞다. 쿨샤크라는 놈이 예전에는 케른이라는 이름을 쓴 것
같습니다. 처음에 라한 형님이 그렇게 부르는 걸 들은 기억이 나
네요. "
파직!
로이나가 케른이라는 이름에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이에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의 손잡이가 터져 나갔다. 여자로 보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악력이었다.
'오호, A 급 용병이 된 게 힘 때문이었나? 스피드인줄 알았건만.
여자가 대단하군. '
제라드는 로이나가 검사임을 한 눈에 알아봤다. 허리에 차고 있
던 검에서도 느낄 수 있었고, 딱 벌어진 어깨와 우락부락한 근육이
그랬다.
하지만 여자 용병이 대부분 그렇듯 스피드로 승부하는 검사라
생각했다. 헌데 좀 전의 악력을보니 완전히 잘못 짙은듯했다. 저
정도 악력이라면 힘을 위주로 한 용병의 그것과 비등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죠?"
"쿨샤크라는자가저희를초대했습니다. 아니, 그자의 아버지라
사람이 초대했죠. 헌데 ."
시스마란의 얘기를 들으면서 로이나는 두 번 놀랐다 라한의 실
력이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데에서 한 번 놀랐고,
그의 곁에 엑스 마스터가 있다는 것에 또 한번 놀랐다
"한 마디로 뮬라 상단에서 라한을 어떻게 했다는 말이군요. "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쿨샤크라는 작자는 성질 더럽고 음흥
하기로유명하지만그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거든요. 제가 아는 레
드리안은 대의를 위해 힘쓰는 사람입니다 용병들의 편의도 잘 봐
주고, 영주가 아님애도 불구하고 영지민을 위해 많은 금액을 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한 말이니 거짓은 아닐 겁니다. "
제라드의 긴 설명에 로이나가 고민에 빠졌다.
이곳에서 오래 머무른 제라드의 말이라면 믿어도 될 것이다. A
등급 정도의 용병이라면 사람 보는 안목도 늘어나니 그리 틀린 말
은 아닐 터였다. 또, 용병 길드를 뒤흔들 정도의 사람이라면 정보
력도 예사롭지 않을것이다 결국, 그의 판단이라면사실이라고봐
도 무방했다.
"그럼 라한은?"
"그자와 무관하게 다른 곳으로 갔다고 봐야죠. "
"그렇군요. "
"앞으로 어쩔 생각입니까?"
"글쎄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라한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발에 해보지 않아서. "
"그럼 저희와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라한이 왔던 길을 되짚
어가며 용병일을할생각입니다 그리고 이건 제 사견입니다만, 처
음 시스마란 일행과 만났던 스카라트 산맥에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
이 들더군요. "
제라드의 말에 로이나도 어느 정도 긍정하는 빛을 띠웠다.
"그러죠. "
"잘됐습니다. 당장내일 출발할생각입니다. 아, 위험한곳도 몇
군데 지나야 합니다. "
"알겠습니 다. "
로이나의 결정은 텔레포트 마법에 기인했다.
라한에 대해 들어보면 그는 분명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했다. 아
마 실종됐었던 그 기간에 배운 것이리라.
헌데 텔레포트 마법 자체가 대응 마법진이 있어야 가능한 마법이
었다. 또, 대응마법진을설치하려면 직접 가서 설치하는 방법 뿐.
그럼 결국 라한이 이동하면서 설치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로이나는 시스마란과 대화하면서 그가 라한을 극진하게 생각하
고 있음을 느꼈다. 에펠 일행과 대화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따뜻
한 감정이었다.
'이 녀석을 키워봐야겠군. '
로이나는 드래곤이 아닌 검사로서 시스마란을 키워볼 생각이었
다. 후일, 라한과 일행이 된다면 그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 탓이다. 헌데 조금 안타까운 면도 없지 않았다. 시스마란이 검
사보다 마법사에 더 가까운 신체였기 때문이다.
'아깝군. 일찍 마법을 배웠으면 대마법사가 될 수 있는 몸인데. '
본래 마나 친화력은 특별한 마법을 사용해서 확인하는 게 보통
이다. 헌데 시스마란은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마나의 강한 향을 느껴졌다. 그것도 엄청나게 진한 향
기였다. 물론 로이나 정도 되는 고룡이 아니었다면 마나 향기 자체
를 느끼지도 못했겠지만 말이다.
루이나 왕국은 남쪽의 베센 지방을 거의 80 퍼센트 가까이 흡수
하며, 명실 공히 대륙중앙의 괘자가되었다. 그후에는서쪽에 인
접한 피트리네 왕국을공격해서 거의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대
륙에서 손꼽히는 옥토인 밀트와 평원과 호템 호수를 점령한 것이
다. 아직 케라스 왕국보다 병력은 부족하지만, 땅덩어리가 두 배가
넘으니 따라 잡는 건 시간 문제였다.
헌데도 루이나 왕국의 엘베로 국왕은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갑
자기 등장한 엄청난 실력자들 때문이다.
느닷없이 소드마스터 넷과 7 서클 유저 둘, 상급 정령사의 모인
집단이 등장했다 그렇게 등장한 그들이 각 왕국과 긴밀한 회의를
거치며 무언가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7 서클 유저 마법사
라는 잉글리아트라는 남자가 자신에게 오기로 되어 있었다.
잉글리아트는 역사서를 뒤지면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엄청난 강
자였다. 육백 년 전, 드래곤과의 싸움에서 죽었다고 알려졌지만너
무 오래되어서 확인할 수 없는 얘기였다 헌데 그런 강자가 루이나
왕국을 방문하기로 약정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대체 언제 오는 거냐?"
오기로 했던 잉글리아트가 방문하지 않았다. 벌써 이틀이 지났건
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이 때문에 엘베로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갑자기 등장한 것만도 짜증나는데, 그들이 자신의 왕국만 빼고
다른 곳을 방문했다고 생각하자 걱정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혹시
나 그들이 다른 왕국을 등에 업고 루이나 왕국을 공격한다면, 무너
지는 건 한 달이면 충분했다
"고정하십시오. 무언가 일이 있을 겁니다. "
"일이 있을 거라고? 7 서클 유저 마법사가 일이 있어서 못 온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대체 뭐가 있어서 그가 연락도 못
취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냐? 생각을 해봐라. 생각을. "
엘베로 국왕의 말에 대신들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도 작
금의 위기를 충분히 직감했다.
"브루일렌 후작! 행적은 찾았는가?"
"죄송합니다, 국왕 전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
브루일렌 후작은 어제부터 잉글리아트를 찾는 수색대의 수장을
맡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어떤 희생을 치르
더라도 잉글리아트를 찾으라고 명령했었다. 헌데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그건 최소 루이나 왕국 내부에는 없다는 얘기였다.
"케라스 왕국에 통신을 넣어서 도움을 청해라. 그리고 그들이 왕
국 수뇌 회의에 참가해서 어떤 얘기를 주고받았는지도 알아내라. "
"예, 국왕 전하. "
대답은 했지만 그리 자신 있는 일은 아니 었다. 지금까지 수차례
나 이런 노력을 해보지 않았는가.
헌데, 각왕국들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들과관련된 일체의 일
에 대해 함구했다. 심지어 형제국이라 불리는 케라스 왕국까지도
대답을 회피하기만 했다.
"파론 공작만 남고 모두 물러나라. "
"예, 국왕 전하 "
대신들이 모두 물러나자 파론이 엘베로좌 앞으로 다가왔다
시간을 속일 수 없었음인지 파론의 머리카락은 거의 빠져 있었
다 그나마 남은 머리카락도 빛바랜 흰머리라서 그의 나이를 짐작
케 했다.
"파론! "
"예, 국왕 전하. "
"정보단을총동원해서 잉글리아트를 찾아라. 그리고 한 편으로
는 그들의 은거지를 찾아내라. 무려 일곱 명이다. 그들이 머무는
곳이라면 그리 작은 곳은 아닐 터. 대륙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
내라. 알겠느냐?"
"예, 국왕 전하. "
명령을 끝냈는데도 파론은 대전을 벗어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였다. 이에 엘베로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말해라. "
"오래전에 도주했던 레테아를 찾았습니다. 필슨 백작의 장남이
라는 그놈 말입 니 다. "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 눈을 빛냈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좋은
소식이 었다.
"위치는?"
"케밀턴 왕국 동쪽에 있는 레비안 산맥 아래입니다. "
"멀리까지 갔군. "
"예 케밀턴 왕국으로서는 드래곤 로드가 산다는 레비안 산맥에
발을들이기 힘든 입장입니다. 그들이 워낙광포한지라. 아마, 그
런 점을 이용해서 터를 잡은 듯합니다. "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 잠시 머릿속을 더듬었다 그리고 케밀
턴 왕국 동쪽에 범죄자 마을이 있다는 정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왕국 측에서는 군대를 파견하기 힘든 곳, 몬스터들도 왕국이 가
까워서 쉽게 접근 못하는곳. 아마 이런 점을 이용해서 그곳에 자
리를 잡은 것이리라.
"데려와라. 상하게 하지 말고 정중하게 데려와라. 만약 거부하
면 납치해도 좋다. "
"알겠습니 다. "
"최정예 비밀 기사단 하나와 이번에 새로 창설한 신예 병단 둘을
보내라. 그자는 예사로운 자가 아니다. "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
파론이 뒷걸음질로 대전을 벗어났다. 그가 완전히 벗어나자 엘
베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요즘 엘베로는 자신의 최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이가 나이인
지라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탓이다.
죽을 때가 되자 자신이 했던 잘못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
다. 모두 야망을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그 배경에는 루이나 왕국을
위해서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또 왕국을 누구보다 잘 다스릴 자
신도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희생양이 된 존재들에 대해 미안한 마
음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필슨 백작과 그의 가족에게만큼은 달랐다. 실종된 라한
과 도주한 레테아가 괜히 불쌍하게 느껴진 것이다. 차라리 그때 깨
끗하게 정리했다면 이런 마음도 품지 않았으련만. 살아남았다는
게 엘베로의 마음을 계속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번 기회에 용서를 빌어야지. 그래도 안 된다면 죽여서 화근
없애야겠다. "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용서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
었다. 부모를 죽인 원수는 한 하늘아래 살 수 없다지 않은가. 심지
굳은 레테아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게 분명했다.
잉글리아트는 루이나 왕국으로 가서 드래곤의 발호를 알릴 임무
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국왕과의 밀담을 통해 비밀 엄수를 철저히
해야 했다.
헌데 그는수아나왕국을 지나면서 이동을 멈추었다. 너무많은
곳을 돌아다녀서 지친 것이다. 아니, 귀찮아졌다고 해야 옳을 것
이다
그래서 그는 한 여관에 머물며 책을 읽고 있었다. 로테라 숲에서
발견했지만 아직 해석 못한 책이었다.
"요즘 바빠서 책 볼 시간도 없었군. "
잉글리아트가 가지고 있는 책은 모두 열한 권이다. 그리고 그 책
의 표지에는 9 로 시작하는 이상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술,글리아트
는 이 책을 9 서클 마법 주문이 적힌 책이라고 확신했다.
"젠장. 이게 도대체 언제 사용됐던 언어야? 알아볼 수가 있어
야지. "
잉글리아트가 이 책을 얻은 건 판테아에 의해 굴레를 벗은 직후
였다. 즉 천 년도 훨씬 지난 옛날이었다.
그때부터 시간 날 때마다 이 책을 살피며 해석하려고 애썼다. 헌
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도대체 언제 사용된 언어인지도 알 방법
이 없었다.
"주인장! 여기 술! "
"예, 나으리. "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 주인장도 잽싸게 술을 가져왔다. 가
져온 술도 잉글리아트의 앞에 놓여 있던 그 술이었다.
하긴, 벌써 보름 전부터 여기 죽치고 있으니, 아무리 머리 나쁜
놈이라도 좋아하는 술 정도는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탁- !
술을 한 잔 쭉 들이켠 잉글리아트가 술잔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돌려 책을 살폈다.
책을 보지 않았을 때는 보기만 하면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헌데 막상 보고 있자니 암담한 마음에 덮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
뚝같았다. 지금 잉글리아트에게는 마약과 같은 그런 책인 셈이다
'9 로 시작하는 걸보면 분명 9 서클이 분명한데, 도무지 해석이
안 되는군. '
처음 대륙에 나왔을 때, 그가 한 일은 며러 현자들을 만나는 일
이었다. 판 왕국마다 한 명씩 존재하는 게 현자였기에 찾는 것도
쉬웠다. 헌데 그들중 누구도이 책을해석하지 돗했다. 겨우알아
낸 거라고 해봐야 앞에 쓰인 9 라는 숫자와 끝에 쓰인 마법서라는
글 딸랑 네자 에 불과했다
젠장 8 서클 마법주문도 없는 마당에 9 서클이 오ㅔㄴ 말이냐
책을 덮어 버린 잉글리아트가 숙소로 올라갔다
잉글리아트가 루이나 왕국을 방문하지않은 가장 큰이유가 현
자의 부재였다 현자라 불리던 엘베로가 국왕이 되어 버렸으니 현
자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엘베로는 현자라는 이름 자체가 가지
는 힘을 알기에 의도적으로 현자를 두지 않았다
시스마란의 성장
다음날 로이나와 제라드 시스마란을 비롯한 용병 열두병이 엘
퐁소 지방을 출발했다 라한이 깨달음을 얻었던 에사르나 강을 거
처 트루미 숲을 지나 베루니아 왕국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다 그때
까지도 찾지 못한다면 스카라트 산맥까지도 들어갈 생각이었다
로이나 일행이 엘퐁소 지방을 출발했을 때 라한과 투바는 열띤
논쟁을 하고 있었다
상위 서클을 하위 서클 마법으로 바꾸는 게 가능하다니까
이봐 라한 그게 가능하다면 누가 상위 마법사가 되려고 하겠
어 불가능하니까 모두 서클 올리려고 열을 올리는 거잖아
라한과 투바의 논쟁은 서클 때문에 벌어졌다 라한은 이미 클래
스 마법과 비클래스 마법을 겼어봤기에 자신 있게 말할수있었다
또 대륙에서 7 서클 마법으로 알려진 텔레포트를 그는 6 서클의 힘
만 가지고 행하지 않았던가 그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건 경험에
근거한 당연한 행동이 었다.
반면 투바는 자신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주장이라서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연구하는 마법진, 그 마법진의 도형이 서클에 따
라 정해지기 때문이다. 즉 마법진 안에 그려야 할 동심원의 수가
고위서클일 수록 많아지는 것이다 만약 라한의 주장을 수긍할 경
우, 자신의 마법진에 대한 지식 자체를 완전히 무너뜨려야 했다
"내가 경험했다니까 그러네. 내가 텔레포트 쓰는 거 아까 봤지?
근데 내가 몇 서클 마법사 같아? 난 1 서클 마법사야. 남들보다 많
은 기운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띠는 분명 한 개라고. "
"인정할수 없어. 넌 분명히 서클수가많을거야. 근데 내가볼
수 없게 어떤 조치를 취한 거겠지.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돼. "
투바의 대답에 라한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실력 자체
를 의심하고 있으니 대화 자체가 무의미했다.
"그럼 넌 내가 몇 서클까지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7 서클이겠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서클이 7 서클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뭐 아주 아주 오래전에는 9 서클 대마법사가 있었다
고는하지만, 그건 벌써 십만 년도 더 오래 된 얘기고. 지금은 7 서
클이 한계 아냐?"
투바가 7 서클이라고 하자 라한은 또 말문이 막혔다. 6 서클 정도
라고 했으면 7 서클 마법을 보여주면서 확인시켜줄 수 있었다. 헌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 실력을 말해 버렸으니 도무지 어떻게 할 방
법이 없었다
"빌어먹을. 8 서클 주문만 있으면 사용할 수 있는 건데."
"정말?"
"야이, 미친 마족아! 넌 속고만살았냐? 내가그렇다면 그런 거
야. 알아들었어?"
"8 서클 주문만 있다면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지?"
투바의 말에 라한이 걱정스러운 빛을 띠웠다. 스스로도 8 서클이
가능한지 어떤지 모르기 때문이다. 8 서클주문을알아야확인해보
지 않겠는가. 본적이 없으니 자신이 가진 제령기로 가능한지 어떤
지도 알 틱이 없었다.
"그게, 음 아직 8 서클 마법이 어떤지도 모르고
"넌 분명히 쓸 수 있다고 했다. 인정하지. "
"인정은 하는데. "
"그럼 됐어. 내가 불러주는 주문을 인챈트 해봐. "
투바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느닷없이 인챈트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아?"
"8 서클 마법을 아는 존재를 소환하면 되잖아. 우리 삼촌이 인간
마법에 조예가 깊어서 8 서클마법까지 알고 있을 거야. 거의 이만
년 가까이 사셨던 분이라서 지금 마법 체계와는 좀 다르지만. 뭐,
어떻게든 8 서클 마법만 배우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그건 그런데. "
라한은 9 서클 마법 자체보다 마족이라는 존재가 더 꺼림칙했다.
모두 투바처럼 말잘들으란 법이 없다. 자칫 대륙을 피로 물들이
려는 성격을 가진 놈이라면 정말 골치 아파졌다.
"왜? 자신 없어? 없으면 지금 말해. 아까 네가 주장했던 것도 철
회하고. 그럼 없었던 일로 해줄게. "
"자신이 없는 게 아니라마족이라서 그래. 난 인간이라고. 마족
을 반길 리가 없잖아. 그리고 나타나는 마족이 너처럼 좋은 놈이라
는 보장도 없고. "
라한이 의도적으로 투바를 띄워줬다. 혹시나 불상사가 생기더라
도 자신을 해코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투바도 라한이 좋은 놈이라고 하자 기분이 좋았다. 마족이라고
나쁜 놈이라는 소리를 좋아하지는 않는 것이다. 거기다 자신은 라
한을 친구로 인정한상태였다. 친구에게 인정받았다는 그 자체가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난또, 뭘 걱정하나했자. 마족은그렇게 나쁜존재가아니야.
인간들이 소환하면서 괴상한 걸 시키니까문제지. "
"괴상한 걸 시키다니?"
"부를 때 대부분 복수를 꿈꾸고 부르더라. 자신을 괴롭힌 존재
를모조리 죽여 버려라. 뭐 그런 식으로. 그딴마음을먹고소환하
니까 소환체인 우리는 거기에 응해서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
투바의 말에 라한도 반쯤은 수긍했다. 대부분의 흑마법사 자체
가 악이라는 존재와 가까웠으니 복수의 마음으로 소환하는 것도 충
분히 가능한 얘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한은 오벨리아 팰리스에 쓰여 있던 글귀를 기억하고
있었다. 대륙 전부를 피로 물들였던 그 사건 말이다.
"용마전쟁은 어떻게 설명할 거야? 그때는 피의 축제를 벌였다고
하던데. "
"마족이 피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그게 꼭 살생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야. 오래전에 용마전쟁 당시에도 마족은 인간을 죽이려고 물
질계에 온 게 아니라는 거야. 그냥단순히 놀러 온 거거든. 드래곤
이 이곳에서 유희를즐기는 것과 비슷하지. 헌데 인간들이 마족이
나타났다면서 공격을 하기 시작했어. 우리 마족들은 일단 공격받
으면 난폭해지는 존재라서 뭐, 뒤는 얘기 안 해도 되겠지?"
먼저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공격 받기 시작하자쓸어버렸다 라
한은 이런 식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타당한 얘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도 힘을 갖게 되자 그런 마음을 먹지 않았는
가.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을 자신에게 피해가 오면 뭉개고 싶은 그
런 욕망 말이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거지?"
"이 인간이 속고만 살았나?"
결국 투바의 입에서도 라한이 했던 말이 나왔다. 이에 라한은 할
말이 궁해져서 괜히 하늘만 바라봤다. 자신이 했던 말 그대로 공격
받는 게 이런 기분이라 것도 처음 알았다.
"좋아. 까짓것 인챈트 해보지, 근데 누구야?"
"나한테는 먼 친척뻘 되는데, 그냥 삼촌이라고 부른다.
"대체 누군데?"
"뱀파이어 로드 이그니스. 우리 삼촌 이름이야. "
이그니스라는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어디서 들
어본 이름이었다. 아니, 어떤 책에서 봤던 이름이었다. 헌데 막상
생각하려고 하자 잘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서 들어 봤는데. "
"우리 삼촌은 물질계에 자주 왔어. 요즘은 뜸했지만 한 사오백
년 전만 해도 물질계에 출근하다시피 했는걸. "
"사오백 년 전이라 아, 이그니스 왕국의 초대 국왕. "
이그니스는 인간 세상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그의 소환주문이
대륙에 엄청 널리 퍼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헌데 그는 최상급
마족인 뱀파이어를다스리는로드. 그를소환하는 게 쉬울 리 없었
다. 이 때문에 소환을 하려던 사람들은 대부분 기력이 다해 죽어 버
렸다. 결국 소환 당사자가 없는 소환물인 이그니스만 남은 것이다.
이에 이그니스는 물질계를 마구 활보하며 유희를 즐겼다. 그 산
물 중 하나가 이그니스 왕국이었다 아직도 대륙 동부의 최강대국
으로 불리는 이그니스 왕국. 초대 국왕이 뱀파이어 로드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라한은 괜히 쓸 데 없는 궁금증이
생겼다.
부를 테니까 적어. "
"완전 주문이야?"
"당연하지. 불완전 주문으로 부르려면 제물도 많이 필요하고 들
어가는 마나도 엄청나. 아무리 너라도 그 마나를 감당할수 있을
것 같아?"
"그렇군, "
소환주문에는 크게 완전 주문과 불완전 주문으로 나된다. 물질
계에 퍼진 소환주문은 백이면 백 모두 불완전 주문이다. 완전 주문
과 불완전 주문의 가장 큰 차이는 소환에 필요한 힘에 있다. 완전
주문은작은마나로부를수 있다. 반면, 그주문이 엄청나게 길고
난해해서 머리로 외우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또 인챈트에
버금가는 복잡한 도형과 공식이 사용되는 마법진도 필요했다. 인
챈트가 서서히 잊혔듯, 완전 주문도 잊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불완전 주문은 엄청나게 많은 마나가 소모된다 혹 마나가
부족할 때는 제물로 대신하기도 한다. 아기의 피나 처녀의 생명 같
은 제물 말이다. 하지만 짧고 간단한 주문과 단순한 마법진으로 인
해서 기억되기는 쉽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 이어지는주문은 거의
불완전 주문이 었다.
"부를 테니 일단 적어. 아무리 너라도 다 외우기는 힘들 거야. "
"불러봐. "
투바가 부르는 주문은 엄청나게 길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메모
지에 적는 것에도 근 오십여 장이 소모될 정도였다. 이 정도의 긴
주문이라면 물질계에서 사라지는 것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다 인챈트는 주문에 비해 그 난해함이 수십 배에 달한다. 헌
데 주문마저 이렇게 복잡하고 난해하다니. 아무리 라한이라도 몇
날 며칠을 고생해야 인챈트가 가능할 듯싶었다.
"후, 엄청나군, 이거 주문맞아?"
"응. 어떻게 할래? 인챈트 할 거야? 아니면, 소환주문을 외울
거야"
결론은이미 나와있었다. 인챈트. 소환주문자체가상위 마법의
클래스 계열이어서 라한에게 불가능한 까닭이다.
"인챈트밖에 못 해. "
"알았다. 한 달 정도면 인챈트 할 수 있겠지?"
"오 일 후에 보자고. "
말을 마친 라한이 오두막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 남은 건 주문
을보고 인챈트공식을만들어내고, 새기는 일 뿐이다. 투바가 필
요 없었기에 조용한 오두막으로 들어간 것이다.
투바는 마계 마법에 능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검술에
능한 존재도 아니었다. 물에 대한 권능을 가진 일종의 술사에 가까
웠다. 정령과 또 다른 방법으로 물을 다루는 것이다.
정령사는 물이 없는 곳에서도 물의 정령을 불러서 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투바는 그런 일이 불가능했다. 물이 없는 곳에
서는물에 관한술법 자체를부릴 수 없었다. 대신 물이 있는곳에
서 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물이 많은 바다 같
은 곳에서는 거의 전지전능한 힘을 내는 게 가능했다. 마계 종족으
로는 레브리안. 즉, 레브리안 족의 수장이 투바였다.
"하압! "
프라하의 기합소리가 공터를 울렸다.
그는 요즘 오두막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서 도끼술을 수련하고
있었다. 하지만좀처럼 진보가 없었다. 지난수백 년간수련을 했
는데도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았는가. 며칠 수련해서 진일보하기를
기대하는 건 명백히 욕심이었다.
"하앗! "
부우웅! 쩌저적!
도끼가 공기를 가르며 거대한 나무에 박혔다. 이에 나무가 세로
로 쩍 갈라지며 양쪽으로 크게 벌어졌다. 보통 사람이 본다면 그
엄청남에 기가 질릴 모습이었다.
헌데도 프라하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오래전에 가능했던
경지였지, 새로이 성장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
"이봐, 프라하. 무기를 마구 휘두른다고 최고는 아니잖아. "
프라하가 욕설을 내뱉자 투바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는 라한이 인챈트를 하러 가자 혼자 남겨졌다 지난 며칠 동안
계속 대화하던 상대가 없어지자 할 일이 없었다. 이에 괜히 오두막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만난 게 프라하였다. 자기 딴에는 열심히 휘두르는 것 같
은데 투바가 보기에는 영 시원찮았다. 바하라 성을 지키던 다크 나
이트들의 검술을봐서 더 심한듯했다. 다크 나이트, 그중에서도
바하라 성을 지키는 다크 나이트는 모두 일당백의 최고 검사들이었
다. 거기가그들은수명도거의 만년이다. 검을한번 휘두르면만
년 가까이 휘두르는 것이다. 고작 천 년 정도를 배운프라하와 비
교 자체가 안 되었다.
"뭐야?"
"힘으로 휘두르는 건 자제하라는 말이지. "
요즘은 프라하도 투바를 편하게 대했다. 처음 하루 이틀 어색했
을뿐이지, 막대하기 시작하자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그의 거
친 성격이 마구 표출된 것이다.
그런데도 투바는 아무 소리 못했다. 자신에게 이긴 라한이 서열
을 정했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오만상욕을 하고 있었지만,
"네가 도끼술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잘난 척이야? 도끼를 휘둘
러보기는 했어?"
"그건 아니지만, 보기는많이 봤지 내가이래 뵈도마왕의 아들
이다. 우리 마왕성 바하라에는 너보다 몇 십 배는 뛰어난 기사들이
수만 명도 더 된다고. "
투바의 말에 오히려 프라하가 말이 궁해졌다. 자신이 마계를 가
보지 못했으니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보는 거와
휘두르는 게 다르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자신도 누군가 도끼를 휘
두르는 걸 보고 배우지 않았던가. 자신의 입장이 그러니 대꾸할 말
이 궁해질 수밖에 없었다.
"쳇. 거기 애들이 그렇게 강해?"
"당연하지. 뭐, 일단 수명부터 다르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
고. 다시 휘둘러봐. 네가 아는 도끼술 전부 다. "
투바의 말에 프라하가 몸을 움찔거렸다. 시키는 대로 하자니 자
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결론은 오래지 않아 내려졌다. 현재 도끼술의 답보 상태
가 프라하를 너무 답답하게 했음이다. 지나가는 똥개한테라도 배
워야 할 판에 뭘 가리겠는가. 오히려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상대가
최상급 마족 투바라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잘 봐라, 하압!"
부우웅!
"차앗! "
휘이이잉! 쾅!
프라하가자신이 아는 도끼술을 차례로 펼치기 시작했다 아주
어릴 때 배웠던 것부터 엑스 마스터가 될 때 배웠던 도끼슬까지.
알고 있는 모든 걸 차례로 펼쳤다.
투바가 보기에 프라하의 도끼술은 체계가 부족했다. 한 눈에 마
구잡이로 보고 배운 걸 한대 묶어놓았음을 알아본 것이다
도무지 도끼의 흐름이 연결되지가 않았다. 두세 동작을한후에
는 다시 새로운 동작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지금 펼치는 모든 걸
한 가지 흐름으로 연결시키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
지 않았다.
부우우웅! 쾅-!
"후우우, 후우우우. "
마지막 도끼질을 마친 프라하가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마에는
땀이 마구흘러내리고, 입고 있던 얇은옷은물에 빤듯 젖어 있었
다 또, 힘을많이사용해서인지 얼굴도붉게달아오른상태였다.
"엉망이군. "
"뭐?"
투바의 짧은 감상평에 프라하가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그간 해
온 노력을 한 마디로 짓밟는 말이었다. 또 자신의 노력을 헛짓으로
만드는 말이기도 했다.
"엉망이라고. "
이 이
"눈 풀어 자식아! 네가 노려보면 어쩔 건데. "
투바의 말에 프라하가 서서히 기운을 풀었다. 친해졌다고는 하
나 그에게 이길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는 기색은 여전했다.
"내 도끼술이 뭐가 문제지?"
"세상 어디를 가봐라. 너처럼 도끼술 한번 펼치고 진을 다 빼는
놈이 있는가. "
"그건 내가 최선을 다해서 휘둘렀기 때문에
"헛소리. 넌 힘을 뺄 때와줄 때를구분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빠르게 휘두르는 게 힘을 주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내가 잘은 모르
지만 최소 그 정도는 안다. 넌 종족은 개자식이면서 머리는 닭대가
리냐?"
투바의 마지막 욕은 프라하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오직 힘을 줄
때와뺄 때를구분하지 않았다는말. 그 말만이 머릿속을 계속 맴
돌며 프라하를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알아들은 건가? 영 닭대가리는 아니네. 근데 내가 뭐 가르친 거
지? 내가 뭘 알아야 가르치지. '
프라하가 고민하는 듯 보이자, 투바가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제라드 일행과 길을 떠난 로이나는 난데없는 몬스터의 습격으로
곤경에 처했다. 무려 오십 마리에 육박하는 베어울프의 습격이었
다. 몬스터가 많은 곳이 아님에도 이런 엄청난 공격이라니. 지금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푸욱!
"크윽! "
일행 중 한 명인 한슨이 베어울프에 의해 사지가 찢걱 나갔자.
이에 놀란 제라드가 검을 휘둘러 베어울프를 베어 버렸다. 하지만,
사지가 찢긴 한슨은 엄청난 출혈에 눈을 뒤집으며 목숨을 잃었다.
"빌어먹을. "
벌써 열 명이나 죽었다. 로이나를 포함해서 열세 명밖에 없던 인
원 중에 거의 대부분이 죽은 셈이다. 이제 남은 인원이라고 해봐야
로이나와제라드, 시스마란뿐. 갑자기 닥친 엄청난 피해에 몸에서
힘이 풀려 나갔다.
"왜 이런 곳에서 저런 놈들이 공격하는 거야?"
"제라드님, 뒤! "
시스마란의 말에 제라드가 급히 상체를 숙여 베어울프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검을 뒤로 한 바퀴 휘저어 베어울프의 허리를 베어
넘겼다. 이런 엄청난 베어울프의 공격은 모두 로이나의 작품이었
다. 떨거지들을 떼어내기 위해서, 또 라한과관계있는자들하고만
다니기 위해 방법을 강구한 것이다 또 시스마란을 수련시키고 싶
은 마음도 이런 계획에 한몫했다.
"로이나님, 어쩌죠?"
"싸워야죠. 죽더라도 버티는 수밖에 없죠. "
"하지만, 아직 저놈들은 반 이상 남아 있습니다. "
열 명의 희생자를 내는 동안 처리한 베어울프는 걱우 이십여 마
리에 불과했다. 아직 삼십 마리 가까이 남아 있었기에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고 도망칠 건가요? 베어울프의 습성을 몰라서 그러십니
까? 저들은 적을 놓치고 포기할 자들이 아닙니다. "
"맞다. 시스마란. 저들을모조리 죽이기 전엔살아남기 힘들어."
로이나의 말을 제라드가 거들었다.
그는 용병 생활을 오래하면서 베어울프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
다. 단 한 명이라도 남는다면 마을까지도 따라가는 존재가 베어울
프였다. 전멸시키지 못하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헛!"
챙-!
"정신 차리세요. 한눈팔았다가는 모두 죽습니다. "
로이나가 일행을 다그치며 대형을 유지했다. 대형이라고 해봐야
서로 등을 맞댄 자세에 불과했지만, 이 정도라도 지켜야 상대하기
수월했다. 최소 뒤에서 공격받는 건 막을수 있지 않겠는가. 좀 전
에 제라드가 한 젓처럼 베어울프 무리에 뛰어들어서는 가능성이 없
었다.
채챙! 퍽- !
"허업!"
로이나는 베어울프를 상대하면서도 시스마란에게서 시선을 거
두지 않았다. 눈은베어울프를향해 있었지만, 감각만큼은그에게
집중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모든 일을 꾸민 이유가 시스마란의 수련이었으니 당연했다
또, 로이나와 상대하는 베어울프 역시 건성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힘이 엄청 들어간 듯 보이지만, 실상 살상력은 거의 없는
공격에 불과했다.
'저놈만 없으면 더 좋겠는데.
로이나는 제라드도 떼어내고 싶었다. 그가 라한과 관계가 있다
고는 하지만, 그리 깊은 관계는 아니라 생각한 탓이다.
헌데, 그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다. 그마저 죽고 시스마란만 남는
다면, 바로 의심받을 공산이 컸다. 자신과 제라드는 같은 A 등급 용
병. 다 죽고 시스마란과 로이나만 살아남는다면, 상황이 묘하게 변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압! "
푸욱!
베어울프의 목을 찌른 로이나가 검을 툭 털었다. 이에 피가 옆으
로 번지며 옆에 있던 베어울프의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뻗어 나가
는 로이나의 검, 시야가 가려진 베어울프의 목이 잘려 떨어졌다.
제라드는 로이나의 검술을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검사로 보였다. 저 정도면 혈전사의 칭호를 받아도 이상
하지 않을 실력이었다. 물론, 용병 의뢰를 수행한 횟수가 부족해서
칭호를 받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실력만큼은 혈전사와 비교해
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다.
"하앗! "
크게 소리 지르며 제라드가 의욕을 북돋았다. 그리고 로이나에
게 지지 않겠다는 듯 더 강하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자존심상했다. 지기 싫었다. 다른사람이라면몰라도생전처음
들어본로이나에게만큼은무슨 일이 있어도이기고싶었다. 또, 제
라드라는 이름이 여자보다 약한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오기로, 의지로 혹은 재미 삼아싸우는 세 명의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결론은 로이나의 의도 대로 이들의 승리로 끝
날 것이다. 시스마란을죽일 생각이 없으니 베어울프가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푸욱!
"쿠오오_f_!"
오십여 마리의 베어울프를 처리한 로이나 일행이 바닥에 주저앉
았다. 주변에 베어울프의 시체가 수북하게 쌓였다
피냄새가 진동하고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
았다. 아무 생각 없이 이 자리에 누워서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헉, 헉!"
"마란! 일어나. 여기 이대로 있다가는또다시 공격당한다. "
제라드의 말에 시스마란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피냄새가 몬스터를 부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힘들
어도 당장 쓰러져서 자고 싶어도 이 자리는 아니었다.
"가죠. "
로이나는 이미 일어나서 검을닦고 있었다. 얼마나좋은 검인지
베어울프의 펏방울하나묻어 있지 않았다. 헌데도로이나는 계속
해서 검을 닦았다. 자신이 아끼는 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라한은 소환주문을 인챈트 공식화시키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노력의 결과로 그 과정도 이미 막바지였다. 물론 직접 새겨
넣는 작업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한고비 넘겼다는 생각만으로도
피로가 몰려왔다.
"으아! 잠 온다. "
길게 기지개를 켠 라한이 수첩을 내려놓았다. 그 상태로 목도 꺾
어보고 허리도 좌우로 움직이면서 몸을 풀었다. 특히 손가락을 풀
때는 더 심혈을 기울였다. 앞으로 해야 할조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손가락이 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 주인!
"왜?"
-2 서클 마법 가르쳐 줘.
"전에 가르쳐줬잖아. "
테세르는 요즘 마법을 배우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었다. 이 때문
인지 밤낮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마법 수련만 해댔다. 아직 고리를
많이 만들 수 없어서 고위 서클은 무리였다. 하지만 2 서클 마법은
가능한 경지에 올랐다.
-그건 주인이 사용하는 비클래스 마법이고. 난 클래스 마법이
필요하다고.
테세르와 라한의 가장 큰 차이가 고리였다. 라한은 엄청난 힘을
다룰 수 있지만 고리가 하나뿐이다. 반면 테세르는 현재 고리가 두
개였다. 즉 2 서클 마법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경지인 셈이다.
라한이 고리의 제한이 없는 마법만 사용할 수 있는 것과는 확실히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테세르가 라한보다 뛰어난 건 아니었다. 가진 바 힘도 미
약했지만 무엇보다 의지력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라한이 시동어
만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도 긴 주문을 모두 외워야 걱우 사용할
수 있었다. 몇몇 마법은 시동어만으로 가능하긴 하지만 걱우 서너
개에 불과했다. 거기다 머리가 너무 나쁘다는 것도문제였다. 2 서
클 주문조차 외우지 못하고 메모지를 보고 읖을 정도였다. 나쁜 머
리와 떨어지는 의지력이 테세르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난 클래스 마법 모르는데. "
-어? 왜?
"난사용못하잖아. 필요 없는 건 안 외웠지. 내 머리가드래곤
머리통도 아니고. 필요도 없는 걸 뭣 하러 외우냐. "
그렇구나.
대답을 하던 테세르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처음으로 마법 수련
에 제약을 받은 상황이었다. 테세르는 치료 마법에 유난히 강했다.
그래도 정령은 정령인지 남에게 이로운 마법에 강한 모양이다. 그
렇다고 다른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건 아니 었다. 치료 마법을 행
할 때는 의지력물 크게 집중시키지 않아도 굳이 주문을 외우지 않
아도 시동어만으로 시전할 수 있다는 게 달랐을 뿐이다.
헌데 테세르 자신은 그런 상황이 몹시 불만이었다. 자신도 공격
마법, 방어 마법 마구 써가면서 누군가와 싸워보고 싶었음이다.
"마법 더 많이 배우고 싶지?"
-응.
"후후, 나중에 마법사 길드에 갈 일이 생기면 그때 구해 줄게
돈이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벌 수 있으니까. "
대답을하는 테세르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이에 라한이 의
아한 표정으로 테세르에게 되물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주인아! 있잖아.
"왜?"
-나도 고대 마법 배우고 싶은데.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라한이 아는 한 고대 마법은 오벨리아 팰리스에 존재하는 마법
책뿐이었다. 테세르의 말은 오벨리아 팰리스에서 마법책을 가져오
자는 얘기였다.
스카라트 산맥까지 텔레포트를 하더라도 오벨리아 팰리스까지
걸어가야 하는 여정은 쉬운 길이 아니었다.
일단 기후에 맞게 시간을 딱 맞춰야 하고 왕복으로 이동하는 데
에만도 일 년 가까이 걸리는 긴 시간이었다. 파마리스 평원 전체에
서 텔레포트가 불가능한 게 이유였다.
"테세르. 마법에 대한 열정은 잘 알겠는데, 오벨리아 팰리스까
지 가는 건 좀무리인 것 같다. 나중에 갈 일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시간을 내서 가는 건 좀그러네. 너도 알다시피 갔다오는 시간이
만만치 않잖아. 당장급한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거기까지 그 시
간을 들여서 가는 건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
-그릴지?
"응. 미안하다, 테세르. 하지만 갈 일이 생긴다면 그곳에 있는
마법책 다 보여줄게, "
-알았어,주인. 뭐, 어쩔수 없지.
테세르를걱우달래기는했지만, 기분이 그리 좋지는않았다. 그
래도 자신에게는 가장 오래된 친구가 테세르였다. 그가 원하는 바
를 들어주지 못하는 게 못내 미안스러웠다.
로이나 일행이 나메라 왕국의 국경을 지났다. 하지만, 단 한번도
마을에 머무르지 못했다. 계속된 몬스터의 공격으로 이동 방향이
상당부분 어긋난 탓이다. 마을로 가야 하는데 계속해서 산을 넘고
있으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 었다
"헉, 헉!"
"여기서 좀 쉬었다가 이동하죠. "
"그러죠. "
시스마란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원래 실력이 부족했기에
이미 오래전에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그나마 집념 하나로 버티
고 있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제라드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자존심 때문에 괜찮은 척
했을 뿐, 그도 당장 쓰러져 자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또 로이나의 겉모습도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최소 겉으로는
말이다. 실제로는 큰 피로를 느끼지 못했지만, 보는 눈이 있어서
힘든 척 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라드는 중얼거림에 시스마란이 의문을 표했다. 어느 정도 기
력을 되찾았는지 말할 힘은 생긴 모양이다.
제라드는 엄청난 몬스터의 공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
지 용병으로 살아오면서 이런 경험이 단 한번도 없었다. 마치 작정
하고 덤빈 듯하지 않은가 그가 아는한 이런 상황은 절대 불가능
한 일이었다.
"벌써 열두 번이야. 아주작정하고달려들잖아. 내가용병 생활
을 짧게 하지는 않았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
"그러고 보니 전에 싸울 때도 계속 그런 얘기를 했었죠. "
로이나 일행은 몬스터의 공격을 모두 열두 번 받았다. 그것도 열
마리씩 수를 늘려서 점점 더 힘들게 말이다. 어떻게 딱 그만큼만
늘어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또 그들이 왜 자신들을 마을에서 떨
어뜨리려 하는지도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로이나님.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라드의 물음에 로이나가 뜨끔해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
지 않은 듯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라이칸들의 짓이 아닐까요?"
"역시 로이나님도 저와 같은 생각이군요. "
지금까지 공격한몬스터는단한가지. 베어울프뿐이었다. 그리
고 그들을 조종할 수 있는 이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존재는 라
이칸드로프였다. 이 두 가지 상황만으로도 누구의 소행인지 쉽게
결론 내려졌다. 물론 이 모든 건 로이나가 계획적으로 이렇게 만든
거였다.
"몸이라도 풀어두세요. 또 언제 공격할지 모르니까 "
"그래야겠죠. "
"뭐, 지금까지와 같다면 밤에는 공격이 없을 테니까. 좀 버텨
보죠. "
지금까지 공격한 몬스터들은 해가 떨어지면 공격하지 않았다
제라드가 의심을 품은 건 이때부터였다. 어떻게 해만 떨어지면 공
격이 없는지. 의심을 품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두두두두두!
"또 오는군요. 준비하죠. "
" 예. "
발자국소리가 들리자 로이나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검을 뽑아들고는 서로 등을 마주 댔다.
처음 몇 번은몬스터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당황스러워했다. 들
려오는 발자국소리만으로도 엄청난 수라는 걸 알았기에 치를 떨었
었다. 헌데 이젠당황하는기색을찾기 힘들었다. 긴장하는모습은
보였지만 의연하게 잘 대처하고 있었다.
스스릉!
"검 날이 많이 상했군요. "
제라드의 말에 로이나와 시스마란이 그의 검을 살폈다. 그의 말
마따나날이 무뎌져 있었다. 저런 상태의 검이라면 베는데 들어가
는힘도훨씬 커질수밖에 없다. 빨리 마을을찾아가지 못하면, 맨
손으로 싸워야 하는 최악의 사태에 직면할지도 몰랐다.
"제 검도 비슷하네요. "
"후후. "
시스마란의 검은 제라드의 검보다 상태가 더 심했다. 원래 그의
검보다 재질이 떨어졌기에 어쩔 수 없었다.
텅티레아로 만든 검이 기사 지망생에게나 최고의 검이지, A 급
용병에게는 중하급의 검밖에 되지 않았음이다.
"로이나님의 검은 아직 괜찮군요. "
로이나의 검도 예전보다는 예기가 많이 바랬다. 너무 많은 피를
머금어서 검 자체의 날카로움이 약해진 것이다. 하지만 제라드나
시스마란의 검보다는 훨씬 나아보였다. 로이나의 검이 그들과 비
교할 수 없을 만큼 명검이기에 이 정도에서 그칠 수 있었다.
"옵니다. "
베어울프가 시야에 들어오자 로이나가 일행을 일깨웠다. 이에
반응하듯 제라드와 시스마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또 얼굴에도
좀전보다긴장한기색이 역력했다. 잦은 일이지만, 아직도두렵긴
두려운 모양이 었다.
로이나 일행은 베어울프와의 지겨운 싸움을 무사히 끝냈다. 물
론 로이나가 뒤에서 몰래 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싸움으
로 로이나 일행은 베어울프의 공격을 열세 번 막은 셈이다.
"아무 생각 없이 한 이틀 푹 잤으면 소원이 없겠군. "
"저도 그렇습니다, 제라드님. "
말을 마친 시스마란이 제라드의 눈치를 살폈다. 무언가 할 얘기
가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에 제라드가 고개를 갸웃하며 시스마
란을 재촉했다.
"할 얘기가 있나보군. 말해보게. "
"저, 그게
제라드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시스마란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
다. 그의 태도로 봐서는 곤란한 부탁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괜찮으니까 말해보게. "
"후우우, 저 제라드님. 제게 검술을가르쳐주십시오. 이런 실력
으로는 짐만 될 것 같습니다. "
시스마란의 말에 제라드가 미간을 좁혔다 이런 부탁이라는 걸
예상치 못한 것이다.
그의 말처럼 실제 시스마란의 실력이 보잘것없는 건 아니었다
원래는 약했을지 모르나 라한에게 수련 아닌 수련을 받으며 상당히
강해진 탓이다. 또 로이나가 만들어낸 멋진 계획도 시스마란의 실
력을 올리는 데 한몫했다 용병 등급 판정을 다시 받는다면 실력으
로 B 등급은 받을 수 있을 거였다.
"미안하네, 시스마란. 자네를믿을수 없어서가아니라, 나
로 세운 규칙이 있어서 정말 미안하네. "
한참 고민하던 제라드가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 말에 시스
마란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을 함부로 가르
쳐주지 않는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말을 꺼
낼 때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시스마란의 말을 듣고 있던 로이나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리고 시스마란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입을 열었다.
"저한테 배워보겠어요?"
"예? 저, 정말요?"
시스마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게 변했다 은연중에 로이나에게
배우고 싶은 마음을 가졌던 탓이다.
지금까지 열세 번에 걸쳐 싸우는동안, 로이나의 실력을똑똑히
봤었다. 로이나는 자신이 위험할 때마다 손을 뻗어서 도와주었다.
그것도 아주 여유 있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왠지 로이나가 제라드보다 강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힘겹게 싸우는 제라드에 비해 로
이나는 너무 수월하게 싸우는 듯했다.
겉모습을 봐도 제라드는 작은 생채기들이 많은데 반해, 로이나는
어디 한 군데 흐트러진 곳도 없지 않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로이
나에게 검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음을 부정할수 없었다.
"제가 가르쳐드리죠. 원래 검술을 함부로 가르쳐주지 않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죠. 대신. "
말을 멈춘 로이나가 시스마란을 다시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몸
에서 강한 마나 친화력을 다시 한번 느꼈다
'역시 아까워. '
"제가 가르치기는 하지만, 제가 스승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
고 싶습니다 "
"그게 무슨
"다른 누군가가 또 다른 걸 가르친다고 하면, 혹은 기회가 되어
서 다른무언가를 배울 기회가 되면, 그냥 배우라는 말입니다. 저
한테 미안한 마음 품지 말고요. 그게 제 조건입니다. -
로이나의 말에 시스마란과 제라드가 의아한 빛을 감추지 못했
다. 가지마라고 붙잡아도 부족할 판에 마음이 돌아서면 언제든지
가라니 자신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 너무 달랐다.
"그, 그게 조건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헌데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로이나님. "
"글쎄요. 나중에 알게 될 날이 오겠죠. 뭐 안오면 그걸로족하
구요. "
로이나가 대답을 회피했다.
시스마란의 꿈이 기사라는 건 로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밤에 쉴
때마다 기사가 꿈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생활 패턴 하나하
나가 기사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위라면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마법사가 되
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
"시간 끌 필요 없겠죠, 제라드님. "
"걱정 마십시오. 검술 수련 장면을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
기사든 용병이든 검술 자체의 의미는 남달랐다. 심혈을 기울여서
다듬고 발전시킨 검술이 마구 퍼지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특히
제라드나 로이나 정도의 실력자에게는 그 의미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범상치 않은 검술이 분명할 테니까.
로이나와 시스마란이 제라드에게서 약 오십 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숲이 울창해서 이 정도의 이동만으로도 시야를 가리기
는충분했다. 또 위험이 닥쳤을 때, 소리를 쳐서 도움을 청할수도
있는 거리였다
"제가 가르치려는 검술은 아주 오래전에 존재했던 검술입니다. "
" 예. "
"수천 년도 더 오래된 검술이죠. "
로이나의 말이 시작되자 시스마란이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지금
순간만큼은 기사를 꿈꾸며 검을 배우던 그 시기로 돌아간 듯했다.
"제가 잘 배울 수 있을까요?"
"그건 시스마란님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렸죠. 아, 제가 가
르치려는 검술은 대륙에서 사라진 검술입니다. 즉 제가 가르치고
나면 이 검슬을 아는 사람이 저와 시스마란님뿐이라는 얘기죠. "
로이나의 말에 시스마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 듣는 모범 학
생의 표정 그대로였다.
그 모습을 본 로이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저 외에 다른사람이 이 검술을사용한다면, 그건 시스마
란님이 다른 사람에게 퍼트렸다고 봐야 합니다. 무슨 뜻인 줄 아시
겠죠?"
"예. 절대 다른사람에게 알리지 않겠습니다. 제가죽는그순간
까지. 아니 죽어서도 이 검술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 시스마란, 별것 아닌 놈이지만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합
니다. "
시스마란의 얼굴에 결의의 빛이 떠올랐다. 나름대로 비장한 각
오를 다지는 모습이 었다.
하지만 로이나는 시스마란의 모습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왜
저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 새삼 시스마란의 순박함을 다
시 한번 느꼈다.
'라한이에게 해를 끼칠 인간은 아니로군, 헌데 그때 그놈들

로이나가 시스마란과 전에 봤던 에펠 일행을 비교해봤다. 달라
도 너무 달랐다.
에펠 일행은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는 부모도 팔아먹을
놈이었다. 또 옆에 있던 동료까지도 헌데 시스마란은 원리원
칙에 너무 충실했다. 이런 인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차라리 죽음
을 택하지 배신을 하지 않는다. 둘이 비교되자 시스마란이 더 대견
해보였다.
"그럼 검술 수련을 시작하겠습니다. 앞으로 밤에 세 시간씩 이
런수련을할겁니다. 기간은저와헤어질 때까지. 아셨죠?"
" 예. "
"제가 가르칠 검술 이름은 '그랜드 엘베이라'라는 검술입니다.
역사서를 잘 뒤지면 이름 정도는 들을 수 있는 쾌 유명한 검술이죠. "
로이나의 말에 제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은 담담한 빛
을유지할뿐, 어떤 탐욕의 기색도찾아볼수 없었다. 그랜드 엘베
이라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기 때문이다.
실제 그랜드 엘베이라라는 검술은 상당히 유명했다 제라드 정
도 되는 인물이 로이나의 말을 들었다면, 이런 식으로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로이나에게 매달리며 검을 가르쳐달라고
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그랜드 엘베이라가 뛰어난 검술이기 때
문이다.
"제 검술의 장점은유연한 대처에 있습니다. 어느한곳에 집중
해서 전력을 다하는 걸 철저히 배제한 검술이죠. "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구요?"
"예. 항상 여지를 남겨둡니다. 돌발 상황이 닥치더라도 유연하
게 대처하기 위해서죠. 일단 절 공격해보세요. "
로이나의 말에 시스마란이 주저하는 빛을 띠었다 배우는 입장
에서 가르치는 스승을 공격하는 게 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더니 검에 손을 올렸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
"오세요. "
"예 하압!"
시스마란이 큰 기합소리를 터트리며 검을 대각선으로 쳐올렸다.
일견하기에 발검과 흡사한 자세였다. 이에 로이나가 한걸음 슬쩍
물러나며 검을 위로 툭 쳐올렸다. 그러자 시스마란의 검은 다시 위
로 쳐오는 로이나의 검에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헛!"
"먼저 묻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반응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그, 그게
"말씀해보세요. "
"검을 막거나 피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쳐올릴 거라고
는 예상을 못해서. "
시스마란의 말에 로이나가 미소를 띠었다. 시스마란의 솔직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보통은 그렇게 막죠. 하지만, 그 두 가지 방법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막고 나면상대가공격할수 있는기회를계속준
다는 게 문젭니다. 두 번째 방법은 피할 자리가 여의치 않을 때는
좋지 않다는 게 문제죠. "
"그게 잘
"삼백에 가까운몬스터와싸우고 있습니다. 헌데, 공격권을 계
속 몬스터가 가지고 있다면, 막기만 하다가 진이 빠져 죽을지도 모
릅니다. 또, 그 삼백에 가까운몬스터의 거의 대부분이 죽고 십여
마리의 몬스터만 남았습니다. 너무 많은 몬스터를 죽여서 주변에
는 시체가 가득 차 있죠. 이런 상황에서 피하는 게 쉬울 거라고 생
각하십니까?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시체를 밟고 중심을 잃을 수
도 있죠. "
로이나의 설명에 시스마란이 탄성을 질렀다. 그런 상황까지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그가 일대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사 지망
생이었기 때문에 생각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펼치는 검이 지나가는 길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그
검들이 어떤 공격을 막기 위해서인지 또 어떤 공격을 하려는 의도
인지를 계속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로이나가 시스마란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그리고 주
변을 대충 훑은후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로이나의 검술은 마치 봄바람에 휘날이은 꽃의 흔
들림 같았다 조금의 과격함도 보이지 않ㄷ은 검술 시스마란은 로이
나의 검술이 물과 같다고 생각했다 검을 끊임없이 휘두르면서도
멈칫하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멋지구나
그는 난생처음으로 검술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눈이 부실 지
경이었다 밤이라서 고고히 비치는 달빛 외에는 그 어떤 빛도 찾아
볼 수 없건만 로이나의 검술은 너무나도 눈이 부셨다 그리고 저
검술을 자신이 펼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묘한 상상도 해
봤다 곧 자신이 배울 것인데도 왠지 자신과 거리가 멀리 보이는
아니 감히 인간인 자신이 배워서는 안되는 검술 같았다 그렇게
고고해 보임에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보면 시스마란도 약
간의 욕심은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검술을 가르치겠습니다 검을 잡으세요

그렇게 로이나가 시스마란에게 검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랜
드 엘베이라는 희대의 검술이었다

이그니스
라한이 무려 일주일의 노력 끝에 소환 인채트 스크롤을 만들어
냈다 처음 예상했던 시간보다 이틀이 더 걸린 셈이다 생각보다
너무 난해한 공식과 도형이라서 어쩔수 없었다
대단하군 아무리 빨라도 보름 이상은 걸릴거라고 생각했은데
우리 주인을 어떻게 보고 그 따위 망발을 하는 거야 쉬엄쉬엄
해서 일주일이나 걸렸지 쉬지 않고 게속 했으면 삼일이면 끝냈을
거라고 주인아 맞지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백한 부정의 의미
였다
지금 라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눈은 움푹 들어가 있고 피부
는 몹시 거칠었다 또 수마가 몰려오는지 눈도 반쯤 감긴 상태였다
누가 보더라도 쉬엄쉬엄했다고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쯧쯧. 산송장이군. 인챈트하는 걸 끔찍히도 지겨워하면서, 이
상하게 일단 시작하기만하면 끝장을 보는군. "
"내 성격이라고 해두자고. "
소환 인챈트를 모두 끝냈을 때 라한이 투바와 프라하, 테세르를
불러 모았었다. 투바는 뱀파이어 로드와의 중재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기에 부를 수밖에 없었다. 프라하는 마계의 다크 나이트가
정말 강한지 확인해보고 싶다며 꼭 부르라고 했었다. 테세르는 뱀
파이어 로드가 인간 마법에 능하다고 해서 보려 했다.
"라한. 찢어!"
"잠시만, 슈라!"
라한의 부름에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들렸다. 진동이 사라졌을
때, 슈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본 투바와프라하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슈라를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음, 이건 너무 하는군. 주인. 아무리 그래도 한달에 한번은
불러줘야 하는 거 아닌가? 대체 얼마만이지?
"미안. 후후, 그럴 일이 있었어. "
-주인이라서 화도 못 내겠군.
슈라는 나타나자마자 불평부터 토했다. 그동안 단 한번도 부르
지 않았던 게 속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라한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종의 비밀 병
기로 그를 남걱뒀기 때문이다. 헌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8 서
클 주문은 모르지만 제령기가 8 서클 인챈트가 가능할 정도로 강해
졌기 때문이다. 또 곧 나타날 이그니스에게 8 서클 마법을 배운다는
것도 이런 결정에 한몫했다. 7 서클과 8 서클의 차이가 그만큼 크기
때문에 슈라를 비밀병기로 둘 필요가 없었음이다.
"라한, 저게 뭐지?"
"라, 라한. 저 저
프라하와 투바가 동시에 의문을 표해왔다. 프라하는 그냥 골렘
이려니 하며 담담한 반응이었다. 헌데 투바의 반응은 예사롭지 않
았다. 슈라의 힘이 상당히 강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야, 투바. 뭘 놀라고 그래? 보면 몰라? 골렘이잖아. "
"내가 알고 있는골렘은 저따위로 크지 않아. 그리고 저 기운도
골렘치고는 너무 강하잖아. "
투바는 마법진에 대해 공부하면서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 그 중
에 골렘에 대한 것도 있었다. 자신이 아는 골렘은 3 미터 정도 키에
소드 유저 상급 정도의 힘이었다. 헌데, 눈앞에 골렘은 7 미터에 육
박하는 키에 힘도 거의 소드익스퍼트 중급에 육박했다. 자신이 알
고 있는 것과 너무 달랐기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저게 무슨 골렘이야. 괴물이구만. "
"웃긴 놈. "
짧게 대꾸한 라한이 슈라와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 왜 그를 불렀
고,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말해준 것이다.
라한의 말을 다 들은 슈라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빛을 띠었다. 최
상급 마족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아는 탓이다.
-주인. 주인이 전보다 강해진 건 알겠는데, 좀 무모하지 않을까?
"그냥 믿어봐 그리고 앞으로 입 열지 말고 구경만 해. 실험 정
신이 무척 강한놈이라서 널 해부하려고들지도모르거든. 저기 있
는 저 녀석도 걱정되기는 하지만, 저놈은 어떻게 통제가 되겠지만
앞으로 나을 녀석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
라한이 투바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지.
대답을 마친 슈라가 라한의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위치에서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라한. 이제 해봐. "
"알았어. 소환 이그니스! "
시동어를 크게 외친 라한이 스크롤을 찢었다. 이에 스크롤에서
검은 연기가흘러나오며 공터를 가득 메웠다. 한치 앞도 살펴 볼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이 라한 일행을 덮쳤다.
-뭔 놈의 마족들은 나을 때마다 시커먼 걸 뿌리고 나온데
"훗. "
테세르의 말에 프라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두 번째 소환이
지만 지금까지는 항상 검은빛을 흘리며 소환되었다. 왜 마족들의
어둠의 종족이라고 부르는지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우우우우우우웅: 쩌저저적!
공기의 진동이 공터에 울려 퍼졌다. 그 뒤를 이어 공간이 갈라지
는 소리가 귀를 때리며 들려왔다. 투바가 소환될 때와는 또 다른
모습에 일행 모두가 이채를 발했다. 심지어 투바조차도 신기함에
눈을 번득였다. 그 자신도 같은 마족이 소환되는 모습은 처음 보는
탓이다.
부우우우응!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날아올랐다. 스크롤을 찢은 이후
처음 벌어진 물리력의 변화였다.
"쿨럭, 쿨럭! "
프라하가 기침을 하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라한의 앞에서 소환
되는 모습을 봤던 게 화근이었다. 그 때문에 라한이 뒤집어써야 할
먼지를 프라하가 전부 뒤집어쓰고 말았다. 또 가장가까이 있었기
에 먼지로 보기 힘든 굵은 돌멩이들의 습격도 받아야 했다. 상처를
입지는 않겠지만 낭패한 모습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연기가 서서히 걷히자 이 미터에 육박하는 꽤 큰 체구의 미남자가
모습을 보였다. 라한이 소환한 뱀파이어 로드 이그니스인 듯했다
쿠쿵!
"음 "
이그니스는갑작스러운소환에 어안이 벙벙했다. 소환될 때, 불
완전 주문이 아닌 완전 주문임을 깨달은 탓이다.
대체 누가 있어 완전 주문을 사용할 수 있는지. 그것도 최상급
마족인 자신을 완전 주문으로 소환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
었다. 또 이런 상황은 창조된 이후로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당신이 이그니스인가?"
라한의 목소리가 이그니스의 상념을 깨웠다. 인간의 건방진 말
이 이그니스의 사색을 방해한셈이었다. 이에 이그니스가눈을부
라리며 고개를 서서히 돌렸다.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로 라한을 노
려봤다.
"겁이 없는 놈이군. 네놈이 날 부른 놈이겠군. -
"그렇다고 볼 수 있지. "
라한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혀 겁먹지 않은 듯 긴장하
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라한은 몹시 놀라고 있었다. 상대의 기세가 너무
강했다. 이에 심장이 마구 요동치고 다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헌데도 겉으로는 태연한 모습을 유지해야 했다. 마족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 자체가 단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다 또투바에게 통했던 당당함이 이그니스에게도충분히 먹힐 거
라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놈이군. 날 보고 놀라지 않는 놈이 다 있다니.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볼까?"
말을 마친 이그니스가 서서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대기
가 무섭게 요동치며 회오리바람이 생걱났다.
프라하는 인상을 찌푸리며 진땀을 흘려댔다. 맹세코 이 정도로
강한 기운은 난생 처음이었다. 판테아가 더 강하긴 하겠지만, 그는
기세를 흘리는 짓은 하지도 않았다. 눈빛만으로 프라하를 제압했
으니 말이다 테세르는언제 돌아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강
제 귀환인지 자의로 돌아간 건지는 그 스스로만 알 거였다.
"흠. "
라한이 신음성을 흘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얼굴만
큼은 굳건한 의지가 엿보였다. 기세 자체는 버티기 힘들지만 심리
싸움에서는 지기 싫었던 것이다.
"훗, 역시 이놈은보통놈이 아니라니까. 삼촌! 그만하세요. 애
들 다치겠어요. "
"응? 도련님!"
투바를 발견한 이그니스가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공터를 메웠
던 기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완벽히 사라졌다.
기세가 사라지자 프라하가 급히 허리를 폈다. 좀 전에 낭패한 모
습을 보였던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삼촌, 오랜만이에요. "
"대체 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여긴 물질계입니다.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도련님이 계실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년
식을 치르기 전에는 그 어떤 소환에도 응해선 안 되는 걸 아실 테
죠?또, 이건 마계의 율법이기도합니다. 지금은부르마섬에서 유
배중이라고 들었는데 이런 곳에 오시다니. 마왕 루시퍼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그니스의 잔소리에 투바가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표정으로 봐서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놈 보기보다 말이 많은 놈이네. 좀 근엄한 놈인 줄 알았는데. '
솔직히 라한은환상이 깨지는 느낌을 받았다. 등장부터 거창했
고 그 뒤의 기세도 어마어마했다. 그런 존재가 저런 잔소리를 하다
니.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에고, 삼촌 알았으니까 그만하세요. 그리고 지금은 소환돼서
나온 게 아니던가요? 소환된 분이 소환의 주체에게 기세를 쏘아 보
내다니. 그게 말이나 될법한 소립니까?"
"아, 그렇군요. 하하하. 처음 있는 일이라서."
이그니스가 소환된 횟수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소환되었을 때
소환을 한 당사자가 살아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 때문에 최소
소환을 시행한 사람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줘야 한다는 걸 깜빡 잊
고 말았다. 만약 좀 전에 흘렸던 기세로 라한이 죽기라도 한다면
이그니스는 처별을 면하기 힘들었다. 소원을듣지도 않고 자기 손
으로 죽였기 때문이다
드래곤에게 맹약이 있듯 마족에게는 율법이라는 게 존잰했다.
'투바의 말에 의하면 소환을 한 내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는 모
양이군. '
라한은좀전의 기세를떠올리며 식은땀을흘렸다. 제령기, 제란
기 모두 동원해서 막았는데도, 힘겹게 버티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
던가. 그 상창에서 기세를 더 강하게 흘렸다면 주화입마에 빠졌을
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대단한 놈이군. 내 기세를 정면으로 받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다니. 인간 중에도 이런 놈이 있었나?"
"그런가? 칭찬이라고 생각해주지. "
라한이 담담하게 대꾸하자 투바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는 이
번에 라한이 좀 더 낭패한 모습을 보이길 바랐다. 그게 지금 투바
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지금까지 하찮은 놈들과 맞먹으면서 얼마나 비참했던가. 어떻게
든 상황을 역전시키고 싶었는데 씨도 안 먹히다니, 자신이 라한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음을 인정해야 할 듯했다.
'인간 같지 않은 놈. '
"그럼 일단소원을들어볼까?말해봐라.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이행해주지. "
"어떤 게 율법에 어긋나는지 물어도 될까?"
라한의 대꾸에 이그니스가 미소 지었다. 당당한 라한의 태도가
마음에 든 것이다. 강자존의 세계인 마계. 그곳에서 저런 배짱은
충분히 호감 가는 모습이었다. 건방지지 않으면서도 당당한그런
태도 말이다.
"후후, 율법이라 일단 마계의 비밀을 발설하는 일은모두 율
법에 어긋난다. 또, 물질계가 멸망에 이르는 길도 율법에 어긋나
고. 혼란 정도는 상관없지만. 크크크. "
이그니스의 웃음에 프라하가 소름끼친다는 듯 몸을 떨어댔다.
아무리 마족이라지만, 어떻게 저런 음침한 웃음을 터트릴 수 있는
지. 투바에게서 받았던 마족의 느낌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내 소원이 율법에 어긋나지는 않겠군. "
"말하라. "
"8 서클마법 전부를가르흠, 정정하지. 네가알고 있는마법
을 모조리 가르쳐달라. 그게 내 소원이다. "
뒤늦게 테세르를 떠올린 라한이 소원을 수정했다. 8 서클 같은
고위 마법은 테세르에게 무리겠지만, 2 서클 정도의 하급 마법은 테
세르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소원이 자신에게 국한되어 있으니, 자
신이 배워서 테세르에게 전해줘야겠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만
족했다
"마계 율법을 잊었나? 마계 마법 역시 마계의 비밀 중 하나다.
발설하는 그 자체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지. "
"마계 마법을 가르쳐 달라는 게 아니다. 물질계의 마법을 가르
쳐달라는 거지. 모른다고 할 텐가?"
라한의 대답에 이그니스가투바를 바라봤다. 그는 라한에게 일
러바친 게 투바임을 확신했다.
이에 투바가하늘만바라보며 돌부리만툭툭차댔다. 변명이 먹
히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럴 땐 그냥 모른 척 대답을
회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흥. 도련님. 그런다고 그량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
"아, 그게 있잖아 "
이그니스는그냥 넘어갈생각이 없었다. 그러다자칫 마계 모든
존재를 소환하게 될까봐 걱정되었다.
자신이야 투바와 친하기도 했고, 또 경험 자체가 많았기에 적당
히 대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중상급 마족들은 투바가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하는 입장이다. 지위에서 너무 큰 차이가나기 때문
이다.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일이 커질 걸 염려했음이다.
"도련님! "
"그게 난 가르쳐주기 싫었는데아, 맞아. 저놈이 머리가 엄
청 좋거든. 유도심문을 하더라고. 난 거기에 홀딱 넘어갔지 뭐야.
이야, 난 인간 중에서 저렇게 똑똑한 놈 처음 봤다니까. "
"도련님! 마계의 일을 발설하는 건 율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모르는 건 아니시겠죠?"
이그니스의 말에 투바가 움찔거렸다. 그도 스스로가 잘못했음을
아는 탓이다. 다만, 모르고 넘어가기를 바랐을 뿐이다.
"삼촌. 우리 아버지한테 말 안 할 거지?"
"에휴, 저도 처음 소환돼서 율법을 어겼으니 이번 일은 없었던
일로하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벌어지면, 마왕루
시퍼님께 알릴 수밖에 없습니다. 명심하십시오. "
"알았어.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투바가 율법을 어겼다는 걸 마왕에
게 이를 생각은 없었다. 그가 투바를 거의 키우다시피 했기에 차마
내칠 수 없었음이다.
"인간. 좋다. 네 소원을 들어주지. 헌데 흑마법을 배우려는 건
가? 아니면 그냥 마법?"
"둘 다. "
흑마법과 마계 마법은 분명 달랐다. 흑마법이 마계와 가까운 느
낌을풍기기는하지만, 물질계에 존재하는마법임은분명했다. 이
에 반해, 마계의 마법은 마법이라기보다 술법에 가까운 마족 전용
힘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배우지 못하는 그런 능력인 셈
이다.
"후후, 이제 1 서클로 보이는데, 어느 세월에 다 배우려고 그러
나?"
"그건 내 사정이고 이그니스 당신은 내가 알려달라는 것만 가르
쳐주면 돼. "
"후후, 그러지. 소원을 접수한다. "
말을 마친 이그니스가 공터를 서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라한
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낮은 주문을 읖조렸다.
라한도순간움찔하기는했지만, 별반응은보이지 않았다. 이그
니스가 자신을 해코지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 내일부터 시작하지. 오늘은 쉬고 싶군, "
"그러지. "
이그니스는 차원을 이동하느라 너무 많은 힘을 소모했다. 이 때
문에 피로가 몰려와서 눈이 감기기 직전이었다.
라한도 상황은 비슷했다. 인챈트를 하느라 며칠 동안 잠도 자지
못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라는마족. 그것도로드라는존재를본
다는 기대감에 억지로 잠을 참았을 뿐이었다.
다음날, 라한은 해가중천에 뜬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자신이 늦잠 잤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어색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기 위해 시선을 침대로 옮겼다
"허, 참나. "
때는 이미 정오가 지난 시각이다. 헌데도 자신 옆에 건장한 체구
의 미남자가죽은듯자고 있었다. 자신도늦잠을잔거지만, 자신
보다 더 한 녀석이 보인 것이다.
'뭔 놈의 마족이 늦잠이나 퍼질러 자고 난리야. '
마족이라고 늦잠자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괜한
환상에 젖어 늦잠이라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듯했다.
눈곱을 대충 땐 라한이 옷을 빠르게 주워 입었다. 그리고 음흥한
표정을 지으며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가다듬었다
'네놈이 최상급 마족인지 최상급 마물인지는 몰라도 여긴 내 땅
이야. '
생각을 정리한 라한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어 머리 위로 주먹을
들어 올리더니 힘차게 내뻗었다.
빡- !
"으악! "
라한의 주먹은 이그니스의 머리를 정확하게 강타했다 박 깨지
는 소리까지 들리는 걸로 봐서는 제대로 맞은 모양이다.
"애 일어나! 이게 뭐하는짓이냐?피곤하다고재워줬더니 늦잠
을 자? 여기가 네놈 안방이야?"
"이, 이 네놈이 감히 내 머리를
휘이잉! 빡- !
"으악! "
이그니스가 변명을 늘어놓으려 하자 라한이 주먹을 다시 휘둘렀
다. 이에 좀 전보다 더 큰 소리가 오두막에 울려 퍼졌다.
라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그니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최
상급 마족인 자신이 인간 따위에게 맞다니. 난생 처음 겪는 어처구
니없는 상황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빨리 일어나지 못해! "
라한의 외침에 이그니스가정신을차렸다. 곧 이어 자신이 인간
에게 맞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현실이었음을 인지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그니스가 눈을 부라렸다.
"네 이놈! 네놈이 정녕 죽고싶은모양이구나. 이, 이
"까불지 말고 일어나. 또 맞을래? 어쭈, 눈 부라리네. 마계 율법
을 잊은 거야? 나 멀정하게 살아 있다고. 네놈이 날 죽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라한이 무모한 행동을 한 이유는 율법에 기인했다. 자신이 그 어
떤 해코지를 하더라도 상대는 자신을 해치지 못하는 걸 이용한 것
이다 물론 이그니스의 목숨을 위협하는 행동이라면 어떻게 변할
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극한 상황까지만 유도하지 않는다
면 자신의 안전은 확실하다고 믿었다. 그게 마계의 율법이고 관례
였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두고 보자 내 네놈의 소원만 들어주고 나면 널 단매에 죽이
겠다 "
"맘대로 해. "
라한이 이그니스를 자극한 가장 더 큰 이유는 빠른 교육을 받고
싶어서였다. 자극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그니스도 가르치는 열의를
들어낼 테고 그럼 자신은 더 빨리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다 배운후가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소
원을 성취하고 나서 돌려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소환하는
것보다 돌려보내는 게 휠씬 쉬우니까 말이다.
"나가지. "
"그러던가 잠꾸러기 마족씨. "
라한의 도발성 언어에 이그니스가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
만, 지금 화를 낼 수는 없었다. =1 도 율법의 범위 011 서 벗어날 수 없
는탓이다. 그럼 결론은단하나. 최대한빨리 가르쳐서 죽여 버리
는 길 뿐이었다.
그날부터 라한은 이그니스에게 엄청난속도로 마법을배우기 시
작했다. 흑마법에서부터 통상 그냥 마법이라 불리는 것까지 총망라
한 넓은 분야였다. 또 8 서클에 국한되지 않고 1 서클 마법부터 차례
로 배웠다. 거기다 클래스 마법과 비클래스 마법의 구분을 두지 않
고 모조리 배웠다. 테세르에게 마법을 가르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라한은 흑마법을 배우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나의 운용
방법에서 기존 마법과 너무나 다른 까닭이다. 대체 왜 흑마법이 물
질계에서 배척당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로 마나를 다루는
방법이 다르다 뿐이지 완벽한 하나의 학문이지 않은가.
세간에서 어떤 평가를 내리든지, 라한에게는 배워야 할 대상에
불과했다. 뭔가 배우고 익히는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라한이기에
더 그러했다
처음 나메라 왕국의 엘퐁소 지방을 출발했던 로이나 일행. 지금
은 도착지에 거의 근접한 베루니아 왕국 외곽에 와 있었다. 무려
넉 달의 긴 여정이었다.
하지만, 그 긴 시간동안에도 마을에는 단 한번도 들어가지 못했
다. 세상에 이런 곳으로도 사람이 다닐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험한
곳만 골라서 다녔다. 그 과정에서 식량이 떨어지자 나무 열매로 배
를 채웠고, 그도 없을 때는 몬스터 고기로 주린 배를 부르게 만들
었다. 물론 모두 로이나의 작품이었다.
"이제 마을이군요. "
"멀리 보이는 성벽이 베루이나 왕국의 국경 입니다. "
시스마란의 말에 제라드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제라드의 음성에는 약간의 환희와 아쉬움이 함께 담걱 있었다.
그도 험난한 고생을 거치며 많은 실력 향상을 거두었다. 이에 아쉬
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환희의 감정은 넉 달 만에 마을을
발견했다는 데에서 오는 기쁨의 표출이었다.
"잠시만요. "
"예? 말씀하십시오. "
로이나의 부름에 시스마란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로이나는 그에게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검술을 가르쳐줬
기에 수많은 몬스터의 공격을 무사히 넘겼다. 또 로이나에게 배운
검술 그 자체로도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 스스로도 느낄 정도로 엄
청난 성장을 이루었음을 깨달은 탓이다.
"스카라트 산맥까지 가실 건가요?"
"물론입니다. "
"그건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
로이나의 물음에 시스마란이 당연하다는 듯 긍정을 표했다. 하
지만 제라드는 좀 곤란하다는 듯 말을 돌렸다. 실력을 향상시키기
는 했지만 다시 몬스터의 공격을 받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제 아
무리 강해져도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 실력 향상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그럼 제라드님은 베루니아 왕국에 남으시겠군요. "
"예. 한동안은 이곳에 남아야할것 같습니다. 너무많은시간
을 허비했습니다. "
"알겠습니다. 그럼 시스마란님은 계속 가신다는 거죠?"
"예. 당연하죠. 라한 형님을 찾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을 겁
니다. "
시스마란도 몬스터가 무서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실력 향
상과는 별개로목숨이 아까운건 제라드와같았다. 하지만, 라한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은인이자 유일한 친인이었으니 말
이다.
피곤에 절어 잠 들 때도 밤마다 라한의 꿈을 꾸곤 했다. 그가 몬
스터에게 당하는 꿈을 그 꿈을 꾸고 나면 라한이 더욱 더 보
고싶었다. 겨우 몇 달동안함께 지냈을뿐인데, 왜 그렇게 그리운
지는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다만 라한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이
해할 수 없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그럼 일단 마을에들어가면 잠시 헤어지죠. 재정비는 해야 하
니까요. "
"그럼 어디서 만날까요?"
" '눈의 꽃' 이라는 여관이 있습니다. 들어가서 동쪽으로 계속 가
면 나을 거예요. 그곳에서 만나기로 하죠. "
"알겠습니다, 로이나님. "
로이나는 시스마란에게 에펠 일행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이
에 시스마란은 계속 대답을 회피했다. 그 모습만으로도 그들 사이
에 무슨 관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로이나는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물어댔다. 그리고 에펠 일행
이 라한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되었다. 쿨샤크가 어떤 짓
을 했는지도.
'베르네를 만나야겠어 . '
지금까지는 일행과 항상 함께 지냈기에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아
무리 드래곤이라도 들키지 않게 베르네를 만났다가 대화를 하고 다
시 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때문에 그를 만나려던 계획을 계
속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기회가 왔다. 성에 들어가면 시스마란과 잠시 헤어져
야 하는 것이다. 로이나는 그때 베르네를 만나서 에펠 일행에 대해
서 들은 말을 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처분도 논의하
고 말이다.
처음 라한은 이그니스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서로으르렁대
는 사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수업을 받을 때만큼은 공손한 제자의
모습을갖추었다. 헌데 언젠가부터 토를달기 시작했다. 아니 이그
니스가 가르치는 주문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이놈! 내가 그렇게 가르치던? 어제는 다 외웠다면서. "
"다 외웠어. 이번에 시전한 건 네가 가르친 주문을 조금 바꾼 거
라니까. "
"누가 바꾸라고 했는데? 누구 허락받고 바꾸는 건데? 주문 잘못
바꾸다가 마나 폭주하면 어쩌려고 그래? 응?"
"자신 있으니까 바꾼 거지, 자신도 없는데 내 마음대로 바꿔겠
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
아마 처음 배울 때 라한이 이런 일을 벌였다면 이그니스도 쌍수
를 들어 환영했을 것이다. 그때는 라한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었
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를 가르치면서 제자에게 가지는 스
승의 마음가짐을 조금은 가지게 된 탓이다. 또 라한이 상당히 뛰어
난 제자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번이 아니면 언제 이런 제자를
둘 수 있겠냐 싶었다.
"이놈아! 말 하면 좀 들어라. 아무리 막나가는 제자라도 스승이
하는 말을 그따위로 씹어대진 않는다. "
"뭐, 그건 나도 인정하지만 가능해 보이는 걸. "
"이놈이 그래도
"알았어. 알았다고. "
이그니스의 호통에 결국 라한이 패배를 선언했다. 그의 표정에
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느낀 탓이다.
라한은 요즘 자신이 아는 마법에 흑마법을 대입시키는 일에 열
을올렸다 흑마법끼리의 조합도 재미있먼지만, 무관한두마법을
합치는 게 더 재미있었다.
물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이그니스는불같이 화를 냈다. 자
칫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기에 제지를 한 것이다. 라한은 그때마
다 패배를 시인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대답했었
다. 그리고 며칠 가지 않아서 다시 이런 일을 벌였지만.
"쳇. 나쁜 놈 같으니라고. "
"미안하다니까. 뭐 그런 일로꽁하고그러냐. 대충넘어가자."
"우씨. 젠장. 오늘부터 5 서클 마법에 들어간다. 근데, 이번에
도 공격 마법과 방어 마법, 치료 마법은 주문만 외우고 넘어갈 생
각이냐?"
"말했잖아. 난 그런 마법 못 쓴다고. 그런 마법은 클래스 마법이
라서 불가능해. "
이그니스도 라한의 특이한 신체에 대해서 들었었다 그리고 한
동안 호기심을 가지고 몸을 살피기도 했었다. 헌데 그 시간이 오래
되자 깜빡할 때가 많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보조 마법을 깨우치고
사용했기에 반쪽짜리 마법사라는 걸 잊곤 했다
"이번에도 흑마법부터 할까?"
고개를 짧게 끄덕인 라한이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깃틸
펜을 꺼내서 메모할 준비를 끝냈다.
"먼저 공격 마법부터 부를테니 적어라. 먼저 다크 캐논이다. 주
문은 세상을 이루는 근원 중 가장 고귀한 어둠이시여. 그의 힘을
빌러 이 세상에 파괴를 만들려 합니다. 이에 이게 주문이다. 그
리고 주문을 외울 때, 떠올릴 연상은 이런 장면이고. 의지를 강
하게 주입하지 않으면 힘든 마법이다. "
라한은 이그니스가부르는 마법 주문을 깨알같이 적었다. 웬만
한 사람은 읽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크기였다. 라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라한은 그 동안 엘퐁소 지방에 몇 번 갔다 왔었다. 부족한 메모
지를 보충하고 식량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텔레포트 마
법은 비클래스마법이었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또 아공간창출
마법이 있으니 짐을 들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다만 줄어가는 돈이
라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을 뿐이다.
베루니아 왕국에 있던 로이나가 베르네의 위치를 수소문했다.
물론, 바람의 정령왕인 실피드를 이용해서였다. 그렇게 알아낸 결
과 베르네가 현재 대륙 동부의 루나사 왕국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
했다. 이에 로이나가 루나사 왕국으로 순간 이동했다
드래곤끼리는 특별히 기척을 감추지 않는 한 서로의 위치를 알
아볼 수 있다. 서로의 유희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기운을 흘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알아보지 못하는 드래곤끼리의
고유 기운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 거리에 있어야 가능하지 너무 멀어서
는 곤란했다. 원래 로이나가 있던 곳은 대륙 북서부에 위치한 베루
니아 왕국. 대륙 동부에 있는 베르네의 기운을 느끼는 건 불가능했
다.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령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음, 기운으로 봐서는 곧 이곳을 지나치겠군. "
작게 중얼거린 로이나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부서진 나
뭇가지를 모으고 마른 풀을 한 곳에 모아 캠프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약 십 분의 시간이 흐른 후, 로이나가 모아둔 마른 풀에
불을 붙였다. 그 불은 나뭇가지로 빠르게 번지더니 이내 활활 타오
르기 시작했다. 딱, 그 시기에 로이나의 오른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네가 에펠 일행을 데리고 오는 소리였다.
"아, 누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베르네. 너야말로 여긴 웬일이야?"
서로 알고 왔음이 분명함에도 짐짓 모른 척 인사를 했다 조금의
거짓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연기였다 드래곤이 유희를 통해 얼
마나 많은 연기력을 쌓는지 가늠케 했다.
"오랜만입니다. 로이나님. 그간 어디 갔었습니까?갑자기 사라
지셔서 걱정했습니다. "
"흥 그랬나?"
로이나의 목소리에 냉기가 풀풀 흘렀다. 에펠 일행이 어떤 놈들
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라한을 배신한 인간. 그 말 하나만으로도
살려둘 가치가 없었다.
-로이나님, 무슨 일 있습니까?
-저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았다.
베르네가 메시지 마법으로 은밀하게 물어왔다. 이에 로이나도
자연스럽게 답했다. 이 정도 마법은숨 쉬듯할수 있는 드래곤이
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좀 쉬었다가 가죠. "
"예, 베르네님. "
로이나가 만들어둔 모닥불에 앉은 베르네가 말했다. 이에 에펠
일행도 모두 찬성을 표하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동안 그들도 꽤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하
지만 시스마란이나 제라드와 비교하면 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들은날이 뭉팅해진 검으로몬스터를 베지 않았던가. 예기가 남아
있는 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편하게 지내온 셈이었다.
-저들이 어떤 놈들입니까?
-라한을 배신했던 놈이다.
-그래요?
-응. 실피드가 전해준 라한의 행동과 내가 만났던 녀석이 해준
말. 그리고 이런저런 정황을 려어보면 거의 확실해.
로이나의 말이 끝나자 베르네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라한을 배
신했던 놈들을 보호하고 있었다는 게 화가 난 모양이다. 그 모습에
로이나가 눈짓으로 제지하며 그를 다독였다.
-그만해라. 아무래도 라한은 모든 사실을 알았던 것 같아. 그래
서 그들을 골탕 먹이려고 계획을 짰었고.
-근데요?
-우리가 방해했잖아. 내가 아는 라한이라면 단순한 보복 정도로
끝낼 리가 없거든. 아마, 그의 계획에 이들이 쫓기는 것도들어 있
었던 것 같아. 근데, 우리가 이들이 편하게 도주하도록 도와줬으
니. 에휴.
-그, 그렇군요.
로이나는 라한의 성정을 잘 알았다. 그의 성격이라면 보복이 가
벼울 리 없다. 한 대 맞으면 열 대로 갚는 게 라한아니던가. 그런
성격을 감안하면 아마도 에펠 일행이 쫓기는 것도 예상 했을 것이
다. 쉴새 없이 도망다니며 스스로를비관하게 될 에펠 일행,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잡혀 죽거나 할 터 였다.
헌데, 그런 상황을로이나와베르네가방해해 버렸다. 의도했던
바는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그렇게 된셈이다. 그렇다고지금이
들을 죽이는 건 말이 안 되었다. 편하게 죽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게 라한의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지금이라도손을 떼서 고
생하게 만들어야 했다.
-손 뗄까요?
-그래야지
"잠시 얘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
"네, 베르네님. "
베르네가 로이나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일행에
게서 조금씩 멀리 떨어졌다. 그렇게 그들의 시야에서 완벽히 사라
졌을 때 로이나와 베르네가 먼 곳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한참 달리
다 마나파동이 미치지 않는 곳에 이르러서야 로이나가 중얼거렸다.
"매스 텔레포트!"
로이나가 시동어를 외치자 그들의 몸에 푸른빛이 일렁였다. 동
시에 공기 울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는 가 싶더니 이내 완벽히 사라
졌다.
로이나와 베르네가 사라진 후에도 에펠 일행은 하루 종일 기다
렸다. 설마 자신을 버리겠냐는 생각에서였다. 자신들이 누군가를
배신했듯, 남도 그럴 수 있음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린 후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터벅터벅 걷는 힘없는 발걸음과 어두운 얼굴. 일견하기에는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보였다. 엄청난 원군이 한 순간에 사라져서 허무했
던 탓이다.
로이나는 에펠 일행을 보자마자 기분이 팍 상했다. 보는 것만으
로도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자신
이 시스마란을 키운 정도와 비교하면 한참 부족하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자신이 검술을 가르치며 성장시켰던 것과는 달리, 베르네는 함
께 싸우는 정도에 그쳤다 그들끼리만 싸운 게 아닌 함께 말이다.
이 때문에 실전경험을 쌓긴 했지만 아주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체계적인 검술과 실전을 함께 쌓은 시스마란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
했다.
"로이나님 ! 여기
"로이나님이라고부르지 마. 어색하니까. 그리고호칭은음, 나
중에 정하자. "
"예. 누님. 여기는 어디죠?"
"베루니아 왕국이야. 만날 사람이 있거든. 앞으로 함께 행동할
일행이기도 하고. "
로이나와 베르네는 베루니아 왕국 국경 부근 마을에 와 있었다.
시스마란과 만나기로 한 여관에 미리 숙소를 잡은 것이다
"만날 사람이오?"
"응. 일단 너 모습 좀 바꿔야겠다. "
"어떻게 바꿀까요?"
"마법사로 해. 네가만날 녀석 말이야. 아무리 봐도 검술보다는
마법이 어울리는 놈이야. "
"오호, 누님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보통 녀석은 아닌가보네
요. 후후, 일단 모습부터 바꿀게요. 폴리모프!"
베르네의 키가 조금씩 작아졌다. 또 머리카락도 금색에서 백금
발로바픽었다. 그리고 얼굴가득한주름과구부정한허리. 영락없
는 노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딱 좋아. 로브 같은 걸 입는 게 낫겠다 "
"알았어요. 아공간 오픈! "
베르네가 자신의 여행 물품을 넣어 둔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머리 위 공간에 만들어진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어서 로브를 꺼냈
다. 검은빛과 푸른빛이 묘하게 조화된 고풍스런 로브였다
"스태프도 하나 꺼내! "
" 예. "
베르네가작아진 자신의 키만한스태프를 꺼냈다. 얼핏 검은색
으로 보이지만, 빛에 비추면 금빛도 언뜻 보이는 묘한 스태프였다.
걸어 다니는 보물 창고라 불리는 드래곤. 그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
났다
"아주 좋은데 . "
"고맙습니다, 누님. "
로이나의 칭찬에 베르네가 히죽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의 칭찬
이 기분 좋은 모양이다.
실제 베르네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마법사였다. 그것도 엄청
나게 긴 시간동안 마법을 익힌 노마법사 말이다.
똑 똑
"로이나님, 계십니까?"
"네, 들어오세요. "
딸각!
문이 열리고 시스마란이 들어왔다. 마을에 들어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옷을 새로 샀는지 깔끔해 보였고, 얼굴에 가득한
먼지도 사라져 있었다.
"오셨군요. 근데, 정비를 못한 것 같습니다. "
"너무 피곤해서 먼저 잤습니다. "
"이런. 제가 주무시는 걸 깨운 건 아닌가요?"
"아니요. 어차피 일어날 시간이 됐으니 괜찮아요. "
로이나는 베르네를 만나고 오느라 정비를 하지 못했다. 그 때문
에 옷에 묻은 먼지도 여전했고, 머리카락도 푸석푸석한 상태였다.
시스마란이 본 건 로이나의 그런 모습이었다.
"다행입니다. 근데, 옆에 계신분은
"아, 인사하세요. 이곳에 와서 만난분입니다. 오래전에 절 많이
도와주셨죠. "
"허허허, 반갑구먼. 베르네라고하네."
베르네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에 시스
마란이 급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전 시스마란이라고합니다. 보시다시피
지금은 용병입니다. "
"후후, 젊은놈들치고는 인사성이 밝구먼. 난마법사일세."
" 예. "
"누 로이나양과는 아주 오래전에 만났었지. "
누님이라 부르려던 베르네가 급히 말을 바꾸었다. 이에 로이나
가 잠깐 긴장하는 기색을 보였다가 곧 마음을 놓았다.
실제 베르네가 이런 말실수를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냥
로이나라고 부르기가 너무 미안해서, 잠깐 실수하는 모습을 보였
을 뿐이다. 자신이 로이나에게 말을 놓는 게 힘들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였다.
-흥.
-누님, 제 마음알죠?후후, 어쩔 수 없는상황이니 이해하시리
라 믿습니다.
베르네의 사과에 로이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삼 자신과 같
은 드래곤이 얼마나 영악한 존재인지 깨달았다. 하긴 수천 년의 기
억을 가진 드래곤이 멍청하다면, 그게 더 우스운 일이다.
"저, 로이나님.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내일 아침에 길을 떠나기로 하죠. 여기 베르네 할아버지도 저
희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
-베르네. 꼬투리를만들어서 저 녀석한테 마법을 가르쳐봐. 주
문 같은 실질적인 것보다, 그냥 마법의 기초를 닦는 정도면 돼.
-누님이 원하신다면야.
로이나의 말이 끝나자 베르네가 시스마란을 찬찬히 살폈다. 그
의 무엇이 로이나의 호기싱을 자극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얼
핏 볼 때는 시스마란의 체질을 알아보지 못했다. 가지고 있는 마나
도 형편없었고. 헌데, 자세히 살피자 뭔가 달랐다. 엄청난 마나 친
화력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대마법사의 기질이 있는 녀석이 분명
런 존재를 얼핏 보는 정도만으로 알아봤음이다.
저 베르네님 저희 여정은 험난할지도 모릅니다 혹시나 사고
라도 당하시면.
허허 뭐가 그리 걱정인가 어차피 살만큼 산 늙은이가 아닌가
삶에 별 미련이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네 그리고 걱정을
받을 만큼 약하지도 않고 말일게
아 예
시스마란의 걱정에 베르네가 이채을 발햇다 그의 말투에서 진
정을 느낀 탓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걱정할줄 아는 사람 그건
라한에게 해코지 할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되었다
괜찮은 녀석이군
그렇게 다음 여행의 일행이 정해다 제라드가 빠지고 베르네
가 그 자리에 들어갔다 인원은 적지만 사상 최강의 파티가 그들이
리라
슈라의 변신
마법을 배우던 라한이 짬을 내서 투바를 찾았다 할 일 없이 빈
둥거리던 투바에게 반가운 손님이었다
여 투바
어 바쁘신 몸께서 여긴 왠일이셔
라한의 부름에 투바가 비꼬듯 대꾸했다
요즘 투바는 지루해 미칠 지경이었다 프라하는 도끼술 익히느
라 정신없지라한도 마법 배우지 그나마 놀만한 상대인 테세르마
저 혼자 마법주문 외우느라 자신과 놀아줄 상대가 업ㄱ었다 이 때
문에 심사가 많이 꼬여 있었다
녀석 삐쳤냐
내가 인간인줄 알아 삐지긴 누가 삐져
보니까 화났구만 소심하기는
"안 삐쳤다니까! "
투바가 버럭 소리 지르며 고개를돌려 버렸다. 그러면서도 라한
의 눈치를 슬쩍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정말오랜만에 찾아온 대
화 상대가 그냥 가 버릴까 걱정된 탓이다
그래. 알았다. 안삐쳤어. 됐지?"
"응. 난 안 삐쳤다. "
대답을 하던 투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뒤늦게 어리광
비슷한 추태를 부렸음을 깨달은 것이다.
'젠장. '
"너 요즘 심심하지?"
"뭐가심심해. 나도나름대로바빠. 왜 이러셔."
"그래? 그럼 안 되겠네. "
말을 마친 라한이 몸을 돌려 돌아가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에
투바가 다급한 얼굴로 라한의 앞을 막았다. 그리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짐짓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흠, 흠. 내가바쁘긴 하지만친구가부탁하는거라면 없는시간
이라도 내야지. 난 친구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훌릉한 마족이잖아. "
"후후, 녀석 꽤나 심심했나보네. "
"무슨 소리야. 나도 바빴다니까. 없는 시간조개서 도와주려고
했더니. 쳇. 가라. 가!"
투바의 외침에 라한이 싱긋웃었다. 투바가귀엽게 느껴졌다. 나
이만많지 숫제 아이와다름없지 않은가 마족이 잔인하다더니 투
바는 해당사항이 아닌 듯했다.
"뭐, 그럼 다른 사람한테 부탁을 해야겠.
"아, 진짜. 아무래도안되겠다 믿을놈이 있어야지."
라한의 말을 잽싸게 끊은 투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 심
심했던 모양이다.
"왜? 바쁘다면서. "
"뭘 부탁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녀석들은 불안하잖아, 내가
해 줄게. 인심 쓰지. "
"그래. 너 말고는 믿을 만한 놈이 없지. "
"그럼. 당연하지. "
라한이 투바에게 져 주기로 했다. 별일 아닌 일에 자존심 세우는
투바가 귀엽기도 했고, 자신 역시 투바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기 때
문이다. 아니, 투바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시간 날 때마다 슈라를 풀어줄게. "
"슈라? 그 덩치 큰 얼음덩어리?"

"그놈은 왜?"
"몸이 얼음이다보니 오래 소환할 수가 없더라고. "
라한의 말처럼 슈라는 오랫 동안 물질계에 머물 수 없었다. 몸체
가 얼음이라서 이내 녹아 버리기 때문이다. 걱우 두 시간 내외? 그
정도가 지나면 강제 소환 당했다. 그나마도 별 움직임 없이 가만히
있을 때에나 그 시간을 머물 수 있을 뿐, 급격한 움직임을 보이고
나면 시간은 더욱 단축되었다.
"뭐, 그거야 몸체가 얼음이라서 그런 거 아닌가?"
"응. 그래서 얼음을 다른 재료로 바꾸고 싶어서, "
"얼음골렘을 얼음이 아닌 다른 재료로 바꾸겠다고? 어떤 재료
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재료는 상관없어. 네가 알아서 몸체를 바꿀 수 있도록 좀 해주
라. 만들 때부터 얼음으로 만들어지도록 되어 있어서 쉽지 않네.
마법진에 능한네가아니면도와줄사람이 없다. 내 인챈트보다네
마법진이 이런 쪽에서는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
라한이 투바를 슬쩍 띄워줬다. 이에 투바의 얼굴도 활짝 펴졌다.
자신을 높게 봐 주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칭찬을 해준
사람이 인챈트의 대가인 라한이라는 점. 이 하나만으로도 마법진
에 대해 인정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알았어. 그 정도야 뭐. 후후후. "
"그리고 여기 "
라한이 아공간을 열어서 마나석 두 개를 꺼내서 건넸다. 오래전
마나의 유적에서 구했던 마나석이었다.
"오호, 마나석 멋지군. 탐나는데. "
"하나는 네가 가지고, 나머지 하나는 슈라의 몸체를 재구성할
때 주입 좀 시켜. "
"날 준다고?"
"응. 도와주는 대가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투바 네 지식은 이만
한 가치가 있잖아. "
투바의 얼굴이 황홀하게 물들어갔다. 지식을 인정해주는 걸로도
부족해서 이런 대가를주다니. 이 정도 마나석이면 상당히 강력한
마법진을 구성할 수 있을 듯싶었다.
"뭐, 이런 것까지. 이런 대가를바라고도와주는게 아닌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나석은 이미 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나석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단순하기는. '
"나 그만 가볼게. 늦으면 이그니스가 날 삶아먹으려 들 거야. "
"그래. 야! 슈라 불러주고 가야지. "
"아! 맞다. 슈라! "
라한의 부름에 슈라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났다. 이에 투바가 호
기심 강한 얼굴로 그를 찬찬히 살폈다. 벌써 두 번째 보는 건데도
신기하기 그지 없었다. 저 정도 덩치와 힘이라니
-흠, 주인. 이번에는 빨리 불러주는군.
"하하. 뭐 그렇지. 근데 어쩌나? 난 어디 가봐야 하거든. "
-가다니?
"앞으로 널 저 녀석한테 맡길 생각이야. 거부하지 말고 받아
들여. "
슈라가고개를 천천히 돌려서 투바를바라봤다. 이어 얼굴이 팍
찡그려지며 고개를 홱 돌렸다. 투바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슈라는 마족을 막기 위해 생성된 골렘이다. 비록 마족과 싸운 적
은 없지만, 마족이라는 그 자체에 거부감을 가졌다. 골렘을 만들던
창조자가 마족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인. 마족에게 날 맡기는 이유가 뭐지?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그런 건 아니야. "
-그럼 이제 내가 필요 없어졌다고 생각한 건가? 하긴 주인은
내가 필요 없을 만큼 강해지기는 했지. 휴, 그렇군.
슈라의 어두운 얼굴에 라한이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가 널 저 녀석한테 준다고 했어? 잠
깐 맡기겠다는 거 지. "
-아, 그렇군. 후후, 난 또 주인이 날 버리는 줄 알았다.
"미치겠군. 내 옆에 있는놈들은다왜 이런지 에휴, 앞으로 저
녀석이 네 몸체를 바꾸는 연구를 할 거야. 옆에서 하라는 대로 해
라, 말이 안통할테니 눈치보고움직이고. 알았지?"
-알겠다, 주인.
슈라의 얼굴이 좀 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자아졌다. 라한이 좋
아서인지 투바가싫어서인지는 알길이 없었다. 하지만지금 라한
에게 속한 골렘이라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럼, 간다, 투바. 부탁해! "
"알았어. "
-나중에 보자, 주인.
라한이 날듯이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늦었다가는 이그니스의 엄
청난 잔소리가 시작될 터,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지난 다섯 달 동안 슈라의 몸체가 얼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뀌
었다. 하지만돌이나 쇠 같은 지정된 물체는 아니었다. 주변에 어
떤 재료가 많으냐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가변 재료였다.
또 그의 몸속에 마나석 하나를 더 집어넣어서 오래 머물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아무 일 하지 않고 서 있기만한다면 하루 종
일 머물 수도 있을 정도였다.
또 라한은 그 시간 동안 7 서클 마법까지의 주문을 모두 적었다.
외우지는 못하고 적어 놓는 데에만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물론 그 마법을 사용할 때 필요한 마음가짐이나 마법의 이해에
대해 배우기는 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주문을 적는 일에 불과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래 걸려도 너무 오래 걸린 편이었다.
"더럽게 많군 내가 알고 있는 마법이 겨우 그 정도였다니. "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 가장 큰 이유는 마법의 수 때문이다.
라한이 알고 있던 마법도 적지 않았지만 실제는 그보다 수십 배나
많았다. 너무 많은 수의 마법에 라한이 치를 떨 정도였다.
"어제 그레이트 그로우를 끝으로 7 서클 마법은 모두 끝났다. 오
늘부터 8 서클마법을가르칠 생각이다. 근데, 자신은 있는거냐? 8
서클 마법은 7 서클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따나가 들어가는데. "
"뭐 까짓것 해보자고. 어차피 메모만 할 건데. "
라한도 자신의 기운이 8 서클 마법을 감당할 수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7 서클 마법을 사용하고도 넉넉하게 남았기에 가능하지 않
을까 하고 생각했다.
"네 녀석의 마나는 너무 해괴망측해서 도무지 측량할 수가 없다.
그 정도가 7 서클까지 가능한지 8 서클까지 가능한지 말이다. "
"한번 해 봅시다 그려. "
"무모한 놈. "
이그니스도 라한이 도전할 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황당한 짓
을 수없이 많이 한 라한 아니던가.
라한은 마법을 배울 때 절대 무리하는 법이 없었다. 마법 조합을
할때도 성공을확신하기 전까지는 시도조차하지 않았다 이그니
스가 미친 짓이라고 말했던 수많은 조합도 라한은 성공할 거라고
완벽히 화신한 마법이었다. 남에게 무모하게 보일지 몰라도 라한
은 안전하다고 믿었기에 시행했음이다. 그러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안 되는 마법은 기록하는 정도로 만족했다. 대부분 마법사가 마법
주문에 목숨 거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럼 시작한다. 잘 적어라. "
"응. "
그렇게 8 서클 마법에 대한 공부가 시작되었다. 헌데 교육이 진
행되면 될수록 라한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스스로의 힘으로 8
서클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아직은 무리로군. 어쩌지. '
또 다른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제령기를 늘일 수 없을 듯했다.
헌데 깨달음이라는 건 얻고 싶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어떤 특정
한 계기가오기 전까지는 주문을 외우는 정도로 끝내야 할듯했다.
뮬라 상단의 본점 안.
쿨샤크가 이방인의 방문을 받았다. 몸 전체를 검은 옷으로 도배
한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였다. 하지만 검을 차고 있지는 않았다.
뮬라 상단의 후계자와의 대담이기에 무기를 빼놓고 들어온 탓이다.
"그래, 무슨 일로 왔소?"
".의뢰를 포기할 생각이오. "
쿨샤크의 물음에 사내가 낭패한 기색으로 어렵사리 대답했다
쿨샤크가 의뢰한 건 에펠 일행의 죽음이었다.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나메라 왕국 최대의 암살자 길드에 의뢰를 넣은 것이다. 그렇
게 결과만을 기다린 지 벌써 오 개월. 그는 암살자 길드에서 좋은
소식을 전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에펠 일행의 실력에 비
해 암살자 길드의 세력이 월등히 강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쿨샤크의 물음에도사내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자기 길드
의 치부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내가 망설이자 쿨샤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돈이 부족해서 그러시오? 그 정도 금액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오. "
" 그럼?"
"휴, 우리 능력 밖의 의뢰였소. "
사내의 대답에 쿨샤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멍청한 용병 세 명을
때려잡는 일이 어째서 능력 밖이라는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세 놈의 실력은 그리 강하지 않다고 알고 있는데?"
"그놈들은 그리 강하지 않았소. 문제는 그들에게 조력자가 있었
다는 것이오. "
"조력자?"
"그렇소. 처음엔두명이었는데, 얼마전에는한명이더군. 헌데
그자의 실력이 너무 강하오. "
사내의 말에 쿨샤크가 미간을 좁혔다. 조력자가 누구인지를 고
민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용병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놈 중에서 강한 놈이 있었나? 이상
하군.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런 건 없었는데. '
쿨샤크도 나름대로 조사를 한 후에 의뢰를 맡겼다. 정도를 알아
야 의뢰금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조사한바에 따르면, 에펠 일행은형편없는놈들이었다. 용
병이 된 것도상단호위를하기 직전이었고, 실력도 걱우 C 등급을
받을 정도였다 B 등급을 돈으로 받았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도대체 그 조력자라는 자가 얼마나 강하기에 포기한다는 말이
오. 고작두 명 아니오. 그것도한 명은중간에 빠졌으니 이제 한
명밖에 안 될 텐데 어째서?"
"혈전사에 들어도 부족하지 않은 실력이었소. 헌데 내가 아는
혈전사 중에는 그런 자가 없소. 아마 그 녀석들이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놈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소. "
그들은 아직 베르네가 떠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베르네가 떠
나기 직전에 암살행을 중지한 탓이다. 아마 지금 다시 암살행을 시
작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혈전사? 그런 놈들이 어떻게 혈전사를 안다는 말이오?"
"그건 우리도 모르오. 그들에 대해 나름대로 조사했지만 알려진
바가 전혀 없소. 한 가지 확실한 건. "
"확실한 건?"
"엄청난 실력자라는 거였소. 그리고 그 말은 의뢰를 맡을 수 없
다는 말도 되오. "
사내의 대답에 쿨샤크가침음성을흘렸다. 혈전사라니. 어느하
늘에서 갑자기 떨어졌는지는 모르나, 일이 모하게 틀어지고 있음
은 분명했다. 그들을 죽이지는 못해도 그들이 가지고 간 보물은 반
드시 찾아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좋소. 그들을죽이라는 의뢰는 철회하겠소. 대신 그가 가지고
있는 반지를 가져오라는 의뢰는 지속시켰으면 좋겠는데 가능하
겠소?"
"거절하겠소. 여기! "
말을 마친 사내가 주머니를 내밀었다. 의뢰를 맡으면서 선금으
로 받은 금액이었다.
사내는 이번 의뢰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의 휘하에 있던 암
살자 백여 명을 잃은 것이다. 전체 인원의 3 분의 1 에 해당하는 엄
청난 수였다.
"젠장. 사람 죽이려고 만든 길드가 고작 용병 세 놈을 처리하지
못하다니 "
"미안하게 됐소. "
"흥 그런 허접스런 곳에 맡긴 내가 잘못이지, "
쿨샤크의 말에 사내의 이마에 혈관이 붉어졌다. 화났다는 표시
였다. 헌데도 쿨샤크의 폭언은 멈출 줄 몰랐다.
"그래서 대륙 5 대 암살자에 의뢰를 넣었어야 하는데. 시간만 낭
비했군. "
"음. "
사내가 이를 악다물며 어렵게 분을 삼켰다. 의뢰에 실패했으니
뭐라할말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속으로는수치스러움과분노에
머리가 돌 것 같았다.
"흥. "
"그럼 이만. "
말을 마친 사내가 방을 나왔다. 들어을 때보다 더 처진 어깨가
애처로웠다.
쾅- !
"빌어먹을! "
사내가 나가자 쿨샤크이 책상을 내려쳤다. 에펠 일행이 도주한 지
벌써 오 개월. 지금 다른 곳에 의뢰한다면 거리 때문에라도 더 큰
돈을 지불해야 했다. 누가 뭐래도 상단을 이끌어 갈 후계자인 쿨샤
크에게 돈 낭비는 짜증나는 일이었다.
" 데메크 "
"예, 쿨샤크님. "
쿨샤크의 부름에 집무실 옆 쪽문에서 데메크가들어왔다. 그는
예전과 같은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 얼굴의 음침함은
과거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오 개월 동안 어느 정도의 성취가 있
었던 모양이다.
"어쩌지?"
"다른 곳에 의뢰를 넣으십시오. "
"어디가 좋을까? 벌써 멀리까지 도주해 버려서 휴. "
"다크라이더 길드라는곳이 있습니다. 대륙북부에서는아주유
명한 곳입니다. 최근 십 년 사이에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죠. "
다크라이더 길드는 엘베로에게 치를 떤 다크시안이 이끄는 곳이
었다. 과거 라한을 한 번 도와주고 잠적했던
다크라이더 길드는 케라스 왕국에 본점을 두었다 위치로는 대
륙 중북부인 셈이다 그곳은 라한이 파마리스 평원에 들어갔을 때,
정식으로 발족했다. 그리고 어려운 의뢰를 많이 받아들였고, 그 모
든 의뢰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다크시안의 치밀한 사전 조사가
그런 일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곳에서 할 수 있을까? 거리가 보통 먼 게 아닌데. "
"다크라이더 길드는 대륙 5 대 길드에 들 정도로 뛰어난곳입니
다. 최근 십 년 사이에 그 정도로성장한거죠. 아마, 시간이 좀더
지난다면, 대륙 최고의 암살자 길드가 될지도 모릅니다. "
다크라이더 길드는 그야말로 눈부신 성장을 거두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암살자 길드 서열 5 위에 당당히 랭크된 것이다. 일 년 전
까지만 해도 걱우 10 위권이었음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빠른 성장이
었다. 이 속도의 반만 유지해도 조만간 최고가 되는 건 불 보듯 뻔
해 보였다.
"알았어. 데메크가 의뢰를 넣어줘, 무엇보다 스케일러 링은 꼭
찾아야 돼. 알고 있겠지?"
"저, 그 전에 허락 받을 게 있습니다. "
"뭐지?"
"다크라이더 길드는 정보 수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입니다.
아마 의뢰를 넣으면 그를 죽이려는 이유를 하나씩 다 설명해야 할
겁니다. 물론 정보 제공을 하지 않아도 되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엄청난 금액을 지불해야 합니다. "
데메크의 말에 쿨샤크가 고민에 빠졌다. 정보 제공이라는 말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정보를 제공하다보면 라한을 배신했던 얘기까지 꺼내야 했다.
또 결혼을 약속했던 카류나를 버린 이야기까지 함께 말이다. 그렇
게 모두 까발리고 나면 자신의 명예가 형편없이떨어져 버린다 쿨
샤크가 고민하는 부분이 그 대목이었다.
그놈들. 입이 무거운 놈들인가?"
다크라이더 길드에서 어떤 정보가 흘러나왓다는 에기는 듣지
못햇습니다
알앗어 데메크가 알아서 설명해
알겟습니다 그럼이만
엘퐁소 지방에는 다크라이더 길드의 지부가 없엇다 이곳의 너
무작은 지방이기 때문이다 결국 의뢰를 넣으려면 큰도시까지 가
야 햇다 빠른 말로 달려도 5 일은 걸리는 거리였다
다시 댜륙으로
라한은 8 서클 마법을 기록하는 정도로 끝냈다 아주 조금이지
만 8 서클 마법을 시전할 만큼의 제령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끝났군
그렇군 9 서클은 모르지
아직 본적이 없다
그렇군
이근;스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9 서클에 대
한 애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8 서클의 인간 마법이 있다는 사
실도 투바에게 처음 들었다
하지만 분명히 잇다
있어
응 어딘가 있을 거다 십만 년도 더 오래 전이지만 9 서클 마법
사가 있었거든 "
"말도 안 돼. "
라한은 이그니스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9 서클이라니. 마나 고
리를 아무리 살펴봐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마나가 만들 수 있는 고리는 아무리 얇아도 손가락 마디만큼은
되어야 한다. 그 정도는 돼야 마나가 공명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헌데, 이 굵기로는심장주변에 아홉개의 띠를만들수 없었다. 제
아무리 촘촘하게 만들어도 자리가 안 나왔다.
"놀랄 것 없다. 인간이 아니니까. "
"그럼 그렇지. 누구야? 드래곤?"
"아니. 마족이다. 내 조상이었던분이지."
"너희 가문은 인간 마법을 엄청 좋아하는군. "
라한의 물음에 이그니스가 실소를 머금었다.
"훗, 그렇게 보긴 힘들어. 그분 이후로 인간 마법에 손댄 마족은
내가 유일하니까. "
"그런가?"
"나도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인간 마법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인간 마법을 7 서클까지 익힌 후에 8 서클 마법에 대해 고민
하기 시작했지. 그렇게 근 천 년이 지난 후에야 내가 가르쳐준 8 서
클 마법을 만들어냈던 거고. 9 서클 마법은 만 년 이상 걸렸을 거다.
어쩌면 9 서클 마법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물질계에
서 9 서클 마법을 연구하다가 실종됐거든. "
라한은 이그니스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인간이 할 일을 마
족이 한셈이기 때문이다. 자신 역시 8 서클마법을 연구해서 만들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냥 이그니스라는 존재를 통해서 배우려
고만 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어차피 7 서클까지의 마법은 인간이 만든 거
니가 "
"그것도 드래곤에게 받은 지식으로 만든 거겠지. "
"얘기가 그렇게 되나? 후후. "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이 시작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처음 마
법 지식을 가르쳐 준 존재는 드래곤이었고 그 마법을 더 확장시킨
존재는 마족이었다. 인간은 드래곤이 준 마법을 약간씩 응용하는
정도에서 만족했다. 노력할 줄 모르는 인간. 공짜 좋아하는 인간의
성격이 이런 곳에서 드러났다.
"쳇. 엄청 잘난 척 하는 인간이 이 정도라니. 같은 인간으로서
솔직히 부끄럽군. "
"그럼 앞으로 9 서클은 스스로 연구해서 만들어봐라. 지금부터
하면 되지. "
"그래서 더 부끄럽다. 마음속으로는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도 혼자 연구해서 만들기는 싫거든, 어떻게든 9 서클 마법을 구하고
싶으니. "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 자체만으로도 반쯤은 성공한 거다. 나머
진 네 선택에 달렸지. "
라한은자신이 없었다. 심법을새로만들고, 제령기로마법을사
용하는 법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더 이상은 자신 없었다. 솔직히
심법도 혈도라는 기존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게 아니었던가. 그
러고 보면 자신이 시작해서 완성시킨 분야는 단 하나도 없는 상황
이었다.
"이제 내 임무가 끝났으니 마계로 돌아가야겠군. "
"꼭 그래야하나?"
"그게 소환이다. 소환의 목적이 달성되면 돌아가야 하는 거지. "
이그니스의 말에 라한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근데 이상하군. 내가소환을 했으니 뭔가 대가를요구해야 하
는 거 아닌가? 난 소환을 그런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
"대가? 물론 있지. "
"응? "
"도련님을 부탁한다. "
이그니스의 진지한 말에 라한이 실소를 터트렸다. 어이가 없어
서라기보다 그의 말에서 걱정이라는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
족도 인간과 같은 감정이 있는 종족이다.
헌데 아직까지 마족에 대한 차별을 버리지 못한 듯했다. 피도 눈
물도 없는 매정한 종족이라는 차별 말이다.
'나부터 고쳐야겠군. '
둘의 첫 만남은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칠 개월 동안 지
내면서 정이 많이 들었다. 가족이라고 부르기는 힘들겠지만 동료
정도까지는 발전한 것이다.
"다시 부르면 어떻게 되는 거지?그때 일행이 되어달라는 소원
을 빈다면?"
"한번 소환했으니 더 이상은무리다 이미 너와나의 인연은 이
걸로끝났다는거지. 뭐, 정 보고싶으면마계로한번놀러 와라."
"마계라
이그니스는 그냥 해본 말이겠지만, 라한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는 마계를 그리 어둡고 칙칙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에 한 번
가봤던 곳이라서 더 그런지 몰랐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인연이 되면 또 보겠지. 후후. "
"그래. 인연이 되면
이그니스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투바와 프라하에게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떠나려는 것이다.
투바는 어차피 나중에 만날 테니 인사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또 프라하와는 그리 큰 정이 들지 않았기에 만날 필요를 느끼지 못
했다. 테세르 역시 하찮은 정령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기에 인
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그니스가 사라지자 라한이 씨익 웃었다. 어차피 정이라는 감
정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성격이었다. 떠난 건 떠난 거고 남은자
신은 스스로의 행보를 정해야 했다.
"테세르! 프라하! 투바! "
라한의 목소리가 오두막 주변에 울려 퍼졌다. 목소리에 제란기
를조금담아서인지 엄청나게 큰목소리였다. 이에 주변에서 어지
러운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라한의 외침을 듣고 달려오는 모양
이다.
"무슨 일이야?"
"왜 부른 거지?"
-주인! 왜 그래?
거의 동시에 도착한 투바와 프라하, 테세르가 의아한 듯 되물었
다. 라한은 실눈을 뜬 채로 일행을 찬찬히 살펴봤다
'프라하 녀석 많이 강해졌군. '
라한은 한 눈에 프라하가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그에게서 풍기
는 기세가 부드러워졌다는 게 느껴졌다. 저칠어만 보이던 기운이
부드러워졌다는 것. 그건 스스로의 기운을 통제할 줄 안다는 얘기
였다.
"후후, 이제 나가야지. 언제까지 이 동네에 처박혀 있을 거야?
안 그래?"
"오, 이제 나가는 거야?흐흐흐흐, 인간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
까? 궁금한데. "
투바의 대답이었다. 그는 인간 세상에 나온 적이 단 한번도 없었
다. 누군가에게 소환된 게 라한이 처음이었으니 당연했다.
"언제 출발할 거야 7"
"때는 내일. 목적지는 엘퐁소 지방. 목표는 쿨샤크! 방법은. 후
후. "
"크크크. 그 재수 없는 자식은 내가 죽이지. "
프라하가 음침하게 웃었다. 그는 쿨샤크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
졌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굴레를 벗은 존재들 때문이기는 했지만
처음 시작이 쿨샤크였으니 그런 마음을 먹을 만도 했다.
도 서 명 : 1 서클 대 마법사 5
지 은 이 : 양 강
출 판 사 : (주)로크미디어
출판년도 : 2005 년 4 월 16 일
봉 사 자 : 박종란

쿨샤크의 실종

스카라트 산맥에 들어갔던 로이나, 베르네, 시스마란. 그들은 이곳을 근 두 달 동안


헤매고 다녔다. 물론, 라한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라한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애초에 라한이 그곳에 간 적이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설사 라한이 스카라트 산맥에 들렀다 하더라도 흔적을
남길 리 만무했다. 자신들을 노리는 자가 있을 때, 흔적을 남길 만큼 라한이
허술하지 않았음이다.
그렇다고 지난 두 달 동안 허송세월만 한 건 아니었다. 시스마란의 검술 실력이
어느 정도 선장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로이나가 가르쳐준 검술의 완성도를 감안하면
상당히 느린 성장이었다. 시스마란의 검에 대한 자질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탓이다.
그나마 로이나의 뛰어난 가르침과 시스마란의 배우겠다는 집념이 강했기에, 이
정도의 성과라도 올릴 수 있었다.
"라한 형님은 대체 어디 계실까요?"
"글쎄요. 이곳에 없는 것 같네요. "
"그럼 어쩌죠?"
시스마란과 로이나가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베르네는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자신과 라한이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알렸기 때문이다.
"라한이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해야겠군요. "
"그렇죠. "
"음, 제가 아는 라한은 당하고 참는 성격이 아닙니다. 하나를 당하면 열을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죠. "
로이나의 말에 시스마란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라한의 성격을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
자신이 본 라한은 자상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었다. 또, 동생들을 무척 아꼈다. 헌데,
로이나는 라한의 나쁜 성격만 아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라한과 친한 척 하니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다.
당했을 때 돌려준다면.
"쿨샤크나 그의 아버지에게 가겠죠. "
로이나는 라한이 뮬라 상단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다. 라한의 본성을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헌데도 이곳으로 온 건 일종의 도우미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시스마란을 라한을 도울 조력자로 점찍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럼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군요. "


"그럼 돌아가죠. "
네.
"잠시만. "
시스마란의 대답에 베르네가 제지를 하고 나섰다.
"말씀하십시오, 어르신. "
"넌 왜 라한이라는 그 녀석을 찾으려고 하는 게냐?"
그건 저.
베르네의 물음에 시스마란이 주저하며 대답을 못했다.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그냥 원래 일행이었기에 다시 찾고 싶었다? 왠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그 이상으로 라한을 겨정하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게.잘 모르겠습니다. "
"쯧, 쯧. 너희들 대화를 들어보니 라한이라는 녀석이 누군가와 싸웠던 모양이구나.
헌데 그 세력이 만만치 않고. 맞느냐?"
"예. 맞습니다. "
"예. 그런 것 같습니다. "
베르네의 물음에 시스마란과 로이나가 동시에 대답해왔다. 원래 로이나의 서열이
위겠지만 지금은 유희 중이다. 베르네의 현재 모습이 늙은 마법사였으니 말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만나서 뭘 하려는 게냐?"
그거야 저도 형님을 도와서.
"도와서?"
"형님이 하려는 일을 도울 생각입니다. "
시스마란의 대답에 베르네가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누가 봐도 깔보고 있음이
역력한 그런 웃음이었다.
"허허, 이놈 보게. 라한이라는 아이가 엄청난 마법사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예. 저희 형님은 대마법사이십니다. "
"그런 녀석에게 너의 그 알량한 검실력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나도 마법사라서 잘 안다. 검사의 보호가 마법사를 돕기는 하지만, 그것도 실력이
엇비슷할 때의 얘기다. 대마법사 정도 되는 실력자에게 너 정도의 검사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거지. "
"아무리 미약한 힘이라도 도울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한 것 아니겠습니까?"
시스마란의 당당한 대꾸에 베르네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순해 보이기만 하던
시스마란이 이렇게 발끈할 수도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꼬리를 내릴 수는
없었다. 로이나가 시킨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쯧, 쯧. 네가 도움이 되는 상대는 라한이라는 아이의 적이 약한 존재일 때다 헌데,
그런 적을 상대할 때는 네 도움이 없어도 무리가 없다는 게지. "
"그럼."
"잘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
베르네의 말에 시스마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도 이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자신은 검술보다 마법에 더
재능이 있다고 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배워온 검술이 아니던가. 기사라는 꿈 하나만 가지고 십 년
이상을 살아왔건만 뜬금없이 마법사라니. 너무 황당해서 대꾸할 의욕도 없었다.
"또, 그 마법사 타령입니까?"
"이놈이 어른 말에 타령이 뭐냐, 타령이. 너한테 맞으니까 말하는 게지."
"아무리 그러셔도 전 기사가 된다는 생각만 가지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
"넌 마법사가 어울린다니까. "
시스마란은 베르네의 고집이 답답했다. 왜 자신에게 마법을 그렇게 강요하는지.
자신의 신체가 마법에 어울린다 하더라도 자신과 친한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너무
매달린다는 생각을 당최 지울 수 없었다.
베르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기사? 물론 좋은 직업이다. 한나라에서 인정받을
수 있고, 신분 상승도 가능하니까. 헌데, 시스마란의 체질은 마법에 너무 특화되어
있었다. 저런 몸으로 마법사가 되지 않는 건 마나에 대한 모욕이다. 또, 자신의
지금 몸은 노인이 아니던가. 나이든 사람이 말을 하면 배우겠다고 할만도 하건만.
도대체 허락할 기미가 안 보였다.
"빌어먹을 놈 "
"대체 왜 그렇게 마법사가 되라고 하시는 겁니까?"
"마법사에 딱 알맞은 몸이니까. "
"에휴, 제가 마법사가 되면 어느 정도 경지까지 오를 수 있습니까?"
시스마란의 물음에 베르네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처음으로 긍정 비슷한 의미의
대답이 나왔다. 어찌 보면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최소 5 서클은 가능하다. "
라한 형님은 이미 6 서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형님께 제대로 된 도움을
주려면 6 서클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시스마란은 라한을 6 서클 마법사라고 생각했다. 라한이 그 정도의 실력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아직 라한의 특이한 마법과 신체에 대해서 몰랐기에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좋다. 내가 널 7 서클 마법사로 만들어주지. 배울래, 말래? 마지막 기회다.
"7.서클?"
"그래, 이 망할 놈아. 어쩔래?"
가능하기는 한 겁니까? 전 7 서클 마법사가 있다는 얘기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역사서에는 7 서클 마법사의 존재가 남아 있었다. 허나, 역사를 한낱 이야기의
하나로 치부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때문에 역사를 실제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허황된 이야기라 생각하는 것이다.
시스마란도 이런 부류였다. 역사는 역사일 뿐. 현 대륙에 없으니 7 서클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배울 거야, 말 거야 7"
"7 서클이 가능하다면 배우겠습니다. "
시스마란의 입에서 마법사가 되겠다는 말이 나왔다. 그건 기사가 되는 걸
포기하겠다는 말과 같았다. 정말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시스마란이 마법사가 되는 길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라한이었다. 지금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것. 어떻게든 강해져야 라한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말, 이 때문에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내가 가르쳐주지. 후후, 따라와라. "
"예?"
로이나. 난 이 녀석을 데리고 잠시 어디 좀 가야겠다.
예. 베르네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셨다면야.
베르네의 전격적인 결정에 시스마란이 머리를 긁적였다.
갑자기 어딜 간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 이곳은 스카라트 산맥이
아니던가. 험지가 분명한 이곳에서 일행을 나누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최소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헌데 로이나의 태도가 더 의문스러웠다. 자신이야 두 명이지만 로이나는 혼자가
아닌가. 헤어지면 그만큼 위험에 더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저, 어르신. 어딜 가더라도 마을에 가서 헤어지는 게.
그럴 필요 없다. 로이나는 네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하니까. 가자. "
말을 마친 베르네가 시스마란의 손목을 끌었다. 그 상태로 스카라트 산맥의
동쪽으로 향했다. 시스마란 몰래 로이나에게 눈을 깜빡이는 걸 잊지 않았다.
-누님. 반말한 것 용서해 주십시오.
-후후, 고생해.
원래 목적은 베르네가 시스마란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게다. 그냥 마법이라는 것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게 하는 것, 마법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 그게
원래 그들의 계획이었다.
헌데, 베르네가 시스마란의 신체에 반해 버렸다. 그냥 동기부여만 하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용언을 가르칠 수는 없겠지만 존재하는 인간 마법
7 서클까지는 최대한 열심히 가르쳐 볼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저 녀석한테 마법을 가르치라고 해도 되려나?'
로이나의 겨정은 일견 당연했다. 베르네의 마법 지식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론 드래곤이라는 종족과 비교했을 때 부족하다는 말이다. 베르네는 각종 잡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인챈트, 정령술, 검술, 토목, 대장장이,
미술까지. 상당히 다양한 분야에 아우르는 방대한 분야였다.
헌데, 마법이라는 학문은 드래곤 중 최악이었다. 물론,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게 되는
용언은 다른 드래곤과 비슷했다. 헌데 마법사로 유희를 즐기면서 알게 되는 인간
마법에는 너무 무지했다 마법사로 유희를 단 한 번도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그가 시스마란에게 가르쳐 줄 인간 마법을 얼마나 알고 있을지.
로이나는 그게 겨정스러웠다
'알아서 하겠지. '
라한 일행이 엘퐁소 지방으로 공간 이동했다. 뮬라 상단까지 걸어서 다섯 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들은 이동할 때 라한이 만들어 준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했다. 물론 라한은
스크롤 없이 스스로의 마법으로 이동했다. 불필요한 곳에 스크롤을 사용할 만큼
라한은 낭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음, 인간의 향기. 오- 이건 여자의 향기구나. 좋군. 좋아. "
"뭐?"
"아니야. "
엘퐁소 지방으로 와서 가장 좋아하는 이는 투바였다. 아직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멀리서 느껴지는 인간의 향기와 그 안에 담긴 피. 투바의 신경을 모하게 자극한
듯했다.
"후후, 좋아. 좋아. "
"야, 투바!"
"어?"
투바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라한이 제동을 걸어왔다. 그냥 방치했다가는 미친놈
소리를 들을까봐 겨정되었다.
물론 투바 혼자만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깨끗하게 무시할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일행이라는 것. 그의 옆에 자신이 있다는 게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자칫하면
미친놈 일행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실 웃지 좀 마. "
"왜?"
"아니면 좀 품위 있게 웃던가. "
"내 웃음이 품위가 없나?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 바하라 궁에서는 내 웃음 한 번에
시녀들 수십 명이 우수수 넘어졌는데. 살인 미소라고 난리였다고. "
투바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자신과 일행이 되는 이들
중에는 정상적인 놈이 없는 듯했다.
프라하는 얼핏 근엄해 보이지만, 속 좁기로 유명했다. 테세르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투바를 믿었건만. 어쩜 하나같이 이 모양인지.
정상적인 사람은 유일하게 자신뿐인 것 같았다.
'에고, 돌겠군. 세상에 멀쩡한 놈이 나 하나뿐이라니. '
라한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면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을 거였다. 일행 모두가
라한의 웃음을 섬뜩해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일행 중에 정상은 단 하나도 없었다. 또, 인원 구성 자체도
비정상적이었다. 마족, 인간, 라이칸드로프, 정령, 골렘. 역사를 다 뒤져봐도 이런
식으로 짜인 파티는 없었다.
"라한, 바로 갈 생각인가?"
"얘는 갑자기 왜 이래?"
숲에서 망나니 사촌처럼 행동하던 프라하가 근엄하게 말을 걸어왔다. 숲에서와는
너무 다른 모습에 투바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그곳에서와 이곳에서의 말투가
이렇게 다른지. 역시 정상적 인 놈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바로 가야지. 시간 끌 필요 없잖아, "
"그러지. "
프라하가 끝까지 근엄한 표정을 고수했다. 아무래도 남들 보는 곳에서는 근엄하게
행동하는 병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반면, 투바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오- 여자의 향기'라는 말만 계속 되풀이했다.
아무래도 주 전공은 마법진이 아닌 여성학인 것 같았다
'미치겠군. 숲에서는 이러지 않았잖아. '
그나마 다행이라면 테세르가 잠잠하다는 것 정도였다. 로브 안에 숨어서 명상을
하는 지 도통 말이 없었다. 아마, 2 서클마법 주문을 외우는 듯했다.
라한은 이그니스에게 배운 마법 주문 가운데, 2 서클 주문 전부를 테세르에게
가르쳐줬다. 그때부터 테세르는 마법을 익히는 데 박차를 가했다.
"가자고. "
말을 마친 라한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프라하가 조용히 뒤 따랐다.
하지만 투바는 마을에 들어가자마자 주변을 둘러보기 여념이 없었다. 입에서는 '오-
여자의 향기'라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면서.
"라한. 어디 가서 목이나 좀 축이고 가는 게 어때?"
"그럴까?"
라한도 목이 칼칼했다. 아니, 인간이 만들어준 음식이 그리웠다. 숲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해서였다.
짤랑!
여관문을 열자 청량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여관홀에서 술 혹은
식사를 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로 잠깐 모였다. 하지만 그냥 평범한 일행이라
생각했는지 이내 고개를 돌렸다
헌데 단 네 명. 여관의 여종업원과 홀의 구석에 있던 여자 용병 셋은 달랐다.
그들은 투바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후후, 역시 내 멋진 모습에 반했군. "
여자들의 시선을 느낀 투바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처럼 투바는 잘
생겼다. 아니 더럽게 잘생겨서 아름답게 보일 정도였다.
너무 잘생기면 여자들이 외면한다? 남자는 아름답게 생긴 것보다 멋있게 생겨야
한다? 그건 평균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을 때의 얘기 이다. 투바 정도의 외모가 되면
그런 제약은 아무 쓸모도 없었다.
'골치 아프군. '
시선을 애써 무시한 라한 일행이 홀의 중앙 부분에 앉았다. 다른 곳에는 손님이
가득 차 있어서 앉을 곳이 거기뿐이었다.
'하필 앉아도 이런 곳이냐. 젠장. '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라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뭘 드시겠어요?"
"아무거나. "
여 종업원의 말에 라한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여자의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신경
쓰여서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또, 분명 리더는 자신이건만 투바만 바라보고
주문을 받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흥. 뭘 드시겠어요?"
여종업원이 또 다시 투바에게 주문을 요구했다. 좀 전보다 더 간드러지고 애교
넘치는 목소리였다. 이에 투바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로 입을 열었다.
"오, 레이디께서 이런 험한 일을 하시다니. 그 고운손이 상할까 염려됩니다. "
"쿨럭! "
라한이 사례 걸린 듯 기침을 해댔다. 근엄함을 유지하던 프라하조차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아니에요. "
"레이디가 좋은 요리를 추천해보십시오. 그대가 추천하는 요리라면 분명히 맛있을
거라 믿습니다. 아름다우신 레이디, "
"예. "
짧게 대답한 여종업원이 식당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라한은 여종업원의 얼굴이 붉어지는 걸 분명히 봤다. 눈에 황홀한 빛을 띠고 있는
것도 함께 말이다.
'그거 참 희한하네. '
별말 아닌 것 같은데도 여종업원은 정신을 못 차렸다. 항상 실리를 따라 움직였던
라한에게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잠시 후, 여종업원이 두 손 가득 요리를 들고 나왔다. 그동안 화장을 했는지
전과 조금은 다른 얼굴이었다.
"맛있게 드십시오, 손님. "
여종업원의 말에 라한이 반짝 눈을 빛냈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용하게
말했다.
"레이디가 주는 음식이니 당연히 맛있을 겁니다. 후후후. "
"헉!"
"겨!"
라한의 말에 투바와 프라하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하지만 라한은 여종업원의 얼굴이
황홀하게 변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투바가 했으니 자신도 가능할 거라
자부심의 발로였다. 하지만 여종업원은.
"흥, 꼴에 눈은 높아가지고. "
여종업원이 라한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그리고 못 볼 걸 봤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주인은 못생겨서 안 통해.
라한의 행동을 계속 살피던 테세르가 슬쩍 비꼬았다. 라한의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름대로 괜찮은 얼굴이라 생각했건만, 이런 취급을 당하다니 억울하고
분했다
'젠장. 카류나한테는 잘 통했는데. '
여종업원이 돌아간 후에도 라한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기분이
최악이라서인지 음식도 맛이 없었다. 억지로 입안에 우겨 넣고 아무 생각 없이 씹어
삼킬 뿐이었다.
"라한. 넌 얼굴 때문에 안 돼. "
음식점을 나오는 순간 투바가 슬쩍 비꼬았다. 이에 라한의 이마에 혈관이 툭툭
튀어나왔다. 그리고 이성이 끊어지는 듯 정신이 아득하게 변했다.
"라한 정도면 잘생긴 편 아닌가?"
프라하의 말에 라한의 의식이 서서히 되돌아왔다. 그나마 그의 말이 위로가 된
모양이다.
실제 라한도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투바가 더럽게 잘생겨서 평가 절하 되었을
뿐. 평범함보다 약간 상위에 속하는 얼굴임에 분명했다.
"투바 "
"어?"
"앞으로 내 앞에서 느끼한 행동을 했다가는 여자가 쳐다보고 싶지 않을 얼굴로
만들어주겠어, 아주 아작을내주지. 믿어도 좋아."
라한의 말에 투바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아는 라한은 한다면 하는 놈이다.
특히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라면 웃으면서 즐길 수 있는 그런 성격이었다.
앞으로 투바의 애정 행각에 심대한 영향을 줄 게 분명했다.
"아, 알았어. "
"자, 출발하자고. "
프라하가 앞서 나가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좀 전에 비해 한결 밝아져 있었다.
투바가 라한에게 당한 게 유쾌한 모양이다.
툭- !
"뭐해? 가자고. "
라한이 투바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프라하를 따라갔다. 이에 투바가 소스라치듯
놀라며 그 뒤를 따랐다.
'젠장, 어쩌다가 내 신세가 이렇게 됐는지. 마계 서열 2 위인데. '
라한에게 씨도 안 먹히는 걸 알기에 차마 서열을 들먹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쌓인
게 많았는지 눈만큼은 매섭게 치떴다. 라한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을 풀며 아닌
척 실실 웃었지만.
야심한 밤.
뮬라 상단의 후계자인 쿨샤크가 안절부절못하며 방을 서성였다.
"오늘쯤이면 연락이 올 텐데, "
일주일 전. 데메크가 뮬라 상단을 떠났다. 다크라이더 길드를 방문해서 에펠 일행을
처리하는 의뢰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4 일 전에는 의뢰를 무사히 마쳤다는
보고를 받았다 헌데, 이틀 전 다크라이더 길드에서 데메크를 정중히 청했다. 의뢰의
이유와 전후 사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답답해 미치겠군. "
이틀 전에 다크라이더 길드로 갔으니 오늘 낮에는 길드장이나 길드의 수뇌부를
만났을 것이다. 밤새도록 얘기할 리 없으니 저녁에는 보고를 받아야 정상이었고.
헌데 자정이 넘었음에도 도무지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똑! 똑!
쿨샤크의 상념이 한창 진행 중 일 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데메크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
"그래?"
짧게 반문한 쿨샤크가 방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40 대 하인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종이를 내밀고 있었다. 데메크가 보내온 서신인 듯했다. 하인의 서신을
낚아챈 쿨샤크가 입을 열었다.
"수고했다, 나가봐라. "
"예, 도련님. "
하인이 사라지자 쿨샤크가 서신을 뜯어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얼굴이 조금씩 펴졌다.
"너무 꼬치꼬치 캐물었군. 암살자 길드 치고는 특이한 곳이야. 그래도 의뢰를
받아들였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후후후 "
다크라이더 길드는 규율이 엄한 곳이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면서도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특이한 곳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누가 봐도 선량한 사람은 절대
해치지 않았다. 선량한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위해서 의뢰의 배경을 샅샅이 조사하는
셈이다. 물론, 선량하다는 말을 붙일 사람이 너무 드물었다는 게 문제이기는
했지만.
화라락!
쿨샤크가 벽난로에 서신을 던져서 태워 버렸다.
"며칠 후면 데메크가 돌아오겠군. "
말을 마친 쿨샤크가 침대에 누웠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남은 건
다크라이더 길드가 가져올 소식을 차분하게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채챙!
쿨샤크가 누웠을 때, 작은 금속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목 아래에서 섬뜩한 예기가
느껴졌다. 누군가가 자신의 목에 검을 갖다 댄 것이다.
"누, 누구?"
"대답은 나중에 해주지. "
퍽-!
말을 마친 괴 침입자가 쿨샤크의 머리를 강하게 두드렸다. 이에 쿨샤크가 침대 위에
서서히 쓰러졌다. 머리에서 피가 나지 않는 걸로 봐서는 큰 부상은 아닌 듯했다.
"이 녀석은 5 백 골드짜리로군. "
말을 마친 괴 침입자가 쿨샤크를 어깨에 멨다. 조금의 무게도 느끼지 못하는 듯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괴 침입자가 문을 통해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덜겨!
삑삑!
"누구냐!"
누군가의 외침이 상단에 울려 퍼졌다. 침입자를 발견하고 소리를 지른 모양이다.
하지만 괴 침입자는 그 외침을 무시하며 상단의 구석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한참
달리다 상단 본점의 담에 이르렀고 가볍게 넘어서 사라졌다. 새가 나는 모습과
흡사할 정도로 가볍게.
한편, 쿨샤크를 잡기 위해 엘퐁소 지방에 도착한 라한 일행.
이곳에서 아주 황당한 소문을 접했다. 바로 어제 쿨샤크가 납치됐다는 소식이었다.
뭐 볼 거 있다고 그딴 놈을 납치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라한이 노리던
목표를 누군가 먼저 건드린 건 분명했다.
"라한, 어쩌지?"
"미치겠군, 대체 어떤 놈이 그 자식을 유괴한 거지?"
"잘 된 거 아닌가? 어차피 라한 너의 목표가 그놈이었다면서? 누군가 대신
처리했으면 충분하지 뭘 그래. "
마지막 투바의 말에 라한과 프라하가 눈을 부라렸다.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가 엿보였다.
라한과 프라하. 그들은 쿨샤크를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 단순히 그의 죽음을 바란
게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복수를 해야 화가 풀릴 성 싶었다.
"어림없는 소리. "
"맞아.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할 거야. "
라한과 프라하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그 모습에 투바가 소름 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된 게 마족보다 더한 살기를 풍길 수 있는지. 과연 저들이
인간과 라이칸드로프가 맞나 싶었다. 그게 아니면.
'내가 마족이 맞나? 살기에 겁먹다니. '
흠, 흠. 그럼 직접 처리해야지. 손에서 풍기는 진득한 피냄새만이 살아가는 이유가.
"가자. "
"그러지. "
투바가 애써 변명을 늘어놓으려 할 때, 라한과 프라하가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혼자 남겨진 투바만 바보가 되어서 남겨졌다.
'젠장. 뭐가 이래?'
라한 일행이 뮬라 상단 본점 입구에서 10 미터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쿨샤크가
납치되어서인지 본점 곳곳이 살풍경스러웠다. 몇 몇 순찰을 도는 사람 외에도
수많은 호위무사들이 저택 곳곳에 숨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후계자라는 건가?"
"어쩔 거야?"
프라하의 물음에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모습이었다.
그의 행동에 투바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칭 대마법사와 마왕의 아들, 엑스마스터가
있는데 이렇게 조심스러운 움직임이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야, 그냥 밀고 들어가자고. 뭐가 무서워서 그러는 건데?"
"그래야겠군, "
라한의 결론도 투바와 같았다. 어차피 지금은 뮬라 상단 전체보다 자신의 세력이
강했다. 물론,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저곳에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하지만, 라한의 감각에는 그 정도 되는 인물이 잡히지 않았다. 뮬라 상단의
호위무사 정도로는 라한 일행 중 그 누구도 처리할 수 없을 터. 미리부터 겁먹고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라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프라하와 투바가 그 뒤를 따랐다. 테세르는 라한의
로브 속에서 고개만 슬쩍 내밀었다.
-주인. 너무 무모하게 싸우지 말라고. 나 마법 공부하는데 방해되니까.
퍽-!
- 꾸웩!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테세르가 있던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이에 테세르가 비명을 질렀다.
테세르가 한 말은 라한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한 말이었다. 쿨샤크가 사라져서
짜증나 미치겠는데, 마법 주문이나 외우고 있다니.
"멈춰라! "
라한이 상단 입구에 도착하자 호위무사들이 그들을 제지했다. 이에 프라하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레드리안에게 라한과 프라하가 왔다고 전하게. "
프라하의 근엄한 말투에 호위무사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근엄함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정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약속은 하셨습니까?"
"허허허. 일단 레드리안에게 내가 한 말을 전해보게. "
"알겠습니다, 그럼. "
두 명의 호위무사 중 한 명이 저택 안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라한은 시작부터 큰 충돌이 있으리라 예상했다. 프라하가
레드리안의 이름을 직접 불렀기 때문이다. 호위무사 된 입장에서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으니 충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헌데, 상대는 프라하의 근엄함 때문에
섣불리 발끈하지 못했다. 오히려 엄청난 지위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죄스러운 표정까지 지었다.
"프라하 제법인데. "
-똥개가 잘나봐야 똥개지 .
퍽-!
프라하를 욕하는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또 한 번 주먹을 휘둘렀다. 요즘 테세르는
매를 버는 묘한 재주를 익혔다. 로브 속에서 마법 공부는 안하고 맞는 법만
공부하는 모양이다.
"프라하. 내가 대신 팼다. "
"후후. "
그들이 사사로이 농담을 주고받고 있을 때, 안쪽에서 십여 명의 인원이 서서히
다가왔다. 상단주인 레드리안을 비롯한 측근 호위 무사들이었다.
그들이 다가오면서 주변 정원에 모한 기류의 움직임도 함께 느껴졌다. 상단주가
움직이면서 은밀하게 호위무사를 대동한 듯했다.
"오랜만이군 "
"흠. 살아 있었군. "
레드리안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했다.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라한 아니던가.
설사 살았더라도 반쯤은 폐인이 되어 있을 거라 믿었었다.
"죽기를 바라고 있었나?"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았지. 자네들이 살아 있다면. 내 아들의 실종도 이해가
가는군. 벌써 죽인 건가?"
레드리안은 쿨샤크가 실종된 이유를 라한에게서 찾았다.
라한과 쿨샤크. 그 둘은 서로 간에 원한이 깊었다. 또 쿨샤크를 깔끔하게 유괴해갈
실력으로도 충분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바라는 게 뭔가? 이미 죽었다면 시체라도 넘겨주게. 혹, 내 목숨을 원하는 건가?"
"이 아저씨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쿨샤크를 유괴하기라도 했다는
얘기야? 내가 그런 놈으로 보여?"
"후후, 내 목숨을 바라는 거라면 기꺼이 주겠네. 어차피 자네를 막을 힘은 내게
없으니까. 하지만, 그분들에 대한 정보를 바라는 거라면 포기하게. 나도 모르고
있으니, "
라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졸지에 유괴범으로 몰렸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유괴한 거 아니라니까. "
"자네를 이해할 수가 없네. 자네 정도의 실력자가 왜 그렇게 발뺌을 하는 겐가?"
"돌아 버리겠군. 뭔 말이 통해야지. 쿨샤크 그 자식이 살던 방으로 안내해. "
라한이 재차 부정하자 레드리안도 뭔가 잘못됐다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라한이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의 실력이면 모조리 죽여 버리고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는 실력이니 말이다.
"따라오게. "
레드리안이 몸을 돌리자 그의 일행들도 따라서 몸을 돌렸다. 심지어 매복해 있던
자들까지. 그 뒤를 라한이 씩씩거리며 뒤 따랐다. 아직도 유괴범으로 몰렸던 분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젠장. 나를 유괴범으로 생각하다니. "
-주인. 원래 쿨샤크 유괴하려고 했잖아. 한 발 늦었을 뿐이지.
퍽!
오늘 테세르는 맞으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계속 라한의 속을 긁으니 말이다.
라한이 뮬라 상단 안으로 들어갔을 때, 로이나가 뮬라 상단 근처에 도착했다.
실피드!
스스르르륵!
로이나의 부름에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미풍을 일으키며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왔군.
라한이 어디 있지?
로이나는 라한과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지 못했다. 라한이
스스로의 기운을 숨겼기 때문이다. 실피드 역시 라한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처음 라한의 기운을 느꼈던 건 강한 마법을 사용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은
바람이기에, 어디든 갈 수 있는 존재이기에 라한을 직접 보고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말을 마친 실피드가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직접 돌면서 라한을 찾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실피드가 사라지자 로이나의 표정이 아련하게 변했다. 이제 곧 있으면 만나게 된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자신을 알아볼까? 갖가지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유괴범을 찾아라
쿨샤크의 방에 들어온 라한이 주변을 찬찬히 훑었다. 유괴를 했던 자가 남긴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한참 돌던 라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미치겠군. 이번엔 또 뭐야?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라한의 말에 투바가 의문을 표해왔다.
또 바람인데.
또?
응.
실피드는 모르고 있었지만, 라한은 실피드의 방문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문자가 테세르와 같은 정령이었고 그에게서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넘어갔었다. 살기를 비롯한 나쁜 의도가 느껴졌다면 오래전에 한 판 붙었을 터였다.

"이번에도 넘어갈 거야?"


"레드리안은?"
"나갔어. 용병 길드에 사람 찾는 일을 의뢰했나봐. 용병단 대장이 왔다고 보러
간다더군.
"그럼 해볼까? 매직라인 프리즌!"
라한의 중얼거림에 쿨샤크의 방 주변에 은은한 빛이 원을 이루며 감돌았다. 라한이
느꼈던 실피드의 위치를 딱 둘러싸는 원이었다.
매직라인 프리즌(7 서클 - 비클래스 마법). 상대를 가두는 이 방법은 조합 마법이다.
이그니스에게 마법을 배우면서 본래 마법에 흑마법을 가미해서 조합해낸 것이다.
이 때문에 물질계와 마계, 환계를 통틀어서 라한만이 이 마법을 알고 있었다.
라한이 마법을 외우자 프라하가 라한의 곁에 다가왔다 그도 라한과 투바의 대화를
들었음이다.
"어디보자. 바람의 정령인가?"
-.
"그만 나타나는 게 어때? 아닌 척 해봐야 소용없어."
라한의 외침에 원의 중앙에서 희미한 무언가가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로이나가
불러냈던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였다.
-왕을 뵙습니다.
실피드의 등장에 테세르가 잽싸게 로브에서 나왔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더니
극도로 공경하는 자세를 취했다.
"오호라. 정령왕이었군. "
-날 어떻게 알아본 거지?
"느껴지니까. "
-기운을 두고 온 나를 느꼈다고? 믿을 수 없다.
"믿거나 말거나 "
실피드는 기운의 거의 대부분을 정령계에 두고 왔다. 물질계에 가지고 올 수 있는
기운조차도 정령계에 두고 온 것이다. 물질계의 존재들이 기운을 감추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방법이었다. 아예 기운을 두고 물질계에 와 버리는. 누군가가 실피드의
기운을 느낀다는 그 자체가 말이 안 되었다.
황당해하는 실피드에게 라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의도가 뭐야? 뭣 때문에 날 찾아온 거지?"
-바람의 정령이 뭣 때문에 널 찾은 거라고 생각하나?
누군가가 날 찾으라고 시켰겠지. 근데 말이야. 대체 누가 날 찾고 있을까?
정령왕까지 부려서.
-곧 알게 되겠지. 후후.
말을 마친 실피드가 서서히 사라졌다. 라한이 시행했던 매직라인 프리즌을 완벽히
무시하는 모습이었다.
'쳇. 정령왕이라서 그런가? 안 통하네. '
라한은 실피드가 매직라인 프리즌을 벗어나 버리자 허탈했다. 그를 오랫동안
가두지는 못하더라도 잠시나마 주춤하게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헌데, 처음
약간 제약을 가하는가 싶더니 무리 없이 벗어나 버렸다. 아마 처음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생소한 마법에 당황했던 것이리라,
"테세르! 원위치! "
-넵!
라한은 테세르가 실피드에게 한 행동도 마음에 안 들었다. 자신에게는 그 정도로
공경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테세르가 자신보다 실피드를 더 높게
평가했다는 게 화가 치밀었다.
"테세르! "
-응, 주인.
"앞으로 나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마라. "
-응?
"대답해. "
-알았다, 주인
라한은 테세르의 재차 대답을 듣고서야 얼굴을 풀었다.
바람의 정령왕이라.
"대체 누굴까?"
"곧 알게 되겠지. "
프라하와 투바의 말에 라한이 조용히 대꾸했다.
로이나의 앞 쪽에 실피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나타났을 때보다 약간은 더
희미한 모습이었다. 라한의 마법을 빠져나오면서 힘을 쾌 많은 소진한 듯했다.
"어떻게 됐어?"
-그 전에. 라한이라는 그 인간. 대체 어떤 놈이지?
"왜?"
로이나의 물음에 실피드가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사실 그대로를 얘기해주기는
자존심 상했다. 그렇다고 거짓을 늘어놓는 건 정령왕의 품위에 맞지 않았다.
-그가. 날 알아봤다.
"그게 뭐가?"
-기운을 감추고 있던 나를 정확하게 잡아냈다.
"말도.안 돼."
로이나는 실피드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설사 자신이라도 기운을 감춘 정령을
찾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헌데, 라한이 실피드를 알아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령을 찾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더 강한 정령을 옆에 두는 길 뿐이다. 그 강한
정령이 약한 정령의 존재를 알려줄 때에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헌데, 테세르가
실피드보다 강하다? 그건 믿기 어려웠다. 아니, 정령계 그 누구도 정령왕인
실피드보다 강할 수는 없었다. 다른 속성의 정령왕이라 하더라도 비슷한 정도에서
그칠 뿐이었다.
-나도 믿어지지 않지만 사실이다.
"만나보면 알겠지. 지금어디 있지?"
-저기 저 집 안에 있더군.
"알았다, 수고했어, "
로이나의 인사에 실피드의 모습이 서서히 흐려졌다. 그가 완벽히 사라지자 로이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폴리모프! "
로이나가 처음 라한과 만났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살피며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모습이 변했을 뿐인데도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서 함께 지낼 때도 돌아간
듯했다. 그렇게 즐거운 표정으로 상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 구석구석을 살피던 라한이 일행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깔끔하군. "
"아무런 흔적도 없어. "
-최소한 마법사는 아니군.
일행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놈이 그를 훔쳐갔을까?"
"그러게. 대체 어떤 놈이 그걸 훔쳐갔지?
일행은 쿨샤크를 짐짝취급하고 있었다. 처음에 했던 유괴라는 말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확실한 건. 보통 내기가 아니라는 거야. "
그렇지. 이 정도로.
말을 하던 투바가 멈칫거렸다. 그리고 주변의 기운을 얼핏 느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드래곤이다. "
투바의 말에 프라하가 도끼를 움켜잡았다. 오래전 굴레를 벗은 자들이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이에 신경이 곤두서고 손이 축축하게 젖었다.
-익숙한 기운인데.
테세르의 말이었다. 마나의 정령인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분명 익숙한 기운일
것이다.
"라한, "
"글쎄. "
라한은 로이나의 기운을 구분하지 못했다. 로이나와 함께 지낼 때 기운에 예민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세르는 달랐다. 그는 과거에도 마나의
정령이었고 지금도 마나의 정령이었다.
-로이나다.
짧게 말한 테세르가 로브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과거에 로이나의 살기어린
눈빛에 얼마나 주눅이 들었던가. 아직도 로이나가 무서운 모양이다.
똑! 똑!
"밖에서 라한님을 뵙고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쩔까요?"
호위무사의 말에 라한이 일행을 둘러봤다.
짧으나마 그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라한의 시선에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고 해. "
"알겠습니다, 라한님. "
호위무사는 라한 일행에게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레드리안에게 그렇게 하라고
지시를 받은듯했다. 그러면서 라한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하려는 것이리라,
"무슨 일이지?"
그와 동시에 꽤 멀리서 느꼈던 마나의 힘이 문밖에 이르렀음도 파악할 수 있었다.
똑! 똑!
"모셔왔습니다."
"들여보내. "
찰칵!
로이나가 들어오자 라한이 몸을 움찔거렸다. 생각 같아서는 로이나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드래곤임을 아는 이상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라한은 테세르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그날, 로이나의 정체를 들었다. 마나에 예민한
테세르였기에 그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다시 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무시했었다. 어쩌면 로이나가
드래곤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드래곤이구나. '
로이나가 들어오자 라한이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인간에게서
느낄 수 없는 광포한 느낌을 받았다. 그와 함께 헤아릴 수 없이 긴 생의 흔적도.
"류. 아니, 라한님! 오랜만입니다. "
말을 마친 로이나가 라한에게 한걸음씩 다가왔다. 이에 라한은 딱 그 정도의
거리만큼 뒷걸음질을 쳤다.
"라한님, 왜?"
"이제 속이려들지 않아도 돼. 로이나가 누군지 아니까. "
그, 그건.
라한의 말에 로이나가 몸을 비틀거렸다. 설마 자신의 정체를 알아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렇게 잠시 몸을 비틀거리던 로이나의 시선에 투바가 잡혔다.
-네놈 짓이구나. 네놈이 내 정체를 라한에게 알렸어.
마족은 본능적으로 드래곤을 알아본다. 물질계 소환의 가장 큰 걸림돌이 드래곤이기
때문이다.
"훗. "
로이나의 메시지 마법에 투바가 웃음을 지었다.
"그래. 내가 말해줬지. 뭐, 내가 말해주지 않았어도 알아챘겠지만. "
"이놈! "
"그만해. 로이나. "
라한의 말에 로이나의 얼굴이 슬프게 변했다. 그녀는 라한의 목소리에서 냉담함을
느꼈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도 덩달아 깨달았다.
"라한님. "
"날 죽이러 온 건가?"
"죽이다니요. 제가 라한님을 왜?"
"모른 척 해도 소용없어. 드래곤이 굴레를 벗은 존재를 죽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
라한의 말에 로이나가 충격에 휩싸였다 그의 말은 라한도 굴레를 벗은 존재라는
말이었다. 류카라한에 이어 라한까지 굴레를 벗은 존재라니, 드래곤과의 험난한
싸움에 라한을 보내야 하는 게 안타까웠다.
"라한님. 전 라한님을 해치려고 온 게 아닙니다. 라한님이 굴레를 벗은 존재라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고요. 굴레를 벗었는지는 같은 굴레를 벗은 존재가 아니면
알아보지 못합니다. "
굴레를 벗은 존재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굴레를 벗은 존재 뿐이라는 것.
라한도 몰랐던 사실이다
"라한님, 믿어주세요. "
"휴우, 앉자. "
라한의 인상이 좀 전보다 밝아졌다. 일단로이나의 말을 믿기로 한 것이다.
물론, 완전한 믿음이 아니었기에 약간의 거리감은 둬야 했다. 하지만, 좀 전처럼
냉담한 분위기를 풍기지는 않았다.
"라한."
이보게, 라한. 상대는 드래곤일세. 우리와 함께.
"믿고.싶어."
어렵게 대답한 라한이 로이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입을 열었다.
"믿어도 되겠지?"
"예. "
로이나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그녀는 라한이 자신을 믿어준 게 고마웠다.
주변 모두가 반대하는데도 자신의 편이 되어준 게 감사했다. 역시 라한에게
찾아오길 잘했다 싶었다.
라한이 자리에 앉자 나머지 일행도 자리를 찾고 앉았다. 프라하는 여전히
못미더운지 도끼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라한이 입을 열었다.
"좀 전에 정령. 로이나 작품이야?"
"예. "
"오래전부터 종종 보이더군. "
"오래전부터 찾았으니까요. "
로이나는 계속해서 높임말을 고수했다.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서의 습성을 버리기
힘든 모양이다. 이에 라한이 답답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로이나. 이제 높임말 쓸 필요 없어. 서로 불편하잖아."
그게.
"높임말 쓰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라한이 아닌 건 아니잖아. "
"예. 아, 응 "
로이나의 어색한 반말에 투바가 눈을 반짝였다. 드래곤이 원래 저런 존재였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만난 건 처음이지만 마계의 책에서 수백 번이나 등장했던 드래곤이다. 헌데, 자신이
읽었던 드래곤의 이미지와 너무 달랐다. 투바는 드래곤을 광포하고 피를 좋아하는,
어떤 면에서는 마족과 흡사한 파괴적인 존재라고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나쁜 책이 더 많아, "
근데 인원 구성이 좀.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일행을 차근차근 훑었다. 그녀의 말처럼 특이한 구성임이
분명했다. 인간, 정령, 라이칸드로프, 마족. 거기다, 부르면 모습을 드러낼
골렘까지,
"뭐, 그렇지? 하하하. "
"드래곤이 더해지면 더 특이한 구성이 되겠지. "
투바의 말에 로이나도 웃음을 터트렸다. 일행에 마족이 있으니 화를 내야함에도
도무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보다 라한에 대한 믿음이 더 큰
탓이다.
근데 라한. 아까 굴레를 벗은 존재라는 얘기는.
"맞아 난 굴레를 벗었어. "
"언제부터?"
"태어날 때부터. 저기 저 녀석도 굴레를 벗은 놈이고. "
라한의 설명에 로이나가 프라하를 바라봤다. 그에게서 강한 기운을 느꼈다. 물론,
자신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약했다. 하지만 보통의 라이칸드로프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강했다.
"라한. 우리 드래곤 중에 몇몇이 굴레를 벗은 존재를 죽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들었지. 굴레를 벗은 존재들의 모임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녀석들을 본
적이 있거든. "
"근데 왜?"
"왜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냐고?"
라한의 물음에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라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웃을지 모르지만 싸우기 싫었어. 그들과 함께 있으면 드래곤과의 싸움이 불가피할
것 같았거든. "
"지금은?"
"마찬가지지. 피할 수 있는 싸움을 찾아서 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싸움을 대신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싫었어. "
라한이 본 제이슨 일행은 이미 유대관계가 공고해진 상태였다. 그런 단체에 객으로
들어가는 건 발언권이 너무 약했다. 발언권의 약화는 위험하고 험한 임무를 맡는
것으로 다가올 터. 라한은 그런 상황이 싫었다.
"뭐 잘됐잖아. 우리 일행에 드래곤이 끼어 있으니 그들보다 더 강한 거 아닌가?"
"난 뺐으면 좋겠군. "
"그건 로이나 말이 맞아. 로이나는 우리 싸움에 참가할 수 없어."
로이나의 대답을 라한이 거들었다. 일행 모두의 시선이 라한에게 쏠렸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무슨 소리야?"
"로이나 역시 드래곤이다. 인간을 위해 종족과 싸우라는 건 무리가 아닐까?"
"그런가?"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로이나는 우리 싸움에 참가할 수 없어. 판테아
때문에. 맞지?"
라한의 말에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라한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그 전에 몇 가지만 물어볼게. 과거에 실버 드래곤이 있었어. 맞지?"
"응. "
"그 실버 드래곤이 판테아에 의해 사라졌고. 맞나?"
"그, 그걸 어떻게?"
라한의 말에 로이나가 경악하며 말을 더듬었다. 자신도 얼마 전에야 알게 된 사실이
아니던가. 인간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대답은
투바가 대신했다.
"우리 마계의 전대 마왕도 판테아에게 소멸됐으니까. "
오래전 투바는 용마전쟁 때문에 전대 마왕이 판테아에 의해 소멸되었다는 얘기를
했었다. 죄목은 물질계의 무분별한 간섭이었다. 이에 라한은 마계에 그 정도의
제약을 가했다면, 물질계에도 했으리라 생각했다. 오벨리아 팰리스에서 봤던 실버
드래곤의 흔적. 지금은 이미 사라진 드래곤의 존재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라한. 근데 우리가 저. 로이나라는 분을 어떻게.
프라하가 말을 길게 늘였다. 라한은 프라하가 하려는 말의 의도를 정확히 집어냈다.
서열을 확실히 해달라는 얘기였다. 처음 투바가 나타났을 때 했듯이 말이다.
"로이나! 우린 친구지?"
"응. "
"여기 있는 이 녀석들도 모두 내 친구들이야. "
"후후, 난 상관없어. "
로이나는 라한이 한 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고 흔쾌히 승낙했다. 서열이라고
부르긴 어렵지만, 어찌됐든 예전과 같이 모두친구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테세르만은 그러지 못했다 로이나가 정령왕을 부린다는 이유 때문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쿨샤크를 납치해갔다. 사람을 납치해 갔다면 그 이유가 있을 터.
조만간 본점으로 어떤 조건을 걸고나올 것이다. 그게 금액이 됐든 어떤 보물이 됐든
말이다. 이 때문에 라한일행은 뮬라 상단의 본점에서 며칠 묵기로 했다.
"레드리안. "
"말하게 . "
라한은 레드리안의 조상인 제이슨처럼 굴레를 벗은 존재였다. 이 때문에 뮬라
상단의 상단주인 레드리안은 라한의 나이를 수백 살 정도로 생각했다. 제이슨과
동급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이에 라한이 반말로 일관함에도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하대하고 있는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라한을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보물 같은 거 있나?"
"보물? 글쎄. 상단에 보물이라고 해봐야 수송할 물품과 금화뿐인데. "
라한이 보기에 유괴범은 엄청난 실력자였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상단의 돈을
훔치는 일 정도는 우스울 정도였다. 헌데도 금에는 손을 대지 않고 사람만
유괴해갔다. 그건 돈이 아닌 무언가가 필요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상하군. 레드리안이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
"정말 보물 같은 거 없어?"
"어차피 그자는 곧 연락을 해 올 걸세. 그때는 그자가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있겠지. 그런데 내가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하겠는가?"
레드리안의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다. 헌데도 궁금함을 참기
힘들었다. 자신과 흡사한, 어쩌면 자신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는 자가 필요로 하는
물건이라니. 예상보다 큰 보물일지도 몰랐다.
"그렇.겠지. "
"더 물어볼 게 없으면 나가보겠네. "
"그 녀석한테 연락 오면 알려주는 거 잊지 말라고. "
"알겠네. "
말을 마친 레드리안이 객방에서 나갔다. 그가 나가자 객방 주변에 숨어 있던
호위무사들의 기척도 함께 사라졌다.
"무슨 소리야?"
레드리안이 나가자 프라하가 대뜸 질문을 해왔다. 라한과 레드리안 사이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뭐가?"
"보물이라니? 갑자기 왜 보물 얘기를 꺼낸 거야?"
"그자의 실력 때문에 추측 해본거야. "
"아, 알겠다. 그 정도 실력자가 돈 때문에 사람을 유괴할리 없다는 말이지?"
프라하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프라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사람 자체에게 관심이 있는 거 아닐까? 쿨샤크 그 자식은 음흉한 놈이라서
적이 많을 수도 있잖아. 우리처럼. "
"아니, 그건 아니야. 그자는 자신이 쿨샤크를 납치해 간다는 걸 의도적으로 알렸어.
"
"의도.적으로?"
"응. 그자의 실력이면 호위무사들한테 걸리지 않고도 충분히 나갈 수 있었어.
들어올 때 들키지 않았으니 나갈 때도 가능했다고 봐야지. 헌데, 호위무사들에게
납치하고 있는 모습을 보였어. 의도적으로 보였다고 봐야지. "
그제야 프라하도 상황파악이 되었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행적을 보였다는 말. 그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납치되고 있음을 알리려는 의도로 봐야 했다. 그건 납치에
대한 대가가 있다는 걸 반증하는 얘기이기도 했다.
"연락이 오겠군. "
"기다려야지. "
라한이 레드리안에 이어 프라하와 대화를 할 때 로이나와 투바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로이나는 평소 성정이 조용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투바는
로이나를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어른스러운 척 하고 있었다. 마족의 자존심인지
드래곤에게 우습게 보이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다음날 저녁.
레드리안이 라한 일행을 찾아왔다. 역시나 은밀히 따르는 호위 무사 십여 명을
대동한 채였다.
"무슨 일이지?"
"연락이 왔네. "
레드리안의 말에 라한 일행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로이나와 신경전을 벌이던
투바도 호기심어린 빛을 띠었다.
"원하는 게 뭐였지?"
"스케일러 링이라고 하더군. "
"스케일러 링? 그게 뭐지?"
"그건 나도 모르겠네. "
라한의 물음에 레드리안도 모른다는 몸짓을 취했다. 이에 로이나가 라한에게 눈짓을
해왔다. 자신은 스케일러 링이 어떤 건지 안다는 얘기였다.
"어쩔 거야? 모른다면서? 근데 언제까지 스케일러 링을 가지고 오래?"
"스케일러 링이 준비되면 알아서 찾아오겠다고 하더군. 지금부터 수소문해
봐야겠지, "
레드리안은 지금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뭔지도 모르는 물건을 찾아서 아들과
교환해야 하다니. 또 서른이 넘은 아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도 짜증나 미칠
지경이었다.
"우리도 나름대로 찾아보지. "
"고맙네, 그럼 가보겠네. 할 일이 많구먼. "
"수고해. "
말을 마친 레드리안이 터벅터벅 객방을 나갔다. 어깨가 축 처진 게 안쓰러워
보였다.
레드리안이 나가자 라한이 로이나를 바라봤다. 좀 전에 보였던 눈빛에 대한 해답을
달라는 의미였다.
"스케일러 링은 마법 반지라고 볼 수 있어. "
"엥? 겨우 마법 반지? 의외군. "
"그렇게 보긴 힘들어. 스케일러 링은 마법 무구 중에서도 특급에 속하는 거니까. "
"특급?"
로이나의 특급이라는 말에 프라하가 호기심을 담아 되물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끼고
있는 푸른색 반지를 슬쩍 쓰다듬었다.
마법 무구 중에 특급으로 분류 되는 건 대륙에 열 개뿐이었다. 그 중 하나는
프라하가 가진 폴리모프의 반지였다. 또 드래곤과 엘프도 몇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단 세 개밖에 안 되는 특급 마법 무구 중 하나가 유괴범이 찾고
있는 스케일러 링이었다.
"마법 무구 중에 특급은 영지를 통째로 넘겨도 구하지 못하는 귀한 물건이야. "
"대체 무슨 마법이 담겨 있는데?"
"메이저 윈드스텝, 메이저 스톤스킨, 메이저 스트랭스. 이렇게 세 개가 담겨 있어.
"
로이나의 설명에 라한이 감탄성을 터트렸다. 작은 반지에 세 가지 마법이나 담은 게
대단해보였다. 윈드 스텝, 스톤 스킨, 스트랭스. 이 세 가지 마법은 모두
보조마법으로 3 서클이다. 하지만, 앞에 메이저가 붙었다면 5 서클마법이 된다. 속도를
증가시켜주는 윈드 스텝과 피부를 강하게 해주는 스톤 스킨, 힘을 배가시켜주는
스트랭스. 비록 5 서클이지만 세 가지 마법을 한꺼번에 시전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근접 전투 능력이 두 배 이상 상승될 게 분명했다.
"엄청나군. 그럼 나머지 특급 무구들도 다 그 정도 수준이야?"
"그건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달렸지. 스케일러 링을 제외한 나머지는 7 서클 혹은
6 서클 마법 하나씩밖에 담겨 있지 않아. 스케일러 링만 여러 개가 담긴 거지.
프라하가 가지고 있는 변형의 반지도 특급으로 분류되는 거라고. "
라한이 프라하의 반지를 바라보며 크기를 가늠했다. 그리고 그곳에 자신이 5 서클
마법 세 개를 담을 수 있을지를 예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보였다.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세밀하게 새기더라도 두 개가 한계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대단하군. 아직 내 실력이 고대 인챈트에 미치지 못한다는 건가? 아니면. 인챈트를
간단하게 하는 어떤 방법이 있었거나. 휴, 난 아직 멀었군. '
라한은 스케일러 링을 꼭 찾고 싶었다. 그곳에 새겨진 인챈트를 직접보고 도형과
공식을 확인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기.라한?"
"어?"
로이나가 생각에 잠겨 있던 라한을 일깨웠다. 이에 라한이 눈을 멀뚱멀뚱 뜨며
로이나를 바라봤다.
"스케일러 링 말이야. 어쩌면 에펠 일행이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
"에펠? 로이나가 그들을 어떻게 알아?"
널 찾아다니다가 그 녀석들하고 동행한 적이 있어. 그러다가.
로이나가 에펠 일행을 만났던 얘기를 들려줬다. 그러면서 시스마란과 스카라트
산맥에 갔던 얘기까지 함께 했다.
미안. 그들이 라한을 배신했던 녀석인지 모르고.
"흠, 뭐 나중에 다시 괴롭히면 되니까 그건 됐어. 근데, 에펠에게 있다는 근거는
어디서 나온 거야?"
"쿨샤크의 태도가 이상해서. 단순히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을 죽이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암살자를 동원했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 정도 피해를 입고도 암살자들이
악착같이 달라붙을 정도라면 엄청난 의뢰금을 지불했을 거야. 그 정도의 의뢰금을
감수하고서라도 얻을 게 있었다면, 스케일러 링 밖에 없지 않을까?"
로이나의 말에 라한과 주변 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암살자들의 피해와
에펠 일행의 중요성을 비교해보자 미심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잘것없는 에펠
일행을 죽이기 위해서 백 명 이상의 암살자들이 목숨을 잃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맞지 않았다.
"젠장. 그놈들은 계속 거치적거리네. 지금어디 있지?"
"대륙 남동부 지역에 있을 거야. 아마도 범죄자들의 마을로 들어갈 것 같은데. "
"범죄자들의 마을이라.레비안산맥 아래에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
"맞아, 그곳에 네 형도 있을 거야. 그때 그 참사가 있은 후부터 그쪽에서 지내고
있어, 한 번 가보는 게 어때?"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의 참사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 형인 레테아가 루이나 왕국이 아닌 그 먼 곳까지 간 것도
의아했다.
"로이나. 그때의 참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라한의 물음에 로이나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라한이 모르고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었다. 당황스런 마음에 어쩔 줄 몰랐다.
라, 라한. 그건.
"로이나. 솔직하게 말해줘. 대체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로이나가 난감한 듯 시선을 회피했다. 하지만 라한의 시선은 로이나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라한의 시선을 받자 로이나도 체념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라한에게 입을 열었다.
"라한. 놀라지 않는다고 약속해. 그럼 말해줄게. "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에게는 이유를 듣는 게 더
중요했다. 나 머지 일은 차후에 생각할 일이었다.
"필슨 백작이 암살자들에게 죽임을 당했어. "
말을 한 로이나가 라한의 얼굴을 살폈다. 겨정스러운 얼굴을 가득한 채로. 헌데
라한의 얼굴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 마치 남의 얘기를
듣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휴우, 필슨 백작이 죽고 나자 엘베로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어. 필슨 백작 가문은
친인척이 거의 없다시피 하잖아. 견제할 세력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니
당연했겠지, 그는 먼저 필슨 백작가에 반란죄를 씌웠어. 많은 귀족들이 반발했지만,
원래 귀족들의 수는 엘베로 쪽이 더 많았으니까 별 힘도 못쓰고 사그라졌지. "
"그렇겠지. 힘이 있는 자가 곧 정의가 될 테니까. 후후후, 반란죄를 뒤집어쓰고
가족들은 전원 참수에 처해졌을 테고. 형은 그 와중에 도주했겠지. 아니, 로이나가
도주할 수 있도록 도와줬겠군. 내 말이 맞아?"
"라.한. "
"괜찮아. 이미 죽은 사람 때문에 이성을 잃을 만큼 어리석지 않으니까. "
말을 마친 라한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로이나와 투바, 프라하가 그를
따라 일어났다.
라한, 어디.
"머리 좀 식힐게. 겨정하지 마. "
"믿어도 되는 거지?"
"아직 날 몰라?"
짧게 되물은 라한이 일행을 뚫고 나왔다. 뒤에 남은 사람들의 얼굴이 침통해졌다.
그들은 그렇게 라한이 삭이고 있는 슬픔의 깊이를 짐작했다.
"멍청한 놈. 힘들 땐 서로 의지하는 게 친구지. "
투바의 조용한 읊조림이 객방에 울려 퍼졌다.
객방에서 나온 라한이 정원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달이 밝구나. "
-주인, 괜찮아?
테세르의 물음에 라한이 말을 머뭇거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이 라한의
감정을 짐작케 했다.
잠시 무언가 말을 하려던 라한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테세르. "
-응.
"나. 어쩌지?"
말을 마친 라한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부모님의 죽음과 가문의 몰락. 비록 수많은
생을 살아온 라한이었지만, 견디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주인.
짧게 말한 테세르가 라한의 어깨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의 볼에 몸을 비비며
라한을 위로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돼? 왜 이렇게 된 거지?
-라한 주인.
테세르가 라한의 목에 매달렸다. 이젠 라한이 떨고 있다는 게 몸으로 전해졌다.
"후우! "
-복수.할 거야?
복수라.
길게 되뇐 라한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별이 무척이나 밝아보였다.
둥근 달과 그들을 비추는 아름다운 별들. 그리고 길게 떨어지는 별똥별까지.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듯 보였다.
"모르겠어."
짧게 대답한 라한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모른 척 할 수는 없겠지. "
-주인.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그를 죽이러 가야 할까? 그건 해결책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님의 원수. 그냥 죽음으로 마무리 짓기에는 쌓인 화가 너무
컸다. 또, 자신을 막기 위해 나설 기사들이나 병력들의 피해도 조금쯤은 감안해야
했다. 어찌됐든 자신의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되도록 나라자체에는
피해를 주지 않고 엘베로에게만 해를 가해야 제대로 된 복수가 될 듯했다.
"일단 조사를 좀 해야겠어, "
-그래. 주인 생각이 그렇다면.
결국 라한은 복수를 다짐했다. 물론, 포기했더라도 엘베로가 라한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화근이 될 수 있는 라한을 살려둘 리 없으니 말이다.
"테세르! "
-응?
"사일런스 마법 할 줄 알아?"
-응. 왜?
"주변에 좀 쳐줘.
사일런스 마법은 일종의 방음 마법이다. 사일런스 마법의 범위 내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는다. 반대로 밖의 소리가 안에 들리지 않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2 서클 래스마법이었기에 라한에게는 불가능한 마법이었다.
-그럴게. 마나의 힘이여, 창조의 만물이여. 그대의 뜻을 담아 나 이곳에 권위를
내리려 합니다. 사일런스!
테세르의 주문 영창이 끝나자 주변에 미약한 마나가 감돌았다. 곧이어 밖에서
들리던 풀벌레소리와 바람소리가 완벽히 사라졌다. 소리에 관해서만큼은 안과 밖을
완벽하게 격리시킨 상태였다.
"고마워, "
-근데 주인. 사일런스는 왜?
"정령계로 돌아가 줄래?"
-어? 어. 알았어.
테세르가 별 다른 대꾸 없이 정령계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라한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바닥에 조아리며 경건한 표정을 지었다. 일종의 절을
한 것이다. 물론 절을 하는 절차나 방법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었다. 과거의
단편적인 지식이 이런
상황에서 절을 하라고 권했을 뿐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
그렇게 라한은 밤새도록 통곡을 했다.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한편, 엘베로는 한밤중에 파론의 방문을 받았다.
"쿨럭, 쿨럭. 무슨 일인가?"
"레테아라는 녀석을 사로잡는데 실패했습니다. "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겨우 전직 기사나부랭이를 잡는 일을
실패하다니.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이유는?"
"조력자가 있습니다. "
"조력자?"
"예.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그 마을 주민 모두가 그 녀석을 싸고돌았습니다. "
파론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겨우 마을 주민들 때문에 실패했다는 얘기이지 않은가.
레테아를 데려오는 일에 동원된 수는 비밀 조직원 오십 명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기사에 버금가는 실력자였다. 헌데, 겨우 마을 주민들 때문에 실패했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자세하게 설명해라. 겨우 주민들 때문에, 쿨럭, 쿨럭! 실패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엘베로가 계속 기침을 해댔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한 눈에 알아볼
정도였다. 엘베로의 노환에 파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 겨정할 때가 아니지. '
파론의 나이도 만만치 않았다. 파론의 나이는 올해 65 세.
엘베로보다 적었지만, 얼마 남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길어야 5 년에서 10 년? 그
안에 자신도 이 땅에 묻힐 거였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범죄자들입니다. 극악한 죄를 지었지만, 스스로
무고함을 외치다가 도주한 자들이죠. 그들 대부분이 용병 출신입니다. "
그래서 인원수가 부족하다 이 말인가?
예. 거기다 왕국에서 정식으로 보낸 기사단이 아니라서 대놓고 싸우기가 너무
힘듭니다. 아무래도 전하께서 친서를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파론의 말에 엘베로가 고민에 빠졌다. 친서를 내린다면 레테아르 조용히 데리고
오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또 인접 왕국에 자세한 내막을 숨기려면 범죄자 집단
전체의 소탕으로 몰고 가야 한다. 그러자면 한 명과의 싸움이 아닌 그 마을
전체와의 싸움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엘베로는 싸움이 커진다는 그 자체가 꺼려졌다.
다른 방법은 없는가?
예. 지금으로썬 그 방법이 최선입니다.
음, 알겠다. 서안을 보내도록 하지. 가능 시간은?
이동 시간 모두 감안하더라도 두 달이면 충분합니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다.
말을 마친 엘베로가 의자를 돌렸다. 이에 파론도 뒷걸음질로 국왕의 집무실을
나갔다.
두 달이라. 시간이 없는데.
결심
다음날 라한이 일행이 있던 객방에 들어섰다.
일찍 일어났네.
망할 자식. 밤새 한 숨도 못 잤다.
라한의 말에 투바가 씹어뱉듯 날카롭게 대꾸했다. 친구라는 놈이 슬픔을 혼자 삭인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왜 불면증 있냐? 마족도 그런 병에 걸리나?
망할 놈.
라한의 눈은 심하게 부어 있었다. 누가 봐도 밤새도록 울었다는 걸 알 정도였다. 이
때문에 투바는 화도 못 내고 발만 굴렀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자신보다
밤새도록 눈물을 흘린 라한이 더 힘든 건 당연했으니 말이다.
라한. 어쩔 셈이야?
"글쎄. 마법 무구는 별로 탐나지 않는데, 쿨샤크 그 자식은 꼭 잡아야 돼. "
"그거 말고. 엘베로라는 인간을 어떻게 할 거냐고. 가만 둘 거야? 복수 해야지. "
투바의 말에 라한이 헛웃음을 흘렸다. 새삼 자신을 겨정해준 친구들의 존재가
고마웠다.
"안 그래도 그 얘기 때문에 부탁할 게 있어. "
"말만해. "
"투바! 네가 가서. 쳇, 투바 넌 안 되겠다. "
"뭔데 그래? 내가 못하는 게 어디 있다고. "
"됐고. 프라하 네가. 아, 미치겠네. 너도 안 되겠다. 어째 믿을 놈이 하나도 없냐.
그렇다고 정령인 테세르한테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
"대체 뭔데 그래?"
투바와 프라하가 동시에 반문을 표했다. 이에 라한이 고개를 돌리며 로이나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로이나 외에는 믿을 사람이 없을 성 싶었다.
"로이나. 부탁 좀 들어줄래?"
"말해. 드래곤으로서 해도 되는 일이라면 도와줄게, "
라한의 말에 투바가 황당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억울했다. 자신이 못하는
일을 드래곤이 할 수 있다는 말 그 자체가 자존심 상했다.
이, 이.
"로이나. 엘베로에 대한 조사를 좀 해줘. 정보길드를 이용하는 게 좋겠다.
필요하다면 암살자 길드도 이용해보고. 어떻게든 엘베로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아내줘. "
투바가 화를 터트리려 할 때, 라한이 말을 끊었다. 이에 로이나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한의 눈 안에서 비치는 슬픔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인간은 아니지만, 웬만한 인간보다 인간에 대해 더 잘 아는 존재가 자신 아니던가,
인간으로 보낸 유희 기간만 수백 년에 육박하니 말이다.
"알았어. 내가 해볼게. 그럼 잠시만. "
말을 마친 로이나가 공간에 손을 저었다. 그러자 공간에 틈이 생기며 손이 들어갈
만한 통로가 만들어졌다. 로이나가 자신의 보물 창고와 통하는 아공간을 연 것이다.

찰칵!
로이나가 아공간에서 팔찌를 하나 꺼냈다. 전체적으로 은은한 푸른색을 띠는
고풍스러운 팔찌였다.
"이걸 착용해. "
"음, 위치 추적 장치인가?"
"응, 라한이 어디 있든지 내가 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팔찌야. 내 마나에만
반응하니까 다른 드래곤들은 그 팔찌를 이용하지 못할 거야. "
"알았어. "
짧게 대답한 라한이 팔찌를 착용했다. 마치 맞춘 듯 딱 들어맞았다.
똑! 똑!
라한이 팔찌를 살펴보려 할 때,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어지러운
발자국소리가 뒤따랐다.
"누구야?"
"레드리안일세. 좀 들어가도 되겠는가?"
"들어와, "
레드리안이 건장한 체구의 사내 한 명을 대동한 채 객방 안으로 들어왔다. 헌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지금까지 은밀히 따르던 호위무사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자네가 라한이라는 사람인가?"
라한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레드리안 옆에 있던 사내에게서 나왔다 마흔은 넘어
보이는 중년 기사였다. 딱 벌어진 어깨와 굵은 팔뚝이 쾌나 쓸 만한 실력을
갖추었음을 짐작케 했다.
"당신 뭐야?"
"흠, 자네가 대마법사라고 하던데 맞는가?"
"난 당신 정체를 물었는데?"
라한의 재차 물음에 중년 기사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짐짓 부드러운
음성으로 답했다.
"난 나메라 왕국 수도 기사단 단장인 사르비엘 후작일세. "
인스타노 사르비엘 후작. 그는 나메라 왕국에서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검 실력을
가진 강자이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무서움은 검 실력이 아니었다. 그 실력을
뒷받침하는 뛰어난 두뇌와 그 머리에서 나온 계획을 실행시킬 수 있는 배경, 이
모든 것이 사르비엘 후작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유괴사건이 있었더군. "
사르비엘 후작의 말에 라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겨우 상단의 후계자 한 명이
납치된 일에 수도 기사단이 동원된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가?'
라한은 이번 납치 사건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그렇다고 하더군. "
"이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뭐가?"
"자네가 이번 실종 사건에 끼어든 이유 말일세. "
사르비엘 후작의 물음에 라한이 사르비엘의 눈을 살폈다. 예사롭지 않은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반말에 신경 쓰지 않는 것도 범상치 않았다. 거기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물어오는 태도도 일반 귀족들과 달랐다.
'이런 귀족도 있긴 있네. 별일이야. '
"그 유괴범이 데려간 쿨샤크란 놈에게 볼일이 있거든.
"그게 뭔지 말해줄 수 있겠나?"
"없어. "
"그렇군. "
라한의 짧은 말에도 사르비엘 후작은 별반반응이 없었다. 심계가 깊다는 의미였다.
"이제 내가 묻지. 수도 기사단 단장이라는 사람이 유괴 사건을 조사하는 이유가
궁금하군. "
"이번이 아홉 번째 일세. "
"응? "
"이번이 아홉 번째 납치라는 말일세. 그렇게 납치해 간 사람에 대한 대가는 항상
마법 무구더군. 그것도 A 급 이상만. "
그제야 지금상황이 이해가되었다. 아마, 그 아홉 번째 중 최소 한 번은 왕실 사람을
납치한 것이리라.
'생각보다 거물이었군. '
"그게 끝인가?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모두 A 급만 원했었지. 우리 왕국에는 특급 무구가 없었거든. 근데
이번에 납치해 간 사람이 특급 무구인 스케일러 링을 원한다고 하더군. "
"그래서?"
"그가 원하고 있다면 이곳에 스케일러 링이 있다는 얘기겠지. "
그의 말은 스케일러 링을 찾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가능하면 유괴범에게 주지
않고 왕국에 귀속시키려 할 것이다. 특급 무구자체만으로도 왕국에 엄청난 힘이 될
테니까.
"근데 왜 날 찾아왔지? 나한테 그 반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닐세. 문제가 좀 심각해져서 그러네. "
문제라.
"그 유괴범은 얼마 전 우리 왕국의 왕자님을 납치했었네. 그때 원했던 건 일트레어
대거 였지. A 급일세. "
약 석 달 전, 유괴범이 나메라 왕국의 왕자를 납치했다. 그를 돌려주는 대가로
원했던 게 A 급 마법 무구인 일트레어 대거였다. 나메라 왕국의 국보로 여겨지던
일트레어 대거. 하지만, 왕자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기에 교환 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막상왕자를 찾고 나자 사라진 국보가 계속 걸렸다. 이에 유괴범에 대한
조사를 계속했고, 그의 유괴가 한 번이 아니라는 걸 알아냈다.
"제법이군. "
"제법 정도가 아닐세. 우린 일트레어 대거를 반드시 찾아야 하네. "
"스케일러 링도 구하면 가져갈 생각이겠지. "
부인하지 않겠네. 하지만, 그를 그대로 뒀다가는 대륙에 존재하는 마법 무구란
무구는 모조리 사라질지도 모르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겠군. 그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이는
녀석이라면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겠지. "
일리 있는 얘기였다. 한 나라의 왕자를 거리낌 없이 납치했던 사람이다. 다른
왕국의 왕자도 유괴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A 급 혹은 특급은 거의 대부분왕국에
소속되어 있는 상황. 헌데, 왕자를 대가로 보물을 요구한다면 보물이란 보물은 모두
유괴범이 가지게 될 수도 있었다.
"근데 나하고 무슨 상관이지. "
상단주가 자네 실력이 범상치 않다고 말하더군, 언뜻 듣기로는 6 서클 마법사라고
하던데.
사르비엘 후작이 말을 길게 끌었다. 실력에 대한 진위를 확실히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먼저 자네 실력을 보고 싶은데. "
"싫어. "
라한은 마법을 광대짓 하려고 배운 게 아니다. 힘이 필요해서 배웠고, 오래 살고
싶어서 배웠던 게 마법이다. 이 때문에 사르비엘 후작에게 마법 실력을 자랑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거기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사르비엘 후작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실력을 보여주면서까지 남을 도와줄 필요는 없었다.
"자네가 실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자네를 신뢰할 수 없네. "
"난 당신의 신뢰가 눈곱만치도 필요 없거든. "
"흠. 그렇군. 난 자네의 힘이 필요하네. "
"밖에 있는 부하들도 많으면서 나까지 필요한가 모르겠네. "
라한의 비꼼에 사르비엘 후작이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차마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한참 머뭇거리던 사르비엘 후작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사실 그자와 부딪힌 적이 있었네. "
"오호, 그래?"
"복면을 쓰고 있어서 외모는 보지 못했지만, 검을 나눠봐서 실력은 잘 알지. 그는
너무 강했네. "
"얼마나?"
"그는 우리를 가지고 놀았네. 그가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기사단 전체가 몰살
됐을지도 모르지. 헌데, 더 대단한건 그에게 죽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걸세.
단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우리 모두를 제압했다는 얘기지. "
사르비엘 후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기사단 전체가 단 한명에게 패한 게
수치스러웠다. 헌데, 너무 부끄러워서 왕국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단 한
명에게 당했다는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임무를 포기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었다.
'생각보다 강한 놈이군. 설사 굴레를 벗은 놈이라 하더라도 기사단을 가지고 놀
정도는 아닐 텐데. '
굴레를 벗은 존재라면 웬만한 기사단보다 강하다. 하지만, 강하다는 정도와 가지고
논다는 건 염연히 달랐다. 상대는 의도적으로 살수를 쓰지 않고 기사단을
패배시켰다. 그건 실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도 기사단을 꺾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프라하가 할 수 있을까?'
프라하의 실력이면 모두 죽이는 데에는 30 분이면 충분했다. 헌데, 상대를 죽이지
않고 모두 제압한다면? 힘들어 보였다. 아니, 불가능했다. 프라하의 능력을 한참
상회한 실력이라야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을 마친 라한이 로이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로이나. 그놈 실력이 어느 정도일까?
-글쎄. 드래곤도 불가능해. 물론 마법을 사용한다면 가능하겠지만, 검술만으로
기사단을 제압할 실력은 드래곤에게도 없어.
라한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만만치 않다는 생각에 겨정부터 앞섰다
"만약 그가 보물만 받고 도주해 버리면 잡을 방법이 없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 헌데,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대가를 주면 인질을 반드시
풀어줬었네. "
"현재 그자의 거취는?"
"모르네. 그때는 정말 운이 좋아서 발견했던 거지. "
라한이 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참가한다면 승산이 높아질 게 분명했다.
거기다 투바와 프라하가 가세한다면 필승을 장담할 수도 있었다. 헌데, 기사단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그 자체가 영 내키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을 좀 줬으면 좋겠군. "
"알겠네. 내일 다시 찾아오겠네. "
사르비엘 후작이 조용히 객방을 벗어났다. 그가 나가자 주변에 산재해 있던
기사들의 기운도 함께 사라졌다.
사르비엘 후작이 나간 후에도 라한은 입을 열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가문이 망했다는 소식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골치 아픈 사건에 휘말린 느낌이었다.
"대체 누구지? 굴레를 벗은 놈들 외에도 그런 놈이 있나?"
말을 마친 라한이 프라하와 로이나를 바라봤다. 혹시 아는 게 없냐는 의미였다.
이에 프라하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혹시 마족이 아닐까?"
-마족?
마족이라.
테세르와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드래곤도
불가능한 실력이라지 않은가. 육체적 능력에 서 월등한 마족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닐 거야. "
"마족은 아니야 "
로이나와 투바가 동시에 반론을 제기했다. 이에 라한과 테세르, 프라하의 시선이
그들에게 모였다. 시선을 받은 투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족은 물질계로 건너오면 힘의 대부분을 봉인 당하게 돼. 일종의 제약을 받는
거지. 그래도 보통 인간들보다 강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야. 마족이
물질계에서 이정도 실력을 가지려면 최상위 마족은 되어야 하는데. 내가 아는
최상위 마족 중에 물질계로 넘어온 마족은 아무도 없어. 얼마 전에 넘어왔던
이그니스 삼촌이 거의 유일하지. "
"맞아. 마족은 마족만의 고유 흔적이 남아. 다른 존재는 몰라도 드래곤인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물론, 아주 희미해서 자세히 살펴야 겨우 찾을 수 있지만. 어쨌든
우린 자세히 살폈잖아. 근데 마족의 느낌은 저기 있는 투바가 유일했어. "
투바의 말을 로이나가 받았다. 결론은 마족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라한은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짙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드래곤도 아니고 마족도 아니다? 그렇다고 굴레를 벗은 존재로 보기에는 너무
강하다는 말이지?"
딱- !
"아, 생각났다. "
라한의 물음에 로이나가 손가락을 퉁기며 말했다. 로이나의 반응에 라한과 프라하,
투바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로이나를 어려워하는 테세르까지 라한의 로브
안에서 한쪽 눈을 내밀었다.
"누구?"
"카이렌. "
"카이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최소 라한의 기억에는 없는 이름이 분명했다. 결국
만나본 사람은 아니라는 의미인 셈이다. 라한이 부가 설명을 해달라는 듯 로이나를
바라봤다.
"카이렌은 엘프야. "
"엘프? "
응. 한 4 천 년 전이던가? 그때 정말 희한한 엘프가 나타났어, 그는.
카이렌은 무려 4 천 년 전에 소드마스터에 오른 엘프였다. 마법이나 정령이 아닌
검으로 한계를 넘은 존재. 엘프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였다. 거기다 그는 조화나
평화라는 존재 의미에 큰 관심이 없었다. 먼저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공격당하면 몇 배로 보복을해야 직성이 풀렸다. 성격과 실력 모두 여타의 엘프와는
극과 극이었다.
"4 천 년? 용케도 살아 있네. "
"확실하지는 않아. 그가 정말 굴레를 벗었다면 그일 가능성이 다분해. 헌데, 굴레를
벗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봐야겠지. "
"흠, 로이나는 굴레를 벗은 존재를 구분하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럼 그에
대해서 아는 대로 설명해봐 "
라한의 물음에 로이나가 회상에 잠겼다. 카이렌이라는 존재에 대해 기억을 가다듬는
중이었다. 그렇게 잠깐 멍하게 있던 로이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엘프이면서도 엘프가 가지는 성격적 특징을 보이지 않았어. 그와 유희를 즐긴
적이 있었는데, 내가 드래곤이라는 걸 알면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더군, 배포도
크다고 봐야겠지. "
"엘프가 유괴라.별일이네. "
"어떤 면에서는 라한과도 비슷한 성격이야. "
"나? "
"응. 목적을 위해서 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거든. 또, 당하면 몇 배로
갚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도 비슷하지. "
로이나의 설명에 라한의 호기심이 더욱 짙어졌다. 꼭 만나보고 싶은 녀석이었다.
정말 그의 성격과 자신이 비슷한지, 자신처럼 오래 살려는 꿈을 꾸는 엘프는
아닌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궁금했다.
엘프라.
"카이렌이 굴레를 벗었는지 어떤지는 나도 몰라, 헌데, 그가 검을 익혔고 또, 그
검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건 확실해. "
"그의 위치를 찾을 방법은 없나?"
"그건 좀. 카이렌은 숨는데 탁월한 재주를 가졌어. 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게
가능한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카이렌이 숨으려고 마음먹으면 그
누구도 찾지 못한다는 것. "
"드래곤도?"
"응. 드래곤도. "
로이나의 대답에 주변 일행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하의 드래곤마저 찾지
못하는 상대라니. 과연 그런 상대가 존재할 수 있나 싶었다.
"일단 스케일러 링인가 뭔가 하는 것부터 찾아야겠군. "
"그래야겠지. "
로이나도 찾지 못한다면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뭔 대화를 하고
싶어도 만나야 할 수 있는 일. 나머지는 그 후에 결정해야 했다.
"로이나! 우릴 에펠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시켜줄 수 있어?"
"음, 괜찮을까?"
로이나는 자신이 하려는 행동이 물질계 개입인지 어떤지를 고민했다. 라한 일행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유희로 보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저들을
이동시켜주는 행동이 물질계에 어떤 해를 주는 것도 아니었다. 둘 사이의 적절한
기준이 없었기에 쉽사리 결정내리기가 힘들었다.
한참 고민하던 로이나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너희들이 내 정체를 알고 있으니까. 미안해. "
"그럼 나 혼자만 이동하는 건 어때? 그것도 안 될까?"
"라한 무슨 소리야! 너 혼자 가서 재미 보겠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도 갈
거야. "
"나도 당연히 갈 거다. 날 빼놓을 생각은 하지마라. "
라한의 말에 프라하와 투바가 제동을 걸어왔다. 재미있는 사건이 생길 게 분명한
곳에 빠질 수는 없었다. 거기다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력을 분산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었다.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누가 너희들 빼 놓는데?"
"그럼?"
"머리는 장식품이냐? 내가 인챈터라는 거 잊었어? 나만 갔다 오면 나머지는
스크롤로 가면 되잖아. "
"아, 맞다. "
"그렇군. "
라한이 쏘아붙이자 투바와 프라하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순간 라한이
인챈터라는 걸 깜빡한 듯했다.
일행을 대충 정리한 라한이 로이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로이나. 나 혼자 가는 건 가능해?"
"그 정도는 상관없겠지 . "
"그럼 가서 좌표 좀 알아와야겠다. 지금 좀 보내줘. "
"알았어. 매스 텔레포트!"
로이나가 마법을 시전했다. 이에 라한과 로이나의 몸에 푸른빛이 잠시 일렁였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라한과 로이나의 모습도 완벽히 사라졌다.
판트리아계에 속한 영계의 지휘부. 저승사자인 새턴이 동료인 트레이시를
불러들였다. 얼마 전 저승사자의 수장인 퓨리트에게 상황 보고를 했던 그들이었다.
"새턴.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부른 거야?"
"왜? 바쁜가? 요즘 차원에 신경 끊어서 시간 남잖아. "
"나도 여가 생활 좀 즐겨야지. "
"허허, 이 친구. "
트레이시의 대답에 새턴이 헛웃음을 흘렸다. 과거에는 저승사자들과 전혀 상관없는
말이 여유라는 단어였다. 영계 다스리랴, 판트리아계 다스리랴. 숨 쉴 틈 없이
움직였던 그때를 생각하자 지금의 여유가 꿈만 같았다.
"근데 대체 무슨 일인가? 자네가 날 부를 정도면 예삿일은 아닌듯한데, "
"아, 내 정신 좀 보게. 과거 판테아님이 관리하던 그 장소 기억나는가?"
"그 장소?"
"왜, 용마전쟁 이전의 유적 말일세. "
새턴의 말에 트레이시의 인상이 구겨졌다. 판테아가 영계 지옥에 갇힌 후부터
까맣게 잊고 지냈던 기억이다. 정말 귀찮은 일이었기에 기억하는 것 자체가
끔찍했다. 어찌됐든 기억은 떠올랐고, 어떤 결론을 내리든 스스로 마음의 결정은
내려야 했다.
"잊고 있었네. 후우, 그 유적들. 미치겠군. 자넨 어쩔 생각인가?"
"나도 결정을 못 해서 자네를 찾아 온 걸세, 퓨리트님에게 알릴까?"
"알린다면 그분이 어떤 결정을 내릴 것 같은가?"
"관리하라고 하겠지.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위험한 곳이니까. "
새턴과 트레이시의 걱정은 여기서 기인했다. 관리하기 싫다는 것. 웬만하면 그
유적과는 인연을 끊고 싶다는 것. 이 때문에 퓨리트에게 알리는 걸 계속 미루고
있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새턴의 물음에 트레이시가 고민에 빠졌다. 일의 경중으로 봐서는 분명히 알려서
조치를 취해야 했다. 하지만, 알려진 후에 자신이 바빠지는 건 너무 싫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끽하는 여유가 아니던가. 또 다시 귀찮은 일에 매달리는 건 내키지
않았음이다.
"난. 지금이 좋다네. "
"결국 그런 결정을 내렸구먼. "
"난 지금의 여유를 놓치기 싫다네. "
"후후후, 알겠네. 나 역시 요즘 느끼고 있는 이 여유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구먼.
그리고 퓨리트님이 수장이 된 후부터 지금까지 방치하지 않았는가? 여태 별일이
없었으니 괜찮을 걸세. "
새턴이 애써 스스로를 합리화 시켰다. 그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에
트레이시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마우이 "
"뭘 고마워하고 그러는가. 서로가 좋자고 하는 일인데. "
"어쨌든 고맙네. "
그들이 말한 유적은 새턴과 트레이시만 알고 있는 비밀이다. 과거에는 판테아와
함께 타인의 출입을 막았던 곳. 헌데, 판테아가 갇힌 후부터 그들만의 힘으로
막았었다. 셋이 하던 곳을 둘이서 관리했으니 힘든 게 당연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그곳에 신경 썼고, 어쩔 때는 영계의 일마저 뒤로 미루고 그곳을 살폈다.
그들에게는 고문과 같은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헌데, 퓨리트가 수장이 된 후, 그곳에서 신경을 끄고 지냈다. 스스로가 귀찮았던
이유와 퓨리트의 신경 끄라는 말을 충실히 이행한 결과였다.
잠시마나 신경을 꺼서일까? 다시 그곳을 관리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그럼 이 일은 우리 둘만 알고 있는 비밀일세. "
"당연하지 내 끝까지 입을 다물 테니 염려 말게. "
"그러세. "
그들은 그렇게 대륙의 크나큰 위험덩어리를 방치했다. 이 일이대륙에 어떤 영향을
줄지, 지금의 그들은 짐작조차 못했다. 저승사자에게도 미래를 볼 능력은 없으니
말이다.
로이나와 라한은 오래전에 레테아를 살피던 언덕에 도착했다. 물론, 로이나의
텔레포트를 이용해서였다.
"분위기가 이상하네. "
"그러게.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
라한의 감각에는 그 어떤 인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감이 뛰어난 라한에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근처에는 없다는 얘기였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저기 보이는 저 집이 네 형이 살던 집이야. 아들 이름이 휴란트라던가?"
"맞아. 내 조카가 되지. 나보다 열 살 정도 적었으니까 지금은 스무 살 정도
됐겠네. "
라한과 레테아의 나이 차이는 무려 열아홉 살이다.
이 때문에 레테아의 조카와 라한의 나이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열 한살차이. 레테아가 결혼을 늦게 해서 이 정도였다. 다른 이들처럼 20 대 초반에
했다면, 라한과 두세 살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았을 터였다.
"일단 여기 좌표 좀 확인해야겠다. 디텍트 로케이션! "
라한이 좌표를 확인하는 동안, 로이나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디텍트 로케이션. 텔레포트에 꼭 필요한 마법이다. 헌데, 판트리아 대륙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진 마법이었다. 심지어 드래곤도 이 마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용언으로는 좌표 확인이 가능하지만, 물질계 마법으로는 이미 오래전에 실전된
것이다.
'저 마법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대체 그 동안 라한이 뭘 하며 지냈기에 저
마법을 알고 있을까?'
로이나의 궁금증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 드래곤도 오래전에 잊어버린
마법을 아는 라한. 대체 어떤 경로로 고대에 사용 된 마법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끝났다. 돌아가자. "
"어? 어 매스 텔레포트! "
로이나는 끝내 의문을 풀지 못했다. 마법사에게 마법 서클과 기원을 묻는 건
실례되는 일이다. 라한 역시 마법사라고 생각한다면 이 점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실례를 범하면서까지 의문을 풀고 싶지 않았기에 의문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 시켰다.
라한은 뮬라 상단으로 돌아가자마자 인챈트 스크롤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로이나와 자신을 제외하더라도 이동해야 할 사람은 두 명. 그들이 왕복할 수 있게
도합 네 개를 만들어야 했다.
라한이 인챈트 스크롤을 만드는 그 시각. 레테아는 집과 꽤 멀리 떨어진 마을의
목책에 있었다. 그 위 fl 서 밖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쉬었다.
휴우, 죄를 짓는 건 아닌지.
"그런 소리 말게. 자네는 이제 우리 식구일세. 자네가 위험해 처했는데 우리가
구경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적 병력이 너무 많습니다. 이대로는 마을 주민들 모두가 화를 당합니다. "
"허허, 이 사람도 참. 만약 저들이 날 노리고 왔다면 자넨 어쩌겠는가? 자네도
우리처럼 도왔을 거 아닌가? 우린 이미 가족일세. 미안해할 필요 없네. "
"고맙습니다. 촌장님. "
목책 위에서 밖을 바라보던 촌장과 레테아의 대화였다.
목책 밖에는 근 오백에 달하는 병력이 도열해 있었다. 하나같이 군기가 가득한 것이
정예병임을 짐작케 했다. 이에 반해 마을 주민들 중 전투가 가능한 사람은 고작
백여 명이었다. 비록 방책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턱없이 부족한
수임에 분명했다.
"옵니다. "
"온다! 모두 준비!"
촌장의 외침에 목책 위에 있던 장정들이 화살을 화로에 담갔다가 뺐다. 불화살을
만든 것이다.
"모두 대기! "
"모두 대기! "
촌장이 외치자 중간에 있던 사람들이 명령을 전달했다. 이에 시위를 당기고 있던
사람들이 몸의 긴장을 살짝 풀었다. 그렇게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던 마을 사람들.
적이 어느 정도 가까이 오자 다시 몸을 긴장시키기 시작했다.
"발사! "
휘이익! 투두두둑!
촌장의 외침에 마을사람들이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이에 백여개에 달하는 화살이
달려오던 사람들에게 날아갔다.
"실드! "
"실드! "
화살이 날아가자 달려오던 적들 사이에서 마법이 시전되었다. 그들 사이사이에
마법사가 포진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마 법사들은 모두 2 서클 마법사였다. 폭발형 마법이 나오는 3 서클수준에 이르지
못했기에 백병전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 3 서클 마법사가 있었다면 첫 공격은
마법사의 파이어 볼이 되었을 것이다.
"으악! "
"겨!"
퉁! 퉁!
"쳐라! "
몇 명의 비명소리와 실드에 부딪히는 화살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공격 외침이
목책밖에 울려 퍼졌다.
쿵- !
선두에 있던 사람들이 목책에 부딪혔다. 그리고 단 한 번에 목책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무로 만든 목책이었기에 내구력이 부족했다.
"전원 근접 전투 준비!"
"근접 전투 준비!"
외침에 퍼지자 목책 위에 있던 사람들이 아래로 뛰어내려왔다. 성벽이 아닌 목책.
이 때문에 적들도 사다리를 준비하지 않았다. 어차피 몇 번 부딪히면 부서질 목책에
사다리를 세우는 건 무의미했다. 차라리 빠르게 부수고 들어가 난전을 유도하는 게
나았다.
"준비 !"
쿵- !
목책에 부딪히는 소리가 커질수록 마을 사람들의 등에 흐르는 땀의 양도 늘어갔다.
쿵-!
파직!
쿵! 쿠쿠쿠쿵!
기어이 목책 입구가 뚫리고 말았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무기를 꼬나 잡고 전방으로
달려갔다. 입구에 몰려 있을 때, 싸우려는 생각에서였다.
"와! "
"쳐라!"
채채챙!
촌장의 공격 명령에 마을사람들이 적을 맞아갔다. 하지만, 그들도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살아남은 적의 수는 최소사백. 자신들의 네 배를 넘은 병력이었기에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 때문일까? 짐을 휘두름에 있어서 뒤를 생각지 않는 공격
일변도의 검을 고수했다.
마을 사람들이 달려가자 레테아가 뒤를 슬쩍 바라봤다. 집의 모퉁이에서 휴란트가
활을 쏘는 게 보였다. 자신의 전처를 밟게 하기 싫어서 간단한 무기술조차 가르치지
않았던 아들 휴란트. 활을 들고 있는 모양새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너에게 뭔가를 가르칠걸 그랬구나. '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엘베로라는 인간을 너무 쉽게 봤음을 인정해야
했다.
'내 동생 라한이는 어디 있을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서였을까? 괜스레 동생 라한이 떠올랐다. 벌써 십 년도 더
오래전이건만 라한의 얼굴은 조금도 잊히지 않았다. 그만큼 동생을 아끼고
사랑해서이리라.
"하앗! "
마음을 다잡은 레테아도 전방으로 쏘아져갔다.
레테아의 위기를 짐작조차 못한 라한이 엘퐁소 지방의 뮬라 상단으로 공간 이동
해왔다.
"로이나. "
"응?"
"전에 부탁했던 것 좀 부탁해. 시간이 오래 걸려도 좋으니까 자세하게 알아봐줘. "
노력은 해보겠지만 장담은 못하겠다.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서 보낼 때 외에는 유희
해본지 오래됐거든. 특히, 인간으로 유희를 해본 지 너무 오래돼서 정보길드를 찾을
수나 있을지.
로이나가 자신 없다는 듯 말을 머뭇거렸다. 헌데도 라한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아무리 못해도 투바나 프라하, 테세르보다는 로이나가 휠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저 녀석들보다 나아. "
라한이 다른 일행을 슬쩍 살피며 대꾸했다.
투바는 물질계 자체가 처음이었다. 거기다 그의 여자밝힘증. 이건 도무지 해결책이
없었다.
프라하 역시 괜히 근엄한 척하는 성격과 욱하면 쓸어버리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혹, 프라하에게 맡겼다가 수틀리기라도 한다면 그 지역 전체가 쑥대밭이 될
공산이 컸다. 정령인 테세르는 라한과 일정거리 이상 떨어질 수 없으니 애초에 고려
대상에서 제외였다.
결국, 투바, 프라하, 테세르를 제외하면 로이나 밖에 믿을 이가 없는 셈이었다.
.
.
라한의 말에 프라하가 딴청을 피웠다. 로이나에게 지기 싫어하는 투바조차도 괜히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툭툭 걷어찼다. 스스로 가 생각해도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임을 깨달은 탓이다.
"알았어. 노력해볼게. 그럼. "
"미안해. 로이나. "
"미안은 무슨. 그럼 나중에 봐. "
말을 마친 로이나가 방을 나갔다. 약간 섭섭해 하는 눈빛이었다. 이에 라한의
얼굴에도 미안한 기색이 스쳤다.
'미안. 로이나. 나 하나보고 온 건데. 에휴, 다음에 잘 해줄게. '
마음을 다잡은 라한이 주변을 훑었다. 프라하의 얼굴이 좀 전보다 확연히 밝아져
있었다. 아니, 안도하는 기색이라고 봐야 정확했다. 스스로는 부인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드래곤이라는 존재에게 주눅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흠, 흠. "
"왜?"
"하루 정도만 칩거해야겠다. "
"인챈트하려고?"
라한의 말에 투바가 짧게 반문했다. 라한의 칩거 이유를 특별한 고민 없이도
짐작했음이다.
"응. 밤에 끝날 것 같기는 한데, 이동은 내일 아침에나 할 수 있을 거야. "
"그래. 하루 늦는다고 그놈들이 어디 가겠냐?"
"그 동안 말썽피우지 말고. 알았지?"
라한의 잔소리에 투바와 프라하가 눈을 부라렸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라한이
자신들을 애 취급하는 게 화가 난 듯했다.
"젠장. 저, 애 늙은이 같은 놈. "
"나도 찬성. "
"철없는 너희들보다는 낫지. 빨리 나가. 시간 없으니까. "
"알았다. 알았어. 어, 어. 밀지 말라고. 내 발로 나갈테니까."
끝까지 반항하던 투바도 결국 방밖으로 내밀렸다. 그들은 라한이 인챈트를 끝내는
밤까지 밖에서 보내야 할 터였다. 반면 테세르는 라한의 로브 속에서 밤까지 보낼
특권을 얻었다. 입 다물고 조용히 있었다는 게 그가 특권을 얻은 이유였다.
'녀석들이 눈치가 없어. 하긴, 나같이 뛰어난 정령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지. '
테세르는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국 남들과 달리
이득을 본 셈이지 않은가. 지금 순간만큼은 자신이 예언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테세르를 품속에 둔 라한이 인챈트 공식을 체계화 시켜나갔다. 한두 번 하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챈트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공식 한 번 잘못 새겼다가는 마법이 실패할 수도 있는 일이다. 정말 운 없으면
텔레포트를 하는 중간에, 공간에 갇혀 미아가 될 위험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습관적이고 반복적이더라도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섬세한 작업이
인챈트였다.
그곳 좌표가.
좌표 책을 꺼내든 라한이 공식을 서서히 만들어갔다.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라한을 두고 나온 투바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를 본 프라하가 짐짓 근엄한 척
입을 열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쳇, 친구는 개뿔이 친구야?"
"그건 무슨 소리야?"
"라한 말이야. 말이 친구지. 숫제 부하나 다름없잖아. 우릴 친구로 대해준 적이
있기는 있냐고. "
투바의 푸념에 프라하가 고개를 절래 저었다. 하지만, 투바의 말을 수긍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오래전 굴레를 벗은 존재들을 만났을 때, 라한이 했던 말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위험한순간에 친구라고 했던 라한의 말. 자신의 위험을 도외시하고 함에
공간 이동 했던 일. 프라하는 그때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었다.
"곧 알게 될 거야. "
"뭐가?"
"라한이 말한 친구의 진정한 의미 말이야. 라한을 좀 더 알고 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라고. "
"쳇, 둘이 사귀기라도 하는 거야? 왜 갑자기 편들고 난리야. "
투바의 황당한 말에 프라하가 슬쩍 미소 지었다. 물론, 사귄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그냥 지금 순간만큼은 투바가 귀여워 보인다고 할까? 딱 그런
기분이었다.
엘베로가 보낸 병력들에 맞섰던 레테아와 마을 주민들의 싸움은 이미 끝에
다다랐다. 마을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죽임을 당했고, 살아 있는 자들도 멀쩡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몸을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기사
출신이었던 레테아 정도였다.
채챙!
"큭! "
한 병사의 검이 레테아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팔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빌어먹을. "
욕설을 내뱉은 레테아가 뒤를 슬쩍 바라봤다. 휴란트가 겁에 질린 채 떨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서 몇몇 마을사람이 힘겹게 싸우고 있지만,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결정을 해야 해. '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가족이 교수형 당할 때 끝났을 목숨. 지금 죽는다
해도 손해 본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만큼은, 아들인 휴란트만큼은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가족의 죽음마저
외면하고 살리려던 상대가 휴란트 아니었던 가.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는 건
스스로가용서치 않았다. 또, 필슨 가문의 대가 이곳에서 끊어지는 것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 '
"레테아! "
레테아가 막 결심을 굳혔을 때, 마을 촌장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미 일 검을
허용했는지 옆구리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촌장님!"
"도망치게. "
예? 하, 하지만.
촌장의 말에 레테아가 몸을 움찔거렸다. 도망은 방금 막 생각했던 거였다. 헌데,
막상 촌장이 도망치라고 하자 오히려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괜찮네, 도망치게. 도망쳐서 복수해주게."
"촌, 촌장님. "
"부탁이네. 자네 외에는 믿을 사람이 없어. "
촌장은 레테아가 복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레테아가 이곳에 올 때
가족의 죽음을 외면하고 왔음을 알고 있었다. 가족마저 외면한 그가 고작 마을
사람들을 위해 복수를 결심할 리 없었다. 다만, 휴란트의 죽음이 안타까워서, 또
레테아의 죽음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뿐이다.
"촌. 장님."
"지체했다가는 늦네. 어서. "
채채챙!
다가오는 검을 쳐낸 레테아가 눈물을 글썽였다. 너무 미안했다. 자신 때문에 벌어진
싸움에서 자신이 발을 빼다니. 기사였을 때의 레테아였다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어서!"
죄송합니다. 촌장님. 부디. 부디.
레테아는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휴란트 에게 빠르게
다가가더니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휴란트!"
"아버지! "
"미안하다. 질책은 나중에 받으마. "
말을 마친 레테아가 휴란트의 손을 잡고 내달렸다. 목적지는 마을 뒤쪽에 있는
산이었다. 드래곤 산맥의 한 줄기인 인간들의 금지. 대륙에서 보기 힘든 오크들을
비롯한 여러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곳. 들어가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험지로 살기
위해 올라야 했다.
다음날 아침. 라한이 투바와 프라하를 불렀다.
"어이, 잘 잤는가?"
"다 모인거야?"
괜한 허전함에 라한이 다시 한번 주변을 훑었다. 며칠 함께 있지 않았음에도
로이나의 빈자리가 커보였다.
"인챈트는 끝난 거야?"
- 당연하지. 우리 주인은 어젯밤에 인챈트 끝내고 밤새 푹 잤다고.
테세르가 눈치 없이 라한 자랑을 해댔다. 이에 투바가 눈을 부라리며 테세르를
매섭게 노려봤다. 누군 밤새도록 밤이슬 맞으면서 보냈는데, 따뜻한 방에서 발 뻗고
자다니. 마왕의 아들인 투바로서 는 인정할 수 없는 행태였다.
물론, 라한 혼자였다면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었다. 인챈트라는 게 마법진을
그리는 일보다 더 힘들고 고단한 일이니 어느 정도 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헌데, 아무 상관없는 테세르까지 발 뻗고 편하게 잤다는 건 용납이 안 되었다.
"오호라, 그래? 시커먼 정령 너까지 발 뻗고 잤다는 말이지. "
-당연하지 위대한 정령인 나 테세르는 주인의 가호를 받고 로브 속에서 편하게.
퍽-!
"조용해! "
테세르의 입을 라한이 폭력으로 막았다. 그는 투바의 눈에 비치는 살기를 읽었다
힘이 많이 약해진 투바에게 지지는 않겠지만, 이길 자신도 없었다. 또, 자신이
친구로 인정한 투바와 싸우는 건 더더욱 싫었다.
"라한. 내 저놈을 그냥, "
"너도 그만해. 시간이 별로 없어. 빨리 그 자식들 찾아서 스케일러 링을 찾아야지.
"
"이, 이. 젠장. 테. 세. 르. 운 좋은 줄 알아라. "
-흥.
테세르가 코웃음 치며 라한의 로브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투바의 살기가 두렵긴
두려웠던 모양이다
내 저놈을.
"줬어. 자 받아. "
탁- !
라한이 텔레포트 스크롤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쾌나 정성스럽게 만든 듯
얇게 만들어진 스크롤이었다.
"이번 건 제법 스크롤다운데?"
"재료가 얼마 안 남았어. 아껴 써야지, "
"그런가?"
시간 없어. 빨리.
라한이 일행을 재촉할 때,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제 찾아왔던 사르비엘
후작이 재차 방문한 것이리라.
그렇게 잠시 후, 노크소리가 라한 일행의 귀에 들려왔다.
똑!똑!
"날세. 들어가도 되겠는가?"
"들어와. "
역시나 사르비엘 후작의 목소리였다. 어제보다 따르는 사람일적은 걸로 봐서 라한을
어느 정도는 신임한 듯했다.
"아침부터 납셨군. "
"급한 일이라서 그러니 이해해주게. 그래, 결정은 했는가?"
"그 결정이라는 게 유괴범을 찾는 일까지인가? 아니면 그를 잡는 일까지
포함해서인가?"
라한은 카이렌이라는 그 엘프와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일단 같은 굴레를 벗은
존재. 그러면서도 다른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 함께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또, 그에게 이길 자신이 없다는 것도 그런 결정에 크게 한몫했다.
글쎄, 후자였으면 좋겠는데 .
"그럼 거절하지. "
"흠, 좋네. 그럼 찾는 것만 도와주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보겠네. "
"무슨 수로?"
라한의 말투는 다분히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한차례의 격돌을 통해서 그의
힘이 기사단을 능가한다는 건 명백해진 상태였다. 헌데, 그가 카이렌을 잡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도움을 줄 사람이 생겼네. "
"도움이라 인원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그를 이길 수 있을까?"
"한 명일세. "
"한 명? 누구지?"
"미안하네. 말하지 않기로 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때 말해주겠네 "
라한의 얼굴에 약간의 놀람이 담겼다. 물질계의 그 누가 있어서 단신으로 카이렌을
상대할 수 있을까? 일단 떠오르는 상대는 없었다.
물론, 굴레를 벗은 존재라면 앞뒤가 들어맞는다. 하지만, 왠지 그건 아닌 듯했다.
다수가 모여 있는 굴 FP 를 벗은 존재들 중 단 한 명이 대등, 혹은 그 이상의
실력자를 상대한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누굴까? 곧 알게 되겠지. '
새삼 사르비엘 후작의 발이 넓다는 생각을 끝으로 고민을 접었다. 어차피 카이렌을
만나게 된다면 알게 괼 일. 미리 고민할 필요는 없었음이다.
"그럼 얘기는 끝난 거지?"
"아직. 대체 그를 어떻게 찾을 생각인가?"
"그건 내가할 일이야. 아, 깜빡할 뻔 했군. 내가 그를 찾아주면 당신도 나한테
뭔가를 해줘야 거래가 성립되는 거 아닌가?"
"흠, 원하는 게 뭔가?"
잠시 고민하던 사르비엘 후작이 어렵사리 대꾸했다. 알려지기로 6 서클 마법사인
라한. 그가 원하는 일이 간단할 리 없었다. 아직 말도 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나중에 말해줄게. 무리한 부탁은 안 할 테니까 미리부터 겁먹지 말라고.
기사도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어야 하네. 또, 우리 나메라 왕국의 국익에 해를
가하는 일도 허락할 수없네. 명심하게.
알았어. 그럼 이만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알겠네. 그를 찾으면 연락 주게.
짧게 인사한 사르비엘 후작이 객방을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투바와 프라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라한을 바라봤다. 대체 뭘 요구할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알 게 될 거야. 이제 가자고. 텔레포트!
대답을 미룬 라한이 마법을 시전했다. 라한이 사라지자 투바도 테이블에 있던
스크롤을 찢었다. 그 뒤를 이어 프라하도 스크롤을 찢으며 투바의 뒤를 따랐다.
텔레포트!
텔레포트!
혼자 남겨진 테세르의 몸이 서서히 희미해져갔다. 라한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져서
물질계에서 사라지는 현상이었다.
-말이나 좀 해주고 가지. 쳇.
잠깐 푸념을 토한 테세르가 정령계로 돌아갔다.
형을 찾아서
레테아의 집이 보이는 언덕 위.
라한이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군. 뭔가 이상한데.
주변은 어제와 비슷하게 황량했다. 간간히 들리는 바람소리와 풀벌레소리가
그러했고, 새소리가 또 그러했다.
스팟!
쿵-!
아이고. 이놈의 텔레포트는 당최 적응이 안 되는군.
프라하가 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쩔 수없이 함께 이동했던 걸
포함하면 벌써 세 번째 텔레포트. 헌데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지 나타날 때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착-!
"유후! 공기 좋구나. "
반면 투바는 아주 안정적인 착지를 보였다. 어떻게 보면 우아하기까지 한 멋진
모습이었다.
"조용히 좀 해봐. "
"왜? 무슨 일이야?"
"좀 이상하지 않아?"
"왜? 조용하고 좋은데. "
라한의 의문에 투바가 의아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라한의 인상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불안함과 불길한 느낌. 조금은 늦은 듯한 알 수 없는
애틋함. 갑작스럽게 엄습하는 기분에 모골이 송연했다.
"이상해. "
"대체 뭐가?"
"안 되겠다. 가보자. "
말을 마친 라한이 전방으로 쏘아져갔다. 처음 목적지는 멀리 보이는 레테아의
집이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어제와 분명히 달라진 듯 보였다.
"라한! "
"같이 가!"
투바와 프라하가 라한의 뒤를 따랐다. 엄청난 속도였다. 헌데도 라한과 그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신법을 모르는 그들이 평보에도 신법을 가미한
라한을 따라 잡을 리 만무했다.
"흠. "
레테아의 집에 도착한 라한이 침음성을 흘렸다. 집은 얼핏 멀쩡해 보이지만
구석구석이 부서져 있었다.
"형! 형!"
헉, 헉. 젠장. 더럽게 빠르네. 뭔놈의 인간이.
뒤늦게 따라온 투바가 불평을 토해냈다. 하지만, 라한의 표정을 본 후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어둡고 걱정스러운 라한의 얼굴. 잘못
건드렸다가는 경을 칠 것 같았다
헉, 헉. 헉. 젠장. 너.
"쉿!"
뒤늦게 도착한 프라하가 터트리려는 불만을 투바가 제지시켰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라한의 표정도 이상했고, 이 집의 분위기도 예사롭지 않았다.
"라한. "
철컥!
투바의 부름을 무시한 라한이 집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이거.
집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운을 미리 읽었기에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헌데, 집 안의 상황이 문제였다. 온통 파헤쳐져서 누군가 난리를 피운 듯했다.
"프라하. 주변을 좀 뒤져줘. "
투바. 넌.
"나? 뭐?"
말을 하던 라한이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 마족의 짓인지 아닌지 좀 알아봐줘, 난 주변 다른
곳에 좀 가봐야겠어 "
"난 또 뭐라고. 알았어. "
라한은 아직도 마족을 피의 상징이라 생각했다. 투바를 사귀면서 마족에 대한
선입견을 많이 버렸지만,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었다. 이 때문에 미심쩍은 일이나
잔인한 행동을 보면 마족부터 떠올렸다. 라한이 머뭇거린 건 이번 일로 투바와의
사이가 틀어질까 염려해서였다.
투바가 흔쾌히 승낙하자 라한이 오두막을 나갔다. 그리고 마을의 중심부가 있는
서쪽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라한이 떠나자 프라하도 오두막 주변을 살피러 나갔다.
혼자 남은 투바. 주변을 슬쩍 돌아보더니 이내 오두막을 나갔다 그리고 오두막 앞에
있는 우물 앞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중얼거렸다.
물의 권능. 힘의 상징 너의 힘을 이곳에 부르노니 나레브리안의 수장 투바에게 그
힘을 보여 다오. 움샤크리아 레브타!
투바의 외침이 끝나자 우물 안에 있던 물이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 후, 투바의
주변을 빙빙 돌며 뭔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였다
"후후, 아직 녹슬지 않았군. "
투바의 말에 주변을 돌던 물이 투바의 몸에 엉겨왔다. 흡사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애완동물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정령사가 물을 부리는 건 그곳에 깃든 생명체. 즉, 정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생명체가 없는 물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정령. 그들과의 친분을 이용해서 부탁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마족인 레브리안이 물을 부리는 건 정령사와 확연히 달랐다. 물 그 자체에
생명을 부여해 버리는, 그래서 그물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부하가 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비록 한 번에 하나의 부하밖에 만들지 못한다는 단점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물이 많은 곳이라면 엄청나게 강한 부하를 둘 수도 있는 방법이었다.
"어제와 그제. 이틀 동안 이 오두막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말하라. "
투바의 말에 물이 죄송한 듯 고개를 숙였다. 투바의 명령을 이행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투바가 부하로 만든 건 우물 안에 있던 물이다. 그 안에 갇혀 있던 그가 밖의
상황을 봤을 리 만무했다.
'골치 아프네. 그냥 오두막에 있던 물을 쥐어짜낼 걸 그랬나?'
"야! 그럼 이 오두막에 있었던 일을 알려줄 방법이 없는 거야?"
투바의 말에 물이 주변을 빙빙 돌았다. 마치 무언가를 고민하는 모습과 흡사했다.
그렇게 한참 빙빙 돌던 물. 드디어 생각을 마쳤는지 투바의 눈앞에 마주섰다.
"뭐야"
스르르륵!
물이 바닥에 서서히 가라앉았다. 땅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바닥에만 흥건히 고인
상태였다. 그 상태로 물에서 묘한 음성이 들려왔다.
-쥐새끼 같은 놈.
-샅샅이 뒤져라!
누군가의 욕설과 외침이 물에서 퍼져 나왔다. 아마 우물 안에서 들었던 누군가의
음성인 모양이다.
-도주한 것 같습니다.
-젠장,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필요하다면 마을주민들을 고문해도 좋다.
-예.
마지막 음성을 끝으로 어지러운 발자국소리만 들렸다 이곳 오두막에서 물러가는
소리인 듯했다.
"흠, 누군가가 여기 왔었군. "
"뭐, 뭐야?"
물이 전하는 목소리를 들은 건 투바만이 아니었다. 오두막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던 프라하도 그 목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곳에서 들리는 낯선
목소리. 프라하는 그 목소리가 들린 직후에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젖은 땅과 대화하는 투바를 발견했다.
"그 뒤로는 누군가의 방문이 없었나?"
투바의 질문에 바닥에 깔려 있던 물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리고 투바의 주변을 빙빙
돌며 아니라는 몸짓을 보여 왔다.
"흠, 그럼 누군가가 이곳에 왔었고, 아무소득도 없이 돌아갔다는 건가?"
"야! 투바! 저거 뭐야?"
"뭐가?"
"저 빙빙 도는 물컹물컹한 건 뭐냐고! "
"보면 몰라? 물이잖아. "
프라하의 놀란 물음에 투바가 능글맞게 답했다. 너무 담담해 보이는 표정이라서
오히려 프라하가 바보가 된 듯 보였다.
"우씨, 누가 물인지 몰라서 그래? 저 물이 왜 혼자 지랄 발광을 하는 거냐고. "
"내가 물을 다스리는 마족이라는 걸 잊었어? 내가 물을 부리는 방법이야. 우리
레브리안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물을 다스리지. "
"쳇! 누가 마족 아니랄까봐. 뭘 해도 이렇게 흉측하냐. "
실제로 프라하는 너무 크게 놀랐었다. 좀 전에 물이 빙빙 돌 때, 투바를 공격하려는
줄 알고 도끼를 잡기까지 했었다. 헌데, 투바의 표정이 너무 평온해보여서 잠시
참았을 뿐. 만약 투바가 약간이라도 움찔거렸다면 프라하의 도끼는 물을 갈랐을 게
분명했다.
"왜 놀랐어?"
"그럼 내가 이 꼴을 보고 안 놀라겠냐. 젠장. "
"녀석. "
투바가 프라하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만난 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다니. 새삼 '친구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한
기분이었다.
"이 손 좀 치워. 징그럽게. 근데 저 물컹이가 뭐라고 하던?"
"최근에 누가 이 집을 방문했던 것 같아. 그리고 누군가를 찾고 있던 모양이더군.
아마도 라한이의 형이라는 인간이겠지. 흠, 좋은 의도로 찾는 건 아닌 것 같던데. "

"그래? 그 다음은 어떻게 됐어?"


물컹거리는 물에서 약간 떨어진 프라하가 되물었다. 아직도 이성을 가진 물에
적응이 되지 않은 듯했다. 프라하의 행동에 투바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용케 잘 도망갔나 봐. "
"흠, 다행이기는 한데, 대체 누굴까?"
"라한의 가문을 망가뜨린 그 녀석이겠지. 이름이 엘베로라고 했던가?"
"흠. "
"누군지 몰라도 불쌍하군, 라한이놈 더러운 성격에 곱게 넘어갈 리가 없는데. "
투바가 끔찍하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이에 프라하가 투바의 어깨를 툭툭 치며
속삭였다.
"너도 만만치 않아. "
하늘로 날아오른 라한이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봤다. 레테아의 집에서는 볼 수 없던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누구지?"
라한의 눈에 들어온 사람들은 마을 주민으로 보기 어려웠다. 얼핏 봐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획일화된 복장. 저런 모습은 범죄자마을의 주민보다는 그들을
소탕하러온 기사나 병사에 더 가까웠다.
"확인해 봐야겠어, 블링크!"
약간의 불길함을 느끼며 라한이 블링크를 시전했다. 공중에서 사라진 라한이 나타난
곳은 마을의 허름한 골목 안이었다.
"대장님. 모두 모아놨습니다. "
"음, 태워 버려! "
"예."
라한의 근처에서 누군가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에 라한이 고개를 슬쩍 빼고 그
사내의 주변을 살폈다.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사람보다는 한결 주민에 가까운
모습의 사람들 수십 명이 공터에 모여 있었다. 헌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대부분
어디 한군데씩 피를 묻히고 있었고, 멀쩡한 사람들도 무척이나 초췌했다.
"살려주십시오. "
"시끄럽군. "
꽤 높아 보이는 사내가 귀찮은 듯 말했다. 그 앞에 선 사내가 송구스러운 듯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빨리 시작해라!"
"예! 발사!"
슈슈슈슉!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을 둘러싼 병사들이 활을 쏘았다. 엄청난 화살이 공터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쇄도했다.
"으악! "
"사, 살려줘! "
"컥!"
가차 없는 공격에 라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서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신경 쓸 만큼 너그럽지 않았음이다
'뭔 죄를 지었을까?'
잠깐 생각해보던 라한이 몸을 다시 숨겼다. 지금은 상관없는 사람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저놈이 좋겠군.'
라한이 혼자 떨어져서 주변을 살피고 있는 병사를 발견했다. 그에게 몰래 다가간
라한이 세라소드를 꺼내들었다.
퍽-!
뭐, 뭐.
퍼벅!
털썩!
라한의 세라소드에 뒤통수를 맞은 병사가 뭔가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라한이
세라소드를 다시 휘둘러 병사를 완벽하게 기절시켜 버렸다. 처음 때릴 때의 강도가
너무 약했던 모양이다.
'이것도 연습 좀 해야겠군, '
"더럽게 무겁군. "
병사를 어깨에 짊어진 라한이 주변에 있는 작은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라한은 집
안에서 그 어떤 생명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도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라한은 뛰어 들어간 집의 지하실로 내려갔다. 벌써 누군가가 뒤졌는지
난장판이었다.
"난리군. 어디보자. 테세르! "
-응. 주인 왜?
"사람 크기로 몸 좀 불려봐!"
-응
짧게 대답한 테세르가 몸을 서서히 키웠다. 몸 전체가 검은 빛을 가진, 그러면서도
몸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마구 그려진 특이한 모습이었다.
"좋군. "
-근데 왜?
"곧 알게 될 거야. 자! 이거 입어."
라한이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테세르에게 입혔다. 옷깃으로 몸을 반쯤 드러내도록
덜 잠그고는 후드를 완전히 눌러쓰게 만들었다.
-주인. 옷 좀 빨아 입어라. 이게 뭐냐? 악취가 너무 심하잖아.
"코도 없는 게 악취는 개뿔이. 넌 그 상태로 내 옆에 서 있기만 해. 아주 좋아. "
-뭐가 좋다는 거야?
"저절로 알게 될 거라니까. "
현재 테세르의 모습은 상당히 기괴했다. 마족? 그런 정도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만큼의 공포감이 느껴졌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공포의 극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
"야! 일어나! "
짝- !
라한이 병사의 따귀를 강하게 때렸다. 헌데도 병사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병사를 기절시킬 때의 강도가 너무 강했던 모양이다.
"아쿠아!"
쏴아아아!
라한이 물을 생성시키는 1 서클 마법을 시전해서 병사의 얼굴에 끼얹었다. 이에
병사가 눈을 흐리멍덩하게 뜨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듯 했다.
"임마! 정신 차려!"
라한이 그의 목에 세라소드를 가져갔다. 위협용이었다. 물론, 여차하면 살상용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칼라피안의 유물이랄 수 있는 세라 소드로 누군가를 죽이기는
싫었다.
으, 으.
"빨리 일어나!"
"누, 누구. 헙!"
뒤늦게 세라 소드를 발견한 병사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일개 병사에 불과한 그가
이런 위협에 너그러울 수는 없었다.
"너희들은 누구지?"
말, 말할 수.
이상하지. 너희들 복장에 있는 문양은 내가 아는 그 어떤 왕국에서도 볼 수 없는
문양이거든. 누굴까?
말을 마친 라한이 세라 소드를 슬쩍 틀었다. 이에 검에 버려져 있던 날카로운
살기가 병사를 뒤덮었다.
"헉!"
목에 댄 검 때문에 고개를 젖혔던 병사가 테세르를 발견했다. 후드를 꾹 눌러쓰고
있는 검은 빛 일색의 특이한 모습.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런 기괴한 모습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으리라.
저 친구는 성격이 좀 더럽거든. 말 안 들으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고. 아, 물론 난
말리고 싶지만 저 녀석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서 말이야. 알아서 해.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눈을 부라렸다. 몸을 바꾸라고 해서 덩치를 불렸고 로브를
입으라고 해서 입기까지 했다. 자신은 시킨 대로 했을 뿐이건만 공포 조성용으로
사용하다니.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살기가 마구 치솟았다.
"커, 컥!"
테세르의 살기는 라한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겁에 질려
있던 병사를 반쯤 공황상태로 만들기는 충분했다.
물론, 기사나 관록 있는 병사쯤 되면 이런 위협은 별 의미가 없다. 체계적이고 힘든
수련을 거치면 그 만큼 정신력이 강해지기 때 문이다. 하지만, 라한이 본 병사는
수련이 부족했다. 또, 경험도 부족해 보였다. 이런 사람은 약간의 위협으로도
충분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워, 원하는 게 뭐요?"
"뭐요?"
"니까? 뭐든,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
역시 병사는 애송이였다. 일단 나이가 너무 어렸다. 또, 이마에서 마구 흘리고 있는
땀이 겁에 질렸음을 짐작케 해줬다. 거기다 미약하게 새어나오고 있는 소변 냄새는
라한의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경험은 그리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 뭐, 테세르 저놈
생긴 것도 보통은 아니지. '
"먼저 너희들의 정체. 대체 너희들 뭐하는 놈들이야?"
"우리는 대 루이나 왕국의 비밀 조직인 베루니아트의 일원이다. "
"루.이나?"
병사의 말에 라한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루이나 왕국의 비밀조직이라면 분명
엘베로가 키운 조직일 터. 어쩌면 밖에 있는 병사들 모두가 형인 레테아와 관계있는
인물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좀 전에 학살당하던 사람들은 레테아와 좋은 인연을
가졌던 사람일 가능성이 다분했다.
'골치 아프게 췄군. '
라한은 마을 주민들의 죽음을 무시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형을 못 만난 지 벌써 십
년이 넘은 상황. 어쩌면 모습이 크게 변한 형이 그 피해자 중에 한 명일지도
몰랐다.
"혹시 레테아라는 사람을 아나?"
마음을 다잡은 라한이 병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병사는 약간 놀라는 듯하더니 곧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게 레테아라는 사람을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
"잡았나?"
질문을 하던 라한의 손끝이 미약하게 떨렸다. 정말 중요한 순간이었다. 만약 형이
죽었다고 한다면? 어쩌면 이곳에 있는 병사들 전부를 몰살시켜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다 루이나 왕국까지도. 병사의 입에 이곳에 있는 병사들 전부의 목숨이
달려 있는 셈이다.
"아직. 못 잡았습니다. "
"휴, 다행이군. "
"예?"
병사는 끝까지 높임말을 고수했다. 라한의 불안해하는 눈빛과 약간씩 떨리며 목을
건드리는 검의 촉감. 이런 것들 때문에 반항이라는 단어를 애초에 지워 버렸다.
"지금 레테아라는 사람의 위치는?"
그건 잘.
"위치는?"
라한이 강압적으로 한 번 더 물었다 이에 병사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오줌을 마구
흘렸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크긴 컸던 모양이다.
"그, 그게 저도 잘. 제 지위가 너무 낮아서요. "
"마지막으로 묻지, 위치는?"
"저도, 그게.아, 아닙니다. 병사들의 반이 레비안산맥으로 갔습니다. 아마그곳으로
갔을 겁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뭐든 시키는 대로 다하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발."
라한이 검을 목에 살짝 긋자 병사가 놀란 얼굴로 빠르게 대답했다. 일단은 라한이
원했던 대답이었다. 죽지 않고 살았으니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하지만, 레비안산맥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지금은 로이나도 없는 상황.
드래곤 로드가 산다는 레비안 산맥에 가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고맙군, 나중에 너희 패장 만나면 카라한 필슨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전해라. "
퍽-!
라한이 병사의 뒤통수를 세라 소드로 내려쳤다. 엄청난 소음이 들리며 병사가 모로
쓰러졌다.
"너무 강하게 때렸나 7"
라한은 머리를 쳐서 기절시키는 게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니, 그전 생에서도 이런
경험은해 본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강약조절을 제대로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죽지는 않겠지. "
말을 마친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형을 찾아야 할 차례였다. 생각
같아서는 이곳에 있는 병력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지만, 참기로 했다.
하지만, 마구 날뛰는 엘베로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기절시키기 직전에 한
마디를 덧붙였던 것이다. 지금 이 병사가 의식을 차리면 자신의 상사에게 알리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테세르. 옷 벗어놓고 돌아가라. 나중에 다시 부를 테니까. "
-주인. 날 꼴사납게 만들어놓고 공포 조성용으로.
"빨리 돌아가지?"
-쳇. 정말 주인만 아니면 그냥.
"뭐야?"
-간다. 나중에 불러줘. 주인!
라한이 눈을 부라리자 테세르가 잽싸게 정령계로 도망갔다. 역시 그에게는 라한이
천적이었다.

드래곤 로드 로테마이어스의 레어 안 이곳의 주인인 로테마이어스가 레어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생각에 잠겼다.
'카이렌. 그 빌어먹을 엘프놈을 어떻게 찾지? 드래곤인 나도 찾는 게 쉽지 않으니.'
운명의 굴레를 벗은 엘프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인 카이렌. 그는 은신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로테마이어스가 그를 찾아내는 게 절대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자신의
주변에 있다는 확신이 서면 섬세하게 마나를 퍼트려서 찾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있는지 모르거나 거리가 좀 떨어지면 기척을 알아내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젠장, 그렇다고 골치 아프게 계속 마나를 퍼트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마나의 감으로는 찾을 수 없는 상대 카이렌. 마나를 퍼트리면
찾을 수 있지만,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그를 찾기 위해 계속 마나를 퍼트릴 수는
없었다. 너무 피곤한 일이었고, 자칫 무리했다가는 제 풀에 쓰러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어쩐다. 음, 그나저나 이 빌어먹을 엘프 놈은 대체 어디 숨은 거야?'
생각을 전환한 로테마이어스가 그의 거처를 생각해봤다.
카이렌의 본질은 엘프. 그렇다면 숲을 떠나서 살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다른
엘프들과 섞여서 사는 건 그곳에 있는 엘프들에게 너무 위험했다.
'엘프가 없는 숲이라. 너무 많아. '
후보지가 너무 많았다 일단 레비안 산맥에 있는 숲이 그러했다. 산이 아닌 숲만
따져도 근 백여 개. 그 중 엘프들이 살고 있는 곳이 겨우 세 군데에 불과하니
많아도 너무 많았다. 또, 다른 산맥이나 육지에 방치된 숲까지 포함하면 못 해도
오백 개는 넘어가는 수였다.
'카이렌. 카이렌. 혹시?'
판트리아계에는 드래곤 발가락 틈새가 가장 안전하다는 속담이 있다. 이건 예원계의
등장 밑이 어둡다는 속담과 거의 흡사했다. 드래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드래곤의 반
이상이 몰려 살고 있는 레비안산맥에 거처를 정했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또,
이곳에 있으면 드래곤의 허실을 탐지하기도 좋을 터 어쩌면 지금 이곳에 숨어서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우우우웅!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 마나를 주변에 퍼트렸다. 그렇게 이곳에 다른 이의
눈이 없는지 찾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자신과 가디언 그리고 연락을 위해 둔
어린 드래곤 두 마리 외에는 별달리 느껴지는 기운이 없었다.
'하긴, 제깟 녀석이 감히 이곳에 올 리가.'
다행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소름이 끼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계속 마나를
퍼트리지 않으면 항상 불안한 상대가 카이렌이었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기습이라도 가한다면 큰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나야 그 정도 기습으로 죽지 않겠지만, 다른 어린 드래곤이라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듯했다. 이대로 뒀다가는 다른 드래곤들이 너무 위험했다.
물론, 나이가쾌 있는 성룡이나 고룡이라면 기습을 할 때 느껴지는 살기를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3 천 살 이하의 드래곤이라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죽지는
않겠지만,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는 건 피할 수 없으리라.
"크라이드리안! 에스타리스!"
로테마이어스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드래곤 둘을 불러들였다.
크라이드리안은 로테마이어스와 같은 속성의 레드 드래곤이다. 나이는 겨우 1 천 5 백
살, 레드 일족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전투에 재능이 없는 드래곤이다. 하지만,
로테마이어스는 그를 무척이나 신임했다. 같은 레드 일족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탓이다.
이에 반해 에스타리스는 화이트 드래곤이다. 나이는 크라이드리안과 비슷한 1 천 5 백
살. 하지만 속성과 다르게 전투에 상당히 능했다. 크라이드리안과 정 반대인
셈이다. 헌데도 로테마이어스는 그를 크게 신임하지 않았다. 항상 사악하고 간교한
화이트 일족. 지금 자신의 수족이 되어주고 있지만, 상황이 불리해진다면 언제든
발을 뺄 종족이 화이트 일족이라고 생각했다.
"예, 로드님. "
"말씀하십시오, 로드님. "
채 10 초도 지나지 않아서 크라이드리안과 에스타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라이드리안. 넌 대륙에 흩어져 있는 드래곤들에게. 흠, 아니다. 에스타리스.
네가 대륙에 있는 드래곤들을 만나라. 만나서 주변을 샅샅이 뒤지라고 전해라.
그리고 혹, 위험이 닥친다면 자존심 세우지 말고 도주하라고 일러라, "
"예, 로드님. "
로테마이어스가 원래 크라이드리안에게 내리려던 명령을 철회했다. 대신 그 명령을
에스타리스에게 내렸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이기에 크라이드리안과
에스타리스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크라이드리안. 넌 레비안 산맥을 돌면서 미심쩍은 건물이 없는지 조사해라. "
"예. 헌데 어째서 그런 명령을."
"어쩌면 카이렌이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크라이드리안. 샅샅이 뒤져서 그의
흔적을 찾아라. "
"예, 로드님.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
처음 내린 명령은 전투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크라이드리안에게
맡기려고 했었다. 반면, 뒤에 내린 명령은 자칫 카이렌과 마주쳐서 크게 싸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의 성격만 본다면 처음 명령은 크라이드리안이, 두 번째 명령은
에스타리스에게 어울리는 일인 셈이다. 헌데 로테마이어스는 크라이드리안에게
위험할 수 있는 일을 맡겼다.
-인간들이 우리 레비안 산맥에 들어왔더군. 그들을 처리하면서 전투에 대한 감을
익혀라,
로테마이어스가 메시지 마법으로 크라이드리안에게 조언했다. 이에 크라이드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너무 고맙고 황송했다.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 이렇게
애써주다니. 전대 로드에게서는 볼 수 없는 따뜻한 모습이었다.
"가라. 빠른 시일 안에 해결해야 한다. "
"알겠습니다, 로드님. "
"알겠습니다. "
레어를 나온 크라이드리안은 레비안산맥을 샅샅이 뒤졌다. 물론 서치(Search :
6 서클 마법)를 이용해서였다. 그렇게 다섯 시간 동안 헤매다가 처음 맞닥뜨린
상대는 엘베로의 부하들이었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브레스 공격. 그리고 모두 불타 버린 엘베로의 부하들. 재만 남아서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음, 실수했네.
크라이드리안의 공격은 무척이나 강력했다. 하지만, 자신의 속성을 무시했다는 게
문제였다. 엘베로의 부하들 뿐 아니라 엄청난 범위의 숲까지 태워 버렸으니 말이다.

-다음부터는 브레스를 자제해야겠다.


생각을 마친 크라이드리안이 다시 레비안 산맥을 뒤지기 시작했다.
작은 집에서 나온 라한이 곧장 동쪽으로 달려갔다. 평보에 광견보를 섞은 게 아닌
광견보 그 자체를 시전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빨리 찾지 못하면 형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한편 레비안 산맥에 들어간 레테아와 그의 아들 휴란트. 몇 번의 고비를 무사히
넘기며 산맥 안으로 점점 깊이 들어갔다. 이젠 추격해오던 병사들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레테아는 이런 현상을 자신들이 너무 깊이 들어와서라고 판단
내렸다.
레테아가 숨을 헐떡이는 휴란트를 세웠다.
"휴란트. "
"헉, 헉. 예. 아버지."
"내가 미우냐?"
"아닙니다. 제가 어찌 아버지를 미워하겠습니까?"
"그래, 이젠 너도 알아야겠지. 전에 잠깐 언급했던 네 삼촌에 대해서도 다
말해주마. "
휴란트는 자신의 성이 필슨이라는 걸 몰랐다. 또, 가문이 엘베로에 의해 몰락했음도
몰랐다. 어두운 기억을 아들에게까지 전가시키지 않으려는 레테아의 배려였다.
헌데, 이젠 말해야 할 듯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공격과 고향이나 다름없는
마을의 참사. 이런 일을 설명하자면 엘베로와 필슨 백작 가문의 일부터 설명해야
가능했다.
"후우, 먼저 우리 가문의 일부터 설명해야겠구나. 사실 우리 가문은 루이나 왕국의
유력한 귀족가문이었다. "
"루, 루이나 왕국? 귀족?"
"그래. 지금은 반란을 도모했다는 누명을 쓰고 몰락했지만, 귀족이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
레테아의 말에 휴란트가 의미모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슨 가문이 몰락할 때, 휴란트는 여덟 살이었다. 어린 나이이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나이는 아니었다. 휴란트는 자신의 집이 부유했고, 왜 많은
식솔들을 부렸다는 걸 잊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바꿔 환경 때문에 처음 의아해하며
적응 못했던 일도 어렴풋이나마 기억했다. 그때와 아버지인 레테아의 말을
비교해보자 상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네 삼촌은 카라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멋진 사람이었다. 그는."
그렇게 라한에 대한 얘기와 가문, 그리고 엘베로의 비열한 행동까지 모두 설명했다.
레비안 산맥에 들어온 라한이 주변을 뒤지며 흔적을 찾아갔다. 레테아의 흔적은
찾지 못했지만, 꽤 많은 병력이 이동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테세르. "
-음냐, 하여간 우리 주인은 사람 잘 때 깨우는 데 일가견이 있다니까.
"시끄러 이 부근을 돌면서 형 좀 찾아줘. 우리 형 얼굴 알지?"
-아, 주인하고 다르게 멀쩡하게 생긴 사람?
테세르의 대답에 라한이 눈을 부라렸다. 그럼 자신은 멀쩡하게 생기지 않았다는
말인가. 생각할수록 열 받는 말이었다.
"바쁘지만 않았어도. 젠장. 빨리 찾아봐. "
-알았어.
대답을 마친 테세르가 숲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레테아를 한 번 찾아볼까 하는
마음으로는 힘들었다. 외모로 라한을 건드려놨으니 어떻게든 찾아서 아부를 해야만
했다.
테세르가 사라지자 라한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기운을 멀리 퍼트려서 인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음, 없군. "
라한은 주변에 꽤 오랫동안 제령기를 퍼트렸다. 헌데, 인간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끔씩 느껴지는 생명체도 인간보다는 오크나 트롤 같은 몬스터에
더 가까웠다.
"얼마나 깊이 들어간 거지?"
나른함을 느낀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더 뒤질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칫 엘베로의 부하들과 크게 싸워야 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기운을 모두 소진할 수는 없었음이다.
"일단 가보지 . "
생각을 마친 라한이 적당히 방향을 잡고 달려갔다. 하지만, 그리 오래 달리지
않아서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젠장. 들킨 건가?"
라한의 기운에 뭔가 거대한 물체가 잡혔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대한
기운이었다.
쿠오오오오오!
"빌어먹을. "
욕설을 내뱉은 라한이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어차피 위치를 들켰으니 지금
도망가는 건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차라리 자신에게 유리한 자리를 잡아서 선공을
취하는 게 나았다.
쿠오오오오!
-하찮은 인간들.
라한이 꽤나 널찍한 공터에 도착했을 때, 머리를 파고드는 기묘한 음성이 들려왔다.
라한이 고개를 들고 음성의 정체를 확인했다. 역시나 드래곤이었다. 그것도 레드
일족. 시아를 가득 메우는 거대한 동체에 라한의 몸이 움찔거렸다.
'젠장. 왜 하필 저놈이냐. '
라한도 레드 일족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섯 속성, 아니 과거에 사라진
실버일족을 포함하면 여섯 개 속성 가운데 가장 강한 드래곤이 레드 일족이 아닌가.
왠지 이번 싸움은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았다.
'그나마 어려 보여서 다행이다. '
라한은 드래곤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로이나를 본 적은 있지만,
본체를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영웅담을 읽으면서 대략적이나마 고룡과 성룡의
크기 정도는 구분 할 수 있었다. 지금 나타난 드래곤은 영웅담에서 듣던 드래곤들
가운데에서도 작은 축에 속했다. 아마 1 천 살에서 2 천 살 사이 정도의
드래곤이리라.
-크크크크. 아직 남아있는 쥐새끼가 있군, 마법사인가?
라한의 머리 위를 한 바퀴 선회한 드래곤이 음침한 음성을 흘렸다. 헌데, 라한을
표현 할 때 아직 남아있는 쥐새끼라고 했다. 그건 이미 인간들을 한바탕
쓸어버렸다는 얘기였다.
"흠. "
원래 라한은 걱정은 했으되 겁을 먹지는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도망갈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헌데, 막상 드래곤의 본체를 마주하고 보니 이게 아니었다. 도주? 틱도 없는 소리
같았다. 저 거대한 덩치로 저런 속도를 낼 수 있다니, 광견보를 최대로 시전해도
비등한 속도가 한계일 듯했다. 거기다 텔레포트를 쓰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었다.
마법의 종주라 불리는 상대 앞에서 마법으로 도주를 하다니. 발각당하는 건
순식간일 듯싶었다.
-가라! 피닉스!
한마디 내뱉은 드래곤이 마법을 시전했다. 피닉스. 라한의 세라소드에 인챈트 되어
있는 불계열 4 서클 마법이었다. 라한을 1 서클마법사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림 없어. 피닉스! "
라한도 마법을 마주 시전했다. 드래곤이 시전한 마법과 같은 피닉스였다. 물론,
세라소드에 인챈트 되어 있던 마법을 시전한 거였다.
쾅- !
-오호, 1 서클마법사가 어떻게 피닉스를.오호라, 마법검이라 이건가? 크크크크.
얼핏 놀란 표정을 짓던 드래곤이 이내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마법검. 그것도 4 서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검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인간들의 기준으로 본다면
B 급에 속하는 상급의 마법 무구인 셈이다.
"저 자식이."
한 소리 흘린 라한이 광견보를 시전했다. 빠르게 달려서 나무를 타고 올랐다.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나무의 끝을 박차고 하늘로 떠올랐다.
라한이 블링크를 사용하지 않고 광견보를 사용한 건 자신의 서클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처음 드래곤의 4 서클 피닉스 공격. 그건 라한의 실력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어쩌면 히든카드가 될지도 모르는 비밀을 미리 알릴 필요는 없는 법.
1 서클 마법사 행세를 하기 위해 서 광견보를 사용한 것이다.
"피닉스! 매직 애로우! "
인챈트 된 피닉스에 이어 1 서클 마법을 드래곤에게 퍼부었다. 드래곤은 라한의
마법을 일견하더니 몸을 슬쩍 틀었다. 거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유연한
몸놀림이었다.
'걸렸어. '
"매직 애로우! 아쿠아 애로우! "
드래곤이 몸을 틀자 라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두 가지 1 서클 마법을 연달아 펼쳤다.
-가소로운. 실드!
드래곤이 라한이 선 쪽에 실드를 시전했다. 라한이 사용한 건 겨우 1 서클 마법이다.
실드 정도면 그 마법을 막는데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쾅- !
스팟!
-컥!
드래곤은 라한이 사용한 마법을 무사히 막았다. 실드에 어떤 충격도주지 못했으니
완벽한 수비였다. 하지만 뒤가 허술했다. 처음에 피했던 매직 애로우가 회전해서
드래곤의 뒤를 쳤으니 말이다.
"빌어먹을. 매직 애로우! 매직 애로우! 윈드 애로우! 윈드 파이어!"
처음 사용했던 매직 애로우는 드래곤을 정확히 가격했다. 헌데도 그 어떤
상처도주지 못했다 대신, 충격은 있었는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이
기회였다. 지금 몰아쳐서 끝내지 못하면 승산이 없었다.
-쿠오오오! 실.
콰콰콰쾅!
쿠쿠쿠쿠쿵!
뒤늦게 라한의 공격을 눈치 챈 드래곤이 실드를 시전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늦은감이 있었다. 라한의 공격이 휠씬 빨랐고, 드래곤의 대응은 늦었다.
"젠장. 저 괴물같은놈이. 매직 애로우! 윈드파이어! 윈드파이어!"
욕설을 내뱉은 라한이 마법을 계속 퍼부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듯
악착같은 태도였다.
원래 1 서클 마법 중에는 폭발형 마법이 없다. 공격 마법이라고 해봐야 애로우
형태밖에 없으니 당연했다. 이에 라한은 폭발형 마법을 만들어낼 필요성을 느꼈다.
쾌 오랫동안 고민했고 연구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게 윈드 파이어 마법이다.
윈드 파이어는 파이어 애로우와 윈드 애로우를 꼬아서 발사하는 특이한마법이다. 꼴
때, 두 마법을 강하게 압축시켜서 충격이 가해지면 반발력에 의해 터지도록 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는 못하지만, 변형으로 필요한 걸 만드는 데에는 도가 튼
라한이었다.
콰콰콰쾅!
"뭔가 다른 게 필요해. "
라한이 사용한 윈드 파이어는 엄청난 파괴력을 보였다. 1 서클 마법 두 개를 변형한
조합이었지만, 서클 이상의 제령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이 하나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작은 생채기는 계속 내고 있었지만, 결정타로 사용하기에는 무리였다.
다른 이도 아닌 드래곤이니 말이다.
-이, 이놈! 이 하찮은.
콰콰쾅!
라한의 윈드 파이어가 드래곤의 욕설을 막아 버렸다. 하지만, 드래곤도 좀 전보다는
능숙하게 막아냈다. 아니, 능숙하게 맞아준 모습이었다. 작은 팔과 큰 날개로 몸을
감싼 채로.
"젠장. "
드래곤이 점점 적응해가고 있음은 라한도 느꼈다. 헌데, 뽀족한 수가 없었다. 계속
염두를 굴리고 있지만, 1 서클 마법은 1 서클 마법 아무리 제령기를 많이 담아도 본래
높은 서클의 마법보다는 한 수 아래였다.
레테아의 얘기가 계속 될수록 휴란트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져갔다. 상대는 이제
국왕이 된 엘베로. 가문을 생각한다면 복수를 해야 마땅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아니,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아, 아버지. "
"미안하다. 끝까지 말하지 않으려 했다. 그냥 조용히 묻혀 지낼수만 있다면 잊으려
했었다. 헌데, 그가. 가문의 원수인 엘베로가 우릴 그냥 두지 않는구나. "
"아버지. "
휴란트가 아버지를 부르며 눈물을 떨구었다.
너무 억울했다. 힘이 없다는 게 이런 기분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비참하고
원통하고.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만 불렀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기에 그냥 아버지만 불렀다.
그리고 이젠 다 커 버린 휴란트가 아버지를 안았다.
'아버지. 죄송해요. 지금까지 어리광만 부린 절용서해주세요.'
레테아도 휴란트에게 미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대에서 생긴 업보가
아들에게까지 이어지다니. 휴란트를 볼 면목이 없었다.
'정말 미안하구나. '
그렇게 서로 미안해하는, 그렇게 서로 안고 있는 시간이 지나고 레테아가 휴란트를
조용히 불렀다.
"휴란트. 시간이 없구나. 서둘러야겠다. "
"근데 아버지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글쎄다. 아직 정해놓은 곳은."
부스럭!
레테아가 휴란트를 등 뒤로 밀며 주변을 살폈다. 분명히 인기척이었다. 너무 비참한
심정이라서 주변을 둘러보는 걸 게을리 했던 모양이다.
"누구냐!"
"잠, 잠깐! 우린 적이 아닙니다. 그 검 좀."
레테아의 외침에 숲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2 남 1 녀였다. 그 중 선두에 선
남자의 말에 레테아가 검을 살짝 내렸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 에펠님이었군요. 근데 어떻게 여기까지."
"저희도 도망 나왔죠. 여기가 대체 어딥니까? 중간에 길을 잃어서. 그나마
레테아님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
레테아는 에펠 일행을 기억하고 있었다. 엘베로의 2 차 공격이 있기 직전에 마을에
들어왔던 사람들이다. 레테아의 기억에 에펠일행은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레테아는 그들을 그리 신임하지 않았다. 이유 없이 친절한사람, 이유 없이
부지런한사람.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뭔가 꿍꿍이가 있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그들에게서 약간 거리를 두고 지냈었다.
"여긴 레비안 산맥이라는 곳입니다. 벌써 꽤 많이 들어왔죠. "
"레비안 산맥? 어디서 들어본 곳인데."
에펠을 비롯한 베린, 카류나. 이들은 대륙 지형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했다.
과거에는 마법사란의 지식으로 버텼지만, 암살자의 첫 공격에 란이 죽임을 당했다.
그 후 로이나와 베르네의 인도로 여기까지 올수 있었지만, 그들도 이미 떠나
버렸다. 지금 그들에게는 대륙의 정보를 제공해줄 정보 공급처가 사라진 셈이다.
"드래곤 산맥이라고 아십니까? 그곳이 여깁니다. 대륙 드래곤의 반 이상이 이곳에
산다고 알려져 있죠. "
"드, 드래곤 산맥?"
레테아의 대답에 에펠 일행 모두가 경악해했다. 드래곤 산맥이라니. 쫓겨서
여기까지 왔지만, 이곳이 드래곤 산맥이라는 건 꿈에도 생각 못했다.
"레테아님. 이제 어쩌죠? 혹시 나가는 길을 아십니까?"
카류나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그보다 혹시 저와 휴란트가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까?"
레테아에게는 카류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에펠
일행이 자신의 가문에 대한 비사를 들었는가? 혹 들었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었는가. 지금 레테아에게는 그게 더 중요했다.
"아,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었나보군요. 저희는 방금 왔기에 듣지 못했습니다. "
'다행이군. '
카류나의 대답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카류나의 솔직한 대답으로 그들은
죽음의 고비를 넘었다. 만약 필슨 가문의 비사에 대해 들었다면, 레테아는 그들을
죽여 입을 막아야했다. 자칫 자신의 행적을 엘베로에게 발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별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집안 얘기라서요. 아, 나갈 방법은 저도 잘


모릅니다. 저도 여긴 처음이거든요. 살아서 나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죠. "
"근데 이상하군요. 드래곤 산맥에는 몬스터들이 우글우글 거린다고 들었는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몬스터를 단 한 마리도 보지 못했습니다. "
"그건 저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곳이 드래곤의 거처라
불리는 레비안 산맥인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
그들이 몬스터를 보지 못한 건 라한과 싸우고 있는 드래곤 크라이드리안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산맥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절대자의 출현. 또,
전투감각을 익히라는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가는 곳마다 살기를 흘렸으니 몬스터가
나타날 리 없었다. 몇 명의 먹잇감을 포기하더라도 숨는 게 최선이었으리라.
"운이 좋았군요. 근데 이제 어쩌면 좋죠? 길도 모르는데, "
"돌아가는 길은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서쪽으로만 계속 가면 되거든요. 하지만,
아직 그 정체불명의 집단이 남아 있으니.휴, 아직은 이곳에 더 머물러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
레테아는 엘베로가 보낸 조직을 정체불명의 집단이라 칭했다. 그건 그 집단이
자신과 관계없다는 걸 에펠 일행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자신 때문에 이 위험한
레비안 산맥으로 쫓겼다는 걸 안다면, 저들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군요. 그럼 마냥 도망갈 게 아니라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드래곤 산맥이라서인지 그 재수 없는 놈들이 더 이상은 쫓아오지 않는 것 같더군요.
시간만 보내면 될 것 같은데요. "
"흠, 그럴까요?"
레테아도 에펠 일행의 의견에 찬성을 표했다. 벌써 다섯 시간째 보이지 않는
엘베로의 부하들 이곳이 레비안 산맥임을 감안하면 가능한 얘기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휴란트가 너무 지쳐 있었다. 자신은 한때나마 기사출신이었기에
체력에 자신이 있었지만, 휴란트는 아니었다.
"적당한 곳이 없을까요?"
"글쎄요. "
"아버지. 좀 전에 본 동굴은 어때요?"
레테아와 에펠 일행이 고민하고 있을 때, 휴란트가 의견을 제시했다. 헌데,
레테아는 의아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동굴이라니. 레테아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동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럼 자신과 함께 있었던 휴란트도 보지 못했어야
정상이다. 헌데, 대체 언제 동굴을 봤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휴란트야. 우리가 언제 쯤 동굴을 본 게냐?"
"예? 아까요. 한 시간쯤 전에 지났던 계곡 위에 있었잖아요. 엄청 큰 동굴이라서 본
줄 알았는데. "
"흠, 혹시 잘못 본 게 아니냐?"
휴란트의 대답에 레테아가 다시 한번 되물었다 아들인 휴란트가 못미더워서는
아니었다. 다만, 자신에 대한 믿음이 너무 강해서 믿을 수 없었을 뿐이다.
레테아는 몇 시간 전부터 도주보다는 쉴 곳을 찾아야 함을 느꼈다. 이 때문에
주변을 샅샅이 뒤지면서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았다. 헌데 그런 자신이 보지 못한
곳을 휴란트가 봤다니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일단 가보시죠. 어차피 이곳에 있어봐야 별 수는 없잖아요. "
"그러죠. "
베린의 의견에 레테아도 승낙의 몸짓을 취했다. 어차피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차라리 휴란트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는게 나았다.
라한에게 계속해서 공격당하던 드래곤 크라이드리안. 붉은 비늘에 붉은 피를
뒤집어써서 상당히 흥측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공격 가운데 치명타가 단
하나도 없었기에 겉보기와 달리 피해는 적었다.
반대로 라한의 겉모습은 상당히 평온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거의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사용할 수 있는 공격 마법은 1 서클이 전부. 헌데, 그 마법을 마구
퍼부어서 제령기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는 제 풀에 지쳐 쓰러질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
그나마 다행이라면 고위 서클의 비클래스 마법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정도였다. 크라이드리안의 뒤통수를 칠 마지막 한 수는 남은 셈이다.
"저놈의 껍질을 통과하지 못하면 방법이 없어. "
역시 드래곤 스케일은 강하고도 질겼다. 그렇게 많은 폭발형 마법에 당하고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 계속 꽃히는 마법 때문에 날개
여기저기가 찢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방법이 방법이 있을 거야. '
"윈드 파이어! 윈드 파이어! "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면서도 마법을 멈추지 않았다. 당장 마법이 끊겼다가는
오랫동안 벼르고 벼렸던 크라이드리안의 공격이 시작될 터. 그런 상황까지 가기
전에 마무리 지어야 했다.
'혹시?'
잠깐 궁리한 라한이 광견보를 시전해서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나무 끝에 다다랐을
때 하늘로 높이 치솟아 올랐다.
"로케이션 디텍트! "
라한이 공중에서 마법을 시전했다. 텔레포트를 할 때 사용하는 좌표 확인
마법이었다.
쿠오오오!
-1 서클 마법사가 아니었구나.
콰콰쾅!
크라이드리안의 외침에 라한이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 방법 밖에 없었다. 1 서클
마법만 퍼붓다가 제 풀에 쓰러질 수는 없는 일이다. 히든카드를 버리더라도 지금
어떤 방법을 쓰는 게 최선이었다.
"흥. 윈드 파이어!"
다시 한번 마법을 사용한 라한이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물론 광견보를 계속 섞어서
사용한 움직임이었다. 드래곤과 싸우는 지금 순간만큼은 광견보의 흉측한 모양새를
도외시했다.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판국에 그런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똥통에
뒹굴어도 오래 살고 싶은 게 라한의 꿈이었으니까.
"덤벼봐, 자식아!"
크라이드리안을 도발한 라한이 뒤로 계속 물러났다. 이와 동시에 퍼부어지던 마법도
약간 뜸해졌다. 겉으로는 마나가 다 된 기색이 역력했다.
'제발 조금만 더!'
마법이 뜸해지자 크라이드리안도 공격할 여유가 생겼다. 분노한 얼굴로
크라이드리안이 마나를 끌어 모았다.
-엡솔루트 실드! 헬 파이어!
크라이드리안은 먼저 방어를 튼튼히 한 이후에 공격을 시작했다. 무차별 공격을
당해서인지 조심하는 듯했다.
'그딴 건 필요 없다. 바보 드래곤, '
속으로 비웃음을 흘린 라한이 헬 파이어의 영향권에서 빠르게 물러났다. 광견보와
블링크를 섞어서 사용한 엄청난 속도였다.
-이놈!
한소리 내뱉은 크라이드리안이 라한을 향해 쇄도했다. 멀리 있을수록 상대가 피하기
쉬운 건 당연한 일. 라한에게 좀 더 접근해서 끝장낼 속셈이었다.
'빌어먹을. 너무 많이 왔어. '
인상을 찌푸린 라한이 크라이드리안에게 쇄도해갔다. 이에 크라이드리안이 주춤하며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엡솔루트 실드! 파이어 블레이드! 파이어 토네이도!
라한의 접근을 막기 위해 크라이드리안이 마법을 주변에 뿌렸다. 레드 드래곤의
화염마법다운 엄청난 열기가 라한을 덮쳤다.
'미치겠군 '
-주인! 나도 도와줄까?
라한이 크라이드리안의 마법을 피하고 있을 때, 테세르의 음성이 뇌리를 두드렸다
주변을 살피러 갔던 테세르가 돌아온 듯했다. 어쩌면 일찍 왔었지만, 구경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찌됐든 라한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다.
"테세르! 저놈 마구 공격해! 빨리! "
-어? 공, 공격? 아, 그건 자신 없는데 해볼게.
테세르가 정령계에서 뭔가를 꺼내왔다. 테세르가 쓰기 딱 좋은 크기의 작은
책이었다.
현재 테세르는 크라이드리안의 뒤쪽에 있는 나무에 숨어 있었다. 마나를 숨기는
일에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마나의 정령 테세르. 모습만 감춘다면 천하의 드래곤도
그를 찾아낼 수 없었다. 거기다 크라이드리안이 라한에게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도 테세르의 은폐가 유지되는 이유였다. 모습을 숨길 수 없다는 게 카이렌과 다른
점이리라.
'저놈 뭐하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라한이 테세르를 바라봤다. 그리고 황당한 듯 입을 떡 벌렸다. 누군
마법 피하느라 정신없어 죽겠는데 책을 꺼내들다니.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쥐새끼 같은 놈! 헬 파이어!
"쳇. 블링크!"
마법을 재빨리 피한 라한이 테세르를 다시 바라봤다. 테세르는 책을 펴든 채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뒤적이더니 이내 손가락을 딱 퉁겼다.
-찾았다. 주인 조금만 기다려! 전지전능한 마나의 힘이여. 이제 그대에게 속박된
자유를 내가 풀어주나니 나 테세르의 이름으로 어, 에또, 뭐더라.
주 문을 한참 외던 테세르가 말을 얼버무렸다. 주문을 까먹은 모양이다. 마나의
정령이되 머리가 너무 나쁜 테세르. 그에게는 저 정도로 긴 주문을 한 번에 읊는 게
무리였다.
"이런 젠장맞을. 저놈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
-아, 미안 주인! 조금만 기다려. 제대로 외우고 사용할게.
현재 테세르는 3 서클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2 서클 마법도 길다고 못 외운
테세르가 3 서클 마법을 시전하려 하니 제대로 될 리 가 없었다.
'두고보자. 테세르. 넌 나중에 주먹 오백 대다. '
후일을 다짐한 라한이 다시 크라이드리안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아직도 헬
파이어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전투 경험이 일천하다는 게 마법 조합의 단순함을
이끌어냈다. 또, 강한 마법이 최고라는 바보 같은 생각도.이 때문에 8 서클 마법인
헬 파이어만을 고집하는 크라이드리안이었다.
"핫! "
뒤로 계속해서 도망가던 라한이 직각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헬 파이어를
피하던 라한. 한참 지난 후에 다시 한번 직각으로 틀었다. 두 번의 방향 전환으로
처음과 정반대로 몸을 피하는 형국이 만들어졌다.
'조금만 더. '
라한이 도주하는 속도를 조금씩 늦추며 자리를 잡아갔다.
라한은 자신이 좀 전에 기억해둔 좌표로 크라이드리안을 유도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마지막 한 수가 여기 달려 있는 탓이다.
헌데 자꾸만 어긋났다. 알면서 피하고 있는지 우연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중요한
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계획했던 일이 틀어질
지경이라는 게 중요했다.
'제발 이번만은. '
쿠오오오오!
-이놈! 헬 파이어!
마법을 시전한 크라이드리안이 공중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라한이 생각했던 좌표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결국, 또 한 번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미치겠군. 테세르! 마법이고 나발이고 저 녀석 정신 사납게 좀 해봐. '
-잠깐만. 주인. 거의 다 외웠어. 전지전능한마나의 힘이여. 이제 그대에게 속박된
자유를 내가 풀어주나니 나 테세르의 이름으로 아씨, 또 까먹었네. 뭔 주문이
이렇게 어려워.
테세르는 처음과 같은 대목에서 또 주문을 잊어먹었다. 라한이 좌절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 저놈에게 윌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저놈 마나의 정령 맞아? 돌의 정령 아냐?'
-크크크크. 마지막이다. 애송이.
공중에 오른 크라이드리안이 숨을 크게 들이셨다. 이에 주변에 있던 마나가
엄청나게 요동하기 시작했다.
'미, 미친.'
땅 위에 있던 나무들이 엄청 기류에 휩싸였다. 또 대기에서도 엄청난 소음이 터져
나오며 심상찮은 일을 예상케 했다.
"혹시. 브레스?"
생각을 마친 라한이 다급한 듯 주변을 훑었다. 브레스를 피할 만한 장소를 찾기
위함이었다. 헌데,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레드드래곤의 브레스를 단순한 바위
따위로 막을 수는 없는 일. 어떻게든 저 엄청난 힘을 막아내야 하는데,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테세르!"
-어? 어, 어. 이거 뭐야? 저놈 미쳤군. 여기서 브레스라니. 숲다 타버리면
어쩌려고.
"숲만 중요하고 난 안 중요하냐? 나도 숯덩이가 되게 생겼다. 멍청한 정령아! "
-아, 맞다. 근데 저 엘프는 우릴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건가?
생뚱맞은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엘프라니.
-엘프야! 구경만 하지 말고 좀 도와줘. 우리 주인 죽잖아.
"흠. "
침음성이 들려왔다. 헌데 라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라한과 한참 떨어진 곳.
오히려 라한보다 드래곤과 더 가까운 숲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라한이
경악하며 주변을 살폈다. 헌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 누구냐?"
"시끄럽다. 인간. "
이번 대답은 드래곤의 바로 아래에서 들려왔다. 그 사이에 드래곤 바로 아래로
이동한 모양이다.
'이 럴. 수가. '
믿을 수 없었다. 기감에 예민하다는 자신이 이방인의 등장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드래곤에게 패하는 것보다 더 비참한 기분이었다.
"인간! 살고 싶으면 뭐든 해라. "
"어? 어. 저 녀석을 이 앞까지 끌고 와. 저기 끝이 갈라진 나무상공 15 미터
정도까지만. "
"노력해보지. "
보이지 않는 상대와 라한이 의견을 주고받았다. 어색한 기분이었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살수만 있다면, 저 빌어먹을 드래곤에게 이길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앗! 엘레테르의 비검. 에탄! "
드래곤 바로 아래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서 단검 십여
개가 하늘로 쏘아졌다.
-쿠오오!
놀란 크라이드리안이 숨을 멈추었다. 일단 브레스는 어떻게 막은 상황이었다.
'살았다. '
"인간! 날 위로 날릴 수 있나?"
"잠시만. "
라한이 아공간을 열어 스크롤을 두 개를 꺼냈다. 그리고 그 스크롤 두 개를 드래곤
아래로 빠르게 던졌다. 한 차례 공격을 해서일까? 좀 전에 느끼지 못했던 이방인의
위치가 포착되었다. 라한의 스크롤은 정확히 그 위치로 향했다.
"흠, 저놈도 날 발견한 건가?"
의아한 듯 중얼거리던 이방인이 스크를 두 개를 낚아챘다. 스크롤을 슬쩍 훑어본
이방인이 그 중 하나를 찢으며 외쳤다.
"좋군. 플라이!"
이방인이 드래곤 아래로 빠르게 쏘아져갔다. 크라이드리안이 놀란 듯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도 이방인을 발견한 모양이다.
'이상하군. 드래곤보다 저 인간이 먼저 발견하다니. '
생각은 순식간에 끝났다. 지금은 생각이 아닌 행동이 필요한 시기. 크라이드리안을
처리하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도 부지하기 힘들었다.
"받아봐. 미친 드래곤. 하앗!"
끊임없이 도발하는 이방인의 태도에 라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드래곤을
유도하는 방법 치고는 너무 유치했다. 저따위 도발에 드래곤이 걸려들겠냐 싶었다.
헌데
-이놈! 감히 잔재주를 피우다니,
걸려들었다. 라한이 생각한 그 이상으로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단순한 존재 인
모양이다.
크라이드리안이 마법이 아닌 육탄 공격을 감행했다. 이방인은 플라이 마법과 빠른
몸놀림을 적절하게 사용해서 피하기 시작했다.
역시 드래곤의 움직임은 덩치와 다르게 빨랐다. 하지만, 이방인의 몸놀림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멀쩡한상태의 드래곤이었다면 이방인보다 더 빠를 게 분명했다.
하지만 라한과의 싸움으로 쾌 많이 지쳤고, 잔부상이지만 쾌 많은 출혈을 한
후였기에 상당히 느려져 있었다. 이 때문인지 현재 둘의 속도는 거의 비등했다.
'흠, 아직 내 경험이 부족한가?'
라한이 내심 스스로를 자책했다. 프라하와 쾌 많은 논전을 벌였지만, 논전은 논전에
불과했다. 실제로 싸워본 경험이 부족했기에 실전에서 제대로 된 힘을 사용하지
못했다. 아니, 힘은 제대로 사용했지만, 상대를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저렇게 느려진 걸 알았다면, 저 정도로 단순한 상대인 줄 알았다면, 스스로의
힘으로도 상대를 처리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멍청이 바보 드래곤. 다른 드래곤들도 널 멍청하다고 놀리지?"
-이놈! 닥쳐라! 누가 감히 날 놀린다는 말이냐?
이방인은 공격을 피하면서도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크라이드리안은 그럴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며 꼬박꼬박 대꾸했다. 참으로 한심한 작태였다. 싸울 때 계속 말을
하는 이방인이나 그 말에 발끈하는 드래곤이나 한심하긴 매한가지였다.
"바보들, 매직 스크류!"
라한이 마법을 시전했다. 발사는 하지 않고 머리 위에 만들기 만한 모습이었다.
적절한 시기를 노려서 만들어놓은 마법을 날릴 생각이리라.
'조금만 더!'
"엄마 젖 제대로 못 먹고 자랐냐? 왜 그렇게 비실비실해?"
-닥쳐라. 이놈!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지금이다. '
둘의 한심한 작태를 보던 라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크라이드리안이 자신이
원한 딱 그 위치에 도달했음이다.
"테세르! 알지?"
-당연하지.
대답을 마친 테세르가 매직 스크류를 꼭 껴안았다. 마나의 정령이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이었다.
"좋아. 가랏! 텔레포트!"
라한의 외침에 매직 스크류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매직 스크류를 안고 있던
테세르도 사라졌다.
콰콰콰쾅!
곧이어 크라이드리안의 몸속에서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다. 마치 몸속에서 폭탄이
터진 듯한 소리였다.
-쿠오오오!
쿵- !
궁중에서 이방인을 공격하던 크라이드리안에 바닥에 추락했다. 이에 바닥의 움푹
패며 무수한 나무들이 가로로 꺾여 넘어졌다.
"휴, 살았군. 테세르. "
라한의 외침에 공간에서 테세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딘가에서 달려오는 게 아닌
나타나는 테세르. 이런 형태는 정령계에서 소환될 때에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잘했어. "
-후후후, 당연하지, 내가 누구야? 난 마나의 정령이야. 마나의 정령이라고. 내가 못
하는 게.
"시끄러. "
테세르에게 일침을 가한 라한이 드래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이미 의식을 잃었는지
더 이상의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 씩 보이는 턱 아래의 헐떡임이 죽지
않았음을 알려줄 뿐. 반송장이나 마찬가지의 상태였다.
스스스슥!
라한이 드래곤 앞에 도착하자 그의 옆에서 이방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테세르의 말처럼 엘프였다. 초록색 머리카락을 탐스럽게 기른 아름다운 여성체.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지경이었다.
"음 "
"그런 눈으로 보지마라 인간. 난 남자다. "
"음. "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했다. 인간. "
"미안하군. 누구 생각이 나서 말이야. 근데 정말 남자 맞아?"
라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능글맞게 대답했다. 헌데, 그의 얼굴표정이 요상했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 아이의 얼굴이지 않은가. 예상 못한 표정에
이방인이 한걸음 물러났다.
"그, 그 표정은 뭐냐?"
"하하하. 뭐 나중에 알게 되겠지. "
"그나저나 어떻게 한 거지? 대체 왜 드래곤이 추락한 건지 설명해줄 수 있겠나? 난
공격하는 걸 보지 못했는데?"
이방인의 물음에 라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답해주기 싫었음이다. 이에 라한이
빈정거리며 입을 열었다.
"먼저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예의 아닌가? 그리고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대체 어떻게 내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거지?"
"내 이름은 카이렌이라고 한다. 너와 같은 굴레를 벗은 존재지. "
라한도 예상하고 있던 상대였다. 로이나가 말했던 드래곤도 찾지 못한다는 유일한
상대 카이렌. 그 하나만으로도 상대가 누구인지 쉽게 짐작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되자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몸을 숨기는 건 내 특기다.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라. "
"훗, 그런가? 드래곤을 상처 입힌 방법도 내 특기다. 너도 그렇게만 알아둬라. "
"재미있는 인간이군. 아주 재미있어. "
조금 전 라한은 드래곤 크라이드리안에게 만들어둔 매직스크류를 공간이동 시켰다.
자신이 아닌 다른 개체만의 이동. 그건 8 서클 마법인 텔레포트 아더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이에 반해 라한의 실력은 7 서클 비클래스 마법까지만 가능한 상태
라한에게 가능한 마법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그는 테세르를 이용했다. 이미 8 서클 마법 주문은 다 외우고 있는 바.
테세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마나를 더해서 임의로 8 서클 마법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물론, 운 나쁘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아까는 경황이 없었고, 그만큼 다급했다.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모험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비탄의 활 레이시드
레테아와 에펠 일행이 휴란트가 발견했다는 그 장소에 도착했다. 헌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휴란트야! 대체 동굴이 어디 있다는 게냐?
아버지. 저기 안 보이세요? 저기 동굴 있잖아요.
흠.
침음성을 흘린 레테아가 에펠 일행을 돌아봤다. 에펠 일행도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몸짓을 보여 왔다.
아버지! 저기 저 큰 동굴이 안 보인다고요?
휴란트야!
아버지 말씀 좀 해보세요. 저기 저 동굴이 안 보여요?
휴란.트야.
레테아는 휴란트가 정신 착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을에 닥친 불상사와
가문의 비사. 정신적 충격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들에게 너무 못난 짓을 한 것 같아 죄스러웠다.
"아버지. "
"미안하다. 얘야! 정말 미안하다. "
레테아가 휴란트를 꼭 껴안았다. 다른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그냥 미안하다는
말밖에.
"아버지! 제발요. 정말 저게 안 보이세요?"
휴란트가 계곡의 낭떠러지 중간을 가리키며 계속 외쳤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었다. 헌데도 계속 고집을 피우고 있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휴란트. 제발 정신 차리거라.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제발, 휴란트. "
말을 하던 레테아가 눈물을 글썽였다. 이에 휴란트가 결심한 듯 입을 악다물었다.
"아버지. 정말 있다고요! 보세요!"
말을 마친 휴란트가 레테아의 손을 뿌리치고 계곡으로 달려갔다. 계곡 끝에
다다랐을 때, 공중을 향해 힘껏 도약했다.
"안 돼!"
"멈추세요!"
레테아와 에펠의 제지는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이미 공중을 향해 뛰어내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헛!"
"어, 어디?"
휴란트가 사라졌다. 헌데, 아무런 증거도 남지 않았다. 어이없는 상황에 레테아와
에펠 일행의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다.
"휴란트! "
"휴란트씨! 어디 있어요?"
레테아의 외침을 카류나가 받았다.
휴란트와 에펠 일행의 나이 차이는 고작 세 살. 레테아에게나 아이이지 에펠
일행에게는 다 큰 어른이나 다름없었다.
"휴란트!"
"이런 어이없는 일이."
에펠 일행이 황당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레테아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무 황당했다. 지난 20 년 동안 애지중지 키웠건만 이렇게
황당하게 잃어버리다니.
"혹시."
생각을 마친 레테아가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로 조금 물러나더니 계곡 쪽으로
힘차게 뛰었다
"안 돼요!"
"멈춰요! "
레테아가 휴란트의 전처를 밟으려 하자 에펠과 베린이 레테아의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 레테아. 그를
휴란트처럼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었음이다.
"놓으세요!"
"안 됩니다. 아드님 일은 유감이지만, 그렇게 무모하게 행동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
"하지만.혹시 모르잖습니까? 저 계곡 중간에 우리가 모르는 길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
"그거야 실험을 해보면 알 수 있는 겁니다. 굳이 몸을 던져서 확인해볼 필요는
없으니까 잠시만 참으십시오. "
레테아를 다독인 베린이 바닥에 돌을 들어올렸다. 꽤나 큰 돌이라서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던지겠습니다. 하앗!"
레테아를 일깨운 베린이 돌을 계곡 밖으로 던졌다. 좀 전에 휴란트가 달리던 속도와
위치를 고려해서 던진 쾌나 섬세한 손놀림이었다.
휘이이이익!
하지만 돌은 사라지지 않았다. 계곡 밖으로 어느 정도 날아가던 돌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풍덩!
아련하게 돌이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정도 깊이의 계곡이라면
레테아도 살아남지 못할 터였다.
"다시, 다시 한번만. "
"알겠습니다. "
레테아의 부탁에 베린이 다시 돌을 들어올렸다. 무려 다섯 개였다.
그 돌들을 어떤 건 강하게, 또 어떤 건 약하게 연달아 던졌다. 하지만, 그 돌들은
모두 계곡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어떤 의심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낙하에
불과했다.
"휴.란트. "
"고정하십시오. 일단 저희가 살길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이곳이 드래곤 산맥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곳에 동굴이 없다면 다른 곳에서라도 은신처를 찾아야 합니다.
"
"하지만, "
"레테아님! "
"알겠소. "
레테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방향을 틀었다. 어쩔 수 없었다. 좀 더 아들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래도 한 때 기사였던 사람이
레테아였다. 아들의 실종이 확실시된 지금은 대의를 위해 움직여야 했다. 그게
기사의 가르침이었고 레테아가 생각한 기사의 행동패턴이었다.
"힘내십시오. "
"예. 언젠가 다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는 모르지만,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드래곤산맥의 어떤 특성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을지도
모르니 희망을 가지십시오. "
에펠과 베린의 위로를 들으면서도 레테아의 걸음에는 힘이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아들이다. 가문의 복수마저 뒤로 미루고 애지중지 했던 아들 휴란트. 그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데 어찌 힘을 낼 수 있겠는가.
"드래곤 산맥을 빠져나가는 일은 도와주겠네. "
"고맙습니다. "
에펠 일행과 레테아 모두 자신들이 있는 이 산맥을 드래곤 산맥이라 불렀다. 원래
명칭은 레비안산맥. 이 산맥을 발견한 레비안이라는 사람이 레테아와 에펠 일행의
말을 들었다면 무척 억울해할 일이다.
물론, 수백만 년 전에 존재했던 사람이라 지금은 없지만 말이다.
크라이드리안을 잡은 라한과 카이렌. 대충 통성명을 마친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크라이드리안을 포박하는 일이었다.
물론, 그 포박이라는 게 나무 덩굴 정도로 묶는 건 아니었다. 라한의 마법과
오랜만에 소환한 슈라의 물리적인 힘. 거기에 카이렌의 날카로운 검이 더해져서
만들어진 임시 포박이었다.
쉽게 말해 라한이 크라이드리안의 드래곤하트를 제령기로 봉하고, 크라이드리안의
목을 슈라가 두 손으로 조르고, 카이렌이 드래곤하트가 있는 곳에 검을 올려놓는
일련의 동작이었다.
-주인! 근데 이 드래곤은 어떻게 된 거야? 난 드래곤에 의해 만들어져서. 그게 저.
조금 전 드래곤과의 싸움에서는 슈라를 사용하지 않았다. 나무가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울창한 숲에서 슈라를 불렀다가는 움직임에 제약을 받을 게
분명할 터. 제령기를 사용하는 제약받는 슈라를 사용하느니 차라리 혼자 싸우는 게
낫다고 판단했었다.
"드래곤을 죽이는 일은 못하겠다는 뜻이지?"
슈라의 어색한 말에 라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라한을 주인으로 삼았어도
태생은 속이지 못하는 듯했다. 그를 창조한 드래곤에게 호의적인 감정부터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뭐, 그렇기는 하지만. 꼭 죽여야한다면. 어, 그러니까 내가 잡기만 하고 주인이
죽이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죽일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
-고맙다, 주인.
별일 아닌데도 슈라가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의 태도에 라한이 걱정스러운 빛을
띠었다. 운 없으면, 정말 재수 없으면 드래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데,
드래곤에게 호의적인 부하라니. 앞으로 의 일이 순탄치 않을 듯했다.
"근데 라한! 대체 이 드래곤을 왜 살려두려는 거지? 지금 드래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거야?"
"대충은 들었어. 근데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거든. 나도 드래곤의 수를 줄여야
한다는 건 알지만. 에휴, 미안하다. "
카이렌의 퉁명한 대꾸에 라한이 미안한 듯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라한도 드래곤을 하나라도 더 줄여놓는 게 유리하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로서는다른 대안이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형인 레테아를 찾는 게 다른 모든
일보다 우선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뭐 머리 나쁜 놈 같지는 않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
"믿어줘서 고맙다. "
라한과 카이렌은 통성명을 한 후에 꽤 많이 친해졌다. 동류라고 할까? 둘은 상당히
흡사했다.
먼저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게 비슷했다. 또, 그 목적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 또한 둘의 공통점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일치하고 있는 건 그들의 목적이었다.
오래 살자. 똥통에 빠져 살더라도 목숨만은 부지하자. 그들의 인생 목표가 그렇게
같았으니 빨리 친해지는 것도 과언은 아니었다.
"근데 라한 대체 이 덩치를 어떻게 깨울 생각이야?"
"뭘 고민하고 그래? 그냥 깨우면 되지. 야! 일어나!"
퍽-!
라한이 크라이드리안의 눈을 발로 찼다. 제란기를 담지 않았기에 그리 위력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은 모든 생명체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곳이다. 위력적이지
않다하여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꿈틀!
역시나 라한의 발길질에 반응이 왔다. 깨지는 않았지만 몸을 움찔했으니 깨게
만드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야! 빨리 일어나! "
퍽! 퍽! 퍽! 퍽!
라한의 발길질이 연이어 네 번 이어졌다. 눈의 한 가운데에 한번. 그 주변에 세
번이었다. 이번은 제란기도 약간 섞어서 소리가 상당히 우렁찼다. 그 소리에
어울리게 통증도 만만치 않을 잣이다.
-크르르르릉!
크라이드리안이 콧바람을 내뱉으며 눈을 파르르 떨었다. 곧 깨어난다는 증거였다.
"요놈 봐라. 빨리 안 일어나!"
-그, 그만해라. 일어났다.
또 다시 발길질을 하려 하자 크라이드리안이 잽싸게 제지시켰다. 자신을 깨운 게
라한이었고, 그 방법으로 자신의 눈을 때렸음을 아는 듯했다.
"일어났군. "
-왜 날 죽이지 않았지?
"부탁할 게 있어서. "
-크크크. 그냥 죽여라. 우리 드래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 너희 인간
따위의 부탁을 들어주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크라이드리안의 강경한 태도에 라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드래곤의 자존심이
강하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도 이런 태도를 유지할지는
생각 못했었다.
"카이렌!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다시 들볶아야지. "
퍽! 퍽! 퍽! 퍽! 퍽!
-콕, 크륵! 크륵!
카이렌이 크라이드리안의 눈을 발로 사정없이 걷어차기 시작했다. 라한과 다르게
평생 검을 익혔던 카이렌. 그의 발길질은 라한의 것보다 더 심한 고통을 선사했다.
'저놈 성격도 참. 어찌 저렇게 더러울꼬. '
라한이 카이렌의 행동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누가 봐도 라한과 카이렌은
오십보백보였다. 헌데 카이렌의 성격이 더럽다고 욕하고 있으니. 누가 듣는다면
황당해서 고개를 저을 일이었다.
"야! 카이렌! 그만해라. 그러다 애 잡겠다. "
"무슨 소리야. 이놈은 더 맞아야 돼. "
"맞긴 윌 더 맞아! 너 깡패야? 무슨 애가 패면 다 되는 줄 알아. 쯧쯧. "
"그런가? 흠, 역시 제대로 배운 놈이라서 다르군. "
라한의 말에 카이렌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한과 카이렌의 작태를
보던 슈라가 입을 떡 벌렸다. 뭐 저런 놈들이 다 있나 싶었다.
-주인. 그건 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하여간 사람은 배워야 한다니까. 저 못 배운 놈 하는
짓거리 좀 봐라. 에잉!"
"라한. 너무 그러지 말라고. 나야 검 익히느라 배움을 얻지 못했던 거잖아. "
카이렌은 라한이 마법사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죽어 들어갔다. 마법사는 뛰어난
머리 뛰어난 머리는 제대로 배운 사람. 이런 공식 때문에 자신보다 머리가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야! 크라이드리안!"
-뭐라고 해도 소용없다. 인간 따위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내가 할 말은 두 가지다. 두 가지를 모두 승낙하면 살려주겠다. "
-들을 필요 없다. 난 하지 않을 거니까.
라한의 말에 크라이드리안이 끝까지 거부를 표했다. 라한은 그의 태도를 무시한
채로 입을 열었다.
"첫째. 난 굴레를 벗은 존재다. 여기 있는 카이렌도 마찬가지고. 아마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을 거야. "
-그럴 리 없다.
"내 이름은 카라한 필슨이다. 들어본 적 있나?"
-그건.
"없겠지. 너희들이 가지고 있던 정보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까. 자! 내가
굴레를 벗은 존재라는 정보를 너희 대장에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 그게 너희 대장을
위하는 진정한 길이라고 생각하는데. "
라한의 말에 크라이드리안이 고민하는 빛을 보였다. 자신들의 정보에 없는 굴레를
벗은 존재의 등장이라니 분명 중요한 정보임에 분명했다. 정보의 중요성만 따지면
로드에게 알려야 할 일이다.
헌데, 인간들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자신은 물질계 최강이라는
드래곤. 인간들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자존심 상했음이다.
-흠, 두 가지라고 했나? 하나는 뭐지?
"이곳 레비안 산맥에 레테아라는 사람이 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것이다 어린 사람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군. 아무튼 레테아라는
사람과 그의 일행을 찾아줬으면 하는데 "
-어떻게 생겼지?
"테세르! "
라한의 부름에 테세르가 숲 뒤쪽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라한과 비슷한 크기로 몸을
불린 상태였다. 또, 그의 모습도 원래 테세르와 달랐다. 분명 레테아의 모습이었다.

