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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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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낭만주의 vs 사실주의
반면 파르마의 수도원은 주인공 파브리스의 시선으로만 전투를 바라보기에 시야가 좁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는 장군을 보고 감탄한다거나 대열을 이탈하는 등 어리숙한 모습을
보인다. 화산과 구름, 물뱀 등 엄숙하고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묘사가 주를 이루었던 레
미제라블과는 달리 피를 흘리며 내장이 튀어나온 말, 푹 패인 땅과 적군의 시체 등 현실적이고 결코
고상하다고 할 수 없는 사실적인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파브리스 또한 완벽한 군인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순수한,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현실에 존재할 법한 인물이다.
요약하자면, 위고는 워털루 전쟁을 하나의 서사시적 영웅담으로 승격시키고자하며, 전지적 작가로서
개입하고 작가주의적 개입이 엿보인다. 한편 스탕달은 작가의 주관적 개입을 줄이고, 어리숙한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객관적 전쟁의 민낯을 그려내고자 한다.
2. 사실주의 사조
사회의 한 단면을 그려내는 것에서 나아가 발자크는 그 유명한 『인간극 la comédie humaine』을 통해
19 세기 프랑스 사회의 총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인간 세계를 축소시켜 놓은 하나의 무대이자, 당시
사회상, 여러 계층의 인물들, 생활 양식을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했기에 시대상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발자크는 지리하고 단순한 관찰의 시선이 아닌 전형적
상황 하의 전형적 인물을 충실히 그려냄으로써 총체성을 만들어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스스로는
보수반동적인 왕당파였으나 지극히 혁명진보적인 작품을 그려낸 발자크의 작품들이 오늘날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보편적 공감을 얻고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술을 통한 현실적 모순의 극복과 역사적
현실의 예리한 통찰, 정확히 말하자면 귀족의 몰락과 자본을 기반으로 한 부르주아의 승리 예견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주의 작품들의 서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을 정리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해보자. 먼저,
사실주의 작품들은 대부분 한 인물의 일대기에 사회역사적 드라마를 투영하고 있다. 이 때,
주인공들은 과거와 달리 서민 계층에 속하며, 그렇기에 출세에 대한 야망을 품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성장을 이루고 사회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즉 위반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들의 분투는 결국
실패로 끝나기에 사회의 힘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통감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그려지는 19 세기
프랑스 사회의 풍속으로는 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에서 등장한 황금만능주의, 억압적 결혼 제도에서
파생된 간통 사건과 성적, 육체적 욕망의 적극적 발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 미셸 투르니에의 다시쓰기
사실, 페로의 동화들 또한 온전한 창작물이 아니라 구술로 전통되는 이야기들을 다시 써낸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서술 층위가 아닌 서사 층위에서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반복적인 도식을 지닌, 다시
쓰여진 이야기들이다. 길을 헤매지 않기 위해 가는 길에 흔적을 남기는 이 모티프는 읽자마자
우리에게 동일한 카테고리의 다른 작품들을 떠오르게 한다. 같은 동화로서는 « 헨젤과 그레텔 » 이
그러하며, 다이달로스 미궁에 들어간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신화도 함께 분류해볼 수 있다.
게다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에 식인귀인 마녀와 미노타우르스가 있어 그들을 처치해야 한다는 점
또한 동일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투르니에가 사랑했던 콩트 장르의 특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해하기 쉬우나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고, 입에서 입으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전승되며 끝없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앞서 투르니에가 인물들의 위상에 변화를 줌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려고 했음을 언급한 바
있는데, 로그르의 집을 둘러볼 때 사용된 ‘진정한 왕좌 un véritable trône’ 라는 단어는 이를 매우 잘
표현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폭력을 거부하는 히피, 남성과 여성의 매력만을 모두 갖춘 양성구유,
박해받는 예수, 깜짝 선물을 주러 나타난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를 모두 지닌 로그르는 더 이상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닌 우리의 삶에 필요한 마법적 구원이 된다. 또한 피에르는 과거의 동화를
벗어나 20-21 세기의 파리를 살아가는 한 명의 성인이 되어, 동시대의 사람들이 잊고 있는 가치를
보전하고 큰 나무로 우뚝 서는 인물이 될 것이라고 감히 예상해볼 수 있다. 또한 그런 모습이야 말로
코로나 사태 이후 환경에 무엇보다 관심을 쏟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관이다.
