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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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세기 소설

1. 낭만주의 vs 사실주의

프랑스의 19 세기는 무엇보다 사실주의의 시대로 여겨지지만, 19 세기 초반의 흐름은 낭만주의를


중심으로 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고전주의의 이성적 법칙을 뛰어넘어 개인의 개성과
감정, 작가의 주관을 중시했던 낭만주의는 빅토르 위고, 뒤마 혹은 비니와 뮈세, 라마르틴 등
시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낭만주의가 지나친 환상과 감성에 호소한다는 것에 반하여 등장한
사실주의는 객관적 시선으로 사회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한다.

이 두 사조를 비교함에 있어 그 특징을 일일히 열거하는 것은 너무 장황해지거나, 단순한 나열에


지나지 않을 우려가 있기에 실제적 예시를 통해 비교해보고자 한다. 즉,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과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스탕달의 파르마의 수도원이 각각 ‘워털루 전쟁’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먼저 레 미제라블에서는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전쟁 현장의 모습을 한 눈에 담아내는 듯하다. 넓은


범위의 지형을 묘사하고, 한 인물이 아니라 군단의 완벽한 모습을 이야기한다. 직접적으로 épopées
orphiques 라는 단어를 등장시키며 전투를 하나의 신화로 보이게 한다. Olympe, dieux et bêtes,
hydre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서도 동일한 의도가 엿보인다. 군인들의 모습 또한 매우
구체적으로, 완벽한 영웅적 존재로 그려진다.

반면 파르마의 수도원은 주인공 파브리스의 시선으로만 전투를 바라보기에 시야가 좁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는 장군을 보고 감탄한다거나 대열을 이탈하는 등 어리숙한 모습을
보인다. 화산과 구름, 물뱀 등 엄숙하고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묘사가 주를 이루었던 레
미제라블과는 달리 피를 흘리며 내장이 튀어나온 말, 푹 패인 땅과 적군의 시체 등 현실적이고 결코
고상하다고 할 수 없는 사실적인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파브리스 또한 완벽한 군인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순수한,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현실에 존재할 법한 인물이다.

요약하자면, 위고는 워털루 전쟁을 하나의 서사시적 영웅담으로 승격시키고자하며, 전지적 작가로서
개입하고 작가주의적 개입이 엿보인다. 한편 스탕달은 작가의 주관적 개입을 줄이고, 어리숙한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객관적 전쟁의 민낯을 그려내고자 한다.
2. 사실주의 사조

문학적 사조는 단일한 흐름, 세대, 세기 별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나 19 세기를 대표하는


사조가 사실주의, 장르는 소설이라는 것에는 이견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주의(réalisme)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의가 없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여러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할 만한 특징은 바로 사실주의가 현실의 모습을 적확하게 그려내고자 한다는 점이다.

한 편,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애초에 문학이 아닌 미술계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성스럽고 아름다운 것,


교훈을 전하는 장면만을 그리던 미술계에서 귀스타브 쿠르베의 등장은 큰 반향, 나아가 논란을
불러왔다. 지나치게 세속적인 장면을 포착하고 실물 크기로 그려내 감상자를 압도하는 그의 그림은
전통 아카데미 회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으며, 1855 년 만국 박람회에서 전시가 거부되었다.
그러자 쿠르베는 직접 가건물을 지어 자신의 작품 40 여 점을 전시하고 『사실주의에 대하여 Du
Réalism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즈음 Café Andler 는 이곳에 모여든 문인, 비평가, 화가들의
사실주의 요새가 되었으며, 샹플뢰리가 쿠르베 전시회의 도록 서문을 쓰며 <사실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뒤랑티가 다시 <사실주의>라는 이름의 잡지를 창간하며 미술계의 사실주의 운동은 극에
달했다.

1857 년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Madame Bovary』가 출간되며 문학계에서도 사실주의가


본격적으로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플로베르 그 자신은 유파를 혐오하여 사실주의라는 사조 안에
묶이기를 거부했고, 자신의 낭만주의 기질을 ‘보바리즘’으로 표현해낸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실주의의 대표적 작가로 꼽히는 이유는 바로 그가 글을 쓰는 목적이 진실을 만드는데 있었기
떄문이다. 과학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그의 정확성은 철저한 자료조사를 기반으로 한다. 마담
보바리를 집필할 때에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작품 집필 시에 방대한 자료 조사와 현지
방문이 반드시 수반되었다.