물론, 피부가 시커멓고 눈빛이 멍청하다는 게 레테아와 달랐지만, 어찌됐든 그런


세세한 걸 제외하면 레테아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생겼다. 물론 피부색은 이런 게 아니지만. 그 정도는 너도 대충 확인할 수
있겠지. "
-그게 끝인가?
"그래, 레테아와 그 일행만 찾아주면 널 놓아주겠다. 난 사람을 찾을 수 있고 넌
로드에게 중요한 소식을 전할 수 있고. 어때? 멋진 생각 같지 않아?"
-흠, 허락하겠다.
결국 크라이드리안도 허락의 말을 내뱉었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라고 죽는 게 두렵지 않겠는가. 드래곤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을 뿐. 살 길만 있다면 살고 싶은 건 모든 생명체의 공통된 바람이었다.
"잘 생각했어. 후후후. 테세르. 이 녀석 좀 치료해줘라."
-알았다. 흐흐흐흐.
테세르가 짐짓 음흉한 웃음을 터트렸다. 나름대로 드래곤을 겁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하지만 비록 잡혔다고는 하지만 크라이드리안은 드래곤이다. 정령
따위에게 겁먹을 리 없는 물질계 최강의 존재였다.
-미친 정령 같으니라고.
-뭐야?
"테세르! "
크라이드리안과 테세르가 싸울 기미가 보이자 라한이 재빨리 제지시켰다.
하여간 테세르는 잠시만 내버려두면 사고를 쳐댔다. 어떻게 된 게 아무리 충고를
해도 먹혀들지가 않았다.
-저 꼬마 정령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뭐?
-사고뭉치 정령 같으니.
이젠 슈라와 테세르도 서로 대화가 통했다. 슈라가 투바에 의해 재창조될 때,
물질계 언어를 배운 탓이다. 그 전에는 소환 시간이 짧아서 배우지 못했던 물질계
언어.
투바에게 재창조될 때는 소환된 시간 내내 함께 지내야 했다. 그 때문에 답답함을
못이긴 투바가 그에게 말을 가르친 것이다
-저, 저. 뚱땡이 골렘이.
"테세르! 그만하라고 했다.
-힝. 주인은 나만 미워해.
삐친 테세르가 크라이드리안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또
자신 있는 치료 마법을 그에게 시전했다.
-힐링!
희미한 빛이 크라이드리안을 감쌌다. 그 빛이 사라지자 크라이드리안의 표정이
약간은 편안해졌다. 아주 미약하나마 치료가 되긴 된 모양이다.
"나머지는 알아서 치료해라. "
-크크크. 너와 했던 약속은 지킨다. 우리 드래곤은 약속을 어기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 약속이 이행된 후에! 널 가만두지 않겠다.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
라한의 말이 끝나자 슈라가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카이렌도 검을 거두고 옆으로
비켜섰다. 제약이 사라지자 크라이드리안이 서서히 떠올랐다.
쿠오오오오!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
말을 마친 크라이드리안이 산맥의 한곳으로 날아갔다. 로드인 로테마이어스의
레어가 있는 방향이었다.
오해의 시작
크라드리안이 사라진 후, 카이렌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라한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겨우 사람을 찾는 일 때문이었나?
뭐가?
그 드래곤 녀석을 살려준 거 말이야.
카이렌의 물음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도에 카이렌의 눈이 붉게
상기되었다. 명백히 분노했다는 표시였다.
고작 인간 한 명 때문에 드래곤을 살려 주다니. 빌어먹을. 드래곤 하나가 가지는
힘이 얼마나 큰 지 알기나 해?
알아.
근데 살려 준 거야?
살려주기는 했지만 그 녀석은 잊어도 돼. 어차피 우리와 싸우지 못할 테니까.
라한의 말에 카이렌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얼굴을 천천히 돌리며 라한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슨 의미냐는 걸 몸으로 물어온 모습이었다.
"너나 슈라가 그 녀석에게 가했던 제약은 해제했지만, 난 아니잖아. "
"마나를 봉하는 거? 하하하하. 드래곤에게 마나를 봉하는 제약 따위가 통할 거라고
생각해? 똑똑한 줄 알았더니 헛똑똑이잖아. "
카이렌의 질타에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쉬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지, '
어쩌면 카이렌의 말처럼 효과가 없을지도 모른다. 라한보다 마법에 있어서는 월등한
존재가 드래곤이니까,
그렇다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라한이 드래곤하트를 봉할 때 사용한
방법은 마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란기를 돌리는 무공의 능력과 제령기를 돌리는
마법의 능력을 반쯤 섞은 특이한 봉인 방법. 드래곤 역사상 처음으로 보는 방법이
분명할 것이 기에 일말의 가능성은 있었다.
-주인. 이제 뭘 하지?
"일단 기다려야지. "
"꼴좋군. 드래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마냥 기다리겠다니. "
라한과 카이렌의 좋던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드래곤을 그냥 풀어준 일에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 불만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기에 라한도 참고 있으려 했었다. 헌데, 사사건건
불만을 터트리자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야! 카. 이. 렌! 너 치사하게 자꾸 이럴 거야?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사과를
받았으면 그걸로 끝이지 왜 자꾸 시비 걸고 난리야. "
"시비는 무슨. 그냥 그렇다는 거지. "
"어휴, 저 속 좁은 놈. 뭔 사내자식이 그 모양이냐. 생긴 것도 여자 같아가지고. "
여자라는 말이 나오자 카이렌의 눈이 모로 쭉 찢어졌다. 그 상태로 라한을 날카롭게
노려보고는 살기를 서서히 일으켰다. 4 천 년이 넘은 긴 시간 동안 자신을
괴롭혀왔던 예쁜 외모. 오랫동안 예민해했던 부분을 라한이 또 건드린 셈이다.
'어라? 잘 못 건드린 건가? 어쩌지, 음, 음.'
"야! 눈 풀어! 예쁜 얼굴에 주름가면 보기 안좋.
스팟!
휘잉!
순간적으로 카이렌이 라한에게 쇄도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맞으면 즉사할 수도 있는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라한의 광견보가 없었다면 피하지도 못했을 터였다.
"빌어먹을. "
"닥쳐! 하앗! "
카이렌이 계속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이에 라한이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며 계속해서
주먹을 피했다. 숨 돌릴 틈도 없었다. 체력이라면 라한도 뒤지지 않지만, 카이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 상태로는 라한이 주먹의 제물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야! "
"그 입 다물라고 했다. "
카이렌은 도무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도망 다니면서 어렵게 입을 열어도
무시해 버리는 카이렌.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때에나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미치겠군. 이거 어쩌 크크크.'
라한에게 모책이 떠올랐다. 비록 누군가를 팔아먹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라한을 탓하기 전에 그렇게 생겨먹은 외모를 탓해야 하리라.
"야! 카이렌! 너 보다 더 예쁜 남자도 있는데 네가 왜 그래?"
뚝- !
라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이렌의 몸이 멈추었다. 몸에서 풀풀 풍기던 살기도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좀 전에 살기등등하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사실인가?"
"물론이지. 뭐, 너보다 더 예쁘다고는 못하겠지만, 아무튼 더럽게 예쁘게 생긴 놈인
건 확실하다. 내가 보기엔 둘의 외모 수준이 거의 흡사한 수준이라고 봐. "
라한의 말에 카이렌의 안색이 환하게 변했다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하나? 혼자서
당했던 외모에 대한 수모를 누군가와 함께 당할 수 있다는 점. 오직 그
하나만으로도 즐거운 기분이었다.
'특이한 놈들이야. 저렇게 다르다니. '
라한이 생각한 얼굴의 주인공은 물론 투바였다. 헌데 둘의 반응이 너무 달랐다.
투바는 자신의 외모를 자랑스러워했다. 또, 그 외모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여자를
유혹하는데 사용했다. 헌데, 카이렌은 외모를 저주하며 산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어떻게 비슷한 수준의 외모 같으면서도 이렇게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는지.라한에게는 미스터리였다.
'설마 저놈도 투바처럼 변하지는 않겠지. '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카이렌을 계속 다독였다. 빠른 시일 안에 꼭 만나게
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동굴에 떨어진 휴란트가 동굴 밖을 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왜
자신은 아버지를 볼수 있는데, 밖에서는 자신을 보지 못하는지. 안타까움에 계속
소리를 질렀지만, 밖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마저 듣지 못했다.
'이제 어쩌지. '
휴란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남겨졌다. 이야기책에서 봤던 영웅들의 고독한
여행기. 어릴 때는 마냥 동경했지만, 직접 겪어보니 너무 무서웠다. 지금
순간만큼은 그들이 정말혼자 다녔던 게 맞나 싶었다.
'나쁜 책 같으니라고. 책을 믿는 게 아니었어.'
책의 나쁜 점을 씹어 발긴 휴란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는 길은 알 수
없는 막에 의해 막혀 있었다. 지금 그에게는 안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혹, 혹시 드래곤이 살지는 않겠지?"
우우우우웅!
마치 휴란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안쪽에서 모한 울림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휴란트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그리고 눈을 꼭 감고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 저 어쩌죠?'
마치 눈만 뜨면 아버지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꿈일
뿐. 아버지가 이곳에 없다는 건 휴란트도 잘 알았다. 지금은 혼자서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시기였다.
"그래. 카라한삼촌도 열여덟 살에 집을 나가셨다고 했어. 세상에서 잊힌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고 했어. 나도. 나도 할 수 있어 "
마음을 다잡은 휴란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좀
전과는 얼굴에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뚜벅! 턱!
휴란트가 한 걸음씩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은 그리 넓지 않았다. 동굴의
크기만으로 보면 드래곤의 레어는 아닌 듯했다.
잠깐안도의 한숨을 쉰 휴란트가 벽을 짚었다. 매끈했다. 그 어떤 돌출부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연적인 동굴은 아니야. 그렇다고 드래곤도 아니고. 그럼 누구지? 혹시 드워프?"
휴란트는 이곳이 드워프가 살던 곳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어쩌면 지금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드워프가, 마법에
대해 무지한 땅의 종족이 남의 이목을 속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자신에게만 보이고
아버지를 비롯한 에펠 일행에게 보이지 않았던 동굴. 드워프들이 그런 일을 할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드래곤인데. 그들은 아닌 것 같고. 대체 뭐지?"
휴란트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일단 이곳에는 먹을 게 전혀 없었다. 이런 곳에서 빨리 빠져 나가지 못하면 굶어
죽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다. 왜 지금에서야 아버지에게 불효했던
과거가 생각나는지.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아버지에게 더 잘했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자위했다.
뚜벅!
한참 걷던 휴란트가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에서 빛이 스며 나왔기 때문이다.
햇빛인지 마법에 의한 빛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와 다른
무언가가 앞에 있는 건 분명했다.
'정신 차리자, 휴란트. 오우거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했다. 정신
차리자. 휴란트. '
스스로를 다독인 휴란트가 품을 뒤졌다. 무기가 될 만한 걸 찾기위해서였다. 헌데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의 과잉보호가 낳은 어처구니없는 사태였다.
"미치겠군, "
휴란트가 겉옷을 벗어 손에 들었다. 제대로 된 무기로 볼 수 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옷을 쥐고 있으니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뚜벅!
휴란트가 다시 걸음을 옳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갔을 때 눈앞에 돌로 만들어진
문이 나왔다.
"이걸 어떻게 열지?"
잠시 중얼거린 휴란트가 문에 손을 가져다댔다. 혹시나 문을 열만한 장치가 있는가
싶어서였다. 헌데.
그르르르륵!
휴란트가 손을 대자마자 문이 서서히 열렸다. 쾌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지
상당히 거슬리는 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으악! "
문이 어느 정도 열렸을 때, 문안에서 빛이 쏟아졌다 멍하게 서있던 휴란트가 순간
시력을 잃고 비명을 질렀다. 너무 어두운 곳에 서 만난 밝은 빛. 자칫하면 정말
실명할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이런, 문 건너편이 밝다는 걸 알면서도 멍하게 있다니. '
휴란트의 미천한 경험이 이런 사태를 불러왔다. 이 때문에 멍하게 서서 시력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 멍하게 있던 휴란트. 실눈을 뜨며 시력이 돌아왔는지 확인해갔다.
다행히 눈에는 이상이 없었다. 시야의 한가운데가 멍이든 듯한 점이 보였지만, 그것
역시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증상이었다.
"다행이다. "
휴란트가 벽 옆에 붙었다. 그리고 고개를 빠끔히 내밀어 문 안을 살폈다.
"어라?"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이긴 했지만 생명체와는 무관한
것들뿐이었다.
동굴 안에는 온갖 기하학적인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천장부터 바닥, 벽까지
사방 10 미터 정도 되는 방 전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야! 예쁘네. "
이곳과 너무 어울리지 않는 동굴 모습에 휴란트가 감탄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는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서일까?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 최소 자신을 해칠 무언가는
없으니 당연한지도 몰랐다. 거기다 가장 걱정했던 드래곤의 레어가 아니라서 더
다행스러웠다.
"그나저나 큰일이네. 먹을 게 없어, "
역시나 생존의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다. 현재 휴란트에게 남은 식량은 말 그대로
제로였다 헌데, 동굴 끝이 이런 공동이었으니 살 길이 막막했다.
"하아임."
휴란트가 동굴의 한 중간에 도달했을 때, 미칠 듯이 잠이 쏟아졌다. 그제야
쫓기느라 쾌 오랫동안 피곤에 절어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단순히 피곤해서라고 보기에는 몰려오는 잠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수면제를 잔뜩 마신 것 같은 몽롱함과 연신 터져 나오는 하품. 책 읽느라
몇날며칠을 샜을 때도 이런 피곤함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건 뭔가 이상해. 뭔가."
철퍽!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한 휴란트가 바닥에 쓰러졌다. 뭔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서도 잠을 이기지 못했음이다.
로테마이어스의 레어 안.
크라이드리안이 비틀거리며 레어의 입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숨을
몰아쉬며 가디언이 오기를 기다렸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로테마이어스의 가디언들이 크라이드리안에게 몰려왔다.
"누구냐!"
-나다. 크라이드리안. 로드님을 좀 불러다오.
가디언들은 본질적으로 생명체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이 누군가를 구분하는
유일한 방법은 목소리뿐이다. 이 때문에 크라이드리안이 쓰러졌을 때에도 적개심만
드러냈다. 그러다가 크라이드리안이 입을 열자 안색을 펴며 적개심을 풀었다.
"저 로드님께서는 지금 명상을 하신다고."
-지금 내 모습을 그대로 전해라. 그럼 로드께서 달려오실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대답을 마친 가디언 한 명이 레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머지 가디언들도 적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한 명씩 사라졌다.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서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크라이드리안이 약 십분 쯤 기다렸을 때, 레어 안에서 엘프의 모습을
한 미남자가 걸어 나왔다. 로드인 로테마이어스가 폴리모프한 모습이었다.
-죄송합니다, 로드님.
로드가 나타나자 크라이드리안이 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로테마이어스가 본체가
아닌 폴리모프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쓰러져 있다고는 하지만 로드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크라이드리안의 눈. 자신의
상급자가 올려다보게 하는 그 자체가 죄였기 때문이다.
"괜찮다. 흠, 근데 다쳤군, "
-죄송합니다, 로드님.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드래곤이 부상당했다. 길가다 넘어져서
다쳤을 리 만무했다. 그럼 누군가가 드래곤을 부상 입혔다고 봐야했다. 그 누가,
대체 어떤 겁 없는 자가 드래곤을 공격했을까? 누군지 모르는 그 상대에게 분노가
솟구쳤다.
"어떻게 된 일이냐?"
-굴레를 벗은 존재를 만났습니다.
"흠, 혹시 카이렌이었느냐?"
-그도 있었고 인간도 있었습니다.
크라이드리안의 말에 로테마이어스의 눈이 매섭게 치켜떠졌다. 안 그래도 골치
아팠던 카이렌과 굴레를 벗은 인간들이 연합했다. 어차피 모두 죽일 놈들이었지만,
순간 살기가 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들어가자. 너 혼자의 힘으로 그들 모두를 막는 건 무리였겠지. "
-로드님. 그보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치료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
-정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크라이드리안이 고집을 피우자 로테마이어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말대꾸 한번 없던 크라이드리안이 자신의 말을 자르다니, 너무 생소한 느낌에
어안이 벙벙했다.
"무엇이냐?"
-우리가 모르는 굴레를 벗은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이름이 뭐지?"
-카라한이라는 인간입니다. 카이렌은 그를 라한이라고 불렀습니다.
크라이드리안의 대답에 로테마이어스가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거기다 역사를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는 이름이었다. 아니, 한 명이
있기는 했다. 류카라한. 이름이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 류카라한이라는 자가 아니던가?"
-류. 카라한? 그게 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처음 등장한 인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누군가와
비슷했다. 혹시 자신이 속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가 검을 썼느냐? 아니면 마법을 썼느냐?
-그게 저. 1 서클 마법만 사용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몸놀림은 어땠느냐?"
-엄청나게 빨랐습니다. 제가 최고로 내는 속도와 거의 비슷한 속도라서 .
크라이드리안의 대답에 로테마이어스가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답을
종합해보면 류카라한이 확실했다.
원래부터 약간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류카라한. 검사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마검사였으니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거기다 이름도 비슷하고
마법도 1 서클만 사용했으니 자신의 짐작이 확실하다고 단정 지었다.
"류카라한이라. 그 녀석과 카이렌의 협공이라면 네가 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
-아, 네.
크라이드리안은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류카라한은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헌데, 입을 다물고 침묵을 고수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치료를 해야겠구나. 엡솔루트 리커버리! "
로테마이어스가 크라이드리안의 몸에 마법을 시전했다. 9 서클절대 치료마법답게
엄청난 빛이 크라이드리안의 몸에 머물렀다가사라졌다.
치료가 끝나자 로테마이어스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일어나 보거라. "
-감사합니다. 으윽!
비틀! 쿵!
일어나려던 크라이드리안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엡솔루트 리커버리가
실패했다는 얘기였다.
"음? "
의문을 품은 로테마이어스가 크라이드리안의 몸에 손을 올렸다. 그 상태로 마나를
천천히 주입했다 머리부터 시작해서 몸으로. 그렇게 이동하다가 드래곤하트까지
이르렀을 때,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 이건."
-로드님. 무슨 문제라도
크라이드리안의 의문을 무시한 채로 다시 마나를 주입했다. 그리고 크라이드리안의
몸을 다시 살펴 나갔다. 역시나 드래곤하트가 이상했다. 분명 깨어지거나 금간 게
아님에도 제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이상하군. 엡솔루트 리커버렌"
두 번의 마법 시전으로 외상은 완벽히 치료되었다. 헌데, 오직 드래곤하트만은 굳은
상태 그대로였다.
"확인해봐야겠어. 레비테이션! "
-로, 로드님.
로테마이어스가 크라이드리안을 공중으로 띄웠다. 아주 높은 위치가 아닌 바닥에서
살짝 떠오를 정도의 높이였다.
"잠시만 참아라. 고룡께 가봐야겠다. "
-로드님, 잠시만.
다급해하는 로테마이어스를 크라이드리안이 제지했다. 이에 로테마이어스가 의아한
듯 크라이드리안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냐?"
-제가 그 인간과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
-예. 레테아라는 사람을 찾아주기로 약속을 해서.
크라이드리안의 목소리가 모기 소리처럼 작아졌다. 거래를 통해 서 목숨을
구걸했다는 게 수치스러워서였다.
"약속은 지겨야겠지. 우리 드래곤에게 약속은 남다르니까. "
-감사합니다, 로드님.
로테마이어스는 크라이드리안의 패배를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자신이
총애하는 크라이드리안이 살아왔다는 게 더 중요했다. 또, 지금 그의 드래곤하트
때문에 품은 의문을 풀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알겠다, 프리미아!"
끼이이익!
로테마이어스의 외침이 있고 잠시 후, 레어 안에서 아름다운 인간 소녀가 걸어
나왔다. 블루 드래곤 프리미아였다.
곧 2 천 살이 되는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대륙의 정세를 파악하는 거였다. 그
때문에 근 일 년 동안이나 대륙을 여행하다가 좀 전에 로드의 레어에 도착했다.
"예, 로드님. "
"레테아라는 인간을 찾아라. 우리 드래곤 산맥에 있는 것 같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게다. 필요하다면 내 가디언을 사용해도 좋다. "
"저, 로드님. 무슨 일이라도."
"어디 좀 갔다 와야겠다. 그때까지 그 인간을 찾아서."
말을 하던 로테마이어스가 크라이드리안을 바라봤다. 어디로 데려다주면 되느냐는
표시였다. 이에 크라이드리안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엘프리오나 숲 동쪽 10 킬로미터 지점입니다.
"들었지?"
"예, 로드님. 그대로 하겠습니다. 헌데 반항하면?"
프리미아의 물음에 로테마이어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모종의 결정을
내렸는지 담담하게 말했다
"반항하면 보내줘라. 원하는 자만 옮겨라. "
"알겠습니다. 텔레포트!"
대답을 마친 프리미아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로테마이어스가 다시
크라이드리안을 바라봤다.
"이제 더 부탁할 거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가지. 매스 텔레포트!"
로테마이어스가 크라이드리안과 함께 어딘가로 이동해갔다. 아마 자신이 품은
의문을 품어줄 고룡을 찾아 간 것이리라.
라한이 엄청난 속도로 숲을 가로질렀다. 입이 바싹 마르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쉬지 않고 달렸다.
"빌어먹을 놈. "
라한은 지금 카이렌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투바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카이렌의
당장 보고 싶다는 생떼에 라한이 두 손 두 발 다들었다. 찾아오지 않으면 또 다시
발광을 부릴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지고 들어갔다.
"젠장. 나쁜놈. 미친놈. 놈팡이. 드래곤 발톱 때만도 못한 놈!"
투바를 찾아가면서도 끊임없이 욕을 퍼부었다. 너무 억울해서 욕이 마구 쏟아졌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욕을 한 적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헉, 헉! 다 왔다. "
라한은 근 세 시간을 달려서야 레테아의 오두막 근처에 도착했다. 산맥에 들어갈
때, 광견보를 최대로 펼쳐서 네 시간이나 들어갔던 거리였다. 헌데, 세 시간 만에
돌아왔으니 굉장한 속도임에 분명했다. 또, 그 속도는 라한이 체력의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얘기도 되었다.
"아이고. 죽겠다. 프라하! 투바! 어?"
라한이 프라하와 투바의 이름을 외친 후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막상 달려올
때는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가 느껴졌다.
"누구지?"
"여! 라한! 뭐하다가 이제 온 거야?"
멀리서 투바가 천천히 다가왔다. 헌데, 프라하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기분에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놈들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라한이 터벅거리며 투바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재수 없도록 아름다운 얼굴로
능글맞게 웃는 투바, 카이렌과 자꾸만 겹쳐보여서 더 짜증나는 얼굴이었다.
'내 얼굴이 휠씬 낫구만. '
라한이 스스로를 위로하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보면 라한도 쾌 잘난 얼굴이었다. 투바와 카이렌이 너무 예쁘게 생겨서
상대적으로 못나 보일 뿐. 어디 내놔도 빠지는 얼굴은 아니었다.
"야! 대체 무슨 일이냐? 누가 있는 것 같은데?"
"역시 라한. 한 번에 알아보는군. "
"말해봐, 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사고라니. 그 무슨 섭섭한 말을 하고 그러시나. 여기 정찰 온 놈들이 있어서 잠시
잡아뒀지. "
투바의 대답에 라한이 눈을 흘겼다. 자신에게 느껴지는 기운은 못해도 열 명. 헌데,
이 기운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투바의
말처럼 그냥 잡아둔 건 절대 아니라는 얘기였다.
의심을 접지 못한 라한이 다시 되물었다.
"그냥 잡아둬? 거짓말 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별거 아니야. 프라하가 심심하다고 해서 가지고 놀고 있는 중이지. "
"프라하만? 넌 아니고?"
"나야 말리려고 했지. 근데 너무 재미있어 보이더라고. "
라한이 뒤통수에 손을 얹고 몸을 휘청했다. 역시나 그냥 잡아두기만 한 건
아니었다.
말리려고 했다는 투바의 말도 믿기 어려웠다. 장난이라면 프라하보다 투바에게 더
어울리니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부추긴 것도 투바일 것이고, 주동자도 투바일 게
분명했다.
"가자. "
"그래, 내가 재미있는 구경시켜줄게. "
투바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활짝 펴고 앞서갔다. 라한은 그 뒤를 따르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되는 애들이 프라하와 투바였다. 장난이라면 테세르가
단연 으뜸이지만, 그는 자신과 멀리 떨어지지 못한다는 제약이 있었다. 헌데 투바와
프라하는 그런 것도 없으니 눈앞이 깜깜했다.
'에고 대체 이 중생들을 어찌할꼬. '
그렇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레테아의 오두막 뒤뜰로 걸어갔다.
"둘! "
"짹짹! "
"하나! "
"참새! "
"둘! "
"짹짹! "
오두막 뒤 쪽에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 큰 남정네 열명이 옷을 훌렁 벗은
채로 바닥에 키스를 하는 모습.
가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다시 하나!"
참새!
프라하의 외침에 열 명의 사내가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어린 아이들이 토끼
흉내낼 때의 그 모습이었다.
"둘! "
짹짹!
프라하의 '둘'이라는 구령에 사내들이 고개를 땅에 묻었다. 그리고 흙을 혀로 쓰윽
핥으며 맛있다는 듯 냠냠거렸다.
"다시 하나! "
"야! 프라하! 너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아, 라한왔구나. 이리 와서 앉아. 이놈들 겁나게 재밌어."
"뭐 하고 있냐니까!"
프라하의 대꾸에 라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라한은 인간이다. 물론, 다른 동물로 살았던 때를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은 인간이
분명했다. 헌데 인간이 다른 종족에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었다. 같은
인간으로서 참기 힘든 모습이었다.
"이거? 참새 놀이지. "
"너 바보냐? 손을 머리에 올리는 저 자세가 참새야? 저건 토끼잖아. 멍청아!"
라한의 말에 프라하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참새가 아니라 토끼
형태였다.
"그게 어."
프라하가 말을 머뭇거리며 투바를 바라봤다. 뭔가 도움을 달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이에 투바가 라한과 프라하 사이에 끼어들었다.
"글쎄 말이야. 내가 저 모습은토끼라고 말을 했는데, 저놈이 극구 참새라고
우기잖아. 하여간 머리 나쁜 놈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
"뭐? 이, 이."
분노가 극에 달하면 오히려 말이 안 나오는 법. 지금 프라하의 표정이 딱 그러했다
사내들의 모습이 참새라는 말도 투바가 했던 말이고, 이런 일을 시킨 것도
투바였다. 자신한테 다 덮어씌우고 발을 슬쩍 빼 버리다니. 억울해서 말이
안나왔다.
"쯧쯧. 하여간. 프라하! 넌 앞으로 저놈하고 놀지 마라. 놀아봐야 너만 손해야. "
"무슨 소리야? 내가 뭘 어쨌다고. "
라한의 말에 투바가 발끈하며 대꾸했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뭔가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쳇! 투바 이놈, 다시는 너하고 노나 봐라. "
"이래서 어린 애들은 안 된다니까. 좀 놀렸기로서니 그새 삐쳐서는. 쯧, 쯧. "
투바의 말이 프라하의 심기를 계속 건드렸다. 이에 프라하의 눈이 붉게 달아오르며
살기가 피어올랐다. 이대로 뒀다가는 뭔가 큰 사고가 날 것만 같았다.
"그만해!"
"하지만. "
"늑대가 덤비면 어쩔 거야?"
"투바 너도 그만해. 나이도 적지 않는 놈들이 어찌 그렇게 철이없냐? 에휴, 투바!
프라하! 짐 챙겨. "
라한이 둘을 갈라놓으며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다 사내들 쪽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눈빛이 이상했다. 투바가 무슨 짓을 한 듯 했다.
"야! 투바! 저 녀석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어? 아! 저거? 별거 아니야. 그냥 약간 겁만 줬는데. "
"겁? 어떻게?"
"별거 아닌데. 야! 물! 이리와! "
투바의 부름에 우물 안에서 무언가가 기어 올라왔다. 투바가 전에 만들어둔 물
덩어리였다.
우물에서 물이 걸어 나오자 사내들의 얼굴이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이미 한차례
겪었던 절대의 공포감이었다.
"참새! "
"짹짹! "
겁에 질린 탓일까? 갑자기 시키지도 않은 '참새 짹짹'을 열심히 해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라도 하는 무슨 이유가 있는 듯 정말 열심이었다.
'하, 이제 알겠군. '
물 덩어리. 그냥 보면 별거 아니다. 하지만, 저 물이 저렇게 혼자 움직이고 있으니
무서워하는 게 당연했다. 자신도 처음 볼 때 뜨끔했으니 말이다.
"야! 투바! 저거 대체 뭐야?"
"내가 물을 다스리는 마. 흠, 아무튼 그거잖아. "
마족이라고 하려던 투바가 급히 말을 얼버무렸다. 사내들의 귀와 눈을 의식한
탓이다 아직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지. "
"그래서 저 녀석을 만들었는데. 다시 물로 돌려보내는 방법을 모르겠다. "
본래 물을 다스리는 마족인 레브리안은 성인식 때 제대로 된 술법을 배운다. 아직
힘을 컨트롤할 능력이 되지 않을 때에는 사용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헌데, 투바는 마계에서의 지위를 이용해서 방법을 알아냈다. 분명 어떤 힘없는
마족을 협박해서 배운 것이리라. 하지만, 돌려보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바보! "
"뭐?"
"너나 프라하나 멍청하긴 매 한 가지구만. 쯧쯧. 가자!"
"우씨 ! "
라한이 둘을 바보로 치부해 버렸다. 헌데도 투바와 프라하는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해놓은 게 있으니 대답할 말이 궁했으리라.
라한과 투바, 프라하, 물 덩어리.
세 명과 하나가 레비안 산맥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올 때와는 달리 상당히 느린
이동이었다. 투바와 프라하의 속도가 빠르지 않은 탓이다. 거기다 새로 등장한물
덩어리. 이놈의 걸음이 너무 느려서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일어나라!
"."
-아이야! 일어나거라.
아득히 먼 곳에서 대지의 품과 같은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포근해서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잠에 빠져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 아버지?"
-아이야! 일어나라.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를 떠올린 휴란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눈을 뜨고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아직도 꿈인가?"
뭔가 이상했다. 주변이 온통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헌데도 자신의 손과 발은
뚜렷하게 보였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자신의 사지. 뭔가
언밸런스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에고, 아직 꿈이구나. "
-아이야! 일어났느냐?
"어? 누, 누구세요?"
처음 아버지의 목소리인줄 알았던 따뜻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에 휴란트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분명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버지 레테아의 목소리도 포근하지만, 지금
목소리는 아버지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숫제 포근함을 풍기기 위해 창조된 목소리
같았다.
"누, 누구죠?"
-난 레비안이라고 한다.
"레비안?"
-그래. 내 이름은 레비안이다. 레비안 뒤푸르. 그게 내 이름이다.
포근한 목소리의 대답에 휴란트가 생각에 잠겼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헌데, 갑자기 생각하려니 쉽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후후후, 기억이 잘 안 나는가보구나. 난 네가 있던 산맥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다. 이곳 판트리아 대륙 최초의 대신관이기도 하지.
"아! 레비안 산맥! "
그제야 떠올랐다. 레비안이라는 이름. 분명 이 산맥의 이름이었다. 뒤에 딸린 성
뒤푸르는 없었지만, 이 산맥의 이름만큼은 레비안이 확실했다
-아직도 이 산맥을 레비안 산맥이라고 부르나 보구나.
"예. 근데 이상하군요. 이 산맥의 이름이 정해진 건 아주오래전부터 라고 하던데요.
"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살아계시죠? 그때부터 살아계셨으면 못 해도 천살은 됐을 텐데요. "
휴란트의 말에 레비안이 웃었다. 천 살이라니. 웃음밖에 안 나왔다. 자신이 이곳에
갇힌 지, 못해도 만 년이다. 헌데 휴란트는 그 긴 시간을 10 분의 1 로 줄여 버렸다.
시간에 대해 무지한 휴란트의 치기어린 말이 즐거웠음이다.
-그래. 넌 어쩌다가 이곳에 오게 됐느냐? 이곳은 아무나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아닌데.
"그게 이상해요. 전 이곳을 볼 수 있는데, 저희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저만 왔어요. "
"아, 활의 슬픔을 아저씨가 나눠가졌군요. "
-그렇게 볼 수 있지. 그때부터 비탄의 활은 비탄의 활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레이시드라는 이름을 지었지. 이렇게 아름다운 활이 이름조차 없어서 되겠느냐?
레비안의 말마따나 정말 아름다운 활이었다. 활대에 아로새겨진 세밀한 문양과
유려하게 꺾인 활대의 곡선. 그리고 활에서 풍기는 신성력까지, 그 무엇 하나
예사롭지 않은 게 없었다.
"이름이 예쁘군요. "
우우웅!
휴란트의 말에 반응하듯 레이시드가 미미하게 몸을 떨었다. 마치 휴란트의 말을
알아듣는 듯한 모습이었다.
"헛?"
-레이시드는 신성한 물건이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신전에서 신기로 불렸던
것이지.
"그. 렇군요. "
다시 한번 물어 보마, 나와 함께 나가고 싶으냐?
레비안의 질문에 휴란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함께 나가고 싶다는 얘기는 이전에도
했었다. 헌데, 또 다시 물어보다니. 무슨 의도로 되묻는지 알 수 없어서 의아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했던 얘기. 또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이죠. 아저씨! 같이 나가요. "
-너에게 짐을 안겨줄지도 모르겠구나.
레비안의 말이 끝나자 레이시드가 조금씩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이시드의 활대에서 눈부신 빛이 폭사되었다. 고의 신기가
대륙에서 사라졌으니 말이다.
"아무도 안 계세요? 누구 없어요? 아저씨! 아저씨 어디 가셨어요?"
휴란트가 주변을 보며 크게 외쳤다. 계속 대화를 해오던 상대가 침묵을 지키자
두려움을 느낀 듯했다.
-여기 있다. 아이야. 놀라지 말아라. 흠, 올해 스물두 살이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예?"
-아니다. 나갈 수 있으면 나갈 생각이냐?
"당연하죠. 아버지가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
휴란트의 말에 레비안이 웃었다. 아버지를 걱정하는 그의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대체 언제 느끼고 느껴보지 못했는지 까마득한 따뜻한 감정이다. 하지만,
자신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 터. 괜히 세상으로 나가 지금의 인간을 살펴보고
싶었다.
'육체가 없으니 나가는 게 쉽지 않구나. '
-내가 길을 알려줄 테니 나가거라.
약간 서운한 목소리로 레비안이 말했다.
레비안은 사람이 너무 그리웠다. 휴란트는 레비안이 근 만 년 동안 인간을
그리워하다 만난 상대였다. 정말 그를 보내기 싫었다. 할 수만 있으면 계속 옆에
두고 말벗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남을 이롭게 해야 하는 대신관.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음이다.
"아저씨! "
-말하거라. 아이야.
-아이야! 일어나거라.
아득히 먼 곳에서 대지의 품과 같은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포근해서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잠에 빠져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 아버지?"
-아이야! 일어나라.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를 떠올린 휴란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눈을 뜨고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아직도 꿈인가?"
뭔가 이상했다. 주변이 온통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헌데도 자신의 손과 발은
뚜렷하게 보였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자신의 사지. 뭔가
언밸런스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에고, 아직 꿈이구나. "
-아이야! 일어났느냐?
"어? 누, 누구세요?"
처음 아버지의 목소리인줄 알았던 따뜻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에 휴란트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분명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버지 레테아의 목소리도 포근하지만, 지금
목소리는 아버지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숫제 포근함을 풍기기 위해 창조된 목소리
같았다.
"누, 누구죠?"
-난 레비안이라고 한다.
"레비안?"
어보는 눈이나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목소리. 어찌 보면 자신이 어린
휴란트에게 위로받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심지가 곧은 아이로구나. 잘되었어. 어쩌면 이 모든 게 신의 뜻일지도 모르지 . '
레비안이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아이야. 이름이 무엇이냐?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아직 제 소개도 하지 않았군요. 전 휴란트라고 합니다.
아니다. 휴란트 필슨. 그게 제 이름입니다. "
휴란트가 자신의 풀 네임에 성을 포함시켰다 멸문한 필슨 가문. 이제 자신이 당당한
필슨 가문의 후계자임을 인정한 것이다.
-뒤를 돌아보거라.
"어? 이게 뭐죠? 아까는 없었는데. "
은빛으로 빛나는 멋진 활이 공중에 떠 있었다. 손대면 지문이라도 남을까 염려될
정도로 매끈한 활대가 휴란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레이시드라는 활이다. 한때 비탄의 활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었지.
"레이시드?"
-그래, 그 활은 주인을 슬프게 하는 묘한 재주를 지니고 있어서 그렇게 불렸었다.
하지만, 내가 그 활을 가지고 활과 슬픔을 나누던 순간부터 비탄의 활이라는 이름은
부르기 어렵게 됐지.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하지 않느냐?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인형이나 장난감이 있었겠지.
"예. 물론이죠."
-그 물건을 아끼고 사랑했듯 레이시드를 아끼거라. 네가 레이시드를 아끼면
레이시드도 너의 마음을 알아줄게다. 서로가 서로를 아낄 때 진정한 친구가 되는
거지.
그제야 휴란트도 레비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굳이 대화를 사용하지 않더라고
마음을 나눌 수는 있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 좋아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레이시드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음을 직설한 것이리라.
그래. 레이시드. 말을 못 해도 넌 내 친구야.
분명 말을 하는 존재는 자신과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레비안뿐이다. 하지만,
휴란트는 레이시드도 하나의 이성체로 생각했다. 자신과 레비안, 레이시드. 이렇게
세 명이 일행이 되었다고 말이다.
스팟!
우우우우웅!
"아앗! "
휴란트가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지나서야 서서히 가라앉았다. 팔뚝 너머로 약간의
잿빛이 보이자 휴란트가 팔을 슬며시 내렸다.
"살았다. 아저씨! 방금 레이시드에서 난 빛은 뭐예요?"
-흠, 제대로 들어왔구나.
"어?"
이번에 들린 레비안의 소리가 이상했다. 전에는 홀 전체에서 울려 퍼지던 것이
지금은 머리 자체에서 울리는 듯했다. 누군가 자신의 뇌 속으로 들어와서 속삭이듯.

_놀라지 마라. 난 지금 네 머릿속에 직접 얘기하고 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죠?"
-네가 레이시드의 주인이 되었으니까. 잡아 보거라.
레비안. 지금은 레이시드가 된 그의 말에 휴란트가 손을 천천히 뻗었다. 설마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왠지 사실일 것만 같았다.
착! 우우웅!
휴란트가 레이시드를 잡자 활대가 부드럽게 울음을 토했다.
-후후. 레이시드도 널 좋아하는구나. 너의 순수한 마음이 레이시드의 인정을 받은
것 같다.
"정.말요?"
뭔지 모르지만 아무튼 기분은 좋았다. 레이시드에서 전해져오는 따뜻한 느낌도
좋았고, 레비안의 인정받았다는 말도 좋았다. 하지만 자신의 무기가 생겼다는 게
휴란트에게는 가장 기쁜 일이었다.
아버지의 과잉보호 때문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검 한번 잡아보지 못했었다. 아니,
검은 고사하고 무기 대용으로 쓸 수 있는 간단한 농기구조차손에 잡아본 적이
없었다. 헌데 이렇게 멋있는 무기가 자신의 것이 되다니. 꿈이 아니길 바라면서
눈을 세차게 비볐다.
-좋으냐?
"예? 예. 정말 좋아요. "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레이시드는 신궁이라 불리는 최고의 무기라 할 수 있다.
최고의 무기에는 노리는 헌터들이 있게 마련이 지. 넌 그들에게서 스스로 몸을
지켜야 한다.
그제야 좀 전에 레비안이 말한 짐이 무언지 깨달았다. 최고의 무기를 노리는
자들에게서 스스로를 지키는 일. 싸움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휴란트에게는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 가방에 넣어두고 다니면 안 될까요?"
-신궁이 무언지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신궁이 대륙에 출현하면 신전에서 가장 먼저
알게 될 게다. 아무리 숨겨도 그들을 속일 수는 없다는 얘기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한
순간의 판단으로 다른 이들의 표적이 되다니. 두려운 마음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전 자신 없어요. "
-하지만 신궁은 강한 무기다. 지금부터 신궁을 쓰는 법을 알려줄 테니 잘 듣거라.
신궁 레이시드에는 활줄이 없다. 그렇다고 활줄을 새로 사서 달아야하는 건 아니다.
활줄이 없어도 그냥 쏠 수 있는 최강의 무기가 레이시드였다.
또, 레이시드는 시전자가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정확하게 꽃힌다. 물론, 누군가가
쳐내거나 피하면 빗나가겠지만, 최소 팔이 흔들려서 화살이 빗나가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훈련 없이도 명사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장점은 화살이 필요 없다는데 있었다. 화살 없이, 활줄없이 그냥 활줄과
화살이 있는 듯 당겨서 쏘면 나간다는 점이다. 화살의 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이것 역시 장점이었다.
마지막 장점은 무엇이든 꿰뚫는다는 거였다. 천하의 드래곤 스케일도 신궁
레이시드의 화살을 막아내지 못한다.
"허!"
-놀랐느냐?
"예. 그럼 저도 쏠 수 있군요. "
-아직은 무리다.
희망에 가득한 휴란트의 말에 레비안이 찬물을 끼얹었다. 이에 휴란트가 의아한
빛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쏘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
-그래. 그냥 쏘면 되는 게 레이시드인건 맞다. 하지만 넌 레이시드와의 동화가
부족하다. 방금주인이 되었으니 당연하겠지. 지금부터 넌 레이시드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 항상 아끼고 사랑하면 레이시드도 너에게 마음을 열게다. 마음이 여린
친구니까.
휴란트는 레비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성이 없는 물건이 마음을 연다는 게
의아했음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인형이나 장난감이 있겠지.
"예. 물론이죠."
-그 물건을 아끼고 사랑했듯 레이시드를 아끼거라. 네가 레이시드를 아끼면
레이시드도 너의 마음을 알아줄게다. 서로가 서로를 아낄 때 진정한 친구가 되는
거지.
그제야 휴란트도 레비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굳이 대화를 사용하지 않더라고
마음을 나눌 수는 있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 좋아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레이시드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음을 직설한 것이리라.
그래. 레이시드. 말을 못 해도 넌 내 친구야.
분명 말을 하는 존재는 자신과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레비안뿐이다. 하지만,
휴란트는 레이시드도 하나의 이성체로 생각했다. 자신과 레비안, 레이시드. 이렇게
세 명이 일행이 되었다고 말이다.
물 덩어리 변
레테아와 에펠 일행이 숲을 헤매고 다녔다. 헌데, 마땅히 몸을 숨길만 한 장소가
없었다. 좀 괜찮다 싶은 장소에는 몬스터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레비안 산맥에서 비어 있는 동굴을 기대하다니. 좀
무리한 요구인 듯 했다.
이제 어쩌죠?
참다못한 베린이 레테아에게 말을 걸었다. 벌써 17 시간이다. 아무리 검을 익힌
사람이라도 17 시간이나 산을 헤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이곳은
몬스터가 우글거린다는 레비안 산맥. 이런 곳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몇 시간째
헤매고 다녔으니 지금까지 버틴 게 용했다.
내가 말하지 않소. 이곳 안의 지리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내가 아는 건. 저기
보이는 저 방향으로 계속 가면 우리가 지냈던 마을이 나온다는 것뿐이오.
"빌어먹을. 이 큰 산 속에 동굴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
세상물정 모르는 베린이 계속 투정을 부렸다. 산에 동굴이 하나쯤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동굴이 비어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아직 세상 경험이 부족한
사람임은 어쩔 수 없었다.
"동굴이 없었던 건 아니지 않소. 그 동굴에 몬스터의 흔적이 있어서 들어가지
못했던 거지. "
"맞다. 베린. 동굴은 많았다. 비어 있는 동굴이 없었을 뿐이지. 휴, 그나저나
레테아님. 이제 어쩌죠? 이제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습니다. "
에펠의 말에 레테아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휴란트를 잃고 산을 헤맨 건
17 시간이다. 하지만, 마을에서 출발했던 시간을 포함하면 이미 이틀을 넘기고
있었다. 아무리 검을 오래 수련한 사람이라도 지칠 때가 된 것이다.
"나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구려. 의견들을 내보시오. "
"땅 속으로 들어가는 건 어때요? 아무리 몬스터라도 땅 속으로 다니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
카류나의 말에 레테아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답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우린 이곳에서 며칠은 묵어야 하오. 헌데, 식량도 없는 땅
속에서 마냥 기다리는 건 어림없는 소리요. "
"그럼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건 어떨까요? 열매가 많은 나무를 잡고 올라가면 며칠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에펠의 대답에 레테아가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쓸 만한 나무가 있는지
찾아보기 위한 자연스런 몸짓이었다.
"열매가 많은 나무라."
말을 하던 레테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늘위에 무언가 떠 있었다. 그 무엇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의문을 제기하려던 에펠도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그리고 레테아와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베린과 카류나도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어? 저게 왜 저기 있죠?"
"글쎄. "
공중에 무언가 나타났음에도 레테아와 에펠 일행은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다.
현재 레테아와 에펠 일행이 위치한 곳은 나무가 엄청나게 우거진 산 속이다. 이런
곳에서는 공중을 나는 몬스터의 공격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무와
잎사귀라는 천연 장애물이 지상에선 이들의 방어막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저게 와이번인가요?"
"모르겠소. 모습은 비슷한 것 같은데."
"저기!"
베린이 하늘을 가리키며 놀란 음성을 토했다. 하늘을 날던 물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빠르게 이동한 것과는 다른 완벽한 사라짐. 에펠 일행 모두가 놀란 눈을
계속 비볐다.
"사라진 게 아니오. "
레테아는 한때 기사, 그것도 기사 단장까지 역임했었던 뛰어난 실력자였다. 이
때문에 에펠 일행과는 다른 무언가를 볼 시력을 갖추고 있었다.
레테아는 공중을 날던 그 물체가 아주 작은 무언가로 바뀌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작은 점이 조금씩 커지고 있음도 깨달았다.
"그럼 ?"
"내려오고 있소. "
커지고 있는 점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에펠 일행마저 그 점을 확인했다.
"헛!"
"레테아님. 어쩌죠?"
"섣불리 움직이지 마시오. "
공중에서 모습을 바꾸고 내려올 수 있는 생명체. 그건 마법에 능한 존재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곳이 드래곤이 살고 있는 레비안산맥임을 감안하면
정체가 쉽게 파악되었다. 드래곤. 물질계 최강의 존재가 레테아와 에펠 일행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저, 저."
에펠의 눈에 점이 크게 보였다 인간의 형태였다. 그제야 에펠도 떨어지는 생명체의
정체를 파악한 듯했다.
"움직이지 마시오. 정말 그 존재라면 도망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오. "
"하, 하지만. "
"멈추시오!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내 검에 먼저 죽을 것이오. "
레테아가 에펠 일행을 위협하며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레테아는 실로 냉정했다. 비록 오래전이지만 한때나마 기사였다 게 유감없이
드러났다.
드래곤은 물질계 최강이자 마법의 종주라 불리는 존재. 그런 존재에게 등을 보이는
건 죽여 달라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찰나의 시간이지만 그런 결론까지 내리고 에펠
일행을 통제하는 레테아였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공중에 있던 생명체가 내려왔다. 일단 겉모습은 인간
여성이었다.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
여성체의 등장에 레테아와 에펠 일행이 그 자리에 부복했다. 특히, 에펠은 정말 큰
죄를 지은 듯 땅에 머리를 쾅쾅 찍기까지 했다. 역시 생존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놈들다웠다.
"흠. "
잠시 침음성을 흘린 여성체가 레테아와 에펠 일행을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 만족한
듯 미소를 흘렸다. 무섭도록 아름다운 미소였다. 물론 모두 부복해 있느라 아무도
그녀의 외모를 보지 못했지만.
'좋군. '
여성체는 로테마이어스가 보낸 블루 드래곤 프리미아였다. 그녀는 레테아를 찾기
위해서 로테마이어스의 가디언들을 이용했다. 이 넓은 산맥을 혼자서 다 뒤지기는
무리였으리라. 그렇게 한참 뒤지다 포기할 즈음 인간들을 찾았다는 가디언의 연락을
받았다. 그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위대하신 존재시여. 성스러운 땅을 밟은 것에 대해 깊이 사죄드립니다. "
"사죄드립니다. "
레테아의 말을 에펠이 받았다. 이에 프리미아의 얼굴에 미소가 더 짙어졌다.
마음에 드는 인간들이었다. 최소 엘퐁소에서 자신을 농락했던 인간과는 격이 다른
인간으로 보였다.
그때 받았던 치욕, 분노. 자중하라는 로드의 엄명이 아니었다면 그때 한바탕했을
터였다.
"레테아가 누구냐?"
프리미아의 물음에 일행 모두가 침묵에 잠겼다. 누구라고 밝히기 두려웠음이다.
레테아와 에펠 일행은 드래곤의 방문을 좋게 해석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레비안 산맥에 무단 침입했으니 좋은 의도로 찾아왔을 리 만무했다. 지금
상황에서 레테아가 누군지 밝혔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터. 어떻게든 숨기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묻는다. 레테아가 누구냐?"
"."
두 번의 물음에도 레테아와 에펠 일행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들의 태도에
프리미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좋았던 인상이 조금씩 나빠지고 있음을
느꼈다. 정황으로 보면 이들 중 한명이 레테아가분명한데도 대답을 안 하다니.
여전히 고개를 묻고 있는 공손한 태도만 아니었다면, 공포가 어떤 건지 가르쳐줬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묻는다. 레테아가 누구냐?"
프리미아가 살기를 약간 흘렸다. 두려움은 가지되 정신이 상하지 않도록 아주
미약한 살기 였다.
에펠 일행이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엄청난 실전을 치렀지만 수련이 부족한
에펠, 베린, 카류나. 그들의 수준으로는 버티기 힘든 살기였다. 계속 떨던 일행 중
에펠이 갑자기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제일 오른쪽에 있는 검은 머리 남자가 레테아입니다.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냥 저 자가 가자는 곳으로 따라온 것뿐입니다. 정말 저희는 오기 싫었는데,
저자가.저자가. 모두 저자가 시킨 일입니다. 정말 저희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십시오. 위대하신 존재시여. "
"여기 검은 머리 남자가 레테아라는 말인가"
"예. 위대하신 존재시여, 모든 잘못은 저자에게 있습니다. 저희는 정말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
에펠의 속사포 같은 말에 프리미아가 살포시 되물었다. 이에 베린이 고개를 숙인
채로 손가락으로 레테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치졸하고 야비한 인간의
전형이었다.
"네가 레테아인가?"
프리미아가 레테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에 레테아가 잠시 몸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예. 제가 레테아가 맞습니다. 모든 잘못은 저에게 있으니 저들은 살려주십시오. "
"오호, 특이한 모습이군. 검은머리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 후후후. 근데 넌
저들이 밉지 않으냐? 저들이 널 고발했는데도 저들을 옹호하다니 이해가 안 가는군.
혹, 저들과 무슨 깊은 관계라도 되는 건가?"
프리미아의 물음에 레테아가 고개를 슬쩍 저으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들
휴란트와 동생 라한의 실종. 그리고 가문의 멸망과 집요하게 쫓아오는 엘베로의
검은 손길, 이 때문에 레테아는 너무 힘들었다. 어쩌면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닙니다. 저들과 전 만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
"그럼 저들을 위해 변호하는 이유가 뭐지?"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제가 한 일이라서 그렇게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위대하신 존재시여. "
레테아의 담담한 대답에 프리미아가 미소 지었다. 정말 아름다운 미소였다. 죽음을
각오한 레테아마저 마음이 흔들릴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후후, 어쨌든 난 임무를 마쳐야 하니 나랑 어디 좀 가줘야겠다. "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위대하신 존재시여. "
"그럼 눈을 감아라, "
프리미아의 말에 레테아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프리미아의 아름다움은 상대가
드래곤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을 혹하게 할 정도였다. 그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 일조차 힘들었다. 이 때문일까? 눈을 감는 게 레테아에게는 한결 편했다.
"그럼 이동하겠다. 매스 텔레포트! "
프리미아가 마법을 시전해서 레테아와 함께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에펠이 무너지듯 바닥에 누워버렸다. 그 뒤를 이어 베린과
카류나도 바닥에 벌렁 누웠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드래곤의 모습을 보지도
못했는데, 이 정도로 진이 빠지다니.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살았군, "
"레테아는."
"죽겠지. 드래곤에게 잡혀서 살아남길 바라는 건 무리일 테니까. "
"어쨌든 우린 살았잖아. 안 그래?"
그들은 레테아의 생사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하고 있는 건 여기를
어떻게 빠져나가느냐에 대한 것뿐. 다른 건 자신들의 관심 밖이었다.
라한을 보낸 카이렌이 나무에 기대 꾸벅꾸벅 졸았다. 말동무였던 라한이 사라지자
무료했던 탓이다.
그렇게 하염없이 졸고 있을 때, 멀리서 뭔가가 느껴졌다. 강하고 광포한
기운이었다.
"드래곤인가?"
잠시 중얼거린 카이렌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졌다. 카이렌의 특기 은신술이었다.
라한이 말한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중 뭐가됐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항상 철저히 준비하고 신중하게 움직이는 카이렌. 그의
그런 성격이 있었기에 드래곤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디냐?"
공중에 떠 있던 프리미아가 괴성을 질렀다. 그의 옆에서는 레테아가 공중에 뜬 채
어렵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 언제 공중에 떠서 땅을 바라 봤겠는가. 난생처음 겪는
생소한 경험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레테아라는 인간을 데려왔다. 어디냐?"
프리미아의 외침에 카이렌이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는
은신술을 좀 더 신중하게 시전했다.
쉽사리 움직이기가 껄끄러웠다. 자신과 라한이 살려 보낸 드래곤은 분명 레드 일족.
헌데, 공중에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파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레드
일족이 아닌 블루 일족이라 는 의미였다. 이 때문에 쉽사리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못했다.
"레테아! 네가 외쳐라! "
"예? 어떻게 하면 되는지?"
"그냥 네 이름만 외치면 된다. "
"알겠습니다. 위대하신존재시여 "
공손하게 대답한 레테아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바닥을 바라보며 크게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전 레테아라고 합니다. "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드래곤이 시킨 일이니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피하지
못할 바에는 즐겨라, 평소 그의 지론처럼 지금 상황에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정말인가?'
레테아를 바라본 카이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인간이었다. 거기다 전에
테세르가 취했던 모습과도 몹시 흡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전 레테아입니다! "
레테아의 연이은 외침에 카이렌이 결심을 굳혔다.
카이렌이 은신술을 풀었다. 하지만, 손은 왼쪽 허리에 차고 있는 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상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어서였다.
'그나저나 이놈의 라한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착- !
카이렌 앞에 프리미아와 레테아가 착지했다. 프리미아는 많은 경험이 있었던 듯
부드러운 착지였다. 반면, 레테아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기에 잠시 몸을
비틀거렸다. 하지만, 검을 오랫동안수련한 사람답게 넘어지는 꼴사나운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군. 넌 뭐지?"
"난 카이렌이다. 라한 친구지. "
프리미아의 물음에 카이렌이 자랑스러운 듯 답했다. 옆에서 대화를 듣던 레테아가
의아한표정을 지었다. 라한이라니. 자신의 동생 이름이 왜 이런 곳에서 언급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인간을 찾아왔다. "
"내가 라한 친구 카이렌이다. 날 라한이라고 생각해라. "
카이렌의 대답에 프리미아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지시받은 건 이 숲에 있는 인간에게 레테아를 전해주는 일이었다. 헌데,
인간은 없고 그 인간의 친구라고 주장하는 엘프만 남았다. 이 때문에 넘겨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쉽게 결정내리기 힘들었다.
"난 인간에게 전해주라고 명령받았는데. "
"아, 진짜 답답한 드래곤이네. 내가 라한 친구라니까 그러네."
카이렌은 자신이 라한의 친구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이유는 라한이 정규 교육을
받았다는 데 있었다.
카이렌은 어릴 때부터 검을 동경해서 엘프 마을을 떠났다. 이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이라고는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검술과 은신술도 정말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
기연으로 배웠을 뿐. 누군가에 게 정식으로 배운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셈이었다.
반면, 라한은 무려 8 년의 시간 동안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기간 동안 학교 교육 외의 다른 곳에 치중했지만, 교육을 받은 건 분명했다. 거기다
졸업도 수석으로 했다지 않은가. 카이렌으로서는 자신이 꿈꾸던, 동경하던 일을
멋지게 해낸 것과
같았다.
"네가 인간의 친구라는 걸 어떻게 믿지?"
"그게 음. 그거 꼭 증명해야 하나?"
"넌 엘프다. 내가 아는 엘프는 인간과 친분을 맺는 성격이 아니다. "
프리미아의 대답에 카이렌이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젠장할. 빨간 드래곤녀석. 전달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왜 라한얘기만 하고 내
얘기는 안 한거야? 쳇! 역시 제대로 배운 라한만 기억한다는 건가?'
순간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누군 배우기 싫어서 안 배웠겠는가. 검이 너무 좋아서 배움을 뒤로 미뤘던 게
이렇게 작용할 줄은 정말 예상 못했었다. 거기다 물질계 최강이라 자부하는
드래곤마저 정식 교육을 받은 라한만 기억하다니. 역시 사람은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며 슬픔을 억눌렀다.
"나! 카이렌! 라. 한. 의 친. 구. 맞. 다. "
"증명할 방법은 없다는 거로군. 휴, 네가 친구라고 주장하는 그 인간은 대체 언제
오는 거지?"
"곧 올 거다. "
프리미아의 물음에 카이렌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에 그들의 대화를 듣던 레테아가
조용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라한이라는 사람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입니까?"
"그래. 너하고 같은 검은. 응? 너 라한하고 무슨 사이지? 머리색이 똑같네. "
실제로 자신의 처지에 드래곤의 대화에 끼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동생의
이름이 거론되자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내고 말았다.
"제. 동생입니다. "
"뭐?"
레테아의 말에 카이렌이 놀란 음성을 토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오히려 짐작 못한 자신이 더 바보 같았다. 물질계
최강이라는 존재를 살려주고 구하려던 상대. 그 정도만으로도 라한의 가족임을
짐작했어야했다. 괜히 드래곤을 살려줬다고 화부터 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에고, 라한 오면 사과부터 해야겠네. 하긴, 제대로 배운 놈이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지. '
"제 동생이 확실합니다. "
"음, 검은 머리만 가지고 그렇게 판단해도 되는 건가? 이상하군. "
프리미아가 레테아에게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대답은 그녀도 1 미 알고 있었다.
대륙에서 검은 머리가 그리 흔치 않으니 말이다.
실제 검은 머리카락은 흔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희귀했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십여 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거기다 가문 대대로 검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는 집안은 대륙에서 필슨 가문이 유일했다.
검은 머리에 같은 이름, 그 정도만으로도 라한을 동일 인물로 봐도 무방한 것이다.
"제 동생은 어디 있죠?"
"아, 나하고 닮은 녀석 찾으러 갔는데 좀 늦네. "
"잠시만. 둘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대충 알겠군. "
"뭐가?"
"너와 이곳에 있던 인간이 친구였다는 거 말이다. 대화를 계속 듣고 있으니 친구가
맞긴 맞나보군. "
프리미아의 말에 카이렌이 활짝 웃었다. 자신을 라한의 친구로 인정해줬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기뻤다.
"하하하하, 당연하지. 난 라한의 친구다. "
"알았다. 알았어. 그럼 난 이만 가보지. "
프리미아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카이렌을 다시 살피며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카이렌은 굴레를 벗은 엘프의 마지막 생존자다. 프리미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약간의 적대감을 느껴야 정상이다. 실제로 다른 드래곤들이 그를 본다면
적개감이 아니라 살기부터 드러낼 거였다.
헌데 살기가 일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뭔가 자신이 실수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뭐지? 왜 살기가. 아, 그렇군 '
잠깐 생각을 해본 후에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입견과
너무 다른 카이렌의 태도가 원인이었다.
로테마이어스는 굴레를 벗은 존재를 물질계를 무너뜨릴 존재로 표현했다. 이 때문에
프리미아도 굴레를 벗은 존재를 나쁘게만 생각했었다.
가령 몸에서 살기가 풀풀 풍기고 날카로운 기세를 마구 흘리는 그런 상대 말이다.
헌데, 아니었다. 보통의 엘프보다 장난기가 좀 더 심할 뿐. 평범함 그 자체였다
어떻게 저런 치기어린 엘프가 물질계를 멸망시킨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이! 드래곤 친구! 잘 가라고! 다음에 봐!"
"흠. 텔레포트! "
다시 한번 침음성을 흘린 프리미아가 마법을 시전했다. 약간의 의구심을 가슴 속에
품은 채로.
프리미아가 간 후, 카이렌과 레테아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카이렌은 친구의
형님이라서 쉽게 말을 붙이기 불편했다. 어차피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태였다.
반면, 레테아는 상대가 엘프라서 말을 붙이지 못했다. 엘프와 인간이 전혀 동떨어진
존재는 아니지만, 그리 가까운 존재는 아닌터. 괜히 말을 붙였다가 인간에 대한
나쁜 감정을 심어주기 싫었음이다.
그렇게 한참의 침묵이 지나가고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기."
"저기."
현재 레테아와 카이렌의 사이는 마치 남녀 관계의 어색한 만남과 흡사했다. 아직
그들 스스로는 모르고 있지만, 제 3 자가 이곳에 있다면 딱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였다.
물론, 이런 얘기를 꺼냈다가는 카이렌에게 제대로 화풀이 당할게 분명했다. 하지만
현재 이곳의 분위기가 그런 쪽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먼저 말씀하십시오. 조화와 평화의 엘프시여! "
"하하하. 먼저 말해.라 인간. 네가 조금더 빨랐던 것 같다. "
말을 높일까 말까를 고민하던 카이렌이 결국 말을 놓았다. 친구의 형이기는 하지만
자신보다 까마득히 어린 나이의 레테아. 다른 건 몰라도 높임말을 쓰는 건 차마 할
수 없었다.
"예. 그럼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저, 성함이?"
"아까도 들었듯이 카이렌. 그게 내 이름이야. "
카이렌도 본래는 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릴 때 정령술과 마법을 포기하면서
가문에서 추방당했다. 그때부터 성이 없는 대륙 유일의 엘프가 되었다.
"그렇군요. 조화로운 엘프 카이렌님. 라한과는."
"그냥 카이렌이라고 불러라. 님이라는 호칭은 부담스럽군. "
"아, 예. 알겠습니다. 카이렌양."
빠직!
카이렌은 엄청나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 누가 봐도 여성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외모였다. 이 때문에 레테아도 카이렌을 여자 엘프라고 생각했다. 이름까지
여자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 그로서는 아주 당연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카이렌은 용납할 수 없는 단어였다. 카이렌양이라니, 친구의 형만
아니었다면 검부터 휘둘렀을 터였다.
"인간! "
"예, 말씀하십시오. 카이렌양."
"난! 남자다. 인간수컷! "
카이렌의 말에 레테아가 짐짓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어 카이렌을 보자 거짓말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어떻게
저런 얼굴이 남성체일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이에 반해 분노한 카이렌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더
아름답게 보였다. 그냥좀 전 같은 평온한 얼굴이었으면 납득시키기 쉬웠으련만,
카이렌에게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빌어먹을 '
'사실일까?'
각자 나름의 생각이 있었지만,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라한 일행과 물 덩어리는 근 하루를 레비안 산맥에서 보냈다.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가는 시간의 두 배를 보낸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아직도 목적지의 채 반도
오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미치겠군. "
라한이 뒤따라오고 있는 물 덩어리를 보며 불평을 토했다. 이렇게 오래 걸린 가장
큰 원인이 라한이 보고 있는 저 희한한 물건 때문이었다.
아무리 물이라지만 느려도 너무 느렸다. 라한과 투바, 프라하가 뒷짐 지고 걸어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계곡같은 물을 만났을 때, 신기에
가까운 속도를 보인다는 것. 그때는 빠른 게 아닌 거의 공간 이동과 흡사했으니
말이다
"이러다 언제 도착하지. "
"라한. 너무 그러지 마라 저놈도 나름대로 열심히 달리고 있다고. "
"저걸 그냥 죽여 버려?"
"안, 안 돼!"
라한의 말에 투바가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물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투바가 소환한 물 덩어리에게 충격을 가하면 그 통증이 고스란히 투바에게
전해졌다. 잘못된 소환이라서 그런지, 본래 그런 건지 는 확실치 않았다. 다만,
지금 저 물 덩어리를 소멸시켰다가는 투바 역시 거의 초주검상태가 될 거라는 것.
오직 그 사실만이 투바에게 중요했을 뿐이다.
"어휴! "
"물이다!"
라한이 푸념을 토했을 때, 선두에 가고 있던 프라하가 외쳤다. 정말 희소식이었다.
물을 만난다면 물 덩어리의 속도가 빨라질 터. 그 물길이 길면 길수록 도착하는
속도 역시 덩달아 빨라진다는 얘기였다.
"오호, 꽤 긴 계곡인데. "
"휴, 살았다. "
길게 늘어진 계곡물을 보자 투바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아직 라한의 눈에
깃들었던 살기를 잊지 못했다. 물 덩어리를 바라보는 그 섬뜩했던 시선. 자신을
향해 있지 않았음에도 몸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야! 물?"
스르르륵!
라한의 부름에 물 덩어리가 잽싸게 달려왔다. 그래봐야 원래 속도보다 아주 조금
빨라지는 정도였다. 하지만, 본래 속도를 감안하면 전력 질주나 마찬가지였다.
"알지?"
끄덕끄덕!
물덩어리는 라한의 말을 무척이나 잘 들었다. 아니, 거의 기겁하며 복종하는
수준이었다. 투바를 거의 가지고 놀다시피 하는 라한의 행동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라한에게 새겨진 악마의 낙인 때문일 수도. 그것도 아니라면 그 둘 다의
영향일지도.
"우리도 가지. "
라한이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물론, 투바와 프라하라는 애물단지가 있었기에
광견보를 최대로 사용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물 덩어리와 함께 다닐 때보다는
확실히 빨라진 속도임에 분명했다.
한참 달리던 라한이 계곡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급격히 몸을 세웠다. 그리고
계곡의 한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가 느껴졌다. 헌데, 그게 뭔지
정확하지 않았다.
"라한 왜 그래?"
"이상하군. 뭔가가 있긴 있는데. "
"있긴 뭐가 있다고 그래?"
라한이 바라보던 곳은 그냥 맨 벽이었다. 최소 투바와 프라하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뭔가있어. 테세르!"
-왜?
테세르는 라한의 로브 안에서 마법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라한이 무조건 외우라고
명령을 내린 탓이다. 머리 나쁜 테세르는 극구 거부했지만, 주인인 라한을 당할
수는 없었다. 크라이드리안과 싸울 때의 절박한 상황에서 주문을 까먹은 테세르.
라한은 테세르를 그냥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차라리 마법을 배우지 않았을 때라면 물리력이라도 행사했을 것이다. 헌데,
테세르는 마법을 배운 후부터 마법만 쓰려고 했다. 그런데, 주문도 못 외우다니.
전투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걸림돌과 다를 바 없었다. 테세르가 마법을
포기하거나 주문을 제대로 외우거나. 양단간에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할 수밖에
없었음이다.
"저기 뭐 없어?"
-어? 아무것도 없는데?
테세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했다. 하지만, 라한은 저 벽에 뭔가 있음을
확신했다. 그게 뭔지를 몰랐을 뿐. 예사로운 벽은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했다.
"거봐, 라한. 있긴 뭐가 있다고 그래. 너무 예민해진 거야."
"흠, 이상하군 "
라한이 보고 있는 절벽은 휴란트가 뛰어든 바로 그곳이다. 레비안 산맥에 사는 모든
드래곤이 발견하지 못했던 곳.
테세르도찾지 못하는곳. 에펠 일행과 프라하, 투바도 찾지 못하는 곳. 하지만
라한은 이곳에서 뭔가를 느꼈다.
레비안과 레이시드를 가둔 동굴에는 판테아의 장치가 되어 있다. 마나를 가진
존재는 이곳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런 장치였다.
만물의 근원이자 에너지원인 마나. 마법이 됐든 검이 됐든 수련을 거치면 마나를
가지게 된다. 이 때문에 프라하나 투바는 이 동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드래곤 역시.

하지만, 라한은 마나보다 제령기와 제란기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마나 친화력이


바닥이라서 마나는 늘지 않고 제령기와 제란기만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어렴풋이나마 이곳에 뭔가 있음을 짐작했다 하지만 1 서클 양만큼 가지고 있는 마나
때문에 정확히 구분할수는 없었다.
"에이, 네가 예민해진 거라니까. 테세르도 아무것도 없다고 하잖아. "
"그런가?"
애써 의문을 접은 라한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그가 예민해져 있는 건
사실이었다. 당연하게도 원인은 투바가 소환한 물 덩어리에 있었다. 형 레테아의
소식 때문에 급해 죽겠는데, 저런 속도로 이동하고 있으니.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눌러 참느라 극도로 예민해진 것이다.
'저긴 나중에 다시 확인해봐야겠어. '
다른 사람 모두 아니라고 해도 라한에게는 의심나는 곳이 분명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들의 눈도 있고 형의 일도 있어서 조사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나중에 시간이 난다면 정말 철저하게 조사를 해볼 생각이었다.
"응?"
한참 걷던 라한이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상태로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계곡
쪽을 바라봤다.
"저건 또 뭐야?"
라한의 말에 투바와 프라하도 고개를 돌렸다. 뭔가 있었다. 이번은 라한만 본 게
아니라 투바와 프라하의 눈에도 보였다.
"라한. 사람 같은데?"
"아무래도 그렇지?"
"이상하군. 이런 곳에 웬 사람이람?"
"형인가?"
생각을 마친 라한이 바닥을 박차고 계곡을 내려갔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속도를 냈다. 새삼 그가 형을 생각하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급하긴 급했나보네. "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보군. "
라한이 사라지자 투바와 프라하가 자리에 앉았다. 그 상태로 라한의 흥을 보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한참 지나자 라한이 플라이 마법을 사용해서 인간 한 명을 안고 왔다. 헌데, 표정이
가히 좋지 않았다. 단순히 형이 아니었다는 정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표정이었다.
"야! 너 왜 그러냐?"
"흠. "
프라하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투바에게서 나왔다. 갑자기 찌푸려진 얼굴과 긴
신음소리. 프라하가 모르는 뭔가를 투바는 아는 듯 했다.
"야! 투바. 대체 왜 그래?"
"저놈. 신기를 가지고 있다. "
"신기? 비싼 거겠네. "
"바보 같은 놈. 내가 누군지 잊었어? 이 멍청아!"
투바의 핀잔을 듣고서야 프라하도 상황이 파악되었다. 신기라면 마족과는 상극인
기운을 풍길 게 분명했다. 프라하 자신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마족인 투바라면
온몸으로 절감하고 있으리라.
"골치 아프네. "
"젠장. 저 인간을 뭐하러 데려 온 거야? 자기도 편하지는 않을 텐데. "
"라한이 편하지 않.아! 맞다. "
뒤늦게 라한의 상태를 떠올린 프라하가 탄성을 질렀다.
라한도 악마의 낙인을 받으면서 반쯤은 마족이 되어 있었다. 물론, 천하의 대신관이
오더라도 라한이 악마의 낙인을 받았는지는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라한
자신은 신기가 곁에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을 게 분명했다.
"쳇. "
착- !
"라한 괜찮아?"
가장 먼저 프라하가 달려 나갔다. 신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이기에 그밖에 나설
사람이 없었다.
"이놈 좀 받아라. "
"응. "
데리고 온 인간을 대충 민 라한이 멀찍이 떨어졌다. 그리고 투바를 날카롭게
째려보고는 살기를 일으켰다.
자신에게 악마의 낙인을 찍은 존재가 투바였다. 그럼 신기 때문에 생긴 이 짜증을
풀 상대도 투바밖에 없다는 얘기가 되었다.
라한의 눈초리에 투바가 기겁하며 입을 열었다.
"아, 미, 미안. 내가 알고 그런 건 아니잖아. 저런 게 튀어나올 줄 알았나. "
"나쁜 놈. "
"미안하다니까. "
"됐으니까 물 덩어리나 안 보이게 처리해라. 저놈 보면 기절한다. "
새로 나타난 사람이 물 덩어리를 본다면 레테아의 오두막에서의 일이 재현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은 극구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르르르륵!
"헛!"
물 덩어리가 투바와 라한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물이 가까운 곳이라서인지
너무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라한이나 투바 모두 제대로 저지하지도
못했다.
"젠장. 어떻게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냐?"
"그, 그게 있지. "
"어휴, 저놈의 물 덩어리 눈치도 없지."
"미안. "
갑자기 투바가 불쌍해졌다. 분명 라한과 동등한 사이이건만 물 덩어리라는 짐
때문에 계속 당하기만 했다.
"허억!"
역시나 라한이 데리고 온 인간이 의식을 잃었다. 하긴. 그 누가 스스로 움직이는 물
덩어리를 보고 놀라지 않겠는가. 그 인간도 수련 정도가 그리 높지 않은 평범한
인간임에 분명했다.
"야! 저 인간 어떻게 할 거야?"
"어쩌긴 뭘 어째? 혹시 형하고 관계있는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이게 전부 저."
"아, 하하하하. 내가 업고 갈게. "
투바가 잽싸게 새로 나타난 인간을 업으려 했다.
"으악! "
"저 바보. "
쓰러진 인간은 신기를 꼭 쥐고 있었다. 이 때문에 투바가 경기를 일으키며 도리어
튕겨 나왔다.
"근데 대체 누구지?"
"나야 모르지. "
쓰러진 인간은 휴란트였다. 그는 레이시드를 얻은 뒤 계곡의 아래쪽 통로를 통해
빠져나왔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보고도 확인할 수 없는 그런 출구였다. 그렇게
출구를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다 라한을 만난 거였다.
"프라하!"
"알았다. "
투바를 대신해서 프라하가 휴란트를 업었다. 역시 엑스마스터. 꽤 큰 활과 20 대
청년을 업었음에도 가뿐한 몸놀림이었다.
프라하의 등에 업힌 휴란트를 보며 라한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군. "
아무 생각 없이 데리고 온 게 실수였다. 이런 험한 산에 떡하니 나타난 인간을
데리고 오다니. 평소의 라한이었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라한은 갑자기 인간에 대한애정이 깊어졌다. 아니, 생명체에 대한 애정이 깊어진
듯했다.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으면 안쓰러운 마음부터 생기니 말이다.
어쩌면 가문의 비사와 형에 대한 그리움이 이런 감성을 낳았는지 모른다.
"이놈을 업고 가야 하나?"
라한이 난감한 듯 이마를 짚었다. 이에 투바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답답하면 깨워! 마법 뒀다 뭐하냐?"
"저놈의 신기 때문에 영 껄끄럽단 말이야. "
"쳇. 네가 껄끄러우면 난 뭐냐?"
라한의 마족적인 특성이라고 해봐야 악마의 낙인이 전부였다. 그건 라한이 직접
마계로 가거나 신전에 들어가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마족은 다르다. 굳이 신전까지 가지 않더라도 신관이 보면 정체를 간파
당하게 된다. 그나마 투바가 최상급 마족이었기에 대신관이 아니면 발각당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어찌됐든 신기에 더 큰 영향을 받는 건 라한이 아닌
투바였다.
"일단 가자고. "
"프라하 수고 좀 해!"
결국 일행이 한 명 추가됐다. 물 덩어리라는 짐과 쓰러진 인간이라는 짐. 두 존재의
예상 못한 합류로 라한은 죽을 맛이었다. 형이 걱정되어 죽겠는데 속도가 나지
않으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잠깐! "
물이 있는 계곡을 지나 한참 걷던 라한이 일행을 불러 세웠다. 정말 하기 싫은
일이지만 형을 빨리 만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야?"
"야! 물!"
스르르륵!
라한의 부름에 물 덩어리가 잽싸게 튀어왔다. 평소에도 이런 속도를 낼 수 있다면
벌써 도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라한, 설마 죽이려는 건 아니지?"
"투바! 신경 꺼! "
"어, 알았어. "
라한은물 덩어리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평소에는 종종 대들던 투바도
지금만큼은 지고 들어가야 했다. 물의 고통은 곧 투바 자신의 고통 다중 공격을
자유자재로 펼치는 라한에게는 합동 공격도 오히려 해만 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저자세로 일관하며 라한의 비위를 맞춰줄 수밖에.
"물! 업혀! "
갸우뚱!
라한의 말에 물 덩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물 덩어리의 엄청나게 큰
머리통이 좌우로 흔들렸다. 일견 우스운 모양이었지만, 그 누구도 웃을수 없었다.
라한의 얼굴에 서린 냉랭한 기운을 느낀 탓이다.
라한의 결론은 물 덩어리를 업는 거였다. 혐오스러운 모습 때문에 정말 업기
싫었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뭐해? 빨리 업혀! "
우우웅! 철퍼덕!
어색한 몸짓으로 물 덩어리가 라한의 등에 업혔다. 어색하고 불편한 모양새였지만,
이내 모양새를 갖추었다.
등에 뜨끈한 기운을 느낀 라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 정말 더러웠다. 마치 똥
덩어리를 등에 올린 느낌이었다. 이 물컹함과 찝찝함이라니. 차라리 재수 없게 생긴
투바를 업는 게 백 번 나을 듯했다.
"젠장. 물 덩어리! 넌 앞으로 변이다. "
우웅?
"네 이름은 앞으로 변이란 말이다. 변 몰라? 똥!"
한 소리 내뱉은 라한이 천천히 앞서갔다. 그 뒤에서 투바가 인상을 마구 찌푸리며
뒤따랐다.
투바가 순간 치미는 화를 억눌렀다. 자신이 창조한 물 덩어리를 더러운 것과
비교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지금은 명백히 라한이 강자. 딴죽을
걸어봐야 자신만 손해였다. 그냥 입 꾹 다물고 죽은 듯이 지내는 게 최선이리라.
왔다! 라한
카이렌과 레테아는 만난 지 근 하루 동안 침묵을 고수했다. 서로 눈치만 보며
누구도 먼저 말을 못 꺼낸 탓이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웃을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피를 말리는 일이었다.
고귀한 존재 앞에서 바지를 내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이곳에서 혼자 움직일 수도 없으니. 이 일을 어쩐다.
현재 이곳은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레비안 산맥이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몬스터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수시로 몬스터의 공격을 받았다. 물론, 이들의
공격은 거의 대부분 카이렌의 검에 의해 해결되었다.
문제는 이곳에 몬스터가 수시로 출몰한다는 그 자체에 있었다. 너무 위험해서 혼자
움직일 수 없다는 점. 그래서 화장실 볼일을 보기위해서는 카이렌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점. 별거 아니지만 레테아에게 너무 소중한 그것 때문에 이렇게 온몸을
비틀어야만 했다.
'말해? 에휴, 도저히 못하겠다. '
엘프는 대륙에서 가장 고귀하고 순결한 존재로 꼽혔다. 카이렌과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지만, 레테아는 그런 사실을 몰랐다. 고귀한 존재에게 더러운 얘기를 할 수
없어서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카이렌이라고 하루 동안 편했던 건 아니었다. 수시로 출몰하는 몬스터의 공격을
막는 건 고스란히 카이렌의 몫이었다. 레테아 역시 검을 익힌 검사였지만,
카이렌과는 하늘과 땅 정도의 실력차이가 존재했다. 그에게 몬스터를 맡기느니
차라리 혼자 다 처리하는 게 마음 편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지?'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레테아가 라한의 형이라는 데 있었다. 제대로 배워서
동경하고 있는 라한의 친형. 그 하나만으로도 언행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흠, 저기."
먼저 말을 꺼낸 건 레테아였다. 약간 쑥스러운 듯 붉힌 얼굴이 나이답지 않았다.
"말해라, 레테아!"
카이렌은 레테아에게 말을 놓았다. 라한의 형이기는 했지만, 나이 때문에 차마 말을
높일 수 없어서였다.
레테아 역시 카이렌의 반말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반말하는
엘프가 카이렌 뿐임을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둔한 건지, 긴장해서인지
그런 눈치를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게 저기. 아닙니다. "
레테아가 결국 말을 접었다. 차마 화장실 볼일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레테아가 입을 다물자 또 다시 적막이 감돌았다. 그렇게 지옥 같은 침묵이 돌 무렵,
구세주가 등장했다.
"야! 왜 이제야 오는 거야?"
숲의 끝에서 라한이 무언가를 업고 낑낑대며 걸어왔다. 그 뒤에 서는 프라하 역시
무언가를 업고 당당하게 뒤따라오고 있었다. 맨몸이라 가장 편해 보이는 투바는
제일 뒤쪽에서 고개를 땅에 묻고 걸어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으차! "
철퍼덕!
라한은 카이렌 앞에 도착하자마자 물 덩어리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간 쌓인 게
많았는지 쾌나 감정 섞인 던짐이었다. 그 뒤를 이 어 도착한 프라하도 등에 업었던
상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던지지 않은 걸로 봐서 업은 상대에게 유감은 없는
듯했다.
"응? 이 물컹거리는 건 뭐냐? 꼭 그거 같네. "
"야! 변! 이리와!"
스르르륵!
역시나 라한의 부름에는 잽싸게 반응하는 물 덩어리 변이었다.
"너 처음에 이거 보고 뭐 같다고 생각했어?"
"어? 왜 그지 있잖아. 볼일 보면 나오는 그거."
"맞다. 이놈이름이 변이거든. 변! 인사해라. 카이렌이다."
라한의 말에 물 덩어리 변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낑낑대며 어렵게 머리를
들어올렸다. 너무 큰 머리 탓에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프라하. 너도 이 녀석한테 인사해라. "
"아, 아, 아. 안녕하세요. 프, 프, 프.라하라고 합니다. "
말을 마친 프라하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뭔가 조짐이 이상했다. 대부분 저런
증상은 누군가"11 게 한 눈에 반했을 때에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프라하의 상태를 눈치 챈 라한이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흘렸다.
"카이렌. 저놈 너한테 반했다. "
"이, 이."
라한의 말을 듣자마자 카이렌에게서 살기가 폭사되었다. 의식을 잃고 있는
휴란트마저 몸을 꿈틀거릴 정도의 살기였다.
"허엇! 저, 저기 고귀하신 엘프님. 혹,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프라하가 카이렌에게 말을 걸어왔다. 헌데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붉어지는 프라하의 얼굴. 카이렌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었다.
"프라하. 저놈 남자다. "
"뭐, 뭐?"
라한의 충고에 프라하가 슬슬 뒷걸음질 쳤다. 카이렌에게서 풍기는 살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오면서 카이렌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가 남자라는 얘기는 듣지
못했던 프라하.
순간 눈을 야리며 라한을 바라봤지만, 라한은 딴청만 피워댔다.
"라한아!"
"형!"
일촉즉발의 상황은 그나마 평범한 인간 레테아에 의해 무마되었다.
레테아를 본 라한이 그에게 달려갔다. 레테아도 라한을 향해 마주 달려갔다. 그리고
포옹.
라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혹시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계속 걱정했었다. 만약
레테아마저 잘못됐다면, 그래서 정말 천애고아가 됐다면, 라한 스스로도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희대의 살인마가 됐을 수도.
"라한아. 살아 있었구나. "
"형. "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냥 형 품에 안겨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근데 라한아!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저들은 모두."
레테아가 라한 일행을 가리키며 말을 얼버무렸다. 뒤늦게 등장한 투바를 본 탓이다.
투바 역시 엄청나게 아름다운 얼굴이다. 하지만 카이렌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남자라는 게 한 눈에 구분이 된다는 점이다. 구분이 모호한 카이렌보다는
확실히 나은 셈이다.
"아, 형님, 제 친구들소개해 드릴게요. 카이렌!"
라한은 카이렌부터 불렀다. 그냥 뒀다가는 프라하가 몸성히 못 지낼 것 같았다
프라하도 살고, 정신 사나운 지금 상황도 종식시키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응."
라한의 부름에 카이렌도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이제 정식으로 인사할 시간이
찾아왔다. 하루 종일 참았던 침묵을 털어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형이야. 여기는."
"카이렌이다. 보시다시피 엘프고. 또, 보시다시피 남자다. "
라한의 말을 카이렌이 받았다. 마지막에 덧붙인 보시다시피 남자라는 말은 좀
아니다 싶었지만 그냥 이해하기로 했다.
"레테아라고 합니다. "
"하하하. 반가워. "
라한은 카이렌의 인사가 끝나자 투바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난감했다. 마족이라고 말한다면 대번에 겁부터 집어먹을 것이다. 물질계에서 마족의
이미지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었다.
"어, 이 녀석은. 그러니까."
"투바라고 한다. 라한 형이지만 나이는 내가 많으니까 높임말을 기대하지는 말라고.
"
투바의 인사가 끝났다. 정체를 밝히지도 않았는데 너무 쉽게 마무리되었다. 괜히
고민부터 했던 라한만 바보가 된 셈이다.
'간단하네. '
"아, 예. 전 라한형 레테아라고 합니다. 우리 라한이를 보살펴줘서 감사합니다. "
나이가 많다는 말에 높임말은 하고 있지만 좀 어색했다. 투바의 겉모습이 겨우
이십대로 보인 탓이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지낸 라한이 침묵하고 있으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겉모습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나이 때문에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레테아의 의아한 표정을 본 투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지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으라고. "
그 말에 레테아도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했다. 드래곤과 맞장 뜨는 엘프까지 본
마당에 믿지 못할 건 또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 녀석은."
프라하를 소개하려던 라한이 뒤늦게 물 덩어리 변을 떠올렸다. 그가 레테아의 눈에
들어갔다가는 또 다시 기절 사태가 벌어질 거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금이 밤
시간이라 반투명한 물 덩어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들킬 게 뻔했다. 그 전에 1 무슨 수를 써야 했다.
-투바. 저 녀석 어떻게 좀 해라.
라한의 메시지 마법에 투바가 물 덩어리에게 슬쩍 다가갔다. 그의 앞까지
도착해서는 물 덩어리에게 윈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물덩 어 리가 땅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휴, 살았다. '
"라한아. 왜 그러느냐?"
"아, 아니에요. 저 녀석은 프라하라는 녀석이에요. 도끼를 잘 쓰는 친구죠. "
"안녕하십니까. 라한이 형 레테아라고 합니다. "
"프라하. "
프라하는 자기 이름만 부르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직도 카이렌에게 미련이
남은 모양이다.
대충 소개를 다 받은 fp 테아가 의문을 품었다. 한결같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존재들이다. 카이렌, 투바, 프라하.
카이렌이야 엘프이니 이해할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으로 보이는 투바와 프라하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라한의 나이는 고작 서른이 아니던가. 자신보다
한참어린 동생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존재와 친구로 지내고 있으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형.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좋은 친구들이라서 사귀게 된 거니까
어색해하지도 마시구요. "
"알았다. 근데 저기 저 쓰러진 친구는 누구냐?"
레테아가 무성한 풀 사이에 쓰러진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휴란트였다.
한밤중이라 보지 못할 법도 한데, 용케도 휴란트를 발견했다. 역시 기사 단장
출신다웠다.
"저 녀석은. 나도 모르는데. "
"응? "
"오다가 계곡에서 발견했거든요. "
계곡이라는 말에 레테아가 순간 눈을 빛냈다. 곧이어 엄청난 속도로 휴란트에게
달려가서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휴. 란트. "
"어?"
레테아의 부름에 라한의 어벙한 물음을 토했다.
"휴란트야! 휴란트!"
레테아의 계속된 부름에도 휴란트는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단순히 기절에 의한
증상만은 아니었다. 마을에서 쫓긴 이후부터 계속된 정신적, 육체적 피로에
기절이라는 변수가 더해져서 수면이 길어진 것이다.
"형. 그냥 의식을 잃은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근데 묘한 인연이네. 어째
그놈이 내 조카가 되지?"
"아, 그렇구나, 고맙다, 라한아. 네가 휴란트를 살렸어."
"살리긴요. "
라한이 어색하게 대답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필이면 신기를 가진 인간이 자신의 조카라니. 잘 돌봐주고 싶어도 신기 때문에
쉽지 않을 듯했다.
'휴란트라고 했나? 네놈 인생도 참 기구하다. '
라한도 조카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드래곤에게도 레테아와 일행으로 있는
자신 또래 아이 한 명을 조건으로 건 거였다. 헌데, 드래곤끼리 전달되는 과정에서
또래 휴란트를 빼먹어 버렸다. 어떻게 보면 크라이드리안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셈이다.
드래곤에게 약속은 다른 종족에게 비치는 약속과 다르다. 어기면 소멸. 그 때문에
드래곤을 약속의 종족이라 부른다. 그런 상황에서 라한이 휴란트를 찾아 왔으니.
어찌 보면 라한이 크라이드리안의 소멸을 막아준 것과 같았다
크라이드리안을 대동한 로테마이어스가 레비안 산맥 북쪽 끝자락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크라이드리안의 몸에 대한 조언을 듣기 위해서였다.
"로드님. 여기는. "
"베르타라스님 레어가 있는 곳이다. "
베르타라스는 다른 고룡과는 좀 다른 위치에 서 있었다.
전대 로드. 이 한 마디 때문에 모든 드래곤들은 그를 우러러봐야 했다. 물론 그런
지위가 어떤 힘을 가지지는 않았다. 다만 상징적으로 최고 어르신이기에 조심할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여기는 왜."
"우리 드래곤 중에서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분이 베르타라스님이다. 난 아직
그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 "
스스로 오만하다고 생각하는 로테마이어스도 베르타라스만큼은 무시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가 한 말이면 거의 대부분 옳다고 믿고 따랐다. 단 한 번. 물질계에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은 어겼지만.
어찌됐든 로테마이어스에게는 정신적 지주로 인식되는 유일한 드래곤이었다.
저벅 ! 저벅 !
로테마이어스와 크라이드리안이 얘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었다. 이렇게 약 십여 분.
그들의 눈앞에 엄청나게 거대한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나게 크군요. "
"베르타라스님 이니까. "
크라이드리안의 감탄에 로테마이어스가 짧게 답했다. 말 속에서 그가 베르타라스를
얼마나 존경하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흠, 나오시는군. "
레어 안을 잠깐 살피던 로테마이어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게 채 숨도 돌리기
전에 동굴 안에서 50 대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백금발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청수한 인간의 형태였다.
"로드님을 뵙습니다. "
베르타라스를 본 로테마이어스의 첫마디였다. 비록 로드 지위를 자신에게
물려줬지만, 여전히 로드로 기억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마나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로드로 기억될지 모른다. 그만큼 존경하고 있으니 말이다.
"로드라는 말은 부담스럽네. 근데 무슨 일인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
"들어오게. "
"감사합니 다. "
베르타라스가 몸을 돌려 레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로테마이어스가 고개를
숙인 채로 뒤따랐다. 크라이드리안은 바닥에서 약간 뜬 상태로 레어 안으로 천천히
이동되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자리에 앉자마자 베르타라스가 용건부터 물어왔다 아직도 로테마이어스의 물질계
간섭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먼저 이 아이를 살펴봐주십시오. "
"응?"
"예. 크라이드리안이라는 레드 일족입니다. 기억을 더듬으시면 누군지 떠올리실 수
있을 겁니다. "
크라이드리안은 베르타라스가 로드일 때 성년식을 치렀다. 모든 드래곤의
성년식에는 반드시 참가해야 하는 게 로드인 바. 베르타라스가 크라이드리안을
모르고 있을 리 만무했다.
"기억나는군. 근데 무슨 일인가?"
"먼저 크라이드리안의 드래곤하트를 살펴봐주십시오. "
로테마이어스가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자리에 베르타라스가 다가갔다.
그리고 크라이드리안의 목 아래까지 떠올라서 손을 살포시 댔다.
한참 크라이드리안을 살피던 베르타라스가 침음성을 흘렸다. 분명 자신도 처음
겪어보는 증세였다. 아니, 물질계 전체를 통틀어서 이런 식의 봉인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어떻습니까?"
"열기가 너무 강하군. "
레드 일족에게 열기가 강하다니 누가 들으면 당연하지 않느냐고 타박 받을
소리였다. 하지만, 그 소리도 베르타라스의 입에서 나오자 왠지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저. 열기가 강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요?"
"레드 일족이 열기를 다스리는 건 말 안 해도 알 테지. 그 때문에 열과 관련된
공격에는 거의 타격받지 않지. 하지만, 이 아이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열기
이상의 뜨거운 무언가가 드래곤하트를 감싸고 있더군. "
"어떻게 레드 일족이 감당할 수 없는 열기가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그건 나도 확신할 수 없구먼. 대체 이 아이가 왜 이렇게 됐는지 경위를 설명해
주겠는가?"
"크라이드리안, 네가 설명하거라. "
"예. 로드님. 사실 전 로드님의 명령을 받고."
크라이드리안이 라한을 만나게 된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의 싸움과
생포되었을 때의 상황까지도. 약간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포장되었지만, 거짓말은
조금도 포함되지 않았다.
"휴-. "
크라이드리안의 얘기가 끝나자 베르타라스가 길게 한숨쉬었다. 그 반응에 오히려
로테마이어스와 크라이드리안이 조바심을 냈다. 웬만한 일에는 심경변화가 없는
베르타라스이지 않은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든 인간을 보고 싶군. "
"류카라한을 말입니까?"
"류카라한? 이 아이와 싸운 인간이 그였는가?"
"예, 로드님. "
로테마이어스의 대답에 베르타라스가 생각에 잠겼다. 류카라한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베르타라스에게 류카라한은 좀 특이한 존재로 기억되었다. 대륙최고의
검사였으면서도 마법에 관심을 가진 존재. 그렇게 열성을 보여서 종국에는 마법을
익히는 데 성공한 마검사. 하지만, 전투 중에는 단 한 번도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던
특이한 사람이 류카라한이었다. 이 때문에 류카라한의 마법 실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전혀 없었다.
'그가 마법 실력을 숨긴 게 이런 이유였나?'
오해가 오해를 부른다더니 지금이 딱 그런 경우였다. 대충 마음의 정리를 한
베르타라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류카라한의 마법 실력은 아무도 모르지. "
"소문으로는 하급 마법을 겨우 펼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 류카라한이 마법을 사용하는 걸 본 존재가 아무도
없으니까. 허허, 이 아이를 어찌 치료해야할지 모르겠군. "
로테마이어스와 베르타라스. 그들은 소문을 믿었어야 했다. 실제로도 소문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정녕 이 아이를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까?"
"열기를 없애려면 블루 드래곤이나 화이트 드래곤을 찾아가는게 좋겠군, 아무래도
상극의 속성이라 할 수 있으니."
"아, 그렇군요. "
어찌됐든 해결책을 얻어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 해결책이 정확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넋 놓고 레드 일족 한 명을 잃을 수는 없는 일.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스런 대화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흠, 물질계 간섭을 포기할 생각은 없는 건가?"
"죄송합니다. 제 마음은 확고합니다. "
"그렇겠지. 자네가 고집 하나는 우리 드래곤들 중 최고였으니. "
"죄송합니 다. "
다시 한번 사과 말을 내뱉은 로테마이어스가 크라이드리안을 데리고 사라졌다.
실제로 라한의 금제는 화기 계열이 아니었다. 수시로 그 속성이 변하는 특이한
금제였다. 제령기와 제란기가 아니면 대륙 그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라한의
고유 금제인 셈이다.
하지만 베르타라스가 크라이드리안을 살폈을 때에는 화기 속성이었다. 이 때문에
베르타라스도 이런 조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크라이드리안에게는 정말 불행한
일이지만, 이것도 운명이리라.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친 일행이 모닥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은
사람이 많아서 이동은 좀 더 미뤄야 할 듯했다.
"근데 라한. 우리 여기에 왜 왔더라 7"
라한을 본 투바가 조용히 의문을 던져왔다. 레테아의 형 때문에 정신이 너무 없어서
목적을 잠깐 잊고 있었다.
"에펠 그 자식 잡으러 온 건데, 뭐 어쩌다보니. 하하하. "
"에펠?"
"에펠?"
라한의 어색한 대답에 레테아와 휴란트가 동시에 되물었다.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봐 표정까지 너무나 흡사했다.
'전혀 안 닮은 것 같았는데, 저런 게 비슷하네. '
휴란트는 밤이 한참 깊었을 때에야 잠에서 깼다. 그는 일어나서 라한을 보자마자
경기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괴물이라고 괴성을 지르며 계속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물 덩어리 변에 대한 공포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이에 라한이 꿈 꾼 거라고 우겨서 겨우 다독였다. 믿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무사히 넘어갔다.
"왜요? 에펠이라고 알아요?"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이 맞는지 모르겠구나. "
"몇 놈이었어요?"
"세 명이었지, 여자한 명에 남자두 명이었는데. 용병 출신 같더구나. "
레테아의 대답에 라한이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세 명. 자신이 찾는 자들이
그들이라면 한 명은 죽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자한 명이 건재한 듯하고
에펠이라는 이름을 아는 걸로 봐서는 베린, 란 둘 중 한 명이 죽임을 당한
것이리라.
'그래도 용케 버텼네. 암살자라는 것들이 영 시원찮네. '
라한은 쿨샤크가 암살자 길드를 이용했음을 거의 확신했다. 용병 출신을 처리하는
일에 용병을 사용하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거기다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은밀하게 처리하는 암살자가 유리했으리라.
"형! 그 세 명 이름 혹시 기억나요?"
"에펠, 베린, 카류나, 그 이름이 확실해요."
대답은 휴란트에게서 나왔다. 그의 밝은 목소리가 주변 분위기마저 환하게
만들었다.
휴란트는 라한을 무척이나 잘 따랐다. 말로만 듣던 삼촌을 만난 게 좋았던
모양이다. 거기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가 젊어 보이는 것도 호감을 가지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라한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마음으로는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손에
쥐고 있는 신기가 문제였다. 그렇다고 신기로 인해 어떤 타격을 받는 건 아니었다.
다만 너무 껄끄럽다는 것.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계속 신경 쓰인다는 것. 이런
점이 휴란트와 허물없는 사이가 될 수 없게 만들었다.
"확실하군요. "
"그들이 네가 찾던 그들이 확실해? 흠, 근데 너의 말을 들어보면 좋은 의도로 찾는
건 아닌 듯한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레테아는 라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들과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살기 위해서
자신을사지로 내몰았던 에펠 일행. 이곳에 들어오게 된 모든 이유를 자신에게
뒤집어 씌웠던 걸 잊지 않고 있었다.
"그놈들. 뭐라고 해야 되지?"
"그냥 나쁜 놈들이지. "
"맞아. 천하의 마족보다 더 나쁜 놈들이 그놈들이지. "
프라하의 말에 투바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하지만, 가지게 된 화를 밖으로
표출하지는 못했다.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일행의 말을 들은 레테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아직 이곳 레비안 산맥에 있을 거다. "
"형이 있던 곳이 여기하고 멀어요?"
"그렇게 멀지는 않다. 왜 찾으려고?"
"예. 꼭 찾아야 되요. "
"그럼. 찾아야지 암. 찾아야하고말고."
라한의 말을 카이렌이 받았다.
카이렌은 쿨샤크를 납치한 뒤 마냥 기다리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정말
우연한 기회에 쿨샤크와 대화를 할 기회가 생겼다. 대화 중에 스케일러 링이 에펠
일행에게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라한은 스케일러 링이라는 마법 도구와 복수를 위해 그들을 찾아야 했다. 반면
카이렌은 오직 스케일러 링 하나 때문에 그들을 찾는 중이었다.
"흩어질까?"
"그래도 드래곤 산맥인데, 좀 위험하지 않을까?"
"그렇겠지? 흠, 뭐 어쩔 수 없지. 일단 남쪽부터 시작해서 북으로 쭉 훑고
올라가자. "
"좋아. "
그렇게 에펠 일행에 대한수색이 시작되었다. 라한은 마법으로 공중에서 찾기도
했다. 물 덩어리 변은 땅에 스며들어서 그야말로 물샐틈없는 수색에 착수했다.
라한에게 잘 보이려는 의도가 다분한 열성이었다.
"젠장. 알고 튀었나?"
"하여간 그 놈들. 더럽게 운 좋은 놈들이라니까. "
결국 라한 일행은 에펠 일행을 찾지 못했다. 곳곳에서 흔적이 발견했지만, 얼마
못가서 종적을 놓쳐 버렸다.
"어쩌지?"
"다음 기회를 노려야지. 일단 나가자. 그놈들도 산맥에 마냥 틀어박혀서 지낼 수는
없을 거야. 언젠간 나오겠지. "
"정보 길드를 이용하려고?"
"그게 좋겠지 . "
그렇게 라한 일행이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처음 들어온 방향과는 약간 다른
길이었다. 카이렌이 쿨샤크를 숨겨둔 곳이 마을 조금 북쪽이기 때문이다.
쿨샤크에게도 꽤 많은 앙금이 남은 라한이었기에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그
눈빛에 레테아와 휴란트가 순간 몸을 움찔거렸다. 그들에게는 살기보다 그런 눈빛이
더 무서웠다.
라한 일행이 레비안 산맥을 출발한 지 5 일.
카이렌이 쿨샤크를 가둬둔 한적한 집에 거의 도달했다. 지금 걷는 속도면 오늘 밤
안으로 그 집에 도달할 듯했다.
라한을 쫄래쫄래 따라가던 휴란트가 레비안과 대화를 시작했다.
'정말 못 봤어요?'
-말했다시피 네가 눈을 너무 일찍 감았다.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잘 모르겠구나.
휴란트의 의문은물 덩어리 변에 있었다. 분명 본 것 같은데 모두가 아니라고 하니
자신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때 봤던 물덩어리의 모습이
생생했다. 헌데, 그 모든 게 거짓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분명히 봤는데.'
-그것보다 저기 앞서가는 검은 머리 남자 보이느냐?
'왼쪽? 아니면 오른쪽?'
-왼쪽에 선 남자 말이다.
일행에 검은 머리는 모두 세 명이다. 칠흑 같이 검은 머리카락의 레테아와 라한.
그리고 약간 회색빛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인 투바. 그 중 레비안이 언급한 이는
투바였다.
'그가 왜요?'
-아무래도 이상하군.
'왜요?'
-마족의 기운이 풍긴단 말이야.
레비안의 대답에 휴란트가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너무 놀라서였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럼 그가 마족이라는 말이에요?'
-그게 확실치가 않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면 엄청나게 높은 지위를 가진 마족일
텐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상대가 마족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아서 그런다. 대신관이었던 내가 그렇게
느낀다면 잘못 봤거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마족이라는 뜻밖에 안 되거든.
그제야 휴란트가 안색을 풀었다. 그는 레비안이 잘못 봤다고 단정 지었다.
투바는 삼촌인 라한의 친구라고 했다. 투바가 마족이라면 마법사인
라한은그를부른흑마법사라야앞뒤가들어맞는다. 헌데, 라한의 마법은 흑마법의
기운이 거의 풍기지 않았다. 그건 아버지인 레테아가 확인했기에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긴 겉으로 드러난 마나라고 해봐야 1 서클이 전부였으니 흑마법의 기운이 풍길 리
만무했다. 그가 설사 흑마법만 배웠다 하더라도 제령기와 제란기가 기반이었으니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난 또. 그럼 아저씨가 잘못 봤나 봐요. '
레비안에게 생각을 건넨 휴란트가 신기를 들어 올렸다. 이에 레비안도 휴란트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그런가보구나. 신기가 곁에 있는데 저렇게 멀쩡하게 걸어 다니다니. 내가 너무
오래 갇혀 있었군,
신기 레이시드는 엄청난 신성력을 품고 있다. 일반인은 잘 모르겠지만 마족에게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한다. 이 때문에 웬만한 마족은 레이시드의 곁에 있는
정도로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게 된다. 헌데 투바가 멀쩡하게 걷고 있으니 아니라고
생각할 만도 했다.
하지만 투바는 웬만한 마족이 아니었다. 실력과는 별개로 마왕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최상급 마족이 그였다. 설마 인간이 최상급 마족을 불렀겠냐는 생각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레비안은 착각은 여기서 기인했다
"저기다. "
선두에 선 카이렌의 대답에 일행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다. 말은 안했지만 지겹긴
지겨웠던 모양이다. 매일하는 노숙도 꽤 큰 불편함을 줬을 테고.
"어?"
라한이 멀리 보이는 집 안의 기운을 살폈다. 그리고 의아한 듯 카이렌의 얼굴을
바라봤다.
없었다. 생명체라고 보이는 그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
아직 꽤 먼 거리여서 카이렌은 집 안의 기운을 잡아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잡아둔
쿨샤크가 사라졌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없어. "
"뭐가?"
"네가 잡아둔 그 자식이 없다. 오호라. "
라한이 멀리 있는 집의 왼쪽을 살피며 기이한 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에 카이렌을
비롯한 일행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야! 왜 그래?"
"저기 있군. 잠시 후에 보자고. "
말을 마친 라한이 모습을 감추었다. 마법이 아닌 광견보를 시전한 사라짐 이었다.
처음 약간 빠른 정도에 그쳤던 광견보가 이젠 공간 이동과 비견될 정도로
발전되었다. 물론 이런 속도로 오랫동안 이동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짧은 거리의
움직임만큼은 이런 믿을수 없는 속도가 가능했다.
그렇게 잠시 후, 라한이 뭔가 묵직한 물체를 어깨에 올리고 나타났다. 의식을 잃은
쿨샤크였다.
쿨샤크는 지금부터 약 한 시간 전에 카이렌이 해놓은 결박을 풀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묶여 있었던지라 잠시나마 몸을 풀어야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몸이 풀린 후 탈출을 시도했다.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갔더라면
라한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쿨샤크가 택한 방향은 라한이 오는 방향과
그리 어긋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라한에게 바로 발각됐다. 지지리 복도 없는
놈이다. 아니, 지금까지 쾌 많은 운이 작용했지만, 이젠 그 복이 다된 듯했다.
카이렌이 직접 구해놨다는 집 안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포박을 푼 쿨샤크가 집에
화풀이를 한 듯했다.
집 상황을 보고 가장 분노를 표한 사람은 카이렌이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 "
"후후후, 이 녀석 성깔은 여전하군. 하하하, "
라한이 정말통쾌하게 웃어재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에펠 일행을 놓치고 얼마나
분노했던가. 그때 받았던 찝찝한 기분이 쿨샤크를 잡음으로써 모두 사라졌다.
"형. 휴란트 데리고 잠시만 나가 계세요. "
"흠, 그 사람도 악당이냐?"
레테아의 물음에 라한이 헛웃음을 흘렸다. 악당. 이곳에 시스마란이 있다면 딱
어울릴만한 소리였다. 새삼 '기사들은 모두 저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미소로
답했다.
"형. 악당 맞아요. 저와는 쾌 오래전부터 악연이었죠. "
"아무리 악당이라도 갱생의 여지는 있는 법이다. 바른 길로 인도해보고 그래도 되지
않을 때 폭력을 가하거라. "
"뭐, 이 녀석이 갱생의 여지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형이 한 말이니 노력해볼게요. "
"그래. 고맙다, 휴란트. "
"예 아버지. "
레테아가 아들 휴란트를 데리고 집을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라한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형과 휴란트를 데리고 다녀서는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것 같았다.

우선 물 덩어리 변이 그러했다. 레테아를 만난 직후부터 땅 속에 스며들어서


움직이고 있었다. 라한에게는 느린 발걸음을 더 느리게 만드는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슈라와 테세르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곳에서는 불러 놓기로
약속했던 슈라. 항상 라한의 로브 속에서 마법 주문을 외우던 테세르. 그들 모두
레테아가 등장하자마자 모습을 감추었다. 라한이 귀환시킨 것이다. 레테아가 검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으련만. 라한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라한의 행동 자체에 있었다. 레테아의 기사도
정신은 시스마란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말그대로 정의의 사도가
그였다. 이 때문에 잔인한 행동을 할 때마다 당위성을 주입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유 없는 잔인함을 레테아가 두고 보지 못하는 탓이다.
'어쩐다? 안전한곳이 있나? 젠장. 그놈의 엘베로 그자식이 왕만 아니었어도. '
엘베로가 루이나 왕국의 왕이라는 게 너무 크게 작용했다. 현재 루이나 왕국은 중앙
대륙의 패자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이 때문에 그의 눈에서 벗어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륙 동쪽 끝에 숨어 있는 레테아마저 찾아내지 않았는가. 대륙 어디를
가더라도 엘베로의 눈을 완벽히 속이기는 힘들 성 싶었다.
'뭔가 수를 내봐야겠어 '
어떤 일을 꾸며서라도 안전한 곳을 만들어야 했다. 엘베로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혹은 눈은 닿으나 절대 손을 댈 수 없는 곳으로.
탁! 탁! 탁!
바닥에 쓰러진 쿨샤크 주변에 라한과 일행이 둘러앉았다. 다행히도 이곳에 빈 나무
의자가 많아서 모두 한 자리씩 차지 할 수 있었다. 라한의 머리맡에 앉은 라한이
몸을 여러 번 꺾었다. 본격적인 작업을 위한 준비 운동이었다 그 운동이 무르익었을
때 라한이 발을 들어 올렸다.
빡- !
"컥!"
라한의 다리는 쿨샤크의 뒤통수에 정확히 가격했다. 쿨샤크가 경악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상태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연신 눈을 비볐다. 아직도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
쿨샤크의 시야에 처음으로 잡힌 사람은 카이렌이었다.
"헉! 위대한 엘프님. "
"내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
카이렌이 라한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카이렌도 열 받은 건 사실이다.
자신이 아끼는 집 안을 이 꼴로 만들어놨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충 보기에도
자신보다는 라한이 품은 분노가 더 커보였다. 이럴 때는 선수를 양보하는 게
서로에게 좋은 길이라 판
단했다.
"너, 너."
라한을 본 쿨샤크가 경악하며 말을 더듬었다. 단지 사람을 본 것뿐이건만 도무지
입을 다물 생각을 못했다. 받은 정신적 충격이 크긴 컸던 모양이다.
'흠, 저놈 라한 얼굴만 보고도 저런 반응을 보이네. 대체 라한한테 얼마나 큰
잘못을 한 거야? 아니면 라한한테 크게 당하기라도 했나?'
'역시 라한 저놈은 난 놈이었어. 인상만으로 먹고 들어가잖아. '
'우리 마족보다 더 지독한 놈이야. 어떻게 얼굴만으로 멀쩡한 애를 저런 얼굴로
만들 수 있지?'
각자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라한의 표정이
너무 비장해서였다. 나라를 구한 장수가 적장을 맞을 때에나 보일 수 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쿨. 샤크. "
라한이 속삭이듯 말했다. 이에 쿨샤크가 경기를 일으키며 몸을 마구 떨어댔다.
"라, 라한. 제발 살려줘. 살려."
"그 입 다물라. "
라한의 목소리는 시종일관나직하고 담담했다. 하지만, 라한의 눈은 달랐다. 붉게
충혈 된 눈과 날카롭게 치떠진 눈초리. 그 때문에 주변에 있는 누구도 쉽사리
마음을 놓지 못했다.
"라, 라한. 살려."
"넌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군. 분명 입 다물라고 말을 했건만. 쯧쯧. 변! "
라한이 물 덩어리 변을 불러냈다. 바닥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듯 모습을 갖추는
변이었다.
"컥!"
털썩!
쿨샤크는 물 덩어리 변을 보자마자 의식을 잃었다. 그 모습의 기괴함 때문에 천하의
쿨샤크도 버티지 못한 듯했다.
"허, 이것 참. 뭐가 이러냐?"
라한이 물 덩어리 변을 부른 건 정말 즉흥적인 발상에서였다. 물컹하고 찝찝한
기분을 쿨샤크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그래서 자신이 느꼈던 불쾌한 기분을
갖도록 해주고 싶다는 그런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헌데, 물 덩어리 변의 외모를
생각지 못한 게 실수였다.
"라한. 이제 어쩔 거야?"
"에이. 김샜다. 다음타자 나서라. 난 손 털래."
라한의 눈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좀 전에 분노했던 눈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렇다면 눈빛에 가득했던 분노도 연기였다? 새삼 라한의 연기력과
치밀함에 살이 떨려왔다.
'독한 놈, '
라한 일행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실제로 라한은 쿨샤크에게 화 낼 이유가 없었다. 이필리에 종합학교에서도 쿨샤크가
당했지 라한이 당하지는 않았다. 또, 얼마 전 싸움 이후에 쿨샤크가 겪었을
마음고생은 적지 않을 거였다. 거기다 자신의 부상도 쿨샤크와는 관계없이 벌어진
일. 쿨샤크에게는 원한이 있을 턱이 없었다.
반면, 쿨샤크는 라한에게 크나큰 분노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라한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어찌됐든 힘을 가진 자는 라한이었고, 마냥 당해야 하는 사람은
쿨샤크였으니 말이다. 그것도 영원히.
"다음 타자는 내가 하지. 근데 나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별로 당한 게 없는데. "
나서려던 프라하가 몸을 멈칫거렸다. 그 역시 쿨샤크와의 악연이 없음을 피력한
것이다.
"야! 뭐가 이래? 그럼 내가 나서지, "
투바가 나섰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투바는 쿨샤크를 만나는 게 오늘이
처음이지 않은가. 그가 화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헌데, 그의 붉게 충혈된 눈을
보면 화낼 이유가 있었던 듯했다
"변! 넌 들어가있어. 야! 일어나!"
퍽! 퍼벅!
"큭! "
신음을 토한 쿨샤크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며 물 덩어리를
찾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헛것을 봤나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아직도 그 끔찍했던 모습이 생생한데
헛것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게 자신이 본걸 부정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너 나 알아?"
"모, 모릅니다. "
퍽-!
"나 정말 몰라 7"
"저, 정말 모릅니다. "
투바는 같은 물음만 계속 던졌다. 역시나 쿨샤크도 같은 대답만 계속했다. 그렇게
근 십여 차례가 지속된 후, 투바의 물음이 바뀌었다.
"난 너 때문에 피해를 본 피해자다. 너 같은 놈이 라한의 어린 시절에 끼어들어서
저 녀석 성격이 저 모양이 췄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응? 착하게 자랄 수도
있었던 놈 성격을 저렇게 더럽게 만들어 놨는데. 대체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말해!
해결책을 만들어내란 말이야!"
"저, 저
"젠장. "
라한이 욕설을 토하며 밖으로 나갔다. 더 듣고 있기 거북했다. 최근에 좀 심하게
군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까지 걸고넘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도
형을 만난 이후로는 잘 대해줬는데, 아직도 이전의 앙금을 지우지 못했던 모양이다.

결국 라한의 일행에 쿨샤크라는 커다란 짐 덩어리가 추가되었다. 쿨샤크로서는


일단죽지 않았으니 다행인 셈이다. 라한도 답답할 때 화풀이 할 대상이 생겼으니 큰
불만이 없었다.
"라한. 이제 어디로 갈 거야?"
"글쎄다. "
원래 계획은 칼라피안의 거처에 들러서 남은 두 가지 보물을 챙긴 후에 루이나
왕국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헌데, 루이나 왕국으로 갈 이유가 사라졌다. 기다려야
할 가족이 없으니 갈 필요가 없었음이다. 가족들과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라 더
가기가 싫었는지도 모른다.
"일단 루이나 왕국으로 가는 게 어때? 너 복수해야 되잖아. "
"글쎄. "
투바의 말에도 라한은 쉽사리 결정내리지 못했다. 아직 엘베로를 죽여야겠다는
마음을 굳히지 못해서였다.
물론, 가족의 복수만 생각한다면 죽여야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라한에게는
껄끄러운 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일단 멀다는 것. 때문에 그 먼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루이나
왕국의 텔레포트 좌표를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또, 나이로 보면
오늘내일하고 있을 엘베로의 면상에 마법을 퍼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남들의 가십거리가 된다는 거였다. 한 나라의 왕을
죽인다면 대륙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건당연한 일. 자칫 그 일로 대륙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까 두려웠다.
"그럼 어쩔 건데? 네가 행보를 결정해야 우리가 맘 편하게 따르지. "
"흠, 일단 엘퐁소로 가자. "
"엘퐁소? 카이렌이 여기 있잖아. 쿨샤크도 이미 잡았고. 거기다우리는 스케일러
링도 못 찾았잖아. 거기 가서 할 일이 있나?"
본래 라한의 엘퐁소 지방 방문은 쿨샤크 때문이었다. 그의 실종을 조사하다가
스케일러 링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셈이다. 헌데, 쿨샤크는 이미 잡았고 스케일러
링을 가지고 있는 에펠 일행은 다른 곳으로 도주했다. 어디로 도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 엘퐁소 지방은 아니었다. 결국 엘퐁소 지방에 가야 할 목표 자체가
사라진 것과 같았다.
"내가 가야 할 곳이 수아나 왕국의 멜카투라 산이거든. 근데 엘퐁소가 그곳과 제일
가까워. "
"걸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알았다. 알았어. 몇 시간만 기다려봐. 스크롤 만들어 올 테니까. "
"고마우이. "
라한이 침대 위로 올라가 아공간을 열었다. 그 속에서 나무가 아닌 얇은 종이 십여
개를 꺼내 바닥에 내려놨다. 나무를 미리 얇게 잘라 종이 형태로 만들어둔 듯했다.
전에 라한이 했던 말처럼 재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 겨우 십여 개, 한 때, 로테라
숲에서 마구 낭비해 버린 게 뒤늦게 후회스러웠다.
"라한.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네, "
"응. 이제 정말 아껴 써야 돼. "
말을 마친 라한이 종이에 무언가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레테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이내 웃음을 머금고는 훈훈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 생각이 났다. 마구 어지럽혀져 있던 방과 그 한가운데 앉아있는 라한의 모습.
과거 필슨 백작가에 있을 때의 그 모습과 너무 흡사했다.
이미 십 년 이상 지났건만, 레테아에게는 바로 어제의 일처럼 뚜렷하게 기억되었다.
"후우, 끝났다. "
라한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걸터앉은 후, 두 시간이
지나서였다.
"오늘은 일찍 끝났네. "
"응.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공식을 미리 써놨었거든. 종이도 미리 만들어왔었고. "
"목적지가 어디야?"
"전에 그 집. 자! "
라한이 인챈트 스크롤을 하나씩 던졌다. 투바, 프라하, 카이렌, 레테아, 휴란트.
그리고 죽은 듯 눈치만 보고 있는 쿨샤크까지. 모두 여섯 개였다.
"라한아. 이게 뭐냐?"
"그걸 찢으면서 텔레포트라고 외치면 돼요. "
"텔레. 포트? 혹시 이게 마법 스크롤이냐?"
"예. "
레테아도 마법 스크롤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또, 왕궁 내에서 본 적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자신의 스크롤을 가져보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사용해 보는 것
자체도 처음이었다.
"라. 한아. "
"형. 너무 놀란 눈으로 보지 마요. 쑥스럽잖아요. 그리고 죽기 싫어서 이렇게 된
거니까 놀라워할 필요 없어요. "
"하하하 이거 참. 내 동생은 이렇게 성장했는데, 난 그동안 뭘 했는지. "
레테아가 씁쓸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은 아들 휴란트
살려보겠다고 대륙 오지에 숨어 농사만 지었다.
꿈, 미래, 복수. 이런 건 루이나 왕국을 떠나는 그 순간에 버렸다. 오직 휴란트를
살리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남겼을 뿐이다.
헌데, 라한은 아니었다. 스스로는 죽기 싫어서라고 하지만, 레테아에게는 범상치
않게 다가왔다. 대륙에서 사라진 연금술. 라한은 인챈트라 부르는 실전된 학문을
결국 익히고 돌아왔다.
놀라웠다. 아니, 경악스러웠다. 사라진 학문을 찾기 위해서 오지를 다녔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이런 복잡한 감정이 동생인 라한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반면, 자기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저, 아버지. 삼촌. 마법 스크롤이 뭐예요?"
"어? 어, 그게."
휴란트가 라한 일행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물음에 오히려 레테아가 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아들을 아낀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휴란트는 세상 물정모르는 애가 되었다.
다른 사람 다 아는 것도 모르는 어른. 말 그대로 철없는 어른이 휴란트였다. 이
모든 게 자신의 과잉보호가 만든 결과물이었다.
'내가.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독수리도 자기 새끼는 벼랑 끝으로 모는 법이거늘,
난 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웠구나, '
아들인 휴란트는 올해 나이 스물두 살이다. 너무 늦은 후회였다. 몇 년 만 일찍
깨달았더라도 그렇게 오냐오냐하며 키우진 않았을 터였다 그렇게 췄다면 휴란트도
어엿한 어른으로서 대접을 받았을 테고.
"이제 가죠. 시간 없어요. "
라한이 레테아와 휴란트의 대화를 끊었다. 레테아의 표정에서 몹시 후회스러워하는
기색을 발견한 탓이다. 저대로 뒀다가는 스스로를 너무 비관할 것 같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출발하죠. 텔레포트!"
찌직!
"저도 갑니다. 텔레포트!"
찌직!
투바를 시작으로 일행 모두가 공간 이동을 감행했다. 물론, 죽을상을 하고 있는
쿨샤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가 이동한 후, 카이렌이 자신의 집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지었다.
"에고, 정든 집인데. 정리도 못하고 가는구나, 나중에 정리해주마. 텔레포트! "
찌직!
카이렌을 끝으로 일행 모두가 모습을 감추었다. 텅 빈 카이렌의 집에 정적이
감돌았다.
스르르륵!
한참 정적이 감돌던 집에 묘한 이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투바가 소환했던 물
덩어리 변이었다.
텔레포트는 스크롤을 가진 사람들만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다. 고로 스크롤을
가지지 못한 물 덩어리 변은 이동에서 제외되었다.
철퍽! 철퍽!
혼자 남겨진 게 억울했는지 물 덩어리가 집 곳곳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그렇게 마구
광분을 토하던 물 덩어리. 곧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스르륵 스르륵! 첨벙!
한참 고민하던 물 덩어리 변이 생각을 정했는지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상태로
라한과 투바, 그리고 일행이 있는 서쪽으로 기어갔다. 땅을 서서히 적시면서
프리미아
엘퐁소 지바의 뮬라 상단의 본점.
상단주인 레드리안이 초조한 기색으로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어제 들려온 엘퐁소
지방 영주의 최후 통첩이 그 이유였다.
10 일 안에 귀공의 뮬라 상단을 엘퐁소 지방에서 철수시키기를 바란다.
그루일란드 엘퐁소 남작
정말 짧은 문구였다. 헌데, 그 짧은 문구가 레드리안에게는 충격을 안겨주기
충분했다.
누가 뭐래도 뮬라 상단의 본점은 엘퐁소 지방이다. 이 때문에 뮬라 상단이 행하는
많은 사업의 중심지도 이곳 엘퐁소 지방이었다. 헌데, 빠른 시일 안에 엘퐁소
지방을 떠나라니. 아무리 큰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막아야 했다. 10 일 안에
사업을 철수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말 떠나야 한다면? 사업의 반을 엘퐁소 지방 영주에게 헌납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나마 빠져 나가는 사업의 반조차도 상당히 큰 피해를 입겠지만.
어찌됐든 레드리안으로서는 엘퐁소 남작의 마음을 돌리거나 사업의 반 이상을
포기하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정녕 방법이 없는 건가?"
레드리안의 나지막한독백이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이에 회의실을 가득 메운 상단의
수뇌들의 표정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그들로서도 뽀족한 수가 없었음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허허허. "
똑!똑!
"상단주님. 엘리케트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라. "
엘리케트는 레드리안의 오른팔 같은 존재였다. 쿨샤크에게 있어서 데메크가 가지는
위치와 비슷한 셈이다.
어제 엘퐁소 남작의 최후통첩을 본 직후, 레드리안은 엘리케트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을 알아오라고 지시했었다. 아마, 이번 방문은
그 이유를 알려주기 위함이리라,
"상단주님을 뵙습니다. "
"그래. 엘리케트. 이 일의 발단이 대체 뭐던가?"
"그게 저."
레드리안의 물음에 엘리케트가 난감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상단주인 레드리안에게
하기 힘든 말인 듯했다. 하지만, 레드리안으로서는 반드시 원인을 알아내야 했다.
그래야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괜찮으니 말해보라. "
"아무래도 상단주님의 예상대로 쿨샤크 도련님이 발단인 듯합니다. "
"흠, 분명 그 일은 내가 직접 사죄를 드렸거늘. 어찌 일이 이렇게 커진단 말인가?"
레드리안도 쿨샤크와 프리지아 엘퐁소 사이의 불미스러운 일은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엄청난 금화와 골동품을 가지고 엘퐁소 남작에게 사과까지 했었다.
레드리안은 그렇게 일이 마무리 된 줄 알았다.
그때 엘퐁소 남작도 없던 일로 하자고 했고, 남작 영애인 프리지아도 용서한다는 듯
말했었다. 헌데, 어제 갑자기 최후통첩이 날아온 것이다.
"상단주님. "
"말하라. "
"그게 저 아무래도 이번 일은 엘퐁소 남작 가 내부의 일도 영향을 미친 듯합니다. "
"엘퐁소 남작 가 내부의 일?"
레드리안은 한 동안 쿨샤크의 실종 때문에 주변 정보에 소홀했다. 중앙 상급 귀족인
샤르비엘 후작이 방문하고 특급 마법 무구인 스케일러 링을 찾느라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 때문에 다른 곳에 신경 쓸 틈이 없었음이다.
"예. 프리지아 엘퐁소 남작 영애가 실종됐습니다. "
"뭐?"
엘리케트의 말에 레드리안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정보였다.
남작 영애가 실종이라니. 정보가 중요한 상단의 주인인 자신이 어떻게 이런 큰
정보를 놓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 오래된 얘기는 아닙니다. "
"언제지? 대체 언제 실종되었지?"
"10 일 쯤 된 것 같습니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갑작스럽게 실종되어서.
엘퐁소 남작께서도 무척 심란해하시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그 일의
원흉으로 저희 상단을 의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가 뭐 얻을 게 있다고 남작 영애를 납치한단 말인가. "
막상 화를 내기는 했지만, 레드리안도 정황상 가능한 얘기라고 생각했다 쿨샤크까지
실종됐으니 말이다.
쿨샤크는 프리지아 엘퐁소를 끔찍하게 따라다녔다. 물론, 귀족이 되고 싶은 욕심의
발로였다. 하지만 겉으로는 프리지아를 엄청나게 사랑해서 쫓아다닌 걸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두 집안의 정식 결혼승낙과 곧이어 벌어진 정격적인 파혼. 쿨샤크가
프리지아를 데리고 도망쳤다고 해도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다.
"상단주님. 고정하십시오. 이 일은 화를 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쿨샤크
도련님을 찾아서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
"상단주님 객방에 라한님과 그 일행이 들었습니다. "
엘리케트의 얘기가 막 끝났을 때,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라한과 그 일행이
객방에 도착한 듯했다.
"알겠다. 흠, 이번 회의는 이걸로 마친다. 저녁에 회의를 속개할 테니 그때까지
모이도록. 이상. "
말을 마친 레드리안이 회의실을 나왔다. 그 길로 라한이 머물고 있는 객방으로
향했다.
그래도 쿨샤크를 찾고 있는 사람 중에 한 명이 라한이다. 혹, 그가 쿨샤크를 데리고
왔거나 그의 거처를 찾았다면,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물론, 라한이 쿨샤크를 곱게 놓아줄지는 의문이었다. 혹은 그의 거처를 알려줄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약간의 단서라도 있다면 빌어서라도 정보를 알아내야 했다.
그게 상단을 살리고 아들인 쿨샤크도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다.
뮬라 상단의 객방에 돌아온 라한은 먼저 샤르비엘 후작의 방문을 받았다.
객방부근에 세작을 심어뒀는지 레드리안보다 먼저 알고 찾아왔다.
"빠르군. "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래. 어떻게 됐는가?"
"보면 알 텐데. 음."
스팟!
라한이 말을 길게 늘였을 때, 객방에 빛이 터져 나왔다. 뒤늦게 텔레포트한
카이렌의 이동이었다.
"아, 미안. 미안. 좀 늦었지?"
"저, 저."
샤르비엘 후작이 말을 더듬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카이렌을 한눈에 알아본
모양이다 하지만, 카이렌은 샤르비엘 후작을 알아보지 못했다. 서로 싸웠으면서도
별 관심을 두지 않은 상대라 기억하지 못한듯했다.
"라한. 이 아저씨 뭐야?"
"너하고 싸웠다고 주장하는 아저씨거든. 잘 봐. 혹시 이렇게 생긴 아저씨하고 싸운
적 없어?"
라한의 말에 카이렌이 샤르비엘 후작을 다시 한번 살폈다. 자세히 보자 본
사람같기도 했다. 헌데, 당최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건 샤르비엘
후작이 정말 별 볼일 없는 상대였다는 뜻과 같았다.
"본 것 같기는 하군. 근데 어디서 봤더라. 이봐! 인간. 너 나 알아?"
"너, 너."
샤르비엘은 계속 말을 더듬기만 하고 제대로 대꾸를 못했다. 충격이 너무 큰
탓이다. 하긴, 혼자서 자신을 포함한 부하 기사들 모두를 가지고 논 실력자였으니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 아저씨 풍 있나? 상태가 왜 이래?"
"훗, 이봐, 샤르비엘 후작!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은데? 다음에 보자고. "
"그, 그. 그러지. "
어색하게 대답한 샤르비엘 후작이 객방을 나섰다. 들어올 때의 느긋하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허둥대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어떻게 싸웠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새삼 카이렌의 사악함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긴. 저 자식은 나하고 드래곤하고 싸울 때도 구경만 할 정도로 치밀한 놈이니까,
'
카이렌은 평소 행동과 다르게 몹시 신중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항상 덜렁거리는
모습에 혹해서 그를 과소평가한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어쩌면 평소의 그런
모습조차도 모두 설정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라한. 언제 출발할 거야? 수아나 왕국까지 가려면 못해도 보름은 걸리는
거리인데. "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가지 뭐. "
"그럴까?"
짧게 되물은 투바가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그 모습을 본 프라하도 그 옆에 나란히
누웠다. 요즘 들어서 유독 가까워진 둘 사이에 라한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울리기 힘들어 보이더니. 용케 잘 다니네. '
둘의 사이가 가까워진 건 이방인이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한 명은 물질계의 이방인,
한 명은 인간 사회의 이방인이라는 공통점. 그 때문에 서로에게 약간씩의 동질감을
가졌고, 그런 생각들이 서로에게 호감을 심어준 것이다.
'뭐, 다행이지. '
똑! 똑!
"들어와! "
밖에서 들리는 노크소리에 라한이 짧게 대꾸했다. 그러면서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쿨샤크를 슬쩍 바라봤다. 이번 방문자가 그의 아버지인 레드리안임을 짐작한 탓이다

"오랜만일세. 그래 성과는. 쿨샤크?"


"아. 버지, "
레드리안이 구석에 있던 쿨샤크를 한 번에 알아챘다. 방 안이 밝았으니 발견하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쿨샤크의 모습을 본 레드리안이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 행동에 라한이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잠깐. 이 녀석은 내 몫이야. "
"그게 무슨 말인가? 저 아이는 내 아들일세. 어찌 애비가 되어서 아들도 못 본다는
말인가?"
"그거야 애가 제대로 컸을 때 얘기지. 저놈은 한참 뜯어 고쳐야 인간 구실할 것
같거든. 내가 인간 제대로 한 번 만들어보지. "
"말. 말도 안 되는 소리일세, "
라한의 대꾸에 레드리안이 기가 막힌다는 듯 황당해했다. 그는 아들의 인성을
고치는 일도, 막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모두 아버지인 자신의 몫이라 생각했다.
"물론 당신 가문이 나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면 나도 이렇게 나오지는 않겠지.
"
"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인가? 혹, 쿨샤크가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
있을 때 저지른 일 가지고 이러는 건가? 그건 이미 오래전 일이 아닌가? 그때 일로
이러는 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쿨샤크도 문제지만 당신한테도 앙금이 많거든. "
"나한테? 내가 자네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레드리안의 반문에 라한이 목을 좌우로 꺾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대꾸했다.
"전에 굴레를 벗은 그 자식들 있는 곳으로 갈 때, 나한테 그런 얘기를 했었지. 절대
피해주지 않겠다고. 정 못 믿겠으면 자신을 제압하라고. 맞나?"
"그건."
그제야 레드리안도 라한의 말을 이해했다. 자신은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지만, 그때 라한은 엄청난 부상을 입었다. 물론, 과정은 라한 스스로가
무리한 텔레포트를 해서였지만, 그렇게 하도록 유도한 건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분명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셈이다.
"이제 할 말 없지?"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내가 저놈 데리고 간다. 단, 저놈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지. 운 좋으면 인간 제대로 만들어서 나타날 수도 있고. 어때? 괜찮은
거래 아닌가?"
할 말은 없었지만 인정할 수는 없었다. 쿨샤크의 안위도 문제였지만, 지금 엘퐁소
남작의 오해를 풀 유일한 수단이 쿨샤크라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쿨샤크 자체에 대한 건 라한을 믿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굴레를 벗을 정도의
존재가 거짓부렁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에서 였다. 하지만, 쿨샤크가 사라졌을
때, 엘퐁소 남작의 분노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그가 있어야 프리지아 엘퐁소의
실종과 쿨샤크의 실종이 무관함을 피력할 수 있는 것이다.
"자네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겠지. "
"아, 아버지 "
"하지만, 지금은 안 되네. 뮬라상단이 쾌 큰 위기를 겪고 있어서 정말 지금은
곤란하네. 사정을 좀 봐주면 안 되겠는가?"
"이유가 뭐지?"
"그건. 휴, 사실은."
레드리안이 라한에게 뮬라 상단의 사정을 설명해줬다. 그러면서 엘퐁소 남작의
분노를 약간 부풀리는 건 일종의 부록이었다.
그렇게 한참 듣던 라한이 미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이제 우리 사정을 좀 봐줄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엘퐁소 남작만 어떻게 해주면 된다는 말이지?"
"그렇네. "
"그럼 엘퐁소 남작은 내가 만나보지. 안 그래도 말 잘 듣는 귀족이 하나
필요했거든. 샤르비엘 후작은 말 잘 듣는 귀족은 아니라서 말이야. "
라한의 말에 뒤에서 멀쩡하게 듣고 있던 투바와 프라하가 몸을 일으켰다. 라한의
말에서 앞으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을 예감 한듯했다.
하지만 라한 곁에 있던 레테아는 정반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라한이 귀족을 너무
쉽게 여긴다고 생각한 탓이다. 아직 라한과 일행의 실력을 확실히 모르는 레테아.
그들은 귀족과 그들의 사병이 라한 일행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라한의
말을 무모하다고 여겼다.
"정말 해결해줄 수 있는가?"
"나만 믿으라니까. 아!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좀 두둑하게 준비해줘. 알았지?"
"그건 알아서 하겠네. 부탁하네. "
레드리안이 약간은 밝아진 얼굴로 객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쿨샤크의 얼굴이
완벽하게 찌그러졌다. 아버지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쯧쯧. 저놈은 아직 철들려면 멀었다니까 뭐, 내가 인간 하나 만드는 셈 치지 뭐.
아마 몇 년 후에는 오늘 일을 고마워하게 될 거야. 크크크. '
레드리안이 나가자 라한은 레테아에게 훈계성 교육을 들어야 했다. 귀족이 가지는
힘과 그 사병의 강함에 대한교육이었다. 동생인 라한이 강해진 건 인정하지만,
아직도 그에게는 귀족이 더 위험한 존재였다.
드래곤 로드 로테마이어스의 레어 안.
치료에 실패한 크라이드리안과 로테마이어스가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로드님께서 시키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
"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
어두운 표정을 지은 로테마이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쉽게 내릴 수 없는
대답이라서인지 도무지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고룡 베르타라스의 말대로라면 화이트 일족 혹은 블루 일족의 고룡에게
크라이드리안을 부탁해야만 치료가 가능했다. 하지만, 로드의 입장에서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또, 현재 로드인 자신을 반대하는
드래곤들이 고룡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안 들었다.
"크라이드리안. "
"예. 로드님. "
"혹시 친한 고룡이 있느냐? 우리 레드 일족이 아닌 블루나 화이트 일족 중에서
고룡의 도움을 받아야겠는데."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크라이드리안이 뭔가 말을 하려는 듯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했다. 그 모습에 로테마이어스가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그를 재촉했다.
"괜찮으니 말해보거라. "
"저, 그러니까."
"괜찮다. "
"레이시아나님은 어떻겠습니까?"
레이시아나라면 라한의 부탁으로 엘베로를 조사하고 있는 로이나를 의미한다.
크라이드리안도 본래 로테마이어스와 로이나가 친했다는 걸 알았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크라이드리안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고민에 잠겼다. 그렇게 한참 생각하던
로테마이어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로이나. 휴, 그래 알았다. 찾아봐야겠구나. "
"감사합니다, 로드님. "
크라이드리안이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가식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였다.
"지금 로이나가."
스으으윽!
로이나의 현 위치에 대한 얘기를 하려할 때, 레어의 한쪽 구석에 박힌 마나석에
불이 들어왔다. 레어의 주변에 쳐둔 알람 마법에 누군가가 걸렸다는 의미였다.
"응?"
"로드님. 누가 온 듯합니다. "
"음, 프리미아가 온 모양이구나. "
조용히 읊조린 로테마이어스가 레어의 입구를 바라봤다. 가디언의 수장으로 둔
오크가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지금 도착한 존재를 알리러 온
것이리라,
짤랑!
"로드님. 프리미아님이 왔습니다. "
"들라하라. "
로테마이어스의 말처럼 프리미아였다. 레테아를 찾아서 카이렌에게 데려다주고 온
시간으로만 보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프리미아는 카이렌과의 짧은 만남 이후로 뭔가 모한 기분을 가졌다. 굴레를 벗은
존재가 세상을 파멸시킬 것이라는 로드의 말. 이번 일에 참가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에서부터 혼란을 느낀 탓이다.
"로드님을 뵙습니다. "
"그래. 늦었구나. 무슨 일이 있었느냐?"
"생각할 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프리미아의 대답에서 로테마이어스가 의구심을 느꼈다. 지금까지 꽤 많이
만났었지만, 이런 식의 대답을 해 온 적이 없었음이다.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되겠느냐?"
"저, 로드님. 아무래도 뭔가 이상합니다. "
"뭐가 말이냐?"
"카이렌이라는 굴레를 벗은 자를 만났었습니다. "
"흠, 류카라한은 못 만난 모양이군. "
로테마이어스는 아직도 라한을 류카라한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단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는 무지함이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얼핏 보기라도 했다면 이런 오해는
일찌감치 사라졌을 터였다.
"예. 제가 갔을 때는 카이렌만 있었습니다. 헌데."
"헌데?"
프리마아가 말을 끊으며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로드의 의견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말이라서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프리미아의 그런 모습에 로테마이어스가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말해도 된다는,
편하게 말해보라는 그런 의미였다.
"괜찮으니 말해 보거라. 너의 의견이 타당하다면 수긍할 준비가 되어 있다. "
"감사합니다. 로드님. 저, 아무래도 저희가 굴레를 벗은 존재들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잘못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말이냐?"
편히 앉아 있던 로테마이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좌우를 서성거렸다. 자신도
어렴풋이 느 꼈던 그 무언가를 프리미아에게서 듣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로테마이어스도 굴레를 벗은 존재에 대해 오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해서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 뿐. 정말 타당한 생각이라면
지금부터라도 해오던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그럴 마음의 준비도 이미 되어 있었고
말이다.
"카이렌이라는 엘프에게서는 아무런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를 약간
경계하는 모습은 보였지만, 원천적으로 적대감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카이렌이라는 엘프는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 저를 속일 수 있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진실로 보였습니다. "
"진실이라. 적대감이라."
로테마이어스도 그제야 지금까지 막연히 가졌던 불안함이 무언지 깨달았다. 아무런
반항조차 없이 죽음을 받아들였던 드워프와 엘프. 그들의 죽음은 드래곤에 의해
내려졌음에도 너무 담담했다. 어떤 면에서는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 죽음이었다.
그런 드워프와 엘프들이 대륙을 어지럽히고 물질계를 파멸시킨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누군가와 싸우는 그 자체를 싫어하는 그들이 어떻게 물질계를 파멸시키겠는가.
몇몇의 파괴적인 행위로 전체를 오해했음을 인정해야 할듯했다.
'그렇구나. 내가. 내가 그들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헌데 이미 늦어 버렸으니.'
실제 굴레를 벗은 인간들은 대체로 파괴적이었다. 과거의 류카라한이 그러했고,
제이슨이 또한 그러했다. 아니, 지금 굴레를 벗은 인간들은 모두 그런 시기를
거쳤다. 그리고 아직도 꽤 많은 굴레를 벗은 인간들은 그런 일면을 완벽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나 드워프는 달랐다. 대대로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파괴하려는 것과는
동떨어진 문화를 가진 그들 이 때문에 그들은 굴레를 벗었음에도 누군가의 위에
서려 한 적이 없었다. 문화 자체가 다른 탓이다.
"프리미아. 이미 너무 멀리까지 와 버렸구나. 인간들이 저질렀던 나쁜 행동 때문에
모든 종족을 나쁘게 봐버리다니. 후우, 로드인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저.로드님 . "
"말하거라. "
"인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할 듯합니다. "
"인간은 거론할 여지도 없다. 그들의 파괴적인 행위는 과거의 기록만으로도
충분하다. 라이칸 역시 마찬가지고. 그들은 본성이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나쁜
놈들이다. 갱생의 여지조차 없는 놈들이지. "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에서 의지가 엿보였다. 다른 종족은 몰라도 인간과
라이칸드로프만큼은 용납이 안 되는듯했다. 실제로 인간과 라이칸드로프의 탐욕과
파괴 본능이 엄청났으니 그러는 게 당연했다.
"로드님. 인간들이 탐욕스럽고 파괴적이라고는 하지만, 모두가 그렇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
"그럼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네 생각을 듣고 싶다 "
로테마이어스는 어린 드래곤 중에서 단 두 명을 크게 신임했다. 크라이드리안과
프리미아였다. 물론, 다른 드래곤에 비해 크게 차별 대우를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같은 일이라면 그들에게는 좀더 쉽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일을 골라서 줄
뿐이었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프리미아가 하는 일을 그냥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무시하기
싫었다. 평소에 가졌던 호감이 이런 식으로 작용했음이다.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
"시간?"
"예. 인간을 다시 겪고 싶습니다. 이젠 인간들 모두가 아니라 굴레를 벗은
인간들만을 겪어보고 싶습니다. 정말 그들 모두가 파괴적인지, 혹은 저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하고 싶습니다. 혹, 저희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면,
죽여야 할 놈들과 죽이지 않아도 될 놈들을 가려내겠습니다. 부디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
프리미아의 폭탄선언에 로테마이어스가 할 말을 잃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로드인
로테마이어스에게 정면으로 반하는 의견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자 프리미아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로드가 되었지만 고룡들과 반목하고 있는 로드 로테마이어스. 그의 입지를
조금이라도 크게 만들기 위해서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했다. 헌데, 아무 생각 없이
모두를 전멸시켰다가는드래곤 일생에 크나큰 오점을 남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서 행동할 필요성이 있었다.
"후우, 알겠다. 일단 네 의견을 수용하겠다. "
"감사합니 다. "
"네게 큰 임무를 맡기겠다. 류카라한을 비롯한 굴레를 벗은 인간 모두에 대해
조사해라. 더불어 생존해 있는 굴레를 벗은 라이칸과 카이렌에 대해서도 함께
조사해라.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까지 모두. "
"알겠습니다, 로드님. "
프리미아가 고개를 깊이 숙이고 레어를 벗어났다. 그녀가 나가자 오래전부터 멍하게
서 있던 크라이드리안이 머리를 긁적였다. 소외된 채로 대화가 오갔던 게 어색했던
모양이다.
"크라이드리안. "
"예, 로드님. "
"프리미아의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느냐?"
"그게 저. 참 똑똑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후후후, 녀석, 그래. 프리미아는 생각이 깊은 드래곤이다. 남들이 한 번 생각할
때, 두 번 세 번 심사숙고하는 성격이지. 너 역시 생각이 깊지만 프리미아와는 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넌 뭐든지 조심해서 생각하는 편이고 프리미아는 말 그대로
신중하다고 봐야겠지. 내게도 그런 면이 부족하기도 하고. "
말보다 실천을, 생각보다 행동을 우선하는 게 로테마이어스의 성격이었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자신의 그런 성격을 잘 알았다. 이 때문에 지금 고룡과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그의 생각으로는 굴레를 벗은 존재 모두를 죽이는 게
최선이었기에 고룡들과 뜻을 달리한 거였다.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로드님 답지 않습니다 "
"나답다라. 글쎄다. 난 나다운 게 뭔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네가 류카라한에게
부상을 입은 사건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나였다면, 적을 사로잡은 이가
류카라한이 아닌 나였다면 널 살려두지 않았을 게다. 미래에 적이 될 존재를
살려두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널 살려서 내게 보냈다.
비록 드래곤하트에 모종의 장치를 하긴 했지만, 죽이지 않은 건 분명하다. "
"그게 무슨."
크라이드리안은 로테마이어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부상으로 뭔가 심경에 변화가 온 건 분명해보였다. 그게 어떤 방향인지 감이 잡히지
않을 뿐이었다.
"류카라한은 레테아라는 인간을 위해 널 살려 보냈다. 하지만, 그게 정말 한 명의
인간을 위해서일까? 후우,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게 뭐가 췄든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건 세상의 파멸을 그냥 두지 않을
사람이라는 말도 된다고 봐야 한다. 세상이 파괴되면 그가 아끼는 모든 것이 사라질
테니까. "
"아, 그렇군요. "
그제야 크라이드리안도 로테마이어스의 심경 변화를 눈치 챘다. 로테마이어스는
인간에 대해, 굴레를 벗은 존재들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은 잔인하다. 라이칸드로프는 살육을 즐긴다는 가장 기본 되는 명제부터
의심하고 있었음이다.
"프리미아가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지켜봐야겠다. 피를 부르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길 바라야겠구나. 후후후. "
"그렇군요. "
"우린 로이나에게 가봐야겠다. 그 일과는 별개로 네 치료는 해야하지 않겠느냐,
근데, 지금 로이나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겠군,"
"나가자, 오랜만에 유희를 즐겨보자꾸나. 프리미아가 올 때까지 로이나를
찾으면서."
로테마이어스가 크라이드리안의 손을 잡고 레어를 벗어났다. 지금 순간만큼은
드래곤에게서 볼 수 없는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드래곤은 본질적으로 사회를 구성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최고라는 오만함이 생존의
기본바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게 정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도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하는 생명체이다.
다만, 그 모든 것의 판단의 기준이 자신이라는 게 다른 생명체들과 다를 뿐이다.
뮬라상단의 본점 정원에서 카이렌이 좌우를 서성거렸다. 얼굴표정으로는 뭔가 큰
고민거리가 있는 듯했다. 이에 옆에서 그를 바라보던 투바가 슬쩍 끼어들었다.
"카이렌. 왜 그래? 라한이 덮치기라도 한 거야?"
"아니. "
평소 같았으면 발끈하고 나을 카이렌이 담담한 어투로 대꾸했다. 그 모습에 투바가
오히려 더 큰 의혹을 느꼈다.
물질계 생명체 치고는 상당히 긴 삶을 살았던 카이렌. 그 때문에 평소에는
감정기복이 거의 없는 존재가 카이렌이었다. 헌데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의아하기도 했으리라.
"흠, 흠. 대체 무슨 일이야? 말해봐. 물질계 최고 해결사인 나 투바님이 모든 걸
해결해줄 테니까. "
"아니야. "
투바의 연이은 재촉에도 카이렌은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꽤나 심각한 고민인
듯했다.
최근 며칠 사이에 투바와 카이렌은 급속히 친해졌다. 그 두 명이 가진 외모적인
뛰어남이 동질감을 만들어낸 탓이다. 동병상련이라던가? 오히려 한때나마 투바와
친했던 프라하가 소외될 정도였다.
"에휴,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섭섭하군. 그래도 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사실은."
투바의 말에 카이렌의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동질감을 느꼈던 유일한 친구를 잃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말해봐. "
"난 사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어. 다른 엘프와는 다르게 검을 좋아했다는 게
이유였지. 마을에서 이단아로 통했거든. 그래서 결국은 마을을 나올 수밖에 없었어.
뭐, 내 선택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 후회하지는 않아. 하지만, 아직
정규교육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어. "
"정규 교육이라."
"라한은 정규 교육을 받았더라고. 그게 너무 부러워. 거기다가 라한은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하더군. 나도, 정말 나도 열심히 하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잘할 수 있는데, 너무 늦은 걸까?"
어찌 보면 웃기는 얘기였다. 교육을 받지 못해서 서글프다니.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그 자체를 고문으로 여기는 아이들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을 말이었다.
하지만, 카이렌에게는 정말 심각한 상황이었다. 평생 배우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한을 품고 살아온 탓이다.
"배우고 싶어? 대체 뭘 배우고 싶은 거야?"
"뭐든 상관없어. 제대로 배우고 싶어.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배우고 싶어. 선생이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학생이 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으니까. "
투바에게는 카이렌의 말이 먼 나라 얘기처럼 들렸다. 자신도 교육 받기 싫어서
수없이 도망쳤지 않은가, 자신이 너무 배부른 투정을 부렸음을 인정해야 할 듯했다.

'쳇. 그래 난 공부 싫어 한다 젠장. '


"음, 그런 아픔이 있었군. "
생각과는 다르게 겉으로는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아이라고 인식되는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난 정말. 배우고 싶어. "
"그럼 있잖아. 레테아에게 배워보는 게 어때?"
"레테아? 라한의 형?"
"응. 듣기로는 레테아가 기사 단장이었다고 하더라고. 그에게 검을 배워봐. "
투바의 말에 카이렌이 황당한 듯 입을 떡 벌렸다. 자신이 레테아보다 한참 윗줄의
검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상위 실력자가, 그것도 한참 상위에 있는 자신이 한참
아래의 실력을 가진 레테아에 게 검을 배우다니 남들이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가락질할 게 분명했다.
"이봐. 투바. 내가 레테아보다 강하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야?"
"어허, 이 엘프 참. 검술을 늘이는 게 중요한건 아니잖아. 넌 누군가에게 제대로
배우고 싶었던 거 아냐? 도움이 되고 안 되고가 뭐가 중요해?"
"그런가?"
투바의 설득에 카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남의 눈을
무시하도록 한 듯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
그렇게 거의 결정이 날 순간에 그들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한이었다.
라한은 그들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 아마 형과 관련된 얘기로 끝나지
않았다면, 그들의 대화에 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 언제 온 거야?"
"아까왔다. 모습을 감추는 건 카이렌이 한수 위지만, 뒤에 숨어서 기척만 감추는 건
내가 한 수 위거든. "
"그런가?"
라한의 대답에 카이렌과 투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라한의 뛰어난 기운
컨트롤능력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척에 있는 자신들마저 속일 수 있다는 건
지금 처음 알았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친구라는 생각에 그러려니 했다.
만약 라한이 친구가 아닌 적이었다면 어떻게든 후환을 없애는데 주력했을 터였다.
"근데 라한, 내 생각이 어때서 그러는 거야? 레테아에게 검을 배운다. 내가 보기엔
멋진 생각 같은데?"
"우리 형도 카이렌의 검술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고. 너희들에
비해서는 한참 부족하지만, 형의 검 실력도 보통은 아니거든. "
"그게 뭐?"
"그런 형이 카이렌에게 검을 가르치려 들겠어?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봐. 너
카이렌! 내가 마법 가르쳐달라면 가르쳐 줄래?"
라한의 대꾸에 카이렌과 투바가 할 말이 궁해졌다. 카이렌도 마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때 귀동냥으로 들은 주문만 해도 상당했으니 말이다. 다만,
사용해본 적이 단한 번도 없었기에 못쓰는 것 뿐. 다시 연습한다면 하위 서클
정도까지는 빠른 시일 안에 깨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라한에게 마법을 가르친다? 황당한 말이었다. 라한은 비록 비클래스에
불과하지만 7 서클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는 대마법사의 존재. 그런 라한에게 마법의
기초만 알고 있는 자신이 어떻게 마법을 가르치겠는가? 황금을 집채만큼 가져다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그렇군. 휴, 난 그럼 어떻게 교육을 받지?"
"반대로 해봐, "
"반대로?"
"그래. 굳이 정규교육을 받는 것에 만국한 짓지 말고. 정규교육을 가르치는 쪽으로
생각해보라고. 학생과 선생의 신분이 바꿔기는 하지만, 서로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될 거야. 그것 역시 꽤 자랑스럽지 않을까? 정규 교육을 가르쳐봤다는 것이니까.
어때?"
라한의 말에 카이렌이 생각에 잠겼다. 가끔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고 얼굴이
어두워지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고민하던 카이렌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레테아에게 검을 가르치라는 말이군. 후후후. 뭐, 날 이용해먹으려는 네 생각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 정도는 용서해준다. "
"레테아가 아니라 휴란트를 얘기하는 거야. 그놈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려. 철이
없는 거지. 네가 하나씩 가르친다면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
"응. 까짓것 가르치지 뭐. 단, 오래 가르칠 수는 없어 지금부터 딱 두 달. 그때까지
내가 아는 것. 혹은 내가 검을 익히면서 깨달은 것들을 중심으로 가르쳐줄게. "
카이렌의 대답에 라한의 얼굴이 밝게 변했다. 휴란트 문제로 꽤 오랫동안
고민했음이다.
라한은 휴란트의 기본 교육을 다시 시켜야함을 깨달았다 또, 가능하면 검이나 마법
같은 호신용 기술도 함께.
하지만, 자신이나 투바가가르 칠 수는 없었다. 투바는 마족이었고, 자신은 악마의
낙인을 찍은 인간. 자칫 정체가 드러났다가는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라이칸드로프인 프라하에게 맡기기도 애매했다. 체격조건 때문에 휴란트가
도끼술을 습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따져 봐도 카이렌이 적임자였다.
헌데, 그를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검사가 자신의 검술을 얼마나 애지중지 하는지
알기에 부탁하는 게 너무 꺼려졌다. 그런 상황에서 흔쾌히 승낙하고 나왔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 시작할 거야?"
"미룰 필요 없겠지. 나도 선생이라는 거 한 번 되어보자고. "
"고마워. "
"고맙긴. 나도 얻는 게 있는데. "
그렇게 해서 카이렌이 휴란트의 스승이 되었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 가르치는
한시적인 스승이라고 하지만, 라한에게는 그것만도 충분히 고마웠다. 카이렌 역시
자신이 정규 교육의 한축을 담당한 다는 게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로테마이어스의 레어를 나온 프리미아. 그녀가 처음 방문한곳 엘퐁소 지방이었다.
얼마 전 인간에 대해 조사할 때 유희를 즐겼던 곳이기에 이곳부터 방문한 것이다.
"이제 어쩌지? 집을 먼저 가 볼까? 아니면 정보 길드?"
프리미아가 엘퐁소 지방의 도심 한 중간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변에서 어떤
걸 찾으려는 게 아닌 고민할 때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음, 어디가 좋을까? 일단. 응?"
뭔가 결정을 내리려고 할 때, 전방에서 친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드래곤이
분명했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일족인 블루 일족이었다.
"누구지? 헉! "
프리미아가 느꼈던 일족에게서 엄청난 기세가 풍겨져 나왔다. 드래곤들끼리 유희
중에 만났을 때 서열을 알리기 위한 기세였다.
프리미아가 느쪘던 기운 정도라면 분명히 고룡이었다. 그것도 블루 일족의
최고령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강한 기운. 이 정도라면 레이시아나밖에
없었다.
꾸벅!
프리미아가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바라본 채로 고개를 숙였다. 고룡에 대한
예우였다. 그렇게 한참 지나자 라한의 부탁으로 엘베로를 조사하고 있던 로이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레이시아나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들어라.
로이나는 블루 일족 중에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고룡이다. 하지만, 최고령 블루
드래곤은 조만간 마나로 돌아갈 나이였다. 유희를 즐길 수 있는 드래곤 중에서는
로이나가 최고령인 셈이다.
-레이시아나님. 이곳에서 유희를 즐기고 계셨습니까?
-지금은 로이나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자주 쓰던 이름이니 어색하지는 않을 게다
"알겠습니다, 로이나님. "
로이나의 이름을 들은 프리미아가 메시지 마법이 아닌 육성으로 대답해왔다. 이제는
자신도 유희의 하나로 로이나를 대하겠다는 의미였다. 로이나가 유희중인 이름을
알렸다는 건 서로 유희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지내자는 뜻이다. 프리미아도 그
의견에 동조했기에 유희 때 사용하는 이름을 불렀다고 볼 수 있다
"그래. 이름이 뭐지?"
"지금은 프리지아라는 미름을 쓸까 합니다. "
"프리지아? 음, 엘퐁소 남작의 실종된 딸 이름이 프리지아라고 하던데. 그게
너였나?"
"예, 로이나님. "
블루 드래곤 프리미아. 그는 한 때 쿨샤크의 연인이었던 프리지아 엘퐁소였다.
물론, 쿨샤크에게 어떤 감정이 있어서 연인으로 지냈던 건 아니었다. 유희의
일환으로 함께 지냈을 뿐이다.
카류나와 쿨샤크의 관계를 목격했을 때,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 행동 역시 모두
연기에 불과했다.
"실종됐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유희를 그만둘까 했는데, 어쩌다보니 다시 해야 할 것 같아서요. "
"재미있는 유희였나 보군. "
"호호호. 지금은 이전에 가졌던 신분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신분이 필요해서 다시 온 것뿐입니다. "
프리지아 엘퐁소. 라한이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뭔가 특이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괜히 아는 척해서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무시하고 있었다. 또,
당시 자신에게는 쿨샤크라는 골치 아픈 상대가 있었기에 의도적으로 무시한 감도
없지 않았다.
"근데 만날 사람이라? 유희를 그만뒀다가 다시 할 정도로 신경 쓰이는 인물인가?"
"혹시 크라이드리안을 아십니까?"
"음, 레드 일족의 그 녀석 말인가? 그 녀석이 맞는다면 알고 있지. 로테마이어스가
유독 아꼈던 녀석이니까. "
"맞습니다. 로이나님이 저를 아꼈던 것만큼 로드님은 크라이드리안을 아꼈었죠. "
프리미아가 로이나를 그윽하게 바라봤다. 고마워하는 감정을 눈에 담은 모습이었다.
프리미아의 직설적인 눈빛에 로이나가 피식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신도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근데 너의 유희와 크라이드리안이 무슨 관계지?"
"제가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크라이드리안을 꺾은 인간이거든요. 그와 함께 다니는
엘프도 다시 보고 싶고요. 아주 흥미로운 존재였거든요. "
프리미아의 말에 로이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인 크라이드리안을 꺾은
인간의 존재. 그 하나만으로도 로이나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크라이드리안이. 인간에게 졌나?"
"예. 듣기로는 류카라한이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와 함께 있는 엘프는
카이렌이라고. 아시죠? 그림자 검사라고 불렸던 그 카이렌이요. "
로이나의 얼굴에 황당함에 젖었다.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카이렌과 류카라한의 동행? 처음 듣는 얘기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류카라한과
카이렌은 어떤 연결의 끈도 없었다. 거기다 자신이 류카라한을 떠나온 것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그들이 어떤 경로로 동행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류한이 카이렌과 함께 다니고 있어?"
"로드님은 그렇게 말씀 하시더라구요. 전 류카라한이라는 인간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
프리미아의 대답에 로이나가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진행되면 될수록 로이나의
얼굴은 점점 어둡게 변했다.
류카라한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라한도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가 더 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둘 모두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헌데, 류카라한은 기존에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 카이렌까지 함께 일행이 되었다. 이
말은 라한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는 걸 의미했다. 세력의 약세는 혹시
있을지 모를 충돌 때 엄청난 약점으로 드러날 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라한의 앞으로의 행보가 걱정스럽게만 다가왔다.
'라한. 상대 일행은 점점 강해지는데 어쩌려고. '
"프리미아. "
"예, 로이나님, "
"카이렌의 실력이 어느 정도지?"
"그게 잘. 로이나님도 아시다시피 엘프인 카이렌은 실력을 설명하기 애매하잖아요.
"
카이렌의 특기는 검술과 은신술이다. 이 중에 검술은 수준을 설명하기 편하지만,
은신술은 아니었다. 대륙전체를 통틀어서, 아니 역사를 모두 따져 봐도 카이렌만큼
뛰어난 은신술을 가진 존재는 없었다.
최소 겉으로 드러난 존재 중에는 카이렌이 단연 최고였다. 그런 존재이기에
누군가와의 싸움에서 승자를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특히, 라한처럼 특이한
방식으로 실력을 키운 사람이라면 더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
'누가 이길까?'
로이나의 관심사는 오직 여기에 있었다. 지금 라한의 실력이라면 다른 굴레를 벗은
존재보다는 한 보 정도 위에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카이렌이라면?
'확인해 봐야겠어. '
"프리미아 "
예, 로이나님. "
"나하고 어디 좀 가자. "
"예?"
"만날 사람이 있어. 일단만나보고 네가 본 카이렌과 이번에 만날 사람의 실력을
비교해줘. 최근에 만났던 네가 비교하는 게 가장 나을 것 같다. "
로이나의 말에 프리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약간의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카이렌과 비교되는 존재. 로이나가 한 말이니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누가 있어 카이렌과 비교될 수 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예. 제 일은 그렇게 급한 게 아니니까 만나고 가도 무방할 거예요. 근데, 이번에
로이나님이 소개시켜줘서 보고 느낀 건 당연히 비밀이겠죠?"
"두말하면 잔소리지. 가자. "
로이나와 프리미아는 이런 사이였다. 엄청난 나이 차이에도 어느 정도의 간단한
농담은 나눌 수 있는 사이. 그러면서도 서로에 대한 사적인 침해는 하지 않는
사이였다.
물론, 이 모든 관계의 바탕에 로이나를 향한 프리미아의 존경심이 깔린 건
당연했다.
도 서 명 : 1 서클 대 마법사 6
지 은 이 : 양 강
출 판 사 : (주)로크미디어
출판년도 : 2005 년 5 월 31 일
봉 사 자 : 박종란
카이렌, 선생 되다
휴란트와 카이렌을 부를 라한이 객방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과연 휴란트에게
검을 가르치는 게 옳은 선택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지.'
검을 배운다는 건 자신의 생명을 검 한 자루에 건다는 의미와 같다. 휴란트 역시
검을 배운다면 그때부터 자신의 검 실력자 생명을 내걸어야 한다. 라한의 고만은
여가서 기안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10 년 이상을 살아온 조카에가 너문 가혹한 듯 했다. 어쩌면
자신의 선택으로 조카인 휴란트가 죽음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들었다.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라한에게도 절반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내 입장이, 아니 우리 필슨 가문의 지금 입장이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도록 하고 있어. '
엘베로에 대한 복수? 그 정도는 라한과 그의 동료들의 힘이라면 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라한은 물론이고 그 동료들의 행적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결국, 드래곤을 비롯한 굴레를 벗은 존재들에게까지 현 위치와 실력이 알려질 터.
그 이후는 서로의 목숨을 건 혈투가 기다릴 게 뻔했다.
그 과정에서 자칫 라한이 죽기라도 한다면, 레테아와 휴란트의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라한을 죽인 이들이 그들을 살려둘지도 의문이었고, 엘베로를 추종하는
자들의 추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자 휴란트를 마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이해해다오. '
똑! 똑-!
"들어와. "
라한의 부름에 카이렌과 휴란트가 들어왔다. 카이렌은 약간 웃는 얼굴이었고
휴란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검술 수련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받지 못한
탓이다.
라한과 이야기를 끝냈던 카이렌은 그 동안 정원 구석에서 검술을 정리하며 지냈다.
짧은 시간에 필요한모든 걸 가르쳐야 하는 엄청난 속도의 수련이 될 건 당연한 일.
이 때문에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반면, 휴란트는 뮬라 상단 여기저기를 다니며 세상을 배워 가는 중이었다.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면 범죄자 마을에 갇히다시피 자랐으니 신기하기도 했으리라,
둘을 차례로 둘러본 라한이 먼저 휴란트에게 말을 던졌다.
"뭐하고 있었어?"
"그냥 상단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
"그래 어떻더냐?"
"엄청 부자더군요. 정원 곳곳에 있는 석상이 정말 멋졌어요. 그 정도 석상이면 엄청
비싸겠죠?"
"그렇. 겠지. "
대답을 하던 라한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했다.
이곳이 부자라는 말. 그 자체가 어린 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다는 얘기였다. 과거를
잊고 살았다는 뜻이었으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었다.
'이젠 과거를 되찾아야 한다. 엘베로에게서. 네가. '
라한은 엘베로에 대한 복수를 휴란트에게 미룰 생각이었다. 자신보다는 휴란트가 더
큰 피해를 봤다고 생각해서였다.
라한이 피해를 본 거라고 해봐야 어린 시절 잠깐 쫓겼던 것과 부모님, 누나의
죽음뿐이다. 반면, 휴란트는 조부모를 잃었고 과거를 잃었다. 또, 엘베로를 피해서
숨어 지내야 하는 힘든 삶을 살수밖에 없었다.
너무 어려서, 아버지인 레테아가 쉬쉬해서 모를 뿐. 실상 엘베로에게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이 휴란트인 셈이다.
"혹, 검을 배울 생각은 없느냐?"
"검요? .음, 삼촌. 전 검보다 활이 좋아요."
휴란트가 어깨에 메고 있던 신궁 레이시드를 툭툭 두드렸다. 얼굴 가득한 미소가
레이시드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 했다.
"활이라.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먼저 검술을 배워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꼭
검사가 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검술을 배우면서 굳어 있는 네 몸을 푼다고
생각하면 어떻겠느냐?"
"그 정도라면 좋아요. "
잠깐 생각하던 휴란트가 흔쾌히 승낙했다. 적을 맞아 검을 휘두르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음이다.
"카이렌!"
"알았어. 나도 활을 조금 쓰거든. 일단 기초검술을 가르치고 나서 활도 좀
가르쳐볼게. 근데, 난 아주 어릴 때 외에는 활을 거의 사용해보지 않아서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
"그 정도면 충분해. 휴란트에게는 계기가 필요한 거니까. "
라한의 말이 끝나자 카이렌이 휴란트를 바라봤다.
'괜찮군. '
쓸 만한 근골이었다. 직접 가르쳐 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일단 겉으로는 나쁘지
않은 몸 같았다. 아버지인 레테아에게 물려받은 몸이라서 그런 듯했다.
"휴란트. "
"예, 카이렌님. "
"앞으로는 선생님이 라고 불러라. "
"예, 선생님 "
휴란트의 대답에 카이렌이 밝게 웃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선생님이라니 비록학생 시기를 거치지는 못했지만, 정규교육의 한축을 담당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늘을 날 것 같았다.
"그럼 나가자. "
"예, 선생님. "
벌떡!
카이렌이 휴란트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서려 할 때, 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번뜩였다.
"어? 라한 왜 그래?"
"왔군. "
"뭐가? 오긴 누가 왔다고 그래?"
쿵쾅!
카이렌이 질문을 막 던졌을 때, 객방 문이 벌컥 열렸다. 열린 문으로 프라하가
어깨에 쿨샤크를 걸치고 뛰어 들어왔다. 이번 방문이 쿨샤크와 관계가 있는 듯했다.

"어라?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다 모여온 거야?"


카이렌의 물음에 프라하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라한도 함께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약간은 살기가 감도는 섬뜩한 웃음이었다.
"어, 어이. 이봐. 왜 그래?"
"왔다 "
"누가 왔다는 건데?"
"있어. 엄청 음흉한자식. 쿨샤크!"
라한의 부름에 쿨샤크가 의아한 듯 눈을 멀뚱거렸다. 아직 라한 1 말한 인물이
누군지 감이 잡히지 않은 듯했다.
"크크크, 이놈하고 붙어 다니던 음흉한자식이거든. 언제고 한번 손보려고 했었지. "
"그래? 별일 아니네. 너희들끼리 재미있게 놀아라. 난 간다. 휴란트, 가자. "
"예, 선생님 "
카이렌이 휴란트의 손을 잡고 객방을 나갔다.
지금 그에게는 다른 어떤 재미있는 놀이보다 선생으로서의 임무가 더 중요했다.
평생 동안 한으로 생각했던 일을 해결하는 것이니 당연한지도 모른다.
"쿨샤크. 너하고 붙어 다니던 그 음흉한 자식이 왔군. "
"데. 메크?"
Rm 덕!
라한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섬뜩하게 변했다. 이 자리에 투바가 있었다면 누가
마족인지 의심스러워할 정도의 표정이었다.
"라한! "
"가자고. "
라한이 객방 문을 나섰다. 그 뒤를 쿨샤크를 둘러멘 프라하가 뒤 따랐다. 쿨샤크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다.
데메크가 머무는 곳은 상단 건물의 왼쪽 건물 구석이었다. 본래 쿨샤크가 있던 방
바로 옆방인 셈이다. 물론, 지금 쿨샤크는 그 곳이 아닌 라한과 함께 지내고
있지만.
그리고 라한이 있는 방은 상단의 오른쪽 건물이었다. 데메크의 숙소와 비교하면
극과 극인 셈이다.
이 때문에 쾌 먼 곳을 달려서야 데메크가 머무는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콰쾅!
"비켜!"
"예? 예. "
라한과 프라하의 이동은 상당히 많은 호위 무사들의 저지를 받았다.
하지만, 프라하의 도끼가 바닥을 한 번씩 두드릴 때마다 분분히 자리를 비켜줬다.
한 번의 도끼질에 대리석 바닥에 쩍쩍 갈라졌으니 두려워서 물러난 것이다.
물론, 레드리안이 라한을 극빈 대우하고 있다는 기본 전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막아섰을 게 분명했다.
"여긴가?"
"여기군. "
꿀꺽!
프라하의 물음에, 기에 좀 더 예민한 라한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한 번에 데메크를
찾아낸 모습에 쿨샤크가 침을 삼켰다. 그제야 라한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예전에 쿨샤크는 라한을 단순히 뛰어난 마법사 정도로만 생각했다. 왕국을 뒤지면
못해도 스무 명은 나오는 그런 실력자 말이다.
헌데, 데메크의 도착을 한 번에 알아채고, 그 위치까지 정확하게 짚어내는 모습에
생각을 바꿔 먹어야 했다. 이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황실 기사단 단장이 온다 하더라도 동쪽 끝 건물에서 서쪽 끝 건
물"11 있는 사람을 찾아내지는 못한다. 육안으로도 거의 안 보이는 거리이니
말이다.
헌데, 라한은 해냈다. 그것도 한 번에 정확한 곳까지 완벽하게.
똑! 똑-!
"누군가?"
"나다. "
"누구지?"
"네놈을 철저하게 괴롭혀줄 멋진 분! "
쾅- !
대답을 마친 라한이 방문을 걷어찼다. 방문의 경첩이 떨어져 나가며 실내가 한 눈에
보였다.
"헛!"
"허허, 이거 참. 저놈변태잖아."
실내 풍경이 요사스러웠다. 옷을 완전히 벗고 있는 여섯 명의 미인들과 중간에서
허리에 손을 짚고서 있는 데메크. 마치, 여섯 명의 미인들에게 자신의 물건으로
쇼를 하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너 뭐하냐?"
"너, 너.
라한을 본 데메크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어갔다. 라한의 실력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기에 두렵다는 감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라한을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나중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상단의 힘 전부를 합쳐도 라한 한 명을 상대하는 게 불가능했다.
헌데, 자신은 그런 것도 모르고 라한에게 해코지를 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패, 얼마나 소름끼쳐 했던가.
그나마 라한이 실종됐기에 안도하고 있었을 뿐이다. 만약 라한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그래서 지금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지금
이곳에서 변태짓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터였다.
"끌고 나올까? 네가 알아서 나올래?"
"그, 그게."
데메크는 레드리안에게 라한이 있다는 언질을 받지 못했다. 레드리안을 만나기는
했으나 인사만 대충하고 나왔으니 당연했다.
일을 마치고 오면서 사온 여섯 명의 여자들. 이들과 빨리 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이런 상황을 연출했다.
"이봐, 아가씨들, 그만 나가지 그래?"
프라하가 여자들을 쭈욱 훑어보며 비꼬았다. 그러자 여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은 모양이다.
잠시 뭔가 의논을 하던 여자들 중 한 명이 데메크의 옆으로 와서 당당하게
대꾸했다.
"흥. 대체 누가 누구보고 나가라는 거야? 우리 데메크님은 뮬라 상단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나가려면 당신들이나 나가!"
"실질적인 주인? 오호라. 데메크 이 자식 거짓말도 수준급이잖아. 그런 거짓말로
여자들을 설득한 거야? 쯧쯧, 사내란 모름지기 자신이 가진 매력으로.
"시끄러.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야! 데메크. 나올래? 말래? 뭐, 결과는 어차피
같을 거야. 그냥 나오면 덜 맞는 거고, 버티면 많이 맞는 거고. 선택은 자유니까
알아서 하라고. "
말을 마친 라한이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그리고 손가락도 몇 번씩 꺾으며 데메크를
위협해갔다.
분명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위협의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래 가졌던 공포가
있었기에 그 모습 정도로도 충분했다.
"나. 가지. "
"쿨샤크. 둘의 정담은 나중에 나누라고. "
라한이 나가자 쓸쓸한 표정의 데메크가 터벅거리며 뒤따랐다. 얼굴 표정만 보면
마치 단두대로 끌려가는 죄수의 모습 같았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이 난국을
타개할 모책을 떠올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놈 참. 마음껏 머리 굴려보라고. 크크크. '
라한이 눈을 굴리는 데메크를 슬쩍 바라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흑마법에 대해 모르고 있을 때라면 데메크의 도주를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흑마법에 대해 물질계의 그 누구보다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어설픈 흑마법사 데메크의 술수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구멍을 만들어줘서 마음껏 패줄 수 있는 건수를 만들고 싶은 마음도 약간은
가졌다.
'그래, 뭔가 생각해봐, 나도 몸이 근질거리거든.'
라한이 객방에 들어오자 투바가 반갑게 맞았다. 프라하와 라한이 없는 그 잠깐의
시간동안 꽤나 지루했던 모양이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아, 이 자식 좀 데리고 오느라고. 야! 너 저기 서 봐."
데메크가 라한의 말에 따라 객방의 구석에 섰다.
"넌 뭐하냐? 너도 가야지. "
"나도?"
"그래, 자식아. 너나 저놈이나 한 통속이잖아. "
라한의 말에 쿨샤크도 터벅거리며 데메크의 옆에 섰다.
그들의 모습에 투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누구기에 라한에게 저렇게 찍힌
건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프라하 대체 쟤들 뭐야? 특히 저 늙은이는 왜 쿨샤크 저 자식하고 동급으로
취급받는 거 야?"
"뭐, 별거 없어. 나하고 라한 을노렸다는 것? 뭐 그 정도지."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어떻게 라한을 노리냐? 차라리 마계에 사는 마왕을 노리는
게 낫지. "
투바의 말에 라한이 그를 날카롭게 째려봤다.
자신을 마족 이상의 나쁜 놈으로 치부하는 말이 분명했다. 스스로가 착하지는
않아도 나쁜 놈은 아니라고 믿는 라한. 투바의 말에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투바로서는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 스스로가 라한과 는 절대 적으로 서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쳇. 라한 저놈은 자기가 마족보다 나은 줄 안다니까. '
"이, 이보게. 그, 그때는 모두 쿨샤크가 시킨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네. 자네도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를 잘 알지 않나? 난 정말 어쩔 수
없었네. 용서해주게. "
데메크의 말에 쿨샤크가 입을 떡 벌리며 그를 돌아봤다.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자신이 고용주이기는 했지만, 계략은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던가. 헌데, 모든 게 자신이 시킨 일이라고 매도하고 있었다.
평생 자신의 부관이라 생각했던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배신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다가는 자신이 덤터기 쓸지도 모를 일. 어떻게든 수를 내야
했다.
"라, 라한. 내가 아니야. 내가했던 모든 건 데메크가 시킨 일이야. 난 정말하기
싫었는데, 이 녀석이 다 시켰다고. 제발 믿어줘. 우린 친구잖아. "
"무, 무슨 소리! 네가 상단의 후계자라면서 나한테 시킨 일이잖아. 난 저분들에게
해코지하기 싫었는데, 모두 네가 시켰잖아. 빨리 진실을 말해. "
"그, 그게 무슨. 네가 만들어낸 계획이잖아. "
라한, 프라하, 투바가 데메크와 쿨샤크의 행태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놈들이 많다고 들었지만, 정말 저런 놈들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내 살다 살다 저런 놈들은 처음 본다. "
"하여간. 쓰레기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난 더러운 놈들보다 너희들처럼 서로를
팔아먹는 놈들이 더 싫어. "
프라하와 투바가 데메크와 쿨샤크를 싸잡아서 욕했다. 누가 보더라도 욕먹어 마땅한
모습이었다.
"근데, 저놈들이 나쁜 놈일까? 에펠하고 그 일당들이 나쁜 놈들일까?"
"오호, 저 놈들하고 붙으면 흥미진진하겠는데. 전에는 한 통속이 되는 바람에
제대로 된 대립 상황을 만들지 못했는데. "
"에펠이라는 놈들은 모르지만, 저놈들하고 비견될 놈들이라면, 아주 제대로 나쁜
놈이겠군. 한 번 보고 싶은데. "
투바가 본격적으로 호기심을 표해왔다. 하지만, 이건 투바만이 아닌 라한 일행
모두의 의문이나 마찬가지였다.
'흠, 전에는 서로 한 편이었던가? 나중에 적으로 만나게 해봐야겠어. '
이 결정으로 데메크의 생명은 조금 더 연장되었다. 호기심은 참지 못하는 라한의
성격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다.
"자, 일단금제부터 가해보자고. 너! 이리와!"
"무, 무슨."
"오라면 오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빨리 안 와?"
라한의 연이은 재촉에 데메크가 죽을상을 하고 다가왔다.
"손! "
착- !
라한이 데메크의 손을 잡고 제령기와 제란기를 적당히 나누어 주입시켰다.
순간 경악한 데메크가 자신의 손을 라한의 손에서 빼려 했다. 하지만, 악력에
있어서 마법만 익힌 데메크가 라한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 아무리 용을 써도
라한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뺄 수 없었다.
"다 됐다. 조금만 기다려. "
제령기와 제란기 주입을 끊은 라한이 심장에 남아 있던 마나도 조금 주입시켰다.
그리고 데메크의 심장 주변으로 세 가지 기운을 유도했다. 데메크가 원래 가지고
있던 기운까지 모두 네 가지 기운이 한 곳이 모인 모양새였다.
"대, 대체 쿨럭! 뭘 하려는 건. 컥! "
말을 하려던 데메크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라한이 데메크의 흑마법
기운을 본격적으로 조정한 탓이다.
라한은 자신이 주입한 세 가지 기운과 데메크의 기운을 한 가닥씩 풀어서 꼬았다.
한 번, 두 번. 라한이 기운을 꼬아갈수록 데메크의 혈색은 점점 검게 물들었다.
육체적인 충격과 정신적인 놀람의 발현이었다.
"자, 끝!"
라한이 손을 털고 데메크에게서 물러났다. 라한이 물러나자 데메크가 자신의 흑마법
기운을 움직이려 해봤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뭔가에 묶인 듯 아주 약간의 미동만 있을 뿐. 뜻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건가?"
"뭐, 별거 아니야. 그냥 기운을 좀 꼬아놨지. 네 능력으로 그걸 다 풀려면 한 오백
년은 걸릴걸. "
털썩!
라한의 말에 데메크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평생 동안 연구하고 익혀온,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무방한 게 흑마법이었다. 헌데, 라한의 이상한 술수 때문에 단 한
번에 모든 걸 날려 버렸다.
죽음을 내리는 것보다 더 가혹한 처사였다.
"차라리, 차라리 날 죽이게. 날 죽이란 말일세. "
"그건 안 될 말이지. 난 누군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만큼 나쁜 놈이 아니거든.
내가 너무 착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하라고. "
"이, 이."
데메크의 비참한 모습에 쿨샤크가 오줌을 마구 지렸다.
검사에게 검이 모든 것이듯 마법사에게도 마법은 생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쿨샤크 역시 검을 익혀 봤기에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지금 데메크가
겪고 있을 좌절감과 비참함을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라, 라한 설마 나도?"
"너? 훗, 네 검술은 있으나마나니까 금제고 뭐고 필요 없지. 검사가 아닌 나도
너보다는 검을 잘 쓰겠다. "
라한의 말에 쿨샤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부끄러운 마음보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더 크다는 게 너무 비참했다
"앞으로 데메크 너도 우리하고 같이 다닌다. "
"마음대로 하게. "
데메크의 목소리가 처연하게 들려왔다.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던 프라하마저도
약간의 측은함을 느낄 정도였다. 헌데도 라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허, 참나 "
"왜? 내가 잔인해 보여?"
"뭐, 조금은."
"악은 악으로 치료한다. 앞으로 내가 가질 신념이야. "
프라하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특히, 데메크와 쿨샤크 같은 놈들은 어지간히
다루어서는 반성하지 않을 것도 잘 알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나마 라한 일행 중에는 제일 착한 이가 프라하인 모양이다.
'왔군. '
라한의 감각에 새로운 기운 두 개가 잡혔다.
"데메크, 쿨샤크. 너희들은 나가 있어. "
멀리서 느껴지는 기운에 라한이 데메크와 쿨샤크를 내보냈다. 두 기운 중 하나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야. "
"후후, 로이나. 앉아. "
방문객은 로이나와 프리미아였다.
둘은 라한을 만나기로 한 이후, 엘퐁소 지방을 몇 차례 더 돌았다. 라한이 원했던
정보 몇 가지를 더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정보를 충분히 모은 후에야 이곳에 온
것이다.
"일 얘기는 나중에 하자. 프리미아. "
"예, 로이나님, "
"아참. 프리미아는."
"드래곤이군, 블루 일족인가? 나이는 3 천살아래. 지금은 엘퐁소 남작의 딸로 유희를
즐기고 있던가?"
로이나의 말을 라한이 받았다. 프리미아의 외모를 보고 한 눈에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음, 날 알고 있는 건가?"
"기억을 못하는군. 쿨샤크라는 놈한테 여자를 빼앗겼던 못난 놈이 나였거든. "
"아! 그때 그 인간이었군. 어쩐지 낯이 익다 했어. "
그제야 프리미아가 랴한을 알아봤다. 처음부터 눈여겨보지 않아서 기억하지 못했을
뿐. 라한이 프리미아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면 한 눈에 알아봤을 터였다.
"서로 아는 사이인가 7"
"이 드래곤, 그러니까 프리미아? 아무튼 이 드래곤이 쿨샤크와 결혼할
사람이었더군. 맞나?"
"그렇다고 할 수 있지. "
프리미아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라한을 바라봤다. 그에게는 라한이라는 존재가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자신이 드래곤임을 알면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당당함, 거기다 유희 중인
드래곤을 한 번에 짚어내는 비범함까지. 다른 인간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재미있는 인간이군. 요즘은 특이한 인간을 너무 많이 본단 말이야. 아, 이 일행에


껴서 조사를 해볼까? 호호호호, 아주 재미있겠어. '
"프리미아, 네가 본 카이렌과 여기 라한을 비교해봐. 어떨 것같아?"
"예? 아, 맞다. 잠시만요. "
짧게 대답한 프리미아가 드래곤하트에 있는 마나를 천천히 퍼트렸다. 그리고 그
마나를 라한의 몸에 천천히 부딪히며 반발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잠시만. 뭐하는 거야?"
"아, 맞다. 지금 프리미아는 너하고 카이렌의 실력을 비교하는 중이야. 얼마 전에
프리미아가 카이렌을 봤다고 하거든."
"그래서?"
"그래서는 뭐, 앞으로 적으로 만날 테니까 실력을 알아보는 거지. "
로이나의 대답에 라한이 피식 미소를 터트렸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로이나의 마음이 고마웠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과 카이렌의
관계를 모르고 착각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큰 실수하고 있는 모습을 마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잠시만 로이나. "
"응? "
"카이렌은 내 친구야. 원래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내 친구가 됐어."
"그게 무슨."
오해는 오해를 부른다고 했던가? 지금 로이나의 상황이 딱 그러했다.
오해의 첫 시작은 누가 뭐래도 로테마이어스였다. 라한이라는 이름을
류카라한이라고 오해했던 게 지금 상황에 이르게 한 발단인 셈이다.
그 다음 오해는 고룡 베르타라스였다. 라한의 특이한 마법을 겉으로 마법을 드러낸
적이 없는 류카라한의 능력이라고 오해해 버린 것이다. 이 두 가지의 큰 오해가
프리미아, 로이나에게까지 이어졌다.
"카이렌은 내 친구라니까. 지금 내 조카 녀석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있어. 나중에
돌아오면 만나봐. "
"이. 이상하네 프리미아. "
"그게 저도 잘. 지금 카이렌은 크라이드리안에게 이긴 류카라한과 함께 있다고
분명히 들었거든요. 로드께서 한 말이니 잘못됐을 리가 없어요. "
프리미아가 뭔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로이나의 여성스러움과는
다른 앙증맞은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었다.
'드래곤 중에서도 이런 보물이. 후후후, 내가 찍었다. '
투바의 음흉한 생각이었다. 하여간 여자라면 이성을 잃는 어떤 병이라도 걸린
모양이다. 그 상대가 비록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엥? 크라이드리안이라는 드래곤은 나하고 싸웠던 드래곤인데. 그리고 류카라한?
류카라한이라면 과거 베르첸 제국의 그 영웅 맞나?"
"어? 크라이드리안과 싸웠던 게 류카라한이 아니라 당신이었다고? 어, 그럴 리
없어. 로드께선 분명히 류카라한이라고 했단 말이야. "
프리미아가 짐짓 화난 듯 쏘아붙였다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런 부끄러움을 도리어 쏘아붙이면서 해소하려는 생각이었다.
"이 여자가 왜 이래? 왜 갑자기 귀여운 척이야?"
"쿨럭 !"
라한의 말에 프리미아가 무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붉어진 얼굴이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줬다.
반면, 주변에 있던 프라하와 투바는 뭐 저런 놈이 다 있냐는 듯 라한을 노려봤다.
저렇게 귀여운 외모의 프리미아에게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되느냐는 일종의
질책이었다.
라한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느낌은 다르지만 여성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로이나와 어린 시절을 함께 지내지 않았던가. 아름다움에 적응되어 있다는
게 이런 식으로 작용한 탓이다.
또, 이전 삶이었던 예원계에서 알게 모르게 인공 미인을 많이 본 것도 크게 한 몫
했음이 분명했다.
"아, 알겠다. "
"뭐가?"
"라한. 처음 이름을 지을 때, 누구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했지?"
"아하, 그렇군. 하하하하. 이거 참. "
로이나의 말에 라한도 알겠다는 듯 손가락을 퉁겼다. 모든 오해의 발단이 자신의
이름에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카라한, 류카라한. 이름이 비슷하구나. "
"흥. 거봐요. 제 잘못이 아니라니까요. 이름을 그런 식으로 지으니까 이런 오해가
생기죠. "
프리미아가 심통이 난 표정으로 라한에게 대꾸했다. 자신이 바보취급 당했던
화풀이라도 하는 듯했다.
"어이, 드래곤씨! 귀여운 척은 그만 좀 하라고. 하여간 멀쩡하게 생긴 것들은 꼭 그
외모를 이용하려 든단 말이야. "
"뭐? 이, 이. 겁 없는 인간이 감히."
"풋. 역시 라한이군. "
프리미아가 폭발하려는 바로 그때 로이나가 입을 열었다. 분노하려는 프리미아를
제지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말이었다.
실제로도 로이나의 말에 프리미아가 분노를 억눌렀다. 자신이 존경하는 로이나의
인정을 받은 인간. 그 하나만으로도 화를 참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주변 분위기를 대충 마무리 지은 로이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카이렌이 라한과 함께 지낸단 말이야?"
"응. 뭐, 그렇게 췄어. "
"다행이네. 그래도 힘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됐어. "
로이나는 힘이 한쪽으로 기우는 게 걱정스러웠다. 라한에 대한 애정이 류카라한보다
더 강해서는 아니었다. 힘의 불균형은 약한 쪽의 몰락을 가져오기 마련. 자신이
인정한 라한이 그런 몰락의 한축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 걱정 한 거야?"
"뭐, 걱정이라기보다. 근데, 카이렌은 어디 있는 지야?"
"나도몰라. 내 조카 녀석 데리고 어디 갔거든. 아마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검술을 가르치고 있을 거야? 검사들 대체로 그렇잖아. "
"그렇지. "
로이나와 라한의 대화를 듣던 프리미아가 바닥을 툭툭 건드리며 딴청을 부렸다.
그녀가 보기에 로이나와 라한 사이에는 뭔가 끈끈한 정이 있었다. 애정 같은 단순한
감정은 아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느껴본 적이 없는 그런 끈끈한 정, 그건
마치 평생을 맡길 수 있는 친구사이의 우애와 흡사했다.
'다른 녀석을 찾아봐야겠네. '
누군가를 존경하면 그 사람을 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지금 프리미아의 경우가
딱 그러했다. 로이나와 라한 사이에 싹트고 있는 끈끈한 우정에 자신도 그런 관계를
만들고 싶었음이다.
'저놈은.음, 마족이잖아. 이런, 내가 왜 마족을 지금에서야 알아 본 거지?'
마족은 마족만의 고유 기운을 풍긴다. 하지만, 보통의 인간은 그런 기운을 감지할
수 없다. 마족의 실력이 너무 월등하기에 마음먹고 숨기면 찾아낼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프리미아는 드래곤이다. 마족이 기운을 숨긴다고 알아채지 못할 만큼 약자가
아니었다. 헌데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이모두가 자신을 마구 몰아붙였던 라한
때문이라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한 마음뿐이었다.
'마족은 좀 그렇고. 저, 어라? 저 녀석은 라이칸이잖아. 뭔 일행이 이 모양이이?
인간, 마족, 라이칸드로프라. 거기다 카이렌은 엘프니까 별종들이 다 모인 거네. '
라한 일행의 면모를 돌이켜보던 프리미아가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 눈을 빛냈다
그녀는 라한부터 시작해서 일행 모두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아참, 로이나. 엘베로는 어떻게 됐어?"
"꽤 많이 알아봤지. 근데, 어떻게 손을 썼는지 과거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더라고. 솔직히 좀 놀랐어.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비밀 조직이 사실을 숨긴
거겠지. "
"그렇게 말하는 것 보니까 제대로 된 정보를 구했나보네. "
라한의 말에 로이나가 웃음을 머금었다.
로이나가 라한의 생각을 잘 읽듯 라한 역시 로이나가 말하고자 하는 걸 한 번에
알아챘다. 새삼 둘이 오랫동안 함께 지냈다는 게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들의 모습에 프리미아가 볼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었다. 심통이 난 것이다. 아주
조금이지만 로이나를 라한에게 빼앗겼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잉, 나도 괜찮은 인간 하나 찾아봐야겠다. '
"다크라이더라는 암살자 길드인데도 불구하고 엘베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더라고. 아, 참. 근데, 말해주기 전에 조건이 있어. "
"조건? "
"응. 이건 내가 건 조건이 아니고 그 쪽 011 서 걸어온 조건이야. "
"뭔데?"
"그곳 길드 마스터가 라한을 한 번 만났으면 하더라고. 만나겠다는 허락을 하면
말해주기로 그 인간과 약속했어. "
로이나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 속에는 없는
길드였다.
거기다 정보 길드가 아닌 암살자 길드라는 것도 의아하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암살자 길드와 접촉해보지 못해서였다.
"이상하군. 날 아나? 뭐, 한 번 만나는 건 괜찮겠지 "
"그럼 말해줄게, 엘베로는 과거에."
로이나의 입에서 엘베로의 추한 과거가 마구 흘러나왔다. 얼마나 많은 귀족을
죽였는지, 또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가 주
내용이었다.
"그리고 필슨 백작을 죽인 곳은 뷰나로즈라는 암살자 길드야. 물론, 엘베로의
사주를 받은 거지. "
"뷰나로즈라. 아직도 있겠지?"
"응, 금방 사랴질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직도 건재하다고 하더군. 지금은
루이나왕국 최대의 암살자 길드로 성장했어. 엘베로가 뒤를 봐줘서 가능했던 거라고
봐야겠지. "
라한이 뷰나로즈라는 이름을 계속 되뇌었다. 사주를 한 사람이 엘베로라고는
하지만, 직접 칼을 든 곳도 간과할 수 없었다.
"아, 지금 엘베로는 어때? 그러니까 왕이 된 후 말이야. "
"지금은 대륙의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올랐어. 일단 한나라의 왕이
되었으니 당연하겠지. 하지만, 현재 루이나왕국이 중앙 대륙의 패자가 되었다는 게
더 큰 문제야. 중 앙 대륙 최고 실권자가 엘베로 그 인간인 셈이지. "
"중앙 대륙의 패자라. 휴, 모르겠군. 국민들 삶은?"
"아주 좋아. 중앙뿐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살기 좋은
나라가 그곳이거든. 밖으로 왜 많은 적을 두고 있지만, 국민들의 삶만큼은 어느
나라 못지않게 잘 되어 있어. "
라한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부모님의 복수?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한나라의 국민으로서 나라를 잘 다스리는 왕을 처리한다는 게 달갑지 않았다.
"아, 맞다. 지금 엘베로의 나이가 몇이지? 후계자는?"
"엘베로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이가 많아. 아직 까지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신기할 정도라고 봐도 무방해. 그리고 후계자의 나이는 올해 스물넷.
본질적으로 능력이 부족해. 누군가를 다스렸다가는 같이 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 근데 욕심은 또 많거든. 잔인한 측면도 강하고. "
"결론은?"
"그가 왕이 됐다가는 얼마 가지 않아서 루이나 왕국이 무너질 거야. 갑작스럽게
대국이 된 곳이 루이나 왕국이라서 노리는 왕국이 많거든. 아마, 엘베로가 죽는 그
순간부터 여기저기서 견제가 들어올 거야 "
라한의 머릿속에 앞으로의 일이 대충 그려졌다. 지금자신이 해야 할 일과 후일
추진해야 할 일까지.
대강의 판을 짠 라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가족은 없나? 욕심 많은 그 자식이 왕이 됐을 때 후원이 될 만한 그런 가족
말이야. "
"음, 가족이 있긴 있는데, 그게 음. 일단 엘베로는 원래 가족이 없어. 그래서 내가
말하는 후계자나 가족도 모두 데리고 와서 키운 거야. 정에 의해서라기보다 후대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수단의 하나라고 봐야겠지. "
"후대에 이름이라. 남자들은 좀 그런 게 있지. 자신이 죽고 나서도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그런 것들. 영웅심? 공명심? 뭐 그런 거라고 보면 되겠네. "
영웅심이나 공명심. 라한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단어였다. 마음 편하게 오래 사는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라한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남자들의 그런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해는 하지만 그런
마음들보다 오래 사는 게 더 중요할 뿐이다.
"엘베로는 평생 두 명의 자녀를 두었어. 한 명은 엘레노아라는 여자인데, 지금
케라스 왕국의 왕인 루핀트와 결혼했어. 왕비인 셈이지. 어차피 왕국간의 관계라서
큰 도움은 안 될 거야. 그래도 누나가 타국의 왕비라서 어느 정도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엘레노아는 정에 약하고 엄청나게 착하거든, 동생이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백방으로 노력할 게 뻔해. "
"그 후계자라는 녀석 이름이 뭐지?"
"쿠벨린 드루이탄 엘베로. 루이나 왕국에서는 망나니 쿠벨린으로 통하는 것
같더라고. "
"망나니라."
희망이 조금은 보이는 듯했다.
엘베로 자체는 뛰어난 왕이지만, 아들인 쿠벨린은 무능하기 짝이 없다. 엘베로에
대한 복수는 쿠벨린에게서 시작해야 할 듯했다. 그게 라한식 복수 방법이었다.
"아, 아까 다크라이더 길드의 길드장이 날 보자고 했다면서? 언제쯤 보는 게
좋을까?"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봤으면 하더군, "
"로이나가 보기엔 어때?"
"암수를 쓸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어. 암살자 길드의 길드장을 하고 있지만, 본성이
음흉한 것 같지는 않았거든. "
로이나가 그렇다면 그럴 것이다. 몇몇 특별한 인간이 아니면 로이나를 속일 수
없으니 말이다.
"오래 끌 필요 없겠지. 내일쯤 들러야겠다. "
"그럼 서둘러야겠네. 내가 자리를 만들어 놓을게. 그럼 내일 보자고. "
"미안해. 고생만 시켜서. "
"뭘. 내가원해서 하는일인데. 그럼 텔레포트!"
로이나가 그 자리에서 마법을 사용했다. 라한이 내일 만나기로 했으니 지금 당장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한 길드의 길드장을 옆집친구 만나듯 할 수는 없으니
당연했다.
"프리미아라고 했나?"
"무슨 일이지 인간?"
"대화의 기본이 안 되어 있군. 내가 이름을 불렀으면 너도 이름 좀 부르면 안
되냐?"
"흥. 내가 인간 같은 하등 동물의 이름을 왜 외워야 하지?"
"그래. 맘대로 해라. 첸. 하여간 드래곤들은 말이 안 통한다니까. 로이나를
제외하고는 말이 통하는 드래곤을 본 적이 없어. 에잉!"
라한은 그냥 해본 말이었다. 헌데, 프리미아는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 그건 자신이 성격을 고치지 않으면 로이나처럼 되기
힘들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내가 정말 그런가? 나도 꽤나 개방적인 드래곤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드래곤 가운데 가장 개방적인 존재라면 누가 뭐래도 베르네미스라 할 수 있다.
세상만물모두에게 호기심을 가진 베르네미스. 헌데, 그는 로이나와는 달리 대부분의
드래곤에게 배척당하고 있었다. 정도에서 너무 크게 어긋나서였다.
로이나는 기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개방이기에 존경받는 드래곤이 되었다.
반면에 베르네는 개방성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배척받았다. 지나치면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던가. 로이나와 베르네가 딱 그런 입장이었다.
"이봐. 드래곤, 가려면 가고 남으려면 남고. 마음대로 해라. 드래곤이니 어디서 길
잃어버리진 않겠지. "
"쳇. "
라한은 프리미아를 별로 경계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로이나에
대한 믿음이 그 기반이었다. 자신이 믿고 인정한 로이나이기에 그녀가 데리고 온
프리미아도 함께 인정한 것이다.
다음날 아침.
로이나가 라한을 찾아왔다. 부스스한 표정의 라한이 반쯤 눈을 감은 채로 로이나를
맞았다.
"어, 왔네. "
"자는 걸 깨운 건가?"
"아니, 이제 일어나려고 했어. "
"아, 오늘 다크라이더 길드 길드장하고 만나기로 약속했어, 근데, 표정이
이상하던데. "
로이나는 전날 다크라이더 길드의 길드 본부로 날아갔다. 그리고 바로 오늘 라한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길드장인 다크시안은 로이나가 드래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보를 캐기 위해 로이나가 약간 기세를 흘린 탓이다.
드래곤인걸 알면서도 정보 제공의 대가로 라한을 원한 다크시안. 그도 보통 대담한
게 아니었다.
"아침에 만나기로 했어?"
"응. 길드장인 다크시안 외에는 너와의 만남을 모르거든 내가 비밀로 해달라고
했어. "
"잘 했어. "
로이나가 라한의 대답을 들으며 몸을 돌렸다. 라한에게 옷을 입을 수 있도록 해주는
배려였다. 이에 라한도 주섬주섬 옷을 들어서 입기 시작했다.
보통 여자들은 아예 방밖으로 나갔다가 옷을 다 입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보통이다.
그게 대륙의 문화이고 인간들의 생활 방식이다.
하지만, 둘은 그런 고정된 문화에서 자유로웠다. 그런데도 서로가 서로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으니, 둘 모두 특이하기는 특이한 존재임에 분명했다.
"끝났어. 아까 하던 얘기가 뭐였지?"
"다크라이더 길드의 길드장 말이야. 널 잘 아는 것 같더라고. "
"날? 흠, 이상하네. 난 암살자 길드하고는 얽힌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
"그래? 그럼 정말 이상하네. 라한의 과거부터 필슨 백작의 과거까지 완벽히 꿰뚫고
있더라고. "
라한과 로이나가 생각에 잠겼다.
라한은 자신의 과거를 하나씩 되짚으며 암살자 길드의 유무를 찾는 중이었다.
로이나 역시 자신이 라한을 보살필 때, 암살자 길드원을 만난 적이 있는지를
생각해봤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암살자와 관계된 적이 없었다.
"모르겠다. "
"만나보면 알겠지. 가자. "
"다른 일행들 안 데리고 가도 되겠어? 위험할지도 모르잖아. "
로이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라한에게 말했다. 이에 라한이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답했다.
"로이나도 참. 로이나가 있는데 그게 뭐가 문제야?"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 관계 된 일이면 내가 도와주기 애매한데 그쪽은 아무래도
물질계를 뒤흔들 수 있는 조직이라서 내가 손대기 힘들거든. 자칫 댔다가는.
"알아, 근데, 그쪽은 아닐 거야. 그놈들이 내 과거를 알 리 없거든. 내 가족에
대해서도 알 턱이 없고.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잖아. "
"그래. 가자, 준비 끝났지?"
로이나의 물음에 라한이 자신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준비가 끝났다는 걸 몸으로
답한 모습이었다.
"그럼 간다. 매스 텔레포트! "
스으윽!
로이나가 마법을 시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라한이 텔레포트를 시전할 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라한이 사용하는 텔레포트는 상당히 빨랐다. 시전 속도가 아닌 발현되는 속도에서의
차이였다.
라한이 텔레포트를 사용하면 발현되는 그 순간 완벽하게 사라져버린다. 헌데,
로이나가 사용하는 텔레포트는 발현이 느렸다. 서서히, 몸이 옅어지듯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엘퐁소 시 외곽의 숲 안.
휴란트가 카이렌의 지도에 따라 기초 검술을 휘두르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몸이라서인지 작은 몸동작에도 몹시 힘들어했다.
웬만한 검사 수준으로 몸을 만드는 데도 몇 년은 걸릴 듯했다.
"헉, 헉!"
"그만. 5 분간 쉬었다가 다시 한다. "
"예. 선생님. "
카이렌의 말이 끝나자마자 휴란트가 바닥에 벌렁 누워 버렸다. 오르내리는 가슴의
기복이 힘들어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쯧, 쯧. 그래가지고 검을 휘두르겠느냐?"
"전 검사가 아니라 궁수가 될 거라고요. "
"궁수든 검사든 기본은 체력이다. 지금 네 체력으로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 "
"하지만."
대꾸할말이 없었다. 휴란트도 체력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되는
걸 어쩌겠는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질 체력이 아니었기에 더 비참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라한한테 마법 무구 좀 만들어달라고 해아겠다. "
"아, 그런 수가 있었군요. "
"마법 무구에 의존하려는 생각을 버려라, 당장은 마법 무구로 어떻게 한다지만,
그런 도구에 의존해서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
휴란트의 고개가 또 다시 숙여졌다. 자신의 나태한 마음이 자꾸 드러나는 게 너무
부끄러웠다. 헌데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와서인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당장은 라한에게 마법 무구를 만들어 달라고 하고. 나중에는 스케일러 링을 찾으면
그땐 네가 그걸 사용해야겠다. "
"스케일러 링요? 그게 뭐예요?"
"마법 무구다. 라한도 스케일러 링 정도의 성능을 내는 마법 무구는 만들지 못할
게다. 육체적인 힘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무구지. "
뭔가 말을 하려던 휴란트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마법 무구 얘기가 나을 때마다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의존하고 싶은 마음. 이런 천성을 버리는 일도 휴란트에게는
버겁기만 했다.
"자, 그만. 다시 검을 휘두른다. "
"예. 선생님. "
비틀거리며 일어선 휴란트가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잠깐 쉬어서인지 좀 전
보다는 한결 나은 모습이었다. 이런 나아진 모습도 그리 얼마가지는 않겠지만.
어찌됐든 휴란트에게는 짧은 5 분의 휴식도 꿈같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라한과 로이나는 어느 여관의 뒷골목으로 이동했다. 로이나가 미리 봐둔 장소인
듯했다.
"여기가 어디지?"
"케라스왕국 중부지방이야. 여기서 남쪽으로 4, 5 일 거리만 가면 루이나 왕국이
나오지 "
"수도와 가까운 모양이네. "
"저기 동쪽으로 하루 정도 저리만 달리면 수도가 나오니까 먼 거리는 아니지. "
라한과 로이나가 대화를 나누면서 여관의 입구 쪽으로 걸었다. 로이나의 이끎에
라한이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모양새였다.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
"응. 이미 와 있을 거야. 들어가자. "
짤랑!
로이나가 문을 열자 청랑한 종소리가 여관에 울려 퍼졌다. 이에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서 담소를 나누던 손님들의 시선이 잠시 모였다.
라한과 로이나가 여관 안으로 들어가자 손님들 중 남자들의 시선에 적개심이
떠올랐다. 어떤 이는 인상을마구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노려보는 사람도 있었다.
로이나가 얼굴을 가리지 않은 탓이다.
'이럴 줄 알았어. 차라리 엘프 모습으로 있지 왜 인간모습으로 바꿔서는.'
라한은 자신을 노려보는 인간들의 시선이 거추장스러웠다. 저들이 시비를
걸어온다면. 모르긴 몰라도 라한이 나서기 전에 로이나가 먼저 처리를 할 것이다.
헌데도 누군가가 시비를 걸어온다는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홀에서 보기로 한 거야? 아니면 객실에서?"
"일단 여기 있으면 데리러 올 거야. "
아니나 다를까 채 1 분도 되기 전에 2 층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내려왔다. 시선이
정확히 라한에게 향한 걸로 봐서 다크라이더 길드관계자임이 분명해 보였다.
한편, 홀에서도 누군가가 움직임을 보였다. 로이나에게는 포근한 미소를,
라한에게는 날카로운 살기를 드러낸 모습이 시비를 걸러온 떨거지가 분명했다.
"여기."
"이봐! "
2 층에서 내려온 사내가 말을 꺼낼 즈음 시비를 걸러온 사내가 라한을 불렀다. 한쪽
다리를 건들거리며 떠는 모양새가 심히 불량해보였다.
"실례합니다만 이분은 저희와 용건이 있는 분입니다. "
"나도 용건이 있는 건 마찬가지거든. 내 용건 끝나면 그때 보내주마. 멀쩡하게
걸어갈 수 있을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지만. 크크크."
그제야 2 층에서 내려온 사내도 불량해 보이는 사내의 목적을 눈치 챘다. 헌데도
말리기보다는 한걸음 물러서서 관망하는 빛을 보였다. 라한과 로이나의 실력을
알아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거 참. 귀찮은데."
"내가 할까?"
"그냥 내가 할게. "
로이나를 제지시킨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이나는 일견 순하고 약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드래곤이다. 혹, 힘을 제대로
사용하는 날에는 이 도시 자체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라한이 나서기로
했다.
"애송이! 일어서면 어쩔 건데?"
라한이 일어서자 사내가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어왔다. 한 마디하고 로이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남자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라고 자랑하는 듯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
"뭐? 이, 이 자식이."
라한의 담담한 대꾸에 사내가 눈을 부라렸다.
그는 자신의 덩치 정도면 라한을 겁먹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라한이 작은
키는 아니지만 약간은 마른 몸이었기 때문이다.
헌데도 라한에게서는 긴장하는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실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긴, 굴레를 벗은 존재와 드래곤을 적으로 둔
라한이 아니던가. 동네에서 노는 불량한 건달에게 겁을 집어먹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덩치! 뜨거운 게 좋아? 찬 게 좋아?"
"엉? 난 뜨거운. 뭔, 뭔 소리냐?"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려던 사내가 뒤늦게 발끈했다. 잠깐이지만 라한에게 휘말렸던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누가. 이길까?'
라한과 사내의 행동을 다크라이더 관계자가 흥미진진하게 바라봤다.
겉 모습만보면 라한의 행동이 객기로만 보였다. 라한보다 한 뼘정도 큰 키와
1.5 배에 가까운 몸무게. 일단 체격적인 조건으로만 보면 어른과 아이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길드장인
다크시안이 극진하게 대하는 일행이다 특별할 게 없는 사람을 다크시안이 극진하게
대할 리가 없었다. 또, 라한의 얼굴에서 보이는 여유가 예사롭지 않았다. 저런
표정은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자신의 힘에 자신이 있을 때에나 보일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뜨거운 게 좋다고 했어?"
"닥쳐라! 누가 뜨거운 게 좋다고."
"그럼 찬 거야? 흠, 어디보자 찬 게 뭐가 있더라. 아, 그게 좋겠군. 아이스 홀!
아쿠아 실드! "
라한이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사용했다. 아이스 홀은 찬 기운을 빨아들이는 1 서클
마법이다. 단순히 찬 기운만 빨아들이기에 공격마법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다음 마법인 아쿠아 실드가 라한이 아닌 사내의 주변에 쳐졌다. 이에 처음 발현 된
아이스 홀이 아쿠아 실드를 마구 당기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사내의 몸 주변을
두르고 있던 실드가 빨아들이는 힘에 의해 점점 작아졌다. 어떻게 보면
압축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모양새였다.
"좋군. "
잠깐의 시간이 더 흐르자 사내의 몸을 실드가 완전히 뒤덮었다. 마치 옷을 입은
모습과 흡사했다. 단단하고 차가운 옷 말이다.
"뭐, 뭐냐?"
"아직 덜 끝났어. 아쿠아 애로우!"
라한의 아쿠아 애로우가 사내의 몸을 두드렸다. 더 정확하게는 사내가 옷처럼 입고
있던 아쿠아 실드를 강하게 두드린 것이다.
채챙!
"크악! "
단단하던 실드가 라한의 아쿠아 애로우에 깨어져 나갔다. 그 때문에 사내의 몸에
실드의 파편이 마구 스쳤다. 그리고 몇몇 개의 파편은 사내의 몸에 정확하게
박혔다.
투투투둑!
사내의 몸에 박혔던 파편이 뽑히듯 사라져갔다. 과도한 충격에 의해 실드가 디스펠
된 모습이었다.
파편이 사라지자 파편이 박혔던 곳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근 백여 개에 가까운 수라서 처참할 지경이었다.
"더 할래?"
"이, 이."
사내가 눈을 매섭게 치떴다. 자존심 때문에 차마 굽히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럼 이번에는 뜨거운 걸로 할까?"
"컥!"
털썩!
연이은 라한의 말에는 사내도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정말 두 번 당하기는
싫었다. 거기다 또 한다면 기존에 가진 상처를 안고 견뎌야 하는 게임이었다.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흠, 흠. 마법사였군요. "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근데, 절 만나기로 하신분인가요? 아니면. 그분이 보낸
사람?"
"보내서 왔습니다. 올라가시죠. "
"앞장서십시오. 따라가겠습니다. "
라한과 로이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일어나자 홀에 있던 사람들 몇몇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들 대부분이 라한을 잠시마나 노려봤던 사람들이었다.
라한이 홀을 뒤로하고 사내를 따라갔다.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당당한걸음이었다. 라한이 2 층으로 올라가자 홀에 있던 사내들의 몸이 축 늘어졌다.
긴장했던 몸이 풀려서 생긴 현상이었다. 만약 그들이 먼저 나섰던 사내보다 급한
성격이었다면 아마 쓰러진 사람은 그들이 됐을 터였다.
다크라이더 길드
대륙 북부에서 손꼽히는 암살자 길드이면서 최고의 정보 조직이다. 또,
결집력에서도 타 길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끈끈하게 묶여 있는 곳이다.
하지만, 다크라이더 길드를 진정 최고로 만든 건 다름 아닌 길드장 다크시안이다.
부하들을 자신만 바라보게 만든 것도, 정보의 중요성을 부하들에게 각인시킨 것도
모두 다크시안의 작품이었다.
최강은 아니지만 최고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다크라이더 길드 그곳의 우두머리
다크시안. 누구 앞에서도 겁에 질려본 적이 없는 그가 지금은 미약하게 떨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냥 앉아 있어. "
다크시안의 나직한 말에 로이나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라한이 있는 지금
이곳에서만큼은 드래곤으로서의 대접을 받기 싫었음이다.
"예. 위대하신."
"그런 존칭도 오늘은 생략해라. "
"알겠습니다. 흠, 흠. 로이나님. "
몇 번 헛기침을 한 다크시안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몇 가지의 제약에서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의 예를 표하는 모습이었다.
"라한. 난 신경 쓰지 말고 대화해. "
"고마워. 이름이 다크시안이라고 했나요?"
라한이 다크시안의 눈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에 다크시안도 라한을 찬찬히
살피며 허실을 탐지했다.
'묘하군. 알 수가 없어. 그때의 그 아이가 맞는 건가?'
다크시안이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맞먹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조직을 오랫동안 다스리다보면 자연스럽게 사람 보는 눈을 가지게 된다. 이 사람이
힘을 숨기고 있는지 허세를 부리고 있는지, 혹은 진실한 사람인지 가식적으로
대하는지 같은.
헌데, 라한에게서는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둘의 레벨 자체가 다르다는
얘기였다.
"날 보자고 했다더군요. 이유가 뭐죠?"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고 싶었네. "
"얼마나 성장했는지? 절 아시나요?"
"어릴 때부터 자네를 봐왔지. 후후, 그때와는 너무 다르구먼. 정말 달라졌어. "
다크시안의 표정이 아득하게 변했다.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절 대체 언제 본 거죠? 전 당신을 본 기억이 없는데요. 또, 다크라이더라는 이름도
어제 처음 들었습니다. 제가 당신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 알 수가 없군요. "
"모르겠지. 말을 안했으니까. 10 년쯤 전에 우리 다크라이더 길드가 자네를 도운
적이 있네. 그때 자네는 엘베로가 키운 비밀 조직의 추적을 받고 있었지. "
"아! 그때 그."
그제야 라한도 상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졌던 의문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을
도왔던 조직인 다크라이더. 그 오래전에 왜 자신을 도왔을까? 이 의문을 풀지
못하면 발 뻗고 편히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도왔는지 궁금한가 보구먼. "
"무려 10 년도 더 된 얘기인데. 대체 왜 날 도운 거죠? 그때는 제가 누군가의 주목을
받을 만큼 강하지도 않았습니다. 혹시, 우리 집안과 관계가 있었던 겁니까?"
"잘못 짚었군. 내가 도운 건 엘베로라는 늙은이에 대한 분노가 커서일세, 할 수만
있다면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우고 싶을 정도니까. "
대답을 듣던 라한이 팔짱을 끼고 의자에 비스듬히 누웠다. 그 상태로 다크시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동질감이 느껴지는군요. 흥미로운데요. 흠, 근데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까 말했다시피 당시의 전 정말 볼 것 없는 아이였습니다. 헌데, 왜
하필이면 저를 주목했을까요? 전 이해가 안 가는데요. "
"그건 내가 자네에게 암수를 쓴 적이 있어서일세. "
"암수?"
다크시안의 말에 라한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누군가에게 암수를 당한 기억이
없어서였다.
라한의 의아한 표정에 오히려 다크시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분명히 암수를
썼고, 라한은 그 때문에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다크시안이 직접 지시하고 확인한
일이기에 확신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라한이 암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다니. 뭔가 자신이 놓친 게 있는
듯했다.
"혹, 우리 길드가 암수를 사용한 걸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당시의 암수
때문에 과거를 잃은 거?"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다크시안이 가한 암수는 백치의 풀로 불리는 셀베카를
이용한 방법 그 이전의 과거를 잃었다면 지금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과거를 잃어? 내가?'
망각의 샘물에도 내성을 가진 라한이 셀베카에 영향을 받을 리 만무했다. 상황이
이러니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도 모르는 암수라니. 재미있군요. "
"후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아무튼 난 엘베로의 의뢰를 받아 자네에게 암수를
가한 적이 있었네.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이미 지나간 일이니
너그럽게 용서해주리라 믿네."
"그러죠. 어차피 기억도 안 나니까. "
라한은 다크시안을 쉽게 용서해주었다. 기억도 안 나는데 딴죽을 거는 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내가 자네를 만나고 싶어 했던 건 엘베로 때문일세."
"좀 쉽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난 엘베로를 파멸시키고 싶네. 자네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 난 정말 많이
당했거든. "
"어떤 식의 파멸을 원하는 겁니까? 죽음?"
라한의 물음에 다크시안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는 엘베로에게 죽음을 내리는
행동을 자비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버려둬도 그리 오래 살기 힘들 정도로 늙어 버린 엘베로. 지금 그를
죽였다가는 자칫 성군에 대한 암살로 오도되기 십상이었다. 그건 이름을 대대로
떨치려는 엘베로를 돕는 결과를 나을지도 모른다. 다크시안이 바라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난 엘베로의 명성에 흠집을 내고 싶네. "
"어느 정도죠?"
"많은 시간이 흘렀을 때, 루이나 왕국에서 엘베로를 폭군으로 기억하게 만들고
싶더군. 내가 생각한 최대의 복수는 그런 것일세. "
다크시안의 말에 라한이 음흉하게 웃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복수와 너무
똑같았다.
"좋군요. "
"고맙네. 난 자네를 돕고 싶네, 엘베로를 완벽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자네뿐일세. 자네의 능력과 로이나님의 힘이면 그리 힘들지 않겠지. 어떤가? 힘을
합하겠는가?"
"로이나는 힘듭니다. 물질계에 크게 관여할 수 없는 입장이거든요. 우리가 알고
있던 드래곤의 상식과는 좀 다르죠. 생각보다 많은 제약이 있으니까. "
"그런.가?"
다크시안이 약간 힘 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드래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웠던 모양이다.
보다 못한 로이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엘베로는 굳이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쉽게 처리할 수 있다. 지금 라한이 가진 힘과
세력이면 그리 힘든 일도 아니지 "
"그렇.습니까?"
그렇게 되물으면서도 얼굴에서는 믿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누가 뭐래도
엘베로는 중앙 대륙의 패자로 성장한 루이나 왕국의 국왕이다. 이런 위치에 있는
자를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말 자체가 억지라고 생각했다.
라한의 실력을 모르고, 라한 일행의 실력을 모르고 있으니 당연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뭐, 그건 어차피 내가할 일이니까 다크시안님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궁금한 건 절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 뿐입니다. 앞으로 제게 어떤 도움을 주실
거죠?"
"정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일세.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대륙 그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네. "
라한의 입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지금 라한에게 꼭
필요한 게 정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드래곤이나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 비교하면 미약한 세력임에
분명했다. 개개의 실력에서는 앞서지만 수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난 탓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정보였다 라한은 그들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지금
어디 있는지,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다상대가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도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라한이 스스로를 약세라 생각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정보라.좋습니다. 거래 성립. "
"화끈해서 좋군. 그래 무슨 일부터 할 텐가?"
"먼저 정보가 필요합니다. "
"어떤 정보인가? 아는 거라면 바로 말해주겠네. 혹, 모르는 정보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구해서 주지. "
라한의 화통한 대답에 다크시안도 시원하게 대꾸했다. 마주 웃는 모습이 상당히
흡족한 듯했다.
그는 라한이 마음에 들었다. 얼굴에 여러 가지 생각을 담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얼굴만 보고는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없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물론, 적으로 만났다면 상당히 찜찜한 상대였겠지만. 하지만,
동료가 된 지금은 그 누구보다 훌륭한 아군이었다.
"먼저 잉글리아트, 제이슨, 토일렛, 루나시언, 크리퍼트, 루시펠. 이 여섯 명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역사서에 나오는 영웅들의 이름일 겁니다.
실제로그들이거든요. 제가 필요로 하는 정보는 이런 과거의 정보가 아니라 현재의
정보입니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지.
어떻게든 알아봐주십시오. "
"흠, 자네가 그들을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군. 우리도 지금 그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많은 정보를 구해보겠네.
"
다크시안이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담담하게 대꾸했다. 라한이 그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일단은 의문을 접기로 했다.
지금은 서로에 대한 허실을 탐색할 시기가 아니었다. 먼저 믿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는 게 지금 우선해야 할 과제였다.
물론, 라한과 로이나가 돌아간 후에는 그 여섯 명과 라한을 함께 조사하겠지만.
그건 그들이 없는 곳에서 은밀히 해결할 일이었다.
"또, 엘베로의 정확한 거처에 대해서 알아봐 주십시오. "
"정확한 거처? 그거야 당연히 루이나 왕국의 왕궁 아닌가? 국왕이니 당연히."
"일단 알아보시면 됩니다. 제가 아는 엘베로는 의심이 많은 놈이거든요. 아무런
정보가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
"알겠네. 일단 자네 말대로 조사를 해보지. 더 필요한 게 있는가?"
"지금은 없습니다. "
"그럼 먼저 말했던 정보에 전력을 다하겠네. 아, 우리와의 접선은 각 도시의
여관에서 할 수 있네. 여관의 지붕 꼭대기에 회색 천두 개가 묶여 있는 곳이 우리의
끈이 닿아 있는 곳일세. 그곳에서 이 패를 내밀면 극빈대우를 해줄 걸세. "
다크시안이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푸른색 패를 내밀었다.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패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문양에 새겨져 있었다.
'오호라. 이거 의외의 수확인걸. '
라한이 보기에 다크시안이 준 다크라이더 패는 마법 무구였다. 그곳에는 1 서클
라이트 마법이 담걱 있었다. 서클만 보면 최하급의 마법 무구인 셈이다.
하지만, 라한은 다크시안이 준 패의 재료에 흥미를 느꼈다. 1 서클 정도라면 라한의
능력으로 쉽게 지울 수 있는 일. 지우고 5, 6 서클 마법 몇 개를 담는다면 라한
일행에게 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마법 무구로군요. "
"역시 한 번에 알아보는군. 우리 길드가 가지고 있는 보물이나 마찬가지 일세. "
다크시안의 보물이라는 말에 라한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길드 내에서 보물로
여길 정도라면 수가 많지 않다는 의미였다.
좀 많이 가지고 있다면 여러 개 얻으려고 했던 라한의 생각이 수포로 돌아갔다.
'아쉽네. '
"그럼 나중에 다시 뵙죠. "
"그럼 고생하게. "
다크시안의 인사를 끝으로 라한이 로이나 옆에 섰다. 함께 이동하자는 의미였다.
"매스 텔레포트!"
라한이 다가오자 로이나가 마법을 시전했다. 라한과 로이나가 사라지자 다크시안의
몸이 축 늘어졌다 드래곤 앞이라 긴장했던 몸이 뒤늦게 풀렸다.
"휴, 힘들군. 이거야 원. 그나저나 라한이라고 했던가? 드래곤에게 아무런 위압감도
느끼지 않다니. 대단했어. 후후후. "
다크시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드디어 엘베로에게 복수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자신이 직접 하지는 못하지만,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그냥 복수할 수 있다는 그
자체로 충분히 만족했다. 그리고 라한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만난 것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프리미아와 레테아
라한은 다시 뮬라 상단으로 돌아오자마자 칩거에 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를
고민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딱 일주일이 흘렀을 때, 라한이 일행을 모두 불러모았다. 검술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던 카이렌도 포함해서였다. 하지만, 레테아와 휴란트, 프리미아는 이
자리에서 빠져 있었다.
일행을 차례로 훑어본 라한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프리미아는?
레테아하고 함께 있을 거야.
형하고?
응. 재미있게 노는 것 같던데.
투바의 대답에 라한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본질적으로 드래곤을 무서워하는 레테아가 먼저 말을 걸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지루함을 못 견딘 프리미아가 레테아를 찾아간 것이리라. 레테아는 공포에 사로잡혀
차마 거절하지도 못했을 테고.
"로이나! 프리마아 좀 불러줘. "
"알았어. "
짧게 대답한 로이나가 마나를 서서히 공명시켰다. 프리미아에게 메시지 마법을
사용해서 호출하려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메시지 마법은 서로 보고 있는 상태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로이나와
프리미아 사이에서는 그런 제약이 없었다. 같은 속성의 드래곤이기에 행할 수 있는
일종의 종족 신호이기 때문이다.
"불렀어. 곧 올 거야. "
"형하고 휴란트는 데리고 오지 말라고 해줘. "
"알았어. "
라한은 이번 모임에서 앞으로 할 일에 대한 전체적인 판도를 짤 생각이었다. 어쩌면
드래곤과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다. 이 때문에
형인 라한과 조카인 휴란트는 제외시키고 싶었다. 지금까지 힘들게 살았으니 이제는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단, 이번에 짠 판도 중에서 엘베로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휴란트를 앞장세울 생각이었다.
똑! 똑-!
"들어와!"
"인간. 날 불렀더군. "
"이 드래곤이 왜 이래? 라한이라고 부르라고 했지?"
"그건 내 마음이다. 인간 수컷! "
프리미아의 대꾸에 라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화가 난다거나 짜증이 난 건
아니었다. 다만, 드래곤의 저런 똥고집이 귀찮을 뿐이었다.
"어휴, 그래 너 잘났다. 앉아."
"싫다. 그냥 서서 듣겠다. "
"그래 너 잘났다. 맘대로 해라. 서 있으면 자기만 손해지. "
프리미아를 잠깐 노려본 라한이 주변을 다시 훑었다.
이제 자신이 원했던 일행 모두가 모였다. 열사를 뒤져봐도 다시 볼 수 없는 엄청난
파티였다. 하지만, 상대할 적을 생각하자 뭔가 부족해 보였다.
'앞으로 만들어가야겠지 . '
"프리미아. 부탁이 있어서 불렀다. "
"뭐지? 인간. "
"네가 유희를 즐길 때 사용했던 프리지아 엘퐁소라는 신분이 필요해. "
"그건 왜?"
라한이 말을 할 때 프리미아는 한쪽 다리를 건들거리며 불량스럽게 듣고 있었다.
라한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일종의 시기심 때문이다. 자신이 존경하는
로이나가 라한에게만 신경 쓰고 있으니 질투가 난 것이다.
"여기를 떠나야 하는데, 정리는 하고 가야 될 것 같아서.
"무슨 정리?"
"너 때문에 엘퐁소 남작이 열 받아 있어. 빨리 수습하지 못하면 뮬라 상단이 엄청난
피해를 받을 거야. "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프리미아가 끝까지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아마 라한이 아닌 투바나 프라하가
부탁했다면 이런 반응은 아니었으리라.
"좀 도와주라. 일단 가서 정식으로 말하고 나오면 되잖아. 왜 몰래 나와 가지고
이런 분란을 일으키고 난리야. "
"그거야 내 맘이지, 내가 분란을 일으키든 분가루를 일으키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별꼴이야. 정말. "
프리미아가 팔짱을 낀 상태로 몸을 반쯤 틀었다. 얼핏 토라진 모습이라 상당히
귀엽게 보였다. 일행의 표정을 보니 '귀여워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단한사람.
라한만 제외하고.
"야! "
"왜?"
"죽을래?"
기어이 라한이 분노를 터트렸다 그로서는 이렇게라도 해서 일행을 바로잡아야 했다.
'운 좋으면 둘 다를 얻겠지. '
프리미아가 하는 행동을 보면 일행을 쉽게 떠나지 않을 듯 보였다. 실제로도 일행을
만나가면서 자신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행동이 여러 번 포착되기도 했다. 라한도
프리미아의 동행 자체에는 별 이견이 없었다. 로이나가 데리고 왔으니 어느 정도의
믿음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아니었다. 항상 자신의 말에 딴죽을 걸고 나오는 존재. 이런
상태로는 제대로 된 파티가 될 수 없었다. 사소한 결정에서도 계속 걸고 나을 게
분명하니 말이다.
지금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가 피곤할 게 뻔했다.
"이, 이. 미천한 인간이."
"그래. 오늘 누가 죽나 제대로 한 번 해보자. "
"로이나님. 저 인간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제가 먼저 시작한 게 아니니
양해해주십시오. "
프리미아의 말에 로이나가 난감한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라한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빛을 띠웠다.
라한이 강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크라이드리안에게도 힘겨워했던 실력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헌데 프리미아는 크라이드리안보다 오히려 한 수
위의 실력. 이 싸움은 라한에게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게 거의 확실했다.
"라한. "
"괜찮아 저 미친 자식을 죽여 버리겠어. "
"이, 이놈이."
프리미아가 기운을 끌어올려 라한을 압박했다. 이에 따라 객방 간에 엄청난 기류가
형성되며 대기가 차갑게 식어갔다. 블루 드래곤이 가진 물의 기운이 객방을 잠식한
모습이었다.
"프리미아. "
"로이나님. 이번만큼은 저도 참을 수 없습니다. "
"로이나 됐어. 어차피 한 번은 부딪혀야 할 일이야. "
로이나가 제지를 하려 하자 프리미아와 라한이 차례로 답했다.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였다.
구우웅!
프리미아의 기운에 반응해서 라한도 기운을 불러 일으켰다. 예전보다조금은 강해진
기운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라한도 어느 정도 발전한 듯했다.
라한은 크라이드리안과의 싸움으로 많은 걸 얻었다. 한계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그런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 깨달음을 토대로 수시로 수련했고,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는데 성공했다.
쿠쿠쿵! 콰콰쾅!
기운이 맞부딪히자 투바와 프라하, 로이나, 카이렌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들이 보기에 라한과 프리미아는 통제 불가능의 상태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물러서서 기운의 여파를 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뒤로 물러나면서도 그들은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프리미아는 어차피 자존심이
있으니 이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문제는 라한이었다. 상당히
이성적이고 냉철한 라한이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우웅!
똑! 똑-!
일촉즉발. 그야말로 터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프리미아가 약간 놀란 눈빛으로 기운을 서서히 거두었다. 그리고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입구 쪽을 바라봤다.
반면 라한은 부드럽고 담담하게 기운을 거두었다. 마치 방문객이 올 줄 알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들어와! 형. "
찰칵!
레테아였다. 라한과 프리미아의 거대한 기운을 느끼고 찾아온 모양이다. 하긴,
기사단장출신인 그가 이 정도 기운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무슨 일 있어? 아까 여기서 엄청난 기운이."
"아, 아니 그냥 우리들끼리 장난을 치고 있었을 뿐이다. "
레테아의 물음에 프리미아가 먼저 대답을 해왔다. 자신이 화를 냈다는 걸 숨기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이에 라한이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장난은 무슨 장난. 날 죽이겠다고 기세를 일으킨 것 아니었나?"
"그, 그게.정말장난이었어. 내가 어떻게 그런 위험한 일을 하겠어. 절대 아니야. "
프리미아가 당황한 말투로 어렵사리 대꾸했다.
뭔가 묘한 상황이었다. 레테아가 들어온 직후부터 바꿔 프리미아의 태도. 레테아를
신경 쓰고 있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역시 그런 사이였군. 근데 형은?'
라한은 프리미아의 마음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형인 레테아의 마음과 둘의
진척 정도를 몰랐을 뿐이다.
"프리미아님. 제 동생을 왜?"
"정말 아니야. 믿어줘, "
프리미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레테아에게 애원했다. 그녀의 반응에 로이나를 비롯한
주변 인물 모두가 의아한 빛을 띠었다. 그들은 프리미아가 레테아를 아끼고 있다는
걸 지금 처음 알았음이다.
"어쩌다 둘이."
"흠, 흠. 투바 모른 척 해. "
"아, 그러지. "
주변에서 어색한 듯 헛기침을 마구 해댔다. 아직까지 상황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은
듯했다.
처음부터 프리미아가 레테아를 신경 쓴 건 아니었다. 로이나가 라한을 아끼듯
자신도 누군가를 아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자니 같은 인간이 필요했고, 그렇게
해서 찾은 사람이 레테아였다. 휴란트가 카이렌에게 검술을 배우느라 시간이
없었으니 레테아 밖에 남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 대화를 나눌 때, 레테아는 자신의 과거사를 풀어놓았다. 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과 가문의 비사. 그리고 조용한 곳에서 숨어살다가 또 다시 엘베로에게
공격받았던 일까지.레테아의 말로 프리미아는 안타까움을 느꼈고, 그 안타까움이
호감으로 발전했다.
물론, 아직은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감정은 아니었다. 호감을 깨고 싶지
않았기에 단점을 드러내기 싫었을 뿐이다.
"후후, 프리미아. 아까 그 기세는 대체 어디 간 거야?"
"무, 무슨 소리야? 기세라니? 좀 전에 그건 장난이었잖아, 안 그래?"
"장난 한번 살벌하군. "
라한이 프리미아를 게슴츠레하게 쳐다봤다. 약점 잡혔으니 까불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프리미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애써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지금상황만 봐도 라한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음은 명백해 보였다.
'음흉한 놈 '
좀 전에 보였던 라한의 경솔함은 모두 연기였다. 프리미아는 지금에 와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왜 주변 일행들이 라한을 대단하게 보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도
완벽하게 당했으니 말이다.
"흠, 흠. 장난이었는데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구나. "
"아니에요. 앉으세요. 형도 알아야할 일이거든요."
"알겠다. "
레테아가 자리에 앉자 라한이 프리미아를 다시 한번 흘겨봤다. 그 눈빛에
프리미아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드래곤인 자신이 라한에게 잡혀 지낼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성격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레테아가 최근에 가지게 된
약간의 호감마저 사라질까 걱정스러웠다.
"먼저 우리가 할 일은 엘퐁소 남작을 다독이는 일이야. 프리미아. 할 수 있겠지?"
"휴, 알겠다. 나갔다가 정식으로 나오면 되는 거지?"
"아니, 아니야. 그것보다 형하고 같이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
"어?"
라한의 말에 프리미아가 의아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그녀는 라한의 정확한 의도를
짚어내지 못했다. 그의 말이 너무 두루뭉술한 까닭이다.
프리미아의 의아한 표정에 라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하고 같이 가서 결혼할 사이라고 해. 안 그럼 다 큰 처자가 집 나가겠다는데
허락하겠어?"
"그건 그렇지만."
"라한아. 그건."
프리미아와 레테아가 반대 의견을 표했다. 프리미아의 붉어진 얼굴과 레테아의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 라한에게는 그들의 그런 모습 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형. 미안해. 그래도 이 방법밖에 없어.'
"방법이 없잖아. 형도 생각을 해봐. 휴란트가 갑자기 집 나가겠다고 하면 대뜸
허락할 거야? 일행도 없이 그냥 가겠다고 하는데?"
"그건 안 되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프리미아님과 결혼이 라니. 아무리
거짓이라지만 그건 좀."
"방법이 없다니까, 지금은 서로의 체면을 따져줄 때가 아니라고. 그리고 프리미아도
어차피 유희니까 이해할 거야. 맞지?"
라한이 프리미아를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마치 '좋아?'라고 묻는 모습이었다.
프리미아는 라한의 표정에 고개를 푹 숙였다. 한 번 약점을 잡히자 도무지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맞.다. 어차피 유희니까. "
"하지만 프리미아님. "
"난 괜찮다. 혹시 상대가 나라서 싫어하는 건가?"
"형. 진짜로 결혼하라는 얘기가 아니잖아. 어때?"
"에휴, 알겠다. "
길게 한숨을 쉰 레테아가 긍정을 표해왔다. 정말 어쩔 수 없어하는 기색이었다.
'형에겐 보호해줄 사람이 필요해. '
라한이 이런 식으로 긴 연극을 한 건 모두 레테아 때문이다. 후일, 혼자 남겨진
레테아를 도울 조력자로 프리미아를 선택한 것이다.
라한은 레테아가 남은 생을 편안하게 살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
헤어져야 했다. 자신과 함께 있는 그 자체가 엄청난 위험을 안고 가는 것이니
말이다.
헌데, 아무런 도우미 없이 혼자 두는 건 너무 불안했다. 레테아의 실력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세상의 험난함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리미아 정도라면, 최소 그녀가 레테아의 보호자라는 유희를 끝낼 때까지는
레테아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프리미아의 유희는 레테아가
늙어 죽는 그 순간까지 이어질 테고.
"형 프리미아. 서둘러 줘."
"알겠다. "
"알았다, 라한아. "
대답을 마친 프리미아와 레테아가 객방을 나갔다. 약간은 어색한 듯 서로 거리를 둔
모습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둘이 손을 잡고 다닐 날이 올 것이다. 그게 안 된다면, 라한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그게 라한이 형을 돕는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다.
"일단 엘퐁소 남작 일은 다 끝났군. "
"근데, 과연 허락을 할까? 레테아는 올해 쉰 살이야. 프리미아는, 아니 프리지아
엘퐁소라는 신분은 올해 나이가 열여덟 살이잖아. 엘퐁소 남작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거야 프리미아가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드래곤인데 그 정도도 해결하지 못하면
드래곤의 탈을 쓴 오크라고 봐야지. "
"허, 참. 그래. 알아서 하겠지."
라한도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이만 보면 프리지아 엘퐁소라는
신분은 아들인 휴란트와 더 어울리는 나이였다.
헌데, 과연 허락을 할까? 그건 프리미아와 레테아의 역량에 맡길 생각이었다.
"이 일을 끝내면 뭐할 거야? 마냥 도망만 칠 생각은 아니겠지. "
"후후, 도망이라 그것도 좋지. 근데, 그 전에 꼭 들를 곳이 있어 할 일도 있고. "
"들를 곳? 아, 멜카투라 산인가?"
"응. "
라한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드워프인 칼라피안 에이피라타뿐이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물이 멜카투라 산에 보관되어 있다. 애초에 상단 행렬에 껴서
이동할 때부터 생각한 목적지가 그곳인 셈이다.
스크롤은 일단 한 번 사용하고 나면 다시는 사용할 수 없다. 마나를 꾸준히
빨아들이는 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스릴이나 드래곤 본 같은 물질은
마나를 꾸준히 흡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런 물질을 인챈트하면 당연히
영구적인 마법 도구가 된다.
라한이 멜카투라 산까지 가서 유물을 찾으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영구적인
마법 물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가 있는 곳. 그랜드 인챈터가 되기 위해서는
스크롤뿐 아니라 영구적인 마법 도구도 많이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내 꿈. 그랜드 인챈터. 절대 포기할 수 없어.'
결의를 다시 한번 다진 라한이 로이나를 바라봤다.
"로이나 멜카투라 산이 여기서 얼마나 돼?"
"빠르면 십 일. 늦어도 보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야. "
"좋아. 프리미아 일이 끝나면 바로출발하자. 나머진 그때 생각하자고. "
"알았어. "
라한의 행보가 정해졌다. 정확하게는 원래 가지고 있던 목적을 남들에게 알린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로서 1 차 목적지는 확실해졌다. 남은 건 프리미아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일뿐 이었다.
"근데, 라한. 프리미아는."
"어떻게 알았냐고?"
로이나의 물음에 라한에 짧게 대꾸했다.
프리미아가 레테아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로이나에게는 그게
의문이었다. 거기다 라한은 이곳에 온 후부터 레테아를만난 적이 없었다. 스스로의
수련과 앞으로의 고민 때문에 바빴기 때문이다.
헌데, 어떤 경로로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응. 라한은 프리미아와 레테아가 함께 있는 걸 한 번도 못 봤잖아. "
"보지는 못했지만 듣기는 했어. "
"그래도 이상한데 보지도 않고 둘 사이가 그런 관계인지 어떻게 알아? 직접
만나봐야 느낄 수라도 있지. "
로이나의 물음에 라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몰랐어. "
"근데 아까는?"
"아까도 몰랐어, 대신 프리미아가 로이나를 엄청 존경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
그리고 나와 로이나 사이의 관계처럼 프리미아도 그런 관계가 죌 인간을 찾을
거라는 생각은 했어. "
"그냥 찾는 것하고 사귀는 건 다르잖아. 너하고 내가 사귀는 게 아닌데. "
로이나는 아직도 라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과 라한이 사귀는 사이인가?
그건 아니었다. 그럼 프리미아와 레테아도 사귀는 사이는 아니어야 정상이었다.
프리미아가 자신을 존경해서 대상을 찾은 거라면 말이다.
헌데, 결국 프리미아와 레테아는 결혼 승낙을 받으러 떠났다. 마치 중간 단계를
훌쩍 건너뛴 것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둘은 사귀는 게 아니야. 뭐랄까? 자신들도 모르게 휘말렸다고 할까?"
"이해가 안 돼.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줘. "
"프리미아는 원래 레테아와 사귈 생각이 없었다. 나와 로이나의 관계처럼 허물없는
사이로 지내고 싶었을 뿐이지. 헌데, 내가 둘을몰아붙였잖아. 마치 사귀지 않으면
안 되는 사이처럼. 형하고 프리미아는 휘말린 거야. 형은 몰라도 프리미아는 지금
머릿속이 엄청 복잡할걸. 자신이 의도했던 것하고 너무 다르게 흘러갔으니까. "
"그렇.구나. "
그제야 로이나도 지금 상황을 이해했다. 애초에 레테아와 프리미아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라한에 의해 의도치 않게 이렇게 되었을 뿐이다.
"그럼 이 모든 게 라한 네 머릿속에서 나온 거란 말이야?"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
옆에 있던 투바가 의문을 표하자 라한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프리미아가 레테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건 사실이다. 그건 사람 자체에게
매력을 느꼈다기보다 라한보다 윗사람을 찾고 싶은 마음에 기인했다.
휴란트는 라한의 조카, 레테아는 라한의 형 라한보다 위에 서고 싶은 마음 때문에
둘 중에서 레테아를 택한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와 사이가 좋아져서 라한과
로이나의 관계보다 윗줄이 되고 싶었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프리미아는 급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라한과의 살기등등한 대립이 그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타난 레테아. 급박한 상황과 갑작스러운 레테아의
등장으로 프리미아는 심적 혼란을 겪었다. 라한은 그 상황을 자신이 유도한
방향으로 이끌었을 뿐이다.
"괴물 같은 놈. "
"마족한테 괴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
라한이 프라하와카이렌, 로이나를 돌아보며 도움을 청했다. 누구라도 자신의 편을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괴물. "
"두말하면 잔소리지. "
"라한. 아무래도 지금 상황은 좀."
믿었던 로이나마저 라한을 괴물 취급했다. 로이나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을
유도해낸 라한 아니던가? 수천 년을 산 자신보다 심리전에 능하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괴물로 불리기 충분했다.
"쳇. 테세르. 너도 그렇게 생각해?"
-뭐? 괴물?
"그래. 너도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냐고. "
-당연하잖아. 난 처음 주인에게 소환됐을 때부터 주인이 평덤하지 않은 존재라는 걸
알았다니까. 괴물 주인 파이팅!
"쩝. "
퍽! 퍽-!
라한이 홧김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테세르가 있던 바로 그 위치였다.
-주인. 왜?
"시끄러! "
퍽! 퍽-!
쿠웩!
한편, 레비안 산맥을 힘들게 빠져나온 에펠 일행은 대륙의 중앙으로 향했다. "에펠.
어디로 가야 하지?"
"일단 고향으로 가보자. 숨어살더라도 고향이 편하겠지. 우리가 살던 곳이니까. "
본래 그들의 목적지는 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범죄자 마을이었다. 그리고 그곳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건 성공했다.
하지만, 루이나 왕국의 비밀 조직이 공격하는 탓에 범죄자 마을이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에펠 일행의 목적지도 사라졌다.
"라한. 그 개자식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래. 혹시 라한이 쫓아오기라도 하면 어쩌지?"
"그렇다 하더라도 고향에 있는 게 더 나아. 그곳은 스카라트 산맥과 가까워서
숨기도 편하잖아. 그리고 설마 우리가 고향으로 갔다고 생각하겠어?"
에펠의 설명에 베린과 카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타당한 소리로
들렸다.
어차피 라한에게 발각 당했다가는 죽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고향
땅에서 맘 편하게 살다 죽고 싶었다. 귀소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괜히 고향땅이
그리워졌다.
"근데, 다음 마을은 언제야? 이번은 마을이 왜 이렇게 멀어?"
"조금만 더 가면 될 거야. "
"여기서 조금만 쉬었다가 가자. 난 더 이상 못 가겠어. "
카류나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다리를 두드렸다. 하루 반 동안 꼬박 이어진 강행군.
비록 검술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여기서 좀 쉬었다가 가자. "
카류나의 옆에 베린파 에펠도 따라 앉았다. 다리를 연신 두드리는 모습이 그들도
쾌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카류나! 물 없어?"
"잠시만. "
카류나가 물을 건네자 에펠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에펠이 물을 다 마시자 다음은
베린이 수통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남아 있던 물 전부를 비워 버렸다
"카류나! 물 얼마나 남았어?"
"세 통 정도. 더 마실래?"
"난 됐어. 너도 목 좀 축여야지, "
"그래야지. "
카류나도 수통을 꺼내 물을 마셨다.
"크윽! 대체 마을은 어디야?"
"걱정이군. 오늘 안으로 마을을 찾지 못하면 물이 없어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
에펠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일행을 일깨웠다.
그의 말처럼 마을을 빨리 찾는 게 시급했다.
남은 물이라고 해봐야 수통 두 개 반 정도. 이 정도 양으로 하루를 버티는 건
무리였다. 어떻게 해서든 오늘 해지기 전에 마을을 찾아야 했다.
"남은 물이 별로."
카류나가 수통을 하나씩 꺼냈다. 그리고 물을 흔들어 보이며 물이 얼마 안 남았음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어? 이상하네. "
카류나가 다시 물을 흔들었다. 헌데, 찰랑이는 듯한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거기다 수통 자체가 너무 가벼웠다.
"왜? 무슨 일 있어?"
"물이. 없어. "
"무슨 소리야? 수통 두 개 남았잖아. 좀 전에 먹던 것까지 두 개 반은 남아야 정상
아냐?"
"그건 그런데."
카류나가 다시 수통을 흔들었다. 역시나 너무 가벼웠다. 거기다 좀 전에 마시던
수통마저 급격하게 가벼워지고 있었다.
"이거 왜 이래?"
"뚜껑 열어봐! 빨리!"
베린의 다급한 외침에 카류나가 수통을 하나씩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뒤로
뒤집어서 탁탁 털어도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이, 이게."
뭔가 말을 하려던 에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챙-!
에펠이 검을 빼들었다. 무언가 이질적인 걸 느꼈기 때문이다. 에펠이 검을 뽑자
베린과 카류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았다. 그리고 기운을 집중시키며 무언가를
느끼려고 애썼다.
"저쪽이야. "
에펠의 외침에 베린과 카류나가 바위 아래쪽을 바라봤다. 뭔가 축축한 물체가
흐느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 저게 뭐야?"
"몰. 몰라. "
흐느적거리는 물체를 보며 에펠과 베린이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몬스터 목록에도 없는 물체였다. 얼핏 보면 젤리 같으면서도 살아서
움직이는 물체. 끔찍함에 저절로 닭살이 돋았다.
"온다. "
흐느적거리는 물체가 에펠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정확하게는 카류나가 들고 있는
마지막 남은 수통을 향해서였다.
"헉!"
털썩!
놀란 카류나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 너무 끔찍한 모습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놀란 모양이다.
스르르르륵!
철썩!
흐느적거리는 물체가 움직일 때마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끔찍한 모습에
이어 소리까지 기이한 물체, 에펠과 베린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쿵쾅거렸다.

"이 요물. 받아라!"