페로의 지하실과 노통브의 암실은 모두 빛이 차단된 어두운 공간, 금지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쉽게
죽음의 이미지와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페로의 공간이 단순히 살해와 시체유기를 위한 밀실의
장소라는 사실에 비하여, 노통브의 공간은 죽음이 사진이라는 현대예술의 결과물로 탄생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첫 연인 에믈린이 사고로 암실에 갇혀 동사한 이후 돈 엘레미리오는
죽음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고, 이후 연인들을 모두 동사시켜 암실에 아름다운 옷을 입혀
전시한다.
1. 플라톤 vs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은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통해 모든 사물에는 완벽한 이상인 이데아가 존재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그 이데아의 모방이라고 역설했다. 플라톤은 조물주의 모방작인 자연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다시 모방하는 예술가의 행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국가』
에서는 침대를 그 예시로 들고 있는데, 이데아의 침대를 모방하여 현실의 침대를 제작하는 장인,
그리고 그 장인의 모방작을 또 다시 모방하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이야기이다. 결국 화가는
이데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모방의 모방에 전념하는 저급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정서적 차원에서, 미메시스의 핵심적인 기능은 카타르시스 작용이다. 미메시스가 생산하는 감정은
플라톤에게는 불필요한 것이지만 아리토텔레스에게는 감성적 불행을 막을 수 있는 안전장치로
여겨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속적으로 억압할 경우 폭발할 수도 있는 감정을 일정하게
배출함으로써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불행을 예방하는 미메시스의 기능을 카타르시스라고 불렀다.
2. 아폴리네르
불소설
나아가 동일한 아비투스를 공유한 다수의 개인은 단순한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 행동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계급’이다. 마르크스가 계급을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와 그에 따른 객관적 위치로
규정했다면, 부르디외는 실체로서의 생산 관계뿐만 아니라 그 실체적 관계를 작동시키는 행동의
논리, 즉 유사한 아비투스를 공유하고 있는 집단을 기준으로 계급을 재정의한다. 따라서 아비투스는
경제 자본을 유지하거나 재생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상류층의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또한, 교육을 통한 아비투스와 문화 자본, 나아가 사회자본의 세습이 경제 자본의
층위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의 자본론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각 자본의 형태가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전환되면서 맹렬하게 총자본의 양을 증식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전환은 매우 특정한 조건
위에서 매우 은폐된 메커니즘을 통해 수행된다. 이때 전환의 우선권을 쥐고 있는 것이 바로 부르주아
계층이기에, 불평등한 사회구조는 부르주아에 유리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된다. 각각 내부와
외부에 축적되는 문화 자본과 경제 자본의 상호 전환은 자본 총량의 유지 혹은 확대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자본의 축적은 더 이상 노동력의 착취라는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정교한 은폐 속에서 이루어진다.
노동자들의 자녀들이 또다시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경제 자본의 획득을 위해
필수적인 문화자본의 축적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립학교 진학 자체를 서술자가 서민
계급에서 벗어나게 된 것의 첫걸음으로 파악할 수 있다.
서술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 심지어는 노동자 계급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폄하하고
부인해왔음을 La Place 를 통해 고발한다. 허례로 가득차 진실이 부족한 부르주아 계급의 삶과 대비해
노동자 계급이 간직하고 있는 진실성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재조명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감정적으로 치우친 헌사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텍스트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에르노가 택한
평평한 글쓰기의 방식 덕분이다. 꾸며낸 글쓰기조차 진실이 결여된 잉여로 파악하기에 노동자 계급이
사용하는 간결한, 그러나 깊은 뜻을 담고 있는 언어를 차용함으로써 과거 자신의 모습에 대해
속죄하고 아버지와 화해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