플로베르에 더해 스탕달과 발자크는 사실주의를 완성시킨 작가들이다. 먼저 스탕달은 『적과 흑』의


제사에 당통의 말을 인용해 “진실, 신랄한 진실”이라고 적으며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사실주의
문학의 핵심임을 선포하였다. 또한 동일한 책 안에서 그 유명한 ‘거울론’을 이야기하였는데, 요컨대
사실주의 문학은 거울처럼 이 사회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주의에 가해진
여러 비판 내지 검열과도 연결될 수 있다. 실제로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는 지나치게 외설적이고
통속적이라는 이유로 기소를 당한 바 있는데, 스탕달의 거울론은 ‘비판해야 할 것은 사회이지,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을 든 자가 아니다’는 논리로 플로베르를 위한 방패가 될 수 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진실이라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vrai)이 아닌 사실임직함
(vraisemblance) 혹은 마땅히 희구해야 할 진실(vérité)이라는 점이다. 이유인 즉슨, 이유는 그것이
사실보다 더 큰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주의 적 미메시스의 대상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사실적 개연성이다.

사회의 한 단면을 그려내는 것에서 나아가 발자크는 그 유명한 『인간극 la comédie humaine』을 통해
19 세기 프랑스 사회의 총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인간 세계를 축소시켜 놓은 하나의 무대이자, 당시
사회상, 여러 계층의 인물들, 생활 양식을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했기에 시대상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발자크는 지리하고 단순한 관찰의 시선이 아닌 전형적
상황 하의 전형적 인물을 충실히 그려냄으로써 총체성을 만들어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스스로는
보수반동적인 왕당파였으나 지극히 혁명진보적인 작품을 그려낸 발자크의 작품들이 오늘날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보편적 공감을 얻고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술을 통한 현실적 모순의 극복과 역사적
현실의 예리한 통찰, 정확히 말하자면 귀족의 몰락과 자본을 기반으로 한 부르주아의 승리 예견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주의 작품들의 서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을 정리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해보자. 먼저,
사실주의 작품들은 대부분 한 인물의 일대기에 사회역사적 드라마를 투영하고 있다. 이 때,
주인공들은 과거와 달리 서민 계층에 속하며, 그렇기에 출세에 대한 야망을 품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성장을 이루고 사회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즉 위반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들의 분투는 결국
실패로 끝나기에 사회의 힘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통감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그려지는 19 세기
프랑스 사회의 풍속으로는 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에서 등장한 황금만능주의, 억압적 결혼 제도에서
파생된 간통 사건과 성적, 육체적 욕망의 적극적 발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보편적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문학의 역할임을 감안할 때,


사실주의는 19 세기 프랑스에서 태동하여 전성기를 누렸지만 여전히 울림을 주고 있으며 그 숨결이
멈추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자연주의 사조

앞서 살펴본 사실주의에 이어 에밀 졸라를 필두로 한 자연주의 사조가 등장한다. 자연주의를


사실주의 안에 포함시킬 것인가, 별개의 사조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는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사실주의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졸라는 파리 근교에 위치한 자신의 별장에서
위스망스, 모파상, 알렉시 등의 작가들과 주기적으로 모임을 열며 이른바 메당파를 형성하기도 했다.
앞서 확실한 유파가 형성되지 않았던 사실주의와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사실주의를 극적으로
밀어붙여 과학적 실험의 방식을 문학에 차용하고자 한 졸라는 ‘인간 시체에서 아무것도 가리지 말 것
ne rien voiler du cadavre humain’이라는 말로 자신의 방법론을 설명하기까지 했다. 상상과 허구를
배제하고 오로지 현실과 관찰에 근거해 글을 써야한다는 것이다. 『실험 소설 Le Roman
expérimental』에서 그가 규정하는 자연주의 소설가는 관찰에 의거해서 가설을 세운 다음 실험을
통해 그 가설을 검증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자연유전론과 환경결정론을 받아들이며 인물에 후천적
성격보다 선천적 기질에 집중한다. 이는 19 세기 과학의 비약적 발전과도 무관하지 않다.