에펠이 흐느적거리는 물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꽤나
날카로운 기세가 담긴 검이었다. 수많은 격전을 치르며 순간적인 검 휘두름에
익숙해진 덕이다.
스륵! 철퍼덕!
에펠이 휘두른 검은 흐느적거리는 물체를 정확히 이등분하며 지나갔다.
하지만, 갈라진 곳이 순간적으로 합쳐지며 처음의 모습을 갖추었다.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듯했다
"저거 뭐야?"
"같이 하자. "
베린이 결의에 찬 눈빛으로 괴물체를 바라봤다. 그 옆에서 에펠도 검을 꼬나 잡고
살기를 일으켰다.
"지금이다. 하앗! "
"하앗! "
에펠과 베린이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에펠의 검은 괴물체의 허리를 양단하기 위해
가로로 휘둘러졌다. 반면, 베린의 검은 괴물체의 머리부터 아래로 주욱 그어
내렸다. 일견하기에 베린과 에펠의 검에 의해 괴물체가 사등분된 듯 보였다.
스르르, 철퍽!
사등분 되었던 괴물체의 모습이 다시 원상복구 되었다. 애초에 일반적인 검에는
타격을 받지 않는 듯했다.
-크리릭!
괴물체가 기괴한 음성을 토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괴물체가 다가올 때마다 에펠과
베린도 한걸음씩 뒷걸음질 쳤다. 그들로서는 더 이상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카류나!"
에펠과 베린이 계속 뒷걸음질치자 남은 사람은 카류나뿐이었다. 이미 의식을 잃은
탓에 도망가지 못한 것이다.
"베린. 다시 해보자. 하앗!"
"하앗! "
카류나를 구하기 위해 에펠과 베린이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그래도 일말의
동지애는 있는 모양이다.
철퍽!
퍼억!
"컥! "
"크륵! "
이번에는 괴물체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몸이 다시 합쳐지자마자 에펠과 베린의
머리를 강하게 두드린 것이다.
털썩!
강한 충격에 에펠과 베린이 의식을 잃었다. 카류나를 포함한 셋 모두 쓰러지자
괴물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자신이 공격당했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크리릭!
괴물체가 카류나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던 수통을 빼앗아서
마셨다. 물이 조금씩 줄어들수록 괴물체의 형체도 조금씩 뚜렷해졌다
-크릭!
통통!
물을 다 마신 괴물체가 자신의 배를 두드렸다. 그 상태로 바닥에 주저앉아서 자신이
공격당한 이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꾸르르륵!
흐느적거리는 괴물체. 그는 투바가 만들어낸 물 덩어리 변이었다. 함께 텔레포트를
하지 못해서 혼자 남았던 변.
어쩔 수 없이 투바의 기운이 느껴지는 북서쪽으로 마냥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물이 있으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마찬가지로 힘을 사용하면 가지고 있던
물을 조금씩 소모한다. 걷는 행위 자체도 적은 양이지만 힘을 소모하는 일. 거기다
이곳 황무지에는 물도 없었다.
-크르륵!
물 덩어리 변은 삼일 간의 강행군으로 힘을 너무 많이 소진했다. 이 때문에 몸의
크기가 쾌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물을 훔쳐서 힘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크릭?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물 덩어리 변이 카류나의 짐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가방 안에서 테세르에게서 받은 느낌과 비슷한 걸 느꼈다.
물 덩어리 변이 카류나의 가방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초록빛을
띠는 자그마한 반지를 꺼냈다.
-크링? 크링?
물 덩어리 변이 반지를 좌우로 훑었다. 테세르가 맞는지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크리리릭!
틱-!
테세르가 아니라는 결론이 서자 인상을 찌푸리며 반지를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쪼로록 달려가 다시 주웠다. 버리기는 아까웠던
모양이다.
굴레를 벗은 존재들은 둘 남아 있는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를 찾기 위해 힘을
나누었다. 류카라한과 잉글리아트, 크리퍼트가 한조, 토일렛과 루시펠이 한 조가
되어 각각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
그 중 류카라한 일행은 라이칸드로프 돈네리아 미스티크를 찾기 위해 대륙의
동쪽으로 향했다. 드래곤 산맥과 인접한 숲 안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얼마나 더 가야 되는 거야?"
"일주일은 더 가야 될 걸. "
그들의 이번 이동은 무척이나 더뎠다.
출발한 지 벌써 24 일.
헌데 아직도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했다.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걸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좀 참게. 일단 가기만 하면 대응 마법진을 설치할 테니. "
"지금 없잖아. 나중은 필요 없다고. "
계속 불만을 터트리고 있는 이는 크리퍼트였다.
검사라는 이유 때문에 일행의 모든 짐은 류카라한과 크리퍼트의 몫이었다. 헌데,
수련 정도에서 류카라한이 크리퍼트보다 월등했다. 다른 역량을 가지고 같은 짐을
지고 있으니 크리퍼트가 힘든 게 당연했다.
"에휴,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좀 돌아다녀볼 걸 그랬군, "
"진작 좀."
"쉿! 누가 있다. "
둘의 대화를 류카라한이 제지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가야 할 앞쪽을 바라보며 눈을
매섭게 떴다. 누군가가 자신들을 미행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음, 인간인가?"
"그런 모양이군. "
크리퍼트와 잉글리아트가 류카라한의 시선이 닿은 곳을 보며 차례로 말했다.
류카라한이 느낀 기척을 뒤늦게 알아챈 모양이다.
크리퍼트와 잉글리아트는 검과 마법을 극성으로 익힌 실력자이다. 그들의 능력으로
기척을 놓친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물론, 그들보다 뛰어난 존재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어찌됐든지 금 느껴지는 기운만
보면 그리 강한 자는 아닌 듯했다.
"정신 차려라. 만약 저들이 우리를 노리던 자들이라면 어쩔 뻔 했나?"
"아니잖아. 아니면 됐지, 뭐."
"자칫 잘못하면 다 죽는 수가 있다. 제발 정신 차려라. 크리퍼, 잉글리아트. "
류카라한이 크리퍼트와 잉글리아트를 질책했다.
크리퍼트의 임무는 이동하는 동안 오른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알아채는 거였다.
대신 잉글리아트는 전면, 류카라한은 좌측과 후면을 맡기로 했었다. 혹시 모를
기습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준비를 한 것이다.
헌데, 이번에 느껴진 기척은 오른쪽 전방.
잉글리아트와크리퍼트둘모두가잡아내야하는기척이었다. 헌데, 전혀 다른 곳을 맡고
있던 류카라한이 먼저 알아챘다. 그건 크리퍼트와 잉글리아트가 잡아내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물론, 이유는 서로 떠드느라 놓친 것이고.
"쳇. 근데 어떤 놈이야? 여긴 사람 사는 곳이 아닌데. "
"글쎄. "
지금 일행이 있는 곳은 대륙동쪽의 황무지인 로아평이다. 곳곳에 작은 숲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 메마른 땅뿐인 곳. 사람이 쉽게 지나갈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보이는군. "
먼 곳을 가리키며 잉글리아트가 말했다.
"별로 크지 않은데? 인간인가? 아니면 엘프?"
"인간이군. 세 명. 남자둘, 여자하나."
크리퍼트의 물음에 류카라한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에 크리퍼트와 잉글리아트가
놀란 눈으로 류카라한을 바라봤다.
시력이 상당히 뛰어난 크리퍼트가 겨우 크기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헌데, 류카라한은 상대의 수와종족, 성별까지 완벽하게 구분해냈다. 새삼 둘의 실력
차이가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용병 같은데, 여긴 무슨 일이지?"
"잠, 잠깐만. 류카라한. 용병이라는 말은 상대의 복장을 봤다는 얘긴가?"
크리퍼트의 물음에 류카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 류카라한과 크리퍼트의 실력
차이가 확실해졌다.
"놀랍군. "
"내가 먼저 가지. "
말을 마친 류카라한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전방에서 오는 인간들을 맡기 위해서였다
류카라한이 앞으로 쏘아져가자 잉글리아트와 크리퍼트가 서로를 바라봤다.
"어떻게 생각해?"
"거짓말 같지는 않던데. "
"차이가 이렇게 컸나?"
"글쎄다. "
그들도 류카라한의 뒤를 따라 갔다. 류카라한과는 다르게 상당히 느린 걸음이었다.
걸어가면서 류카라한의 실력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물 덩어리 변은 어디에?
류카라한은 황무지를 가로 지러 인간의 기척이 느껴지던 곳까지 달려왔다. 그렇게
한참 다리던 류카라한이 뭔가 이질적인 기운에 걸음을 멈추었다.
뭐지? 정령인가?
류카라한의 감각에 물의 기운이 느껴졌다. 단순히 물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의 기운과는 차원이 달랐다. 순수한 물 자체의 기운. 정령이 아니면 절대
풍길 수 없는 그런 기운이었다.
나와라.
짧게 외친 류카라한이 천천히 걸어갔다. 한참 걸어가자 눈앞에 반투명하고
물컹거리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정령.인가?
류카라한도 정령을 본 적은 있었다. 로이나와 함께 다닐 때에는 정령왕도 몇 번이나
봤었다.
오히려 류카라한에게는 하급 정령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하급 정령을 본 건
판테아를 만나기 이전 뿐. 그 이후 그 긴 시간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탓이다.
-크링?
"정령이냐?"
-크리링?
기괴한 소리를 토한 물 덩어리 변이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본능적으로 류카라한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알아본 것이다.
"흠, 하급정령이면 말을 못하겠지. 근데, 아래에 쓰러진 인간들은 누구지?"
류카라한이 쓰러진 세 명. 에펠 일행을 가리키며 물 덩어리 변을 재촉했다.
류카라한으로서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정령에 대한
일종의 예의였다.
하지만, 물덩어리 변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네 짓이냐?
감히 인간을 해코지하다니. 죽여 버리겠다. ' 그런 식으로만 들렸다.
"이봐. 정령. 뭐하는 거야 7"
류카라한이 오른손을 들어 물 덩어리 변을 잡으려 했다. 이에 물 덩어리가 손을
빠르게 빼며 뒤로 물러났다.
챙그랑!
"응?"
뒤로 물러나던 물 덩어리 변이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손에 쥐고 살펴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류카라한이 바닥에 떨어진 물체를 주웠다. 처음에는 그냥 대수롭지 않은 반지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무심코 손에 쥐어보자 무언가 달랐다. 이런 느낌은 마법무구가 분명했다.
그것도 겉으로 마나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 정도의 마법 무구라면 특급임이
분명했다.
류카라한이 순간 놀란 눈으로 전방을 바라봤다.
"어?"
전방에 있어야 할 물 덩어리 변이 없었다. 류카라한이 잠깐 한눈 판 사이에 도망간
듯했다.
"이거 참. 정령이 아니었나? 그나저나 마법 무구라."
반지를 살피던 류카라한이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착용했다. 원래 약간 헐렁해
보이던 반지가 류카라한의 손에 딱 맞도록 줄었다.
"좋.군. "
류카라한이 반지를 바라보며 감탄성을 흘렸다. 정말 탐나는 물건이었다. 그냥
단순히 착용했을 뿐인데 몸이 이렇게 가벼워지다니. 시동어를 알아서 시전한다면
엄청난 효과가 있을 게 확실했다.
"어이! 류카라한! 어떻게 됐어? 인간들은?"
멀리서 크리퍼트가 크게 외치며 달려왔다.
'저놈들 손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지. '
류카라한이 반지를 가지기로 마음먹었다. 약간의 탐욕과 굴레를 벗은 다른 존재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두 가지 생각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어? 얘네들 벌써 뻗었네. "
"뭐, 그렇게 됐다. 가자. "
"이 녀석들은 어쩌고?"
"알아서 하겠지. "
짧게 대꾸한 류카라한이 앞장서서 걸었다. 그는 쓰러진 세 명의 일행과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이 반지의 주인임을 주장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굴레를 벗은 다른 존재들과 에펠 일행, 그리고 자신까지 세 부류가 반지를
노릴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지. '
류카라한이 앞장서서 걷자 크리퍼트와 잉글리아트도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쓰러진
세 명의 인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애초에 정이라는 감정을
초월했으니 당연한지도 모른다.
프리미아와 레테아가 10 일 만에 뮬라 상단으로 돌아왔다. 하루만에 돌아올 거라는
예상보다 9 일이나 늦은 복귀였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라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프리미아에게 짜증을 부렸다. 차마 형에게는 언성을 높일
수 없어서 프리미아를 몰아붙인 것이다.
시급을 다투는 이때에 10 일을 허비하다니. 라한으로서는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게. 어쩔 수 없었어. "
"라한아. 일이 좀 있었다. "
그들의 태도에 라한이 호기심어린 빛을 띠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늦은 걸
어찌할 수는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궁금증이나 풀자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 있었어? 멀쩡하게 돌아온 걸로 봐서는 별일 없어 보이는데. "
"말도 마, 유희 때 아버지였지만, 얼마나 까다롭던지. 거기다 샤르비엘 후작인가?
하여간 그 늙은이하고 같이 있는 바람에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니까.
"
"샤르비엘? 그렇군. "
라한도 샤르비엘 후작을 깜빡하고 있었다.
왕국의 후작이 엘퐁소 지역에 일이 있어 방문했다. 그럼 엘퐁소 영주의 집에서
지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거기다 레비안산맥에서 이곳으로 왔을 때, 레테아와는
안면을 익혔을 터. 영주성에서 그와의 만남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가 너와의 관계를 묻더군. 형이라고 하니까 상당히 놀라던데. "
"하긴, 그때는 형하고 아무런 대화도 없었으니까 몰랐겠지. "
"그리고 내가 프리미아님과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입을 다물지 못하더군. "
대충 얘기만 듣고도 그곳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샤르비엘 후작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은 카이렌이 아닌 라한이었다.
카이렌마저 일행으로 둔 사람이 라한이기 때문이다.
'좋다고 입 찢어졌겠군. '
라한이 가진 힘과 세력이면 한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
라한이 적으로 돌아선다면? 자칫 왕국의 붕괴까지도 낳을 수 있는 일이다.
헌데, 그의 형인 레테아가 엘퐁소 영주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나왔다. 좀 전의
과정과는 완벽히 다른 전개가 되는 것이다. 적이 될 사람의 형이 자국 사람이 되는
일. 왕국 측에선 잠재된 적을 없애고 힘을 얻는 결과를 가져올 게 확실했다.
"샤르비엘 후작이 개입해서인지 결혼 승낙은 그리 어렵지 않았어. 오히려, 어떻게든
결혼했으면 좋겠다는 분위기마저 풍기던걸. "
"그렇겠지. 근데. 샤르비엘 후작이 마냥 사람 좋은 놈이 아닌데,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야. "
"그런 건 없던데. 오히려 그 반대였어. 우리 필슨 가문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가문의 복수를 도와주겠다고 나오더라고. "
"역시 그 자식은 만만하지 않군. "
라한은 도움을 주겠다는 그 자체를 샤르비엘 후작의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라한의 힘과 세력이라면 도움을 주지 않아도 복수는 쉴게 할 수 있다. 다만,
그 방법을 정하지 못해서 미루고 있을 뿐. 당장 마음만 먹으면 나라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도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런 상황임을 샤르비엘 후작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다만, 뭔가 도움을 줌으로써
구실을 만들 생각이었으리라. 후일,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구실.
"좋아. 그렇다고 치고. 대체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거야?
"뭐든 다 돕겠다고 하던데. "
"허, 그놈 참. 우리 세력을 어느 정도는 꿰뚫고 있다는 얘기잖아. "
구체적인 도움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그 자체가 라한의 힘을 꽤 상세히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라한이 무리한 부탁을 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음, 그게 그렇게 되나? 난 그냥 도와주겠다고 하기에 좋은 뜻만 있는 줄 알았는데.
"
"에고, 뭔 드래곤이 머리에 돌만 들었나? 생각이 왜 그렇게 없어? 하여간. 그나저나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가 있지. 막연한 감만 가지고 그런 결정을 할 리가 없는데.
"
"아, 생각났다. 샤르비엘 후작 옆에 음침하게 생긴 남자가 있더군. 외모는 쾌
잘생긴 것 같은데 분위기가 너무 음침해. "
프리미아의 말에 라한이 생각을 더듬어봤다. 잠깐 생각해보자 그 인물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아마, 샤르비엘 후작이 카이렌을 대적하기 위해서 구했다는 그 사람일
거였다.
'꽤 강한가보군. '
"어떻게 생겼지? 실력은?"
"잘생겼어. 검을 차고 있는 걸로 봐서는 검사 같았고. 실력은 우리 레테아보다 횔씬
강했어. 프라하라는 늑대 녀석보다 조금 약한 수준으로 보면 될 거야, "
"굴레를. 벗은 인간?"
프라하는 굴레를 벗은 존재 중에서도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한다. 그보다 조금
약하다면 굴레를 벗은 인간밖에 없다.
"재수 없으면 일찍 부딪힐지도 모르겠군. 젠장. 프리미아. 형. 당장 떠날 테니까
준비 좀 해줘. "
"어? 엘퐁소 남작이 마차하고 수행인들 붙여주기로 했는데. 내일 도착하기로
했다고. "
"그럴 시간 없어. 빨리 준비해. "
일이 다급해졌다. 상대가 누군지는 확실치 않지만, 굴레를 벗은 인간이
분명해보였다. 만약 전에 만났던 그 부류라면 혼자 있을 리 만무했다. 지금
부딪혔다가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라한은 90 퍼센트의 승률에서는 싸움을 걸지 않는다. 최소 95 퍼센트를 넘는 승률, 할
수만 있으면 100 퍼센트의 승률이 확실할 때에만 싸우는 게 라한이다. 그가 오래살기
위해 선택한 싸움 방식이기도 했다.
"아고, 수행인 없으면 귀찮은 일을 우리가 해야 되잖아. "
"프리미아! "
"알았다. 알았어. 어휴, 레테아는 그렇지 않은데 넌 왜 그렇게 다혈질이야? 쳇. "
"빨리. "
"가잖아. 간다고. "
프리미아가 투덜거리며 객방으로 들어갔다. 떠날 채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떠날 채비라고 해서 짐을 가지러 가는 건 아니었다. 노숙을 할 수도 있기에 그에
대한 준비물을 갖추는 것뿐이다. 며칠 정도 먹을 간이 식량도 포함해서.
"어휴, 저 말썽꾸러기 아가씨를 어찌한다. "
-주인아. 잘하면 주인 형수 될 사람인데.
"그러게 말이다. "
라한이 프리미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질린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한이 레테아라는 프리미아의 약점을 잡은 건 분명했다 헌데, 그 약점이라고
해봐야 큰일에 대한 결정에만 유효할 뿐이다. 지금처럼 사소한 움직임에서는 도무지
통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강해져야지. "
자신의 몸을 툭툭 턴 라한이 상단의 한 곳으로 걸어갔다. 다른 일행들을 찾아서
준비를 시키기 위함이다
출발준비는 근 다섯 시간이 지나서야 마무리 되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일행을 모두
찾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탓이다.
"준비 다 됐지?"
"응. "
"저, 혹시 레이디 프리시아양?"
막 출발하려 할 때, 프라하의 뒤에 있던 쿨샤크가 말을 걸었다. 그 옆에서 데메크도
의아한 표정으로 프리미아를 바라봤다.
"어라? 쿨샤크잖아, "
"오, 맞구려. 레이디 프리시아. "
프리미아의 유희 이름은 프리시아 엘퐁소. 그 유희 때, 쿨샤크와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비록 라한의 계략에 의해 깨지긴 했지만, 한때나마 서로 사랑했던
사이임은 분명했다. 물론, 프리미아의 입장에서는 유희에 한해서였다.
"근데 네가 여긴 웬일이지?"
"흠, 흠. 레이디 프리시아. 말투가 좀."
프리미아가 프리시아 엘퐁소로 지낼 때에는 요조숙녀였다. 말투도 조신했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귀족가의 예법에 어긋나지 않았다.
하지만, 레테아와 결혼 약속을 한 이번 유희는 달랐다. 얽매일 수밖에 없던
귀족가의 예법을 많이 버린 상태였다.
스스로가 귀찮기도 했고, 레테아가 자신의 정체를 안다는 이유도 있었다. 어찌됐든
지금 프리미아는 귀족가의 예법을 지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말투가 뭐? 근데 대체 넌 여기 왜 있는 거야?"
"아, 그게 저. 뭐, 그렇게 됐소. "
"그렇게 되긴 뭐가 그렇게 돼? 내가 너 인간 만들려고 데리고 다니는 거지. "
쿨샤크와 프리미아의 대화에 라한이 끼어들었다. 스스로를 변론하려는 쿨샤크가
꼴사나워서였다.
라한의 말에 프리미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저놈을 인간 만든다고? 라한 네가? 푸하하하. 너나 잘해. 누가 누굴
가르친다고 난리야? 예의도 모르는 놈이. "
"뭐, 그래도 저런 놈한테 차인 너보다는 내가 더 낫지. "
"뭐, 뭐? 이, 이게."
라한의 말에 프리미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라한에게 한심한 놈 취급 받는 인간에게 차였다는 점. 그 하나만으로도 라한에게는
지고 들어가는 셈이었다.
"왜? 틀렸어?"
"쳇. 두고 보자. "
프리미아가 라한이 아닌 쿨샤크를 매섭게 노려봤다. 라한보다 쿨샤크가 더 만만했던
모양이다.
프리미아의 살기어린 눈빛에 쿨샤크가 몸을 미약하게 떨었다. 어떻게 된 게 라한과
일행인 사람은 그 누구하나 만만한 존재가 없었다.
어쩌다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됐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이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가자. "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게! "
라한 일행이 뮬라 상단을 벗어나려 할 때, 먼 곳에서 레드리안이 달려 나왔다.
라한이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깜빡했다는 몸짓을 취했다.
이곳이 레드리안이 사는 곳이니 떠날 때에도 말을 해주는 게 예의였다.
거기다 쿨샤크와 데메크라는 멋진 장난감까지 허락했으니 당연히 한마디 해주고
떠나야했다. 헌데, 너무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어서 미처 말을 하지 못했다.
"아, 이거 미안하군. 깜빡했어. "
"흠, 그래. 지금 떠나려는 겐가?"
"뭐, 그렇게 됐어. "
"갑자기 떠나기로 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조금. "
라한이 어깨를으쓱하는 정도로 대답을 대신했다. 굴레를 벗은 존재가 무서워서
도망간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서였다.
"말린다고 멈추진 않겠지?"
레드리안이 라한의 뒤에 있는 쿨샤크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허락은 했지만, 아들
걱정이 되긴 된 모양이다.
그가 쿨샤크를 보내기로 한 건 아들을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정말 지금 정신
상태로는 세상을 살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르고, 그러면서 머리가 좋지도 않은. 정말 그렇고 그런
인간인 쿨샤크. 괜히 잘난 척하다가 죽는 인간의 전형적인 성격 아니던가. 어떻게든
아들을 바꾸고 싶었기에 라한에게 떠맡긴 것이다.
"이미 말했잖아. "
"알겠네. 여기. "
레드리안이 두툼한 주머니를 내밀었다. 상당한 무게가 느껴지는 주머니였다.
"돈인가?"
"맞네. 여행 자금으로 쓰게. "
"잘 쓰지. "
라한이 흔쾌히 돈을 받았다. 어차피 남아도는 게 돈인 레드리안에게서 받는
것이기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언제쯤. 돌아을 건가?"
"글쎄. 그건 돼봐야 알겠는데. 대신, 돌아올 때 저 인간은 제대로 만들어놓을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고. "
"고맙네. "
레드리안의 마지막 인사를 뒤로하고 라한이 뮬라 상단을 벗어났다. 라한의 뒤에
있던 쿨샤크도 울상을 지으며 따라갔다.
라한이 엘퐁소 지방을 막 벗어났을 때, 뒤쪽에서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라한이 일행들을 옆으로 비켜 세우며 뒤를 바라봤다.
"누구지?"
"테세르!"
투바의 물음에 라한이 테세르를 불렀다.
테세르는 라한이 뮬라 상단에 있는 동안 로브 속에서 책만 읽었다. 헌데도 아직
3 서클 마법 주문을 외우지 못했다. 아니, 2 서클 마법도 겨우 반을 외웠을 뿐이다.
머리가 나쁘긴 나쁜 모양이다.
-왜?
"저 끝에 먼지 보이지?"
-말이네.
"혹시, 말을 타고 오는 녀석들 중에 아는 녀석 있나? 라한의 물음에 테세르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직 라한이 확인할 정도로 가까워지지 않았기에 테세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뭐래도 마나가 가장 민감한 존재는 테세르였기 때문이다.
-좀 되는데.
"그 중에 핵심 인물은?"
-샤르비엘 후작하고 음, 또 한 녀석도 익숙하기는 모르겠네. 오래전에 느껴본 것
같은데.
샤르비엘이라는 말에 라한이 고개를 절래 저었다. 약간은 예상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젠장. "
왠지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또, 테세르가 말한 또 다른 인물의 존재도
꺼림칙했다. 예전에 만났던 존재와 최근에 만난 샤르비엘의 동행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두두두두둑!
이젠 말발굽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라한도 달려오는 존재들의 기운을
구분할 수 있는 거리였다.
"샤르비엘이 맞군. 근데 익숙한 기운? 모르겠는데. "
-익숙한 기운이 하나 더 있어. 확실하다고.
"그래? "
테세르에게 익숙하고 라한에게 낯선 기운. 그건 라한이 마법을 익히기 전에 만났던
사람이라는 얘기였다. 그 이후의 기운은 그 누가됐든 잊은 적이 없으니 말이다.
테세르는 머리가 너무 나빠서 좀 지나면 잊어버리지만.
"흠. "
"왜?"
말발굽 소리가 더 가까워졌을 때, 라한이 침음성을 흘렸다. 갑작스러운 라한의
행동에 투바와 프라하가 의문을 표해왔다. 반면, 로이나는 라한의 옆에 서며 뒤를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강하군. 프리미아!"
"왜?"
"이 기운이 맞나?"
"음, 맞는 것 같은데. "
잠시 기운을 느껴보던 프리미아가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누군가의 기운을
구분하는데 서툴렀기 때문이다.
기운을 느끼는 일이라면 드래곤으로서 당연히 터득하게 되는 능력이다. 하지만,
기운을 구분하는 건 많은 유희를 거치면서 터득해야한다. 헌데, 프리미아는 유희를
그리 많이 거쳐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기운을 구분하는 일에 서툴렀다.
"전투 준비 할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
도끼를 잡는 프라하를 보며 라한이 제지시켰다.
라한이 느끼기에 다가오는 상대는 꽤 강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 정도로 강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굳이 뽑자면 레테아나 휴란트 정도? 나머지는
다가오는 그자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강한 실력자였다.
"멈췄다. "
-어? 그러네.
테세르가 예전에 느꼈던 기운이라고 했던 사람, 레테아보다 강하다고 느껴진 그
사람이 걸음을 멈췄다. 그와 함께 따라 오던 수행인 한 명도 함께 멈췄다. 샤르비엘
후작 일행 중에서 두 명이 뒤에 처진 것이다.
"왜 멈췄을까?"
-보고 올까?
"테세르 너 말고, 카이렌! "
"어. "
라한이 카이렌을 불렀다. 은신술의 대가인 그에게 상대의 실력을 확인하고 오게 할
속셈이었다.
"부탁해. "
"알았어. "
테세르가 기운에 민감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실력을 구분하는 능력에는 약하다.
단순히 마나의 강도만으로 실력을 측정하기는 힘든 까닭이다.
하지만, 경험이 많은 카이렌이라면 상대의 실력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거기다 은신술의 대가이니 들키지 않고 상대를 염탐할 수 있을 터. 이런
상황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그였다.
카이렌이 사라지고 잠시 후, 샤르비엘 후작을 비롯한 일행이 라한의 앞까지
다가왔다.
두두두둑!
"워! 워!"
말을 타고 온 사람은 모두 네 명이었다. 그중 선두에 선 사람이 샤르비엘
후작이었다. 중간에 선 나머지 세 명은 샤르비엘 후작의 부하로서 그리 강한
실력자는 아니었다. 물론, 라한과 그 일행의 기준에서 말이다.
"무슨 일이지?"
"겨우 따라잡았군. "
"그건 내가 원한 대답이 아닌데? 무슨 일이지?"
"전에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고 했지 않나? 그때 얘기를 못 끝냈으니 마무리하러 온
거지. "
골치 아픈 녀석이었다. 그때는 카이렌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 싫어서 서둘러 보내
버렸다.
그리고 그런 라한의 심경을 샤르비엘 후작이 모를 리 없다 그래도 귀족들 사이에서
굴러먹었으니 눈치만큼은 빠를 테니 말이다. 헌데, 지금 와서 이 무슨 고약한
심보인지.
"원하는 게 뭐야?"
"동행을 두 명 뒀으면 하네. "
"동행? 더 필요 없는데. "
"아니 필요할 걸세. 나오게. "
샤르비엘 후작이 뒤를 보며 말했다. 이에 샤르비엘의 뒤에 있던 부하 기사 두 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뭐하자는 수작이야?"
"수작이랄 것까진 없지 않나? 허허허, 먼저 소개하지. 이쪽은 덩치는 크지만
마법사라네. 자꾸 기사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더군. 그리고 여기 곱게 늙은 이
친구는 정령사일세. 땅의 중급정령을 소환하는 꽤나 대단한 실력자이지. "
"반갑다. 난 파울이다. 단장님 말씀대로 마법사이지. 덩치만 보고 기사로 오해하지
말라고. "
마법사 헤피에타 파울. 나메라 왕국에서는 상당히 귀중한 인력으로 손꼽힌다. 겨우
서른의 나이에 5 서클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 흘러서 5 서클 마스터가
되고, 더 노력해서 6 서클이된다면 대륙에서 손꼽히는 마법사가 되는 셈이다.
"해리언이다. 직업은 정령사. "
정령사 피트리아 해리언. 나메라 왕국 최고의 정령사로 꼽힌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는 서른 정도지만, 실제로는 쉰이 넘었다. 조화를 중시하는 정령사이기에
겉모습이 늙지 않았을 뿐이다.
"이봐. 샤르비엘 후작. 내가 저들을 일행에 넣겠다고 한 기억이 없는데?"
"뭐, 당장 어떤 힘이 되지는 않을 걸세. 하지만, 저들이 있으면 우리 나메라 왕국
내에서만큼은 통행이 자유로울 거야. 저들의 지위가 생각보다 높거든. 아마 내가
저들의 단장이라는 위치만 아니었으면, 나도 고개를 숙여야 할지도 모르지. "
"딴청 피우지마. 내가 왜 저들을 우리 일행에 넣어야 하는 건데?"
라한이 언성을 높이며 샤르비엘 후작을 노려봤다. 절대 저들을 일행에 넣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라한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샤르비엘 후작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능글맞은 표정을 지어 라한의 속을 긁었다.
'뭐 저딴 녀석이 다 있어?'
"야! 내가 왜?"
"있지 이유 당연히 있지."
"이유가 있다고?"
"당연하지. 저기 있는 프리지아양은 엘퐁소 남작의 유일한 혈육일세. "
"그래서?"
라한이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이에 샤르비엘 후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레테아는 엘퐁소 남작의 사위가 되었다고 볼 수 있지. 그래서 며칠 전에 국왕께
작위를 내려주십사 하고 주청을 올렸지. 그리고 어제 레테아에게 작위가 내려졌네.
일단은 자작일세. "
"자.작?"
"자작이라는 작위는 우리 나메라 왕국의 자산이나 마찬가지일세. 귀족의 죽음은 곧
우리나라의 손해로 이어지게 되지. "
그제야 샤르비엘 후작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레테아와 프리미아를 엘퐁소
영주성에 10 일씩이나 가두어뒀던 일.
그건 시간을 끌기 위한 샤르비엘 후작의 술수였다. 그 10 일 동안 국왕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레테아에게 작위를 내린 것이리라.
"당했군. 젠장. "
욕설을 내뱉은 라한이 프리미아를 노려봤다. 그것도 모르고 당했냐는 무언의
질책이었다.
라한의 눈빛을 받은 프리미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드래곤인 자신이, 인간보다 위에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자신이 인간들에게
농락당하다니. 라한과 레테아, 로이나가 이 자리에 없었더라면 모두를 죽여 입을
막았을 게 분명했다. 그래야 자신의 실수가 조금이라도 감춰질 테니 말이다.
'요즘 내 꼴이 왜 이러냐?'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지금 와서 프리미아를 질책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좋아, 좋다고. 샤. 르. 비. 엘. 후. 작.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이, 이해해주게 자네와 일행이 너무 탐나서. 정말 그게 저."
라한이 살기를 흘리자 샤르비엘 후작의 몸이 마구 떨렸다. 그의 옆에 있던 샤르비엘
후작의 수행인들도 마찬가지로 몸을 떨어댔다.
라한의 실력에 대해 의심하고 있던 수행인들, 하지만, 앞으로 다시는 라한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은 하지 않으리라. 최소 라한 앞에서는 말이다.
"이해? 좋다고. 까짓것 일행으로 받아주지. 대신, 나중에. 아주 나중에 몇 배로
되갚아 줄 테니 명심하라고. "
말을 마친 라한이 몸을 돌려 앞장서갔다. 라한이 앞서가자 레테아와 프리미아,
휴란트와 로이나도 그 뒤를 따랐다.
"등장이 아주 멋지군, 앞으로 재미있겠어. "
"그러게. 요즘 장난감이 자꾸 생겨서 너무 좋은 거 있지. "
프라하와 투바가 동행이 된 파론과 해리언을 조롱했다.
이에 약간 다혈질이었던 파론이 순간 발끈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옆에 있던
해리언이 파론의 손을 잡고 제지시켰다. 경험 많은 해리언이었기에 프라하와 투바의
힘을 대충이나마 느낀 것이다.
일행이 모두 앞서가자 샤르비엘 후작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휴, 살았군. 파론. "
"예. 후작님. "
"저들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서 알려주게. "
"염려놓으십시오. "
파론이 샤르비엘 후작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루이에의 뒤를 터벅거리며
따라갔다. 해리언도 샤르비엘에게 고개를 숙이고 파론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샤르비엘 후작도 말을 타고 돌아갔다. 그가 어느 정도 거리까지
멀어졌을 때, 공간을 가르며 카이렌이 나타났다.
"라한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군. 후후, 어리석은."
카이렌은 벌써 오래전에 뒤에 멈춰 섰던 두 명의 사내를 살피고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뭔가 더 캘게 없나 싶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라한은 절대 죽지 않아.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내 마음에 든 생에 최초의
인간이거든, "
독 백을 내뱉은 카이렌이 라한이 간 곳을 뒤따라갔다.
과거 루이에를 찾아 나섰던 제이슨과 일행, 그때의 암습으로 제이슨은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근 두 달 이상을 병상에서 요양하며 보낸 것이다 이 때문에 루이에에
대한 제이슨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때부터 루이에는 굴레를 벗은 존재들에게서 완벽하게 적으로 규정되었다. 직접
피해를 당한 제이슨 뿐 아니라 모두의 결정이 그러했다.
한 명의 힘이 중요한 이때에 제이슨을 병상에 두 달이나 묶어둔 루이에.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굴레를 벗은 존재 모두에게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했다. 심지어 뒤늦게
합류한 류카라한까지도.
"잉글리아트에게선 아직 소식이 없어?"
"곧 올 거야. 보채지 좀 마. "
"토일렛은?"
"어련히 알아서 오겠지. 제발 좀 진정해. "
제이슨의 말에 루나시언이 짜증난다는 듯 날카롭게 대꾸했다. 하루 온종일 이런
질문을 반복하고 있으니 짜증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잉글리아트와 토일렛은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를 섭외하러 갔다.
잉글리아트는 류카라한과 크리퍼트를, 토일렛은 루시펠을 대동한 채였다.
그리고 오늘 새벽 정말 공교롭게도 거의 동시에 돌아온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헌데,
결과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었다. 이 때문에 제이슨과 루이나시언 모두
답답해하던 참이었다.
"넌 궁금하지도 않아?"
"궁금해. 궁금해 미치겠어. 근데, 하루 온종일 묻고 있는 네가 더 짜증나. 제발 그
입 좀 다물고 있어. 나도 답답해 미치겠으니까. "
"쳇. 소심하기는. "
루나시언이 발끈하며 대꾸하자 제이슨이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좀
심하게 보챈 것 같기는 했다.
그렇다고 저렇게 매정하게 나오다니. 괜히 민망한 마음에 땅바닥만 툭툭 찼다.
"근데, 루나시언. 그들이 우리."
"왔다. "
루나시언이 제이슨의 말을 끊고 전방을 가리켰다. 제이슨도 루나시언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텔레포트 해올 때 보이는 현상이었다.
이미 대응 마법진을 설치해놨기에 가능한 텔레포트였다.
은은하게 나오던 빛이 사라지자 세 명의 인영이 모습을 보였다. 토일렛과 루시펠,
거대한 덩치의 라이칸드로프. 이렇게 세 명이었다.
"왔군. "
"어서 오게, "
제이슨과 루나시언이 토일렛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토일렛 일행은 꽤 험난한 일을 겪었는지 몸 전체가 먼지 투성이였다. 특히,
루시펠은 팔에서 피까지 흘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처음 만났을 때 좀 싸웠지. "
토일렛의 담담한 말에 제이슨과 루나시언이 루시펠과 라이칸드로프를 차례로
바라봤다.
부상당한 루시펠에 비해 라이칸드로프의 몸에서는 그 어떤 흉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몸 전체에 먼지를 뒤집어 쓴 건 같지만, 부상이 없다는 것. 그건 루시펠이
라이칸드로프에게 완벽하게 패했다는 의미와 같았다.
"반갑네. "
"크크, 반갑다. 인간들이여."
라이칸드로프 이리아나 케이플. 그의 음침한 목소리에 제이슨이 몸을 미약하게
떨었다. 목소리만으로 어느 정도의 공포를 느꼈음이다.
"흠, 흠. 반갑군. 난 루나시언이라고 하네. 보아하니 검을 익힌 것 같군. 나도 검을
익힌 검사일세. "
"크크크, 검? 네가? 크크크크. 인간은 검을 들기만 하면 모두 익혔다고 하나?
가소롭군. "
케이플의 말에 루나시언이 발끈하며 검에 손을 가져갔다. 이에 토일렛이 루나시언의
어깨를 잡으며 눈으로 제지시켰다.
"왜? "
"싸우자고 모인 게 아닐세. "
"쳇. "
"하찮은 것들. "
라이칸드로프는 본질적으로 인간을 눈 아래로 본다. 지금의 케이플도 그런 본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라한이 프라하를 만난 게 큰 행운인 셈이다.
"어떻게 된 건가?"
"보시다시피. "
처음 케이플을 만났을 때, 토일렛과 루시펠은 곧장 공격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루시펠은작은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몸이 멀쩡했던 토일렛이 케이플을 끈질기게
설득했고, 이에 그도 수긍하며 합류한 것이다.
만약 케이플이 끝까지 싸웠다면 셋 모두 큰 부상을 입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셋
모두가 공멸했을지도.
2 대 1 의 싸움, 헌데도 대등하게 싸웠다는 건 그만큼 라이칸드로프가 강하다는 걸
의미한다. 결과가 이렇게 나오자 잉글라아트 일행도 걱정스러웠다.
"잉글리아트는 무사할까?"
"아직 안 왔는가? 흠, 골치 아프군. 케이플은 베어울프를 대동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싸웠네. 그랬기 때문이 이 정도에서 끝날 수 있었지. 헌데, 만약 그쪽
라이칸이 베어울프를 대동하고 싸운다면.힘들 걸세. "
토일렛의 말에 제이슨과 루시펠, 루나시언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케이플을
만났던 토일렛 일행은 정말 운이 좋은 경우였다. 하지만, 잉글리아트쪽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자칫, 잉글리아트를 이미 제압한 라이칸드로프가 베어울프를 대동하고 쳐들어올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지?"
"전투준비. "
"큭, 크크크크. "
제이슨과 토일렛의 대화에 케이플이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음이 가득 담긴 그런
웃음이었다
"무, 무슨 의미냐?"
"내가 라이칸이라는 걸 잊었나? 그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 역시 그의 실력에 비해
부족하지 않을 거다. 내가 너희들을 돕기로 한 이상 그놈은 너희들의 손끝하나
건드릴 수 없다는 뜻이지. "
"그렇.군. "
케이플의 말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자신의 약세를 드러낸 발언이
부끄러웠다. "하여간 연약한 인간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
"흠. "
케이플의 도발에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강해봐야 얼마나 강하겠냐며 안도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헌데, 막상 겪고 나자
라이칸드로프가 왜 물질계 2 인자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왔다. "
잠깐의 침묵이 흐를 찰나에 빛이 서서히 터져 나왔다. 토일렛 일행이 나타날 때
보였던 그런 빛이었다.
빛이 사라지자 네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잉글리아트와 크리퍼트, 류카라한,
라이칸드로프였다.
"괜찮은가?"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당연히 괜찮지. "
토일렛의 물음에 잉글리아트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토일렛을 비롯한
기존에 있던 인원 모두가 잉글리아트 일행을 살펴봤다.
깨끗했다. 일행의 몸 어느 곳에서도 전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찾아볼
수 있기는 했다. 라이칸드로프의 몸에서 꽤 많은 혈흔이 보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뭐, 보시다시피 저 녀석이 베어울프를 대동한 채로 엄청난 공세를 퍼붓더군, "
"그래서?"
"다 처리하고 잡아온 거지. 지금은 우리 입장을 이해하고 일행이 되기로 했으니까
적대하지는 말라고. "
잉글리아트의 대답에 일행 모두가 놀란 빛을 띠었다. 특히, 기존에 도착했던
케이플의 표정은 놀람을 넘어 경악하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한참 멍하게 있던 케이플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미스티크? 돈네리아 미스티크 맞나?"
"케이플. 이로군. "
"이거 정말 오랜만이군. 한 팔백 년 됐나?"
"그 정도 됐겠군 "
둘의 대화에 굴레를 벗은 인간 일행이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둘 사이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아서였다.
돈네리아 미스티크와 이리아나 케이플은 라이칸드로프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했다.
동시대에 나타나서 함께 다니며 엄청난 악명을 떨친 탓이다.
"근데 어쩌다가?"
"휴- ! "
길게 한숨을 쉰 미스티크가 류카라한을 바라봤다. 자신이 류카라한에게
제압당했다는 의미였다.
미스티크의 행동에 케이플도 류카라한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놀랍군.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니. 인간이 맞긴 맞나?'
인간을 하찮게 생각했던 걸 일부 수정해야 할 듯했다. 자신이 느끼기에 류카라한이
자신보다 강해보였기 때문이다.
잉글리아트 일행이 미스티크를 찾아 갔을 때, 그는 베어울프를 대동해서
공격해왔다. 이때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 류카라한이었다.
그는 베어울프 수십 마리를 순식간에 베어 넘기고 미스티크를 압박했다. 그리고 채
5 분도 되지 않아서 그를 제압해버렸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이용한 확실하고
완벽한 승리였다.
'대단했지. 라이칸 둘과 싸워도 쉽게 패하지는 않겠어. '
그때를 떠올린 잉글리아트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는 류카라한과 한 배를 탄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을 느꼈다. 너무 압도적인 실력과 강한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든 것이다.
"뭐, 일단은 다 모였군. "
"며칠 쉬었다가 다 같이 갈 곳이 있다. "
류카라한의 말에 일행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류카라한이 가지는 실력 때문에
발언권이 강화된 탓이다.
"갈 곳이라니? 어디지?"
"엔샬라르 신전. "
"엔샬라르 신전? 들어본 적이 없는데. "
"없는 게 당연하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테니까. "
엔샬라르 신전은 지금 인정받는 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믿는 신전이다. 일종의 미신
숭배 단체의 근거지인 셈이다.
하지만, 단순이 이교도라고 규정짓기에는그 힘이 너무 강했다. 숭배한 대상이
힘이었고, 그 힘을 얻는 방법으로 골렘을 택했기 때문이다. 강력한 골렘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단체가 엔샬라르 신전의 신도들이었다.
류카라한은 엔샬라르 신전을 대륙에서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이다. 물론, 혼자
힘으로 한 건 아니었다. 제국의 수많은 기사와 마법사를 동원해서 공격했고, 한
번으로 안 되어서 두 번 세 번 계속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제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동원된 정예 반 이상 잃었으니 말이다.
피해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엔샬라르 신전을 붕괴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만약
실패했다면 대륙은 피바람이 몰아쳤을 터였다.
"거기는 왜?"
"힘이 필요하니까. "
"흠, 지금우리가 힘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미 사라진 유적에 매달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
"아니, 그 정도로도 부족하다. 라이칸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 약했고, 너희들도
약했다. 이 힘으로는 드래곤을 상대할 수 없어. 여기 있는 인원 모두가 덤벼도
로드인 로테마이어스 하나를 처리하지 못한다. "
류카라한의 말에 주변에 있던 일행 모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수치스러워서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는 못했다. 드래곤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류카라한이었고, 자신들보다 더 강한 존재도 그였기 때문이다.
'건방진 자식. '
'두고 보자. '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속으로는 저마다 욕설을 퍼부었다. 힘이 필요하기에
참고 있을 뿐. 후일, 일이 정리된다면 처리 대상 1 순위는 류카라한이 될 터였다.
다음은 라이칸드로프들이 될 테고.
"오늘은 쉬고 내일 이동한다. 여기서 두 달은 가야 할 거리이니 미리 준비를 해
두는 게 좋을거다. 아, 그리고 제이슨과 크리퍼트는 이곳에 남는 게 좋겠군. 이곳을
지킬 사람도 필요하니까 "
"이곳을 아는 존재는 우리밖에 없는데, 굳이 지킬 필요가 있을까?"
"당연히 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
말을 마친 류카라한이 홀을 나가 버렸다. 더 이상의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류카라한이 나가자 남은 일행들이 팔을 부르르 떨었다. 류카라한의 힘도
문제였지만, 지금은 지휘권이 더 큰 문제였다.
라이칸드로프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던 류카라한. 이 때문에
어느 사이엔가 류카라한이 수장처럼 되어 있었다. 어떤 큰 계기가 없다면 앞으로도
그의 지위는 확고할 듯했다.
라한 일행의 이동은 현재까지 순조로웠다. 사소한 몇 가지 일만 빼고.
라한 일행은 이동할 때, 돌아가면서 식사를 담당했다.
라한부터 시작해서 뒤늦게 합류한 파울과 해리언까지 모두 열두 명. 한 끼에 두
명씩 해서 평균 이틀에 한 번꼴로 자기 차례가 돌아왔다. 물론, 장난감이 되어있는
쿨샤크와 데메크도 포함한 수치였다.
"프리미아 너 밥 안 해?"
"내가 왜 해?"
문제는 프리미아였다. 조용히 식사준비를 하면 되련만, 그마저도 귀찮은지 하기
싫다고 버티기 일쑤였다. 뮬라 상단을 출발한 지벌써 4 일. 지금까지 두 번이나 이런
실랑이를 벌인 것이다.
"제발 말 좀 들어라. 나도 식사 준비하잖아. 대체 뭐가 문제야?"
"레테아하고 같이 하게 해 달라니까. "
인원이 열두 명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원하는 사람과 식사 당번이 되는 건 아니었다.
두 명의 이방인인 파울과 해리언, 장난감처럼 되어 버린 쿨샤크와 데메크 때문이다.

언제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네 명의 골칫거리. 이들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일행 중 쾌 강한 축에 들어가는 존재를 당번으로 함께 둬야 했다. 문제는 그 강한
축에 들어가는 일행에 프리미아가 포함된다는 거였다.
"말했잖아. 저 녀석들 관리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
"왜 하필 나야? 우리 일행에 인재가 그렇게 없어? 나 말고도 많잖아. "
프리미아를 제외하더라도 프라하, 투바, 카이렌, 로이나, 그리고 라한. 다섯 명
정도의 강자가 존재한다. 프리미아가 빠지더라도 관리 인원으로는 부족하지 않은
수였다.
하지만, 카이렌은 휴란트의 검술 수련 때문에 서로가 항상 붙어 다녀야 했다.
시간이 부족한 탓에 어쩔 수 없이 차별 대우를 한 것이다.
또, 로이나는 다크라이더 길드에서 전해오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 수시로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식사 당번이 되는 건 그나마 한가한 아침뿐이었다.
이런 저런 제약 때문에 두 명은관리 임무에서 빠졌다 결국, 프리미아가 포함되지
않으면 네 명의 관리자가 맞춰지지 않는 셈이다.
"프리미아. 네가 형하고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건 알겠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고집 좀 그만 피우고 말 좀 들어라. 제발. "
"좋아. 좋다고. 레테아와 함께 당번이 하지 못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고 쳐.
하지만, 그 꼬마 정령은 왜 놀기만 하는 건데?"
"꼬마 정령? 테세르?"
프리미아가 테세르를 걸고 넘어졌다. 라한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었다.
'젠장. 제대로 걸렸군. '
라한이 골치 아프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정령이 식사 당번하는 거 본 적 있어?"
-맞아. 내가 어떻게 식사 당번을 하냐?
라한의 말을 테세르가 맞받았다. 식사 당번이 되는 건 싫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프리미아는 조금도 굽힐 줄 몰랐다.
"그래. 일반적인 정령이라면 그렇겠지. 근데 난 식사하는 정령도 난생 처음 봤거든.
넌 먹잖아. 먹으면 식사 당번해야지 안 그래?"
-그건 음, 그거야.
테세르가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솔직히 대꾸할 말이
없었으리라.
라한이 걱정한 건 테세르의 식성이었다. 예전에는 아무런 음식도 먹지 않던
테세르였다. 헌데, 언젠가부터 자신이 먹는 음식을 탐내기 시작했다. 테세르의
특이한 행태에 라한이 음식을 조금씩 주기 시작했고, 결국 지금에 이르렀다.
현재 테세르는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식사하고 배설했다. 음식을 섭취해서 영양분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취미생활로 먹는 것이다.
"프리미아. 네 생각이 뭔지는 알겠는데 테세르는 안 돼. "
"왜 안 돼? 먹으면 식사 준비도 해야 당연한 거잖아. "
"그건 맞는데, 이 녀석은 특이한 정령이잖아. 이 녀석이 저 이방인들 눈에
발견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그건 그렇지만. 에 또, 그래도 싫어 저 녀석이 식사준비 안 하면 나도 안 해. "
프리미아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죽어도 요리는 하기 싫다는 태도였다.
'어휴, 요리가 어려운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버티지?'
요리라고 해봐야 별거 없었다. 가지고온 건포를 끓는 물에 넣고 함께 끓이는 정도에
불과했다. 헌데, 그마저도 싫다고 버티다니.
"좋아. 알았어. 넌 식사당번에서 제외시켜주지."
"정말? 정말이지? 나 식사 준비 안 해도 되는 거지?"
"그래. 안해도돼. 뭐, 형한테 말하면 형이 대신할테니까 상관없어, "
라한의 말에 프리미아의 눈이 도끼눈이 되었다. 결국, 프리미아가 빠진 자리를
레테아가 메운다는 얘기이지 않은가. 자신의 귀찮음 때문에 레테아를 고생시키기는
싫었다.
"야! 너, 라한. "
"왜?"
"쳇. 사악한 인간 같으니라고. "
"내가 사악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니까. "
"젠장. 됐다. 됐어 그냥 내가한다. 해."
짜증스럽게 내뱉은 프리미아가 일행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건포를 대충 꺼내
물로 씻기 시작했다.
프리미아가 사라지자 라한이 비릿하게 웃었다.
"쯧쯧. 저렇게 단순한 드래곤이라니. "
-주인아. 내가 보기엔 저 드래곤이 단순한 게 아니라 주인이 사악한 거야.
"시끄러. 망할 정령 같으니. 너 앞으로 먹지 마 "
-주, 주인. 식사는 내 정령 생활의 유일한 취미생활이라고. 그걸 못 하게 하는 건
날 두 번 죽이는 거야. 내가 먹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주인도 잘 알잖아.
테세르의 대답에 라한도 약간의 긍정을 표했다. 먹을 때 보이는 행복해하는 표정.
의도적으로 지으려고 해도 안 되는 얼굴이었다.
'젠장. 뭔 정령이 이 모양이야?'
"테세르. 너 먹지 않는다고 굶어 죽는 건 아니잖아. "
-주인아. 만약 주인이 인챈트나 마법을 못하게 되면 어떨까? 나한테는 먹는 게
그거하고 같다고.
"빌어먹을. 그래 배 터지도록 먹어라. "
테세르에게 짜증을 부렸지만, 얼굴 표정만큼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프리미아의 입에서 다시는 식사 당번에 대한불평이 나오지 않을 터.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최소한 같은 문제로 시끄럽게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뮬라 상단을 떠난 지 5 일 째.
라한 일행이 나메라 왕국의 남쪽 국경 지역에 도착했다. 기존에 있던 라한
일행이었다면 2-3 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아진 일행과 체력이 약한 휴란트 때문에 꽤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정지!"
라한 일행이 다가가자 국경 수비를 맡고 있던 경비원이 일행을 막았다. 검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봐. 파울, 해리언.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왜 우리가 해야 하지?"
"너희가 있으면 통행하기 편할 거라면서? 샤르비엘 후작이 그렇게 말했으니 알아서
해야지. "
"그렇.군. "
어렵사리 대답한 파울이 앞으로 나섰다. 거구의 파울이 나서자 경비원들의 얼굴에
긴장한 빛이 어렸다. 적아를 떠나서 거구의 사내를 대면하는 그 자체가 부담을 주기
충분했다.
"뭐, 뭐냐?"
"이 정도면 신분 확인이 되나?"
당황한 경비원에게 파울이 착용하고 있던 반지를 내밀었다. 나메라 왕국 왕실에서
직접 하사한 푸른색 반지였다.
나메라 왕국에서는 귀족에게 작위를 증명할 수 있는 반지를 하사한다. 이 때문에
나메라 왕국의 귀족은 모두 반지를 하나씩 착용하고 있다.
공작은 검은색 반지를, 후작은 흰색 반지를, 백작은 푸른색 반지를, 자작과 남작은
각각 붉은색 반지와 초록색 반지를 착용한다.
그리고 귀족이되 작위가 없는 귀족과 그 가족들은 회색 반지를 착용한다.
물론, 이 모든 반지에는 나메라 왕국만의 고유 문양이 새겨져 있다. 다른 일반적인
예물용 반지와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파울은 작위가 없다. 하지만, 마법사라는 점과 실력을 감안해서 푸른색 반지를
하사받았다. 경비원에게 내민 반지 자체가 백작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백작님이시군요. 들어가십시오. "
"수고해. "
짧게 대꾸한 파울이 고개를 돌려 라한을 바라봤다. 이 정도면 잘했지라고 자랑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파울의 시선을 받은 라한이 비릿하게 웃으며 한 마디 했다.
"싸구려로 별 걸 다하네. "
"싸, 싸구려?"
"마법 재료 아니잖아. 그럼 싸구려지. "
라한이 귀한 재료를 구분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인챈트가 되느냐 안되느냐, 라한은
그 한가지만 따졌다. 마나를 흡수하는 성질이 강하면 강할수록 비싼 재료가 되는
것이다.
경비원을 지나친 라한 일행이 국경을 통과했다. 약 30 분쯤 계속 걸어가자 또 다른
국경이 나왔다. 수아나 왕국의 국경이었다.
수아나 왕국과 나메라 왕국이 전통적으로 우방국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경제적, 정치적 교류는 자유롭게 하는 편이었다. 수아나 왕국의 개방 정책의
성과였다.
대륙 최고의 관광지로 손꼽히는 곳인 수아나 왕국. 개방 정책 하나만으로도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라한이 수아나 왕국의 국경에 도착하자 경비병이 일행을 제지시켰다.
"정지 ! 멈춰라. "
"파울, 해리언. 알아서 하겠지?"
"흠. "
짧게 신음을 흘린 파울이 다시 나섰다. 역시나 거구의 사내라서 그런지 경비원의
얼굴에 긴장이 흘렀다.
"안녕하신가?"
"용.건이 뭔지 밝혀라. "
"수아나 왕국의 풍경이 아름답다 하여 여행을 하는 중이었네. 아, 우린 나메라
왕국의 귀족일세. 여기. "
이번에도 파울은 착용하고 있던 반지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자국 사람이
아니었기에 말투도 반쯤은 존대가 섞여 있었다.
파울의 행동에 경비병이 반지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빼려는 시늉을 했다.
"어?"
"으차! "
쑤욱!
결국 경비병이 파울의 손에서 반지를 빼냈다. 반지를 몇 번 쳐다 본 경비병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고맙소. 통과!"
"이, 이거 뭐지?"
경비병은 반지를 뇌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빼서 가졌던 것이다.
"당신들 일행은 통과됐소. 빨리 가시오. "
"잠시만. 자네 뭐하는 건가?"
"뭐가 말이오?"
"왜 내 반지를 가져가는 겐가?"
파울의 대꾸에 경비병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연신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뇌물
받은 걸 들킬까 염려하는 듯했다
"이 반지는 내게 준 것 아니오?"
경비병이 낮은 목소리가 더 작게 변했다.
"무, 무슨 소린가? 이 반지가 어떤 반지인지 알고 그러는 겐가? 그건 나메라 왕국의
귀족임을 증명하는 반지일세. "
"아! "
그제야 경비병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경비병도 나메라 왕국의 귀족들이 특이한 반지를 착용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반지를 직접 내밀어서 신분을 증명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너무 생소한 경험이었기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수행하는 기사들이나 시종을 통해 신분을 증명한다. 필요하다면
귀족이라는 증서를 가지고 다니는 것 역시 수행인이 할 역할이었다. 지금까지 수
없이 많은 귀족을 만났지만, 그 사람들 모두 수행인을 통해 신분을 증명했다. 이런
상황은 난생 처음이었다.
'어쩌지?'
'이 무슨 창피냐?'
경비병과 파울 모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경비병은 귀족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겁에 질린 상태였다. 반면, 파울은 뒤에 있는 라한 일행
보기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수가 없었다.
"어쩌죠?"
"반지나 돌려주게. "
경비병의 낮은 물음에 파울 역시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둘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저, 저는."
"들어가도 되겠지 7"
"예. 통과입니다. "
"오늘 일은 잊게. "
말을 마친 파울이 고개를 들었다. 그 상태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국경을 통과했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세상 참 재미있군. "
파울의 뒤를 따라가던 라한이 작게 독백했다.
-난 주인이 더 재미있어.
테세르의 말이었다.
테세르는 '만약 라한이 파울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를 생각했었다.
결론은 '당당하다' 였다.
뇌물을 주든지 폭력을 행사하든지 라한은 언제는 당당했다. 일단 자신이 했던
일이라면 후회하지 않는 성격. 설사 그게 실수라 하더라도 반성은 할지언정 후회는
절대 하지 않는. 라한은 그런 성격이었다.
라한 일행이 수아나 왕국 국경 마을의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역시나 여기저기서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초리들. 로이나와 프리미아의 외모가 불러온 일이었다.
"귀찮아. "
"흥. 아름다움이 뭔지 모르는 놈.
프리미아가 라한의 말에 딴죽을 걸어왔다. 헌데도 라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을 모른다는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 탓이다.
라한의 조각 실력이나 미술 실력은 상당히 뛰어난 수준이었다. 하지만, 미적 감각은
형편없었다. 아무려면 이필리에 종합학교에 서도 미적 감각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내렸겠는가? 라한도 자신의 미적 감각이 형편없음을 인정하기에 대꾸를 하지
않았음이다.
"저기 앉지. "
카이렌도 은신을 풀고 라한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친근하게 라한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오늘도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 같지?"
"야, 카이렌. 네가 이런 짓 하는 게 불을 지피는 거라는 거 알지?"
"물론. "
카이렌은 분명 엘프 남성이었다. 하지만, 외모만큼은 여느 여자 못지않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라한에게 귓속말을 하는 그 자체가 홀에 앉은 많은
남성들의 질투를 유발시켰다.
'예전에는 저렇지 않았는데. '
예전의 카이렌은 자신의 외모에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로 오해하는
그 자에 피아구분을 가리지 않고 분노를 표출할 정도였다.
그런 카이렌이 변했다. 투바와만난 이후부터였다. 투바에게 어떤 언질을 받았는지,
요즘은 자신의 외모를 은근히 이용하기까지 했다.
'이런 식의 변화를 원한 건 아니었는데. '
라한은 카이렌과 투바의 성격이 반 정도씩 섞이길 바랐다. 그렇게 되면 여자를
밝히는 투바의 성격이 고쳐질 거라 믿었다. 또, 카이렌의 콤플렉스도 어느 정도는
치유될 거라 믿었고.
헌데, 뭔가 변화의 방향이 잘못 되었다 카이렌만 변하고 투바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거기다 카이렌이 투바를 너무 많이 닮아가고 있었다. 아직 여자를 밝히지는
않지만, 외모를 이용하는 정도까지 이른 것이다. 이 상태라면 투바처럼 되는 것도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뭘 드시겠습니까? 저희 여관에는."
"식사가 될 만한 걸로 아무거나. 12 인분. "
점원 꼬마가 뭔가 장황하게 설명하려 하자 라한이 말을 끊어 버렸다. 로이나와
프리미아, 카이렌을 향한 끈적끈적한 시선이 짜증스러워서였다.
이제 10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점원도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이곳에 묵을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남자들의 질투를 받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답이 나왔다.
"라한. 그래도 오늘은 조용하네. "
"조용한 게 아니라 조심하는 지겠지. 그래도 인원이 열두 명이라서 쉽사리 덤비기
힘들 테니까. "
로이나의 말을 라한이 담담하게 받았다. 여관에 들를 때마다 겪어온 상황이라서
이젠 별 감흥도 없었다. 뭐, 거의 대부분 프라하나 파울, 해리언이 나서서 처리하니
신경 쓸 일이 없기는 했다.
대략 30 분이 지났을 때, 예의 그 점원이 식사를 들고 나왔다. 열두 명의 식사라 세
번이나 왔다 갔다 해서야 겨우 식사를 다 차릴 수 있었다.
"맛있게 드십시오. "
점원의 말을 뒤로 하며 라한이 먼저 수저를 들었다. 라한의 나머지 일행 모두가
수저를 든 후에야 쿨샤크와 데메크가 수저를 들었다. 영락없는 노예의 모습
그대로였다.
식사를 대충 마친 라한 일행이 여관 2 층으로 올라갔다. 객방이 2 층과 3 층에 모두
모여 있어서였다.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네. "
"저 파울 녀석 덕이지. "
"응? "
"저 녀석 덩치가 좀 되잖아 덩치 덕 좀 보는 거지. "
"그런가?"
파울의 덩치는 인간이라 부르기 힘들 정도로 컸다. 제아무리 간 큰 인간이라도 저런
덩치가 포함된 열두 명의 파티는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 라한이 파울과 해리언을
일행에 받아들이고 본 유일한 혜택인 셈이다.
"아침에 몇 명이나 기절해 있을까?"
"그래도 오늘은 조용하게 끝났으니 열 명 미만이지 않을까?"
라한 일행이 여관에 묵으면, 아침에 십여 명의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밤사이에
프리미아, 로이나, 카이렌을 덮쳤던 사내들이었다. 물론, 그들 모두 죽지는 않았다.
다만, 죽지 않을 만큼 두드려 맞아서 병원 신세를 꽤 오래져야 할 뿐이다.
"내기 할까? 난 열 명 이상 걸지. "
"좋아. 난 열 명 미만. "
프라하와 투바가 내기를 시작했다. 프라하는 열 명 이상이었고, 투바는 열 명
미만이었다.
"좋아, 내기 성립. 내일보자고."
"크크. 이번엔 내가 이길 거야. "
프라하와 투바가 서로 도박의 결과를 예상해보며 객방에서 잠을 청했다.
투바의 희한한 결심
다음날, 프라하와 투바가 동시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볼까?
후후후, 확인해보자고.
먼저 프라하가 객방을 뛰쳐나갔다. 그 뒤를 투바가 느긋하게 뒤 따랐다.
투바는 이번 내기에서 자신이 이길 거라고 확신했다. 평소에도 기절해 있던 사람
수는 겨우 열 명에서 열두 명 사이였다. 헌데, 어제는 정말 조용하게 취침했으니 열
명이 안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나, 둘, 셋.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셋, 열넷. 이봐! 투바! 내가 이겼다고.
먼저 나갔던 프라하의 말에 투바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돼. 어제 그렇게 조용했는데 어떻게 평소보다 더 많을 수가 있지. "
밖으로 나온 투바도 홀에 쓰러진 사람을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프라하의 말처럼
정확히 열네 명이었다. 어이없는 마음에 프라하만 멍하게 쳐다봤다.
"내가 이겼지? 오늘 저녁식사 당번은 투바 네 담당이야. 푸하하하. "
"어떻게 더 많을 수가 있지?"
"히히히, 오늘 점심, 저녁식사 당번을 모두 투바 네가 해야겠군. "
"어떻게 더 많을 수가 있냐고. "
투바는 어떻게 더 많으냐는 물음만 연신 해댔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투바의 멍한 표정에 프라하가 설명을 해왔다.
"어제 홀에 있던 사람이 다른 여관보다 적었나? 그건 아니잖아. 지금까지 우리가
들렀던 여관의 손님 수하고 거의 비슷했다고. 근데, 어제는 너무 조용하게 끝났지.
"
"그래서?"
"그들은 밤에 덮치려고 참았던 거야. 어제 파울 녀석의 표정이 좀 가관이었거든.
경비병하고 있었던 실랑이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겠지. "
"그.렇군. "
그제야 투바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들을 본 사람들의 수가 줄지 않았으니 시비를 거는 사람도 거의 비슷해야
정상이다. 평소에는 홀에서 한, 두 팀이 시비를 걸고 나머지는 밤에 덮치는
상황이었다. 헌데, 어제는 홀에서 아무런 시비가 없었으니 결국, 밤에 덮칠 사람이
많아진다는 얘기와 다름 아니었다.
"젠장. "
"바보, 투바. 넌 나름대로 똑똑하다고 하는 놈이 내기만 하면 프라하한테 지냐?"
뒤늦게 내려오던 라한이 투바를 비웃었다. 항상 프라하를 가지고 놀던 투바. 헌데
내기에서만큼은 프라하를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라한이 보기에는 그런 투바가
한심했던 모양이다
"쳇. "
"투바. 그건 네가 세상 경험이 부족해서 그래. "
"."
라한의 말에 투바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일견 타당한 말이라서 대꾸할 말이 없었다.
평소에 프라하를 가지고 놀았던 건 모두 마계 바하라 성에서 하인들을 가지고 놀 때
써먹던 방법이었다. 대체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응하게 하는 그런 방식이라서
지금까지는 프라하에게 잘 먹혔다.
하지만 내기는 다르다. 그땐 프라하도 부족하나마 머리를 짜내게 된다. 그 부족한
머리를 짜낼 때, 프라하는 그간에 있었던 수많은 경험을 무의식중에 사용했다.
투바와 비교도 안될 만큼 경험이 많기에 프라하가 승리하는 공식이었다.
"라한. 경험은 어떻게 해야 쌓이지?"
"경험이라. 나도 경험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확실히는 모르겠다. 그냥 내
생각으로는 시배를 가려내는 일에 많이 휘말리는 게 우선 아닐까? 그때마다 대화,
혹은 무력으로 해결하게 될 테고, 그런 일이 쌓이고 쌓이면 그게 다 경험이 되고
노련함이 될 것 같은데. "
"시비라."
투바가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며 라한이
프라하에게 말했다.
"프라하, 넌 그 녀석들 좀 깨워라. "
그 녀석들이란 라한 일행의 장난감이 된 쿨샤크와 데메크, 불청객으로 찾아온
파울과 해리언을 이르는 말이다.
"알았어. "
프라하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투바와의 내기에서 이긴 게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투바, 넌 식당가서 아침 준비 좀 부탁해줘. 간이 식량도 충분히 준비해달라고
하고. "
"알았다. "
투바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라한의 말에 가슴에
남아서였다.
"나머지 일행은 내가 깨울게. "
라한이 다시 객실로 올라갔다. 모두가 깨어나면 또 다시 분주한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프리미아와 라한의 신경전도 계속 이어질테고.
한이 객실로 올라가자 투바가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건성으로 라한이 부탁했던
걸 말해주면서 생각에 잠겼다.
'경험이라 그래, 누가 뭐래도 난 아직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마족이었지. 그렇다고
그냥 넋 놓고 경험이 쌓이길 기다릴 수는 없는데. '
투바는 누군가에게 지는 걸 몹시 싫어했다. 특히, 맞먹는 것조차 화가 나는
프라하에게는 더 더욱 그랬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마계 서열 제 2 위가 아니던가.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그 자체도
약간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헌데, 그런 이들에게 진다? 자존심이 무너지다
못해 짓밟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경험? 그래. 경험 그까짓 것 뭐 대충 시비 막 걸어서 많이 싸우면 되는 거 아냐?'
투바가 묘한 결심을 했다. 경험을 쌓는 방식으로 시비 거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분명 라한이 말한 시비는 이런 방식으로 걸라는 말이 아니었다. 헌데, 투바는 이
정도밖에 생각이 닿지 않았다.
원래 시비를 잘 걸었던 프리미아에 이어 투바까지. 왠지 라한 일행의 행보가 상당히
시끄러워질 듯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라한 일행. 대충 몸을 추스른 탓인지 몸 상태가 좋아보였다.
어차피 체력적으로 한계를 드러낸 사람은 휴란트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마법사인
파울이 수시로 회복시켜줬기에 체력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다만, 강행군에 심적인
피로가 쌓였을 뿐이다.
'시작해볼까?'
음흉한 미소를 지은 투바가 라한에게 다가갔다.
그는 경험 쌓기 작전을 라한에게서 시작할 생각이었다. 일행 중 처세술에 가장 능한
존재가 라한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항상 남들보다 한 발 앞서서 생각하고 행동했던
라한. 그와의 꾸준한 대결구도로 라한만큼 성장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라한. 대체 옷 꼴이 그게 뭐야?"
"신경 꺼. "
"어떻게 신경 안 쓸 수가 있어? 그래도 네가 우리 일행의 리더나 마찬가지잖아.
근데 리더 옷 꼬락서니가 그게 뭐야? 리더면 리더답게 품위를.
"옷이 밥 먹여 주냐? 너나 잘 해. "
"옷이 밥 먹여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끄럽다고 했다. "
라한이 강압적으로 치고 나오자 투바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낀 탓이다.
'젠장. 역시 너무 강적이다. '
경험 쌓기 작전의 첫 시작이 너무 허무하게 마무리 되었다. 라한으로 첫 시작을
하기에는 무리였던 듯했다.
'뭐, 그럼 다른 상대로 해야지. '
생각을 마친 투바가 프리미아에게 다가갔다. 지금까지 라한에게 만큼은 철저하게
당해왔던 프리미아. 그녀라면 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 듯했다.
"이봐. 프리미아 아, 프리시아 엘퐁소라고 불러야겠군. "
"무슨 일이냐? 건방진 마. 흠. "
마족이라고 말 하려던 프리미아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음을 인지한 것이다.
프리미아, 로이나, 투바, 프라하. 이 네 명의 신분은 쿨샤크, 데메크, 파울,
해리언에게 비밀이었다. 카이렌과 라한 식구들만 정확한 정체가 알려진 셈이다.
"건방진 뭐?"
"무슨 수작이지?"
"수작이라기보다는 그냥 심심해서 말이야. 너 요즘 퍽 하면 라한한테 시비
건다면서?"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
프리미아가 불쾌한 듯 고개를 돌렸다. 마족인 투바와 함께 있는 그 자체가 찝찝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투바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든 프리미아를 말로
눌러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에는 다시 라한에게 도전할 생각이었고.
'이 정도에서 무너지면 안 돼. 내가누구야? 마계 서열 2 위 아냐? 겨우 드래곤
따위에게 무너진다면 종족을 갈아야지. 암. '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은 투바가 다시 입을 열었다.
"라한한테 시비 걸어서 뭘 건졌는데?"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했다. "
"쯧쯧, 넌 그래서 안 돼. 라한한테 덤비는 건 너한테 무리라니까. 왜 자기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덤비고 난리야?"
투바의 빈정대는 말투에 프리미아가 눈을 부라렸다. 아무런 기세도 일으키지
않았건만 눈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듯했다.
'좋아, 분위기 탔어. '
"노려보면 어쩔 건데? 이 자리에서 공격이라도 할 생각이야?"
"이, 이."
"멍청하기는. 레테아하고 결혼 약속 했지? 결혼 약속 했으면 신부 수업이나 좀 더
하지 그래? 괜히 라한 붙들고 장난치지 말고. "
투바의 말이 점점 심해졌다. 본격적으로 프리미아를 몰아붙이기 시작하자 자신감이
붙은 듯했다.
"이 미천한."
"프리시아, 무슨 일이오?"
프리미아가 막 화를 내려고 할 때, 레테아가 끼어들었다. 좀 멀리 떨어져서도
프리미아를 계속 지켜봤던 모양이다.
"아, 아니에요. "
"괜찮으니 말해보시오. 무슨 일이오?"
레테아가 프리미아에게 말을 놓았다. 라한 일행에 불청객이 참가해 있었기에
프리시아 엘퐁소로 대한 것이다.
이런 레테아의 말투와 호칭 때문에 둘 사이도 꽤나 가까워졌다. 아무래도 드래곤이
아닌 인간으로 대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듯했다.
"투바가 저한테 신부 수업이나 하래요. "
"허허, 겨우 그런 일이었소? 투바님. "
"왜?"
"프리시아의 신분이 뭔지 잊었습니까? 굳이 신부 수업을 할 필요는 없지요. "
레테아가 프리미아의 편을 들며 투바에게 반박했다.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아주
당연한말이었다. 하지만, 너무 당연한 말이기에 오히려 투바가 할 말이 없었다.
설사 드래곤의 입장이라 하더라고 신부 수업은 별 필요가 없다. 그 막강한 힘으로
요리사 몇 명만 납치하면 되니 말이다.
또, 프리시아 엘퐁소라는 신분도 신부 수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제 자작이 된
레테아 필슨. 자작부인이 손에 물 묻힐 일이 있겠는가. 이래저래 프리미아가 신부
수업을 할 필요는 없는 셈이다.
"쳇, 이제 2 대 1 로 공격하겠다 이거야? 두고 보자. "
결국 투바가 패배를 선언하고 자리를 떴다. 투바가 사라지자 프리미아가 레테아의
품에 살포시 안겼다. 자신을 귀찮게 하던 투바를 사라지게 만든 레테아가 너무
고마워서였다.
사실, 투바는 2 대 1 이라는 것보다 레테아의 존재가 더 껄끄러웠다. 라한이 다른
면에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형에게만큼은 극진했기 때문이다. 자칫,
레테아의 심기를 어지럽게 했다가는 라한이 가만히 있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젠장. 내가 언제부터 라한을 무서워하게 됐는지. 에고, 내 신세야. '
투바가 라한을 무서워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라한을 보기만 해도 오금을 저리는
그런 건 아니었다. 아주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라한의 의견에 반박하지 않는 정도에
불과했다.
실제로 사소한 일에서는 서로 장난도 잘 치는 좋은 친구사이였다. 그건 투바뿐
아니라 프라하, 카이렌을 비롯한 기존의 라한 일행 모두가 그랬다.
하지만, 일행 모두에게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아무도 라한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일행들은 문득 '이런 게 카리스마라는 거구나. ' 라고 느꼈다.

류카라한과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엔샬라르 신전을 찾아 떠났다. 본진에 남은


굴레를 벗은 존재는 제이슨과 크리퍼트뿐이었다.
"아, 심심해. "
"그래도 심심한 게 귀찮은 것보다 좋지 않은가?"
"난 차라리 귀찮은 게 나아. 빌어먹을 류카라한. "
제이슨의 눈에 분노의 감정이 번뜩였다. 엔샬라르 신전을 찾는 여정에 참가하지
못한 게 화났던 모양이다.
"근데, 이상하군. 왜 정령사인 자네를 데리고 가지 않았을까?"
"망할. "
사라진 어떤 지역을 찾는 데 가장 적합한 직업은 정령사였다. 그 다음으로 마법사,
검사순서일 터. 헌데, 굴레를 벗은 존재들 중에 상급정령사는 제이슨뿐이었다.
결국, 엔샬라르 신전을 찾는데 꼭 필요한 존재가 제이슨인 셈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류카라한은 제이슨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가 제이슨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자네 류카라한에게 밉보인 거라도 있는가?"
"밉보인 거? 물론 있지. "
"뭔가?"
"이놈의 입이 문제지. "
"입? 아하. 수다 말이군. "
굴레를 벗은 존재들은 대체로 과묵한 편이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거의 하지
않는 성격을 가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류카라한의 과묵함은 정도가 심했다. 반대로
제이슨은 다른 굴레를 벗은 존재와는 달리 수다쟁이에 가까웠다.
"내가 내 입 가지고 말 하는데 왜 지가 난리야?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허허허, 자네도참. 이번 기회에 수다떠는 버릇을 고쳐보는 게 어떤가?"
"말 하라고 있는 입으로 말도 못하면 그게 사는 건가? 난 자네들의 그 무거운 입이
더 답답하네. "
"그런가? 하하하. "
크리퍼트가 웃음으로 대답을 받았다.
제이슨이 좀 시끄러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굴레를 벗은 존재들은 제이슨의
수다를 은근히 즐기는 편이었다. 어쩌면 로테라 숲에서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제이슨의 수다에 익숙해진 건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지금 제이슨의 수다는
무료한생활의 청량음료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으, 으.답답해서 못 살겠군. "
"그렇게 답답하면 바람이나 좀 쐬고 오는 게 어떤가? 아, 자네 후손이라는
레드리안이나 좀 보고 오는 게 어떤가? 다른 동료들이 돌아오려면 못해도 두 달은
걸릴 걸세. 빨리 갔다 오면 충분한 시간일 거야. "
"그럴.까?"
찌푸려졌던 제이슨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후손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즐거운
듯했다.
"여긴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 갔다 오게. 두 달 안에는 꼭 돌아와야 하네. "
"걱정 말게. 금방 갔다 오겠네. 올 때 자네 선물은 꼭 챙겨오지."
"여행 자금은 있어야겠지? 자, 받게. "
철렁! 착!
"하하하. 역시 자네뿐이구먼. 그럼 나중에 보세. "
제이슨이 서둘러 문을 나섰다. 제이슨이 나가자 크리퍼트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했다.
제이슨의 후손은 비록 귀족은 아니었지만 생존해 있기는 했다. 거기다 그 후손도
쾌나 큰 상단을 꾸려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헌데, 자기 후손은 이미 2 백 년 전에 멸문해 버렸다. 세상 천지에 자신의 혈육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이다. 괜스레 혼자 남겨졌다는 외로움에 서글퍼졌다.
한편, 레드리안을 찾아 나선 제이슨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행 준비는 필요 없겠고. 일단 가자고. "
현재 그들의 본거지는 대륙의 남부 지역에 위치한 베센 왕국. 헌데, 레드리안이
있는 곳은 대륙의 북부 끝 왕국인 나메라 왕국이다. 북쪽으로 이동해서 루이나
왕국과 케라스 왕국을 거쳐 수아나 왕국을 지나면 나오는 곳이다.
"서둘러야겠군. "
수아나 왕국의 국경을 출발한 지 15 일.
라한 일행이 멜카투라 산의 기슭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라한 일행은
조용한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수시로 투바와 프리 미아가 말싸움을 한 탓이다.
그 덕에 라한은 귀찮은 일 없이 조용히 이동할 수 있었다. 라한에게 만큼은 다행한
일인 셈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너무나 첨예한 설전과
대립. 그리고 불꽃 튀는 심리전. 이 때문에 라한과 프리미아의 언쟁보다 더 길고
시끄러웠다. 프리미아를 한방에 잠재울 능력이 투바에게는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프리미아에게 도 투바를 한 방에 잠재울 능력이 없었다.
"쯧쯧, 공부 좀 더하라고. "
프리미아를 약 올린 투바가 자리를 떴다 이번 언쟁에서는 투바가 승리한 것이다.
'지금까지 2 승 41 패인가? 뭐, 이제 시작이지. '
투바가 프리미아와 말싸움을 시작한 지 이제 9 일이 지났다. 헌데, 말싸움을 한
횟수는 이미 40 회를 넘어섰다. 하루에 네, 다섯 번의 말싸움을 한 셈이다.
그렇게 싸운 결과가 겨우 2 승 하지만, 39 패를 할 때까지 단 1 승도 없었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는 거였다.
'2 대 1 만 아니면 훨씬 많이 이겼을 텐데. '
프리미아 곁에는 항상 레테아가 있었다. 잠시 안보이다가도 설전이 조금 치열해지면
은근슬쩍 나타나서 프리미아 편을 들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초반에는 거의
프리미아와 레테아의 압승이었다.
헌데, 언젠가부터 조금씩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투바가 레테아와 프리미아의 패턴을
읽기 시작한 후부터였다. 일단 패턴을 읽자 상대의 약점과 자신의 장점도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라한 말을 빌리자면 경험을 얻은 것이다.
"잠시만! 라한. 더 갈 거야? 여기가 멜카투라산 바로 아래인데. "
"음, 오늘은 여기서 쉬자. 산에는 밤에 혼자 갔다 올게. "
"혼자? 몬스터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로이나가 걱정스럽다는 듯 라한을 만류하고 나왔다. 아무리 라한이 강해져도
로이나에게는 항상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보이는 듯했다.
"로이나도 참. 내가 몬스터 따위에게 당할 정도로 약해 보여?"
"그건 아니지만 굳이 위험을 사서할 필요는 없잖아. "
"이해해줘. 이곳은 나와 칼라피안의 추억이 시작된 곳이야. 나 혼자 간직하고 싶어.
"
"휴, 그래 그럼 조심해. "
멜카투라 산은 칼라피안이 큰 부상을 입은 장소였다. 하지만, 라한에게는
칼라피안이라는 마음의 스승을 만난 장소이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이곳만큼은 다른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으면 했다.
-주인. 나도 가면 안 돼?
"넌 괜찮아. "
테세르도 칼라피안과의 추억에 포함되는 존재였다. 항상 칼라피안의 옷자락을 들고
이리저리 옮겼던 테세르. 그때마다 똑바로 들어달라고 호통 치던 칼라피안. 그때를
생각하자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라한. "
"아, 그래. 모두 정지! 오늘은 이곳에서 묵는다. 시간이 이르니까 각자 자기 시간을
갖도록 하자. "
라한이 일행을 멈춰 세웠다. 좀 이른 야영 결정에 몇 명이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라한의 목적지를 몰랐던 불청객들과 장난감들이었다. 하지만, 기존에 있던 사람들이
아무 말없이 받아들였기에 직접 의문을 제기하지는 못했다
일행이 멈추자 카이렌이 휴란트를 데리고 산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그렇듯 검술
수련을 위해서였다.
카이렌은 일행이 휴식을 취할 때마다 휴란트를 데리고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지면
보통 두, 세 시간은 지나야 다시 나타났다. 녹초가 되어 흐느적거리는 휴란트와
즐거운 표정을 지은 카이렌. 휴란트와의 수업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휴란트. "
"예, 선생님. "
적당한 곳까지 들어온 카이렌이 휴란트를 불렀다.
"이제 체력 훈련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
"정말요?"
휴란트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벌써 자신의 체력이 갖춰졌다 게 믿어지지 않은
듯했다.
실제로 휴란트의 체력은 예전과 비교해서 몰라보게 나아졌다. 이젠 여느 기사
지망생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성 싶었다. 휴란트 스스로도 자신의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걸 느낄 정도였다. 이 모든 게 카이렌의 열성적 인 지도 덕이었다.
물론, 훈련 후에 파울이 해주는 회복 마법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게 없었다면
훈련을 제대로 받더라도 이동할 수 없었을 터였다.
"후후, 녀석. 오늘부터는 체력이 아닌 눈과 관절수련을 할 생각이다. "
"눈하고 관절도 수련해요? 그런 수련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
"나만의 방식이니 의아해할 필요 없다. "
"예, 선생님. "
카이렌의 말에 휴란트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현재 휴란트에게 카이렌은 검술 스승 이상의 존재였다. 체력 훈련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처세술과 경험도 함께 전수받은 탓이다. 라한에게 칼라피안이 정신적인
지주이듯, 휴란트에게 카이렌도 마찬가지의 위치였다.
"눈을 수련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음, 눈을 수련하면 상대방이 휘두르는 검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상대가 어떤 공격을 하는지 볼 수 있다면 대처하기도 쉬워질 것 같아요.
"
"반만 맞았다. 하지만 눈 수련은 상대방만 보는 게 아니다. 스스로가 휘두르는 검의
궤도와 속도, 기세까지 함께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자신 내면의 상태와
상대방의 내면까지도 함께 봐야 하지. 그게 내가 가르치려는 눈 수련이다. "
"예, 선생님. "
휴란트의 눈이 진지하게 변했다. 카이렌과의 수련에 빠져들었을 때 항상 짓는
눈빛이었다.
카이렌이 휴란트에게 검을 가르친 지 이틀 째 되었을 때, 검을 잡을 때의
마음가짐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휴란트는 그 마음가짐이라는 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추상적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재차 설명하고 이해시키자 휴란트도 그 마음가짐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휴란트가 수련을 할 때는 저런 눈빛을 보였다.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다잡았다는 뜻이다.
몸에 대한 수련 이전에 마음가짐부터 가르친 카이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진정한
선생이 되고 있었다.
"관절 수련은 어떤 각도의 공격도 막거나 피할 수 있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너 역시
어떤 각도로든 공격할 수 있게 해줄 게다. "
"팔, 다리 관절만 수련하는 겁니까?"
"아니다. 팔, 다리는 물론이고 목과 허리, 손가락마디까지.몸에 있는 모든 관절을
수련한다. "
카이렌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휴란트의 눈빛도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제 보였던
눈빛과는 또 다른 눈빛이었다.
'녀석. 마음을 열었구나. 고맙다. '
카이렌은 휴란트의 눈빛 변화를 내면세계의 발전으로 판단했다. 저런 발전은 곧
정신력 강화로 다가올 터. 그 정신력을 바탕으로 수련을 한다면, 육체 수련은 그리
어렵지 않을 듯했다.
"눈에 대한 수련을 하기 전에 기초 수련을 하도록 하자. 앞으로 그 어떤 수련을
하더라도 그 이전에는 기초 수련이 선행되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선생님. "
"시작해라. "
카이렌의 명령이 떨어지자 휴란트가 검을 뽑았다. 그리고 가로베기, 세로베기,
대각선 베기를 위아래, 좌우로 행하는 여덟 가지 동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각 백 번씩 마친 후에야 검을 멈추었다.
"수고했다. 5 분간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하도록 하겠다. "
"예. 선생님. "
휴란트가 바닥에 조용히 앉아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카이렌에게 배운 명상을
통한 휴식이었다.
예전에 휴란트는 명상을 하는 5 분 동안 자신의 또 다른 영혼 레비안과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했다. 헌데, 수련만 시작하면 아무리 불러도 대꾸가 없었다.
그 상황에 대해 수련이 끝난 후 서로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다. 헌데, 레비안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수련이 시작되면 자신도 모르게 어두운 곳으로
떨어진다고. 그곳에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 후부터는 수련 때 레비안을 찾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수련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나타날 테니 말이다.
카이렌과 휴란트가 검술 수련을 위해 떠났을 때, 라한은 자그마한 패를 꺼내
살펴보고 있었다.
"라한. 뭐하는 거야?"
"아, 이거 좀 보고 있었어. "
라한이 패를 들어 로이나에게 보여줬다. 다크라이더의 길드장인 다크시안에게
받았던 그 동패였다.
"그건 왜?"
"좀 이상해서. "
"뭐가?"
"이거 동패가 아닌 것 같아. 재료가 구리처럼 보였는데, 아니더라고. "
"그래?"
"응. 이 패에 1 서클 마법인 라이트가 인챈트 되어 있거든, "
라한의 설명에도 로이나의 얼굴에서는 의문이 지워지지 않았다. 다크시안이 준 패에
라이트가 인챈트 되어 있는 건 로이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헌데, 새삼스럽게
아는 얘기를 왜 꺼내는 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건 전에도 말했잖아. "
"그랬지. 근데, 이 패의 재료가 뭔지 모르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구리가 아니면 그냥 녹슨 쇠겠지. "
"한 번 봐. "
라한이 들고 있던 동패를 로이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지?"
동패를 한참 살피던 로이나가 의문을 표했다. 자신도 이 패의 재료가 뭔지 모르는
듯했다.
"모르겠지?"
"응, 미스릴 이상의 강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색깔이 너무 짙어. "
"미스릴 정도가 아니야. "
말을 하던 라한이 세라 소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검으로 패를 힘껏 내려쳤다.
카카캉!
패는 세라 소드와 쾌 강하게 부딪혔음에도 아무런 흠집이 나지 않았다.
세라 소드의 재료는 미스릴. 그것도 칼라피안이 직접 담금질한 명검 중에 명검이다
헌데, 세라 소드로도 아주 작은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설사 드래곤 본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닐 듯 했다.
"어때?"
"놀랍군. 거의 드래곤 본 수준이잖아. "
"응. 어쩌면 드래곤 본보다 더 단단할 수도 있지. "
"그럴지도 모르겠다. "
로이나도 패의 단단한 정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인챈트나 할까 싶었거든, 마침 카이렌이 휴란트에게
마법 무구 하나 만들어주라고 하기에 그거나 만들까했지, 근데, 아무리 긁어도
흠집이 안 나더라고."
휴란트의 체력이 많이 향상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카이렌이 원하는 수준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라한에게 마법 무구를 부탁한 건 이 때문이다. 단시간
내에 올릴 수 없는 체력을 편법을 이용해서 올려주려는 카이렌의 배려였다.
"라한. 근데, 이 금속이 마나를 흡수하는 성질이 있는 건 확실해?"
"응. 그것도 아주 강해. 미스릴하고 비교도 안 될 정도야."
현 대륙에서 물질의 마나 흡수 정도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라한뿐이다. 설사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마나를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을 뿐. 그 물체가
마나를 흡수하는 성질이 있는지는 알아보지 못한다. 아마, 마계, 환계, 정령계를
통틀어서 라한만이 그런 성질을 알아볼 수 있을 듯했다.
"드래곤 본하고 비교하면 어때?"
"글쎄. 드래곤본을 본 적은 있는데, 마나흡수율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는 확인을
못해봤어. "
"잠시만. "
로이나가 주변을 슬쩍 살폈다. 다행히 람 중에서는 이곳을 보는 이가 없었다.
"금방 갔다 올게. 텔레포트! "
로이나가 라한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사라진 듯했다.
로이나가 사라지자 라한은 정체불명의 다. 역시나 처음 보는 금속이 분명했다.
금속에 대한 정보는 찾아낼 수 없었다.
'대체 뭐지?'
아무런 특징 없이 처음 보는 금속에 불과했다면 라한도 이렇게 신경 쓰지는 않았을
터였다. 헌데, 이 정체불명의 금속은 마나를 흡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미스릴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흡수력 이었다.
'젠장, '
이 금속에 대한 비밀을 밝혀내기 전에는 잠도 제대로 못 이룰 듯 했다. 라한 역시
드래곤만큼이나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니.
스팟!
라한이 금속을 한참 살펴보고 있을 때, 로이나가 돌아왔다. 예의 그 텔레포트
마법이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을 인식한 탓인지 마나의 공명이 상당히 낮았다.
"어디 갔다 온 거야?"
"레어에 잠깐 갔다 왔어. 이것 좀. "
로이나가 상자 하나와 책 네 권을 내밀었다.
물품을 건네받은 라한이 로이나에게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설명을 해달라는
표시였다.
"먼저 이 책은 대륙에 있는 모든 금속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어. 그리고 이건
식물에 대한 게 적혀 있고, 이건 돌, 이건 대륙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뼈에 대한
게 적혀 있을 거야. "
"오호, 이런 책도 있었나?"
"라한은 모르는 게 당연하지. 벌써 이천 년 전에 쓰인 책이거든. "
"좋은데. "
라한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했다. 정체불명의 물체에 대한 의문도 지금 순간만큼은 잠시 뒷전으로
미루어두었다.
"그리고 이 상자에는 드래곤 본이 들어 있어. 물질계에 나타나면 안 되는 거라서
아주 조금만 담았어. 보고 돌려줘야 해. "
라한은 드래곤 본이 물질계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걸 처음 들었다. 알았다면
오벨리아 팰리스에서 그 많은 드래곤 본을 그냥 두고 오지는 않았을 거였다.
나타나서는 안된다는 것. 그건 곧 귀한 물건이라는 의미가 될 테니.
"드래곤 본은 인간들이 다루기엔 너무 위험한 물건이야. "
"그거야 그렇겠지. 근데 겨우 그 정도로 물질계에 나타나면 안 된다는 건 좀 심하지
않나?"
"물론, 아주 작은 양이 풀리는 건 큰상관이 없어 지금도 대륙곳곳에는 드래곤
본으로 만든 마법 무구가 몇 가지는 존재하니까.
하지만, 드래곤 본으로 만든 물건이 많아지면 위험해져. "
말을 하던 로이나가 주변을 훑었다. 엿듣는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사일런스 에어리어(Silent A,ea) !
근처에 사람이 없다는 게 확인되자 로이나가 마법을 시전했다. 이곳에서 하는
얘기가 막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마법이었다.
"라한. 이 마법은 라한이 사용할 걸로 해줘. "
"그러지 뭐.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 해봐. "
로이나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은 그녀를 하급 용병 정도로 생각했다. 라한이 그렇게
소개를 했고, 로이나도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헌데, 이번에 사용한건 분명 마법이었다. 하급용병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라한이
한 걸로 해두자고 한 것이다
"사실 이 얘기는 우리 드래곤들의 치부를 설명해야 하는 거라서. 뭐, 그래도 기왕
꺼낸 얘기니까 마무리해야겠지. 한 4 천 년 쯤 됐나? 그때 상당히 많은 드래곤들이
목숨을 잃었어. 소위 말하는 드래곤 슬레이어들 때문이지. 소수가 덤빈 거라면 그
정도로 속수 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거야. 헌데, 수백 명의 사람들이 드래곤
본으로 된 무기를 들고 공격하니 대책이 없더라고. 방어구도 드래곤 스케일로 만든
거라서 제대로 된 타격을 주기 힘들었고. 또, 그때는 고위 마법사도 꽤 많을 때라서
인간들의 힘이 상당히 강했어. "
"음, 드래곤 슬레이어 얘기를 듣긴 들었지 근데, 모두 거짓말이라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사실 드래곤이 인간에게 죽음을 당한다는 건 우리 드래곤으로서는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야. 그래서 대륙에 떠돌고 있는 많은 역사를 고쳤지. 드래곤 슬레이어의
존재도 이야기 속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왜곡시켰고. "
"요지가 뭔지는 알겠어. 드래곤 본이나 스케일로 만든 물건이 널리 퍼지면,
드래곤들의 안위를 위협받는다는 거잖아 "
"맞아. 그래서 당시 로드께서 드래곤 본이나 스케일을 대륙으로 푸는 걸
금지하셨어. 그리고 대륙에 퍼져 있던 드래곤본, 드래곤스케일 무구들을 마구
모아서 폐기처분해 버렸지. "
라한은 드래곤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물건이 자신들의 신체를 구성하는 물품이라니. 황당하면서도 어이가 없었으리라
어찌 보면 자신들 스스로가 동족을 죽인 것과 같지 않은가.
'꽤나 어처구니없었겠군, '
-주인. 그럼 오벨리아 팰리스에 있는 드래곤본 팔아서 . 푸푸풋!
라한이 갑작스럽게 끼어든 테세르의 입을 서둘러 막았다. 하지만, 이미 핵심 내용이
다 나와 버렸다. 안 하느니만 못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라한. 오벨리아 팰리스라니? 전에 실종 됐을 때, 오벨리아 팰리스에 있었던 거야?
그리고 드래곤 본이라면. 아, 오벨리아 팰리스의 결계를 우리 드래곤들이
유지했으니, 선조 드래곤들의 뼈가. 흠. "
테세르의 몇 마디 말로 로이나가 상황을 미루어 짐작했다.
"그게. 어, 그러니까. "
-주인! 왜 그래? 그 드래곤 본 팔아서 한 몫 챙기자니까.
"시끄러, 이 멍청아. "
-내가 왜? 주인도 돈 좋아하잖아.
"이런 젠장. "
드래곤 본은 엄청나게 좋은 인챈트 재료다. 드래곤 본에 무언가를 새길 능력이
라한에게 부족했기에 손대지 않았을 뿐.
후일, 실력이 조금 더 나아지면 오벨리아 팰리스에 있는 드래곤본으로 인챈트를
수련할 계획이었다. 헌데, 테세르의 말실수 때문에 계획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라한. 그 드래곤 본은."
"미안. 속이려고 한 건 아닌데, 그게 좀 그렇네. 하하하. "
라한이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라한의 어색한 표정에 로이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모른 척 할게. "
"진짜?"
"응. 일단은 모른 척 할게. 나중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뭐, 그냥. "
"고마워, 로이나. 정말 고마워. "
라한이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자칫하면 꿈이었던 그랜드 인챈터의 길을 잃을 뻔한 위험한 순간이었다. 로이나가
눈감아 주지 않고 다른 드래곤에게 말했다면. 오벨리아 팰리스에 있는 드래곤 본은
세상에서 사라졌을 게 분명했다. 라한에게는 잃었던 꿈을 다시 찾은 셈이었다.
-주인. 좋단다. 입 벌어진 거 봐라.
퍽-!
라한은 해가 질 때까지 로이나에게서 받은 책을 읽으며 보냈다. 책 내용 중 상당
부분은 라한이 이미 알고 있던 지식이었다. 하지만, 새로이 알게 된 지식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아'하는 탄성을 지르며 입으로 계속 되뇌었다.
"이런 식물도 있었나? 허, 그거 참 "
-주인. 해 졌는데 안 가?
라한이 출발할 생각을 않자 참다못한 테세르가 말을 걸어왔다.
"어? 벌써 그렇게 췄나?"
-응. 해는 아까 졌어, 주인이 워낙 열심이라서 말을 못 걸겠더라.
"그렇군. 으차! 이제 출발해볼까?"
라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들고 있던 책은 어느샌가 아공간에 넣어둔 후였다.
- 가자.
"오랜만에 한 번 달려볼까. 헙! "
라한이 순간적으로 광견보를 시전했다. 이에 바로 앞에서 바라보던 테세르가 라한의
흔적을 놓쳤다. 너무 빠른 속도로 움직였기에 움직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에이씨. 이놈의 주인이.


욕설을 내뱉은 테세르가 정령계로 돌아갔다. 어차피 달려가서는 라한을 따라잡기
힘들 터. 차라리 정령계로 돌아가서 다시 불러줄 때까지 기다릴 요량이었다.
스팡!
광견보를 시전하자 귀에서 바람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한이 바람을 가를 때
내는 소리였다.
라한은 거의 전력으로 광견보를 시전했다. 이 정도로 빠르게 시전한 적은 과거 가짜
레드리안을 잡을 때뿐이었다. 심지어 드래곤 크라이드리안과 싸울 때에도 이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런 속도를 내는 건 자유로운 방향 전환이
어려워서였다.
'이상하군. 풍경이 느리게 움직여. '
라한의 속도는 가히 번개와 비견될 만큼 빨랐다. 헌데, 주변 풍경은 그렇지 않았다.
느리게 하나씩 변하는 풍경. 그러다가 어느 순간 중간 환경을 건너뛰기 일쑤였다.
마치 주변을 찍은 사진을 띄엄띄엄 보는 기분이었다.
'이상해. '
다시 한번 의문을 느낀 라한이 몸을 세웠다.
이젠 입가로 흐르는 침도, 붉게 충혈 되는 눈도 보기 힘들었다. 라한이 광견보를
거의 완전에 가깝도록 바꾼 탓이다.
"다시 해보지 뭐. "
스팡!
라한이 다시 광견보를 시전했다. 역시나 주변 환경의 움직임이 달랐다.
'왜 이러지?'
다시 광견보를 멈춘 라한이 생각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에휴, 모르겠군. 내 속도에 비해 주변 환경이 느리게 움직이다니. 그것 참. "
라한이 바닥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이미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네. 테세르. "
-쳇, 맨날 자기 혼자 달려가고. 주인 사상이 꼬롬해.
테세르는 나타나자마자 라한에게 불평을 토해냈다. 자기만 남겨두고 먼저 달려간 게
섭섭했던 모양이다.
"이해해라. 근데, 꼬롬? 그런 사투리는 대체 어디서 배웠냐? 난그런 말을 가르친
기억이 없는데. "
판트리아 대륙은 대륙 공용어를 사용한다. 대륙 전체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심지어 엘프나 드워프, 드래곤마저도 대륙공용어를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륙전체의 억양이 완벽히 같은 건 아니었다. 특히, 각나라의 하위 계층은
약간씩 변형된 공용어를 사용한다. 통상 사투리라 불리는 그런 언어였다.
-어? 글쎄다. 내가 이 말을 어디서 배웠더라? 아, 맞다. 파울이라는 인간이 이런
단어를 쓰던데?
"파울? 샤르비엘 후작이 보낸 그놈?"
파울은 나메라 왕국의 떠오르는 신성으로 불린다. 젊은 나이에 5 서클유저 마법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웬만한 귀족과 버금가는 위치 인 셈이다.
듣기로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나메라 왕국의 왕궁 내에서 마법을 배웠다고 했다.
헌데, 그런 파울이 사투리를 사용한다? 그것도 대륙 남부 지방에서나 쓸 수 있는
그런 사투리를? 뭔가 앞뒤가 맞지않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면서 꼬롬하다는 단어를 쓰던?"
-우리 일행 전부가 주인이 가자는 대로 가고 있잖아. 파울은 라한 주인이 꼬롬해서
일행들이 끌려 다니는 거라고 하던데.
"오호라, 파울이 그랬단 말이지? 그냥 내버려뒀더니 기어오르네. 언제 한 번
밟아줘야겠군. "
-쯧쯧. 그래서 주인이 꼬롬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수틀리면 밟아줄 생각부터
하고. 에잉. 주인이 그러니까 착한 나까지 욕먹는거잖아.
라한이 약간의 살기를 담아 테세르를 노려봤다. 이에 테세르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나중에 두고 보자. 테세르. "
-아, 하하하. 주인. 농담이었던 거 알지?
"농담은 개뿔이 농담이냐?"
-주인, 그게. 아참. 근데 왜 부른 거야? 아무 일 없이 부를 인이 아닌데
말이 막힌 테세르가 말을 돌려 버렸다. 그대로 뒀다가는 더 큰일이 일어날
듯해서였다.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깜빡했다는 듯 이마를 두드렸다. "아, 맞다. 내가 네 주위를
돌아 볼테니까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좀 봐줘. "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내 움직임이 어떤지만 봐주면 돼. "
-주인 화가 풀린다면야 뭔들 못하겠어? 해봐.
테세르는 끝까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다. 라한의 화가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이다.
"녀석, 머리 굴리기는. 일단 봐라, "
스팡!
라한이 다시 광견보를 시전했다. 하지만, 좀 전처럼 일직선으로 산을 오르는 건
아니었다. 테세르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도는 움직임이었다.
'흠, 테세르도 끊어져서 보이는군. 왜 이런 거지?'
라한은 분명 테세르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면 서도 테세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것이다.
헌데, 테세르의 모습이 자꾸 사라졌다. 좀 전에 주위 환경이 사라졌다가 나타난
것과 거의 흡사한 모습이었다.
한참 돌던 라한이 테세르의 눈앞에 멈춰 섰다.
"어때?"
-뭐가?
"혹시 내 모습이 사라지지 않던?"
머리를 긁적이던 테세르가 대답했다.
-그게 잘모르겠다. 주인이 광견보를 시전하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아까도 내
주변에 주인이 입은 옷 색깔만 핑핑 돌더라고.
"색깔만 핑핑 돈다고?"
-응. 주인 옷이 진한 회색이잖아, 내 주변에도 진한 회색 빛무리만 남던데.
"빛무리라.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직 뚜렷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테세르의
말은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헌데, 왜 자신의 시선에는 사물이
끊어져서 보일까? 라한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는 듯했다.
"모르겠군. 일단 올라가자. 테세르. "
-좋아.
테세르가 라한의 로브 속에 들어갔다. 라한과 함께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간다. 꽉 잡아!"
스팡!
라한이 다시 광견보를 시전했다. 이번에도 주변 사물이 끊어져서 보이는 현상은
여전했다.
"테세르! "
-응?
달려는 와중에 라한이 테세르를 불렀다.
"주변 풍경 한 번 봐봐. 뭔가 다르지 않아?"
-주변 풍경? 음, 우와! 빠르다. 빛으로 보이네.
" 빛으로?"
테세르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저렸다. 속도는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데세르의 눈에는 사물이 빛으로 보였다. 라한의 눈에 비친 사물과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단순히 속도에 의한 변화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연구 좀 해봐야겠어.
테세르 사고 치다
꽤 오랫동안 달려서 라한이 동굴을 개조한 허름하고 작은 창고에 도착했다. 오래 전
세라 소드를 발견한 칼라피안의 보물 창고였다.
이마에 땀을 대충 훔친 라한이 창고 벽에 기댔다.
후, 후. 힘들군.
-우와. 주인 엄청 빠르다. 앞으로 말 대신 주인 타고 다녀야겠다.
시끄러. 망할놈아. 나 힘들어 하는 거 안 보이냐?
라하닝 연신 숨을 몰아쉬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하루 온종일 걸어야 오를 수 있는
멜카투라 산. 이곳의 정상까지 단숨에 달려왔으니 힘들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근데, 여긴 하나도 안 변했네.
드워프가 만든 창고인데 당연하지.
칼라피안의 보물 창고는 작고 허름해보였다. 최고한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절대 허름하지 않다는 걸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맞다. 칼라피안 아저씨가 드워프였지.
"들어가 볼까?"
라한이 창고 손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돌렸다.
스르륵!
창고 문은 꽤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음에도 열렸다. 역시 드워프의
작품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대단하군. "
뚜벅! 뚜벅!
라한이 창고 안으로 한 발자국씩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심장이 터질듯
매어왔다. 새삼 칼라피안과의 옛 추억이 떠오른 탓이다.
"저기.였지. "
라한이 창고 중앙에 있는 상자를 보며 세라 소드를 원래 세라 소드가 놓여 있던 그
상자였다.
라한이 숙연해지자 테세르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주인, 힘내.
"그래야지. "
애써 기운을 차린 라한이 상자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칼라피안이 말했던 대로
상자를 살짝 돌렸다.
끼이익!
상자 아래쪽에서 특이한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돌렸던 상자도 옆으로 조금씩
이동되었다.
-주인, 신기하다.
"테세르. 쉿! "
라한이 상자의 변화를 살펴보며 신경을 집중했다. 혹시 어떤 위험이 없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드워프 장인이었던 칼라피안. 그가 자신이 만든 보물을 허술하게 관리할 턱이 없다.
그의 꼼꼼한 성격과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한 애착을 생각하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주인. 왜?
"조용히 좀 해봐. "
뚝! 뚜둑! 뚝! 뚝! 뚜두두둑!
상자 아래쪽에서 좀 전과는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뭔가 있어. "
라한이 테세르를 잡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이목만큼은 상자
아래쪽에 조금도 떼지 않았다.
-주인 대체 뭔데 그래? 나도 좀 알자.
"입 꿰매 버리기 전에 그 입 좀 다물어. "
라한은 칼라피안의 기관장치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헌데, 테세르가 자꾸
말을 걸자 자꾸만 신경이 분산되었다. 지금 심정으로는 정말 테세르의 입을 꿰매
버릴지도 몰랐다.
뚜두두둑! 뚝! 뚝!
쿠구구구궁!
마지막 뚜둑 소리를 끝으로 물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후로는 상자
쪽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테세르. 내 허락이 있기 전에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 "
-응.
테세르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정말 믿음이 가지 않는 말투였다.
'저놈 사고 치는 거 아냐?'
어쨌든 테세르가 대답은 했기에 일단은 참기로 했다. 아무리 믿음이 가지 않더라도
근거 없이 몰아붙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볼까?"
라한이 다시 상자로 다가갔다. 처음에 있던 상자가 반으로 쪼개진 채로 나뒹굴고
있었다.
"흠, 이건 뭐지?"
상자는 깨져 있었지만 상자가 있던 자리에는 또 다른 상자가 나타나 있었다. 푸른
색깔의 손바닥만 한 상자였다
-주인. 이 상자 예쁘다.
"야! 멈춰! "
덥썩!
라한의 제지가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테세르가 상자를 잡아 버렸다. 놀란 테세르가
손을 뗐지만 이미 일이 벌어진 후였다.
쿠구구구구궁! 콰쾅!
"젠장. 테세르 꽉잡아!"
라한이 테세르를 로브에 집어넣고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기
전에 창고를 나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젠장. 늦었다. "
문이 없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반쯤 열려 있던 문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문이 없었던 것처럼 흔적조차 발견 할 수 없었다.
-주, 주인. 미안. 그게 난 그저. 너무 예뻐서. 그러니까.
"됐으니까 일단 주변부터 살펴봐."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창고를 살펴보기 위해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테세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라한이 좀 전의 푸른색 상자를 들어올렸다.
"역시 가짜군. "
상자는 한 쪽이 열려 있었다. 헌데, 안에는 아무것도 처음부터 도둑을 잡기 위해
만들어둔 미끼였던 모양이다.
-주인. 완전히 막혀 있어.
"마나가 새어나오는 곳 없어?"
-응. 그것도 해봤는데, 완벽하게 막혀 있어, 완전 통짜 쇠로 된 것 같은데, 그리고
이 상자 안에는 마나가 하나도 없어.
"골치 아프군. "
라한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심법을 만들어낼 때 이후로 최고의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텔레포트 안 돼?
"마나도 없는데 텔레포트가 가당키나 하냐?"
-주인은 마나 안 쓰잖아. 제령기로 안 돼?
"다른 마법은 몰라도 텔레포트는 안 돼. 텔레포트는 제령기에 공명할 주변 기운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불가능해."
-어쩌지?
"몰라. "
라한이 바닥에 주저앉아 생각에 빠졌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뚜렷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골치 아프네, "
-뭔가 방법이 없을까?
"글쎄. 아저씨 성격을 생각하면 통로를 만들어뒀을 리 없지. 자신이 만든 물건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잖아. "
-그렇.겠지?
얼핏 보기에는 칼라피안의 성격이 상당히 너그럽고 부드러워 보인다. 그리고
라한에게도 그런 성격으로 대해왔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부드러운 눈빛 속에 언제나 칼을 간직하고 있던
칼라피안.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
그였다.
아니, 칼라피안뿐 아니라 굴레를 벗은 존재 모두가 그런 성격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오랫동안의 폐쇄적인 생활로 성격이 그렇게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흠, 그렇다고 이렇게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는 없고. 답답하군. "
-아까 마법 쓸 수 있다고 했잖아. 날려 버려.
"해 볼까?"
라한도 마법을 써야겠다고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곳이 폐쇄적인 장소만
아니 었으면 날려 버릴 자신도 있었다.
헌데, 이 창고가 너무 작다는 게 계속마음에 걸렸다. 자칫 잘못하면 창고와 함께
자기 자신도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해봐, 이 정도쯤은 날려 버릴 수 있잖아.
"글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헌데, 여기가 너무 좁아서 잘못하면 나까지
날아가 버린다고. "
-아, 맞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주인. 창고 부수면 그때 불러줘. 나 정령계에서
기다릴게. 간다.
테세르가 정령계로 돌아갔다. 자신이 마법의 여파에 당하는 건 무서웠던 모양이다.
테세르가 돌아가자 라한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그래도 자신이 주인 아니던가?
헌데, 주인을 버리고 정령계로 도망가 버리다니. 이번 기회에 테세르의 충성심을
다시금 고취시켜야 할 듯싶었다.
"테세르. 튀어나와!"
라한이 테세르를 소환했다. 그리고 테세르가 나타날 곳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기다렸다.
근데, 한참 기다렸음에도 테세르가 나타나지 않았다. 보통은 라한 눈앞에
소환되어야 정상이었다.
"어라? 테세르. 빨리 튀어나와!"
역시나 테세르가 소환되지 않았다. 이 창고의 어떤 기능 때문에 테세르의 소환이
불가능한 듯했다.
"뭐야? 좀 전까지는 있던 놈인데, 왜 소환이 안 되지?"
라한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창고의 어떤
기능 때문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젠장. 시끄러워도 함께 있는 게 좋았는데 괜히 무섭네. 아, 그렇군. 공명한 마나가
없어. "
텔레포트와 마찬가지로 소환도 주변 기운과 공명해야 가능하다. 헌데, 이곳은
공명할 기운이 전혀 없었다. 테세르의 소환이 불가능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으, 으."
라한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몸을 살짝 떨었다. 그는 단순히 갇혔다는 것보다 혼자
남겨졌다는 게 더 무서웠다.
"그러고 보니 혼자 남켜진 게 처음이구나. "
외로움을 대충 다독인 라한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였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나?"
적당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정말 테세르의 말처럼 마법으로 부수는 방법뿐일
듯했다.
"까짓것 해보지 뭐. 파이어 실드! "
라한이 세라 소드에 인챈트 된 파이어 실드를 먼저 시전했다. 공격 마법을 사용했을
때 자신이 받을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마법이 얼마나 줄여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튕겨나오는 공격 마법의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마법이 그대로 튕켜 나오면 그땐. 죽겠지. "
창고의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는 라한도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공격 마법에는
라한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힘을 담을 생각이었다.
라한은 1 서클 공격 마법에 7 서클에 버금가는 제령기까지 담을 수 있다. 이에 반해
세라 소드에 인챈트 된 파이어 실드는 겨우 4 서클, 라한의 전력을 감당해낼 수 있는
방어 마법이 아니었다.
공격했던 위력 그대로 튕겨 나온다면 파이어 실드가 깨짐과 동시에 라한 역시
죽음을 맞을 게 분명했다
"후우우, 제발, 파이어 애로우!"
라한이 파이어 애로우를 시전했다. 이에 커다란 불화살이 창고의 한 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콰콰콰콰쾅!
채채챙!
"크악! "
창고를 맞고 나온 마법의 여파가 파이어 실드를 산산조각 내 버렸다. 라한 역시
실드를 깨고 남은 마법의 위력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멜카투라 산 아래에 야영을 하던 라한 일행. 이미 아침이 되었음에도 라한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로이나를 비롯한 일행 모두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러게. 약속을 어길 라한이 아닌데. "
"올라가봐야 하는 거 아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 라한은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하던데."
레테아와 로이나, 투바, 프라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차례로 말했다.
"아무래도 찾아 나서는 게 낫겠다. 라한이 좀 음흉하기는 해도 약속을 어길 놈은
아니잖아. "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어제 라한이 한 말 때문에 선뜻 나서기가 그러네. "
"어휴, 미치겠네.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야?"
"그러게. 어쩌지? 생각 같아서는 당장 찾으러 가고 싶은데 말이야. "
일행들이 차례로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선뜻 어떻게 가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떠나면서 라한이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 서였다.
"혼자 잘난 척하더니 이게 뭐야? 하여간 인간은 어쩔 수 없다니까. "
프리미아만 유일하게 라한을 질책하고 나왔다. 그간에 쌓였던 게 많긴 많았던
모양이다.
프리미아가 입을 열자 최근에 천적이 된 투바가 끼어들었다.
"왜 거기서 인간이라는 말이 왜 튀어 나오는 건데? 레테아는 인간 아냐?"
"그, 그건."
"흠. "
레테아는 연신 신음만 흘렸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멜카투라 산의 정상에서 떠나지
않았다. 동생 라한에 대한 걱정이 너무 커서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탓이다.
"로이나. 방법 없어?"
"음 일단 저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좀 옮겨주라. 보는 눈이 많으니까 마법을 못
쓰겠다."
"그건 내가 하지. "
프라하가 라한의 나머지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물론, 나머지 일행이란 장난감 두
명과 불청객 두 명이었다.
"이봐! 너희들 따라와. "
"무슨 일인가? 우리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
프라하의 말에 해리언이 의문을 제기하고 나왔다. 일행들 사이에 도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듯했다.
하지만 장난감이 된 쿨샤크와 데메크는 아무런 대꾸 없이 프라하를 따라갔다.
최근에 라한 일행과 다니며 많이 고분고분해진 모습이었다.
"알거 없어. 따라와. "
"라한이 안 보이는군. 어디 간 건가?"
"글쎄 알거 없다니까 그러네. 따라오기나 해. "
프라하가 해리언과 파울을 강제로 끌었다. 힘으로는 프라하의 적수가 될 수 없는
해리언과 파울. 그렇다고 이곳에서 마법과 정령을 사용해서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이 프라하가 이끄는 데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프라하가 외부의 눈을 데리고 사라지자 로이나가 주변에 마나를 퍼트렸다. 혹시
다른 눈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난 일단 레어로 돌아가서 방법을 강구해보지. 금방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
"부탁하지. "
"그럼 텔레포트!"
로이나가 마법을 사용해서 레어로 돌아갔다.
불청객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리 먼 곳까지 데리고 가지는 않았을 터. 아무래도
이곳에서 뭔가를 하기는 껄끄러웠다. 마법을 사용하든 정령을 쓰든 레어가 더
편했다.
로이나가 사라지자 일행들 사이에 또 다시 의견이 분분했다. 반 정도는 라한을
찾으러 나서자는 의견이었다. 또, 나머지 반은 이곳에서 기다려보자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단 한사람. 아니, 한 드래곤은 라한이 어떻게 되든지 관심 없다는 투로
일관했다.
"이봐! 프리미아. 그래도 우리 일행이었다. 너도 일행이 됐으면 걱정하는 척이라도
좀 하라고. "
"난 가식적인 행동은 못해. "
"드래곤이 그렇지 뭐. 하여간 드래곤들은 이기적이라니까. "
결국 참다못한 투바가 프리미아에게 시비를 걸었다.
투바의 말에 프리미아가 눈을 부라리며 살기를 피어 올렸다. 항상 중재를 했던
라한도 없었고, 눈치를 봐야 하는 로이나도 없었다. 프리미아에게는 마음껏 화를 풀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셈이다.
"버러지 같은 놈이 감히 내게."
"저, 저. 저 말하는 꼬락서니 봐라. 라한은 설사 일행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너하고
결혼할 사람의 동생이다. 이 망할 드래곤아! 비록 유희에 불과할지라도 너하고 한
식구가 될 사람이란 말이다. 네가 아무리 개념이 없어도 네 식구한테 그러면 안
되지?"
"식.구?"
"몰랐냐? 그러니까 나한테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레테아 표정 좀 봐라.
걱정하는 거 안보여? 레테아 걱정하는 거 보이면 너도 걱정하는 척이라도 하란
말이다. 그래도 네가 감정이 있는 동물이면 그래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그, 그건."
프리미아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라한과 자신이 식구가 되다니. 비록
유희에 불과할지라도 죽음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최소한 지금의
유희가 끝날 때까지는.
"자, 자. 그만들 싸우고 일단 기다려보자. 로이나가 갔으니까 뭔가 방법을
강구해오겠지. "
"그래. 일단 기다려보자,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
"
그렇게 일단 기다리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일행들의 얼굴은 처음보다
한층 어두워진 상태였다. 알 수 없는 어떤 불안한 느낌 때문이다.
레어로 돌아간다고 했던 로이나. 실상 그녀가 이동한 곳은 멜카투라 산의 정상
부근이었다. 일단 용언 마법으로 라한을 찾을 생각에서였다.
"이글 아이즈(Eagle eyes)! "
로이나가 시력을 극대화 시켜주는 마법을 시전했다. 인간에게는 없는 용언
마법이었다.
"서치 오브젝트(Search object)! "
다음 마법을 시전하며 라한의 얼굴을 떠올렸다. 생각하고 있는 상대를 찾는 마법이
서치 오브젝트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마법도 용언 마법이었다.
그렇게 근 한 시간이 흐르고 로이나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멜카투라 산 전체를
샅샅이 뒤졌음에도 찾지 못한 것이다.
"라한. 대체 어디."
로이나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이제 진정으로 라한의 안위가 염려되기
시작했다.
아침에 라한이 오지 않았을 때만해도 이 정도로 걱정하지는 않았다. 라한의 실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헌데, 이젠 그 믿음마저 무너지고 있었다.
"안 되겠어. 텔레포트! "
로이나가 레어로 돌아갔다. 생각하고 있는 방법이 자신에게도 무리여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레어로 돌아간 로이나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겠지. 괜찮아야 돼. 실피드! 엘라임! 샐리온! 노아스!"
로이나가 4 대 원소 정령의 정령왕들을 모두 불렀다.
드래곤은 성룡이 되면 그 누가 됐든지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다. 바람과 관련된
골드 드래곤도 물의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고, 물과 관련된 블루 드래곤도 불의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다. 속성에 상관없이 정령왕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친화력에 따라 통제 능력에서 차이가 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4 대 원소 정령왕을 한꺼번에 소환하는 건 쉽지 않다. 설사 드래곤 로드라
하더라도 4 대 정령왕을 한꺼번에 부르는 무모한 행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힘을 급격히 소모시키기 때문이다.
헌데 로이나는 4 대 정령왕을 모두 불렀다. 어찌 보면 무모한, 그러면서도 대담한
결정임에 분명했다. 그만큼 라한을 아낀다는 얘기도 되었다.
"헉, 헉."
로이나가 계속해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서는 땀이 마구 흘러내리고 다리는
미약하게 떨렸다. 힘을 무리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흠, 로이나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일까? 우리 4 대 정령왕을 모두 부를 만큼 중요한 일인가?
-글쎄. 내가 아는 로이나는 쾌나 이성적이고 냉철한 성격을 가진 드래곤이었다.
헌데, 4 대 정령왕을 한꺼번에 부르다니. 정말 중요한 일이 생긴 건가?
-부른 이유가 뭐냐?
네 명의 정령왕이 각기 성격에 맞는 물음을 던져왔다.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이 힘들어하는 로이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같은
속성이라서 정이 가는듯했다. 반대로 불의 정령왕은 뭔가 불만이 많은 듯 용건부터
물어왔다.
"헉, 헉. 사, 사. 사람을 찾아줬으면 좋겠어. "
숨을 가다듬은 로이나가 힘겹게 말했다. 로이나의 말에 오히려 정령왕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람?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 정령왕 넷을 모두 불렀단 말이냐? 미쳤군,
드래곤이 광포한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일단 누군지나 알자. 로이나.
혹시 전에 그 인간이야? 내게 찾아달라고 했던 그?
마지막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의 물음에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은
부끄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전에 그 인간을 아직 못 찾은 거야?
"아니, 찾았어. 근데, 근데 또 사라졌어. "
-그 인간이 대체 뭐야? 뭔데 고룡인 로이나가 그렇게 신경 쓰는거지?
-그만. 자세한 설명은 정령계로 돌아가면 내가 해줄게. 로이나. 잠시 기운을
회복해라. 잠깐 갔다 올 테니. 가자.
실피드가 정 령왕들을 다독였다.
실피드는 전에 라한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다른 정령왕들도 한번씩은
찾아다녔지만, 라한을 직접 본 정령왕은 실피드가 유일했다.
힘겨워하는 로이나보다 실피드에게 설명 듣는 게 나을 듯했다.
-실피드가 알고 있는 모양이니 돌아가자고.
-로이나. 무리하지 마라.
마지막물의 정령왕 엘라임의 염려어린 말을 끝으로 정령왕 모두가 모습을 감추었다.
정령왕들이 사라지자 로이나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4 대 정령왕 모두를 소환했던 게
몸에 무리를 준 탓이다.
한 때 케라스 왕국 주변 산맥에 몸을 은거했던 루이에. 원래 그는 그곳에서 평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이슨과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루이에의 집에 침입해
버렸다. 루이에로서는 반드시 피해야 하는 사람들이었기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루이에는 대륙 여기저기를 떠돌며 방랑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은거 중일
때 알지 못했던 많은 정보를 들었다.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대륙에 나왔다는 것과
그들이 대륙의 각 왕국과 연계하고 있다는 거였다.
루이에는 제이슨과 직접 싸워봤다. 그 때문에 그들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굴레를 벗은 존재들의 대륙 진출, 루이에로서는 상당히 껄끄러운 일이었다.
어차피 그들과의 정면충돌로는 승산이 없었다. 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힘보다 정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샤르비엘 후작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에게 도움을 주면서 굴레를 벗은 존재들에 대한 정보를 모아볼
생각이었다.
헌데, 샤르비엘후작에게 아주 흥미로운 일을 제의받았다. 라한 일행에 대한
미행이었다. 그때가 벌써 20 일 전 일이다.
"아직도 그대로인가?"
"예, 루이에님. "
라한 일행과 하루 떨어진 곳에서 백준의 기사 베라스무스 루이에와 마법사
이클리프가 야영을 취하고 있었다.
이클리프는 샤르비엘 후작이 통신을 위해 남겨 둔 마법사였다. 실력은 고작 3 서클
마스터. 하지만, 라한 일행이 된 파울과 통신마법을 하는 데에는 아무 부족함이
없었다.
"이유는?"
"확실한 정보는 전해오지 않고 있습니다. "
"분위기는?"
"상당히 침울하답니다. 얼핏 라한이라는 리더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아직 확실한
정보는 아닙니다. "
이클리프의 대답에 루이에가 생각에 잠겼다. 그로서도 라한 일행이 멜카투라 산
아래에 머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멜카투라 산이라. 이 검의 주인이 살았던 곳이군. '
루이에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슬쩍 쓰다듬었다. 얼핏 보기에도 명검임을 알 수
있는 소검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서 그 아이를 만났었군. 후후후. '
루이에가 과거에 만난 한 아이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자신에게 의류상 위치를
가르쳐줬던 아이였다.
루이에의 머릿속에 뚜렷하게 남은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고작 열 명이 될까?
헌데, 그 중에 그 아이가 남아 있는 건 그때 풍겼던 아이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아이로서는 보기 드물게 당돌했던 아이. 그러면서도 품속에 있던 칼을 꽉 쥐고 있던
치밀함. 루이에의 평소 성격과 너무나 흡사했기에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어떻게 자랐는지 궁금하군. '
루이에는 그 아이가 라한이라는 걸 몰랐다. 알았다면 이렇게 소극적으로 미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태도로 라한의 변한 모습을 살펴봤을 게 분명했다
루이에 역시 궁금함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저, 루이에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아닐세. 다른 연락 온 건 없는가?"
"예, 연락이 오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
"기다리지. "
이클리프의 얼굴에 존경심이 어렸다. 가식이 아닌 진정이 담긴 존경심이었다.
원래 이클리프는 루이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이에를 대할 때도
건성건성 대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샤르비엘 후작의 충고가 없었다면,
높임말조차 쓰지 않았을 터였다. 그가 후작의 후광에 힘입어 지휘권을 얻었다고
생각한 탓이다.
헌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주일 전에 있었던 몬스터와의 격전
이후부터 이렇게 변한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과도한 존경심에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대단한분. 하지만 무서운 분. '
일주일 전. 루이에와 이클리프가 베어울프의 습격을 받았다. 지금은 대륙 곳곳에서
간헐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었기에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 보였던
루이에의 검술. 마법사인 이클리프마저 반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고 깔끔했다.
특히, 이십여 마리의 베어울프를 모두 처치한 후에 보였던 무표정함이라니, 사선을
수없이 넘어본 사람이 아니면 절대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감히 이클리프로서는
따라갈 수도 없는, 아니 자신의 직속상관인 샤르비엘 후작조차도 따라갈 수 없는
경지에 있다는 걸 그때 직감했다.
그때부터 이클리프는 루이에를 거의 맹목적으로 존경했다. 강함에 대한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눈 좀 붙여라. 구슬에 불이 들어오면 깨워주지."
"아닙니다. 루이에님부터 주무십시오. 요 며칠 계속 눈도 붙이지 않았지 않습니까?"
"훗,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난 괜찮다. 자라. "
한마디 더 내뱉은 루이에는 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 상태로 불침번을 서는
루이에였다.
"고맙습니다. "
이클리프가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노숙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편안한
표정이었다. 루이에에 대한 믿음에 기인한 것이리라.
창고에 갇혀서 자신의 마법에 의식을 잃었던 라한.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몸을
꿈틀거렸다.
"으, 으."
정신이 몽롱했다. 팔다리가 내 것 같지 않고 머리도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떤지는 명확하게 깨달았다.
"빌어먹을. 쿨럭! "
라한이 기침을 하자 입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충격에 의해 내장기관을 다친
듯했다.
"헉, 헉. 으.망할. 이게 무슨 망신이야?"
어렵게 몸을 추스른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현기증이 돌았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몸이 엉망이군. "
라한이 제령기와 제란기를 차례로 돌렸다. 몸 상태를 점검하고 내장 기관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두 가지 기운을 모두 돌리자 몸이 어느 정도는 제 모습을 찾은 듯했다.
"미치겠네. 대체 여길 어떻게 나가지? 시간은 얼마나 흐른 거야? 망할 테세르가
그런 소리만 안 했어도 시험해보는 무모한 짓은 안 하는 건데. "
괜히 테세르에 대한 원망만 커졌다. 일단 테세르를 욕하기 시작하자 세상 모든 게
다 짜증났다.
보물 창고에 이런 장치를 해둔 칼라피안에게도 화가 났고, 지금 옆에 없는
테세르에게도 화가 치밀었다. 또, 자신이 이곳으로 오는 걸 말리지 않은 로이나와
다른 일행에게도 분노가 치밀었다. 괜한 투정인걸 알면서도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에휴, 어떻게든 나가기만 하면 뭐가될 것 같은데."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처음 살펴 본 곳은 라한의
마법이 닿은 곳이었다.
"뭐 이래? 흔적도 없잖아. "
라한의 마법은 4 서클 실드를 깰 만큼 강했다. 헌데, 창고에는 약간의 흠집도 나지
않았다.
"대체 이게 뭔데 이래?"
라한이 창고를 다시 둘러보기 시작했다. 지금 라한은 이 창고를 만든 재질이 가장
궁금했다.
아무리 1 서클 마법이라지만 7 서클 정도의 제령기를 담았던 마법이었다. 헌데,
흠집도 나지 않다니. 라한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거 뭐야? 미스릴이잖아. 허, 이거 참. 꼴에 담글질까지 되어있어? 이 거대한
창고 전체가? 미치겠군. "
창고 재질을 살펴본 라한이 경악했다. 창고 전체가 하나의 통짜 미스릴이었다.
그것도 드워프의 솜씨로 잘 담금질된 그런 미스릴창고였다
"어휴, 그러니 이런 일이 벌어지지."
미스릴은 마나를 흡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구적인 마법
도구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헌데, 창고의 재질이 미스릴이라는 것. 그건
이 창고 전체가 마나를 흡수한다는 얘기와 같았다. 왜 창고 안에 마나가 없는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창고 안에 있어야 할 기운마저 창고의 재료가 되는
미스릴이 모조리 흡수한 탓이다.
"흠, 그럼 그냥 쳐봐?"
라한이 세라 소드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좌우로 몇 번 휘둘러 본 후, 창고의 벽을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
채캉!
"으윽! 젠장. "
라한의 손아귀를 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무 강하게 쳐서 손에까지 충격이
전해졌다.
"아, 돌아버리겠네. "
세라 소드에 맞은 창고의 벽면에 미세한 흠집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 흠집의
정도가 너무 작았다.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창고의 벽. 세라 소드로 쳐서
뚫으려면 얼마나 쳐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썩을! 하앗!"
카카캉!
라한이 다시 세라 소드를 휘둘렀다. 이번에도 창고 벽면에는 아주 작은 흠집을 내는
정도로 그쳤다. 거기다 손에 전해지는 엄청난 충격. 벽면을 칼로 내려쳐서 뚫다가는
손이 망가지는 게 먼저일 듯 했다.
"검 수련 좀 제대로 해 둘걸. "
흠집이 난 부분을 보던 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새로 난 흠집이 전에 난
흠집과 다른 부분에 나 있었기 때문이다. 라한의 검 휘두르는 정확도가 부족하다는
증거였다.
"방법을 강구해야겠어. "
라한이 세라 소드를 집어넣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물리적인 공격으로 뚫으려는
시도를 포기한 거였다.
"마법으로는 미스릴을 부수는 게 거의 불가능한데. 그렇다고 칼질로 뚫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어쩌지?"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에이씨. 칼라피안 아저씨는 왜 이딴 장치를 만든 거야? 그리고 만들었으면
말이라도 해주지. "
칼라피안도 이런 기관 장치를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헌데, 라한의 성정을
생각하고는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항상 철두철미하고 세심한 성격이 라한
아니던가. 그라면 이런 장치에 당하지 않고 보물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테세르를 깜빡했다는 게 칼라피안의 실수였다. 항상 사고뭉치였던 테세르.
그가 이번 창고에서도 크나큰 실수를 범할 거라는 걸 예상했다면, 좀 더 제대로 된
대처법을 알려주고 눈을 감았을 터였다.
"아, 몰라. 몰라, 검도 안 되고, 마법도 안 되고. 어쩌라고."
라한이 바닥에 벌렁 누워 버렸다. 서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단 누워 있으니 수마가
몰려왔다. 내장기관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피곤이 몰려온 것이다.
"좀 자고. 나중에. 다시. 보."
라한이 잠을 참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정신적 육체적인 혹사가 심했는지
도저히 참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라한이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기절이
아닌 수면이었다.
정령왕들에게 부탁했던 로이나가 초조한 듯 레어를 서성였다.
"왜 이렇게 늦지?"
다른 이도 아닌 정령왕. 그것도 4 대 정령왕을 한꺼번에 이용한 것이기에 오래
걸리지 않을 줄 알았다. 헌데, 벌써 이틀 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다시 불러야 하."
위이이잉!
대기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물의 정령왕 엘라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던
로이나가 서둘러 엘라임 앞으로 다가갔다.
-피곤해 보이는군.
"아, 조금. 근데 다른 정령왕들은?"
-내가 대표로 왔다. 네가 블루드래곤이라서 내가 소환되는 게 힘의 소모가 적을
거다
"그렇.군. 찾았어?"
-미안하다. 못 찾았다.
엘라임이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로이나와 같은 속성인 물의 정령왕
엘라임. 그 때문인지 로이나와의 감정 교류가 꽤나 친숙하고 흡사했다. 로이나가
느끼고 있던 다급함과 초조함을 그도 느낀 것이다.
"흔적도 없어?"
-그게 이상하더군. 인간이라면 어디를 가든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다. 설사 자신이
흔적을 지우려고 애쓰더라도 우리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지. 헌데, 없었다.
"멜카투라 산을 다 뒤져본 거야?"
-응.
엘라임의 대답에 로이나가 몸을 비틀거렸다. 너무 큰 실망감과 좌절감에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라.한. "
-힘들어 보이는군.
"괜찮아. "
-그 인간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
"말해봐 "
원래 엘라임은 용건만 전해주고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자신이 머물러 있는 그
자체가 로이나를 피곤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에 4 대 정령왕 모두를 부르면서
힘이 고갈된 로이나이지 않은가. 아직 힘이 회복되지 않았을 것이기에 빠른 회복을
생각한다면 소환 시간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로이나의 얼굴에 보이는 좌절감 때문에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이나가 신경 쓰는 그 인간에 대해 궁금함이 몰려온 것이다.
-네가 찾고 있는 그 인간의 이름이 라한이라고 했나?
"라한이 왜?"
-그 인간에 대해 설명해봐라. 그가 멜카투라 산을 오른 게 확실하다면 흔적이
남아야 정 상이다.
"그렇겠지. "
-멜카투라 산에 있는 땅의 정령에게 라한이라는 인간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지.
계속 없다는 대답 뿐이었다. 그래서 우린 라한이라는 인간이 멜카투라 산에 오른
적이 없다고 결론 내렸었다.
엘라임의 대답에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어서였다.
"그럴 수도 있지. "
-그렇게 멜카투라 산에 대한 수색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한 땅의 정령이
라한이라는 인간을 봤다고 하더군. 그리고 바람처럼 나타나서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럼 멜카투라 산에 갔던 건 확실해?"
-그게 확실하지 않다. 그 땅의 정령이 묘한 소리를 하더군. 공간이동 같지 않은
이동을 했다던가? 만약 공간 이동을 한 거라면 너희 마법인 텔레포트겠지.
"그래서?"
-텔레포트를 사용했다는 건 멜카투라 산 이외의 장소에 볼일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지. 같은 멜카투라 산에 가는데 텔레포트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 멜카투라 산에 가지 않았다는 거군. "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아까 말했듯이 그 땅의 정령은 라한이 공간 이동 같지
않은 이동을 했다고 말했다. 텔레포트가 아닌 건 분명한데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그렇게 말하더군.
다른 정령은 라한의 너무 빠른 움직임 때문에 라한을 보지 못했다. 상급 정령만
되어도 라한이 움직일 때 생기는 긴 빛무리는 봤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멜카투라
산에는 중급과 하급 정령뿐이어서 라한을 본 정령이 없었다.
엘라임이 말하는 땅의 정령도 라한이 몸을 세웠을 때, 그를 본 정령이었다. 화면이
끊어져 움직이는 게 궁금해서 라한이 몸을 세웠던 그때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텔레포트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거야? 대체 어떤 이동이었기에
모른다는 거지?"
-그건 우리도 다각도로 생각해보고 있다.
로이나도 라한의 광견보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라한이 말해준 적이 없어서였다.
또, 라한은 광견보라는 신법 자체를 잘 쓰지 않았다. 로이나로서는 광견보를 볼
기회가 한 번도 없었던 셈이다.
"그럼 알아낸 게 없군. "
-로이나. 라한이라는 인간이 보였던 움직임은 쉽게 넘길 게 아니다.
"드래곤도 본체로 최고의 속력을 내면 그 정도는 나온다. "
-아니, 너희들의 움직임은 아무리 빨라도 정령의 눈을 속이지 못해, 움직이는
주체가 누군지 구분하지 못할 수는 있어도 움직임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발끈한 엘라임의 말에 로이나가 머쓱해했다. 그러면서도 정령들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가? 근데 그게 왜?"
-쉽게 얘기하고 있지만, 심각한 문제다. 만약 마법 아닌 다른 방법으로 정령의 눈을
속인 거라면 우리 정령계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말이 된다.
"그게 왜?"
-그건 흠.
뭔가 말을 하려던 엘라임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인
모양이다.
엘라임이 입을 다물어 버리자 로이나가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다른 존재도
아닌 물의 정령왕 엘라임. 그가 유도심문 따위에 넘어갈리 만무했다.
"말 하려다가 마는군. "
-드래곤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정령계의 존재 이유와 관계있는 건가?"
-비슷하다고 해두지.
"흠. "
라한의 얼굴이 복잡하게 변했다. 갑작스러운 라한의 실종과 정령왕들의 민감한
대응, 뭐가 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라한을 만나면 말해줘야겠어. '
뭔지 모르지만 정령왕들이 라한에게 신경 쓰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건
로이나에게 큰 불안을 심어주었다.
-로이나. 그럼 우린 다시 그 인간을 찾으러 가겠다. 혹, 그 인간을 찾으면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겠나?
"그래야. 하나?"
-로이나. 우리 정령들이 그 인간을 적대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를 믿어라.
"휴, 그러지. "
마지못해 로이나가 긍정을 표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라한과 정령들을
떼어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단 라한을 찾고 난 후의 얘기겠지만.
-그럼 다음에 보지.
인사를 한 엘라임의 모습이 서서히 까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로이나가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군. 적대감은 보이지 않았어. 근데, 왜 라한에게 신경 쓰는 거지?'
차라리 적대감이라도 보였다면 피아구분이 확실했을 것이다. 데, 엘라임의
얼굴에서는 뭔가 갈망하는 빛만 보일 뿐. 악의로 이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실과 가장 가까운 존재인 정령. 그들이 가식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래도 몰라. '
아무리 생각해도 라한과 정령왕들을 붙여놓는 건 아니다 싶었다. 일말의 불안이나마
없애고 싶었음이다.
어둠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혼자 사색을 할 때,
눈을 감고 행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자청한 어둠이 아닐 때는 크나큰 공포를 느끼게 된다. 혼자
남겨졌다는 외로움과 고독함. 스스로에게 느끼는 절망감과 분노. 이런 감정들에
고스란히 노출되기 때문이다.
라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꼈고, 절망과 분노를
맛봤다.
"젠장. 그래도 난 나야. "
헌데 라한은 그런 감정들에 얽매이지 않았다. 셀 수 없으리만치 많은 전생의 기억이
라한의 정신을 강인하게 만든 탓이다.
"빠져나가고 말겠어. "
라한이 다시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마법으로는 안돼. 그렇다고 칼질도 안되고. 인챈트? 창고 전체를 인챈트 해
버릴까?"
인챈트에 대해 생각하던 라한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마땅한 인챈트가 생각나지
않은 탓이다.
라한이 이 창고의 밖에 있었다면, 인챈트 할 많은 마법들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헌데, 라한이 안에 있다는 게 문제였다. 무슨 마법을 쓰든지 라한은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까닭이다.
"인챈트가 안 되면 뭐로 하지? 음, 마법으로 하려면 엄청난 절삭력을 가진 마법으로
해야겠지 그래야 내가 충격을 받지 않을 테니까. 절삭력이라. 그래. 만들어보자고.
어차피 지금 쓰는 마법도 다 내가 조합한 거잖아. "
라한의 결론은 마법이었다. 하지만, 윈드파이어처럼 치중한 마법은 아니었다.
마법의 힘을 한 곳에 집중시켜수 있는 그런 형태를 원했다.
"일단 직진성만 따지면 원드 파이어 마법이 가장 강하다. 윈드 마법에 파이어
마법을 잘 섞으면 절삭력을 올리는 데에도 좋겠지. 하지만 저 벽이 마나를 엄청나게
머금고 있다는 게 문제인데. 잘못하면 잘리는 게 아니라 터져 버린단 말이야."
마나는 기본적으로 충격에 대한 반발력이 강했다. 무언가가 나를 치고 들어올 때,
튕기는 성질이었다.
라한의 절삭력 강한 마법이 창고 벽면을 쳤을 때, 자칫하면 그 파편이 라한을 덮칠
수도 있는 것이다.
"땅 속성 마법까지 함께 담아야겠어, 공격과 치지 않으면 나까지 죽을지도 몰라.
음, 그리고는 걸 막으려면 물속성도 필요하겠고. 쳇, 네 가지 속성 전부 다
이용해야 되는 거잖아. 이게 가능한가?"
물마법과 불마법은 상극이다. 이 때문에 두 속성을 섞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지금 대륙에는 그게 마법에 대한 정석이었다.
"다른 대안이 없잖아. 에휴, 목숨 거는 건 내 성격하고 안 맞는데."
어쩔 수 없었다. 이곳에서 마냥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거기다 더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
라한은 식량의 대부분을 아공간에 넣어두었다. 이곳에서는 아공간을 사용하는 게
불가능했다. 식량 거의 대부분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주머니 속에 있는 식량이라고 해봐야 하루, 이틀 분량뿐. 굶주림을 참는다 하더라도
보름을 버티는 게 고작일 듯싶었다. 그 안에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살 수 있는
것이다.
두, 세 번 안에 성공해야 하닌 시도하는 것도 힘들고. 미치겠네.
이곳에서는 제령기나 제란가의 보충이 불가능했다. 창고의 흡수 능력이 너무
강해서였다. 결국, 라한이 지금 가지고 있는 제령기와 제란기만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얘기였다.
라한이 가지고 있는 세라 them 는 크기가 너무 작아서 하루 정도면 마나가 가득
찼다. 굳이 라한이 돕지 않더라도 자연지기만으로 하루면 재충전이 되는 것이다.
헌데, 라한이 갇힌 창고는 너무 컸다.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됐는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채 반이 차지 않은 듯했다.
실패하면 죽는다.
결의를 다진 라한이 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본격적으로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떠나는 일행
라한이 실종된 지 일주일. 멜카투라 산 아래에 있던 일행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라한이 사라진지 벌써 일주일이야.
벌써 그렇게 됐군.
로이나도 돌아오지 않고 있어.
그렇군.
카이렌이 입을 열자 일행들의 이목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카이렌은 라한이 없는 동안 은연중에 리더가 되어 있었다. 힘을 가진 이들 중 가장
진중한 성격이라서 저절로 그렇게 된 거였다.
프라미아.
말해라. 엘프.
로이나에게서 연락이 왔던 걸로 아는데?
"레어에 계신다. 그곳에서 라한을 찾고 있다고 들었다. "
프리미아의 대답에 일행들이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로이나가 라한을 이미 찾았기를 은근히 바랐다. 약간 섭섭한 마음은
있겠지만, 라한의 안위가 더 소중한 탓이다.
헌데, 로이나 역시 아직 찾고 있다는 얘기. 고룡인 그도 라한을 찾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골치 아프군. "
"도대체 라한은 어디 있는 거야?"
"자자, 그만. 라한이 자의로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나? 그러니까 라한이 우릴
버리고 도망갔다고 생각하는 사람?"
카이렌의 물음에 일행들모두가 침묵을 고수했다. 라한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였다.
"나, 난 라한이 도망갔다고 생각해. "
유일하게 프리미아만 라한을 낮게 평가했다. 일행들은 프리미아의 말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딴죽을 걸었던 프리미아. 이번도 그러려니 하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뭐야? 왜 내 말은 무시하는 건데?"
"네 남편한테 물어봐. "
"뭐야?"
"그만. 지금 싸우자고 모인 자리가 아니다. "
투바와 프리미아가 대립하려하자 카이렌이 둘을 중재시켰다. 어떤 면에서는
라한보다 더 강한 카리스마가 풍기는 카이렌이었다.
'이상하네. 왜 저 엘프가 하는 말에는 토를 못 달겠지?'
프리미아가의아한듯고개를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의문을 접었다. 그도 라한의
생사에 대해 궁금했음이다. 누가 뭐래도 레테아의 동생이었으니 말이다.
"라한이 타의에 의해 실종되었다. "
"음. "
"흠. "
카이렌이 결론을 내리자 일행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예상했던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임시 리더인 카이렌의 입에서 나오자 무게가 남달랐다.
"라한을 납치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해 말해봐. "
"라한을 납치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누가 뭐래도 드래곤이겠지, 이미
라한이 드래곤 한 놈을 박살낸 적이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라고 봐. "
프라하가 가장 먼저 용의자를 지목하고 나섰다 그 말에 카이렌도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그 역시 유력한 용의자로 드래곤을 꼽고 있었음이다.
"드래곤은 아니라고 봐. 그 당시에 로이나도 우리와 함께 있었잖아. 멜카투라 산에
드래곤이 나타났으면 로이나가 가장 먼저 알아차렸을 거 야. "
"그럼?"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아닐까? 그들의 힘도 무시할 수 없잖아. 인원도 쾌 많고.
거기다 그들은 대륙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왕국이 지원하고 있는 상황이잖아.
정보력에 있어서는 그들이 최고일 것 같은데. "
"그럴 수도 있지. "
카이렌은 투바의 의견에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이봐. 카이렌. 네 생각은 어때? 대체 누구 같아?"
"누가 더 유력한지는 중요하지 않아. 용의자가 생기면 어차피 그들 모두를 조사해야
할 테니까. "
맞는 말이었다. 어차피 어떤 용의자가 됐든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결국, 용의자가
된 이들 모두를 조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그들을 조사해야겠군. "
"음, 드래곤은 프리미아 네가 조사해라. "
"내가 왜?"
"너도 우리 친구니까. "
"친구?"
"그래. 라한은 우릴 친구로 생각했다. 너도 조건 없이 일행으로 받아들여졌으니
친구라고 불러도 무방하겠지. "
친구라는 말에 프리미아가 찡한 감동을 느꼈다. 언제부터 자기가 이런 감정에
약해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엄숙한 순간에 들려온 친구라는 한 마디가
프리미아를 흔들었음은 분명했다.
"만약에 말이야. 정말 만약인데, 그러니까 만약에. 라한이 이미 죽었으면 어쩌지?"
투바의 경솔한 물음에 일행들 모두가 침묵에 쌓였다. 그렇게 잠시 후, 카이렌이
낮고 음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누가 됐든. 설사 그가 신이라 할지라도 라한을 죽인 놈은 내가 죽여 버린다.
"
"꿀꺽 ! "
" 음. "
카이렌의 살기어린 말에 일행들 모두가 침을 꼴깍 삼켰다. 순간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카이렌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강한 실력자인 투바와 프라하. 카이렌보다 오히려 더
강한 프리미아도 살기에 몸을 움찔한 건 마찬가지였다.
"프리미아. "
"알았어. 드래곤 쪽은 내가 조사해볼게. 로이나님하고 같이 조사하면 어렵지 않을
거야. 그럼 레테아. 나중에 봐! 아잉! 텔레포트! "
프리미아가 레테아에게 윙크를 하고는 마법을 사용했다. 프리미아가 사라지자
카이렌이 주변을 한차례 훑었다.
"그럼 나머지는 떠날 채비를 해줘. "
"어디 갈 건데?"
"굴레를 벗은 존재들에 대해 조사해봐야겠어. 다음 유력한 용의자잖아. "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 자자, 준비하자고. "
프라하가 일행을 다독이며 준비를 서둘렀다.
일행 모두가 흩어지자 시종일관 입을 다물고 있던 레테아가 조용히 읊조렸다.
"라한아! 살아만 있어다오. "
그렇게 라한 일행의 행보가 정해졌다. 그들은 그날 점심 식사를 마친 직후에
멜카투라 산을 떠났다.
프리미아는 로이나의 레어로 바로 이동하지 않았다. 서열상 둘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존재해서였다.
바로 가는 건 상대가 낮을 때, 혹은 비슷한 위치일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프리미아는 로이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였기에 레어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라한이라. 모르겠군. 그 인간이 대체 뭔데 그러지?"
프리미아는 일행들이 라한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게 신기했다. 꽤 오랫동안 살아온
프리미아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더 신기한 건 자기 자신조차도 라한에게 묘한 매력을 느낀다는 거였다. 물론,
이성적인 매력은 절대 아니었다. 그냥 라한과 있으면 편하다는 느낌. 그리고 그와
함께 지내는 게 당연하게 생각되는 그런 묘한 매력이었다.
"참 신기한 인간이기는 하지. "
"멈추십시오. "
"응?"
프리미아가 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때, 눈앞에서 엘프 여섯 명이 나타나 앞을
막았다. 로이나가 레어 보호를 위해 둔 가디언이었다.
"프리미아님이시군요. 용건이 무엇입니까?"
"당연히 로이나님. 아, 아니구나. fp 이시아나님을 만나러 왔지."
"저. 급한 일입니까?"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게. 요즘 레이시아나님이 심기가 편치 않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루 종일
멍하게 하늘만 보고 계십니다. "
엘프 가디언의 대답에 프리미아가 또 한 번 놀라워했다. 천하의 드래곤이, 그것도
침착하다는 블루 일족의 고룡이 인간 때문에 넋을 놓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이거 뭐야? 라한이라는 인간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라는 건가? '
프리미아도 라한에게 매력이 있다는 건 인정했다. 자기 스스로 도묘하게 끌리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드래곤이라는 걸 망각할 정도의 매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로이나의 반응은 뭐란 말인가? 이건 정말 남녀사이의 일 같지
않은가? 유희가 아닌 진짜 남녀 사이의 애정 같은 그런 관계.
지금 상황이 몹시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내가 로이나님을 잘못 본 건가? 아니면 라한을 잘못 본거? 흠, 좀 더
지켜봐야겠어. '
"어?"
갑자기 느껴지는 기운에 프리미아가 고개를 들어 뒤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 아!"
프리미아를 따라 뒤를 보던 엘프가 순간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꽤나 반가운 손님을
발견한 것이다.
"어이! 이게 누구야? 블루 일족의 개구쟁이 프리미아 아닌가?"
"흥. 베르네미스님. 누가 개구쟁이라는 거예요?"
"아, 하하하. 이젠 숙녀가 다 됐다 이건가?"
"뭐라구요?"
"하하하. 농담이다. 농담. "
나타난 이는 골드 드래곤 베르네미스였다. 시스마란에게 마법을 가르치겠다고
종적을 감췄던 베르네미스. 그가 유희적 모습인 베르네의 형태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주세요. 베르네미스님.
"이런, 이런. 삐친 건가? 이거야원."
"제가 베르네미스님인 줄 아세요? 삐치긴 뭘 삐쳐요?"
"하하. 단단히 삐쳤군. "
"흥. "
베르네미스와 프리미아도 꽤나 친한 사이였다. 로이나와 가장 친한 베르네미스.
로이나를 존경하는 프리미아가 그를 그냥 둘리 만무했다.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을까? 어떤 성격 때문에 로이나가 좋아할까? 이런 생각으로 베르네미스와 친해진
거였다.
이에 반해 베르네미스는 누군가를 만날 때, 편견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 스스로가
워낙에 친구가 없어서였다. 친구가 없으니 누구라도 친근하게 대하면 최선을
다했다. 어찌 보면 정에 굶주려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베르네미스님. 푸른 수정의 3 장로 드일리프 인사드립니다.
"어, 드일리프로군. 오랜만이야. "
"네, 반갑습니다. "
로이나의 레어에는 정해진 가디언이 없다. 대신, 로이나가 돌봐주는 엘프 마을에서
장로들이 번갈아가면서 가디언 역할을 해왔다.
로이나로서는 똑똑한 가디언을 쓸 수 있고, 엘프로서도 든든한 후 원자를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올해 로이나의 레어를 지키는 임무를 드일리프가 맡은 듯했다.
"마을은 어때? 아직도 몬스터가 많나?"
"아닙니다. 레이시아나님이 결계를 만들어주셔서 더 이상 공격 받는 일은 없습니다.
"
"다행이군. "
"감사합니다. "
드일리프가 진정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르네미스의 도움이 컸음을 아는 까닭이다.
로이나가 드래곤이기는 하지만, 결계를 마구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약간이지만
인챈트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헌데, 로이나는 인챈트를 공부한 적이 없었다. 책을 살펴본다면 간단한 몇 가지는
할 수 있지만, 그런 결계는 오래가기 힘들다. 이 때문에 베르네미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베르네미스도 로이나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래서 만들어진 엘프 결계는 거의 반영구적이었다. 엘프 마을로서는 엄청난 기연을
얻은 것이다.
"근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레이시아나님 만나러 온 거 아닌가?"
"아, 내 정신 좀 봐. 베르네미스님. 가요."
"베르네미스님. 레이시아나님의 신기가 불편합니다. 좀 달래주십시오. "
"그래? 음, 왜 그럴까? 설마 아직도 못 찾은 건가?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
"감사합니다. "
짧게 대답한 드일리프가 옆으로 두 걸음 물러났다. 로이나의 레어로 가는 걸
허락한다는 의미였다.
드일리프가 물러나자 베르네미스와 프리미아가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그들은 올라가면서도 서로 아무런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프리미아는 라한이라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베르네미스는 자신의
ㄹ 11 어에 두고 온 시스마란 때문에 고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로이나가 베르네미스와 프리미아를 맞았다. 꽤나 평온한 얼굴이었다. 표정만보면
심기가 불편하다는 말은 거짓말 같았다.
"레이시아나님을 뵙습니다. "
"레이시아나님. 오랜만입니다. "
프리미아와 베르네가 차례로 인사를 해왔다. 로이나가 아닌 레이시아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지금은 유희 중이 아니라고 생각한 탓이다.
"로이나라고 불러도 돼. "
"네, 로이나님. "
"그러죠. 로이나님. "
레이시아나는 베르네미스와의 유희에서 로이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또, 라한과의
유희에 프리미아가 참가했을 때도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 이 때문에 둘 모두에게
로이나로 불려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베르네미스가 누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건 문제가 있었다. 베르네미스와
로이나가 친한 건 사실이지만, 호칭에서마저 허물없이 지내는 건 다른 드래곤이
모르기 때문이다. 프리미아 역시 모르고 있을 것이기에 그녀의 앞에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베르네. 근데 무슨 일이지?"
"아, 그냥 왔습니다. "
"제자가 속 썩여서 그런 건 아니겠지?"
"로이나님. 혹시 저 미행하고 다녔습니까?"
베르네가 놀란 눈으로 반문했다. 단번에 찍어내는 안에 감탄한 기색이 역력했다.
"훗, 한 번쯤 방문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하, 그럼 해결책도 알고 계시겠군요."
"해결책이야 뻔하지. 네가 공부하는 수밖에."
"로이나님. 그, 그건."
베르네가 방문한 건 시스마란에게 가르칠 마법이 없어서였다. 그는 용언 마법과
엘프 마법이 아닌 인간 마법은 알고 있는 게 고작 이십여 개밖에 안 되었다. 그
중에서 자신이 싫어하는 공격마법을 제외하자 정말 몇 개 안 되었다. 제자라고 삼은
시스마란에게 가르칠 마법이 없는 것이다.
"왜? 배우기 싫어?"
"제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이것저것 기웃거리고 연구하기 좋아하지만, 정작 깊이 파고드는 건 단
하나도 없지. 음, 그러고 보니 너! 마법에 대해 공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군. "
"그게. 어, 그러니까. 우리 드래곤은 나이를 먹으면서 저절로 마법을 익히게
되잖아요. 그래서 다른 마법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베르네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새삼 왜 마법을 공부하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었다.
"그래. 용언은 그렇게 얻게 되겠지. 헌데, 인간마법은 어쩔 건 데? 설마 용언을
가르칠 생각은 아니겠지?"
"아이고, 로이나님도 참. 용언이 가르친다고 되는 겁니까? 인간의 정신력으로
용언이라니. 전 제 제자를 벌써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
"그럼 엘프 마법이라도 가르쳐보지?"
로이나의 연이은 말에도 베르네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에휴, 벌써 해봤죠. 엘프 마법도 공격 마법 빼니까 몇 개 되지도 않던데요. 인간
마법하고 합쳐서 여덟 개던가?"
"그래? 엘프 마법 중에서도 공격 마법이 그렇게 많았나?"
"그게 아니라. 제가 아는 엘프 마법이 열두 개밖에 안 되는지라."
"푸풋! "
베르네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프리미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베르네의 어벙한
모습이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마법의 종주라는 드래곤이 마법이 몰라 찾아오다니.
드래곤 역사상 한 번 있을까 말까한 희귀한 일이었다.
"야! 너 웃지마. "
"후후후. 알았어요. 근데, 베르네미스님. 아직도 베르네라는 이름을 쓰시네요. "
"그게 뭐?"
베르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프리미아 앞에서 우스운 꼴 보였던 게
민망해서였다.
"지겹지 않아요?"
"그게 뭐가 어때서? 난 유희 때 영웅이 되거나 나라를 세우는 일은 안 하잖아. 다른
지역으로만 가면 같은 이름으로 유희를 즐겨도 상관없어. "
"아, 그런 장점이 있구나. "
"근데, 프리미아. 너도 생각을 짜내봐."
베르네가 프리미아에게까지 도움을 청하고 나왔다. 지금 그에게는 무척이나 절실한
문제였다.
생애 처음으로 둔 제자에게 가르칠 마법이 없다니. 제자에게 너무 미안했다. 또,
덥석 스승이 되겠다고 나섰던 자신이 부끄럽고 창피해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뭘요?"
"내가 제자를 하나 뒀거든. 인간이야. 근데, 이 녀석한테 가르칠 마법이 없단
말이야. "
"문제는 베르네미스님이 마법을 모른다는 거군요."
"그렇지. 아는 게 있어야 가르칠 텐데. 마법에는 영 흥미가 없어서 말이야. "
프리미아가 생각에 잠겼다. 나름대로 해결책을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참 후, 프리미아가 조용히 입을 떼었다.
"마법에 대한 기본 원리는 가르쳤죠?"
"물론이지. "
베르네미스가 큰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기초부터 하나씩 가르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의 발로였다.
"그럼 책을 주세요. "
"책?"
"예. 마법의 기본 원리는 알고 있다고 하니까 주문만 알면 되잖아요. 뭐,
주문만으로 안 되는 것도 많지만, 그건 베르네미스님의 지식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
"책이라."
베르네미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희망이 보이는 모양이다.
"풋! "
이번에는 로이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베르네의 표정 변화가 너무 즐거워서였다.
저렇게 단순하다니. 자신과 같은 드래곤이 맞나싶었다.
'베르네는 머리가 좋은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멍청하다니까. '
로이나의 생각을 눈치 챈 베르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괜스레 창피한 기분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프리미아가 웃을 땐 뭐라 시비라도 걸었지만, 로이나가 웃자 뭐라 말하기도
힘들었다. 누가 뭐래도 서열상 로이나가 위였기 때문이다.
'에고, 이게 무슨 꼴이냐?'
"근데, 책은 어떻게 구하지?"
"예? 그거야 베르네님이 알아서 구하셔야죠. "
"아고, 또 왕궁에 찾아가서 협박해야 하나?"
"그래도 보석을 달라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책이야 어차피 필사하면 되니까. "
"뭐, 그건 그렇지만. 알았다. 근데 넌 여기 웬일이냐?"
베르네는 일단 자기 일이 일단락되자 프리미아의 방문 이유가
궁금해졌다. 평소에 로이나를 존경하기는 했지만, 직접 찾아오는 경우는 드문
프리미아. 괜한 호기심에 눈이 반짝 거렸다.
"아, 맞다. 로이나님. 저."
말을 하던 프리미아가 베르네를 바라봤다. 둘이서만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무언의
의견 표시였다.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냐?"
"괜찮아. 프리미아. 베르네는 괜찮으니까 말해."
로이나의 말에 베르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드래곤 중에서도 호기심 제왕이
베르네 아니던가? 호기심 제왕이 베르네 아니던가? 호기심을 풀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아, 예. 로이나님. 저기. 라한의 실종에 대해 회의를 했습니다. "
"그래?"
"라한? 로이나님, 라한을 찾은 겁니까?
"찾았는데. 또 사라졌어. "
"이런. "
베르네가 안타까운 음성을 내뱉었다. 라한을 한 번 만나보려고 했던 베르네였다.
그런 기회가 사라지자 아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저, 베르네님. 라한이라는 인간에 대해 아십니까?"
"당연하지. 라한을 처음 본 드래곤이 바로나라고. 아마 대륙전체 종족을 통틀어도
라한을 빨리 본 순으로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걸."
"그.래요?"
베르네의 음성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라한을 알고 있다는 그 자체가 그를
자랑스럽게 만든 듯했다.
헌데, 프리미아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드래곤이 고작 인간을 알고 있다는
걸 자랑스러워하다니. 라한이 관련된 일에 대해 서 자기 예상과 어긋나는 일이 자꾸
벌어지자 순간 짜증이 일었다.
'그 인간 대체 뭐야? 베르네님도 알고 있단 말이야?'
"프리미아. 말해봐. "
로이나의 재촉에 프리미아가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예. 아마 이번 실종은 타의에 의한 게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
"그럴 가능성이 높지. "
"근데, 라한의 실력을 생각하면 그를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많지 않잖아요. "
"그렇지. "
프리미아가 뭔가 말을 할 때마다 로이나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미 오래전에 한
번씩 생각했던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저희 드래곤입니다. 또, 그쪽은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꽤 모인
파티라서."
"드래곤들이 그를 납치한 게 아닌가 조사해야 한다는 거로군. "
"예. 그렇게 결정 났습니다."
"드래곤은 아니야. "
로이나의 대답에 프리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로이나가 이미 생각하고 있으리란 걸 짐작하고 있었다. 회의 결과가 그렇게
났기에 말하러 왔을 뿐. 로이나에게 무언가를 충고한다거나 알려주려고 온 건
아니었다.
"이미 조사해보셨군요. "
"조사라고 할 것도 없지. 로드가 된 로테마이어스가 대륙 서쪽 끝에 가 있으니까.
다른 곳에는 신경 쓸 여력도 없을 거다."
로테마이어스는 베르타라스를 만난 후부터 계속 고룡들을 찾아다녔다. 특히, 차가운
기운과 관계있는 화이트 일족은 하나도 빠짐없이 만나서 크라이드리안의 상세를
살피게 했다. 조만간 로이나도 찾아올 게 분명했다.
"그래요?"
"응. 크라이드리안이라는 녀석을 치료하느라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고 있더군. 아마,
고룡들 모두 만나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로드 밑에 있는 다른 드래곤들은 내가
이미 불러서 물어봤다. 최근에 인간을 납치한 적이 있는지 물었는데, 모두 없다고
하더군."
"아, 그렇군요. "
로이나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라한에 대한 얘기를 하자 서글퍼진 듯했다.
"그럼 다른 일행들은?"
"굴 fp 를 벗은 존재들의 모임을 조사한답니다."
"그래.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곳이지. 하지만."
뭔가 말을 하려던 로이나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 로이나의 애매한 태도에
프리미아와 베르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 성격이 아니었기에 의아했음이다.
로이나는 라한이 납치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라한의 성격을 생각하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라한은 자존심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언제든지 도주할 수
있는 성격이었다. 그런 라한이 누군가 납치하려고 하는데 곱게 납치당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설사 상대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하더라도 테세르를 보내
도움을 요청해야 정상이었다. 그게 로이나가 알고 있는 라한이었다.
"그럼 가서 말할까요?"
"마음대로 해. "
"굴레를 벗은 존재들을 조사하는 건 어떻게 할까요?"
"그것도 마음대로 해. "
라한이 사라지자 로이나가 일행에 대해 흥미를 잃었다.
처음부터 그들과 함께 다녔던 것도 라한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헌데, 그
연결 고리가 사라졌다. 그들이 하는 일에 신경 쓸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
"그래. 마법을 사용해서 돌아가. "
"예. 로이나님. 텔레포트. "
로이나가 마법사용을 허락하자 프리미아가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이동했다.
프리미아가 사라지자 베르네가 편한 얼굴로 말했다.
"누님. 근데 라한은 언제 만났던 겁니까?"
"너하고 헤어지고 바로. "
"아, 아깝네. 저도 라한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거든요."
"나중에 시스마란하고 같이 만나보도록 해."
"예. "
로이나의 얼굴에 혼자 있고 싶다는 기색이 엿보였다. 이를 눈치챈 베르네가
헛기침을 해댔다.
"흠, 흠. 누님. 저 가볼게요. "
"그래. 너도 마법 써서 가라. "
"예. 누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텔레포트!"
베르네까지 사라지자 로이나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그 상태로 라한과 자신에
대해 생각해봤다.
'왜 라한에게 이렇게 신경 쓰는 거지?'
로이나 스스로도 해답을 몰랐다. 그냥 생각하면 걱정되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라한은 어둠 속에서 장장 보름을 보냈다. 어둠과 외로움에 익숙해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긴 시간동안 일행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봤다.
그렇게 내려진 결론은 '일단 일행들과 만나지 말자'였다. 자신이 너무 독선적이지
않았나? 자신 때문에 오히려 안전할 수 있는 이들이 위험에 처한 건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일행들과 떨어져 있을 결심을 한 것이다.
물론, 그 동안 일행에 대한 생각만으로 시간을 허비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일행들에 대한 마음을 다잡은 건 단 며칠에 불과했다. 나머지 시간에는 이
지긋지긋한 창고를 탈출하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 해봤다.
"이 방법이 성공해야 할 텐데. "
라한이 그동안 주력으로 삼은 건 마법이었다. 비록 1 서클에 불과하지만, 스스로
대마법사라 생각하는 라한.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동원했고, 그렇게 해서
결국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불마법, 물마법, 땅마법, 바람마법. 네 가지를 한 마법으로 합치는 건 성공했다.
아직 시도 해보지는 않았지만, 이 방법이면 틀림없이 새로운 마법을 시전할 수 있을
거야. 근데, 과연 저 무지막지 한 벽을 뚫을 수 있을까?"
마법은 만들어냈지만, 이 새로운 시도가 창고를 뚫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창고
벽면의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해보자.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하자고. "
라한이 제령기와 제란기를 한 번씩 점검했다. 심법을 돌리는 게 아닌 단순히
점검하는 수준이었다. 자칫 심법을 돌렸다가 가진 기운마저 빼앗길 수 있기에 이게
최선이었다.
"좋아. 엡솔루트 레이저(Absolute laser) !"
라한이 새로 만든 마법을 눈앞에 시전했다. 이에 은빛과 금빛이 묘하게 려인 둥근
톱니가 라한의 눈앞에 떠올랐다. 라한이 만들어 낸 마법이 실체화 된 모습이었다.
시전 된 마법을 보며 라한이 만족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론만으로 만들었던
마법이었기에 확실하지 않았던 엡솔루트 레이저. 막상 눈앞에 떠오르자 감회가
새로웠다.
"이게 내가 만든 마법이란 말이지? 멋진데. "
라한이 감탄한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4 대 원소 마법의 결합. 너무 감격스러워서 벽에 쏘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엡솔루트 레이저는 라한이 만든 마법의 결정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륙 그
어디를 봐도 찾아볼 수 없는 4 대 원소의 결합. 그 한가지만으로도 이름을 떨치기
충분했다.
하지만, 라한의 능력은 단순히 엡솔루트 레이저 하나에 국한되지 않았다. 4 대
원소를 한 번 결합했다는 것. 그건 다시 4 대 원소를 결합할 수 있다는 말도 되었다.
지금까지 대륙에 없었던 마법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연
것이다.
"후우, 아깝지만 쏴야겠지. 엡솔루트 레이저!"
라한이 다시 한번 시동어를 외쳤다. 라한의 시동어에 눈앞에 떠있던 둥근 톱니가
벽을 향해 빠르게 쇄도해갔다.
위이이잉!
크카카카카카캉! 채채채챙!
마치 금속으로 금속을 긁는 소리가 벽에서 울려나왔다. 톱니가 벽을 때리는
소리였다.
위이이이잉 !
카카카카캉! 채챙! 채챙!
둥근 톱니는 멈추지 않고 계속 벽면을 때렸다. 이에 벽면에서 불꽃이 튀며 창고를
환하게 밝혔다.
"제발 뚫어라, "
엡솔루트 레이저는 벽면에 계속해서 흠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벽면이
서서히 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런 파임이 벽을 뚫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젠장할. 이놈의 벽은 도대체 두께가 얼마야?"
라한이 질린 듯 욕설을 내뱉었다. 그 욕설이 거의 끝날 때쯤 시끄럽게 들려오던
소음도 멎었다. 라한이 시전한 마법이 힘이 다해 멈춘 상태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젠장."
라한이 엡솔루트 레이저가 가격한 벽면을 보며 연신 욕을 쏟아냈다. 결국 벽면을
뚫는데 실패한 탓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벽에 근 50 센티미터 깊이의 홈을 파는
데 성공한 것이다. 헌데, 아직도 밖이 보이지 않았다. 50 센티미터를 훨씬 넘은
두께인 듯했다.
"돌아버리겠군. 엡솔루트 레이저는 제령기의 소모가 큰 편인데. "
사용한 힘과 남은 힘을 비교해보며 라한이 절망어린 표정을 지었다.
엡솔루트 레이저만 사용한다면 앞으로 대여섯 번 정도 쓸 힘밖에 남지 않았다.
헌데, 만약 그 안에 벽을 뚫지 못하면? 그때는 죽음을 기다리는 길밖에 남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엡솔루트 레이저만 고집하는 건 너무 무모한 도박으로
보였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겠군. "
결국 라한이 엡솔루트 레이저의 사용을 포기했다.
엡솔루트 레이저로 벽을 뚫는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뚫었다
하더라도 라한이 빠져나갈 구멍으로는 부족한 탓이다. 결국, 뚫는 정도가 아닌
잘라내는 정도가 되어야 하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4 대 원소까지 결합했는데. 우씨, "
한 마디 불평을 토한 라한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엡솔루트 레이저보다 더 강한
마법을 만들어 내야 할듯했다. 아니면, 마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강구하거나.
한참 고민하던 라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법만으로는 안되겠군. 검만으로도 안되고. 그럼 섞어?"
라한이 묘한 발성을 해냈다. 마법과 검을 려는 방법. 지금까지 대륙의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생각이었다.
"어차피 인챈트는 이미 돼 있어서 안 되니까. 음, 인챈트 아닌 방법으로 섞어야
하나?"
인챈트. 대륙에서는 연금술로 알려진 방법 외에는 검과 마법을 섞는 게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해본 사람조차 없었다. 검과
마법이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마검사라는 직업이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마법에 재능 있는 사람이
검을 조금 익히거나, 검에 재능 있는 사람이 하급의 마법을 익히는 정도에 그쳤다.
그 중 마법이 주가 된 마검사는 갑자기 공격해오는 적을 상대하는 정도로만 검을
사용했다. 검을 주로 사용하는 따검사도 마법을 단순히 견제용 이상으로 사용한
적은 없었다.
"견제용으로 써서는 가능성이 없어. 검을 돕는 마법 마법을 돕는 검이 필요해. "
라한은 애초에 검과 마법을 하나로 묶을 생각을 먹었다 아니, 서로 돕도록 만들어서
능력을 배가시킬 작정이었다.
"그럼 내가 진짜 마검사가 되는 건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라한이 마검사가 될 확률은 극히 낮았다. 검술 자체에 재능이
없는 탓이다.
검을 휘두르는데 재능 없는 라한이 마검사라니. 테세르가 들었다면 주인 미쳤다며
비웃을 일이었다.
"일단 해보자. "
라한이 검을 꺼내 들고 찬찬히 살폈다. 검에 대해 먼저 이해한 후, 그에 걸맞은
마법을 생각해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한참살핀 후에야 마법 공식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대륙에 없는
방법이니만큼 새로 만들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 쉽지 않은 일이 될 게 분명했다.
라한 일행. 지금은 라한이 빠진 일행을 따르던 이클리프가 루이에에게 다가왔다.
"루이에님. "
"무슨 일이지?"
"두 가지 소식입니다. "
샤르비엘 후작이 한 명이 아닌 두 명을 라한 일행에게 보낸 건 정보를 좀 더
수월하게 전하라는 의미였다. 이 때문에 정령사인 해리언에게도 통신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마법 무구를 전해준 것이다.
헌데, 무려 보름 가까이 소식이 없었다. 지금까지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보냈던
걸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오랜만이군. "
"죄송합니다. "
"자네가 죄송할 건 없지. "
라한 일행도 해리언과 파울이 누군가에게 정보를 주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그동안은 별 상관없다는 생각에 통신 마법을 쓰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안 좋게 흐르고 있었기에 그들을 통제할 수 밖에 없었다. 혹,
그들로 인해 라한이 납치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샤르비엘 후작은 두 명 정도 보내면 제대로 된 통신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라한 일행이 본격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하자 통신할 수 있는 길이 원천
봉쇄되었다. 카이렌의 은밀함과 치밀성이 만든 작품이었다.
"먼저 확실한 정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러게. "
"그들이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
이클리프의 말에 루이에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후, 짧게 되물었다
"음, 목적지는?"
"일단 남쪽이라는 것만 알려졌습니다. 현재 위치로 봐서는 케라스 왕국으로 들어갈
생각인 것 같습니다. "
"케라스 왕국이 라."
루이에가 말을 길게 끌며 회상에 잠겼다. 어느 왕국을 가든 루이에가 죽인 사람은
존재했다. 이번 회상도 그런 대상 중 한 명이었다.
'소문보다 약했지 . '
"두 번째 소식은?"
"그들의 리더로 알려진 라한이라는 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
"보이지 않는다? 전에도 그런 소식을 전해 왔었지, 확실한 건가?"
루이에의 물음에 이클리프가 순간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루이에가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편하게 말하게. 내가 잡아먹지는 않으니. "
"예. 그게, 저 보이지 않는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헌데, 지금까지도 수시로
모습을 감췄던 터라 일행에서 완전히 빠졌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답니다. "
"그렇군. "
루이에가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루이에가 입을 다물자 이클리프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뒤늦게 본 루이에가 다시 말했다.

"말해보게. 내가 편하게 대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죄송합니다. "
"또 죄송하다고 하는군. 됐으니 말해보게. "
"일행에서 빠진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헌데, 수시로 모습을 감췄던 사람이라서
일행에서 완전히 빠졌는지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
루이에게 침음성을 흘리며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헌데도 이클리프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직도 루이에게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에 대한 설명을 하려했던 것 같은데?"
"아, 예. 이번에 사라진 사람은 용병이라고 합니다. 여자인데, 엄청난
미인이랍니다. "
"여자? 상황이 묘하군. "
루이에가 이채를 발했다. 거의 동시에 사라진 남녀. 뭔가 의심을 사기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쪽에서도 서로 눈이 맞아 사라진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
"파울과 해리언 말인가? 아니면 그들과 함께 있던 원래 일행들 말인가?"
"파울과 해리언 얘깁니다. "
"그들의 원래 일행은?"
"아무런 얘기가 없다고 합니다. 거기다 일행들 모두의 얼굴에 비장함이 감돌아서
묻기가 껄끄럽답니다. "
파울과 해리언은 속이 깊은 사람이다. 샤르비엘 후작이 굳이 그들을 골라서 라한
일행에게 맡긴 걸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그들이 라한과 사라진 여자가 서로 눈이 맞았다고 평가했다. 그건 평소에도
그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고 봐야 했다. 헌데도 원래부터 함께 했던 일행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루이에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뭔가 이상하군. 그들이 착각한 건가? 아니면, 기존에 일행들이 착각한 건가? 흠,
아무래도 기존에 있던 일행들이겠지. '
결국 루이에는 기존 일행의 판단이 옳다고 결론 내렸다.
단 하루만 더 생활해도 그 만큼 그 사람을 더 잘 알게 된다. 헌데, 파울과
해리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오랫동안 지냈던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파울과
해리언보다 그들의 판단을 더 믿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비장한 얼굴이라고? 설마. 죽은.건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자 라한이 죽었다는 결론까지 이르렀다. 일행의 얼굴에
감돌았다는 비장감을 설명할 길이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직접 봐야겠어. '
"이클리프. 떠날 채비를 하게. 서둘러야겠어. "
"예, 루이에님. "
그날 루이에와 이클리프는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지금까지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기만 했던 루이에. 이젠 그들과 함께 할 때가 온 듯했다.
물론, 샤르비엘 후작이 의도했던 일과는 대치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루이에가
샤르비엘 후작에게 몸을 의탁한 것 자체가 정보와 재미를 위해서였다.
라한 일행이 더 궁금했고 재미있을 듯 했기에 바꿔보고 싶었다. 샤르비엘 후작에서
라한 일행으로 말이다.
라한이 마법 공식을 하나씩 떠올리면서 5 일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5 일을 공식들을
조합하는 데 사용했다.
라한이 창고에 갇힌 지 벌써 20 일이 지난 셈이다. 이미 식량은 떨어진 지 오래.
물마법으로 만들어내는 물이 없었다면 벌써 오래 전에 죽음을 맞았을 터였다.
"에고, 되려나?"
라한이 축 처진 채 말했다. 이젠 일어나는 일조차도 힘에 겨웠다.
"이 방법이 실패하면 난."
차마 끝말을 잇지 못했다.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를 떠올리기 싫었음이다.
헌데도 자꾸만 죽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잘 때도 죽는 꿈, 멍하게 있을 때도
자신이 죽어 한줌 흙이 되는. 그런 끔찍한 꿈과 상상이었다.
"세라 샤프니스(Sera sharpness) 마법뿐이군. 제발."
세라 샤프니스는 라한이 새로 만들어낸 마법이다. 90 퍼센트의 윈드 마법과
10 퍼센트의 나머지 원소 조합으로 만들어낸 세라 샤프니스. 라한에게는 살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세라 샤프니스 마법은 대상을 날카롭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대장간에서 파는 싸구려
검도 세라 샤프니스 마법을 받으면 명검에 비견될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진다.
라한이 선택한 최후의 선택이었다.
"으차! "
챙-!
라한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허리에 매달려 있던 세라 소드를
뽑았다.
"믿는다. 세라 샤프니스!"
라한이 마법을 시전하자 세라 소드가 미약한 빛에 다가 사라졌다. 라한의 마법이
검에 시전된 거였다.
"제발. 제발."
검을 휘두르기 전에 라한이 몇 번이고 세라 소드에게 빌었다 자신의 목숨이 지금
세라 소드에 달려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제발. 하앗!"
라한이 세라 소드를 벽에 내치쳤다.
채재재재쟁! 스슥!
라한의 세라 소드가 벽면을 갈랐다. 중간에 잠깐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완전히 갈라 버렸다. 라한의 세라 샤프니스가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됐다. 됐어. "
눈물이 핑 돌았다. 세라샤프니스마법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벽을
가른 것으로 만족했다.
어차피 세라 샤프니스 마법은 마나 소모가 거의 없는 하위 서클의 마법. 마음만
먹으면 수십, 수백 번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앗! "
라한이 다시 세라 소드를 휘둘렀다. 헌데, 전혀 갈랐던 곳과 전혀 다른 방향을
갈랐다. 라한의 검술 실력이 형편없어서였다.
"젠장, 어떻게 검만 휘두르면 이 모양이냐? 조각칼은 정확하게 휘두를 수 있는데, "
라한이 다시 세라 소드를 잡고 휘둘렀다 역시나 이번에도 전혀 다른 방향을 잘랐다.
라한의 검술 재질이 형편없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썩을. 미치겠네. 에잇! 에잇! 하앗! 하앗! 하압!"
라한이 세라 소드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이젠 방향을 잡고 어쩌고 하는 준비
동작도 없었다. 아예 벽면을 걸레로 만들겠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휘두를 뿐이었다.
"죽어라! 받아라! 나쁜 놈! 젠장할!"
기합에서 욕설로 바뀌었을 뿐. 라한의 휘두름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현기증이 일었다.
그럼에도 라한은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얼굴에는 즐거워하는 모습도
보였다. 갇혀 지내며 쌓였던 울분을 검을 휘두르면서 푸는 듯했다.
"하앗! 이얍! 압! "
한참 검을 휘두르던 라한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상태로 벽을 천천히 살폈다.
"뚫렸다. 하하하하. 뚫렸어. "
부서지지 않을 것 같던 미스릴 벽면에 구멍이 뚫렸다. 비록 주먹하나 정도 크기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됐어. 하압! 압! 이얏!"
라한이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힘찬 휘두름이었다.
"하압! 아앗!"
채챙! 챙그랑!
한참 휘둘리던 세라 소드가 벽면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라한이 시전했던 세라
샤프니스의 지속시간이 다된 것이다.
"으윽! 젠장. "
손아귀가 찢어질듯 아파왔다.
"세라 샤프니스!"
아픔을 애써 지운 라한이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그리고 세라 소드를 좀 전보다 더
힘차게 휘둘렀다.
"하압! 아압! 아얏!"
라한이 근 아홉 시간 동안 세라 소드를 휘둘렀다. 중간 중간 계속 마법을 시전해서
세라샤프니스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힘이 달릴 땐 쉬어가면서 체력을 아쪘다. 이제 끝이 보이는데 기력이 다해
의식을 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압! 후우, 후우. "
한참 휘두르던 라한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 벽면을 살폈다. 벽면에는 어느새 기어
나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됐어. "
세라 소드를 허리에 찬 라한이 희열에 찬 외침을 토했다. 정말 길고 길었던
20 일간의 감금생활. 이제 그 끝이 보였다
라한이 구멍에 머리를 디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이제. 자유.다. "
한마디 내뱉은 라한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홉의 칼 휘두름으로 지칠
대로 지친 탓이다. 하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계속 남아 있었다.
정령왕과의 대화
다음날 라한이 초췌한 얼굴로 눈을 떴다. 빠져나왔다는 즐거움은 가득했지만, 아직
음식 섭취를 못했던 라한. 잠을 자고 일어나도 체력 회복이 거의 되지 않았다.
아, 배고파.
비틀!
라한이 배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머리가 핑 돌아서 다시 쓰러질
뻔했다.
이러다 굶어죽겠다.
라한이 주변을 한차례 훑었다. 그 후, 의아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 길이 아니었군.
라한이 있는 곳은 동굴 안이었다. 예상했던 곳과는 다른 곳으로 나온 셈이다.
라피안이 만든 창고는 원래 동굴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동굴의 입구였기에 방향을
잘 잡고 벽을 뚫었다면, 밖으로 나올 수 있어야 했다.
헌데, 라한이 있는 곳은 동굴 안이었다. 입구가 있었던 쪽이 아닌 다른 쪽을
뚫었다는 의미였다.
"인생이 왜 이러냐?"
라한이 벽에 손을 짚은 채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현기증이 일었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하루만 더 지체해도 굻어죽을 것 같아서였다.

한참 걸어가던 라한이 작은 홀에 도착했다. 그 홀의 중앙에는 작은 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저게. 뭐지?"
단위에는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선뜻 상자를 잡아 내용물을 확인하지
못했다. 애초에 갇혔던 것도 상자를 잘못 만진 탓 아니던가, 이제 상자만 보면 괜히
겁부터 났다.
"음, 아무 이상 없지?"
라한이 주변을 돌며 상자를 천천히 살폈다. 다행히 이 상자에는 어떤 기관도
연결되지 않은 듯했다.
삐걱!
라한이 상자를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입을 떡 벌리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팔찌와 목걸이?"
상자 안에서 발견된 건 미스릴로 만들어진 팔찌와 목걸이였다. 칼라피안이 라한에게
남겨주려 했던 그것 같았다.
"젠장. 이게 왜 여기 있냐고! 저 창고 안에 있다면서! "
자신이 나온 창고와 이곳의 거리는 무려 백 미터가 넘는다. 기관장치 정도로 상자가
옮겨질 수 없는 거리였다. 거기다 이 상자 자체에는 연결된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보물이 없는 곳에서 칼라피안의 유물을 찾으려 했음이다.
"칼. 라. 피 안. 이, 이."
가만히 생각해보자 칼라피안에게 완전히 속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위험한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 곳을 가르쳐 준 것이다.
"에휴, 믿은 내가 잘못이지. "
칼라피안도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다. 처음 보물을 둔 곳은 라한이 갇혔던 그
창고가 분명 맞았다.
평소에 의심이 많았던 칼라피안. 왠지 불안한 마음에 보물을 한 번 더 옮겼다.
칼라피안은 뒤에 옳겼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라한에게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라한이 팔찌와 목걸이를 품에 대충 집어넣었다.
"일단 가자. "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동굴 통로를 따라 계속 걸었다. 역시나 한 쪽 손으로 벽면을
짚은 채였다.
"헉, 헉!"
한참 걷던 라한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동굴 안에서 보낸 시간만 벌써 열 시간이
넘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동굴이 끝없이 이어지자 정신적인 피로가 라한을
잠식해왔다.
"더럽게 기네. "
라한이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이젠 반쯤 체념한 듯 기대감 가득하던 표정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시 다섯 시간 정도를 걸었을 때, 동굴의 막바지에 도달했다.
동굴이 막혀 있었다. 밖이 나을 거라는 기대 하나로 힘겹게 버텼던 라한. 너무 큰
절망감에 숨쉬기조차 곤란했다.
"이, 이런.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세라 샤프니스!"
라한이 세라 소드에 마법을 시전했다.
이, 안 돼! 그럴 리 없어! 있을 거야!
쿠쿵! 쿠루루룽! 크캉!
"아앗!"
한참 칼질을 하던 라한이 순간 손으로 눈을 가렸다. 벽면 건너편에서 빛이
쏘아져왔기 때문이다.
라한은 무려 20 일 이상 햇빛을 보지 못했다. 자칫 실명까지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젠장. 봉사될 뻔 했잖아. "
다행히 라한의 손이 늦지 않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을 치렀을 터였다.
한참동안 눈을 가렸던 라한이 몸을 뒤로 돌렸다. 어두운 쪽을 바라본 상태로 서서히
손을 뗐다. 일단 밝음에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어느 정도 빛에 적응되자 몸을 천천히 돌렸다. 아직 눈이 부신 건
여전했지만, 견딜 만했다.
"살았다. 근데 낮이었군. "
라한이 찢겨진 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해가 떠 있는 위치로 봐서는 오후 4 시쯤 된
듯했다.
하지만, 아직 밖으로 나가는 건 무리였다 라한이 찢은 벽면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또 부수자. 하앗!"
다시 벽을 내려쳤던 라한이 검을 놓치고 손을 잡고 주저앉았다. 세라 소드가 벽을
가르지 못하고 튕겨 나온 탓이다.
"젠장. 시간 다 됐잖아. "
라한이 빛에 적응하기 위해 보낸 시간은 대략 10 여 분. 이 때문에 세라 샤프니스의
지속시간이 다 된 듯했다.
"으이구, 바보. 세라 샤프니스! 하앗!"
라한이 다시 세라 샤프니스를 시전했다. 그리고 세라 소드를 들고 다시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좀 전보다 더 한 독기가 담긴 칼질이었다.
라한의 칼질은 해가 졌을 때에야 끝났다. 동굴 벽면을 뚫는 데 2 시간 이상 걸린
셈이다. 그래도 미스릴 벽면을 뚫을 때와 비교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지금 라한의 상태는 최악에 치달았다. 오랫동안 굶은 상태에서 힘을 너무 많이 쓴
탓이다.
물론, 그동안 수시로 쉬며 힘을 충전하기는 했다. 하지만, 기본적 인 체력이 너무
떨어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헉, 헉. 다 했다. "
뚜벅! 뚜벅!
털썩!
한 마디 내뱉은 라한이 비틀거리며 찢은 동굴 틈으로 나왔다. 그리고 힘없이 자리에
엎어져서 잠을 청했다.
라한이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한밤중이었다. 얼굴이 땅으로 향해 있어서 달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믐인 듯 어둡기 그지없었다.
으, 으.
신음을 토한 라한이 몸을 꿈틀거렸다. 그렇게 몸을 일으키려던 라한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을 받았다.
'응? 골치 아프군. '
라한이 느끼기에 상대는 한 명이 아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듯했다.
그들이 몬스터가 됐든 산짐승이 됐든 라한에게는 위험한 상대였다. 상대할 기운이
없었기 때문이다.
'몸만 성하면.'
아직 제령기와 제란기는 남아있었다. 하지만, 체력이 너무 떨어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상태로는 단순히 일어서는 행위조차도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젠장, '
"에라 모르겠다. 누구야?"
엎어져 있던 라한이 몸을 벌렁 뒤집었다. 그 상태로 하늘을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죽이려면 죽여. "
-무모한 인간이로군.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근데 이 인간이 맞나?
-맞아. 분명 저 인간이 라한이라는 놈이다. 그때는 세심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꽤나 무모한 놈이었군.
들려온 목소리에 라한이 눈을 굴려 주변을 형체의 특이한 모습이 눈에 잡혔다.
"너희들은 뭐냐?"
-소개를 안 했군. 우린 정령계에서 왔다.
"정령?"
-후후, 난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라고 한다.
-난 땅의 정령왕 노아스라고 한다.
-샐리온.
-난 전에 본 적이 있을 거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라고 한다. 네 명의 정령왕이
라한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라한에게는 상당히 이례적이고 의아한 만남이었다.
"왜 찾아왔냐고! 심심해서 놀러 나온 건 아닐 거 아냐?"
-흠, 네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속도를 직접 보고
싶다.
실피드가 대표로 대답했다. 한 번 익혔던 안면이라서 그가 맡기로 한 듯했다.
"놀고 있네. 지금 내 꼴 안 보여? 이 상태로 달리라고? 배 째! 난 못해. "
-상태가 어떻지? 난 모르겠는데.
"정령왕이 그것도 몰라? 뭔 정령왕이 이래? 테세르보다 못하잖아."
라한의 말에 주변 정령왕들이 분노에 찬 표정으로 노려봤다. 자신들을 하찮게 본
것에 화가 치밀었다.
-우린 정령왕이지만 힘을 가지고 온 게 아니다.
"뭔 말이야? 알아듣기 쉽게 좀 얘기하면 안 돼?"
-정령은 소환자가 없으면 물질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물론, 우리 정령왕들도
마찬가지로 소환자가 없으면 물질계에 나타날 수 없어.
"그래서?"
-그래서 우리가 택한 방법은 영상만 이곳으로 오는 거였다. 지금 우리는 정령계에
있다는 말이지. 네가 보고 있는 건 정령계에 있는 우리 영상일 뿐이다.
실피드의 대답에 라한도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는 정령들.
그들도 라한처럼 정령계에서 영상을 통해서 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라한의 몸
상태를 알 턱이 없었다.
"쳇, 그럼 허깨비잖아. "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근데, 지금 네 몸 상태가 어떻지?
"엉망이다. 그러니까 귀찮게 굴지 말고 좀 꺼져!"
-우린 네가 달리는 모습을 봐야 한다.
실피드의 말을 들으며 라한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정령왕이라도
허상에 불과한 이들. 더 이상 겁먹지 않고 음식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어디 가는가? 우린 네가 빠르게 달리는 모습을 반드시 봐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씨, 자꾸 귀찮게 굴래? 배고파 죽겠다니까. 보고 싶으면 음식 가져와! 음식 주면
달려주지."
-흠, 그건 힘들다 아까 말했다시피."
"영상뿐이라서 힘들다 이 말이지?"
-그렇다.
"그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얘기잖아. 기운도 없으니까. "
라한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의 말처럼 말하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인
탓이다.
-계속 비협조적으로 나오는군. 우린 먼저 확인할 게 있어서 로이나에게도 말하지
않고 왔다.
실피드가다시 말했지만, 라한은 아무런 대꾸도하지 않았다. 이젠 나무라도 찾아서
뜯어 먹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라한이 대꾸를 하지 않자 정령왕들끼리 뭔가를 수군거렸다.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걸로 봐서 정령계에서 하는 의논인 듯했다
그렇게 십여 분이 흐른 후,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 라한. 바라는 게 뭐지? 지금은 힘들겠지만, 나중에 반드시 보답하겠다.
말해라.
역시나 라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라한이 침묵을 고수하자 오히려
정령왕들이 더 다급해했다.
-우리 정령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보답하겠다고 하면 반드시 보답한다는
말이다.
"."
-바라는 게 뭐지? 드래곤과 관계된 것만 아니라면 뭐든지 도와겠다.
라한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비틀거리고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한시도 쉬지 않았다.
'빌어먹을. 뭔 나무 찾기가 이렇게 힘들어. '
칼라피안의 창고가 있던 곳은 돌산이었다. 라한이 창고에 갇혔다가 빠져나온 곳
역시 돌산이었다. 나무라도 보이면 뜯어 먹으려 했건만, 막상 찾으려니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아고, 죽겠다. '
라한의 침묵에 정령왕들이 다시 회의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 라한에게는 들리지
않는 정령계에서의 회의였다
회의가 끝나자 실피드가 결의에 찬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라한. 인간들이 정령계를 무척이나 궁금해 한다는 걸 알고 있다.
"."
이번에도 라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약간은 솔깃한 기색이
엿보였다. 실피드의 말투에서 뭔가 대단한 결심을 했다는 걸 직감한 탓이다.
'또 뭐라고 하는 거야?'
-만약 네가 전력으로 달려준다면 널 정령계에 데리고 가겠다. 물론, 오랫동안
허락할 수는 없다. 하지만, 네가 가고 싶은 모든 곳에 데리고 갈 것을 약속한다.
'정령계라. 별거 아니네. 지들 사는 세상을 구경시켜 준다는 거잖아. '
라한이 아무런 대꾸 없이 계속 걸었다. 눈앞에 숲이 보이는데도 무지 가까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라한의 걸음이 너무 느리다는 게 이유였다.
'이거 언제 도착하나?'
비틀!
콰당!
"윽!"
라한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옆에서 떠들어 대는 실피드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었고, 그 때문에 바닥에 있던 돌부리를 보지 못 한 것이다.
"젠장 "
-이봐, 인간. 어때? 생각 좀 해 봤나? 좋은 조건 아닌가? 다른 곳도 아닌 정령계다.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서 정령계를 구경한 인간은 단 두 명뿐이다.
'두 명? 있긴 있다는 얘기네. 히허, 그거 참.'
라한은 정령계에 발을 디딘 인간이 단 한 명도 없는 줄 알았다. 지금까지 정령계에
갔다 온 사람의 얘기를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해서였다.
헌데, 한 명도 아닌 두 명이나 존재하다니. 처음이 아니라는 말에 오히려 호기심이
강해졌다.
"좋아. 달려주지. 대신 조건이 있어. "
-말해라. 웬만하면 다 들어주겠다.
"일단 배가 너무 고프거든. 혹시 근처에 강이나 냇가 없나?"
-음, 강이나 냇가라. 잠시만 기다려라.
실피드의 모습이 영상에서 사라졌다. 정령계 내에서 어딘가로 간 듯했다.
실피드가 사라지자 쓰러져 있던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릎을 짚고
허리를 굽힌 채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현기증을 잠시마나 잠재우기 위함이었다.
'죽겠네. 빨리 좀 와라. '
스으응!
-저쪽으로 5 백 미터 정도 가면 작은 냇가가 나온다. 근데 냇가는 왜 찾는 거지?
"배가 고파서. "
-달리는 건?
"나중에 생각하자. "
라한이 방향을 틀어서 걷기 시작했다. 실피드가 가리킨 그 방향을 향해서였다.
그렇게 약 십여 분 쯤 걸었을 때, 물소리가 들려왔다. 급류가 아닌 듯 잔잔하고
부드러운 물소리였다.
'살았다. '
물소리가 들리고 몇 분 더 걷자 작은 시냇물이 눈에 보였다. 물이 잠시 모이는 곳인
듯 웅덩이처럼 보였다.
첨벙!
라한이 물가로 다가가 손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한기가 라한의 정신마저 일깨우는
듯했다
"좋군. 스파클링(Sparkling)!"
라한이 물에 담근 손에 마법을 시전했다. 불마법과 바람마법을 적당히 섞어서
만들어낸 전기마법이었다.
치치직!
툭! 툭! 툭! 툭!
라한의 마법이 시전되자 물에서 묘한 소리가 만들어낸 전기가 물과 만나는
소리였다. 그리고 물고기가 한 마리씩 배를 위로 한 채 뜨기 시작했다.
-뭐, 뭐하는 짓이냐? 감히 물의 정령왕인 내 앞에서 물을 죽이는 일을 하다니. 네
이놈!
라한의 마법을 본 엘라임이 분노에 찬 외침을 죽음을 물의 오염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물을 죽이긴 뭘 죽여! "
-네, 네 이놈! 감히 네가. 네가.
"시끄러! "
한 마디 내뱉은 라한이 물에 뜬 물고기를 손에 쥐었다. 물고기는 아직 죽지
않았는지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덥썩!
"흠냐. "
라한이 꿈틀거리는 물고기를 산 채로 입에 넣었다. 피가 입가에 튀고 비늘이 입
주변에 달라붙었다. 헌데로 라한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맛있게 먹었다.
-저, 저. 야만인.
-저거 인간 맞아? 몬스터 아냐?
-인간이 생식을 하던가? 화식하는 게 인간 아니었나?
-흠.
라한이 물고기를 뼈째 삼키자 정령왕들이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그들에게는 인간이
생식을 한다는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나도 비위 상하니까 입 좀 다물어. '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지금은 입을 먹는 데에만 쓰기도
바빴다.
우물우물
꿀꺽!
라한이 연달아 아홉 마리의 물고기를 씹어 삼켰다. 그 중에는 라한의 팔뚝보다 더
굵은 물고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정령왕들은 놀란 음성을 토하기 여념이 없었다. 그러면서 몬스터와
인간이 어떤 면에서 다른지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끄억! 으- 좋다. "
라한이 배를 두드리며 바닥에 벌렁 누웠다. 배가 부르자 서서히 수마가 몰려왔다.
라한의 행동을 계속 지켜보던 정령왕들이 라한에게 다가갔다.
-이제 달려줄 수 있겠지? 네가 원한대로 물가가 어디인지 가르쳐줬잖아.
"좀 자고 보자. "
-이봐, 인간! 비록 영상뿐이지만, 우린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다.
실피드가 간곡하게 요청했다. 그 모습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자신이 달리는
걸 보고 싶어 하는지 그제야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봐. 정령씨. 아니, 정령양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실피드라고 불러라. 우리가 너한테 인간씨라고 부르면 어떻겠는가?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럼 실피드. 대체 왜 달리라는 건데?"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달리면 안 되겠는가? 우리가 찾는 인물과 같은 조건이면,
그때 다 말해주지. 물론, 조건이 안 되면 해명을 듣지 못하겠지만.
"난 무려 20 일 이상 갇혀 있었어. 너무 오랫동안 해를 못 봐서 날짜감각이
오락가락하지만, 대충 그 정도 갇혀 있은 것 같단 말이야. 너도 생각을 해봐. 20 일
동안해가 없는 어두운 곳에서 갇혀있다가 나왔는데, 처음 만난 놈이 아니, 처음
만난 놈들이 '달려봐.' 그러는데 '어 그래.' 하면서 달릴 사람이 어디 있어? 너라면
달릴 거야?"
라한의 대꾸에 실피드가 아무 대꾸를 못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좀 황당한 요구
같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꽤나 절박한 사정이 있어서 말해줄 수가 없었다.
-상황이 좀 이상한 건 인정하지만, 우리에겐 중요한 일이다. 달려줄 수 없는가?
"좋아. 좋다고. 대신 아까 말했던 조건 잊지 말라고. "
-정령계에 데려가는 일말인가? 하하하. 당장 데려가주지.
라한의 긍정적인 대꾸에 실피드가 크게 웃었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사람 같았다.
아, 지금은 싫고 나중에. 지금은 생각할 게 좀 많거든. "
-알겠네. 언제든지 연락하게.
라한은 창고 안에서 연구한 새로운 마법들을 다시 연구해볼 생각이었다. 대충
생각해봐도 꽤나 획기적인 연구들로 보인 탓이다.
"근데 내가 너희들한테 어떻게 연락하지? 난 정령왕하고 계약한 적이 없어서
말이야. "
-음 그렇군.
라한은 이번 기회에 정령왕과 계약해볼까 하는 흑심을 품었다. 그렇다고 테세르에게
불만이 많은 건 아니었다. 힘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는 생각 때문에 계약하려 한
것이다.
'드래곤은 힘들겠지?
좀 전에도 정령왕들은 드래곤과 얽히는 걸 껄끄러워하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다른
정령은 몰라도 정령왕은 드래곤과의 싸움에 사용할 수 없을 듯했다. 하지만,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의 싸움에서 는 확실히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터. 그 정도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했다.
"뭐, 어쩔 수 없이 너희들 중 한 명하고 계약해야겠지?"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넌 이미 정령과 계약하지 않았나? 우리 정령계에서는
이단아 취급당하는 그 정령과 계약한 걸로 아는데.
"테.세르. "
-그래. 테세르. 그를 통하면 우리를 부를 수 있다.
실피드의 대답에 라한의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정령왕과 계약 할 수 있는 건수를
놓친 것이다.
"그냥 너희들하고 계약하면 되지 않나? 그럼 쉽잖아 "
-우린 계약하는 게 금지되어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그 자체가
물질계에 큰 혼란을 주기 때문이지.
실피드의 대답에 라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칫, 전에는 로이나 꼬봉으로 잘 다니더만. "
-그건 계약이 아니다. 서로간의 배려일 뿐이지. 그래서 거절하고 싶으면 거절해도
상관없다. 정령계에서 무료하게 지내는 게 싫어서 대부분 들어주기는 하지만.
어찌됐든 계약은 분명 아니다.
"비싸게 굴기는."
-테세르 정도면 우리와 연락하는데 문제는 없을 거다.
라한은 더 이상 정령왕을 닦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실피드의 얼굴에서 강경한
의지를 본 탓이다.
'아깝네. '
"그렇게 하지. 아! 조건이 하나 더 있어. "
뒤늦게 생각난 듯 라한이 실피드를 불렀다.
-뭔가?
"정령계에서 테세르를 따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따돌렸다는 소식이
들렸다가는.
-알겠다. 정령계 내에서 테세르의 지위를 올려주도록 하지. 이제 됐는가?
"한 가지 더. 로이나한테 날 찾았다는 얘기를 하지 말아줘. 나중에 내가 직접 가서
말할 테니까. "
이번 물음에는 실피드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다른 정령왕들을 둘러보며
뭔가 의논을 나누었다.
"별거 아닌 일로 무지 고민하네. "
-로이나한테는. 비밀로 하지.
실피드는 라한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줬다. 거의 대부분 무리한 부탁이 아니었기에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정령왕과의 계약은 실패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정령왕은본래부터 누군가와의 계약이 금지된 존재였으니.
"이제 달려볼까?"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쭉 폈다. 잠깐쉬어서인지 몸도 많이 나아진 듯했다.
-기대되는군.
"이봐. 실피드. 근데 다른 정령왕들은 내가 싫은가본데, 표정들이 영 안 좋아.
-그, 그건.
라한의 말처럼 정령왕들의 얼굴은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물의 정령왕 엘라임의
얼굴은 더 심각했다.
"뭐야?"
-그건 로이나 때문이다.
"로이나? 로이나가 왜?"
-우린 로이나한테 널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헌데, 넌 우리가 널 찾았다는 걸
비밀로 해 달라고 말했지. 그 때문이다. 네가 한말 때문에 우린 로이나와의 약속을
어길 수밖에 없다. 저기 엘라임의 얼굴이 더 심하게 찌푸려진 건 그가 물의
정령왕이라서 그렇다. 로이나 역시 물을 다스리는 블루 드래곤의 고룡이니까.
"쳇,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그러네. 나중에 로이나한테는 내가 말해줄게, 그럼
너희들을 혼내는 일은 없을 거야. "
실피드의 심각한 말에 라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정말 심각한 내용인줄 알았다. 헌데, 듣고 보니 겨우 약속 때문이지 않은가?
별거 아닌 일로 긴장했다는 민망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령왕으로서는 정말 중요한 얘기였다. 다른 이도 아닌 정령이 누군가와의
약속을 어기다니, 그것도 물질계 최강인 드래곤과의 약속을. 정령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사건이었다.
"자, 이제 달려보지. 근데, 얼마나 빠른 속도를 원하는 거야?"
-네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
"좋아. 약속 했으니 나도 지켜야겠지. 잘 보라고. "
스팟!
라한이 엄청난 속도로 내달렸다. 근 20 일 만에 처음으로 시전해보는 광견보였다.
라한이 빠른 속도로 달려가자 정령왕들이 뭔가 논의하기 시작했다.
-실피드 어떤가? 저 속도면 되는 건가?
-아직 좀 부족한 것 같군.
-얼마나 부족한 거지?
엘라임의 물음에 실피드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정령왕을
한차례씩 살펴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조금. 하지만, 내가 알기로 그 아주 조금은 물질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의
한계나 마찬가지다.
-그런가?
-15 만 년쯤 전이던가? 그때 어떤 드래곤도 마법 대신 본체의 속도를 올리는 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드래곤도 저 정도의 속도는 냈었지. 하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실피드의 설명에 다른 정령왕들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오래 전에 그런 드래곤이
있었음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랬지. 근데 그 드래곤이 어떻게 됐었지?
-죽었지. 생명체가 버틸 수 없는 속도니까,
-그랬군. 그럼 처음부터 저 인간을 찾을 필요가 없었던 것 아닌가?
노아스의 되물음에 실피드가 웃으며 답했다.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 어차피 저 인간이 우리에게 바랐던 것도 쉬운
일이잖아. 로이나한테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건 좀 그렇지만.어차피
로이나한테도 알려준다는 얘기는 안 했잖아. 찾아보겠다고만 했지 ,
-그건 그렇지.
-돌아오는군. 자자, 이제 신경 끄자고.
라한이 가까이 다가오자 실피드를 비롯한 정령왕들의 입에서 나오던 말소리가
사라졌다 나머지 회의는 정령계 내에서만 하는 듯 했다.
"헉, 헉 달렸다. 이제 췄지?"
-그래 됐다. 수고 했다. 그럼 나중에 테세르를 통해서 연락해라. 정령계 구경
시켜줄 테니까.
"그래. 헉, 헉."
숨을 계속 헐떡이던 라한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직 기력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은
라한, 좀 무리하게 달렸더니 다시 현기증이 몰려왔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실피드의 인사를 끝으로 정령왕들이 하나씩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라한이 냇가의 돌에 몸을 기대앉았다.
"싱거운 놈들. 테세르! "
피식 웃음을 터트린 라한이 테세르를 소환했다.
스르릉!
-오? 오호, 주인. 살아 있었군. 대단한데. 난거기서 굶어 죽을 줄 알았는데.
툭툭! 주욱!
테세르는 나타나자마자 라한의 주위를 날아다니며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라한의
볼을 건드렸다가 당겼다.
데세르의 수다에 라한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 같아서는 뭔가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귀찮아서 참았다. 피로가 밀려왔기 때문이다
"시끄러. "
-오, 우리 주인. 진짜 살아있다. 말도 한다. 이야, 놀라워.
테세르의 수다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정말 라한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라한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부라렸다.
"야! 조용 안 해? 넌 내가 죽길 빌었다는 거야? 뭐야?"
-엄마야. 놀래라. 우와, 우와! 소리도 지른다. 진짜 살았네.
"이게 진짜. 너 죽을래?"
움찔!
테세르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호들갑 떨었음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놀란 테세르가 몸을 슬쩍 돌렸다. 도망가기 위한 준비 동작이었다.
"동작 그만!"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차렷 자세로 고개만 살짝 돌렸다. 몸은 그대로 있는 상태로
180 도 회전하는 머리. 테세르가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에헤~ 주인. 화났어?
"닥쳐. "
-난 너무 반가워서 그랬지.
"됐으니까 너 불침번 좀 서라. 좀 자야겠다."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근데 너무 피곤해서 만사가 귀찮았다. 몸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어도 이대로 넘어가지는 않았을 터였다.
-엥? 만나자마자 자는 거야?
"내 상태 보이냐? 지금 엉망이거든. 물론, 기분도 아주 더러워. 그니까 건드리지
마라. "
-옛. 대장님.
힘차게 대답한 테세르가 몸을 조금 분리해서 칼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칼을
한 손에 든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기 딴에는 열심히 불침번 서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행동이었다.
테세르의 준비 동작이 끝나자 라한이 서서히 눈을 감았다. 잠에 빠져드는
행동이었다.
-아참, 주인. 근데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이씨! "
라한이 막 잠에 빠져들려 했을 때, 테세르가 말을 걸어 왔다. 이에 라한이 분노에
찬 눈으로 테세르를 노려봤다.
-아, 맞다. 잔다고 했지. 그럼 잘 자라, 주인.
테세르의 말을 끝으로 라한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근데, 주인. 대체 얼마동안 갇혀 있었던 거야? 식사는 얼굴 보니까 배고파
보이는걸.
"야! 너 죽을래?"
-아, 맞다. 잔다고 했지. 주인 잘 자!
"너 자고 일어나서 보자. "
-근데, 주인. 아까.
라한과 테세르의 이런 실랑이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계속 되었다. 그동안 라한이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던 테세르. 자꾸만 라한의 잠을 방해했다.
퍽-!
-으악!
"말로 할 때 들을 것이지. "
결국, 라한의 주먹이 한 차례 휘둘러진 후에야 테세르도 입을 다물었다.
한편, 크라이드리안을 치료하기 위해 로테마이어스는 대륙에 있는 거의 모든
드래곤들을 만나고 다녔다.
"화이트 드래곤 중에서는 널 치료할 수 있는 이가 없구나. "
"죄송합니다, 로드님. "
그나마 크라이드리안을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드래곤은 고룡 뿐이다. 이
때문에 로드의 권위로 소환하기가 상당히 껄끄러웠다. 어쩔 수 없이 직접
찾아다니면서 크라이드리안의 상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 "
"전 괜찮습니다. 로드님. 저 때문에 더 이상고생하실 필요 없습니다. "
"아니다. 아직 우린 블루 드래곤의 고룡을 만나지 않았다. "
로테마이어스는 블루 드래곤을 제외한 모든 고룡을 한 번씩 만났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크라이드리안을 치료할 능력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아직 블루 일족의 고룡은 만나지 않았다.
블루 드래곤 중에서는 고룡이 단 둘 뿐이다. 그 중 한 드래곤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서 마나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는 고룡 중의 고룡이었다. 그런 고룡은 만나는
행동 그 자체가 금지되는 행위였다. 그리고 남은 블루 일족의 고룡은 단 한 명.
로이나뿐이었다.
"저, 블루 일족의 고룡이면 레이시아나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
"하지만, 지금 로드님과 레이시아나님은 껄끄러운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fp 이시아나님이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 함께 다니고 있다는 소문이."
"괜찮다. 어차피 언젠가는 화해를 해야 할 상대였다. 레이시아나는 내 어릴 적
친구였으니까. "
로테마이어스로서도 정말 힘들게 내린 결정이었다. 어쩌면 레이시아나와 만나는 게
껄끄러워서 다른 일족의 고룡부터 만났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아끼는 크라이드리안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굽힘은 감수할 수
있었다. 그게 로테마이어스가 크라이드리안을 아끼는 방법이었다. 마찬가지로
로이나도 프리미아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굴욕을 감수할 터였다.
"지금 레이시아나님은 어디 계시는지요? 저 혼자 가겠습니다. "
"아니다. 아까 말했다시피 레이시아나는 내 어릴 적 친구였다. 이번 기회에
그녀와의 오해를 풀어야겠다. 아카폴리안! "
아카폴리안은 정보를 담당하는 드래곤이다 로테마이어스가 그를 부른 건 그에게
로이나에 대한 정보를 듣기 위함이었다.
후다다닥!
잠시 후, 엘프의 모습을 한 아카폴리안이 레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 로드님. "
아카폴리안이 무릎을 꿇은 채 명령을 기다렸다.
"레이시아나의 현재 위치에 대해 말하라. "
"예? 그게 저."
아카폴리안이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에 로테마이어스가 의아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최근에는 정보가 없습니다. 한 달 반쯤 전에 프리미아가 정보를 모아서 한 번에
알려오겠다고 전한 후로는 레이시아나님에 대한 정보 수집을 중단해서."
"프리미아가? 그녀는 굴레를 벗은 존재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라고 보냈는데. "
"한 달 반쯤 전에 프리미아가 레이시아나님을 만났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에
다니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
"프리미아가 레이시아나와 함께?"
"예, 로드님. "
프리미아가 레이시아나를 존경하는 건 로테마이어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가 크라이드리안이 자신을 존경하는 정도와 같다는 것도 잘 알았다.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프리미아가 레이시아나를 대하는 것과 크라이드리안이 자신을 대하는
것에 대해 서로 비교할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이 맡긴 임무가 있는데 내팽개치고 레이시아나를 따랐다? 그건 좀
이해가 안 되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로드였기때문이다.
거기다 프리미아는 굴레를 벗은 존재를 적으로 규정한 자신의 뜻에 찬성했던
드래곤이다. 물론, 뒤에 좀 이해가안간다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건 아직 추측일
뿐. 현재로는 자신의 명령을 어길 명분이 없었다.
"프리미아가 레이시아나와 동행하는 이유에 대해서 들어온 정보가 있느냐?"
"예, 레이시아나님이 인간들과 동행하고 있었답니다. 근데, 그 인간들 중에
크라이드리안에게 상처 입힌 인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와 동행하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모아보겠다고 했습니다. "
"뭐라? 류카라한이?"
로테마이어스는 아직도 크라이드리안을 해친 인간을 류카라한이라 믿었다. 처음
미심쩍어 했던 크라이드리안조차도 지금은 자신에게 이긴 인간을 류카라한이라
생각했다. 자꾸 다니면서 계속 듣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믿게 된 거였다.
"프리미아 말로는 라한이라는 인간이라고 합니다. "
"흠, 그와 동행한 이유가 있었군. 현재 프리미아의 위치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지난 한 달 반 동안 프리미아가 정보를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정보를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정황으로 봐서는
케라스 왕국을 지나 루이나 왕국으로 향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
"근거는?"
"최근에 케라스 왕국 남쪽에서 프리미아를 봤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
"음, 케라스 왕국이라."
로테마이어스가 생각에 잠겼다. 아카폴리안과 크라이드리안도 침묵으로
로테마이어스의 명령을 기다렸다.
원래 수아나 왕국의 중부에 있던 카이렌 일행. 라한의 실종이 확실시 된후,
남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그 결과지금은이미 수아나 왕국을 벗어나 케라스 왕국의
남부까지 이동한 상태였다. 라한과 함께 이동할 때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빠른
움직임이었다.
"알았다. 그만 나가보도록!"
"예, 로드님. "
한참 생각한 로테마이어스가 아카폴리안을 내보냈다.
"크라이드리안. "
"예, 로드님. "
"우린 루이나 왕국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프리미아와 레이시아나 일행을
기다리자꾸나 ."
"알겠습니다. "
로테마이어스는 레이시아나가 카이렌 일행을 떠난 걸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루이나 왕국이 아닌 레이시아나의 레어로 향했을터였다.
"꽉 잡아라. 매스 텔레포트!
위이잉! 팟!
로테마이어스와 크라이드리안이 레이시아나를 만나기 위해 레어를 떠났다.
레이시아나가 없다는 걸 생각지도 못한 채로.

굴레를 벗은 존재 중 유일한 정령사인 제이슨. 레드리안을 만나고 자신들의


은거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현재 위치는 케라스 왕국의 동남부. 여기저기 여행을
하느라 조금 돌아가는 길이었다.
"흠, 마음에 걸려. "
제이슨은 레드리안을 만나면서 뭔가 묘한 기분을 느쪘다. 레드리안이 자신에게 뭔가
숨기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누가 뭐래도 레드리안은 자신에게 후손이 되는 입장이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뭘까?"
레드리안이 제이슨에게 숨기고 있는 건 라한에 대한 정보였다. 라한에게 쿨샤크가
볼모로 잡혀 있기에 사실을 숨긴 것이다.
라한도 혹시 벌어질지 모르는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쿨샤크를 납치한 것이다.
라한의 치밀함이 새삼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 "
애써 의문을 지운 제이슨이 다시 길을 재촉했다. 예상대로라면 두 달 안에 다른굴
레를 벗은 존재들이 돌아올 터. 서두르지 않으면 제 시간에 돌아갈 수 없었다.
라한과 떨어진 카이렌 일행도 제이슨처럼 케라스 왕국의 남부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제이슨보다는 루이나왕국과 조금 더 먼 곳이었다. 갑작스럽게
휴란트가 앓아누워서 3 일을 지체한 탓이다.
만약 휴란트가 앓아눕지 않았다면 제이슨보다 한 발 앞서서 루이나 왕국으로 갔을
터였다. 아니면, 제이슨과 만났을 가능성도 높았음이다.
"휴란트는 좀 어때?"
"다 나았다. 이제 이동해도 될 정도야. "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이동하자. "
"그러지. "
지금 여관의 객방에는 카이렌을 비롯한 일행 몇 명이 모여 있었다. 당연하게도
장난감 둘과 불청객 둘은 제외된 채였다. 또, 몸살을 앓았던 휴란트도 제외되어
있었다.
어차피 일행의 행보에 영향을 줄 수 없는 이들이기에 별 상관없었다.
"근데, 베센 왕국이 확실한 거야?"
"이런 저런 정황으로 보면 거의 확실해. 그곳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는 증거가 몇 개 포착됐거든. "
"근데."
똑 똑!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저, 여관 주인입니다. "
"무슨 일이시죠?"
레테아가 문도 열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손님이 찾아 왔습니다. 꼭 만나야겠다고 하는데요."
"손님요?"
"예, 두 명입니다. 워낙 간절하게 말하는지라. 거기다 함께 왔던 두 분과 이미
안면이 있는 듯해서 그럽니다."
"함께 왔던 두 명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왜 덩치 엄청 큰 사람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하고 나이 좀 들어 보이는 사람하고
아는 사이로 보여서."
"파울하고 해리언인가? 음, 알겠습니다. 곧 내려가도록 하죠."
"예, "
여관 주인이 물러나자 레테아가 일행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나가보지. 샤르비엘 후작이 보낸 놈들 같은데."
"그러자. 어차피 중요한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잖아."
카이렌의 말을 끝으로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리미아도 약간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반대 의사를 표하지는 않았다.
루이에의 합류
객방에서 나온 카이렌 일행이 홀로 내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잠시 있자
파울과 해리언이 손을 흔들었다.
흠.
파울과 해리언 옆에 있던 사람은 두 명이었다. 헌데, 그 중 한 명의 실력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레테아보다는 몇 단계 위, 프라하보다 아주 약간 아래로 보이는
대단한 실력자였다.
그때 그 자로군.
저 자였어. 레티아와 내가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갔을 때, 옆에 있던 인간 말이야.
바로 저 인간이었어.
그래? 음.
잠시 침음성을 흘린 카이렌이 파울과 해리언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 뒤를
프라하와 투바, 레티아와 프리미아가 조용히 뒤따랐다.
"우릴 만나러 왔다고?"
카이렌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에 파울 옆에 앉은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에라고 한다. "
"흠, 그래서?"
"너희들과 일행이 되고 싶다. "
"일행에 대한 건 저 두 명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
카이렌이 파울과 해리언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얼굴만큼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듯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저들은 샤르비엘 후작이 보낸 세작이나 마찬가지다. "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난 지금 이 순간부터 샤르비엘 후작을 떠날 생각이다. 그리고 너희들과 일행이
되고 싶다. 받아주겠나?"
루이에의 너무도 당당한 말에 오히려 카이렌이 의아스러워했다.
저 정도 실력자라면 빈말하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목숨이 걸려 있거나 아주
큰일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런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진실이라고 믿어야 할 상황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카이렌이 뒤를 보며 일행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알아서 해. 지금은 네가 우리 리더나 마찬가지잖아. "
"흠, 알았다. "
카이렌이 다시 루이에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상태로 루이에의 눈을 바라보며 진실
여부를 탐지했다.
'진정이군, '
카이렌이 루이에의 눈에서 진심을 읽었다. 하지만, 일행 모두의 안위가 걸린
일이기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루이에라고 했나?"
"그렇다. 음, 자네가 카이렌이라는 엘프겠군. "
"아는군. 왜 우리 일행이 되려고 하는지 물어도 되겠나? 그리고 샤르비엘 후작을
떠나려는 이유도 알고 싶군. 끝으로 저들이 당신 생각을 알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

카이렌의 긴 물음에 루이에가 웃음을 머금었다.


