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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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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본질적으로 실재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나타내며, 실제적으로 '허위의식'이라는 표현과 상호교
환되고 있다. 그것은 근본적인 물질적 근거와 강제를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결함을 갖
원래의 중요성과 매우 가까운 의미에서 그 용어를 사용했는데, 경험의 세계를 관념의 영역으로 변형
서 채택될 때 경멸적 의미가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보수적인 사회이론가와 좌파, 우파
의 비평가에게서 발견된다 하더라도 (알튀세르(Althusser)의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반명제가
보여 주듯이) 그러한 맥락에서 이 용어는, 그것이 매우 비실제적인 것이고 실제의 현실에 기초하고 있
대조적으로, 전문적인 사회과학적 용어는 그러한 부정적 함의를 부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자연적, 심리적, 혹은 사회적 실재의 근본적 개념을 정의하는 이념을 말한다. 더욱이 사상이나 활동의
별되는데, 즉 (1) 그것이 적용되는 현상의 범위에 의해서, (2) 그것이 명료화되지 않는 사실에 의해서
되는지는 설명하는 사람의 이론적 설득에 달려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적 지위의 함수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영향의 문제로 인해서 여러 난관들이 발생한다. 유물론자들은 그것을 질서에 도
했음이 드러났고, 새누리당은 ‘NLL’ 공방을 이어가며 이념 공세를 퍼붓고 있다. 대선 직후 국정원의
조직적 대선개입과 여론조작마저 드러나 선거의 공정성마저 흔들리는 상황이다. 말하자면, 이데올로기
인 ‘집단 지성’의 산물로 여겨지지만 위키피디아에도 지리적 격차가 존재한다. 미국에 관한 지식은 10
기업들은 자신들의 환경파괴 행위를 가리기 위해 ‘환경주의’를 내세우며 ‘그린 워시(green wash·환경파
괴 행위를 감추기 위해 친환경적 방안을 실행하는 시늉을 하는 것)’를 일삼는다. 지역의 고유한 상권
다고 말한다. ‘그린 워시’와 같은 은밀한 이데올로기의 형태를 밝혀내고 우리가 폐기한 이데올로기를
구제할 좋은 기회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가 죽었다’는 자기기만적 믿음은 시장과 자본의 기득권을 옹호하고 진보와 변화를 가로막
는다. 2009년 경제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아랍에서는 민주화
재를 꼽는다. 저자는 “각국에서 일어난 기존 체제의 전복은 잠시나마 자유라는 짜릿함을 선사했지만,
먼저 지젝은 1940년대 말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를 예로 들어 ‘없는 것’, 즉 부정이 정체성의 일부라
똑같은 커피지만 무엇이 없는 커피냐에 따라 둘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무엇이 없느냐에
결국 지젝은 이 커피를 헤겔의 ‘총체성’ 개념을 빌려와 자본주의에 빗댔다. 그는 “헤겔의 총체성은 현
상 너머 숨겨진 조화를 찾자는 게 아니라 특정 개념에 다양한 부정과 실패를 포함시키자는 것”이라고
라고 묘사하는 것으론 충분치 않으며 자본주의 이면에 숨겨진 실패 지점들도 살펴봐야만 한다”고 덧
하면서 ‘100만마리의 동물들을 관리할 방법을 동물원에서 배워야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전했다. 또
“한국을 포함한 개발국가들이 아프리카의 비옥한 토지를 사들이는 바람에 기아 문제가 새로 발생되고
식의 해석만 넘쳐난다”고 지적했다. 단순히 사람을 탓하고 사람들의 탐욕과 부패만을 지적하는 바람
하지만 환경문제의 근본을 외면하고 있다”며 “환경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바
꿔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젝은 “상황이 침울할지라도 터널 끝에는 항상 ‘희망의 빛’이 있다”며 대학과
예 지젝은 동구
슬라보예 구권 사회주의
의가 몰락하며
며 현실 사회
회주의가 역사
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던 때 철학계
에 등장했
했다. 그 이후
후 ‘이데올로기
기의 종언’, ‘ 역사의 종말’’ 같은 담론이
이 유행했다. 정확히 바로
로 그 시점
에 지젝은
은 “이데올로
로기는 아직 끝나지
끝 않았다
다” “역사는 아직
아 진행되고
고 있다”라는
는 주장을 들고
고 등장했
한다.
으로 이데올로
통상적으 로기는 진짜 메시지를
메 은폐
폐하는 것, 사람들에게
사 색안경을 씌우는
는 것, 즉 마르크스가
마
이야기했
했던 허위의식
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이다
이 다. 그리고 여전히
여 유효하
하다. 이데올로
로기는 사람들
들로 하여
금 오인하
하게 하며 진실을
진 직시하
하지 않게 하면
면서 작동한다
다. 상품 이데
데올로기도 그
그런 정의에서
서 벗어날
수 없다.. 가령 흰 봉지와
봉 노랑 봉지에
봉 같은 설탕을 넣고 선택하게 하는데,
하 우리는
는 흰 봉지와
와 노랑 봉
지 사이에
에 선택의 기회가
기 있다고
고 여기게 된다
다. 하지만 실상
실 선택한 본질은
본 늘 같
같은 설탕이다
다. 이것이
이데올로
로기가 만들어 내는 효과의
의 한 가지 예
예다.