에밀 졸라는 발자크의 인간극에 대항마가 될 만한 작품을 쓰겠다는 야망으로 『루공-마카르 총서』를


집필한다. 정신 병력이 있는 아델라이드 푸크가 두 명의 남자 루공, 마카르와의 사이에서 각각 낳은
자식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한 가문의 유전학적 폭력성을 가설로 삼아 이를
검증하기 위해 그려내고 있다. 실제로 졸라는 『목로주점 L’Assommoir』를 발표하며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암묵적 금기였던 민중, 하층민의 삶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그려낸 작품이 처음이었던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실 이 유전학적, 자연과학적 가설이라는 것은 과학성에 의문을 품게 만들며,
실제로 그의 작품 내에서 과학적 법칙에 어긋나는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당대에도 자연주의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선술한 바 있는 과학적 부정확성도 그 이유 중 하나였으며


사실적인 묘사에서 드러나는 외설과 폭력성, 저속함, 혹은 문체가 빈약하다는 등의 이유였다. 결국
1880 년 자연주의자들을 한데로 묶어주는 원동력 중 하나였던 플로베르의 죽음 이후 그들 사이에는
개인적 문제 혹은 문학적 견해의 차이로 인해 마찰이 빚어졌고, 자연주의는 약 30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프랑스 문단을 뒤흔들고 사라졌다.
20 세기 소설

1. 미셸 투르니에의 다시쓰기

투르니에는 스스로에게 ‘도둑까치’라는 별명을 붙일만큼 ‘다시쓰기’를 즐겨한 작가이다. 그의 다시


쓰기는 무엇보다도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첫 작품인 «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 » 부터가 로빈슨 크루소의 변용이었고, 모든 이야기의 기원인
성경 또한 투르니에의 단골 재료가 된다. 더욱이 콩트(conte)에 높은 가치를 부여해온 투르니에는
자신을 샤를 페로의 후계자로 자청한 바 있다. 소설(nouvelle)이 사실을 열거하는 저널리즘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 콩트는 구전 전통의 특성을 간직하며 신화와 맞닿아 있고,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다시 쓰기의 필수 요건이 충족된다.

사실, 페로의 동화들 또한 온전한 창작물이 아니라 구술로 전통되는 이야기들을 다시 써낸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서술 층위가 아닌 서사 층위에서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반복적인 도식을 지닌, 다시
쓰여진 이야기들이다. 길을 헤매지 않기 위해 가는 길에 흔적을 남기는 이 모티프는 읽자마자
우리에게 동일한 카테고리의 다른 작품들을 떠오르게 한다. 같은 동화로서는 « 헨젤과 그레텔 » 이
그러하며, 다이달로스 미궁에 들어간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신화도 함께 분류해볼 수 있다.
게다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에 식인귀인 마녀와 미노타우르스가 있어 그들을 처치해야 한다는 점
또한 동일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투르니에가 사랑했던 콩트 장르의 특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해하기 쉬우나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고, 입에서 입으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전승되며 끝없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이에 더해 « 꼬마 푸세 » 는 투르니에가 좋아하는 테마들의 종합 선물 상자와 같은 작품이다. 그


중에서도 주인공인 꼬마 푸세와 로그르 씨 두 인물에 대한 분석은 작품 속 여러 테마들을 효과적으로
함축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를 좋아하는 작가에게, 부모에게 버려졌지만 자그마한 몸집으로
재기발랄하게 이곳저곳을 누비는 꼬마 푸세는 충분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일 테다. 또한 « 마왕
Le Roi des Aunles » 에서 이미 거대한 테마로 자리매김했던 식인귀(l’ogre)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는 않다. 푸세는 버려지기 보다는 버리는 것을 택하고,
식인귀의 변주인 로그르(Logre)는 공포보다는 신비를 자아내는 존재이다. 이처럼 작가는 익숙한
인물들에게 변화를 줌으로써 그들의 위상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고자 했음으로 보인다.

어떻게 다시 썼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원전을 살펴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페로가 « 꼬마 푸세


» 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주제를 제시해보자면 ‘동물적 야만에 대한 인간 문명의 승리’라고 할 수
있으며, 야만과 문명은 각각 식인귀, 푸세에 의해 대변된다. 식인귀의 끝없는 허기와 폭력성, 흉측한
생김새는 동물적이고 충동적인 야만의 속성을 드러낸다. 숲에서 횡포를 부리고 아이들을 잡아먹는
식인귀를, 푸세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지혜롭게 처치하고 마법의 장화를 전리품으로
얻어 사업에 활용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동물성은 자연으로 대치해볼 수 있을 텐데, 순리에 따라
흘러가는 운명을 받아들이기 보다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 삶을 개척하는 푸세의 모습은 인간 문명의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이다.