얼핏 소심해 보이는 말이었다 하지만, 루이에는 카이렌의 의문에 찬 말에 오히려
믿음을 가졌다.
자신이 일행이 된다면 그때도 카이렌이 리더가 될 터. 리더가 조심스럽다는 건 일행
모두의 생명이 그만큼 안전하다는 얘기였다.
"하나씩 대답하겠다. 당신들의 일행이 되려고 하는 건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나보다 강해보이니 내 실력 정도는 한 눈에 알아차렸겠지. "
카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루이에가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평소에 잘
짓지 않는 웃음을 오늘따라 많이 짓는 듯했다.
"나 정도 실력이 되면 세상이 참 무료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당신들 일행은 나보다
더 강해 보이는데도 재미있어 보이더군. 그게 부러웠다. 당신 일행이 되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좀 더 커질 것 같다는 이유도 있었고. 부정하지 않겠다.
"
"솔직하군. "
"그리고 두 번째 물음이 샤르비엘 후작을 왜 떠나려고 하느냐 였던가? 그건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대답과 비슷하다 재미가 없었거든. 또, 그와 함께 있어봐야 내가
사는데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
루이에의 솔직한 대답에 이번에는 카이렌이 웃음을 머금었다.
"마음에 드는군. 마지막 대답은?"
"저들에게도 말했으니 알겠지. 그리고 저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상관없다.
어차피 난 저들과 관계없는 사람이니까. "
루이에의 대답을 들은 카이렌이 파울 일행을 바라봤다. 역시나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루이에가 샤르비엘 후작을 떠난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좋다. 일행으로 받아들이지. "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나 역시 당신들 일행에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
"마음대로. "
"그리고 저기 있는 세 명은 샤르비엘 후작에게 돌려보내는 게 어떻겠나? 일행에
도움이 되는 놈들은 아닌 걸로 보이는군. "
루이에의 말을 들으며 카이렌도 아차 싶었다.
어차피 샤르비엘 후작이 저들을 맡길 때 했던 거래는 라한과 한거였다 라한이
사라진 지금. 그리고 라한이 사라졌다는 걸 이제는 파울 일행도 다 아는 현
상황에서 굳이 저들을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었음이다.
"그렇군. "
"직접 보내기 뭣하면 내가 보낼 수도 있다. 원한다면 죽일 수도 있지. "
루이에의 너무나 담담한 말에 파울 일행이 몸을 떨었다. 특히, 루이에와 함께
지냈던 이클리프는 몸을 떠는 정도를 넘어 거품까지 물고 있었다. 직접 루이에의
실력을 봤기 때문이다.
"이봐! 이번에 새로 일행이 된 이 친구가 너희들을 죽이고 싶어 하는군. 너희들
발로 걸어갈래? 아니면 죽여서 시체를 보내줄까?"
"그, 그건."
파울이 말을 더듬으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샤르비엘 후작의 명령이라 쉽게
떠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자니 두려움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흠, 죽고 싶은 건가?"
"파울. 가세. 후작께는 내가 말씀드리지. "
"예. 해리언님. "
결국 해리언이 파울에게 철수를 명했다. 파울은 기다렸다는 듯이 해리언의 말을
따랐다 두렵긴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럼 올라가지. "
카이렌이 몸을 돌리자 파울 일행이 여관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프라하와 투바가 고소하다는 듯 킥킥거렸다.
"뭐해? 올라가자고. 새 친구가 왔으니 정보를 나눠 봐야 하지 않겠어?"
"좋지. "
카이렌 일행에 한 명의 식솔이 더해졌다. 그리고 두 명의 불청객이 사라졌다.
인원수로는 전력이 줄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전력이 보강된 것이었다.
루이에 혼자 힘으로 파울 같은 마법사 열명은 쉽게 상대할 수 있으니 말이다.
라한은 꼬박 하루 반을 자고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떠서 처음으로
본 건 졸고 있는 테세르였다.
'이놈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뭔 놈의 정령이 잠만 많아서는. 에고, 내 팔자야. '
라한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고 있는 테세르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네. '
괜히 푸념을 토한 라한이 테세르에게서 좀 떨어진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심법 수련을 위해 무념무상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라한은 제령기와 제란기를 근 스무 차례나 돌렸다. 헌데도 아직 기운이 완전히 차지
않았다. 그 동안 소모된 기운이 너무 큰 탓이다.
'흠, 이제 반? 여기 터가 너무 안 좋군. '
보통 산은 기운이 충분하기 마련이다. 헌데, 이곳 멜카투라 산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산의 정상 부근인 이곳에만 기운이 부족했다. 이 모든 게 칼라피안이 만든
거대한 미스릴 창고 때문이었다. 미스릴 창고가 자연의 기운을 꾸준히 흡수하고
있으니 기운이 충만 할 턱이 없는 것이다.
"으차! 이제 움직여야겠지. "
라한이 졸고 있던 테세르 쪽을 바라봤다. 좀 전의 소리에 깼는지 심법 수련하는
도중에 깼는지 테세르가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일어났냐?"
-주, 주인. 일어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밤새 한숨도 안자고 불침번 섰는데.
"입에 침이나 발라라. "
-어? 입?
테세르가 자기 입을 스윽 훔쳤다. 진짜 침이 묻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없는데?
"너 바보냐? 정령이 침 흘리는 거 봤어? 그리고 넌 몸 전체가 마나잖아. 침이 어디
있다고 흘리겠어?"
-아, 그렇구나.
"정령은 거짓말 안 한다더니. 널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단 말이야. "
-흠, 흠. 그거야 뭐."
테세르가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정령계 법칙에서 많이
어긋나 있파고 느낀 듯했다.
"테세르. 근처에서 내가 수련할 만한 동굴 좀 찾아봐! "
-동굴? 전에 그 창고에서 하면 되잖아.
"거긴 미스릴 덩어리라서 안 돼. 거기선 수련하다가는 마나 고갈로 죽기 딱
좋겠더군. "
-아, 그럼 이 산을 돌아다녀야 하는 거야? 귀찮은데.
테세르가 가기 싫다는 빛을 노골적으로 보였다. 그 모습에 라한이 혀를 끌끌 찼다.
"내 살다 살다 너처럼 게으른 정령은 처음 본다. 머리도 나쁘지, 게으르지. 아무리
찾아봐도 장점 하나가 안보이네. 야! 너 잘하는 게 뭐야?"
-내가 잘하는 거? 당연히 있지.
"뭔데?"
-뒷다마 까기. 주인 없는 데서 욕 엄청 잘해. 아마 주인도 들으면 내 욕 실력에
감탄할 걸.
라한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 죽을래?"
-왜? 잘하는 거 말하라면서?
"시끄러! 맞고 찾아볼래? 그냥 찾아볼래?"
-뭐만 하면 폭력부터 휘두르고 난리야. 쳇.
"뭐야?"
-간다. 가. 치사해서 간다.
테세르가 잽싸게 날아갔다. 뒤도 안돌아보고 달리는 모양새가 꽁지에 불붙은 닭
같았다.
"저 자식을 어쩌지?"
테세르가 사라지자 라한이 다시 심법 수련을 시작했다.
십여 차례의 심법 수련이 끝났을 때, 테세르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헉, 헉. 찾았다 찾았어.
"어떤 동굴인데?"
-원래 베어울프가 살던 곳인데, 내가 쫓아보냈어. 청소까지 끝내고 왔으니까 가서
살기만 하면 돼.
"어쩐 일로 기특한 일을 다 하냐?"
-내가 원래 준비성이 철저하잖아.
테세르는 오늘 라한에게 너무 큰 죄를 지었다. 스스로 뒤에서 욕하고 있다는 걸
발설해 버린 것이다.
당시에는 몰랐던 걸 동굴을 찾으면서 깨달았다. 둔해도 너무 둔한 테세르. 그걸
뒤늦게 깨닫고 아부하는 심정으로 청소까지 끝낸 거였다.
"가자. "
-어.
"슈라! "
라한이 오랜만에 슈라를 불렀다. 보는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나마 슈라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였다.
쿠구구궁!
-음, 주인. 오랜만이군.
슈라가 돌과 흙, 습기가 묘하게 섞인 채로 나타났다. 신기한 모습에 테세르의 눈도
반짝 빛났다.
본래 얼음으로만 이루어졌던 슈라. 투바의 개조로 근처에 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몸체를 구성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이곳은 돌과 흙이 지천으로 널린 냇가. 슈라의
몸이 그런 것들로 구성된 모습이었다.
"모습이 좋아 보이네. "
-투바라는 그 마족 덕분이지.
"후후, 슈라. 나 좀 태워주라. 아직 몸이 그리 좋지 못해서 말이야. "
-그러지.
슈라카 손을 내밀어 라한 앞에 내밀었다. 그 손 위로 라한이 타자 손을 들어 어깨에
내려놓았다.
가자.
-어디로 가면 되지?
테세르 앞장 서.
-응.
테세르가 앞장서자 슈라가 그 뒤를 천천히 뒤따랐다. 전에는 걸을 때 쿵쿵거리던
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았다. 구성 재료 중 흙으로 발바닥을 만든 탓이다.
오, 멋진데.
동굴에 도착한 라한은 감탄성을 토했다. 자신이 원하던 딱 그 형태의 동굴이었다.
-당연하지. 내가 누구야? 정령계 최고의 정령이자 위대한 라한 주인의 하나밖에.
음, 둘이군. 둘 중 더 나은 소환물인 테세르란 말씀. 이 정도는 당연한 거지.
하여간 저놈은 띄워주면 안 돼. 슈라. 테세르. 밖에서 알아서 놀아라. 너무
멀리가지는 말고. 난 정리할 게 좀 있어서.
라한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 대충 자리를 잡았다. 그 상태로 미스릴 창고 안에서
연구했던 걸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빠져나가기 위한 마법만 연구했던 것을 확대 시켜서 보편화시키는 연구였다.
크라이드리안은 제이슨에게, 제이슨은 카이렌에게
루이나 왕국의 북쪽에 위치한 필사르 평야.
그리 크지도 않지만 상당히 비옥한 곳이다. 이 때문에 과거 케라스 왕국이 루이나
왕국과 적대국일 때, 계속 노리던 지역이기도 했다.
가을이면 온통 금빛으로 가득 차는 루이나 왕국 최대의 평야인 필사르 평야. 이곳에
금발 머리의 미남자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어를 떠난 로테마이어스와
크라이드리안이었다.
여기가.
루이나 왕국의 북쪽 필사르 평원이다.
아.
크라이드리안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과거에 이곳에 와본걸 뒤늦게
기억해낸 거였다.
"내일 오후 쯤 프리미아 일행이 이곳을 지나갈 거다. 그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자꾸나. "
"예, 로드님, "
로테마이어스와 크라이드리안이 평원의 한쪽에 있던 오두막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추수철이 한참 지난 겨울철이라서 오두막이 텅 비어 있었다.
오두막은 보통 농사일이 많을 때, 농부들이 쉬는 곳으로 사용된다. 이곳에서 식사도
하고 참도 먹는 그런 곳. 이곳에 로테마이어스와 크라이드리안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
우우웅!
로테마이어스가 뭔가 말을 하려 할 때, 그가 차고 있던 목걸이가 울리기 시작했다.
"로드님. "
"흠, 베르타라스림이구나. 잠시 가봐야겠다. "
로테마이어스가 착용한 목걸이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고룡이 로드를 찾을 때
사용하는 거였다. 대대로 로드만 이어받는 보물이자 족쇄인 셈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용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로드를 부를 만큼 중요한 일이 거의
생기기 않기 때문이다. 설사 생겼다 하더라도 고룡들의 자존심은 로드를 부르는 걸
주저하게 만들었다.
"예, 로드님. 그럼 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프리미아도 네가 가까이 있는 걸 알면 알아서
찾아올게다. 그리고 웬만하면 내일 오후까지는 오도록 노력하마. "
"알겠습니다. "
프리미아 일행이 이곳을 지난다고는 하지만, 정확히 이곳을 지난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드래곤들은 그들만의 고유기운이 있는 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않으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음, 본체로 있는 게 좋겠구나?"
" 예?"
"넌 지금 마나가 봉인된 상태라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지금 몸으로 있다가는
하찮은 인간들에게도 당할 수 있다. "
"아, 그렇군요. "
크라이드리안의 얼굴에 서글픔이 담겼다. 자신이 힘을 잃은 걸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되새기자 절로 슬픔이 몰려왔다.
"그럼 눈을 감아라. 폴리모프 아더!"
위이이잉 !
로테마이어스가 크라이드리안에게 마법을 사용했다. 이에 크라이드리안의 몸 주위에
금빛이 일렁이더니 이내 서서히 커졌다. 본체로 변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크라이드리안은 간단한 폴리모프조차 사용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좀 전에
하고 있던 엘프의 모습도 로테마이어스가 이동의 편의를 위해 마법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음, 됐다. 본체로 있으면 하찮은 인간이 덤비는 일은 없을 게다. 그럼 금방 갔다
오마. "
"괜찮습니다. 볼일 다 보고 오십시오. "
"녀석. 그래 알겠다. 텔레포트! "
로테마이어스가 마법을 사용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로드가 사라지자
크라이드리안이 거대한 몸을 서서히 바닥에 눕혔다.
"내 신세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
크라이드리안은 원래부터 전투에 큰 자질이 없었다. 하지만, 로드인 로테마이어스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실세에 가까운 권력을 구가했다. 그
상태에서 전투 능력만 일정 수준 이상 올린다면 차기 로드가 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헌데, 라한에게 마나를 봉인당한 후부터 세력권에서 급격히 멀어졌다. 스스로도
자괴감에 시달렸고, 주변 드래곤들도 크라이드리안을 은근히 멸시하기 일쑤였다.
물론, 로드가 항상 근처에 있었기에 대놓고 손가락질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만으로도 깔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흠. "
크라이드리안이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치료를 위해 대륙 곳곳을 돌았던
게 내심 피곤했던 모양이다.
국경을 넘은 상급 정령사 제이슨이 이틀 전에 루이나 왕국에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은 루이나 왕국 최대 옥토라는 필사르 평야에 거의 다다랐다.
"이제 거의 다 와가는군. 한 10 일 정도 달리면 도착하겠어. "
제이슨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스쳤다. 지금속도면 늦지 않게 은거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응? "
그렇게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던 제이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먼 곳에서 꽤나
거대한 물체를 발견한 탓이다.
"저게 뭐지?"
잠시 가진 마나를 퍼트려봤지만, 상대에게선 그 어떤 마나의 느낌도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미약하게 들썩이는 걸로 봐서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분명했다.
거기다 이 거리에서 보이는 물체라면 그 크기도 범상치 않을 터였다.
"설마?"
제이슨이 놀란 얼굴로 눈을 마구 비볐다. 그 상태로 자신이 봤던 물체를 보고 또
바라봤다.
"분명해. 드래곤이야. "
제이슨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아니, 긴장감보다는 좌절감이 더 강했다.
상대에게서 그 어떤 마나의 기운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나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는 보통 두 가지 뿐이다. 마나가 하나도 없거나
마나를 완벽히 숨길 실력이 되거나.
헌데, 물질계 최강의 존재인 드래곤에게 마나가 없을 리 만무했다. 결국,
제이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한 실력자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빌어먹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니. 얼마나 강한거야? 고룡인가?"
제이슨이 그 자리에 우뚝 선채로 욕설을 내뱉었다.
"헛! "
제이슨이 어쩔 줄 몰라할 때, 앞에 있던 드래곤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갔다. 정확히
제이슨을 향해서였다.
"들킨.건가? 젠장. "
제이슨이 멀리 보이는 드래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들켰으니 도망가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 차라리 원 없이 싸워서 후회를 남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가 마법만 쓸 수 있어도. '
마법사에게는 최고의 도주 방법인 텔레포트가 존재한다. 물론, 대응마법진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그 정도는 은거지에 설치했으니 어렵지 않았다. 만약 제이슨이
정령사가 아닌 마법사였다면? 이렇게 달리는 대신 텔레포트 마법 주문을 외우고
있을 터였다.
"실라이론!"
제이슨이 어느 정도 다가가서 바람의 상급 정령 실라이론을 불렀다. 본격적으로
싸울 준비를 하는 거였다.
제이슨이 실라이론을 부르자 앞에 있던 드래곤. 크라이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좀 전까지만 해도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다. 제이슨이 달려오고 있다는 걸
느끼지도 못한 것이다. 마나가 봉쇄되면서 기운을 느끼는 힘까지 약해진 탓이다.
하지만, 제이슨이 꽤 가까운 곳에서 실라이론을 부르자 그제야 알아 차렸다. 그리고
다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런. '
주변을 둘러본 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멀리서 동이 터오는 게 보였다. 하지만, 크라이드리안이 원한시간에는
한참 못 미쳤다. 로테마이어스와 프리미아가 이곳으로 오는 시간은 대략 오후 쯤.
시간이 한참 남았기에 혼자 싸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 없는데. '
크라이드리안은 라한과의 전투가 드래곤으로서의 첫 전투였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완벽하게 패했다 그때부터 전투에는 영 자신이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열등의식과
패배의식 때문이다.
"하앗! "
제이슨이 기합성을 토하며 쇄도해왔다. 또, 공중에서는 바람의 상급 정령
실라이론이 거대한 윈드 스피어를 들고 크라이드리안을 공격했다.
-쿠오오오!
피어를 터트린 크라이드리안이 꼬리를 강하게 휘둘렀다. 드래곤들이 전형적으로
행하는 공격 패턴이었다.
드래곤 피어는 상대를 겁먹게 만드는 방법이다. 혹, 상대가 강한 존재라 하더라도
피어를 듣게 되면 순간적으로 움찔하게 마련이다. 그때 꼬리 공격을 해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다.
헌데, 이번에 터트린 피어는 제이슨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크라이드리안의 마나 봉쇄 때문에 제 위력을 내지 못한 것이다.
채챙!
팍팟!
제이슨이 크라이드리안의 꼬리를 피해 뒤로 몸을 날렸다. 반면 실라이론은 옆으로
돌아 크라이드리안의 뒤로 돌아갔다.
"드래곤. 이놈! "
-쿠오오오.
처음에는 겁에 질린 마음에 허술한 공격을 했던 제이슨이다. 헌데, 막상 싸워보자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피어가 이 정도밖에 안 돼?'
잠시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지워 버렸다. 지금은 눈앞에선 드래곤과 싸울
때였지 이유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쿠오오오!
부우우웅!
콰콰콰콰쾅!
이번 공격은 크라이드리안이 먼저였다. 꼬리로는 제이슨을 이빨로는 실라이론을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공격을 실라이론은 여유 있게 피해냈다. 하지만, 평소에
몸놀림이 둔했던 제이슨은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퍽-!
"컥!"
다행히 꼬리에 정확하게 가격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땅에 부딪혀 날아오른 돌에
머리를 맞았다.
"빌어먹을. "
제이슨이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를 스윽 훔쳤다. 역시나 뜨끈한 피가 이마에서
흘러내리고 있번다.
반면, 크라이드리안은 득의양앙한 웃음을 지었다. 라한과의 전투와 비교하자 너무
쉬운 상대로 보였다.
라한은 엄청난 마법 실력에 빠른 몸놀림을 가졌다. 거기다 임기응변도 능해서
정면으로 상대하는 게 상당히 껄끄러웠다. 이에 반해, 제이슨은 몸놀림도 느렸고,
전투 경험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뒤에서 윈드 스피어를 들고 있는
실라이론이었다.
'저 정령만 어떻게 하면 되겠는데. '
크라이드리안은제이슨을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대신, 뒤에 선 실라이론에게만
정신을 집중시켰다. 승리의 관건이 정령에게 달렸다는 생각에서였다.
-응?
정령을 돌아보고 다시 고개를 돌린 크라이드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앞에 쓰러져
있던 제이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탓이다. 흘린 피의 양으로 봐서는 꼼짝없이 누워
있을 것만 같았던 제이슨. 그가 사라지자 온 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경험이라면 오히려 제이슨이 라한을 압도했다.
순간 만만하다는 생각에 긴장을 늦춰서 당했을 뿐이다. 또, 제이슨의 순간적인
임기응변 능력이 약하다는 것도 그가 당한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제대로
싸운다면 라한만큼 골치 아픈 상대가 제이슨이었다.
"하앗! "
제이슨은 크라이드리안이 고개를 돌렸을 때, 중급 정령을 불러냈다. 그리고 그
정령을 타고 크라이드리안의 머리 위로 올라가 있었다. 기회를 보고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헛!
스파팟!
크라이드리안이 고개를 들자 뒤에 있던 실라이론도 공격을 감행했다. 이젠 앞뒤가
아닌 위와 뒤에서 공격당하는 형국이었다.
-어딜.
크라이드리안이 몸을 틀고 고개를 치켜 올렸다. 그리고 앞발로 실라이론의 창을
막았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했던 임기응변의 발현이었다.
-컥!
하지만, 그는 제이슨이 정령사라는 걸 깜빡했다. 또, 그가 중급정령인 실라페를
불러놓은 상태라는 걸 잊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실수의 결과가 지금 그의 왼쪽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였다.
쿠오오오오!
크라이드리안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를 본 제이슨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멍청하긴. 하앗!"
크라이드리안이 고통에 어쩔 줄 몰라 할 때, 제이슨이 다음 공격이 속개되었다.
이번은 앞, 뒤, 위에서 펼쳐지는 3 방향 공격이었다.
푸욱!
스핑!
크라이드리안이 제이슨의 공격을 피해냈다. 하지만, 실라이론과 실라페의 공격을
막는 건 실패했다. 그가 제이슨의 공격을 우선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실라이론의 창은 크라이드리안의 오른쪽 눈에, 살라페가 만든 바람의 톱날은
크라이드리안의 목 언저리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이미 승부가 난 셈이다
"역시 멍청하군. "
-크오, 오오오오.
"쯧쯧. 내가 정령사라는 걸 잊었나? 정령을 이용한 공격이 아니면 네 몸에 상처를
낼 수 없는 게 나다 "
이번 전투의 승패는 크라이드리안의 착각으로 결정되었다. 세 가지 공격 중
제이슨의 공격을 우선적으로 막았다는 것 말이다.
실제로 막지 않아도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는 게 제이슨의 공격이었다. 하잘 것
없는 공격을 막느라 정작 중요한 공격을 막지못한 바보 같은 대처였다.
물론, 아무런 이유 없이 크라이드리안이 제이슨의 공격부터 막은 건 아니었다. 다른
정령은 조용히 공격한데 반해, 제이슨은 항상 기합을 넣었다는 것. 그 때문에
크라이드리안의 시선이 제이슨에게 먼저 쏠렸다는 게 이유였다. 어찌 보면 제이슨이
치른 수많은 전투 경험이 승리를 낚은 거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 그만 가라, 실라이론! 실라페! 끝내!"
스팟!
피잉!
실리이론과 실라페가 다시 크라이드리안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크라이드리안도
몸부림치며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이젠 제이슨 쪽은 크게 신경 쓰지도 않은 채로
정령들만 상대했다. 좀 전 제이슨의 말로 전투 방법을 찾은 듯했다.
하지만, 이미 피를 흘리고 있는 상태였다. 거기다두 눈도 잃어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이런 싸움이 오래 지속될 턱이 없었다.
쿠욱!
스파파파팟!
-쿠오오오.
쿠궁!
마구 발광하던 크라이드리안이 평야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숨을 몇 번 헐떡이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다. 로드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받던 한 골드 드래곤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크라이드리안이 죽자 제이슨이 시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멍청한 드래곤 같으니. 내 공격은 무시해도 네 공격은 날 향했어야지. "
어차피 제이슨이 죽거나 큰 부상을 당하면 소환된 정령들은 강제 역소환 당하게
된다. 죽은 크라이드리안에게 그 점을 꼬집은 거였다.
"휴, 그나저나 엄청 힘드네. 실라이론, 실라페. 돌아가."
실라이론과 실라페가 정령계로 돌아가자 제이슨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힘에 부치는
정령의 소환으로 체력이 다한 것이다.
"그래도 멋진 보물을 건졌군. 드래곤하트에 드래곤본, 드래곤 스케일. 이게 돈이
얼마야? 크크크. 그리고 류카라한. 네놈이 날 무시하지만, 이제 아무 말 못하겠지.
흐흐흐흐. "
제이슨이 탐욕에 가득한 눈으로 크라이드리안의 시체를 살폈다. 돈과 굴레를 벗은
존재들 사이에서의 지위.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멋진 물건이었다.
한편, 제이슨이 크라이드리안과 한창 치열한 전투 중일 때, 카이렌 일행도 루이나
왕국의 북부 지역에 도착했다. 제이슨보다 불과 한, 두 시간 간격 밖에 떨어지지
않은 셈이다.
"여기가 라한이 살았던 왕국이지?"
"그렇다고 하더군. "
카이렌의 물음에 프라하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테세르만큼은 아니어도
만만치 않게 머리가 나쁜 프라하. 전에 많이 들었던 내용임에도 잠깐 생각을 해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놈 이름이 엘베라고 했나?"
"응. 지금 루이나 왕국의 국왕이라고 하더군. 근데 왜?"
이번 물음에는 투바가 대답했다. 경험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괜찮은 편인 투바
프라하와는 달리 묻자마자 바로 답할 수 있었다.
"가는 김에 손 좀 볼까 싶어서. "
"여기 왕?"
"응. 어차피 라한은 그 놈 손보는 일을 휴란트한테 맡기려고 했잖아. 휴란트가
우리하고 있으니까 상관없을 것 같은데. "
"그게 그렇지가 않아. "
투바가 카이렌의 말에 제동을 걸고 나왔다. 이에 걷고 있던 일행 모두가 투바를
바라봤다.
"왜?"
"라한은 엘베로를 좀 특이하게 손보려고 했거든. 근데, 그 방식이 뭔지 모르겠어. "
"아, 맞다. 그렇지. 음, 그래도 좀 섭섭한데. 그냥 살짝 보고 오는 건 어떨까?"
"잠깐만. 지금 엘베로라고 했나?"
대화를 한창 진행하고 있을 때, 루이에가 의문을 표해왔다. 그는 엘베로가 루이나
왕국의 국왕이 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아, 맞다. 너도 루이나 왕국 출신이라고 했지. "
"아니, 난 루이나 왕국출신이 아니다. 힘이 필요해서 루이나왕국에 잠시 몸을
의탁했을 뿐이지 "
"예? 정말입니까?"
루이에의 말에 레테아가 놀랍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루이에를 루이나
왕국의 영웅으로만 기억했다. 그리고 그가 루이나 황국 출신이라는 것에 일말의
의문도 품은 적이 없었다.
'놀랍군. 루이나 왕국 모든 기사들의 우상이었던 루이에가 다른 나라 사람이라니 .
'
"그렇다. 난 루이나 왕국 사람이 아니다. "
"그럼?"
"음. "
레테아의 연이은 물음에 루이에가 침음성을 흘렸다. 대답하기 곤란한 모양이다.
그렇게 한참 있던 루이에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난 나라가 없다. "
"나라가 없다고요?"
"그렇다. 난 대륙 남쪽 멀리 떨어져 있는 섬에서 태어났으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엄청난 몬스터들과 싸우며 자랐다. "
"아, 그, 그런."
레테아가 놀란 눈으로 루이에를 바라봤다. 그리고 새삼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대륙에는 큰 애정이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에게도 큰 애정이 없지. "
"훗, 그래도 애정을 가져봐. 알고 보면 꽤나 쓸 만한종족이 인간이거든. 나도
라이칸이라서 예전에는 인간들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근데, 라한과 다니면서 이런
저런 일을 겪다보니 결국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더군. 굳이 인간이 최고라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인간이 사악하네. 어쩌네 하면서 손가락질할
필요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
프라하의 의외성 짙은 말에 일행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 ! 프라하. 너 생각보다 똑똑하구나. "
"당연하지. 내가 이래봬도 우리 라이칸 중에서는 최고의 인재로 꼽혔다. "
"자랑이다. "
"푸풋! "
"하하하하."
투바의 짧은 한 마디에 일행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에 프라하는 영문도 모른 채
얼굴을 붉혔다. 괜히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근데, 아까부터 뭔가 이상한 게 느껴지는데. "
"뭐가?"
"저 앞에서 뭔가 강한 기운이 느껴진단 말이야. "
"그래?"
카이렌의 말에 일행들이 전방으로 감각을 집중했다. 헌데, 그 누구도 전방의 상황에
대해 알아본 이가 없었다. 카이렌이 아니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멀었기 때문이다
"카이렌. "
"왜?"
"강하군. "
"고맙군, "
루이에가 순수한 감탄을 터트렸다.
그는 굴레를 벗은 존재들을 꽤 많이 만났고 싸웠다. 헌데, 그들 중 카이렌과
비견되는 이는 단한 명뿐이었다. 제스란, 그가 아니면 카이렌과 비등한 결투를 하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근데, 앞에서 느껴지는 파동이 어떻."
"싸움이군. 뒤따라와라. "
카이렌이 뭔가 느낀 듯 앞으로 뛰쳐나갔다.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던 걸 어느 정도
가까워져서야 깨달은 탓이다.
"카이렌! 누구야?"
"몰라. 근데, 정령 같아!"
달려가는 카이렌을 향해 프라하가 물었다. 이에 카이렌도 뒤를 슬쩍 돌아보며
답했다.
카이렌이 사라지자 레테아가 일행들을 둘러봤다. 이렇게 손놓고 있어도 되냐는
물음이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저놈이 무모하게 덤빌 리 없거든.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간
거야. "
"그래도. "
"그리고 카이렌이 쉽게 당할 리 없잖아. 천천히 걸어가도 위험해지기 전에 만날 수
있어. "
투바가 레테아를 진정시켰다. 그 모습에 루이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특이하군 혹시 닥칠 수 있는 위험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가? 아니면 카이렌을
믿고 있다는 거?'
루이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약한 상대와 싸우더라도 항상 최선을 다해왔던 루이에. 혹, 상대가 강해보이면
암습도 마다하지 않는 성격 아니던가. 루이에가 카이렌 입장이었다면 무조건
인원수로 밀고 나갔을 터였다. 그게 루이에가 생존을 위해 취해온 방법이었다.
카이렌은 일행과 떨어져서 계속 달렸다. 그렇게 근 2 킬로미터 정도 왔을 때, 거대한
동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한없이 미약해 보이는 존재도.
"드래곤이잖아. 근데 저놈 상태가 왜 저래?"
카이렌은 한 눈에 거대한 동체가 드래곤임을 알아봤다. 헌데, 그에게서 아무런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겉모습이 분명 드래곤임에도 왠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가보면 알겠지. "
카이렌이 은신술을 사용해 서서히 다가갔다. 꽤 가까이 다가가자 드래곤과 인간의
싸움을 좀 더 명확히 살펴볼 수 있었다.
'저놈그때 그 드래곤이잖아. 근데, 마나는? 설마 라한이 했던 그때 그 금제?'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카이렌의 표정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물질계 최강의
존재인 드래곤의 마나를 봉인하는 인간 라한.
새삼 라한이라는 인간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흠, 라한. 네 능력은 어디까지가 끝인 줄 모르겠구나. '
쿠욱!
스파파파팟!
-쿠오오오.
쿠궁!
크라이드리안의 추락과 함께 전투가 막을 내렸다. 승리는 제이슨. 힘의 9 할을
잃었으니 패배는 거의 기정사실이었다. 거기다 싸움 경력도 제이슨과 비교도 안
되어 보였다.
'저놈. 굴레를 벗은 놈이군. '
카이렌은 제이슨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봤다. 굴레를 벗은 존재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느낌 덕이었다.
'공격을 해?'
카이렌이 잠깐 망설이는 빛을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쉽게 나왔다.
'일단 제압해야겠군. '
현재 카이렌은 라한의 실종을 굴레를 벗은 존재들의 짓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라한의 행방을 묻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잡아야 하는 상대였다.
또, 굴레를 벗은 존재들의 은거지로 알려진 곳은 루이나 왕국을 지나야 나오는 베센
왕국이다. 헌데, 이곳은 베센 왕국과 꽤 멀리 떨어진 루이나 왕국의 북부 지방
굴레를 벗은 존재가 이곳에 나타난 그 자체에 의혹이 생겼다. 이래저래 일단
생포해야 하는 셈이다.
스으윽!
카이렌이 제이슨의 근처까지 서서히 이동했다.
"휴, 엄청 힘드네. 실라이론, 실라페 돌아가."
제이슨이 정령을 돌려보내자 카이렌의 얼굴에 비웃음이 감돌았다. 그로서는 일을
쉽게 풀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거였다.
'일이 쉬워졌군. '
제이슨이 정령의 도움을 받더라도 그를 잡는 건 가능했다. 카이렌의 실력과 경험이
제이슨을 압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령이 남아있을 땐, 칼을 뽑고 땀을 흘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귀찮은
상황이 수월하게 바꿔 것이다.
스스스슥!
카이렌이 제이슨의 뒤로 이동했다. 그때까지도 제이슨은 크라이드리안의 시체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의 실력으로 드래곤을 잡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하하하. 내가 드래곤을 잡다니. 하하하하하. 드래곤들 별거 아니잖아. "
스르르릉!
제이슨이 대소를 터트릴 때, 카이렌이 검을 뽑았다. 제이슨의 행동 하나하나가
카이렌을 돕는 상황이었다.
"이거, 이거. 굴레를 벗었다는 다른 녀석들도 말만 그럴싸하지 형편없는 거 아냐?
저 따위 드래곤한테 겁을 먹다니. "
"과연 그럴까?"
"헉!"
카이렌이 검을 들어 제이슨의 목을 겨누었다. 순간 놀란 제이슨이 헛바람을 삼켰다.
"왜?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형편없다면서? 근데 어쩌지? 나도 굴레를 벗었거든. "
"어, 어떻게?"
"어떻게 갑자기 나타날 수 있었냐고? 후후후. 알거 없어 "
퍽-!
"컥!"
카이렌의 검 손잡이가 제이슨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이에 제이슨의 몸이 옆으로
서서히 쓰러졌다.
"별거 아닌 게 깝치기는."
카이렌이 제이슨 옆에 대충 걸터앉았다. 그 상태로 크라이드리안의 시체를
바라봤다.
'흠, 비싼 시체로군 '
카이렌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일행을 기다렸다. 그는 모든 일행이 모인 후에
제이슨에 대한 심문을 할 생각이었다.
도서명 : 1 서클 대마법사 7
저자명 : 양강
출판사 : 로크미디어
출판년도 : 2005 년
봉사자 : 최아람
-라한의 선택
루이나 왕국의 국왕인 엘베로.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만, 눈빛만큼은
젊은이의 그것보다 더 밝게 빛났다.
비록 몸에는 온갖 검버섯과 주름이 가득했지만. 패기만큼은 누구 못지않다는
증거이리라.
그런 엘베로가 대신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어떤 모임에는 정사에 참가하기 힘든
지방 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 모였는가?
노쇠한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목소리라서도 죽음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제아무리 국왕이
라도 나이는 속이지 못하는 듯했다.
예, 국왕 전하.
내가 그대들을 부른 건 중대한 발표를 하기 위함이다.
하명하십시오, 국왕 전하.
엘베로의 말에 대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속으로 이번 엘베로의 소집이 국왕 승계와 관계가 있다
고 생각했다.
대부분 왕국에서는 국정 운영이 힘들 정도로 늙기 전에 후계자
에게 대통을 물려준다. 국왕이 죽었을 때 생길 수 있는 혼란을 막
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루이나 왕국에서는 국왕승계에 대한 얘기
를 그 누구도 꺼내지 못했다.
현재는 루이나 왕국의 대변혁기. 대신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
는 나라의 정세를 후계자인 쿠벨린이 따라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
다. 그리고 그 생각은 거의 정확했다. 그만큼 쿠벨린은 무능했다.
꿀꺽!
엘베로 국왕이 말을 끊고 주변을 훑는 그 순간부터 좌중에서는
침 삼키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대신들의 옆에 서 있던 쿠벨린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오늘의
소집이 자신과 관계 있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그 때문인지 이마에
땀이 솟고 목이 타들어갔다.
지금 이 순간부터.
계속 침묵을 지키던 엘베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주변을 훑어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엘베로가 잠깐 멈추었던 입을 다시 열었다.
쿠벨린의 세자 지위를 박탈한다.
헉!
컥!
엘베로의 말이 떨어지자 대신들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권 승계가 아닌 쿠벨린의 세자 작위 박탈이라니. 대전에 있는 그
누구도 엘베로가 이런 선언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전, 전하! 어찌하여.
전하. 갑자기 그게 무슨.
몇몇 대신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의문을
표했다.
그들도 쿠벨린이 국왕이 되는 건 반기지 않았다. 그의 무능함과
이기적인 성정을 잘 아는 탓이다.
하지만, 이미 늙은 국왕 아래에 후계자가 없다는 건 문제가 달
랐다.
당장 엘베로가 죽어 버린다면? 루이나 왕국은 지방 귀족들의 봉
기를 막을 구심점이 없었다.
겨우 중앙대륙의 패자로 성장한 루이나 왕국이 지방 귀족들에
의해 분해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오나, 국왕 전하.
아바마마. 제가 무슨 잘못을 지었기에.
옆에서 보고 있던 쿠벨린이 엘베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로서
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보다 더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이제 국왕이 된다는 부푼 꿈을 안고 있었는데, 세자 작위 박탈이
라니. 아직도 엘베로의 폭탄선언이 현실이 아닌 듯 느껴졌다.
쿠벨린.
예, 아바마마. 혹, 제게 부족한 게 있다면 배워서 바꾸겠습니
다. 제발 세자 작위를 박탈한다는 말씀만큼은.
쿠벨린 넌.
.
엘베로의 말이 이어지자 대신들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들
도 엘베로의 해명을 듣고 싶었음이다
쿠벨린 넌. 가망이 없다.
아, 아버님.
넌 왕이 될 재목이 아니야.
아버님.
엘베로의 말이 떨어지자 쿠벨린이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려댔
다. 이성적으로 되지 않으면 감성이라도 자극할 요량이었다.
쿠벨린, 물러나거라.
아, 아버님.
뭣들 하느냐? 쿠벨린을 대전 밖으로 끌어내라. 그리고 왕자궁
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라.
예.
엘베로의 말에 대전 주변에 있던 왕실 친위 기사단이 쿠벨린에
게 다가갔다. 그리고 안쓰러운 듯 고개를 몇 번 젓고는 쿠벨린의
어깨를 잡았다.
놔라! 이놈들. 난 이 나라의 왕세자다!
쿠벨린 왕자님
놔라!
왕자님!
왕실 친위 기사단 단장이 약간은 격양된 어조로 쿠벨린의 어깨
를 끌었다.
국왕의 명령이 최우선인 왕실 친위 기사단. 그들로서는 엘베로
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놔라!
쿠벨린의 발악에도 왕실 친위 기사단은 손을 놓지 않고 기어이
그를 대전 밖으로 끌어냈다.
왕실 친위 기사단의 일부와 쿠벨린이 사라지자 대신들이 엘베로
를 바라봤다. 해명이 필요한 눈빛이었다.
이유가 궁금하냐?
예, 전하.
이유는 너희들 생각과 같다.
예? 그게 무슨.
엘베로의 말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건지도 모른다. 사안이 대권이라는
큰 사안이었으니 말이다.
쿠벨린은 너무 무능하다. 그게 이유다.
하지만.
루이나 왕국 전역에 알린다. 덕망 있고 지능이 뛰어난, 그러면
서도 정세를 읽을 수 있는 자를 세자로 책봉하겠다. 남녀 불문! 루
이나 왕국의 국민 중 뛰어난 자라면 누구나 국왕이 될 수 있다.
엘베로의 말에 대신들이 입을 떡 벌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폭탄선언이었다.
왕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세자 책봉. 이곳 판트리아 대륙에서
는 유례없는 일이었다.
전하 재고해 주십시오. 이번 일은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부디 다시 한번.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가 남자이든 아니면 여자이든, 귀
족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왕이 될 자질이 충분하다면
그에게 루이나 왕국의 세자 자리를 넘겨주겠다. 이상.
말을 마친 엘베로가 대전을 벗어났다. 그가 나가자 대신들이 저
마다 머리를 굴리며 고민에 빠졌다.
막말로 자신도 세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잘만 이용하
면 자신이, 혹은 자신의 가문이 루이나 왕국의 왕가로 우뚝 설 수
도 있는 것이다.
대전을 나온 엘베로가 파론과 마주 앉았다.
내 말이 무모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전하.
후후, 저들은 저마다 자기 가문만 생각하겠지.
그럴 겁니다. 겉으로 나라를 생각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이
기적인 자들이니까요.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 은은한 웃음을 머금었다.
모를 게야. 이번 일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을 거라는 걸.
엘베로의 웃음기 가득한 말에 파론이 몸을 떨었다.
국왕이 된 이후로 항상 훈훈한 분위기를 풍겼던 엘베로. 그 때문
에 엘베로의 본 모습을 잠시 잊고 지냈다. 수많은 사람을 희생양으
로 삼고 이 자리까지 온 잔인한 성품이라는 것을.
파론.
예, 전하.
정보원들을 모조리 풀어라.
하오면.
대륙의 정보를 더 자세히 캐야겠지. 내가 만든 나라를 다른 나
라 놈들 손에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전하.
엘베로의 말은 다른 나라 사람이 루이나 왕국의 세자가 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즉, 세자 후계자 선정에 다른 나라가 장난을 칠 수 없도록 함이
다. 정보 수집에 절대적인 자신감이 없으면 이런 극단적인 세자 책
봉 정책을 펼 수 없었을 터였다.
*
루이나 왕국이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을 때, 카이렌은 크라
이드리안의 시체 앞에서 일행을 기다렸다.
카이렌이 빨리 달려와서인지 근 30 분이 지나서야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링게 늦은 거야?
뭐, 서두를 필요 있나? 네가 다 알아서 할 텐데. 근데 저건 뭐
야?
카이렌의 말에 프라하가 뒤에 있는 거대한 물체를 되며 의문을
표해왔다.
그가 보기에도 드래곤이 분명했다. 하지만, 물질계 최강의 존재
이기에 설마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되면 몰라? 드래곤이잖아.
정말? 프리미아. 저거.
프리미아에게 무슨 말을 하려던 프라하가 입을 다물었다. 프리
미아의 표정이 너무 요상했다.
프리미아는 이곳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
다. 프라하는 그 모습을 지금에서야 발견했다.
이봐! 프리미아. 왜 그래?
.
야! 프리미아.
루이에. 그놈들 좀 어떻게 해라.
프리마아가 계속 침묵을 고수하자 카이렌이 루이에를 불렀다.
제대로 된 일행이 아닌 쿨샤크와 데메크. 그들을 기절시켜 달라는
의미였다.
그러지.
퍽-!
털썩!
쿨샤크와 데메크가 쓰러지자 카이렌이 다시 프리미아를 바라
봤다.
프리미아. 표정이 왜 그래?
저 드래곤은 크라이드리안이다.
알아. 그게 왜?
그는 로드가 가장 아끼는 드래곤이야.
그런가?
카이렌도 쓰러진 드래곤이 크라이드리안일 거라는 생각은 했었
다. 라한이 싸울때, 오랫동안 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프리미아의 표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리 드래곤이 개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드래곤의 죽음에 아주 무감각한 건 아니다.
난 또 뭐라고. 그럼 동족이 죽은 것 때문에 충격 받았다는 거야?
그런 게 아니다. 다른 드래곤이 죽었다면 내가 이런 반응을 보
이지는 않을 거다.
그럼 뭔데?
카이렌은 아직도 프리미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프
리미아의 과민반응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내가 말했잖아. 크라이드리안은 로드가 가장 총애하던 드래곤
이라고. 네가 그를 죽인 걸 안다면 로드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
각해? 이곳에 있는 이들을 다 죽여도 화를 풀지 못할 거야.
어차피 드래곤 로드는 우릴 죽이려고 하잖아. 어차피 적인데
뭐.
카이렌은 끝까지 태평한 자세를 유지했다. 지금 상황의 위급함
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크라이드리안은 얼마 전에 마나를 잃었다 류카라한. 아니, 라
한이라고 했나? 그와의 싸움 이후로 마나를 봉인 당했어.
그게 왜?
그 이후로 로드는 크라이드리안을 데리고 대륙 곳곳을 다니면
서 치료하려고 애썼어.
그럼. 이 근처에 로드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건가? 내 감각에는
아무것도. 젠장. 온다.
주변에 감각을 퍼트리던 카이렌이 다급한 음성을 내질렀다. 먼
곳에서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진 탓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로드와 크라이드리안은 헤어졌
다. 정말 공교롭게도 하필 헤어진 그 상황에서 크라이드리안과 제
이슨이 싸우게 됐고, 결국 크라이드리안이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지금 현재 남겨진 주변 상황만 보면 제이슨이 아닌 카이
렌이 크라이드리안을 죽인 것처럼 보였다.
-쿠오오오오오!
쿠쿠쿠쿵!
-어찌 된 일이냐?
황금빛 거대한 동체가 카이렌 일행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등장에 카이렌을 비롯한 일행 모두가 몇 걸음씩 뒷걸음질
쳤다. 그가 풍기는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이다.
-다시 묻겠다. 어찌 된 일이냐?
로테마이어스의 분노 가득한 눈이 프리미아를 향했다. 눈만 보
면 이런 물음 대신 브레스부터 날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헌데도 그는 해명부터 들으려 했다. 바로 앞에 크라이드리안의
시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분노를 풀다 자칫 크라이드리안의 시체
가 상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음이다.
위대하신 로드님을 뵙습니다. 프리미아 인사드립니다.
-프리미아, 말하라. 어찌 된 일이냐?
그게, 저.
말을 하려던 프리미아가 카이렌을 바라봤다. 이에 카이렌이 앞
으로 한절음 나섰다.
로테마이어스. 오랜만이다.
-흠, 카이렌. 네 짓이냐?
믿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내가한 일은 아니다. 여기 쓰러진
이 녀석 짓이지.
카이렌의 대답이 끝나자 로테마이어스가 그의 눈을 계속 바라봤
다.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나름대로 판단해 보려는 노력이었다.
잠시 후, 로테마이어스가 카이렌이 가리킨 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정령사로군. 상급의 정령사라.굴레를 벗은 자인가?
알아보는군.
-카이렌, 너도 굴레를 벗었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럼 너도 한통속이겠군.
로테마이어스가 서서히 살기를 불러일으켰다. 그 모습에 카이렌
을 비롯한 투바, 프라하도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전투 준비를 갖추
었다.
로드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프리미아. 네가 낄 일이 아니다.
로드님. 중요한 얘깁니다. 들어주십시오.
프리마아가 로테마이어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얼굴 가득한 절
실함이 그의 기분을 말해주는 듯했다.
프리미아의 느닷없는 행동에 로테마이어스가 살기를 잠깐 누그
러뜨렸다.
-말하라.
감사합니다, 로드님. 먼저 여기 있는 두 명과 저기 쓰러진 두
명은 굴레를 벗은 존재가 아닙니다. "
프리미아가 레테아, 휴란트, 쿨샤크, 데메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이들은 로드님의 분노와 상관없는 자들이니 살려주셨으면 좋겠
니다 "
프리미아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그 네 명을 바라봤다. 역시나
굴레를 벗기에는 한참 부족해 보이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지금 가진 분노는 그런 시비를 가릴 눈을 주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드래곤인 프리미아를 제외한 모두를 죽여야
직성이 풀릴 성 싶었다.
-허락할 수 없다.
로드님.
-난 두 번 말하지 않는다. 허락할 수 없다.
말을 마친 로테마이어스가 다시 살기를 불러일으켰다. 좀 전과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기운이었다.
그 모습에 좀 전까지 당당하던 카이렌도 서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기운에 반응해서 몸이 저절로 밀려난 모양새였다.
큭!
흠.
투바와 프라하가 침음성을 흘렸다. 새어나오는 기운만으로도 버
티기 힘든 듯했다.
로드님.
빠직!
프리미아가 다시 로테마이어스를 불렀다. 이에 로테마이어스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프리미아를 노려봤다. 다시 한번 더 나서면 너
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안 돼. 다른 이는 몰라도 레테아만은.
텔레포트!
주변을 한 번 훑어본 프리미아가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갑자기
프리미아가 사라지자 로테마이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딜 간 거지?
잠깐 생각해 보던 로테마이어스가 이내 의문을 접었다. 지금은
I 프리미아가 아닌 다른 존재들을 죽이는 게 먼저였다.
생각을 정리한 로테마이어스가 살기를 좀 전보다 더 강하게 불
러일으켰다. 그와 함께 마나의 기운이 카이렌 일행들에게 폭사되
었다.
콕!
주루루룩!
의식을 잃은 쿨샤크와 데메크, 제이슨이 뒤로 쭉 밀려났다.
-쿠오오오!
으으윽!
으윽!
커억!
로테마이어스가 드래곤 피어를 터트렸다. 이에 이미 의식을 잃
은 세 명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의식을 잃었음에도 원초적인 공포
를 느낀 듯 보였다.
다음은 레테아가 공포를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인간 본연의 심
성을 건드리는 공포였기에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로테마이어스! 죄 없는 이들은 빼고 싸우자
-크크크크. 크라이드리안은 죄를 지어서 죽인 것이냐? 다 똑같
은 놈들이야. 다 똑같아!
카이렌의 말에도 로테마이어스의 분노는 풀릴 줄 몰랐다. 오히
려 풍겨 나오는 기운은 계속 강해지기만 했다.
로테마이어스의 행동에 투바가 주변을 훑었다.
힘겹게 버티던 레테아가 의식을 잃는 모습이 투바의 눈에 들어
왔다. 너무 큰 심적 부담에 정신을 놓아 버린 듯했다.
어? 휴란트도 버텨?
투바가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휴란트를 바라봤다. 역시나 의식
잃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현재 의식을 잃지 않은 이는 프라하와 투바, 카이렌, 휴란트였다.
그 중 자신과 카이렌, 투바가 의식을 잃지 않은 건 이해가 되었다.
헌데 휴란트가 의식을 잃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게 신기했다. 육체
적, 정식적 능력은 오히려 레테아가 위이지 않은가?
어라?
프라하도 휴란트가 의식을 잃지 않은 게 신기한지 고개를 갸웃
거리고 있었다. 헌데, 카이렌은 당연하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았
다 카이렌은 휴란트가 의식을 잃지 않은 이유를 아는 듯했다.
나중에 물어봐야겠군.
생각을 마친 프라하가 도끼에 손을 올리고 자세를 잡아갔다. 본
격적인 전투 준비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투바도 손을 모은 채 정신을 집중시켰다. 마계 술법을
부리기 위한 자세였다
카이렌! 내가 앞을 맡을게. 넌 뒤를.
잠시 기다려.
프라하를 제지시킨 카이렌이 하늘의 한 쪽을 바라봤다. 다른 이
들도 카이렌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왜?
뭔가 있다.
카이렌의 말에도 프라하와 투바는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었
다. 카이렌의 오감이 그들보다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어?
잠깐 지나자 투바와 프라하의 눈에도 공중에서 다가오는 무언가
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대상이 둘
이라는 건 구분할 수 있었다.
-크음. 폴리모프 셀프!
로테마이어스가 살기를 서서히 누그러뜨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
다. 그리고 모습을 엘프 형태로 바꾼 채 공중을 바라봤다.
-멈춰라. 로테마이어스!
잠시 후, 공중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로테마이어스의 살
기가 빠르게 흩어졌다.
레이시아나
-폴리모프 셀프.
공중에서 날아온 이는 블루 드래곤 레이시아나였다. 라한의 실
종 이후로 세상사에 의욕을 잃었던 레이시아나. 그가 프리미아의
부탁을 받고 이곳에 나타났다
레이시아나, 이건 내 일이다
로테마이어스, 이건 내 일이기도 하다.
레이시아나!
로테마이어스가 강압적으로 레이시아나의 이름을 불렀다 제발
끼어들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듯했다.
로테마이어스. 내 지금 이름은 로이나다.
그럼 유희? 정말 유희인가?
그래. 유희가. 맞아.
잠깐 망설이던 로이나가 힘겹게 대답했다.
휴우우.
로테마이어스가 길게 한숨 쉬었다. 드래곤인 걸 다 아는 상태에
서 유희라니. 좀 황당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수긍하기로 했다.
로이나. 이들은 크라이드리안을 죽였다.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로이나가 카이렌 일행을 살펴봤다. 역시나
라한은 보이지 않았다.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눈으로 확인하게 되자
더 서글픈 기분이었다.
크라이드리안이. 죽었군.
그렇다 그래서 저들을 죽여 화를 풀 생각이다. 내 기분을 이해
하지 못하겠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프리미아가 죽었다면 나 역시 같은 태
도를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그냥 물러날 수는 없다.
로이나!
로이나의 대답에 로테마이어스가 눈을 부라렸다
그러면서도 눈빛만큼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목소리와 달리 로
이나에게 화가 나 있지는 않다는 증거였다.
로테마이어스. 아니, 로드님이라고 불러야하나? 부탁한다. 이
들을 그냥 보내줘.
왜?
로테마이어스의 물음에 로이나가 카이렌 일행을 다시 훑었다
원래 로이나는 레테아와 휴란트만 살릴 생각이었다. 과거에도
라한과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살렸던 로이나. 이번
에도 역시 그들이 죽도록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막상 다른 일행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누가 뭐래도
라한의 몇 안 되는 친구들이 카이렌을 비롯한 일행들이다.
라한과 선이 이어져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었음
이다.
부탁해.
로이나. 분명 유희라고 했다. 근데 왜 저들을 살리려고 하는 거
지? 로드인 내가 하는 일을 고작 네 유희로 막는다는 게 말이 된다
고 생각해?
말이 안 된다는 건 알아. 근데, 근데저들이 죽는 건 못 보겠
어. "
로이나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로이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래곤으로서, 그것도 블루 일족의 고룡으로서 이런 감상적인
태도를 보이다니. 자신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사이만 아니면 로
드의 지위를 이용해서라도 바꿔놓고 싶었다.
로이나.
로테마이어스, 부탁해.
이, 이. 좋다. 네 부탁을 들어주지, 대신, 나도 조건이 있
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앞으로 백 년 동안 레어를 벗어나지 마라.
잠깐 생각하던 로테마이어스가 조건을 걸고 나왔다. 로이나를
레어에 감금시키겠다는 조건이었다.
로테마이어스!
왜? 싫어? 그럼 나도 저들을 죽여 버리겠다.
로이나가 카이렌 일행을 다시 훑었다. 그리고 처연하게 고개를
저으며 로테마이어스의 눈을 바라봤다.
좋.아. 대신, 나도 한 가지 조건을 더 걸게.
말해라.
네가 굴레를 벗은 존재와 싸우는 건 뭐라 하지 않겠어. 대신
저들과 싸우는 건 자제해줘. 그게 내 조건이야.
로이나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카이렌 일행의 실력을 가늠해 나
갔다.
프라하부터 시작해서 휴란트, 투바. 로테마이어스의 시선이
카이렌에게 이르렀을 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이렌이 걸리는데.
다른 이들은 드래곤을 시키면 쉽게 처리할 수 있을 듯했다. 헌
데, 카이렌은 자신이 없었다. 마음먹고 숨으면 자신이라도 처리하
기 어려운 이가 카이렌이었다.
로이나.
왜? 카이렌이 걸리는 거야? 우리 드래곤이 고작 엘프 따위를
겁내고 있었나?
로테마이어스의 마음을 눈치 챈 로이나가 나름대로 방법을 강구
했다. 어떻게든 저들을 살리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로이나. 수작 부려도 소용없다. 카이렌은 어린 드래곤에게는
버거운 상대다. 내가아니면 저 녀석을 처리할 방법이 없어.
로이나가 산전수전 다 겪은 드래곤이듯 로테마이어스도 만만치 않
았다. 로이나의 도발이 로테마이어스에게 고스란히 읽히고 있었다.
그럼 1 년. 앞으로 딱 1 년만 저들을 건드리지 마. 설마 그 정도
도 참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1 년이라. 좋다 1 년간 저놈들을 살려주지.
카이렌, 프라하, 투바. 너희들도 향후 1 년 동안은 드래곤과 싸
우지 마라. 이건 너희들과 드래곤 사이의 거래나 마찬가지야.
흥.좋아. 로이나가 하는 말이니 들어주지.
로이나. 이제 거래는 성사되었다. 이제 레어로 돌아가라. 내 허
락 없이는 레어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한다는 걸 잊지 말라고.
로테마이어스가 이죽거리며 로이나를 자극했다. 로이나는 얼굴
일그린 채 로테마이어스를 노려봤다.
로테마이어스. 너의 로드 지위가 얼마나 가는지 두고 보겠다.
하하하하. 마음대로 하라고.
드래곤의 약속은 맹약이라 불리며 절대적인 힘을 행사한다. 약
속을 어기는 순간 드래곤으로서 가진 모든 힘이 소멸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맹약보다 우선하는 일이 생긴다면 로이나도 레어를
나을 수 있다.
물질계 붕괴와 관련된 일. 드래곤이라는 종족 자체의 존폐위험.
그리고 드래곤의 상징이랄 수 있는 로드의 생명이 위험해 질 때.
이 세 가지 경우에는 이전에 했던 맹약을 무로 돌릴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위 세 가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로이나는 향후
백 년 동안 레어에서 나을 수 없다는 얘기도 된다.
착잡한 표정의 로이나가 일행들 사이를 천천히 거닐었다.
-카이렌. 라한을 찾아줘. 찾지 못하면 라한에게 힘이 될 수 있
세력이라도 만들어줘. 부탁이야.
로테마이어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로이나가 카이렌에게 메시
지 마법을 날렸다.
로이나. 왜 우리 때문에 그런 일을.
-프리미아. 넌 빠른 시일 안에 레테아와 함께 조용한 곳에 가서
살아라. 이건 부탁이 아닌 명령이다.
로이나는 카이렌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프리미아에게 메시지 마
법을 사용했다. 드래곤 로드인 로테마이어스 앞이라 길게 설명할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로이나님.
부탁해. 카이렌, 프리미아. 텔레포트!
로이나가 카이렌과 프리미아에게 다시 한번 당부의 말을 남겼
다. 그리고 아쉬운 얼굴로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크크크. 하찮은 것들.1 년은 짧다. 마음껏 도망가라. 텔레포트
아더! 텔레포트!
비릿한 미소를 날린 로테마이어스가 먼저 크라이드리안의 시체
를 이동시켰다. 그 후, 자신도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레어로 돌아갔
다. 약간은 서글픈 얼굴을 한 채로.
휴우우!
털썩!
로테마이어스가 사라지자 카이렌이 길게 한숨 쉬었다. 프라하와
투바는 바닥에 주저앉아 연신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만으로도 심
장이 터질 듯했다.
프라하. 투바. 일어나!
아, 잠시만 쉬자. 아직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럴 시간 없어. 빨리 일어나.
프라하의 늦장에 카이렌이 언성을 높였다.
로이나가 자신의 자유를 버리면서 만들어준 소중한 1 년이다. 어
떻게든 그 안에 라한에게 도움이 될 세력을 만들어야 했다. 아니면
상대 세력을 깎아서 위험을 줄이거나.
그게 로이나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었다.
왜 그래?
큰 희생을 치르고 1 년을 벌었어. 우린 그 1 년을 최대한 아껴서
드래곤에 필적할 만한 세력을 만들어야 해. 그게 로이나를 위하는
길이고 라한을 위하는 길이야.
좀 갇혀 지내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나도 수백 년 동안 갇혀
지냈다.
프라하가 바닥에 누우며 대꾸했다. 그 말에 카이렌이 눈을 부라
렀다.
그래. 넌, 아니 우린 오랫동안 갇혀 지냈지 갇혀 지내봤으니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 거 아냐? 미래가 없는 기분, 꿈이 사라진
느낌. 직접 겪어봤으니 누구보다 잘 알잖아. 그런데 계속 늦장 부
리겠다고?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젠장.
에이씨. 알았다. 알았어.
프라하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를 이어 투바도 힘겹
게 일어섰다.
근데, 이 녀석은 어떻게 하지?
투바가 쓰러진 제이슨을 가리키며 물었다.
데리고 간다. 정보가 필요하니까.
내가 들지.
프라하가 의식을 잃은 제이슨을 어깨에 걸쳤다. 그동안 투바는
쓰러진 레테아와 쿨샤크, 데메크를 깨웠다.
일행이 모두 깨자 좀 전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프리미아는 하루 정도 더 함께 다닌 후, 레테아와 함께 일행을
떠나겠다는 말을 전해 왔다. 겉으로는 단순히 여행을 하고 오겠다
는 말뿐이었다.
하지만 카이렌은 로이나가 어떤 언질을 줬음을 미루어 짐작했
다. 이 때문에 아무런 반대 없이 그들을 보냈다.
레테아도 프리미아에게 무언가를 들었는지 떠나는 데 큰 거부감
이 없어 보였다.
그들이 떠나고 10 일 후.
카이렌 일행이 루이나 왕국 남부 지방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
서 휴란트를 앞세워 엘베로에게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물론, 세력
을 키우는 일도 이곳에서 시작할 터였다.
*
라한은 멜카투라 산의 어느 동굴에서 꼬박 하루를 보냈다. 미스
릴 창고 안에서 얻은 지식과 깨달음을 단순히 정리하는 데에 이만
큼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으-!
길게 기지개를 켠 라한이 동굴을 걸어 나갔다.
동굴 안에서 20 일을 굶어봐서인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
았음에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 상대적인 포만감을 느끼는 듯
했다.
야! 테세르! 슈라! 어디 있어?
라한은 동굴을 나오자마자 테세르와 슈라부터 찾았다.
라한은 카이렌을 비롯한 친구들과 헤어진 후,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테세르와 슈라에게 더 의지하게 되는 경향
이 강했다.
테세르와 슈라는 약 10 분이 지난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꽤 먼
곳에서 놀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 주인. 나왔네.
-주인 잘 지냈나?
테세르가 슈라의 어깨 위에서 라한에게 손을 흔들었다. 슈라 역
시 테세르를 태운 채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어라? 둘이 좀 친해졌나?
-앞으로 테세르와 친하게 지내기로 했다. 괜찮은 정령이더군.
-후후후. 나도 슈라하고 친하게 지내기로 했어. 괜찮은 골렘이
더라고.
본래 둘은 서로를 약간씩 무시하는 사이였다. 헌데, 슈라가 투바
에게 대륙어를 배운 후부터 앙숙처럼 지냈다. 서로 대화를 하게 되
자 더욱 사이가 나빠진 셈이다.
라한도 둘 사이가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둘에게서 비친 모습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만
들었다.
그런데 저렇게 다정한 모습이라니. 친하게 지내는 둘의 모습이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사이가 좋아진 건 좋지만, 어째 좀. 떨떠름하네.
슈라!
-말해라, 주인
저놈한테 잘해 주지 마. 어차피 다 까먹을 거야.
라한의 말에 슈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라한의 말을 이해 못 한
듯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저놈 머리 엄청나게 나쁘거든. 네가 아무리 잘해 줘도 내일되
면 기억도 못할 거라고.
-음, 무슨 뜻인지는 알겠군. 근데, 설마 그렇게 머리 나쁜 존재
가 있을까?
겪어보면 알겠지.
라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슈라도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기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머리 나쁜 당사자인 테세르는 아니었다.
-주인! 어쩜, 어쩜 고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어? 나처럼 여린
정령한테 너무 심하잖아.
시끄러. 내가 없는 말한 것도 아닌데 뭘 그래. 그리고 시간 나
면 정령계나 한 번 갔다 와라.
-어? 정령계? 거기는 왜?
라한이 말을 돌리자 테세르도 화가 났었다는 걸 까맣게 잊은 채
화제를 옮겼다. 역시 머리가 나쁘긴 나쁜 정령이었다.
저놈. 저 머리로 용케 살아 있네.
그냥 가보면 알아. 정령왕들이 널 부를 거야. 그냥 시키는 대로
만 하면 돼.
-알았다. 그럼 내일 불러줘. 알았지?
알았으니까 빨리 갔다 와.
-응.
짧게 대답한 테세르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사라지자 슈라가 아쉬운 듯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친한 친
구가 사라지는 게 아쉬웠던 모양이다.
슈라. 난 인간 세상으로 나가야겠다.
-또, 인간 세상으로 가는 건가? 그럼 날 소환해 놓지 못하겠군.
슈라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를 본 라한이 피식 웃음
을 흘렸다.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거야. 인간 세상에 가는 건 맞는데 자리
를 잡을 생각이거든, 돈은 많으니까 별장 같은 거 하나사서 거기
서 지내도 되고.
-그럼?
내가 자리 잡을 때까지는 부르기 힘들 거야. 대신 자리 잡으면
계속 불러놓고 있을 테니까 기분 풀어라.
-음, 그 말 믿어보지.
슈라의 얼굴이 약간 펴졌다. 그래도 나중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음, 모습을 바꿔야겠지?
-모습?
응 아무래도 신분을 속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내 얼굴이
널리 알려진 건 아니지만, 정보를 다루는 놈들은 알고 있을 것 같
거든.
-음, 그럼 그 얼굴을 봐둬야겠군. 소환물이 돼서 주인도 구분
못하면 안 되니까
슈라가 바닥에 서서히 누운 채로 턱을 바닥에 붙였다. 라한과 눈
높이를 같게 해서 모습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야, 야! 너무 일러. 아직 모습을 바꿀 준비가 안 됐다고.
-그럼?
인챈트 해야 되니까 좀 기다려.
짧게 대답한 라한이 바닥에 주저앉아 아공간을 열었다.
큭!
라한이 아공간을 열었을 때, 순간적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복
부에서 통증이 느껴진 탓이다.
이상하네. 갑자기 웬 통증이. 너무 오래 굶었나?
갑자기 느껴진 통증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했다. 통증의 정도가 심하지도 않았고 너무 오래 굶어서라는 이유
가 있어서였다
-주인 왜 그러지?
아니다.
라한이 열어둔 아공간에서 몇 가지 물품을 꺼냈다. 미스릴 창고
안에서 가지고 나온 목걸이와 조각칼이었다.
오래 안 걸리니까 옆에서 놀고 있어.
-그러지.
쿠루루룽!
슈라가 엎드린 자세 그대로 옆으로 두어 바퀴 굴렀다. 일어나는
일도 귀찮은 듯했다
저놈. 테세르한테 나쁜 걸 배웠군. 그거 참.
슈라를 잠깐 쏘아본 라한이 인챈트를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마법이기에 공식을 만들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상위 서클의 마법을 목걸이라는 작은 공간에
새기는 게 힘들었을 뿐이었다.
*
폴리모프를 새기는 인챈트는 근 다섯 시간이 지나서야 끝났다.
으차! 어라? 너 뭐하냐?
-근육 놀이하고 있었다.
라한이 인챈트 하는 다섯 시간 동안 슈라는 바닥에 벌렁 누운 채
로 시간을 보냈다. 가끔 라한이 인챈트 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거의 대부분은 손가락으로 배에 왕(王)자를 그리며 소일했다. 테세
르에게 배운 놀이임에 분명했다.
그게 근육 놀이냐?
-그렇다고하더군 주인도해 봐라. 재미있다.
"그렇기는 개뿔이.테세르 짓이지?"
-음, 우리 테세르가 가르쳐준 놀이이기는 하지만. 주인. 정말
재미있다. 해 봐라.
테세르가 가르쳐준 근육 놀이는 인간에게는 재미를 주지 못한다.
다른 이들은 손으로 그림을 그리더라도 배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테세르나 슈라는 손으로 그으면 그 모습이 선명하게
남는다. 비록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 곧 원래 형태로 복구되지만,
그 짧은 시간이나마 근육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여간, 테세르이놈, 돈안 되는 짓은 엄청 잘한다니까.
됐어, 가자.
-인챈트 끝난 거야? 끝났으면 모습을 보여줘야지.
아, 그렇군. 잘 봐둬라. 폴리모프!
라한은 목걸이를 목에 차고 마법을 시전했다. 곧 라한의 몸에 은
은한 빛이 어렸다.
-우와. 주인 몸에서 빛이 난다.
우우우웅!
라한의 모습이 완전히 변하자 슈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라한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왜? 이상해?
-늙었잖아,
이게 뭐가 늙은 거야? 내 본래 나이로 돌아간 거지.
라한의 현재 나이는 31 세. 이번에 변한 모습은 그보다 한참 더
들어 보이는 50 대였다. 라한의 말과는 달리 실제 나이에서 꽤 멀어
진 모습이었다.
-주인의 실제 나이가 얼마나 되는데?
올해로 서른하나야.
-흠, 내 눈에는 주인의 지금 모습은 쉰 살은 훨씬 넘어 보이는데
그래? 이상하네. 이미지 미러!
고개를 갸웃거린 라한이 이미지 미러 마법을 시전했다. 눈앞에
거울을 만들어서 모습을 볼 수 있는 마법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본 라한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분명 자신이 예상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마법을 시전하면서 잠
깐 딴생각을 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주인. 이상하지?
젠장. 어쩌다 이 꼴이 됐지? 내가 원한 건 이런 모습이 아닌데.
-그럼 다시 해라. 그럼 되잖아.
그게, 에.그러니까.안 돼.
라한이 말을 얼버무리다가 힘겹게 대답했다.
스스로 대마법사라 생각했던 라한이 이미지 연상에서 실수를 하
다니. 다른 마법사들이 듣는다면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일이었다.
-왜?
목걸이가 너무 작아서 다시 마나를 흡수하려면 못해도 6 개월은
걸릴 거야.
폴리모프 마법은 7 서클에 속하는 상위 마법이다. 현재 라한이
인챈트 할 수 있는 최상위 마법인 셈이다
헌데, 목걸이는 칼라피안의 세공술 탓에 실과 비교될 정도로 가
늘었다. 굵은 부분이라고 해봐야 육망성모양의 펜던트뿐. 사용된
미스릴의 양이 너무 적어서 단시일 내에 7 서클의 마나를 모으는 게
불가능했다.
-그럼 6 개월이 지나야 다시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야?
응. 그렇다고 하나 남은 팔찌에도 같은 마법을 인챈트 하는 건
좀 그런데. 뭐 어때? 그냥 가자.
-주인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쿠르르릉!
누워 있던 슈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뻗어 라한을
잡고 어깨에 올렸다. 산에서 내려갈 때만이라도 그를 태워주기 위
해서였다.
고마워.
-당연한 일이지. 어디로 가면 되지?
음, 저쪽으로 넘어가자.
라한은 일행과 헤어진 방향과 반대되는 곳을 가리켰다 당장은
일행과 헤어지고 싶었음이다.
-왜? 이제 일행을 안 만날 생각인가?
아니, 나 때문에 위험에 노출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게 다야?
꼭 그런 건 아니고. 잠시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또, 카이렌도 좀뭐 그냥 그럴 일이 있어. 묻지마.
라한도 일행과 헤어지는 게 좋은 건 아니었다. 헌데, 왠지 함께
다니면 서로에게 족쇄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라한 자신만 해도 과거에는 거의 매일 마법과 인챈트를 수련했
었다. 헌데, 일행이 생기고부터 마법과 인챈트 수련이 뒷전으로 밀
려나기 일쑤였다. 아무래도 동행이 생기니 서로의 눈치를 알게 모
르게 본 탓이다.
카이렌도, 투바도, 프라하도 아마. 나와 비슷하겠지.
실제로 라한의 다른 일행들도 꽤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단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녔기에 수련할 시간이
부족했다. 또, 라한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강해져서 정신 상태가 많
이 해이해 졌다. 이런 마음가짐은 곧바로 수련에 대한 소홀함을 낳
았다.
가자.
-그러지
라한이 슈라의 어깨를 타고 산을 천천히 넘어갔다. 다행히 거의
대부분 바위산이었기에 애꿎은 나무를 죽이는 일은 없었다.
-블리아드마을
류카라한과 굴레를 벗은 다른 일행들이 황폐한 사막위에 섰다.
주변을 훑어본 루시펠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류카라한. 재체 여기 뭐가 있다는 거야?
이곳은 과거 엔샬라르 신전이 있는 곳이다. 아마, 땅을 파야 나
오겠지.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까.
류카라한은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이었다. 상대가 발끈해서 말하
든, 시비조로 말하든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런 류카라한의 태도
가 다른 일행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심중을 알 수 없는 자는 상대하지 말라.
과거의 격언처럼 류카라한은 상대해선 안 될 사람이었다. 이런
성격의 사람은 실력이 보잘것없더라도 껄끄럽기 마련이다. 헌데,
실력까지 뛰어났으니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곳에서 야영한다.
그러지.
짧게 대답한 사람들이 야영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새로이 편
입된 케이플과 미스티크도 포함해서였다.
처음 케이플은 류카라한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수
시로 시비를 걸었다.
결국, 바로 어제 류카라한과 케이플이 크게 충돌하는 사건이 벌
어졌다. 그리고 결과는 류카라한의 압승. 이때부터 케이플도 류카
라한의 명령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만. 루나시언과 루시펠은 식사준비를 시작해라. 잉글리아트
와 토일렛은 나와 함께 이 주변을 조사한다. 케이플, 미스티크. 너
희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식수를 구해 봐라.
그러지.
알겠다.
저마다 한마디씩 대답한 일행이 흩어졌다. 잉글리아트와 토일렛
만 류카라한의 곁에 다가와서 그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잉글리아트와 토일렛은 마법사이다. 주변을 조사하는 데에는 적
합한 직업인 셈이다. 류카라한이 이들을 따로 부른 게 이 때문이다.
물론, 상급 정령사인 제이슨이 더 적합한 인물임에 분명했다. 하
지만, 그의 수다스러운 성격은 류카라한에게 너무 시끄립게 다가왔
다. 이 때문에 제이슨을 두고 엔샬라르 신전을 찾아 나선 것이다.
잉글리아트. 넌 여기서 북쪽으로 1 킬로미터 가서 주변을 조사해
줘. 마나를 퍼트려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지를 찾으면 될 거야.
그러지.
그리고 토일렛은 여기서 남쪽으로 1 킬로미터 이동해서 조사해
라.
알았다.
잉글리아트와 토일렛이 흩어지자 류카라한이 잠깐 과거를 회상
했다. 스케일러 링을 구할 때에 대한 회상이었다.
한참 회상하던 류카라한이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를 생각
하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행운이 었어 .
*
류카라한 일행은 근 넉 달을 황무지에서 머물렀다. 거의 매일 주
변을 살피고 마법사들은 마나를 퍼트리며 흔적을 뒤졌다. 헌데도
그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 시간이 너무 흐른 탓이다.
오늘도 여느 날처럼 아무런 소득 없이 흘러가는 줄 알았다. 잉글
리아트가 하늘이 떠나가라 외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찾았다!
응?
어?
장난치지 마.
멀리서 들리는 잉글리아트의 외침에 일행 모두가 한 소리씩 내
뱉었다. 지금 잉글리아트의 임무는 저녁 식사였다. 주변을 둘러보
임무가 아니 었다.
모닥불이 있는 곳에서 요리하고 있던 사람이 뭘 찾았겠냐 싶었다.
진짜 찾았다니까.
에이, 거짓말.
모두조용. 잉글리아트. 뭘 발견했다는 건가?
류카라한이 주변을 정리하고 잉글리아트를 바라봤다. 잉글리아
트는 희열에 들떠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 여기 좀 봐.
잉글리아트가 모닥불이 있던 곳을 가리키며 외쳤다. 류카라한이
모닥불로 다가가서 불타고 있던 장작을 발로 찼다.
파팍!
흠.
맞지? 맞지?
평소 근엄하던 잉글리아트가 오늘따라 경박해 보였다. 지난 넉
달 동안 해 왔던 고생이 힘들긴 힘들었나보다.
찾았군.
류카라한의 나직한 말에 일행 모두가 모여들었다.
류카라한이 가리킨 곳에는 기형적인 돌이 튀어나와 있었다. 뿔
모양이지만, 사각형 형태를 온전히 띠고 있는 모습. 절대 자연스럽
게 만들어진 모습이 아니었다.
허허, 참나. 여기 있는 걸 그렇게 찾아헤매다니.
오늘은 늦었으니 그냥 잔다. 내일 아침 일찍 이곳을 파기 시작
한다. 마법사가 힘써야 할 테니, 오늘 불침번은 검사들이 서도록
하지.
좋아.
그러지.
마법사들의 얼굴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리더가 된
류카라한의 말이기에 어쩔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오늘 불침번을 서야 하는 검사들은 흔쾌히 승낙했다. 차라
리 밤에 좀 고생하는 게 낮에 땅 파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 탓이다.
하긴, 이렇게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땅을 파는 건 한계를 넘은
그들도 탐탁지 않으리라.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친 류카라한이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역시나 밝은 표정의 검사들과 어두운 표정의 마법사들. 오늘 할
일을 스스로가 잘 아는 듯 보였다.
오늘부터 이곳을 파야 한다. 쉽게 팔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뭐, 마법을 이용해서 크게 몇 방 때리는 게 제일 낫지 않나?
맞아. 검으로 여길 파서 언제 끝나겠어.
류카라한의 물음에 검사들이 차례로 대답했다. 마법사들이 순간
발끈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들도 자신들이 하는 게 가장
낫다는 걸 알았음이다.
잉글리아트! 할 말 있나?
.없.다.
토일렛.
나도 없다. 젠장.
토일렛의 대답을 끝으로 회의가 막을 내렸다. 이로써 땅을 파고
깨부수는 모든 일은 마법사의 몫이 되었다. 남은 검사들은 밤에 불
침번을 서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정도가 될 터였다.
그럼. 시작하지.
알았다. 내가먼저 시작하지 마나가 주는 축복이여. 바람이 전
해주는 향기여. 그 힘을 내게 머물게 하라. 플라이!
잉글리아트가 천천히 떠올랐다. 공중에서 직격으로 마법을 쏠
작정이었다.
우린 물러나지.
류카라한이 일행들 모두를 먼 곳으로 대피시켰다. 어느 정도 거
리까지 멀어지자 잉글리아트가 떠 있는 곳에 마나가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마나 집중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때, 잉글리아트의 전면에 거
대한 불덩어리가 형성되었다. 3 서클 불 마법인 파이어 볼에 6 서클
의 마나를 담은 모습이었다.
파이어 볼!
콰콰쾅!
잉글리아트의 외침이 끝나자 거대한 불덩어리가 바닥에 부딪혔
다. 파이어 볼이 부딪힌 곳이 움푹 파였다.
마법의 여파가 잦아졌을 때, 잉글리아트 주변에 다시 마나가 모
였다. 두 번째 마법을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파이어 볼!
잉글리아트가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이번에 시전한 마법이 좀
전에 부딪힌 바로 그 자리에 정확하게 꽂혔다.
6 서클 마스터 마법사인 잉글리아트. 단순히 서클만이 아닌 정확
도에서도 그에 버금가는 실력을 보였다.
잉글리아트. 이번엔 내가하지. 마나가 주는 축복이여, 바람이
전해주는 향기여. 그 힘을 내게 머물게 하라. 플라이!
토일렛이 잉글리아트가 있던 곳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잉글리
아트가 한 것처럼 파이어 볼을 만들어 바닥으로 날렸다.
쿠쿠쿠쿵!
한 번만 더!
알았다. 파이어 볼!
류카라한의 외침에 토일렛이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예의 그 파
이어 볼이었다.
쿠쾅!
그만 됐어!
크게 외친 류카라한이 파이어 볼이 부딪힌 자리를 향해 걸어갔
다. 토일렛과 잉글리아트도 바닥으로 내려와서 파이어 볼이 부딪
힌 자리로 향했다.
와우! 멋지군.
제대로 팠는데.
역시 멋져!
굴레를 벗은 존재들 중 검사들이 저마다 탄성을 지르며 감탄했
다. 이에 토일렛과 잉글리아트가 흐뭇한 듯 미소 지었다.
이정도면 됐다.
무, 무슨 소리야? 설마 나머지를 직접 파자는 소리는 아니겠
지?
류카라한의 말에 검사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직접 손
으로 파는 건 싫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파야 입구가 나오는지 알 수 없는 판에 직접 파자고 할
턱이 없지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고 내일 다시 판다.
어? 마법 겨우 두 번씩밖에 안 썼잖아. 근데 벌써 쉬어?
무리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드래곤이라도 나타나면 어쩔 텐
가? 땅을 파더라도 항상 힘을 남겨두고 판다. 불만 있나?
류카라한의 철두철미함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항상 여지를 남겨두는 것. 그래서 유사시를 항상 대비하는 류카
라한. 그 모습에 다른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타당하다는 걸 잘 아는 탓이다.
다음날 다시 잉글리아트와 토일렛이 마법을 사용해서 땅을 팠
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마법사들의 땅 두드리기는
근 보름 동안 지속되었다.
이제 지겹다. 지겨워!
그러게. 대체 언제까지 파야 하는 거야?
그만들 하게. 우리보다 저 위에서 마법 쏴 대는 마법사들이 더
불쌍하지.
루나시언의 말에 다른 일행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잉글리아트 차례인지 그가 하늘에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
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겠지.
자, 이제 그만하자고. 당장 오늘이라도 입구가 떡하니 나타날
지 누가 알아?
맞아. 좋게 생각하자고.
굴레를 벗은 인간인 루시펠과 루나시언, 굴레를 벗은 라이칸인
미스티크와 케이플의 담소였다.
잉글리아트의 마법 시전은 상당히 깔끔하다. 지금까지 내가 본
그 어떤 마법사보다 깔끔해.
토일렛은 잉글리아트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마법 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가끔씩은 탄성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마법사라도 서로 시전하는 방식에서 약간의 차이는 존재한
다. 토일렛은 잉글리아트가 마법을 쓰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모습
을 돌이켜보는 중이었다. 혹, 자신에게 잘못된 습관은 없는가? 잉
글리아트가 시전하는 모습에서 배울 점은 없는가? 남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그런 점을 찾기 위해서였다.
거의 됐군. 그만!
구덩이를 보고 있던 류카라한이 크게 외쳤다. 이에 공중에 떠 있
던 잉글리아트가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다.된거야?
저기를 봐라.
류카라한이 구덩이의 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일행들이
류카라한이 가리킨 구멍으로 시선을 던졌다.
구멍이군!
됐어!
좋았어!
일행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이제 오랫동안 계속되던 지겨운
땅파기가 끝났다고 볼 수 있었다.
이제 들어가서 힘이 된다는 그 물건을 가지고 나오면 되는 건
가?
후후, 그건 들어가 보면 알겠지. 입구가 아직 작다. 유사시에
달려서 도망 나을 수 있을 정도까지 넓혀야겠지.
그건 내가 하지.
류카라한의 말에 미스티크가 앞으로 나섰다.
이미 입구가 어디인지 드러난 상황. 그 입구를 넓히는 건 대수롭
지 않은 일이었다. 검에 마나를 주입해서 강하게 쭉 훑어내면 되는
것이다.
하앗!
쿠콰콰쾅!
우르르르!
미스티크가 검으로 긋자 구멍 주변에 엄청난 먼지가 생겨났다.
그 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았을 때, 사람 두 명이 나란히 들어가도
될 정도의 큰 구멍이 나타났다. 미스티크가 입구를 묻고 있는 바위
를 검으로 부순 탓이다.
좀 더 크게 만들어라.
그러지. 하앗!
콰콰콰쾅!
한 번의 칼질이 더해지자 입구가 엄청나게 커졌다. 지금 크기라
면 네다섯 명이 나란히 들어가도 될 정도였다.
좋군. 들어간다. 선두에는 나와 미스티크, 루나시언이 가운데
는 마법사인 잉글리아트, 토일렛이 선다. 끝은 케이플과 루시펠이
맡도록.
그러지
알았다.
그럼 알아서 몸조심해라.
말을 마친 류카라한이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류카
라한이 말했던 순서에 맞게 차례로 들어갔다.
*
류카라한 일행은 다섯 시간 가량 축축한 통로를 지났다. 그렇게
모두가 짜증을 부릴 즈음, 눈앞에 거대한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양식과는 약간은 다른 고풍스러운 벽화와 천장. 고대 유적
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저거 뭐야? 동상인가?
루나시언이 홀의 한 곳을 가리키며 입을 떡 벌렸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높이 10 미터가 넘는 거대한 석상이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잖아. 저것들 다 뭐야?
다시 살펴보자 홀의 외곽 쪽은 온통 거대한 석상으로 가득 차 있
었다. 줄잡아 20 구는 되는 듯했다.
골렘이다.
골.렘? 말도 안 돼. 그건 이야기 속에서나.
직접 확인해 봐라. 이스라트!
외침을 토해낸 류카라한이 홀의 중앙으로 서서히 걸어갔다. 이
에 반응하듯 중앙에 있던 석상도 한 걸음씩 걸어오기 시작했다.
쿵! 쿠궁! 쿵! 쿠궁!
이스라트! 오랜만이군.
-흠, 내 전 주인을 죽였던 자로군. 여긴 무슨 일인가?
너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 허락하겠나?
-후후후후. 대륙에서 골렘이라는 존재가 위험하다고 소멸시키
려 했던 네가 내 주인이 되겠다고? 크크크. 재미있구나.
골렘 이스라트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본
류카라한의 일행들이 입을 떠억 벌렸다.
애초에 그들은 골렘이라는 마법 무구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
들이었다. 이야기 속에서나 나을 법한 마법 무구가 골렘이라 생각
했기 때문이다.
헌데, 실제로 존재하다니. 그것도 눈앞에서 직접 보게 되다니
두 눈으로 보고도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특히, 마법사인 잉글리아트와 토일렛의 놀람은 더 심했다. 다른
이들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 정도지만, 그들은 존재할 수 없다고 단
정 짓듯이 믿은 이들이 아니던가. 믿음이 송두리째 깨지는 기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골렘을 다시 차분히 바라본 류카라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싫은가?
-싫을 리가 있나? 어차피 우린 전 주인이라는 존재에게 애정을
가지지 않은 소환물. 현재 소환자에게 충실하면 그뿐이지. 내 주인
이 되겠는가?
그러지.
-계약은 성립되었다. 태초의 맹약에 의해 나 골렘 이스라트는
류카라한에게 귀속된다. 일이 생기면 불러라.
말을 마친 골렘이 서서히 부서져갔다. 골렘을 이루는 자아는 류
카라한과 연결된 다른 차원으로, 몸체를 이루는 돌은 이곳에 남은
것이다.
멋지군.
빨리 계약해라.
어떻게 하면 되지?
골렘의 가슴에 이름이 쓰여 있을 거다. 그 이름을 불러 간단하
게 대화한 후, 계약을 맺으면 된다.
류카라한의 말에 일행들이 골렘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
만, 쉽사리 먼저 골렘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없었다.
기왕에 계약할 거라면 좀 더 강한 골렘과 계약하고 싶은 건 당연
지사. 어떤 골렘이 더 강한지 몰랐기에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나 깨워서 하면 된다.
그래도 더 강한 골렘이 있을 거 아냐? 대충 봐도 모양이 다 다
른데.
토일렛이 의문을 제기해 왔다. 이에 다른 일행들의 시선이 류카
라한에게 몰렸다. 그들도 궁금해했던 사항이었다.
모두 같다. 모습이 다른 건 마지막으로 소환되었던 장소가 다
르기 때문이다.
장소?
그렇다. 골렘은 소환한 곳에서 가장 흔하게 널린 재료를 이용
해서 몸체가 구성된다. 내가 계약한 돌 골렘은 마지막 소환이 돌이
많은 곳이라서 그런 모습이었던 거다.
아, 그렇군.
류카라한의 대답에 일행들이 다시 골렘 앞에 섰다. 그리고 저마
다 골렘 가슴에 쓰인 이름을 보며 하나씩 계약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평균 능력을 이미 능가한 굴레를 벗은 존재들. 이 때문에
계약하는 데에도 큰 문제가 없었다.
류카라한! 근데 아직 석상은 열 몇 개 남았는데 이걸 어쩌지?
부순다.
왜? 이 아까운 걸 왜 부순다는 거야?
잉글리아트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그는 골렘이라는 존재가 신기했다. 할 수만 있다면 연구해서 만
들고 싶을 정도였다.
헌데, 골렘을 부수다니. 마법사인 잉글리아트로서는 절대 허락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 명이 골렘 둘과 계약하는 건 불가능하다. 골렘 역시 다른 골
렘과 계약이 된 자와는 다시 계약하지 않거든. 네가 소유하고 있는
골렘의 핵이 부서져서 다시 재생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골렘들
은 너와 계약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설명이 된 건가?
아니, 난 이 골렘을 가지고 가서 연구해 보고 싶어. 그래서 골
렘이라는 걸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고.
안 돼!
왜?
위험하니까.
잉글리아트의 말에 류카라한이 절대 불가를 선언했다. 잉글리아
트가 아무리 설득해도 그로서는 절대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골렘은 엄청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먼저, 노력 없이 힘을 얻는다는 게 문제였다. 정말 운 없으면 치
기어린 아이의 손에 의해 한 가정이, 한 마을이 박살날 수도 있었다.
거기다 더 큰 문제는 골렘의 자아였다.
최초 소환자의 성격을 그대로 가지게 되는 골렘. 학살자의 손에
서 처음 자아가 형성된 골렘이 존재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굴레를 벗은 이들이야 스스로의 능력이 출중하니 문제가 안 되
었다. 하지만 일반인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런 자아를 가진 골렘
을 소환한다면, 오히려 골렘에게 끌려 다닐 수 있는 문제였다. 그
건 곧 학살자가 가지는 자아의 표출로 엄청난 피바람을 불러올 게
뻔했다.
그럴 수는 없어.
연구하려면 네 골렘으로 연구해라. 다른 골렘을 가지고 가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다시 고집을 피우면 죽음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이, 이. 젠장.
결국 잉글리아트가 지고 들어갔다. 호기심을 풀기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골렘을 소환해서 저 녀석들을 모두 부숴라. 제
이슨과 크리퍼트도 줘야 하니 두 마리는 그대로 남겨두도록.
젠장. 실로아!
먼저 잉글리아트가 골렘을 소환해서 다른 골렘들을 부수기 시작
했다. 그 모습에 다른 이들도 골렘을 소환해서 하나씩 부수었다.
류카라한은 골렘이 거의 부서졌을 때, 검으로 핵만 찾아 파괴했
다. 모습이야 어차피 다시 만들면 그만인 골렘들. 자아가 잠들어
있는 핵을 깨 버려야 제대로 된 소멸이 이루어진다.
됐군. 잉글리아트, 토일렛. 너희 둘은 골렘을 소환해서 남은 골
렙들을 들고 가도록 지시해라.
그러지.
나머지 사람들은 골렘을 소환해서 입구를 넓혀라. 골렘을 끌고
나가야 되니까.
알겠다.
잉글리아트와 토일렛이 자기 골렘에게 남은 골렘을 하나씩 들게
했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은 골렘을 소환해서 입구를 부숴 나갔다.
*
라한은 멜카투라 산을 내려간 후에 슈라를 돌려보냈다. 그 길로
계속 남동쪽으로 이동해서 일레마 산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다
시 슈라의 도움을 받아 산맥을 넘어서 케라스 왕국의 영역권에 들
어섰다.
여기가 좋겠군.
-뭐가?
여기 자리 잡아야겠다.
-저 마을에?
테세르가 멀리 보이는 마을을 가리키며 물었다.
응. 저기가 좋겠어. 슈라, 테세르. 너희들 생각은 어때?
-내가보기엔 괜찮아 보이는군. 특히, 마을주변의 황무지가 마
음에 든다.
-내가 보기에도 좋아 보이는데. 일단 변방이니까 사람들은 순박
할 거 아냐.
슈라와 테세르가 차례로 수긍의 말을 전했다. 그들이 보기에도
꽤나 괜찮은 곳으로 보인 듯했다.
그럼 다시 모습을 바꿔볼까?
-왜? 할배 모습도 좋은데.
시끄러. 내 나이로 돌아갈 거야.
라한이 멜카투라 산을 떠난 지 6 개월이 흘렀다. 라한이 만든 폴
리모프 목걸이가 마나를 재충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라한은 지금 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흰머리와 흰 수염, 얼굴 가득한 주름. 세수할 때마다 자신이 아닌
기분에 멍해 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도 주인 말에 찬성이다.
-쳇, 맘대로 해라, 맘대로 해.
테세르가 고개를 획 돌렸다. 그러면서도 눈은 뒤통수에 그대로
둔 채였다. 라한의 변할 모습이 궁금하긴 했던 모양이다.
폴리모프 캔슬. 폴리모프!
라한이 이전의 노인 모습을 없애고 다시 시전했다. 서서히 일그
러져 가는 얼굴과 외모.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라한의 폴리모프가 완성되었다.
갈색 머리카락과 약간 그을린 말끔한 외모. 그리고 덩치가 조금
더 커져서 원래 라한의 모습보다 한층 건강해 보였다.
-이번은 마음에 드는군.
라한의 이모저모를 뜯어본 슈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통수에
눈을 달고 있던 테세르도 고개를 몇 번 갸웃하더니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 지었다.
괜찮지? 이미지 미러.
라한이 거울을 만들어 자신의 모습을 비춰봤다. 20 대 중반의 잘
생긴 미남자의 모습이었다.
어라? 이게 아닌데.
-왜?
난 30 대 초반으로 변하려고 했는데. 흠, 흠. 뭐, 어쩔 수 없지
그냥 이렇게 살아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쩔 수 없어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주
만족한다는, 행복하다는 표정이 분명했다.
-주인, 좋아?
당연히 좋. 뭐야?
-아, 아니. 난뭐.그냥.
시끄러. 슈라. 돌아가!
-슈라. 나중에 불러줄게.
테세르가 슈라에게 윙크를 했다. 꽤나 살가운 모습이었다.
-다음에 꼭 불러줘야 돼. 테세르. 나중에 보자.
꼭 불러줄 테니까 걱정 마.
라한의 대답을 끝으로 슈라가 모습을 감추었다. 마지막까지 아
쉬운 표정을 지은 슈라. 돌아가기 싫었던 모양이다.
여기가 다크라이더 길드가 있던 왕국이던가?
케라스 왕국은 루이나 왕국의 북쪽에 인접해 있다. 당장 10 년 전
만 해도 중앙 대륙의 패자로 불리던 케라스 왕국.
최근 루이나 왕국의 눈부신 발전으로 2 인자로 밀렸지만, 아직도
그 군사력만큼은 으뜸으로 평가받았다.
굳이 만날 필요는 없겠지.
라한의 현재 모습은 학자풍의 마법사였다. 지팡이는 없지만, 깊
게 눌러쓴 로브만으로도 마법사로 보이기 충분했다. 라한의 외모
가 그만큼 말끔하고 세련돼 보였기 때문이다. 또, 로브의 고풍스러
움도 라한을 마법사로 인식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라한이 자신의 몸을 다시 한번 훑어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
다. 그리고 마을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테세르는 언제나 그렇듯
라한의 로브 속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멈추시오!
허름한 목책 위에서 가죽옷을 입은 사내가 라한을 제지하고 나
왔다. 꽤나 긴장한 듯 창끝이 파르르 떨리는 게 여실히 보였다.
무슨 일인가?
인, 인간이냐?
허허허, 당연하지 않소.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하는 동물 보셨
소?
휴-!
사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창을 내렸다. 어둠 속이라서 라한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젊은이 같은데, 이 험한 곳까지는 무슨 일
로 온 거냐?
내 목소리 연기가 훌륭했나봐.
라한은 한동안 60 대 노인으로 지냈다. 그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60 대의 말투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20 대 중반의 모습. 지난 6 개월 동안 해왔던 60 대
노인의 목소리를 버려야 할 때였다. 좀 전의 대답에서도 순간적으
로 노인의 말투가 나오려는 걸 어렵게 참았다.
몬스터들의 삶에 대해 연구할 게 있어서. 일레마 산맥에 사는
몬스터들이 너무 마음에 들더군요.
허, 이봐. 젊은이. 몬스터가 마음에 든다고 했나? 우린 몬스터
때문에 하루하루 가슴 졸이며 죽음의 공포를 안고 사는데, 참나.
사내가 약간 화난 목소리로 라한에게 대꾸했다.
아, 미안합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
해해 주십시오.
직업이 뭐냐?
마법사요. 몬스터를 연구해서 그들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마
법을 연구하고 있었거든요.
마, 마법사? 정말이십니까? 정녕 마법사가 맞습니까?
사내가 흥분한 목소리로 라한에게 되물었다. 반말로 일관하던
말투도 어느새 존대어로 변해 있었다.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내를 바라봤다.
마법사 처음 보나? 왜 저렇게 놀라지?
내가 마법사인 건 맞는데요. 근데 왜 그렇게 놀라는 겁니까?
아이쿠, 제가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목책 위에 있던 사내가 잽싸게 내려와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라
한의 코앞에서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진위를 탐하기 시작했다.
내 몸에 뭐라도 묻었어요? 너무 뜯어보는군요.
아, 죄송합니다. 마법사가 맞는지 좀.하하. 들어가시죠.
사내의 얼굴이 무척이나 밝아졌다. 이유는 모르지만, 라한으로
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여기가 좋겠군. 여기 자리 잡아야겠어.
라한은 이번에 방문한 마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마법 실험을 하자면 몬스터를 자주 찾아야 한다. 헌데,
이곳은 일레마 산맥과 인접해 있어서 마법 실험 대상을 찾는 것에
용이했다.
또, 슈라를 머물게 하려면 꽤 큰 땅이 필요한데, 산맥 주변이 황
무지라서 그 점도 유리했다.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문제가 남아 있기
는 했다. 하지만, 가진 돈이 충분하니 금전으로 만족시켜줄 수도
있을 듯했다. 그게 아니면 가진 마법을 이용해서 어떤 도움을 줄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래저래 라한에게는 최적의 땅인 셈이다.
집들이 허름하네. 케라스 왕국은 강국이라고 알고 있는데.
라한도 케라스 왕국이 한때 중앙 대륙의 최강대국이라는 건 알
고 있었다. 정치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분야를 꽤나 열심히 공부
한 탓에 알고 있는 것이다.
헌데, 라한의 눈에 보인 이곳은 강대국의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
었다. 허름한 1 층 형태의 나무 건물. 그나마도 보수가 되지 않아
무너지기 직전인 듯한 모습이었다.
또, 피곤에 절어 있는 마을사람들과 정비가 되지 않은 마을 사
이의 길들. 라한이 생각한 케라스 왕국의 모습과 너무 달랐다
여깁니다. 들어가십시오. 마법사님.
사내는 그나마 정리가 잘 된 집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물론, 라한이 지금까지 봐왔던 집들과 비교해서 잘 정리가 되었다
는 뜻이다.
고맙습니다.
사내의 안내에 따라 라한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네 명 정도가 식사하기 알맞은 식탁과 꽤나 튼튼하게 만들어진
나무 의자가 라한의 눈에 들어왔다.
삐걱!
의자는 라한이 앉자 비명을 질러댔다. 본래 튼튼한 나무로 만들
어져 있었지만, 관리가 거의 되지 않은 듯했다.
이상해. 마치 유령의 집 같잖아.
라한의 느낌이 딱 이러했다. 오가는 사람은 있으되 생기가 사라
진 모습. 분명 비옥한 땅이 분명한데도 관리를 하지 않는 밭들. 괜
스레 묘한 기분에 몸이 떨려왔다.
쉬십시오. 곧 저희 촌장님이 오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라한의 대답을 끝으로 사내가 집을 나갔다.
*
사내가 나가자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안 곳곳을 살폈다.
분명, 원재료만큼은 튼튼한 원목이 분명했다. 그것도 대륙중부
에서만 자란다는 부레토 나무였다.
헌데, 관리가 너무 엉망이었다. 이런 식으로 방치했다가는 천하
의 부레토 나무도 채 10 년을 버티지 못할 듯싶었다.
이거 비싼 나무가 분명한데, 테세르.
-어.
마을 사람들 봤지? 어떤 느낌을 받았어?
-글쎄. 뭐, 내가 본다고 아나?
테세르가 라한의 로브에서 고개만 빠끔히 내밀었다 뭘 그런 걸
신경 쓰냐는 얼굴이었다.
그냥 네 느낌을 말해봐.
-아우, 주인 진짜 부지런하다. 그냥자기 일이나 신경 쓰지.
야!
-알았다, 알았어. 쳇. 그냥 두려움 반, 기대 반. 내가 느낀 건
그랬어.
나하고 같군.
라한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두려움 반, 기대 반.
아마, 기대는 마법사인 자신의 등장 때문에 생긴 마음일 터였다.
그렇다면 두려움은? 이 마을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
작할 수 있었다.
덜컥!
라한이 궁리에 빠져 있을 때, 문이 열리며 라한의 이전 모습과
비슷한 연배의 노인이 들어왔다.
라한은 30 대로 변하려다 실패해서 20 대 중반의 모습이 되었다.
그 때문에 20 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연륜이 느껴지는 모
습이었다.
이번에 들어온 노인은 라한과는 또 다른 의미로 연륜이 느껴졌
다. 말 그대로 너무 늙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전 이곳 블리아드 마을의 촌장인 익스멈입니다.
촌장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음, 그냥 라한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라한요?
예. 사정이 있어서 풀 네임을 알려드리지 못하니 이해해 주십
시오. 아, 그렇다고 쫓기고 있다거나 도망자 같은 건 아닙니다.
라한은 일단 자신의 이름을 숨기기로 했다.
특히, 성(姓)인 필슨은 루이나 왕국에서 반역자로 낙인찍혀 있을
터. 비록 변방이라고는 하지만, 숨기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또, 이 마을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도 성을 숨기
데 한몫했다.
라한의 예상대로 이곳에 무슨 문제가 있다면 도움을 청할 게 분
명했다. 헌데,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마을 사람들은 라한
이 머무는 걸 반기지 않을 것이다. 라한 역시 성격상 자신을 꺼리
는 곳에 버티고 있을 리 만무했다.
머물지 못하는 곳에 괜히 이름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흔적을 숨
겨야 하는 게 현재 라한의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정말 마법사님이십니까?
예 변변치 않지만 마법사인건 확실합니다.
실례지만 확인을 해도 괜찮을는지요?
흠, 그건 상관없지만, 제가보기에는 촌장님도 마법사로 보입
니다만.
라한의 눈에 촌장의 심장에 두르고 있는 마나의 띠가 보였다. 비
록 하나밖에 안 되고 가늘었지만, 꽤나 오래된 듯 선명하게 자리
잡은 모습이었다.
전 겨우 1 서클 마법 몇 개를 아는 수준이라서 마법사라고 부르
기도 민망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일단 날 속일 사람은 아니군.
라한이 상대가 마법사임을 꼬집은 건 의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
다. 혹,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라한을 속이
려 들 터. 그걸 시험해서 인간성을 확인해 본 것이다.
그럼 보여드리겠습니다. 매직 애로우!
라한이 1 서클의 가장 간단한 마법인 매직 애로우를 시전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목소리와 손동작이었다.
헉! 시동어만으로?
이 정도면 확인이 된 겁니까?
물론입니다. 시동어만으로 마법을 시전하시다니. 놀랍군요.
감사합니다.
라한이 미소를 머금고 놀란 얼굴의 익스멈을 바라봤다.
역시나 눈에서 거짓을 읽기는 힘들었다. 그냥 순박하고 착한, 보
통 시골 할아버지의 눈빛 그대로였다.
저. 실례지만 몇 서클 마법사이신지요? 제가 1 서클 마법사라
서 상대의 서클을 확인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서클을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군요.
아, 죄송합니다.
마법사에게 서클을 묻는 게 실례인 건 분명했다. 하지만 마법사
끼리는 전혀 실례가 아니었다. 마법사끼리는 서클 그 자체가 서열
이기에 오히려 묻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어떻게 마법을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정작 마법사에 대해서 아
것도 모르고 있구나.
라한은 한눈에 촌장의 마법 실력을 간파했다. 또, 마법은 익혔
으되 마법사와의 교류가 전무하다는 것도 눈치 챘다.
아, 그리고 말씀 놓으십시오. 제가 나이가 한참 어리니.높임
말을 듣는 게 부담스럽습니다.
아, 그래도 되겠는가?
예.
익스멈 촌장은 라한을 처음 볼 때부터 높임말을 사용했다. 원래
예의가 바른 건지 마법사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라한을 불편
하게 만든 건 분명했다.
거기다 마법 실력을 보여준 후에 보이는 극도의 존칭과 경이로
워하는 얼굴. 라한에게는 부담 덩어리로 다가왔다.
제게 마법 실력을 묻는 걸 보니 연유가 있을듯하군요. 말씀해
보십시오.
아, 그게 저.
라한이 핵심을 찔러오자 순간 촌장이 당황해하며 말을 잇지 못했
다. 그 딴에는 표정 관리를 완벽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에구, 시골사람이라 그런가? 순박하기 그지없네. 사기 당하기
딱 좋아.
말씀해 보십시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정, 정말인가?
예. 일단 들어봐야 알겠지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드리겠습
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촌장 익스멈이 계속해서 고개를 조아렸다. 아직 부탁이 뭔지도
말하지 않고 고마워하자 오히려 라한이 민망해 졌다.
이거, 이거.순박한 거야? 영악한 거야? 이러면 거절을 아예
못하잖아.
저, 그만 하시고 말씀해 보십시오.
예, 마법사님. 아니, 라한군. 사실 우리 마을은 왕국에서 버린
땅이라네.
버려요?
그렇다네. 몬스터 출몰이 너무 잦아서 포기한 거라고 봐야겠지.
흠.
라한이 신음을 흘렸다.
과거에는 라이칸드로프 혹은 베어울프의 습격이 그렇게 자주 일
어나지 않았다. 일어나더라도 소규모라서 마을의 수비대만으로 수
비가 가능할 정도였다.
헌데, 언젠가부터 몬스터들의 습격이 치밀하고 영악해 졌다. 게
릴라전과 대규모 공격을 병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왕국의 외곽지는 불모지처럼 변했다. 왕국의 수비대가
그런 곳까지 일일이 관리할 수 없어서였다. 이곳 블리아드 마을도
그런 곳 중에 한 곳이었다.
그럼 마을을 떠나지 그랬습니까?
그게 쉽지가 않다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을도 말을 타고 이
틀을 달려야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나가겠는가? 거기다 우리 마을
에는 말도 없으니. 걸어서 간다면 일주일 넘게 걸리는데 어떻게
나갈 수 있겠는가?
그래도 이렇게 겁에 질려 사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갈 수만 있다면 갔겠지. 헌데, 북쪽 산맥보다 다른 마을로 가는
길에 베어울프들이 더 많다네. 가다가는 다른 마을은 구경도 못하
고 다 죽게 생긴 게지.
그제야 이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비쳤던 두려움이 이해되었다.
남을 수도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마음이 마을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게 음.
다른 마을로 가는 길에 있는 베어울프만 처리해 드리면 되겠습
니까?
라한의 말에 촌장이 한참 고민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
다. 그 모습에 라한이 의아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떻게 해 드리면 될까요?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몬스터들이 우리 마을을 공격하지 못하
게 해주게나.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럴 걸세. 하지만, 우리는 정말 떠나고 싶지 않으이. 죽지 않
을 수만 있다면 여기서 계속 살고 싶다는 말일세.
촌장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마디로 다른 마을로 가기 싫다는 얘기였다. 최소한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자유를 잃더라도 이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것. 라한으
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혹, 이 마을에 어떤
보물이라도 있는지.
그런 건 아니네.
그럼 이유가.
아닐세. 없었던 일로 하세.
촌장이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촌장이 일어나 버리자 오히려 라한이 조급해했다. 호기심이라면
어떻게든 풀어야 하는 성격이 지금 발휘되었다.
저기 촌장님 뭐든 도와드릴 테니 말씀해 보십시오. 전 케라스
왕국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왕국에 소속된 사람도 아닙니
다. 용병은 아니지만, 꽤나 자유로운 사람이니 마음 놓고 말씀하셔
도 됩니다.
정말.인가? 정말 왕궁에 소속된 마법사가 아닌가?
물론입니다.
촌장이 라한의 눈을 찬찬히 살폈다. 그 말이 진실인지 어떤지를
확인해 보려는 눈빛 같았다.
에고, 본다고 압니까? 전 꽤나 영악한 놈이라고요.
실제로도 라한은 어떤 한 왕국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설사 소속되었다 하더라도 촌장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
은 있었다. 영악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라한 아니던가? 들
킨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좋네. 말해주지.
.
촌장이 입을 열자 라한은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기다렸다. 재촉
하는 것보다 기다리는 게 입을 열도록 하는 길임을 아는 탓이다.
잠깐 입을 다물고 있던 촌장이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케라스 왕국은 대륙에서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몇 안 되는 나라
중에 하나라네. 그 중에서도 여자를 노예로 부리는 건 대륙에서 으
뜸이지.
그런가요?
대답을 들으면서도 라한은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알기로 대륙에서 노예를 인정하는 나라는 없었다. 누군
가가 촌장을 속이기 위해서 노예 제도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음이
분명했다.
3 년 전. 우리 마을이 고립되기 전 1 년 동안 마을 여자 스물한
명이 수도로 끌려갔네. 이 모든 게 노예 제도 때문이지.
그러니까 노예 제도에 더 이상 피해를 볼 바에는 차라리 위험하
더라도 여기서 살겠다 이 말입니까?
우리는 몬스터보다 인간이 더 무섭네. 우린 천민이고 이곳은
원래 영주도 없었거든. 마음대로 노예로 사용해도 되는 마을이라
는 얘기지. 하지만 이젠 정말 싫다네. 내 아들딸들이, 내 이웃들이
노예로 팔려가는 걸 더 이상은 볼 수 없단 말일세.
촌장의 눈에 절실함과 간절함이 묻어났다. 듣고 있던 라한의 가
슴이 찡해질정도였다.
어떤 놈이 장난친 거지? 새빨간 거짓말로 순진한 마을 사람들
등쳐먹는 놈이 대체 어떤 놈이야?
라한은 촌장의 말을 들으며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대륙에
서 노예 제도가 인정되는 나라가 있다니, 자신의 지식과는 완벽히
어긋나는 내용이었다.
물론, 대륙에서 노예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대역 죄인의 가족
은 죽이되 동조자들의 가족들은 노예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기 때
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것도 아니었다. 대대로 이 마을에서 살며 세상
사에 무지하다는 게 죄라면 죄일까? 나라에 누를 끼칠 만한 그 어
떤 죄도 지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좋습니다. 제가 도와드리죠. 저 역시 한동안 머물 곳이 필요했
으니, 이곳에 머물면서 몬스터를 막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대신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라한의 말에 촌장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조건이 뭔지
도 듣지 않고 어두운 표정부터 짓는 촌장. 그 모습에 라한은 자신
이 괜히 나쁜 놈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촌장님. 조건이 무리한건 아닙니다. 얼굴 좀 펴시죠.
아, 미안하네.
라한의 말에 촌장이 고개를 숙였다. 뒤늦게 오해했다는 걸 깨닫
고 미안해진 듯했다.
제가 원하는 건 마을 옆에 있던 땅입니다.
땅?
예. 농사를 지을 생각으로 원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아주, 정
말 아주 큰 집이 아니면 살지 못하는 지라.
아, 살 집을 필요로 하는 거로군. 그럼 내 집이라도.
아닙니다. 마을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낼 생각이니 땅을
좀 내주십시오. 마을 옆의 황무지 정도면 좋겠습니다.
라한의 말에 촌장의 얼굴이 확연히 밝아졌다. 라한이 원하는 게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긴, 인력을 빌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 쓰지 않는 땅을 달라는
것이니 별것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라한에게는 슈라와 약속한 게
있기에 꼭 필요한 땅이었다.
혹시 마을 동쪽의 농토를 달라는 건?
농토는 필요 없습니다. 마을 서쪽에 있는 황무지를 제게 주시
면 됩니다. 대신, 그 곳에 제가 뭘 짓든 신경 쓰지 말아주십시오.
또, 제가 그곳에 지을 집에는 허락 없이 누구도 들어올 수 없도록
해주십시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알겠네.
그럼 당장 오늘부터 움직이겠습니다. 아침에 뵙죠.
말을 마친 라한이 촌장의 방에서 나갔다. 일단 주변에 몬스터 분
포 상황부터 살펴볼 요량이었다.
-라한의 기절
촌장 집을 나선 라한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없는 곳에
서 플라이 마법을 시전하기 위함이었다.
젠장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몬스터의 침입을 두려워해서일까? 자정이 다 된 시간인데도 이
곳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손에는 하나씩의 무기가
될 만한 농기구를 든 채였다.
-주인, 저기로 가.
그게 좋겠다.
라한이 테세르가 가리킨 골목으로 들어갔다. 테세르의 감각에
도, 라한의 감각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좋군. 인비져빌리티!
라한이 투명 마법을 시전했다. 이에 라한의 몸이 조금씩 희미해
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어때?
-제대로 됐네.
후후, 플라이!
라한이 공중으로 떠올라 남쪽으로 서서히 날아갔다.
북쪽은 라한이 지나온 일레마 산맥, 남쪽은 다른 마을로 가는 길
이었다. 일단 다른 곳으로 갈 길부터 먼저 조사하기 위해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참 날아가던 라한이 움직임을 멈추고 아래를 바라봤다.
멋지군
-저게 멋져? 엄청나게 많구만.
그게 그렇게 되나? 난 그냥 경치가 좋아서.
라한이 플라이 마법을 사용한 지는 꽤 오래 되었다. 하지만 하늘
로 날아올라 경치를 감상한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다. 특히 이렇게
야밤에 공중으로 떠올라 야경을 감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경치가 좋긴 좋네.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 그렇겠지.
-주인도 들었잖아. 몬스터보다 인간이 더 무섭대. 인간들은 하
나같이 이기적이고 사악하다니까.
테세르가 라한을 노려보며 말했다. 주인인 라한을 질책하는 말
임에 분명했다.
그래서?
-아, 뭐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그냥 그렇기는 뭐가 그냥 그래? 너 달도 밝은데 한 번 신나게
맞아 볼래?
라한이 음침한 목소리로 테세르를 겁주기 시작했다. 그냥 내버
려두면 마냥 기어오르는 테세르. 이번 기회에 제대로 바로잡을까
하는 의도도 있었다.
-아, 하하하. 주인. 난 그냥 그러니까. 아, 전에 내가 정령계
갔다 왔잖아.
말 돌리지 마라.
-내가 정령계에서 어떤 위치까지 올랐는지 안 궁금해?
궁금하긴 하지만 일단 맞고 보자.
퍽-!
라한이 테세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상당한 힘이 실린 주먹질
이었다
-컥! 정령 죽네.
그 입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지이이익!
으으으으으윽!
라한이 테세르의 입을 양 손으로 쭉 잡아당겼다. 마나로 이루어
져서인지 테세르의 입은 끝도 없이 찢어졌다.
처음은 분명 화풀이용으로 찢었다. 헌데 막상 찢기 시작하자 꽤
나 재미있는 놀이였다.
오호, 요거 재미있네.
-으, 으. 즈은아! 자모해따!
앞으로 안 까불 거지?
-아까부다. 사려주라.
라한이 테세르의 입에서 손을 뗐다. 아쉬워하는 게 역력한 라한
의 눈빛이었다.
-, . 입 찢어지는 줄 알았네. 근데 주인 손은 씻었어?
뭐라? 또 찢어줘?
-아, 아니. 주인 손은 약손.
테세르가 라한의 손을 쪽쪽 빨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라한이 기
겁하며 뒤로 떨어졌다. 순간 오한이 드는 느낌이었다.
야! 그만해.
-에헤헤, 이제 안 때릴 거지?
너 하는 거 봐서. 그나저나 몬스터들이 꽤 많네.
라한이 아래를 바라보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테세르도 아
래를 보며 신기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몬스터가 많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얼핏
보기에도 몬스터 무리가 십여 개. 개개의 수로는 천 마리가 훌쩍
넘어가는 듯 보였다.
저것들 어떻게 처리하지?
-내가 할까? 내가 배운 마법으로 저놈들을.
아서라. 괜히 설치다 몬스터한테 먹힐라.
테세르가 강한 건 사실이다. 인간 4 서클 마법사는 큰 무리 없이
요리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테세르가 마법이 아닌 육체적 능력으로 싸울 때의
얘기였다. 주문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 마법만 사용했다가는 1 서클
마법사에게도 버거울 테세르. 그가 마법으로 몬스터를 상대한다는
그 자체가 황당한 소리였다
-주인. 내 마법 실력을 못 믿는 거야? 전에 크라이드리안인가
뭔가 하는 드래곤하고 싸울 때도 내가 마법으로 도와줬잖아.
시나리오를 쓰는구먼. 네가 돕긴 뭘 도와 주문 까먹어서 빌빌
거려놓고.
-내가 그랬었나? 흠, 흠. 아, 그것도 다 내 계획이었다니까. 내
가 허술하게 보여야 드래곤이 방심하지.
그래놓고 넌 마나 감추고 숨어 있고?
예전 크라이드리안과 라한의 싸움 때, 테세르는 아무것도 한 일
이 없었다. 라한의 말처럼 숨어서 주문만 외우다 끝났다.
헌데도 테세르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바득바득 우겨댔다. 어
떻게든 자신이 쓸모 있다는 걸 어필하고 싶은 듯했다.
-무슨 소리야, 주인.
됐어. 마법은 나중에 쓰고 정령계에서 받은 지위나 얘기해 봐.
-아, 정령계에서 지위? 하하하하. 놀라지 마시라. 내가, 멋쟁이
정령인 본인이 상급 정령이 되었다는 말씀.
그래?
라한이 별것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대꾸했다.
라한은 테세르가 최상급 정령이 되길 바랐다. 그동안 소외받고
천대받은 것에 대한 대가로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이에 반해, 테세르는 상급 정령이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
다. 최소중급, 하급정령에게는 놀림 받지 않을 터. 그 정도만으로
도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쁨을 느꼈다.
-주인, 대단하지 않아?
별로, 그 얘기는 됐어. 일단 슈라하고 둘이서 신나게 놀아봐!
슈라! "
라한이 몬스터가 없고 돌이 많은 곳에서 슈라를 불렀다. 그리고
여전히 공중에 뜬 채로 팔짱을 꼈다.
-음, 주인. 여기가 앞으로 우리 집인가?
아니. 일단 저놈들부터 처리해야할 것 같아서. 테세르하고 둘
이서 알아서 처리해.
-그러지.
슈라가 베어울프가 사는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그 뒤를 테세르
가 팔을 걷어붙이고 뒤따랐다.
슈라보다 테세르의 기세가 더 사나웠다. 마치 '이제 상급 정령
이다. 다 덤벼라' 라고 말하는 듯했다.
쿵! 쿵! 쿵!
쿠웨액!
-죽어!
슈라와 테세르가 싸움을 시작하자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들이 싸우는 동안 동굴에서 정리한 마법을 되새기기 위해서였다.
*
음, 일단 물 속성의 비율을 낮추고, 바람 속성의 비율을 높이
면. 어디보자.오호, 이거 괜찮은데.
라한이 손에 만들어진 마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슈라와 테세르가 피터지게 싸우는 동안 마법을 조합하고
있었다. 미스릴 창고 안에서 배웠던 4 원소를 섞는 법을 이용한 새
로운 마법조합이었다.
파괴력은 어느 정도나 되려나? 발사!
방금 라한이 만든 마법은 이름이 없다. 이 때문에 이미지 연상을
도울 시동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의로 '발사'라는 이름
을 붙여 쏘는 건 가능했다.
쾅! 슈우우우웅! 콰쾅!
오호, 두 번 터지네. 좋아. 아주 좋아.
라한은 슈라와 테세르의 싸움에 참가하지 않았다. 조합한 마법
을 몬스터에게 뿌리면서 돕긴 했지만, 제대로 된 도움이 아니었다.
이 때문인지 가끔은 정말 황당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제대로 목표를 잡지 않고 쏴서 테세르 바로 옆에서 터지는 경우
가 그런 황당한 일이었다. 그때마다 테세르가 라한을 매섭게 째려
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디까지나 테세르는 소환물, 라한은 소환
자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또 슈라와 맞서 싸우고 있는 몬스터를 치유해 버리는 일도 두 번
있었다. 그때마다 슈라는 그의 성격답게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싸우
기만 했다. 대신 옆에서 싸우던 테세르가 라한을 노려봤다.
하긴, 누군 열심히 싸우는데 라한은 오히려 몬스터를 돕고 있으
니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음, 이번에는 불속성을 가득 채우고땅속성이.어?
비틀!
라한이 몸을 비틀거렸다. 예상치 못한 현기증이 찾아온 탓이다.
뭐지? 이거 왜
비틀!
컥!
현기증에 이어 복부에서도 강한 통증이 찾아왔다. 너무 갑작스
러운 현상이라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이, 이상. 큭!
복부에서 또 한 차례 통증을 느껴졌다. 이번은 좀 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통증이었다. 라한의 정신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졌
다. 플라이 마법이 풀리며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털썩!
-음?
뒤를 슬쩍 돌아본 슈라의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자아가 역소환
되고 본체가 무너지는 모습이었다
-어라? 슈라 어디 갔어?
슈라를 돌아보던 테세르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계속해
서 공급되던 라한의 기운이 중단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우씨, 우리 주인 왜 저래?
테세르가 놀란 얼굴 라한에게 뛰어갔다. 그 뒤를 몬스터들이 무
기를 휘두르며 뒤따랐다.
-야이, 빌어먹을 놈들아. 쫓아오지 마. 나중에 다 죽여줄 테니까.
테세르가 욕설을 내뱉으면서 몸을 빠르게 불렸다. 그가 인간과
거의 흡사한 크기가 되었을 때야 몸 불리기를 멈추었다.
-망할 주인.
라한 앞에 도착한 테세르가 그를 들쳐 업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쁜 주인아! 왜 거기서 자고 난리야?
테세르는 라한을 계속 욕하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평소에 티격태격하기는 하지만, 테세르는 라한을 좋아했다. 아
니, 라한이 죽으면 따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소환자와 소환물의 관계가 아니라도 이런 생각은 변함없었다.
라한은 테세르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지 오래였기 때문이
다. 아마, 라한도 마찬가지겠지만.
-헉, 헉.
한참 도망 온 테세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쫓아오던
몬스터들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 베어울프는 한 번 찍은 상대는 끝
까지 쫓아가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테세르가 중간에 날아서 도망
치지 않았다면 몇날 며칠 도망만 다녔을지도 모른다.
-에고, 삭신이다. 이놈의 주인 때문에 허리 휠 뻔했다.
테세르가 푸념을 토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등에 있
는 라한을 뒤로 살짝 밀었다.
쿵-!
테세르의 행동에 라한이 바닥에 부딪혔다. 그 모습을 보며 테세
르가 비릿하게 웃었다.
-주인, 미안. 실수!
벌렁!
테세르가 라한의 배를 베고 누웠다.
이젠 더 이상 달릴 힘도 없었다. 라한에게서 오는 힘이 끊어지자
힘의 한계를 느낀 것이다.
-근데 이상하네. 우리 주인이 아무 데서나 잘 놈이 아닌데. 음,
놈? 자는데 뭐 어때?
라한의 심장이 뛸 때마다 테세르의 고개가 까딱거렸다. 또, 라한
이 숨을 쉴 때마다 테세르의 고개가 크게 한 번씩 들렸다. 그런 식
으로 리듬을 타며 테세르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피곤이 몰려온 것
이다.
*
라한은 꼬박 열두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의식을 되찾았다. 너무 갑
작스러운 일을 겪어서일까? 눈을 떴음에도 정신이 몽롱했다.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지? 갑자기 현기증이 일더니 복부에 통
증이. 통증이. 이젠 숨 쉬기조차 힘들구나. 마치 누가 내 배 위
에 올라가 있는 이런 느낌이라니.
라한이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내리 깔았다. 자신의 배를 보기 위
함이었다. 그리고 발견했다. 자신의 배에 몸을 올린 채로 자고 있
는 말썽꾸러기 테세르.
야!
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테세르를 강하게 떨쳐냈다. 한
참 달게 자고 있던 테세르가 라한에 의해 튕겨 나가며 나무 기둥에
부딪혔다.
퍽-!
-아이고 아파라.
"야이, 빌어먹을 자식아!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남은 심란해
죽겠는데, 잠이나 퍼질러 자? 그것도 내 배 위에서?"
-어? 주인 깼네.
주인 깼네? 네가 정말 날 주인으로 생각하기는 하냐?
라한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테세르가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반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라한. 어색한 기분에 테
세르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주, 주인. 그러니까.미안해. 근데,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
해? 내가 주인 배 위에서 잔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니잖아. 지금까지
는 가만히 있어놓고.
그건. 에휴, 아니다. 성질내서 미안해.
라한이 테세르에게 사과했다. 스스로도 자신이 너무 민감했음을
인정했다.
-근데, 주인. 대체 왜 갑자기 잠이 든 거야?
잠든 게 아니고 의식을 잃은 거야.
-왜? 베어울프가 던진 도끼에라도 맞은 거야?
그런 건 아니고. 일단 돌아가서 얘기하자. 마을이 이쪽인가?
라한이 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테세르는 괜히 딴청 피우며 대
답을 회피했다.
테세르가 마을로 돌아가는 길을 알고 있을 턱이 없었다. 한 가지
만 계속 생각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테세르. 정신없이 도망
치는 와중에 마을로 가는 길까지 기억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까.
됐다. 어차피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니까. 플라이!
라한이 플라이 마법을 사용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역시나 예
전에 없던 아련한 통증이 느껴졌다.
뭔가 이상해.
공중에 오른 라한이 주변을 쭉 훑어보며 방향을 가늠했다. 멀리
마을 근처에 있는 산맥의 실루엣이 보였다.
저쪽이군. 가자.
-응
라한이 마을이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그 뒤에서는 테세르가 라
한의 엉덩이를 바라보며 따랐다.
약 30 여분을 날아가자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라한은 마을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테세르. 근데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지?
-몰라.
몰라? 네가 나 지킨 거 아니었어?
-지키라고 안 했잖아. 난 그냥 잠만 잤는데
테세르의 대답에 라한이 입을 떡 벌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멍
청한 놈임에 분명했다.
말을 하지 않았다고 불침번을 소홀히 하다니 그것도 베어울프
가 우글우글 거리는 험지에서.
정말 운이 나빴으면 테세르와 라한 둘 다 자다가 죽는 꼴사나운
일을 겪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치겠군.
-기분 풀어라, 주인. 앞으로는 불침번 꼭 설게.
라한이 테세르의 말을 무시한 채 마을로 걸어갔다. 전날 많이 처
리해서인지 마을로 가는 동안은 더 이상 몬스터를 만나지 않았다.
-주인! 다 왔다. 저기 마을이네,
다 왔으니까 한 번 날아볼까. 플라이!
라한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마을을 향했다. 한차례 홍역을 치렀
던 라한. 마을에 들어간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어?
비틀!
쿵-!
마을 목책에 거의 다다랐을 때, 라한의 몸이 심하게 휘청했다.
그리고 또 다시 의식을 잃으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주, 주인! 진짜 왜 그래?
웬 놈이냐!
라한이 의식을 잃은 곳으로 마을 자경 단원이 달려왔다. 라한이
플라이 마법을 써서 날아올 때, 본 듯했다.
형님! 사람인데요.
일단 묶어서 촌장님께 데려가라.
예.
자경 단원들이 라한의 포박한 채로 마을로 들어갔다. 테세르는
이미 라한의 로브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
라한이 마을 앞에서 의식을 잃은 시간은 정오쯤이었다. 헌데 다
시 의식을 되찾은 때는 이미 해가 져서 어두워진 후였다. 이번에도
근 열두 시간 동안 의식을 잃은 셈이다.
음.
의식을 되찾은 라한의 시아에 고풍스러운 천장이 들어왔다. 전
날 들렀던 촌장의 방이었다
내가 어떻게.
일어났는가?
아, 촌장님.
촌장의 목소리에 라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킨
상태로 촌장을 바라봤다.
괜찮은가?
예. 근데, 어떻게 된 거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일세. 대체 어떻게 된 건가? 겉으로는
아무런 부상이 없어 보이는데.
그게. 저도 잘 모릅니다.
라한이 뭔가 궁리를 하는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몸 상태에 대해 가장 궁금해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라한
자신이었다. 제령기와 제란기를 돌려봤지만, 몸에서 그 어떤 이상
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과로라고 보기에도 뭔가 이상했다.
혹시 마나 충돌 같은 거 아닌가? 내가 마법에 대해 잘은 모르
지만, 마법사가 마나 충돌을 조심해야 한다는 건 들은 기억이 나는
구만.
마나 충돌은 아닙니다.
아, 좀 전에 보고를 받았네. 마을 남쪽에 있는 몬스터들이 상당
수 줄었다고 하더군. 고맙네.
아닙니다. 완전히 소탕하지 못했으니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거죠.
하하, 아닐세.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이. 앞으로 몇 달은 우리
마을을 공격하지 못할 게야.
촌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동안몬스터들 때문에 마
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몸이 나아지는 대로 나머지 놈들도 처리 하겠습니다.
그래주면 고맙기는 하지만, 무리는 하지 말게.
예, 촌장님.
그럼 쉬게.
촌장은 라한의 이마를 한 차례 더 만진 후에야 밖으로 나갔다.
라한의 건강에 대한 걱정이 큰 듯했다.
촌장이 나가자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상태로 어젯밤과
낮에 있었던 증상을 되새겼다.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어.
-주인. 진짜 왜 그래? 두 번씩이나 의식을 잃었잖아.
나도 내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
라한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의식을 잃는 증상의 원인만 안다면 어떻게든 해보련만. 이
유를 모르니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심법 만든다고 난리 피울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얼마나 놀랐
는데.
심법? 심법. 그래. 그때하고 비슷해. 증상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뭔가 내 몸의 변화 때문이라는 점은 확실히 비슷해.
테세르의 말을 듣자 라한도 뭔가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의 말처
럼 과거의 증세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내 몸의 변화라고하면. 음, 내가 남들과 다른 점은 심장이 아
래에 있다는 것하고 좀 특이한 방법으로 힘을 모았다는 건데 어
떤 걸까?"
-이놈의 주인이 대체 뭐라고 구시렁대는 거야? 좀 똑바로 말
해봐.
둘 중 하나겠지. 그 둘 중에서 어떤 건지는 지금부터 확인해 봐
야겠어.
-야! 주인!
아우, 귀청이야. 나귀 안 먹었어. 조용히 말해.
-내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 우씨.
그랬나? 미안.
라한의 얼굴이 좀 전보다는 한결 나아졌다. 여전히 수심이 낀 얼
굴이었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증세에 대한 단서를 어느 정도는 잡
은 탓이다.
-아까 왜 그렇게 멍하게 있었던 거야?
생각 좀 하느라고.
테세르가 라한의 턱밑으로 날아와 턱을 괴었다.
-어떤 것 같아?
지금 내 증세가 예전 심법 만들려고 할 때와 비슷하다고 했지?
거기서 힌트를 얻었어.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거라면 딱 두 가지
잖아. 심장 위치가 아래에 있다는 것하고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힘
을 키웠다는 것. 이 둘 중 하나겠지.
예전에 심법을 새로 만들어야 했던 것도 남들과 다른 신체 때문
이었다 물론 제스란이 강제로 주입해 준 상극의 기운도 한몫했고
말이다. 어찌됐든 모든 일의 발단은 남들과 다른 라한의 몸에서 기
인한 것. 지금의 특이한 증세와 현상도 거기서 비롯되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럼 둘 중에 어떤 것 때문인지만 알면 고칠 수 있는 거야?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것도 몰랐을 때보다는 한결 낫겠
지.
-그렇구나.
이럴 때 투바가 있으면 좋은데.
-투바?
응. 그놈이 좀 멍청해 보이기는 해도 마계 의술에 대해서만큼
은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거든. 물어보면 어느 정도 조언은 얻을
수 있을 텐데. 좀 아쉽네.
평소에는 좀 멍청하고 장난꾸러기 같은 투바. 하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지식을 소유한 학자나 다름없었다.
해박한 이론적 지식과 빈약한 실생활의 지혜. 투바의 상태가 딱
그러했다.
-뭐, 없는 놈 얘기해서 뭐해.
하긴, 나 심법 몇 번 돌리다가 잘 생각이니까 너도 좀 쉬어.
-그렇게 자고 또 자려고? 그냥 바람이나 좀 쐬자. 나 심심해.
혼자 나가서 놀면 되잖아.
라한이 귀찮은 듯 손을 탈탈 털었다. 하지만 테세르는 질 수 없
다는 듯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안 돼. 그건 안 돼. 다른 사람이 나 보면 어떡해?
보면 좀 어떠냐? 정령이라고 하면 되지.
-싫어. 누가 잡아먹으면 어쩌라고.
잡아먹기는 뭘 잡아먹어.
말을 마친 라한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움직이기 싫다
는 걸 노골적으로 표현한 모습이었다.
-주인아!
.
-주인아! 야! 주인. 멍청이 주인아!
테세르가 계속 불렀음에도 라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
기 싫긴 싫었던 모양이다.
라한이 계속 침묵을 고수하자 테세르가 이불을 확 움켜쥐었다.
-흥.
촤라락!
테세르가 라한이 덮고 있던 이불을 힘차게 당겼다. 이에 라한을
덮고 있던 이불이 침대 바닥에 떨어졌다.
라한의 힘이 일반 마법사를 능가한다고는 하지만, 테세르에 비
할 수는 없는 법 테세르가 이불을 힘껏 당기면 라한으로서도 방법
이 없었다.
아씨. 대체 왜 그래?
-나가자. 응?
알았다, 알았어.
결국 라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잔뜩 일그러뜨린 얼굴이기
는 했지만,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주인. 속으로 나가고 싶기는 했지?
시끄러.
라한이 옷을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해가 이미 졌음
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 참 부지런하게 산다.
위태롭게 사는 거지. 언제 몬스터가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잠도
편히 못 자는 모습이잖아.
-그런가? 그래도 핑핑 노는 나태한 모습보다는 보기 좋은데 뭐.
정령계는 어때? 내 생각에는 걔네들도 핑핑 노는 그런 종족 아
닌가?
라한의 물음에 테세르가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자칫 남에게
들킬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주인인 라한과 함께라
는 생각에서인지 불안한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음, 반반이야.
반반?
라한은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테세르를 바라봤다. 그의 상식으
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였다.
-응. 계약이 된 정령은 엄청나게 바빠. 나도 그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 하지만 계약이 되지 않은 정령은 시간이 남아돌아. 하루
종일 멍하게 시간만 때우는 거지.
이상하군. 계약된 정령이라 하더라도 부르지 않으면 할 일이
없잖아, 넌 마나석을 흡수해서 좀 특이하게 됐으니까 제외하고, 대
부분의 정령은 하루 동안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될 텐데. 근
데도 바쁘다고?"
라한의 의문은 여기서 기인했다.
대부분의 정령사가 하루에 소환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두
시간 남짓. 굴레를 벗은 정령사인 제이슨이라 하더라도 보통 다섯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물론 몸을 혹사시켜 무리를 한다면 다섯 시간 이상도 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정령들은 하루에 두 시간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하는 일이
없는 셈이었다.
라한의 의문에 테세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모르면
조용히 하라는 그런 느낌이 풍기는 고갯짓이었다.
왜 그래?
-주인은 정령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하긴 주인만 그런
게 아니라 정령사들이 다 그렇지. 드래곤들도 우리 정령들이 어떻
게 지내는지는 모를 걸.
자세히 설명 좀 해봐.
-물론, 실질적으로 일을 하는 시간은 정령사들이 소환한 시간뿐
이야. 하지만, 정령계에서 정령은 속성을 몸에 담는 노력을 계속
해야 돼.
테세르가 설명을 시작하자 라한이 마을 골목으로 들어갔다. 사
람들의 이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 도착하자 라한이 테세르를 손 위에 올렸다.
속성을 몸에 담는다는 게 무슨 뜻이야? 이해가 잘 안 돼.
-음, 예를 들어보자. 물의 정령을 부리는 정령사가 있어. 이 정
령사가 물의 정령인 운디네를 소환했다면 물로 할 수 있는 뭔가를
시키겠지.
그렇지.
-물질계에서 이 운디네는 소환자가 시킨 어떤 일을 할 거야. 아
까 말했듯이 물 속성을 사용하는 일일 테고. 그치?
어.
-그렇게 물질계에서 물 속성을 사용하고 나면 운디네는 사용한
만큼 물 속성을 잃게 돼 그럼 정령계에서 다시 소모한 물 속성을
채워야하지. 그렇지 않으면 다음날 다시 소환했을 때, 제 힘을 다
발휘하지 못하거든.
테세르의 설명에 라한이 미간을 살짝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그
리고 잠시 후, 또 다른 의문이 생긴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물 속성을 채우지 못하고 계속 사용하기만 하면 속성이 사라지
나? 그러니까 물의 정령이 물의 정령이 아니게 되냐고.
-아니 그렇지는 않아. 그냥 정령계에서 가만히 있기만 해도 속
성이 서서히 차긴 차거든. 대신 속도가 느리지. 그렇게 했다가는
다음날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해. 뭐, 물질계에 있을 때에도 힘을
쓰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속성이 차긴 차, 물론, 정령계보다 훨씬
느리지만.
그럼 너는?
-어?
라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테세르가 짧게 되물었다. 라한의 물
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너도 물질계에서 마나를 사용하잖아. 근데 마나도 정령계에서
채우는 건가?
-주인 바보야?
뭐가?
-마나도 자연 속성의 하나라는 거 알잖아. 어차피 마나를 하나
하나 풀면 물, 바람, 불, 땅, 풀, 나무, 바위 등등 자연에 속하는 모
든 속성이 된다는 걸 알면서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네. 물의 정령이
물 속성을 몸에 담을 때, 난 이것저것 다 섞어서 담으면 되는 거지.
음.
테세르의 대답에 라한의 침음성을 흘렸다. 막연하게 알고 있던
마나의 지식.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머리로만 기억했던 마나에
대한 지식이 명확하게 풀렸다. 결국 마나도 자연의 하나였다. 아
니, 자연 모두를 다 합친 힘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마나는 자연을 포함한다. 우리가 속성별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결국은 마나의 일부를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지.
-주인 뭐해?
라한이 고민에 빠지자 테세르가 주변을 마구 날아다녔다. 갑자
기 소외된 느낌이 두려운 듯했다.
근데, 근데.마나 상태일 때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섞이던 것
들이 왜 따로 떼놓고 다시 뭉치려 하면 안 될까?
-주인! 뭐하냐니까!
어? 아, 미안. 궁금한 게 또 있는데.
-뭔데?
불 속성하고 물 속성은 잘 안 섞이거든. 넌 그걸 어떻게 섞어?
라한의 의문은 당연했다.
미스릴 창고 안에서 보낸 20 일.
라한은 그 기간에 속성을 섞는 나름대로 공식을 만들어 냈다. 하
지만, 상극의 속성이 잘 섞이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
다. 섞을 수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힘들기만 한 게 상극속성의 결
합이었다.
어찌어찌해서 이들을 억지로 섞었지만, 항상 불안정한 상태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어? 글쎄.
글쎄라니? 몰라? 네가 섞었잖아.
그게 난 섞으려고 한 적이 없는데 그냥, 그냥 합쳐졌어.
그냥 합쳐져?
-응. 난 그냥 저절로 됐어. 내가 마나의 정령이라서 그런가?
테세르의 어리둥절한 대답에 라한의 의문이 더 커졌다. 그냥 섞
였다는 테세르의 말. 라한으로서는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섞을 수 있었다면 물질계의 마법은 지금보다 가일층 진보
했을 게 분명했다. 비록 인위적인 결합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라한
은 속성을 결합시켜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마법으
로 미스릴 창고를 뚫었다. 두께가 무려 50 센티미터가 넘는 엄청난
미스릴 벽을.
물질계에 있던 마법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찌 보
면 물질계 마법사(史)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말도 안 돼. 상극의 속성 마법을 그냥 합쳤다고? 그럴 수는 없
어.
-몰라. 난 그냥했어. 굳이 합친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걸. 그냥
난 다 필요하니까 다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다 모아? 그냥 다 모아? 에휴, 모르겠다.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들어가자.
라한이 머리를 휘휘 가로저으며 골목을 벗어났다.
속성에 관한 문제는 마법사들의 평생 숙제나 다름없었다. 어차
피 평생 안고가야 할 고민이기에 오늘은 이쯤에서 접기로 했다.
응?
촌장의 집으로 걸어가던 라한이 한 집 앞에 이르렀을 때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는 그 집의 지붕으로 향한 채였다.
-주인 왜?
저 위에 깃발 말이야. 두 개지?
-그런 거 같은데.
둘 다 삼각형으로 된 거 맞지?
-그렇네. 근데 그게 왜?
저 깃발 좀 보고와 봐.
-알았어.
테세르가 깃발을 향해 날아갔다. 어두운 밤이라 다행히 테세르
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거기 혹시 무슨 그림이나 글씨 같은 거 안 쓰여 있어?
-있어. 다크라고 쓰여 있네.
됐다. 내려와.
-응.
테세르가 내려오자 라한이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 모습을
테세르가 신기한 듯 바라봤다
후후후.
-주인 왜 그래?
저 깃발 보면서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음, 센스 엉망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던데.
바보. 저 깃발은 다크라이더 길드의 정보 수집처라는 뜻이잖아.
-아, 맞다. 전에 그 다크시안인가 하는 아저씨가 그런 소리를
했었지.
그제야 테세르도 깃발의 의미를 알아챘다. 다크라이더 길드는
정보 길드가 아닌 암살자 길드였다. 헌데 정보 길드와 필적한, 아
니 정보 길드를 능가하는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지금 라한
은 그 정보력의 원천에 대해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역시 대단하군.
-왜?
다크라이더 길드의 정보력이 왜 뛰어난지 알겠다. 이런 오지에
까지 정보 수집처를 두다니. 정보 길드에서도 이런 곳에선 정보를
안 모을 거야.
-아, 맞네.
역시나 테세르의 이해력은 한 발씩 뒤떨어졌다. 머리 나쁘다는
게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가자.
처음 라한은 다크라이더 길드의 정보 수집처를 방문해 볼까 생
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는 상황. 별 목적
없이 신분을 노출하는 게 싫었기에 일단 모른 척 하기로 했다.
다음날, 라한은 아침 일찍 일어나 침상 위에서 명상에 잠겼다.
자신의 몸에서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일과 어제 테세르가 했던
속성에 대한 얘기, 이런 것들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한참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라한이 길게 숨을 토해냈다.
휴우우
-왜?
조만간 정령계에 한 번 가야겠다.
-뭐? 우리 정령계는 인간의 방문이 허락되지 않은 곳이야. 정령
왕들이 알기라도 하면.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경악성을 터트렸다.
인간의 정령계 방문. 테세르가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없
었던 일이다.
테세르가 태어나기 전에는 두 차례나 있었지만, 그건 테세르도 모
르는 일이다. 이 때문에 라한의 말이 황당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얘기가 끝난 거야.
-무슨 말이야?
정령왕들하고 이미 얘기한 거야. 얼마 전에 네 신분 상승에 대
해 얘기 하면서 정령계 방문도 같이 얘기 했었어. 시간 되면 한번
가기로 약속한 거니까 걱정할 거 없어.
-아, 그렇구나. 그럼 상관없지. 근데 정령계를 인간이 방문하다
니. 대단한데.
테세르의 얼굴에 감탄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긴, 테세르가 알기
로는 정령계의 인간 방문은 라한이 처음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테세르의 지식 밖의 범위를 모두 포함해도 역사를 통틀어서
세 번째의 방문. 감탄해도 될 정도로 대단한 일임에 분명했다.
너희 동네 놀러 가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정령들은 물질
계에 자주 오잖아.
-뭐, 그건 그렇지만.
나중에 정령계 가고 싶을 때 말할 테니까 그때 정령왕한테 전해
주기만 해. 그럼 걔네들이 알아서 할 거야.
라한의 말에 테세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가는 거 아냐? 우리 동네 안 궁금해?
사는 게 다 똑같지 뭐.
-신기하네. 보통 사람은 이럴 때 너무 궁금해서 잠을 못 잘 텐데.
지금은 머릿속이 복잡해.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서 갈 거야.
-그래, 알았어.
라한도 정령계가 궁금하기는 했다. 그곳에서 어떤 깨달음에 대
한 느낌만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방문하자고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막연하게 느껴지는 정령계에서의 깨달음이 문제였다. 몸
상태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또 몹시 위태로운 상태인 라한. 지금의
깨달음은 약보다 독이 될 듯해서 방문을 미루기로 마음먹었다.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대충 풀었다.
-나가려고?
음, 글쎄.
-고민 있어? 얼굴이 왜 그래?
다른 것보다 내 몸 말이야. 내 몸에 대해서 연구하려면 조용한
장소가 필요한데. 어쩌지?
라한은 과거 심법을 만들어 낼 때, 가족을 피해서 집을 떠나왔
다. 이번 역시 그때와 유사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남의 이목을 신
경 쓰지 않아도 되는 조용한 곳이 필요했다.
-마을 옆에 있는 공터에 집 짓는다면서? 촌장한테 말해봐.
내가 한 게 있어야지. 첫날에 몬스터들을 많이 죽이기는 했지
만, 그 정도로 마을 옆 공터를 달라고 하는 건 좀 무리일 것 같아.
뭔가 더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내가 나가서 몬스터들 모조리 쓸어버릴까?
아니 그 정도로는 힘들어. 마을에서 내가 꼭 필요한 존재로 인
식 되게 만들어야 돼.
-주인이 할 줄 아는 게 마법밖에 더 있나? 근데 몸이 이상해서
마법도 못 쓰잖아. 괜히 썼다가 또 쓰러질 생각은 아니겠지?
테세르의 목소리에 약간은 질책하는 듯한 말투가 섞였다. 첫날
라한을 엎고 도망쳤을 때,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이다.
내가 마법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나? 아니지. 또 있지.
라한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담겼다.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테
세르가 불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주, 주인 왜 그래?
마을을 위해서 뭔가 하기만 하면 되잖아.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일. 나만 할 수 있는 그런 일 말이야.
-그게 뭔데? 마법도 못 쓰면서.
난 인챈터잖아. 여기에 결계나 한번 만들어볼까 하는데 어때?
라한의 대답에 테세르가 머리를 긁적였다. 스스로 라한이 인챈
터임을 망각했다는 표시 였다.
-맞다, 주인. 인챈터였지. 요즘 계속 마법만 써서 인챈터라는
걸 깜빡했다.
난 마법보다 인챈트가 먼저라고. 마법사이기 이전에 인챈터란
말이야.
-주인이 워낙 인챈트를 안 해서 그랬지.
한동안 마법은 봉인해야겠다. 어차피 몸 상태가 이래서. 원인
을 알아낼 때까지는 사용을 자제해야지.
라한은 스스로의 몸 상태가 걱정스럽고 무서웠다. 운 없어서 몬
스터들 사이에서 의식을 잃었다가는 그대로 죽음 아니던가. 똥통
에 굴러도 사는 게 좋은 라한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근데 결계는 어떻게 만들려고?
전에 구해둔 마나석이 몇 개 남았어. 그걸로 간단한 결계를 만
들어 볼 생각이야.
쾅-!
라한과 테세르가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촌장집 문이 거칠게 열렸
다. 곧이어 익스멈 촌장이 조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큰, 큰일 났네.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서두르시는 겁니까?
헉, 헉. 쳐, 쳐들어.쳐들어.
촌장이 말을 잇지 못하고 계속 헉헉거렸다.
평상시 지금 시간의 익스멈 촌장이라면 남쪽 목책에서 자경 대
원들을 격려할 때였다. 헌데, 이곳에 숨을 헐떡이며 모습을 드러냈
다. 결국 그곳에서 이곳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셈이다.
진정하시고 숨을 크게 내쉬세요. 진정하신 후에 차근차근 말씀
해 보세요.
휴우우, 휴우우, 헉, 헉. 이제 좀 낫구만. 큰일 났네.
무슨 일입니까?
베어울프가 쳐들어왔네. 엄청난 수일세.
촌장의 놀란 목소리에 라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런, 나 때문인가?
베어울프는 한번 점찍은 상대를 끝까지 아가는 습성이 강하
다. 테세르가 라한을 데리고 도망칠 때. 날아서 이동했기에 쫓아오
지 못했을 뿐, 베어울프는 라한과 테세르, 슈라를 포기하지 않았
다. 그때부터 라한의 체취와 흔적을 계속 찾아다닌 거였다.
수가 얼마나 되죠?
모르겠네. 아무튼 엄청나게 많네. 멀리서 봤는데 마을 남쪽 목
책을 완전히 무너뜨릴 기세로 달려오고 있더군.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라한이 대충 옷을 걸쳤다. 그리고 촌장과 함께 베어
울프가 몰려온다는 남쪽 목책으로 향했다.
-라한의 결심
마을 목책의 상단에 올라선 라한이 밖을 바라봤다.
아직 안 보이는군. 촌장님이 미리 알아낸 건 정찰병을 통해서
인가?
아직 베어울프가 남쪽 목책에 다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멀리
보이는 먼지 구름으로 봐서 엄청난 수의 베어울프가 다려오는 건
분명했다.
어쩌면 좋겠는가? 해결책이 없겠는가?
뭐, 싸우는 수밖에 없죠.
그렇.겠지?
촌장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엄청난 수의 베어울프와 싸운다
는 게 두려워서였다.
두두두두두!
보인다! 베어울프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지축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땅이 마구 진동하고 목책이 마구 떨렸다.
엄청나군. 백 마리는 훨씬 넘겠는데?
휴우우, 대체 왜 이렇게 많이 몰려온 건지 모르겠군. 지금까지
이렇게 많이 몰려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익스멈 촌장의 목소리에 착잡함이 담겼다. 두려움과 마을에 대
한 걱정이 섞인 목소리였다.
이곳 사람들은 베어울프와 그렇게 오랫동안 싸워왔으면서도 습
성을 잘 모르는군.
베어울프가 한 번 찍은 상대를 계속 따라다닌다는 건 용병들 사
이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용병 생활을 수년 정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정보인 셈이다. 헌데 이곳의 촌장인 익스멈은 그런 간
단한 지식조차 모르고 있었다. 막아낼 생각만 했지 상대를 알아보
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 준비!
자경단 대장인 비클만의 목소리가 목책에 울려 퍼졌다. 이에 남
쪽 목책에 있던 자경 대원들이 창을 꼬나 잡기 시작했다.
촌장님은 물러나 계십시오. 싸움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비클만이 비장한 목소리로 익스멈 촌장에게 말했다. 마을의 중
심이자 정신적 지주인 촌장의 안위를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익스멈 촌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결의를 불태웠다.
그럴 수는 없네. 내 비록 나이가 많지만 마법사일세. 1 서클의
보잘것없는 실력이지만, 베어울프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네.
하지만 촌장님.
마법사로 부르기도 민망한 1 서클이라 베어울프 한 마리도 처리
할 수 없는 나일세. 하지만, 저놈들의 눈과 발을 어지럽혀 자네들
을 도울 수는 있네.
휴우, 알겠습니다. 촌장님.
비클만이 결국 촌장의 용기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얼굴에 떠올
라 있던 걱정의 빛은 그대로였다. 촌장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여전
하다는 증거였다. 비클만과 촌장의 대화를 들으며 라한도 나름대
로 고민을 시작했다.
어쩌지?
라한의 낮은 목소리에 테세르가 로브에서 고개만 빠끔히 내밀
었다.
-뭐가?
그냥 내가 확 쓸어버려?
-그러다 또 쓰러지면? 지금은 베어울프 수가 많아서 나도 구해
줄 자신 없다.
라한의 걱정은 여기서 기인했다. 처음 의식을 잃을 때 마법을 합
성하는 중이었고, 두 번째는 플라이 마법을 쓰고 있을 때였다. 즉
합성 마법이 의식을 잃는 원인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어쩌면 마법을 쓰는 그 자체가 라한의 몸에 치명적일 수도 있는
상황. 섣불리 베어울프를 죽이겠다고 나설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럼 어쩌지?
-몰라. 그건 주인이 알아서 해야지.
라한이 전방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도울 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치겠군.
두두두둑!
쿠루루룩!
쿠오오오!
베어울프가 가까이 옴에 따라 땅을 울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또, 기괴한 신음소리와 포효소리가 목책에 울려 퍼졌다. 약간의
피어가 담긴 탓에 포효를 들은 사람들의 전의가 점점 사라지고 있
었다.
방법을 생각해 내야 돼. 방법.
쿠오오오!
라한의 고민이 계속되었다. 그와 동시에 달려오던 베어울프도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이젠 목책과 불과 백 미터 앞까지 다가온
상태. 곧 활을 비롯한 공격을 개시할 때였다.
전원 조준!
비클만의 목소리가 목책에 울려 퍼졌다.
쉬이익!
목책에 서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활을 들고 시위에 화살을 걸기
시작했다. 익스멈 촌장은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주문을 외웠다.
활을들고 있는사람이라고 해봐야 겨우 십여 명. 이 수로는 엄
청난 수의 베어울프를 제대로 상대할 수 없었다.
또 활의 질이 너무 떨어져서 맞히는 화살도 베어울프의 가죽을
뚫을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빌어먹을.
젠장. 슈라! 테세르! 저놈들 처리해! 테세르는 사람 크기로 몸
불려서 싸워!
라한이 선택한 최후의 수는 슈라와 테세르였다. 그로서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유일한 방법이었다.
쿠우우우웅!
-음, 주인. 이번엔 자주 부르는. 어?
슈라는 목책의 아래에서 주변에 널려 있는 돌과 흙을 몸체로 구
성했다. 그리고 형태가 완성되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
웃거렸다 소환되었을 때,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을 본 게 처음이어
서였다.
슈라, 저놈들 처리해.
-음, 일단 처리부터 해야겠군.
슈라가 베어울프가 달려오는 곳으로 마주 달려갔다.
주먹을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베어울프를 처리하고 있는 슈라.
그 모습에 목책에 있던 사람들이 입을 떡 벌렸다.
마을 사람들에게 골렘은 이야기책에나 등장하는 전설 속의 마법
생물이었다. 아니, 대륙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 골렘은 전설 속에서
나 존재하는 허구의 물체에 불과했다.
헌데 그런 존재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그 전설 속의
물체가 두려움의 상징인 베어울프를 학살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
격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믿어야만 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상
황이었다.
어, 어떻게?
저, 저거. 저거.
활을 조준하던 자경 단원들까지 멍하게 활시위만 당긴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테세르! 넌 뭐해? 빨리 안 나가?
-우씨. 알았다. 알았어.
라한의 재촉에 테세르가 로브에서 나왔다. 그 상태로 몸을 서서
히 불리더니 사람 정도의 크기로 커졌다.
저, 저.
헉!
사람들 사이에서 슈라가 나타날 때와는 또 다른 반응이 나왔다.
슈라가 나타났을 때의 반응은 황당함, 경악, 약간의 경이로움이
었다. 반면, 테세르의 등장은 경이로움이라는 감정이 완벽히 배제
된 두려움 그 자체를 사람들에게 선사했다. 하긴, 몸 전체에 기하
학적인 문자를 새긴 검은 물체가 등장했으니 두려워하는 게 당연했
다. 얘기로만 듣던 마족의 모습이 지금 테세르의 모습이니 말이다.
-하앗!
외침을 토한 테세르가 베어울프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 상태로
베어울프를 학살하며 종횡무진하기 시작했다.
슈라는 주로 막고 뭉개는 공격 패턴이었다. 반면 테세르는 피하
고 목을 잘라 버리는 방법으로 베어울프를 처리했다. 둘 모두 베어
울프의 천적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였다.
라, 라한. 저건.저건 뭔가?
아, 촌장님. 저기 덩치 큰 놈은 골렘이고 작은 놈은 정령입니
다. 놀랄 필요 없어요. 제가 데리고 다니는 놈들이거든요. 마을에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그렇군.
익스멈 촌장이 반쯤 얼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거 참. 그래도 고립된 곳이니 정보가 새어 나갈 일은 거의 없
겠지.
라한이 슈라와 테세르를 풀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이곳의 고립
성 때문이다.
자국의 왕국과도 동떨어진 외진 곳 블리아드 마을. 이곳이라면
저들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또 마을에 결계를 만들고 나면 어차피 마을 사람들의 통행에 대
한 모든 정보는 라한에게 들어올 터. 정보를 막을 확실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촌장님.
왜, 왜 그러는가?
아닙니다 나중에 얘기하죠.
알겠네.
라한은 익스멈 촌장에게 저들의 존재에 대한 비밀을 다짐받으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투 중인 상황 지금 얘기하는 것보다 정리가 된
후에 하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 말을 돌렸다.
슈라와 테세르가 베어울프를 모두 처리하는 동안 마을 자경 단
원들은 싸우는 모습을 멍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실제로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학살하고 있는 슈라
와 테세르. 도우려다가 오히려 방해만 될까 걱정됐다.
슈라와 테세르가 베어울프를 모두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수고했다. 돌아가! 설명은 나중에 해 줄게.
-알았다.
-주인, 나도 가?
슈라는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돌아갔다. 하지만 테세르는 정령
계로 돌아가기 싫은 듯했다.
일단 돌아가. 곧 다시 부를 테니까.
-쳇, 알았다.
결국 테세르도 정령계로 돌아갔다.
라한이 슈라와 테세르를 돌려보내자 마을 사람들이 라한에게 몰
려들었다.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뜻이리라.
이보게, 라한. 설명해줄수 있겠는가?
뭐, 별것 아닙니다. 그냥 제가 데리고 다니는 녀석들이에요. 요
즘 몸이 안 좋아서 그놈들한테 대신 싸우라고 했을 뿐입니다.
라한이 간단하게 설명했음에도 마을 사람들은 시선을 떼지 않았
다. 이 정도 설명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가 가득 담긴 시선이었다.
라한. 좀 더 자세히 말해 주게. 우린 저런 걸 난생 처음 보네.
특히, 검은 정령. 난 그게 혹시.그러니까혹시.
마족이 아닌지 의심한다는 의미죠?
그렇네.
정령이 확실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족은 좀, 뭐랄
까? 아무튼 마족은 좀 다르게 생겼어요.
그럼 골렘은?
그건 제가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된 골렘입니다 저, 그리고 좀
피곤하거든요. 들어가서 쉬어도 될까요?
라한이 더 이상의 대답을 회피하며 말을 돌렸다.
그들에 대해 모두 얘기하자면 오벨리아 팰리스까지 설명해야 했
다. 그러자면 그곳에 있는 드래곤 시체들과 마계 통로도 말해 줘야
할 터. 귀찮은 일이 될 게 분명하기에 이쯤에서 그만하기로 했다.
알겠네. 자네가 나쁜 마음을 먹지 않을 거라 믿네.
훗,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무
리한 부탁은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그럼 이만.
라한이 발을 돌려 쉬던 곳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익스
멈 촌장이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공짜는 없다는 말.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는다는 말. 결국, 어떤
대가를 요구하기 위해서 도왔다는 의미였다.
말로는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라한에게 별거 아닌 일이 마을에는 엄청나게 큰 일일
수도 있다. 어떤 부탁을 할지 모르지만, 그 부탁에 대해 듣기 전까
지는 얼굴이 펴지지 않을 성 싶었다.
자네를 믿네.
라한의 뒷모습을 보며 익스멈 촌장이 자조적인 말을 내뱉었다.
좀 전에 보여준 테세르와 슈라의 힘은 마을 전체 전력을 상회했
다. 라한이 마음만 먹으면 마을을 통째로 접수하는 일도 가능했다.
헌데 익스멈 촌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라한이 선한 사람이
기를 비는 일뿐이었다.
*
방으로 다시 돌아온 라한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잘한 걸까?
라한이 테세르와 슈라의 모습을 남에게 보여준 건 에펠 일행과 동
료였던 카이렌 일행뿐이었다. 그 중 에펠 일행이 라한을 배신했고,
이 때문에 남에게 이들을 알리는 걸 더욱더 꺼려온 게 사실이다.
어쩌면 이들을 숨겨진 힘으로 쓰자고 생각한 이래 처음으로 알
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라한에게는 중대하고 신중할 수밖
에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었잖아. 그래, 어쩔 수 없었어.
라한으로서는 이들을 알리는 길 외에 다른 수가 없었다.
강한 마법을 가지고 있되 쓰지 못하는 라한. 이 원인을 알아내서
해결책을 찾기 전에는 테세르와 슈라가 유일한 힘이자 조력자였다.
테세르!
-어? 바로 불렀네.
어떻게 생각해?
-뭐, 생각이 있으니까 그랬겠지. 난 상관없어.
테세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라한의 속마음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한 담담한 말투였다.
녀석.
라한은 괜히 테세르가 고마웠다. 이것저것 묻지 않고 전적으로
믿어주는 테세르. 그가 있었기에 라한은 언제나 즐거웠다.
가끔 너무 나쁜 머리로 인해 골치 아플 때도 있지만, 그것마저도
유쾌할 때가 많았다.
혹시 내 몸에 대해 좀 알아?
-나야 모르지
응, 전에 너 내 몸에 들어간 적 있다고 했지. 왜 내가 의식 잃고
쓰러졌을 때, 그러니까 투바 부르기 바로 전에 말이야.
-있긴. 있지.
테세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때 라한의 몸 안에 들어가
서 오히려 몸을 망가뜨려놨다는 생각 때문이다.
다시 한번 들어가 볼래?
-뭐?
한 번 더 들어가 보라고. 통증이 오는 부위가 복부거든. 심장인
지 단전인지 확실치 않지만, 아무튼 배 부근이야. 거기 좀 살펴봐.
-그래도 돼?
테세르의 의심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당시 라한에게 지은 죄로
꽤 오랫동안 마음고생을 한 모양이다.
괜찮으니까 해 봐.
-알았어.
테세르는 한참 고민한 후에야 승낙했다. 라한의 잔머리에 당하
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라한의 얼굴에 가득한 수심을 보고는 마음을 굳혔다.
현재 라한의 몸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 같은 상태이다. 원인
을 알아내지 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라한의 죽음은 곧 테세르의 영원한 정령계 잔류를 의미하니 테
세르에게도 큰일이었다.
시간 끌 필요 없지.
라한이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주변을 몇 차례 두리번거리
며 피식 미소를 터트렸다. 주변에 사람이 꽤 많았다. 대부분 무기
를 들고 있는 자경 단원이었다.
내가 무서웠나보군.
자경 단원의 라한 감시는 당연한 일이었다. 라한의 강한 힘을 목
격했으니 위험이 닥치기 전에 발견해야 하는 건 그들의 의무였으니
말이다.
슈라!
쿠구구궁!
라한의 부름에 슈라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에 나뭇가
지와 흙뿐이라서 몹시 흉한 모습이었다.
-음, 또 불렀군. 근데, 사람이 많은 곳에서 불렀군. 이유가 있나?
급했거든. 힘은 필요한데 내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고. 뭐 그
랬지.
-그렇군. 그때 갑자기 들어오던 힘이 끊겨서 나도 놀랐다. 몸에
문제가 있는 거로군. 심각한 문제인가?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번에 부른 이유는 주변에 있는 인간들을 처리하는 일인가?
아니, 그냥 누가 이 방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좀 막아줘. 강제로
들어오려고 하면 그때 손을 쓰고. 알았지?
테세르가 라한의 몸속으로 들어가면 일단 그는 가디언으로서 쓰
이지 못한다. 또 마법을 잃은 라한 역시 마을 주민들이 무력으로
공격해오면 대책이 없다.
물론, 그들이 라한을 공격할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그렇지만,
항상 만일을 대비하는 라한이기에 슈라를 미리 불러놓은 거였다.
-알았다. 몸 빨리 치료하길 빈다.
고마워.
라한이 슈라의 무릎을 살짝 더듬은 후에 집으로 들어갔다. 테세
르는 슈라의 어깨에 앉아 볼을 톡톡 건드리고 라한을 따라왔다. 테
세르와 슈라가 그 사이에 많이 친해졌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침대에 누운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테세르, 들어가.
-알았어. 그럼 들어간다.
말을 마친 테세르가 라한의 배 위에 섰다.
그리고 마치 물이 스며들듯 서서히 라한의 뱃속으로 사라져갔다.
흠.
라한은 테세르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갈 때, 약간의 통증을 느
꼈다. 하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한차례 신음을 흘리
는 정도로 끝났다.
내말 들려?
-응, 들려.
내 몸 여기저기 한 번 돌아봐. 어디 이상한 거 있는지.
-뭐, 본다고 내가 아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테세르는 이미 라한의 몸 구석구석을 돌고
있었다.
거기서 왼쪽 팔을 거쳐서 목을 지나서 오른쪽 팔로 지나가라.
-알았어.
라한은 테세르를 심법의 경로에 따라 움직이도록 유도했다. 처
음 스며든 곳이 단전 부근이라서 테세르를 유도한 길도 제란기를
돌리는 심법의 경로였다.
어때?
심법의 경로를 따가 테세르가 한 바퀴 돌았을 때 라한이 질문을
던졌다.
-몰라. 난 잘 모르겠어
흠, 그렇군, 그럼 거기서 심장 쪽으로 움직여봐.
-알았다.
라한의 말에 따라 테세르가 단전에서 약간 뒤쪽에 치우쳐 있는
심장으로 이동했다.
큭!
-어? 괜찮아?
테세르가 라한의 심장 쪽으로 이동했을 때, 좀 전보다 큰 통증이
라한을 감쌌다. 꽤나 버티기 힘들 정도의 통증이었지만, 아주 잠깐
으로 그쳤기에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아, 괜.괜찮아. 거기서 먼저 회음으로이동해서.
이번은 제령기가 움직이는 경로를 따라 테세르를 이동시켰다.
테세르 역시 라한이 이미 뚫어놓은 경로를 통해 움직이는 거라서인
지 어려움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어때?
테세르가 제령기의 심법 경로를 모두 거쳤을 때 라한이 또 다시
질문을 던졌다.
-모르겠다. 난 아무리 봐도 그게 그거 같은데.
흠.
라한의 얼굴이 침통하게 변했다.
라한도 이번 실험으로 증세의 원인을 찾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약간의 힌트는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헌데, 제령기와 제란기의 심법 통로 모두를 점검했음에도 잘못
된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면 잘못된 곳이 있었지만, 테세르가
발견 못 한 것일 수도 있다.
어찌됐든 라한은 이번 실험으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역시 그렇군.
-근데 주인. 통로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단전하고 심장하
고 가까워졌네.
뭐?
-전에 내가 주인 몸속에 들어갔을 때도 단전으로 들어가서 심장
을 통해서 돌았거든. 근데 전에는 단전에서 심장까지 두 걸음에 움
직였는데, 이번은 한 걸음에 움직여지네.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눈을 번뜩였다. 예상치도 못했던 큰 힌트
를 얻은 것 같았다.
테세르!
-어.
내가 마법 써 볼 테니까 거기 있다가 어떻게 되는지 잘 봐
-마법 쓸 거야? 또 기절하면 어쩌려고?
그래도 이 방법밖에 없어. 집중해서 잘 살펴봐라.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세르는 라한의 심장 부위에 그대
로 머문 채였다.
쓴다. 플라이!
라한이 플라이 마법으로 날아올랐다. 역시나 이번에도 복부에서
미약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마법을 계속 지속할수록 복부의 통증이 점점 강해졌다.
으, 으윽!
쿵-!
결국, 라한은 이번에도 의식을 잃었다. 현재의 라한에게 마법을
쓰는 게 무리한 행동임에 분명했다.
라한이 쓰러지자 테세르가 스르르 나왔다.
-에휴, 우리 주인. 왜 이러나?
라한이 의식을 잃었으니 슈라에게 가던 힘도 사라졌을 게 분명
한 일. 슈라가 없으니 이제 테세르가 라한을 지켜야 했다.
-으차!
테세르가 라한을 대충 들어 올려 침대에 눕혔다. 얼굴을 가득 찌
푸린 라한. 그 모습을 보며 테세르의 얼굴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우씨. 주인아, 아프지 좀 마.
*
라한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의식을 되찾았다. 꼬박 열두 시간 동
안 기절해 있었던 셈이다.
으. 죽겠군.
-깼어?
응.
라한은 일어나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법을 쓰고
생겼던 통증이 너무 끔찍해서였다.
-많이 아팠어?
죽을 것 같더라. 젠장. 그건 그렇고. 어떤 이상한 일 없었어?
네가 보고 느낀 그대로 말해줘.
라한이 화제를 돌리며 테세르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의식을 잃은
건 잃은 것. 지금 라한에게는 통증의 원인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라한의 질문에 잠깐 생각에 잠겼던 테세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인이 사용한 기운이 제령기였지? 그러니까 심장에 있는 기
운. 맞지?
응. 마법은 제령기로 시전하니까. 근데 왜?
-주인이 마법을 시전하니까 제령기가 심장을 마구 돌더라.
그렇겠지.
라한도 알고 있는 얘기였다. 이 때문에 마법을 서클이라는 등급
으로 나누는 것이니 당연했다.
-근데, 제령기가 돌면서 제란기가 담긴 단전을 건드린다.
뭐?
-사실이야. 제령기가 움직이면서 단전을 툭툭 건드리더라고.
제령기가 단전을 건드리니까 거기 있던 제란기는 들끓기 시작했고.
뭐, 그래서 두 기운이 막 싸웠어.
라한은 테세르의 대답에서 통증의 원인을 찾았다.
심장과 단전이 가까워졌다는 게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 때문에
각각에 담겨 있던 제령기과 제란기가 서로 간섭하기 시작했고, 서
로 상반된 두 가지 기운이 반응하면서 통증이 온 것이다.
흠, 근데 왜 가까워진 거지? 단전은 원래 움직인 적이 없었고
심장도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는 움직인 적이 없는데.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근데, 언제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는지는
알고 있어.
그래?
라한이 테세르를 눈앞으로 끌어당겼다. 조바심이 났다. 언제인
지 안다면 원인을 어느 정도는 추측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언젠데?
-주인이 창고에 갇혔다가 나온 뒤부터야.
왜 그렇게 생각해?
-그때 주인이 피곤하다가 곯아떨어졌잖아. 그때 주인 몸을 대충
살펴봤어. 근데 그때만 해도 심장하고 단전하고 이렇게 가깝지는
않았거든. 그러니까 그 뒤부터 움직이기 시작했겠지.
테세르의 말에 라한도 어느 정도 느끼는 바가 있었다.
본격적인 통증이 시작된 건 바로 며칠 전이다. 하지만, 아주 미
약한 통증을 느낀 건 미스릴 창고를 나온 직후부터였다. 당시에는
통증이 그리 크지 않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곰곰이 생각
해 보자 그때부터 시작된 통증이 분명했다.
설사 미약한 통증이 오판이었다 하더라도 결과는 같았다.
최근에 통증이 시작됐으니 심장과 단전이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
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최근에 라한 스
스로 얻은 깨달음이라면 창고 안에서 얻은 속성에 대한 게 전부였
으니 테세르의 말이 거의 정확할 터였다.
흠, 속성에 대한 깨달음 이후로 심장과 단전이 가까워지고 있
다? 왜지? 좋은 깨달음 같았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의문을 토해낸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창고에서 나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스스로를 천천히 돌아보는 중이었다.
속성을 합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속성을 합칠 수 있다. 합
친다. 혹시?
잠깐 생각해 보자 어렵지 않게 결론이 나왔다.
속성을 합친다. 즉 상극의 속성도 서로 결합할 수 있다는 게 깨
달음의 요지였다. 결국 서로 상극인 제령기와 제란기도 합칠 수 있
다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깨달음에 반응해서 합쳐지려고 가까워지는 거잖아.
분명 라한에게 좋은 일임에 분명했다. 제령기와 제란기가 합쳐
지면 더 많은 에너지로 재탄생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 될 터, 그
때가 되면 라한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얻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합쳐지는 과도기에는 단순한 마법
조차도 라한에게 위험한 일이 되는 것이다. 또 합쳐지는 과도기에
제대로 융합되지 못했을 때에도 라한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잘 되면 지금보다 강해지지만 운 없으면 스스로의 힘에 의
해 붕괴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생각해 내야 돼. 성공적으로 융합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돼. 또 빨리 합칠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야 돼.
생각해 내야 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라한이 크게 소리쳐 버렸다. 생각에 너
무 열중하다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온 현상이었다.
-주인 왜 그래?
아, 아니. 휴우우.
-왜 그러는데?
그게. 흠. 사실 내 몸은.
라한이 스스로 생각해 낸 몸에 대한 결론을 테세르에게 설명했
다. 그 말을 들은 테세르도 라한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생각해 내야 돼. 반드시 생각해 내야 돼!
그래. 생각해야지. 융합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반드시 찾아내
야 돼. 이대로 잘 되길 빌면서 마냥 기다릴 순 없어.
-그래. 생각해 내야 돼.
테세르의 얼굴에 걱정이 떠올랐다. 라한의 붕괴는 테세르에게도
두렵게 다가온 탓이다.
벌떡!
갈 곳이 있어.
-어디?
일단 여기 일을 대충 끝내고 가야겠다.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대충 걸쳤다. 그 모습에 테세르가
고개를 계속 갸웃거렸다.
-주인! 지금자정이 넘었어. 대체 어딜 가려고?
촌장님을 봐야겠어. 시간이 없어.
옷을 다 입은 라한이 집을 나섰다. 테세르는 이미 라한의 로브
속으로 들어간 뒤였다.
*
똑! 똑!
라한이 지금 익스멈 촌장이 자고 있다는 집 앞에서 문을 두드렸
다. 그리 깊이 잠들지 않았는지 문소리가 나자마자 안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접니다, 라한.
아!
문 건너편에서 들려온 익스멈 촌장의 물음에 라한이 조용히 답
했다.
들어오게.
아.
익스멈 촌장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라한이라는 엄청난
실력자를 독대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재미있군. 난 힘을 잃어서 서글픈데 촌장님은 내 힘을 두려워
하고 있으니. 이거 참.
앉게.
예.
라한이 자리에 앉자 익스멈 촌장이 간단한 다과와 차를 내왔다.
마을에서 재배한 것인지 신선하고 구수한 향기가 방을 가득 메웠다.
음, 좋군요.
허허, 우리 마을 특산물일세. 지금은 재배해서 우리만 먹지만,
과거에는 여기서 나는 차와 이 마른 나물을 수도에 내다 팔았다
네.
그렇군요. 아주 좋습니다.
잠깐의 인사말과 칭찬이 오간 후, 라한이 잠깐 침묵을 지켰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라한이 침묵을 지키자 익스멈 촌장도 탁자에 바싹 다가앉았다.
그도 라한이 본론을 꺼내려 한다는 걸 눈치 챘다.
어려운 부탁인가?
모르겠습니다. 제게는 중요한 일인데, 이곳에는 어떨지.
미리 말해 두겠네. 마을 처녀는 절대 안 되네. 내 목에 칼이 들
어와도 허락할 수 없네.
예?
느닷없는 촌장의 말에 라한이 놀라 되물었다.
마을 처녀라니. 라한은 생각지도 않았던 얘기였다. 갑자기 무슨
색마가 된 것 같지 않은가? 묘한 기분에 정리하던 생각이 뒤죽박죽
엉켜 버렸다.
다시 말하겠네. 자네가 아무리 그래도 마을 처녀들은 안 되네.
물론, 자네 힘이라면 우리 마을을 지상에서 지워 버릴 수도 있겠
지. 하지만 우린 끝까지 싸울 걸세. 마을 처녀를 지키고 마을을 지
키기 위해서 계속 싸울 거네.
저기요. 촌장님. 전 마을 처녀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 없는데요.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구요.
결국 라한이 익스멈 촌장의 말을 끊었다. 더 듣고 있다가는 진짜
색마가 될 듯해서 끊을 수밖에 없었다.
라한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대꾸하자 익스멈 촌장이 머리를 긁적
였다. 자신이 너무 넘겨짚었음을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이거, 참. 미안하구만. 지금까지 이런 일이 몇 번이나 있어서
말이야.
뭐, 그 얘기는 이쯤 해두죠.
이곳 블리아드 마을은 다른 마을과 단절된 곳이다. 이 때문에 다
른 마을사람들을 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가끔
씩 여기저기 떠돌던 용병들이 이곳을 들르는 경우는 있었다. 그리
고 그들은 마을을 지켜주는 대가로 처녀들을 요구했다.
게다가 처녀들을 충분히 데리고 논 후에는 마을을 떠나 버리기
일쑤였다. 또, 몇몇은 자신에게 주어진 처녀들을 납치해서 데려가
는 경우도 있었다.
외지에서 흘러들어온 거의 모든 용병이 이런 패턴이었다고 생각
해도 무방했다.
예외라면 지금 자경단 대장으로 있는 비클만 단 한 명뿐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익스멈 촌장이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 무슨 부탁인가?
땅을 좀 내주십시오.
어느 정도의 크기를 원하는가? 우리도 땅 형편이 그리 좋지 못
해서 말일세.
제 골렘 보셨죠? 그놈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을 정도로 커야 합
니다.
라한의 대답에 익스멈 촌장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로서는 불가
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보시다시피 우리는 마을 목책 안에서만 생활한다네. 이 안에서
우리가 먹을 식량을 농사짓고 가축을 키우고 살지. 마을이 그리 넓
지 않아서 힘들 것 같구먼. 미안하네.
마을 안의 땅을 달라는 게 아닙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마
을 서쪽의 공터를 주시면 됩니다.
거긴 원래 우리 땅이 아닐세. 몬스터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
니 그곳은 버려진 곳이나 마찬가지지.
익스멈 촌장의 말에 라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딱 그가 원했
던 대답이었다. 이제 몇 가지 일을 해주고 또 다른 부탁을 해도 되
는 조건을 갖춘 셈이다.
제가 마을을 다섯 배로 불려드리겠습니다.
마을을? 어떻게?
제가 결계를 만들어 볼까 합니다. 주변을 포함해서 다섯 배 정
도 크게 설치하면 되겠죠. 아, 물론 완벽히 차단하는 그런 결계는
아닙니다. 하지만 베어울프 중에서는 마법 쓰는 놈이 없으니 결계
를 알아채지 못할 겁니다. 뭐 인간이라 해도 이 결계를 알아내려면
최소 5, 6 서클 마법사 정도는 되어야 할 겁니다. 그것도 유심히 살
펴야 겨우 알아보겠죠. 이 정도면 마을을 위한 충분한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라한의 대답에 익스멈 촌장의 얼굴이 흥분으로 가득 찼다. 라한
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이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마을 크기가 다섯 배가 되는 일, 그건 마을의 수확량이 다섯 배
이상이 늘어난다는 얘기와 같았다.
물론, 그 범위 안에 라한의 거대한 땅도 포함될 터였다. 설사 그
렇다 해도 다섯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는 건 변함없었다. 늘어난 곳
에는 이전에 많은 자리를 차지하던 주거 공간이 없으니 말이다.
정말, 정말 가능한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물론입니다. 대신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가 말해보게
결계를 설치한 후에 잠깐 자리를 비울 생각입니다. 그동안 제
집을 좀 만들어 주십시오. 무리한 부탁인줄은 알지만, 제겐 중요한
일입니다. 부탁드립니다.
라한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는 정말 중요한 일이었
기에 이렇게 정중하고 신중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지금 라한에게는 시간이 금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이 마을을 버리는 건 말도 안 되었다.
이곳에 터를 만들고 움직일 시간을 만드는 일.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 신중하게 행동하는 라한이었다.
흠, 알겠네. 만약 자네가 설치한 결계가 믿을 만하다면, 자네 집
을 짓는 일은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 확답을 안 주는군. 신중한 성격이
야.
고맙습니다.
라한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라한은 웬만해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 성격이다. 하지만 존경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는 거리낌 없이 고개를 숙이는 성격 역
시 라한이었다.
그가 본 익스멈 촌장은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단
순히 나이가 많아서는 아니었다. 마을을 아끼는 마음. 자기 자신보
다 마을을 더 사랑하고 가꾸려는 마음. 그 따뜻함에 라한이 감복해
서였다.
그럼 결계는 내일 아침에 설치하겠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시고
확답을 주십시오.
알겠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인사를 마친 라한이 촌장이 묵고 있는 집을 나왔다. 들어갈 때보
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이었다.
-주인. 왜 그렇게 조심스럽게 대한 거야? 평소 주인 성격답지
않던데.
그래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래? 그냥 협박해서.
사람은 힘에 굴복하면 최선을 다하지 않아. 그에게 흠 잡히지
않을 정도로만 움직이지. 하지만 정말 감동받았을 때에는 최선을
다해 그를 위해 봉사하지. 그게 인간이야.
-아하,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한테 봉사 받고 싶었다는 말이군.
봉사가 아니라 저들이 진정으로 날 대하길 바랐을 뿐이야. 날
두려워하는 것도 좋고 싫어하는 것도 괜찮아. 대신, 가식으로 날
대하는 건 싫었어. 그러려면 먼저 내가 진정으로 대해야지.
-음, 대충 알겠다.
라한이 이곳에서 며칠 머물다 떠날 거라면 이렇게 대하지 않았
을지도 모른다. 테세르의 말처럼 힘으로 굴복시켜서 필요한 걸 얻
으려 했을지도.
하지만 라한은 이곳에 꽤 오래 머물 생각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겁 많고 소심하지만 순박하기 그지없는 마을 사람들. 그들과 섞
여 지내면 라한 스스로도 조금쯤은 순수해 지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자. 내일은 아침부터 움직여야겠어.
-응.
라한이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피곤한건 아니었지만, 앞으로 움
직일 걸 생각하며 체력을 비축해 둘 요량이었다.
집에 돌아온 라한이 잠을 청하기 위해 누웠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젠장. 또 기절해야 되잖아.
-왜?
마나석 말이야. 아공간에 넣어 뒀거든. 미치겠군.
-아, 그게 그렇게 되네.
라한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마나석을 꺼내려면 아공간을 열어야한다. 헌데, 아공간 오픈 역
시 마법이었으니 라한의 기절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또 다시 통증을 겪고 의식을 잃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찹
찹했다.
어쩔 수 없지. 테세르. 잘 지켜라.
-알았어.
에휴, 아공간 오픈! 으.으윽!
마법을 시전하자마자 라한이 복부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전에
는 마법 시전 후 잠깐의 시간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시전 직후에
통증이 전해졌다. 단전과 심장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는 얘기
였다.
-주인 괜찮아?
망할.
욕설을 내뱉은 라한이 아공간에 손을 넣었다. 고통을 참고 있는
지 이마에 땀이 가득했다.
테세르, 받.아.
라한이 마나석과 인챈트에 필요한 도구들을 테세르에게 건네고
쓰러졌다. 다행히 침대 위에서 마법을 시전했기에 쓰러져 다칠 일
은 없었다.
-아고, 우리 주인 큰일 났다.
테세르가 쓰러진 라한의 몸에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어두운 얼
굴로 라한을 바라봤다.
걱정스러웠다. 지금까지 항상 당당하게 지냈던 라한이기에 지금
모습이 더 어색하기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라한이 겪고 있는 고
통을 나누고 싶을 정도였다.
*
다음날 라한은 아무것도 못하고 하루를 소일했다.
전날 한밤중에 쓰러진 탓에 정오가 넘어서야 깼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라한은 해가 채 다 뜨지도 않은 이른 새벽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근 아침잠이 많아진 걸 감안하면 꽤나 이른 기상이었다.
-하아암! 주인아, 좀 더 자자 잠 온다.
시간 없어. 오늘 오전 중으로 끝내고 가봐야 돼.
-어디 가는지 모르지만, 좀 늦게 가면 안 돼? 나 잠 오는데.
그래서? 계속 자겠다고? 정령계 가서 자는 건 어때? 정령계에
서 영원히 잠만 자게 해줄 테니까.
라한의 협박성 말에 테세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테세르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정령계에서 소환되지 않는 거였
다. 지금은 지휘가 상승해서 따돌림 당하지 않겠지만, 아직 과거의
기억을 잊지 못한 테세르. 다른 정령에게 정령계가 아늑한 보금자
리라면 테세르에게는 끔찍한 곳에 불과했다.
-나가자.
진작 그럴 것이지.
-근데, 오늘 일찍 일어났네.
그거야 시간이 없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요즘 매일 늦게까지 잤잖아. 미스릴 창고
에서 나온 뒤부터 매일 해가 다 뜬 후에 깨어났으면서.
테세르의 말을 듣던 라한도 어리둥절해했다. 생각해 보니 최근
에 아침잠이 너무 많아졌음을 인지한 탓이다.
물론, 몸이 피곤하면 새벽에 못 일어날 수도 있다. 특히, 미스릴
창고에서 나온 직후라면 몸이 극도로 피곤했으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헌데, 그런 현상이 미스릴 창고에서 나온 뒤부터 지금까지 거의
6 개월 이상 계속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고 보니까 이상하네.
-뭐, 그냥 늙었다고 생각해. 늙으면 아침잠이 많아진다고 하잖아.
실제 라한의 아침잠은 단전과 심장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현상
때문이었다. 단전과 심장의 위치 변화 역시 신체의 변화일 터. 몸
스스로가 신체의 변화를 아기의 성장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바보냐? 늙으면 아침잠이 적어지는 거지.
-아, 농담이야, 농담.
라한이 기상 시간에 대한 의문을 접었다. 아니,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생각하지 뭐. 나가자.
-그래.
밖으로 나온 라한이 마을 남쪽으로 향했다.
너무 이른 새벽이라서 마을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
만, 남쪽 목책에 가까이 갈수록 사람들이 한두 명씩 보이기 시작했
다. 몬스터의 습격을 살피는 초병들의 교대 인원이었다.
수고하십니다.
어, 어? 어.
라한을 본 초병 한 명이 놀란 얼굴로 도망갔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왜 저러지?
한참 걸어가자 또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은 교대를 마
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듯 목책 쪽에서 걸어오는 사람이었다.
수고하십니다. 밤새 별 일 없었.
어? 으.으악!
이번에 인사를 받은 사람 역시 겁에 질린 얼굴로 도망갔다. 상황
이 이렇게 되자 라한도 슬슬 짜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젠장.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는가 본데, 이거 너무하잖아.
-주인, 참아.
사람을 괴물 취급하는데 어떻게 참아?
-그럼 다 죽이자. 그럼 되잖아.
테세르가 한술 더 떠서 라한을 자극했다 이에 라한이 눈을 치뜨
며 테세르를 노려봤다.
시끄러!
-핏! 못 참는다고 해놓고 결국 참내 뭐.
조용 안 해?
-알았다. 알았어. 치사해서 입 다문다.
라한과 테세르는 티격태격하며 어느새 남쪽 목책에 다다랐다.
목책에 다다르자 초병들이 밖이 아닌 안쪽을 향해 창을 겨누고 있
었다.
저거 나한테 겨눈 거 맞지?
-그럴 걸.
미치겠네. 진짜 확 쓸어버려?
라한의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심한 행동을 한
다면 라한 스스로도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봐요! 내가 괴물입니까? 왜 나한테 그 창을 겨누고 그러세요?
그, 그건. 그러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어제 마을을
구해준 것밖에 없는데요.
그건 그렇지만.
라한이 쏘아붙이자 자경 단원들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실제 라
한이 잘못한 일은 없었다. 죄라면 너무 강한 힘을 보여줌으로써 마
을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만들었다는 정도였다.
그럼 좀 비켜주실래요? 나가봐야 하거든요.
어, 어딜 가려는 거냐.옵니까?
자경 단원의 입에서 반말과 높임말이 묘하게 섞여 나왔다. 너무
놀라 말의 중심을 잡지 못한 탓이다.
어제 촌장님한테 다 얘기했거든요. 궁금하시면 촌장님께 가서
물어보세요. 그럼 이만.
말을 마친 라한이 자경 단원 쪽으로 걸어갔다. 라한이 다가올수
록 자경 단원들이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한참 뒤로 밀리다가 어느 순간 좌우로 갈라지며 라한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두려움 때문에 저절로 만들어진 길
이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라한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라한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였다.
헌데 자경 단원들에게는 사신의 미소로 보였다. 두려움을 품고
있다는 선입견이 만든 현상이었다.
-환영 결계
마을 목책을 나온 라한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잘은 모르지만 기름진 곳 같군. 그치?
-주인이 그렇다면 그렇겠지.
녀석. 슈라! 나와라.
쿠구구궁!
슈라가 나오자 테세르도 인간 정도의 크기로 몸을 불렸다. 그리
고 라한의 좌우로 서서 대형을 갖추었다.
-주인. 요즘 자주 부르는군. 아주 좋아.
음, 어제 하던 얘기마저 해야겠다. 나 지금 힘을 못 써. 마법 쓰
면 의식을 잃어버리거든. 인챈트는 잘 모르겠는데, 정말 재수 없으
면 그것도 의식을 잃을지 몰라.
-흠, 주인이 의식을 잃으면 난 역소환 되는데, 왜 부른 거지?
내가 마법 쓸 일이 없도록 도와야지. 여긴 몬스터들이 득시글
거리잖아.
-알겠다. 몬스터들만 처리하면 되는군.
슈라와 테세르를 좌우로 대동한 채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렇게
약 한 시간쯤 걸었을 때, 걸음을 멈추고 좌우를 훑었다.
이쯤이 좋겠군.
-여기서 결계석 만들 거야?
응. 슈라. 땅 좀 파줘. 깊이는 내 키 두 배 정도로 해주고, 폭은
한 이 정도? 부탁해.
라한이 양손을 어정쩡하게 벌린 채 폭을 알려줬다. 대략 1 미터
정도 되는 폭이었다.
-그러지.
쿠쾅! 쿠루루루루!
테세르가 손을 펴서 땅에 꽂았다. 손을 다시 당겼을 때 라한의
키 두 배 정도 깊이의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폭 역시 라한이 생각
한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정도였다.
됐군. 테세르. 이 안에 들어갈 만한 크기의 바위가 필요한데
좀 찾아서 가져와줘.
-알았어.
밝게 대답한 테세르가 서쪽으로 날아갔다. 이곳으로 날아올 때,
그곳에서 바위를 본 모양이다.
약 10 분 쯤 지났을 때, 테세르가 자신의 몸통만 한 바위를 등에
지고 나타났다. 라한의 힘을 당겨쓰지 않는다면 절대 들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일단 여기 내려놔.
-어.
테세르가 라한 앞 10 미터 지점에 바위를 던졌다.
바위가 날아오자 슈라가 손을 펴서 라한의 앞을 가렸다. 주인인
라한을 파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쿠웅!
크기에 걸맞은 엄청난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그와 함께 바
닥에서 수많은 바위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슈라가 라한의
앞을 막지 않았다면 큰 곤욕을 치렀을 게 분명했다.
슈라 고마워.
-당연한 일이다.
라한이 바위 앞으로 다가가서 이리저리 살폈다.
딱 좋군. 테세르. 여기 구멍 좀 뚫어줘.
-어.
스팟! 쿠쿠쿠쿠팟!
테세르가 손을 송곳처럼 만들어 바위에 찔러 구멍을 만들었다.
30 센티미터 정도 되는 깊이였다.
떼구르르르.
라한이 마나석을 구멍에 짚어 넣었다. 그리고 주위에서 흙을 대
충 긁어모아 그 위에 덮었다.
됐다.
-끝난 거야?
아니, 이제 공식 새겨야지.
-아휴, 이 일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해야 되는 거야?
테세르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위를 옮겨오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 또 슈라가 땅을 파
것 역시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이 두 가지 일을 마친 후, 라한이 공식을 새기는 동안 테
세르와 슈라는 할 일이 없었다. 테세르의 얼굴에 떠오른 지겹다는
표정은 이 때문이었다.
그럼 어디 시작해 볼까?
라한이 팔을 걷어붙이고 바위에 뭔가를 새기기 시작했다. 이 작
업은 거의 30 분 동안 계속 되었다.
과거 오벨리아 팰리스에서 결계를 만들어본 라한. 그때의 결계
보다 훨씬 낮은 등급의 결계이기에 공식을 만들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바위가 부서지지 않도록 하면서 세밀한 공식을 새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휴우우, 힘드네.
-우린 지루했다.
라한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바위에서 물러났다. 인챈트가 끝났
다는 표시였다.
라한이 물러나자 테세르가 지겨웠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옆
에 있던 슈라도 지겹긴 마찬가지였는지 테세르와 비슷한 자세였다.
그렇게 지루했어?
-주인이 30 분 동안 멍하게 있어봐.
음, 그럼.
말을 하다만 라한이 바닥에 둥근 원을 그렸다. 그 중간에 '마을'
이라는 글씨를 써 놓고 테세르와 슈라를 바라봤다.
여기가 마을이야. 그리고 여기가 지금 우리가 있는 곳.
라한이 원에서 좀 떨어진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렇군. 근데?
슈라 넌 여기, 그리고 여기, 또 여기에 아까 팠던 만큼의 구멍
을 뚫어줘. 지금
라한이 원 주변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결계 설치를 위
한 마나석을 심을 곳이었다.
-일을 분담해서 할 생각이군. 그럼 몬스터가 오면 어떻게 할 생
각이지? 가디언으로 날 부른 거 아닌가?
테세르 있잖아. 괜찮을 거야. 네가 땅 다 파고 오면 그때 테세
르를 보내고 널 가디언으로 쓰지 뭐.
-그렇군. 알겠다. 빨리 끝내고 돌아오겠다.
그럼 고생해.
라한의 인사를 뒤로하고 슈라가 동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사라
지자 라한이 테세르를 지그시 쳐다봤다.
테세르. 이 바위를 저 안으로.
-알았어.
테세르가 바위를 슈라가 판 구멍에 집어넣었다. 마치 크기를 재
고 맞춘 듯 바위가 구멍이 딱 맞아 들어갔다.
슈라가 구멍을 다 파고 돌아오자 테세르가 라한을 떠났다. 슈라
가 파놓은 구멍 옆에 바위를 하나씩 두는 일을 하기 위함이었다.
테세르까지 돌아왔을 때, 라한은 세 번째 구멍에서 인챈트 하는
중이었다.
왔냐?
-얼마나 했어?
여기 거의 끝났어.
-나도 바위 다 갖다놨어.
응. 수고했다.
테세르가 돌아오자 처음과 같은 지루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라
한이 인챈트 하는 동안 테세르와 슈라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세르와 슈라 그 누구도 불평을 토해내지 않았다. 한 명
씩만 라한 옆을 지킬 때보다 나아진 탓이다.
한 명씩 다른 일을 할 때, 남은 이는 혼자서 멍하게 지켜봐야 했
다. 하지만 지금은 둘. 처음 바위에서 일 할 때와 동일한 조건임에
도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 지루한 상황을 이미 보내서
였다.
끝났다.
-휴우.
-다 됐군.
라한이 결계를 위해 공식을 새긴 바위는 모두 다섯 개였다. 다섯
번째 바위가 테세르의 의해 구멍에 들어갔을 때, 막 해가 중천에
뜰 때였다. 거의 일곱 시간을 결계를 만드는 데 보낸 것이다.
이제 하나 남았군.
-또 남았어?
이제 우리가 만든 결계석을 활성화시켜야지.
-아, 그거구나. 난 또.
가자.
라한이 오전에 만들어둔 결 f 계석을 하나씩 방문했다. 거기서 결
계석에 제란기를 불어넣어 활성화시켰다.
-주인. 안 쓰러지네.
아직 제란기는 괜찮은 모양이다.
제란기는 단전의 안에서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반면, 제령기는
심장의 주변에서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이 때문에 제란기를 움직
였을 때는 통증으로 쓰러지는 일이 없었다. 안에서 움직이기에 제
란기를 덜 건드린 탓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단전과 심장이 더 가까워진다면 제란기를
움직일 때도 통증이 올 것이다. 어쩌면 당장 내일부터 통증이 을
수도 있는 일이고.
테세르는 마나의 정령이라서 안 되겠고. 슈라. 너 저기까지 가
서 이쪽 좀 봐.
-응?
그냥 가보면 알아.
-그러지.
슈라가 라한이 가리킨 곳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어느 정도 거리
까지 떨어졌을 때, 슈라가 고개를 돌려 라한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이, 이게 뭐지? 주인이 있는 쪽은 이쪽이 맞는데.
슈라는 소환물이라서 소환자인 라한이 있는 곳은 본능적으로 알
아낸다. 이 탓에 슈라의 시선은 정확히 라한이 있는 곳을 향해 있
었다.
내가 보여?
-왜 이러지? 주인이 있는 곳은 분명 이쪽인데.
-주인. 쟤 왜 저래?
테세르가 라한의 귀에 대고 조용히 물었다. 그 물음에 라한이 웃
음을 머금고 답했다.
슈라는 내가 있는 곳을 본능적으로 알아. 내가 그를 소환했으
니까. 근데, 내가 있는 곳이라고 느껴지는 곳에서 날 찾을 수 없는
거야. 그래서 저런 모한 표정이 된 거고.
-아, 그렇구나.
고개를 대충 끄덕인 테세르가 슈라에게 날아갔다. 그곳에서 라
한이 있는 곳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역시 안 보인다. 마나가 흘러가는 모한 기류 때문에 주인
위치가 왜곡돼 보여.
후후.
테세르의 말을 들으며 라한도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 나왔다.
-주인. 나왔군. 이상했다. 주인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알겠는
데, 이 앞에 절벽은.
-절벽이 어디 있어? 이거 마나잖아.
하하하하.
슈라와 테세르의 언쟁에 라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테세르
와 슈라가 싸우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왜 웃어?
테세르 넌 마나의 정령이라서 이 앞에 마나가 흐르는 게 보이는
거야. 근데 슈라는 아니거든. 그래서 앞에 보이는 마나가 만들어낸
환영밖에 못 보는 거지 내가 만든 환영이 절벽이니까 절벽으로 보
이는 거라고.
-아, 그렇구나.
-그럼 그냥 앞으로 걸어가면 안으로 들어가지나?
말을 마친 슈라가 대답도 듣지 않고 걸어 나갔다. 그가 움직이자
테세르가 놀란 얼굴로 외쳤다.
-안 돼!
쿠쿠쿵!
-어이쿠!
슈라는 앞에 있던 절벽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정확하게는 마나
기류에 의해 튕겨 나온 것이다.
-저 바보. 앞에 마나가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니까 그러네.
하하하하하.
-왜 그러지?
앞에는 마나 기류가 벽처럼 가로막고 있어. 환영을 실제처럼
포장해 놓은 거지.
-음, 뭔 말인지는 모르지만 못 들어간다는 얘기로군.
맞아.
라한은 절벽 환영에 마나를 단단하게 굳혀 기류를 형성하도록
만들었다. 이 때문에 누군가가 부딪히더라고 진짜 절벽처럼 느끼
게 된다. 환영 결계를 환영이 아닌 실제처럼 포장한 셈이다.
-그럼 어떻게 들어가지?
따라와.
라한이 결계를 따라 서쪽으로 걸어갔다. 슈라의 눈에는 절벽을
옆에 끼고 이동하는 걸로만 보였다.
약 20 분 정도 걸어가자 수풀로 교모하게 가려진 동굴이 눈에 들
어왔다.
-오, 이건 곳에 동굴이 다 있군. 나무에 가려져서 그냥 지나칠
뻔했다.
-나무? 나무가 어디 있어?
슈라의 딸에 테세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눈에 나무가 보이
지 않은 까닭이다.
동굴을 가린 수풀 역시 환영의 일부분이다. 실체가 마나 덩어리
라서 테세르에게는 나무가 아닌 뭉쳐진 마나로 보였다.
-저기 나무.
그것도 마나거든. 슈라. 네 눈에는 수풀로 보이겠지만 테세르
에게는 실체인 마나 덩어리로 보일 거야. 맞지?
-어, 저기 마나가 뭉쳐 있네. 음, 그러고 보니 뭉쳐진 모양이 작
은 나무들이 뭉쳐 있는 모양하고 비슷한걸.
훗.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웃음을 머금었다.
테세르는 본체인 마나밖에 보지 못한다. 반면 슈라는 본체가 아
닌 환영밖에 볼 수 없다. 환영과 본체 모두를 볼 수 있고 구분하는
이는 라한이 유일했다.
-주인. 결계가 진짜 같군.
-그러게. 이렇게 만들 줄은 몰랐는데.
슈라와 테세르가 감탄을 터트렸다. 하지만 서로 다른 면에서 터
트리는 감탄이었다.
슈라는 눈에 보이는 환영에 경이를 품었다. 그의 눈에 마나 덩어
리라고 불리는 모든 물체가 진짜처럼 보여서였다.
반면 테세르는 마나 운용 능력에 감탄했다. 마나를 굳게 만들어
단단하게 하는 방법, 그리고 단단해진 마나로 이런 저런 모양을 만
들어서 환영을 실체처럼 꾸미는 방법. 마나의 정령인 테세르조차
생각지 못한 방법이었다.
후후, 뭐 이 정도야 기본이지.
-근데 주인. 입구가 좀 작군.
어? 음, 좀 그러네.
수풀에 가려진 동굴 입구는 가로 2 미터 세로 3 미터 정도의 쾌 큰
크기였다. 그럼에도 슈라가 들어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슈라의
덩치가 동굴의 크기를 능가할 정도로 컸으니 어쩔 수 없었다.
-어쩌지?
안되겠다. 일단 돌아가. 나중에 다시 부를게.
-그러지.
쿠루루룽!
슈라의 몸체가 부서져 바닥에 쌓였다. 자아는 돌아가고 몸체를
구성 중이던 돌과 흙만 남은 모습이었다.
슈라가 돌아가자 테세르가 몸집을 원래의 작은 크기로 줄였다.
그리고 라한의 로브에 들어가 고개만 밖으로 내밀었다.
야! 뭐야? 걷는 게 그렇게 싫어?
-걷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여기가 더 편해서 그러지.
라한은 걸을 때에도 좌우, 상하의 흔들림이 없었다. 이 모든 게
광견보의 효용이었다.
참나.
-주인이 이해해라. 히잉.
처음 라한이 광견보를 익혔을 땐 이런 효능이 없었다. 라한의 신
체와 맞지 않는 신법이었기에 오히려 부작용만 가득했다.
그러나 광견보를 계속 연구하고 특이한 자신의 신체에 맞게 바
꾸자 조금씩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상적인 걸음에서 자연
스럽고 편한 걸음을 몸 스스로가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라한이 광견보를 극성으로 익혔다. 이때
부터 일상적인 걸음에서도 흔들림을 찾기 힘들었다. 눈만 감으면
움직이는지 가만히 서 있는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들어가자.
-자, 출발!
라한이 동굴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가끔 눈을 감기도 하고,
어쩔 때는 뭔가를 만지기 위해 손을 휘젓기도 했다.
라한이 동굴에 들어간 지 30 분. 밝은 표정의 라한이 반대편 동굴
출구로 걸어 나왔다.
좋군.
-주인. 왜 그렇게 빙빙 돌아서 나오는 건데?
확인은 해 봐야지.
-무슨 확인?
후후후.
동굴의 입구와 출구의 거리는 일직선으로 백 미터 정도밖에 되
지 않는다. 이런 짧은 거리를 30 분이나 걸려서 이동한 것 때문에
테세르가 불만을 털어놓았다.
-무슨 확인?
미로. 제대로 설치됐는지 직접 겪어봐야지.
-미로? 미로 같은 게 있었어?

라한은 동굴 안에 미로를 설치했다 아니, 미로 역시 환영 결계
에 포함되어 있었다.
라한이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데 30 분이나 걸린 건 이 미로를 하
나씩 거치기 위해서였다.
물론, 고위 마법사라면 미로가 환영임을 알아챌 수 있다. 일단
환영이라는 게 탄로 나면 미로를 거치지 않고 마나를 흩어서 출입
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고위 마법사는 대륙 전체에서 몇 명 되지 않는
다. 드래곤과 엘프를 모두 포함하더라도 채 백 명이 되지 않는 수
였다. 대륙에 사는 대부분의 존재들은 이 미로를 피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아, 여기저기 단단하게 만들어둔 결계가 그거구나.
응. 얼마나 걸리나 확인해 봤어. 미로를 다 읽고 있는 나조차도
30 분이나 걸리더군.
-미로를 모르는 사람은?
뭐, 운에 맡겨야지. 평생 통과 못 할 수도 있고 빨리 통과할 수
도 있고. 말 그대로 운에 달렸지.
-무서운 곳이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테세르의 얼굴은 무섭다는 표정이 아니었
다. 그 스스로가 이런 환영 결계에서 자유로운 탓이다.
좋군. 좋아.
-뭐가?
내가 만들었지만 결계가 너무 잘 만들어진 것 같아서.
-뭐, 내가 보기에도 잘 만든 것 같긴 하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어제까지 축 처져있던 기분과 비교하면 천
지차이였다. 지금 순간만큼은 단전과 심장의 가까워짐으로 오는 통
증을 잠시마나 잊고 지낼 수 있었다.
이제 돌아가자.
-응.
라한이 밝은 얼굴을 한 채 마을로 향했다. 라한의 기분이 좋아보
이자 테세르도 덩달아 즐거운 표정이었다.
*
라한이 마을에 들어서자 자경 단원들이 주위를 빙 둘러쌌다. 얼
굴에 떠오른 긴장이 그들의 심리 상태를 말해주는 듯했다.
무슨 뜻이죠?
어디 갔다 오는 것이오?
자경 단원들 사이를 뚫고 자경단 대장 비클만이 걸어 나왔다.
다른 이들이 입을 열 엄두도 못 내는 상황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비
클만.
역시 마을 자경단의 대장이라 뭔가 다른 모습이었다.
결계를 설치하고 왔습니다. 촌장님께 듣지 못했나요?
결계?듣지 못했소만. 대신, 돌아오면 촌장님을 만나고 가라
는 얘기는 있었소.
훗, 겨우 촌장님께 데려가는 일 때문에 이렇게 빙 둘러싼 건가
요? 환영 인사가 너무 거창하네요.
라한이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살짝 비꼬았다. 라한의 입가에 미
소가 떠오르자 자경 단원들이 손을 파르르 떨었다. 혹시나 살수를
펼칠까 두려웠음이다.
미안하오. 어제 보여준 힘 때문이니 이해해 주시오.
이해는 하지만 기분은 나쁘군요. 좀 물려주실 수 없나요? 촌장
님이 계신 곳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거든요. 이렇게 거창하게 데려
가지 않아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허허, 미안하오. 난 이들을 물리려 했는데, 도통 말을 안 듣고
있소이다. 이미 통제를 벗어난 듯싶으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소.
비클만이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마을 사람들의 민감한 반응이
마치 비클만 자신 때문인 듯한 모습이었다.
뭐, 정 그렇다면 앞장 서 주시겠습니까?
따라오시오.
비클만은 과거에 용병 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검을 휘둘러 생계
를 유지하는 일을 수십 년간 해온 것이다. 다른 마을 사람들이 죽
지 않기 위해 싸운 것과는 약간 달랐다.
이 때문인지 비클만은 라한을 보면서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대신 경이감과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라한을 바라봤을 뿐이다. 용
병들이 갖는 강함에 대한 본능적인 감탄. 용병계를 떠난 지 3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버리지 못한 습성이었다.
들어가시죠.
고맙습니다.
라한과 비클만, 자경 단원들이 촌장이 머무는 집 앞에 도착했다.
똑! 똑!
라한이 문을 두드리자 함께 온 자경 단원들이 집을 빙 둘러쌌다.
나름대로 라한을 겁주려는 행동이었다.
머리는 잘 썼는데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지. 쯧쯧.
라한을 포위해서 허튼짓을 못하게 하려는 판단은 괜찮았다. 상
대가 라한만 아니면 말이다.
누군가?
촌장님,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철컥!
라한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익스멈 촌장 외에도 일곱 명의 노인이 더 보였다. 마을의
나이 많은 원로들이 모두 모인 듯했다.
아, 손님이 계셨군요. 제가방해한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아닐세. 마침 자네 얘기를 하고 있었지. 앉게나.
감사합니다.
익스멈 촌장의 말에 라한이 조용히 빈자리에 앉았다.
마을 원로들은 라한이 들어온 순간부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
았다. 어떤 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어떤 이들은 미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음, 자네 이름이 라한인가?
예. 맞습니다. 어르신. 헌데.
낯선 노인의 말에도 라한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익스
멈 촌장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허허허, 인사하게. 여기 있는 일곱 명은 모두 마을 원로들일세.
아,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라한이라고 합니다.
라한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라한의 모습에 좀 전에
말을 걸었던 노인이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역시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로군. 하하하. 과연
과연 그랬어.
예? 무슨 말씀이신지?
마을 안에서 자네에 대한 소문이 어떤 식으로 퍼져 있는 줄 아
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좋은 식으로 퍼지지는 않았으리라 생
각합니다.
라한이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그 모습에 노인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마음에 드는 친구로군. 아주 좋아. 그래, 남들 눈보다
스스로가 더 중요하지.
감사합니다.
그래도 말이 나왔으니 마저 해야겠지. 마을 안에서 자네가 괴
물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더군. 마족을 부리는 마왕이라는 소문도
있고. 아무튼 나도 그 소문 때문에 자네를 만나러 여기 오면서
고민 많이 했다네. 나 역시 무서웠거든. 허허허.
그러셨습니까?
라한은 시종일관 남의 얘기를 듣는 듯한 담담한 태도였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사항이라서 별 감흥이 없었음이다.
근데, 만나보니까 자네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구만. 괜히 겁
부터 집어먹은 게지.
허허, 형님. 사람 불러놓고 뭐하는 겁니까?
내가 또 주책을 부렸군. 그래, 무슨 일로 온 건가?
노인의 물음에 라한이 익스멈 촌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결계가 완성됐습니다.
오! 정말인가?
오, 과연.
라한의 말이 떨어지자 주변 노인들이 저마다 탄성을 질렀다. 라
한이 오기 전에 익스멈 촌장에게 대강의 사정을 들은 모양이다.
결계로 되겠는가? 몬스터들은 줄잡아 수천 마리일세. 북쪽 산
맥에 있는 몬스터들을 포함하면 만 마리는 훌쩍 넘길 텐데. 과연
결계가 버텨주겠는가?
버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몬스터들은 이 마을을 찾지
도 못할 테니까요.
라한의 음성에서 자부심이 묻어났다. 스스로가 만든 결계에 그
만큼 자신 있다는 표시였다.
어떻게?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입구로 향했다.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더 나은 경우가 많다. 이번
경우도 그러했다.
밖에서 이곳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암벽으로 보인다는 걸 일깨워
준다면 나머지 설명은 할 필요 없었다. 보이지 않으니 몬스터의 수
는 문제가 될 수 없는 탓이다.
비클만 밖에 있는가?
예, 어르신.
라한에 대한 소문을 얘기했던 노인 아함브라가 비클만을 불렀다.
비클만 역시 촌장을 상대할 때보다 더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같이 갈 테니 채비를 하게. 자네 혼자 데려갈 생각이니 다른 사
람들은 물리게나.
그게 저. 통 말을 안 듣습니다. 저 사람을 너무 무서워하는지
라. 죄송합니다.
그럼 가서 전하게. 물러나지 않으면 이 젊은이가 우리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다고, 그렇게 전하면 물러날 걸세.
아함브라의 말에 노인들이 웃음을 머금었다. 반면, 비클만은 당
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아함브라를 다시 바라봤다.
어, 어르신. 그건 좀.
허허허, 뭐 하는가? 어서 전하지 않고.
저, 그게. 에휴, 알겠습니다.
비클만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주변에 있던 다른
노인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형님. 또 시작하는 겁니까? 어째 며칠 잠잠하다 싶더니.
길지 않은 세상. 웃으면서 사는 게 뭐가 어때서?
형님도 참.
노인 아함브라는 블리아드 마을의 최고령이다. 올해로 나이 96
세. 대륙의 평균 수명을 한참 넘어선 셈이다.
오래 살다보면 세상이 무료해지기 마련이다. 대부분 이런 경우
노인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세월 탓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
게 지루하게 여생을 보내다가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헌데, 아함브라는 달랐다. 어떻게든 재미있을 만한 놀이를 찾아
내는 성격이었다. 그 탓인지 아함브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밝
은 성격이었다. 또, 장난을 좋아해서인지 외모도 나이보다 젊어보
였다.
라한군, 가세.
예.
아함브라의 붙임성 있는 말투에 라한도 마을 사람들의 태도로
불쾌했던 마음을 털어 버렸다.
익스멈 촌장과는 또 다른 의미로 편안함을 주는 아함브라. 라한
은 왠지 이곳 블리아드 마을이 좋아질 것만 같았다
*
노인들과 비클만이 라한의 인도로 결계를 벗어났다. 그들은 결
계 밖에서 안을 바라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게.
이게 자네가 말한 결계인가?
결계가 이런 거였다니.
노인들이 입을 떡 벌린 채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결계를 단순히 보호막 정도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많은
수의 몬스터가 공격하면 보호막에 금이 가거나 깨진다고 생각해
왔다.
헌데, 환영을 이용한 결계라니. 그것도 실체처럼 만질 수도 있
는 그런 환영이라니.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이제 제 말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 그렇구먼. 이런 식의 결계였다니.
실체가 있는 환영이라서 몬스터들은 이곳을 통과하지 못합니
다. 이 안에 마을이 있다는 것도 모를 겁니다.
라한의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 목소리에 비클만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결계가 마법이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럼 마법사들은 이곳을 알아보겠군.
그건 마법사들이 어느 정도 수준이냐에 달렸죠. 익스멈 촌장
님. 알아보시겠습니까?
라한이 1 서클 마법사인 익스멈 촌장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가
이곳의 결계를 간파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라한의 물음에 익스멈 촌장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모르겠네. 아무리 봐도 진짜 같으이.
들으셨다시피 아무나 이곳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대
륙에서 이곳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열 명이 채 안 될 겁니다. 드
래곤과 엘프를 모두 포함하더라도 백 명이 안 될 거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대륙의 인간들 중 이 결계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굴레를 벗은 인간인 잉글리아트와 토일렛 정도
에 불과했다. 드래곤과 엘프를 포함한 숫자도 라한이 입 밖으로 꺼
낸 수보다 훨씬 적었다.
거기다 알아볼 수 있는 그 몇 명조차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
칠 정도로 교묘한 결계였다.
흠.
큼.
노인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뭍론, 그들이 라한의 말을 모두 믿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륙
에서 이곳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적다는 건 확실했다. 새삼 라
한의 능력을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대단하군.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허허허허. 라한군. 자네 처
음볼 때부터 마음에 들더니 어찌 이리 예쁜 짓만 골라서 하는가?
하하하하.
감사합니다, 아함브라님.
아닐세. 감사는 우리가 해야지. 흠, 내 손녀딸이 저놈에게 시집
가지 않았으면자 네한테 줬을 거야. 아깝군. 아까워.
아함브라의 말에 자경단 대장 비클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제니안과 결혼한 게
아직도 불만이십니까?
당연하지 이놈아. 산적 같이 생긴 놈이 꽃 같이 예쁜 내 손녀를
데려갔는데.
어르신!
말처럼 아함브라가 비클만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손
녀와 손녀사위가 된 비클만의 외모 차이가 너무 극명해서 농을 걸
어본 거였다.
이런 농담 역시 손녀 제니안과 비클만에 대한 사랑이 밑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정말 싫은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보다
행동으로 타박했을 테니 말이다.
흠, 근데 라한군.
예.
익스멈 촌장이 라한을 불러 세웠다.
아무리 만져 봐도 그냥 벽 같은데 어떻게 출입하지? 혹시 갇혀
있는 거 아닌가?
아까 나온 동굴 기억하십니까?
라한은 동굴을 통해서 결계 밖으로 나왔다. 이미 결계가 완전히
활성화되었기에 그곳이 유일한 입구였다.
물론, 라한 정도의 실력자가 잠시 마나를 흩어 놓는다면 출입이
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라한이 활성화된 결계를 흩을 생각이 없었으니 출입구
가 단 하나뿐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럼 그곳을 통해서만 오갈 수 있는 건가?
예. 아까 말씀드린 미로 길을 잘 기억하셔야합니다. 안에서 길
을 잃으면 영원히 못 빠져 나을 수도 있거든요.
음, 그렇군.
익스멈 촌장이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과연 이런 식의
반쯤 고립이 옳은 선택인가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한참 가만히 있던 익스멈 촌장이 다시 한번 의문을 제기했다.
혹, 자네가 이 통로를 없앨 수도 있는가? 음, 그러니까.
제가 마을 사람들을 마을 안에 가둘 수 있느냐는 얘기죠?
흠, 흠.
없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결계를 수정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려면 완전히 없애고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 제게는 이만한 결계
를 만들 마나석이 더 이상 없습니다.
라한에게 남은 마나석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 마나석으로는 기껏해야 꽤나 큰 저택을 결계로 둘러쌀 수 있
을뿐이다. 마을을 결계로 감싸는 데 들어가는 마나로는 턱없이 부
족했다.
그렇군.
이제 확인하셨으니 들어가시죠.
아, 비클만. 자네가 길을 잘 외워두게. 우린 늙어서 기억력이
영. 자네만 믿네.
나도 자네만 믿으이.
비클만. 잘 외울 거라 생각하겠네.
라한이 만든 동굴안의 미로는 엄청나게 복잡했다. 천재가 아니
면 한 번에 기억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런 어려운 미로를 노인들은 비클만에게만 떠넘기고 있었다.
비클만에게 거는 기대가 컸기에 의도적으로 책임을 떠안기는 것
이다.
노인들은 차기 촌장으로 비클만을 내정했다. 비클만 스스로는
모르지만, 장로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정해진 상태였다.
이 때문에 그에게 좀 더 많은 짐과 책임을 맡기려는 경향이 강했
다. 그렇게 해야 차후 촌장이 되었을 때 부담 가지지 않고 잘 이끌
어나갈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
다시 마을로 돌아온 라한과 노인들, 그리고 비클만.
그 중 노인들은 촌장이 머물던 집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반면,
비클만은 동굴에 있던 미로를 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의 머리
로 미로를 모두 외우는 게 힘들었던 모양이다.
왼쪽이던가?
오른쪽입니다 왼쪽, 왼쪽, 오른쪽, 오른쪽, 오른쪽, 왼쪽, 직
진 두 번. 왼쪽 갔다가 그 다음은 오른쪽.직진 한 번, 그리고 오
른쪽.
아, 알겠소.
중얼거리는 비클만에게 라한이 미로 통과 순서를 다시 읊었다.
동굴 미로를 다 외우지 못하는 비클만이 답답한 라한이었다.
비클만은 동굴에서 나온 후부터 계속 방향을 중얼거렸다. 잠시
라도 신경을 놓으면 통과하는 길을 잃을 것 같았다.
아유, 비클만씨.
말하시오.
어차피 이 길은 비클만씨만 사용할 건 아니죠?
그야 그렇소만.
마을 사람들 다 이용할 길이라면 그냥 적으세요. 왜 그걸 굳이
외우려고 애쓰세요?
라한이 핀잔을 주자 비클만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고맙소. 적으면 되는 거였군. 이거 참.
그럼 전 안에 들어가 볼게요. 혼자 적을 수 있죠?
지금은 가능할 것 같소.
그럼 수고하세요.
할 말을 마친 라한이 다시 촌장이 머물고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촌장을 포함한 여덟 노인들이 라한이 들어오는 걸 보고 놀란 표
정을 지었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호, 비클만이 벌써 다 외웠는가?
지금 메모하고 있습니다. 다 적으면 다시 한번 확인해 보려고
요.
에잉. 결국 적는 방법을 택하는군. 적으면 된다는 건 자네가 가
르쳤겠지?
예.
그럼 그렇지. 비클만은 융통성이 너무 없단 말이야. 쯧쯧. 걱정
이야.
아함브라가 혀를 끌끌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주변 노
인들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비클만의 충직함과 우직한 성격은 촌장을 하기에 딱 알맞았다.
또,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씨도 촌장이 되는 데 적격이었다.
헌데 융통성이 너무 부족하다는 게 문제였다. 아함브라를 비롯
한 노인들이 제일 안타까워하는 부분도 이 부분이었다.
형님.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닥치면 다하게 될 겁니다. 절 보
십시오. 저도 촌장이 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자네와는 달라. 자네는 그래도 머리는 좋았단 말일세. 촌장 일
을 너무 몰라서 처음에 힘들어했지만, 머리가 좋아서 쉽게 적응했
지. 헌데 비클만은 이게 문제야, 이게.
아함브라가 자신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혀를 찼다. 아무리 생
각해도 비클만의 부족한 융통성은 대책이 없었다.
저기 어르신.
어? 뭔가?
부탁이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라한이 노인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로서는 낭비할 시간이 없
어서 약간의 무례를 범할 수밖에 없었다.
음, 익스멈한테 대충 듣기는 들었지. 집을 지어달라는 말이지?
예, 어르신.
아함브라의 말에 라한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함브라는 익스멈이 촌장이 되기 전에 촌장직을 지냈다. 그 때
문에 익스멈 촌장보다 아함브라의 발언권이 더 강했다. 고작 10 여
년 촌장이었던 익스멈과 그 전에 20 년간 촌장이었던 아함브라의
경력 차이 때문이다.
익스멈 어떻게 생각하는가?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죠.
그건 당연한 거고. 어디서 어느 정도 크기로 지어야 할 건지 말
해보게.
그건 저. 아직 생각을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하고는.
아함브라가 라한의 눈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라한의 의
도를 알아보려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흠, 놀랍군. 아무것도 모르겠어.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 젊은이
인지.허, 참
아함브라는 라한의 눈에서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분노, 기쁨,
희열, 슬픔 그리고 피, 광기, 살육.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무려 백 세 가까운 삶을 살았던 아함브라가 벽을 보는 느낌을 받
을 정도로 완벽한 무(無)의 상태였다.
하긴, 시간이 전부는 아니지.
아함브라의 힘은 세월이었다. 많은 세월을 살면서 많은 사람을
겪어온 아함브라. 그 때문에 사람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의 성품을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남을
속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기꾼, 아함브라의 세월을 능가
할만큼 수련을 쌓은 검사, 마법사, 정령사. 깊은 지식으로 세상에
달관한 학자. 이런 이들은 아함브라의 능력 밖 존재였다.
어느 정도 크기를 원하는가?
저기 익스멈 촌장님은 제 골렘을 보셨을 겁니다. 그 녀석이 잠
깐 몸을 풀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으면 합니다.
이보게 라한. 자네 골렘이 몸을 풀 정도라면 가로 세로 백 미터
는 돼야 한다는 뜻인데, 무리일세. 지금이 농사철은 아니지만, 그
만한 집을 지을 주민을 선발하는 건 어렵다는 얘기일세.
그렇.군요.
라한이 김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아함브라가 피식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보게 라한군.
예. 어르신.
어떻게 할 텐가? 자네 능력이면 힘으로 마을을 굴복시켜서 집
을 얻어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함브라가 라한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모
르지만 상당히 위험한 발언인 건 분명했다.
어르신은 제가 그러길 바라십니까?
허허, 당연히 바라지 않지. 난 자네 생각을 듣고 싶네. 그렇게
할 생각인가?
아함브라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무리 그래
도 자기 자신을 위해 마을 사람을 해코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마을 사람들이 자신에게 피해를 줬다면 더 생각할 필요 없
이 마을을 쓸어버렸을 것이다. 그게 라한의 성격이고, 지금까지 그
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자신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는 힘없는 마을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집이야 안 되면 직접 지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허허허. 좋군. 좋아. 내 책임지고 자네 집을 지어주지.
예?
갑작스러운 아함브라의 말에 라한이 놀라 되물었다.
승낙하겠다는 말일세.
형님. 아무리 그래도 인력이.
익스멈 촌장의 만류에 아함브라가 손을 내저었다.
이보게 익스멈. 도움을 받았으면 베푸는 게 사람 사는 법이라
네. 라한군이 우릴 위해 결계를 만들어줬으니 우린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야지. 안 그런가?
-후후, 저 할아버지는 말이 통하네.
아함브라의 시원한 대답에 테세르가 끼어들었다. 이곳에 들어와
서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어?
응?
테세르의 등장에 노인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직 익스멈
촌장만 몸을 살짝 떨며 두려움을 표했다. 테세르가 베어울프를 학
살하던 그 장면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할아버지들, 안녕!
흠, 이건 뭔가?
자넨 누군가?
-나? 정령. 어, 저기 촌장할아버지는 날 봤을 텐데. 맞지?
그, 그게.
테세르가 손을 흔들자 익스멈이 순각 몸을 움찔거렸다. 극대화
된 공포가 불러온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흠, 자네가 그 검은 정령이로군. 얘기는 들었네.
-헤헤, 이거 부끄러운데. 아무튼 집 지어준다고 약속한거지?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갑자기 튀어나오네요. 테세르. 나와서
어르신들에 인사드려라.
라한도 테세르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지금
까지 항상 사람들을 피해왔던 그였기에 이렇게 끼어들 걸 전혀 예
상치 못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차라리 소개
를 해줌으로써 앞으로 편하게 지내도록 해주는 게 나을 듯했다.
-할아버지들 안녕!
야!
-흠, 흠.하세요. 주인 됐지?
라한이 소리친 건 테세르의 반말 때문이다.
물론 정령과 인간 사이의 일이니 반말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라한이 높임말을 쓰는 상대에게 테세르가 말을 놓는다면
라한과 테세르 사이의 관계가 묘하게 변질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라한은 그런 어색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테세르에게
높임말을 강요했다.
나도반갑네. 허허, 귀엽게 생겼구먼.
-그치? 맞지? 나 귀엽게 생겼지? 하하하하.
흠, 흠.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버릇이 좀 없네요.
어색해하는 노인들에게 라한이 사과를 건넸다. 테세르는 귀엽다
는 말이 기분 좋았는지 실실 웃기만 했다.
아닐세. 근데 정령에게 말을 놔도 되는 건가? 우린 이런 일에
서툴러서.
이 녀석은 괜찮습니다.
-그래. 맞아. 괜찮아. 특히 아함브라 할아버지는 다용서해 주
지. 하하하.
테세르가 아함브라에게 친근감을 표했다. 그게 집을 지어주겠다
는 말 때문인지, 귀엽다고 한 말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테세르가 아함브라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어허, 그놈 참.
저, 어르신들. 전 급히 갈 곳이 있어서 마을을 비워야 합니다.
라한의 말에 노인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모였다. 결계에 대한 믿음
이 확실하지 않은 이때, 라한이 떠나는 게 걱정스러운 듯했다.
음, 멀리 가는가?
예. 좀 먼곳입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알겠네. 우린 빠른 시일 안에 자네 집을 완성하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라한이 집을 나오자 테세르가 어깨 위로 올라갔다.
-새로운 힘을 얻다
-주인 일이 잘 돼서 다행이다.
응. 시간을 벌었어.
-근데 어딜 가려는 거야?
가보면 알거다. 내가 마법 쓰면 의식 잃는다는 거 알지? 잘 지
켜라. 텔레포트!
라한이 마법을 사용해 마을을 벗어났다. 기절할 걸 각오하고 행
하는 위험천만한 시도였다.
라한이 촌장의 집을 나가자 익스멈 촌장이 우려의 빛을 띠었다.
형님. 집 크기가 어마어마합니다. 마을 사람들한테 그 큰일을
모두 맡긴다는 건 아무래도 좀.
라한군은 보배일세.
예?
시간이 더 지나봐야 확실히 알게 되겠지만, 내 눈에 그의 능력
이 범상치 않아 보이더군.
익스멈 촌장의 의문에 아함브라가 차분히 말문을 열었다. 그가
입을 열자 다른 노인들도 모여 앉았다. 그들도 익스멈과 같은 의문
을 품고 있었음이다.
그건 베어울프와의 전투에서 직접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도의 능력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
더군.
그게 무슨?
그의 눈에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네. 물론 수련을 오래 쌓은
이들도 내 눈을 속일 수 있지. 하지만, 그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하게 할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네.
아직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익스멈 촌장의 재차 질문에 다른 노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들 역시 익스멈 촌장과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내 나이 올해 아흔여섯 일세. 오래 살아오면서 늘어난 건 사람
보는 눈뿐이더군. 근데 그에게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네. 마치
생명체가 아닌 존재를 보는 것 같았지. 난 그 이유를 세월에서 찾
았네.
세월?
나보다 오래 산 존재라면 그렇게 완벽한 무를 풍기지 않을까하
는 생각을 한 게지.
아함브라의 판단은 거의 정확했다. 다만 라한의 나이가 아니라
망각의 샘물로도 지우지 못한 기억 때문이라는 걸 몰랐을 뿐이다.
말도 안 됩니다. 형님보다 오래 살다니요. 형님 나이가.
말이 되네. 그가 인간이 아니라면 말이 되는 게지.
아함브라의 말에 익스멈 촌장을 비롯한 주변 노인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한참 멍하게 있던 노인들. 어느 한순간 경악한
얼굴로 아함브라의 얼굴을 바라봤다.
설, 설마?
설마 드. 드.
맞습니까?
난 그렇게 생각했네. 그 결계만 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아마 확실할 걸세.
아함브라의 설명에 익스멈 촌장이 의자에 털썩 기대앉았다. 힘
이 확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드래곤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다시 생각
해 보자 그게 가장 합당한 생각 같았다. 듣도 보도 못한 골렘과 검
은 정령의 등장. 인세에 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결계. 드래곤이
아니면 해답을 찾기 힘들었다.
그럼 그의 비위를 맞춰야겠군요.
그럴 필요는 없네. 어찌됐든 그는 유희중이지 않은가? 괜히 그
의 정체가 들켰다는 걸 알렸다가는 큰 화를 부를 수도 있는 일이야.
이럴 땐 모른 척 하는 게 상책이지.
아함브라는 라한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유희
중이라고 단정 지었다. 오래 살면서 여기저기서 들은 풍문은 있는
모양이다.
그럼 드래곤이 왜 여기 나타났을까요?
음, 내 생각인데 아마 어떤 부상을 당한 게 아닐까 싶네. 왜 동
물들은 영역 싸움을 하다가 다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드래곤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 만약 부상당해서 숨어들어온 거라면
영역 싸움에서 패했을 게야.
아함브라는 드래곤을 여타 동물들과 같이 취급하고 판단했다.
시골을 벗어나보지 못한 아함브라. 드래곤에 대해 무지해서 생긴
오해였다.
세력 다툼이나 알력이라는 말도 드래곤이 여느 동물과 같다는
데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드래곤이 혼자 생활한다는 아주 간단
한 사실만 알았어도 이런 오해는 벌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근데 그를 왜 보배라고 하신 겁니까?
그가 드래곤 본체로 있다면 아니겠지. 하지만, 그는 인간의 모
습으로 우리 마을에 들어왔네. 그가 유희를 하는 지금 순간만큼은
우리 마을의 일원이나 마찬가지란 말일세.
그럼?
그가 유희를 즐기는 동안 우린 위험이 없어지는 거라고 볼 수
있지. 설사 왕국에서 군대를 끌고 쳐들어오더라도 그가 있는 한 우
린 안심하고 지낼 수 있네.
아함브라의 설명에 익스멈 촌장과 주변 노인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제야 아함브라가 말한 보배의 의미를 깨달은 모
습이었다.
그럼 형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가 해달라는 걸 다
들어줘야 합니까?
당연히 다 들어줘야지. 잘못 하면 몬스터가 아니라 드래곤에게
마을이 쑥대밭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럼 보배라고 하기도 어렵지 않습니까?
허허, 그가 유희중이라는 걸 잊었는가? 그가 바라는 걸 들어주
기는 하되 무리인 일은 무리라는 인식을 풍겨야 하네. 그럼 다음에
는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겠지. 그도 유희를 그만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바보 같은 생각과 결과였지만, 그리 잘못된 판단은 아니었다. 라
한이 드래곤만큼 강한 것도 사실이고 마음만 먹으면 마을을 날려
버릴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또 왕국에서 군대를 파견하더
라도 라한이 마음만 먹으면 모조리 처리할 수 있으니 그것 역시 어
느 정도 타당한 말이었다.
그럼.
그에게 우리가 그의 정체를 눈치 챘다는 인상을 심어주면 안 되
네. 혹, 그랬다가는 그가 유희를 그만둘지도 모를 일이야. 물론,
곱게 다른 곳으로 가준다면야 상관없지만, 유희를 방해받았다는
생각으로 마을에 피해를 주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렇군요. 저희는 모른 척 해야 하는군요.
그렇지. 그럼 나가서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게. 절대로 라한이
드래곤이라는 걸 알려서는 안 되네. 심지어 비클만한테도 라한의
정체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키게.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전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집 지으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아서요.
수고하게.
이렇게 라한에 대한 마을의 대우가 정해졌다. 한마디로 극빈 대
우였다. 오판과 오해에서 비롯되었지만, 어찌됐든 라한으로서는
손해 볼 거 없는 장사였다.
*
블리아드 마을에서 텔 fl 포트 했던 라한. 드래곤 산맥이라 불리
는 레비안 산맥에 쓰러져 있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마법을 쓴 직후
에 의식을 잃은 것이다.
-슬슬 깰 시간이 됐는데.
테세르가 쓰러진 라한의 옆을 서성였다.
테세르는 12 시간이라는 꽤 긴 시간 동안 라한을 지켰다. 꽤나 지
루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헌데도 테세르의 얼굴에선 지루하다는 표정을 찾기 힘들었다.
이유는 주변에 널려 있는 몬스터들 시체가 말해줬다.
-또 어디 안 나타나나?
레비안 산맥은 대륙에서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몬스터가 많
은 숲이다. 이에 쓰러진 라한을 노리고 나타난 몬스터 역시 엄청나
게 많았다.
테세르는 그렇게 나타난 몬스터를 가지고 놀듯이 하나씩 처리했
다. 위험할 수 있는 몬스터의 습격이 테세르에게는 놀이의 하나로
전락된 것과 다름없었다.
으, 으.
-오! 깼어?
라한이 신음을 흘리자 테세르가 바싹 다가앉았다.
으윽! 젠장 역시 의식을 잃었군.
-뭐, 그렇지.
테세르가 뒷짐을 진 상태로 주변을 쭉 훑었다. 라한에게 주변 상
황을 일깨워 칭찬받으려는 의도였다.
이게 무슨 냄새야? 피 냄새?
-어? 다 몬스터들이 흘린 피 냄새지. 밤에 몬스터들이 얼마나
많이 덤비는지 말이야. 내가 그놈들 다 처리하느라 진땀 뺐다.
테세르의 설명을 들은 라한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도 통증이 남아 있는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모습이었다.
일어난 라한이 주변을 돌아보며 입을 떠억 벌렸다. 죽은 시체들
의 처참한 모습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야!
-왜?
대체 이놈들을 어떻게 처리한 거야? 시체들 상태가 왜 이래?
-뭐, 심심해서 좀 팼지.
주변 시체들의 몸 전체가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죽어서 빛이 바
랜 것과는 또 다른 모습. 테세르가 주먹으로 몬스터들을 팼던 게
분명했다
내가 미쳐. 하여간 넌.아유, 됐다. 됐어.
-쳇, 주인 다칠까봐 몬스터들 다 처리해 줬더니.
곱게 처리했으면 내가 이러겠어? 이게 뭐니? 이게. 눈은 시퍼
렇고 관절마다 피멍 들어 있고, 거기다 저놈들 코는 왜 저래? 대체
저 코 안에 뭘 집어넣은 거야?
단순히 멍든 정도라면 라한도 이렇게 치를 떨지는 않을 터였다.
헌데, 시체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는 게 문제였다.
시체들의 코에 들어 있는 큼지막한 돌멩이와 눈 주변의 낙서들.
거기다 하트 모양으로 선명하게 새겨진 멍 자국까지. 라한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광경이었다.
-심심하니까 그렇지. 주인도 12 시간 동안 멍하게 있어봐. 안 심
심하겠어?
그래도 그렇지. 아고, 됐다. 그만하자. 말하는 내 입이 더 아
프다.
-쳇. 전에는 불침번 안 섰다고 뭐라고 하더니만. 오늘은 제대로
섰는데도 뭐라고 하네. 변덕쟁이 같으니라고.
뭐야?
-아니다. 그냥 혼잣말이다. 근데 여긴 왜 온 건데? 전에 왔던 거
기 같은데.
라한과 테세르가 나타난 곳은 오래전에 휴란트가 신궁을 얻은
장소였다.
알아볼 게 좀 있어.
-뭔데?
보면 알아. 음.
라한이 작게 신음을 흘리고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정신을 집중
시켜서 과거에 느꼈던 묘한 기운을 찾으려 애썼다.
-주인 뭐해?
쉿! 조용해 봐.
라한이 계속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전에 느꼈던 그 특이한
기운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이 기운은 과거에 테세르도 느끼지 못했다. 라한 역시 막연하고
희미하게 느끼는 정도로 그쳤다.
이쪽이군. 가자.
-어디 가는데? 뭘 느낀 건데?
가보면 알아.
라한이 눈앞에 펼쳐진 절벽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곳에서 다
시 눈을 감고 기운을 찾으려 애썼다.
이쪽인데 벽이군, 흠, 환영인가?
라한의 감각에 기운이 시작되는 곳은 낭떠러지 건너편 벽이었
다. 눈에는 단순한 벽으로 보이지만, 분명히 무언가 있는 게 분명
했다.
어디 볼까?
라한이 돌을 집어 건너편으로 던졌다. 날아가던 돌은 벽에 부딪
히는가 싶더니 이내 벽 속으로 사라졌다. 건너편 벽 속에 공간이
있다는 얘기였다.
-어? 사라졌다.
응. 분명 이 건너편에 뭔가가 있어.
-말도 안 돼. 마나의 정령인 내가 느끼지 못하는 환영이라니.
그럴 리가 없어.
마나가 아니야. 나도 이 기운이 뭔지는 모르겠어. 근데, 한 가
지 확실한 건 쉽게 느낄 수 없는 기운이라는 거야. 고도의 수련을
쌓지 않으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기운이야.
라한조차도 이 기운이 새어나오는 곳을 찾는 데 많은 정신력을
소모해야 했다. 심지어 마나의 정령이라는 테세르는 이 기운을 느
끼지도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느껴지지도 않다니. 믿을 수 없어.
그리고 이건 내 생각인데 이 기운은 마나에 친숙할수록 못 느
끼는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이곳은 누군가에 의해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어. 근데, 내가 보
기에 그 은폐 방식이 거의 절대적이라는 거야.
-무슨 말이야? 좀 쉽게 설명해봐.
테세르가 약간의 짜증을 담아 라한을 몰아붙였다. 마나의 정령
이라는 자신이 기운을 느끼지 못한 게 화났던 모양이다.
테세르의 날카로운 대꾸에 라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테세르의
어린아이 같은 생떼가 유쾌했기 때문이다.
녀석.
대부분 기감이 예민해 지려면 많은 수련을 쌓아야 돼. 근데, 이
놈의 대륙에는 마나가 온통 퍼져 있거든. 즉, 수련을 쌓으면 쌓을
수록 마나에 친숙해 질 수밖에 없단 말이야. 근데, 마나에 친숙한
존재가 오히려 느끼지 못하는 기운이라면, 이곳을 찾을 수 있는 사
람은 아무도 없겠지
-아하, 그러니까 이곳은 그 누구의 발길도 허락하지 않은 곳이
란 말이지.
그건 아닌 것 같아. 전에 휴란트가 이 근처에서 발견됐거든. 내
추측으로는 휴란트가 이곳에 들어갔던 것 같아.
라한은 오래전부터 휴란트의 행동을 의심해왔다. 휴란트의 남달
리 뛰어난 이해력이 그 이유였다.
카이렌이 뛰어난 스승인 건 사실이다. 검에 있어서는 대륙 최고
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휴란트는 그런 뛰어난 스승을 만났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검에 대한 깨달음이 너무 빨랐다.
물론, 카이렌이 하루 24 시간 휴란트 옆에 붙어서 지냈다면 그 정
도로 빠른 깨달음도 이해가 갔다. 어긋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것
까지 지도할 수 있으니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헌데 카이렌이 하루 중 검을 가르치는 시간은 겨우 서너 시간.
이 정도로는 휴란트의 빠른 깨달음을 설명하기 힘들었다.
결국, 카이렌 혹은 그에 버금가는 어떤 이의 철저한 지도를 받았
거나 이곳에서 무언가를 얻었다는 결론밖에 없었다.
-휴란트. 하긴, 좀 이상하긴 했어. 항상 혼자서 중얼거리고 멍
청해 보이면서도 가끔씩 희한하게 똑똑한 발언을 하긴 했었지.
그것도 있지만 그 녀석이 가지고 있는 활. 심상치 않았어.
-그래?
응. 여기서 풍기는 기운하고 상당히 비슷해. 완벽하게 같지는
않은데 꽤나 비슷한 기운이었던 건 분명해.
-음, 그렇구나. 난 그 활에서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휴란트의 신궁에서 풍기는 기운은 신성력이다. 하지만, 이곳에
서 풍기는 기운은 신성력이 아니었다.
헌데도 라한은 두 기운 사이에 흡사한 점이 많다고 느꼈다. 왜인
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두 기운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꼈
을 뿐이다.
들어가 보자. 테세르.
-알았어.
라한은 현재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이 탓에 낭떠러지 건너편
에 있는 절벽으로 갈 방법이 없었다.
라한이 테세르를 부른 건 그를 이용해서 건너가기 위해서였다.
물론, 플라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다 느리고 위태위태할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테세르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으차!
조심해.
라한을 들어 올린 테세르가 낭떠러지를 건너 건너편 절벽으로
날아갔다. 계곡풍이 불어 몹시 흔들렸지만, 용케도 놓치지 않고 잘
버텼다.
-여기야?
잠시만.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고 다시 기운을 찾기 시작했다. 가까운 곳
이라서인지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운의 출처를 찾아냈다.
여기 맞군. 손으로 밀어봐.
-응.
라한의 말에 따라 테세르가 한 손으로 절벽을 짚었다. 이에 손이
쑥 들어가며 벽 속에 파묻힌 모양처럼 변했다.
제대로 찾았군. 들어가자.
-어.
절벽에 내린 라한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겉으로는 절벽으로
스며드는 모양새였다.
*
안에 들어선 테세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동굴이네.
음, 기운이 강해졌어.
-근데, 주인. 휴란트가 여기 들어갔다가 나왔다면 비싼 건 없을
텐데. 뭐하려고 온 거야?
난 보물찾기 하러 온 게 아니야.
-그럼?
이 안에서 풍기는 기운 말이야. 아무래도 내 깨달음하고 관계
가 있을 것 같아.
단전과 심장이 가까워지면서 제령기와 제란기가 조금씩 변질되
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두 기운이 조금씩 섞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계속 가까워지다가 어느 순간 단전과 심장이 겹쳐지면?
아마도 지금 가진 제령기와 제란기는 더 이상 제령기와 제란기가
아니게 될 터였다. 둘의 속성이 묘하게 섞인 다른 속성으로 재탄생
될 게 분명했다.
라한은 최종적으로 가지게 될 재탄생된 기운이 이곳에서 풍기는
기운과 흡사할 거라고 생각했다.
있으되 느끼지 못하는 기운. 힘을 가지고 있으되 힘이 없어 보이
는 기운. 상극의 기운이 반발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이것
뿐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리로 왔군.
응.
라한이 힘들여서 이곳을 방문한 이유도 어찌 보면 살기 위해서
였다.
자신이 미래에 가지게 될 기운을 미리 느껴 안정성을 꾀하려는
것. 또, 결과를 미리 느낌으로서 단전과심장의 결합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려는 것. 이 모든 게 라한 나름의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뚜벅!
라한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동굴 안에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도 안 사는 것 같지?
-응.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이는데.
대부분의 동굴과는 달리 이곳에는 그 어떤 생명체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동굴마나 산다는 쥐, 박쥐조차도 이곳에는 보이지
않았다.
헌데도 동굴 안은 활력이 가득 차 있었다. 생명력과는 또 다른
활력. 이곳에서 풍겨오는 묘한 기운이 만들어낸 현상인 듯했다.
뭔가 이상하긴 이상해.
한참 걸어가자 작은 방이 보였다. 라한도 이 방에 들어갈 때는
세라 소드를 오른손으로 꽉 움켜쥔 채였다. 혹시 생길 수 있는 불
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뚜벅!
라한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활이 놓
여 있었음직한 보관대였다 아마, 휴란트가 가지고 있는 신궁이 놓
여 있던 곳이리라.
-텅 비었네.
아니, 가득 차 있어.
-뭐가?
밖에서 느꼈던 기운 말이야. 이 방에 가득 차 있어. 어떻게 이
곳에만 이 기운들이 모일 수 있는지 모르겠군.
이곳은 대륙 최초의 대신관인 레비안을 가두기 위해 판테아가
만든 공간이었다.
대신관이었던 레비안은 이곳에 갇혀서도 계속해서 신성력을 키
웠다. 그리고 그의 육체가 썩어서 사라지는 순간, 그는 가진 모든
신성력을 이 방안에 풀었다. 라한이 느낀 신성력은 레비안이 풀었
던 신성력의 일부였다.
하지만, 라한이 느끼고 있는 기운이 신성력만 해당되는 건 아니
었다. 판테아가 레비안을 가두기 위해 결계처럼 둘러둔 기운. 신의
기운에 가장 근접한 사자들의 기운도 함께 느꼈음이다.
-난 하나도 안 느껴져서 모르겠다.
흠, 그럼 어디 한번 느껴볼래?
-어떻게?
잠시만.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 상태로 주변에
가득한 기운을 몸속으로 끌고 들어왔다.
으음.
기운이 단전과 심장을 지날 때 라한이 묘한 신음을 터트렸다. 아
픔 때문에 터트리는 비명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른함과 포근함을
만끽하면서 터트린 환희의 신음에 더 가까웠다.
정말 묘하군. 이런 기분이라니.
-주인 뭐해?
잠깐 기다려봐.
라한이 단전에 들어온 기운을 테세르에게 조금씩 보냈다. 이에
테세르의 검은 빛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 이거 왜 이래?주인. 이거 뭐야?
가만히 있어봐.
라한이 테세르에게 보내던 기운의 양을 아주 조금씩 늘렸다. 그
에 따라 테세르의 검은 빛도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회색빛으로,
그리고 흰빛으로.
잠시 후, 테세르가 눈부시게 깨끗한 하얀 색으로 탈바꿈되었다.
-주인 이거 뭐야?
여기에 가득 차 있는 기운을 너한테 보낸 거야. 제령기 대신 보
낸 거지.
-음, 기운이 있긴 있구나. 근데, 이거 몸에 안 좋은거 아냐?
테세르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자신의 몸이 변하
게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렇진 않을 거야. 이 기운은 그러니까 뭐랄까? 순수하다고 해
야 하나? 아무튼 아주 깨끗한 기운이야.
-그래도 무서워.
테세르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에 서툴렀다. 정령들의 고리타분
한 생각이 테세르에게도 배어있는 탓이다.
그나마 테세르이기에 이 정도라도 버텼지 다른 정령이었다면 기
겁해서 정령계로 돌아갔을 게 분명했다.
무서워하지 마. 어차피 이 기운도 지금 내 몸을 통해서 네게 가
고 있는 거야. 문제가 생겨도 내게 먼저 생길 테니까.
라한이 테세르를 안심시켰다. 라한의 말에 테세르도 어느 정도
두려움을 떨쳐 버렸다.
하지만, 실제로 이 기운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은 라한이
었다. 과연 이 기운을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기운이 오히
려 심장과 단전에 문제를 남기는 건 아닐까? 이런 저런 고민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흠, 다행이다.
-뭐가?
아까 이 기운이 단전과 심장을 지날 때, 사실 좀 두려웠어. 혹
시나 내 기운과 반발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거든. 근데 아무렇지
도 않더군. 최소한 이 기운과 내 기운이 반발하지는 않는다는 얘기
잖아.
-근데, 이 기운 엄청 이상하네. 주인한테 들어오는 기운의 양은
줄어든 것 같은데 힘이 넘쳐.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기운을 다시 한번 느끼기 시작했다.
아, 놀랍군.
-왜?
기운이 엄청나게 강해. 같은 양이면 거의 다섯 배 이상의 힘을
낼 것 같은데.
-그래? 음, 위험하지는 않겠지?
위험하지 않게 만들어야지.
다섯 배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실상은 그 이상이었다. 라한이 다
섯 배라고 한 건 이 기운을 당장 받아들였을 때, 사용할 수 있는 힘
을 말한 것이다. 라한이 크게 성장해서 이 기운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열 배 이상의 힘도 발휘할 수 있을 듯했다.
-주인. 그럼 앞으로 주인이 이 힘을 사용하는 거야?
글쎄. 한 번 해볼까?
라한이 테세르에게 가던 기운을 줄이고 가부좌를 틀었다.
-왜?
심법 한 번 돌려봐야겠어.
-아, 알았어.
라한이 눈을 감고 심법을 운용했다.
먼저 라한이 제란기를 돌리는 방법으로 주변의 기운을 받아 단
전으로 유도했다. 그렇게 해서 단전에 주변에 가득한 기운을 담기
위해서였다.
헌데, 단전에 들어왔던 기운은 그 자리에 잠시 머물더니 이내 대
기 중으로 돌아가 버렸다. 마치 단전마저 길의 한 통로로 사용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빌어먹을.
제란기를 돌리는 심법이 실패하자 제령기를 돌리는 법으로 주변
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헌데 기운은 이번에도 심장 주위에 잠시 머물다 대기 중으로 흩
어져 버렸다 마찬가지로 심장 역시 통로로만 사용하는 듯했다.
젠장.
-왜? 잘 안 돼?
응. 그냥 지나가 버린다.
-음, 그럼 안 모아지는 거야?
라한의 얼굴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이 기운을 받아들일 수 없다
는 데에서 충격을 받았다.
라한의 심장과 단전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아무런 발전
없이 이대로 가까워졌다가는 엄청난 통증을 유발할 건 자명한 일.
어쩌면 라한 스스로 고통을 버티지 못하고 자살할 수도 있는 문제
였다. 라한 역시 인간이기에 통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탓이다.
반면, 제령기와 제란기를 주변에 가득 찬 신성한 기운으로 바꾼
다면통증 없이 겹치는 게 가능하다. 또, 더 강한 힘을 가지게 됨으
로써 지금까지 쓰지 못했던 8 서클 마법도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어떻게든 모으고 말겠어. 지금 내 기운을 이 기운으로 바꿔 버
리겠어.
라한이 결의를 다지고 다시 심법을 운용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그래도 안 되면 세 번, 네 번, 다섯 번. 끊임없이 시도하고
노력할 생각이었다.
*
라한은 동굴 안에서 근 한 달을 보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심법으로 이 기운을 담으려 했다. 그러
다 십 일 쯤 지났을 때, 다른 방법을 이용해야 이 기운을 담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때부터 새로운 방법을 찾느라 하루의 대부
분을 할애했다.
그리고 지금.
라한은 이 기운을 몸에 담는 행동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 맞아. 이 기운은 자연도 아니고 마나도 아니었어. 이 기
운을 몸에 담으려 하는 행동 자체가 어리석었지, 후후후.
말만 들으면 거의 자포자기(自暴自棄)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라한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그게 아님을 짐작케 했다.
-그럼?
이 기운은 다른 게 아니었어. 내 몸에 있는 기운. 아니 생명이
있는 물체와 없는 물체 모두가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기운이었어.
-어렵다.
후후후,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대소를 터트린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상태로 심법이 아
닌 명상에 빠져들었다.
눈을 감은 라한의 얼굴이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또 잠시 후에
는 푸른 빛깔을 띠며 시체처럼 변했다.
-주인!
라한은 테세르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아니 듣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의 내면과 대화하며 그 내면이 겉으로 드러나도록 설득했다.
이번에는 라한의 얼굴이 검게 변했다. 테세르의 원래 색깔과는
또 다른 빛나는 검은색이었다.
-주, 주인.
내 안의 힘. 내가 가진 힘. 그런 건 이제 없다. 힘? 그런 건 스
쳐가는 바람일 뿐. 그저 내 안에 잠겨 있는 나를 일깨울 뿐이다.
우우우우우웅!
라한의 깨달음이 계속되면서 동굴에 묘한 기류가 용솟음쳤다.
라한이 가지고 있던 제령기와 제란기가 몸에서 빠져나가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라한은 그렇게 가진 힘을 모두 버리는 듯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흩어졌던 제령기와 제란기가 라한의 몸속으로 빠른 속도로 되돌아
왔다. 이에 따라 힘이 빠져나갈 때보다 더 강한 기류가 동굴 안에
용솟음쳤다.
제령기와 제란기를 다시 받아들인 라한. 다음은 새로운 기운을
일깨워서 몸에 차곡차곡 쌓았다.
나는 나. 이제 내가 곧 힘이다.
라한이 새로운 기운을 쌓는 속도를 배가시켰다. 이번에는 단전
과 심장 같은 특정한 곳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몸 자체, 라한 그 자
체에 새로운 힘을 포용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쿠쿵!
결국, 라한의 몸에 새로운 기운이 가득 찼다. 그러자 주변에 가
득 차있던 기운도 라한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번쩍!
라한이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봤다. 라한의 눈에서 백색의 빛나
는 안광이 동굴을 잠깐 밝혔다 사라졌다.
-주인 괜찮아?
.
테세르의 물음에도 라한은 주변을 멍하게 돌아보기만 했다. 그
모습에 테세르의 얼굴이 초조하게 변했다.
-라한 주인! 정신 차려!
피식!
난 괜찮아.
테세르의 재차 외침에 라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멍하던 눈빛도
원래대로 돌아온 채였다.
-어떻게 된 거야?
힘을 얻었어. 아니, 나 자신을 다시 깨우쳤어.
-아무튼 나쁜 일은 아니지?
응. 아직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지만, 좋은 쪽으로 들어선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통증으로 쓰러지는 일은 없을 거야.
라한의 얼굴에 기쁨과 아쉬움이 함께 공존했다. 그 표정을 보며
테세르가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이 제대로 된 건 아닌 것 같은데?
휴우우, 그게 좀 그러네.
-왜?
원래는 제령기와 제란기를 모두 버리고 새로운 힘만 가지려고
했어. 근데, 기존에 있던 힘을 버리는 게 쉽지 않더군. 이미 내 몸
에 길들여진 힘이라서 대기 중으로 흩어졌다가도 다시 돌아와 버
린다.
새 술은 새 그릇에 담는 법. 라한 역시 기존에 있던 힘을 모두 버
리고 깨끗한 몸에 새로운 힘을 담으려 했다.
헌데 이미 몸에 적응해 버린 제령기와 제란기가 라한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대기 중으로 힘겹게 내보냈음에도 다시 본래 있던 자
리로 돌아온 것이다. 라한이 의도했던 바와는 많이 어긋난 셈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새로 얻은 힘으로 기존에 있던 힘들을 녹여서 흡수하는 수밖에
없지. 근데 문제는.
-문제는?
힘을 완전히 융화시키기 전까지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는
거야. 아니, 쓸 수는 있는데 불안정해서 극도로 위험해.
라한의 몸속에는 기존에 있던 제령기와 제란기, 1 서클의 마나,
그리고 이번에 새로 얻은 기운까지.모두 네 가지 힘이 공존하고
있다.
얼핏 강한 힘을 얻은 소리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몹시 위험하
고 불안정한 상태였다.
세 가지 힘이 각기 다른 성질을 가지고 한 곳에 모여 있기 때문
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에 얻은 힘이 기존에 있던 세 가지
기운을 아우르고 있다는 정도였다.
-힘을 쓰면 어떻게 되는데?
글쎄. 힘이 제대로 발휘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 또 몸이
버틸 수도 있고 못 버틸 수도 있어 아무튼 몹시 불안정한 상태야.
이번에 얻은 힘이 기존에 있던 세 가지 기운을 감싸듯 위치하고 있
기는 한데, 에휴, 모르겠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새로 얻은 힘이 기존에 있던 힘을 완전히 흡수해서 융화시킬 때
까지 기다려야지 지금은 그 수밖에 없어.
힘을 얻었으나 아직 사용하기는 무리였다. 새로운 힘이 제대로
깨어있지 않은 탓이다.
라한이 새로 얻은 힘은 어느 한 곳이 아닌 몸 전체에 잔잔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아직 제대로 일깨우지 못한 상태라서 반쯤은
굳어 있는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런 상태에서 무리하게 힘을 사용하는 건 위험했다. 먼저 이 힘
을 차근차근 부드럽게 만들어서 몸에 적응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그렇게 새로운 힘을 완전히 일깨운 후에 기존에 있던 힘을 흡수하
게 만든다면 힘을 되찾는 건 순식간에 이루어질 터였다.
-안 좋은 거야?
아니, 어차피 이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전에도 해결책은 시
간뿐이었지만, 그때는 시간이 흘러도 제대로 될지 미지수였지. 근
데, 이젠 아니야. 시간만 흐르면 예전의 힘을, 아니 예전보다 훨씬
강한 힘을 사용할 수 있어.
-다행이다. 그럼 이제 그냥 놀면 되는구나.
테세르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정말 좋아하는 테세르를 보
면 라한도 함께 웃었다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친구가 옆에 있다
는 게 행복했다.
후후, 그건 아니지. 이제 새로 얻은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깨우
쳐야 돼.
-어? 왜?
새로 얻은 힘으로는 마법을 못 써. 마나하고 체계가 다르거든.
전에 마법을 쓸 때 사용했던 제령기는 인위적으로 마나 체계와 흡
사하게 만들어서 썼는데, 이건 그게 안돼. 기운 그 자체가 하나의
완전체거든. 마치 생명체처럼.
-그럼 앞으로 마법을 영영 못 쓰는 거야?
마법은 못 쓰겠지만, 이 힘으로 마법 비슷한 힘을 만들어 낼 수
는 있어. 마법을 다른 방법으로 써야 되겠지.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테세르는 아직 라한이 새로 얻은 힘에 대해 잘 몰랐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지도 모른다. 그와는 전혀 다른 체계의 새로
운 기운이니 말이다.
기운의 체계가 다르니까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야 이 힘을 쓸 수
있어 어차피 힘이 융화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때까지 이거
나 연구해야겠다.
-마법 주문 새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과 비슷한 거야?
그냥 그렇게 이해하면 빠르겠네.
라한조차도 아직 새로 얻은 기운에 대해 완벽히 파악하지 못했
다. 다만, 전에 가졌던 기운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과 이 기운을 제
대로 쓰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연구해야 한다는 건 확실했다.
-그럼 다시 힘을 쓰는 데 얼마나 걸리는 거야?
모르지. 빠르면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몇 년, 몇 십
년이 걸릴 수도 있어. 이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라서.
-근데 주인. 우리 어떻게 돌아가지? 여기서 마을까지는 꽤 먼데.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면 블리아드 마을로 돌아가는 게 쉽지 않
다. 그곳과 레비안 산맥의 거리 때문이다.
블리아드 마을은 대륙의 중앙의 조금 북쪽에 위치한 케라스 왕
국의 북부 지역이다. 위치상 대륙의 중앙부분인 셈이다. 헌데 이
곳은 대륙 남동부 끄트머리였다. 걸어서 이동한다면 못해도 몇 달
은 걸릴 거리였다.
후후, 그건 이미 준비해 뒀지.
라한이 허리에 맨 작은 가방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오래전에 만
들어둔 텔레포트 마법 스크롤이었다.
-아, 스크롤을 미리 준비해 뒀구나.
응. 아공간을 못 열 것 같아서 미리 가방에 넣어 놨지. 이게 내
가 가진 마지막 스크롤이야. 가자. 일단 마을로 돌아가야겠다.
-응.
텔레포트!
라한이 마법을 사용해서 마을로 돌아갔다.
라한이 사라지자 감춰져 있던 동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라한이 머물렀던 동굴은 더 이상 감춰진 동굴이 아니었다. 라
한이 판테아의 기운과 레비안의 기운 모두를 흡수했기 때문이다.
-로테마이어스와 라한의 첫 만남
마을로 돌아온 라한은 어처구니없는 소식을 접해야 했다. 마을
저수지에 귀신이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괴물도 몬스터도 아닌 귀신이라니.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당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촌장님. 그리고 여러 어르신들. 좀 자세히 설명해 보세요. 귀신
이라니오. 이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습니까?
귀신이 분명하네. 아니면 마족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좀 가보
게. 시간이 없네.
촌장이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라한을 재촉했다. 얼굴 표정만으로
도 그가 겁에 질려 있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흠, 마족이라. 투바는 아니겠지? 테세르.
-응.
좀 보고 와 볼.아니다. 같이 가자.
테세르에게 시키려던 라한이 말을 정정했다. 직접 가서 귀신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한 듯했다.
-괜찮겠어? 주인은 지금 힘을.
너희들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슈라.
라한이 슈라도 소환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라한은 마을 주민들이 말한 귀신이라는 걸 믿지 않았다. 하지만
마족이라는 건 충분히 있을법한 얘기라고 생각했다.
직접 투바라는 마족과 동료가 된 적도 있지 않은가? 또 8 서클 마
법까지 마법 주문을 가르쳐 준 존재도 마족이었고. 직접 본 적
이 많으니 마족이라는 말에는 어느 정도 믿음이 갔다.
-음, 한 달 만이군.
시간 없다. 일단 가자.
-알겠다.
비클만과 익스멈 촌장이 저수지 쪽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그 뒤
를 라한이 테세르, 슈라를 대동한 채 따랐다. 테세르는 어느새 인
간 정도의 크기로 몸을 불린 상태였다.
익스멈 촌장이 말한 저수지는 저수지라고 불리기 민망할 정도로
작았다. 단순히 작은 개울을 막아 큰 웅덩이를 만들어 놓은 정도에
불과했다.
여기가 저수지?
그렇네.
근데 귀신은 어디 있죠?
지금 물속에 있을 걸세. 곧 나올 테니 어떻게 좀 해주게.
저수지 주변은 자경 단원들이 철통 같이 에워싸고 있었다. 평소에
몬스터를 막기 위해 동원되던 인원이 이곳으로 총출동한 듯했다.
안 보이네요.
이상하군. 전에는 10 분마다 한 번씩 고개를 내밀곤 했는데.
라한이 저수지에 도착하고 이미 한 시간이 흘렀다. 헌데도 익스
멈 촌장이 귀신이라 불렀던 그 물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저기 주인.
어? 왜?
라한이 멍하게 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 슈라가 말을 걸었다.
-좀 이상하군.
뭐가?
-내 몸에 들어오는 기운이 좀 달라졌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되지?
슈라는 소환된 그 순간부터 자신에게 오던 기운이 달라졌음을
눈치 챘다. 헌데, 라한과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려 있
어서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라한이 따분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
았다면, 이번에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터였다.
아, 이거? 좀 바뀌었지? 어때?
-모르겠다 힘이 늘어나거나 줄어든 것 같지는 않은데 기분이
묘하군. 뭐랄까?
상쾌해졌지?
라한이 슈라의 기분을 단번에 집어냈다. 스스로도 느꼈던 기분
이기에 슈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맞다. 묘한 기분인데 상쾌하고 포근하군. 무슨 일이 있
었던 건가?
귀신이다!
귀, 귀신이 나타났다!
나중에 얘기해 줄게.
갑자기 들려온 마을 사람들의 외침에 라한이 슈라를 제지시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마을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살폈다.
저거 뭐야? 저놈 혹시?
-변이네.
라한이 저수지 중앙에서 헤엄치며 놀고 있는 변을 발견했다. 테
세르 역시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저놈이 왜 여기 있냐?
-몰라. 근데 엄청 즐거워 보이네. 물이 많아서 그런가?
야! 변! 이리 튀어와!
라한이 변을 보며 크게 소리쳤다.
라한의 목소리에 한창 수영을 즐기고 있던 변이 놀란 표정을 지었
다. 그 역시 이곳에서 라한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음이다.
-크릭? 크리릭!
라한을 본 물 덩어리 변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을
라한이 눈을 부라렸다.
야! 동작 그만! 한 발자국만 뒤로 가도 넌 내 손에 아작날 줄 알
아! 알았어?
-크리릭!
그럼 이리로 튀어와! 빨리!
-크리리릭!
라한의 협박성 말에 물 덩어리 변이 잽싸게 달려왔다. 라한이 무
섭긴 무서웠던 모양이다.
자, 자네. 아는 귀신인가?
귀신이요? 하하하하. 이 녀석은 귀신이 아녜요. 음, 뭐라고 해
야 하지? 마족이라고 부르긴 좀 부족하고, 그냥 몬스터도 아니고.
소환물이라고 해야 하나? 여기 있는 슈라하고 비슷한 경우라고 보
면 돼요.
물 덩어리 변도 알고 보면 슈라와 흡사했다. 물질계에 존재하는
흔한 물질로 재구성된 생명체인 것이다.
슈라가 주변에 있는 물질로 골렘으로 변하는 것과 달리, 물 덩어
리 변은 물을 이용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게 다를 뿐. 본질이 마법
생물이라는 건 같았다.
-크리리릭!
따라와! 촌장님. 이 녀석은 제가 교육 시킬게요. 근데, 제 집은?
아, 대충 마무리 되었네. 아직 벽을 덜 만들었지만, 들어가서
쉬어도 될 게야.
어느 쪽이죠?
라한이 촌장과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물 덩어리 변은 한 발을 뒤로
빼고 있었다. 언제든 도망갈 수 있도록 채비를 갖추는 모습이었다.
저쪽으로 계속가면 나오네. 건물이 커서 아마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걸세.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변! 따라와.
라한이 물 덩어리 변의 귀를 움켜쥐고 익스멈 촌장이 가리킨 방
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 뒤를 슈라와 테세르가 잡담을 나누면
서 따랐다.
라한은 물 덩어리 변을 만난 게 반가웠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
만, 그래도 한때나마 일행이었지 않은가? 오랜만에 만난 지기 같
아서 기분이 좋았다.
라한의 그런 기분에는 투바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한몫했다. 비록 자의로 떠나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때
의 동료들을 그리워하는 라한이었다.
-저긴가?
이야, 크네. 기대 이상이잖아.
-그러게. 나도 그 할아버지들이 이렇게 크게 만들어 놓을 줄은
몰랐는데. 대단한 걸.
라한과 테세르가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건축물을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물론 돌을 깎아 지은 튼튼한 집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레토 나무로 목재 건물을 지었을 뿐이다. 헌데도 그 규
모에서 라한과 테세르가 생각했던 범위를 넘어섰다.
예상보다 두 배는 큰 것 같군
-그러게. 이 정도면 슈라가 뛰어 놀아도 되겠는데. 어쭈. 슈라
입 찢어지는데?
-크흠.
누가 뭐래도 지금 기분이 가장 좋은 이는 슈라였다. 이제 그도
물질계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을 터였다.
실례합니다.
아, 라한님이시군요. 들어가십시오.
라한이 근처 인부를 붙잡고 인사를 건넸다. 예상으로는 또 두려
움에 떨면서 도망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헌데 인부들은 라한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을 뿐. 두려워하
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라한이 없는 동안 그가 마족이나 괴물이
아니라는 걸 익스멈 촌장과 마을 어른들이 설명해준 탓이다.
아, 감사합니다.
아직 외장 공사가 덜 끝나서 시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괜찮습니다.
공사 인부들의 담담한 대꾸에 오히려 라한이 어리둥절해했다. 예
상했던 반응과 너무나 다른 태도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얼떨떨하네.
그러게.
건물 안은 말끔하게 단정되어 있었다. 소란스러운 밖과는 확연
히 차이나는 모습이었다.
-이야, 멋지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흠, 감탄은 나중에 하자. 변? 이리와!
-크릭!
물 덩어리 변이 부동자세로 라한 앞에 섰다. 얼굴을 푹 숙인 모
습이 애처로워보였다.
고개를 들라.
-크릭!
고개를 들라!
-크리릭!
라한의 두 번째 말에 변이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팔 다리는 여
전히 바싹 붙인 부동자세였다.
말을 못하니 대답은 힘들겠고. 음, 어디 보자. 투바를 만난 적
이 있나?
절레절레.
라한의 물음에 변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성의가 느껴지
는 강한 고갯짓에 테세르와 슈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투바를 만난 적이 없어? 흠, 그럼 여기는 왜 온 거야? 넌 투바
를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끄덕끄덕!
변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변이 하려는 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찾으려고 했는데 여정이 험난했나보군. 하긴, 물이 없으면 힘
을 못 쓰니 그럴 수도 있겠지.
끄덕끄덕!
라한은 물 덩어리 변의 특징을 잘 알았다. 그와 며칠 동안 강행
군하면서 나름대로 그에 대해 파악한 것이다.
물 덩어리. 물이 실체화 되어 생명체가 된 경우였다.
이 때문에 물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또, 물
을 오랫동안 접하지 못하면 상당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아마 이
곳에 흘러들어오게 된 것도 오랫동안 물을 접하지 못하다가 저수지
를 발견한 탓이리라.
그러고 보니 요즘 대륙 전체에 가뭄이 심하군. 힘들었겠어.
라한의 측은한 말에 변의 얼굴이 애잔하게 변했다. 자신의 심정
을 알아줘서 고맙다는 표시 같았다.
됐다. 오늘은 대충하고 자자. 슈라! 너 저기 땅 좀 파줄래?
-그러지.
슈라가 손으로 땅을 긁어 꽤나 큰 웅덩이를 만들었다.
내일 인부들한테 여기 물 좀 채워달라고 부탁드려야겠다. 그래
야 이 녀석이 편하게 지내지.
-크리릭, 크릭!
물 덩어리 변이 배시시 웃으며 라한에게 몸을 비볐다. 갑작스러
운 행동에 라한이 펄쩍 뛰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이게 왜 이래? 징그럽게.
-크리리릭!
라한의 말에도 물 덩어리 변의 얼굴은 여전히 싱글벙글 이었다.
물속에서 지내게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듯했다.
실제로 물 덩어리 변이 라한을 보고 기겁했던 것도 물의 영향이
컸다. 처음 라한을 만났을 때, 제대로 물을 접하지 않고 강행군하
지 않았던가? 그때의 기억을 지우지 못해서 라한을 만나기 꺼려한
거였다.
*
다음날 마을 주민들이 슈라가 파 놓은 구덩이에 물을 집어넣었
다. 구덩이가 꽤 커서 고된 작업이었음에도 마을 사람들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라한에 대한 소문이 모두 거짓이라는 게 밝혀진 지금, 라한은 마
을 사람들에게 은인으로 비춰졌다. 마을을 한 번 구하고 결계를 만
들어 몬스터의 위협을 원천적으로 막았으니 당연했다.
-주인! 뭐해?
바쁘다.
라한이 야외에 마련된 탁자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라한은 요즘 새로 얻은 힘을 사용할 방법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
다. 기존의 마법 주문 그대로 사용해서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 탓이다.
마법 주문에는 반응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주문을 새로 만들어
야 하나? 아휴.
라한이 길게 한숨을 쉬며 탁자에서 일어났다. 라한이 일어나자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테세르와 슈라, 변이 라한의 뒤에 바싹 달라
붙었다.
내가 힘을 얻은 건 의지였지. 그럼 힘을 부리는 것도 내 의지일
텐데, 쉽지 않군.
이론적으로는 스스로의 의지를 강하게 집중시켜서 힘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급박한 전투 중에 힘에 의지를 집중시키는 건 쉬
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해볼까?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면서 손 위
에 뜨거운 불꽃이 생기도록 의지를 집중했다.
화라락!
라한이 눈을 감은 지 십여 분이 지나자 백색의 눈부신 불꽃이 손
위에 생겨났다. 왜 멀리서 지켜보던 테세르와 슈라, 변이 순간적으
로 엎드려야할 만큼 뜨거운 불꽃이었다. 헌데, 라한의 손에는 그
어떤 열기도 전달되지 않았다.
역시 가능은 하군. 헌데 십 분이라. 이제 남은 건 얼마나 능숙
해 지느냐인가?
불꽃을 만들어내는 건 성공했다. 헌데, 십 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는 게 문제였다.
적을 보고 공격하고 방어하기도 바쁜데 의지를 집중시키는 데
십 여 분을 허비하다니. 전투 중에 이 정도 시간을 눈 감고 지냈다
가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죽음을 맞을 게 분명했다.
-주인! 아까 그 하얀 건 뭐야?
불꽃이지.
-그거 몇 서클이? 엄청나게 뜨겁던데.
테세르의 말에 라한도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새로 얻은 힘을 몇
서클로 규정해야 할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음이다.
후후후. 그래도 결과는 같네.
아무리 생각해도 새로 얻은 힘은 서클로 나누는 게 무의미할 것
같았다. 하지만, 굳이 나누자면 1 서클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몸
전체가 거대한 힘의 띠이니 말이다.
1 서클.
-말도 안 돼. 그게 뭐가 1 서클이야?
1 서클 맞아. 1 서클의 정의가 뭐야? 하나의 마나 고리로 마법을
시전하는 거잖아. 지금 얻은 힘도 고리가 하나뿐이야 그 고리가
내 몸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는 게 예전과 다르지만. 어쨌든
1 서클은 1 서클이지.
라한도 스스로의 대답이 약간은 억지스럽다는 걸 잘 알았다. 하
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이전보다 더 1 서클 같은 게 새로 얻은 힘이
었다.
과거에는 클래스 1 서클 마법과 비클래스 고위 마법을 함께 사용
했다. 제대로 된 1 서클 대마법사가 아니었던 셈이다.
헌데 이제는 모든 마법을 새로 얻은 힘으로만 해결해야 한다.
또, 새로 얻은 힘은 몸 전체를 하나의 막으로 둘러싸고 있으니 예
전보다 1 서클에 더 근접한지도 모른다.
-근데 불 만드는 것밖에 못 해? 텔레포트 같은 건?
그건 아직 안 돼, 마법에서 상위 서클의 마법과 흡사한 걸 새로
얻은 힘으로 사용하는 일은 기운 소모가 꽤 심하거든. 근데 기존에
있던 힘을 제대로 융화시키지 못한 지금은 상위에 속하는 힘을 사
용하기 힘들어.
-그럼 불만 만들 수 있어?
얼음도 만들 수 있지. 뭐, 지금은 그 정도밖에 안돼. 제령기와
제란기가 새로 얻은 힘에 계속 응화되고 있으니까 조만간 되겠지.
라한의 얼굴에서는 조급해하는 기색을 찾기 힘들었다.
그는 이런 예민하고 세밀한 일에서 조급함이 오히려 화를 부른
다는 걸 잘 알았다. 급할수록 돌아가듯 이런 일은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차근차근 생각해야 했다.
-얼음도 엄청 차겠네? 만들어봐.
그럴까?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렇게 약 십 여분
이 흐르자 손 위로 하얀 구체가 생겨났다. 라한이 만들어낸 얼음
덩어리였다.
얼음 덩어리가 만들어지자 주변에 있던 대기가 급속도로 차갑게
식었다. 라한이 있는 부근만이 아니라 저택 주변 수십 미터까지 차
갑게 식어가는 대기. 가히 이 주변만큼은 한겨울을 연상케 할 정도
였다
-우와. 엄청나네.
휴우, 힘드네.
-힘들어?
응. 의지를 집중시키는 건 머리를 쓰는 것하고는 또 다르거든.
정신적인 피로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엄청 힘들어.
잠시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인데도 이마에 땀이 가득했다.
라한은 아직 새로 얻은 힘을 사용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간단한 힘을 사용하는 데에도 몹시 힘들어했다.
-그거 힘 소모가 너무 큰 거 아냐?
아니. 아직 내가 적응이 안 되어서 그래. 적응되면 이 정도로
힘들어하는 일은 없을 거야.
라한이 열기 덩어리와 한기 덩어리를 만들어냈음에도 힘의 소모
는 거의 없었다. 다만 힘을 사용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시켜서 피로
감이 가중됐을 뿐이다.
그나마도 드래곤을 능가하는 긴 세월을 기억하는 라한이기에 이
정도라도 버틸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시전조차 불가능하거나
시전하더라도 정신이 피폐해 져서 미쳐갈 게 분명했다. 어쩌면 수
천 년의 기억을 가진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견딜 수 없을지 모른다.
*
드래곤 로드 로테마이어스의 레어 안.
로테마이어스는 요즘 누군가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를 찾기 시작한 지 벌써 다섯 달.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의 흔
적을 찾지 못 해서 심기가 불편했다.
9 개월 전 로이나와의 약속 이후, 그는 카이렌 일행과 기존에 있
던 굴레를 벗은 존재들의 정보를 캐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서 카이렌 일행과 류카라한 일행은 죽여야
할 상대에 지나지 않았다 크라이드리안을 부상 입게 만든 류카라
한과 부상당한 크라이드리안을 죽인 카이렌. 약속한 1 년 뒤에 그들
을 모두 처리하기 위해서 그들의 정보를 모은 것이다.
그렇게 약 석 달 동안 정보를 모으는 과정에서 또 다른 사실을
알아냈다. 애초에 크라이드리안을 부상 입힌 존재가 류카라한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때부터 로테마이어스는 크라이드리안을 부상 입힌 존재를 찾
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한 달 쯤 지났을 때 그의 이름이 카라한 필슨이며 이미
오래전에 실종됐다는 정보를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로테마이어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드래곤을 부상 입힐
정도라면 예사로운 존재는 아닐 터. 쉽사리 다른 이에게 죽지는 않
았을 거라 판단했다.
살아만 있다면, 목숨이 붙어 있기만 하다면 자신이 직접 그의 목
을 자를 생각이었다. 자신이 아끼는 크라이드리안을 위해서.
어디 있는가? 정말 죽었는가?
라한을 찾아다닌 지 다섯 달.
아직 라한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심지어 정령왕들마저 라한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는 대답만 건네올 뿐이었다.
그럴 리 없어. 정령왕들의 그묘한표정. 분명 알고 있는 게 분
명해, 그럼 왜?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드래곤인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는 정령왕이라니. 심지어 같은 속성을 가진 불의 정령왕
샐리온마저 대답을 기피하고 있었다.
그 인간이 대체 뭐기에 정령왕마저. 흠, 모르겠군.
로드님 저 아카폴리안입니다.
들어와라.
로테마이어스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레어 밖에서
아카폴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카폴리안은 로테마이어스 세력에서 정보를 담당하고 있다. 대
륙 곳곳에서 활동하는 드래곤들이 얻은 정보가 우선적으로 그에게
취합되는 것이다.
로테마이어스는 아카폴리안에게 라한을 찾으라고 명령했었다.
그때가 다섯 달 전의 일이다. 그동안 아카폴리안은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 라한을 찾는 데에만 주력했다.
로드님을 뵙습니다.
인사는 됐다. 그래 찾았느냐?
어느 정도 흔적은 찾은 것 같습니다.
그래?
어둡던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로테마이어스와는 달리 아카폴리안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라한의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한 탓이다. 같습니다라는 추측성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아카폴리안. 정보 담당으로서 약간은 부끄
러운 일이었다.
그게, 저. 정확한 정보는 아닙니다.
그럼?
그가 뛰어난 마법사라는 점에서 착안했을 뿐입니다.
자세히 말하라.
아카폴리안을 재촉한 로테마이어스가 테이블에 있던 물을 들이
켰다.
그는 라한에 대한 대강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던 소식이던가?
비록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또,
아카폴리안의 성격상 비록 추측이라도 상당히 신빙성 있는 정보임
에 분명했다.
예. 대륙에서 사라진 지형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결계 같습니
다.
고작 결계?
헌데, 드래곤인 저조차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교묘하게 포
장된 결계였습니다. 아마 인간들 중에는 그 결계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인간들 중에서도 라한이 만든 결계를 알아보는 사람이 전혀 없
는 건 아니었다. 다만 자세히 보지 않고 알아볼 수 있는 존재가 없
을 뿐이다.
흠, 가능성이 있군.
라한은 마법의 종주인 드래곤에게 마법으로 상처 입힌 사람이
다. 마법적 능력으로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봐도 무방
했다.
그런 상황에서 드래곤마저 알아보기 힘든 결계가 나타났다. 이
정도 마법 실력을 갖춘 존재라면 라한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거기다 결계가 만들어지기 직전에 그곳에서 엄청난 대학살이
벌어졌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대학살?
예. 지금 결계 주변에 살고 있는 수백 마리의 베어울프가 결계
가 설치된 날 즈음에 학살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기사단
이 출동한 흔적이 없는 걸로 봐서는 굴레를 벗은 존재이거나 그 이
상의 실력자가 처리했다고 사료됩니다.
위치는?
케라스 왕국 북쪽에 위치한 블리아드라는 마을입니다.
아카폴리안의 부연 설명을 듣자 결계와 라한이 관계가 있을 거
라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현재 굴레를 벗은 존재들은 아카폴리안과 로테마이어스의 정보
망에 모두 잡혀 있는 상태였다. 헌데, 그들이 결계가 설치된 곳에
간 적이 없으니 답은 하나뿐이었다.
라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라한이 그곳에 은거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가겠다.
준비하겠습니다.
아카폴리안의 대답에 로테마이어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일은 내가 해결한다. 넌 굴레를 벗은 놈들과 카이렌
일행들의 동태를 살피는 데 주력해라.
알겠습니다.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에 살기가 스쳤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라
한에 대한 살기가 솟구치는 모양이다.
아카폴리안이 나가자 로테마이어스가 레어를 정리하기 시작했
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난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훗, 고작 인간 한 놈 죽이러 가면서 레어를 정리하다니.
드래곤에게 인간을 죽이는 일은 숨 쉬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헌
데, 로테마이어스의 지금 행동은 마치 결전을 치르러가는 기사의
모습과 흡사했다.
샐리온!
자기 스스로에게 기분이 나빠진 로테마이어스. 화 풀 곳을 찾기
위해 불의 정령왕을 불렀다.
-로테마이어스. 무슨 일이지?
하나 묻지. 왜 라한이라는 인간을 숨기려는 건가?
-대답하지 않겠다.
내가 그 녀석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았다면?
-으음.
샐리온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렇지만 안타까워하는 표정은 찾아
보기 힘들었다.
샐리온이 라한의 거처에 대해 입을 다문 건 어디까지나 약속 때
문이었다. 라한에게 함구하겠다고 했던 약속 말이다.
물론, 그때는 로이나의 눈에서 벗어나겠다는 의미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찌됐든 약속은 약속이다. 모른 척하기로 약속했기에 로
드인 로테마이어스에게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거였다.
걱정하는 얼굴은 아니군.
-인간의 안위 따위에 신경 쓸 만큼 우리 정령왕이 한가해 보였나?
근데 왜 그 인간에 대해 입을 다물었던 거지? 끝까지 몰랐다고
시치미 뗄 생각인가?
-부정하지 않겠다. 그가 어디 있는지는 오래전에 알았지. 하지
만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네게도 말하지 않았다. 네가
그의 거처를 알았다고는 하지만 우리 정령왕들이 약속을 어긴 건
아니지. 네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낸 거니까.
하하하하하!
샐리온의 대답에 로테마이어스가 대소를 터트렸다. 이제야 대강
의 의문이 풀렸다.
웃는 로테마이어스를 보며 샐리온이 입을 열었다
-로테마이어스. 조심해야 할 거다.
조.심?
-그래. 라한은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날 우습게 보는 건가? 난 드래곤 로드다. 인간 따위와 날 비교
하다니. 정령왕이라 하더라도 허튼 소리는 용서하지 않는다.
샐리온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샐리온을 불러내기 전부터 조금씩 싹트던 알 수 없는 불안함. 샐
리온의 말은 타오르던 불에 기름을 끼얹는 발언이었다.
로레마이어스가 다소 과장되게 쏘아 붙인 것도 이런 불안한 마
음을 들키기 싫어서인지도 모른다.
-로테마이어스. 네 실력은 잘 안다. 하지만, 그 인간도 만만치
않다.
헛소리!
-그래. 네 말대로 기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라한의 힘은 좀 불
가사의한 구석이 있다. 힘을 측정할 수가 없지. 또 그는 대륙에서
정령왕을 알아채는 유일한 인간이다.
무슨 말이지?
이번에는 로테마이어스도 호기심을 드러냈다 샐리온의 알아챈
다는 말이 신경을 자극한 탓이다.
-우리가 몰래 힘을 숨기고 다가가도 그는 우릴 알아본단 말이다.
샐리온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입을 떠억 벌렸다. 그러면서 얼
굴 가득 불신의 빛을 띠었다.
보통 정령사들은 자신이 소환한 정령을 알아본다. 그건 그 정령
이 소환자를 위해 몸을 실체화하기 때문이다.
실상 정령은 원소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원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듯 모습조차 보지 못하는 것이다. 설사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실체를 지운 정령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이 까닭이다.
헌데 샐리온은 라한이 정령을 알아본다고 했다. 그것도 모습을
숨기고 있는 정령을. 그건 모습을 보는 게 아니라 원소를 볼
수 있다는 얘기와 다름없었다.
흠,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자연을 보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걸
믿으란 말인가? 하하하하. 보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겠지.
-그럴 수도 있다. 기감이 뛰어난 자라면 정령을 느낄 수 있으니
까. 이 일 때문에 우리 정령왕들도 그에 대해 의견을 나눈 적이 있
다. 그때 우리가 내린 결론은 라한이 분명히 보고 있다는 거였다.
물론 우리 판단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라한이라는 인간
이 심상치 않은 존재라는 건 확실하다.
훗, 날 겁줘서 그를 죽이러 가는 걸 포기하게 하고 싶은가 보
군. 어리석구나. 샐리온, 네가 뭐라고 하더라도 그는 내 손에 죽는
다. 돌아가라!
-후후, 나 역시 그 인간이 싫다 건방진 놈이거든, 내가한말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너를 위해서였다.
돌아가라고 했다. 샐리온!
로테마이어스가 불의 정령왕 샐리온을 정령계로 돌려보냈다. 그
의 강제 귀환 명령에 샐리온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라져갔다.
샐리온도 로테마이어스가 라한에게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
다. 누가 뭐래도 로테마이어스는 물질계 최강이라는 드래곤 존재
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라한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가 본 라한은 누군가에게 쉽게 생각될 정도로 하찮은 자가 아니
었으니 말이다.
*
샐리온을 돌려보낸 로테마이어스는 그 길로 블리아드 마을이 위
치한 일레마 산맥으로 이동했다.
이곳이던가?
로테마이어스는 블리아드 마을에 가본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마을로 정확하게 텔레포트 하는 게 불가능했다.
어디. 음, 저기가 결계로군. 과연.
라한이 만든 결계를 보며 로테마이어스가 감탄을 터트렸다.
아카폴리안의 말마따나 정말 진짜 같은 결계였다. 이곳에 결계
가 있다는 걸 몰랐다면 로테마이어스조차도 모르고 지나쳤을지 모
른다.
이게 그 인간의 능력인가? 대단하군.
라한에 대해 생각하던 로테마이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도
모르게 라한과의 싸움을 걱정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빌어먹을. 이게 다 그 샐리온의 헛소리 때문이다.
애써 고개를 가로저은 로테마이어스가 결계로 다가갔다. 그리고
절벽으로 보이는 결계에 손을 넣고 마나를 흩었다.
우우우웅!
로테마이어스의 손짓에 작은 입구가 만들어졌다. 마치 절벽에
작은 블랙홀이 생긴 것 같은 특이한 모습이었다.
로테마이어스가 뚫어놓은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자
뚫어 놓은 결계의 구멍이 다시 닫혔다.
*
라한은 새로 얻은 의지의 힘을 신화력(神化力)이라고 불렀다.
라한은 저승사자 수영의 선택에 의해 수 없이 많은 죽음을 경험
했다. 수영은 신의 대리인이라 부를 수 있는 상태.
이 때문에 라한은 자신이 신이 된다면이라는 가정을 수시로
해왔다. 자신이 신이 된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지 않았을
텐데. 자신이 신이라면 수영 같은 저승사자의 만행을 묵과하지 않
았을 텐데. 신화력은 그런 가정에서 비롯된 이름이었다.
라한이 신화력을 얻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오늘도 라한은 새로 얻은 신화력에 몸을 적응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떤 공부나 연구를 통해 신화력을 알아가는 건
아니었다. 라한의 적응은 작은 힘이나마 신화력을 계속 사용함으
로써 그 힘을 몸으로 느끼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 이 상태라면 1, 2 년 안에 완전히 적응할
수 있을 거야.
라한의 신화력에 대한 적응력은 몹시 빨랐다. 시전하는 라한뿐
아니라 구경하던 테세르와 슈라, 물 덩어리 변도 놀랄 정도였다.
라한은 불과 한 달 전에는 신화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감도 잡지
못했다. 그런 라한이 2 주 전에 처음으로 신화력을 사용하는 데 성
공했다. 비록불꽃과 얼음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라한에게는 생애
처음으로 사용한 신화력이었다.
그리고 다시 2 주가 흐른 지금.
라한은 불꽃과 얼음 덩어리를 만들던 경지를 넘어섰다. 지금은
날아오르거나 블링크 같은 짧은 거리를 공간 이동하는 것도 가능했
다. 과거의 능력 중 일부를 되찾은 셈이다.
그래. 이제 남은 건 시간이다.
라한의 얼굴에 웃음이 넘쳤다.
어차피 서두른다고 해결될 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느긋한 마
음으로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면 머지않아 끝이 보일 거라고 믿었다.
그럼 이번에는 실드를 해볼까?
라한이 의지로 실드를 만들어낸 건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과거
에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강한 실드였다.
헌데, 라한은 실드를 방어용으로만 사용하는 게 불만이었다. 어차
피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니 실드를 공격용으로 바꿔보고 싶었다.
먼저 실드에 불의 기운을 담고 모양을 조금 바꾸면. 음, 해볼
까? 실드!
우우웅!
기괴한 음이 터져 나오고 라한의 눈앞에 거대한 막이 만들어졌
다. 열기가 라한 앞쪽으로 강하게 풍기고 있는 불의 막이었다.
과거에 라한은 간단한 불꽃을 만드는 데에도 10 분의 정신 집중
시간이 필요했다. 헌데 지금 라한은 시전하자마자 실드를 만들어
냈다. 과거와 비교해서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증거였다.
약해. 열기를 조금 더 강하게 해야. 응?
한창 새로운 시도에 재미를 들였을 즈음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
렸다.
테세르!
-응?
멀리서 라한을 지켜보던 테세르가 곧바로 대답했다. 라한이 테세
르를 부르자 주변에 있던 슈라와 물 덩어리 변도 곁으로 다가왔다.
누군가가 결계를 뚫었다.
-뭐?
누가 왔어.
-내가 알아 볼.
왔군.
테세르가 막출발하려 할 때, 라한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집 먼 곳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주인 왜?
드래곤이군. 이런 기운이면 레드 드래곤인가?
라한의 기감에 생소한 기운이 잡혔다. 로이나, 프리미아에게서
느꼈던 기운과 흡사한, 하지만 화기가 강한 그런 존재였다.
-드래곤?
크크크크크.
라한의 집 동쪽에서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결계를 뚫고
들어온 로테마이어스의 웃음소리였다.
테세르, 슈라, 변. 이리로!
라한이 일행을 자기 주변으로 불러들였다.
라한은 들려온 웃음소리만으로 상대가 예사 드래곤이 아님을 느
꼈다.
이 정도 피어를 만들어 낼 존재라면 로이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실력이었다. 거기다 느껴지는 불의 기운이라면 레드 일족일
터. 블루 일족인 로이나보다 더 전투적인 드래곤이기에 식은땀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레드 일족인가?
하하하하하. 내 피어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건가?
레드 일족이냐고 물었다.
크크크, 하찮은 인간이 제법이군.
로테마이어스가 말을 돌려 자신이 레드 드래곤임을 밝혔다.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에도 긴장이 감돌았다. 새삼 샐리온이 왜
조심하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왜 온 거지?
묻겠다, 인간. 과거에 크라이드리안과 싸운 적이 있는가?
크라이드리안? 흠, 있지.
그럼 넌 오늘 내 손에 죽는다.
로테마이어스가 살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 모습에 라한이 테세
르와 슈라, 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재미있군. 드래곤이 이렇게 허약한 종족이었나? 패한 놈은 사
라지고 대신 다른 놈이 나타나다니. 내가 드래곤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군.
크라이드리안은. 죽었다. 카이렌이라는 엘프놈에게 죽었지.
널 죽이고 나면 다음은 그 엘프놈 차례다.
피식!
라한이 로테마이어스의 살기 짙은 말을 비웃음으로 남겼다. 그
모습을 보며 로테마이어스가 눈을 부라렸다.
죽고 싶으냐?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웃음을 흘리다니.
하하하하하. 어차피 날 죽이러 온 거 아닌가? 내가 웃지 않았으
면 죽이지 않을 작정이었나?
이놈이.
한마디만 하지. 설사 네가 나를 이긴다하더라도 카이렌을 죽이
지는 못할 거다. 드래곤을 전부 동원해도 마찬가지 결과를 낳을 뿐
이지.
무슨 소리냐?
라한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라한의 말에서 그 어떤 거짓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런 모습이 로테마이어스를 더 긴장시켰다.
헛소리.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한의 말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는 건 드래곤으로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의혹을 품었으면서도 머리로
는 끊임없이 아니라고 소리쳤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 절로 알게 되겠지.
말해라! 무슨 뜻이냐?
바보 같은 말이군. 너희들 드래곤 전부를 합한 힘보다 카이렌
의 힘이 더 강하다는 뜻이다.
이놈. 그런 헛소리를 하다니.
말과는 달리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더욱 짙어졌다.
몇 달 전 카이렌을 만났을 때, 받았던 느낌 때문이다.
로테마이어스가 카이렌을 만났던 시기.
그때 로테마이어스는 크라이드리안의 죽음 때문에 이성을 상실
한 상태였다. 감정대로 행동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그곳에 있던 모
든 이를 죽여야 정상이었다.
헌데 카이렌을 보는 순간 이성이 서서히 돌아왔다. 그에게서 풍
기는 거대한 산의 느낌이 로테마이어스의 이성을 일깨운 것이다.
당시엔 애써 그 느낌을 부정했다. 역시나 자신의 자존심이 그런
기분을 받아들일 수 없는 탓이다.
헌데, 라한의 말로 그때 상황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불쾌하
고 찝찝한 기분. 그러면서도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두려움까
지. 생소하고 어색한 기분이 스스로에게 화가 치밀었다.
뭐. 그건 됐고. 날 죽이러 왔다니 싸워 봐야지. 안 그래?
크크크.
로테마이어스가 다시 피어를 터트리며 살기를 뿜었다. 그 모습
을 보며 라한도 서서히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크리릭! 우웅!
라한과 로테마이어스가 전투 준비를 갖추자 물 덩어리 변이 서
글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뒤에 만들어진 자신의 물웅덩이를 바
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싸우다가 자신의 새로운 집인 물웅덩이가
날아갈까봐 걱정하는 듯했다.
물 덩어리 변의 표정에 라한도 아차 싶었다. 이곳에서 싸우면 자
신의 집은불 바다가 될 터였다. 아니, 겨우 자리를 잡은 블리아드
마을까지 한줌의 재로 변할 게 분명했다.
젠장.
드래곤!
왜? 두려운가?
후후, 물론 두렵지. 대륙 최강이라는 드래곤이 나타났는데 안
두려울 리가 없지. 근데 괜찮겠어?
무슨 소리냐?
라한의 뜬금없는 말에 로테마이어스의 살기가 많이 누그러졌다.
로테마이어스 역시 드래곤. 역시나 호기심은 풀어야 직성이 풀
리는 종족이었다.
여긴 내 결계 안이라고. 내가 결계에 이상한 짓이라도 해뒀으
면 어쩌려고 그래?
크크크. 그딴 건 신경 쓰지 않는다.
난 신경 쓰이거든. 비싼 내 결계가 너 때문에 망가지는 게 싫
어. 너! 말은 그렇게 했어도 싸움이 시작되면 결계부터 망가뜨릴
작정이잖아. 안 그래?
흐음.
라한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침음성을 흘렸다. 핵심을 찔렸다는
증거였다.
실제로 로페마이어스는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결계부터 부술 생
각이었다. 그렇다고 결계에 어떤 함정이 설치되어 있을까 걱정한
건 아니었다. 최소 그의 감각에 결계는 결계 그 자체일 뿐, 그 어떤
함정도 느껴지지 않았음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이지면 싸움은 불리해 질 수
밖에 없다. 찝찝한 구석을 남겨 놓을 바에는 차라리 일찍 부숴 버
리고 마음 편하게 싸울 생각이었다.
뭐, 너도 껄끄러운 것 같고. 나도 너 같은 놈 죽이는 데 결계를
사용했다는 치욕적인 말을 듣기는 싫거든. 자리를 옮기는 게 어때?
라한의 결계는 로테마이어스가 느낀 것처럼 단순한 결계에 불과
했다. 이곳에 그 어떤 함정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라한은 마치 결계에 함정이 있는 것 마냥 말했다. 그런
자연스러운 말에 로테마이어스도 괜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뭐, 네가 따라오든 말든 난 결계 밖에서 싸울 테니까 알아서 하
라고.
라한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플라이 마법과 흡사한 의지의 힘
이었다.
라한이 날아오르자 로테마이어스가 입을 떠억 벌리며 놀라워
했다. 그의 눈에 보이는 현상은 플라이 마법이 분명했다. 헌데 마
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 플라이 마법의 존재. 로테마이어스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어떻게든 마나를 사용했을 게 분명하니 남은 건 하나뿐이
었다. 자신이 느끼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마나를 사용했다는 것.
그건 곧 마나를 사용함에 있어서 라한의 능력이 드래곤 로드인 자
신을 능가한다는 얘기였다.
라한의 힘이 마나가 아닌 의지라는 걸 몰랐기에 벌어진 오해였다.
훗, 당연히 놀라겠지.
웃음을 머금은 라한이 오른손을 들어 테세르와 슈라, 물 덩어리
변을 향해 내저었다. 그 손짓에 테세르를 비롯한 세 존재가 공중으
로 두둥실 떠올랐다. 라한이 의지를 집중시켜 그들을 들어 올린 것
이다.
그 모습을 본 로테마이어스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의 눈에 보이는 현상은 분명 레비테이션 아더가분명했다. 무
려 6 서클의 고위 마법인 레비테이션 아더. 헌데도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이 불안해지자 샐리온이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빌어먹을
따라와!
라한이 일행 셋을 데리고 북쪽으로 날아갔다. 그 뒤를 로테마이
어스가 멍한 얼굴로 따랐다.
로테마이어스는 라한의 능력을 본 후 살기가 누그러졌다. 아니,
싸우겠다는 의지 자체가 이미 사라져 버렸다. 라한의 능력에 자신
도 모르게 겁을 먹은 것이다.
그런 멍한 로테마이어스를 데리고 라한이 계속해서 날아갔다.
덩치가 큰 셋을 데리고 이동하느라 정신력 소모가 심했다. 하지만
계속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힘든 내색을 하면 안 되었다.
이봐! 드래곤! 얼굴이 왜 그래?
닥쳐라!
라한은 정신이 아득했다. 갑작스럽게 신화력을 많이 사용한 탓이
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한척, 장난스러운 척. 연기를 계속했다.
라한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집에서 10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
이었다.
타다닥!
라한이 테세르를 비롯한 일행들을 바닥에 내렸다. 몹시 부드러
운 착지라서 바닥을 딛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이제 시작하자고.
라한은 로테마이어스와의 싸움에 이길 자신이 없었다. 할 수만
있으면 어떻게든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승산 백 퍼센트가 아니
면 무조건 피하고 보는 라한 아니던가?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싸움을 피할 방도가 없어보였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 싸움, 이제는 불리한 싸움을 유리하게 만드
는 일에 몰두해야 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태연하게 행동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흠.
하하. 두려운가?
닥쳐라. 우리 드래곤들은 두려움이 없다. 하물며 난 드래곤 로
드 로테마이어스다. 두려움 같은 건 수천 년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로테마이어스는 그냥 싸우자고 하면 될 얘기를 길게 늘어놓았
다. 자신도 모르게 겁에 질려 있다는 얘기였다.
로테마이어스의 반응에 라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물론, 이
길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자신에게 유리
하도록 이끌어온 듯싶었다.
시간 끌지 마라. 로테마이어스!
헛소리!
훗!
비웃음을 머금은 라한이 모습을 감추었다. 의지를 이용한 근거
리 공간 이동이었다.
헛!
짝-!
라한이 엘프의 모습을 한 로테마이어스의 앞으로 이동해서 따귀
를 쳐올렸다. 꽤나 강한 힘이 담겨 있어서 로테마이어스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전투 중에 이런 움직임을 보였다면 로테마이어스가 쉽게 당했을
리 없다. 항상 긴장하고 상대를 살필 테니 오히려 라한이 당할 가
능성이 높았다.
헌데 이번에는 계속 싸움을 종용하기만 했지 실제 싸움이 시작
되지 않은 상태였다. 먼저 공격해 올 줄 몰랐기에 방심하고 따귀를
맞았다.
이, 이.
-라한!
라한의 행동에 슈라가 경악성을 터트렸다. 드래곤 로드 로테마
이어스를 먼저 칠 줄은 몰랐음이다.
슈라는 드래곤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 탓인지 드래곤이라면 일
단 호감부터 가지는 게 슈라였다.
아, 뭐 하찮은 드래곤 따위가 자꾸 머뭇거려서 말이야.
-하, 하지만.
슈라의 멍한 표정을 보며 라한이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슈라가 아닌 로테마이어스를 의식한 말이었다.
바쁜 시간 조개서 왔는데 안 싸우잖아. 답답하게 시리.
흐음.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다. 텔레포트!
한참 미간을 좁힌 채 고민하던 로테마이어스. 결국 그가 도주를
택했다. 드래곤으로 태어나서 수천 년 동안 처음 해 본 도주였다.
그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라한의 당당한 태도와 알 수 없는
힘의 사용. 머릿속이 복잡하고 두려워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
었다.
비틀!
로테마이어스가 사라지자 라한의 몸이 순간 휘청거렸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더니 서서히 쓰러졌다.
털썩!
-라한!
-주인!
-크리리릭!
테세르가 기절한 라한을 들어 올려 슈라에게 날아왔다. 하지만
테세르가 슈라에게 다가갔을 때, 그의 형체가 무너져 내렸다. 라한
이 의식을 잃으면서 슈라 역시 역소환 된 탓이다.
-젠장. 변! 가자!
-크리리릭!
테세르와 변이 라한을 데리고 집으로 날아갔다.
테세르의 얼굴에 초조함과 걱정이 가득했다. 또 변의 얼굴에도
테세르와 비슷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곳에서 함께 살면서 정
이 든 듯했다.
-누구를 위해 싸우나?
라한이 의식을 되찾은 건 그로부터 약 두 시간이 흐른 후였다.
단순히 정신적 피로감이었기에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깨어
났다.
으.머리야.
-주인. 깼어?
-크리리링!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아무래도 로테마이어스 앞에서 태연한
척 힘을 마구 쓴 게 무리였던 모양이다.
응. 아고. 죽겠네.
-괜찮아?
죽지는 않을 것 같다.
-멀쩡하네. 농담하는 것 보니.
쳇.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근데, 그 바보 드래곤이 그냥 돌아갔어.
봤어. 보고 기절한 거야.
-어떻게 한 거야? 드래곤이 도망을 가다니. 이야, 소문 퍼지면
얼굴을 못 들고 다닐 거야. 키키키.
테세르가 그때를 회상하며 기묘한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가득
장난기와 비웃음을 머금은 모습이었다.
테세르는 본래 드래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만났
던 드래곤 로이나와의 만남이 껄끄러웠던 게 이유였다.
라한이 소환한 특이한 정령이었던 테세르. 로이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정령이라는 이유로 몹시 구박했다. 그 탓에 테세르는 드래
곤이라는 종족 자체에 불만이 가득했다.
일단 좀 나가자.
-왜?
슈라를 불러야겠어.
-좀 쉬었다가 하는 게 어때? 몸도 덜 회복됐는데.
괜찮아.
라한이 몸을 비틀거리며 공터로 나갔다.
슈라!
머리가 터질 것 같이 아팠지만 참고 슈라를 불렀다. 그에게 확인
할 게 있었기에 무리인줄 알면서도 소환했다.
-음, 쓰러지는 걸 보고 역소환 됐는데, 다행히 살아 있군.
슈라. 궁금한 게 있어. 솔직하게 대답해 줬으면 좋겠다. "
-말해라, 주인.
나와 드래곤이 싸우면 넌 누구 편을 들 생각이냐?
라한의 질문에 슈라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문 채
눈만 껌벅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예전에도 내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을 거야. 그때 넌 드래곤
은 과거의 주인일 뿐이라고 했어. 이제 네 주인은 나니까 내 명령
에 따를 거라는 말도 했지. 맞나?"
-흐음, 그랬지.
슈라가 힘없이 대답했다. 지금 상황이 난감한 듯했다.
슈라의 태도에 라한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에휴, 그때 네가 했던 말을 믿고 난 네가 내 편이라고 생각했
다. 근데, 근데 말이야. 아까 로테마이어스와 내가 대치하고 있을
때, 네가 지었던 표정. 아무래도 그때 넌 나보다 로테마이어스를
더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내 말이 맞나?"
-나도 모르겠다.
그럼 그때 네 기분은 어땠지? 아, 그럼 다시 묻지. 내가 드래곤
과 싸우게 된다면 넌 누구 편을 들 생각이야? 나야? 아니면 드래곤
이야?
라한이 슈라를 몰아붙였다. 그때 로테마이어스를 걱정했던 슈라
의 모습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음이다.
라한의 질문에 슈라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잠시 후, 슈라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주인이 드래곤과 싸운다면 난 주인 편을 든다. 전에 말했듯 드
래곤은 날 창조한 창조주이자 과거의 주인일 뿐. 지금 내 주인은
내 앞에 있는 라한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흠, 아까 주인과 싸울 뻔 한 드래곤은 분명히 로드였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럼 로드와 내 싸움에서는 드래곤 편을 들
겠다는 말인가?
-확실히 모르겠다. 일반 드래곤과의 싸움에서 주인 편을 드는
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지만. 로드와의 싸움은. 나도 정말 어
떻게 할지 모르겠다.
슈라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상태로는 위험했다. 자칫 등 뒤에서 적을 맞을 수도 있는
문제 아니던가?
정면대결에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한 존재 드래곤. 그런
존재와의 싸움에서 앞뒤로 적을 맞는 건 없는 승산이 더 없어지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됐어, 그럼 쉬어라.
라한이 힘없는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그 뒤를 테세르와 물
덩어리 변이 조용히 따랐다.
방에 들어온 라한이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뒤통수에 망치를
얻어맞은 기분에 정신이 멍했다.
-주인, 힘내!
.
-내가 있잖아. 난 드래곤이든 엘프든 무조건 주인 편이야.
테세르가 나름대로 라한을 위로했다. 그런 그를 보며 라한이 씁
쓸하게 웃었다.
테세르.
-응?
만약에 내가 정령왕과 싸우게 된다면 넌 누구 편을 들 거야? 너
도 정령왕이겠지?
라한의 질문에 테세르도 대답이 궁해졌다. 그렇다고 하기도, 아
니라고 하기도 힘든 질문이었다.
슈라가 드래곤에 의해 창조되었듯 테세르 역시 정령왕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자연이 아닌 마나의 정령이
되었지만.
어찌됐든 테세르의 창조에 정령왕이 큰 몫을 했음은 분명했다.
-그게, 그러니까.
변! 넌 어때? 내가 투바와 싸운다면 넌 누구 편을 들 거지?
-크리링!
라한의 연이은 질문에 변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역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너희들을 탓할 생각은 없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만약 내 부
모님과 너희들이 싸웠다면 나 역시 부모님 편을 들었을 테니까. 근
데, 좀 씁쓸하네. 내가 이기적인 거겠지.
-주인
-크릭!
됐어. 나 잠 좀 잘 테니까 나가 봐라.
라한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지금은 다 잊고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대륙 남부의 엘베루토 분지.
이곳은 분지 안에 갖가지 기화요초와 작지만 아름다운 호수를
간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여기서 파생된 여러 가지 전설로 사람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다.
관광지로도 유명했던 엘베루토 분지. 지금은 관광지로서의 면모
를 많이 잃었다. 이곳에 류카라한 일행이 군사를 키우기 위한 훈련
소를 만든 탓이다.
류카라한은 이곳 외에도 대륙 수십 군데 요처에 훈련소를 만들
었다. 그들이 생각한 주적 드래곤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채채채챙!
크악!
막아라!
항상 기합소리로 가득하던 이곳에 비명소리와 신음이 터져 나왔
다. 무려 천 명의 정병이 훈련하던 이곳을 누군가가 기습했기 때문
이다.
버텨라! 잠시만 버티면 그분들이 도와주신다!
막아!
그들은 류카라한 일행에게 검술을 배운 강병이다. 용장 아래에
약졸은 없는 법.
그들 훈련병 천 명이면 대륙 여느 왕국의 2, 3 천명의 기사단에
버금가는 실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최정예병들이 갑작스러
운 기습에 맥을 못 추고 무너져 내렸다.
항복하라! 검을 놓고 엎드리면 목숨은 살려준다.
헛소리! 우린 죽을지언정 숙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항복 권유에 훈련병 중 한 명이 노한 외침을 토했다.
류카라한 일행에게 검을 배운 최정예병 천 명.
대륙 어디에 가더라도 최고라 평가받을 그들도 이번에는 제 힘
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니, 힘은 제대로 발휘했으나 상대가 너무
강했다. 거기다 수가 거의 두 배에 가까우니 이기지 못하는 게 당
연했다.
카이렌. 저놈들이 항복하지 않는데 어쩌지?
최대한 생포해. 끝까지 반항하면 죽이고.
알았어.
류카라한이 만든 훈련소를 급습한 이들은 카이렌 일행과 그들이
키운 2 천여 정병이었다.
류카라한을 능가하는 검 실력을 가진 카이렌. 그들에게 배운 군
사들 역시 류카라한에게 배운 병사들을 능가했다. 헌데 수에서도
두 배에 가까웠으니 쉽게 승리를 거두는 게 당연했다.
죽어라!
누군가가 카이렌의 뒤에서 기습을 해왔다. 뒤에 슬금슬금 다가
온 류카라한의 병사 중 한 명인 듯했다.
훗!
카이렌이 슬쩍 몸을 틀어 검을 피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상대의
목을 움켜쥐었다.
류카라한은 숨어서 공격하는 것만 가르쳤나?
닥쳐라! 두 배의 수로 기습한 주제에 입만 살았구나.
두 배가 아니라 너희들과 같은 수였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
그, 그건.
카이렌의 말에 병사가 할 말을 잃었다. 그도 개개의 힘이 상대에
미치지 못함을 아는 탓이다.
너희들을 기습한 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일 뿐. 이길 자
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어쨌든 너희들은 기사도를 버렸다.
그럼 너희들은? 각 왕국에 힘으로 압박해서 돈을 뜯어내는 너
희들은 기사도를 지킨 건가?
이번 카이렌의 말에도 훈련병은 할 말이 없었다. 평소에도 약간
찝찝해했던 부분이기에 더욱더 그런지 모른다.
너희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희들이 저지른 만행
이 너무 크다.
크윽!
카이렌이 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배가시켰다. 이에 훈련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핏줄이 불거졌다.
털썩!
죽이지는 않겠다. 스스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차근차근
생각해 보도록.
퍽-!
카이렌이 상대의 머리를 가격해 기절시켰다. 아마 이 훈련병도
다른 여느 훈련병들처럼 카이렌의 비밀 감옥에 감금될 터였다.
카이렌. 대충 정리가 끝났어. 돌아가자.