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 이 그것이 허위
위라는 것, 자신이
자 속았다
다는 것을 알게
게 된 뒤에야
야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데
데올로기의 종언을
종 의미하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의 것과는 다른
른 양상의 이데올로기
이
가 존재한
한다. 그것이
이 <지젝의 기묘한
기 이데올
올로기 강의>에서 이야기하
하는 ‘ 냉소주
주의 ’ 이다. 이데올로기
이
종언 시대
대의 이데올로
로기, 바로 냉소주의는
냉 허
허위이며 거짓
짓이라는 것과
과 자신이 속
속고 있다는 것을
것 알면
서도 행동
동을 바꾸지 않는 것이다
다. 한 가지 예
예를 들면 산타클로스의
산 존재이다.
존 부
부모와 아이 모두
모 산타
클로스가
가 없다는 것을
을 알고 있으
으면서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것 행동한 속아주는 이런 것이 냉
한다. 서로 속
소주의이다.
살아”라고 하면 “너”는 대타자가 된다. 라깡적 정신분석의 핵심은 대타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대타자
의 선택에 대해서 나 자신이 책임을 져야한다. 이는 고통스러운 일인데 대타자가 있다면, 신이나 아버
지의 탓으로 돌리듯이, 핑계를 댈 수 있다. 신이나 아버지의 핑계를 대며 책임을 떠넘기는 것처럼 대
대타자의 대리인이 아니라 어떤 도구이고 수단이 된다. 역사적로는 대타자의 수단이 있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이데올로기의 노예이긴 마찬가지다. 스탈린도 그렇고 레닌도 그렇고 많은 사람을 죽였는
데 그들은 스스로 선하고 아이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 나는 선하고 아이를 좋아하지만 내가 이렇게
한 사회주의 건설의 목표가 있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희생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 하수인으
다는 것이다.
젝의 생각이다.
만 버려내야 한다. 신이 없다면, 즉 대타자가 없다면 주체가 남는다. 주체는 어렵고 혁신적인 주제인
명에 반응할 때 정체성을 갖게 된다. 그런데 지젝은 이러한 것을 주체화라고 말하지 주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젝의 주체는 아무 실체를 갖지 않는다. 주체가 실체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 불일치에서 주체가 탄
생한다. 자유의 공간이 거기에 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댈 수 있지만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 불일치
체라는 궁핍’이 더 옳다. 생물학적 특성으로 채워진 것이 실체로서의 자아라고 한다면, 그와는 구별되
체다. 부모의 유전자를 받아 나눠주면 끝이다. 이를 니힐리즘이라 생각한다. 지젝은 이러한 유물론으
짐을 마찬가지로 질 수 있다.
공산주의가 있다.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자연사적 존재로서의 우리, 이를 인정하면 현실감각이 있다고
다. 우리가 결정하고 책임을 떠안는다면 그때 주체가 되며, 지젝은 책임을 떠안은 주체가 되라고 말한
다.
여러 혁명에 관한 비판적인 지젝의 견해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대부분의 혁명이 실패했는
데, 그 이유로 현실적인 체제를 뒤집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체제를 뒤집은 이후에는 욕망하는 방식 자
체, 꿈을 꾸는 방식 자체 바꾸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게 지젝이 이야기하는 혁명의 두 번째 단계
야 한다. 우리의 욕망 자체를 바꾸고, 우리의 꿈 자체를 바꾸고, 우리의 일상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
이렇게 하자”가 아니라 우리가 개입해서 우리가 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젝이 이야기하는 지젝
식 공산주의다.
영화는 불온하고 급직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극장에서 보기 어려운 영화다. 체제가 조금이라도
지적이라면 이러한 영화는 금지될 것이다. 지젝은 한 유력 언론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 중
지젝은 대중적이고 허접한 영화들을 인용한다. 철학계에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대중문화를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 지젝이 전략적으로 대중문화를 다루지 않는다. 대중문화는 그의 철학 자체의 구성에서
에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결정하는 주체라는 사실에 관한 자각이 필요하다. 기
독교를 빗대어 설명한다면 신은 없고, 존재하는 것은 성령 공동체일 뿐이다. 배제된 자들의 연대, 이
런 것들이 일종의 성령이다. 지젝은 그런 자리에 있는 우리 자신을 확인할 것을, 많은 작업을 통해서
우리에게 촉구한다.