그러나 이 도식은 투르니에의 흥미를 끌 망정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그의 작품 세계 전반에서 알 수


있듯, 작가가 추구하는 바는 야성적이고 거친 동물과 화려하고 빈틈없는 문명의 힘이 아니라
부드럽고 평화로운 식물과 우리를 꿈 같은 상상력으로 이끌어주는 자연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투르니에는 변증법적으로 동물성과 문명이라는 두 대립항을 하나로 합쳐 놓고 이에 대항할 가장
강력한 힘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식물성이다. 파리의 23 층짜리 최신식 타워는 단순히 첨단
문명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연결되지 않고도 스스로 숨을 쉬고 엘리베이터라는 연결망으로
이어져 있는 유기체적 동물의 모습을 띄고 있기도 하다. 그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지 않은 아들
푸세는 쪽지 한 장만을 남긴 채 토끼들을 데리고 숲으로 향한다. 여기에서 만난 로그르 씨와 그의
일곱 딸들은 원작 속 흉측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요정 같은 소녀들과 여성으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거인 로그르 씨는 숲 속에서 채식을 하고 온갖 꽃으로 아지트를 꾸며 생활하고 있다. 이
환상적인 광경에 꼬마 푸세는 완전히 매료된다.

식물성의 승리는 오직 그 환상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숲은 문명과 대립되는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 로그르 씨가 들려준 창세 이야기에서 천국과 태초의 세상은 나무를 중심으로 대지와
태양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원형은 고대의 종교뿐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여러 콘텐츠에 등장한다. RPG 게임 ‘메이플스토리’와 영화 <아바타> 등에서도 세계관의 중심이 되는
것은 나무 세계수다. 그리고 그 세계를 찾아 스스로 떠난 아이는 입문을 마치고 다시 태어난다는
점이 숲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소녀들의 야릇한 손길을 즐기고 음주와 흡연이라는 성인의 행동을
맛보는 피에르는 결국 메르퀴르 타워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더 이상 도망치던 어린아이가 아니다.
이제 그는 원한다면 언제든 커다란 밤나무가 되어 홀로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시에 산타-로그르가
준 크리스마스 선물 장화를 간직하고 자라날 이 인물은. 벌목꾼에 억센 아버지와는 다르게
언제까지나 어릴 적의 마음과 자연을 향한 소중한 향수를 간직한 어른이 될 것이다.

앞서 투르니에가 인물들의 위상에 변화를 줌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려고 했음을 언급한 바
있는데, 로그르의 집을 둘러볼 때 사용된 ‘진정한 왕좌 un véritable trône’ 라는 단어는 이를 매우 잘
표현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폭력을 거부하는 히피, 남성과 여성의 매력만을 모두 갖춘 양성구유,
박해받는 예수, 깜짝 선물을 주러 나타난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를 모두 지닌 로그르는 더 이상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닌 우리의 삶에 필요한 마법적 구원이 된다. 또한 피에르는 과거의 동화를
벗어나 20-21 세기의 파리를 살아가는 한 명의 성인이 되어, 동시대의 사람들이 잊고 있는 가치를
보전하고 큰 나무로 우뚝 서는 인물이 될 것이라고 감히 예상해볼 수 있다. 또한 그런 모습이야 말로
코로나 사태 이후 환경에 무엇보다 관심을 쏟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관이다.

이에 더해 이 작품의 결말이 누구의 승리인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로그르의 집에 붙어있던, ‘전쟁이 아닌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자 Faites l’amour, ne faites pas la
guerre’ 라는 유명한 히피들의 구호는 결국 작금의 현실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 인간의 오만함과
파괴적 폭력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투르니에는 자연과 문명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에 앞서 동식물
모두를 파괴하기에 이른 문명의 이기, 그 이기적인 모습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글을 자연과 문명 혹은 동물과 식물 정도의 단순한 도식으로만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 명의 인물, 하나의 행위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없이 파고들어가며 그 깊이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투르니에의 글은 독자들에게
능동적으로 자신의 사고 안에 뛰어들 것을 요구한다. 실제로 그가 남긴 말들을 종합해보면, ‘소설이
주제를 가질 수는 있으나 주제를 소설에 부여하는 것은 독자이기 작가가 아니’기에, ‘한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독자들이 자유롭게 끌어가야 할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복잡하고 머리 아픈
과정이기 보다 유희였고, 글쓰기는 독자에게 함께 놀자고 제안하는 초대장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고등학생이 아닌 초등학교 5 학년생 정도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한 것 또한, 철학이 ‘어려운
과목’이 아닌 즐거움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글을 마치며 제목에서 언급했듯, ‘꼬마 푸세는 왜 가출을 했는가 ?’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가장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인물에게 자율성을 되돌려주기 위함이다. 애당초 ‘
납치’였던 제목을 ‘가출’로 변경해 피에르의 숲 방문이 온전히 자신의 선택이었음을 강조하고, 거대한
사회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해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날 수 있게 한 것이다. 또 한
가지의 가능성은 이 가출이 바로 투르니에의 다시 쓰기 행위에 대한 은유라는 것이다.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는 것, 그렇게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하는 것이 바로 꼬마 푸세의 가출이자
투르니에의 글쓰기이다.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은 해보았거나, 적어도 생각해보았을 가출이라는
행위가 단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피에르를 다시 태어나게 했듯이 한 사람이라도 그의 글을 읽고
철학적 사유로 이끌어진다면, 바로 그 순간 그의 글쓰기는 공쿠르보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대상보다도 무거운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어쩌면 투르니에라는 인물 자체가 이야기로 하여금
우리를 취하게 하고 공상하게 만드는 l’Ogre 일지도 모른다.
2. 아멜리 노통브의 다시쓰기