투바의 말에 카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은 씁쓸하고 서글
픈 얼굴을 한 채.
지금 이곳에는 카이렌 일행의 병력이 류카라한 일행의 병력보다
많았다. 하지만 실제로 가진 모든 병력을 다 합하면 류카라한 일행
의 병력이 카이렌 일행의 병력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지금은 상대의 약한 곳을 기습했기에 승리를 거뒀을 뿐, 전면전
이 벌어지면 승산이 그리 높지 않았다.
전원! 전장을 정리하라!
전장을 정리하라!
카이렌 일행은 시체를 수습하고 포로들을 모두 포박한 후 거처
로 발길을 옮겼다. 승리에 고무되어서인지 병력들의 얼굴 역시 몹
시 밝았다.
류카라한은 골렘을 구한 직후 병력을 모았다. 왕국에 서신을 보
내 인원을 차출하는 방식이었다. 명목상 드래곤을 상대하려는 목
적이었기에 왕국에서도 기꺼이 병력을 보내줬다.
헌데 어느 정도 힘이 생기고 인원이 늘어나자 문제가 발생했다.
인원이 늘면 늘수록 그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커진 것이다.
류카라한은 그들에게 들어가는 비용 역시 왕국에서 조달했다.
겉으로는 비용을 얻어온 거였지만, 실상은 힘으로 협박해서 뺏은
거나 다름없었다.
반면 카이렌도 로테마이어스와 헤어지고 나서 병력을 모았다.
드래곤과 류카라한 일행 모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함을
절감한 것이다.
하지만 힘을 얻는 과정에서 류카라한과는 방법이 달랐다.
그는 대륙 곳곳에 있는 암살자 길드와 용병 길드를 병합하는 방
법을 이용해서 힘을 얻었다. 큰 길드는 자칫 손을 댔다가 화를 초
래할 수 있기에 중소 길드에 국한 지었다.
왕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병력을 얻은 류카라한. 이 때문에 그
들의 병력은 이미 3 만에 육박해 있었다. 반면 카이렌 일행은 방법
상 한계가 있었기에 1 만 2 천 병력이 한계였다.
곧 류카라한 일행이 닥칠 거야. 서둘러.
알았어.
카이렌 일행은 지금까지 수차례 류카라한 일행과 부딪혔다. 그
들의 훈련소, 정보 기지 등등 기습이 가능한 모든 곳에 병력을 투
입했고, 대부분은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본대끼리의 정면충돌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카이렌이 정면충돌을 의도적으로 피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상대의 본대가 오기 전에 철수할 생각이었다.
멈춰라!
헉!
젠장.
빌어먹을.
멀리서 들리는 고함소리에 카이렌, 프라하, 투바가 차례로 욕설
을 내뱉었다. 상대의 발 빠른 대응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스퓽! 콰콰쾅!
모두 물러서라!
카이렌이 병력을 뒤로 물리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전면
을 바라보며 눈에 신경을 집중했다.
힘들겠군.
카이렌의 눈에 상대 세력이 잡혔다. 대충 봐도 5 천에 육박하는
수 같았다.
하하하하하. 네놈이 카이렌이렷다?
누군가?
난 잉글리아트라고 한다. 네놈이 카이렌이 맞는가?
그게 내 이름이기는 하지.
카이렌의 얼굴에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카이렌이 걱정하는 건 자신의 목숨이 아니었다. 5 천 아니, 5 만
의 병력이 쳐들어와도 자신의 목숨은 건질 수 있는 카이렌이었다.
문제는 자신이 데리고 온 2 천의 병력을 잃을 수 있다는 데 있었
다. 고작 1 만 2 천밖에 안 되는 병력 중 2 천. 세력의 15 퍼센트가 넘
는 힘을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뼈를 묻을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게다. 하하하하하.
잉글리아트! 류카라한은 왔나?
겨우 네놈들 때문에 류카라한이 직접 올 필요는 없지.
그런가?
카이렌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류카라한만 없다면 병
력을 조금 더 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왜?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카이렌!
응? 누구지?
이리아나 케이플. 그게 내 이름이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굴레를 벗은 라이칸 이리아나 케이플의 말
이었다. 덩치에 걸맞은 엄청난 크기의 목소리에 카이렌 진형에 있
던 병력들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후후, 프라하. 네 후손 아닌가?
크크크. 어린놈이 버릇이 없구나. 케이플!
카이렌의 말을 프라하가 받았다. 그 말에 이리아나 케이플이 눈
을 둥그렇게 떳다. 상대에게 굴레를 벗은 라이칸이 있다는 정보를
얻지 못한 듯했다.
웬 놈이냐?
프라하. 아, 라이칸 세계에선 프라미트라는 이름을 사용했지.
프, 프라미트? 빛의 도끼라는 프라미트님이 맞습니까?
크크크, 그런 별명이 있긴 있었지.
프라하의 말에 케이플이 입을 떠억 벌렸다.
생각지도 못한 존재의 등장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가 라이
칸드로프 세계의 최강자로 불리는 프라미트일 줄이야.
프라미트님. 왜 그곳에 계십니까?
너야말로 왜 그곳에 있는 거냐? 내 말을 거역할 셈이냐?
흠, 죄송합니다. 프라미트님. 오늘 실례를 범해야겠습니다.
크크크, 하하하하. 네놈이 감히 내게 대적하겠다고? 오늘 내가
왜 빛의 도끼라 불리는지 똑똑히 보여주지.
프라미트의 말에 케이플도 이를 악물었다.
좋습니다. 과연 전설이 강한지 제가 강한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케이플도 도끼를 꽉 움켜잡았다. 일촉즉발의 사태. 첨예한 대립
은 투바에 의해 깨졌다.
어이, 이것 봐! 내 상대는 없는 건가? 우린 셋이서 왔다고. 그
럼 너희들도 최소 세 명은 와야지. 안 그래?
걱정 마라. 계집 같은 놈아!
그럼, 그럼. 예쁘장하게 생긴 네놈은 우리가 맡아주지.
루나시언과 루시펠이 차례로 대꾸했다. 이미 검을 반쯤 뽑은 모
습이 오래전부터 벼르고 있었음을 알려줬다.
골치 아프군. 상대가 더 많아.
카이렌이 프라하와 투바를 돌아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형세가
좋지 않으니 알아서 몸을 빼내라는 충고성 발언이었다.
나도 잊으면 안 되지. 하하하하.
그럼.
크리퍼트와 토일렛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참담하던 기분을 더
참담하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빌어먹을. 둘 빼고 다 온 건가?
그래도 류카라한이 없어서 다행이군.
류카라한 일행 중 류카라한 본인과 라이칸드로프 돈네리아 미스
티크를 제외한 여섯 명이 이 자리에 나타났다. 카이렌 일행에서 단
세 명만 온 걸 감안하면 엄청난 세력 차이였다.
어쩌지?
일단 나와 프라하가 길을 뚫는다. 투바. 네가 병력들을 데리고
본대로 도주해라.
괜찮겠어?
어떻게든 해봐야지. 그럼 프라하. 따라와! 하앗!
카이렌이 검을 뽑고 앞장서서 달렸다. 그 뒤를 프라하가 도끼를
휘두르며 따랐다.
한참 달려가던 카이렌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의 특기인
은신술이 발동된 모습이었다.
카이렌이 사라지자 잉글리아트와 토일렛이 무언가를 중얼거렸
다. 은신술 상태를 찾아내기 위한 마법인 듯했다.
모두 조심해!
토일렛의 외침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지금까
지 서로 정면충돌을 피해왔던 일행들의 첫 정면대결. 실력이 강한
만큼 싸움도 거세고 치열했다.
투바의 도주는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실패했다. 잉글리아트
일행이 소환한 골렘에 막힌 탓이다.
단순히 3 대 6 의 싸움은 어떻게 버틸 재간이 있었다. 수비에 신경
쓴다면 최소 지지는 않을 성 싶었다.
헌데, 그들 사이에서 골렘이 소환되면서 상황이 뒤바뀌었다. 이
젠 수비에 치중해도 버티기 힘들었다.
빌어먹을.
서로의 피가 튀고 비명이 터져 나오는 엄청난 혈전이 몇 시간째
계속 되었다. 이미 한차례 싸웠던 카이렌 일행의 병력들이 하나둘
씩 목숨을 잃었다. 이에 따라 잉글리아트가 데려온 병력들의 기세
가 조금씩 높아졌다.
물론 잉글리아트가 데려온 병력들의 피해도 적은 건 아니었다.
개개의 능력에서 카이렌이 키운 병력의 실력이 월등했기에 실제 쓰
러지는 수는 오히려 잉글리아트 쪽이 더 많았다.
하지만 수에서 너무 크게 차이가 나서 승세는 잉글리아트 쪽으
로 굳어가는 듯싶었다.
헉! 헉! 헉!
젠장.
그렇게 근 반나절을 싸웠을 때, 카이렌 일행의 2 천 병력은 이미
5 백으로 줄어들었다. 또, 잉글리아트의 병력도 5 천에서 3 천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카이렌 일행의 핵심 세력도 잉글리아트를 비롯한 굴레를 벗은
존재의 싸움에서 서서히 밀렸다. 인원수에서 압도당하는 상황이
이런 불리한 결과를 만들었음이다.
케이플과 크리퍼트를 상대하던 프라하는 어깨에 일검을 맞고 부
상을 당했다. 아직 검을 휘두르는 건 문제가 없지만, 체력 소모가
극심해질 게 분명했다.
병력을 도주시키려던 투바는 결국 루나시언과 루시펠, 그리고
그들의 골렘에 의해 완벽하게 저지당했다. 그리고 치열한 결투.
현재 투바는 몸 여기저기 작은 부상을 당한 채 숨을 연신 헐떡
였다.
그나마 부상이 없는 이라면 카이렌 정도였다. 하지만 잉글리아
트와 토일렛의 합동 마법에 의해 제대로 된 공격 기회조차 잡지 못
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만 하는 묘한 상황을 반나절 동안 계속한
셈이다.
빌어먹을.
포기해라. 투바! 네 놈은 오늘 여기서 죽는다.
비록 내가 네 손에 죽을지언정 포기는 하지 않는다. 어디 죽여
봐라.
소원이라면. 하앗!
채채챙!
슈슈슈슝!
쳐라!
한창 치열한 격전에 또 다른 무리가 끼어들었다. 뒤늦게 상황을
눈치 채고 지원 온 루이에와 휴란트였다.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난 괜찮다. 어떻게 알고 왔느냐?
루이에님이 뭔가 심상치 않다면서 병력을 대동하고 왔습니다.
루이에가? 후후, 다행이군.
멀리서 루이에가 냉막한 얼굴로 전장을 훑었다. 그리고 오른손
을 높이 쳐들고 외쳤다.
공격!
와! 와!
루이에가 데려온 병력의 수는 3 천 명이었다. 살아남은 잉글리아
트 일행의 병력과 비등한 수였다.
그들의 가세로 카이렌 일행과 잉글리아트 일행의 싸움이 돌변
했다.
오호, 이거 어쩌나? 역전이네?
어, 어.
상황이 바뀐 전장을 보며 투바가 루나시언을 자극했다. 루나시
언 역시 전장을 확인했는지 침통한 표정이었다.
젠장. 후퇴!
후퇴!
카이렌과 대치중이던 잉글리아트가 결국 후퇴를 선언했다. 굴레
를 벗은 존재들의 싸움과 병력들의 싸움. 둘 모두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카이렌! 쫓아가자.
아니, 쫓지 마. 오늘은 여기까지.
왜?
프라하가 의문을 담아 물었다. 승기를 잡은 이때 몰아붙이지 않
는 게 이해가 되지 않은 듯했다.
루이에의 얼굴을 봐라.
흠.
루이에의 얼굴에 불안함이 가득했다. 뭔가 도박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곳과 가장 가까운 우리 병력이 누군지 생각해봐.
아, 정보병!
응. 저들은 전투병이 아니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알았어. 모두 추격 중지! 쫓지 마라.
프라하의 외침에 상대를 따라가려던 병력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의 행동에 잉글리아트가 데려온 병력들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카이렌은 병력보다 정보를 우선시했다. 이 때문에 병력을 키우
는 일보다 정보를 얻는 일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카이렌의 노력이 만들어낸 성과물이었다.
정보원.
어느 정도 훈련을 거친 후에 대륙 곳곳으로 퍼져 정보를 모으는
인원이었다.
루이에!
다행히 늦지 않았군.
고맙다. 정보원들을 데리고 와서 도와주다니. 기발한 발상이
었다.
우리 병력들이 너무 멀리 있더군. 가까운 곳에 저들밖에 없어
서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고맙다.
카이렌이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에 루이에가 피식 웃음
을 터트리며 손을 내저었다. 뭐 이 정도로 인사를 하냐는 표정 같
았다.
이제 돌아가지.
그러지. 프라하 병력을 수습해줘. 아군 시체는 데려가고 적군
시체는 화장해.
알았어.
프라하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록 5 백 명에 불과하지만
그 병력을 살린 것만으로도 만족한 모습이었다.
근데 휴란트! 루이나 왕국 일은 어떻게 됐어?
잘 되고 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제가 후계자가 될 것 같
아요.
휴란트는 몇 달 전 루이나 왕국의 수도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엘
베로의 후계자를 뽑는다는 소식 때문이다.
그리고 두 달.
휴란트는 이미 남은 후계자 몇 명 중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선발
된 상태였다. 카이렌과 그들을 지지하는 중소암살자, 정보 길드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걱정 마십시오.
특히, 신분에 대한 건 무조건 비밀에 붙여라.
알고 있습니다.
지금 휴란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신분을 들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필슨 가문의 혈육이라는 게 알려지는 그 순간, 후계자 후보에
서 탈락함은 물론이고 루이나 왕국의 정면 공격을 받아야 할 테니
말이다.
그래. 아무튼 수고했다. 가서 쉬어라.
알겠습니다, 선생님.
휴란트가 돌아가자 카이렌이 하늘을 쳐다봤다. 그리고 오래전에
실종된 라한을 떠올렸다.
네가 원한 게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카이렌이 본 라한은 치밀하고 완벽한 복수를 원하는 성격이었
다. 그라면 단순히 가서 죽이는 게 아닌 상대의 목적과 의도를 완
벽히 붕괴시키는 길을 택할 터 카이렌이 휴란트를 루이나 왕국의
후계자로 만들려는 의도도 거기 있었다.
엘베로의 꿈이라면 미래에 그가 죽은 후, 루이나 왕국 최고의 왕
으로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이다. 이를 완벽히 무너뜨리기 위해서
는 최고의 왕을 최악의 왕으로 만드는 일뿐이다.
카이렌은 휴란트를 왕으로 만들어서 엘베로를 최악의 폭군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물론 엘베로가 죽기 직전에 휴란트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것
도 멋진 복수 중 하나가 될 것이고.
*
카이렌 일행이 류카라한 일행과 한창 대립하고 있는 시기.
라한은 신화력에 적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라한
은 하루가 다르게 신화력을 사용하는 데 능숙해졌다.
-주인 괜찮아?
뭐가?
-전에 그 말. 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테세르의 전에 그 말은 정령왕과 라한 중에 누굴 돕겠냐는 질문
이었다. 그 다음날 라한은 바로 밝은 표정으로 수련에 임했지만 테
세르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매일 자신이 누구 편을 들까를 고민하며 보냈다. 그러다 오
늘 나름대로 결정을 내리고 라한에게 말문을 열었다.
됐어. 그 얘기는 안 해도 돼. 네가 내 편을 든다고 해도 기분이
좋지는 않을 거야. 난 네가 날 좋아하듯 정령왕들도 좋아해야 한다
고 생각하거든. 누가 뭐래도 정령왕은 널 탄생시키게 한 장본인이
잖어.
-그래도 난.
됐어. 그 얘기는 하지 말자.
-응.
라한은 전에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기 싫었다. 설사 자신
을 돕는다고 할지라도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정령
왕을 돕는다고 한다면 최악의 기분이 될 것 같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대답을 듣지 않고 잊어버리는 게 나을 듯했다.
슈라하고 변에게도 전해줘.
-알았어. 근데 그때 말이야. 로테마이어스가 왜 도망간 거야?
정말 주인이 무서워서 도망친 거야?
아니.
테세르는 그날 이후부터 계속 궁금했다. 정말 드래곤 로드 로테
마이어스가 두려워서 도망친 걸까? 정말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라
한을 무서워한 걸까? 이 의문을 풀지 못하면 발 뻗고 잘 수 없을 성
싶었다.
-그럼 왜 도망간 거야?
어지러웠을 거야. 내가 너무 당당하게 나왔으니까. 거기다 내
가 어떤 힘을 써도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거거든. 네가 신
화력을 느끼지 못했듯이 그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아, 그럼 불안했던 거구나. 주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
니까.
맞아. 두려움보다 불안한 마음이 가중되어서 도망친 거야. 아
마, 내가 허세를 부렸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다시 나타나겠지.
로테마이어스는 확실한 게 아니면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드래곤
대부분이 그런 성격이지만 로테마이어스는 정도가 심했다.
다른 드래곤들이 보고를 할 때도 추측성 발언을 싫어한 로테마
이어스 아니던가? 그런 성격이기에 확실히 알 수 없는 라한의 능력
이 불안했으리라.
라한은 모르고 있지만 로테마이어스가 도주를 택한 데에는 불의
정령왕 샐리온의 말이 큰 영향을 줬다. 라한을 만나기 전부터 지 fp
불안해하고 겁을 집어먹고 있었음이다.
그런 상태에서 라한의 당당한 행동을 보자 불안함이 가중되었
고, 결국 도주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카이렌에 대해 한 말은 무슨 뜻이야? 그것도 거짓말이야?
무슨 말?"
-드래곤이 전부 다 덤벼도 못 이길 거라고 했잖아.
흠, 그건 반반이야.
라한의 대답에 테세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라한의 아리송한 대
답이 헷갈렸던 모양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드래곤 전부는 아니고 반은 이길 수
있다는 얘기야?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에고, 사실 나도 카이렌의 능력을 정확
하게 모르겠어. 근데 두 가지는 확실해. 카이렌은 평소에 자신의
실제 실력보다 악한 척 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일행을 떠난 가장
큰 이유가 카이렌이라는 것. 그 두 가지 만큼은 확신할 수 있어.
과거에도 라한은 카이렌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하
지만, 그가 평소에 보여주는 능력보다 실제는 더 강한 게 아닐까하
는 의심은 계속해서 해왔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최근에 신화력을 얻으면서 더더욱 굳어졌
다. 카이렌에게서 신화력의 향기가 느껴진 탓이다.
과거에는 신화력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기에 막연한 추측에 불과
했다. 하지만 신화력을 익히고 사용하는 지금은 카이렌의 능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카이렌이 왜 약한 척 한 거야?
그건 나도 몰라. 아마 나하고 관계가 있겠지.
-음, 너무 넘겨짚은 거 아냐?
뭐 그럴 수도 있지.
라한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차피 지금은 이미 떨어져 있
는 상태이니 더 고민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근데 카이렌 때문에 떠났다는 건 무슨 말이야?
불안했어. 겉으로 드러난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이
잖아. 혹시 그가 다른 마음을 먹고 내게 접근한 게 아닐까하는 의
심을 종종했거든.
-아, 그렇구나. 그럼 로테마이어스는 언제쯤 다시 올까? 주인
말대로라면 다시 온다는 얘기잖아.
테세르의 이번 물음에 라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모르지.
라한의 착잡해하는 표정에 테세르도 입을 다물었다. 대답에서
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음을 짐작한 탓이다.
-걱정 마. 다음에 나타나면 내가 한 방에 날려 버릴 테니까.
녀석.
라한이 다시 신화력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라한은 로테마이어스가 다시 돌아오는 시간을 길어야 한 달로
봤다. 그의 정보력이면 한 달 안에 자신에 대해 꿰뚫어볼 수 있으
리라는 판단에서 였다.
*
라한이 로테마이어스와 싸운 지 어느 덧 두 달이 흘렀다. 애초에
한 달 정도 후에 다시 찾아 올 거라 예상했던 로테마이어스. 예상
에서 한 달이나 더 지났음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주인. 로테마이어스가 겁을 제대로 먹은 것 같은데.
이상하군. 이 정도로 정보력이 형편없는 놈은 아닐 텐데.
라한도 의문을 품고 있는 중이었다.
대륙 최강이라는 드래곤. 그것도 로드가 라한의 허세에 겁먹고
두 달이나 나타나지 않다니. 라한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애초에 샐리온이라는 변수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이런 오차가 발
생한 것이다.
-근데, 요즘 답답한 일 있어?
왜?
-수련하면서 인상을 자주 쓰는 것 같아서.
음, 조금.
-뭔데?
테세르의 물음에 라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말해도 되나 안 되나
한참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이내 결심을 했는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비웃지 마라.
-뭔데?
신화력에게 생명이 있는 것 같더라고. 자아라고 해야 하나? 아
무튼 스스로 의지로 뭔가를 한다는 느낌이 자꾸 들어.
라한의 얼굴에 약간의 쑥스러움이 담겼다. 자신의 입으로 이런
황당한 말을 하는 게 부끄러운 듯했다.
라한으로서는 이렇게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가 보기에는
딱 이 표현이 어울렸기 때문이다.
-엥? 그게 무슨 말이야?
이놈들이 가끔씩 거부하더라고. 음, 뭐라고 해야 하지? 예를
들면 내가 몸이 좀 안 좋을 때 무리해서 힘을 쓰려고 하면 신화력이
꿈쩍도 안 해.
-그건 몸이 피곤해서 신화력이 안 움직이는 거 아냐?
그냥 그렇게 보면 편한데, 뭔가 좀 이상해. 스스로 판단한다는
느낌이랄까? 힘이 남아 돌 때도 강하게 사용할 수는 없거든. 근데
그저께 저기 있는 벽을 부술 때는 약하게 쓰려고 했는데도 강하게
발휘되더라고. 마치 딱 이 만큼의 힘을 발휘해야 저걸 부술 수 있
어 라고 나한테 알려주는 것 같았어.
이틀 전 라한이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절벽을 무너뜨린 적이
있다. 그때 라한은 절벽의 크기를 가늠하고 신화력을 어느 정도 조
절해서 사용했다.
헌데 라한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한 힘이 발휘되어서 스스로
도 깜짝 놀랐었다. 그때 절벽을 다시 확인하자 철광석이 많이 함유
된 절벽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예상 못한 강한 힘이 절벽을 부수기
딱 좋은 힘이 된 적이 있었다.
라한도 절벽에 철광석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단단해진 걸 알
았다면 발휘된 만큼의 힘을 쓰려고 했을 것이다.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신화력이 무슨 정령도 아
니고. 이성이 있을 리가 없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는데, 의구심이 사라지질 않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령하고 그런 힘하고 비교하면 안 되지.
그래. 정령하고 비슷한 느낌이었지. 아참. 너 정령계로 돌아가
서 정령왕들한테 좀 만나자고 전해줘. 아니다. 오늘 중으로 정령계
를 방문할 거라고 말해줘.
라한은 테세르의 정령과 비슷하다는 말에서 뭔가 몰랐던 걸 알
게 될 듯했다.
그러자면 정령이 많은 곳에 가보는 게 최선일 터. 이번 기회에
전에 약속했던 정령계를 들러 볼 생각이었다.
-이번에 가려고?
응. 어차피 전에 약속했었잖아. 더 미룰 거 없이 한 번 가보지.
뭐.
-알았어. 그림 나중에 보자.
인사를 마친 테세르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테세르가 사라지자 라한이 슈라와 변을 불렀다.
-주인. 무슨 일이지?
-크리릭!
슈라와 변이 차례로 의문을 표했다.
전에 라한은 물 덩어리 변의 특이한 언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심
지어 투바도 물 덩어리의 이상한 말은 이해하지 못했다.
헌데 몇 달 동안 함께 살아서인지 이제는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 졌다.
딱히 어떤 말인지 알아들었다기보다 억양과 표정으로 하고자하
는 말을 유추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슈라. 너 잠시 돌아가 있어야겠다.
-왜?
어딜 좀 갈 생각인데, 그동안 로테마이어스가 나타나기라도 하
면 곤란하잖아.
-음, 멀리 가는가? 오래 걸리나?
슈라가 돌아가기 싫은 듯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몇 달 동안 물
질계에서 마음껏 놀았던 게 즐거웠던 모양이다.
아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혹시 몰라서 그런 거니까 돌아
가 있어.
-알았다. 빨리 다시 불러주길 기다리지.
슈라가 돌아가자 라한이 변에게 시선을 돌렸다.
변.
크리릭!
넌 어쩔래? 그냥 여기 있는 건 위험해 보이는데.
-크리리리링. 쿠라랑!
뭔가 말을 마친 변이 땅 속으로 스르르 스며들었다. 물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땅에 고인 모습이었다.
오호라. 물처럼 됐군. 이 정도면 로테마이어스도 못 알아보겠
다. 그래도 모르니까 조심해라. 혹시 로테마이어스가 집을 박살내
더라도 절대 반응하면 안 돼. 알았지?
찰랑! 찰랑!
물의 모습으로 돌아간 변이 물결을 일으켜 화답했다.
변마저 물로 변하자 라한은 차분히 앉아서 테세르를 기다렸다.
그렇게 잠시 후, 라한의 눈앞에서 공간이 갈라지며 미약한 빛이 흘
러나왔다.
-오랜만이다, 라한.
샐리온이군.
-먼저 이 주문을 읊어라.
정령왕을 부르는 주문인가보군.
라한이 눈앞에 떠오른 주문을 천천히 읊었다. 그가 주문을 다 읊
자 대기가 서서히 진동하더니 좀 전에 나타났던 샐리온이 눈앞에
나타났다.
샐리온의 조금 전 모습은 환영이었다. 처음 정령왕들이 라한 앞
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 같은 환영.
하지만 라한을 정령계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는 환영이 아닌 실
체가 물질계로 소환되어야 했다. 라한이 읊은 주문은 정령왕을 물
질계로 소환하는 주문인 셈이다.
-역시 아직 살아 있군.
물질계에 나타난 샐리온의 첫 마디였다.
후후, 로테마이어스를 만났던 건가?
라한은 샐리온의 말투에서 그가 로테마이어스를 만났음을 알아
냈다. 하긴 불의 정령왕이니 불의 지배자라는 레드 드래곤과 상당
한 친분이 있는 게 당연했다.
-만났었지. 두 달 쯤 됐나? 널 죽이러 간다더군.
두 달 전에 만나긴 했지.
-근데 멀쩡하군. 그럼 로테마이어스가 죽었나?
아니, 겁먹고 도망갔으니 아직 살아 있을 거다.
라한의 말에 샐리온이 미약한 살기를 흘렸다. 같은 불 속성인 fp
드 드래곤 로테마이어스를 비하하는 말투가 거슬리는 듯했다.
-헛소리. 드래곤은 겁이라는 감정이 없다.
"겁이 없는 생명체는 그 어디에도 없다. 겁을 느낄 만큼 강자를
만나지 못해서 느끼지 못할 뿐이지.
-그럼 네가 로테마이어스가 겁먹을 정도로 강자라는 뜻인가?
강하지는 않지만 강하게 비칠 수는 있지. 자, 이제 그런 얘긴
그만하자고. 날 정령계로 데려갈 덴가?
라한이 화제를 돌렸다. 로테마이어스에 대한 얘기를 더 하고 싶
지 않았음이다.
샐리온과의 대화가 길어져서 로테마이어스 앞에서의 행동이 연
기라는 게 들통 나면 곤란했다. 시간이 좀 더 흘러 신화력이 완벽
히 익숙해진다면 그때는 로테마이어스를 맞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 힘을 제대로 깨우치지도, 제대로 적응하지도 못한 지금은 로
테마이어스의 재등장이 걱정스러웠다.
-그러지. 내 손을 잡고 눈을 감아라.
라한이 샐리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샐리온이 잡고 열기
를 불어넣었다.
무슨 짓이지?
-강해졌군. 힘을 느낄 수가 없어.
샐리온이 열기를 불어 넣은 건 라한의 힘을 가늠하기 위해서 였
다. 정말 로테마이어스가 겁먹을 정도로 강한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었으리라.
정령은 호기심이 많은 존재였군.
-미안하게 됐다. 순간 궁금증이 일어서. 그럼 이번에는 진짜
정령계로 가겠다.
말을 마친 샐리온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라한과
은 주변으로 미약한 파동이 퍼져나갔다.
파동이 멎고 진동이 완전히 사라지자 라한과 샐리온의 모습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정령계를 돌아보며
라한이 사라지고 잠시 후, 분노한 표정의 로테마이어스가 라한
의 집에 찾아왔다.
-이놈! 어디 있느냐?
로테마이어스의 외침에도 라한의 집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
다. 아무도 없었으니 반응이 없는 게 당연했다.
물론 물로 변한 변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라한에게 들은 대로
잠자코 듣기만 했다. 애초에 피어에 영향을 받지 않는 물 덩어리
변. 때문에 겁에 질려 떠는 반응을 보일 리도 없었다.
진짜 물 그 자체로 돌아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놈! 숨지 말고 나와서 겨뤄보자. 카라한!
로테마이어스가 집 주변을 날아다니며 분통을 터트렸다.
몸은 예전과 달리 본체로 변한 상태의 로테마이어스. 날아다니
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풍겼다.
-네 이놈!
한마디 외친 로테마이어스가 마나를 집 안으로 퍼트렸다. 그리
고 인상을 팍 찡그리며 땅으로 내려왔다.
-빌어먹을 인간 놈, 벌써 도망쳤군. 라! 한! 잊지 않겠다. 라아
아한!
로테마이어스가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주변의 마나
를 입으로 잔뜩 모았다. 브레스를 쓰기 위한 준비 자세였다.
이곳에서 드래곤 로드의 브레스가 뿜어지면 마을은 불바다가 된
다. 거기다 결계로 다른 곳과 단절되어 있는 블리아드 마을. 이곳
의 참사는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터였다.
-젠장
브레스를 막 터트리려던 로테마이어스가 마나를 다시 대기 중으
로 퍼트렸다.
로테마이어스는 겨우 인간 한 명 때문에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
려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또 아직 라한을 죽이지도 못한 상황에서
분노부터 터트리는 자신이 한심했다.
-라한. 어디까지 도망치는지 두고 보겠다.
로테마이어스가 마을 주변을 한 바퀴 돈 후에 레어로 돌아갔다.
얼굴을 가득 일그러뜨린 채였다.
드래곤이 마을 주변을 날아다닐 때, 마을 내부에선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말로만 듣던 드래곤을 처음으로 본 사람의 당연한 반응
이었다.
로테마이어스가 돌아간 후, 마을 원로들과 익스멈 촌장이 회의
를 개최했다.
라한이 좀 전의 그 드래곤 아닌가?
내가 보기엔 라한을 찾아온 드래곤 같았네. 아무래도 라한이
세력 다툼에서 패하고 도망 온 게 맞는 모양이야.
원로원의 의견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다. 드래곤에 대한 크나
오해가 더 큰 오해를 부르는 모습이었다.
아니, 아니지. 그렇게 보긴 힘들어. 세력 다툼에서 패했는데 왜
드래곤이 와서 발광을 치겠는가?
그럼?
내가 보기에 라한이 원래 드래곤의 왕이었던 것 같네. 드래곤
의 왕을 로드라고 부르던가? 아무튼 내 생각은 그렇다네. 헌데, 반
란이 일어나 로드가 바뀌었겠지.
아함브라의 발언에 주변 원로들이 귀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왕이 바뀌면 전에 왕이었던 자를 죽여야 뒤끝이 없네. 아마 반
란으로 로드가 바뀌었지만, 기존에 로드였던 라한이 도주를 해서
찝찝해한 게 아닐까? 그래서 라한을 죽이기 위해서 왔다고 생각하
는데.
음, 일리가 있군요. 익스멈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래도 자네
가 마법을 조금 배웠으니 대충 알 게 아닌가?
저야 뭐. 형님들 의견에 따를 뿐입니다.
마을 안에서 익스멈 촌장의 발언은 거의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
했다. 하지만 원로원들과의 회의에서는 발언권이 그리 크기 않았
다. 말이 곧 법으로 불리는 아함브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역시 익스멈은 자신의 생각을 펼치지 못했다. 그냥 아
함브라가 하는 말에 동조를 할 수밖에.
그럼 형님. 저희가 어찌해야 합니까? 마을에서 싸움이라도 벌
어지면 저희 마을은 초토화될 겁니다.
그렇다고 라한에게 집을 떠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럼?
일단 라한은 잠시 자리를 피한 것 같네. 바로 어제 그를 봤다는
소문이 있는 걸 보면 좀 전의 그 드래곤이 오는 걸 보고 도망친 거
겠지
아함브라의 말에 주변 원로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라한이
사라졌으니 마을에서 드래곤끼리의 싸움이 벌어지지는 않을 거라
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원로원의 노인들을 보며 아함브라가 혀를 끌끌 찼다.
어허, 물론 드래곤들끼리의 싸움을 마을에서 하지 않는다는 건
다행이지. 하지만 우리 역시 큰 힘을 잃었다는 걸 잊었는가?
예?
만약 라한이 다시 로드에 오른다면 어떻겠든가? 정말 운 좋으
면 약한 드래곤이나마 우리 마을의 수호신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
지. 거기다 우리가 라한의 싸움에 한 손을 거든다면? 아마 우리를
박대하지는 않을 게야. 잘만하면 지금 우리 땅을 몇 배 더 키워줄
수도 있고, 정말 기분이 좋다면 이 나라를 우리에게 줄 수도 있는
일이지.
아, 그렇군요. 하지만 이미 사라졌는데.
에휴, 우리로서는 애석한 일이지, 일단 사라졌으니 희망도 사
라져 버렸어. 에잉. 오늘 회의는 이걸로 끝내세. 흥이 사라졌어.
아함브라가 아쉬운 얼굴로 회의를 끝냈다.
드래곤 정도의 강자들끼리 싸울 때는 인간의 수가 큰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들은 간단한 피어에도 전투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실력 차이를 모르는 아함브라의 무모한 생각. 과연
그들이 라한과 드래곤의 싸움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
였다.
*
한편, 정령계에 도착한 라한은 개운하고 깔끔한 기분을 온몸으
로 느꼈다. 정령계라는 차원 자체가 가지는 고유 기운이었다.
아, 느낌 좋은데
-뭐라? 정령계의 조화로운 기운을 직접 겪으면서 고작 느낌 좋
은데라고? 어처구니없구나.
좋아서 좋다고 하는데 얘가 왜이래?
-이, 이놈이.
라한의 말투는 흡사 애들을 달래고 어르는 듯했다. 평생 누군가
의 떠받듦만 받던 정령왕 샐리온. 순간 욱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 화내지 말라고. 난 손님이잖아. 어이, 주인장. 안내 좀 해
봐.
-네가 정녕 죽고 싶은.
-그만해, 샐리온.
샐리온이 손을 치켜들고 분노를 터트리려 할 때,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역시 먼 곳에서 라한과 샐리온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 때문에
샐리온이 충분히 화낼 만하다는 생각도 하기는 했다.
하지만 라한의 말처럼 샐리온은 이곳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라
한은 자신들이 초대한 손님인 터. 손님을 불러놓고 주인이 분노를
표하는 건 예의가 아닌 듯싶었다.
-실피드. 저놈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너도 들었지? 저놈
이.
-들었어. 그래도 참아. 우리가 초대한 손님이잖아. 흠, 라한.
예전보다 더 무모해졌군.
샐리온을 제지시킨 실피드가 라한을 슬쩍 떠봤다. 그 말에 라한
이 웃으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뭐, 내가 무모해졌다는 건 나도 인정하지. 근데 너도 만만치 않
은 걸. 예전에도 남 훔쳐보는 걸 좋아했지만, 요즘은 더 심한 것 같
더라고.
-무슨 말이지?
내가 이곳에 나타난 지 한 10 분 됐지? 그동안 넌 저 끝에서 계
속 훔쳐보고 있었잖아. 안 그래?
-그, 그걸 어떻게.
실피드가 놀란 음성으로 말을 더듬었다. 라한이 자신을 눈치 채
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탓이다.
라한이 이곳에 도착한 건 대략 10 분전이었다. 헌데, 이곳과 물
질계의 대기가 너무 달라서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아니, 숨을
쉴 수는 있는데도 가슴이 답답한 특이한 느낌이었다. 아마 자연 그
대로의 기운을 들이마셔서 몸이 예민하게 반응한 듯했다.
그 때문에 라한은 십 분 정도를 가만히 서서 몸을 적응시켰다.
보통 사람은 적응하는 데 며칠은 걸리지만 라한은 십 분 만에 해낸
것이다.
나머지 둘도 나왔으면 좋겠군. 구경거리가 되는 건 적성에 안
맞거든.
-흠.
-으음.
라한의 말에 물의 정령왕 엘라임과 땅의 정령왕 노아스가 모습
을 드러냈다. 얼굴은 뭔가 알 수 없다는 표정과 부끄러워하는 기색
이 가득했다.
질책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냥 구경거리가 되는 게 싫었을
뿐이니까.
-어떻게 알았지?
느껴지니까. 보이니까. 향기가 맡아지니까.
-대단하군.
실피드가 놀랍다는 듯 대답했다. 라한의 능력에 진정으로 감탄
했다는 표시였다.
하나만 묻지. 물질계에 있을 때, 정령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던
데 너희들이 보낸 건가?
-역시 눈치 채고 있었군.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
너희들이 맞군. 대체 이유가 뭐야? 왜 자꾸 날 감시하는 건데?
누가 날 감시하라고 했나?
라한은 블리아드 마을에서 지낼 때, 수시로 정령의 느낌을 받았
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정령이 아닌 자신 주위를 살피는 정령의
느낌이었다.
악의가 느껴지지 않아서 방치하기는 했지만 기분이 좋은 건 아
니었다. 정령왕과의 친분이 없었다면 붙잡아서 해코지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가 감시하라고 한 건 아니다.
그럼?
-전에 우리를 만났을 때 네가 특이한 인간이라는 느낌을 받았
지. 그래서 널 좀 자주 살폈을 뿐이다.
별 다른 악의가 느껴지지는 않더군. 좋아. 없었던 일로 해주겠
어. 대신 앞으로는 조심 좀 해주면 좋겠다.
정령들은 너무 조화로운 나머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누군가
를 속이는 일 자체에 재능이 없는 존재가 그들이었다. 물론, 테세
르는 특이한 주인과 특이한 성장 환경 덕에 좀 다르지만.
대부분의 정령은 거짓과 거리가 멀다.
라한이 정령에게서 악의를 느끼지 못한 건 그들이 정말 악의가 없
기 때문이다. 정령은 악의라는 감정 자체를 속이지 못하니 말이다.
이제 정령계를 소개시켜주는 게 어때? 시간이 별로 없거든.
-정령계를 먼저 소개해야겠군, 정령계는 신에 의해 세상이 열릴
때, 가장 먼저 창조된 차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원의 근
본 바탕이 된다고 보면 되겠지.
그렇군.
-이 때문에 이곳은 신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들리는 곳이기도
하다.
신의 목소리라는 말에 라한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신이라는 존
재 자체를 증오하는 그였기에 저절로 지어진 표정이었다.
-왜 웃지?
실픽드의 물음에 라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야. 계속해.
-흠, 흠. 우리 차원계는 아까 말했다시피 신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들리는 곳이다. 신계와의 거리는 멀지만 실상은 가장 가깝다
고 봐도 무방하지.
실피드의 얼굴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신과 가깝다는 게 뿌듯
했던 모양이다.
아,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정령계 좀 구경시켜줘.
-그러지. 따라와라.
실피드가 앞장서 가며 라한을 인도했다.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정령이 살아가는 터전이었다. 바람의 정령
부터 시작해서 땅의 정령, 불의 정령, 마지막으로 물의 정령이 사
는 곳까지. 나름대로의 질서를 가지고 사는 모습이 인간과 다
를 바 없었다.
인간과 비슷하네.
-누구나 사는 모습은 비슷하지. 하지만 저들의 마음은 인간보다
훨씬 깨끗하다.
그렇다고 치자고. 다음 갈 곳은 어디지?
라한이 실피드의 입을 막고 화제를 돌렸다. 라한 스스로도 인간
이 이기적이고 추하다는 걸 잘 아는 탓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왜 인간만 그런 존재로 취급을 당할까 불쾌
하게 여겼다.
어차피 사는 게 다 똑같지 않은가? 나름대로의 창조 목표가 다를
뿐. 인간이든 다른 여느 생명체는 목표를 일해 노력하는 건 비슷하
다고 생각했다.
라한이 두 번째로 들른 곳은 정령들이 속성을 몸에 받아들이는
곳이었다. 테세르가 정령의 수련 장소라 불렀던 곳.
엘리멘탈 레고르라고 부르는 이곳에서 라한은 묘한 기분을 느
꼈다.
-왜 그러지?
아, 아니다.
실피드의 물음에 라한이 아니라며 부정을 표했다.
라한은 엘리멘탈 레고르에 들어서면서 누군가 말을 거는 느낌을
받았다. 제발 대화를 해달라는 듯한 간절함. 그러면서도 자신을 외
면하는 라한을 섭섭해 하는 느낌.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
었다.
내가 너무 예민해진 건가?
애써 무시한 라한이 실피드를 계속 따랐다.
바람의 레고르와 땅의 레고르, 그리고 불의 레고르에 들를 때까
지는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라한 스스로가 누군가가 걸어오는 말
을 애써 무시한 것이다. 그러다가 라한이 물의 레고르에 도착하면
서 사건이 벌어졌다.
어라?
바람과 땅, 불의 레고르를 지날 때, 라한은 누군가가 말하는 듯
한 느낌 때문에 몹시 찝찝했다. 느껴지는 간절함과 섭섭함의 원인
이 마치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였다.
헌데 물의 레고르에 들어서자마자 그런 느낌이 사라졌다. 아니,
너무 약해서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이상하군. 왜 이곳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거지?
-라한, 뭐하는가? 이곳은 정령의 레고르다. 인간이 오래 머물
곳이 못되니 빨리 움직여라.
아, 알았어. 잠시만.
라한은 자신이 품은 의문을 꼭 풀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이곳 물의 레고르가 아니면 풀 수 없을 듯했다.
-뭐하는 거지? 빨리 움직여라.
아, 이.이게.
-왜 그러지?
가슴이, 가슴이 너무. 너무 답답.해.
말을 하던 라한이 그 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사
태에 실피드가 빠르게 달려와 라한을 받았다.
-무슨 일이야?
-흠, 이제야 반응이 오는 건가?
-뭐가?
-라한은 인간이다. 정령계에서 멀쩡하게 움직이는 게 이상한
거지.
대부분의 인간은 정령계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과거에 두 차
례 들렀던 인간의 방문. 그때도 인간은 정령의 레고르를 채 다 거
치지도 못한 채 의식을 잃었다. 정령계의 생소한 대기와 기운이 인
간의 정신력을 피폐시킨 탓이다.
-후후. 라한은 좀 다를 줄 알았더니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하는군.
-데리고 나갈까?
-아니, 아까의 그 버릇없음을 생각하면 그냥 살려줄 수 없지.
이대로 쫌 더 두고 고통 받게 하자고.
-히히히. 그래. 그저 좋은 생각이야.
땅의 정령왕 노아스의 대답으로 정령왕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엘라임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세 정령왕들이 의견을
모았으니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의식을 잃은, 의식을 잃은 척한 라한은 눈을 감은 채로 주변에
의지를 집중시켰다. 신화력을 퍼트려 자신이 느낀 의문을 풀기 위
함이었다.
음, 이상하군, 분명.어?
느껴졌다. 분명 생명체였다. 정령과 흡사하면서도 정령과는 뭔
가 다른 생명체 정령계에 자신 외에 또 다른 방문자가 있다는 생
각에 의구심이 더 강해졌다.
음, 누굴까? 몰래 들어온 건가? 아니면 정령왕들의 허락을 받
고 들어온 건가? 알 수가 없군.
-아니에요. 저희는 여기 사는 걸요.
라한의 의문에 반응하듯 상쾌한 목소리가 뇌리에 들려왔다. 갑
작스러운 현상에 라한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누, 누구지?
-전 나무랍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생각에 반응하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이나
꿈은 아니었다. 귀가 아닌 뇌리를 두드리는 소리였지만, 누군가가
하는 말임에 분명했다.
나무라니? 그게 무슨?
-아, 제 말이 들리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무슨 소리야?
-자연을 이해하는 존재님. 그대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다른 자
연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요.
뇌리에 들리는 목소리에 행복이라는 감정이 묻어났다.
하지만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라한. 나무의 부탁에도 쉽게
이름을 말해주지 못했다.
나무라니. 나무가 왜 말을 하는 거지?
-왜라니오? 저희는 원래 말을 할 수 있어요.
그럼?
-우린 말을 하지만 아무도 저희 목소리를 듣지 못하죠. 아주 오
래 전에는 정령들이 저희 목소리를 들었는데, 이젠 정령들 중에서
도 저희 목소리를 듣는 이가 없어요. 아, 엘라임님은 그래도 대충
은 듣는 것 같더군요.
나무의 설명에도 라한은 그가 하는 말을 제패로 이해하지 못했
다. 너무 생소한 얘기였기에 그의 말을 믿는 데에만도 오래 걸릴
듯했다.
엘라임은 대충 듣는다고?
-그분도 저희와 대화가 되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열 마디 말을
하면 한 마디 정도 알아들으시죠. 그러고 보니 저희와 대화가 되는
유일한 존재셨군요. 성함을 가르쳐주세요. 다른 자연들에게 자랑
해야겠어요.
아, 난 카라한 필슨이야.
-카라한 필슨, 카라한 필슨, 카라한 필슨. 좋은 이름이네요.
카라한 필슨님.
나무가 라한의 이름을 계속 되뇌었다. 마치 라한의 이름을 평생
잊지 않겠다는 듯.
그냥 라한이라고 불러주면 좋겠는데. 그리고 님이라는 존칭도
좀 빼고.
-그래도 되나요?
응.
-네, 라한님.
호칭은 바꿨음에도 님이라는 존칭은 그대로였다. 누군가를 높여
부르는 게 입에 붙은 듯했다.
근데, 모습이 안 보이네.
-지금 눈을 감고 계시잖아요.
아, 맞다.
라한은 지금 정령왕들을 속이기 위해 의식을 잃은 척하고 있었
다. 눈을 감고 있으니 자연을 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럼 눈을 뜨면 볼 수 있는 건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저희를 보는 이가 없었거든요. 저희와
대화할 수 있는 이도 없었고요. 어쩌면 볼 수 있을 수도 있. 아,
정령왕들이 라한님을 옮기려고 해요.
이런, 이제 일어나야겠군.
"으, 으.
라한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좀 전에 들렸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기 위함이었다.
라한의 고개가 오른 쪽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노아스를 반쯤 가
리고 선 희미한 나무의 모습이 보였다.
너 인가?
-아, 알아보시는군요. 역시 제가 보였어요. 제가, 제가.
근데 이제 가봐야겠다. 정령왕들이 까다롭게 굴면 골치 아프
거든.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뭐지?
-어딜 가시든 그곳에는 자연이 있을 거예요. 그들과 대화해 주
세요. 그들을 외롭지 않게 해 주세요. 부탁합니다.
노력은 해볼게. 근데 정령계 아닌 다른 곳의 자연도 대화를 할
수 있나? 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는데.
-대화를 할 수 있는 자연은 정령계가 유일하답니다. 하지만, 그
들도 의지가 있으니 서로 의사소통은 할 수 있어요. 꼭 말을 주고
받아야 대화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라한은 자신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나무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물론, 눈을 감고 있을 때도 나무가 감격했다는 걸 느끼긴 했다. 하
지만 눈을 뜨고 우는 모습을 보자 차마 이곳에 더 머물 수 없었다.
으, 으윽! 내가 의식을 잃은 건가?
-음, 깼군. 어떻게 깼지? 지금까지 의식을 잃은 인간이 자력으
로 깬 적이 없었는데.
내가 남다른 데가 있나보지. 가자고.
라한이 정령왕들을 재촉해 물의 레고르를 빠져나갔다.
처음에는 보고 들을 수 없었던 자연의 모습과 목소리. 헌데, 막
상 나무와 대화를 하고 나자 주변이 온통 자연이었다. 또, 여기저
기서 자신을 알아봐달라고 애원하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아우, 미치겠군. 빨리 좀 가자. 여긴 너무 시끄럽고 산만해.
-무, 무슨 소리냐? 우리 정령의 레고르는 항상 고요하고 숙연한
곳이다. 산만하다니.
아, 됐어. 빨리 가자.
라한이 정령왕들을 제치고 앞서 나갔다. 레고르를 이미 빠져나
왔음에도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라한이 다음으로 들른 곳은 정령이 창조되는 곳이었다.
엘리멘탈 크리터라고 불리는 이곳.
테세르가 전에 한 말처럼 태어나는 정령들은 속성이 없었다. 살
아가면서 스스로에게 적합한 속성으로 변화되는 듯했다.
라한의 정령계 방문 과정은 엘리멘탈 크리터가 끝이었다. 이제
물질계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실피드.
-뭐지?
라한은 처음 자신이 나타났던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들어
온 곳인 여기를 통해 곧 정령계를 떠날 터.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네가 했던 말 중에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더군.
-말해라.
전에 신의 목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곳이 정령계라고 했었지?
-그랬지
그럼 지금까지 신이 몇 번이나 말을 걸었지?
라한의 질문에 실피드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왜 대답이 없지?
-그건.
신이 정령계에 말을 건 적은 태초에 몇 번이 전부였다. 지금 정
령왕들이 이 자리에 오른 후에는 단 한 번도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
한 것이다.
전대 정령왕에게 신의 목소리가 먼저 들리는 곳이라고 들었기에
그렇다고 알고 있을 뿐. 실제로 겪은 적은 없는 셈이다.
뭐, 그건 됐다. 어느 정도 예상했으니까. 또 한 가지 의문이 있
어. 물질계의 신전에서는 인간이 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기도
를 하거든. 그럼 그때 신이 신관들에게 하는 말도 이곳을 거쳐서
가는 건가?
-크크, 킥킥킥.
라한의 물음에 가만히 듣고 있던 땅의 정령왕 노아스가 키득거렸
다. 다른 정령들도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냐? 왜 기분 나쁘게 웃는 건데?
-자연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는 하찮은 인간이 신의 목소리를 듣
겠다니. 가소로워서 웃었다.
신의 목소리라. 그래. 나 역시 신의 목소리를 들은 적은 없다.
근데, 신의 대리인이라는 놈은 만난 적이 있지.
-헛소리 인간 따위를 신의 대리자가 만나줄 리 없다.
실피드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분노와 불신이 느껴졌다. 라한의
말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듯한 강경한 말투였다.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고 주변에 기운을 퍼트렸다. 그리고 마음
을 열고 좀 전에 느꼈던 자연의 목소리를 찾기 시작했다.
역시 있군. 내가보기에 저들은 이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있
다. 자연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라한의 뇌리에는 자연의 목소리가 똑똑하게 들렸다. 헌데 그들
의 반응을 보면 정령왕들은 자연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정령왕들이 오히려 인간을 질책한다는 게 우스웠다. 라한
이 보기에 인간이나 정령왕이나 거기서 거기처럼 보였다.
내가 신의 대리인을 만난 적이 있다면 어쩔 건데? 그리고 내가
자연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럼 어쩔 건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신의 대리인은 우리조차 만난 적이 없다.
또 자연과 가장 가까운 우리 정령들조차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게 자
연의 목소리다. 그런데 인간인 네가? 하하하하. 재미있군. 아주 재
미있어.
너희들이 자연 아닌가? 근데 자연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
해? 이해가 안 되는데?
라한이 짐짓 모른 척 정령왕들에게 물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자
연에 대해 알고 싶었음이다.
-자연과 정령은 다르다. 자연은 우리의 탄생 배경이지 우리 자신
이 아니다. 너희들처럼 목적 없이 태어나는 인간들은 알 수 없겠지.
목적?
-그래. 우리 정령들의 창조 이유는 너희 인간 따위에게 소환되
어서 힘을 쓰는 게 아니다. 물질계에 가득한 자연을 수호하는 게
우리 본연의 임무다.
흠,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의 탄생에 목적이 없는 건 맞군, 우
리 인간들은 스스로를 위해 태어나서 자신을 위해 살다가 죽으니
까. 근데, 너희들이 자연을 수호하는 이유도 결국 너희들 스스로를
위한 것 아닌가?
라한의 독설에 정령왕 실피드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정령이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우기고 싶었다. 인간보
다 덜 이기적이고 덜 개인적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자연의 약화가 곧 정령의 약화로 다가오는 일. 정령들이 자연을
수호하는 가장 큰 이유도 결국 자신들의 힘을 강하게 하기 위함이
었다. 라한의 두루뭉술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에 대꾸할 말
이 궁해졌다.
아, 됐어. 이런 얘기 하자고 온 건 아니니까. 근데, 너희들이
자연의 얘기를 못 듣나? 의외로군.
-휴우우, 사실대로 말하지. 예전에는 자연과 우리 정령들은 많
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린 자연을 사랑했고 자연도 우리에게 고마
워했지. 헌데 언젠가부터 자연이 우리에게서 마음을 닫았다. 아직
도 우린 그 이유를 모른다.
멍청하군. 내가 최근에 들어본 대답 중에 가장 멍청한 대답이
었다.
라한이 실피드를 비웃었다. 비난의 의도가 분명한 목소리와 표
정이 가득했다.
-무슨 소리지?
-내가 저놈이 건방지다고 했지? 일단 버릇부터 고쳐놓고 보자
고 내가 말했.
노아스. 너도 자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 그럼 너도 썩었나
보군. "
-닥쳐라!
실피드. 너도 들리지 않지? 샐리온 너도 들리지 않을 테고.
맞나?
-이, 이놈이.
라한이 하나씩 지적할 때마다 정령왕들이 눈을 부라렸다. 그들
은 라한의 비웃음 가득한 질책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헌데 뭔가 이상했다. 라한이 물의 정령왕 엘라임에게만은 독설
을 퍼붓지 않고 있었다.
후후, 전부 썩었어. 이기적으로 변한 거지. 자연이 말을 하지
않았다고? 어리석은 것들. 자연은 계속 말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들을 자세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엘라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라한이 갑자기 엘라임을 걸고 넘어졌다. 그 말에 엘라임이 당황
한 표정을 지었다.
엘라임. 왜? 말하기 불편해?
-그건.
너도 자연이 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그게 저.
엘라임 사실대로 말해봐. 저기서 사실을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자연을 생각해야지. 안 그래?
라한이 계속 엘라임을 몰아붙였다. 라한이 대답을 재촉할 때마
다 엘라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렸다.
한참 당혹한 표정을 짓던 엘라임. 결국, 결의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흐으음, 그.그래. 네 말이 맞다. 자연은 지금도 얘기하고 있
지. 그들이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정령들이 듣지 못하는 거다.
-무, 무슨 소리냐? 엘라임. 자연은 말을 하지 않은 지 이미 오
천 년이 지났다. 근데, 그 무슨.
-맞다. 엘라임. 그게 무슨소리냐?자연은.
엘라임의 대답에 다른 정령왕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인정할
수 없다는 빛을 노골적으로 띄운 채였다.
크크크, 정령왕들도 참 이기적이군. 인간 못지않아. 자신들이
듣지 못한다고 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다니, 너희들의 행태
가 인간과 뭐가 다르지?
-헛소리하지 마라. 자연은 말을 하지 않은 지 이미 오천 년이 지
났다.
아니, 아니야. 너희들이 자연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지 오
천 년이 지난 거겠지.
라한이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실피드를 비웃었다. 엘라임은
정령왕들 사이에서 입을 다문 채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사실 엘라임도 자연이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랐다. 하지
만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정
령왕들과 정령들을 답답해하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인정할 수 없다. 자연은.
자연은, 자연은, 자연은. 대체 그 자연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언제까지 우길 작정이야? 왜 너희들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
지? 무려 오천 년이다. 오천 년 동안 그들은 너희들에게 외면 받았
다. 이제 마음을 열고 그들의 말을 들어줄 때가 되지 않았나?
라한이 정령왕들을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 말에 정령왕들이
한동안 말을 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엘라임. 네가 확실하게 말해주면 좋겠군.
-그게.
네가 정령계를 위하고 자연을 위한다면 말해라. 지금 자연들은
몹시 슬퍼하고 있다. 이 상태로 시간이 더 지난다면 자연도 너희들
을 외면할 테지. 자연이 외면하는 정령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건
너희들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라한이 엘라임마저 몰아붙였다. 그 말에 정령왕들의 모든 시선
이 엘라임의 입으로 쏠렸다. 다시 한번 엘라임의 입으로 확인해 보
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연은. 말을. 하고 있다
-정말이야? 엘라임.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나 역시 자연이 말하는 걸 들은 건 얼마 되지 않아. 백 년쯤?
아마 그 정도 됐을 거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자연의 목소리
에 귀를 기울였어. 하지만 아직도 그들이 하는 말은 명확하지 않
아. 내가 자연을 생각하는 마음이 부족한 거겠지.
이제 모든 게 확실해졌다. 엘라임의 말. 거짓을 말하지 않는 정
령의 말이기에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엘라임의 말이 끝나자 정령왕들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모든 잘
못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에고, 이제 알았으니 됐어. 잘못은 알게 되면 고치게 되지.
-고맙.다.
불의 정령왕 샐리온이 힘들게 감사를 표했다. 얼굴이 붉게 달아
오른 모습이 감사 인사가 어색한 듯했다.
됐어, 그 정도로 고맙기는.이제 날 집으로 보내줘, 나도 여기
서 배운 게 있으니까.
-알겠다. 내가 보내주지. 마중 나가지 못하는 걸 이해해라 그럼.
샐리온이 라한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미약한 빛이 라한
의 몸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다음에 또 보자고.
마지막 라한의 인사를 끝으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라한이 사
라지고 나서도 정령왕들은 누구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지금부터라도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 다시는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였다.
-라한의 변화
알파람 산맥의 남부 기슭.
이곳은 나무보다 풀이 더 많은 특이한 산맥이다. 그래서인지 몬
스터조차 거의 살지 않았다.
몬스터가 없는 곳. 거기다 여기저기 호수가 많고 귀한 풀들이 많
이 자라는 곳. 그리고 인세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아름다운 절경이
가득한 곳. 헌데도 이곳에서 사람을 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사
람들이 드나들기 힘들 정도로 오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인간들이 사는 곳을 찾으려면 금지로 불리는 레비안
산맥을 넘어야 한다. 이런 위치적인 특징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알파람 산맥이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이놈아! 거기 안 서?
오빠! 도대체 왜 그래요?
사람을 보기 힘든 이곳에 대륙어가 퍼져 나왔다. 그와 함께 무척
늙어 보이는 노인과 10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모습을 드
러냈다.
이놈아! 대체 왜 그러는 거냐? 이유라도 알자.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겁니까?
이번에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색머리와 약간 그을린
얼굴이 잘 어울리는 20 대 중반의 사내였다.
그래, 좋다. 내가 널 속였다고 치자 그럼 넌 지금까지 살면서
거짓말 한 번도 안 하고 살았냐?
예. 전 지금까지 단 한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은 기사도에 위배되는 행동이니까요.
사내의 대답에 노인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순간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생각이 든 탓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사내의 말이 맞는 듯도 싶었다.
자신과 함께 지낸 시간이 벌써 몇 해던가? 그 동안 단 한 번도 거짓
말을 하지 않은 걸 보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지고 들어갈 수는 없는 법. 마음을 다잡은 노인
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놈아. 살다보면 거짓말도 할 수 있지. 그리고 내가 한 거짓말
이 악의에 의한 거였냐? 아니잖아. 내가 한 거짓말도 알고 보면 다
널 위해서였거늘. 어찌 이리 난리를 친단 말이냐?
악의가 됐든 신의가 됐든 거짓말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오빠! 대체 할아버지가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요?
그건. 아니다.
뭔가 말을 하려던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 해서는 안 되
는 말인 듯했다.
시스마란! 네 이놈! 그래도 내가 네 스승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작은 거짓말을 했기로서니 이렇게 방방 뛰어도 되는 거냐?
노인의 입에서 시스마란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베르네에게 마법을 배우기 위해 떠났던 바른 생활 사나이 시스
마란 기사도에 충실하려 했던 기사 지망생. 그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네에게 마법을 배우기 위해 머물던 장소가 이곳인
모양이다.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거짓말은 나쁜 겁니다. 잘못했다고 시인
하고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십시오. 그렇게 하기 전
까지는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용서? 이놈이.난 네 스승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잘못을
빌어야 한다는 말이냐?
제가 제자이기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스승님은 거짓말
이라는 악독한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제자 된 도리로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미치겠군.
베르네가 한 거짓말이라고 해야 별거 아니었다. 자신이 본래 드
래곤이었다는 것. 시스마란을 제자로 삼기 위해 노마법사로 위장
을 했다는 거짓말이 전부였다.
헌데도 시스마란은 베르네의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았다. 당장
거짓말하는 스승이 싫다고 뛰쳐나왔으니 말이다.
오빠! 할아버지! 대체 무슨 거짓말을 한 거예요. 저도 알 권리
가 있다고요.
흠, 에일린. 넌 모르는 게 낫겠다.
맞다 에일린. 넌 돌아가라. 이 녀석은 내가 반드시 데리고 돌
아갈 테니까.
할아버지. 저도 알고 싶다고요.
안 돼!
에일린은 시스마란과 같은 인간이다. 또, 그녀는 베르네의 정체
를 몰랐다. 이제 열여덟 살에 불과한 그녀가 드래곤이라는 말에 겁
먹을까봐 둘 모두 쉬쉬하고 있었다.
시스마란.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하자.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 스승님이 잘못을 시인하길 바랄
뿐입니다.
이놈이 끝까지.
할아버지. 뭔지 모르지만 시인하세요. 오빠가 잘못된 판단을
할 리가 없잖아요.
에일린. 너까지 이러기냐?
에일린은 그녀가 일곱 살이었던 열한 살에 부모를 여의였다. 전
염병이 그녀를 고아로 만든 것이다.
그때부터 에일린은 대륙 여기저기를 전전하며 거지로 지냈다.
그러던 그녀를 베르네와 시스마란이 발견한 건 2 년 전이었다.
당시 에일린은 영양실조에 식중독이 겹쳐 생사가 불투명한 상태
였다. 정말 우연한 기회에 베르네와 시스마란의 눈에 띄지 않았다
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터였다.
헤엥, 용서하세요. 할아버지. 오빠가 바른 소리만 하는 건 할아
버지가 더 잘 아시잖아요.
허허, 이거 참. 그래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속이지 않으마.
됐냐?
진심을 담아서 말씀하십시오. 스승님.
베르네의 사과에도 시스마란은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베
르네가 건성으로 사과한다는 걸 느낀 까닭이다.
이 정도면 됐지 뭘 더 바라는 거냐? 그리고 너.
-내가 드래곤이라는 걸 알면서 이러는 거냐?
베르네가 에일린을 의식해 메시지 마법으로 말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지켜야 할 도리는 있는 겁니다.
-이놈아, 드래곤은 원래 유희라는 걸 한단 말이다. 신분을 숨기
는 게 당연한 것이거늘.
-인정할 수 없습니다.
시스마란은 드래곤의 유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유희라
는 행동 자체를 다른 사람을 속이는 잘못된 행위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인정이고 나발이고. 드래곤은 원래 유희를 한단 말이다.
-그럼 드래곤 전부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 거로군요. 스승님
만이라도 그런 악행을 그만해 주십시오.
-악, 악행? 미치겠군.
드래곤의 유희를 악행이라 규정지은 시스마란. 그 말에 베르네
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도저
히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할아버지! 또 메시지 마법으로 얘기하고 있는 거죠? 자꾸 그러
시면 저 화냅니다.
아, 아니다. 에일린. 흠, 흠 시스마란. 좋다. 내 진심으로 사
과하마. 앞으로 다시는 유.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됐냐?
네. 이제 잘못을 뉘우쳤으니 진정 바르고 정직한 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시스마란이 베르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마치 형량을 다 채
우고 나온 죄인을 다독이는 형사의 모습 같았다.
가자. 이놈아.
예. 스승님.
오빠. 잘 생각했어요. 가요.
그래.
시스마란의 현재 마법 실력은 이미 6 서클 마스터였다. 마법을
배운 시간을 감안하면 엄청난 성장임에 분명했다.
시스마란의 마법 성장에 가르치던 베르네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
다. 짧지 않은 삶을 살면서 이처럼 뛰어난 마법 재능을 처음 겪은
탓이다.
에일린 역시 마법을 배운 마법사였다. 실력은 겨우 1 서클 유저.
시스마란과 비교하면 한참 낮은 실력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다. 뛰어난 재능이라고
보긴 힘들지만 마법사가 될 평범한 자질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헌데도 마법 실력이 향상되지 않은 건 그녀가 마법을 별로 좋아
하지 않은 탓이다. 그녀는 마법보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그림 그리는 걸 더 좋아했다. 시스마란처럼 열성적으로 마법을 배
웠다면 지금쯤 이미 2 서클 마스터는 됐을 터였다.
돌아가자. 오늘은 7 서클 주문을 가르치겠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시스마란이 좀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
다. 너무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베르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었다.
내 제자이긴 하지만, 진짜 별종이네.
서두르자. 오늘 너 때문에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했어.
또 마법이에요? 에고, 에일린 심심해요.
녀석아, 너도 마법을 배우면 되지 않느냐?
그건 지루하단 말이에요.
에일린의 투정에도 시스마란은 웃고만 있었다. 그런 투정마저도
귀엽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에일린. 마법 공부 빨리하고 놀아줄게.
역시 오빠밖에 없다니까. 그럼 전 계곡에서 그림 그리고 있을
게요.
에일린이 밝은 얼굴로 떠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베르네
가 머리를 움켜잡았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별종들을 제자로 두게 됐는지. 그래, 내
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음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괴물
같은 녀석들을 제자로 맞았겠어?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시스마란과 에일린을 무척 아
꼈다. 그는 이들과 함께 있음에 이번 유희가 심심하지 않았다. 어
쩌면 지금까지 그가 결었던 모든 유희 중 가장 행복한 유희인지도
모른다.
아참. 스승님 형님 소식은 없습니까?
그게 있기는 있다.
정말입니까?
흠, 문제가 좀 생겼더군.
베르네의 대답에 시스마란이 조바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헤어진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가장 중요한 사람은 라한인 듯했다.
무슨 일입니까?
얼마 전에 로드와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야.
로드면 드래곤 로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레드 드래곤이
라던?
그래. 로테마이어스가 그의 이름이지.
베르네의 음성에서도 착잡함이 묻어났다.
베르네도 라한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시
스마란보다 더 라한을 걱정하는지도 모른다. 그보다 라한을 먼저
만났고, 그보다 더 일찍부터 만나고 싶어 했으니.
어떻게 그런 일이. 대체 형님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드래
곤 로드가.
이유는. 아니다. 말해도 모르겠지.
로테마이어스와 라한의 충돌은 오래전부터 예정된 수순인지도
모른다. 로테마이어스는 굴레를 벗은 존재의 씨를 말리려 하고, 라
한은 로테마이어스가 씨를 말리려는 굴레를 벗은 존재이니까.
하지만 이런 일을 시스마란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스마란은 굴레를 벗은 존재가 무언지도 몰랐다. 이런 시스마
란을 제대로 이해시키자면 아주 기본적인 사항까지 모두 설명해야
했다
아직까지 드래곤 사이에서 조심하는 내용이기에 말하기가 꺼려
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혹시 잘못된 건 아니겠죠?
스승님. 빨리 말씀 좀 해주세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별 일이 없는 모양이다. 로드가 라한을 죽
이려고 찾아갔다가 그냥 돌아왔거든. 이유는 모르지만 아직 라한
과 로드가 제대로 싸운 건 아닌 것 같다.
휴우우, 다행이네요. 그럼 지금 형님은 어디 계십니까? 전에는
실종됐다고 하셨잖습니까?
나도 아직 어디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소문으로는 로드가 라
한과 충돌을 일으키고 나서 두 달 쯤 후에 케라스 왕국 북부 지방에
서 발광을 한 모양이더군. 아마, 라한도 그쯤에 있지 않을까?
시스마란의 얼굴이 당최 펴질 줄 몰랐다.
시스마란도 라한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건 잘 알았다. 직접
눈으로 본 것도 있고 베르네에게 전해들은 얘기도 있어서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실력이라고 생각했다. 누
가 뭐래도 인간이 사용하는 마법의 원류가 드래곤 아니던가? 라한
도 마법사이니 드래곤보다 뛰어난 실력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단
정 지었다.
가요.
어딜?
형님 찾으러 가야겠습니다. 로드가 다시 쳐들어오면 저라도 한
팔 거들어야죠. "
이놈아. 드래곤 로드가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냐? 네가 한 팔 거
든다고 제대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응? 겨우 6 서클 마법 실
력으로 돕긴 뭘 도와? 오히려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
베르네가 답답한 듯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다.
그 역시 라한이 걱정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뒤늦게 얻
은 제자마저 위험에 노출시킬 순 없었다.
하지만.
네놈이 7 서클 마스터가 된다면 나도 말리지 않겠다. 그 정도 실
력이면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전엔 절대 보낼 수 없다.
7.서클? 좋습니다. 까짓것 7 서클 마스터가 되면 보내준다는
말이죠?
그래. 7 서클이 되면 보내주마. 아니, 라한이 있는 곳을 어떻게든
찾아서 그곳으로 보내줄 테니 그때까진 보채지 마라. 알겠느냐?
예, 스승님.
안타깝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6 서클 정도의 마법으로는
오히려 방해만 될 거라는 베르네의 말. 시스마란에게 너무 크게 작
용했다.
아무리 보고 싶어도 라한에게 방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시스마란.
예.
너도 속이고 있구나.
제가요?
갑작스러운 베르네의 말에 시스마란의 의문을 표했다. 평생 거
짓말 해 본 적이 없는 시스마란이었다. 베르네의 말이 무슨 의미인
지 궁금한 게 당연했다.
그래. 너도 에일린에게 내 정체를 숨기고 있지 않느냐?
그건 제가 아닌 스승님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같은 게야. 내가 내 정체를 숨겼고 넌 다른 이의 정체를
숨기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거짓말이라는 건 같지 않느냐?
베르네의 말에 시스마란도 할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거짓말을
절대 하면 안 된다는 자신의 생각을 약간은 수정해야 할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에일린에게만은 사실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으
니 말이다.
그날부터 시스마란은 7 서클 마법을 익히는 데 최선을 다했다.
평소에도 마법을 배우는 데 열성적이었지만, 지금은 열성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할 정도였다.
*
다시 물질계로 돌아온 라한.
무척이나 밝은 얼굴로 집을 쭉 훑었다.
테세르, 슈라. 변! 어디 있어?
-음냐, 주인 왔어? 정령계 어땠어?
-주인 돌아왔군.
-크리리릭!
테세르, 슈라, 물덩어리 변이 차례로 인사를 해왔다. 특히 테세
르의 궁금증은 상당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정령계를 주인인 라한이 어떻게 생각할까? 혹
시 실망하지는 않았을까? 이런 저런 의문들에 대한 대답을 빨리 듣
고 싶었다.
아, 보채지 말라고. 음, 우선 정령계 방문은 성공적이었다. 얻
은 게 아주 많아.
-우리 정령 계. 어땠어?
평화로우면서도 나태해 보이고, 그러면서도 부지런해 보이
는.아주 특이한 곳이더군.
-그렇게 대답할 것 같더라 근데 얻은 거라니? 그게 뭐야?
테세르의 질문에 라한이 웃음을 머금었다. 정령계에서 정령왕들
을 힐책할 때 짓던 비웃음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누가 보더라도 진
정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의 흡족한 웃음이었다.
내 힘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게 됐어. 그냥 단순히 힘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 세상 모든 것에 생명이 있으니 내 힘에도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어.
라한은 자연과의 대화를 통해 많은 걸 깨달았다.
먼저 자신이 가진 힘. 자연은 아니지만 그도 라한에게 무언가 말
을 하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됐다.
라한이 가진 기존의 힘인 제령기와 제란기, 마나. 이 또한 라한
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지금 라한이, 그 힘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꾸준히 귀를 기울이고 경청한다면 언
젠가는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결국 라한이 앞으로 해야 할 수련은 힘과 자신이 의사소통을 하
는 거였다. 그게 대차의 방식이든 막연한 느낌의 방식이든. 이제
라한 마음대로 움직이는 힘이 아닌 서로의 의견 조율을 통해 움직
이는 힘을 만들어야 했다.
-크리리릭!
어?
-크리리링 !
라한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물 덩어리 변이 무언가 말을
걸어왔다. 이에 라한이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변이 하고자 하
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말해봐.
-크리리링. 왔었다.
다시 한번 말해봐.
-크리리링. 드래곤이 찾아 왔었다.
물 덩어리 변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물론 겉으로는 크리리링이라는 말로만 들렸지만, 분명히 의미가
전달되었다.
로테마이어스가 찾아 왔었군. 그놈이 무슨 짓을 하고 갔어?
-그냥 여기저기 날아다니다가 사라졌다.
흠, 다행이군. 애써 만든 집을 건드리지 않아서. 근데, 변!
-응?
너도 반말이냐? 젠장.
쿵-!
욕설을 내뱉은 라한이 변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그리고 눈
을 슬쩍 흘기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라한이 들어가자 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
게 잠깐 있던 변. 갑자기 깨달은 듯 라한이 들어간 방문을 멍하게
쳐다봤다.
-크리리릭 !
변이 멍한 표정으로 한 말을 테세르와 슈라는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방 안으로 들어간 라한은 확실하게 이해했다.
내 말을 알아들었어? 라는 의미라는 것을.,
제8권
베사 길드의 길드장 에테르
정령계에서 라한은 자연과 대화를 하는데 성공햇다 아마 신
화력을 익히면서 만물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게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한것이리라
하지만 물질계에서은 자연과의 대화가 불가능했다 정령계의 자
연이 가지고 있던 언어능력이 이곳에는 없은 탓이다 정령계에서
정령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과 달리 물질계에서 하급 중급 정
령이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하지만 자연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들이 무언가을 전하려 할 때 품게 되은 의지가 라한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라한은 누군지 모를 자연과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앞으로 조심하지
-주인, 또 중얼거린다.
-요즘 주인 상태를 보면 뭔가 불안해.
라한은 요즘 혼자서 뭔가를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자연이
전하는 의지에 자신도 모르게 대꾸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테세르와 슈라는 라한의 의지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보지 못한다고하여 없다고단정 짓는무신론자. 마찬가
지로 자신이 듣지 못한다 하여 자연이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정
령왕들
테세르와 슈라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이 듣
지 못한다는 생각에 라한을 미친놈 취급하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조심하도록 노력할게. 하지만, 그때는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하지?"
슈라. 우리 주인 저대로 괜찮을까? 아무래도 상태가 너무 심각
해 보이는데.
-나도 걱정이다. 도대체 왜 저러지? 최근 며칠 사이에 저렇게
변한 것 같은데
물 덩어리 변은 라한의 행동을 이해했다.
이전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
재는 투바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라한도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자신의 생각을 알아듣는 단둘밖에 안 되는 존재 중 하
나가 라한인 셈이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니 자연의 의지를 알아
듣는다는 라한의 말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 로테마이어스 걱정 안 해?
"안 그래도 슬슬 움직여야겠다. 나가자. "
-어딜?
"전에 봤던 다크라이더 길드의 정보 수집처에 좀 가야겠어. 정
보가 곧 힘이거든. "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슈라와 테세르, 변도 그
뒤를 느긋하게 따랐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었다. 슈라와테세르, 변이
인간들이 많은 곳에 나타나다니. 이곳 블리아드 마을이 아니면 꿈
도 꾸지 못할 일임이 분명했다.
라한과 일행들이 전에 봐둔 곳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처음
에는 여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낮에 와보니 술 냄새도 꽤나 강하게
풍겼다.
"어떻게 접촉해야 할까?"
말을 하던 라한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다크라이더
의 길드장 다크시안에게 증표로 받은 패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 패의 재료가 뭔지 모르고 있군. '
라한이 다크시안에게 받은 패는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로이
나에게 받은 대륙 물질 사전에도 이 물질에 대한 정보는 들어 있지
않았다.
'어쩌면 이 대륙의 물질이 아닐지도 모르지. 만나봐야겠어. '
어차피 이 패는 다크시안에게서 나온 증표였다. 아무리 노력해
도 알아낼 수 없다면 다크시안에게 다시 물어보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슈라. 넌 밖에서 대기해. 가자."
끼이이익!
라한이 문을 열고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쾌나 귀에 거슬리는 소
리가 들려왔지만 라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곳곳
에서 느껴지는 낯선 자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느라 여념이 없었다.
'괜찮은 놈도 있군. 놀라운데. '
라한이 문 안에 한 발을 들여놓은 상태로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
를 천천히 돌리며 숨어서 지컥보는 이들을 하나씩 훌었다.
'저자인가?'
차례로 돌던 라한의 시선이 왼쪽 지붕근처에서 멈추었다. 라한
이 이채를 발하며 나지막이 탄성을 터트렸다. 긴장보다는 호기심
이 가득 담긴 목소리와 눈빛이었다.
-주인 왜 그래?
"곧 알게 되겠지. 나서지 마라. "
테세르라고몰래 지켜보는자들이 있음을모를 리 없다. 라한이
깨달음을 얻기 이전만 해도 테세르의 기감이 라한을 능가하지 않았
던가? 비록 상대가 있고 없고를 알아채는 데 뛰어날 뿐, 강함과 약
함을 판별하는 능력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어찌 뤘든 테세르도 숨은 자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라한이 나서지 말라고 말한 건 테세르가 숨어 있는 자들을 해코
지할까 염려되어서 한 말이다
"실례합니다. "
"무슨 일인가? 이방인. "
카운터에 앉아 있던 구레나룻 가득한 사내가 거칠게 대꾸했다
라한의 등장을 반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한 가지 부탁과 한 가지 의문을 풀고 싶습니다만
"들어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말은 해 보게. "
"저들은 잠도 저기서 잡니까?"
라한이 지붕, 탁자아래, 카운터 뒤를차례로훔으며 말했다. 이
에 카운터에 있던 구레나룻 사내가 몸을 움찔거렸다.
"흠. "
"이런. 얼굴에 살기가감도는군요. 대답하지 않아도상관없습니
다. 아주 어릴 적에 이야기책을 보면서부터 가졌던 의문이거든요. "
라한의 얼굴에서 정말 궁금해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말을
들은 구레나룻 사내도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각해보니 자신도 오래전에 가져봤던 의문인 듯했다.
"대답해주지. 대신 자네도 내 물음에 대답을 해주면 좋겠군. "
"들어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말은 들어보겠습니다. "
라한이 좀 전에 사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받아쳤다. 겉으로 보
기에는 서로가 아주 유쾌해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실제 구레나룻 사내의 손에는 땀이 가득했다. 어느 날 느
닷없이 나타나서 몬스터들을 박살 내 버린 사내. 강함으로 따지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덤벼도 승산이 없을 게 분명했다 오직 믿는
거 라고는 기습 하나뿐이 었다.
한데 유일한 그 방법도 용이하지 않을 성싶었다 들어오자마자
숨어 있는 이들을 다 가려내는 상대에게 기습이라니 가당치도 않
은 소리였다.
"저들도 저기서 잠을 자지는 않네. 교대하는 사람이 있지. "
"그럼 저들 외에도 더 있다는 얘깁니까?"
"그렇지는 않네. 자네가 온다는 정보를 듣고 인원을 모두 동원
한 거지. "
"철저하시군요. "
"자네에게 들켰으니 철저하다는 말은 부담스럽군. "
구레나룻 사내의 대답에 라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딴에는그 말도 맞았다. 결국모든준비가 허사로돌아갔다. 준
비 그 자체가 무의미해진 것이다
"아까 제게 물어볼 말이 있다고 하셨죠? 물어보세요. "
"어떻게 알았는가? 저들은 철저히 훈련받아서 숨을 참는 시간도
그리 짧지 않네. 거기다 좀 전에 저들은 특별하게 제조된 약물까지
마셨네. 그 약물을 마시면 몸이 차갑게 식어 체온을 감지하는 것도
불가능할 텐데. "
사내는숨어 있는자들의 실력을잘알았다. 설사한제국의 황
실 친위 기사단 단장이 온다 하더라도 30 분 이상 몸을 숨길 수 있
는 자들이 그들이다.
물론살기를드러내서 공격을시작한다면 들킬 수밖에 없다. 하
지만 가만히 숨어서 정보만 캐는 거라면 세상 그 누구의 눈도 속일
수 있다고 자부해왔다. 그런 존재를 곡한이 한눈에 알아채 버렸으
니 궁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체온이 전부인 건 아닙니다. 숨소리가 전부인 것도 아니고요.
생명체는 누구나 가진 기운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마나라고 부른다지요?"
"그럼 그 기운을 느꼈다는 말인가? 마나를?"
"그렇다고 해 두죠. "
쾅- !
라한의 대답에 사내가 탁자를 손으로 강하게 내려쳤다.
"말도 안되는소리! 저들은그 어떤 검술도 익힌 적이 없다. 물
론 마법도 마찬가지다. 저들이 배운 전투술은 암기를 사용하는 게
전부인데 마나가 느져져? 헛소리다. "
"마나는 꼭 어떤 걸 익혀야지만 몸에 스며드는 게 아닙니다. 누
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마나를 가지게 되죠. 하지만 그 양이 너무 미
미해서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
라한의 대답에도 구레나룻 사내는 인정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
다. 누구나마나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몰랐던 얘기지만, 설사그
렇다 치더라도 미미한 양일 게 분명했다.
물론 라한이 마나 스캔을 시전하는 모습이 보였다면 어느 정도
는수긍하고 넘어갔을 터였다. 하지만 라한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감시당했고, 그동안 마나스캔과 흡사한 주문이나
손짓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어 있는
이들을 모조리 찾아낸 것이다.
"이, 이, 이음?혹시
구레나룻 사내는 다크라이더 길드의 제 198 지부 소속 정부 수집
처 수장이다. 서열로만 따지면 까마득하게 아래인 셈이다.
하지만 정보를 캐는 능력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열 살이 되면서부터 오직 정보를 캐는 능력만 습득했고,
또 그것만 배웠다 그리고 쉰세 살이 된 지금, 43 년이라는 기나긴
경력이 라한의 정체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인가?'
구레나룻 사내 닉스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정보를 습득하
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전 원로회의에 대한 정보
도 들었고, 그곳에서 라한이 드래곤이라는 정보까지 입수했다.
하지만 닉스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렸다.
드래곤이라니 이곳에 사는 시골 무지렁이는 모를지라도 정
보를 캐며 살아온 닉스는 드래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드래곤은 라한처럼 마을을 위해 몬스터를 죽이
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또 얼마 전 드래곤이 마을을 선회하며 라
한을 죽이겠다고 선포하고 사라졌다. 드래곤과 드래곤의 대결은
전무후무한 일이니 라한이 드래곤이라는 것도 사실로 보기 힘든 것
이다.
닉스는 이런저런 가정들로 라한을 드래곤으로 알고 있는 원로원
들의 생각을 무시했던 게 사실이다.
한데 지금 라한의 행동과 태도를 보자 원로원의 생각이 사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드래곤이십니까?"
"예?"
구레나룻 사내 닉스의 말에 라한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드래곤이라니. 자신이 그렇게 광포하게 굴었나 싶었다.
'전에는 날 류카라한이라는 자라고 오해하더니 이젠 드래곤인
가? 잘하면 엘프, 드워프 다 나오겠군. 오크는 싫은데
"사실이었군요. 무례를 범했습니다. "
"이봐요. "
"말씀 낮추십시오. 정보는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
"이 사람이 진짜 내가 어딜 봐서 드래곤으로 보여요? 전 인간
이라고요, 인간!"
라한이 발끈하며 외쳤다.
라한은 인간 우월주의에 빠져 있다거나 만물의 영장이 인간뿐이
라고 생각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인 지금은 인간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제아무리 뛰어나고 아름다운 존재라도 지금 라
한에게는 타 종족에 불과했다.
"정말 아닙니까?"
"아닙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절 드래곤으로 본 겁니까? 안 그래
도 드래곤 몇 놈이 날 죽이지 못해 안달인데
"흠, 흠. 그렇군. 미안하네. 원로원 늙은이들이 그렇게 생각해
서 그만 허허. 이거 참. "
닉스의 말투가 다시 하대로 바픽었다. 그리고 말끝에 어색한 웃
음을 흘리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정보를 담당하는 자신이 잘못
된 정보를 믿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음이다.
"됐습니다. 지나간 일이니까 잊도록하죠. 우선 이것부터 봐주
십시오. 자, 여기."
라한이 품에 있던 패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렸다. 이제 농담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갈 생각이 었다
"이건 음
닉스가 패를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몇 차례 두드리고 돌려본
스의 얼굴에 놀람의 감정이 서서히 자리 잡았다
"어디, "
닉스가 카운터 아래에서 검은 잉크를 어냈다. 그리고 라한이 내
민 패를 잉크 속에 넣었다 빼서 카운터의 깨끗한 곳에 꾹 눌렀다.
"잉크는 닦아서 주세요. "
"아, 몰라봤습니다. 상부에서 오셨습니까?-
닉스의 말투가 존칭으로 바뀌었다. 그 말에 오히려 라한이 어색
한 표정을 지었다.
"말투가 아주 자유자재로 바뀌시는군요. -
"이해해 주십시오. "
"그 패가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아, 외부분이시군요. 패는 저희 길드 내에서 길드장인 다크시
안님만 가지고 계십니다. "
닉스의 말투는 이제 완전히 높임말이었다. 얼굴도 반쯤 숙인
습이라 하인이 주인을 대할 때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길드의 존폐가 달린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 상징적인 의
미로 잠깐 빌려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 길드 상부에서 큰일을 하
러 오신 분인 줄 알았습니다. "
"뭐, 아닌 걸 알았으니 다시 말씀 좀 낮춰주시겠습니까? 전
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높임말 듣는 걸 즐기지는 않거든요.
없는 놈들한테는 아니 지만
라한은 닉스가 높임말을 쓰는 그 순간부터 불편함을 느꼈다. 라
한이 닉스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다.
"이 패는 라이더스 패라고 불립니다. 이 패를 소지한 사람에게
는 이유를 불문하고 길드장을 대하듯 예의를 다해야 하는 게 저희
규칙인지라 어쩔 수 없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
"길드장에게는 말하지 않을 테니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
"죄송합니다. 차라리 절 죽여주십시오. "
닉스의 극단적인 말에 라한이 길게 한숨 쉬었다.
고집불통 닉스. 라한은 그를 그렇게 규정지었다.
'골치 아프네. '
"좋습니다.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
"감사합니다, 라한님. "
"전에 제가 길드장에게 뭔가를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그 정보
듣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라한이 말을 돌려 본론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말을 높이고 낮추
는 일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음이다.
"죄송합니다. 아마, 길드의 극비 사항인듯합니다. 길드에 서신
을 넣어 담당자를 부르겠습니다 며칠만 기다려주십시오. "
"그러죠. "
"캐슬에 가 계시면 제가 기별을 넣겠습니다. "
라한이 사는 곳은 슈라의 거대한 덩치를 수용하기 위해 엄청난
크기로 지어졌다. 이 때문에 마을에서는 라한이 사는 곳을 캐슬이
라 불렀다.
개중에는 마왕성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 대부
분은 캐슬이라는 이름에 익숙해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
라한이 고개를 짧게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왼쪽 지붕
에 숨어 있는 사내를 흘낏 쳐다보는 걸 잊지 않았다.
라한이 나가자 닉스가 주변에 숨어 있던 사람들을 손짓해 불러
모았다.
"휴, 라이더스 패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
"나도 놀랐네, 근데 그 패가 라이더스 패가 확실하던가?"
"직접 보십시오. "
닉스가 라한이 눈여겨본 사내에게 천천히 패를 내밀었다. 말투
도 하대가 아닌 높임말이었다. 실제로 그의 지위가 닉스보다 높다
는 증거였다
"맞군. 근데, 어떻게 이 패를 가지고 있지? 그자가 다크시안님
과 무슨 관계이기에
"에테로님도 모르시는 일이었군요. "
"다크라이더 길드 내부의 일이니 어쩌면 모르는 게 당연할 수도
있지. 하지만, 흠 아닐세. "
"본부에 연락할까요?"
"내가 하겠네. 통신 마법사를 불러주게,
"알겠습니다. "
닉스가 카운터 아래에 달린 작은 줄을 당겼다. 줄이 쾌 멀리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먼 곳에서 아련하게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잠시 후, 로브를 깊게 눌러쓴 허리가 구부정한 사람이 안으로 들
어왔다. 일견하기에도 나이가 무척 많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리플리. 본부와 통신을 열어라. "
"알겠습니다. "
에테로의 말에 마법사 리플리가 품에서 수정 구슬을 꺼냈다. 그
리고 손을 올려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통신 마법을 시전했다.
츠츠 츠츠츠츠 1
"누구시오?"
"198 지부 리플리입니다. 담당자를 부탁드립니다. "
"누구의 통신인가?"
"베사 길드의 에테로님이십니다. "
"아, 알겠네. "
수정 구슬 속의 통신 담당자가 서둘러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라한과 마주했던 다크시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크시안이다. 에테로는?"
"헉! 길드장님을 뵙습니다. 198 지부 리플리입니다. "
리플리는 본부의 상급자 중 한 명이 통신을 받을 줄 알았다. 한
데, 때 아닌 길드장이 직접 통신을자청하고나왔다. 예상못한 일
이기에 그만큼 놀람이 클 수밖에 없었다.
"리플리로군. 자네 아들 병은 이미 완치 단계에 접어들었네. 이
왕 고생하는 거 조금 더 수고해 주게.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다크라이더 길드의 힘은 다크시안의 저런 세심함이 큰 힘을 발
휘했다. 수많은사람을부하로 두고 있지만 그누구도 함부로 대
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상대의 기분이 좋을 말을 골라서 할 줄 아
는 언변. 그리고 누구와 대화를 하든지 약간의 정보를 얻어서 만나
는 철두철미함까지 다크시안이 없었다면 지금의 다크라이더
길드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감격한 리플리가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터트리며 구슬에서 멀어
졌다. 그 뒤를 이어 에테로가 구슬 앞에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다크시안님. "
"후후, 그래. 그동안 잘 지냈는가? 에테로. "
"하하, 다크시안님의 염려 덕에 이렇게 눈 뜨고 살아 있습니다. "
"하긴, 내가신경을좀쓰긴 했지. 그건 그렇고무슨 일인가?아
니, 그것보다 거긴 무슨 일로 간 건가?"
"저도 휴가 좀 즐기고 싶었습니다. "
베사 길드는 다크라이더 길드에 정보를 제공하는 진짜 정보 길드
라고 볼수 있다.
다크라이더의 다크시안에 의해 만들어졌고, 현재까지도 다크라
이더만을 위해 정보를 캐는 곳이 베사 길드인 셈이다.
그리고 베사 길드의 수장인 에테로에게는 지병이 있다. 허리를
쓰면 쉽게 픽로해지는 병이었다. 걸어 다니면 다리보다 허리가 먼
저 아파오고 앉아서 일을 해도 허리에서 뻐근함을 빨리 느낀다. 일
종의 노환인 셈이다.
"그 친구 참. 그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통신을 넣은 겐가?
특별한 정보라도 얻었는가?"
"오늘은 오히려 정보를 얻기 위해서 연락했습니다. "
에테로의 말에 다크시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
며 에테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정보를 얻어? 무슨 말인가?"
"제가 쉬고 있는 이곳에 라한이라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이자에
대해 아시는 대로 알려주십사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
베사 길드의 길드장 에테로의 말에 다크시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한의 갑작스러운 실종 이후, 다크시안은 라한을 찾는 데 총력
을 기울였다. 라한에 대해 아는 사람이 극소수라서 베사 길드에 도
움을 청하지도 못했다. 오직 다크라이더 길드의 핵심 멤버만을 이
용해서 그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찾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어느 한적한 곳에서 라한이 죽었다고
결론 내렸다.
한데 뜻밖의 장소에 라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의 흥분과 희
열이 다크시안을 들뜨게 만들었다.
"정말인가? 정말 라한인가?"
"이름은 라한이 맞습니다. 또, 라이더스 패를 가지고 있었습니
다. "
"맞군, 정말맞군 허허허. 역시 살아 있을줄 알았다. 그가 쉽
게 죽을 리 없지. 암, 그렇고말고. "
다크시안의 들뜬 목소리에 에테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다크시안을 모신 이후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간 그가 흥분하
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대체 라한이 누구이기에? 다크시안과 무슨
관계이기에 이렇게 감격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누굽니까?"
"라한일세. 내 오랜 염원을풀어줄사람이기도 하고. 어디 다친
곳은 없던가?"
"훗, 그는 누가 다치게 하고 싶다고 다칠 만큼 약자가 아닙니다. "
"그런가?"
다크시안이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실제로 라한의 실력이 어
느 정도인지 아는 게 없는 탓이다.
라한에게 복수를 부탁한 것도 라한보다 그 세력에 기인한 바가
컸다. 또, 그에게 정보를 제공하기로 약속한 것도 라한의 강함보다
는 묘한 분위기에 매료되었다고 봐야 정확했다.
"혹시 그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 겁니까?"
"난 그를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그가 강한지 약한지는 잘몰
라. 뭐, 특별히 궁금하지도 않고. "
"겨우 한 번 보고 라이더스 패를 맡겼다는 말입니까? 또, 말씀하
시는 걸 보니 그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무슨 생각
으로 라이더스 패를 맡긴 겁니까?"
"그냥 넘어가 주게. "
"그리고다크시안님. 라한이라는사람은제 정보망에도들어 있
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가 대체 누굽니까?"
"글쎄. 자네가 강하다고 하니 강한 사람이겠지 "
다크시안은 라한의 본실력이 어떤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인간됨을 믿었고 그의 눈빛을 믿었을 뿐이다.
그런 라한에 대해 됫조사하는 건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했
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라한에 대해 더 무지할수밖에
없었다.
"강한 정도가 아닙니다. 베어울프를 날아다니는 똥파리보다 더
쉽게 잡아버리는자가그자입니다. 또, 베어울프를종잇장처럼 구
걱 버리는 골렘을 소유하고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만하게. 난 그의 힘에는 관심이 없어 그냥 그가 원하는 게
있으면 들어주게. 그럼 되는 거야. "
"다크시안님 ! ! "
다크시안의 대책 없는 말에 에테로가 언성을 높였다.
같은 길드이지만 다크라이더 길드의 하부 길드나 다름없는 베사
길드. 마찬가지로 에테로도 다크시안의 하급자나 마찬가지이기에
언성을 높이는 그 자체가 하극상이 었다.
하지만, 길드를 만들기 전에 죽마고우였던 둘이기에 이 정도로
하극상을 논하기는 힘들었다.
"난 그를 믿네. 그냥 믿어. "
"에휴, 알겠습니다. 그가제게 와서 전에 부탁했던 정보를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뭡니까?"
"전에 내가 자네에게 알아보라고 했던 것일세. "
에테로가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러다 정보가 무언지 깨달은 듯 눈을 밝게 빛냈다.
"혹시
"맞네. 그 일일세. 자네가 알고 있는 정보를 그에게 알려주면
되네. "
"흠. "
에테로가 침음성을 흘리며 침묵에 잠겼다
다크시안이 오래전에 알아보라고 했던 건 대륙에 새로이 나타난
강자들의 세력. 즉, 굴레를 벗은자들에 대한정보였다. 그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또 길드 지부도 수차례나 옮겨 다녀
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굴레를 벗은 자들의 정보를
캐는 건 성공했다. 그것도 쾌나 깊이 파고들어서 상당히 정확하고
방대한 양의 정보를 캘 수 있었다.
"그였군요. "
"그에게 내 안부나 전해주게나. 그럼 끊겠네, "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
통신을 끊은 후에도 에테로는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굴레
를 벗은 자들에 대해 알아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그들의 실력
때문이다.
그가 본 굴레를 벗은 자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되 인간으로 보기 힘들 만큼 강한 자들. 그들 개개인의 힘으로도
한 나라와 자웅을 걱룰 수 있는 그런 실력자들이었다.
라한이 그들에 대한 정보를 부탁했다면 최소 그들과 비슷한 정
도의 실력은 가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강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정도인 줄 몰랐군. '
에테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삼 기
습으로 그를 처리하려 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에테로님. "
"아, 그를 만나러 가야겠네. 준비해 주게. "
"예, 알겠습니다. "
에테로가 이곳에 온 건 지금부터 약 1 년 전의 일이다 지병이 있
어서 마음 편히 업무를 볼 곳을 찾다가 이곳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면서도 베사 길드가 얻은 정보를 취합하는 데에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설사 당장 목숨을 잃을 상황에 직면한다 해도 정보를
얻는 데 최선을 다할 사람이 에테로였다. 닉스가 그러하듯 그 역시
정보 하나만 보고 평생을 지낸 사람이니 말이다
라한은 집에 다시 돌아와서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방인의
방문을 받았다. 닉스를 대동한 에테로 일행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닉스씨. "
"책임자는 제가 아니라 여기 계신 에테로님이십니다. "
"반갑네. 난 에테로일세. 아, 내가말을높이지 않는 걸 이상하
게 생각하지 말게. 다크시안님은 내 상관이기 이전에 친구이니 이
해해줄 거라 믿네. "
라이더스 패를 가진 사람은 길드장을 대하듯 한다. 다크라이더
길드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철칙이자 법이다.
하지만 에테로는 라한에게 말을 높이지 않았다 다크시안과의
개인적인 친분 그리고 다크라이더 길드가 아닌 베사 길드의 길드장
이라는 이유 때문에 높이기가 힘들었다.
"괜찮습니다. 앉으시죠. "
라한이 마련된 테이블로 에테로 일행을 이끌었다. 그리고 공손
하게 에테로 일행을 먼저 앉힌 후에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자네 얘기를 들었네 다크시안님이 안부 전해달라더군. "
"고맙습니다. 한데 제가 부탁한 정보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건 내가 전해주겠네. "
말을 마친 에테로가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 모습에 닉스를
비롯한 일행들이 자리를 떴다. 에테로가 하는 말을 듣지 않겠다는
길드 내부의 약속된 행동이었다.
"훈련이 잘돼 있군요. "
"다크라이더 길드니까. "
에테로는 자신이 다크라이더 길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라한도 상대의 신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자신이 원
한 정보를 얼마나 자세히 알아왔느냐 그리고 그 정보가 얼마만큼의
신빙성이 있느냐만 알면 그뿐이었다.
"이제 말씀해 주시죠. "
"잘 꾸며놨군. 대륙에서 보기 힘든 모습들 같은데?"
라한이 꾸며놓은 정원과 집 외관은 대륙 형식과는 사뭇 달랐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화가 섞인 듯한 분위기. 그러면서도 묘하게
어울려서 무척이나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말을 돌리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요. 이곳은 제가 어렴풋
이 기억하고 있는 이런저런 기억을 섞어서 꾸민 곳입니다 "
"그렇군. "
에테로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에테로는 자신의 입에서 나을 말이 대륙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
고 생각했다.
누가 뭐래도 대륙 최강자들의 정보 아니던가? 라한 역시 최강자
중의 한 명일 테니,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대륙의
판도가 바펄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 때문일까? 입을 여는 게 자꾸만 주저되었다.
"제가 두려우십니까?"
"후후, 그럴지도 모르지. "
"제가 왜 두려우십니까?"
"자네가 이 대륙을 어떻게 바꿀지가 걱정되네. "
에테로의 말에 라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 정도는 수긍
이 가는 말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대륙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강했다.
그의 생각 여하에 따라서 대륙의 판도가 바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은 대륙의 판도를 어떻게 바꾸느냐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라한의 관심 사항이 아닌 것이다.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 '
라한의 관심사는 어떻게 해야 오래 사는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적들에게 목숨을 잃지 않는가? 그리고 자신을 따랐던 사람들을 안
전하게 지키는가? 자신의 가문을 망하게 만든 엘베로를 어떤 식으
로 비참하게 만드는가? 이런 것들뿐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대륙이 바펄 수도 있다. 하지만 대
륙이 피바다가 되든 평화를 유지하든 그건 라한의 관심 밖이었다
되도록 대륙도 평화롭게 유지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있지만 불가
피하다면 바뀌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전 대륙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
"그럼 왜 그들에 대해 알려는 건가?"
"그건 그들과 제 일이지 대륙의 정세와는 무관합니다. 그 과정
에서 불가피하게 어떤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그리 크지는 않을
거 라고 생각합니 다. "
"그게 그렇지가 않네. 자네는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
은 이미 세상의 정세에 너무 깊이 관여해 버렸어. "
라한은 대륙 흐름과 무관한 이곳 블리아드 마을에서 소일하고
있다. 그 하나만 보더라도 라한이 대륙을 바꿀 생각이 없음은 자명
한 일이었다.
하지만 에테로가 파악한 다른 이들은 달랐다. 이미 그들의 손짓
한 번, 발걸음 한 번이 대륙을 크게 바꿀 위치까지 오른 상태였다.
라한이 그들과 어떤 관계인지 또 어떻게 관계를 맺어갈지가 대륙에
큰 영향을 주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말씀해 주시죠. "
"알겠네. 어차피 피할수 없는 거겠지. 음, 누구부터 설명을 해
야 할까? 일단 검은 측부터 설명하겠네. "
"검은 측?"
"처음 다크시안님이 알아보라고 한 곳은 지금 말하려는 검은 측
뿐이었네. 한데 수개월 전 또 다른 지령이 내려왔지. 다른 곳까지
함께 조사하라는 거였네. "
검은측은 처음라한이 부탁한곳. 즉, 류카라한이 이 I 는굴레
를 벗은 존재의 조직이었다.
"다른 곳요?"
"그렇네. 검은 측에 비해 크게 밀리지 않는 강자들의 모임이지.
우린 그곳을 회색 측이라고 부르네. "
"아, 그렇군요. "
에테로의 대답에서 회색 측이 카이렌 일행임을 짐작할수 있었
다. 류카라한 일행과 비슷한 실력을 가진 조직. 아무리 생각해도
카이렌 일행밖에 없었다. 거기다 그가 정보를 얻기 시작했다는 시
기도 라한의 실종 시점과 거의 일치했다.
"검은 측은 골렘을 가지고 있네. 자네가 가진 골렘보다는 작은
것 같군. "
"골렘? 말도 안 돼. "
라한이 혀를 내둘렀다. 그가 알기로 골렘이라는 마법 물체는 이
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비록 라한은 정말 우연한 기회에 얻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없어야 정상이었다.
"말이 안 되지만 사실일세. 나도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모
르지만, 분명 골렘이었네. 그것도 1 인당 하나씩. 모두 여덟일세. "
"여덟이라
라한이 알기로 기존에 있던 굴레를 벗은 존재는 모두 여섯 명이
다. 거기에 류카라한이 포함되었다 치더라도 일곱 명. 한 명이 많
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상은 나을 곳이 없었다.
"왜 뭐가 잘못줬는가?"
"어떻게 여덟 명이죠?"
"그 중 둘은 라이칸드로프일세. "
"둘? 하나가 아니라 둘?"
둘이 라이칸드로프라면 여덟이 아닌 아홉이어야 맞아떨어진다.
한 명의 실종. 혹은 죽음 그게 뭐가 됐든 라한으로서는 반드시 알
아야 할 일이었다. 정말 운 없으면 제 3 세력이 등장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러는가?"
"혹시 이름을 압니까?"
"그건 모르네. 자기들끼리는 본명을 부르는지 몰라도 타인이 있
는 곳에서는 모두 가명을 쓰고 있네. 하지만 이런저런 가정을 대입
해 보면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 대륙에선
한때 영웅이라 불렸던 존재들이니까. "
"직업 구성은요?"
라한이 빠르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마법사가 둘이고 나머지는 모두 검사일세. "
"마법사가 둘에 모두 검사? 정령사는 없습니까?"
"없네. "
"제이슨이라는 자가 그 일행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제이슨이라 대륙에서는 최고의 정령사로 알려진 역사 속 인
물이지. 한데 그 일행에는 없네. "
에테로의 대답에서 어느 정도 결과가 나왔다.
이유는 모르지만 제이슨이 굴 fl 를 벗은 존재들의 일행에서 빠졌
다. 내부문제인지 외부문제 때문인지는아직 알수 없다. 어찌 뤘
든 류카라한 일행에서 빠져나온 건 분명해 보였다.
'다행이군. 제이슨이 내심 껄끄러웠는데. '
실제로 제이슨의 실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고 라한도 제이슨의
실력을 높게 보지 않았다. 정령왕까지 만나본 라한이었으니 상급
정령사가 하찮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정령사라는 점이 라한을 신경 쓰게 만들었다. 다양
한 직업군이 조합될수록 다양한 공격이 가능한 일. 제이슨이 적 세
력에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한데 제이슨이 일행에서 빠졌다. 이제 두 직업밖에 없는 셈이다.
)건 곧 그만큼 단조로운 조합밖에 할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계속 설명해 주십시오. "
"그는 골렘을 구해온 뒤에 바로 여러 왕국을 순회하듯 방문하고
다녔네. 그리고 엄청난 자금을 강탈하듯 빼앗아왔지. "
"류카라한. 실망이군. "
라한이 무의식중에 말을 내뱉었다
자신과 이름이 같은 대륙 최고의 영웅 류카라한. 아버지 필슨 백
작도 류카라한을 닮아가라는 뜻에서 맨 앞 글자를 뺀 카라한이라는
이름을 아들 라한에게 주었다.
한데 그런 류카라한이 치졸한 짓을 저질렀다. 거기다 드래곤과
싸우려는 그들이 왕국의 원조를 받고 있다. 그건 자칫 싸움에 패했
을 때, 왕국 모두가 드래곤들의 분노를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이 되겠군. '
"그리고 각 왕국에서 정예로 키우고 있는 견습 기사들을 모조리
데리고 갔네. "
"음 "
라한이 보기에 견습 기사들은 드래곤과의 싸움에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지금부터 제아무리 뛰어난 검술을 가르친다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기껏해야 자신들 대신 죽는 방패막이 그 이상은
되기 힘들 터. 결국 류카라한은 자신들이 단 1 분이라도 더 살기 위
해 방패막이를 만든 것에 불과했다
"왜 그러는가?"
"검은 측이라는 그들의 목적이 뭔지 압니까?"
"그건 모르네 "
"그들은 드래곤과의 싸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

에테로가 긴 침음성을 흘리며 턱을 괴었다. 라한과는 좀 다른 의
미에서 흘린 침음성이었다.
에테로는 인간이 드래곤과 대적한다는 그 자체를 무모하게 생각
했다. 지금 터트린 신음도 그런 만용을 허탈해하는 소리였다.
'하긴 눈앞에 있는 라한이라는 자도 드래곤이 노리고 있는 인간
이었자 근데 싸운 적이 있으려나?'
얼마 전 드래곤이 마을을 선회하며 살기를 뿜어대고 사라진 적
이 있다.
라한도 드래곤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얘기였다. 비록 그때 라한
이 자리를 비우면서 싸움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충돌은 시간문
제 같았다.
"자네는 승산이 있다고 보는가?"
"글쎄요. 원래는 대충 싸우다 몸을 피하면 그만인 싸움이었습니
다. 하지만 이젠 절대 패해서는 안 되는싸움이 됐습니다. 그들이
패한다면 드래곤의 다음 목표는 왕국 전부가 될 테니까요. -
"그그렇겠지. "
에테로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제야 작금의 사태를 짐
작한 모습이 었다.
드래곤과 인간의 대결.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물론 몇몇 소수의 싸움은 과거에도 있어왔다.
무지한 이들이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면서 혹은 드래곤이 스스
로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도시 하나를 불바다로 만드는 그런 일
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칫 종족 대 종족의 대결로 퍼질 수 있었다. 설
사 인간이 승리한다 하더라도 회생 불능의 상처를 입을 게 뻔했다.
'흠, 그래도 최소한 라한은 그와 드래곤의 싸움 정도로 범위가 정
해진다. 한데 회색 측과 검은 측은 대륙 전체와 드래곤의 싸움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너무 커. 이거 심상치 않은 일에 빠지겠는데.
에테로는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싶었다. 다크라이더 길드와베사
길드만큼은 드래곤의 분노를 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이 싫었다.
어차피 세상에 나름대로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 만든 길드가 다크라
이더 길드와 베사 길드였다.
드래곤이 정의에 어긋난다면 자신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게 설
립 취지인 셈이다.
"어쩌면 좋겠는가?"
"그거야 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죠. 계속 얘기해 주십시오. "
"아, 알겠네. 회색 측은 검은측과 계속해서 대립해 왔네. 불과
몇 달 되지 않았지만 빠른 속도로 세력이 커졌지. "
"세력이 커지다니요?"
"그들 역시 사람들을 끌어들였네, 하지만 왕국에서 견습 기사를
데려오는 방법이 아닌 길드를 이용하는 방법이었지. "
"길드? "
"그들은 대륙에 산재해 있는 중소 용병 길드와 암살자 길드를 병
합해서 병력으로 쓰고 있네. "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카이렌이 선택한
방법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음이다.
그게 누가 됐든 다른 인간을 끌어들인 건 분명했다. 이 역시 자
칫 드래곤의 분노를 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요?"
"그들은 그 병력으로 검은 측을 끊임없이 견제했네. 그리고 몇
달 전에는 검은 측이 가지고 있던 골렘 한 기를 탈취하는 데에도 성
공했지. "
"골렘 한 기?"
"그렇네. 원래 검은 측에는 1 인당 골렘 한 기가 있고, 한 기가 여
분으로 있었네. 한데 회색 측에게 한 기를 탈취당하는 바람에 여분
이 없어진 셈이지. "
에테로의 대답에 라한이 뭔가 생각에 잠겼다.
'그골렘은제이슨몫이었겠군. 흠, 골렘은 뛰어난 병기라고볼
수 있다. 그리고 한번 계약을 맺은골렘은그주인이 죽기 전까지
다른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 그럼 제이슨이 죽었다고 봐야 하나?
아니면 제이슨을 주려고 가져온 골렘인데, 그 전에 제이슨이 실종
돼서 주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지만 제이슨에게 골렘이 없
는 건 확실하군. '
라한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일단 제이슨은 걱정하지 않아
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회색 측에서 묘한 일을 하더군. "
"무슨 일입니까?"
"그 진형에 있는 이들 중 한 명이 루이나 왕국의 왕세자가 되는
간택 경쟁에 뛰어들었다. "
"그래서요?"
라한은 직감적으로 그가 휴란트임을 알아챘다. 라한의 성격을
아는 카이렌 일행이 그 성격에 맞는 복수를 진행하는 중인 듯했다.
"지금 현재로는 상당히 유력한 후보까지 오른 상태일세. "
"결과는 언제 나옵니까?"
"아직 몇 개월은 더 지켜볼 모양이야. 엘베로의 신중한 성격을
알 수 있지. "
라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는 엘베로
라면 그런 신중함이 당연했다
"더 있습니까?"
"정리는 이 정도로 끝일세. 더 들어오는 정보가 있으면 찾아오
겠네. "
"알겠습니다. "
라한의 대답을 끝으로 에테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척이나
어두운 얼굴이었다 종족 대 종족의 대결을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
이다.
에테로 일행이 떠난 후에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검은 측이라 불리는 류카라한 진형과 회색 측이라 불리는 카이
렌 진형. 라한은 이 두 진형이 큰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카이렌. 내가 너희를 떠나온 건 실력을 키우라는 의미였다. 휴. '
안타까웠다. 자신의 의도는 이게 아니었는데 자꾸만 엇나가는
카이렌 일행.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애써 키운 그들의 세력은 물론이고 잘하고 있는 스스로의
수련까지도 방해할 것 같았다.
'부디. '
라한은 카이렌, 류카라한 일행에 대한 생각을 접고 다른 고민에
빠졌다. 이곳을 떠나기 전 테세르가 언급한 로테마이어스에 대한
생각이었다.
'내가돌아왔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럼 벌써 나타났어야하는
데, 왜 안 나타나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로테마이어스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로테마이어스의 레어 안.
블리아드 마을에서 발광한 이후 로테마이어스는 레어 안에서 자
중하며 보냈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반성하는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라한의 실력을좀더 깊이 생각해 보고, 얼마남지 않
은 카이렌 일행과의 전투에 신경을 집중시키는 정도의 자중이었다.
"아카폴리안 "
"네. "
로테마이어스의 정보 담당 아카폴리안. 그는 요즘 로테마이어스
의 레어와 정보를 얻어야 하는 곳을 하루에도 수없이 많이 오가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10 일 남았다. "
"알고 있습니다, 로드님, "
"그들은 여전한가?"
"예,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로드님과의
싸움을 잊은 듯한 모습 같았습니다. "
카이렌과 로테마이어스가 약정한 1 년이 이제 10 일 남았다. 10 일
후에는 로테마이어스가 약속에서 자유로워지는 셈이다. 그건 곧
카이렌과의 일전을 치를 수 있다는 얘기도 되었다.
"내 결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로드님의 결정에 따를 뿐입니다. "
"난 너의 생각을 물었다. "
"제 생각은
약간 뜸을 들이던 아카폴리안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라한 쪽을 먼저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로드님
께서 시간이 없으시면 저희들이 가서 그 녀석을 처리하겠습니다. "
"너희들이?"
"예. 맡겨만 주시면 제가 가서 그놈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
로테마이어스는 아카폴리안의 자신감 넘치는 말이 기분 좋았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행하는 건 문제가 있었다.
아카폴리안은 로테마이어스의 눈이나 다름없다 로테마이어스가
얻는 정보의 90 퍼센트 이상이 아카폴리안이 모아오는 정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칫 아카폴리안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몇 달 동
안은장님으로 지내야할상황에 처하게 된다. 괜히 골치 아픈 일
을 자처할 만큼 로테마이어스가 어리석지는 않았다
"네 생각은 괜찮지만 무리가 많다. "
"무리라면?"
"라한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다. 비록 전투에선 무
능했지만 크라이드리안을 제압했던 인간이 라한이다. "
"그럼 제가 다른 드래곤들을 이끌고 처리하겠습니다. "
아카폴리안의 연이은 요청에도 로테마이어스는 고개만 가로저
었다.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아카폴리안의 말을 한 번은 시험해 보고 싶었다. 꼭 이길
수 있어서가 아니라 라한의 실력을 가늠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넌 가선 안 된다. 하지만 2 천 살 내외의 드래곤 둘 정도를 그 녀
석에게 보내라. 목표는 물론 그 녀석의 죽음이다. 하지만 힘에 부
친다는 생각이 들 때는 즉각 도주하라고 일러라. "
"알겠습니다, 로드님. "
"넌 카이렌과 그 떨거지들만 감시해라. "
"명심하겠습니다, 로드님 "
"피곤하군. 쉬고 싶다. "
"네, "
로테마이어스의 축객령에 아카폴리안이 됫걸음질로 fl 어를 나갔
다. 그가 나가자 로테마이어스가 의자에 기대며 길게 한숨 쉬었다.
"라한, 휴. "
로테마이어스는 라한이 무서웠다. 꼭 이길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
었다.
그의 실력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 대체 어떤 마법을 사용하는지
아는 게 없다는 것. 그런 것들이 의미모를 두려움을 안걱줬다.
로테마이어스가 라한에게 가는 걸 자꾸 미룬 이유도 이 때문이
었다. 어쩌다 보니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상대가 라한이 되어 버린
셈이다. 질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껄끄러운상대. 그가 라한
이었다.
에테로가 라한의 집을 떠난 지 5 일 후, 그가 다시 라한을 찾아왔
다. 아마 그 5 일 동안 베사 길드를 통해 검은 측과 회색 측에 대한
정보를 재정리했으리라.
"어서 오십시오. "
"기다린 것 같군. "
"그냥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
라한이 에테로를 공터 테이블로 안내했다 전과는 다르게 에테
로의 수행인들은 라한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 방문한 이후 에테로에게 어떤 언질을 받은 듯했다
"자네는 내가 말하는 정보를 믿는가? 혹 거짓 정보라면?"
자리에 앉은 에테로가 다짜고짜 물음을 던졌다.
에테로 자신은 남이 하는 말을 잘 믿지 않는다 정보를 오랫동안
다루어왔기에 더 그런지도 모른다. 한데 라한은 에테로의 말에 그
어떤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런 라한의 태도가 너무 신기했다.
대충 대화를 해 봐도 라한의 경험은 녹록지 않아 보였다. 그런
사람이 남의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듣고 믿는다? 그것도 생판 처음
보는 에테로의 말을?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왜요? 거짓말이라도 했습니까?"
"그걸 묻는 게 아닐세. 내 판단에 자네는 심상치 않은 경험을 많
이 한 사람일세. 그 정도 실력을 갖추자면 그만큼의 경력과 경험을
거쳐야 하는 건 당연하겠지. 한데 그런 자네가 내 말에 약간의 의
심도 품지 않더군. 내가 마는 사람들에 대한 기준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일세. "
"훗, 물론 대부분 어느 정도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의
심하고들겠죠. 경험은사람을 타성에 젖게 할뿐만 아니라, 의심
이라는 놈을 마구 키우니까요. "
"그런데?"
"뭐, 그냥 너무 많은 경험을 해서라고 생각해 두십시오. "
그냥 지나치듯 한 말이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라한은 에테로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경험을 했고, 그 경험만큼이나 많은 기
억을 가지고 있다.
8, 에테로가 꿈도 꾸지 못할 경지에 이르면서 수많은 깨달음의
단계를 거쳤다.
그러면서 늘어난 건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이었다. 또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능력도 범인의 기준을 뛰어넘
었다.
라한이 에테로의 말을 들었을 때, 그 말투와 목소리에서 거짓을
느끼지 못했다. 에테로 역시 라한에 비하면 한참 적은 경험과 경력
을 가졌을 것이기에 라한이 그렇게 들었다면 그럴 터였다
"알 수 없는 말이군 "
"그냥 그렇다고 해두십시오. "
"그러지. "
"근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뭔가 다른 정보가 있을 거라
고 보이는데요. "
라한의 물음에 에테로가 한차례 머리를 긁적였다. 막상찾아오
기는 했지만, 그리 중요한 정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거 참 그리 중요한 정보는 아닐세, "
"말씀해 보십시오. "
"전에 말했던 그. 휴란트라는 사람의 정체가 발각되었네. "
"정체라니요?"
에테로는 휴란트를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회색 측, 그러니까 카이렌 일행 중에서 휴란트의 실력이 가
장 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약하다는 그 이유 하나가 라한의 관심을 끌지 못할 거라고 믿었다.
한데 라한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조바
심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엘베로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 들컥서는 안 되는
정보가 있는모양이더군. 그 정보가 엘베로의 귀에 '들어갈' 모양
이야. "
"정체?"
에테로의 말에 라한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휴란트가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할 거라면 필슨 가문의 사람이라
는 것뿐이다 그것만 숨긴다면 그의 능력으로 루이나 왕국의 후계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뭐, 자세한건 모르네. 그에 대해서는그리 이목을집중하고 있
지 않아서 말이야. 근데 자네는 그와 무슨 관계인가?"
"그는 아닙니다. "
"휴란트라는 자는 필슨 가문의 후손일세. "
에테로는 라한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냥 라한이라고 부르
고는 있지만, 그의풀 네임이 카라한필슨이라는 것도몰랐다. 다
크시안이 알아보라고 한 인물에 라한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탓이
다. 또, 다크시안이 라한에 대해 그 어떤 언급도하지 않았다는 것
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알고 있습니다. "
"그의 정체가 엘베로의 귀에 들어가면 그가 꾼 후계자의 꿈은 포
기해야할 걸세 물론, 그의 조력자가 회색 측이니 엘베로가그를
해코지하지는 못하겠지 . "
카이렌과 프라하, 투바. 그들이 있는 이상 휴란트가 엘베로에게
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검은 측이라 불리는 류카
라한 일행에게 다친다면 모르겠지만, 엘베로가 가진 힘으로는 카
이렌 일행을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쾌나 오랫동안 공들였을 후계자의 꿈은 접어야 할 게 분
명했다 제아무리 강한 집단의 일원이라도 원수에게 뒤를맡길 수
는 없을 테니 말이다.
"좀 전에 '들어간'이 아니라 '들어갈'이라말씀하셨습니다. 그
얘기는 아직 엘베로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는 얘기 아닙니까?"
"맞네. 엘베로의 하부 정보 조직에서 휴란트의 정체를 알아랜
것 같더군.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후계 후보자들의 정보가
엘베로에게 보내지는데, 아마이 정보도그때 함께 올라갈걸세 "
"막아주십시오. "
"불가능하네. 정보가 올라가는 날이 이제 3 일 남았거든. 지금
당장 동원 가능한 인원으로는 그들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게 불가
능해. "
정보 조직에서 정보를 빼내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정보와
관련된 모든 문서를 수거하는 건 물론이고, 그 정보를 캔 자와 그
정보가 거쳐 간 모든 이들의 입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단 3 일. 제아무리 뛰어난 조직이라도 한 조직을 혼란시키고 문
서를 빼오고, 몇 명의 입을 막는 일을모두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
한 시간이다. 거기다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베사 길드에서 갑자
기 인원을 모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처리해야 할 사람의 이름과 위치
그리고 문서들이 보관된 곳만 알아봐 주십시오. "
"흠, 자네가아무리 대단해도 이번 일은불가능한 일일세. 정보
길드를 우습게보지 말게. 자네가 마법사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세. 그들이 마법사에 대한 대비도 하지 않았을 것 같은가? 모르긴
몰라도 마법을 방해하는 어떤 장치 정도는 설치해 뒀을 걸세. "
"그건 걱정 마시고 알아봐주세요. 내일 아침까지 부탁드립니다. "
"알겠네.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알아봐 주기는 하겠지만
에테로의 얼굴에 걱정이 어렸다.
안 지 얼마 안 되지만, 자신의 친구이자 마스터인 다크시안이 인
정하는 사내가 라한이다.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다크시안이 호
감을 가지고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절대 다쳐서는 안 되는 사람
이 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
"시간이 촉박하니 이만 가 보겠네. "
에테로가 서둘러 라한의 집을 나섰다. 그가 나가자 라한이 초조
하게 공터를 오락가락했다.
-주인. 휴란트가 걱정돼?
"아니. 카이렌이 있잖아. 투바랑프라하도 있고. 휴란트가다치
는 일은 없을 거야. "
-근데 왜 그렇게 초조해하는 거 o
"카이렌이 선택한 방법은 내가 하려는 방법이었어. 내가 생각한
최선의 복수 방법이지. 근데, 휴란트가 정체를들켜 버리면 이 방
법은 포기할 수밖에 없어. 그런 상황이 오는 건 싫거든. "
라한은 계획했던 일을 수정하는 걸 무척이나 싫어한다. 처음 계
획이 스스로가 생각한 최선책이기에 수정한다면 차선책이 될 수밖
에 없는 탓이다.
아무래도 차선책으로는 엘베로에 대한 복수가 만족스럽지 못할
터. 그런 상황은 죽어도 싫었다.
-한마디로 제대로 복수할 수 없을까봐 걱정한다는 거잖아.
"그게 어때서?"
-주인,
"왜?"
-인간이 참 독하다.
테세르의 말에도 라한은 그리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독하다는
말을 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라한이었다.
"고마워. "
라한의 담담한 말에 꾸짖으려던 테세르가 오히려 멍해졌다.
'세상에 주인이 독하다는 건 알았지만, 뭐 저런 자식이 다 있
냐? 주인만 아니면 그냥 머리를 뜯어 보는 건데. 쳇. '
생각만했을뿐, 입 밖으로 내지는못했다. 누가뭐래도 라한은
주인이었고 테세르는 그의 소환물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뒤처리
다음날 아침
에테로가 닉스만을 대동한체 라한을 찾아왔다 그리고 뭔가 적
힌 쪽지 몇장만 내밀고 바로 사라졌다
흠 생각보다 많군
아홉명이네 그리고 여기서 멀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본 적이 있는 곳이라는 거다 운 나쁘
게 가 본적이 없는 곳이었으면 거기까지 뛰어가야 할 뻔했다
그렇군
라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반면 테세르는 아쉽다는 빛을 노
골적으로 보였다 라한을 타고 달리는 걸 엄청나게 좋아하는 테세
르 아니던가 가 본 적이 있어서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게 이렇
게 아쉬울 수 없었다
"슈라. 넌 어떻게 할래?그냥 여기 있을래?아니면 다른공간에
가 있을래?"
-난 그냥 여기 있겠다.
"그래라. "
슈라가 라한의 부름을 기다리는 다른 공간. 그곳은 온통 어둠뿐
이라 적막하기 그지없다. 전에는 그 공간이 싫은줄몰랐지만, 물
질계에 오랫동안 머무르자 그곳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밝은 햇살과 따뜻한 정에 익숙해졌다고 할까? 할 수만 있다면 이
곳 물질계에서 주인인 라한, 친구이자 동지인 테세르와 평생을 함
께 보내고 싶었다.
"변. 넌 여기서 슈라하고 놀아라. "
-크리릭!
"테세르. 넌
난 당연히 주인 따라가야지.
원래 라한은 테세르도 이곳에 두고 갈 생각이었다. 갖은 수다로
자신을 귀찮게 할 듯한 기분 때문이다. 또 머리 나쁜 테세르가 사
고라도 쳤다가는 그 됫수습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테세르. 그냥 너도 저 녀석들하고
-나 준비는 다 끝났어, 가자.
"아 그게
-뭐 해?시간 없잖아. 전부 열한명이라고. 서두르지 않으면휴
란트가 위험해져.
테세르가 라한의 말을 계속 끊고 서두르자고 재촉했다. 직감적
으로 자신을 떼어놓고 가려 한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그래. 가자. 이리와 "
출발.
테세르가 라한의 로브 안으로 들어가서 신나게 외쳤다
라한에게 이번 외출은 복수의 성패를 결정지을 만큼 중대한 일
이었다. 하지만 테세르에게는 단순히 놀러 가는 일 그 이상도 이하
도 아니었다.
"간다. 공간을 넘어서! "
라한이 간단한 시동어로 공간을 건너뛰었다. 예전과는 사뭇 다
른 시동어에 테세르도 고개를 갸웃했다.
라한과 테세르가 나메라 왕국의 남쪽 끝 엘퐁소 지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휴란트의 정체를 알아낸 사람이 이곳에서 머물고 있는
탓이다.
"감회가 새롭군. "
-그러게 말이야. 근데, 루이나왕국이 아닌 게 신기하다. 이 먼
곳에서 휴란트의 정체가 유출되다니.
"곧 알게 되겠지. "
라한이 엘퐁소 지방의 시내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테세르는
여전히 라한의 로브 속에서 고개만 달랑 내밀고 있었다.
-주인. 어디로 갈 거야?
"저쪽. "
라한은, 작지만꽤나 정갈하게 정리된 술집으로들어갔다 그리
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저자인가?"
라한이 품에서 에테로에게 받은쪽지를 꺼냈다. 그쪽지에는눈
썹이 짙은 40 대 사내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비슷한데.
"확인해 보자고. "
라한이 사내 앞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그 모습을
보며 아침을 먹고 있던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보쇼. 당신 뭐요?"
"혹시 부레이노씨 되십니까?"
"내 이름은 어떻게 아시오?"
"저랑 어디 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
라한의 말에 부레이노가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
다 그 상태로 왼쪽 발을 뒤로 빼며 싸울 채비를 갖추었다.
본능적으로 라한에게서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다.
"저하고 싸울 생각이십니까?"
"당신! 목적이 뭐야? 누구야?"
"곧 알게 될 겁니다. "
"하앗! "
라한의 대답을 듣던 부레이노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더니 라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기습이라 라한의 얼굴에도 놀
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척-!
단검을 든 부레이노의 손이 어느샌가 라한의 왼손에 잡혀 있었
다. 부레이노의 빠른 기습보다 더 빠른 라한의 대처였다.
"먼저 공격했으니 절 원망하지 마십시오. "
라한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부레이노의 손목에서 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빠직!
"으악! "
그와 함께 부레이노가 쥐고 있던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챙그랑!
"저도좀놀랐습니다. 이렇게 다짜고짜공격해 올줄몰랐거든요. "
"헉, 헉. 손손 좀
"아, 이런. 손목이 부러졌군요. "
라한이 부드럽게 왼손을 풀었다.
부레이노가 자리에 주저앉은 채 신음을 흘렸다. 정신 멀정한 상
태에서 타인에 의해 손목이 부러진 부레이노. 의식을 잃지 않은 게
용했다.
"당신 목적이 뭐야?"
"곧 알게 될 겁니다. 그럼 수면으로!"
라한의 수면으로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부레이노가 서서히 몸을
뉘었다. 라한의 신화력을 이용한 슬립에 당한 것이다.
"이분 식사비는 제가 내도록 하죠. "
라한이 부레이노가 앉았던 테이블에 2 실버를 내려놓고 나왔다.
나름대로 자신이 악당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테세르에게는 그런 행동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은 듯
했다. 이미 질린다는 눈으로 라한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주인. 진짜 악독하다.
부레이노는 휴란트의 정보를 처음 캐낸 사람이다. 라한으로서는
처리해야 할 대상 1 순위인 셈이다. 다른 사람 모두 사라져도 그가
다시 휴란트의 정체를 상부에 보고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술집을 나온 라한은 이번에는 엘퐁소 외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많은 곳을 어느 정도 지나오자 테세르가 라한을 조용히
불렀다.
-주인.
"왜?"
-아까 '수면으로' 라고 한 게 신화력을 이용해서 쓰는 마법 시동
어지?
"마법은 아니지만 시동어는 맞아. 그냥 내가 의지를 집중하기
편하게 부르면 되니까. "
신화력은 라한의 의지에 의해 발현된다. 하지만 그 의지를 실체
화할 어떤 연상 작용이 필요하다. 마법에서 파이어 볼을 사용할
때, 불의 형상과 열기를 상상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름 너무 대충 지은 거 아냐?
"그게 어때서? 내가 편하면 그만이지. "
라한은 이름을 짓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
자신만 연상에 도움이 되면 그만인 신화력의 발현. 괜한 이름 때문
에 고민하는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름은 뭐가 있는데? 아까 보니까 공간을 넘어서던가?
그것도 있던데?"
"공간으로, 불의 공, 뜨자, 수면으로, 고치기. 뭐 이런 식인데 "
-작명 센스가 진짜 엉망이군 이게 뭐니 이게? 뜨자? 고치기?
뭐든 건성건성
테세르가 라한을 나무라며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라한이 지은 이름은 하나같이 유치했다
"귀찮아. 그냥 이걸로 할래. "
라한은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미 자신이 생각해 둔 이름에
어떤 연상을 떠올리는 게 익숙해진 탓이다.
만약 지금 시동어를 바꾼다면 그에 따르는 연상을 다시 외워야
한다. 불필요한 일에 두 번 고생하는 건 죽어도 싫었다.
-쳇.
"저기군 "
라한이 어느 상점 건물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꽤 멀리서
멈추었기에 아직 라한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이 녀석은 어떻게 할 건데?
"지키고 있어. "
라한이 테세르를 남겨 두고 상점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어느 정
도 다가갔을 때 라한이 입을 열었다.
"투명해지기. "
라한의 말이 끝나자 모습이 서서히 희미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
라졌다. 인비져빌리티와 같은 투명화 마법의 시전이었다.
-저놈의 시동어. 하여간 유치 빤스다
약 10 분 후, 라한이 어깨에 갈색 머리의 말끔한사내를 걸치고
나타났다 10 분 만에 저택 안에서 사람을 납치해 온 것이다.
-빨리 끝났네.
"별별 장치를 다 해놨더군. 꼴에 죽기는 싫어 가지고. "
라한이 들어갔다 나온 집에는 특별한 장치가 없었다. 한데 주인
의 방 안. 그러니까 라한의 어깨에 있는 자의 방에는 마법 장치와
각종 물리 트랩이 화려하게 깔려 있었다.
-주인. 이 녀석들 왜 안 죽여? 데리고 다니는 거 너무 귀찮은데.
"쓸 데가 있어서. 가자. "
라한이 처음 사로잡은 사내와 이번에 데려온 사내를 양쪽 어깨
에 둘러멨다. 실제로는 부유 마법과 같은 띄우기를 사용해서 살짝
걸친 모습이었다.
라한은 엘퐁소 지방 외곽에 위치한 버려진 농가에 사로잡은 이
들을 가두었다. 그리고 테세르에게 지키라고 한 뒤, 목록에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납치해 왔파.
지금까지 모두 여덟 명. 폭력을 사용해서 기절시킨 사람이 반,
마법으로 수면에 빠지게 만든 사람이 반이었다.
"네 이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납치된 자들 중 한 명이 라한에게 눈을 부라렸다. 어이없이 이곳
에 끌려온 게 황당하고 화난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야! 조용해. "
"이, 이놈! 내 형님은 이곳 엘퐁소 지방의 유력한 부호이시다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헉, 그렇습니까?"
라한이 짐짓 놀란 듯 고함친 사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사내가 기가 살아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날 풀어주면 네놈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
"정말이십니까?"
"그렇다. 난한번한말은지킨다. 물론, 약간의 매질은피할수
없겠지만, 내가 선처를 부탁할 테니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거다. "
"오, 정말이십니까?"
라한의 태도가 계속 저자세이자 사내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마치 벌써 풀려난 듯 얼굴 가득 웃음까지 머금은 채였다.
"내 말하지 않았느냐? 난 한번 한 말은 지킨다. "
"흠, 그렇군. 근데, 내가 당신을 납치한 건 아무도 모를 텐데.
그냥 당신을 여기서 죽여 버리는 게 더 확실할 것 같아. "
"아, 아니다 날살려주면 매질도 하지 않을뿐 아니라돈도 두
둑하게 주겠다. "
"돈이라 . . "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뭔가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사내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돈에 약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법. 사내는 라한이 돈을 택할 거
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납치된 사람들은 라한이 장난치고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이보시오. 우릴 왜 납치한 것이오? 우리가 댁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소. "
"정말 몰라? 여기 납치된 애들 잘 살펴봐. 그래도 모르겠어?"
"흠. "
라한의 말에 납치된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아닌
척했지만 대충은 눈치 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알겠지?"
"나메라 왕국에서 눈치 챈 모양이군. 크크크. 그래, 우릴 고문할
생각인가?"
라한이 납치한 자들은 엘베로의 정보 조직원이다.
남의 나라인 나메라 왕국에서 활개 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때문
에 그들은 라한을 나메라 왕국의 조사원이나 순찰원쯤 된다고 생각
했다. 그에게 자신들은 자국에 침입한 스파이나 다름없었으니 말
이다.
"고문 7"
"훗, 해 봐야 소용없다. 아무리 고통을 줘도 우린 배후 인물을
밝히지 않는다. "
배후 인물이라는 말에 라한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베사 길드의 정보력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말로 비추어보면 나메라 왕국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은
듯했다. 또 설사 들키더라도 배후는 들키지 않도록 모종의 장치를
한 것처럼 보였다.
한데 베사 길드는 그 모든 걸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배후와 조
직의 연계 그리고 그들이 모은 정보까지
베사 길드의 뛰어난 실력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배후 인물? 엘베로 얘기하는 거지?"
"그, 그걸 어떻게
"다 아는 걸 새삼스럽게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시나?"
납치된 자들도 자신들이 정보를 캐고 있다는 게 들켰음을 눈치
챘다. 하지만 그 배후 인물이 엘베로라는 건 들키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그 누군가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또, 그런 낌새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보 조직보다 더 뛰어난 조직이 다크라이더 길
드에서 만든 베사 길드임을 알지 못했다. 또 그들 조직의 꽤 깊숙
하고 높은 곳에 베사 길드원 다수가 활동하고 있음도 몰랐다.
"됐어. 그냥 여기 찌그러져 있어라. 근데 올 때가 됐왔군. "
덜컥!
라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테세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람 크
기로 몸을 불린 테세르가 로브로 몸을 완전히 가린 모습이었다.
"늦었군. "
-아, 이놈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서 말이야.
쿵- !
테세르가 어깨에 걸친 사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라한은 그
사내의 얼굴을 살피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군. "
이제 끝이지?
"거의 그렇다고 봐야지 "
라한이 처리해야 할 사람은 모두 아홉 명이다. 이곳에 갇혀서 라
한과 대화를 나누던 사람은 모두 여덟 명 나머지 한 명을 납치하
기 위해 테세르가 떠난 거 였다.
-아까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 같던데.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이 녀석 얼굴이 왜 이래? 벌집을만들
어놨네. "
-말했잖아, 저항이 너무 거셌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테세르가 데리고 온 사내는 20 대 중반의 다부진 체격의 사내였
다 얼굴만 멀정하다면 미남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한데 지금 얼굴은 인간으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
다. 눈은 퍼렇게 멍이 들었고 볼은 잔뜩 부어서 얼마나 맞았는지
짐작하기 힘들 정도였다.
-저항이 너무 거셌다니까.
"알았다, 알았어. "
테세르가 사내를 완전히 망가뜨려 놓은 가장 큰 이유는 그 남자
의 외모 때문이다. 라한의 모습과약간닮았다는것. 그하나때문
에 테세르의 분노를 자극한 것이다.
물론 라한의 본래 모습이 아닌 폴리모프 반지를 사용해서 변한
지금 모습과 비슷한 거였다 30 대인 지금 모습이 10 년 정도 젊었을
때 가질 수 있는 그런 모습 말이다.
아마, 지금이 아닌 라한의 본래 모습과 흡사했다면 초주검이 아
니라 이미 시체를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뭐 하면 돼?
"서류를 찾아와야지. 넌 여기 지키고 있어. 혼자 갔다을 테니까. "
-얘들하고 좀 놀아도 되지?
"맘대로해. 대신, 죽이면 안된다. 알았지?"
-알았어
라한의 승낙이 떨어지자묶여 있던 여덟 명의 얼굴에 공포가 어
렸다
라한에게는 폭력을 당하지는 않았다. 납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맞은 사람은 있지만, 이곳에 갇힌 그 순간부터는 물리력에 당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테세르는 왠지 폭력을 행사할 것 같았다. 후드를 완전히
트리는 테세르. 일행은 라한이 이곳에 있어주기를 마음속으로 빌
고 또 빌었다.
"그럼 간다. "
-응 잘 놀다 와.
라한이 사라지자 테세르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헉!"
"크헉 ! "
묶인 여덟 명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온통 검은 테세르의 얼굴 때
문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처음 라한이 신화력을 익혔을 때에는 테세르도 백색이었다. 라
한의 신화력이 여과 없이 테세르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데 지
금의 테세르는 예전과 같은 검은색이었다. 라한이 신화력에 어느
정도 능숙해지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무서워?
"어, 어 어 억 ! "
여덟 명 중한 명이 놀란마음에 의식을 잃었다. 나머지 일곱 명
은 차라리 의식을 잃은 사람이 자신이기를 바랐다. 그럼 테세르의
공포스러운 모습은 보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이히히히. 놀아보자고.
테세르가 묶인 사람들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칼 모양으
로 생긴 펜을 꺼내들었다.
"살, 살려주십시오. "
"다 말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묶인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 자리에 머리를 묻고 목숨을
구걸했다. 테세르의 모습이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이다.
-아는 게 뭔데?
"뭐든 물어만 보십시오. "
-그냥 너희들이 알고 있는 걸 다 불어. 안 그러면
"예. 먼저 저는 21 년 전에
라한에게 엘퐁소 지방 영주의 동생이라고 했던 사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마구 털어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일곱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상 내력부
터 조직에 대해 아는 정보까지, 아는 정보를 모조리 털어내고 있으
니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호, 그래?
테세르가 라한이 두고 간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잡혀
있는사람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정보의 중요
성 같은 건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런 걸 가려낼 능력도 없
는 테세르였다
한편, 테세르를 남걱둔 라한은 루이나 왕국의 북부 지역으로 이
동했다. 1 년 전 제이슨과 드래곤 크라이드리안이 싸웠던 바로 그
장소였다.
"곧 지나가겠지. "
라한이 땅에 귀를 대고 청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두두두두두.
일반인은 들을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진동이 땅을 통해 전해져왔
다. 말 서너 필이 달려오는 소리였다.
"곧 오겠군. "
엘베로의 정보 조직은 정보를 통신 마법으로 전하지 않는다. 대
륙 곳곳에 통신 가능한 마법사를 보낼 만큼의 여력이 없는 탓이다.
이 때문에 정보가 들어오면 일단 서신에 기록해서 빠른 말로 보
내야 한다.
물론, 엘베로의 비밀이나 나라의 존폐가 걸린 중대한 일에는 통
신 마법을사용한다. 그만큼 시급한문제이기에 그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베사 길드는 거의 모든 정보를 통신 마법으로 주고받는다.
일개 길드가 한 나라의 국왕이 거느린 정보 조직보다 더 많은 통신
마법사를거느리고 있다는증거였다. 또, 엘베로의 정보조직 보다
더 방대한곳까지 퍼져 있으니 가히 베사 길드의 정보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투명해지기. "
라한의 모습을 감추고 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잠깐 기다리
자 빈 말 두 필과 사람이 탄 말 한 필이 라한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오호, 말 두필을 비우고 다니는군. 쾌나 치밀한데. '
말 두 필을 비운 건 갈아타기 위함이다. 라한도 한눈에 그런 상
황을 눈치 챘기에 감탄을 터트렸다.
"워, 워!"
말을 세운 사내가 라한이 있는 곳 부근의 나무 아래에 말을 묶었
다. 그리고 자신은 그 옆에 있는 나무에 등을 기대어 눈을 스르르
감았다.
때는 한여름. 나무 그늘에서 몸을 식히고 좀 쉰 후에 다시 출발
할 생각인 듯했다.
'어디 있을까?'
사내가 눈을 감자 라한이 묶어둔 말들을 향해 다가갔다. 신화력
으로 몸을 완전히 감싸서 예민한 말조차 라한이 다가오는 걸 느끼
지 못했다.
'대체 어디 숨걱놨지?
라한이 말에 묶인 가방을 조심스럽게 하나씩 살폈다. 한데 아무
리 살펴봐도 휴란트를 비롯한 후계자들의 정보가 적힌 서신을 발견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
라한은 결국 찾기를 포기하고 쉬고 있는 사내에게 걸어갔다.
" 이봐! "
"음냐. "
" 이! "
후다닥!
라한의 연이은 외침에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
리번거렸다.
"누구냐?"
"이게 어디서 반말이야? 너 몇 살이야?"
"이놈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라한의 앞에 선 사내. 이크샤트의 몸에서 매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단순한 정보 조직원이 가질 수 있는 기세가 아니었다.
"오호, 기세가 제법 사나운데?"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
언제 꺼내었는지 이크샤트의 손에 긴 시미터가들려 있었다. 아
주 자연스럽고 깔끔하게 검을 꺼내 든 이크샤트. 라한은 그 모습으
로 상대가 예사 정보 조직원과 다름을 눈치 챘다.
'좀 배우긴 했군 '
라한이 왼쪽 발을 뒤로 뺀 채로 손을 가슴 앞으로 두었다. 누구
나 알고 있는 전투의 기본자세였다.
뒤처리
f7
* SCAN0031.PCX *
"부질없는 짓이다. 하앗!"
이크샤트의 시미터가 라한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그리고 라한
의 목을 완전히 레뚫었다. 아니 레뚫은 것처럼 보였다.
분명 레뚫은 것처럼 보였지만 손끝에 닿는 감각이 없었다. 이 정
도의 움직임으로 피한 사람이라면 자신보다 윗줄이 분명했다. 거
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
이크샤트가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라한이 피했음
직감한 것이다.
"쾌나 빠른 출수였다. 또, 잘못됐다는 걸 알고 빠르게 주변을 훌
자세도 괜찮았다. "
라한의 목소리가 이크샤트의 뒤쪽 나무 위에서 들려왔다. 그 목
소리에 이크샤트가 고개를 들어 라한을 바라봤다.
하지만 쉽사리 다음 공격을 이어가지는 않았다. 라한의 차분한
표정과 담담한 목소리에서 자신보다 월등히 강자임을 직감했다.
이런 상대에게 계속 덤비는 행위는 명을 재촉하는 길밖에 되지 않
는다.
"넌 누구냐?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하나만 넘 겨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
"뭘 말이냐?"
"네가 가진 서신. 내가 필요한 건 그것뿐이다. "
"헛소리! "
외마디 외침을 토한 이크샤트가 다시 전투 자세를 갖추었다 목
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서신은 넘겨줄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
가 느껴지는 모습이 었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네. '
상대의 의지가 느껴지는 얼굴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마음에 들었음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서신을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미안하군. 묶어!"
라한의 말이 끝나자 이크샤트의 주변에 있던 나무들이 빠르게
가지를 뻗어 그를 묶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이크샤트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마법사?"
"보시 다시 피 . "
라한이 대답하며 이크샤트의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찾아도 서신 비슷한 걸 발견할 수 없었다
"야! 어디 있어?"
"차라리 날 죽여라. "
"이 자식을 그냥 아우, 빨리 내놔! "
"그런다고 내가 말할 것 같으냐? 죽음은 두렵지 않다. "
이크샤트의 강경한 태도에 라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저히
말로는 안 될 상대였다.
"생각 읽기! "
라한이 이크샤트의 눈을 바라본 채로 시동어를 외쳤다.
생각 읽기! 독심술과 흡사한 라한만의 마법이었다.
"더러운 놈!"
한참 이크샤트의 눈을 보던 라한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무, 무슨 소리냐?"
"쳇. "
라한이 이크샤트의 하의를 내려 속옷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
크샤트가 자신의 속옷 안에 서신을 숨겨둔 모양이다.
"으, 드러. "
라한이 이크샤트의 속옷 안에서 누런 봉투를 찾아냈다. 쾌 오랫
동안 안 씻었는지 땀 냄새와 그곳의 냄새가 섞여 상당히 묘한 향기
가 코를 자극했다.
라한이 봉투를 꺼내 들자 이크샤트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약
간 붉어진 얼굴
자신도 속옷 안에 서신을 숨긴 게 약간은 수치스러운 듯했다.
찌직!
"어디 보자. "
라한이 봉투를 찢어 안에 있던 서신을 꺼냈다. 모두 두 장이었
다. 라한은 그 중 첫 장에 쓰인 내용을 먼저 읽었다.
-오늘 드디어 나메라 왕국의 군사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이 정도
정보면 루이나 왕국과 협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루이나 왕국과 협상을 해?"
라한이 의문을 터트리며 이크샤트를 바라봤다. 그렇게 잠시 보
면서 품속에 있던 에테로의 쪽지를 꺼내들었다.
"다르네. "
에테로가 준 쪽지에는 서신을 전하는 사람의 몽타주도 함께 들
어 있었다. 한데, 그 몽타주의 얼굴과눈앞에 있는 사내의 얼굴이
완전히 달랐다.
"잘못 골랐군. 너 누구냐?"
"말할 수 없다. "
"너 루이나 왕국의 세작이 아니로군. 넌 대체 누구냐?"
"차라리 날 죽여라. "
"독한 놈이네. 계속 보면 알겠지. "
라한이 이크샤트에게서 시선을돌려 서신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래 내용은 나메라 왕국의 군사 정보입니다. 베센 왕국의 영
광을 위해서 미 한 목숭 바칠 각오가 래 있습니다. 그럼 띠만
밝은 달빛 아래에서 베센 왕국의 부활을 꿈꾸며
헤피에하 파을 올림
서신을 읽으면서 라한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헤피에타 파올.
한때 라한의 일행을 따라다녔기에 라한도 알고 있는 이름이다.
샤르비엘 후작이 라한을 감시하라며 보냈던 5 서클 마법사. 그가 베
센 왕국에서 나메라 왕국에 보낸 세작이라니 예상 못한 정보에
어안이 벙벙했다.
'재미있는 정보를 얻었군. 그래, 남부 지방의 방언을썼다는 얘
기를 들었을 때 의심해 봤어야 했어. '
현재 베센 왕국은 루이나 왕국에게 북부 지방을 내주고 세력이
약해졌다. 왕국이라는꼬리표를달고 있지만, 웬만한소국보다못
한 상태가 베센 왕국이었다.
"이봐. 뭔가 이상하군. "
"아무것도 묻지 마라, 난 대답하지 않는다. "
"베센왕국은 대륙중부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고. 근데, 나메라
왕국은 대륙 중북부 지방이거든. 베센 왕국에게 나메라 왕국의 정
보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 "
"멍청이로군. 루이나 왕국과의 협상에 쓸 정보다. "
"아, 그렇군 "
라한의 담담한 물음에 이크샤트가 되받아쳤다. 어차피 서신에
있던 내용을 그대로 읖은 정도이니 별 상관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이 정도 정보를 아는 걸로 봐서는 그 역시 단순한 정보 전달자는 아
닌 듯 보였다.
"흥. 넌 누구냐? 내가 알고 있는 나메라 왕국의 인물 중에는 너
같은 실력자가 없다. 넌 누구지?"
"뭐, 나메라 왕국 사람은 아니다. 풀어줘!"
짧게 대답한 라한이 좀 전에 시전했던 마법을 없앴다. 갑자기 주
어진 자유에 이크샤트가 의아한 빛을 띠었다.
"날 왜 풀어주지?"
"내가 찾는 녀석이 아니거든. "
"진짜 나메라왕국 놈이 아닌 모양이군. 넌 누구냐? 너 정도의
실력자가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
"신분을 묻기 전에 자기 신분부터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
이크샤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게 꺼려지는지 쉽게 입을 열
지 않았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나도 그리 궁금하진 않거든. "
"난베센왕국의 이르나백작이다. 이크샤트이르나. 그게 내 이
름이다. "
이크샤트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것보다 상대에 대해 알아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단 한 차례 충돌이었지만, 라한은 쉽게 볼 수 있는 마법사가 아
니었다. 특이한 시동어와 빠르고 정확한 마법 구사. 어쩌면 대륙에
알려지지 않은 대마법사의 탄생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먼저 하나만 더 묻자. 너 파올하고 친해?"
"파올은 내 직속 부하다. "
"그럼 내 이름을 들어봤겠군. 라한. 그게 내 이름이다. "
"라한? 헛소리. 내가 아는 라한이라는 자는 20 대 초반의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다. "
이크샤트는 라한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현재 라한의 외모가 30 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라한 역시 굳
이 폴리모프를 풀어서 확인시컥줄 생각은 없었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지만 난 라한이 맞다. "
"흠. "
이크샤트가 침음성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듣기로 라한은 루이나 왕국의 반역자인 필슨 가문 사람이다. 즉,
루이나 왕국에게 땅을 내어준 베센 왕국과는 한편이라고 봐도 무방
한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라한을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루이나 왕국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훗, 내가 당신 나라를 도왔으면 좋겠지?"
라한은 이크샤트의 표정과 뒤바펀 말투만으로 그의 의도를 알아
챘다.
누구나 핵심이 찔리면 뜨끔하는 법. 이크샤트도 자신이 말을 채
다하기도 전에 의도를 들키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렇소. 당신도복수할수 있고우리 베센 왕국도큰 힘을
얻으니 서로 좋은 것 아니겠소?"
"복수? 어떤 식으로?"
"잘하면 당신이 루이나 왕국 거대 영지의 영주가 될 수도 있소. 물
론 우리 베센 왕국이 루이나 왕국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았을 때 가능
한 얘기겠지만. 어찌 췄든 서로에게 좋은 일인 건 확실하지 않소?"
"하하하하하. "
이크샤트의 말에 라한이 대소를 터트렸다. 그 정도가 복수라니.
그런 식의 복수라면 지금 당장 엘베로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비
틀 능력이 라한에게는 있었다.
"왜 웃는 것이오?"
"비록 엘베로 때문에 가문을 잃었지만 나 역시 루이나 왕국의
국민이다. 내가 너희를 도와서 루이나 왕국에 해를 가할 것이라 보
는가?"
"그래도 루이나 왕국은 당신 가문을 망하게 하지 않았소? 내 국
왕 전하께 말해서 당신에게 백작의 작위를 부탁해 보겠소. 아니,
후작의 작위를 내려달라고 말할 수도 있소. 당신이 큰 공을 쌓는다
면 그 이상도 가능할 것이오. 어떻소? 우리 베센 왕국을 위해 힘쓰
지 않겠소? 서로에게 좋은 일인 듯싶은데. "
이크샤트의 말이 이어지자 라한도 슬슬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그 분노를 담아 이크샤트를 매섭게 노려봤다.
"이봐. 난루이나왕국의 국민이다 그 빌어먹을 엘베로 때문에
가문이 망했지만, 그래도 난 루이나 왕국의 국민이다. 내 나라가
제아무리 엿 같고 역걱워도 내가 태어난 땅이고 내가 살아가야 할
땅이란말이다. 애국심?그딴 건 나도잘모른다. 하지만 내 조국
에 해를 가해선 안 된다는 건 잘 안다. "
"그래도
라한도 루이나 왕국이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 있을뿐, 나라에서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으니 말
이다. 거기다 엘베로라는 원수가 왕국의 국왕으로 앉아 있으니 정
이 안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루이나 왕국을 다른 나라에 팔아먹을 수는 없었다. 제아
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이 루이나 왕국의 국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그래도는 개뿔이 너한페 베센 왕국을 배신해서 해를 가하라
고 한다면 넌 할 수 있어?"
"베센 왕국은 내 가문을 망하게 하지 않았소. "
"닥쳐라, 내 손으로 빌어먹을 루이나 왕국을 망하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 나라에 팔아먹는 일은 하지 않는다. "
"그래도
"야! 너 가! 여기서 그만주절대고빨리 꺼져. 마음바러면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
틱-!
라한이 뜯었던 서신을 이크샤트에게 던졌다. 그리고 살기를 일
으컥 이크샤트를 압박했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살기에 이크샤트가 서서히 됫걸음질 쳤다.
난생 처음 겪는 강한 살기에 살갗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가, 가겠소. 가겠소. "
이크샤트가 가까이 있는 말에 올라타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두
필의 말은 손도 대지 않고 달려가는 이크샤트. 살기에 눌려 미처
말을 다 챙길 수 없었음이다.
"빌어먹을. "
이크샤트가 멀어지자 라한이 욕설을 내뱉었다. 괜히 꿀꿀한 기
분에 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싶었다.
득프든프든프글!
그렇게 한참 돌부리에 화풀이를 하고 있을 때, 말발굽소리가 들
려왔다. 아직 쾌 먼 거리였지만, 말의 속도를생각해볼 때 그리 오
래 지나지 않아서 이곳에 도달할 성싶었다.
라한은 지금 달려오는 말에는 자신이 기다리던 이가 타고 있으
리라 생각했다.
"투명해지기. "
몸을 숨긴 라한이 좀 전에 숨었던 나무 그늘 아래에 몸을 기댔다.
히이이 잉!
"워워!"
라한의 앞부분에서 달려오던 사내가 말을 멈추었다.
라한이 있던 곳은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곳이라 쉬기 딱 좋았
다. 이 때문에 한여름에 말을 달리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이곳에
서 땀을 식혔다가 간다. 라한도 이 점에 착안해서 여기서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이번에는 정확하군. '
좀 전에 확인한 몽타주와 일치하는 사내였다. 이번에야말로 휴
란트에 대해 적힌 서신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이거로군. '
이크샤트와 달리 이번에 나타난 정보원의 서신 관리는 형편없었
다. 말 옆에 달린 가방에 단추도 채우지 않은 채로 어설프게 서신
을 넣어둔 것이다. 이크샤트가 좀 지저분하긴 했어도 정보원으로
서는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할 듯했다
'뜨자. '
라한이 부유 마법과 흡사한 방법으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여전히
'투명해지기' 를 취소하지 않은 상태라서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다.
공중에 떠오른 라한이 나무 수풀 사이에서 서신을 꺼내 읽었다.
네 명 남은 후계자 후보들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정보가 적혀 있었
다. 물론 휴란트가 필슨 가문의 후손이라는 얘기도 함께였다.
'맞군 이걸 어떻게 바꾸지?음카테슈?이거 좋군. 카테슈로
결정. '
라한이 휴란트의 가문 항목에 필슨 대신 카테슈라는 가상의 가
문을고쳐 넣었다. 신화력과 라한의 세밀한손놀림이 결합되어 거
의 완벽한 조작이 이루어졌다.
카테슈는 카라한, 테세르, 슈라. 세 명의 이름중 첫 글자만섞
어서 만든 가문명이다. 처음에는 카테슈가 아닌 '카슈'라는 가문
을 만들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말썽만 피우는 테세르가 못미더
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미운 정이 있어서 차마 테세르를 제외시키지 못
했다. 당장은 빼고 싶은 마음이 마구 용솟음쳤지만 억지로 끼워 넣
은 셈이다.
'테세르. 너 운 좋았다. '
라한은 서신을 완벽하게 수정하고 다시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
다. 그동안 정보를 전달하던 사내는 눈을 감은 채 코까지 골고 있
었다. 정보 보안에 신경 써야 하는 자신의 직무를 완전히 내팽개친
모습이었다.
'엘베로. 네가 키운 놈들은 네놈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구나. '
라한이 엘베로를 싫어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능력마저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힘으로 현자의 지위
에 올랐고 또 국왕이 되었다. 정치적인 수완만큼은 라한보다 휠씬
뛰어난 셈이다.
'얼마 안 남았다. 공간으로! '
결의를 다진 라한이 공간 이동을 감행했다. 서신을 가지고 있던
자는 라한이 사라지고 한참 후에야 눈을 뜨고 다시 이동했다. 라한
이 서신을 보고 고쳤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채로.
라한이 뿌듯한 얼굴로 인질을 잡아놓은 곳에 들어섰다. 라한의
등장에 테세르의 얼굴에는 아쉬워하는 기미가 가득했다.
반면, 인질들의 얼굴에는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라한이 없
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이도 시달린 모양이다.
"얼굴들이 왜 이래?"
-얼굴? 누구? 나?
테세르가 짐짓 모른 척하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라한의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이상하네. 폭력을 쓴 것 같지는 않은데
인질들의 얼굴은 깨끗했다. 라한이 갈 때 봤던 것과 똑같은 모습
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그들의 표정에 공포와 고마워하는 감정이
묘하게 려여 있다는 정도였다.
"너하고 저 사람들 전부 다. 표정이 왜 이래?"
-표정이 어때서? 아무 일도 없었는걸.
"네 얼굴은 마치 뭔가를훔친 사람 같은 얼굴이고 저 사람들은
마족에게 쫓기다가 영웅이라도 만난 얼굴 같잖아. "
대충 찍은 말이지만 라한의 말은 거의 들어맞았다.
인질들은 테세르의 검은 얼굴과 외모 때문에 그를 마족으로 판
단했다. 라한이 영웅이 아니라는게 다르기는하지만, 일단그들을
마족의 공포에서 건져줄 사람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주인. 그게 무슨 말이야? 주인이 영웅이라는 건 그렇다 치고
내가 마족이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저 사람들 얼굴이 꼭 그렇잖아, "
-우씨. 라한주인. 난정령이라고. 오히려 마족에 더 가까운건
주인이잖아. 투바도 마족이고 주인도 이마에 마족의 낙인이
"야! "
라한이 소리쳐서 테세르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나을 말 다
나왔으니 너무 늦은 셈이다.
"컥!"
"히억!"
역시나 테세르의 말을 들은 인질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와
동시에 얼굴도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어, 어 주인. 고의가아니었다. 그러니까어미안해. 주
인의 정체를 발설하면 안 되는 건데 진짜 그게
"너 그 입 안 다물래?"
-아, 입? 알았어.
테세르가 말을 하면 할수록 라한은 점점 마족으로 굳어졌다. 참
담한 기분이 었다.
신화력을 익히면서부터 라한은 스스로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
을 종종해 왔다. 스스로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의 한계를 넘어
섰다는 생각 패문이다.
그 후부터 라한은 의도적으로 인간의 도리라는 걸 지키려고 노
력했다. 나름대로 인간으로 남아 있으려는 발버둥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족으로 굳어지는 일까지 벌어지다니. 그 대상
이 테세르만 아니면 그냥 참고 넘어가지 않았을 터였다.
"이봐요. 설마 저 시커먼 놈의 말을 믿는 건 아니겠죠?"
라한이 인질들에게 슬쩍 물었다. 하지만 인질들중에 라한의 말
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몸을파르르 떨며 어쩔 줄몰라
하는 인질들. 죽음보다 더한 공포에 할 말을 잃은 모습이 분명했다.
'테세르 저 자식. 내가사고 칠 줄알았어. 그냥 카슈라고 적을
걸. '
짜증이 나자 테세르를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이 후회스러웠다. 다
시 그런 상황이 닥치면 또 그대로 할 테지만 어찌 됐든 지금
심정으로는 테세르가 괜히 원망스러웠다.
"말한다고 믿을 리도 없고. 에고 모르겠다. 테세르! 이 사람들
알아서 들쳐 업어. "
-아홉 명인데?
"알아서 업어. 문어처럼 몸을 만들어서라도 어떻게든 업어. "
-알았어.
라한이 인간이고 싶어 한다면 테세르는 라한이고 싶어 하는 경
향이 강하다. 팔두 개, 다리 두 개, 머리 하나. 이런 형태를유지
하는 걸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한데 아홉 명의 사람을 업고 가려면 사람의 형태로는 불가능하
다. 결국 괴물처럼 변해서라도 업으라는 얘기였다.
"빨리 안 해?"
-해. 한다고.
테세르의 몸이 옆으로 쭉 늘어났다. 그 몸에서 촉수 같은 것이
하나씩 나오더니 이내 문어 같이 난잡한모양으로 변했다. 머리가
없고 다리만 아홉 개 달린 묘한 괴물의 형상이었다
"으헉!"
" 크윽! "
테세르의 변한 모습에 그나마 이성을 찾고 있던 인질들도 모조
리 의식을 잃었다. 라한이 보기에도 괴물 같기는 괴물 같았다.
츠르르륵!
-다 들었다.
테세르가 의식을 잃은 인질들을 하나씩 들어올렸다. 아홉 개의
다리에 각각 한 명씩의 사람 거대한 옥토퍼스에게 당하는 어부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간다 다 함께 공간으로
라한이 광범위 매스 텔레포트와 흡사하게 신화력을 사용했다
순간 백색 빛이 터져 나오며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 빛이 사라지
자 라한과 테세르 인진들 그리고 이곳에 남겼던 따스한
온기마저 함께 사라졌다
로테마이어스가본 라한
로테마이어스의 레어 안
로테마이어스가 차가운 표정으로 주변 드레곤들을 부러 모았다
정보담당인 아카폴리안 감시와 전투을 담당하은 에스타리스 빌
리마니 등등 열마리가 넘는 드레곤들이 로테마이어스 앞에 도열
했다
아카폴리안
예 로드님
새로운 정보는
라한이라는 인간이 돌아왔습니다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이 착잡하게 변했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라한 애기만 나오면 이런 표정이 저절로 지어졌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라한이라는 존재를 두러워 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어디 갔다 왔는지는 파악췄느나?"
그게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가 쓰는 방법이 좀 특이해서 마나
의 기척을 감지할 수가 없습니다. "
"역시 그렇군. "
로테마이어스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던 내용이다. 자신조차
도 라한이 어떤 식으로 공중으로 떠서 달렸는지 모르는 터. 자신보
다 약한 아카폴리안이 라한의 방법을 알아낼 리 만무했다.
"추측되는 일은?"
죄송합니다, 로드님. 뚜렷한 단서가 없는지라 하지만 이
번에 사라졌다가 나타난 이후에 아홉 명의 인간을 데리고 나타났습
니다. 여러 정령들의 말을종합해 보면 인질로 보입니다만, 그 역
시 확실한 건 아닙니다. "
"흠. "
로테마이어스의 침음성에 주변 드래곤들이 몸을 움찔했다. 답답
한 마음에 자신들에게 화풀이할까 두려웠음이다.
.로드님. 오늘 이 자리에 저희들을 모이라고 하신 건
"카이렌. 그 녀석을 오늘 처리할 생각이다 "
.역시 그렇군요. 저기 로드님. 이번 일은재고해 주셨으면 좋겠
습니다 "
"재고? 무슨 말이지?"
아카폴리안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의문을 재기했다
예전 같으면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그 자체로 분노를 표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자기 자신도 이번 일에
막연한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아카폴리안의 정보력에
대한 믿음도 일조했다.
"카이렌 일행들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합니다 "
"무슨 함정이라도 파고 있는 건가?"
"그게 더 이상합니다. 너무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들도 로드님
이 찾아갈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도무지 어떤 행동을보이지 않습
니다. 그건 아무래도
"이미 모종의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겠지, "
아카폴리안의 말을 로테마이어스가 받았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다른 드래곤들은 이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은 로드 로테마이어스가 카이
렌 일행을 신경 쓰고 있다니. 그들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자
신들이 아는 로테마이어스라면 당장 찾아가서 그곳을 불바다로 만
들어야 정상이 었다.
"그래도 간다. "
"로드님. "
"아카폴리안! 넌 우리 로드께서 그 녀석들을 피하기라도 해야
한다는말이냐?로드님. 명령만내려 주십시오. 제가당장찾아가
서 깡그리 정리해 버리겠습니다. "
화이트 드래곤 에스타리스가 답답함을 그대로 표출했다. 하찮아
보이는 엘프 일행을 신경 쓰는 게 짜증 났던 모양이다.
"에스타리스. 이번 문제는 그리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
"닥쳐라. 넌 우리 드래곤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우린 물질계 최
강의 존재 드래곤이다. 고작 하찮은 엘프 놈 때문에
"그만. 난 너희들에게 이곳에서 싸우라고 허락한 적이 없다. "
둘의 싸움을 로테마이어스가 제지하고 나왔다.
요즘은 되는 일이 없었다 당최 어떤 생각을 하고 지내는지 종잡
을 수 없는 라한도 그랬고, 세력을 키우고 있는 카이렌 일행도 마
찬가지였다 또, 골렘이라는희한한마법 무구를준비한류카라한
일행도 별 다르지 않았다. 이래저래 일이 자꾸 꼬이는 느낌에 짜증
이 치밀어 올랐다
"죄송합니다, 로드님. "
"용서해 주십시오. "
"됐다. 에스타리스. 카이렌 일행을처리할자신이 있느냐?"
"맡겨만 주십시오. 그들의 목을 로드님 앞에 바치겠습니다. "
로테마이어스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은 대타를 보내는 거
였다. 혹시 모를 위험에서 몸을 빼고 카이렌의 실력도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빌리마니. 너도 같이 가라. "
"알겠습니다, 로드님. "
"로드님. 저 혼자서도 충분히
"그만. 난 마음을 굳혔다. "
"예, 로드님 "
로테마이어스의 확고한 말에 에스타리스도 뜻을 굽힐 수밖에 없
었다.
카이렌 일행의 문제가 정해지자 이젠 라한에 대한 문제가 남았
다. 그에 대한 얘기를 하기 위해 로테마이어스가 아카폴리안에게
시선을 던졌다.
"라한에게는 누가 가기로 했지?"
"리투미아와 벨라루스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
"리투미아, 벨라루스. 자신 있느냐?"
로테마이어스가 왼쪽에 선 드래곤들을 보며 물었다
"반드시 그 녀석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
"맡겨만 주십시오. "
리투미아와 벨라루스가 확신에 찬 대답을 해왔다. 그 말에 로테
마이어스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라한은 쉽게 다룰 수 있는 자가 아니다. "
"명심하겠습니다. "
로테마이어스가 다시 우려를 표했음에도 그들의 표정에는 걱정
하는 기색이 없었다.
라한이라는 존재 자체를 우습게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라한은 아니다. 됐다. 그만 가 봐라. "
"네. "
로테마이어스의 말이 떨어지자 카이렌 일행을 맡기로 한 에스타
리스, 빌리마니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그 뒤를 라한을 맡기로
한 리투미아와 벨라루스도 따라 나갔다.
걱정하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네 명의 드래곤. 로테마이
어스는 왠지 이번 일에서 큰 피해를 볼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카폴리안. "
"예, 로드님. "
"라한과 카이렌 일행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
"그 말씀은
"저들과 그놈들의 싸움이 불리하게 돌아가면 네가 그들을 데리
고 도주하라는 뜻이다. "
로테마이어스도 이런 얘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한데 너무
불안했다. 머릿속으로 계속 고민하다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그를 따르는 드래곤이라고 해 봐야 걱우 열둘. 그 중 넷을 한순
간에 잃는다면 세력의 3 분의 1 을 잃는 셈이었다. 거기다 패배의 충
격을 더하면 세력의 반 이상을 잃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떻게든
승리로 이끌어야 할 싸움이고, 패한다하더라도 피해는 어떤 식으
로든 최소화시컥야 했다.
"로드님. 전 로드님의 의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이냐?"
"현재 저들 세력 중 가장 강한 곳은 류카라한이 이끄는 곳입니
다. 카이렌 세력과 류카라한 세력이 서로 견제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상 카이렌이 가진 힘은 류카라한에게 한참 못 미칩니다. "
"그렇겠지. "
"한데, 류카라한이 아닌 저들에게만 신경 쓰는 이유를 모르겠습
니다. 또 류카라한과 카이렌의 싸움은 저희에게 이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상대적으로 저희가 강해질 텐데 왜
굳이 그들과 싸우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아카폴리안이 오래전부터 가졌던 의문점이다. 류카라한이 가진
세력은 새로 얻은 병력을 제외시키더라도 녹록지 않은 세력이다.
굴레를 벗은 존재만 무려 여덟 명. 개개의 능력이 드래곤에게 크
게 뒤지지 않으니 엄청난 힘을 가진 세력이라 볼 수 있다.
반면 카이렌 일행 중 굴레를 벗은 존재는 고작 두 명. 카이렌과
프라하뿐이다. 마족으로 알려진 투바와 뒤늦게 가담한 루이에를
포함하더라도 네 명밖에 없는 셈이다.
"카이렌은 단순히 굴레를 벗은 존재 한 명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강하다 "
"하지만 류카라한 역시 단순히 굴레를 벗은 존재 한 명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강합니다. "
"하하하하. 넌 카이렌에 대해 너무모르는구나. 하긴 그놈은네
가 태어나기 이전에 살았던 놈이니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흠, 류
카라한이라 그래, 그 녀석도 제법 강한놈이지. 하지만 카이
렌과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다. 류카라한 같은 놈 둘 정도는 덤벼
야 걱우 동수를 이룰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놈이 카이렌이다. "
아카폴리안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 정도로 강할 줄
은 생각지도 못한 탓이다.
아카폴리안도 카이렌과 류카라한의 과거 기록을 본 적이 있었
다. 그리고 그 기록들을 보며 카이렌과류카라한을 거의 같은 선
상에 두고 파악했다. 아니, 실제로는류카라한을조금 더 높게 보
는 경향이 강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크게 부풀리기를 좋아한다. 특히 강
자가 등장하면 그를 영웅시해서 실제 실력보다 더 강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엘프인 카이렌의 행적은 오히려 축소되어 기록되었다. 폭
력과 거리가 먼 종족인 엘프. 때문에 카이렌의 행적을 축소시키는
그 자체가 엘프의 치부를 감추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로드님. 카이렌의 실력을 십분 인정해 준다 하더라도 류카라한
의 세력이 더 크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머릿수에서 이미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데요. "
"그래. 실제 싸운다면 류카라한의 세력이 이기겠지. 하지만 류
카라한 그놈들은 내부가 결속되어 있지 않아. 모래로 지은 성과 비
슷한 거지.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허물어지게 될 거다. "
로테마이어스의 판단은 정확했다.
실제로 류카라한을 마음으로 따르는 이는 라이칸드로프인 이리
아나 케이플과 돈네리아 미스티크뿐이다. 아카폴리안은 이 현상을
강자를 숭상하는 라이칸드로프의 습성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이 역시도 확실한 건 아니었다.
반면, 잉글리아트를 비롯한 다섯 명의 존재들은 류카라한을 껄
끄러워했다 당장 드래곤과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류카라한을 무너
뜨리기 위해 궁리를 짤 그들이었다.
물론, 류카라한을 포함한 세 명의 세력이 잉글리아트 일행보다
더 강한 건 분명했다. 하지만 암습이나 기습을 랙한다면 승부를 장
담하기 힘들었다. 자칫하면 내부 분열이 공멸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아, 그렇군요. "
"하지만 지금 류카라한 놈들은 강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드래곤
들을 쉬이 싸움에 투입하지 못하는 거고. "
"알겠습니다, 로드님. 한데
로테마이어스도 이런 식으로 질질 끄는 싸움은 좋아하지 않는
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드래곤들을 대동하고 싹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지금 카이렌 일행과 류카라한 일행의 힘은 너무 강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이겨도 손해였다. 자칫 이기더라도 자신을 따르
는 드래곤의 반 이상을 잃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한데?"
"로드님의 판단으로 보자면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가 카이렌 일
행에게 간 건 너무 위험한 행동 아닙니까?"
"이기지 못할 게다. "
"그런데 왜?"
"그들은 카이렌이라는 존재를 너무 우습게 생각하고 있어. 몸으
로 느끼게 해 줘야지. "
로테마이어스는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가 카이렌 일행을 어떻
게 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았다. 한데도 그들을 보낸 건 두 가지 생
각에서였다.
첫째는 자신을 따르는 드래곤에게 상대의 힘을 깨닫게 해주는
것. 그래서 다시는방심해서 당하지 않도록하는 거였다. 물론운
나쁘면 두 명의 드래곤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죽이지 않고 살릴 수만 있다면 이번 일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클 게 분명했다. 어쨌든 앞으로는 상대를 우습게 보는 드래곤은 없
을 테니까.
둘째는 카이렌의 힘을확인할수 있다는 데 있다. 로테마이어스
조차도 확실히 파악할 수 없는 카이렌의 실력. 어쩌면 굴ㄹ 11 를 벗은
존재들과의 싸움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카이렌을 제대로 팍악할
수 있다면 나머지 싸움은 쉽게 해결될 거라 믿었다.
'문제는 라한 그놈인데. '
카이렌의 실력을 알아내더라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라한.
도무지 어떤 방법으로 힘을 쓰는지, 정말 마법사가 맞는지조차
의문투성이인 존재가 라한이었다. 그의 실력을 알아내기 위해 리
투미아와 벨라루스를 보내긴 했지만, 그들이 라한의 실력을 파악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카폴리안. "
"예, 로드님. "
"프리미아가 어디 숨어 있는지 찾았느냐?"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로이나님의 레어를 들른 후로는 흔적이
완전히 지워져서 죄송합니다. "
카이렌 일행을 떠났던 프리미아와 레테아는 먼저 로이나의 레어
부터 방문했다. 그곳에서 잡기에 능하다는골드 드래곤 베르
네미스를 만났고, 그에게 드래곤의 흔적을 없애는 도구를 얻어갔다.
그때부터 프리미아의 행적은 드래곤들의 이목에서 완전히 사라
졌다.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가 서로를 알아챌 수 있는 드래곤 고유
의 기운 한데 다른 드래곤들이 풍기는 기운을 프리미아만 풍기지
않고 있으니 찾아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드래곤이 근처에 나타났
을 때, 몸을 숨기면 그만이었으니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
는 한 찾는 건 요원해 보였다.
"베르네미스. 그놈 짓이겠지. "
"그런 걸로 보입니다. "
"베르네미스. 두고 보자. "
골드 드래곤 베르네미스. 그는 오래전부터 드래곤 사이에서 이
단아라 불렸다. 늘 사고만 치고 다녔고 별 희한한 연구 때문에 산
을 시끄럽게 만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로테마이어스만큼은그를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했다.
한데 지금 순간만큼은 베르네미스라는 존재가 성가시기 그지없
었다. 그만 없었으면프리미아를 일찌감치 찾았을테고, 그럼 카이
렌 일행과 함께 지내는 동안 얻어낸 단편적인 지식이라도 얻었을
터였다.
"계속 흔적을 찾고 있으니 곧 어떤 소식이 있을 겁니다. "
"됐다. 프리미아에게는 신경 끄고 카이렌 그놈들과 싸우기로 한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 그리고 라한과싸우기로 한 리투미아, 벨
라루스를 살려서 복귀시키는 데 최선을 다해라. "
"알겠습니다. "
예전에는 라한에 대한 정보를 캘 패 정령왕을 이용했다. 이 때문
에 라한의 행적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한데 얼마
전부터 정령왕들이 라한을 훔쳐보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 최상급 정령 역시 라한에 대한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라한에 대한 정보 수집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
래도 상급 정령을 이용한 정보 수집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한 탓이다.
무엇보다 정령왕들의 선언으로 가장 충격을 받은 이는 정보 담
당 아카폴리안이 아닌 로테마이어스였다. 안 그래도 실력을 종잡
을 수 없어서 신경 쓰였던 상대가 라한이다. 한데, 정령왕들마저
돕고 있으니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대체 왜, 그놈이 대체 뭔데
로테마이어스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하자 아카폴리안이 조심스
럽게 레어를 나갔다. 아무리 로테마이어스를 존경하는 그라도 괜
한 불똥에 화를 당하고 싶지는 않았음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라한은 인질들을 골방에 처박아 놓고 며칠
째 시간만 보냈다. 막상납치를 해 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처리할
지 결정하지 못해서였다.
-주인. 저놈들 그냥 둘 거야?
"왜?"
-밥만 축내잖아, 그냥 처리해 버리자.
"너 정령 맞아?"
테세르의 말을 라한이 황당하다는 듯 되받아쳤다. 어떻게 된 게
정령이라는 놈이 인간인 라한보다 더 죽이고 싶어 안달이니.
-주인답지 않게 왜 그래? 그냥 죽여 버리자.
" 시끄러 . "
라한도 요즘 행동이 평소의 자신과 많이 다르다는 걸 잘 알았다.
물론, 의도적으로 인간적이고 싶어 하는 라한의 마음이 반영된 결
과였다.
-그럼 어쩔 건데?
"생각 중이야. "
처음에는 저들의 기억을 일부만 지워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휴란트에 대한 정보가 그들에게는 단순한 정보 그 이상이 아니기에
지우는 것도 쉬울 거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테세르가 라한의 정체에 대해 묘한 소리를 하면서부터
일이 틀어졌다. 라한이 마족이라는 테세르의 헛소리가, 그들의 뇌
리에 충격적인 사실로 박혀 있을 터. 아무리 라한이라도 지우는 게
그리 쉽지 않았다
'골치 아프군. 그냥 강행해 버려?'
두 기억을 모두 지우는 것도 가능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실패 확률이 너무높았다. 설사 성공한다 하더라도완벽하게 지우
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평시에는 몰라도 꿈을 꾸거나 어
떤 계기가 생기면 지웠던 기억이 온전히 살아나 버리는 것이다.
'테세르의 말처럼 그냥 죽여 버려?'
라한도 인질을 처음 잡아왔을 때, 그냥 죽여 버릴 작정을 했었
다. 그렇지만이내 고개를젓고는한숨을푹푹쉬었다. 살인이라는
해결책이 내키지 않은 탓이다.
'방법이 없을까? 음 아! 그렇군. '
"테세르. "
-어?
"가서 에테로 좀 불러와. "
-어? 알았어.
테세르가 사람 크기로 몸을 불린 후 밖으로 뛰어나갔다.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은 채.
테세르는 근 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돌아왔다 거리를 생각하
면 상당히 빨리 온 편이었다. 테세르의 존재를 알고 있던 에테로가
그를 보자마자 달려온 듯했다
"돌아왔구먼. 그래, 일은잘해결됐는가?"
"돌아온 건 며칠 됐습니다. 일도 거의 해길됐고요. "
"날 부른 걸 보니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말해 보게. "
"그게 저 ."
라한이 인질을 데리고 오게 된 경위를 차례로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에테로가 의문을 품고 라한을 바라봤다.
"얘기만 들어서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 "
"저들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문젭니다. "
"그냥 죽여 버리면 될 것을 뭘 그리 고민하는가?"
에테로의 말에 라한이 그를 게슴츠레하게 쳐다봤다. 그 말 진심
이냐고 묻는 눈빛이 었다.
라한의 눈빛에 에테로가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허허허. 그눈좀풀게. 이거 부담스러워서 원. 미안하네."
"전, 절 시험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
"알겠네, 알겠어. 그러니 그눈에 힘 좀풀게."
에테로가 죽여 버리라고 말한 건 라한의 심성을 알아보기 위해
해 본 말이었다. 라한도 그 말을 바로 짐작하고 오히려 에테로를
압박한 것이다.
"그럼 해결책을 내주시죠. "
"그 눈빛이 무서워서라도 말해야겠구먼. "
"그래주시면 고맙죠. "
"그냥 저들을 우리가 데리고 가겠네 그럼 되지 않겠는가?"
에테로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너무 쉬워 보이는 단순
한 대답에 오히려 라한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며칠 동안
머리 싸매고고민했었는데, 저렇게 쉽게 대답해 버리다니. 며칠 동
안 고민했던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았다.
'빌어먹을. '
"데려가서 어쩌실 겁니까?"
"우리가 정보 길드라는 걸 잊었는가? 저들을 다시 교육시켜서
우리 정보원으로 쓰면 그만이지 뭘 그러는가? 잘하면 저들에게서
엘베로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도 있는 일이고. 이래저래 우
리에겐 좋은 일이지. "
막상 대답을 들으니 정말 간단한문제였다 어차피 저들은 정보원
으로 키워졌다. 그리고 정보를 팔아 돈을 번 사람들이다. 직장을 엘
베로 정보 조직에서 베사 길드로 바찐주면 그만인 문제였다.
물론 엘베로에 대한 충심이 남아 있어서 베사 길드에 오히려 해
를 끼칠 수도 있다. 하지만 라한에 대한공포심과 베사 길드의 철
저함이 적절하게 결합된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성싶었다.
"그렇 .군요. "
"그 문제 말고는 더 할 말 없는가?"
"예. 없 아,혹시 베센왕국에 대해 아십니까?"
"베센? 거긴 루이나 왕국에게 영토의 반을 잃은 나라 아닌가?
이미 세가 기울어서 약해진 곳일 텐데. "
베센 왕국의 몰락은 대륙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그 몰락이 루
이나 왕국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건 더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이고 지금 베센 왕국은 루이나 왕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까지 몰락했다
더 이상 대륙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인 베센 왕국. ell
테로는 라한이 왜 그 나라를 언급하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은 베센 왕국의 세작을 만났습니다. "
"세작?"
"예. 나메라 왕국에 세작을 보냈더군요.
흠, 역시 베센 왕국이 그리 쉼게 영토를 포기할 리 없지
다른 사람들은 베센 왕국을 이미 무너진 나라라고 평가했다 하
지만 에테로는 좀 다르게 판단했다.
순식간에 무너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통의 강호라고 할 수 있
는곳이 베센 왕국이다. 그런 나라가 자기 영토의 반 가까이를 잃
고 주저앉아 있을 리 만무했다.
.예. 땅을 되찾으려고 노력은 하더군요. 근데 방법이 잘못됐습
니다. "
.무슨 발법을 택했던가? 혹, 비밀리에 군사라도 키운 건가?"
.아닙니다. 루이나 왕국에 다른 나라의 군사 정보를 알려주고
거래를 통해서 되찾으려 하더군요. "
"멍청한
에테로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재고할 여지도 없이
잘못된 판단이었기에 저절로 나온 말이었다.
"예. 멍청한 판단이죠. "
.루이나 왕국이 타국을 점령해서 더 강한 힘을 얻으면 오히려 힘
들어지는 건 베센 왕국이거늘, 어찌 그런 멍청한 판단을 했는지.
쯧쯧. 이게 다 그 썩어빠진 류칸트 공작 때문이지. "
에테로의 입에서 낯선 이름이 거론되었다. 이에 라한도 약간의
호기심을 갖고 재차 물음을 던졌다.
"류칸트 공작이 누구죠?"
"베센 왕국 유일한 공작일세. 원래는 두 명이었는데 루이나 왕
국과의 전투에서 한 명이 죽고 이제 유일한공작이 된 놈일세. 현
재 베센 왕국의 실세라고 할 수 있지. "
"근데 그가 왜요?"
"전통적으로 베센 왕국에서 공작을 지냈지만 자국에 불만이 많
것 같더군 하긴자기 뜻대로안되니 화가났던 거겠지 "
"그가 원하는 게 뭔데요?"
"해군 통수권. "
류칸트 공작은 베센 왕국의 실세 중에 실세이다. 그를 따르는 귀
족이 왕국 귀족의 반이 넘으니 가히 엄청난 세력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그도 베센 왕국에서 갖지 못한 게 딱 하나 있다. 군사 통치
권. 이미 약해질 대로약해졌지만, 해군력만큼은대륙최강인 나라
가 베센 왕국이다. 이 나라의 해군 통솔권은 타국의 해군 통솔권과
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해군 통솔권?"
"그렇네. 베센 왕국의 해군은 대륙 최강이라불러도 과언이 아
니야. 대륙최강의 기사단을꼽을때, 카르왕국과베루니아왕국,
케라스 왕국. 이 세 나라가 경합을 벌이지만, 해군력은 베센 왕국
에게 견줄 만한 나라가 없네. 말 그대로 최강이라는 얘기지. "
"해군 통솔권을 달라고 했는데 허락을 받지 못한 거군요. "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베센 왕국의 해군 통솔귄은 전통적으로
왕실의 피가 섞인 사람이 맡아 왔거든. 제아무리 류칸트 공작이라
도 해군 통솔권을 얻어낼 수는 없었을 게야.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
에테로가 라한의 호기심을 조금씩 자극해 왔다 어차피 현재 라한
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었기에 에테로의 말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방법이 뭐죠?"
"베센 왕국이 무너지면 되는 거야, 좀 더 정확하게는 베센 왕국
의 왕조가 무너지면 되는 거지. "
"그럼 류칸트 공작이 배신을 한다는 말입니까?"
"아직 거기에 대한 정보는 없네. 하지만 캐려고만하면 그리 오
래지 않아서 캘 수는 있네.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테로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류칸트 공작의 배신. 그것도 적국인 루이나 왕국과 손을 잡았다
확신이 서 있었다
"에테로님의 말투를 들어보니 루이나 왕국을 의심하고 있나 보
군요. "
"그럴 수밖에 없지 최근그가펼친 정책들이 전부그렇거든. 전
쟁 중에 베센 왕국의 국왕이 죽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휘둘리지는
않았으련만. 안타깝군. 안타까워. "
베센 왕국의 전대 국왕은 루이나 왕국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
었다. 지금은 고작 나이 열두 살의 어린아이가 베센 왕국의 국왕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 물론 귀족들이라도 똑똑하면 그나마 정치
가 안정될 수 있겠지만, 현재 왕궁에 출입하는 고위 귀족의 반수
이상이 류칸트 공작의 편이다. 류칸트 공작이 정책을 마음대로 농
락할 수 있는 여건이 완벽하게 주어진 셈이다.
"류칸트 공작이라 에테로님. 그에 대해 조사해 주십시오. 그
리고 그를 돕고 있는 귀족 중에서 다른 나라와 선이 닿아 있는 자가
있는지도 함께 조사해 주시고요. "
"알겠네. 또 해줄 일은?"
"전에 말했던 검은 측과 회색 측. 그들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
는지 찾아봐 주십시오. "
"감시하는 측? 우리 말고 또?"
"네. "
"또 다른 세력이 있는 건가?"
"예. 그 세력이 누군지는 묻지 마십시오 들으면 기분이 별로 안
좋을 겁니다. "
"흠, 알겠네. "
라한이 생각하는 또 다른 세력은 물론 로테마이어스를 비롯한
드래곤들이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정보의 중요성을 알 터.
류카라한 일행과 카이렌 일행에게 나름대로 눈을 심어뒀을 게 분명
했다.
라한은 그들이 심어놓은 눈을 뽑아 버릴 생각이었다.
"절대 그들의 정체가 뭔지 캐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눈이 있
는지 알아봐 주시고, 있으면 그들이 각 진영에서 어떤 신분으로 있
는지만 제게 알려주시면 됩니다. "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도록 하겠네. -
상대는 드래곤. 제아무리 뛰어난 정보 길드라도 드래곤의 눈을
완벽히 속이는 건 거의 덜가능하다 자칫 라한의 눈과 귀가 될 베
사 길드가 드래곤에 의해 대륙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알아볼 정보가 또 있는가?"
"아닙니다 이 정도면 됐습니다. 매번 이런 번거로운 일만 시키
군요. "
"하하하. 아닐세. 어차피 이건 내가할 일이니 신경 쓰지 말게
뭐, 공짜고객이라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다크시안님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지. "
에테로가 라한에게 농담을 걸어왔다. 몇 번 보지 않았음에도 서
로가 어느 정도 친숙해졌다는 증거였다. 라한도 에테로의 그런 농
담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농담이 자신을 인간으로 인정해 주
는 것 같아 반길 정도였다
"하하, 공짜고객이라. 그러고보니 그렇군요. 나중에제가타국
에 가게 되면 선물이라도 사와야겠습니다. "
"그거 좋지. 대륙 서부의 밀리아노 왕국에 새로운 고대 유적이
발견되었다더군. 아마, 좋은마법 무구도 몇 구 나왔을 게야. 아,
그렇다고 그 마법 무구를 구해달라는 말은 아닐세. 하하하하하. "
"그럼요. 에테로님이 그런 황당한 요구를 할 리가 없죠. "
"이런, 그게 그렇게 되나? 하하. 그럼 이만 가 보겠네. 다음에
또 보세. "
"알겠습니다. "
라한이 에테로를 집에서 쾌 먼 곳까지 배응했다. 좀 어색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라한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군가를 배웅해 본 적이 거의 없었
다. 있어봐야 아주 어릴 적 아버지 필슨 백작이 왕국에 갈 때 정도
였다. 그런 그에게 에테로를 배웅하는 일은 꽤나 의미 있게 다가왔
다. 보통 사람이 된 그런 기분을 라한에게 선사한 것이다.
'보통사람이라. 그래. 나도보통사람이지. 보통사람이어야지.
보통의
언젠가부터 라한은 평범해지고 싶어 했다. 남들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 다른 사람이 겪기 힘든 일은 자신에
게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보통 사람. 스스로가 인간이고 싶어 하는
라한의 소박한 소망이었다.
그렇다고 오래 살고 싶은 욕구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래오래
살면서도 평범해지고 싶은, 소박하지만 조금은 무리한 요구였다.
인간 VS 드레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라한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자신의 집 부
근에서 낯선 존재의 기운을 느낀 탓이다
보통 사람이라는 거 내 욕심인가
라한이 착잡한 얼굴로 주변을 쭉 었다
둘이군
테세르 슈라 변 이리와라

주인 갑자기 왜 그러지
크릭
테세르는 라한의 부름에 잽싸게 달려왔다 그 역시 드레곤의 접
근을 느낀 탓이다 하지만 슈라와 변은 기감에 둔한 존재였기에 드
레곤의 접근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 ㄸ문에 라한의 갑작스런 부
름도 의아하게만 느껴졌다.
-왜는 왜야? 라한 주인이 오라면 빨리 올 것이지.
-그게 그렇지만
-크릭.
슈라와 변에게 테세르가 일침을 놓았다. 상황 파악 못하고 느릿
느릿 움직이는 게 답답했던 모양이다.
예전 같으면 슈라와 변도 라한의 부름에 잽싸게 뛰어왔을 터였
다. 과거에는 라한도 약간은 명령하는투였고, 슈라와 변도그 말
에 절대 복종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 라한은 테세르와 슈라, 변에게 자유를 선사해 줬다.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그들을 부르는 일 자체를 자제한 것이다.
"됐어. 내 뒤로 와. "
-어? 어.
테세르가 약간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라한의 너무나도
태연해 보이는 태도 때문이다.
상대는 다름 아닌 드래곤. 태연하게 상대할 만큼 약한 존재가 아
니다. 한데, 라한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봐! 그만 나오지.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거야?"
라한의 부름에도 드래곤들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다. 설마
자기들이 들켰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의 무반응에 라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의 침묵이 드래
곤 특유의 오만함 때문임을 아는 것이다
"야! 거기 둘! 빨리 좀 나와. 귀찮으니까. "
라한이 지붕 위 굴뚝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에
지붕이 몇 차례 들썩이더니 흐릿한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형체가 완전해지자 엘프 모습을 한 남자와 아름다운 인간 여성
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모습이었다.
"음- ! "
"흠 i "
나타난드래곤들이 일제히 신음을흘렸다. 자신들이 들킨 게 상
당히 의외였던 모양이다.
"나오라고 할 때 바로 좀 나오면 덧나나? 젠장. 왜? 너희들이 들
킨 게 신기해? 이해가 안 가?"
"어떻게 알았지? 그냥 감으로 찍은 건가?"
"풋, 하여간 너희 드래곤들은 항상 그런 식이지. 나 기분 엄청
안 좋거든. 용건이나 말해 봐. "
라한의 시비조에 드래곤들이 눈을 꿈틀거렸다. 하찮게 생각하던
인간에게 이런 식의 말을 들은 게 화가 치밀었음이다.
"네가 라한이냐?"
"알면서 온 거 아닌가?"
"역시 시건방진 놈이로군. 나벨라루스. 내 이름을걸고오늘널
죽여 버릴 걸 맹세한다. "
"벨라루스! "
골드 드래곤 벨라루스의 말에 함께 온 리투미아가 외마디 외침
을 토했다. 그가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는 대목 때문이다.
긴 수명과 엄청난 마법을 가진 드래곤. 수명과 능력만으로 따지
면 축복받은 생명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신은 모든 생명체에게 공평한 법.
드래곤에게 이런 축복만 선사핼을 리 만무한 일이다. 그들에게
긴 수명과 뛰어난 마법을 준 대신 이름의 가치와 대륙의 중재라는
엄청난 사명을 부여한 것이다. 이 탓에 드래곤은 맹세를 할 때도
심사숙고해야 하고, 이름을 걸 때도 조심해야 한다.
"리투미아. 내가 설마 저놈을 놓치기라도 한다는 말이야?"
"그런 말이 아니라 이름이라는 게
드래곤의 맹세는 생명보다 소중하고 드래곤의 이름은 그들이 가
진 마법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떠돈다. 함부로 맹세하지 않고 함부
로 이름을 걸지 않는 드래곤을 빗대는 말이다.
한데, 오늘 벨라루스가 자신의 이름을 걸었다. 성공 여부를 떠나
서 이름을 건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됐어. 저놈을죽이면 되는거야 리투미아. 런 저놈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만 해, 죽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
"그게 알았어. "
골드 드래곤을 지혜의 드래곤이라 부른다. 그건 그들이 탐구하
고 연구하기를 좋아하는 습성을 가져서였다. 그런 골드 드래곤 벨
라루스가 약간은성급한 일을 저질러 버렸다. 모든드레곤이 지혜
로운 건 아닌 모양이다.
"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모양이군. "
"져? 골드 드래곤인 나 벨라루스가 진다고? 하하하. "
라한의 말에 벨라루스가 대소를 터트렸다. 아직도 라한이라는
존재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싸워 보면 알겠지. 본체로 변해라. 시간을 주마. "
"애송이. 넌 이 몸으로도충분하다. 먼저 덤벼라 "
"난 기회를 줬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
라한도 두 번 권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권해 봐야 들
을 것 같지도 않았다. 또 굳이 불리함을 자처하고 싶지도 않았다.
"슈라, 테세르, 변. 내가말하기 전까지는 끼어들지 마라. 불의
공 "
라한의 공격에 벨라루스가 허리를 슬쩍 틀어 피했다. 너무 자연
스러운 회피에 라한이 이채를 발했다.
'싸울 줄 아는 놈이군. '
과거에 싸워봤던 크라이드리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상
당히 많은 전투 경험을 가진 게 분명했다.
"이번엔 내 차례다. 윈드 커터! 윈드 토네이도! "
"헛!"
라한이 다음 공격을 준비하려 할 때, 벨라루스의 마법이 날아들
었다. 너무 적절한 타이밍이라 라한은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을 뻔
했다.
"윈드 글라이 더 !"
수없이 많은 바람의 칼날이 라한의 눈을 어지럽혔다. 과연 바람
을 다스리는 골드 드래곤다운 공격이었다.
"아직 멀었다. 헬 파이어! 윈드 토네이도! "
"헛! 막기! "
불 마법과 바람 마법이 라한을 강타했다. 순간적으로 신화력을
이용해 막았지만 충격이 작지 않았다
"윈드 글라이더! 윈드 블레이드! "
벨라루스가 다시 윈드 글라이더로 라한의 눈을 어지럽혔파. 그
리고 그 사이로 거대한 바람의 검이 라한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공간으로! 막기 !"
라한이 뒤로 순간이동하며 몸 주변에 막을 씌웠다. 막기는 촉시
날아올지 모르는 마법을 미리 대비한 거였다.
"크크크, 인간의 힘이란고작그런 것이다. 이제 드래곤의 위대
함을 알겠는가?"
다행히 이번은 공격이 아니라 벨라루스의 말이었다. 라한을 언
제든 죽일 수 있는 상대로 판단한듯했다.
"그렇군, 지금까지 내가 건방지게 굴었던 것. 진심으로 사과.
바람의 칼날! 물의 소용돌이!"
라한이 사과하는 척하며 두 가지 공격을 퍼부었다.
처음 라한의 공격은 상대를 탐색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그래서
공격의 위력도 약했고, 방향도 그리 정확하지 않았다.
한번 벨라루스의 실력을 본 라한은 본격적으로 공격을 하기 시
작했다. 라한의 본신의 힘을 담은 신화력의 정화인 셈이다.
쿠루루룽!
"헛!"
먼저 땅의 흔들림이 가해지자 벨라루스의 발아래에서 지진이 시
작되었다. 다른 곳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오직 벨라루스가 디디고
선 발 바로 아래만 흔드는 방법이다. 라한의 세밀한 신화력 움직임
이 만든 결과였다.
"플라이!"
땅이 흔들리자 벨라루스가 플라이 마법으로 날아올랐다. 그로서
는 가장 자연스러운 대처법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처는 라한 역시
예상하고 있었다.
"엡솔루트 실드 "
라한의 다음 공격인 바람의 칼날이 벨라루스의 전신을 난자하듯
쇄도했다. 갑작스럽게 이어진 공격에 벨라루스가 몸 전신에 투명
한 막을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흐트러졌지만 용케도 마법 시전에 성공했다.
그러자 라한의 물의 소용돌이가 벨라루스가 만든 실드를 감쌌
다. 이 때문에 벨라루스의 시야가물로완전히 가려졌다.
"뭐, 뭐냐?"
"아직 멀었다. 불의 지붕! "
불의 지붕은 엄청나게 뜨거운 열기로 위에서부터 내리누르는 방
법이다. 보통 사람은 미처 닿기도 전에 숨이 막혀 죽는 엄청난 공
격법이었다.
이, 이놈이
"얼음의 물방울!"
라한이 벨라루스의 말을 깨끗이 무시하고 다음 마법을 시전했
다 이번 전투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의 발로였다.
얼음의 물방울.
불의 지붕과 반대로 바닥에서 위펄 얼음 덩어리가 튀어 오르는
방법이다. 얼음이 튀면서 엄청난 한기를 발산하기 때문에 웬만한
이는 의식하기도 전에 얼어 버린다
"허억! 으악! "
벨라루스가 비명을 질러댔다. 지금은 드래곤의 체면이고 뭐고
따질 때가 아니 었다.
상체는 뜨거운 열기에, 하체는 엄청난 한기에 휩싸여 미칠 것같
았다. 너무고통스러워 절로비명이 질러졌다. 맹세코태어나서
처음 겪는 고통이 었다.
"멈춰라!"
라한의 먼이은 공격에 벨라루스가 거의 유린당하듯 처참하게
개졌다. 이 모습을 보고 리투미아가 라한을 제지하고 나왔다.
"네 이름은?"
난 그린 드래곤 리투미아다. "
골드 일족보다 상황 판단이 빠르군, "
.먼저 저것 좀 어떻게 해 주지 않겠나?"
리투미아가 아직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벨라루스를 보며 말했
다.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벨라루스. 그 소리를 듣는 것만
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이제 그만. "
털썩!
라한의 짧은 한마디에 이전에 시전했던 모든 공격이 사라졌다.
벨라루스는 공격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그 자리에 쓰러져 의식을 잃
었다. 정말 허무한 패배였다.
"네 말대로 풀어줬다. "
"그, 그게
리투미아가 불안한 듯 말을 더듬었다. 이렇게 순순히 풀어줄 거
라 예상 못한 것이다.
,넌 어쩔 거지? 그냥 돌아갈 텐가? 아니면 나와 싸울 텐가?"
"그냥 돌아 .가겠다. "
말을 하는 리투미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당하게 왔다
가 이렇게 돌아가는 게 수치스러웠다.
"돌아가? 누구 맘대로?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 그냥 왔다
가 즐기고 가면 되는 줄 알았는가?"
"원하는 게 뭐지?"
리투미아가 어두운 얼굴로 라한을 바라봤다. 그가 무슨 요구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싸워서 담판을 짓고 싶었다.
한데 벨라루스를 단 10 분 만에 제압해버린 라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난 흠, 또 다른 손님인가?"
"뭐?"
"나오는 게 어떤가?"
"역시 로드님의 예상이 맞았군. "
라한의 집과 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금발의 엘프 여성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등장에 리투미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자아졌다
"아카폴리안!"
"리투미아. 꼴이 말이 아니군. "
"그게
아카폴리안의 말에 리투미아가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유독 고개를 많이 숙이는 리투미아였다.
"리투미아. 질책하려는 건 아니었다. "
"미안하다. 우리의 자만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
"알면 됐다. 라한. "
아카폴리안이 라한을 불렀다.
라한은 아카폴리안이 나타난 뒤부터 미간을 좁히고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카폴리안이 불렀을 때도 그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계
속 같은 표정 이 었다.
-주인. 저 드래곤이 부르잖아
-주인.
,야. 내가 저놈들 부하야? 저놈들이 부른다고 일일이 대답해야
7"
-그건 아니지만
지금 라한의 능력이면 아카폴리안과 리투미아 둘 모두를 처리할
수 있다. 설사 벨라루스가 의식을 잃지 않아서 셋을 상대해야 한다
고 해도 승리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로드인 로테마이어스에게는 불가능했다. 저들과는 비교
도 안 될 만큼 강한 존재인 로테마이어스. 지금 라한의 힘으로는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처리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커졌는데
라한. 오늘 우리를 돌려보내 주지 않으면 로드님께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잘 선택해라. "
아카폴리안이 또다시 말을 했음에도 라한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
다. 지금 그만의 고민에 빠져 다른 곳에는 신경 쓰고 있지 않았음
이다.
"그럼 다음에 보지. "
인사를 마친 아카폴리안이 쓰러진 벨라루스를 들치 업고 사라졌
다. 그 뒤를 이어 리투미아도 모습을 감추었다.
-주인! 뭐 해? 나쁜 놈들 다 도망갔잖아.
"어? 어,"
라한이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이마를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현기증이 몰려온 것이다.
'시간이 더 필요해. 아직은 아직은 무리야. '
겉으로는 라한이 벨라루스를 아주 쉽게 제압한 걸로 보였다 리
투미아도 그렇게 생각했고 멀리서 지켜보던 아카폴리안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라한으로서는 몹시 힘겨운 싸움이었다. 라한의 신화력이
벨라루스가 사용한 엡솔루트 실드를 간신히 통과한 것이다.
벨라루스의 실드를 간신히 통과했다는 것. 그건 로테마이어스의
실드에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얘기와 같았다.
'통해야 할 텐데. '
라한이 아카폴리안과 다른 드래곤을 놓아준 건 나름대로 복안이
있어서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라한의 성격으로 보면 드래곤들을
살려두는 그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설사 살려주더라도 크라이드리안에게 한 것처럼 모종의 장치를
해서 힘을 못 쓰게 하는 것. 그게 라한이 지금까지 보여 온 성격이
자 패턴이었다.
그런 라한이 지금까지와 다르게 드래곤들을 무사히 돌려보냈다.
이때 로테마이어스가 어떻게 생각할까? 라한은 이 점에 착안해서
드래곤들을 그냥 돌려보냈다. 어느 정도의 도박성이 깔린 행동이
었다
만약 로테마이어스가, 라한이 자신에게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다
면 더 지체하지 않고 라한을 공격할 터였다. 이건 라한이 도박에서
패하는 것이다.
하지만 로테마이어스가 라한의 의중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래
서 좀 더 오랫동안 고민한다면, 그건 라한이 도박에서 이기는 거였
다. 라한으로서는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말이다.
레어로 돌아간 아카폴리안이 로테마이어스의 레어로 급히 들어
갔다. 두 눈으로 확인한 라한의 실력을 직접 말해주기 위해서였다.
"로드님. 로드님!"
"왜 이리 호들갑이냐?"
"라한이, 라한이 "
아카폴리안의 입에서 라한이라는 이름이 거론되자 앉아 있던
테마이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한과 관련된 모든 얘기가
테마이어스에게는 현재 최대의 관심사였다
"리투미아와 벨라루스가 죽었는가?"
.아닙니다. 벨라루스는 현재 자신의 레어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리투미아는 밖에서 로드님이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
"벨라루스의 부상은 어느 정도인가?"
.목숨에는지장이 없습니다. 한데, 쾌 오랫동안 요양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다행이군. "
말을 하면서도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벨라루스는 부상을 당했지만 리투미아는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라한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본 라한
은 적을 살려둘 만큼 너그러운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마 라한이 졌다는 건가?'
"라한은 어떻게 됐지?"
생각과 동시에 로테마이어스가 물음을 던졌다. 드래곤들의 무사
귀환이 라한의 패배를 의미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라한은 무사합니다. 아무런 부상도 없습니다. "
"뭐라?"
"예. 그게 저
"말하라. "
로테마이어스가 아카폴리안을 재촉했다. 그로서는 라한에 대한
그 어떤 것도 놓칠 수 없었음이다.
하지만 아카폴리안은 상황을 그대로 얘기하는 게 수치스러웠다.
대륙 최고라 생각했던 자신들의 패배가 아니던가? 거기다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 로드인 로테마이어스의 이름을 팔았다는 것도 부끄
럽기 그지없었다
"리투미아에게 물어보심이 나을듯합니다. 전투의 앞부분은 전
혀 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
"리투미아를 불러라. "
실제로 아카폴리안은 라한과 벨라루스의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
지 다봤다. 다만, 전투의 초반부에는 엄청나게 먼 곳에서 봤기에
세부 사정을 알지 못했던 것뿐이다.
아카폴리안이 레어를 나가서 리투미아를 데리고 돌아왔다 리투
미아의 얼굴도 수치스러움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리투미아. 라한과 벨라루스의 싸움을 네가 본 그대로 말하라 "
"예, 로드님 처음에는 벨라루스가거의 압도하는싸움이었습니
다. 벨라루스가 공격할 때마다 라한은 속수무책으로 밀리기만 했습
니다. 하지만 그가속임수를 써서 벨라루스가궁지에 몰리기 시작
했습니다 그럴 때, 그를따르는골렘과정령 그리고 정체를 알수
없는 놈들이 라한을 돕고 나서는 바람에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
리투미아가 사실에 거짓을 더해서 대답했다. 들어오기 전에 아
카폴리안에게 어떤 언질을 들은 듯했다.
"속임수라 . ."
로테마이어스는 그들의 목소리만 듣고도 거짓을 상당량 섞었음
을 눈치 챘다. 긴 시간의 삶 동안 겪은 수많은 경험이 참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게 만들었다.
"예. 분명 속임수였습니다. "
"그가 압도할 때 사용했던 공격이 어떤 것이었느냐?"
"예. 처음에는땅의 흔들림이라는묘한공격이었습니다. 어스퀘
이크(지진을 일으키는 마법)와 흡사한 마법 같았는데, 벨라루스의 발
아래만 흔들렸습니다. 그때 벨라루스는
리투미아가 자신이 보고 들은 전투 과정을 차분하게 전했다. 물
론 중간중간에 슈라, 테세르, 변을 전투에 참가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야 자신들의 패배가 조금이라도 만회될 테니 말이다.
'어설프군. '
로테마이어스는 리투미아의 설명을 들으며 정령, 골렘, 정체불
명의 존재가 싸움에 참가하지 않았음을 눈치 챘다. 그들의 공격이
앞뒤가 맞지 않는 어설픈 공격이었기 패문이다.
'그래도 마법사는 맞는 모양이군. 방법은 특이하지만 마법으로
보이는 공격이었다. '
로테마이어스는 라한을 마법사로 단정 지었다.
검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정령과골렘이 전투에 참가하
지 않았으니 정령사나 골렙술사로 보기도 힘들었다. 설사 그들의
참가를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전투 가담 정도가 너무 낮았다
"시전 시간은 어땠나? 주문은?"
"그런 건 일체 없었습니다. "
"흠- ! "
로테마이어스가 리투미아의 설명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신음
을 흘렸다. 시동어 없이 사용했다는 게 충격을 던져준 것이다.
"어떻게 살아왔지? 라한 성격상 너희들을 곱게 보내줄 리 없는
데. "
"그게 저
"탈출했습니 다. "
리투미아가 말을 머뭇거리자 아카폴리안이 잽싸게 대답했다. 차
마 로드의 이름을 팔았다는 얘기는 할 수 없었음이다.
"아카폴리안 그 말 책임질 수 있는가? 맹세할수 있느냔뜻이
다. "
"그, 그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
로테마이어스가 맹세를 언급하자 아카폴리안이 그 자리에 부복했
다. 맹세가 가지는 무게를 생각하면 더 이상의 거짓말은 무모했다.
고작 처벌을 피하기 위해 드래곤임을 포기할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어떻게 빠져나왔지?"
"저, 그건 사실 로드님의 이름으로 그를 협박했습니다. 우릴 죽
이면 로드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
"라한의 반응은?"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아무 대답도못했습니다.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말도 못한 채 굳어 있었습니다. "
아카폴리안이 자신이 본 그대로 설명했다. 그 말에 로테마이어
스가 더한 의혹에 쉽싸였다.
"그게 사실이냐 정말 라한이 굳어 있었느냐?"
"예.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
이번에는 아카폴리안도 당당히 맹세했다. 이 얘기만큼은 조금의
가감도 없는 진실이라는 의미였다.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에 복잡 미묘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가 아는 라한은 겁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과 대치했을 때도
당당하게 마주했던 라한 아니던가? 그런 그가 겁에 질렸다는 걸 어
떻게 믿겠는가?
한데 아카폴리안이 맹세까지 한 걸로 봐서 라한의 모습이 겁에
질려 있었던 건 분명한 듯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럼, 그럼흠, 라한이 아카폴리안을
속인 거로군. 날 끌어들이겠다는 뜻인가?'
라한이 정말 겁에 질렸다면 로테마이어스는 그를 치기 위해 움
직이는 게 당연한 일이다. 반대로 로테마이어스를 끌어들이기 위
해 겁에 질린 척했다면? 로테마이어스가 라한에게 가는 건 그의 함
정에 빠지는 일이었다.
'라한. 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거다. '
로테마이어스가 마음을 굳혔다. 라한의 실력과 그가 판 함정을
완전히 파헤치기 전까지는 그를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있지도
않은 라한의 함정을
"아카폴리안. 라한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
지 말고 그에 대한 모든 걸 알아내라.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리투미아가 물러난 후에도 로테마이어스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과연 오늘 내린 결정이 제대로 된 결정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라한이 최근에 힘을 얻었으며 그 힘을 제대로 흡수하고 컨트를
하지 못한다는 걸 로테마이어스는 모르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
았다면 시간을 재촉해서라도 라한을 치러 갔을 것이다
베센 왕국은 이미 몰락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안과밖으
로 썩을 대로 썩은 베센 왕국. 몇몇 귀족들이 나름대로 살려고 발
버둥 치고 있지만, 몰락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하지만 베센 왕국에도 마지막 한 수는 남아 있었다.

카르노 숲.
이 천혜의 요지가남아 있는한, 더 이상루이나왕국에게 유린
당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카르노 숲은 베센 왕국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루이
나 왕국에게 공격당하기 전에는 왕족 대대로 사냥을 해 온 곳이 이
곳이었다. 이 때문에 이 숲에는 베센 왕국 선조들의 수많은 기록과
흔적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루이나 왕국의 국경으로 전락해서 몇몇 병사들
외에는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 돼 버렸다.
화이트 드래곤 에스타리스와 레드 빌리마니는 대륙의 남부에 위
치한 카르노 숲에 도착해 있었다. 카이렌 일행을 치기 위함이었다.
벨라루스와 라한의 싸움을 듣지 못한 그들. 이 탓인지 얼굴에는
일말의 걱정스러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기는 건 기정사실이고
어떤 방법으로 카이렌 일행을 죽일까만 고민하는 그들이었다.
"저쪽이던가?"
"누가 오는군, "
에스타리스의 말에 빌리마니도 걸음을 멈추고 한쪽을 바라봤다.
희미한 실루엣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미천한 라이칸드로프 프라하입니
다. "
"위대한 드래곤을 만나게 돼서 반갑다 난 마왕의 아들인 투바
라고 한다. "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비천한 엘프 카이렌 인사드립니다. "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가죽이려 했던 상대 세 명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프라하는 폴리모프를 풀고 라이칸드로프 본연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카이렌 역시 로브를 벗고 긴 귀를 드러낸 채로 공
손하게 인사했다. 오직 투바만이 뭔가 불만인 듯 인상을 조금 찌푸
렸다.
"너희들이 그들이로군 우리가 왜 왔는지 알겠지?.
네. 잘압니다. 그래서 죄를청하러 왔습니다. -
프라하가 대표로 대답했다 평소에 그들의 대표가카이렌이었음
을 생각하면 좀 이례적인 일이었다
"네놈 이름이 프라하라고 했나?"
"예. 위대하신 존재이시여. "
"우리가 왜 왔는지는 알겠지?"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의 눈에 언뜻 살기가 스쳤다. 그 모습을
본 프라하가 잽싸게 대답했다.
"위대하신 존재께서 원하신다면 저희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
다. 다만
"다만?"
"로테마이어스님을 뵙고 싶습니다. "
프라하의 말에 듣고 있던 빌리마니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비
아냥거림 가득한 목소리로 비꼬듯 입을 열었다.
"흥. 로드께서 그리 한가한 줄 아느냐? 너희 같은 하찮은 존재를
만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도는 분이 아니시다. -
"저희가 로테마이어스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분에 무릎 꿇고
사죄해야 도리일 것 같아서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니 부디 허
락해 주십시오. "
너무 처량한 목소리에 빌리마니의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생각해보면 프라하의 말대로 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무엇보다
죽이지 않고 생포해온다면 더 큰 공로를 인정받을 것 같기도 했다.
-에스타리스. 어떻게 생각해?
고민 끝에 빌리마니가 에스타리스에게 메시지 마법으로 도움을 청
했다. 그의 의견과 자신의 생각을 합쳐서 결론을 내릴 작정이었다.
-글쎄. 들어주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왜?
-저놈들은 영악한 놈들이야. 쉽게 믿을 놈들이 못 돼. 거기다
우리가 명령받은 건 생포가 아니라 사살이야 괜히 일을 크게 만들
필요 없잖아.
에스타리스는 카이렌 일행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특히 말을 줄줄이 쏟아내고 있는 프라하라는 놈은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가장 큰문제는 자신들이 상대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거였다.
상대의 실력도 얼굴도 그리고 그들의 경력도 그들에 대해 아
는 거 라고는 마족인 투바를 제외한 카이 렌과 프라하가 검사라는 정
도에 불과했다.
-그래도 에스타리스. 생각을해 봐. 원래 로드께서 가장아끼던
드래곤은 크라이드리안이었어. 근데 그 멍청한 놈이 저놈들에게
죽었지. 지금로드께서는딱히 총애하고 있는드래곤이 없다는 얘
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건 알지만
에스타리스의 마음도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빌
리마니가 쐐기를 박듯 한마디 던졌다.
-운 좋으면 우리들 중 한 명이 차기 로드가 될 수도 있는 일 아
니겠어?
-그래. 맞아. 리투미아나 벨라루스도 라한이라는 놈을 생포해
오지는 않았을 거야. 우리가 생포해 간다면 로드께서도 우릴 다시
보시겠지.
둘의 의견이 모아졌다.
생포.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애써 고개를 가로
저었다
"좋다. 너희들을로드께 데려가도록하지. 단, 영악한네놈들을
그냥 데려갈 수는 없다. "
"저희가 스스로 팔을 묶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프라하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를 본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벨리마니와 에스타리스가 얼핏 듣기로 카이렌 일행에게는 마법
사가 없다 즉 손만 묶으면 거의 완벽히 제압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카이렌, 투바 이리 와. "
프라하가 뒤에 선 카이렌과 투바를 보며 말했다. 그 말에 투바가
발끈하듯 외쳤다.
"정말 묶을 작정이야?"
"응. "
"빌어먹을. 그래 네 멋대로 해라. "
투바도 체념한 듯 팔을 늘어뜨렸다. 얼굴 가득 자포자기한 표정
이었다.
"미안해. 어쩔수 없어. 다음생에 다갚을게."
"젠장. 시끄러. "
프라하의 사과에 투바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묶여서 가기로
마음먹기는 했지만 못내 마음에 안 드는 모습이었다
"카이렌 너는?"
"그냥 묶어, "
카이렌은 순순히 두 팔을 내밀었다. 프라하가 팔을 파르르 떨면
서 카이렌의 팔을 묶었다.
"이제 다 묶었습니다. "
"너도 묶어야지?"
아시다시피 저희 중에는 마법사가 없습니다 스스로의 팔을 묶
을 방법이 없는지라 죄송합니다. "
"이리 와라. 내가 묶어주마. "
빌리마나가 활짝 웃으며 프라하에게 손짓했다. 프라하는 못내
발이 떨어지지 않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터벅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꽉 묶어 주십시오. 제가 딴마음을 품지 않도록.
크크크, 네놈이 딴마음을 품어 봤자 내 손바닥 안이다. 건방진
라이칸 같으니 ."
빌리마니가 한소리 내뱉고 프라하의 손을 잡았다 파르르하는
게 프라하의 손이 몹시 떨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스위핑 퍼
"하앗! "
빌리마니가 포박 마법인 스위핑 퍼슨(sweeping person)을 사용하
려 했다. 이때 프라하가 빌리마니의 턱을 향해 손을 쭉 내밀었다.
채챙!
쇄도하던 프라하의 손목 아래에서 날카로운 검이 튀어나왔다.
이 상태로 프라하의 손이 빌리마니의 턱을 가격한다면, 두말할 필
요도 없이 빌리마니의 사망이었다.
"허엇! 블링 콕! "
"그게 맘대로 되나?"
순간적으로 공간 이동을 감행하려던 빌리마니. 그의 시도는 불
발에 그쳤다. 갑작스럽게 그의 목을 조르는 손 때문이다
푸욱!
"커억!"
"하나 끝!"
빌리마니의 뒤에서 목을 조른 이는 카이렌이었다. 오래전에 이
곳에 와서 은신을 하고 있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빌리마니를 제압
한 것이다. 이 모든 게 카이렌의 머릿속에서 나온 시나리오였다.
그럼 앞에서 손을 묶였던 이는? 사실 손이 묶인 이는 카이렌이
아니었다 지금 카이렌 일행의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하프 엘프 헤
르만. 그가 카이렌으로 분장해 드래곤들을 속였다.
"빌리마니! 빌리마니! 이, 이놈들. 어?카이렌이 둘?"
지지직!
앞에 묶여 있던 카이렌이 얼굴에서 무언가를 떼어냈다. 가죽을
얇게 저며 만든 가면이었다
묶은 줄을 쉽게 끊어낸 카이렌, 아니 헤르만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위대하시고 위대하신 드래곤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하찮
게 생각하는 엘프, 라이칸드로프 그리고 저 하프 엘프에게 꼼짝없
이 당했습니다그려. "
"야! 헤르만 난 왜 빼놓는 거야?"
"아! 위대한 마족 투바님도 계셨죠. 죄송합니다. "
헤르만이 웃으며 말하자 투바도 웃음으로 말을 받았다 스스로
최강의 존재라 생각하는 드래곤 그들을 완벽하게 속인 것만으로
도 통쾌한 기분이었다
"흥. 빌리마니가 없어도 난충분히 강하다. 우리 드래곤은 지상
최강의 존재로
"그래. 드래곤은 지상 최강의 존재가 맞지. 근데 거기에서 넌 제
외시켜야 할 거야. 넌 죽은 목숨이거든. "
프라하의 비아냥거림에 에스타리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당장 뛰
어나가서 프라하의 목을 비틀어 버리려는 기세였다.
하지만 억지로 화를 억누르고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좀 멀리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진짜 카이렌, 앞에서 도
끼를 어깨에 멘 채로 살기를 풀풀 흘리는프라하.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에스타리스의 요모조모를뜯어보고 있는투바. 대충서 있
는 듯해도 진영이 너무 교묘해서 쉽사리 공격하기가 힘들었다.
'저 가짜 놈만 빼고는 전부 강한 놈들이다. 빌어먹을. 실수했군.
이렇게 강한 줄 몰랐건만 '
카이렌만 없다면 어떻게 대등한 승부를 펼쳐볼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실력을 종잡을 수 없는 카이렌이었다.
'마나를 전혀 안 풍기는데, 대체 저놈은?'
카이렌에게서는 그 어떤 마나도 풍기지 않았다. 아니, 풍기긴 풍
겼으되 그로서는 느끼기 힘들 정도로 미약했다. 그런 카이렌이 모
습까지 숨긴다면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에스타리스. 죽이지는 않겠다. "
"무슨 소리냐? 내가 네놈들에게 잡히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7-
카이렌의 말은 이미 다 이긴 승자들이나 하는 말이다. 에스타리
스가 그 말에 발끈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 에스타리스도 자신이 패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존심 패문에 어떻게 버티고 있을 뿐, 실제로 싸운다면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라한에 대한 모든 걸 조사해라. "
"라한? "
"내 조건은그 하나뿐이다. 라한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았으
면 어디 있는지 그리고 죽었다면 누가 죽였는지 밝혀내라. 네가 할
수 없으면 로테마이어스에게 도움을 청해도 좋다. 그것만 지키면
널 살려주겠다. 맹세하겠는가?"
프라하가 에스타리스에게 맹세하라고 재촉했다.
맹세, 즉 약속하면 어떻게든 라한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설사
로드가 허락하지 않는다 해도 혼자의 힘으로라도 라한에 대해 반드
시 알아내야 했다.
"라한이라? 후후후. 그는 이미 죽었을 거다. "
"무슨 소리냐?"
가만히 있던 카이렌이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경악하는 카이렌
일행을 보며 에스타리스가 고소를 지었다.
"라한에게 드래곤 둘이 찾아갔다. "
"그럼 라한이
"그래. 며칠 전에 찾아갔으니 이미 죽어 사라졌을 거다. "
틸썩!
에스타리스의 말에 프라하와 투바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너
무 놀라운 사실 때문에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에스타리스. 그 말 사실이냐?"
"내 눈으로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드래곤둘이 갔으니 이미 죽
었다고 봐야겠지. 그놈은 너희들처럼 여럿이 아니니까. "
"흥. 그럼 아직 확실하지 않은 거로군. "
"꼭 눈으로 봐야만 아는 건 아니지. 라한이라는 인간은 분명히
죽었다. 너희들은 우리가 오는 줄 알았지만, 그놈은 그것도 몰랐을
거거든. 아마,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우리 드래곤들에게 제대로 대
처도 못 하고 죽었을 게 분명하다 "
에스타리스의 말이 카이렌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다가왔다. 은
거하던 곳을 떠나서 떠돌던 카이렌. 그가 왜 이들과 함께 행동했겠
는가? 전부 라한이 좋아서였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
음이 지금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카이렌의 안타까운 말을 들으며 에스타리스가 천천히 앞으로 나
섰다. 그리고 굵은 나무가 있는 곳에서 한쪽 팔을 올리고 비스듬히
기댔다.
"크크크, 모두 사실 컥!"
에스타리스의 목에서 검이 삐져나왔다. 에스타리스가 부릅뜬 눈
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흰머리, 말끔한얼굴그리고매서운눈동자 백준의 기사루이에
였다.
"네놈 네놈은
"루이에, "
촤악!
털썩!
루이에가 에스타리스의 목에서 검을 뽑았다. 피가 분수처럼 쏟
아져 바닥에 흥건히 고였다
"루이에 왜?"
"너희들이 찾는 그가 누군지 난 모른다. 하지만 이 드래곤의 말
에 현혹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설사 그가 죽었다 하더라도 우린
바꿔지 않아도 되지. 어차피 우리의 적은드래곤이었고, 라한이라
는 인간을 죽였다는 존재 역시 드래곤이니까. 내 말이 틀렸나?"
루이에의 설교에 카이렌과 프라하, 투바가 주먹을 꽉 쥐었다. 드
래곤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모습이었다.
"루이에, 고맙다. "
"당연한 일이었다. 5 일 동안이곳에 숨어 있었더니 몸이 뻐근하
군. 그만 돌아가지 "
"한 마리가 도망갔다. "
"응? "
갑작스러운 카이렌의 말에 일행들이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들은 에스타리스와 빌리마니 외에 누구도 보지 못한 탓이다
"멀리서 우리를지켜보는드래곤이 있었다. 풍기는기운으로봐
서는 아카폴리안 같더군. "
"아카폴리안?"
"쾌나 영악한 놈이다. 그가 이곳에서 있었던 대화를 다 들었을
거다. "
카이렌이 섣불리 에스타리스를 공격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었
다. 멀리 있지만 다른 드래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 운 나쁘면 두
마리의 드래곤과 싸워야 한다는 게 그를 머뭇거리게 만들었음이다.
"그렇게 가까이 있었나?"
"저 끝에 있는 나무 위에 숨어 있었다. 너희들이 이곳에 나타나
기 전부터 지켜보고 있더군. "
"흠. "
카이렌 일행은 이번 계획을 시행하기 위해 꼬박 5 일을 허비했다.
카이렌과 루이에가 이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도 5 일, 헤르만이
카이렌의 모습으로 지낸 것도 무려 5 일 전부터였다.
처음 카이렌이 이렇게 하자고 했을 때, 프라하와 투바는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냥 싸우면 되지 뭔 꽁수를 부리냐는 의미
였다.
하지만 수장이 된 카이렌이 강력하게 요청했고, 루이에와 헤르
만이 찬성하면서 계획의 시행이 결정되었다. 가장 고생할 카이렌
과 루이에, 헤르만이 찬성하는데 다른 이의 반대가 무슨 소용이 있
겠는가?
만약 이때 카이렌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혹은 5 일이 아닌 하루
이틀 전에 준비했다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어쩌지?"
"로테마이어스의 귀에 들어가면 분명 뭔가 조치를 취할 거야.
일단 돌아가자. 대책을 논의해야겠어. "
"빌어먹을. 류카라한 그놈들도 짜증 나 미치겠는데, 이게 뭐야?"
"자 자,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가서 일단푹 쉬고 내일 얘기하자. "
카이렌이 일행을 다독이며 몸을 돌렸다. 가장 먼저 앞서 가는 카
이렌. 그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라한. 제발
아카폴리안과 리투미아, 벨라루스가물러난후, 라한은 하루하
루를 초조한 심정으로 보냈다. 로테마이어스의 선택 여하에 자신
의 목숨이 걸린 탓이다.
"오늘도 무사히 넘겼군. "
-주인. 무슨 소리야?
"아니다. "
아카폴리안이 돌아간 지 오늘로 3 일이 지났다. 이 정도 시간으
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방법을 정하는 데에
도 이 정도의 시간이 걸릴 수는 있는 문제였다.
-주인. 로테마이어스가
"왔나?"
테세르의 말에 라한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온 정신이 로테
마이어스의 행동에 가 있기에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어? 오긴 뭐가 와?
"아, 아니군. "
라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렇게까지 긴
장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미치겠군.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
로테마이어스의 결정은 어쨌든 라한의 권한 밖이었다. 지금 라한
에게는 신화력을 완전히 흡수해서 완벽히 컨트롤하는 게 먼저였다
한데 로테마이어스 때문에 도무지 정신 집중이 되지 않았다. 초
조한 마음이 라한의 수련을 방해한 것이다.
쾅! 쾅-!
"라한, 있는가?"
라한이 자기 자신에게 짜증을 부리려 할 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테로의 목소리였다.
"에테로님이군요. 정말잘오셨습니다 들어오십시오."
"허허, 이거 날 너무 반겨주는구먼. "
에테로의 말마따나 라한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에테로를 반
겼다. 듣고 있던 에테로마저 너무 밝은 목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앉으십시오. "
"어? 그그래. "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나야 뭐, 그저 그렇지. 근데 왜 그러는가? 그날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그날이라니요?"
라한이 짐짓 모른 척 에테로에게 되물었다. 그를 보며 에테로가
길게 한숨 쉬었다.
"말해 줄 수 없는 일인가 보군 "
"알고 계셨군요. "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네. 급히 해야 할 말이 있어서 되돌아 왔
었네. "
에테로도 며칠 전 라한이 누군가와 싸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집 밖에서 안의 싸움을 보는 거라서 눈으로 보지 못했지딴, 풍기는
기세와 수시로 들리는 폭음으로 싸움이 벌어졌다는 건 확신한 상
태였다.
"그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건 모르겠네. 말했다시피 밖에서 잠시 서 있다가 돌아갔으니
까. 대체 왜 싸운 건가? 그리고 그들의 정체에 대해 말해 줄 수 있
는가?"
"에휴. "
라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한도 그날 에테로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집 밖에 있다가 사라진 에테로. 잘만 하면 그날
싸움이 있었다는 걸 숨길 수 있을 성싶었다.
물론, 라한이 에테로라는 인물을 너무 과소평가했음이다.
에테로는 누가 뭐래도 정보 길드의 수장이다. 일상에서 벌어지
는 사소한 것에도 귀를 기울이는 직업인 셈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눈여걱보는 라한의 일을 건성으로 넘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요 며칠 이곳을 찾아올까 말까 많이 망설였네. 어쩌면 그날 그
싸움으로 자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
"그렇군요. "
"만약 적이 남아 있기라도 하면 나까지 위험하지 않은가?하하
하. 이해해 주겠지?"
"이해합니다. "
에테로도 라한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다. 베어울프를 처리한 일
이나 결계를 만든 일 등등. 이런 일련의 사건만 가지고도 라한의
실력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라한이 자신의 집에서 누군가와 싸웠다. 보통 적을 집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거의 없으니 누군가가 라한을 찾아왔다고 봐야
했다. 또 당당하게 라한을 찾아왔다는 건 라한보다 강자일 수도 있
다는 의미였다. 에테로로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일
이었다.
"이겼는가?"
"그런 것 같습니다. "
"다친 곳은 없는가?"
"다행히 없습니다. "
"자네와 싸운 적은 어찌 됐는가?"
"도주했습니다. "
에테로의 연이은 질문에 라한이 바로바로 대답했다. 어느 정도
는 예상했던 질문이라 망설임이 없었다.
"또 올 수도 있겠군. "
"그럴 수도 있습니다. "
"그때도 이길 수 있는가?"
"그들만 온다면요. "
라한의 애매한 말에 에테로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들만' 이라는 말. 그건 다른 누군가가 등장할 경우 라한이 위
험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또 다른 존재가 있는가?"
"정말 알아야겠습니까?"
"말해 주면 좋겠네. 해 주지 않으면 우리 나름대로 자네 됫조사
를 할 수밖에 없네. 우리 정보력에 대해서는 잘 알겠지. "
"그렇겠죠. "
라한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표정이었
다. 라한은 베사 길드뿐 아니라 다크라이더 길드도 드래곤과의 싸
움에 끼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려면 아예 모르는 게 최선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정보를 얻는 일에 그들의 도움을 배제하고 싶었지
만, 라한의 여건상그건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정보는 얻지만실
질적인 싸움과 핵심 내용은 모르게 하고 싶었다.
"말해 주게. 이미 한배를 탄 처지 아닌가?"
"그들의 정체가 궁금하다고 했죠?"
"회색 측인가? 아니면 검은 측인가? 아니, 아니지. 회색 측은
자네와 친분이 있으니 그쪽은 아닐 게야. 그럼 검은 측?"
에테로가 나름대로 생각해 둔 얘기를 꺼내놓았다. 지난 3 일 동
안 이 일에 대해 고민한 듯했다.
"둘 다 아닙니다. "
"둘 다 아니다? 흠, 그럼 전에 자네가 언급한 제 4 의 세력이라는
말이군. "
"예. "
드래곤과 싸우던 그날
라한은 자신을 찾아온 에테로에게 카이렌 일행과 류카라한 일행
의 정보를 캐는 또 다른 인물을 찾으라고 했었다. 또 다른 세력이
있음을 에테로에게 말한 것이다.
이때에도 라한은 그 세력이 누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모
르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한 탓이다.
"그들은 얼마나 강한가?"
"그들의 정체만 알면 얼마나 강한지는 짐작이 가실 겁니다. "
"그들의 정체가 대체 뭐기에 그러는가?"
"그들은 그들은 드래곤입니다 "
라한의 대답에 에테로가 입을 떡 벌렸다. 생각지도 못한 얘기
였다.
드래곤이라니. 대륙 최강이자 물질계의 중재자로 알려진 그들이
아니던가?한데, 군림하는종족드래곤이 라한과싸웠다?또, 그
싸움에서 라한에게 패해 도주했다? 도저히 믿음이 가지 않는 얘기
였다.
"그,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가? 말하기 싫으면 관두
지. 에잉. "
"믿고 안 믿고는 에테로님 자유입니다. 대신, 제가부탁한 일은
포기하지 말아주십시오. "
"자네 그 말. 진짜로군. "
그제야 에테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라한의 말처럼 그
의 적이 드래곤인 게 확실했다.
"그냥 믿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
"그게 무슨 말인가? 이건 내 목숨뿐 아니라 우리 베사 길드와 다
크라이더 길드 전체의 존폐가 걸린 일일세. 자네 대체 어쩌자

"어쩌자고 위대하시고 또 위대하신 드래곤에게 죄를 지었느냐
이 말이죠?"
"그렇네. 드래곤은 대륙 최강의 존재일세, 그에게 대적하는 건 스
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과 다를 바 없는 일이라는 걸 정말 모르는가?"
에테로의 말에 라한의 인상이 구겨졌다.
대부분의 인간이 에테로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게 분명하다.
인간들에게 드래곤은 역사 속의 신수이며 공포의 대상으로 기억되
는 터. 드래곤에게 대적하겠다는 그 자체를 만용으로 여길 게 확실
했다.
하지만 에테로만은,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눈이 되어주고 있는
그만은 다르길 바랐다. 이게 인간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제가 죄를 지었다고요? 네. 죄를 지었습니다. 드래곤 한마리
를 제 손으로 반쯤 죽여 놨거든요. 하지만 제가 그를 처리하지 않
았다면 아마 전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설사, 그 싸움에서 요
행히 도망쳤다 하더라도 평생 그들의 그림자를 피해 다니는 겁쟁이
가 됐을 겁니다. "
"그렇다 하더라도
"제 적이 드래곤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그들이 그
렇게 무서워요? 그럼 이 일에서 손 떼십시오. 말리지 않겠습니다. "
그냥해보는말이 아니었다. 드래곤에 대한공포를 정녕 떨쳐버
리지 못한다면 이쯤에서 베사 길드와 연을 끊을 생각이었다. 필요
하다면 다크라이더 길드와도 연을 끊을 각오가 돼 있었다.
"미안하네 내가 너무과민반응을했군. 그래, 솔직히 얘기하겠
네. 난 드래곤들이 무섭네. 그 이름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일
세. 하지만이 일에서 손을떼고싶지는않네. 까짓것 사람이 한번
죽지 두 번 죽는가? 역사상 유례없는 큰 싸움을 한번 준비해 보세,
하하하하하. "
"진심입니까?"
"진심일세. 후후후. "
계속 어두운 표정이던 에테로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지
금까지 라한을 시험해 보느라 연기를 한 것 같았다.
"이거 제가 당한 겁니까?"
"당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알고 계셨군요. "
"아, 자네가 말한 제 4 의 인물이 드래곤이라는 거? 알고 있었네. "
라한이 이마를 부여잡고 꾹꾹 눌렀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
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 fl 게 완벽히 속은 것이다.
"이거 참.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속은 게 처음인 것 같군요. "
"자네가 많이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지. "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회색 측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네. 그 정보를 듣고 어느
정도 예상했지. 뭐 그게 아니라도 알아챘을 걸세. 전에 우리 마을
상공에 드래곤이 나타나서 한바탕 소란을 피운 적이 있지. 그때부
터 자네를 죽이려 하는 드래곤이 있다는 건 알았네. 하나를 생각하
니 나머지는 대충 짐작이 가더군. "
에테로는 라한과 싸운 상대의 정체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라한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연기를 했을뿐. 상대가
드래곤이든 신이든 그리 개의치 않는 존재가 에테로였다.
물론, 처음에는 드래곤에 의해 다크라이더 길드와 베사 길드가
피해를 입을까 몹시 걱정했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꽤 오랫동안
고민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고민해서 나온 결과는 '라한을 돕
자 ' 였다.
다크시안과는 달리 에테로는 어릴 때 버림받아 암살자로 키워졌
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세상에 대한증오를 배운 셈이다 그런 그
가 누군가와의 싸움을 두려워할 리 만무했다. 그에게는 삶 그 자체
가 투쟁이고 전투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보? 제가 말한 제 4 의 인물을 찾았군요. "
"그것도 찾았고 또 다른 정보도 있네. "
"그래요?"
"이틀 전에, 그러니까 자네가 드래곤과 싸운 바로 다음 날 드래
곤 두 마리가 회색 측을 공격했네 좀 더 정확하게는 회색 측의 핵
심 인물들과 싸웠다고 봐야겠지. "
말을 하는 에테로의 목소리가 밝았다. 그 말투 때문에 라한도 카
이렌 일행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목소리만으로 전투의 결과를
짐작한 탓이다.
"이겼군요. "
"뭐 이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네. 회색 측 핵심 인물들에게 놀아
났다고 봐야겠지. "
"그래요?"
"함정을 팠더군. "
에테로의 얼굴에 감탄의 표정이 스쳐지 나갔다. 처음 이 정보를
받았을 때 적잖이 놀랐던 모양이다.
"함정요?"
"회색 측의 우두머리. 예사로운 자가 아니더군. "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
"사실 싸웠다고 보기도 민망하지. 그때
에테로가 자신에게 들어온 정보 그대로 라한에게 하나씩 설명해
줬다. 라한은 에테로의 말을 들으며 가끔씩 감탄사를 터트리며 놀
라워했다.
"역시 카이렌이로군. 그놈 생긴 것하고 다르게 머리가좋다니까. "
"생긴 건 자네보다 나은 게 아닌가? 대충 그에 대한 정보가 들어
왔는데 엄청란 미모를 자랑하는 엘프라고 하던데. "
"예쁜 카이렌보다 멋진 제가 낫죠. 하하하하. "
"허허, 그거 참, 허허허. "
라한이 어색한듯크게 웃어 재꼈다. 뭐라토를달려고 했던 에
테로도 그냥 웃으며 넘어갔다.
'그러고 보면 라한도 잘생기긴 잘생겼어. '
에테로도 라한의 외모를 어느 정도는 인정했다. 뚜렷한 이목구
비. 특히 서글서글한 눈매가 남에게 호감을 사기 딱 좋았다.
'근데 저 얼굴은 가짜겠지. '
에테로는 라한의 본 얼굴이 어떤지 모른다. 하지만 다크라이더
길드의 길드장인 다크시안은 라한의 본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처음 라한과 대면한 후, 에테로는 다크시안과 쾌 많은 대화를 나
누었다. 제일 처음한얘기는물론외모였다 다크시안이 언급한사
람이 자신이 본 그가 맞는지를 확인하는 거였으니 당연한 절차였다.
'듣기로는 별로라던데. 너무 평범하게 생겨서 사람들 사이에 묻
힌다고 했던가?'
다크시안이 했던 말이다. 어쩌면 그가 라한을 만났을 때 아름다
운 로이나가 함께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다크시안의 기
억에 라한은 평범한 외모를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풍기는 기도는 남달랐다. 말 하나하나에도 사람을 압도
하는 분위기를 풍겼던 라한, 다크시안은 외모와 너무 다른 라한의
기도에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고민해야 했다.
"참, 전에 제가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습니까?,
"아, 내 정신 좀 보게. 양측의 세작을모두 발견했네. 근데 어
쩔 생각인가? 드래곤이 보낸 눈이니 어쩌면 그들도 드래곤이지 안
겠나?"
"처리해야죠. 일단 눈부터 끊어 버릴 생각입니다. -
"알겠네. 여기 그들의 외모애 대해 적혀 있네. 부디 조심하게.
"걱정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
에테로는 라한을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드래곤과의 싸움
을 재고하라고 말하지 못했다. 어차피 말한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게
분명한 라한. 괜히 말을 저내서 기분을 꿀꿀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고 생각했다.
라한이 모르은 세상
때는 한여름
인간 동물 할 것 없이 모두 짜증을 부릴 만큼의 무더위가 계속
되번다 거기다 벌써 석 달째 비 한 방울 내리지 많았다. 농사가 피
폐해짐은 물론이고 가난한 농부, 힘없는 몬스터들은 때 아닌 가뭄
에 하나씩 말라죽어갔다.
이런 가뭍으로 대륙 모든 나라의 경제가 바닥까지 내리달았다.
특히 루이나 왕국에게 국토를 잃은 베센 왕국은 그 정도가 타국과
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각했다. 전쟁의 패배로 매달 공물을 바
쳐야 했던 그들에게 이런 가뭄은 신의 저주처럼 느껴졌다.
과거 베센 왕국의 중남부.
현재 축소된 베센 왕국의 중북부에 라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쩍
쩍 갈라진 논토와 그늘에 늘어져서 굻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
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심각하군. "
라한의 눈에 보인 사람들은 모두 열한 명. 20 대 초중반의 꽤나
젊은 사람들이 었다
"젊은 사람이 일을 하지 못하니 어라?"
세상을 한탄하려던 라한의 코에 묘한 냄새가 포착췄다. 피 냄새
였다. 근원지는 청년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듯했다.
"웬 피 냄새? 물어보면 알겠지. "
라한의 코는 남들과 달리 예민했다. 수련을 통해 오감이 예민해
지기도 했고 전생의 마지막이었던 개의 후각이 조금 남아 있어서이
기도 했다.
"실례합니다. "
"엇!"
"으헉 ! "
라한이 갑자기 나타나자 쉬고 있던 청년들이 놀란 음성을 내뱉
었다 라한이 가까이 다가을 때까지 인식하지 못한 듯했다.
"이런, 제가놀라게 해드렸나보군요. 죄송합니다. "
"음 "
라한의 재차 인사에 청년들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중 한 청년이
라한의 몸 구석구석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의 눈이 라한의
허리에 있는 세라 소드에 닿았을 때, 아쉬워하는 눈빛을 보였다.
'기분 나쁘게 뭐 하는 짓이야?'
찝찝한 기분에 라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청년들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좀과도해 보이는 청년들의 행동에
라한의 의구심을 가졌다.
'왜 저러지?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저, 실례합니다. "
라한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년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가 라한에게 말을 건 것이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봐서
라한을 조금쯤은 두려워하는 듯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
"혹시 용병이십니까?"
"아, 이 칼때문에 오해하셨나보군요. 전용병이 아닙니다. "
"그럼 그 검은
"이거요? 그냥 장식용입니다. "
라한이 대충 둘러댔다. 라한의 직업은 용병도 아니고 기사도 아
니다. 또, 허리에 차고 있는세라소드를마지막으로 썼던 때도 미
스릴 창고에서 벽을부술 때였다 검 자체를 거의 쓰지 않으니 장
식용이라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럼 검을 쓸 줄 모른다는 말입니까?"
"검을 배우려고 해 봤는데 재능이 없다고 하더군요. "
"오호, 그래요?"
청년의 얼굴에 살기가 감돌았다. 갑작스러운 청년들의 태도에
라한이 슬슬 됫걸음질 쳤다.
'이거 뭐야?'
"얘들아!"
"예, 형님, "
"식사다! 쳐라!"
"흐흐흐. "
우두머리로 보이는 청년의 말에 다른 청년들이 자리를 털고 일
어났다 언제 꺼냈는지 손에는 쟁기와 낫을 챙걱 든 채였다.
"이것 보세요.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 이놈 베센 왕국 놈이 아니로군. "
"예. 전 이 왕국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이 나라에 무슨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제게 왜 이러시죠?"
라한이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말했다. 괜히 분노해서 무고한 생
명을 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청년들은 라한의 저자세를 겁에 질려서라고 판단했다.
그 모습에 더욱 짙은 살기를 뿌리며 기세등등 라한에게 다가왔다.
"어디 다른 나라 놈은 얼마나 맛있는가 볼까?"
"말해 뭐 합니까? 저 통통한 살 좀 보십시오. 흐흐흐흐. "
라한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인육을 먹는
잔인한 자들. 라한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돌아갔다.
'어찌, 어찌 이런 일이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라한도 이번 일에는 충격
을 크게 받았다. 동족을 먹는 그 행동 자체가 라한을 혼란스럽게
한 것이다.
물론, 라한의 전생에 동족을 먹는 종족으로의 삶도 없는 건 아니
었다.
하지만 이번은상황이 좀달랐다. 이성이 강한 인간. 불을다룰
줄 알고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에게 식인이라는 행위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동족을 먹다니
"얘들아! 뭐 하냐? 식사 식는다. "
"예, 형님. "
"너희들. 지금 풍기는 이 피 냄새도 너희들 짓이냐?"
다가오는 청년들을 보며 라한이 어깨를 확 폈다. 더 이상 상대에
게 예의를 갖추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놈 참 예민한 놈이네. 땅속에 묻은 지 벌써 다섯 시간이나 지
났는데 그 피 냄새를 맡다니. "
"역시 그랬군. 크크크, 그랬어. 하하하하하."
라한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젠 저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동족애 같은 어쭙잖은 감정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분노와 살기가
라한을 감싸기 시작했다.
"테세르!"
-기다리고 있었어.
"죽여. 최대한 잔인하고 처참하게, 완전히 뭉개 버려! "
-알았어.
테세르의 몸집이 조금씩 커졌다. 상대와 비슷한크기로 커진 테
세르가 청년들에게 다가갔다.
테세르의 등장에 청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듣도 보도 못 한
존재가 살기를 풀풀 날리며 다가오는 모습. 그 하나만으로도 청년
들의 공포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이, 이게 뭐야? 이게
"부디 다음 생에서는 좋은 일만 하면서 살아라. "
"이이
청년 중 하나가 라한에게 기습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보다 테세
르가 먼저였다. 테세르가 이미 그의 목을 잡고 옆으로 꺾고 있었다.
"크륵! "
목이 반쯤 꺾인 청년이 게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얼굴은 붉게 달
아올랐고 발은 이미 땅에서 약간 떠 있는 상태였다.
-주인 말 들었지? 다음 생에서는 내 부하로 태어나라.
테세르가 나머지 손으로 청년의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파삭!
청년의 머리가 수박 터지듯 깨졌다. 구역질 나고 지저분한 모습
에 라한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남은 청년들의 표정은 라한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
했다.
-두려우냐? 그럼 우리 주인한테 잘하지 그랬어?
청년들의 바짓가랑이 사이로 오줌이 줄줄 흘러내렸다. 너무 심
한 공포감에 신체에 대한 통제력이 떨어진 모습이었다.
"테세르! 서둘러, "
-알았어.
테세르가 한 명씩 돌아가며 상대의 목을 비틀었다. 청년들은 테
세르의 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하나씩 죽어 나갔다. 개중에 목
이 꺾이고도 죽지 않는 이는 머리를 터트리는 수고까지 더했다.
-주인 끝났어.
"돌아가자. "
-그냥 가려고?
"에테로님을 좀 봐야겠어. 공간으로! "
라한은 테세르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공간 이동을 시전했다.
라한이 사라지고 몇 시간 후, 농사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습
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은 테세르가 죽인 이들을 칼로 도려내서
먹기 시작했다. 인간으로서 차마할수 없는잔인한 짓이지만, 그
들에게는 일상사인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블리아드마을은 가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어쩌면 대륙
에서 유일하게 가뭄의 영향을 받지 않은곳인지도모른다. 라한이
수시로 물을 불러내고 비를 내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날씨를 변화시킬 수 있는 마법은 컨트를 웨더(Cont.of weathe.)가
유일하다. 그리고 이건 인간의 마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오직 드래곤의 용언으로만 가능한 마법인 셈이다.
하지만 라한은 용언으로만 가능하다는 컨트를 웨더의 시전에 성
공했다. 드래곤의 전유물을 라한도 공유하게 된 것이다.
라한의 이런 성장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곳이 블리아드 마을이
었다. 비가 필요할 때마다 라한이 비를 내리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곳 블리아드 마을은 한 달에 한 번 휴일을 가진다.
매달 11 일. 라한이 이곳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일종의 기념 일인 셈이다.
그리고오늘은 8 월 11 일. 블리아드마을의 전체 휴일이다. 이 때
문에 에테로가 머물고 있는 닉스의 술집도 문이 닫혀 있었다.
쾅쾅쾅!
"에테로님 ! "
쾅쾅쾅!
"에테로님 ! "
라한이 닉스가 운영하는 술집 문을 강하게 두드렸다. 너무 다급
해 보여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라한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 아닙니다. "
라한의 얼굴을 알아본 주민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라한은 그런
곳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빨리 에테로를 만나자신이 보고 겪
은 일을 확인해 봐야 했다.
쾅쾅쾅!
"에테로님! 닉스씨! "
삐걱!
"라한님 아니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문이 열리고 닉스가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자다 일어났는지
몹시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급한 일이 있습니다.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
"예. 들어오십시오. "
덜컥!
문이 열리자 라한이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라한이 사라지자
구경하고 있던 주민들도 하나둘씩 흩어져갔다.
다시 문이 닫히자 술집의 내실에서 에테로가 천천히 걸어 나왔
다 그 역시 자다 일어났는지 눈을 반쯤 감은 모습이었다.
"에테로님. "
"왜 이리 호들갑인가? 드래곤이 쳐들어오기라도 했는가?"
"확인해 볼 일이 있습니다. "
"말해 보게. "
에테로가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으며 자리에 앉았다. 라
한도 맞은편에 앉아서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가 어디 갔다 왔는지는 아시죠?"
"음,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지금쯤이면 드래곤들과 한판 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갑자기 드래곤이 무서워지기라도 했는
가"
"그게 아니라 제가 본 일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
"본 것? 말해 보게, "
"사실 제가
라한이 베센 왕국의 중북부 지방에서 겪은 일을 침통한 표정으
로 설명했다. 그 얘기를 듣던 에테로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 었다.
"자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군. "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대륙 전체에 가뭄이 심각할 정도일세. 블리아드 마을은 자
네 덕분에 물이 풍족하지만, 다른 곳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일세. "
"그게 제 얘기하고무슨상관이 있습니까? 가뭄 때문에 사람들
이 전부 굶어 죽기라도 했다는 얘깁니까?"
가뭄이 오면 농사를 망치게 마련이다. 대륙의 근본 식량은 농사
로 나오는 곡물류인 터. 라한도 가뭄이 식량 부족에 크게 일조한다
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 가뭄이 올해 처음인 건 아니었다. 최근 10 년 안
에는 없었지만, 그 이전에는 수없이 많이 겪은 일이 가뭄이었다.
한데 이번에만 아사자가 속출한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되었
다. 또 가뭄이 있을 때마다 인육을 먹는 이들이 우후죽순 생걱난다
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자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
"최근에 베센 왕국이 무슨 일을 져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그럼
답이 나을 걸세. "
"그야 루이나 왕국과의 전쟁 설마 그 전쟁 때문에 모아뒀던 식
량을 다 쓰기 라도 했다는 말입 니까?"
그제야 라한도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했다.
베센 왕국의 현 상황은 전쟁으로 인한후유증이었다. 당시 너무
많은 인원과 식량 차출로 평민들의 삶이 피폐해진 것이다.
"그 정도가 끝이라면 이런 상황까지는 안 왔겠지. 루이나 왕국
에게 매달 보내고 있는 식량이 더 큰 문제일세. "
"이제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식량을 매달 루이나 왕국
에게 빼앗기고 있으니 이런 일이 벌어진 거로군요. "
"그렇다고 볼 수 있네. 그 덕에 현재 루이나 왕국의 국민들과 귀
족들은 대륙 어느 왕국보다 편하게 가뭄을 나고 있지. "
침통한 라한의 표정이 복잡 미묘하게 변했다. 대체 누굴 탓해야
하는가? 자국을 위하는 루이나 왕국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힘이 없어 식량을 빼앗기고 있는 베센 왕국의 왕족들을
탓하기도 힘들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든 버티는 게 베센 왕국
이 할수 있는유일한일이지. 아, 루이나왕국이 식량을덜 가져가
도록 신에게 비는 것도 방법이라고 볼 수 있겠군. "
쉽게 말해 방법이 없다는 얘기였다.
'안 돼. 이건 아니야. '
라한의 표정에 결의가 떠올랐다. 당장은 수가 없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휴, 전그만가보겠습니다. 낮잠을방해해서 죄송합니다. "
"아닐세. 라한 너무 마음쓰지 말게. 어차피 세상이란다그런
거 아니겠는가? 위에서 군림하는 자가 있으면 밑에서 지배당하는
자도 있게 마련이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부하며 지내는 벌레 같
은놈들도 있을테고. 이번 일도마찬가지일세. 현재로써는루이나
왕국이 베센 왕국을 휘어잡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네. 힘이 없
으면 어차피 다 빼앗길 수밖에 없는 거지. "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
라한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닉스의 술집을 나왔다.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염두를 굴려 봐도 뚜렷
한 해결책이 없었다.
'그래. 힘이 있어야하는 거야. 당장 아부하고 잘보여 봐야 힘
없으면 말짱 꽝인 거야. '
베센 왕국이 사는 길은 단하나뿐이다 힘을 키우는 길. 허리띠
를 더 졸라매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은 힘을 키워야 했다. 루이나
왕국의 뒤통수를 후려칠 수 있는 그런 힘 말이다.
헬레나와 하울을 만나다
라한이 다시 베센 왕국의 중북부로 이동해 왓다 아까의 상황
을 재현하고 싶지 않아서 이동하기 전부터 투명하게 몸을 만든 상
태였다
저기로군
라한의 눈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휘두르는 모습이 들어
왔다 카이렌 일행의 세력ㅇ; 된 사람들이 훈련을 하는 모습이었다
어디 보자
라한이 주머니에서 에테르가 전해준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곳에는 상대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얼굴 그림이 괘나
상세하게 그러져 있었다
라한이 찾아야 할 이가 드레곤이라면 굳이 얼굴 그림을 확인할
필요는 없다 드레곤끼리면 알아볼수 있다는 특유의 기운을 라한
역시 구별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도 라한이 몽타주를 꺼낸 건 상대가 드래곤이 아니라는 생
각에서였다.
카이렌에게는 상대가 드래곤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능력이 없
다. 하지만 상대가 강한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있다.
드래곤이 힘을 감추더라도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는 정도는 알아내
는 것이다.
로테마이어스도 카이렌의 그런 실력 정도는 알 터. 그에게 드래
곤을 세작으로 보낼 리 만무했다. 말 잘 듣는 인간이나 세뇌시킨
인간을 세작으로 심었을 게 분명했다.
'수염 참 멋지네. 나도 수염이나 길러볼까?'
몽타주에 나타난 사람은 옅은 구레나룻과 긴 콧수염이 인상적이
었다. 사내다우면서도 미적으로 균형이 잘 맞는 조각 같은 얼굴이
었다.
'이걸 어떻게 찾는다?'
라한의 '투명해지기'는 거의 완벽하다. 누군가잘때 옆에서 몇
시간씩 구경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한데, 카이렌마저 속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몸을 숨기는 능력은 고금 최강인 카이렌. 그의 실력이라면 라한
을 감지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카이렌에게서 풍기는 기
운이 라한이 사용하는 신화력과도 어느 정도는 비슷한 터. 최대한
빨리 찾아서 떠나는 게 카이렌에게 들키지 않는 길이었다.
-주인.
로브 안에서 테세르가 작은 목소리로 라한을 불렀다. 라한은 그
말에 생각으로만 대답했다.
'어?'
-저기 프라하다
'알아. '
무기를 들고 휘두르는 사람들의 앞에는 프라하가 근엄한 표정으
로 서 있었다. 그가 사람들을 가리키는 교관 역할을 하는 듯했다.
-어떻게 보여?
'많이 강해졌군. '
프라하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예전보다 강했다. 그 기운도 거칠게
요동치는 게 아닌 차분하게 가라앉은 기운이었다. 라한은 프라하가
자신과 헤어진 후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음을 한눈에 알아봤다
-쾌 멋있어졌네.
'테세르. 아까 몽타주 봤지?'
-응
'찾아봐. 너라면 카이렌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야
테세르에게는 몸을 숨길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하지만 풍기는 기
운을완벽하게 감추는능력은가지고 있다. 즉, 모습만들키지 않
는다면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는 테세르였다.
-알았어,
테세르가 라한의 로브에서 나와 바닥에 내려왔다. 그 상태로 낮
게 날며 사람들 사이를 훔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라한은 테세르에게 몸을 더 작게 만들 수 없느냐고 물
은 적이 있었다. 몸만 더 작게 만들 수 있으면 천하제일의 스파이
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테세르는 라한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몸을 크게 불렸던 건 속
을 비워서 가능했을 뿐. 실제로 가지고 있는 몸체의 구성 성분은
어쩌지 못한다고 말했었다.
한참 후에 다시 날아온 테세르가 라한의 로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쪽 손으로 사람들의 왼쪽을 가리켰다.
'저쪽이야?'
응. 무지 잘생겼더라
'쳇. '
라한은 원래 외모에 무감각한 성격이었다. 외모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한데, 언젠가부터 외모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미소년에
가까운 투바와 엘프 남성 카이렌을 만나고 난 후부터였다. 주변 일
행들이 자꾸 그들과 비교를 하려 들자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생각이
었다.
-안 가?
'곧 끝날 것 같네. 끝나면 처리하지 뭐.
라한의 말처럼 프라하의 교육이 막바지에 들어선 듯했다. 프라
하가 자꾸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도 그러했고, 교육을 받는 훈련병
들의 지친 모습도 그런 생각에 확신을 더해줬다.
"자,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오후수업도 열심히 받길 바란다
이상. "
프라하가 큰 목소리로 훈련병들에게 말했다. 어찌나 큰지 거대
한 연무장이 떠나갈 듯했다.
프라하가 나가자 훈련병들이 저마다 그늘을 찾아서 휴식을 취했
다. 라한도 몸을 투명하게 한 채로 테세르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
갔다.
'이쪽인가?'
-저기 저자다. 수염 난 잘생긴 놈
테세르가 가리킨 쪽에 수염이 깔끔하게 자란 잘생긴 남자가 보
였다. 그는 일행들과 떨어져 혼자서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날기. '
라한이 몸을 살짝 띄운 채로 그에게 날아갔다. 그의 바로 앞까지
날아간 라한이 손목을 몇 차례 떨었다.
'오랜만에 하는 건데 잘 되려나 모르겠네, '
-뭐 할 건데?
'이거. '
퍽-!
털썩!
라한이 사내의 뒤통수를 세라 소드로 강하게 내려쳤다. 소리가
너무 커 때린 라한이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사내를 기절시키는 데
에는 성공했다.
'너무 강했나? 역시 잘 안 되는군. '
-쟤 머리 깨졌겠다.
'팔자라고 생각해야지. 가자. 다 함께 공간으로. '
라한이 사내 옆에서 공간 이동을 시전했다. 아무런 빛도 터져 나
오지 않는 은밀한 공간 이동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라한은 쓰러진 자에게 수면을 한 차례 더 선사했
다. 혹시나 자신이 없는 사이에 깨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후, 라한은 베센 왕국의 남부 지방으로 이동했다 바다가 멀지
않아서인지 아득하게 느껴지는 짠 냄새가 라한의 코를 자극했다
"음, 이게 바다 냄새인가?"
-뭔 냄새라도 나나?
정령인 테세르는 본질적으로 후각이 발달되어 있지 않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자극적인 향기가 아니면 느끼지 못하는 것
이다.
"가자. "
라한미 남쪽으로 걸음을 옳겼다. 다가갈수록 바다 향기가 점점
진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 이동하자 라한의 눈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부두가 가까워졌다는 증거였다. 이곳만큼은 가뭄의
피해가 닿지 않았는지 사람들의 얼굴에서 굻주림을 찾기 힘들었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먹는 건가?"
-바다는 거 대한 식량 창고라고 하잖아.
"그런 얘기가 있긴 있지. "
날이 갈수록 머리가 좋아지는 테세르를 보며 라한이 미소를 머
금었다. 버려진 돌도 다듬으면 옥석이 된다더니. 테세르가 딱 그
경우였다.
-거기다 불의 정령이 대륙에서 많이 활동할 때면 물의 정령은
바다에서 활동하는 게 서로간의 규칙이거든. 지금 가뭄이 심하니
까 바다가 활기를 띠는 게 당연한 거야.
"잠깐. 잠깐만. 그게 무슨말이야?네 말은가뭄이 정령들때문
에 벌어진 거라는 얘기야?"
-당연하지. 대륙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 현상은 우리 정령들이
만드는 거라고. 홍수도 마찬가지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가뭄도 마
찬가지지.
"그럼 정령왕들한테 말하면 가뭄을 없앨 수 있는 거야?"
-그건 안 되지. 정령왕들이 들어줄 리가 없어. 그들도 힘이 없
거든.
테세르의 말에 라한의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자신들이 하는 일
이라면서 그걸 바꿀 힘이 없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령들이 하는 일이라면서? 그럼 바꿀 수도 있는 거 아냐?"
-정령계에 가득한 자연의 힘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야. 다른 곳
에서 자연 활동을 하면서 그 힘을 얻는 거지. 그리고 주인도 정령
계에 가 봤으니까 알 거야. 정령계 지형이 이곳 대륙하고 완전히
똑같지?
"그랬던가? 지형은 유심히 보질 않아서. "
-뭐, 잠깐 가서 지형까지 파악하는 건 무리였겠지. 그럼 지금
알아둬. 정령계 지형은이곳과완벽하게 일치해. 다른점이라면 인
간이나 엘프, 드래곤 같은 이성체들이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바꾼
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정도지.
라한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조금 의외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근데 대륙하고 같은 모양이라는 게 내가 한 말하고 무슨 관계가
있지?"
-있지. 관계가아주 깊지. 정령들이 속성을가지지 않고 태어난
다는 얘기, 했었지?
"응 "
-그들 중에서 불의 정령으로 거듭나는 녀석들 말이야. 그들이
정령계의 판트리아 대륙 정도 되는 위치에서 불의 정령으로 바꿔고
있어. 그 때문에 판트리아대륙에 불의 기운이 엄청나게 강해지는
거지
"그럼 좀 섞여서 하면 되잖아. "
-이미 시작했기 때문에 그건 힘들어. 그리고 설사 시작되지 않
았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어. 거듭날 때는 같은 속성끼리 뭉쳐야
하거든. 가까이 모여서 힘을 교류하지 않으면 순수한 정령으로 태
어날 수 없어.
생소한 얘기였지만 라한의 관심사는 이게 아니었다. 어떻게 가
뭄을 없앨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자연재해를 최대한 막을 수 있
느냐? 라한의 관심사는 이것뿐이었다.
골치 아프군. 위치가 바뀌면 대륙은 홍수에 시달리겠지?"
-아마도.
"혹시 다른 정령들도 지금 거듭나고 있나?"
-물론이지, 땅의 정령은 대륙의 서쪽에서 바람의 정령은 바다
먼 곳에서 거듭나고 있어
"그럼 그들이 만든 영향은?"
-대륙 서쪽은 연일 지진이 일어나고 있고 바다 먼 곳은 거의 매
일 폭풍이 일고 있지
라한은 정령이라는 존재가 평화와 조화의 존재라고 생각해 왔
다. 한데, 오늘 얘기로그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결국, 자신들살
자고 대륙에 피해를 주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거듭남이라는 거. 안 하면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그럼 정령계가 무너질걸, 정령계가무너지면
이곳 판트리아 대륙도 사라지게 될 거야. 따뜻함도 차가움도 없는
곳. 흙이 없고 바람이 없는 곳. 그리고 빛과 어둠이 없는 곳이 될
거니까.
라한도 별 기대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홧김에 해 본
말일 뿐. 그도 정령계와 판트리아계가 서로 공생 관계에 있다는 정
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결국 인간의 힘으로 자연재해를 버틸 수밖에 없다는 말이네. "
-뭐 그런 셈이지.
"에고. 이건 나중에 생각해 봐야겠다. 가자."
라한이 사람들을 비집고 부두의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참
가자 '산상의 슁터' 라는 커다란 술집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그렇군. '
어느 정도 가까이 오자 라한이 은밀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곳
에서는 사람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냥 들어갈 거야 7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해 볼까?'
딸랑!
라한이 문을 열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문 위에서 울린 청량한 종
소리가술집 홀 안에 퍼졌다. 미리 와서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
이 잠깐 입구를 향했다가 사라졌다. 소리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자
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어서옵셔. "
종소리에 반응한 또 다른 사람, 술집 종업원이 라한을 맞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드는 그런 목소리였다
"괜찮은 포도주 있습니까?"
"외지분이시군요. 이곳은 마하트가 일품입니다 여기서 북쪽으
로 조금만 가면 우리나라 최고의 마하트 생산지가 있거든요. 저희
술집은 그곳에서 바로 만들어서 오는 최상급 포도주만 취급하기 때
문에 정말 끝내줍니다. "
마치 줄줄 왼 듯 읖는 종업원의 목소리에 라한이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로 달달 외울 정도라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 사람 전문가로군. '
전문가는 기술이나 마법, 검술을 익힌 사람만 되는 게 아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도 전문가가 될 수 있고, 집에서 가사를 돌보는
사람도전문가가될수 있다. 자기 일에 자부심을가지고끊임없이
노력하는 그 사람이 바로 전문가인 것이다.
라한은 종업원의 시원한 목소리와 유창한 말솜씨로 그가 전문가
임을 눈치 챘다.
"알아서 주십시오. 식사도함께 주시고요. 아, 설마외지 사람이
라고 바가지를 씌우지는 않겠죠?"
"이런,손님. 저희는바가지 같은 걸 씌우지 않습니다. 한번 손
님은 영원한 손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하는걸요. 혹시 압니까?
언제 다시 이 마을에 들르게 될는지요. 저희가 최선을 다하면 그때
도 저희 술집으로 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손님께서 발이 무
척 넓은 분이라면 입소문이라도 내줄 텐데 어찌 바가지를 씌우겠
습니까? 저희는 손님이 누가 됐든지 최선을 다합니다 아, 단 한
가지 경우는예외군요. 저희는공짜손님을받지 않습니다. 술값이
없으면 저기서 노래를 부르든가 춤이라도 추셔야 합니다. 하하하. "
종업원이 술집의 한쪽을 가리키며 웃음을 터트렸다. 쾌 그럴듯
한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크기도 서너 명이 함께 올라가 작은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하하. 술값은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
"가끔은 술값이 있는데도 저기에 올라가는 분들이 계신답니다. "
"그래요?"
"물론입죠. 스스로음유시인을능가한다고 생각하는분들이 널
리고 널렸는걸요. 또, 어떤 용병은 자신이 겪은 멋지고통쾌한 이
야기를 저기 서서 풀어놓기도 한답니다. "
종업원의 얼굴에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실제로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때마다 재미있는 얘기와 좋은 노래를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전 그런 재주가 없어서요. "
라한이 손사래를 치며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쾌 많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기에 손님이 많았음에도 몇 자리가 남아 있었다.
라한이 거절 의사를 표하자 종업원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기색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 모습에 라한이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서운 곳이네 그래도 마음에 드는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라좋은생각같아.'
대륙은 오랜 가뭄으로 인해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베센
왕국은 패전까지 겪어 그 정도가 심각할 정도였다. 한데도 이곳만
큼은 패전과 가뭄이 피해간느낌이었다. 술집 사장의 탁월한상술
과 종업원의 철저한 전문가 정신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그래. 살 방법은 있는 거지. 근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라
라한은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남에게 해 보고 싶었다. 삶이 자랑
스러워서라거나 신세를 한탄하려는 마음은 아니었다. 처음 해 보
는 일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과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 버리고 싶은
마음, 이런저런 생각들이 결합되어 나온 결과였다.
'에고, 아서라. 나하고 안 맞아. '
라한은 순간 먹었던 마음을 애써 지웠다. 지금 라한은 놀러 온
게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류카라한을 보는 눈을 제거
해야 했다. 아직은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니기에 함부로 나서는 건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
라한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있었다. 종업원의 시원한목소리
에 라한이 고개를 들었다.
"빨리 나왔군요. "
"예. 그렇다고음식을대충만든건 아닙니다. 일류요리사여섯
명이 항시 대기 중이라서 음식을 빨리 만든 겁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
"하하. 알겠습니다. "
라한이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라한이 식사를 시작하려 하자 종
업원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식사만큼은 수다를 듣지 않
고 편하게 해 주려는 그 나름의 배려였다.
'사소한 거지만 아주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어 사장이 누군지
궁금하네. '
호기심을 어떻게든 풀어야 하는 건 드래곤에 필적하는 라한이
다 이런 의문도 풀지 않고 넘어갈 리 만무했다.
'누가 좋을까?'
라한이 식사를 하면서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물어볼 사람을
물색하기 위함이었다
'저 사람이 좋겠군. '
라한이 술집 구석에서 술을 먹고 있는 두사람을 발견했다. 얇지
만 긴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남녀였다.
'다른 지방 사람인가?'
이곳은 어촌이라서 남녀가 입고 있는 것 같은 깨끗한 옷은 보기
힘들다. 또, 대륙의 최남단이라서 얇고짧은옷을선호한다. 그런
생각을 갖자 외모도 왠지 이곳 사람들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알려나?'
외부인으로 보임에도 라한이 그들을 찍은 건 그들에게서 느껴지
는 편안함 때문이었다. 이곳에 한두 번 온 사람은 저렇게 편하게
있지 못한다. 강인한 뱃사람의 시끌벅적함 속에서 어떻게 태연하
겠는가? 대부분은 괜한 위압감에 수저를 들기 힘든 게 정상이었다.
한데도 그들은 주변 얘기를 흘릴 대로 흘리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지. '
라한이 수저를놓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술병과잔을들
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
"무슨 일이죠?"
앉아 있던 사람중 여자가 바로 대답해 왔다 라한이 쳐다보고
있음을 일찍부터 느낀 모양이다.
"보아하니 외지에서 오신 분들 같은데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여자가 대답할 때 남자의 손이 테이블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아주 미약하게 착 소리가 들렸다. 라한의 예민한 청각이 아
니면 듣지 못할 소리였다.
'검?'
검을 잡는 소리가 분명했다 쓰지는 않지만 라한 역시 검을 가지
고 다니기에 익숙한 소리였다.
"같은 외지 사람 같아서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
"저희는 남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만돌아가주
시겠습니까?"
여자의 얼굴에서 강한 경계심이 드러났다. 라한의 말을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눈치였다.
"뭐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혹시 북쪽에서 오셨습니
까?"
"그건 왜 묻죠?"
"옷이 길어 보여서요. 아시다시피 이곳은 대륙의 최남단이라서
상당히 덥거든요. "
라한의 말에 여자가 자신의 몸과 일행인 남자의 몸을 한차례 돌
아봤다. 라한의 말대로 뭔가 어색한복장이었다. 귀족 여성이라면
몸을 가리기 위해 긴 옷을 입을 수도 있다 한데 남자마저 긴 복장
인 건 확실히 이상했다.
"그렇군요. 앉으시죠. "
"예? 아, 예. "
여자가 라한의 합석을 허락했다. 라한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여
자와 남자 중간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라한이 옷차림 얘기를 꺼낸 건 그들을 알고 찾아온 게 아니란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라한의 말에 여자도 어느 정도는 의심을 풀고
합석을 허락한 것이다. 물론, 아무런 자신이 없었으면 쉽게 허락
할 리 없었다. 아마 검을잡았던 남자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은 것
이리라.
'어디흠, 예상대로보통 실력이 아니로군. 조금만 더 강했으
면 굴레를 벗을 수도 있었겠어. '
라한이 본 남자의 실력은 이미 극한에 달해 있었다. 이 상태로
조금만 더 강해진다면 굴레를 벗은 존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그 과정에 얻어야 하는 깨달음은 순전히 그 남
자 스스로의 몫이겠지만 어찌 됐든 그 남자의 실력이 굴레를
벗는 조건에 거의 근접해 있는 건 확실했다.
'저런 강자가 여기는 왜?'
라한은 두 명의 일행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런 것도 모른
채 남자가 손을 검에서 살짝 떼었다. 라한은 그 남자의 실력을 알
아봤지만, 그는 라한의 실력을 알아채지 못한 탓이다.
"보아하니 그쪽도 타지방에서 오신 모양이군요. 어디 출신인지
물어도 실례가 안 될까요?"
"전 특별하게 머무는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머물렀던
곳은 케라스 왕국이니 그곳이라고 해도 무방하겠군요. "
"그렇군요. "
여자가본격적으로 라한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의
심은 가셨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듯했다.
"두 분께서는 어디 출신인지요? 그런 복장은 본 적이 없어서요. "
"이 옷은 우리나라옷이 아닙니다. 저희는 이렇게 깨끗한옷을
만들지 못하거든요. "
라한은 두 사람이 입은 옷을 찬찬히 뜯어봤다. 그리 특별한 옷은
아니었다. 대륙 어디를 가나 흔히 구할 수 있는 그런 봄, 가을용 옷
이었다.
'저 옷이 뭐가 깨끗하다는 거지?'
바다 사람들의 거친 복색에 비하면 깨끗한 옷이 분명했다. 하지
만 대륙 내륙에는 저보다 더 깨끗하고 화려한 옷이 널리고 널렸다.
딱히 깨끗하다고 부를 수 있는 옷이 아닌 것이다
"그러시군요. "
"근데,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성은 있는지요?"
"그냥 라한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
"아, 그러시군요. "
라한이 일행 주변으로 은밀하게 막을 쳤다 라한이라는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라한의 건너편에 앉은 두
남녀는 라한의 그런 행동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사내가 강
하다고는 하지만 라한보다는 한참 아래 실력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도 이름을 듣고 싶네요. "
"아 저는 헬레나라고 하고 이쪽은
"하울. "
여자의 말을 받아 남자가 짧게 자기 이름을 말했다. 무뚝뚝함이
몸에 밴 듯 자연스러운 목소리였다
"레이디 헬레나와 하울님이셨군요. "
"그냥 헬레나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라한림. "
"그러죠. 헬레나. "
라한의 헬레나라는 호칭에 앉아 있던 하울이 몸을 움찔거렸다
얼굴에는 불쾌하다는 표정이 한것 떠오른 채였다.
헬레나가 하울을 눈으로 제지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저희에게 온 건 뭔가 물어보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아, 제가정신이 없었네요. 이 술집 주인이 누군지 너무궁금해
서 찾아왔습니다. "
착- !
라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울의 손이 다시 탁자 아래로 내려
갔다. 그리고 검을 잡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갑작스러운 태도에 라한이 의구심을 품었다.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 주인이 누군지는 왜 묻는지요?"
"별일은 아닙니다. 여기 종업원이 너무 친절해서 그를 누가 교
육시켰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
"정말 그것뿐인가요?"
"예, "
라한의 단호한 대답에도 하울의 손은 쉽사리 탁자 위로 올라오
지 않았다. 아직도 라한에 대한 경계가 풀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사실 우리도 이곳주인의 이름은잘모릅니다 이곳에 온지 얼
마 되지 않았거든요. "
"아, 그러시군요. "
대답을 하던 라한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가 힘겯게 끝맺었다. 아
주 익숙한 기운이 술집 안에서 느껴진 탓이다
'그녀가?'
.그럼 용건이 끝난 것 같으니 그만 돌아가 주시
헬레나가 말을 멈추고 시선을 한 곳으로 돌렸다. 라한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뒤로 돌렸다.
라한의 눈에 익숙한 이의 모습이 보였다. 푸른빛 머리카락이 어
깨까지 내려오는 아름다운 여자.
'그녀가 확실해. '
라한은 나타난 여자가 프리미아임을 확신했다. 모습이 조금 성
숙해지기는했지만, 귀엽던 그모습이 그대로날안 있었다. 또, 느
껴지는 기운도 당시에 느꼈던 프리미아의 기운이 확실했다.
챙-!
"하앗! "
하울이 값작스럽게 검을 뽑아 들고 프리미아를 공격했다. 프리
미아는 어깨를 살짝 틀어 하울의 공격을 피했다. 이미 공격을 예상
이라도 한 듯한 모습이 었다.
갑자기 싸움이 시작되자 술을 먹고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
나갔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이에 반해 종업원들은 차분하게 탁자를 옆으로 치우기 시작했
다.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한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라한이 혀를 내
둘렀다.
"야압! "
하울의 공격이 실패하자 헬레나의 공격이 이어졌다. 강하지는
않지만 빠르고 정확한 공격이 었다.
프리미아는 왼발을 축으로 한 바퀴 크게 회전했다. 그러자 헬레
나의 검이 프리미아의 오른쪽 허리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좋구나. 계속 해. "
"하앗! "
"야얍! "
쉬익!
채채챙!
언제 꺼내 들었는지 프리미아의 손에도 검이 들려 있었다. 그리
고 수차례 공방이 계속되며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하울의 공격은 빠르면서도 강했고 헬레나의 공격은 정확하고 날
카로웠다. 이에 반해 프리마아의 검은 빠르지도 강하지도 그렇다
고 정확하지도 않았다. 다만, 몸놀림이 드래곤답게 워낙빠른지라
공격을 모두 막아내고 피할 뿐이었다.
'비슷한데. '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하울과 헬레나의 검은 프리미아와 완전히
달랐다. 심지어 프리미아는 검술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라한의 눈에는 둘 사이에 뭔가 공통점이 있었다. 아니,
프리미아의 움직임이 상대의 공격을 모두 읽고 있는 느낌이라고 봐
야 정확했다. 마치 검의 다음공격 지점을 알고 미리 피하는느낌
상대의 발동작까지도 완벽히 레뚫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괜찮소?"
헬레나가 프리미아의 손바닥에 어깨를 맞고 쓰러졌다. 하울은
쓰러진 헬레나에게 달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걸로
치열한 공방전은 프리미아의 승리로 돌아간 셈이다.
"많이 발전했구나. "
"제자 하울, 스승님을 뵙습니다. "
"제자 헬레나, 스승님을 뵙습니다. "
하울이 헬레나의 어깨를 부축한 채로 함께 무릎을 꿇었다.
하울과 헬레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싸움을 구경하던 이들의 얼
굴이 멍해졌다 알고 싸웠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라한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나서야 좀 전에 느꼈던 막연한 느낌
을 이해할 수 있었다.
프리미아가 헬레나와 하울의 스승이라는 것. 그건 프리미아가
그들의 검술을 모두 레뚫고 있다는 점이나 다름없으니 미리 예측하
고 피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일어나라. 들어가자꾸나. "
-프리미아. 맞지?
라한이 프리미아에게 은밀하게 음성을 전달했다. 프리미아는 순
간 몸을 움찔하더니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예전의 방방 뛰던 성
급하던 성격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라한은 프리미아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머리를 두세 차례
긁적였다.
자신이 음성을 보낸 주인공임을 피력한 행동이었다.
라한인가?
-응.
-살아 있었군
프리미아가놀란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녀는 라한이 이미 죽었
다고 믿고 있었다. 라한의 갑작스러운 실종을 설명할 길이 그 방법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다.
"하울, 헬레나. 이 사람은 누구지?"
프리미아가 짐짓 모른 척 제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에 하울
과 헬레나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프리
미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손님이 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같이 들어가자고. "
말을마친 프리미아가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제자들의 입을 미
리 막아 라한이 들어오는 걸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라한님. 스승님께서 허락했으니 들어가시죠. "
"고맙습니다. 헬레나. 하울. "
살짝 고개를 숙인 라한이 먼저 프리미아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 뒤를 헬레나가 길게 한숨을 쉬며 따랐다. 하울은 라한의 등을
보며 눈을 매섭게 치떴다. 불청객인 라한이 마음에 들지 않모 모양
이다
재회 1
안으로 들어간 라한은 깨끗하게 단장된 객실로 안내되었다 그
는 머물게 된 객실에서 점심과 저녁 식사를 마쳤다 그 시간까지
프리미아가 방문하지 않은 것이다
똑똑
자정이 한참지난 시간
막 잠을 청하려는 하는 찰나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라한은 풍
기는 기운으로 방문객이 프라미아임을 짐작했다
들어와
프리미아가 안으로 들어와 라한의 얼굴을 뚫어지라 처더봤다
한참을 그렇게 처다보던 프리미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살펴봐도 라한이 아니라고 생각한듯 했다
내모습이 바뀌어서 놀란 모양이네
"라한 맞아?"
"맞아. "
"목소리가 비슷하기는 한데 얼굴이 너무 달라 풍기는 기운도
. 뭐가 뭔지 모르겠군, "
프리미아는 풍기는 기운이 너무 약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
녀에게 라한의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은 탓이다.
라한은 풍기는 기운이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프리미아와 자신 주
변으로 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기운을 폭사시켜 자신의 기운이 약
하지 않음을 보여줬다
프리미아는 라한의 들쑥날쑥한 기운 때문에 몹시 혼란스러웠다.
과거에도좀특이한기운이기는했지만, 이 정도는아니었다. 거의
없다시피 하다가 살이 떨릴 정도로 강해지는 기운이라니. 이런 힘
조절은 드래곤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라한이 맞는다면 강해졌군. "
"고마워. "
"그 얼굴은 뭐야?"
"이걸로 만든 거지 "
라한이 목에 차고 있는 목걸이를 내밀었다. 폴리모프가 가능하
도록 해 주는 인챈트가 된 목걸이였다.
"마법 무구로군. "
"응. "
"그래도 완전히 믿기는 힘들어. 네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그땐 믿어주지. "
프리미아도 라한이 내민 목걸이가 인챈트된 마법 무구임을 알아
챘다.
하지만 그 마법 무구가 어떤 종류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이 때
문에 라한이 하는 말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프리미아가 피해 다니는 존재는 다름 아닌 드래곤이다 로
테마이어스가 자신을 찾기 위해 보냈을 드래곤들. 그들을 경계해
야 하기에 확실하지 않은 건 쉽사리 믿을 수 없었음이다.
"미안하군. 이 얼굴은 한 번 되돌아가면 다시 6 개월 정도 걸리거
든 다른 방법으로 외모를 바꾸는 방법도 있기는 있지만 귀찮아. "
"그럼 난 네가 라한이라는 걸 믿을 수 없다. "
"대신 다른 걸 보여주지. 테세르!"
라한의 부름에 테세르가 로브 안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자
다 일어났는지 눈을 반쯤 감은 모습이었다.
"뭐 해?"
-음냐. 안녕.
테세르가 조금은 성숙하게 변한 프리미아를 보며 손을 어색하게
흔들었다.
"그때 그 버릇없는 정령이로군. "
"이제 내가 라한이라는 걸 믿을 수 있겠지?"
"훗. "
그제야 프리미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라한을
경계하느라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좀 앉지. "
"그래. "
프리미아가 앉자 테세르도 라한의 로브에서 나와 탁자 위에 섰
다. 탁자 위에서 몇 번 고개를 흔들어 억지로 잠을몰아내는 테세
르.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탁자에 대자로 엎어졌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왜 살아 있었으면서도 나타나지 않은
거지?"
"이놈 실수로 어디 갇혀 있었다. 나오는 데 한 20 일 걸렸던가? 그
렇게 고생 고생 해서 나오고 나니까혼자서 시간을보내고 싶더라고. "
라한이 테세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테세르는 뭔가
대꾸를 하려다 이내 포기해 버렸다. 대신 그는 말싸움보다 잠이 먼
저라는 듯 고개를 더 깊이 파묻었다.
"그랬군. 하긴, 예전부터 저 녀석은사고만치고다녔지 "
"너도 마찬가지였어. "
"그랬나?"
예전이었으면 발끈했을지도 모를 라한의 말도 프리미아는 웃음
으로 넘겼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이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변했군. "
"내가 7"
"응. 뭐랄까? 어른스러워졌다고 할까?"
"칭찬으로 들을게. "
프리미아의 말투 하나하나가 라한과의 공백을 느끼게 해줬다.
실제 헤어진 시간은 겨우 13 개월에 불과하다. 한데도 마치 10 년은
지난 듯했다.
'정말 많이 변했구나 그들도 변했겠지. '
프리미아의 변화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카이렌 일행이 떠올랐
다. 프라하를 먼발치에서 잠깐 보기는 했지만 대화는 해 보지 못했
다. 아마그와도 대화를 하면 13 개월의 공백이 느껴질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카이렌, 투바도 그만큼의 공백이 느껴지리라.
"이제 네 얘기를 할 차례인 것 같은데. 어쩌다가 여기서 술집 사
장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유희를즐길 때 만들어둔곳이야. 한 5 백 년쯤됐지. 그때
이곳에 술집을 차리고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물려줬어, 당시에 난
엘프로 유희를 즐길 때라서 5 백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나타나도 그
리 이상할 건 없지. "
"그러고 보니 귀가 길군. "
"이제 본 모양이네. "
"어. "
라한은 사람을 흘낏 봐도 쾌나 상세하게 파악할 줄 안다. 어릴
패 쫓겨 다녔던 기억이 라한의 성격을 치밀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
지만프리미아의 긴 귀는 지금에서야 발견했다. 프리미아의 외모
적 성숙함 때문에 다른 변화에 소홀했던 탓이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먼저 떠났던 네가 날 찾으러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고. "
"혹시 이 부근에서 류카라한 본 적 있어?"
"류카라한? 로이나님이 예전에 사랑했다던 그 인간?-
"뭐?"
"아, 아니다. "
라한은 로이나와 류카라한의 관계를 전혀 몰랐다. 얼핏 안면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사랑한 사이였다는 건 지금에서야 알게 되
었다.
'골치 아프네. '
류카라한의 요즘 행보는 위험 그 자체였다 자칫하면 인간이라
는 종즉 자체가 전 드래곤의 분노를 살 수도 있 는 일을 진행하고 있
은 터 지금은 아니겠지만 나중에 일이 마무리되면 그를 직접 처리
할 생각이었다.
그게 인간이라는 종족을 대륙에 오래 보전시키는 길이라는 판단
에서였다.
프리미아. 근데 왜 다른 일행들과 떨어졌지?"
로이나님이 우리한테 떠나라고 했어.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우
리, 아니 레테아의 안전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
.그러고 보니 형이 안 보이네 "
.레테아는 다른 곳에 있어. 이곳은 돈이 필요해서 잠시 수금하
러 온 것분이야."
"형이 있는 곳이 어디야
"부티아르 섬 ."
프리미아의 입에서 생소한 지명이 나왔다. 대륙 지도를 완전히
외워서 다시 그렸던 라한조차도 모르는 이름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곳인데. "
,넌 말해도 모를 거야. 대륙이 아니니까. "
"대륙이 아니라고?"
.응. 부티아르 섬은 대륙에서 남쪽으로 100 킬로미터 정도 떨어
진 곳에 위치한 섬이야. 아까 날 찾아왔던 녀석들은 그곳에 사는
원주민이 었지 . "
" 큭 "
라한이 이마를 짚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완전히 헛짚었다.
라한은 헬레나와 하울이 대륙의 북부 사람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조금은 더워 보이는 옷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실제로는 오히려 대륙의 한참 남쪽에 위치한 곳 출신이었
다. 그들은 너무 더운 곳에서 왔기에 이곳 날씨가 오히려 선선하게
느껴져 조금은 긴 옷을 입은 거였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옷을 입었
을 수도 있다는 걸 감안하지 못한 라한이었다.
'요즘은 실수투성 이로군. '
부티아르 섬은 대륙 남쪽에 위치한 거대한 섬이다. 그곳은 대륙
에 있는 웬만한 나라 두 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큰 크기를 가지고 있
다. 섬 안에 산,산맥, 강, 호수. 이 모든걸 가지고 있는곳이다.
"왜 그래?"
"아니야. 근데 아까 스승이라고 부르던데 검을 가르친 거아?"
"한 50 년 됐나?그때 부티아르 섬에 간 적이 있었어. 처음그곳
에 갔을 때는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신기하더군. 그
래서 나도 표류해서 떠밀려 온 척하고 거기 사람들과 섞여 지냈어. "
"드래곤이라는 건 숨기고?"
"아니. 그곳사람들은드래곤이 뭔지도몰라. 그들이 쓰는대륙
어도 내가 가르친 거야. 거기는 말만 있지 글이 없거든 "
"미개한 곳인가?"
라한의 반사적인 대답에 프리미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
에 라한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생각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한 건 없는 듯했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미개하다는 기준이 글이 없다는 거야? 아니면 드래곤이 뭔지
모른다는 거야? 생활환경이 달라 아는 범위가 다를 뿐이지 그들은
미개인이 아니야. "
"하지만 글은 모든 문명의 척도가
"그래, 글이라는 건 중요하지 기록을할수도 있고 업적을전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그들에게도 글 아닌 글이 있어. 바로 그림
이지.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남기고 싶을 때는 그림을
그려 "
"그래. 내가잘못했어, 미안해."
라한이 얼떨떨하게 잘못을 시인했다. 알고 보면 프리이마의 말
도 맞다 싶었다.
어차피 미개하다, 그렇지 않다의 기준도 이곳 판트리아 대륙 사
람들이 만든 거였다. 이곳의 기준으로 이곳을 높게 보는 말이니 바
탕부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약 부티아르 섬에 사는 사람들 기준으로 이곳이 미개하다면
판트리아 대륙에 사는 사람 전부가 미개인이 되는가? 그건 아니었
다. 미개하고 아니고를 나누는 기준. 그건 같은문화를 가진 사람
들끼리 그 문화를 공유하지 못할 때에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전
혀 동떨어진 문화의 사람끼리는 가려내기 힘든 문제였다
"됐어.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나도 화낼 자격이 없
는 거지. "
"그곳에 애착이 많은가 보네. "
"그곳에는 날 다른 종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사람이 없
거든, "
"이해가 간다. "
라한도 최근 심하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자신이 강하다는 이유
만으로 인간이 아닌 듯 떠받드는블리아드 마을사람들 또, 자신
이 강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을 죽이려 드는 로테마이어스
어차피 자신도 인간일 뿐인데 왜 그렇게 다른 종족 대하듯 하는지
답답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근데 아직 왜 왔는지 얘기를 안 했어. 류카라한이 왜?-
"로테마이어스가 류카라한 진영에 자신의 눈을 심어뒀더군. 그
걸 걷어낼 생각이야. "
"로드, 그와싸울 생각이군. "
"이미 싸움은 시작됐어. 이젠 내가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
니야. "
라한은 이미 로테마이어스와 싸울 생각을 굳혔다. 그런데도 아
직 싸우지 않고 있는 건 단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라한의 힘이 완전하지 못해서 승률이 반반이라는 것. 라
한의 성격상 이런 승률일 때는 일단 싸움을 피하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로테마이어스의 지위가 드래곤 로드라는 점에 기인한
다. 다른 드래곤의 분노를 사지 않고 당당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서 뒤끝을 남기지 않는 길, 그게 뭐가
됐든 드래곤 전체와의 싸움은 무조건 피해야 하는 탓이다.
"그렇겠지. 로드는 널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 거기다 크라이드
리안까지 죽어 버렸으니
"그 얘기는 됐어. 류카라한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로테마이
어스가 심어 놓은 세작이 어디 있는지는 알거든. 누군지도 알고. -
"그 일이 끝나면 어쩔 생각이야?"
"어?"
"로드와의 일이 다 마무리되면 어떻게 지낼 거냐고. "
"그게 어
라한은 거기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당장눈앞에 닥친 일이
많아서 생각이 미치지 않았음이다.
"할 일 없으면 일 끝나고 부티아르 섬으로 와. 몬스터도 있고 바
다 괴물들도 많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곳이야. 가족을 위해서 몬스
터와 맞서 싸우는 전사들. 그런 전사들이 싸우고 돌아오면 따뜻하
게 맞아주는 가족들. 그리고 그런 전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검을
연습하는 아이들, 그곳은 치열하지만 따뜻함이 가득한 곳이야. "
"내가 가도 될까?"
"물론이지. 언제나환영이야. 레테아도아주좋아할거야."
"응 일이 끝나면 꼭 갈게. 반드시. "
라한도 차별하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권력 다툼이 없고 자
신을 인간으로 대우해주는 곳에서 지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먹
은 터에 받은 제의라 더 솔깃했다.
"난 내일부터 식재료를 사 모아야 해서 그만 자야겠다. 쉴 만큼
쉬다 가도록 해. 종업원들한테는 미리 말해뒀으니까. "
부티아르 섬은요즘 연일 해일이 일어 식량이 부족했다. 테세르
가 말한 물의 정령의 거듭남 탓이다. 프리미아가 육지에 나온 것도
해일 때문에 부족한 식량을 사 가기 위함이었다
"아참 형한테는나봤다는얘기 하지 마. 걱정할거야."
"알았어. "
"낮에 그 녀석들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
"그러지. 근데 라한. "
프리미아가 방을 나가려다 고개를 돌려 라한을 불렀다
"왜?"
"네가 그 녀석들이라고 부른 사람들은 나이가 마흔이 넘는다.
부티아르 종족 특성이 노화가 느려서 어려 보이지만, 실제로 너보
다 나이가 많다. "
"그, 그래?"
응. 그리고 앞으로 나한테 너라고 부르지 말고 형수님이라고
불러라. 그럼 간다. 쉬다가가."
프리미아가 나간 후에도 라한은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리미아의 말이 머릿속에서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탓이다.
라한의 멍한 표정에 테세르가 라한을 쿡쿡 찔렀다. 프리미아가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를 듣고 깬 테세르였다.
-주인 왜 그래?
"아니야. "
-주인 이상해.
"그게 모르겠다. "
몹시 복잡한 심정이었다. 과거에 한 번 결혼했던 레테아였기에
형수라는 존재가 처음인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은
기분이 남달랐다.
마치 진짜 가족을 맞았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너무 생소한 느낌
에 머리가 복잡했다.

류카라한 일행의 본진은 베센 왕국의 동남부 지방이다. 세력을


키우려는 마음을 먹은 후 장소를 물색했고, 이런저런 여건에 가장
들어맞는 곳이 이곳이었다.
그들이 베센 왕국을 택한 건 패전 이후 나라가 혼란스럽다는 이
유에 기인했다 아무리 자신들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한 나라의 내
부에서 대놓고 군사훈련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왕궁에서 다 알더
라도 예의상 어느 정도는 감춰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예의를 덜
지컥도 되는 약한 나라가 좋았다. 베센 왕국이 적격인 셈이다.
또 베센 왕국의 많은 지역 중 동남부 지방을 택한 건 이곳에 넓
은 평야와 분지, 바다가 함께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형은 군사를 훈련시키는 페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또 베
센 왕국을 택하기는 했지만, 그나마 부유한 곳을 찾다 보니 바닷가
밖에 없었다. 가뭄의 피해를 바다의 어획량으로 어느 정도는 보완
한 것이다.
류카라한 진영의 내부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저택. 그곳에서도 가
장 깊은 내실에 류카라한을 비롯한 일행 모두가 모였다.
"모두 모였군. "
"오랜만에 다 모으는군. "
잉글리아트가 비꼬듯 류카라한을 질책했다. 그 말에 굴레를 벗
은 라이칸드로프 케이플과 미스티크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자신
들이 인정한 류카라한을 비난하는 게 기분 나빴던 모양이다. 반면,
굴레를 벗은 인간들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잉글리아트에게 찬성
의 눈빛을 보냈다
"일이 있었다. 이해해달라고는 하지 않겠다. -
"흠. "
류카라한이 당당하게 버티고 나오자 오히려 잉글리아가 할 말
이 궁해졌다.
생각 같아서는 그렇게 할 바에는 차라리 수장 자리를 때려치우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지금 상황에서 너무 위험한 발언이었다. 자칫 이
자리에서 류카라한 측과 잉글리아트 측이 정면충돌할 수도 있다.
아직 카이렌 일행과 드래곤이라는 큰 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내
부 분열은 최악의 경우였다.
"10 일 후에 카이렌 일행을 끝장낸다. "
"가능한 소리인가? 아직 그들이 어디 숨어 있는지도 모르지 않
나?"
잉글리아트가 차분하게 반론을 제기했다. 이번 발언은 류카라한
에 대한 반감이 아닌 이성적인 생각에서 나온 얘기였다.
"그들을 나오게 할 생각이다. "
"무슨 소리지?"
"함정을 파서 이번 기회에 완전히 처리할 생각이다.
"함정?"
사실 류카라한은 카이렌 일행과의 충돌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
래서 지금까지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카이렌 일행과의 정면충돌을
알게 모르게 피해왔다.
자신들의 진형이 카이렌 일행보다 강하다고는 하나 그 차이가
그리 크지는 않은 터. 특히 카이렌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는 이상
정면충돌이 공멸로 이어질까 걱정된 탓이다.
그러던 류카라한이 마음을 굳혔다. 야금야금 세력이 축소당하는
게 더 큰 피해를 낳는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제 3 구역 부근에 골렘을 모조리 모아 둘 생각이다. "
"골렘? 미쳤군. 그러다 잘못해서 그들에게 파괴당하기라도 하
면 어쩌려고
류카라한 세력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일행 그 자체이다. 류카라
한과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들 그리고 잉글리아트를 비롯한 기
존 다섯 명, 이들이 대륙 최강의 세력을 이끄는 주축이었다.
이들을 제외하고 가장 큰 힘이라면 모두가 골렘을 꼽는다. 특히,
마법사들에게 골렘은 단순히 골렘의 능력 하나로 그치지 않았다.
든든한방어막, 캐스팅 시간을 벌어주는 지연제. 골렘의 합류만으
로 힘을 두 배 이상 얻은 것이다.
류카라한은 그런 소중한 존재인 골렘을 미끼로 사용하자고 말하
고 있다. 자칫하면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카이렌과의 대치에서 열세
로 돌아설 수도 있는 문제였다.
"골렘을 쓰지는 않는다. "
"하지만방금골렘을미끼로
"8 연무장 뒤쪽에 골렘 8 기를준비시컥 놨다. 물론, 겉만 번지르
르한 가짜 골렘이다. "
"그럼 그걸 미끼로?"
"이번 함정으로 카이렌 일행은 지상에서 사라진다. 세부 사항은
미스티크에게 말해뒀으니 전달받도록. 이상
말을 마친 류카라한이 내실을 나가 버렸다. 얼굴 가득 불쾌한 표
정을 떠올린 채였다. 자기 이익만 따지는 잉글리아트 일행들에 대
한 역겨움의 표현이었다.
류카라한이 사라진 후, 미스티크와 케이플이 잉글리아트 일행들
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리고 잠시간 침묵하다 뭔가 눈으로 얘기하
듯 이상야릇한 표정만 지었다.
남은 이들은 류카라한이 나가고 거의 10 분 동안을 침묵을 지켰
다. 류카라한이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 "
"갔군. "
"미스티크. 대체 그놈이 말한 함정이라는 게 뭐야?,
"아, 그거? 나한테도 말로 안 하고 여기 써서 주더라고.읽어
봐. 그놈들 안 걸릴 수가 없겠더군. -
잉글리아트와 미스티크가 친근하게 대화했다. 좀 전에 보았더
적대적인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뭐 단순하네. 그냥 골렘을 놔두고 개인 훈련하는거잖아. 그때
골렘을 비우는 시간은 대충 1o 분?-
"응. 그놈들이 10 분 안에 공격해서 골렘을 다 부술 수 있을까?"
미스티크의 물음에 잉글리아트가 눈을 갑고 생각에 잠겼다. 한
참이 지나서 잉글리아트가 다시 눈을 떴다.
"카이렌. 그놈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하다
"어떻게?"
"그놈에게는 안 보이는 묘한 능력이 있더군. 그놈이라면 10 분
안에 경비병을 모조리 다 처리하고 골렘을 완파시킬 수 있다. "
잉글리아트가 나름대로 카이렌의 능력을 평가했다. 그 결과는
충분히 가능하다였다. 그리고 잉글리아트의 그런 판단은 실제로도
옳았다.
카이렌은 지금까지 싸우면서 가진 능력을 모두 사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굴레를 벗기 전에 대륙을 유랑할 때도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다. 그가 정말 최선을 다한다면 10 분 안에 골렘을 처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거기에 동료들의 힘까지 더한다면 10 분
을 반으로 줄여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 엘프 놈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야. "
"당연하지. 그놈하고 드래곤만 어떻게 하면 류카라한 그놈도 이
제 끝이다. "
"크크크 그럼 세상은 우리가 하하하하 "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 케이플이 대소를 터트렸다. 좀 전까
지 류카라한을 존경하는 듯 행동했던 케이플, 그도 실제로는 잉글
리아트와 한통속이 었다.
'류카라한. 너도 참 불쌍하다. '
잉글리아트의 회의 내용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프리미아가
영하는 술집을 나온 라한이 었다.
그는 원래 드래곤이 심어놓은 자만 데리고 사라질 생각이었다
한데, 훈련 중에 갑자기 뛰어가는 케이플을 보며 괜한 호기심이 발
동했다. 평소에는 항상 화만 부르던 호기심이 이번에는 제대로 발
동된 거였다.
'그나저나 카이렌. 설마 저 멍청한 함정에 빠지지는 않겠지?'
라한의 눈에는 류카라한이 짠 함정에 많은 허점이 보였다. 특히,
훈련을 하면서 골렘을 놔두고 간다는 점이 대표적이었다. 아무리
대규모 훈련이라 하더라도 골렘을 두고 다니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골렘은 다른 차원에서 대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훈련에 아무런 방해가 안 되는데 왜 두고 다니겠는가?
두 번째 문제는 다시 돌아온다는 시간이었다. 겨우 10 분. 그 정
도로 짧은 훈련은 어디에도 없다.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함정인
셈이다.
'어쩌면 그걸 노린 걸지도 모르지. '
류카라한은 바보가 아니다. 그 역시 10 분의 짧은 훈련이 존재할
수 없다는 건 잘 알 터였다. 한데도 10 분이라는 시간으로 소문내려
고 하고 있다. 그건 오히려 카이렌의 생각을 역으로 되짚는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류카라한이 10 분이라고 소문냄으로써 '골렘을 부술 시간이 없
으니 꿈도 꾸지 마라. ' 라는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카
이렌은 10 분 안에 부술 자신이 있으니 덤빌 테고 말이다.
'아무래도 속겠어. 류카라한이 심리전에 이렇게 능할 줄은 몰랐
는데. 에고. '
카이렌이 똑똑한 건 사실이지만 인간들의 간교함을 너무 모르는
게 단점이었다. 게릴라전을 꾸준히 펼쳤지만 그중에서 간교하다고
할 만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아주 정석적인 게릴라전과 기습. 매복을할 때도 정석에서 벗어
난 적이 없었다. 류카라한은 카이렌의 그런 성격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한 번만 도와줄게. '
라한이 은밀하게 내실을 빠져나와 연무장으로 갔다. 그리고 납
치 대상을 찾아서 조용히 기절시켰다
'공간으로. '
라한이 사라지고 류카라한 일행은 함정을 하나씩 진행시켰다. 8
연무장에 위치한 골렘을 지정한 위치로 옮기고 대규모 훈련도 교육
생들에게 전달했다. 오직 류카라한을 비롯한 핵심 인물만 정확한
사실을 알 뿐.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완벽한 함정이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라한은 방 안에 틀어박혔다. 테세르와 슈라,
변의 출입마저도 통제할 정도로 완벽한 격리였다. 문 밖에서 테세
르가 몇 번이나 라한을 불렀지만 그냥 물러가라는 말만 할 뿐, 방
밖으로 나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낸 지 5 일.
라한이 초췌한 모습으로 방을 나왔다. 모습은 그랬지만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주인. 무슨 일 있어?
"먼저 에테로님한테 가 봐야겠다. 너희들은 여기 있어. "
라한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블리아드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집
중시킨다. 그가 해놓은 일이 많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세르와 슈라의 움직임은 라한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
들이 한 번 움직이면 마을 전체가 술렁이며 전쟁 통을 방불케 했다.
거대한 덩치가 쿵쿵거릴 때마다 아이들은 슈라를 따라다니기 바
빴고 테세르가 손을 한 번 들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몸을 움찔거리
며 겁에 질리기 일쑤였다. 정령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완전히
두려움을 버리지 못한 모습이었다.
라한은 거추장스러운 일을 막기 위해 혼자 움직일 생각이었다
공간 이동을 사용하면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는 일. 조
용히 가서 처리할 일이었기에 혼자 가는 게 나을 성싶었다.
-괜찮아? 얼굴이 말이 아닌데.
"괜찮아, 기분은 아주 좋으니까. "
라한이 문을 활짝 열고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폐부까지 시원
해지면서 머리가 맑아졌다.
"아! 좋다. 금방 올 테니까 말썽 피우지 마라. 공간으로. "
라한이 테세르에게 한차례 주의를 주고 공간 이동을 감행했다.
테세르는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굳이 보채지는 않았다.
5 일간의 칩거 후 나타난 라한.
나름대로 생각해 둔 게 있어서 움직였을 터였다. 그런 상황을 대
충은 눈치 챘기에 보챌 수 없었음이다.
변화를 재촉하다
닉스의 술집으로 간 라한이 에테르와 마주 앉았다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 라한과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는 에테르 꽤긴 시간을
말없이 마주하고 있음에도 그 누구 하나 답답해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군요
때가 되면 하겠지
훗 에테로님은 그 성격 때문에 오래오래 살 겁니다
허허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에테로의 소탈한 웃음에 라한의 마음도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뭐랄까 세상사를 달관한 사람의 지혜를 엿봤다는 느낌 그런 오
묘한 기분에 마음까지 아늑하게 변했다
전 에테로님과 대화하는 게기분 좋습니다
나도 자네 같은 뛰어난 젊은이와 대화하는 게 즐겁다네
"에테로님은 못 당하겠군요. "
"그래, 말할준비는 된 듯하구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
만 해 보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겠네. "
에테로의 말에 라한이 잠시 머뭇거리다 힘겸게 입을 열었다.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
"말해 보게. "
"카이렌 진영에 보낸 세작이 혹시 그의 정보 담당으로 있는 사람
입니까?"
원래 라한은 베사 길드가 심은 눈이 누군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믿는 에테로의 손안에 있는 사람일 테니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이 누군지 깨달았다. 그러자 베사
길드의 정보력에 대해 감탄을 넘어서서 두려움마저 느끼게 되었다.
카이렌 진형에서 정보를 담당하는 헤르만. 그는 카이렌으로 분
장해서 드래곤 둘을 완벽하게 속여 넘긴 하프 엘프였다.
"그렇다네. 하프 엘프이면서 우리 길드 소속이지. 어떻게 알았
는가?"
"드래곤 둘과의 싸움에 있었던 이들 중 제가 모르는 사람은 두
명입니다. 한 명은 나무 안에 숨어서 드래곤을 죽인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카이 렌으로 분장한 사람이죠. "
"그런가?"
"예. 그런데 베사 길드는 정보 길드입니다. 다크라이더 길드가
전신이니 암살자 길드라고 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곳의 암살
자들로 드래곤을 암살하기는 힘들죠. 아마, 드래곤을 죽인 그는 굴
레를 벗은 이들 중 한 명일 겁니다. 카이렌에게 몸을 숨기는 법을
어느 정도 배운 사람이겠죠. "
라한이 본 다크라이더 길드는 대륙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하나를보면 열을알듯, 정보를다스리는그들의 능력을보면
암살자들의 능력도 능히 짐작이 갔다.
하지만상대는 다름 아닌 드래곤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암살자
라도 처리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만약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대륙
에 있는드래곤은 이미 오래전에 씨가 말랐을 것이다. 결국, 다크
라이더 길드의 초특급 암살자가 드래곤을 죽이길 바라는 것보다 굴
레를 벗은 이들 중 한 명이 카이렌에게 은신술을 조금 배우는 게 더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허허. 그렇군.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좀 두려운 생각이 들더군요. "
"뭐가 말인가?"
"베사 길드의 정보력 말입니다. 좀무서울 정도입니다. 만약 이
들이 저에 대해 파고들면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
강한 사람을 수족으로 두는 건 모든 이의 바람이다 하지만 그
수족이 너무 강해서 통제마저 불가능하다면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
었다. 지금 라한의 경우가 딱 그러했다.
베사 길드의 정보력은 뛰어나다 못해 두려울 정도였다. 이들의
정보력과 은밀함이면 자칫 자신도 등 뒤에서 칼을 맞을 수 있는 것
이다. 또, 이들의 정보력이 나쁜 일에 사용된다면 대륙 전부를혼
란에 빠뜨리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음, 이해는 가네, "
"묻겠습니다. 세상을 집어삼킬 생각이 있습니까? 솔직하게 말
씀해 주십시오. "
"왜 그런 질문을 던지는지 알겠네. 후후, 이제 자네가 인간으로
보이는군. "
" 예?"
"전에는 뭐랄까? 달관했다고 할까? 나쁘게 말하면 자신 외에는
관심 없는 태도 때문에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네. 그런데 지금은 인
간으로 보이는구먼. 세상이 혼란아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면서 인간이라는 종족을 생각하는 마음도 그렇
게 보이는군. "
에테로의 평가에 라한도 자신이 그랬나에 대해 고민해 봤다. 아
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잘 모르는 얘기였다.
최근에 스스로 인간적이고 싶어 노력한 건 사실이다. 그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런 노력이 세상을 생각하는 마음이었던가? 아니면
인간이라는 종족을 생각하는 마음이었던가? 그것도 아니면 순전히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었던가?
'내가 인간인 건 확실하고 점점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 그런 내가다시 인간성을 회복한건가?모르겠군. 모르
겠어. '
라한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지금은 이런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었다. 다시 에테로를 바라본 라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대답을 안하셨습니다. 세상을 집어삼킬 생각입니까? 베
사 길드뿐 아니라 다크라이더 길드도 함께 포함해서 물어보는 겁
니다. "
"후후, 글쎄다. 자네가걱정하는건 우리가이 세상을뒤에서 조
종하는 것일 테지. 우리가 가진 정보력으로 말이야. 맞는가?"
"맞습니다. "
"그러지는 않을 게야. 뒤에서 조정해서 뭐 하는가? 그런다고 세
상 사람들이 베사 길드가 주인이라고 인정해 주는가? 단순한 자기
만족과 야망을 위해? 아닐세. 우린 그런 야망을 품은 적이 없어.
자기만족에도 관심이 없네. "
에테로의 목소리는 어딘지 쓸쓸하게 들렸다. 너무 애잔해서 라
한의 기분마저 가라앉을 정도였다.
"왜요? 그런 야망을 품을 법도 한데요. "
"자네는 모르겠지. 내가, 아니 다크시안님을 포함해서 우리가
왜 암살자 길드와 정보 길드를 만들었는지 자네는 모를 거야. 휴우
우, 우린 세상에 대한 증오가 가득했네. 누군가에게 버림받거나 조
종받은 경험이 있거든. "
"그럼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들었겠군요. "
"끝까지 듣게. 물론, 그런 마음을 먹은 적이 없다고는 못 하겠
네. 하지만 우린 그런 방법보다 우리 같은 사람을 구제하는 길을
택했네. 대륙 북동부 사피을 지방은 원래 거대한 평야였네. 십여
년 전 우린 그곳을 사들여서 집을 지었지. 그리고 우리처럼 버림받
거나 누군가에게 조종당했던 이들을 데려다 키우고 있네. "
라한도 사피을 지방의 변화에 대해서는 얼핏 들은 바가 있었다.
최근 10 년 사이에 가장 크게 변화한 곳으로 대륙에서 쾌나 유명
했다. 그곳의 주인이 누군지 누가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죄 없이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
었다.
"거기가
"그곳을 만들자고 말한 사람이 다크시안님이고 그걸 실천에 옮
긴 사람이 나일세. 우리 꿈은 자네가 말한 것처럼 그리 거창하지
않아. 작은 지방을 얻어서 그곳에서 마음 편히 지내고 싶을 뿐이
네. 비록 우리가 지금은 다크라이더 길드와 베사 길드의 수장으로
있지만, 일만 마무리되면 그곳에 은거해서 지낼 생각이네. 우린 마
음이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거든 "
에테로의 말에 라한도 느끼는 게 많았다. 작은 행복. 특히, 마음
이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그의 말은 라한의 가슴 깊숙이 박히는 말
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
"아닐세. 오해를 할 법한 일이었으니 이해하네. 오히려 지금이
라도 믿어주니 고맙구먼. "
"이거 아침부터 괜히 찾아와서 소란만 피우다 가는군요. "
"멀리 나가지 않겠네 "
라한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닉스의 술집을 나왔다. 잠깐 나와 길
을두리번거리던 라한이 방향을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촌장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라한이 방문했을 때 촌장은 자신의 집을 내주고 다른 곳에서 지
냈다. 하지만 라한이 자기 집을 구한 뒤부터는 촌장도 원래 자기가
살던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라한이 방향을 잡은 곳도 자신이 잠시
머물렀던 촌장의 집이었다.
똑!똑!
"촌장님. 일어나셨습니까?"
철컥!
"어서 들어오게. "
촌장이 잠옷만 입은 채로 서둘러 뛰쳐나왔다 라한의 목소리에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일단 앉게. "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셨나보군요. "
라한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부드러운 말투와 목소리가 불안
했던 촌장의 따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괜찮네. 그래 무슨 일인가?"
"먼저 한 가지 밝힐 사실이 있습니다. "
"뭔가?"
"마을 원로들께서 절 드래곤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
니다. "
"흠. "
라한은 에테로와 대화를 마치고 나서 자신이 인간이라는 게 자
랑스러웠다. 딱히 인간에게 어떤 장점이 있어서가아니었다. 인간
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30 년 이상 살아온 라한.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이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번진 것이다.
"전 드래곤이 아닙니다. 촌장님과 원로들께서 오해하고 계신 겁
니다. "
"역시 그랬군. "
"촌장님은 알고 계셨군요. "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닐세. 나도 아함브라님 말씀만
들었을 때는 자네를 드래곤으로 믿고 있었지. 근데 자네가 지금까
지 우리 마을에서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바끼더군. 자네에
게는 따뜻한 온정이 느껴졌어. 내가 드래곤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
만 그런 따뜻한 마음씨는 우리 인간들만 가지는 게 아닐까?"
익스멈 촌장의 말이 라한의 기분을좋게 만들었다. 단순히 인간
으로 남에게 기억되고 있다는 말. 별게 아닌데도 미소가 절로 지어
졌다.
"감사합니다. "
"그런 말이나 하자고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할 말이라도 있
는 겐가?"
"몇 가지 건의할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
"말해 보게, "
촌장이 등을 등받이에 묻고 들을 채비를 갖췄다. 라한도 머리를
정리하며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블리아드 마을을 이대로 두실 생각입니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 자세히 말해주겠는가?"
"지금 대륙은 장기간의 가뭄으로 몹시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블리아드 마을은 제가 필요할 때마다 비를 내려서 다행히도 별 피
해가 없지만, 제가 계속 머물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겠지. "
익스멈 촌장의 얼굴에 불안감이 담겼다. 라한이 마을을 떠난다
는 말이 그를 초조하게 한 모양이다
촌장의 얼굴을 본 라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당장 떠나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마을이 혼자 설 수 있
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뿐입니다. "
"그래도 섭섭하구먼. "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설치한 결계가 영구적이지 않
다는 건 아시겠죠?"
라한의 물음에 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설치한 결계의 수명이 짧은 건 아니지만 언젠가는 사라질
겁니다. 전 그 기간을 50 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
"휴우우. 다행히 많이 남았구먼. "
"많이 남은게 아닙니다. 겨우 50 년. 그안에 몬스터는물론이고
케라스 왕국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힘을 키워야 합니다. "
"몬스터는 그렇다 치더라도 케라스 왕국은 왜? 우리가 케라스
왕국과 전쟁이라도 벌여야 한다는 말인가?"
익스멈 촌장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그를 보며 라한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50 년의 공백은 그리 작지 않거든
요. 50 년 후에 이곳이 개방됐을 때, 서로의 문화가완전히 같으리
라 생각하십니까?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그건 그렇지만. "
"문화적 차이는 생각의 차이를 낳게 마련입니다. 그런 생각의
차이는 오해를 부르게 되겠죠. 어쩌면 그게 빌미가 되어 전쟁이 벌
어질 수도 있는 일이고요. "
익스멈 촌장은 라한의 말에 뭔가 반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
무리 생각해 봐도 라한의 말이 옳았다.
50 년이라는 시간. 그것도 완전히 단절된 채로 보내는 50 년은 그
리 짧은 게 아니었다. 라한의 말마따나 문화적 공백이 만든 생각의
차이는 서로간의 부적응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대부분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완전히 흡수해서 차이가 나는 생각을 없애는 방
법을 택하게 마련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7"
"먼저 경제를 굳건히 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전문가를 양성해야
하고요. "
"전문가?"
"예. 농사만큼은 스스로 최고라 자부할 수 있는 농사 전문가. 농
기구를 만드는 일은 최고로 잘하는 농기구 전문가. 그리고 군사용
무기를 만드는 일에 단연 발군인 무기 전문가. 일을 최대한 세분화
해서 각 분야에서 전문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
익스멈 촌장은 라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
를 보며 라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어느 술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의 종업원은 손님
의 기분을 헤아리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
졌더군요. 그런 능력이 타고난 것일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서 만들어낸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
"그런가?"
익스멈 촌장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직도 전문가의 중요
성을 인식하지 못한 듯했다.
"제가 그 지방에 다시 간다면 반드시 그 술집에 갈 겁니다. 그 종
업원과 대화를 하는 일 자체가 편안했거든요. 아직도 느끼는 게 없
으십니까?"
"잘 모르겠네. "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면 몇 배의 성과를 거
둘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만약촌장님께서 아주 어린 시
절부터 촌장이 되기 위한 수업을 해왔다면 어땠을까요? 만약 이곳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농사에 대해 배웠다면 그가 컸을 때 어
떻게 변할까요?"
"어른이 되었을 때 농사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되겠지. "
그제야 익스멈 촌장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촌장수업
이라는 대목에서 마음이 움직인 모양이다.
실제로 익스멈 촌장은 촌장 수업이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받
지 못했다. 그는 아함브라가 갑작스럽게 촌장을 그만두고 새로이
촌장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 기간은 블리아드 마을 자체도 촌장의 무능
력으로 몹시 힘들어 한 시기였다.
만약 촌장이 되기 위한 어떤 교육을 미리 받았다면 그렇게 힘들
어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또, 블리아드 마을로서도 혼란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게 분명했다.
"한분야에 대해 아주 어릴 때부터 꾸준히 노력하면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문가가 된 사람을 충분
히 존중해 주고 대우해 준다면 사람들도 노력을 기울일 겁니다. "

"지금 블리아드 마을 사람들은 딱히 잘하는 분야가 없습니다
모두 이 분야 저 분야에 손을 대기 때문입니다. 이것저것 할 줄 아
는 건 많지만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그런 어정정한 사람이 되어 버
린 겁니다. "
라한의 말이 익스멈 촌장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꽃혔다.
그도 이런 일 때문에 안타깝게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
다. 일은많고 일손은적고. 그런상황이 계속되다보니 어쩔수없
이 이렇게 된 거였다.
"하지만 일손이 너무 부족하네. "
"아니오. 일과사람의 배정이 잘못된 겁니다. 지금 집집마다 기
르고 있는 가축은 가축 전문가를 정해서 맡기고 그가 하고 있던 농
사일은 가축을 넘긴 사람에게 나눠주십시오. 또, 농사와 자경단 일
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검에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는 농
사를 그만두게 하십시오. 마찬가지로 농사에 재능이 있는사람에
게는 검을 손에서 놓고 쟁기와 호미만 손에 들도록 만드십시오. 그
리고 끝으로 어린아이들에게는 글을 필수적으로 가르치고 어느
정도 성장하면 분야를 나눠서 집중적으로 공부하도록 하십시오. "
라한의 긴 설명에 익스멈 촌장이 혀를 내둘렀다. 자신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얘기였다.
근데 듣고 보니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어차피 나눈다고 해서
일이 늘어나지는 않는다. 한 사람이 맡는 일의 가짓수가 줄고 맡은
일의 양이 늘어나는 것일 뿐이다 일의 효율이 오르니 오히려 더
큰 이득을 남길 듯도 싶었다. 문제는 업무의 교환 과정에서 생길
혼란과 공백 기간의 무노동이었다.
"그럼 그 변화기간은 . "
"슈라와테세르, 변을 이용해서 최대한돕겠습니다. 대신 3 개월
안에 해결하셔야 합니다. 그 기간만도운후에 일에서 손을 뗄 생
각입니다.
익스멈 촌장의 얼굴이 신중하게 변했다. 이 일의 성패에 대해 깊
이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라한은 촌장이 생각을 마칠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한
참 후 익스멈 촌장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3 개월이라
"촉박하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제게도 시간이 많지 않으니 이
해해 주십시오. "
"노력해 보겠네, "
이제 라한이 해 줄 수 있는 얘기는 다 끝났다. 남은 건 익스멈 촌
장과 블리아드 마을 사람의 몫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잘해 낼 수 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들이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최선을 다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라한이 몸을돌렸다. 그상태로 집을 나가려던
라한이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촌장님. 제가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
"말'하게. "
"지금 블리아드 마을의 촌장은 다른 사람이 아닌 익스멈 촌장님
본인입니다. 아함브라님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더 이상 휘둘리지
마십시오. "
라한의 말에 익스멈 촌장이 발끈하듯 입을 열었다.
"그분은 전대 촌장이셨네. 그분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건 당연한
일일세. "
"의견을 물어보는 정도라면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그분이 모든
정책을 결정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두머리가 둘이면 조직
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죠. 그냥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럼 이만. "
할 말을 마친 라한이 다시 몸을 돌려 집을 나갔다. 익스멈 촌장
라한이 한 말을 계속 되새기며 고민했다.
'우두머리가둘이면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돌아가지
않는다 않는다 휴우, 모르겠군. '
로테마이어스가 자신을 따르는 드래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대
륙 곳곳에서 정보를 모으던 드래곤도 모두 포함해서였다. 로테마
이어스를 제외하고도 열세 마리나 되는 수였다.
"로드님. 모두 모였습니다. "
"역시 프리미아가 안 보이는군. "
"죄송합니 다. "
로테마이어스가 아카폴리안의 짧은 대답을 듣고 주변을 찬찬히
훔었다. 자신을 포함하면 모두 열넷. 대륙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도
있는 엄청난 세력이었다
"아카폴리안 "
"예, 로드님. "
"네가 여기 있는 드래곤들 중에선 나이가 제일 많군. "
" 예. "
아카폴리안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래봐야 겨우 몇 십 년 차이였
다. 드래곤의 수명을 감안하면 아주 작은 차이인 셈이다. 인간으로
치자면 겨우 몇 개월 정도이니 말이다.
"오늘 결판을 짓는다. "
" 예. "
로테마이어스의 선언에 다른 드래곤들이 웅성거렸다. 아무런 언
질도 받지 못한 탓이다. 갑작스러운 공격 명령에 어안이 벙벙했다.
로테마이어스가 내릴 결판이라면 류카라한 일행과 카이렌 일행.
그리고 라한을 죽이는 것뿐이다.
원래는 로테마이어스도 라한과 다른 일행을 치는 걸 더 신중하
게 하려 했다. 가장큰 변수인 라한의 실력을알방법이 없었기 때
문이다.
그랬던 로테마이어스가 공격을 결정한 건 카이렌 일행과 드래곤
둘과의 대화에 기인했다. 그들의 입에서 라한을 걱정하는말을들
은 것이다.
라한의 실력을 가장 잘 아는 이는 그와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카
이렌 일행이다. 그런 그들의 입에서 라한의 안위를 걱정하는 말이
나왔다. 그건 드래곤 둘로도 라한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는 얘기
와같았다. 결국, 로드인 로테마이어스의 실력이라면 라한을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라한 이놈. '
지금까지 라한의 허세에 놀아났다고 생각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아카폴리안. 네가드래곤 넷을 데리고 카이렌 일행을 친다. 목
표는 필살. "
"알겠습니다. "
아카폴리안이 드래곤 넷을 골라 옆으로 물러섰다. 가름이 끝나
자 로테마이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리투미아. "
"네. "
"너도 드래곤 넷을 데리고 류카라한 일행을 쳐라. 마찬가지로
목표는 사살이다. "
"알겠습니 다. "
로테마이어스가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리투미아에게 류카라한
일행 공격의 지휘권을 맡겼다. 라한에게 패해서 돌아오기는 했지
만 그래도 가장 신중한 그가 믿음직스러웠으리라.
"벨라루스. 몸은 좀 괜찮으냐?"
"목숨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
"넌 나와 함께 라한에게 복수하러 간다 넌 몸이 아직 완전히 회
복되지 않았으니 구경만
마지막 명령을 내리려던 로테마이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만나
고 싶지 않은 이의 기운을 느낀 탓이다.
로테마이어스가 레어의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지나
자 금발을 탐스럽게 기른 중년 노인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베르타라스님. 여긴 어쩐 일입니까?"
로테마이어스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드래곤
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베르타라스님을 뵙습니다. "
"전대 로드님을 뵙습니다. "
"그만. 로드여. 나하고 갈 곳이 있다. "
"베르타라스님. 오늘은중요한 일을 할생각입니다. 다음에 찾
아뵙도록 하죠. "
로테마이어스의 머릿속에는 라한에 대한 살심밖에 없었다. 지금
까지 그에게 놀아났다고 생각하자 하루도 더 지체하기 싫었다. 최
대한 빨리 달려가서 모가지를 비틀어놓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
을 것 같았다.
"로드여. 오늘은 반드시 나와 가야 한다. "
"저 역시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
"흠, 드래곤들을 많이 모았군. 오늘 그들을 죽일 셈인가?-
"예. 막는다면 설사 베르타라스님이라 하더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
로테마이어스의 대담한 말에 베르타라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
신이 뽑은 로드 로테마이어스. 자신의 실수가 대륙에 피를 부른다
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왔다.
"그래. 내가로드가하는 일을막을수는 없겠지. 난늙은드래
곤일 뿐이니까. 하지만 오늘은 나도 물러설 수 없다. -
"베르타라스님 !"
로테마이어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끝까지 막고 나오는 그가
짜증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베르타라스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보게 로드. 오늘 일은 내 사심이 있어 온 게 아닐세. "
"그럼 ?"
"신의 사자가 찾아왔네. 차기 로드가 된 자네를 만나고 싶은 모
양이야. "
"신의 사자? 판테아?"
로테마이어스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물음에 베르타라스
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니더군. 신의 사자가 바꿔 모양이야. "
"그럼요?"
"이름이 퓨리트라고 하더군. "
퓨리트는 몇 년 전 판테아의 후임으로 저승사자가 되었다. 심심
하면 라한을 살펴보며 마치 영화를 보듯 구경했던 퓨리트. 그는 판
테아의 경우를 거울삼아 웬만하면 물질계에 간섭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너무 길어진 가
뭄과 대륙 전체에 퍼지는 전쟁의 기운. 거기다 드래곤들 사이에서
퍼지는 강한 살기의 느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방문한 것이다.
"흠, 알겠습니다. 아카폴리안. 네가나대신 정리 좀해라."
"알겠습니다, 로드님. "
로테마이어스의 말은 오늘 일을 다음으로 미룬다는 말이었다.
다섯의 드래곤이 각각의 진영을 치더라도 라한이 어느 한쪽에 합세
하면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알수 없는 법. 다음에 자신까지 힘을
합해서 완벽하기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카폴리안은 로테마이어스가 하려고 했던 일을 자신에
게 맡긴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라한에 대한 공격을 아카폴리안이
지휘하는
"베르타라스님. 혹시 거짓을 전하는 건 아니겠죠?"
"난 지금까지 맹세를 했건 안했건 거짓말을 한 적이 없네. "
드래곤들이 맹세와 이름을 걸고 한 약속에 약한 건 사실이다. 대
신 아무것도 걸지 않은 약속에는 그리 얽매이지 않는다. 때론 거짓
말도, 때론 사기도 치는 존재가 드래곤이다.
그러나 베르타라스는 유희 때를 제외하면 그 어떤 거짓말도 한
적이 없다. 심지어 유희 때에도 거짓을 싫어해서 진실된 행동을 하
려고 최대한 노력했던 이가 베르타라스였다.
"알겠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내 레어에 있네. "
"가시죠. "
로테마이어스의 눈가가 약간 찌푸려졌다. 신의 사자인 퓨리트가
베르타라스의 레어에 있다는 게 거슬린 모양이다.
누가 뭐래도 현재 로드는 로테마이어스였다. 신의 사자가 찾아
온다면 자신을 먼저 만나는 게 순리였다. 한데도 자신이 아닌 베르
타라스를 먼저 찾아갔다.
만약 예전 신의 사자였던 판테아라면 친분 때문에 먼저 갔다고
도 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퓨리트는 베르타라스로서도 처음 만
나는 존재였다. 그럼 지위를 봐서라도 자신을 먼저 찾아와야 정상
이었다.
"가지. 매스 텔레포트!"
베르타라스와 찡그린 얼굴의 로테마이어스가 모습을 감추었다.
블리아드 마을은 라한이 말한 전문가 양성을 위해 눈코 뜰 새 없
이 바빴다 마을 사람들이 잘하는 걸 가려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해본 일이기에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도 저것도 잘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
렇다고그들에게 마냥놀도록할수는 없는 일. 그나마소질이 있
는 부분을 찾아내서 집중적으로 교육시켜야 했다.
이제 겨우 5 일이 지났음에도 진척이 상당히 빨랐다. 아직 본격
적인 교육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할 일을 나누는 일은 거의 마무
리 단계에 와 있었다.
그동안 라한과테세르, 슈라, 변은 비어 있는마을의 일손을채
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당장 겨울에 먹고살아야 하기에 농사일도
손을 대야 했고 부서진 쟁기를 고치거나 자경단원의 무기를 손보는
일도 모두 그들의 몫이었다. 심지어 부서진 집을 보수하고 울퉁불
퉁해진 길을 다듬는 일도 모두 그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아이고, 허리야. 재수 없으면 처음으로 허리 못 쓰는 정령 나오
겠다.
-난 손가락이 많이 무텨졌다. 매일 손으로 밭고랑을 만들다 보
니 엉망이군. 아무래도 다시 한번 소환해야겠어.
테세르의 엄살에 슈라도 같은 식으로 응수했다. 걱우 5 일이었지
만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테세르가 주로 한 일은 나무를 베고 돌을 나르는 일이었다. 셋
중에서는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테세르. 그에게 가장 적합한 일이
었다.
슈라는 거대한 덩치와 힘을 바탕으로 밭을 가는 일을 맡았다. 손
가락으로 한 번 슥 그으면 완성되기는 했지만, 너무 넓고 많은 곳
이라 그 역시도 쉽지 않았다.
조용히 물속에서 혜엄을 치는 변이 맡은 일은 밭에 물을 주는 일
이었다. 또, 땅속에 있는 수맥을 발견해서 우물을 만드는 일도 그가
한 일이었다. 세상에서 물과가장친숙한존재인 변. 그는깊은곳
에 있는 물도 귀신같이 찾아냈다. 그에게 가장 적합한 일인 셈이다.
-주인. 이 일을 얼마나 오래 해야 하는 거야?
"다섯 달. "
-힘들어서 못 하겠어.
"참아. 그동안 마을 사람들 덕에 편하게 쉬었잖아. "
라한의 얼굴에도 픽곤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농기구를 고
치고 집을 보수하는 그의 일도 쉽지 않았기 패문이다. 한데도 그는
힙들다는 표현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주인. 얼굴 표정이 어째 좀 그렇다. 무슨 일 있어?
"이틀도 안 남았어. "
-뭐가?
"카이렌이 류카라한 일행의 함정에 빠지는 날 말이야. "
-아, 맞다.
류카라한의 계획대로라면 이틀 후 자정에 카이렌이 공격을 할
것이다.
라한은 내심 카이렌이 류카라한이 판 함정에 속지 않기를 바랐
다. 한데, 에테로가 가져다준 정보를보면 아무래도속은듯했다.
바로 내일 류카라한의 골렘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카이렌이
었다. 아마 라한이 모른 척한다면 함정에 빠져 큰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다.
"내일 잠시 갔다 와야겠다. "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냥 입구부터 마구 흔들어놓을 생각이야. 뭔가 심상찮은 분위
기를 느끼면 카이렌도 골렘 파괴를 감행하지 않겠지. "
라한의 의도는 류카라한 진형의 겉을 완전히 파괴하는 일이었
다 그렇게 여기저기 박살내 놓으면 카이렌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
를 느낄 테고, 그럼 골렘을 부수는 일을 다시 생각할 거라 믿었다.
-야호. 신난다. 그럼 내일은신나게 싸울수있겠네.
"쳇. 넌 아무리 봐도 정령 같지가않아. 싸우는 걸 너무좋아하
잖아. "
-나도 그게 신기해. 히히
테세르는 이 지겨운 일에서 하루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게 마냥
좋았다
라한이 하루를 정리하고 잠을 청하려 했다. 그때 눈앞에 아지랑
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라한이 몸을 바로
잡고 세라 소드를 움켜잡았다.
-라한. 그 검은 내려놓게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의 영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정령계에서 영상만 라한에게 보여주는 예전의 그 방법
이었다.
"실피드?"
-그래. 나실피드다. 다행히 여기 있었군.
"여긴 무슨 일이지. 그것보다 자연하고 대화는 성공했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실피드의 음성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웬만한 일에는 조급함을
보이지 않는 조화의 존재 정령. 그들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무슨 일인데?"
-골드 드래곤 아카폴리안이 널 공격하기 위해 드래곤들을 끌어
모았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흠, 방금 정확한 정보가들어왔군
드래곤 다섯. 그들이 널 치기 위해 오고 있다.
꽝- !
라한이 탁자를 강하게 두드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혀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라한은 드래곤 둘이 패했으니 다음은 로테마이어스가 직접 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로테마이어스가 다른 드래곤들에게 위신을
세우는 길이니 말이다.
또, 라한에 대한 분노는 그 누구보다 로테마이어스가 더 클 터.
직접 와서 처리하는 게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런 라한의 생각이 완전히 빗나갔다 카이렌이 드래곤과 했던
대화 그리고 로테마이어스와 아카폴리안 간의 잘못된 의사소통.
이 두 가지가 라한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게 만들었음이다.
"대체 왜?"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는 것보다 몸을 피하는 게 우선이다. 네
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드래곤 다섯을 상대할 수는 없어. 설사
로테마이어스라도 다섯의 드래곤과 싸우는 건 무리야.
"젠장. "
-그들은 정정당당한 싸움을 좋아하는 무리들이 아니야. 분명 기
습을 택할 거야. 빨리 피해.
라한은 실피드의 경고가 고마웠다. 그의 말이 아니었다면 싸움을
이곳에서 했을 게 분명했다. 드래곤 다섯과 라한의 싸움, 결과가 어
찌 췄든 블리아드 마을의 초토화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제 막 자
리를 잡아가고 있는 블리아드 마을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테세르,슈라. 일단돌아가. 변!변!"
라한이 보이지도 않는 테세르와슈라를 강제 귀환시켰다. 지금
은 그들을 불러서 의견을 구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생각
과 동시에 행동할 때였다.
"변! 변! 어디 있어?"
삐걱!
-크릭?
물 덩어리 변이 문을 살짝 열고 얼굴만 내밀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표정 이 었다.
"이리 와! "
라한이 변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로 그의 허리를 휘어잡았다.
-라한 서두르게. 난 이만 가네.
라한이 서둘러 집을 나왔다. 그리고 막 마법을 시전하려다가 몸
을 멈추었다.
'젠장. 그냥은 안 돼 '
라한이 변을한손에 잡은 채로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 짧은 글을 휘갈겨 썼다.
날 죽이고 싶으면 세바스헤스 평원으로 와라 -라한
라한이 도전장을 쓴 종이를 문 앞에 붙였다.
그냥 갔다가는 블리아드 마을이 온전치 못할 수도 있다. 또 싸움
을 피한다고 마냥 싸우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싸워야
할 거라면 블리아드 마을에 피해를 주지 않고 싸우고 싶었다.
"변! 확 잡아라! "
스팟!
라한은 공간 이동 대신 광견보를 시전했다. 그것도 발자국을 강
하게 찍어 흔적까지 남겼다. 드래곤들이 나타났을 때 라한이 남기
고 간 흔적을 발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세바스테스 평원은 블리아드 마을에서 서쪽으로 한참 가야 나온
다. 지금 그곳은 베어울프의 서식지가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넓
은 데다 강까지 끼고 있어서 싸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
었다.
세바스테스 평원의 중앙을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 세스리안 강.
그 가에 있는 거대한 바위에 라한이 걸터앉았다.
"테세르, 슈라. "
라한의 부름에 강제 귀환췄던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을
보며 라한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휴우우. "
-주인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곧 큰 싸움이 벌어질 거야. "
-여기가류카라한 그놈이 함정이 만든곳이야? 아싸. 어디 있
어? 그놈들 어디 있어?
테세르의 철없는 말에도 라한은 미소만 지었다. 처연하기 그지
없는 미소에 슈라가 뭔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다.
-주인. 무슨 일 있는 거로군. 여기가 어디지?
-어?그러고보니 여긴 내가 매일 돌 가져오던 곳이네. 세바스
테스 평원이던가?
"맞아. "
세바스테스 평원 곳곳에는 작은 바위산이 여러 개 존재한다. 이
때문에 몬스터가 없을 때에도 농토로 각광받지 못했다. 땅도 비옥
하고 강까지 끼고 있음에도 지형적 영향으로 그리 발전하지 못했던
세바스테스 평원. 이곳에 바위산만 없었다면 케라스 왕국에서도
어떻게든 이곳에서 몬스터를 몰아냈을 터였다.
-여긴 왜 온 거야?
"말했잖아. 싸우러 왔다고. "
-대체 누구하고 싸우는데? 로테마이어스라도 온 거야?
-맞나 보군.
테세르의 말을 슈라가 받았다. 그 말에 테세르의 얼굴이 급속도
로 어두워졌다.
슈라의 얼굴도 말이 아니었다. 드래곤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지
금은 라한을 모시고 있는 슈라였다. 기왕이면 드래곤과의 싸움에
는 참가하고 싶지 않은 그였다.
"아니 . "
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모습에 테세르와슈라의 얼
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들은 드래곤만 아니면 누구하고든싸울자신이 있었다. 특히
슈라는 드래곤 로드만 아니면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창
조자의 위치에 있는 이를 어찌하는 건 껄끄러웠음이다.
-그럼 됐네. 다 나오라고 해. 드래곤이야? 까짓것 그놈들이야
그냥 처 리하자고.
"다섯이라고 하더군. "
-어?
"이번에 날 죽이기 위해 오는 드래곤이 다섯 마리라고. "
-컥!
테세르가 입을 떡 벌리며 황당하다는표정을 지었다. 슈라의 얼
굴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이건 창조자에 대한 예의 문제가 아니었
다. 드래곤 다섯이 힘을합쳐서 공격하는상황. 라한의 안위가위
협받을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마을에 위해를 주는 게 싫어서 이리로 왔어. "
-바보 주인. 우리 도망가자. 다섯 마리는무리야. 주인도 전에
그랬잖아. 아직 힘을완전히 사용하지는못한다고. 그렇게 말했잖
아. 일단 도망갔다가 나중에 싸우자.
"흠. "
라한도 싸우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길 자신이 있는 싸움만
했지만, 이젠싸움그자체가싫었다. 그냥조용히 초야에 묻혀서
남은 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쿠오오오오!
-쿠오오오!
-쿠오오오!
멀리서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반응하듯 또 다른 포효 소리
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늦었군. "
-주인!
"싸울 수밖에 없어. "
-왜?
"내가 싸우지 않으면 블리아드 마을이 사라질 거야. "
언젠가부터 갖게 된 인간적인 마음. 그런 감정이 라한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예전이면 도망치고도 남았을 일에 어쩔 수 없이 싸워
야 하는 상황이 었다.
-쳇.
"변. 네 역할이 크다. 저기 강에 들어가있어."
-크릭!
라한이 강가를 싸움터로 정한 건 변의 능력 때문이었다. 물만 있
으면 거의 무적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는 변. 그의 도움으로 회심을
일격을 노리기 위함이었다
팔락!
착- !
라한의 눈앞에 종이 한 장이 가로로 흔들리며 떨어졌다. 그 종이
를 라한이 낚아채듯 손에 쥐었다.
-크크크크. 감히 그따위 도전장으로 우릴 귀찮게 하다니
-하찮은 인간이 겁을 상실했구나.
라한 앞으로 공간 이동 되어온 종이는 그가 남겼던 도전장이 었다.
그 도전장을 보며 라한이 은은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다행히 자
신의 도전장을 보고 찾아왔다. 드래곤의 급한 성격을 생각할 때,
마을에 피해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전장을 보자마자 라한을
죽이기 위해 날아왔을 테니까.
"다행이군. 근데 여섯인가?"
실피드의 말로는 다섯의 드래곤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라한 앞
에 나타난 드래곤은 여섯이었다.
-크크크. 벨라루스. 마지막은 너에게 맡길 테니 적당한곳에서
쉬고 있어라.
-흠, 부탁하마.
라한에게 엄청난부상을 입고 달아났던 벨라루스. 그가포함되
어서 하나가 늘어난 거였다.
라한은 벨라루스라는 이름을 듣고서야 그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전에는 폴리모프 상태로 싸웠기에 본체를 보지 못한 탓이다.
"나한테 박살 나더니 친구들을 데리고 왔군. "
-닥쳐라.
"내 기억에 넌 나와 이름을 걸고 약속을 했다. 그때 날 죽이겠다
는약속이었지 한데, 넌 약속을지키지 못했어."
-그, 그건
라한은 로이나, 프리미아와 함에 지내며 드래곤에 대해 쾌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이름을 건다는 의미와 맹세에 대해서도 그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이름을 걸고도 넌 나와의 약속을 어겼다. 그럼 벨라루스라는
이름을 쓰는 이는 내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 내 말이 틀렸나?"
-큭
벨라루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신음만 흘렸다.
잠깐 말하고 지나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한데, 라한이 그
말을 언급하자 당시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넌 내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 그 소원마저 들어주지 못하면 넌
드래곤으로서의 삶을마감하게 되지. 아, 다른종족은환생이라는
걸 하지만 드래곤은 죽음이 곧 소멸이라던가?"
-원, 원하는 게 뭐냐?
결국 벨라루스가 저자세로 나왔다. 소멸 당하는 상황까지는 어
떻게든 막아보고 싶었음이다.
벨라루스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다른 드래곤들도 웅성거리기 시
작했다. 벨라루스가 라한과 이름을 걸고 약속했다는 걸 몰랐던 다
른 드래곤들, 만약 알았다면 이 자리에 데리고 나오지는 않았을 터
였다. 라한만 죽이면 소원을 말할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라한이 다른 드래곤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가장 약한 드래곤을
찾기 위함이었다.
'저놈이 좋겠군. '
라한은 벨라루스와 다른 드래곤 하나를 맞상대시킬 생각이었다.
문제는 벨라루스의 부상이 심각하다는 점이다.
겨우 날아다니고 말하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전투가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벨라루스. 그에게는 가장 약한 드래곤을 상대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더라도 이길 가능성이 몹시 낮았다
"이리와 봐. "
큼.
벨라루스가 천천히 날아서 라한 앞에 섰다. 얼굴을 약간은 숙인
모습이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운 듯했다
"치료하기. "
라한이 벨라루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치료를 시작했다. 라한이
다시 손을 떼자 벨라루스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라한에게 당
한 상처라 라한이 치료하는 게 더 효과가 있었음이다.
'아직은 무리군. '
치료는 했지만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다. 힘을 회복하는 데에
는 시간이 필요한 탓이다. 하지만 부상은 완전히 치료되었기에 좀
전보다는 한결 나은 전투를 할 수 있을 터였다.
-이게 무슨 뜻이냐?
"내 소원을 말하기 위한 준비 단계 정도라고 생각해라
-소원이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거야. 너 저기 보이는 까만 드래곤 놈하고 싸워
야 한다. 죽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단, 저 드래곤이 날 공격하지 못
하도록 만들어라. 내 소원은 그게 전부다
생각 같아서는 그를 죽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
면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울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싸움의 결과는
보나마나 벨라루스의 패배였다. 완치는 췄지만 회복이 덜 된 탓에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하는 벨라루스였다.
문제는 그 싸움이 너무 빨리 끝날 경우 또다시 다섯 드래곤의 합
공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라한으로서는 최악의 상황과 맞닥
뜨리는 경우였다.
차라리 둘을 대충 싸우게 해서 전투에서 배제시키는 게 나았다.
물론, 다른 드래곤들이 위험해 처한다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최소한 그때까지라도 라한은 넷의 드래곤만 상대하
면 되었다.
-그런
-벨라루스. 빨리 이리 와. 까짓것 소원 들어주라고.
라한에게 지목당한 드래곤이 벨라루스를 불렀다 그의
밝은 목소리에 벨라루스의 얼굴도 조금은 밝아졌다.
라한에게 지목당한블랙 드래곤 이실리아. 그는 라한의 조건이
마음에 들었다. 드래곤 넷이면 라한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고 생
각한 것이다.
-이실리아.
-괜찮아. 앉아. 우린 구경이나 하자고. 어때?
-그럼 되는군.
벨라루스는 이실리아와 싸우는 게 껄끄러웠다. 몸 상태도 안 좋
았고 같은편과싸우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한데, 가만히 생각해
보자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되었다.
어차피 라한의 소원은 이실리아가 싸움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
는 일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해도 되는 것이다.
-그렇지. 달라진 건 너 혼자 구경하려던 좀 전에서 나랑 같이 구
경하는 걸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크크크. 라한. 똑똑한 척하더니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갔구나.
벨라루스가 라한을 비웃었다. 그 말에 라한도 머리를 짚으며 실
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연기였다.
지금 라한의 실력이면 드래곤 셋 정도는 어떻게 요리할 수 있다.
넷은 좀 버겁지만 테세르와 슈라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것도 가능할
듯싶었다. 문제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로테마이어스였다.
'해보자. '
"슈라, 테세르. 넌 저기 있는 저놈하고 놀고 있어. 나머지 놈들
처리하고 도와줄 테니까. "
-알았다.
-그러지.
테세르와 슈라가 화이트 드래곤 라모네샤트에게 달려갔다. 그
모습에 라모네샤트가 코웃음을 쳤다
-비천한 놈들이 겁이 없구나. 쿠오오오!
라모네샤트가 테세르와 슈라를 향해 마주 달려갔다. 살기를 풀
풀 흘리는 모습에 라한이 걱정스러운 빛을 띠었다
"조심해! "
-주인이나 조심해!
처음 공격의 시작은 라모네샤트의 발끝에서 시작됐다. 앞발을
이용해서 슈라의 가슴을 공격해 온 것이다.
-쿠오오오!
슈라는 그 발을 오히려 한 손으로 잡고 공중에 조금 떠 있는 라
모네샤트의 몸 아래로 뛰어 들어갔다.
-하앗!
슈라가 라모네샤트의 몸아래까지 파고들었을 때, 뒤에 숨어 있
던 테세르가 위로 뛰어올랐다.
목표는 라모네샤트의 눈이었다.
-건방지다. 블링크.
-빌어먹을.
테세르가 욕설을 내뱉고 슈라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들로서는
회심의 일격이었다. 라모네샤트가 최대한땅에 가까이 있을 때 어
떻게든끝장을봐야하는 일이었다. 한데, 결국실패했다. 이제 공
중에 높이 떠 있는 라모네샤트를 상대로 힘걱운 싸움을 벌일 수밖
에 없었다.
'역시 힘의 소모가 심해. '
슈라나 테세르 모두 힘의 원천은 라한이다. 그들의 움직임이 격
렬하면 격렬할수록 라한이 사용하는 힘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입장
이었다.
"네가 아카폴리안이 었던가?"
-기억하고 있군.
"이제 우리 차례로군. 시작하지. 공간으로!불의 공!"
공중에 떠오른 라한이 불덩어리를 아카폴리안에게 쏘았다. 탐색
을 겸한 공격이라 그리 매섭지는 않았다.
-엡솔루트 실드!
-쿠오오오!
라한의 공격은 아카폴리안에게 쉽게 막혔다. 어차피 어떤 부상
을 입힐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라한도 그리 아쉬워
하는 기색은 없었다.
라한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마자 다른 두 마리의 드래곤이
라한의 좌우를 치고 들어왔다.
"흥. "
라한의 원래 목표는 애초부터 아카폴리안이 아니었다. 역습을
가해을 드래곤 중 하나를 노린 일종의 포석이었다.
카오오오.!
콰콰콰쾅!
라한은 왼쪽에서 찍어오는 앞발을 가볍게 피하고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리고 테세르가 했던 것처럼 빠르게 위로 튕겨 올라갔다.
"물의 소용돌이! 바람의 향기!"
라한이 물의 소용돌이로 다른 쪽에서 공격해 오는 드래곤의 시
야를 가렸다. 그리고 바람의 향기로 전방에서 노려보고 있는 아카
폴리안에게도 공격을 가했다 이것 역시 공격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견제의 의미가 강했다.
"하앗! "
챙-!
라한이 세라 소드를 꺼내서 바로 앞에 선 드래곤에게 집어던졌
다. 정확성이 아무리 떨어지는 라한이라도 거대한 덩치의 드래곤
마저 못 맞출 정도는 아니 었다.
-쿠오오오!
왼쪽에 있던 그린 드래곤 메카드리가 라한의 세라 소드를 날개로
쳐냈다. 세라 소드는 메카드리의 날개에 맞고 멀리 튕겨 나갔다.
"투명해지기. 공간으로. "
라한이 메카드리가 날개를 드는 그 순간 몸을 투명하게 만들었
다. 그리고 메카드리의 턱 아래로 공간 이동했다.
퍼퍽!
-쿠욱!
라한의 주먹이 메카드리의 턱을 강타했다. 마법사로만 알았던
드래곤들. 갑작스러운 라한의 육탄 공격에 대처법을 찾지 못했다.
상대가 드래곤 스케일을 뚫을 수 있는 강한 검사일 경우에는 드
래곤 본체보다 폴리모프한 작은 몸이 유리하다 막기보다 피하는
방법을 전투법으로 써야 하는 까닭이다.
반면, 마법사와의 싸움에서는 폴리모프한 작은 몸보다 드래곤
스케일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본체가 휠씬 유리하다. 드래곤 스
케일이 가진 마법 방어 능력과풍부한 드래곤 하트의 마나. 이 두
가지의 도움만으로도 무적에 가까운 마법사가 될 수 있는 탓이다
드래곤들은 라한을 마법사라고만 생각했고, 그래서 본체로 공격
해 왔다. 폴리모프한 채로 싸우다 패한 벨라루스의 전례가 있다는
것도 본체로 공격해 오기로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데, 갑작스럽게 라한이 육탄 공격을 감행해 왔다. 전에는 보이
지도 않던 세라 소드도 꺼내 들었다. 도무지 검사인지 마법사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놈! 블링
퍼퍽!
라한의 주먹이 메카드리의 턱을 마구 강타했다. 주문을 외울 틈
조차 주지 않을 만큼 빠른 주먹 공격이었다.
-레드리안느.
-알았어.
아카폴리안이 레드 드래곤 레드리안느를 불렀다. 이에 레드리안
느가폴리모프했다. 확실치 않으니 둘은본체로 둘은 폴리모프한
작은 몸체로 싸울 생각이 었다.
퓨리트 강림
베르타라스의 레어
전대 로드답게 거대한 동굴 벽 전체가 화려함의 극치였다 물론
대부분의 드레곤이 금과 보석을 좋아하기는 한다 하지만 베르타
라스의 레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금덩어리였다 이 정도로
화려한 레어는 전 드레곤 준 오직 베르타라스의 레어가 유일했다
드워프의 세공 기술로 동굴 벽에 홈을 만들어 금괴를 박아 넣는
다 그리고 박아 넣은 금괴들 사이의 빈 공간은 사파이어 루비 다
이아몬드 오팔등등 대륙에서 값비싸기로 유명한 보석을 갈아 알
막게 끼워 넣는다 심지어 바닥도 어둠의 눈물이라은 애칭을 가진
흑요석을 깔아서 반짝이는 검은빛이 입을 다물수 없게 만든다
예술품에 가까운 베르타르스의 레어 안에서 저승사자의 수장 퓨
리트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 정도로 많은 보석을 구하기 위해 인
간과 드워프를 핍박했을 걸 생각하니 한심한 생각밖에 안 들었다.
"드래곤이라는 놈들. 어째 하는 짓이 다 마음에 안 들어 "
퓨리트의 말이 레어를 울렸다. 그 말에 앞에 앉아 있던 베르타라
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반면, 로테마이어스는 당당하게 고개를 쳐
들고 퓨리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퓨리트님. 로드를 데리고 왔습니다. 하실 말씀은
"내가 말하고 싶을 때 할 거니까 재촉하지 마라. 베르타라스. "
"죄송합니다. "
베르타라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로테마이어스는 베르타라스
의 저자세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베르타라스도 처음부터 이런 저자세를 유지한 건 아니었다. 처
음 퓨리트가 사자라고 나타났을 때는 오히려 로테마이어스보다 더
근엄하고 오만한 자세였다. 퓨리트가 자신이 신의 사자라고 한 말
을 믿지 못한 탓이다.
이에 퓨리트가 간단한 손짓으로 레어 근처에 있던 산 하나를 날
려 버렸다. 그리고 다시 손짓을해서 없어졌던 산을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본 후부터 베르타라스는 저자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베르타라스님 . "
"왜 그러는가?"
"왜 저딴 녀석의
"말조심하게. 저 분은 신의 사자일세. "
베르타라스가 급히 로테마이어스의 입을 막았다. 순간의 말실수
로 드래곤 전체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되었음이다.
"저놈이 신의 사자라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흠, 네가 로테마이어스라는 빨간 드래곤이군
발끈해서 외치는 로테마이어스에게 퓨리트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눈을 부라리고 퓨리트를 노려봤다.
"뭐라?"
"내가 신의 사자라는 걸 믿지 못하겠다고?-
"흥. "
퓨리트의 담담한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위기감을 갖기
시작했다.
말투에서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어떤 식으로 보여줄까? 음, 레드 일족을 이 세상에서 지워줄
까? 아니면 골드 일족을 지워줄까? 그냥 드래곤이라는 종족 전부
를 세상에서 지울까?"
퓨리트가 은근슬쩍 로테마이어스를 위협했다. 그의 지위가 로드
이니 가장 적할한 협박이었다.
"아이고, 퓨리트님. 그런 말씀은 말아주십시오. 제가 이 못난 로
드를 대신해서 사죄드리겠습니다. "
"베르타라스. 난 네게 한 말이 아니다. -
"부디 용서를
"한 번만 더 내 말에 끼어들면 판트리아 대륙에서 드래곤이라는
종족이 사라질 것이다. "
"크헙! "
베르타라스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협박 내용보다 퓨리트의 몸에
서 풍기는 살기에 놀란 얼굴이었다.
순간 베르타라스가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사죄를 청했다. 퓨리
트가 신의 사자임을 새삼 인지한 거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
옆에 있던 로테마이어스도 퓨리트의 살기를 체감했다. 드래곤조
차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강한 살기였다 드래곤보다 강한 존재.
퓨리트가 신의 사자임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널 왜 이곳으로 불렀는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다. "
역시 무책임한 로드로군 베르타라스. 이놈이 정녕 네가뽑은
로드더냐?"
"죄송합니다. "
베르타라스는 연신 사과의 말만 내뱉었다. 그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자칫 말실수라도 했다가는 드래곤이라는 종족 자체가 사
라질 수도 있을 터. 최대한 입조심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태도가
최선이었다.
"로테마이어스. "
"하명하십시오. 사자시여. "
드래곤의 존재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물질계의 중재입니다. "
"중재의 의미는?"
물질계가 다른 차원의 간섭을 받지 않도록 하고 이곳에 사는 종
족이 멸종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
퓨리트의 물음에 로테마이어스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한시라
도 지체했다가는 화를 당할 것 같은 느낌에 잠시도 머뭇거릴 수 없
었다.
잘 알고 있군. 그럼 네가 그동안 물질계의 중재 임무를 제대로
완수했다고 생각하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
"잘 몰라? 하하하하. 세턴! 트레이시!"
퓨리트가 로테마이어스를 비웃듯 크게 웃어재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수하인 저승사자 세턴과 트레이시를 불러들였다.
마계와 천계를 살피는 저승사자 세턴, 물질계와 정령계를 살피
는 트레이시, 그들이 퓨리트의 부름에 즉각 모습을 드러냈다.
"수장님을 뵙습니다. 신 세턴 부름을 받고 대령했습니다. "
"수장님을
퓨리트가 그들의 인사를 손을흔들어 제지했다. 본성이 겉치레
를 싫어하는 퓨리트였다
"세턴. "
"예. "
"지금 마계와 천계는?"
"천계는 현재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계는마왕의 아
들이 사라진 지 오래돼서 몹시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마왕인 루
시퍼는 아들 투바의 실종을 물질계의 짓으로 단정하고 대대적인 전
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마계의 행동이 옳다고 보는가?"
"루시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행동이라고 봅니다. 좀 전에 말씀
드린 투바라는 마족이 성년식이 얼마 남지 않은 마족이라 아무래
도 어린 마족이라 자칫 물질계 사상에 물들 수도 있습니다. 만약
물질계에 익숙해진 마족이 마왕이 된다면 마계가 어떻게 변할지 장
담할 수 없습니다. "
세턴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계의
전면적인 진출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얘기였다.
로테마이어스가 일어나자 베르타라스가 그의 팔을 잡아 다시 앉
혔다. 아직 한 명의 신의 사자가남아 있는상황 그의 얘기를 다
듣고 반응을 해도 늦지 않았다.
"트레이시. 정령계는?"
"원래 정령계에는 정령들이 자연과 대화하지 못하는 소소한 문
제가 있었습니다. 한데, 물질계 한 인간의 도움으로 현재 거의 정상
화된 상황입니다. 아직 물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만이 자연과 대화
가 가능하지만 어린 정령의 거듭남이 끝날 때쯤에는 다른 정령왕들
도 모두 자연과 의사소통할 수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그리고 시간
이 더 흐른다면 하위 정령들도 자연과 대화가 될 거라 사료됩니다. "
"물질계에 대해서도 말하라. "
"물질계는 몹시 혼란스러운상태입니다. 정령계 거듭남의 영향
으로 가뭄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고 그 영향으로 인육을 먹는 인
간까지 생기고 있습니다. 이성을 가진 인격체가 인육을 먹는 일은
2 천 년 전의 대가뭄 이후로 처음 있는 일입니다. "
"또? "
"물질계에 마족이 장시간 소환된 채로 있습니다. 완전 소환으로
소환된 터라 시간제한도 없습니다. 이대로 두면 물질계에 눌러 살
지도 모릅니다. 아까 세턴이 한 말로 미루어보면 그가 마왕의 아들
인 투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
마족은 마계에서 물질계로 옮겨오면서 모습이 변한다. 일단 모
습이 변하면 같은 마족이 아닌 이상 구분하기가 힘들다.
물론, 마계와 물질계를 살펴보는 이가 한 명이었다면 구분할 수
도 있다. 그들의 고유 기운을구별할수 있는 것이다. 한데 물질계
는 트레이시, 마계는 세턴이 살피다 보니 기운을 구별하는 게 불가
능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눈앞에 있는 드래곤입니다. 특히 로드인 로테
마이어스. 그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간 하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물론, 인간 하나를 죽이는 그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만
트레이시가 로테마이어스를 곁눈질로 살펴봤다. 형편없이 구겨
진 로테마이어스의 면상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하라. "
트레이시가 헛기침을 한차례 하고 말을 이었다.
"흠, 흠. 알겠습니다. 로테마이어스는 인간하나를죽이는 일에
만 매달려 물질계를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물질계 중재를 담당해
야 할 그가 임무를 태만히 하고 있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
트레이시의 말이 끝나자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
다. 면목이 없었다. 드래곤 로드가 되어서 드래곤이 해야할 임무
를 망각하다니. 그것도 다른 드래곤들에게까지 일을 시켜서 임무
를 소홀히 하게 했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이런 말까지 들었음에도 라한에 대한 분노는 도무지 사그라지지
가 않았다. 이젠 크라이드리안의 복수가문제가아니었다. 드래곤
으로서의 자존심 문제였다. 심지어는 자신이 이런 식으로 질책받
는 게 모두 라한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모두 그놈 때문이다. 순순히 죽어줬으면 이런 일은 없었으련
만 라한 이놈 두고 보자. '
"드래곤 로드 로테마이어스. 이래도 할 말이 있는가?"
로테마이어스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로테마
이어스의 고개가 더 깊이 숙여졌다.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어서였다
"로테마이어스.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
"없습니다. "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로테마이어스가 말했다. 그 모습을 본 퓨리
트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퓨리트는 오래전부터 라한을눈여걱봐왔다. 그가살아가는모
습이 재미있었고 그 주변에 있는 친구들도 유쾌했다. 라한과 그 주
변 인물을 보는 일이 퓨리트에게는 지루한 영계 생활의 활력소나
다름없었다.
그런 재미를 로테마이어스가 앗아가려 했다 라한을 죽임으로써
쌓인 분노를 풀려고 한 것이다.
퓨리트는 그 일로 쾌 오랫동안 고민했다. 라한을 계속 살 수 있
도록 해서 재미를 느끼고 싶어음이다. 한데 명분이 없었다. 아무
리 저승사자의 수장이라도 물질계의 일에 마구 개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기가 어쩌겠어. '
퓨리트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로메마이어스를 바쁘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에게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걸 인지시키면 라한을 죽
일 시간조차 없을 터. 그럼 라한을 보는 재미를 계속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번 일이 로테마이어스의 분노를 더 크
게 만들었다는 걸 모르는 퓨리트였다.
"로테마이어스.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빠른 시일 안에 '마족을 마계로 돌려보내고 물질계 인간들을 계
도하겠습니 다. "
"혹시 네가 죽이려 하는 인간이 라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인가?-
".
갑작스러운 퓨리트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곳에서 라한의 이름이 언급될 줄은 생각지도 못 했다.
"그놈 인생이 참재미있더군. 아주재미있어. 하하하
"아, 예. "
퓨리트가 라한의 이름을 슬쩍 언급했다. 괜히 라한을 건드려서
자신의 재미를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세턴. 넌 마계로 가서 루시퍼를 말려라.만약 물질계 공격을 감
행했다가는 내가 마계를 송두리째 날려 버리겠다. -
"알겠습니다. "
"그리고 트레이시와 얘기해서 투바라는 마족과 친분이 있는 마
족을 물질계로 불러들여라 투바라는 그놈은 말로 해서 돌아가지
않을 거다. "
"예. "
퓨리트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언뜻 비쳤다 사라졌다.
투바도 라한의 주변 인물중 한 명이다. 그가 마계로 돌아가는
것도 퓨리트의 재미가 반감되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베르타라스. "
"예. "
"넌 이 길로 정령계로 가라. "
예?"
베르타라스가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정령계로 가라는 말을 제
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인간들 중에는 정령계를 방문한 이가 종종 있었다. 라한을 포함
해서 무려 세 명. 한데 드래곤들은 인간들 중에 정령계를 방문한
이가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드래곤 중에서 정령계를 방문한 존
재가 단 한 명도 없는 탓이다.
자신들이 못하는 일은 하찮은 인간도 할 수 없다는 드래곤의 자
만과 오만함, 그런 생각이 소문으로 떠도는 인간의 정령계 방문을
인정하지 않았음이다.
그런 베르타라스의 귀에 정령계를 방문하라는 얘기가 들려왔다.
퓨리트가 하는 말이니 방법도 그가 만들어줄 터. 역사를 통틀어 정
령계를 방문하는 유일한 드래곤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실피드, 엘라임, 노아스, 샐리온!"
퓨리트가 정령왕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이에 정령왕들이 차
례로 강제 소환되어 왔다 얼떨떨한 표정을 봐서 소환을 예상치 못
한 모습이었다.
-누구냐?
-누가 우리 넷을 동시에 베르타라스. 너인가?
불의 정령왕 샐리온이 베르타라스를 노려봤다. 범인이 그밖에
없다는 확신마저 가진 얼굴이었다.
드래곤과 정령왕의 계약은 허락을 구하는 방식이다. 정령왕을
부르면 그 말에 응답하고 안 하고는 모두 정령왕의 뜻에 달린 것이
다. 로이나가 4 대 정령왕을 모두 소집했던 것도 이런 허락에 의한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은 강제 소환이었다. 정령왕이 허락하고 안 하고
를 묻지도 않고 그대로 끌고 나오는 강제 소환. 정령왕들이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아닐세. 저기
베르타라스가 눈으로 정령왕 옆에 앉은 퓨리트를 가리켰다. 이
에 정령왕들의 시선이 모두 퓨리트에게 향했다.
-흠, 당신은 누구인가? 본 적이 없는 인물인데
-누구시죠?
샐리온의 반말과 엘라임의 높임말이 차례로 이어졌다. 말투에서
도 성격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말조심하게. 이분은 새로이 신의 사자가 되신 퓨리트님이시네
-신의 사자? 판테아님은?
"바뀐 모양이야. 인사부터 올리게. "
-흠.
샐리온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조금 낮췄다. 그러면서도 눈은 퓨
리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정말 신의 사자인지를 탐색하는
모습이었다
'똑같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
이런 완벽한 무의 상태는 판테아가 유일했다. 최소한 정령왕
마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존재는 그가 유일했다.
그런데 퓨리트에게서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베르타라스의
말마따나 그가 신의 사자인 게 사실인 듯했다.
-샐리온. 신의 사자를 뵙습니다
-실피드. 신의 사자를 뵙습니다.
"그만. "
정령왕 네 명이 차례로 인사를 하자 퓨리트가 말을 끊어버렸다.
아무 의미 없는 겉치레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음이다.
.여기 있는 베르타라스를 정령계로 데리고 가라. 그리고 지금
정령계에 닥친 상황에 대해 의논하고 대륙에 퍼져 있는 가뭄을 빨
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라, "
-하오나 대륙의 가뭄은
.거듭남 때문이겠지. 베르타라스와 의논하면 거듭남을 빨리 당
길 수 있는 방법이 나을 거다. 그리고 실피드. "
-예. 퓨리트님.
실피드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퓨리트는 그
를 찬찬히 뜯어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명이 다 됐군, "
- 예 .
"얼마나 남았지?"
-10 년 남짓 남았습니다.
"흠. 후계는 구했느냐?"
-생각해 둔 사람은 있습니다.
퓨리트의 짧은 물음에 실피드도 공손하지만 짧은 말로 대답했
다. 그들의 대화를 듣는 베르타라스와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람이라고? 정령이 아니고. "
-저희들 실수로 너무 오랫동안 자연과 대화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정령을 키워내지 못했습니다
"심각하군. 그 인간이 누군가?"
-라한이라는 인간입니다. 아직 정령이 될 자격은 부족하지만 자
연을 이해하는 능력은 뛰어납니다. 그에게 바람의 술을 가르치
면 바람의 정령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피드의 말은 베르타라스와 로테마이어스, 심지어 퓨리트마저
경악하게 만들었다. 반면, 다른정령왕들은크게 놀라는기색이 없
었다. 실피드에게 이미 언질을 받은 듯했다.
"바람의 술을 익힐 자질은 있는가?"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한 차례 시험하기는 했습니
다만 그때는 좀 부족했습니다.
"그럼 정령왕이 될 수 없는 게 아니더냐? 거기다 인간이 정령왕
이라니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퓨리트는 라한을 정령왕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
다. 그를 계속 인간으로 두고 구경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라한이
들었다면 실피드와 퓨리트 모두에게 발끈할 일이었지만 그들로서
는 어쩔 수 없었다.
실피드는 남은 수명 동안 어떻게든 정령왕이 될 존재를 만들어
내야했다. 한데, 정령왕조차자연과간신히 의사소통하는 시점에
서 하위 정령이 자연과 대화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로서
는 라한 외에는 적격자가 없는 셈이다.
이에 반해 퓨리트는 자신의 유일한 재미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
다. 영계 일이 눈코뜰 새 없이 바쁘기는 하지만그건 어디까지나
하위 저승사자에 국한된 일. 하루 종일 서류에 사인만 하는 퓨리트
에게는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그런 그에게 라한이라는 구경거
리마저 없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퓨리트님께서 이번에 새로이 신의 사자가 되셔서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냐?"
퓨리트가 발끈하듯 소리쳤다. 그 모습에 실피드가 부드럽게 웃
으며 대답했다.
-과거에도 인간이 정령왕이 된 경우는 있었습니다. 물의 정령이
두번, 땅의 정령이 한번. 이렇게모두세 차례나됩니다.
"그래?"
-예. 그들 모두 뛰어난 자연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
만, 몸 자체가 마나를 많이 받아들이지 못해서 정령을 소환하는 능
력은 약했지만, 정령과 자연 친화력만큼은 뛰어났기에 정령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라한 역시 자연 친화력은 대륙에서 최고입니다.
어쩌면 역사를 통틀어서도 최고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어릴 적부터 테세르라는 정령을 부려왔습니다. 정령 친화력도 알
게 모르게 많이 성장돼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어떻게 해서든 라한을 차기 정령왕으로 만들
겠다는 말이냐?"
화난 듯한 퓨리트의 말투에 실피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신의 사자라는 존재가 인간 한 명에게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의아했다. 판트리아계에 속하는 차원 전부를 관할하는 신의 사자
퓨리트. 적어도 그의 지위라면 이런 식의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된다
는 생각이었다.
-저 라한과는 무슨 관계이십니까?
"관계는 무슨 관계. 난 그놈을 만난 적도 없어.
그럼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시는지 물어도 실례가 되지 않
을까요?
"=1 건
"실피드. 감히 네가 퓨리트님께 뭘 물을 자격이 있느냐? 넌 그냥
퓨리트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만이다. 알겠느냐?"
퓨리트가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세턴이 대신 대답했다. 그를 보
며 퓨리트가 몰래 눈을 찡긋거렸다. 일종의 고맙다는 신호였다.
-죄송합니다.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정령이 없다고 했나? 그래도 가장 가능
성 있는 정령은 있겠지. 그에게 바람의 술을 가르쳐라, "
-죄송합니다. 정령 중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라한 외에도 가
능성이 있는 인간은 있습니다. 근데 이미 반쯤 폐인이 된 사람이
라서
"폐인이 됐다고? 젠장. 폐인이 되기 전에 정령계로 데려갔어야
지. "
퓨리트가 안타까운 듯 외침을 토했다. 그 말에 실피드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게 어쩔 수 없었습니다. 폐인이 되기 전에는 가능성도 없는
자였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폐인이 되고 나서 자연과 친숙해진 인
물인지라
"젠장. 그럼 어차피 안 되는 거잖아 "
-예. 그래서 지금으로써는 라한이 가장 적합한 인물얍니다.
"그 일은 차후에 얘기하도록 하지. 일단 베르타라스를 데리고
정령계로 가라. "
알겠습니다.
정령왕들이 베르타라스와 함께 사라졌다. 정령계로 간 것이다.
정령왕들과 베르타라스가 사라지자 퓨리트가 머리를 벅벅 긁었
다. 깊이 생각할 때 무의식중에 하는 버릇이었다.
'누구지? 누군지나 물어볼 걸 그랬나?'
퓨리트가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도 괜히 물질
계에 내려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원래 퓨리트가 물질계에 내려온 건 라한을 살리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라한을 살리는 일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싶었다. 한데 그
과정에서 투바를 보내야 하는 일이 생겨 버렸다. 재미가 크게 반감
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로테마이어스.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하지 마라. "
"알겠습니다. 퓨리트님. "
"세턴, 트레이시 그만 돌아가자. "
"저기 퓨리트님. 잠시만
트레이시가 퓨리트를 슬쩍 불렀다. 급히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
었다.
"막 ! "
퓨리트가 간단한 언어로 주변에 투명한 막을 만들었다. 안에서
밖의 소리는 들을 수 있되 밖에서는 안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막이
었다.
퓨리트의 요상한 술법에 로테마이어스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법. 마법과 흡사하지만 분명히 차이
나는 방법. 라한이 사용하는 것과 너무 비슷했다.
"퓨리트님. "
"무슨 일이지?"
"지금 드래곤 몇 마리가 라한을 공격하러 갔습니다 "
"뭐야?"
퓨리트가 물질계의 심각한 변화를 알게 된 건 꽤나 오래전 일이
었다.
하지만 웬만하면 간섭하고 싶지 않았기에 물질계 방문을 계속
미루기만 했었다.
그러던 퓨리트가 하필 지금 이 시간에 이곳을 방문한 건 로테마
이어스가 라한을공격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금그를부르지 않으
면 라한이 위험에 처할 것 같아서 방문한 것이다.
한데 로테마이어스의 공격은 막았지만 다른 드래곤의 공격은 막
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방문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 셈이었다.
'우씨, 라한 살리려고 왔는데 라한도 위험하고 투바도 보내야
되고. 이게 뭐야?'
"모두 여섯 마리인데 한 마리는 부상이 심해서 아, 지금 정보
가 들어왔습니다. "
"말채 봐, "
"드래곤 한 마리가 자신의 동족과 구경만 하고 있답니다. 라한
이 상대하고 있는 드래곤은 네 마리이고 그 중 한 마리는 슈라라는
골렘과 테세르라는 정령이 상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
"젠장. "
퓨리트가 욕설을 내뱉었다. 수장이 된 후에 처음으로 뱉는 욕이
었다. 그만큼 라한의 위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라한의 싸움은 어떻게 돼가고 있지?"
"그건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라한이라는 인간은 굴
레를 벗은 존재라서 저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싸움의
자세한경과까지는
"알았다. 넌 세턴과 투바를 귀환시키는 일부터 처리해라 그리
고 정령왕과 얘기해서 폐인이 됐다는 그자를 찾아라. 그리고 그를
완치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라. "
퓨리트는 로테마이어스가 보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속삭였다.
"알겠습니다. "
세턴과 트레이시가 공손하게 읍하고 사라져갔다. 그들이 사라지
자 퓨리트가 주변에 만들었던 막을 걷어냈다.
"로테마이어스. "
"예. 퓨리트님 "
"머리가 아주 좋더군. "
"예? 무슨 말씀이신지. "
"이곳에 오기 전에 다른 드래곤들에게 라한이라는 인간을 공격
하라고시켰더군. 아주훌륭해. 머리를아주잘썼어."
퓨리트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당장이라도 로테마이어스를 죽
일 기세였다.
"그 그럴 수가
"모른다고 할 텐가?"
"저는 그게
로테마이어스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부하 드래곤들이 과도
한 충성심을 발휘한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자신
을따르는드래곤에게 피해가갈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모두 자신이 시킨 일이라고 하기에는 퓨리트가 너무 무서웠다
"빌어먹을. "
로테마이어스의 주저하는 모습을 보며 퓨리트도 결국 살기를 억
눌렀다.
상대는 드래곤 로드. 아무리 퓨리트라도 함부로 죽일 수 없는 자
였다. 죄목이 충분하다면 소멸의 영을 내리겠지만 당장은 죄목이
너무 부족했다. 중재자로서 임무를 소홀히 하기는 했어도 아직까
지는 물질계의 균형이 깨지지 않은 탓이다
"로테마이어스. 잘 들어라. 지금 당장 드래곤 전부를 소집해서
물질계의 혼란을 막아라, 그리고
라한을 절대 죽이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턱까지 치고
올라온 말을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드래곤이 중재자라면 자신은 관리자였다. 관리자가 되어서 어느
한 존재를 편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됐다 알아서 잘해라 "
퓨리트가 찡그린 얼굴로 영계로 돌아갔다.
퓨리트는 영계로 돌아가서 신의 호출을 받았다. 신은 퓨리트의
물질계 외출과 그곳에서의 대화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퓨리
트에게 영계 외출 금지와 개별 존재에 간섭할 수 없다는 처벌을 내
렸다. 퓨리트가몇 번이나항변했지만아무소용이 없었다. 물질계
의 절대자가퓨리트라면 영계의 절대자는신이니 말이다.
쿠쿠쿠쿵!
"헉, 헉!"
라한이 숨을 헐떡이며 전방을 노려봤다.
벌써 한 시간째 이어지는 전투. 라한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
었다. 단순히 전투를 한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전투의 치열함
때문에 마치 한 달은 싸운 느낌이었다.
아카폴리안과 다른 드래곤들 역시 힘들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라한이 이 정도로 끈질기게 버틸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
나마 다행이라면 테세르와 슈라에게 큰 부상을 입혀서 강제 귀환시
킨 정도였다.
-제법이구나.
"흥. 아직 난 팔팔하다고. "
라한이 뻐근한 가슴을 활짝 펴며 기세등등하게 대답했다. 그 모
습을 보며 아카폴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 드래곤 셋과 라한의 싸움은 라한이 거의 압도하는 상황이
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라한의 빠른움직임. 그리고 신화
력의 사용과 육박전을 병행하는 멋진 공격 방법. 드래곤들은 계속
해서 수세에 몰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또 테세르와 슈라 역시 라모네샤트에게 크게 뒤지지 않는 실력
을 보였다. 슈라의 강한 힘과 테세르의 빠르고 매서운 공격이 라모
네샤트의 손발을 어지럽힌 결과였다.
라한에게 약간은 유리하게 돌아가던 전투 양상은 아카폴리안에
의해 바뀌었다. 그가 라한을 공격하다 말고 슈라를 기습해서 부숴
버린 것이다. 다행히 핵은 부서지지 않았지만 당장 혼자 남은 테세
르가 문제였다.
결국 테세르도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라모네샤트에 의해 강제
귀환되었다. 다시 소환하려면 힘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독한놈.
슈라와 테세르가 강제 귀환됐을 때, 아카폴리안은 라한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셋으로 아주 조금 밀리는 정도였으니
넷이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한데, 그 후로 꼬박 한나절을 싸웠음에도 라한은 쓰러질 줄 몰랐
다. 도무지 라한이 가진 힘의 끝이 어디인지, 정말그가 인간이 맞
는지, 이젠 라한의 정체마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라한은 테세르와 슈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빠짐으로써 힘을 고스란히 잃은 건 아니었다. 그들에게 들어가던
신화력을 소모시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시간이 없는데. '
라한이 하늘을 바라보며 조바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류카라한 일행이 함정을 파는 날이다. 라한이 미리 가서
흔적을 남걱놓지 못하면 카이렌 일행이 크나큰 타격을 받을 터. 어
떻게든 빨리 처리하고 그곳으로 달려가야 했다.
'승부다. '
라한에게도 마지막 한 수는 남아 있었다. 하루 종일 강 속에서
라한의 부름만 기다리고 있는 변이 마지막 한 수였다.
"하앗! "
라한이 광견보를 사용해서 빠르게 쇄도했다. 목표는 아카폴리안
이었다. 어차피 드래곤 넷과 싸우는 지금도 라한은 크게 밀리지는
않았다. 드래곤 하나를 처리해서 셋만 남게 되면 승산은 라한에게
있었다.
-블링크!
라한의 공격에 아카폴리안이 마법을 사용했다. 보통은 실드를
사용했겠지만 그는 블링크를 선택했다. 라한과 오랫동안 싸우면서
나름대로 깨달은 방어법이었다.
라한의 공격은 실드를 무력화시키는 경우가 허다했다. 실드의
결을 따라 자연스럽게 비집고 들어가는 이상한 방법이었다. 이런
공격 때문에 드래곤들이 위기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몇 차례 계속되자 드래곤들도 실드의 사용을 자제
했다.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되도록 블링크로 몸
을 피하는 방법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어딜!"
라한이 공간 이동한 아카폴리안에게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라
한의 연이은 공격에 아카폴리안이 당황한 얼굴빛을 보였다.
'저놈 왜 나만 공격하는 거야?'
-블링크!
-이놈! 거기 서라! 헬 파이어!
-아쿠아 스크류!
다른 드래곤들이 라한의 공격을 끊기 위해 공격을 가했다 라한
은 다른 드래곤들이 가하는 공격 중 위험한 것만 피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허용했다. 그들의 공격으로 약간의 부상을 당하더라도 아
카폴리안만큼은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막기! 하앗! "
-블링크!
라한은 등 뒤에 막을 만들어 놓고 다시 아카폴리안에게 쏘아져
갔다. 놀란 아카폴리안이 또다시 블링크를 사용했지만 라한 역시
계속해서 뒤를 쫓았다.
라한은 광견보로 빠르게 이동한 후에 아카폴리안의 아래에서 위
로 날아오르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냥 날기를 사용하는 건 이동이
너무 느려서 광견보를 적절히 배합한 것이다.
"하앗! "
-헬 파이어!
"막기 ! "
라한이 뒤에서 날아오는 헬 파이어를 힘겸게 막았다. 한데, 정신
집중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헬 파이어에 의해 막의 한쪽이 부서
졌다. 그리고 그 부서진 틈으로 헬 파이어의 불덩어리가 라한의 어
깨를 때리고 지나갔다.
"크윽! 하앗!"
이를 악다문 라한이 다시 아카폴리안에게 쇄도했다. 그 모습에
아카폴리안이 놀란 얼굴로 몸을 틀었다.
부상을 감수하면서까지 공격을 감행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
때문에 미쳐 블링크를 쓰지 못했다.
퍼억!
쿠억!
라한의 주먹이 몸을 튼 아카폴리안 옆을 공격했다. 날개가 있는
부분이었다.
"뜨거운 열기! 차가운 냉기! "
라한이 날개에 손을 묻은 채로 두 가지 신화력을 발동시켰다.
예전에 테세르와 슈라에게 보여준 적이 있는 단순 열기 발산과 냉
기 발산이었다. 물론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뜨겁고 또 차
가웠다.
-쿠오오오오!
아카폴리안이 비명을 터트렸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며 몸이
흔들거렸다.
-아카폴리안! 매직 미사일! 토네이도!
뒤에서 따라오던 메카드리의 마법이 라한의 등을 향해 날아왔
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라한의 등짝이 벌집이 될 판이었다.
"빌어먹을!"
-엡솔루트 리커버리!
라한이 물러나자 뒤따라왔던 레드리안느가 아카폴리안에게 회
복 마법을 시전했다.
-크!
레드리안느의 회복 마법에도 아카폴리안의 상세는 좀처럼 나아
지지 않았다. 아직도 그의 날개에서 뜨거운 열기와 차가운 냉기가
연신 반발하고 있었음이다
-이놈!
"흥. "
라한이 코웃음을 흘리고 강 쪽으로 몸을 피했다. 레드리안느와
메카드리, 라모네샤트가 분노한 얼굴로 뒤쫓았다.
드래곤들도 강 속에 라한의 아군이랄 수 있는 존재가 숨어 있음
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만 하루를 싸우면서도 강 쪽으로
는 의도적으로 가지 않았다.
한데, 이번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아카폴리안의 부
상에 이성을 잠시 상실한 모습이었다
-받아라. 헬 파이어!
레드리안느의 헬 파이어가 라한의 등을 향해 날아왔다. 라한은
왼쪽 어깨를 부여잡은 채로 옆으로 빠르게 피했다. 좀 전에 입은
어깨의 상처가 라한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죽을 뻔했다. '
라한의 어깨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이 상태로 싸움
이 길어졌다가는 라한의 패배가 불 보듯 뻔했다. 마지막 도박을 위
해서 살을 주는 법을 택했던 라한이다.
"막기! 바람의 광시곡! "
라한이 바람의 광시곡을 시전했다. 이에 강 주변에 있던 돌들이
마구 떠올라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라한의 공격 자체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한데, 그 돌들이
쇄도하는 드래곤들의 눈을 마구 어지럽히고 있었다. 라한이 노린
것도 이점이었다.
콰콰쾅!
-허튼짓은 안 통한다.
메카드리가 돌을 부수며 뚫고 들어왔다. 그 뒤를 레드리안느를
비롯한 다른 드래곤이 따랐다.
그들의 눈에는 라한의 부상당한 어깨와 뒤에 쓰러져 고통스러워
하는 아카폴리안밖에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이 한 명 빠져서 전력
이 감소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라한의 어깨 부상이 치명적이니 지
금이라면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이야! 변!"
스팟! 콰콰콰콰쾅!
드래곤들이 강 위를 지날때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드래곤 주
위를 감싸듯 치솟아 오른 수십 줄기의 물기둥 갑작스러운 사태에
드래곤들이 몸을 멈추었다.
-이이
"변! 빨리! "
-크리릭!
변의 대답이 들리고 치솟아 오른 물기둥이 서서히 뭉치기 시작
했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흐르자 드래곤을 완전히 둘러싼 일종
의 막처럼 변했다.
-크리리릭!
막이 조금씩 축소되기 시작했다. 드래곤을 옥죄기 시작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물이 몸을 조여오자 드래곤들의 얼굴에도 당황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어림 없다. 헬 파이어!
레드 드래곤인 레드리안느. 그는 속성과 맞는 헬 파이어를 자주
사용한다. 라한과 싸울 때도 그랬고 평소에 장난을 칠 때도 헬 파
이어를 가지고 놀 정도였다.
그만큼 헬 파이어 하나는 완벽한 컨트롤을 보여주는 레드리안
느. 한데도 이번에 사용한 헬 파이어는 변이 만든 물기둥을 뚫지
못했다. 불을 다스리는 그의 능력보다 물을 다스리는 변이 한 수
위라는 증거였다
-프리즌!
레드리안느의 공격이 실패하자 화이트 드래곤 라모네샤트의 공
격이 이어졌다.
모든 것을 얼려 버린다는 프리즌을 사용한 라모네샤트. 이번 공
격은 효과가 있었다 변이 만든 물의 막이 얼어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프리즌은 오히려 자신들의 수명을 깎아먹는 역할을 해
버렸다 물이 언 상태로 계속해서 조여 온 것이다.
-이게 뭐야? 헤븐스 포이즌!
라모네샤트의 공격이 실패하자 그린 드래곤 메카드리도 가장 자
신 있는 공격을 가했다. 모든 속성에 독을 가하는 그린 드래곤 고
유의 마법이었다. 역시나 이 공격도 변이 만든 물의 막에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물에 독을 가함으로써 자신들이 위태
로운 지경에 처했다.
-크릭!
"어?"
변이 라한을 돌아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라한도 변
을 돌아봤다
-크리리릭!
변의 말은 물이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최근 연이어 벌어진 가뭄
으로 강의 수위가 낮아진 탓이다. 드래곤의 덩치가 조금만 작았어
도 완전히 조여 죽일 수 있었으련만 긴 가뭄과 부족한 수량가 못
내 아쉬웠다.
"미치겠군. 그럼 저놈이라도
라한이 아카폴리안에게 빠르게 쏘아져 갔다. 다른 드래곤이 빠
져나오기 전에 아카폴리안만이라도 완벽히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크리릭!
변이 얼마 안 남았다며 라한을 재촉했다. 라한도 최대한 빨리 아
카폴리안에게 쏘아져 갔다. 그리고 그를 공격하려고 손을 들었을
때, 뭔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변, 이리와!"
-크링?
"빨리! "
-크리리릭!
라한의 재촉에 변이 라한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자 라
한이 아카폴리안을 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깝군. 함께 공간으로! "
라한이 변의 손을 잡고 공간 이동을 시전했다. 그가 사라지고 얼
마 있지 않아서 드래곤 로드 로테마이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흠.
-로드님을 뵙습니다. 이실리아 인사드립니다.
-로드님을 뵙습니다. 벨라루스 인사드립니다.
이실리아와 벨라루스가 침통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인사를 귀
끝으로 흘린 로테마이어스가 주변을 천천히 훌었다.
로테마이어스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이는 아카폴리안이었다.
처참하게 녹은 왼쪽 날개의 반과, 마찬가지로 얼어서 깨지고 있는
왼쪽 날개의 반. 결국 아카폴리안의 왼쪽 날개는 녹거나 얼어서 완
전히 못쓰게 돼 버렸다
-로, 로드님을
-됐다. 저건
쿠쿠쿵!
로테마이어스가 강으로 눈을 돌렸을 때, 때마침 변이 만든 물 덩
어리가 사라졌다. 그와 함께 갇혀 있던 드래곤 셋이 바닥으로 추락
했다.
-흠, 이실리아. 벨라루스.추궁은나중에하겠다. 매스텔레포트!
로테마이어스가 가까이 있던 아카폴리안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
뒤를 이실리아와 벨라루스가 나머지 드래곤들을 데리고 따랐다.
재회 2
베센 왕국의 서부 지방 베네스
이곳은 산이 많고 그산에서 철광석이 많이 나온다 그래서 베센
왕국이 매년 저둬들이는 수입의 꽤 많은 부분을 담당했다
그런 베네스 지방도 가뭄은 어쩔수 없었다 안 그래도 수원
이 부족한 곳이라 아사자가 속출한 것이다 거기다 원래 인
구가 적은 곳이라 지금은 생존자를 보는 것조차 힘든 지경이였다
이미 황폐화되어 몬스터가 가득한 베네스 지방에 라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께에 피를 철철 흘리고 얼굴마저 창백한 라한 공간
이동해오자마자 몸을 비틀거렸다

크릭
괜찮아 치료
라한이 치료의 신화력을 어깨에 사용했다. 어깨에서 희미한 빛
이 흘러나오자 흐르던 피가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이 부근이 었는데. "
이곳은 류카라한이 3 구역이라고 했던 곳, 카이렌을 죽이기 위한
함정을 파놓은 곳이다.
라한은 지도를 얼핏 보며 찾아왔기에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
다. 카이렌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서둘러 3 구역이라 명명된 곳
을 찾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비틀!
걸어가려던 라한이 몸을 비틀거렸다. 치료는 다 끝났지만 흐르
는 피 때문에 현기증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크리리!
변이 라한의 앞에서 팔을 양옆으로 확 펼쳤다. 가지 말고 몸을
추스르라는 의미 였다.
그런 변을 보며 라한이 손을 내저었다.
"그럴 시간 없어. 내가 지체하면 내 친구들이 위험해져. "
-크리리릭!
"난 괜찮아. "
변의 걱정해 주는 마음에 라한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잘해 준
것도 없는데 자신을 위해 드래곤과 싸워주고 또 몸까지 걱정해 주
는 변. 괜히 울컥하는 기분에 울음이라도 터트리고 싶었다.
-크리릭?
"진짜 괜찮으니까 걱정 마. "
말과는 달리 라한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바로 앞에 있는 물체
도 흐릿하게 보이고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머리가 터질 듯 아파왔다.
또, 팔을 움직일 때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예사롭지 않았다.
-크리릭.
"훗. "
라한은 변의 계속되는 걱정을 웃음으로 흘렸다
몸은 엉망이었지만 지금은 쉴 틈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몇 시
간 전에 에테로에게 정확한 위치를 전해 듣고 이곳으로 왔어야 했
다. 드래곤과의 싸움만 없었다면 조금은느긋하게 일을 처리했을
터 였다.
몸도 정상일 테니 수월하게 일을 처리했을 테고.
"음. "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고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거의 바닥
난 신화력이 라한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저기군. "
라한이 방향을 틀어 천천히 걸어갔다. 한참 걸어가자 수풀 사이
에 교묘하게 가려진 동굴이 눈에 들어왔다. 또, 동굴주변에 십여
명의 사람이 숨어 있는 게 보였다. 동굴 입구를 은밀하게 지키는
사람인 듯했다.
"투명해지기. "
라한은동굴로 들어가면서 또다시 신화력을 사용했다. 이젠 현
기증을 넘어서서 헛구역질이 마구 나왔다.
동굴을 통과하자 거대한 연무장이 눈에 들어왔다. 일견하기에도
쾌 많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 같았다.
'대단하군. 류카라한녀석. 하는짓은마음에 안들지만능력하
나는 죽여주는 놈이라니까. '
이런 은밀한 장소를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거기다 이
런 곳에 많은 사람을 들키지 않고 데려오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런 난제를 류카라한은 모두 해결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거대한 연무장이 존재하고 있고 만 명은 될 법한 사람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또, 그 만 명이 머물 수 있는 수많은 집들이 감탄을 자아내게 만
었다.
'제대로 가르쳤군. '
때는 저녁
연무장주변은식사준비로몹시 분주했다. 여기저기 연기가 피
어오르고 그 사이로 구수하고 향긋한 냄새가 풍걱 나왔다.
그런데도 연무장 주변 곳곳에는 검을 들고 주변을 경계하는 모
습이 심심찮게 보였다. 라한이 놀란 점은 이 때문이다. 지형적 이
점만으로도 경계를 소홀히 할 법하건만 경계하는 이들의 눈빛은 뭔
가 찾아내겠다는 집 념으로 가득했다.
'근데 어디지?'
라한이 골렘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땅한
장소가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더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듯했다.
'일단 좀 살펴봐야겠다. '
라한이 투명한 상태로 주변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골렘을 찾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곳에 대한좀 더 많은 정보를 캐려는목적도
없지 않았다.
라한이 숨어들어 간 곳. 베네스의 비밀 기지에 류카라한 일행이
한자리에 모였다.
거대한 중앙 탁자의 상석에는 류카라한이, 그 좌우에는 케이플
과 미스티크가 자리했다. 그리고 하석이라고 할 수 있는 아랫자리
에 잉글리아트를 비롯한 굴레를 벗은 인간들이 자리 잡고 앉았다.
"다 모였군. "
류카라한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잉글리아트를 비롯한 몇몇이 자신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한눈을 파는 그 순간 승냥이 같은 그들의 먹이가 될 것도
잘 알았다. 그랬기에 잉글리아트를 포함한굴레를 벗은 인간들을
하석으로 앉힌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 케이플과 미스티크도.
잉글리아트의 편에 섰다는 건 몰랐다. 알았다면 자신의 양옆으로
그들을 앉히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니, 그 모든 사실을 알았다면 훌
훌 털어 버리고 예전에 머물던 은거 장소로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왜 모이라고 한 거지?"
"진행 상황은 어떻게 됐나?"
류카라한이 잉글리아트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깨끗하게 무시
했다. 그 태도에 잉글리아트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진행 상황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루나시언. 어떻게 됐지?"
"거의 다 끝나간다. "
"거의 다 끝나가?"
"그렇다. "
루나시언의 대답에 류카라한이 못마땅한 눈빛을 보냈다. 너무
느리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 탓이다.
"대체 지금이 몇 신가? 끝냈어도 벌써 끝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
"생각보다 많아? 크크, 내 험담하느라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은 건
아니고?"
"이이
발끈하려던 루나시언이 어렵게 화를 억눌렀다. 지금은 참을 때
였다. 괜스레 화냈다가는 인내하며 지냈던 긴 시간을 날려 버릴 수
도 있는 일이었다.
"한 시간 준다. 그 안에 끝내라. "
"젠장. "
"불만인가?"
"하면 되잖아. 썩을.'"
루나시언이 욕설을 내뱉으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뒤를 잉글
리아트를 비롯한 다른 미들이 따라 나갔다. 류카라한에 대한 반감
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쿵- !
"어?"
가장 뒤에서 나가던 마법사 토일렛이 뒤로 튕겨났다. 마치 무언
가에 부딪히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토일렛. 왜 칠칠치 못하게 넘어지고 난리야?"
"그게 이상하네. 분명 뭔가에 부딪혔는데. "
토일렛이 한 손으로 엉덩이를 문지르고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토일렛과 크리퍼트의 대화를 듣고 있던 류카라한이 자리에서 벌
떡 일어났다
챙-!
"나와라!"
류카라한이 검을 뽑으며 외쳤다. 그 모습을 보며 토일렛과 크리
퍼트가 뒤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잘못한 게 있으니 알아서 겁
을 집어먹은 모습이었다.
"토일렛!주변에 마나스캔을시작해라. 크리퍼트. 먼저 나간놈
들 전부 모이라고 전해라. "
"어? 어."
류카라한이 빠르게 명령을 전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크리
퍼트는 지체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모양이다.
"토일렛! 뭐 해?"
"알았어. 마나 스캔!"
토일렛이 눈을 지그시 감고 주변 마나를 탐지했다. 투명화 마법
으로 숨어들어 온 이가 있는지 찾는 것이다.
"케이플. 넌 토일렛을보호하고. 미스티크. 넌 잉글리아트가오
면 그를 보호해라, "
"그러지. "
"알겠다. "
케이플이 눈을 지그시 감은 토일렛 앞을 막아섰다. 미스티크는
입구 쪽으로 가서 잉글리아트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움직이자 류카라한도 검을 전방으로 슬그머니 들어 올렸
다. 그 상태로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무언가를 느끼려 애썼다.
류카라한과 케이플, 미스티크가 진형을 갖추자 먼저 나갔던 이
들이 한 명씩 들어왔다. 그 잠깐 사이에 쾌 멀리 갔었는지 생각보
다 오래 걸린 편이었다.
"루나시언. 루시펠. 너희는 입구를 막아라, 우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출입시컥선 안 돼. 알겠지?"
"그러지. "
루나시언과루시펠이 입구를막아섰다. 이미 검을뽑아들고온
걸로 봐서는 크리퍼트에게 대강의 사정을 들은 듯했다.
"잉글리아트. "
"알았어. 마나 스캔!"
언질을 받았는지 잉글리아트가 곧바로 마나 스캔을 시전했다. 아
직 아무런 임무도 부여받지 않은 크리퍼트만이 멍하게 서 있었다.
"류카라한, 난 뭐 하지?"
"기다려. 토일렛, 찾은거 있나?"
"없어. "
"흠. 카이렌인가?"
류카라한이 의심한 이는 카이렌이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들어을 수 있는 존재. 마나 스캔으로도 쉽게 잡히지 않는 존재. 류
카라한이 알기로는 카이렌이 유일했다.
"류카라한. "
"크리퍼트. 너와난칼질을시작한다. 우리 일행이 있는곳을제
외한 이 공간 전체에 칼을 휘둘러. 어서. -
류카라한이 말을 마치자마자 칼을 휘두르기
고 크리퍼트도 반대쪽에서 칼을 휘둘렀다.
시작했다. 그를 보
찌익!
한참 칼을 휘두르던 크리퍼트의 칼끝에 뭔가가 걸렸다. 순간적
으로 칼을 뒤로 뺀 크리퍼트가 칼끝을 자신의 눈앞에 가져왔다
"류카라한. 옷자락이야. 피가 묻어 있는데. "
"어디?"
류카라한이 크리퍼트 옆으로 다가와서 칼끝에 달린 옷자락을 살
폈파 그의 말처럼 피가묻어 있었다. 한데, 크리퍼트의 칼에 베여
흘린 핏자국은 아닌 듯했다. 이미 반쯤 말라 있는 피와 누렇게 묻
은 먼지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아닌 게 분명했다.
"잉글리아트. 토일렛. 공격 마법 준비해, "
"알았어. "
"그러지. "
저마다 대답을 마친 그들이 마법 주문을 중얼거렸다
토일렛은 공격력이 약해도 많은 곳을 공격할 수 있는 매직 에로
우를 머리 위에 만들었다. 일견하기에도 십여 개는 되는 수였다.
잉글리아트는 가장 무난하면서도 공격력이 강한 파이어 볼을 눈앞
에 만들었다.
"나오는 게 어떤가? 이미 들킨 것 같은데. "
류카라한의 엄포에도 상대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갔다
가는 마법과 칼에 죽음을 맞을 게 뻔한 상황에서 나을 리 만무했다.
"끝까지 버티겠다는 건가? 그것도 좋겠지. 크리퍼트
"알았어. "
휘익!
휘이 잉 !
크리퍼트와 류카라한이 다시 칼질을 시작했다. 좀 전보다 더 세
밀하고 매서운 칼질이었다.
한편 라한은 연무장 곳곳을 살피다가 익숙한 기운을 느쪘다. 오
래전 어느 동굴에서 만났던 잉글리아트 일행의 기운이었다.
'따라갈까?'
몸 상태로 봐서는 무리한 행동 자체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
런데도 호기심 때문에 발이 저절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미 한
번 그들을 훔쳐본 적이 있다는 것도 뒤따르는 데 한몫했음이다.
그렇게 따라갔던 라한이 내실의 천장에 매달렸다. 그곳에서 류
카라한과 그들의 대화 내용을 다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유쾌하지
않은 마무리까지도 모두 목격했다.
그렇게 일이 깨끗하게 마무리되었다면 라한으로서는 더 나을 것
없는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잉글리아트 일행이 몸을 돌려
나갈 때 벌어졌다.
갑자기 느껴진 어깨의 통증. 그와 동시에 매달려 있던 라한이 바
닥으로 추락했다. 다행히 서둘러 시전한 '날기'로 땅에 떨어지는
소리는 막을 수 있었지만 하필이면 그때 토일렛이 라한에게 다가
와 부딪혔다는 게 문제였다
'빌어먹을. '
천장 구석에 몸을 쭈그린 라한이 욕설을 내뱉었다. 물론, 마음속
으로 한 욕이라 다른 이들에게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끝까지 버티겠다는 간가? 그것도 좋겠지. 크리퍼트. "
"알았어. "
류카라한과 크리퍼트의 말에 라한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망할. '
무의식적으로 라한이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좀 전에 크리
퍼트의 칼에 찢긴 부위였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치명적인 상처가
될 뻔했다.
'돌아갈까?'
다행히 류카라한은 상대가 라한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라한에게도 도망갈마지막수단은 남아 있었다. '공
간으로' 이 방법이면 이곳에서 안전하게 도주하는 것도 가능했다.
'괜히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 '
지금 라한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돌아가는 건 두 가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첫째는 라한스스로가 안전해질 수 있다는 것. 그리
고 두 번째는 류카라한 일행이 이번 함정을 포기할 수 있다는 점
이었다.
류카라한은 지금 숨어 있는 이를 카이렌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입구만 지키고 있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함
정도 카이렌 일행을 속이기 위한 거였다. 즉, 카이렌에게 함정의
전말을 들켰으니 시도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공간으로. '
라한이 연무장으로 통하는 입구라고 할 수 있는 동굴 밖으로 공
간 이동했다. 여전히 '투명해지기'가남아 있는상태라서 들킬 염
려는 없었다.
'하나를 더 남기는 게 낫겠지. '
라한이 세라 소드를 꺼내들고 주변을 찬찬히 훌었다. 숨어 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동굴 입구를 살피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
었다.
'미안하다 '
라한이 숨어 있는 이들의 뒤로 가서 한 명씩 처리했다. 뒤에서
조용히 목만 가르는 일이라서 신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십여 명을 다 처리한 라한이 어깨를 주물렀다. 그리 큰 움직임이
아니었는데도 어깨에 무리가 간 듯했다
'이것도 좋겠군, '
라한이 동굴 입구 위 벽면으로 날아올랐다. 그곳에 류카라한에
게 남기는 짧은 서신을 남겼다.
류가라한. 재미있는 장난이었다. 가짜 골렘이라니 하하하.
아주 유쾌한 장난이 었어, -렌
마지막 서명은 '렌' 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했다. 류카라한에게 카
이렌이 다녀간 것으로 알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카이렌 일행도 이곳에 올 수 있는 일. 카이렌이라는 이름
을 전부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이 때문에 끝 글자만 따서
서명을 남겼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라한은 기절하다시피 하며 침대에 쓰러졌
다. 그 상태로 몸도 꿈쩍하지 않고 근 이틀 동안 잤다.
이틀후, 라한이 몸을꿈틀거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너무오래
자서인지, 몸 상태가 안 좋아서인지 정신이 몽롱했다.
"꼴이 말이 아니군. "
"일어났군. "
"헉. "
순간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목소리의 주인을찾았다. 아
직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로테마이어스라도 찾아
온다면 그대로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일세. "
"아씨. 놀랐잖아요. "
라한이 대상을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베사 길드
의 길드장 에테로였다. 로테마이어스가 아니라는 건 다행스러웠지
만, 잠시나마 간을 졸였다는 게 못내 억울했다.
"무슨 잠을 그렇게 오랫동안 자는가?"
"그랬나요?"
라한이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뗐다.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꼬박 이틀 동안 잠만 자더군. "
"좀 피곤했나 보죠. "
"흠, 자네가 자러 들어을 때 여기 내가 있었다는 거 아는가?"
"그 그랬나요?"
라한은 집에 들어와서 쓰러져 잘 때도 미처 주변을 살피지 못했
다. 몸 상태가 너무 엉망이라 경계심이 약간 흐트러진 듯했다.
"옷 좀 갈아입 어야겠군. "
"흠. "
라한은 그제야 자신의 거짓말이 먹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하
긴, 비틀거리며 들어오는모습도 다들켰고, 옷에 잔뜩묻은 핏자
국도 들켰으니 라한의 거짓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나가 있을 테니 옷부터 갈아입고 나오게. "
"네. "
에테로가 나가자 라한은 서둘러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다
행히 상처가 다시 터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진
신화력을 다시 회복하려면 몇 달은 걸릴 성싶었다.
'로테마이어스가 안 와야 할 텐데. '
라한이 옷가지를 대충 챙겨 입으며 고민을 시작했다
류카라한 일행은 큰 문제가 안 되었다. 그들의 대화로 판단컨대
라한이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인
식조차 못하고 있는 이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로테마이어스 측의 드래곤과는 몇 차례나 부딪쳤다. 심
지어 며칠 전에는 드래곤 네 마리를 박살 내놓기까지 했다. 지금
로테마이어스의 머릿속은 안 봐도 뻔했다. 라한을 어떻게 처리할
까? 라한의 실력이 대체 어느 정도일까? 이런 고민으로 하루하루
를 보낼 게 분명했다.
'들키면 끝장이다. '
로테마이어스가 아무리 라한을 신경 쓴다 해도 부상만 들키지
않으면 시간을 벌 수 있다. 신경을 많이 쓰는 만큼 공격도 섣불리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직 멀었는가?"
"다 줬어요. 들어오세요. "
라한이 에테로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자신은 침대에 비스듬하게
기대앉아 에테로를 건너편에 앉혔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보군. "
"아닙니다. "
"아니긴 자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네. 어딘가에 기댄 자세로
날 맞은 게 이번이 처음이지 않은가? 아직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기
힘들 정도라는 얘기겠지. 안 그런가?"
"에고, 역시 에테로님은 못 속이겠네요. "
라한이 졌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실제로 그 말이 모두 사실이었
으니 대꾸할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을 당한 겐가? 아참, 검은 측의 3 구역은
"이미 갔다 왔습니다 혹시 그곳에서 최근에 들어온 소식은 없
습니까?"
"깨끗하게 비우고 사라졌더군. 아마 회색 측에게 들킨 모양이야. "
"다행이네요. "
라한의 예상대로 류카라한은 숨어들어 온 사람을 카이렌이라고
생각했다. 또, 비밀 기지를들켰다는생각으로그곳에서 인원을철
수시켰다. 물론 철저히 준비했던 함정도 포기했다.
"자네 몸은 어떻게 된 건가?"
"드래곤과 싸웠습니 다. "
"살아있는 걸 보니 이기긴 이긴 모양이군. "
라한이 희미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에테로가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라한이 드래곤과 싸운다는 걸 알았을 때는 심장이 멎을 듯
경악스러워했다 한데 이젠 라한이 드래곤과 싸웠다는 얘기가 담
담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런 게 익숙해진다는 건가 싶었다.
"싸움 얘기를 해줄 수 있겠는가?"
"훗, 마치 제가 이야기꾼이라도 된 듯이 얘기하시는군요. "
"뭐 어떤가? 나 정도면 뛰어난 관객 아닌가? 기왕이면 몸짓까지
같이 해주게. "
"하하하. 몸 상태가 엉망이라 몸짓은 못하겠습니다. "
간단한 농담이 오가고 라한이 그때 상황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
작했다. 정령왕이 드래곤의 공격을 알려준 대목부터 마지막에 변
을 이용해서 도망갈 때까지
한참 얘기하던 라한이 뭔가 놓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왜 그러는가?"
"뭔가 놓친 것 같은데 그게
"그러고보니 테세르와슈라, 변이 안보이는구먼. 그들은 어딜
갔는가?"
"아까 강제 귀환됐다고 말했잖아요. 정식 소환과 귀환이 아니라
서 한동안은 부를 수 없어요. 한두 달은 있어야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변은 . 변은 맞다. 변! "
그제야 라한은자신이 놓친 게 무언지 깨달았다. 물 덩어리 변.
몰래 숨어서 지켜보다가 갑자기 도망치는 바람에 그를 데리고 오는
걸 깜빡했다.
"변이 왜?"
"그놈을 3 구역에 두고 왔어요. "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죠. 잠시만요. 공간으로! "
라한이 3 구역으로 공간 이동했다. 그곳에서 변을 찾기 위해 3 구
역과 그 주변까지 샅샅이 뒤졌다. 한데도 변을 찾을 수 없었다.
"에휴, 어쩌지?"
라한 혼자 떠나 버리자 변은 땅속에 숨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
다가 자신의 창조주인 투바가 오는 게 느껴졌다. 카이렌 일행이 함
정 인 줄 모르고 다가오는 거 였다.
이에 변은 잽싸게 땅에서 나와 투바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곳을 몇 번 둘러보다가 돌아갔다. 라한이 있는 곳이 아닌
카이렌 일행이 지내는곳으로 그제야제 주인을찾은셈이다
"찾았는가?"
"아니요. "
"너무 상심하지 말게. 그는 원래 여기저기 떠돌다 이곳까지 오
지 않았는가? 잘 찾아을 테니 마음 편하게 먹게. "
"에휴, 그놈이 없으면 일손이 많이 달리는데
"쿨럭 ! "
라한은 변의 안위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쇠심줄보다 더 질긴 목숨을 가진 놈이 변이었다.
문제는 변혁기에 있는 블리아드 마을에 일손이 부족해진다는 거
였다. 물을옮기고수원을찾는 데 최고의 인재인 변. 그가 없으면
일이 두 배로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테세르하고 슈라 그놈들도 한두 달은 일을 못 하는
데, 젠장. "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얼굴에는 그들에 대한 걱정이 가득 담걱
있었다.
에테로는 그제야 라한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
도 실제로는몹시 걱정하고 있는 라한. 그러면서도 남에게는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하는 어린아이 같은 성격. 되는 대로 막사는 듯
보이지만 항상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 따뜻한 성격을 가졌
지만 선악을 확실히 구분 짓는 라한은 그런 성격이었다
라한은 3 일을 더 쉬고 다시 마을 작업을 돕기 시작했다. 테세르
와 슈라 그리고 물 덩어리 변까지 빠진 자리를 라한 혼자 도맡아 처
리해야 했다.
물이 필요하면 옮걱 주었고, 농기구가 필요하다면 직접 두드려
만들어주었다. 또, 돌이 필요하면 밖에서 옳걱 주었고 밭을 갈아
달라면 땡볕 아래에서 밭을 갈았다.
아직 채 회복되지 않은 신화력과 이제 많이 사라져서 신화력에
거의 응화되다시피 한 제령기와 제란기. 라한이 사용할 수 있는 힘
을 총동원한 고된 노동이 었다.
라한은 오늘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밤늦게
집으로돌아왔다. 혼자서 일을도맡아한지 벌써 10 일. 지치고힘
들어서 뼈마다가 분리되는 느낌마저 받았다
"아이고. 못살겠다. "
라한이 다리를 두드리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오늘따라 괜스레
테세르와 슈라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
는 변까지 그들이 다시 돌아온다면 정말잘해주겠다고 스스
로에게 다짐했다.
"뼈가 녹네, 녹아. 이거 내 몸 맞아?"
똑똑!
"안에 있는가?"
에테로의 목소리였다. 예전 같으면 웃으며 맞았겠지만 지금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그와 대화하자면 최소 몇 분은 허비할 터.
라한은 그 시간마저도 수면에 투자하고 싶었다.
"예예. "
"다행히 있었구만. 그래 몸은 좀 어떤가?"
"보시다시피 죽을 지경입니다. "
라한의 엄살에 에테로가 웃음을 머금었다.
무적의 강철 마법사로 보였던 라한의 엄살이 너무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제야 진짜 인간처럼 보였다고 할까? 그런 기분에 괜
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멀정하구만. "
"이게 멀정한 걸로 보이십니까? 이 다리 부은 것 좀 보십시오.
내 다리가 아닌 것 같다니까요. "
"허허,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왔네. "
"그래요?"
라한이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지금 그에게는좋은 소식보다 잘
있는 시간이 더 중요했음이다.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군. "
"아닙니다. 말씀해 보세요. "
"변을 찾은 것 같네. "
"어디서요?"
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무반가운마음에 자신도모
르게 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곧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슬그머
니 앉았다.
스스로도 좀 경박스러웠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회색 측에 있는 것 같네. "
"회색 측이면 카이렌?"
"그런 것 같더군. "
"아, 그럼 그때 그렇군. "
라한이 사건의 전말을 손쉽게 추리해 냈다. 변의 창조주가 투바
임을 감안하면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왜 그러는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닐세. 그만 쉬게. "
"예. 그럼 멀리 안 나갑니다. 공간으로. "
"안 쉬고 어디
에테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한이 모습을 감추었다. 서두
르는 모습을 보며 에테로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거 아는가? 난 최근까지도 자네가 드래곤이 아닐까 의심했었
다네 후후. 하지만 이젠 알겠어. 자넨 인간이 맞네. 정말 인간적
이고 따뜻한 인간 말일세. '
에테로는 라한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힘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
는 점도 좋았고 영웅인 척하지 않는 것도 좋았다. 또 자신의 잘난
부분을 은근히 부끄러워하는 점도 귀엽게 보였다.
스팟!
"헛! "
에테로가 집을 막 나가려 할 때 집 안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
다. 공간 이동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아, 저기 에테로님. "
"어? 라한 아닌가? 벌써 데리고 온 건가?"
"그게 아니라어, 그러니까지금카이렌이 어디 있죠?"
카이렌 일행은 본진을 수시로 옮겨 다닌다. 드래곤의 이목과 류
카라한의 이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라한은 아무 생각 없이 전에 갔던 카이렌의 진형으로 갔다가 빈
공간만 보고 돌아왔다. 이미 카이렌이 본진을 옳긴 것이다.
"이거 참. 지금은루이나왕국남부지방에 있네 베테나라는지
방 아는가?"
"아, 어딘지는 알아요. "
"그곳에서 남쪽으로 10 킬로미터 정도 가면 거대한 저택이 나을
게야. 거기 있네."
"그럼 나중에 봐요. 공간으로. "
라한이 다시 공간 이동해 갔다.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다.
에테로는 폭풍이 지나간 느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용건만 듣고 사라지는 라한. 왠지 자신도 바쁘게 뭔가
를 해야 할 듯한 느낌이었다

라한이 에테로가 일러준 지역에 도착했다. 그의 말처럼 거대한
저택이 산을 끼고 지어져 있었다.
'이놈도 대단해. 여기저기 잘도 만들어놨다니까. '
라한의 눈에 보인 저택은 새로 지어진 듯 깨끗했다. 전에 갔던
집도 크고 깨끗한 건물이었다. 카이렌이 세력을 키울 마음을 먹은
후에 만든 저택이 분명했다.
'이런 저택을 대체 몇 개나 지은 거야? 갑부네. '
라한은 집 한 채를 얻기 위해 블리아드 마을에 갖은 도움을 줘야
했다. 그러고도 크긴 하지만 나무로 만든 허름한 집이 전부였다.
한데, 카이렌 일행들은 아예 저택을 지어 버렸다. 그것도 대륙
곳곳에 수십 개의 저택을 지금 라한의 집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가볼까?"
14 개월 만의 재회. 가슴이 떨리고 숨이 막혀왔다. 첫마디를 어
떻게 꺼낼까? 그냥 손 인사를 할까? 아니면 윙크를할까? 이런저
런 고민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까짓것 부딪쳐 보자고. "
라한이 저택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갔다. 어차피 만날 일. 숨어
들어가기보다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가고 대면하고 싶었다
"멈춰라! 이곳은 타인에게 쉴 곳을 제공하지 않는다. 물러가
라. "
"실례합니다만 전 이곳 주인을 꼭 만나야 합니다. 전갈을 넣

"네놈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썩 물러나지 않으면 당장 검을
쓰겠다. "
저택 입구를 지키던 사내가 라한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호통을
쳤다. 그 모습에 라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요. 전 이곳주인을아주잘알거든요. 괜히 망신당하지 말
고 들어가서 전갈이나 넣어주시죠. "
"흥. 밥한끼 얻어먹으려고온모양이다만잘못짚었다 이곳은
거지들 구제하는 곳이 아니니 썩 꺼져라. "
어디를 가든 상대의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라한의 허름한 외모만으로 주인인 카이렌과 만날 자격이 없다고 생
각하는 경비병 그 모습에 라한도 슬슬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이봐. 내가마지막으로 경고하지. 날들여보내 주든가. 아니면
험한 꼴을 당하든가, 난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고. "
"이, 이 거지 같은 놈이 감히
"경고를무시했다이거지. 좋아. 네가자처한일이니 어쩔 수 없
지. 낙석! "
라한의 간단한 말이 끝나자 경비병 위에 거대한 바위가 생성되
었다. 그리고 그 바위가 곧바로 경비병에게 떨어졌다.
"허업!"
쿠우웅!
라한이 만든 바위가 경비병 바로 앞에 떨어졌다. 정확하게는 경
비병의 발등 위에 떨어진 것이다

라한은 당연히 경비병이 비명을 터트릴 줄 알았다. 발바닥이 짓
뭉개지는 통증이 예사롭지 않은 건 자명한 일이니 말이다.
한데도 경비병은 신음을 흘릴 뿐 비명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카
이렌의 훈련이 만든 성과였다.
"어디 이래도 버티는가 볼까?"
툭툭!
"으악! "
라한이 경비병의 발을 뭉개고 있는 바위를 발로 툭툭 찼다. 이에
바위가한두 차례 흔들리며 경비병의 발에 통증을 배가시켰다. 결
국 경비병도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내가 험한 꼴 당할 거라고 말했지?"
으,
"야! 거기 숨어 있는놈들. 빨리 너희 대장한테 라한이 찾아왔다
고 전해. "
저택 입구에는 경비병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곳곳에 숨어서 문을
지키는 자가 족히 열 명은 되었다.
라한의 말이 끝나자 미약한 발소리가 들렸다. 몇 명이 안으로 이
곳에서 벌어진 일을 전하러 간 거 였다.
후다다닥!
저택 안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라한은 발소리만으로
그가 프라하임을 짐작했다.
콰쾅!
"라한! "
프라하는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라한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이내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눈을 부라렸다. 어떤 놈이 라한을 사칭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오랜만이야. "
"누구냐"
라한은폴리모프를 해서 가짜모습을유지하고 있다. 프라하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폴리모프 때문에 못 알아보는 모양이군. "
"폴리모프?"
"네 반지하고 같잖아. "
"흠. "
프라하가 마법 반지를 착용하고 있다는 건 아는 사람이 별로 없
다. 그중 라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저택 안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상황. 결국 눈앞에 있는 이가 라한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긴 해도 아무런 의심 없이 덥석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라한의 실종은 벌써 오래된 일이고, 그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어서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말 라한인가?"
"그렇다니까. "
"그럼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라. "
프라하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상황을 객관적이고 냉정하
게 판단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녀석. 변했구나. '
콰쾅!
프라하가 어떤 물음을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저택 문이 또 한
차례 거칠게 열렸다. 그 안에서 카이렌과 투바가 놀란 얼굴로 뛰어
나왔다.
"라한은?"
"저자가 자신이 라한이라고 하는군. "
프라하가 카이렌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말했다. 라한이 그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주는 모습이었다.
얘기를 다 들은 카이렌이 주변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 물러나라. "
"네! "
카이렌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주변 나무와 땅 아래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어서 저택 문을 지키는 이들이었다
모두 물러나자 카이렌이 라한을 지그시 쳐다봤다.
"네가 라한이라고?"
"카이렌. 쳇, 너도날못알아보다니 섭섭한데."
"라한에게선 예전부터 별다른 기운을느낄 수 없었지. 한데, 지
금 네게서 풍기는 기운은
카이렌의 얼굴이 침중하게 변했다. 그도 라한에게서 풍기는 기
운이 자신과 흡사하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비슷하지. "
"그렇군. 어떻게 그런 기운을 가질 수 있지? 판테아를 만났나?"
카이렌은 수련을 통해 신화력과 비슷한 기운을 얻은 게 아니었
다. 굴레를 벗는과정에서 판테아와 거래를통해 얻은 거였다. 그
때문에 이 기운은 생명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기운이라고 생각해
왔다. 자신이 신의 사자에게 얻었으니 오직 신과 그의 사자만이 가
지는 기운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불가능해. 이건 인간이, 아니 드래곤이라도 가질 수 없는 기운
이야. 근데 저자가 어떻게
판테아가 힘을 줬다고는 해도 제대로 된 힘은 아니었다. 판테아
가 가진 기운의 아주 미미한 조각을 얻었다고 할까? 그 정도였기에
라한이 가진 기운보다 많이 미흡하고 부족했다. 카이렌은 몰랐지
만 라한은 그 차이를 명확히 잡아냈다
"카이렌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 아니다. 네가라한이라고했나?"
"그렇다니까. "
"프라하 "
"알았어. "
카이렌이 프라하를 불렀다. 라한과 가장 먼저 만났으니 오래전
일을 물어보라는 의미 였다.
프라하도 그 말뜻을 이해하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묻지. 내 원래 이름이 뭐지?"
프라하가 물음을 던지자 카이렌과 투바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
다. 거짓임이 드러나면 한 번에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라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못 알아보
는 건 괘씸했지만 철두철미한 자세가 마음에 든 것이다.
"네 이름은 프라미트. 맞나?"
"흠, 그건 아는사람이 좀 있으니 알수도 있겠지. 그럼 너와내
가 처음 만날 때 상황을 말해 봐라. "
"넌 내가 마법을 쓸 때 풍기는 기운을 느끼고 찾아왔지 그때 내
가 사용했던 마법이 아마도 로케이션 디텍트였을 거야. 그리고 너
하고 나하고 크게 한판 붙었고 난 싸우다 힘에서 밀리니까 도망갔
지. 더 말해 볼까?"
"그리고 내가 다시 널 만난 건 언제지?"
프라하의 물음에 라한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런데도 투바
와카이렌은 라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직도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내가 용병들을 따라다닐 때였어. 그때 모습이 바꿔 네가 뒤에
서 따라오는 걸 내가 발견했지. 거래를 통해서 동행하기로 했고.
이 정도면 된 거 아닌가?"
"프라하. 다 맞는 얘기야?"
라한의 대답에 카이렌이 프라하를 재촉했다
라한이 대답한 내용은 투바나 카이렌도 모르는 얘기였다. 그런
내용까지 모두 알아맞혔다면 라한이 분명할 터였다.
카이렌의 질문에 프라하가 입을다물고 멍하게 서 있었다. 그렇
게 한참 있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반갑다. 친구야. "
"반갑다. "
프라하가 라한을 조용히 끌어안고 훌쩍였다. 라한은 프라하에게
안긴 채로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반갑게 맞아주는 그들이 좋았다. 정이 느껴져서 좋았고 자신을
아껴주는 마음이 좋았다. 그래서 이들을 잊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프라하의 행동에서 라한의 정체가 확실해졌다. 카이렌과 투바도
라한에게 다가와 그를 안았다
"라한. "
"반가워. "
"나쁜 놈. 우리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데.
"미안해. "
라한이 카이렌과 투바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렇게 작은 덩치
의 라한이 장정 셋을 끌어안았다. 프라하, 투바, 카이렌 그리고 라
한은 그렇게 다시 뭉쳤다
불괘한 재회
오렌만에 다시 만난 라한과 일행들 아무 말없이 마주보고만
있어도 괜히 웃음이 나왔다 새삼 이런게 친구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 라한 대체 왜 갑자기 사라진 거야 무슨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투바의 물음에 라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라한이 일행을 떠난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가 시간이 필요해서
였다 일행과 다니면서 자신을 추스르고 그간 못했
던 스련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햇다
두 번째 이유는 카이렌의 실력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당시에
는 라한도 카이렌의 실력을 종잡을수 없었던 상황 괜한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일행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일행들 스스로가 수련을 계속하기를 바라
는마음 때문이었다. 자신과함께 다니며 이런저런 일에 휘말리다
보니 일행들에게는수련할시간이 턱 없이 부족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서로 떨어져서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는 게 나을 듯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생각 같아서는 사실대로 다 말하고 싶었다. 한데 세 가지 이유
중 그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알고 보면 다 함
께 있으면서도 서로를 다독여 나아질 수 있는 문제였다.
카이렌에 대한 의심은 더더욱 말하기 힘들었다. 결국 친구를 의
심한다는 말이지 않은가? 이런 얘기를 했다가는 자칫 일행과 틀어
질 듯해서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냥. "
고민 끝에 라한이 한 대답이다. 그로서는 당장 생각나는 단어가
이 말밖에 없었다.
"뭐야? 그럼 심심해서 우릴 떠났던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냥 넘어가주라. 말하기 좀 그렇다. "
"그럼 누구한테 납치당한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니야. 내 의지로 너희들을떠났어. 이유는여러 가지
가 있지만 말하기가 좀 그러네. "
라한이 말을 둘러대자 카이렌이 게슴츠레한 표정을 지었다. 자
유분방하게 살았어도 카이렌이 엘프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 때
문에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결과를 납득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 라한. "
"됐어. 이유가 뭐가그리 중요해. 어차피 다 지난 일이잖아. 들
어가자고. 오늘 거하게 한 잔 해야지. "
카이렌의 말을 프라하가 끊고 나왔다. 서로에게 곤란한 얘기 같
았기에 그냥 말을 돌렸음이다
"그래. 들어가자. 라한. 오늘코가삐뚤어지도록마셔보자고."
"풋, 그래 한번 마셔보자 "
"좋아. "
라한과 일행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로 저택에 들어갔다 누
가 봐도 다정해 보이는 친구이자 가족의 모습 그대로였다.
술판이 벌어졌다. 산해진미까지는 아니지만깔끔하고 맛깔스러
운요리가 정원에 가득 펼쳐졌다. 또, 대륙각지방을 대표하는유
명한 술들도 음식들 사이사이에 자리 잡았다.
가득 널린 음식과 술들을 보며 라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이
런 거창한 술자리는 라한에게 맞지 않았다.
라한이 생각했던 재회는 이런 식이 아니었다. 조촐한 술자리에
옹기종기 모여앉아서 지난 얘기를 나누는 자리. 싸구려 술이라도
다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마냥 좋은 술자리. 라한이 생각한 건 그
런 재회였다.
'대륙에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는데
라한이 거부감을 느낀 가장 큰 이유였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봤
던 인육을 먹는 사람들. 그 때문에 대륙 정세에 꽤 많은 관심을 가
지게 되었다. 아사자가속출하고 자신의 아들딸을 팔아야
하는 대륙의 힘없는 이들. 심지어 귀족들조차도 은밀히 도적단을
키우는 실정을 에테로에게 보고받은 적이 있었다
"카이렌. "
"응? "
"이 술자리 말이야, "
"아, 좀조촐하지?하하. 이해하라고. 지금 가뭄이 너무 심해서
아무리 닦달하고 쥐어짜내도 더 이상은 안 나와. 이게 한계라고. "
카이렌의 대답은 라한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닦달하고 쥐어짜냈다는 말은 다른 이들에게서 강탈했다는 얘기
나 다름없었다 설사 그 상대가 귀족이라 하더라도 빼앗아서 즐기
는 건 옳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 악랄한 귀족에게서 빼앗았겠지. '
그냥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다시 물음을 던졌다.
"대체 어떤 나쁜 귀족 놈들한테서 뺏은 거야?"
"뭐 귀족도 없는 건 아니지만 실제로 그놈들한테는 윌 빼앗는 게
쉽지 않아. 그놈들하고 충돌이 잦으면 류카라한 놈들이 눈치 챌 수
가 있거든. 그래서 대부분은 가까운 마을을 무작위로 쓸어온다. 도
적단으로 가장하면 그리 어렵지 않거든. "
" 흐음
카이렌의 대답에 라한이 침음성을 흘렸다. 점점 엇나가는 그들
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공백이 너무 크구나. 휴우우. '
라한이 머리를 휘저어 애써 생각을 지웠다. 지금은 친구들과 오
랜만에 만난 자리다. 괜한 말로 그들과의 사이가 불편해지는 건 원
하지 않았다.
"라한.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얘기나 좀 들어보자. "
"아까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지?"
"미스릴 창고에 갇혔다가 나온 얘기까지 했어. "
"글쎄. 거기서 나오니까 배가 고파 미치겠더라고. 나무들도 맛
있는 음식으로 보일 정도였다니까. 뭐 다행히 가까운 곳에 냇가가
있어서 거기서 물고기를 잡아먹었지, 으 지금은 먹을 수 있으려
나? 당시에는 산채로 뜯어먹었거든. "
라한이 당시를 회상하며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이렌 일행이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서로가 살아온 얘기를 하고 있을 때, 프라하가 자리에서 일
어났다.
"나 이제 가봐야겠다 "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라한의 물음에 옆에 있던 투바의 볼이 씰룩거렸다. 웃음을 억지
로 참는 모습이 었다.
"어라? 무슨 일인데 그래?"
"에고. 말 마라, 내가 지금 휴란트 아버지로 등록이 되어 있거든.
"어?아!그렇군. 크크. 재미있겠는데."
처음 휴란트를 왕국 후계자 선정 경합에 내보낼 때만 해도 가족
이 없는 고아로 출전시켰다. 가문 역시 평범한 시골 평민으로 소개
함으로써 귀찮은 일을 피했다.
한데 언젠가부터 휴란트에게 가문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
다. 라한이 만들어낸 가상의 가문 카테슈 때문이었다
소문이 너무 진짜 같아서 오히려 아니라고 발뺌하기가 힘들어
졌다. 그래서 가상의 아버지를 만들어냈고 프라하가 그 역할을 맡
았다.
"재미는무슨. 난귀찮아미치겠어. 퍽 하면왕궁으로불러서 이
것저것 물어보기나 하고. 젠장. "
"프라하, 고생해. "
"쳇. "
프라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얼굴 가득 인상을 쓰고 있지만
기분 나쁜 얼굴은 아니먼다.
프라하를 배웅하느라 라한과 카이렌, 투바가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 앉으려고 할 때 투바가 입을 열었다.
"우리 일어난 김에 그놈들이나 보러갈까?"
"누구?"
"쿨샤크하고 데메크. "
"그렇지. 깜빡하고 있었다. "
라한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들이었다. 쿨샤크와 데메크. 그들은
라한을 죽이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노예 아닌 노예가 되어야 했다.
'그놈들 인간 좀 됐으려나?'
"어떻게 지내고 있어?"
"보면알아. 여전히 우리에 대한적개심은대단하지. 가보자고."
카이렌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는 쿨샤크와 데메크가
마음에 안 든다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띠운 채였다.
반면, 투바는머리를긁적이며 카이렌의 시선을 피했다. 쿨샤크
와 데메크에 관련된 어떤 일에 잘못한 게 있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야?"
"아니야. 가자. "
투바도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한도 뒤따라 일어났다. 그들 사이
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
다. 어차피 지금 가는곳에 그들이 있을 터. 만나보면 대강의 사정
은 알 수 있을 듯했다.
카이렌이 앞장서서 간곳은 연병장이었다. 다른 이들이 훈련하
는 곳인 듯 어지럽게 발자국이 찍혀 있었파
"하나! "
"하앗! "
"둘! "
"하앗! "
연병장 쪽에서 구령 소리와 기합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라한은
단 번에 뒤에 들리는 기합 소리가 쿨샤크의 목소리임을 알아챘다
"검?"
"응. 요즘 쿨샤크하고 데메크는 검을 배우고 있어. "
"쿨샤크는 그렇다 쳐도 데메크까지?"
"우리 힘으로는 네가 건 금제를못풀겠더라고. 마법을못 쓰니
배울게 검뿐이잖아. 그리고우리는마법사가거의 없어. 용병 길드
나 암살자 길드는 원래 마법사가 부족한 곳이라서 어쩔 수 없었지. "
카이렌이 모은 세력의 기본은 대륙에 산재한 용병 길드와 암살
자 길드였다. 그것도 대규모가 아닌 중소 길드를 병합해서 만든 게
지금 카이렌의 세력이었다. 근간이 되는 곳에 마법사가 부족하니
카이렌의 진형에도 마법사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검이라고는 들어본 적도 없을 텐데. "
"우리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소싯적에 검을 배웠나
봐. 너무 오랫동안 검을 놓아서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기본기는 오
히려 쿨샤크보다 나았어. "
"오호 그래?"
"그렇게 놀랄 건 못 돼. 기본기는 괜찮은데 체력이 형편없거든. "
"그래도 놀라운걸. "
데메크가 검을 배웠다는 말에 라한이 놀라움을 표했다. 그 모습
을 보며 카이렌과 투바가 라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 이해한다는
의미였다. 자신들도 데메크가 검을 휘두르는 걸 보고 놀랐으니 말
이다.
"일단 가보자. "
"그러지. "
라한이 일행들과 연무장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연무장 앞에
도달하자곳곳에서 쉬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경례를 해왔다. 군
대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훈련이 잘 돼 있군. 역시 대단해. '
새삼 카이렌의 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검술만
뛰어난게 아니었다. 남을지도하는능력. 그래서 자신을완벽하게
따르게 만드는 지도력까지 가진 인물이었다.
"저기군. "
쿨샤크와 데메크는 연무장의 구석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마 이곳에서의 지위가 구석에서 휘두를 수밖에 없는 입장인 듯
했다.
카이렌과 투바가 라한을 데리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검을 휘두르던 쿨샤크와 데메크도 검을 멈추었다. 그
리고 카이렌과 투바를 바라보며 눈을 부라렸다
'왜 저러지?'
쿨샤크와 데메크라면 세상에서 라한을 가장 싫어해야 정상이다.
자신이 그들을 반노예 상태로 만들어 고생하게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데 지금 그들의 모습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어긋나 있었다. 라
한을 볼 때보다 더한 적개심을 카이렌과 투바에게 보내는 쿨샤크와
데메크. 그들의 모습에 라한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봐, 쿨샤크, 데메크. 오랜만이다. "
"흥. 너도 이 악의 집단에서 악마 같은 짓만 할 생각인가?"
"닥쳐라!"
쿨샤크의 말에 옆에서 훈련하던 다른 사람이 분노성을 토했다.
그들에게는 신과 같은 카이렌과 투바. 그들을 모욕하는 말을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만. "
"쿨샤크. 데메크. 너희들에고아니다. "
무슨 말을 하려던 라한이 곧 입을 다물었다. 왠지 더 물었다가는
기분이 나빠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기분 좋게 술 먹고
회포를 풀고 싶었지 언짢은 기분으로 고민하고 싶지는 않았다.
"잭슨. 잘 가르쳐라. "
"예. "
좀 전에 소리쳤던 잭슨이라는 사내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단순한 훈련병이 아니었다. 쿨샤크와 데메크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검술 스승이었다
"가자. "
"또 보여줄 사람이 있어. "
카이렌의 말에 라한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젠 그들의 보여준다는 말이 달갑지 않았다. 그들 나름대로는
그간 자신들이 해온 성과를 자랑하는 것이겠지만 라한에게는 부정
적인 생각만 자꾸 들게 하는 일일 뿐이었다. 한데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 가자. "
"따라와 "
라한이 힘없이 대꾸했다. 카이렌은 라한의 기분을 눈치 채지 못
한 듯 자랑스럽게 앞장서 갔다.
카이렌이 어느 정도 앞장서서 가자 투바가 라한의 어깨를 툭
쳤다
"응?"
"이번에 볼 사람은 아니다. 그냥 너무 놀라지 마. "
"알았어. "
투바의 걱정스런 말에 라한도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라한은 카이렌을 비롯한 일행들의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
았다. 좋은 면 다 버리고 나쁘게만 변한듯해서 가슴이 아플 정도
였다.
그런 와중에 투바의 걱정을 듣자 기분이 조금은 풀렸다. 그래도
투바만은 예전의 모습이 남아 있는 듯해서였다. 마족이면서 따뜻
한 정을 가진, 그러면서도 장난을 몹시 좋아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라한은 저택 구석에 마련된 작은 집으로 안내되었다 일견하기
에도 튼튼하게 지어졌다는 게 느껴질 정도의 집이었다. 창문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터 자체가 바위 위라서 바닥도 단
단했다.
'이건 마법?'
거기다 라한의 기감에 집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마나가 느껴졌
다. 배열식으로 봐서는 마나를 쓰지 못하게 억누르는 방해 장치 같
았다.
'감옥이군. '
라한은 이곳을 감옥이라고 단정 지었다.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
게 창문을 만들지 않은 점과 땅을 파고 도주하는 걸 막기 위해 단단
한 바위 위에 집을 만든 점. 그리고 집 전체를 두르고 있는 마나 유
동 방지 장치까지 마법사나 그에 준하는 실력자를 가두는 감
옥이 분명했다.
끼이이이익 !
문을 열자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사람이 거의
출입하지 않는 곳이라는 증거였다.
"들어가자. "
"흠. "
카이렌이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끈적끈적한습기가 라한의 전신을 감쌌다. 관리조차 제대로 되
지 않는 곳이라는 증거였다.
"여길 통해서 음식을 밀어 준다. "
"흠. "
통로는 약간 내리막의 형태였다. 그 통로 옆으로 주먹 두 개 굵
기의 파이프가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이 파이프에 음식을 넣어서
아래로 흘려보내는 듯했다.
"네가 어제 나한테 그랬잖아. 그래서 나도 널 기다
어느 정도 내려가자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대화
하는 듯했지만 들리는 목소리는 하나뿐이었다.
"누구지?"
"보면 알아. "
카이렌이 라한의 물음을 일축하고 다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걸어갈수록 대화하는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한데도 여전히
들리는 목소리는 하나뿐이었다.
'무슨 짓 설마
라한은 내려가면서 이곳에도 자연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자연과 대화하기 위해서 의지를 집중시켰다.
그러는 과정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자연이 하는 말이 서로 주고
받는 대화임을 알아챘다. 라한 이외에 자연과 대화하는 첫 번째 인
간이었다.
의문을 애써 참은 라한이 걸음을 재촉했다. 자연과 대화할 수 있
이가 누군지 너무 궁금했다.
앞서 걸어가던 카이렌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에 따라 라한과
투바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흠. "
"놀랐지? 저놈은 제이슨이야. 세계 최고의 정령사라고 자부하
던 놈이지. "
"으음. "
라한은 연신 침음성만 흘렸다. 제이슨의 몰골이 너무 처참해서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손목은 벽에 연결된 쇠사슬로 완벽하게 제뚫려 있었다. 두다리
는 서로 묶여 있고 묶은 쇠사슬에는 엄청난 무게의 추가 달린 모습
이었다. 두 눈은 오래전에 파였는지 눈이 있던 자리가 휑하게 비어
있었다. 거기다 상체와 하체에는 흥터가 가득하고, 그 흥터에는 구
더기가 득시글거렸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봐, 제이슨! "
"아, 나저 사람싫어. 나저 사람싫어."
카이렌의 부름에 제이슨이 겁에 질려 떨기 시작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흥터의 범인이 카이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왜 저런 끔찍한 짓을
오히려 테세르가 하는 짓은 귀엽게 보였다. 그는 기껏해야 멍을
만드는 정도이지 않은가? 카이렌처럼 눈을 뽑거나 손목을 사슬로
뚫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카이렌. 이게 전부
"저 상처들 대부분은 내가 만든 거지, "
"너무 끔찍해. "
"끔찍하다고? 우린 저놈 때문에 로테마이어스라는 거물과 상대
하게 됐어. 드래곤과 싸운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기나 해? 산골
에 처박혀서 유유자적하며 지낸 넌 이해 못하겠지. "
라한은 서로의 회포를 풀어놓는 자리에서도 자신이 드래곤과
싸웠다는 얘기를 빼놓고 말했다.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였다.
그래서 카이렌은 라한과드래곤의 싸움을모르고 있었다. 알았
다면 혼자만 드래곤과 싸웠다는 식의 말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흠. "
라한도 카이렌 일행이 제이슨 때문에 로테마이어스와 싸우게 된
건 알고 있었다.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정도가 너무 심했다.
제이슨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의도한 건 아니었다. 어쩌다
드래곤과 만나게 됐고 어쩔 수 없이 싸워 이긴 게 그가 한 일의 전
부였다. 공교롭게도 그 과정에서 카이렌에 제압당했다는 게 운이
없었을 뿐. 그가 의도한 건 단 하나도 없는 셈이다.
실제로 잘잘못을 따지면 라한의 죄가 더 컸다. 크라이드리안이
라한에게 마나를 봉인당하지 않았다면 그런 지경에 처했겠는가?
어찌 보면 제이슨은 죄인이 아니라 피해자에 불과했다.
"이봐, 제이슨. 이 사람기억하나?"
"응? 몰라 몰라. 난 네가 누군지 몰라. 근데 내 친구는 널 안대. "
"네 친구?"
카이렌의 물음에 제이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그것
도 모르냐는 표정 같았다.
"내 친구 몰라? 전에 말해줬잖아. 여기 있는 흙이 내 친구야.
어?근데 저 사람은 내 친구가좋아한다. 우이씨. 내 친구는 나만
의 친구야. 근데, 근데. 내 친구가 저 사람을 더 좋아해. 안 돼.
안돼. 내 친구는나만의 친구야. 저 사람을더 좋아하면안돼."
제이슨이 턱으로 라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얼굴 가득 억울하다
는 표정을 짓는 제이슨. 라한에게 친구인 흙을 뺏기는 게 싫은 얼
굴이었다.
'제이슨은 정말 자연과 대화를 하고 있었구나, 근데 흠. '
자연과 대화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 해도 엄청난 능력이라고 봐
야 한다. 한데 그런 이가 이미 폐인이 됐다는 게 못내 가슴 아팠다.
생각같아서는그를 데리고 가서 치료하고 싶었지만, 부상의 정도
가 너무 심해 쉽지 않을 듯했다.
'카이렌도 허락하지 않겠지. '
설사 치료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카이렌이 허락할지 미지수였
다. 지금카이렌의 얼굴은 제이슨의 불행 자체를즐기는표정이었
다. 그런 사람에게 재미를 빼앗겠다고 하면? 그가 허락할 리 만무
했다.
'차후에 생각해야겠다 '
라한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몰골이 너무 끔찍해서 더 보고 있
기가 거북했음이다.
"가자. "
"왜? 그만 보고 가려고?"
"응 구역질 나. "
"크크크. 저놈이 좀 지저분하기는 하지 그래도 난 저놈을보는
것만으로도 술맛이 살아나던데. "
카이렌의 대답에 라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채 2 년도 되지 않은 헤어짐의 기간. 그동안 카이렌은 너무 많이
변했다. 타성에 젖었다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주 악질적이고 악
마적인 타성만 골라서 섭취한 사람 같았다.
'돌아가야겠다. '
라한은 이들과의 시간이 즐거울 줄 알았다. 서로가 함께 했던 시
간 동안 진정으로 위했고 또 진정으로 아쪘던 사이였다. 비록 공백
이 있었지만 그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막상 만나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너무 많이 변한 카이렌
의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같은공간에 있다는그 자체로 불
편함을 느낄 정도였다. 살인을 즐기고 남의 불행을 즐기는 전혀 엘
프답지 않은 모습. 그리고 그런 자신의 변화를 알면서도 애써 무시
하는 모습이 라한을 이방인처럼 만들었다.
'라한, 미안해. '
터벅거리며 감옥을 나오는 라한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 모습
을 본 투바 역시 발걸음이 무겁긴 마찬가지였다.
투바는 마계에서 이보다 더 악랄한 것도 많이 봐왔다. 그런 그였
기에 이 정도 환경으로 자신의 성격이 바꿔지는 않았다.
그도 라한만큼이나 카이렌의 변화가 어리둥절했다. 마치 몸속에
다른 이가 빙의된 것처럼 순식간에 변해 버린 카이렌. 먼저 겪고
느꼈던 일이기에 라한의 지금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감옥에서 한참 걸어 나온 라한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멈추
자 카이 렌과 투바도 뒤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왜?"
"빈 방 있나?"
"그만 자려고?"
"응. "
라한은 지금의 찝찝한 감정을 잊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
라리 두 눈 딱 감고 한숨 자는 게 나을 듯했다.
그렇지 않고 이 상태로 눈뜨고 더 있다가는 카이렌이 역걱워질
것 같았다. 그래도 친구라고 생각했던 카이렌이라 그런 상황까지
는 치닫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왜? 좀 더 놀다가 자지. "
"피곤해. "
"그럼 어쩔 수 없지. 이봐! 누구 없나! "
카이렌이 주변을 돌아보며 크게 외쳤다. 그 말에 어딘가 숨어 있
던 이들 중 한 명이 카이렌 앞으로 걸어왔다.
"말씀하십시오. "
"라한 따라가면 안내해 줄 거야. "
"알았어. "
사내가 앞장서 걷자 라한도 그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을 때 라한이 고개를 돌려 카이렌과투바를 바라봤다.
투바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 안타까운 표
정을 띤 투바. 오늘 있었던 이런저런 일을 사과하는 듯했다.
반면, 카이렌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음흥해 보였다. 마치 무슨
꿍꿍이를 꾸민 사람 처럼.
"에휴. "
라한이 땅이 꺼져라 한숨 쉬었다. 카이렌의 변화가 꼭 자기 잘못
인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자신이 카이렌을 떠나지 않았다면 이런
성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터였다.
'감시 인인가?'
카이렌과 헤어진 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라한을 따르
고 있었다. 모두세 명. 꽤나혹독하게 수련 받았는지 상당히 은밀
한 움직임을 보였다.
한참 걸어가자 작은 집이 눈에 들어왔다. 저택과는 조금 동떨어
진 곳에 위치한 집이었다.
'카이렌 왜?'
카이렌과 투바, 프라하는 이곳이 아닌 중앙에 지어진 거대한 저
택에 살 것이다. 그런데 라한에게는 저택에서 동떨어진 곳에 지어
진 작은 집을 내주었다. 그건 라한을 경계하고 있다는 얘기로도 볼
수 있었다.
'아닐 거야. '
라한이 애써 고개를 저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라한이 들어가
자 안내했던 사내가 문 옆에 섰다. 그리고 좀 전부터 계속 따라오
던 사내 세 명이 더 나타나문주변에 늘어섰다. 라한을 감시하겠
다는 의도가 명백한 행동이었다.
"빌어먹을. 대체 왜? 왜?"
라한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
은카이렌과투바, 프라하를 친구라고생각하고찾아왔다. 때문에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고 허물없이 대할 거라고만 믿었다.
한데 아니었다. 투바와 프라하는 몰라도 카이렌은 라한을 경계
하는 기색이 너무 역력했다. 겉으로는 반기고 있었지만눈빛만큼
은 항상 다른 꿍꿍이가 있는 눈빛이었다.
"아닐 거야. 그래, 아닐 거야. 내가잘못봤을거야."
라한이 지금의 현실을 도피하려 침대에 몸을 뉘였다. 눈이라도
감으면 좀 나아질 것 같아서였다.
'미치겠군. '
잠을 청하려 했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해서
오히려 더 심한 망상만 더해갔다.
'응? '
그렇게 한참뒤척였을때, 라한은 뭔가묘한기분을받았다. 어
떤 기운을 느낀 건 아니었다. 단순히 누가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
까하는 묘한 기분이 었다.
'흠. '
라한이 주변에 신화력을 서서히 퍼트렸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
비하는 본능에 충실한 모습이었다.
'카이렌?'
처음 신화력을 퍼트렸을 때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은신
술의 대가인 카이렌인지라 라한도 놓칠 뻔했다.
한데 두 번, 세 번 계속 신화력을 퍼트리자 뭔가 이상한 점을 발
견할수 있었다. 자신이 퍼트린 신화력이 어딘가에 맞고 왜곡되는
현상이었다.
라한은 이 현상의 원인을 카이렌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 세상에
서 라한의 이목마저 속일 수 있는 존재는 카이렌뿐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대체 왜?'
카이렌이라는 확신이 서기는 했지만 먼저 아는 척하지는 않았
다. 스스로 은신술에 최고라 생각하는 카이렌이 무안해할까 염려
된 탓이다.
"라한, "
갑자기 들리는목소리에 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역시 대처가 빠르군. "
말과 함께 라한의 왼쪽에서 카이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암습을 가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카이렌. 여긴 무슨 일로?"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 "
"내일 하면 안 되는 거야? 지금 시간이
"은밀하게 해야 할 얘기라서 어쩔 수 없었어. 이해해줘. "
카이렌이 의자를 당걱서 침대 옆에 앉았다 라한도 침대에 다시
걸터앉으며 카이렌을 조용히 바라봤다
"말해봐. "
"흠. 먼저 네가 얼마나강해졌는지 궁금해. 전이나 지금이나 너
에게서는 느껴지는 기운이 별로 없어서 말이야. "
라한은 카이렌의 의도가 무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금
은 자신에 대해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전하고 비슷해. 넌 내가드래곤하고싸우는 걸 봤잖아. 크라이
드리안이었지? 휴우, 그때 정말 힘겹게 이겼지. "
"안타깝네. 난 네가 더 성장하기를 바랐는데. "
카이렌의 얼굴에는 안타까워하는 감정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
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기색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일단 생각을 접은 라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계속 놀았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근데, 대체 무슨 일이야?
이런 물음은 낮에 핸도 되는 거잖아. "
"너 대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대륙?"
카이렌의 물음에 라한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얼굴만 보고도
그의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한 것이다.
"그래. 대륙. 지금 대륙은수시로 전쟁이 벌어져서 사람들이 죽
어나가고 있지. 거기다 망할놈의 드래곤들은 수시로 나타나서 금
은보화를 강탈해가고, 잦은 가뭄과 홍수로 식량이 부족해지는 사
태가 자주 벌어져. "
"흠. "
라한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젠 그의 의도를 확실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난 이런 불합리한 사태가 싫어 "
"그래서 대륙을 발아래 두겠다고?"
"그래. 내가 대륙의 패자가 되어서 판트리아를 부유하게 만들어
볼 생각이야. 내가 대륙에 있는 수많은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면 더
이상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겠지. 그리고 이번 기회에 드래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그놈들의 행포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
역시나 카이렌은 대륙을 제패할 꿈을 꾸고 있었다. 엘프인 카이
렌이 인간들이 사는 대륙을 제패하겠다는 말. 라한은 그 말에 찬성
할 수 없었다.
인간은 인간이 사는 방법이 있고 엘프는 엘프들만의 삶이 있다.
타 종족이 간섭하는 그 자체가 균형을 깨는 일 같았다.
"카이렌. 넌 엘프야. 네가 대륙을하나로뭉치려고 하면 인간들
이 가만히 있을까? 네가 아무리 강해도 그들이 고분고분 말을 들을
리 없어. "
"내가 그 생각도 안 했을 것 같아? 후후, 내게는 휴란트가 있잖
아. 다음달쯤이면 휴란트가루이나왕국의 후계자가될거야. 엘
베로는 내가 조용히 가서 죽여 버리면 되니까 휴란트가 루이나 왕
국의 왕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
"그러니까 넌 휴란트를 뒤에서 조종해서 대륙 유일의 제국으로
만들겠다는 거야?"
"역시 머리가좋군. 바로맞췄어. 휴란트를조종하고내가키운
세력을 이용하면 대륙을 재패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 "
카이렌의 말이 계속 될수록 라한의 거부감도 점점 커졌다. 방법
이야 어찌줬든 엘프인 그가 인간을 지배하겠다는 말이지 않은가?
그래도 인간으로 살고 싶은 라한에게 좋게 들릴 리 없었다.
"류카라한 일행과 드래곤들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데? 아직 그
들에 대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거 아닌가?"
"류카라한 그놈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얼마 전에 그놈들이
골렘을 모아뒀다는 곳에 갔었는데 '렌' 이라는 사람이 그들을 골탕
먹인 모양이더군. "
"흠. "
카이렌의 입에서 '렌'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라한이 류카라한
진형에서 도망치면서 경고글에 남긴 가명이었다. 하지만 카이렌은
'렌' 이라는 이름을 라한이 남겼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류카라한 놈들하고 부딪쳤던 건 확실
한 것 같아. 난 렌이라는 이름이 로테마이어스가 남긴 가명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
"로테마이어스?"
"그래. 이름도 비슷하잖아. 거기다 내 세력과류카라한세력 외
에 끼어들 강자는 드래곤밖에 없어. "
"그렇군. "
라한이 멍한 표정으로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카이렌의 황당한
해석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지은 표정이었다.
라한의 표정을 보지 못한 카이렌이 설명을 계속했다.
"로테마이어스가 류카라한 놈들하고 붙었어. 우리가 손 놓고 지
내도 둘 중 한 세력은 사라질 거라는 거지. "
"그래서?"
"패한 세력은 말할 필요도 없고 설사 이긴 세력이라도 그 힘이
많이 줄어들 건 당연하잖아. 그때 내가 나서서 깡그리 정리해 버리
면 끝나는 거지. 문제는
카이렌이 말을 길게 끌었다. 주변을 슬쩍 돌아보는 모습이 뭔가
심각한 내용인 듯했다
"문제?"
"흠, 사실, 문제는 프라하 그놈이야. "
"프라하가 왜?"
"그놈은 내 대륙 제차에 대한 얘기를 듣더니 반대부터 하더군
그리고 투바 그놈도 그래. 널을 찾기 전에는 다른 일에 신경 쓸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박하더라고. "
카이렌의 말에 라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투
바와 프라하는 아직 순수했다. 야망이나 힘에 대한 욕심보다 친구
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친구로 생각해도 될 듯했다.
"그렇구나. "
"그래서 내가 널 찾아왔지. 프라하는솔직히 별 문제가 안 되는
데 투바 그놈은 함부로 건드리기가 힘들거든. 어떻게 보면 물리적
인 힘만 쓰는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이상한 주술도 쓰고, 마족이
라서 그런지 쉽게 상대하기가 힘들어. "
"나보고 그들을 처 리하라는 말은 아니 겠지?"
"아, 아니지. 아니야. 우린 모두 친구인데 어떻게 처리할 수가
있어. 그냥네가그들을좀설득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하려는 일
이 결국 대륙을 위하는 일이라는 걸 왜 모르는지 에휴, 안탸까워
미치겠다. "
카이렌이 침대를 툭툭 치며 안타까워했다. 라한은 그런 카이렌
의 모습이 모두 가식으로만 보였다.
"카이렌. "
"응. 도와줄 거지?"
"난 싫어. "
"왜? 아, 넌 귀찮은 거 딱 질색이었지 걱정 마 너한테는 아무
일 안시킬 테니까. 그냥투바와프라하만설득해 주면 돼. 나머지
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
"난 네 일을 돕고 싶은 생각이 없어. 굳이 막지는 않겠지만 내게
어떤 도움을 바라지는 마라. 난 네 생각에 찬성하지 않으니까. "
말을 마친 라한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명백한축객
령이었다.
라한의 행동에 카이렌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라한. 너도 내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난 너하고 적으로
만나기 싫어. "
"나 역시 너와 싸우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솔직히 이놈의
대륙이 어떻게 돌아가든 큰 관심도 없고. 하지만 네 생각은 좀 아
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까 말했듯이 널 막으려들지는 않겠지만 내
게 어떤 도움을 바라지는 마라. 이게 내 대답이다. "
라한이 이불을 뒤집어 쓴 상태로 말했다. 그를 본 카이렌의 입가
에 비릿한 미소가 담겼다.
'라한. 그게 내가 원한 대답이었다. '
"알겠어. 방해는 하지 않는다니
카이렌이 터벅거리며 집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서도 라한은
덮어쓰고 있던 이불을 내리지 않았다.
기분이 최악이었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듣고 싶
지 않았다. 괜히 왔다는 생각에 자신의 머리만 계속 쥐어박았다.
'카이렌. 내가 화내지 않도록 해줘.
라한의 집을나온카이렌은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저택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때, 경비병이 카이렌에게 다가왔다.
"루이에님이 오셨습니다. "
"그래? 지금 어디 있지?"
"숙소에서 쉬고 계십니다. "
"알겠다. "
경비병이 물러나자 카이렌은 곧바로 루이에가 묵고 있는 3 층으
로 향했다. 라한을 만날 때보다 더 반가워하는 얼굴이었다.
루이에는 급한 일이 있어서 잠시 저택을 떠나 있었다. 그리고 오
늘 그 일을 모두 마치고 다시 돌아왔다.
똑똑!
"누군가?"
"나다, 카이렌. "
"들어와라. "
루이에의 허락에 카이렌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침대에 걸
터앉아 검을 닦는 루이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또, 검을 손질하고 있군, "
"이게 내 일상이지. 근데 무슨 일이지?"
"오늘 손님이 왔다. "
"손님?"
"네가 만나보고 싶어 했던 사람. "
루이에가 닦던 검을 검집에 넣었다. 호기심이 일었다는 표시였다.
루이에는 카이렌 일행에 몸을 담은 이후부터 라한을 만나고 싶
어 했다. 계속 뒤쫓다가 갑자기 사라진 라한. 아직도 그때의 실종
이유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또 지금은 덜했지만 처음에는 라한이라는 이름 자체에 민감하게
반응한 이들이 카이렌 일행이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들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한 게 당연했다.
"지금 어디 있지?"
"오늘은 시간이 늦었다. 내일 보는 게 나을 것 같군. "
"음, 그렇군. "
자리에서 일어났던 루이에가다시 자리에 앉았다. 얼굴 가득 아
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용건이 끝난 듯 싶은데도 카이렌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를 보
며 루이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할 말 있나?"
"저건 아직도 가지고 있군. 잡동사니는 대체 왜 그렇게 모으는
건가?"
아직 정리가 덜 끝났는지 카이렌이 말을 돌렸다. 그가 가리킨 건
루이에의 방에 가득 한 무기들과 방패, 옷 조각 그리고 다리를 못
쓰는 이들이 사용하는 휠체어였다. 개중에는 빛을 발하는 물건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리 소중하게 다
루는 물건은 아니 라는 의미 였다.
"내게는 뜻 깊은 물건이다. "
"훗, 넌 저기 있는휠체어 말고는닦지도않잖아. 대충늘어놓으
면서 뜻 깊은 물건이라니
카이렌이 말을 하면서 휠체어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 후 손으로
휠체어 위를 대충 살폈다. 역시나 휠체어 위에만 먼지가 없었다.
보나마나 돌아오자마자 닦은 게 분명했다.
"카이렌. 다시 말하지만그물건은건드리지 마라. 내 마지막경
고다. "
"흠. "
카이렌이 흠칫 놀라며 손을 뗐다. 그러면서도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전에도루이에가가지고 있는물건을만진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한데 오늘은살기마저 일으
키며 카이렌을 압박했다.
'그때는 휠체어가 아니었지 흠, 휠체어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
건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루이에. "
"할말이 있는눈치로군. 말해라. 난머뭇거리는걸좋아하지 않
는다. "
루이에의 재촉에 카이렌이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생각을 정리
할 때 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한참 동안 미간을 좁혔던 카이렌이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프라하, 투바 그리고 오늘 만났던 라한까지 내 생각에 찬성
한사람은아무도 없었다. 네가유일하지. 아직도대륙을제패하겠
다는 내 생각에 동조하는가? 난 그걸 확인해 보고 싶다. "
일행 중에서 카이렌의 생각을 이해하는 사람은 루이에밖에 없었
다. 그만이 그나마긍정적인 대답을해온것이다. 그래도지금까지
는 두 명의 반대와 자신을 포함한 두 명의 찬성이라 무시할 수 있었
다. 설득이 안 되면 힘으로라도 제압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데 이젠 세 명의 반대와 자신을 포함한 두 명의 찬성이었다.
수적으로 열세였다. 물론 아직도 그들 세 명을 이길 자신은 있었
다. 라한의 실력이 예전그대로라면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찾아왔나보군 라한이라는 자가 강한가?"
"글쎄 강하다고 볼 수 있지. 아직 그의 실력을 모르니까. "
"흠, 너조차 모르는 강자라
"그래도 이길 자신은 있다. 그는 갓 성룡이 된 드래곤을 겨우 이
길 수 있는 실력밖에 안 되거든. 그동안 강해져봐야 큰 차이는 안
날 거라고 생각한다 "
카이렌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자신을 따르는 게 유리하다는 걸
은연중에 피 력하는 모습이었다.
"그럼 윌 그리 걱정하는 거지?"
"걱정하는 게 아니다. 네 생각을 확실하게 알고 싶을 뿐이지. "
"내 생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
"그때 넌 대륙을누가가지듯관심 없다고했었지. 대신, 잉글리
아트를 비롯한 그놈들 전부를 죽이기만 하면 된다고 했었고. 맞
나?"
카이렌의 물음에 루이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을 들은 카
이렌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실제 루이에의 실력이 그리 강한건 아니었다. 프라하, 투바, 라
한 그리고 카이렌. 이들 중 루이에보다 강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보통 사람 기준으로는 절대자로 불릴지 몰라도 이곳에서는
가장 약한 이가 그였다.
그렇지만 지금 카이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지금
은 강자 한 명이 아쉬운 때였다.
'류카라한. 그놈들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젠장. '
카이렌의 계획은 단순했다.
류카라한 일행과 로테마이어스 일행의 싸움. 그리고 그 결과는
로테마이어스 세력이 셀 것이다. 카이렌은 남은 로테마이어스 세
력을 처리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비록 큰 싸움 후라서 지치고 다친
상태가 되겠지만 로테마이어스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대신 죽어줄 놈이 필요하지. '
로테마이어스가 강한 건 사실이다. 물질계 최강의 존재로 드래
곤을 꼽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루이에의 실력도 약
한 건 아니었다. 물론 이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그런 루이에가 로테마이어스와 싸움에서 어느 정도만 버텨준다
면, 그래서 그의 눈을 어지럽힐 수만 있다면 기습으로 끝장 낼 수
있을 터였다. 카이렌에게는 고금 최강의 은신술이 있으니 가능할
터였다.
"더 할 말 있나?"
"검을 좀 더 닦고 자도록 해라. "
"응?"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거든. 흐흐흐. "
카이렌이 음침하게 웃으며 루이에의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루이에가 생각에 잠겼다.
'쓸 일이라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냐? 카이렌. '
루이에라고 해서 카이렌이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당장의 목적
이 같아서 한 배를 타고 있을 뿐이다.
'지나보면 알겠지. '
루이에는 카이렌의 말에 따라 검을 좀 더 닦은 후에야 잠을 청했
다. 그날따라 달이 왜 이리도 어두운지 루이에의 미래상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암습
다음날 투바나 라한을 데리러 왔다 아침 식사를 함께 하자는
의미였다 그를따라 식당에 가자 카이렌이 먼저 와서 식사를 기다
리고 있었다 프라하는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은지 보이지 않았다
일찍 나왔네
난 아침잠이 없거든 앉아
카이렌의 말에 따라 투바와 라한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깔끔한
고 맛갈스러운 대륙 곳곳의 요리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
안 먹어
잠시만 누가 올 거야 같이 먹어야지
카이렌은 루이에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기왕이면 식사를
하면서 서로를 소개시켜줄 생각이었다
잠깐 기다리던 라한이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참. 혹시 변 못 봤어?"
"변?"
"물 덩어리 말이야. "
라한의 말에 투바가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며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왜? 못 봤어?"
"아니, 봤어 근데 다음 날 사라졌어. "
"다음 날 사라져?"
"응. 나하고 같이 있었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안 보이더라고. "
라한과 투바가 변에 대해 얘기를 나눌 때, 카이렌은 입구만 바라
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온다는 그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
이었다.
'왜 저러지?
라한은 카이렌의 눈에서 불안해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유는 모
르지만 변의 실종과 관계가 있는 듯했다
'물어볼까?'
잠깐생각했지만묻지 않는 게 나을 듯했다. 안 그래도 새벽에
있었던 대화로 서로에게 간격이 생긴 지금. 괜히 더 물었다가는 친
구를 의심한다는 오해를 받을 것만 같았다.
'왔군. '
라한의 기감에 누군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굴레를 벗은 흔적
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실력은 굴레를 벗은 이들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자였다
"늦었다. "
문이 열리고 루이에가들어왔다. 주변을쓱훌어보는모습이 라
한을 찾는 듯했다.
루이에의 시선이 카이렌, 투바를 지나서 라한에게 닿았다.
"네가 라한이라는 인간인가 보군. 들었던 것하고는 다른데. "
루이에의 말에도 라한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라한은 루이에가 들어온 그 순간부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눈
에는 살기가 감돌고 주변에 기운이 요동쳤다. 분노하고 있음이 확
실한 모습이 었다.
라한의 변화를 느낀 투바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라한. 왜 그래?"
"너, 너
라한이 왼손을 들어 루이에를 손가락질했다. 그 모습을 보며 투
바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대체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네가 루이에로군. "
라한의 입에서 루이에의 이름이 나왔다. 아직 소개도 하지 않은
루이에를 한 번에 알아본 라한. 그 모습을 보며 오히려 루이에가
고개를 갸웃거 렸다.
"날 아는가?"
"알지, 아주 잘 알지. 몇 번이나 봤으니까. 크크크, 내가 바보
같았어. 그때는 네가 루이에라는 걸 몰랐거든. "
라한의 자조적인 웃음에서 슬픔이 묻어났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카이렌과 투바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라한, 무슨 일이야? 대체 무슨 일인데 혼자서 웃고 그래?"
"라한. 왜 그래?"
카이렌과 투바가 라한의 양쪽에 섰다. 너무 격분해있는 듯 보여
서 말리기 위함이었다.
"라한이라고 했지? 난 널 처음 보는데 넌 날 본 적이 있다고? 언
제였지?"
"그건 알 필요 없다. 그냥 넌 내 손에 죽으면 되는 거야. "
"내가 왜 너한테 죽어야 하는지 알고 싶군. "
"복수하겠다고 약속했다. "
라한이 식탁을 벗어나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주변에 있던 음식들과 벽에 걸린 그림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라한
의 강한 기운에 버티지 못한 것이다.
라한이 천천히 다가오자 루이에도 손을 검에 올렸다. 그리고 왼
발을 살짝 빼고 허리를 아주 조금 낮춘 자세를 취했다. 언제든 검
을 뽑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뭐 하는 거야?"
카이렌이 루이에에게 달려가 옆에 섰다. 그 역시 검을 손에 올리
고 싸울 채비를 갖추었다.
"카이렌. 날 막을 생각인가?"
"물론이야. 지금 루이에는 우리 세력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사
람이다. 너하고 싸우게 둘 수는 없어, "
"그럼 난? 난 너한테 필요 없는 존재였나? 나보다 루이에가 더
중요하다는 뜻인가?"
"그건 흠. "
라한의 물음에 카이렌이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대답할지 궁리하
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참 가만히 있던 카이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라한. 넌 1 년 반이나우릴 떠나 있었다. 그것도우리가 떠난게
아닌 네가 자의로 떠난 거였지. 우리를 친구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루이에는 전장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라고 볼 수
있다. 네가 숨어서 혼자만 잘 살려고 할 때, 우린 서로 등을 맞대고
적과 맞섰다고! 네가 전우애라는 걸 알기나 해? 혼자 살아보겠다
고 숨었던 네가 우리를 이해할 수나 있냐고!"
카이렌의 절규에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잘못의 발단이 자
신이었으니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루이에를 칼라피안을 죽인 그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정신적인 스승이었던 칼라피안이 마나를 잃고 죽어갈 때 라한은 스
스로에게 맹세했었다. 루이에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어떻게든 죽
여서 칼라피안의 넋을 기리겠다고. 그렇게 맹세했었다.
"카이렌. 네가 막으면 너도 위험해진다. 물러나라. "
"어림없는 소리. 네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모르지만 나도 그렇
게 약하지 않다 "
"카이렌. 부탁이다. 이 일에서 손을 떼라. "
"하하하하하, 자신만만하구나. 어디 마음대로해봐."
결국 카이렌이 검을 뽑았다. 루이에를 내버려둘 수 없다는 뜻이
었다. 그리고 기어이 라한과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스르르릉!
루이에도 검을 뽑고 전투 자세를 갖추었다. 일촉즉발의 사태. 누
구든 먼저 움직이면 전투가 시작되는 상황이었다.
"라한! "
투바가 끼어들었다.
투바도 카이렌의 전우애라는 말에는 수긍했다. 루이에를 몇 번
이나 살려줬고, 반대로 목숨을 구함 받은 적도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라한에게 검을 겨눌 수는 없었다. 투바에게는 첫 친구이자 가
장 소중한 친구가 랴한이 었다.
"투바. 너도 내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야?"
"라한. 이유라도알자. 대체왜?"
"내가 죽인 이들 중 한 명과 관계가 있나보군. "
대답은 라한이 아닌 루이에에게서 나왔다.
그는 라한의 입에서 복수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상황을 파악했
다. 자신이 죽인 사람이 몇 명이던가?그들중 한 명과관계가 있
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살기를 돋우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크크, 아는군, 넌 내 스승님을죽였다. 내가가장존경하는분
이 너 때문에 죽었단 말이다. "
"유감이군. "
"유감? 넌 그 말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모양이군, 나 카라한
필슨 널 죽여 그분의 한을 풀어주겠다. "
카라한 필슨. 라한이 필슨 가문의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이에
루이에가 놀란 얼굴로 라한을 바라봤다.
'카라한, 카라한 흠, 제스란님의 제자였구나. 그래, 그분의
제자가 평범할 리 없지. '
루이에는 라한이 분노하는 이유를 제스란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봐온 이들 중 단연 최고였던 제스란. 죽어가면서
제자를 부탁한다고 했던 사람이 그였다.
'제스란님. 제자분이 훌륭하게 자랐군요. '
루이에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라한이 살기를 일으키고 있
는데도 무섭기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루이에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강하다고 소문난 사
람은 모조리 찾아가서 죽인 이가 루이에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도 유독 가슴에 남는 사람이 있었다.
제스란.
그 누구보다 강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
고 죽이려 했고 결국 그를 자살로 몰고 가는 데 성공했다.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런데 죽으면서 보여준 안쓰러움과 고독이 가득
한 얼굴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누군가를죽이고 나서 죄책
감을 느낀 적은 맹세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가 남겼던 휠
체어를평생 간직하고살았는지도모른다. 매일 닦으면서, 매일 그
를 생각하면서
"루이에. 이 정도면 이유가 되나?"
"충분하다. 하하하하하. "
루이에가 통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카이렌에게 슬쩍
눈짓했다. 이 싸움에서 빠지라는 의미였다.
루이에의 눈짓을 받은 카이렌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 혼자 싸우
도록 할 수 없다는 강인한 의지마저 엿보였다.
"카이렌! "
"안 돼. 넌 우리 세력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널 그냥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
루이에가 제지하자 오히려 카이렌이 목소리를 높였다.
원래 카이렌은 라한을 눈 아래로 봤다. 라한 정도는 마음만 먹으
면 언제든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 전에 풍겼던 기운이 오판이었음을 알려줬다. 버티
기 힘들 정도로 강했던 라한의 기운. 카이렌은 라한이 뿜은 기운의
정도를 로테마이어스가 전신의 기운을 마구 뿜어낼 때와 흡사하다
고 느꼈다. 만약 루이에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라한을 감당할 능
력이 카이렌에게는 없었다.
"라한. 미안하군. 제대로싸우고싶었는데."
' 크크크. "
한 번 웃은 라한이 루이에에게 다가갔다. 그 상태로 그를 그대로
지나쳐 식당 입구까지 걸었다.
"따라 나오겠지?"
"그러지. "
라한이 나가자 루이에가 그 뒤를 따랐다. 일말의 두려움도 없는
당당한 모습이 었다.
"멍청한 놈. "
카이렌도 루이에의 뒤를 따라 나갔다. 인상을 마구 찌푸린 카이
렌. 지금 상황이 몹시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미치겠군. "
식당 안에서 계속 망설이던 투바도 결국 밖으로 나갔다.
누구 편을 들지는 결정하지 못했지만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는 봐야 했다.
라한이 도착한곳은 저택에서 쾌나 멀리 떨어진 공터였다. 병사
들의 야외 훈련 장소인 듯 곳곳에 쉴 곳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가 어떤가?"
"좋군. 내가죽을 장소로 마음에 드는 곳이야. "
"루이에 그딴소리 하지 마라. 넌 절대 여기서 죽지 않아."
카이렌의 외침에 라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카이렌의 말은 루이
에와 자신의 싸움에 무조건 참가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카이렌. "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네가 날 버린 순간부터 우린 친구
가 아니었다. 모두 네가 저지른 일이니 스스로를 원망해라. "
라한은 더 이상 카이렌을 말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자
신이 복수를 포기하는 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 어쩔 수 없이 카
이렌에게 해를 주지 않고 루이에를 꺾는 수밖에 없었다.
"루이에. 나부터 시작하겠다. 날기! 빛의 공!"
라한이 공중으로 떠올라 그보다 더 높은 곳에 빛의 공을 만들었
다. 거대한라이트마법과도같은 빛의 공 이 마법이 실현되자주
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무슨 짓이냐?"
"보면 알겠지. 하앗!"
라한이 만들어둔 빛의 공에 신화력을 집중시켰다. 이에 빛의 공
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빛의 공이 공터뿐 아니라 멀리 있던 저
택까지 밝게 비출 정도로 커지자 라한이 보내던 신화력을 서서히
끊었다.
"이게 전부라면 이제 내 차례로군. 간다. 하앗!"
루이에가 검을뽑아들고 라한에게 쇄도해갔다 그 옆에 있던 카
이렌은 검을 뽑아 라한의 주변을 돌았다. 루이에가 위험할 때 돕고
라한이 틈을 보이면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아직이다. "
라한이 빛의 공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그러자 구체가 작은 구체
로 나뉘기 시작했다. 하나, 둘 그렇게 갈라지던 구체가 어느새
수백여 개로 늘어났다.
" 합! "
라한이 구체를 향하고 있던 왼손물 아래로 그어 내렸다. 그 손에
따라 나뉘어졌던 구체가 땅으로 우박처럼 쏟아졌다.
"피해!"
"헙!"
첫 경고성은 투바에게서 나왔다. 그 뒤로 루이에와 카이렌의 헛
바람 들이키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스팟! 콰콰쾅!
땅에 떨어진 빛의 공이 공터 주변에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실로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한데도 카이렌과 루이에, 투바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무슨 짓이지?"
"다른 사람이 개입하는 건 싫거든. "
라한이 떨어뜨린 빛의 공은공터 주변을감싸듯 떨어졌다. 그리
고 그곳에 엄청난 구덩이를 만들어서 마법사가 아니면 넘어오기 어
렵도록 만들었다. 거기다 떨어진 빛의 공 하나하나가 뿜어내는 빛
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흠. 예사 빛이 아니군. "
공터 구석에서 지켜보던 투바가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그가 빛
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한 탓이다.
다른 이들은 빛을 단순히 밝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만 생각했
다. 하지만투바는 빛 때문에 피부가 찢어지는느낌을 받았다. 신
성력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대로 해보자고. 하앗!"
라한이 세라소드를 뽑아들고 루이에에게 쇄도해갔다. 공격하다
멈춰 섰던 루이에는 자연스럽게 뒤로 몸을 빼냈다. 갑작스럽고 느
닷없는 공격 이 었다.
공격하다 멈춰서 어정정한 자세였던 루이에가 놀란 얼굴로 몸을
틀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단 한 번으로 승부가 갈릴 뻔한 위험한
순간이었다.
"라한. 비겁하다. "
"흠. "
카이렌의 외침에 라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카이렌의 얼굴에선
라한을 배려하는 표정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더 이상 라한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라한은 그런 카이렌이 안타까웠다. 비록 전날 있었던 몇 가지 일
로 기분은 상했지만 아직도 카이렌을 친구로 생각했던 라한이었다.
괜히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빌어먹을. 불의 바다!"
라한이 자신이 있는 곳과 루이에가 있는 곳의 바닥에 불을 만들
었다. 루이에는 옆으로 두 걸음 피해서 불의 공격권에서 벗어났다.
"하앗! "
루이에가 수세에 몰리자 카이렌이 본격적으로 끼어들었다. 살기
가득한 검을 휘두르는 카이렌. 라한은 그저 마법과몸놀림을 이용해
피하기만 했다. 아직도 카이렌과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음이다.
"피하지 마라. "
"카이렌, 왜?"
"하앗! "
카이렌의 검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에 따라 라한의 자세도 서
서히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라한이 몰리기 시작하자 카이렌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라한
을 이 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얼굴이 었다.
카이렌은 자신이 라한이나 로테마이어스보다 강하다고 생각했
다. 비록 실력은 부족해도 그만의 특기인 은신술을 사용한다면 누
구든 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지금 그 믿음은 확신으로 변
했다. 로테마이어스와 비견될 만큼의 기운을 풍긴 라한을 밀어붙
이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그는 라한과 로테마이어스의 실력을 한참 잘못 알았다.
지금 라한의 실력이면 카이렌과 루이에 모두를 쉽게 처리할 수 있
었다. 카이렌에게 살수를 펼 수 없다는 소극적인 자세가 라한을 궁
지에 몰고 있을 뿐이었다.
"공간으로. 막기!"
라한은 계속되는 카이렌의 파상 공세에 연신 밀리기만 했다. 대
부분 피하고 막는 수비 형식만 취하며 변변한 공격을 하지 못했다.
라한이 계속 수세를 취하자 카이렌은 점점 득의양양해졌다. 마
치 이미 다 이긴 듯한모습이었다. 반면, 함께 싸우고 있던 루이에
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루이나 왕국의 왕궁 안 연무장.
보통 왕궁 기사단만 이용하는 이곳에 때 아닌 인파가 몰렸다. 수
도에 머무르는 핵심 귀족은 물론이고 지방에 위치한 하위 귀족까지
모두 모인 탓이다.
"누가 될까?"
"좀 알아낸 거 없는가?그래도 자네는왕궁에서 열리는 회의에
종종 참가했지 않은가?"
"허허, 후작, 공작들끼리만 결정한 걸 낸들 어찌 알겠는가?"
귀족들의 대화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그 대부분은 오늘의
주인공이 누가 될까에 대한 궁금증을 묻는 내용이었다
"근데 너무 갑작스럽군. "
"그러게 말이야. 이렇게 바삐 결정할 줄은 몰랐어. "
오늘은 루이나 왕국의 후계자를 선정하는 날이다. 원래는 몇 달
후에 치러질 예정이었지만 고위 귀족파 국왕의 결정으로 갑작스럽
게 치러지게 되었다.
하지만 엘베로 국왕은 한 달 전부터 칙명으로 전 귀족을 수도로
모이라고 명했었다. 그 하나만 보더라도 엘베로 국왕은 이런 식의
갑작스러운 후계자 선정을 예상한 게 분명했다.
빰빠빠빠!
"전체 차렷! "
나팔소리가울려 퍼지고 누군가의 구령이 들렸다. 이에 중앙에
마구 퍼져 있던 귀족들이 벽 쪽으로 붙었다. 저마다 음료를 하나씩
들고 있는 귀족들. 한데도 뭔가를 마시는 소리를 내거나 잡담을 하
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빰빠빠빠!
다시 한번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자 대전에서 몇 명의 사람이 천
천히 걸어왔다. 왕궁에서 은밀히 진행된 후계자 선정에서 발언권
을 가졌던 고위 귀족들이었다.
루이나 왕국에 최고 귀족이라 불리는 공작, 후작 그리고 백작 중
실세 6 명. 모두 13 명의 귀족이 연무장에 마련된 단상뒤의 의자에
착석했다.
부우웅! 부우우웅!
이번엔 좀 낮은 톤의 나팔소리가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왕실
기사단이 조금 빠른 걸음으로 입구에서 단상으로 가는 길을 만들었
다. 그리고 10 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이들 두 명이 뛰어와 왕실 기
사단이 만든 길에 붉은 카펫을 깔았다. 왕족을 상징하는 푸른 방패
가 그려진 카펫이었다.
"대 루이나 왕국의 국왕 폐하 납시오. "
누군가의 외침 011 연무장에 모여 있던 귀족들이 움직임을 멈추었
다. 귀족이 아닌 이들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바닥에 묻었고 귀족들
은 고개를 숙인 채 예를 표했다.
원래 왕국은 폐하가 아닌 전하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현재 대륙
에 제국이 없으니 폐하라는 호칭은 받을 사람이 없는 셈이다.
하지만 그건 타국에서 부르는 명칭일 뿐. 대부분 자국의 왕을 부
를 때에는 폐하라는 호칭을 쓰는 경우가 더 많았다. 자국의 우월성
을 나타내려는 의도였다.
"와! 루이나 왕국 만세! 엘베로 국왕 폐하 만세!"
"엘베로 국왕 폐하 만세! 만세!"
엄청난함성이 연무장을 가득 메웠다. 귀족뿐 아니라그들을시
중들기 위해 온 평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도 엘베로가루이
나 왕국을 부유하고 강하게 만들었음을 아는 것이다.
잠시 후, 루이나 왕국의 국왕 엘베로가 지팡이를 짚고 걸어 나왔
다. 아주 천천히, 가끔 비틀거리며 나오는엘베로. 화려한국왕예
복도 엘베로의 나이를 가리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만. "
엘베로가 단상에 뒤에 마련된 중앙 의자에 앉아 손을 내저었다
그 손짓에 연무장을 가득 메운 만세 소리와 나팔소리가 순식간에
멎었다.
"시작하라. "
"예. 오늘은 우리 루이나 왕국의 제.
이미 늙어 허리가 휜 파론이 단상에 올랐다. 그는 먼저 루이나
왕국의 역사와 역대 왕들 그리고 그 왕들의 업적을 차례로 읖었다.
마지막 엘베로의 업적을 읖을 때에는 있는 사실 없는 사실 모두 섞
어서 최대한 화려하고 멋지게 말했다. 그의 말만으로 판단하면 엘
베로는 성군이자 성자였고 대륙의 구세주였다.
".이렇게 루이나 왕국은 대륙에 이름을 떨쳤고 앞으로도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대륙에 더 뻗어나갈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루이나 왕국의 국왕이자 영웅인 엘베로 폐하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선정하는 자리입니다. 후계자 앞으로!"
파론의 말에 엘베로가 걸어왔던 입구 쪽에서 휴란트가 걸어 나
왔다.
"휴란트 카테슈. 그대는 카테슈 가문의 제 21 대 후손이 맞는가?"
"예?"
"그대는 카테슈 가문의 제 21 대 후손이 맞는가?"
갑작스러운 물음에 휴란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테슈라는
이름이 너무 생소했기 때문이다.
휴란트가 후계자가 되려고 지원할 때에는 평민의 자손이라고 말
했었다. 그래서 성도 없고 뚜렷한 근거지도 없다고 했었다.
그런 휴란트에게 갑작스럽게 카테슈라는 가문의 후계자라는 질
문이 떨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종잡
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그대가 카테슈 가문의 제 21 대 후손이 맞
는가?"
"예?아, 예. 맞습니다. "
휴란트의 얼떨떨한 대답에 파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후계자가 되기 위한수많은 시험에서 최고의 성적을 받았던 휴란
트.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그가 이렇게 멍청한 대답을 하는 게 이해
가 되지 않았다.
반면, 단상 뒤에서 보고 있던 엘베로는 오히려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휴란트가 후계자가 되려고 지원할 때 자신을 평민의 자손
이라 소개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테슈라는 성도 자신
의 비밀 정보 조직에 의해 알려진 터. 지금 보이는휴란트의 멍한
대답도 자신의 가문이 들킨 것에 대한 놀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휴란트 카테슈. 무릎을 꿇으라. "
"예. "
파론의 말에 휴란트가 오른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왕이
나 부모에게 행하는 예였다.
남성이 여성에게 구애할 때는 왼쪽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오른
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두고 고개를 숙인다. 만약 구애가 실패
하면 빠르게 검을 뽑아 자결하기 위함이었다.
반면, 국왕 앞에서는 검을 뽑기 힘든 자세를 취하는 게 관례였
다. 대부분이 오른손잡이인 터. 오른쪽 무릎을 바닥에 대면 왼손을
왼쪽무릎위에 올려야하고, 이 자세는발검을어렵게 만든다. 국
왕의 암습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 폐하. "
"알겠다. "
파론이 단상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에 엘베로가 지팡이를 짚고
섰다. 나머지 차례는 그가 진행하려는 듯했다.
"휴란트 카테슈 "
"예, 폐하. "
"국성 엘베로를 받겠느냐?"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가문을 빛내겠습니다. "
국성 엘베로.
루이나 왕국의 왕성이 엘베로 하나뿐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국성 엘베로를 하사하겠다는 말은 휴란트를 아들로 삼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휴란트를 엘베로 가문에 받아들여 후계자로 삼
겠다는 얘기였다.
"나 쿠벨린 드루이탄 엘베로의 이름으로 공포하노라. 지금 내
앞에 있는 휴란트 카테슈는 지금 이 시간부로 휴란트 드루이탄 엘
베로이며, 루이나 왕국의 단 하나뿐인 세자로 책봉되었다. 향후 그
를 만나면 나를 대하듯 공경하고 존경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시에
는 국법으로 처벌하겠다. "
"루이나 왕국 만세! 엘베로 국왕 폐하 만세! 휴란트 왕세자 저하
만세!"
"루이나 왕국 만세! 엘베로 국왕 폐하
파론의 열창을 시작으로 단상 뒤에 있던 핵심 귀족들도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 다음은 연무장에 가득찬귀족들, 그 다음
은 그들을 수행하는 기사들과 시종들이 만세를 불렀다.
한동안 공석이었던 루이나 왕국의 후계자가 정해진 것이다.
"갑작스럽게 후계자 선정이라니 살 떨려 미치는 줄 알았네. "
먼 곳에서 후계자 선정식을 지켜보던 프라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원래 예정보다 한참 앞당걱진 후계자 선정식에 놀란 기색
이 역력했다.
"어쨌든 잘 끝나서 다행이다. 근데 카테슈는 대체 뭐야 7"
프라하도 카테슈라는 성은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휴란트의 대
답이 조금만 늦었으면, 혹은 프라하가 조금만 더 성급했어도 후계
자 선정식은 엉망이 됐을 터였다.
휴란트가루이나왕국의 세자가되었을때, 라한은루이에, 카이
렌과 싸우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카이렌에게 차마 살수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콰콰콰쾅!
"헉! 헉!"
라한이 강한 공격을 하고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계속해서 몰아
쉬는 숨이 그동안의 격전을 말해주는 듯했다
"라한. 최선을 다해라. "
"닥쳐 ! "
루이에의 조롱에 라한이 짜증을 담아 외쳤다.
그도 최선을 다해서 루이에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래서 카이렌을 공격하기 위해 강한 공격을 준비한 적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그를 만났을 때가 떠오르고 그와 함께 지냈던 때가 떠
올랐다. 눈딱 감고 공격하려 해도손이 떨려서 제대로공격할수
가 없었다.
"라한! 그만해. 제발!"
멀리서 지켜보던 투바의 음성이 들렸다. 너무 간절해서 저절로
눈이 돌아갔다.
'투바
눈물이 고인 투바의 얼굴을 보며 라한도 가슴이 아팠다. 라한이
라고 친구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지 않겠는가? 게다가 투바라면 자
신의 목숨을 살려준 적도 있지 않은가? 마계를 떠나 라한을 위해
넘어와 준 투바의 말이라서 웬만하면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루이에를 살려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륙 오지에서
눈을 감은 칼라피안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복수를 포기하다니, 자
신에게는 정신적 지주이자 아버지 같던 칼라피안. 복수를 하지 않
으면 억울하게 죽은 그에게 너무 미안했다.
"카이렌. 제발 이번 싸움에서 손을 빼라. "
"라한. 네가 살기를 거두기 전까지는 나도 어쩔 수 없다. 이해
해라. "
카이렌이 음흥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루이에
가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편을들어주고는 있지만 카이렌이라
는 엘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카이렌은 라한과의 싸움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껄
끄러운 존재인 라한을 처리할 속셈이었다.
"하압! "
카이렌이 검을 뽑아 쇄도해갔다. 그러자 옆에 있던 루이에도 검
을 뽑아 라한을 공격해갔다.
"젠장. "
라한이 카이렌의 검을 피하기 위해 왼쪽으로 한 걸음 이동했다.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루이에의 공격도 함께 피하기 위함이었다.
"어딜!"
"공간으로!"
다시 카이렌이 공격하려하자 라한이 공간 이동을 감행했다. 이
번은 아예 공중으로 이동해서 공격을 피했다
"그런다고 공격 못할 줄 알고. "
"카이렌! 그만!"
카이렌이 검을 겨누자 라한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그를 보며
카이렌과 루이에도 검을 늘어뜨렸다.
"뭐지?"
"루이에를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냥 살려줄 수는 없다. "
"무슨 말이냐?"
"루이에와싸워서 내가 이기면 그를 데리고 가겠다. 죽이지 않
겠다고 약속할 테니 제발 손을 떼라. 카이렌. 부탁이다. "
라한의 말에 제일 기뻐한 이는 투바였다. 라한의 어려운 선택으
로 친구끼리의 싸움은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카이렌이 루이에를 돌아보며 의사(,0.)를 물어봤다. 이에 루이
에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긍정을 표했다
"루이에 괜찮겠어?"
"어차피 이건 내 싸움이었다. 내가한 일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나 혼자 싸우는 게 당연하지. "
"에휴, 어쩔수없군. 제발조심해라."
카이렌이 순순히 전장에서 물러났다. 그가 투바가 있는 곳까지
멀어지자 루이에가 검을 고쳐 잡았다.
"루이에. 난 약속은 지킨다. "
"죽여도 상관없다. 어차피 검을 익힐 때부터 죽음은 각오한 일
이었다. 오히려 강한 너에게 죽게 돼서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
루이에의 얼굴에 의지가 깃들었다.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루이에도 자신이 라한보다 한참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또,
서로가 최선을 다해 싸운다 해도 카이렌과 자신의 합친 힘보다 라
한이 더 강하다는 걸 잘 알았다.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이번은 아까와 다를 거다. "
"알고 있다. 카이렌을 공격하지 못하는 너의 소극적인 자세 때
문에 싸움이 대등해진 거겠지. 하지만 나 역시 그냥목 내밀고죽
고 싶은 생각은 없다. "
"흠. "
"공격해라. 최선을 다해서 맞아주마. "
루이에가 검을 라한에게 걱누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정말 죽음
을 각오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라한은 순간 루이에가 괜찮은 놈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 앞에서도 태연할 수 있는 대담함과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
는 용기. 라한도 갖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
라한이 땅으로 내려와 서서히 신화력을 끌어올렸다. 어느 정도
는 정당한 승부를 위해 땅에서 공격할 생각이었다.
'한 번이면, 한 번이면 나도 죽겠지. '
꿀꺽!
루이에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단 한 번.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승패가 갈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자신의 패배가 될 게 분명했다. 한데도 이 싸움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일까? 자신은 라한에게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마음이 아주 편해질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지었던 죄를 속죄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간다. 빛의 권능:"
라한이 둥근 빛 덩어리를 루이에에게 쏘았다. 루이에는 검으로
앞을 가린 채 방어에 전념했다.
콰콰콰콰쾅!
채채채챙!
루이에가 빛 덩어리를 검으로 막았다. 그러자 뒤에서 누군가 당
기기라도 한 듯이 쭉 밀려났다. 엄청난 속도와 파괴력에 어쩔 수
없었다.
투캉!
쾅- !
"쿨럭 ! "
빛 덩어리를 막고 있던 루이에의 검이 부러졌다. 그와 동시에 루
이에가 빛의 덩어리에 가슴을 맞고 뒤로 튕겨나갔다. 엄청난 충격
을 받았는지 연신 피를 토해내는 모습이었다.
"약속했듯이 죽이지는 않았다. 다만, 며칠 치료를
푸-욱!
"컥!"
라한의 허리 뒤쪽에서 배 쪽으로 검이 관통했다. 누군가가 라한
을 뒤에서 찌른 것이다.
"라한! "
놀란 투바가 라한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라한의 뒤에서 비릿하
게 웃고 있는 카이렌을 발견했다.
"카이렌. "
".카이렌. "
라한도 힘겹게 고개를 돌려 카이렌을 바라봤다. 영문을 알 수 없
다는 얼굴이었다.
"이상한가?"
"대체 어떻게?"
"보면 몰라? 기습이잖아.크크크. "
카이렌은 투바 옆으로 이동해서 은신술을 사용했다. 루이에에게
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라한이기에 근처까지 접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죽이기 위해 살기를 일으킨다면 기감이 뛰어난 라
한이 바로 알아챈다는 거였다.
그래서 라한이 완전히 방심할 때까지 기다렸다. 라한이 신화력
을 일으킬 때도 검을 확 쥐고 참았다. 라한이 루이에를 공격할 때
도 검을 파르르 떨며 참았다. 그렇게 참던 카이렌에게 기회가 왔
다. 라한이 루이에에게 공격을 성공시키고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그럼 왜?"
"장애물이니까. "
카이렌의 말에 라한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제야 카이렌
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대륙은 혼자만의 것이 아
"라한. 괜찮지? 라한, 제발. "
투바가 라한을 안고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울던 투바가 카
이렌을 노려봤다.
"카. 이, 렌. 널용서하지 않겠어."
투바가 독기서린 말을 내뱉고 사라졌다. 그가 안고 있던 라한도
함께였다
그들이 사라지자 부상당한 루이에가 카이렌을 바라봤다. 마치
'왜?' 라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 마라. 널 살리려고 그런 거니까. "
"그는 날 죽이지 않았다. 대체 왜?"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어쨌든 난 널 살렸고 널 죽이려 했던 라
한은 죽었다. "
카이렌은 라한이 죽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복부를 완전히 관통
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라한의 심장은 하복부에 있다. 심장을 완전
히 관통 당했을 라한. 살아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장을 찌르지 않았던데
"크크크. 나한테 자기 약점을 가르쳐준 게 명을 줄인 거지. "
"무슨 소리지?"
"그놈은 심장이 여기 있거든. 흐흐흐, 하하하하하. "
카이렌이 자신의 하복부를 가리키며 웃어재꼈다. 통쾌하면서도
음침함이 물씬 풍기는 웃음이었다
"좋겠군."
"젠장. "
한참 웃던 카이렌이 욕설을 내뱉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루이
에가 고개를 갸웃거 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투바 그놈 공간이동을 할줄 알았어 지금까지는 한번도 쓴
적이 없는데 빌어먹을 힘을 숨긴 건가
카이렌의 얼굴이 수신간에 어두워졌다 라한이라는 큰적은 처리했지만
또 다른 적을 만들고 말았다
이제어쩔거지
찾아야지 힘을 도대체 얼마나 숨기고 있었은지 알아내야지
카이렌이 저택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길로 부하들을 불러
튜바 를 찾도록 명령했다
마계로
한편 라한과 엄청난 혈전을 치르고 패한 로테마이어스 진영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져서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승리를 장담한
싸움에서 패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런 사기 저하은 라한에게 패한 드레곤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
니었다 싸움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드레곤은 물론이고 로테마이어스
와 뜻이 달랐던 다른 드레곤들조차도 이번 만큼은 신각하게 받아
들였다
로드 어찌할생각이요

말해보게 압을 다물고 있으면 이미 겪은 치욕스런 일이 사라
지는가
라한에게 패했다는 소문이 돌자 대륙각지에 흩어져 있던 고룡
들이 로드를 방문했다. 베르타라스는 물론이고 대륙 일에 관심이
없던 은거 고룡들까지 포함해서였다.
로테마이어스는 한 고룡의 추궁에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정말
얼굴을 들 면목이 없었다.
대륙 최강이라 자부했던,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대륙을 지울 수
도 있다고 생각했던 드래곤이 패했다. 그것도 다수의 드래곤이 단
한 명의 인간에 의해 단순히 로테마이어스만의 문제로 보기
에는 일이 너무 커졌다
"로드. 이 일을 어찌할 텐가? 그를 그냥 둘 생각인가?"
"설마 해결책조차 없는 건가?"
고룡들이 돌아가면서 로테마이어스를 추궁했다. 그리고 계속 이
어진 로테마이어스의 침묵. 답답한 마음에 고룡들의 언성만 점점
높아졌다.
"이보게 로드! 이 일은
"그만! 모두 그만하고 기다려보시게. 로드도 생각이 있겠지. "
보다 못한 베르타라스가 다른 고룡들을 진정시 켰다
베르타라스라고 해서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다. 로테마이어스의
계획을 계속 반대해왔지만 이런 식으로 패할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적어도 다수의 인간에 의해 소수의 드래곤이 패하는 그런 시나리
오가 되기를 바랐었다. 그게 드래곤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 지키면
서 물질계를 안전하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베르타라스. 전대 로드라고 편드는 것이오?"
"말조심해라. 레미디우스. "
"흥. "
고룡들이 베르타라스를 보는눈빛도 좋지는 않았다. 그가로드
직을 잘못 넘겼다고 생각한 탓이다.
"그만하십시오. 이번 일은 제 잘못입니다. "
"로드. 이제 입을 여는군. "
계속 침묵을 고수했던 로테마이어스가 힘겸게 입을 열었다. 붉
게 상기된 얼굴과 꽉 쥐어진 주먹이 지금 그의 기분을 말해주는 듯
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
"로드. 그런 대답을들으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먼저 드래곤
을 꺾었다는 그 인간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그리고 그
가 어떤 방법으로 우리 드래곤들을 꺾었는지 아는 대로 모두 말해
주시게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 늙은이들을 진정시킬 수 없을 걸세, "
"흠. "
한 고룡의 요구에 로테마이어스가 다시 침음성을 흘렸다. 그 상
태로 이마를 짚고 베르타라스를 바라봤다. 조언을 구하는 눈빛이
었다. 베르타라스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아시다시피 인간입니다. "
"그건 알고 있다. "
"그의 실력은 엄청나게 강합니다. 겨우 2 천 살 내외라고는 하지
만 드래곤 넷을 혼자서 꺾을 정도이죠. "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구석에 있던 고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드. 그 말은 어떤 계략이나함정 없이 순수한실력으로우리
드래곤 넷을 이 겼다는 뜻인가?"
"그가 함정을 준비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와 싸웠던 드래
곤들도 그 함정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도록
그 인간이 유도했다는 얘깁니다. "
"또 싸워도 당할 수 있다는 얘기군 "
"맞습니다 그러니 그의 순수한 실력이라고 봐도 무방하죠. "
"흠. "
로테마이어스의 확신에 찬 말에 고룡들이 일제히 침음성을 흘렸
다. 그제야 드래곤을 꺾은 인간에 대해 감을 잡은 모습이었다.
"그의 이름은 라한입니다. 아직 성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말투를
보아 대륙 중부에 있는 루이나 왕국, 케라스 왕국, 수아나 왕국. 이
세 나라 중 한 곳 출신이라고 판단됩니다. "
"검사인가? 아니면 마법사?"
"검을 들고 다니고 가끔 육탄 공격을 감행하지만 본질은 마법사
로 보입니다. "
"허허, 이거 참. "
라한이 마법사라는 말도 듣고 있던 고룡들에게는 충격이었다.
마법의 종주인 드래곤이 인간 마법사에게 패하다니 믿을 수 없는
사실을 계속 접하게 되자 한숨밖에 안 나왔다
"앞으로 그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 필요하다면 우리 고룡들
도 돕겠다. "
"그래. 로드의 명령으로 직접 요청한다면 내가 당장 가서 요절
내고 올 수도 있다. "
고룡들이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결국 라한을 자신들이
처 리하겠다는 얘기 였다.
"그건 곤란합니다. "
"왜?"
"며칠 전에 신의 사자 퓨리트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
"신의 사자? 퓨리트? 판테아가 아니라 퓨리트라고 하던가?"
듣고 있던 고룡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신의 사자라는 말에
란 눈치였다.
고룡들이 혼란스러워하자 듣고 있던 베르타라스가 다시 끼어들
었다
"퓨리트님은 이번에 새로 신의 사자가 된 분이시네. 그러니 더
이상 판테아님은 언급하지 말게. 자칫 지금 사자가 되신 퓨리트님
을 노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 "
"흠. "
베르타라스의 설명에 고룡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맞는 얘기였다. 물질계 최강자가 드래곤이라고는 하지만 신
의 사자에 비하면 한참 부족할 수밖에 없다. 판테아의 손짓 한 번
에 실버 드래곤이 대륙에서 완벽히 사라지지 않았는가? 괜히 지금
신의 사자가 된 퓨리트에게 밉보일 필요는 없었다.
"그럼 퓨리트님이 와서 무슨 얘기를 하고 갔는가 7"
"물질계 중재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꾸중을 들었습니다. "
"그런 얘기를 했단 말인가?"
" 예. "
고룡들이 약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신의 사자가 드래곤을 질
책한 건 역사 이래로 단 한 번. 오벨리아 팰리스가 열려 마족이 침
입했을 때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드래곤들이 받은 처벌은 실버 일
족의 소멸이었다.
"흠. "
"혹시 무슨 처벌을
"특별히 처벌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
고룡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이번에는큰 처벌을 받
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심하기는 일렀다.
"앞으로 조심해야겠군. "
"그 때문에 여러 고룡들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말해보게. "
고룡들이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경청했다. 신의 사자 퓨리트가
나타난 이상 고룡이라고 손 놓고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의 물질계 혼란을 수습해 주십시오. "
"어떻게 말인가?"
"유희를 이용하면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다른 고룡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타라
스조차도 이번 의견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유희라면 우리가 인간들 사이에 여 지내면서 그들을 돕는 방
법을 쓰자는 말인가?"
"예. 맞습니다. 하지만 인간들만돕자는 얘기가아닙니다. 지금
의 가뭄은 엘프, 드워프는 물론이고 라이칸과 베어울프 같은 몬스
터들에게도 엄청난 시련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
"괜찮은 방법 이군. "
드래곤에게는 엄청난마법 능력이 있다. 특히, 고룡들은성룡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마법을 시전할 수 있다. 로테마이어스의
말은 이런 능력을 이용해서 물질계에 혼란을 조금이라도 줄이자는
의미였다.
"라한에 대한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고룡께서는 지금의 가
뭄과 대륙에 부는 전쟁 바람을 잠재우는 일만 도와주십시오. "
"자네 힘으로 되겠는가?"
"할 수 있습니다. 맡걱주십시오. "
라한을 고룡들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이건 자존심이 달린 문제
였다. 어차피 시작도 자신이 했으니 끝맺음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었다. 또, 그렇게 해야 드래곤 사이에서의 로드 위치가 확고해질
수 있었다.
"믿어보겠네. 그럼 우리는 오랜만에 유희나 즐겨야겠군. "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고룡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폴리모프를 시작했다 엘프
둘, 드워프둘, 인간셋. 그외에도 라이칸드로프와베어울프같은
많은 종족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종족만 해도 만여 종이 넘는다. 한데 이곳에 모
인 고룡들의 수는 걱우 십여 개체뿐이었다. 개체수가 너무 적기에
모든 종료의 모습을 다 갖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대륙의 주축이랄수 있는 인간과 엘프, 드워프, 라이
칸드로프, 베어울프는둘 이상씩. 나머지는 고룡 몇 명이 여러 종
족의 모습을 바꿔가면서 취해야 했다.
"그럼 난 먼저 가겠네. 텔레포트! "
"나도 가야겠군. 텔레포트!"
제각각 모습을 갖춘 고룡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모두 사라지고
베르타라스만 남자 로테마이 어스가 그를 바라봤다
"할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얼마 전에 내가 정령계에 다녀왔네. "
"아, 그렇죠. 깜빡했습니다. "
베르타라스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제스처
를 취했다. 드래곤들이 라한에게 패한 사건 때문에 잠깐 잊고 있었
음이다.
"이번 가뭄은 그래도 1, 2 년 안에 끝날 것 같더군, "
"정령계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나도 잘 모르겠네. 정령왕들도 그 일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더군. 근데 눈치로 봐서는 최근에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 일이 정령들의 거듭남 정도를 강하게 만든 것 같더군. "
지금까지는 정령이 거듭날 때 짧게는 3 년에서 길게는 6 년의 시
간이 걸렸다. 그 정도의 시간은흘러야속성을 완전히 습득할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이번에는 거듭남의 시간이 1, 2 년이면 끝날 듯했다. 예전
과 비교해서 거의 반 이상 짧아진 셈이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
"그렇지. "
라한의 조언으로 정령왕들이 자연과 대화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
작했다. 그 일은하위 정령들에게도묘한자극을 줬고, 결국그들
도 자연과 대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기에 이르렀다. 아직까지 하위
정령들 중에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이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자연과 더 친숙해진 건 사실이고 이 때문에 거듭남의 시간도 덩달
아 짧아지는 효과를 가져왔다
"근데 그 말씀을 하시려고 남으신 겁니까?"
"난 다시 정령계로 가봐야 할 것 같네. "
"퓨리트님을 만나셨습니까?"
"아닐세. 이건 정령왕들과내 일일세. 할말이 있다더군."
베르타라스가 로테마이어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건 허락을 얻
기 위함이었다. 퓨리트의 명으로 갈 때와는 달리 이번은 자의에 의
한방문이다. 그리고 정령계는물질계가 아닌 다른 차원인 터. 물
질계 중재자의 수장인 로드에게 허락을 구해야 예의였다.
"꼭 방문해야 합니까? 지금 물질계가 어지러운데
"정령왕들이 꼭 해야 할 얘기가 있다더군 보여줄 것도 있다 하
고. 방문해야 할듯해. "
베르타라스는 이번에 정령계에 가서 5, 6 년 정도 머물 생각이었
다. 말로만 듣던 정령계를 몸으로 직접 느끼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정령왕들이 허락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얘기 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이 일은 다른 고룡들에게 얘기하지 않겠습니
다. 은밀하게 갔다 오십시오. "
"알겠네. 그럼 다음에 보세. "
"베르타라스님, 잠시만 "
로테마이어스가 나가려는 베르타라스를 급히 불렀다.
"할 말이 남았는가?"
"전에 퓨리트님을 만났을 때 라한을 아는 눈치였습니다. "
"그렇기는 했지. "
"제가 라한을 처리했을 때 노하기라도 하면
로테마이어스가 말끝을 흐리자 베르타라스도 고민에 빠졌다. 당
시를 떠올리는모습이었다. 한참고민 후 베르타라스가 천천히 입
을 열었다.
"아는 눈치이기는 했지. 한데 무슨 관계가 있는 건 아닌 듯했어,
그분께서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지 않았는가?"
"그래도 왠지 눈치가
"그리고 내가 여기저기 알아본 정보에 의하면 라한이라는 인간
도 굴레를 벗은 존재더군. "
"그게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자넨 잘 모르겠군. 굴레를 벗으면 신의 사자의 이목에서 벗어
나게 되네. 굴레를벗은자들의 공통적인특징이지, 퓨리트님도신
의 사자이니 라한을 볼 수 없지 않겠는가?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관계가 생길 수 있겠는가?"
"그렇군요. "
퓨리트가 라한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딱히 언급
해서 살리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가보겠네. "
"알겠습니다. "
베르타라스가 나가자 로테마이어스가 생각에 잠겼다
'라한. 어떻게 처리하지?'
지금 가장 걸리는 일은 누가 뭐래도 라한이었다. 드래곤 넷을 혼
자서 꺾은 실력자. 그런데도 그의 정확한 실력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다시 싸운다고 해도 이길 자신이 없다는 게 가
장 큰 문제였다.
'베르타라스님은 분명 뭔가를 아는 눈치였어. 나한테도 비밀로
하다니. 이유가 뭐지?'
베르타라스의 정령계 방문도 의문점이 많았다. 눈치로 봐서는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모양인데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던 베르
타라스. 왠지 이번 방문이 라한과 관계가 있는 듯해서 찝찝하기 짝
이 없었다.
'빌어먹을. 이게 모두 라한 그놓 때문이다. '
퓨리트만생각하면 라한을손대지 않아야 했다. 딱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관심을 보이는 기미가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굴레를 벗었다는 생각을 하자 오히려 죽여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신의 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보이지 않는 이의
존재 자체가 껄끄러울 터. 어쩌면 내심 그들을 죽여주기를 바랄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일단 죽인다. '
결국 로테마이 어스가 마음을 굳혔다.
요즘은 라한이라는 이름만 들려도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심지
어는 잘 때도 라한에게 죽는꿈을 종종꿀 정도였다. 언제부터 일
개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했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투바와 라한이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라한과 처음 만났던 곳. 굴레를 벗은 인간들이 오랫동안 은거했던
로테라 숲이 었다.
"라한. 죽지 마 라한. "
"망할, 죽지 마란 말이야. "
계속된 외침에도 라한에게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라한 제
라한의 이마를 쓰다듬던 투바가 소스라쳐 놀랐다.
라한이 숨을 쉬지 않았다. 몸도 차갑게 식어서 퍼석거렸다. 이미
죽은 것이다.
"아아니지? 장난치지 마. 아니지?"
투바가손을 벌벌 떨며 눈물을글썽였다. 믿을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라한이 죽다니
"야! 이 빌어먹을자식아!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데, 내가 얼
마나 내가 얼마나
투바가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가슴 한 곳이 휑하니 빈 느낌이
었다.
한참 울던 투바가 라한을 들었다. 차가운 냉기가 팔에 전해졌다
그제야 정말 라한이 죽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라한. 네 복수는 내가 꼭 해줄게. "
투바가 라한을 든 채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자신이 처음 소
환됐던 오두막을 향해서 였다.
오두막에 도착한 투바가 라한을 침대에 눕혔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내가 그놈을 죽여서 보내줄게. "
투바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를 악다물었다. 이제 친구로 생각했
던 카이렌을 죽일 차례였다. 마음에 내키는 건 아니지만 라한을 위
해서라면 자기 자신의 목숨도 내놓을 수 있었다.
"잠시만 멈추게, "
"헛!"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투바가 고개를 획 돌렸다. 회색머리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냐?"
"저승사자가 원래 직위인데 보통은 날 신의 사자라고 부르더군 "
"저승사자? 네가 판테아인가?"
오래전 라한이 굴레를 벗은 존재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얘기를 하면서 판테아라는 이름을 언급했고, 그가 저승사자라고
불린다는 것도 말했다.
투바는 그때 라한이 했던 얘기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이 때문
에 저승사자라는 말에 판테아라는 이름부터 튀어나왔다.
"판테아님은 저승사자들의 수장이셨지. "
"셨지?"
"지금은 퓨리트님이 수장이 되셨다. 난 퓨리트님 아래에서 물질
계를 다스리는 트레이시라고 한다. "
"훗. "
트레이시라는 말에 투바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서서히
살기를 일으켰다.
라한에게 듣기로 저승사자는 죽은 이를 데려간다고 했다. 라한
이 죽어서 그를 데려가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자 절로살심이 일기
시작했다.
'라한. 저놈만 처리하면 네가죽는 일도 없겠지?나만 믿어. 내
가, 내가 처리할게.
투바가 기운을 끌어올리자 오두막이 마구 들썩거렸다. 하지만
트레이시가 있는 곳부터 뒤쪽으로는 평온한 상태 그대로였다. 투
바의 힘이 트레이시의 힘을 뚫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투바. 이런 힘은물질계에서 금지되어 있다. 알텐데."
"닥쳐. 날 죽이기 전에는 라한을 손끝하나 건드릴 수 없을 거다. "
투바의 말에 트레이시가 고개를 옆으로 내밀어 그 뒤를 바라봤
다.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희미한 형체가 느껴졌다
'라한이라는 그 인간인가보군. 굴레를 벗은 놈이 내 눈에 보일
정도면 죽은 거 아닌가?'
트레이시가 기운을 집중해서 라한을 살폈다. 한참살피자 깊은
곳에서 아주 약한 생의 기운이 느껴졌다. 겉으로 죽어 보일 뿐이지
아직 살아 있는 상태였다.
'자연이 이렇게 열성적이라니. 정령왕재목이라더니. 역시.'
라한은 심장을 완전히 관통 당했다. 심지어 그 옆에 있던 단전마
저 반 정도는 깨진 상태였다. 이런 상태라면 설사 드래곤이라 하더
라도 살아남지 못한다.
한데도 라한은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주변에 가득한 자
연이 라한의 생명을 끝까지 잡고 있는 탓이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자연마저 그 끈을 놓으면 그땐 정말
죽을 수밖에 없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죽었다고 봐도 무
방한 상태가 지금의 라한이었다.
"네 친구인가?"
"차라리 날 죽여라. "
투바가 손을 양 옆으로 벌려 트레이시의 앞을 막았다. 계속해서
흘리는 눈물이 그의 감정 상태를 짐작케 했다.
"오해하고 있군. 난 저놈을 데리러 온 게 아니다. "
"그, 그럼 죽지 않았다는
"굴레를 벗은 이들은 죽어도 영혼이 분리되지 않는다 바로 소
멸이지. "
철썩!
트레이시의 말에 투바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멸
인간들은 소멸이 무언지 잘 모른다. 죽으면 모두 끝이라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족인 투바는 소멸의 의미를 잘 알았다. 다시는 환생할
수 없다는말. 차원 내에서 그흔적이 완벽하게 사라진다는말. 누
가됐든 처벌의 최고형은 바로 소멸이었다.
"투바. 넌 지금 마계로 가야 한다. "
.
투바는 트레이시의 말을 못들은 듯 넋을 놓고 있었다. 반쯤은 실
성한 모습에 트레이시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투바! 정신 차려라. 너한테 문제라도 생기면 마계가 물질계를
침 입할지도 모른다. "
마계로
%5
* SCAN0039.PCX *
투바의 눈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삶의 의지를 버
릴 때 생기는 현상이었다
"투바! 빌어먹을. "
트레이시가 투바에게 다가가 그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머리
를 통해 자신이 가진 기운을 불어넣었다.
"정신 차려! "
트레이시가 끊임없이 기운을 불어 넣어 투바의 정신을 일깨웠
다. 그런데도투바의 의식은 점점 흐려졌다. 트레이시가 넣어주는
생명의 기운보다 투바가 버리는 생명의 기운이 더 많은 탓이다.
"젠장. 원하는 게 뭐야? 이놈이야 이놈만 살리면 돼?"

트레이시의 말에 투바가 신음성을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사라
져가던 생명의 기운도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정신이 좀 들어?"
"으 여기가
투바가 혼미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 동안 생과 사를 넘나
든 투바였다.
"쳇, 머리 쓴 거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투바의 말투가 높임말로 바뀌었다. 투바가 계획적으로 이런 일
을 벌였다는 증거 였다.
"음흥한 놈. 마족이 음흥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닌데. "
"흠, 흠. "
투바가 뒤에 있는 라한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음흥함의 원산지
가 라한이라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원하는 게 뭐냐?"
"라한을 살려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건 그것뿐입니다. "
"어디보자. "
트레이시가 투바를 지나쳐 라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목
에 손을 갖다 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힘들겠군. "
"ㅇㅖ?"
"내 능력으로는 그를 살리는 게 불가능해. "
트레이시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라한은 이미 생명력의 불씨가 꺼져 있었다. 제아무리 저승사자
트레이시라도 살릴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살려주신다면서요. "
"아쉬워. 수장에서 오시면 쉽게 살릴 수 있을 텐데. "
저승사자라고 모두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직급에
따라서 가진 능력이 천차만별인 존재가 저승사자였다.
또, 같은 직급이라 하더라도 가진 힘의 종류는 상당한 차이가 있
었다. 치유에 특화된 저승사자, 불공격에 특화된 저승사자등등.
저승사자의 수만큼 그 힘의 종류가 다양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 중 트레이시는 공간을 이용하는 능력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
고 있었다. 치유나 불, 물 같은 다른 힘도 사용할 수는 있지만 공간
을 다루는 능력에 비하면 한없이 약했다.
"그분은 어디 있습니까?"
"그분은 처벌을 받아서 이곳에 내려을 수 없네. "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투바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트레이시가 눈
살을 찌푸렸다.
"이봐. 나도 어쩔 수 없다고. "
"닥쳐! 망할 사기꾼 같으니. "
"흠, 흠. "
기어이 투바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라한을 살릴 수 없으니
트레이시에게 예의를 지킬 필요가 없었다.
"이봐. 내 능력으로는불가능하지만, 저 인간을살릴수있는방
법은 있어. "
"정말요?"
투바의 말투가 바로 높임말로 변했다. 자유자재로 말투를 바꾸
는 투바. 그 모습에 트레이시가 혀를 내둘렀다.
'저것도 능력이라고 봐야 하나? 이거 참. '
"살릴 수는 있지만 내 힘으로는 안 돼. "
"방법이 뭔데요?"
투바의 재촉에 트레이시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마계. "
" 예?"
"저놈 이마에 낙인이 찍혀 있군 저런 녀석에게는 내 힘보다 마
계 마력이 더 효과적이지. "
오래전 투바는 라한에게 악마의 낙인을 찍었다. 라한의 지식을
마계에서도 습득해 보려는 의도로 일종의 마계 출입증을 찍은 것
이다.
그렇지만 악마의 낙인은 단순히 출입증의 용도로 쓰도록 만든
게 아니었다.
마족이 아닌 이에게 낙인을 찍어 쉽게 처리하려는 것. 악마의 낙
인이 처음 만들어질 때의 목적이었다.
'그래, 맞아 악마의 낙인을찍었으니 마계 치료법도휠씬잘통
할 거야. 내가 왜 그걸 깜빡했지?'
애초에 악마의 낙인을 만든 취지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마계 술법에 예민한몸을 갖도록 하는 악마의 낙인. 마족의 약한
공격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반대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마계 술법에 예민하
게 반응하는 몸을 갖게 되는 것. 즉, 치료도 한결 쉬워지는 몸이 악
마의 낙인을 찍은 라한의 몸이었다.
"그럼?"
"마계로 데려가서 마계 의사인 이블리트에게 보여봐, 나보다는
살릴 가능성이 높을 거야, "
이블리트는 마계 최고의 의사로 알려진 마족이다. 그가 손을 대
서 살리지 못한 이가 없고 알아내지 못한 병이 없었다. 마왕루시
퍼마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던 이블리트. 그가 손을 댄다면 라
한도 살릴 수 있을지 몰랐다.
'이블리트 아저씨는 인간을 싫어하는데 살려주실까?'
라한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마족이지만 선뜻 찾아가기가 힘들
었다. 이블리트의 외골수적인 성격이 문제였다.
이블리트는 마왕과 그 가족들만 치료해주는 바하라 성 주치의였
다. 마왕루시퍼의 허락이 없으면 다른 이를 치료해 줄수 없는 입
장이었다
또 이블리트는 인간을 극도로 미워했다. 아무렴 천족보다 인간
이 더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까. 마왕루시퍼의 허락이 떨어지
더라도 치료해 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아 보였다.
'일단 부딪쳐보자. '
"가요. "
"넌 이번에 가면 다시 물질계로 오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겠느
냐?"
트레이시의 말에 투바가 망설이는 빛을 보였다. 라한이 치료된
후에도 그를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투바는마왕의 가족이다. 그것도 직계 후손. 이 때문에 그를소
환할 수 있는 방법은 완전 주문밖에 없었다. 한데 완전 주문을 이
용해서 소환하는 건 한 존재에게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
는다. 라한이 완전 주문을이용해서 투바를소환했으니 라한이 투
바를 다시 소환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시간이 없다. 저 인간은당장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
험해. 빨리 결정해라. "
투바가 계속 망설이자 트레이시가 다급한 음성을 내뱉었다. 괜
히 시간 끌었다가 마계로 가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좋아요. 가요. 까짓것 살기만 하면 언젠가는 보겠죠. "
"잘 생각했다. "
망설이던 투바가 마음을 굳혔다. 일단 라한을 살리는 게 급선무
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찌됐든 살아만 있다면 다시 만날 기회는 있다. 하지만 죽으면,
아니 소멸되면 모든 게 끝이다. 투바로서는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출발하죠. "
"그럼 가겠다. 마계로!"
트레이시가 짧게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오두막 전체로 희미한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아직 인가요?"
"다 왔다. 문 열고 나가봐라. "
트레이시의 말에 투바가 오두막 문을 열었다. 문 밖에서 질퍽이
면서도 음습한 마계 기운이 투바의 온몸을 휘감았다.
"마계로군요. "
트레이시는 오두막을 통째로 들어 마계로 옮겼다. 라한조차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이었다. 공간을 다스리는 일에 특화된 트레
이시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트레이시도 공간을 통째로 옮기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
만 희미하게 보이는 라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자칫 그를 놓치
고 갔다가는 약속을 어기게 되는 일. 차라리 집을통째로 옮기는
게 마음 편했다.
"이제 내 일은 끝났다. 돌아가는 방법은 네가 알아서 생각해라
그럼, "
"고맙습니다. "
할 말을 마친 트레이시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어차피 그가 투바를 만난 이유는 그를 마계로 돌려보내기 위함
이었다. 이제 그 일을마쳤으니 라한에 대한 건 신경 쓸 필요가 없
었다. 주어진 임무 외에는 관심 없는 트레이시였다.
오두막 밖으로 나온 투바가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이곳의 정
확한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멀지 않다. "
투바가현재 자신이 있는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았다. 다행히 바
하라 성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라한. 조금만기다려. 내가꼭살려줄게."
투바가 라한을 등에 업었다. 그때 라한의 손끝이 아주 미약하게
떨렸다.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서 투바도 라한의 변화를 알아채
지 못했다.
바하라 성
이곳은 마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자 가장 위대한 이가 머무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고성을 지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시끄럽게 구는 그 자체가 곧 죽음을 의미하니 누가 떠들겠는가?
물론 마계 역사 이후 지금까지 항상 조용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
다. 까마득한 옛날 마계와 천계의 싸움 때도 이곳은 시끄러웠고,
판테아가 마왕을 소멸시켰을 때에도 마족들의 울음이 그치지 않았
던 곳이 이곳 바하라 성이었다
그리고 수백 년 전부터 불과 몇 해 전까지. 마왕의 아들인 투바
가 이곳에서 머물 때도 사고치는 소리가 연일 들려왔다.
하지만 최근 투바가 물질계로 소환된 이후 몇 년 동안은 별 사고
가 없었다. 대신, 마왕의 아들이 사라진 사건 때문에 살얼음판 같
은 살벌함이 성을 가득 메웠다
쾅쾅쾅!
"문 열어! "
수년간 조용했던 바하라 성에 다급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문 열어! "
수년간 사라졌던 투바가 다시 돌아왔다. 라한이라는 환자를 대
동한 채로
쾅쾅쾅!
끼이이익!
투바의 두 번째 두드림에 거대한 성 문이 서서히 열렸다. 문이
열리자 투바가 라한을 안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계 왕자이신 투바님에 경의를! "
"경의를!"
투바는 들어가자마자 수천의 다크나이트가 도열한 모습을 봐야
했다. 투바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블리트 아저씨 어디 있어?"
"마왕께서 찾으십니다. 먼저 그곳부터
"이블리트 어디 있냐고! "
투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은 아버지인 루시퍼를 만나는 일보다 라한을 살리는 게 급
선무였다. 설사 루시퍼가 엄청난 벌을 내린다하더라도 이런 마음
은 변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빨리 말해 다 죽여버리기 전에 이블리트 어디 있어
투바가 살기를 일으키자 맨 앞에서 말했던 마족이 두세 걸음 물
러 났다 기운이 눌려 저절로 벌어진 일이었다
물질계에서의 투바는 두 가지 제약을 가지고 있었다 일정수준
이상의 힘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규칙과 단순히 물질계로 넘어가
면서 사라진 힘 이 두가지 제약 때문에 실제 능력의 100 분의 1 도
채 사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계로 돌아온 투바는 달랐다 이제 자신의 힘 전부를 사
용할수 있는 투바 그가 마음만 먹으면 다크나이트 수뱍 정도는
쉽게 처리 할수있었다
지 지금은 17 연구실에 있습니다
비켜
헐떡이며 말을 끝내자마자 투바가 그를 밀쳤다 그리고 자신이
낼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17 연구실로 내달렸다
투바가 사라지자 다크나이트중 몇명이 바하라 성 내부로 뛰어
들어갔다 당연히 투바의 귀환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다크나이트의 수장과 몇명의 다크나이트들은 바하라 성의
내실로 뛰어갔다 그곳에 묵고 있는 마왕 루시퍼에게 소식을 전할
의도였다
또 나머지 몇명은 뱀파이어 로드 이그니스의 방으로 뛰어갔다
그 역시 오랫동안 투바를 기다린 탓이다
라한을 살려라
바하라 성의 17 연구실
이곳은 이블리트가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때문에 책 몇권을 제
외하면 침대와 의자 탁자가 전부였다
벌컥
투바가 라한을 업은 채로 문을 열어젖였다 갑작스렁ㄴ 소리에
누워 있던 어블리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 누구
아저씨 빨리요
어 도련님
이블리트는 아직도 잠에서 덜 깬 상태였다 지난 이틀 동안 꼬박
반을 샌 탓이다 한데도 용케 투바를 알아봤다
빨리요 인사할 시간 없어요
투바가 이블리트가 누워 있던 침대에 라한을 눕히자 이블리트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이건
"제 친구예요. 살려주세요, 제발. "
"흐음. "
이블리트가 라한을 슬쩍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도련님. 제가 아무리 의술이 뛰어나도 시체를 살릴 재주는 없
습니다. "
"시체라니요? 살아 있다구요. "
투바의 말에 이블리트가다시 라한을 바라봤다. 다시 진찰하기
위해 손을 뻗다가 멈칫거렸다.
"도련님, 인간 아닙니까?"
"맞아요. "
"그럼 치료할 수 없습니다. "
이블리트가 팔짱을 낀 채로 몸을 돌렸다. 투바의 얼굴을 보면 마
음이 약해질까봐 고개까지 돌린 모습이었다.
"아저씨. 제발 좀 살려주세요. 제 친구라구요. "
"그래도 안 됩니다. 제가 바하라 성의 주치의라는 건 아시겠죠?
전 루시퍼님과 그 가족이 아니면 치료하지 않습니다. "
"다른 마족들도 종종 치료했잖아요. "
"예, 그랬었죠. 하지만그들은마족이었습니다. 마족에 한해서
는 기분이 내킬 때 치료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제 목에 칼이 들어
와도 하지 않습니다. "
털썩!
이블리트의 고집에 투바가 무릎을 꿇었다. 자존심을 굽히더라도
라한만큼은 꼭 살리고 싶었음이다.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안 됩니다. "
"제가 무릎까지 꿇었는데 안 된다는 겁니까?"
"죄송합니 다. "
투바가 고개를 푹 숙이고 라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이마
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라한. 미안해. 내가, 내가못나서내가힘이 없어서
투바가 눈물을 떨구었다. 그 모습에 이블리트가 몸을 움찔했다.
이블리트에게는 인간을 절대로 치료하지 않는다는 신조가 있다.
그의 조상들이 인간에게 너무 큰 피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신조를 어겨야 할지도 몰랐다. 자신이 아무리
잘 났어도 마왕의 가족을 치료하는 주치의인건 변함없는 사실. 자
칫 자신의 고집으로 마계 후계자인 투바가 쇠약해질까 염려되었다.
"도련님, "
"엉엉. "
삐걱!
투바가 계속 울고 이블리트가 어쩔 줄 몰라 할 때 문이 조심스
럽게 열렸다. 그곳에서 반가운 표정을 한 뱀파이어 로드 이그니스
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도련님. "
"삼촌! "
이그니스의 부름에 투바가 그의 품에 안겼다. 눈물이 마구 흘렀
다. 라한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래, 괜찮다. 괜찮아. "
"삼촌, 라한이라한이 엉엉."
투바의 말에 이그니스가 침대로 천천히 다가갔다.
투바의 말마따나 라한이 분명했다. 자신에게는 유일한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존재. 상황을 파악한 이그니스도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이블리트. "
"예, 이그니스님. "
"살려라. "
"하오나 그는 인간입니다. "
직책상으로 이그니스보다 투바가 위였다. 투바의 명령도 듣지
않았던 이블리트가 이그니스의 명령을 들을 리 없었다.
"이블리트. 내가 화내는 걸 꼭 봐야겠는가?"
"아무리 그러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그니스님과 이 인간이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전 제 신조를 지키고 싶습니다. "
이블리트의 강경한 태도에 이그니스가 기운을 끌어올렸다. 말로
안 되면 힘으로 눌러서라도 치료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이, 이그니스님. 차라리 절죽이십시오."
"이블리트. 이놈! "
철컥!
"이블리트. "
이그니스가 막 힘을 사용하려 할 때, 문이 열리고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에 이그니스와 이블리트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마왕 루시퍼님을 뵙습니다. "
"마왕을 뵙습니다 "
"흐음. "
안에 들어온 루시퍼가 이그니스와 이블리트를 한 번씩 돌아봤
다. 대기를 뒤흔들고 있는 이그니스의 기운. 루시퍼는한눈에 이
그니스가 힘을 쓰려 했다는 걸 짐작했다.
'겨우 인간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군. '
이그니스도 인간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이블리트보다
덜하다 뿐이지 그 역시 인간에 대해 쾌 큰 반감을 가진 존재였다
그런 이그니스가 인간을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루시퍼는 이
그니스의 행동이 의아하게만 보였다.
"이그니스. "
"하명하십시오. "
루시퍼의 부름에 이그니스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 인간을 살리려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저 아이가 라한입니다. "
"그렇군. "
오래전 이그니스가 라한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돌아왔을 때 루시
퍼가 그를 불렀다. 그에게 물질계에 대한 소식을 듣기 위함이었다.
한데 그때 이그니스는 물질계에서 투바를 봤다는 말을 전했다
투바가 마계를 벗어났음을 그때 처음 알게 된 거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투바와 친한 라한에게 마법을 가르친 일도 말
했다. 때문에 루시퍼도 라한과 투바의 사이가 어떤지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아버지 "
"투바 네 죄를 잘알겠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처벌을받을수 없습니다. 먼저
제 친구를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시기만 하면 뭐든 다 하겠습니다. "
투바가 간절하게 빌었다. 그 말을 들은 루시퍼가 이블리트를 바
라봤다. 눈짓으로 살릴 수 있는지를 묻는 모습이었다.
"그는 인간입니다. 제가 어찌 인간을 살릴 수가
"내 눈에는 이미 죽은 인간으로 보이는군 살릴 수는 있는가? 우
선 그것부터 확인해 보라. "
"확인해 보겠습니다. "
이블리트가 라한의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손을 통해 차가운 기
운이 전해졌다. 아무리 봐도 시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블리트가 라한의 머리를 통해 기운을 불어넣었다. 한참 라한
의 몸을 살피자 아주 미약한 생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런 상태로
이렇게 오랜 시간을 죽지 않고 버틴 게 신기할 정도였다.
"흐음
라한의 머리에서 손을 뗀 이블리트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몸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쾌 많은 심력을 소모한 듯했다.
"살아 있는가?"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살아 있는 건 확실합니다. 그리고 더 이
상한 건 그 생명을 마치 누군가 억지로 잡고 있는 느낌이 든다는 겁
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기이한 일은 처음 겪습니다. "
이블리트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절대 살릴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왔던 이블리트. 한데 이제는 자신이 살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살릴 수 있는가?"
"확신할수는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처음겪는 기이한
일이라서요. 하지만물질계, 정령계, 마계, 천계 모든곳을통틀어
서 그를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존재가 저라는 건 장담할
수 있습니다. "
"그렇군. "
투바를 비롯한 주변 이들은 루시퍼가 살리라는 명을 내릴 줄 알
았다. 지금까지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절차라 믿었다. 한데 루시퍼는 짧은 대답 이후 침묵을 고수했다.
"마왕님, 어쩔까요?"
"루시퍼님. "
"아버지. "
이블리트와 이그니스, 투바가 차례로 재촉했다. 한결같이 갈망
이 담긴 얼굴이었다.
라한이라는 존재. 이그니스에게는 제자였고 투바에게는 친구였
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반드시 살려야 할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계 최고의 의사라 불리는 이블리트. 그는 희귀한 병을
가진 라한이기에 꼭 살리고 싶었다. 그것도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살려보고 싶었다. 의사로서 갖는 당연한 호기심의 발로였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루시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투바를 향
해서였다.
루시퍼의 시선이 닿자 투바가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투바. "
"예, 아버지. "
"꼭 살리고 싶으냐?"
" 예. "
루시퍼가 투바의 강경한 얼굴과 이블리트의 간절한 얼굴 이그
니스의 간절한 표정을 차례로 돌아봤다. 하나같이 같은 대답을 원
하는 얼굴이었다.
'이거 참. '
"투바. "
"예, 아버지. "
지금 투바에게는 라한을 살리는 일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
다.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생각이었다.
"살리라는 명령은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
"뭐든 하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
"휴우우
루시퍼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투바의 머리를 한 차례 쓰
다듬고 말을 이 었다.
"얼마 전에 세턴이라는 신의 사자가 날 찾아왔더구나. "
"세턴이요?"
"그래 그가내 수명이 얼마남지 않았음을알려주더군. 나도대
충은 짐작하고 있었지. "
"아버지. "
"네 성년식이 좀 남았지만 아무래도 서둘러야 할 것 같다. "
루시퍼의 말에 옆에서 듣던 이그니스와 이블리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로서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런 말씀 마세요. "
"허허, 어쩔 수 없는 게야. 그래서 너에게 조건을 걸려고 한다.
내가 저 아이를 살려주면 넌 마왕직을 승계 받아야 한다. 허락할
수 있겠느냐?"
"마왕님. 투바님은 아직 성년식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먼저 성
년식이 지나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 "
"맞습니다. 너무 이른 판단이라 생각됩니다. "
루시퍼의 말이 끝나자 이그니스와 이블리트가 차례로 반론을 제
기했다. 하지만 투바는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가본 신의 사자의 능력 그건 거의 전지전능에 가까웠다. 차
원 이동을 주문만으로 한다는 것도 대단했고, 그 이동이 개체가 아
닌 공간 자체의 이동이라는 것도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런 신의 사
자가 한 말이라면 허언은 아닐 터였다. 결국 아버지인 루시퍼의 생
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사실이리라.
"말했다시피 내겐 시간이 없다. 그래서 물질계를 공격할 생각까
지 했던 것이다. "
"하오나. "
"이미 결정한 일이니 아무 말 하지 말라. "
보통 마족이 물질계로 가는 건 일종의 유희였다. 틀에 박힌 생활
에서 벗어나 물질계에서 새로운 재미를 맛보려는 것이다.
그런 유희를 위해 마계에서 물질계로 넘어가는 길은 단 두 가지.
소환에 의한 것과 오벨리아 팰리스를 통하는 길뿐이다.
그 중 소환은 물질계 존재들이 행하는 것이기에 마계의 마족이
개입할여지가없었다. 하지만오벨리아팰리스는달랐다. 비록결
계를 뚫는 과정에서 마계 마족의 반 이상이 죽을 테지만 가능하긴
했다. 단순히 유희를 위해 너무 큰 희생을 치러야 하기에 지금까지
물질계 침입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흐음. "
"흠. "
루시퍼의 말에 주변 이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들도 마계가 공
격 준비를 했음은 알고 있었다
루시퍼가 계획한 물질계와의 전쟁.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
이었다. 마왕 자리가 공석이 될 때 오는 마계의 혼란과 물질계를
공격했을 때 마계가 받을 피해. 루시퍼는둘중에서 전자가 더 위
험하다고 판단했다.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전쟁을 감행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투바, 약속하겠느냐?"
"아버지. "
뭐든 하겠다고 마음먹은 투바였지만 마왕 승계만큼은 망설여졌
다. 그 일이 아버지의 죽음과 관계있는 일이기에 더 그랬는지 모
른다.
"네가 마왕 승계식을 치르겠다고 허락하면 저 아이를 살리도록
명을 내리겠다 선택은 네게 달렸다. "
"아버지. "
"나로서도 어쩔 수 없구나 강요해야 하는 날 이해해다오. "
루시퍼의 표정이 착잡하게 변했다. 그도 아들에게 이런 식의 강
요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요즘 루시퍼는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쇠함을 느쪘다. 벌써 몇 년
전부터 조금씩 약해지던 기력. 요즘은 그 증세가 심각할 정도였다.
오늘 아침에는 순간적으로 현기증마저 느꼈다. 기력이 빠른 속도
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할게요. "
한참 고민하던 투바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루시퍼는 투바의 결
정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잘 생각했다. 이블리트. "
" 예. "
"살려라. 반드시 살려라. 그 아이를살리지 못하면 너도죽음을
면치 못할 거다. "
"하, 하지만이 인간의 부상은너무심합니다. 그리고이런증
세도 난생 처음 겪는 거라서 그게 저
이블리트도 라한을 고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희귀한 증상
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매달려볼 가치는 충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치료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증상이 특이한 만
큼 치료법도 완전히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까닭이다.
"이블리트. 살려라. "
"하오나
"다시 말하게 하지 마라. 살려라 "
"아, 알겠습니다. "
루시퍼의 매서운 눈빛에 이블리트가 서둘러 대답했다.
역시 마왕은 마왕. 기운을 끌어올린 것도 아니고 단순히 눈빛을
치떴을 뿐이다. 한데도 연구실 전체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투바, 이그니스. 나가지."
"아버지. 전
"나가자 여기서 보고 있으면 이블리트가 치료에 집중하지 못할
게다. "
"맞습니다. 도련님. 나가시죠."
이그니스가 루시퍼의 말을 거들었다. 투바가 함께 있어서 도움
될 게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알았어요. 라한,살아줘. 날위해서 살아줘. 부탁이야,"
투바가 라한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친구.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
하는 친구 라한.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이젠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
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한편 블리아드 마을에 있던 베사 길드의 길드장 에테로. 조용히
쉬고 있던 고가 소식을 들은 건 불과 이틀 전이었다.
라한의 죽음. 그것도 친구라 믿었던 카이렌에게 죽었다는 말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라한. "
아무도 없는 공간을 보며 에테로가 한숨을 쉬었다.
그도 라한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건 잘 알았다. 이미 죽은 사람이
니 당연한 일이다. 한데도 당장 문을 열고 들어와 아는 체할 것만
같았다.
"에테로님. 다크라이더 길드에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 "
"하지만 에테로님. 심장이 뚫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심장이 뚫
리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설사 드래곤이라 하더라
도 드래곤 하트가 깨지면 죽는 게 당연한 겁니다. "
닉스가 에테로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도 에테
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심장이 배에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난 그런 말 믿을
수 없네. "
"하지만 카이렌이라는 엘프가 직접 그렇게 말했다지 않습니까?"
"그가 착각했을 거다. 어떻게 심장이 가슴에 있지 않고 배에
얻은 정보에는 라한이 싸웠던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카이렌이 루이에에게 한말. 즉, 라한의 심장이 배에 있다
는 말도 함에 적혀 있었다.
한데도에테로는 인정할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고싶지 않았는
지도 모른다.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기에
"에테로님. 제발 이제 그만하십시오. 보고 있는 저희가 너무 힘
듭니다. 제발. "
"닉스. "
"예. "
"라한. 정말 죽었겠지?"
주저하던 에테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도 라한이 죽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 강해서 억
지로 부정했을 뿐이다
"예. 투바라는 자가 데려갔다고는 하지만 살 가망은 없다고 봐
야 할 겁니다 "
"그렇겠지. 휴우
긴 한숨을 쉰 에테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감았다 라한의 얼
굴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아직도생생한데 웃고 있는모습, 화내던 모습. 모두가뚜렷하
게 기 억나는데 자네는 이미, 이미
마음을 정리한 에테로가 차분하게 말했다.
"닉스. "
"예. "
"다크라이더 길드에 통신을 넣게. 내가 직접 전하겠네. "
"알겠습니다. "
닉스가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통신 마법사를 불렀다.
에테로는 며칠 동안 반 폐인처럼 지냈다. 식사 대신 술을 마셨고
업무 대신 한숨을 쉬며 시간을 소일했다. 안그래도 좋지 않던 에
테로의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한데 지금이라도 마음을 다잡았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건강이야
앞으로 좋은 공기 마시며 요양하면 되고, 밀린 업무도 지금부터 열
심히 보면 그만이었다
"에테로님을 뵙습니다. "
"본부로 통신을 넣게, "
"알겠습니다. "
통신 마법사가 오자 에테로가 담담하게 명령했다. 겉으로 보기
에는 완전히 마음을 다잡은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에 담긴 슬픔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주변 사람들이 걱
정하지 않도록 억지로 아닌 척했지만, 실제 그의 가슴은 아직도 눈
물을 흘리는 중이 었다.
누구인가?
"베사 길드의 길드장 에테로다. 다크시안님을 불러라. "
-아,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수정 구슬에 비친 통신 마법사가 사라졌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
이 흐르자 다크시안이 머리를 긁적이며 나타났다.
-에테로. 오랜만이야. 그래 어떻게 지냈나?
"전 잘 지내고 있습니다. "
- 얼굴 표정은 그게 아닌 것 같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다크시안이 한눈에 에테로의 상태를 파악했다. 정말 오랫동안
한 길드의 수장직을 맡고 있는 다크시안. 역시 사람 보는 눈도 예
사롭지 않았다.
"사실은
-뭔데 그러는가? 주저하지 말고 말해보게.
"라한이 죽었습니다. "
다시 한번 한숨을 쉰 에테로가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그 말에
다크시안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라한이 죽다니? 자네가 엄
청나게 강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떻게 죽을 수가
있는가?
"사실은
에테로가 그간 라한에게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했다. 드래곤과
싸운 얘기, 검은 측인 류카라한의 진영에 잠입한 얘기, 카이렌을
만나기 위해 회색 측을 방문한 얘기, 그리고 친구라 믿었던 카이렌
에게 기습을 당한 얘기까지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아무
런 가감 없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에테로의 얘기를듣던 다크시안의 얼굴은 경악그자체였다. 드
래곤과싸우다니 그로서는상상도못한 일이었다. 거기다 친
구인 카이렌에게 죽었다는 건 경악과 분노를 동시에 갖게 했다.
-카, 카이렌이라고 했느냐? 혹시 그가 엘프이더냐
"네 "
-역시, 역시 그놈이었어. 그놈이 결국
다크시안은소싯적에 기연을 얻은 적이 있다. 현실이 싫어서 산
을 헤매다가 발견한 어떤 동굴 안에서였다.
그곳은 오래전부터 버려진 듯 사람의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손
만 대면 부서질 정도로 썩어버린 옷자락과 라이더스 패. 그리고 그
곳에 살았던 이가 남걱놓은 듯한 일기장 한 권이 전부였다. 다크시
안은 그 책에서 카이렌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이곳에 머물었던
이가 카이렌이라는 엘프에게 암습을 당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은신술에 대한 약간의 힌트도 얻을 수 있었다. 일기장이라서 수련
법은 제대로 쓰여 있지 않았지만 핵심 내용은 어느 정도 적혀 있었
던 것이다.
다크시안은 그 책을 바탕으로 은신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내용
이 너무 부족해서 거의 90 퍼센트는 머리를 짜내 직접 만드는
이었다. 하지만 어설프게 은신술을 익히는 데에는 성공했고 그걸
바탕으로 다크라이더 길드를 만들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에테로. 그자는 우리가 그들을 살펴보고 있다는 걸 아는가?"
다크시안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모종의 결심을 했다는 증거
였다. 그 변화에 에테로의 얼굴도 덩달아 차갑게 변했다.
"모르고 있습니다. "
-흐음. 그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게.
다크시안의 얼굴이 점점 무표정하게 변했다. 사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내리는 수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알겠습니다. "
-오늘부로 대륙에 흩어져 있던 베사 길드를 반으로 나눈다. 하
나는 다크라이더 길드의 정보부에 포함시켜 카이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총력을 기울여라. 그리고 나머지 반의 베사 길
드는 대륙 북동부에 있는 빈가로 가서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알겠습니다. "
다크라이더 길드는 오래전부터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고아들
을 데려다 키워왔다. 다크라이더 길드가 얻는 수입의 거의 대부분
이 그들에게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처음은 수 명, 수십 명이었던 작은 고아원이었다. 한데 대륙에서
계속적으로 고아들을 모으자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거기다 최근에 대륙 전체에 불었던 전쟁의 영향으로 그 수가 마을
하나를 다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래서 다크시안은 대륙에 쓸 만한 땅을 찾기 시작했다. 고아들
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 찾
던 다크시안이 대륙 북동부의 도시를 발견했다. 베어울프들에게
쑥대밭이 되었던 곳이라 사는 데에도 큰 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북동부의 도시.
다크시안은 이곳을 빈가라 명명하고 고아들을 모았다. 일종의
고아들만 사는 도시를 만들어낸 것이다.
- 에테로.
" 예. "
-카이렌을 죽일 방법을 찾는 데 6 개월 주겠다 그 안에 그를 죽
일 방법을찾아내라. 남은다크라이더 길드 전체가 희생되어도상
관없다. 반드시 찾아내라.
다크라이더 길드의 길드장 다크시안. 그가 카이렌을 죽일 결심
을굳혔다. 암살자 길드이니 방법도 당연히 암살이었다. 물론, 성
공 가능성이 희박한 위험한 도박이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힘들다고 해서 포기할 다크시안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쉬운 일보다 어려운 일이 더 많았던 다크라이더 길드가 아니던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냈고, 설령 없으면 방법을 만들어서라도 대
상은 반드시 죽여 왔던 다크라이더 길드였다.
"알겠습니다. "
-다음에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럼 수
고하게.
다크시안이 통신을 끊자 에테로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예
상보다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아무래도 다크시안은자신이 라한
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를 아낀 듯했다.
"카이렌이라 죽일 수 있을까? 닉스. 자네도 통신 내용을 들었
겠지?"
"예, 에테로님. "
보통은 담당자가 통신할 때 곁에 있는 사람은 모두 물러난다. 통
신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이번에는 닉스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에테로가 그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스터께서 시킨 일이니 무조건 방법을 찾
아낼 겁니다. "
"후후, 그렇겠지. "
여섯 달이라는 시간만 아니면 죽일 방법을 찾아낼 것도 같았다.
현재 카이렌 진영과 류카라한 진영은 적대 관계. 시간이 흐르면 카
이렌에게도 약점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다.
한데 여섯 달이라는 시간이 문제였다. 지금은 쥐죽은 듯 서로를
살피고 있는 양측 진영. 여섯 달 안에 사건이 벌어지길 바라는 건
무리였다.
'일단 둘을 붙여야겠군. '
에테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머 리를 싸매야 할 듯했다.
라한이 치료에 들어가고 다크라이더 길드가 복수를 다짐한 지
금. 로테마이어스도 묘한 상황에 직면했다.
"모르겠군. 모르겠어. "
"로드님. "
"정말모르겠어. 허허허, 이거 참."
"로드님. "
아카폴리안이 로테마이어스를 계속 불렀다. 한데도 로테마이어
스는 혼자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모르겠군, 모르겠어. "
"로드님!"
아카폴리안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약간은 불경이라고 봐
도 될 정도였다.
그런데도 로테마이어스의 상태는 여전했다. 아직도 혼자 뭔가를
중얼거리며 레어 안만 왔다 갔다 하는 로테마이어스였다
"어떻게 할까? 음, 모르겠어. "
"로드님!"
"어? 어 무슨 일이야?"
아카폴리안의 목소리가 레어를 울릴 정도가 되자 로테마이어스
도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아카폴리안의 부름을 들은 모양이다.
"대체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시는 겁니까?"
"모르겠어. 대체 어떻게 하지. "
잠깐 아카폴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던 로테마이어스. 어느샌가 다
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아카폴리안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로드님! 로드님! 로드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 미안. 라한말이야. 너무허무하게 죽은것같지 않아?"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계속 말을 퍼붓자 로테마이어스도 상념에
서 빠져나왔다.
"역시 그 생각을 하는 중이었군요. "
"그놈 참 불쌍한 놈이야. "
로테마이어스도주변을살펴보는눈이 있다. 라한 011 의해 세작
들이 제거되는 바람에 정보가 좀 늦기는 해도 결국은 그에게도 정
보가 들어가게 마련이다.
로테마이어스가 라한의 죽음을 들은 건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로테마이어스도 믿으려 들지 않았
다. 드래곤넷을혼자서 처리한실력자가카이렌에게 죽다니. 그것
도 기습을 당해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한 상태로 죽음을 맞다니, 믿
기 어려운 얘기 였다.
그런데 주변 정황이 너무 정확했다. 그리고 연이어 들어오는 정
보도 라한이 죽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때부터 로테마이어스의 상태가 이렇게 변했다. 스스로 호적수
라 생각했던 라한의 허무한 죽음 탓일까? 중요한 뭔가가 뻥하고 뚫
린 기분이었다.
"어차피 잘 된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이거야 원.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한동안 그놈 죽일 생각만 하면서
계획을 짜고 또 고민하고 그랬는데, 막상 그놈이 죽었다고 하니까
뭘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그리고 이상하게도 전혀
즐겁 지가 않아. "
그제야 아카폴리안도 로테마이어스의 상황을 짐작했다.
일종의 공허함이었다. 오직 자신만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라
한의 너무나도 허무한죽음. 로테마이어스는 이 일로 인해 목표와
목적 둘 다를 동시에 잃었다. 살아가는 이유가 사라진 셈이다.
"어차피 저희의 최종 목표는 굴레를 벗은 존재들 전부를 죽이는
일이지 않았습니까? 다시 그 일에 매진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 근데, 그놈이 빠지니까 도통 흥이 안 나. "
로테마이어스가 따분한 듯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 가득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였다
"후훗.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일단류카라한놈
들하고 카이렌 놈들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일 것 같습니다. "
"그래, 그 일에라도 매달려야겠다. 아카폴리안. 이제 라한그놈
한테 신경 꺼도 될 테니 나머지 놈들에 대한 정보 수집에 최선을 다
해라. 사라졌던 세작들도 다시 심고. "
"알겠습니다. "
아카폴리안이 나가자 로테마이어스가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놈이 죽으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허무하지
이거야 원. '
로테마이어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의 가치를 생각했다. 어
차피 죽고 나면 살았을 때 쌓아놓은 모든 것이 사라지는 법. 죽음
자체가무 로 돌아가는 것임을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한모습이
었다.
이블리트는 꼬박 한 달 동안 라한을 치료했다. 처음에는 과연 살
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데 이젠 살릴 수 있
다는 확신이 섰다.
다만, 살릴 수는 있지만 그가 예전처럼 움직일 수 있을지는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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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었다. 라한의 부상이 너무 심했고 또 가수면 상태로 너무
오래 지낸 탓이다.
지금 라한은 고요한 숨소리를 내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숨도 쉬
지 않았던 과거와 비교하면 확연히 나아진 모습이었다.
"운이 좋았어. "
처음 라한을 치료하려 했을 때에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도 잡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라한의 손끝이 아주 미약하게 떨리
는걸 발견했다. 호흡무, 맥박무. 결국, 생명 반응자체가
완전히 멎은 라한의 미미한움직임, 이블리트의 상식과는한참 어
긋나는 일이었다.
믿을수 없었지만 어차피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그
걸 몇 차례나 목격했다. 상식에서 어긋난다고 하여 무시할 수는 없
었다.
이블리트는 이 상황의 이유를 외적인 요인에서 찾기 시작했다.
라한 스스로가 아닌 다른 존재가 대신 움직이고 있다고 판단한 것
이다.
결과적으로 이블리트의 이런 생각은 정확했다. 라한이 아닌 다
른존재의 개입을확인한 것이다. 이블리트는 이 존재를 '원천'이
라 불렀다. 라한이 자연이라 부르는 그것이었다.
"저놈도 참 운이 좋지. "
다른 존재의 개입을 확인한 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이블리트는
단순히 원천, 즉 자연이 풍부하도록 주변 여건만 만들어주면 끝이
었다. 그 뒤부터는 자연이 라한의 몸을 알아서 치료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보내기를 한 달.
라한이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했고 맥박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의식을 되찾기만 하면 이블리트가 할 일은 80 퍼센트 이상 끝
나는 셈이었다.
"오늘쯤 반응이 올 텐데. "
이블리트가 본 지금 라한의 몸은 거의 정상이었다. 문제는 오랫동
안 쓰지 않은 다리를 과연 다시 쓸 수 있느냐였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 못하고는 순전히 라한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 있었다.