벨기에인으로, 프랑스어권 현대 작가로 분류되는 아멜리 노통브는 신화와 철학, 고전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그 중에서도 다시쓰기 기법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대표작은 푸른 수염 Barbe bleue
이다. 역시 샤를 페로의 콩트 푸른 수염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배경을 현대의 파리로 옮겨왔다.
부유한 독신 남성의 집에 젊은 여성이 들어가게 되고, 금지된 방이 존재한다는 기본적인 도식 하에
인물 간의 관계를 약간 수정하였다. 노통브는 원작이 가진 문제점 두 가지, 즉 푸른 수염이 아내를
살해한 이유의 부재와 여성 주인공이 수행하는 역할의 무력함에 주목하여 다시쓰기를 행하고 있다.

페로의 원작은 정관사 La 를 붙여 푸른 수염을 가진 남자에게 집중하는 반면, 노통브의 푸른 수염은


제목에 정관사가 없으며, 남성 주인공 돈 엘레미리오의 외형과도 푸른 수염과는 관계가 없다. 콩트의
소재를 차용한 것이지, 그 인물 자체를 다시 등장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품의 제목에 정관사를
붙이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작품의 서두에서 사라진 여덟 명의 세입자 문제를
이야기의 화두로 제시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페로의 동화 소재를 연상시킨다.

페로의 지하실과 노통브의 암실은 모두 빛이 차단된 어두운 공간, 금지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쉽게
죽음의 이미지와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페로의 공간이 단순히 살해와 시체유기를 위한 밀실의
장소라는 사실에 비하여, 노통브의 공간은 죽음이 사진이라는 현대예술의 결과물로 탄생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첫 연인 에믈린이 사고로 암실에 갇혀 동사한 이후 돈 엘레미리오는
죽음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고, 이후 연인들을 모두 동사시켜 암실에 아름다운 옷을 입혀
전시한다.

앞서 말했듯, 제목에서부터 우리는 인물 간의 역학 관계 혹은 작가가 인물에 부여하는 중요성이


원작과는 달라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노통브의 푸른 수염에서는 폭력적인 남성이 아닌
강인한 여성이 두 사람 간의 관계를 주도해나간다. 이는 여성 주인공의 이름이 Saturnine Puissant
이라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Puissant, 권력자, 강자라는 의미의 성을 가진 이 여성은 작품 내에
드러난 모든 갈등을 스스로 해결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페로의 푸른 수염의 아내는 작중 그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그레마스의 행위자 이론을 적용하자면 여성의 역할을
대상, 혹은 기껏해야 발신자에서 주체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푸른 수염의 아내는 남편이 살인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알게 된 순간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나 잠시 시간을 벌어 형제자매들에 의해 구조된다. 그러나 사튀르닌은 처음부터 돈 엘레미리오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사랑에 빠진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이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불러온 재앙이
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지를 발휘해 돈 엘레미리오를 암실에 가두고 죽음을
비껴나간다. 돈 엘레미리오는 검정색과 흰색, 무지개의 7 색 중 노란색을 제외한 8 색깔을 자신이
죽인 여인들에게 부여하였다. 남은 노란색은 본래 사튀르닌의 자리였겠으나, 사튀르닌은 자신의
지혜로 노란색을 뛰어넘은 황금이 될 수 있었다. 황금, 금색의 성서적 중요성은 작중에서 수차례
등장한다.
불평론