"하하하하. 정신이 드는가?"
라한이 신음을 흘리자 이블리트가 침대로 다가가 앉았다.
밝은 얼굴의 이블리트. 희귀한 병을 치료했다는 자부심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윽! "
"아직 움직이지 말게. "
'누구지?'
라한의 귀에 생소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눈이 떠지지 않아
서 직접 확인할수가 없었다.
"크윽! "
억지로 일어서려던 라한이 신음을 터트렸다. 마치 팔과 다리가
자기 것이 아닌 느낌이었다.
'설마?'
"으으으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데
다 말까지 할 수 없자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네. 왜 팔, 다리가움직이지 않느냐는
말이군. 아, 혹시 팔, 다리가잘렸는지를 걱정하는 것일 수도 있겠
군. 결론부터 말하자면자네 팔과다리는멀정하네. 너무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신경이 말을 듣지 않는 것 뿐이야. "
"으으
"아, 눈이 왜 안 떠지는지도 궁금하겠군. 지금 자네는 근육을 써
야하는모든행동에 제약을받을게야. 이유는아까와같지. 시간
이 지나면 차차 나아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
이블리트가 라한의 의문을 미리 짐작하고 대답했다. 다행히 귀
는 들렸던 라한이라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리하지 말고 좀 더 자두게. 엘레트리에!"
이블리트가 이불을 당걱 라한의 목까지 덮었다. 그리고 그의 머
리를 짚어 마계 술법을 시행했다. 물질계의 슬립과 비슷한 마계 수
면 술법이었다.
다음 날 의식을 되찾은 라한이 눈부터 깜빡였다. 어제는 되지 않
던 눈 뜨기가 되자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야 살았다는 안도
감이 든 모양이다.
"라한. 정신이 들어?"
"살아났구나. "
라한이 눈을 뜨자 투바와 이그니스가 인사를 해왔다.
"으으어 . ."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려던 라한이 신음을 터트렸다. 아
직 목 근육은 제대로 풀리지 않은 듯했다.
"그냥 그대로 있어. 차차 나아질 거래. "
"그래, 가만히 있어라, 무리하면오히려 몸에 좋지 않다. "
"투으으, 투두바, 이이그니스
라한이 어눌한 말투로 투바와 이그니스를불렀다. 투바와 이그
니스는 단순히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도 그게 너무 고마웠다.
"그래. 나야. 나여기 있으니까몸부터 회복해."
"거참, 목소리만으로 날 기억하다니, 하여간 머리는 더럽게 좋
놈이라니까. 허허허. "
이그니스의 어색한 웃음이 연구실에 울려 퍼졌다.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웃음이었다.
"나나이일으으크어주어. "
"안 돼! 무리하면 오히려 탈 날 수도 있어. "
"나나알이일크어주어
"이 고집불통 같으니. "
라한이 계속 일으컥달라고 하자 투바도 더 거절하기 힘들었다
전에도 엄청난 속도로 회복한 전적이 있는 라한. 이번에도 그런 기
적을 일으키길 바랄 뿐이었다.
"으윽! "
"괜찮아?"
투바가 일으키려 하자 라한이 신음을 터트렸다. 일어나면서 움
직였던 근육에서 통증이 느껴진 듯했다.
"괘괜차아나. "
"젠장. "
투바가 욕설을 내뱉었다. 환자만 아니면 한 대 쥐어박아서라도
말을 듣게 만들고 싶었다.
"이일으 .컥
"알았다. 망할 자식아. "
투바가 라한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라한이 가끔 인상을 찌푸
리기는 했지만 더 이상 신음을 하지는 않았다. 입 밖으로 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
"고집불통!"
더 참지 못한 이그니스가 밖으로 나가 버렸다. 라한의 힘들어하
모습이 못내 견디기 힘들었음이다.
저벅!
휘청!
착- !
바닥에 발을 디디던 라한이 몸을 휘청했다. 투바가 잡아주지 않
았다면 쓰러졌을 게 분명했다.
"무리하지 말라니까. "
"헤헤. "
어색하게 웃은 라한이 투바를 슬쩍 밀었다. 어떻게든 혼자 일어
나보려는 발버둥이 었다.
라한의 재활은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눈을뜨자마자, 말조차제
대로 하지 못하던 때부터
새로운 기술
라한이 재활 훈련을 시삭한지 한달이 흘럿다 이젠 걷고 뛰는
정도는 쉽게 할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에 대해 이블리트는 기적이라며 놀라워했다 그는 라한이 뛰
게 되는 시간으로 1 년 이상을 잡았다
1 년을 한달로 축소시켜 버린 라한
멀리서 라한을 지켜보던 루시퍼는 혀을 내두르며 딱 한마디
내 뱉었다
독한놈
라한이 겪은 한 달 간의 훈련은 고통과 눈물의 연속이였다 계속
해서넘어지고 또 부딪치며 그리고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며
하지만 라한은 더 힘들게 한 건 과연 예전처럼 될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었다 이 때문에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그런 고통스러운 과거가 있었기에 라한의 재활이 빨랐는지도 모
른다.
"라한 뭐 해?"
"수련. "
요즘 라한은 잃어버린 신화력을 되찾는 데 하루의 거의 대부분
을보냈다. 몸이 기억하는 힘 신화력. 그래서인지 진척은몹시 빨
랐다. 빠르면 2 주, 늦어도 3 주 후에는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
을 것 같았다.
"오늘은좀놀자. 나좀 있으면 마왕직 승계 받아야한다고. 그
때는 놀고 싶어도 못 놀아. "
"뭐 하고 놀까?"
"내가 하는 거야 뻔하지. "
투바의 가장 큰 관심사는 뭐니 뭐니 해도 마법진이다. 과거 투바
가 라한에게 완전 주문을 가르쳐준 것도 결국 마법진에 대한 지식
을 더 많이 습득하기 위해서인 터. 시간이 있을 때 라한에게 조금
이라도 더 배워둬야 했다.
"잠시만. 어디 한번 불러볼까? 슈라, 테세르. "
라한이 슈라와 테세르를 불렀다. 아직 신화력이 완전히 돌아오
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소환하는 일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어 라?"
테세르와 슈라가 나타나지 않았다. 신화력을 충분히 주입했는데
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예상 못한 상황에 라한이 당황하는 기색
을 보였다.
"이, 이거 왜 이러지?"
"여기선 정령을 부를 수 없어 슈라도 마찬가지로 소환이 안 돼. "
"왜?"
테세르와 슈라는 공간을 이동해서 소환자인 주인에게 넘어온다.
그래서 제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환이 가능했다. 때문에 그
들의 소환 불가능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판트리아라는 큰 차원에는 작은 차원 수백 개가 존재해. 그 모
든 차원이 판트리아라는 큰 틀에 묶여 있는 거지. "
"그런데?"
라한도 판트리아계가 수많은 차원으로 이루어진다는 건 알고 있
었다. 정령계와마계. 라한이 직접 가서 보고느꼈으니 아는 게 당
연했다.
"각각의 차원들은 모두 서너 군데의 차원과 연결되어 있어. 그
중 한 군데는 무조건 영계니까 실질적으로 두세 군데의 차원하고만
연결됐다고 볼 수 있지. "
"그러니까 정령계하고 골렘이 모이는 차원이 마계하고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야?"
"그렇지. "
투바의 설명에 라한이 나머지를 미루어 짐작했다. 한데도 풀리
지 않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근데 전에 내가 널 처음 봤을 때 말이야. 그때는 테세르도 마계
에 들어왔잖아. 거기다 소환도 마계 내에서 했는데. "
"그건 거기가 부르마 섬이라서 가능했던 거야. 부르마 섬하고
오벨리아 팰리스는 거의 붙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그래
서 오벨리아 팰리스에서 소환 가능한 건 부르마 섬에서도 가능한
거지, "
"그럼 물질계하고 연결된 나머지 차원은 뭐야? 하나는 이곳 마
계라고 보면 되고, 나머지는 뭐지? 골렘?"
라한의 물음에 투바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도 잘 모르는 듯한 모
습이었다.
"골렘은 아니야. 골렘은 만들어진 차원에 속해 있는 귀속 차원
같은 거거든. 물질계에서 만들어졌으니 물질계에서만 부를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연결된 다른 차원은 나도 잘 모르겠다. 환계던가?"
"그럼 나중에 물어보지 뭐. "
투바의 마법 지식은 거의 대부분 이그니스에게 들은 것이다. 또
투바가 알고 있는 차원에 대한 지식 역시 루시퍼나 이그니스에게
들은 게 대부분이었다.
"골치 아픈 얘기는 그만하고 마법진 공부나 시작하자. "
"어제 어디까지 했더라?"
"공간 왜곡까지 했지. "
"그럼 오늘은 속성 결합에 대해서 알아볼까?"
"속성 결합?"
속성 결합은 라한이 미스릴 창고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고민하다
가 찾아낸 방법이었다. 라한이 신화력을 익히게 된 배경도 이 속성
결합에 기인했다. 그에 대한 깨달음 때문에 스스로의 몸이 변한 것
이다.
"응. 내가 미스릴 창고에 갇혔을 때
"도련님! "
라한이 설명을시작하려 할때, 멀리서 이그니스의 목소리가들
렸다.
라한의 마계 체류로 가장 즐거워한 이는 투바가 아닌 이그니스
였다. 과거에는 이그니스가선생이었고 라한이 제자였던 터. 한데
지금은 라한의 마법 지식이 이그니스를 능가했다. 마법에 광적인
이그니스가 라한에게 배우는 입장이었다.
"삼촌. 무슨 일이에요?"
"루시퍼님이 찾으십니다. "
"거짓말 아니죠?"
"하하하, 거짓말이라니요. 일단가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
이그니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라한은 한 눈에 그가 거짓
말하고 있음을 짐작했다. 한데 투바는 아직 그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한 듯했다.
"알았어요. 그럼 라한하고 놀고 있어요. "
"예. 천천히 갔다 오십시오. "
투바가 멀리 사라지자 라한이 이그니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마치 '또?' 하고묻는듯했다.
"이그니스. "
"어?"
"거 짓말이 지?"
"무, 무슨 소린가? 거짓말이라니? 내가 도련님에게 거짓말이라
도 했다는 말인가?"
이그니스가 변명하면서 왼쪽 눈을 파르르 떨었다. 그가 거짓말
할 때 보이는 독특한 증상이었다.
"투바 저놈 바보 같아. "
"어? "
"어떻게 똑같은 거짓말에 매일 속을 수가 있지?"
"어, 허히허. 거짓말 아니라니까그러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
제 못한 얘기나 하세 "
이그니스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역시나 목적이 있는 거짓말
이었다.
이그니스는 라한에게 마법 체계에 대해서 배우고 있다. 속성 결
합과 조합 그리고 클래스 마법과 비클래스 마법이 그 주된 내용이
었다.
반면, 투바는 마법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지식을 전해 들으
려 했다. 인챈트 혹은 속성에 관계된 모든 지식이 포함된 거였다.
"역시나 이런 이유였어. "
"무, 무슨 소린가? 빨리 어제 하던 얘기나 하세. "
"그 전에 궁금한 게 있는데. "
"뭐야?"
라한은 투바와 대화하면서 얻은 의문을 이그니스를 통해 풀 생
각이었다. 아무래도투바보다는 이그니스의 지식이 해박할 터. 그
에게 묻는다면 의문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물질계와 연결된 차원이 뭐가 있지? 정령계는 알겠는데 다른
건 모르겠거든. "
"물질계하고 연결된 차원? 그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드래곤들
도 이런 얘기는 모를 텐데. "
차원 연결에 대한 연구는 마계의 몇몇 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
다. 그리고 연구자체도마계 학자들에 의해서만진행되었다. 때문
에 지금 차원 연결에 대한 이야기는 마계 고위 마족이 아니면 아는
이가 없었다
"투바가 말해주더군. "
"하여간 도련님 입 가벼운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
"왜? 말해주면 안 되는 거야?"
마계의 비밀이라면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호기심을풀기 위해
투바와 이그니스를 위험에 처하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음이다.
"아니, 비밀은 아닌데 좀 아까워서 말이야. "
"아까워?"
"응. 차원 연결에 대한 연구는 시작부터 끝까지 마계에서만 진
행되었다. 근 5 만 년 가까이 연구해서 지금의 결과를 얻어낸 거지.
근데, 아무런 노력 없이 너한테 알려주는 게 어째 좀 아깝다는 생
각이 들더라고. "
말과는 달리 이그니스의 얼굴에서는 아까워한다는 감정을 찾아
보기 힘들었다. 라한에게만은 뭐든 다 가르쳐주고 싶은 이그니그
였다.
"그래도 말 해 줄 거지?"
"후후, 물질계는 모두 네 개의 차원과 연결되어 있어. 하나는 모
든차원이 그렇듯 영계하고 연결되어 있지. 이 영계는 판트리아계
에 있는 모든 차원과 연결되어 있거든. "
"오호, 그래?"
"응. 그리고 나머지 세 개는 정령계, 마계, 환계야. "
"환계? 그게 뭐야?"
환계라는 말은 라한도 처음 듣는 단어였다. 물질계와 연결되어
있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도 한데 너무 생소한 이름이었다.
"환계는동물들이 사는곳이야. 지능이 있는동물이라고 할까?
나도 그 이상은 모르겠어, 직접 가본 적이 없거든. "
"환계라 환계
라한이 환계라는 이름을 되새겼다. 잊지 않으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이었다.
이그니스는 환계를 동물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마계 학자
들이 알아낸 정보가 그랬기에 이그니스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
었다.
하지만 실상 환계는 동물들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 동물이라기
보다 소환수에 가까운 생명체들이 사는 곳이었다.
"라한. 더 물어볼 거 있어? 없으면 어제 하던 얘기나 계속 하
자고. "
"그러지 뭐. 어차피 나야 투바가 됐든 네가 됐든 별 상관없으니
까. 어제 어디까지 했더라?"
이그니스나 투바는 라한과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그와의 대화
자체가 자신의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까닭이다. 이 때문에 한때
라한을 놓고 모한 신경전을 벌인 적도 있었다.
결론은 당연히 투바의 승리.
마계에서 투바의 지위가 더 높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때부터 이그니스가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마왕 루시퍼를 꼬
드걱 투바를 계속 부르게 한 것이다. 가끔 부르지 않을 때에는 오
늘처럼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어찌췄든 3 일에 이틀은 이그니스
가 라한을 차지했다.
"어제는 불과 바람을 조합하는 얘기까지 했어. 오늘은 불과 물
조합에 대해 얘기해줘, "
"어쩌다 내 신세가 이리 됐누. 이 어두침침한 곳에서 공짜 강의
나 하고 있다니, "
"하하, 여기서 목숨을건졌으니 이 정도는해줘야지. 안그래?"
"그래. 알았다. 음, 불은 너도 알다시피 뜨거운속성이야. 물은
차가운속성이고. 근데, 불에는뜨거운 것 말고 밝히는속성도 있
거든. 물도 마찬가지로 차가운 속성 외에 치료하는 속성도 있고.
이 두 가지를 교묘하게 배열해서
라한은 입으로 강의를 하면서도 몸은 대기를 느끼기 위해 완전
히 열어뒀다. 신화력을 흉수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
함이었다.
한참 강의를 하고 있을 때, 라한이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한데 그 느낌이 확실하지 않았다. 분명 뭔가달라진 것 같은데 어
떤 게 달라졌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그니스. 뭔가 좀
스스스
"뱀파이어들의 영원한 로드이시며 밤의 제왕인 이그니스님을 뵙
습니다. "
라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앞 그림자가 서서히 형체를
갖췄다. 그리고 이그니스에게 무릎을 꿇고 존경을 표했다.
놀란 라한이 오른발을 뒤로 빼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동시에 신
화력을 조금 끌어 모아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라한. 긴장할 거 없어. 우리 마계 정찰병 역할을 하고 있는 섀
도우야. "
"섀도우?"
"응. 말그대로 그림자군단이지. 마계 최고의 은신술 대가라고
생각하면 돼 "
"흐음. "
라한도 섀도우가 사용한 은신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뭔가 느
끼기는 했지만 대체 어디 숨어 있는지 찾아낼 수 없었다 대륙 최
강이라는 카이렌의 은신술도 신경을 집중하면 찾아냈던 라한이다.
한데 섀도우가 사용한은신술은 그보다 더 은밀했다.
"섀도우. 무슨 일이지?"
"벨제르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조만간 우리 바하라 성을 공
격할 생각인 듯합니다. "
"벨제르가? 젠장. "
벨제르라는 말에 이그니스가 욕설을 내뱉었다. 짜증이 치미는지
얼굴도 잔뜩 일그러뜨린 채였다.
"이그니스. 벨제르가 누구야?"
"아, 라한. 벨제르는잠시만. 섀도우,수고했다. 돌아가라. 이
얘기는 내가 루시퍼님께 직접 전하겠다. "
"알겠습니다. "
섀도우의 그림자가 다시 바닥에 가라앉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
지는 섀도우를 보며 라한이 입을 떡 벌렸다.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도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처음에는 카이렌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 생각했는데 겪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건 카이렌의 은신술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나지
않은가? 만약 저런 상대가 뒤에서 공격해 온다면 생각만 해
도 끔찍했다.
"아까 벨제르가 누구냐고 물었지?
" 응 "
"그걸 설명하자면 우리 마계 상황부터 알아야 되겠군. 원래 우
리 마계는 마왕 루시퍼님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 반란 같
은 건 꿈도 못 꾸는 곳이었지. 그런데 투바님이 사라지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 마왕후계자가 성년식도 치르기 전에 물질계로
나가 버렸거든. 넌 잘 모르겠지만 모든 마족은 성년식을 치르기 전
에 물질계로 나갈 수 없어. 주체성이 완전히 형성되기 전에 물질계
로 나가 버리면 물질계 종족에게 너무 크게 물들어 버리거든. 너도
투바님을 보면 알겠지만 일반 마족들과 많이 달라졌다. 정이라는
감정에 휘둘리게 된 거지. "
"내 잘못이군. "
라한의 대답에 이그니스가 손을 내저었다.
이그니스는 투바의 소환이 그 스스로가 원한 것임을 알고 있었
다. 라한의 잘못이 아주 없다고는할수 없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투바에게 있다고 봐야 했다. 또 이미 지나간 일을 따지고 들어봐야
나아질 게 없었다.
"어쨌든 그 때문에 마왕 후계자 선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
마계 곳곳에 퍼진 마족들이 자신이 후계자감이라며 들고 일어난 거
야. 아, 물론그들은모두마왕루시퍼님의 핏줄이 아주조금이라
도섞인놈들이야.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마왕루시퍼님의 정통후
계자는 투바님뿐이 거든. "
"나 패문에 벌어진 일 같군. 도울 방법이 없을까?"
"사실 다른 마족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 세력도 약하고 섞인
핏줄도 미약하기 짝이 없거든. 근데 벨제르 그놈이 문제야. 세력이
쾌 크거든. "
벨제르.
마계 대공이자 마왕 루시퍼의 동생이다. 차기 마왕 자리에 앉아
도 전혀 문제가 없는 핏줄. 거기다 세력도 루시퍼에 비해 크게 부
족하지 않았다.
"어쩌면 되지?"
"뭐, 간단하지 벨제르 그놈만 죽이면 다 끝나는 거야. "
"밑에 있는 놈들이 가만히 있을까?"
"아직 마계에 대해 잘 모르는군. 이곳은 핏줄 승계가 그 어느 곳
보다중요한 곳이야. 마왕이 될 자격이 있는 놈들만 처리하면 그
아래 있는 놈들은 내세울 핏줄이 없어지지. 그런 놈들은 말 한마디
로 굴복시킬 수 있어. "
"편한 동네군. "
원래 벨제르는 루시퍼의 물질계 공격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물질계를 나가기 위해서는 오벨리아 팰리스를 통과해야 할 터. 결
계를 뚫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나면 그때 마왕 자리를 노리
고 진격할 속셈이었다.
한데 그런 계획이 투바의 귀환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오랫동안
벼르던 계획이 한 순간에 무너진 것이다. 이에 화가 치민 벨제르가
부하들을 남마계로 모았다 힘을 조금 더 비축해서 한 번에 밀어
버리려는 생각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생
각도 크게 한 몫 했을 터였다.
"근데 그게 그렇지가 않아. 이번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루
시퍼님이 입을 피해는 클 수밖에 없어. "
"벨제르라는 놈의 세력이 그렇게 커?"
"응. 아직 루시퍼님 세력보다는 약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고 있
기에는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아. 이대로 붙었다가는 이걱도 피해가
적지 않을 거야. "
이그니스의 얼굴에 걱정이 어렸다. 그를보며 라한이 피식 웃음
을 터트렸다.
"왜 웃어?"
"아까 보니 섀도우라는 놈 은신슬이 장난 아니던데. 그놈한테
죽이라고 하면 안 돼?"
"섀도우는 전투 능력이 전무하다시피 해. 힘도 약하고 스피드도
느린 편이지. "
"그래도 그의 뒤에서 찌를 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냐?"
라한의 말에 이그니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라한에게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야! 그 웃음 무슨 뜻이야?"
"은신술은 대단하지만 죽이려고 마음먹었을 때 풍기는 살기는
어쩔 거야? 아까는 이곳에 적이 없어서 아무런 살기를 드러내지 않
았던 거야. 만약 이곳에 적이 있었다면 이 근처에 오자마자 너도
알아차렸을 걸?"
"그런가? 문제는 살기를 어떻게 감추느냐와 부족한 전투 능력이
군. 그럼 말이야. 그럼
"그럼?"
"내가 그 은신술을 배우면 어떨까? 내 전투 능력이 섀도우보다
낫잖아. "
라한의 주목적은 은신술이었다. 카이렌의 은신술에 당해 큰 부
상을 입었던 라한. 만약 그 은신술을 카이렌만큼, 혹은 그 이상 익
힐 수 있다면 같은 수법에 다시 당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살기는 어쩔 건데? 은신술이 아무리 대단해도 죽이려고 마음먹
는 그 순간에는 살기를 드러낼 수밖에 없잖아. "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어때? 가르쳐줄 생각 있어?"
"나 혼자 결정하기 힘든 일 같군 잠시만 기다려봐. "
이그니스가 라한을 두고 성으로 걸어갔다. 이 일을 결정할 수 있
는 결정권자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였다.
이그니스가 사라지자 라한은 신화력을 모으는 데 신경을 집중했
다. 아무래도 대화를 하면서 모으는 것보다는 이렇게 혼자 조용히
모으는 게 빨랐다.
이그니스는 근 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나타났다. 마왕 루시퍼
를 대동한 채였다.
"이그니스. 왜 이렇게 늦었어? 기다리다
이그니스를 반기려던 라한이 뭔가 모한 분위기를 느꼈다. 좀 전
에 섀도우가 나타났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때보다
는 변화가 적어서 라한도 한참 후에야 분위기 변화를 눈치 챘다.
라한이 다시 오른발을 뒤로 빼고 신화력을 끌어 모았다. 그러면
서도 묘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 자를 찾기 위해 주변에 온 신경을 집
중했다.
"라한, 내가 좀 늦었지?"
"흐음. "
이그니스가 라한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이에 라한이 침음성을
흘리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날 시험하겠다 이거지? 까짓것 해보자고. '
라한은 이런 묘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 이가 좀 전과 같은 섀도우
임을 짐작했다. 알았지만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건
자존심 문제였다.
'오른쪽인가?'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라한의 고개도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불의 공!"
"오, 빠르군. "
라한이 불의 공을 만들어 느껴진 곳으로 던졌다. 강한 마법의 빠
른 캐스팅에 보고 있던 루시퍼가 탄성을 질렀다
'놓친 건가? 왼쪽?'
"공간으로!"
스팟!
라한이 공간 이동으로 왼쪽 10 미터 지점으로 이동했다. 동시에
허리에 차고 있던 세라소드를 좌우로 강하게 휘둘렀다.
서걱
"허억!"
바닥에 있던 그림자가 서서히 형체를 갖췄다. 역시나 라한의 예
상처럼 섀도우였다 좀 전보다 더 크고 무섭게 생겼지만 섀도우임
은 분명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내 아들놈이 대단하다고 칭찬을 하더니 역
시 한 가닥 하는 녀석이로군. "
"죄송합니다. 루시퍼님. 소인이 부족해서 인간에게 부상을 당했
습니다. "
나타난 섀도우가 왼팔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라한의 세라
소드에 왼팔을 다친 듯했다.
"미스트. 네 잘못이 아니다. 저 인간이 우리가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났던 게지. 이름이 라한이라고 했던가?"
"마왕?"
"하하하하하. 그래, 내가 마왕이다. "
라한의 말투에 루시퍼가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반말이던가? 물론 적이라면 화부터 냈겠지만 투바의 친구라고 하
니 웃음부터 나왔다.
"라한, 말조심하게. 저분은 마계의 하나뿐인
"이그니스. 됐다. 난괜찮으니 물러나거라."
"예, 루시퍼님. "
이그니스가 물러나자 루시퍼가 라한을 찬찬히 살펴봤다. 보면
볼수록 라한이라는 인간이 더 궁금해졌다.
라한은 얼핏 아무 힘도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자
신에게 찾아왔던 세턴과 비슷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신의 사자
도 아닌데 신의 사자와 흡사한 기운이라니. 너무 신기해서 해부라
도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특이한 인간이로군. 신의 사자가 사용하는 힘과 비슷해. 어디
서 배운 거지?"
"저 혼자 배웠습니다. "
라한의 말투가 높임말로 바꿔었다. 친구인 투바의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예의를 지켰다.
"그 말 믿어도 되겠는가?"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
"마음에 드는 인간이로군. 라한이라 기억해두겠네. 미스트.
명을 받들라. "
"예, 루시퍼님. "
라한이 섀도우라고 생각했던 미스트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루시퍼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명을 내린다. 지금 이 시간부터 라한에게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걸 가르쳐라. "
"명을 따르겠습니다. "
"하하하하. 라한. 그럼 최선을 다해 배우게. 하하하하. "
명을 내린 루시퍼가 천천히 바하라 성으로 돌아갔다.
루시퍼는 라한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실력도 마음에 들었고 그
가 아들 투바의 친구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또 힘을 가지고 있
으면서 드러내지 않으려는 태도도 좋았고, 가식적이지 않은 모습
도 좋았다. 한마디로 오랜만에 만난 흡족한 상대였다.
"흠, 흠. 그럼 나도 가보겠네. 루시퍼님이 명령을 내렸으니 한동
안 만나지 못하겠구먼. 라한, 고생하게. "
"다음에 보자고. "
루시퍼가 라한에게 최선을 다해서 배우라고 했다. 그건 다른 이
들이 라한의 배움을 방해할 수 없다는 뜻도 되었다. 물론 루시퍼의
명령에서 자유로운 투바는 별개였다.
"라한이라고 부르면 되는가 7"
"나도 미스트라고 부르면 될까?"
"마음대로. 그럼 자리를 옮기지. "
"앞장서. "
섀도우 로드 미스트.
그_도 라한에게 큰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자신의 은신술을 레뚫
어보고 공격을 가한 라한. 강자존의 세계 마계이기에 그 정도만으
로도 인정받을 가치가 있었다.
한적한 곳에 도착한 미스트가 걸음을 멈추었다. 덩달아 따라가
던 라한도 멈춰 서서 미스트를 바라봤다.
"지금부터 네게 은신술을 가르치겠다. 먼저 호흡을 멈춰라. "
미스트의 말에 라한이 호흡을 멈췄다. 고분고분한 태도에 미스
트가 웃음을 머금었다
처음 투바의 친구가 인간이라고 했을 때, 미스트는 뒤에서 한숨
만쉬었다. 라한이 은신술을배우고싶다고 했을때도 '인간주제
에' 라며 깔봤던 게 사실이다.
한데 라한에게 호되게 당하고 나자 마음이 바꿔었다. 또 자신을
이겼으면서도 자만하지 않고 열심히 배우는 자세도 마음에 들었다.
"이제 눈을 감고 자기 내면을 본다고 생각해라. "
"그러지. "
라한의 은신술 수업이 시작되었다.
라한은 카이렌에게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은신술을
배울 생각이었다. 이에 반해 미스트는 자신이 인정한 인간이니만
큼 최선을 다해 가르치려 했다. 물론 루시퍼의 명령도 열성적인 가
르침에 한몫했다.
라한이 미스트에게 은신술을 배운 지 두 달이 흘렀다. 이젠 미스
트도 라한의 은신술에 놀랄 정도였다.
"나오게, 이제 된 거 같군. "
미스트의 말에 라한이 바닥에서 솟아나듯 서서히 나타났다. 미
스트가 은신술을 풀 때의 모습과 완벽히 일치했다.
"대단하군. 이젠 나도 못 찾겠어. "
"이게 모두 네 덕이다.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
"훗, 어울리지 않는말을하는군. 루시퍼님의 명령 때문에 한일
이니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
미스트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라한의 고맙다는 인사
가 낯간지러웠던 모양이다.
"아무튼 네 덕에 많은 걸 배웠다. 근데 내가 알고 있는 그놈하고
너무 비슷하군. "
"네가 알고 있는 그놈이 카이렌이라는 엘프겠지?"
"역시 네가 가르친 건가?"
라한의 물음에 미스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부하중에 한놈이 엘프에게 가르쳐줬다고하더군. 벌
써 4 천 년 가까이 흘렀군. "
"네 부하라는 그 섀도우는 어떻게 됐지?"
"죽었다. 카이렌 그놈이 은신술만 배우고 죽였지. "
미스트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카이렌에 대한 분노가 치솟는
듯했다. 하긴 자신의 부하가 호의를 베풀고도 배신당해 죽었으니
찾아가서 죽이지 못하는 게 억울할 터였다.
"괜한 얘기를 꺼낸 것 같군. "
"어차피 다지난 일이다. 라한, 대신 복수해 주겠나?투바님 말
씀으로는 너도 카이렌이라는 엘프에게 부상당했다던데? 해줄 수
있겠지?"
미스트의 갑작스러운 말에 라한이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 미스
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아직도 그놈에게 정이라는 게 남아 있는 건가? 인간이란
이해할 수가 없군. 배신한 놈에게 정이라니
"그게 아니다. "
"그럼 죽여주겠나?"
"그게 에휴 "
미스트의 재촉에 라한이 한숨을 쉬었다.
라한도 카이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지금까지 자
신에게 해를 끼친 이를용서한 적이 없는 라한. 생각 같아서는 카
이렌도 당장 찾아가서 죽이고 싶었다.
한데 정말 미스트의 말처럼 정 때문일까? 아직도 카이렌을 죽이
는 건 망설여졌다. 마음속으로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치면서
도 또 한편으로는 카이렌을 어떻게 죽일 수 있냐는 안타까운 마음
이 새록새록 싹텄다.
"내가 너무강요한 것 같군. 됐다. 그놈복수는나중에 내가하
겠다. 소환될 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아니, 아니야. "
"응? "
라한이 급하게 말을 내뱉었다. 어떤 결심이 선 눈빛이었다
"내가, 내가죽이겠어. 카이렌. 내가직접 죽이겠어."
"후후, 자신 없는 말은 내뱉지 마라. 됐다. "
"아니, 내가죽일게. 꼭죽여줄게."
"그래, 알았다. "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미스트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라한과 두 달 동안 함에 지내며 그의 성정을 파악한 미스트였다.
그가본 라한은그렇게 모질지 못했다 겉으로는강한척, 냉정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정에 약한 이가 라한이었다.
"나가자. 수업이 완전히 끝났으니 오늘은 신나게 놀아야지 "
"그래, 나가자. "
라한은 지난 두 달 동안 신화력을 완벽하게 회복했다. 어떤 면에
서는 전보다 조금 더 강해진 느낌마저 들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
서 라한의 신화력을 담는 그릇이 조금 커진 모양이다.
"라한! "
라한과 미스트가 두 달 만에 바하라 성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
다. 어떻게 들었는지 투바가 이미 나와서 라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투바! "
"후후, 라한, 성과는좀 있었어? 미스트 아저씨가쓰는은신술
어렵지?"
"응. 대단하더군. "
"허허, 대단해? 그렇게 대단해서 두 달 만에 내 기술을 다 배운
거냐? 나 참. "
미스트가 웃으며 라한을 꾸짖었다. 시샘이 아닌 즐거운 말투에
라한과 투바도 웃음을 머금었다.
"이봐, 미스트. 나정도되니까두달에 배운거지. 투바이 녀석
은 어림도 없어. 2 만 년은 걸릴 거다. "
"라한, 뭐야?"
"허허, 도련님. 맞는 말 아닙니까?"
"우씨. "
투바가 입을 쭉 내밀었다 '나 삐쳤으니 빨리 달래봐.' 라는 시위
같았다.
"투바. 그동안 잘 지냈지?"
"뭐야? 나한테 말도 없이 사라져놓고. 뭐? 잘 지냈지? 아이고.
1 거 서러워서 못 살겠네. "
"미안. "
투바의 지위면 미스트와 라한이 교육하던 곳에 난입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라한의 성장을 위해서 난입하고 싶은 욕구를 억
눌렀다. 항상 자기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 투바에게는 이것조차 엄
청난 일이었다.
"쳇. 자, 받아. "
"어? 이거 뭐야?"
투바가 라한에게 책을 한 권 내밀었다. 최근에 쓴 듯 빳빳하고
깨끗한 책이 었다.
"일기. "
"일기?"
"응. 내가 널 처음 만났던 때부터 지금까지 널 보며 느낀 점을 적
은 거야. 내가 마족이라는 건 쏙 빼놓고 적었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네가 마족의 친구라는 건 모를 거야. "
투바는 인간들과 려여 살 라한을 위해서 자신이 마족임을 빼놓
고 적었다. 라한이 마족의 친구라며 손가락질당할 걸 막기 위해서
였다.
한데 라한은 사람들과 려여서 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미 인
간으로 보기 힘들 만큼 강해진 라한 사람들과 려여 사는 건 그 사
람들에게 너무 위험했다. 라한이 딱 한 번 마음을 잘못 먹으면 그
사람들 전부가 몰살당할 수도 있기 패문이다. 그게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지 위험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고마워, 근데 난 내 친구가 마족이라는 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
아. "
"네 마음은 잘 아니까 그냥 받아둬. "
"알았다. "
라한이 투바를 꼭 껴안았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새삼
'이래서 친구가 소중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자. 오늘은 놀아야지. "
"나도 원래 그럴 생각이었는데 안 되겠다. 이그니스하고 루시퍼
님 좀 불러줘. "
"왜?"
라한의 말에 투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자기는 라한과 하루 종
일 같이 놀고 싶은데 라한은 그게 아닌 듯해서 섭섭했다.
"내가 은신술을 배운 이유가 있거든. 일단 그 일부터 처리하고
거하게 한잔 하자고. "
"쳇, 어쩔수 없지. 미스트아저씨."
"알겠습니다, 도련님. "
미스트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먼저 루시퍼에게 가서
곧 라한이 찾아을 거라 말했다. 그 다음 이그니스를 방문해서 루시
퍼가 있는 집무실로 오도록 전했다.
루시퍼의 집무실.
마왕이 업무를 보는 곳답게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풍겼
다. 입구 양쪽에 늘어선 구릿빛 동상과 벽을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그림들.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주인의 품격을 말해주
는 듯했다.
집무실에 먼저 도착한 이는 이그니스와 미스트였다.
"루시퍼님을 뵙습니다. "
"거기 앉아라. "
"라한은 아직 안 왔습니까?"
"곧 오겠지. "
루시퍼의 말에 이그니스가 그의 바로 아래 의자에 앉았다. 미스
트는 이그니스보다 두 칸 아래의 의자에 조용히 착석했다. 대집회
때 그들이 앉는 자리였다.
잠시 기다리자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마왕 루시퍼님. 도련님이 라한을 데리고 도착했습니다. "
"들라하라. "
말이 끝나고 거대한 집무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안에서 라한
과 투바가 나란히 들어왔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
"어? 아, 루시퍼님을 뵙습니다. 라한입니다. "
라한이 뒤늦게 루시퍼에게 인사했다. 들어오면서 입구 양쪽에
놓인 동상을 보느라 인사가 늦은 것이다.
"그래, 앉게. 투바, 너도 앉아라. "
"네, "
투바와 라한이 이그니스와 미스트가 마주보이는 곳에 적당히 자
리 잡았다. 그들에게는 정해진 자리가 없었기에 편한 곳에 앉아도
상관없었다.
"그래, 라한. 미스트에게 많이 배웠는가?"
"예, 루시퍼님이 염려해 주신 덕분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
라한의 말이 끝나자 건너편에 있던 미스트의 얼굴이 밝아졌다.
자신이 가르친 라한이 자랑스러운 눈치였다.
"그럼 라한 네게는 우리 마족 스승이 두 명이나 있는 셈이군. "
"그렇게 되는군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그니스는 라한의 마법 스승이다. 그에게 배운 마법 주문이 성
장의 밑바탕이 되었으니 그 누구보다 소중한 스승임에 분명했다.
또 미스트는 라한의 은신술 스승이다. 그에게 마법 외의 또 다른
세계를 알려준 미스트. 라한에게는 이그니스와 미스트 둘 다 소중
한 존재였다.
"그럼 날 찾아온 이유는 뭔가?"
"마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두 명의 스승은 제가 성장
할수 있도록 도와줬고, 제가죽음의 문턱에 있을 때도 마계에서
구함을 받았습니다. 그 보답을 조금이나마 하고 싶습니다. "
"보답?"
루시퍼는 라한이 어떻게 은신술을 배우게 됐는지는 알고 있었
다. 하지만 투바의 친구였고 또 스스로가 감탄한 인간이기에 가르
쳤을 뿐 딱히 조건이 있어서 가르쳐쭌 게 아니었다.
"벨제르를 죽이겠습니다. "
"뭐?"
흐음
라한의 말에 투바와 이그니스가 신음을 흘렸다.
벨제르.
루시퍼와 버금가는 세력의 수장이다. 또 그 스스로의 능력도 루
시퍼를 제외하면 마계 최강이라 불린다.
"투바, 이그니스.조용해라. 라한.그말책임질수있느냐?"
"네. "
"좋다. 허락하겠다. 이그니스. 미스트. 벨제르의 위치를 라한에
게 가르쳐줘라. 앞으로 벨제르에 대한 모든 정보는 나보다 라한에
게 먼저 전한다. 이상. "
"아버지. "
투바가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그 역시 벨제르를 잘 알기에 라한
을 그냥 보낼 수 없었음이다.
"투바. 라한이 직접 결정한 일이다. 그의 선택을 믿어보자꾸나. "
"하지만 아버지. "
"투바야. 네가 진정 라한을 위한다면 그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볼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 그게 친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
루시퍼의 자상한 설명에 투바가 라한을 바라봤다. 라한도 투바
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달라는 표시였다
"알겠습니 다. "
"라한. 더 부탁할 게 있는가?"
"저 동상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라. "
루시퍼의 명이 떨어지자 라한이 동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한참 살펴보던 라한이 동상에서 한 걸음 떨어졌다.
부스럭!
라한이 품에서 라이더스 패를 꺼냈다. 그리고 그 패와 동상을 번
갈아가며 쳐다봤다.
'똑같군. '
"루시퍼님. "
"말하라. "
"이 금속의 재질이 뭔지 봐주실 수 있습니까?"
"금속? 이리 줘 보게. "
"네. "
라한이 라이더스 패를 루시퍼에게 던졌다. 신화력을 이용해서
던진 거라 천천히 부드럽게 날아가서 루시퍼 앞에 멈췄다
"음. 이건 마계 금속이군. 다크아이언이라고부르지."
"이 금속은 마계 외에는 나오는 곳이 없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없다.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
라한이 한 걸음 물러나자 루시퍼가 라이더스 패를 다시 던졌다.
그가 던진 것도 천천히 부드럽게 날아가서 라한 앞에 멈췄다. 사소
한 일이지만 새삼 마왕 루시퍼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젠장. 이러니 내가 몰랐지. 마계 금속이었다니. '
라한은 라이더스 패에 엄청난 비밀이 숨걱져 있을 거라고 믿어
왔다. 생소한 재질에 생소한 성질. 물질계에서 본 적이 없는금속
이기에 괜한 망상에 젖어 살았다.
한데 알고 보니 마계에서만 생산되는 금속에 지나지 않았다. 비
밀이라고 해봐야 원산지가 마계라는 정도였다. 고민할 만한 가치
가 없는 금속 때문에 심력만 소모한 셈이었다.
' 망할. '
문제라도 있는가?"
"아닙니다.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
"그러게. "
라한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집무실을 나왔다. 하루 종일 좋던 기
분이 다크아이언 하나 때문에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다.
그날 숙소로 돌아간 라한은 한숨만 푹푹 쉬었다. 아직도 라이더
스 패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그렇게 한참 짜증내던 라
한이 투바에게 받은 책을 꺼내 들었다.
"녀석. "
책을 읽자 짜증났던 라한의 기분이 스르르 풀렸다. 투바가 쓴 책
내용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에고, 그래. 잊자. 친구가 있잖아. "
라한은 밤을 꼬박 새워서 책을 다 읽었다. 눈물이 핑 도는 감동
과 훈훈한 웃음이 밤새 끊이지 않았다.
"으차. 나가자. 일부터 끝내야겠어."
라한은 밤을 새웠음에도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정신
적 충만감으로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었다.
라한이 방을 나오자 섀도우가 조용히 라한을 맞았다. 라한이 깨
기를 기다린 모양이다.
"무슨 일이지?"
"이그니스님과 로드께서 찾으신다. 가자. "
"위치를 찾은 모양이군. 가지. "
라한의 말에 섀도우가 모습을 감췄다. 그런데도 라한은 섀도우
가 어디에 있는지 꿰뚫어볼 수 있었다. 지난 2 달 동안의 수련했던
결과였다.
섀도우가 미스트와 라한이 수련했던 곳에 걸음을 멈췄다.
"들어가라. "
"수고했어. "
철컥!
라한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그니스가 웃는 얼
굴로 라한을 맞았다.
"거기 앉아. "
"그러지. 근데 미스트. 이제 내 앞에서 숨어봐야 소용없다니까. "
미스트가 라한이 바라보는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라한이 그
가은신술 쓴 곳을 한눈에 찾아낸 것이다.
"역시 대단하군. 미스트의 말을완전히 믿지 않았는데, 이건 그
정도가 아니잖아. "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라한의 은신술이나 은신술을 찾는 능
력은 저보다 뛰어나다니까요. "
미스트는 라한이 들어오기 전에 은신술을 사용했다. 이그니스에
게 라한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야, 이게 사람을 뭐로 보고. "
"하하하. 이해해라. 라한. 그래도네 스승이나마찬가지인데 화
내지는 않겠지?"
"아이고. 내가 더러워서 참는다. 쳇, 나도 제자 하나 키우든가
해야지. "
라한이 바닥어 1 주저앉으며 대꾸했다. 그 말에 이그니스가 다시
라한을 도발해왔다.
"하하하 자네 성격으로 어디 제대로 가르칠 수나 있겠나? 그 더
러운 성격 버리기 전에는 힘들 걸, "
"뭐야?"
라한이 주먹을 불끈 쥐며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입은 웃는 모습
이었다. 화가 난 게 아니라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봐. 난 네 마법 스승이라고. "
"망할. "
주먹을 움컥쥐었던 라한이 결국 다시 주먹을 풀었다. 그러면서
입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하하. 그놈 참. "
"아, 근데 벨제르 그 자식은 어디 있어?"
라한이 본론을 꺼냈다. 라한이 화제를 돌리자 이그니스와 미스
트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벨제르는 여기 이곳에 있어. 경비를 서는 다크나이트만 1 만이
넘으니까 조심해야 할 거야. "
벨제르가 라한에게 지도를 내밀었다. 꽤나 자세하게 그려진 지
도였다.
또 벨제르가 있는 곳도 빨간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어서 그를 찾
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가 지금 우리가 있는 바하라 성인가?"
"응. 그리고 이거, "
벨제르가 또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그 종이를 펴 본 라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뭐냐?"
"벨제르 얼굴이다 근데 네 얼굴이 왜 그래?"
"이거 너무 못생겼잖아. 뭔 문어 대가리도 아니고. 이게 뭐니?
이게?"
"크크크, 인간들 기준으로는 못생긴 얼굴이겠지, 근데 우리 마
족들 사이에서는 잘생긴 편에 속한다. "
미스트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는 곳이 다르니 미의 기준이 다른 건 당연한 법이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했다.
눈세 개와 벗걱진 이마, 튀어나온송곳니. 아무리 봐도 구역질
나는 외모인데 잘생긴 편이라니. 새삼 마계와 물질계가 얼마나 동
떨어진 세상인지 느낄 수 있었다.
"이놈만 죽이면 되는 거지?"
"응. 근데 정말 자신 있어?"
"믿어봐. 해볼 테니까. "
"그래, 네 고집을누가꺾겠냐? 대신 조심해라. 너 다치면 도련
님 또 난리난다. "
"알았어, 이건 다 외웠으니까 넣어둬. "
라한이 지도와 그림을 내밀면서 일어났다. 긴장감이 전혀 느껴
지지 않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라한도 이그니스와 미스트가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잘 알았
다. 그들의 목소리와표정에서도그런 걱정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곳에는 없지만 투바도 자신이 다치지 않기를 빌 게 분명했다.
그 때문에 라한은 의도적으로 태연한 척했다. 자신이 긴장하고
있으면 그들의 걱정이 더 커질까 염려한 탓이다.
마계는 북 마계와 남 마계로 구분된다.
이 중 바하라 성이 위치해 있고 마족들이 모여 사는 곳은 북 마
계였다. 반면, 남마계는마족보다마물이라불리는 괴수가 더 많
다. 몇몇 죄를지은마족들이 숨어 살기도하지만, 절대 다수가마
물인 터. 때문에 루시퍼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바하라 성을 떠난 라한이 남 마계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마물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꼬박 11 일. 그래서인지 약간
은 지친 얼굴이었다.
"으으으"
지난 11 일 간의 여정을 떠올리자 절로 소름이 돋았다. 마물이 무
서워서가 아니었다. 너무 끔찍하고 구역질나게 생긴 마물의 모습
에 속이 매슥거렸다
"이쯤인데. "
라한이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그러면서 기억을 더듬어 벨제
르가 사는 곳을 탐색했다.
"저쪽이군. "
방향을 정한 라한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 상태로 음침한숲 안으
로 걸어 들어갔다
'찾았다. '
한참 걸어 들어가자 시커먼 벽을 가진 성이 눈에 들어왔다. 벨제
르가 살고 있다던 베니카 성이었다
'어디보자, '
라한이 성 주변을 둘러보며 경비원 수를 파악했다. 어느 정도 둘
러보자 성의 경비 상태를 대충 확인할 수 있었다.
엄청나게 많은 다크나이트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마족들. 지
기다 성 주변에 가득한 마물이 라한의 눈을 어지럽혔다.
'더럽게 많군. '
라한이 은신술을유지한 채로 벽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라한의
은신술을 눈치 챈 마족은 없었다.
'한 번 해보자고. 뜨자. '
라한이 신화력을 이용해 공중으로 떠올랐다. 다행히 신화력을
사용했음에도 은신술은 풀리지 않았다.
라한이 벨제르를 죽이겠다고 단언한 것도 신화력의 특성에 기인
했다. 신화력의 사용은몸이 아닌 정신력을소모하게 하는 터. 몸
에 사용하는 은신술과 충돌할 리가 없었다. 결국 신화력을 사용하
더라도 은신술이 풀리지는 않는 것이다.
물론 신화력을 사용하더라도 살기를 일으키면 들키게 된다. 벨
제르를 죽일 때 살기만큼은 조심해야 했다.
'저기군. '
벽을조용히 넘어간라한이 내성 입구로향했다. 곳곳에 경비를
서는 마족들이 보였지만 라한을 발견한 마족은 없었다.
'누가 문 좀 안 열어주나?'
라한이 첫 번째 난관에 부딪쳤다 굳게 잠긴 내성 문이 문제였다.
'미치겠군. 왜 아무도 안 다녀?'
아무리 기다려도 내성 문을 열고 나오거나 들어가는 이가 없었다.
이대로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다면 라한도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라한의 은신술은 몸에 사용하는 기술이다 이 때문에 몸에 힘이
가해지는 행동을 하면 은신술이 풀리게 된다. 얼핏 봐도 엄청난 무
게로 보이는 내성의 문. 직접 열기 위해 몸에 힘을 줬다가는 남에
게 들키기 십상이었다.
라한은 내성의 문 앞에서 근 두 시간을 보냈다.
'나온다. '
라한이 내성 문 안쪽에서 들리는 발소리를 들었다.
쿠루루루룽! 쾅!
예상대로 내성 문이 열리고 하인으로 보이는 마족이 밖으로 나
왔다. 이에 라한은 신화력으로 몸을 살짝 띄운 채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살았다. '
라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두 시간의 기다림이 너무 지루했
다. 생각 같아서는 좀 전에 나왔던 그 마족에게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다.
'문제는 지금부터 인데. '
이제 벨제르의 얼굴만 떠올리며 그를 찾아야 한다.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벨제르. 거기다 같은 인간이 아니기에 모습조차 생소
한 마족. 한 번 봤던 그림으로 그를 찾아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그놈도 자기 딴에는 높은 놈이니까 위에 있겠지?'
루시퍼도 바하라 성의 최상층부에 머무른다. 뿐만 아니라 물질
계의 왕들도 대부분 왕궁의 상층부에서 산다. 벨제르 역시 반란군
의 수장이니 높은 곳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뚜벅!
라한이 뒤꿈치를 들고 계단을 하나씩 오라갔다 가끔 누군가가 나
났을때만 신화력을 사용해 계단 옆으로 피했다 신화력을 조금
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한참 올라가자 계단의 끝이 보였다 그리고 그끝에 높이 5 미터
정도의 문이 위치해 있었다
저기군 또 기다려야 하나
라한이 문 앞에 난간에 앉았다 이번에도 누군가가 나오거나 들어
가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치열한 전투
라한은 문 앞에서 꼬박 하루를 보냈다 반새도록 아무도 출입하
지 않은 셈이다
미치겠다 이 자식은 아무것도 안 먹고 사나
라한은 이 문앞에 벨제르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
가 식사를 할때 하인이 들어가야 정상이다 한데 도무지 출입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잘못 짚었나 이거 뭔 창고 같은거 아냐
만 하루 동안 아무도 출입하지 않은곳 살아 있는 존재가 사는
곳이라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막상 자리를 뜨기도 힘들었다 지금
까지 기다린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온다
라한이 올라왔던 계단을 통해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꼬박 하루 만에 보는 마족이었다.
'오, 좋아 '
라한의 눈에 마족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한 손에는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음료수가 담긴 물통을 든 마
족이었다.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은 먹는군. '
라한이 숨을 참고 조용히 기다렸다. 음식을 들고 온 마족이 문
앞에 섰다. 그상태로손으로문에 뭔가를그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 수 있는 어떤 방법인 듯했다.
'어라? 그냥 힘으로는 안 열리는 건가? 다행이군. '
기다리다 지쳤던 라한은 힘으로 문을 열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벨제르의 능력을 정확히 종잡을 수 없었기에 억지로 참았
을 뿐. 마족이 조금만 더 늦게 나타났다면 성격 급한 라한이 힘으
로 문을 열고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데 문은 힘으로 열리는 게 아니었다. 라한은 모르는 어떤 수신
호를 문에 그리면서 여는 특이한 형태. 힘으로 열었다가는 다른 마
족에게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는 길밖에 안됐을 터였다.
쿠쿠쿠쿠쿵! 쿵!
문이 열리자 라한이 신화력을사용해 마족을 타넘었다. 그리고
잽싸게 안으로 들어가 문 옆에 섰다.
'여는 수신호가 뭐였더라?'
안에 들어온 라한이 좀 전에 마족이 했던 수신호를 되새겼다. 다
행히 오래 지나지 않은 일이라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벨제르를 죽이고 나서 도망가려면 어차피 이 문을 통과해야 한
다. 그러자면 문 여는방법을 알아야하는 건 당연한 일. 뒤늦게라
도 특이한 문 개폐 방법을 알았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입구도 똑같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지금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좋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
할 것 같았다.
'어디 갔지?'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느라들어온 마족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
지 못했다. 어차피 텅 빈 방이기에 사라질 곳이 없는데도 갑자기
사라지다니. 라한도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일단 가봐야겠다. '
라한이 신화력을 사용해 몸을 살짝 띄었다. 그 상태로 방 안으로
천천히 날아 들어갔다
라한이 바하라 성에 들어갔을 때, 마왕 루시퍼는 마족들을 바하
라 성으로 불러 모았다. 회의 때 참가하는 마계 귀족만이 아닌 마
족 전부를 모은 루시퍼.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마족들이 웅성거
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글쎄, 마왕께서 생각이 있으시겠지. "
"혹시 다시 물질계로 쳐들어가는 거 아냐?"
"허허, 투바님께서 돌아왔는데 물질계를 공격할 이유가 없지 않
은가? 간악한 벨제르를 공격하는 거라면 모를까. 그리고 설사 물
질계를 공격하는 거면 어떤가? 우린 마왕께서 시키는 대로 하면 그
만이지, 언제 마왕께서 우릴 실망시킨 적이 있었는가?우린 그냥
시키는 대로 따르면 되는 거야. "
"그래도 난 걱정되는구먼. 이렇게 전 마족을 모두 모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지. "
모인 마족들의 대화는 대부분 이번 모임의 이유에 대한 얘기였
다. 루시퍼가 아무런 언급도 없이 마족들을 모은 탓이다.
징! 징! 징!
뿌우웅! 뿌우웅- !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바하라 내성에서 마계 귀족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등장에 마족들은 또 한 번 놀라워해야 했다.
평소에 자주 등장했던 마계 귀족들은 당연히 이 자리에 참석했
다. 문제는 내성 안에서만 움직이며 루시퍼만 만났던 마계 귀족들
도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거였다. 마계의 중대사가 아니면 모습조
차 나타내지 않던 마계 귀족들등장. 이번 소집이 심상치 않은 소
집임을 짐작케 했다.
꿀꺽!
상황을 파악한 귀족들이 침을 삼켰다. 긴장이 되자 입이 바싹바
싹 마른 모양이다.
징! 징! 징!
뿌우웅! 뿌우웅- !
한창웅성거리던 마족들이 일제히 입을다물었다. 그상태로 내
성 입구를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그들의 눈빛을 받으며 루시퍼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그 뒤에는 투바가 몸을 움츠린 채
로 따라왔다.
"와! 와!"
"마왕 루시퍼님 만세! "
"마계여 영원하라! "
"천계를 멸하자! "
"물질계를 점령하자!"
과연 마왕 루시퍼였다. 그가 풍기는 제왕의 기운에 마족들도 혀
를 내둘렀다.
"모두 조용!"
이그니스의 한마디에 바하라 성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위계질
서가 확실한 마계다웠다.
"오늘 이 자리는
이그니스가 말을끊고 마족들을둘러봤다. 자신의 얘기가끝났
을 때 마족들이 놀랄 걸 생각하니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 이 자리는 마왕 루시퍼님이 후계자인 투바님께 마왕 자
리를 승계하는 자리다. "
"컥!"
"흐음. "
이그니스의 말이 끝나자 마족들이 신음을 흘렸다. 역시나 이그
니스의 예상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조용. 루시퍼님, 나오십시오. "
"그러지. "
루시퍼가 천천히, 하지만당당한걸음으로 단상에 섰다. 그곳에
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옛날을 회상했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구나. '
"이그니스의 말처럼 오늘 내가 이 자리에 나온 건 마왕 자리를
넘겨주기 위함이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앉아 있던 이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생각하니 나 역시 허전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우리 마
계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서는
마족들이 숨을 죽이고 루시퍼의 연설을 들었다. 틀에 박힌 말이
었지만 루시퍼의 입에서 나오자 그것도 남달랐다.
".이로써 내가 지금까지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 아들 투바에
게 물려주려 한다. 투바, 나오라, "
"예? 예. 아버지. "
투바가 머리를 긁적이며 단상으로 나섰다. 아직도 이 자리가 실
감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투바. 오늘부로 내가맡았던 마왕 자리는 너에게 넘어간다. 마
계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는가?"
"예. "
"천계를 멸하고 물질계를 점령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느냐?"
"물, 물질계도요?"
투바의 되물음에 옆에 있던 이그니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차
마 이런 상창까지는 예상 못한 탓이다.
-그냥 형식적인 겁니다. 예라고 하십시오.
-삼촌. 아무리 그래도 물질계는
-그냥 예라고 하십시오. 제발.
이그니스가 일종의 텔레파시 같은 마계 술법으로 투바에게 말했
다. 한데도 투바는물질계 점령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 모습이었다
"다시 말하겠다. 천계를 멸하고따계의 영광을지속시키는 oloTT
최선을 다하겠는가?"
"아, 예."
루시퍼가 말을 바러서 물었다. 물질계에 관련된 질문을 쏙 뺀 것
이다.
"마계의 모든 마족에게 전한다. 오늘부로 이곳 바하라 성의 주이
은 투바가 될 것이며 전 마계의 주인도 내 아들 투바가 될 것이다 ,-
"와! 와! 마왕 투바님 만세! 전대 마왕 루시퍼림 만세! 마계여 여
원하라! "
"영원하라!"
"영원하라! "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바하라 성에 마계 구호가 울려 퍼졌
다. 그제야 투바도 자신이 마왕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모두 조용! 마왕이시여. 저기서 보고 있는 마족들에게 한말씀
전하십시오. "
"아, 아버지, "
"아버지라는 호칭은 불가합니다. 이제 마왕 투바님에는 아버지
가 없습니다. 전 지금 이 시간부터 마계의 귀족 중 한 명에 불과합
니다. "
마계의 규칙이었다. 마왕 위에는 그 어떤 이도 존재할 수 없는
마계 규칙. 마왕이 곧 법이며, 또전 마족의 우상이 마왕하나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규칙이었다.
"그, 그러지. "
투바가 루시퍼를 지나쳐 단상에 섰다. 그 위에서 마족들을 둘러
보니 기분이 남달랐다 이제야 진짜마왕이 되었다고 할까? 생소
한 상황이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마족들이여. 나투바가오늘 너희들의 주인이 되었다. 이제 너
희의 영광을 위해, 마계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이곳 바하라 성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너희들에게 맹세한다. 나만 믿고 따
라오라. 너희에게 내가 얻을 영광을돌려주겠다. 기적을보여주겠
다. 믿으라, "
"와! 마왕 투바님 만세!"
"만세! "
여기저기서 함성이 들려오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지금 기분으로
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그니스도 투바의 연설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 성년식
도 치르지 않은 투바가 이렇게 잘 할 줄은 예상 못한 것이다. 새삼
'핏줄은 어쩔 수 없다. '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루시퍼 역
시 갑작스럽게 마왕이 되어 뛰어난 지도력 하나로 마계를 휘어잡았
으니 말이다.
다시 내성으로 들어온 투바와루시퍼, 마계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모두 고맙다. "
투바가 마왕이 앉은 가장 높은 자리에서 근엄하게 말했다. 이에
다른 마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당연히 이어받을 자리를 받으신 것뿐입니다. "
"맞습니다. 어차피 투바님이 이어받으실 자리였습니다. "
마계 귀족들은투바가마왕이 된 것에 불만이 없었다. 루시퍼의
말이라면 뭐든 따르던 마계 귀족들. 그런 루시퍼가 결정해서 마왕
자리를 물려줬으니 투바를 마왕으로 모시면 그만이었다.
"알겠다. 그럼 더 이상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
"저희는 그냥 따를 뿐입니다. "
이그니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말에 투바도 힘을 얻
었다.
"오늘 난 우리 마계의 새로운 마왕이 되었다. 이렇게 경사스러
운 날 그대들을 왜 모이라고 한 줄 아는가?"
"하명하십시오. "
이그니스는 오늘 모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마계 귀
족들이 모르고 있기에 그도 짐짓 모른 척 말했다.
"지금 밖에는 우리 마계에 있는 마족들의 대부분이 모였다. 난
지금 그들을 남 마계 지역으로 보낼 생각이다. "
" 예?"
"마왕님. 그 말씀은 벨제르와 정면 승부를 하겠다는 뜻입니까?"
벨제르가 현재 머무르고 있는 곳이 남 마계였다. 또 지금 마계의
가장 큰 화두도 벨제르의 반란인 터. 투바의 말을 벨제르와 싸운다
는 걸로 해석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다. 난 그를 따르는 다른 마족들에게 항복을 권하러 갈 생
각이다. "
"항, 항복요? 하오나 마왕님. 그들은 벨제르를 따르고 있습니
다. 그가 죽지 않는 이상은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겁니다. "
"맞습니다, 마왕님. 벨제르가 반란을 일으킨 간악한 놈이기는
하지만 부하들만큼은 확실하게 휘어잡은 자입니다. 그가 건재하는
한 그의 부하들이 항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
마계 귀족들 몇 명이 의아함을 표해왔다.
그들의 상식으로 투바의 명령은 무모했다. 통하지도 않을 마족
들에게 항복을 권고하다니. 그러다 암습이나 매복에 당했다가는
오히려 대꽤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미스트. "
"예, 마왕님, "
"네가 말하라. "
"예. 지금마왕님의 친구가 벨제르를죽이러 갔습니다. 그가 이
일만 성공하면 벨제르 휘하베 있는 마족을 포섭하는 건 어려운 일
이 아닙니다. "
미스트의 말에 다른 마계 귀족들도 상황을 파악했다. 그도 투바
의 인간 친구가 마계에 왔다는 건 들은 것이다.
"미스트.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겨우 인간 따위가 벨제
르를 죽이다니.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는구나 "
"맞다. 미스트. 어떻게 인간만믿고이 많은마족들을험지로 밀
어 넣는단 말이냐?"
마계 귀족들의 반응은 당연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인간은 언제
나 피해자이자 약자였다. 그들을 가지고 노는 것도 언제나 마족이
었고, 그들이 사는 세상을 혼란에 빠지게 만든 것도 마족이었다.
항상 당하기만 했던 인간이 마계 대공 벨제르를 죽인다는 걸 믿을
수 없었음이다.
"그만. 아직 미스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미스트 계속해라. "
투바가 다른 마족들의 입을 막았다. 이에 말을 꺼내려던 마계 귀
족들도 급히 입을 다물었다. 제아무리 황당해도 마왕의 권위에 도
전할 용기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마계는몹시 혼란한 시기입니다. 당장은 벨
제르만 위험인물이지만, 실상 우리 마계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위
해 계획하는 이들은 하나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벨제르가 죽
었을 때 그 휘하 마족들을 빨리 거둬들이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
니까? 반란을 계획하는 이들이 벨제르 휘하의 마족들을 포섭하는
건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제 2 의 벨제르가 탄생하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마왕님.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
"허락한다. "
미스트는 마계 귀족들 중에서 지위가 낮은 편이다. 때문에 그가
이곳에서 발언할 때는 높임말을 쓸 수밖에 없었다. 반면 다른 귀족
들은 마왕 투바가 아닌 미스트에게 하는 말이기에 반말을 서슴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미스트. 네가말한것도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의 밑바탕이 되는 걸 잊고 있는 것 같군. 인간이 과연 벨제르를 죽
일 수 있을까? 우린 먼저 그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만약
그가 벨제르를 죽일 수 있다면 다른 거 생각해 볼 필요 없이 남 마
계로 가는 게 맞다. 하지만 그가 죽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
가? 자칫 함정에 빠져 엄청난 곤란을 겪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런
일을 누가 책임져야 하지? 미스트. 네가 책임지겠는가?"
한 마족의 말을 끝으로 회의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계속 말하던
이그니스와 미스트도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책임? 책임이라고 했는가?"
"예?"
"그 책임 내가 지겠다. 난 내 친구 라한이 벨제르를 반드시 죽일
거라고 믿는다. "
"하, 하오나 마왕님. 그는 인간이
다시 반론을 제기하려 하자 투바가 인상을 찌푸렸다. 입 다물고
찌그러져 있으라는 의미였다.
"인간이 어쨌다는 거지? 하찮은 존재라서 벨제르를 죽일 수 없다
고? 그럼 내가 하찮은 친구를 가진 하찮은 놈이 되는군, 맞는가?"
"아, 아닙니다. "
"내 결정은 변함이 없다. 오늘 너희들을 모이라고 한 건 의논
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 결정을 통보해서 마족들을 이끌라
고 모이라고 한 것이다. 또 다시 내 결정에 반박하는 놈은 앞으로
나오라. "
투바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변을 천천히 훌었다. 그의 눈빛이
닿을 때마다 마족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마왕의 기세, 제왕의 기도.
투바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었다
"명을 내린다. 루흠, 시퍼, 이그니스. 너희가마계 귀족들을
지휘하라. "
"명을 따르겠습니다. "
"명을 따르겠습니다. "
루시퍼와 이그니스가 차례로 대답했다. 무척이나 흡족한 얼굴이
었다.
"미스트. "
"예. "
"넌 섀도우들을 데리고 선두에서 정보를 수집해라. 마물의 정보
부터 마족들의 매복 사항까지 빠짐없이 조사해라. "
"알겠습니다. "
이제 결정은 내려졌다. 그 결정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마계
귀족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마계의 율법이자 규칙이었다.
"이상. 출발하라. "
"네. "
마계 귀족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
자 투바가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휴우우. 라한, 널 믿어 네가하는일이니까. 내 친구니까."
라한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른 채 넘어와서
마계 대기로 힘들어했던 라한. 한데도 용케 그 상황을 모면해서 결
계를 완성시켰던 집념,
그리고 자신을 죽일까 말까를 망설이다가 결국 죽이지 않기로
한 상황 판단력 그런 라한이라면 벨제르를 죽일 수 있을 거라 믿
었다.
반대편 문으로 걷던 라한이 이상한 낌새를느꼈다. 아무리 걸어
도 그 문과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다.
'뭐지? 설마 미로?'
라한이 자리에 앉아 주변에 신화력을 천천히 퍼트렸다. 역시나
모한 기운이 방 안에 가득했다.
'젠장. 어쩐지 빨리 사라진다더니.
라한이 문 여는 방법을 떠올릴 때 바로 앞에 있던 마족이 사라진
일이 있다. 그때 라한은 자신이 한눈팔아서 놓쳤다고 생각했다. 한
데 이제야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미로.
마족은 이 미로를 통해서 이동했기에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진
거였다.
'여러 가지로 속 썩이는군. 망할 벨제르. 네가곱게 죽을수 있
는지 두고 보자고. '
라한이 괜한 벨제르만 욕했다. 욕할 상대가 그밖에 없어서였다.
'그나저나 나가긴 나가야 하는데. '
라한이 방 전체에 신화력을 뿌렸다. 미로가 있는 걸 알았으니 이
젠 그 미로가 시작되는 곳을 찾아야 했다. 일단 미로가 시작되는
곳만 찾으면 그곳으로 돌아가 미로의 길을 따라 가면 그만이었다.
'복잡하군. '
한참 신화력을 퍼트렸음에도 미로의 시작 부분을 찾지 못했다.
미로를 만드는 데 사용된 건 마법이 아닌 마계 술법. 라한에게 생
소한 방법이라서 쉽지 않았다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 망할미스트. 제대로좀알아봐주지.'
라한은 미로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었다. 미스트가말해주지 않
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스트가 몰랐던 건 아니었다.
섀도우의 본질은 그림자.
본질적으로 이런 미로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말해주지 않
은 거였다. 자신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라한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게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
'시간이 걸려도 어쩔 수 없지. '
라한이 다시 눈을 감고 주변에 신화력을 퍼트렸다. 이젠 미로의
입구를 찾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대신 마계 술법의 본질을 파악하
는데 신경을 집중했다.
마법의 본질을 알게 되면 무슨 마법이든 쉽게 파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마계 술법의 본질을 파악하게 되면 이런 미로도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터였다.
'마나보다 농도가 짙고 균일하군. 알 수 없는 기운이 좀 려여 있
는데 잡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세상의 본질이 마나가 아닌 건
가? 그래, 어쩌면 마계에 가득한 기운이 세상의 본질일 수도 있지.
마나는 그 중 몇 가지가 사라진 힘이고. '
세상에는 마나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라한도 그렇
게 배웠고 심지어 드래곤도 그렇게 얘기한다.
하지만 마계에 가득한 기운과 마나를 비교해보자 그렇게 단정
짓기 힘들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마계 기운이 더 근원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흠, 그럼 알 수 없는 그 기운에 대해서만 알면 나머지는 마법 체
계와 같다는 거로군. '
라한이 신화력을 더욱 집중했다. 이젠 그가 알 수 없는 특이한
기운에게만 신화력을 보냈다.
신화력을 한참 보내던 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자연이잖아. 마계에도 자연의 기운이 퍼져 있는 건 알았
지만 이건 이건 허허. 이거 참. 세상 만물의 근원이 자연이
라 재미있군, '
라한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파악한 게 기분을 좋게 만
든 탓이다.
'자연이면후후, 쉽게 되겠군. 그나저나 그때 제이슨도 자연
과 대화가 가능했는데. '
지금 판트리아계에서 자연과 대화가 가능한 이는 몇 되지 않는다.
최근에 대화할 수 있게 된 정령왕들과 라한, 제이슨이 전부였다.
그중 정령왕들은자연과 대화할수 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
다. 때문에 자연과의 융합정도나친화력에서 많이 떨어졌다. 반면
라한은 그들보다 오래되었기에 자연과의 대화가 일상 대화처럼 가
능했다.
'제이슨은 모르겠군. '
라한의 자연 친화력은 가히 최고였다. 정령왕들도 감히 따라오
지 못할 정도였다. 한데 제이슨과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그가
자연과 대화하는 걸 오래 보지 못한 탓이다.
'어디보자. '
라한이 의지를 집중해서 자연과 대화를 시도했다. 역시나 라한
이 부르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열어줘. '
라한의 의지에 반응하듯 주변에 미로가 서서히 흩어졌다. 겉보
기로는 멀정했지만 라한의 기감에는 분명히 변화가 느껴졌다.
'됐다. '
라한이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좀 전보다 더 선명해지고 밝아
진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뜨기. '
라한이 공중에 뜬 채로 서서히 날아갔다 처음 봐둔 문 쪽이었다.
문 앞에 도착한 라한이 안으로 신화력을 밀어 넣었다. 문 안을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한 명. 벨제르로군. '
안에서는 단 하나의 개체만 느껴졌다. 식사를 가져다주러 왔던
마족은 이미 나간 듯했다.
'대단하군. '
엄청나게 강한 기운이었다. 루시퍼보다는 못했지만 그에 필적할
만했다. 왜 루시퍼가 벨제르를 꺼려했는지 알 것 같았다.
'또 문이 열리길 기다려야 하나?'
"들어오게 "
'컥.'
편하게 앉아 기다리려던 라한이 순간놀라 벌떡 일어났다. 목소
리만으로도 자신의 방문을 알고 부른 것임을 짐작한 것이다
"문을 열 줄 모르나보군. "
크르르륵!
거대한 문이 열리고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깔끔하고 정갈하게
차려진 식사와 고풍스러운 그림이 라한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중
간 011 근엄하게 앉아 있는 벨제르가 라한을 보고 있었다.
"내가 온 걸 알고 있었나?"
"역시 인간이로군 의외야. "
"날 알고 있었냐고 물었는데. "
"당연한 걸 묻는군. 내 방 바로 앞에서 3 일 동안 머물렀던 놈을
놓칠 정도로 내가 바보로 보였나?"
그 말을듣고보니 벨제르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라한은마계
술법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오래 머물렀고, 또 그 기간에 별짓을
다했다. 마계 대공이라는벨제르가그정도도 알아채지 못할리 없
었다.
"내가 실수했군, "
"주제 파악 못하고 이곳까지 숨어 들어온 게 실수였지. "
"쳇, 기껏 은신술 배웠더니 써먹지도 못하겠네. "
라한과 벨제르가 딴소리를 해대며 서로를 탐색했다.
라한은 벨제르를 살펴보며 숨이 멎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강자
와 싸우는 건 맹세코 처음이었다. 객관적으로 루시퍼가 더 강해보
이기는 하지만 그와는 싸울 이유가 없었다. 한데 눈앞에 있는 벨제
르와의 싸움은 현실이었다. 피할 수 없는, 반드시 이걱야만 하는
라한의 당면 과제였다.
반면 벨제르는 라한을 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여기까
지 숨어들어온 걸 보면 힘이 없는 놈은 아닌 듯한데 아무것도 느껴
지지 않다니. 황당하고 혼란스러워서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특이한 놈이군. "
"넌 생긴 게 특이해. "
"인간 맞나?"
"너보다 잘 생겼으니 인간 맞겠지. "
서로 실없는 소리를 하며 계속 상대를 탐색했다. 계속 상대를 살
피고 파악하려 했지만 결과는 이미 나와 있었다.
'싸워봐야 알겠다. '
이 하나뿐이었다.
"죽을 준비는 됐나?"
"미안하군. 난 죽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거든. 근데 혼자 싸
울 생각인가?"
"크크크, 부하들이 없어도 너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다. -
벨제르가 부하들을 부르지 않는 건 이유가 있었다. 이곳까지 아
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들어왔던 라한. 만약 부하들이 들어을 때 문
이 열리고 소란스러워지면 도망갈까 염려한 것이다. 그게 아니더
라도 기껏 푼 은신술을 다시 사용해도 골치 아팠다. 벨제르로서는
부하를 부르지 않는 게 최선인 셈이다.
"다행이군. 그럼 내가시작하지. 공간으로! 불의 공! 바람의 칼
날! 공간으로!"
라한은 공격이 끝나면 바로 공간 이동으로 몸을 피했다. 혹시 모
를 기습이나 특이한 공격에 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벨제르는 라한의 공격을 손짓 한 번으로 무력화시켰다. 그러면
서도 라한에게서 눈을 톄지 않았다. 라한이 방심했을 때 회심의 일
라한과벨제르의 싸움은치열했다. 벌써 세 시간째. 한데도누구
하나 승기를 잡지 못했다. 이 패문에 서로가 약간씩 놀란 상태였다.
"제법이군. "
"닥쳐라. 인간 주제에
벨제르의 힘은 대단했다. 라한이 한 번만 방심해도 그대로
싸움을 끝낼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경험이
부족했다. 태어날 때부터 대공이었던 탓에 누구와 싸울 기회가 없
었다는 게 그의 약점이었다. 그래서 라한과의 싸움은 치열한 공방
전으로 이어졌다. 누구하나 승기를 잡지 못한 채
반면 라한은 붕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공격을 퍼부었다
이런 경험은 심리적인 측면에도 크게 작용했다. 수시로 깝죽대듯
놀리는 라한의 태도에 벨제르는 이미 도발당한 상태였다.
"말은 네가 더 많아. "
" 이놈이
벨제르의 기세가 거세졌다. 거대한 기의 폭풍으로 눈을 뜰 수 없
을 지경이었다. 벨제르가 기세를 일으키자 라한도 덩달아 신화력
을 끌어올렸다.
콰콰콰쾅!
두 기운이 부딪치자 엄청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큰 소리
가나는데도 밖에선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이곳에 특별한장치
가 되어 있는 건지, 아니면 벨제르가 어떤 언질을한 건지는 확실
치 않았다.
'나한테는 다행이지. '
콰콰콰쾅!
기운이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에 따라 둘의 시야도 점
점 나빠졌다. 기가 부딪치면서 엄청난 수증기를 일으킨 탓이다.
'지금, '
생각을 마친 라한이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미스트에게 특강
을 받은 은신술의 발현이었다.
라한이 은신술을 사용하자 벨제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했다. "
은신술은 시전할 패와 풀 때 약간의 공백이 존재한다. 때문에 서
로 간에 공방이 계속 될 때는 은신술을 사용할 수 없다.
한데 좀 전에 기운의 충돌이 생기면서 시야가 가려졌고 이때 벨
제르가 기세를 약간 누그러뜨렸다. 뒤늦게 도발당했다는 걸 알고
의도적으로 기운을 줄인 것이다.
그게 함정이었다. 라한은 그런 태도까지 모두 계산하고 망설임
없이 은신술을 시전했다.
"나와라, 이놈! 비겁하게 뭐하는짓이냐?"
벨제르의 말에 은신술을 풀 라한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제 그에
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뿐일 터. 도발당해서 기회를 날릴 만큼
라한이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래, 떠들어라. 어차피 넌 내손에죽는다. '
라한이 신화력을쓴상태로 조용히 움직였다. 목표는 벨제르의
뒷목이었다
뒷목은 생명체의 사각지대라고 할 수 있다. 고개를 돌려도 확인
하기 힘들고 설사 확인하더라도 손대기가 힘든 부위였다.
쾌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라한은 벨제르의 됫목으로 가지 못
했다. 너무 심할 정도로 발광을 해서 도무지 이동할 틈이 없었다.
'젠장 '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보이지 않으니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벨제르. 운 나쁘게 한 번 걸
리면 그걸로 라한의 은신술은풀리게 된다. 아니, 정말운 없으면
그 한 방으로 죽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은데. '
지금 라한은 벨제르의 왼쪽 뒷부분에 와 있었다. 아주 조금씩,
공격을 피해가며 온 곳이 겨우 여기였다.
'그냥 공격해?'
이곳에서 공격한다 해도죽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뒷목보다 확률이 낮기에 자꾸만 주저되었을 뿐이다.
"이놈! 모습을 드러내라. "
벨제르의 마구잡이식 공격이 더 심해졌다. 지치지도 않는 모습
에 라한이 혀를 내둘렀다.
'망할. 그래 해보자'
"이레이저(Eraser) ! "
이레이저는 라한이 만든조합공격이다. 불속성과물속성, 바
람 속성 그리고 땅 속성이 모두 려인 라한만의 공격법. 신화력으로
라한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공격법이었다. 단점은 손바닥이 닿아
야만 공격 효과가 있다는 거였다. 때문에 가까이 접근해야만 사용
할 수 있었다.
라한이 이레이저를 손바닥에 시전하고 벨제르의 목을 향해 뻗었
다. 그가 할수 있는 마지막 한 수였다.
"이놈! 크허! "
놀란 벨제르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입을 짹 벌린 채
라한의 목으로 다가왔다. 이빨로 물려는 의도였다.
'헛!'
벨제르의 이런 공격에는 라한도 경악했다. 벨제르의 튀어나온
날카로운 송곳니가 무는 용도로도 사용된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겨우 이빨 따위로
라한은 공격을 감행하기로 마음먹 었다.
어차피 지금 몸을 피하는 건 손해가 더 컸다. 지금까지 은신술로
보낸 시간이 얼마던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다 정면 승부로는 이길 자신도 없었다. 어차피 지금 피했다가
는 패색이 짙은 상황으로 치달을 게 뻔했다. 물론 벨제르의 이빨을
우습게 보는 마음도 이런 결정에 한몫했다.
"하앗! "
콰콰쾅!
'닿았다. '
손바닥에 전해지는 느낌이 이레이저가 벨제르의 목에 적중했음
을 말해줬다. 그런데 손 위치가 정면이 아닌 자신의 목 쪽이었다.
벨제르의 이빨도 라한의 목에 닿은 듯했다.
"커억!"
"쿠오오 3.!"
라한이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목에서 흐르는 피가
순식간에 바닥을 적셨다.
쿠쿵!
이레이저에 맞은 벨제르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목은 마치 폭
탄이라도 맞은 듯 완전히 짓이걱진 상태였다
"크르륵!"
"망할. "
라한의 의식이 서서히 흐려졌다.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피를 흘
쓰러지면서도 벨제르의 죽음은
려서 버틸 재간애 없었다. 하지만
목격했다.
'겨우 이빨 따위가
며칠 후 루시퍼가 휘하 마족들을 데리고 벨제르가 있는 성 앞에
도착했다. 여전히 삼엄한 경비와 음습한 분일기가 그들을 맞았다.
루시퍼님 오긴 왔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합니까?"
"으음. "
한 마계 귀족의 말에 루시퍼가 신음을 흘렸다. 대답할 말이 없었
음이다.
상황으로 보면 벨제르가 죽지 않은 듯 보였다. 달라진 게 없었으
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루시퍼님. 지금이라도서둘러 회군해야합니다 이대로 있다가
기습이라도 당하면
"그만하라, "
"하지만
다시 한번 마계 귀족이 입을 열려 하자 루시퍼가 매섭게 노려봤
다. 까불면 재미없다는 의미였다.
비록 마왕 자리는 물려줬지만 그래도 루시퍼는 루시퍼. 그의 눈
빛에 근처에 있던 마계 귀족들이 몸을 떨었다.
미스트. 가서 살펴보고와라. 이그니스. 넌 벨제르에게항복서
신을 보내라. "
"알겠습니다. "
"예."
미스트가 사라지자 이그니스도 남 마계 성으로 천천히 걸어갔
다. 어느 정도 가까이 가자 성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그니스를 발견한 듯했다.
난 마계 최상급 귀족 이그니스다. 벨제르를 만나고 싶다. "
이그니스가 성 위를 바라보며 크게 외쳤다. 일말의 두려움도 찾
아볼 수 없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이그니스의 외침에 성 위에 있던 마족들 몇 명이 모습을 감추었
다. 성 안으로 들어가 벨제르에게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기다리 겠다. "
이그니스가 당당하게 말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 당당한
태도에 성 위에 있던 마족들도 입을 떡 벌렸다.
잠시 후 미스트가 앉아 있던 이그니스의 뒤에 나타났다.
"이그니스님. "
"무슨 일이지?"
"상황이 좀 이상합니다. "
"이상하다? 어떤 게 이상하다는 말인가?"
원래 보고는 루시퍼에게 먼저 해야 정상이다. 지금 마족들을 인
솔하는 책임자가 루시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스트는 이그니스를 먼저 찾아왔다. 사안이 너무 특이
해서 먼저 물어보고 보고할 생각이었다.
"내성이 잠겨 있습니다. 보통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두드리면
열렸는데 이번에는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습니다. "
"흐음. "
"어쩔까요? 이대로 보고할까요?"
"내성이라 내성이면 벨제르 그놈이 사는 곳일 텐데 잠겨 있다
고? 이해가 안 설마?"
"무슨 일이라고 생긴 겁니까?"
"벨제르가 죽었다. 루시퍼님께 이 사실을 전하고 전 마족을 전
방에 대기시켜달라고 말해라. "
바하라의 내성에는 마왕을 비롯한 많은 식솔들이 생활한다. 하
지만 남 마계의 내성에는 벨제르만 산다. 그의 성정이 의심이 많아
서 가까운 곳에 다른 마족을 두지 않는 것이다. 또 그런 성격 때문
에 내성 출입 자체도 벨제르의 허락이 있어야만가능하다. 일정한
규칙대로 두드리면 벨제르가 문을 열어주는 형식이었다.
그런 벨제르혼자만사는내성이 잠겨 있다. 그것도 일정한규칙
"에 따라 두드리면 열어주던 문마저 아무 소식이 없다. 그건 내성
내부에 어떤 일이 생겼음을 말해주는 거였다.
"그게 정말입니까?"
"가서 그대로 전해라. "
이그니스의 재촉에 미스트가 서둘러 모습을 감추었다. 이그니스
의 명령에 따라 루시퍼에게 보고하기 위함이다
'제발. '
계획대로라면 라한이 성에 들어간 지 최소 5 일은 지났을 것이다
그리고 5 일 내내 싸울 리 없으니 이미 승부는 났을 터였다. 이미 승
부가 났는데 아직 내성문이 열리지 않고 있다는 말. 그건 벨제르의
신상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의미한다.
'라한이 무사해야 할 텐데. '
라한의 꼼꼼한 성격을 감안하면 문을 여는 방법 정도는 알아냈
을 터였다. 때문에 라한이 이겼다 해도 내성문은 열려야 정상이었
다. 한데 문은아직도굳건히 잠겨 있다. 그건 라한의 신상에도문
제가 생겼다는 뜻이 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루시퍼가 마족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엄청
난 마족들의 등장에 성 위에 있던 마족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이그니스. 그 말이 사실이냐?"
"예. 제 판단이 맞는다면 확실합니다. "
"음, 믿어보지. 이그니스. 알아서 해라."
"알겠습니다 "
공손하게 대답한 이그니스가 성문 앞에 섰다. 다리를 적당히 벌
리고 손을 편안하게 내린 모양새였다.
이그니스가 위를 쳐다보며 크게 외쳤다.
"벨제르는 이미 죽었다. 항복하면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 "
"뭐, 뭐?"
"무슨 소리야?"
이그니스의 말이 끝나자 성 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나름대로 대
화를 나누며 말의 진위를 판단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좀 전에 벨제르에게 보고하
러 간 마족의 돌아왔다. 얼굴 가득 침통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어떻게 됐지?"
"아무리 불러도 벨제르님이 대답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아무
래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만큼 받은 충격이 큰 탓이었다.
"설마, 설마?"
"똑똑하게 말해라. 정말 내성에서 아무 대답이 없었느냐?"
"예. 정말 없었습니다. "
"흐음. 나가지. "
우두머리인 듯한 마족이 다른 마족들에게 말했다. 그 말에 다른
마족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딜 간다는 말씀입니까?"
"우린 벨제르님 하나 보고 여기까지 왔다.
우리가 마계에 어떤
뜻을 세우기 위해 온 게 아니란 말이다. 한데 벨제르님이 돌아가셨
다. 우리가 여기 더 머물 이유가 있는가?"
어차피 여기 모인 마족들은 마계를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럴 만
한 위인도 되지 못했고 그런 포부도 가진 적이 없는 마족들이었다.
다만, 자신이 따르는벨제르가반란을 일으컥서 따라일으켰고, 벨
제르가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따라 왔을 뿐이다.
"그건 그렇지만
"두말 할 필요 없다. 마계 율법상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면 큰 처
벌은받지 않을거다. 기껏해야한단계강등정도겠지. 나가자.-
말을 마친 마족이 먼저 성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다른 마족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어쩌지?"
"다시 한번 경고한다. 지금 나와서 항복하면 너희들의 안전은
보장해 주겠다. 만약 이번에도 나오지 않는 마족이 있다면.크크
크,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거둬야지. 크크크. "
심각한 표정의 마족들에게 이그니스의 말이 결정타가 되어 날아
왔다. 이에 다른 마족들이 우수수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항복하겠습니다. "
"저도 항복하겠습니 다. "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성 문 위에서 벌어진 사
태는 마치 전염병처럼 성 전체에 퍼졌다.
"항복하겠습니다. "
"저도 항복하겠습니다. "
결국 벨제르 휘하의 마족들은 극소수 몇 명을 제외하고 모두 항
복했다. 남은 마족들도 싸우기보다는 자결을 택했다
무혈입성.
싸우지 않고 벨제르가 머물던 성이 루시퍼의 손에 들어왔다.
"미스트. 내성 문을깨라. 최대한빨리 깨라."
"예?"
"어서! 라한이 위험할지도 몰라 "
"네. "
미스트가 마족 몇 명을 데리고 내성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굳게
잠걱있는 문이 미스트를 착잡하게 만들었다.
"깨라. "
"예. "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깨라. 무조건 박살내! "
"네. "
미스트의 말에 마족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들었다. 술법이 주 공
격법인 마족은 마계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금방 깨질 것 같던 내성 문은 의외로 굳건했다. 흠집은 많이 냈지
만 아직도 내성 문은 건재했다. 미스트의 얼굴도 점점 초조해졌다.
"이그니스. 멀었어"
"죄송합니다. "
"빌어먹을. 다크 인페르노! "
뒤늦게 나타난 이그니스가 마계 술법을 시전했다. 다크 인페르
노. 단일 개체를 상대로 하는 이그니스 최고의 술법이었다.
콰라쾅!
엄청난 폭음과 먼지가 문을 감쌌다. 소리만으로는 문을 수십 개
는 날려 버릴 듯했다. 한데 먼지가 걷힌 상황은 실망스러웠다. 흠
집만 조금 크게 냈을 뿐, 도무지 뚫릴 기미가 안 보였다.
"젠장. 벨제르. 그놈이 가진마력을다퍼부어서 만들었군."
"이그니스. 물러나라. "
"어? 루시퍼님. "
루시퍼가 제일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서둘러 일을 수습했지만
이제야 시간 여유가 생긴 듯했다.
그는 항복한 마족들을 거둬들이느라 바빴다. 항복한 마족들 중에
마계 귀족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마계 귀족이 같은 마계 귀족을
포로로 취급하는 건 자칫 또 다른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다. 때
문에 최상위 마계 귀족인 루시퍼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해보지. "
" 네. "
루시퍼가 내성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걸음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상상을 초월했다.
"물러나라. "
파악!
콰직!
루시퍼가 내성 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모습만으로는 그리 큰
힘을 준 것 같지 않았다.
한데 결과는 정 반대였다. 문은 주먹을 중심으로 세로로 완전히
조개져 있었다.
"이그니스. 미스트. 이 문은 왜 그렇게 서둘러서 열려고한 건가?"
"설명은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미스트, 가자 "
이그니스가 미스트의 손을 잡고 부서진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
다 그들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였다.
이그니스와 미스트의 다급해하는 모습에 루시퍼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러다 뒤늦게 라한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그니스와 미스트가 빠른속도로 계단을올랐다. 태어나서 이
렇게 빨리 달린 적이 있나싶을 정도였다. 그 뒤를루시퍼 역시 빠
른 속도로 따라 올라갔다.
"라한! "
"라한! "
또 다른 문이 그들 앞을 막아섰다. 도대체 문이 몇 개나 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비켜라. "
쾅- !
루시퍼가 주먹 한방으로 문짝을 날렸다. 새삼 전대 마왕의 힘을
확인하는 순간이 었다.
문을 한 번 더 만났지만 이번에도 루시퍼의 주먹 한방으로 통과
했다.
"벨제르. "
"으음 L "
루시퍼와 일행들이 벨제르의 방에 들어왔다. 그들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건 거대한 덩치의 벨제르였다. 이미 죽었는지 미동도 하
지 않았다.
"라한! "
"헛!"
고개를 천천히 돌리다가 라한을 발견했다. 그는 이미 말라붙은
피 바닥에 누워 있었다. 피부가 이미 퍼렇게 죽어 있어서 시체나
다름 없는 상태였다.
"아직 살아있군. 미스트. 나가서 이블리트를불러라."
"예. "
루시퍼가 라한을 살폈다. 다행히 목숨은 붙어 있었다. 바닥에 말
라붙을 정도로 피를 흘렸다면 이미 오래전에 죽어야 정상이다. 한
데도 살아 있는 라한을 보며 루시퍼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루시퍼님. 정말 괜찮겠습니까?"
"글쎄다. 잘 모르겠군. 아직 살아 있기는 한데 상태가 좋지는 않
아. 피가거의 없어. 이그니스. 이놈목에 있는이빨좀빼라,"
라한의 목에 이빨이 있다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 이빨이 라한의
목 깊숙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헉, 물렸군요. "
"대단한 놈이군. 벨제르의 이빨에 물리고도 살아 있다니. "
벨제르의 이빨은 어느 정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벨제
르가 자신의 이빨을 뱉으면 그 스스로의 의지로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다. 하지만 벨제르가죽으면 이빨도 서서히 힘을 잃게 된다.
벨제르의 생명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한시적인 의지인 셈이다.
써억!
이그니스가 조심스럽게 벨제르의 이빨을 뽑았다. 그러자 이미
다 흘린 줄 알았던 피가 또 다시 흘러나왔다.
"뽑았습니다. "
"이블리트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 "
루시퍼가 자리에서 일어나 벨제르의 시체를 살폈다. 먼저 눈을
뒤집어 보고 이빨이 빠진 입 안도 살폈다. 그리고 완전히 짓이걱진
목과 가슴, 하체도 살피며 상처를 찾기 시작했다.
"딱 한 방에 보냈군. "
" 예?"
"라한의 공격 한 방으로 벨제르가 죽었어. "
"그거야 은신술로 기습했으니까
이그니스의 대답에 루시퍼가 혀를 끌끌 찼다. 이그니스의 생각
이 오판이라는 걸 질책하는 행동이었다.
"쯧쯧. 이그니스. 기습에 성공했는데 라한이 저 꼴이 될 수있다
고 생각해? 그리고 이 방 상태를 봐라. 이게 기습에 성공해서 죽인
모습인가?"
"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
방 상태가 엉망이었다. 이건 라한과 벨제르가 엄청난 난전을 치
렀다는 증거 였다.
"헉, 헉. 마 루시퍼님을 뵙습니다. "
이블리트가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미스트의 말에 서둘러 달
려온 듯했다.
"뭐하는가? 라한을 치료해라. "
"네. "
이블리트가 라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대충의 응급조치를 취한
후 업고 내려갔다.
"우리도 가지. "
"네. "
루시퍼와 이그니스가 나란히 걸어 내려갔다. 들어을 때의 다급
했던 표정과는 달리 평온한 얼굴이었다.
'라한. 죽으면 가만 안 둬.
'투바가 난리 치겠군. '
실상 루시퍼와 이그니스 둘 다 라한의 부상으로 조바심 난 상태
였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다. 체면 때문에
속내를 다 드러내지 못한 것이다.
물질계로의 귀환
마계는 밤낮의 변화를 구분하는 게 쉽지않다 낮에도 약간은
흐릿한 밝음을 밤에도 조금의 희미한 빛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희미한 낫과 밤이 수십 차례 변햇다 라한이 의식을 잃은
채로 보낸 시간이 그만큼이었다
야 라한
투바 왔네
멀리서 투바가 몇명의 다크나이트를 데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다크나이트 중에서도 최상급의 실력자인 듯 상당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몸은 찮아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
뭐 그럭저럭 근데 웬만하면 몸 애기는 꺼내지마
라하능ㄴ 벨제르와의 일전때 그의 이빨을 무시했다 겨우
물리는 정도로 큰일이라도 벌어질까하는 안일한 생각을 한 거였다.
한데 결과는 심각했다. 루시퍼와 이그니스가 조금만 늦었어도
라한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크크크, 얘기 들었다. 물려서 기절했다면서?"
"그 얘기 꺼내지 말라니까. "
라한도 물려죽을 뻔했다는 걸 몹시 부끄러워했다. 이 때문에 누
군가가 벨제르와의 싸움 얘기를 꺼내는 걸 싫어했다
"히히, 부끄러운 건 아는 모양이야. "
"조용 안 해?"
라한이 투바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부끄러운 마음을 이런 식
으로 상쇄시키려는 의도였다.
"인간이 건방지구나. "
라한의 외침에 투바가 아닌 그 옆에 있던 다크나이트들이 인상
을 찌푸렸다. 마왕인 투바에게 일개 인간이 화를 내는 게 기분상
한 얼굴이었다.
야! 누가 대화에 끼어들라고 허락했어? 따라오려면 그 입부터
다물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마왕이시여. 하오나 감히 일개 인간이 전마계의
통솔자이신 투바님에 소리를 지르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에
게 마계의 힘을 보여주어 다시는 이런 무엄한 짓을 할 수 없게 만드
셔야 합니다 "
다크나이트 중 한 명이 투바에게 조언을 해왔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 듯 투바는 그저 고개만 가로저었다
"투바. 저놈 뭐냐?"
"마왕 수호대라던가? 아무튼 웃기는 놈들이야. "
"저놈들이 왜 따라온 건데?"
"나한테서 10 미터 이상 떨어질 수 없다면서 따라오는데, 아고
미치겠다. "
마왕 수호대.
이름처럼 마왕만 지키는무력 집단이다. 이들은마왕이 있는곳
이면 어디든 따라다닌다. 잠을잘 때, 집무를 볼 때, 혹은 휴식을
위해 조용히 머리를 식힐 때에도 이들은 멀지 않은곳에서 마왕을
지킨다.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 동안 마계가 존재해 오며 그만큼 많은
마왕이 마계를 물려받았다. 그 시간 동안 마왕이 죽임을 당한 적은
단 한 차례. 오래전 판테아에 의해 전전대 마왕이 소멸되었을 때
뿐이다. 이 사건은 마계 자체가 판테아의 힘에 눌린 것이니 마왕
수호대가무력해서라고보기 힘들다. 결국, 마왕수호대 스스로의
실수로 마왕을 지키지 못한 건 단 한 차례도 없는 셈이다.
"아참, 너 마왕이었지. 이거 높으신 분을 대하는 일이니 허리를
숙여야 하나"
"당연하지. 라한, 이놈. 당장허리를숙이거라."
"뭐? 너 죽을래?"
"아, 농담. 농담. "
농을 던졌던 투바가 됫걸음질 치며 라한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누
가 보더라도 친한 친구들끼리 할 수 있는 흔한 농담과 장난이었다.
그런데 마왕 수호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멈춰라! "
스팟!
"허억!"
스걱!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라한이 빠르게 옆으로 물러났다. 다행
히 옷자락만 살짝 베이고 부상은 당하지 않았다.
"야, 너 뭐야?"
"마왕을 협박한 죄는 죽어 마땅하다. 하앗!"
"멈춰! 너희들 진짜 죽을래?"
마왕 수호대가 다시 공격하려 하자 투바가 그들을 제지했다. 그도
마왕수호대가 갑자기 공격할 걸 몰랐는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마왕님. 저 인간은 마왕님을 농락했습니다. "
"시끄러. "
투바의 일침에 마왕 수호대들이 한 걸음 물러났다. 씩씩거리는
투바에게 다시 뭐라 말하기 힘들었음이다.
"투바. 어떻게 된 거야?"
"미안. 저놈들한테 따라오지 말라고했는데, 내 곁에서 일정 거
리 이상 떨어질 수 없다고 우기는 바람에 이렇게 췄다. 네가 이해
해라. 저놈들도다날위해서 저러는거니까. 알았지?"
"후후, 괜찮아. 저놈들 보니까 그래도 안심이 된다. "
화를 낼 상황임에도 라한은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좀 전에는 잠
깐 놀랐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지금 마왕 수호대의 태도가 모두
투바를 위한 마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화를 내기보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라한. 너 그 말
"이제 가봐야지. "
"물질계로?"
"응. 마왕이 된 지 얼마되지 않아서 솔직히 걱정했었어, 인간들
은 왕권 교체 후에 반란이나 농민 봉기가 제일 많이 일어나거든. "
라한의 말에 투바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했다. 라한이 마계를 떠
나려는 걸 짐작한 것이다
" 라한. "
"야, 너 그표정. 대체 뭐냐?날사랑하기라도하는거야?왜 눈
물을 글썽거리고 난리야?"
"누가? 누가 울었다고 그래?"
"아님 됐어. 이제 가봐야겠다. 사실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며칠
됐는데 넌 보고가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어. "
라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도 아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럼 우리 다시 못 보는 거야?"
"어?"
"나 이제 물질계로 소환될 수 없을 거야. 내가 마왕이 되는 바람
에 완전 주문이 아니면 소환될 수 없거든. 근데 완전 주문을 아는
유일한사람인 넌 이미 날소환한 적이 있잖아, 완전 주문은같은
사람에게 두 번 사용될 수 없어. "
"내가 오면 되지 오벨리아 팰리스에 만든 결계는 내가 만든 거
라는 걸 잊은 거야? 오고 싶으면 언제든 올 수 있어. 물론 나가는
것도 어렵지 않고. "
투바의 얼굴이 밝아졌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모습
이었다.
실제 오벨리아 팰리스를 이용한 차원 이동은 쉬운 일이 아니었
다. 마계의 마족이 통과하려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하고, 물질
계에서는 그 결계를 제대로 레뚫어볼 수 있는 이가 아예 없었다.
하지만 결계를 만든 라한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가 만들었기에 그 결계를 통과하는 방법도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까
닭이다.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너 하는 거 봐서. "
"뭐?"
"정리되면 들를게. 루시퍼님, 이그니스, 미스트에게는 네가 대
신 전해줘. "
라한은 루시퍼를 비롯한 다른 마족은 보지 않고 갈 생각이었다
긴 이별은 그만큼 큰 그리움을 가져오는 일. 그냥 조용히 사라져서
그들 에게 심려를 끼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도 이그니스 삼촌은 보고 가라, "
"아니, 그냥가는게 나을 것 같아. 다큰 어른이 눈물글썽거리
는 건 보고 싶지 않아. "
" 라한. "
투바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슬픔을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강해졌다는 거 너도 알지? 로테마이어스에
게 당하는 일은 없을 거야. 카이렌에게 다시 당하지도 않을 거고. "
"에휴.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아참, 나가면 로이나
부터 구해줘 우리 때문에 로테마이어스하고 맹약을 맺었어. "
"걱정 마. "
라한이 로이나에 대해 들은 건 카이렌과 함께 있을 때였다. 그때
부터 로이나를 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야, 너. 라한하고 같이 다녀. 라한이 다치면 네가 죽는 거야.
알았어?"
투바가 옆에 있던 마왕수호대 중 한 명을불렀다. 라한에게 가
장 적극적으로 대들던 그 다크나이트였다.
"하오나, 마왕님. 전마왕수호대 부대장입니다. 제가어찌 마왕
님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시끄러,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
"그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마왕님의 명령이라도 ., "
"명령 불복종이라 허허, 내가 우습게 보인다 이거지? 이봐.
저놈이 지금 내 명령에 토를 달았고, 이젠 내 명령을 아예 무시하
려고 하는군. 죄명이 뭐지?"
투바가 옆에 있던 다른 마왕 수호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말에
마왕 수호대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원칙상 마왕의 명령에 토를 다는 그 자체가 즉결처분감이다. 한
데 마왕 수호대의 부대장은 토를 다는 정도를 넘어서서 명령까지
거두어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당연히 반역죄와 대역죄, 항명죄
라고 봐야 옳았다.
"그, 그건
"똑바로 말해라. 저놈 죄명이 뭐지?"
"반, 반역죄와대역죄. 그리고항명죄입니다 "
"너! 이 자리에서 처분해 줄까?"
투바가 다시 마왕 수호대 부대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망설
임을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얼굴에 마왕 수호대 부대장의 표정도
덩달아 굳었다.
"다시 말하지. 이 자리에서 처분해 줄까?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내 명령을 듣든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내게 죽든지. 선택해라. "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
"네 입으로 한 말이니 번복하지는 않겠지. 라한, 저놈 데리고 가 "
투바가 라한을 보며 몰래 한쪽 눈을 깜빡였다. 나름대로의 연기
에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하여간 저놈 장난치는 건 엄청 좋아한다니까. 마계가 어찌되
려나. '
"투바. "
"그냥 데리고 가. 저놈이 약하긴 해도 방해는 안 될 거야. "
"에휴, 그래. 알았다. "
라한의 승낙에 마왕수호대 부대장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어
쩔 수 없이 하찮게 생각하는 인간의 부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라한. 그럼 몸조심해, 일끝나면꼭들르고. 알았지?"
"그래, "
"이 녀석 꼭 돌려줘야 돼 알았지?"
"그래, 알았어. "
투바가 마왕 수호대 중 한 명을 라한에게 붙인 건 나름대로 복안
이 있어서였다. 왠지 이대로가면 다시 오지 않을것 같은라한. 그
가 마계로 다시 돌아오게 만들 구실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래, 투바. 고마워. '
라한이 터벅거리며 바하라 성 입구로 향했다. 그 뒤를 마왕 수호
대 부대장이 느릿한 걸음으로 딜따랐다
라한은 꼬박 10 일을 걸어서야 부르마 섬에 도착했다. 마계에서
는 금지로 지정된 부르마 섬. 하지만 마왕 투바의 명령이 있었는지
라한과 마왕 수호대 부대장은 아무런 제지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여기군. "
"여기는 인간들의 발길이 단 한 번도 닿지 않은 금지 중의 금
지다. "
"그건 아닌 것 같군 난 여기 온 적이 있거든. -
부르마 섬 중간의 성역. 이곳은 오래전 라한이 투바를 처음 만난
곳이었다. 그때를 생각하자 새삼 세월의 흐름이 무상하게 느껴졌다.
'그때는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는데 이젠 아무렇지도 않구나.
"이봐, 인간. 여긴 어떻게 통과할 거지?"
"이리와 봐, "
라한이 손가락을까딱거리며 수호대 부대장을불렀다. 몹시 거
만해 보이는 행동이었다.
"널 따르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버릇없이 군다면 나도 용서하지
않겠다. "
"너 이름이 뭐지?"
"캐리비언. 그게 내 이름이다. "
"그래, 캐리비언. 이제 좀와봐,"
"흥. "
마왕 수호대의 부대장 캐리비언이 코웃음을 치며 다가갔다. 이
름을 가르쳐주기는 했지만 인간에게 불린다는 게 기분 나쁜 얼굴이
었다.
"어? 투바? 네가 여기 웬일로
"헛, 마왕님?"
라한의 말에 캐리비언의 고개가 뒤로 홱 돌아갔다. 마왕 투바에
게 예를표하기 위해 무릎도 반쯤 굽힌 상태였다. 하지만 뒤를살
핀 캐리비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라한이 그에게 거
짓말을 한 것이다.
"이, 날 속였
퍼억!
틸썩!
캐리비언의 고개가 다시 돌아오려 하자 라한이 주먹을 강하게
휘둘렀다. 그 주먹에 맞은 캐리비언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단
한방에 의식을 잃은 캐리비언이었다.
"쓸 만하군. "
라한이 휘두른 주먹에는 신화력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는 무
형의 기술에만 쓰던 신화력을 물리력에도 적용시컥 본 것이다.
"투바, 미안하다. 다시 마계로오는건 힘들겠어."
라한은 쓰러진 캐리비언의 얼굴을 한참 쳐다봤다. 투바에게 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를 캐리비언의 얼굴을 보며 대신하는 중이었다.
"칙칙한 곳인데도 왠지 그리울 것 같군. "
라한이 결계 중심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투바는 막에 막혀서 가지
못했던 곳을 라한은 신화력을 살짝 일으킴으로써 쉽게 통과했다.
"에휴, 투바. 인연이 닿으면 다시 보겠지. "
라한이 결계에 손을 올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상태로 이곳
에 설치했던 결계의 결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계의 결이 느껴지자
라한의 몸도 서서히 희미해졌다. 오벨리아 팰리스가 있는 물질계
로 이동되는 모습이었다.
라한이 오벨리아 팰리스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몇 년 동안 머
물렀던 곳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그대로네. 하나도 안 변했어. "
라한이 주변을둘러보며 회상에 잠겼다. 테세펀와 티격태격하던
기억, 책을 통해 마법을 처음 익혔던 기억 그리고 마음의 스승인 칼
라피안의 죽음까지 과거를 회상하자 눈빛이 아련하게 변했다.
"그래, 지금의 나를있게 해준곳이지, 아, 맞다. 테세르!"
-어?주인, 살아있잖아. 에이씨.
라한 앞에 소환된 테세르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라한이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야! 너 그거 무슨뜻이야? '살아 있잖아. 에이씨?' 내가죽기
를 은근히 원했다는 말이지?"
-무, 무슨 소리야? 주인. 설마 내가 그럴 정령으로 보여?
"응. "
-쳇.
오랜만에 만나서일까? 이런 농담까지도 유쾌하게 느껴졌다. 테
세르도 오랜만에 만난 라한이 반가운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여긴 그대로다. 그치?"
- 어라? 그러고 보니 오벨리아 팰리스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그리고 드래곤하고 싸운 건 나도 아는데 카이렌한테 죽었다는 소문
도 돌더라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떻게 알았어?"
-정령계에 있으면서 다들었어, 정령왕들도 주인 죽었다고 난
리였어. 바람의 정령왕께서는 카이렌 죽이러 가자고 길길이 날뛰
었다니까.
정령왕이 걱정하고 있었다는 말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했다
처음 만났을 때만해도 서로 잡아먹지 못 해 안달이었던 사이였다.
그때를 생각하자 새삼 시간의 흐름이 몸으로 느껴졌다.
"이거 참. 고맙다고 해야 하나?"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말해봐. 카이렌한테 죽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테세르의 질문에 라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설
명해야 할지 감을 잡기 힘들었다. 테세르와 헤어져 있는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탓이다.
"글쎄다. 드래곤하고 싸운 건 너도 알 테고. 그 후로 카이렌을
찾아갔어. 그냥 오랜만에 회포나 풀어볼까 했는데, 망할.
-왜?
"거기 루이에가 있더군. 칼라피안 아저씨가 루이에 그놈 때문에
불구가 됐다는 건 너도 알지?"
-그건 알지. 그래서 마나가서서히 흩어져서 죽었잖아, 그래서
어떻게 됐어?
테세르도 칼라피안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
큼 많은 정이 들었기에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싸웠다. "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데. 주인 실력이면 루이에한테 아,
카이 렌하고도 싸웠군.
"정확하게는 뒤에서 기습당했지. 그래서 죽을 뻔했다. "
테세르의 눈이 가로로 쭉 찢어졌다. 카이렌에 대한 분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다행히 투바가 날 마계로 옮겼지. 거기서 운 좋게 살아났고. "
-그럼 6 개월 이상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거야?
라한은 6 개월 전에 카이렌에게 공격당해서 의식을 잃었다. 너무
긴 시간이었기에 테세르의 걱정도 클 수밖에 없었다.
"마계에서 이런 저런 일이 좀 있었어, 어쨌든나왔잖아. 그럼 된
거지. "
-카이렌은 어쩔 거야? 죽이자. 죽여야지. 당하고 어떻게 살아?
"모르겠다. 카이렌. 에휴, 모르겠어."
-주인. 설마 배신한놈을용서할생각은 아니겠지? 예전 에펠
패거리를 생각해봐. 그때 그놈들이 배신했을 때 어떻게 했어? 이
번에도 카이렌을 철저하게 무너뜨려야지.
라한도 카이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아니, 죽음보
다 더한 고통을 카이렌에게 선사해서 두고두고 후회하도록 만들고
싶을 정도였다.
한데 마음을 모질게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때 친구였다는
게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또 지금 카이렌의 어긋남이 자신 때
문인 듯도 했다. 은거 중인 카이렌이 대륙을 떠돌기 시작한 것도
목적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걸 배운 것도 모두 라한이
었으니 말이다.
"그 얘긴 그만하자. "
-주인.
"됐어. 그만하고 나가자. 슈라도 봐야지. "
에고, 그래. 주인도 생각이 있겠지,
라한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테세르도 입을 쭉 내민 채로 라한을
따랐다.
라한이 가루로 변해 버린 엘프의 뺏가루와 아직도 건재한 드래
곤 본을 지나서 오벨리아 팰리스 입구에 섰다.
"문 열까"
-주인. 엄청나게 추운 거 아냐? 전에는 날짜 맞춰서 열어야 했
잖아.
"예전보다는 추위가 덜할 거야. "
-그래?
"응 네가화염의 구슬하나를못쓰게 만들었잖아. 밖에서 온기
를 빨아들이던 힘이 약해졌으니 추위도 약해졌겠지. "
그런가?
테세르의 실수로 화염의 구슬 하나가 경로를 이탈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마계와 물질계 사이의 결계가 깨졌고, 결국 라한이 마계
까지 가서 다시 결계를 설치했었다.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좀 화가 나지만, 그 일로 투바를 만나게
됐으니 용서해 주지. "
-아하하하. 미래를 내다본 내 예지력이 만들어낸 산물이지
"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그 입 찢어 버린다. "
헙!
척-!
라한이 오벨리아 팰리스 입구에 손을 올렸다
'제발. '
아직도 예전 그대로의 혹한이라면 라한의 몸에도 심한 충격을
줄 게 분명했다. 물론 예전 라한이 아니기에 죽지는 않을 터였다.
신화력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신화력
이라도 극도의 한기를 완전히 막아낼지는 미지수였다.
쿠구구궁
쏴아아!
"흐음. "
-으악. 주, 주인. 춥다.
"역시 예상보다 한기가 덜해. 이건 그냥 추운 지방 기후하고 비
슷한 정도잖아. "
-그, 그래도 춥다.
테세르가 라한의 로브 속으로 들어갔다. 라한의 온기를 이용해
서 추위를 조금이라도 막아보려는 속셈이었다.
"넌 정령이 추위를 타고 그러냐?"
-정령도 추위를 탄다고. 불의 정령은 이런 곳에서 살아 있지도
못할 거야.
"넌 마나의 정령이잖아. "
-그러니까 난 추위도 타고 더위도 타지,
불의 정령은 열사의 사막에서도 더위를 느끼지 않는다. 몸 자체
가 열기인 불의 정령. 자신의 몸보다 덜 뜨거운곳에서 더위를느
낄 리 만무했다. 반면 추운 지방에서는 그 어떤 정령보다 추위를
많이 탈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얼음의 정령은 추운 지방에서도 추위를 느끼지 않는
다. 대신 더운 곳에서 심한 더위를 타게 된다.
한데 테세르는추위와더위를모두다느낀다. 불, 물, 바람, 땅
등등. 모든 속성을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자. "
-으으으. 추워.
밖으로 나온 라한이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제일 먼저 눈이 간
곳은칼라피안을묻은장소였다. 이미 눈이 덮여서 흔적도 보이지
않았지만 라한은 정확한 위치를 용케 찾아냈다.
"저기 계시겠지 "
-그쯤 될 거야.
"아저씨. "
괜스레 눈물이 흘렀다. 복수를 못해서 느끼는 억울함 때문이 아
니었다. 오랫동안못본사람을보고 싶은마음. 그리움이 사무쳐
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에고.
"젠장. 청승맞게 눈물이나흘리다니. 슈라. 어디 있어?나와!"
쿠르르릉!
라한이 큰 목소리로 슈라를 불렀다. 목소리를 크게 낸 건 상념을
지우려는 의도였다.
으음 오렌만이다 주인.
"가자. "
-여긴 오벨리아 팰리스로군. 여긴
"얘기는 가면서 하자고. "
-주인이 원한다면 그러지.
슈라가 라한과 테세르를 들어 어깨에 올렸다.
예전의 슈라는 테세르를 어깨에 올리기 싫어했다. 하지만 이젠
어느 정도 가까워진 탓에 테세르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꺼리지 않
았다
라한과 일행이 오벨리아 팰리스를 출발한 지 한 달 반이 흘렀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움직여서 생각보다 오래 걸린 편이었다.
-주인. 이제 공간 이동 하자.
"그럼 조금만 이동해 볼까?"
오벨리아 팰리스가 있는 페사 평원에서는 공간 이동이 불가능하
다. 드래곤이 이곳에 공간 왜곡을 시컥놓은 탓이다. 공간 자체가
일그러진 터라 신화력을 이용한 공간 이동도 불가능했다.
하지만한달반의 이동으로 페사평원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
났다. 이젠 공간 이동으로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것도 가능했다.
-왜 조금만 가?
"그냥 전에 거쳤던 곳을 한 번씩 다 거치고 싶어. 오래 걸리진 않
을 거야, "
-안 바빠?
"바쁠 게 있나? 그냥 느긋하게 가는 거지. "
사실 라한은 일찍 가는 게 두려웠다. 일찍 가면 그만큼 빨리 카
이렌과 부딪혀야 한다. 그와 싸우는 그 자체가 꺼림칙했음이다
물론, 싸워서 질까봐 두려운 건 아니었다. 친구라 생각했던 이와
싸운다는 그 자체가 내키지 않았을 뿐이다.
-주인이 그렇게 하겠다면 그러지 뭐.
"슈라. 잠시만 돌아가 있어. 이동하고 나서 부를게. "
-그러지.
슈라의 몸은 아직 눈과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다. 오벨리아팰리
스 앞에서 만들어진 후 역소환 된 적이 없는 탓이다.
지금 이곳은 추위 때문에 괜찮지만 아래로 이동한 후에는 이런
몸체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동한 후에 그 주
변에 널린 지형지물로 몸을 구성하는 게 나았다.
또 라한의 능력으로 슈라 정도로 큰 덩치를 공간 이동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래저래 이동 후에 부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럼 간다. 공간으로. "
슈라가 사라지자 라한이 신화력을 일으컥 공간 이동을 시작했
다. 부상 전보다 더 강해진 신화력. 거기다 벨제르와의 싸움으로
신화력을 컨트롤하는 능력도 예전보다 한결 세밀해졌다. 때문에
공간 이동을 하는 데 소모되는 신화력이 예전의 반에도 못 미쳤다.
그만큼 라한이 성장했다는 증거였다.
라한이 처음 나타난 곳은 프라하를 처음 만난 스카라트 산맥이
었다. 과거 여행의 시발점이라 볼 수 있기에 이곳을 택했다.
"좋구나. "
라한이 주변을 둘러보며 탄성을 질렀다. 적당히 위치해 있는 바
위와 곳곳에 쌓인 눈. 거기에 잿빛 하늘이 더해져서 그야말로 절경
이었다.
-좋네 예전에는 몰랐는데
"그때는 이런 경치를 볼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으니까. "
-그런가?
"그때는 오래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너무 강했어. 그래서
주변 경치는보지 않고 몬스터가 있나 없나, 적이 있나 없나만살
폈지. "
라한의 말투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육체적인 수련이 라한의 정
신을 성숙시 킨 듯했다
-슈라 불러야지 .
"아, 맞다. 슈라. "
슈라 역시 나타나자마자 주변부터 둘러봤다. 오래 함께 다녀서
인지 어딘지 모르게 라한과 비슷해 보였다.
-오! 경치 멋지군. 주인. 여기가어디지?
"스카라트 산맥. 너도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군. "
-머리는 내가 좀 좋지.
갑자기 끼어든 테세르의 말에 슈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골렘인 슈라도 테세르가 머리 나쁜 건 아는 모양이다.
"테세르 너는 찌그러져 있어라. "
-그래, 테세르. 다른건몰라도머리 좋은건좀아니다.
-뭐야? 이제 아주 작당을 하고 날 놀리는군. 내 뛰어난 머리가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라.
테세르도 정령계 내에서는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특히 잔머리
에는 테세르를능가할 정령이 없었다. 정령이라는존재 자체가꽁
수나 잔머리와 거리가 멀었으니 상대적으로 테세르의 머리가 뛰어
나 보였다.
한데도 테세르는 정령의 그런 특성을 감안하지 않고 자기 머리
가 좋다고만 생각했다.
"슈라. 그만하자. 머리 나쁜놈한테 머리 나쁘다고하면원래 저
렇게 발끈하는 거야. 바보한테 바보라고 놀리면 싫어하는 거하고
같지. "
-우씨.
"천천히 내려가자. "
주인. 사람들이 나타나면 알아서 돌아가야 하나?
블리아드 마을에서의 슈라는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그곳에서만큼은 자신의 존재를 마음껏 드러내고 다닌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곳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드래곤과 싸울 때 잠깐 드러낸 것 외에는 항상 누군가의
눈치를보며 살았다. 그도 남들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다니고 싶
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왜 돌아가고 싶어?"
-아니. 나도 편하게 돌아다니고 싶다.
"그럼 돌아가지 않아도 돼, 전에 널 역소환해둔 건 널 나의 숨겨
진 힘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야. 근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 충분
히 강해졌으니까. "
지금의 라한은 마계로 가기 전보다 두 배는 강해졌다고 봐도 무
방했다. 거기다 미스트에게 배운 은신술도 그의 실력에 크게 한몫
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강한 자를 만나도 최소한 죽지 않을 자신은
있는 셈이다.
-고맙다.
"고맙긴. 가자. "
-그러지.
슈라가 천천히 스카라트 산맥을 내려갔다. 그의 어깨에 앉은 라
한은 산맥을 내려가면서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왜 예전에는 이 아
름다운 경치를 보지 못했는지 자기 자신이 한심할 정도였다.
카르 왕국.
이곳은 검술이 발달된 북 대륙 강국 중 한 곳이다. 이웃 왕국인
베루니아 왕국과 형제 왕국이기도 해서 감히 타국에서 넘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이었다.
라한이 카르 왕국 국경 부근에 도착했다. 스카라트 산맥을 출발
하고 4 일이 지난 시간이었다.
"여기가 그놈들의 고향이군. "
그놈들
"에펠 그놈들 말이야. "
-아, 맞다.
에펠, 카류나, 시스마란, 란, 베린. 이들의 고향은카르왕국이
다. 비록 귀족들의 텃새 때문에 왕국을 떠나기는 했으나 그들이 카
르 왕국 사람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들 중 란은 암살자들의 첫 습격 때 이미 죽임을 당했다. 또 시
스마란은 라한을 좋아해서 그들과 헤어졌으니 남은 에펠 일행은 세
명. 에펠, 카류나, 베린뿐이었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찾아서 죽여 버려야지.
"정령이 말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쯧쯧. "
테세르에게는 정령의 특징이랄 수 있는 조화로운 성정이 극도로
결핍되어 있었다. 그게 첫 계약자가 라한이라서인지, 아니면 마나
의 정령이라서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테세르가 처음부터 저랬던가? 아니면 내가 저렇게 만든 건가?'
가만히 생각해 보자 처음에는 저러지 않았던 것 같았다. 결국
마나의 정령이라서가 아니라 자신 때문에 저렇게 바뀌었다고 봐야
했다.
'어째 나하고 같이 지내면 다 저렇게 변하냐? 카이렌도 그렇고
저놈도 그렇고. '
라한은 야수적인 기질이 강했다. 겉으로는 싸움이 싫다고 하지만
실상은 상대와싸워 짓눌러 버리고 싶은 욕구가 강한 성격이었다.
한데 과거에는 저런 야수적인 기질이 겉으로 드러났다. 때문에
종종 야수들이나 할 수 있는 울부짖음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라면서 그 기질이 속으로 갈무리되어 남들에게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문제는그 기질이 남에게 은근히 전염된다는사
실이었다. 그리고 이런 전염성은 일행이 순수한 존재일수록 더욱
강하게 작용했다. 평화의 종족인 엘프 카이렌과 조화로운 종족인
정령 테세르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주인. 저 앞이 국경인데 괜찮겠어?
"괜찮아. 그냥가. 나머진 내가책임질 테니까."
슈라는 자신이 남에게 드러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자기 자신
이 어떤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워한 건 아니었다. 자신이 드러남으
로써 주인인 라한에게 피해를 줄까 두려웠다.
-주인 생각이 그렇다니 그냥 가겠지만, 혹시라도 마음이 변하
면 말해라.
"걱정 마. "
라한의 호언장담에 슈라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면
서도 수시로 어깨에 있는 라한을 바라봤다. 괜히 걱정스러운 마음
이 들어서였다.
국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슈라가 라한을 바라보는 횟수도 잦아
졌다. 한데도 라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히려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쿵쿵!
"불러! 어서"
"빨리 연락해. 지원군은 언제 오는 거야?"
슈라가 국경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경비병들의 고함이 들려왔
다. 거대한 골렘의 등장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들이었다.
"멈! 멈, 멈춰라."
슈라가 경비 초소 앞에 도착하자 한 명의 경비병이 창을 슈라에
게 내밀고 말했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경비병. 겁을 먹은 기
색이 역력했다.
"뭐야?"
"인, 인간?"
라한을 본 경비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라한의 존재를 그제야
발견한듯했다.
"그래. 인간이다. 문 열어. "
"누구냐?"
겁에 잔뜩 질려 있던 경비병의 얼굴이 조금 나아졌다. 괴물이 아
닌 인간의 등장에 용기를 얻은 탓이다.
"인간이라고 했잖아. 문 열어. "
"용건을 말해라. "
목책 뒤에서 경비병이 눈을 부라렸다. 새삼 인간 패문에 겁을 집
어먹은 게 화난 모양이다.
"들어가는 게 내 용건인데. "
"흥. 겨우 장난감 돌 조각을 믿고 호기를 부리는구나. "
경비병의 태도는 '골렘은 무서워도 인간 따위는 무섭지 않다'
태도였다. 이에 라한의 기분도 나락으로 치달았다.
'이놈 봐라. '
"슈라. 너보고 장난감 돌 조각이라고 하는군. 장난감이 아니라
는 걸 보여줘. "
-어느 정도로 부수면 되지?
"저 목책을 완전히 부숴 버려. "
-그러지.
짧게 대답한 슈라가 주먹을 들어올렸다. 아주 단순하고 느릿한
동작이었다.
"뭐, 뭐냐?"
콰쾅!
슈라가 들었던 주먹으로 목책을 내리쳤다. 이에 뒤에 있던 경비
병이 경악한 얼굴로 몸을 굴렀다. 그래도 쾌나 몸이 날랜 탓에 부
상은 당하지 않았다.
"음, 깨끗하군, "
이미 낡을 대로 낡은 목책이라 슈라의 주먹 한 번에 완전히 부서
졌다. 저런 목책으로 어떻게 몬스터를 막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
였다.
-주인 이제 어쩌지?
"들어가자. "
-알겠다.
라한을 어깨에 태운 슈라가 경비병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지나가는데도 경비병은 다리를 후들거리며 멍하게 서 있기
만 했다.
슈라가 어느 정도 들어가자 뒤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
다. 지원군이 온 듯했다.
"멈춰라. "
"슈라, 잠깐만. "
뒤에서 들리는 외침에 라한이 슈라를 세웠다. 그리고 아래로 뛰
어내려 뒤에 선 이들을 바라봤다.
"나? "
"흥. 요상한 괴물을 믿고 설치나본데, 내가 온 이상 너의 만행도
이다. "
경비병의 수장인 듯한 사내가 호기 있게 말했다. 그 말에 다른
경비병들도 힘을 얻은 듯했다.
"요상한 괴물이라 재미있군. 슈라, 테세르. 너희들은 보고만
있어. "
주인이 직접 해결할 거야?
"내가 너희들 믿고 설친다고 하잖아 보여줘야지. "
라한이 팔을 걷어붙이고 상대를 노려봤다. 단순히 눈빛뿐이었음
에도 엄청난 살기가 요동쳤다.
"이 이놈
"훗, 모두 스톱!"
라한이 평범한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한데도 결과는 전
혀 평범하지 않았다.
"뭐, 뭐냐?"
"이 이게
"으악
라한이 시전한스톱은 일종의 패럴라이즈 마법과흡사하다. 상
대를 마비시컥 버리는 마법인 셈이다. 다른 점이라면 상대가 한 명
이 아닌 다수라는 것과 마나 대신 신화력을 사용한다는 거였다.
"요상한 괴물만 믿고 설치는 놈이 힘 좀 써봤다. "
"01, 01
"그럼 고생 좀 해. 으차!"
라한이 풀쩍 뛰어 슈라의 어깨에 올라탔다
라한이 사용한 스톱은 신화력을 상당히 많이 사용하는 고위급 기
술이다. 한데도 이 방법을 사용한 건 나름대로 복안이 있어서였다.
지금 이곳에는 없지만 여기서 벌어진 일이 로테마이어스의 귀에
도들어갈 터. 그에게 내가돌아왔으니 긴장하라는 일종의 경고장
이었다.
"너, 넌 누구냐?"
"카라한 필슨. 그게 내 이름이다. 똑똑히 기억해둬라. "
이름을 풀 네임으로 말한 것 역시 로테마이어스에게 하는 말이
었다. 비록 이곳에는 없지만 말이다.
로테마이어스 잘봐라
라한은 슈라에 올라탄 채로 카르 왕국을횡당햇다 북서쪽으로
북동쪽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라한 과거 에펠 일행과 용병임을
할때 이동했덩 길을 그대로 가는 중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카르왕국 측에서 수많은 제지를 받았다 병
사 기사 때로은 마법사까지 대동한채였다
카르왕국 측에서도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을 막기
위해 보낸 사람마다 전부 의식을 잃거나 마비되어 버리니 정말 미
칠 노릇이었다 한데도 라한 일행은 그냥 내버려두기에는 자존심
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북대륙 최강대국 중 한곳이라 알려진 카르왕국 아니던
가 라한일행은 그냥 방치했다가는 다른왕국에게 얼굴을 들고 다
니ㅣㄹ수 없었다 어떻게든 라한일행을 저지해야 그나마 구겨진 체면
을 조금이라도 살릴 수 있는 입장이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난리란 말이오? 아직도 그자의 정체에 대해
서는 알아낸 게 없소?"
"송구하옵니다. 정보부에 알아보라고 했으니 곧 소식이 있을 겁
니다. "
라한의 등장으로 카르 왕국에서 급히 귀족 회의를 소집했다. 급히
모일 수 있는 귀족물 모두 모아 대책을 의논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렇게 회의를 시작한 지 벌써 8 일. 한데도 라한을 잡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라한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레이블 후작 도착했습니다 "
"들라하라. "
"네. "
밖에서 들리는 시종장의 목소리에 카르 국왕이 서둘러 명령했
다. 근엄함과 엄격함이 함께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신 레이블, 카르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
"기다리고 있었네. 앉으라. "
"네 폐하. "
레이블 후작은 카르 왕국의 정보부를 담당하는 수장이다. 이미 3
대째 카르 왕국의 정보부를 담당하고 있는 레이블 후작가. 비록 작
위는 공작보다 낮으나 실제 세력은 공작에 버금갔다.
"그래, 그 카라한 필슨이라는 자에 대해서는 알아냈는가?"
"다행히 폐하의 명령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
"잘됐군. 잘됐어. 허허. 그래 그가 대체 어느 나라의 세작이던
가?"
카르 왕국에서는 라한을 이웃하고 있는 타국의 세작이라고 생각
했다. 그곳이 아니고서야 카르 왕국의 내부를 휘저으며 쑥대밭으
로 만들 까닭이 없었다.
"그는 루이나 왕국 출신입니다. "
"뭐라? 루이나 왕국? 그곳은 대륙 중남부에 위치한 곳이 아닌가?
우리 카르 왕국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곳인데 어찌하여
"루이나 왕국이 얼마 전 베센 왕국 영토를 빼앗더니 겁이 없어진
모양입니다. "
레이블 후작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모여 있던 귀족 중 한 명이
먼저 말했다. 그가 끼어들자 카르 국왕과 레이블 후작이 눈살을 찌
푸렸다.
"비트로 백작, 폐하와얘기하고 있었다. 겨우 백작주제에 네가
끼어들 수 있단 말이냐?"
"죄, 죄송합니다. "
"흥. 백작 주제에 겁이 없구나. "
"살려주십시오. 소인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여
"그만 됐다. "
카르국왕이 그들의 언쟁을 제지했다. 비트로 백작의 행동이 마
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일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
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
"그만, 레이블후작 계속설명하라."
"예 폐하. "
레이블 후작이 비트로 백작을 한 번 째려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카라한 필슨이라는 자가 루이나 왕국 사람인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루이나 왕국에서 보낸 세작은 아닙니다. "
"루이나 왕국의 세작이 아니다?"
"예. 폐하. 필슨가문은지금루이나왕국의 국왕인 엘베로에의
해 멸문당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바로는 필슨 백작의 의문사와
그들의 반역이 멸문의 이유라고 하지만 실상은 엘베로의 계획에 의
해 차근차근 진행된 멸문입니다. "
"으음, 기억나는군. "
과거 필슨 가문의 멸문은 대륙 사가들에게 꽤 크게 다뤄진 사건이
었다. 그사건과맞물려 엘베로가루이나왕국의 국왕이 되었기 때
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잊힐 때쯤 루이나 왕국이 베센 왕국을 침
략했다. 전쟁으로 필슨 가문의 멸문이 다시 한번 화두로 떠올랐다.
카르 왕국에서도 그 사건을 쾌 오랫동안 다루었다. 비록 멀리 떨
어진 왕국이지만 국가의 일이기에 중요하게 다룬 것이다.
"그럼 그는?"
"제 생각에는 루이나 왕국의 엘라 드루이탄 엘베로 국왕에게 보
내는 경고장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
"으음.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냥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묵과하는 게 최선일 듯합니다. "
카르 국왕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무너질 대로 무
너진 체면이 문제였다.
"그 방법 외에는 수가 없겠는가?"
"지금으로써는 그게 최선입니다. 하지만 체면이 문제입니다. "
"해결책은 있는가?"
"아예 접촉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악의를 가진 접촉이 아니
라 호의적인 접촉이면 거절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
"그건 안 됩니다. "
"맞습니다. 그는 우리 왕국을
레이블 후작의 말이 끝나자 다른 귀족들이 반론을 제기했다. 개
중에는 핏줄까지 세운 채 열변을 토하는 이도 있었다.
라한의 카르 왕국 횡단은 비단 왕국의 체면만 깎은 건 아니었다.
그를 제지하겠다고 자신 있게 나섰던 귀족들의 체면을 모두 깎았
다. 귀족 사이에서 실추된 체면은 곧바로 세력의 약화로 이어지는
일. 이대로 접촉을 통해 일이 무마된다면 먼저 나섰던 귀족들만 피
해를 보는 셈이다.
"모두조용. 레이블후작, 계속말해보라."
"예, 폐하. 지금까지 카라한필슨이라는자의 행보는실로놀라
울 정도입니다. 일당백, 아니 일당천이라해도과언이 아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우리 왕국 사람으로 만들 수만 있다
면 대륙 통일도 무리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
레이블 후작의 생각은 라한을 카르 왕국의 힘으로 만드는 거였
다. 그렇게만 된다면 대륙 통일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었다
"대륙 통일이라
카르 국왕이 나지막이 읖조렸다.
대륙 통일.
이 한 마디가 가지는 힘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유구한 대륙 역사
속에서 그 누가 대륙 통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과거에도 없었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미래에도 없을 게 분명했다. 심지어 대륙 최
강자라 불렸던 류카라한이 베르첸 제국을 세울 때에도 대륙의 반을
가지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만약 카르 왕국이 대륙을통일할 수만 있다면? 이 대륙이
존재하는 한 카르 왕국의 이름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터였다. 또
이 생각을 해낸 레이블 후작의 이름도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대륙 통일이라는 말이 준 충격 때문일까? 마구 떠들던 대신들이
침묵을 고수했다.
"폐하. 깊이 헤아리시옵소서. 대륙 통일이옵니다. 대륙 역사상
최초의 대륙통일 국가가 카르 왕국이 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아
니, 카르 제국이 될 수 있는 기회입니다. "
"흐음. "
레이블 후작이 쐐기를 박듯 한마디 던졌다. 카르 국왕은 신음만
흘린 채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역시 대륙 통일을 이루고 싶은 꿈은
있었음이다.
"폐하. 소신의 생각은 좀 다르옵니다. "
"다르다?"
라한을 포섭하는 분위기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때 카르 국왕
바로 앞에 있던 백발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예 폐하. "
"쉬린 공작. 말해보라, "
쉬린 공작은 카르 국왕의 숙부뻘 되는 사람이다. 또 그는 카르
왕국의 군권을 모조리 장악하고 있기도 했다. 때문에 카르 왕국 최
고의 실세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입을 열면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고, 그가 하자고
하면 다른 이들은 두말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쉬린 공작은 입을 쉽게 열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대전 회
의에 참가하면서도 입을 여는 건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할 정도
였다. 그만큼 국정에 큰 관심이 없고 오직 전쟁과 전투를 준비하고
치르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 명에게 군권이 모
두 장악되어 있음에도 반란 걱정은 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폐하. 카라한 필슨이라는 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합니다. "
"그건 알고 있다. 그래서 카르 왕국에 힘을 보태도록 하자는 게
아닌가?"
"먼저 폐하께 한 명을 소개시컥주고자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
"허락한다. "
카르 국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쉬린 공작이 시종장에게 다가갔다
"시종장. 접대실에사람이 있을걸세. 데리고오게."
"예, 공작님. "
공손하게 대답한 시종장이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쉬린 공
작이 됫짐을 쥐고 차분히 기다렸다. 가끔 천장의 샹들리에도 바라
보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여유로워보였다.
잠시 후, 시종장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폐하. 용병 제라드 들었습니다. "
"용병? 쉬린 공작. 그대가 부른 사람이 제라드라는 용병인가?"
"예, 폐하. "
"들라. "
용병 제라드.
그는 오래전 라한이 용병일을할 때, 그 일행의 리더였다. 그리
고 라한이 사라진 후에는 로이나, 시스마란과 함께 라한을 찾는 여
정을 함께 떠났었다. 베어울프의 잦은 공격을 함께 막아냈던 로이
나, 시스마란, 제라드. 그는 베어울프와 거의 매일 싸우면서 엄청
난 검술 진보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A 급 용병을 건너뛰고 혈전
사가 된 상태 였다.
"혈전사 제라드. 카르 국왕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
제라드가 무릎을 꿇은 채로 공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폐하가 아
닌 전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본래 폐하는 황제에게 하는 예였다.
제라드는 카르 왕국 사람도 아니고, 또 분위기 때문에 기죽을 만큼
약자도 아니었기에 당당하게 전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혈전사?"
"혈전사?"
"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혈전사인가?"
혈전사.
용병들의 신으로 불리는 엄청난 실력자들이다. 대륙에 혈전사의
칭호를 받은 이는 걱우 열 명 내외. 그만큼 실력이 됫받침되지 않
으면 받을 수 없는 호칭이었다.
그리고 혈전사의 칭호를 받은 이는 가까운곳에 있는용병들을
부릴 권리도 주어진다. 칭호 그 자체로 엄청난 지위와 세력을 의미
하는 셈이다.
"예, 맞습니다. "
"놀랍군. 아직 한참 어려 보이는데 혈전사라니. "
"폐하. 제라드는 혈전사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실력자입니다. "
"오호, 그래?"
"예 폐하
카르 국왕에게 쉬린 공작이 대신 대답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제라드와 면담을 해서 들은 얘기였다.
"제라드 경 그대는 우리 카르 왕국을 위해 일 할 생각이 없는
가? 내 섭섭하지 않게 해주겠다. "
"죄송합니다. 카르 국왕 전하. 소인은 야인으로 살아가며 야인
을 위해 한 몸 바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명령을 거두어주십시오. "
야인이라는 말은 용병을 뜻한다. 나름대로 용병을 멋있게 표현
한 것이다.
"어허, 안타깝구나. 쉬린공작."
"아, 예. 제라드. 카라한필슨이라는자에 대해 말해보게."
"알겠습니다, 공작님. 카라한 필슨은 저와 함께 다닐 때 라한이
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일행도 있었습니다. "
제라드가 라한과 만나서 다닌 일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했
다. 에펠 일행과몬스터를잡던 기억. 쿨샤크와의 만남. 그리고그
들과의 충돌까지, 그가 알고 있는 건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했다.
"너의 얘기는 잘 들었다. 한데 네가 한 얘기와 라한을 포섭하는
게 무슨 관계가 있지?"
"그건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카라한 필슨은 얼마 전 수도에서 반
나절 거리인 세브란 지역을 통과했습니다. 그때 전 국왕 폐하의 명
을 받들어 왕궁 기사단 1 천 2 백과 수도 방위병 1 만 5 천을 보내 라한
을공격하도록 시켰습니다. 한데 결과는 대패였습니다. 어떻게 마
법을 썼는지도 모르게 모두 의식을 잃거나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
쉬린 공작이 끼어들어 설명했다. 그가 말을 시작하자 제라드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쉬린 공작의 부탁으로 왕궁까지 오기는 했
지만 나라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제라드. 이런 골치 아픈 의논
자체가 짜증스러웠다.
"그건 나도 들은 적이 있다. 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왕궁 기사단은 카르 왕국 최강의 기사단으로 손꼽히는 곳입니
다. 한데 왕궁 기사단의 3 분의 2 를 보냈음에도 대패했습니다. 분명
마법사이기는 한데 그가 어떤 마법을 어떻게 썼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자를 우리 왕국에 둘 수 있겠습니까 7"
"무슨 말이오?"
"우리가 담아두기에는 너무 큰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
다른 귀족들은 모르지만 쉬린 공작은 라한을 직접 본 적이 있었
다. 얼마 전 라한을 공격하는 자리에 은밀하게 따라간 것이다.
그때 쉬린 공작은 멀리서 구경만 했다. 한데도 그는 사지가 마비
된 채 만 하루 동안 꼼짝할 수 없었다.
그는 그때 깨달았다. 라한은 한 나라가 담아두기에 너무 큰 인물
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작은 우물과 같은 카르 왕국에 몸을 의탁
할 리 없음을
"쉬린 공작님. 만약 그가 우리 왕국을 위해 힘을 보태준다고 생
각해 보십시오. 물론 약간의 모험이 있기는 하지만 성공만 하면 엄
청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
"레이블 후작. 만약 카라한 필슨이 왕궁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
린다면 제압할 자신이 있는가?"
"그야 왕궁 기사단이
"바보 같은 소리. 왕궁 기사단의 3 분의 2 가 손도 쓰지 못하고 제
압당했네. 한데 왕궁 기사단이 그를 제압한다고? 그게 말이 된다
고 생각하는 겐가? 혹시 그대는 카라한 필슨을 끌어들여 국왕 폐하
를 시해하려는 생각을 가진 건 아닌가?"
레이블 후작의 말에 쉬린 공작이 눈을 부라리고 대꾸했다. 평소
에 그를 싫어했던 탓이 자신도 모르게 심한 말이 나와 버렸다.
"모두 그만. "
"예, 폐하. "
"제라드라고 했지? 그대 생각은 어떤가? 카라한 필슨이 카르 왕
국에 힘을 빌려줄 가능성이 있겠는가?"
카르국왕이 뒤로물러난제라드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차피 대
신들끼리 왈가왈부해봐야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라한을
잘 아는 이에게 물어보는 게 나을 성 싶었다.
카르 국왕의 물음에 제라드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카르국왕전하. 라한은저보다더 야인같은사람입니다. 비록
야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 야인처럼 살아가
는 게 라한입니다. 그 정도면 대답이 되겠습니까?"
"흐음, 불가능하다는 말이군. "
좀 전에 카르 국왕이 제라드에게 카르 왕국을 위해 일할 수 있겠
냐고 물었다. 그때 제라드는 야인을 위해 야인처럼 살겠다고 대답
했다. 그럼 제라드보다 더 야인 같은 라한은 어떻겠는가?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 그 자체를 답답해할 게 분명했다.
"폐하. 라한은 우리가 가두어놓기에는 너무 큰 인물입니다. 유
념하시옵소서 . "
"쉬린 공작.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7"
"그냥 무시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제라드에게 듣기로 카라
한 필슨은 건드리지 않으면 그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자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왕국 내에서의 일도 알고 보면 모두 우리가
먼저 도발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
"쉬린 공작님 하지만 우리 왕국의 체면이
"체면 때문에 나라를 망칠 수는 없지 않소. 어차피 그는 다른 왕
국도 들를 것이오. 그럼 그 나라에서도 카라한 필슨의 힘을 절감할
수 있겠지. "
사실 쉬린 공작은 라한이 무서웠다. 그와 한 차례 부딪쳐보며 느
낀 절망감과 암담함. 그런 상황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블후작. 쉬린공작. 짐이 결정을내리겠다 오늘이시간부
로 카라한 필슨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방 경비대
에 연락해서 골렘을 탄 인간을 만나면 대항하지 말고 길을 열어주
라 전하라 그리고 각 여관을 수소문해서 그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라고전하라. 내 결론이다. 이상."
결정을말한카르국왕이 대전을 벗어났다. 결정했으니 더 이상
싸우지 말라는 뜻이었다.
친구가 되지 못할 사람이라면 최소한 적은 되지 말아야 한다. 라
한 정도의 강자와 적으로 돌아서는 그 자체가 엄청난 부담으로 작
용할 테니 말이다. 때문에 카르 국왕은 묵과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
고 오히려 이동을 도우라고 명령했다.
카르 국왕의 단호한 명령에 쉬린 공작이 미소를 머금었다. 다행
히 다시 라한과 마주칠 일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
제라드가 어깨를확펴고 대전을 나갔다. 국왕이 있는자리였기
에 고개를 숙였던 제라드였다. 국왕이 사라진 지금은 더 이상 고개
를 숙일 필요가 없었다.
제라드가 대전을 나가자 쉬린 공작이 그 뒤를 따라 나갔다. 그에
게 할 얘기가 있는 듯했다.
"잠시만 기다리게. "
"용건이 더 있습니까?"
"어딜 가려는 건가?"
쉬린 공작도 제라드가 카르 왕국에 몸을 의탁하지 않을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인재를 그냥 보내는 게 서운했다.
그래서 그를 잡고 잠시나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전 라한을 따라갈 생각입니다. "
"뭐?"
제라드의 대답에 쉬린 공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혈전사라는
이름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일. 한데 그들이 라한과 힘을 합친다
면 대륙이 어떻게 바펄지 종잡을 수 없었다.
"제라드. 그를 만나서 뭘 어쩌려고?"
"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했습
니다. 하지만 절 탄복시킨 사람은 단두 명뿐입니다. 그 두 명 중
한 명이 나타났는데 어찌 모른 척할수 있습니까?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따라다닐 겁니다 "
제라드가 탄복한 두 명은 라한과 로이나였다. 여자의 몸으로 엄
청난 검술을 사용하던 로이나. 그리고 젊은 나이에 신기에 가까운
마법을 난사하던 라한. 그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
음이다. 물론 로이나가 드래곤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 대상에서 삭
제되었겠지만 말이다.
"설마 그와
"무슨생각하고 있는지 압니다. 아마그럴 일은 없을겁니다. 전
세상사에 큰 관심이 없거든요. 아마 라한도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먹지 않을 겁니다. "
제라드도 그런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세상의 주인이 된
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사내대장부의 피를 끓게 만드는 일 아니
던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이 좋아하는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없었다. 제라드는 권력과 자유. 이 둘 중에서 자유를 선택했다.
"그 말 믿어도 되겠는가?"
"혹 라한이 세상을 지배하려는 마음을 먹으면 제가 뜯어 말리겠
습니다. 이 정도면 췄습니까?"
"그래, 혈전사가하는말이니 믿어야지, 바로떠날생각인가?"
"예. 지체할 필요 없겠죠. "
제라드는 카르 왕궁에 오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았다. 라한과 관
계 있는 일이기에 마지못해 참가했을 뿐. 그런 게 아니었다면 이곳
에 올 시간에 라한의 뒤를 따라갔을 터였다.
"내가 말을 한 필 보내주겠네. 명마라 불리는 것이니 금방 따라
갈 수 있을 게야. "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
"다음에 또 보세. 그때도 적이 아닌 친구로 봤으면 좋겠군. "
"저 역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제라드가 웃는 얼굴로 쉬린 공작에게 인사했다.
제라드가 본 쉬린 공작은 인상이 참 좋은 귀족이었다. 또 귀족이
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남을 배려할 줄 알았다. 거기다 가진 권력을
정해진 일 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강직함도 가지고 있었다.
'또 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막연히 그런 생
각이 드는군요.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제라드는 왕궁 입구에서 백색의 말 한 필을 선사받았다. 쉬린 공
작이 제라드를 생각해서 보낸 말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곧장 동쪽
으로 향했다. 라한이 있는 곳을 향해서였다.
라한은 카르 왕국의 북동부 지역부터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
다. 카르 왕국에서 그가 가는 길을 모조리 열어준 탓이다. 그 때문
에 불과 3 일 만에 남은 카르 왕국을 모두 통과할 수 있었다. 왕국을
횡단하는 데 정확히 11 일 걸린 셈이다.
그리고지금. 라한은베루니아왕국서부지역에 도착했다. 카르
왕국과형제국인 베 l 루니아왕국. 그곳 역시 언질을받았는지 아무
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아, 지루해.
"또 뭐가 문제야?"
-그냥 바로 가자. 이게 뭐야? 매일 걷기만 하고.
"네가 걷는 거 아니잖아. 슈라가 우릴 데리고 다니는 건데 왜 네
가 엄살이야?"
라한과 테세르는 잠 잘 때와 식사할 때만 슈라의 어깨에서 내려
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게 이동만 한 셈이다.
-그러니까더 심심해, 슈라는걷기라도하지. 난뭐야?하루종
일 멍하게 지내니까 똑똑한 머리가 둔해지는 느낌이야.
"그럼 내려서 혼자 걸어오든지. "
아씨, 대체 왜 이렇게 걷는 건데? 바로 가면 안 돼? 어차피 목
적지는 블리아드 마을이잖아.
라한은 과거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 가는 중이었다. 스카라트 산
맥에서 카르왕국, 그리고 베루니아왕국까지 이곳을 지나면
나메라 왕국의 서부 지방과 수아나 왕국의 엘퐁소 지방을 지나쳐서
블리아드 마을로 들어가는 정말 긴 여정이었다.
"그냥 유람이 라고 생각해. "
-그게 말이 돼? 로테마이어스는 주인 죽이려고 호시탐탐 기회
만 엿보는데 유람이라니. 또 카이렌한테 복수는 언제 할 거야?
"로테마이어스가 찾아오게 할 생각이야. "
라한이 직접 로테마이어스에게 찾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렇게 하면 자신이 드래곤 로드를 죽이러 가는 게 된다. 결과가 같
더라도 누가 시작했느냐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라한은 그런 상황
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의 정보를 흘리고 다녔다.
그렇게 느긋하게 기다리면 로테마이어스가 직접 찾아을 터. 그
때 조건을 걸고 싸울 생각이었다.
-어이쿠, 참으로 태평하다.
"그나저나 저놈은 언제까지 미행하려나? 지겹지도 않나?"
라한이 뒤를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에 테세르도 고개를 뒤
로 돌리고는 혀를 끌끌 찼다.
미행이라면 모름지기 들키지 않아야 한다. 한데 은신술의 대가
가 된 라한에게 저런 어설픈 미행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짓이었다.
설사 라한이 은신술을 배우기 전이라 해도 별로 달라질 건 없었다.
과거에도 정령왕의 흔적을 찾아냈던 라한 아니던가? 예나 지금이
나 라한을 미행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모한 행동이었다.
-아는 사람이지? 기운이 익숙해
"이름이 제라드던가? 뭐, 저놈도 지치면 나오겠지. "
제라드는 이틀 동안의 강행군 후에 라한을 따라 잡았다. 하지만
선뜻 다가가서 말을 걸기가 힘들었다.
실제로 둘이 함께 지낸 시간은 아주 짧았다. 그 짧은 시간을 빌
미로 동행을 요청할 정도로 제라드의 낯짝이 두껍지 않았음이다.
-제라드가 누구더라? 이름이 익숙한데.
"전에 용병으로 잠깐 지낼 때 리더였던 사람이야. "
아, 기억났다. 쾌 괜찮은 놈이었던 것 같은데.
"내 기억도 비슷해, "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슈라는 계속 동쪽으로 이동했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 시간. 배가 고파진 라한이 주변을 훌어
봤다.
"저기군. 가자. "
-그러지
카르 왕국과 베루니아 왕국에서 해준 배려는 단순히 제지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었다. 식사 시간을 절묘하게 계산해서 때가 되면
항상그 부근에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또, 잠잘 시간이면 주변
여관중한곳이 텅 비어 있었고, 혹 야영을할 때는주변에 큰 천
막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오늘 식사도 마음에 드는군. "
- 먹자,
테세르가 허겁지겁 음식에 뛰어들었다. 마치 3 일은 굶은 사람
같았다.
"넌 매끼 먹으면서도 게걸스럽게 먹는군. 뱃속에 거지가 들었
나?"
-내 뱃속에는 당연히 마나가 들었지.
테세르의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오히려 라한이 민망해졌다.
딴에는 농담이라고 던진 건데 진심으로 대답하다니. 이런 대답을
예상 못했기에 순간 멍한 기분이었다.
'저놈하고는 수준이 안 맞아서 농담도 못 하겠어. '
-끄윽! 주인. 잘 먹었다.
"다 먹었으면 저기 가서 저놈 좀 데리고 와. "
- 오늘은 부를 거 야?
"신경 쓰여서 안 되겠다. "
웬만하면 제라드에게 말붙이지 않고 그냥 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슈라의 덩치가 커서 이동이 빠르니 쉽게 따돌릴 수 있을줄 알았다
한데 제라드는 웬만한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어설픈 미행이지
만용케도 처지지 않고따라온제라드. 그의 노력이 기특해서라도
얼굴을 한 번 봐야 할 듯했다
테세르가 사라지자 라한이 음식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음, 좋군. "
"으아악:"
라한이 맛을 음미하려던 찰나에 기괴한 비명이 들려왔다.
'테세르. 저놈은 꼭 사고를 친다니까. '
안 봐도 뻔했다. 분명 테세르가 장난쳤을 터. 제라드가 제아무리
강해져도 라한의 신화력을 가져다쓰는 테세르를 감당하기는 무리
였을 것이다.
"헉, 헉."
-주인 데리고 왔다.
"너 또 장난쳤지?"
-어? 아하하하. 그냥 뭐
좀 전까지만 해도 테세르는 주먹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 한데 지
금은 라한과 비슷한 크기까지 커져 있었다. 장난을 치지 위해 덩치
를 키운 듯했다
"제라드씨. 앉으세요. 저놈이 장난친 건 제가사과드리죠."
"아, 아닐세. 그냥허허,"
제라드가 테세르의 눈치를 슬쩍 살픽며 자리에 앉았다. 라한 앞이
라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는 해야겠는데,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왜 미행하셨어요? 그냥 부르시지. "
"아, 그게 좀 근데 전에는 골렘과 이 검은, 어
"정령입니다. "
"정령? 전에는 골렘하고 정령을못본 것 같은데, 언제 계약한
건가?"
라한이 테세르, 슈라와함께 다닌 건 제라드를 알기 휠씬 전 일
이다. 하지만 제라드 앞에서 한 번도 소환한 적이 없었다. 제라드
가 테세르와 슈라를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오래됐습니다. 일단 좀 드시죠. "
"말하기 싫은모양이군. 뭐 그렇다고 쳐주지. 그럼 어디 식사를
해볼까?"
손을 몇 차례 비비던 제라드가 음식을 빠른 속도로 먹기 시작했
다. 테세르보다 더 게걸스러운 모습에 라한이 혀를 내둘렀다.
'먹는 거야? 흡수하는 거야?'
- 우와.
테세르도 놀랐는지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그만큼 제라드의 식
사 속도가 빨랐다는 증거 였다.
제라드는 지난 3 일 동안 한 끼도 먹지 못했다. 그의 다리로는 슈
라의 걸음을 따라가기도 벅찼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한을 놓친 적
도 몇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과거 이동했던 길을 되짚어가며 겨우
따라잡았다.
"꺼억! 잘 먹었다. "
"진짜 잘 먹네요. "
"하하, 내가 식탐이 좀 있네. 자고로 맛있게 먹는 자가 진정한
사나이 아니겠는가?"
"사나이 되기 무지 쉽네요. "
라한의 비꼼에 제라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자기가 지어낸 말에
도리어 민망함을 느낀 제라드였다.
"그나저나 자네 어디로 가는 길인가? 소문처럼 루이나 왕국으로
가는 건가?"
"아닙니다. "
"그럼 엘퐁소 지방이겠군 전에 거기가 도착 지점이었지, "
"거기도 아닌데요. "
라한의 목적지는 블리아드 마을이다. 카르 왕국이나 베루니아
왕국. 혹은 앞으로 지나칠 나메라 왕국과 수아나 왕국. 이 모든 곳
은 흔적을 남기기 위해 지나는 길에 불과했다.
라한이 계속부정하자 제라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라한
의 목적지가 엘퐁소 지방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때문에 그
의 부정에 의아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 아닌가? 이 길은 분명히 전에 그 길이 맞는데. "
"지금 제가 전에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건 맞습니다. 하지
만 최종 목적지는 엘퐁소 지방이 아닙니다. 예전에도 제 목적지는
엘퐁소 지방이 아니었고요. "
"그럼 정말 루이나 왕국을 공격하려는 건가?"
제라드가 걱정을 담아 물었다.
만약 라한이 루이나 왕국을 공격한다면? 그 승리자가 누가 되든
지 루이나 왕국의 피해는 적지 않을 터였다. 제라드는 용병이기 이
전에 한 명의 소시민. 힘없는 이들의 이유 없는 희생은달갑지 않
았다.
"그것도 아닙니다. "
"그럼 대체 자네 목적이 뭔가?"
"목적지는 케라스왕국입니다. 거기 제 집이 있거든요. 오래 머
물기는 힘들겠지만. "
"자네 고향은 루이나 왕국 아니 었나?"
지금 라한은북 대륙에서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카라한 필슨이
라는짧은 이름을모르는 이가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 모든 게 카
르 왕국 내에서 라한이 벌인 일에 기인한다. 하긴 혼자서 수만의
병사를 상대했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제라드는 카라한 필슨이라는 이름이 회자될 때부터 그에 대해
정보를 수집했다. 용병들의 수장이랄 수 있는 혈전사 제라드. 그가
가진 정보력도 웬만한 정보 길드 못지않았다. 그래서 라한의 정체
를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라한이 정체를 숨기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전처
럼 정체를 일정 부분 숨기고 다녔다면 그가 알아낼 수 있을 리 만무
했다.
"제가 루이나 왕국메서 태어난 건 맞습니다. "
"아우, 답답해. 그냥다털어놔보게. 대체 목적지는어디이며 거
기서 무얼 할 생각인가?"
"별로 말하고 싶지 않군요. 따라오는 건 막지 않겠지만 제게서 뭘
알아내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때가 되면 어차피 알게 될 테니까. "
"흐음. "
제라드가 라한의 일행이 되겠다고 쫓아온 것도 조금은 억지스러
운 일이었다. 알고 보면 친분이 거의 없는 사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억지로 일행이 되어놓고 목적지와 하려는 일까지 묻다
니. 이건 억지를넘어서 염치없는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제라드도
그런 자신의 입장을 알았기에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죠. "
"알겠네. "
라한이 자리를 틸고 일어나 숲 외곽으로 걸었다. 어느 정도 걸어
가자 크게 만들어진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제라드가 일행이
될 걸 알기라도 한 듯, 큰 천막 옆에 작은 천막 하나도 함께 만들어
두었다.
"그럼 좋은 꿈꾸십시오. "
"자네도 편히 쉬게 "
라한이 고개를 까딱하고 큰 천막으로 들어갔다. 제라드는 라한
이 완전히 들어간 후에야 작은 천막에 들어가 몸을 뉘였다.
"라한이라 내가 강해졌다는 걸 모를 리 없는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
라한과 처음 만날 때 제라드의 실력과 지금의 제라드의 실력은
천지 차이였다. 등급은 A 등급 용병에서 혈전사로 겨우 한 단계 상
승. 하지만 이 한 단계를 넘지 못 해 좌절하는 용병이 수도 없이 많
았다 한데 제라드는 A 등급을 넘어서 혈전사가되었다. 단순히 한
단계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실력 향상인 셈이다.
라한도 제라드의 이런 성장을 모를 리 없다. 기감에 그 누구보다
뛰어난 라한이니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도 라한은
제라드의 실력에 대해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모를 리 없어. 그럼 내가 강해져봐야 별거 아니라는 건가? 에
이, 내가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제라드는 부정했지만 실제 라한의 생각이 이러했다. 제라드가
혈전사가 되든지 A 등급 용병으로 남아 있든지 라한에게는 별 상관
없었다. 어차피 라한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수 없는 실력인 건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라한이 베루니아 왕국 동부 지역에 도착했다. 일주일의 짧은 시
간 동안 왕국을 횡단한 셈이다. 이제 하루만 더 지나면 베루니아
왕국의 국경을 지나 나메라 왕국의 영토에 들어서게 된다.
그동안 라한과 새로 일행이 된 제라드 사이에는 거의 대화가 없
었다. 기껏해야 식사하라는 말과 잘 자라는 인사 정도에 불과했다.
제라드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라한은 테세르라는 든든한 수
다쟁이가 있어서 굳이 말을 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침묵은 의외의 상황에서 깨졌다. 제라드가 던진 별거 아닌
듯한 한 마디. 그 짧은 말이 라한으로 하여금 말을 할 수밖에 없도
록 만든 것이다.
"에펠이라는 이름 기억하는가?"
"에펠?"
"그래, 예전에 자네 일행이었지. 그때 자네를 배신했던 자들중
한 명이었을 걸세. "
"그 이름은 왜 꺼내는 거죠?"
라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직도 에펠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듯했다.
"그가 이 부근에 살고 있네. "
"어디죠?"
라한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미
는 이름에펠, 카류나, 베린, 란. 과거에 다하지 못한복수를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동시에 자신의 편을 들어준
시스마란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죽일 생각인가?"
라한의 상념을 제라드가 깨웠다. 그에게는 죽이고 죽이지 않고
가 더 중요한 모양이다.
"제 일입니다. "
"그들이 사는 곳은 나만 알고 있네. "
"말해 주십시오. 사례는 톡톡히 하겠습니다. "
라한의 조급해하는 표정에 제라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직 그들을 싫어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 못한
것이다.
"라한. 그들은 지금
"말해주지 않아도 찾을수는 있습니다. 이 근처에 있다고 했으
니 10 분이면 찾아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에휴, 알겠네 따라오게."
라한의 말에 제라드도 체념어린 빛을 띠웠다.
지금까지 라한과함에 가면서 그가 헛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
았다. 그리고 몇 번의 몬스터 공격을 눈빛 한 번으로 모조리 죽여
버리는 가공할 능력도 확인했다. 그런 라한이 찾을 수 있다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괜스레 가르쳐주지 않겠다고 버텨봐야 나아지는
게 없었다.
"슈라 잠시만 돌아가 있어, "
-그러지.
라한이 슈라를 돌려보내고 제라드를 따라갔다. 슈라의 덩치 때
문에 어쩔 수 없이 돌려보낸 것이다.
제라드가 라한을 안내한 곳은 베루니아 왕국 서부에 위치한 작
은 산이었다. 주로 화전민들이 밭을 일구며 사는 곳으로 부유한 사
람은 찾기 힘든 곳이다. 또 권력가들도 이런 곳에는 시선을 두지
않는다. 이곳에 신경 써봐야 득 될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라한은 에펠 일행이 어느 저택이나 상단에서 호위무사를 하고
있을 거라생각했다. 미숙하지만 열심히 배운 검술이 있으니 그들
에게는 그런 일이 알맞았다.
한데 아무리 둘러봐도호위무사가 있을만한곳이 없었다.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해도 겨우 입에 풀칠하는 수준에 그치는 화전민
이들이 호위무사를 쓸 턱이 없었다
"여기는 어디죠?"
"저기를 보게. "
제라드가 멀리 팔을 뻗어 한 곳을 가리켰다. 화전농 중에서도 가
장 외곽에 위치한 곳이었다.
"저기가 뭐죠?"
"보는 것처럼 화전민들이 사는마을일세. 특히, 내가가리킨 곳
은 화전민 중에서도 최하층에 속하지. 새로 들어온 이방인이나 불
구자들이 사용하는 곳일세. "
"그럼? "
"맞네. 에펠, 베린, 카류나는저기서 밭을일구며 살고 있네."
라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예상 못한 일이었다.
에펠 일행은 검술을 10 년 이상 배운 사람들이다. 란도 마법을 그
시간 동안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긴 시간 동안
해온 수련이 아까워서라도 이런 곳에서 밭을 일구며 살지는 않는
다. 거기다 기사 지망생들 정도 되면 콧대가 높아서 화전민들과 려
여 사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나오는군. "
제라드의 말에 라한이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은 오두
막에서 세 명의 남녀가나오는게 눈에 보였다. 에펠, 카류나, 베린
이었다.
"란은?"
"그는 죽었네. 첫 암살자들의 공격 때 죽었다더군. "
"죽었구나. "
죽었다고 하면 마음이 개운할 줄 알았다. 그래도 자신을 배신한
자들이니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해왔다. 한데 막상 란이 죽었다고
하자 가슴 한 곳이 무겁게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제 가서 복수해보게. 마음껏 처리하게. 난모른척하겠네 "
"그건
행복해 보였다. 힘들게 땀흘리며 사는에펠과카류나, 베린. 그
들의 모습이 부러울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해
코지하는 행동은 아름다움을 해치는 나쁜 행동처럼 생각되었다.
"왜 안 가는가? 자네를 배신한 이들이지 않은가?"
-주인. 내가 가서 처리할까?
"휴우우우, 췄어, 제라드씨. 그냥 가죠. "
한참 고민하던 라한이 결정을 내렸다. 차마 그들을 죽일 수 없었
음이다.
당장 행복해 보인다고 하여 그들의 과거가 순탄하다고 보기는 힘
들다. 그래도 10 년 이상배운 검술을포기한 에펠 일행들. 꿈을 버
리고 이곳에 왔으니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을 터였다.
결국 라한을 배신한 대가로 너무 큰 죗값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괜찮겠는가? 후회할 거 같으면 미리 말하게. 정 못하겠으면 내
가 처리해줄 수도 있네. "
-맞아, 내가 가서 한방에 처리할게
"됐습니다 그냥가죠. 저들은지금죗값을치르고있잖아요.그
리고 제라드씨. "
"말하게 "
"고맙습니다. "
라한이 진심을 담아 제라드에게 말했다.
인과응보
예전에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죄를 짓고도 떳떳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봐서인지도 모른다. 한데 이젠 인과응보라는 말
을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죗값을 받고 있을 테니 말이다.
- 주인.
"테세르 가자. "
-주 우웁!
라한이 뛰쳐나가려던 테세르를 손으로 잡아 주머니에 구겨 넣었
다. 테세르의 성격상 그대로 두면 에펠 일행을 어떻게 할 것만 같
았다. 지금까지 테세르가해온수많은장난들과괴롭힘. 그걸 생각
하자 테세르를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라한은 에펠 일행을 먼발치에서 지컥본 뒤부터 한동안 말이 없었
다. 어떤 게 사람이 사는 건가? 자유가 무엇인가? 죄는 무엇인가?
평생 해본 적 없는 난해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중이었다.
"제라드씨. "
"말해보게. "
"사람이 왜 살까요?"
"그야 태어났으니까 살지. "
라한의 물음에 제라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
다. 난해한질문의 해답은가장단순한법, 제라드가성의 없이 대
답했음에도 라한은 그게 해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태어났으니까사는 거지. 나도 태어났으니까살아야 하
고. 기왕 사는 거 즐겁고 자유롭게 살면 그만이잖아. "
"이보게. 라한. 아직 젊은나이 아닌가?젊을때는뭐든쉽게 생
각하게. 괜히 골머리 썩을 필요 없지 않나? 골치 아픈 고민은 나이
가 들어서 머리가 하얗게 새면 그때 하라고. "
"그러죠, 제라드씨, "
라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한 모양이다.
라한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해왔다. 인간이면서 인
간 이상인 존재. 그래서 스스로 인간으로 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
었다.
그런데 이젠 그런 노력이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그냥 태어났으
니 살아가는동안 열심히 살다 가면 그만이었다. 물론, 열심히 아
주 오래오래 살려는 목표는 여전히 가지고 있겠지만
며칠 후, 라한이 나메라왕국의 국경을 넘었다. 라한에 대한소
문을 들었는지 엄청난 병력까지 대동한 나메라 왕국. 라한은 그들
모두에게 수면을 선사하고 여유 있게 통과했다.
라한의 왕국 횡단에 나메라 왕국 왕성이 발칵 뒤집혔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그자가 우리 왕국에 들어온 지 벌써 5 일
이오. 대체 이 일을 어찌하란 말이오?"
나메라 왕국의 벤자민 국왕이 짜증을 부렸다. 생각지도 못한 이
방인이 나라를 휘젓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폐하, 카르 왕국과 베루니아 왕국에서도 그가 지나가는 걸 수
수방관 했습니다. 저희도 그들을 따라서 조용히 보내주는 게 어떨
지요?"
"필로 후작.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만약 그를 보내준다면
우리 나메라 왕국은 타국에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오. 어떻게든
그자를 처리해서 북 대륙 최강대국이 우리 왕국임을 널리 알려야
하오. "
"헬밍턴 후작. 카르 왕국과 베루니아 왕국이 힘이 없어서 그를
보내준 줄 아시오?"
"흥, 그깟 나라가 뭐가 그리 대수라고. "
북 대륙 최강대국은 카르 왕국과 베루니아 왕국이다. 그건 대륙
정세에 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북 대륙에 속한 나메라 왕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에 북 대륙 최강대륙이었던 나메라 왕국. 그들은 아직도 스스
로가 최고라는 자만심을 버리지 못했다.
"헬밍턴 후작.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시오. "
"그대야말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시오. 우리 나메라 왕국은 대
륙 최강이라고불려도손색이 없소. 특히, 우리 황금사자단은 역
사를 통틀어서 대륙 최고의 실력자들만 모인 집단이오. 그들이 보
유한 우리가 무얼 두려워한단 말이오?"
황금 사자단.
나메라 왕국의 왕궁 기사단을 일컫는 말이다. 모두 1 천 명으로
이루어진 그들은 창술에 특히 능했다. 또 집단 전을 오랫동안 수련
해서 단일 개체를 향한 집단 전투에는 가히 최강으로 불렸다.
"그럼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해 황금 사자단을 파견하자는 말이
오"
"못할 건 뭐가 있소? 황금 사자단을 보내서 그를 완벽히 제압할
수만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않소?"
라한을 사로잡거나 죽인다면 나라의 위상을 크게 떨칠 수 있다.
카르 왕국과 베루니아왕국에서 포기한 일을 그들이 해낸 것이니
말이다.
"그만. 헬밍턴 후작. 그대가 이번 일을 지휘해서 그자를 처리하
라. 죽여도 상관없다. 단, 사로잡으면 두 배의 공로를 인정하겠다. "
폐하 그를 공격하은건 무리입니다
그만하라 이일의 전권은 헬민턴 후작에게
양도하라 이상
알겠습니다
필로후작도 더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목했다ㅏ 국왕이이미 내린
결정을 반복할리 만무한 일이다 또 후작의 작위로 국왕의 말
토을 달기에는 목숨이 너무 아까워다
거사는 3 일후 장소는 베크리오 시 외곽이다 황금기사단 1 천
과 수도 방위군 2 천 중앙군 3 만은 내일까지 왕궁 중앙 연무
장에 집결하라 이상
헬밍턴 후작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 명령은 대전에 모인 각 귀족
들이 소속 부대에 연락할 터였다
대 학살 그리고 혈전
로테마이어스 레어안
로테마이어스는 라한의 죽음으로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호적수
가 너무 어이없게 죽은 일에 충격을 받은 탓이다
로드님 아카폴리안입니다
들어와라
로테마이어스는 아카폴리안이 들어오는 데도 침상에 누워서 맞
았다 전에는 그가 올때마다 궁금한걸 물었은데 이젠 아니었다
라한의 죽음으로 다른일에도 흥미를 잃은것이다
로드님
듣고있다 말해라
로테마이어스는 건성으로 대답햇다 한눈에 귀찮아하고 있음을
느낄수 있을 정도였다
"라한에 대한 얘깁니다. "
"라한?"
로테마이어스가 침대를 한 손으로 밀고 자리에 앉았다. 아카폴
리안이 들어온 후 처음으로 보이는 제대로 된 반응이었다.
"네. "
"무슨 일이지?"
"라한이 살아 있습니다. "
"뭐라?"
로테마이어스가 벌떡 일어났다. 라한이라는 이름이 준 충격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 였다.
"정황으로 봐서 라한이 확실합니다. "
"어디 있지?"
"지금 나메랴 왕국 중앙을 지나고 있습니다. 스카라트 산맥에서
부터 계속 동쪽으로 이동한 듯 보입니다. "
"질긴 놈. "
라한이 죽었다고 할 때는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랐었다. 호적수가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삶의 의지를 강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막상살아 있다고 하자 걱정부터 앞섰다. 로테마이어스에게 라한
은 없으면 허전하고 있으면 껄끄러운 상대였다.
"어쩔까요?"
"스카라트 산맥에서 계속 동쪽으로 이동했다면 시간이 쾌 흘렀
다는 뜻이군. 왜 지금에서야 찾아낸 거지?"
"그게, 소문은오래전부터 들었습니다. 하지만 전 정보력을 카
이렌과 류카라한에게 맞춰놓느라 확인이 늦었습니다. "
아카폴리안은 라한이 사라진 후에도 카이렌과 류카라한 일행에
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라한에 의해 핵심 세작들이 사라진 후, 더욱 힘들어진 정보 수
집, 때문에 계속 신경 쓰지 않으면 그들에 대한 정보를놓치기 일
쑤였다. 어쩔 수 없이 아카폴리안이 직접 돌아다니며 일일이 확인
할 수밖에 없었다
"그놈이 뭘 하고 있지?"
"좀 이상합니다. 보란듯이 대놓고 다니고 있습니다. 카라한필
슨이라는 풀 네임까지 알려진 걸 보면 숨을 생각이 조금도 없는 듯
보입니다. "
"대 놓고 다니고 있다?흐흐흐. 날 기다리고 있군. 찾아오라는
뜻인가? 좋다.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해주마. "
로테마이어스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라한을 죽이겠다는 결심
을 굳힌 얼굴이었다.
"로드님.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항상자신
을 어느 정도 숨기고 지냈습니다. 한데 이번은 너무 드러내놓고 다
니고 있습니다. 어쩌면 로드님을 해하려는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
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아니, 그놈은 날 기다리고 있어, 보여. 느껴져. "
"그럼 다른 드래곤들을 대기시켜놓겠습니다. "
아카폴리안은라한과한 번 싸워본 적이 있다. 그때 느낀 건 라
한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과 임기응변 능력이 무섭도록 뛰어나다
는 거였다. 그런 라한에게 로테마이어스 혼자만 보낼 수는 없는 노
릇이었다.
대학살! 그리고 혈전
165
* SCAN0128.PCX *
"아니, 이번에는 나 혼자 간다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게 하
라. 로드의 이름으로 내리는 명령이다. "
"하지만
"아카폴리안. 네가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기 시작했지? 죽고
싶은 게로구나. "
로테마이어스가 눈을 부라리자 아카폴리안이 고개를 빠르게 숙
였다.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서 어쩔 수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
"그놈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라. 이틀 주겠다. 어떻게든 알아
내서 내게 말해라. "
"알겠습니다 "
아카폴리안이 나가자 로테마이어스가 레어 안을 서성였다
'기다렸다. 라한, '
걱정이나 두려움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
터 예정된 싸움을 하는 느낌이랄까. 신이 정해놓은 길을 그대로 답
사하는 묘한 기분이 었다.
라한이 나메라 왕국 수도에서 멀지 않은 베크리오 시 외곽에 도착
했다. 꽤나 긴 여정이었음에도 피곤한 기색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쾌 많은 것 같군. "
"역시."
"왜요?"
"나메라 왕국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 "
라한은 카르 왕국에서 베루니아 왕국을 지나는 동안 단 한 번도
공격받지 않았다. 오히려 극진한 배려에 편한 여행을 할 정도였다.
한데 나메라 왕국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처음 국경 지역부터 매
복을 시컥놓더니, 그 후로 하루에도 몇 번씩 공격을 가해왔다.
"내가 윌 어쨌다고 저러지? 그냥 지나가는 게 그렇게 큰 죄인가?"
"힘을 가진 게 죄라면 죄인 거지. "
되도록 소란 피우지 않고 조용히 지나려 했다. 어차피 로테마이
어스의 정보력이면 이름을 알리는 정도로도 라한을 찾아낼 터. 남
은 여정은 옛 생각에 젖어서 느긋하게 보내고 싶었다.
한데 나메라 왕국에서 라한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라한이 가진
골렘과 힘을 그냥 묵과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 힘들겠네요. "
"어차피 한 번은 본보기를 보여야지. "
지금까지 수십 차례 공격을 받으면서도 죽이는 일만큼은 피해
왔다. 대부분마비와수면을통해 피를흘리지 않고 통과한 라한
이었다.
그런 라한의 손속이 문제였다. 어차피 공격에 실패해도 병력 피
해가 없으니 나메라 왕국 측에서도 손해 볼 게 없었다. 무엇보다
이런 두루뭉술한 대응이 낳은 가장 큰 문제는 민간인들의 공격이었
다. 공을탐내서 과일 장수로, 생선 장수로 위장해서 암습하는 민
간인들의 행태에는 라한도 짜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명도 남김없이 깡그리 죽여주지. "
"에휴, 이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건만. "
제라드는 용병으로 지내며 수많은 상황을 경험했다. 그는 라한
의 대응이 이런 문제를 낳을 걸 예상하고 있었다.
"반대하실 겁니까?"
"아닐세. 자넨 충분히 경고를 했다고 보네. 그런데도 무모하게
덤비는 저들이 문제인 거지. "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
라한이 슈라와 테세르, 제라드를 둔 채로 혼자 걸어갔다. 어쩔
수 없이 손을 쓰기는 하지만 잔인할 게 불 보듯 뻔한 일. 제라드에
게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엄청나군, 대체 몇 명이야?"
얼핏 보기에도 엄청난수였다. 기사 3 천 명에 병사 3 만. 거기다
마법사 20 여 명까지 이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착
잡한 심정이었다.
"한 번에 끝낼까? 아니면 천천 어?"
라한이 전방에 늘어서 있는 병사들을차례로쭉훔었다. 그러다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젠장 "
사람이 너무 많아 대체 누가 누구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래, 잘 봐둬라. 로테마이어스. "
라한이 느낀 기운은 로테마이어스였다. 라한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병사들 사이에 숨어 있는 듯했다.
"뜨기. "
라한이 몸이 공중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단 한 방의 마법으로 모
조리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라한이 날아오르자 나메라 왕국 측에서도 그를 발견했다
"궁수 조준!"
차차착!
"발사! "
슈슈쑹
"흥. 잘 가라. 땅의 분노! 불의 회오리! "
라한이 두 가지 공격을 연이어 시전했다. 화살보다 시전은 늦었
으나 발동은 오히려 라한이 빨랐다
쿠루루루룽!
"으으악!"
"뭐, 뭐야?"
라한이 시전한 땅의 분노가 병사들이 딛고 선 땅을 없앴다. 꺼지
거나 깎은 게 아닌 아예 50 미터 정도의 땅을 없애 버렸다.
휘이익!
"사, 사람살려!"
라한의 다음 공격인 불의 회오리가 병사들 사이를 종횡무진 했
다. 땅이 꺼진 상태라서 병사들은도망갈곳도찾지 못했다. 깊은
땅에 갇힌 채로 불의 회오리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불의 회오리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거대
한 구덩이 안에는 시커멓게 타버린 시체만 남았다.
집단전 최강이라는 황금 사자단도, 정예병이라던 3 만의 수도 방
위군도, 3 서클 이상만 모인 20 여 명의 마법사도, 라한의 공격에 숯
덩이로 변했다.
"이제 나오는 게 어때?"
짝짝짝!
"놀랍군. 난생 처음 보는 멋진 마법이었어. "
숯덩이를 비집고 로테마이어스가 박수를 치며 걸어 나왔다. 뭐
가 그렇게 좋은지 얼굴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재미 있었나?"
"볼만 하더군. 내 브레스보다는 못하지만 아주 뜨거운 열기였어, "
"재미있었다니 다항이군, 근데 어쩌지? 난 네놈 면상만 보면
재미가 없거든, "
3 만 이상의 사람을 죽이는 느낌.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이 참담
한 심정을 설명하기 힘들다 특히 얼마 전까지 스스로 인간이고자
노력했던 라한에게는 더 비참하게 다가을 수밖에 없었다.
"내게 불마법을 사용한 건 나한테 보여주기 위한 거겠지. "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하다. "
"근데 어쩌지? 위력은 굉장했지만 나보다 한참 약한걸.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상 로테마이어스도 몹시 놀라고 있었다.
웬만한 열기에는 뜨거움을 느끼지 않는 그가 라한의 공격에 뜨거움
을느낀 탓이다. 물론브레스보다그 열기가 약하기는 했다. 하자
만 레드 드래곤이 아닌 인간이 만든 열기라는 걸 감안하면 가히 놀
라울 정도였다.
"그런가? 실망시켜서 미안하군. "
"그럼 시작할까? 폴리모프 셀프!"
로테마이어스의 몸이 서서히 커졌다. 본체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싸울 채비를 하는 모습이 었다.
로테마이어스가 본체로 변하자 라한은 팔짱을 낀 채로 차분히
기다렸다.
"이제 끝났나?"
-크크, 그 거만한 말이 언제까지 나오나 두고 보겠다. 헬 파이
어!
스팡!
로테마이어스가 선공을 가했다. 그는 처음부터 가장자신 있는
공격을 퍼부었다.
헬 파이어
레드 드래곤의 전유물이면서 로테마이어스가 가장 좋아하는 공
격이었다. 또 그가 가장 강한 파괴력을 낼 수 있는 마법도 헬 파이
어였다.
"흥. 공간으로. "
헬 파이어가 쇄도해오자 라한이 코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공간
이동을 시전해서 슬쩍 피했다
-쥐새끼 같은 놈. 파이어 스톰!
콰콰콰쾅!
"바람의 장막. 물의 분노!"
라한은 로테마이어스가 시전한 파이어 스톰을 간단한 바람의 장
막으로 막아냈다. 곧이어 물이 치솟게 하는 공격을 로테마이어스
의 발아래에 시전했다
-헛, 블링크. 파이어 스피어!
스팟!
"공간으로. 바람의 칼날!"
라한은 로테마이어스가 시전하는 공격을 무리 없이 피해냈다.
마치 이런 공격이 올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운 행동이
었다.
-엡솔루트 실드. 아쿠아 링!
"바람의 창!"
라한이 시전한 바람의 창이 로테마이어스의 마법에 정면으로 충
돌했다.
콰콰콰쾅!
채챙!
충돌과 동시에 라한이 세라소드를 뽑았다. 근접전과 원거리 공
격을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원래 라한은 세라소드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검에 자질이 부
족해서 정확히 휘두를 수 없는 라한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드래곤이고, 그가 본체로 있을 때에는 가끔 사용
한다. 덩치가 너무 커서 검에 자질이 부족한 라한도 쉽게 맞출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으로. 하압!"
라한이 로테마이어스의 전방으로 공간 이동했다 그상태로 빠
르게 쇄도해서 로테마이어스의 눈을 찔러갔다.
-어림없다. 블링크!
로테마이어스가 피하자 라한이 세라소드를 상대에게 걱누었다.
"바람의 빛. "
라한의 시동어에 세라소드 앞에서 백색빛이 쏘아졌다. 로테마이
어스의 목을 향해 정확히 날아가는 바람의 빛. 갑작스러운 공격에
로테마이어스가 헛바람을 들이 켰다.
-헙! 엡솔루트 실드!
로테마이어스는 실드를 정면으로 세우지 않았다. 비스듬하게 만
들어서 라한의 공격이 옆으로흘러가도록만들었다. 그가 가진 많
은 전투 경험이 이런 변칙적인 방어를 가능하게 했다.
스핑! 콰콰쾅!
엡솔루트 실드에서 빗걱나간 바람의 빛이 멀리 보이는 숲을 그
대로 관통했다. 이에 나무가 찢걱나가고 땅이 움푹 파였다.
"젠장. "
로테마이어스가 쉽게 막아내자 라한이 욕설을 내뱉었다. 치명
적인 상처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생채기는 낼 수 있으리라 생
각했다. 한데 로테마이어스의 전투 경험이 라한의 예상을 뛰어넘
었다.
-이제 내 차례군. 헬파이어. 헬스톰. 랜드스피어!
로테마이어스가 세 가지 마법을 동시에 시전했다. 헬 파이어로
라한의 시선을 뺏고 헬 스톰으로 다급하게 만든 뒤 랜드 스피어로
부상을 입힐 생각이었다.
"바람의 장막. 바람의 장막. 물의 방패!"
라한이 세 가지 방어를 연달아 사용했다. 바람의 장막 두 개는
전방에 물의 방패는 발아래에 만든 라한. 로테마이어스의 의도를
미리 짐작한 모습이었다.
마법에 대해서 라한만큼 잘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그
니스에게 대륙에 존재하지 않는 8 서클 마법까지 배운 탓이다. 물
론, 로테마이어스가 드래곤의 전유물인 용언을 사용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용언이라는 건 거의 정신 마법이었기에 실상 전투에는
쓸 만한 마법이 별로 없었다.
-알고 있었군.
"랜드 스피어 말인가?"
랜드 스피어는 이미 9 천 년 전에 사라진 마법이다. 로테마이어
스도 드래곤 레어에 있는 고서를 통해 정말 우연찮게 찾아냈다. 어
떻게 보면 기연이랄 수도 있는 방법으로 찾아낸 게 랜드 스피어인
셈이다.
때문에 인간인 라한은몰라야정상이었다. 아니, 다른드래곤뿐
아니라 물질계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몰라야 정상인 마법이 랜드
스피어였다.
그런데 라한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자연스럽게 막아냈다. 한 치
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그건 이미 수천 년 전에 사라진 마법인데.
"훗, 너만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하압!"
라한이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강한 공격은 배제하고 약한 공격
을 파상적으로 퍼부어 로테마이어스의 이목을 분산시킬 생각이었
다. 그렇게 한참싸우다보면 언젠가 절호의 기회가을 것이라 믿
었다.
라한이 로테마이어스와 싸우는 장소에서 한참 떨어진 곳. 멍한
표정의 헬밍턴 후작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인간과 드래곤의 치
열한 싸움에 기가 질린 표정이었다.
헬밍턴 후작은 다행히 라한의 공격에서 목숨을 구했다. 늦잠을
자는바람에 조금늦게 도착한게 그의 목숨을살렸다. 대신, 그는
인간과 드래곤의 엄청난 싸움을 구경하는 목격자가 되었다.
헬밍턴 후작 외에도 라한과 로테마이어스의 싸움을 지켜보는 이
들이 있었다. 제라드와테세르, 슈라. 라한을따라가다가 뒤늦게
싸움을 발견한 것이다.
"이보게, 정령군. 라한을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주인? 괜찮아.
제라드의 말에 테세르가 관심 없다는 듯 대꾸했다. 마치 라한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드래곤하고 싸우고 있네. 돕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해. "
-그냥 드래곤이 아니라 드래곤 로드야.
"뭐, 뭐?"
드래곤 로드라는 말에 제라드가 경악했다. 드래곤의 싸움으로도
부족해서 드래곤 로드라니 황당하고 놀라워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봐. 제라드씨. 왜 그래?
테세르의 말에도 제라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드래곤
로드라는 말만으로 반쯤 얼이 빠진 듯했다.
-이봐. 제라드씨!
"어?어. 정령군. 왜 그러는가?"
제라드가 어벙한 말투로 대꾸했다. 아직도 놀람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 었다.
- 얼굴 표정이 왜 그래?
"아, 아닐세. 근데 정말 안 도와줘도 되겠는가? 저러다 죽기라
도 하면
제라드가 진심을담아걱정을표했다. 오래 같이 있지 않았지만
벌써 어느 정도 정이 든 모습이었다.
-주인이 부르면 모를까, 그게 아니면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야.
"그, 그래도. "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낫다니까. 슈라, 안 그래?
테세르가 옆에 서 있던 슈라를손가락으로 찔렀다. 이에 멍하게
라한의 싸움을 보던 슈라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 뭐가?
-넌 우리가 주인 싸움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 아니면 그냥
구경해야 한다고 생각해?
슈라가 턱을 괴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라한의 싸움 패턴을 보고,
자신이 싸움이 끼어들었을 때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봤다
-슈라, 뭐해?
-음, 그게 그거 같군.
-그게 그거라니? 뭔 말이야?
-구경하는 게 돕는 것 같다는 말이다.
라한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로테마이어스의 시선을 분산시
키고 있었다. 광견보와 신화력을 함께 사용하기에 가능한움직임
이었다.
한데 슈라는 그런 속도로 움직일 자신이 없었다. 좀 빠르다는
테세르도 라한의 움직임을 따라잡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결국, 싸
움에 끼어들어봐야 라한의 계획을 망치게 하는 결과만 가져올듯
했다.
-거봐, 제라드씨 슈라도 그냥 구경하는 게 낫다고 하잖아.
"이해할 수가 없군. 자네들은 라한의 소환물들 아닌가? 왜 자기
주인을 돕지 않지?"
제라드의 말에 테세르와 슈라가 동시에 인상을 찡그렸다. 제라
드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왜, 왜 그러는가?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가?"
-소환물? 누가 소환물이야? 내가 라한을 주인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우린 친구라고. 알아들었어? 젠장.
테세르는 소환물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약을통해
라한과 함께 다니고 있지만 둘 사이는 단순히 소환, 비소환으로 따
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함께 다니며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젠 소환물이라는 말보다 친구나 가족이라
는 말이 더 어울렸다.
죽여 버리고 싶군.
슈라의 한 마디에 제라드의 몸이 얼어붙었다. 제아무리 혈전사
라도 엄청난 덩치의 슈라는 무서운 듯했다.
"알, 알겠네. 내가실수했어. 정령군.골렘군.용서해주게."
-흥.
제라드의 말에 테세르가 코웃음을 쳤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
다. 이에 비해 슈라는 한 번 강하게 째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
도 없었다. 그런 행동에 제라드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거 참. 말 한 번 잘못했다가 죄인으로 전락하는군. '
라한과 테세르, 슈라. 이들 사이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많았다. 서로를 끔찍하게 아끼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은 서
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이들. 서로를 위험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
쓰면서도 때로는 의도적으로 위험에 방치하는 이들. 한 명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 항상 계산적으로 행동했던 제라드로서는 그들을 제
대로 이해하기 힘들 성싶었다.
베르타라스는 6 개월 전에 정령계에서 돌아왔다. 원래는한 5, 6
년 정도 머무르려 했지만 라한이 죽었다는 얘기 때문에 어쩔 수 없
이 돌아와야 했다. 정령왕들이 너무 예민해져 있어서 더 머무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베르타라스는 레어 안에서 자중하며 지냈다. 독서와 사
색 그리고 식사와잠, 이 네 가지만 거의 반복하다시피 한 베르타
라스였다.
그러던 그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뭐라? 정말 살아 있단 말이냐?"
"예. 아마도 그럴 겁니다. "
로테마이어스가 여기저기 세작을 심어 놓았듯 베르타라스도 많
은 드래곤들을 대륙에 풀었다. 개중에는 로테마이어스의 진영에서
그들의 정보를 캐는 드래곤도 있었다.
정오 무렵.
로테마이어스의 진영에 있던 드래곤이 베르타라스를 방문했다.
그리고 라한이 살아 있다는 정보를 알렸다.
"아마 그럴 겁니다? 대체 무슨 말이냐?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거지 아마 그럴 거라니?"
"로드께서 그 인간을 죽이기 위해 직접 가셨습니다. 지금쯤 죽
었을지도 모릅니다. "
"언제냐?"
" 네?"
"로드가 라한을 만나러 간 게 언제냐는 말이다. "
베르타라스가 언성을 높였다. 평소에는 항상 자상한 모습만 보
여주던 베르타라스. 그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앞에 선 드래곤이 놀
란 표정을 지었다
"오, 오늘 새벽입니다. "
"어디지?"
"그건 아직 잘 아카폴리안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
"알았다. "
어린 드래곤이 물러나자 베르타라스가 레어 안을 서성거렸다.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라한과 로테마이어스의 싸움. 누가 이기든 나아질 게 없는 싸움
이었다.
로테마이어스가 죽는다면 다른 드래곤들이 라한을 가만히 둘
리 없다. 자칫 전 드래곤과 인간의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는문제
였다.
"라한이 죽었을까?"
라한 한 명의 죽음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좋아하는
정령왕들이 어떻게 나을 지 알수 없었다. 정말 재수 없으면 드래
곤과 정령왕들이 충돌이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좀 더 일찍, 일찍 싸웠어야 했는데. "
고룡들 대부분이 수면 중일 때라면 로테마이어스가 죽어도 큰일
은 벌어지지 않는다. 결정권이 거의 베르타라스에게 있기에 그가
무마시킬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의 사자 퓨리트의 방문 이후, 고룡들 모두가 깨어난 상
태였다. 지금 대륙 곳곳에 흩어져서 가뭄 피해를 줄이려고 애쓰는
고룡들. 그들이 드래곤 로드의 죽음을 모른 척할 리 만무했다.
"가봐야겠어 . "
늦지 않았다면 싸움을 말릴 생각이었다. 늦었다 하더라도 큰 일
이 벌어지기 전에 무마시켜야 했다.
라한과 로테마이어스의 싸움에 천지가 진동했다. 땅이 갈라지고
하늘에 굉음이 터져 나왔다. 멀지 않은곳에 있던 숲은 이미 불타
서 재가 되었고 곳곳에 놓여 있던 바위도 녹아 내린 지 오래였다.
당연히 숯덩이가 되었던 나메라 왕국군의 시체도 가루로 변했다.
-쿠오오오오!
라한은 작은 공격을 계속 퍼부으며 픽해 다녔다. 너무 빠른 공격
에 로테마이어스도 많은 부상을 당했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체
력 소모를 심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시끄러! "
-죽여 버리겠다.
"맘대로 해라. "
라한도 왼쪽 어깨에 작은 부상을 당했다. 눈 먼 마법이 어깨를
스친 것이다.
-헬 파이어!
'또 저거군. 망할. '
"공간으로. "
쉽게 피해내기는 했지만 실상 라한이 제일 경계하는 마법이 헬
파이어였다.
단 한 방이면 몸이 완전히 녹아내리는 극도의 열기. 잠깐만 한눈
팔아도 그대로 끝이기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파이어 볼!
"바람의 장막!"
파이어 볼을 막아내는 라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의도적으로 힘
척하는 모습이 었다.
로테마이어스와 근 세 시간을 싸우면서 그를 죽일 기회가 몇 차
례 있었다.
하지만 팽팽한 전투를 연출하기 위해 기회가 올 때마다 흘려 버
렸다. 나름대로 세운 계획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끝내자. '
세 시간의싸움, 이 정도면충분할것같았다. 이젠끝을내도로
테마이어스의 호승심을 자극할 수 있을 듯했다.
"공간으로. 불의 폭발!"
로테마이어스의 마법을 계속 피하던 라한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해오던 작은 공격 난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동! 공간으로! 이동! "
라한이 좌우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다 갑자기 로테마이어스의
어깨에 찰싹 달라붙었다.
"끝내자, 이레이저! "
이레이저. 벨제르를 한 방에 보낸 그 공격이었다.
마계에서의 라한은 어느 정도 힘의 제약을 받았다. 그곳의 과도
한 대기가 라한의 행동을 무디게 만든 탓이다. 또 벨제르는 마계
내에서 최고의 힘을 발휘한다. 로테마이어스보다 두 단계 정도 윗
줄의 실력자라고 볼 수 있다.
라한은 제약당한 힘으로 로테마이어스보다 강한 벨제르를 죽였
다. 그가 만든 궁극의 공격법 이레이저를 이용해서 단 한 방으로
끝냈다.
로테마이어스가 이 공격을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콰콰콰쾅!
-쿠오오오오오!
라한의 공격에 로테마이어스의 어깨 뒤쪽에 터져나갔다. 로테마
이어스의 드래곤 스케일을 뚫고 내부를 관통한 것이다
쿠우웅!
엄청난 고통에 로테마이어스가 바닥에 추락했다. 눈을 둥그렇게
뜬 모습이 대체 이게 뭐냐고 묻는 듯했다.
라한이 쓰러진 로테마이어스의 몸 위에 섰다. 상처를 부위를 지
그시 밟은 채였다.
죽, 죽여라,
"한 가지 요구만 들어주면 살려주겠다 "
-크크크, 난 드래곤 로드 로테마이어스다. 비굴하게 인간에게
구걸하지 않는다.
로테마이어스의 이런 반응은 라한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을 길게 끌고 갔다.
"아깝지 않나?"
-무슨 소리냐?
"아주 미세한 차이로 내가 널 이겼다. 다시 싸워서 이기고 싶을
걸?"
닥, 닥쳐라.
로테마이어스가 당황한 기색으로 외쳤다. 너무 뻔한 반응에 라
한이 웃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로테마이어스도 라한과 다시 싸우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라한
이 근접전에 사용했던 이레이저. 그것만 막으면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조건 무지 간단한데. "
-헛소리하지 말고 죽여라.
"로이나가 너와 맹약을 맺었더군. 그것만 풀어주면 널 살려주겠
다. 그런 너도힘을더 키워서 나와싸울수있지. 어때?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 지?"
라한이 싸움을 길게 끈 것. 그래서 서로 팽팽한 실력이라고 연기
한 것. 이 모든 건 로이나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였다
-로이나. 흥. 허튼수작부리지 말고그냥죽여라
잠깐 생각하던 로테마이어스가 다시 고집을 부리고 나왔다. 살
고자 하는 의지보다 자존심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골치 아프네. 생각보다질기네. 어쩌지?'
이 정도면 될 줄 알았다. 무려 세 시간의 싸움으로 다시 싸우고
싶도록 만들었으니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한데 로테마이어스는
라한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고집이 강했다. 라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었다.
'미치겠군. '
"망할. 그냥 죽어라. 죽어. "
라한이 로테마이어스의 목에 손을 올렸다. 드래곤 하트가 위치
한 그 위치였다. 이 상태로 다시 한번 이레이저를 사용하면 로테마
이어스는 죽음을 면하기 힘들다. 드래곤 하트가 완전히 깨지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드래곤은 없으니 말이다.
"이레이
-쿠오오오오! 멈추게!
라한이 이레이저를시전하려 할때, 멀리서 포효하는소리와함
께 외침이 들려왔다 뒤늦게 알아채고 날아온 베르타라스였다.
"누구지?"
멈추게!
쿠궁!
-폴리모프 셀프!
베르타라스가 라한 근처에 내려왔다. 그 후 폴리모프를 시전해
서 인간의 모습으로 바꾸었다
"넌 누구지?"
"다행히 늦지 않았군 "
"누구냐고 물었다. "
라한의 얼굴에도 긴장이 어렸다 베르타라스의 몸에서 풍기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아서였다.
'뭐야? 로테마이어스보다 더 강하잖아. 저놈이 진짜 로드 아
냐'
드래곤은 나이로 강함이 정해진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 시간만
마나를 얻기 때문이다.
로테마이어스가 전투에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
만 베르타라스보다 한참이나 어린 나이였다. 자질로 에우기에는
둘 사이의 나이 차이가 너무 컸음이다
"베르타라스라고 하네. 그냥 늙은이라고 생각하게. "
"싸우려고 온 건가?"
"아, 아닐세. "
베르타라스가두 손을 내저었다.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거짓말
로 단정 짓기 힘들었다.
"그럼 용건이 뭐지?"
"로드를살려줄 수 없겠는가? 내 따끔하게 충고해서 다시 덤비
지 못하도록 하겠네. "
-베, 베르타라스님,
누워 있던 베르타라스가힘겹게 입을 열었다. 자신의 꼴이 너무
창피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내가 왜 살려줘야 하지?"
"그를 죽이면 자넨 드래곤 전체와 싸워야 할지도 모르네. "
지이이 잉 !
-흥. 누구 마음대로.
라한과 베르타라스 사이에 반투명한 영상이 나타났다.
"실피드?"
-실피드.
"네가 웬일이지?"
-나도 잊으면 안 되지.
- 나도.
-쩝.
실피드의 뒤를 이어 엘라임과 노아스, 샐리온도 모습을 드러냈
다. 바람의 정령왕과물의 정령왕, 땅의 정령왕은당장이라도뛰쳐
나갈 듯 다급한 모습이었다. 이에 비해 불의 정령왕 샐리온은 이
자리가 불편한 듯 안절부절못했다. 레드 드래곤 로테마이어스가
쓰러져 있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습이었다
"정령왕이 모두?"
-잘들어라. 베르타라스. 드래곤 일족전체가라한과싸운다면
너희들은 우리 정령들도 상대해야 할 거다.
"그 그런
예상은 하고 있었다. 정령계에서 그들이 보인 라한에 대한 과도
한 관심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렇게 전격적으로 나설 거
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거기다 정령왕과의 싸움도 아니고 정령들과의 싸움이라고 말했
다 그건 정령계와 드래곤 일족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야, 너희들 여기 왜 온 거야? 내가 불렀어?"
-후후, 라한 오랜만이야. 살아 있었군.
-쳇, 콱 뒈져 버리지 왜 살았냐?
물의 정령왕 엘라임은 그의 성격을 대변하듯 라한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반면, 무뚝뚝한 땅의 정령왕 노아스는 라한에게 핀잔을 놓
았다. 그렇지만눈빛만큼은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듯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하여간 저놈 싸가지하고는 에고. 이봐. 베르타라스라고 했
나? 이제 입장이 반대가 된 것 같군. "
"흐음. "
베르타라스가 침음성을 흘렸다.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던 로테
마이어스도 체념의 빛을 띠었다.
"로테마이어스를 살리고 싶다고 했나? 조건을 들어주면 살려
주지. "
"말해보게. "
"로이나. 내 조건은그게 전부야. 로테마이어스가로이나와한
맹약을 스스로의 입으로 취소하는 것. 그 정도면 괜찮은 거래 아
닌가?"
어차피 지금의 싸움부터 그 전의 과정 모두가 로이나를 구해주
기 위해서였다. 맹약으로한것이라 맹약의 당사자가아니면 풀리
지 않는 로이나의 구속. 그것만 해결되면 로테마이어스를 살려주
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로드. 어쩌겠는가?"
그냥 죽이라고 하십시오.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저
놈의 공격 패턴을 몰라서 졌다는 게 억울할 뿐입니다.
"이보게. 로드. 로이나를 풀어주게. 자네는 로드 아닌가?"
- 저보다 더 강한 로드가 나오겠죠.
로테마이어스의 고집에 베르타라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를
본 라한의 심정도 착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라한.
"어?"
-잠깐만 이리로.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라한을 조용히 불렀다. 이에 라한도 베
르타라스와 로테마이어스 모르게 천천히 다가갔다.
-우리를 이용해 봐.
"뭐?"
-넌 머리가 좋으니까 방법을 알 거야.
실피드의 말에 라한이 궁리를 시작했다. 잠깐 생각해 보자 방법
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봐. 로테마이어스. 만약 네가 로이나를 풀어주지 않으면 나
와여기 있는정령왕들. 그리고 정령계에 있는모든정령은드래곤
을 공격할지도 몰라. "
-무, 무슨 소리냐?우리 드래곤이 너와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
는데, 왜 정령이 먼저 싸움을 건다는 말이냐?
"왜? 드래곤은 먼저 싸움 걸어도 되고 정령은 안 돼? 웃기시네, "
뚜둑뚜둑!
라한이 목을 좌우로 꺾었다.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었다는 표시
였다.
- 내,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나?
"로이나 풀어 달라니까. 대체 몇 번을 말해야 돼!"
-로이나와의 맹약을 파기하면 정령들을 돌려보내겠나
로테마이어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신의 잘못으로
드래곤 전부를 사지로 몰수는 없는 일. 자존심을 버리더라도 드래
곤 일족과 정령계의 싸움은 막아야 했다.
"물론이지. 그리고 앞으로 나와 네 일에 정령들이 끼어들지 못
하도록 하겠어 어때?"
-라, 라한.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왜?
"이봐. 실피드, 노아스, 엘라임, 샐리온. 너희들은 정령왕이야.
물질계 일에 사사로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입장이라고. 알았어?"
-하지만 네가 죽으면 차기 바람의 정령왕이
"뭐?"
정령왕들이 라한을 살리기 위해 애쓴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라한
과의 친분 때문이다. 그에 의해 자연과 대화를 다시 시작하게 됐
고, 정령계가활력을되찾았다. 도움을받았으니 어느정도의 도움
을 주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라한이 절대 죽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단순히 친분 때문
이 아니었다. 차기 바람의 정령왕으로 라한을내정했다는것. 그래
서 그가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게 더 큰 이유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 그냥 가. 앞으로 물질계 일에 간섭하지 마. 정령계 내에
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을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자, 로테마이어스. 이 정도면 됐나? 빨리 로이나와의 맹약을
파기해라. "
정령왕들의 입을 막은 라한이 로테마이어스를 재촉했다. 지금
그에게는 다른 어떤 일보다 로이나의 자유가 우선이었다.
로이나와의 맹약을 파기한다.
"고맙군. 베르타라스라고 했나? 앞으로 웬만하면 부딪치지 말
자고. 실피드,노아스, 엘라임,샐리온. 너희들도돌아가봐."
라한은 정령왕들의 반응도 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더 말하지 말
고 그냥 돌아가라는 의미 였다
-에휴, 라한. 몸조심해라.
-그래. 넌 죽으면 안 돼.
-나쁜 놈.
-저놈은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다니까.
한 마디씩 내뱉은 정령왕들이 한 명씩 돌아갔다. 저마다 아쉬운
표정을 지은 채였다.
"라한. 고맙네. 매스 텔레포트!"
베르타라스도 로테마이어스를 데리고 사라졌다. 로테마이어스
는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라한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라한이 싫
긴 싫은 모양이다.
"죽여? 살려? 에이, 봐줬다. "
라한이 멀리 서 있는 헬밍턴 후작을 보며 중얼거렸다.
생각 같아서는 죽여서 입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사람을 너
무 많이 죽였다는 생각에 참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의 이름은 널리
알려진 터. 더 이상 입을 막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제라드씨. 이제 가죠. "
"그, 그러지. "
제라드가 어정정한 말투로 대답했다.
라한이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
번의 마법으로 3 만 이상의 병사를 죽였을 때도 그러려니 했었다.
드래곤 로드와 싸워 이겼을 때에도 이 정도로 놀라지는 않았다. 한
데 4 대 정령왕이 라한을옹호하면서부터 머리가복잡해지기 시작
했다. 이건 단순히 강하기만 한 게 아니라 배경까지 막강하지 않은
가? 세상에 이런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슈라가자, 테세르 이놈은어디 갔어?"
-테세르는 요기.
슈라가 몸을 돌려 등을 드러냈다. 테세르는 슈라의 몸 사이 관절
에 교묘하게 몸을 숨기고 있었다.
"너 뭐하냐?"
라, 라한주인. 왕들 갔어?
테세르는 4 대 정령왕이 나타난 그 순간에 슈라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상급 정령이 된 지 쾌 오래됐음에도 정령왕의 존재는 부담
스러운 듯했다.
"갔어. 가자, "
-어, 어.
라한이 제라드와테세르, 슈라를 데리고장소를 벗어났다. 헬밍
턴 후작은 라한 일행이 사라지고도 한참 후에야 정신을 되찾았다.
싸움이 끝난 지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리고 살이
떨려왔다.
"믿, 믿을수가 없어. 드래곤을 이기다니 거기다 4 대 정령왕을
모두
헬밍턴 후작은 어릴 적부터 검을 익힌 검사였다. 그래서 그 엄청
난 난전 중에도 싸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검을 익히면서 좋아
진 시력도 그런 목격에 한몫 거들었음이다
"가야 돼. 가서 알려야 돼 "
헬밍턴 후작이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리고 허둥지둥 수도로 달
려갔다.
나메라 왕국에서 블리아드 마을까지 오는 데에는 두 달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제라드의 걸음에 한계가 있어서 속도를 늦춘 탓이다.
물론, 슈라가 제라드를 어깨에 태웠다면 시간이 늦어지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슈라가 사용하는 힘의 원천은 라한의 신화력. 라한
이 신화력이 거의 무한대로 가지고 있으니 지치지 않는슈라의 이
동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었다. 한데 슈라는 라한과 테세르를 제외
한그 누구도 어깨에 올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라한도 제라드
옆에서 함께 걸어야 했다.
두 달의 시간,
그동안 나메라 왕국 동부와 수아나 왕국을 지났음에도 아무런
충돌도 없었다. 라한의 전투 사실이 이미 널리 퍼진 탓이다.
지금 카라한 필슨이라는 이름은 대륙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신인
의 출현, 영웅의 출현, 혹은 드래곤 슬레이어의 출현 등
등. 수많은 억측과 이야기가 카라한 필슨이라는 이름 앞에 붙었다.
"혈전사라고 으스대더니 겨우 그 정도로 지치는 거예요?"
"내가 약한 게 아니잖아. 저 무식한 골렘이 너무 강한 거지. "
지난 두 달 동안 라한과 제라드는 많이 친해졌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호칭도 편하게 하기로 했다.
"저도 걸었잖아요. "
"너도 괴물이잖아. 쳇. "
제라드가 고개를 홱 돌렸다. 짐짓 삐쳤으니 각오하라는 협박이
었다.
그렇지만 그런 협박에 넘어갈 라한이 아니었다.
"나이 먹고 뻑 하면 삐치고. 아이고. "
"뭐야? 내 나이가 어때서?"
제라드가 발끈하자 라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장난치고
있다는 걸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나이가 마흔이니까 중년이네. 이제 철들 때도 됐는데. "
"이놈이. "
"따라잡아 봐요. 중년 아저씨. "
"너, 거기 안 서?"
제라드가 눈을 부라리자 라한이 앞서 달려갔다. 그 뒤를 제라드
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따랐다. 친형제 사이처럼 친근한 모습
이었다.
한참 라한을 따라가던 제라드가 걸음을 멈췄다.
"헉, 헉. 라한. 잠깐만, "
"어라? 벌써 지친 거예요? 이거 실망인데. 중년이 아니라노년
이네. "
"그게 아니라. 앞에 절벽이
제라드가 그들 앞에 선 엄청난 높이의 절벽을 보며 말했다. 분명
라한은 고개만 넘으면 블리아드 마을이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라
한을따라가며 열심히 고개를넘었다. 한데 나오라는마을은나오
지 않고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 그들을 맞았다.
"아, 이거요?이거 결계예요. 이게 다 제 작품이라구요. 이런동
생이 자랑스럽지 않아요?"
"결계? 이게 결계라고?"
제라드가 라한을 지나쳐 절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절벽 면에
손을 올리며 천천히 쓰다듬었다
"진짜 절벽 같죠?"
"진짜 절벽 같은 게 아니라 절벽 맞잖아. 손에 딱딱한 감촉이 느
껴지는걸. "
"그것 역시 제 작품이랍니다. 어때요? 위대한 동생 둔 게 자랑스
럽죠?"
"그, 글쎄. 난 아직도 이게 절벽으로 보이는데. "
제라드도 라한이 만든 진짜 같은 결계를 알아채지 못했다. 제라
드가 마법사이면서 혈전사와 비슷한 경지에 올랐다면 이 절벽이 결
계라는걸 알아봤을지도모른다. 하지만제라드는검사였다. 아무
리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어도 마법사보다는 미세한 기운 변화에
무딜 수밖에 없었다.
"따라오기나 하세요. 슈라, 돌아가, 들어가서 부를게 "
-알겠다.
"빨리 가요. "
"어? 어."
라한이 제라드의 손을 이끌고 한 쪽으로 걸어갔다. 블리아드 마
을로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었다
"눈 감아요. "
"왜?"
"괜히 이상한 거 보고 발 헛디딜 수 있으니까. 그냥 눈 감아요. "
"알았다. "
제라드가 눈을 감자 라한이 그의 손을 잡고 한 걸음씩 이동했다
동굴 안에 설치된 미로를 따라 그를 인도하는 모습이었다.
한참 걸어가던 제라드가 갑자기 눈앞을 손으로 막았다. 감은 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느낀 탓이다.
"슈라. 나와라. 집이다!"
-으음. 역시 여기가 제일 편하군.
라한의 부름에 슈라가 나타나 주변을 둘러봤다. 집에 도착해서
인지 얼굴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다 온 거야?"
"예, 이제 눈 떠도 돼요. "
"흐음. "
제라드가 조심스럽게 실눈을 떴다.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
으로 나온 제라드. 그래서인지 실눈을 떴음에도 눈이 아려왔다.
"원래대로! 이제 좀 괜찮을 거예요. 눈 떠보세요. "
"오, 신기하군. "
라한이 신화력을 이용해 제라드의 동공을 풀었다. 정확하게는
흥채를 축소시켜 빛이 들어오는 걸 줄였음이다
"어때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군, "
"평화로운 곳이죠. "
원래 블리아드 마을에서는농토를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있는
농토도 집 앞에 조금씩 있는 게 전부라서 농촌 마을이라 부르기 힘
들었다.
목책을 마을 주변에 둘러놓고 그 안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땅
이 적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농토가 비약적으로 늘어나서 농촌 마을이라 불러
도 손색이 없었다. 이 모든 게 라한이 만든 결계 덕이었다.
"그런 것 같군. 나도 노년에는 이런 곳에서 지내볼까 생각중
이다. "
"벌써 노년이잖아요. "
"뭐야?"
"농담이에요. "
"이놈이 형을 가지고 노는군. 가지고 놀아. 첸. "
제라드는 투덜대면서도 라한에게서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싸
우고 투덜대는 것도 그들 나름의 친근한 표현인 셈이다.
"빨리 가요. "
"녀석. 알았다. "
라한과 제라드가블리아드 마을로 천천히 걸어갔다. 마을을향
해 걸어가는 라한의 얼굴 표정이 따뜻하게 변했다.
'얼마만이지?'
정확히 9 개월 13 일.
라한이 생사의 고비를 두 번이나 넘고 블리아드 마을로 돌아왔
다. 전 보다 더 강하고 더 성숙한 모습으로
도 서 명 : 1 서클 대마법사 10
지 은 이 : 양강
출 판 사 : (주)로크미디어
출판년도 : 2005 년 11 월 12 일
봉 사 자 : 박종란
라한, 움직이다
라한이 블리아드 마을에 들어서자 마을 사람들이 한 명씩 나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적대감 가득한 얼굴이었다. 라한을 이방인으로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라한과 함께
온 제라드도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서 적대감을 읽었다. 이에 그가 검에 손을 올린
채로 긴장한 빛을 보였다. 제라드가 전투 자세를 취하자 라한이 그의 손을 슬쩍
잡았다. 섣불리 나서지 말라는 의미였다.
라한. 어떻게 된 건가?
형. 잠시만요.
날 못 알아보는군.
라한은 블리아드 마을에서 지낼 때, 폴리모프 반지로 모습을 바꾼 상태였다. 하지만
마계에 갔다 오면서 원래 얼굴로 돌아갔다. 그래서 지금은 원래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이 모습을 처음 보는 블리아드 마을 사람들이 적대감을 가지는 게
당연했다.
"멈추시게. 여긴 어떻게 왔는가?"
마을의 대표인 익스멈 촌장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그 역시 라한을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오랜만입니다. 익스멈 촌장님. "
"나, 나를 아는.?"
뭔가 말을 하려던 익스멈 촌장이 말을 얼버무렸다. 뒤늦게 익숙한 목소리임을
떠올린 탓이다.
"저 라한입니다. "
"라.라한?"
라한의 대답에도 익스멈 촌장의 얼굴에서는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9 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실종되었던 라한이다. 어느 순간 다른 얼굴로 불쑥 나타나서 자기가
라한이라 하는데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예전과 같은 얼굴로 나타나더라도
재삼재사 의심했을 터였다.
"절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음, 이거 어쩌지? 아, 맞다. 블리아드 마을이 결계로
가려져 있는 거 아시죠? 제가 아니면 여길 어떻게 들어왔겠어요? 제가 직접 만든
결계니까 쉽게 들어왔죠. "
"그 정도 설명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걸 자네도 알 테지. "
"그건. 하아. "
단순히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라한이라고 단정 짓는 건 무리가 있었다. 마을
안에서 내통할 수도 있고, 또 뛰어난 마법사가 직접 뚫고 들어 올 수도 있는
문제였다. 예전에 라한도 뛰어난 마법사라면 이곳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아, 답답해. 이것들은 어딜 간 거야?"
사실 라한이라는 걸 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슈라와 테세르를 보여주는
거였다. 다른 누구에게도 없는 특이한 정령과 골렘. 이들만 보여주면 라한이 마렵게
해명하지 않아도 신분을 알릴 수 있었다. 한데 그들은 이곳에 오자마자 바뀐
블리아드 마을을 구경한다며 사라진 상태다. 아마도 마을 외곽지에서 뛰놀다가
라한이 사는 집으로 바로 들어갈 게 분명했다.
"라한에게는 특이한 정령과 골렘이 있네. 그들을 보여주게."
라한의 당황한 표정을 보며 익스멈 촌장이 핵심을 찔러 왔다. 익스멈 촌장도 라한을
증명하기 가장 좋은 방법으로 그들을 생각하고 있었음이다.
'어쩔 수 없이 역소환해야겠네. '
테세르와 슈라가 어디에 있든지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건 쉬운 일이다.
주인이 라한이기에 돌아가라고 한마디만 던지면 그들은 딱 소환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소환이라는 것 자체가 소환체에게 타격을 주는 행위이기에 웬만하면 하지
않으려 했다.
쿵쿵쿵!
라한아 막 테세르와 슈라를 딱 소환하려 할 때, 지축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라한의 등 뒤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주안. 나 왔다.
-라한. 주인.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테세르는 라한아 곤경에 처할 잘 알고 있었다. 라한이 오벨리아 팰리스에서 자신을
불렸을 때, 바꿔 모습으로 잠깐 어색했던 테세르. 자기가 한 번 겪은 일이기에 이런
일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하하하. 이거 참. "
라한이 어색한 듯 마리를 긁적였다.
라한은 평소에도 거울을 잘 보지 않는다. 씻고 나서도 손으로 머리를 대충 털고
다니는 성격이었다. 어차피 후드를 눌러쓰고 다닐 때가 많았기에 외모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이다. 항상 얼굴을 볼수 있는 제삼자보다는 이런 일에 무딜 수밖에
없었다.
-멋쟁이 촌장님. 안녕!
- 역시 이곳이 좋군.
테세르의 말에 슈라가 주변을 만끽하는 얼굴로 말했다. 블리아드 마을에 돌아온
것만으로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라한. 환영하네. "
"네. 촌장님. "
이제 슈라와 테세르가 나타났으니 라한의 신분은 확실해졌다. 그 어떤 신분증보다
더 확실한 신분증이 그들이었다.
사실 익스멈 촌장은 처음 라한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진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닐 경우 마을의 사활을 걸어야 할 일이기에
애써 모른 척했을 뿐이었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가?"
"그게 저도 설명을 드리고 싶기는 한데 알려서 좋을 게 없는 얘기라서요. "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게지 가서 차 한 잔 하겠는가? 아니면 일단 집에 가서
쉬겠는가?"
익스멈도 라한이 자신들과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내용까지는 캐묻지 않았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는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얘기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일. 라한과 관계된 일이면서
모르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라면 익스멈 촌장의 한계를 넘어선 일이라는 의미였다.
"일단 좀 쉴게요. 여독을 좀 풀어야 할 것 같네요. "
"그러게. 나중에 한 번 들르게. "
"예. "
라한이 공손하게 인사하고 집으로 향했다
라한이 대화하는 동안 제라드는 어정정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다. 라한과의
친분을 생각하면 자신도 뭔가 한마디 거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익스멈
촌장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 섣불리 끼어들기가 힘들었다. 자칫 끼어들었다가는
버릇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염려한 탓이다. 차라리 먼저 말이라도 걸어주면 그에
맞게 대답하겠건만. 익스멈은 라한 외의 사람에게는 관심도 없었으니 제라드로서는
참으로 불운한 일이었다.
라한이 집 앞에서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 모습에 제라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에고. "
"왜 그래?"
"형. 손님이 있는데요. "
라한은 집 근처에 왔을 때 누군가가 이미 와있음을 느꼈다. 그것도 아주 친숙한
기운이 었다.
"손님? 자네가 돌아왔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는 건가?"
-대체 왜 온 거야?
테세르가 불평을 터트렸다. 테세르도 안의 기운을 느낀 듯했다. 하지만 그리
반갑지는 않은 듯 얼굴이 잔뜩 찡그러져 있었다.
"일단 들어가죠. "
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테세르는 볼에 바람을 잔뜩 불어
넣은 채로 뽀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로이나. 나 왔어. "
"로이나?"
라한의 부름에 제라드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로이나라는 이름에 놀란 얼굴이었다.
'그녀가?'
로이나.
아는 이름이었다. 자신을 놀라게 했던 두 번째 인물. 신기에 가까운 검술로
베어울프를 베어 넘기던 여검사.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로이나는 라한을
찾는 중이었다.
"로이나. 나와! 안에 있는 거 알고 있어. "
삐걱!
"흠, 흠. "
로이나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나왔다. 들킨 게 어색한지 헛기침으로 만회하려는
기색이 보였다.
"로이나. 여기는 웬일이야?"
"먼저 자유를 찾아줘서 고마워. "
원래 로이나와 라한은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 라한의 어린 시절 대부분을 로이나와
함에 보낸 탓에 둘만큼은 허물없이 지내곤 했다. 그런데 오늘 만남은 서로가
어색함을 느꼈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
"그, 그건 그렇지만."
라한의 딱딱한 대꾸에 로이나가 당황한 빛을 보였다. 아주 반갑게 맞지는 않더라도
옛 친구를 대하듯 편하게 대할 줄 알았다. 자기가 라한을 생각하는 만큼 라한도
자신을 생각할 거라고 믿은 것이다. 한데 아니었다. 라한은 로이나에게 시종일관
냉담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지금까지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난 신세 지고 못사는 성격이야. 나 때문에 생긴 일을 마무리 지은 거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어. "
"그래도."
"더 할 얘기 없지?"
"어? 어."
라한의 짧은 질문에 로이나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제대로 된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럼 가봐. "
"알, 알았어. "
결국 라한의 입에서 가라는 말이 떨어졌다. 로이나는 어쩔 수 없이 알았다고
대답했다. 더 있을 핑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배웅 안 나갈게. 그럼 이만, "
라한이 자기 할 말만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라한이 사라지자 로이나가 그
자리에 굳은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이나. 뭐 해? 안 가? 잘 가!
"그래, "
테세르의 말에 로이나가 씁쓸한 표정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가 느낀 시름을
말해주는 듯 터벅거리는 발소리가 라한의 집 안에 울려 퍼졌다. 로이나가 멀리
사라지자 제라드가 라한이 들어간 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라한. 라한. "
"왜요? "
제라드의 부름에 라한이 뚱하게 대답했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아까 그 여자, "
"로이나가 왜요?"
"왜 그렇게 보냈어?"
"형. 그건. 에휴."
대답을 하려던 라한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제라드는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로이나가 누구던가? 자신을 두 번째로
놀라게 한 신비의 여검사가 아니던가?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기 전까지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말해봐. 왜 그렇게 보냈어? 그녀가 널 찾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전에도
너 찾으려고 엘퐁소 지방까지 찾아왔었어. 그때 나하고도 잠깐 동행했지.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얼마나 많은 베어울프들한테 공격받았는지 넌 모를
거다. 라한. 로이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되는
거야. "
"형. "
"왜?"
"나도.나도 사정이 있어요. "
라한이 처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꼬치꼬치 캐물으려던 제라드도 그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너무 서글퍼 보여서 묻는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래, 알았다. "


제라드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밖으로 나갔다. 괜히 큰 죄를 지은 느낌에 얼굴이
붉어졌다.
제라드가 나가자 라한이 침대에 몸을 묻었다.
'로이나. 미안해. 난 어차피 떠날 사람인걸.'
라한은 언젠가부터 로이나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게 사랑인지 어떤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립다는, 보고 싶다는 그런 감정이 몹시 위험하다는 건
잘 알았다. 자신은 언젠가 떠날 사람이기에.
벌컥!
-주인. 내가 쫓아 보냈다. 잘했지?
뒤늦게 들어온 테세르가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소리를 해댔다.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지냈으면서도 아직 라한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 테세르였다.
"누가 너보고 그런 짓 하래?"
-어? 그야 주인이 아까.
"시끄러. 혼자 있고 싶으니까 나가!"
라한이 짜증난다는 듯한 말투로 테세르를 내쫓았다 테세르는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 채 밖으로 쫓겨났다. 라한의 얼굴 표정이 너무 살벌해서 이유를
물어보지도 못했다.
라한이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누웠다. 아무 생각 없이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로이나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 없을 듯했다.
똑!똑!
막 잠이 들려던 라한의 방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오늘 라한은 마음
편하게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구세요?"
"라한 맞는가? 정말 라한인가 7"
밖에서 들린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감격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아, 에테로님이군요. 들어오세요. "
라한의 허락이 떨어지자 에테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눈에 가득한 눈물이 지금
그의 심정을 말해주는 듯했다.
"우.는 거예요?"
"자네. 살아있으면 살아있다고 기별이나 줄 것이지 이게 뭐 하는 건가? 난 자네가
정말 죽은 줄 알았네. 정말 죽은 줄 알았어. 그러다 얼마 전에 자네가 드래곤
로드와 싸웠다는 소식이 들려왔지.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더군.
외모도 내가 알고 있는 자네와 달랐거든. 한데 이렇게 내 눈앞에 나타난 걸 보니
자네가 맞구만. 외모는 달라졌어도 자넨 라한이 확실해. "
정보 길드원은 사람을 파악할 때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각종 가면이나
분장으로 외모를 쉽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폴리모프 마법으로도 외모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바, 외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자칫 잘못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정보길드원은 외모보다 목소리, 표정, 자주 행하는 습관이나
버릇을 먼저 따진다. 제아무리 외모를 바꾸어도 천성은 속일 수 없는 탓이다
에테로도 라한을 확인할 때 외모보다 습관과
버릇을 먼저 봤다. 거기다 밖에서 놀고 있는 거대할 덩치의 슈라와 정령 테세르.
라한이 아니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헤에, 이거 참. "
라한이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에테로의 반응에 라한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블리아드 마을 사람들은 라한이 죽을 뻔했다는 걸 몰랐다. 하지만 정보 길드의
수장인 에테로는 라한이 겪은 일을 다 알고 있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슬퍼했던가? 이 일을 다크시안에게 보고한 후, 카이렌을 죽일 음모까지 꾸민
사람이 에테로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그게 좀. 하하하. "
라한이 멋쩍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에테로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자네. 우리가 어떤 일을 꾸몄는지 알기나 하는가? 자네가 죽은 줄 알고 카이렌을
죽일 계획까지 짰단 말일세. "
"그, 그랬나요? 설마. 실천한 건 아니겠죠?"
라한도 다크라이더 길드가 대단한 곳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특히 그 정보력과 정보
분석 능력은 가히 최고라고 인정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라한이 아는 카이렌은 다크라이더 길드에 당할 만큼 어설픈 자가 아니었다.
그 어떤 함정을 파고, 또 매복이나 기습을 하더라도 모두 이겨낼 존재가
카이렌이었다. 다크라이더 길드가 카이렌을 공격하는 행위 자체가 오우거에게
덤비는 오크의 행동보다 더 무모한 짓이었다.
"이미 실행 중일세. "
"예?"
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테로의 말을 다크라이더 길드가 카이렌을 공격한
걸로 이해한 것이다.
"흥분했군. 진정하게. "
"지금 제가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카이렌을 공격하다니요. 아직도 카이렌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십니까? 어디죠? 지금 싸우는 곳이 어딘지 말씀해주세요. 제가
도우러 갈게요. "
"허허, 이 친구 참. 누가 공격했다고 했는가?"
"예? 아까는 이미 실행 중이라고."
라한의 떨떠름한 대답에 에테로가 웃음을 머금었다. 라한의 과민 반응으로 그도
자신을 걱정한다는 걸 느낀 탓이다.
"다크라이더 길드가 무슨 기사단쯤 되는 줄 아는가? 우린 쳐들어가서 싸우는 짓은
하지 않네. "
"그럼 암살?"
"보통은 그렇겠지. 근데 이번은 아닐세. "
에테로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에테로가 하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럼요?"
"이간질. 우리가 이번에 택한 방법일세. 이미 진행 중이지."
"이간질? 누구하고 누구를요?"
"맞혀보게. "
언뜻 생각하기로는 카이렌과 루이에 사이의 이간질 같았다. 완벽히 카이렌의 편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 루이에이니 말이다. 하지만 실상 그 이간질은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루이에의 배신 정도로는 카이렌을 위태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테로님이 이런 걸 모를 턱이 없는데. '
다크라이더 길드의 하부 조직이자 대륙 최고 정보 조직인 베사 길드. 이곳의 수장인
에테로라면 그의 정보 분석력도 예사롭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럼 카이렌의 실력과
루이에의 실력 차이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류카라한하고 카이렌? 얘들은 원래 적대 관계였는데. 그럼 둘을 정식으로 붙인
건가?'
"류카라한 일행과 카이렌 일행인가요?"
"후후, 맞네. 이미 어느 정도 성과도 거두었지."
"성과라면?"
"크리퍼트라는 자가 카이렌에게 목숨을 잃었네. 검은 측의 세력이 그만큼 줄어든
거지. 세력이 조금 더 줄면 회색 측 수장인 카이렌이 정면으로 치고 들어갈
상황이었지. "
'상황이었어?'
말투가 좀 묘하게 들렸다. 과거형. 쳐들어갈 상황이었지만 실제로는 국면이 다르게
흘러갔다고 이해할 수 있었다.
"상황이 변했나 보군요. "
"검은 측에서 회색 측, 그러니까 류카라한 일행이 카이렌 일행에게 눈을 심었더군.
핵심 인물이거나 그에 근접한 인물인 모양이야. "
"그래요?"
"아마, 오늘쯤 프라하가 죽을지도 모르네. "
뜬금없이 들리는 에테로의 말에 라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른 이도 아닌
프라하. 투바보다 먼저 만났던 친구이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프라하가 죽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카이렌이 프라하라는 자에게 어떤 일을 시켰어. 좀 먼 곳으로 가야 하는 일이었지.
근데 류카라한 일행들이 그가 가는 경로를 알아버렸어. 아마 오늘 쯤 프라하를
죽이러 갈 걸세. "
"망할. "
라한이 욕설을 내뱉었다. 프라하가 죽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프라하를
먼저 발견해서 살려야 했다.
"어딥니까?"
"어? 왜 그러는가?"
"류카라한이 프라하를 공격하는 곳이 어디죠?"
"아, 자네까지 도울 필요는 없네. 이미 죽었을 게야. "
"에테로님 ! "
참다못한 라한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무 다급해서 예의를차릴 여유가 없었다.
"자, 자네 왜."
"프라하가 어디 있는지 말씀해주세요. 빨리요. "
"알, 알겠네. 그는 대륙 동북부에 있는 레비안 산맥 북쪽에 있네. 바르쿠사라는
산골 마을에서 거사를 치른다고 들었네. "
"공간으로!"
에테로의 말이 끝나자마자 라한이 공간 이동을 시전했다. 너무 다급해서 인사마저
건너뛴 채였다.
라한이 사라지자 에테로가 한 손을 들고 어정쩡하게 섰다. 라한을 잡으려다 너무
빨리 사라져서 잡지 못한 거였다.
"이런, 더 중요한 얘기가 있는데. "
로테마이어스의 레어 안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드래곤 로드이며 절대 권력자인
로테마이어스가 라한에게 패한 탓이다.
"로드. 신경 쓰지 말게. "
"흐음."
베르타라스가 위로의 말을 던졌다. 그 말에 로테마이어스는 침음성으로 착잡한
심정을 드러냈다. 그 역시 라한에게 패할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로드. 이런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이제 잊게. "
"휴우우. "
벌써 한 달 이상 이런 상태였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은 로테마이어스.
제아무리 드래곤이라도 본체가 아닌 유희체로 긴 시간을 굶는 건 해로울 수밖에
없었다.
"로드. 이제 그만 정신 차리게. 이미 지난일일세."
스팟!
스으으윽!
베르타라스가 다시 위로의 말을 던질 때, 레어 곳곳에서 갖가지색이 터져 나왔다.
여러 속성의 드래곤들이 공간 이동해 올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로드. "
"로드! "
나타난 이들은 모두 고룡들이었다. 대륙 곳곳 011 흩어져서 유희 겸 대륙 도우미를
하다가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처음 로드가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만 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설마
드래곤 로드가 일개 인간에게 패했겠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소식을 듣고도
로테마이어스의 레어를 방문하는 건 계속 미루기만 했다. 하지만 같은 얘기가 계솔
들리고 또 정황이 너무 사실적이었다. 심지어 드래곤과 인간의 대결이라는 노래까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될 정도였다. 이쯤 되자 고룡들도 더 참기 힘들었다. 그래서
고룡들끼리 뭉쳐서 의논을 나누었고, 결국 오늘 다함께 이곳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로드. 허허허. 대륙에 묘한 이야기가 돌더군. 사실은 아니겠지?"
"그 얘기 정말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로드가 인간에게 패하다니. 너무 황당해서
웃음밖에 안 나오더군. "
고룡들의 말에 베르타라스가 손을 마구 저었다 말조심하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베르타라스. 자네 왜 그러는가?"
"쉿! "
"자네 행동은 꼭 꼭 그 얘기가 진짜인 것 같구먼. 하하하.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진. 아니겠지?"
"그 입 좀 조심하게. "
결국 베르타라스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 반응에 고룡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베르타라스. 자네 그게 무슨."
"여러 고룡님들. "
계속 듣고만 있던 로테마이어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저마다 떠들던 고룡들도
입을 다물고 로테마이어스를 바라봤다. 시원하게 대답해주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
이 말을 끝으로 로테마이어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제 모든 게 확실해졌다.
드래곤 로드 로테마이어스의 패배. 믿을 수 없는 사실에 고룡들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존경하는 베르타라스님 그리고 고룡님들 "
한창 이어지던 침묵을 로테마이어스가 다시 깨뜨렸다. 이에 멍해 있던 고룡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로테마이어스가 그들을 한차례 둘러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제가 로드 임무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로드의 지위를 물러나려 합니다. "
로테마이어스의 오랜 침묵은 이 말뜰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동안은 말을 꺼낼
용기가 없었다. 염치없이 반억지로 로드가 되어놓고 지금 와서 물러나려는 게
창피해서였다.
"로드.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가 로드 자리를 물러나다니. 자네가 물러나면 대체
누가 로드를 한단 말인가 7"
"죄송합니다. 베르타라스님. 그리고 여러 고룡님들. 전 더 이상 로드자리를 맡을
면목이 없습니다. 저 대신 로이나에게 로드자리를 맡기십시오. "
"로드. 그 무슨 무책임한 말인가? 자네가 일을 벌여놓고 지금에 와서 이 무슨."
"죄송합니다. 제가 무능하고 성급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
"어허, 이거 참. "
"흐음. "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더니 다시 침묵에 빠졌다. 개중에는 오래 전부터
로테마이어스가 로드 직을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한 고룡들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로테마이어스가 로드 직을 물러난다고 하자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런 침묵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로테마이어스를 한 달 이상 다독이던
베르타라스도 고룡들을 살피느라 입을 열지 못했다. 로테마이어스는 고룡들에게
한차례 입을 연후, 계속묵묵부답. 그리고 고룡들도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침묵으로 가장 곤란해하는 이는 단연 베르타라스였다. 누구 하나 말을
꺼내 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련만. 이도저도 아니게 되자 오히려 고룡과
로테마이어스 모두의 눈치를 살피는 입장이 되었다.
'미치겠군. '
다행히 베르타라스의 구원군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아카폴리안이었다.
"로드님. 베르타라스님. 아, 고룡님들도 계셨군요. "
"무슨 일이지?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
아카폴리안의 말에 베르타라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아카폴리안이 고마워 미칠 지경이었다.
"레비안 산맥 북쪽에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
"사건? 무슨 일이지?"
"카이렌 진영에 있던 프라하가 류카라한 진영에서 나온 놈들에게 공격당했습니다."
쾅- !
아카폴리안의 말이 끝나자 고룡 중 한 명이 바닥을 강하게 글렀다. 감히 드래곤의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레비안 산맥에서 싸우다니.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에 화가
치밀었다.
"웬만하면 로드에게 맡겨두려 했는데 안 되겠군. 내 이것들을."
"잠깐 기다리게. "
테르타라스가 발끈하는 고룡들을 만류했다. 이에 아카폴리안도 떼르타라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카폴리안. 프라하뿐이더냐? 아니면 카이렌도 있더냐?"
"프라하만 나타난 걸로 보입니다. "
"프라하? 문제는 그가 아니다. 카이렌이지. "
"그럼? "
베르타라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를 보며 로테마이머스가 한숨을 쉬었다.
베르타라스가 하려는 말이 뭔지를 짐작한 것이다.
"카이렌을 처리해야지, 이보게, 로드. 자네가 벌인 일 중에 라한에 대한 건 이미
패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겠네. 류카라한에 대한 일은 엄밀하게 말하면 로드가
만든 게 아니지. 하지만 카이렌에 대한 건 로드가 시작한 걸세. 그들에게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들은 세력을 키우지도 않았을 게야. "
"알고 있습니다. "
류카라한과 굴 fp 를 벗은 존재들은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해 세력을 만들었다 그
시발점이 로테마이어스이기는 했지만 그가 직접 만나서 협박하거나 공격한 적은
없었다. 또, 이미 죽은 굴레를 벗은 존재들도 로테마이어스 휘하의 다른 드래곤이
한 일이지 로테마이어스가 직접 움직이지는 않았다. 비록 로테마이어스의 명령
때문에 움직이기는 했지만.
그렇지만 카이렌은 시작부터 로테마이어스가 연관되어 있었다. 애초에 세력을 만들
빌미를 준 것이 로테마이어스의 선전포고인 셈이다.
"그럼 지금 로드 직을 그만두면 안 되지. 카이렌을 처리한 후에 로드 직을
그만두게. "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
베르타라스는 카이렌을 위험 분자로 규정지었다. 그도 카이렌이 대륙제패를 꿈꾸고
있음을 아는 탓이다. 또, 그 목적을 위해 루이나 왕국에 이미 손을 뻗었음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지. 오래오래, 신중하게 생각하게, 후후. "
"그럼 좀 쉬겠습니다. "
로테마이어스가 레어의 많은 방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베르타라스를
비롯한 고룡들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로테마이어스가 들어가자 베르타라스가 히죽 웃었다.
"일단 보류는 시켰는데 이제 어찌 되려나. "
베르타라스가 카이렌을 끌고 들어간 가장 큰 이유는 로테마이어스의 로드 직 유임에
있었다. 당장의 상황으로는 로테마이어를 로드 직에 붙잡아 둘 핑계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그가 로드 직을 더 하게 만들기 위해 카이렌을 끌어들인 것이다. 물론,
카이렌이 위험분자라는 것도 베르타라스의 생각에 한몫했다.

레비안 산맥은 대륙에 존재하는 산들 중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다. 그래서 레비안


산맥과 관련된 전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역사가 긴 만큼 상상력으로, 혹은
어느 정도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어 전설이 만들어진 것이다. 때로는
황당한, 때로는 신빙성 있는 전설이 가득한 레비안 산맥. 드래곤이 둥지를 틀고
있지 않았다면 이미 오래전에 인간들의 조사가 이루어졌을 터였다.
클라마트 분지도 그런 전설 속 지명 중 한 곳이다. 신이 숨을 토해서 만들어졌다는
조금은 엉뚱한 곳. 레비안이라는 이름의 산맥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특이하게 땅이
꺼져 있는 곳. 그래서 산속에 있으면서도 계곡이나 골짜기가 아닌 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클라마트 분지는 분지이면서도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기본 토대가 레비안
산맥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한데 지금 클라마트 분지에는 가득하던 나무가 단
하나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다. 누군가에 의해 부서지고 뜯긴 듯 처참하게 쓰러진
잔해만 남아있었다.
"으아아악! 차, 차라리 죽여라, "
황량해진 클라마트 분지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곧이어 지친 듯한 목소리가 힘겹게
들려왔다.
"아니, 아니지. 그냥은죽일 수없어,"
진득한 살기가 담긴 목소리가 대답했다. 비명을 지른 사람과 앙숙인 듯 적의가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크크크, 그래, 마음대로해라. 어차피 너희들에게 걸렸을 때 살아나는 건 포기했다.
"
"오호, 천하의 프라하가 포기를 하다니. 그럼 안 되지. 아, 설마 팔, 다리를 하나씩
잃어서 그런 건가? 에잉. 나머지 팔다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포기하면 안
되지. "
비명을 지르고 힘겹게 말을 내뱉은 이는 프라하였다. 어쩌다가 자신이 움직이는
곳을 류카라한 일행에게 들켰고, 결국 기습을 당해서 이런 처참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흐흐흐, 케이플, 어차피 너희들과 싸울 때 죽음은 각오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들은 왜 죽인 거냐? 너희들과 무슨 원한이 있어서 죽인 거냐! "
"그거야 경고였지, 뭐, 드워프도 끼어 있어서 쾌나 재미있는 살인이었어. 반항하는
맛이 제법 좋았거든. "
"미친놈. "
"이따위 세상에서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지. 어디. 이제 다른 쪽 팔도
잘라볼까? 아, 이번은 이걸로 자르는 게 좋겠어. "
이리아나 케이플.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가 등 뒤에서 톱을 꺼냈다. 한 뼘
길이의 접힌 톱이었다. 두 번 접히도록 만들어진 것이라서 완전히 펴면 꽤 커질
듯했다.
"이봐! 케이플! 멀었어?"
케이플이 톱을 꺼내 들었을 때,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굴레를 벗은 인간
잉글리아트였다.
"잉글리아트. 아직 안 갔나?"
"케이플. 우리 목적은 이놈을 죽이는 거였지, 가지고 노는 게 아니었다. "
"이건 내 취미 생활이다. 간섭하지 마라. "
"흥. 그럼 알아서 와라. "
잉글리아트가 약간의 협박이 담긴 말을 내뱉었다. 혼자 오라는 말. 텔레포트 없이
달려오라는 의미였다.
"이봐. 잉글리아트. 너무하는 거 아냐? 난 아직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고. "
"시간 없어. "
"그래도 너무하잖아. 어젯밤에 바르쿠사 마을을 박살 낸 것도 나였어, 또 이놈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유인한 것도 나였고. 너희들은 기다리면서 재미만 봤잖아.
그런데 이 정도도 이해 못 하는거야?"
케이플의 푸념에 잉글리아트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생각해보니 어젯밤부터
케이플만 고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처참한 광경을 계속 두고 볼 만큼
그의 비위가 좋지는 않았다.
"그럼 한 시간 후에 올 테니까 그때까지 처리해, 한 시간이면 충분하겠지?"
"그럼, 충분하지. 히히, 잉글리아트. 복 받으라고."
"훗, 그럼 한 시간 후에 보자고. 마나의 권능을 내 손에 담아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이동하려 합니다. 나에게 마나의 힘을, 내 몸에 공간의 권능을. 텔레포트!"
잉글리아트가 케이플을 한차례 쳐다보고 공간 이동 했다. 방해꾼이 사라지자
케이플이 다시 프라하를 노려봤다.
"크크크, 이제 갔군. 재미있게 놀아볼까?"
케이플이 다시 톱을 꺼내 프라하의 눈앞에 보였다. 날이 섬뜩하게 서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느껴졌다.
"이런다고 내가 겁먹을 거라고 생각했나?"
"얼마나 버티나 볼까?"
툭- !
케이플이 프라하의 남은 어깨 위에 톱을 올렸다. 그러자 프라하가 몸을 움찔거렸다.
당당한 척했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프라하였다.
"크크크. "
두루루룩!
"으아악!"
케이플이 톱으로 프라하의 팔을 잘랐다. 아니, 썰었다. 이에 프라하가 비명을
질렀다. 제아무리 프라하라도 이런 고통은 견디기 힘들었다.
"이번옌 다리를 해볼까?"
프라하에게 남은 거라고는 머리와 왼쪽 다리뿐이었다. 양팔과 오른쪽 다리를
케이플에게 잃은 것이다.
"멈춰라!"
스팟!
케이플이 다시 톱을 쓰려 할 때,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파공음이 빠른
속도로 커졌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였다
케이플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톱으로 날아오는 물체를 막았다.
채채챙!
"웬 놈이냐!"
"이런, 너무 늦은 거군요. "
'누구지?'
나타난 사내의 얼굴을 보며 케이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카이렌과 투바는 직접 만난 적이 있었고, 라한은 몽타주를 본 적이 있었다. 또,
드래곤들도 자주 바꾸는 몸과 얼굴은 그림으로 몇 번이나 익혔다. 한데 눈앞에
나타난 이와 비슷한 외모는 본 적이 없었다.
"넌 누구냐?"
"프라하님. 괜찮으십니까?"
나타난 사내의 인사에 프라하가 고개만 슬쩍 들었다. 몸이 거의 잘려 나간 상태라서
목을 움직이는 일도 힘겨운 모습이었다.
"흐음. 프라하님을 이렇게 만든 게 당신입니까?"
"크크크, 제법 한수하는 놈인 것 같군. 하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 "
나타난 사내의 말에 케이플이 살기를 흘리며 대답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드래곤은 아닐 터. 그럼 자신이 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빠른 속도로 강해진
잉글리아트조차도 아직은 자신의 아래라고 생각하는 케이플이었다.
"말투를 들어보니 당신이 한 짓이 맞는가 보군요. "
"크크, 이놈과 아는 사이인 것 같군. 그럼 먼저 너부터 죽여주지. "
"누구 맘대로?"
케이플의 말에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놀란 케이플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쓰러져 있던 프라하와 뒤에서 말했던 이가 함께 사라진 후였다.
"누, 누구냐?"
"우리 스승님께 무언가를 물어보려면 좀 공손하게 말해야죠. 그러지 않으면 우리
오빠가 화낸다구요. "
이번엔 왼쪽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여자의 목소리였다.
"누구냐?"
"어머, 어떻게 같은 질문만 계속하실 수 있죠?"
"닥쳐라! 계집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
케이플의 눈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어린 소녀에게 농락당한 게 그를 분노케 한
듯했다.
"어머나, 무서워라. "
"에일린. 그만하고 물러나거라. 시스마란. 네가 처리해라."
"네, 스승님. "
시스마란. 오래전 베르네미스를 따라 사라졌던 그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예전보다 한결 성숙하고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흥, 다 덤벼도 시원찮을 것들이."
"제가 먼저 공격하겠습니다. "
시스마란이 케이플의 말을 끊었다. 그의 눈도 케이플 못지않게 빛나기 시작했다.
프라하의 참담한 모습에 화난 듯 보였다.
"누구 맘대로. 하앗!"
"블링크! "
케이플이 왼손에 톱을, 오른손에는 검을 들고 시스마란에게 달려왔다. 시스마란은
단순한시동어 영창으로 공간 이동했다. 잉글리아트마저도 주문을 외워야 고위
마법을 쓸 수 있는 바, 한데 시스마란은 아무런 준비 동작 없이 시동어만으로 상위
마법인 블링크를 시전했다.
"어, 어떻거."
"프라하넙이 다친 걸 형님이 아시면 더 비참해질 겁니다. 그냥 제 손에 곱게
죽으십시오. "
"닥쳐라!"
케이플이 고함을 지르자 시스마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안쓰럽다는 듯
측은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어쩔 수 없군요. 블링크!"
스팟! 채챙!
" 크윽! "
시스마란이 공간 이동으로 케이플의 뒤에 나타났다. 그리고 곧바로 검을 휘둘러
케이플을 공격했다. 마법과 공격을 동시에 하는 특이한 모습이었다.
"어허, 저놈 또 저렇게 싸우는군. 내 그렇게 일렀건만."
"내버려 두세요. 오빠 방식이잖아요. 빨리 이 사람이나 치료하세요. "
시스마란은 7 서클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 아니, 7 서클마스터마법 전부와 용언 마법
몇 가지를 배웠으니 그 이상의 경지라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특이하게도 검
쓰는 걸 좋아했다. 상대아주 약하면 검만으로, 상대가 적당히 강하면 검과 마법을
함께 쓰는 게 지금의 시스마란이었다. 베르네미스는 그런 시스마란에게 몇 번이나
충고했었다. 마법을 배웠으면 마법사처럼 싸우라고, 마법만사용해야 마법이 더 빨리
익숙해진다고, 그렇게 충고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데도 시스마란은 도무지
검을 포기할 줄을 몰랐다. 어릴 때 가졌던 기사의 꿈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아이고, 이놈은 이미 늦었어. 그리고 사람이 아니라 라이칸드로프다. 저기 있는
저놈하고 같은 종족이지. "
"어머나. 그래요? 근데 모습이?"
"폴리모프의 반지를 착용하고 있어서 그래. 특급 마법 무구지. "
"근데 어쩌다가 둘이 싸우게 된 거예요?"
"글쎄다 이놈아! 빨리 처리해. 시간없다. "
"예. "
케이플이라는 강자를 상대하면서도 시스마란은 여유가 있었다. 베르네의 용언
마법과 마법 무구 덕에 몸놀림과 마나 반발력, 동체시력이 향상된 탓이다. 거기다
집중력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된 탓에 주문 없이 시동어만으로 마법을 시전할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지금 실력만큼은 시스마란이 케이플을 압도하고 있었다.
라한의 인챈트 실력이 놀랄 정도로 향상된 후, 베르네도 나름대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베르네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시간을 제외하면 남는 시간 전부를 인챈트에
매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지금 베르네의 인챈트
실력도 예사롭지 않았다. 문제는 가끔, 아주 가끔씩 엉터리 마법 무구가 나오거나,
아예 시전되지도 않는 물품이 나온다는 거였다. 그래도 예전에 1 서클 마법 무구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성과라고 볼 수 있었다.
"헉, 헉. 넌누구냐?"
"네 애비다. "
대답은 시스마란이 아닌 구경하던 소녀에게서 나왔다. 그녀 역시 시스마란이 패할
거라는 건 전혀 생각하지 않은 듯 느긋한 얼굴이었다.
"이놈
"년이지. "
"이."
"한눈팔 시간 없을 텐데요. 블링크!"
시스마란이 다시 공간 이동으로 케이플의 뒤에 나타났다. 그리고 이어진 쾌검. 미처
다 피하지 못한 케이플의 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크윽! "
"한눈팔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이제 끝내야겠군요. 하앗! "
시스마란이 검을 고쳐 잡고 빠르게 쇄도했다. 이번에는 마법이 섞이지 않은 검사
고유의 묵직한 검이었다.
카카캉!
투칵!
케이플은 시스마란이 휘두른 검을 막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검의 재질이
달라서인지 금세 부러지고 말았다.
"컥!"
서걱!
검이 부러지자 시스마란의 검이 케이플의 목을 그대로 갈랐다. 순간 움찔하던
시스마란.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휘휘 저으며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았다.
"또 살생을 했네요. "
"이놈아 라한을 도우려면 이보다 더한 짓도 많이 해야 할 거다. 빨리 가자. "
"그렇.겠죠. "
시스마란이 7 서클 마법을 마스터한 건 1 년 쯤 전이었다. 그때 그는 바로 뛰쳐나가서
라한을 도우려 했다. 하지만 스스로 뭔가 부족하다는 걸 느끼고 예전에 배우던
검술을 다시 익히기 시작했다. 로이나에게 전수받은 검술이었다.
그렇게 한창 검을 수련하고 있을 때 라한의 사망 소식이 들렸다. 시스마란은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로 시름에 젖어 지냈다. 검술도손에서 놓고 마법도 손에서 놓았다.
자기가 익힌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듯 한심한 모습이었다. 베르네는 고민 끝에
시스마란에게 용언 마법 몇 가지를 가르쳤다. 뭔가를 배우면서 삶의 의욕을
되찾으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몇 달 전들려 온 라한의 생존소식. 시스마란은 그길로
베르네를 이끌고 판트리아 대륙으로 넘어왔다. 라한을 돕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렇게.
"할아버지. 이 사람 죽겠어요. "
"시, 시스.마란?"
거의 죽어가던 프라하가 한마디 내뱉었다. 시스마란의 얼굴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예. 접니다. 프라하님. 조금만 참으세요. 곧 고쳐 드릴게요."
"나, 나는.나는 틀렸어. 라, 라한을 도와줘. "
"먼저 치료부터 하고 형님을 도우러 갈 생각입니다. "
"카.이렌. 함.정.알고. 나도 마음이 흔들. 미안하. 전해."
프라하는 말을 다 잊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시스마란이 조심스럽게 프라하의
눈을 감겨줬다.
스승님. 오빠. 이 사람, 아니 이 라이칸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죠?
글쎄다.
아무래도 형님을 빨리 찾아야겠습니다.
함정이라는 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이미 한 번 카이렌에게 죽을 뻔한 라한.
이번에도 카이렌에게 당한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야겠군. 가자. 매스 텔.
카이렌이 있는 곳으로 가주십시오.
어? 라한 먼저 안 보고?
카이렌부터 처리해야겠습니다.
뭐, 어차피 목적지가 같으니까. 텔레포트!
베르네미스도 다급함을 느끼고 서둘러 공간 이동 했다. 프라하의 시신을 수습해주는
게 예의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시스마란 일행이 사라지자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바닥에 있던
돌과 흙들이 골렘으로 변했다. 케이플이 죽으면서 계약되어 있던 골렘이 만들어 진
것이다.
-주인이 죽었군. 흐음.
에고가 담긴 보석이 깨지지 않는 이상 소멸되지 않는 게 골렘이다. 때문에 계약자가
wrn 으면 그 자리에서 다른 주인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라한의 분노
원래의 바르쿠사 마을은 평범한 시골 광산 마을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평범하다고 보기 힘든 마을이었다. 인간과 드워프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 터전이 된
탓이다.
심심찮게 드워프를 볼 수 있는 곳. 대륙에 몇 안 되는 이 종족과 인간의 공동 터전.
라한이 밝은 빛을 뿌리며 이곳 바르쿠사 마을에 모습을 드러냈다.
늦은. 건가?
주변을 둘러보며 라한이 낮은 음성을 내뱉었다. 주변 풍경이 너무 끔찍해서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온통 시체가 가득했다. 인간은 물론이고 드워프의 시체까지 온 사방에 가득 차
있었다. 여기저기 위치한 집들을 온통 부서져 있었고 그나마 멀쩡한 집들에는
불길이 타오르는 중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라한도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프라하! "
라한이 두 손을 입 주위에 모으고 크게 외쳤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그 바람이 불길에 부딪히는 소리뿐이었다.
"프라하!"
한참 외치던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주변에 기운을 퍼트려 생존자가 있는지
찾는 행동이었다.
"없, 없.어. 프라하! "
라한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프라하를 찾기 시작했다. 한데 아무리 찾아도 프라하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프라하! 응?"
다시 라한이 프라하의 이름을 외쳤을 때, 멀리서 마나가 유동하는 게 느껴졌다.
마나 유동의 정도로 봤을 때 상당히 고위 마법이 시전된 것 같았다.
"프라하. "
라한이 광견보를 시전해서 빠르게 달려갔다. 시체는 타 넘고 건물은 날아서 넘었다.
또, 불타는 곳은 그대로 뚫고 지나가며 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어느 정도 달려가자 분지처럼 파인 곳이 나타났다. 그리고 분지중앙에 서 있는
골렘을 발견했다. 의아한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자 바닥에 쓰러진 처참한 프라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프라하!"
라한이 프라하에게 달려가서 그를 안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처참한 모습을 보자
저절로 발걸음이 멈췄다.
"프.라하. "
프라하의 오른팔과 오른쪽 다리가 깨끗하게 잘려 나가 있었다. 또, 왼팔은 뜯겨
나가 있어서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프라하. 어엉, 어엉."
라한이 프라하의 상체를 부여잡고 오열했다. 프라하의 죽음이 자기 잘못인 것
같았다 자신이 조금만 일찍 왔다면, 아니 애초에 카이렌에게 당하지 않았다면
프라하가 이런 처참한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죽여 버리겠어. 반드시, 반드시.죽여 버리겠어."
라한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태어나서 이 정도의 살기를 뿜어 낸 적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카이렌에게 기습당해서 죽음의 위기에 놓였을 때에도 이 정도로
분노하지는 않았다.
한참 울던 라한이 프라하를 바닥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프라하의 몸이었던 부분으로 생각되는 걸 하나씩 주웠다.
시스마란과 베르네, 에일린이 나무가 우거진 숲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스마란은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돌아보며 자세를 낮추었다. 카이렌이 있는 곳이라 생각했기에
전투 자세를 취한 것이다.
"스승님. 여기가 어디죠?"
"아까 있던 곳에서 남쪽으로 한참 내려왔지. "
"여기 카이렌이 있나요?"
"아니. "
베르네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를 보며 시스마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여긴 왜 온 거예요?"
"여기가 레비안 산맥 남쪽이거든. 고룡들이 특히 많은 곳이지. "
레비안 산맥에는 대륙에 사는 드래곤의 반 이상이 살고 있다. 레비안 산맥을 드래곤
산맥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레비안 산맥 전 부분에 드래곤이 고르게 퍼져있는 건 아니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거대한 산맥인 만큼 그 지형도 가지각색인 레비안 산맥. 그중 남부는
드래곤에게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힌다. 심부름시키기 편한 드워프, 엘프들이 많이
살고 있고, 먹이라고 할 수 있는 몬스터가 상당히 많이 분포되어 있는 탓이다.
드래곤들 사이에서 권력층이라고 할 수 있는 고룡들. 그들이 레비안 산맥 남쪽에
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요?"
"카이렌이 어디 있는지 물어봐야지 "
"카이렌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신 거 아니었어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7"
"참 나, 스승님을 믿은 제가 바보였습니다. "
시스마란이 실망했다는듯 말했다. 레비안이 그 말에 발끈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듣고 있던 에일린의 말이 더 빨랐다.
"오빠. 그만 하세요.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철든 거잖아요. "
"뭐, 뭐야?"
"그래, 에일린. 네 말이 맞다. 예전에 비해 발전했으니 참아야겠지. "
"망할. 어쩌다 내 용생이 이리 꼬였누. "
시스마란의 결정타에 베르네가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시스마란에게 정체를 들킨
후부터 줄곧 열세를 면치 못했던 베르네. 자신이 드래곤으로 태어난 게 이렇게 싫은
적이 없었다.
"스승님, 그럼 이제 어쩔 거죠?"
"여기서 저쪽으로 조금만 가면 드래곤 로드의 레어가 나오거든. "
"로드한테 물어보자구요? 그거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드래곤 로드라는 말에 시스마란이 놀라 되물었다. 그 역시 자신의 실력이
로테마이어스보다 한참 부족하다는 걸 아는 것이다.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좋은 꼴 보기는 힘들겠지. "
"그럼요?"
"아카폴리안이라는 놈한테 물어볼 생각이야. 로드의 심복이라고 봐도 무방한
놈이거든. 정보를 담당하고 있어서 카이렌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거야. 아,
맞다. 이번 기회에 라한이 어디 있는지도 물어봐야겠다. "
"순순히 말해줄까요?"
시스마란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그의 물음은 당연했다. 시스마란과 베르네는 어디까지나 라한의 편이었다. 로드의
심복이라는 아카폴리안이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라한의 편에게 정보를 제공해줄 리
만무했다
"가르쳐줄 수밖에 없을 거야. "
"왜요?"
"얼마 전에 사건이 있었거든. "
"사건?"
"크크크, 푸풋, 푸하하하하."
베르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을 참기 힘든 듯 배꼽까지 잡은 상태였다.
"스승님 왜 그러세요?"
"오빠. 스승님이 드디어 미쳤나봐요. 하긴, 전에도 좀 미쳐 보이시기는 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증세가 나타나네. "
"누가 미쳤다는 거냐? 쳇. "
에일린의 말에 베르네가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에일린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웃음도 이미 멈춘 채였다.
"스승님. 대체 왜 웃으신 거예요?"
"아, 얼마 전에 라한이 큰일을 해냈거든. "
"어떤 일요?"
"로드를 박살냈어. "
" 예?"
베르네의 대답에 시스마란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에일린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입을 떡 벌렸다.
에일린과 시스마란도 로테마이어스의 실력은 익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이 아는
대로라면 로테마이어스의 강함은 거의 신에 비견될 정도였다. 물론 과장이 약간
섞인 채로 들었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강함이 상상을
초월함은 분명했다.
그런 로테마이어스를 라한이 이겼다. 결국 라한이 로테마이어스보다 강하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라한의 강함이 시스마란과 에일린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라는 말도
되었다.
"사실이야. 후후, 얼마 전에 들은 얘기지. 고룡들이 찾아가서 한바탕 했다는 거
보니까 사실인 모양이야. "
"역시 라한 형님은 대단해. "
시스마란이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라한이라면 죽고 못 사는 시스마란다웠다.
"핏, 로드가 약했을 거야. 오빠. 로드하고한번 싸워봐요. 오빠가 이길 거예요. "
"아서라. 시스마란이 아무리 강해도 로테마이어스한테는 어림도 없어. 나한테도 못
이기는 놈이 무슨, "
"말도 안돼요. 어떻게 오빠보다 강한사람이 있을 수 있죠? 스승님이야 종족이
다르니까 이해한다고 쳐도 같은 인간이 오빠보다 강하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
에일린은 시스마란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스마란이
라한을 칭찬할 때에도 한 귀로 흘려들었다. 마음속으로는 오빠가 된 시스마란이
가장 강하다는 생각을 굳게 한채로 말이다.
그런데 이젠 라한이 더 강하다는 게 증명되었다. 드래곤을 꺾은 라한. 시스마란은
베르네보다 한 수 아래의 실력이었으니 변명할여지가 없었다.
한데도 에일린은 시스마란보다 강한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우겨서 시스마란을 가장 강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음이다.
"에일린. 날 높게 봐주는 건 고맙다만 예전부터 형님이 나보다 강했다. 난 형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이었어. "
"오빠. 분명 속임수를 썼을 거예요. 혹시 알아요? 한 오백 명 정도 숨어 있다가
공격했을지. 아니다. 한 오천 명 정도 됐을 거야. 분명해. "
에일린의 고집에 시스마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말해봐야 먹히지 않을 게
분명한 일. 괜히 입씨름해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스승님. 근데 형님이 로드한테 이긴 거하고 아카폴리안이 무슨 상관이 있어요?
오히려 한 번 패했으니 더 싫어할 것 같은데요. "
"로드가 라한한테는 졌지만 카이렌이 남았잖아. 그가 시작한 일이니 카이렌을
죽이는 것도 그가 할 일이야. "
"그런데요?"
"근데 로드는 라한한테 당한 부상이 아직 남아있거든. 제대로 싸우기 힘든 상태지.
물론 카이렌하고 싸운다고 해도 지지는 않겠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게 분명해. "

로테마이어스의 몸에는 라한에게 당한 부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로드의 강한


마법으로 치료했는데도 완전히 낫지 못했다. 라한의 신화력 때문에 회복이 더딘
탓이다. 물론, 행동에 큰 제약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부상이
남아있다는 게 중요했다.
"부상이 심한가요?"
"아니. 거의 다 나았을거야. 근데 아카폴리안의 입장은 그런 게 아니지 로드가
부상당한 몸으로 싸우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을 거야. 충신이거든. "
"그럼. "
"우리가 살살 구슬려서 물어보면 말해줄 거야. 카이렌을 우리가 처리하길 바랄
테니까. "
"그렇군요. "
베르네의 긴 설명에 에일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머리가 좋았나?' 라며
의아해하는 얼굴이었다.
"기다려라. 혼자 만나고 올 테니. "
"같이 안 가구요?"
"넌 인간이잖아 잘못하면 말도 꺼내기 전에 싸움부터 날지도 몰라. "
"그러네요. 그럼 여기서 기다릴게요. 다녀오세요."
"그래. 텔레포트! "
베르네가 마법을 사용해서 종적을 감추었다. 그가 사라지자 에일린이 따분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만만한 상대가 없어지자 심심했던 모양이다.
"에일린. "
"응. 오빠. "
시스마란의 부름에 에일린이 눈을 깜빡거리며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시스마란이
자기와 놀아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의 눈빛이었다.
"나도 잠깐 어디 좀 갔단 와야겠다. "
"나도 같이 가요. "
"개인적인 일이라서 혼자 갔다 오고 싶어.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니까. "
베르네는 시스마란과 에일린에게 무척 소심한 드래곤으로 찍혀있었다. 다른
드래곤이 듣는다면 아마 '그럼 그렇지.'라고대답할지도 모른다.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소심한 드래곤으로 유명한 베르네였으니 말이다.
"대체 어디 가는데요?"
"예전에 살았던 곳에 잠시 가보려고. "
베르네는 기사 수련을 나온 뒤부터 고향에 가보지 못했다. 벌써 수년 동안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셈이다. 이번에 잠깐 짬이 생겼으니 고향을 방문해볼
생각이었다. 딱히 누군가를 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막연한 향수. 고향에
대한그리움이 시스마란의 감성을 자극한 것이다.
"힝. "
"금방 올 테니까 말벙 피우지 말고 기다려. "
"아, 맞다. 그럼 아까 거기로 데려다주세요. 아까 죽은 그 사람, 아니
라이칸드로프. 화장해야겠어요. "
"아, 맞다. 깜빡했네. 근데, 괜찮겠어? 끔찍하지 않아?"
"오빠도참. 스승님이 제 앞에서 먹은 몬스터가 수천 마리는 넘을 거예요. 우걱우걱
뜯어 먹는 걸 직접 봤던 제가 그 정도를 끔찍해하겠어요?"
원래 에일린은 베르네의 정체를 몰랐다. 그래서 베르네도 에일린 앞에서만큼은
언행에 신중을 기했다. 하지만 비밀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 시스마란에게 정체를
들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에일린에게도 장체를 들키고 말았다. 베르네와
시스마란의 대화를 에일린이 엿들은 것이다.
처음에 엄청 놀랐던 에일린. 하지만 그 놀람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탓에 드래곤의 무서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베르네가 에일린을 약 올리고 싶을 때 몬스터 뜯어 먹는 걸 보여줬다 여린
에일린이었기에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무섭고 끔찍한 것도 자꾸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베르네의
약올림이 계속될수록 에일린도 끔찍한 모습에 점점 익숙해졌다. 이제는 웬만큼
처참한 모습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런가? 하여간 베르네 스승님은. 어휴. "
에일린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그녀를 아끼는 시스마란의 입장에서는 가슴 아픈
얘기였다. 아직 세상에 대해 깨닫기도 전에 끔찍한 모습부터 익숙해진 에일린이지
않은가? 그런 변화가 달가울 리 만무했다.
"됐어요.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
"그래. 알았다. 조심해야 돼. 위험하면 그 반지 바로 사용하고. 알았지?"
시스마란이 말한 반지는 베르네가 만든 마법 물품 중 하나였다. 푸른색, 붉은색. 한
쌍으로 된 것으로 붉은색 반지를 사용하면 푸른색 반지가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지금 푸른색 반지는 시스마란이 착용하고 있고, 붉은색 반지는 에일린이
착용하고 있다. 011 일린이 사용하면 언제든지 시스마란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예, 알았어요. "
"눈 감아. 내 손에 공간의 힘을 빌려 권능을 담는다. 마나의 권능, 공간의 힘,
그대의 힘으로 에일린을 이동시켜라. 텔레포트아더!"
에일린이 눈을 감는 걸 확인하고 시스마란이 용언 마법을 사용했다. 일반마법으로는
8 서클. 시스마란 능력 이상의 마법이었다. 때문에 용언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에일린을 보낸 시스마란이 몸을 휘청였다. 아직 완전하지 않은 용언을 사용한
후유증이었다.
"역시 용언은 힘들군. 이제 나도 가볼까. 내 손에 공간의 힘을 빌려 권능을 담는다.
마나의 권능, 공간의 힘. 그대의 힘으로 공간을 건너뛰어라. 텔레포트! "
시스마란도 공간 이동으로 사라지자 횅한 바람만 숱에 가득했다.
프라하의 죽음을 확인한 라한. 한참 돌아다니면서 줍자 프라하에게서 사라진 몸을
대부분 찾을 수 있었다.
"저건 누구지?"
돌아다니다 보니 목이 잘린 라이칸드로프가 보였다. 아주 깨끗하게 잘린 단면이
상당한 실력자에게 당했음을 짐작게 했다.
"라이칸드로프면 프라하의 친구인가? 아니면 굴레를 벗은 놈이겠지. 그래서 골렘이.
흐음. "
라한은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리아나
케이플이나 돈네리아 미스티크의 얼굴을 몰랐다. 죽은 케이플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멍하게 서 있는 골렘을 보자 죽은 이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프라하가 죽었고 미스티크나 케이플 중 한 명도
죽었다. 한 명이 불구가 된 상태였으니 죽은 두 명 외에 다른 제삼자가 끼었음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케이플에게서 시선을 거둔 라한이 프라하를 바라봤다.
"미안해. 모두, 모두. 내 잘못이야. "
라한이 주변에서 주운 몸체를 프라하의 부족한 부분에 내려놓았다 흐르던 눈물은
이미 멈춘 상태였다 원래의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잘 가, 프라하. 불의 권능! "
프라하에게서 어느 정도 멀어진 라한이 신화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프라하의 몸에
불이 붙었다.
화라락!
재로 변해가는 프라하를 보며 라한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공간.음?"
공간 이동 하려던 라한이 뭔가 다른 기운을 느꼈다. 이에 신화력을 거둬들이고
기운이 느껴진 곳을 응시했다.
"이봐! 케이플! 불장난하는 취미도 있었어?"
새로이 나타난 자가 케이플이라는 이름을 언급했다. 그 말에 라한은 좀 전에
깨끗하게 잘린 이가 케이플이라는 걸 짐작했다.
'그럼 왜 죽었지?'
상황이 모하게 꼬여있음을 느꼈다. 이미 두 팔과 다리 하나를 잃은 프라하가
케이플을 죽였을 리 없다. 마찬가지로 목이 잘린 케이플이 프라하의 팔다리를
자르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국제삼자. 한데 그 제삼자가 잉글리아트는 아닌 것
같았다. 또, 나타나자마자 내뱉는 말을 감안하면 꽤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진 일인
듯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로 봐서는 마법사 같은데. 잘린 단면은 검사가 아니면
불가능하고. 확인해봐야겠어. '
라한이 연기를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나타난 이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하, 라, 라.라한 "
"오랜만이군. 잉글리아트."
"케이플은?"
"저기, "
라한이 케이플의 시신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잉글리아트는 그 시신을 보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잉글리아트는 라한이 케이플을 죽였다고 생각했다. 자신보다 강한 케이플을 죽일
실력이라면 자신도 쉽게 죽일 수 있을 터. 서서히 다가오는 공포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살, 살려줘. "
"묻겠다. 프라하는 누가 죽였지?"
"케, 케이플이 죽였어 전부 케이플이 한 일이야. 난 몰라. 난 모르는 일이라고. "
겁에 질린 잉글리아트를 보며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분노를 참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다시 묻겠다. 프라하는 누가 죽였지? 네 주둥이에서 저놈 짓이라는 말이 다시
나온다면 혓바닥을 잘라버리겠다. "
"그, 그건. "
라한의 협박에 잉글리아트가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이 일을 꾸민 건 굴레를 벗은
존재 전부였다. 하지만 실행한 이는 이리아나 케이플과 돈네리아 미스티크,
잉글리아트였다. 세 명 중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으니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프라하는 누가 죽였지? 대답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
대답을 들을 방법은 무척 많거든. "
라한이 비릿하게 웃으며 잉글리아트를 바라봤다. 전혀 날카롭지 않은 평범한
눈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이 잉글리아트에게 더 큰 두려움을 선사했다.
"류, 류카라한이 그랬어. 난 하지 말자고 했는데. 네가 무서워서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걱정 말라면서 죽이자고 했어. 정말이야. "
"안내해라. "
"어?"
"류카라한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
라한이 팔짱을 끼고 차분하게 말했다. 이에 잉글리아트가 재빨리 뒤로 뛰어가며
외쳤다.
"텔레포."
"누구 맘대로!"
스팟!
도망가려던 잉글리아트에게 라한이 쇄도해 갔다. 광견보까지 섞은 속도라서 가히
빛에 비견될 만했다.
퍼억!
"커헉!"
라한의 주먹이 잉글리아트의 코에 적중했다. 광견보가 섞인 속도에 주먹의
파괴력까지 실려서 한방에 코뼈가 내려앉았다
"류카라한이 어디 있는지 말해라. "
쓰러진 잉글리아트에게 라한이 차분하게 물었다.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으면서도
힘들어하는 기색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언제든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광견보에
익숙해졌다는 증거였다
"류카라한은."
위이이잉!
갑자기 느껴진 마나의 유동에 라한이 고개를 돌렸다. 마나의 유동정도로봐서 상당히
높은수준의 마법이었다. 최하 7 서클. 어쩌면 그 이상의 마법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런 마법 실력자는 흔치 않기에 라한도 순간적으로 잉글리아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텔레포트! "
스팟!
잉글리아트가 주문도 없이 마법을 시전했다. 실제로 주문 없이 마법을 시전하는 건
그에게 무리였다.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시전 후에 마나가 꼬여
오랫동안 앓아눕는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가능하기는 했다
"망할. "
잉글리아트가 도망가자 라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나타난 존재 때문에
놓쳤다고 생각하자 화가 치밀었다.
"어? 웬 연기지?"
나타난 이는 시스마란의 매스 텔레포트로 이동되어 온 에일린이었다. 그녀는
나타나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다. 가기 전에 보지 못했던 불길에
의아함을 느낀 모양이다.
"넌 누구지?"
라한은 상대를 보며 한심함을 느꼈다. 그녀의 몸속에서 느껴지는 마나가 고작 1,
2 서클 마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전에 풍긴 기운은 적어도 7 서클은 되는
마나의 유동이었다.
"어? 당신은 누구죠?"
"내가 먼저 물었다 넌 누구지?"
"저요? 에일린요. "
"에일린이라."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류카라한 진영과 카이렌 진영에 속해있는 이름은
모두 레고 있는 라한. 그럼 그 두 진영에 속해있지 않은 제삼자라는 의미였다.
"이름 예쁘죠?"
"누가 널 이리로 이동시켰지?"
"그건 음. 비밀! "
에일린이 손가락으로 입을 막고 대답했다 장난치는 게 분명한 행동이었다.
"너하고 장난치자는 게 아니다. 누가 널 이쪽으로 보냈지?"
"어머나. 무서워라. 우리 오빠만나면 다 일러줘야지 "
에일린은 끝까지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아이였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널 이쪽으로 보낸 사람이 누구냐? 드래곤이냐?"
라한이 결국 살기를 일으켰다. 이에 에일린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얼굴은 하 dig 게
질린 채였다.
"몰, 몰라요. "
"정말 모른다는 건가?"
"정, 정말 몰라요. "
에일린도 지금이 장난칠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비록 마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베르네라는 뛰어난 스승 밑에서 얼마간 배웠다. 풍기는 기운으로 강약을
판단하는 정도는 가능한 실력이었다.
그의 감각과 느낌이 눈앞에 있는 사내가 시스마란보다 강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또, 몹시 위험한 존재라는 것도 덩달아 알려주고 있었다.
지금 에일린이 모른다고 말한 건 죽음을 각오한 발언이었다. 오빠인 시스마란을
살리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말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
"정, 정말 몰라요. "
"젠장. "
에일린의 강경한 태도에 라한이 욕설을 내뱉었다. 살기는 일으켰지만 차마 어린
소녀를 죽일 수는 없었다.
라한이 인상을 찡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에일린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목숨은 건진듯했다. 일단 한숨 돌리고 생각해보니 자신은 죽지 않을 방법이 있었다.
시스마란과 한 쌍으로 가지고 있는 반지를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흥. 이봐요. 그렇게 욕하면 내가 겁먹을 줄 알아요?"
"꺼져라, 마음 바뀌면 널 죽일지도 모른다. "
"죽여 봐요. 죽여 봐요. "
에일린이 가슴을 내밀고 당당하게 나왔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라한이 난감한
기분을 느꼈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나 싶었다. 좀 전에 풍긴 살기는 상대가 드래곤이라도 주눅
들게 만들 정도로 강했다. 한데 어린 소녀에게선 겁을 먹은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 미친 거? 그건 아닌 것 같은데. '
"왜요? 못 죽이겠어요? 흥, 별것도 아니면서 까불기는. "
"그 입 좀 다물지 그래?"
"다물기 싫다면 어쩔 건데요. "
"어휴, 저걸 그냥. "
라한이 주먹을 위로 치켜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생각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약해서 차마 내려치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기 위해
별짓 다했지만, 약자를 괴롭힌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라한이었다.
"때려 봐요. 때려 봐요. "
에일린이 자신의 머리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반지 시동 주문을 계속 되뇌는
중이었다. 여차하면 도망가기 위해서였다.
에일린의 막 나가는 행동에 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쳇. 공간으로! "
참다못한 라한이 공간 이동을 시전했다. 라한이 사라지자 혼자 남은 에일린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갔네. "
머리를 긁적인 에일린이 주변을 찬찬히 훑었다. 가장 먼저 찾은 건 이곳에 온
목적인 프라하의 시신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프라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아까 연기가 그거였구나. 야까 그 사람이 화장했나 보네. 왜 내가 할 일을 자기가
하고 난리야. 나쁜 사람 같으니라고. "
라한이 졸지에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화장을 먼저 했다는 아주 사소한
이유였다.
"에이, 오빠한테나 가봐야겠다. 텔레포트!"
생각을 마친 에일린이 반지에 기운을 집중해서 마법을 시전했다. 원래 이렇게
마법을 시전하면 반지 주변에 희미한 빛이 흘러나와야 정상이었다. 한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어? 이상하네. 텔레포트! "
두 번째 외침에도 반지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반지에 문제가 있는 듯했다.
"이, 이. 불량품 같으니라고. "
-쿠오오오!
갑자기 들려온 몬스터의 포효에 에일린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좀 전에
라한에게 당당하게 굴었던 것도 전부 이 반지를 믿어서였다. 한데 반지의 마법이
발동되지 않는 지금은 도망갈 수단이 없었다.
"큰, 큰일이다. "
-쿠오오오!
쿠오오오!
몬스터의 포효하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 한두 마리가 아닌 듯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쿵! 쿵-!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오우거 네 마리가 에일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덩치만큼 살벌한 인상에 에일린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쿠오오오!
쿵쿵쿵!
순간 오우거가 에일린에게 쇄도했다. 단방에 끝내려는 듯 엄청난 기세였다.
"으아악!"
에일린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너무 놀란 나머지 의식을 잃은
거였다.
타악!
"대책 없는 꼬마네, "
오우거의 거대한 주먹을 라한이 한 손으로 잡았다. 주먹이 잡힌 오우거가 라한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라한은 공간 이동으로 블리아드 마을에 갔었다. 하지만 험지에 여린 소녀를 두고
왔다는 생각에 먼저 몸을 투명하게 만들고 다시 돌아왔다. 아무 일 없으면 블리아드
마을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한데 우려했던 대로 몬스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소녀는 겁에 질려서 의식을 잃었다
오우거보다 더 짙은 살기를 뿌리는 라한에게는 당당했던 에일린. 하찮은 오우거를
보고 기절하는 걸 보며 라한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바람의 권능!"
오우거가 살기등등하게 노려보자 라한이 짧게 시동어를 외쳤다. 그러자 오우거들은
제대로 반항도 못 해본 채로 허리가 잘려 나갔다.
"공간. 에고, 저게 문제네. "
블리아드 마을로 돌아가려던 라한이 골렘을 발견하고 신화력을 흩었다. 일단 저
골렘을 처리하고 이동해야 할 듯했다.
"저걸 어떻게 처리한다? 흐음, 슈라. "
라한이 슈라를 불렀다. 나타난 슈라도 골렘을 발견했는지 심각한 얼굴이었다.
-골렘이군.
"응. 너보다 작기는 하지만 골렘인 건 확실해. "
-주인 어쩔 거지?
"안 그래도 너하고 의논하려고 불렀어. 저놈을 어떻게 처리할까? 그냥 에고(Ego)가
담긴 보석을 깨뜨릴까?"
라한의 말은 '소멸시킬까'라는 의미였다. 비록 신에 의해 창조된 생명체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성을 가진 존재가 골렘이다. 라한도 생명체나 다름없는 그를 이유 없이
죽이고 싶지는 않아서 슈라에게 물어본 것이다.
-주인. 그에게도 이성이 있다는 건 알지?
"물론이지. 내가 널 돌덩어리로 생각한 적 있어? 너 역시 테세르와 마찬가지로 내
친구잖아. 골렘의 에고를 이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너를 친구로 생각하는 거야. "
-그럼 내가 데리고 갔으면 하는데.
"어?"
슈라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리고 간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골렘이 소환되지 않았을 때 아공간에 머문다는 건 주인도 알고 있지?
"응. "
-다른 골렘들과는 달리 내 아공간은 엄청나게 넓다. 저런 골렘수백 기가 들어가도
될 정도로 크지.
"아, 그러니까 네가 저 골렘을 데리고 아공간으로 가겠다는 거로군, "
라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방법으로 골렘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내 아공간도 좀 키울 필요가 있겠군. '
라한도 아공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아공간은 라한의 실력이 높지 않을 때
만든 거라서 그리 크지 않았다. 작은 방 정도의 크기. 골렘이 들어가기에는 턱없이
작은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라한의 힘으로 아공간을 만든다면 작은 영지만 한
크기로 만들 수 있었다. 라한이 이 정도일진대 고대 고룡들이 자신들의 마나를 모아
만든 슈라의 아공간은 얼마나 크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라한이 만들 수 있는
아공간보다 몇 배는 클 게 분명했다.
-주인. 허락해주겠나?
"그래, 좋아 위험한 골렘을 대륙에 풀어놓는 것보다 그게 낫지.
-고맙다. 그럼 먼저 돌아가지. 이 골렘을 그 곳에 적응시키려면 내가 있어야할 것
같다. 웬만하면 아공간 안에서 지낼 테니 필요하면 불러라.
-응, 수고해.
슈라가 케이플이 람기고 간 골렘을 들고 사라졌다.
골렘은 주인을 잃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때문에 주인 없는 골렘은 이성을 가진
건축물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골렘이 가진 아공간 내에서는 이동에 제약이 없었다.
마음대로 이동하고 또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슈라가 돌아가자 라한이 에일린을 업고 공간 이동 했다. 허리가 둘로 나된 오우거
시체 네 구와 재가 된 프라하를 둔 채로.
라한이 블리아드 마을에 있는 자신의 집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나타나자
기다리고 있던 에테로가 입을 열었다.
"어디 갔다 오는 겐가?"
"짐이 좀 있어서요. "
라한이 대답을 하며 등에 있는 에일린을 슬쩍 보여줬다. 이에 에테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는 표시였다.
"그 여자는 누군가?"
"보시다시피 짐요. "
"그런 짐이면 집 안에 쌓아놓고 살고 싶구먼. "
"에테로님. "
라한이 갑자기 정색하며 말했다. 그 표정에서 에테로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무슨 일인가?"
"프라하가 죽었습니다. "
"역시. "
"그는 제 친구였습니다. "
라한의 말에 에테로가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에테로는 프라하가 라한의 친구인 줄
몰랐다. 알았다면 항정에 빠지지 않도록 어떤 도움을 줬을 터였다.
"이제 어쩔 생각인가?"
"류카라. 이봐. 꼬마. 일어났으면 그만 내려오는게 어때?"
라한이 말을 끊고 등 뒤에 있는 에일린에게 말했다. 숨소리의 변화로 에일린이
깨어났음을 느낀 거였다.
라한이 알아챘음에도 에일린은 계속 자는 척했다. 그녀는 라한에게 당당하게
대하다가 오우거의 모습에 기절했다.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연기가 서툴군. "
쿵- !
라한이 등에 있는 에일린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에 둔탁한 소리가 바닥에서
울려 퍼졌다.
"아고고. "
"에테로님. 류카라한이 어디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
라한은 아파하는 에일린을 깨끗하게 무시했다. 에테로도 에일린의 존재가 아예 없는
듯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아까 그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자네가 가버려서 못 했네. 사실 류카라한 진영에
큰일이 벌어졌네. "
"큰일요?"
"한 달 전에 류카라한이 자신의 세력을 해체시켰네. 근데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아직도 모르겠단 말이야. "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세력마저 해체시킨 류카라한. 정복의 꿈을 버린 듯 보이는
그가 왜 프라하를 죽이려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르겠군요. 류카라한도 그렇지만 굴레를 벗은 다른 존재들이 더 이해가 안
가는군요. "
"류카라한이 단독으로 벌인 일 같더군. 그래서 지금 류카라한은 다른 이들에게
감금당한 상태일세. "
"감금?"
"크리퍼트가 죽은 일 때문에 류카라한을 제외한 다른 일행들이 그의 골렘을 찾기
위해 본진을 비운 일이 있지. 그때 류카라한이 세력을 완전히 해체해버렸어. 아마
다른 일행들과 의논하지 않고 자의로 일을 감행한 모양이야. "
류카라한은 애초에 세력을 만든 이유가 드래곤과의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로테마이어스가 바라는 물질계 멸망을 저지하기위해 만든 것이다. 한데 라한이
드래곤 로드 로테마이어스를 꺾었다. 물질계 멸망을 꿈꾸는 로드가 패했으니 세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하지만 류카라한을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의 목적은 대륙 정복이었다. 한데 대륙정복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을 해체했으니 참고 있을 리 만무했다.
"왜?"
"거기까지는 나도 모르겠네. 하지만 세력이 사라진 후부터 그들의 종적이
묘연해졌어, 핵심 구성원만 모여 있으니 세작을 심을 수가 없더군. "
"류카라한이 감금됐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가 다크라이더 길드에 서신을 보냈더군. 읽어보게. "
에테로가 서신을 내밀었다. 라한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신을 받아 읽었다.
다른 일행들은 라한의 정보처가 다크라이더 길드라는 걸 몰랐다. 심지어 카이렌과
로테마이어스도 그 사실만큼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류카라한은 최근에 라한의
정보처가 다크라이더 길드라는 걸 알아냈다. 자유를 되찾은 로이나가 라한과
다크시안이 만나서 했던 대화를 들려줬기 때문이다.
로이나에게 자네 얘기는 많이 들었네. 그래서 그런지 낯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군.
얼마 전 자네의 승전보를 들었지. 놀랍더군. 드래곤을 제외하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강한 줄 알았거든. 내 자만이었지. 아무튼 축하하네. 그리고 고맙네. 대륙을
구해줘서.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군. 난 내 나름대로 대륙을 구하기 위해 세력을
모았네.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지. 한데 그 일이 대륙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어. 바보 같았지. 그런 실수를 지금에서야 깨닫다니. 아마, 이 편지를
보내고 나면 다른 녀석들에게 죽거나 감訃품憫? 그래서 이렇게 부탁하겠네. 굴레를
벗은 존재들을 모두 죽여주게. 나를 포함해서 모두.그게 내 부탁일세. 내 솔직한
바람은 자네까지 죽어달라고 하고 싶네만, 그런 부탁은 들어주지 않겠지. 다시 한번
당부하겠네. 카이렌 일행은 물론이고 나와 함께했던 일행들까지 모두 죽이게. 그게
대륙에 평화를 찾아주는 길일세. 끝으로 한 가지만 더 부탁해야겠군. 로이나를 잘
부탁하네.
- 천고 죄인 류카라한-
"휴우우. "
서신을 다 읽은 라한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상황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또, 카이렌 일행과 싸울 때 왜 그렇게 소극적이었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수장이랄 수 있는 류카라한은 애초에 드래곤과의 싸움만 염두에 두었음이다.
'프라하의 죽음과 류카라한은 아무런 관계가 없겠군. 망할 잉글리아트. 두고 보자.
'
"어떤가?"
"류카라한은 자신이 위험에 처할 걸 알고 있었군요, "
"그런 셈이지. "
"어디 있는지 찾을 방법이 없습니까?"
라한의 물음에 에테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역시 찾아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소수 정예의, 그것도 엄청난 실력자만 모인 집단이 작정하고 숨으니 찾을
방법이 없었다.
"몇 군데 좁혀지기는 했는데 범위가 너무 넓어. "
"어딘데요?"
"루이나 왕국, 케라스 왕국, 베센 왕국. 그리고 베루니아 왕국 전 지역일세. 그들이
사라질 시기에 특이 현상이 일어난 곳이지. "
"너무 광범위하군요. "
무려 네 나라였다. 특히 최근에 영토가 넓어진 루이나 왕국이 포함되어 있는 게
치명적이었다. 말이 네 나라이지 거의 다섯 나라에 맞먹는 넓이였다.
"계속 조사해주십시오. "
"중요한 내용은 또 있네. "
"말씀하십시오. "
"저기요. 저한테도 말 좀 걸어주세요. "
계 속 구경만 하던 에일린이 끼어들었다. 멍하게 듣고 있으려니 심심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라한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예 없는 셈 치기로 마음을 굳힌
듯했다.
"에테로님.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하시죠. "
"물덩어리 기억나는가?"
"변요?"
"그래, 그를 찾았네. "
에테로의 대답에 라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변이 아직 살아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물덩어리 변은 투바에 의해 만들어진 마력 생물이다. 투바가 물질계에 있을 때는
몰라도, 그가 마계로 갔으니 사라지거나 마계로 강제 소환 되어야 정상이었다.
"예? 변이 아직 있어요?"
"카이렌에게 잡혀 있네. "
"어디 있죠?"
"대륙 동쪽에 있는 라하파라는 왕국에 있네. 여기 자세히 그려져 있으니 찾기는
쉬울 게야. "
에테로가 세밀하게 그려진 지도를 내밀었다. 라한은 그 지도를 꼼꼼히 살핀 후에
불태웠다.
"저 나가 봐야겠습니다. "
"아, 잠시만. 이 아가씨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나?"
에테로가 공간 이동 하려는 라한을 불러 세웠다. 이래저래 짐으로 분류되는
에일린이었다.
"테세르! "
철컥!
라한의 부름에 밖에서 테세르가 걸어 들어왔다. 인간 정도의 크기로 모습을 불린
채였다.
-주인, 왜?
"이 꼬마하고."
"자꾸 꼬마, 꼬마 할래요? 전 아가씨라구요. "
에일린은 아까부터 심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분위기가 이 정도로 가라앉지 않았다면
오래전에 발끈해서 대들었을 터였다.
"테세르. 이 꼬마 아가씨하고."
"그냥 아가씨라고 해요!"
"테세르. 여기 그냥 아가씨하고 좀 놀고 있어라. "
"우씨. "
라한이 아가씨 앞에 그냥을 붙이자 에일린의 입이 쭉 튀어나왔다. 뽀로통해진
모습이었다.
-오, 그냥 아가씨. 삼삼하게 생겼는데.
"으악! "
테세르가 빈정거리며 에일린에게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테세르의 얼굴이 눈앞에
다가오자 에일린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이런저런 끔찍한 모습 다 본 에일린,
하지만 이런 식의 공포는 난생 처음이었다.
"재미있게 놀고 있어. "
"잠, 잠시만요."
에일린이 다급한 음성으로 라한을 불렀다. 이에 라한은 귀찮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뭐냐? 그냥 아가씨.
잘못했어요. 놀아줘요.
테세르 뭐해? 데리고 나가.
-주인. 알았어. 그냥 아가씨. 오늘 밤 나하고 뜨거운 밤을 불태워 보자고. 으차!
아악! 살려줘! 살려줘!
테세르가 에일린을 번쩍 들고 밖으로 나갔다. 에일린이 계속 비명을 질렀지만
귀담아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테로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수고하게.
공간으로!
라한이 공간 이동 하자 에테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라한의 침실이었다. 알려줄 정보를 다 알려줬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편히 쉴
생각이었다.
치, 치한. 살려줘요!
-아가씨. 뭘 그렇게 빼고 그래?
이, 이. 괴물아!
에테로가 밖으로 나가자 테세르와 에일린의 실랑이가 들렸다. 에테로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으며 집으로 향했다.
밀실에서 엿듣다
시스마란이 고향에 들렀다가 다시 레베안 산맥 남쪽에 나타났다. 베르네도 딱 그
시간에 원래 있던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스승님. 갔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카이렌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어. 생각보다 쉽게 말해주더군. 자기도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했겠지. 근데 라한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어. 얼마 전에
로이나님이 아카폴리안을 찾아가서 한바탕한 모양이야. 그러면서 다른 누구에게도
라한의 위치를 가르쳐주지 a 라라고 엄포를 놓고 갔다는군.
로이나님이요?
며칠 전 로이나가 아카폴리안을 찾아갔다. 그에게 라한의 위치를 물어보기
n 이해서였다. 원래 그가 얻은 정보는 로드인 로테마이어스 외의 다른 존재에게
말하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로테마이어스와 동급이라고 할 수 있는 로이나의
물음에는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카폴리안이 라한의 위치를 말해주자 로이나는 또 다른 걱정을하기 시작했다.
행여나 고룡들이 라한을 찾아가서 해코지할까 염려된 것이다. 그래서 아카폴리안을
협박해 로테마이어스와 자신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라한의 위치를 말하지 말라
맹세하게 했다. 다른 것도 아닌 맹세였기에 베르네에게는 라한의 위치를 말해줄 수
없었다.
"응. 로이나님이 라한을 끔찍하게 아끼거든, 에고, 그 때문에 우리가 라한을 찾는
건 좀 힘들게 췄어. 어라? 근데 에일린은 어디 있어?"
"프라하님 화장해주러 갔어요. 지금쯤 끝났을 거예요. 데리러가죠. "
"위험하게 왜 혼자 방치했어?"
"반지 있잖아요. 위험하면 사용하겠죠. "
"반지?"
시스마란이 반지를 언급하자 베르네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반지의 효능을
장담하지 못하는 탓이다.
'미치겠네. 괜히 잘난 척해 가지고. '
베르네는 거의 모든 분야에 잡다한 지식을 가졌다. 호기심 많은 그의 성격이
이런저런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한 탓이다. 하지만 이런 지나칠 정도의 호기심은
그가 한 분야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었다. 베르네가 할 줄 아는 게 많음에도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음은 이 때문이었다.
베르네가 시스마란과 에일린에게 준 반지도 그런 호기심의 산물이었다. 아주 오래전
마법 무구에 관심을 가지면서 어설픈 지식으로 만든 반지였다 그래서 이 반지가
제대로 발동될지 어떨지 장담할 수 없었다.
"빨리 가자. 매스 텔레포트!"
베르네가 서둘러 마법을 시전했다. 스스로도도 자신이 만든 마법 무구를 믿지
못하는 듯 불안한 모습이었다.
베르네는 레비안 산맥 북쪽에 나타나자마자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에일린을 발견할
수 없자 곧바로 마나를 주변에 퍼트려 탐색하기 시작했다. 반면 시스마란은 느긋한
얼굴로 팔짱만 끼고 있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겼겠냐 하는 얼굴이었다.
"이놈아. 넌 에일린이 걱정되지도 않아?"
"이 반지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어요? 어디서 놀고 있겠죠. "
시스마란이 손가락에 찬 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베르네가 좀 과하게 거짓말을 한
게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이익, 그렇지. 반지가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
베르네가 어렵게 말했다. 마음속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려니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반지의 마법이 발동되지 않을 수 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가 반지를 선물할 때 너무 호언장담했기 때문이다.
'미치겠네, '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맹세코 이렇게 가슴 졸여본 적은 처음이었다.
"스승님. 근처에는 없는가 봐요. "
"그.래. "
"여기 재로 봐서는 화장을 하긴 한 모양인데요. "
"그래. "
베르네도 프라하가 있던 자리에 재가 가득히 쌓인 건 발견했다. 그나마 화장을
끝냈다는 게 베르네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다.
"스승님. 이거 오우거 아닌가요?"
"어디? 어디?"
시스마란의 말에 베르네가 잽싸게 달려갔다. 깨끗하게 잘린 오우거 시체 네 구가
보였다.
"흐음. 상당한 실력자가 왔다 갔네요. 이 정도 검술 실력이면 전의 그놈 일행이라고
봐야겠죠?"
시스마란의 얼굴에서도 걱정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엄청난 실력자의 등장 가능한
모든 변수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검이 아니다. "
"그럼 마법?"
"그것도 아니야. 뭔지 모르겠어. 조화롭고 자연스러운 기운이 약간 묻어 있는 걸로
봐서 마법이나 검은 아닌데. 설마 정령?"
"정령?"
"정령하고도 좀 다른데. 뭐지?"
시스마란은 잘린 단면이 너무 깨끗해서 당연히 검사라고 생각했다. 한데 베르네는
검사가 아니라고 말했다. 이에 시스마란도 단면에서 풍기는 기운을 느끼려 애썼다.
그러자 베르네의 말처럼 좀 특이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정령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그런 기운이었다.
"스승님. "
"확인해봐야겠어. 실피드!"
베르네가 바람의 정령왕을 불렀다 깨끗하게 잘라낼 수 있는 정령이라면 바람의
정령이 가진 절삭력뿐이다. 실피드를 불러서 물어보면 그, 혹은 그의 정령들이 이
일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하아암. 오랜만이군. 베르네미스. 음? 인간이군. 오호, 상당히 강해. 놀랍군. 요즘
인간은 그 한계를 알 수가 없어.
실피드가 베르네에게 인사하다가 시스마란을 발견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실피드. 물어볼 게 있어서 불렀다. "
-뭐, 드래곤은 항상 그런 식이지. 그래 뭐지?
"여기 이 단면 보이나?"
-이건 그? 흠, 흠.
실피드는 순간 라한이 한 일이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시스마란과
눈앞의 베르네를 의식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라한의 적인지 친구인지 확신할
수 없는 탓이다. 물론, 과거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말했을 터였다. 베르네가라한과
친분이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 지금은 곤란했다. 라한이 로테마이어스에게
이긴 후부터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적이 될지도 모르는 드래곤에게
라한에 대해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람의 정령이 한 일이야?"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군.
"곤란해?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니지 곤란한 건 뭐야?"
-정령도 그럴 때가 있다. 다른 용건은 없나? 없으면 돌아가야겠군.
베르네도 실피드가 뭔가를 숨긴다는 건 느꼈다. 하지만 꼬치꼬치 캐물을 수는
없었다. 말하기 싫으면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게 정령이지 않은가? 매달려
봐야 별 소득이 없을 걸 알았기에 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고맙다. "
-그럼 수고해라.
실피드가 사라지자 베르네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 머릿속이 복잡해 미칠 것 같았다.
그놈의 잘난 척이 문제였다. 애초에 반지를 주면서 잘난 척하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 흘러가지는 않았을 터였다.
"스승님. 어쩌죠?"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이제 어쩌지?"
"일단 카이렌이라는 자를 만나러 가죠. "
"에일린은?"
"반지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세요. 가요. "
"그, 그래, "
반지 얘기만 나오면 할 말이 궁해지는 베르네였다.
"빨리요. "
"알았다. 매스 텔레포트! "
베르네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마법을 시전했다. 시스마란의 얼굴도 처음보다는
어두워져 있었지만 반지에 대한 믿음으로 베르네보다는 한결 밝은 얼굴이었다.
라한이 카이렌의 본거지에 숨어들어 왔다. 미스트에게 배운 은신술을 사용해
완벽하게 몸을 숨긴 채였다.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텐데. '
라한이 이곳을 뒤진 지 벌써 40 분이 지났다.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데도 아직
물덩어리 변이 있는 곳은 찾지 못했다.
'카이렌?'
한참 뒤지던 라한이 카이렌을 발견했다. 바쁜 일이 있는 듯 어딘가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따라가 봐야겠어. '
마음을 굳힌 라한이 카이렌의 뒤를 밟았다. 은신술에 있어서 이미 카이렌을
능가했기에 들킬 염려는 없었다.
카이렌은 은신술만 익혔지 은신술을 꿰뚫어 보는 법은 익히지 못했다. 심지어
미스트도 은신술을 꿰뚫어 보는 법은 알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라한은 은신술을
배우면서 그 은신술을 꿰뚫어 보는 법까지 함께 익혔다. 자기가, 혹은 미스트가
은신술을 사용할 때생기는 미세한 기운의 변화를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알아낸
것이다.
'밀실?'
한참 동안 바쁘게 달려가던 카이렌이 한적한 곳에 있는 밀실로 들어갔다. 그곳은
라한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는 곳이었는데 그때는 아무 흔적도 찾지 못했었다.
어떤 마법적인 느낌도 없었기에 별다른 의심도 하지 않았다.
끼익! 그르르륵!
밀실에 들어간 카이렌이 벽에 걸린 횃불을 건드렸다. 그러자 바닥이 갈라지며
통로가 나타났다 마법으로 숨겼을 거라는 라한의 예상과는 달리 기관 장치였다.
'이러니 못 찾았지. '
천하의 라한이라도 기관으로 숨겨진 곳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카이렌이 바닥에
생긴 구멍으로 들어갔다. 이에 라한도 그의 뒤에 바싹 붙어서 뒤따랐다
그르르륵! 쿵!
라한이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 조금만 늦었으면 문에 껴서 들킬 뻔한
순간이었다.
'휴우. '
문이 닫히자 카이렌이 뒤를 돌아보며 다시 확인했다 의심이 많은 그였기에 닫히는
소리만으로도 안심하지 못한 모양이다.
확인을 마친 카이렌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비스듬하게 꼬인 내리막길에 끝없이
이어진 계단.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다.
'놀랍군. 이런 곳이라니. 대체 여기는 뭐 하는 곳이지?'
카이렌이 계단을 내려간 지도 벌써 한 시간. 아직 계단은 끝나지 않았다. 정말
인간이 만든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점점 궁금해지는데. '
계단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라한의 호기심도 점점 강해졌다.
'끝? '
30 여 분을 더 내려가자 내리막이 평지로 바뀌었다. 계속되던 계단이 어느덧 사라진
상태였다.
'한 시간 반쯤 됐나?'
얼추 그 정도는 지난 것 같았다. 한 시간 반 동안 계속 이어진 계단이라니. 빛이
없어서 내려오는 속도가 느렸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긴 통로였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문이 달려있었다. 그리고 그 문 안에서 사람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은 라한도 아는 목소리였다.
'루이에로군. '
철컥!
카이렌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의 정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역시나
루이에가 근엄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 옆에 앉은 인물을 보며
라한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크리퍼트?'
라한은 오래전에 굴레를 벗은 존재 거의 대부분을 만난 적이 있었다. 굴레를 벗은
라이칸드로프 두 명을 제외하면 모두 만난 셈이다. 당연히 그들 중에는 크리퍼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단한번의 만남이었지만 라한은 그들의 얼굴을 똑똑하게
기억했다. 그 당시에 위험한 텔레포트를 감행해서 죽을 위기에 처했던 라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았던 이들이기에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크리퍼트가? 죽었다고 들었는데. '
에테로는 크리퍼트가 카이렌 일행에게 죽었다고 했다. 한데 지금 눈앞에서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그렇다고 어딘가 묶여서 감금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에테로님이 실수한 건가?'
라한이 아는 한 에테로가 거짓 정보를 흘릴 사람은 아니었다. 또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알려줄 사람도 아니었다. 그럼 카이렌이 계획적으로 일을 꾸몄고, 에테로는
그 계획에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고 봐야 했다.
'이해가 안 되는군. 다크라이더 길드를 속여서 뭘 얻으려는 거지? 혹시 류카라한
일행을 속이려는 건가?'
아직은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숨어들어 가서 얘기를 좀 더 들어봐야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라한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루이에와 크리퍼트, 카이렌까지 함께
있는 곳이다. 사람이 늘어난 만큼 들킬 가능성도 높아진 터. 들키지 않으려면
라한이 더 신중하게 움직이는 방법뿐이었다.
"카이렌. 앉아라 "
"급히 부를 만큼 중요한 일이겠지?"
"글쎄. 토일렛이 와봐야 알겠군. 오늘 모임은 토일렛이 주선했거든."
"미쳤군.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
"올 여유가 있으니 왔겠지. 토일렛을 믿어보라고. "
카이렌이 발끈하자 루이에가 낮은 목소리로 타일렀다. 그 말에 카이렌도 화를
억눌렀다.
크르르릉!
좀 지나자 라한이 들어온 곳과 반대쪽 벽이 서서히 갈라졌다. 이곳과 같은 형태의
문이 반대쪽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놀랍군. 입구가 양쪽에 있잖아. 대체 이거 만드는데 얼마나 들인 거야?'
라한이 들어온 길을 만드는 정도로도 수백만 골드가 소요된다. 한데 다른 곳에도
똑같은 길이 있다면 소요 금액은 두 배라고 봐야했다. 대체 얼마나 많이 갈취하면
이런 돈이 나오는지 계산도 되지 않았다.
"오는군. "
"미안. 늦었다. "
거대한 자루를 어깨에 멘 토일렛이 손을 흔들었다. 친한 친구에게나 할 수 있는
친근한 모습이었다.
"이봐. 토일렛.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크리퍼트가 없어서 이제 그쪽 사정은 자네만
전할 수 있다는 걸 잊었어?"
"카이렌. 너무 그러지 말라고. 나도 이유가 있어서 왔으니까. "
투둑!
토일렛이 어깨에 멘 자루를 바닥에 던졌다. 거대한 크기에 비해 떨어지는 소리는
몹시도 가벼웠다. 경량화마법을 걸어놓은 듯했다.
"이건 뭐지?"
"열어봐. "
"흐음. "
챙! 스삭!
카이렌이 검을 꺼내 자루 입구를 잘랐다. 친해 보이는 이들 앞에서조차 몸을 사리는
모습이었다.
'어지간히 의심이 많은 놈이었군. 카이렌. 실망이다. '
라한이 카이렌을 측은하게 바라봤다.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꿈? 바로 옆에 있는
동료도 못 믿는데 세상을 가지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싶었다.
카이렌이 자른 자루에서 의식을 잃은 두 사람이 굴러 나왔다. 이미 의식을 잃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누구지?"
"나도 누군지는 몰라. 근데 상당한 실력자인 건 분명해, 내가 패할 뻔했거든. "
그들을 데려온 토일렛도 이곳에 미리 와있던 카이렌과 루이에, 크리퍼트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라한은 그들을 본 적이 있었다.
'쟤들이 왜 저기서 튀어나오나?'
하울과 헬레나였다. 베센 왕국의 어느 술집에서 프리미아와 조우할 때 만났던 이들,
프리미아와 형인 레테아의 제자였던 그들이 분명했다.
'실력은 괜찮아 보이던데. '
라한은 그들이 쾌 강한 검술을 가지고 있었던 걸로 기억했다. 직접 싸우지는
않았지만 프리미아와 대결하던 모습을 떠올려 보자 어느 정도 실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도 두 명을 혼자서 잡을 정도면 형편없는 거 아냐?"
"후후, 사실 난 졌다. 한명은 어떻게 감당이 되는데 두명은 이길 수가 없더군. 근데
이놈들이 멍청한 건지 착한 건지. 날 그냥 보내주더라고. 그래서 몰래 수면제를
써서 재웠지. "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여기 온 건가? 알아서 처리하면 될 걸 가지고. "
"이건 그냥 부록이야. 더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다. "
토일렛이 본론을 꺼낼 기미를 보였다. 그러자 짜증내던 카이렌도 귀를 기울였다.
토일렛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얘기임을 직감한 것이다.
"무슨 일이야?"
"잉글리아트가 중상을 입었다. "
"뭐?"
"또 있다. 케이플이 실종됐어. "
토일렛의 연이은 말에 주변에 있던 이들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이런 소식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류카라한 진영에 있던 이들 중 카이렌에게
포섭된 이는 단 두 명. 크리퍼트와 토일렛 뿐이었다.
이 중 토일렛은 잉글리아트라는 경쟁자 때문에 오래전부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자신보다 딱 한 발 높은 경지에 있는 잉글리아트에게 패배감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카이렌의 포섭에 기다렸다는 듯이 넘어왔다.
이에 비해 크리퍼트는 카이렌 쪽 세력이 더 강해 보여서 포섭된 경우였다. 류카라한
진영에서 수장이랄 수 있는 류카라한은 어차피 대륙 정복에 관심이 없었다. 원래
가진 세력에서 류카라한의 힘은 제외시켜야 하는 셈이다. 그런데 원래 세력에서
류카라한을 빼고 생각해보자 가진 세력이 너무 미약했다. 이 힘으로는 대륙 정복은
고사하고 카이렌 세력에 맞서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이럴 바에 차라리 카이렌에게
몸을 의탁하자며 직접 찾아왔다.
그때가 2 년 전이었다. 죽은 척한 건 자신의 배신을 류카라한이 눈치 챘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잉글리아트가 왜?"
잉글리아트는 아주 오래전에 8 서클 마법서를 입수했다. 하지만안에 쓰인 고대어를
몰라서 배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1 년 전에 고대어를 아는 학자를 만났고
그에게 고대어를 배우며 8 서클 마법을 익혀나갔다. 아직 익힌 마법이 몇 개 안 되서
8 서클 마법사라고 부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8 서클 마법사가 되는 것도 시간이
해결해줄 터. 지금은 아니라도 후일 카이렌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게 분명했다.
"그건 모르겠다. 오자마자 의식을 잃어서 말이야. "
"상태는 어때?"
"불행하게도 치명적이지는 않아. 신관들은 한 3 일 후면 의식을 되찾을 거라고
하더군. "
"완치는?"
"못해도 6 개월 이상 장기 치료가 필요하다던데. "
토일렛의 대답에 카이렌의 표정이 밝아졌다. 죽지 않은 게 아쉽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그는개월의 시간을 벌었다. 적처도 이 시간만큼은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다. 그렇게 표정이 밝아졌던 카이렌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누구 짓일까?"
"내 생각인데 주문 없이 마법을 시전한 것 같다. "
"주문 없이? 그게 그 정도로 위험한 건가 7"
"응. 하위 마법은 몰라도 텔레포트는 7 서클마법이거든. 시동어만으로 마법을
시전하면 마나가 꼬일 수밖에 없지, "
"마법에 대해 좀 자세히 설명해주겠나?"
이곳에 모인 이들 중 마법사는 토일렛 한 명뿐이다. 당연히 마법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도 토일렛밖에 없었다. 물론, 숨어서 듣고 있는 라한은 제외하고
말이다.
"7 서클 마법사는 보통 5 서클 마법까지만 주문 없이 사용한다. 좀 무리하면
8 서클까지도 주문 없이 쓸 수 있고. 하지만 잉글리아트는 아직 7 서클 마법사거든.
8 서클 마법 몇 개 익혔다고 8 서클 마법사는 아니 라는 말이지. "
"그게 왜?"
"8 서클 마법사가 되면 7 서클 마법. 그러니까 텔레포트를 주문 없이 사용할 수 있지.
물론 무리한다면 말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잉글리아트가
자기 실력을 과신한 게 아닌가 싶은데? 자기가 이미 8 서클 마법사가 된 기분에
7 서클 마법을 주문 없이 사용한 거지. "
토일릿의 설명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그냥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케이플이 실종됐다면서? 거기에 대해서는 알아낸 정보가 없나?"
"그게 모르겠단 말이야. 너희들이 프라하가 가는 곳을 미리 알려줘서 미스티크하고
잉글리아트, 케이플. 이 세 명을 함께 보냈거든. 완벽하게 처리할 생각으로
넉넉하게 보낸 거지. 근데, 잉글리아트와 미스티크만 돌아오고 케이플이 안 왔어. "