1. 플라톤 vs 아리스토텔레스

문학 비평, 나아가 모든 예술적 비평의 시조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오늘날 논해지는 예술 이론은 단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확장시킨 내용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두 위대한 학자는 예술과 미메시스에 대해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먼저 미메시스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보통 모방 혹은 재현으로 번역되는 이 용어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복제가 아닌 예술에 있어 창조적 변형을 가리킨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예술을
미메시스의 산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미메시스를 주로 미학적 현상으로 간주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플라톤은 미메시스를 무엇보다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에서 고려하면서
『국가』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

플라톤은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통해 모든 사물에는 완벽한 이상인 이데아가 존재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그 이데아의 모방이라고 역설했다. 플라톤은 조물주의 모방작인 자연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다시 모방하는 예술가의 행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국가』
에서는 침대를 그 예시로 들고 있는데, 이데아의 침대를 모방하여 현실의 침대를 제작하는 장인,
그리고 그 장인의 모방작을 또 다시 모방하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이야기이다. 결국 화가는
이데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모방의 모방에 전념하는 저급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플라톤이 보기에 국가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소년의 윤리적 교육이다. 당시 가장 성행한


예술 양식인 비극이 예술적 모방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비극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안에 윤리적 교훈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미메시스는 이성이 아닌 감정과
감각이라는 정신의 저급한 부분에 호소하기에 윤리적 차원에서 문제를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결국
청소년에게 악영향만을 끼치는 예술가를 도시(국가)에서 추방할 것과 동시에 이성과 지성을 갖춘
철인의 통치를 주장하였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은 미메시스가 단순 모방이 아닌 창조적 재현이라는 현대의 해석을


태동시켰다. 그에게 모방은 배움의 원천이며 인간 행동의 바탕이며, 긍정적 쾌감을 준다.. 플라톤이
예술가를 자연, 진실을 모독하는 사람으로 보았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재현하는 사람으로 볼
뿐이다. 즉 ‘사실‘ 혹은 ‘진실’(vrai)이라는 개별성이 아닌 ‘진실임직함(vraisemblance)’이라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동으로 파악한 것이다. 말하자면 시인은 현실을 단순히 복제하는 사람이 아니라,
개량된 모방 본성을 통해 현실을 ‘시학적으로’ 재구성하여 더 신선하고 더 매혹적이고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정서적 차원에서, 미메시스의 핵심적인 기능은 카타르시스 작용이다. 미메시스가 생산하는 감정은
플라톤에게는 불필요한 것이지만 아리토텔레스에게는 감성적 불행을 막을 수 있는 안전장치로
여겨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속적으로 억압할 경우 폭발할 수도 있는 감정을 일정하게
배출함으로써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불행을 예방하는 미메시스의 기능을 카타르시스라고 불렀다.

플라톤에게 시인은 국가에서 추방해야 할 문제아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시인은 공동체의


감정을 순화함으로써 사회를 지키는 덕성스런 파수꾼이다.

2. 아폴리네르

그림 모양의 글쓰기라는 부제를 지닌 칼리그람은 언어와 그림, 즉 텍스트와 이미지를 동시적으로


재현해내는 기법이다. 젊은 시절 상형문자에 심취했던 아폴리네르는 서체(caligraphe)와 표의문자
(idéogramme)을 혼합한 신조어 칼리그람을 자신의 시집 제목으로 붙인다. 시인은 이 칼리그람을 "
서정적 상형문자(ideogrammes lyriques)"라고 정의한 바 있다.

칼리그람은 우선 먼저 전통적인 (시) 텍스트의 유형학에 따른 관습적인 독서에 이의를 제기한다.


페이지 위에 배치된 다양한 요소들 사이의 관계의 가능성이 무한하다. 최소한 전통적인 독서의
범주를 벗어난다. 물론 시간성 (위에서 아래로)과 유형학 (좌에서 우로)의 순서에 따를 수 있지만
칼리그람이(형상) 형성하는 공간은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따라서 독자는 매번 단어의 형태와,
의미, 그리고 그 위치를 동시에 고려하면서 능동적으로 독해를 하게 된다.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아폴리네르가 이 시를 쓰기 전 탁상에 우연히 넥타이와 시계를


풀어놓았다고 한다. 이것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아폴리네르가 의도한 것은 오브제를 보이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사물마다
응축되어 있는 시대성과 인간성에 관한 성찰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넥타이는 개인의 삶을 속박하는 사회적 규범, 시계는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시간, 즉 인생의
알레고리가 된다. 시계의 눈금과 시각을 오락가락하며 시계를 일종의 인간의 삶을 비유하는 우화처럼
해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요컨대 칼리그람은 언어의 공간화를 통해 문자 그대로의 ‘행간의 의미’
를 독자 스스로 탐색하는 자발성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전반 6 시각은 존재하는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혈기 왕성한 연인으로 등장하는


양치기 소년(티리시스)을 예찬하기까지 한다. 후반 6 시간으로 건너가면 일종의 번민(angoisse)이
모습을 드러낸다. 시간을 의식하고, 철학적 사변이 드러나고 미지에 것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상념 등이 나타난다. 최후의 운명적인 시간, 이 자정은 시간이 다시 틀을 죄어오기 시작하는 숙명의
자정인가?

불소설

아니 에르노 La Place 의 부르디외적 분석

에르노는 거듭해서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고찰이 부르디외를 주축으로 한 사회비평의 영향을


받았음을 밝혔고, 실제로 에르노의 작품을 분석할 때 부르디외의 이론이 자주 인용되곤 한다.
불문학자 요제프 유르트(Josephe Jurt)는 에르노와 부르디외가 학업을 통해 ‘계급의 탈주자(transfuge
de classe)’가 되었고, 지배 계급에 편입된 후에도 불편을 느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와 관련해 문학 사회학자 이자벨 샤르팡티에(Isabelle Charpentier)는 ‘에르노는 소설로 쓴 부르디
외’라고 평한 바 있다. 다만 에르노는 이를 일부 인정하면서도 소설(roman)이 아닌 문학(littérature)
이라고 용어를 수정하며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밝혔다.

부르디외는 경제 자본에 국한되었던 마르크스의 자본 개념을 획기적으로 확장시켰다. 자본을 경제에


국한할 때 자본의 증식을 설명하는 거의 유일한 방식은 ‘노동 착취’였다. 그러나 부르디외가 도입한
새로운 자본 개념은 이전까지 전혀 자본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보이지 않는 것’. 즉 사회자본과 문화
자본으로 뻗어 나간다.

부르디외의 자본론에서 논하고 있는 세 가지 형태의 자본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경제


자본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화폐로 변환될 수 있고, 재산권의 형태로 제도화될 수 있는 한편, 문화
자본은 특정한 조건 위에서 경제 자본으로 변환되며 교육적 자격의 형태로 제도화된다. 사회자본은
사회적 의무로 구성되어 있고, 특정한 조건 위에서 경제 자본으로 변환되며, 칭호의 형태로
제도화된다. 경제 자본의 매개가 객관적인 실체인 화폐로 외부에 축적된다면, 사회자본은 행위자들
사이의 주관적인 ‘관계’로 나타나고 이 또한 축적된다.

그중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문화 자본은 다시 세 가지 형태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 체화된 형태,


둘째, 예술작품이나 악기, 유적 등 객관화된 사물의 형태, 마지막으로 학력 자본으로 대표되는
제도화된 형태가 바로 그것이다. 에르노가 받은 문학 교수 자격증이 바로 제도화된 문화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체화’의 속성으로, 문화 자본이 일종의 ‘아비투스
(habitus)’가 되도록 한다.

부르디외는 저서에서 아비투스라는 용어를 한마디로 정의하지는 않았다. 라루스(Larousse)


사전에서는 이를 ‘선천적인 것으로 보일 만큼 세습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 범위와 관계없이 한 사회
집단을 특징짓는 학습된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아비투스는 역사적으로 구축되며 특정한 생산조건
안에 내재한 모든 사고, 행동, 지각을 낳는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인 도식으로, 행위자의 ‘몸’에
내재한다. 이는 ‘체화’라는 단어로 요약되는데, 아비투스가 행위자의 의식과 관념, 앎을 포함하되 이는
행위자의 몸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몸은 사회적 존재로서 주체와 세계의 관계성이 아비투스의
형태로 체화되는 장소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아비투스는 일종의 버릇, 습관 혹은 취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다. 이때의 이해는 개인을
넘어서 개인과 타자, 집단, 조직, 사회 사이를 조율한다.