"특별한 일은 없었고?"
"모르겠어. 미스티크는 프라하에게 당한 건 아니라고 하더군, 프라하를 거의
병신으로 만들어놓고 이동했다고 하니까 틀린 말은 아닐 거야. "
"그럼?"
"뭐, 잉글리아트가 깨어나기 전에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지. "
결국 모든 열쇠는 잉글리아트가 쥐고 있었다. 그가 깨어나기 전에는 그들 사이에
오가는 그 어떤 얘기도 추측에 불과하다는 의미였다. 확실한 게 하나도 없는
상태이기에 찝찝한 기분이었다.
'프라하가.프라하가. 카이렌. 네가 한 일이었어. 감히 프라하를, 프라하를.'
라한이 주먹을 부르르 떨며 살기를 억눌렀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카이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이곳이 카이렌과 그 일행들이 만든 장소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물론 지금
라한의 실력이면 자신이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렇지만 이곳의
라한이 모르는 어떤 장치 때문에 도주해버린다면 곤란했다. 강한 자들이기에
작정하고 숨으면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어차피 카이렌을 죽일 기회는 앞으로 많을
테니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카이렌. 내가 죽일 때까지 죽지 말고 기다려라. 꼭.'
라한이 살기를 갈무리하며 카이렌을 노려봤다. 눈에 칼이 달렸다면 카이렌의 머리는
수십, 수백 번도 더 뚫렸을 정도로 강한 눈빛이었다.
"혹시 말이야. 혹시."
갑자기 생각난 듯 카이렌이 조용히 운을 때었다
"혹시 뭐?"
"너희들도 라한이 돌아왔다는 얘기는 들었겠지. 난 케이플의 실종이 그놈 짓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
카이렌의 말에 다른 이들이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잊고 지냈던 라한의 존재가
그들을 답답하게 만든 것이다.
"잠깐. 그건 아닐 거 같은데?"
"왜?"
"프라하가 가는 곳은 우리만 알고 있었잖아. 근데 라한 그놈이 어떻게 프라하에게
갈 수 있겠어?"
"그건 토일렛 말이 맞다. 정말 라한이 한 짓이라면 우리나 잉글리아트 일행 중에서
배신자가 있다는 소린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리고 프라하가 반병신이 된 걸
확인했다고 했지? 그럼 라한은 아니라고 봐도 될 것 같아. 라한 그 자식이 미리
알았다면 프라하가 그렇게 다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안 그래?"
크리퍼트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라한은 투바와 프라하만큼은
끔찍하게 아꼈으니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지. 라한에 대해 알아낸 건 없어?"
"없다. 케라스 왕국에 들어간 후에 완전히 사라졌어. "
"질긴 자식. 곱게 죽어주면 얼마나 좋아?"
라한의 뒷조사를 토일렛이나 잉글리아트가 직접 했다면 블리아드 마을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또 그곳에 라한의 은신처가 있음도 알아냈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 정도 위치에 있는 이들이 라한을 직접 찾아 나설 턱이 없었다.
부하들에게만 맡걱 놓으니 라한을 못 찾는 게 당연했다.
"용건 끝났으면 그만 헤어지자고. 이렇게 오래 모여 있어서 좋을 거 없으니까. 아,
그렇지. 크리퍼트. 넌 저 녀석들 관리 잘해라."
"걱정 마. "
"그리고 토일렛! 잉글리아트가 부상당했으니까 너도 좀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겠지?"
"뭐, 그럭저럭. "
"그럼 잉글리아트가 깨어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말해줘. 아무래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판도를 바꿔놓을 것 같다. "
"그러지,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크리퍼트. 지루해도 참아라. 후후. "
카이렌과 루이에가 라한이 있는 입구 쪽으로 나갔다. 그들이 자리를 뜨자 토일렛도
일어나서 반대쪽 입구로 걸어 나갔다. 반면 크리퍼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한숨만 쉬었다. 세간에 죽었다고 알려진 탓에 이곳에 숨어있어야 하는 듯했다.
'저놈은 처리해야겠군. '
모두 사라지고 크리퍼트만 남자, 라한이 숨죽이고 기다렸다 다른 일행들이 계단을
완전히 벗어나서 지상으로 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기다리던 라한이
크리퍼트에게 다가갔다. 넉넉하게 두 시간을 기다린 후였다.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던가?"
"누 누구냐!"
갑자기 들려온 말에 크리퍼트가 경악하며 외쳤다. 굴레를 벗은 존재답게 어느샌가
검을 뽑은 상태였다.
"이런, 이런. 날 잊은 건가?"
"라, 라한. "
"기억해줘서 고맙군. "
라한이 크리퍼트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입가에 감도는 미소가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를?"
"너 죽이러 왔지. "
원래 라한은 이곳에서 싸우지 않으려 했다. 앞으로 싸울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터.
굳이 장소적인 불리함을 끼고 싸울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울과 헬레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싸워야했다. 비록 티격태격하며 지냈지만 프리미아와의 인연을
모른 척할 수 없었음이다.
"하, 하나만 묻자. 로테마이어스와 싸워서 이겼다고 들었다. 본 실력이었나? 아니면
함정을?"
라한이 함정을 파서 로테마이어스를 이겼다면 크리퍼트에게도 한 가닥 희망은 있다.
적어도 라한의 실력이 로테마이어스보다 약할 테니 말이다. 반대로 라한이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이겼다면 로테마이어스보다 강하다는 뜻이었다. 고 말은
크리퍼트카 라한을 이길 가능성이 아주 없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군. 한 가지는 말해주지. 넌 여기서 죽는다.
죽었다고 알려진 놈이니 완전히 사라져야 제대로 된 거 아니겠어?"
"흐음. "
라한의 자신만만한 말에 크리퍼트는 본능적으로 초의 장함을 느꼈다. 또
로테마이어스와의 싸움에서도 본 실력으로 이겼음을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
"제안? 너한테 얻고 싶은 전 없는데. "
"너한테 어떤 정보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잉글리아트가 있는 곳은 모르고 있겠지.
날 살려주면 그들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겠다."
크리퍼트의 말에 라한이 귀를 쫑긋 세웠다. 솔깃한 얘기였다. 아무래도 하나 보다는
다수가 있는 곳을 아는 것이 더 유용할 게 분명했다.
"지금 잉글리아트에게는 8 서클 마법서가 있다. 날 살려준 대가로 잉글리아트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된다면 8 서클 마법서를 얻을 수 있을 거다 너한테 손해되는 장사는
아닐 텐데. "
크리퍼트가 쐐기를 박는 말을 해 왔다. 이에 라한도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물건이니 처리해야겠지. '
라한은 8 서클 마법서를 없앨 생각이었다. 8 서클 마법을 백해무익하다고 생각한
탓이다. 물론 가지고 있는 8 서클 마법서가 인간이 만든 물건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적어도 인간의 몸을 감안해서 그에 걸맞게 만들었을 테니까,
라한은 이그니스와 투바에게 들었던 8 서클 마법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억에
의하면 아직 인간 중에는 8 서클에 이른 사람이 없었다. 결국 잉글리아트가 들고 있는
8 서클 마법서도 이그니스의 선조 마족이 만들었을 게 분명했다. 인간의 몸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만든, 그래서 인간이 익혔을 때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할 수도 있는
위험한 물건이라고 볼 수 있었다.
"8 서클 마법서라."
"살려주면 바로 떠나겠다. 세상과 동떨어져서 혼자 살아갈 테니까 제발 살려줘. "
크리퍼트의 비굴한 말에 라한이 피식 미소를 터트렸다. 누구나 살고 싶은 건
마찬가지일 터. 크리퍼트의 비굴한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진 건 아니었다. 다만 예전
당당하게 자신을 압박하던 때와 비교하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고 할까? 묘한
기분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좋아. 살려주지. 대신단한번이다. 다시 내 눈에 띄면 그땐 죽는다는 얘기지. "
"고맙다. 정말 고맙다. "
"자, 이제 말해보실까? 먼저 잉글리아트가 어디 숨어있지?"
"그는. 잠깐. "
말하려던 크리퍼트가 급히 자기 입을 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라한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러지?"
"내가 말해줬는데 날 살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너 같은 놈인 줄 아냐? 입으로 내뱉은 말은 지킨다. "
"그래도. "
크리퍼트는 라한이 자신을 살려주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자기가 라한
입장이라고 생각해보자 살려줄 이유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라한은 크리퍼트의 말에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놈이 자신을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게 당연했다.
"믿든 말든 네 마음이다 하지만 이번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좀 전에 했던 거래는
없었던 걸로 생각하겠다. "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
라한이 협박하자 크리퍼트가 다급히 대답했다. 누가 뭐래도 지금 크리퍼트는
약자였다. 라한을 의심해서 거래를 길게 끌고 갈 입장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잉글리아트는 어디 있지?"
"루이나 왕국 수도에 있다 "
"이필리에?"
"엘베로가 국왕이 된 후 루이나 왕국의 수도는 루스티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
엘베로는 루이나 왕국의 국왕이 된 후 대대적인 체제 개편을 단행했다. 각 지역의
명칭을 바꾼 것도 그때였다. 수도의 이름을 비롯한 각 지방의 이름을 거의 대부분
바꾸었고, 기사단에 붙어 있는 명예 호칭도 일부 수정했다. 또, 세율을 낮춰서
국민들이 조금 더 편히 지낼 수 있게 만들었고 귀족의 수를 10 퍼센트 가량 줄여서
과도한 녹봉 지출을 막았다. 이 모든 게 국왕이 바뀌었음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셈이다.
"루스티아? 이름 좋네. 근데 크리퍼트. 루이나 왕국의 수도는 작은 곳이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야 할 것 같군. "
"엘타나 남작을 볼모로 잡아서 그 저택에 머물고 있다. "
"엘타나?"
엘타나 남작이라는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한데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누구더라? 어디서 들어보기는 했는데. '
꽤 오랫동안 고민했는데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들은 이름인 듯했다.
"이, 이제 가도 되나?"
"8 서클 마법서가 어디 있는지도 말해줘야지. "
"그건 나도 모른다. 난 잉글리아트가 숨기 한참 전에 죽었다고 알려졌어. 그래서
자세한건 잘 몰라. 그들이 숨어있는 곳도 토일렛에게 들어서 아는 거라고. "
"음, 좋아. 보내주지. "
고민을 거듭하던 라한이 결국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살려주기로 약속했으니
보내줘야 했다. 하지만 또다시 허튼 짓을 할 수도 있는 일. 어느 정도의 제약
장치는 만들어둘 생각이었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
"어디로 보내줄까?"
라한이 크리퍼트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이에 크리퍼트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라한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를 두렵게 만드는듯했다.
"괜, 괜찮아. 내가 알아서 갈게. "
"훗, 누가 널 위해서 보내준다고 한줄 아냐? 너 골렘 가지고 있지?"
"아! "
"골렘은 수거해야지. 어디가 좋을까? 아, 거기가 좋겠군."
말을 마친 라한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하울과 헬레나를 양어깨에 멨다. 아직 경량화
마법이 남아있어서 쉽게 들 수 있었다.
"어디로 갈 거지?"
"너도 잘 아는 곳. 공간으로. "
라한이 크리퍼트와 쓰러진 하울, 헬레나를 데리고 공간 이동 했다.
라한과 크리퍼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로테라 숲이었다. 굴레를 벗은
존재들이 수백 년 동안 은거하며 지냈던 곳. 라한이 투바에 의해 목숨을 구함 받은
곳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여긴 로테라 숲?"
"아는군. "
"네가 여길 어떻게 알지?"
"어쩌다 보니 알게 췄다. 자, 골렘을 불러보실까?"
라한의 말에 크리퍼트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조금 넓은 곳으로 이동해서 골렘을
부를 요량이었다.
"그럼 부르겠다. 세실리온!"
크리퍼트의 외침에 땅이 조금씩 울렸다. 에고가 공중이 아닌 땅속에서 생긴 듯했다.
"멍청하기는, 앞을 보고 불러야지. "
"별로 불러본 적이 없어서. "
"쳇. "
-으음, 오랜만이군. 크리퍼트. 웬만하면 좀 자주 불러주지 않겠나?
골렘마저도 땅속에서 만들어진 듯 바닥에 입이 들썩거렸다. 묘한 상황에 크리퍼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골렘마저 제대로 부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운 듯했다.
"미, 미안, "
-이번에도 전투를 위해서 부른 건가? 그럼 저 인간을 죽이면 되는군.
"아니, 아니야. "
-으음?
"사실 널 부른 건. 휴우, 너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싶어서 불렀어. "
한참 망설이던 크리퍼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자주 부르지는 않았어도 정이 든
모양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네가 죽지 않는 이상은 계약 파기를 하지 않는다.
"그럼 죽여야겠군. "
"무, 무슨. "
라한의 말에 크리퍼트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골렘의 한마디에 자신을 죽이려
하다니. 너무 놀라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설마 약속한 걸 어기겠냐?"
라한이 신화력을 일으켜 크리퍼트의 몸을 감쌌다. 그에게서 골렘에게 가는 계약의
고리를 신화력으로 막아버리려는 의도였다.
계약의 고리.
이름은 거창하지만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생명이 있어야 계약이 유지되는
골렘과 주인. 라한이 말한 계약의 고리는 크리퍼트에게서 전해지는 생명체의 반응이
골렘에게 가지 않도록 막아버리는 거였다. 실제 죽었든 그렇지 않듯 골렘에게만
죽었다고 인식되면 그만이었다.
-죽은. 건가?
"슈라. "
-흐음, 자주 부르는군. 난 이제 그 골렘과 막 친해졌. 또 다른 손님이 있는 것
같군.
"응, 데리고 사라져줘. "
-그러지.
슈라가 주인이 죽었다고 생각한 골렘을 데리고 사라졌다. 너무 쉽게 골렘 하나를
처리한 라한이었다. 골렘이 사라지자 크리퍼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한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라한. 대체 윌 한 거지?"
"골렘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서 말이야. 자, 이제 용건이 끝났다. 아까 있던 곳으로
데려다 줄까? 아니면 그냥 알아서 가겠나?"
"그냥 여기서 헤어지고 싶다. "
"목적지는?"
"서쪽. 이 대륙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갈 거다. "
"그럼 몸조심하라고. 대륙에서 나하고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후후, 공간으로.
"
라한이 공간 이동을 이용해서 모습을 감추었다. 가면서 슬쩍 신화력을 뽑아서
크리퍼트의 몸에 심었다. 그가 어디에 숨어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일종의 추적
마법이었다.
라한이 사라지자 크리퍼트가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라한의 강함만 생각하면
지금 당장 어딘가로 도망가야 정상이었다. 한데 카이렌과 대륙 정복에 성공했을 때
얻을 영광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일단 살고 보자. '
대륙 정복으로 얻을 영광보다 라한이 더 무서웠다. 그가 본 라한의 힘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드래곤 로드마저 이긴 라한이니 아주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정을 내린 크리퍼트가 좀 전에 말한 것처럼 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도
없는, 목표도 없는 여행을 시작하는 크리퍼트였다.
로테라 숲에서 사라진 라한이 에테로가 머무는 닉스의 술집에 나타났다. 하울과
헬레나 때문에 물덩어리 변을 구하려던 계획은 일단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양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숨어 다닐 수는 없는 까닭이다.
"으악! "
"에테로님! "
라한이 나타나자 에테로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느긋하게 저녁식사를 즐기다가
라한의 방문을 받았다. 그런데 나타난 곳이 하필이면 에테로의 바로 옆 의자였다.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이런 등장에는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휴우,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이보게. 라한. 제발 미리 말 좀하고 나타나게. 이
늙은이 놀라 죽는 걸 꼭 봐야겠는가?"
"죄송합니다. 에테로님. 식사 중일줄은 몰랐어요."
"아고, 됐네. 됐어. 같이 식사하겠는가?"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차에 잘됐네요. "
라한이 어깨에 짊어진 하울과 헬레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렸다. 에일린을 집어
던지던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누군가?"
"그냥 좀 아는 사람요."
"자네 요즘 부업을 하는군. "
"예?"
"아닐세. 그냥 요즘 인신매매로 돈을 버는 건 아닌가 싶어서 해본 말일세. "
"에테로님도 참. "
에테로의 농담에 라한이 웃음을 머금었다. 생각해보니 그런 오해를 살 만도 했다.
처음에는 어린 소녀를, 다음에는 남녀 한 쌍을. 하루에 세 명이나 업어 왔으니 그런
오해를 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음, 맛있는데요. "
"닉스가 덩치는 그래도 요리는 잘한다네. "
"이게 닉스 아저씨가 만든 요리예요? 놀라운데요. "
"후후, 나도 처음 닉스가 만든 요리를 먹고 자네하고 똑같은 반응을 보였지. "
라한과 에테로가 농담을 해가며 유쾌하게 식사를 마쳤다. 식사가 끝나자 닉스가
들어와서 식기와 남은 반찬을 가져갔다. 라한을 보고 놀란 기색을 보이기는 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갑자기 쳐들어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젠
그러려니 하는 듯했다.
"변은 구하지 않았군. 저들이 변보다 더 중요한 인물인가?"
"뭐,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확인해볼 게 있어서 데리고 온 거거든요. "
"말해보게. 언제나 그렇듯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다 말해주겠네. "
에테로가 차분하게 말했다. 식사를 하며 농담을 주고받던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말'하게. "
"크리퍼트가 살아있습니다. "
"흐음, 역시 그랬군. "
에테로가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를 보며 라한이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던 건 아닐세. 미심쩍은 부분이 좀 있어서 의심하고 있었지. "
"그렇군요. "
"그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체가 사라졌네. 카이렌 일행이나 류카라한
일행에게서 눈을 뗀 적이 없는데 사라졌으니 제 3 의인물이 나타났거나 스스로
걸어갔다는 결론밖에 남지 않더군. 우린 제 3 의 인물로 자네를 지목하고 있었네.
그런데 낮에 자네한테 말했을 땐 죽은 줄도 모르는 얼굴이었어. 자네가 아니면
제 3 의 세력이 끼어들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으니 스스로 걸어서 사라졌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더군. "
에테로는 모든 변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확실하지 않은 얘기였기에 라한에게
하지 않았을 뿐. 미심쩍은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재삼재사 조사하는
성격이었다.
"낮에 말씀해주시지. "
"의심하고 있기는 했지만 살아있을 가능성보다 죽었을 가능성이 더 컸네. 우리도
그의 시체를 확인했거든. 그래서 자네한테 말할 수 없었네. "
"에테로님 답네요. 아, 또 있어요. 도대체 프라하가 위험에 처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듣자 하니 류카라한 일행과 카이렌 일행밖에 모르는 것 같던데요. "
라한이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카이렌과 다른 이들의 대화를 엿들은 후부터
궁금했던 사항이었다.
"우리가 카이렌 일행에게 심은 정보원이 헤르만이라는 건 알고 있을 테지. "
"예. 전에 제가 알아맞혔죠. "
"근데 요즘은 카이렌이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고 하더군. 자네를 공격한
뒤부터 의심이 부쩍 많아진 게지 "
카이렌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도 직접 확인할 정도로 의심이 많았다. 심지어
자기 동료들에게도 등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할 정도였다. 그런 카이렌이라면
심복에게 중요한 정보를 말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 거 같더군요. "
"근데 헤르만에게 또 다른 조력자가 생긴 모양이야.
"또 다른 조력자요?"
"그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우리도 들은 바가 없네. 헤르만이 말해주지 않았거든.
아마 당사자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모양이야. "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핵심 구성원인 것만은 분명했다. 어쩌면 좀 전 011
협박했던 크리퍼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대체 누굴까? 왜 날 돕는 걸까? 누군지 알게 되기 전에는 내버려둬야겠군. '
라한은 굴레를 벗은 존재 모두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 카이렌에게 배신당하고
프라하가 죽은 지금.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이런 결심을 카이렌이나
칭글리아트 일행도 알고 있을 터. 그럼 알려지지 않은 그 조력자도 라한에게 죽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정보를 주는 사람을 미리 죽일 필요는 없었다. 아직 처리할 일이 남은 지금.
다른 이들을 먼저 처리하고 맨 나중에 처리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정보를 걸러서 들어야겠어. '
지금까지 라한은 에테로의 정보에 거의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그가 알려준 정보
가운데 잘못된 게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신뢰를 어느
정도는 접어야 했다. 특히 카이렌에 대한 정보는 반 정도의 신뢰와 반 정도의
의심을 함께 가져야 할 듯했다. 그 정보가 굴레를 벗은 존재를 거쳐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더 물어볼 게 있는가?"
"케이플이라고 아십니까?"
"알고 있네. 종족은 라이칸드로프. 도끼와 검 모두를 쓰는 상당히 강한 실력자라고
알고 있네. 그리고 이번 프라하를 처리하는 임무에 참가한 세 명 중 한 명이지. "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
케이플은 시스마란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의 겁파 마법에 거의 유린당하듯 허무하게
쓰러진 것이다. 그러나 라한은 시스마란의 등장을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케이플이
시스마란에게 죽임을 당한 것도 몰랐다.
"케이플이 죽었는가?"
"예. 제가 갔을 펀 이미 죽어 있더군요. 목이 깨끗하게 잘렸습니다. 검을 상당히 잘
쓰는 사람에게 당한 것 같기는 한데.검흔만 살펴보면 케이플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자 같아서요. 고렇다고 드래곤이 싸운 흔적은 없고. "
에테로는 라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약한 자에게 죽임을 당한다?
말뜻만으로는 분명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 검술 실력이 떨어지는 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니? 그럼
기습이라도 당했다는 건가?"
"아니요. 거긴 분지처럼 저진 곳이라서 기습은 거의 불가능한 곳입니다. "
라한이 프라하와 케이플이 죽은 곳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 말에 에테로의 의문이
더욱 커졌다.
"그럼 더 이해가 안 가는군. 어떻게 약한 자에게 죽을 수가 있지. "
"저도 그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검술 실력만 따지면 케이플보다 약한 자가
분명합니다. "
"그럼 다수에 의한 공격에 당했다는 말인가?"
"저 역시 그런 생각입니다. 약한 자에게 당하려면 그 방법뿐이죠. 근데 잉글리아트
일행도 아니고 카이렌 일행도 아니더군요. "
"그럼 제 3 의 인물?"
"아주 무시할 수 없죠. 어쩌면 아까 데리고 온 그 꼬마하고도 관계가 있을지
몰라요. "
라한의 대답에 에테로의 얼굴이 침중하게 변했다. 지금 국면은 무려 4 개의 세력이
싸우는 형편이었다. 라한, 드래곤, 잉글리아트, 카이렌. 그런 상황에서 또 다른
세력이 등장했다? 자칫 유리함을 점한 라한이 불리해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알아보겠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다시 변을 찾으러 갈 생각인가?
아니요. 오늘은 너무 늦었습니다.
캉렌의 진영에 만들어진 밀실은 기계 장치로 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하나가
그렇다는 건 다른 밀실도 같은 방식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건 직접 눈으로
찾아야 하기에 밤에는 힘들었다.
알겠네. 그럼 쉬게.
예. 에테로님도 그만 쉬십시오. 그럼
라한이 인사를 하며 하울과 헬레나를 양 어깨에 메고 밖으로 나갔다. 라한이 나가자
에테로가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또 다른 세력이 나타나서
좋을 게 없었다. 라한은 이미 승기를 완전히 잡은 상황. 변수가 생긴다는 그 자체가
불안한 일이었다.
마지막 인사
라한이 집에 도착하자 제라드가 반갑게 맞았다. 하루 종일 혼자 지내느라 심심했던
모양이다.
어이, 라한. 왜 이제 오는 거야?
형님. 미안해요. 심심했죠?
아니, 뭐. 꼭 그렇다기보다. 근데 갔던 일은 다 해결됐어?
원래 제라드는 슈라, 테세르와 잘 노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라한이 가끔
자리를 비워도 심심함을 느끼지 않았다. 한데 오늘 낮에 에일린이 오는 바람에 놀
상대가 없었다. 슈라는 라한이 소환하는 바람에 사라졌고 테세르는 에일린
괴롭히기에 재미가 들어서 제라드와 놀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중년이 다 된 나이에 에일린 괴롭히기에 동참할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는 상대를 위해 테세르를 말리기도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혼자서 고독을 씹으며 시간을 소일해야 했다.
"깨끗하게 해결되지는 않았는데 뭐 대충은 됐어요. "
"다행이군. 근데 라한. 너하고 싸우는 상대가 드래곤 말고 또 있었어? 난 드래곤
로드한테 이기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
제라드는 라한의 상대가 누군지 몰랐다. 라한이 말해주지 않았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라한도 굳이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알게 되면 깊숙이
관여하게 될 건 자명한일. 제라드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려는 라한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있어요. 골치 아픈 놈들하고 아주 야비한 놈들하고. "
"둘? 놈들?"
"예. 두 집단이에요. "
"누군지 몰라도 실수했군. 너하고 맞서다니. 쯧쯧. "
제라드가 아는 한 대륙 최강자는 라한이었다. 최고라 불리는 드래곤 로드를
꺾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라한은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의 사자가 있는 한 영원히
최고가 될 수 없는 라한. 대륙을 마음대로 들었다 놨다. 하지 않는 이유도 조용히
자중하고 있는 신의 사자들을 의식해서였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강한 건 아니에요. "
"겸손도 지나치면 예의에 어긋나는 법이다. 넌 이미 최고야. "
"형님도 참. 아까 짜증 부린 거 미안해요. "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았다. 너한테 사정이 있었겠지. 근데 어깨에 멘 건 뭐냐?
요즘 인신매매에 재미 들였나?"
"아니요. 그냥 아는 사람들이에요. 들어가죠. "
"그러지. "
라한이 방으로 들어가자 테세르도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이 가까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주인. 일은 잘 끝났어?
"그럭저럭 그 꼬마는?"
- 매달아 놨는데.
테세르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이에 라한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뭐?"
라한이 테세르에게 에일린을 맡긴 건 단순히 귀찮아서였다. 아직 에일린이 적인지
아군인지, 혹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황. 그녀를 적으로 규정짓지
않은 이상 괴롭히라고 명령할리 없었다. 옆에서 이것저것 알려고 애쓰는 에일린
때문에 신경이 분산돼서 맡겨놨을 뿐이다.
-뒤뜰에 묶어 놨어.
"가자. "
라한이 서둘러 뒤뜰로 향했다. 제라드도 약간 놀란 얼굴로 뒤를 따랐다. 괴롭히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매달아 놓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뒤뜰에 가자 기진맥진해 있는 에일린이 눈에 들어왔다. 큰 나무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이 시계추를 연상케 했다.
"테세르. "
-응?
"풀어. "
-왜? 재밌잖아.
"풀라고 했다. "
라한이 낮은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그 말투에 테세르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풀게. 푼다고.
테세르가 공중으로 날아가서 에일린을 묶은 줄을 잘랐다. 줄이 잘리고 에일린이
떨어지자 라한이 손을 슬쩍 휘저었다. 신화력을 일으켜서 떨어지는 에일린을 받은
거였다.
착- !
에일린이 안전하게 착지하자 라한이 그녀를 조용히 바라봤다. 기진맥진한 에일린이
눈앞에 있는 라한을 매섭게 노려봤다. 자기가 이렇게 된 게 모두 라한 탓이라도
되는 듯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내가 미운가 보군. "
"이, 이. 악마 같으니. "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가 이러니 사과해야겠군. 미안하다, 꼬마야. "
"흥. "
라한의 사과에도 에일린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당한 고통이
얼마던가? 말 몇 마디로 화를 풀기에는 서러운 게 너무 많았다.
"그래도 화를 안 푸는군. 테세르!"
-어, 주인 왜?
라한이 테세르를 부르자 에일린이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다. 테세르라는
이름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는 듯했다.
"에일린을."
"잘, 잘못했어요. "
라한의 입에서 이름이 호명되자 에일린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다시
괴롭히라는 말이 나올까 봐 지레 겁먹은 것이다.
"얘가 왜 이래? 테세르. "
"잘,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
"이거 참. "
라한이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좀 전까지 독기를 풍기던 그
에일린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테세르. "
"제발 살려주세요. 어엉, 엉어어엉."
라한이 다시 테세르를 부르자 에일린이 울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되자 보고 있던
라한이 민망한 기분이었다.
"알았어. 누가 죽인대? 테세르. 씻겨라. 형님, 가요."
"그, 그래. 근데 라한. 테세르한테 또 맡겨도 될까?"
제라드의 입에서 라한이라는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러자 에일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라한? 오빠가 찾는 사람인가?'
시스마란은 라한의 이름을 거의 입께 달고 살았다. 항상 입이 마르게 칭찬하며
멋있다며 정의의 사도라며 떠받들었다. 그래서 에일린도 라한이라는 이름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시스마란은 라한을 정의감 넘치는 멋있는
마법사라고 말했다. 한데 눈앞에 있는 라한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에 지나지
않았다. 시스마란이 말한 라한과 눈앞의 라한,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동일인으로
보기 힘들었다. 아니, 거의 극과극의 인물이었다. 정의의 사도와 악마이니 말이다.
'이름만 같을거야. 이름만. 근데 너무 강하다. '
세상이 넓다 보니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도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엄청난
강자끼리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시스마란이 말한 강한
마법사와 눈앞에 있는 강한 실력자, 이름까지 같으니 아무래도 같은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테세르. 또 괴롭히면 내 손에 죽는다. 알았지?"
-칫, 줄 때는 언제고 그새 빼앗아 가냐. 치사한주인 같으니라고.
테세르가 투덜거리며 에일린을 잡아 어깨에 멨다. 이미 인간의 크기로 몸을 키운
상태라서 에일린을 업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발버둥을 치는 에일린 때문에 시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놔! 놔! 이 괴물아! 날 놔줘!"
-조용히 좀해. 이 그냥아가씨야. 너 떠들면 우리 주인이 화낸단 말이야.
"놔! 이 괴물! 차라리 날 죽여라. "
우씨.
"놔! 이. 우웁!"
참다못한 테세르가 에일린의 입을 막았다. 더 떠들었다가는 라한에게 꾸중 들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형님, 가죠. "
"그래. "
라한이 제라드와 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테세르는 에일린을 씻기기 위해 예전 변이
머물던 연못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모두 사라지자 슈라도 평소 자신이 쉬는 넓은
공터로 사라졌다.
방에 도착한 라한이 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어라?"
라한이 구해온 하울과 헬레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치 엄청난 죄라도 지은 듯
고개까지 떨군 채였다.
"은인을 뵙습니다. "
"은인인 건 좋은데 이거 뭐 하는 겁니까?"
"생명의 은인에게는 생명으로 갚아야 하는 법. 저희들의 생명을 구해주셨으니
이제부터 저희 생명은 당신 것입니다. "
하울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면이 있어서 구하기는 했지만 이런
지경이 올 줄은 몰랐음이다.
"이봐요. 저 모르겠어요? 예전에 만났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라한, 성격은 더럽지만 친인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성격. 실력은 드래곤조차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함. 당시 드래곤 로드와 적대
관계에 있었음. 그리고 최근 드래곤로드 로테마이어스를 꺾고 대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음. "
"젠장,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했습니까?"
"스승님이 그렇게 말해줬습니다. "
하울의 대답에 라한이 미간을 찡그렸다. 하울의 스승이라면 프리미아가 분명했다.
성격 더럽다는 주관적인 평가도 그녀가 말해준 것이리라.
'망할 프리미아 철 좀 들었나 했더니. '
"제가 라한인 것도 맞고 그 성격 더럽다는 것도 다 사실이라고 칩시다. 근데 전
부하를 두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거든요. "
"생명의 은인에게 생명을 바치지 못하면 있으나 마나 한 생명이겠죠. 은혜를 갚을
수 없으니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습니다. "
하울이 주먹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당장 목숨을 끊겠다는 게 허언은
아닌 듯했다
"망할. "
퉁- !
라한이 신화력을 일으켜 하울의 주먹을 막았다. 그러자 하울이 '왜?' 라는 의문을
담아 라한을 바라봤다.
"망할, 프리미아. 그년이 시켰죠? 이렇게 하라고 사주한 거죠?"
"말할 수 없습니다 "
"사실대로 말해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프리미아가 시킨 거 맞죠?"
" 예. "
라한이 받아들이겠다고 하자 하울도 순순히 실토했다. 라한이 받아들였으니 이제
하울과 헬레나는 라한의 사람이었다. 스승인 프리미아보다 라한의 말을 우선적으로
들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망할. 갔다 와서 봅시다. 공간으로. "
라한이 사라지자 하울과 헬레나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울의 말처럼 생명의
은인에게 생명을 바치는 관습이 그들의 섬에 있는건 사실이다. 하지만 부하가 되는
건 아니었다. 언제고 한번은 그의 목숨을 살려주는 게 그곳의 관습이었다.
하지만 프리미아가 그들에게 라한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그의 부하가 되든 친구가
되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어떻게든 그를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는 명령이었다.
에일린이 씻고 나오자 테세르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점수를 매기듯
야시시한 테세르의 눈빛. 에일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야이, 괴물아. 뭘 보는거야?"
-보, 보긴 뭘 봤다고 그래? 난 그냥 깨끗하게 씻었는지 확인한거라고.
"흥. "
당황하는 테세르를 보며 에일린이 코웃음을 쳤다. 이미 그녀에게 테세르는 변태,
치한으로 낙인찍힌 상태였다.
-야, 꼬맹이. 그 눈빛은 뭐야?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믿어. 믿지. 근데 대체 당신 정체가 뭐야?"
에일린은 낮에 테세르를 봤을 때부터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시스마란에게 슈라나
테세르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 탓이다.
시스마란과 지낼 당시에 라한은 슈라와 테세르에 대해 말하는 걸 꺼려했다.
시스마란도 그런 라한의 의도를 알고 있었기에 에일린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 내 정체?
"그래. 이 괴물아. 넌 누구야?"
용기를 얻은 에일린이 만용을 부렸다. 아직 어려서인지 아니면 개념이 없어서인지,
테세르의 무서움을 완전히 잊어먹은 모습이었다.
'요거 봐라. 재미있네. '
에일린의 당돌한 말에 테세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놀이를
발견했을 때 짓는 테세르 특유의 표정이었다.
-난 사실 인간이었다.
"뭐?"
-지금 내 몸이 이렇게 된 건 모두 우리 주인에게 저주를 받아서. 흑,흑. 너도
나처럼 되지 않으려면 우리 주인한테 잘해야 돼.
"라, 라한이라는 그 사람이 이렇게 만든 거라고?"
-그래, 나도, 나도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런데. 엉엉 엉.
급기야 테세르가 울음을 터트렸다. 너무 서러워서 듣고 있던 에일린도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울, 울지 마. "
-우리 주인. 무서워. 조심해
"그럼 돌로 뭉쳐진 커다란 그것도 나쁜 주인이 한 짓이야?"
-흑, 흑, 말 안 듣는다고 이렇게 만들어 버렸어. 말 잘들으면 나중에 원래 모습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하는데, 정말 해줄지도 의문이고. 엉엉.
테세르의 말에 에일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제야 라한의 무서움을 깨달은
듯했다.
-오늘은 저기 있는 빈방에서 자라. 그리고 내일 우리 주인이 부르면 제발 대들지 좀
마. 네가 대들면 우리한테까지 화가 미친다고.
"알았어. "
에일린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테세르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공간 이동 했던 라한이 예전에 방문한 적이 있는 베센 왕국의 술집에 도착했다.
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가는 모습이 화가 단단히 난듯했다.
쾅- !
"야! 나와!"
"손님. 오늘 영업은 이미 끝났습니다. "
"시끄러. 여기 주인 나오라고 해. "
종업원의 만류에 라한이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상황이 이쯤 되자 곳곳에서
청소하던 종업원들도 하던 일을 멈췄다.
"손님. 주인께서는 아무나 만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다시 찾아오셔서 정식으로
통보해주십시오."
"머리 파랗고 실실 웃는 그년 나오라고 해. 안 그러면 여기 내버린다. "
"손님. 자꾸 이러시면 저희도 무력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무력? 까짓것 해보자. 누가 이기나 보자고."
말을 마친 라한이 팔을 걷어붙였다. 여차하면 정말 다 때려 부술 기세였다
"호호호, 머리 파랗고 실실 웃는 그년이 나를 의미하는 건가?"
라한이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외칠 때, 안에서 프리미아가 걸어 나왔다. 여전히
귀엽고 깜찍한 얼굴이었다.
"그래. 이 망할."
"형수한테 그렇게 심한소리를 하면 안 되지 형수님하고 불러봐."
"너 죽을래?"
라한이 성큼성큼 걸어가서 프리미아의 멱살을 잡았다. 부릅뜬 두 눈이 그가
분노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라한아. 그 손 놓거라. "
"누. 형님?"
차분한 레테아의 목소리에 라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테아가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원래 라한 정도의 실력이면 프리미아뿐 아니라 레테아가 이곳에 있다는 것도
알아채야 정상이었다. 한데 너무 화가 나서 미처 기운을 퍼트리고 살펴보지 못했다.
알았다면 그래도 형수라고 할 수 있는 프리미아의 멱살을 잡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라한아. 형수 멱살이나 잡는 몰상식한 행동은 누구한테 배운거냐? 내가 그렇게
가르쳤더냐?"
"아, 아니요. "
라한이 프리미아의 멱살을 놓고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얼굴 가득 당혹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들어가서 얘기하자꾸나. "
"예. "
레테아의 말에 라한이 공손한 표정으로 따라 들어갔다 이 상황을 가장 흥미 있게
지켜보는 이는 프리미아였다 항상 자신을 놀렸던 존재 라한. 말과 실력, 모든
면에서 단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프리미아의 통쾌한 첫 승리였다.
안에 들어간 라한과 레테아가 마주 보고 앉았다. 프리미아는 레테아의 뒤 011 서 혀를
날름거리며 라한을 놀려댔다.
'망할 프리미아. 내가 이래서 드래곤을 싫어한다니까. '
"라한아. 드래곤 로드한테 이겼다는 얘기를 들었다. 장하구나. "
"뭘요. "
"하지만 난 네가 걱정된다. 너 역시 허황된 야망으로 대륙을 어지럽힐까 걱정돼서
하루도 편히 잘 수 없구나 "
레테아의 말에 라한이 공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이놈의 대륙을 가질 생각은 조금도 없거든요. "
"남자라면 야망을 품을 줄 알아야 하지. 하지만 그 야망을 자제할 줄 아는 것도
남자가 가져야 할 도리란다. 부디 지금의 네 생각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예. 형님 말씀 명심할게요. "
라한이 대답하자 레테아가잠시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야 본론을 꺼낼 생각인
듯했다.
"형님. 말씀하세요. 동생한테 못할 얘기가 뭐가 있어요?"
"로드가 죽었으니 대륙이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것 같구나. 맞느냐?"
"거의 그렇죠. "
"그럼 우리와 함께 돌아가지 않겠니? 그곳에서 마음 편하게 지내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느냐?"
레테아는 라한이 걱정되었다. 야망을 품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는 일. 자칫 라한을 오해하고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런 시기 질투가 커지면 음모가 되고, 결국 라한이 그 음모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죄송해요, 형님. 이번 말씀은 따를 수 없을 것 같아요. "
"왜? 대륙을 정복할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근데 왜 돌아갈 수 없다는
게냐?"
"대륙 정복은 아니지만 제게도 꿈이 있어요. "
"휴우우, 네 생각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겠구나. 그럼 언제쯤 네 꿈을 이룰 것
같으냐?"
레테아가 착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라한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게 그를 답답하게
만든 듯했다.
"안 그래도 형님을 찾아뵈려고 했어요. 전 조만간 대륙을 떠날 생각이거든요. "
"대륙을 떠나? 어디로?"
"목적지는 없어요. 그냥 떠나야할 것 같아서. 앞으로 형님을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라요. 미리 인사드릴게요. "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깊이 숙였다. 형에게 행하는 마지막 인사였다.
"꼭 떠나야 하느냐?"
"예. "
"네 생각이 그렇다면 말리지 않으마. 판트리아 대륙 남쪽 섬에서 널 기다리는 이
형이 있음을 명심하거라. 네가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리마. "
"예, 형님. "
레테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다시 동생을 볼 수 없다는 게 그를 서글프게
만든 것이리라.
"그럼 가볼게요. 형님, 행복하세요. 공간으로. "
라한이 서둘러 공간 이동 했다. 더 머물러 있다가는 형에게 눈물을 보일 것
같아서였다.
다음 날 오전 늦게 일어난 라한이 마당으로 나왔다. 라한이 나오자 제라드와 슈라,
테세르 그리고 에일린이 마당으로 모두 모였다.
"라한아. 피곤했나 보구나, "
"좀 늦었죠?"
-에이, 제라드씨가 잘 몰라서 그러나본데, 우리 주인 원래 늦잠 잘 자요.
테세르가 비꼬자 옆에 있던 에일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테세르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허리를 슬쩍 꼬집었다.
-왜?
"조심해. 더 괴물같이 만들면 어쩌려고 그래?"
에일린이 작은 목소리로 테세르를 일깨웠다. 그제야 테세르도 어제 자기가 했던
장난을 기억해냈다.
"꼬마야. 그게 무슨 말이야? 괴물 같이 만들다니?"
에일린은 소곤소곤 말했지만 듣지 못할 라한이 아니었다. 오감에 있어서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라한. 에일린의 작은 목소리도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귀신같은 라한의 예민함에 에일린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아, 아니에요. "
"뭐가 아니라는 거야?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어제 하던 얘기나 계속해보지, "
"예?"
"너! 정체가 뭐야? 네 실력으로 텔레포트하는 건 불가능할 테고. 그럼 누군가가 널
강제로이동시켰다는 얘긴데, 대체 누구야?"
라한이 에일린을 처음 만났던 장면을 떠올리며 물었다. 라한이 입을 열자 테세르와
슈라, 제라드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오빠요. 오빠가 절 강제 이동 시켰어요. "
"그래?"
라한은 에일린이 고분고분하게 대답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 살기를
흘리면서 물었는데도 버텼던 에일린이지 않은가? 오늘도 당연히 모른다며 버틸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에일린의 입에서는 너무 쉽게 대답이 나왔다. 얼굴도
어제와는 다르게 공손한 표정이었다.
'거짓말인가?'
너무 쉽게 대답해주자 오히려 지금 대답이 거짓말 같았다. 이렇게 쉽게 말해줄
거라면 어제 그렇게 버틸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오빠가 누군데?"
"저, 저기 그 전에 여쭤볼 게 있어요. "
'여쭤봐? 흐음. '
어제는 반말 일색이었던 게 에일린의 말투였다. 그런데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투가 높임말이었다. 그것도 극존칭.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라한의
의심을 가중시켰다.
"말해봐. "
"혹, 혹시. 시, 시스마란이라고 아세요?"
"시스마란?"
"시스마란?"
에일린의 말에 제라드와 라한이 동시에 대답했다. 둘 모두에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예. "
"시스마란이라. 넌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지?"
"시스마란이 제 오빠예요. 어제 절 강제 이동 시켰던 사람도 시스마란 오빠구요. "
에일린의 대답에 라한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의 말이 거짓말이라 생각한 탓이다.
라한이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시스마란은 고아였다. 당연히 가족도 없었다.
여동생이 등장한 그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또, 시스마란은 몇 년째 연락이
끊어졌던 사람이다. 이렇게 공교로운 때에 처음 보는 여자가 여동생을 자처하고
있으니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거기다가 시스마란은 마법사가 아닌 검사였다.
검사가 마법을, 그것도 8 서클에 버금가는 텔레포트 아더를 사용했다는 건 믿음이
가지 않았다.
"오호, 그래? 시스마란이 오빠라고?"
"예, 우리 오빠가 당신 얘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라니까요. "
"오호, 그래? 테세르!"
계속 듣고 있던 라한이 테세르를 불렀다.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였다.
'감히 내 과거를 건드리다니. '
시스마란은 라한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당연히 지금도 만나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한데 누군가가 나타나서 시스마란의 여동생을 사칭하고 있었다.
라한의 과거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셈이다.
-주인, 왜?
"데리고 놀아라. "
-어? 시스마란하고 아는 사이라고 하잖아. 시스마란이면 전에 그 바른생활 사나이
아냐?
"테세르. "
-아, 알았어. 야! 꼬맹아. 가자. 으차!
테세르가 에일린을 어깨에 들쳐 메고 사라졌다. 에일린은 영문도 모른 채 테세르에
업혀 이동되었다.
테세르가 사라지자 제라드가 조심스럽게 라한을 불렀다
"라한아 "
"예, 형님. "
"시스마란은."
"시스마란은 검사였습니다. 기억하시죠?"
라한이 제라드의 말을 끊고 해명했다. 그 말에 제라드도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군. 그럼 저 꼬마가 사기를 친 건가?"
"예. 어떻게 시스마란의 이름을 알았는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용납할 수 없네요. 제
과거 속 인물 중 몇 안 되는 호의적인 인물이었거든요. "
라한은 과거에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대륙을 종횡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또 헤어졌다. 만난 사람 모두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난 사람 중 몇 명은 아직도 라한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특히 호의적으로 만나서 호의적으로 헤어진 이들은 잊히지가 않았다. 그런 사람들
중 대표적인 이가 시스마란 과제라드, 다크시안이었다. 때문에 누군가가 그들과의
기억에 흠집 낼만한 행동을 하면 그만큼 심한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세상 참 무서워졌군. 저 어린 것을 이용해서 널 속이려고 하다니. "
"누군지 몰라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
"그래, 이번 일은 나도 화가 나는군. 시스마란은 내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으니까. "
제라드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그 역시 분노를 느꼈다는 증거였다. 그 모습을
보며 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래서 내가 형님을 인정했지. '
평소 제라드는 무척이나 부드러운 성격이었다. 그래서 누구라도 그를 보면 만만하게
보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제라드도 한번 화가 나면 무서울 정도로 변했다.
혈전사. 그 호칭에 걸맞은 진정한 피의 전사로 변하는 제라드였다.
카이렌은 3 일이 지나서야 크리퍼트가 사라진 걸 알았다. 그동안밀실에 들어가지
않은 탓이다. 3 일째 토일렛이 잉글리아트의 소식을 가져왔고 그래서 밀실에
모이기로 했다. 만약 이 모임이 없었다면 크리퍼트가 사라진 걸 깨닫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터였다.
"크리퍼트는 어디 있지?"
"글쎄다. 그냥 놀러 간 거 아닐까? 여기가 좀 답답하잖아. "
카이렌의 물음에 루이에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크리퍼트는 이전에도 조용히
외출했다 돌아온 적이 몇 번 있었다. 때문에 루이에는 이번에 사라진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토일렛. 어떻게 됐어? 모이자고 한 걸로 봐서
잉글리아트가 깨어난 것 같은데?"
"맞아. 잉글리아트가 깨어났다. "
"누구한테 당한 거지?"
" 라한. "
토일렛의 짧은 대답에 다른 이들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라한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였다.
"그 자식. 정녕 끼어들 생각이군. "
"이게 모두 너 때문이지 않은가? 그 전에만 해도 라한은 우리 일에 관심이 없는
놈이었어. 드래곤하고는 수시로 부딪친 것 같았지만 우리하고는 아무런 충돌이
없었단 말이야! 한데 네가 암습을 가하는 바람에.
기습을 당하기 전의 라한은 이번 일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는 알게 모르게
많이 개입했지만, 겉으로 드러난 라한의 움직임이 없었다. 드래곤과 몇 번 충돌한
게 알려졌을 뿐. 류카라한 진영과 카이렌 진영에는 그 어떤 간섭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망할. 그래서 어쩌라고? 지금 라한을 찾아가서 빌까? 아니면 내가 가서 목을
내밀어? 내가 죽으면 너희들이라고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림없는 소리. 그놈은
우리 모두가 죽기를 바라고 있을 거다. "
"잠깐, 잠깐. 지금 이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니다. "
카이렌의 짜증 가득한 말을 루이에가 제지했다. 평소에 말이 별로 없는 그였기에 단
한마디만으로 토일렛과 카이렌의 시선을 모았다.
"루이에. 그게 무슨 소리지?"
"프라하가 가는 곳은 우리밖에 모른다고 했지?"
"그렇지. "
"근데 라한은 프라하가 있는 곳에 나타났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크리퍼트가
사라졌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루이에의 말은 명백했다. 라한에게 정보를 전해준 인물로 크리퍼트를 꼽은 것이다.
"에이, 설마. 크리퍼트는 그렇게 간 큰놈이 아니잖아. 검술 실력은 뛰어나지만
모험을 시도할 만큼의 담력은 없는 놈이야 "
"맞다. 루이에. 내가 크리퍼트를 받아들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
"하지만 잘 생각해봐라. 프라하의 위치를 라한이 알고 있었다. 그건 우리 중의 한
명이 라한의 끄나풀이라는 얘기밖에 안 돼. "
루이에의 말에 카이렌도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라한에게 정보를 전해준 자가 있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사라진 크리퍼트.
우연으로 보기에는 상황이 너무 절묘했다.
"크리퍼트가 의심스럽군. "
"그렇지 "
"그래도 섣불리 결정할 수는 없다. 만약 며칠 안으로 크리퍼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땐 확실해지는 거겠지. "
일단 크리퍼트에 대한 의심은 보류하기로 했다. 상황이 딱 들어맞기는 했지만 그가
지금까지 해온 일이 너무 많았다. 그간의 공로를 생각해서라도 어느 정도 기회를
주고 싶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잉글리아트가 다른 말은 안 했나? 가령 라한의
실력이라든가, 아니면 프라하의 생사에 대한 것. "
"프라하는 죽었다. 잉글리아트가 불타고 있는 프라하를 봤다고 하더군. 아마
프라하가 죽고 나서 라한이 나타난 모양이야. "
"라한의 실력은?"
"휴우우. "
카이렌이 다시 묻자 토일렛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라한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으로 답답함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꺾을 방법이 없는 상대였다.
너무 강해서, 자신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강자라서.
"강한가 보군. "
"잉글리아트는 라한에 대해 딱 한마디로 정의하더군. "
"한마디?"
"응. "
토일렛이 카이렌과 루이에의 얼굴을 차례로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슬쩍 흔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절대자. "
"절.대자. "
"예전에도 강했지. 그때 카이렌 네가 암습을 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아 "
루이에와 카이렌의 얼굴도 착잡하게 변했다. 예상은 어느 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듣게 되자 기분이 더 엉망이었다.
"내가 잉글리아트가 아니라서 뭐라 말하기 힘들군. 아무튼 잉글리아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또 뭐라더라? 맞서 싸우는 게 자살 행위라던가?"
"흐음. "
"망할. "
잉글리아트가 한마디 할 때마다 루이에와 카이렌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이미
한 번 격돌해봤고 당시에도 정식 대결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라한이었다. 그러나
그땐 절대자라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비면 어떻게
상대할 수도 있었던 게 라한이었다. 그랬던 그가 더 강해져서 나타났다. 카이렌과
루이에가 절망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카이렌. 네 생각을 묻고 싶다. 어쩔 거지? 만약 라한이 이곳을 공격해 온다면?"
"정면 대결로는 이길 수 없겠지. 하지만 내게도 방법이 있다."
"은신술 말이군. "
"그래. 너희들이 시간을 끌고 시선만 잡아둔다면 누구라도 죽일 자신이 있다. "
카이렌이 짐짓 당당하게 말했다. 이렇게라도 용기를 얻고 싶었던 모양이다.
카이렌의 말에 루이에와 토일렛이 침묵에 잠겼다. 그들은 카이렌의 말대로 하면
승산이 있을까를 타진해보고 있었다. 한참 고민하던 토일렛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능성은 있겠군. "
"가능성? 훗, 내 은신술은 판트리아 대륙 역사상 최고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상대가 라한 아닌 라한 할애비라도 죽일 자신 있어! "
카이렌이 눈을 빛내며 서서히 살기를 일으켰다. 그 모습을 토일렛이 흐뭇하게
지켜봤다. 카이렌의 은신술을 믿는 모습이었다.
라한은 3 일 정도 아무 생각 없이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를
만끽하고 싶어서였다.
4 일째, 라한이 옷을 챙걱 입고 나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테세르. 에테로님은?"
-곧 올 거야. 저기 왔네.
라한은 옷을 입기 전에 테세르에게 일러 에테로를 불렀다. 그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에테로님. 저 꼬마 좀 맡아주세요. "
라한이 에일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 여정에는 테세르, 슈라도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 에일린을 돌볼 사람이 없었기에 에테로를 부른 것이다.
"어디부터 갈 생각인가?"
"잉글리아트부터 봐야겠어요. "
"조심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네. 언제까지 돌아올 수 있는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
라한의 담담한 말에 에테로가 웃음으로 대담했다. 그 누구에게서도 긴장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테세르. 이리로 들어와. "
라한의 말이 끝나자 테세르의 몸이 원래의 작은 크기로 변했다. 그러자 에일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테세르가 작게 변하는 걸 처음 보는 에일린이었다.
"저, 저게."
"형님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
"나도 가겠네. "
"형님. "
"내가 비록 너보다 약하지만 그래도 혈전사라고. 천하의 혈전사가 상대가 무서워서
떨면 되겠어?"
제라드의 말에 라한이 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당당한 말에서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그래요. 같이 가요. "
"그래야 내 동생이지. "
제라드가 라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정한 형제 같은 모습에 보고 있던 에테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기 좋군. "
"훗, 에테로님. 그럼 저 꼬마 좀 부탁합니다."
"잠시만요. "
라한이 사라지려 할 때, 하울과 헬레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등장에 라한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무슨 일이죠?"
"말씀 놓으십시오. 이제 저희는 라한님의 부하나 마찬가지입니다. "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러지. 여기 무슨 일로 온 거지?"
"저희는 주인님의 부하입니다. "
하울의 말에 라한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나름대로 생각해둔 말이 있다는 증거였다.
"후후, 그러니까 주인인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가겠다는 건가?"
"예. "
"그럼 주인인 내가 시킨 일도 해야겠군. 너희들은 부하니까. 맞지?"
"물론입니다. "
라한의 진한 미소에 하울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라한에게 복안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럼 여기 남아서 블리아드 마을을 지켜라. 그리고 재능 있는 자들을 뽑아서
검술도 전해주고. "
"예?"
"왜? 싫어? 내가 너희들 주인이잖아. 시키는 대로 해야지.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
"그럼 하는 거지, 잘 부탁한다. 공간으로!"
"수고하게, "
사라지는 라한과 일행을 보며 에테로가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봤는지 라한과
제라드도 마주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에테로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안 남은 것 같군. '
라한 일행이 사라지고 가장 좋아한 사람은 에일린이었다. 그래도 에테로는 인간으로
보인 모양이다.
"할아버지 아까 그 사람. 대체 왜 그래요?"
"에잉? 무슨 뜻이지?"
"아, 아니에요. 할아버지도 한통속이었지. 쳇. "
에일린이 말을 얼버무리자 에테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하려던 말을 모를
에테로가 아니었다. 한데 그 말이 당돌하면서도 귀여워서 도무지 화를 낼 수
없었다.
한편 라한의 명령 때문에 남은 하울과 헬레나의 얼굴이 마구 찌푸려졌다. 이런
식으로 떼놓을 줄은 몰랐는지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시킨 일이니 해야겠지. 저기 어르신.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십시오. "
"따라오게. 내가 촌장을 소개해주겠네. 라한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의심하지는 않을 게야. "
"감사합니다. "
에테로가 하울과 헬레나, 에일린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한동안
북적이던 라한의 거처가 휑하게 변했다.
라한와 일행들이 루이나 왕국의 수도 루스티아 외곽에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좋군. 테세르. 너도 여긴 오랜만이지?"
-그렇게 좋아?
"뭐, 그냥. 그래도 고향이잖아. "
고향에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괜히 기분이 들떴다. 라한도 알게 모르게 향수병을
앓고 있었던 모양이다.
-난 인간들이 고향을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그게 인간이지 아무리 강한 척해도 정이라는 감정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거든. "
-쳇, 저 아저씨는 또 잘난척하네. 자기가 오래 살면 얼마나 오래 살았다고.
제라드의 말에 테세르가 딴죽을 걸었다. 자기가 모르는 걸 남이 알고 있다는 게
심통 난 모습이었다.
"어쩌다 보니 또 잘난 척했군. 미안하네. 까만 정령. "
-테세르라니까. 자꾸 까만 정령이라고 부를래?
"난 너보다 머리가 나빠서 이름도 못 외우는군, 똑똑한 네가 이해해야지.
어쩌겠어?"
제라드의 말에 테세르가 씩씩거렸다. 얘기가 길어질수록 자꾸 당하는 느낌에 화가
치밀었다.
"테세르. 그만 해. 형님도 그만하세요. 싸울 놈이 없어서 저런 멍청한 놈하고
싸워요?"
"허허, 라한. 그게 무슨 소린가? 우리 까만 정령님께서는 너무 똑똑해서 세상을 다
굽어 살필 수 있다네. "
"푸홋, 형님. 그만 하세요. "
제라드의 비꼼에 테세르의 볼이 터질 듯 부풀었다. 화는 치미는데 대꾸할 말은
생각나지 않고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라한. 근데 어디로 갈 생각이야? 바로 그, 잉.뭐더라? 잉글리아트? 아무튼 그자를
공격할 거야?"
"아니요. 여긴 내 고향이잖아요. 예전 살던 곳이나 한번씩 가볼까 생각 중이에요.
그놈들은 어차피 도망 못 가거든요. "
라한은 잉글리아트와 그 일행들이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해 놓은 게 많으면
포기하기도 아까운 법. 그들은 류카라한을 전복시키고 지금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그렇게 투자한 게 아까워서라도 쉽사리 도망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럼 어디부터 구경할 생각인데?"
"집요. 가자. "
라한이 앞장서서 걷자 테세르가 그의 로브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많은 곳을
지나갈 것이기에 알아서 숨은 거였다.
한참 동안 걷던 라한이 어느 저택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서글픈 표정과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예사 저택이 아님을 짐작케 했다.
"여기가 어디야?"
-여긴 예전에 라한 주인이 살던 집이었어.
"여기가 필슨 백작가로군, "
제라드도 라한의 성이 필슨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또, 필슨 가문이 엘베로에 의해
멸문했음도 잘 알았다. 용병들의 수장이랄 수있는 혈전사. 정보 습득에 있어서도
예사롭지 않은 존재였다.
"알고 있었군요. "
"내가 혈전사라는 걸 잊었나?"
"훗, 혈전사라는 호칭이 자랑스러운가 봐요. "
"혈전사는 용병들의 꿈이다. 난 그 꿈을 이룬 거지. "
제라드의 얼굴에 자부심이 어렸다. 용병들은 대부분 혈전사라는 꿈을 위해 평생을
바친다. 제라드 역시 혈전사 하나만 바라보고 평생을 용병으로 지낸 사람이었다. 그
꿈이 이루어졌을 때 세상을 다가진 기분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근데 전 혈전사를 처음 봐요. "
"후후, 아마 앞으로도 나 외에는 혈전사를 보기 힘들 거다. "
"왜요?"
"혈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돼. 일단은 경력이 중요하지. 일정
수준 이상의 용병 수행 횟수가 되지 않으면 혈전사가 될 시험조차 치를 수 없거든.
"
제라드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물은 건 왜 혈전사를 볼 수
없느냐에 대해서였다. 한데 제라드는 뜬금없이 혈전사가 되는 조건을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물었던 내용과 동떨어진 대답이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형님. 제가 물은건."
"알고 있어. 혈전사를 볼 수 없는 이유가 혈전사가 되는 조건에 있거든. "
"그래요?"
라한이 벽에 몸을 기대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제라드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을
준비를 갖춘 모습이었다. 라한이 벽에 기대자 제라드가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입을
열었다.
"응. 아까 어디까지 했더라? 아, 용병 수행 횟수까지 했지. 일단 용병 수행 횟수가
충족되면 다음은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해. 그 실력을 확인하는 방법은 용병의 탑에
있지. "
"용병의 탑?"
"그래. 베루니아 왕국 북부에 있는 곳이지. 용병의 탑에는 수많은 기관장치가 되어
있어. 그 기관장치들을 모두 뚫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비로소 혈전사가 될 수 있는
거야. "
"그렇게 해서 혈전사가 되는 거구나. 전 처음 듣는 얘기예요. "
라한도 용병패는 가지고 있었다. 어릴 때 루이나 왕국을 떠나오면서 돈을 주고 산
거였다. 하지만 단순히 통행증 대용으로 쓸 생각이었기에 용병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당연히 용병의 탑이라든지 혈전사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문제는 그 꼭대기에 있다. 꼭대기에서 혈전사의 칭호를 받으면 한 가지 임무가
주어지거든. "
"한 가지 임무? 그거 말해주면 안 되는 거죠?"
혈전사에게 임무가 있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럼 그 임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비밀일 게 분명했다.
"뭐, 사실 비밀이기는 하지만. 너한테는 말해주마, "
"괜찮아요. 궁금하기는 하지만 형님을 곤란하게 만들면서까지 알고 싶지는 않은
걸요. "
"사실 너한테 도움을 청하고 싶어서 말해주려는 거다. 도움을 받으려면 이유는
알아야지. "
"도움?"
제라드는 라한과 함께 다니면서도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했다. 웬만한
일은혼자서 하려고하고,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받더라도 나중에 그에 준하는 일로
반드시 보답해줬다. 스스로의 자존심이 남의 도움을 거저 얻는 걸 용납 못 하는
것이다.
그런 제라드이기에 도움이라는 말이 특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쉽지
않은 도움이 될 테지만 말이다.
"그래. "
"말해보세요. 들어 드릴게요. "
"미리 대답하지 마라. 듣고 나서 신중히 생각하고 대답해라. "
라한의 성급한 말에 제라드가 제동을 걸었다. 행여나 섣부른 판단으로 후회할 일을
할까 걱정되었음이다.
"알았어요. 들어보고 판단할게요. 뭐예요?
"혈전사의 임무는. 휴우우. "
제라드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동생이 된 라한에게 말하기 곤란한듯했다.
제라드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라한이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제라드의 눈을 보며 방긋 웃어 보였다.
"형님. 아니, 형. 절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편하게
말해요. 동생이잖아요. "
"그래. 동생이지. 에휴, 사실 혈전사의 임무는 신대륙을 찾는 일이다. "
"흐음."
제라드의 대답에 라한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런 임무일 줄은 예상치 못한 탓이다.
라한은 기껏해야 어딘가로 가서 누군가와 싸우라는 임무인 줄 알았다. 그게
혈전사다운 임무라 믿었다. 한데 실제 임무는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신대륙
발견. 라한도 순간 당혹감을 느꼈다.
"무리겠지?"
"지금까지 혈전사들이 모두 신대륙을 찾기 위해 사라진 거예요?"
"아니, 꼭 그렇지는 않아. 감시하는 사람이 없거든, 그냥 임무만 받아놓고 마음대로
지내는 사람도 있지. "
혈전사가 된 사람들이 모조리 대륙을 찾아 떠났다면 혈전사에 대한 전설은 없어야
정상이다. 사라진 그들이 전설을 만들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혈전사에 대한 무수한 전설이 존재했다. 때로는 혈전사가 용병들을 규합해서 왕국을
공격한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그럼 형님은요?"
"모르겠다. 신대륙을 찾으러 떠나고 싶기는 하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지금까지
신대륙을 찾아 떠난 혈전사들이 수없이 많았는데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만큼 위험하다는 얘기지. "
"그렇겠죠. "
"문제는 신대륙을 떠나는 첫 시작이 레비안 산맥이라는 거야. 그곳을 넘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지. 너도 알다시피 드래곤 산맥이잖아. 인간이 건너가는데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 "
실제로 신대륙을 찾아 떠난 혈전사의 거의 대부분은 레비안 산맥에서 목숨을
잃었다. 드래곤에게, 혹은 엄청난 수의 몬스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어쩌면
혈전사의 신대륙 찾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레비안 산맥일지도 모른다.
"형님 근데 신대륙 찾기를 꼭 동쪽에서 시작해야 돼요?"
"아니, 꼭그런 건 아니야. 어디로 가든 상관없어. 근데 남쪽은 바다라서 배를
몰아야 하는데 둘이서 배를 몰고 갈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불가능하고. 서쪽은 사막이라서 너무 위험해. 그 끝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사막에 뛰어들 수는 없지. 그리고 북쪽은 너도 알다시피
파라리스와 페사가 있지. 엄청나게 추운 곳이라서 들어가면 곧바로 얼어 죽는다고
하더군. 가장 위험한 곳이지. 레비안 산맥도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나마 그곳이
가능성이 높아. "
제라드의 긴 설명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보니 가장 적당한 곳이 레비안
산맥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라한이 없을 때의 얘기였다. 이미 파라리스
평원과 페사 평원을 지나 오벨리아 펠리스로 가본 라한에게는 오히려 북쪽이 쉬운
곳이었다.
"형님. "
"훗, 녀석. 거절해도 괜찮다. "
"까짓것 갈게요. 제 일을 끝마치면 같이 가죠. 뭐. 어차피 저도 이놈의 대륙을 떠날
생각이었거든요. "
"라한아. 그렇게 무리할 필요 없다."
"아니요. 정말 여길 떠날 생각이었어요. 대신 레비안 산맥을 넘지 말고 북쪽으로
가죠. "
라한은 오래전부터 대륙을 떠날 결심을 하고 있었다. 테세르와 슈라만 데리고
조용히 사라지는 게 이 대륙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차피 떠나려고
마음먹었던 라한. 오히려 제라드라는 든든한 동료가 생겨서 다행스러웠다.
"라한아. 북쪽은 너무 위험해. "
"걱정 마세요. 이미 가봤으니까. "
"가봤다고?"
"예. 완전히 일주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가봤으니까 도움이될 거예요. "
라한의 대답에도 제라드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쉬운 길을 놔두고 왜 힘든 길을
택하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미 드래곤 로드를 꺾은 라한. 레비안 산맥을
지나가는 데 걸림돌이 없을 게 분명했다. 라한이 끼어있는 일행에게는 레비안
산맥이 가장 쉬운 셈이다.
"어차피 넌 드래곤 로드를 꺾었잖아. 레비안 산맥이 더 쉬울 텐데 왜 다른 길로
가려는 건지 모르겠다. "
"레비안 산맥은 지난 수천 년 동안 드래곤 산맥이라고 불렸어요. 드래곤들의 상징이
된 거죠. "
"그래서?"
"제가 로드를 꺾어서 안 그래도 드래곤들은 자존심이 많이 뭉개진 상태예요. 그런데
제가 드래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레비안 산맥을 지난다면 드래곤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아마 죽기 살기로 달려들걸요. 그들에게는 마지막 자존심이니까. "
라한은 드래곤들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뭉개고 싶진 않았다. 그 일이 드래곤과의
전면전을 의미하는 걸 잘 아는 까닭이다.
"로드가 다시 덤빌까?"
"아니요. 로테마이어스의 성격상 로드 직을 때려치웠을 거예요"
"뭐? 로드 직을 때려치워?"
"예. 로테마이어스는 자존심이 엄청 강한 놈이거든요. 그놈 성격에 드래곤 로드를
계속하고 있을 리 없어요. "
드래곤들은 대부분 로드가 되기를 바란다. 어찌 보면 인간의 권력욕과 비슷한
셈이다 하지만 그 이유에 있어서 인간과 확연히 달랐다.
인간은 권력을 누리기 위해 지위를 바라지만 드래곤은 단순히 새로운 경험을 위해
로드가 되려 한다. 호기심 강한 드래곤들 무엇이든 겪어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격이 로드라는 지위에 대한 집착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로드도 너한테 덤비지는 못할 텐데. "
"혼자 덤비지는 않겠죠. "
"아, 그렇군. "
제라드는 드래곤이 당연히 1 대 1 싸움을 할 거라고 생각해왔다. 지금까지 드래곤이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싸우는 걸 보지도 듣지도 못한 탓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다수가 모여서 싸움을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역사서에 따르면
마족과의 싸움에서는 그런 경우가 몇 번 있었으니 말이다.
"얼어 죽지 않도록 해줄게요. 북쪽으로 가요. "
"그래. 알았다. "
제라드가 흔쾌히 승낙했다. 어차피 라한이 없었으면 어디로 가든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었다. 북쪽으로 간다 하더라도 혼자서 레비안 산맥을 건너는 것보다 안전할 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들어가 볼까?"
라한이 예전에 살던 집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망설여지는
모양이다.
"어? 아, 이거 참. 얘기 하느라 집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군. 들어가 볼래?"
"그냥 누가 사는지는 궁금하네요. "
"그럼, 가보자. "
제라드가 앞장서서 저택 문으로 향했다 라한은 좀 더 주저하다가 어렵사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에 살던 집에 다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착잡한 듯했다.
"실례합니다. "
제라드가 저택 문 경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경비가 제라드의 위아래를 훑고
인상을 찡그렸다. 한눈에 제라드가 용병임을 알아본 눈치였다.
"무슨 일이냐?"
"이 집의 주인을 뵙고 싶은데 들어갈 수 있을까요?"
제라드의 말에 뒤에서 듣던 라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고, 내가 경비라도 안 들여보내 주겠다. '
생판 처음 보는 용병이 집주인 보고 싶다는데 들여보내 줄 경비가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그 주인 된 자가 귀족이라면 더더욱 불가능한 얘기였다.
"허허, 이거 참 요즘 용병들이 겁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
역시나 경비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라한의 예상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전 제라드라고 합니다. 들여보내 주십시오. "
"당신이 제라드인지 제기랄인지 그딴 건 모른다. 썩 꺼져라. "
"주인께 알려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전 혈전."
"라한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이 집 fT 살던 사랍이니 주인께 말해보십시오.
귀족이라면 제 이름을 알겁니다. "
라한은 대륙 횡단으로 엄청난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다 벌어진 드래곤 로드와의
싸움. 그리고 승리. 그때부터 라한이라는 이름은 대륙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눈앞의 경비 역시 라한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다.
"라한? 푸훗, 요즘은 개나 소나 다 라한이라네. 나도 라한이다. 나도 라한이야!"
"예?"
"허허, 라한아. 네 이름이 꽤나 유명해졌나보구나."
"그런. 가 봐요. "
라한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라한이 한때 정체를 드러내고 다닌 건
명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로테마이어스에게 도전장을 내밀 목적으로 정체를
드러내고 다닌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얻을 명성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라한아. 그냥 실력을 약간 보여주는 게 빠를 것 같다. "
"에고. 남에게 보여주려고 배운 게 아닌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불의 벽!"
라한이 짧은 언어로 신화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라한과 경비 사이에 불의 벽이
만들어졌다. 열기가 전혀 없는 무의만 불의 벽이었다.
"으헉 !"
경비가 놀란 음성을 토했다. 이런 변화를 처음 겪은 듯했다.
이 정도면 제가 라한이라는 게 증명이 됐나요?
잠, 잠깐 기다리시오.
경비가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일단 저택의 주인에게 알릴 생각이었다.
라한이 일으킨 불의 벽도 경비를 완전히 믿도록 만들지는 못했다. 라한이라는
이름이 너무 유명했기에 설마 자기 앞에 나타나겠냐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생성된 불의 벽으로 혹시? 하는 생각은 가지게 만들었다.
오랜 은원을 정리하다
요즘 파론은 기력이 없어서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누워서 보냈다. 엘베로보다
나이가 적었지만 그 역시 늙은 건 분명했다. 오늘도 누워서 하루를 소일하려던
그에게 경비병이 달려왔다. 뭐가 그리 급한지 숨까지 몰아쉬고 있었다.
공작님! 공작님!
왜 그리 호들갑이냐?
저기 그러니까.
막상 달려오긴 했지만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확실하지 않은 사실을 알리는 게
그를 주저하게 만든 듯했다.
뜸들이지 말고 말해라. 저기 그러니까. 라한.
라한?
라한이라는 말에 파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힘에 부치는지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게 그러니까. "
"쿨럭, 쿨럭. 뜸들이지 말고 말해라. 라한이 뭐가 어쨌다는 말이냐?"
"스스로를 라한이라고 부르는 자가 문 앞에 와 있습니다. 어쩔까요?"
"뭐시라?"
파론의 눈에 경악이 담겼다. 라한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낀 듯 보였다.
"웬만하면 쫓아 보내려고 했는데 이상한 마법까지 쓰는 통에. 죄송합니다. "
"그럴 리가, 설마 그럴 리가."
파론이 허둥지둥 침대 아래에서 뭔가를 꺼냈다. 정보 조직을 통해 입수한 라한의
몽타주였다.
"이, 이 그림 속 인물이더냐?"
"아, 맞습니다. 똑같습니다. "
"휴우우. "
경비병의 대답에 파론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날이 언제고 찾아올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죽기 전에는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게 자기를 위하는
길이며, 자기 후손들을 위하는 길이라 믿었다.
"지금 밖에 있느냐?"
"예. "
"그래도 발버둥은 쳐봐야겠지. 넌 이 길로 성으로 들어가서 폐하께 알려라. 이
반지를 보여주면 성에 들어가는 데 별문제 없을 것이다. "
"예? 아, 예. "
파론의 반응으로 경비병도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런 파론의 놀란 표정과
다급한 얼굴을 처음 접한 경비였다.
"뭐 하느냐? 빨리 성으로 들어가라. "
"예, 공작님. "
경비병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파론이 밖을 보며 외쳤다.
"밖에 누구 없느냐? 경비 대장. 경비 대장! "
"공작님. 경비대장은 지금 연무장에서 부하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파론의 부름에 집사가 대신 들어와서 대답했다.
경비대장이 이곳에 있었다면 경비병이 파론에게 직접 말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명령과 보고에도 체계가 있는 법. 먼저 경비 대장에게 보고했다면 그가 대신
파론에게 보고했을 터였다.
"지금 당장 경비대장에게 가서 전 병력을 연무장으로 모으라고 전하라. "
"예?"
파론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집사가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파론의 반응이 그를
놀라게 한듯했다.
"뭐 하는가? 어서 경비대장에게 전하지 않고. "
"알겠습니다, 공작님. "
집사가 얼떨떨하게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일단공작이
시킨 일이니 이행할 수밖에 없었다. 집사가 나가자 파론이 힘겹게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지팡이를 짚은 채로 침실을 나섰다.
제라드와 담소를 나누던 라한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저택 내부의 어수선함이었다. 마치 대적이라도 찾아온 듯 여기저기 사람들이
배치되고 있었다. 그 다음엔 뒷문 쪽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느껴졌다. 대부분
여자와 아이들인 듯 미약한 기운들이 끊임없이 저택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형님. 뭔가 심상치 않죠?"
"글쎄다. 난 잘 모르겠는데. "
"사람들이 배치되고 있어요. 그리고 아까 보고하러 들어갔던 경비병하고
어린아이들, 여자들이 뒷문으로 빠져나갔어요. "
라한의 말에 제라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필슨 백작가의 저택이었지만 실상
이곳은 공작가의 저택보다 더 큰 규모였다. 왕성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곳이
이곳이었다. 당시 루이나 왕국의 양대 실세였던 필슨 백작과 엘베로. 그 세력
구도를 이런 곳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한데 라한은 이 럴은 곳의 후문에서 생기는 변화까지 알아챘다. 제라드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예민한 기감이었다.
"그게 느껴져?"
"형님도 참. "
"근데 정말 네 말이 맞는다면. 이곳의 주인이 너하고 관계가 있다는 얘긴데. "
"그렇겠죠. "
라한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다급해하는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자네와 적이라면 먼저 치는 게 좋지 않을까?"
"병력을 배치하고 있기는 한데 기습할 때 사용하는 배치하고는 달라요. 뭐랄까?
정식으로 맞을 준비를 한다는 느낌? 뭐 그러네요. "
"정식으로 맞을 준비를 한다고?"
"예. 기다리면 우릴 맞이할 사람이 나을 거예요. "
라한은 서두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상대에게서 도주 의사를 느끼지 못한 탓이다.
설사 도망간다고 해도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도망가 봐야 그리 멀리 가지는
못할 터. 그때 따라가도 늦지 않았다.
"나오네요. "
한참 기다리자 흰머리가 드문드문 나있는 중년 사내가 문으로 다가왔다. 라한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듯 두려움이 담긴 얼굴이었다.
"당, 당신이 라한이오?"
"제가 아니라 이쪽입니다. "
라한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은 집사였다. 파론의 명령을 받고 라한을 데리러 나온
것이다.
"흐음. 따라오시오. "
집사가 앞장서서 걸어가자 라한과 제라드가 뒤따랐다. 걱정이나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평온한 얼굴을 한 채였다.
라한과 제라드가 연무장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에는 백여 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좌우로 포진해있었다. 라한이 다가가자 반대편에서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
나왔다. 비틀거리는 모습이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혹시 했는데 역시 당신이었군요. "
"날 알고 있었군. 일단 앉게나. "
파론의 말이 끝나자 병사 중 한 명이 의자를 가져왔다. 제라드까지 배려한 듯
양손에 의자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이름이 파론이던가요?"
의자에 앉은 라한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자 파론이 착잡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심 라한이 자신을 모르길 바랐던 모양이다.
"알아봐 주니 고맙구먼. "
라한은 파론을 본 적이 없었다. 몇 번 부딪칠 기회가 있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묘하게 어긋나기만 했다. 하지만서로의 얼굴은 알고 있었다. 라한은 베사 길드의
정보망을 통해, 파론 역시 자신의 정보 조직을 통해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것이다.
"별말씀을. "
"자네에게 정보를 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었지. 아마 우리 조직보다 더
정확하고 빠른 정보였을 게야. 맞는가?"
"아마 그럴 겁니다. "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자네에 대한 정보만큼은 묘하게 늦었거든. 가끔은 잘못된
정보도 있었고. "
에테로가 수장으로 있는 베사 길드는 단순한 정보 길드에 불과했다. 라한에게 베사
길드만 있었다면 파론의 정보를 흐리는 일은 불가능했을 터였다. 하지만 라한에게는
베사 길드와 더불어 다크라이더 길드도 도움을 주고 있었다. 암살자 길드가 라한의
정보를 쥔 타 정보원을 수시로 암살했기에 라한에 대한 정보만큼은 항상 늦게, 혹은
잘못된 정보가 들어간 것이다.
"저도 모르는 도움을 많이 받았나 보군요. 나중에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해야겠습니다."
"후후, 그래. 인사를 해야될 게야. 한두 번이 아니거든. "
"알겠습니다. "
라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겉모습만 보면 서로 적이라는 걸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자네는 전혀 긴장하지 않는군."
"여기 모인 사람들을 믿고 하시는 말씀이라면 긴장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네요.
"
"그렇겠지. 자네는 드래곤을 이긴 사람이니까. 하지만 만만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
"훗. "
파론의 말에 라한이 뭔가를 깨닫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는가?"
"시간을 끌 생각이시군요. 가족들을 도망가게 한 건가요?"
라한이 핵심을 짚어내자 파론이 침중한 음성을 내뱉었다. 의도를 들킨 이상 가족을
살릴 길이 더 희박해졌음이다.
"어디로 가라고 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내가 말해줄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럼 질문을 좀 바꿔보죠. 루이나 왕국입니까? 아니면 다른 왕국입니까?"
라한이 재차 질문을 던지자 파론이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걸었다. 당연히 가족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말해줄 리 만무했다 이 정도 이치를
라한이 모르지는 않을 터. 한데 라한은 너무나 뻔한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내가 자네를 과대평가한 건가? 내가 대답해주지 않을 거라는 건 자네도 잘 알
탠데."
"그럼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그들이 루이나 왕국이 아닌 다른곳으로 간다면
해치지 않겠습니다. 단,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면요. 하지만 다시 루이나 왕국으로
돌아온다면, 아니면 지금 도망간 곳이 루이나 왕국 영역 안이라면, 그땐 그들의
목숨을 거두겠습니다. "
라한의 말에 파론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웃음이었다.
"날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파론님이 제 가족들을 모두 죽인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당신과 같은
전철을 밟으라는 보장은 없죠. "
"하하하하.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
"믿든 안 믿든 사실입니다. 루이나왕국만 아니라면 살려 드리죠."
라한이 재차 강조하자 파론의 눈빛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말 믿어도 되는가?"
"전 피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파론님도 지금 루이나왕국을 떠난다면
쫓아가서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
라한은 가급적 살인을 자제하려 했다. 특히 복수의 대상을 가족에게 전가하는 일은
무조건 피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원수들에게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생각해낸 소박한 복수 방법은 추방이었다.
엘베로와 파론은 루이나 왕국외 지도자 격인 존재였다. 긴 시간동안 해놓은 걸도
많고 얻은 것도 만은 엘베로와 파론. 그들에게 추방은 그동안 해온 모든 노력을
무로 돌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단순한 추방이지만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만드는
셈이다.
"왜지? 난 자네 원수가 아닌가?"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요. "
"내 가족은. 내 가족은. 루이나 왕국을 벗어날 걸세."
파론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가족을 살리겠다는 의지가 담긴 말이었다.
"파론님은요?"
"난 어차피 생에 여한이 없네. 이미 살 만큼 살았지 않은가? 자네에게 죗값을
치러야지. "
파론도 자신이 라한에게 큰 죄를 지었음은 알고 있었다. 스스로의 야망 때문에 지은
죄를 애써 무시했을 뿐이다.
"그럼 저들은?"
"내 가족을 살려주겠다고 했으니 저들은 물리겠네."
"고맙습니다. "
파론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인사였다.
만약 파론이 저들을 앞장세워 공격한다면 더 많은 수밖에 없었다. 가급적 피를 적게
보려는 라한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되는 셈이다.
"헤롤드 집사, 로이킨 경. 고향으로 돌아가게. "
"공작님. 그럴 순 없습니다. 저도 공작님과 함께하겠습니다. "
"맞습니다. 공작님. 저 역시 평생 공작님의 은혜를 받고 살았습니다. 죽음으로 갚을
수 있다면 기꺼이 목숨을 던지겠습니다. "
파론의 말에 헤롤드 집사와 경비대장 로이킨이 눈물을 글썽였다. 그들을 보며
파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내 뜻을 모르겠는가? 부디 떠나게. "
"그럴 순 없습니다. 공작님. "
"제발 내 말대로 하게. 저 아이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게야. "
파론의 말에 듣고 있던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그의
말에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라한은 아직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그 말이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한번 피를 보면 자칫 계속 피를 볼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공작님.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저희들이 모두 덤비면."
"자네들의 섣부른 행동이 루이나 왕국에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네. 제발 돌아가게.
"
"그, 그. 휴우, 알겠습니다. "
파론의 계속된 말에 집사도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그 역시 파론 밑에서 많은
일을 해온 경험 많은 사람이었다.
"집사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알겠다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로이킨 경. 공작님의 뜻대로 하게. "
"하지만. "
"로이킨 경! "
참다못한 헤롤드 집사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로이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집, 집사님. "
"로이킨 경. 병사들을 물리게. 이유는 나중에 설명해주겠네."
헤롤드 집사가 먼저 연무장을 벗어났다. 그러자 로이킨도 어쩔 수 병사들을
수습해서 연무장을 나갔다.
모두 나가자 라한이 팍론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좋은 부하들을 두셨군요. "
"난 좋은 부하들을 뒀지만 저들은 주인을 잘못 만났다고 봐야지 "
"안타깝군요. "
"한 가지만 물어보겠네. 날 죽이고 나면 왕성으로 갈 생각인가?"
파론의 질문에 라한이 생각에 잠겼다. 원래 이곳을 방문한 건 파론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순히 예전에 살던 집에 누가 사는지 궁금해서 와봤을 뿐이다.
정말 우연찮게 파론을 만난 것이다.
한데 일단 파론을 만났으니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파론에 대해 전해진다면
엘베로가 무슨 짓을 꾸밀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골치 아픈 일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겠군. '
"아마 왕성으로 바로 갈 듯합니다. "
"그분에게도 나와 같은 기회를 줄 건가?"
"아마도요."
파론이 말한 기회는 라한이 준 기회를 의미한다. 루이나 왕국을 떠나면 굳이
찾아가서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 좀 전에 라한이 파론에게 준 기회였다
"그러지 말게. 그냥 목숨을 거두게. "
"왜죠?"
"그분은 한 나라의 국왕이시네. 그분에게 모멸감을 주지는 말라는 뜻일세. "
파론도 라한이 기회를 주는 이유가 피를 보고 싶지 않아서라는 건 알고 있었다. 또,
기회를 주는 게 모멸감을 주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자신은
살려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모멸감을 느꼈다. 그 의도가 어찌 됐든 모멸감을 느낀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알겠습니다. "
"고맙네, 고마워. "
파론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목숨을 거둬 가라는 의미였다.
파론의 행동에 라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
"라한아, 힘들면 내가하마. "
"아니요. 제가 해야 합니다. "
파론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파론이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정말."
라한이 손에 신화력을 살짝 일으켰다. 그러자 손에 하얀 오오라가 번져 나왔다
라한이 손을 거두자 파론의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죽음이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절 용서하십시오. 땅의 이글거림!"
라한이 신화력을 이용해서 파론을 묻었다. 어두워진 얼굴이 그의 심경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괜찮아?"
"좀 씁쓸하네요. "
"좋게 생각해라. "
"에휴, 그래야죠. "
라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엘베로를 방문할 차례였다.
잉글리아트가 분주하게 짐을 챙겼다. 아직 부상이 다 낫지도 않은 잉글리아트. 이런
움직임도 부상 회복에 치명적이었다.
"도망가야 돼. 올 거야. 어떻게든 찾아서 올 거야. "
라한은 잉글리아트 일행이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해온 노력에
미련이 남아서라도 포기하지 못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라한의
오판이었다. 자기 실력과 풍기는 기세를 너무 가볍게 여긴 것이다.
"다른 놈들은 몰라. 라한 그놈은. 그놈은 괴물이야."
최근에 라한과 마주친 적이 없는 이들은 라한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명으로
안되면 두 명이, 그래도 안되면 그 이상모여서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잉글리아트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한 번 부딪쳐보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달은 것이다.
"어디로 가지? 로테라 숲? 아니야. 거긴 그놈도 알 거야. 그럼 어쩌지?"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라한의 정보력에 대해모르고 있다는 게
이런 문제를 야기했다. 정보력을 모르니 라한이 어디까지 쫓아올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일단 여긴 떠나야 돼. "
잉글리아트가 등에 큰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간단한 행동에도
현기증이 일었다.
"크윽!"
아직 부상이 낫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부상만 없었다면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도망갈 수 있으련만. 그게 안 되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휴우우 "
잉글리아트가 길게 심호흡을 해서 심신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비밀 통로를 이용해서
은밀하게 저택을 벗어났다. 목적지는 없지만 일단 이곳은 무조건 벗어날
생각이었다.
잉글리아트가 조용히 루스티아를 벗어난 날, 라한은 루이나 왕국의 왕성에
도착했다. 이미 언질을 받은 탓인지 왕성 곳곳이 몹시 분주했다. 파론의 저택과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병력이 배치되어있었고, 지금도 계속 병력이 추가되는
중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지?"
"그러게요. 이런 상황은 달갑지 않은데 "
라한이 답답한 속내를 드러냈다. 이런 상태라면 피 보는 걸 피할 수 없게 된다.
병사들을 방패막이로 삼는 엘베로.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라한에게는
짜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피를 봐야겠지. "
"어쩔 수 없죠. 형님은 뒤로 물러나 계세요. 제 일이잖아요."
죄 없는 병사들을 죽이는 그 자체가 죄를 짓는 일임에 분명했다. 때문에 라한은
제라드를 이 일에서 제외시킬 생각이었다. 죄인은 자기 하나로 충분하니 말이다.
"라한아. 내가 형이 맞긴 맞는 거냐?"
"예?"
"형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도 이 싸움을 거들 수 있도록 해야지. 형 된 입장에서
동생만 죄를 짓도록 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제라드의 말에 라한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감격한 듯 눈물마저 글썽인
채였다.
"형님!"
"왜?"
"너무 멋있는 말 아녜요? 쳇. "
머쓱해진 라한이 괜히 농을 걸었다. 이렇게 해서 울컥해진 마음을 추스르려는
의도였다.
"하하하. 내가 좀 멋있지? 그럼 내가 먼저 시작해볼까?"
챙-!
제라드가 검을 뽑고 왕성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라한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형. "
"어? 왜?"
"잠시만요. 그래도 기회는 줘야죠. "
라한의 말에 제라드가 한 걸음 물러났다. 라한의 의도를 눈치 챈 행동이었다.
제라드가 물러나자 라한이 전면으로 나섰다.
"현자 엘베로님! 듣고 계십니까? 듣고 있으면 제게 그 귀한 얼굴 좀 보여주시죠. "
라한이 왕성을 보며 크게 외쳤다. 이에 왕성 위에서 갖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국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있으니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무엄하다. 감히 대 루이나 왕국의 국왕 폐하의 대명을 부르다니. 네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
"흥, 명성 좀 얻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
갖가지 욕설을 들으면서도 라한은 웃음으로 잃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
탓이다. 자기라도 누군가가 자기 아버지를 욕한다면 저렇게 나을 터였다. 아니,
당장 가서 모가지를 비틀어 버렸을 게 분명했다.
"엘베로 영감님! 계시면 좀 나와보시죠. 기습 같은 치졸한 짓은 안 할 테니까.
얘기나 좀 나눠봅시다. "
라한이 다시 외쳤다. 역시나 이번에도 왕성 위에서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시장통을
방불케 할 만큼 듣기 민망한 욕들도 종종 섞여있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왕성
위에 고요가 감돌았다.
"세자님이시다. "
"세자님이 나오셨다. "
라한의 조카인 휴란트가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휴란트?'
'라한 삼촌?'
라한과 휴란트가 서로를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라한은 깜빡했다는 듯
자책하는 표정이었다. 이에 비해 휴란트는 '대체 왜?' 라는 의문 가득한
얼굴이었다.
'근데 저건 누구지?'
라한이 휴란트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의 모습에 또 다른 영상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주름 가득한 얼굴과 백발, 얼핏 봐도 노인으로 보이는 모습이 휴란트와
묘하게 겹쳐 있었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
"형, 돌아가죠. "
"뭐? 돌아가?"
파론을 죽일 때 마음이 흔들려서일까? 휴란트가 엘베로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었다면 여기에 찾아오지 않았어야 했다. 그래야
휴란트가 정상적으로 왕위를 물려받고, 그가 왕이 된 루이나 왕국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세자가 된 저놈이 제 조카예요.
"진, 진짜야?"
-예.
라한이 신화력에 의지를 담아 메시지 마법처럼 의사를 전했다. 제라드는 놀란
표정으로 라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에휴,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면 의심할거야. 대충 싸우다가 도망가는 게 낫지. "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제라드가 라한에게 바싹 다가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경험을 바탕 삼아
나름대로 해결책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피를 적게 보는 게 좋겠지. 내가 배신을 하마. "
"예?"
"그냥 이번 기회에 죽으라는 말이다. "
"죽, 죽다니요. 그게 무슨."
라한은 세상에서 죽는다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별별 걸 다
겪어본 라한이지 않은가? 처음 심법이라는 걸 만들어 낼 때에는 혈맥이 터져 나가는
고통을, 인챈트 재료 구하러고 폐사 평원을 지날 때에는 몸이 얼어붙는 추위를,
무리한 텔레포트를 감행한 후에는 마나가 꼬이는 아픔을 그리고 미스릴 창고에
갇혔을 때에는 굶주림을, 카이렌에게 기습당했을 때에는 죽음의 공포를.살고 싶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이 모든 걸 견뎌낸 라한이었다.
"놀라기는, 정말 죽으라는 얘기가 아니고 죽음을 가장해보라는 말이야. "
"아, 그 말이었구나. 근데 제가 죽는 연극에서 죽이는 사람은 형님이겠죠? 저
사람들은 의뢰를 받은 용병이 저를 죽였다고 생각할 테고. 맞죠?"
"그렇지. "
"형은 검사라서 불가능해요. 형이 암습해서 죽였으면 시체가 남아야 하잖아요. "
"그런가?"
제라드가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보니 자기가 라한을 죽이는 건 무리가
있는 연극 같았다.
"그냥 적당히 싸우다가 사라지죠. "
"어쩔 수 없지. 그럼 나부터 시작하마, "
"웬만하면 살수는 피하세요. "
"알았어. 하앗!"
제라드가 먼저 성벽으로 쇄도해 갔다. 그러자 성벽 위에서 화살과 마법이 마구
쏟아졌다.
"방어의 힘. "
라한이 신화력을 일으켜 제라드의 위쪽에 막을 만들었다. 물론, 제라드의
실력이라면 화살이나 마법에 쉽게 당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사람도 눈먼 화살에 맞을 수 있는 법.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미리
방어막을 만들어둔 것이다
라한과 제라드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싸우다가 몸을 피했다. 라한은 별 부상이
없었지만 제라드는 팔과 다리에 작은 부상을 입은 채였다.
"형님. 괜찮아요?"
"뭐, 이 정도야. "
제라드가 팔과 다리를 툭툭 털었다. 아무 이상 없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모르니까 치료하죠. 치유의 힘!"
라한이 제라드의 몸에 손을 대고 신화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여기저기 나 있던 작은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동시에 미약하게 느껴지던 통증까지 완전히
사라졌다
"오고, 마법 치료하곤 좀 다르군. 어떻게 한거야?"
"쓸 만하죠?"
"그렇군. "
보통 마법으로 하는 치료는 상처를 봉합하는 데 유용하다. 이에 비해 신성력을
이용한 치료는 통증을 없애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 많이 쓰인다. 한데 라한의
치료는 두 가지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통증도 사라지고 상처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거기다 계속 흘린 피로 인해 쌓였던 노곤함도 말끔히 사라졌다.
"형님. 근처 여관에서 좀 쉬고 계실래요?"
"뭐 하려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거 아닌가?"
"그건 맞지만 시간을 좀 단축시켜야겠어요. "
엘베로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의 죽음도 머지않았다고 볼 수 있다. 가만히 있어도
휴란트가 왕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라한은 자기가 대륙을 떠나기 전에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직접 죽일 생각이군. "
"예. "
"조심해라. 오늘 한바탕했으니 경비가 삼엄할 거야. "
"이러면 어때요?"
제라드의 걱정에 라한이 은신술을 사용했다. 카이렌을 능가하는 완벽한 사라짐에
제라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게 뭐야? 마법이야?"
"아니요. 인비져빌리티하고는 좀 다르죠. 그러니까 걱정 말고 기다리세요. 금방
갔다 올게요. "
"그래, 알았다. "
제라드가 근처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라한은 그가 들어가는 여관을 확인한 후에
다시 왕성으로 발걸음을 옳겼다.
라한이 다녀간 후, 엘베로가 대신들을 급히 소집했다. 당연히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였다. 다섯 시간의 긴 회의. 하지만 아무런 해결책도 마련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다음 날 다시 회의를 하기로 하고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들이 돌아가고 엘베로가 힘겨운 걸음으로 침소에 도착했다. 남은 삶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건 엘베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죽음에 초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데 아니었다. 막상 라한이 나타났다는 얘기를 듣자 불안함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게 삶에 대한 집착이었구나. "
엘베로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침소에 들었다. 긴 회의를 해서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샤라락!
엘베로가 막 잠에 들려는 순간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엘베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누구냐!"
"좋은 책이 많군요. 영감님. "
들려온 목소리에 엘베로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침대 옆 책상에 앉아있는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누, 누구냐? 여긴 어떻게."
"그러고 보니 제 목소리를 모르고 계시는군요. 빛의 공!"
목소리의 주인이 주변을 밝혔다. 라한이 책 한 권을 편 채로 책상에 앉아있었다.
"라한?"
"오랜만입니다. 엘베로 영감님. 아, 나 역시 루이나왕국의 국민이니 전하라고
불러야 하나요?"
"후후후, 역시. 역시 왔구먼. 기다리고 있었다. "
순간 당황했던 엘베로가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그리고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매복이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
"확인해볼까?"
엘베로의 침소에는 그 어떤 매복도 없었다. 심지어 기관장치나 마법 도구조차
전무했다. 한데도 엘베로는 무언가 있는 듯한 인상을 계속 풍겼다. 현자 출신의
국왕다운 행동이었다. 무언가 있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 라한이 스스로 물러가게끔
하려는 것이다.
"엘베로님, 제가 그렇게 어리석어 보였습니까? 절 오랫동안 조사했다고 들었는데,
너무 과소평가하고 계시는군요. "
"흐음. "
"허세를 부려봐야 통하지 않습니다. 아참, 이 방에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밖에는
들리지 않을 겁니다. 한번 실험해볼까요? 여봐라!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라한이 주변을 돌아보며 마구 소리쳤다. 한데도 밖에선 들어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 방 주변을 신화력으로 감싸고 있었기때문이다.
라한의 행동에 엘베로도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자기 허세가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임을 깨달았다.
"강해졌군. "
"엘베로님은 많이 늙으셨군요. "
"세월은 속일 수 없는 게지. "
"무엇이 엘베로님을 집착하게 만든 겁니까? 권력? 부? 대체 뭐가 가지고
싶었습니까? 우리 가문을 멸문시키면서까지 가지고 싶었던 게 대체 뭡니까?"
라한의 절규에 엘베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유라. 나도 모르겠네. 왜 그렇게 국왕이 되려고 애썼는지, 왜 세상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때는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거든. 그게 내
길이라고 믿었지. "
"야망. 이 었군요. "
"뭐라고 말해도 좋네. 지금은 지금은."
엘베로가 말을 잇지 못하자 라한이 끼어들었다.
"지금은요?"
"지금은 모든 게 허무하다는 걸 깨달았네. 어차피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게
사람이거늘. 내가 어리석었지. "
엘베로의 음성이 미약하게 떨렸다.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듯 한 목소리였다.
"너무 늦으셨군요. "
"자네는 나보다 어린데도 일찍 깨달은 것 같군. "
엘베로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자기 행동의 덧없음을 깨달았다. 그 이후부터 베센
왕국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다. 인생무상이라고 할까? 웃고 살아도 짧은 생을 왜
그리도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지금 생각하면 후회만 가득 남은 삶이었다.
"엘베로님보다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
"응?"
"아닙니다. 그냥 제가 엘베로님하고 너무 달라서라고 생각하세요. "
라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수많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픈 기억, 슬픈 기억,
행복한 기억 등등. 거기다 엘베로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수많은 죽음을 겪었다.
그 많은 경험들과 기억들이 라한에게 권력의 덧없음을 가르쳤는지 모른다.
"세 가지만 묻겠네. 파론은 잘 갔는가?"
"예. 조용히 눈감았습니다. "
라한의 대답이 끝나자 엘베로가 회상에 잠겼다. 파론과 함께했던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화도 참 많이 냈었는데. 끝까지 자신을 따랐던 걸 보면 정말
충신이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를 죽인 게야. '
길게 한숨을 쉰 엘베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루이나 왕국을 무너뜨릴 생각인가?"
"루이나 왕국은 엘베로님의 왕국이기도 하지만 제 나라이기도 합니다. "
"끝으로 하나만 더 묻겠네. 세자를."
엘베로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라한이 다시 끼어들었다.
"세자를 죽일 생각이냐고 묻는 것 같군요. "
"아닐세. "
"그럼?"
"휴란트가 자네 사람인가?"
"흐음. "
이번에는 라한이 침음성을 흘렸다. 엘베로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카이렌이 진행한 일이지만 흠잡을 데 없는 계획이었다. 자신이라도 휴란트를 미리
알지 못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정도였다.
"맞구먼. 역시 맞았어. 후후후_"
"알고 계셨군요. 근데 왜 그를 세자로 삼은 겁니까?"
"지금은 내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있네. 아까 말했듯이 후회밖에 남지 않더군. 필슨
백작가에 죄를 청하고 싶었어. "
엘베로의 진실한 말에 라한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엘베로는 죄를 뉘우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 방편으로 자신의 후계자를 휴란트로 삼은것이다. 또, 반역을
저질렀다는 필슨백작가의 누명도 벗긴 상태였다.
"하지만. 너무 늦으셨습니다. "
"후후, 알고있네. 죽음이라는 거, 대수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군.
자네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기꺼이 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두려워. "
"죽음이라는 건 그런 거죠. "
"이제 괜찮네. 자네 손으로 날 죽여주게. "
엘베로가 고개를 내밀었다. 허리에 차고 있는 칼로 자신의 목을 단번에 베어 달라는
의미였다. 이에 라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
"세자에게 시킬 생각인가? 그건 아니 될 말이네. 세자는 아직 어려. 또, 날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다가는 세자가 왕좌를 잇는 일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네.
그러니 자네가 날 죽이게. "
라한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엘베로의 죽음은 라한이 아닌 휴란트의
몫이었다. 그러니 그 일로 겪을 시련이나 고통도 그가 넘어야 할 과제에 불과했다.
"죄송합니다. 오늘 제가 온 건 경고하려고 왔던 겁니다. 근데 그럴 필요가
없었군요. 죽음을 준비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
"라한. 그냥 날 죽이게. 제발. 세자에게."
"죄송합니다. 공간으로. "
라한이 다른 곳으로 공간 이동 했다. 그러자 엘베로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자에게. 세자에게 짐이 될 수는 없어. '
결심을 굳힌 엘베로가 서랍을 열어 작은 검을 꺼냈다. 그리고 검을 목에 가져다
대고 힘껏 찔렀다.
푸욱!
"커억!"
엘베로의 몸이 옆으로 서서히 무너졌다. 루이나 왕국의 기반을 마련한 희대의 효웅
엘베로. 그는 자결을 통해 화려하지만 후회 많았던 삶을 마감했다.
로테마이어스의 레어 안.
며칠 동안 로테마이어스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자신이 카이렌을 처리해도
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리고 오늘 어느 정도 결론을 내렸다.
"아카폴리안. "
"예, 로드님. "
"오늘 이 시간부로 로드 자리를 레이시아나에게 넘긴다. 나와 함께 로드 시험을
치렀으니 자질을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
"로, 로드님, "
로테마이어스의 폭탄선언에 아카폴리안이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이런 결정을
내릴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이미 결정한 일이다. 그리고 카이렌은 내가 처리하겠다. 고룡들에게 내가 말한
그대로 전해라. "
"로드님. 이 일은 고룡들과 상의해보고 나서 결정하는 게 어떨지요? 드래곤 전체의
대표자인 로드를 바꾸는 일입니다. 이런 큰 일을 어찌 통보만으로."
"며칠 전 모임 때 고룡들에게 내 뜻을 밝혔다. 넌 그냥 내 결정을 그대로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 "
로테마이어스의 뜻은 확고했다. 더 이상 로드라는 자리에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자존심 상하고 너무 부끄러웠다. 인간에게 패한 주제에 어찌 드래곤을 대표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드래곤 로드자리를 물러나는 게 다른 드래곤들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하오나. "
"난 지금 카이렌을 처리하러 가겠다. 어쩌면 내가 죽을수도 있지. "
"로드님. "
"레이시아나에게도 내게 했던 것처럼 충성을 다하여라, 텔레포트!"
로테마이어스가 아카폴리안에게 한 번 더 당부하고 공간 이동했다.
로테마이어스가 로드 자리를 미리 물려준 건 카이렌과의 싸움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만약로드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로 카이렌과 싸워서 패한다면, 드래곤이라는
절대자의 위치가 흔들리게 된다.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로드가 한 명도 아닌 두
명에게 각각 패했으니 말이다.
물론 예전이라면 이런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카이렌과의 싸움에서 자신이
패할 거라는 가정 자체를 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라한에게 패한 후로 자신감을
많이 잃었다. 이젠 누구와 싸워도 이긴다고 자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쩌지?'
로드가 사라지자 아카폴리안이 고룡들을 찾아 나섰다. 어차피 로드인
로테마이어스가 내린 명령이었으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테마이어스의 말처럼 단순히 통보만 할 생각은 아니었다. 로드를
잡아달라고, 진정한 로드는 로테마이어스뿐이라고 고룡들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로테마이어스의 변화
한편, 시스마란과 베르네는 카이렌의 은거지를 찾는 데 성공했다. 대략적인 위치만
들은 터라 찾는 데 이틀이나 걸렸다. 이곳을 찾은 뒤에 베르네가 먼저 카이렌을
살펴보고 돌아왔다.
스승님. 카이렌이라는 엘프가 안에 있습니까?
있기는 있는데 너 싸우지 마라.
예?
베르네의 말에 시스마란의 의아한 빛을 띠었다.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빨리
처리하자고 서둘렀던 베르네였다. 한데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 못 이겨.
에이, 스승님도 참. 라한 형님이 아니면 저보다 강한 자가 없을 거라면서요.
"그래, 그렇게 말한 적이 있긴 있지. 한데 내 실수였다. 카이렌은 너보다 강해. "
사실 베르네는 카이렌의 실력을 제대로 탐색하지 못했다. 카이렌이 사용하는 기운도
라한의 신화력과 비슷한 힘이었다. 베르네가 느낄 수 없는 기운이었기에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상대의 기운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 그건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거나 특이한
능력을 사용한다고 봐야 했다. 물론 특이한 능력이 반드시 시스마란보다 강하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상대를 파악할수 없다는 게 베르네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자칫하면 제자인 시스마란이 죽을 수도 있는 일. 확실하지 않은 일에 시스마란을
내몰 수는 없었다.
"다행이에요. "
"뭐가?"
"그래도 형님이 약한 자한테 부상당한 게 아니라서요. "
시스마란의 말에 베르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꽤 오랫동안 함께 지내왔지만
저런 말을 할 때마다 저놈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네놈 머릿속에는 라한 밖에 없냐? 어떻게 뭔 일만 생기면 전부 라한하고 연관을
짓고 그러냐?"
"그, 그지야. 제 기억에 라한 형님이 가장 정의감 넘치는 분이였으니까요. "
시스마란의 눈에는 라한이 최고로 보였다. 정의감 가득하고 기사도를 지키는 진정한
영웅. 사랑하는 여인을 남에게 빼앗기고도 눈물로 슬픔을 이겨낸 사람.
시스마란에게는 라한이 인생의 기준이자 본보기였다.
"어허, 이놈아, 내가 전에도 말했지? 라한은 그런 놈이 아니라니까. 이런저런
소문을 들어보면 천하에서 가장 악독한 놈이."
라한에 대해 욕하던 베르네가 입을 다물었다. 시스마란의 눈에서 살기를 읽은
탓이다
"어, 그.그게. 그러니까. "
"라한 형님을 모독하는 일은 제가 용서하지 않습니다. "
"젠장. 그래도 내가 네놈의 스승이다. 스승한테 그런 눈초리를 보내는 건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을 죽이고 나서 저도 자결할 생각이었습니다. "
시스마란은 진심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라한에 대한 욕만큼은 들어줄 수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스승을 죽이고 그 죗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놓을 생각을
한 거였다.
"됐다. 됐어. 그래, 라한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놈이다. 망할. "
"라한 형님이 훌륭한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형님에 대한 욕은
자제해주십시오. "
"썩을. 잘났다. "
라한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결론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베르네는 라한이 해온 일에
대해서 들은 게 있으니 영웅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반면, 시스마란의 눈에는
라한이 항상 멋있게 보였으니 욕을 들어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근데 스승님. 이제 어쩌죠? 카이렌이 제가 상대할 수 없는 강자라면 먼저 라한
형님을 찾아야 하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요. "
"글쎄다. 아카폴리안 그놈을 만나서 다시 한번 닦달해볼까?"
"그런다고 말해주겠습니까?"
"근데 너 에일린 걱정은 안 하냐 7"
베르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그 말에 시스마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
"어차피 카이렌하고 싸우지 못할 지면 에일린이나 찾아보는 게 어떠냐? 지금 당장은
딱히 할."
베르네가 말을 끊고 먼 곳을 응시했다 그곳에서 친숙한 기운을 느낀 탓이다.
"스승님. 왜요?"
"로드가 왔다. "
"로드라면 라한 형님에게 패했다는 그?"
"그래. "
베르네가 침중한 표정을 짓자 시스마란이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스승님. 근데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로테마이어스가 카이렌과 힘을 합칠까 봐 그런다 아무리 라한이 강해도 둘이 힘을
합치면 감당하기 힘들 거야. "
그제야 시스마란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라한의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게
시스마란이었다. 라한의 안위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이니 심각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가서 물어봐야겠다. "
"스승님. "
"괜찮아 난 드래곤이거든. 내가 아무리 미워도 대놓고 공격하지는 않을 거다. "
베르네가 성큼성큼 로테마이어스의 기운이 느껴진 곳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얼굴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로테마이어스의 분노가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이다.
베르네가 다가오자 그를 느낀 로테마이어스도 마주 걸어왔다. 모른 척 지나갔다면
굳이 찾아가서 만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베르네가 자신을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면 만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로드를 뵙습니다. "
"베르네미스로군. 무슨 일이지?"
베르네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베르네가 마음에 들지 않은
얼굴이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
"물어볼 말이라. 내가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다. 프리미아에게서 드래곤의 향기가
풍기지 않더군. 아카폴리안은 네가 한 짓이라고 하던데 맞는가?"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베르네가 침을 삼켰다. '올 것이 왔구나'하는 표정이었다.
로테마이어스의 말처럼 프리미아에게서 드래곤의 향기가 풍기지 않는건 베르네의
작품이었다. 그는 연금술, 그러니까 인챈트를 연구하다가 우연하게 한 가지 물건을
만들어냈다. 드래곤의 향기를 숨겨주는 물건이었다. 베르네는 자신이 만든 물건을
프리미아에게 선물했다. 그가 레테아와 함께 몸을 피하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프리미아는 그 물건을 가지고 다님으로써 로테마이어스의 이목에서 완벽하게
사라졌다.
"아이고, 로드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게는 그런 물건을 만들 재주가 없습니다.
만약 제가 그런 물건을 만들 수 있었다면 로드님이 절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만들 수는 있지만 지금 가지고 있지 않은 거겠지. "


"에이, 설마요. "
"네가 만들지 않았다는 걸 용언으로 말할 수 있는가? 네가 그렇게 한다면 네 말을
믿어주지. "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베르네가 체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젠 더 속이는 게
불가능했다. 속이기 위해 드래곤임을 포기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에휴, 제가 만든 게 맞습니다. 제 물건이 로드님의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
"널 탓할 생각은 없다. 마법으로 뭔가를 만들었다면 그건 네 능력이 뛰어난 거겠지.
하지만 네가 만든 물건 때문에 내가 몹시 성가신 일을 겪어야 했다. "
"죄송합니다. "
"한 가지만 해주면 널 용서해주마. "
"말씀하십시오. "
로테마이어스가 거래를 걸어왔다. 이에 베르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드래곤 로드의 일을 방해한 베르네. 고룡이 아닌 그로서는 너무 무모한
행동이었다.
"만들어라. "
"예?"
"하나 만들어서 나한테 넘겨라. "
"그, 그 정도면 됩니까?"
베르네는 로테마이어스가 아주 거창한 요구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다. 한데 막상 들어보니 별거 아니었다. 드래곤의
향기를 숨기는 마법 무구가 만들기 힘든 것도 아니었고 또, 재료가 많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당사자의 피와
약간의 드래곤 본 그리고 자신이 알아낸 마법 주문이면 금방 만들어 낼 수 있는
물품이었다.
"그래. 그것만 해주면 너의 지난 과오를 모두 용서하겠다. "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제게 로드님의 피와 뼈를 조금 떼어 주십시오. 본체일
때에도 향기를 감추려면 한 이 정도 크기는 있어야 할 겁니다. "
베르네가 손을 어깨 너비로 벌려 보였다. 그러자 로테마이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필요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피와 뼈를 빼내는 게 껄 Rm 러운 얼굴이었다.
"꼭 그래야 하는 건가?"
"예. 반드시 당사자의 피와 뼈가 필요합니다. "
"어쩔 수 없군. 폴리모프!"
잠깐 고민하던 로테마이어스가 몸체를 변화시켰다. 좀 전에 가졌던 엘프의 몸에서
본체로 돌아간 것이다. 본체 상태의 로테마이어스가 피를 조금 뽑고 뿔을 조금
부러뜨렸다.
-이 정도면 되는가?
"예, 충분합니다. "
-폴리모프.
로테마이어스가 다시 엘프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상체만 한 뿔과
피가 둥실 떠있었다.
"아공간 오픈!"
베르네가 아공간을 열어 큰 물통 하나와 몇 가지 도구를 꺼냈다. 드래곤 본에 마법
주문을 새기기 위해 필요한 조각칼이었다.
"오래 걸리나?"
"30 분이면 됩니다. "
"서둘러라, "
"예. "
베르네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로테마이어스가 건네 준 뿔 조각에 뭔가를 새기기
시작했다. 라한보다는 못하지만 쾌나 섬세한 손놀림이었다.
조각이 끝나자 뿔 조각에 드래곤의 피를 뿌렸다. 조각 사이사이에 피가 모두
스며들도록 몇 번씩 흔들기도 하고 후후 불기도 했다.
"이제 거의 끝났습니다. 마나의 권능과 드래곤의 권능 그리고 대륙 판트리아의 힘을
이곳에 불러오노니. 인챈트리마 세크리피셜 리무버!"
베르네가 주문을 외우자 뿔 조각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그 빛은 뿔 조각주변을
빙빙 돌더니 이내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 빛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는 뿔 조각
역시 손바닥 크기로 작아진 상태였다.
"이건가?"
"예. 이걸 들고 다니면 그 어떤 드래곤도 로테마이어스님을 찾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모습은 숨겨야 합니다. 그리고 드래곤이
아닌 다른 존재는 드래곤의 향기로 로드님을 찾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향기만
없애주는 이 마법무구는 별 쓸모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
베르네의 설명은 라한을 두고 한 말이다. 드래곤이 마음먹고 숨었을 때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라한, 그에게는 아무쓸모 없으니 괜히 다시 덤빌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이제 네가 용건을 말할 차례로군.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저기, 물어볼 게 있습니다. "
"말하라. "
"혹시 카이렌하고 연합을 하려는 건.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면 다시 생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드래곤의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엘프 따위와 힘을 합칠 수가
있습니까?"
베르네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미간을 좁혔다. 그는 베르네의 생각이 라한을
걱정해서임을 눈치 챘다. 로테마이어스 같은 강자가 누군가와 연합해서 상대할
자라면 그보다 강한 자일 터. 라한외에는 그에 걸맞은 사람이 없었다.
"라한이라는 인간하고 친분이 있다고 들었다. "
"조금 있습니다. "
"그는 어떤 인간인가?"
로테마이어스의 물음에 베르네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막상 이렇게 물어보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서였다.
"그는."
"됐다. 너한테는 좋게만 보일 테지. 결론만 말하자면 난 카이렌과 연합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
"그럼 여기는 어쩐 일로? 혹시."
"네가 생각한 혹시가 맞을 것이다. 난 오늘 카이렌을 죽이려 한다. "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베르네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로테마이어스와 적대 관계였던 이는 라한만이
아니었다. 류카라한 일행과 카이렌 일행도 로테마이어스와 맞서 싸우던 상대였다.
'그러고 보면 로테마이어스는 적이 많았군. 불쌍한 건가?'
"그렇군요."
"저 인간은 뭐지?"
"아, 제 제자입니다. 시스마란. 이리 와서 로드님께 인사드려라."
베르네가 시스마란물 부르며 눈짓을 해댔다. 함부로 라한이라는 이름을 꺼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시스마란은 그런 눈짓을 알아볼 만큼 재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라한 형님의 동생 시스마란, 인사드립니다."
"저, 저."
"라한의 동생?"
순간 로테마이어스가 살기를 일으켰다. 라한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살기가 치솟는
듯했다. 그러나 곧 살기를 누그러뜨리며 찬찬히 시스마란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강하군. 굴레를 벗은 자인가?"
"굴.레? 그게 무.'
"아닙니다. 이 아이는 원래 그렇게 강하지 않았는데 저한테 마법을 배워서 이렇게
강해진 겁니다. "
베르네가 시스마란의 말을 끊고 대신 대답했다. 괜히 말을 길게 끌어서 그의 화를
돋울 필요는 없었음이다.
"용언이 느껴지는군. 베르네. 네가 가르친 건가?"
"그게 그러니까."
"용언은 아무에게 가르쳐주는 게 아니다. 너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테지. 그럼
네가 인정한 자인가?"
"그게."
로테마이어스의 물음에 이번에는 베르네가 말을 얼버무렸다. 대답하기 곤란한 듯
고개까리 푹 술인 채였다.
"시스마란이라고 했나?"
"예. "
"용언을 배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절 그냥 배우라고 해서 배운 건데요. "
시스마란의 대답에 로테마이어스가 인상을 찌푸리고 베르네를 노려봤다. 왜 그 말을
하지 않았냐는 질책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로드님. 그러니까 제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 곁 아니고요. 굳이 그 말을 해서."
"됐다. 어차피 알아야할 일이지. 용언을 가르친 드래곤은 배운 자를 평생 떠날 수
없다. 용언을 배운 자가 죽어야 그 계약이 사라진다. "
"예?"
"그리고 용언을 가르친 드래곤은 용언을 배운 자를 지킬 의무가 있다. 평생 동안
다른 이에게 죽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
"스승님. 이게 사실입니까?"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시스마란이 베르네를 바라봤다. 그의 해명이 필요한
눈빛이었다.
"아. 그러니까. 그게. 에휴, 사실이다. "
"그럼 스승님은 평생 절 따라다니려고 가르쳤군요. "
"엥?"
"휴우우. 스승님. 스승님이 절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드래곤과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
참으로 이상하게 이해하는 시스마란이었다. 그 말에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던
로테마이어스조차 멍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야! 이놈아.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안 됩니다. "
"누가 누구랑 결혼한다는 거냐? 내가 미쳤어?"
"이제 체념한 모양이군요. 다행입니다. "
"저놈이! "
"그만 베르네. 너!"
로테마이어스가 둘의 실랑이를 끊었다. 더 들어주면 자신도 바보가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 로드님. "
"너하고 똑같은 놈을 제자로 삼았군. "
"."
"."
베르네와 시스마란 둘 다 할 말을 잃은 모습이었다. 서로가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더 물어볼 건 없는가?"
"예. "
"그럼 난 카이렌을 죽이러 가야겠군. "
"저기 잠시만요. "
시스마란이 사라지려는 로테마이어스를 급히 붙잡았다. 이에 로테마이어스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지? 인간!"
"저. 카이렌을 죽이는 일은 저희 형님이 할 일입니다. "
"그래서?"
"로테마이어스님이 카이렌을 죽이면 라한 형님이 화낼 텐데요. "
시스마란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눈을 부라렸다. 로테마이어스를 라한의 이름만
대면 겁을 집어먹는 겁쟁이로 생각하는 발언이었다.
"하찮은 인간이 겁이 없구나. 내 네놈을 죽여 라한에 대한 분풀이를 해야겠다. "
"절 죽여도 라한 형님이 화낼 겁니다. 그럼 필요한 걸 얻을 수 없을걸요. "
시스마란이 재차 폭탄 발언을 하자 베르네가 조바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러다가
로테마이어스의 분노가 폭발한다면 그대로죽은 목숨이었다. 하지만 로테마이어스는
시스마란을 죽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살기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필요한 걸 얻을 수 없다? 후후후, 그래 필요한 걸 얻으려면 화를 사서는 안
되겠군. "
"예. "
"좋다. 카이렌을 라한에게 양보하지. 대신 앞으로 너희들과 함께 다녀야겠다. "
"예?"
"너희들과 함께 다니면 라한을 만날 수 있겠지. "
로테마이어스는 모종의 이유로 라한을 만나야 했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 부탁도 할
생각이었다. 한데 핑 rPt 거리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 적이랍시고 서로 싸웠던
사이이지 않은가? 무슨 염치로 찾아가며, 또 그에게 어떤 식으로 부탁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베르네, 시스마란과 일행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적어도 라한을 만날
핑계는 있으니 말이다.
"로드님. 그건 좀."
"난 이미 결정했다. "
"그렇게 하십시오. 저도 로테마이어스님에게 물어볼 게 많았습니다. "
시스마란이 다시 입을 열자 베르네가 다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입 다물라는 뜻이 담긴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시스마란은 눈치
없는 모습을 보였다.
"물어볼 거?"
"라한 형님의 활약상을 듣고 싶습니다. 로테마이어스님과 어떻게 싸웠는지, 얼마나
멋있었는지. 궁금해 하던 참입니다. "
시스마란의 말이 떨어지자 베르네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로테마이어스를
도발하는 의미가 다분한 말이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참고 있을 리가 없었다.
"당돌한 놈이군."
베르네의 생각과 달리 로테마이어스는 차분한 얼굴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다.
"로드님. 가시죠. 여기 있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지. "
베르네가 앞장서고 로테마이어스가 그 뒤를 따랐다. 시스마란은 로테마이어스의
바로 옆에 달라붙어서 이것저것 질문을 해댔다. 거의 대부분이 라한이 얼마나
강해졌느냐, 얼마나 멋있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다음 날, 라한이 제라드를 데리고 잉글리아트가 머물고 있다는 엘타나 남작가를
방문했다. 일단 제라드를 남작 저택 근처에 두고 라한만 은밀하게 숨어 들어갔다.
'없네. 어디 갔지?'
라한의 기감이면 이 저택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이 된다. 그래서 신화력을
넓게 퍼트려서 잉글리아트의 기운을 찾으려 애썼다. 한데 아무리 찾아도
잉글리아트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쳤다더니 요양이라도 간 건가?'
생각을 마친 라한이 저택 구석으로 갔다. 이렇게 된 이상 볼모로 잡혀 있다는
엘타나 남작과 그 식솔부터 구할 생각이었다. 잉글리아트 외의 잔당들은 구할
사람을 구한 후에 처리해도 늦지 않았다.
'여기군. '
라한이 기운 여러 개가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꽤 오랫동안 배불리 먹지
못했는지 기운이 몹시 약해져 있었다.
'지키는 놈은 없군. 묶어 놓은 건가?'
라한이 입구에서 안을 살폈다. 매복은 없는 듯했다. 또, 안에 갇혀 있는 자들
중에는 그리 강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철컥!
라한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갇혀 있던 자들 중 몇 명이 살기를
일으켰다.
'꽤 오랫동안 고생한 모양이군.'
"빛의 힘! "
라한이 신화력을 일으켜 방을 밝혔다. 그러자 안의 전경이 훤하게 들어왔다.
대략 30 여 명의 사람들이 작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모두가 입에 재갈을
물고 팔다리가 결박된 상태였다.
"놀라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풀어주려고 온 겁니다."
라한의 말에도 묶인 이들의 살기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지간히도 심하게 당한
듯했다.
"믿든 말든 당신들 자윱니다. "
팔다리부터 풀었다가는 공격을 해 올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한 명만 재갈을
풀기로 했다.
"푸허! 날 어쩔 셈이냐?"
"말씀드렸잖습니까? 풀어 드리려고 온 겁니다. "
"흥,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라한은 이곳에 갇힌 이들 중 가장 화려한 옷을 입은 50 대 중반의 남자를 풀었다.
왠지 그가 엘타나 남작인 듯했다. 그래서 그에게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납득시키고
조용하고 은밀하게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믿지 않으면 어쩔 겁니까? 죽일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풀어주지도 않았을걸요. "
"이놈! 전에도 그렇게 말해서 내 딸을 데려갔지 않느냐? 내 딸을 살려내라, 내 딸을
살려내란 말이다!"
사내가 절규하듯 내뱉자 라한이 급히 신화력을 일으켰다. 이곳에서 외치는 소리가
밖에 들리지 않게 방음의 막을 친 것이다.
"에고, 당신 딸이 무슨 일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음, 으으음!"
라한이 차분하게 설명하려 할 때, 구석에 있던 40 대 중반의 여성이 신음을 흘렸다.
눈에 눈물마저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이에 라한도 눈을 돌려 40 대 여성을
바라봤다.
"누구.더라?"
"음, 으으음!"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한데 도무지 어디서 봤던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라한이 기억 못 할 정도라면 아주 어릴 때 헤어졌던 사람일 게 분명했다.
"푸헙! 헉, 헉."
라한이 여성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었다. 그러자 숨을 몰아쉬며 라한을 애잔하게
바라봤다.
"우리 어디서 봤죠? 어디서 봤더라?"
"라.한. 라한. "
"흐음. "
여성의 입에서 라한이라는 이름에 나왔다. 이에 라한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한참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루시아?"
"라한. "
"누나. 루시아 누나 맞지?"
"라한아. "
여성이 힘겹게 라한에게 안겼다. 감격스러운지 눈물을 마구 흘리고 있었다.
루시아 필슨. 이제 루시아 엘타나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라한의 누나였다. 오래전
엘타나 남작가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생명을 연명한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살아있었던 거야?"
"난 필슨 가문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사람이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야.
엘베로 국왕은 필슨의 피가 섞인 사람이면가리지 않고 다 죽이려 했으니까. "
엘타나 남작은 루시아를 살리기 위해 강수를 두었다. 엘베로에게 충성하는 것.
그래서 루시아를 죽이는 것보다 엘타나 남작을 자기 사람으로 갖는 게 더
이익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었다. 정말 열성적으로 충성하고 또 많은 재물을
바쳤다. 그리고 그가 시키는 일이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결국 루시아를 살리는 일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일을 했음에도 작위는 올라가지 않았다. 루시아를 살려준
대가로 일을 했다는 걸 엘베로와 파론도 아는 터 그래서 그의 작위를 남작에서 더
올리지 않은 것이다.
"미안해, 누나. 내가. 내가 조금만 일찍 왔으면."
"아니야. 내가 미안해. 널 괴롭히기만 했는데, 그래서 날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렇게 날 구하러 와줬잖아. 정말 고마워. "
그제야 엘타나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낯익은 느낌을 받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루시아가 시집간 지방의 남작 가문이었던 것이다.
"근데 아까 딸 얘기는 뭐야? 설마 누나 딸?"
"그놈들이. 그놈들이 내 딸을 데리고 가서. 내 딸을."
루시아가 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딸 생각만 하면 분이 가시지 않는 듯했다.
루시아가 말을 멈추었음에도 다음 말은 짐작할 수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원래 라한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대륙을 떠나겠다고 약속하면 살려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크리퍼트도 살려준 것이다. 하지만 지금 라한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적어도 이곳에 머물렀던 이들은 모조리 죽일 생각이었다.
"누나, 괜찮아. 내가 복수해줄게. "
"라한아. "
"일단 나가자. 몸부터 살펴봐야겠어. "
생각 같아서는 오늘 모조리 죽여야 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루시아를 비롯한
묶여 있던 이들의 건강이 너무 안 좋았다. 이대로 뒀다가는 빠져나가서도 큰 병을
앓을 게 분명해 보였다.
"내 딸을."
"내가 복수할 거야. 그러니까 일단 나가자."
라한이 빠른 속도로 다른 이들의 재갈과 묶인 팔다리를 풀었다. 이제 오해가
풀렸는지 라한에게 살기를 흘리는 사람은 없었다.
"라한이라면. 얘기 많이 들었네."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
"아닐세. 내가 한 일은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한 길이었지 자네를 위해서가 아니었네.
"
"알겠습니다. 일단 나가시죠. "
라한이 일행을 인도해서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제지하는 사람이나 감시자가 없어서
수월하게 나을 수 있었다. 잉글리아트 일행은 오래전에 세력을 잃었다. 거기다
최근에는 잉글리아트까지 실종된 상태였다. 때문에 다른 일에 신경 쓸 여력이 거의
없었다. 자기들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기 위해 연일 회의를 개최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제라드는 한바탕할 거라고 믿고 몸을 풀고 있었다. 한데 라한의 결정이 바뀌는
바람에 다시 숙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혼자 애가 달아 있다가 허무하게 끝나
버린 셈이다.
라한이 숙소를 잡아서 엘타나 남작가 사람들을 쉬게 챘다. 그가 나오자 제라드가
의문을 담아 물었다.
"라한아. 어떻게 된 거냐?"
"제 누나가 있어요. "
"누나?"
라한의 말에 제라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필슨 가문의 멸문은 그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그에게는 가족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누나가
등장했다고 하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저한테는 형하고 누나가 한 명씩 있었어요. 처음에는 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다
살아있네요. "
"형도 살아있어?"
"예. 성격 더러운 드래곤 만나서 잘 살고 있어요. "
라한의 말에 제라드가 입을 떡 벌렸다. 드래곤이라는 말이 그를 놀라게 한 탓이다.
"드래곤?"
"그냥 그런 게 있어요. 형님. 저 잠깐만 들어갔다 올게요."
"그, 그래. "
제라드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아직도 그가 들은 말이 실감 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제라드의 모습을 뒤로하고 라한이 루시아가 묵고 있는 숙소로 들어갔다. 루시아는
어느새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엘타나 남작 그리고 아들 한 명과 함께 라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못생긴 얼굴은 여전했다. 그래도 세월이 흘러서 생긴 주름이
그녀가 현숙한 여인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누나. "
"내 동생, 라한아. "
훗, 누나. 저하고 같이 지낼 때는 그런 말 한 번도 안 했던 거 알아요?
루시아는 라한을 구박하기만 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루시아에게 구박받았던 때는 라한이 이필리에 종합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일.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그때의 앙금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기에 누나와 동생
간의 따뜻한 재회만 남아 있었다.
"그래, 그때는 그랬지 아참, 발칸, 인사하거라. 외삼촌이다."
"발칸 엘타나라고 합니다."
10 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이가 라한에게 인사를 해 왔다. 다행히 루시아를 닮지
않아서 깔끔하고 단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래, 발칸이라고? 이름이 좋구나."
"고맙습니다. "
"반갑네. "
"첫 만남이 이렇게 되는군요. 라한이라고 합니다."
발칸의 인사가 끝나자 엘타나 남작이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이에 라한도 예를 갖춰
마주 인사했다.
"라한아.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니?
"부탁이요?"
"그래. "
"뭔지는 몰라도 불가능한 게 아니면 들어 드릴게요. 라한의 허락이 떨어지자
루시아의 얼굴이 자아졌다. 하지만 옆에 있던 발칸의 얼굴이 그보다 더 밝게
변했다. 루시아가 하려는
부탁이 발칸과 관계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발칸이를 네 제자로 삼아줄 수 있겠니?"
"제. 자요?"
"그래, 마법사가 되기에 늦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너라면 우리 발칸이를 잘
가르칠 수 있을 것 같구나. 라한아, 부탁한다. "
루시아의 부탁에 라한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애초에 이번 일을 끝마치면
대륙을 떠날 생각이었다. 폐사 평원을 지날 거라서 쉬운 여정도 아니었다. 그런
위험한 일에 힘없는 발칸을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라한이 손을 쓰기도
전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누나. 사실 난."
"너라면 잘 가르칠 수 있을 거야. "
"누나. 저하고 함께 있으면 너무 위험해요. "
"여기보다 더 위험할까? 엘베로 그 미치광이의 개 노릇을 하는 것도 이제 더는 못할
것 같다. "
루시아가 독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지난 시간 동안 엘베로에게 쌓인 원한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었다.
엘베로 때문에 그녀의 남편인 엘타나 남작은 온갖 더러운 일을 다 했다. 특히
성공시켜도 욕만 먹는 일을 많이 한지라 민심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 상태로 더
가다가는 엘베로가 아니라 농민들의 반란으로 죽임을 당할 것 같았다.
"누나, 잠시만. "
라한이 루시아를 부르며 은밀하게 눈짓했다. 엘타나 남작과 발칸을 밖으로 내보내
달라는 의미였다. 그 눈빛에 엘타나 남작이 발칸을 데리고 나갔다. 지금까지 해온
고생이 얼마이던가? 눈치도 알아채지 못할 엘타나 남작이 아니었다.
엘타나 남작이 나가자 라한이 루시아 앞에 마주 앉았다.
"누나. "
"왜?"
"발칸이 떠돌이의 제자가 되길 바라세요? 아니면 왕실의 친척으로 편하게 지내길
바라세요?"
루시아가 의아한 눈으로 라한을 바라봤다. 아직 라한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누나. 대답해보세요. 어떤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그야 당연히 왕실의 친척으로 편하게 지내길 바라지. 그 어떤 어머니가 아들이
고생하기를 바라겠느냐?"
"그럼 그냥 이곳에 계세요."
"왜?"
조만간 휴란트가 루이나 왕국의 국왕이 된다. 그리고 루시아는 휴란트의 고모가 될
터였다. 엘타나 남작 가문이 휴란트의 유일한 친인척이 되는 셈이다. 거기다
휴란트의 여린 성정을 생각하면 루시아가 고생하도록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이유는 곧 알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이곳에 계세요."
"라한아. 내 아들이 자질이 없는 거야? 자질이 없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줘,
깨끗하게 포기할 수 있게."
"그런 게 아니에요. 진짜 좋은 일이 생길테니까 그냥 이곳에 계세요. 아,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엘베로가 죽었을지도 몰라요."
라한은 엘베로의 자결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떠날 때 보였던 엘베로의
눈빛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삶을 체념한자의 눈빛이었다.
"엘.베로가? 엘베로가 정말 죽었어?"
"확실하지는 않아요. 조만간 소식이 올 테니까 이곳에 계세요. 만약 빠른 시일 안에
좋은 일이 생기지 않으면 그때 다시 찾아올게요. 그럼 됐죠?"
"그 말 믿어도 되는 거지?"
"예. 제 말 믿으세요. "
루시아는 라한의 다짐을 받은 후에야 얼굴을 풀었다. 악몽 같았던 지난 시간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음이다.
"그럼 여기서 며칠 쉬다가 저택으로 돌아가세요. "
"저택?"
"예. 그놈들은 오늘 안으로 다 죽을 겁니다. "
라한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잉글리아트 일행에 대한 분노가
순간적으로 솟구친 것이다.
잉글리아트 일행이 루시아의 딸을 겁탈했다. 이에 수치심을 버티지 못한 루시아의
딸은 자결하고 말았다. 루시아의 딸은 라한에게 조카였다. 라한의 조카를 욕보이고
자결하도록 만든 것이기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라한아. 그들은 강해."
"제가 더 강할 겁니다. "
말을 마친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차가운 얼굴을 한
채였다. 이에 루시아가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자기 동생 같지 않았다. 이야기
속에서나 듣던 학살자의 느낌이었다.
라한이 나오자 제라드가 쭈그리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오늘 밤에
무슨 일이 터질 걸 느낀 듯했다.
"형님. 기다리고 계세요. 처리하고 올게요."
"무슨 소리야. 같이 가야지. "
"좀 흥한 모습을 보여 드릴지도 모릅니다. "
"네 얼굴 보고 느꼈다. 가자. "
처음 엘타나 남작가에 들어갈 때에만 해도 얼굴이 차갑지는 않았다. 무뚝뚝하기는
했지만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은 얼굴이었다. 한데 그곳을 나온 후에는 무뚝뚝함에
차가움이 더해졌다. 누나가 살아있음을 확인했다면 부드러워야 정상일 터, 한데
오히려 차가워진 걸 보고 무슨 일이 생겼음을 눈치 챘다.
"예, 형님. 같이 가죠."
-주인. 무섭다.
라한이 차가운 얼굴로 엘타나 남작가로 향했다. 로브 안에서 라한의 기운을 느낀
테세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굴을 굳이 보고 있지 않아도 라한의 감정이 느껴진
듯했다.
콰콰쾅!
라한이 엘타나 남작가의 정원에 거대한 불덩어리를 떨어뜨렸다. 한데도 저택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기척이 얼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한두 명씩
모습을 드러냈다.
"웬 놈이. 라한?"
"여긴 어떻게?"
루나시언과 루시펠이 차례로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라한이 이 곳을 찾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이곳에 숨어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굴레를 벗은
존재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세 놈이 비는군. 잉글리아트, 토일렛, 미스티크는?"
"난 여기 있지. "
라한의 말이 끝나자 동편 저택에서 미스티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인간이 아닌
라이칸드로프였다. 때문에 웬만한 일에는 그가 직접 나서지않았다. 나서는 그 순간
남들의 이목이 집중되기 때문인데 이번만큼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가 바로 라한이니 말이다.
"잉글리아트와 토일렛은?"
"토일렛은. 어디 있지?"
좀 전까지만 해도 토일렛은 그들과 같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라한이 나타났으니
합심해서 싸워야 정상인 셈이다. 한데 라한이 나타났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도망갔군."
라한이 주변을 살펴보며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미스티크와 일행들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라한은 자신이 정원을 공격하자마자 누군가가 텔레포트를 사용했음을 눈치 챘다.
하지만 굳이 따라갈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가 도망간 곳이 카이렌의 진영임은
뻔한 일. 나중에 방문할 곳이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냐! 도망이라니. "
"토일렛은 카이렌과 내통하고 있었지. "
"무, 무슨?"
"한 가지만 묻겠다. 엘타나 남작가의 여식을 범한 적이 있는가?"
라한이 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미스티크와 일행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한 명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범인인 모양이었다.
"너희들은 내일 뜨는 해를 볼 수 없을 것이다. "
"흥. 너 혼자서 우리를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으냐!"
"두고 보면 알 일이지. "
스팟!
라한이 광견보를 사용해서 좀 전에 대꾸한 미스티크에게 쇄도했다. 이에 미스티크가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검을 극성으로 배운 미스티크였기에 반응도 상당히 빨랐다.
짜악!
하지만 그보다 라한이 더 빨랐다. 미스티크가 최고의 속도로 피했지만 이미
라한에게 따귀를 맞은 후였다.
"크윽! "
"편히 죽을 수 없도록 해주지. 형님."
"알았어. 하압! "
제라드가 가장 왼쪽에 서 있는 루시펠에게 검을 휘둘렀다. 루시펠도 마주 검을
뽑아서 제라드의 검에 맞서 싸웠다.
"너희들은 내 몫이군. 스스로의 운 없음을 탓해라. 바람의 의지! "
라한이 신화력을 일으켜 루나시언과 미스티크를 동시에 공격했다. 주먹 모양의 불은
루나시언을 공격했고, 형체를 확인하기 힘든 반투명한 형상은 미스리크를 공격했다
"하압! "
"헙!"
채챙!
루나시언과 미스티크가 라한이 날린 신화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휘익!
라한의 신화력이 루나시언과 미스티크의 검을 피했다. 그리고 다시 루나시언과
미스티크의 목과 어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치 의지를 가진 듯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허업!"
"흡! "
라한의 신화력이 방향을 바꾸자 루나시언과 미스티크가 몸을 굴렸다.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법이 저절로 움직이는 걸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너무
생소한 현상이라서 이런 식으로 피하는 것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다.
콰쾅!
루나시언과 미스티크가 몸을 굴려 피하자 라한의 신화력이 바닥을 강타했다. 엄청난
소음이 신화력의 강도를 짐작게 했다.
"뭐, 뭐지?"
겨우 피해낸 루나시언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생명이 있는 듯 알아서
움직이는 신화력에 놀란 듯했다.
"나도 안 될 줄 알았는데, 되는군."
"무슨 소리냐!"
"너희들이 알 필요는 없겠지. 물의 의지, 땅의 의지!"
라한이 다시 신화력을 일으켜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루나시언과 미스티크도 연신
검을 휘두르고 몸을 구르며 피해 다녔다.
라한도 의지력을 집중시켜서 공격의 방향을 바꾸는 건 오늘 처음 시도해본 거였다.
어차피 신화력은 의지의 힘, 의지로 만들어진 힘이기에 의지로 방향을 바꾸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첫 실험을 오늘 해봤고 그 방법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피해 다녀라 마음껏 피해 다녀라. "
라한이 음침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지은 적이 없는 살벌한
얼굴이었다.
사실 라한은 미스티크와 루나시언을 끝낼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조카를 죽인 이를 곱게 죽일 수 없다는 생각에 싸움을 길게 끌고 가는 중이었다.
계속 피하면서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그렇게 계속.
채챙!
"하앗! "
"허업!"
라한이 미스티크와 루나시언을 가지고 놀고 있을 때, 루시펠과 제라드의 싸움은
점점 치열해져 갔다. 검술만 비교하면 루시펠이 제라드보다 두 수 정도 위였다.
한데 최근에 놀고먹었던 루시펠과는 달리 제라드는 바로 몇 달 전까지 용병으로
검을 휘둘렀다. 많은 경험으로 겨우 동수를 이루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 오래갈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루시펠에게는 경험 자체가
부족한 게 아니었다. 오래전에는 수많은 격전을 치렀지만 최근에 싸웠던 경험이
부족했을 뿐이다. 그래서 둘의 싸움이 길어질수록 루시펠의 움직임은 점점
가벼워졌다. 예전에 쌓았던 경험이 다시금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탓이다.
"하앗! "
"어딜!"
챙-!
제라드가 상체를 숙인 채로 검을 찔러 오자 루시펠이 손목을 감싸는 힐트로 툭
밀었다. 어쩔 수 없이 제라드가 검을 거두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그냥
넋 놓고 있을 루시펠이 아니었다. 제라드가 물러나는 그만큼 따라붙어서 검을 쉬지
않고 휘둘렀다.
채채챙!
"크윽! "
루시펠의 검이 제라드의 왼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쾌나 큰 상처인 듯 어깨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애송이 같은 놈. 하앗!"
루시펠이 제라드의 왼쪽으로 돌며 검을 휘둘렀다. 방향은 제라드의 목이었다. 왼쪽
어깨 부상으로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제라드. 어쩔 수 없이 왼쪽 팔을 포기할
생각으로 오히려 팔을 내밀었다.
"후웃! "
타악!
"어?"
루시펠은 자신이 휘두른 검이 제라드의 어깨를 자를 것이라 확신했다. 제라드는
이미 어깨를 포기한 듯 했고 라한은 멀리 있었으니 방해할 자가 없을 줄 알았다.
한데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존재가 루시펠의 검을 막고 있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커진 테세르였다.
-이봐! 검 좀 쓰는걸,
"넌 누구냐?"
-내 이름도 못 들어봤나? 테세르. 그게 내 이름이다.
"정령?"
라한이 골렘과 정령을 데리고 다닌다는 건 루시펠도 알고 있었다. 또, 골렘의
이름이 슈라이며 정령의 이름이 테세르라는 정보도 얻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정령이 이렇게 묘하게 생겼을 줄은 미처 몰랐다. 거기다 물, 불, 바람, 땅, 그 어떤
향기도 느껴지지 않는 특이한 존재라서 놀람이 더 컸다.
-위대한 마나의 정령 테세르님이시다.
"정령 따위가 감히. "
-정령 따위? 이 자식이. 오늘 너 죽고 나 살자, 이 자식아.
테세르가 눈을 부라리며 손 모양을 변화시켰다 제라드가 들고 있는 검과 흡사한
모양이 었다.
"무, 무슨."
- 덤벼. 임마!
테세르가 검을 휘두르며 루시펠에게 달려갔다. 이에 다시 정신을 차린 제라드도
공격을 시작했다. 검을 들지 않은 왼쪽 어깨를 다친 게 다행이었다.
"하압! "
"받아라!"
-죽어!
테세르, 제라드, 루시펠이 저마다 기합성을 터트리며 충돌했다. 이번은 전과 달리
루시펠도 수세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검을 배우지 않은 테세르의 마구잡이식
공격과 제라드의 예리한 기습이 루시펠의 손과 발을 어지럽게 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루시펠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테세르가 검을 마구 휘두르고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규칙은 있기 마련. 그 규칙만 찾아내면 테세르와 제라드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았다.
테세르와 제라드, 루시펠의 싸움을 보던 라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슈라. "
쿠구구궁!
- 싸우는 중인가?
"테세르 좀 도와라. 저놈들 처리하면 골렘 하나씩 나을 테니까 데리고 가고. "
-알겠다, 주인.
대답을 마친 슈라가 루시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루시펠도
밀리기 시작했다. 이젠 얼굴에서도 여유가 보이지 않았다.
"망할! "
실제로 슈라의 공격 자체가 위협적인 건 아니었다. 한데 그가 주먹을 휘두르면서
바닥을 마구 판다는 게 문제였다. 테세르와 제라드의 공격을 피하면서 발을 디딜
때마다 균형을 잡기 위해 애써야했다. 물론, 이런 영향은 제라드도 함께 받았다.
하지만 바닥에서 약간 뜬 상태로 움직이는 테세르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존재가 마구잡이로 공격해 오니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루시펠의 싸움을 잠깐 보던 라한이 다시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쉽지는 않아도
결국에는 이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스티크, 루나시언. 제법이군. 그럼 이건 어떨까? 바람의 의지, 불의 의지!"
라한이 신화력을 일으켜 두 가지 기운을 더 불렀다. 그러자 미스티크와 루나시언은
두 가지 기운에 각각 공격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나도 겨우 픽하는
정도에 그쳤던 그들.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라한을 노려봤다. 빨리 죽여 달라는
의미 같았다.
"그렇게는 안 되지. "
휘휙!
파팟!
"크악! "
피하던 루나시언의 어깨에 불덩어리와 물덩어리가 적중했다. 루나시언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헉, 헉. 그래, 차라리 죽여라. "
"아직 멀었어. 차라리 자결하고 싶도록 만들어주지."
라한의 신화력이 루나시언의 눈앞을 빙빙 돌았다. 루나시언은 침을 꼴깍 삼키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파팍!
"으악! "
불덩어리가 루나시언의 허벅지를 뚫고 지나갔다. 그런데도 피는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불의 열기가 튀어나오려는 핏방울을 모두 증발시킨 탓이다.
"그, 그냥 죽여라"
"아직이야. "
스팟!
"으악! "
물덩어리가 루나시언의 다른 쪽 허벅지를 뚫고 지나갔다. 루나시언이 눈을 붉게
충혈시킨 채로 라한을 쏘아봤다.
"헉, 헉. 이 악마, 그냥 죽여라 "
"아직이라니까. "
라한의 공격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곳만 골라서 뚫었다. 열기와 한기가 느껴질
때마다 그곳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졌다. 몸이 녹아내리는 통증과 얼어붙는 통증.
라한도 오래전 심법을 만들 때 겪어봐서 그 고통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았다.
"크크크, 더, 더. 몸부림쳐라. 더 "
"으아악! "
루나시언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동안에도 미스티크는 라한의 공격을 용케
피해냈다. 그의 실력이 루나시언을 능가한다는 증거였다.
"제법이군. 어디 또 한 번 해볼까? 불의 의지, 물의 의지. "
라한이 다시 불덩어리와 물덩어리를 만들었다. 그 모습에 미스티크가 몸을 세웠다.
더 이상 발악해봐야 소용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퍼퍽!
"크윽! "
미스티크가 몸을 세우자 공격하고 있던 바람과 흙덩어리가 양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퍼퍽!
곧이어 뒤늦게 만든 물과 불덩어리도 미스티크의 허벅지를 뚫고 지나갔다.
"이런, 벌써 포기한 건가? 겨우 이 정도로?"
"차, 차라리 죽여라. 이 악마. "
"그냥은 안 된다고 말했을 텐데. "
"왜, 대체 왜! "
미스티크가 절규하며 라한을 원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흐르고 있었다.
"죄를 지었으니 죗값을 치르는 거지. "
"크크크, 그래, 죄를 지었으니 죗값을 치르는 거겠지. 그럼 넌!"
"응? "
"넌 얼마나 정당하게 살았나? 네가 하고자 하는 일과 네가 해온 일은 정의에서
어긋난 적이 없는가? 말해봐라 말해보란 말이다!"
미스티크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외쳤다. 억울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난, 난."
채챙!
"크윽! "
갑자기 들려온 비명에 라한이 고개를 돌렸다. 루시펠이 배에 검을 꽃은 채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휴우. "
-자식. 별것도 아닌 게.
제라드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테세르는 반대로
루시펠에게 다가갔다. 그의 주특기, 가지고 놀기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크크, 왜 말이 없지? 넌 정당하게 살았어? 넌 정의에 어긋난 행동을 한 적이
없느냔 말이다. "
미스티크가 재차 외치자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보는
중이었다.
한참 눈을 감고 있던 라한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이레이저! "
라한이 신화력을 일으켜 쓰러진 루나시언과 미스티크의 목을 뚫었다. 곧이어
테세르가 다가가고 있는 루시펠의 목숨도 거두었다.
-주인.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이제 재미 좀 보려고 하는데.
"슈라. 곧 골렘이 나을 거야. 데리고 가라. "
라한이 테세르의 푸념을 무시하고 슈라에게 말했다.
-안돼.
테세르가 루시펠에게 달려가 목에 손을 대었다. 혹시나 살아있으면 가지고 놀려는
의도였다
-우씨, 죽었잖아.
테세르가 루나시언과 미스티크에게도 달려가서 목에 손을 짚었다. 역시나 모두 죽어
있었다. 라한의 단 한번공격으로 모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주인. 너무하는 거 아냐? 주인 혼자 재미 보고 내가 재미 보려고 하는데.
"가자. "
라한이 터벅거리며 저택을 벗어났다. 표정이 복잡 미묘하게 변한 채였다. 그 모습에
테세르도 더 이상 따지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라한이 사라지자 골렘이 하나씩 나타났다.
너무 갑작스러운 전투 시작에 미처 골렘을 부르지도 못하고 죽은 미스티크, 루시펠,
루나시언. 그들이 소유한 골렘이 주인을 잃고 소환된 것이다.
골렘이 소환되자 슈라가 어깨에 하나, 양손에 하나씩. 셋의 골렘을 모두 들고
아공간으로 돌아갔다. 다른 골렘보다 크지 않았으면 셋을 한꺼번에 들지 못했을
터였다.
다시 숙소로 돌아온 라한이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쾅쾅!
-주인. 왜 그래?
답답한 마음에 테세르가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라한은 테세르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들어갔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가 거의 없었던 라한이었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라. "
-주인아, 대체 왜?
"테세르. 라한을 그냥 두게. "
-왜? 대체 이유. 우웁!
"가자니까. "
테세르가 다시 입을 열자 제라드가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테세르가
발버둥치며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라한이 테세르에게 가는 신화력을 끊은 후였다.
때문에 테세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제라드의 손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혼자 남겨진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내 인생은 정의로웠는가?'
미스티크가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을 위해서였다. 정의에 위배되는 일이 아닌지, 정당한
행동이었는지를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인생도 정의에 위배되는 행동이 많았겠지. 내 인생도.'
괜히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미스티크 일행들의 가장 큰 잘못은 대륙을
점령하겠다는 야망을 품은 게 아니었다. 라한보다 힘이 약했다는 것, 라한을 죽일
기회가 있을 때 죽이지 못했다는 것, 그게 그들의 가장 큰 잘못이었다. 결국 라한
역시 힘의 논리에서 우위에 섰기에 그들을 죽일 수 있었을 뿐이다.
복수도 결국 힘이었다. 난 정의롭지 않은 행동을 해가며 힘의 우위를 이용한
거로구나. 나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거였다.
생각이 거듭될수록 점점 자괴감에 빠졌다.
난 무엇이 잘나서 그들의 죄를 물으러 다닌단 말인가? 어차피 같은 족속인 것을.
언젠가부터 라한은 대륙을 위해서 굴레를 벗은 존재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정의감에 휩싸여 살았던 셈이다. 한데 이제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자신의
힘이 더 강했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 뿐. 어차피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재회
라한이 미스티크 일행을 모조리 처리한 날 아침.
루이나 왕국의 국왕이었던 엘베로의 자살이 세간에 알려졌다. 이 때문에 루이나
오아국이 발칵 뒤집혔다. 세제 개편과 각종 제도의 개혁으로 루이나 왕국의 기반을
다졌던 엘베로 국왕. 대대로 성군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 그가 자살했다는 건 놀람을
넘어선 충격 그 자체였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루이나 왕국 전역에 퍼졌고 바로 다음 날은 타국의 왕성까지
알려졌다. 그리고 이 소식은 시스마란과 동행한 로테마이어스와 베르네의 귀에도
들어갔다.
어떻게 생각해?
글쎄요. 생각은 로드님께서 하십시오. 전 그냥 따르겠습니다.
얼마 전에는 라한이 필슨 백작가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퍼졌지. 필슨 백작가는
엘베로에 의해 멸문했고.
라한은 대륙을 횡단할 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다녔다. 예전에는 애칭인
라한이라는 이름만 알렸지만 그땐 풀 네임을 다 드러냈었다. 그래서 라한이 필슨
백작가의 후손이라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그럼?"
"가봐서 손해 볼 건 없을 것 같군. "
"그렇군요. 시스마란. 이리 와라."
"예. 스승님 "
베르네의 부름에 시스마란이 조심스럽게 로테마이어스에게 다가갔다. 라한과의
싸움에 대해 궁금해 할 때는 당당했던 시스마란. 한데 소식을 다 듣고 나자 갑자기
로테마이어스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누가 뭐래도 로테마이어스는 라한의
적이었다. 라한의 적은 곧 자신의 적이라는 생각이 시스마란을 바꾼 것이다.
"베르네미스. "
"예. 로드님. "
"저놈. 정상적인 놈 맞나?"
"좀 이상하죠? 하하하, 그냥 이해하십시오. "
오랫동안 함께 지낸 베르네도 시스마란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정상적인
사고와 너무 먼 판단을 종종하기 때문이다. 베르네조차 그러할진대 로테마이어스는
어떻겠는가? 황당하다 못해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어쩌다 저런 놈을 제자로 삼았냐?"
"마법에 재능이 있어서요. "
"흐음, 그건 나도 대단하게 생각한다. 지난 수천 년간 봐온 인간들 중에 마나
친화력이 가장 뛰어난 인간이더군. 그래도 그렇지. 정상적인 놈도 아닌 저런 놈을
제자로 삼는 건 좀 무책임한 행동 아닌가?"
"지금까지 존재했던 천재들은 대부분 좀 극단적이지 않습니까? 그냥 저놈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하십시오. "
베르네가 진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자칫 화를 사서 시스마란을 공격할까
두려웠음이다.
"저놈은 극단적인 게 아니라 이상한 거지. "
"그, 그런가요? 하하하. "
베르네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로테마이어스가 화난 것 같지 않아서
다행스러웠다.
"무슨 얘기들을 하셨습니까?"
"아니다. 가자. 로드님. 가시죠."
"그러지. 매스 텔레포트! "
로테마이어스가 시동어를 외치자 셋의 몸에서 연한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텔레포트를 감행한 로테마이어스 일행이 루스티아에 모습을 드러냈다. 외곽지도
아닌 수도 한중간에 모습을 드러낸 로테마이어스 일행. 주변에서 놀란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뭘 봐! 텔레포트 처음 봐?"
"스승님 처음 볼걸요?"
"그러냐? 쳇. "
텔레포트는 베르네가 아닌 로테마이어스가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빛에
로테마이어스가 화를 낼까 봐 베르네가 대신 발끈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눈빛을 자신한테 돌리려 했음이다.
"베르네. 애쓰지 마라. 나도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
"예? 아, 예. "
"베르네. 라한을 찾아라. "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베르네가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곧이어 마나를 주변으로
퍼트려 강한 기운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한의 기운을 느끼기 위해 마나를
퍼트리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라한에게서는 기운이 거의 풍기지 않는다는 걸
베르네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가 소환해놓았을 정령이나 골렘을 찾으려 애썼다.
한참 앉아있던 베르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앉을 때보다 한결 밝아진
얼굴이었다.
"찾았군."
"예. "
"돌덩이나 시커먼 정령을 찾은 거겠지. "
"맞습니다. 특이한 정령이 이곳에 있더군요. "
베르네도 테세르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다. 정령의 기운을 풍기지만 4 대 원소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특이한 존재. 몸 자체가 마나로 이루어진 이상한 존재.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이기에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가지. "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
로테마이어스가 움직이려 하자 시스마란이 재빨리 앞을 가로막았다. 이번에는
로테마이어스도 눈을 부라리며 시스마란을 노려봤다. 로테마이어스가 인정한 인간은
라한이지 시스마란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라한의 동생이라는 말 때문에 억지로
화를 참았을 뿐이다.
하지만 앞을 가로막는 행동에는 화가 치밀었다. 하찮은 존재가 감히 드래곤의 앞을
가로막다니. 라한만 아니었으면 당장 그의 목숨을 거두었을 터였다.
"네놈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
"로, 로드님 저놈이 아직 철이 없어서."
"스승님은 물러나십시오. 전 할 말이 있습니다. "
베르네가 중재하려 하자 시스마란이 그를 막았다. 할 말은 하고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시스마란다운 행동이었다.
"할말이 있다? 크크크, 죽어서도 그 입을 놀릴 수 있는지 보겠다. "
"죽여도 할 말은 합니다. "
"건방진."
"아이고, 로드님. "
로테마이어스가 마나를 일으키자 베르네가 재빨리 그의 손을 잡았다.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베르네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베르네미스. 네놈도 죽고 싶은 것이냐?"
"아,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아, 일단 이유는 들어보고 죽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중요한 얘기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베르네의 만류에 로테마이어스가 일으켰던 마나를 흩었다. 시스마란이 강하기는
하지만 로테마이어스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능력이었다.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자이기에 이유를 듣고 나서 죽여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말해라. 이유가 타당하지 않으면 넌 죽는다. "
"전 이유가 타당하지 않아도 할 말은 합니다. "
"건방진. "
"라한 형님에게는 저 혼자 가겠습니다. 제가 허락을 받도록 하지요. 만약 형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형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강제로 가겠다고 한다면
저부터 상대해야 할 겁니다. "
시스마란 딴에는 라한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다. 행여나 라한의 생명에 위험을
줄까 염려되었음이다. 하지만 시스마란의 말에 로테마이어스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자신을 넘어야 라한을 만날 수 있다는 대목이 그를 황당하게 만든 것이다.
"하찮은 인간. 라한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하는 말인가? 그런 의도라면 아직 넌 주제
파악을 못 한 게로군. 라한은 누군가의 보호를 받을 만큼 약하지 않다. 특히,
너처럼 보잘것없는 실력으로는 라한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 "
"무, 무슨 소립니까? 전 라한 형님을 돕기 위해 오랫동안 힘든 수련을 마쳤습니다.
"
테마이어스의 말에 시스마란이 발끈하며 외쳤다. 그가 베르네에게 마법을 배운
이유가 무엇이던가? 산속에 틀어박혀서 갖은 고생을 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 모든
게 라한을 도울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힘으로
라한을 도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한데 로테마이어스는 시스마란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난 시간 동안 해온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오랫동안 힘든 수련을 마쳤다고? 가소롭군. 그럼 라한은 그동안 놀았다고
생각하나? 라한의 적이랄 수 있는 카이렌은 놀기만 해서 지금의 실력이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어리석은 놈이군. 그들은 너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지금의
실력을 갖추었다. 너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더 힘든 수련을 통해서 지금의 실력이 된
것이다. 스승 잘 만나서 편하게 강해진 너하고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힘든 수련을
거친 자들이다. "
"그, 그건. "
"꺼져라. 네가 라한을 막겠다고 나서는 건 라한에 대한모독이다. 라한의 지금
실력에 대한 모독이고 라한의 지난 노력에 대한 모독이다. 그리고 라한에게 패한 날
모독하는 것이기도 하다. "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시스마란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주춤주춤 옆으로
물러났다.
로마이어스의 말처럼 라한은 과거 몇 번의 사선을 넘나들며 금의 실력을 갖추었다.
편하게 실력을 쌓은 시스마란이 그를 보호할 수 있다는 건 라한의 지난 노력과
경험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또, 그런 노력의 대가로 강해진 라한에게 패한 존재가
로테마이어스였다. 라한의 노력과 경험을 무시하는 건 패한 로테마이어스를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베르네미스, 가자. "
"예. "
로테마이어스가 앞서 걷자 베르네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시스마란 옆을 지날
팬 눈짓으로 그를 질책했다, 그 역시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동의한 듯 보였다.
라한은 만 하루 동안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얼굴이 무척이나
어두워진 라한. 누가 봐도 고민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라한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7"
"아니에요. "
"말해봐. 어제 네 얼굴이 너무 어두워서 그냥 내버려 뒀지만 궁금해서 안 되겠다. "
제라드가 보채자 라한이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자신의 과거가 너무
부끄러워진 것이다.
"형님."
"괜찮아. 말해봐."
제라드가 라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단순한 행동인데도 라한은 포근함을 느꼈다.
쿠당탕탕!
라한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문이 열리고 테세르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소환되어 있지 않을 때는 몰라도 소환된 상태에서는 라한과 테세르는 서로가 어디
있는지를 공유한다. 때문에 라한이 방에서 나온 것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테세르
역시 라한이 왜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주인아! 어제 왜?
"아이고, 테세르야. 이제 막 말하려고 하잖아. "
-아, 그랬어? 그럼 말해봐.
테세르가 바닥에 앉아 팔짱을 꼈다. 그를 보며 라한이 살짝 미소지었다.
라한은 어제 하루 종일 자신의 과거를 회상했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의 라한이
있기까지 거의 35 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긴 시간인데도 후회스러운 일을
너무 많이 저지른 듯했다.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정치를 외면했던 것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로이나에게 모질게 대한 것까지. 온통 잘못한 일만 가득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테세르를 만나고 그에게 말을 가르치고 그리고 그와 함께
여행을 한 일은 전혀 후회스럽지 않았다. 35 년에 가까운 삶 동안 유일하게 잘한
일이 그뿐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테세르를 보니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었다.
"형, 내가 있잖아요. "
-주인이 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쁜 짓만 한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전부
후회스러워요. 내가 왜 이렇게 살았나? 좀 더 좋은 일을 할 수는 없었나? 휴우우.
제 과거가 너무 싫어요. "
라한의 말에 제라드가 입을 다물었다. 이런 후회를 하고 있다는 건 짐작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미스티크 일행을 빨리 죽이지 않고 괴롭힌 자신을 자책하고 있을
줄 알았다.
한데 라한은 자기 과거 전부를 후회하고 있었다. 그건 곧 자기 자신을 부정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같았다.
-주인. 주인이 과거에 잘못을 많이 한 건 사실이야. 내가 잘못 한 것도 아닌데 막
구박하고. 또, 별로 큰 잘못도 아닌데 엄청 몰아붙이고. 뭐, 그래도 난 다용서할게.
난 마음이 넓거든.
"테세르. 그런 뜻이 아니다. 입 다물어 "
제라드가 테세르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 상황에서 라한을 더 나락으로 몰고 갈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형님. 아니에요. 테세르 말이 다맞아요. 제가 테세르에게 너무 모질게 대한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을 하던 라한이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친숙한 기운과 낯선 기운을
함께 느낀 탓이다.
"라한아, 왜?"
철컥!
문이 열리고 로테마이어스와 베르네, 시스마란이 들어왔다. 테세르는
로테마이어스를 보는 순간 라한의 뒤로 숨었다. 정령인 그로서는 드래곤 로드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누구십니까? 이 여관은 저희가 전세를 냈는데요. "
"형님. 제 뒤로 가세요. "
"어? 왜?"
"로드예요. "
라한의 말에 제라드가 놀란 눈으로 로테마이어스를 바라봤다.
로테마이어스는 평소에 엘프의 모습으로 다니기를 좋아한다. 회의를 할 때도,
아카폴리안에게 명령을 내릴 때에도 항상 엘프의 모습이었다. 드래곤 본체가 아니면
거의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한데 오늘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요 며칠 인간이 많은 곳을 베르네와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모습을 바꾼 것이다. 그래서 제라드도 로테마이어스를
알아보지 못했다.
"무슨 일이지? 또 싸우자는 건가?"
"흐음, 싸우자고 하면 싸워줄 건가?"
라한의 낮은 음성에 로테마이어스도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눈에서 불꽃이 튀며
둘의 눈이 마주쳤다. 한참 노려보던 두 사람 중 라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싸우려고 온 게 아니군, 용건이 뭐지?"
"먼저 대답해줄 수 있겠나? 싸우자고 하면 싸워줄 건가?"
"원한다면 기꺼이. 하지만 이번에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걸. "
라한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말의 내용과는 달리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내가 우스운가 보군. "
"노력하지 않는 자는 누가 됐든 우습게 생각한다. "
"내가 노력하지 않았다고?"
"그래. 넌 드래곤이라는 자만에 빠져서 스스로를 단련한 적이 없다. 드래곤은
수련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헛소리는 하지 마라. 그 누가 됐든지 노력하면
강해질 수 있다. "
라한의 질책에 로테마이어스가 한숨을 쉬었다.
로테마이어스는 라한에게 패한 후로 오랫동안 칩거하며 지냈다. 그동안 패한 이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지금은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가 생각한
패인은 라한이 말한 것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스스로의 노력 부족. 그래서인지
라한의 말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라한. 넌 로드님만 보이고 난 안 보이냐?"
"누구?"
베르네가 라한에게 섭섭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라한은 베르네를 본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 잠깐 봤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흐른 시간이 얼마던가?
아직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또, 라한은 어느 정도 강해진 후부터는 외모보다 기운을 기억하는 데 익숙했다.
한데 베르네와 만났을 땐 기운을 느끼는 능력이 없던 어린 시절이었다. 라한이
베르네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지 모른다.
"쳇, 내가 기억 못 할 줄 알았어. 나 베르네다. "
"베르네? 베르네. 베르네면. 베르네 신관님?"
"그래, 이놈아. "
"드래곤이었군요. "
베르네라는 이름은 라한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드래곤일 거라는 생각지도
못했다. 때문에 놀람도 클 수밖에 없었다.
"엥? 로이나님이 내 얘기 안 했어?"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사고뭉치 드래곤이 절 보고 싶어
한다는 얘기는 한 것 같은데. 그 사고뭉치가 베르네신관님은 아니겠죠?"
"흠, 흠."
베르네가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형님. 저는 기억하시겠습니까?"
"시스마란이군. 용케 살아있었네. "
"강해지겠다는 집념만으로 살았습니다. "
베르네와 시스마란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제라드도쩍 앞으로 나섰다.
급박한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한 탓이다.
"라한아.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해봐라. "
"예?"
이런 일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얘기해야 되는 거야. 마음속에 있는 걸 털어버려야
홀가분해지지 "
제라드의 재촉에 라한이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다른 이는 몰라도 로테마이어스가
있는 곳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참 고민하던
라한이 결국 결심을 굳혔다. 지금의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뭐든
할 생각이었다.
"아까 얘기가 다예요. 그냥 제가 살아온 삶이 후회만 가득한 것 같아서. 지금의 제
자신이 싫어지네요. "
"너도 영락없는 인간이었군. "
라한의 말이 끝나자 로테마이어스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듣고 있던 시스마란이 눈에
불을 켰다.
"형님이 얘기하는 건 그 누구도 끊어서는 안 됩니다. "
"뭐야?"
"시스마란. 그만 해. 로테마이어스. 무슨 뜻이지? 내가 영락없는 인간이라니? 난
원래 인간이었다. "
라한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훗, 최근에 넌 스스로가 인간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을 겪었겠지, 그 단계를
지나고 나서는 왜 사는지에 대한 의문을 느꼈을 테고. 그리고 지금 네 과거와 너
스스로에 대해 후회하는 마음만 들고. 맞나?"
"어, 어떻게?"
라한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로테마이어스의 지적이 너무 정확해서 들은 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드래곤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 안 그런가? 베르네. "
"라한아 그건 로드님 말이 맞다. "
"베르네 신관님. 그게 무슨?"
"우리 드래곤들은 인간들하고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오래 살지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세상 모든 존재들보다 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너 같이
특이한 놈을 제외하면 대륙에서 가장 강한 게 사실이거든. 그런 생각을
하면서부터는 자기 행동에 이유를 부여하려고 애쓰게 되더군. 강한 힘이니만큼 잘못
사용하면 그 폐해도 그만큼 커지니까. "
베르네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로테마이어스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팔짱을 꼈다.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띤 채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웃는 건 아니었다. 그냥 라한이 자신보다 늦게 깨닫는다는 게
기분 좋았다. 적어도 이런 변화에 있어서는 드래곤인 자신이 라한보다 위였으니까.
"그럼 드래곤들은 이미 오래전에 겪는 일이라는 얘깁니까? 그럼 해결책도 있겠군요.
"
"자신이 하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의미를 부여하기
전에 했던 모든 행동을 후회하게 되는 건 당연해. 왠지 예전에 했던 행동은 다
잘못한 것 같거든. 그때 우리 드래곤들은 수면을 취한다. 한 몇 백 년 자고
일어나면 일일이 이유를 붙이는 게 귀찮아지거든.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
"있다. "
베르네의 말을 로테마이어스가 반박하고 나왔다. 이번에는 라한의 시선이
로테마이어스에게 향했다. 지금은 적이고 아군이고를 따질 생각이 없었다. 지금의
무거운 기분을 덜 수만 있다면 설사 그 대상이 악마라 하더라도 조언을 얻을
생각이었다.
"방법이 있다고?"
"그래. "
"그 방법이 뭐지?"
"부탁이 있다. 그 부탁만 들어주면 방법을 가르쳐주겠다."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라한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냥 말해주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두 귀로 들으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
"말해봐라. "
"네 말대로 앞으로 뼈를 깎는 수련을 할 생각이다. 나 자신을 채찍질해서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경지에 도달해 볼 거다. 그때 내가 원하면 나와 싸워주겠나?"
"그게 끝인가?"
"그래, 이게 전부다. 이 부탁만 들어주면 방법을 말해주지."
로테마이어스의 말이 끝나자 라한이 웃음을 머금었다. 어차피 로테마이어스가
원하면 싸울 생각이었다.
"어렵지 않군. 허락하지. 이제 말해주겠나?"
"책을 써라. "
"뭐? "
"네가 기억하고 있는 네 과거에 대해 모두적어라. 단, 적으면서 네가 했던 행동
하나하나에 이유를 달아라. 없으면 지어내서라도 달아라. "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겨우 그 정도로 자신의 심병이
치료되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건가?"
"그러고 나서는 네가 쓴 글을 하나씩 읽어라. 억지로 만든 이유도 다시 읽게 되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게 되지. "
"흐음. 그러지. "
잠깐 침묵했던 라한이 긍정을 표했다. 어차피 지금은 다른 대책이 없었다. 한때
적이기는 했어도 지금은 적의를 보이지 않는 로테마이어스. 그의 경험과 지식을
믿어보기로 했다.
"라한아 저자는 너하고 싸웠던 자야. 저자의 말을 어떻게 믿고 실행한다는 거냐?"
"형님. 전 지금 뭐라도 잡고 해결책을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에요. 이대로
있다가는."
라한이 미처 말을 끝내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하지만 굳이 뒷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살할지도 모른다. 이 말을 하려고 했으리라.
그만큼 지금의 자기 자신이 싫었기에.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해보는 게 낫겠지. "
"지금 시작할게요. 로테마이어스. 네가 제시한 해결책이니 책임도 네 몫이다. "
말을 마친 라한이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시스마란이 손을 뻗어 잡으려다 이내 손을
거두었다.
밤새도록 회포를 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얼굴에 드러난 라한의 우울한 기분이 그만큼 절실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라한이 자신의 일생을 기록하기 위해 칩거에 들어간 동안 카이렌은 자신과 함께한
일행을 모았다. 그래봐야 루이에와 토일렛뿐이었지만, 그 강함으로는 가히 최강이라
불릴 만했다.
"라한이 잉글리아트 진영을 무너뜨린 지 벌써 10 일이 지났다. 이유가 뭘까?"
"잉글리아트를 찾느라 그런 거 아닐까? 그놈은 라한이 나타나기 전에 사라졌잖아. "
카이렌의 질문에 토일렛이 대답했다. 그는 라한이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곳으로 도망쳤다. 아무래도 잉글리아트가 빠진 그곳보다는 카이렌이 있는 이곳이
더 안전할 것 같아서였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 하지만 뭔가 부족해. 아, 참. 루이에. 그 놈은 데리고 왔어?"
"응. 엘타나 남작가에 그대로 있더군. 반폐인이 된 상태라서 도망도 못 가고 굶고
있었나 보더군. "
"크크크, 나와 대적했던 놈 꼴이 우습군. "
루이에가 데려온 사람은 류카라한이었다. 그는 엘타나 남작가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라한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서 미처 그곳까지 찾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라한이 다녀간 다음 날부터 10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로 지냈다.
루이에가 데려오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굶어 죽었을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이상해. "
"뭐가?"
"라한 그놈은 그렇게 허술한 놈이 아니거든. 류카라한이 갇혀 있다는 걸 몰랐더라도
구석구석 찾아봤을 텐데. 왜 그냥 사라졌을까?"
토일렛의 지적에 모두가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라한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만 알 수 있다면 이런 고민은 필요하지 않다.
한데 그에 대한 아주 작은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부관이자 정보 담당인
헤르만이 라한에 대한 정보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군. 라한에게 급한 일이 생겼다는 것. "
"그렇겠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사라질 정도라면 무슨 일이 생겨도 단단히 생긴
거겠지. "
"아무튼 조심해야 한다. 그놈은 미스티크와 루시펠, 루나시언 셋을 한꺼번에 꺾은
놈이야, "
루이에의 지적에 카이렌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라. 그놈이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내 은신술은 찾지 못했다. 예전에는
죽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완벽하게 없애주지. "
"루이에. 그건 카이렌 말이 맞다. 너와내가그놈의 눈만 어지럽힐 수 있다면
카이렌에게 완벽한 기회가 생길 거야. 그럼 그놈은 끝이지. 크크크. "
카이렌은 자기 은신술을 믿었다. 과거에도 라한을 죽음으로 몰고갔던 은신술과
엄청난 쾌검, 이 두 가지와 루이에, 토일렛의 도움이면 그 누구라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놈을 죽이고 나면 우리에게 남은 건 하나뿐이겠지. "
"대륙 정복. "
카이렌과 토일렛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미 라한을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몽롱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식사 시간 외에는 모습도 보이지 않던 라한이 저녁 무렵에 홀로 나왔다. 무려 석 달
만의 외출이었다. 전보다 한결 밝아진 얼굴이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주인. 다 썼어?
라한의 짧은 대답에 테세르가 방긋 웃었다. 구박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장
편한 상대는 역시 라한이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많이 나아졌네,
"그래?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아. 생각도 많이 했거든. "
테세르와 라한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로테마이어스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로테마이어스는 고된 수련을 했는지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다 썼나 보군. "
"응. 다썼다. 네 말대로 어느 정도는 나아진 것 같더군. 근데 이 정도로는 부족한
것 같다. 아직도 가슴이 답답해. "
로테마이어스의 대답에 라한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때 서로 으르렁대던 사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친근한 모습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라. 네 행동의 당위성을 적어놓은 글이니 네 과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거다. "
"그래야겠지. "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회고록 쓰기를 중요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일이었는데도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섰으니 말이다.
"후후. "
"근데 넌 뭐 하고 있었지? 드래곤이 땀 흘리는 모습은 난생처음 보는 것 같군. "
"드래곤도 본체 상태가 아닐 때에는 격렬하게 움직이면 땀을 흘린다. "
처음에는 라한뿐 아니라 로테마이어스의 얼굴도 어느 정도는 어두운 편이었다. 그
역시 라한을 이기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탓이다. 한데 지금은 그의
얼굴도 어느 정도 밝아져 있었다. 고된 수련으로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많이
편안해진 듯했다.
"수련 중이군. "
"널 이기기 위해 몸을 혹사시키고 있는 중이다. 당장은 힘들지만 머지않아서 널
넘어설 수 있을 테니 기대해도 좋다. "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근데 부탁이 하나 있다. 들어줄 수 있나?"
"부탁?"
당장의 모습이 화목해 보인다 하여 둘 사이가 가까운 건 아니었다. 언제 충돌할지
모르는 경쟁 관계에 있는 존재가 라한과 로테마이어스였다. 그래서 웬만하면
자존심을 굽혀야 하는 부탁은 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한데 라한이 부탁이라는
말을 했다. 로테마이어스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네 뼈를 조금만 빼줄 수 있나?"
"뼈?"
"그래, 피도 조금 필요하고. "
"라한아. 드래곤의 향기를 없애는 도구를 만들 생각인 거야?"
대답은 베르네가 해 왔다. 그가 드래곤의 피와 뼈로 만든 물건이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니요. "
"그럼?"
"그냥 쓸 일이 있어요. "
라한의 대답에 로테마이어스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라한이 하는 거라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궁금한 로테마이어스였다.
"어디에 쓸 거냐?"
"그거야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
라한의 성의 없는 대답에 로테마이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 대답 같았기 때문이다.
로테마이어스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라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싫으면 말고. 안되면 베르네님한테 부탁하면 되니까."
"아니, 내가 뼈를 조금 빼주지. 하지만 기억해둬라. 넌 나한테 빚 하나를 졌다.
나중에 이 빚을 갚아야 할거야. 텔레포트!"
로테마이어스가 공간 이동으로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곳과 주변여관 모두를 전세
내기는 했어도 루이나 왕국의 수도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런 곳에서 본체로
변해서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로테마이어스가 사라지자 베르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한아. 그런 일이라면 나한테 말해도 되잖아. 굳이 로드한테 부탁할 필요가
있었을까. "
"혼자 조용히 갔다 올 곳이 있거든요. 근데 로드는 내가 공간 이동을 하면 따라왔을
거예요. "
"그럼 따돌린 거?"
"예. 시간 없으니 금방 갔다 올게요. 공간으로. "
라한에 신화력을 일으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라한이 사라지고 잠시 후,
로테마이어스가 사람 몸통만 한 뼈와 피가 들어있는 큰 드럼통을 들고 나타났다.
"라한 어디 갔지?"
"잠시 갔다 올 곳이 있다면서 갔습니다. "
"망할. "
로테마이어스가 욕설을 내뱉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꿍꿍이가 자신이 가져온 뼈로 예상하지 못한 물건을 만드는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잠시 비운사이에 공간 이동 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이다.
로테마이어스가 인상을 찡그리자 베르네를 비롯해서 모인 이들 모두가 조용히
뒷걸음질 쳐서 사라졌다. 괜히 이 자리에 있다가 분노를 사고 싶지는 않았음이다.
라한은 책을 쓰면서 네 가지를 잊고 지냈음을 깨달았다. 그 때문에 로테마이어스
모르게 이곳으로 온 것이다.
라한은 먼저 류카라한의 존재를 깜빡했다. 그는 죽은 게 아니라 잉글리아트
일행에게 감금당했다고 했다. 그럼 엘타나 남작가에서 그를 찾았어야 옳았다. 한데
정신적인 불안정 때문에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 새벽에 서둘러
이동해서 찾아봤지만 누군가 머물렀을 법한 지하실만 찾았을 뿐, 류카라한은 발견할
수 없었다.
두 번째로 깜빡한 건 한동안 라한에게 즐거움을 줬던 물덩어리변의 존재였다.
카이렌 진영에 갇혀 있다는 걸 알았지만, 프리미아의 제자들 때문에 잠시 미뤄뒀던
변. 우선 친구라 할 수 있는 변부터 찾을 생각이었다.
세 번째로 라한은 쿨샤크와 데메크의 존재를 잊고 지냈다. 어린시절의 악연 때문에
너무 큰 죗값을 치르고 있는 그들이었다. 죄를 이미 뉘우쳤든지 그렇지 않든지
이제는 자유를 찾아줘야 할듯했다.
끝으로 라한 외에 유일하게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제이슨을 깜빡했다. 이미 폐인이
되기는 했지만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귀한 인재인 제이슨. 그를 카이렌의 손에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아직 있어야 할 텐데. '
라한이 은신술을 사용한 상태로 주변을 돌아다녔다. 가장 먼저 찾으려고 애쓴
존재는 당연히 변이었다.
'안 느껴지는군. 역시 기관 장치인가?'
라한이 방을 하나씩 방문하며 찬찬히 살폈다. 전에는 기감에만 의지했지만 이번에는
시각과 촉각을 모두 사용해서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섯 번째 방에 들어갔을 때,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에 익은 물건인데. '
제승업. 아니, 제스란이 타던 휠체어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서 살펴보자 그때 그
휠체어가 분명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방안에는 물건이 가득 쌓여 있었다. 마치 골동품이라도 모으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물건들의 거의 대부분은 먼지가 쌓여 있어 볼품이 없었다. 단
하나, 제스란이 타던 휠체어만 유일하게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이었다.
'이곳의 주인이 누구일까? 이 물건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라한이 제스란이 타던 휠체어를 잘못 보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이 휠체어의
재료가 페사 평원에 있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함,
마나를 머금고 있는 유일한 나무, 두 가지만으로도 라한은 이 휠체어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냈구나. 그분도 내 스승임에는 분명한데. '
지금까지 스스로의 스승은 오벨리아 팰리스에서 죽은 칼라피안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사지를 건너고, 또 마음의 위안을 받은 탓이다. 하지만
제스란은 라한이 가진 심법의 원형을제공한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라한의 진정한
스승은 칼라피안이 아닌 제스란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잊고 지냈구나. 이 얘기는 책에 쓰지 못했는데. '
드르륵!
라한의 상념을 깨는 소리와 함께 루이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수건을 들고 제스란의 휠체어부터 닦았다. 그의 일상인 듯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루이에? 저자가 왜? 혹시 그가 제스란을?'


이제야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래전 그가 카이렌을 찾아왔을 때, 루이에가
말했던 스승을 죽였다는 의미. 그게 무슨 뜻인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또, 그가
루이에를 죽이기 위해 싸웠을 때, 반쯤 체념한 듯 보였던 표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뉘우치고 있었군. 그래, 뉘우치고 있었어. 해서 그때 내게 살기를 드러내지 않았던


거야. 오히려 죽이려고 방방 뛴 건 카이렌이었지. 이제 알겠어. 이제 다 알았어.'
복수의 허무함은 이미 오래전에 깨달은 라한이었다. 에펠 일행이 화전민이 되고
엘베로가 죽여 달라고 말했을 때 절실히 느낀 거였다. 하지만 칼라피안의
복수만큼은 꼭 할 생각이었다. 그의 비참한 죽음이 평생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탓이다.
한데 이젠 칼라피안의 복수를 포기해도 될 것 같았다. 제스란을 죽이고 지금까지
휠체어를 닦았다는 건 그 긴 시간 동안 마음고생도 심했다는 얘기였다. 비록 대상이
칼라피안은 아니었지만 루이에가 안고 살아온 짐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을 터,
고생하며 지낸 과거를 생각하자 용서할 수 있을듯했다. 또, 자신은 잊고 지낸
제스란을 평생 간직하고 살았다는 것에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뉘우치면 용서하는 게 마땅한 거지. '
라한이 루이에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사라졌다. 마음의 짐을 어느 정도 덜어낸 듯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루이에의 방을 나온 라한이 다시 다른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카이렌이 머물고 있는
일곱 번째 방을 지나 여덟 번째 방에 들어갔을 때, 손끝에 무언가가 느껴졌다.
기관을 작동시키는 장치인 듯 싶었다.
'이건가?'
생각을 마친 라한이 주변으로 신화력을 퍼트렸다. 혹 기관 장치가 발동될 패 소리가
크기라도 하면 다른 사람이 달려 올 수도 있는 일. 그런 불상사를 미리 막기 위해
주변에 방음막을 친 것이다.
그르르륵!
라한이 기관을 당기자 바닥이 좌우로 열렸다. 라한이 생각한 것처럼 꽤 큰 소리가
퍼져 나왔다. 방음의 막을 치지 않았다면 카이렌이 머물고 있는 방까지 전해졌을
정도였다.
뚜벅!
라한이 빛의 공을 눈앞에 띄우고 천천히 내려갔다. 이곳은 몇 달 전에 들어갔던
밀실과는 계판이 짧았다. 대신 잘 다듬어진 복도가 라한을 맞이했다.
복도를 따라 어느 정도 걷자 눈앞에 네 개의 문이 나타났다.
'흐음. '
라한이 안쪽에 기운을 퍼트리고는 이내 신음성을 흘렸다. 한 군데에서만 기운이
느껴지고 다른 곳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느껴지는 기운도 몹시 희미했다
'쿨샤크와 데메크로군. '
라한이 쿨샤크와 데메크가 느껴진 문 앞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어느 문에 먼저
들어갈지, 또 은신술을 풀지 말지에 대해 망설이는 중이었다.
'기운을 봉쇄하는 마법진을 만들어왔군. 토일렛 짓이겠지. '
라한이 기운을 느끼지 못한 세 개의 방 주변에는 마나가 흐르고 있었다. 안에서
생기는 마나를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커튼이었다. 하지만 카이렌의
진영에는 마법사가 없었다. 결국 류카라한 진영에 있다가 배신을 한 토일렛이
만들었다고 봐야 했다.
'일단 저곳부터 가자. '
쿨샤크와 데메크의 기운이 약하기는 했지만 죽을 정도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다른 문을 방문하고 찾아와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라한이 문에 손을 올리고 신화력을 일으켰다.
철컥!
라한의 신화력이 맨 왼쪽에 있는 문의 자물쇠를 녹였다. 그러자 문이 조금 열리며
안의 정경이 슬며시 드러났다.
'류카라한?'
처음 보는 사내였다. 하지만 몽타주를 통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얼굴이었다.
류카라한.
희대의 영웅이라 불렸던 그가 팔다리를 쇠사슬에 뚫린 채 벽에 매달려 있었다.
대륙을 질타하며 다닐 때에는 이런 결말을 예상치 못했으리라.
뚜벅!
라한이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가자 류카라한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라한의
얼굴을 확인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마치 오기를 기다린 듯했다.
"왔.군. "
"존칭은 생략해도 되겠지?"
"훗, 굴레를 벗은 존재들끼리는 존칭을 쓰지 않는 게 관례지. "
"그런가? 바람의 칼날! 바람의 포근함! "
라한이 신화력을 일으컥서 류카라한을 결박하고 있는 쇠사슬을 끊었다. 곧이어
앞으로 쓰러지는 류카라한을 바람을 이용해서 부드럽게 안아 내렸다.
"역시 강하군. "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내 편지를 받은 모양이야. 다행이군. "
"편지를 보낸 이유가 뭐지? 난 너하고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엄밀히 말하면 너와
난 서로 적이었지 않나?"
라한이 차가운 얼굴로 류카라한에게 말했다. 비록 그가 편지를 보내기는 했지만
라한이 그를 용서한 건 아니었다. 각 왕국에서 병력을 차출해서 드래곤과 싸우려 한
것. 그 병력을 이용해서 카이렌과의 소모전에 사용한 것. 라한의 기준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직도 날 원망하는군. 당연한 건가? 후후, 편지를 왜 보냈냐고 물었는가? 이유를
모르는 얼굴은 아닌데 다시 묻는군. "
"네 편지에는 굴레를 벗은 자를 모두 죽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도 자살했으면
좋겠다고 썼지 . "
"그랬다. "
"그럼 이렇게 구차하게 목숨을부지하는 이유가 뭔가? 너 정도의 실력이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쉽게 할 수 있었을 텐데. "
기운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도 쉽게 할
수 있다. 몸속에 간직하고 있는 마나를 스스로 터트리거나 끊어버리면 쉬운
일이었다.
"할말이 있어서 이렇게 버텼네. 그럼 넌 왜 날 찾아왔지? 그리고 이렇게 날 풀어준
이유는 뭐지?"
"지금 네 생각을 듣고 싶다. 아직도 대륙 정복을 꿈꾸나?"
라한은 류카라한이 죄를 뉘우친다면 용서할 생각이었다. 그가 지은 죄가 크기는
하지만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 거의 대부분인 터. 대륙에 행한 행동을 반복하지
않겠다고만 다짐하면 살려줘도 무방할 거라고 생각했다.
"대륙정복? 일개 인간이 이 큰 대륙을 정복하는 건 꿈이지. 너 역시 대륙 정복은
꿈꾸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지금은 네 힘이 최고인 듯 보이지만 언제 너보다 강한
사람이 나올지 모르거든. "
"그렇겠지. "
"인간이라는 존재는 목표가 생기면 강해진다. 네가 살아서 이 대륙을 정복한다면
다른 인간들에겐 네가 목표가 되는 거지. 시간이 많이 흐르면 그 목표를 달성한
인간이 반드시 나을 거다. 그땐 너도 내 꼴이 되겠지. 그게 인간이다. 역경이
많을수록, 장애물이 많을수록 더 강해지는, 그런 존재가 인간이다. "
류카라한의 설교에 라한이 웃음을 머금었다. 기다리던 대답이었다.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라면 다시 대륙을 정복하려는 야욕은 품지 않을 것 같았다.
"다행이군. 내가 널 살려준다면 가장 먼저 뭘 할 생각이지?"
"살려줘? 크크크. 넌 네가 온 용건만 말하고 내가 기다린 이유는 묻지도 않는군.
물어주겠나?"
"이유? 그게 뭐지?"
"너한테 두 가지 부탁을 하고 싶었다. 하나는 좀 전에 내가 말한 거다. 대륙 정복에
대한 꿈을 버려라. "
류카라한의 대답에 라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생각이 점점 마음에 들고
있었다.
"꿈을 버릴 생각은 없다. 애초에 대륙을 정복하려는 꿈은 꾼 적도 없으니까 이
정도면 대답이 됐나?"
"두 번째 부탁이 있다. "
"말해라. "
류카라한이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를 보며
라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말해봐라. 난 시간이 별로 없다. "
"흐음, 로이나를 부탁한다. "
"뭐?"
"로이나가 너와 나를 동시에 좋아했더군. 나와는 과거의 인연으로 넌 현재의
인연으로. 과거인 나보다 현재인 네가 더 어울릴 것 같다. 로이나를 잘 보살펴
줘라. 드래곤이기는 해도 여린 여자나 다름없다. 내가 죽으면 로이나를 부탁한다. "

류카라한의 대답에 라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부탁은 들어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로이나가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자신의 실력은 이미 드래곤도 넘어선 상태.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하는 건
너무 위험했다 이 대륙에 남아있는 이상 언젠가는 자신을 넘어설 존재가 나을 테고.
그땐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그 부탁은. 망할 "
거절하려던 라한이 놀란 얼굴로 류카라한에게 달려갔다. 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걸 본 것이다.
"부.탁해. "
"망할 자식. "
류카라한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신화력으로 제압해놓을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젠장. 망할. 썩을. 개자식."
라한이 이미 수명이 다한 류카라한을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한데 아무리 욕을 해도
후련해지지가 않았다. 이런다고 그가 남기고 간 부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류카라한. 끝까지 속 썩이는군 "
라한이 인상을 찌푸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죽은 건 이미 지난 일. 이젠 나머지
세 개의 방을 방문할 차례였다.
라한은 두 번째 방도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갔다.
"제이슨이군. "
지금 페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제이슨은 굴레를 벗은 존재였다. 제아무리 큰
부상을 당해도 죽지 않은 이상 기운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류카라한도 밖에서는
기운을 느끼지 못했지만 안에서는 어느 정도의 기운이 느껴졌다. 한데 제이슨은
안에 들어와서도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역시. "
라한이 제이슨의 몸을 살펴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상태가 너무 심각했다. 몸이
망가진 건 물론이고 가지고 있던 마나도 어떤 장치에 의해 억제당하고 있었다. 이미
수명 이상을 산 존재이기에 마나 억압 자체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풀어! "
라한이 제이슨의 몸을 막고 있던 마나 제약을 풀었다. 그리고 제이슨의 눈을
뒤집어보며 상태를 점검했다.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예전 라한의 경우처럼 자연이 억지로 그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휴우, 이거 참. 정령왕을 불러야겠군. 테세르!"
라한이 루스티아에 있을 테세르를 강제로 정령계로 보냈다가 다시 소환했다. 이렇게
해야 거리의 제약을 받지 않고 소환할 수 있는 것이다.
-엥? 주인. 대체 뭐야? 한창 재미있게 놀고 있었는데.
"시간 없다. 정령왕 좀 불러라. 한명도 좋고 다 불러도 좋아. 신화력 마구 퍼가도
되니까 빨리 불러. "
-주, 주인. 혹시 정령왕을 소환할 생각이야?
"응. "
지금까지 라한이 정령왕들과 만난 건 이미지였다. 정령왕들의 힘은 정령계에 그대로
있고 이미지만송출해서 대화한것이다. 한데 이번에는 소환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정령왕의 소환,
-주인은 정령 친화력이 없어서 불가능할 텐데.
"그냥 불러. 친화력은 없어도 친분은 있잖아. 올 거야. 나한테 볼일이 있는
눈치였거든. "
-주인이 그렇게 말하니 시도는 해보겠지만. 안 될지도 몰라. 그럼 간다.
테세르가 사라지자 라한이 눈을 감고 주변의 자연과 대화를 시도했다. 제이슨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있는 자연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제이슨의 자연 대화능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라한은 제이슨보다 자연과의 대화 능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그가 대화할 수 있는 자연도 훨씬 많았다.
라한은 자연과의 대화를 통해 제이슨의 생명 연장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가 대화할
수 있는 자연을 총동원해서 제이슨의 생명을 이어놓으라고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휴우우."
제이슨의 생명 반응이 전보다는 강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송장 상태인
건 변함이 없었다. 이곳에 자연이 너무 부족해서 이 정도가 한계였다.
부우우웅!
라한이 벽에 기대 한숨을 쉴 때, 대기가 일렁거렸다. 곧이어 엄청난 신화력이
빠져나가며 정령왕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헙!"
상당한 양의 신화력이 한꺼번에 빠져나가자 라한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새삼
정령왕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느낄 수 있었다.
-라한. 불렀더군. 안 그래도 널 찾을 생각이었다.
가장 먼저 나타난 실피드가 라한에게 말했다. 그러자 다른 정령왕들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둘이 대화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날? 무슨 이유로?"
-내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
"정령왕도 수명이라는 게 있나?"
-당연히 수명이 존재한다. 세상에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지.
라한이 뒤로 물러난 정령왕들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자 정령왕들이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뭔가 죄를 지었거나 쉽지 않은 부탁을 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네가 내 뒤를 이어라
"그거야 어렵지 않. 뭐, 뭐라고?"
-내 뒤를 이어 정령왕이 되어 달라고 말하는 거다. 그리고 바람의 정령왕이 되려면
바람의 술이라는 걸 배워야 하거든. 왜 힘든 수련이니까 지금 시작해도 빠듯해.
라한이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이런 부탁을 받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음이다.
"야. 실피드. 누가 정령왕이 되겠대?"
-응? 난 네가 허락할 줄 알았는데.
"내가 왜?"
-요즘 네 행보를 보면 정리하는 모습 같잖아 그래서 대륙 생활정리하고 정령왕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
"미친. 난 네가 수명이 다돼 가는 줄도 몰랐다. 근데 정령왕이 되긴 개뿔이 되냐?"
라한이 짜증을 담아 외쳤다. 그만큼 당혹스럽고 화가 치밀었다는 증거였다.
-그럼 대륙 생활을 정리한 건 무슨 의미야?
"그건 내 맘이다. 너한테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는데. "
-그래도 넌 정령왕이 되어야 돼. 만약 내가 죽었을 때 후계자가 없으면 이 대륙이
위험하거든. 물론 너도 위험에 처할 테고.
실피드의 협박에 라한이 뒤에 있는 정령왕들을 차례로 노려봤다. 분명 공범이었다.
당사자가 실피드이기에 그가 대표로 말하고 있을 뿐 정령왕들의 공통된 생각임에
분명했다.
"위험에 처해? 왜? 나하고 싸우려고? 까짓것 덤벼봐. 누가 이기나 한번해보자고.
귀찮으니까 한꺼번에 다 덤벼. 젠장."
-잘못 알고 있군. 우리가 너한테 해코지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난 바람의 정령왕 이
자리가 공석이 되면 판트리아 대륙에서 바람은 사라진다. 숨을 쉬지 못하는
인간들이 살 수 있을까? 너도 마찬가지지. 너 숨 안 쉬고 얼마나 살 수 있어?
기껏해야 몇 시간? 아니지. 넌 좀 괴물 같은 놈이니까 한 일주일? 그 이상이 한계일
걸?
실피드의 설명에 라한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인간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대륙 전체를 멸망으로 몰고 갈 수는 없었다.
또, 자신도 숨을 쉬지 못해서 허무하게 사라지고 싶지도 않았고.
"다른 방법은 없나? 정령계에 그 많은 정령들 놔두고 왜 나한테 그래. "
-그건 나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정령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어. 뭐, 과거에도 물질계의 존재가 정령왕이 된 경우는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안전하게 제대로 된 정령왕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잠시만. 자연과 대화할수 있는 정령이 없어서라고? 얼마 전까지는 너희들도 자연과
대화를 못했잖아. "
-그거야 정령왕이 된 후의 일이지. 정령왕이 될 때 자연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대화도 못하는 정령이 어떻게 정령왕이 될 수 있겠어. 이 대륙에 정령왕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너밖에 없는 셈이지.
라한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이젠 그 모든 시간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때 죽어버릴걸. 이거 뭐, 제이슨 꼴보다 더 한심하. 제이슨?'
절망적이었던 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실피드를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으히히히히. "
-라, 라한. 너 왜 그래? 미친 거야?
"으히히히히. "
- 미치면 안 되는데. 정신이 붕괴되면 정령왕이 될 수 없는데 정령왕이 되는
과정에서 몸은 대기 중에 흩어진다. 정령계로 넘어가는 건 오직 정신이었다. 때문에
정신만 멀쩡하면 몸이 폐인이 되어도 정령왕이 될 수 있었다.
"누가 미쳤다는 거야?"
-다행이군.
"다행은 무슨. 난 정령왕 안 해. "
- 대륙이 멸망하기를 바라나 보군
"아니. 그것도 싫어. "
라한의 대답에 실픽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에 물러나 있던 정령왕들도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럼?
"제이슨을 정령왕으로 만들면 되지. "
-아, 그 얘기였군. 오래전에 제이슨도 물망에 올랐지. 한데 미쳤잖아. 그래서 안
돼,
"그건 내가 고칠 수 있어. 그러니까 너희들은 나하고 이 녀석을 정령계로 데려가
주기만 하면 돼. "
정령왕들은 자연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신이 붕괴된 존재에는
치료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한은 자연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적이 있다 때문에 자연의 힘을
정령왕들보다 잘 알았다. 자신이 죽음 직전에 몰렸을 때, 끊임없이 자신을 일깨우던
자연들. 서서히 몸이 되살아나자 라한을 격려하고 응원하던 자연들. 그들의 힘이면
제이슨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라한. 네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우린 네가 더 좋은데. 넌 검증된 인간이고 저자는
아직 검증이 안 됐거든.
"시끄러, 끝까지 고집 피우면 한바탕 휘젓는 수가 있어. 그리고 만약 저놈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땐 내가 정령왕이 되지. 어때?"
-알겠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그럼 라한. 잡아라.
실피드가 라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의 정령왕 엘라임은 이미 제이슨을 들쳐 업은
상태였다.
"잠시만. 그놈 데리고 먼저 가라. 난 나중에 다시 부를게. "
-거절한다.
"쳇. 그럼 너희들은 돌아가고 실피드만 남아. 이 정도면 되겠지?"
-허락하지.
실피드의 말이 끝나자 뒤에 있던 정령왕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엘라임 역시
제이슨을 안은 채로 함께 사라졌다.
"나가자."
-어딜 가려는 거지?
"넌 여기가 어디로 보이냐?"
-감옥 같군.
"그래. 감옥이지. 그러니까 다른 죄수들 풀어주러 가야지. "
-그렇군.
라한이 나가자 실피드가 그 뒤를 바싹 따랐다. 행여나 도망이라도 칠까봐 몹시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쳇. '
라한이 세 번째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물덩어리 변이 갇혀 있었다.
"변!"
우웅?
"맞구나. "
우웅, 우웅.
라한의 부름에 물덩어리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 큰 머리통에서 좌우로
번져가는 미소가 라한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녀석 여전하네. 해제. "
라한이 방 안에 만들어진 억제 장치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러자 물덩어리 변이
달려와 라한에게 안겼다.
꽈악!
'뭐, 뭐야?'
라한도 물덩어리 변이 반갑기는 했다. 하지만 반가움의 표현을 안으면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는 그 순간 느껴지는 물컹하고 축축한 느낌이 싫어서였다.
철퍽!
라한이 물덩어리 변을 자신에게서 떼어놓았다 역시나 옷이 잔뜩 젖어 있었다.
그것도물이 아닌 젤리에 젖은 것처럼 끈적거리기까지 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
"변. "
우웅?
"전에 살던 곳으로 보내줄 테니까. 거기서 쉬고 있어라. 공간이동. "
라한이 신화력을 일으켜 변을 블리아드 마을로 이동시켰다. 그가 사라지자 라한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쿨샤크하고 데메크로군. "
밖으로 나온 라한이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등장에 쿨샤크와 데메크가
동시에 달려왔다.
"하앗! "
"이얍!"
검도 없이 주먹으로 휘둘렀지만 상당히 매서웠다. 상대가 라한이 아니었다면 곤란한
일을 겪었을 정도였다
휘이이익 ! 터억 !
라한이 막아서려 할 때, 실피드가 바람을 일으켜 그들을 밀어냈다. 그러자 라한이
고개를 까딱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크크크, 차라리 죽여라. 이놈들아. "
"또 무슨 장난을 치고 싶은 거지? 이 악마 같은 놈들. "
쿨샤크와 데메크는 누군가가 다른 방의 자물쇠를 깨는 소리와문 여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곳을 방문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나의 기류가
다른 방 주변을 감싸고 있어서 대화내용은 듣지 못했다. 때문에 방문자가
라한이라는 건 몰랐다.
"그 성깔은 여전하군. "
"라, 라한?"
라한은 문 입구에 서 있었고 그 뒤에 횃불이 있어서 데메크와 쿨샤크는 실루엣밖에
볼 수 없었다. 때문에 라한의 얼굴은 확인할 수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라한이라는 걸 알아봤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래. 나다 "
"죽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살아있지?"
"카이렌이 너희들한테도 자랑하고 다녔나보군, 뭐, 죽을 뻔한 건 사실이다. "
"정말 라한인가?"
"설명할 시간 없다. 집으로 보내줄 테니까 나쁜 짓 하지 말고 살아라. 다시
헛짓하다 걸리면 그땐 국물도 없다. 공간으로. "
라한이 서둘러 공간 이동을 시전했다. 이에 쿨샤크와 데메크가 멍한 표정으로 강제
이동 되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라한이 실피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자. "
-일이 끝난 모양이군. 손을 잡아라.
실피드가 손을 내밀자 라한이 그 손을 꽉 잡았다. 곧이어 주변에 바람의 일더니
라한과 실피드가 모습을 감추었다.
정령계에 도착한 라한이 자연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이미 한 번 대화를 해본 터라
어렵지 않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부탁이 있어. '
라한이 의지로 말을 걸자 자연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야. '
'말해봐. '
'어떤 걸까?'
'무리한 부탁은 아니겠지?'
'쉬운 부탁일 리 없는데. '
'어서 말해봐. '
라한의 말에 자연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실제 어떤 부탁일까에 대한
궁금함보다 라한과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은 마음에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중이었다.
'저기 쓰러진 사람 보여?'
'보여. '
'아주 잘 보여. '
'으음, 끔찍해. '
'맞아, 맞아. 많이 다친 것 같아. '
시끄럽게 내뱉는 자연들의 말에 라한이 웃음을 머금었다 치기어린, 하지만 너무
순수한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 것이다.
'저 사람도 너희들하고 대화할 수 있어.
'정말이야?'
'믿을 수 없어. 너 외에 우리와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
'맞아, 맞아. 믿어지지가 않아. '
'아, 나 저 사람 알아. '
믿을 수 없어 하는 자연 틈에서 자그마한 흙 조각이 제이슨을 안다는 듯한 의사를
표했다. 그러자 계속 떠들던 자연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정말 알아? 어때? 정말 우리하고 대화할 수 있어?'
'거짓말이지? 라한 외에 우리하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
'맞아, 맞아.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정령왕들도 우리 중 몇 명하고만 대화할 수
있을 뿐인걸. '
아직 정령왕들도 자연 전부와 대화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대화하려는 의지를 가진
소수의 자연만이 정령왕과 대화할 수 있을 뿐이었다. 반면 라한은 멍하게 있는
자연이든 대화하려고 하는 자연이든 가리지 않고 말을 걸고 들을 수 있었다. 아직
정령왕들도 자연 친화력이 라한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말해봐. 말해봐. 그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그와 대화를 했어. 내게 말을 걸더라고. '
'그럼, 정말 저기 쓰러진 인간이 우리와 대화할 수 있다는 말이야?'
'정말이야? 정말 라한 외에도 우리와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응'
흙 조각의 대답에 자연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라한과 대화 하는 것도 좋기는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제삼자와도 대화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깨우자. '
'그래. 깨우자. 말해보고 싶어.'
'내가 먼저야. 내가, 내가 먼저 말할 거야.'
자연들의 대화를 계속 듣고 있던 라한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다행히 제이슨과 대화해본 자연이 있어서 쉽게 납득시켰다 이제 남은 건 자연을
제이슨 곁에 두는 일뿐이었다.
'잠시만. 저 사람 이름은 제이슨이야. '
'제이슨? 제이슨, 제이슨. '
'외우기 쉽다. 쉽다. 너무 쉽다. '
라한이 한마디 할 때마다 자연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무수히 많은 자연이
라한 주변에 있었기에 말을 하나하나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정령왕들은 그리 시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자연이 많지 않은 탓에 실제 들을 수 있는 목소리도 몇 안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제이슨은 크게 다쳤어. '
'다쳐? 얼마나? 얼마나 7'
'괜찮아. 우리가 고칠 수 있어. 우리는 못하는 게 없는 걸?
'맞아, 맞아. 우리가 고칠 수 있어. 고칠 거야. 그래서 말할래.'
'내가 먼저야. 내가 먼저. '
자연들이 제이슨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그리고 그의 눈, 배, 가슴, 팔, 다리 등등,
몸 곳곳으로 스며들어 가서 제이슨의 생명력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머리도 부탁해. '
'머리는 내가 들어갈래. '
'나도, 나도. '
'나도 머리가 좋아. '
자연들 대부분이 제이슨의 몸속에 스며들자 라한이 정령왕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 대충 된 거 같군. "
-저렇게만 하면 되는 건가?
"응. 자연들이 살릴 생각이 있으니까 머지않아 제이슨도 회복될 거야. "
-라한. 만약에 정령왕이 되기 싫은 마음에 거짓말하는 거라면.
"난 판트리아 대륙을 걸고 거짓을 말할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거든. 믿어보라고.
만약 수일 내로 차도가 없으면 그때 다시 찾아와. "
-믿겠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고민 끝에 대답했다. 라한의 얼굴에서 그 어떤 거짓의
느낌도 받지 못한 터.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그림 다시 돌려보내 주겠어? 할 일이 많이 남았거든. "
-그러지.
대답을 마친 실피드가 손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라한의 몸 주변에 미약한 바람이
불더니 모습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자 희미하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물질계로 귀환한 것이다.
1 서클 대 마법사
정령계에서 돌아온 라한은 카이렌 진영으로 가지 않고 루스티아의 숙소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로테마이어스가 방방 뛸 걸 생각하니 더 지체하기 힘들었다.
역시나 라한이 돌아오자 로테마이어스가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라한. 대체 어디 갔다 오는 거지?
아, 뭐, 그냥.
날 따돌리고 가다니. 중간에 테세르까지 사라진 걸로 봐서 싸우러 간 거 같은데.
로테마이어스의 살기 가득한 말에 라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변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다 일행이 되긴 했지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던 사이였다. 굳이 변명까지 해서 구차해지고 싶지 않았다.
"말해라. 싸우러 간 거였나?"
"마음대로 생각해라. "
"흥,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 너에 대해 많이 알게 될까 두려웠나? 그래서 나
모르게 싸운 건가?"
로테마이어스의 목적은 라한을 이기는 거였다. 그러자면 스스로수련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라한이 싸우는 모습을 봐 두는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했다. 한데
중간에 라한이 몰래 싸우러 갔다 왔다고 생각하자 자신을 견제해서 그랬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훗, 네가 날 이겨? 웃기는 소리. 그따위 생각을 가진 네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날
못 이긴다. "
"뭐라! "
로테마이어스가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라한의 말에 기분이 상한 얼굴이었다.
한데도 라한의 얼굴은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로테마이어스가 화를 내든 말든 관심도
없다는 태도였다.
"약점을 알아내서 이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하지만 그 약점은 내가 보완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너 스스로가 절대적인 위치에 선다면 그런 보완도 무의미하지. "
"무슨 뜻이냐?"
"감히 내가 덤빌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기 위해 수련하라는 뜻이다. 남의 약점이나
캐려고 노력하지 말고. "
"이놈이."
"흥. "
라한이 코웃음 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로테마이어스는 라한의 등을 바라보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분노에, 억울함에, 치욕스러움에 저절로 나온 반응이었다.
라한이 감옥을 쓸고 가자 카이렌이 토일렛과 루이에를 불렀다. 연무장"11 는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까지 모조리 집결시킨 채였다.
"얘기는 들었다. 라한이 왔다 갔나 보더군."
"망할 자식 "
"어떻게 할 생각이지?"
토일렛이 팔짱을 끼고 조용히 물었다. 그 역시 라한이 쥐도 새도 모르게 왔다 간
일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라한이 다녀간 감옥은 카이렌의 숙소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때문에 토일렛보다 카이렌이 받은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죽여 버리겠다. "
"이봐, 카이렌. 감정적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다. 라한은 홧김에 가서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상대가 아니야."
발끈하는 카이렌을 토일렛이 진정시켰파. 그래도 마법을 익히며 남들보다 깊은
생각을 하게 된 토일렛, 아무리 화가 치밀어도 흥분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어쩌면 그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지."
"반대?"
"반대라니?"
카이렌의 말에 토일렛과 루이에가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평소에 말이 없던
루이에도 카이렌의 말에 호기심을 느낀 듯했다.
"라한도 우리가 자신을 공격할 거라는 건 생각하지 못할 거다. "
"그래서 먼저 공격하자고? 난 반대다."
"왜지?"
"그건. 음, 아무튼 반대다. "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에 대비하고 있지 않은 상대를 공격하는 게 유리할 수도 있다
때문에 미리 철저히 준비해서 라한을 공격하면 좋은 성과를 낳을 수도 있다. 한데도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라한의 실력을 직접 보고 들었기에 그와의 싸움을 계속
미루고 싶은지도 모른다.
"이봐, 토일렛. 무턱대고 공격하자는 게 아니다. "
"그럼? "
"함정을 미리 파놓자는 거지. 함정을 파놓고 그를 유인한다면 더 쉽지 않을까?"
카이렌이 재차 설득하자 토일렛도 고민에 빠졌다. 카이렌의 말처럼 함정을 파놓고
유인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영악하기로는 고금
최강인 존재가 라한이었다. 과연 그가 카이렌의 유인에 넘어가 줄지 미지수였다.
"라한이 쉽게 속는 놈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내가 들은 정보도 그랬고 너도 라한이
무척 영악한 놈이라고 말했다 한데 가능할까?"
"물론 그놈이 영악한 건 사실이지. 하지만 난 이미 한 번 그를 초주검의 상태까지
몰고 갔었다. 그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지. "
카이렌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토일렛이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의 말처럼 유인에만
성공한다면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만약 이번 계획이 실패한다면?
다음에 라한을 만날 패는 이번보다 더 안좋은 조건에서 싸워야 할 게 분명했다
그때는 라한이 미리 준비를 하고 찾아올 테니까.
"루이에. 네 생각은 어때?"
한참 고민하던 토일렛이 루이에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의 의견을 참고해서
결정하려는 의도였다.
"글쎄. 난 라한이 얼마나 영악한 놈인지 모른다. 그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별로
없고 실제 만난 적도 몇 번 안 되니까. 하지만 우리가 선수를 칠 수도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 "
"그럼 넌 반대로군. "
"그렇다고 볼 수 있지 "
"그럼 내 결정에 달렸군. "
한마디 내뱉은 토일렛이 다시 고민에 빠졌다. 현재로써는 카이렌과 루이에의 의견이
갈라졌다. 1 대 1.
남은 자신의 결정 여부에 따라 선공이냐 방어냐가 정해지게 되었다.
'카이렌의 말도 틀리진 않아. 하지만 신중한 성격의 루이에의 결정도 무시할 수
없고. 흐음, 문제는 라한을 죽일 수 있느냐인데 모르겠군. '
토일렛의 망설임이 길어지자 카이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토일렛. 네가 고민하는 게 뭔지는 알겠다. 하지만 잘 생각해봐, 정황을 보면
시기가 문제일 뿐, 라한과 부딪쳐야 하는 건 어쩔 수없는 일이잖아. 어차피 부딪칠
거라면 좀 더 유리한 조건에서 싸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건 그렇지만. "
"먼저 공격당하는 게 유리할까? 아니면 함정을 파놓고 공격하는 게 유리할까?"
"그야 당연히 함정을 파놓고 공격하는 게 유리하지. "
"그럼 마지막 질문, 우리가 라한과의 싸움을 피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겠지 . "
"그럼 결정 난 거 아냐? 어차피 싸워야 하는 싸움. 유리하게 싸우는 게 당연한
거잖아. "
카이렌의 설명에 토일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싸움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시기가문제일 뿐, 어차피 부딪쳐야 할 상대가 라한이었다. 그리고
공격하는 게 공격받는 것보다 유리한 것도 당연했다. 이래저래 선공이 그들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래, 카이렌. 네 말이 맞다. 먼저 공격하도록 하지. 근데 지금까지는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야 공격하자는 거지? 먼저 공격할 기회는 지금까지 여러 번
있었잖아.
"휴란트가 며칠 전에 왕이 됐거든. "
"그게 왜?"
"라한을 하루라도 빨리 처리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휴란트가 우리가 아닌 라한의
말을 따를 테니까. "
카이렌도 라한과의 싸움은 껄끄러웠다. 어차피 싸워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괜스레
계속 미루고 싶었다. 한데 휴란트가 루이나 왕국의 왕이 된 지금은 더 미루기
힘들었다. 자칫하면 손에 들어온 루이나 왕국을 라한에게 빼앗길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럼 언제 할 거지?"
"시기는 빠를수록 좋지. 대신 그를 안전하게 유인하는 게 문제야. "
"라한과 그 떨거지들 외에 나머지 놈들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 "
"그럼 역시 텔레포트 에어리어뿐인가?"
텔레포트 에어리어.
일정 구간에 텔레포트 마법진을 그려놓고 정해진 시간에 영역 안에 있는 모든
물체를 강제 이동 하는 방법이다. 물론 무게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 무거워진다면
텔레포트가 시전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라한만 빼 올 수 있다면 무게가
초과되는 일은 없을 터. 그를 유인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 텔레포트 에어리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럼 함정은 어떻게 할 거야? 그리고 텔레포트 에어리어까지 그를 데리고 오는
건?"
"글쎄. "
"라한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인다. 자칫 유인하다가 잡힐 수도 있어. "
루이에의 말에 카이렌과 토일렛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난관에 부딪친 것이다.
그의 말처럼 웬만한 거리는 한 호흡으로 줄여버리는 게 라한의 움직임이었다 괜히
유인하러 갔다가 힘도 쓰지 못하고 잡힐 수 있는 일.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선공하겠다는 계획 자체를 포기해야 할듯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
한참 고민하던 카이렌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토일렛과 루이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방법이 있어. 믿어봐 "
"알겠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믿어보지, 하지만 명심해라.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라한을 죽일 길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
토일렛이 걱정스런 말을 내뱉었다. 지금 카이렌 일행 세 명 중단 한 명이라도
사라지면 라한을 상대하기 힘든 입장이었다. 카이렌이 죽는다면 당연히 라한을
처리할 방법이 없었고. 토일렛이 죽는다 해도 렐레포트 에어리어를 발동시킬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필요성이 적은 사람이 루이에였지만 라한의 눈을 어지럽혀서
카이렌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려면 그 역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럼 함정은?"
"일단 그놈은 마법사다. 그러니까 마나를 봉해놓은 구역을 만드는 게 우선이겠지. "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은데. "
"왜?"
"감옥도 마나가 봉해진 곳이었다. 한데 그놈은 제이슨과 쿨샤크를 빼 갔다. 또 비록
죽기는 했지만 류카라한의 결박도 그놈이 풀었다. "
카이렌의 말에 토일렛이 침묵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라한이라는 인간은 진짜
특이한 놈이었다. 얼핏 마법사 같으면서도 몸놀림이 기사를 능가했다 또, 마법을
사용하면서도 마나의 흐름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사의 기준에서 한참 벗어난 셈이다.
"그럼 어쩌지?"
"그냥 장애물이 많은 곳은 어떨까?"
"장애물?"
"그래. 어차피 너희들은 내가 라한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일을 해야
돼. 그의 눈을 어지럽혀서 히점을 드러내도록 만들어야 하는 거지 그러자면 나무와
바위가 많아서 거치적거리는 물체가 많은 곳이 좋을 것 같은데. 또 폭포 같은 게
가까이 있어서 시끄러운 곳이라면 더 좋겠고. "
"나무와 바위가 많고 폭포가 가까이 있는 곳이라."
토일렛이 생각에 잠겼다. 대륙을 돌아다니며 가봤던 곳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참 고민하던 토일렛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딱- !
"그래, 거기가 좋겠군, "
"어디?"
"로테라 숲. "
"로테라 숲?"
"그래, 내가 판테아 놈에게 갇혔던 곳이지. 그곳에 나무가 많고 폭포가 있는 곳이
있다. 또, 주변에 바위가 많아서 싸우기 무척이나 힘든 곳이지. "
토일렛의 설명에 카이렌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 장소면 라한의 눈을
어지럽히기 충분할 듯했다. 그리고 라한을 죽이는 일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루이에의 얼굴은 그리 좋지 못했다. 언뜻 표정이 어두워졌다가 억지로
웃음을 머금는 루이에였다.
"그럼 거기로 하지. 토일렛. 넌 루스티아 외곽에 텔레포트 에어리어를 만들어라.
창고에 있는 금을 다 써도 상관없으니까 완벽하게 만들어야 돼 "
"문제없다. "
텔레포트 에어리어를 만들 때에는 막대한 금액이 소요된다. 재료도 재료지만 단 한
번 사용하기 위한 마나를 모으기 위해서 많은 마법사들을 초빙해야 하는 탓이다.
"그럼 토일렛. 수고해라. 루이에와 난 몸이나 풀고 있을 테니까. "
"그러지. "
토일렛이 나가자 카이렌이 음흉하게 웃었다. 아직 싸우지도 않았지만 벌써 라한이
죽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자신의 은신술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이리라.
방에 들어간 라한은 고민에 빠졌다. 카이렌의 감옥에서 제이슨을 본 후로 가진
의문을 풀기 위함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 제이슨은 뛰어난 정령사였어. 대륙 최고의 정령사. 근데 고문
정도에 정신을 놓았다? 말이 안 돼. '
어느 정도 이상의 실력자가 되면 정신력도 덩달아 강해진다. 제이슨 역시
정령사로서 한 획을 그었으니 그에 걸맞은 정신력을 가졌을 터였다. 때문에
카이렌의 고문이 아무리 대단해도 정신이상자가 되는 일은 없어야 정상이었다. 한데
그는 정신을 놓고 몸도 폐인이 되었다.
'마나를 봉해서? 아니야. 마나를 봉했다고 해도 정신까지 놓았다는 건 말이 안 돼.
'
아무리 생각해도 제이슨이 그렇게 처참하게 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오래 산만큼
생에 대한 집착도클 게 분명했다. 그 집착하나만으로도 미치는 일은 피할 수 있어야
마땅했다.
'그럼 다른 이가 그의 정신을? 정신? 그럼 혹시 그자가?'
라한이 휴란트에게서 겹쳐 보인 또 다른 영상을 떠올렸다. 분명 누군가가 몸에
빙의한 모습이었다.
'휴란트만이 아니라 다른 이의 정신에도 들어갈 수 있다는 건가? 아니면 빙의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확인해봐야겠어. '
얼마 전 라한은 휴란트가 루이나 왕국의 국왕으로 봉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예상처럼 엘베로가 자결을 했고 휴란트가 그 뒤를 이은 것이다.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신화력을 일으켰다. 로테마이어스가 끼어들 걸 염려해서
신화력을 일으킬 때에도 은밀하게 행동했다.
'공간으로. '
라한이 루이나 왕국의 국왕 침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회의를 하고 있는지 휴란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없군. "
라한이 집무실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때웠다. 서랍을 열어보기도 하고 신화력을
사용해서 은밀한 장소가 있는지도 탐색해봤다. 굳이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시간을 소일할 목적이었다.
"응? "
라한이 침대 아래쪽에서 마나의 기운을 느꼈다. 무언가를 가리기 위한 것인 듯
장벽처럼 둘러싸고 있는 마나였다.
"어디. 해제. "
라한이 신화력을 일으켜 마나를 슬쩍 흩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던 책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장부인가?"
라한이 책을 하나씩 살폈다. 그의 예상처럼 장부였다. 하지만 금전의 수입과 지출이
적힌 장부가 아니라 귀족들의 허실을 기록한 장부였다.
"더러운 놈들 엄청 많네. 근데 왜 이런 놈들을 그냥 뒀지?"
엘베로가 필슨 백작가를 무너뜨리긴 했으나 루이나 왕국의 입장에서는 성군이었다.
그가 행했던 수많은 개혁이 루이나 왕국의 발전을 이룩한 것이다. 그런 엘베로가
뒤가 구린 귀족들을 그냥 뒀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휴, 이런 게 정치라는 건가? 나 같으면 그냥 확! "
뚜벅!
"오는군. "
장부를 보며 화를 삭이고 있을 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의 가벼운
발걸음과 묵직한 발걸음 네 개. 카이렌에게 검술을 배운 휴란트와 그를 지키는
호위기사들인 듯했다.
휴란트가 오는 걸 느끼자 라한이 침대 천장에 매달렸다. 휴란트는 상관없지만 그의
호위기사들에게 들켜서 좋을 거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럼 쉬십시오. "
"알겠다. 물러가거라 "
"예, 폐하. "
휴란트가 침실에 들어서자 호위무사들이 저마다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않고 침실 입구에서 양쪽으로 나누어서고 있었다. 오늘 밤 휴란트를
지키도록 명령을 받은 모양이었다.
착- !
기사들이 완전히 나가고 문이 닫히자 라한이 휴란트의 뒤에 내려섰다.
"헉! 삼. 흐읍!"
놀란 휴란트의 입을 라한이 서둘러 막았다.
"쉿!"
"휴우, 삼촌. 여긴 어쩐 일로?"
상황을 눈치 챈 휴란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라한과 떨어져 지낸 시간 동안
세상 물정에 많이 밝아진 모습이었다.
'녀석, 예전에는 멋모르고 덤비더니 많이 컸구나. '
라한이 휴란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휴란트도 공손한
자세로 그 앞에 마주 앉았다.
"휴란트. "
"예, 삼촌. "
"그놈하고 대화가 가능해? 아니면 너도 모르게 빙의된 거?"
"그, 그게 무슨?"
라한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휴란트가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세상 물정을 많이
알게 되기는 했지만, 아직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하는 자세는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그놈 불러봐. "
"삼.촌. "
"알고 찾아왔으니까 아니라고 하지 마. 화내려는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도 말고. "
라한의 말에 휴란트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알고 온 게
확실해 보였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레비안의존재에 대해 의심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놀란 마음에 순간 아니라고 할 뻔했다. 하지만, 자신이 죄를 지은 건
아니었다. 굳이 아니라고 부정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맞아요. 어떻게.어, 어? 흐음, 어떻게 알았지?"
휴란트가 묘한 신음을 흘리더니 이내 전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레비안이
휴란트의 몸을 잠식한 것이다.
"이렇게 나오는 것도 가능한 모양이군. "
"후후, 아직 휴란트의 정신력이 날 따라오려면 멀었으니까. "
"그런가?"
라한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레비안이 휴란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몸을 잠식한 데에
화난 눈치였다.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군. "
"내 조카의 몸을 엉뚱한 놈이 장악하고 있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지. "
"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안하군. 난 네가 나와 대화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
레비안의 해명에 라한도 살기를 풀었다. 레비안이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듯해서였다.
"재미있군. 굴레를 벗은 존재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아마 자네보다 훨씬 빨리 벗었을 걸세. "
"이름이 뭐지?"
"레비안. 지금 레비안 산맥이라 불리는 곳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나였다. "
라한은 레비안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그가 까마득한 옛날에 굴레를 벗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
"말해라. 뭔지 모르지만 굳이 속이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
레비안의 대답에 라한이 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성격이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스스로에게 거짓을 말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당당하다는 것, 어떤 물음에도
대답할 수 있다는 것, 그건 스스로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마음에 드는군. 첫 번째 질문. 휴란트의 몸속에 있으면서 그에게 해를 끼친 적이
있나?"
"없다. 맹세코 단 한번도 없다. 내 판단으로 휴란트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만 했고,
또 그런 행동을 하도록 휴란트에게 충고했다. "
"두 번째 질문. 제이슨을 그렇게 만든 게 너인가?"
"그건. 흠. "
라한의 두 번째 질문에 레비안이 망설이는 빛을 보였다. 지금까지 당당했던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했다는 건가?"
"그건 아니다. 당시 내 판단으로는 그의 정신을 혼란시키는 게 최선이었다. "
"이유는?"
"그는 휴란트의 몸속에 내가 있다는 걸 눈치 챘다. 넌 휴란트의 삼촌이니까
알려져도 휴란트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거든. 내가 휴란트의
몸속에 있다는 사실이 카이렌을 비롯한 다른 이들 귀에 들어가면 자칫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
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
역시나 제이슨의 정신 분열에 레비안이 관계하고 있었다. 단순히 고문만으로
정신이상자가 되었다는 걸 의심해왔던 라한. 이제야 그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위험한 일이라면?"
"실험 대상 같은 거지. 휴란트를 위험에 노출시킬 바에는 차라리 한 명의 희생자를
만드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
"흐음. "
레비안의 말을 들은 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터였다.
아니, 아예 죽여서 입을 봉했을지도 모른다. 살생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이는 용서하지 않는 게 라한의 성격이니 말이다.
"이미 지난 일이니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도록 하지. 어차피 제이슨은 곧
치료될 테니까. "
"치료? 정신이 붕괴되었는데 어떻게 치료할 수 있지? 그러고 보니 넌 어떻게 날
알아본 거지? 지금까지 내가 휴란트의 몸속에 있다는 걸 알아본 사람은 단 두 명.
너와 제이슨이라는 정령사뿐이었다. 어떻게 날 알아볼 수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군. "
레비안의 물음에 라한이 작게 미소 지었다.
자연은 만물의 근원이자 본질이다.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면 만물의 본질을
보고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레비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휴란트의 몸속에
완벽하게 빙의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라한의 눈에는 그 본질이 보였다. 휴란트의
몸속에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는 레비안의 모습을. 제이슨 역시 자연과 대화가
가능했으니 레비안을 발견했을 터였다.
당시 제이슨은 레비안을 알아보고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사람의 몸속에 또 다른
이가 있는 걸 처음 본 탓이다. 그 모습을 보고 휴란트의 몸속에 있던 레비안은
제이슨이 자신을 알아봤다는 걸 짐작했다. 그래서 밤마다 휴란트의 몸을 잠식해서
제이슨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게 자극이 되어서 결국 정신이 붕괴되는 사태까지
이른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고 싶다. "
"말해라. "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군. "
"난 오히려 네 계획이 더 궁금하다. 얼마 전에 굴레를 벗은 존재 몇을 처리했더군.
솔직히 놀랐다. 네가 강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 뭐, 드래곤
로드를 이길 정도의 실력이니 당연한 건가? 아무튼 이미 대륙 최강자가 된 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
레비안은 본래 신관이었다. 때문에 아직도 평민들의 평안한 삶과 평화를 바랐다.
그가 라한에게 물은 건 전쟁을 일으키지 말아달라는 일종의 부탁이었다.
"먼저 굴레를 벗은 존재를 대륙에서 사라지게 만들 생각이다. "
"한 명도 빠짐없이?"
"물론 한 명도 빠짐. 흠, 한 명은 제외로군. "
"너?"
"나 외에 한 명이 더 있다. 거래를 해서 살려준 자가 있지. "
라한의 대답에 레비안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라한이 살려준 자가 누구인지
떠올리려는 의도 같았다. 그렇게 한참 고민하던 레비안이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모르겠군. 누군지 물어도 될까?"
"크리퍼트. "
"이유는?"
"뉘우치는 것 같아서. "
"흐음. "
레비안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도 굴레를 벗은 존재들의 위험성은 알고 있었다.
때문에 휴란트의 몸을 언제든 잠식할 수 있음에도 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을 피했다.
누가 뭐래도 휴란트의 몸은 휴란트 자신의 것. 자신 역시 굴레를 벗은 존재이기에
주체로 나서지 않으려 한 것이다.
라한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굴레를 벗은 존재들을 처리하고 다니는
듯했다. 한데 크리퍼트는 단순히 죄를 뉘우친다는 이유로 놓아줬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르겠군. 내가 자네를 잘못 판단하고 있는 건가? 네가 그런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살려줄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
"나도 내가 그를 왜 놓아줬는지는 모르겠다. 당시에는 죄를 뉘우치는 것 같아서
놓아줬는데, 좀 후회스럽기도 하고. 그냥 그렇다. "
라한의 두루뭉술한 대답에 레비안이 미간을 찡그렸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사실 라한도 왜 크리퍼트를 놓아줬는지 확실치 않았다. 당시 그의 얼굴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비쳤고, 다시는 검을 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놓아준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도 단순한 느낌이기에 그가 정말 죄를 뉘우치는지, 또
검을 들지 않을지는 확신하기 힘들었다.
"무책임한 발언이군. 아, 자네에게 한 명의 거처를 알려주고 싶군. "
"한 명? 크리퍼트라면 말해줄 필요 없다.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거든. "
"크리퍼트는 아니다. "
"그럼? "
"잉글리아트. "
"잉글리아트?"
레비안의 대답에 라한의 얼굴에서 화색이 돌았다. 잉글리아트. 얼마 전 굴레를 벗은
존재를 처리할 때 보이지 않아서 의이하게 생각했던 인물이었다. 또, 그의 야망과
행동을 생각하면 꼭 죽여야 할 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미 에테로에게 연락해서
그의 거처를 찾는 중이었다.
"표정이 좋군. 찾고 있었던 모양이지. "
"당연하지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이거든 "
"만약 그도 죄를 뉘우친다면?"
"그는 죄를 뉘우쳐도, 이미 마나를 대기로 흩었다고 하더라도 살려둘 수 없다. "
라한의 눈에서 살기가 비쳤다. 프라하의 죽음에 잉글리아트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
탓이다.
물론 프라하를 직접 죽인 이는 케이플이었다. 잉글리아트는 뒤늦게 나타나 케이플을
데리러 을 뿐이다 하지만 뒤늦게라도 나타났다는 건 프라하의 죽음에 알게 모르게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반드시 죽여야 할 이유로
충분했다.
"개인적인 이유가 섞여 있나 보군. "
Rm 덕!
"너 역시 휴란트에게 나쁜 짓을 한다면 살려두지 않는다. 휴란트의 몸속에 있다고
해서 죽일 수 없다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
말을 마친 라한이 신화력을 휴란트의 눈을 향해 살짝 뿜어냈다. 그러자 휴란트가
아닌 레비안의 목소리가 고통에 젖어 들었다.
"크윽! 어, 어떻게?"
"이건 경고다. 네가 휴란트의 몸속에 있어도 수틀리면 소멸시킬 수 있다는 걸 잊지
마라. "
"흐음. "
라한이 신화력을 거둬들이자 레비안이 침음성을 흘리며 침묵했다. 다시금 라한의
능력에 놀란 눈치였다.
"잉글리아트는 어디 있지?"
"왕궁 시종장을 죽이고 그 행세를 하고 있더군. "
"그래? 후후. "
드래곤 발톱 사이가 가장 안전하다고 했던가? 잉글리아트는 멀리 도망가는 길을
택하기보다 이미 라한이 다녀간 왕성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또, 한나라의
정치를 좌우할수 있는 위치이기에 야망을 펼치기에도 나쁘지 않은 자리였다.
"아직 야망을 버리지 못한 게지. "
"그런 것 같군. 거처는?"
"아래층 왼쪽 제일 끝 방이 시종장의 침실이다. "
"고맙군. 휴란트하고 할 얘기가 있는데 좀 비켜줄 수 있나?"
"그러지. "
레비안의 눈이 뒤집히더니 서서히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깊이 침잠해 있던
휴란트가 다시 몸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휴란트?"
"예, 삼촌. "
"이면에 있었어도 내가 하는 말은 다 들었겠지?"
"예. "
휴란트카 전보다 더 공손하게 대답했다. 레비안을 통해 새삼 라한의 실력을 다시
한번 느낀 휴란트, 이젠 단순히 삼촌이 아닌 대륙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실력자로
대하는 듯했다.
"레비안이 네게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 문제는 없었던 걸로 하지. "
"예, 삼촌. "
"이거 받아라. "
착- !
"이게 뭐죠?"
라한이 좀 전에 보던 장부를 휴란트에게 던졌다. 엘베로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비리 귀족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라한은 그런 걸 참고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정치적인 방법으로 처리하지 못하면 스스로의 힘으로라도 처리할
생각이었다.
"비리 귀족에 대해 적힌 장부다. 돈을 얼마나 처먹었는지, 귀족의 권리를 이용해서
평민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아주 자세히 쓰여 있더군. "
"그런 귀족이 있어요?"
"네가 처리할 수 있겠어? 엘베로가 건드리지 않은 걸로 봐서 만만치 않은 녀석들
같은데 "
엘베로가 비리 귀족들을 건드리지 않은 건 시간이 부족해서였다. 그들을 처리하자면
그들과 관계된 상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함께 단죄해야 한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그로서는 자칫 마지막을 혼란스러운 상창에서 맞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럴 바에는 후인에게 그 뒤를 맡기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데 라한의 방문
이후 갑작스럽게 자결하는 바람에 미처 휴란트에게 비리 귀족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예. 이제 루이나왕국의 국왕이 되었잖아요. 제가 처리할 일인걸요. "
"그래. 그들은 네게 맡기마 "
"이제 잉글리아트라는 사람을 처리하러 갈 거예요?"
"그래야지. 죽어 마땅한 놈이니까. "
말을 마친 라한의 몸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은신술을 사용한 것이다.
"레비안. 듣고 있지? 아까 내가 한 말을 잊지 마라. "
한마디 더 내뱉은 라한이 완전히 사라졌다. 라한이 사라지자 휴란트의 몸속에 있던
레비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걱정 마라. 라한, 휴란트는 네게 조카겠지만 내게는 친구나마찬가지다. '
시종장의 방에 들어간 라한은 잠들어 있는 60 대 초반의 시종장을 발견했다. 아니,
시종장의 모습으로 변해있는 잉글리아트를 발견한 거였다.
'이놈 봐라. 세상모르고 자고 있네. '
라한은 아직 은신술을 풀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잉글리아트는 라한의 기척을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거나 찾아볼까?'
라한이 잉글리아트의 주변에 신화력을 서서히 퍼트렸다. 그리고 마법으로 숨겨진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한참 뒤지자 엘베로가 장부를 숨겨둔 곳과 비슷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해제, '
라한이 신화력을 일으켜 마나를 흩었다. 그러자 낡고 두꺼운 책이 모습을 드러냈다
벌떡!
라한이 마나를 흐트러뜨리자 자고 있던 잉글리아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나의 막이 사라졌음을 느낀 듯했다.
착- !
"역시 8 서클이야. "
재빨리 책을 잡은 라한이 표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잉글리아트가 눈을
부라렸다.
"누구냐!"
"오랜만이야. "
라한이 은신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잉글리아트는 놀란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어떻게?"
"아주 좋은 생각이었어. 여기 숨을 생각을 다하다니 말이야. 나도 여기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
"근데 어떻게 찾았지?"
"네가 모르는 굴레를 벗은 존재가 이 성에 있었거든. "
라한의 대답에 잉글리아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굴레를 벗은
존재는 가까이만 있어도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있다. 때문에 근처 fl 굴레를 벗은
존재가 있었다면 잉글리아트도 그를 느낄 수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레비안은
굴레를 벗은 존재이면서도 휴란트의 몸을 빌려 쓰고 있었다. 때문에 잉글리아트는
레비안이 근처에 있음을 알아보지 못했다. 반대로 레비안은 굴레를 벗은 존재가
가까이 오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
"그건 알아서 판단하라고. 그리고 이거 말이야, "
라한이 손에 든 책을 들고 흔들었다. 잉글리아트는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책을
잡으려 했다. 책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그런 반응을 불러온 거였다.
"곧 죽을 놈이 욕심이 많구나. "
"그, 그런. "
그제야 잉글리아트도 상황을 파악했다. 라한은 자신을 죽이러 왔다. 8 서클 마법서에
집착하기보다 살길을 모색하는 게 우선이었다.
"눈 돌아가는 거 보니 살 방도를 생각하나보군. 꿈 깨. 이번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
라한이 신화력을 잉글리아트에게 슬쩍 보냈다. 그의 마나를 봉해서 도주를 원천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커억!"
"이제 딴 짓 못하겠지. "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도망 못 가게 마나를 봉했다. 아, 그건 드래곤도 풀지 못했던 거니까 괜히 애쓰지
말라고. "
예전 라한은 드래곤 크라이드리안의 마나를 봉쇄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신화력이
아닌 제령기와 제란기를 이용했다는 게 다를 뿐, 원리는 지금과 그때가 완벽히
같았다.
"그냥 죽여라. "
"물어볼 게 있거든. 대답해주면 이 책을 돌려주지. "
"정말이냐?"
"물론. "
라한의 담담한 대답에 잉글리아트가 생각에 잠겼다. 라한이 약속을 지킬지에 대해
고민하는듯했다 그렇게 가만히 있던 잉글리아트에게 라한이 재촉의 말을 내뱉었다.
"내 의문은 류카라한에 대해서다. 그가 대륙 정복을 꿈꿨는지가 궁금하거든. 최근에
마음이 변해서 대륙 정복에 대한 꿈을 버린 건지, 아니면 애초에 그런 야망을 품은
적이 없는지. "
라한의 질문에 잉글리아트가 미소를 머금었다. 대답해줘도 상관없는 질문 같았기
때문이다.
"후후, 별거 아니군. 류카라한은 애초에 대륙 정복 같은 건 관심 없었다. 우리 뜻에
따라서 그런 척했을 뿐. 실제로는 대륙 정복의 야욕을 품은 적이 단한 번도 없었지.
그래서 희생자가 많이 나을 것 같은 싸움은 계속 피하기만 하더군. 그러지 않았다면
카이렌 그놈을 일찍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참 멍청한 놈이지. 이 질문이 전부냐?"

"내가 궁금했던 건 그게 전부다. 자! "


라한이 8 서클 마법서를 잉글리아트에게 던졌다. 책을 받은 잉글리아트가 활짝
웃으며 책 내용을 살폈다. 혹시라도 라한이 책을 바꿔치기 했을까 봐 걱정된
모양이었다.
"의심이 많은 놈이군. "
"그래야 오래 살아남지. 근데 이 책을 돌려준 이유가 있을 텐데. "
"상관없으니까. "
"무슨 소리지?"
"어차피 넌 그 책과 함께 사라져야 하거든.
"무, 무슨 소리냐! "
잉글리아트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는 라한이 자신을 살려주는 줄
알았다. 그래서 8 서클 마법서를 자신에게 순순히 넘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라한은 애초에 잉글리아트를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약속을 할 때도
살려준다는 약속이 아닌 책을 돌려준다는 약속만 했다. 그 약속을 확대해석한 게
잉글리아트의 실수였다.
"하지만 아까는."
"그래. 아까는 책을 돌려준다고 약속했지. 그래서 돌려줬잖아. 안 그래?"
"이, 이 사기꾼. "
"훗, 소멸!"
라한의 짧은 외침에 잉글리아트와 그가 쥐고 있던 8 서클 마법서가 서서히 사라졌다.
신화력에 의해 분해되는 모습이었다.
"다음 생이 없을 테니 명복은 빌지 않아도 되겠지. "
잉글리아트가 죽자 그의 앞에 골렘의 에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물건으로 몸체를 구성하려 했다.
"공간으로. "
라한이 골렘의 에고를 잡고 서둘러 공간 이동 했다. 이곳에서 골렘의 몸체가
구성되었다가는 자칫 성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때문에 넓은 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한적한 곳으로 이동한 라한이 슈라를 불러 잉글리아트의 골렘을 데리고 가도록


했다. 이로써 토일렛을 제외한 모든 골렘이 슈라의 아공간에 머물게 되었다.
라한이 숙소로 돌아오자 로테마이어스가 서신을 들고 들어왔다. 아직 개봉되지 않은
서신이었다.
"봤지?"
"무슨 소리야?"
"봤잖아. 마나의 흔적이 남아있구만. "
"그, 그. 어험. "
로테마이어스는 라한 몰래 편지를 읽어봤다. 하지만 뜯어서 편지를 읽은 건
아니었다. 마법을 사용해서 안의 내용만 살펴봤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도
라한의 눈을 속이기는 힘들었다.
"쳇. "
찌익!
라한이 서신을 뜯어서 읽기 시작했다. 읽어 내려갈수록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편지를 구겨버리며 눈을 부라렸다.
"그놈이 프라하를."
"어쩔 거야?"
"부르는데 가야지, "
카이렌이 라한을 부르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프라하를 사지로
몰아넣은 사람이 자신임을 밝히는 것. 그래서 화가 치밀어서 쫓아오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함정일 거야. 마법의 종주인 내가 가면 도움이 될 수 있을걸. "
"아서라. 너하고 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
"무슨 소리. 난 네가 싸우는 건 다 봐야겠다. "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내가 말했지. 남의 약점을 캐기보다 스스로가 절대 강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라고. "
라한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자신도 라한의 말이 뭘
뜻하는지는 알았다. 하지만 상대가 카이렌이라는 게 로테마이어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드래곤을 제외하면 대륙 제 2 인자라고 할 수 있는 카이렌과 대륙
제 1 인자인 라한의 대결. 그 전투를 보지 않고는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보고 싶다. "
"내 말을 못 알아들었군. 남의 약점을."
"알아, 알고 있다고. 그래도 보고 싶다. "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얼굴에 깃든 의지로
말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로테마이어스가 등장했을 때 카이렌이 도망갈까
염려되었다. 그들은 분명히 라한 한 명을 상대할 작전과 함정만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로테마이어스. "
"왜?"
"투명화 마법 써봐. "
"인비져빌리티. "
라한의 말에 로테마이어스가 순순히 투명화 마법을 사용했다. 라한의 말투에서 뭔가
방법이 있음을 느낀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완벽하군. 봉인!"
라한이 로테마이어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신화력을 일으켰다. 이에 로테마이어스의
몸에 가득하던 마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확하게는 라한의 손이 머물렀던 곳에
로테마이어스의 마나가 완벽하게 봉인된 것이다.
"이, 이게 뭐지?"
"말 그대로 봉인이지. 네가 사용한 인비져빌리티는 그대로 뒀으니까 모습이
드러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앞으로 꼬박 하루 동안은 마나를 쓸 수 없을 거다.
재수 없으면 튀는 파편에도 다칠 수 있다는 말이다. "
"그런. "
사람이 기척을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서는 청각, 시각, 촉각, 후각, 미각, 기감. 이
여섯 가지를 모두 지워야 한다. 로테마이어스의 인비져빌리티는 다른 투명화 마법과
달리 전자의 다섯 가지 감각은 완벽히 지울 수 있었다. 심지어 피부에서 느껴지는
체온마저도 완벽하게 지울 수 있는 게 로테마이어스의 인비져빌리티였다. 하지만
기감. 즉, 몸속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완벽하게 지우지 못했다. 어느 정도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카이렌 정도의 강자를 속이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라한이 로테마이어스의 마나를 완벽하게 봉인함으로써 기감도 완벽하게
지웠다. 그가 큰 소리로 떠들지 않는 이상은 들킬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앞으로
꼬박 하루 동안은.
'그때는 날 봐준 거로군. '
봉인이 너무 쉽게 이루어졌다. 단순히 접촉해서 봉인이라고 외치는 것만으로 드래곤
로드였던 로테마이어스의 마나가 완벽하게 봉인되었다. 이런 실력이면 오래전
싸움에서도 라한이 쉽게 승리할 수 있었을 터였다. 결국 당시에 로이나를 풀어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힘 조절을 했음이다.
'난 멀었구나. '
"테세르. 로테마이어스. 가지. "
라한이 테세르를 대동하고 밖으로 나갔다. 물론 완벽하게 사라진 로테마이어스도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라한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주변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라한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카이레이 심어둔 감시꾼인 듯했다.
한참 걸어가던 라한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눈에 보이는 곳의 바닥에 마법 장치가
되어있음을 깨달은 탓이다.
"텔레포트 에어리어라. 함정은 다른 곳에 있다는 건가?"
"함정?"
라한의 중얼거림을 들은 로테마이어스가 뒤에서 속삭였다. 마나가 완전히 봉인된
로테마이어스. 때문에 바닥에 설치된 마법 장치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응. 텔레포트 에어리어 같군. 아, 로테마이어스. 카이렌은 은신술을 쓰는자다. 내
옆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 말을 자제해라. "
"그러지. "
로테마이어스의 대답을 끝으로 라한이 텔레포트 에어리어가 있는 곳에 발을 디뎠다.
안에 들어선 라한이 눈을 지그시 감고 때를 기다렸다. 이 장치가 특정 시간에
발동되도록 만들어진 것임을 눈치 챈 탓이다.
라한이 두 시간가량 기다렸을 때, 바닥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바야흐로
텔레포트 에어리어가 발동될 시간이 된 듯했다.
우우우웅! 스팟!
진동이 점점 심해지더니 바닥에서 강한 빛이 폭사되었다. 그와 동시에 담담하게 서
있던 라한과 투명화 상태인 로테마이어스가 다른 곳으로 강제 이동 되었다.
이동된 라한이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어도 경계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테라 숲?"
"응? "
라한의 중얼거림을 들은 듯 전방에 서 있던 토일렛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테라 숲이 맞군. "
"흐음. "
라한이 로테라 숲을 아는 듯하자 토일렛이 침중한 음성을 내뱉었다.
토일렛이 이곳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지형에 익숙하다는 이점을 안기 위해서였다.
한데 라한도 이곳을 아는 듯 말하자 그 이점이 사라졌다 만약 라한이 카이렌
일행보다 이곳에 대해 잘 안다면오히려 지형적인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여기서 투바를 만났지. 얼마 전에도 여기 온 적이 있었고. "
로테라 숲에 도착하자 새삼 투바의 고마움을 다시 한번 느꼈다. 처음 이곳에서
죽음의 고비에 있을 때에도 투바가 라한의 목숨을 구해줬다. 그리고 카이렌에게
기습당해서 생사의 고비에 있을 때도 투바가 라한을 살렸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투바에게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함 받은 셈이다.
라한이 이곳을 바라보며 옛 추억을 되살리는 동안 카이렌 일행들은 눈짓으로 대화를
나누며 대책을 의논했다. 라한의 표정에서 이곳에 대해 생각보다 잘 안다는 느낌을
받은 탓이다.
"날 죽이려고 부른 거 아닌가? 시작하지 "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해보자고. 파이어 볼!"
토일렛이 인상을 찌푸리며 마법을 시전했다. 고위 마법사의 기본 마법이라고 할 수
있는 파이어 볼이었다.
"방어. "
라한이 간단하게 주문을 외워 토일렛이 날린 파이어 볼을 막았다. 그러자 옆에서
루이에가 검을 휘둘러왔다.
'음? 허초?'
루이에의 검은 빠르고 정확했다. 한데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마치 죽이려는
의지가 결여된 듯했다.
"하앗! "
"이동! "
"하압! "
라한이 공간 이동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러자 루이에가 다시 검을 휘둘러 라한을
공격해 왔다. 쉬지 않고 공격하는 모습은 루이에의 장기가 분명했다. 다른 점이라면
이번 공격 역시 죽이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나와 싸울 생각이 없는 건가?'
루이에의 공격을 피하면서 라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이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모르겠군. 어떤 꿍꿍이가 있는 건가? 꿍꿍이? 그러고 보니 카이렌이 안 보이는군.
훗, 손발을 어지럽게 만들어놓고 공격하겠다?'
라한은 뒤늦게 카이렌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싸우게 되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한데 루이에의 기세 꺾인 검술에
카이렌을 찾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어디 보자. '
라한이 주변을 살피며 카이렌을 찾기 시작했다. 카이렌보다 몇 배나 뛰어난
미스트의 은신술도 찾아낸 라한이다. 카이렌이 숨어있는 곳을 찾지 못할 턱이
없었다.
'저기군, '
라한은 카이렌이 나무 아래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검을 뽑아든 채
매섭게 노려보는 카이렌. 그 모습이 너무 살기등등해서 라한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보겠어. '
라한이 몸을 빙그르 돌려서 카이렌과 멀리 떨어졌다. 라한의 행동에 토일렛이
서둘러 그 앞에 마법을 쏘았다. 어떻게든 라한을 카이렌이 있는 쪽으로 유인하려는
의도였다.
'그렇게는 안 되지. '
"바람의 장막!"
라한이 바람의 장막으로 토일렛의 마법을 비껴 나가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또 몸을
돌려 카이렌에게서 더 많이 떨어졌다.
라한이 멀리 떨어지자 카이렌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냥 기다리다가는
라한 을 죽일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앗! "
루이에가 다시 라한을 압박해 왔다. 여전히 무언가가 빠진 공격이었다.
'왜지?'
루이에의 계속된 행동에 라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카이렌에게 자신을 유인하기 위해서는 아닌듯했다. 이미 카이렌과의 거리가
멀어져서 별 의미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을 해코지할 생각이
없어서라는 뜻인데.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채챙!
라한이 세라소드를 뽑아 루이에와 검을 마주쳤다. 그러면서 눈빛으로 의아해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라한의 눈빛을 받은 루이에가 처연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미안하다는 듯, 후회하고 있다는 듯 매우 오묘한 표정이었다.
'왜?'
라한과 루이에가 검을 섞고 있을 때, 카이렌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조금씩
다가오는 게 지루했던 모양이었다.
'오는군. '
라한의 등 뒤로 돌아간 카이렌이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아직 날 눈치 채지 못했다. '
카이렌은 라한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아직 자신을 알아채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씩 자신감이 붙는 걸 느꼈다.
'이번엔 목이다. '
전에는 복부를 찌르는 바람에 라한이 구사일생할 기회를 줬다. 카이렌은 그때
마무리 짓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었다. 이번에는 다시 기적이 일어나지 않도록
라한의 목을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
라한이 카이렌이 있는 곳으로 조금씩 밀렸다. 루이에 역시 라한을 죽이지 않으려
하고, 라한 역시 차마 루이에에게 살수를 쓰지 못했다. 둘의 묘한 상황때문에 생긴
팽팽한교전. 하지만 토일렛이 간간이 날리는 마법 때문에 라한은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카이렌. 마무리 짓자. '
카이렌은 라한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라한 역시 의도적으로
카이렌에게 등을 보이는 중이었다. 허점을 드러내서 공격하도록 유도하고, 그때
카이렌에게 치명타를 안길 생각이었다.
'그래, 지금. '
카이렌은 라한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이미 계획한 대로
라한의 목을 위해서였다.
"어딜!"
"안 돼!"
이미 눈치 채고 있던 라한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루이에가 먼저였다. 카이렌의
검에 자신의 검을 가져다 댐과 동시에 몸을 날려 라한을 막았다.
채앵! 투캉! 서걱!
카이렌의 검은 루이에의 검을 자르고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라한의 몸을
막아섰던 루이에의 가슴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컥!"
"미친! "
"무, 무슨?"
루이에가 카이렌의 검을 대신 맞았다. 물론 라한은 미리 알고 검을 피했다. 하지만
그걸 알지 못했던 루이에는 카이렌의 검에 몸을 던진 결과가 되었다.
"허. 윽!"
"왜? 왜지?"
"난. 속죄하고 싶었는데. 헉, 헉. 결국. 못했. 군. "
루이에는 자신이 검에 맞는 순간 라한이 이미 피했다는 걸 알아챘다. 나름대로는
라한 대신 맞기 위해서였는데, 결국은 자결한 것 밖에 되지 않았다.
"그, 그럼. "
"제.스란님에게 지은 죄.를 갚고 싶었는."
루이에가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카이렌이 날린 회심의 일격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의미였다.
"망할. "
카이렌이 욕설을 내뱉으며 검을 곧 추세웠다. 그도 알고 있었다. 루이에의 방해가
없었어도 라한은 검에 맞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이미 자신이 이곳에 숨어있다는 걸
알고 있었음을, 라한의 눈빛과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루이에였구나. 이곳의 정보를 보내 준 사람이 그였어. 제스란님의 의자를 봤을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바보, 바보. '
핵심 멤버끼리 행했던 회의 내용도 에테로를 통해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카이렌 일행 중에 자신에게 정보를 보내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걸 이미 오래전에
짐작했다. 한데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간과하고 지냈다. 그가
루이에라는 걸 알았다면 그가 몸을 날릴 수 있음도 예상했을 터, 이렇게 허무하게
죽도록 방치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내가 바보였어. '
"하앗! "
라한이 멍한 표정으로 서 있자 카이렌이 선공을 날렸다. 은신술이 라한에게
읽힌다는 건 좀 전의 교전으로 깨달았다. 더 이상무의미한 은신술로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카이렌의 검이 날아오자 라한이 모습을 감추었다. 카이렌이 아닌 라한이 은신술을
사용한 것이다.
"허엇!"
"헙!"
카이렌이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라한이 은신술을 사용할 거라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듯했다. 또, 멀리서 마법을 날릴 시기를 보고 있던 토일렛도 헛바람을
들이켰다.
"토일렛! 골렘! 골렘을 불러! 주변을 초토화시켜 버려. "
"아, 알았어. 스티리안! "
토일렛의 부름에 그의 앞에 은은한 빛을 발하는 구슬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구슬을
중심으로 주변 oft 있던 돌과 나무, 흙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골렘이 형체를 갖추는
모습이었다.
"그럴 순 없지. "
어디선가 들린 라한의 목소리. 동시에 막 모습을 갖추던 스티리안의 핵이 산산조각
났다. 라한이 세라소드를 휘둘러 핵을 박살 낸 것이다.
'하나 정도는 어쩔 수 없지. '
"하앗! "
은신술은 공격이 동반되지 않을 때에나 지속될 수 있다. 때문에 라한이 세라소드를
휘두르는 순간 은신술이 풀리며 모습이 드러났다. 카이렌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쇄도해서 검을 휘둘렀다.
"훗 "
비웃음을 흘린 라한이 카이렌의 검을 한 걸음 이동해서 피했다. 너무 쉽게 피해서
공격하던 카이렌이 멍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너무 느려. "
말을 마친 라한의 모습이 또다시 흐릿해졌다. 카이렌이 은신술을 쓰면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데 적어도 1 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라한도 예전에는 30 초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한데 이번에는 거의 찰나의 순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마계에 있던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졌다는 증거였다.
"망할. "
"스티리안을. 네 이놈. 파이어 볼! 불의 권능 마나의 힘. 파이어 토네이도! 파이어
볼, 매직 에로우! "
골렘을 잃은 토일렛이 주변에 마법을 난사했다. 적아의 구분이 없는 마구잡이식
공격에 카이렌마저 이러저리 피해 다녀야 할 정도였다.
토일렛이 마법을 난사할 때, 라한은 그의 등 바로 뒤에서 조용히 웃고 있었다.
"어리석은!
서걱!
한참 동안 조용히 있던 라한이 한마디 내뱉고 검을 휘둘렀다. 이에 전방에만 마법을
쏘아대던 토일렛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살기 위해, 권력을 위해 배신까지 했던
토일렛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이, 이."
토일렛이 죽자 카이렌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는 라한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완벽에 가까운 은신술과 빠른 몸놀림 그리고
드래곤을 능가하는 마법 실력 자신의 알량한 함정으로 그를 처리하겠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행동인지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
"카이렌. "
"라.한. "
이번에는 라한도은신술을 쓰지 않았다. 그래도 한때 친구였던 이가 카이렌이었다.
그의 최후만큼은 본신의 능력을 모두 끌어내서 싸우고 싶었다. 그게 한때나마
친구였던 카이렌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 생각했다.
"프라하의 죽음, 네 짓이라는 건 오래전에 알았다. "
"오, 오해야. 내가 아니야. "
"한 달 전이던가? 크리퍼트가 사라지던 날. 난 너희들이 밀실에서 했던 말을 모두
들었다. 프라하의 죽음, 토일렛과 크리퍼트의 배신. 잉글리아트의 부상 그리고 두
명의 납치. 이래도 발뺌할 생각이야?"
"그 그건
카이렌은 크리퍼트의 실종이 라한과 관계있으리라는 건 생각지 못했다. 그냥 그가
살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크리퍼트의 실종에
라한이 관계가 있다니.
"왜 그랬지? 프라하마저 죽였어야 했나?"
"크크크, 하하하하하. 그래 내가 죽였다. 그를 보낸 것도 나였고 그가 움직이는
경로를 알려준 것도 나였다. 그래서 어쩔 거냐? 날 죽일 셈이냐? 그래, 죽여라
어차피 지금은 네가 강자. 약자인 난 네가 하는 일을 막을 수 없겠지. "
"강자라서 약자를 죽인다?후후후, 애초에 넌 드래곤을 싫어했다. 창조되면서 가지는
강한 힘으로 약한 종족을 괴롭힌다며 드래곤들을 증오했지. 근데 네가 그들과 다른
게 뭐가 있지? 힘을 가졌다고 대륙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나? 그래서
다른 이들을 네 발아래 꿇리고?"
"그래. 그게 내 꿈이었다. 어차피 너도 날 죽이고 나면 대륙을 정복할 생각이잖아?
왜,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흥. 너 역시 똑같아, 힘을 가지면 그 힘으로 뭔가를
이루려 하지. "
힘을 가지면 쓰고 싶어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처음
미약한 힘으로 무언가를 시작할 때에는 여기저기도움을 요청하다가도, 스스로의
힘이 강해지면 그때 도움을 줬던 이들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려는 것. 그렇게 해서
힘이 더 강해지면 더 큰 꿈을 꾸는 것. 그게 인간의 본성이리라.
하지만 힘을 얻었을 때 그 힘을 쓰면 적이 생기게 된다. 배신감 때문에 혹은 강해진
힘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그렇게 적이 점점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렇게
늘어난 적이 언젠가는 오만해진 자신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넌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군. "
"반성? 난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대륙 정복, 너도 꿈꾸는 거잖아
안 그래?"
"참으로 어리석구나. 그렇게 대륙을 정복하면 어쩔 건데? 권력을 쥐고 떵떵거리면서
살면 행복할 것 같았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면서 자신만 배부르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잖아. 너도 아닌 걸 알잖아. 좋은 친구들, 좋은 동료들과 땀 흘리며
여행하는 게 더 행복할 것 같지 않아? 힘들 때 서로 위로하는 게 더 즐거울 것 같지
않냐고!"
"흥, 그따위 설교는 듣고 싶지 않아. 어차피 죽일 생각이면죽여라. "
카이렌이 자리에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그 행동에 라한도 착잡한 심정으로
날아올랐다 이미 카이렌의 마음은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말로 설득할 단계는
지난 것이다.
'미안하다. 권력에 눈뜨도록 만든 내 잘못이 크구나. '
"이레이저! "
라한이 고개를 돌리고 신화력을 일으켰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
이레이저가 카이렌의 온몸을 강타했다.
스팡!
라한이 만들어낸 이레이저에 카이렌의 몸이 사라졌다. 부서지거나 녹는 게 아닌
완벽한 소멸이었다.
"로테마이어스. 넌 어때?"
"뭐가?"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만 하던 로테마이어스가 뚱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약간의 놀람이 담겨 있었다. 라한의 최종공격 이레이저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로테마이어스도 이레이저에 맞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크기도 작고
이레이저가 날아가는 속도도 느렸다. 때문에 마음먹고 피하면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데 이번은 거의 빛과 같은 속도로 카이렌을 강타했다. 이레이저의
크기도 카이렌의 몸을 완전히 뒤덮을 정도였다.
"너도 대륙 정복이라는 야망을 가진 적이 있어?"
"있지. 해츨링 시절에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 "
"지금은?"
"그래서 좋아지는 게 없잖아. 귀찮기만 하지. 그냥 조용한곳에 서 배불리 먹고
지내면 그게 최고잖아 "
로테마이어스의 말에 라한이 담백하게 웃었다.
대륙 정복.
남자라면 한 번쯤 꿈꿔 볼 만한 원대한 포부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서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만 명의 존경보다 진정한 친구 하나가 더 소중하지 않은가?
"로테마이어스. "
"말해라. "
"우리 "
우리?
친구 하자.
쿨럭!
로테마이어스가 사레들린 듯 기침을 해댔다. 라한이 이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
왜, 싫어?
야! 너 친구 사귄 적 없지?
왜?
친구는 그냥 친구가 되는 거지. 친구 하자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 쳇, 간다.
텔레포트!
당황한 표정의 로테마이어스가 루스티아의 숙소로 공간이동 했다. 그가 사라지자
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녀석, 좋아하는 눈치네. 훗, 하늘 참 맑다. 합!
라한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괜히 날고 싶었다. 그러면 답답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았다.
까마득히 높은 곳까지 날아오른 라한이 두 손을 입가에 모으고 외쳤다.
난 1 서클 대마법사이며 그랜드 인챈터다. 세라소드의 주인이며 테세르와 슈라의
친구다. 난! 라한이다!
새로운 여행의 시작
루스티아로 돌아온 라한이 일행을 데리고 블리아드 마을로 돌아갔다. 라한이 머무는
곳이 아닌 에테로의 술집 앞이었다.
짤랑!
어서옵. 오, 라한!
왔구만. 그래, 일은 잘 끝났는가?
닉스의 말에 책을 읽고 있던 에테로가 반갑게 맞았다. 그도 대륙 소식을 계속 듣고
있었는지 그리 놀라는 얼굴은 아니었다.
예. 그럭저럭.
얘기는 들었네. 근데 카이렌과의 싸움 소식은 없던데. 아직인가?
카이렌도 죽었습니다.
소식을 못 들었는데.
로테라 숲에서 싸워서 그럴 거예요.
라한이 에테로와 담소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라한과 함께 왔던 일행들도
술집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스승님. 저. 저거 에일린 아니에요?"
구석에 앉아있던 시스마란이 옆에 앉은 베르네를 불렀다. 그 말에 베르네도 고개를
들어 카운터 쪽을 바라봤다.
"엥? 에일린 맞잖아. 야! 너 뭐 하냐?"
에일린은 에테로와 함께 지내면서 집안일을 거의 도맡아서 했다. 노는 사람에게는
음식을 줄 수 없다는 에테로의 말에 에일린도 어쩔 수 없었다. 오늘도 카운터에
앉아서 오늘 수입을 계산하다가 라한 일행을 맞은 것이다.
"어? 스승님. 우앙! 스승님. 오빠!"
돈을 세던 에일린이 베르네와 시스마란에게 달려왔다. 그간 고생이 복받쳤는지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진짜 시스마란 동생 인가 보네. "
"그러게요. "
제라드가 뒤에 앉은 라한을 쿡 찔러 말했다. 그러자 라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맞다고 했잖아요. 사람 말도 안 믿고. "
"저 녀석이 마법사가 될 줄 알았나, 뭐. "
"우씨. "
"에일린. 형님에게 그 무슨 말버릇이냐? 형님을 대할 때는 항상 공손해야 한다고
말했을 텐데. "
옆에서 듣고 있던 시스마란이 에일린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에게는 하늘이나
다름없는 라한. 그에게 대드는 에일린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하지만 오빠. 내가 저 사람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네가 생각이 짧은 거다. 나도 예전에 형님 때문에 엄청난 몬스터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도 전부 날 수련시키기 위한 행동이었어.
너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거다. "
"뭐가요?"
"형님이 했던 행동이 다 널 위해서라는 걸 알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
라한은 에펠 일행을 고생시키기 위해 몬스터를 불러 모은 적이 있었다. 그때
시스마란도 덩달아 공격을 받았다. 물론 그때는 시스마란을 수련시키려는 의도가
어느 정도 담긴 행동이었다. 한데 에일린에게 했던 행동에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냥 거짓말하는 것 같아서 괴롭혔고, 당돌해 보여서 고생시켰을 뿐이다.
"아, 그. 렇지. "
"거봐. 형님께서 그렇다고 하시잖아. 지금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게 다 널
위해서였다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
"칫. "
"어허. "
"알았어요. "
시스마란이 눈을 부릅뜨자 에일린도 어쩔 수 없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스승인
베르네에게는 막 대해도 오빠인 시스마란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에일린이었다.
"허허허, 그러고 보니 자네가 말했던 인물을 모두 만난모양이군, "
"예. 찾아왔더군요. "
"자네하고 친한 사람이라면 대단한 사람들이겠지. 인사 좀 시켜주겠나?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만난 것만으로도 가문의 자랑거리 아니겠는가?"
에테로의 말에 라한이 웃으며 한 사람씩 소개했다.
"이쪽은 아시죠?"
"알다마다. "
"또 뵙네요. 제라드입니다. "
제라드가 석 달 만에 만나는 에테로에게 인사했다. 용병으로서는 그의 지위가 거의
절대적이다. 때문에 제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정보 길드의 길드장에게는 말을 높이지
않는 게 관례였다. 한데 라한이 도움을 많이 받았고 존경하는 사람인지라 제라드도
높임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의동생인 시스마란입니다. 전에 절 따르던 동생이 있다고
말씀드렸죠? 이 녀석이 그 녀석이에요. "
"반갑습니다. 시스마란이라고 합니다. 형님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고 들었습니다.
늦었지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허허, 형하고는 다르게 아주 공손한 사람이구만. "
"에테로님. 그 형이 절 의미하는 건 아니겠죠?"
"왜 아니겠는가?"
"뭐라구요?"
"허허허허. "
에테로가 농담을 던지자 라한이 짐짓 화난 척하며 말했다 에테로의 농담에
동참해주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쪽은 제가 태어날 때 도움을 줬던 사람이구요. "
"라한. 말해도 되는 게냐?"
"괜찮아요. 아마 대충 눈치 채고 있을걸요. "
"반갑습니다 위대하신 드래곤 베르네미스님. "
라한의 눈치 챘을 거라는 말에 에테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미
베르네가 골드 드래곤 베르네미스임을 알고 있었음이다.
"오호, 날 알고있었으면서도 놀라지 않다니. 담력이 크구만."
"고맙습니다. 위대하신존재시여. 아, 그리고 저쪽은 드래곤 로이신 로테마이어스님
아니십니까?"
에테로가 로테마이어스마저 안다는 듯 말하자 베르네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단순히 안다는 것보다 그 앞에서 당당할 수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흥, 하찮은 인."
"야! "
"쳇. "
로테마이어스가 하찮은 인간이라고 말하려하자 라한이 눈을 부라렸다. 이에
로테마이어스가 혀를 차고 고개를 획 돌렸다.
원래 라한을 좋아했던 이들에게는 에테로 역시 은인이라고 할 수 있다. 라한에게
정보를 제공해서 많은 도움을 줬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때 라한과 적이었던
로테마이어스에게 에테로는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요 녀석은 알죠?"
"테세르. 반갑네. 이거 석 달 만에 만나는 건데 더 멋있어졌군."
-푸헤헤헤. 역시 영감님이 뭘 안다니까,
테세르가 허리를 확 펴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자신을 치켜세워주는 에테로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슈라는 일이 있어서 안 불렀어요. "
"그렇군. "
"소개는 이걸로 끝이네요. "
"이봐요. 왜 난 소개 안 해요?"
가만히 듣고 있던 에일린이 발끈하며 끼어들었다. 이미 인사를 했던 제라드도
에테로와 다시 인사했다. 심지어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테세르와도 다시 인사를
하는 상황이었다. 한데 자신은 그 인사 대열에서 쏙 빠져있었다.
"시스마란. "
"예, 형님. 에일린. 어른들 얘기하는데 버릇없이 이게 무슨 짓이냐:"
"하지만 오빠. 나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다구요. 왜 나만. "
"에일린!"
"히잉. 알았어요. "
에일린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풀 죽은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후후, 에일린양. 우린 바로 좀 전까지 같이 지냈으니 인사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게지. "
"그래두요. "
"훗, 아참. 라한. 일이 다 끝났으니 이제 어쩔 생각인가? 설마 대륙 정복을."
갑자기 떠오른 듯 에테로가 라한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에 라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에테로님. 아직도 절 모르세요. 전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에요. "
"그럼 이제 어쩔 생각인가?"
"여길 떠날까 해요. "
"떠나다니? 어디로?"
"그건 비밀입니다. 오늘 이곳에 온 건 그래도 오랫동안 함께 지낸 에테로님한테
인사를 해야 할 것 갈아서 온 거예요. "
라한의 말이 끝나자 에테로가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는 라한 때문에
하루하룬가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 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젊음이라는 걸 느낄 순 있었다. 이제 다시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얼을 거라 생각하니
아쉬울 기분이 들었다.
"아쉽구만. 아! 전에 데리고 온 두 명은 어쩔 생각인가 7"
"오래 걸리는 일을 시켰으니 별수 없을 거예요. "
"정말 그럴까?"
에테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울, 헬레나, 물덩어리 변이 닉스의 술집으로
들어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군. "
"그래, 검술 교육은 잘 돼가?"
"이미 끝냈습니다. "
"뭐?"
검술은 하루 이틀에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라한이 하울에게 검술을 가르치라고
한 것도 오래 걸릴 걸 감안해서 한 말이었다. 검술을 가르치는 동안은 따라가겠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고, 그럼 조용히 사라질 수 있는 까닭이다.
"에테로님의 도움을 받아서 쉽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 "
"에테로님. 무슨 소리예요?"
"책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내가 사람을 불러서 저들이 알고 있는 검술을 책에
남기라고 했지. 블리아드 마을은 그 책을 읽고 스스로 검술을 익힐 게야. "
"허어. "
라한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의도를 에테로라면 알고 있었을 터였다.
한데도 하울과 헬레나를 도와 검술 교육을 쉽게 할 수 있는 걸 돕다니. 괜한
배신감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섭섭한 모양이군. 하지만 저들 입장도 생각해보게 저들의 머릿속에는
자네밖에 없어. 그들을 버리면 저들이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그건 그렇지만. "
"그냥 저들을 받아들이게. "
에테로의 조언에 라한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자신을
주군으로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주인 잃은 강아지가 행복할 수 없듯, 주군을 볼 수
없는 하울과 헬레나도 행복하게 지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죠. "
라한의 대답에 하울과 헬레나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 라한의 승낙에 흡족한 듯했다.
우웅, 우웅.
"그래그래 너도 있었지. 가까이 오지만마라."
라한이 자신에게 슬금슬금 다가오는 물덩어리 변을 발견했다. 또 안아서 젖을까 봐
미리 경고부터 하는 라한이었다.
우웅.
"에테로님. 오늘은 쉬고 내일 떠날게요. 내일은 인사를 못하고 떠날 것 같으니까 안
보이면 갔구나하고 생각하면 돼요. "
"알겠네. 어딜 가더라도 부디 몸조심하게. "
"예, 에테로님. "
인사를 마친 라한이 고개를 숙인 채 집으로 돌아갔다. 얼굴에 가득한 수심이 그의
고민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날 자정. 라한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제라드를 찾아왔다.
"라. 흐읍!"
"쉿! 형. 가요. "
라한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제라드에게 말했다. 영문을 모르면서도 제라드 역시
용병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인지라, 눈치 하나는 빨라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아꼈다.
"공간으로. "
라한이 작은 목소리로 공간 이동 했다. 이에 라한과 제라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라한과 제라드가 페사 평원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은밀하게 도망 나온 게 기분
좋은 듯 라한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라한. 이 밤에 뭐 하는 거야?"
"뭐긴요. 우리끼리 가자는 거지. "
"그래서 야반도주하듯 도망 나온 거야?"
"뭐, 어쩔 수 없잖아요. 그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는 건 너무 귀찮다구요. "
라한의 말에 제라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못 말린다는 듯 한숨까지 쉬고
있었다.
스팟!
"어?"
라한이 막 출발하려 할 때, 그의 옆에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이 사라지자
로테마이어스가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에테로 그 영감 말이 맞군. "
"그러게요. "
슈라와 테세르를 제외하면 라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에테로였다. 그만큼
오랫동안 함에 지냈고 서로 의견을 나누었기에 당연한 일이다.
에테로는 라한이 밤에 몰래 떠날 걸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낮에 인사를 못
하고 떠난다는 언질을 줬을 리 만무했다. 로테마이어스도 라한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해서 라한을 가장 잘 아는 에테로를 찾아가서 라한의
의도에 대해 물어봤다 에테로도 라한에게 조력자를 많이 두고 싶은 마음에 생각한
바를 그대로 전해준 것이다.
"야, 로테마이어스. 네가 어떻게?"
"에테로 그 영감한테 물어봤더니 오늘 밤에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군. "
"그럼 내가 여기로 올지는 어떻게 알았지?"
"시스마란 이놈이 널 처음 만난 곳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라며? 그래서 북쪽으로
가겠구나 생각했지. "
사실 로테마이어스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륙 최강자가 된 라한이 야반도주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라한의 방문을 열어보고 비어
있음을 발견했다. 만약 설마 하는 생각에 손놓고 있었다면 라한을 영영 놓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망할. 되는 일이 없네. 오려면 혼자 오지. 저 녀석들은 왜 데리고 온 건데?"
라한이 욕설을 내뱉었다. 연기까지 하며 야반도주했던 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그의 일행이 된 것이다.
"눈이 많아야 감시하기 편하지. "
"그럼, 그럼. "
"정 저희가 싫으시면 이 자리에서 자결하겠습니다. "
우웅, 우웅!
"아씨. 짜증 나. 그래, 가자. 가. 까짓것 도망 안 가면 되잖아. 그리고 너희 둘.
앞으로 자결하겠다는 소리 한 번만 더 해봐. 그 입을 찢어 버릴 테니까. "
"알겠습니다. 주군. "
하울의 주군이라는 말에 라한이 또 한 번 비틀거렸다. 아무래도 외딴 섬에서 살았던
하울과 헬레나에게 적응하는 데에는 왜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테세르. "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왠지 들킬 것 같더라니까.
테세르는 나타나자마자 라한을 조롱하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그 역시 라한과
오랫동안 함께 지냈다. 때문에 라한의 표정에서 그가 앞으로 할 일을 예측한
것이다.
"내가 도망칠 걸 알고 있었어?"
-에잉, 주인은 똑똑한 척하지만 알고 보면 거짓말이 얼굴에 다
쓰여 있다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인을 오랫동안 봐온 내 눈은 못 속이지.
"쳇. 가자, "
라한이 먼저 앞장서서 걸었다. 성큼성큼 걷는 모습이 짜증났음을 짐작게 했다.
-아참, 주인. 투바는 안 볼 거야?
"투바? 그놈은 너무 자극적이야. "
-그럼 로이나는?
"너무 밋밋해. "
라한이 대충 대답하고 빠르게 달려갔다. 북으로, 북으로. 자신이 아는 이들이 없는
곳으로,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으로. 신대륙으로.
The end
작가 후기
지금까지 제 글을 읽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 서클 대마법사가
10 권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참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글로 전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제대로 전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시즈 SIZ 와 1 서클 대마법사. 벌써 두 번째 완결이군요.
처음 시즈 SIZ 를 출판할 때만 해도 제가 '작가' 라는 꼬리표를 달아도 되는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작가' 라고 불리는 분들에게 괜히 욕만 먹는 게 아닐까하는 걱정도
했습니다. 그러다 2004 년 10 월에 시즈 SIZ 를 완결하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글에서
움직이던 캐릭터가 어느새 제 분신이 되어있더군요. 더 이상 그 분신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이 절 울게 만들었나 봅니다.
1 서클 대마법사 완결.
글은 끝났지만 이 속에 있던 라한은 아직도 제 머릿속에 살아있습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라한이라는 놈이 이야기를 만들어 달라고 농성을 부립니다. 그래서 끝이
애매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이야기를 만들 여지를 남겨두고 싶었던 거겠죠.
하지만 완결을 지은 이상 라한은 머릿속에서 지울 생각입니다. 새로운 주인공이 제
머릿속에서 태어날 준비를 갖추고 있거든요. 시즈가 그러했듯 이제 라한도 새로운
주인공에게 자리를 내줘야 할 때가 된 거죠.
다음 이야기는 몬스터를 엄청 사랑했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아주 어릴 때 '비스트
하우스' 에 들어와서 의지할 곳이 몬스터뿐이었던 주인공 엔델. 그래서 그는
몬스터들을 진짜 친구라 믿습니다. 하지만 몬스터들의 배신으로 결국 엔델도
그들에게서 정을 뗍니라. 대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믹스 몬스터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같은 몬스터이면서도 잡종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하는 믹스몬스터들.
결국 몬스터에게 배척받았다는 동질감으로 그들은 뭉치게 됩니다.
대책 없는 믹스 몬스터와 그들을 길들이는 트 FP 이너 엔델. 그들이 세상을
활보하면서 벌어지는 유쾌한 이야기와 흥미진진한 사건이 여러분들 즐겁게 만들
겁니다.
양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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