나아가 동일한 아비투스를 공유한 다수의 개인은 단순한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 행동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계급’이다. 마르크스가 계급을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와 그에 따른 객관적 위치로
규정했다면, 부르디외는 실체로서의 생산 관계뿐만 아니라 그 실체적 관계를 작동시키는 행동의
논리, 즉 유사한 아비투스를 공유하고 있는 집단을 기준으로 계급을 재정의한다. 따라서 아비투스는
경제 자본을 유지하거나 재생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상류층의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또한, 교육을 통한 아비투스와 문화 자본, 나아가 사회자본의 세습이 경제 자본의
층위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보프의 언어공동체에 관한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 언어는 아비투스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틀이자 계층 집단 내의 의사소통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훗날 에르노는
언어와 자본의 밀접한 관계에 관해 설명하며 ‘지식의 획득’을 중요한 키워드로 제시한다. 이때 우리는
집과 학교로 분리되는 언어 계층의 문제, ‘학교의 언어’로 이루어진 지식의 획득이 그녀의 계층
상승에 큰 영향을 주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부르디외의 자본론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각 자본의 형태가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전환되면서 맹렬하게 총자본의 양을 증식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전환은 매우 특정한 조건
위에서 매우 은폐된 메커니즘을 통해 수행된다. 이때 전환의 우선권을 쥐고 있는 것이 바로 부르주아
계층이기에, 불평등한 사회구조는 부르주아에 유리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된다. 각각 내부와
외부에 축적되는 문화 자본과 경제 자본의 상호 전환은 자본 총량의 유지 혹은 확대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자본의 축적은 더 이상 노동력의 착취라는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정교한 은폐 속에서 이루어진다.
노동자들의 자녀들이 또다시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경제 자본의 획득을 위해
필수적인 문화자본의 축적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립학교 진학 자체를 서술자가 서민
계급에서 벗어나게 된 것의 첫걸음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에르노는 La Place 를 통해 ‘사회적 자서전’이라는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정립하였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의 삶, 나아가 그와 자신의 관계,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는 글을 씀으로써 아버지가 속한
노동자 계급의 삶을 재건하고자 한 것이다. 이 작품은 매우 상반된 두 개의 기억을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 서술자가 CAPES 시험에 통과하는 장면, 둘째, 아버지의 죽음과 장례식이다.
제도적으로 상위 계급에 속하게 되는 순간, 서술자는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비현실적인 슬픔과
혐오를 느낀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갇혀 있던 비현실성에서 깨어나 온몸으로
현실을 맞닥뜨린다. 세레모니라는 단어는 시험과 장례를 모두 지칭하지만 이 두 사건은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나는 이제 완전히 부르주아가
되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삶이 급격하게 다른 단계로 이행해왔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러한
갑작스러운 인지는 죄책감을 불러온다. 자신이 그동안 잊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작품의 도입에 CAPES 시험을 언급한 것은 자신이 ‘계급탈주자’임을 자인하는 것에 다르지
않다.

죽음 때문에 이제는 아버지와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느낀 서술자는 아버지의 삶에 대해 글을 써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 단절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과연 필연적이었는 것인지에 대해 자문한다.
아버지는 농민에서 공장 노동자로, 다시 소상인으로의 계급 상승을 이뤄낸 인물이며, 자신의 자리, 즉
계급을 지키내기 위해 분투했던 인물이다. 그로부터 다시 한번 계급 상승을 이루어낸 딸은 그들의
단절이 문화적 격차에서 온 것으로 파악한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며 부모와 교사들의 언어가
다름을 인지하고, 문학 속에서 볼 수 있는 부르주아들의 삶과 교양있는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과 연결된다는 것은 너무나 파악하기 쉽다. 서술자는
상위 계급의 아비투스 습득을 자신의 계급 상승 전략으로 채택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문화 자본이
부족하며 추가적인 습득에도 관심이 없는 아버지와 그가 속한 계급을 하등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
그들이 단절된 원인이다. 아버지 또한 이를 인지하고 있기에 타인의 시선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사회자본이 순환하는 장 내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결국 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딸은 자신의 학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게 되며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다. 이미 문화 자본, 사회 자본에 있어 극복할 수 없는 격차가 생겼으며, 앞으로 이것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것을 아버지와 딸은 암묵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술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 심지어는 노동자 계급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폄하하고
부인해왔음을 La Place 를 통해 고발한다. 허례로 가득차 진실이 부족한 부르주아 계급의 삶과 대비해
노동자 계급이 간직하고 있는 진실성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재조명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감정적으로 치우친 헌사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텍스트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에르노가 택한
평평한 글쓰기의 방식 덕분이다. 꾸며낸 글쓰기조차 진실이 결여된 잉여로 파악하기에 노동자 계급이
사용하는 간결한, 그러나 깊은 뜻을 담고 있는 언어를 차용함으로써 과거 자신의 모습에 대해
속죄하고 아버지와 화해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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